[KHAN14] 0001 / 0933 ---------------------------------------------- 제로 코드(Zero Code), 10년의 시간을 되돌리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수현(10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검사(Normal, Sword User,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테라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세상을 관조하고 은둔을 원하는 자, 정상(頂上)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33) 7. 신장 · 체중 : 181.5cm · 75.5kg 8. 성향 : 질서 · 혼돈(Lawful · Chaos) [근력 86] [내구 92] [민첩 96] [체력 78] [마력 48] [행운 36]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 업적(21) > < 특수 능력(1/1) > < 잠재 능력(4/4) >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저 멍한 기분으로 왼손에 쥐고 있는 작은 구슬을 굴려본다. “사용자 김수현.” 10년. 그 기나긴 시간 동안 그토록 열망하고 꿈꾸었던 것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내 안을 가득 채우는 상실감과 시리도록 아픈 마음은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사용자 김수현. 다시 한 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나직하지만 아름다운 미성이 내 귓가를 두드린다. 그 소리에 끌려 나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수록 잿빛 벽돌로 이루어진 바닥이 눈에 밟혔다. 그러다가 이내 서른 평에 달하는 공간을 시야에 담았을 즈음, 조금씩 올라가던 시선이 멈췄다. 모든 것의 시작을 알리고, 모든 것을 마무리 짓는 ‘소환의 방’. 그리고 방의 중앙에 놓인 직사각형 제단 위에는, 하얀 빛을 뿌리는 날개가 희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공허한 기분을 느끼며 제단에 앉아있는 ‘천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사용자 김수현의 요청을 재확인 하겠습니다. 당신은 진심으로 홀 플레인의 시간을 되돌리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까?” “그래.”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의 천사를 응시한다. 미의 절정이라 불릴만한 아름다운 외모도, 티 하나도 보이지 않는 매끈한 피부도, 언뜻언뜻 속살을 비추어주는 아슬아슬한 옷차림도. 그 모든 게 오직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떠한 욕망도 일지 않는다. 천사의 아름다운 자태도, 애틋한 눈길도. 그 어느 것도 이미 죽어버린 내 가슴을 흔들지 못했다. 나는 ‘그날’ 이후로 모든 감정을 잃어버렸다. “도저히 납득 할 수 없습니다. 저를 비롯한 모든 천사들은 당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니, 틀렸어. 나는 너희들의 이해를 바라는 게 아니야. 세라프.” 귀에 들리는 내 목소리가, 너무나 사늘하다. 천사, 세라프의 음성은 평소와는 다르게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오늘을 제외하곤 단 한 번도 세라프가 동요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한 말이 그만큼 충격적이라는 소리일까. 잠깐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세라프는 곧바로 무표정한 인상을 회복했다. 그리고 예의 나직한 목소리로 나를 차분히 타이르기 시작했다. “사용자 김수현, 당신은 홀 플레인의 모든 임무를 달성했고 정상을 거머쥔 첫 번째 사용자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가 아닙니다. 그토록 소망했던 제로 코드를 얻었습니다. 당신은 ‘자격’이 있습니다. ‘자격’이 허락하는 안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세라프. 얘기는 이미 끝났어.” “지구로의 귀환? 좋습니다. 지금의 능력을 유지한 채 지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홀 플레인에 남는다? 그것도 좋습니다. 제로 코드만 있다면 당신은 모든 대륙을 다스리는 왕, 아니 그 이상의 존재도 될 수 있을 겁니다.” 도저히 멈추지 않을 것 같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오른손을 허리춤에 짚었다. 손아귀에 들어오는 검의 손잡이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후유, 그런 감언이설에 넘어간 건 10년으로 충분해. 이제는 지친다. 세라프? 더는 말하지 않을게. 너희들이 어떤 말로 나를 꾄다고 해도, 내가 제로 코드의 사용을 재고하는 일은 없을 거야.” 손잡이를 바스라 지도록 쥐고 회로를 따라 마력을 일으킨다. 내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기운을 읽었는지 세라프는 일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곧 나를 보는 그녀의 얼굴에 안쓰러워하는 감정이 물들었다. 아직 설득을 포기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제로 코드의 소유권은 오롯이 사용자 김수현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건드릴 권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겁니다. 그 대단한 힘을 간직한 물건을 단순히 시간을 되돌리는데 사용하겠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 “마지막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은 정말로, 그 10년의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반복하고 싶다는 겁니까?” 말을 마친 세라프의 말투는 이젠 거의 애원조에 가까워져 있었다. 문득, 내부서부터 까닭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건 말 그대로 아무 이유 없는 웃음이었다. 나는 한동안 소리 없이 웃었다. * 이곳은 지구가 아니다. 현대인들이 누리는 일상과는 판이하게 다른, 비일상적인 생활이 이루어지는 ‘홀 플레인’이라는 또 하나의 세상.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내가 지금껏 겪었던 일들을 하나씩 되짚으며 거슬러 올라가 보기 시작했다. 처음 홀 플레인에 들어왔을 때는 10년 전 아직 앞날이 창창하던 23살일 때였다. 지구에 있을 때의 마지막 기억이라고 하면, 2년 동안의 군 생활을 마치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오던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전역 신고를 하고 집으로 귀가하던 도중 기차 안에서 곤히 잠들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바로 이곳 ‘소환의 방’으로 소환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내 눈앞에는 오직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하얀 날개를 일렁이는 천사가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알 수 없었던 상황. 말 그대로 드디어 집으로 돌아간다는 꿈에 부풀어있던 나에게는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꿈도, 상상도 아니었다. 그것을 겨우 현실로 받아들였을 즈음 나는 천사에게 다시 돌려보내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내가 다음으로 이동된 곳은 ‘통과의례’로 불리는, 사용자의 자격을 증명하는 장소였다. 나는 그곳에서 난생 처음 보는 괴물들에게 쫓기며 강제로 시험을 치러야만 했다. 정해진 시험 기간은 7일. 그곳은 오롯이 생존만을 위한 전쟁터였다. 무수한 생명의 위협 속에서, 간신히 일주일을 버티고 나서야 비로소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에 입장할 수 있는 ‘사용자(User)’의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통과의례는 끝이 아니었다. 홀 플레인이야말로 진정한 시작이었다. 통과의례가 7일 동안의 생존 전쟁이었다고 한다면, 홀 플레인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기약 없는 지옥이었다. 그리고 시작된 홀 플레인에서의 생활. 그저 살고 싶었다. 나는 살고 싶었기 때문에 홀 플레인이라는 비상식적 세상에 필사적으로 적응했다. 끝에 다다르면 돌아갈 수 있다는 천사의 말 한마디에 모든 희망을 걸었고, 자그마치 10년이란 세월을 활동했다. 그래, 단지 살고 싶었고 돌아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끊을 수 없는 내 인연들과 함께. “사용자 김수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는 겁니까? 혹시 생각이….” ‘인연’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울컥하는 감정이 솟아오른다. 나는 세게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회상에 잠겨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아, 잠깐 옛날 생각이 나서. 그나저나 고통스러운 10년의 반복이라…. 그렇게 말해주는 것을 보니,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나보지?” “…….” “맞아. 너희들 덕분에 겪을 필요도 없었던 고통들을 경험했지. 그것도 무려 10년 동안이나 말이야.” “사용자 김수현.” 심리를 읽으려고 하는지, 세라프의 시선이 내 곳곳을 관찰한다. 관두라고 말하려는 찰나, 그녀의 아름다운 입술이 열리고 고요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혹시, 사용자 김유현과 사용자 한소영을 생각하는 거라면…. 당신이 원하는 바를 알 것 같습니다. 사용자 김수현. 저에게 매우 합리적인 생각이 있습니다. 현재 당신이 소유한 GP는 소원을 몇 번이고 발동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포인트를 쌓은 상태입니다. 굳이 제로 코드를 사용해서 과거로 돌아가지 않아도….” ‘인정하기 싫지만, 그놈 말이 맞았군.’ 저 말이 나올 줄 알았다. 세라프의 말이 끝나기도 전, 나는 칼집에서 칼을 뽑아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핑! 공기를 찢어발기는 날카로운 파공음. 내가 쏘아 보낸 파동은 세라프가 앉아있는 제단을 크게 뒤흔들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녀가 일으킨 새하얀 보호막에 파동은 흔적도 없이 소멸하고 말았다. “사용자 김수현…. 심정은 이해하지만, 무의미한 행동입니다. 아마 스스로도 알고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차피 알고 있다. 사용자는 천사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 그럼에도 내가 검을 휘두른 것은, 절대 의지를 바꾸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아스타로트가 죽기 직전에 그러더군. 결국 너희들도 똑같은 연놈들이라고.” “지금 악마의 말을 믿으시겠다는 겁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 “사실이 그렇잖아.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결국 결론은 별 차이가 없는걸.” “잠시만, 잠시만 대화를…. 당신의 요구사항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한 설명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자격이 없다며. 자격이 없어서 안 된다며. 그래서 시간을 되돌려서, 다시 자격을 만들어오겠다고 까지 했는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아.” “수현!” 핑! 핑! “소리 지르지 마, 귀 안 먹었으니까. 그리고 사용자랑 성은 붙여서 불러. 네가 항상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파동이 날아가고, 사그라졌다. 세라프는 이런 돌발 행동을 믿을 수 없는지 서글픈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녀를 겨누고 있는, 서슬 퍼런 빛을 뿜어내는 검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힘껏 마력을 불어넣자, 검신에서 시퍼런 불길이 조금씩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검 끝을 쳐다본 세라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저야말로 마지막으로 경고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검을 치우십시오. 아무리 설정을 사용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당신의 근원은 인간입니다. 아득한 차원 계급을 가진 존재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 그럼 어디 한번 시험해볼까? 싹 다 집어치우고 제로 코드에 너희들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하면 되겠네.” “확실히 사용 권한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제로 코드의 발동은 무조건적으로 저희들을 거쳐야 이루어집니다. 헛된 꿈은 깨시기를 바랍니다.” “자신하고 있군. 과연 방법이 없을까.” “수…. 사용자 김수현. 하…. 의미 없는 언쟁입니다. 그래도….” 세라프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듯 입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검에 피어오르는, 차가운 분노와 진심으로 점철된 감정을 느꼈는지 이내 입술을 꼭 다물었다. “…….” “…….” 잠시간, 나와 세라프 사이로 묵직한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끓어오르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검을 내렸다. 그리고 쓸쓸한 기분으로 왼손에 쥐고 있는 제로 코드를 들어보았다. 진한 청 빛을 뿜고 있는 작고 예쁜 구슬 한 조각. 이런 게 도대체 뭐라고…. “세라프. 더 이상 싸우기도 싫고, 말하고 싶지도 않아. 네가 내 심정을 이해해준다면, 그리고 정말로 나를 생각하고 있다면. 부탁한다.” 부탁이라는 말을 꺼낸 순간, 슬픔에 젖어있던 세라프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나는 그녀를 향해 제로 코드를 쥐고 있는 손을 내밀었다. 이제는 확실하게 결심을 굳혔다. “다시 한 번 부탁할게. 나는 10년 전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내가 처음 이곳에 들어왔던, 그 시절로.” 내 간절한 의지를 읽은 걸까. 그 순간 말간 빛을 내던 제로 코드가 환한 빛 무리를 발산하기 시작한다. 나는 담담히 꾹 쥐고 있던 손을 활짝 펴주었다. 그러자 이제는 광채를 뿜는 구체가 두둥실 떠오르더니, 가느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세라프가 있는 제단으로 날아갔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구체를 받아들였다. 세라프의 공허한 시선은 곧 내가 보내는 시선과 마주쳐 허공에서 복잡이 얽혔다. 그렇게 서로 보고만 있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곧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열렸다. “정말로 그것을 원한다면.” “…….” “당신의 의견을 존중하겠습니다.” “세라프.” 세라프는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기운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아까도 말했지만, 사용자 김수현은 현재 상당한 양의 GP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걸 그대로 없애는 건 전혀 합리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세라프의 말에 나는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되돌아갈 건데 지금 와서 골드 포인트(Gold Point = GP)가 무슨 소용이랴. 그러나 세라프의 생각은 다른지, 그녀는 뭔가를 조작하는 듯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손을 놀리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신의 의지는 제로 코드의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좋습니다. 도우미의 권한으로, 세부 사항은 임의로 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사용자 김수현에게 해가 되는 일은 손톱만큼도 없을 겁니다. 그럼 작업이 끝난 후 곧 뵙도록 하겠습니다.” 작업이 끝난다고? 곧 뵙겠다고?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 말에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냐고 물어보려는 찰나였다. 막 입술을 떼려는 순간, 소환의 방 내부로 전에 듣지 못한 웅혼한 목소리가 가득히 차올랐다. “사용자 김수현의 요청을 받았습니다. 27%, 58%, 77% 100%. Loading…. 승인 완료. 통과되었습니다. 지금 바로 Code Name, Zero의 실행을 알립니다. 모두 준비하십시오.” 끄긍, 끄그긍. 그 순간 어디선가 마치 녹슨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세라프의 품안으로 들어갔던 제로 코드가 맑은 빛을 뿌리며 허공으로 비산했다. 파앗! 시야를 잔뜩 메울 만큼 환한 빛이 내부를 가득하게 물들인다. 여전히 녹슨 기계음이 들리고,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감각들이 전신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낯설지는 않다. 공간이 비틀어지는 감각, 그리고 뭔가를 빠르게 지나치는 감각. 흡사 일전에 벌였던 아틀란타 탈환전에서 지옥의 대공이 등장할 때 느꼈던 세상이 일그러지는 감각과 비슷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는 빛 무리에 가려져 이젠 세라프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다. 이윽고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1. 사용자 정보 창 수정. 2. 제로 코드 발동 조건 및 내용 추가. 3. 오타 및 문맥 수정. 0002 / 0933 ---------------------------------------------- 제로 코드(Zero Code), 10년의 시간을 되돌리다. 쉴 새 없이 눈꺼풀을 두드리던 빛이 서서히 미약해진다 느껴질 즈음, 나는 꾹 닫고 있던 눈을 슬며시 열었다. 방 전체를 가득히 메우고 있던 빛들은 어느새 미미한 광채만을 남긴 채 조금씩 사그라지는 중이었다. 한두 번 눈을 깜빡이자 뿌옇던 시야가 조금씩 초점이 잡혔다. 이윽고 사물을 판단하는데 무리가 없을 만큼 회복되자, 나는 차분히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다르다.’ 잠시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인데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칼도, 입고 있던 장비들도 모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텅 비어버린 손에서 시선을 내리자 얼룩무늬가 그려진 군복이 보인다. 그리고 왼쪽 가슴에 부착된 부표를 보는 순간 나는 잠시 숨을 멈추고 말았다. 그때였다. “Code Name Zero. Complete. 제로 코드의 발동을 확인합니다. 정상 발동을 확인했습니다. 사용자 김수현, 축하합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여전히 제단에 앉은 상태로 나를 바라보는 세라프가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약간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녀의 몸 상태는 척 봐도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왜 그렇게 보시는 겁니까?” 아름답게 일렁이던 하얀 날개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져 있었고, 몸 전체는 반투명한 상태로 뒤편을 여과 없이 비치는 중이었다. 오직 예의 표정 없는 얼굴만이 예전과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자, 세라프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오랜만에 당신의 걱정 어린 눈빛을 받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지금은 지구의 시간으로 2011년 12월 27일 목요일 입니다. 당신의 요청에 따라, 지구의 김수현이 처음 소환의 방으로 들어온 시점으로 돌아온 상태입니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사용자 김수현의 요청은 성공적으로 처리 및 완료된 상태입니다.” “그래…. 그렇구나. 그럼 세라프, 너는 나와 함께 돌아온 건가?” 나직이 입을 열자, 세라프는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저었다. “정확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일단은 No 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에게 설명해야 할 부분이 남아있어 제로 코드에 아주 잠시 동안 억지력을 요청했습니다. 제로 코드는 제 의견을 타당하다고 여겼는지 다행히 요청을 수락해주었습니다.” “설명해줄게 있다고?” “네. 그렇습니다.” 여전히 눈가를 찡그린 채 반문하자, 세라프는 오히려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그것은 내가 홀 플레인에서 활동한 10년을 통틀어 처음 보는 천사의 미소였다. 갑작스럽지만 너무도 산뜻하게 다가오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찌푸렸던 눈가를 풀고 말았다. 잠시 동안 어색한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하지만 먼저 말문을 연 것은 내가 아니라 세라프였다. 그녀는 은백색의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눈을 반쯤 감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 사용자 김수현이 홀 플레인에 처음 소환되었던 날을 기억합니다. 그때 당신이 저를 보고 처음 꺼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몰라.” 그런걸 기억할 리가 없잖은가. 도대체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려고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묵묵히 들어보기로 했다. 세라프는 적어도 ‘도우미’ 입장으로 따지면 항상 적절한 조언을 해주는 존재였다. “여, 여긴 어디야? 어? 너, 넌 누구세요! 라고 했습니다.” “나 참, 말 더듬는 것까지? 별걸 다 기억하네.” “후후.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그 외에도….” 파직! 그 순간 공간이 찢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시답잖은 얘기를 잇던 세라프의 전신이 크게 비틀렸다. 그것은 흡사 연결 상태가 불량한 TV를 켰을 때 나오는 잡신호 현상처럼 보였다. “흑!” 비틀렸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간다. 세라프는 고통에 젖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 현상이 반복될수록 반투명한 상태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낯설게만 보인다.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당장에라도 원래의 고요한 태도를 보일 것 같은데, 지금 눈앞의 세라프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윽고 노이즈 현상이 잦아들 즈음, 간신히 몸을 추스른 세라프는 씁쓸한 표정을 내비쳤다. “제로 코드에게 인정을 바라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도 10년을 함께 했는데…. 석별의 정을 나눌 시간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아 진짜 적응 안되네.’ 예전 같았으면 저런 말을 하기는커녕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세라프 말마따나, 천사들은 언제나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종족이니까. 10년 동안 한결 같은 태도만 보아오다가 갑자기 변한 모습을 보니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래…. 그럼 얼른 설명해주고 끝내야지.” 결국, 나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고 말았다. 세라프는 서글퍼 보이는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더니 이내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사용자 김수현은 중반부부터 GP를 거의 소모하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벌어들인 포인트를 어느 정도 소모해서 다시 시작하는 당신에게 몇 가지 특전을 부여할 생각입니다.” “응? 특전?” “물론 남은 GP도 그대로 남겨두겠습니다." “특전이라….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번 끝을 본 만큼 대우는 해주는구나. 이것 참 고마워서 눈물이 나는군.” 비아냥거림이 다분히 담겨있는 말투였지만, 세라프는 그게 아니라는 듯 살짝 고개를 저었다. “대우라기보다는 호의로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를 비롯한 모든 천사들은 당신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며, 동정하고 있습니다.” “동정? 하하하….” “동정이라는 말이 기분 나쁘게 들리셨다면 사과 드리겠습니다. 당신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홀 플레인 안에서 천사들은 사용자들을 돕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제가 사용자 김수현에게 단 한번이라도 해롭게 들릴만한 조언을 드린 적이 있습니까?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 호의를 받아들일지, 아니면 그냥 넘길지는 사용자 김수현에게 전적으로 맡기겠습니다.” 전적으로 나한테 맡긴다고는 했지만, 세라프는 어떻게든 ‘특전’을 받게 만들려는 듯 조금의 반박할 여지도 주지 않고 있었다. 더구나 여기서 더 몰아붙이려고 해도 딱히 할말이 생각나도 않아, 나는 떨떠름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훌륭한 선택입니다. 지금 이 선택이 사용자 김수현이 이루려는 바를 한층 손쉽게 만들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동의를 표하는 순간, 세라프는 한결 안도한 눈빛으로 가느다랗게 웃었다. 그리고 이제 거의 보이지도 않는, 희미한 날개를 한 번 힘차게 펄럭였다. 곧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가 삽시간에 줄어들고, 이내 머리 위로 보드라운 손길이 느껴졌다. 살며시 눈을 치켜 올리자, 세라프는 느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싫어도 잠시만 참기를 바랍니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머리 속으로 내용을 직접 입력 및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세라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가 얹고 있는 정수리 부분에 뭔가 번쩍이는 충격이 느껴졌다. 아프지는 않다. 오히려 신기하게도, 세라프가 전달하려는 정보들이 머릿속으로 확실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그녀가 주는 정보들을 차분히 음미했다. <사용자 김수현 전용 특권 설정(Tanay)> 1. 사용자 김수현이 본래 가지고 있던 능력치 정보에 관한 특전을 부여합니다. 첫 번째, 1회차 에서 이루었던 사용자 정보를 ‘로드’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기본으로 갖고 있는 6가지 능력치 정보 중에서 4가지를 무작위로 선별해 수치를 상향합니다. 수치의 상향 정도 또한 무작위로 결정됩니다. 2. 클래스에 관한 특전을 부여합니다. 통과의례에 입장하기 전 미리 클래스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일반 클래스뿐만 아니라 Rare, Secret 클래스를 포함, 비밀에 감싸여있는 모든 클래스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3. 특수 능력과 잠재 능력에 관한 특전을 부여합니다. 사용자들은 일반적으로 특수 능력 1슬롯과 잠재 능력 4슬롯을 가지게 되지만, 사용자 김수현에게는 잠재 능력 슬롯을 하나 더 추가로 개방하겠습니다. 이것 또한 숨겨진 능력 포함 특수 능력과 잠재 능력을 모두 개방하며, 본인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는, ‘고유 능력’이란 슬롯을 개방할 수 있습니다. 고유 능력은 특수 능력 상위에 해당하는 능력입니다. 고유 능력을 포기한다면 특수 능력 1개와 잠재 능력 5개 전부를 본인이 원하는 능력으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이 때, 개방 슬롯은 자동적으로 잠재 능력에 포함 합니다.) 그러나 고유 능력을 가지는 것을 선택한다면 잠재 능력 하나를 소비하고, 남은 4슬롯 중 절반만 본인이 원하는 능력으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남은 2개는 랜덤으로 결정됩니다.) 4. 단 1회에 한해서, 신체 개조 시술을 받을 수 있습니다. 5. 사용자 김수현이 원하는 장비를 한가지 선택할 수 있으며, 종류에 제한은 없습니다. 다만 EX등급의 장비들은 선택할 수 없습니다. 쉴 틈도 주지 않고 머릿속을 빼곡히 채우는 특전에 관한 정보들. 복잡한 기분으로 눈을 뜨자, 어렴풋한 잔영만이 남아있는 세라프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정수리에 얹은 손을 치우지 않고 있었지만, 아까와 같은 감촉이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 입력된 정보의 정리를 간신히 마친 후 나는 조용히 탄성을 터뜨렸다. “이건….” 솔직히 이정도 특전을 부여할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에 약간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정말로 이런 특전들을 부여 받고 시작할 수 있다면, 게임을 시작하기 전 캐릭터 편집을 사용하는 것과 다름없는 출발이었다. 그런 내 기색을 읽었는지 세라프는 미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특전들은 사용자 김수현이 벌어들인 포인트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물론 제 호의도 일부 섞인 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천사들 전원의 동의를 이끌어냈기 때문에 조금도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나야 좋기는 한데, 어차피 너는 곧 사라지잖아. 균형 문제로 제지 받지 않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방금 전 사용자 김수현의 말투에서 약간의 자만심을 느꼈습니다. 제가 10년 동안 누누이 말씀 드렸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방심은 금물입니다.” “주의할게. 아니, 근데 균형이 문제라고. 생각해봐. 갓 들어온 사용자가 이런 특전을 부여 받고 시작한다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그 부분은 Tanay로 해결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균형은…. 물론 균형 생각도 한 건 맞지만….” 잠시 말을 멈춘 세라프는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주저하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본래 사용자 김수현이 지니고 있던 잠재성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 편이 균형을 맞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라프의 말은 수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었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곧장 알아들을 수 있었다. 사실상 ‘잠재성’이 ‘사용자 정보’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이기 때문이다. 세라프의 뜻을 헤아릴 순 있지만, 그럼에도 입안에서 쓴맛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홀 플레인의 정상에 오른 유일한 사용자다. 수많은 기적과 우연을 토대로 올랐다는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옛말에도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놈이 강한 놈이라고. 일반적인 강함을 말한다면, 나는 자신 있게 강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물론 최고, 최강을 칭할 수 없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후유.” “자만은 금물입니다. 방심하지 마십시오.” 결국 세라프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 말이었던 것 같다. 정말로 그녀 말대로 내가 자만이라도 느꼈는지,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조금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그것도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해진 세라프를 보자 바로 누그러졌다. “이제…. 정말로 헤어질…. 시간….” 세라프의 말대로 정말 끝이 온 모양이다. 그녀는 마치 바로 고장 나기 일보직전의 TV화면처럼 이리저리 비틀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제는 다시 원상태로 회복도 되지 않고 있다. 그것을, 나는 그저 하염없이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이별…. 당신…. 꼭…. 싶었던…. 있습니다.” 점점 세라프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 그녀의 존재감이 서서히 사라져간다. 그래도, 세라프는 필사적이라도 봐도 좋을 만큼 내게 말하고 있었다. “그…. 정말….” “세라프. 마지막까지 이래서 조금 미안한데, 잘 안 들려.” 그래도 내가 하는 말은 들리는지, 세라프의 얼굴에 슬픔이 물들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애당초 내가 바랬고, 또한 자초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부…. 디….” 팟! 노이즈가 더더욱 심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하얀 빛이 팟 소리를 내며 번쩍였다. 세라프의 주위로 찬란한 빛살이 여러 갈래 생겼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제 진정으로 끝이 다가왔는지, 그녀가 입술을 한 번 짓씹는다. 그리고 눈동자에 힘을 주는가 싶더니, 입술이 서서히 떼어졌다. “부디 행복하세요….” 사르르…. 그 말을 끝으로, 세라프는 사라졌다. 더 이상의 노이즈 현상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있는 힘을 다해 내뱉은 최후의 말은 내 귓가에 확실히 들어왔다. 마지막 순간 나를 보며 활짝 웃은 것 같기도 하지만, 말에 집중하느라 그것을 자세히 살필 겨를은 없었다. 나는 아주 잠시 동안, 세라프가 있었던 자리를 우두커니 응시했다. ============================ 작품 후기 ============================ 1. 김유현에 대한 회상 내용 삭제. 2. 홀 플레인과 김수현에 대한 내용 삭제. 3. 오타 및 문맥 수정. 0003 / 0933 ---------------------------------------------- 세라프, 당황하다. 10년의 시간을 되돌렸다. 10년 동안 함께했던 세라프는 사라졌다. ‘그러면 이제는 어떻게 되는 거지…?’ 지금은 비어있지만, 곧 제단 위로 천사가 소환될 것이다. 새로운 천사가 나올 수도 있고 다시 한 번 세라프가 나올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라면 아무래도 상관없겠지만 후자의 경우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아마 나와 함께한 기억을 모두 잊고 나오리라 추측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호기심은 일었다. 3분 정도를 기다리자 역시나 반응이 오는 게 느껴졌다. 제단 위 공간이 파도처럼 일렁이기 시작한 것이다. 1회차에서는 이때쯤이면 정신을 잃고 있었을 터. 천사가 소환되는 과정은 한 번도 본적이 없기에, 나는 깊은 관심을 갖고 제단 위를 유심히 관찰했다. 수면에 이는 물결처럼, 동심원을 그리며 웅웅 퍼져나가던 파문의 중앙에서 새하얀 빛이 비죽 새어 나온다. 그 빛은 한 순간 일렁이는가 싶더니 이내 폭죽 터지듯 환하게 폭발하며 하나의 형체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나는 새로운 천사가 생성되는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이윽고 제단 위로 생성이 완료된 한 명의 천사가 보였다. 아직 눈은 감고 있었지만 그 자태는 너무도 익숙한 느낌이었다. 성스러움이 묻어나는 일렁이는 날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품과 고고한 빛깔을 뽐내는 광채. 모습을 드러낸 천사는 세라프와 완전무결하리만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세라프의 눈이 서서히 열린다. 짧은 순간, 나를 마주하는 그녀의 연록 빛 눈동자에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아름답고, 고귀하다. 세라프는 소설이나 만화 속에 나오는 천사들처럼, 차마 말로 하기 힘들 정도의 고요함과 성스러운 기운이 흘러 넘치는 매력을 갖고 있었다. 달빛을 발랐는지 시릴 듯이 빛나는 은백색 머리카락은 실크 마냥 윤기가 찰찰 흐르고 있었다. 피부는 흰 눈을 연상케 할 정도로 뽀얗고, 잡티 하나 없는 고운 살결을 자랑한다. 연한 쌍꺼풀이 진 눈 안으로 옥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거기에 언뜻언뜻 비치는 속살까지. 그러나 그 고운 자태를 봐도 음욕은커녕 단 한 올의 욕망도 일어나지 않는다. 애당초 차원이 다른 존재이므로 서로에 대해 느끼는 감정 자체가 다를 것이다. 내가 깨어있는 것에 놀랐는지 세라프의 시선이 느껴졌다. 관찰을 하고 있는지 잔잔한 눈동자로 내 구석구석을 훑는다. 언제나처럼 나를 보는 그녀를 느끼며, 그제야 확신을 내릴 수 있었다. ‘세라프. 10년 전의 너구나.’ 그 순간, 세라프의 고운 입술이 열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응.” “소환의 방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행성 지구. 국가 대한민국 출신. 나이 23살. 이름 김수현. 본인 인증이 완료되었습니다. 앞으로 인간 김수현은 편의상 사용자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앞으로 당신의 안내를 맡은 도우미 세라프라고 합니다.” “응.” “사용자 김수현은 이 소환의 방에서 기본적인 지식들을 알려드린 후, 통과의례라고 불리는 장소로 이동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진정한 사용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증명하셔야 합니다.” “응.” “…….” 빠른 속도로 말을 잇던 세라프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이게 아닌데’ 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세라프를 보자 약간이지만 신선한 감정이 일었다. 하지만, 일단 받을 건 받아야겠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본인이 왜 이곳에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라면, 하지 않는 것을 권하겠습니다. 통과의례에 들어가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2시간에 불과합니다. 물론, 현재의 상황이 혼란스럽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살고 싶다면, 그리고 돌아가고 싶다면….” 세라프는 옳다구나 싶었는지, 다시금 속사포처럼 쏘아대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적응이 됐다고는 해도, 솔직히 처음에는 제법 무서웠다. 표정 없는 얼굴과 고요한 어조로 말하는데 흡사 귀신이라도 본듯한 기분이었다. 그때를 떠올리자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피식 웃음을 터뜨린 후,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아아. 그래.” “사용자는 주어진 시간을 자신의 처지를 최대한 적응하는 것에 할애하는 것을 추천….” “알겠어, 알겠다고.” “…….” 순순히 수긍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라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녀의 손이 느릿하게 허공을 부유하는가 싶더니, 눈을 서너 번 끔뻑이며 떨떠름히 중얼거린다. “정신병자는 아니고…. 마음도 굉장히 안정된 상태입니다. 특이합니다.” “누구 마음대로 정신병자…. 아무튼 상관없잖아. 세라프 너도 네 말을 따라주는 게 편하지 않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럼 된 거지. 뭘 그렇게 투덜거려.” “투덜거리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좋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의 태도는 매우 바람직합니다. 앞으로도 그런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면 생존율은 비약적으로 상승할 것입니다. 그러면 일단….” 나는 이번엔 아예 손을 들어버리고 말았다. 세라프는 드디어 내 신호를 봤는지, 또 말을 멈춰버리고 말았다. “궁금한 게 있다고 했는데.” “그렇습니까. 좋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던 사항에 해당되는 질문만 아니라면, 특별히 질문을 허락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아니고. 혹시 나한테 줄 거 없어?” “줄 거 말씀이십니까? 질문의 명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합니다.” “음~. 아, Tanay라고 하면 된다고 하던데?” “!” Tanay라고 말한 순간 세라프가 눈에 보일 정도로 동요하는걸 볼 수 있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반응이 재밌기는 한데, 이러다가 혹시 받지 못하는 건 아닌지 살짝 걱정이 들었다. 특전을 포기할 수는 없다. 일단 억지로 몰아붙이는 한이 있더라도 받자는 생각에, 나는 살살 타이르는 어조로 말했다. “Tanay, 분명 Tanay라고 했어. 멋대로 시작하는 건 좋은데, 그래도 받을 건 받고 해야지….” “…….” 세라프는 순식간에 표정을 회복했다. 그러나 표정만 회복했을 뿐이다. 지금 내 눈에는 그녀가 동요한 기색을 감추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게 훤히 보이고 있었다. 평소에 느릿하게 일렁이는 날개가 사정없이 살랑거리는걸 보면, 당황한 게 틀림없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세라프는 곧바로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나 그녀의 손가락은 엄청난 타수로 허공을 두드리고 있었고, 입술을 쉬지 않고 오물거리고 있었다. 아마 Tanay란 것을 확인하고 다른 천사들과 교신을 나누고 있을 것이다. 차 한잔을 비울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그 동안 세라프는 수많은 표정 변화를 보여주었고, 나는 침묵을 지키며 그것을 구경했다. 그것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기에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세라프가 눈을 떴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사용자 김수현과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싫은데.” “잠깐이면 됩니다.”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본인이 왜 이곳에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라면, 하지 않는 것을 권하겠습니다. 통과의례에 들어가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2시간에 불과합니다. 물론, 현재의 상황이 혼란스럽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음, 또 뭐라고 했더라.” 방금 전 세라프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 하자, 그녀는 단박에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네 말마따나 통과 의례에 들어갈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줄건 주고, 받을 거 받고. 이게 합리적인 행동이 아닐까?” 일부러 ‘합리적’이라는 단어를 강조하자, 세라프가 입술을 짓씹는다. 그래. 분하겠지.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인간에게 말로 밀릴 줄은 몰랐을 테니까. 솔직히 이런 상황을 한 번쯤은 경험해 보고픈 마음이 있었다.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세라프의 반응은 굉장히 싸늘했다. 마치 일종의 실험용 생쥐를 보는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돌려보내달라고 애원하는 내 말을 들은 척도 않고, 이곳 저곳 뛰어다니며 난동을 피우자 곧바로 내동댕이쳐졌었다. 그런 기억이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이런 상황은 내게 미묘한 쾌감을 선사해주었다. 고소한 마음에 절로 여유로운 미소가 배어 나온다. 세라프는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딱!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고, 주변의 흐름이 약간이나마 느려졌다. 몸이 초기화된 상태라 자세하게 느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10년 동안 굴러먹은 경험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곧이어 세라프의 말이 이어졌다. “사용자 김수현의 주장은 합리적입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현재 소환의 방을 감싸고 있는 시간의 흐름을 늦춘 상태입니다. 만족하셨습니까?” “응.”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세라프는 잠시 나를 세심하게 살펴보는가 싶더니, 고요히 입을 열었다. “저 또한 사용자 김수현에 대해 궁금한 게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싫다면, 굳이 묻지는 않겠습니다.” “아, 그래? 그냥 알려줄까도 했는데.” 조금 더 골려볼까 싶은 마음에 은근히 어깨를 으쓱 이자, 세라프는 눈빛을 반짝였다. “아, 그렇습니까? 확실히 지금 저를 비롯한 모든 도우미들은 혼란에 빠져있습니다. 들을 수만 있다면 자초지종을 듣고 싶습니다.” “하지만 싫어.” 그제야 내가 자신을 갖고 놀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세라프의 양 볼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그것을 보자 박수라도 치며 크게 웃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녀는 뾰로통한 얼굴로 나를 쏘아보더니, 이내 차분히 표정을 정리하며 말했다. “도를 넘는 행동을 할 경우 적절한 제제를 가할 수는 있지만, 도우미들의 1원칙에 사용자들에게 해를 주지 않는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 만큼, 앞으로 도우미를 상대로 한 말장난은 지양해주시길 바랍니다.” “아득한 계급을 가진 차원이 다른 존재들이잖아. 넓은 아량으로 용서하면 되겠네.” “…말씀하신 Tanay의 확인을 마쳤습니다. 이것은 이미 결제가 완료된, 저희들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효력을 지닌 일종의 서약입니다. 특히 부여되어있는 특전은 전원이 면밀히 검토한 결과 완전무결한 사용자 김수현의 것으로 판명 났습니다.” “흠. 그런 것 치곤 납득이 빠르네. 재미없게.” “저희들에게 있어 Tanay란 그런 의미입니다. 검토 정도는 가능해도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사용자 김수현에게 부여된 특전 또한 거둘 수 없습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0년차부터 이런 힘을 갖고 시작하면 확실히 예외가 되어버릴 텐데? 예를 들면 균형이 어그러진다던가….” “균형에는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세라프는 주저 않고 딱 잘라 대답했다. 그러더니 약간 엄해 보이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특전의 내용을 읽었습니다. 확실히 예외적인 내용들이 많았습니다만. 그래도 자만은 금물입니다. 특전을 모두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넘어서는 능력을 지닌 존재들이 없는 게 아닙니다.” 그래도 세라프는 세라프인지, 여전히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어쨌든 ‘없는 게 아닙니다.’라는 말로도 충분했다. 예전에 받았던 ‘무수히 많습니다.’라는 평가와는 판이하게 달랐으니까. 나는 순순히 인정하기로 했다. “하긴, 굳이 사용자에 시선을 국한시킬 필요는 없지. 그 외의 존재라면 홀 플레인에 있을 만도 해.” “그렇습니다.” ‘홀 플레인’이라고 말하는 순간, 잠시나마 세라프의 눈이 일렁였다. “사용자 김수현의 특전을 전부 설정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리라 예상됩니다. 현재 남은 시간은 1시간 47분 26초. 통과의례에 맞추려면 빠듯할 것 같습니다. 제 추측이지만, 이미 홀 플레인의 내부 사정을 알고 계신 것 같은데….” “Ok. 생략. 그건 애초에 내가 바라던 바였다고.” “인위적으로 시간 흐름을 느리게 만들었지만, 어디까지나 보상받은 시간에 한해서 입니다. 다음 과정으로 넘어가기 전 준비에 약간의 시간이 소요될 예정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세라프가 준비하는 동안, 나는 통과의례에 생각이 미쳤다. 통과의례라고 함은 간단히 말해서 ‘사용자로서의 자격을 증명하기 위한 시험을 치르는 장소.’로 정의할 수 있다. 나와 같이 영문도 모르고 납치된 사람들이 모이는 곳. 시험에 합격하는 조건은 단 두 가지이다. 7일이라는 시간 동안 살아남거나, 7일 안에 워프 게이트로 도착하는 것이다. 즉 ‘생존’이 자격을 증명하기 위한 필요조건인 셈이다. 생존에 성공한 사람들은 다시 소환의 방으로 불려오게 된다. 그리고 잠재성에 맞는 클래스를 부여 받고, 비로소 실재(實在) 공간인 홀 플레인으로 입장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억울하면서도 섬뜩한 시험이다. 생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을 경우, 그대로 ‘사망’ 판정을 받게 되어버리니까. “사용자 김수현. 모든 준비가 완료됐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준비를 마쳤다는 세라프의 신호를 받을 수 있었다. “특전의 상세한 내용은….” “알고 있어. 전부 내 머릿속에 들어있으니까, 바로 시작했으면 좋겠다.” “예. 따로 정보를 전달할 필요는 없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럼, 어떤 특전을 먼저 부여 받으시겠습니까?” “음….” 차례대로, 나는 첫 번째 능력을 떠올렸다. ‘1. 사용자 김수현이 본래 가지고 있던 능력치 정보에 관한 특전을 부여합니다. 첫 번째, 1회차 에서 이루었던 사용자 정보를 ‘로드’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기본으로 갖고 있는 6가지 능력치 정보 중에서 4가지를 무작위로 선별해 수치를 상향합니다. 수치의 상향 정도 또한 무작위로 결정됩니다.’ 특전을 마음 내키는 대로 설정할 수는 없다. 세라프가 순서를 지정해준 데는 모두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1번을 먼저 하는 게 정답이었다. 모든 설정의 시초는 능력치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예전 능력치를 그대로 계승한다면 당연히 검사 성향으로 가야겠지만, 일단은 상승폭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었다. “로드, 그리고 능력치 상승에 대한 특전부터 부여 받겠어.” “Yes. 사용자 김수현 명의로 입력된 정보를 불러옵니다. 27%, 56%, 87%, 100%. Complete. Load가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습니다.” 세라프의 말이 끝나자마자 온 몸에서 활력이 샘솟는걸 느꼈다. 그와 더불어 주변의 느릿한 흐름이 피부에 더욱 확실하게 다가온다. 갓 군대를 전역한 23살의 젊은 신체라고 해도, 소드 마스터를 이룬 육체와 비교할 수는 없다. 팡! 오른팔을 세게 뻗어보자, 거친 파공음이 들렸다. 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사용자 정보를 확인했다. “…….” 능력치들은 계승됐다. 그러나 그것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초기화된 상태였다. 정상의 진명과 업적이 나름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다 여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용자 정보 로드 확인. 이제 능력치 상승 추가 특전을 사용해야지?” “Yes. 물론입니다. 혹시나 노파심에서 말씀 드리는데, 6가지 능력 중 4가지 능력이 무작위로 상향됩니다. 증가하는 능력과 수치 또한 모두 무작위지만, 사용자의 잠재성과 성장 정도를 따라 이루어집니다. 이 부분을 필히 유념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정도야 알고 있다고.” 쉽게 말하면, 능력치가 높을수록 올라가는 정도가 낮고, 반대로 능력치가 낮을수록 올라가는 정도가 높다는 소리였다. 그것은 잠재성에 따른 사소한 개인차는 있을지 몰라도,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적용되는 법칙이었다. 기연, 영약, 업적 보상을 제외하면 단순한 수련에 의한 능력치 상승은 한계가 있다. 근력, 체력, 마력. 나는 이 세 능력치만큼은 꼭 상향되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원했다. 난 마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다음이 체력이고 근력, 내구, 민첩은 동등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행운을 가장 마지막으로. 물론 한 수치만 높고 다른 수치들이 형편없이 낮다면 그것대로 문제가 될 소지는 있다. 하지만, 다른 수치들이 어느 정도 받쳐준다는 가정하에 가장 효율이 좋은 능력이 바로 마력이었다. “그럼 지금 바로 부여하겠습니다.” ‘행운은 오르지 않아도 돼. 제발 근력, 체력, 마력. 하다못해 체력, 마력만이라도…!’ 내 간절한 마음이 닿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새 특전은 부여된 모양이었다. 세라프가 손을 한 번 휘저었다고 느낀 순간, 시야에 보이는 허공에 네 개의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 0004 / 0933 ---------------------------------------------- 특전을 사용하다. 『알 수 없는 기운이 당신의 근력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근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알 수 없는 기운이 당신의 민첩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민첩이 소폭 상승 합니다.』 『내부의 마력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도저히 통제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마력이 대폭 상승 합니다!』 『행운의 여신이 당신에게 미소 짓습니다! 그녀는 당신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행운이 대폭 상승 합니다!』 메시지들을 보니 근력과 민첩은 큰 상승을 기대할 순 없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근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민첩 96포인트는 홀 플레인에서도 손에 꼽을 수 있는 만큼 높은 수치였다. 하지만 마력과 행운은 자못 기대되었다. 이벤트 성이 짙긴 했지만, 특수 메시지가 출현했다. ‘정말 오랜만에 설레는 감정이란 걸 느껴보는군. 체력이 오르지 않은 건 아쉽긴 하지만….’ 어차피 처음에는 특전을 부여 받을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다. 이 정도만해도 엄청난 것이었기에, 나는 두근대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바로 사용자 정보창을 갱신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수현(0년 차) 2. 클래스(Class) : - 3. 소속 국가(Nation) : -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자격을 증명할 필요가 있는 자, 예비 사용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3) 7. 신장 · 체중 : 181.5cm · 75.5kg 8. 성향 : 질서 · 혼돈(Lawful · Chaos) (변경 전) [근력 86] [내구 92] [민첩 96] [체력 78] [마력 48] [행운 36] (변경 후) [근력 94] [내구 92] [민첩 98] [체력 78] [마력 90] [행운 88] < 업적(0) > < 특수 능력(0/1) > < 잠재 능력(0/4) > ‘근력 8포인트 상승, 민첩 2포인트 상승, 마력 42포인트 상승, 행운 52포인트 상승. 총합 104포인트 상승.’ 좋다. 아주 좋다. 초라한 수치를 보이던 능력치들은, 메시지 이후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 기뻐해야 할 상황이 맞지만 체력 능력치가 눈에 밟혔다. 다른 능력치들과 비교하자 마음 한 켠에 자꾸만 아쉬움이 남았다. ‘차라리 행운 말고 체력이 올라갔다면….’ 체력은 다른 모든 능력치의 ‘기둥’ 또는 ‘뿌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성이 높다. 마력을 차의 엔진에 비교한다면 체력은 차체라고 할 수 있을까. 현재 내 체력 능력치는 78포인트로 굉장히 어중간한 수치였다. ‘출력은 그럭저럭 뽑을 수는 있을 것 같은데…. 후유.’ 인간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모양이다. 전보다 훨씬 나은 능력치를 가지게 됐는데도 아쉬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저런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불만은 그만두기로 했다. 받아야 할 특전도 아직 많이 남은 상태. 이렇게 어슬렁어슬렁 시간만 죽이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사용자 김수현. 다음 특전으로 넘어가시겠습니까?” “음. 그럼 그래 볼…. 아니, 잠시만.”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능력치야 내가 손댈 수 없는 부분이니 바로 들어갔다고 해도, 지금부터는 아니었다. 스스로 선택하고 만들어나갈 수 있다. 그런 만큼 하나하나의 결정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세라프. 통과의례까지 남은 시간 좀 말해봐.” “1시간 42분 23초입니다.” “잠시만, 잠시만 생각 좀 하자. 30분…. 아니 10분이라도.” “사용자의 뜻대로.” 나는 곧바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홀 플레인에서 나는 강자였다. 그래도 어느 정도 힘이 있었기 때문에 제로 코드를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강자라 불릴 자격은 있지만, 그래도 ‘최고’ 또는 ‘최강’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런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현저히 낮은 마력 능력치는 언제나 내 발목을 잡았다. 지금 마력 문제를 해결하기는 했지만, 어떻게 보면 딱 여기까지일 수도 있다. 지금 내 육체는 이미 한계를 맞은 것과 다름없다. 겉으로는 0년 차로 표기되어있지만 실제로 10년 차 육체를 로드 했으니까. 보상, 장비, 영약 등 따로 능력치를 올리는 방법은 있어도,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 통용되는 ‘수련’으로 상승을 꾀하기는 힘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불리하다는 소리는 절대로 아니었다. 개인차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평균을 내보면 70포인트~80포인트 사이서 수련으로 인한 성장이 멈추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런 경우를 감안한다면 현재 내 능력치는 초호화라 볼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우고.’ 어디서나 예상을 뛰어넘는 특별한 경우가 존재한다. 시작부터 능력치가 70포인트를 넘어가는 경우도 생각해야 했다. 아니, 앞으로는 그런 경우들과 시선을 맞춰 생각해야 한다. 1회차에서 겪었던 기적과 우연들이 이번에 또 일어나리라는 보장이 없다. 내가 원하는 바를 위해서라도, 그것을 이룰 수 있을 만큼의 힘은 꼭 필요했다. 눈을 떴다. 세라프는 여전히 제단 위에 앉아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세라프, 다음 특전으로 클래스 선택을 요청하겠어.” “Yes. 사용자 김수현의 요청을 받았습니다. 통과의례, 홀 플레인에 입장하기 전 클래스를 고를 수 있는 우선권이 부여됩니다. 또한, 일시적으로 모든 비밀에 감싸인 클래스도 공개하겠습니다.” 클래스 선택은 사용자 설정으로써 자격을 증명해야만 할 수 있는 일종의 과정이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보면 원래는 통과의례에서 살아남은 후 홀 플레인으로 입장하기 전, 소환의 방에서만 거칠 수 있는 과정이었다. 즉 나는 그 과정을 모두 생략하고 시작부터 정보 설정에 들어가는 셈이다. 난 이번에도 검사와 관련된 클래스를 선택할 생각이었다. 마력이 높아짐으로써 다른 클래스를 선택할 수 있는 길도 열리긴 했다. 그것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검사가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한 번 가본적이 있는 길이다. 지름길이 있는데, 굳이 새로운 길을 개척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허공으로 빼곡한 정보가 적혀있는 차트가 주르륵 떠오른다. 볼 것도 없이 Rare 차트는 꺼버린다. 그리고 Secret 차트만을 남겨두고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직업 목록(Secret)』 [전투 마법사(War Mage)] [전장의 지휘자(Field Maestro)] [진혼의 암살자(Requiem Assassin)] [영혼 명령자(Soul Commander)] [보석 마법사(Jewel Mage)] [복제술사(Copy Archimage] [죽음의 기사(Death Knight)] [광휘의 사제(Brilliance Priest)] [………….] ‘이건 아니고…. 이것도 아니다…. 흠…. 분명 그놈이 갖고 있던 클래스가….’ 시크릿 클래스가 이렇게 많았던가? 생각보다 많이 나오는 클래스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결국 혼자서 낑낑거리며 찾다가, 이러다 시간만 잡아먹을 것 같아 세라프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세라프. 시크릿 중에서, 검사 클래스들만 따로 보이게 할 수 없을까?” “어려울 건 없습니다. 혹시 검사 관련 시크릿 클래스로 선택하실 생각입니까?” “그렇다면?” “권장합니다. 훌륭한 선택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 바로 선별해드리겠습니다.” 내가 클래스에 이리 목을 메는 이유는 바로 특수, 잠재 능력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었다. 능력치에 따라 클래스를 결정하고, 클래스에 따라 특수, 잠재 능력을 결정한다. 이게 바로 내가 정한 순서였다. 나는 그 중 ‘고유 능력’이란 것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무작위로 뽑힐 두 가지 잠재 능력을 최대한 대비해야 했다. “선별 작업이 끝났습니다. 차트를 올려드리겠습니다.” “응.” 나는 세라프가 걸러준 클래스들을 다시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마법사를 상대하기 용이한 클래스였다. 1회차에는 마력과 행운 수치가 낮아 마법사들과 전투할 때마다 항상 애를 먹어야만 했다.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릴 정도로 오소소한 소름이 돋았다. ‘찾았다.’ 그리고 목록이 중반을 넘어갈 즈음, 드디어 원하던 클래스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검술 전문가(Sword Specialist)] [주문 저격수(Spell Sniper)] 시크릿 클래스는 각 클래스마다 고유한 ‘권능’이 존재한다. 두 클래스 모두 1회차에 등장했고, 강력함은 사방을 떨쳐 울릴 정도였다. 검술 전문가의 권능은 검과 관련된 모든 행동에 이점이 있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자를 수 있다. 주문 저격수의 권능은 일정 확률로 마력 완전 저항이라는 내용이었다. 주문 저격수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말해보면 75포인트 이하의 마력 능력치로 펼치는 모든 마법을 저항할 수 있다. 그리고 85 포인트 이하는 80% 손해를 경감해주며, 심지어 90포인트 이하는 50%를 줄여준다. 아마 생각을 하지 않고 바로 클래스 특전을 받았다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주문 저격수를 선택했을 것이다. 잠재 능력 중 하나인 항마력과 권능을 중첩할 경우, 마력의 극한을 달리는 대마법사를 제외하곤 일반 마법사들은 허수아비로 전락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생각을 거친 후 내 마음은 검술 전문가로 급격히 쏠리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자를 수 있다는 권능은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이었다. 나는 검술 전문가로 활약했던 사용자를 떠올렸다. 그의 무위는 정말로 대단했다. 수많은 마법을 자르고, 베며, 상쇄했다. 그를 상대했던 수많은 마법사들이 마치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갈 정도였다. 주문 저격수도 좋지만, 검술 전문가도 만만찮다. “…….” 한동안 심사숙고를 했지만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검술 전문가였다. 어떻게 보면 모험이나 다름없는 선택이었지만, 나는 뭔가에 홀린 듯 홀가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검술 전문가로 하겠어.” “소드 스페셜리스트 말입니까? 나쁘진 않지만, 주문 저격수도 상당히 괜찮은 직업입니다. 사용자 김수현의 현 마력 능력치를 감안하면, 당신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마법사는 드물 겁니다.” “그렇긴 해.” “그럼 왜….” “반대로 말하면 결국 있긴 있다는 소리잖아.” “…….” 세라프는 여전히 탐탁잖은 얼굴이었다. 언뜻 마음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바로 다잡고 더욱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예를 하나 들어줄 테니까 생각해봐. 일정 이상의 성공이 보장된 타겟 시스템이 있고, 컨트롤에 좌우되는 논 타겟 시스템이 있어. 전자는 어느 정도 안전성이 있다고는 해도 명백한 한계가 있지. 하지만 후자는 순수 내 실력에 따라 효율이 달라지거든.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지?” “이해는 했습니다.” “그럼 검술 전문가로 할게.” “사용자의 뜻대로.” 세라프는 잠시 생각하는 듯싶더니, 이내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또 하나의 정보가 갱신됐다는 메시지를 볼 수 있었다. 『축하합니다. 시크릿 클래스, 검술 전문가(Sword Specialist)를 얻었습니다. 사용자 정보가 갱신됩니다.』 메시지를 보자 이상하게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첫 고비를 무난하게 넘어서 그런지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나는 바로 마음을 가다듬고 바로 다음 특전을 준비했다. 다음 특전은 내 의지가 일정 부분 개입될 수 없는 부분이 있었기에, 나는 다시금 긴장을 끌어올렸다. ‘3. 특수 능력과 잠재 능력에 관한 특전을 부여합니다. 사용자들은 일반적으로 특수 능력 1슬롯과 잠재 능력 4슬롯을 가지게 되지만, 사용자 김수현에게는 잠재 능력 슬롯을 하나 더 추가로 개방하겠습니다. 이것 또한 숨겨진 능력 포함 특수 능력과 잠재 능력을 모두 개방하며, 본인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는, ‘고유 능력’이란 슬롯을 개방할 수 있습니다. 고유 능력은 특수 능력 상위에 해당하는 능력입니다. 고유 능력을 포기한다면 특수 능력 1개와 잠재 능력 5개 전부를 본인이 원하는 능력으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이 때, 개방 슬롯은 자동적으로 잠재 능력에 포함 합니다.)’ 머릿속에 입력된 정보를 천천히 곱씹는다. 특수, 잠재 능력은 추후 본인의 성향을 따라 하나씩 개화화는 특성을 지닌다. 즉 처음부터 능력을 정하고 시작하는 것 자체로도 엄청난 이득이었다. 그만큼 다른 사용자들과는 다른 출발선에서 시작한다는 걸 의미하니까. 그러나, 그런 만큼 선택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었다. 거듭 말하지만 특수, 잠재 능력은 캐릭터의 효율에 영향을 미치는 최고로 중요한 부분 이다. 자신의 클래스에 걸맞은 특성을 얻는다면 그만큼 사용자는 강해진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그만큼 본 클래스의 효율을 이끌어낼 수가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해지고 싶다면 능력치, 클래스, 능력 모두를 조화롭게 구성해야 한다. “세라프. 다음 특전은 능력 부여로 하자고.” “Yes. 그럼 묻겠습니다. 고유 능력 슬롯의 활성화 여부를 알려주십시오. 그에 따른 차이는….” “알고 있어. 고유 능력을 선택하는 방향으로 할게.” “알겠습니다. 잠재 능력 슬롯을 하나 소비합니다. 또한 남은 네 슬롯 중 두 슬롯은 무작위로 선발됩니다.” 믿는 구석은 있다. 능력치의 상승에 사용자의 성장 정도를 따졌던 것처럼, 능력 개방에도 비슷한 법칙이 적용된다. 간단히 말해서 소드 마스터를 이룬 내 육체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소리였다. 내 생각이 틀림없다면, 1회차에 가지고 있던 능력 중 2개가 선발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속으로 주판을 튕기는 동안, 준비를 끝냈는지 세라프가 신호를 보냈다. “고유 능력, 특수 능력, 잠재 능력 목록 차트를 불러왔습니다. 선택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잠재 능력 두 슬롯을 먼저 개방하시겠습니까?” 일말의 불안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나는 잠재 능력 두 개를 먼저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잠재 능력 두 슬롯을 먼저 개방하겠어.” ============================ 작품 후기 ============================ 1. 홀 플레인과 김수현에 대한 내용 삭제. 2. 특수 능력 개화 내용 수정. 3. 오타 및 문맥 수정. 0005 / 0933 ---------------------------------------------- 특전을 사용하다. 홀 플레인은 힘, 정확히 말하면 ‘사용자 정보’가 최우선으로 우대받는 세상이다. 연차, 성향, 능력치, 능력 등 한 명이 갖고 있는 모든 정보를 종합, 그것으로 가치 판단을 내리는 세상. 그렇기에 더욱 예민하게 구는 건지도 모른다. 확실히 특전을 부여 받을 줄은 몰랐고, 짧은 시간에 완벽한 설정을 짜기란 불가능했다. 하지만 내게는 10년이라는 경험이 있다. 살고 싶었다. 살고 싶다면 힘이 있어야 했다. 생존을 갈망하는 마음은 곧 힘을 추구하는 열망으로 이어졌다. 어떤 능력을 올려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강해질 수 있을지. 나는 수없이 고민했고 연구했다. 고작 48포인트라는 마력 능력치로 Master의 경지에 이른 것은 그냥 딱지치기로 얻은 것이 아니었다. 설마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지만, 부여 받은 특전들은 그 동안 연구해놓은 지식을 활용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무작위로 선발된 잠재 능력들은 내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비어있던 두 슬롯에 들어온 능력의 이름을 읽자, 다행히 안도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고유 능력 1슬롯, 특수 능력 1슬롯, 잠재 능력 2슬롯이었다. 그리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고유, 특수, 잠재 능력의 선택을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후유. 다 골랐다.” “…….” 그때, 미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어차피 소환의 방에는 둘밖에 없는 상황. 지금 나를 보고 있는 게 누군지는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세라프와의 마지막 이별은 애틋했다. 하지만 10년 동안 쌓인 앙금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이젠 내부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터라 눈앞의 천사를 곱게 보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난 일부러 세라프가 있는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한동안 시선을 돌린 채로 딴청을 피웠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나는 결국 세라프의 불편한 시선을 이기지 못해 말문을 열기로 마음먹었다. “뭘 봐.” 일부러 불퉁거림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물었지만 시선은 더욱 은근해졌다. 세라프는 잠시 나와 시선을 교환하더니 약간 상기된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용자 김수현의 능력치. 그리고 특전에서 선택한 고유, 특수, 잠재 능력. 이 두 분야로 나뉜 설정과 검술 전문가의 설정을 종합해보았습니다. 그러자 한가지 추론을 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도우미 마음대로입니다.” 바로 받아 치는 세라프를 보며 약간은 황당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지금 천사가 농담을 한 건가? 아니면 진담인 건가? 어쩌면 반반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 해보니 어떻든.” “능력치, 능력 분야에 대한 연구가 굉장히 깊다고 느꼈습니다. 마치 홀 플레인이란 공간을 오랫동안 경험한 사용자처럼 느껴집니다.” “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 순간 속이 심하게 따끔거렸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태연히 되묻자, 세라프는 좌우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조금 특이한 성격인건 인정해.” “행동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사용자 김수현의 특전을 사용함으로써 뽑아낸 효율은 천사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홀 플레인을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결코 그런 선택이 나올 수 없습니다.” “여기서 잠깐. 무르기 있기 없기.” “없기. 거듭 말씀 드리지만 특전에 관해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천사들은 인간과 다릅니다.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습니다. 뭐, 아무튼. 사용자 김수현이 노리는 바를 대강이나마 알 것 같습니다. 그뿐입니다.” 세라프의 목소리엔 진심으로 감탄한다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아까부터 따끔거리던 속마음에 마냥 우쭐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연구를 했다고는 해도, 지금 노리고 있는 건 예전 최고의 명성을 떨친 여러 사용자들 중 한 명이 가진 클래스를 토대로 잡고 있었다. 유명세도 유명세지만, 나와 이름이 똑같은 탓에 더욱 자세히 기억하고 있다. 검술 전문가 진수현. 해당 시크릿 클래스는 마법사들한테서 악몽이라 불릴 정도로 대 마법사전에서 발군의 위력을 자랑했다. 진수현은 나보다 홀 플레인에 늦게 입장한 사용자였다. 차이를 계산하면 약 1년 정도의 시간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노력이라는 단어로 1년 이라는 시간을 단숨에 좁혔다. 그리고 재능이라는 단어로 나를 순식간에 추월했다. 나 또한 나름대로 노력한걸 생각해보면, 당시 느꼈던 상실감은 아직도 가슴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지금 당장 진수현의 정보를 그대로 구현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일단 그는 나와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본인의 정보를 남한테 알려줄 정신 나간 사용자도 아니었다. 기본적인 꼭 필요한 요소들은 그대로 계승한다고 해도 전체적인 맥락으로 보면 결국 2할의 비중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8할은 내 나름의 독자적인 해석을 섞어 뼈를 만들고 살을 붙여야 한다. 앞서 말한 대로, 내 10년간의 경험과 노련함을 믿을 생각이었다. “아무튼 그런 시선은 관두라고.” 대놓고 불편하다는 얼굴을 드러내자 세라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검술 전문가는 내가 가져갈게.’ 미안한 감정이 없는 건 아니어서, 나는 잠시 진수현을 위해 기도했다. 너 정도면 검술 전문가가 아닌 다른 클래스를 골라도 충분히 성공할 테니 너무 걱정 말라고. 그렇게 기도 아닌 기도를 마친 후, 바로 다음 특전으로 생각을 돌렸다. 네 번째 특전. ‘4. 단 1회에 한해서, 신체 개조 시술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개조 시술이라고 해도 특별한 건 없다. 물론 몸 일부를 기계로 대신하거나 또는 이공간의 존재를 임의 소환, 일부러 자신의 일부를 대신하는걸 본 경우는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팔다리를 완전하게 잃었을 경우에만 해당하는 사항 이었다. 건강하고 사지 멀쩡한 신체를 가진 이상, 몸의 일부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건 바로 문신 시술이었다. 이 과정은 계획의 완성을 위한 필수 요소였다. 만에 하나 문신 시술이 없었다면, 계획의 성공률은 3할도 채 되지 못할 정도로 위험하다. 내가 5번째 특전 때 요청할 물건은 그만큼 강력하고 위험했다. 3번째 특전을 거치는 동안 적지 않은 시간을 들였기에 바로 문신 시술을 요청하기로 했다. “음. 어디 보자. 거창한 개조 시술 보다는 그냥 간단한 문신이나 시술 받고 싶은데.” “가능합니다. 문신 목록 차트를 띄워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아, 괜찮아. 이름은 알고 있거든. 고대 무녀의 각인이라는 문신으로 부탁해.” “문신을 각인할 위치는 어디로 하시겠습니까?” 나는 태연한 얼굴로 오른손을 들었다. 그리고 세라프의 시선이 내 오른손을 따라가는 순간, 손가락으로 내 왼쪽 가슴을 가리켰다. “심장.” “심장 말입니까…?” “왜?” “…….” 세라프의 얼굴은 고요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속으로는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계산을 하고 있을게 분명했다. 내 의도를 파악하려 애쓰는 게 안쓰러웠지만 당연히 아직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일반적인 문신은 피부 위로 새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고대 마법을 이용한 마력 각인을 통해 심장에 시술을 한다는 게 영 탐탁지 않은 모양이다. 사용자들이 사용하는 마력의 중추를 담당하는 기관은 심장과 회로이다. 마력 반응에 직간접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신을 심장에 각인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떤 문제가 터질지 모르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대 무녀의 문신은 다르다. 아마 일반적인 문신을 말했다면 난 세라프와 한동안 설전을 벌여야 했을 것이다. 일반적인 문신들, 즉 마력 증폭이나 양에 관여하는 시술이라면 문제 삼을 거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 무녀의 각인은 일반적인 문신들과 궤를 달리하고 있다. 그것에는 총 2가지 기능이 있다. 첫 번째, 마력이 폭주했을 경우 자체적으로 안정시켜준다. 두 번째, 마력의 흐름을 효율적으로 이끄는데 도움을 준다. 이런 순기능이 있는 고대 무녀의 각인인 만큼, 세라프도 지금 무척이나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살짝 긴장된 기분을 느끼며 그녀의 입술을 응시했다. 이 시술만이 실패할 가능성이 다분한 내 계획을 성공으로 이끌어줄 유일한 최종 열쇠였다. 이윽고 세라프의 고운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Yes.” 빙고. “사용자 김수현의 요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정확히 5분 7초가량의 시간이 소요될 예정입니다. 그럼 지금 바로 시술하도록 하겠습니다.” “Okay.” 그 순간 눈앞 허공으로 밝은 푸른빛을 뿜는 고대 문자들이 생성되더니 이내 타원형을 그리듯 몸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사위로 무녀들의 엄숙한 목소리가 들리는듯한 환청이 느껴졌다. 5분 후. 천천히 주변을 돌던 고대 문자들은, 심장 부근으로 하나씩 스며들었다. 심장이라고 해도 딱히 아픈 느낌은 없다. 오히려 문자 하나가 들어올 때마다 조금이나마 활력이 샘솟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끝 줄에 있던 문자가 들어오는걸 마지막으로 시술을 매듭지을 수 있었다. 뭐가 변했는지 바로 체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력을 운용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일. 나는 곧장 마력의 점검을 시작했다. ‘오호.’ 처음에는 폭발적으로 늘어난 마력으로 인해 운용하는데 약간 애먹으리라 생각했는데, 전혀 부담이 느껴지지 않는다. 회로를 따라 유유히 흐르는 마력들. 시술은 성공적이었다. 예상외의 만족스러운 성능에 절로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괜찮네. 세라프? 남은 시간 좀 알려줘.” “통과의례에 도달하기까지 앞으로 48분 39초 입니다.” 48분 39초라. 나는 살짝 입맛을 다셨다. 별다른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세라프는 시간이 충분하다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론 빠듯하다. 남은 다섯 번째 특전은 도박성이 짙은 모험이었다.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만큼, 크나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그 필요성을 생각한다면, 결코 피할 수 없는 과정.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다섯 번째 특전을 떠올렸다. ‘5. 사용자 김수현이 원하는 장비를 한가지 선택할 수 있으며, 종류에 제한은 없습니다. 다만 EX등급의 장비들은 선택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선택지가 상당히 광범위한 특전이었다. 검, 방어구, 영약, 액세서리 등등. 그러나 그런 일반적인 것들을 선택해버린다면 고대 무녀의 문신 시술을 받은 의미가 없어져버린다. 그만큼 다섯 번째 특전은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화정, 불의 화정이 낫겠다. 다섯 번째 특전은 그것으로 하겠어.” “사용자 김수현의 요청을 승인합니다…?” 끝맺음이 묘하게 올라갔다. 세라프는 끝말을 의문형으로 바꾸더니 눈살을 살짝 찡그렸다. ‘설마 걸린 건가?’ 내 의도를 알아챘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그래도 승인 요청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세라프의 오른손에는 붉은빛이 피어오르는 작은 구슬이 쥐어져 있었다. “…….” “…….” 서로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라프의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녀는 내게 구슬을 건네줄 생각이 없다. 역시나 내 생각이 맞았는지 세라프는 엄한 표정을 짓더니 질책하는듯한 시선을 쏘아 보냈다. 이에 질세라, 나 또한 표정을 딱딱히 굳히며 그녀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들였다. “사용자 김수현.” “Tanay.”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건 다른 문제입니다. 아무리 Tanay라도, 사용자한테 해를 입힐 수 있다면 조언할 수 있습니다." “조언을 빙자한 간섭이겠지. 헛소리 말고 내놔. 난 불의 화정이 필요해. 내가 미쳤다고 다른 좋은 시술 놔두고 엄한 고대 무녀 시술을 받은 줄 알아?” 이래서 세라프가 싫다. 어차피 줄 거 꼭 한바탕 싸우고, 서로 감정은 상할 대로 상한 상태서 일을 매듭짓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가 떠오르자 습관적으로 거친 말들이 목구멍 끝까지 차 올랐다. 그러나 헤어지기 전 애틋이 나를 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문득 머리를 스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였다. 일단 말이라도 들어볼 요량이었다. “당신의 창의성에 경의를 표합니다. 인간이 이런 생각을 해냈다니, 정말로 놀랍습니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 “사용자 김수현. 불의 화정에 대해 얼만큼 알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모든 것을 불태울 수 있다는 것 정도?” “비슷합니다. 불의 화정의 다른 이름은 영원히 타오르는 염화. 세간에 알려진 가장 파괴력이 높은 불은 지옥의 겁화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순수한 불의 집합체, 화정은 그와 동급으로 견줄 만큼 위험한 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파괴를 위한 불입니다.” “알고 있어. 다 알고 있으니 달라는 거야.” “내구 수치 92. 마력 수치 90. 예상 성공 확률 21%. 고대 무녀의 각인을 포함한다면 예상 성공 확률 42%. 바꾸어 말하면 절반을 넘는 58%의 확률로 실패한다는 말입니다.” 세라프는 필사적으로 나를 설득하려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쓴다 해도 특전은 결국 Tanay등급이었다. 그녀 말대로 조언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내 결정을 막을 수는 없다. 해서, 나는 오른손을 쫙 펴고 내밀며 당당히 화정을 요구했다. “성공하면 되잖아.” 내가 말하긴 했지만 참 속 편하게 하는 말이었다. 아마 세라프는 지금쯤 복장이 뒤집어지고 있지 않을까? 실컷 얘기해놨더니 씨알도 안 먹힌다. 그녀는 이제 거의 매달리는 수준으로 애원하고 있었다. “실패는 말할 것도 없고, 성공해도 문제가 됩니다. 실패하면 모든걸 잃고 폐인이 됩니다. 성공해도 분명 예상할 수 없는 불이익이 있을 겁니다.” “분명 EX등급 빼고 모든 장비를 지급한다고 읽은 것 같은데. 화정이 EX등급이었던가?” “원래 불의 화정은 EX등급이었습니다. 홀 플레인에 존재하되 등장할 수 없는 장비란 말입니다. 다만 얻기가 요원하고, 균형 작업을 통해 S등급으로 하락하긴 했지만 위험성이 사라진 건….” 이대로 가면 분명 끝이 없을 것이다. 무척 피곤한 기분을 느꼈기에,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멈췄다. 웬만하면 끝까지 들어주고 싶지만 지금 남은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아니면, 세라프가 이대로 시간을 끌어 통과 의례까지 끌고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더는 얼굴 붉히고 싶지 않은데.” “90이 넘는 내구와 마력 능력치로도 힘든데 체력은 78에 불과합니다. 자신감은 이해하지만 현실을 보길 바랍니다.” 물론 세라프가 걱정하는 바는 알고 있다. 보통사람이라면 그 간곡한 설득에 마음이 약간이라도 움직일 만큼 그녀의 걱정은 따뜻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차라리 다른걸 양보하면 양보했지 이것만큼은 벼르고 벼르던 것이었다. 만약 이대로 화정을 포기한다면…. “회복 시간도 만만치 않은데. 시간 더 끌면 반 시체 상태로 통과 의례에 들어갈걸?” “사용자 김수현.” “더는 말 안 하련다. 불의 화정, 확실히 요청하겠어.” 결국엔 사늘히 일갈하고 말았다. 심상찮은 기류를 읽은 건지 아니면 더는 Tanay에 거부할 수 없는지는 몰라도, 세라프는 천천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얼굴에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 찬 상태였지만 이윽고 그녀는 내 쪽으로 화정을 내밀었다. 하지만, 곱게 주지는 않았다. “성공한다고 해도 분명히, 후회하실 날이 올 겁니다.” “알았어….” 두둥실. 불의 화정. 순수한 불의 집합체. 영원히 불타오르는 염화. 준비과정은 필요하지 않다. 마음을 먹은 지는 오래고, 후 폭풍까지 계산한다면 남은 시간도 별로 없다. 화정은 가느다란 진홍빛 궤적을 그리다가, 그대로 내 입 속으로 쏙 들어왔다. 꿀꺽. 드디어 화정을 얻었다. 비로소 화정이 내 품 안으로 들어왔다. 솟구치는 안도와 희열을 다스리며 나는 빠르게 내부를 관조했다. 쭈룩. 목 울대를 한 번 꿀꺽 움직이자,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동그란 구슬이 느껴졌다. 이제부터가, 진정한 고비의 시작이었다. ============================ 작품 후기 ============================ 1. 홀 플레인과 진수현에 대한 내용 일부 삭제. 2. 오타 및 문맥 수정. 0006 / 0933 ---------------------------------------------- 특전을 사용하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화정은, 뜨거웠다. 그리고 쭈룩 내려간 그것이 몸 안에 유유히 흐르는 마력에 닿은 순간, 화정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화륵! 화르륵! 마력과 반응한 화정은 이내 거센 불길로 변하더니 겉잡을 수 없는 기세로 불어나기 시작했다. 구슬 안에 잠재된 염(炎)의 냄새를 물씬 느낄 수 있을 만큼 화정의 기운은 순수하면서 강력했다. 쾅…! 그나마 미약한 첫 반응.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몸은 이리저리 불룩히 솟아오르며 염화를 토해낸다. 신체가 갑자기 폭발하는 기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외부로 발산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한 번 꿈틀 일 때마다 사방으로 불똥이 튀기고, 몸이 간헐적으로 움찔거렸다. 그런 내 모습을 보았는지, 세라프가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나는 어디 있는지도 모를 그녀에게 간신히 손을 들었다. 끼어들지 말라는 신호였다. 세라프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내 능력으로 화정의 기운을 억지로 <통제>하는 건 요원한 일이었다. 물론 고대 무녀의 문신을 이용한다면 어떻게든 성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직은 문신의 힘을 이용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무엇보다 나는 애초에 그것을 통해 화정을 억제할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게 옳으리라. 고대 무녀의 문신은 앞으로 내 동반자가 될 화정의 기운이 머무를 장소를 제공할 용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건 억압도 통제도 아니다. 지옥의 겁화와 맞먹는 힘을 도대체 어느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단순히 힘을 빌리는 용도로 이야기를 바꾸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언뜻 눈을 뜨니 세라프가 희미하게 보였다.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천사의 그런 모습이 자못 신선했지만, 나는 바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지금까진 전조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화정이 일으키는 폭발을 일반적인 폭발과 비교하면 곤란하다. 물질적 폭발이 아닌 순수한 기운의 폭발. 그만큼 비교할 수 없는 기운과 고통을 동반한다. 그리고 화정은, 비로소 내부서 본격적인 행동을 개시했다. 쾅! 쾅! 쾅! 쾅! "끅. 끄륵." 이어진 폭발에 나도 모르게 잠깐 눈을 까뒤집고 말았다. 제대로 행동을 개시한 폭발에 의한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10년 동안 홀 플레인에서 활동하며 수많은 상처를 입고 고통을 느꼈지만, 지금과 비교하면 애교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더욱 강도가 세질 고통에 소름이 끼쳤지만 그럴수록 나는 이를 바득바득 깨물었다. 나는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난 홀 플레인의 끝을 본 사용자 김수현이다. 그 기간 동안 나는 끝없이 참고 인내해야만 했다. 그 10년 이라는 시간은, 어느 누구도 얻지 못한 제로 코드를 손에 쥐었다는 자부심은 단순한 딱지 치기로 얻은 건 절대로 아니었다. 폭발 소리가 새어 나오는지 아니면 세라프가 말하는지. 주변이 굉장히 소란스러웠다. 하긴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매 순간마다 화정은 자신의 기운을 착실하게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폭발을 일으키려는 순간,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마력을 일으켜 화정의 기운을 북돋아주기 시작했다. 90에 다다르는 방대한 마력이 힘을 보태자 화정의 기운은 순간 터지려던 폭발을 잠시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은 단 한 번에 불과했지만, 미약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내 마력이 화정의 기운에 무리 없이 섞여 든 것이다. 순수한 불의 집합체. 영원히 타오르는 염화. 화정은 의지를 가진 기운이다. 스스로 자아를 갖고 주인을 선택하는 에고 장비와 비슷하면서 다른 점이 있다. 그건 바로 의지의 차이였다. 자기 자신의 의지대로 힘을 행사할 수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아는 없지만 감정은 살아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마력의 합일을 통해 불의 기운과 교감하고 있었다. 현재 느껴지는 화정의 감정은 황당함이었다. 보통 내부 파괴활동을 하고 있다면 그 기운을 통제하는 게 일반적인 맥락이다. 그러나 난 오히려 화정이 활동을 편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손을 내밀고 있었다. 너를 꿇리려는 게 아니라, 동급의 존재로서 힘을 빌리고 싶다고. 간절한 감정을 담아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나는 네가 꼭 필요해. 그러니 어디 한 번 네 마음대로 휘둘러봐. 내가 너의 동반자로 너의 힘을 빌리는 자로 적합한지 아닌지, 스스로 판단하고 그 결과를 나한테 보여다오.' 그러자 겨우 한 번 숨돌릴 틈을 얻었다. 콧구멍으로 뜨거운 숨결을 뿜어낸다. 코에서 불이 화르륵 흘러나왔다. ‘좋아. 알았어.’ 그리고 겨우 화정의 허락을 얻을 수 있었다. 잠시 내부를 가다듬은 후, 나는 빨리 놀자고 칭얼대는 화정이 뛰놀 공간을 안내했다. 첫 타깃은 오른팔과 왼팔이었다. 얼른 기운을 나눠 양방향으로 힘차게 보낸다. 회로와 혈도를 따라 통로를 안내하자 강대한 기운이 얼씨구나 파도처럼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정은 차마 인지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양 손가락 끝에 있는 미세한 경혈까지 점거해버리고 말았다. 보글! 보글! 툭! 툭! 툭! 툭! 몸 안의 혈도가 무언가 툭툭 터지는 기분 좋은 아픔이 느껴진다. 막힌 혈관의 구멍이 시원하게 뚫려 터지는 소리. 억지로 개통 시키는 거라 해도 효과는 훨씬 더 대단했다. 마스터를 이룬 과거의 육체로 뚫기 힘들었던 손가락 끝 미세한 경혈까지 확실하게 뚫어주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양팔의 피부 위로 싯누런 진물과 시꺼먼 액체가 보글거리며 배어 나오다가 이내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허공으로 산화했다. 내 몸 구석에 꽁꽁 숨어있던 노폐물, 불순물들은 화정의 통과가 방해된다는 이유로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평소라면 손뼉치고 좋아할 일이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단순히 팔에 밀어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찔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살살 달래듯 기운을 다시 중앙으로 돌려보냈다. 다행히 화정도 이미 점령한 지역은 관심이 다했는지 순순히 내 의지를 따라주었다. 이윽고 양 팔을 가득 채웠던 모든 기운이 빠져나가자마자 양팔을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말 그대로 엄청난 충격에 감각을 상실해버린 것이다. 이대로 팔을 잃는 게 아닐까 걱정이 들었지만 되돌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얼른 다른 데로 데려가 달라고 성화를 부리는 화정을 달래며 서둘러 두 다리를 향하는 통로로 이끌어주었다. 그리고 거의 다다랐을 즈음 살며시 등을 떠밀자, 무척 기다렸는지 다시 거친 파도처럼 내려가기 시작했다. 보글! 보글! 툭! 툭! 툭! 툭! 양팔과 다른 과정은 없다. 결과도 똑같다. 양다리를 점령한 기운이 모두 빠져나간 순간 버티려던 다리 역시 감각을 상실했다. 무기력하게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내구, 체력, 마력의 능력치로는 간신히 몸이 부서지지 않고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고작인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나게 뛰노는 화정은 연신 몸 안에서 펑펑 폭발을 터뜨리고 있었다. 진심으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온몸을 두드리는 고통에 당장 기절하고 싶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은 내 정신 줄을 미약하게 붙잡아주고 있었다. 쾅! 쾅! 쾅! 쾅! 폭발이 들릴 때마다 심장이 요동치고 피가 뜨거워진다. ‘더 놀데 없어?’ 라고 의지를 전달하는 화정을 보며, 나는 마음을 다잡고 일단 더 기운을 모아달라고 부탁했다. 다음으로 이끌어줄 순서는 최종난관인 머리였다. 나는 머리를 앞두고 처음으로 두려운 감정이 들었다. 이건 다스려질 성질이 아닌 두려움이었다. 머리를 뚫어도 또는 뚫지 못해도 내가 느낄 고통은 상상조차 하기 싫을 수준이었다. 그때였다. '싫으면 그만할까? 굳이 머리까지 올릴 필요는 없잖아? 지금만 해도 충분한데.' 그것은 흡사 화정이 은근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순간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지만 나는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성은 그만하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난 본능적으로 기운을 갈무리해 머리로 올라갈 통로로 인도했다. '바보 같아. 죽을지도 몰라?' “고작 이 정도로.” 들어갈 준비는 끝났다.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머리는 하지 말라고 나를 말리지만 내 행동은 그에 아랑곳 않고 본능에만 충실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정을 통로로 보내며 발악하듯이 고함을 질렀다. “얕보지 말라고!”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 이지만 내 의지는 확실하게 전달된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중앙의 기운이 활발하게 회전을 시작한다. 차곡차곡 기운을 모으더니 배꼽 아래 단전 부근까지 기운이 쭉 내려가 멈췄다. 그 순간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뽑아내어 기운을 위로 솟구쳐 올렸다. 그렇게 장렬한 폭발을 남기며 화정이 순식간에 내 목을 통과하려는 순간이었다. “컥!” 푸확! 코, 입, 귀, 눈 등. 몸에 있는 구멍 모두에서 검붉은 피가 터져 나온다. 내 직감이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이것은 흡사 죽음을 눈앞에 둔 기분이었다. 화륵! 화르륵! 목 부근에서 막힌 화정의 기운은 크게 성화를 부렸다 여기서 폭발이 터지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현실이 나를 덮칠 것이다. 현기증이 온몸을 덮치며 전신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젠 마지막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나는 혼미한 와중에도 목 부근에서 돌아다니던 기운을 다시 단전 아래로 끌어 모았다. 천만 다행히도 기운은 내 의도에 따라 이동해주었다. ‘어떻게든 뚫어야 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총 열 번을 회전해 날뛰는 기운을 갈무리한 후, 난 마지막이라는 생각과 함께 있는 힘을 다해 다시 머리 쪽으로 솟구쳐 올렸다. 그 뒤로 찾아올 고통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꽝! 거친 충격음이 온 몸을 뒤흔든다. 목 부분이 시원하게 뚫리고 머리로 향하는 통로가 개척되자 아까 그랬듯 화정의 기운은 순식간에 머리 전부를 뒤덮었다. * 말 그대로 눈 앞이 보이지 않았다. 단지 그 뿐이었다. 한 순간 점멸해버린 시야는 세상을 하얗게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어느 것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 마치 기억의 중간을 뚝 끊었다가 절단면을 이어 붙인 것 같았다. 화륵! 화르륵! 화륵! 화르륵! 겨우 상황을 받아들였다. 왜 저항을 했냐고 심통을 부리듯 화정의 기운이 머리 속을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고 있었다. 말 그대로 뇌가 녹아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고통? 솔직히 처음 뚫었을 때만 해도 무언가 뻥 뚫리는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천천히 시야가 회복 되고 몸의 인지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는 순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평생 살면서 다시 겪기 싫은 고통을. '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소리를 지를 수 있었다면 있는 힘껏 터져라 질러 냈을 것이다. 이미 평범한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은 아득히 초월해버린, 차원이 다른 자극이 내 몸을 감돌았다. 뜨거운 용광로에 그대로 머리를 담근다면 이런 느낌일까? 석유를 듬뿍 묻힌 후 불덩이로 짚신을 이고 뛰어들면 비슷한 느낌이 날까? 아무리 산전 수전 공중전 시가전까지 겪었다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는 진심으로 죽고 싶었다. 외부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기의 폭발이 내 전신을 뒤덮었다. 지금까지 터진 폭발과는 궤를 달리하는 폭발 이었다. 머리에서부터 시작한 영원히 타오르는 염화는 넌 이제 내 것이라는 듯 야금야금 내부를 점령해 나가고 있었다. 화정의 기운이 닿은 곳은 세포 하나 하나가 지글지글 끓어 올랐지만, 이젠 아프다기보단 따뜻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흐릿하게나마 시야가 돌아왔다. 몸은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니, 하얗게 질린 얼굴로 우두커니 날 내려다보는 세라프가 보였다. ‘살아는 있는 걸까…?’ 다시 한 번 그런 끔찍한 고통을 겪으라고 한다면 그냥 죽는 게 좋을 텐데. 마무리 작업은 머리를 개방시키는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수월한 편 이었다. 나는 천천히 몸 전체로 퍼진 화정의 기운을 모아 심장 쪽으로 살살 보냈다. 내가 마음에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화정은 순순히 내 의도대로 움직여 주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고대 무녀의 각인 마법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화정은 실컷 날뛴 것에 만족했는지 순순히 심장 속으로 들어가주었다. 그리고 이내 얌전히 자리를 잡는걸 느낀 순간이었다. “수현! 수현!” 나는 그대로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안도감을 채 느낄 새도 없이.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 0007 / 0933 ---------------------------------------------- 특전을 사용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 간신히 눈을 뜨자, 잿빛 벽돌의 소환의 방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아직 통과의례에 들어갈 시간은 오지 않은 모양. 이대로 눈을 감으면 푹 자버릴 것 같아, 나는 끙 차 허공으로 고개를 들었다. 예상대로, 허공에는 확인 전 메시지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누운 상태기는 해도 보는 데는 큰 무리가 없어, 다시 바닥에 머리를 기대곤 메시지를 읽어 들였다. 『몸 내부에 감당할 수 없는 만큼의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체력이 영구적으로 10포인트 하락합니다.』 『축하합니다. 몸 내부의 노폐물과 불순물을 모두 태웠습니다. 활력이 돌고, 마력의 흐름이 가일층 높아집니다. 체력 2포인트, 마력 6포인트가 영구적으로 상승합니다.』 『영원히 불타오르는 염화. 심장에 화정이 자리 잡았습니다. 화정과의 동화율은 현재 100%입니다.』 멍하니 하나하나 읽던 도중이었다. 체력 능력치가 하락했다는 메시지를 보는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어지는 메시지들을 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자, 세라프의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 들었다. “사용자 김수현. 정신이 들었습니까? 몸은 좀 괜찮으신 겁니까? 사용자 김수현!” 일단 청각은 회복됐다. 자꾸만 생각을 방해하는 목소리에, 내 몸 상태는 너도 알 수 있지 않냐고 쏘아 붙이려는 순간이었다. “───. ───. ───.” ‘뭐, 뭐야? 왜 바람 빠지는 소리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아니, 목소리는 나오지만 쉰 소리만 샐 뿐이었다. 목이 완전히 나가버린 것이다. 허탈한 마음에 어떻게든 말을 하려고 해도, 여전히 바람 빠지는 소리만 흘러나왔다. ‘결국 온 몸이 회복될 때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나는 크게 숨을 내쉬며 사용자 정보창을 불렀다. 어느 정도 회복될 때까지 특전이 섞인 정보창을 살펴볼 생각이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수현(0년 차) 2. 클래스(Class) : 검술 전문가(Secret, Sword Specialist,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자격을 증명할 필요가 있는 자, 예비 사용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3) 7. 신장 · 체중 : 181.5cm · 75.5kg 8. 성향 : 질서 · 혼돈(Lawful · Chaos) (변경 전) [근력 94] [내구 92] [민첩 98] [체력 78] [마력 90] [행운 88] (변경 후) [근력 94] [내구 92] [민첩 98] [체력 70] [마력 96] [행운 88]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 업적(0) > < 고유 능력(1/1) > 1. 제 3의 눈(Rank : S Zero) (설명 : 일반적인 눈의 개념을 벗어난 비상식 범주에 해당하는 제 3의 눈(The Third Eye). 굳이 말한다면 본인의 직관력과 연동되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표현할 수 있다. 단순히 ‘본다’라는 범주를 벗어나, 현재에 발동하는 모든 현상을 고차원적 사고로 통찰해버린다. 원래는 현재를 벗어난 이상 차원의 현상도 고찰이 가능하지만 본인의 수련 또는 깨달음이 아닌 알 수 없는 힘으로 강제 발현됐기 때문에 2랭크 하락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순수한 불의 기운을 품은 화정의 영향으로 다시 1랭크 상승 보정을 받았다. 사실상 현재의 어떤 것도 사용자 김수현의 눈을 속일 수 없다.) < 특수 능력(1/1) > 1. 신검합일(Rank : Extra) 검술의 최고 경지에 이른 사람이 검이 되고 검이 사람이 되는 경지. 검을 드는 순간 검을 휘두르는 모든 행동에 대해 긍정적인 추가 보정을 받는다. 검의 극한을 깨우치긴 했지만 사용자가 아직 검술의 최고 경지에 이른 건 아니다. 그러나 다년간의 노련한 경험과 수많은 업적 그리고 직업 보정으로 2랭크 상승 보정을 받았다. < 잠재 능력(4/4) > 1. 백병전(Rank : A Plus) (설명 : 근접 무기를 다루는 사람에 있어서는 이미 극한을 넘어선 능력. 이쯤 되면 단순 전투 능력이 아닌 인간으로서 획득 가능한 최고봉의 상승 경지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근접 전투에 한해서는 절대로 밀리지 않는다. 다년간의 노련한 경험과 직업 보정으로 1랭크 상승 보정을 받았다.) 2. 쓰러질 수 없는(Rank : A Plus) (설명 : 전투를 포기할 줄 모른다. 패배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한 의지는 설령 빈사에 이르는 부상을 입었더라도 전투를 가능케 한다. 결정적인 치명상을 입었을 경우도 전투는 가능하지만 전투력 유지 효과는 그만큼 반감된다.) 3. 심안(정)(Rank : A Plus) (설명 : 있는 그대로의 외형을 보는 게 아닌, 대상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눈. 자신을 관조하고 만물을 살피거나 감지하는 능력 또는 비슷한 작용을 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극한으로 다스려진 마음은 S랭크 이하의 정신 오염 마법 아래서도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 4. 전장의 가호(Rank : Extra) (설명 : 평화를 수호하는 전장의 여신 아테나. 오직 전장 한정으로 발동하며 전장 내 한 명의 병사로서 누릴 수 있는 여신의 축복. 가호를 받은 사용자는 전장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넓은 시야를 얻으며, 위기에 몰린 아군의 위치를 곧바로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신성이 담긴 가호를 받았기 때문에, 전장 외 발동으로도 포함해 마법적 행사에 의한 피해를 무조건 감소시킨다.(이는 능력의 랭크와 사용자 본인의 행운 능력치를 적용한 수치로 적용한다.) 사용자 김수현의 행운 능력치는 준수한 수준 이지만, 최고에 이른 가호의 능력으로 적용된 수치보다 1랭크 높은 마법 행사에 대해서는 일부 방어 판정을, 2랭크 높은 마법 행사에 대해서도 감소 방어 판정을 받을 수 있다.) (잔여 능력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사용자 정보를 모두 읽자 탄성과 아쉬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무작위로 얻은 백병전과 쓰러질 수 없는 은 어차피 건드릴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능력이 나쁜 편은 아니었고 랭크도 괜찮게 나왔다. 무엇보다 예전에 사용하던 능력들인 만큼 익숙한 게 좋지 않겠는가? 단 하나 예상을 벗어난걸 모자라 빵 터진 문제는 체력 능력치의 감소였다. 체력은 모든 능력치를 지탱해주는 기둥역할을 해주는 능력치이다. 체력 70포인트. 기존에 의도했던 출력을 그대로 뽑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지탱하는 체력이 70포인트라는 점은 확실히 고민할만한 문제였다. 굳이 비유를 해보자면 자동차로 비유할 수 있다. 설계상 조건은 무척 뛰어나지만, 엔진의 내구도가 굉장히 불안정하다. 만일 엔진이 과열됐을 경우 리 타이어 또는 폭발의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결국 세라프와 내가 했던 예상은 각각 절반씩 들어맞은 셈이다. 체력에 대한 고민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지만 지금 당장은 방법이 없었다. 앞으로 얼마나 모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최대한 그러모아 여유 포인트를 확보해야 한다. ‘0년 차이긴 하지만 10년 차 육체를 불러왔으니…. 수련으로 올리기는 어렵겠지.’ 어차피 지금 당장은 해결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복잡한 생각은 대충 한구석에 밀어 넣고, 지금 당장은 몸을 회복시키는데 전념하기로 마음먹었다. 세라프의 눈총이 점점 더 따가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지금 능력만 봐도 호화찬란한데 여기서 더욱 바라는 것은 욕심일지도 모른다. ……. ……. …….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약 20분 정도 지난 것 같지만, 정확한 시간을 알고 싶었다. 물론 세라프가 알아서 챙겨주긴 하겠지만, 모든 특전을 받은 이후 우리들은 서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대화가 단절된 상태였다.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서서히 시간이 흐를수록 몸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죽는다는 말이 아니라, 화정의 영향으로 차 올랐던 열기가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느낀 기분이었다. 내부를 가득히 메우는 열기가 줄어들수록 몸의 감각도 정상적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사용자 정보창은 모두 확인했다. 그리고 남은 시간 동안 나는 차분히 몸 내부를 관조했다. 확실히 불이익은 있었다. 그러나 목숨은 붙어있으니 어쨌든 계획은 달성한 셈이다. 그리고 어려운 고비를 넘긴 만큼, 고비를 넘고 나서 보이는 보상은 어마어마했다. 특히 몸 내부에 구석구석 퍼져있던 노폐물과 불순물을 깡그리 제거했고, 꽉 막혔던 혈도는 모두 뚫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력의 흐름이 닿지 않던, 손가락과 발가락 끝의 미세한 경혈 구멍까지 뻥 뚫린 것은 예상외의 소득이었다. 활력이 예전보다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으며, 마력 흐름의 속도와 운용 효율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했다. 동급의 사용자와 전투를 할 시 미세한 차이가 승부를 가르는 것을 생각한다면, 나는 비장의 무기를 몇 개 두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후유.” 몸의 감각이 어느 정도 돌아온 것을 느끼자 나는 온 몸 구석구석으로 마력을 보내보았다. 손발 끝까지 쭉쭉 흘러 들어간다. 그에 자신감을 얻어 살며시 오른팔을 움직여보자 이전보다 훨씬 몸이 가벼워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아직 마디마디가 결리고 쑤셨지만, 아까 온몸의 감각이 사라졌던 상태와 비교하면 훨씬 나았다. 이윽고, 난 끙 차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정면으로 고개를 들어 세라프를 응시했다. 그녀 또한 별 감흥은 없는지 고요한 시선을 유지한 채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옷은 이미 넝마라 부르기도 민망할 수준 이었지만, 딱히 부끄러운 감정은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눈앞의 여성은 이성으로 볼 수 없는 천사였으니까. 어깨를 한 번 으쓱인 후, 오른손으로 왼 손목 부분을 톡톡 건드렸다. 시간을 알려달라는 뜻이었다. “통과의례에 입장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준비하십시오.” 세라프의 목소리는 차갑고, 건조했다. 화가 난 게 분명했다. 그 순간, 방금 전 나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그녀의 모습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나는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괜한 말싸움을 하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어차피 얻을 것은 모두 얻은 상황이었으니까. “준비 완료. 전송해줘.” “사용자 김수현. 몸 상태는 괜찮으신 겁니까.” “응. 나쁘지 않아.” “…그럼 바로 전송하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이 촉박한 상태이니, 준비의 방으로 들어가면 최대한 빠르게 행동하는걸 권합니다.” “네, 네.” 무성의한 대답에 세라프는 훤칠한 이마를 찌푸렸다. 하지만 곧 가녀린 손가락을 들더니 가볍게 튕기었다. 딱! 손가락 살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조금씩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흡사 지우개로 지우는 것 같다고 할까? “한가지 조언을 드리자면, 언제 어디서나 방심은 금물입니다. 통과의례를 무사히 통과하고,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의 건투를 바랍니다.” “세라프. 더 이상의 잔소리는 금물입니다. 다음에 볼 때는 입을 다물길 바랍니다.” 끄긍, 끄그긍. 살짝 빈정댄 순간, 익숙한 기계음이 들렸다. 당황하지 않고 시선을 내리자, 다리서부터 어느새 삼분지 이 이상 희미해져 가는 몸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을 보다가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10년만의 재 시작. 이제는 새로운 미래가 펼쳐질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 개척할 미래. 그 누구도 잃지 않고 그 누구도 절망하지 않는, 김수현이 바꾸어나가는 미래. 그것을 생각하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정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1. 김수현 체력 언급 내용 삭제. 2. 오타 및 문맥 수정. 0008 / 0933 ---------------------------------------------- 김수현, 통과의례를 시작하다. 준비의 방. 실로 오랜만에 보는 공간이었다. 준비의 방은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소담스러운 개인 방으로 생각할 정도로 지구의 방의 모습과 비슷했다. 문득 느끼건대, 천사들은 참 쓸데없는 부분에서 배려를 하는 것 같다. 분명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지구와 비슷한 환경 때문에 현관문을 열고 나서려고 한적이 있었다. 당연히 문은 열리지 않았고 그에 따른 절망감에 허우적거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혹시 천사들은 일부러 그런걸 노린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통과의례 입장까지 남은 시간 : 03분 27초』 “3분 27초라. 서둘러야겠구나.” 나는 방 중앙에 덩그러니 놓인 커다란 박스로 다가갔다. 대충 구석 자리에 앉아 박스를 개봉하자, 통과의례에 필요한 여러 물품들이 들어있었다. 예전의 향수는 개뿔, 그런 건 하나도 없고, 일단 내 관심사는 재빨리 옷을 입는 것이었다. 세라프야 그렇다 쳐도, 지금 거진 나체나 다름없는 상태로 통과의례에 전송된다면 시작부터 변태라는 오명을 벗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저것 살펴보자 몸에 착 붙는 쫄쫄이 옷의 성능이 가장 뛰어난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차마 입을 용기가 나지는 않았다. 한동안 이것저것 들어보던 나는 그냥 심플한 옷으로 골랐다. 내가 고른 옷은 속옷, 양말, 신발, 상의, 하의 등 전부 평범함 옷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다만 때가 타는 건 싫었기 때문에, 어두운 색 계통을 골랐다. 솔직히 통과의례 정도는 지금 상태론 맨몸으로 달려들어도 하루도 안되어 통과할 수 있다. 아니, 마음만 먹으면 모조리 작살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초장부터 그렇게 날뛸 생각은 없다. 과거 10년간 홀 플레인에서 죽지 않고 생활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항상 실력의 3할을 숨기고 활동했다는 것이다. 정말 생명이 경각에 달렸을 때를 제외하고는 철저하게 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도록 노력했다. ‘무기는 뭘 고를까….’ 무기를 고르는 과정에선 약간의 고민을 했다. 지금 당장 맨주먹만 들어도 통과 의례의 보스 몬스터를 밥 먹으며 때려잡을 수 있지만, 그래도 편의상 하나 정도는 챙기는 게 좋다. 하지만 이번 통과의례에서는 나름 계획한 것이 하나 있었다. 해서, 혹시 모르니 기다란 장검 하나와 탈착이 가능한 석궁 하나. 그리고 석궁용 화살을 가득 챙긴 후 박스를 닫았다. 이윽고 화살을 가득 쥐고 허공을 올려다보자, 남은 시간이 정확히 0으로 수렴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준비의 방 시간이 끝났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을 통과의례의 공간으로 소환 하겠습니다.』 “Okay. 내가 제일 늦었나?” 『그렇습니다. 아무튼, 사용자 김수현의 건투를 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전송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였다. 우웅! 허공에서 소환 주문이 펼쳐지는 것을 느낀 순간, 배꼽 부근이 확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소환의 시작이었다. * 『전송이 완료 되었습니다. 통과 의례는 자신이 홀 플레인에 입성할 자격의 유무를 가늠하는 시험 입니다. 7일 동안 살아남거나 또는 7일 안에 중앙의 워프 게이트로 도달할 경우 합격입니다. 사용자들의 건투를 빕니다.』 전송이 끝났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나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 순간, 사위를 맴도는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진 기분이 들었다. 풀, 나무, 흙 등을 보니 현재 있는 장소는 숲 중앙 공터로 보였다. 숲이니만큼 공기도 신선하고 바람도 시원했지만, 뭔지 모를 기분 나쁜 끈적거림이 주변을 가득히 적시고 있었다. ‘일단 어떤 사용자들과 같이 시작하는지 둘러볼까?’ 통과의례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홀 플레인은 절대로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곳이다. 하다못해 이용을 하더라도 같이 활동할 동료는 필요했다. 통과의례는 일상을 겪던 현대인들이 처음으로 비 일상을 겪는 공간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생존’이라는 조건이 붙어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현대인들이 힘을 합쳐 조건을 달성하는 게 통과의례의 핵심 중 하나였다.(2회차의 나는 특수한 경우이니 잠시 예외로 두자.) 그런 만큼 통과의례에서 함께 살아남은 동료들은 홀 플레인에 입장해서도 끈끈한 인연을 맺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나는 이번 통과의례에서 인연을 이어갈 동료들을 물색할 생각이었다. ‘물론 아무나 동료로 받아들이면 안되겠지만.’ 현재 내가 소환된 장소는 통과의례의 시작을 알리는 일종의 시작 지점이다. 다른 말로 스타팅 포인트. 10년이 지난 지금은 아무 느낌 없이 이야기하고 있지만, 처음 아무것도 모른 상태로 입장한 통과의례는 악몽 그 자체였다. 오죽하면 홀 플레인에 입장하고 나서도 트라우마가 생겼을 정도니까. 나는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고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역시나 전송된 사용자들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공터를 중심으로, 한껏 불안한 얼굴을 한 채 드문드문 앉아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나를 보며 수군거리는 것까지도. “오빠아…. 방금 저 사람 전송된 거 봤어?” “솔아. 조용히 있어.” “어떡해…. 우리만 온 게 아닌가 봐….” “가만히 있어봐. 저 사람도 우리랑 똑같은 신세 같은데.” 둘의 대화를 들어보니 남매인 모양이다. 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터의 분위기는 조용히 가라앉아있었다. 하기야 다짜고짜 통과의례에 처박고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하면 대혼란이 일겠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천사들에게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듣고 왔을 것이다. 나도 그랬었으니까. ‘이곳이 시작 지점. 과거로 되돌아왔으니 1회차 때도 지금 사용자들을 만났다는 소린데…. 이후에 어떻게 됐더라….’ 공터에 있는 사람 수를 세어보니 총 여덟 명이 앉아있었다. 앞으로 7일 동안 통과의례를 살아가는데 이 여덟 명이 함께 힘을 합칠 수 있을까? 나는 자신 있게 “아니오.” 라고 대답할 수 있다. 마음에 갈등이 일었다. 아직 이곳은 홀 플레인이 아닌, 한 번 통과하면 다시는 올 일 없는 공간이다. 지금 내가 가진 힘으로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을 구하는 건 까짓 거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솔직히 그러기 싫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이 사람들 앞에서 능력을 멋대로 보여주고 살려 들어가는 것은 절대로 피해야 할 일이었다. 원래 명성 또는 알려지는 것은 입 소문을 통하는 게 가장 파급력이 크다. 안 그래도 기득권을 지키는데 앞장서는 홀 플레인 사용자들인데, 통과의례를 통과하기도 전에 마력을 사용하거나 압도적인 뛰어남으로 괴물들을 물리친 사용자가 있다? 만약 그런 소문이 퍼진다면 여러 귀찮은 일이 생기는 건 고사하고 그날로 ‘부랑자’들에게 의문의 살인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선인이 아니었다. 홀 플레인에 살면서 착한 일을 한적은 있지만, 필요에 따라 나쁜 일도 거리낌없이 한 편이었다. 강도, 약탈, 강간 심지어 살인까지. 물론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에서는 그런 것들이 보통으로 받아들여지는 만큼 딱히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튼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를 필요가 있다는 소리였다. 만약 동료로 만들만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사용자 구실을 하기까지 최소 1년 동안은 알게 모르게 보모(?) 노릇을 해줘야 한다. 홀 플레인으로 입성한 후 내가 세운 첫 계획은 바로 동료를 모으는 것이었다. 통과의례는 이 계획에 아주 적합한 공간이었다. 나는 동료를 선발하는데 총 세 가지 기준을 정했다. 첫 번째, 능력치와 잠재성. 두 번째, 성향. 세 번째, 인연. 이리저리 말을 늘어놓았지만, 요지는 내 기준으로 동료로 만들만하면 살리고, 그게 아니라면 죽든지 말든지 신경 끌 생각이었다. ‘그럼 슬슬 제 3의 눈을 사용해볼까?’ 공터에는 아까 붙어있던 남매를 제외하면 다들 서로 거리를 두고 있는 상태였다. 나도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앉은 후, 차분하게 사람들을 관찰하기로 했다. 정말 운이 좋다면, 낯익은 얼굴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사용자는 은행원 복장을 입은 여성이었다. 인상은 전체적으로 평범했지만 동그란 눈동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덜덜 떨리는 게 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심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일단 제 3의 눈을 활성화하기로 했다. 일단은 필요한 것들만 골라서….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이보림(0년 차) 2. 성별(Sex) : 여성(27) 3. 신장 · 체중 : 164.7cm · 58.3kg 4. 성향 : 중용 · 혼돈(Neutral · Chaos) [근력 5] [내구 8] [민첩 11] [체력 7] [마력 9] [행운 11]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헐.’ 나는 헛웃음과 함께 바로 그녀의 사용자 정보창을 꺼버렸다. 초기 능력치는 육체의 영향도 받지만, 무엇보다 사용자가 지닌 잠재성이 곱하기가 되어 나타난다. 즉 여성이라고 해서 무조건 남성보다 육체 능력치가 낮은 게 아니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보림이라는 여성은 잠재성이 낮아도 너무 낮다. 저런 사용자를 살려서 홀 플레인에 들어가도 내 기준에는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었다. 잠시 여담으로 말하자면, 홀 플레인에 들어간 후 수련을 하게 되면 초반엔 정말 능력치가 잘 오른다. 나야 지금 몸 상태가 한계를 맞은 상태니 수련으로 능력치를 올리기 요원하지만, 정상적으로 시작한 사용자들은 그런 제한이 없지 않은가? 어쨌든 그런 것을 감안하더라도 추후 일정 경지를 이룰 사용자들은 싹수가 보이는 법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혀를 쯧쯧 차고, 난 바로 다른 사람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다음 목표는 둘이서 꼭 붙어 앉아있는 남매였다. 남성은 앳되어 보이는 기색은 있었지만, 미간을 찌푸린 게 딱 봐도 날이 서 있는 모습 이었다. 나이는 나보다는 어려 보였고, 소위 잘 나가는 놈인지 껄렁한 태도가 엿보였다. 남매 주위 바닥에 보이는 건 장검 한 자루와 방패 하나. 나름 괜찮은 선택 이었다. 옆의 여성은 남성 옆에 꼭 붙어 있었는데 솔로들이 보면 눈꼴 시려할 모습…. 아 남매였지. 아무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얼굴을 자세히 볼 순 없었지만 그래도 오빠보다는 훨씬 얌전해 보였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안현(0년 차) 2. 성별(Sex) : 남성(22) 3. 신장 · 체중 : 178.8cm · 73.2kg 4. 성향 : 중립 · 중용(True · Neutral) [근력 48] [내구 47] [민첩 52] [체력 51] [마력 35] [행운 56]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안솔(0년 차) 2. 성별(Sex) : 여성(19) 3. 신장 · 체중 : 160.1cm · 45.2kg 4. 성향 : 질서 · 선(Lawful · Good) [근력 8] [내구 17] [민첩 15] [체력 21] [마력 75] [행운 100]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미친, 얜 또 뭐야? 시작부터 마력이 75? 행운이 100?’ 상식을 벗어나는 능력치. 순간 “억.” 소리를 낼뻔했지만, 입술을 꼭 다묾으로써 간신히 불상사를 방지할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해서 안현은 인재였다. 저놈이라면 특이한 경우를 당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통과의례는 가볍게 통과할 수 있다. 그리고 홀 플레인에 들어가서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의 잠재성을 갖고 있었다. 약간 분한 사실이지만 시작 능력치를 비교하면 나보다 높다고 볼 수 있었다. 아무튼 안현의 능력치는 준수하고, 이건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내가 진정 놀란 이유는 안솔이라는 여성의 능력치를 봤기 때문이다. 저건 엽기 그 자체였다. 근력, 내구, 민첩 체력은 볼 것도 없다. 하지만 시작부터 마력 능력치가 75포인트, 행운 능력치가 100포인트 인 것은 정말 홀 플레인의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나는 차분히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안현은 들어본 기억이 없는데…. 안솔은…. 잠깐, 안솔? 솔?’ 솔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문득 직업 특전의 고를 때 보았던 시크릿 클래스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1회차 홀 플레인에 광휘의 사제라는 시크릿 클래스가 등장한 적이 있다. 이명으로 사제 클래스의 끝판 대장이라고 불렸던가? 당시 이름이 ‘솔’ 이라는 사용자가 그 클래스를 얻게 되었고, 추후 최고 사용자들이 모이는 오딘 클랜에서 영입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안솔, 그리고 솔. 이름만 똑같지만 지금 안솔의 능력치만 봐도 가능성은 충분해 보였다. 어차피 남매라면 둘 다 살려야 할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이보림이란 은행원과는 비교도 안 되는 능력치를 가진 둘 이었기에, 동료로 맞이하기에는 충분한 이들이었다. 앞선 두 명의 임팩트가 굉장히 강력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반 시계 방향으로 살펴보기로 했다. 그 다음 제 3의 눈에 걸린 사람은 두 명의 남자였다. 왼편에 앉아있는 남성은 몸은 나름 좋지만 작은 키를 가진 나이 들어 보이는 남성이었다. 살짝 구부러진 코와 오돌토돌한 피부는 인상을 한층 야비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시선을 여러 방향으로 던지는 것으로 보아 나름대로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는 것 같았다. 다음으로, 오른편에 있는 남성은 교복을 입은 학생이었다. 눈 아래 자그맣게 찍힌 눈물 점과 하얀 피부가 돋보이는, 매우 어려 보이는 인상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얌전해 보였는데, 온 몸을 덜덜 떨고 무릎을 양 팔로 꼭 껴안은 게 조금 안 돼 보였다. ‘기억에는 없고…. 사용자 정보나 볼까?’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박동걸(0년 차) 2. 성별(Sex) : 남성(39) 3. 신장 · 체중 : 173.4cm · 73.2kg 4. 성향 : 악 · 혼돈(Devil · Chaos) [근력 31] [내구 26] [민첩 39] [체력 29] [마력 29] [행운 7]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이신우(0년 차) 2. 성별(Sex) : 남성(18) 3. 신장 · 체중 : 170.7cm · 58.4kg 4. 성향 : 질서 · 선(Lawful · Good) [근력 25] [내구 23] [민첩 21] [체력 27] [마력 35] [행운 57]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안현과 안솔이 워낙 놀라워서 그렇지, 박동걸과 이신우의 능력치도 나쁜 편은 아니었다.(그렇다고 좋은 편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박동걸의 기본 능력치는 통과의례에서는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 다만 성향이 걸린다. 악 그리고 혼돈이라는 성향은 함께 나오는 경우가 드물다. 이것이 같이 나왔다는 소리는 박동걸은 현대에서 범죄자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며, 홀 플레인에서는 ‘부랑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와 반대로 이신우는 통과의례를 통과하기엔 살짝 부족한 능력치였지만 마력이 봐줄만했다. 그리고 행운 능력치도 막 시작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높은 잠재성을 보이고 있었다. 질서, 선도 한 번에 나오는 경우도 드문 편인데 아마 천성이 선한 모양이었다. 지금 나와 박동걸이란 남자를 빼고는 모두 자기 자신 또는 옆 사람만 보는데 정신 없었다. 박동걸의 눈동자에는 불쾌한 욕망이 번들거리는 중이었다. 탐욕에 가득 찬 눈동자로 이리저리 뿌리는 시선은 대부분 여성들에게 고정되어있었다. 저런 종류의 시선은 수천 번 보았고, 나도 한때 저런 눈을 했었던 적이 있었다. 왠지 그 욕망의 정체를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추측에 불과하지만, 박동걸이 범죄자라면 어떤 범죄를 저질렀을지 알 것만 같다. 특히 안현 옆에 붙은 안솔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걸 보니 내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제 와서 딱히 저 욕할 꺼리는 없지만, 그래도 한심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혀를 쯧쯧 차며, 남은 두 명의 여성을 향해 제 3의 눈을 활성화하려는 순간이었다. “아, 쓰벌.” 그 순간, 박동걸의 걸걸한 목소리가 공터를 강하게 울렸다. ============================ 작품 후기 ============================ 1. 박동걸, 이신우 능력치 조정. 2. 오타 및 문맥 수정. 0009 / 0933 ---------------------------------------------- 김수현, 통과의례를 시작하다. “하…. 도저히 답답해서 못 있겠네!” “히익!” 아까부터 주변을 살피던 박동걸은, 때를 노리고 있었는지 힘껏 목소리를 높이며 공터의 중앙에 나섰다. 갑작스러운 욕설에 놀랐는지 이신우는 깜짝 놀라며 쉰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박동걸이 이신우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것을 놓치지 않았다. 좋은 말로는 기선제압, 속된말로는 나대는 행동이었다. “어이! 너희들, 이 개 좆같은 상황에 뭐 아는 거 하나도 없어? 응?” 안솔은 안현의 품에 파묻혀 덜덜 떨고 있었다. 안현과 내가 확인하지 못한 두 명의 여성은 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 명은 비교적 침착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 명은 갑자기 소란을 일으키는 박동걸이 마음에 들지 않는듯했다. 눈동자를 가늘게 뜨고 노려보고 있었다. 문득 두 여성의 사용자 정보을 보고픈 호기심이 동했으나 일단 남자의 행동을 지켜보기로 했다. “여긴 다들 벙어리만 모였어? 주둥이만 다물고 있지 말고, 아무 말이라도 좀 해보라고!” ‘까분다.’ 자신이 한 성깔 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은 걸까, 아니면 남성을 과시하고 싶은 걸까. 박동걸은 난폭한 몸짓을 보이며 자신의 주변에 보이는 주먹만한 돌멩이를 세게 걷어차버렸다. 그가 걷어찬 돌멩이는 꽤나 강력한 기세로 날아올라, 숲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그의 돌발행동에 앉아있는 사람들 사이로 어색한 침묵이 내려 앉았다. 그러나 나는 확실하게 들을 수 있었다. 돌멩이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르렁. 그 순간 조용한 숲 속에 나직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돌멩이 소리는 듣지 못해도 방금 전 울음소리는 모두가 들은 모양이었다. 그들의 얼굴에 언뜻 불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10년 전 일이라 모든걸 기억할 수는 없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예전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나는걸 느꼈다. 그때 이 장소에서 무슨 일이 일어 났는지. “씨, 씨펄! 어떤 놈이냐? 불만 있으면 당장 나와. 나와서 얘기하고, 응? 너야? 아니면 너?” 박동걸은 야비하게도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는 이들을 지목했다. 이보림과 이신우는 사색이 된 얼굴로 다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아까부터 박동걸을 노려보던 한 여성이 분연히 일어섰다. 숨을 씩씩 몰아 쉬는 게 어지간히도 참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저씨, 그만 좀 하시죠? 나잇살 처먹고 지금 뭐 하는 짓거리세요?” “뭐? 뭐~? 그만 좀 하지? 나잇살 처먹고? 지금 너 나한테 그런 거냐?” “그래 했다. 어쩔래. 창피하지도 않아? 지금 다들 똑같은 처진데 왜 윽박지르고 지랄이야?” “이젠 반말? 쌍년이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어른한테 꼬박꼬박 대들고 쳐 반말하냐? 네 부모가 그렇게 가르치든?” "쌍년? 하, 보자~보자 하니까…. 그래, 그럼 네 부모는 나잇살 처먹고 애들 윽박지르라고 가르치디? 이 쓰레기 같은 놈아!” 한마디도 물러서지 않고 강하게 받아 치는 여성을 보며 나는 속으로 키득키득 웃었다. 박동걸은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한 듯 헛웃음만 흘렸다. 하지만 곧 분노가 치솟는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르는 중이었다. 그는 세게 콧김을 내뿜더니 이내 잡아먹을듯한 발걸음으로 여성을 향해 걸어갔다. 이윽고 여성의 앞에 선 박동걸은 험상궂은 표정을 들이대며 입을 열었다. “야, 쌍년. 부모가 뭐라고? 다시 한 번 말해봐.” 보통 성인 남성이 이 정도까지 하면 기가 죽을 법도 했다. 그러나 여성이 기가 워낙 세서 그런지 아니면 원체 겁이 없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박동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코웃음 쳤다. “웃겨. 네가 그러면 내가 무서워할 줄 알아? 네 아비랑 어미가 그렇게 가르쳤냐고~. 이 씨발 놈아!” “이 씨발 년이 진짜 뒤지려고….” 진심으로 깊은 분노를 느꼈는지 박동걸의 주먹이 서서히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눈 하나 깜빡 하지 않았다. 그렇게 박동걸이 막 주먹질을 하려는 폼을 잡은 찰나였다. “어이, 아저씨. 그만 좀 하지.”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안현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막 여자의 뺨을 후리려던 박동걸은 황당한 얼굴로 안현을 돌아보았다. 옆에서 안솔이 옷깃을 꾹꾹 잡아 당기는 게 보였다. 그러나 안현은 기어코 한 번 더 입을 열고 말았다. “얘 말이 틀린 건 없잖아. 다 똑같은 입장인데 왜 그래? 저 사람들이 뭔 잘못을 했다고.” “이…. 이 연놈들이….” 박동걸은 수치심이 차오르는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느낀 듯 올라갔던 주먹은 다시 내려오고 있었다. 여성이 미약한 비웃음을 보이자, 박동걸은 벌컥 괴성을 지르며 몸을 돌렸다. 다시 자리에 앉으면서도 연신 씨근거리는 게,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자 울화통이 터진 것처럼 보였다. “씨발, 뭘 꼬라 봐! 눈깔 안 돌려?” 결국 분을 참지는 못했는지, 박동걸은 옆에 가만히 앉아있던 이신우한테 괜한 화풀이를 했다. 이신우는 억울한 얼굴로 자리를 이동했다. 그때였다. 그르렁. 방금 전 들었던 울음소리는 다시금 우리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어렴풋하던 기억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는 이렇게 어영부영 시간만 죽이다가 급작스러운 습격에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다. 원인은 박동걸이 아까 차버렸던 돌멩이, 그리고 여성과의 고성방가. 내가 이 사람들한테 가지는 기억은 이게 전부였다.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이후 홀 플레인에서 보지 못한걸 생각한다면…. ‘다들 통과의례에서 죽었다는 소린가? 아, 안솔은 아닐 수도 있겠군.’ 지금 이대로 시간을 보낼 경우 1회차를 그대로 답습할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나는 약간의 도움을 주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직접적인 도움을 줄 생각은 아니었다. 우선은 이들이 움직이고 서로 힘을 협동할 계기를 주는 정도로만 도와줄 생각이었다. 해서, 나는 바로 석궁을 들었다. 철컥! “저기요. 지금 뭐하세요…?” 다들 무척 예민해져 있는지 자그마한 소음에도 시선이 휙휙 쏟아진다. 나에게 말을 건 사람은 방금 전 끝내주던 입담을 자랑하던 여성이었다. 그래도 개념은 있는지 초장부터 반말을 하진 않았다. 박동걸은 어지간히 미운 털이 박힌 듯싶었지만. “불안하잖아요.” “저는 그 석궁이 더 불안해요.” “글쎄요…. 지금 이곳이 어디라고 생각하세요.” “네?” 여성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매가 날카로워 성깔이 있어 보이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저는 이곳으로 오면서 납득할 수 없는 경우를 여러 번 겪었어요. 그건 여기 있는 모두 마찬가지 아니에요?” “그건…. 그렇죠….”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이는 사람들. 소환의 방, 천사, 전송. 이들 또한 분명히 겪고, 목격했을 것이다. 그런 만큼 지금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은 무리라도 최대한 빨리 현실을 받아들이고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통과의례에 임하는 태도였다. 나는 연사용 석궁에 화살을 장전하기 시작했다. 석궁치곤 약간 작은 크기였지만, 팔목에 낄 수 있는 탈착식이라 제법 편리한 점도 있었다. 방금 전 들렸던 울음소리와 내 행동을 보고 느낀 것들이 있는지, 한 명 한 명 각자 가져온 무기들을 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빈손으로 온 사람들은 제외하고 모두 무기를 들었다. 대충 준비는 끝났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현재 우리들이 있는 장소는 숲 중앙의 공터였다. 사방이 나무와 숲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방금 전 박동걸이 돌멩이를 걷어 찬 반대방향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그나마 공터에서 몇 발자국 이동했을 뿐인데 확연히 어두워진 느낌이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나무와 풀들은 음침한 빛을 띠고 있었다. 울음소리를 들어 어느 정도 불안감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등 뒤로 나를 따라오는 사람들의 기척이 조금씩 늘어나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행동력은 괜찮다는 생각이 드려는 찰나, 내 계획은 시작부터 삐걱거리고 말았다. “야, 안솔. 빨리 일어나. 우리도 얼른 저 형 따라가야지.” “싫어어…. 안으로 들어가기 싫어어…. 무섭단 말이야아….” “너 그럼 여기 계속 있을 거야? 아까부터 네가 그랬잖아. 불안하다고. 여기 있으면 안될 것 같다고. 그런데 갑자기 왜이래?” “으으응….” 남매의 대화를 들은 순간 눈동자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하긴 행운 능력치가 100포인트인 만큼 스스로 느끼는 게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다. 아직은 본능에서 오는 공포감을 이기지 못했는지 엉덩이를 땅에서 떨어뜨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르렁! 그르렁! 둘이서 옥신각신 하는 도중, 몇 번의 울음소리가 추가로 들렸다. 점점 목소리가 커지는 게, 이제 거의 주변까지 온 것이 분명했다. 사람들은 처음엔 침착하게 둘을 기다렸지만, 어느새 한 명 두 명 초조함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저, 저기요. 우리들 먼저 출발하면 안될까요? 실은 저도 아까부터 자꾸만 몸이 자꾸만 떨려서….” “그, 그러자고! 버리고 가자 그냥. 이게 뭔 소리야 갑자기….” 나름 용기를 냈는지 이신우의 목소리는 비장미까지 서려있었다. 그리고 박동걸도 바로 찬성하고 들어왔다. 먼저 떠나자는 소리를 들었는지, 아니면 그렇게 느꼈는지. 안현은 한층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안솔을 끌어당겼다. “자, 일어나. 오빠가 옆에 있잖아. 응? 제발 말 좀 들어라.” “하…. 하지만 발이 안 떨어진단 말이야…. 어엉….” 안솔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 와중에도 이신우와 박동걸은 아까부터 눈치를 주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불안한 공간을 벗어나고 싶은 모양이었다. 물론 나는 저 둘을 버리고 갈 생각은 없었다. 차라리 이 사람들을 버리더라도, 저 두 명하고 같이 다니는 게 훨씬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아 그냥 가자고! 왜 가만히 서있어!” “저, 저기 얼른….” 웅성거림이 심해지자 안현은 얼굴을 딱딱히 굳혔다. 그러더니 결국 자신의 옷깃을 꼭 붙잡고 있는 동생의 손을 강하게 쳐내었다. 안솔은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오, 오빠?” “그래. 그럼 여기 너 혼자 여기 있어. 나는 다른 데로 갈 테니까.” 뻥 치고 있네. 그러나 안현의 연기는 나름 괜찮았다. 말을 마치고 칼과 방패를 쥔 채 바로 매정하게 몸을 돌린 것이다. 성큼성큼 우리 쪽으로 오는 안현을 보며 안솔은 큰 충격을 받은 듯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러다가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그만 가죠."라고 말하는 안현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이내 대놓고 서러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안현은 일부러 우리를 재촉하며 숲 속으로 앞장서서 걸음을 옮기는 척을 했다. “어엉…. 오빠아…. 가지마아….” “안솔, 지금 당장 일어나. 상황 파악 좀 해라 제발, 응?” “내가 잘못했어…. 또 버리지마아…. 가지마아…. 어엉…. 어어엉….” “너…. 당장 안 일어나?!” 결국 안현은 눈을 부릅뜨며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그게 조금은 먹혀 들었는지, 안솔은 앙앙 울면서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크르릉! 크르릉! 크르릉! 크르릉! ‘이런, 너무 늑장을 부렸나.’ 나는 낭패감을 느꼈다. 두려움에서 기인한 낭패감이 아니라, 혹시라도 미래가 바뀌어 안솔을 여기서 잃을지도 모른다는 낭패감이었다. 울음소리의 정체는 이제는 거의 지척까지 다가왔는지 더욱 확실하게 들려오는 중이었다. 문제는, 막 몸을 일으키던 안솔이 그대로 얼어버린 것이다. “오…. 오빠….” 거리는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망연히 손을 내뻗는 안솔을 봤음에도 안현의 행동은 단호했다. 아니 담담한 척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입담녀는 보다 못했는지 자신이 직접 나서려고 했지만, 안현은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그냥 놔두세요.” “오빠! 나만 두고 가지마!” “그럼 스스로 이쪽으로 와. 아직 늦지 않았어. 그것도 못하면 너는 분명 살아남을 수 없을 거야.” “어엉….” 순간 안현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그는 확신에 찬 눈동자로 안솔을 응시하고 있었다. 안현의 진심이 통했는지 안솔은 이를 악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스스로 올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너무 늦어버렸다. 그르렁! 그르렁! ‘이 울음소리는, 데드맨이다.’ 데드맨. 이름은 거창하게 들려도 실상은 별 볼 일 없는 놈이다. 실상 홀 플레인의 사용자들은 데드맨을 괴물로 치지도 않을 정도로 약해빠진 괴물이었다. 어느 정도의 지능과 감염 능력이 있다곤 하지만 감염은 시간 내로 치료만 받으면 충분할 치료할 수 있다.(물론 여기서 치료는 불가능하겠지만.)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고 한다면…. 크아아아! 평소에는 어슬렁거리며 느린 걸음으로 돌아다니지만, 먹잇감을 발견하면 뛰는 걸음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괴성을 지르며 숲 속에서 불쑥 뛰쳐나온 데드맨은, 입을 쩍 벌린 채로 안솔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것은 예상치 못했는지 안현은 비명을 지르며 달려나갔다. “솔아!” 그리고 비명은, 비단 안현만 지른 것이 아니었다. “으, 으악!” “꺅!” 흡사 좀비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군데군데 뜯어진 살점을 덜렁거리는 괴물이 달려들자 일행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내부가 훤히 보이는 가슴에는 돌멩이 하나가 박혀있었는데, 아까 박동걸이 걷어찬 돌멩이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돌멩이를 맞고 우리 주변을 배회하던 놈일 것이다.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사람들의 비명에 반응했는지, 숲 너머로 데드맨들의 울음소리가 한층 증가했다. “아아아아!” “솔아! 정신차려! 솔아아!” 겨우겨우 몸을 일으켰던 안솔은, 데드맨을 보고 아예 정신을 놓아버린 모양이었다. 안현은 재빠르게 뛰어나가기는 했지만, 데드맨이 더 가깝다. 안현도 그것을 느꼈는지 검을 든 손을 크게 뒤로 뻗었다. 그러더니 데드맨을 향해 힘차게 휘둘렀다. 핑그르르! 팍! ‘오? 명중했어?’ 검은 기세 좋게 날아가 데드맨의 왼팔을 훌륭하게 날려버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놈은 잠시 몸을 휘청대더니,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달려 안솔의 앞까지 당도했다. “안 돼애애애!” 입을 쩍 벌린 데드맨. 눈만 크게 뜨고 있는 안솔. 그리고 울부짖는 안현. 그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모종의 행동을 취함으로써 안솔의 미래 역시 바뀌었다는 걸. 나는 아까부터 준비하던 석궁을 주저 없이 발사했다. 핑!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날아간 화살은, 퍽 소리와 함께 데드맨의 머리를 깔끔히 꿰뚫었다. 데드맨의 약점은 머리였다. 걷어찬 돌멩이로도 가슴을 파고 들어가는데 화살을 막을 도리는 없을 것이다. 데드맨은 입을 벌린 그대로 쓰러졌다. 풀썩! “미…. 미친….” “헉…. 헉….” 방금 전 괴물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비슷했다. 다들 반사적으로 자신의 무기를 꼬나 쥐는 게 드디어 지금 이 상황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물론 상황은 대강 알고 있었겠지만, 지금껏 막연한 정도였다면 이제는 확실히 심각한 분위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안현의 행동은 신속했다. 그는 재빠르게 달려가 입만 뻐끔거리는 안솔을 부축했다. 그리고 우리들이 있는 곳으로 신속하게 돌아왔다. 그도 방금 상황에 상당히 놀랐는지 연신 거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이윽고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나는 선두로 몸을 옮겼다. 한 마리를 처치하기는 했지만 조금 있으면 훨씬 많은 놈들이 모여들 것이다. 아까보다 울음소리가 늘어나는 게 데드맨들이 이곳을 향해 모여드는 게 틀림없었다. 그놈들이 포위망을 구성하면 꽤나 골치가 아플 것이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 0010 / 0933 ---------------------------------------------- 김수현, 통과의례를 시작하다. 문득 예전에 재밌게 본 TV 프로가 생각났다. 평범한 인생을 살던 사람이 갑자기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 처한다면? 그 프로에서는 이런 내용이 나왔다. 사람은 일이 닥친 후 딱 15분만 이성적으로 행동한다고. 15분 후에는 이성은 없어지고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나 뭐라나.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내가 이끌고 있는 일행은 그 부분은 건너 뛴 상태라고 봐도 괜찮을까? 현재 우리가 있는 위치는 숲의 높은 언덕으로, 고지대에서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언덕이라고 해도 생각보다 가파른 길을 올랐기 때문에 다들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숨을 돌리고 아래를 보니 역시나 내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불과 한 시간 전만해도 우리가 앉아있던 공터는 데드맨으로 빽빽이 둘러싸여있었다. 사람들은 한 손으로 가려질 만큼 작게 보이는 공터를 보며 침음을 흘렸다. 만약 발을 빼는 게 조금만 늦었더라도 저것들의 먹이가 됐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 기세 좋던 입담녀도 이때만큼은 소름이 돋았는지 팔을 쓱쓱 문지르고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복잡했다. 괴물이 있고 목숨이 위협을 받는다. 그러한 현실을 받아들인 그들의 얼굴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부분만큼은 내가 도울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는 웬만하면 나서지 않고 조용히 뒤에서 지켜볼 예정이었다. 기본적인 정보는 보긴 했지만, 그래도 실제 행동을 지켜볼 필요는 있었다. “헉! 헉! 오라질…. 저것들은 도대체 뭐야?” 방금 올라온 참이라 여전히 숨을 몰아 쉬는 박동걸. 그를 보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텐데. 따지고 보면 방금 전의 위기도 그가 돌멩이를 걷어찼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즉 원인제공자라는 소리였다. 나라면 미안해서라도 가만히 있을 텐데, 어지간히도 낯짝이 두꺼운 모양이다.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리자 안현의 품에 안긴 채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안솔이 보였다. 일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번의 경험으로 한가지 알아낸 사실이 있었다. 지금 울고 있는 안솔이 내가 알고 있는 광휘의 사제가 맞는다면, 그녀의 미래는 어느 정도 보장된다고 생각했다. 행운 능력치 100포인트를 생각해도 통과의례는 당연히 넘길 줄 알았다. 하지만 결과는 아니었다. 미래는 조금만 다른 행동을 해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안솔의 눈물을 닦아주던 안현은 내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화살을 날려 데드맨을 처리한 게 나였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그의 눈동자에서 고마워하는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주곤 다시 언덕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그르렁! 그르렁! “꺅!” “으앙!” 원래 주변에 있던 놈인지 아니면 공터에서부터 우릴 쫓아온 건지 몰라도, 필사적으로 언덕을 오르려는 데드맨이 새로이 두 마리 등장했다. 그러나 아까만큼의 속도는 내지 못하는 상태였다. 데드맨들은 먹이를 발견했을 때 직선으로 달려드는 속도는 제법 빠른 편이다. 그러나 중간에 방향을 곡선으로 틀거나 높은 고지대에 있는 경우 돌진속도는 현저히 줄어든다. 언덕도 올라오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올라오기 전에 그냥 머리통에 칼을 쑥 찔러주면 그만이다. 처음 데드맨을 봤을 때보단 공황상태가 덜했지만 여전히 비명 소리는 나오고 있었다. 이보림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그녀를 억지로 살릴 생각은 없었다. 처음부터 안솔이랑 듀오로 비명 노래를 부르는 게 영 거슬리기도 했고, 사용자 정보를 봐도 도무지 쓸 데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살아남는다면 자기 복일 테고 죽는다면 스스로의 운명일 것이다. ‘이제 슬슬 반응이 나와야 하는데…. 협력이냐, 분열이냐, 아니면 유지냐.’ 마음 편히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아래서 올라오는 데드맨들을 처리하는 게 선결과제였다. 그때였다. 안현이 몸을 움직였다. 공터에 검을 놔두고 왔는지 그는 안솔을 놔두고 주먹만한 돌멩이 하나를 쥐어 들었다. 나는 석궁에 화살을 장전하다가, 안현의 행동을 지켜볼 요량으로 잠시 장전을 멈추었다. 만일 대한민국 성인 남성들에게 칼 하나를 주고 일정거리에 있는 과녁을 맞추라고 하면 몇 명이나 맞출 수 있을까? 조금 전 칼로 데드맨의 왼팔을 자른 게 실력인지 아니면 운이었는지, 실력을 한 번 보고 싶었다. 방금 전과 다르게 신중하게 방향과 거리를 재던 안현은 이내 있는 힘껏 그것들을 향해 돌을 던졌다. 그리고 결과는…. 퍽! “별것 아니군. ” 안현의 돌팔매질은 훌륭했다. 돌멩이는 퍽 소리를 내며 데드맨의 머리를 부수는데 성공했다. 힘없이 고꾸라지는 괴물을 보며 안현은 뭔가 깨달은 듯 눈동자를 빛내곤 나머지 하나도 가볍게 처리했다. “그래. 별것 아니지. 그러니까 고작 두 마리 처리해놓고 거드름 피우지 말라고.” 그러나 안현이 잡는 무게가 아니꼬웠는지 박동걸의 태클이 다시 들어왔다. 안현은 그 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는지, 발걸음을 멈추고 박동걸을 응시했다. 이윽고, 안현의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아저씨 덕분이네. 고마워.” “갑자기 뭔 개소리를 지껄이냐?” “아까 우리 솔이에게 덤빈 놈을 보니까 가슴팍에 묵직한 게 하나가 박혀 있더라고. 덕분에 돌멩이도 파고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알았어.” 안현이 하는 말을 듣던 박동걸은 자신을 비아냥거리는걸 알아챘는지 대번에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다. 안현의 말인즉슨 네가 돌멩이를 걷어차서 공터 사고가 일어날 뻔 했다는 의미를 겨냥하고 있었다. “시방, 그래서 내가 찬 돌멩이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 꼴이 났다? 그게 내가 찬 돌멩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난 그런 소리는 한 기억이 없는데. 그냥 고맙다고.” 유들유들하게 대답하는 안현을 보며 박동걸은 화를 내려고 폼을 잡았다. 하지만 이내 무언가 생각난 듯 으르렁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씨벌, 그럼 너희들은 뭐 잘한 거 있냐? 너한테 지금 붙어있는 년 때문에 우리가 다 죽을뻔한 거 몰라?” “년?” “그럼 씨팔 그게 미친년이지 아니야? 다른 사람들 다 잘만 오는데 애새끼도 아니고 스스로 일어나는 것도 못해?” 안현의 얼굴이 굳었다. 이 부분만큼은 할말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안솔은 자기 때문에 오빠가 당하는 게 미안한지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쓱쓱 닦기 시작했다. “아. 센척하는 거 진짜 꼴 보기 싫네. 따지고 보면 원인 제공은 누가 했는데.” 하지만 우리에게는 입담녀가 있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바로 안현을 원호하며 지원사격을 가하자, 박동걸의 인상이 다시금 일그러졌다. “야, 쌍년. 그 조잘거리는 예쁜 주둥이 안 닥치면 진짜 죽여버린다. 응?” “야, 쌍놈. 나 같으면 미안해서라도 입 닥치고 있겠다. 일은 싸질러놓고 꼬라지 하고는. 그리고 예쁜 건 알아가지고.” “이 우라질 연놈들이 오늘 정말 초상을 보려고 이러나….” 셋 다 잘못한 건 있지만 애초에 미운 털이 박힌 건 박동걸이었다. 주변 분위기도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걸 알았는지 결국 박동걸 또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겨우 위기를 빠져 나오는가 싶더니 다시금 다툼이 일어났다. 이 정도면 상성을 벗어나는걸 넘어서 거의 원수지간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마음속에 답답함이 가시려다가 다시 쏙 밀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습관적으로 담배를 더듬었지만 지금 가지고 있을 리 만무했다. 그냥 박동걸을 자르는 게 일을 진척하는데 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점점 굳어졌다. 그래도 애초에 당분간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면 그러는 게 옳았다. 기껏 고생하면서 전부 여기로 데려왔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은 확실히 거슬렸다. 어찌됐든 다들 마음 한구석에 방금 전의 기억은 생생할 것이다. 도대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하나로 모을 수 있을까? 고민해도 딱히 이거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결국 일단 자리를 피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엄밀히 말하면 이곳도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끼릭! 일부러 석궁을 장전하는 거친 소음을 내자 역시나 모두의 시선을 모을 수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화살을 장전한 후, 난 모두와 시선을 교환하며 말했다. “일단은 저 데드…. 흠. 괴물들을 피하는 게 우선인 것 같습니다.” “그건 누구나 다 알고 있어. 그런데 어쩌라고.” ‘미친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군.’ 순간 박동걸의 입 안에 화살을 박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아마 지금 이곳에 둘 밖에 없었으면 진작에 아가리를 박살냈을 것이다. “지금 서로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다투는 건 시간 낭비 같습니다. 저는 잠시 자리를 비울 테니 그 동안 서로 의견을 나누고 행동방향을 결정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내 말은 딱히 토를 달 수 없는 정론 이었다. 물론 질문이 나올 건 알고 있었다. 다만 질문을 한 사람이 의외였다. “자리는 왜 비우세요? 의견을 나눌 거면 같이 하는 게 낫잖아요.” 내게 말한 사람은 처음에 미처 정보를 보지 못한 차가운 인상을 가진 여성이었다. 거의 나와 또래거나 한두 살 어려 보이는 그녀를 보면서,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익숙한 분위기를 가진 누군가를 떠올리고 말았다. ‘일단 너희들끼리 지지고 볶고 해보라고.’ “…그 괴물이 공터에서처럼 뛰쳐나올 수 있으니까요. 혹시 모르니 주변에서 경계를 하고 있겠습니다. 그러니 의견 조율이 끝나면 불러주세요.” “…너무 멀리 나가지는 마세요.” 조금 대답을 늦게 하긴 했지만 다행히 쓸데없는 의심을 사는 건 피할 수 있었다. 또한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망을 본다는데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말을 마친 후, 나는 올라오면서 눈여겨본 은폐하기 적합한 장소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고 숲 안에 몸을 숨긴 후 나는 바로 마력을 일으켰다. 이윽고 온몸의 감각이 활성화되고, 시각이나 청각이 한층 예민해지는 것을 느꼈다. 현재 떨어져있는 거리에서는 일행들은 나를 못 보겠지만, 나는 그들의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그들을 자세하게 살필 수 있었다. 내가 자리를 옮긴 후 언덕에는 냉랭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저기 언덕 아래 널브러진 데드맨들의 시체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더욱 부추긴다. 입에 꿀을 발랐는지 누구 하나 먼저 나서는 사람은 없다. 표정들은 전부 제각각 이었는데 가장 볼만한 건 바로 박동걸 이었다. 이번에는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인상을 일그러뜨렸다가 다시 히죽 웃기도. 혹시 정신병자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시간이 흘렀다. 다른 소설이나 만화를 보면 주인공이 나서 사람들을 이끌며 잘만 살던데 지금 모인 일행에는 확실한 리더를 맡을 수 있는 인재가 없었다. 이대로 시간을 보내는 건 결코 상책이 아니었다. 흐르면 흐를수록 사람들 마음에 있는 불안감은 커지고, 그렇다면 이성을 잃고 본능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몰랐다. 그 순간, 두 명의 여성이 몸을 일으켰다. 조심스럽게 일행의 중앙에 선 사람은 의외로 이보림이었다. 동시에 몸을 일으킨 입담녀는 그녀를 흘끗 보고는 엉덩이를 다시 바닥에 붙였다. 일단 이보림이 하는 말을 들어볼 요량인 듯싶었다. 이윽고 불안한 눈으로 모두를 둘러보던 이보림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모, 모두 방금 전 괴물들을 보셨을 거예요. 솔직히…. 전 도우미라는 천사에게 들었을 때만해도 질 나쁜 꿈을 꾼다고 여겼어요. 하지만 지금은 현실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네요. 물론 불안해요. 정말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아요. 저도 그렇고 다른 분들도 그렇겠죠.” 딱히 태클을 거는 사람들은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얘기에 열중하고 있다는 걸 느꼈는지, 이어지는 이보림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방금 전에는 망을 보러 간 분 덕분에 우리가 살 수 있었어요. 그러나 그분도 우리랑 똑같은데 기댈 수만은 없잖아요? 지금은 서로 싸우기 보단 협동을 통해 살 길을 모색하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해요.” 상투적인 말이었지만 이보림의 말은 통과의례의 핵심을 짚고 있었다. 협동하고 행동한다. 그녀의 설득이 조금이나마 먹혀 들었는지 일순 죽어있던 분위기가 조금 변한 것 같았다. 그리고, 여태껏 쭉 풀이 죽어있던 이신우도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럼 누나는 앞으로 어떻게 하셨으면 좋겠어요…?” 뒷말을 흐리긴 했어도 대충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네가 먼저 말을 꺼낸 만큼 생각한 바를 말해보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이보림도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는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아직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앞으로 함부로 다투지 말고 서로 차분하게 의견을 교환했으면 해요.” “나는 동의한다.” 그때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기회를 엿보던 박동걸이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박동걸의 얼굴은 아까와는 다르게 진중하고 침착함이 엿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단박에 얼굴을 찌푸렸다. 얼핏 보면 제법 진심으로 보여도 내 눈은 속일 수 없다. 나는 그 표정이 연기를 가장한 얼굴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놈은 또 무언가를 못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 0011 / 0933 ---------------------------------------------- 반으로 갈라지다. “또 나서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텐데?” 바로 들어오는 태클에 박동걸은 입담녀를 보며 눈살을 찡그렸지만 딱히 받아 치진 않았다. 그리고 전에 비하면 더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넌 방금 전 이 아가씨가 한 말 안 들었어? 서로간에 다투지 말자고 했잖아.” “지금까지 네가 한 행동이나 돌아보고 말하지 그래?” “뭐, 그건 그래. 그래도 일단 서로 의견을 내자고 모인 만큼 말이라도 들어보는 게 어때?” 순순히 인정하는 박동걸을 보며 사람들은 모두 헛바람을 삼켰다. 입담녀는 지금 저 인간이 뭘 잘못 먹었나 생각하는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먼저 공터에서 했던 행동은 모두에게 사과한다. 그리고 내 말투가 험해도 너무 껴 듣지 않았으면 해. 원래 이런 말투로 살아와서 그런 거지 딱히 너희들한테 나쁜 감정은 있는 건 아니었어.” 박동걸은 주변을 한번 쓱 둘러보고는 아주 약간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불만 어린 시선은 남아 있었지만 조금 전보다는 훨씬 누그러진 상태였다. 그는 조금씩 일행의 정 중앙으로 이동한 후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일단 얘기를 할만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는지 박동걸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은행원 아가씨가 한말 일부는 공감해. 그래. 지금 말다툼을 하는 건 옳지 않아. 서로 나쁜 감정은 잠시 묻어두고 어떻게든 저 괴물들한테서 달아나 살 궁리를 하자고. 어때?” “…그럼 한번 말해보세요.” “말한 대로야. 일부는 공감하지만 나머지는 불만스러워. 먼저 결론을 말하면 난 각자 처한 상황이 어떤지 스스로들 깨달았으면 해.” “어떤 부분이 불만스러우신데요.” 이보림이 약간 투덜거리며 묻자, 박동걸은 순간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살 길을 모색하는 건 당연하지만 난 협동이란 건 할 수 없을 것 같아. 협동? 말은 좋지.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보나, 심정으로 보나 개 풀 뜯어먹는 소리로밖에 안 들려.” “뭔 소리 하나 했더니. 그럼 나가. 나가서 혼자 도망치고 혼자 살아.” 입담녀가 코웃음 치며 쏘아 붙였으나 박동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수긍하는 빛을 띠우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물론 그것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야.” “그럼 나가라고.” “일단 들어봐. 끝까지 듣고, 응? 다 듣고 말하라고.” 안현이 눈치를 주자 입담녀는 발끈하긴 했어도 입을 다물 수 있었다. 박동걸은 일행 전부의 시선을 받으며 유유히 말을 이어나갔다. “난 무식해. 그리고 거칠지. 대신 거짓말이란 건 할 줄 몰라. 단순하니까. 난 방금 전 공터에서 도망치고 목숨을 잃을 뻔 하면서 많은걸 느꼈고 또 생각했어. 그 이후로 협동이란 단어가 상당히 거슬리게 들려.” 박동걸의 말에, 모두들 방금 전 공터에서의 일을 상기하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반응을 기다렸는지, 박동걸의 목 울대가 살짝 움직였다. “솔직히 말하면 난 불안한 정도가 아니라 정말 무서웠어. 쪽 팔리지만 오금이 저리는 게 실제로 오줌을 지릴 뻔 했다고. 생각해봐. 항상 영화나 TV에서만 보던 그런 놈들이 실제로 내 눈 앞에 나타났는데 별 수 있겠어? 지금 저기 망 보고 있는 놈이 발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 대부분은 저 괴물들의 맛있는 식사 한끼가 됐을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고민하고 생각했어. 자랑도 아니고 위협할 생각도 없으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어봐. 난 칼 밥 좀 먹어본 놈이야. 칼이든 뭐든 이제는 사람이나 동물을 죽이는데 주저하지 않을 수 있어. 왜냐고? 죽기 싫으니까. 공터에서는 워낙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놀랐고 당황했지만, 난 살고 싶어. 그래서 또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난 살기 위해서 이 무기를 휘두를 거야.” 박동걸의 말은 길었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미심쩍어 하면서도 그의 말에 조금씩 집중하기 시작했다. 대충 놈의 속내를 짐작한 나는 속으로 혀를 찼지만 일단 더 두고 볼 요량이었다. 이윽고 그는 한 명 한 명을 지목하며 얘기를 끌어나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잘 몰라도 거기 양아치 같은 기생 오라비는 운동 좀 한 것 같아 보여. 무기도 들고 왔고 괴물들도 처리해봤으니 뭐…. 그리고 거기 너. 너도 네 입만큼 행동할 수 있다면 일말의 도움은 될 수 있겠지. 석궁 들고 있는 놈은 말할 것도 없고. 그래. 이 네 명은 서로 확실하게 도울 수 있어. 즉 협동이라는 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소리야. 안 그래?” 박동걸의 말을 들은 안솔, 이신우, 이보림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지고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들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 이었다. 이윽고 이보림은 용기를 내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과는 협동할 수 없다는 건가요?” “워워. 진정해. 아직 말 안 끝났어.” “도대체….” “그럼 너는 저기 저놈이나 석궁 든 놈처럼 할 수 있어? 너희들이 돌멩이나 칼을 들고 괴물들을 찌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보기엔 영 아니올시다 라니까. 특히 너랑 저놈 옆에 딱 붙어있는 애는 그것들이 나올 때마다 꺅꺅 소리만 질렀잖아. 저기 있는 여자는 조용히 입 다물고 있기라도 했지. 방해는 안 했잖아. 그 정도만 됐어도 내가 아무 말도 안 했을 거야.” 박동걸이 가리킨 여자는 방금 전 나에게 왜 자리를 비우냐고 물어본 여자였다. 그녀는 아직도 차가우면서 차분한 인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잠시간이 시간이 흐르고, 이보림은 종래에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초반에 비해서 상당히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결론은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버린다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이보림을 보며 나는 박동걸이란 인물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의도하는 바를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다시 생각을 해볼만한 발언 이었다. 초반에는 그냥 머릿속에 똥만 든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현 상황을 제법 정확히 파악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논리를 말하고 있었다. 그 속셈이 어떻든 간에 말이다. 기가 죽은 이보림을 보며 박동걸은 누런 이를 드러내더니, 자신감을 회복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렇게 앞서가. 그런 얘기는 아직 안 했다고. 벌써부터 민감하게 반응하지 마.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 그렇다면 서로 협동 한다는 말은 너희들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행동을 보일 때 성립이 된단 말이야. 아마 그냥 이대로 어물쩡 협동한다고 치고 밖으로 나간다면 어떻게 될 거 같아? 양아치 놈은 지 애인 챙기느라 바쁘고 저 꼬맹인 또 얼어 붙어서 방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일걸. 난 그런 어벙한 놈들까지 보호하고, 협동하고 싶지는 않다는 말이야. 난 내 목숨이 가장 중요해. 너희들은 안 그래?” 입담녀도 딱히 할 말은 없는지 손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여성 은행원 얼굴은 확연하게 드러날 정도로 붉은 상태였다. 주먹을 꾹 쥐고 부들부들 떠는 게 보였지만 그녀도 할 말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느긋이 확인한 박동걸은, 드디어 승부수를 띄울 때라고 느꼈는지 청산유수 같은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내 목숨이 가장 중요한 건 여기 누구라도 똑같을 거다. 그걸 인정한다면 말은 똑바로 하자고. 여기 있는 일부 사람들은 협동을 할 수 없어. 지금만 봐도 맹목적으로 의지만 하고 있잖아. 거기 꼬맹이. 그렇지?” 안솔은 자신이 지목 당하자 당황한 얼굴로 현을 보더니 입을 달싹거렸다. 입을 오물오물 거리는 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보였지만 생각대로 말이 안 나오는지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박동걸은 그 모습을 보며 과장되게 두 어깨를 으쓱이곤 말을 이었다. “저놈도 그걸 알고 있으니까 아까 꼬맹이 보고 스스로 걸어오라고 한 거잖아. 아까 그 석궁 든 놈이 가자고 했을 때 같이 갔으면 저런 꼴 안 당해도 됐잖아. 응? 반응이 다들 왜 그래? 내가 또 개소리 한 거야?” 개소리 까지는 아니다. 속내가 어떻든 현실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평가했다고 볼 수 있었다. 문제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한테는 말 그대로 돌 직구를 던진 셈이다.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지금 바로 증명해봐. 지금 바로 언덕 아래로 내려가서 아까 그 괴물 한두 마리라도 잡고 내 앞에 가져와 보라고. 그러면 당장 입을 닥칠 테니까.” “…….” 박동걸은 할 말 다 했다는 듯 스스로 물러나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다른 사람들 반응이 궁금했다. 시선을 돌려 찬찬히 얼굴들을 살펴 보기 시작했다. 안현은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눈을 감고 있었고 솔은 그런 오빠를 보며 가늘게 몸을 떨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이보림과 이신우였다. 애초에 그 둘을 타깃으로 박동걸이 얘기를 꺼낸 게 분명했다. 둘은 눈에 보일 정도로 이를 딱딱 부딪치며 긴장하고 있었다. 한동안 아무도 얘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안현 이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웬만하면 침묵을 지키던 안현은 옆의 동생을 흘끗 보고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솔이는 내 애인이 아니라 친동생이다. 난 솔이를 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어.” “오빠….” 안솔은 감동한 듯 안현의 몸을 와락 끌어 안았다. 박동걸 또한 그 둘을 보며 미처 그걸 몰랐는지 얼 떨떨히 대답했다. “남매라. 그건 몰랐군. 그럼 어쩔 수 없지. 하지만 그래도 변하는 건 없어. 아까와 같은 사고가 또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 누가 장담하지?” 상황은 꽤나 재밌게 돌아가고 있었다. 안현을 겨냥할 수 없으니 짐 덩이가 확실한 안솔을 타깃으로 삼아 안현을 압박한다. 박동걸은 결국 스스로 떨어져 나가는걸 선택한 셈이었다. 대신 조용히 나가는 게 아닌 확실하게 사람들은 흔들고 있었다. 안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언덕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한 분위기가 되었다. “뭐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라고. 말은 좀 길게 했지만, 아무튼 지금 이런 어정쩡한 상태로는 죽도 밥도 안되잖아?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고.” “그래서. 결국 당신이 원하는 건 뭔데…?” 그래도 전보다 날카로움이 줄어든 입담녀가 묻자 박동걸은 바로 대답했다. “나는, 여기서 제대로 된 팀이란 것을 만들어보고 싶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 0012 / 0933 ---------------------------------------------- 반으로 갈라지다. 모두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박동걸의 말은 그만큼 모두의 가슴에 비수를 깊숙이 박았다. 입술이 바짝 마르는지 침으로 살짝 입술을 적신 후, 박동걸은 바로 말을 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우선하는 만큼 믿음이란 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팀은 서로 도울 수 있고 서로 발목을 잡지 않는 팀. 즉 그런 각오를 한 사람들로만 같이 다니고 싶거든.” “너무…. 해요.” 이보림은 울먹거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박동걸을 견제하던 안현과 입담녀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절망감이 떠올랐지만 이내 필사적인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좋아. 어차피 모 아니면 도잖아. 확실히 말해두는데, 정 아니다 싶으면 나 혼자라도 빠지겠어. 어차피 미운 털도 단단히 박힌 것 같고…. 솔직히 너희들의 어중간한 태도에 질린 건 나만이 아닐걸? 석궁을 든 청년도 답답했는지 망 본다 하고 빠진 거잖아. 너희들도 생각이란 걸 좀 해봐.” “장난해? 쓸모 없는지. 도움이 안 되는지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입담녀는 바로 반박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빠져있었다. 그러자, 박동걸은 잘 걸렸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라고…. 너야말로 지금 장난해?” “뭐라고?” “아직도 여기가 현실이 아닌 것 같아? 넌 무슨 목숨을 여벌로 달고 다니냐? 이건 네가 알고 있는 세이브 로드를 할 수 있는 컴퓨터 게임이 아니라고. 정신차려! 우르르 몰려 나갔다가 누가 실수라도 하는 순간에는….” 잠시 말을 멈춘 박동걸은 이내 엄지 손가락을 들어 목을 쓱 긋고 말을 마무리 했다. “전부 죽는 거라고.” 마지막 말에 꽤나 커다란 충격이 있었는지 모두의 얼굴에 상당한 동요가 일었다. 이보림은 망연한 얼굴로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고 입담녀는 입술만 짓씹고 있었다. 오직 차가운 인상의 여성만이 처음의 차분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해는 하지 말자. 네가 날 싫어하는 건 알고 있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 잘못이 있으니 다시 사과하겠어. 하지만 괜한 말로 선동은 하지 말자고. 난 버린다는 소리는 아직 안 했거든.” 그런 반응을 보던 박동걸이 이내 비릿한 웃음을 짓더니 자신의 가슴을 팡팡 치며 외쳤다. “이왕 말 나온 거 바로 결정하자고. 내 뜻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지금 내 쪽으로 와라. 각오만 확실하다면 누구든지 환영하겠다.” 그의 말이 끝나자 언덕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박동걸의 말에 흔들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그의 말은 사람들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뒤흔든 상태였다. 생존에 대한 열망을 가진 사람의 본능에 기반해 자신의 말을 교묘히 묻어버린 것이다. 파급력은 일파만파로 퍼져 나갔다. 안현과 안솔도 고민하고 있었고 심지어 박동걸과 내내 대립한 입담녀도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에 반해 건달은 챙겨온 말끔한 쇠 봉을 통통 두드리며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나는 막말로 안현과 안솔만 들어가지 않으면 상관 없었다. 하지만 혹시 모르는 경우를 대비해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해 입담녀와 아직 보지 못한 한 명의 여성에게 향했다. 일단 능력치라도 확인할 필요는 있었기 때문이다. 첫 타깃은 상당히 기대가 되는 입담녀였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이유정(0년 차) 2. 성별(Sex) : 여성(22) 3. 신장 · 체중 : 166.3cm · 51.7kg 4. 성향 : 선 · 중립(Good · Neutral) [근력 32] [내구 38] [민첩 50] [체력 30] [마력 48] [행운 46]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흠.’ 뭘 믿고 박동걸에게 그러게 개기는 가 싶더니, 확실히 그럴만한 구석이 있었다. 안현과 안솔이 워낙 대단해서 그렇지 이 정도만 해도 초기 능력치론 절대 꿇리는 편이 아니었다. 특히 높은 민첩 능력치와 마력 능력치로 인해 근접, 마법 계열 두 가지의 길이 열린 것은 대단한 축복이었다. 나는 이유정도 염두에 두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으로 제 3의 눈을 돌렸다. 이 여성도 꽤나 호기심이 동하는 편 이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한별(0년 차) 2. 성별(Sex) : 여성(21) 3. 신장 · 체중 : 170.2cm · 48.5kg 4. 성향 : 질서 · 혼돈(Lawful · Chaos) [근력 28] [내구 32] [민첩 46] [체력 24] [마력 68] [행운 40]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 고유 능력(1/1) > 1. 카리스마(Rank : F Plus) “억.” 고유 능력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억 소리를 내고 말았다. ‘말도 안 돼. 카리스마라고?’ 나는 안솔의 정보를 확인했을 때와 비슷한 충격에 잠시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리고 처음 김한별을 봤을 때 왜 ‘그녀’를 떠올렸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 역시 카리스마에 대한 재능이 있었으니까. 그냥 보지 말걸 이란 생각이 들었으나 나는 바로 머리를 흔들었다. 머릿속이 갑자기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내 처음 계획을 생각해본다면 이유정과 김한별은 둘 모두 놓아서는 안될 인재상에 포함되는 인물들 이었다. 심란한 생각에 나는 습관적으로 땅바닥의 흙을 모았다가 폈다. 동시에 의구심 또한 들었다. 안현과 안솔. 이유정과 김한별. 이 네 명의 수준은 홀 플레인에서 평균 초기 능력치를 상회하고 있었다. 아무리 뿔뿔이 흩어졌다고 해도, 이정도 수준이면 절반 이상은 살아남을 법도 한대. ‘내가 모르는 무언가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나지 않았다. 몇 가지 추론을 할 수 있겠지만 확신은 할 수 없는 부분 이었다. 나는 일단 생각을 접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다시 상황을 살피기 위해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어차피 넷 모두를 끌어안고 가기로 마음먹은 이상 차후 이들을 관찰할 기회는 많을 것이다. * 가장 먼저 일어난건 이신우였다. 성향이 질서, 선이면 착하긴 하지만 단점도 있었다. 자신의 줏대가 없는 경우가 많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성향이었다. 행운 능력치 포인트가 아깝긴 했지만 그것 말고는 딱히 내세울게 없던 능력치였기에 나는 가볍게 이신우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저, 저도 꼭 팀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음…….” 잠시 이신우를 품평하듯 보던 박동걸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몸은 네가 지켜야 한다. 만약 네가 걸림돌이 된다면 난 주저 않고 너를 버리고 갈 거야.” “알고 있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좋다! 만약 네가 네 역할만 다해준다면 나 또한 최선을 다해서 너를 돕겠다. 우리 한번 이 지옥 같은 곳에서 같이 살아서 나가보자. 그리고…. 아까는 미안했다. 내가 너무 예민해져 있었어. 진심으로 사과하마.” 동걸의 허락이 떨어지는 순간 이신우는 화색이 만연한 얼굴로 그의 주변으로 달려갔다. 서로 강하게 끌어안는 게 솔직히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일단 이신우를 영입한 박동걸은 다음에는 안현을 지목하며 입을 열었다. “거기 너. 너도 잘 생각해 봐. 너라면 우린 언제나 환영이다.” 건달이 짐짓 우리라는 말을 강조하며 은근한 목소리로 묻자 안현은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는 지금 두 갈래의 길에 서 있었다. 그리고 어느 길을 선택하는지는 온전히 자신의 몫 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비단 안솔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침을 꼴깍 삼키며 안현의 선택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안현의 말문이 천천히 열렸다. “내 대답은 똑같다. 난 절대로 동생을 버릴 수 없어.” 억양의 고저가 없는 편안한 말투였다. 순간 안솔의 얼굴이 환해지고 여성 은행원의 얼굴도 안도감에 물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안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그래도…. 네가 말하는 팀이란 것에 솔이를 포함해준다면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어.” ‘이런 이런.’ 그 말로 말미암아 상황은 다시 박동걸에게로 기울었다. 즉 놈에게 선택권이 주어진 셈이다. 그리고 이건 박동걸이 바라 마지않던 상황이었다. 그는 약간 고심하는 얼굴을 하더니 탐탁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건 좀 곤란한데. 솔직히, 너는 몰라도 그 솔이란 동생은 우리가 보호하기도 어렵고 보호할 생각도 없거든.” “그 부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내가 두 명의 몫을 하면 되니까.” “아니, 그렇게 간단히 말할게 아니라고. 의도치 않은 상황도 있고…. 공터 사건처럼 발목을 잡으면 곤란해진단 말이다.” “그럼 나도 어쩔 수….” “일단 나도 보류. 네가 먼저 말했으면 모를까, 아무튼 팀원이 다 정해지면 그때 다시 상의해 보겠어.” 동걸은 의도적으로 안현의 말을 잘랐고 여지를 남겨두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실제로 데드맨을 상대로 적극적인 행동을 보인 것은 나와 안현뿐이다. 그러나 나는 자리에 없었고, 그런 만큼 안현이 가는 쪽으로 무게가 쏠릴 건 당연한 일 이었다. 물론 박동걸은 안현을 받을 생각은 없는 게 함정이지만 여지를 남겨둠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다시 한 번 흔드는데 성공했다. “너는…. 뭐 마음대로 해. 이래라저래라 말다툼 해봤자 나만 힘들지.” 박동걸은 이유정을 보더니 말을 어물쩍 흘리며 넘어갔다. 이유정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딱히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박동걸은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고, 아직 가만히 있는 이보림과 김한별을 보며 말을 걸었다. “자…. 그럼 너희들의 생각도 듣고 싶은데.” “…….”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라고. 내가 정말 버릴 생각이 있었다면 이 친구를 받았겠어? 얘는 분명 나한테 말했어. 발목 잡지 않겠다고. 내 몸은 스스로 지키겠다고. 스스로 도움이 되겠다고 말했다고. 나라고 뭐 하고 싶어서 이 역할을 맡은 건 아니야. 난 정말 혼자서라도 빠질 각오로 말한 거라고. 어쨌든 살고 싶으면 해야 되잖아? 그러니 만약 너희들이 이 팀에 들어오고 싶다면 똑같이 약속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어떻게 하면….” 결국 먼저 대답한 사람은 이보림 이었다. 박동걸은 김한별을 잠시 바라보곤 바로 말을 이었다. “절대 맹목적인 보호가 아닌 어떤 방법으로든 팀에 도움이 되겠다고 하면 돼. 만약에 네가 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면 나는 가차 없이 너를 내쫓을 거야. 물론 반대로 네가 도움이 된다면 우리도 너를 최선을 다해 도우마. 마음 독하게 먹을 자신이 있다면 이 팀으로 와라.” 어떤 방법이든 팀에 도움이 된다. 뭔가 상당히 어감이 이상하고 위험한 냄새를 풍기는 말 이었다. 이보림도 어렴풋이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여전히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김한별의 얼굴에는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박동걸은 입맛을 다시며 이번엔 김한별을 보며 말했다. “너도 마찬가지야.” “…잠시만요.” 김한별은 여전히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생각을 하고 싶은 듯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약간 걱정이 되었지만 내가 생각하는 바가 맞는다면 그녀는 결정을 유보할 가능성이 높았다. 박동걸은 그 정도는 허용한다는 듯 한발자국 물러서 이신우와 어깨 동무를 했다. 당연히 팀에 들어가는걸 거절할 것이다, 라고 편하게 생각하는 건 어디까지나 소설이나 만화에서만 발생하는 일이다. 실제로 인간은 감정이 나약한 동물 이었다. 그게 더욱이 자신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면 자존심쯤은 내팽개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 먼저 일어난건 은행원 이보림 이었다. 이보림은 미약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힘없이 일어나 박동걸이 있는 쪽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다. 내적 갈등이 심한 듯 보였지만 결국 고개를 떨구곤 박동걸과 이신우 있는 장소로 합류했다. 그리고 그 순간 박동걸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 0013 / 0933 ---------------------------------------------- 반으로 갈라지다. 박동걸의 제안에 안현은 갈등이 심한 듯 보였다. 아마 박동걸이 아닌 다른 사람이 팀을 만든다고 했다면 이렇게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안현은 직감적으로 박동걸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말이 번지르르 해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어둠 컴컴한 냄새를 맡은 것이다. 어찌됐든 명분은 박동걸이 가지고 있다. 말을 어떻게 했든 간에 결과적으론 쩌리 삼총사(안솔, 이신우, 이보림)중 두 명을 품었다. 안현이 갖고 있는 불안감은 이미 커질 대로 커진 상태였다. 동생을 버릴 수 없지만 동생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이미 공터의 사건으로 답이 나온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안현의 선택권은 없어졌다. 박동걸이 여지를 남겨둠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 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박동걸한테 유리하게 흘러간다면 안현, 안솔, 이유정이 남겨질 가능성은 농후하다. 그리고 박동걸은 그게 제 무덤을 파는걸 모르고 있었다. 나와 이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관점은 판이하다. 나는 사람들의 성향과 능력치를 보고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들을 판단했다. 하지만 박동걸은 그런 능력도, 그리고 그것을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나와 박동걸은 서로 원하는 팀이 대한 기준이 다르다. 나는 홀 플레인에 입성 후 도움이 될 동료들을 원했고 박동걸은 자신의 입맛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팀을 원한다. 즉 이 상황은 어쩌면 내게 호재나 다름없었다. 아무튼, 일단 어느 편에 더 힘이 실리는가는 나와 김한별의 선택에 달렸다. 나는 자리에 없으니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히 김한별로 쏠리게 되었다. 그 동안 차분히 생각하던 그녀는 주변을 잠깐 보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러나 살짝 입술을 깨무는 게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지금 망을 보고 계신 분도 데려와야 할거 같아요.” 이윽고 한참 동안 생각하고 흘러나온 말은 선택이 아니었다. 서로서로 긴장한 얼굴로 김한별의 선택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그 동안 참고 있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박동걸은 마치 자기가 뭐라도 되는 양 “아. 그렇지.”라고 지껄이더니 이내 허락한다는 말투로 말했다. “뭐…. 데려와. 오면서 그 놈한테도 대충 얘기해 주고 선택을 내리라고 해. 시간이 많은 건 아니니 너도 오면서 그만 단도리 하고. 아. 잠깐만.” 막 몸을 돌리던 김한별의 발을 박동걸의 말이 붙잡았다. 그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인상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너나 그 놈은 도움이 될 수 있어. 그러니 오면서 서로 잘 좀 말해줘. 내 섭섭하게 하지는 않을게. 뭐 어차피….” 말을 잇던 도중 안현을 흘끗 바라본 그는 뒤에 말을 의도적으로 흐렸다. “아무튼 너희 둘은 환영한다고. 선택 잘 하길 바란다.” 박동걸의 연기는 한창 물이 올라 화룡정점을 찍고 있었다. 이신우는 벌써부터 박동걸이 든든한지 김한별을 보며 작은 파이팅 신호를 보냈다. 일단 박동걸은 이미 이 판의 승자나 다름없었다. 인정하기 싫어도 그는 이미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시작은 꼬였는지 몰라도 역시 나이는 똥구멍으로 먹은 게 아닌 모양이다. 이신우와 이보림은 자신들이 미끼나 정액받이로 놀아날 수 있음을 모르고 있었다. 아니면 그것을 알면서도 목숨이라는 이름값 앞에 굴복했던가. 김한별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머리가 아프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개운하기도 했다. 마음만 먹으면 박동걸을 방해할 수 있었지만 그래서는 일부러 자리에서 나온 의미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 판은 의도하지는 않았어도 나와 그에 한해서 윈윈이 될지도 모른다. 박동걸은 주도권을 잡는데 거슬리는 안현과 이유정을 쳐냈고 나는 염두에 둔 네 명중 세 명을 확보할 수 있으니까. 아까부터 살심이 솟을 정도로 걸리적거렸는데, 스스로 사라지는 것을 방해한다면 바보 아니겠는가. 인재들이 현란한 말솜씨에 말린 건 답답했지만 어차피 그건 개인들의 문제로 내가 상관할건 없었다. 이제 남은 한 명만 잘 끌어들인다면 생각보다 일이 빠르게 풀릴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자박자박. 눈을 감고 있는 동안 뒤편에서 풀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지는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얼른 몸을 일으키며 왼팔에 석궁을 장착했다. 김한별만 보면 예전의 '그녀'가 떠올라 왠지 나도 모르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전방을 향해 석궁을 겨누고 열심히 주변을 살피는 척을 하고 있자 곧이어 나를 발견했는지, 나지막이 부르는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저기….” “네?” 깜짝 놀란 얼굴로 몸을 돌리자 김한별은 고요한 눈동자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왼팔을 주물럭거리며 팔이 아픈 표정을 짓곤 입을 열었다. “울음 소리가 한두 번 들리긴 했는데 주변에는 아직 없는 것 같아요.” “고생 많으셨어요. 의견 조율이 거의 끝나서 이제 그만 오셔야 할거 같아요.” “그럼 지금 바로 가죠.” 나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예상대로 김한별은, 나를 붙잡았다. “잠시만요.” 다시 몸을 돌리자 김한별은 주저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게…. 얘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어요.” “이상한 방향이요?” “네. 어떻게 됐나면요….” 김한별은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곤 그 동안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얘기를 들으면서 그녀의 속내를 짐작하고 싶었지만 김한별은 매우 객관적인 관점으로 핵심적인 내용만 요약해서 들려주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 처하면 좋든 싫든 어느 한쪽으로 얘기가 편향되기 마련인데, 나는 그녀에게 순수히 감탄했다. “그래서 현재 이렇게 됐어요. 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얘기가 끝난 후 내가 어느 편에 설지 궁금했는지 김한별이 바로 물었다. 이미 마음을 정했지만 나는 고민하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얘기가 될진 몰랐네요.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아요.” “저도 그래요.” “그쪽은 그 아저씨의 말을 어떻게 생각해요?” 내 물음에 김한별은 잠시 내 눈을 보고는 평소보다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뭔가 마음에 들지 않나요?” “…네. 그 아저씨만 보면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요. 하지만 이상하게 그때는 아저씨가 한 말에 잘못된 점을 찾을 수는 없었어요.” 이신우와 이보림은 넘어갔다. 그들을 보며 김한별은 고민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그녀가 직접 나를 데려오겠다고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더 얘기는 하고 싶었지만 지금도 상당히 시간이 흘렀기에, 난 발걸음을 옮기며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마음을 일부분이나마 확인한 이상 돌아가면서 조미료만 치면 될 것이다. 서로간에 말은 없었지만 김한별이 내 뒤를 따라오고 있는 건 확실했다. 어느 정도 뜸을 들였다 싶을 즈음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저는 그 아저씨가 한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 “애초에 자신의 논리의 장점과 허점을 교묘하게 섞었어요. 그러니 틀린 말은 없을 수 밖에요. 장점으로 허점을 잘 포장해 자신의 말을 잔뜩 유리하게 만들었는데요.” 어떠한 대답도 없었지만 나는 더 설명을 해보라는 무언의 시선을 느꼈다. 박동걸이 제법 꾀를 부렸지만 난 김한별을 놓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고민하는 것에 대한 해답을 하나씩 설명하기로 마음 먹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거랑 솔직한 건 하나의 조건이 있어야 해요.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킬 수 있는가. 그 아저씨가 자신이 내뱉은 말을 잘 지키는 사람처럼 보이시나요?” “아니요.” 김한별은 즉각 대답했다. “첫만남부터 지금까지 인상도 별로이고 행동은 팀의 화합을 깨뜨리고 있어요. 그의 불확실한 말을 믿고 팀에 들어가느니 그냥 기존에 있는 사람들하고 남는 게 나을 것 같네요. 그러니 저는 기존 사람들과 남겠어요.” 슬쩍 뒤를 돌아보니 김한별은 내 말을 곱씹는지 한창 생각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1분도 흐르지 않아 저기 멀리서 사람들이 보이자 그녀가 내 등 뒤로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하는걸 들을 수 있었다. “먼저 들어간 두 사람이 걱정이네요.” 이 말은 김한별도 마음을 정했다는 소리나 진배 없었다. 나는 직구로 들어가는 게 아닌 최대한 완곡하게 돌려 말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박동걸 그 시발 놈이 이보림이랑 이신우 먹으려고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가지 마요. 가면 님도 이용당해요.”라는 식으로 말했다면 그녀는 나도 불신했을 것이다. 나름 머리 회전이 빠른 것 같아 보이니 조금만 찔러줘도 내 말의 의미를 대강이나마 짐작할 것이다. 이윽고 언덕 위로 두 패로 갈라진 사람들이 눈에 확실히 들어올 정도로 거리는 줄어들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상황이랑 달라진 건 없었다. 한편에는 안현을 위시한 안솔과 이유정이. 그리고 반대편에는 박동걸을 내세운 이신우와 이보림이 있었다. 그리고 언덕 위로 올라온 순간 나와 김한별한테 쏠리는 여섯 쌍의 눈동자가 보였다. * “지금 오는군. 아무튼 망 보느라 수고 많았다.” 벌써부터 뭐라도 된 마냥 구는 박동걸을 보며 무언가 아니꼬운 감정이 치솟았지만 나는 억지로 속을 억눌렀다. 안현의 묵묵한 눈동자. 안솔은 불안한 눈동자. 이유정은 긴장된 눈동자. 이신우의 떨리는 눈동자. 이보림의 힘없는 눈동자. 다양한 눈동자들에 기분이 묘해진다. 나는 그들한테 바로 들어가지 않고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러자 내 뒤를 따라오던 김한별의 걸음도 덩달아 멈추었다. “금방 올 줄 알았는데. 아무튼 오면서 대충 얘기는 들었지?” “들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거야. 힘들겠지만 네가 이해 좀 해라. 이것도 다 살자고 하는 거잖아.” 박동걸의 말이 끝나자 이유정이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는걸 들을 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동걸은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오더니 이내 큼지막한 손을 내밀었다. “우리 팀으로 들어와. 우린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어. 너라면 그리고 뒤에 있는 아가씨도 환영하겠다.” 주변 공기를 감싼 긴장감이 최고로 오르고 모두가 나의 대답을 기다린다. 다른 사람들의 애타는 심정을 모르는 게 아니었기에 나는 그의 손을 외면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구와 친구가 될 수 있는지는 스스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권유는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박동걸은 눈 하나 깜빡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손을 거두지 않은 채 김한별을 향해 물었다. “…그럼 너는?” “저는 당신을 믿을 수 없어요.” 물론 김한별 역시 그를 외면했다. 이내 그를 지나치는 우리 둘을 보며 박동걸은 이죽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 그렇게 나오시겠다. 오면서 저 여우한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몰라도 분명 후회할거다.” “자기 목숨 귀한 줄 알면 남의 목숨도 귀한 줄 아시길 바랍니다.” “헛소리 하고 있네. 기껏 생각해 줬더니만…. 뭐 마음대로 해. 나도 싫다는 사람 억지로 들일 생각 없어. 나중에 다시 팀에 끼워 달라고 애원만 하지 말라고.”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신우야. 보림아. 그만 가자! 저런 위선에 가득 찬 녀석들과 함께 있다간 우리 목숨도 남아나질 않겠다.” 벌써 통성명도 했나. 이신우와 이보림을 억지로 붙잡고 떠나는 그를 보니 큰 짐을 던 기분이었다. 나는 차분한 발걸음으로 남은 사람들 앞에 섰다. 그들의 눈에는 안도감과 뜻 모를 호의 섞인 감정이 나에게 전해져 오고 있었다. 안현은 한숨을 푹 내쉬곤 내게 말을 걸었다. “고생 하셨습니다. 보셨다시피…이렇게 되 버렸네요.” “흥. 잘됐지 뭐. 기죽을 필요 없잖아요? 지들이 떠나고 싶어서 떠난 건데 멋대로 하게 놔둬요. 죽든 살든 알아서들 하겠지.” 이유정의 가시 돋친 말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 말대로 그들은 떠난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남겨진 게 아니라 남은 사람들이고. 이 두 말은, 아주 큰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 0014 / 0933 ---------------------------------------------- 반으로 갈라지다. “떠난 사람들 걱정 보다는 지금 당장 우리 걱정부터 하죠. 일단 언덕을 내려가 이 숲을 벗어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모두를 보고 한 말이 아닌 안현을 지목해 한 말 이었다. 내 시선이 안현을 향하자 자연스레 이유정과 김한별의 시선도 안현으로 넘어갔다. 골목 대장 노릇 좀 해본 경험이 있는지 안현은 시선이 몰리는걸 부담스러워하는 성격은 아닌 것 같았다. 흔쾌히 동의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언덕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내려가는 건 좋습니다만 어느 방향으로 길을 잡고 가야 할지 고민이네요. 지금 위치도 어딘지 모르니….” 고개를 다시 들어올린 안현은 아직도 데드맨들이 우글거리는 공터와 박동걸 일행이 따라간 길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박동걸이 잡고 간 길은 공터와 정반대를 향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머리 좀 굴린 것 같지만 내가 볼 때는 그건 절대로 좋은 선택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쪽이 낫지 않을까요.” 그때 처음처럼 조용히 있던 김한별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가보자 공터를 기준으로 약 90도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유정은 공터와의 거리를 가늠하는가 싶더니 살짝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차라리 공터랑 아예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게 낫지 않아? 저기는 공터와 거리 차이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여기 박동걸과 같은 생각한 사람 추가요. 안현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공부와는 거리가 먼 것같이 생겼는데 제법 머리 회전이 빠른 편인 것 같았다.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유정을 보며 김한별은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간단해요. 현재 저것들은 공터로 상당수 몰린 상태에요. 이 숲에 저것들이 고르게 분포해 있다고 가정하면 한곳에 몰린 만큼 다른 곳은 비어있다는 소리죠. 그렇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은 바로 이 부근일 거에요.” “공터와 정반대 방향은 그때 소란을 듣지 못하고 그것들이 그대로 있을 수 있잖아. 오히려 더 위험할지도 몰라.” 안현의 부연설명이 이어지고 김한별은 그 말이 맞는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내가 생각한 탈주로 와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거의 흡사하다고 할만 했다. 어쨌든 이제 좀 뭔가 제대로 돌아가는 기분에 나는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듣고 보니 그러네? 그럼 아까 그 새끼가 간 방향이 가장 위험할 수도 있다는 소리잖아?” “그렇지. 아무튼 우리도 이 아래로 쭉 내려가 숲을 벗어나는 걸로 하자. 솔아. 그만 일어나.” “응? 응!” 안솔은 깍두기처럼 손가락만 빨며 우리들의 대화를 보다가 안현의 말에 황급히 일어섰다. 나와 안현이 나서서 일을 결정하는걸 보며 다들 큰 불만은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박동걸이 있을 때보다 얼굴도 분위기도 훨씬 안정된 느낌을 받았다. 특히 이유정은 박동걸의 고생길이 고소한지 얼굴에 미소까지 보이고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남은 사람들인 나와 일행들은 신속하게 언덕을 내려갔다. * 탈주로를 정한 후 언덕을 내려간 지 약 두 시간 정도 흘렀다. 울창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길게 뻗어서 그런지 숲 안은 언덕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어둑했다. 두 시간이라는 시간 동안 어두운 숲 속을 우리들은 쉬지 않고 걸어가고 있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나는 흙과 풀을 스치는 소리와 규칙적인 호흡만이 일정한 흐름을 유지하며 선두에 선 나와 안현을 뒤따르고 있었다. 음침한 숲은 조용했고 또 생각보다 큼지막한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 기억에 따르면 그리고 현재 걷는 속도를 유지한다면 오늘 저녁이 되기 전에 숲을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능력치가 준수한 사람들이 모인 만큼 천사들이 일부러 난이도가 높은 숲 중앙에 떨어뜨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오늘 저녁이 되기 전에 이 숲을 빠져 나가는 게 좋았다. 준비의 방 에서는 의류와 무기들만 있었고 식량 또는 물을 제공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생필품들이 있는 장소는 따로 있었다. 반나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레스트 룸이나 하루 동안 잠을 자고 지낼 수 있는 세이브 포인트. 그 외의 방법이라면 다른 사용자들을 약탈하거나 아니면 마을에 있는 상점들을 뒤지는 방법도 있었다. “…오빠.” “응?” 현재 선두는 안현과 내가 섰고 그 뒤를 안솔과 김한별이 바짝 뒤쫓고 있었다. 그리고 이유정이 맨 후미를 맡은 상태로 우리들은 최대한 주변을 경계하며 나가고 있었다. 그러는 도중 안솔이 안현의 옷깃을 꾹 잡아 당기더니 발개진 얼굴로 입을 오물거렸다. “나 쉬 하고 싶어….” “…….” 안솔의 수줍은 말에 모두의 얼굴에도 어색함이 맴돌았다. '병신인가?' 좀 정박아 같아 보이긴 했는데 이 정도라니. 현대에서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사뭇 궁금해졌다. 안현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우리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여기서 잠깐만 멈춰도 될까요. 동생이 볼일이 있다고 하네요.” 다행히 이유정과 김한별은 순순히 동의했다. 여자들끼린 뭔가 통하는 게 있는 모양이다. 안솔은 혼자 가는 게 무서웠는지 오빠를 보고 같이 가자고 생떼를 부리는 해프닝은 있었지만 안현은 매정하게 그녀를 혼자 보내고 말았다. 오빠에게 한 소리 먹고 풀이 죽어 터덜터덜 걸어가는 안솔을 보며 이유정은 피식 웃었다. 어느새 그녀는 땅바닥에 털썩 앉아 있었다. “괜찮겠어? 또 그것들이 달려들 수도 있잖아.” “잘 살피고 있으니까 괜찮을걸. 그리고 나이가 열 아홉인데 화장실도 혼자 해결 못하면 말이 안 돼지. 근데 너 몇 살인데 반말하냐?” “나? 스물 둘. 너도 반말하면서 새삼스럽게. 그런데 너 나보다 어리지 않아? 딱 봐도 갓 스물이나 스물 하나로 보이는데.” “나도 스물 둘이다.” “에~? 동갑이네. 이왕 이렇게 된 거 서로 통성명이나 하는 건 어때요?” 전보다 훨씬 쾌활해진 목소리로 이유정이 모두를 둘러보며 말하자 김한별도 심적인 긴장감에 알게 모르게 지쳤는지 그녀를 따라 조심스럽게 앉았다. 나와 안현도 서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가운 땅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어차피 동생 돌아오면 바로 다시 출발할거니까 간단하게 하자고. 내 이름은 안현이다. 나이는 스물 둘.” “여기 오기 전에는 뭐 하고 지냈어?” 이유정의 질문에 안현은 곤란한 듯 살짝 얼굴을 긁적였지만 이내 순순히 대답했다. “그냥 동네 양아치 짓거리 좀 하면서 알바하고 살았어. 너는?” “나? 이름은 이유정. 나이는 똑같은 스물 둘. 대학교를 휴학하고 경찰 공무원 시험 준비하고 있었지.” 경찰 공무원 시험 이라. 그럼 여경이 꿈인가? 왠지 경찰 제복과 이유정의 모습이 상당히 잘 어울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내 서로 경찰이다 양아치다 수다를 나누던 둘은 나와 김한별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말문을 연건 김한별 이었다. “김한별. 나이는 스물 하나에요. 대학생입니다.” “동생이네? 어느 대학교에 다녔어?” “연세 대학교에 다녔어요.” “와~! 공부 잘하나 보네. 부럽다.” 잠시 감탄의 눈빛을 보내던 둘은 이내 혼자 남은 나한테로 시선을 돌렸고 덩달아 김한별도 뭔가 기대하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 부담스런 시선에 나는 어색한 기분이 들었지만 최대한 차분한 얼굴로 그들의 기대에 응해주었다. “이름은 김수현. 나이는 스물 셋. 군인이었습니다.” “오빠 발견~! 그럼 말 편하게 해요 오빠. 그런데 오빠는 육군 이었어요 공군 이었어요 해군 이었어요?” “그럼 형이네. 저도 말 편하게 하세요. 형 계급은 뭐였어요?” 아까는 단순히 기가 세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유정은 천성이 발랄한 듯 보였다. 동시에 안현은 군대 얘기가 나오자 호기심이 동하는지 나에게 물었다. “육군 병장 이었어.” “아쉽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전역 하셨을 텐데요.” 까르르 웃는 이유정을 보며 나는 쓴웃음을 짓고는 말을 덧붙였다. “전역은 했어. 전역 신고하고 돌아오는 날 여기로 오게 됐거든.” “…….” “…….” “…….” 뭐지? 저 동정 어린 시선은? 이 안쓰러운 분위기는? “왜 다들 그렇게 보는 건데? 난 괜찮아. 별 느낌 없어. 그러니 그렇게 보는 건 그만둬.” 괜찮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어색한 침묵은 우리 사이로 내려 앉았다. 안현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다른 데로 돌렸고 이유정은 대놓고 불쌍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심지어 김한별도 나를 안쓰럽게 바라볼 정도였다. 난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데. 이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이유정은 일부러 발랄한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난 지금 여기 있는 게 아직도 꿈만 같아. 평소 같으면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책 덮고 밖으로 뛰쳐나와 친구를 부르겠죠. 휴게실에 앉아서 실컷 수다 떨다가 맛있는 거 먹으러 나가고 집에 돌아가면서 내일부턴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이러고 있을 텐데.” 그 말을 들은 모두의 표정이 몽롱하게 변한다. 안현도 실 웃음을 흘리며 그 대열에 동참했다. “아마 난 PC방 알바 갔다가 또 외상 하려고 하는 손님과 투덕거리겠지. 돈 안내고 튀는 놈 잡고. 청소 깨끗하게 안 했다고 사장 새끼한테 털리고. 그러다 사모님이 준 치킨 한 마리 뜯으며 카운터에 있다가 퇴근 시간돼서 솔이 데리러 가고. 큭. 아, 형은 집 가면 뭐부터 할 생각 이었어요?” “나?” 갑작스럽게 화살을 나에게 돌리는 안현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10년도 더 된 일이다 보니 잘 생각이 나지는 않는데. 잠깐 고민을 하던 나는 그냥 평범하게 말하기로 했다. “글쎄. 아마도 집에 가면서 사회의 공기를 듬뿍 마시며 나도 이제 자유인이라는걸 실감했을 것 같은데. 그리고 집에 들러서 어머니한테 큰절 올리고 아버지한테 전화도 드려야지. 그리고 어머니가 해주시는 맛있는 밥을 먹고 뜨거운 물에 몸 좀 푹 담근 다음…. 아니 그러니까 왜 다들 그렇게 보는 건데. 그렇게 불쌍한 동물 보듯이 보지 마. 난 정말 괜찮다고.” * 안솔이 볼일을 마치고 오는 걸로 소란은 무사히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면서 “다녀왔습니다.”라고 인사하는 그녀를 보며 귀엽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우리가 다시 현실을 직시하게 되는 신호탄이나 다름없었다. 서로를 소개하고 수다를 나누며 아주 잠시만이라도 이 지옥 같은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안현은 한숨을 푹 내쉬며 터덜터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한 우리는 다시 어두운 숲을 전진하기 시작했다. 나와 안현이 선두에 서고 있다고 해도 길을 인도하는 건 슬쩍슬쩍 내가 하고 있었다. 주변을 감지한 후 데드맨들이 적은 곳으로 일부러 피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 한 마리도 만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숲의 외곽과 가까워지면 가까워 질수록 데드맨들이 고르게 분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데드맨들이 적은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 뿐 이었다. 개중에 가장 걱정되는 건 안솔 이었다. 가장 적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곤 하지만 더 나가면 그곳에도 수십의 데드맨들과 맞닥뜨리게 될지도 몰랐다. 과연 그 상황에서 솔이 침착히 대응할 수 있을지는 불안했다. 그때 안현이 급한 소리를 지르며 몸을 우뚝 서고 말았다. “왜 그래?” “쉿.” 안현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와 이유정이 고개를 돌리자 데드맨 세 마리가 주변을 배회하는 게 보였다. 코를 벌름거리고 입맛을 다시는 게 우리의 냄새를 맡은 것이 틀림 없었다. 반사적으로 안솔을 쳐다보자 그녀는 양 손으로 입을 꽉 막은 채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일단 한 고비는 넘겼다. “시각과 청각 말고도 후각으로도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는 거야?”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일단 숙여봐.” 안현은 얼른 큼지막한 나무 뒤로 자신의 몸을 숨기면서 솔을 품으로 끌어안았다. 이유정과 김한별 그리고 나도 얼른 그를 따라 몸을 숨긴 후 녀석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안현이 방패를 바짝 드는 게 보였지만 나는 일단 고개를 흔들었다. 데드맨을 죽이는 훈련은 나중에 나가서 하는 게 더 나았다. 왜 그런지 이유는 기억이 정확하게 안 나지만 전에 들었던 얘기들 중 통과 의례에서 사용자들은 숲만큼은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한결같이 입을 모았기 때문이다. 감지에 걸리는 거리상으론 지금까지 온 거리의 반 정도만 더 가면 우리는 숲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잘 피해왔는데 지금 녀석들을 죽인다면 또다시 포위될 가능성이 높았다. 데드맨들이 신호를 받고 모여들면 그때는 정말 답이 없었다. 설령 처리한다고 해도 신호를 줄 틈도 없이 단번에 처리해야 하는데 꼴랑 돌멩이 아니면 방패로는 세 마리를 한번에 처리하는 건 요원한 일이다. 순간 허리에 찬 장검이 미약하게 덜그럭거렸다. 진작 안현한테 줄걸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데드맨들은 코를 킁킁거리며 우리가 있는 나무로 한 발자국씩 옮기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 0015 / 0933 ---------------------------------------------- 반으로 갈라지다. 데드맨들은 연신 코를 킁킁대며 우리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오고 있었다. 살가죽은 이리저리 뜯겨 너덜거렸고 얼굴에는 썩은 뼈가 드러나 있어 그로테스크한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놈들을 보는 애들의 눈동자에 공포감이 맺혔다. 확실히 전날까지만 해도 평범한 일상을 누리던 사람들인데, 불과 하루도 안 되는 시간에 데드맨을 보고 기민한 행동을 기대하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그르렁. 그르렁. 맨 앞에 있는 데드맨이 나지막이 울었다. 걸음이 느린 것을 보니 아직 걸린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울음소리와 함께 맨 뒤에 있던 한 마리가 다른 곳으로 방향을 트는걸 보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된 이상 세 마리를 동시에 처리하는 것은 물 건너간 것과 다름 없었다. 그르렁. 그르렁. 데드맨이 한 번씩 울 때마다 나무가 덜덜 떨리는 느낌이 들었다. 흘끗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범인은 안솔 이었다. 그녀는 나무에 몸을 기댄 체 심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스윽, 스윽. 풀이 끌리는 소리와 함께, 이윽고 데드맨 두 마리가 나무 바로 앞까지 다다랐다. 잠시 걸음을 멈춰 고개를 갸웃거리던 놈들은 이내 다시금 천천히 전진해오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가 기대고 있는 나무의 둘레는 상당히 컸으므로, 나는 일행들에게 살며시 신호를 보냈다. 데드맨이 한 발자국을 움직일 때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만큼 옆으로 이동한다. 데드맨이 불쑥 옆으로만 돌아도 당장에 걸릴 가능성이 높았지만 웬만하면 직진하는 성향을 가진 놈들이니 걸리지 않을 확률도 있었다. 한 걸음 가까워진다. 그만큼 한 걸음 이동한다. 한 걸음 가까워진다. 그만큼 한 걸음 이동한다. 한 걸음 가까워진다. 그만큼 한 걸음 이동한다. 그러기를 서너 번 반복하자 어느새 우리들은 나무 둘레를 따라 반 이상 이동한 상태였고, 데드맨 또한 아까 우리가 있던 장소를 볼 수 있던 선까지 진입한 상태였다. 모두 숨소리를 최대한 죽일 만큼 우리들의 주변은 조용했다. 이리저리 고개를 흔들며 주변을 살피던 데드맨은 뭔가 불만스러운 듯 울음을 터뜨리고는 다시 천천히 전방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제 지금 이 상태로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는 생각에 모두의 얼굴에 약간의 안도감이 내릴 무렵이었다. 탁! 우둑! “흡!” 온 몸을 떨며 두 눈을 꼭 감고 있던 안솔이 결국 발을 잘못 놀려 소리를 내고 말았다. 고개를 숙이자 그녀가 밟아 부러뜨린 작은 나뭇가지 하나가 보였다. 엎친대 덮친 격으로 그녀는 비명을 숨기지 못하고 데드맨의 귀에 확실히 들릴만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결국, 사단이 나고 말았다.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데드맨들의 울음 소리가 잦아지기 시작한다. 그 소리를 들은 일행들의 몸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놈들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이내 우리가 숨어있던 나무 둘레를 따라 그 끔찍한 얼굴을 쑥 내밀고 말았다. 걸렸다. “크아아아아아아아!” “으읍! 으으으으으으으으!” 이윽고 데드맨은, 새빨간 이빨을 내보이며 입을 쩍 벌린 채 달려들었다. 안솔을 결국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안현이 한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큰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주변에 있던 세 마리는 확실히 들었을 정도였다. 절체절명의 순간. 내가 석궁을 겨냥하는 동시에 안현이 남은 왼손으로 방패를 들더니 자기자신과 안솔의 몸을 방어했다. 곧이어 얼굴을 들이밀며 뜀걸음으로 오던 데드맨과 안현의 방패가 큰 소리를 내며 충돌했다. 쿵! 충돌 소리가 들리고 안현의 몸의 휘청대는 게 보였다. 다행히 방어는 성공했지만 데드맨은 한걸음 물러난 게 전부였다. 오른손으로 솔을 보호하느라 신경이 분산된 탓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달려드는 데드맨을 보며 나는 재빨리 석궁의 시위를 당기려고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뇌리를 스치듯 지나가는 생각에 나는 머리를 조준했던 석궁을 살짝 아래로 내린 후 화살을 날렸다. '한두 번으로는 부족하지.' 핑 소리와 함께 날아간 석궁은 두 번째로 달려든 데드맨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데드맨이 휘청거리는 사이 나는 바로 허리춤에 매어둔 장검을 꺼내 들었다. “안현! 동생을 이쪽으로 보내! 그리고 이 검을 써!” 다시 자신을 향해 맹렬히 돌진하는 데드맨을 보며 이를 바득 깨문 안현. 그는 안솔을 내 쪽으로 밀어내며 동시에 오른손 또한 쭉 뻗었다. “그럼 부탁해요!” 안현이 말이 끝나는 순간 데드맨들이 다시 방패를 친 충격으로 몇 걸음이나 물러났지만, 그 와중에도 용케 내 쪽으로 밀어 보냈다. 그녀는 미끄러지는 것처럼 달려와 내게 안겨 들었고, 나 또한 안현이 최대한 받기 편한 방향으로 검을 던졌다. 장검과 안솔이 중간에서 교차한다. 거의 넘어지듯 달려오는 안솔을 안전하게 품자 뒤에서 이유정과 김한별의 급한 목소리를 내는걸 들을 수 있었다. “오빠 뒤!” “뒤를 조심하세요!” '알고 있어.' 흘끗 뒤를 보자 아까 방향을 틀었던 데드맨이 내 뒤로 달려오고 있었다. 범인한테는 찰나의 순간일지 몰라도 이미 내 인지영역은 범인을 초월한 상태였다. 단 2초의 순간에 나는 석궁을 장전하고 미간에 겨누었다. 그리고, 발사. 퍽! 이번에는 정확히 미간을 노렸기 때문에 화살은 부담 없이 데드맨의 머리를 파고 들어갔다. “흐…. 어엉…. 어어엉….” 그냥 옆에서 볼 때는, 안솔의 발작적인 행동을 그러려니 여겼었다. 하지만 막상 안아보니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보는 내가 서러울 정도로 흐느끼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안솔의 머리를 쓰다듬고 귓가에 “괜찮아.”라고 속삭이자 그녀의 떨림이 약간 잦아드는걸 느꼈다. 검과 방패를 장비한 안현의 눈동자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두려움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두 다리는 땅에 똑바로 박혀 있었다. 그리고 저런 태도야말로 내가 안현을 비롯한 일행들에게 바라던 태도였다. 안현의 정신적인 각성이 약간이나마 시작된 것이다. 안현은 방패를 가슴 상단으로 들었다. 최선의 방어는 최선의 공격이라는 말이 있듯이 괜찮은 선택이었다. 그는 검을 먼저 휘두르는 게 아니라 방패를 들고 그것들을 향해 전력으로 들이 받았다. 쿵! 콰득! 이번의 돌진은 꽤나 강력했는지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방패에 맞은 데드맨의 가슴이 움푹 들어가 있는 게 안현도 전력을 다해 들이받은 모양 이었다. 카운터 공격으로 재빠르게 베려는 듯 검을 치켜 올리는걸 보며, 나는 한가지 도움이 되는 말을 던져 주었다. “머리를 노려. 놈들은 머리가 약점이다.” 아무데로나 검을 내리치려던 안현은, 내 말을 들은 듯 데드맨의 머리통으로 검을 내리쳤다. 폼은 엉성했지만 힘은 제법 들어가 있는지 앞에 있던 데드맨은 별 반항도 못해보고 정수리가 쪼개지고 말았다. 뒤이어 달려온 데드맨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처음과 같은 방법으로 방패로 방어하거나 충격을 주고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순간적으로 머리를 노린다. 무언가 퍼석한 게 찔리는 소리와 함께 데드맨은 몸을 두어 번 꿈틀대더니 이내 안현의 검에 찔린 채로 몸을 허물어뜨렸다. 그 무게에 같이 팔이 딸려 내려가던 안현은 서둘러 검을 뽑고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거친 숨소리가 주변을 지배했다. 한껏 긴장했었는지 무사히 데드맨을 죽이고 난 후 모두 동시에 참았던 숨을 토해내고 말았다. 방패로 막고 칼로 찌른다. 안현이 한 행동은 단순했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만약 데드맨이 다른 사람들한테 갔다면 어땠을까. 안솔처럼 굳어 움직이지 못하는 정도는 아니어도, 데드맨을 앞에 둔 상태서 깔끔한 연속 공격은 힘들었을 것이다. 안현은 그대로 팔을 늘어뜨리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위에서 돌멩이로 맞출 때는 몰랐는데 실제로 붙으니까 힘드네요.” 당연하지. 생명이 경각이 달린 상황인데 그때 침착함을 유지하고 몸을 뜻대로 통제할 수 있다면 그게 대단한 거다. 그때 몸 안에서 뭔가 자그마한 게 꼼지락거리는 기분이 들어 슬쩍 안았던 팔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안솔은 나는 듯 달려가 안현의 상태를 살폈다. “오빠…. 괜찮아?” “어디 물린 데는 없어. 괜찮은 것 같은데.” “어엉…. 어어엉…. 미안해….” “울지마. 뚝.” 자신 때문에 오빠가 위험에 처한걸 알았는지 안솔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안현은 말 그대로 괜찮다고 했지만 안솔의 눈물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유정은 십 년 감수했다는 얼굴로 터벅터벅 걸어왔고, 안현의 등을 퍽퍽 치며 말했다. “덕분에 살았다. 제법인데?” "뭘. 수현이 형이 이걸 안 줬다면 꽤나 애먹었을 거야. 아 형. 이거 돌려 드릴게요." 아쉬운 손길로 다시 장검을 내미는걸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안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내가 보기에 장검은 네가 갖고 있는 게 나을 것 같다.” “정말 그래도 돼요?” “그래~. 어차피 오빠는 석궁 있잖아. 그런데 너 어디서 검도라도 했어?” 이유정이 거들자 안현은 장검을 갈무리 하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안현과 이유정 둘이서 재잘재잘 떠드는걸 보며 나는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 나는 데드맨의 미간을 겨냥했었지만 의도적으로 가슴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괜찮은 것 같은데….' “잠시만요.” 그때였다. 돌멩이를 날려 데드맨을 주춤거리는데 성공하게 한 김한별은 조금 불안한 얼굴로 우리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웬만하면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있던 만큼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낼지 자못 궁금했다. “공터에서도…이것들을 한 마리 죽인 후 갑자기 몰려들지 않았나요?” “그…. 그랬나?” 이유정이 떨떠름한 얼굴로 수긍하자 모두의 안색이 변했다. 특히 안솔은 거의 발작할 것 같을 기세였다. 안현은 안솔의 발작을 감지했는지 동생의 등을 두드리며 급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면 이곳도 빨리 벗어나는 게 좋지 않을까?” “그, 그러지 뭐. 그럼 얘가 걸어왔던 반대 방향으로 튀는 건 어때?” “음…. 아니. 가던 방향으로 쭉 가도록 하자. 지금 방향을 틀어버리면 오늘 밤을 이 숲에서 새울지도 몰라.” 기특하게도 안현은 오늘 내로 이곳을 벗어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스승과 사제 관계라면 머리라도 쓰다듬었겠지만 지금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 하는 걸로 만족했다. 비록 앞에 몇몇 데드맨들이 감지됐지만 안현의 말은 정답이었다. 이윽고 잠시 몸을 추스른 우리들은 방금 있었던 장소를 빠르게 이탈하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 0016 / 0933 ---------------------------------------------- 반으로 갈라지다. 전에 한 번 말한 것 같지만, 데드맨은 홀 플레인에서는 괴물 축에도 들지도 못하는 놈이다. 능력이라고 해봤자 약간의 지능과 감염 능력만 있을 뿐이다. 자격 증명이 목적인 홀 플레인인만큼 쇠 파이프를 든 건장한 성인 남성은 8할 이상으로 데드맨을 처치할 수 있다.(물론 일대일로 가정하고 남성이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하다면.) 안현은 장검과 방패를 장비했고 기초 능력치가 준수하다. 굳센 마음가짐과 무기를 다룰 줄만 안다면 지금보다 훨씬 성장할 수 있다. 데드맨은 가볍게 볼 정도로 말이다. 한 번 물꼬를 터주자 행동이 더욱 적극적으로 변하고, 휘두르는 참격은 거침이 없어졌다. 안현은 영리하고 타고난 싸움꾼이었다. 아직은 일말의 불안함을 버릴 수 없는지, 방어를 우선하고 카운터를 치는 방법으로 데드맨을 공략하고 있었다. 아마 자신감이 더 생긴다면 장검만으로 서너 마리는 너끈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정면돌파를 택한 후. 우리는 신속히 숲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탈주로를 더듬던 도중 김한별은 오솔길의 흔적을 발견했고, 이 길을 따라간다면 숲을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 그에 따라 일행의 이동 속도도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그러나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데드맨의 출현 빈도가 더 잦아지는 건 피할 수 없는 노릇 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안현의 전투 경험을 쌓는다고 치기로 했고 실제로 전투의 대부분도 안현이 담당하고 있었다. 사람 냄새를 맡은 데드맨 네 마리가 듣기 싫은 울음을 울리며 입을 쩍 벌린다. 안현의 눈에 자신감이 가득한 게 호전적인 성향이 점점 드러나는 것 같았다. 바로 검과 방패를 드는 안현을 보던 안솔은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조심해….” “응. 조금만 기다려. 형. 솔이랑 애들 보호를 부탁해요.” “애들은 걱정 마. 내가 지키고 있으마.” “누가 애들인데?”라고 외치는 이유정의 말에 잠시 웃던 그는 이내 거칠고 맹렬한 기세로 달려 나갔다. 두 마리는 한번에 처리했어도 네 마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석궁에 화살을 매기며 혹시 모르는 불상사를 대비하기로 했다. 자신을 보며 마주 달려오는 괴물들을 향해 안현은 약 1미터를 남겨두고 왼쪽 대각선으로 스텝을 밟았다. 인간의 몸은 유연하지만 괴물들의 몸은 유연하지 못하다. 당장에 물어 뜯을 기세로 달려오던 데드맨은 굳어버린 관절로 인해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옆면 대응에 취약한 틈을 노리고 머리에 검을 찔러 넣는다. 한 마리 아웃. 그와 동시에 검을 바로 빼어 나머지 세 마리를 견제한다. 그런 안현을 보며 참 물건은 물건이구나 라고 느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단순한 공격 방어 일변도가 아닌 상대의 약점을 노릴 줄 안다는 것이다. 데드맨들이 회전에 취약하다는 걸 알고 대각선으로 빠진 건 확실히 칭찬하고 싶었다. 무언가 뭉개지는 소리가 나며 괴물 한 마리가 몇 걸음 물러났다. 데드맨의 공격 수단은 이빨로 물어뜯는 것 하나 뿐이다. 방패로 타격을 주려면 가슴의 상단 위로 드는 게 훨씬 효율적이고 안전하다. 그리고 안현은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닌데 스스로 터득하고 해나가고 있었다. 이빨이 덜렁이는 데드맨을 보며 안현의 검이 유성처럼 찔러 들어갔다. 푹 소리와 함께 나는 속으로 두 마리 아웃 이라고 외쳤다. 두 마리를 골로 보냈으니 이제 절반만 남은 셈이다. 앞선 괴물들을 비교적 쉽게 보낸 탓인지 왼팔에 든 방패가 처음에 비해 느슨하게 든 것 같았다. 한 마리가 어떻게든 한 입이라도 물어 뜯으려 덤벼들고 안현은 그런 괴물을 가만히 지켜보며 장검의 손잡이를 역으로 쥐었다. 그걸 보던 내 눈이 이채를 띠었다. 설마 한 손 발검술을…? 장검을 휘두르는 거리를 계산하고 타이밍을 조절한다. 발검술에 관해서는 꽤나 달인이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원리 또한 알고 있었다. 입을 쩍 벌린 데드맨이 거리 안에 들어왔다. 동시에 장검을 쥔 안현의 손에 힘이 꾹 들어가는 게 보였다. 바로 지금이다. 스칵! 육질이 잘리는 섬뜩한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어설프긴 했지만 단 한번의 절묘한 호선 베기로 데드맨 머리통의 중앙을 날리는데 성공했다. 그의 얼굴에 희열 비슷한 감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전투를 보던 내 눈이 처음으로 찌푸려졌다. 아직 괴물은 한 마리 남아 있었다. 앞의 데드맨이 허물어지는 순간 뒤에서 달려오던 데드맨이 바로 안현을 덮쳤다. 순발력으로 방패를 앞세운 건 좋았지만 느슨하게 잡은 터라 달려오던 데드맨의 힘을 이길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재빠르게 장전한 석궁을 겨누며 둘의 충돌을 지켜보았다. 쿵! “큭!” 예상대로 안현은 방패를 놓치고 말았다. 온 몸으로 충격을 받던 아까와는 달리 고작 왼팔로 충돌을 받으니까 그렇지. 아마 지금쯤 손이 저릿저릿 할게 분명했다. 아무튼 충돌하는 힘의 여파로 안현의 전방은 무방비가 되었고 그 틈을 놓칠세라 데드맨의 이빨은 뱀처럼 그의 가슴을 노리고 들어왔다. 그걸 보는 순간 나는 바로 화살을 날렸다. 미안하지만 네 식사로 전락하긴 아까운 놈이라.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날아간 화살은 정확히 데드맨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막 안현의 목을 물려다 몸이 허물어지는 괴물을 보며 안현은 십 년 감수한 얼굴로 그대로 땅바닥에 앉아버렸다. “후….” “사장님. 나이스 샷.” 방금 전 상황의 위험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유정은 나를 보며 농담을 던졌다. 안현은 보이는 전투는 곧 잘해도 아직 한 수 앞을 읽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긴 지금만 해도 충분한데 그런 것 까지 바라는 건 욕심일지도 모른다. 멍한 얼굴로 자신의 목을 쓰다듬던 현은 나를 보며 안도한 목소리로 말했다. “덕분에 살았네요. 형 고맙습니다.” “뭘. 겨우 한 마리 도와준 건데. 고생했다.” 내 너스레에 현은 고개를 젓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설마 그렇게 공격이 들어올지 몰랐어요. 형이 쏜 화살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슬쩍 안솔의 얼굴을 보니 당장 울음을 터뜨릴 만큼 입을 삐죽이고 있었다. 더 듣기도 싫다는 듯 몸서리 치는 안솔을 보며 안현은 말을 아꼈다. “어쩔 수 없지. 들어오는 순간이 절묘하더라. 그런 경우는 최대한 내가 서포트…” “으앙!”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솔은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바로 눈물을 터뜨리며 오빠를 향해 달려갔다. 참 눈물 나는 남매 애였다. 괜히 머쓱한 마음에 나는 장전된 석궁을 풀고 화살을 다시 통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호전성 하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이유정은 그런 둘을 보며 은근히 부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보기만 해서 그런지 몰라도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칫. 나도 무기 하나 고를걸. 한별아. 너 무기 가진 거 없어?” 이유정의 말에 김한별은 잠시 품속을 뒤적거리더니 짧은 소검 하나를 꺼냈다. 던지는 용도면 몰라도 소검으로 유효타를 먹이려면 거의 근접해야 하기 때문에 썩 효율적인 무기로 보기는 힘들었다. 나 같은 검의 달인이 쥐면 몰라도 평범한 사람이 휘두른다면 대갈통 찍으려다가 오히려 물릴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별 도움은 안될 것 같은데. 근데 너 그건 왜 가지고 다니는 거야?” “혹시 모르니까요. 험한 꼴 당하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낫잖아요.” “…네가 무슨 조선 시대 열녀냐….” 김한별의 덤덤한 목소리에 이유정은 질린 눈으로 고개를 흔들더니 이내 내 왼팔을 바라보았다. 내 왼팔에 장착된 석궁을 탐내는 눈으로 보던 이유정은 이내 다룰 줄 모르는 사실을 떠올린 듯 실망한 얼굴로 투덜대고 말았다. “그 자식이 들고 있던 쇠 파이프 어디 없나. 한별아. 주변에 뭐라도 있나 한번 봐봐.” “없어요.” 보아하니 김한별이 불편한 얼굴을 하는 게 이유정 멋대로 말을 편하게 하는 모양이다. 문득 박동걸 일행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 예전 통과 의례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은 진짜 편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그때 그 시절에는…. 처음 이틀은 정말 도망의 연속이었지. 지금 그들은 뭘 하고 있을까. 열심히 도망치고 있을까? 아니. 어쩌면 벌써 데드맨들의 뱃속으로 조각조각 나뉘어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물론 내 알 바는 아니었기 때문에 바로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전투의 여파인지 아니면 안솔을 달래느라 그랬는지 몰라도 안현은 조금 힘이 빠진 걸음걸이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형. 보니까 오솔길로 보이는 흔적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어요.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바로 움직이는 게 어때요?” “응. 그러자고.” 나와 안현의 대화를 듣던 이유정은 무기가 없는 게 분한지 괜한 심술을 부렸다. “치. 신났네, 신났어. 너 그러다가 훅 갈지도 몰라. 조심해.” “가만히 잡아 먹히긴 싫거든. 이렇게라도 날뛰는 게 차라리 나아. 아무튼 빨리 내려가자.” “알고 있어. 나도 이 숲이 지긋지긋해. 일초라도 빨리 나가고 싶다고.” 그렇게 데드맨 네 마리를 처리한 우리는 다시 빠르게 길을 따라 내려갔다. 확실히 이 길을 따라 간다면 숲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곽 지역에 미약하게 걸리는 데드맨들의 숫자가 마음에 걸렸다. 감지에만 걸리는 게 스물을 훌쩍 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방향으로 간다고 해도 별반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네 마리와 스무 마리를 상대하는 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그렇다면. 정면 돌파를 제외한다면. 탈주로를 여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고 일행들을 설득할 말이 뭐가 좋을까 생각했다. * 예상대로 숲 외곽은 데드맨들로 우글거리고 있었다. 언뜻 봐도 스물은 넘는 게 온 방향이 그르렁 울음 소리로 가득 찬 상태였다. 전방에만 보이는 숫자만 계산해서 그렇지 여기서 소란을 일으킨다면 왼쪽 오른쪽에서 튀어 나오는 괴물들의 숫자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저 멀리 보이는 사람의 흔적을 탄 돌담이 보인다. 그걸 넘어서 보면 울퉁불퉁하긴 해도 길이라 부를 수 있는 대로도 끄트머리가 보였다.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이 숲을 나갈 수 있는데. 일행들도 그걸 알고 있는지 속이 바짝바짝 마르는 모양이다. 아무리 안현이 뛰어나다고는 해도 스물이 넘는 데드맨들을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나기엔 왠지 아쉬움이 발목을 붙잡았다. “미친…. 저기를 도대체 어떻게 뚫고 나가란 건데…?” 이유정의 허탈한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를 파고 들었다. 돌아서 가려고 해도 다른 데는 이렇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안현과 김한별도 딱히 좋은 생각은 없는지 묵묵히 땅만 보고 있었다. 결국 그 방법 밖에 없는가. 가볍게 한숨을 내쉰 나는 이번에 조금 나서주기로 결정했다. “나한테 좋은 생각이 하나 있는데.” 내 말을 듣자마자 모두의 귀가 쫑긋 일어나는 듯 착각이 들었다. 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 0017 / 0933 ---------------------------------------------- 반으로 갈라지다. “유인. 저것들을 유인하는 거야.” “네? 저 괴물들을 끌어들이자고요?” 비슷하지만, 핀트가 약간 어긋났다. 나는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대부분 멀뚱멀뚱 나를 보았지만, 김한별은 눈썹을 치켜 올린 게 대충 내 말을 알아 먹은 듯 보였다. 아무튼, 어느 정도 부연 설명이 필요한 것 같았다. “아니. 끌어들이는 게 아니라 한 명이 미끼가 돼서 저 괴물들을 끌고 가자는 소리야.” 난 잠시 말을 멈추고 숲 안쪽으로 손가락을 뻗었다. 그걸 따라 모두의 시선이 다시 숲 안으로 돌아가는걸 보며 말을 이었다. “소란을 피우면 분명 괴물들이 미끼를 물려고 달려들겠지. 그 상태 그대로 어그로를 유지하면서 저 숲 안으로 유인해 가는 거지. 그리고 그 틈을 타 다른 사람들이 저 담을 넘으면 돼. 그러면 우리는 숲을 벗어날 수 있어.” 일부러 희망찬 어조로 숲을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을 강조했지만 모두의 얼굴에는 회의적인 기색이 떠올랐다. 긍정적인 반응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탐탁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없는걸 보면 확실히 타당성은 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물론 이 작전이 성립되려면 결국 필수적으로 걸리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말하지 않다고 뻔하다. 한마디로 누가 미끼 역할을 할 것인가? 좀비들처럼 느릿하게만 걸어도 해볼만하다 여기겠지만 데드맨들은 먹이를 발견하면 뛰는 걸음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유인하는 사람은 아차하는 순간 포위되고 저것들의 먹잇감이 되는 것이다. 모두 한동안 서로의 눈치만 보았지만, 역시나 머리 회전이 빠른 김한별이 핵심 문제를 짚었다. “그러면 결국 한 명이 희생해야 한다는 거잖아요.” “그렇지.” “누가 할 건데요?” 묵묵부답. 숲을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이 바로 눈 앞에 있으니 누구도 선뜻 나서기 망설여질 것이다. 그런 마음을 헤아릴 수 없는 건 아니었기에 나는 가벼운 한숨을 쉰 후 손을 들었다. 엄한 애 보내서 마음 졸이느니 차라리 내가 하는 게 심적으로 더 편할 것 같았다. “얘기를 꺼낸 사람이 해야지. 내가 할게.” “절대 안 돼요. 너무 위험해요.” “오빠. 한별이 말이 맞아요. 차라리 숨어서 좀 더 기다려요. 응?” 김한별의 즉각 반대와 이유정의 설득. 어차피 이정도 반응은 예상 범위 안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미리 준비해둔 생각을 말했다. “계속 기다릴 순 없잖아. 저것들이 언제 우릴 발견할지도 모르고.” “다른 방향으로 가보는 방법도 있어요.” 이번에도 김한별인가. 이번에도 고개를 흔들며 나는 반박했다. “이동하는데 시간도 걸리고 곧 저녁이에요. 탈출하려면 그나마 지금 시간대가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김한별에 나는 평소보다 목소리에 힘을 주고 입을 열었다. 물론 아까 이유정의 반말에 불편한 얼굴을 했던걸 기억하고 있어서 김한별한테는 아직 말을 놓지 않고 있었다. “틈이 없으면 만들어야 합니다. 다른 장소로 가도 지금 이곳보다 나을 거라는 보장이 없어요.” 딱히 반박할 거리를 못 찾았는지 김한별은 무거운 낯빛으로 입을 다물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속으로는 자신이 미끼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한편으로는 내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는 것 같았다. 바로 이 부분이 이들과 박동걸의 차이점 이었다. 박동걸은 이걸 위선이라고 불렀다. 지금 와서 말한다면 박동걸은 나와 생각이 비슷한 부분이 어느 정도 있었다. 예전의 나라면 가식 떨지 말라며 바로 쏘아 붙였을 테지만 이들한테는 언제나 묵묵히 뒤에서 도와주는 그런 형 또는 오빠로 남을 필요가 있었다. 아마 박동걸이 나대는걸 자제했거나 쓸모라도 있었다면 그렇게 그냥 보내지 않았을 텐데. 나는 시답잖은 상상을 하며 속으로 키득거렸다. 침묵이 내린 장소에 다시 말문을 틔운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그러면요…. 저…. 수현이 오빠가 너무 위험 하잖아요.” 고개를 돌리자 안솔이 발개진 얼굴로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날 걱정해준 건가? 기특한 마음에 볼에 뽀뽀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팔불출로 보이는 안현이 있었기에 그냥 빙긋 웃어주는 걸로 만족했다. 나는 주변을 기민하게 살피는 척을 하며 말을 이었다. “숲을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걷어찰 순 없잖아. 어차피 언젠가 이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 시기가 좀 일찍 온 것 뿐이고.” “그래도….” “스물셋 밖에 안돼서 이런 얘기하는 건 우습지만, 여기선 내가 제일 나이가 많잖아. 이럴 때 안 나서면 또 언제 나서보겠어.” 넉살 좋게 말하자 안솔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안현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뭔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뭔가 내부적으로 결심한 얼굴 이었다. “형.” “응.” ”아까 저 괴물들을 상대하면서 보니 평소에는 걸어 다니다가 사람을 발견하면 뛰는 것 같더라고요. 유인하다 잡힐 가능성도 있어요.” “그렇긴 해도 빠른 걸음 수준으로 보이던데? 전력으로 달리면 잡히지 않을 자신 있어. 그냥 아침 점호 때마다 하던 구보 한다고 생각하면 돼.” “설령 우리들이 빠져나가는데 성공해도…. 그…. 오, 오빠가…. 그 나중에는…. 어떻게 나오실 건데요.” 가만히 듣고 있던 김한별이 다시금 태클을 건다. 얘 갑자기 왜 이래? 그런데 방금 전에 오빠라고 들은 것 같은데. 잘못 들었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곤 대꾸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아무튼 난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한별씨를 포함한 모두가 지금은 이 숲을 벗어나는 것만 생각했으면 합니다.” “그럼 저랑 같이해요 형. 형한테만 그런걸 맡길 순 없어요. 저도 같이 갈게요.” 넌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낫겠다. 안현의 말이 끝나자 안솔은 눈이 동그래지며 그의 옷깃을 꾹 붙잡았다. 나는 어이없는 얼굴로 안현의 얼굴을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안돼. 넌 애들이랑 무조건 같이 가야 한다.” “왜요. 형 혼자서만 위험을 무릎 쓸 필요는 없잖아요.” “저 담을 넘어서도 저것들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혹시 모르는 경우를 대비해 한 명은 일행을 지켜야 해. 그리고 유인은 혼자서 하는 게 더 편하고.” “그래도….” “그리고 넌 동생도 있잖아.” 안솔을 들먹이니 안현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안솔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을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고마움. 걱정스러움. 미안함. 원래의 나는 안솔 같은 애들을 싫어하는 편이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왠지 밉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입을 다물었던 안현의 고개가 간신히 끄덕여졌다. “…그럼 알았어요. 부탁할게요 형.” “그럼. 나도 살고 싶은데. 한번 믿어봐.” “네. 믿을게요.” “믿어도 돼. 쇠뿔도 단김에 빼자고 지금 바로 행동할게. 다들 몸 숙여. 내가 어느 정도 유인했다 싶으면 현이 네가 바로 애들 끌고 달려가.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다시 돌아오는 바보짓도 하지 말고.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려야 해. 알았지?” 여자들은 아무도 말이 없었다. 다만 모두 착잡한 얼굴 이었다. 어쩌면 살 수 있겠다는 안도감과 미끼 역할을 물었을 때 나서지 않았다는 자책감이 떠오른걸 볼 수 있었다. 석궁을 장전하고 몸을 나서기 전 김한별과 이유정 그리고 안솔이 각각 한마디씩 하는걸 들을 수 있었다. “…죄송해요.” “오빠…고마워요. 절대 죽지 말아요.” “몸 조심하세요….” 그들의 진심 어린 걱정에 나는 힘찬 목소리로 화답했다. “굿 럭.” * 나는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물론 일행이 숨어있는 곳에서 나왔지만 바로 소란을 피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지금 이곳에서 소리를 지른다면 재수 없을 경우 안쪽에 숨은 일행이 걸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재빠르게 주변을 살핀 나는 저기 오르막길 끝에 있는 돌덩이들이 눈에 걸렸다. 저 위로 올라간다면 바깥 상황도 볼 수 있고 데드맨들도 모두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무들은 전만큼 커다란 둘레를 가진 것들은 없었지만 혼자서 몸을 숨기며 이동할 수 있을 만큼은 충분했다. 몸을 최대한 숙이고 나무와 나무 사이를 이동한다. 최대한으로 숨소리와 발소리를 죽인고 그것들의 눈에 안 들키고 이동해야 했다. 기도비닉을 유지하는 건 많이 해봤기 때문에 별로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순간 통과 의례의 1회 차 플레이가 머리에 떠올랐다. 공터에서 박동걸과 이유정이 싸우고 그가 걷어찬 돌멩이로 데드맨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그때 나 혼자 살 궁리를 했고, 혼자 도망가 버렸다. 제대로 방향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느라 이틀간 숲 안을 헤맸었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웃음만 나온다. 더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는데.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숨을 줄이고 발소리를 죽인다. 그 상태로 나무 사이로 몸을 숨기며 몸을 착실하게 이동한다. 목표로 한 돌무덤은 썩 높다고 볼 수는 없지만 돌이 둥글게 깎인 만큼 데드맨들이 쉽게 오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돌담 너머로 혹시라도 멀리서나마 마을 또는 건물이 있는지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대략 스무 개의 나무 사이를 이동하는 동안 단 한번도 들키지 않았다. 어느새 돌무덤 앞에 도착한 나는 주변을 잠깐 살피고 신속하게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탁 트인 전망과 아래의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돌담 너머를 바라보니 아쉽게도 마을이나 건물을 볼 수 없었지만 중앙으로 가면 갈수록 발견할 것들이니 큰 걱정은 없었다. 나는 내심 정면 돌파를 포기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력 감지로 인한 판단은 예측을 빗나가지 않았다. 사방에 보이는 데드맨들을 보며 나는 서서히 돌무덤 맨 위에 설 수 있었다. 흘끗 일행이 숨어있는 지점을 보니 안현이 머리를 빠끔히 내미는 게 타이밍을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부터 모두를 위해 확실한 미끼가 되야 한다. 나는 현과 가벼운 시선 교환을 한 후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큰 소리를 질렀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내 목소리는 허공을 크게 울렸다. 효과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직방이었다. 아래서 눈에 보이는 데드맨들의 전부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것이다. 이윽고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나를 향해 달려드는 게 보였다. 일단은 성공이지만 약간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두 팔을 휘휘 휘두르며 소리를 지르고 도발하자 점점 숲 안에서 나오는 데드맨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저기 멀리 있는 오른편에 있는 데드맨들까지 끌어들이려면 돌무덤 위에서 어느 정도 버틸 필요가 있었다. 나는 다시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괴물들아아아아아! 나 여기 있다아아아! 여기를 보라고!”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내 말이 끝나자마자 다발성으로 우는 소리가 귀에 들린다. 그와 동시에 괴물들이 대규모로 내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걸 느꼈다. 가장 나와 가까이 있던 데드맨은 어느새 내가 있는 돌무덤에 도착해 어떻게든 오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소리는 더 지를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먹잇감에 굶주려 있었는지 근방에 있는 모든 데드맨들을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는걸 보며 담담히 한마디 툭 내뱉었다. '옛날 생각 나네.' 나는 점점 모여드는 괴물들을 보며 진한 미소를 배어 물었다. 왼팔에 장착한 석궁을 들고 화살 세 자루를 꺼냈다. 내가 지금 들고 있는 석궁에는 하나를 시위에 걸고 두발을 장전시킬 수 있었다. 한번 장전하면 세 발을 쏠 수 있다. 바로 내 앞에서 아등바등 거리는 데드맨의 미간을 겨누기 전 나는 다시 일행이 숨어 있는 장소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계속 웃음이 나왔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 0018 / 0933 ---------------------------------------------- 반으로 갈라지다. 돌무덤 앞은 꽤 많은 수의 데드맨이 쓰러져 있었다. 각각 미간에 화살이 하나씩 박힌 게, 세어보니 일곱 구 정도로 보였다. 물론 아직도 처치한 데드맨의 배는 넘는 숫자가 남아 있었다. 무너진 동료의 시체를 꾸역꾸역 밟고 기어 올라오는걸 보니 어떻게든 나를 한입 물고 싶은 모양 이었다. “애쓴다, 애써.”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화살을 쥐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찔렀지만 잡히는 게 없었다. 주머니 속의 애꿎은 허공만 휘젓다가 맨 아래까지 딱딱 긁고 나서야 깊숙이 박힌 화살 두발을 꺼낼 수 있었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길에는 이미 쏜 화살이라도 수거해야 할 것 같았다. 아직 모든 데드맨들이 모인 건 아니었다. 멀리 있던 데드맨들이 헐레벌떡 달려오는 게 보였지만 대충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설령 서너 마리가 남아 일행을 노린다고 해도 그 정도는 안현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윽고 아래를 보니 데드맨들이 입을 벌린 채 고개를 앞뒤로 흔들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웃겨 나도 모르게 고개 비트를 타며 똑같이 고개를 흔들어 주었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냐.' 그것들을 보며 비릿한 미소가 배어 나오는 순간 반사적으로 입을 가리고 말았다. 너무 들뜬 거 같다. 홀 플레인 1회 차 사용자 시절에 소드 마스터에 오른 이후 나는 감정의 기복이 거의 없었다. 특히 전투를 앞둔 상황에서는 언제나 얼음처럼 차갑고 냉정해지려고 노력했었다. 그렇기에 역대 최고로 어려운 전투로 꼽히는 아틀란타 탈환 전투와 라그나로크 포위 섬멸전에서도 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런 느낌은 실로 오랜만 이었다. 압도적인 전력 차를 가진 연합군을 봐도 눈 하나 깜빡 하지 않던 내가 살육이라는 감정에 휘둘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감정을 도저히 컨트롤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처럼 불리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무언가 기대하는 설레는 감정이 내 전신에 녹아 든 기분이었다. 돌무덤 위에서 괴물들을 보면 볼수록 감정이 자극하는 본성이 터질 것 같아 숲 안쪽 방향으로 풀쩍 뛰어 내렸다. 조금만 더 참자고 몸을 달래고 있자 돌무덤을 낑낑거리며 올라오던 데드맨들이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기껏 올라왔는데 도리어 내가 내려가니 열이 뻗치는 모양이다. “얘들아. 여기서 일 치르기엔 보는 눈이 많거든. 그러니 우리 조금만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그르렁! 내 말을 알아 듣는지 모르겠지만 데드맨 울음소리를 내며 따라와주었다. 나는 일부러 느린 발걸음으로 숲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원래 목적은 전력으로 뛰어 순식간에 거리를 벌릴 생각 이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중간에 나를 놓치지 않게 어느 정도 따라오게끔 만들 것이다. 어지간히도 굶주린 듯, 나느 돌무덤에 올라오자마자 아래로 우당탕 떨어지는 데드맨을 향해 가볍게 석궁을 쏘았다. 그렇게 가장 열심히 올라온 데드맨은 배고픈 채로 머리통에 화살이 박히고 말았다. 고개를 축 늘어뜨리는 녀석을 확인한 후 나는 바로 몸을 돌려 숲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저 울음소리도 듣다 보니 어느 정도 익숙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잡힐 듯 말듯 완급을 조절하며 달리자 어지간히도 분한 모양이었다. 바로 뒤에서 이빨을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연신 들리는 게 색다른 스릴이 있었다. 그때였다. 꽉! “어.” 하지만 너무 흥을 냈다. 한동안 S자를 그리며 나무들 사이를 종횡 무진하던 나는 왼팔에 무언가 꽉 깨무는 느낌을 받았다. 깜짝 놀라 옆을 돌아보니 데드맨 한 마리가 요상한 얼굴로 내 왼쪽 팔목을 문걸 볼 수 있었다. 아마도 내가 끌고 온 놈은 아니고 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운 좋게 진로에 걸려 이빨을 들이민 것 같았다. 솔직히 별로 아픈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런 놈에게 팔이 물린 것에 대한 놀라움이 더 컸다. 그리고 그 놀라움은 곧 분노로 다가왔다. 아무리 운이라고 해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 이었다. 나는 언짢은 목소리로 내 팔목을 문 데드맨을 보며 말했다. “뭘 봐.” 그르렁. “놀랐잖아…. 씨발아.” 팔목을 물고 있는 데드맨의 눈은 이상했다. 물긴 물었는데 이빨이 들어가지 않는 탓이다. 그럼 당연하지. 네가 내구 능력치가 92포인트에 해당하는 내 육체를 씹을라고? 욕설과 함께 분노의 오른손을 휘두르자 머리통이 빵 하며 터지는걸 볼 수 있었다. 잠시 괴물과 실랑이를 하는 사이 헐레벌떡 나를 쫓아오던 데드맨들은 내 주위를 겹겹이 에워쌌다. 몇몇 놈은 히죽거리는 게 다 잡은 먹이라 생각한 것 같았다. 나는 잠깐 달려온 거리를 가늠해보고는 괜찮겠다 싶어 가볍게 손목을 풀었다.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사방에서 울음 소리가 들렸지만 절대로 두렵지는 않았다. 예전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상대한 지옥 사자들과 비교하면 이놈들은 귀여운 애교 수준 이었다. 다만 이것들이 내 욕구를 조금이라도 충족 시켜주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랬다. “잘 부탁해.” 상냥한 인사를 하자 데드맨을 이빨을 들이밀며 화답했다. 예의라는걸 모르는 놈들이로군. 나 또한 동시다발로 밀고 들어오는 데드맨의 머리를 겨냥해 손가락을 뻗었다. 일단 맨 앞에 한 놈. 콰직! 손가락이 머리를 파고 들어가는 느낌은 뭐랄까, 인간의 말랑한 살이 아닌 뭔가 썩은 통나무를 뚫고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대로 뒤통수까지 가격당한 데드맨을 보며 팔을 들어올리자 내 손가락에 매달린 채 대롱거리며 몸을 늘어뜨린다. 그리고 그 광경을 목격한 데드맨들은 일거에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공포. 항상 인간을 먹이로만 생각하던 놈들이 알기나 할까?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사냥 당할 수 있다는 걸. 그래도 나는 내심 놀라운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라는걸 하는지 아니면 본능인지는 모른다. 먹잇감만 보면 사정없이 달려드는 녀석들이 지금 내가 내뿜는 존재감에 잠깐이지만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기특하긴 하지만 놔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가볍게 마력을 방출해 손에 든 괴물의 머리통을 산산이 바스러뜨리고 손가락을 까닥였다. 어서 덤비라는 신호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데드맨들은 되려 한걸음 물러났다. 장검은 사용하지 않을 생각 이었다. 없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당장에 널린 나뭇가지 하나를 부러뜨리거나 또는 풀 한 포기만 뜯어도 내가 들게 되면 충분한 살상 무기로 바꿀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살육에 목말라 있었고 그 갈증을 풀기 위해 손맛이라는걸 느끼고 싶었다. 손의 관절을 꺾으며 진한 미소를 배어 물었다. 그리고 문득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까부터 웃음을 멈출 수 없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내 본능에 굶주려 있었다. 10년 동안 살기 위해 검을 휘두르고 살(殺)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본성 자체가 피에 흠뻑 젖은 모양이다. 차츰차츰 뒤로 물러나는 괴물들을 보며 나는 입가를 비틀었다. * “형이 잘 해준 것 같은데. 다들 일어나. 빨리 저 담을 넘어야 해.” 방금 전까지 괴물들이 배회하던 숲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한산한 숲을 보며 안현이 기껏 힘찬 목소리로 말했지만 일행의 분위기는 한껏 가라 앉아 있었다. 안현의 말대로 김수현은 주변에 있던 그것들을 모두 끌고 가는데 성공했다. 조금 전만해도 우글거리던 괴물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뜻 모를 절망감이 모두의 몸을 휘감고 있는 것 같았다. “오빠는…. 괜찮을까? 있잖아. 우리 그냥 지금이라도….” 이유정이 답지 않게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하자 안현은 내심 속이 따끔해지는걸 느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수현이 형은 자신을 믿었고 자신이 일행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기대를 배신할 수는 없었다. “그건 안돼. 헛소리 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 다시 그것들이 돌아오면 어떡할래?” “넌 오빠 걱정도 안돼?” “난 형을 믿어. 형도 그랬잖아. 다시 돌아오는 바보짓을 절대 하지 말라고.” 안현의 담담한 말에 이유정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힘이 빠진듯한 얼굴을 보니 안현 자신도 온 몸에 무력감이 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바짝 차리라며 스스로를 위안하고는 힘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믿자. 형이 우리를 믿는 것처럼 나도 형을 믿을 거야.” 안현은 말을 마치고 일어서 밖으로 나와 주변을 살폈다. 다행스럽게 데드맨은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안솔이 조심스럽게 일어나 따라 나오자 이유정도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막 은신처를 나서려던 이유정은 멍하니 앉아있는 김한별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었다. “야. 일어나. 왜 갑자기 멍 때리고 있어?” ”…….” 김한별의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처음처럼 차가운 얼굴로 이유정을 한 번 보더니 천천히 자리서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모두가 나온걸 확인한 후 안현은 전방의 돌담 보며 입을 열었다. “다들 힘내. 눈 앞에 보이는 돌담만 넘으면 이 지긋지긋한 숲에서 벗어날 수 있어. 일단 담 앞까지는 같이 행동하고 담을 넘는 건 먼저 내가 할게. 밖에 또 어떤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안현의 말에 안솔과 이유정은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러나 김한별은 여전이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김수현이 사라진 숲 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도 이내 안현이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을 느꼈는지 바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알겠어요.” 뭘 알겠다는 걸까. 안현은 속으로 한숨이 나왔지만 겉으로 표출하지는 않았다. 형이 있을 때는 서로 도와가며 잘만 움직였는데, 형이 없어진 지금은 왠지 모르게 시작부터 삐걱대는 기분이었다. “…너희들 심정 모르는 거 아니야. 나도 똑같아. 그런데 우리가 이대로 숲 안으로 간다면 형이 희생한 의미가 없어지잖아. 수현이 형이 목숨을 걸면서 만들어준 기회야. 그리고 형은 나한테 너희들의 안전을 부탁했고.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빨리 저 담을 넘고 형이 무사히 돌아오는걸 기다리는 것 뿐이라고.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말은 그렇게 해도 침체된 분위기는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한 번 떨어진 사기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안현 나름대로 열심히 애쓰는걸 알고 있었지만 다들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안현도 말을 할수록 김수현의 공백이 생각보다 크다는 걸 느꼈다. 속으로 까닭 모를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안현은 결국 차오르는 부담감에 눈을 감고 말았다. 나머지 일행들 모두 석궁을 들고 언제나 침착한 얼굴을 가진 남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만난 지 막 반나절 만에 김수현은 그만큼 그들의 마음 속에 자리 잡은 상태였다. 공터에서 빠르게 발을 뺄 수 있었던 것도, 괴물들에게 물릴뻔한 안솔을 구해준 것도, 박동걸에 의해 팀이 분열될 위기에 처했을 때도, 괴물들과 싸우면서 위험할 때마다 화살을 날려 구해준 것도 김수현 이었다. 언제나 중요한 국면에서 그는 든든하게 일행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울타리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 울타리가 사라졌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그의 빈 자리에 공허함이라는 감정을 실감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 0019 / 0933 ---------------------------------------------- 잠시, 헤어지다. 푹! 파각! 털썩. 마지막까지 남은 데드맨의 머리를 부순 후 나는 나무에 기대었다. 주변에는 하나같이 머리가 박살 난 데드맨의 잔해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최대한 아끼고 아끼면서 한 마리씩 상대했는데도 금방 끝나버리고 말았다. 말 그대로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그러나 나는 만족할 수 없었다. 기분을 풀기는커녕 찝찝한 기분만 잔뜩이었다. “퉤.” 눈앞에 보이는 잔해 위로 침을 탁 뱉었지만 살육을 원하는 본능은 지금껏 억지로 억누른 것에 대한 반발심인지 고개를 더욱 치켜들고 있었다. 가슴이 답답해 심호흡을 하며 진정하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부채질하는 것 같았다. 문득 애당초 내가 이 기분을 막을 생각이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염병. 애들 장난도 아니고. 입맛만 버렸네.” 입맛만 쩝쩝 다시던 나는 결국 치솟는 살기를 이기지 못하고 옆에 있던 나무를 후려쳐버렸다. 꽝! 우수수…. 어떠한 마력 처리도 하지 않은, 순수 근력으로 쳤음에도 불구하고 단단했던 나무는 육중한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조금 기분이 풀리긴 했지만, 이미 내부를 가득 채운 살기가 모조리 가시진 않았다. 일행들도 나갔겠다, 마음 같아선 이 숲에 확 불이나 싸질러 버리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돌담을 넘었다고 해도 숲 밖에 또 어떤 괴물이 있을지는 모르는 노릇이었다. 애들 걱정도 되고 화살도 회수하려면 뭉그적거릴 시간이 없었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겠다. 나는 그 동안 놔두었던 마력을 다스리며 신속하게 발을 놀렸다. 나무와 숲 그리고 주변 풍경이 빠르게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지금까지 보낸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나는 아까 내가 있었던 돌무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데드맨들의 머리에 꼽힌 화살들을 하나씩 뽑아내면서 주변을 감지하자, 일행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예상대로 내가 숲 안으로 들어간 후 바로 나간 모양이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이 정도면 충분 하겠지.” 그대로 화살을 주머니에 꼽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안솔이 봤다간 발작을 할지도 모르기에 나는 대충 이물질을 털어냈다. '그럼 슬슬 나가볼까.' 바로 밖에 안현 일행이 있을지도 모르므로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돌담을 넘어가기 전 나는 고개를 돌려 조용한 숲을 바라봤다. 숲은 그대로였다. 예전에도 지금도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예전에 숲을 벗어날 때는 쫓기느라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었다. 그냥 달리다 보니 아차 하는 순간 숲을 벗어났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다. 한동안 숲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뭔가 커다란 짐을 내려놓은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감상적인 기분을 즐긴 후 나는 몸을 날려 담을 넘었다. 시답잖은 분위기에 취하는 건 내 자신이 사양하고 싶었다.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따로 있었으니까. * 훌쩍 돌담을 넘은 후 눈에 들어온 광경은 내 기대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상태였다. 지금 내가 밟고 있는 길은 울퉁불퉁하긴 해도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있다. 언뜻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반듯하진 않아도 가칠한 옆면이 일괄적인 모양새를 보이고 있었다. 길 아래로는 평야가 끝이 보이질 않는 광활한 지평선을 그리고 있었다. 주변은 한산했다. 가끔 살랑대는 바람만이 주변에서 미약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괴물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일행 또한 보이지 않는다. 어디를 둘러봐도, 심지어 마력으로 일부를 감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척은 잡히지 않았다. 문득 그들이 나를 버리고 갔다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선 속성을 가진 인물들이 셋이나 있는 만큼 배신할 확률은 상대적으로 적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단순히 성향만 보고 판단할 수는 없었다. 나를 남겨두고 떠났을 경우를 보류한다면, 결국 내가 없는 동안 나를 기다리다가 변을 당했다고 보는 게 옳았다. 통과의례에 나타나는 괴물은 데드맨 말고도 꽤 많은 종이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가닥을 잡기로 하고, 나는 먼저 일행의 흔적을 찾기로 했다. 단서, 즉 추적을 위한 자국을 찾는 일은 지금의 나로서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차분히 주변을 살피며 돌담을 따라가던 나는 운동화 자국이 움푹 패여 있는 흙 지대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이 방향으로 담을 넘은 것처럼 보였다. 흙이 쓸려있는 방향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자 역시나 일행이 모여있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위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 여기서 나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사실을 확인하자 마음 한구석에 슬며시 자리 잡으려 했던 일말의 배신감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일행이 모여있던 장소에 쭈그리고 앉아 하나씩 천천히 살펴본다. 숙련된 레인저나 트랩퍼가 있다면 언제 어디서 몇 명이 어떻게 왜 등 상황이 발생한 모든 현상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그 정도는 불가능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날카로운 눈썰미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총 동원하는 수 밖에 없었다. 안력을 돋워 발자국을 하나하나 대조하고 비교한다. 일단 일행의 운동화 자국으로 보이는걸 눈에 익힌 후 그것들을 제외한 나머지 자국을 살펴볼 요량 이었다. 단체로 셔플 댄스라도 췄나 싶을 정도로 발자국은 꽤나 격렬하게 찍혀 있어, 판별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았다. 문득 불안한 생각 한줄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다고 스스로 다독이며 계속 살펴나갔다. 차 한잔을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분석을 마칠 수 있었다. 나는 다리를 쭉 피며 일어났다. 일행의 발자국으로 보이는걸 제외한다면 이상한 자국이 하나도 발견 되지 않았다. 굳이 따지면 발 디딤 부분이 움푹 패여 들어간 자국이 하나 있긴 했다. 그러나 그 위에 운동화 문양이 덧씌워져 있어 일행 것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땅이 질질 끌린 흔적이 없으니 데드맨은 절대 아니었다. 보스 몬스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시작한지 이제 막 반나절을 넘기고 있었고 보스 몬스터가 출현하는 조건은 따로 있었다. 보스 몬스터에 대한 생각도 한 구석으로 밀어 넣자 딱히 이거다 싶을 정도로 확 와 닿는 게 없었다. 결국 남은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었다. 안될 것을 알면서도 나는 마력 회로를 일깨우기 시작했다. 한 순간 마력을 폭발적인 기세로 끌어내며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일은 단순히 상대방의 사용자 정보를 확인하는 일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일 이었다. 이 정도 마력을 일으키는 게 이렇게 이른 시기에 올 줄은 나조차도 예상 못했지만 시간을 다투는 일 일만큼 지금 당장 딱히 생각나는 방법이 없었다. 괜히 어물쩍거리고 마력 감지로 찾는다고 하다가, 그 사이에 일이 벌어지면 나도 그들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현재 내가 제 3의 눈을 이용해 고찰하려는 현상은 현재가 아닌 '과거'였다. 물론 이 고유 능력은 조건만 맞춘다면 이상 차원도 고찰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 차원의 미래와 과거를 보는 것도 능력 여하에 달린 일 이었다. 다만 한가지 걱정이 머리를 스치려고 할 때, 내 눈동자로 하나의 장면이 비치듯 스며 들어와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되었다. 파직! “큭…!” 단 1초만 봤을 뿐인데 망막에 비치던 장면이 어그러지면서 커다란 충격이 내 눈을 강타했다. 눈동자가 화끈거리는 게 마치 불에 이글이글 타는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양 눈을 비비면서도 나는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단 1초였다. 1초에 한해 과거의 한 장면만을 봤을 뿐인데, 제 3의 눈이 강제로 캔슬 되어 버렸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눈의 고통이 사그러지자 나는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 하하. 96의 마력 포인트로도 고작 1초를 버티는 게 한계라니…. 미치겠군.” 설마 설마 했지만 내 마력 능력치가 고유 능력의 오버 드라이브를 견디지 못했다. 새삼 제 3의 눈이 얼마나 고위급 능력인줄 재확인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과거를 본다는 것은 미래를 보는 것과 동급으로 취급한다. 단순히 미래를 예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래도 S랭크에 도달한 제 3의 눈이라 잘하면 가능하다고 여겼는데, 강제 발현으로 인한 2랭크 다운이 발목을 잡는 것 같았다. 결국 화정으로 1랭크 상승 보정을 받긴 했어도 지금 현재에 한해 전 현상 고찰이 가능할 뿐 과거와 미래를 다루는 건 아직 시기상조라는 소리나 다름 없었다. 고통은 점점 줄고 있었지만 당장에 시야가 흐릿했다. 마법이 취소 당하고 마력 반동으로 인한 여파의 후유증인 것 같았다. 다행히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눈에 보이는 사물이 또렷해지는 게 영구적인 시력 손실은 아닌 것 같았다. 의도치 않게 위험한 수를 썼지만, 그래도 다행히 하나 건진 건 있었다. 단 1초에 불과했지만 나는 확실히 '과거'를 볼 수 있었으니까. 나는 방금 전에 망막에 비친 장면을 떠올리며 깊은 한숨을 뱉었다. 기껏 옥석들만 모아 겨우 숲을 벗어나니 더욱 까다로운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힘이 없어서 그런다면 이해라도 하겠지만 힘이 있어도 참아야 한다는 현실이 나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정 안되면 통과의례고 뭐고 난리라도 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 이었다. 어째 산 넘어 산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 0020 / 0933 ---------------------------------------------- 잠시, 헤어지다. 이것 참 고마워. 목도 칼칼했는데 이렇게 맥주도 사주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이름이 어떻게…. 엥? 김수현? 설마 소도시 뮬의? 들어봤지! 절규의 동굴에서 일어난 일화는 유명하다고…. 헤헤. 이런 유명인사를 만나고 맥주도 대접 받았으니 나도 가만히 있기는 그런데. 옳지. 내가 얘기 하나 들려줄게. 한 번 들어보겠어? 응? 필요 없다고? 기다려봐. 조금이라도 좋으니 일단 얘기라도 들어줘. 너도 분명 흥미가 동할걸? 지금 대도시 한창 맹위를 떨치는 소울 커맨더도 통과 의례에서 얻었다는 소문이 자자하다고. 그래. 그 영혼 명령가. 어차피 홀 플레인에 있는 사람들 다 통과 의례는 겪고 들어온 거잖아. 자자. 앉아봐. 천사들이 이곳 저곳에 수작을 많이 부린 곳 중 한곳이 바로 통과의례라고. 거기도 비하인드 스토리가 상당한 편이거든. 생각해봐. 그때는 다들 살기에 급급한데 누가 7일 동안 괴물들이 있는 곳을 싸돌아 다니겠어? 그런데 그런 미친놈들이 있더라. 아주 7일 동안 신나서 맵 전부를 샅샅이 뒤지고 돌아 다녔더라고. 그러면 필연적으로 통과 의례의 보스 몬스터를 만날 확률도 높아지게 돼. 응? 무슨 소리냐고? 너 만난 적 없어? 이거 김수현이는 꽤나 성실하게 했나 보네. 무슨 뜻이냐 하면 말이지…. 그전에 맥주 한잔만 더 주면 안될까. 헤헤…. 고마워! 기억해 봐. 너도 분명 노란색 지붕과 파란색 지붕은 기억나지? 그래. 노란색은 레스트 룸, 파란색은 세이브 포인트. 안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게 경고문이잖아? 레스트 룸은 하루를 초과해서 머물면 안되고 세이브 포인트는 이틀을 초과하면 안 돼. 더 머물렀다간 보스 몬스터가 100% 확률로 출현해 버리거든. 아으~. 지금도 소름이 오싹하다. 에일리언 같이 생겨 먹어서는 사람을 맛있다는 듯 우적우적 씹어 먹는데…. 응. 난 만난 적 있어. 어쩌긴. 죽어라 도망쳤지. 웃긴 건 단순히 포인트로 따지면 스타팅, 레스트, 세이브 말고도 또 하나가 있거든. 처음 듣는다고? 그럴 수 밖에. 어디 있냐고? 맵의 외곽지역에 있는 숲을 가로지르는 방향으로 빠져 나오면 큰 대로가 하나 나와. 아직도 기억나. 그 울퉁불퉁한 길. 그런데 그게 아래로는 갈 수가 없어. 레이스들이 천지로 모여 있거든. 그럼 결국 위로 올라가면 도시가 하나 나와. 그런데 솔직히 누가 거기까지 가겠어? 숲을 들어가기도 싫어하는데. 그리고 설령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살아 나온 사람은 드물어. 그곳을 바로 트랩 포인트라고 부르지. 말 그대로 함정 포인트야. 트랩 포인트 도시는 모든 시설이 현대적이고 먹을 것도 풍부해. 지구에서의 향수를 생각나게 하는 곳이지. 정말 떠나기 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지. 경고문? 있어. 있기는 있는데 다른 포인트에 있는 경고문 하고는 달라. 별거 아니다 싶게 생각할 정도로 그냥 간단하게 써 있어. 아무튼 그 도시는 사람의 심리를 굉장히 교묘하게 이용하거든. 떠나기 싫게 만들어 버린단 말이야. 결국 그곳을 발견한 사용자들은 눌러 앉아 버리는 경우가 많아. 그러니 그곳을 발견한 사용자들은 안주해버리고 말아. 여기서 충분히 7일을 버틸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고. 안주해 버리는 순간, 끝나는 거야. 결국 2일이 지나고 난 후 3일째에는…. 어떻게 되는 줄 알겠지? 후후. 응? 난 이걸 어떻게 아냐고? 하하…. 글쎄. 그냥 술이나 더 먹으련다. * 오후가 되자 날이 점점 어두워지는걸 볼 수 있었다. 초저녁 시간대라고 부르기는 조금 애매한 시간대였다. 숲에서 평소보다 어둡다고 여겼는데 구름도 어두운 빛깔을 뿜어내는 게 이러다 비라도 쏟아지면 어떡하나 생각이 들었다. 울퉁불퉁한 길을 걸으며 나는 이제나저제나 마을이 보이기나 조바심이 일었다. 아무래도 걷는 속도를 조금 높일 필요성이 있을 것 같다. 두 다리로 간단히 마력을 돌리자 속도가 한층 빨라진다. 나는 빠르게 발을 놀리며 제 3의 눈으로 과거 현상을 고찰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것은 정말 짧은, 단 1초에 불과했지만 내가 본 장면으로 일행한테 일어난 일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본 장면은 이러했다. 안현은 장검과 방패는 버린 채 안솔을 업은 상태로 뛰고 있었다. 뭐가 그리 다급한지 매우 급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뒤편에 보이는 이유정은 상당히 애매한 얼굴 이었다. 걱정하는지 아니면 화가난건 지 애매한 얼굴을 하고선 안현의 뒤를 쫓고 있었다. 오직 김한별만이 차분한 얼굴로 맨 뒤에서 안현이 버린 칼과 방패를 챙겨 들고 그들의 뒤를 쫓고 있었다. 결국 습격이든 뭐든 일행한테 어떤 식으로든 위해가 있었고, 그 와중에 안솔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일단 나도 안현 일행이 달려간 방향으로 가닥을 잡고 가고 있었다. 사람의 손을 탄 길인만큼 가다 보면 분명 마을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안현 일행과 재회할 가능성이 높았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에 그렇게 습격 당한 걸까. 어떤 일을 당했길래 그렇게 다급한 얼굴로 달린 걸까. 호기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나 지금 머리를 싸매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나중에 천천히 얘기를 듣기로 하고 나는 다시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한창 걷던 도중 무언가 차가운 게 한 방울 똑 떨어지더니 이내 내 뺨을 살며시 적셨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자 내 얼굴로 달려드는 빗방울들이 보인다. 툭. 툭. 툭. 툭. 간헐적으로 쏟아지는 빗방울을 보며 나는 반사적으로 물이 묻은 볼을 쓱 닦았다. 장대비가 쏟아지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마을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행히 내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저기 멀리서 안력으로 확인 가능할 만큼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구간이 눈에 들어왔다. 일행은 분명 저 마을 안으로 들어갔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일부 마을에도 당연히 괴물들이 분포하기 때문에 잘 들어갔을지 걱정이 앞섰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한 번에 처리하고 오는 건데 괜히 시간을 끌었나 보다. 그러는 사이에도 길바닥에 점점이 찍히는 빗방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빗물로 질척이는 진창을 걷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속도를 줄이고 터벅터벅 걸으며 마을과의 거리를 줄이며 나는 반사적으로 마력 감지를 펼쳤다. 천천히 마을을 감지하던 나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껴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뭐, 뭐지?”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마음을 추스르고 조금 더 정밀하게 감지를 했으나 결과는 똑같았다. 놀란 마음에 얼른 마력을 일으켜 나는 마을 안으로 순식간에 진입해 들어갔다. 그리고 입구에 도착하자 보이는 현대식 건물에 나는 입을 벌리고 말았다. '통과 의례에 지구에서나 볼 수 있는 건물이 있다고? 그것도 한 가득히?' 일단 이 마을, 아니 마을이라고 부르기 힘든 도시에는 내 예상대로 일행이 있었다. 네 명의 기운이 느껴지는 게 다행히 전부 다 모여있는 것 같았다. 그건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 나는 두 가지 이유로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첫 번째. 도시에서 어떤 괴물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두 번째. 눈에 보이는 게 현대식 건물이 있는 도시라는 것. 홀 플레인의 도시들은 현대식 건물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중세에서나 볼 수 있는 건물 형태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내가 1회 차 통과 의례 시절에도 그런 점을 적응하는 것도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건 떡 하니 지구에서 자주 보던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경험해보지 못한 일에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바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상황을 주시하기로 했다. 처음 홀 플레인에 들어가는 인간들의 과제는 생활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이 극도로 발달한 지구에 비해 홀 플레인의 생활은 마냥 편리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 것들에 적응하기 위해 통과 의례에서도 일부러 홀 플레인과 똑같은 형태의 건물을 지어 사용자들이 한층 더 적응하기 쉽도록 하는데 이런 건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경우였다. 천사들이 단체로 미치지 않고서야 통과 의례에 이런 건물을 놓아둘 리는 없었다. 그러나 눈을 비비고 봐도 도시의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천사들이 뭔가 노리는 게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순간 문득 예전에 주점에서 한 검사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트랩 포인트 도시는 모든 시설이 현대적이고 먹을 것도 풍부해. 지구에서의 향수를 생각나게 하는 곳이지. 정말 떠나기 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지.' 트랩 포인트를 떠올리자 나는 비로소 눈 앞의 도시가 설명이 되는 듯 했다. 트랩 포인트를 설명하기 전 보스 몬스터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한다. 쉽게 말해 홀 플레인에서는 보스 몬스터를 잡을 수 없다. 본 사람은 꽤 되는데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절대 잡을 수 없다고. 무조건 도망쳐야 한다고. 보스 몬스터는 출현하는데 조건이 필요하다. 그건 바로 레스트 룸에 하루 이상, 세이브 포인트에 이틀 이상 체류하면 무조건 나타난다는 조건이다. 그 말인즉슨 안전한 장소를 찾았다고 안주하지 말고 계속 이동하라는 천사들의 경고나 다름 없었다. 나는 소름이 쭈뼛 돋는걸 느꼈다. 그리고 이 도시를 처음 봤을 때 왜 아무도 없고 조용했는지 이해가 갔다. 그리고 처음 시작할 때 일행들의 높은 수준에도 불구하고 안솔만 빼고 전부 홀 플레인에서 볼 수 없었는지, 눈 앞의 도시와 연관해 생각한다면 한가지 가능성을 추론할 수 있었다. 이들이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보스 몬스터를 상대할 수는 없으니까.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도시 안으로 완전히 진입했다. 10년 만에 보는 건물에 향수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일단은 일행을 만나야 했다. 도시 안으로 들어가자 온통 잿빛 일색의 건물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어두운 도시에 온걸 환영한다는 듯 온통 침침한 빛을 가득 내뿜는 건물들이 영 마음에 거슬렸다. 숙련된 경험을 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짙은 죽음의 향기. 도대체 이 건물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나간 걸까.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 0021 / 0933 ---------------------------------------------- 잠시, 헤어지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하늘에는 먹구름이 한 가득 떠다니고 있었다. 자욱할 정도는 아니지만, 안개도 희미하게 대기를 맴돌고 있었고, 이슬비도 간간히 내렸다. 창을 툭툭 때리는 빗방울들을 보며 김한별은 기분이 차분하게 가라앉는걸 느꼈다. 아늑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편안한 기분을 느꼈다. 지금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감상적인 기분이라고 해도, 숲 안에 있을 때와 숲에서 나온 후 이상한 것들에게 쫓기던 때와 비교하면 훨씬 나은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면…. 어렸을 때는 비 오는걸 참 좋아했는데.' 김한별은 어렸을 때부터 비 오는 날이 좋았다. 우산 하나 들고 비 내리는 거리를 걸으며 음악을 듣는 건 지루한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이었다. 문득 커피 한잔의 생각이 간절했다. 속을 덥힐 수 있는 뜨겁고 맛 좋은 커피 한잔만 있다면 잠시라도 자신을 둘러싼 모든걸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김한별은 처연한 얼굴로 창 밖을 통해 비치는 세상을 바라보았다. 잿빛 그림자가 몸을 드리우는걸 보니 어느덧 저녁이라는 시간이 찾아온 것 같았다. 오늘 하루 동안 너무나 많은 일을 겪다 보니 몸은 물론 정신적인 피로감이 가득했다. 졸린 눈을 비비며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약 20평 정도 되어 보이는 커다란 방이 보였다. 있을 것은 다 있었다. 식량, 물, 침구, 화장실 심지어 샤워 시설도. 정신 없이 도망치다가 도시가 보여 안으로 들어왔는데 진입할 때 김한별은 이상한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도시는 너무도 조용했고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것 같았다. 처음 그녀는 도시를 보며 죽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 와중에 발견한 중간 정도 크기의 건물 하나. 옥상 부분이 검은색으로 칠해진 이 건물은 유독 일행의 눈에 띄었다. 운이 좋았는지는 몰라도 무언가에 이끌리듯 들어와보니 웬만한 것들은 전부 갖춰져 있었다. 육체와 정신은 김한별에게 수면을 요구했지만 아직 잠들긴 미묘한 상황 이었다. 안솔은 아직 혼미한 상태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고 안현은 옆에서 그녀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이유정은…. 이유정의 자취를 좇던 김한별은 어렵지 않게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느새 그녀는 김한별이 현관문 옆에 곱게 세워둔 칼을 집어 들고 있었다. 그녀가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대충은 짐작이 갔기에 한별은 가벼운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언니.” “응.” “칼 내려 놓으세요.” “싫어.” 이유정은 들은 척도 않은 채 현관문의 자물쇠를 풀었다. 현관문에서 철컥 이는 요란한 소리가 들리자 안현도 놀랐는지 방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그는 이유정이 든 칼을 보며 바로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헛수고에요. 칼 내려 놓으시고 얌전히 기다리세요.” 김한별의 목소리가 들리자 이유정은 분한 얼굴로 김한별을 쏘아보고 있었다. “왜?” “…….” “수현이 오빠 데리고 올 테니까 너희들은 기다리고 있어.” '오빠. 수현이 오빠.' 속으로 그의 이름을 조그맣게 되뇐다. 김한별의 머리에 그의 생각이 떠올랐다. 처음 봤을 때부터 김한별은 김수현과 자신을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공터에서 봤을 때부터 무언가 남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항상 침착한 얼굴과 자신감 있는 목소리. 그리고 차분한 눈동자.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언덕에서 그와 이야기를 하고 그의 판단에 이끌렸다. 김한별은 잠시 이유정을 물끄러미 바라본 후 말을 이었다. “언니만 그 오빠 걱정하는 거 아니에요. 또 가도 할 수 있는 건 없잖아요. 그냥 얌전히 기다리는 게 도와주는 거에요.” “아직도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다시 말하지만 안 갈 거면 빠져. 너희들이 안 가면 나라도 가서 데려오겠어.” “이유정. 한별이 말이 맞아. 일단 칼 내려놔.” 안현의 엄한 목소리가 들리자 이유정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안현과 김한별 둘을 보며 코웃음 치던 그녀는 이내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참 너무들 하네. 지금쯤 오빠는 우리들을 찾아 이곳 저곳 헤맬지도 모르는데. 응?” 너무들 하네. 이 한마디는 수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듣자 모두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리는걸 느꼈다. 그러나. 안현은 입을 꾹 다물었지만 김한별은 아니었다. 그녀는 옆방에 흘끗 보이는, 아직 쓰러져있는 안솔에 잠시 시선을 건넨 후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었잖아요. 그것들이 달려드는데 우리들도 위험한 상황이었고요. 아마 저 아이가 아니었다면 지금 여기 있는 모두가 죽었을지도 몰라요.” “누가 몰라? 그래서 일단 피하고 솔이 여기로 데려온 거잖아. 왔으면 끝? 우리 일단 안전하니까 이제 끝? 오빠는 알아서 찾아 오겠지?” 의문문으로 자신을 비꼬는 이유정을 보며 김한별은 속이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부터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도, 반말을 하는 것도 영 거슬렸다. 자신도 모르게 입 꼬리를 살짝 올리고 비웃는 표정을 지은 채 김한별은 차갑게 대답했다. “그럼 나가세요. 나가서 실컷 찾아보세요. 언니가 죽든 말든 상관 안 할 테니까.” 스스로 말하고도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이었다. 얘기를 들은 안현은 놀란 얼굴로 김한별을 바라보았다. 이유정은 잠시 충격 먹은 얼굴이 되더니 이내 ”하.”하고 허탈한 웃음 소리를 내뱉었다. “너…. 진짜로, 정말로 싸가지 없는 애구나. 이런 애를 살리려고 오빠가 희생한 거야? 참 실망이다. 아까 가지 말라고 걱정하던 모습은 다 연기였나 보네.” “전 분명 가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도 하겠다고 한 건 그 오빠잖아요. 그걸 왜 제 탓으로 돌려요?” “너…. 후유, 아니다. 너 같은 쓰레기랑은 더 말할 가치도 없겠어. 그냥 입 다물어. 피도 눈물도 없는 차가운 년.” 또 고함을 지르며 득달같이 달려들줄 알았던 김한별은 이유정의 의외의 대응에 조금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을 쓰레기라 부르며 무시하는 태도에 자존심에 심한 상처가 나는걸 느꼈다. 그녀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어느덧 김한별의 숨소리도 처음보다 더욱 거칠어진 상태였다. 이어 말하는 목소리에는 미약한 울분이 섞여 있었다. “말씀이 심하시네요. 제 말이 어디 틀린 데라도 있나요?” “몰라. 그런 거 관심 없어. 그런데 난 최소한 너처럼 가식적으로 살고 싶지는 않아.” “말 다 했어요?” “나이도 어린 게 눈 똑바로 뜨고 쳐다보네. 어쩔 건데? 서로 머리카락이라도 쥐어 뜯을까? 아서라. 그 하얗고 뽀얀 얼굴에 스크래치 나고 싶지 않으면 그냥 예쁜 주둥아리 다물라고.” “다들 그만해!” 점점 수위를 높여가는 둘의 말다툼을 보다 못한 안현이 화난 목소리로 둘을 강하게 일갈했다. 그 기세에 이유정과 김한별은 자기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말았다. 안현은 우묵한 눈동자로 잠시 둘을 노려보고는 이유정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놔.” “…싫어.” 칼을 꼬옥 껴안는 이유정을 보며 안현은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쉰 후 조금은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형 찾으러 갈게. 생각해보니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정말? 그럼 같이 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안현을 보며 이유정은 떨떠름하지만 나름 반기는 얼굴이 되었다. 그녀의 말에 안현은 고개를 힘없이 흔들며 대답했다. “아니. 혼자 가는 게 더 편해. 아까 그것들이 있을지도 모르고. 너랑 한별이는 솔이 좀 돌봐줘.” “쟤랑? 싫어. 쟤는 이제 믿을 수 없어.” 계속해서 자신을 매도하는 이유정을 보며 김한별도 속에서 울컥 무언가 치솟는걸 느꼈다. 아까부터 참고 참던 게 결국 폭발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나름 냉정한 머리의 소유자였다. 화가 나면 이유정처럼 목소리가 높아지고 열불을 내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목소리는 차갑고 냉소적으로 바뀐다. 그녀는 전에 없던 사늘한 목소리로 안현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가지 마세요. 가면 오빠도 틀림없이 당해요.” “너 입 안 다물어?” “그쪽이나 입 다물어요.” “뭐? 그쪽? 다시 한번 말해봐.” 이유정이 눈을 부라리며 한대 칠 듯이 나서자 안현은 얼른 이유정이 품은 칼을 강제로 빼앗아 버렸다. 그러나 김한별도 이미 작정을 했는지 한번 뚫린 말문은 둑 터진 물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알지도 못하면서 나서지나 말라고요. 아까 쟤가 없었으면 우린 다들 어떻게 될 거 같았어요? 칼도, 주먹도 안 통하는 거 못 보셨어요? 가면 죽을게 뻔한데 도대체 왜 그렇게 가겠다는 거에요?” “이 쌍년이 진짜…” “할 말이 없으니 욕을 하시는 거겠죠. 지금 오빠가 어디 있는 줄 알고 데리고 오겠다는 거에요?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보세요.” “핑계 한번 좋네? 이제 본성 드러낸다 이거지? 오빠 덕분에 지금 우리가 여기 있는 건 생각도 안나? 위선은 있는 대로 떨면서 남 등쳐먹을 생각만 하는 구나. 딱 보니까 답 나오네. 그 새끼보다 더 추악한 년 이잖아?” 트러블 메이커와 자신을 비교, 아니 더욱 깎아 내리는 말에 김한별은 처음으로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분노가 치솟아 오르는지 김한별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톤을 높여 말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잖아요! 산 사람이 살겠다는 게 뭐가 나빠요?!” 그 말이 기폭제가 되었는지 이유정은 안현을 거세게 밀치며 달려들었다. 김한별 또한 이를 바득 깨물고 힘껏 뺨이라도 올려 붙일 요량으로 손을 올리려는 순간 이었다. 벌컥. “뭐야. 뭐가 이렇게 소란스러워.” 자물쇠가 풀린 현관문이 열리며 한 청년이 문 안으로 들어섰다. 침착한 얼굴과 자신감 있는 목소리, 그리고 차분한 눈동자. 마지막으로 왼 팔에 매여있는 석궁. 그를 보는 방 안에 있던 모두는 동시에 숨을 멈추고 말았다. 갈등이 최고조로 올라갔던 방 안의 분위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진 것 같았다. “모두 무사해서 다행이다.” 그는 잔잔한 미소를 짓고는 왼 팔에 든 석궁을 푼 후 모두를 향해 오른손을 들어 인사했다. 그는 바로 김수현 이었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 0022 / 0933 ---------------------------------------------- 함정의 도시. 잠깐의 해후를 나누고 나를 비롯한 모두는 중앙 거실에 모여 앉았다. 안솔이 보이지 않았지만 옆 방에서 미약한 숨소리가 새어 나오는 게 아직도 정신을 잃은 상태인 모양이다. 모두가 있는 거실에는 뜻 모를 불안한 기운이 한껏 감돌고 있었다. 흡사 고요한 폭풍전야를 앞둔 기분. 아무래도 좋지 못한 타이밍에 들어온 것 같았다. 감동적인 재회까지는 아니어도 이런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는 건 생각도 못했기에 내심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안현의 어색한 얼굴이 보이고 이유정과 김한별은 서로를 보며 씩씩 거리는 게 의견차로 인해 서로 갈등이 터진 것 같았다. 마지막에 김한별이 소리 지르는 게 얼핏 들리긴 했지만 자세한 일은 나중에 알아볼 생각 이었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있었지만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힘 없는 얼굴을 한 안현 이었다. “수현이 형. 어떤 말을 먼저 해야 하는지 갈피가 잡히지 않네요. 형 덕분에 숲을 벗어난 건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기다리지 않고 먼저 가버린 건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변명을 해도 핑계가 될 건 알지만 그래도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었습니다.”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안현을 보며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당당할 때는 당당하지만 굽힐 때는 굽힌다. 성향이 중립과 중용이라 불안한 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다행히 그렇게 막돼먹은 놈은 아닌 것 같았다. 안현의 정중한 사과에 나는 고개를 흔들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 “너희들이 보이지 않아서…. 처음엔 조금 당황스럽긴 하더라.” “죄송합니다. 드릴 말이 없습니다.” “죄송하다는 말은 그만 해도 돼. 너희들한테도 분명 사정이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까. 그런데 네 동생이 보이지 않네?” “아….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야, 안현. 잠깐만. 그거 내가 말할게. 괜찮지 오빠?” 안현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이유정이 재빠르게 말을 끊으며 나섰다. 어느새 나한테도 말을 놓아버린 그녀를 보며 참 붙임성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웬만하면 차분한 김한별한테 듣고 싶었지만 지금 심기가 불편한지 미간이 모인 게 보였기에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니까 오빠가 숲 안으로 그것들을 끌고 들어가고….” 안현도 동의한걸 확인한 이유정은 김한별을 흘끗 노려본 후 설명을 시작했다. 그녀의 설명은 부족한 부분은 많았지만 그만큼 간단하고 명료했다. 애초에 대강의 상황을 짐작하고 있는 만큼 추가로 설명을 요구할 부분은 없었다. 다만…. “허공에서 유령 같은 게 나타났다고?” “응.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유령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것 같아. 마치 완벽한 투명이 아니라는 느낌? 대충 날개가 달려있는 것 같은 형체는 어느 정도 보였어. 이동하는 경로도 보이고. 그런데 현이 아무리 칼로 베도 도저히 쓰러지지를 않더라.” 이 부분은 조금 더 자세히 들을 필요가 있어 고개를 돌리자 안현은 눈을 감았다. 그때를 회상 하려는 모습 이었다. 그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정이 말이랑 비슷해요. 있는 힘껏 베었는데 그냥 공기만 가르는 기분이 들었어요.” 공기만 가른다. 형체만 보이고 완벽한 투명이 아니다. 날개가 있었다. 세 개의 조건을 종합해본 나는 이내 머릿속으로 하나의 기억이 스치듯 떠올랐다. 레이스다. 불투명한 투명인간과 날개가 있다는 말을 들은 나는 단박에 레이스를 생각해낼 수 있었다. 레이스는 물리적인 공격으로는 피해를 입힐 수 없는 괴물이다. 사람의 몸을 통과하면서 정신에 고통을 가하는 방법을 구사하는데 안현이 그들의 공격을 십 수번을 버텼다고 하니 통과의례에서는 나름 조절을 해놓은 것 같았다. 말을 들으면서 나는 한가지 궁금증이 일었다. 지금 일행은 통상적인 방법으로 레이스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그들을 피한 걸까? 나는 겸사겸사로 안솔을 걸고 넘어지기로 했다. “그럼 그것들 때문에 네 동생이 다친 거야?” 내 물음에 안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안현의 이야기에, 나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레이스들은 안현의 저항이 가장 격렬한걸 보고는 그를 집중해서 공격했다고 한다. 당연히 안현은 고통스러워 했고 종래에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칼과 방패를 떨어뜨렸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를 위기에서 구한 건 안솔이었다. 좀 더 자세히 알려달라고 말했지만 그 부분은 안현도 잘 설명하지 못했다. 이유정도 김한별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냥 안솔이 비명을 지르다가 이내 그녀의 전신에서 하얀 빛이 번쩍이더니 자신들을 공격하던 것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는 게 설명의 전부였다. 그리고 그 직후 안솔은 바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말을 전부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현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이내 불안한 얼굴로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형…. 솔이 괜찮은 거겠죠? 다시 일어날 수 있겠죠?” “몸 상태는 어떤데.” “숨은 고르게 쉬어요. 맥박도 정상이고요. 그런데 가끔 뭐가 아픈지 얼굴을 일그러뜨려요. 신음 소리도 간간히 흘리네요.” 마력 오버 드라이브. 설마 안솔이 벌써 마력을 발현했다는 건가?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이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여겼다. 나는 처음 시작할 때 마력 수치가 낮아 고생을 정말로 많이 했었다. 또한 통과의례를 지나 홀 플레인에 입장 후 검기를 뽑아내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 편이었다. 하지만 안솔은 시작부터 75란 마력 수치를 가지고 시작하니 다를 수도 있겠다고 여겼다. 무의식의 세계라는 건 연구라는걸 할 수 없는 분야였으니 내가 모르는 무언가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건 지금 수련 되지 않은 육체로는 75 포인트의 마력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것.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크게 무리만 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나도 한번 봐야 알겠지만, 딱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너무 걱정하지마.” “그, 그러면 지금 좀….” 급하게 입을 여는 안현을 보며 참 어지간하다라고 생각하고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였다. 한 부드러운 손길이 내 팔목을 착 붙잡았다. 왼쪽 팔목에 느껴지는 말랑한 느낌에 고개를 돌리니 이유정이 나를 보고 입을 삐죽이고 있었다. “야, 안현. 넌 방금 돌아온 오빠한테 그게 할 소리냐. 오빠. 배 안고파?” “응? 그냥 참을만한데. 일단 안솔부터….” “이미 우리가 돌아가면서 다 봤어. 오빠가 의사가 아닌 이상 나중에 봐도 되잖아. 일단 우리 얘기도 들었으니까 오빠 얘기도 해줘. 잠시 요기거리 만들어 올 테니까 그거 먹으면서. 응?” 오늘따라 얘가 왜 이럴까. 예전과는 다른 적극적인 태도가 조금 이상했지만 그래도 챙겨준다는데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유정의 발언에 안현도 분위기가 조금 풀린 듯 조금 멋쩍은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은 이거 드세요. 아까 조금 마시다가 챙겨둔 거에요.” “응? 아. 고마워요.” 김한별이 품 속에서 물을 꺼내 나에게 건네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이유정은 김한별이 건네 물을 탁 치며 다시 그녀에게 되돌려 버렸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어안이 벙벙한 사이 김한별이 날카로운 음성이 들렸다. “무슨 짓이에요?” “넌 네가 먹던 거 주니? 오빠한테는 새 걸로 드릴 거야. 그건 네가 마셔.” “너희들 지금 무슨….”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유정은 냉큼 일어서고는 부엌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무언가 주섬주섬 챙기고 이내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게 무언가를 만들기는 하는 모양이다. 다시 고개를 돌려 떨떠름한 기분으로 안현과 김한별을 바라보자 안현은 어색한 얼굴을, 김한별은 차가운 얼굴로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상외의 사태였지만 나는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얼른 화제를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애들은 다 먹었어?” “…예 형. 저희들 먼저 먹었어요. 너무 배고파서…. 하하.” “아니야. 잘했어. 내가 언제 온다고…. 마냥 기다리는 건 미련한 짓이지.” 미안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는 안현의 말에 대답하자 내 눈 앞에 새 생수 병이 탁 놓였다. 벌써 뚝딱 만들어 왔는지 내 앞에 접시를 얌전하게 내려 놓는데 이게 내가 아는 이유정이 맞는가 싶었다. 접시에는 크래커 비슷한 비스켓에 통조림 참치를 얹은 참치 크래커처럼 보였다. 나름대로 예쁘게 만든다고 노력한 티가 났다. 이유정은 손수 물병도 따주며 억지로 꾸민듯한 활기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짜잔~! 이유정님이 만든 스페셜 크래커 등장이요!” “오. 맛있어 보인다. 어디 나도 한입…. 읔!” 침을 꿀꺽 삼키고 얼른 손을 내뻗는 안현을 보며 이유정은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저지했다. 안현이 벌개진 손자국을 쓰다듬으며 불만 어린 얼굴을 했으나 이유정의 도끼눈에 이내 작게 투덜거리며 손을 거두었다. “치사하다. 먹는 것 가지고 이러기냐.” “오빠 먹일라고 만든 건데 네가 왜 먹어. 그리고 오빠도 아직 안 먹었는데 먼저 손대는 건 어디서 배운 버릇이야?” “체.” “오빠. 먹어봐. 맛은 보장할게.” “으, 응? 그래. 고맙다. 잘 먹으마.” 여전히 투덜거리는 안현과 흥 하며 고개를 팩 돌린 이유정을 보며 나는 그냥 웃어버리고 말았다. 크래커 하나를 집어 들고 입으로 꿀꺽 삼키자 싸구려 참치와 비스킷 맛이 입 안에 퍼졌다. 별미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은 했다. 물론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도 아니었고 나름대로 맛은 있었기 때문에 꼭꼭 씹어 먹었다. 다행히 초반보다 분위기는 많이 풀린 것 같았다. 크래커 하나를 더 집을 즈음 나를 보는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워 빨리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그 스무 마리가 넘는 데드맨들을 전부 조졌다고는 말할 수 없어 적당한 각색은 할 생각 이었다. 이유정한테 맛있다고 칭찬한 후 나는 바로 숲 안에서 어떻게 유인했는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형. 그럼 그때 물릴 뻔 했던 거에요?” “최대한 S자를 그리면서 나무 사이로 도망가고 있었거든. 설마 나무를 지나가는데 바로 옆에서 튀어 나올 줄을 몰랐어. 아마 왼손이 조금만 더 옆으로 갔더라도 분명 물렸을 거야.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섬찟해.” “대박…. 그럼 진짜 우리 오빠 못 볼 뻔 했던 거네.” “큭큭. 형. 말도 마요. 이유정 얘 형 오기 전까지 난리도 아니었어요. 갑자기 칼을 들더니 빨리 오빠를 구하러 가야 한다고, 아직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완전 찌를 듯이 설쳤다니까요?” “너 죽는다? 그 정도로 오버하지 않았거든?” “거봐. 인정하네. 결국 하긴 했다는 소리잖아.” “이게 진짜!” 둘이서 아옹다옹 다투며 낄낄거리는 안현과 이유정을 보며 내심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 들었다. 부드러운 분위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차갑게 굳어 있는 김한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과는 다른 냉한 얼굴로 우리들을 응시하는 게 나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에 사늘한 공기 한줄기가 들어오는 것 같았다. 별일 아니겠다 싶었는데 김한별이 마지막에 소리 지른 말을 왠지 가벼이 넘겨서는 안 되는 무언의 직감이 들었다. 나는 이 자리가 끝나는 대로 안현과 따로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 0023 / 0933 ---------------------------------------------- 함정의 도시. 모임이 끝난 후 나는 안현의 인도를 받아 바로 안솔의 상태를 살폈다. 침구 하나를 깔고 새근새근 잠든 모습을 보자 절로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마에 손을 얹어 내부를 체크해보니 예상대로 안솔의 마력은 헝클어진 상태였다. 도를 넘지 않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자정 작용으로 인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겠지만 나는 도움을 주기로 마음 먹었다. “아무래도 새벽에 안솔 간호하는 사람이 한 명 붙어 있는 게 낫겠다.” “그건 제가 할게요.” 당연히 자기가 하겠다고 나서는 안현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창문 너머로 눈을 돌리자 어느새 밖은 완연한 어둠이 내린 상태였다. 안현의 눈동자는 조금 전부터 이미 피로로 가득 차 있었다. 오늘 하루 동안 모두 상당한 심력을 소비했을 것이다.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내일 행동에 지장을 주면 곤란했다. “피곤해 보인다. 일단 나가서 한숨 자고 있어. 얘는 내가 보고 있을게.” “형은 안 주무세요?” “나중에. 일단 여자애들은 오늘 푹 자게 놔두고 너랑 내가 교대하면서 안솔을 보자. 내가 나중에 적당히 깨울 테니까 그때 교대하자고.” “아. 교대. 그러면 되겠네요. 그럼 형 동생 좀 부탁 드릴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안현은 비틀비틀 걸으며 문을 닫고 나갔다. 아직 물어보고 싶은 건 남았지만 수면 욕구를 간신히 참고 있는 안현의 모습이 보였기에 다음에 비교적 한가한 시간이 날 때 묻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트랩 포인트와 일행들의 태도에 머리가 복잡했기 때문에 겸사겸사 생각도 정리할 참이었다. 다만 그전에 할 일은 해야겠지. 문이 꼭 닫힌걸 확인한 후 나는 차분히 마력을 일으켰다. 잔잔한 물의 표면에 파문이 생기듯 이내 내 오른손에는 연한 주홍빛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손을 내밀어 그녀의 가슴 정 중앙에 걸치듯 놓은 후 바로 내부로 마력을 투사했다. 이왕 치료해주는 김에 조금 서비스 해주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마력이 심하게 역류하거나 혈도를 따르는 회로가 꼬인 경우를 고치는 건 꽤나 애를 먹는 일이다. 그러나 단순히 오버 드라이브한 마력을 진정시키고 헝클어진걸 풀어주는 건 손 쉬운 일이었다. 순수한 불의 속성을 띄운 내 마력의 기운이 흘러 들어가자 잠시 안솔의 몸이 움찔거렸다. 마력은 개인이 가진 성향에 따라 띄는 속성이 달라진다. 지금 내가 느끼는 그녀의 마력 속성은 선하고 그만큼 하얀 빛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 흘러 들어간 내 압도적인 마력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우물쭈물 불안해 했지만 나는 그것들이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부드럽고, 그리고 감미롭게 솔의 마력들을 감싸 안았다. 괜찮아. 괜찮아. 도와주러 왔어. 착하지? 얌전히 있으렴. 달래는듯한 느낌으로 계속 솔의 마력을 보듬자 내가 도움을 주러 왔다는 사실을 인식했는지 이내 앞 다투어 내 마력이 있는 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유연히 운용하며 마력들을 보듬어 주었다. 그러자 자기 먼저 쓰다듬어 달라는 듯 이리저리 비비는 그녀의 마력들을 보며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 전신을 훑으며 놀란 곳은 안정시키고 헝클어진 건 풀어준다. 진행이 거의 끝자락에 다다를 무렵 그녀의 얼굴에는 발그레한 홍조가 물들어 있었다. 얼굴도 편안해 보인다. 행복한 꿈이라도 꾸는 건가? 걸리는 게 하나 있긴 했다. 몸 전부를 훑고난 후 마력을 다시 거둬들이려고 하자 안솔의 마력들이 하나같이 들러붙은 것이다. 손을 떼려고 하자 그녀의 몸 내부 마력이 가지 말라고, 조금 더 보듬어 달라고 꾹꾹 잡아당기는걸 겨우 뿌리친 후 나는 간신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작업을 완료하니 시간은 약 한 시간 정도 흐른 것 같았다. 금방 끝낼걸 세세하게 봐주고 활력까지 북돋아주다 보니 예상외로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방 밖의 기척은 딱히 걸리는 건 없다. 아무래도 다들 골아 떨어진 모양이다. 양손을 올려 한껏 기지개를 편 후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어차피 할 것도 없으니 잠시라도 눈을 붙이는 게 나을 것이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방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척에 감았던 눈을 뜨고 말았다. 주변에는 어느새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 앉아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건장한 체격을 가진 인영이 슬쩍 고개를 들이밀더니 나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이유정은 단발 머리고 김한별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생머리를 하고 있었다. 둘 다 아니었으니 결국 안현인 셈이다. “오늘 피곤했을 텐데. 더 자도 돼.”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자 그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다만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는걸 볼 수 있었다. 일분이란 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안현의 입이 서서히 열리는걸 볼 수 있었다. “아니에요. 영 걱정이 돼서 잠도 잘 안 오네요. 형. 우리 솔이 상태는 어때요?” “많이 호전됐어. 내일이면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정말이요? 다행이네요. 저기 형, 그럼….” 안현 답지 않게 우물쭈물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침착하게 그가 말하는걸 기다렸다. 왠지 모르게 지금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현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형. 형이랑 지금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곤란해요.” “얼마든지. 그럼 옥상으로 갈까?” “네.” 보아하니 안현도 잠은 별로 못 잔 것 같았다. 아마도 여러 가지 생각도 많고 안솔 문제도 있고 하니 이래저래 복잡한 모양이었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진심을 읽은 나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거실에는 이유정이 침구를 꼭 껴안은 상태로 자고 있었다. 김한별은 보이지 않는 게 다른 방에서 자는 것 같았다. 그녀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자물쇠를 풀은 나는 조용히 안현과 함께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 서 밤바람에 담긴 차가운 공기를 마시자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다. 우리는 눈 앞에 보이는 칠흑의 도시를 보며 잠시 그렇게 말 없이 서 있었다. 먼저 말문을 연건 안현 이었다. “형. 이 도시는 참 조용하네요.” “그렇지. 수상할 정도로 조용해. 하지만 방심하면 안 돼.” 내 말에 안현은 쓸쓸한 얼굴을 하더니 이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이 뜻하는 바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참고 그가 속내를 털어 놓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형을 보면 정말로 대단한 거 같아요.” “뭘. 똑같은 사람인데 대단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 “아뇨, 그게 아니에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라고요.” 안현은 연속으로 세 번이나 부정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심란함이 가득했고 무력감 또한 엿볼 수 있었다. 그의 심정을 모르는 게 아니었지만 아직 어렴풋했기 때문에 일단 말을 더 들어볼 요량으로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오늘 형이 떠나고 난 이후에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형이 있을 때는 우리들은 정말 서로 잘 맞는다고 느꼈어요. 형은 아닐지 몰라도 저는 우리 다섯이라면 서로 힘을 합해 이곳을 탈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나도 그렇게 생각해.” “네. 그런데 아니었어요. 형이 그러셨죠. 다른 애들을 잘 부탁한다고. 그런데 저는 애들을 잘 이끌 수 없었어요. 이상한 것들에 당해 쓰러지고 솔이 마저 위험에 처하고 말았잖아요. 그리고 형도 오늘 유정이랑 한별이 보면서 이상한 거 느꼈죠? 둘이 싸웠어요. 형을 구하러 가자, 가지 말자 때문에.” 안현은 길게 말을 늘어뜨리면서 괴로운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싫었던 건…. 저는 그때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었다는 거에요. 심지어 말리지도 못했죠. 고작 한다는 소리가 떠밀리듯, 내가 갈게.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나서는 게 전부였어요. 가슴이 너무 답답했어요.” “…….” “형이 없었다면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겠죠. 내일은 어떨까.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이런 부담감에 몸부림치며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안현.” 더욱 감정적으로 변하는 안현을 막기 위해 말을 걸었지만 그는 다시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할 말이 더 남았다는 신호였다. “그런데 그때 형이 나타났어요. 정말 기적 같이. 형을 보자마자 무슨 감정이 들었는지 아세요? 고마움? 아니에요. 미안함? 아니에요. 바로 안도감 이었어요. 형이라면 어떻게든 해주겠지. 형이라면 뭔가 믿을 수 있겠지. 실제로 그렇잖아요. 형이 오자마자 분위기는 다시 괜찮아졌고 솔이의 상태도 호전됐어요. 형은 항상 침착하고 차분해요. 흔들리지 않는다는 느낌? 우리들이랑 다른 것 같아요. 뭔지는 모르지만 무언가 다른 게 분명히 있어요.” 안현의 마지막 말에 순간 속이 뜨끔했지만 나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할 말을 다했다는 듯 고개를 축 늘어뜨리는 현을 보며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한마디 해도 될까. 그렇게 길지는 않을 테니까.” “길어도 되요. 경청할게요.” 홀가분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를 보며 나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가 그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안현은 놀란 얼굴로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나, 이런 부담을 느끼는 것도 괜찮아. 오히려 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행이라고요?” “생각해봐. 우리가 숲 안에서 어땠는지. 네가 그 트러블 메이커 같이 혼자서 모든걸 독단으로 하려고 한 건 아니잖아.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을 억압한 것도 아니고. 내가 대략적인 의견을 내면 유정이랑 한별씨가 섬세히 살피고 추가 의견을 냈지. 그리고 나와 너는 그 의견을 모아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방법을 택했고.” “…….” “우리는 모두가 너를 돕고 있다. 부담을 가지는 건 당연하지만 그 부담을 전부 맬 필요는 없어. 설령 일이 잘못됐다 하더라도 그건 우리 모두의 책임이지 너 혼자만의 책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현이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내가 손을 들어 올리고는 그의 말을 멈추게 했다. 내 신호를 알아 들었는지 안현은 열려던 입을 다시 다물었다. “네가 나를 대단하게 볼 수 있지만 반대로 나도 네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겁 많은 동생을 이곳까지 데려온 것도 그렇고 항상 신속하게 추진력 있게 행동에 옮기니까. 안솔이 너한테 의지하는 것처럼 너도 나한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도 있어. 나도, 유정이도, 한별씨도 너와 안솔한테 의지하는 게 있을 수도 있고. 다섯이 힘을 합해 이곳을 탈출한다. 네가 나한테 처음 했던 말이야. 그런데 그 다음 네가 한 말은 상당히 모순적 이었어. 서로 의지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 짧게 말하려고 했는데 이리저리 말하다 보니 조금 길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나는 마지막 말을 잇기로 했다. “부담이라는 이름의 짐은 우리가 나눠 들어주겠어. 그러니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것만 해.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래. 네가 할 수 있는 것. 다른 건 걱정 안 해도 되잖아? 나머지는 우리들이 그만큼 너를 있는 힘껏 도와줄 거니까.” 천천히 내 말을 곱씹는 안현을 보며 밤바람을 맞았다. 오늘따라 유독 밤바람이 살랑거리는 게 간지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차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안현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옥상에 올라올 때 불안정한 눈동자가 아닌 처음 봤을 때의 우묵하고 무거운 눈동자였다. 그리고 안현은 마음의 고민을 조금이나마 덜었는지 후련한 감정이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 0024 / 0933 ---------------------------------------------- 함정의 도시.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새벽에 안현과 이야기를 나눈 후, 방으로 돌아와 불침번 및 간호 교대를 할 수 있었다. 괜찮다고, 더 자도 된다고 말해도 한사코 등을 떠미는데 별 도리가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눈이라도 잠깐 붙일 요량으로 거실 한구석에 누웠는데 아무래도 푹 잠든 모양이다. 나는 약간 반성하기로 했다. 지금은 거리낄게 없다고 해도 방심은 금물이었다. 물론 내가 비정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무슨 일을 하던 간에 스스로를 극한까지 몰아붙여야 성이 차는 인물이었다. 이미 10년 동안 습관이 돼서 푹 자고, 배부르게 먹는 건 일부러 멀리하는 편 이었다. 슬슬 페이스 좀 올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막 일어나려는 찰나였다. 주변에 인기척이 들려 슬며시 눈을 떠보니 의외로 인물이 내 잠자리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 인물은 다름아닌 바로 안솔이었다. “앗!”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 흔들던 안솔은 이내 나와 시선이 마주치더니 눈을 화등잔만 하게 커지고 말았다.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는데. 나는 너의 적이 아니란다. 그러니 해치지 않아요, 라는 의미를 담뿍 담은 목소리로 부드러운 아침 인사를 건넸다. “안녕. 몸은 좀 괜찮아?”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내 말에 허둥거리면서도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그녀를 보며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 정말 이러면 안 되는데. 왜 저 아이만 보면 스스로 마음이 약해지는 걸까. 한없이 보호 욕구를 자극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 내 행동을 보던 그녀는 우물쭈물하는 태도로 미적이더니 이내 나를 향해 모기만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 오빠.” “응.” “죄송해요….” “응?” 얘는 또 갑자기 무슨 헛소리냐. 어제나 오늘이나 죄송하다는 말을 참 많이 들은 것 같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안솔을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그…. 얘기를 들어서…. 저 때문에…. 많이 힘드셨다고….” 아마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오해할 정도로 그녀가 한 말은 앞뒤가 생략되어 있었다. 그걸 집어 치우고서라도 안솔이 말을 더듬는걸 보며 나는 문득 이 아이의 앞날이 걱정스러웠다. 다른 사람한테 말도 더듬으면서 홀 플레인의 비일상적인 사람들이랑 생활을 도대체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이 아이가 나중에 여성 사용자들의 대표나 다름없는 그림자 여왕이나 처형의 공주와 동급으로 올라서는 광휘의 사제가 된다고? 참 머나먼 얘기로구먼.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죄송할 필요는 없는데. 오히려 굉장히 잘했는걸. 나도 들었는데 모두의 목숨을 구했다면서?” “아, 아뇨! 그건 저도 잘 기억이 안 나서요!”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면 또 한껏 풀이 죽을게 뻔하기 때문에 나는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내 칭찬은 확실히 들었는지 이내 그녀의 표정에 화색이 돌더니 헤실 거리는 얼굴로 손을 방방 젓기 시작했다. 생각하는 게 얼굴로 다 드러난다는 소리고 결론은 말 그대로 천연 타입이었다. 도대체 애를 어떻게 키웠길래 이렇게 순수하고 천연으로 키운 건지 정말로 궁금했다. 그 순간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수현 오라버니. 일어나셨으면 식사 하세요.” “?” “왜요? 오라버니? 왜 그렇게 의문이 가득 찬 눈길로 소녀를 보시는 거죠?” “?” “왜 그렇게 보시…. 제길, 알았어. 원래대로 할게. 어제 우리들 대신 솔이 간호하고 불침번 섰다고 안현이 말해주더라. 고마워서 아침 만들었어. 나머지는 이미 다 먹은 상태니까 걱정 말고.” “음. 확실한 이유정이군. 고맙다.”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내밀자 그녀는 열 받은 얼굴로 내 앞에 접시를 탁 내려 놓았다. 메뉴는 어제와 똑같은 참치 크래커. 메뉴가 똑같다고 만들 줄 아는 게 이거밖에 없니 라고 놀리고 싶었지만 나를 보는 그녀의 사늘한 눈길에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 손을 내밀어 크래커 하나를 베어 물었다. 이유정과 안솔은 가만히 앉아 내가 먹는걸 구경하고 있었다. 막 크래커 하나를 꼭꼭 씹고 있던 나는 불만스런 얼굴로 먹던걸 내려 놓고 말았다. 그런 나를 보며 이유정은 더 먹으라는 얼굴로 눈을 깜빡였고 안솔은 뭐가 그리 좋은지 천진난만한 얼굴로 여전히 헤실 거리는 중 이었다. 오늘 얘들이 단체로 돌은 건가. “내가 무슨 동물원 원숭이로 보이니.” “그 정도는 아니고. 그냥 먹는 방법이 신기해서.” “방법이?” 그 정도는 아니라고 라. 흠. 그렇게 이상하게 먹었나? 그냥 평소에 먹던 방법으로…. 무심하게 생각하던 나는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아차 하고 말았다. “안현은 그냥 몇 번 씹고 꿀떡 삼키던데 오빠는 완전 반대잖아. 얌생이처럼 약간만 뜯어 먹더라. 그것도 최대한 천천히 잘게 잘게 씹은 후 조금씩 삼키는 것 같고. 그렇다고 많이 먹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왜 그렇게 먹는 건데?” 나는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이유정의 눈썰미는 예상외로 날카로웠다. 사실대로 말하면 예전에 요정의 숲에서 요정들한테 쫓길 때 식량이 부족했던 때가 있었다. 남은 식량을 쪼개고 쪼개 하루에 활동할 수 있을 정도로만 먹었는데 그때 이런 식습관이 들어버린 것이다. 그 외에도 나는 캐러밴을 꾸리거나 원정대에 참가하는 등 전투에 임할 때는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평소에 절대로 배부르게 먹지 않는다. 포만감은 예민한 감각을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에. 그러나 위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기에 나는 슬쩍 화제를 돌리기로 마음 먹었다. “그냥 평소 버릇인데. 먹을 때는 먹는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조금 적게 먹는 편이거든. 그나저나 나머지 둘은 안보이네. 다들 어디 갔어?” “안현이랑 김한별? 안현은 혼자서 주변 둘러본다고 나갔고 김한별은 옥상으로 올라간 것 같던데.”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는지 순순히 대답하는 이유정을 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문득 나를 보는 시선에 고개를 돌리니 안솔이 또랑또랑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아직 어색함이 어린 얼굴로 다시 헤실 헤실 웃는다. 도대체 얘 오늘 왜 이러는 건데. 나는 안솔이 마치 어린애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어린애는 처음 낯선 이를 보면 본능적으로 경계한다. 자기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불안해하는 것이다. 그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다가서면 애들은 싫다는 의사를 보이며 울음을 터뜨린다. 그런 애들과 친해지는 방법은 간단하다. 처음에는 일정 거리를 두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아 적어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걸 인식하게 한다. 그러면 궁금증이 일어난 아이는 아장아장 다가와 호기심을 표현하는데 바로 그때가 애들과 친해질 수 있는 적합한 시기였다. 잠시 안솔에 대한 고찰…. 아니 그냥 시답잖은 생각을 하던 나는 이유정이 만들어준 크래커를 하나 더 씹으며 다른 생각에 잠겼다. 24:00를 기준으로 하루를 카운트 한다고 하면 오늘이 바로 트랩 포인트에 들어온 지 이틀째 되는 날이다. 즉 오늘 24:00까지가 안전한 날이라는 소리였다. 모두 말은 없었지만 이곳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다. “일찍 들어왔으면 좋겠는데. 할 얘기도 있고.” “무슨 얘기?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 같은 거?” “비슷해.” “무슨 얘긴데. 오빠. 나랑 솔이한테 먼저 말해봐.” 양 무릎을 모은 상태서 두 팔을 둥글게 벌려 감은 형태로 앉은 이유정은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안솔도 앞으로의 얘기가 나오자 놀랐는지 살짝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아마 이 말을 하면 반발이 클지도 모르지만 나는 정면 승부로 나가기로 마음 먹었다. 아무리 말하기 어렵다고 해도 어차피 다들 알아야 하는 사실 이었다. “오늘 이 도시를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내 말이 끝나자마자 예상대로 둘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 “잠깐 순찰 좀 다녀 왔어요. 형 말대로 섬찟할 정도로 조용해요.”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안현의 첫마디는 도시가 수상스러울 정도로 조용하다는 소리였다. 할 얘기가 있다는 내 말에 거실에는 나를 비롯한 일행 모두가 모여 있었다. 김한별은 바람을 쐬며 마음을 가다듬었는지 평소처럼 차가우면서 차분한 얼굴을 회복한 것 같았다. 나는 모두의 얼굴을 살핀 후 바로 입을 열었다. “모두들 지금 이 통과 의례로 불리는 장소로 오기 전 천사들한테 들은 말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글쎄. 나는 별로 기억이 안 나는데. 그 날개 달린 년이랑 대판 싸우느라 들은 건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유정을 보자 저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일단 저 녀석은 젖혀두고 나는 안현과 김한별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하나씩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주의 사항을 읽긴 했는데 너무 여러 가지가 많아서…. 물이나 식량은 주지 않으니 알아서 찾는 것, 이 공간에서의 죽음은 실제의 죽음을 의미하니 조심할 것, 생존 조건은 중앙의 워프 게이트로 가는 것과…. 에 또 뭐더라.” “7일 동안 버티는 것이죠.” 안현의 말을 김한별이 보완하며 받았다. 그리고 그 말이 바로 내가 기다리던 말 이었다. “바로 그거에요. 7일 동안 버틴다. 한별씨, 혹시 그 조항에 붙어있는 다른 사항 기억 안 나나요?” 내 물음에 김한별은 잠시 이유 모를 불만 어린 얼굴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기억나요. 한 장소에 절대로 안주하지 말라고 천사한테 직접 들은 것 같아요. 7일 동안 계속 도망 다니든지 아니면 중앙으로 가라고 했죠.”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주억이고는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이유정이 재빠르게 들고 일어나 선수를 쳐버렸다. “하지만 오빠. 여기는 안전하잖아? 먹을 것도 많고, 잠도 잘 잤고, 집도 있고. 다들 어제 기억 안나? 숲 안에서 나오자마자 죽을 만큼 고생했잖아.” “그건 그러네. 형. 정말, 굳이 이곳을 떠날 필요가 있을까요? 그 천사들 말을 꼭 다 믿을 필요는 없잖아요.” 곧이어 안현까지 그녀의 말을 지원하며 나에게 묻자 이유정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지간히 밖으로 나가기 싫은 모양 이었다. 나는 둘의 시선을 받아 넘기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모두들 지금 당장이 편하다고 너무 안일한 방향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면 한번 반대로 생각을 해봐.” “반대로?” “그래. 지금 현이가 주변을 돌고 왔으니 알겠지만 지금 이 도시는 너무나 조용해. 숲에 있을 때는 긴장의 연속 이었고 나와서도 너희들은 습격을 받았지. 밖으로 나가면 아마 또 그럴 거야. 하지만….” 나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바로 말을 이었다. “천사들은 우리들한테 그런 행동을 원하지 않아. 실제로 경고도 했고. 7일 동안 살아 남거나 중앙의 워프 게이트로 가고 절대 안주하지 말 것. 천사들이 원하는걸 잘 파악해야 돼. 통과 의례의 뜻과 지금 우리의 상황을 종합하면 뜻에 어긋나게 돼버려. 지금 상황은 딱 봐도 이상하잖아? 밖이랑 비하면 시설도 편하고 먹을 것도 많고 괴물들도 없고. 난 이게 함정이라고 생각해. 여기서 더 머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를 정도로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러니까 오빠는 결국 감이 안 좋으니 떠나자는 거잖아.” “예감만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건 알아. 하지만 정말 불안한 기운이 감도는 건 사실이라고. 이런 장소는 딱 쉴 만큼만 쉬고 챙길 만큼만 챙기고 떠나는 게 가장 효율성이 높다고 생각해. 웬만하면 나는 오늘 안으로 떠났으면 좋겠다.” 설득하고 있기는 해도 솔직히 납득을 시킬 수 있을까 자신은 없었다. 위험이 직면한 상황과 안전한 상황은 설득 성공률이 판이하게 다르다. 더구나 이번에는 스스로 생각해도 설득력이 부족했다. 논리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예측 또는 예감에 의지한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그 부분은 어쩔 수 없었다. 홀 플레인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는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다들 한동안 말이 없었지만 하나 같이 탐탁지 않은 얼굴을 하는 게 떠나기 싫은 듯 보였다. 물론 보스 몬스터 따위 내가 처리하면 그만이지만 적어도 천사들이 마련해준 장소인 만큼 이들에게 정석적인 코스를 밟게 하고 싶었다. 지금 편하면 편할수록 홀 플레인에서 고생할게 뻔하니까. 안현은 고개를 들어 내 눈을 응시하고는 이내 모두를 보며 입을 열었다. “다들 의견이 다른 것 같으니…. 다수결로 해요.” “다수결?” “네. 다만 이 다수결에는 두 가지 조건을 걸 거에요.” “어떤 조건인데요?”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나는 흥미로운 감정이 떠올랐다. 다수결이라. 정말 오랜만에 듣는 말 같았다. 김한별 또한 신선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반문하자 안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조건이라고 해봤자 별거 없어. 먼저 첫 번째. 한 사람당 찬성, 반대, 기권 중 하나를 선택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다만 자신이 그 권리를 선택한 이유를 꼭 말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불평 불만 없이 그 결정에 따를 것.” 안현의 말에 이유정은 이곳에 남는다 가 이길 것이라고 확신하는지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찬성 찬성! 나는 이의 없음. 다수결이라, 다수결 좋네. 지금 바로 하자. 나 먼저 한다?” “하긴. 이런 건 빠르게 하는 게 좋지. 수현이 형은 일단 찬성 한 표도 돌려 놓을게요. 이유는 이미 말씀 하셨으니까요.” “이의 없음.” “그러면…. 혹시 다른 의견 가진 사람 있나요? 없으면 이대로 할게요.” 김한별과 안솔 그리고 내가 동의하자 안현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유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천천히 그녀의 입이 열리고 모두가 그녀가 하려는 말을 주목했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 0025 / 0933 ---------------------------------------------- 함정의 도시. “당연히 나는 반대. 숲이랑 여기랑 비교하면 바로 답은 나오잖아? 괜히 불확실한 오빠의 예측에 목숨을 내놓긴 싫어. 굳이 이 도시를 나가면서 어제와 같은 위험을 감수하는 건 아니라고 봐.”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역시나 아니었다. 이유정은 반대표를 던졌고, 이로서 찬성과 반대는 각각 한 표씩 나온 상황이었다. 입 안에 조금 텁텁했지만 일단 가만히 결과를 지켜보기로 했다. 이유정의 다음 순서는 김한별 이었다. 최소 김한별이 찬성표를 던진다면 희망을 노려볼 수 있어 자연스럽게 관심이 쏠렸다. 그녀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평소의 고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또한 딱히 떠나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제 나름의 판단으로 이분을 본 결과 결코 나쁜 의도가 있다고 생각 되지는 않아요. 실제로 지금껏 항상 좋은 판단을 내려 주셨으니까요. 말씀하신걸 증명할 수 있는 사례는 충분하다고 볼 수 없지만 근거로서의 기능은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찬성, 반대를 고를 수 없어요. 그러니 기권 할게요.” 김한별은 기권을 선택했다. 어떻게 보면 가장 무난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유정은 이미 우리가 남을 거라는걸 확신하는 것 같았다. 얼굴이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나는 생각지 않은 결과가 나왔을 때를 대비하기로 했다. 까짓 거 보스 몬스터가 출현한다고 해도 때려 잡으면 그만이다. 들키지 않게 잡는 게 문제이기는 하지만. 남은 사람은 안현과 안솔이었다. 안현은 잠시 동생을 쓱 보더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걸었다. “솔아.” “응?” “넌 어떻게 하고 싶어?” 안현의 말에 안솔은 일순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손가락을 접기도, 피기도 하는 게 지금까지 나온 표를 세는 것 같았다. 그러다 나랑 잠깐 눈이 마주쳤는데 이내 화들짝 놀라더니 얼굴이 발개지면서 바로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려버렸다. 그러면서 계속 흘끔흘끔 나를 곁눈질하는 것을 보니, 혹시 어디 아프나 생각이 들었다. “솔이는 당연히 반대지~? 그렇지? 여기가 안전하고 편하잖아. 밖으로 나가면 또 무서운 괴물들이 왕~! 하고 몰려와요!” 어느새 이유정은 안솔을 완전히 어린애 취급하고 있었다. 안솔도 그것을 느꼈는지 이유정이 과장한 얼굴로 겁을 주자 볼은 빵빵, 입을 삐죽삐죽 거리며 고개를 살살 흔들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 눈치를 살짝 보고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수현이 오빠 말에 찬성할래요.” 오호라. “그럼! 당연히 찬성~! 응? 뭐라고? 찬성한다고?” 이유정이 신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가, 찬성의 말을 듣자 바로 표정이 변하며 잡아먹을 듯 달려들었다. 안솔은 잽싸게 안현의 품 안으로 숨어버렸다. 안현도, 김한별도 어지간히 놀랐는지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안솔은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한동안 입만 오물거리다가 이내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네. 찬성해요.” “왜! 도대체 왜!” “히잉….” 흉신악살의 얼굴로 씨근거리는 이유정을 물리친 안현은 겁먹은 안솔을 달래며 부드러운 말로 이유를 물었다. “솔아. 왜 찬성하는지 모두한테 말씀 드려야지.” “응…. 그게…. 그냥이요. 그냥 그런 예감이 들어서요. 왜냐하면…” 예감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안현의 안색이 급격히 변했다. 짧은 순간 이었지만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지? “야! 고작 예감으로 그러는 게 어딨어….” “조용히 해!”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안현을 보며 이유정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안현의 얼굴은 보통 진지한 게 아니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심각한 얼굴로 안솔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솔은 그런 그의 시선을 못 느꼈는지 멀뚱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녀린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예전에는 그냥 막연하게 느껴졌는데…. 오늘 자는데 꿈에 수현이 오빠가 나왔어요.” “잠시만 다들 조용히 해주세요. 솔아. 계속 끝까지 얘기해봐.” “우리가 이 방에서 다들 자고 있는데 커다란 괴물이 나타났어요. 마치 에일리언 같은 괴물이요. 그 괴물은 우리들이 있는 건물에 정확히 와서요…. 모두를 위험하게 만들었어요. 꼼짝없이 그렇게 다들 죽는가 싶었는데, 아니 확실하게 죽은걸 본 것 같아요. 그런데 갑자기 꿈 내용이 변했어요.” “어떻게 변했는데.” “태엽을 감는 것처럼 꿈이 처음으로 돌아가더니 갑자기 수현이 오빠가 나왔어요. 그리고 그 괴물이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달랐어요. 수현이 오빠는 자신이 이 괴물을 막을 테니 우리 모두한테 도망가라고 했어요. 저는 오빠 품에 안겨서 정신 없이 도시를 빠져 나가는 게 문득 오빠 걱정이 돼서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꿈이 끝났어요.” “다른 건 기억 안나니?” “맨 마지막에 끔찍한 괴성? 비명? 아무튼 어떤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우리는 모두 숨을 죽일 정도로 그녀의 이야기를 집중해 듣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과거로 되돌아온 후 처음으로 진심 어린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게 되었다. 아무리 내가 모르는 분야라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솔직한 심정 이었다. 그녀의 능력 수치는 마력 75 포인트 그리고 행운 100 포인트. 내 마력 포인트인 96 포인트는 그냥 그런 포인트가 아니다. 당장 홀 플레인에 들어가서도 마법사로 손꼽히는 능력치란 말이다. 그런 내가 제 3의 눈의 힘을 빌어도 과거를 단 1초만 보는 것도 겨우 허락될 정도인데 그녀는 어렴풋하게나마 꿈의 힘을 빌어 과거, 미래를 본 것이다. 물론 나와 안솔간의 엄연한 차이점은 있었다. 나는 실제로 과거에 있었던 일을 볼 수 있으며 내가 원하는 순간에 힘을 발현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일이 간섭에 의한 건지 실제로 일어난 건지 확신할 수 없고, 무작위로 발현 되는 모양 이었다. 아마 극한에 다다른 행운 포인트 덕분에 꽤나 잘 들어 맞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나는 초기에 품었던 의문 중 하나가 풀리는 것 같았다. 1회 차 사용자 시절 때 이들을 볼 수 없었던 이유는 분명했다. 이들은 그때 어떤 이유로 모여서 이 도시에 왔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틀을 초과해 보스 몬스터에게 당하고 만 것 같았다. 아마 안솔은 그때 그 도시의 유일한 생존자일 것이다. “하아….” 앞쪽으로 안현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얘기를 마친 안솔은 불안한 눈으로 이리저리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안현은 거실 바닥을 손가락으로 딱딱 부딪치며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심란함에 찬 얼굴로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도 수현이 형 의견에 찬성합니다.” “너는 또 왜? 너도 나가기 싫다며…! 지금 동생 편드는 거야?” 이유정이 기도 안 찬다는 얼굴로 바로 태클을 걸었다. 안현은 미안한 얼굴로 잠시 이유정을 보고는 바로 입을 열었다. “편드는 거 아냐. 조금 웃긴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슬쩍 고개를 숙인 안현은 자기 품에 안겨있는 안솔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난 솔이랑 19년 넘게 살아왔어. 그리고 이런저런 일도 많이 있었고. 그때마다 느꼈는데, 얘가 감이 굉장히 좋은 편이다.” 당연하지. 행운 100 포인트로 직감이나 천리안을 얻으면 미래 예지도 가능한데. 물론 랭크가 어느 정도 받쳐주긴 해야 하지만. 속으로 여러 생각을 하고 있자 이유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한탄하듯 말했다. “그 놈의 감, 감, 감. 지긋지긋해.”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 확실해. 실제로 솔이가 불안하다고 느끼면 그때는 꼭 안 좋은 일이 일어났어. 꿈으로 얘기를 듣는 건 드문 편 이지만…. 아무튼 찬성 3표, 반대 1표, 기권 1표로 떠나는 걸로 결정하겠어. 애초에 약조한대로 모두 결론을 따랐으면 한다. 다들 일어나. 바로 행동하자.” “지금 바로 떠나려고?” “솔이가 그런 꿈을 꾼 이상 한시라도 빨리 떠나는 게 편해. 다들 최소한 필요한 것들만 챙기자고. 형. 형은 혹시 모르니까 망 좀 봐주세요.” “Ok. 그러고 있을게. 다 끝나면 불러.” 어제와는 다른 안현의 모습에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석궁을 왼팔에 장착한 후 나는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 미묘하긴 하지만 안현은 확실하게 변했다. 오늘 아침에 혼자서 순찰을 돌고 온 것도 그렇고 이상할 정도로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같았다. 물론 어제 나와 나눈 몇 마디로 바로 내면의 심경을 완벽하게 변하게 하는 건 무리였다. 그러나 최소한 겉으로 보이는 태도라도 바꾼걸 보니 내 말을 들어 일단 할 수 있는 곳까지 최대한 할 생각인 것 같았다. 당연히 긍정적인 변화였기에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주변을 살폈다. 안현의 말대로 떠나려면 지금 떠나는 게 가장 좋았다. 괜히 이리저리 뻗대고 늑장 부리다가 오후에 출발해서 밤에 헤매는 건 절대로 피해야 할 일 중 하나였다. 아침에 출발해서 오후 즈음에 쉴 곳을 마련하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아래층에서는 뭔가 상당히 분주한 기척이 잡히는 게 아무래도 있는 건 최대한 가져갈 생각인가보다. 아직 차가운 기운이 가시지 않은 공기를 마시며 나는 머리가 개운해지는걸 느꼈다. 아마도 박동걸이나 이보림, 이신우 같은 애들만 있었으면 남겠다고 지랄했을 텐데 생각보다 일이 상당히 잘 풀린 편 이었다. 이래서 수준이 높은 사용자들이 모인 게 편하다는 거다. 잠시 박동걸 일행을 위해 묵념. 물리적으로 통과 의례 최고 난이도로 꼽히는 숲 내부와 외곽에서 살아 돌아왔고 심리적으로 함정이 있는 트랩 포인트도 격파했다. 이제 랜덤 확률로도 출현할 가능성이 있는 보스 몬스터나 다른 생존자들만 조심한다면 중앙 게이트로 가는 길은 오히려 쉬운 편 이라고 할 수 있었다. 분명 출현하는 다른 괴물들이…. “저기….” 중앙으로 갈수록 출현하는 다른 괴물 생각을 하려는 찰나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인기척에 몸을 돌아보니 김한별이 서 있었다. 등에 작은 가방을 하나 맨 게 준비가 거의 끝난 것 같았다. “네. 준비는 다 끝났나요?” “저는 다 끝냈어요. 다른 사람들은 아직 하고 있고요.” “그렇군요. 그럼 조금 더 망을 봐야겠네요.”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갑자기 얘기를 하자는 그녀의 말에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고개를 주억이며 답했다. “얼마든지요.” 그녀는 약간 내 눈치를 살피는 얼굴로 내 옆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과연 그녀가 무슨 말을 할까 궁금증이 일었다. 김한별은 그녀 답지 않게 한동안 내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유정이 언니나 안현 오빠한테 뭐 들은 거 있으세요?” “한별씨랑 유정이랑 싸운 거요?” “그것도 있고…. 뭐 다른 거라도요.” 특별히 김한별에 대해서 들은 것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군요. 실은….” 이어지는 그녀의 얘기는 별것도 아니었다. 이유정이 나가자고 했을 때 그녀가 반대했다는 게 전부였다. 솔직히 마지막에 산 사람은 살아야지 라고 말했을 때는 조금 쓴웃음이 나왔지만 그게 그녀의 본심이 아닌걸 알고 있기에 나는 부드럽게 넘길 수 있었다. 어차피 지금 와서 섭섭하다고 해봐야 나만 속 좁은 놈 되고 그냥 시원하게 받아들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차피 홀 플레인 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이라서 별로 화나는 일도 아니었다. “…죄송해요. 그때는 그냥 너무 화가 나 있는 상태였거든요. 입장 바꿔 생각하면 얼마나 불쾌하셨을지….” 언제나 고요한 그녀의 목소리가 풀이 죽은 건 처음 본다. 이유정이랑 관계는 아직 소원한 것 같지만 그건 내가 건드리기 좀 힘들었다. 나는 살짝 웃는 얼굴로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요. 불쾌하지 않아요. 오히려 잘하신 것 같네요.” “…….” “정말이에요. 오히려 냉정하게 상황 판단을 내리신 거죠. 그때 그대로 나갔다면 한별씨 말대로 저를 찾기는커녕 유정이나 현이마저 100% 당했을 텐데요. 별로 사과하실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유정이가 너무 다혈질이라 조금 걱정했는데 한별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다음에도 그러면 똑같이 해주세요. 저는 오히려 그게 더 좋을 것 같네요.” “…고마워요.” 말을 마쳤을 때, 우리는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나는 다시 처음으로 그녀가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정말 살짝 웃어서 찰나간에 불과했지만 그녀의 모습은 확실하게 아름다웠다. 문득…. 홀 플레인의 '그녀'가 뇌리를 스쳤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 0026 / 0933 ---------------------------------------------- 아는 사람들과의 만남. 통과의례에 출현하는 괴물들 중 원숭이와 상당히 닮은 망키라는 놈이 있다. 데드맨과 다르게 일단 괴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에는 들어간다고 봐도 무방하다. 온 몸에 부드러운 털이 복슬복슬 나 있어 방어력은 전무하지만, 행동이 매우 교활하고 최소 네 명에서 다섯 명은 몰려다니는 습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초보 사용자가 혼자 상대하기는 껄끄러운 편에 속하는 괴물이었다. “우끼! 우끼끼!” 그리고 현재, 우리는 사람 크기만한 원숭이 다섯 마리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육중한 몸과 기다란 꼬리를 가진 망키는 가진바 힘은 제법 강력해도 몸이 둔한 괴물이다. 물론 급작스럽게 높이 점프해 내려찍는 경우는 있는데 그럴 때는 낙하지점을 예측해 피하면 별 다른 위험은 없었다. “우끼끼! 우끼끼!” “조심해!” 안현과 김한별은 현재 망키 세 마리와 힘겨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내가 한 마리를 견제하고 있었고 이유정이 나머지 한 마리를 맡고 있으니 수적으로는 불리하다고 볼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수적으로만 말이다. 그때였다. 한창 서로 치고 받던 도중 안현과 싸우던 망키들 중 한 마리가 뒤로 슬쩍 빠지더니 몸을 웅크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방향을 보아하니 아마 나를 노리는 것 같았다. 정상적이라면 지금 당장 위태위태한 이유정을 노리는 게 정상이지만 놈들의 성격상 여성을 노리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워낙 성에 대한 욕망이 강하고 번식 활동에 강한 집착을 가진 놈들이라 암컷 개체들만 보면 발정하는 놈들 이었다. 특히 요정이나(개인적으로 망키들이 요정들을 잡는걸 요원하다고 생각하기는 한다.) 인간 여성들을 보면 눈이 돌아갈 정도로 환장하는 놈들이라 남자들을 다 처리하고 여자들만 잡아갈 생각인 것 같았다. “형! 유정아! 조심해! 한 마리가 안 보이는 것 같아!” 안현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정신 없이 세 마리를 상대 하다가 한 마리가 줄어들자 조금 사정이 나아진 모양이다. 아직 초보면서, 목숨이 오고 가는 전투 중에 한눈을 팔다니. 안현의 말을 들은 순간 이유정의 자세가 더욱 방어적으로 변했다. 한 마리로도 버거운데 두 마리를 상대한다고 하자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든 모양 이었다. 이윽고 몸을 웅크린 망키가 괴성을 지르며 허공 높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이 바로 내가 노린 순간이었다. 핑! 나는 지체 않고 시위를 당겼다. 날카로운 파공음을 흘리며 날아간 화살은 보기 좋게 망키의 머리를 꿰뚫었다. 허공에 떠올라 낙하하는 힘을 이용하는 건 좋아도 본인이 움직이지 못하는 건 생각 못했나 보다. 아니면 맞출 리 없다고 생각 했거나. 내가 지금 애들 연습 시키느라 설렁설렁 하는 거지 마음만 먹으면…. '어휴. 내가 말해서 뭘 하냐.' “오빠! 옆에 조심해요!” 알고 있단다. 허공에 떠오른 놈을 노리는 사이 내 옆으로 돌진한 망키는 나를 짓누르려는 듯 손바닥을 찍었다. 나는 보지도 않은 채 종이 한 장 차이로 공격을 피한 후 오른손에 쥐고 있던 화살로 망키의 머리를 찍었다. 깔끔한 카운터 공격. 손에 쥔 화살의 끝에서 부드러운 육질을 파고드는 느낌이 전해져 들어온다. “끼에에에….” 쿵! 구슬픈 소리를 내며 몸을 허물어뜨리는 망키와, 동시에 마침 허공에 떠올랐던 망키의 시체도 똑같이 땅에 떨어졌다. 단 3초 만에 두 마리를 처치한 셈이다. 얼른 화살을 재고 다시 전황을 살피니 다들 비슷비슷하게 싸우는 것 같았다. 안현은 처음처럼 장검과 방패를 활용하며 싸우고 있었고, 김한별은 장검보다 약간 얇지만 길이는 긴 장검을 어설프게나마 휘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유정은 끝 부분이 뾰족하게 깎인 중 단검 두 개를 들고 날뛰는 중이었다. 보아하니 안현이 전방에서 검과 방패로 둘을 견제하다가 틈이 생기면 김한별이 찔러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유효타가 나오면 안현과 김한별 둘이 순식간에 합공을 하는 방식. 전투는 어설프긴 해도 나름대로 괜찮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반면에 이유정은 리치에서 밀려 안으로 들어가기가 힘든 것 같았다. 아주 가끔 망키의 팔에 상처를 입히긴 했지만 연신 뒤로 물러나며 허공에 애꿎은 단검만 휘두르고 있었다. 하기야 무기를 잡은 지 이제 3, 4일 밖에 되지 않은 애들인데 이 이상을 바라는 건 무리였다. 오히려 수준 높은 사용자라는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통과의례에 적응하고 있었다. 나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이유정이 상대하는 망키를 향해 석궁을 겨누었다. 아주 죽이진 않고 저번처럼 틈만 만들어줄 생각 이었다. 핑! “끼에에에!” 화살이 날아가고, 망키의 오른쪽 가슴에 박힌다. 데드맨처럼 고통을 못 느끼는 게 아니기 때문에 망키는 몸을 비틀거리며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칠 이유정이 아니었다. 망키의 가슴에 박힌 화살을 보자 눈이 반짝이더니 이내 민첩하게 몸을 숙여 아래로 파고들어간 것이다. 기본 민첩 능력치 50포인트의 위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 이었다. “죽어라! 씨발 강간 원숭이 새끼!” 걸쭉한 욕설을 뱉으며 이유정은 평생의 원수라도 만난 듯 힘차게 단검을 교차시켰다. 그와 동시에 옆쪽에서도 안현의 기합 소리가 들리는 게 아무래도 결정타를 먹인 듯싶었다. 일 초, 이 초, 삼 초, 사초, 오 초. 오 초 까지 센 후 일행이 상대하던 망키들을 바라보자 다들 처참한 모습으로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유정이 상대하던 망키는 가슴에 X자가 크게 베인 상태였고 안현과 김한별이 상대하던 망키는 각각 큰 상처 하나와 몸에 잔상을 많이 입은 편 이었다. 초반부터 작은 상처를 착실하게 입히더니 이내 체력이 떨어진 망키들을 상태로 일격을 먹인 것 같았다. 아, 이게 바로 키우는 보람이라는 건가. 세 명은 내가 진즉 해치운 망키 두 마리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연신 거친 숨을 몰아 쉬는 게 어지간히도 긴장한 모양이었다. 하긴 매일 한 마리씩만 상대하다가 갑자기 다섯 마리와 상대했으니 평소보다 힘들긴 힘들었을 것이다. “아…. 쌍. 원숭이 피 뒤집어 썼네. 기분 졸라 더러워.”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피를 뿌려낸 이유정은 땅에 침을 탁 뱉었다. 온 몸에 피를 칠하고 하고 땅바닥에 널브러진 그녀는 마치 전장의 여신처럼 강인하고, 또 아름다운 모습 이었다. 안현과 김한별의 처지도 딱히 낫다고 볼 수는 없었다. 옷은 헤지고 온 몸에는 군데군데 말라붙은 핏자국들이 보였다. 그나마 상태가 낫다고 하면 나와 안솔이랄까? 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상념에 잠겼다. 도시를 떠난 지도 어느새 3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즉 우리들은 첫날 포함 4일 동안 살아있는 것이다. 오늘이 바로 5일차였다. 아마 오늘만 이 속도만 유지할 수 있다면 이르면 6일차에, 적어도 7일차에는 워프 게이트로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5일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의 생활은 단조롭다면 단조롭고, 스펙터클 했다면 스펙터클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말 그대로 걷고, 싸우고, 쉬고, 걷고, 싸우고, 쉬는걸 반복했다. 도시를 떠난 후 처음 맞닥뜨린 괴물인 만드라고라와의 전투에서 우리는 자칫하면 안솔을 잃을뻔했다. 갑자기 땅바닥에서 툭 튀어나와 입을 벌린 상태로 집어 삼키는데 나를 제외한 모두는 비명을 지를 정도로 놀라 자빠진 것이다. 대책 없이 뛰어든 안현도 식물의 가시에 찔려 부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미리 감지하고 있던 내가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다. 그 사건 이후로 김한별과 이유정은 뭔가 느낀 게 있었던 것 같다. 겨우 도달한 세이브 포인트에 비치된 무기를 집더니 앞으로 자기들도 싸우겠다고 선언했다. 안현은 여자애들이 싸우는데 난색을 표했지만 둘의 의지는 확고했다. 물론 안현과 나에게만 전투를 맡기는 게 불안했던지 아니면 정말로 돕고 싶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건 난 둘의 눈동자에서 생존에 대한 강한 욕구를 엿볼 수 있었다. 어차피 슬슬 둘도 연습시킬 필요는 있었기 때문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 이후, 우리는 세이브 포인트를 떠나 숲을 지나가면서 한 명의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정확히 망키들이 출몰하는 장소 초입에서 발견했는데, 바로 여성 사용자였다. 얼굴은 제법 예쁘장했지만 아쉽게도 이미 우리가 발견한 당시 시체가 되어버린 상태였다. 몸에 걸친 옷이 거의 벗겨지다시피 찢어져 있고 온 몸은 벌건 멍 자국으로 가득했다. 음부에서는 아직도 따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하얀 정액이 흘러나오는 게 아무래도 우리가 도착하기 직전까지 망키들한테 당하고 있었던 모양 이었다. 입에 흐르는 핏줄 한줄기를 보니 당하는 도중 견디다 못해 자결한 것 같았다. 이유정은 그 광경을 보며 발광했고 당장에 원숭이 새끼들을 조지자며 광분했다. 우연인지 아닌지 몰라도 우리는 주변에서 성기를 벌겋게 드러내고 있는 망키 다섯 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고 그대로 전투에 돌입했다. 솔직히 애초에 이유정이 지른 고성방가에 망키들 또한 우리한테 접근했다는 게 정답일 것이다. 아마도 실컷 즐기다가 암컷이 죽어버렸는데 새로운 암컷 냄새를 맡았으니 흥분한 상태인 놈들이 그냥 지나갈 리 만무했다. 그리고 결과는 우리들의 승리였다. 한 걸음씩 차분히 나아가자고 생각하며, 나는 상념에서 일어났다. “솔아. 언니 수건 하나랑 물 한별만.” “뭐라고요?” 이유정의 말 실수에 김한별이 날카롭게 쏘아 붙였다. “아아, 쏘리. 힘들어서 말이 잘못 나왔어. 한별이 아니라 한 병만.” “까르르…. 네에…. 언니 고생 하셨어요.” “고생은 개뿔. 도대체 저 오빠는 뭔데 이 원숭이 새끼들을 쉽게 처리하는 거야? 그 석궁 나줘! 나도 석궁 쓸 거야!” 괜한 생떼를 부리는 이유정을 보며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억울하면 너도 강해지던가. '나는 말이다. 처음에는 이렇게 도와주는 사람도 없어서 바닥을 박박 기면서 검을 휘둘렀단다.' 물론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냥 어색한 웃음만 지을 뿐 이었다. 그러나 이제 지들도 무기 좀 휘둘러 봤다고 느끼는 게 있는지, 내가 전투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언가 다른 점이 있다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김한별은 조신하게 앉아서 숨을 고르고 있었지만 안현은 헉헉 거리면서도 나에게 고정한 시선을 치울 생각을 안하고 있었다. “형, 형은 어디 특수 부대라도 나온 거에요? 무슨 석궁을 그렇게 잘 쏴요?” “…요즘 군대가면 다 배워.” “아 오빠 뻥 좀 치지마. 사격이면 몰라도 누가 석궁을 배워?” “서울도 안 가본 녀석이 이긴다고 하더니. 군대나 가보고 말해. 그냥 총만 들고 빵빵 쏘는 연습만 시키는 곳인 줄 알아? 총검술이랑 태권도를 비롯해 단검 활용 술, 표창, 활, 석궁도 기본 무술 소양에 들어간다고.” 내 말에 안현과 이유정 그리고 안솔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오직 김한별만이 피식 웃는 게 내 말이 뻥이라는걸 눈치챈 것 같았다. 딱히 걱정스러운 건 없었다. 이미 확고하게 팀이 자리를 잡은 이상 이정도 드러내 보이는 건 허용 범위 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씨…. 몰라. 지금은 좀 쉴래. 괜히 머리만 아프고.” “쉴 거면 앉거나 일어나서 쉬어. 그러다 습격 받으면 어쩔래.” “몰라 몰라 몰라 몰라 몰라 몰라 몰라 몰라. 솔아. 미안한데 언니 초콜릿 하나만. 배고파.” “솔아 오빠도 줘.” “나도 하나 부탁해.” “네에~. 지금 갖고 가요~.” 이유정, 안현, 김한별의 연이은 부탁에 안솔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안현의 강력한 요청으로 동생은 전투의 직접적인 참가는 제한하기로 했다. 대신, 이렇게 모두의 편의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남을 돕는걸 좋아하는 성향인 듯 안솔도 큰 불만은 없어 보였기에, 이 정도 심부름은 납득하고 넘어갈 만 했다. 방실방실 웃으며 물병을 건네는 안솔을 보며 나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인간은 주변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난 동물이다. 그리고 그게 생존이라는 욕구와 연관된다면 둘을 합한 시너지 효과는 그만큼 극대화된다. 나는 새삼 그 말이 맞는다고 느꼈다. 아무리 수준이 높은 사용자들이라고 해도 불과 며칠 전에 평범한 일상을 즐기던 여성들이 지금 괴물들을 향해 익숙하게 칼을 휘두르고 있다. 처음 괴물을 무찔렀을 때 살아있는 생명체를 죽였다는 감각에 한동안 떨던 나를 생각하자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물론 걱정거리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백 번 양보해서 상대가 자신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괴물들이기 때문에 지금은 부담 없이 무기를 휘두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만약에 상대가 같은 사람이라면? 그때도 지금처럼 머뭇거리지 않을 수 있을까? 솔직히 그 부분도 기회가 된다면 연습시켜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럴 기회는 없었다. “얘들아. 이제 슬슬 일어나자. 오늘도 부지런히 걸어야 노란색 지붕이라도 발견하지. 형도 괜찮죠?” “응.” 레스트 룸 말인가. 중앙 게이트로 갈수록 발견하기 어려울 텐데. 그러나 입 밖으로 낼 필요는 없기에 나는 간단히 대답했다. 안현의 말에 이유정은 약간은 분이 풀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몸에 붙은 이물질을 털고 막 몸을 일으키는걸 보며 나도 생각을 정리하고 자리를 털려는 순간 이었다. 연습을 위해 마력 감지는 꺼둔 상태였지만 주변에서 느껴지는 몇몇의 기척에 순간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이윽고 수풀을 헤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어, 이놈들 뭐야.” 그 순간, 나를 비롯한 일행은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네 명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 2. 문단 이동. 0027 / 0933 ---------------------------------------------- 아는 사람들과의 만남. 무성한 수풀을 헤치고 나온 사람은 총 네 명 이었다. 성비는 남성 세 명에 여성 한 명. 모두 머리는 산발된 상태였고 옷도 헤진 게 거지꼴을 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의 모습도 오십보백보였기에 딱히 비웃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재빠르게 네 명의 특색을 살폈다. 맨 왼쪽에 서 있는 남성은 짧은 스포츠 머리에 오른팔에는 기다란 활을 하나 들고 있었다. 아마 활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인 모양이다. 입을 딱 다물고 우묵한 눈동자로 우리들을 보는 게 과묵한 성격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그때, 왠지 모르게 꽤나 낯이 익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사용자라면 홀 플레인에서 활동했다는 소리. 솔직히 조금 흔하게 생긴 얼굴이기는 했지만, 일단 넘기기로 결정하고 나는 시계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가장 선두에 선 사람은 머리카락을 거의 허리까지 기른 사람이었다. 얼굴도 갸름하고 몸도 호리호리한 편이라 뒷모습을 보면 여성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다부진 턱 선과 날카로운 눈매는 그가 남성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들의 중앙에는 보호받는 걸로 보이는 여성이 있었는데, 단아하게 생긴 외모가 눈에 들었다. 그녀는 불안한 얼굴로 우리를 응시하는 동시에, 주변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가장 오른쪽에는, 단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이를 씩 드러내고 있는 남성이 있었다. 척 봐도 까불거리는 게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가장 선두에 선 남성은 우리를 흘끗 보았다. 그리곤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랑 비슷한 생존자인 것 같은데.” “생존자는 저번에도 만났으니 놀라울 건 없다.” 활을 든 남성이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단검을 던지고 받는 놀이를 하던 남성이 우리를 보며 픽 웃음짓고는, 예상대로 까불거리기 시작했다. “쯧쯧…. 보아하니 스무 살 초반? 어린애들이네…. 불쌍한 놈들.” 그 말에 안현이 발끈 했는지 방패를 상단으로 올리며 한걸음 나섰다. 나는 재빨리 그의 어깨를 잡은 후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였다. 다행히 내 신호를 알아들었는지 안현은 이를 바드득 깨물고는 다시 한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단검을 던지던 까불이는 기도 안차는 헛웃음을 흘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저놈 봤어? 저기 양아치 같이 생긴 녀석. 방금 전에 내 말에 발끈 했다니까. 나 참, 뭔 말을 못해요. 무섭네.” “네가 먼저 시비 걸었잖아. 넌 빠지고 일단 정민이한테 맡겨봐.” “…체.” 활을 든 남자가 타박하듯 말하자 그는 입을 삐죽거리곤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애들의 얼굴은 이미 싸늘하게 굳은 상태였다. 하긴 우리는 안중에도 없는 듯 자기들끼리만 떠드는데 속이 상할 만도 했다. 그렇게 서서히 긴장감이 치솟는 순간, 긴 머리 남성이 입을 열었다. “일단 만나서 반갑다. 내 이름은 우정민이라고 한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이 거지 같은 곳에 우연히 떨어진 사람이지.” '우정민. 붉은 송곳니 클랜 로드?' 순간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에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 악마로 불렸던 쌍 단검을 트레이드 마크로 사용하는 놈. 설마 지금 눈 앞에 보이는 놈이 우정민 이라고…? 나는 얼른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 이름(NAME) : 우정민 * 성별(SEX) : 남성(26) * 신장 • 체중 : 177.9cm • 65.7kg * 성향 : 중립 • 혼돈(True • Chaos) 『능력』 * [근력 51] [내구 43] [민첩 59] [체력 48] [마력 55] [행운 36] 우정민의 사용자 정보는, 통과의례에서 평균으로 따져 안현을 능가하는 사용자가 없을 거라는 생각을 가볍게 부수고 말았다. 그리고 눈 앞의 남자가 후에 연합군의 주축을 담당하는 붉은 송곳니 클랜의 로드 우정민 이라는 사실은 나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안현. 이하 동문.” 안현이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우정민 일행에서는 한층 소란이 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자연스럽게 온 몸의 감각을 예민하게 끌어 올렸다. 정말, 정말 저놈이 우정민이 맞는다면 나머지 애들은 몰라도 적어도 활을 든 놈이 누군지는 알 것 같았다. 분명 홀 플레인 후반부에 10강의 한 자리를 담당하는…. 순간 죽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털어버렸다. 분명 나 혼자 여기 있었다면 망설임 없이 죽였을 테지만 애들이 있는 상태에서는 불가능했다. 어느새 우리 일행과 우정민 일행은 자연스럽게 무기를 빼어 들고 대치하고 있었다. 까불 남은 불쾌한 목소리로 안현을 보며 이죽였다. “하여간 이래서 어린 놈들은 잘해주면 안돼. 안현이라고 했나? 죽고 싶지 않으면 말투부터 공손하게 하는 게 좋을 거다.” “오빠. 지금 싸울 시간 없어.” “이런 거 한두 번이야? 죽이는 건 금방이야. 넌 그냥 조용히 기다려.” 처음으로 중앙에 있던 여성이 입을 열었지만, 까불 남은 바로 받아 쳤다. 그의 대답에 그녀는 무서울 정도의 눈길로 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여성의 짜릿한 시선을 받은 까불 남은 입을 쩝쩝 다시곤 이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아~.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니까 째려보지마. 잡아 먹어버리기 전에. 아. 농담. 농담. 얘는 뭔 농담을 못해…. 아무튼 좋아. 거기 애송이들아. 이 어르신은 천승현이라고 한단다. 너희들에게 한가지 묻고 싶은 게 좀 있는데, 이 다섯 마리 원숭이들 말이야. 너네 들이 잡은 거니?” “그랬다면 어쩔 건데.” 천승현이라. 넌 홀 플레인에서 만나면 뒤졌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낭랑한 목소리가 주변 공기를 울렸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잔뜩 돋쳐 있었다. 제발 이유정만이 나서지 않기를 바라고 바랬는데 역시나 였다. 애초에 자존심이 강한 이유정인데다가 박동걸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보이는 천승현이 보이니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이유정의 말에 그는 눈을 끔뻑끔뻑 하더니 박장대소하며 웃어 젖혔다. “푸하하하~. 하이고…. 참자, 참자, 참자. 큭큭, 이 망할 가시나 야. 딱 여기까지 봐준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기분이 그리 넉넉하지가 못해요. 또 정~말, 무~지, 많~이 바쁘고요. 응? 그러니까 우리가 묻는 말에만 성실하게 대답하고 얼른 빠이빠이 하자고. 참. 말은 곱게해라잉. 아니 뭐, 굳이 안 해도 돼. 이 이상 경고는 안 할거니까.” 천승현의 일장 연설을 듣고 있던 이유정은 순간 그 특유의 비웃는 얼굴이 되었다. “미친놈. 에라 이 병신 같은 놈. 경고 안 하면 어쩔 건데.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깝치는거 봐. 찌질 한 새끼.” 역시나 이유정의 입담은 시원했다. 천승현은 어떻게 보면 딱 박동걸과 비슷한 과의 사람이었다. 이유정이 표독스런 얼굴로 독설을 내뱉자 그는 예상외로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한숨을 푹 쉬며 단검을 집는 게 보였다. 나는 왼손에 힘을 주었다. “애새끼들이나 계집들이나 꼭 때려야 말을 들어요. 아무튼 잘 가라.” 씨불딱거리던 천승현은 이내 오른손을 들더니 이유정을 향해 있는 힘껏 내리쳤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가 가지고 놀던 단검 하나가 쏜살같은 속도로 미간을 노리고 오는걸 볼 수 있었다. 막 이유정을 잡아 당기려는 찰나 방패를 앞세운 안현이 재빠르게 움직이는걸 볼 수 있었다. 처음부터 그 남자를 잔뜩 경계하고 있었는지 안현은 방패를 단단히 쥔 상태로 유정의 앞을 막아 섰다. 그리고 나는…. 캉! 피잉! 푸욱. “으아아아악!” 단검은 강한 쇳소리를 내며 방패에 부딪쳐 떨어지고 말았다. 동시에 천승현은 화살이 박힌 오른손을 붙잡으며 나자빠지고 말았다. 상황은 간단했다. 안현이 단검을 막는 사이 나는 궤도를 수정해 그 놈에게 화살을 쏜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활을 든 남자가 시위를 걸고 나를 노리려는 기척을 파악하고 나 또한 먼저 화살을 쏘아내려고 했으나 팅, 하고 빈 시위만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다급한 마음에 이번에는 본신의 힘을 끌어내 순식간에 화살 3개를 장전하고 그 놈의 미간을 향해 석궁을 돌렸다. 그리고 동시에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 이름(NAME) : 선유운 * 성별(SEX) : 남성(25) * 신장 • 체중 : 180.9cm • 78.4kg * 성향 : 중립 • 중용(True • Neutral) 『능력』 * [근력 45] [내구 48] [민첩 62] [체력54] [마력 50] [행운 50] 끼릭! 철컥! 선유운. 역시 그 놈이었다. 궁수라는 직업으로 홀 플레인 최강의 자리인 강의 한 자리를 차지한 사용자. 다른 놈을 향해 화살을 날렸고 새로 장전하는 동안 시간의 차이는 있었다. 그러나 능력치 포인트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내가 훨씬 높을 텐데 선유운은 나와 거의 동시에 머리를 겨누고 말았다. 굳이 따지면 내가 근소하게 빨랐지만. 선유운도 그걸 깨달았는지 처음의 먹먹한 눈과는 달리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일행들 사이에는 사늘한 기류가 감돌았다. 서로 한동안 침묵이 맴돌았지만 안현과 이유정, 김한별이 각자의 무기를 꾹 움켜쥐는 게 느껴졌다. 이 지경에 와서도 여차하면 싸우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걸 보니 내심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천승현은 바닥을 떼굴떼굴 구르며 정신을 사납게 만들고 있었다. “으아아, 으아아악! 죽여! 야! 저 씨발 새끼 당장 죽여! 죽이라고!” “…먼저 단검을 날린 건 너다. 승현. 그러니 제발 입 좀 닥쳐다오. 이 쪽 팔린 놈아.” 난리를 피던 천승현은 서슬 퍼런 우정민의 말에 징징 울면서 오른손을 감싸 안았다. 흘끗 시선을 돌려 이유정을 보니 몸을 미약하게 떨고 있는 게 아마 진짜 단검을 날릴 줄은 몰랐던 것 같았다. 처음부터 묵묵히 상황을 살피던 우정민은 천승현은 잠시 한심하게 바라보고는 이내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단 먼저 사과하겠다. 아무튼 이 정도에서 서로 그만 하지 않겠나? 지금 이러는 것도 서로간에 별 이득은 없어 보이는데.” “그러고는 싶은데 옆에 놈이 활을 안 내리네.” “선유운. 너도 그만해. 시위 풀고 활 내려.” 내 말을 들은 우정민은 손을 들어 선유운의 활을 강제로 내리게 했다. 다행히 선유운도 나를 잠시 보더니 활을 순순히 내렸다. 그들이 내리는걸 확인한 후 나는 천천히 왼팔을 내렸다. 그러나 아직 나도 선유운도 장전을 푼 상태는 아니었다. 우정민은 우리 일행을 보더니 양손을 위로 올리고 한걸음 앞으로 걸으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군. 원래 이런 놈들이 아닌데 근래 좀 힘든 일이 있다 보니 본의 아니게 거칠어진 상태다. 일단 뭐 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시간이 촉박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될까.” 일행들은 전부 나를 쳐다봤다. 심지어 안현마저도.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던 바다.” “이 원숭이들은 어제부터 우리가 추적하던 놈들이다. 모종의 사정으로 아주 잠시 자리를 비웠는데…. 그 동안 우리 일행에 있던 한 명이 이놈들에게 납치 당하고 말았다. 대신 처리해준 건 고맙게 생각하지만, 혹시 근방에서 여자 한 명 본적 있나?” 여성 사용자라…. 혹시? 나는 초입에서 망키들한테 강간 당해 자결한 여성 한 명이 머리에 떠올랐다. “오빠. 혹시 그 노란색 옷 조각 남은 그 여자 말하는 거 아닐까? 등까지 오는 긴 머리랑. 응?” 나는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말았다. 도대체 얘는 생각이라는걸 하는 걸까. 어떻게 멍청해도 이렇게 멍청하지. 생각 없이 바로 말해버리는 이유정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차버렸다. 이유정의 말을 들은 저쪽 일행들은 순식간에 얼굴이 밝아지더니 바로 우리를 향해 물었다. 그 중 가장 큰 목소리를 낸 여자는 처음에 시간이 없다고 말한 여성이었다. “네! 맞아요! 노란색 옷이랑, 긴 생머리에요! 혹시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아…. 그게….” 이유정은 당황한 목소리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도 서로 눈치만 보고 대답이 없었다. 아마도 망키 출몰 장소 초입에서 본 그 여자가 확실한 것 같은데 괴물한테 강간당하다 죽었다고 말하기는 뭔가 미안한 분위기였다. 우리들이 서로 눈치만 보고 있자 남자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마 대충 뒤에 이어질 내용을 짐작한 것 같았다. 그러나 여자는 여전히 애원하는 목소리로 우리를 보채기 시작했다. “혹시 가다가 지나치기라도 했나요? 아니면 언뜻 보기라도 했나요?” “…….” “제발 요. 부탁 드려요. 어디서 봤는지 만이라도 알려주세요. 그 애, 제 친 여동생이에요. 정말 착하고…. 순수한 앤데…. 흑….” 끝내 눈물을 보이는 여성을 보며 일행들은 다시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까는 잘만 싸우던 녀석들이 꼭 이런 곤란한 건 나에게만 떠넘기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착잡한 한숨을 내쉬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 0028 / 0933 ---------------------------------------------- 아는 사람들과의 만남. “이곳에 오면서 여자를 본 적은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본 여성이 그쪽 사람들이 말한 대로 납치된 사람이라는 건 확신할 수 없습니다. ” 최대한 충격을 덜 받게 하려는 의도가 깔린 말 이었다. 그러나 여성의 눈을 여전히 확신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내 말에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이곤 대답했다. “괜찮아요. 지금 저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거든요. 긴 생머리면 몰라도 노란색 원피스라면 거의 확실할 거에요.” “노란색 원피스라 해도…. 조각조각 찢어진 상태라서 일부를 확인했을 뿐 입니다.” “뭐…. 라고요?” 내 말에 여성은 순간적으로 말을 더듬고 말았다. 우정민, 선유운, 천승현 세 명은 이미 손을 꾹 쥐는 게 아마 다음에 이어질 말을 예상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는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떨리는 목소리로, 아닐 거라는 희망을 담은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왜, 왜 옷이 찢어져 있었던 거죠?” “저희가 발견했을 당시 그 여성은 나무에 몸을 기댄 상태로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가가서 확인해본 결과…. 이미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원혜수…!” 원혜수란 불린 여자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멍한 얼굴이 되더니 휘청거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옆에 있던 천승현이 얼른 그녀를 받았지만 이미 다리는 완벽히 풀렸을 것이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아픔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원혜수라 불린 여성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혜연이는 어떻게 죽어 있던가.” 그러나 이미 현실을 받아들였는지 우정민은 담담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하지만 착잡한 음성이 물씬 묻어 나오는 게 마음이 적잖이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잠깐 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는 여전히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입을 열었다. “괜찮아.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어. 그냥 있는 그대로만 말해주면 돼.” “…입가에 핏자국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혀를 깨물어 자살한 것 같습니다.” “아니. 잠시만. 그럴 리 없다. 그 애가 자살할 리가 없어.” “발견했을 때 거의 나체나 다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음부에서 저 원숭이 괴물의 것으로 추정되는 체액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내 말이 끝나던 순간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 앉았다. 그만큼 우정민은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눈에 살기가 감돌고 주먹을 꼬나 쥐는 게 지금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보였다. 옆에서 가만히 듣던 선유운도 눈에 핏발을 세울 정도니 새삼 이들이 느끼는 상실감과 분노를 생생히 전달 받을 수 있었다. 그때였다. 내 말을 들었는지 풀린 눈으로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던 원혜수의 비명이 들렸다. “하…. 하하…. 하…. 하아아아아아아아아!” “혜수야! 정신차려!”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 기세가 몹시 사나워 비교적 유들유들한 태도를 보이던 천승현도 한 발자국 물러서고 말았다. 원혜수는 상실감을 이기지 못했는지 양 손으로 바닥을 쥐어 뜯으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니야! 혜연이가! 혜연이가 죽었을 리 없어! 거짓말이야! 거짓말! 혜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원혜수! 정신 차려! 우리도 진태를 잃었잖아. 기억 안나? 그때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냉정하게 현실을 보라고 말했으면서 지금 네가 이러면 어떡해!” “시끄러! 혜연이는! 혜연이는!” 미친년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원혜수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고 말았다. 그녀는 분노로 비틀린 입가를 내비치더니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에게 달려들었다. 깜짝 놀란 선유운과 천승현이 얼른 양 팔을 잡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악을 지른다. “거짓말! 거짓말 하지마! 죽었을 리 없어! 거짓말이지? 그렇지? 응? 거짓말이고 말해…! 말하란 말이야아아아아악!” “혜수야…. 일단 가서 확인해보자. 응? 진정하고.” 천승현이 계속 달래곤 있었지만, 원혜수는 이미 거의 반 실성한 상태였기 때문에 귀에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하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시체는 이 뒤로 쭉 뻗은 길을 30분 정도 따라가시다 보면 나올 겁니다. 그 주변에 나무가 많지는 않거든요. 동생분 일은 유감입니다.” “이 나쁜 새끼! 네가 혜연이를 죽였어! 죽었다고? 거짓말 하지마! 아니야. 그때 혜연이가 당하는걸 보면서 비겁하게 도망쳤지? 살릴 수 있었는데 도망친 거지? 이 개 같은 비겁한 새끼야아아아!” “뭐라고? 이 미친년이…. 오빠?” 안쓰럽기는 했지만 내 욕을 하는 건 참지 못하겠는지 막 나서려던 이유정.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유정은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지만 내 엄한 얼굴을 봤는지 얌전히 물러났다. 그때, 조용히 하늘만 보던 우정민은 이내 담담한 얼굴로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짝! 나를 비겁자라고 저주를 퍼붓던 원혜수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옆으로 돌아갔다. 발개진 얼굴로 믿을 수 없다는 듯, 옆을 쳐다본 그녀의 눈은 우정민의 손에 고정 되어 있었다. 우정민은 실망감이 가득한 얼굴로 원혜수를 내려다보았다. “그만해라. 원혜수. 더 보기가 역겹구나.” “뭐, 뭐?” “현실을…. 후, 아니다. 지금 너한테 무슨 말을 해도 들을 것 같지는 않군. 엄한데 화풀이 하지 말고 현실을 받아들여라.” “하…. 그래. 다 필요 없어. 자기들 동생 아니라 이거지. 그래~. 그렇겠지. 너희들한테는 고작 4일 동안 만난 인연일지 몰라도,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달라. 20년을 넘게 함께 살아왔다고. 그런데 뭐? 현실을 받아들여?” 독기 어린 음성으로 말하는 원혜수를 선유운은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끝내 그녀의 눈길을 외면해버리고 말았다. 그가 고개를 돌리는걸 확인한 원혜수는 이내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제 3자가 봐도 그녀는 지금 미쳤다고 싶을 정도로, 주위로 실망, 좌절, 불안, 혼돈 등 온갖 마이너스한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원혜수, 너 미쳤어? 단검 날린 내가 할말은 아니지만 네가 이러면 안되지! 일단 진정하고 정신 줄부터 잡자. 너 도대체 왜이래?” “그래. 나 미쳤어. 차라리 미치고라도 싶어. 그러니까 이거 놔. 노라고 그만!” 갈수록 히스테릭이 심해진다. 우정민은 깊은 한숨을 내쉰 후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미쳤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도 여기서 진태를 잃었다. 그러니 그토록 사이가 좋고 애지중지하던 동생을 잃은 심정 또한 알고 있다. 아마 너와 동생이 4일 동안이라도 어떻게 지내는지 한번이라도 봤다면 누구도 네 심정을 공감하고 또 동정할 것이다. 그리고…. 아직 그 사람이 원혜연이라는 보장도 없다.” “거짓말 하지마. 그래! 지금 쟤들이 거짓말 하는걸 수도 있잖아. 애초에 옷도 일부만 본거라 매? 나 지금 가볼래. 갈 거야. 아마, 아니 분명 혜연이가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 인간은 자기 합리화의 동물이라고 한다. 초반에는 그렇게 확신하던 원혜수는 어느덧 180도 태도를 바꾸고 있었다. 애원 했다가, 좌절 했다가, 분노 했다가, 다시 희망을 가진다. 말 그대로 미쳐가는 것이다.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조건 희망적인 쪽으로만 해석하고 있었다. 저런 사람들을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착잡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만해. 너도 그때 혜연이가 원숭이 괴물들한테 잡혀가는걸 봤잖아.” “안 가면 나 혼자서라도 갈 거니까. 이제 이거 그만 놔. 가야 해. 지금 갈 거라고.” “…정민아. 일단 우리도 가보자. 가서 확인해보고…시체라도 있….”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던 천승현은 이내 원혜수의 눈동자가 날카로워 지는걸 느꼈는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천승현과 선유운이 잡았던 팔을 풀어주자 그녀는 나를 한껏 째려보고는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 어색한 눈치만 보다가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따라갔다. 그러나 아직 우정민은 자리에 남아 있었다. “괜한 일에 말려들게 했군. 미안하다. 나도 4일 밖에 보지 못했지만 그 정도로 혜수와 혜연이는 서로를 아꼈어.” 안현은 공감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른팔로는 안솔을 꾹 안고 있는 게 아무래도 불안한 모양 이었다. 씁쓸한 얼굴로 둘의 모습을 보던 우정민은 이내 나에게로 시선을 돌리더니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복수를 대신 해줘서 고맙다. 손을 덜었어. 그런데…. 설마 네가 한 말들이 거짓말은 아니겠지?” “뭐라고?” 순식간에 발끈하고 나서는 이유정을 본 후 우정민은 김한별, 안솔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더니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긴…. 그럴 애들로 보이지는 않는군. 실례했다. 나도 그만 가봐야겠군.” “거듭 그분의 일은 유감입니다. 아쉽지만 저희도 바빠서. 그럼 저희도 이만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아, 잠깐만. 거기 석궁. 잠깐만 이리 와봐.” 갑자기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나는 그를 흘끗 보고는 천천히 그의 앞으로 걸었다. 이윽고 그의 앞에 그는 일행을 살핀 후 나한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죽이고 말을 걸었다. “보답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내가 한가지 정보를 주마. 너희들 지금 중앙의 워프 게이트로 가는 중이지? 대답하지 말고, 고개만 살짝 끄덕여.” 바로 고개를 끄덕이자 이윽고 우정민은 은근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 0029 / 0933 ---------------------------------------------- 왜 그러시는 거에요?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너희도 정 중앙에 있는 워프 게이트로 가는건가?' '갈 수 없을 거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가지 마라. 우리는 불과 이틀전 워프 게이트 근처까지 다다를 수 있었어. 하지만 실패했다. 불과 300미터를 남기고 말이야.' '왜냐고? 발만 동동 구르다 결국 후퇴하기로 결정했거든. 그때 결정을 조금만 더 빨리 했다면…. 진태가….' '생존 조건은 알고 있지? 그냥 7일을 버티는 게 더 좋을 거다. 특히 그 놈은 절대로 상대할 수 없어. 그때 진태 그 놈이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 꼼짝없이 그 괴물한테 죽었을 거다. 꽤 거리가 떨어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 괴물은 정확히 우리가 있는 곳을 노려봤다.' '그 괴물은….' * 보스 몬스터의 출현 조건은 포인트 지점마다 지정된 기간을 체류하지 않을 것. 랜덤 출몰이라는 조건도 있지만 이건 예측할 수 없는 사항이다. 솔직히 나는 워프 게이트 근처에서 보스 몬스터가 출현한다는 것 보다는 우정민 일행이 3일만에 워프 게이트에 도달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하긴 나중에 홀 플레인에 명성을 울리는 우정민과 선유운이 있으니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문득 울부짖던 원혜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나를 보며 저주의 말을 퍼부었지만 딱히 거슬리는 건 없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상실감은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때 그랬다. 형과 그녀를 잃고 난 후 나는 한동안 미쳤었다. 아마 그때 손에 묻힌 피만 순수하게 모아도 웅덩이 몇 개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안현.” 잘 걷던 도중 이유정이 안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안현이 고개를 들어올리자 그녀는 평소 답지 않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고마워.” “뭐가.” “…아까 구해준 거 고맙다고.” 안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생각이 떠올랐는지 ”아하.”거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하여간 너는 그 성깔이 문제다. 성질 좀 죽이고 살아. 내가 처음부터 그 놈을 경계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러면 너 얄짤 없이 이마에 단검 꽂혔다.” “그 놈이 말을 열 받게 하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평소에 수현이 형한테 하는 것 반만큼만 다른 사람들한테 해봐라. 아니면 한별이 성격의 절반만 닮던가. 얼굴만 반반하면 뭐해. 성격이 개차반인데.” “바…. 반반? 정말…? 아…. 흐, 흥! 수현이 오빠는 우리 때문에 고생 많이 하니까 그런 거고. 아무튼 난 싫은 건 싫어.” 안현의 반반하다는 말에 얼굴을 붉힌 유정은 팩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렸다. 의외로 소녀다운(?) 행동을 보이는 유정을 보며 안현의 눈이 휘둥그래지고 말았다. 이 정도만 해도 장족의 발전 이었다. 또 말다툼을 벌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스럽게 잘 넘어간 것 같았다. 그때였다. 두 명의 대화를 듣던 안솔이 안현의 옷깃을 꾹 쥐자 안현은 자동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안솔의 헤실 거리는 얼굴을 보며, 이유정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오직 둔한 안현만이 자기를 둘러싼 모종의 암투를 모른 채 열심히 주변을 살피며 나아가고 있었다. 하여간 왜 꼭 인기 있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둔해 빠진 걸까. 쯧쯧. 한동안 열심히 걷던 우리는 해가 넘어갈 즈음 세이브 포인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는 동안 단 한번의 몬스터도 만날 수 없었다. 일행들은 운이 따른다며 좋아했지만 마냥 기뻐할 일만은 아니었다. 숲을 떠난 이후 도시에 잠깐 있던 때를 제외하고는 우리는 항상 괴물의 습격에 시달렸다. 오죽하면 안솔이 망키의 시체들을 보며 비명도 지르지 않았겠는가. 물론 내가 일부러 괴물들을 만나게끔 유도한 것도 있지만, 어쨌든 일행은 그 동안 고생한 만큼의 보답을 받고 있었다. 워프 게이트를 둘러싼 주변 지대에는 어느 정도 지능이 있는 괴물들이 모여 있다. 통과 의례 최상위권에 포진한 망키 다섯 마리를 처치한걸 봐도 그랬다. 그네들은 그 동안 수많은 괴물들이 일행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예민한 후각은 우리에게 묻은 비릿한 피 내음을 맡을 테니까. 분명, 나는 그렇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우정민과 이야기를 나눈 후 생각을 바꾸고 말았다. 만약에 보스 몬스터가 출현했고 워프 게이트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면, 먹이사슬의 정점에 군림하는 보스 몬스터를 근처에 두고 활동할 간 큰 괴물들은 없을 것이다. 즉 내일도 가면서 괴물을 만나지 않는다면, 우리도 우정민네 일행처럼 워프 게이트를 앞두고 보스 몬스터를 만날 확률이 높다는 소리였다. 아이러니한 상황 이었다. 보스 몬스터를 피하고자 일부러 도시를 떠난 건데 다시 보스 몬스터를 마주칠 위험에 처하고 말았다. 물론 두 상황의 차이점은 있었다. 도시에 있었다면 100% 만났을 테지만 지금 간다면 확률을 예측할 수 없었다. 한동안 생각을 하다가 나는 한가지 의문점에 들었다. 분명 보스 몬스터의 출현 조건은 존재한다. 그리고 통과 의례의 생존자들은 우리들만이 아니라 여럿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분명 동시에 보스 몬스터의 출현 조건을 맞추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거기다 워프 게이트로 접근하는데 보스 몬스터가 높은 확률로 출현한다는 가정까지 더하면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문득 나는 통과 의례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걸 느꼈다. 홀 플레인에서는 10년 동안 굴러 먹으면서 웬만한 건 연구를 마친 상태지만 통과 의례는 아니었다. 고작 사용자들이 가끔 얘기하는걸 우스갯소리가 흘려 들은걸 단편적으로 기억하고 있을 뿐 이었다. 가슴이 답답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뭔가 찜찜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동안 걷던 우리는 이윽고 포인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노란색 지붕이네요. 그런데 오두막처럼 생겼어요.” “다행히 오늘도 발견했네. 그럼 약간 이르지만 오늘은 여기서 쉬는 걸로 하자고. 형, 괜찮죠?” “하루 이상 머물지 말 것. 경고문은 여기도 있네. 아무튼 저번 보다는 그래도 나은 것 같은데. 그렇지 오빠?” “나 먼저 들어갈래요. 빨리 몸을 씻고 싶어요. 옷도 갈아 입고 싶고요. 헤헤.” “…….” “형?” “오빠?” “응? 어, 그래. 그러자.” 황급히 고개를 주억이자 모두들 이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시 내 얼굴을 보다가 다시 조잘조잘 떠드는 일행들을 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철 없는 녀석들. 이래서 단체 행동이 불편하다. 아마 나 혼자 단독으로 움직였다면 이미 홀 플레인에 입장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어차피 지금 고민해도 딱히 묘안이 떠오르지 않아 일단 생각을 접기로 했다. 그러면서 내가 상당히 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서는 생존과 직결 되는 문제가 생기면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하고 어떻게든 수를 내려고 애를 썻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미 내 마음속 한구석에는 수틀리면 뭐든지 베어버린다는 인식이 깊게 박힌 상태였다. “오빠. 뭐해? 우리 먼저 들어간다!” “…지금 갈게.” 나를 보며 해맑게 손을 흔드는 유정이를 보며 나는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 일단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고 싶었다. * 밤이 깊었다. 나는 오두막집 입구로 올라가는 계단에 걸터앉아 불침번을 서고 있었다. 더 이상 불침번은 나와 안현 둘만 서지 않는다. 나와 안현, 김한별, 이유정 네 명이 번갈아 가면서 서고 있었다. 정확한 교대는 알 수 없지만 적당히 시간이 지났다 싶으면 다음 사람과 교대하고 있었다. 초 번은 이유정이고 그 다음이 바로 나였다. 세 번째가 한별, 말 번이 안현 이었다. 한 사람당 2시간 정도 서는데, 분명 1시간도 지나지 않아(내 느낌상.) 이유정이 교대하자고 생떼를 부렸다. 말하면서도 흘깃흘깃 내 얼굴을 피하는 게 분명 자신도 부끄러운 짓을 한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자 초코바 하나가 잡혔다. 대충 져주기로 하고 나가려고 하자 그래도 미안했는지 유정이 내 품에 찔러 넣어 주었다. 몰래 공쳐둔 모양 이었다. 식량이나 음료는 부족한 점이 없어 딱히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슬슬 한별이와 교대를 할 시간이니 대충 초코바 하나 씹고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막 봉지 하나를 뜯으려는 찰나 내 오른쪽 뺨으로 커피 음료 하나가 불쑥 내밀어졌다. 고개를 돌리니 김한별이 허리를 구부린 상태로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런걸 숨겨두고 혼자만 드시네요.” “…유정이가 준거에요.” “그 언니 단것, 특히 초콜릿은 양보 안 하시던데요.” “불침번 시간을 지키지 않았거든요. 생떼부린 게 미안했는지 주더라고요.” 내 말에 김한별은 쓴웃음을 짓고는 내 옆에 걸터앉았다. 초코바를 반으로 뚝 잘라 건네니 넙죽 받아 든다. “잘 먹을게요.” “나도 잘 마실게요.” 김한별도 처음보다는 훨씬 편하게 나를 대하고 있었다. 이유정 같이 발랄하게 지내는 건 아니었지만, 여전히 거리는 있었지만 조금은 줄어든 느낌 이었다. 다만 일행 중에서 아직도 우리만 서로 존댓말을 유지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굳어지다 보니 이제 서로 존댓말을 하는 게 왠지 암묵적인 약속인 것 같았다. “무슨 깊은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요? 제가 온 것도 모를 정도시던데.” 알고 있었어. 그냥 모른 척 했을 뿐이지. 라고 속으로 말했지만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넘긴 후 입을 열었다. “하하, 잠시 멍을 때렸나 보네요. 그런데 제가 표정이 안 좋다고요?” “네. 오늘 오후에 그 남자랑 무언가 말을 한 후 조금 굳어버린 것 같아요. 아닌가요….” 그런가. 항상 조용한 표정을 유지했다고 생각 했는데. 나도 모르게 내 얼굴을 쓰다듬자 김한별은 담담히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그때 무슨 말을 한 거에요?” “…별거 아니에요.”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에요. 현이 오빠도, 유정이 언니도, 솔이도 다들 은근히 불안해 하고 있어요. 그 뒤로 거의 말이 없으셨잖아요.”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요. 다 잘 풀릴 겁니다. 그건 확신해요. 설령 뭔 일이 있다고 해도 잘 해결될 겁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이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초코바와 남은 커피를 한입에 털어버렸다. 왠지 얘랑 얘기할수록 그녀의 기억이 강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불침번을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막 몸을 돌려 계단을 오르려는 찰나였다. “잠시만요. 아직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소설이나 만화, 드라마에서 보면 이런 경우 남자 주인공을 그냥 시원하게 보내주던데. 얘는 왜 안 그러는 거지? 김한별의 태클이 또 시작될 것 같은 느낌에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원래 내 다음 차례가 안현 이었는데 굳이 김한별이 한다고 할 때 이상한 촉이 오기는 했었다. 나는 최대한 상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조금 피곤하네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내일 하면 안될까요? 얼른 들어가 자고 싶어서.” “저는 지금 듣고 싶어요.” “저 어디로 안 도망갑니다.” 점점 심각해지는 분위기에 일부러 농을 던져봤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김한별은 어느새 처음의 차가운 얼굴을 하고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다시, 김한별의 얼굴 위로 그녀의 얼굴이 오버랩 되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물을 수 없을 것 같은 감이 들어요.” “아아, 그때 한 말이요?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그게 뭐냐 면요…” “오빠.” 나는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단순히 오빠 소리를 들어서? 아니었다. 오빠 소리 들었다고 좋아하는 변태는 아니다. “수현이 오빠. 제가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에요.” 김한별의 얼굴은 여전히 차갑고 고요했지만 평소와는 다른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화를 내고 있었다. 도망가지 말라는, 지금 이 자리에 있어 달라는 기세를 풍기며 그녀는 정면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지금 그녀가 진심이라는걸 깨달았다. 그에 따라 내 표정도 내려 앉았고 차분한 눈동자로 김한별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그때서야 그녀의 말문이 열렸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 0030 / 0933 ---------------------------------------------- 왜 그러시는 거에요? “오두막을 발견한 후 오빠가 잠시 주변을 둘러본다고 나가셨잖아요. 그때 우리들끼리 오빠 얘기를 했어요.” “무슨 얘기를 했는데요.” “오늘 만난 다른 생존자들 이야기를 했어요. 그때 한 남자가 유정이 언니한테 단검을 던졌잖아요. 그리고 그때 오빠가 화살로 그 남자의 손을 맞추셨잖아요?” 김한별의 말에 나는 묵묵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 당시 나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다. 우정민과 선유운이 죽자고 덤볐다면 내가 본 실력을 드러내지 않는 한 우리도 분명 한두 명은 죽었을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차하면 일단 한 놈 묶고 시작할 생각 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현 오빠는 방패로 단검을 막았고요.” “그렇죠.” “다들 안현 오빠는 대단해, 고마워. 치켜 세워주고 있어요. 그런데 오늘 오빠의 행동을 보고는 뭐라고 하는지 알고 있나요?” “…….” 순간 뒤에 나올 얘기가 어렴풋이 짐작이 갔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김한별이 먼저 말문을 열고 말았다. “다들 앞에서 말만 안하고 있지 놀란 기색이 역력해요. 안솔 걔는 무섭다고 울먹거릴 정도였어요. 안현 오빠랑 유정이 언니도 어느 정도 충격을 먹은 얼굴 이에요. 그게 끝이 아니에요. 오늘 그 여자한테 너무 직설적으로 말했다고 탐탁지 않아 하고 있어요.” “흠. 그렇군요.” 내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거리자 김한별은 일순 기가 막힌 얼굴이 되었다. “흠. 그렇군요 가 아니에요. 억울하지 않아요? 언니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랬다, 그때 다들 말하기 싫어 나한테 떠넘긴 거면서 너희들을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이런 마음도 들지 않나요?” 그랬던가. 아마 깊은 생각을 하느라 미묘하게 달라진 분위기를 읽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조금 섭섭한 것도 있었지만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홀 플레인에 들어가면 이르나 늦으나 그들도 사람을 죽일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김한별은 태평한 내 얼굴이 답답한지 달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오빠는 항상 혼자 고민하고, 혼자 생각해요. 버거운 일은 대부분 혼자서 떠맡으려고 해요. 물론 오빠한테 나쁜 의도가 없다는 건 알아요.”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 잠시만….” “오해를 문제 삼고 싶은 게 아니에요. 저번에도 말씀 드렸지만 오빠의 판단은 항상 믿음직스러웠어요.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요.” 김한별의 말에 나는 마음속에 돌이 쿵 하고 내려 앉는걸 느꼈다. 도시를 떠난 이후 그녀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는걸 종종 볼 수 있었다. 특히 나와 안현이 앞으로 어떻게 할건지 상의를 하고 있을 경우는 더욱 그랬다. 그때는 별 일 없을 것 같아 그냥 그러려니 넘겼는데 아무래도 오늘 한별이한테 단단히 걸린 것 같았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오빠. 말 편하게 놓으세요.” 내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김한별에 나눈 일순간 말을 더듬고 말았다. 둥그래진 눈으로 그녀를 보자, 불만 어린 얼굴로 나를 쏘아 보고 있다. “응, 네?” “반말하시라고요. 다른 언니 오빠들이랑은 다 편하게 하시면서 왜 저랑은 그렇게 안 하시는데요.” “…알았어.” 한순간 이지만 기백이 밀리고 말았다. 내가, 이 내가 말이다. 홀 플레인 10년 차 사용자…. 그만두자. 김한별만 보면 한소영이 생각나 저절로 마음이 흔들리고 만다. 단순히 고유 능력 카리스마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확실히 내가 그녀를 보는 시선에는 미묘한 감정이 담길 적이 많았다. 그 정도로 처음 봤을 때의 분위기가 누군가와 비슷했으니까. 헛기침을 하고 아까 못다한 말을 잇는다. “항상 내가 판단을 내린 건 아니잖아. 너도, 나도, 현이도, 솔이도. 모두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궁리한 거지.”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으신지 유정이 언니는 포함 시키지 않으셨네요.” “나보다는 현이가 더 고생하지 않았어? 오늘 그 원숭이들과의 전투에서도 대단했고.” “또 그러시네요. 안현 오빠나 유정이 언니한테는 먹힐지 몰라도 저한테는 그러지 말아주세요. 교묘하게 화제를 돌리려고 하지 말아요. 안현 오빠는 저랑 협동해서 간신히 두 마리를 잡았죠. 오빠는 혼자서 두 마리를 처리 했잖아요. 그것도 모자라 유정이 언니 전투하는걸 도와주기도 했고.” 한별의 말은 내 아픈 곳을 구석이 찔러왔다. 역시나 닮았다. 절로 얕볼 수 없다는 마음이 들고 있었다. 가끔 나를 보던 시선은 결국 나를 관찰하던 시선이었나. 아무래도 준비를 단단히 하고 나온 모양 이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고 말았다. 얘기를 조금 더 들어보고 정 안되겠다 싶으면 직구를 던지기로 마음 먹었다. “항상 그랬어요. 숲에서도, 도시에서도, 그리고 오늘 그 낯선 사람들을 만났을 때도요. 평소에는 한 발자국 물러나 있었지만 정말로 위험할 때는 항상 오빠가 나섰어요. 우리를 하나의 팀으로 가정한다면 우리 팀을 이끄는 것도, 기둥도 오빠라고요. 안현 오빠가 아니고요. 그래서 저는 분했어요. 왜 오빠가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건지.” '나를 생각해주는 건가?' “글쎄. 나는 생각이 달라. 안현은 확실히 훌륭해. 행동력도 있고, 추진력도 있고, 결정도 과감하게 하는 편이고. 그리고 그 말은 그렇게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가 다 리더고, 통과의례는 협동이 중요시되는 곳이야.” “그만하세요. 오빠는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에요?” “도대체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 모르겠다 말하면서도 나는 속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김한별의 고요하면서 차가운 눈동자를 더 볼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주위에 한기가 흘렀는데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그 정도였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진짜로 의견을 결정하고 앞장서 행동하는 건 수현이 오빠라고요! 오빠는 쉬우면서 대놓고 드러나는 일은 안현 오빠한테 맡기고 정작 어려운 일은 왜 혼자서 묵묵히 하잖아요. 왜 다른 사람들이 안현 오빠만 고맙고, 대단하다고 하는 거죠? 왜 정작 혼자서 궂은 일은 다 한 수현이 오빠를 두려워 해야 하죠? 그리고 오빠는 어째서 그런걸 애써 숨기려 하시는 거죠?” “너….” “이대로라면 오빠는 똑같은 상황에서 또 똑같이 행동하고 말겠죠. 그리고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풀이 될 가능성도 있어요. 중요한 건 지금 우리 모두가 은연중에 오빠를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거에요.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오빠가 우리 팀의 리더가 되어주세요. 앞으로 어려운 문제가 있다면 혼자 생각하든, 같이 의논하든 행동만큼은 꼭 같이 해요. 오빠가 리더라면 모두 불만 없이 오빠를 따를 거예요.” 김한별이는 이제 거의 애원하는 어조로 나에게 사정하고 있었다. 솔직히 아직은 얼떨떨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차라리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이유정이었다면 원래 그런 성격이구나 하고 웃어 넘길 텐데 김한별은 도통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나는 그 와중에도 그녀가 이 얘기를 나한테 꺼낸 이유를 계산하고 있었다. 서로간 대치 상황이 이어지고 새벽의 한기는 우리들의 몸 곳곳에 스며들고 있었다. 그러나 김한별은 자리를 떠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아니, 대답을 듣기 전에 나를 보낼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 6일차 아침이 밝았다. 마지막 말 번을 서고 온 안현은 모두를 깨운 후 분주히 출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피곤한 얼굴로 온 몸의 관절을 비트는 게 어지간히 뻐근한 모양 이었다. 나 또한 거의 자는 둥 마는 둥 뜬 눈으로 밤을 샜지만 하루 정도 안 잤다고 피로를 느끼는 육체는 아니었다. “안녕. 잘 잤어?” 일부러 밝은 아침 인사를 건네본다. 안솔은 내 말에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후다닥 도망가버렸다. 예전 같으면 부끄러워서 그런가 보다 하고 허허 웃으며 넘기겠지만 막상 면전에서 저런 모습을 보이니 쓴웃음이 밀려왔다. 안현이 그런 안솔의 모습을 발견했는지 어디 하늘 같은 오라버니한테 버릇없이 고개만 까닥 숙이냐고 꾸지람을 듣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울먹울먹. 그 뒤로 어느새 이유정이 다가와 그녀를 감싸준다. 둘이서 티격태격 하는걸 보며 안솔은 어쩔 줄 몰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한 발자국 물러서 그런 광경을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따뜻했다. 정말로 따뜻한 풍경이었다. 아마 삼 남매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들의 모습은 이곳이 지옥 같은 통과 의례라는 곳을 잊게 해줄 만큼 따뜻하고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나는 저 안에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나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저들과 나는 아예 본질이 다른 사람이었다. 과거 일백 명의 사용자를 베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잠깐 그들의 품에 취해 내 자신을 잊어 버린 건지도 몰랐다. '예전에 나를 알던 사람이 지금 나를 보면 기절하겠군.' 자조적인 마음에 키득 웃어버렸다. 어두운 과거를 회상하자 분위기마저 우울해진 것 같았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내게로 천천히 걸어왔다. 뒤에서 이유정이 투덜투덜 거리는 게 아마도 오늘의 오전 말다툼 승자는 안현인것 같았다. “형. 오늘이면 그 워프 게이트인가 뭔가에 도착할 수 있겠죠?” “…응.” “그럼 후딱 도착해버리죠. 여기서 먹는 마지막 아침일지도 모르는데 오늘 아침은 좀 거하게 먹는게 어때요? 형도 많이 드셔야 해요.” 넉살이 넘치는 안현의 말에 나는 미약하게 웃어 보였다. 그의 아침을 먹자는 제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니. 난 괜찮아. 오늘 아침은 너희끼리 먹어.” “네? 하지만….” “원래 중요한 날을 앞두고는 밥을 안 먹는 버릇이 있어서 그래. 그만큼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 수 있거든.” 내 말에 안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김한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여전히 냉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문득 오늘 새벽 김한별과 나눴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한별아 너는 아침….” “안 먹어요.” “어? 그러지 말고….” “안 먹어요.” 김한별은 안현이 말하는걸 다 듣지도 않고 단문으로 받아 치고 있었다. 안솔도 의외의 광경에 놀랐는지 안절부절 손가락만 꼼지락 거리고 있었다. 안현은 어색한 얼굴로 나와 한별이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는 이내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뒤에서 보던 이유정도 감히 지금의 분위기를 거스를 생각을 못하고 평소보다 훨씬 조신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하하…. 그럼 우리끼리 먹어야겠네.” “어, 어쩔 수 없지 뭐. 우리들 몫이 더 늘어나는데. 호호…. 호. 오빠, 한별아. 이거 정말 우리가 다 먹는다…?” 당연히 나와 김한별의 대답은 없었다. 어지간한 이유정도 우리의 반응에 충격을 먹었는지 입을 비죽비죽 거리며 닭 부리를 내밀었다. 순간 김한별이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절대 고개를 돌릴 생각이 없어 그녀의 시선을 외면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분위기는 한층 더 싸늘해졌다. 활기찬 6일차 아침. 그날의 아침은 아침 식사부터 3명이 2명의 눈치를 보는 걸로 시작 되었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 0031 / 0933 ---------------------------------------------- 보스 몬스터. 날씨는 맑았다. 숲 안에서는 볼 수 없었던 말간 햇빛이 우리들의 머리를 보듬어주고 있었다. 분명 나쁜 기분은 아니었지만 일행이 아무런 말도 없이 걷고 있는 게 유일한 문제라면 문제였다. 오두막에서 출발한지 약 여섯 시간 정도 지난 것 같다. 그 동안 우리는 꼭 필요한 말을 제외하고는 거의 말을 나누지 않았다. 나와 김한별 사이의 분위기가 냉랭한 것도 있지만 일행의 내면을 본다면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아무튼. 오랫동안 걸었으면 지칠 법도 한데 우리는 한 번의 휴식도 없이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이윽고 이제 절반 이상이 눈에 잡힐 만큼, 아니 절반만 보임에도 불구하고 큼지막하게 보이는 워프 게이트가 눈에 들어온다. 워프 게이트에 가까워지면 가까워 질수록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았다. 들리는 건 색색 조용한 숨소리 뿐. 다들 끝이 보인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마음속으로 흥분 감이 오른 상태일 것이다. 힘을 내서 가는 건 좋지만 마냥 마음 편하게 갈 수도 없는 노릇 이었다. 예상대로 우리들은 워프 게이트로 가는 길목에서 단 한번도 괴물을 만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다들 알게 모르게 느슨해진 것 같았다. 마음이 심란했다. 보스 몬스터가 출현하게 되면 그때는 정비나 상의를 할 시간이 없다. 귀신 같이 우리가 있는 곳을 눈치채고 달려들 텐데 다들 우왕좌왕 흩어지지만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아무리 내가 있다고 하더라도 본신의 실력을 드러내지 않으면 분명히 사망자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워프 게이트가 눈 앞에 있다. 조금만 더 가면 통과의례는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그런데 눈에 보일 정도의 조금의 거리를 남겨두고 지금껏 지켜온 컨셉과 계획을 포기하는 건 너무 아까웠다. 남은 거리를 어림으로 짐작하니 대충 600미터가 남은 것 같았다. 우정민은 300미터를 남겨두고 보스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다고 했으니 절반만 더 가면 우리도 만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최대한 천천히 가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내 바램과는 반대로 일행의 발걸음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안현도 그걸 느꼈는지 한동안 유지하던 침묵을 깨고 들뜬 목소리로 안솔에게 말을 걸었다. “솔아. 우리 조금만 더 힘내자. 저기 눈 앞에 보이는 커다란 타원형 건물까지 가면 분명 이 지긋지긋한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 조금만 더 참아.” “응!” 부드러운 안현의 말에 안솔도 밝은 얼굴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간간히 미소도 보이는 게 어지간히도 기쁜 모양 이었다. 막 잠깐 쉬자고 말하려던 나는 바로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할 수 없이 그들과 보폭을 맞출 수 밖에 없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워프 게이트와의 거리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었다. 물론 괜한 걱정일지도 모른다. 이대로 그냥 얌전히 워프 게이트로 들어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건 맞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아무도 상처 받지 않는 행복한 길. 하지만 불길한 예감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어딘가 마음속 한곳에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통과 의례에 들어온 이후 가장 광범위하고 세밀한 마력 감지를 펼치고 있었지만 보스 몬스터의 낌새는 조금도 잡을 수 없었다. 어느새 목표 지점까지 500미터를 남겨둔 상태. 워프 게이트는 서서히 그 완연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반듯한 제단이 거대한 타원형 건물을 떠받치고 있었는데 웬만한 건물 한 채와 맞먹을 정도로 웅장한 모습이었다. 중앙은 도넛처럼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있어 연 푸른빛 구체가 둥실둥실 부유하고 있었다. 이따금 가느다란 파란 전류를 흘리는 게 워프 게이트를 가동하는 마력 구임이 분명했다. 겉보기에는 제법 아름다운 구슬이라 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은 구슬로 향했다. 안솔은 순수한 표정으로 감탄하고 있었고 김한별도 신선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게 꽤나 마음에 드는 모양 이었다. 특히, 이유정은 몽롱한 얼굴로 영롱한 빛깔을 내뿜는 구슬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정도였다. “정말 예쁘다…. 조각조각 쪼개서 귀걸이 만들고 싶어. 귀에 걸고 다니면 진짜 아름답겠다. 갖고 싶다.” “언니. 저는 있는 그대로 두고 보고만 싶어요. 정말 아름다운 것 같아요오.” 이유정과 안솔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자 안현은 가만히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귀걸이를 한 유정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생각을 마친 녀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입을 열었다. “끔찍하군.” “어머? 우리 현이 그건 무슨 뜻일까…?” “네가 귀걸이라고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게 조금 웃겨서. 차라리 우리 솔이한테 더 잘 어울리겠다.” “뭐야?” 안현의 심드렁한 얼굴로 조잘거리자 유정이 발끈한 얼굴로 그의 허리를 세게 쳤다. 보아하니 안솔은 얼굴이 방긋하게 변한 게 귀걸이가 어울린다는 말을 들어 그런 것 같았다. 딱히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입가에 수줍은 미소를 보이고 있었으니까. 하렘 왕이 될 기질이 다분한 놈이 시스콘이라는건 어떻게 보면 불행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든 시답잖은 생각에, 절로 싱거운 웃음이 나왔다. 남은 거리 400미터. 주변을 둘러보니 처음 우리가 시작했던(스타팅 포인트) 공터와 상당히 유사한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군데 군데 근소하게 자란 풀 뿌리와 대지의 대부분을 덮은 흙 무리들. 다만 가끔 색깔이 유난히 짙은 흙 무리들이 눈에 띄었는데 발로 밟고 지나가자 다른 흙들처럼 부드러운 느낌 보다는 딱딱하게 굳은걸 밟는 것 같았다. 피가 스며들어 흙이 굳어버린 걸까? 그렇다면 아마도 앞선 통과 의례에서 워프 게이트를 앞두고 당해버린 예비 사용자들일 것이다. 눈치챈 사람은 나밖에 없을 테지만 별다른 소리는 하지 않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300미터가 남았다. 이제 우리들은 거의 빠른 걸음 수준으로 뛰고 있었다. 모두의 얼굴은 우리는 살았다는, 그리고 해냈다는 환희에 흠뻑 젖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도 으르렁 거리던 안현과 이유정이 서로 미소를 짓는다. 안솔을 대놓고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한별이도 여전히 태연한 얼굴이지만 알게 모르게 어딘가 안도한 것 같았다. 300미터에 돌입했음에도 보스 몬스터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 결국 우정민 일행은 운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행운 100을 자랑하는 안솔이 있으므로 이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살핀 후 감지에 걸리는 게 없자 나도 조금은 느긋한 마음으로 마력을 풀려고 할 찰나였다. 나는 그때 알 수 없었다. 우리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것을. 파츳! 파츠츳! 200미터를 남겨둔 시점에서 공간을 찢는듯한 소음이 내 귀에 들렸다. 주변의 공기가 달라지고, 허공이 기이하게 일그러진다. 무언가 거대한 마력이 이동할 때 나타나는 현상 이었다. 일행들도 뭔가 불안한 기운을 느꼈는지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나는 빠르게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역시나 공터를 둘러싼 급작스러운 마력 파장이 발생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그냥 사방으로 퍼지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피면 일정한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마음을 다스리고 차분히 마력이 그리고 있는 문양을 분석하려는 순간. 온 공간을 웅혼히 울리는 소리와 함께 우리가 걸어왔던 길목 중간에 거대한 하나의 진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마법진의 문양을 보는 순간 나는 아차 하고 말았다. 그건 바로 고등 소환 마법 진이었다. 얼른 내 마력을 암암리에 보내 진의 형태를 훼손하려고 했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어느새 허공에 완전하게 떠오른 마법 진은 말간 빛을 뿜어내며 가동을 시작했다. 그런가. 보스 몬스터는 이런 식으로 소환 마법 진을 통해 나타났던 건가. 어느새 나를 포함한 일행은 멍한 얼굴로 마법 진이 떠오른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법 진이 그들의 눈에도 보이는 게 틀림 없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마법 진은 악하고, 불길한 기운을 뭉클뭉클 쏟아내고 있었다. 우우웅! 우우웅! 드디어 마법 진이 소환을 시작했다. 맨 처음 선을 보인 건 보스 몬스터의 얼굴과 손가락 이었다. 그 놈의 얼굴은 말 그대로 그로테스크 그 자체였다. 길쭉한 얼굴에는 눈은 없지만 쭉 찢어진 입과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나 있었다. 거대한 낫이라고 착각할 만큼 날카로운 예광을 뿌리는 손가락도 보였다. 칠흑 강철을 두른 듯 거무튀튀한 갑판부도 나오고 기다란 꼬리도 불쑥 튀어 나왔다. 이윽고 소환을 마친 보스 몬스터는 장장 5미터는 넘어 보이는 거대한 몸을 자랑하고 있었다. 보스 몬스터의 출현이었다. 으적, 으적, 으적, 으적. 꿀꺽! 막 사냥감을 식사하고 있었는지 놈의 입가에는 붉은 피가 번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부족한지 우리를 보며 입맛을 쩍쩍 다시는 중 이었다. 나는 얼른 일행의 얼굴을 살폈다. 보자마자 혼비백산해 사방으로 뛰어가지 않은 건 칭찬해주고 싶었지만 이유정도, 김한별도, 안솔도 패닉 상태에 빠진 모습 이었다. 다들 얼음 동상처럼 몸이 굳은 듯 한 발자국도 땅에서 떨어뜨리지 못한다. 놈이 내뿜는 무지막지한 살기에 압도 당한 것이다. 오직 안현 홀로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간신히 입을 열었을 뿐이었다. “마…. 말도 안돼…. 이, 이건 도대체….”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에! 안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보스 몬스터의 광호한 울부짖음이 우리의 전신을 때렸다. 아마도 살기를 담은 음파를 맞았으니 온 몸이 저릿저릿 할 것이다. 마법에서 풀린 듯 다들 주춤주춤 몸을 움직였지만 한두 발자국이 전부였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모두를 보며 나지막하지만 그러나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두들 정신 줄 놓지마. 당황 하지도 말고. 침착하게 대응하라고.” “혀, 형…. 무리에요. 이번만큼은 무리에요. 이길 수 없어요. 도망쳐야 해요!” 석궁에 시위를 거는 내 모습을 보며 내 말을 곡해했는지 안현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보스 몬스터가 주는 엄청난 위압감에 다들 전의를 상실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 소리치고 다그쳐봤자 오히려 혼란만 조장할 수 있었다. 어차피 이 애들과 같이 잡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최대한 나긋한 마력을 담은 목소리로 모두의 굳어버린 신체를 보듬어주었다. “싸우자는 소리가 아니다. 저놈을 상대하는 건 미친 짓거리나 다름 없어. 네 말대로 우리는 도망친다. 하지만 아무데로나 가면 각개 사냥 당할 뿐이거든. 그러니 워프 게이트 방향으로 도망칠 거다.” “그, 그래요. 얼른….” 수긍은 하면서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유정을 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안현과 김한별은 서서히 공포에서 깨어나는지 눈에 굉장히 미약하지만 생존을 열망하는 활기가 감돌고 있었다. 마력으로 전신을 보듬어주고 지금껏 믿고 의지해온 내가 담담한 반응을 보이자 뭔가 모를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지금부터 다들 짐 또는 무기를 모두 버려. 최대한 몸을 가볍게 만들고 워프 게이트를 향해 전력으로 뛴다.” “에, 에…?” 보스 몬스터가 다시 한번 울부짖는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없었다. 아직도 얼떨떨하게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안솔을 보며 답답한 마음이 치솟았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매고 있던 가방을 강제로 벗기며 입을 열었다. “안현 뭐해! 칼이랑 방패 빨리 떨궈! 그거 들고 뛸 생각이야?” “네…. 네!” 안현과 이유정 김한별은 모두 자기가 들고 있던 짐과 무기를 버렸다. 어느새 보스 몬스터는 네 발을 이용해 우리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땅에 발을 짚을 때마다 쿵 소리가 울리는 게 마치 미약한 지진이 연속해서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첫 번째 지진을 신호로, 나는 안솔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우리 일행 모두 전속력으로 워프 게이트를 향해 질주했다. 달린다. 달리고 달리고 달린다. 모두들 있는 힘껏 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뒤에서 들리는 쿵 소리는 점점 주기가 짧아지고 있었다. 이유정이 불안한 얼굴로 슬쩍 뒤를 보려고 하자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고개 돌려 확인할 생각 하지마. 무조건 앞으로 뛴다는 생각만 하라고.” 보스 몬스터가 소환된 지점은 워프 게이트로부터 300미터. 우리는 200미터를 남겨둔 상태. 100미터 차이가 있었지만 분명 한 번은 따라 잡힐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한 번을 넘기는 게 내 목표였다. 보스 몬스터는 뛰면 뛸수록 가속이 붙는 것 같으니 한번만 자리에서 멈추게 한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속력을 무로 되돌릴 수 있다. 그렇게 다시 처음부터 돌리면 비교적 느린 속도로 우리를 쫓을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우리는 그 틈을 타 워프 게이트로 들어간다. 나는 왼손에 장착한 석궁을 꾹 쥐었다. 쿵! 쿵! 쿵! 쿵! 남은 거리 180미터. 쿵! 쿵! 쿵! 쿵! 남은 거리 160미터. 쿵! 쿵! 쿵! 쿵! 남은 거리 140미터. 소리의 주기가 짧아지는 게 녀석의 속도가 본 궤도에 오르는걸 느낄 수 있었다. 이대로 계속 달린다고 해도 보스 몬스터를 뿌리치는 건 요원한 일일 것이다. 나는 때가 왔음을 느꼈다. 다들 달리느라 정신 없는 틈을 타 나는 일정량의 마력을 장전한 화살로 스며들게 했다. 일반 화살로는 강철 같은 놈의 갑판을 뚫을 수 없을 것이다. 마력 전달을 끝내자 왼쪽 팔목에서부터 전보다 배는 날카로운 예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일련의 준비를 끝냈다. 이제는 정말 내가 나설 차례였다. 어물쩍거리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맞이해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달리던 다리를 멈추며 꾹 잡았던 안솔의 손을 풀었다. 갑자기 정지하는 나를 지나치며 안솔의 경악한 목소리가 들리자 모두 반사적으로 이상한 기분을 느낀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이 고개를 돌리기 전 강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뒤 돌아보지 말고 달리라고!” 처음 들어보는 내 화난 목소리에 다들 찔끔한 것 같다. 하지만 엉거주춤했던 고개가 다시 전방을 향하는걸 확인하자 나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멈춘 나를 보며 첫 타깃은 나라는 듯 달려오는 보스 몬스터를 보며 나는 신속하게 왼 팔을 들어올렸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 0032 / 0933 ---------------------------------------------- 보스 몬스터. 징그러운 이빨을 쩍 벌리며 잡아먹을 듯 달려드는 보스 몬스터를 보며 내 왼팔은 놈의 상단을 향하고 있었다. 한 번에 연달아 쏠 수 있는 화살은 총 3발이다. 그리고 지금 내 화살은 일반 강철이라도 뚫을 수 있는 날카로운 마력을 버무린 상태였다. 조준하고, 발사한다. 파앙! 파앙! 파앙! 예전보다 훨씬 강력한 파공음과 함께 화살은 공기를 가르며 나아간다. 시간차는 있었지만 놈의 미간 정 중앙에 정확히 들어가는걸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텅! 텅! 텅! 내가 날린 화살은 강한 쇳소리를 내며 허무하게 떨어지고 말았다. 즉 보스 몬스터의 외피를 뚫을 수 없었다. 물론 충격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내부로 투사 되는 마력 충격파를 느꼈는지 보스 몬스터는 순간 몸을 움츠렸다. 아무리 소량의 마력을 담았다고는 해도 일반 화살의 배는 되는 위력을 외피만으로 견디는 건가. 무슨 이 딴 놈을 통과 의례에 놔둔 건지 천사들의 뇌가 궁금했지만 일단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것 같았다. 점점 가속을 붙이며 쫓아오던 놈의 움직임을 묶는 데는 분명히 성공한 것이다. 보스 몬스터는 충격의 여파에 해롱거리는지 몸이 더욱더 움츠러들고 있었다. 이 문제는 나중에 세라프한테 단단히 따지기로 하고 일단 나도 바로 몸을 돌려 일행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전방을 보자 일행은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그들이 남은 거리를 보니 조금 있으면 100미터 안으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면 나는 아슬아슬할지 몰라도 애들은 확실히 안전하다고 볼 수 있었다. 막 스퍼트를 올리던 나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애초에 큰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니고 충격을 회복할 시간은 충분할 텐데 놈이 달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있었다. 쿵쿵 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다. 문득 나는 놈이 움츠러든 모습과 어제 전투에서 나를 향해 뛰어오르던 망키의 모습이 떠올랐다. 설마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뒤에서 바람이 치솟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후우웅! 혹시나 한 예상이 현실로 일어났다. 보스 몬스터는 영악하고 치밀한 놈 이었다. 놈 또한 이대로 가면 한 명도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놈이 몸을 움츠러든 건 내 화살에 충격을 받은 게 아니라 큰 도약을 준비하는 자세였다. 내 몸을 포함한 주변 공터에 거대한 그림자가 깔렸다. 보스 몬스터는 나를 넘어 앞서 달리고 있는 일행들을 보고 있었다. 안현이 선두에 달리고 있었고 한별이와 유정이 그 뒤를 비슷하게 쫓고 있었다. 안솔도 열심히 는 달리고 있었지만 기본 체력이 달리는지 어느 정도 후미에 처진 상태였다. 다른 세 명은 몰라도 안솔은 위험할 수 있는 거리였다. 내가 주의를 줄 틈도 없이, 긴 호선을 그리며 허공을 가르던 보스 몬스터는 이내 안현 일행의 후미로 있는 힘껏 착지했다. 땅을 뒤흔들고 지축을 울리는 거대한 소리가 울렸다. 앞서 달리던 안현도 몸을 휘청거릴 정도의 거대한 진동이었다. 그 광경을 보자 내 머릿속은 순간 하얗게 물들었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하나의 메시지가 내 눈 앞에 떠올랐다. 『잠재 능력 심안(정)(랭크 A+)이 발동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외형을 보는 게 아닌, 대상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눈. 자신을 관조하고 만물을 살피거나 감지하는 능력 또는 비슷한 작용을 하는 현상을 일컫습니다. 극한으로 다스려진 마음은 S랭크 이하의 정신 오염 마법 아래서도 평정 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 ……. ………. “후…….” 뜨거운 머리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는다. 하얗던,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던 머리에 냉정한 이성이 가득 차오른다. 조금 전까지 편협했던 시선이 확장되고 눈에 들어오지 않던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웃었다. 웃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도대체 지금까지 무엇을 걱정했던 걸까? 고작 이까짓 상황이 뭐라고. 더 험난했던 순간도, 더 고통스러웠던 순간도, 더 아찔했던 순간도 여러 번 겪었는데. 두렵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다. 무리하지 않는다. 언제나 할 수 있는 선을 긋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한다. 내가 1회 차 홀 플레인을 플레이 할 때 신조로 여겼던 말 이었다. 홀 플레인에서는 어설픈 강함은 통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뛰어난 재능과 능력을 드러내고 그것을 꽃 피우기도 전에 죽어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며 나는 절대로 내 자신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 아무도 내가 소드 마스터지만 마력이 48 포인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나는 철저히 음지에서 생활했다. 홀 플레인에서 10년 동안 활동하면서 그런 태도는 어느새 일종의 강박 관념으로 자리 잡았다. 물론 아직도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다. 다만 그러면 예전의 나와 다른 게 없었다. 똑같은 방법으로는 똑같은 결과를 낼 수 밖에 없다. 친형을 지키지 못했을 때, 믿고 따르고 사랑했던 클랜 로드를 눈 앞에서 잃었을 때 나는 무척이나 후회했다. 그런 길을 다시는 답습하고 싶지 않았고 필연으로 바꾸기 위해서 나는 되돌아오지 않았던가. 이제는 달라지고 싶었다. 한순간 모든 전장 상황을 분석하고 최적의 행동을 계산한다. 필요한 마력을 정확하게 계산하고 끌어올려 효율적인 방안을 모색한다. 더 이상 나 자신을 드러내는걸 답답할 정도로 숨길 생각은 없었다. 필요하면 한다. 물론 들키면 곤란할 수 있지만, 그러면 방법은 간단했다. 걸리지 않으면 된다. 지금의 나는 그럴 수 있는 능력도, 자신도 있었다. 1초도 안 되는 순간에 분석을 마쳤다. 안솔의 위치도 파악했고, 생존 상태도 확인했다. 가장 먼저 해야 되는 일은 보스 몬스터의 어그로를 먹는 일. 어차피 놈의 육중한 몸에 내 모습은 일행의 눈에서 가려진 상태였다. 나는 한껏 마력을 끌어올려 놈의 외피를 파고들만한 마력을 화살에 갈무리했다. 이제는 조준하는 척을 할 필요도 없이 바로 시위를 당겼다. 피잉! 피잉! 피잉! 뒤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살기에 놀랐는지 놈이 흠칫 고개를 돌리는 게 보인다. 그러나 날아가는 화살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놈을 노리고 있었다.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세발의 화살은 보스 몬스터의 가슴팍에 꽂혀 들어갔다. 그러나 아직 남은 게 있다. 펑! 펑! 펑! 마력을 듬뿍 먹은 화살은 마치 폭탄이 터지는 소리를 내며 놈의 외피를 가볍게 부수고 들어갔다. 효과는 곧바로 볼 수 있었다. 끄라라라라라라라라라! 아프지? 아플 거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는 보스 몬스터를 보며 나는 신속한 속도로 달렸다. 제 3의 눈으로 본 결과 안현, 한별, 유정은 비틀거리면서도 용케도 달리고 있었다. 아마도 안솔이 낙오한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아무튼 좋다. 오히려 이편이 더 나한테…. 잠깐. 안현이 멈췄다. “솔아! 솔아! 솔아 대답해!” 막 안솔이 없어진 사실을 깨달았는지 안현이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속으로 멍청한 놈이라고 생각한 후 달리는 속도를 더욱 높였다. 삽시간에 놈과의 거리가 줄어든다. 울부짖던 보스 몬스터는 내가 달려오는걸 보고는 거대한 오른손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팔 전체가 부들부들 떨리는 게 어지간히 분노한 모양이다. 아직 죽지 말라고 일부러 강도도 약하게 한 건데 은혜도 모르는 놈 이었다. 물론 놈이 내 생각을 알리는 없었고 거침없이 나를 향해 손을 내리쳤다. 번쩍이는 손가락의 날은 잘 벼린 사신의 낫처럼 나를 목표로 매섭게 베어오고 있었다. 일반인이 보면 오금이 저리겠지만, 내 눈에는 하품할 정도로 느린 속도였다. 나는 가속한 그대로 한 발로 지면을 찬 후 재빠르게 하체를 구부려 지면과 평행이 되도록 기울였다. 내 얼굴 위로 손가락이 스치듯 지나갔지만 머리카락 몇 올이 베였는지 허공으로 팔랑 이며 비산한다. 하지만, 나는 확실하게 보스 몬스터의 공격을 회피해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깔끔한 슬라이딩 이었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는 양손을 땅으로 짚은 채 기침을 하고 있는 안솔의 모습이 보였다. “콜록! 콜록!” 주변에는 흙먼지가 자욱한 게 놈의 착지할 때 일으킨 여파인 것 같았다. 예전이라면 안솔을 보듬고 안심시키려는 행동을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도, 생각도 없었다. 나는 빠르게 그녀를 안아 일으킨 후 공주님 안기로 품에 들었다. 그녀는 내가 올 줄은 몰랐는지 화들짝 놀란 얼굴이 되더니,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수…. 수현이 오빠…?” “조용히 해. 일단 이놈한테서 떨어지고 보자고.” 말을 마치고 나는 달려오면서 장전한 화살 세발을 다시 뒤쪽으로 뿌렸다. 그리고 결과를 확인하지 않고 바로 흙먼지를 헤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다시 녀석의 구슬픈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게 또 어딘가 아픈데 명중한 것 같았다. 안솔의 얼굴은 가관이었다. 눈에 눈물은 방울방울 단 채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마치 구세주라도 보는 것 같았다. 유정이와 한별이의 만류를 뿌리치고 막 다시 돌아오려던 안현은 이내 흙먼지를 뚫고 나오는 나를 발견하고 입을 헤 벌리고 말았다. 웃긴 건 나를 보는 안현의 표정 변화가 굉장히 다변화적 이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멍한 얼굴을, 그 다음에는 안도하는 얼굴을, 마지막으로 울먹이는 얼굴로 바뀌는데 같은 동성이 그러니까 속이 거북했다. 아무튼, 마치 남매가 쌍으로 울음 파티라도 벌일 것 같았다. 속으로 꼴깝 떤다고 생각하며 나는 계속해서 달렸다. 그때, 김한별이 나를 보며 급한 목소리로 무언가 외치는 게 보였다. 등 뒤로 사늘한 느낌이 드는 게 역시나 놈은 우리를 순순히 보내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보스 몬스터의 꼬리가 내 등을 후려치려고 채찍처럼 낭창낭창 휘어진다. 꿈틀거리며 휘어지는 꼬리를 맞으면 나는 괜찮아도 안솔은 내 몸을 투과하는 충격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문득 이놈을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잡지 못한 홀 플레인의 보스 몬스터를 잡는다면 업적으로 평가될 수도 있고, 무언가 소정의 보상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걸 떠나서도 한 명의 사용자로서 보스 몬스터를 잡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렇다면 나와 안현 일행은 잠시 떨어질 필요가 있었다. 나는 이 공격을 그대로 맞아주기로 마음 먹었다. 이윽고 놈의 꼬리는 강하게 내 등을 후려쳤다. 퍽 소리와 함께 커다란 충격이 내 등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내 몸은 반사적으로 튕겨나갈 것이다. 그 위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마력을 일으켜 몸 내부로 침투한 충격을 받아 들였다. 기본 원리는 사량발천근(넉 냥의 힘으로 천근을 다룬다.)을 참고한 원리지만 내 입맛에 맞게 조절한 내부로 들어온 힘을 조절하고 나누는 기술 이었다. 원래 감당하기 힘든 충격을 받았을 때 충격을 전신에 퍼뜨려 완화하는 기술이지만 이런 식으로도 활용한적이 있었다. 안솔이 견딜 정도의 충격을 전달 후 그대로 던져 앞으로 튕겨 나가게 한다. 그리고 남은 힘을 최대한 옆쪽으로 쏠리게 한 후 나도 몸을 크게 굴렸다. 둘이 동시에 튕겨 나가기 전, 나는 안솔의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일어나면 바로 워프 게이트로 도망가.” 안솔이 대답할 틈도 없이 우리의 몸은 강하게 튕겨 나갔다. 나는 왼쪽으로, 그녀는 일행이 있는 방향으로. 쓰잘데없는(?) 행운 포인트가 이때 발동한 건지 안솔의 몸은 정확히 안현의 품 안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나 또한 땅바닥에 떨어진 후 바닥을 굴렀지만 바로 몸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확실히 보스 몬스터는 여타 통과 의례에 등장하는 괴물들과는 차원이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내가 위험 대상이라는걸 인식했는지 한방 먹였다고 여유를 부리는 게 아니라 바로 내가 있는 방향으로 뛰어 오른 것이다. 전신으로 살기를 진득하게 뿜어내는 게 어그로는 확실히 먹은 것 같았다. 콰아앙! 포탄 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지축이 크게 울렸다. 당연히 피했지만 내 몸도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맞지 않았다는데 더욱 화가 났는지 놈은 연속해서 내가 서있는 장소로 발을 굴리고 있었다. 쾅! 쾅! 쾅! 쾅! 이크. 에크. 이크. 에크. 얼쑤. “오빠아아아!” “혀어어어엉!” 왜에에에에. 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 동안 지켜왔던 묵묵한 오빠 이미지를 위해 간신히 입을 다물 수 있었다. 평소라면 손을 흔들며 괜찮다고 웃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빨리 도망가라는 의미로 손을 저었지만 일행들은 요지부동 이었다. 결국 나는 다시 목청껏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빨리 도망가아아아! 이 바보들아! 워프 게이트로 달리라고오오오!” 내 말에 잠시 소란이 이는 것 같더니 이내 안현이 반항하는 한별을 억지로 끌고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저놈 보소. 안솔이 잡혔을 때는 뿌리치고 달려오더니 달려오는 척도 안 하네. 혀를 쯧쯧 차려는 찰나 나는 다시 빠르게 옆쪽으로 뛰었다. 놈의 발이 다시 내려찍기를 한 탓 이었다.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놈한테 그냥 피하고만 있다는 사실이 분했지만 일단은 참고 있었다. 어차피 잡기로 마음 먹은 이상 애들이 가기만 하면 제대로 조질 생각 이었다. 주변은 어느새 다시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놈이 무차별적으로 발을 내려 찍었기 때문 이었다. 일단 깔끔한 시야를 확보할 목적으로 나는 마력으로 몸의 기척을 지우고 놈의 뒤로 빠져 나왔다. 한순간에 내 기척이 사라졌다. 눈이 없는 탓에 보스 몬스터의 머리가 미친 듯이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필사적으로 나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놈의 틱 장애 짓거리를 본 후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도 안현이 김한별을 잘 끌고 갔는지 네 명 모두 워프 게이트에 막 도착한 것 같았다. 안현의 머리가 산발이 된 게 그녀가 어지간히도 손을 휘두른 것 같았다. 솔직히 그 꼬락서니를 보니 좀 웃기긴 했다. 일행이 도착하자 워프 게이트는 가동을 시작하는지 그들 주변을 반투명한 막으로 둘러친 후 중앙의 푸른 마력구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소환의 방으로의 전송이 시작된 모양이다. 곧이어 그들의 몸을 휘감는 연한 푸른빛의 기운을 보면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강이나마 내가 할 일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어느 정도 흙먼지가 걷히는 것을 보며 나는 빠르게 흙 바닥으로 몸을 쓰러뜨렸다. 나중에 왜 워프 게이트로 빨리 오지 않았냐고 또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별이는 따지고 드는 능력이 제법이니, 꼬리를 맞은 충격이 커 당시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라는 변명 거리를 만들 셈이었다. 어느새 흙먼지가 완연히 가라앉고 연한 푸른빛이 더욱 진해진 일행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처음 준비의 방에서부터 전송 되는 것처럼 발 아래부터 서서히 몸이 지워지고 있었다. 나는 흙 바닥에 몸을 댄 상태서 약간만 상체를 일으키고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잘 가고 나중에 보자는 일종의 신호였다. 그런데…. 갑자기 안현이 한 손으로 눈을 쓱 닦고, 이유정이 주저앉아(발이 안보였는데 주저 앉으니 조금 신기했다.)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김한별 역시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어깨를 들썩였으며 안솔도 내가 있는 방향으로 손을 휘저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뭐, 뭐지? 절대 울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 작품 후기 ============================ 1. 오타 수정. 0033 / 0933 ---------------------------------------------- 보스 몬스터. 김한별은 내게서 끝까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나보고 빨리 일어나라고, 도망가라고 했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아무래도 일행들이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한 모양이다. 이윽고 워프 게이트에 푸른빛이 번쩍이는걸 끝으로 나를 제외한 모두의 전송이 완료되는걸 볼 수 있었다. 갔나? 갔지? 갔네. 어느새 내 주위로 검은 그림자가 수북이 뒤 덮인다. 보스 몬스터는 먹잇감을 놓친 것은 상관없는지 나를 보며 연신 크릉거리고 있었다. 나는 양손을 땅에 짚은 다음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굴러 다녔더니 온몸이 찌뿌둥한 기분 이었다. 잠시 몸을 뒤틀어 허리를 풀자 우두둑 거리는, 관절이 뒤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껏 잘 사용했던 석궁을 물끄러미 보다가 땅에 떨어뜨렸다. 이제는 더 이상 필요가 없었다. 탁 소리와 함께 석궁이 흙 바닥을 나뒹굴었다. 나는 주저 없이 떨어트린 석궁의 위를 발로 밟아버렸다. 파각! 석궁이 반으로 부러진걸 본 나는 무심한 얼굴로 일행이 짐을 떨어뜨린 장소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마력을 일으켜 허공섭물의 묘리를 발현하자 안현이 떨군 장검이 휘르르르 돌며 내 손에 착 안겼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장검을 손에 들게 되었다. 통과 의례를 하면서 내내 생소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수중에 칼이 없다는 점 이었다. 홀 플레인에서 나는 칼을 내 생명이나 다름없이 여겼다. 잠을 잘 때도, 식사를 할 때도, 심지어 씻을 때도 나는 칼을 꼭 옆에 두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안현에게 칼을 건네면서 왠지 전우를 빼앗긴 기분이 들었었다. 이제 다 끝났다. 홀 플레인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얼마나 이 순간이 오기를 원했던가. 얼마나 다시 돌아가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랬던가. 한때 꿈이라고 여겼던 사실은 제로 코드를 얻으면서 현실이 되고 그 현실까지 이제 막 한걸음만 남은 상황이었다. 나는 가슴이 벅차 오르는걸 느꼈다. 내 뜨거운 감정에 심장에 잠든 화정이 반응하는 것 같았다. 심장이 거칠게 두근거리고 온 몸을 구석구석 흐르는 피가 뜨겁게 타오르는 기분이었다. 멈추었던 호흡이, 죽어있던 심장이 다시금 거칠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새롭게 시작하는 기나긴 전쟁의 서막이 이제 막 오르기 직전의 순간. 크아아아아아아앙! 보스 몬스터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놈을 베기 전 손에 든 검을 조용히 응시했다. 과거의 나를 상회하는 실력을 손에 넣었지만 내가 최강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두려움은 없다. 설령 다시 한번 나락으로 떨어지더라도, 다시 한번 큰 상처를 받더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으니까. 나는 일말의 걱정도 없이 검을 들어올리며 보스 몬스터를 겨누었다. 내가 진심으로 검을 든 그 순간, 나를 둘러싼 모든 공기가 일변했다. 『특수 능력 신검합일(랭크 EX)이 발동합니다. 검을 드는 순간 검을 사용하는 모든 행동에 추가로 긍정적인 보정을 받습니다. 다년간의 노련한 경험과 수많은 업적 그리고 직업 보정으로 2랭크 상승 보정을 받습니다.』 『잠재 능력 백병전(랭크 A+)이 발동합니다. 근접 무기를 다루는 사람에 있어서는 이미 극한을 넘어선 능력입니다. 근접 전투에 한해서는 절대로 밀리지 않습니다. 다년간의 노련한 경험과 직업 보정으로 1랭크 상승 보정을 받습니다.』 나는 예전에 소드 마스터였고, 지금은 소드 스페셜리스트(검술 전문가)였다. 검에 관련된 능력을 갖고 있고 검과 관련된 직업을 갖고 있다. 그런 만큼 검을 들고 들지 않을 때 위력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의 거리가 있었다. 이전에는 그저 표홀한 뜬구름 같았다면, 지금은 확실하게 <나는 너를 죽이겠다.>는 의지가 담긴 폭풍 같은 살기가 놈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지금의 내 눈에 놈은 너무나 하찮은, 마치 벌레만도 못할 정도로 보였다. 내가 한 발자국 내딛자 보스 몬스터가 한 발자국 물러섰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영악하다고 해도 괴물인 만큼 야생의 본능은 살아있다. 서로간의 클래스가 아득하리만치 차이가 나는걸 인지한 이상 이미 놈은 전의를 상실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내 검술의 기본은 태극에 원류를 두고 있다. 압도적인 힘으로 제압하기 보다는 내 힘과 상대방의 힘을 역이용하는 기술이 많았다. 최상위권 사용자들과 비교해 근력이 딸리던 나로서는 유일한 대응 방법 이었다. 좀더 상세히 설명하면 전기치유(기에 전념해 부드러움에 이름), 이유극강(부드러움으로 굳센 것을 이김)의 원리를 이용하는데 요체는 고요함으로 움직임을 제압한다는 것이다. 나는 천천히 검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지금 놈한테서 선공을 기대할 수 없는 만큼 내가 먼저 공격할 생각 이었다. 지금 자세는 나만의 발검 술을 펼치기 직전의 일종의 준비 자세였다. 물론 무방비한 상태로 보일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만큼 상대는 내 첫 검로가 어떤 방향으로 공세를 취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이 상태로 번개 같은 속도로 검을 휘두르면 상대는 검로를 읽기도 전에 당하거나 아니면 공세 주도권을 내주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눈 앞에서 덜덜 떨고 있는 보스 몬스터를 보며 곧바로 발검(拔劍)했다. 이윽고. 내 검기는 공기를 찢어 가르며 놈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 ”일검살. 멋진 발검 술 이었습니다. 사용자 김수현. 통과 의례의 생환을 축하합니다. 본 사용자는 6일차 16시 42분 27초를 기점으로 홀 플레인에 입장할 자격을 얻었음을 증명합니다.” 한칼에 보스 몬스터를 반으로 갈랐다. 그 후 소환의 방으로 돌아온 뒤 세라프가 나를 보며 내뱉은 첫마디였다. 그녀는 여전히 작은 제단 위에 빛나는 날개를 일렁이며 고요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주일도 안되어 다시 보는 거지만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인 후 털썩 주저 앉았다. “애들은?”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지만 통과 의례는 홀 플레인과 다르다. 사용자를 관전하는데 제한이 없는 공간이다. 내 플레이를 본게 분명하니 당연히 나와 같이 행동한 사용자들도 봤으리라 여겼다. “타 사용자들의 정보를 알려주는 건 허가 되지 않은 사항입니다.” “쓰리 사이즈 궁금한 거 아니거든. 그냥 잘 들어갔는지 정도는 알려줄 수 있잖아. 거 되게 예민하게 구네.” 내 말을 듣던 세라프는 한숨을 폭 쉬더니 이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용자 안현, 안솔, 이유정, 김한별은 정상적으로 소환의 방으로 전송 되었습니다. 현재는 전담 천사들과 대기 상태로 있습니다.” “그렇군. 반나절 교육 받고 홀 플레인으로 들어가는 건가?” “교육이 그렇게 오래 걸리는 건 아닙니다. 다만 사용자들의 특성에 맞는 직업과 능력을 개방해야 합니다. 사용자 김수현은 본인의 주도하에 익숙하게 끝냈지만 다른 사용자들과 동일시 하지는 말기를 바랍니다.” 이 말에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예전에 7일을 버틴 나는 소환의 방으로 돌아온 후 홀 플레인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익히고 기본 설정 후 입장할 수 있었다. 그때 걸린 시간이 체감상 반나절 이었다. “모든 사용자들을 홀 플레인으로 전송하는건 일괄적으로 처리합니다. 그러므로 통과 의례 7일차가 끝나고 자격을 얻은 사용자들을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나라도 지금 보….” “절대로 안 됩니다.” 한시라도 빨리 입장하고 싶었던 내게 달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일부러 보스 몬스터도 신속하게 처리하고 온건 데.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만 다 듣기도 전에 내 말을 자르는 세라프를 보며 나는 불퉁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그럼 거의 하루하고도 반나절은 여기 있어야 한다는 소리잖아. 그 동안 마냥 기다리라고? 너랑 짝짝 궁이라도 할까?” 내 짜증 어린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세라프는 명료하게 답했다. “원하신다면 해드리겠습니다. 일찍 통과한 사용자들에 한해 원래 조금 더 상세한 홀 플레인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필요 없어.” “그럼 짝짝 궁이라도 하시겠습니까?” “후…. 아니. 그냥 얘기나 하자고.” 진지하게 물어보는 세라프를 보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무지 농담이 안 통하는 천사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통과 의례를 하면서 궁금했던 점 몇 가지를 물어보기로 했다. 물론 말투는 시비조를 듬뿍 담아서. 얘기나 하자는 내 말에 세라프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이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통과 의례를 쭉 플레이 하면서 느낀 건데, 너희들 밸런스 생각은 했어?” “네.” 단문으로 대답하는 세라프. “…숲 한가운데 떨어트린 거랑 레이스는 그렇다고 치자. 도대체 소환 주문에 보스 몬스터는 무슨 놀부 심보냐. 진짜로 무슨 통과 의례가 이래. 이래서는 예비 사용자들이 통과 할 수가 없잖아.”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마지막에도 내가 없었으면 우리 일행은 전멸이나 다름 없었어. 그런 괴물 같은 놈을 풀어놓은 이유가 도대체 납득이 안돼서 그래.” 내 말에 세라프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었다. “통과 의례는 각 회 차에 참가된 사용자들의 수준에 맞춰 자동적으로 밸런스 조절이 됩니다. 물론 이번 회 차는 특별히 사용자 김수현을 제외하고 했습니다만. 아무튼 올해 사용자들의 역대로 따져도 다섯 손에는 꼽힐 만큼 가능성 있는 사용자들이 많았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보스 몬스터는 이해가 안되. 마력도 사용할 수 없는 사용자들인데 어떻게 보스 몬스터를 잡아.” “잡는 건 불가능 합니다. 공략법은 따로 있습니다. 보스 몬스터는 워프 게이트와의 남은 거리 200 미터에서 300 미터 사이로 랜덤 하게 소환됩니다. 홀로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고, 최소 다섯 명이 있으면 최소한 한 명은 워프 게이트로 도달할 수 있습니다.” 세라프가 하는 말을 나는 바로 알아 들을 수 있었다. “…그럼 최대 네 명을 미끼로 도망친다는 소리네.” “정답입니다.” 나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충 보스 몬스터를 워프 게이트 주변에 배치해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통과한 사용자들은 그 동안 함께 했던 동료를 잃는 슬픔을 맛봐야 된다. 홀 플레인 안에서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니 애초에 시작할 때부터 비슷한 충격을 주고 시작하자는 의도를 가진 것 같았다. 악취미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할 말은 없었다. 내가 돌아온 이유도 어떻게 보면 위와 비슷한 상실감을 이기지 못해서 비롯된 것 이니까.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고는 화제를 돌리기로 마음 먹을 찰나 세라프의 입이 먼저 열렸다. “어느 정도 난이도가 있었다는 건 인정합니다. 참고로 앞서 동시에 처음으로 도착한 네 명은 소정의 골드 포인트 포상이 주어진 상태 입니다.” “…오? 그럼 우리들 말고 먼저 통과한 사람들은 없을 텐데. 나는?” “사용자 김수현은 5등으로 통과했습니다. 앞서 말한 네 명은 공동 1등입니다. 그에 따른 보상으로 각각 골드 포인트 2500포인트씩 지급할 예정 입니다.” 오호. 그건 희소식인데. 초반 2500포인트면 상당한 도움이 된다. 사용자 전용 상점에서 사용할 수 있는 골드 포인트는 초반에 굉장한 유용성을 지니고 있다. 나는 반짝이는 눈동자로 입을 열었다. “오. 골드 포인트. 나도 줘.” “아쉽게도, 1등에게만 지급합니다. 원래 한 명한테 1만 포인트를 지급하는데, 이번엔 공교롭게도 네 명이라 4등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은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그런가. 나는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곤 고개를 주억였다. 2500포인트면 홀 플레인 골드로 환전해 초반에 돈이 쪼들릴 걱정이 없었다. 아니면 초보자용 무기도 구매할 수 있고. 그런 내 기색을 읽었는지 세라프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사용자 김수현. 상당히 아쉬워 하는 것 같습니다. 고작 2500 포인트에 불과합니다.” “골드 포인트가 땅 파서 나오는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습니다. 하지만 사용자 김수현이 현재 보유한 골드 포인트는 정확히 3,784,720 포인트 입니다. 굳이 2500 포인트에 연연해도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응? ============================ 작품 후기 ============================ 1. 오타 수정. 0034 / 0933 ---------------------------------------------- 보스 몬스터. 3백만이 넘는 골드 포인트가 모여 있다고? 한순간 당최 무슨 소리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으나 과거로 돌아오기 전 세라프가 한 말이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사용자 김수현의 포인트는 현재 상당한 양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걸 그대로 없애는 건 전혀 합리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설마 특전을 부여하고도 남은 포인트가 있었다는 건가. 그 정도로 포인트가 많았던가 싶었지만 납득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후반부 수많은 업적을 달성 했음에도 불구하고 골드 포인트에는 일절 신경 쓰지 않았지만, 마지막 제로 코드를 얻었을 때도 엄청난 액수의 골드 포인트를 지급 받았던 것 기억이 있었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행운 이었다. “잘됐네. 그럼 사용자 전용 상점 목록 좀 불러봐. 여기서도 불러오는 건 가능하잖아.” “Yes. 알겠습니다. 그러나 아직 지급할게 남은 보상이 남아 있습니다.” “또?” 내 물음에 세라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스 몬스터 말입니다. 지금 바로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상세 내용은 메시지를 확인하시면 됩니다.” 세라프는 말을 끝내고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순식간에 내 앞에 수많은 메시지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위대한 업적! 수많은 가능성 있는 예비 사용자들을 살해한 통과 의례의 포식자, 보스 몬스터를 처리 했습니다. 업적 개수가 하나 추가 됩니다.』 『자유 능력치 2포인트를 지급합니다.』 『사용자 전용 골드 포인트 5만 포인트를 지급합니다. 사용자 전용 골드 포인트는 소환의 방 또는 대도시 내 사용자 전용 상점에서 사용이 가능합니다.』 헐. 업적 개수나 5만 포인트는 그렇다 치고서라도 자유 능력치 포인트를 지급 받은 건 말 그대로 쾌거나 다름없었다. 초반 임무 보상으로 능력치 포인트를 바로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해봤자 3개월간 사용자 아카데미 시설을 졸업하고 얻는 4포인트 밖에 없다. 그 외의 방법이라고 해도 내가 알고 있는 건 얼마 안되고 다들 시간이 걸리는 것들인데 말 그대로 대박이 걸린 것이다. 과거 이뤘던 21개의 업적 중 능력치 포인트를 지급한 업적이 꼴랑 한 개에 불과하다는 걸 감안한다면 말이다. 나는 신나는 얼굴로 세라프를 바라보았다. 세라프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내 앞으로 사용자 전용 상점 목록을 띄워주었다. 『사용자 전용 상점』* 사용자 전용 골드 포인트로만 구매할 수 있습니다. 『사용자 김수현 보유 골드 포인트 : 3,834,720 GP』 * 1. 무기(▽) * 2. 방어구(▽) * 3. 장신구(▽) * 5. 그 외 장비(▽) * 6. 물약(▽) * 7. 영약(▽) * 8. 주문서(▽) * 9. 재료(▽) * 10. 소원(필요 GP : 1,000,000 GP) * 11. 기타(▽) 막 물품을 고르려고 했으나 내가 찾고 있던 물품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나는 아차 하고는 세라프를 보며 입을 열었다. ”77,777 골드 포인트를 상점에 무상으로 지불할게. 금액 맞췄으니 빨리 숨겨진 것들 다 드러내.” 예전에 우연히 GP를 77,777 만큼 사용한 사용자가 있었는데 그때 숨겨진 비밀을 발견했다고 한다. 77,777 GP 히든피스라고 불리는 이것은 사용자 상점의 숨겨진 장비 목록을 단 한번에 한해서 드러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웃기는 점은 그때 그 사용자는 남은 GP가 없어 구매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미 액수를 넘은 사용자들도 같은 처지라나. “…그건 또 어떻게 알았습니까.” “보스 몬스터가 목숨을 구걸하면서 알려주더군.”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실행하는 건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발 화정 같은 이상한 행동은 지양하시길 바랍니다” 나는 키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세라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잠시 곱게 눈을 흘기고는 말을 이었다. “…77,777 GP를 지불 받았습니다. 단 한번에 한해, 숨겨진 목록을 전부 드러냅니다. 사용자 김수현의 남은 GP는 3,756,943 포인트 입니다.” 세라프는 말을 하면서도 얼굴을 살짝 찡그렸지만 이내 가볍게 손을 한번 저었다. 그러자 내 눈에 들어온 활성 목록이 갱신된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일단 볼 것도 없이 바로 영약 쪽을 클릭했다. 혹시라도 체력 포인트를 올릴 수 있는 영약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윽고 촤르르 페이지가 길어지는걸 보며 나는 차분하게 하나씩 검색하기 시작했다. 오, 이런 것도 있었어? 엘릭서는 하나쯤 구비해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런데 가격이 30만 포인트네. 흠. 특수, 잠재 능력의 랭크를 한 단계 상승시킬 수 있는…. 이것도 괜찮다. 가격 50만 포인트. 살만하네. 다른 사용자들이 보면 억 소리가 나올 만큼 비싼 GP를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구매하고 있었다. GP는 모으는 게 아니라면 바로 바로 쓰는 게 이득이다. 특히 이런 기회는 흔치 않게 오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GP를 소비할 작정이었다. 다만, 절대로 소원을 살 생각은 없었다. 소원을 사용하는 건 내 신념에 위배 되는 행동이고 무엇보다 사용자를 살리는걸 제외하면 쓰잘데기 없기 때문 이었다. “하. 능력치 포인트 6을 주는 영약이라. 가격은 90만 포인트. 세라프, 이거 세 개 사고 싶은데.” “불가합니다. 숨겨진 목록들은 구입하는 즉시 목록에서 사라집니다. 즉 한 물품당 하나씩만 구입할 수 있습니다. 물약 부분을 제외하고 2개 이상 구입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 말은 내가 능력치 포인트 상승의 영약을 사면 다른 구매자들은 다시는 살 수 없다는 소리였다. 조금 아쉽기는 해도 나만 먹을 수 있다는 조건이 있으니 이만 양보하기로 마음 먹었다. 나는 한동안 1번부터 11번까지 차분하게 살펴본 후 다음과 같이 구매 목록을 정할 수 있었다. * 천사의 눈물(x 1) : 능력치 포인트가 6만큼 새롭게 생성된다. 추가된 능력치 포인트는 사용자가 원하는 능력치를 올릴 수 있다.(900,000 GP) * 엘릭서(x 2) : 모든 상태 이상 회복. 모든 체력과 마나 회복. 죽지만 않은 상태라면 어떤 사람이든 살릴 수 있는 효능이 있다.(600,000 GP) * 비전의 영약(x 1) - 스킬 포인트 상승 : 특수, 잠재 능력의 랭크를 한 단계 올릴 수 있다. 다만, 고유 능력은 해당 되지 않는다.(700,000 GP) * 체력 상승의 영약(x 1) : 체력 능력치 포인트가 2만큼 상승한다. 다른 능력치 포인트는 올릴 수 없다.(200,000 GP) * 무검(x 1) : 고대 시절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보이지 않는 검. 사용자에게 귀속 되는 기능이 있다. 실체는 정령 계에 존재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 모든 차원에 있는 존재를 타격할 수 있으며 일정한 조건을 만족시킨다면 현세에 검신을 소환하는 것도 가능하다. 절삭력이 굉장히 뛰어나며 웬만해서는 부러지지 않는 튼튼함을 자랑한다. 자체 복원의 성능도 지니고 있다. 또한 무검으로는 전 속성에 대해서 100%의 마법 공격과 마법 방어를 소화해낼 수도 있다.(1,200,000 GP) * 홀 플레인 골드 환전(10 GP당 1골드) : 10000 GP → 1000골드 『총 구매 비용 3,610,000 GP 입니다. 구매 시 환불은 불가능 합니다. 구매 하시겠습니까?』 “응.” 『구매가 완료 되었습니다. 사용자 김수현님의 남은 GP는 146,943 GP입니다. 사용자 전용 창고로 전송이 완료 되었습니다. 사용자 전용 창고는 소도시 어디에서라도 이용이 가능합니다.』 후우. 한동안의 즐거운 쇼핑을 마치고 고개를 들자 세라프는 양 손으로 어여쁜 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다. 저 정도로 좌절하는 세라프는 처음 봤기 때문에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세라프. 어디 아프냐? 왜 울어.” “…사용자 김수현.” “왜.” “한꺼번에 그렇게 많이 사용…. 다른 건 그렇다고 해도…. 하필이면…. 무검을…. 하아….” 한숨을 폭폭 내쉬는 세라프를 나는 이상한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사용한 이유는 당연이 다음에 이런 기회가 다시 오지 않기 때문이다. GP는 다시 벌면 그만이고. 정당히(?) 벌고 계승한 내 GP로 사고 싶은걸 샀는데 도대체 저런 표정을 짓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세라프는 내 눈길을 느꼈는지 이내 표정을 고치고는 담담히 나를 응시했다. “무검은…. 겉보기에는 수수한 검 입니다. 외양이 화려하면서도 좋은 기능이 있고, 또한 성능이 좋은 무기들이 얼마든지 있을 텐데 굳이 무검을 선택한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검의 외양에 집착하는건 머저리 들이나 하는 짓이니 따로 설명하지는 않겠어. 좋은 기능이 없는 건 아쉽지만 검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전투를 굉장히 유리하게 시작할 수 있거든. 특히 이 검을 이용하면 나는 전 속성에 대해 100%의 마법 공격과 마법 방어가 가능하게 돼. 화정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 이만한 검도 없지. 튼튼하고, 복원 되기도 하고. 왜. 이제 와서 걱정돼?” 내 조롱에 세라프는 쓸쓸한 웃음을 짓고는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제는 조금 걱정이 되는 편 입니다. 사용자 김수현은 강합니다. GP로 구매한 모든 장비를 사용한다면 지금 먼저 들어간 최상위권 사용자들과 비교해도 윗선으로 평가 받을 정도입니다. 어쩌면 정점에 선 사용자들과도…. 그러나 방심은 금물입니다.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홀 플레인의 사용자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고 지키려는 성향이 강합니다. 그리고 극단적인 방법을 쓰는 집단도 적잖은 편입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라는 말이 내 가슴을 쿡 찌르고 들어왔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 씹고 말았다. “무슨 소린지 알겠어. 튀어나온 송곳은 표적이 되기 마련이지. 걱정 말라고.” “알고 있으니 다행입니다.”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잠시 세라프의 얼굴을 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 시간 어느 정도 남았어?” “통과 의례를 통과한 후 이제 두 시간 조금 넘었습니다. 원하신다면 홀 플레인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 나는 명상이나 하기로 마음 먹었다. 명상은 자기 수련을 목적으로 하는 거지만 한번 내부를 관조하기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막 가부좌를 틀고 내면으로 침잠하려는 순간 이었다. 눈을 감으려는 찰나 세라프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사용자 김수현.” “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빨리 말해.” 세라프는 여전히 톡 쏘아 붙이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용자 김수현은 저를 싫어하는 겁니까?” 얘는 또 무슨 소리래. 나는 다시 눈을 뜨고 불편한 얼굴로 세라프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이런 흰소리를 늘어놓는 이유가 짐작 되지 않았다. 그런 낌새를 느꼈는지 세라프는 바로 말을 덧붙였다. “저는 사용자 김수현만을 위한 안내하고 원호하는 도우미 입니다.” “내 입장에서는 귀찮게 참견하고 간섭하는 천사일 뿐인데.” “통과 의례에서의 당신은 일행들에게 믿음직스럽고, 차분한 성인 남성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모습이 사용자 김수현의 진짜 모습입니까? 아니면 저와 대화할 때가 진짜 모습입니까?” 나는 잠시간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하였다. 굳이 말하면 지금이 나에 조금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아무튼 통과 의례에서는 컨셉을 잡을 필요가 있었으니까. 나는 그녀가 궁금한 질문이 어떤건지 대충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인간은 천의 얼굴을 지닌 동물이지.” 혹시 또 쏘아 붙이는 게 아닌가 싶었는지 내가 조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자 세라프는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합니다.”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는 소리야. 나를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잘해주고, 싫어하는 사람한테는 잘해줄 필요가 있을까?” 내 말에 세라프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대답했다. “선이 명확히 그어진 생각 같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사용자 김수현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단 한번도 저를 호의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적이 없습니다.” “너무 간단하게 선을 긋지마. 인간은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기를 희망하는 경우도 있거든. 그러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는 소리겠지?” 세라프와 대화를 할 때 편한 점은 대화가 바로 바로 이루어진다는 점 이었다. 따로 이해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내가 한 말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나름의 합리적인 분석을 한다. 세라프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이해 했습니다. 오늘 좋은 가르침을 받은 것 같습니다.” “애초에 인간을 멋대로 납치하고 너네 들 실험 도구로 쓰이는 사람한테 뭘 바라는지. 나 참. 아무튼 더 이상은 말 걸지 마.” 내 말에 세라프는 무언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결국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나는 곧바로 생각을 깨끗이 비운 후 바로 명상을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1. 오타 수정. 0035 / 0933 ---------------------------------------------- 홀 플레인으로! 홀 플레인은 단순하게 본다면 총 네개의 대륙으로 가를 수 있다. 현재 개척된 지역으로는 동부 대륙, 서부 대륙, 남부 대륙, 북부 대륙이 있는게 각 대륙은 사용자와 거주민(기존 홀 플레인 거주민들.)들의 관할하에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아직도 개척된 지역 보다는 미개척된 지역이 훨씬 많은게 홀 플레인의 현실 이었다. 당장 그들의 주변을 둘러싼 미개척 지역을 하루라도 여행한다면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당사자 말고는 아무도 모를것이다. 결국 미개척 지역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원정대를 꾸리고 해당 지역을 점령하는 수 밖에 없었다. 옆은 각 대륙이나 도시마다 잇는 통로를 만들었다고 해도 앞뒤로 미개척 지대가 막힌 상태로는 언제나 불안에 떨 수 밖에 없을것이다. 안현 일행의 홀 플레인 시작 지점은 북부 대륙으로 배정 받았다. 통과 의례에서 자격을 증명한 사용자들은 각 대륙의 대도시에 있는 <시작의 여관>이라는 곳에서 처음 소환이 된다. 시작의 여관은 총 5채가 있으니 동시에 시험이 치러진 통과 의례도 총 다섯 공간이 있었다는 소리였다. 천사들의 배려로 가장 먼저 도착한 안현 일행은 그네들한테 들은대로 여관에서 일어난 후 1층으로 내려간 상태였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탁상 주위 의자에 앉은 후 다른 사용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관은 따로 특별한 것들은 없었다. 말 그대로 잠을 자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용도로 지어진 여관 같았다. 바깥으로 나가는 문과 창문은 있었지만 창문 너머를 본 안현은 나가는걸 포기하고 말았다. 창문에 비친 바깥 세상은 온통 푸른색 천지로 뒤덮여 있었다. 여관 주위를 푸르스름한 결계가 둥글게 감싸고 있는 상태라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여관의 안팎이 따로 분리된 느낌마저 들었다. 여관안은 아직 아무도 도착하지 않은듯 조용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안현은 잠시 창문 주변을 서성인 후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의 눈으로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안솔, 이유정, 김한별…그녀들과 만난후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아니, 나눌 수 없었다. 슬쩍 동생의 얼굴을 보니 덜덜덜덜 떨고 이를 딱딱 부딪치는게 척 보기에도 심각한것 같았다. 안현은 그녀가 지금 자책감에 시달리고 있다는걸 알 수 있었다. 안현 또한 자신의 내부를 가득 채운 뜻모를 불안감에 몸이 떨리는것 같았다. 그 불안감의 근원은 이제 김수현은 우리의 곁을 떠났다는 사실에 있었다. 즉 이제 그 사람은 우리들의 울타리가 되어줄 수 없다는것, 그리고 자신들이 기댈 공간이 사라진 것이다. 문득. 머리속으로 수현이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형의 차분한 분위기와 침착한 태도, 그리고 조용한 음성만 보고 들으면 왠지 모를 자신감이 솟아나는것 같았다. 만난지 일주일도 채 안됬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일행들의 가슴에 깊숙히 박힌 상태였다. '빨리 도망가! 이 바보들아! 워프 게이트로 달리라고!' 마지막에 그 괴물의 꼬리에 맞아 무너진 채로, 자신들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던 형. 안현은 지금에 이르러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걸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형이 뒤에서 든든하게 있어주었기에 자신이 나설 수 있었다는걸. 그리고 자신 또한 알게 모르게 형에게 너무나 많이 기대었다는걸. 자신의 동생을 살리기 위해 희생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안현은 이유정과 김한별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안현은 용기를 내 음울한 얼굴을 들었다. 다른 일행들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유정은 아예 탁자에 몸을 파묻은 상태였다. 내려오자마자 털썩 몸을 숙이더니 여지껏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가끔씩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걸 보면 자는건 아니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그런것 이리라. 안솔은 말할것도 없었다. 처음처럼 대성통곡은 하지 않았지만 고운 눈썹에 눈물을 방울방울 매단채 바닥만 응시하고 있었다.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은 모양 이었다. 오죽하면 천사가 기본 설정을 하는데 살살 달랠 정도였으니까. 오직 김한별만이 처음의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안현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주변으로 사늘한 기분이 맴도는것 같았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여관의 안은 조용한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누가 내는지 모를 흐느낌만이 간간이 들리는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여관 내부도 조금씩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2층에서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내는 소음이 들리고 있었다. 자신들이 먼저 내려온 2층 숙소의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들렸고 모르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안현은 본능적으로 그들이 통과 의례에서 살아남은 다른 사람들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안현의 머리에 하나의 생각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수현이 형이 있을수도 있다. 도망치는데 성공했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안현은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났다. 급작스러운 소음에 모두의 시선이 안현에게 쏠렸다. 유정도 퉁퉁 부은 눈으로 비척비척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 보았다. 안현은 흥분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형, 수현이 형이 왔을지도 몰라." "…무슨 소리야." 유정이 쉰 목소리로 반문하자 안현은 곧바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가리켰다. 그 위에는 생존자들이 나오는 문이 있었다. "우리만 살아남은건 아닐걸. 분명 다른 살아남은 사람들도 똑같이 전송 되잖아. 어쩌면 그 속에 형이…." 유정은 안현의 말을 들은순간 몸을 벌떡 일으킨 후 2층 계단으로 달려갔다. 안솔도 그럴수도 있겠다 생각이 드는지 숙였던 고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유정의 뒤를 쫓았다. 오직 한별만이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는데 그녀는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는것처럼 보였다. 인간이란 참 슬픈 동물이었다. 또다시 시작된 자기 합리화. 모두 그 괴물 같은 놈 앞에서 무너진 김수현을 분명히 확인했었다. 마지막 그의 인사를 보며 다들 눈물을 흘린것도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은 혹시나 라는 생각이 그들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수현이 형이라면 분명히 도망쳤을걸. 그렇지? 그럴거야." "그…그럼. 수현이 오빠라면 어디선가 나보란듯이 살아남을 사람인데. 그때 그 도시에 있던것처럼 문을 벌컥 열고 내려오겠지. 그럼그럼. 그렇구말구." 안현과 유정은 떨리는 목소리로 서로를 보며 고개를 주억였다. 곧 계단 앞에 도착한 그들이 막 2층으로 올라가려는 찰나 문이 달칵이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마법처럼 그들의 움직임이 멈췄고 모두의 시선은 위로 향했다. 두근거리는 긴장감이 그들의 몸을 메우는것 같았다. 이윽고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은…아쉽게도 김수현이 아니었다. 다만 안현네 일행들도 만난적 있는 사람들 이었다. 내려오는 사람은 총 네명 이었는데 그중 선두에 선 사람은 계단 아래 있는 안현네 일행을 보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오. 너희들이 먼저 와 있었나. 아무튼 살아서 보니 반갑군." "응? 우정민. 도대체 누군데…. 아~그때 그 애송이들? 쟤들 다 죽은거 아니었어? 워프 게이트로 간다고 하지 않았나?" "…천승현. 떠들지 마라." 우정민, 천승현, 선유운은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며 1층 로비로 내려왔다. 동생을 잃은 여자 원혜수 또한 가만히 그들을 따라왔는데 얼굴에 슬픔이 가득한걸 보니 대충 그 후의 일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현 일행은 지금 그런걸 신경쓸 여력은 없었다. 당장 수현의 생사를 두 눈으로 보는게 가장 중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정민 일행을 본 순간 그들의 얼굴에는 빠르게 실망감이 내려 앉고 말았다. 요상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선유운은 원혜수를 데리고 나가 탁상 주변의 의자에 앉혔다. 오직 천승현만이 불만스런 얼굴로 투덜거리고 있었다. "쳇. 그렇게 대놓고 우울한 표정을 지을건 없잖아. 서로 같은 처지인데 거 되게 민망하게 만드네. 알았어. 야. 그때 단검 날린거 미안했다." "…어." "아 정말 미안하다고. 그때 이후로 나도 많이 반성했어." "…별 상관없어." "그, 그러냐? 그렇구나. 그럼 다행이고. 하하…하…." 유정의 대답을 들은 천승현의 얼굴이 더욱 떨떠름하게 변했다. 속으로 이런 성격이 아닌데라고 생각하는지 고개를 갸우뚱 거리고 있었다. 우정민 또한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주변을 차분히 살피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한명이 안보이는군. 석궁을 들고 있던 청년은 어디있지?" 우정민의 물음에 일행은 묵묵부답으로 대응했다. 눈치나 머리 회전 빠른편인 우정민은 대략적인 상황이 머리속으로 그려지는것 같았다. 지금 이 자리에 없다는건 통과 의례에서 죽었다는 소리였다. "설마…당한건가? 그러게 분명 워프 게이트로 가지 말라고 했는데 결국 말을 듣지 않은 모양이군. 그러면 너희들은 어떻게…." "안 죽었거든!" "안 죽었어요!" 정민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유정과 안솔이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런 유정을 보며 천승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민은 잠시 뻘쭘한 기분이 되었지만 담담히 안현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 그 괴물을 만났나? 에일리언 같이 생긴놈 말이다." 안현은 대답 대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러나 더 말은 하기 싫다는듯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없는건 아니었기 때문에 우정민은 쓴웃음을 짓고는 조용히 선유운과 원혜수가 앉은 자리에 따라 앉았다. 천승현은 또한 그를 따라 가까운 의자에 냉큼 엉덩이를 털썩 붙이고 있는 힘껏 기지개를 폈다. "으다다다다. 그 차가운 돌바닥 위에 있다가 의자에 앉으니 살거 같네. 그럼 저놈들도 그 괴물 만난거야?" "승현. 너무 큰 소리로 말하지 마라. 우리가 진태를 잃었던 상황과 비슷하다." "그럼 100% 죽었겠네. 아쉽다. 새로운 설정인지 뭔지 했으니 다시 만나면 꼭 한방 먹이고 싶었는데. 그나저나 혜수는…." 막 말을 이으려던 천승현은 선유운의 날카로운 눈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원혜수 또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것 같았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들고는 피로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죽든 말든 저랑은 별 상관 없잖아요. 솔직히 아쉽긴 하네요. 그 사람도 제가 겪은 아픔을 좀 겪어 봤으면 했는데. 정작 당사자가 되어버렸네?" 그녀의 경우 없는 말에 이유정이 폭발하려는 찰나였다. 정민은 그녀를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하며 무거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그딴 말투로 함부로 사람을 말하지 마라." "저랑은 별 상관 없다고 했어요. 누가 뭐라고 했나요?" "그럼 왜 그 청년이 너가 겪은 아픔을 겪었으면 하지? 우리들은 진태를 잃었고 너는 동생을 잃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심정을 안다면 위로라도 못할망정 그딴식으로 싸가지 없게 말을 하는게 옳다고 생각하는건가." "그건…." 원혜수가 머뭇거리자 정민은 콧방귀를 뀌고는 말을 이었다. "할 말 없으면 입 다물고 있어라. 거듭 말하지만 그 청년과 혜연이의 죽음은 어떤 관계도 없다." "정민. 혜수. 다들 그만해." 정민과 혜수는 서로 노려보고 있었다. 특히 혜수는 무에 그리 분한듯 입술을 짓씹을 정도였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냉랭해지자 선유운이 급히 중재에 들어갔지만 둘의 시선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유정을 제외한 안현네 일행은 그들이 뭐라고 떠들든 전혀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여지껏 오매불망 계단 위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고 생존자들이 본격적으로 전송되기 시작하는지 2층에서 가일층 소란스러운 움직임이 들렸다. 서로들 기뻐하는 목소리, 슬퍼하는 목소리, 떠드는 목소리등 여러 목소리가 복합적으로 들렸다. 그리고 살아남은 다른 생존자들도 서로 무리를 지어 2층 문을 열고 차례대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2층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의 신형이 불쑥 몸을 내밀었다. 다음에 몸을 드러낸 사람 또한 안현 일행이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바로 박동걸 이었다. * 온 몸에 구석이 퍼진 마나를 만끽하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상쾌하다. 특히 화정 덕분에 손가락 발가락 끝 미세한 경혈까지 뚫린터라 얻는 쾌감은 더욱 배가 되는것 같았다. 차분히 내면을 관조하고 살피니 이전보다 마나의 양과 질이 더욱 상승된걸 확인할 수 있었다. 비단 그 뿐만이 아니었다. 내부의 모든 노폐물과 혈도가 개통 되고 신체 자체가 마력을 일으키는데 적합한 신체로 변했다. 이말인즉슨 동능력의 사용자와 같은 일검을 휘두르더라도 내가 우세를 점할 여지가 많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화정을 온전히 사용하는건 아직도 머나먼 길 이었다. 체력이 70 포인트라는건 내게 너무나 큰 걸림돌 이었다. 세라프는 화정의 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는 최소 요건이 체력 90 포인트, 온전히 사용하려면 101 포인트 이상은 되야한다고 했다.(나는 이 말을 듣고 솔직히 매우 놀라고 말았다. 99 포인트와 100 포인트의 차이가 천양지차인 만큼, 100 포인트와 101 포인트도 엄청난 차이를 갖고 있다.) 현재 70 포인트에 불과한 나로서는 진심으로 전력을 쏟아내면 몸이 버티지 못할 가능성이 다분했다. 내가 초반에 확실하게 벌어들일 수 있는 포인트를 전부 셈해본 결과, 총 14 포인트라는 결과가 나왔다. 보스 몬스터 2 포인트, 체력 상승 영약 2 포인트, 천사의 눈물 6 포인트, 초반 사용자 아카데미 졸업시 임무 보상 4 포인트. 지금껏 얻은 포인트와 얻는 포인트를 전부 체력에 쏟아부어야 한다는건 알고 있지만 마음 한켠으로는 욕심이 일었다. 홀 플레인 에서는 평균 능력치 60이면 어느 대륙이든 최소한 제몫은 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런만큼 70, 80, 90으로 올라갈 수록 사용자 본인의 가치가 상승하는 것이다. 특히 한 능력치가 90 포인트가 넘어간다면 가면 갈수록 1포인트는 더욱 귀중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욕심이 일었다. 먼저 내 능력치를 살펴본다면 [근력 94] [내구 92] [민첩 98] [체력 70] [마력 96] [행운 88] 인데 일단 체력 2 포인트는 제외시켜야한다. 그렇다면 남은 포인트는 12 포인트. 여기서 근력에 4포인트, 민첩에 3포인트를 마력에 5포인트를 투자한다면 나는 두 가지 능력을 101포인트로 올릴 수 있게 되고 근력은 98포인트를 갖게 되는 셈이었다. 아마 세라프가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을 알게 된다면 당장에 게거품을 물 정도의 생각이었다. 체력은 모든 능력치의 기둥 역할을 한다. 기둥이 튼튼하지 않으면 제 아무리 타 능력치가 높아도 효율을 뽑는데 애로사항이 많을것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안되는건 알아도 한편으로 "그래도." 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나는 일단 지금은 생각을 깨끗하게 접기로 했다. 먼저 홀 플레인에 들어간 후 사용자 아카데미에 들어가 3개월간 체력 훈련만 미친듯이 할 예정이었다. 단 1 포인트도 안오를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지금 체력을 꾸준히 올려두면 후에 얻을 능력치 포인트를 그만큼 아낄 수 있으니까. 전신으로 퍼뜨린 마나를 곱게 갈무리한 후 조용히 감았던 눈을 뜬다. 시간이 어느정도 지났는지는 몰라도 분명 하루는 넘게 지났을 것이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니 홀 플레인으로 통하는 포탈이 이미 열린 상태였다. 나는 멍청한 기분을 느끼며 조용히 나를 응시하는 세라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전송은 벌써 시작했어?" "그렇습니다. 이미 대부분 전송을 마친 상태고 사용자 김수현이 남은 상태입니다." "그럼 말을 하던가." "명상…이라기 보다는 깊은 생각에 잠긴것 같아 섣불리 깨울 수 없었습니다. 걱정은 안해도 됩니다. 아직 시간은 남았습니다." 애들이 걱정할텐데. 미리 들어가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고 오해를 풀고 싶었던 나로서는 썩 거슬렸지만 순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홀 플레인으로 입장하는 포탈로 걸음을 옮겼다. 세라프와 따로 작별 인사를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앞으로 볼 일이 많은데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라프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지 그녀의 말은 막 입장하려던 내 뒷덜미를 붙잡았다. "사용자 김수현." "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상태로 대답했다. 어느새 한발은 포탈 입구로 걸친 상태였다. "부디 몸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따로 부를 일이 있으면 신전을 통해 계시를 내리겠습니다." 나는 그저 무심히 고개만 까닥이고는 푸른빛이 일렁이는 포탈로 몸을 던졌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에구에구…연참을 원하시는 분들이 많으시네요. 하루 한편 올리는 제가 죄송하기도 하고…. 해서 오늘은 그래도 용량을 조금 더 꾹꾹 눌러담아 보았습니다. 기대에 부응을 하지 못한점 진심으로 사과 드립니다.(__) 그리구…사용자 아카데미에서 3개월을 보낸다고 했는데 이부분은 질질 끌지 않을게요. 스토리가 늘어지는 일은 최대한 지양하도록 하겠습니다.(아마 한편, 길면 두편 내로 아카데미 부분은 끝날 예정입니다.) 『리리플』 1) [priest]프리스트 : 코멘트 1등 축하해요! 칭찬 감사합니다. 근래 독자분들의 날카로우신 코멘트를 많이 본 터라 알게 모르게 기가 죽었었는데 프리스트님 코멘트를 보니 그런게 확 풀리네요. ㅜ.ㅠ 2) kjsl : 아하하; 12월 1월이 굉장히 바쁘네요. 아무래도 연초라서 그런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3) GradeDown : 일정 이상 능력치가 올라가면 수련으로는 올리기 힘들어진답니다. 사용자들마다 올라가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가 사용자들의 강함을 판가름하게 되지요. :) 4) 에인트제 : 고민입니다. 하렘으로 할지, 아니면 해바라기로 할지요. 에인트제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5) 사람인생 : 수현이도 고민하고 있답니다. 후후후. 101 포인트 능력치란게 생각보다 엄청나거든요. 앞으로 기대해주세요! 6) 설비연 : 헐. 리메 전부터 보셨다면 3월에 보셨다는 소리신데. 예전에 보시던 분들이 굉장히 많네요! ㅋㅋ 7) 龍牙犬齒 : 개인적으로 이 질문이 나오기를 고대 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제로 코드와 연관이 된 상태라 말하기 어렵지만, 한가지는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소원이 만능은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제한이 걸려있고, 소원이라고 말하기 만망할 정도로 쓰이는 분야가 정해진 상태 입니다. 왜 수현이 형과 클랜 로드를 안 살렸는지는 걸려있는 제한과 연관해 생각하시면 됩니다.(이유는 차차 나온답니다.) 8) 민주남편 : 잌…죄송합니다. 수정 완료 했습니다. 9) 크리아센 : 그렇지요. 그래서 세라프가 기겁한 거구요. 무검은 정말 수현과 궁합이 잘 맞는 검 입니다. 킬킬. 10) 검군자 : 수현이 갈등하고 있어요…. 과연 어디에 쏟아 부을지? 후후훗. 11) 悲流 : 유명한 사람들 대부분은 알고 있답니다. 다만 안현네 일행은 1회차 통과 의례에서 보스 몬스터에 죽음을 당했었죠. 후에 붉은 송곳니 클랜은 이끌게 되는 우정민과 선유운은 알아봤구요. :) 12) 비뢰천사 : 하하; 노, 노력해 볼게요. 그런데 요즘 정말 바빠서요…ㅜ.ㅠ 13) 판타지혈풍 : 최대한 신선함을 느낄 수 있는 방향으로 가보겠습니다. 기대해주세요! 14) ㄴ천령ㄱ : 땡! 엑스 칼리버는 아니랍니다! 엑칼의 주인은 따로 있어요! 15) Dicho : 나름 노렸던 유머인데 Dicho님 한분 웃어 주셨네요. 고맙습니다. ㅜ.ㅠ 리리플에 없으신 분들! 코멘트는 빠짐없이 확인하니 부디 서운해 하지 말아주셔요. 혹시 나는 꼭~리리플을 받아야 겠다는 분은 앞에 신호를 주세요. 제가 기필코 캐치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36 / 0933 ---------------------------------------------- 홀 플레인으로! 전송은 별것 없었다. 이미 수백번은 겪어본터라 그냥 그렇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시작의 여관>으로의 전송을 마친 후 2층 복도로 나오자 아래층이 소란스러운것 같았다. 지금은 일단 기다리면서 앞서 홀 플레인으로 입장한 사용자들의 안내를 기다릴 시간 이었다. 그들이 오기 전까지 다들 긴장감에 왠만하면 조용히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소란은 의외라면 의외였다. 설정을 끝낸 신규 사용자들이 모든 전송을 끝마치면 여관을 둘러싼 전송 결계가 풀리게 된다. 그리고 결계가 풀리자마자 기존 사용자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 신규 사용자들을 안내하는 절차가 있다. 예전의 나는 안내 역할을 맡은 기존 사용자를 상당히 싫어하는 편 이었다. 그들의 태도는 상당히 거만하다. 비유하면 이제 군대물좀 먹은 일병이 막 전입한 신병을 대하는 눈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들 또한 앞서 시행한 통과 의례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고 신규 사용자와 같은 시절이 있었다. 그 후 열심히 노력해 살아 남은건 인정한다. 그들의(안내 역할을 맡은) 말을 들어보면 가관이 따로 없다. 어느정도 홀 플레인에 적응하게 되면서 새로 오는 사용자를 보면 "나도 저랬는데."라는 생각으로 우쭐대는 기분이 든다나. 참고로 나한테 그 말을 해준 사용자는 3달 후 죽은걸로 기억한다. 어찌됬든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지금으로선 별 도리가 없었다. 그들의 설명을 듣고 얌전히 사용자 아카데미로 입학하는게 현재 최선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왕 말이 나온김에 조금 더 설명을 해보면 사용자 아카데미는 정말 획기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설립을 건의한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분명 머리가 좀 돌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주먹구구식으로 보냈던 예전과는 달리 아카데미 설립 이후로 신규 사용자들이 초반에 어이없게 목숨을 잃는 경우가 드물어질 정도로 개선되었다. 아무튼 애들을 만난 후 해후를 나누는건 나누는거고, 뭐라고 말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2층 복도를 걷자 어느새 끝자락 부분을 걷고 있었다. 이제 눈 앞에 보이는 문만 열면 된다는 생각이 들려는 순간 이었다. "씨펄!" 거짓말을 하더라도 일단 애들을 만난 후 오해부터 풀고 싶었던 나는 막 문을 밀려고 나가는 손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문 밖의 1층 계단 부근에서 분명히 들어본 기억이 있는 목소리들이 문틈 공간을 통해 귓가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도 연속으로. "멋대로 짖지마! 이 개새끼야!" "이 썅년은 알려줘도 지랄이냐? 내가 분명히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니 눈깔이 병신인거지! 어디서 함부로 아가리질이야!" "미친년. 나만 봤냐? 나만 봤어? 보림이도 봤다고 하잖아! 응? 석궁이 반으로 동강난거 봤다고 했잖아!" 보림이라는 말을 듣자 나는 걸쭉한 욕설을 내뱉는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대강 짐작이 갔다. 트러블 메이커(?) 박동걸. 설마 살아서 홀 플레인으로 입장할줄은 몰랐는데. 솔직히 그들과 헤어진 후 거의 관심을 끊은 상태였고, 죽든 말든 상관하지 말자는게 내 속마음 이었다. 어쨌든 나는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초반에 띠껍게 군걸 기억하고 있으니 나중에 때가 되면 직접 조질 기회가 있을것 같았다. 나머지 하이톤을 가진 목소리는 누군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박동걸과 부딪치는 유정을 보면 둘다 어지간한 악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혀를 쯧쯧 차고는 조용히 문을 열어 젖혔다. "닥…!?" 곧이어 삐걱이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막 닥치라고 말하려던 유정이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말을 멈추고 고개를 위로 올렸다. 나는 그녀를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역시나 모든 사용자들중 내가 가장 전송이 늦은 모양이다. 바깥으로 한발을 내딛은 순간 엄청난 시선에 내게로 몰리는걸 볼 수 있었다. 얼추 세어보니 마흔명이 넘을만큼 여관은 생존자들로 복작이고 있었다. 예전에는 스무명도 간신히 넘길 수준 이었는데. 사용자 수준이 높은걸 제외하고서라도 6일차에 보스 몬스터를 처리한게 어느정도 영향을 미친것 같았다. 원래대로라면 마지막 날에 여기 있는 인원의 반 이상이 죽음을 당한거라는 뜻인가. 나는 한걸음씩 계단을 내려가며 가볍게 인사를 던졌다. "다들 살아 있었네. 무사해서들 다행이다." 그럼 당연히 살아있지.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워프 게이트로 보냈는데. 나름 무난한 인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반응도 없었다. 막 민망한 기분을 느끼려는 순간 유정이 비틀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오빠…?" "응." 그녀는 팔을 들더니 내 얼굴에 손을 대고는 양볼을 조심스럽게 만지기 시작했다. 눈망울과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게 어지간히도 놀랍고, 감정이 북받치는것 같이 보였다. 비단 유정뿐만이 아니었다. 실낱처럼 여겼던 희망이 현실이 되어 눈 앞에 나타났다. 안현네 일행과 대강 사정을 짐작한것 같은 우정민 또한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내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유정이는 목이 메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빠…수현이 오빠 맞아? 다른 사람 아니지?" "그럼 도플갱어로 보이냐. 아, 아파. 그렇게 세게 당기지마. 아프다고." "생환을 축하한다. 설마 살았다고는 생각도 못했는데…대단하군." 계속 볼을 만지작거리는 유정이의 손을 간신히 떼어내자 옆에서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예상대로 살아남은 우정민과 그 일행이 보였다. 우정민은 무언가 더 말을 하고 싶은것 같았지만 나는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막 열리려던 입을 다시 다무는게 내 신호를 알아들은것 같았다. 그 뒤로 놀란 얼굴로 나를 보는 원혜수와 잠시 눈을 마주쳤는데, 그녀는 고개를 팩 돌리는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안현은 환희에 찬 얼굴로, 유정이는 기쁨 반 슬픔 반의 얼굴로, 솔이는 울먹거리는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안현네 일행과 나는 잠시동안 서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네들은 어떤 말이라도 하고 싶은지 자꾸만 입술을 달싹였지만 뜻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말을 하려고 해도 나오지 않는 경우. 그런건 별 상관이 없었지만 일단은 나는 얼른 이 주목 받는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지금도 충분히 부담스러운데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인 장소에서 솔이가 울음이라도 터뜨린다면 진짜로 쪽팔릴것 같았다. 눈물을 죽죽 흘릴듯한 솔이를 달래며 나는 일부러 구석진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와중에 철저히 소외 당한 박동걸은 탁자에 앉는 우리를 보더니 이내 씨근거리며 이보림을 데리고 반대쪽으로 가버렸다. 이윽고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의 시선도 상당히 줄어들즈음, 애들도 어느정도 마음을 추스른것 같았다. 딱 하나 거슬리는게 있다면 안솔 이었는데, 그녀는 내 옆자리에 찰싹 앉더니 아까부터 옷깃을 꾹 붙잡고 있었다. 안현한테 도움을 요청하는 시선을 보내자 녀석은 멋적은 웃음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형. 저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요. 꼭 불사신을 보는것 같아요." "하하. 불사신은 조금 심하다.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인걸." 내 말에 안현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보다 얘좀 어떻게 해보라고. 한두살 먹은 애기도 아니고 내 옷깃은 왜 아까부터 꼭 붙잡는데. 안솔은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내 말을 받았다. "아니에요. 저는 지금 마치 기적을 보는것 같아요. 계단 아래서 기다리며 혹시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는데…그때마다 오빠는…." 말하는것과 동시에 내 옷을 붙잡는 손길이 거세어지고 있었다. 끝부분을 차마 잇지 못하고 다시 울먹이는 안솔을 보며 나는 난감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부터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다들 살아서 다시 보니까 다행이다." "살았으면 일찍 일찍 오던가! 맨날 사람만 걱정 시키…아니야. 미안해 오빠. 오빠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것도 아닌데…." 잔소리, 사과, 그리고 눈물을 차례대로 보여주는 유정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이만큼 애들이 나를 생각하고 있는줄은 몰랐지만 한편으로는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유정은 주먹을 쥐어 눈가에 남은 눈물 자국을 슥슥 닦고는 말을 이었다. "오빠. 얘기해줘. 아까 저새끼 말로는 워프 게이트 주변에 오빠가 쓰던 석궁이 반으로 똑 부러진채로 있었데. 오빠는 안보이고. 그 괴물도 안보이고." 으흠. 올것이 왔는가. 이때를 대비해 보스 몬스터의 시체를 태워버린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석궁을 확실하게 처리하지 못한건 내 불찰이었다. 대충 얼버무리고는 싶었지만 언뜻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의 주인공은 김한별 이었다. 이대로 두루뭉술 넘어간다면 나중에 그녀와 뭔가 문제가 생길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김한별은 내가 여관으로 오고 나서부터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처음 나를 봤을때를 제외하고는 얼굴도 거의 변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잠시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감정을 읽은 순간 아주 조금이지만,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다행이다라는 느낌이었지만 그 속에 미약하게 섞인 불신과 의혹의 눈초리를 나는 파악할 수 있었다. 한별은 확실히 고만고만한 애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나와 상당히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것 같았다.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언제나 이성이 개입할 여지를 남겨둔다. 아마 본질은 영원히 파악할 수 없겠지만 확실한건 그녀가 나에 대해 의구심이란 싹을 틔운것이다. 여관은 초반처럼 그렇게 소란스럽지도, 그렇다고 침묵만 있는것도 아니었다. 살아남은 생존자 무리들이 소곤대는 목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들리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요즘 참 한숨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느껴졌다. 결국 나는 어설프게 말을 지어내느니 최대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기로 마음먹었다. "응. 그건 맞아. 괴물의 공격을 피하려고 했는데…애초에 석궁을 노린건지. 바로 절반으로 쪼개지더라. 그때는 참 암담했는데. 하하." "왼팔은 괜찮으세요?" 내 말에 김한별이 바로 입을 열었다. 겉보기에는 걱정하는것 같이 들려도, 내 귀에는 "석궁은 왼팔에 장착하고 있지 않았어요?"라고 들렸다. 나는 입맛을 쩝 다신후 바로 대답했다. "꼬리로 공격을 했거든. 나도 모르게 왼팔을 들었는데 아슬하게 석궁만 스치고 지나간것 같아." "…그럼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셨어요?" "글쎄. 솔직히 잘 모르겠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해야하나. 그때는 진짜 죽었구나 싶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거든. 놈이 마구 발을 구르고 나도 미친듯이 땅을 구른것 같긴 한데…."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원래 겪었던 경험을 대폭 수정하고 말을 빙빙 돌리는 방식으로 설명에 들어갔다. 결론은 흙먼지가 자욱한 틈을 타 죽을힘을 다해 달려 숲의 저지대 방향으로 굴렀다는 말에 모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 김한별은 빼고 말이다. 보스 몬스터와 3분 이상 정면으로 대면해본 사람이라면 지금 내 말이 거짓말과 헛점 투성이라는건 금방 알 수 있을것이다. 김한별은 무언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는지 더이상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그때 그 상황을 겪지 못한 탓도 있고 분위기도 내 생환을 축하하는게 주된 분위기라 입을 다물고 있는것 같았다. 그러나 의혹 어린 눈초리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듯 보였다. 나는 이쯤에서 말을 아끼기로 했다. 어차피 말을 빙빙 돌린건 시간을 끌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으니까. 어느새 창문 밖의 결계는 상당히 옅어진 상태였다. ============================ 작품 후기 ============================ 한별이의 종잡을 수 없는 태도는 곧 벌어질 어떤 사건에 대한 떡밥입니다. ㅇㅅㅇ 아흥. 코멘트와 추천이 이렇게 많다니. 이상하게 오늘 글이 안써지더라구요. 오죽하면 글 쓰다가 중간에 샤워만 2번을 했다는…ㅜ.ㅠ. 그래도 오늘 한편을 무사히 올릴 수 있었던건 여러분들의 코멘트 덕분입니다. 히히힣. 오늘 꿈은 코멘트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꿈을 꾸는게 아닐까요? 코멘트 달아주신 독자분들! 쿠폰 주신 독자분들! 선작 눌러주신 독자분들! 추천 눌러주신 독자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 『리리플』 1) 사람인생 : 1등 축하드려요! 그렇지요. 그런데 솔직히 체력은 진짜 어느정도 올릴 필요는 있어요. 지금 수현이 체력이 너무 쪼루라서…. 2) 罰酒 : 아하하. 아직까지 리리플을 그만두고 싶지는 않답니다. 저는 리리플을 쓸때 상당히 즐겁거든요. 두근거리기도 하구요. 3) backtheclock : 고민이에요. 일편단심은 아니지만, 구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있답니다. 다만 하렘으로 갈지 해바라기로 할지 아직도 고민중이에요~. 4) 카이혼 : 12년 3월에 12편 연재하고 습작으로 돌렸던 적이 있습죠. 혹시 기억해주신다면…대박이에요! ㅋㅋ 5) 마령검 : 다, 다음편 드리겠습니다! 넙죽! 6) 겜뭰 : 몸이 배배 꼬일정도의 과분한 칭찬입니다. 감사합니다. 겜뭰님 코멘트 읽으면서 계속 실실~웃었어요. :) 7) 이리잉여 : 쿠폰 감사합니다. 연참…정말 죄송해요. 진짜 하고는 싶은데…엉엉. ㅜ.ㅠ 8) 노래풀잎 : 지, 진정하세요;! 여기 다음편 있습니다. 그러니 진정을…. 9) 크리아센 : 있습니다. 수현이 겪은것도 일종의 환골탈태 랍니다. 다만 정상적인 범주와는 다른, 약식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 10) CrossDie : 쿠폰은 받으면서 연참은 못하는 나란 작가 못난 작가. ㅜ.ㅠ 11) 안빈낙도 : 제로 코드. 하하하…나중에 보시면 알겠지만, 제로 코드나 소원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은 수현은 절대로 할 생각이 없습니다. 아니, 할 생각이 없는게 아니라 수현의 입장에서는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게 정확한 표현이죠. 결말과 연관된 설정이라 지금 공개하기는 어렵습니다. :) 12) Toranoanal : 하하하; 제가 후기는 꼭꼭 챙기는 편이라서요. 앞으로도 알찬 내용으로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13) 카타무네나이: 박동걸이는…후후. 후후후후.(?) 14) 내가변해야산다 : 실은 저도 나름 전개 속도를 높였다고 생각했는데, 독자 분들의 입장에서 보시면 여전히 느린가봐요. 그런데 제가 지금 이상으로 가일층 전개를 빠르게 끌고 나가면 전달하고 싶은 부분을 전부 전달할 수 있을지. 그게 걱정이 되요. ㅜ.ㅠ 15) 릭눅스 : 우쭈쭈쭈~다음편 여기 있어요~. 이거 보고 쑥쑥 커요~ㅋㅋㅋㅋ 아 완전 귀요미세요! ㅋㅋㅋㅋ 리리플에 없으신 분들! 코멘트는 빠짐없이 확인하니 부디 서운해 하지 말아주셔요. 혹시 나는 꼭~리리플을 받아야 겠다는 분은 앞에 신호를 주세요. 제가 기필코 캐치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37 / 0933 ---------------------------------------------- 홀 플레인으로! * 오늘 후기 리리플은 20개로 했습니다. 15개를 넘어버린 저를 용서해주세요. 답하고 싶은 코멘트들이 많아서요…ㅜ.ㅠ 결계가 사라지는것과 동시에 단단히 닫혀있던 여관문이 열렸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안으로 몰려들었다. 입은 꼬라지를 보아하니 기존에 입장한 사용자들 이었다. 현재 내가 시작하는 장소는 북부 대륙의 대도시로 바바라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각 대륙에 하나씩밖에 없는 대도시에 기반을 둔 사용자들인 만큼 한명한명이 제몫을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내는게 예사로이 보이진 않았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오른쪽 가슴부근에 황금 사자가 그려진 문양을 달고 있었는데, 당연히 알고 있는 문양 이었다. 북대륙 황금 사자 클랜. 홀 플레인에 한 획을 그은 클랜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무리한 원정으로 인한 전력 약화와 그 틈을 노린 타 클랜과의 충돌로 결국 자멸의 길을 걷게 되지만 그건 조금 더 후의 일 이었다. 단단해보이는 몸과는 어울리지 않게, 단색의 사제 로브를 걸친 190cm는 넘어보이는 거한은 여관을 주욱 보고는 놀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2관은 예상외로 사람이 많은데?" 우리한테 한 말은 아니었다. 그의 뒤로 들어온 사용자들 또한 심정은 매한가지인것 같았다. 그들중 한명이 차분하게 생존자들의 숫자를 세어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인 후 대답했다. "우와. 2관은 신규 사용자들이 마흔셋이나 되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베이비 붐 사태로군." "이 정도면 근래 거의 최고 기록 수준 아닌가?" "글쎄. 확실히 작년이랑 비교하면…. 관 하나로 따지면 많은 것 같기는 해. 다른 여관 상황은 어때?" 생존자(신규 사용자)들은 지들끼리 숙덕이는 기존의 사용자들을 보며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주변 상황을 날카롭게 살피거나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일단 그들의 얼굴을 기억해두기로 했다. "지금 집계하고 있겠지. 1관에서 현우형 나오신다. 다들 줄서." 현우라는 이름이 나오자 실컷 떠들던 사용자들이 순식간에 오와 열을 맞춰 여관문의 사이드로 정렬했다. 현우. 황금사자 클랜. 두개의 단어를 연관시키는 순간 나는 하나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마 내 생각이 맞다면 추후에 클랜의 대간부가 되는 박현우가 나올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문 양 옆으로 시립한 사용자들의 중앙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사람이 한명 보였다. 말끔한 인상과 깔끔하게 컷트한 훈남스러운 얼굴을 가진 남성 이었다. 1회차에 언뜻 본 기억보다는 조금 동안인것 같았지만 그래도 눈동자를 보니 왠지 그가 박현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예전보다 조금 더 강하게 마력을 일으킨 후 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 이름(NAME) : 박현우(4년차) * 클래스(CLASS) : 일반 검사(Normal Sword Expert) *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Global City) * 소속 단체(CLAN) : 황금 사자 * 진명 · 국적 : 검의 잔영을 남기는 자 · 대한민국 * 성별(SEX) : 남성 * 신장 · 체중 : 179.2cm · 68.7kg * 성향 : 중립 · 중용(True · Neutral) 『능력』 * [근력 90] [내구 81] [민첩 73] [체력 87] [마력 89] [행운 60] 내 예상대로 그는 박현우 였다. 내구나 민첩은 별 볼일 없는 수치였지만(?) 그래도 아직 소드 익스퍼트인걸 보니 성장할 수 있는 여지는 남은것 같았다. 아마 두계단 정도만 올리면 소드 마스터가 될수도 있을것 같은데. 아. 되는구나. 1차 연합 전쟁에서 환영의 소드 마스터로 불리는 놈 이었지. 초반에 명성을 익히 들었지만 나랑은 직접 검을 맞댄 사용자는 아니었다. 특히 민첩 부분이 상당히 아쉬웠다. 하지만 검사치고는 마력이 준수한 편이니 어느정도 보완이 가능할 것이다. 나는 일단 이쯤에서 그에 대한 관심을 접기로 했다. 나중에 연합 전쟁에서 황금 사자 클랜이 개박살나고 그때 그도 살해 당했다고 들었었다. 무엇보다 이미 대형 클랜에 적을 둔 이상 동료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것이다. 내가 혼자 김칫국을 마시고 있는 동안 생존자들의 이목은 박현우로 쏠리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와 우리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이윽고 그 또한 놀라운 표정을 짓더니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2관은 상당히 신규 사용자들이 많은데. 얼추 마흔명은 넘는것 같아." "마흔 세명 입니다. 1관은 몇명이 살았습니까?" "열아홉. 아무튼 좋군. 직업별로 분류하고 광장으로 모이도록 해. 3관, 4관, 5관 신규 사용자들도 곧 데리고 오도록 하지." 거한의 물음에 답한 박현우는 이내 무심한 얼굴로 여관을 나가버렸다. * 광장은 수많은 사용자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바바라 도시의 중앙 광장에 오니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광장이라고 해도 특별히 무언가 대단한건 아니었다. 굳이 비유를 해보면 노천 극장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것이다. 중앙에 둥그렇게 푹 파인 무대를 기준으로 계단이 층층이 올라가는 형태였다. 신규 사용자들은 직업별로 나뉘어 계단 하나당 엉덩이를 하나씩 붙이고 있었다. 벽돌에서 올라오는 차가운 한기에 엉덩이가 시려웠지만 꾹 참고 중앙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가슴 오른쪽 부근에 황금 사자 문양을 달은 사용자들이 한결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일부는 예의 말한것처럼 우쭐한 눈길로 우리를 동물원의 동물보듯 구경하고 있었지만. 만약 홀 플레인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 본다면 그나마 바바라는 사정이 낫다고 할 수 있었다. 미국인 사용자들이 관리하는 서부 대륙은 모든 인종에 대해 개방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기 때문에 몰려드는 인구도 어느정도 있는 편이다. 그렇기에 자유의 대륙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그런만큼 치안이 썩 좋은편에 속한다고 볼 수는 없었다. 대한민국이 관리하는 북부 대륙중 현존 최고의 클랜으로 불리는 황금 사자 클랜. 그런만큼 그들의 내부 규율도 굉장히 엄격하다고 들은것 같았다. 조금 거만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는 현재 다른 일행들과 떨어진 상태였다. 그런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신규 사용자들의 대부분이 현재 원래 무리와 떨어져있을 것이다. 기존의 사용자들이 직업을 분류한답시고 자기들 멋대로 줄을 세운 탓 이었다. 문득 안현과 다른 애들이 무슨 직업을 골랐을지 궁금했지만 나중에 확인하는 즐거움으로 미루기로 했다. 시덥잖은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중앙의 무대로 시선을 돌리자 박현우와 주변의 몇명이 이야기를 나누는게 보였다. 딱히 기다리는것 말고는 할것도 없었기에 나는 조용히 마력을 일으켜 청각을 돋우었다. 대충 무슨 얘기를 하는지 엿듣고 싶었다. "인원 보고 하겠습니다. 1관 19명, 2관 43명, 3관 22명, 4관 29명, 5관 17명 입니다. 총원은 130명 입니다." "직업 분류 인원은?" "근접 전투 계열 75명, 원거리 전투 계열 26명, 마력 재능 계열 18명, 사제 11명 입니다. 시크릿, 레어 그리고 기타 직업은 0명 입니다." "…그렇군. 알겠다. 그럼 이제 슬슬 시작하도록 하지. 유빈. 음석 증폭 마법을 설치하도록. 그리고 그놈도 내 앞으로 데려와." 그놈? 누구를 말하는거지? 그러고보니 2관에서 나올때 안에서 뭔가 소란이 일었던것 같은데…. 분류 되자마자 바깥으로 나가 미리 대기하던 사용자들과 섞이느라 자세히 알아볼 겨를은 없었다. 내 의문은 얼마 안가 곧바로 풀렸다. 박현우가 만신창이의 사내 한명을 이끌고 중앙 무대로 올라선 것이다. 그가 중앙에 발을 디딘 순간 조금씩 소곤거리던 목소리도 전부 사라졌다. 장내는 숨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조용하게 변했다. 박현우는 그 사내를 한팔로 질질 끌고 올라오고는 이내 무대 앞에 툭 던졌다. 그 남자는 다름아닌 박동걸 이었다. 입에 거품을 흘리고 오른팔이 기괴하게 꺾인게 꽤나 초라한 모습이었다. 정신을 놓은건 아닌지 가끔 몸을 움찔거렸는데 얼굴을 보니 상당히 고통스러운것 같았다. 그를 비롯한 다른 기존의 사용자들은 박동걸이 끙끙대든 말든 일말의 신경도 쓰지 않는것 같았다. 박현우는 신규 사용자 모두를 보며 첫 말문을 열었다. "먼저 통과 의례를 통과하신 신규 사용자 분들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일단 시시콜콜한 얘기는 생략하겠습니다. 천사들한테 이미 대부분 얘기를 들으셨을 테니까요. 단."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조금 뜸을 들이고 말을 이었다. 모두들 그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짚을건 짚고 넘어가야겠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 역시 대한민국의 국민 이었습니다. 또한 여러분들이 방금 통과하신 통과 의례라는 시험을 거친 사람들입니다. 우리와 여러분들의 차이점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 홀 플레인이란 공간으로 먼저 들어왔는지, 아니면 나중에 들어왔는지. 즉 요지는…." 음성 증폭 마법의 영향 덕분에 그의 목소리는 주변 공간을 웅혼히 메우고 있었다. 130명이라는 인원 모두의 귓가에 똑똑히 들릴 정도였다. 그는 서서히 발걸음을 옮겨 모두의 앞으로 나서는것과 동시에 박동걸의 쓰러진 앞에 섰다. "우리들은 당신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사람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 말은 확실히 어느정도의 파장이 있었다. 조용히 그의 말에 집중하던 신규 사용자들 사이에 동요하는 분위기가 흘러나온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물론이고 박현우 또한 이 사용자들을 탓할 생각은 없는것 같았다. 나도 그랬으니까. 아무리 천사한테 들은말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듣게 되면 당연히 실망감이 드는 법 이었다. 그런 그들을 묵묵히 훓어보던 박현우는 전보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이 이 거지 같은 홀 플레인으로 억지로 끌려온것도, 억울한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 또한 피차일반인 상황이었고 지금도 그러니까요. 그럼 지금 왜 우리가 여기에 있는지 궁금하시겠죠.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홀 플레인이란 공간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살아남을 수 있도록. 초반에 안내하고 도움을 주기 위해 있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그는 고개를 숙여 박동걸을 내려다 보았다. 고통스러운 와중에 곧 죽어도 자존심은 살아 있는지 박동걸은 치욕에 몸을 떠는것 같았다. 그러나 박현우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그는 바로 눈을 아래로 깔고 말았다. 나는 속으로 고소한 마음이 들었다. "조금 더 부연하면, 온라인 게임에서 고레벨 유저들이 초보 유저들을 도와주는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안내하러온 사용자한테 욕설과 폭언을 했습니다. 물론 우리들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또한 존중합니다. 우리를 믿지 못하거나 도움을 받기 싫으신 분들이 있을수도 있으니까요. 그러신 분들에게 지금 바로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우리들의 안내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들은 지금 일어나 이 장소에서 나가주시기를 바랍니다. 절대로, 그 어떤 제한도 하지 않습니다." 그의 말이 끝났으나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히 일어나는 사람도 없었다. 오직 죽은듯한 침묵만이 광장을 거대하게 감싸고 있었다. 어느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다는걸 확인한 박현우는 고개를 한두번 끄덕거리며 말했다. "아무도 없군요. 그렇다면 남으신 분들은 모두 안내를 받는다고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추후 일탈 행동으로 타 사용자들한테 해를 끼치는 사용자가 있다면 적당한 처분을 내릴수도 있습니다. 물론 안내라는 과정에 어느정도의 통제가 들어갑니다. 하지만 통제가 과하다고 생각하시는 경우 중도에 포기하시는것도 허용이 되니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잠시만…유빈. 음성 증폭 마법 캔슬해." 유빈이라 불린 마법사가 음성 증폭 마법을 해술하자 다시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박현우는 사제 한명을 부르더니 박동걸을 가리키며 뭐라고 말을 하는것 같았다. 나는 얼른 다시 마력으로 청각을 활성화 시켰다. 그의 부름을 받은 사제는 여관에서 본 거한이었다. 저 떡대에 사제라니. 참 언밸런스 하구만. 거구의 사제는 한쪽 무릎을 꿇고는 쓰러진 박동걸 앞으로 몸을 구부렸다. 그리고 어느새 성스러운 빛으로 물든 손을 들더니 그의 오른팔로 가까이로 이동시켰다. "회복." 파앗! 거한이 회복이라는 단어를 짧게 읊조리는 순간 빛으로 물든 손이 화려하게 피어 올랐다. 허공으로 피어오른 빛은 이내 박동걸의 오른팔로 스며들듯 흡수 되었다. 그리고 기괴하게 꺾였던 그의 오른팔은 어느새 서서히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에 몇몇 신규 사용자들이 탄성을 질렀다. 박동걸의 눈동자가 꿈뻑꿈뻑 하는게 직접 회복을 받은 그 또한 매우 놀란것 같았다. 끙 거리며 일어나 슬쩍 오른팔을 움직이는걸 보니 완벽하게 회복된것처럼 보였다. 박현우는 그런 박동걸을 무심한 눈으로 응시하더니 이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어나."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박동걸은 후다닥 소리가 날 정도로 재빠르게 일어났다. 전형적인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모습이었다. 박현우 또한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듯 얼굴을 약간 찡그리더니 으르렁 거리듯 말을 이었다. "아무리 신규 사용자라고 하지만 바바라 도시에서, 그것도 대표 클랜인 황금 사자 클랜원한테 반목하는건 미친짓이다. 이번 한번에 한해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번에도 그런다면 그때는…." 그의 말에 나는 어느정도 의도적인 살기가 섞였다는걸 알 수 있었다. 박동걸 또한 은은히 퍼지는 살(殺)의 냄새를 맡았는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윽고 박현우의 눈짓을 받은 사제는 박동걸을 데리고 근접 전투 계열로 참가시켰다. 그가 순순히 통제에 따르는걸 확인한 후 박현우는 다시 우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불타는 금요일 이네요! 그리고 신나는 주말도…. :) 요즘 메모라이즈가 상상 이상의 과분한 관심과 사랑을 받는것 같습니다. 설마 제가 노블레스 투베에 이름을 올릴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거든요. 그런만큼 연참으로 독자분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게 너무나 죄송하네요. ㅜ.ㅠ 선작 눌러 주신분들, 추천 눌러 주신분들, 코멘트 달아 주신분들, 쿠폰 쏴주신분들. 정말 너무나 감사합니다. 하루가 힘들다가도 메모라이즈를 읽어주시는 독자분들만 보면 머리가 개운해지는 기분이에요. 세상에. 후기를 쓰면서 이렇게 설레이다니요. 하하하. 존경하는 독자님들. 부디 오늘도 편안한 마무리를, 그리고 행복한 주말을 보내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그럼 리리플을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리리플』 1) 크림몽쉘 : 코멘트 1등 축하합니다! 언제나 1등은 리리플을 하는 센스! 바퀴동걸…정말 센스 터지는 별명이네요. 여담이지만 박동걸은 제 소설에 나오는 박동걸이 애초에 밉상 캐릭터이기 때문에 이런거지, 절대로 특정 인물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혹시 동일한 이름을 가지신 분들이 너무 기분 나빠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2) 에네르기 : 헉. 그런것 하나 세세하게 알고 계시다니, 놀랍네요. ㄷㄷ 저도 글을 올리는 입장인지라 하루에 한두번 순위를 보게 되더라구요. 정말 투베에 오를줄은 꿈에도 몰랐지요. :) 3) 가연을이 : 앞으로 조~금 더 실망하실줄도 몰라요. ㅜ.ㅠ 하지만 한별이는 한별이 나름이 그런 이유가 있답니다. 굉장히 영리한 아이에요. 4) 카타무네나이 : 연참을 못하는게 죄송할 뿐이죠…허헝. 5) kdnight : 감사합니다. 습작에서 작성 후 붙여 넣기를 하는데 오류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kdnight님 코멘트를 보고 얼른 수정했다죠. 다시 한번 고맙습니다. :) 6) CrossDie : 아니에요아니에요! 정말 쿠폰 감사해요. 연참 못해서 진짜진짜 죄송해요…ㅜ.ㅠ 마음이 아프당…. 7) 설비연 : 오늘 쪽지함을 보다가 설비연님이 예전에 주신 쪽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 글에 의외로 예전에 읽으신 독자분들이 많은것 같아요 ㅋㅋ 8) GradeDown : 생리라는 말에 순간 이상한 상상을 해버린 변태 작가…입니다. 한별이는 주인공을 믿고 싶어하는 마음은 있어요. 다만 짚을건 짚고 넘어가는 성격이죠. 요즘 한별이 캐릭터가 부각되는 느낌이라 다행이네요. :) 9) Estel : 물론입니다. 회상, 또는 외전으로 계획하고 있어요. 기대해주세요~. 10) 진타 : 충성! 군복무 몸 건강히 하셔야해요! 다음에 나오실때는 글이 한가득 있겠네요. 하하. 11) 포보리 : 죄…죄송합니다. 6, 6연참 ㅎㄷㄷㄷ. 6, 6연참…6연참…@_@. 12) 아릴릴리아 : 반갑습니다! 코멘트는 언제나 환영한다구요. :) 부족한 작품인데 독자분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주신 덕분이에요. 앞으로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13) JoWoon : 네…네? 네?;;; 네;;; 고맙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 14) 빈센트스칼렛 : 나, 나도 코멘트가 기분 좋아서 연재를 하는건 아, 아니에요! 실은 맞아요. ㅋㅋㅋㅋ 저도 츤데레 해보니까 손가락이 오글오글 거려요 ㅋㅋㅋㅋ 15) 라티인형 : 아…쿠폰수 만큼 연참하면…흠…아마도 아틀란타는 가볍게 넘길것 같네요. @_@ 흑흑흑흑…. 16) 백인티모시 : 우후후. 그렇지요. 수현이 라이벌들은 예상외로 많답니다. 이미 이 부분에 관해서는 생각해놓은게 있습죠. :) 17) 블라미 : 넵. 모든 국가가 나오는건 아니구요. 대한민국, 일본, 영국, 미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만 나온답니다. ㅇㅅㅇ 18) 헤븐크라이 : 그게 너무…연참이…정말…ㅜ.ㅠ…. 죄송해용…ㅜ.ㅠ 19) Allumina : 고맙습니다! 말씀해주신것처럼 구멍 탁탁 막고 떡밥도 모두 회수할게요! 매일 몇시간마다 체크를 하신다니…헐…. 헐…. 부담이…. ㅜ.ㅠ 20) 애독자C : 응원 정말 감사해요. 많은 분들이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셔서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 애독자C님도 느낀점을 말씀해주신다면 저야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리리플에 없으신 분들! 코멘트는 빠짐없이 확인하니 부디 서운해 하지 말아주셔요. 혹시 나는 꼭~리리플을 받아야 겠다는 분은 앞에 신호를 주세요. 제가 기필코 캐치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38 / 0933 ---------------------------------------------- 홀 플레인으로! 다시 음성 증폭 마법을 활성화 시킨 후 그는 다시 고개를 올려 신규 사용자들을 바라보았다. 방금전 음성 증폭을 껐을때는 당사자를 제외한 그 누구도 현우의 말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박동걸을 대할때와는 사뭇 대조적인, 살기가 가라앉은 건조한 얼굴로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천사들한테 어느정도 얘기를 듣고 오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 외에도 궁금하신것들이 많을거라는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여러분 모두의 궁금증을 풀려면 일주일 내내 밤낮을 새도 부족할겁니다." 그럼 당연하지. 조금이라도 빨리 사용자 아카데미를 들어가고 싶었던 나는 속으로 강하게 수긍했다. 그런 내 속마음을 읽은것처럼 박현우는 연신 기특한 말을 잇고 있었다. "또한 지금 막 통과 의례를 통과하고 오신 분들인 만큼 몸에 피로도 많이 쌓이셨겠죠. 일단 앞서 여러분들의 동의를 모두 이끌어낸 만큼, 앞으로의 계획을 간단하게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잠시 목을 가다듬고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대도시 바바라에는 사용자 아카데미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혹시 신규 사용자분들 중 도우미 천사들한테 조금이라도 설명을 들으신분 있습니까?" 도우미라는 말을 강조한다. 현우의 말을 들은 사용자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이내 한명씩 손을 들기 시작했다. 조금의 웅성거림은 있었지만 거수(擧手)하는 손들은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언뜻 봐도 과반수가 넘는 사람들이 손을 든것 같았다. 아니,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손을 들었다. 그만큼 천사들 또한 사용자 아카데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왠만큼의 사람들이 손을 들었다고 판단했는지 현우는 손을 내리라는 신호를 보내고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여러분 입장에서 보면 재방송일수도 있겠습니다만…그만큼 중요성이 높고 듣지 못한 분도 있는것 같으니 한번 더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용자 아카데미는 말 그대로 신규 사용자들이 홀 플레인에 보다 쉽게 적응하고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훈련 기관 입니다. 그리고 그 효율성을 인정 받아 사용자 건설 최초로 보상 포인트의 권한을 부여받은 공식적인 임무 중 하나입니다." 어떤놈이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확실히 그것 하나만큼은 인정할만 했다. 천사들의 설정이 아닌 사용자의 임의 설정이 인정 받은건 매우 드물다. 현우는 사용자 아카데미의 연혁과 설립 목적을 시작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훈련을 받는것과 아카데미를 졸업하게 될 경우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중 중요한 내용을 간추려 본다면…. 사용자 아카데미의 훈련 과정은 3개월의 시간이 걸린다. 초반에 사용자의 능력치는 빠르게 상승하는 경향이 있다. 사용자 아카데미에는 본인의 능력치와 직업에 맞는 효율적인 훈련 과정을 갖고 있다. 그렇기때문에 주먹구구식으로 수련을 하는것보다 훨씬 높은 능력치 상승율을 기대할 수 있다. 훈련을 받는 자들 전원을 대상으로 일주일마다 주급으로 20실버를 지급한다. 3개월 과정을 모두 이수한 사용자는 임무 달성 보상으로 4포인트에 해당하는 능력치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정도로 개요를 잡을 수 있었다. 나는 솔직히 보상 4포인트만 보고 하는거지만 다른 사용자들 한테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들릴만한 것들이 많았다. 꽤나 포장은 했지만 그래도 먹여주고, 재워주고, 훈련도 시켜주고, 돈도 준다. 일석 사조인 셈이다. 한동안 설명을 하던 현우는 마지막으로 사용자들마다 능력이 올라가는 상한선이 있다는 말을 꺼냈다. 능력치 포인트를 올리는건 본인 노력에 달린 일이지만,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는 사용자들마다 차이가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보상으로 얻게 되는 포인트는 한계에 다다른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몇 안되는 방법이니 일단은 아끼는게 좋다는 말로 사용자 아카데미에 대한 설명을 매듭지었다. "그럼 이로서 기본적인 설명은 끝났습니다. 원래는 설명 후 바로 아카데미 내부에 있는 숙소로 이동하려고 했습니다만…아직 호기심이 풀리지 않은 분들이 있는것 같으니 서너개 정도에 한해서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원거리 전투 사용자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한명의 여성 사용자가 빠르게 손을 들었다. 손놀림에 상당히 급한 기색이 어린것이 어떤 질문을 할지 무척이나 궁금하게 만들었다. 이윽고 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 여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그…저희는…살아 돌아갈 수는…있나요?" 기대한 만큼 실망도 큰 질문이었다. 꼴랑 한다는 질문이 저거라니. 나는 질문한 여자의 멍청함에 혀를 차고는 현우의 안색을 살폈다. 예상대로 그는 무언가 상당히 거슬리는 얼굴로 질문한 여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한 질문을 비유해보면 지금껏 실컷 설명한것을 엿 바꿔 처먹은거라고 볼 수 있었다. 현우는 눈에 보일정도로 크게 한숨을 쉬고는 메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분명 우리들은 여러분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초반에 명시 했습니다. 그걸 알면 지금 내가 이러고 있겠습니까. 그런건 신규 사용자분들도 앞으로 홀 플레인에서 활동하면서 함께 고민하고 풀어야 합니다." 현우의 한심하다는 눈길을 느꼈는지 여자는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슬쩍 자리에 앉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지만 곧이어 마력 재능자 계열의 남성 한명이 손을 들었다. 스포츠 컷으로 자른 깔끔한 머리와 영리해보이는 인상을 가진 남성 사용자였다. 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 또한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재 이 세상을 홀 플레인이라고 부르는건 알고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을 사용자라고 부르는 것도요. 그리고 이 도시를 바바라 대도시라고 부르는것 같은데, 이 도시에만 우리와 같은 사용자라 불리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까?" 남자의 질문에 현우는 즉각 고개를 흔들고는 대답했다. "아닙니다. 천사들한테 들으셨겠지만 홀 플레인은 총 4개의 대륙으로 갈라진 상태 입니다. 그리고 바바라는 북부 대륙의 단 하나뿐인 대도시 입니다. 도시는 이것말고도 4개의 일반 도시, 그리고 8개의 소도시가 북대륙에 있습니다. 그곳에 또한 우리와 같은 사용자들이 분포해 있습니다. 아직 북대륙의 안전을 완전히 도모한건 아니지만 사실상 도시들 주변은 대한민국 사용자들의 관할하에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대한민국 사용자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국적이 다른 사용자들도…." "예. 홀 플레인에는 대한민국 사용자들만 있는건 아닙니다. 동부 대륙은 일본 사용자들이, 서부 대륙은 미국 사용자들이, 남부 대륙은 영국 사용자들의 관할하에 있습니다. 물론 각 대륙간 어느정도 교류가 있는 편이긴 합니다. 하지만 일단 크게 본다면 그렇게 나눌 수 있다는거죠." 이번 질문은 그래도 아주 쓸모없지는 않았다. 남성 사용자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 앉자 그는 무심한 얼굴로 신규 사용자들을 응시했다. 서너개의 질문을 받겠다고 했으니 아마도 지금 질문이 마지막 질문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사람들도 그걸 아는지 어느 누구도 섣불리 나설 생각을 못하고 있는것 같았다. 그때였다. 현우가 한 사람을 지목했고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슬몃 손을 든 한명의 여성 사용자를 볼 수 있었다. 이윽고 그 여성 사용자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얼굴을 볼 수 있었을때 나는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마지막으로 일어난 여성은 바로 김한별 이었다. 그녀는 예의 고요하고 차가운 얼굴로 현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사고력은 익히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어떤 질문을 할지 격렬한 호기심이 일었다. 지금까지 느꼈던 지루함이 순식간에 사라지는것 같았다. 곧이어 그녀의 고운 입술이 살짝 열리고, 그 사이로 아름다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사용자 아카데미란 곳에서 훈련을 할 예정이라고 들었어요. 그러면 저희들이 그곳에서 훈련을 받는 실제 목적은 무엇인가요?" 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잠시간 장내가 술렁였다. 대부분 인상을 찡그리는게 쓸데 없는 질문을 했다고 생각하는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그녀의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 이었다. 오직 그녀의 말에 깔린 의도를 알아들은 소수의 사람들은 앗차 하는 얼굴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나 또한 한별의 뾰족한 질문에 내심 감탄하는 마음이 들었다. 현우도 어느정도 머리 회전이 되는 사람인지 첫 여성 사용자의 질문을 들었을 때와는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입술에 침을 연신 적시는게 꽤나 당황한것 같았다. 그정도로 한별의 질문은 고도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 이유와 목적은 다른 말이고 목적과 실제 목적도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다. 그녀의 말은 단순히 "우리가 왜 훈련을 받아야 하냐."가 아니었다. 우리를 그곳에서 훈련시키는 실제 목적과 그걸 넘어 사용자 아카데미의 활용 목적을 동시에 묻는 핵심을 짚는 질문 이었다. 현우는 지금과는 다른 머뭇거리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지금껏 거침없이 대답을 하던 그와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 이었다. 신규 사용자들도 그의 이상한 태도를 느꼈는지 순식간에 술렁이던 장내가 조용해졌다. 이윽고 그는 조금은 불편한 어투로 말문을 열었다. "…사용자 아카데미의 활용성은 이미 충분히 설명을 했습니다. 지금 질문하신 사용자는 훈련을 받는데 불만이라도 있으신지요." "불만을 말하고 싶은건 아니에요. 그리고 저 또한 아카데미로 들어가는건 공감하고요. 제가 듣고싶은건 아카데미의 당위성이 아니에요. 정말로 그곳은 단순히 신규 사용자들의 적응과 도움을 위한 목적만 있는 훈련 공간인가요?" 나는 현우가 입을 다무는걸 볼 수 있었다. 문득 홀 플레인 오두막 집에서 그녀가 나한테 한 말이 머리속으로 떠올랐다. <또 그러시네요. 안현 오빠나 유정이 언니한테는 먹힐지 몰라도 저한테는 그러지 말아주세요. 교묘하게 화제를 돌리려고 하지 말아요.> 그 또한 은근슬쩍 화제를 돌리려고 했으나 아예 대놓고 물어보는 한별의 질문에 말문이 막힌것 같았다. 한동안 입술만 짓씹으며 침묵만 지키던 그는 이내 얼굴 가득 쓴웃음을 지었다. 홀 플레인으로 들어와서 처음 보는 그의 살아있는 감정 표현 이었다. 설마 그정도로 한별의 질문이 그의 내면을 건드렸다는 건가. "어차피…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게될 것들 입니다. 좋든 싫든 말이죠." 현우는 잠시 바짝 마른 입술을 침으로 조금 적시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여러분들 모두 행복한 토요일은 보내셨나요? 먼저 선작 눌러 주신분들, 추천 눌러 주신분들, 코멘트 달아 주신분들, 쿠폰 쏴주신분들. 정말, 너무나, 굉장히 감사합니다. 오늘 38화 수정 작업이 많이 더뎌 12시에 올릴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는데 다행히 여러분들의 코멘트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글을 쓰다 머리가 복잡해지면 코멘트를 한번 슥 읽거든요. 그럼 거짓말처럼 머리가 개운해진답니다. 하하하.(진짜에요.) 『리리플』 1. 사람인생 : 1등 축하드려요! 그럼요. 수현이와 클랜간의 마찰을 기본 옵션이죠. 안그래도 지금 벼르고 있는 클랜들 몇개 있걸랑요. 후후훗. 2. 에인트제 : 아니요. 명목상 제한은 없어요. 다만 1회차 홀 플레인에서 최고 능력치 포인트는 근력 101 한명, 마력 101 한명이 있었습니다. 실상 90은 커녕 85만 넘겨도 홀 플레인에서는 목에 힘좀 주고 다닌다구요. 하하하. 3. POWERED : 저두요! 얼른 수현이가 멋지게 자신의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을 쓰고 싶어요. 다만 급한 전개는 되도록 지양하려고 해요. 하나씩 차분하게 담아가며 글을 쓰고 싶거든요. 물론 빠를때는 빠르게, 그리고 필요할때는 느리게.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 4. 설비연 : 정말이에요. 이만큼 많은 분들이 관심을 주실줄은 몰랐거든요. 요즘도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간답니다. 5. 착한몸매 : 하하. 지금 고민중이에요. 솔직히 저도 하렘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답니다. 다만 하렘으로 한다고 해도 몇명을 할지 그게 고민이라서…. 6. Demodex : 감사합니다! 오타 수정 완료했습니다! 7. 웃기네 : 그 부분에 관해서 부연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본문에요. :) 주인공은 자신을 비롯해 모든 사용자들의 직업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주인공의 직업을 확인할수는 없어요. 그러니 직업을 분류할때 "거짓말."또한 가능합니다. 8. 네이샤 : 이런. 주인공 목적은 38화까지 오면서 슬쩍 슬쩍 흘려두었습니다. 후후후. 영원히 자신을 숨기는건 불가능해요. 그리고 수현이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답니다. 그 전까지…. 9. 블라미 :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냥 반 설정 반 이에요. 네개의 대륙을 기반으로 홀 플레인 설정에 가장 적합한 국가들을 선발했지요. ㅇㅅㅇ 물론 그런 장면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 (연참은…죄송해요…허헝.) 10. GradeDown : 엄청난 사람들이 참가 당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지죠. 그렇다면 한자기 "의문."이 생기실텐데, 그건 수현이 형을 만나게 되면 풀리는 의문이랍니다. :) 11. 크리아센 : +ㅁ+ 세라프…는. 어…그러니까…히로인…이라기보다…음…ㅜ.ㅠ(회피!) 12. 암산 : 아니에요.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아요. 전 코멘트만 봐도 배가 가득 부르답니다. 하하하. 13. 애독자C : ㅋㅋㅋㅋ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아 ㅋㅋㅋㅋ 후기만 보아도 책 한권 분량이라니…ㅋㅋㅋㅋ 14. JoWoon : 네…? 네? 네; 네…;; 이…러시면 곤란해요.(ㅜ.ㅠ ㅋㅋㅋㅋ) 15. 기아모자님카 : 전개가 느린점 죄송해요. 하지만 이 부분은 꼭 필요한 부분이라 조금 천천히 가고 있습니다. 항상 느린게 아니라 빠를때는 빠르게, 그리고 필요할때는 조금 천천히 가도록 할게요. 작품 용량은 항상 8K 이상을 유지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기아모자님카의 양해 부탁드립니다.(__) 리리플에 없으신 분들! 코멘트는 빠짐없이 확인하니 부디 서운해 하지 말아주셔요. 혹시 나는 꼭~리리플을 받아야 겠다는 분은 앞에 신호를 주세요. 제가 기필코 캐치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행복한 일요일 보내시기를! 0039 / 0933 ---------------------------------------------- Make an Offer * 오늘 후기는 굉장히 긴 편입니다. 39화에 한해 리리플은 하루 쉬겠습니다. 다만 중요한 내용이 있으니 부디 한번쯤은 읽어봐주시기를 바랍니다.(Page 낚시에 걸리지 말아주세요.) 오늘 후기를 마지막으로 후기와 리리플에 대한 입장을 확실하게 정리할 생각입니다. 독자분들의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 홀 플레인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크게 두 분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원래 홀 플레인에 거주하고 있던 거주민들. 그리고 천사들을 통해 들어온 사용자들. 하지만 사용자라고 해도 다 같은 사용자라고 생각하시면 오산입니다." "같은 사용자가 아니라고요?" 한별의 물음에 현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시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용자들도 있고 그냥 홀 플레인에 안주하고 살아가는 사용자들도 있습니다. 즉 홀 플레인의 거주민으로 전향한 사람들이라는 소리죠. 음…전향이라고 하니 말이 조금 이상하네요. 쉽게 말해 지구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는 자꾸 목이 마른지 한번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나는 그가 어떤 말을 할지 점점 더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황금 사자 클랜원들도 마찬가지고 여러분들 또한 지구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똑같을 겁니다. 우리들은 지금도 열심히 활동하면서 귀환을 위한 단서를 모으고 있습니다. 하지만 홀 플레인에 안주한 사용자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영원히 홀 플레인 안에서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런 사람들은 놔두고 귀환을 원하는 사용자들끼리 뭉치면 되지 않을까요." 정론이었지만, 아쉽게도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한별의 반문에 현우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현실은 그렇게 간단히 구분할수는 없습니다. 홀 플레인은 놀이가 아니란 말입니다. 엄연한 하나의 현실이고, 세상입니다. 여러 이해 관계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고 그만큼 충돌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이 지구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지 못하도록 사사건건 우리들의 계획을 방해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부랑자들을 말하는 건가. 예를 하나 들어보면 Murder Brigade(살인 여단)이란 클랜이 있다. 아직 창설된 클랜은 아니지만 현우가 말한 사용자들이 모인 대표적 클랜중 한곳이다. 인원은 열명내외로 별것 없어도 하나하나가 사람을 살해하는데 쾌감을 느끼는 사이코들의 모임 이었다. 창설 시기는 아마도 조만간 일어날 1차 연합 전쟁 이후로 기억하고 있었다. 여담으로 잠시 말하면 그들의 최후는 꽤나 격렬했다. 북대륙이 강철 산맥을 넘고 아틀란타로 진입했을때도(진입이라고 하기는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활동을 이어갔는데, 실수로 대도시를 소유한 붉은 송곳니 클랜의 사용자 한명을 건드리고 말았다. 그리고 분노한 우정민과 선유운 아래 그들은 한명도 남김없이 토벌당하고 말았다. "그들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같은 사용자들을 죽이는것도 서슴치 않고 저지르죠. 물론 그냥 얌전하게 홀 플레인에서 안주하고 있는 사용자들도 많지만 그런 위험한 부류들도 있다는 소리입니다." 광장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 앉았다. 그들로서는 대부분 인간을 같은 편으로 생각했지, 설마 적이 될수도 있는 경우는 생각해보지 못한것 같았다. 물론 박동걸 같이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용자들도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살인을 해본 경험이 있거나 또는 통과 의례에서 모종의 이유로 살인을 했거나…. "지금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음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의 힘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어떤 건수라도 잡거나 기회만 있다면 바로 세상 밖으로 치고 나올정도로 놈들은 틈을 엿보고 있습니다. 지금 질문한 사용자는 아카데미의 진정한 목적을 물으셨죠? 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그는 잠시 한별을 강하게 응시한 후 말을 이었다. "갓 도착한 신규 사용자들은 놈들의 타겟이 되기 마련입니다. 동료로 만들수도 있고, 아니면 본인들의 욕구도 충족시킬 수 있구요. 사용자 아카데미는 신규 사용자 분들을 그들의 마수로부터 보호하고 가르칩니다. 우리와 힘을 합해 그들과 대항할 수 있는 인재를 기르는 초석이 되는 건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들도, 그리고 우리들도 초반에 그곳으로 들어가는걸 권장하는 겁니다. 신규 사용자분들 입장에서는 하등 손해볼것이 없는 일이니까요." 현우의 말의 요지는 결국 서로 상부상조 하자는 소리였다. 기존 사용자들은 초반 신규 사용자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홀 플레인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신규 사용자들은 그런것들을 바탕으로 성장해 한명분의 몫을 할 수 있는 사용자가 된다. 그러면 그만큼 성장한 사용자는 그 도시, 그 대륙의 소중한 전력이 된다는 소리였다. 한별이는 납득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주변 사람들도 모두 동조하는걸 보니 모두 현우의 말에 공감한것 같았다. 단 한사람. 나만 제외하고 말이다. 물론 그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고 틀리게 설명한 부분도 없다. 그리고 초반에 아카데미로 들어가는건 애초에 내가 원했던 일이라 하등 불만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애초에 1차 연합 전쟁이 왜 발발했는지 원인을 찾는다면 그가 했던 말들은 정작 중요한 부분은 쏙 빠져있었다. 전쟁의 시발점이된 원인을 제공한 황금 사자 클랜원이 저딴 말을 하니 심기가 굉장히 거슬렸다. 그는 음지에서 활동하는 부랑자들을 열심히 까면서 애둘러 말하고 있었다. 부랑자들은 괜히 부랑자가 아니다. 심한자들은 각 도시마가 현상 수배 포스터가 걸려있고 어느곳을 가도 환영 받지 못하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라고 볼 수 있다. 최소한 이 북대륙 내에서 말이다. 그러면 나는 되묻고 싶었다. 너희들도 궁극으로는 똑같은 놈들 아니냐고. 물론 부랑자들 편을 드는건 아니었다. 하지만 기존의 기득권을 지키고, 빼앗으려는 행동은 기존 사용자들도 별반 다를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실제로 1회차 홀 플레인에서 죽을 고비를 넘겨 강철 산맥을 넘고 아틀란타를 점령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틈을 노린 다른 클랜들의 연합과 타대륙의 지원을 등에 업고 기껏 점령한 아틀란타를 뺏기는 뒤통수를 맞았던 적이 있었다.(그후로 절치부심해 라그나로크 포위 섬멸전과 더불어 역대 최악의 전투로 손꼽히는 아틀란타 탈환 전투를 통해 되찾기는 했다.) 홀 플레인에는 이런 명언이 있다. 서로 이해 관계가 통하는 사용자들이 모여 클랜을 만든다. 그리고 공동의 적을 지닌 클랜들이 모여 연합을 만든다. 즉 클랜이나 부랑자들이나 필요만 있으면 칼을 드는 도찐개찐인 놈들이라는 소리다. 그런데 저렇게 교묘하게 말을 잘 포장하는걸 보니 속에서 열불이 차올랐다. 아무리 지금 신규 사용자들한테 그런말을 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고 하지만 직접 일을 경험한 내가 듣기론 기도 안차는 말 이었다. 간신히 속을 달래고 마음을 가다듬을 즈음 한별이 다시 자리에 앉은걸 볼 수 있었다. 그의 말에 어느정도 긍정을 한것 같았다. 어쩔 수 없는 일 이었다. 앞으로의 홀 플레인이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 경험하지 못한이상 현우의 말은 타당성이 있었다. 다시 중앙 무대로 고개를 돌리자 그도 이런 질문을 받은거라곤 생각 못했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서너개의 질문이 이토록 길어질줄은 몰랐습니다. 보아하니 피곤하신 분들도 종종 보이는게…오늘은 여기서 끝내는게 좋을것 같군요. 일단 오늘 하루는 푹 주무시는걸 추천합니다. 훈련을 바로 내일부터 시작 되니까요. 그러면 지금 바로 안내원들의 지시에 따라 숙소로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유빈. 음성 증폭 마법 캔슬."이라고 말한 후 주변에 대기하고 있는 사용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윽고 그의 지시를 받은 사용자들이 우리들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는걸 마지막으로 현우는 무대를 내려갔다. 그리고 그가 막 계단을 내려가기 직전 고개를 돌린 그의 시선은 계단에 모인 사용자들로 향했다. 그 시선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나는 현우가 한별이를 바라보는걸 볼 수 있었다. 그의 눈동자 안에는 그녀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자리잡은것 같았다. 빠르게 한별이 쪽을 보니 그녀 역시 그와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 마음이 불편해지는것 같았다. 어느정도 성장한 대형 클랜인 경우 입단을 희망하는 사용자들도 많지만, 소형 클랜들과 합병하거나 어느정도 가능성이 보이는 신규 사용자들을 선점하는 경우가 있다. 대도시를 대표하는 클랜의 특권중 하나라 건드리기도 어려운 부분이었다. 현우가 한별이를 보는 시선도 그런 부분에서 비롯된 관심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왜인지는 잘 몰라도 한별이 황금 사자 클랜의 오퍼(Offer)를 받을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 아카데미 내부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은 어둑한걸 넘어 밤이라고 할만했다. 숙소는 애초에 나눈 분류에 따라 8명씩 컷트에 한방에 들어갔다. 눈치 빠른 안현이 살짝 대열을 이탈해 내 옆에 끼어들어 나와 현은 같은 숙소를 쓸 수 있었다. 잠자리라고 해도 매트리스 하나 담요 두개로 크게 특별한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열악하다고 할 수 있을만큼 초라하기도 했다. 처음 보는 사람은 투덜거렸지만 예비역으로 보이는 사용자들은 군말없이 안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정도로 사용자 아카데미는 군대와 흡사한 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 하루는 어느정도 자유를 보장한다고 훈련 교관이 비릿하게 웃으면서 말했다.(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연초를 요청했다. 군말없이 본인이 가지고 있던 몇가치를 꺼내주더라.) 그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피곤한지 나를 제외한 모든 사용자들은 바로 곯아 떨어졌다. 안현은 내 옆자리에 찰싹 붙어 잠이 들었는데 솔직히 이러는게 조금 부담스럽긴 했다.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보고있자 무언가 꿈이라도 꾸는듯 입을 쩝쩝 다시는게 보였다. 먹는 꿈이라도 꾸는건가? 참 속 편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북부 대륙의 사용자 아카데미는 전 대륙으로 봐도 악명 높은 훈련으로 굉장히 유명하다. 상상 이상의 훈련들이 상당수 포진하고 있다. 총 13주차를 훈련 받게 되는데 가면 갈수록 상식을 벗어나는 훈련을 받으며 애들이 잘 견딜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 가슴이 답답하다. 조금전부터 연신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이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하나의 생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 머리에는 현재 현우와 한별이가 서로를 바라보던 장면을 계속 떠올리고 있었다. 억지로 털어내고 자려고 할수록 머리가 더욱 복잡해지는것 같았다. 한동안 뒤척이던 나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아래 바닥에 널부러진 슬리퍼 하나를 대충 신고 나는 꾹 닫힌 숙소의 문을 열었다. 어둠컴컴한 복도로 들어서자 차가운 한기가 몸을 식혀주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차가운 공기를 음미하던 나는 주머니를 뒤적여 교관한테 얻어둔 연초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주위를 감지한 후 아무도 없는걸 확인했다. 나는 미약한 마력을 일으켜 손 끝으로 천천히 보냈다. 화륵. 불꽃이 일렁이는 소리와 함께 발화한 불꽃은 연초의 끝부분을 태우고 사라졌다. 나는 바로 한모금 깊이 빨아들였다. "후~우…." 남성 사용자들과 여성 사용자들의 숙소는 건물이 따로 있다. 그녀는 의외로 마력 재능자 계열로 분류 되었는데, 어차피 마력 수치가 가장 높았으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전에 모신 클랜 로드는 전투 계열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냥 목적과 이용 수단으로서 안현 일행을 대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도 궁극적인 목적은 변한건 없었다. 다만 생각의 변화가 있을뿐. 한별이 평소 사용자와는 다른 특별한게 있다는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솔직히 이정도로 흔들릴줄은 나 자신도 예상할 수 없었다. 설마 그녀와 그동안 정이라도 든 걸까. 아니면 연애 감정? 말도 안되는 생각에 나는 곧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에 따라 말간 빛을 내는 재들이 허공에 흩날린다. 나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메마른 내 성격상 고작 일주일 만난 사람과 정을 통한다는건 재고할 일말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였다. 그순간 나는 한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왜 그녀가 마력 재능 계열로 분류됬을때 아쉬워 한걸까? 나는 첫만남부터, 그리고 통과 의례 도중 그녀를 볼때마다 한명의 여성을 떠올렸었다. 그 여성은 1회차에서 진심으로 따랐던 사용자중 한명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동안 김한별에게 한소영의 모습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속 가득히 씁쓸한 기운가 차올랐다. 별것도 아닌 일로 고민하는 내 꼴이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연초를 떨어뜨려 비벼 끄고는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앞으로 할것도 많고 생각할 거리도 산더미였다. 생산성 없는 고민에 더 매달리는건 스스로 사양하고 싶었다. 잠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억지로라도 잠을 잘 생각이었다. 필요하면 스스로를 기절시킬 마음도 있었다. 나는 조용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 작품 후기 ============================ 수현이가 저러는 이유는 아직도 한소영의 향수를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통과 의례동안 한별이를 보면 그녀가 떠올랐다는 부분이 꽤 많이 있었지요. 사용자 아카데미는 일전에 약속한대로 2화 안으로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만큼 스킵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일요일이 지났습니다. 월요일이에요. 네. 월요일입니다. 하아…. ㅜ.ㅠ 어제 순수 용량으로 9K를 올렸는데 양이 작다는 말씀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요. 그게요. 으헝. 죄송해요. 처음 글을 올릴때는 프롤로그 제외하고 8K 이상으로 올려야지. 라고 했는데 10K가 최대 어쩌구 라는 쪽지를 받고 그럼 10K 내외로 올려야겠다. 라고 생각해서 9K를 올렸는데 독자분들 마음에 차지 않았나봐요. ㅜ.ㅠ 부디 독자분들의 너그러운 마음과 양해를 바랍니다. 그리고 후기요…. 네. 후기가 불편하신 분들도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솔직한 심정을 말해보면, 후기나 리리플은 그만두고 싶지 않아요. 제가 후기를 쓰는 시간은요 글을 올리기 20분~30분 정도 전에 작성을 시작해요. 요즘 연참을 못하는것. 죄송합니다. 전개가 느린것. 죄송합니다.(필요한 부분은 천천히. 빠른 부분은 스킵.) 어떤분들은 후기를 쓸 시간에 글을 더 쓰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하루에 한편씩 올리는데, 20분, 30분. 그정도도 저를 위한 시간을 할애하지 못한다는건 너무 슬픈 일이라고 생각해요. 일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저는 후기를 쓰는게 상당히 즐겁거든요. 이번화를 올리면 어떤 코멘트가 달릴까. 재밌다고 해주실까. 어느 부분이 부족할까. 어느 부분이 궁금하실까. 애초에 메모라이즈 재연재를 마음 먹으면서 독자분들과 스스럼없이 소통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선택한게 리리플과 후기구요. 거창한 이유는 절대 없어요. 정말로 저는 여러분과 얘기하는것. 단지 그 이유 하나에요. 용량은 제가 최대한 10K 이상으로 맞추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 후기나 리리플이 Page를 잡아먹는게 거슬리는 분들의 양해를 구하고 싶네요. 상당히 말이 길어진것 같습니다. 오늘 후기에 기분이 나쁘신 독자분이 있다면 정중히 사과 드리겠습니다. 40화 부터는 다시 후기와 리리플을 재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코멘트는 빠짐없이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40화 후기에 38, 39화 리리플을 같이 하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0040 / 0933 ---------------------------------------------- Make an Offer 훈련소로 입소한 후 다음날부터 교관들은 거친 훈련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그리고 신호탄을 쏘아 올린지 1주차 만에 북대륙 사용자 아카데미는 극악의 악명을 증명했다. 130명중 무려 10%를 넘는 인원인 17명이 훈련을 포기하고 퇴소해버리고만 것이다. 한가지 특이한건 15명이 근접, 원거리 전투 계열 사용자라는것. 거듭 말하지만 북부 대륙은 대한민국 출신 사용자들의 관할 아래 있다. 다른 대륙을 관할하는 국가와 차별화 되는것이 하나 있다면 강제적 병역 제도를 가진 나라라는 것이다. 그만큼 성인 남성들은 예비역은 물론이고 군 관련 출신 사용자들도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전대륙을 통틀어 시초를 자랑하는 북대륙 사용자 아카데미는 군대의 향수를 물씬 반영한 모습이었다. 훈련은 고사하고 일과 시간에는 의식주를 포함한 기본 생활도 통제하는등 자유를 억압하는 모습도 종종 보였다. "단순히 훈련이 힘들다."라고 한다면 어떻게든 근성으로 버틸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신규 사용자들을 질리게 만든건 훈련 내용이었다. 실제 군대의 유격 훈련은 애교로 보일 정도의 강도 높은 훈련을 실시하는데, 자격을 증명한 사용자들 대부분이 첫날 토악질을 하는등 훈련을 소화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가장 백미로 불릴만한 훈련은 단연 주말에만 하는 특별 훈련을 꼽을 수 있을것이다. 홀 플레인의 날짜 계산은 지구와 동일한 방식으로 따라간다. 7일마다 돌아오는 토, 일요일 주말 훈련이 바로 신규 사용자들이 아카데미를 떠난 참된 원인 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전투 계열 사용자들이 대다수 떠난 이유도 있었다. 그 훈련은 바로 사용자들끼리 서로 1:1로 전투를 벌이는 것 이었다. 물론 이 훈련은 마법사와 사제는 제외한다. 마법사는 서로 마력을 끌어내어 현실에 구현한 후 타격하는게 기본 원리다. 하지만 초반에는 끌어내는것도, 그걸 조절하는것도 힘들고 그것 말고도 배울 지식의 수준이 상당히 많았다. 13주를 통째로 쏟아부어도 기본을 전부 익힌다는게 요원할 정도로. 사제도 비슷한 이유가 있지만, 공격 마법도 적고 회복이나 전투 보조 마법이 주를 이루는지라 당연히 훈련 대상에서 제외 시켰다. 이 사용자들간의 전투가 서로 얌전히 대련을 하는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사늘한 날을 세운 무기를 쥐어주고 실제로 상대방과 싸워 일정 이상의 상처를 입히는게 규칙이다. 물론 머리나 심장등 급소 부위에는 탄탄한 보호구를 채우고 하지만 그 외의 부분은 그대로 여과없이 드러낸 후 전투에 임하게 하는것이다. 물론 전투를 할때마다 만반의 준비는 갖추기는 한다. 명성있는 사용자들이 교관으로 들어가 항상 불의의 일격을 대비하고 항상 숙련된 사제들을 대기시킨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실제 모의 전투 훈련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훈련 이었다. 아니. 받아들이기 힘든걸 넘어서 대다수의 사용자들은 미친 훈련이라고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나는 이 훈련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해당 훈련은 내가 통과 의례에서 안현 일행에게 유일하게 걱정했던 부분을 보완해주는 훈련 이었기 때문이다. 홀 플레인은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도시 밖으로 어느정도 거리를 벗어나면 그 순간부터 어느곳도 안전하다고 볼 수 없다. 함정에 걸릴수도 있고, 몬스터나 부랑자들의 습격을 받을수도 있다. 사용자들의 영향이 미치는곳도 이러한데 미개척 지역이 어떨지는 두말하면 입 아플것이다. 그런 상황은 순간적인 판단과 순발력을 사용자들에게 요구한다. 얼마나 신속하게 대응하는가에 따라 생사가 갈린다고 볼 수 있었다. 그때 기껏 칼을 들고 나는 사람을 찌를 수 없어, 어떻게 사람을 찔러라고 어벙거리면 굉장히 답답해지는 상황이 오는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사람을 찌르는것과 동시에 찔리는것, 상처 입는것을 익숙하게 몸에 배게 하는 일종의 중요한 훈련 과정인 셈이다. 단 한가지 걱정이 있다면 나는 절대로 모의 전투 훈련에서 상처를 입으면 안된다는것 이었다. 그말인즉슨 전투를 할때마다 무조건 승리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아직 초보에 불과한 사용자들이 내 내구력을 뚫을리는 만무했다. 약한 상대는 무리 없이 이겼지만 어느정도 강한 상대를 똑같이 이기기에는 조금 부담스럽다고 여겼다. 일례로 우정민과 전투를 한적이 있는데 시종일관 방어에 전념해 대등한 경기를 펼치다가 한순간 카운터를 치고 들어가는 방법으로 승리를 거뒀다. 사정이 이러니 어느정도 유명세를 타는건 불가피한 일 이었다. 유명세라고 해도 고작 신규 사용자에 불과하니 대단한건 아니었다. 주변 교관들이나 사용자들 사이에 이번 신규 사용자들 수준이 높은데, 그중 특히 김수현이 뛰어나다, 쓸만하다 정도의 평가였다. 이정도는 허용 범위 내였기 때문에 나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있다. 능력과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스스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예전의 습관과 버릇에 기인한 강박 관념 때문에 무조건 나 자신을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이대로라면 오빠는 똑같은 상황에서 또 똑같이 행동하고 말겠죠. 그리고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풀이 될 가능성도 있어요." "사용자 김수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똑같이 행동하는것.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것. 한별이와 세라프가 한 말은 내 가슴을 뒤흔들었다. 나는 이번에는 유현이 형과 그녀, 한소영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당당히 양지로 나서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이번만큼은 슬픈 엔딩이 아닌, 같이 행복한 결말을 보고 싶다. 홀 플레인에서 힘이란 서로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가 얼마나 많은가에 따라 가늠할 수 있다. 역사가, 그리고 내 경험이 증명한다. 근력 101 포인트를 이루고 한 시대를 풍미한 천하무쌍 사용자도 결국 연합군의 힘에 바스라졌다. 그렇다면 그 동료를 모으려면 어느정도 능력과 명성이 있어야 한다. 나는 처음과는 달리 내 생각이 조금 달라진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홀 플레인에 입성한만큼 이제는 필요하면 할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 내 행동도 변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힘든 훈련이라도 한마디 군소리 않고 열정적으로 임했다. 조금 심하다 싶은 교관의 통제에도 순순히 순응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한것들이 준수한 훈련 성적과 연결 되자 어느새 나를 호의 가득한 눈으로 보는 교관들을 볼 수 있었다.(여담으로 처음 내 숙소 교관을 맡은 사용자는 어느새 내 연초 셔틀이 되었다.) 사용자 김수현에 대한 말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자 저절로 주변 사용자들과의 관계도 개선 되었다. 나와 친구가 되고 싶거나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는 사용자들 또한 점점 늘어났다. 나는 한번에 삐죽 나오는게 아니라 이렇게 한계단씩 천천히 오르며 성장에 대한 여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즉 속된 말로 나는 싹수 있는 놈이라고 선전한 것이다.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다. 그 기간이 개인차는 있을지 몰라도 적응을 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적응을 한 사용자와 하지 못한 사용자의 생존율은 그만큼 큰 차이가 있다. 2주차, 3주차, 4주차는 여전히 퇴소하는 인원들이 어느정도 있었다. 하지만 5주차, 6주차, 7주차를 진행하면서 점점 줄어들더니 8주차에 이르러는 단 한명도 퇴소하지 않았다. 남은 인원은 체로 거른 알짜배기 사용자들이라는 소리였다. 물론 현재 남은 인원이라고 무조건 살아 남는것도 아니고, 나간 인원이라고 해도 무조건 죽는것은 아니다. 단순히 사용자 아카데미로 생사를 판가름 하기에는 홀 플레인의 세상이 가지는 변수가 너무도 다양했다. 다만 확률과 가능성의 문제였다. 오죽하면 졸업 후 홀 플레인으로 진출할때 클랜들의 입단 조건을 알아보면 공통적으로 한가지 사항을 볼 수 있다. 사용자 아카데미의 졸업 여부. 심지어 다른 대륙으로 건너갔을때 북대륙의 사용자 아카데미를 졸업했다고 하면 가산점을 주는 클랜도 있다고 들었다. 아마도 나간 인원들은 2년이 지난 후 살아 남는다면 지급 받지 못한 능력치 보상 4포인트를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다. 안현네 일행은 내 초기의 걱정을 보란듯이 극복했다. 심지어 솔이를 포함해 단 한명의 낙오도 하지 않고 훈련 과정을 이수하고 있었다. 트랩 포인트였던 도시를 떠난 이후 했던 강행군을 했던 경험이 어느정도 도움이 된것 같았다. 안현은 검을 다룬만큼 검사가 될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창을 주무기로 선택했다. 직업을 물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창병(Lancer)을 골랐다고 한다. 마력을 제외한 기초 신체 능력치가 상당한만큼 어떤 무기를 들어도 어울리겠지만 일말의 아쉬움은 있었다. 처음 공터에서 솔이가 위험했을때 그는 검을 투척해 데드맨의 팔을 하나 잘랐다. 나는 그후로 현의 검에 대한 센스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만약 나와 같은 검사의 길을 선택했다면 소드 마스터를 이루는데 적잖은 도움을 줄 수 있었을텐데 본인이 창에 더 흥미가 동한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궁금한건 궁금한거라 왜 창병을 선택했는지 물어보니 대답이 가관이었다. "그때 형이 죽은줄 알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거든요. 솔직히 걔네들 열받잖아요. 형의 생사를 알려 달라는데 자꾸만 대답을 회피하고 사용자 설정이다 뭐다 이상한것만 하자고 하니까…걔가 검사 하라고 했는데 꺼지라고 했어요. 홧김에 창 들겠다고 했죠." 옆에서 듣고 있던 안솔은 초반에는 오빠가 마법사를 하겠다고 어깃장을 놓았다고 부연했다. 그때 천사가 당황하는걸 처음 봤다면서 그녀는 까르르 웃었다. 둘의 태연한 말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안솔은 내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역시나 그녀는 사제를 선택했다. 안현의 말에 따르면 처음 직업을 설정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안솔은 자신이 걸린 시간이 반의 반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무기를 드는데 거부감이 있고고 남을 상처 입히는건 질색하는 만큼 사제는 안솔의 적성에 안성맞춤 이었다. 유정이는 통과 의례에서 사용했던 종류인 단검을 주무기로 선택했다. 특이한점은 한손 단검이 아닌 양손을 사용하는 쌍단검을 선택했다. 직업을 물어보자 자랑스럽게 용병(Mercenary)을 골랐다고 하더라. 확실히 유정은 마력을 포함 모든 능력치가 고른만큼 근접 계열은 어떤걸 골라도 평균을 상회할 수 있을것이다. 아마 나라면 암살자(Assassin)를 추천 했겠지만 다양한 무기를 다룰 수 있는 용병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규 사용자들이 본인의 정보가 개방되고 다룰 수 있게된 만큼, 아카데미에서는 서로의 능력치를 물어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나는 일행들을 모아놓고 절대로 자신의 능력치나 능력등 상세 정보를 교관 포함 다른 사용자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했다. 특히 솔이 한테는 두번, 세번 당부했다. 얘는 내가 왜 그러는지도 모르는데 그저 좋다고 헤실헤실 웃었다. 확실히 보스 몬스터를 만난 이후 나를 대하는 일행들의 태도는 미묘하게 달라진걸 느꼈다. 다만 한명은 점점 우리들과 어긋나는 방향으로 변하는것 같았다. 내가 아카데미에서 어느정도 이름을 알리자 안현, 안솔, 유정이는 은연중 자랑스러워 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본인들이 잘한것도 아닌데 저러는걸 보면 그 세명은 이미 나를 타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반증이었다. 다만 한별이는 예외였다. 한별이는 나를 비롯한 일행들과 점점 거리를 두고 있었다. 처음 훈련을 받고 모였을 당시 그녀에게 무슨 직업을 선택했냐고 묻자 그녀는 곧바로 차갑게 대답했다. "오빠가 방금전에 다른 사용자한테 자신의 정보를 말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세부 정보를 말하지 말라고 했지 누가 직업을 말하지 말라고 했나. 그건 드러낼 수 밖에 없는건데. 나는 겉으로는 멋적게 웃었지만 그 말을 듣자 속이 조금 상하는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내 기색을 조금 느꼈는지 그녀는 조금 후 조그맣게 마법사 계열을 받았다고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까닥이는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물론 제 3의 눈으로 볼 수는 있었지만 일부러 활성화 하지는 않았다. 마력 재능자 계열에 있는만큼 어느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으니까. 한별이는 모임에 불참할 적도 많았다. 마법사들은 공부량이 많고 외울것도, 연습할것도 많다고 하지만 그건 다른 계열도 비슷했다. 일행들끼리 만나봤자 일주일에 한번, 그것도 한번에 한두시간이 전부인데 그것조차 나오기 힘들다고 솔이를 통해 들을적이 많았다. "오빠. 그런애는 그냥 신경쓰지마. 걔 나하고 솔이랑 숙소도 다르고 얘기도 거의 안한다? 그냥 지 꼴리는대로 하라 그래. 그리고 솔직히 김한별…처음부터 마음에 안들었어." "그건 좀 심하다. 그래도…." "그래도는 뭐가 그래도.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 누구지. 처음 우리 여관에서 나왔을때 앞에서 설명하던 사용자 한명 있잖아. 그 남자 사용자. 걔랑 얘기 나누는거 본 사람이 있다고 하던데. 배신자 같은 년." 한별을 배신자라고 욕하는 유정이를 보며 나는 쓰게 웃었다. 아무래도 내가 처음에 느꼈던 예감이 현실이 되고 있는것 같았다. 솔직히 황금 사자 클랜으로부터 오퍼를 받았다는건 욕할 일은 아니었다. 8주차에 이른 지금 나만해도 남몰래 오퍼가 들어온 클랜만 다섯곳이 넘었다. 그중에 당연히 황금 사자 클랜도 있었고. 그래도 우리들과 거리를 두는 행동은 확실히 걸리는게 있었다. 가끔 참여를 할적도 있었지만 그녀가 입을 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딱 한번, 나를 보며 먼저 입을 연적이 있는데 그때 나에게 졸업 후 어떻게 할건지 물은적은 있었다. 나는 대답을 아직 생각중이라는 말로 일축했다. 나는 그날 이후 한소영과 김한별을 분리해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더이상 한별이 문제로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함께 했으면 하는 마음은 있지만 따라오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가는 사람 안 잡고 오는 사람은 철저히 검증 후 받아 들일것이다. 나는 소수 정예를 지향한다. 머릿수만 많은건 사양하고 싶었다. 인연(因緣)이라는 단어가 있다. 인연이란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를 뜻한다. 나는 인연이 우연이 아닌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인연이라는 단어를 믿는다. 실제로 인연으로 맺어진 유대감이 발휘하는 강력한 힘도 겪어본 산증인이었다. 나는 김한별을 인연으로 대하기로 했다. 인연이 닿는다면 만나게 되겠지만 아니라면 그냥 보낼것이다. 더 많은 인연을 만들 능력이 나한테 있는데 불확실한 인연에 매달리는건 바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한소영의 그림자를 벗겨내자,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성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냉정하게 봐도 가능성만 믿고 가는 김한별 보다는 이미 1회차에 검증된 사용자들을 잡는게 더 이득이었다. 더구나 비슷한 가능성을 지닌 신규 사용자들이 많지는 않아도 분명 어딘가에는 있을것이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독자분들 모두 우울한 월요일을 보내셨는지요? 39회에 후기 문제를 다루었는데, 다행히 조아라 관계자분과 얘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결론은 후기를 연재 내용에 붙이는건 큰 문제가 될 소지가 있지만 후기란에 쓰는건 얼마를 쓰던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답변을 들었습니다. 마음이 홀가분 하네요. 다만 후기 내용을 쓰는건 조금 더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쓸때 앞 내용을 미리 말한 적이 있는데 앞으로 전개 되는 내용의 기대감을 떨어뜨리는 스포가 될 수 있다는 코멘트를 봤습니다. 역지사지로 생각해도 저 또한 그럴것 같더군요. 해서, 앞으로 내용에는 연재 내용을 제외하고는 일절 다른 내용을 쓰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후기 및 리리플은 한번 더 생각하고 쓰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전개될 내용이나 스포가 될 수 있는 질문은 노 코멘트로 할 예정입니다. 답답하신 분들도 있겠지만 앞으로 연재할 내용을 보게 되시면 자연스럽게 풀릴 의문들이니 기다려 달라는 말밖에 못하겠네요. 혹시 나는 정말 궁금하다, 이러분은 저한테 쪽지를 보내주세요. 그러면 알려 드리겠습니다.(다만 그 내용을 다른분들한테 말씀하시면 안되겠죠?) 하루동안 잠도 못자고 많은 마음 고생을 했는데 긍정적인 방향으로 마무리 지은것 같아 한결 편안한 기분입니다. 앞으로도 메모라이즈에 많은 관심 부탁드릴게요! 『리리플』 1. 여옥아놀자 : 능력치를 올리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수련, 영약(물약), 기연, 임무 보상 정도로 볼 수 있겠네요. 그리고 극도로 희소하지만 장비에 능력치 상승이 붙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만 수련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별따기로 생각하시면 되요. 그리고…확실히 솔이를 그런 방식으로 활용해도 재밌겠네요. :) 2. GradeDown : 솔직히 저도 처음에는 사용자 아카데미 부분을 학원물과 비슷하게 나가고 싶었어요. 수능(개인의 성적)이랑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클랜 입단)과 관련해서 재밌는 소재가 잔뜩 떠올랐거든요. 다만 그러면 거의 200K~250K 정도의 분량이 필요해 빠르게 스킵하기로 결정했습니다. 3. 아일릴리아 : 헐. 작품 이해도를 위해 1편부터 다시 복습하신다니…정말 감사할 정도로 열정을 갖고 계신것 같습니다.(솔직히 감동 먹었어요. 엉엉.) 작품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신 만큼, 저 또한 앞으로 더욱 알찬 내용으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__) 4. 라티인형 : 기본 규칙은 그렇습니다. 다만 오늘 내용을 보면 아시듯 훈련이 상상 이상으로 힘들다고 보시면 되요. 여담이지만 지식은 홀 플레인에 대한 기초 배경과 전공 지식정도로 보시면 될겁니다. 5. 씨크한갈치 : 하하하. 정말 특이한 꿈을 꾸셨네요. 혹시 실례가 안된다면 그때 능력치랑 직업 같은것도 기억 나시나요? 궁금해요. :) 6. CrossDie : 후기란에 적는건 전혀 상관이 없다고 그러더라구요. 솔직히 이번 40회는 그래서 상당히 즐겁게 쓴것 같아요. 어제는 11시까지 허덕이면서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는데 오늘은 조금 여유가 있네요. 7. zjekfksqlc : 소중한 조언 감사합니다. 독자 모든분들의 입맛을 맞출수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다수의 분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소수분들의 의견을 최대한 수렴하면서요. 저한테는 한분한분이 정말 소중한 분들이거든요. 8. 사람인생 : 사람인생님은 항상 저를 많이 도와주시네요. 그점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건 대답해주어야한다.'라던가 "궁금한것만 요약해서.'는 당연히 리리플에 포함되고, 그 외의 소소한 코멘트도 포함하고 싶어요. 어느 하나도 놓치기는 아쉽거든요. :) 9. 유운처럼 + 블라미 : 오랜만입니다! 여행을 잘 다녀오셨나요? 하하하. 자세가 낮다기 보다는 조금 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느꼈어요. 실제로 제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지적해주시는 분도 많았구요. 10. dsdqwe : NO. 절대로 섭섭하지 않습니다. 정말이에요. 후기는 예전부터 꾸준히 거론된 문제라 완전히 매듭을 짓고 싶어 저번화에 쓴거랍니다. dsdqwe님 같이 항상 소중한 조언을 해주시는 분들에게는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용량은 앞으로 제가 더욱 신경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__) 11. Toranoanal : 음. 순위가 낮군요. 저는 20위 내외로 들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하하. 아직 제가 베스트 지수 산정에 대해 해박하지 않아 자세히는 모르지만…결론은 순위가 높은 작품보다 독자분들이 느끼는 재미, 흥미가 덜한것 같습니다. 저 또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스마트폰으로 읽는 작품들이 다섯개 정도는 있거든요. 그리고 연참도 안하고, 아직 연재된 편수가 적은것도 한몫 하는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들은 앞으로 제가 더욱 노력해 풀어야할 숙제라고 생각해요. Toranoanal님의 안목에 배반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12. yji5502 : 폰으로 그런 긴 장문을 쓰셨다니, 고생 하셨습니다. 그리고 소중한 조언 감사합니다. 독자님의 코멘트를 읽고 느낀바 많았습니다. 앞서 말했듯 스포를 비롯한 몰입도가 떨어질수도 있는 부분은 일절 자제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대해주세요. 13. 애독자C : 감사하다요? :) 14. hohokoya1 : 스포일러를 당하셔도 상관 없다면 쪽지 보내주세요. 15. 크리아센 : 얏호. 마지막 코멘트는 크리아센님. 오늘 크리아센님 코멘트 보고 정말로 한참을 웃었네요. 하하하. 전에는 한별이를 히로인으로 추천하시더니 마음이 바뀌셨네요. :) 한별이는 1회용 캐릭터가 아니에요. 그만큼 앞으로 여러 에피소드도 기획 되어 있구요. 이번화를 보시면서 어느정도 의문이 풀리셨기를 바랍니다. 물론 이걸로 끝이 아닙니다. 복선을 깔은만큼 매듭은 확실하게 지어야겠죠. :)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41 / 0933 ---------------------------------------------- Make an Offer 9주차, 10주차, 11주차로 훈련이 들어가면서 사용자들도 어느정도 궤도에 오르는것 같았다. 1주차에는 단순한 오래 달리기도 힘들어하던 사용자들은 어느새 웃으면서 가볍게 스무바퀴는 넘게 달리는걸 볼 수 있었다. 단 한명의 낙오도 없이 모든 훈련을 소화하는걸 보며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현재 남은 인원은 얼추 80명을 넘는 수준이었다. 사용자 아카데미의 졸업 인원이 80명이 넘는건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졸업 시즌인 마지막 13주차가 다가올수록 아카데미 내부는 기묘한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 가장 먼저 변한건 교관들이 신규 사용자들을 대하는 태도였다. 교관은 무조건 황금 사자 클랜원들만 있는건 아니었다. 7할이 대도시 대표 클랜 인원들이 자리하고 남은 3할은 일반 도시와 소도시 대표 클랜의 선별된 사용자가 출장을 온다. 초반에는 죽일듯 호통치던 교관들은 점점 더 상냥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한명 두명 몰래 불러내 맛있는 식사를 사주는건 거의 예사로 일어나는 일 이었다. 애초에 훈련이 끝나고 대놓고 그 자리서 오퍼를 하는 모습도 왕왕 볼 수 있었다. 물론 어느정도 실력이 있는 사용자들에 한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심지어 생활 교관 명목으로 새로 배정된 교관을 보니 가관이었다. 남성 사용자들 숙소에는 아름다운 여성 교관을, 반대로 여성 사용자들 숙소에는 훈훈한 남성 교관을 배정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 본다면 이러한 인사 이동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것이다. 훈련이 빨리 끝나니 일행들이 만나는 시간도 자연스레 많아졌다. 요즘들어 안현, 안솔, 유정은 만날때마다 향후 진로를 어떤 방향으로 나갈건지 얘기는 무슨 무조건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형은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오빠. 오빠는 어때. 오퍼도 많이 들어왔을거 아냐. 어디 들어갈 계획이라도 있어?" "……." 나를 따르려는건 좋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자기들도 생각을 하고 말을 하면 몰라도 맹목적으로 의지하려는 모습은 서둘러 버릴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의도를 담아 최대한 완곡하게 말하니, 유정은 뾰루퉁한 얼굴로 대답했다. "누가 안한데? 그래도 오빠 생각 먼저 듣고 싶어서 그렇지." "아직 생각중인데. 그러다 너랑 나랑 생각이 다르면 어떡할래." "어떡하긴? 당연히 오빠 따라가야지." "그럼 그럼. 나도 형을 믿어요. 형 파이팅." 옆에서 얘기를 듣던 안현 또한 고개를 주억이면서 한마디 거들었다. 얘들은 요즘 나를 떡으로 생각하는것 같았다. 도대체 왜 그러는건가 물어보니 "수현이 오빠 말만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잖아요." 라고 안솔이 방실방실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통과 의례에서의 헌신과 사용자 아카데미의 유명세가 애들한테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불러 일으킨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믿어주는게 고마운 마음도 들었지만 일단은 말을 아끼고 싶었다. 졸업 전에 입을 열기는 하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한별은 이제 얼굴도 비추지 않고 있었다. 듣자하니 유정이와는 얼굴을 봐도 서로 얘기도 하지 않고 지나친다고 들었다. 그녀 또한 여성 사용자들중 순위권에 오르는 가능성을 보인만큼 여러 클랜에서 군침을 흘리는것 같았다. 이처럼 어느정도 싹이 보이는 사용자들은 우쭐한 기분으로 오퍼가 들어온 클랜들을 저울질하고 있겠지만, 반대로 오퍼를 받지 못한 사용자들도 많았다. 그런 이들은 점점 졸업 시즌이 다가올수록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나가보면 대형 클랜은 무리라도 소도시 또는 일반도시에 들어갈만한 클랜은 있을것이다. 그러나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대형 클랜에 미련을 가진 사용자들도 있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꽤나 대담한 짓거리를 하는 여성 사용자들도 있다고 들었다. 슬슬 교관들과 친해졌겠다, 자신의 몸으로 유혹해 접근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얼마나 치열하게 서로를 밀고 당기고 하는지 알 수 있을것이다. 점점 더 여유를 부리는 애들을 보며 나는 아직 훈련 시즌인 만큼 훈련이나 신경쓰라고 잔소리를 했다. 사용자 아카데미 기간을 괜히 3개월로 잡은건 아니었다. 능력치를 빠르게 올릴 수 있는 황금 기간이란 사용자에 따라 다르지만 약 90일 ~ 100일 사이로 보면 될 것이다. 애들은 투덜거렸지만 나중에는 올리고 싶어도 못 올린다는 말을 하자 바로 입을 다물었다. 나 또한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더욱 훈련에 매진했다. 과거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루기 전까지는 난 단 하루도 수련을 거른적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을 흘러만가고, 졸업 시즌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 훈련도 13주차로 넘어가고 졸업일을 하루 남겨 놓고 있었다. 사용자들 또한 서서히 아카데미의 생활을 마무리 하고 있었다. 훈련때는 엄했던 교관들도 그 외의 시간은 상당히 풀어주는 편 이었다. 그 시간동안 사용자들은 개인 정비를 하거나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누었다. 그 하루도 훌쩍 지나가 어느새 밤이라는 시간이 성큼 다가왔다. 마지막 날인 만큼 같은 숙소를 사용하는 사용자들은 간단한 회식을 했다. 교관들도 너무 심하게만 하지 말라며 어느정도 눈을 감아주고 있었다. 비단 내가 사용하는 숙소만 그런게 아니라 다른 숙소 또한 마찬가지였다. 거창한 회식은 아니고 보급 받은 말린 고기와 음주가 다였다. 그래도 간만에 술을 본 사용자들은 눈을 뒤집고 달려들어 신나게 떠들고 마시고 있었다. 나와 안현은 서로 마주본채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정의 제안으로 각각 몰래 숙소에서 나와 우리끼리 따로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하기로 한 것이다. 슬쩍 자리에서 일어난 나와 현은 살금살금 문 밖으로 나서는데 성공했다. 어차피 다들 얼큰하게 취한 상태였고 서로 어깨 동무를 하면서 우리는 해냈다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런 난리 법석을 떠는 통에 몰래 나오는건 식은죽 먹기였다.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뒤지던 나는 연초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숙소에 놓고온것 같았다. 나는 안현에게 먼저 약속 장소에 가 있으라고 말한뒤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안현은 그깟 담배 안피면 어떻냐고 했지만 나는 애연가인 만큼 술을 먹을때는 꼭 연초를 피우는 버릇이 있었다. 안현을 먼저 보내고 숙소로 돌아와 연초를 챙긴 나는 다시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학술 정보관 한 구석. 나름 대담한 짓거리 였지만 지금이라면 걸려도 별 탈 없이 넘어갈 가능성이 높았다. 깊은 밤 하늘은 어둑한 땅거미를 뿌리고 있었다. 나는 아무도 없는 커다란 운동장을 가로질러 보이는 건물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리고 옆의 화장실을 지나치려는 순간…. "아흑…윽…앙…." 화장실 안에서 묘하면서 달뜬 신음이 새어나왔다. 예민한 내 청각이 용케 놓치지 않았나 보다.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고, 나는 조심스럽게 꾹 닫힌 화장실 문을 열었다. 최대한 조심조심 열었지만 문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그러나 미처 소음을 걱정할 틈도 없이, 열린 문 내부에서 풍기는 야릇한 열기가 내 전신을 덮쳤다. "으아아앙…앙…흐엉!" 흐엉. 내부는 난장판 이었다. 먼저 눈에 들어온건 이리저리 널브러진 옷가지와 교관용 모자를 쓴 사용자 한명. 그리고 그의 배 아래 깔려 신음을 내지르는 여인이 보였다. 칠흑빛의 컷트 머리는 바닥에 닿은 상태로 흩뿌려졌고 고운 허벅지 라인을 가진 다리는 양방향으로 벌려진채 허공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저 얼굴은…분명 한두번 본것 같은데. 그녀의 배 위에 타고있는 사내는 교관이 확실했다. 그가 있는 힘껏 위에서 아래로 허리를 내지를때마다 여인의 몸은 물고기처럼 펄떡이며 여지없는 교성을 질렀다. "조용히…해! 신음…소리가…너무…크잖아!" "아응…! 교관님이 너무 격렬하게 하시니까…흐응…으…응…!" 어절이 끝날때마다 리드미컬하게 허리를 움직인다. 사정없이 자신의 하물을 내려찍던 교관은 힘에 부치는지 이내 삽입한 상태로 허리를 한번 크게 휘젓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자 누운 여자의 몸이 자지러지며 그를 꼭 끌어안는게 보였다. 그 상태로 잠시간 여운을 음미하는 둘. 그리고 아래 황홀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의 입술이 열렸다. "약속 한거에요? 분명 당신네 클랜에 입단시켜 주기로…." "걱정 말라니까. 내일 퇴소식 끝나고 기다리고 있어. 내가 데려갈테니까." 그들은 말을 마치고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음란한 교성 소리가 화장실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로 대강 상황을 짐작한 나는 다시 문을 닫았다. 서부 대륙처럼 반 강제로 하는건 없지만 결국 이런일의 발생을 원천 봉쇄할수는 없었다. 규율이 엄격한 북부 대륙이라고 해도 신규 여성 사용자가 스스로 원해 몸을 미끼로 저런 일을 벌이는 이상 말이다. 나는 얼른 정보관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헉." "……." 나도 모르게 헉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언제 왔는지 한별이 내 등 뒤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감지를 안하고 마음을 푹 놓고 있었다고는 해도 인근까지 다가온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에 나는 놀라운 감정이 들었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보는 남녀의 정사 장면에 너무 집중해 있었던것 같았다. 나는 순식간에 표정을 가다듬고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놀랐잖아. 언제부터 있던거야." "할 얘기가 있어서 오빠 숙소로 갔는데 안 계시더라구요. 그래서 돌아가는길에 오빠가 다시 숙소로 들어갔다가 나오는걸 보고 따라 나왔어요." "그럼 화장실 안도…?" 본거야? 라는 말이 생략 되어 있었지만 그녀는 대충 알아 듣는것 같았다. 살짝 얼굴을 붉히고 내 시선을 회피하는게 아무래도 처음부터 본 모양이었다. 무언가 들켰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잘못한건 없기에 나는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다. 일단 그네들의 즐거운 시간을 위해 이 자리를 피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향하는 방향은 학술 정보관. 그녀 또한 내 뒤를 종종 거리며 쫓아오더니 이내 내 옆에서 보폭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와 그녀는 시린 달빛을 받으며 나란히 걸었다. 조금전의 어색함 때문인지 잠시동안 침묵이 흘렀다. 먼저 말문을 연건 한별이었다. "아마 방금전 그곳 안에서 본 여성 사용자는 이지영이란 사람일 거에요." "이지영…한두번 본것 같은데." "모르시는 건가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하는 한별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모르는게 당연하지. 특별히 능력이 좋은것도 아니고 나랑 친하지도 않은데 내가 어떻게 알아? 얼굴은 제법 예쁘장한 편이긴 한데 솔직히 유정이나 솔이, 한별이를 보다보니 그저그런 수준이었다. 나는 당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모르지. 내가 어떻게 알아. 한마디도 나눈적도 없는데." 내 말에 한별의 얼굴이 안도하는 표정으로 변했다. 나는 점점 더 이지영이란 사용자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얘가 도대체 누구길래 내가 모른다고 하니까 한별이가 이러는걸까? 내가 채 생각을 잇기도 전에 한별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르시는 편이 좋아요. 저희들 내에서도 그렇게 평판이 썩 좋은건 아니거든요. 방금전에 보셨듯이…그런 소문도 돌고 있었구요. 설마 저도 실제로 보게 될줄은 몰랐지만요. 그런데 오빠는 왜 그 장소에 있었던 거에요?" "졸업 기념으로 애들이랑 학술 정보관 안에서 회식하기로 했거든. 가는길에 화장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길래 문을 열었는데 그러고 있더라. 아무튼. 이왕 만난거 너도 갈래?" 너도 갈거지?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동안 한별과의 사이가 소원했던 터라 선뜻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숙이더니 바닥만 물끄러미 응시했다. 문득 칠흑 같은 생머리 사이로 비죽 솟아나온 그녀의 귀가 참 앙증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시덥잖은 생각을 하던 도중 그녀의 입술이 조금씩 열리는걸 볼 수 있었다. "잠시…얘기 좀 하고 싶어요." 그러고보니 할 말이 있다고 했던가. 지금와서 딱히 거리낄 이유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보니 얘랑 둘이서 얘기를 나누는것도 참 오랜만인것 같았다. "황금 사자 클랜에서 오퍼가 들어왔어요." "…응." "원래는 신규 사용자들을 바로 받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이번에는 특별히 수를 늘인다고 하더라구요. 특히 직업이 마법사 계열인 만큼 성장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수도 있다고 했구요. 그리고…저한테 입단하게 되면 간부 후보로 추천한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강한 침음성을 흘렸다. 시작부터 직구로 덤빌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뒤에 이어진 말은 확실히 나를 놀라게 했다. 마법사 계열이 성장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소리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건 차치하고서라도 뒤에 말한 간부 추천은 내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아무리 김한별이 뛰어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간부 추천은 신규 사용자한테 과한 조건이었다. 시크릿 직업이나 레어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몰라도…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머리속을 강타하는 생각에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 나를 보며 한별이 이상한 눈동자로 쳐다봤지만 그에 아랑곳않고 곧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 이름(Name) : 김한별(0년차) * 클래스(Class) : 보석 마법사(Jewel Mage Beginer)] * 소속 국가(Nation) : -(Unsettled) * 소속 단체(Clan) : -(Unsettled) * 진명 · 국적 : 별에서 비롯된 자 · 아름다운 빛과 광택을 다루는 자 · 대한민국 * 성별(Sex) : 여성(22) * 신장 · 체중 : 170.5cm · 45.0kg * 성향 : 질서 · 혼돈(Lawful · Chaos) 『능력』 * [근력 44] [내구 52] [민첩 64] [체력 48] [마력 82] [행운 62] "오빠…?" 멍하게 있던 나는 한별이 부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그리고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말았다. 왜? 어째서? 어떻게? 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었지만 일단은 정신을 다잡을 필요가 있었다. <오빠가 방금전에 다른 사용자한테 자신의 정보를 말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특히 직업이 마법사 계열인 만큼 성장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수도 있다고 했구요.> 확실히 보석 마법사라면 초반에 성장하는데 클랜의 도움이 필요하다. 마법 촉매제로 보석을 사용하는 만큼 어마어마한 금액이 들 테니까. 그러나 지금 중요한건 그게 아니었다. 김한별은 보석 마법사를 얻었다는 사실을 나한테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황금 사자 클랜의 간부로 추천 되었다는 말은 그놈한테는 자신의 직업을 밝혔을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였다. 순간 몸 내부로 차오르는 뜻모를 배신감에 이를 악물었지만…나는 이내 힘을 빼버리고 말았다. 따지고보면 나도 인연으로 그녀를 대하기로 했었고, 여차하면 놓아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그런 감정이 치솟은걸 보니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미련이 남은 모양 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시크릿 직업중 하나인 보석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태도가 달라졌을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와서 내 입장만 생각하는 합리화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내가 제일 싫어하는 행동이었으니까. 감정을 배제하고, 머리속을 차가운 이성으로 가득 채운다, 나는 순식간에 숨을 추스르고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제부터는 같이 행동한 동생이 아닌 한명의 사용자로서 그녀를 대할것이다. "황금 사자 클랜에서 오빠한테도 오퍼를 넣었다고 들었어요."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말하는 김한별을 보며 나 또한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생각해본다고 하긴 했어." "지금은 결정을 하셨나요." "응. 거절하려고. 난 클랜에 들어갈 생각이 없거든." "…왜요?" 거절한다는 말을 하는 순간 그녀의 몸이 움찔 떨리는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걸음을 움직였다. 그러자 그녀 또한 나를 따라 발걸음을 놀렸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녀의 눈을, 그녀는 나의 눈을 서로 응시하고 있었다. 서로의 시선에는 말할 수 없는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이 포함 되어 있었다. ============================ 작품 후기 ============================ 일전에 어느분이 질문하셔서 후기에 올린적이 있는데, 시크릿, 레어 직업을 얻는 방법은 굉장히 다양합니다. 하나로 획일화 되있지는 않아요. 홀 플레인은 언제 어디서 어떤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변수 덩어리라는 말은 이런 경우도 포함 되어 있지요. 혹시 의문을 품으신 분들이 있을까봐…. ㅇㅅㅇ 『리리플』 1) 사람인생 : 1, 2, 3등 축하드립니다. 둘이 닮은 설정이지만 분위기가 닮은검니다. 실제로 자매는 아니에요. 크크. 2) JoWoon : 네! 재밌게 읽으셨기를 바랍니다! 이런 코멘트를 원했다구요! 전에는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 3) 블라미 : 15개를 가득 채운 상태라서 고민하다가 유운님과 함께 +로 넣었지요. 흐흐. 4) 여옥아놀자 : 급전개는 처음 써보는 부분이라 많은 걱정이 일었는데 다행이네요. ㅜ.ㅠ 5) 골렘 : 위에 코멘트를 달았지만…전자의 의미가 더 강해요. ㅇㅅㅇ 6) GradeRown : 근력을 뒷받침할 정도의 능력치는 가지고 있다고 보시면 되요. 더 자세한 사항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노 코멘트를. :) 7) 크리아센 : 오호. 그렇군요. 꾸준히 쓰다보면 언젠가 순위권에 오를날도 있겠죠? 그날까지 힘내볼게요.(아 그리고 한별이 너무 싫어하지 마세요. ㅜ.ㅠ) 8) hohokaya1 : 아마 다음화를 보시면 의문이 해결 되실것 같아요. 기대해주세요. 9) Toranoanal : 재미가 역시 1순위네요. 그래도 좋은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니 한결 안심이 됩니다. 앞으로도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10) 애독자C : 그렇긔?! ㅇㅅㅇ 앞으로 기대 많이 해주긔! ㅇㅅㅇ! 11) 백인티모시 : 제가 아직 초보라 감정에 따라 글이 많이 휘둘리더라구요. 피아노를 들으면서 글을 쓰는 버릇을 들여서 그런가봐요. 12) Edward Wong Hau Pepelu Tivrusk : 다음화를 보시면 의문이 풀리실거에요. 하하하.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42 / 0933 ---------------------------------------------- Make an Offer 어차피 오늘 기회가 있으면 술자리에서 대충 운이라도 띄울 마음은 있었다. 그렇기도 하고 어차피 갈라질 가능성이 농후한 한별이니 만큼 어느정도 내 본심을 말해도 상관 없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줄 알았으면 오두막 앞에서 그렇게 얘기하는게 아닌건데. 뒤늦은 아쉬움이 들었으나 서로 마음이 변한건 매한가지였다. "왜요라고 물으면…조금 답하기 조금 곤란한데." "저…한테는 말하기 곤란하신 건가요?" 유독 <저>라는 말에 악센트를 주는 한별이를 보며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뜻으로 말한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뜻이 아니야. 예전에 나랑 오두막 계단 앞에서 했던 얘기 기억나?" "…네." "나는…음…그동안 3개월이라는 시간동안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어.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을 보면서 어느정도 생각이 변하기도 했고. 아무튼 나는 황금 사자 클랜이 아니라도 그 어느 클랜도 들어가지 않을거야." 뒷말을 조금 흐리긴 해도 한별이는 역시 영리했다. 잠시 내 말을 곱씹는것 같더니 이내 놀란 눈동자로 나를 보고 말았다. 머리 회전이 돌아가는 만큼 내가 하고자 하는 의도를 파악한것처럼 보였다. "그러면. 오빠는 새로운 클랜 창설을 생각하고 있다는 건가요?" "비슷해. 클랜 창설도 생각하고 있고. 다른 애들은 황금 사자 클랜한테 입단 권유를 받지 못했거든. 그것도 있지만 애초에 애들이랑 같이 모여서 행동하고 싶었어." "저 또한…." 내 말이 끝나는 순간 반사적으로 어떤 말을 하려던 한별인 열던 입을 다시 다물었다. 그녀의 숨이 살짝 거칠어진걸 느꼈다. 한별이의 얼굴에 갈등어린 낯빛이 떠올라 있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그녀는 이내 무언가 결심한듯 평소보다 높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또한 그래요. 홀 플레인이란 곳으로 들어오기 전과 후를 비교하면 많은 생각의 변화를 겪었으니까요. 통과 의례에서의 오빠는 대단했어요. 사용자 아카데미에 들어와서도 오빠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특별함을 증명했죠. 오빠가 능력이 있다는건 그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알고 있을거에요. 하지만…." 하지만. 지금부터 그녀가 나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시작 된다는 신호였다. 나는 우묵한 얼굴로 그녀의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홀 플레인이란 세상은 너무나 넓고 방대해요. 어디서 어떤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요. 통과 의례에 있었을 때 처럼 누구 한명의 능력으로 다 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구요. 그럼 오빠는 그러겠죠. 혼자가 아니라 다른 세명도 있다구요." 막 그렇게 말하려던 나는 입을 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별은 어느새 회복한 차가운 얼굴로 나를 지그시 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한다. 하지 않는다를 말하고 싶은게 아니에요. 나쁘게 말하려는것도 아니구요. 하지만…저는 아직도. 오빠는 아니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혼자 안고 가는것 같아요. 홀 플레인 안에서는 집단이 한명한테 의존하는건 너무 위험해요." 한별이는 그 세명의 능력을 과소 평가하지 않는다. 다만 그 세명의 태도와 연관지어 나의 태도를 지적하고 있었다. 결국 이 말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라는 말이었고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소리였다. 다만 간과한 점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할 말을 다했다는듯 한번 숨을 크게 몰아 쉬었다. 나는 그녀가 숨을 돌릴틈을 줄겸, 잠시간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별이는 외골수적인 성향이 강하구나." "……?" "이성적으로 생각하는건 좋아. 하지만 너무 한방향으로 가는 경향이 있어."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너만의 기준, 잣대로 나와 애들을 함부로 평가하지 말라는 소리야." 처음 들어보는 내 사늘한 목소리에 한별이는 놀랐는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나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예전에는 볼 수 없던 내 어조에 그녀의 입술이 살짝 떨리는게 약간 안쓰럽기는 했다. 그러나 이미 한명의 사용자로 대하기로 한 만큼 할 말은 할 것이다. "그건…죄송해요. 하지만 오빠랑 저는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항상 합리적인…." "비슷하다라. 너는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한테 있어서. 특히 클랜을 들어가는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 없다고 봐. 특히 황금 사자 클랜이라면 더더욱." "…왜죠. 그럼 제 말이 틀렸다는 건가요?" "맞고, 틀리고가 중요해? 어떤 선택을 하든 장단점이 있고 그걸 저울질해 본인을 포함 주변 상황을 보고 최선의 선택을 하는게 합리적인 선택이 아닐까?" 김한별은 현재를 보고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 나는 과거와 미래를 보고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 간단한 이치임에도 불구하고 한별이는 혼란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녀를 보며 가슴의 답답함을 느꼈다. 우리는 지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황금 사자 클랜은 북부 대륙 최고의 대형 클랜이에요. 이건 공공연한 비밀이지만…이미 기반을 잡고 강철 산맥으로의 진군을 준비하고 있다구요. 맨땅에 헤딩하는것과는 시작부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어요. 저는 도대체 오빠가 가려는 길에 어떤 장점이 있는줄 도저히 모르겠네요." "강철 산맥으로의 진군이 성공할거라고 누가 장담하지? 간부 추천을 한다고 했지만 그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생각은 해본거니? 아니. 그보다 네가 입단하려는 클랜의 사용자들을 정말로 믿을만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나는 약간 신랄한 어조를 담아 그녀를 쏘아 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별이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우리 둘 사이에는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고 냉한 기류가 형성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잠시 뜸을 들인후 말을 이으려는 찰나 그녀가 말문을 먼저 열고 말았다. "그럼 오빠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가요?" "……." 한마디. 단 한마디였다. 그녀의 단 한마디에 미묘했던 냉기류는 그녀와 나 둘 사이에 시릴듯한 정적으로 변해 내려 앉았다. 오직 들리는건 나와 그녀의 숨소리 뿐. 그녀의 얼굴에는 수많은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분함. 슬픔. 후회등의 온갖 마이너스한 감정. 그녀를 만나고 나서 처음 보는 다양한 감정 표현 이었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는 숨길 수 없는, 너에게 실망했다는 감정을 담고 있었다. "그때 네가 나한테 그랬었지. 도대체 오빠는 왜 그러시는 거에요. 그때 대답을 지금 다시 한다면. 나는…." 나는. "나는 그때 너희들의 울타리 역할을 하고 싶었다. 믿음을 주고 싶었고, 믿음을 받고 싶었지. 나는 원래 성격상 사람을 잘 믿지 않아. 그래서 혼자 다니려는 생각도 안해본건 아니야. 그렇지만. 네 말대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것 또한 분명히 알고 있었지. 나는 그 사실을 나는 외면할 수 없었어." 숨을 한번 고른다. 그리고 바로 말을 잇는다. "그래서 그렇게 결심한 이상 처음 같이 시작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선택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 그리고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과. 명색이 클랜이잖아. 클랜을 만드는데…그래도 가족 같은 사람이 한두명 정도는 있었으면 했거든." 내 말을 듣는 내내 한별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입이 달싹이는게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하는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어느새 우리들의 눈 안에는 거대한 정보관 건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예전에 나와 그녀는 두갈래의 길에 놓인적이 있다. 그때 그녀는 나의 선택을 따랐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나와 그녀는 똑같은 두갈래 길을 남겨놓고 있었다. 나는 이미 방향을 선택했고, 그녀는 아직 선택하지 않았다. 차분히 계단을 오른다. 그리고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한별이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슬며시 문에 힘을 주자 이번에는 삐걱이는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한별이 따라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안현과 아이들은 이미 실컷 술판을 벌인 상태였다. 그날 하려는 얘기는 결국 꺼내지도 못했다. 서로 깔깔대고 웃는걸 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놈들은 곧 죽어도 내 심정을 알 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괜한 심술이 났다. 속 편한 놈들. 그래도 딱히 겉으로 그런 티를 낸건 아니었다. 아마도 이런 날은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일부터 나와 애들이 가는 길은 절대로 편하다고는 볼 수 없는 가시밭 길 이었다. 차라리 사용자 아카데미가 천국 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굴리고 굴릴것이다. 술자리는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안현과 유정이 둘이서 신나게 흥을 내더니 결국 정신줄을 놓고 말았다. 다행히 솔이가 깨어있는 관계로 각자 한명씩 엎고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안현을 대충 한쪽 구석에 던진 후 나 또한 자리에 누우며 생각에 잠겼다. 막상 홀 플레인으로 들어오고 생각에 변화가 온 이상 당장 할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일단은 내일 임무 보상 포인트를 받고 당장 바바라를 떠나는게 급선무였다. 이런저런 계획을 생각하다가 나는 어느새 스르르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대망의 아침이 밝았다. 졸업식과 퇴소식은 솔직히 상당히 지루한 편 이었다. 이것저것 여러개 말하기는 했지만 요약하면 결국 그동안 고생했고 앞으로 북부 대륙에서 많은 활동을 바란다는 전언이 전부였다. 『북부 대륙 대도시 바바라(Babara)의 사용자 아카데미를 이수 했습니다. 임무 보상으로 능력치 포인트 4 포인트가 추가 됩니다.』 졸업식이 끝나고 보상 포인트를 받은 후, 사용자들의 사정은 명확하게 갈렸다. 오퍼를 받은 사용자와 받지 못한 사용자. 오퍼를 받은 사용자들은 그들을 환영하러 온 클랜원들 속으로 들어갔지만 나머지는 그저 손가락만 쪽쪽 빨고 있었다. 꼭 대도시가 아니라도 일반 도시, 소도시만 내려가도 들어갈만한 클랜이 있을텐데. 졸업식이 끝난 아직도 주변을 어정대는걸 보니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긴 했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일단 가장 먼저 창고로 달려가 GP로 구매한 물품들을 수령하고 싶었지만 곧바로 애들이 나한테로 몰려드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안현, 이유정, 그리고 안솔. 나를 비롯해 네명이 모이자 클랜 스카우터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리를 주시하는게 느껴졌다. 이미 모든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 상태였지만 아직도 미련이 남은것 같았다. 안현은 나, 우정민, 선유운 세명 때문에 빛이 가려서 그렇지 클랜에도 군침을 흘릴만한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유정의 성적 또한 평균을 상회하고 있었다. 둘 모두 중견 클랜에 수많은 오퍼를 받았는데 나 때문에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솔직히 보물로 말할것 같으면 솔이가 가장 보물이었다. 광휘의 사제(Brilliance Priest). 사제 직업의 끝판 대장이자 처형의 공주, 그림자 여왕과 나란히 서게 되는 여성 사용자들의 대표. 설령 이 직업을 얻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초반 능력치인 마력 75 포인트와 행운 100 포인트는 어마어마한 메리트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솔이는 의외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안현에게 듣기론 마력을 조절하는데 꽤나 애를 먹는것 같다고 들었다. 그도 그럴것이 아직 초보나 다름없는 사용자가 중상의 마력을 조절하는게 이상한 일 이었다. 아마 시간이 지나고 점점 더 익숙해질수록 그녀의 진가는 더욱 드러날 것이다. 황금 사자 클랜의 스카우터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사용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번에 클랜에서 신규 사용자 총 5명에게 오퍼를 넣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5명중 오퍼에 응한 사용자는 딱 2명이었다. "죄송합니다. 지금껏 같이 행동한 일행이 있습니다. 애들을 놔두고 혼자 들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입단을 권유하러온 스카우터를 구변 좋게 물리치자 안현을 비롯한 애들은 나에게 상당히 미안해 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한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것 같았다. 이런 오해는 나쁜건 아니었지만 찜찜했기 때문에 기회를 봐서 사실을 말하는게 나을것 같았다. 아카데미의 정문을 나서자 바깥은 신규 사용자들과 기존 사용자들로 바글거리고 있었다. 황금 사자 클랜원들을 위실로 다양한 클랜의 문양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다 한 광경이 눈에 밟혔는데 그 광경의 주인공은 이지영 이었다. 그녀는 그래도 나름 이름있는 클랜에 들어간듯 거만한 얼굴로 오퍼를 받지 못한 사용자들을 보고 있었다. 교관 옆에 팔짱을 낀 상태로 유세를 떠는데 속으로 참 꼴깝 떤다는 생각이 들었다. 6개월 후에 지금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기대가 되었지만 나는 일단 발걸음을 돌렸다. 문득 이곳 어딘가 김한별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아까부터 내 얼굴을 쿡쿡 찌르는 하나의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시선이 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니나 다를까 나와 일행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이상 그녀와 미련을 엮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그녀가 보석 마법사라는 사실이 퍼지지 않은걸로 보아 당분간 클랜 내에서 비밀로 하기로 결정한것 같았다. 애들은 모두 기대감에 가득 찬 얼굴로 내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얼른 이곳에서 벗어나려는 찰나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리니 우정민과 그 일행들이 보였다. 우정민이 너 또한 들어가지 않았구나라고 첫 인사를 건넨걸로 보아 황금 사자 클랜의 오퍼를 거절한 나머지 두명이 누군지 알만했다.(물론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잠시 환담을 나누던중 우정민이 당분간 같이 행동할 생각이 있냐고 제안했다. 솔직히 조금 끌리는 사실이기는 했다. 이들이 붉은 송곳니 클랜이라는 힘을 모으기전에 기회를 틈타 깨끗이 쓸어버리는게 마음이 편할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 우정민 일행에서는 원혜수가, 내 일행에서는 이유정이 서로 질색을 하는 바람에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원혜수는 아직도 나에 대한 감정을 버리지 못한듯 간간이 나를 흘기고 있었다. 그 심정을 이해는 한다. 하지만 봐주는것도 한두번인데 자꾸 저딴식으로 나오니 나 또한 그녀를 좋게 보는건 아니었다. 지금은 곱게 보내주지만 언제 한번 단단히 버릇을 고쳐주리라 마음 먹었다. 그렇게 나는 그들과 짧은 작별을 고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애들은 걸음을 멈춘 나를 멀뚱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이들 또한 어느정도 괜찮은 클랜의 입단 제의를 거절하고 무작정 나만 따라왔을 것이다. 아직 어미를 따르는 새끼들의 태도를 벗은건 아니지만 어느정도 얘들을 신용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주는게 우선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하하하. 예상대로 한별이가 무지하게 욕을 먹고 있네요. 참 공들인 캐릭터중 한명이라서 욕을 먹는게 왠지 미안하네요. 그런만큼 1회용 캐릭터가 아니에요. 아직도 출연할 횟수가 많으니 한별이를 조금만 더 지켜봐 주세요. :) 『리리플』 1. 아일릴리아 : 1등 축하드립니다. 거의 올리자마자 코멘트가 올라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자마자 수정 완료 했습니다. 지영이를 한별이로 썼으면…음. 아마 엄청나게 욕을 먹었을것 같아요. 하하하. 2. rhkdel2 : 굉장히 유혹적인 제안이긴 하십니다만…제 손가락을 탓 해야죠. 엉엉. 3. 사람인생 : 오우. 목요일 생일 이시군요. 축하드립니다! 그날 맛난거 많이 드시고 선물도 잔뜩 받으세요. :) 4. GradeRown : 이런…저란 작가 눈 안좋은 작가. ㅜ.ㅠ 확실히 메이플 스토리에서 마법사 초반에 키우는게 힘들었죠. 후후후. 홀 플레인에서 마법사 계열을 하려면 일단 마력이 높아야 한다는 선결 조건이 있지요. 그게 가장 중요해요. 물론 어느정도 공부와 수련도 필요하겠지요. 나머지는 거의 노가다라고 해야 할까요? :) 5. 가연을이 : 한별이 너무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겉으론 이래 보여도 속은…헙.(스포 주의!) 6. 유운처럼 : 이번화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정답을 맞추셨습니다. 짝짝짝!(박수!) 7. 블라미 : 아하하. 솔직히 인공이가 한별이한테 그렇게 큰 미련을 두지 않는지라. 시크릿 직업이 조금 아쉽긴 해도 아직은 인공이한테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에요. 왜냐하면….(뒤이은 내용은 스포이므로 노 코멘트!) 8. 비극의삶 : 그냥 조연이라고 보시면 되요. 조연치고는 어느정도 스토리가 있을 예정이지만 말이죠. 9. 한걸음한걸음 : 통과 의례 부분을 초반으로 생각하시면 되요. 길게 보면 사용자 아카데미 또한 초반으로 볼 수도 있겠네요. 나머지 의문점은 전회 코멘트에서 카이온님과 Toranoanal님이 제가 더 설명할것도 없을 정도로 상세히 설명을 해주셨으니 참고해주세요.(아니면 후기 11번 참조해주세요.) 10. 여옥아놀자 : 하하하. 참으로 매력적인 제안 입니다만…제 손가락을 탓해야죠. ㅜ.ㅠ 질문 하신것 잘 읽었습니다. 후기로 쓰려니 너무 길어 쪽지로 보내 드렸습니다. 한번 읽어봐주세요! 11. Toranoanal : <초반부에 넌지시 언급되었었으나 다소 희미하게 나왔었고 중간중간 조금씩 보충되었더랬습니다.> <작가님이 딱 거기까지만 보여주셨으니까요.> 그 부분에 관한 제 의도와 흐름의 핵심을 짚어내셨네요. 더 부연할것도 없이 완벽한 정답입니다. 12. 봉인된톨스토이 : 이런 질문이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글을 제대로, 정확히 읽으셨다면 당연히 의문을 가지실 내용이거든요. 전자에 하신 질문은 인공이의 실수로 보셔도 무방합니다. 다만 그 자리에서 확인을 하지 않았고, 그 후로 간간히 생각이 났지만 한별이가 얼굴을 잘 비추지 않았거든요. 그때즘이면 서로의 사이도 소원해져 있었구요. 한별이와 한소영을 분리한 이후 예전처럼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후자에 관한 경우는 한별이의 성격과 많은 연관이 있는 부분입니다. 상세 부연을 하면 스포가 될 가능성이 있고 앞으로 내용을 진행하면서 풀리실 의문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진명. 진명은 아무런 효과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홀 플레인 안에서 <쓸곳>은 있습니다. GP로 산 물품은 따로 등급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다만 굳이 비교하면 S등급 위 EX등급 아래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43 / 0933 ---------------------------------------------- 비상을 위한 준비 홀 플레인의 도시들은 거미줄과 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 대륙마다 존재하는 도시들이 위치한 장소가 상이한 만큼, 각 도시들은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하나씩 보면 따로 노는것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서로 필요한 일을 하는만큼 유기적으로 연동하고 있다고 해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현재 나와 일행들이 존재하는 북대륙 또한 수많은 도시들이 존재한다. 북대륙 중앙인 대도시 바바라를 기준으로 동(프린시카), 서(헤일로), 남(칸), 북(파멜라) 방향으로 총 네개의 일반 도시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각 일반도시들은 사선으로 뻗어나가는 방향으로 두개의 소도시들을 산하에 두어 서로 돕고 의지하는 형세를 취하고 있었다. 조금 더 상세한 설명을 한다면, 동쪽의 일반 도시 프린시카 산하의 소도시로는 동북 방향의 에덴, 그리고 동남 방향의 다나. 서쪽의 일반 도시 헤일로 산하의 소도시로는 서북의 도로시, 서남의 베스. 남쪽의 칸 산하 소도시로는 남동의 코란, 남서의 모니카. 그리고 북쪽의 파멜라의 산하 소도시로는 북동의 뮬, 북서의 몬타나가 있었다. 1개의 대도시. 4개의 일반 도시. 8개의 소도시. 각 도시를 관리하는 클랜의 경우 남부 일반 도시인 칸과 같이 중견 클랜이 모여 창설된 남부 자유 연합처럼, 공동으로 도시를 관리하는 경우도 있긴 있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보면 각 도시를 관리하는 대표 클랜은 하나로 보는게 옳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도시를 관리하는 클랜은 자신들이 자리한 위치에 걸맞는 역할을 수행할 의무가 있다. 끝없는 자유를 표방하는 서대륙 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현재 북대륙은 황금 사자 클랜이라는 단일 세력 최강의 클랜이 있어 그걸 가능케 만들었다. 의무에 대해 예를 들어보면 남부에 있는 일반, 소도시인 칸, 코란, 모니카는 중앙 대륙으로 가는 길목인 강철 산맥의 공략을 현재 방침으로 잡은 상태였다. 즉 중앙 대륙으로 넘어가기 위한 전초 기지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었다. 반대로 북부 도시인 파멜라와 산하의 뮬, 몬타나는 미개척 지역과 맞닿아 있었다. 북대륙에서 중앙 대륙으로 한걸음 더 걸어 들어가면 아틀란타라는 대도시가 있다는건 이미 밝혀진 사실 이었다. 아직 그곳을 점령할 여력이 충분하지 못할 뿐이다. 그에 반해 북부 미개척 지역은 말 그대로 미지의 영역이었다. 파멜라를 비롯해 최북단에 위치한 뮬과 몬타나는 미개척 지역을 경계하고 주변을 안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원래는 탐험 또는 공략이라는 역할도 있지만 지금은 금지된 상태라고 교관을 통해 들은것 같았다. 거기다 공공연한 말이긴 하지만 그날밤 한별이가 말해준 정보로 나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사실이 곧 일어날거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원래 처음에느 북부 대륙의 소도시 몬타나로 갈 예정 이었지만 나는 뮬로 방향을 선회하기로 결정 했다. 선회한 데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그중 가장 큰 이유를 꼽으라면 단연 안현 때문이었다. 자세히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예전에 창과 관련된 레어 직업인 <기공창술사>가 뮬의 한 동굴에서 발견 되었다는 말을 들었던게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물론 어디서, 어떻게 얻었는지 상세한건 알지 못했다. 그러나 레어 직업이라도 얻을수만 있다면 전력에 큰 보탬이 되기 때문에 한번 살펴볼 생각이었다. "첫 행선지는 뮬로 갈 예정이야." 소도시인 뮬로 간다고 하자 모두의 얼굴에 의아한 낯빛이 떠올랐다. 다른 사용자들 모두 대도시 또는 일반 도시에서 활동하는데 소도시로 간다고 하니까 뜻 밖으로 생각하는것 같았다. 안현은 뮬로 가는 이유가 궁금한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형. 뮬은 최북단에 위치한 도시 아니에요? 그리고 현재 발견된 도시중에서 가장 최근에 개척된 도시라 주변이 위험하다고 들은것 같아서요. 그런만큼 부랑자들도 빈번히 출몰하기 때문에 어느정도 실력이 쌓이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하던데요." 안현의 말에 틀린곳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일반적으로 보면 말이다. 조금 더 나아가 홀 플레인의 흐름을 보고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게 하고 싶었지만 그건 경험이라는 시간이 걸리는 일 이었다. 그래도 이런 생각을 했다는게 기특해 나는 손을 뻗어 안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현은 멀뚱한 얼굴로 고개를 올렸지만 손길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뮬로 가야하는 타당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일단 현재 황금 사자 클랜의 움직임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안현과 유정은 어느정도 느낀 분위기나 소문이 있는지 설명하는데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아까부터 조용히 있는 솔이가 생각나 고개를 돌리니 그녀는 물끄럼한 얼굴로 내 손과 현의 머리를 보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손을 내렸다. 강철 산맥 너머에 있는 아틀란타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북대륙 내에서 꼭 해결해야할 문제들이 산재했다.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 그걸 모두 통합해서 묶으면 간단히 <안정화>라는 하나의 단어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주변의 몬스터들은 모두 정리 했는지, 세력권 내에 위험한 곳은 없는지, 공략을 하지 않은곳은 없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랑자들의 방해를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지. 안정화는 홀 플레인 안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말 이었다. 관할하에 있는 대륙을 완벽하게 안정화 시킨다면 설령 원정이 실패하더라도 힘을 다시 모을 수 있다. 즉 기반을 탄탄히 일군 뒤에야 중앙 대륙을 향한 진출을 노려봄직 하다는 소리였다. 문제는 안정화에 대한 사용자들의 견해가 천차만별이라는 점에 있었다. 한때 전 대륙 최강 클랜으로 불리던 클랜의 몰락. 황금 사자 클랜은 너무 성급한 결정을 하고 말았다. 소도시 뮬과 같은 개척이 시작된지 얼마 안된 도시도 있었고, 빈말로도 북대륙이 안정 됬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무엇에 쫓기는 것처럼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1회차를 회상해보면 그들은 실패 요인중 하나인 안정화 정책을 미흡하게 진행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나마 굵직한 정책이라고 해봤자 원정 전 서부 일반 도시 헤일로에서 벌어진 전투(황금 사자와 SSUN 클랜(헤일로 대표 클랜)이 부랑자들과 벌인 대규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것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안일했다. 원래 점조직으로 흩어진 사용자들이고 이곳저곳 떠돌아 다니기 때문에 그들을 부랑자라고 부른다. 바퀴벌레와 같은 생명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단 한번의 승리로는 방심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샴페인을 일찍 터뜨렸고 그대로 강철 산맥으로 진군했다. 그리고 그 안일함은 참담한 결과를 불러오고 말았다. 일단 시기를 떠올리면 강철 산맥으로의 첫 원정은 내가 홀 플레인으로 입장하고 대략 6개월 후일 것이다.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13주가 지난걸 고려하면 앞으로 원정까지 3개월은 남았다는 말. 원정대가 돌아오고 여러 클랜들이 눈치를 보는 기간을 합쳐도 우리한테 주어진 시간은 100일 정도였다. 그 기간동안 나는 최대한 자리를 잡고 힘을 기를 필요가 있었다. 북단의 소도시 뮬과 몬타나는 그런면에서 보면 내 계획에 안성맞춤인 도시였다. 실제로 현재 원정을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부랑자들을 정리하려는 낌새가 조금씩 일어나고 있었다. 예민한 감을 지닌 사용자들 이라면 북대륙에 조금씩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는걸 알 수 있을것이다. 부랑자들 또한 더욱더 음지로 숨어들어 은밀히 이동중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조직으로 각개 격파 당하기전 슬금슬금 모여 서대륙에서 발호할 때를 기다리고 있을것이다. 내 예상이 모두 맞는다는 가정에 앞으로의 돌풍이 일어날 곳은 서부와 남부였다. 힘의 방향이 그쪽으로 쏠리고 있는 만큼 동부와 북부는 비교적 그들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볼 수 있었다. "이미 유명한 도시들 주변은 우리가 얻을게 없어. 완벽하게 공략 됬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왠만큼은 개척이 진행된 상태야. 그리고 그런만큼 사용자들도 많아 경쟁이 심한편이지. 이미 터를 잡은 클랜들도 있는만큼 활동에 애로사항도 많을테고." "하지만 저도 들었고, 형이 말씀하신 것처럼 곧 대규모 원정이 일어날수도 있잖아요." 안현의 말에 나는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우리는 원정에 참여할 수 있는 그 어떤 자격도 없었다. 괜히 끼어들어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것 보다는 밑바닥부터 시작하더라도 차분하게 한걸음씩. 확실하게 밟고 올라가는게 훨씬 이득이었다. "원정이 성공할거라고 누가 장담하지? 당장 지금 우리가 있는 대도시 바바라만 해도 4년 년 동안 준비하고 수많은 희생을 바탕으로 개척이 된 곳인데. 그런데 똑같은 4년을 준비하고 바바라 공략 보다 난이도가 높을게 뻔한 강철 산맥을 넘는다는건 힘들다고 봐." "음…정말 그럴까요? 왠지 형이 그러니까 그럴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오빠. 그럼 뮬에는 아직 먹을게 많다는거야?" 내 말에도 애들은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것 같았다. 갓 사용자 아카데미를 나오고 성적이 상위권에 랭크된 애들이라 자신감에 넘치는건 이해해도, 이건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 나는 목소리에 조금 더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부랑자들 걱정은 하지마. 지금 기존 사용자들이나 부랑자들이나 다들 앞으로의 원정에 대부분 관심이 쏠린 상태니까. 그리고 현재 뮬은 사용자들이 갑자기 떠나고 있어 개척이 상당히 지지부진 하다고 들었어. 그들이 포기하고 떠난만큼 우리에게 기회는 많다는 소리야." 당연히 모두 알려줄수는 없는 노릇이라 내 말에는 "이럴것이다." 류의 추측이 섞일 수 밖에 없었다. 나야 미래를 알고 있으니 당연히 확신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지만 과연 애들이 수긍할지는 두고봐야 할 일 이었다. 나는 진지한 얼굴로 그네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안현은 심각한 얼굴로 내가 한 말을 곱씹고 있었다. 유정이 또한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다만 조금전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안솔은…뭐지. 왜 입을 삐죽 내밀고 나를 보는거지.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건가. 나는 입맛을 다시고 솔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그 순간 유정이 고개를 올리더니 답지 않은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빠." "응." "나 궁금한게 있어. 그러니까…물어도 돼?" "그럼. 물어봐." 궁금할 거리가 생기지 않을 정도로 상세한 설명을 했다고 여겼는데 어딘가 부족한 부분이 있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하자는대로 하는것 보다는 이렇게 궁금해하거나 현이처럼 자신의 생각을 어필하는게 백배는 낫기 때문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허락이 떨어지자 유정은 내 옆으로 바싹 다가서더니 슬며시 내 손을 잡았다. 정작 하라는 질문은 안하고 뻘짓을 하는 유정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자 그녀는 이내 잡은 내 손을 자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곧이어 그녀의 입술이 열리더니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밖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앙." 유정이는 도발적인 눈빛을 뿌리며 내 손을 깨물었다. "……." "……." "……." 나를 비롯한 안현과 안솔이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무어보아머(물어보라며). 그애서 무어어(그래서 물었어)."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내 손을 입에 문채 우물거리는 유정이를 나는 어이없는 눈길로 내려다 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고는 내 손을 얌전히 놓아주었다. 안현은 한심하다는 얼굴이었고 안솔은 창피한지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나 또한 태연한 얼굴을 가장하고는 있었지만 조금 거슬리는 기분이었다. 한참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 이딴 짓거리를 하니까 미친년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 예전이었다면, 그리고 다른 사용자가(예를 들어 이지영.) 이런 행동을 했다면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이유정이었다. 그동안 쭉 지켜봤는데 유정이는 본인의 성격상 싫어하는 사람은 정말 병적으로 싫어하는 경향이 있었다. 박동걸을 가장 좋은 예로 들 수 있을것이다. 그런만큼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이렇게 애교(?)도 부린다는걸 알고 있기에 나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열불을 간신히 삼킬 수 있었다. 다만 다음부터는 때와 장소는 구분하게끔 가르칠 필요는 느꼈다. 그런 내 기분을 알아챘는지 내가 입을 열기전 안현이 먼저 타박하는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야. 넌 형이 중요한 얘기하는게 그딴 행동을 하면 어쩌자는건데." "미안. 진짜 미안. 아. 오빠 정말로 죄송해요. 그런데 오빠 얼굴이 너무 진지해서 나도 모르게 그만." "그럼 앞으로 생사가 달린 문제인데 당연히 심각하지." 안현이 뚱한 얼굴로 반문하자 유정이 곱게 눈을 흘기고는 말을 이었다. 왠지 모르게 그녀의 기분이 좋아보였다. "훈련소에서는 우리가 매번 물어도 오빠는 맨날 생각중이다라는 이 말만 되풀이 했잖아.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줄은 몰랐지. 솔직히 난 이런 생각을 아예 할 엄두도 내지 못한거지만…어차피 애초에 오빠 따라가기로 마음 먹은거잖아? 아무튼 나는 찬성찬성." 안현은 유정의 말에 동감하듯 음하며 침음성을 흘리더니 고개를 주억였다. 곧이어 하긴 네가 이런 생각을 해봤을리가 없지 라고 혼자 중얼거렸지만 이내 유정이한테 정강이를 걷어 차이고 말았다. 안현은 씨근거리는 눈길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유정이가 마주 노려보자 이내 칫 하고 고개를 피하더니 나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형 말을 들으니 저도 뮬로 가는게 좋을것 같아요. 그럼 어떻게 이동하실 생각이세요? 최북단에 있는 만큼 걸어서 가는건 시일이 걸릴것 같은데요." 나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안현이 정상적인 질문을 함으로 우리의 조금 풀렸던 분위기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최대한 빨리 가는게 좋아. 우리랑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용자들이 없는건 아닐테니까. 경쟁자는 최대한 적은게 좋거든. 실력이 조금 떨어지는 사용자들은 원정이나 전투를 포기하고 미개척 지역으로 올수도 있어. 그러니 워프 게이트를 이용하자." 어느 도시에든 워프 게이트는 있다. 이용 요금은 거리에 따라 가격을 산정하는데 가까울수록 저렴하다고 볼 수 있었다. 아마 뮬은 최북단에 있는 만큼 보통 가격으로는 한 사람당 2골드(1골드= 100실버 = 10000브론즈.)정도 들 것이다. 내 말에 안현은 부담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워프 게이트 비용은 비싸다고 들었는데…." 반사적으로 주급 받았잖아. 라고 하려던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말을 이었다. "원래 개척 도시는 사용자들을 많이 보내는 정책의 일환으로 워프 게이트 요금을 감면해준다고 들었어. 상황이 이래서 그것도 곧 끝날거라는 말이 있지만 아직은 하고 있을거야. 다들 주급은 어느정도 모았지?" 내 말에 세명은 일제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설마 다 써버린건가. 아니, 쓸데가 없을텐데. 1000골드를 가진 내가 시덥잖은 걱정을 하는 동안 이내 애들은 서로를 보며 동시에 웃었다. 순간 애들이 단체로 미쳤나 싶었지만 어느새 유정이 나를 향해 쑥 내민 손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한뭉치의 주머니가 쥐어져 있었다. 내가 얼떨결에 주머니를 받아들자 유정이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랑 현이랑 솔이가 그동안 주급으로 받은거 싹 다 모아논 돈. 아마 7골드 80실버는 될걸?" "…이걸 왜 내가 관리해? 너네가 받은 돈인데." "너네가 아니라 우리." 유정이는 바로 내 말을 정정했다. 옆에 있던 안현도 멋쩍은 얼굴을 하더니 그녀의 말을 거들었다. "우리들 개인이 가지고 있는것 보다는 형이 관리하시는게 더 나을것 같아서요." "그리고 난 충동 구매가 심하거든." 감초처럼 말을 끼어들며 혀를 살짝 내미는 유정과 애들을 나는 순간 멍한 얼굴로 보고 말았다. 그들이 나를 보는 눈빛을 마주보는 순간 내면으로 처음 느껴보는 신선한 감정이 일었다. 생소한 감정이 내 속을 감도는것 같았다. 나는 억지로 그 감정을 가라 앉힌 다음 주머니를 허공으로 한번 던졌다가, 다시 받았다. 아무 의미 없는 행동 이었다. 다만. 손아귀에 느껴지는 금화들의 무게가 평소보다 묵직하게 느껴졌다. ============================ 작품 후기 ============================ * 오늘 한창 읽으시다가 "뭐야?"를 외치신 독자분들이 계실것 같네요. 음. 유정이 씬을 집어 넣은 이유는 두가지가 있어요. 첫번째는 너무 진지하게 몰입되는 분위기를 완급 조절겸 넣었구요. 두번째는 초반부 코멘트를 보니까 유정이 욕하는 코멘트가…ㅋㅋ. 유정이도 너무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싫어하는 사람한테는 마녀지만 수현이 한테는 한낱 아기 고양이랍니다. * 주인공 일행 클랜 이름은 일단 정해는 놨는데…다른 도시들 클랜 이름을 지금 보니까 너무 오글거리는 것들이 많아서요. 혹시 좋은 클랜 이름 생각나신게 있다면 추천 부탁드려요. * 이번회는 조금만 더 숙독 부탁 드릴게요. 기본적인 홀 플레인의 흐름이나 배경이 상당히 많이 들어간 부분이거든요. 『리리플』 1. 아이릴리아 : 1등 축하 드립니다. 이로서 2연패를 달성 하셨네요. 후후훗. 아. 현대 마법사 코멘트는 지금 봤어요. 그건 지금 연중 상태라…죄송하다는 말밖에 드릴 수 없네요. 다음 작품으로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2. 블라미 : 색즉시공 공즉시생…(?) 그렇습니다. 첫코와 막코는 똑같은 것이지요. 허허허. 다만 첫코는 무조건 리리플을 한다는 차이만 있을뿐…. 3. 사람인생 : 포인트의 종류는 무궁 무진 합니다. 능력치 포인트. 특수, 잠재 능력 포인트. 그리고 GP 포인트가 있지요. 대표적으로 3개만 염두에 두셔도 무방합니다. 4. GradeRown : 음. 전직의 개념보다는 단계의 개념으로 보시는게 더 편하실것 같네요. 예를 들어 소드 마스터를 보면. Sword Beginer - Sword Expert - Sword Master - ???. 이렇게 있습니다. 그리고 일반 직업을 얻어도 추후에 연이 닿으면 시크릿, 레어 직업으로 진화하는 경우도 있구요. 여담으로 직업은 중복이 가능하지만 그렇게 하는 사용자들은 드뭅니다. 능력치가 따라간다면 몰라도 특수, 잠재 능력이 이상한게 나올수도 있거든요. 5. 유운처럼 : 아…연참은…음…. 박수를 더!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ㅌㅌ) 6. 크리아센 : 솔직히 수현이 사기 캐릭터에요. 본신 능력을 둘째치고 이미 미래를 알고 있으니 타인이 보기에 도박이라는 선택을 스스럼 없이 하는거죠. 아마 1회차 였다면 두말않고 황금 사자 클랜에 들어갔을 겁니다. 물론 오퍼도 받지 못했지만.(1회차.) 7. Toranoanal : 저도 매일매일 연참 하시는 분들 보면 참 대단하신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는 비축분이 있어 연참이 가능했는데 다 떨어진 지금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래서 지금은 하루에 한편을 올리더라도 내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으로 올리고 있어요. 8. 큐우비 : 주인공은 참 현실적인 놈이에요. 예를들어 만화처럼 적을 보고 "음. 넌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군. 조금 더 실력을 키워서 와라. 다시 한번 붙어보자." 이러는 애가 아니에요. 적이 일어나기전에 아예 목을 쳐버리죠. 우정민 일행을 가만 놔둔건, 보는 눈들이 많았고 아직 조금 더 지켜보자는 생각을 했을 뿐이죠. 그네들이 붉은 송곳니 클랜으로 명성을 떨치는건 아직 머나먼 일이니까요. 하하하. 아마 조금 더 진행이 되면 자연스럽게 풀리실겁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 9. 솔솔봄바람 : 아이디 너무 예뻐요. 제 맘에 쏙 드네요. "우묵한 눈"은 영어 사전에 라는 뜻으로 나와 있어요. "깊은 눈동자"와 비슷한 의미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10. 여옥아놀자 : 아하하. 아니에요. 오히려 질문 주셔서 감사한걸요. 당연히 동료들은 더 들어오게 됩니다. 앞으로 어떤 동료들이 들어올지 기대해주세요. 그리고 클랜 이름 추천해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하하하. :) 마음 같아서는 한분 한분 모두 리리플을 해드리고 싶지만 후기를 줄이라는 분이 생각보다 많으시네요. 리리플 코멘트를 조금 더 줄였구요. 후기 관련 쪽지 주신분들 모두 답신 드렸습니다. 확인 부탁드려요.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44 / 0933 ---------------------------------------------- 비상을 위한 준비 "서로 음지에서 고생하네. 비록 적이긴 하지만…아무튼 만나서 반가워." "음. 소문은 많이 들었어. 전장의 지휘자 한소영. 그리고 너가 그녀 휘하의 소드 마스터? 진수현 이라고 했던가?" "아. 미안. 진수현이 아니라 김수현 이구나." "아마도. 그녀를 먼저 만났더라면 바로 휘하로 들어 갔을지도 몰라. 그만큼 그녀는 매력있는 사용자거든." "농담의 질이 별로네. 지금 있는곳도 나쁘지는 않아. 그리고 배신하는 취미는 없거든." * 워프 게이트는 다행히 요금 감면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원래 일인당 2골드로 총 8골드를 내야 하지만 50% 할인을 해준탓에 절반인 4골드만 지불하고 이용할 수 있었다. 애들은 잔잔한 파문이 일렁이는 포탈 안으로 들어가면서 연신 신기한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통과 의례때 몇번 겪어봤으니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됬는데. 저렇게 고개를 두리번 거리는건 영락 없이 "내가 바로 초보 사용자에요." 라고 광고하는것과 다름 없었다. 저런 사소한 행동 하나가 부랑자들의 표적이 될수도 있어 주의를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이었다. 그러나 초반부터 잔소리하는 엄마표로 낙인 찍히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반쯤 열었던 입을 꾹 다물었다. 포탈 안으로 완전히 몸을 담그자 알몸으로 바다 속으로 들어간것 같은, 시원한 느낌이 전신을 휘감았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전신을 가득 채운 맑은 기운을 음미한 후 다시 눈을 뜨니 어느새 변했는지, 초라한 도시의 풍경이 눈동자 안으로 들어왔다. 소도시 뮬로 도착한 것이다. 뮬은 빈말로도 번영 했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특히 애들의 반응은 가관이었다. 반듯한 도로와 깔끔한 건물들. 밝고 웅장한 분위기가 있는 대도시 바바라에서 생활하다가 이런 후줄근한 도시를 보니 말문이 막히는 모양 이었다. 개척 도시가 바바라를 따라가는건 요원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도시의 대표 클랜을 맡고 있는 소영주의 수완이 엄청나지 않은 이상 말이다. 나는 애들을 데리고 울퉁불퉁한 황토빛 흙덩이를 밟으며 걸음을 옮겼다. 뮬의 거리는 대체로 한산했다. 간간이 보이는 사용자들도 허술한 장비를 걸친 사람들이 대부분일 뿐 이었다. 아침에서 점심으로 넘어가는 시간인 만큼 다들 도시를 나간 상태라는걸 감안해도, 대도시처럼 한걸음 옮기면 사용자들이 보이는걸 기대할 수는 없을것이다.(물론 나는 애초에 기대한것도 아니다.) 유정은 익숙하지 않은 얼굴로 주변을 구경하더니 궁금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오빠. 우리 이제 어떻게 해? 일단 바로 도시 밖으로 나갈거야?" 무슨 큰일날 소릴. 최소한 돌아올곳은 마련하고 나가야지.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니. 일단 당분간 베이스 캠프로 삼을 여관 부터 잡아야지." "베이스 캠프? 여관?" "정식 클랜으로 등록 되지 않으면 집은 커녕 클랜 하우스도 구하기 힘들거든. 당분간은 여관에서 생활한다고 생각해." 어차피 아침 + 점심도 먹을겸 여관에 먼저 들를 계획이었다. 애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래도 막 홀 플레인에 첫발을 내딛은것 치고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클랜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중간에 사용자 아카데미를 퇴소한 사용자는 하루 벌어먹고 살기도 힘들것이기 때문이었다. 도시에서 정보의 흐름에 가장 민감한 곳이라면 단연 펍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내가 여관을 선택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1회차 홀 플레인 시절 잠깐이지만 뮬에서 활동한적이 있었는데 당시 아무 생각 없이 머물렀던 여관이 있었다. 그때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 여관에서 머물고 그대로 지나쳤지만, 그 후에 나는 여관과 관련한 우연한 사실 한가지를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한동안 대로를 걷던 나는 허름해 보이는 여관 앞에서 걸음을 정지했다. 그러자 나를 따라오던 애들 또한 따라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빛이 바랜 간판에는 <조신한 숙녀>라는 요상한 이름이 걸려 있었다. 나는 정확히 찾았다는 생각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안으로 들어서려는 찰나였다. 우당탕! 쿵쾅! "으아아아아! 사라암 살려어어어!" 여관 내부에서 커다란 소음이 들리는 것과 동시에 턱수염이 거뭇한 한명의 남성 사용자가 여관문을 벌컥 열고 뛰어 나왔다. 똥줄 타는 얼굴로 거의 넘어질듯 달려 나온 그는 실제로 우리 앞을 데굴데굴 구르고 말았다. 하지만 바로. 거의 묘기에 가까운 기술로 벌떡 일어나더니 이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고 말았다. 대강 사정을 짐작한 나는 픽 웃을 수 있었지만 애들은 멍청한 얼굴로 그가 도망간 방향만 볼 뿐 이었다. "멍청히 서 있지만 말고 들어오렴." 이윽고 여관 내부에서 조금 허스키 하긴 해도 여성 특유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멍한 애들을 끌고 여관 안으로 들어서자 난장판이 되있는 내부 모습이 보였다. 이리저리 흩날린 식기나 테이블 보는 애교였다. 부러진 의자와 거꾸러진 테이블을 보며 안현은 끙하고 신음성을 흘렸다. 홀 중앙에는 여성 한명이 오연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는 뭔가에 대단히 만족한 얼굴로 나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다른 사용자들과 특이점을 찾는다면 머리카락에 옅은 잿빛이 비친다는점 이었다. 이내 그 여성은 나를 힐끔 보고는 우리 전부를 천천히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네. 너희들은 손님이니?" 그녀의 고운 입술에서 남성의 애간장을 녹일듯한 나긋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안현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이 양반 또 시작이군. 나는 이미 이런 유혹에 면역이 되있는터라 차분하게 답할 수 있었다. "네. 손님이에요." "식사? 숙박?" "둘 다 입니다. 선으로 식사 먼저 하고 싶네요." 내 대답에 그녀는 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예의 바른 남자가 좋더라. 좋아. 아가들. 이곳은 난장판이니 조금 곤란하겠지? 그러니 다른 자리로 가서 기다리고 있으렴." 나는 그녀가 가리킨 곳으로 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애들은 처음에는 당황하느라 자세히 보지 못한것 같았지만 어느정도 안정이 된 후에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조신한 숙녀>는 나도 간만에 보는 여관이었다. 여관은 총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1층은 로비겸 식당으로 사용하고 2층과 3층은 숙소로 사용한다. 중요한건. 여관 내부에 우리를 제외한 사용자들이 단 한명도 없다는 점 이었다. 잠시 후 여자는 미소 가득한 얼굴로 우리들이 앉은 자리로 다가왔다. 물론 탁자와 의자는 아직 그대로인 상태였다. 그녀는 거의 던지듯이 물과 컵, 그리고 메뉴판을 놓았지만 신기하게도 그것들 모두가 한바퀴 빙글 회전하고는 테이블 중앙에 사뿐히 안착했다. 그걸 본 애들의 눈은 모두 휘둥그렇게 변하고 말았다. "메뉴판은 있는것 말고…없는것도 주문해도 괜찮아. 왠만한건 만들 수 있단다. 뭘 먹고 싶니?" 애들은 동시에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잠시 메뉴판을 슥 훓어본 후 대답했다. 솔직히 훓어본 척만 했을 뿐이고 이곳에 왔으면 뭘 시키는게 좋을지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A코스 4인분으로 주세요." "어쩜. 얼굴도 잘생긴 애들이 선택도 잘한다니까. A코스는 금방 나오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폭발적인 몸매를 한껏 뽐내는 걸음으로 그녀는 총총히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솔은 불퉁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고 유정이 또한 얼굴이 이상했다. 오직 안현만이 나를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여기 왠지 이상해. 왜 여기로 온건데?" "응. 이상해요. 우리 그냥 다른데 가면 안되요?" 유정이 탐탁잖은 얼굴로 입을 열자 솔이 얼른 유정이를 거들며 찬동하고 나섰다. 그녀들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다른데로 가자고 할줄은 몰랐는데. 그렇게 이상한가? 둘의 말은 듣던 현은 질세라 다급한 얼굴로 말했다. "글쎄! 난 괜찮은것 같은데. 별로 이상하지도 않고. 굳이 다른데 갈 필요가 있을까?" 현의 말이 끝나는 순간 두명의 여성 사용자는 동시에 안현을 노려보았다. 유정이는 네가 그럼 그렇지 라는, 솔이는 실망 가득한 눈길로 친오빠를 바라 보았다. 두 여자의 시선에 움찔했는지 안현은 헛기침을 한 후 바로 말을 돌리고 말았다. "배, 배가 많이 고프네. 일단 식사부터 하고 얘기…하자고." "놀고 있네. 아주 그냥 첫눈에 반했냐?" 현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볼 뿐 이었다. 그에게 시선을 거둔 유정은 이내 바로 화살을 나한테 돌렸다. 그녀는 음성은 한껏 뾰족한 상태였다. 솔이 또한 바바라 광장에서부터 뭔가 단단히 뿔이 났는지 그녀 답지 않게 투덜거리고 있었다. "흥. 저는 아가, 아가라고 하는것도 마음에 안들어요. 저희가 무슨 애기들도 아니구요." 안솔의 말이 끝나자 유정은 뜨끔한 얼굴로 조용히 솔이를 응시했다. 나 또한 그동안 솔이를 애로 생각했기 때문에 딱히 할말은 없었다. 유정이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고는 연신 불만을 터뜨렸다. 음. 도대체 왜 이러는거지? "여관을 오려면 제대로 된 곳을 오던지. 딱 봐도 이상하잖아. 안은 난장판이고. 그 남자는 꼬랑지 빠질 정도로 도망가고." 너 성격이 더 이상해. 종잡을 수 없어.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치솟는걸 겨우 억누르며 나는 어설픈 미소로 화답했다. 내 반응 또한 마음에 안드는지 유정이는 연신 툴툴 거리며 솔이와 듀오로 나와 현의 뒷담화를 개시하려는 순간 이었다. 스윽. "우끼얏!" 요상한 비명 소리를 내며 자지러지는 유정. 어느새 유정 뒤에는 한손에 접시를 든 여성이 홀연히 서 있었다. 안현과 안솔 또한 그 여성을 보며 기절할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바로 근접해 있는데 여성의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역시 인생은 실전이라는 헛생각이 들었다. 여성은 그 특유의 나른한 눈동자와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머…이런 특이한 비명 소리는 처음 들어보네." "이 미치…?!" 여성의 태연한 얼굴에 열받았는지 본래 성질을 드러내려던 유정이. 그순간 그녀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짐과 동시에 말을 멈추고 말았다. 여성이 그대로 몸을 숙이더니 한손으로 유정의 어깨를 감싸 안았기 때문이다. 여성은 그 상태 그대로 유정을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 당기고 말았다. 졸지에 그녀는 여성의 가슴에 얼굴을 푹 묻어버리고 말았다. "아가." 어버버 유정이 입을 열지 못하는 사이 여성의 몸에서 은은한 기운이 피어 올랐다. 그 기운은 순식간에 주변을 점령하더니 곧이어 무겁게 짓누르는 공기로 바뀌었다. 그리고 공기가 바뀌는 순간 안현도, 안솔도, 유정도 그대로 몸이 굳은듯 얼굴이 딱딱하게 변했다. 여성은 자신의 품에 안긴 유정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하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그 남자가 왜 그렇게 꽁지 빠지도록 도망갔는지 궁금하니…?" 유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다는게 정답인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따로 행동하지 않고 상황을 보고 있었다. 지금 여성이 펼친건 마력에 재능이 있는 사용자들이라면 기본적으로 할 수 있는 <마력 방출>의 일부였다. 은밀하고 조용하게 주변을 잠식하는 그녀의 마력을 보며 나는 속으로 감탄하고 말았다. 물론 이참에 유정의 버릇을 고칠 마음도 있었다. 손 안대고 코 푸는 거랄까. "그 남자가 들어와서 주문을 받으라고 하더라…그런데 뭐가 먹고 싶다고 한 줄 아니?" 온통 뭉클뭉클한 불안한 공기가 테이블 주위를 가득히 메우고 있었다. 거의 숨 쉬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안현이나 유정이는 몰라도 솔이정도면 어느정도 저항할법도 한데. 당황한 얼굴로 덜덜 떠는 솔이를 보자 역시 실전이 필요하다 여겼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동안 여성은 유정이를 대상으로 계속 말을 하고 있었다. "내 젖이 먹고 싶다고 했어." 말을 끝내고 쿡쿡 웃는 여성을 보며 나는 명불허전이라 여겼다. 이윽고 유정에게서 시선을 뗀 그녀는 나와 현이를 보며 뇌쇄적인 미소를 날렸다. 조금 더 놔두고 싶었지만 간신히 눈동자를 돌려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유정이의 시선을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나는 천천히 오른손을 움직여 테이블 위에 놓인 물컵을 집어들었다. 그러자 나를 보는 여성의 눈동자가 흥미롭게 변하는걸 볼 수 있었다. 나는 꿀꺽 한모금을 마시고 다시 테이블에 놓는 순간 살짝 마력을 담아 내려 놓았다. 탁. 물컵이 나무 테이블에 닿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컵을 기준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간 내 마력은 그녀가 퍼뜨린 주변의 마력들을 순식간에 중화시키며 퍼져 나갔다. 원래는 일시에 큰 충격을 줘 상대방에게 마력 충격을 주겠지만 지금은 전투 상황이 아니었다. 곧이어 커튼이 걷히듯 주변을 메우던 무형의 기운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기운이 걷히자마자 거의 의자에 몸을 파묻은 안현과 안솔은 놀란 얼굴로 나와 여성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유정이는 근접해 있던 만큼 가장 큰 영향을 받았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 쉬었다. 얼굴에 분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녀는 시선을 테이블 아래로 내리 깔고 있었다. 방금전 유정이도 본능적으로 느꼈으리라. 자신과 여성의 사용자 등급이 차원이 다르다는 걸. "어…?" 여성은 설마 이럴줄은 몰랐는지 조그마한 탄성을 지르며 몸을 다시 꼿꼿이 세웠다. 처음에는 놀라움. 다음에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얼굴이 바뀌는 여성을 보며 나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들어보니 그 남자가 쫓겨날만 한것 같네요." 나지막한 내 말에 여성은 재밌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지? 그래도 손님 이잖아. 요즘 장사도 잘 안되는데…. 그래서 한번 먹는데 일백 골드만 달라고 했지." 나 천골드 있는데. "그 남자. 돈이 많아 보이는것 같지는 않던데요." "응. 네 말대로 그놈이 돈이 없다고 하더라고. 대신에…다른 좋은걸 주겠다고 했어." "좋은거라면?" 내 물음에 여성은 입가에 더욱 진한 미소를 배어물고는 말을 이었다. "응. 주사기를 잔뜩 주겠다고 하던데?" "여기, 그, 홀 플레인에도 주사기라는게 있나요?" 안현은 어느정도 마음을 가다듬은 듯 나와 여성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웃긴건 평소와는 다른 잔뜩 깔은 목소리로 말했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여성과 한번 말이라도 섞을 요량으로 저러는걸 보니 남자란 참 슬픈 동물이라고 새삼 느꼈다. 여성은 그런 안현이 귀엽다는듯 요염하게 웃고는 대답했다. "그럼. 남자라면 다들 영양제가 든 주사기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걸?" "네…?" 무슨 소리냐는듯 반문하는 안현을 보며 여성은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현의 바지를 가리켰다. "너도 있잖니. 하얀 영양제가 든 주사기." "하얀 영양제? 아…?!" "응. 내 가랑이 사이로 직접 놓아주겠다고 하더라." 안현은 그녀가 말하는게 어떤 의미인지 겨우 알아챘는지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말았다. 오직 솔이만 무슨 얘기를 하는지 이해가 안가는듯 멀뚱한 얼굴 이었다. "그 주사기를 부러트리려고 했는데…아쉽게도 도망갔어. 운이 좋았지." 여성은 아깝다는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그러자 그녀를 말을 들은 안현이 침을 꿀꺽 삼키며 재빨리 허벅지를 오므리는게 보였다. ============================ 작품 후기 ============================ * 유정이와 솔이가 저렇게 짜증을 부리는 이유. 그건 애기들이 엄마를 보는 이유와 같습니다. 하하하하. * 이번회에 중요한 캐릭터가 등장했네요. 부디 이미지가 의도한 대로 독자분들에게 다가갔으면 참 좋겠습니다. * 아하하. 주인공 클랜명은 이미 정한 상태라서…. 그래도 정말 좋은 이름들을 많이 추천해 주셨네요.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드립니다. 1) CrossDie : 1등 축하합니다. 새로운 챔프의 탄생이군요! 말씀 그대로 의외의 한방 이었습니다. :) 2) 여옥아놀자 : 오호. 저, 전신 애무라. 다음에 본격적인 가르침을 받고 싶네요.(응?) 3) 아일릴리아 :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 완료 했습니다. 수현이의 성향을 생각하면 대충 짐작 가능하실 거에요. 4) vkfkd54 : 리턴(회귀)와 관련해 클랜 이름 하나 만드는것도 괜찮을것 같아요. 소중한 의견 감사합니다. 5) Toranoanal : 한 이라는 클랜명은 이미 지어놨지요. 저도 그게 생각나서…. 말씀해주신것과 관련해 클랜 이름 하나 더 생각해 낼 수 있었네요. 소중한 의견 감사합니다. 그리고 2번째로 다신 코멘트는 아마 다음화 또는 다다음화를 보시면 확인하실 수 있을거에요. 6) 초하루 : 아마 그 소매치기가 역관광 당할걸요. 그것도 뼛속까지…. 7) 봉인된톨스토이 : 와우. 코멘트를 엄청 많이 달아주셨네요. 그만큼 많은 소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소중한 조언 감사합니다. 8) 불곰리즈 : 크앙크앙! 얼른 나으세요…ㅜ.ㅠ 요즘 길이 미끄러운데 조심, 또 조심하시구요. 9) Edward Wong Hau Pepelu Tivrusk : 2화 안에 확인 가능하실거에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 10) 블라미 : 네. 확실한 메리트가 있어요. 왜냐하면 바바라도 처음에는 아틀란타와 같은 미개척 지역인적이 있었거든요.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게 되면 스포가 되니 노코멘트로 하겠습니다. PK는 말 그대로 현실로 보시면 되요. 아무도 보지 않은 상태로 하면 손해는 없어요. 설령 한다고 해도 상황에 따라 판단이 다르게 날 수 있기 때문에…ㅇㅅㅇ.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45 / 0933 ---------------------------------------------- 비상을 위한 준비 여성은 상냥한 손길로 식사를 내려 놓고는 조신한 걸음걸이로 물러났다. 조금전과는 확연히 다른 몸놀림 이었다. 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은 야채 샐러드, 구운 빵, 크림 스튜 그리고 고기 파이가 전부였다. 솔직히 A코스를 주문했지만 코스 요리로 부르긴 애매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래도 다른 요리에 비해 값이 저렴하고 맛도 괜찮았던걸로 기억한다. 분명 유쾌하게 떠들면서 먹을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래도 시장이 반찬인지라 입맛을 다시던 안현이 먼저 수저를 들었다. 나 또한 흰 김이 모락이 올라오는 크림 스튜를 한가득 떠 입 안에 밀어 넣었다. 고소하고 담백한 식감이 입 안 가득 퍼지더니 이내 혀 위에서 사르륵 녹는 느낌이 들었다. "오…. 이거 진짜 맛있는데요? 진짜 살살 녹는것 같아요." 안현이 호들갑을 떨자 안솔도 빵을 하나 들더니 조심스레 한 입 물었다. 곧이어 솔 또한 의외라는듯 눈을 휘둥그래 뜨더니 입을 오물거리는 속도를 높였다. 둘 다 진진하게 먹는걸 보며 나는 속으로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다만 한 사람만큼은 아직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유정이는 평소 엄청 많이 먹는건 아니지만(술은 예외로 두자.) 그래도 깨작이는 애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먹는둥 마는둥 젓가락만 휘휘 젓고 있었다. 눈이 멍하고 시선이 분산된걸 보니 아마 내면에 심한 충격을 받은것 같았다. 하긴 살기를 가득 담은 마력 방출의 직접 대상이 되고 거리가 근접해 있던 만큼 다른 애들과는 차원이 다른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나 또한 예전에 비슷한 경험을 겪은 만큼 현재 유정의 기분을 어느정도 헤아릴 수 있었다. 굴욕감. 모멸감. 자괴감. 무력함. 당해본 사람만이 아는 더러운 기분. 이번은 내가 어느정도 의도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금 미안한 감은 있었다. 마력에서 밀린다는건 일단 상대 사용자보다 자신의 실력이 아래라는걸 증명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이런 과정들 모두가 애들한테 피가 되고 살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앞으로도 얼마나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경험할지 아무도 모르기 떄문이다. 이제는 우리들은 홀 플레인 이라는 거대한 세상에 나온 한명의 어엿한 사용자였다. 신규 사용자들만 비교하는게 아니라 수많은 기존의 사용자들과도 경쟁을 해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애들은 아직 병아리나 다름 없었다. 병아리 중에서도 햇병아리. 애들은 아직 배고픈걸 모른다. 행동도 조심할줄 모르고, 나설때와 나서지 않을때를 구분하지 않는다. 간단히 줄이면 애들한테는 절박함 이라는 감정이 없었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일부 내 탓도 있다고 볼 수 있을것이다. 통과 의례부터 내 울타리 안에서 마음껏 노닐었으니까. 지금은 이냥저냥 운이 따랐다고 해도 계속 이런 태도를 유지한다면, 앞으로 10년이 넘을지도 모르는 홀 플레인 안에서 살아 남을 수 있을까? 나는 99%의 확률로 아니오라고 답할것이다. 항상 행동에 조심하고 나서지 않으려고 했던 나도 셀 수 없을만큼 수많은 사선을 넘어야 했으니까. 지금은 말 그대로 마지노 선 이었다. 사용자들간의 살인, 즉 PK가 마지막 선을 지키고 있었다. 북대륙은 은연중이긴 해도 아직 기존 사용자들끼리 서로 살인하는걸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그래서 부랑자들이 현재 공통으로 배척 받는 것이다. 하지만 곧 1차 연합 대전이 발발한 후에는 상황은 180도 반전 된다. 극 후반부인 이것저것 가릴것 없이 무조건 PK는 하지 않아도 아군과 적군의 경계가 명확하게 갈린다. 더 나아가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 해질것이다. 그런 격변하는 홀 플레인 안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 생존을 위해 나는 앞으로 애들한테 생존을 위한 기술을 가르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저 풀린 정신을 바싹 조일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뮬에서 많은걸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여관인 <조신한 숙녀>로 온 것이다. 식사를 마무리짓고 나는 2인실 방 2개를 대실했다. 남은 골드를 세어보니 내가 받은 주급과 합해 총 6골드 40실버가(+1000골드) 있었다. 식사 + 대실은 1주일을 기준으로 20실버였기 때문에 총 40실버를 지불했다. 각각 배정한 방으로 들어가 간단히 여장을 풀게한 뒤 나는 곧바로 애들을 나와 현의 방으로 모이게 했다. 안현은 손을 계속 쥐었다 피었다 하고 있었다. 얼굴에 설레는 기대감이 가득한게 한시라도 빨리 도시 밖으로 나가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는것 같았다. 유정의 얼굴은 아직도 가라 앉아 있었고 솔이는 그런 언니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눈치 없는 현은 팔을 붕붕 돌리며 입을 열었다. "형. 그러면 앞으로 우리 네명이 뮬에서 같이 행동하고 그러는 거죠? 몬스터도 잡고, 던전이나 동굴 탐험도 하고. 보물들도 발견하고."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애들과 만난 후로 왜 이렇게 한숨이 나오는걸까. 소풍 가는것처럼 들떠 있는 안현을 나는 잠시 지그시 바라보았다. 바로 나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전에 안현 또한 단단한 정신 교육이 절실해 보였다. 평소와는 다른 내 반응에도 불구하고 안현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도 일단 클랜부터 만들어요. 이름은 뭐로 하실거에요? 솔직히 황금 사자 같은 이름은 너무 구리고…." "못 만들어." "다른…네? 안 만드신다구요? 왜요?" "안 만드는게 아니라 못 만든다고." 나는 한손으로 머리를 짚고 이번엔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전투 훈련에 관해서는 열성적으로 임한 안현이지만 그 외 홀 플레인의 역사 또는 설정 관련 수업에서는 조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걸 안다면 지금 클랜을 만들자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텐데. 안현은 그제서야 내 얼굴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조금 뜸을 들인 후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지금 우리 네명은 정식 클랜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이 부족해." "조건…이요? 저는 한명만 있어도 클랜을 만들 수 있다고 들은것 같은데." 조건이 인원을 말하는게 아닌데. 순 외우기 쉬운것만 잔뜩 외웠군. 나는 속으로 혀를 한번 차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 짚고 넘어갈건 무조건 짚고 넘어갈 생각이다. 나중에 어느정도 숙련된 사용자가 된 이후에 이런 꼴을 보이면 그때는 가차 없겠지만 말이다. 클랜은 비슷한 목적을 가진 사용자들의 모임으로 간단히 정의할 수 있다. 또한 정식 클랜은 개나소나 만들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사용자들이 아닌 천사들의 신탁을 받은 거주민들이 각 도시마다 클랜 등록소 안에서 클랜에 관한 모든 사항을 전반적으로 관리한다. 그런만큼 공평하긴 해도 동시에 엄격하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그건 바로 실적을 쌓는 방법 밖에 없었다. 물론 업적을 쌓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건 홀 플레인의 메인 스트림에 영향을 미치는 일인만큼 지금 이루기는 요원한 일 이었다. 실적은 업적과는 달리 적용되는 범위가 굉장히 광범위하다. 캐러밴, 원정대는 실제로 어떤 임무를 마친 후 꼭 공통적으로 성과 보고를 해야한다. 성과 보고는 도시마다 배치된 신전에 들러 맡은 임무를 보고하는 과정이다. 신전의 관계자가 보고를 검토한 후 중요하다 싶으면 자력으로 감찰단을 꾸리거나 대표 클랜에게 요청해 사실 여부를 확인한다. 그러한 과정 하나하나를 실적으로 볼 수 있었다. 어느 장소에서 어떤 몬스터가 출현 했는지, 던전 또는 동굴을 발견했는지, 탐험 내용은 어떤지 사소한 사항 하나하나가 모두 실적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는 부분들 이었다. 어느정도 실적을 쌓았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정식 클랜의 창설 승 신청을 하는데 당연히 그 과정에는 심사가 필수적으로 포함 된다. 하루에도 수많은 신청이 이루어지지만 한달에 승인되는 건수가 한 손으로 꼽는다는걸 사실을 알면 심사가 굉장히 까다롭다는걸 짐작할 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그런만큼 정식 클랜으로 발호한 클랜들의 저력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호오…." 내가 이러한 사실을 차분히 설명해주자 안현은 호오라고 지껄이며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호오는 뭔놈의 호오. 지금 솔이만 봐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 같고만. 이윽고 납득한듯 고개를 끄덕이는 안현을 보며 나는 애들의 앞으로 한걸음 나섰다. 세명의 시선이 나에게 주목 되는걸 보자 나는 유정에게로 시선을 돌린 후 입을 열었다. "모두들 홀 플레인에 첫 발걸음을 내딛은 기분은 어때?" "…별로 유쾌하지 않아." 유정의 착 가라 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한두번 고개를 주억이고는 말을 이었다. "분해?" "…억울해. 분해." 내 물음에 유정이 즉답했다. 그만큼 방금전에 자신의 무력함을 절실하게 깨달은 것이다. 물론 상대가 추후에 지금의 나와 자웅을 겨룰만큼 성장하는걸 감안한다면 어느정도 핸디캡은 있었다. 그래도 그만큼 효과는 확실하다는 생각에 나는 목에 더욱 힘을 주었다. "내가 항상 너희들한테 말했었지. 홀 플레인은 변수가 많은 세상이라고.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줄 모른다고. 만약 방금 여성이 부랑자였다면 어떻게 됬을것 같아?" 거침없는 내 말에 모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게 아니었다. "긴장해. 도가 넘치는 긴장은 독이지만 홀 플레인은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해. 우리는 지금 피크닉 나온것도 아니고 보물 찾기를 하러 온것도 아니야. 이곳에서 살아 남고, 다시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서 있는거라고. 다들 알아 들어?" 안현, 안솔, 이유정의 주변으로 숙연한 침묵이 감돌았다. 안현은 뜨끔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수그렸고 유정이와 솔은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분한줄 알면 됬어. 하지만 억울할건 없다. 그건 네가 그만큼 약하다는 말이니까. 억울하면 수련을 해서 힘을 길러. 방금전과 같은 굴욕을 느끼고 싶지 않으면 이 악물고 정신 단단하게 잡으라고." 나는 잠시 모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쯤 다들 약간이라도 자신의 현재 위치를 자각한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말의 뜻은 이제 슬슬 애들을 성장시킬 첫번째 계획을 꺼낼때가 왔다는 소리였다. 나는 조금은 누그러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1. 클랜 랭크와 관련한 내용 수정. 0046 / 0933 ---------------------------------------------- 비상을 위한 준비 "유정아." "응." "앞으로 방금전과 비슷한…음. 그런 불가피한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할거니?" "…잘 모르겠어." 유정이 얼굴을 구기며 대답했다. 본인 또한 무척 답답할 것이다. 앞으로 그런 상황이 닥친다고 해도 지금 자신은 아무것도 아는게 없었고 또한 할 수 있는것도 없었다. 굳이 답을 한다면 그냥 그대로 당한다라는 선택 뿐이 없을터. 나는 그런 애들에게 가뭄의 단비가 될 말을 꺼낼 생각 이었다. "다들 <마력 방출>에 관해서는 어느정도 알고 있지?" 한껏 몰아 붙였으니 이제 어느정도 살살 달랠 타이밍 이었다. 애들 또한 내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든걸 느꼈는지 슬쩍 고개를 들어 내 눈치를 살피는걸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이 엄마한테 혼나서 풀이 죽었다가 다시 고개를 드는 아이 같은 모습이라 절로 웃음이 나왔지만 속으로 삼켰다. "테이블에서 방금전 여성이 사용한 능력이 바로 마력 방출의 일부라고 보면 돼. 특수, 잠재 능력의 발현이 아니라 누구든지 본인이 지닌 마력 조절로 사용할 수 있는 컨트롤 어빌리티의 일부라는 소리야." 따지고보면 검기, 검강 또한 컨트롤 어빌리티의 일부로 포함 되는 능력들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컨트롤 어빌리티란 말을 들은 후 유정의 눈빛이 변하는걸 볼 수 있었다. "컨트롤 어빌리티…? 오빠. 그러면 우리들도 사용할 수 있다는 거야?" "그래. 연습만 한다면 사용할 수 있어. 더 나아가 방금전과 같은 상황에서 저항, 방어도 가능하고. 대응 방법에 따라서는 역으로 공격을 할 수도 있지." "가르쳐줘." 조금씩 생기가 돌아오는 애들의 얼굴을 보며 나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계속 풀이 죽어 있으면 정말로 실망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활로가 트이자 언제 그랬냐는듯 유정의 눈동자는 조금씩 이글거리며 불타오르고 있었다. 일단은 철저하게 이론을 가르친 후 예를 보여주고, 수련에 들어간다. 유정의 요청에 나는 기꺼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이고 입을 열었다. "혹시 마력 방출을 어떤 단계로 나눌 수 있는지 아는 사람?" "Sensing(감지), Occupy(점유), Coercion(위압)으로 나눌 수 있어요." "오…. 정답." 내 질문에 즉답한 이는 의외로 안솔 이었다. 그녀는 무언가 열망이 가득한 부담 어린 눈길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길에 내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주억이자 솔의 얼굴이 환해지는걸 볼 수 있었다. 나는 혹시 아까 솔이의 얼굴이 이상했던 이유가 현의 머리만 쓰다듬어주고 자기는 안 쓰다듬어 질투가 나서 그런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그건 아니겠지. 아무튼 솔이의 대답은 거의 정답 이었다. 물론 위압보다 상위 단계로 분류되는 Break up(파해), Demolition(파괴)도 있긴 했다. 그러나 그건 일단계인 감지와 비교하면 워낙 고등 기술인지라 아직 배울 수 있을리 만무했다. 때문에 나는 일부러 말을 아꼈다. "지금부터 나는 너희들한테 정말 강력한 기술 하나를 알려줄 생각이다." 서론은 끝났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시간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이라는 말이 있다.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는 뜻으로 본인이 직접 경험해야 확실히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천천히 마력을 일으키며 애들을 등지기 위해 몸을 반바퀴 돌렸다. 나는 천천히 마력을 조절하며 방 바닥 전부로 내 마력을 흘려 보냈다. 몸을 기준으로 바닥에 내 마력이 담긴 둥그런 하나의 원을 그린다. 이미 수천수만번 해본터라 익숙함을 넘어서 내 몸의 일부나 다름 없었다. 내가 가만히 있자 애들이 멀뚱한 시선을 나에게 던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눈을 감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 솔, 유정아. 지금부터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리고 최대한 발소리를 내지 말고 방 내부 어디로든 이동해봐." 내 말을 듣자 조금 머뭇거리던 애들은 이내 한명씩 조용히 움직이는걸 느낄 수 있었다. 자기들 딴에는 살금살금 움직인다고 해도 작정하고 감지를 건 이상 부처님 손바닥 안 이었다. 이윽고 뭔가 삐걱이는 소리가 나는것과 동시에 모두 이동을 완료한걸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뒤돌아선채 그대로 입을 열었다. "안현. 좌측 왼발 기준 38도 남동 방향. 옷장 앞에. 안솔. 우측 오른발 기준 26도 남서 방향. 중앙 탁자 뒤편. 이유정. 내 몸 기준 90도 방향. 침대 위." 내 말이 끝나는 순간 애들은 급하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부터 이정도로 놀라면 곤란할텐데. 나는 싱긋 웃고는 말을 이었다. "이걸 바로 마력 방출의 제 일단계인 센싱, 즉 감지라고 한다. 흔히들 보이지 않는 눈이라고도 하지만 실상은 눈에 보이는 사물과 자신의 마력 회로를 연결이라고 볼 수 있어. 즉. 자기 자신이 받아 들일 수 있는 사고 반경을 마력을 이용해 임의로 넓히는 거지. 너희들. 그 여성이 홀연히 나타나 다들 놀랐지?" "그러고보니…." "네…네. 그러네요. 그러면 형. 그러면 감지를 익히면 그 여성이 언제 오는지 알 수 있다는 건가요?" 어느정도 감을 잡은듯한 안현의 목소리에 나는 뒤돌아 선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으로는. 하지만 감지는 만능이라고 할 수 없어. 감지를 뚫고 들어오는 방법이 없는게 아니거든." "그렇다면…." 나는 이번에 애들이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마력을 강하게 일으켰다. 맹렬한 기세로 무형의 기운을 솟구친 후 이번에는 허공으로 마력을 퍼뜨렸다. 뜨거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내 마력은 순식간에 방 안 전체를 점유했다. 애들이 신기한듯 고개를 두리번 거리는걸 보며 나는 이번에 다른 요구를 했다. "이번에는 다들 손가락으로 숫자를 표현해 봐." 어느정도 애들이 보고 느낄 수 있는, 그리고 내 요구대로 행동 할 수 있는 시간을 준 후 나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안현. 손가락 두개. 핀 손가락은 검지와 중지. 안솔, 손가락 하나. 핀 손가락은 검지. 이유정. 손가락 네개. 핀 손가락은 검지, 중지, 약지, 소지…둘, 넷, 하나, 다섯, 넷, 다섯. 이녀석이." 믿기지 않는지 중간에 빠르게 손가락을 바꾸는 유정이었지만 나는 무리 없이 모두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러자 기가찬듯 유정이 힘없이 팔을 탁 내리는게 느껴졌다. "어…?" "하…?!" "대, 대단해요…!" 애들의 탄성에 찬 소리가 들린후 나는 비로소 다시 몸을 돌려 애들과 얼굴을 마주했다. 모두들 무슨 귀신이라도 본 얼굴로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방 안을 점유한 마력을 유지한 채로 말을 이었다. "감지를 뚫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어. 상대가 알아도 반응할 수 없는 속도를 이용하거나, 공중을 통해 들어오는 방법. 그리고 상대의 마력에 자신의 마력을 은밀하게 섞는 방법등이 있지. 그래서 보다 확실하게 대응하기 위해 감지를 발전시킨 단계를 바로 점유라고 한다." "오빠. 그럼 아까 그 여자가 사용한 능력이 바로 이 점유라는 거야?" 유정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점유는 이단계로 분류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리고 여성이 펼친 능력은 삼단계에 해당하는 위압 이었다. "아니. 그 여성이 사용한 능력은 Coercion. 위압을 사용했지. 마력 방출의 삼단계에 해당하는 능력이야. 단순히 사고 회로를 넓히는데서 한발 더 나아가 마력에 자신의 의지를 담는 나름 상급으로 볼 수 있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지. 물론 사용자에 따라 위력이 다른건 있지만…. 점유를 익히게 되면 그러한 위압을 완벽하게 방어하거나 최소한 일부 저항을 하는것도 가능해." "그, 그럼 나도 위압 배울래. 위압 배우고 싶어." 성급히 말하는 유정을 보며 나는 미미하게 웃고는 유정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손가락을 살짝 튕겨 그녀의 이마를 타격했다. 입을 삐죽 내밀고 이마를 슥슥 문지르는 유정을 보며 나는 어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뛰는건 고사하고 걷지도 못하면서 벌써 날려고 그래? 천재라면 몰라도 위압은 그렇게 하루 아침에 간단히 배울 수 있는 분야가 아니야. 아무리 빨라도 세달은 꾸준하게 수련해야 하거든. 감지부터 완벽하게 익힌 후 한 걸음씩 올라갈 생각을 해. 너무 성급하게 굴지마." "형." 그때. 물끄럼 내 얼굴을 보고 있던 안현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의문을 담은 표정으로 현에게 고개를 돌리자 그는 바로 나에게 말을 던졌다. "저도 위압을…." "얘들이 정말. 아직은 이르다니까." 현은 내 말에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요. 위압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그래요." "오빠. 나도. 아까는 처음 겪는 일이라 당황해서 아무 생각도 안나지만…적어도 위압이 어떤건지 확실하게 보고 싶어. 응?" 안현의 말을 거드는 유정을 보며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마력 방출의 바탕은 마력을 얼마나 세밀하고 효과적으로 조절하는데 의미를 둔다. 감지는 금방 배울 수 있을지 몰라도 그걸 외부로 퍼뜨리고 의지를 담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직 잘 모르는것 같았다. 하지만 현과 유정의 눈동자에서 나는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열정을 엿볼 수 있었다. 순간 내가 처음 홀 플레인에서 활동할 시절이 떠올랐다. 무엇이든 배우려고 발버둥을 쳤던 시절. 변변한 가르침도 받지 못하고 어떻게든 독학으로 이를 악물고 올라가던 시절이 머리속으로 떠올랐다. 그때의 서글펐던 때가 생각나자 나는 무언가에 홀린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력 방출의 삼단계는 일이단계와 차원이 달라. 효율적인 마나 운용과 세밀함은 물론이고 회로를 기반으로 전개하는데 단 한치의 실수도 없어야 돼.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하고 또 어려운건 위압은 자신의 의지를 마나에 담는다는데 있어." "의지라고 하면…." "요체는 감정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가. 이 과정은 굳이 말을 할 필요도 없어. 말 그대로 자신의 의지를 담은 마나가 모든걸 말해주거든. 아까를 기억해 봐. 유정이 넌 그때 어떤 감정을 느꼈지?" 유정은 내 물음에 얼굴을 찡그리더니 잠깐 생각하고 대답했다. "몸이 힘들고…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전문 용어로 그걸 살기(殺氣)라고 한다. 그 여자는 유정이 너를 죽여버리고 싶다고 한거야. 따로 말을 하지 않고 너한테 자신의 의도를 감정을 담아 전달한거지." "……." 내 말에 유정이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굴이 삽시간에 핼쑥해진게 온 몸에 소름이 돋는 모양 이었다. 안현은 아직도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게 아직 이해가 가지 않는것처럼 보였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직 점유는 유지하고 있으니 잠깐 맛이라도 보여주는게 애들의 궁금증을 충족시키는데 나을것 같았다. 나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안현을 불렀다. "현아." "네." "지금부터 난 너를 죽이고 싶어 할거야." "네? 그게 무슨…." 뜬금 없는 소리에 반문하던 안현은 이내 입을 닫았다. 감지와 점유를 보여줄 때처럼 뭔가 시범을 보여줄 거라고 생각한것 같았다. 입을 딱 다물고 얼굴도 딱딱히 굳은게 나름대로 대비를 하는것처럼 보였다. 물론 내가 보기에는 전혀 소용없는 짓거리였다. 나는 눈을 감은 후 마인드 트레이닝에 들어갔다. 지금부터 안현을 나와 생사결을 벌일 원수로 설정하고 기억한다. 어느정도 속을 가다듬은 후 나는 눈을 뜨면서 한순간 폭발적으로 마력을 일으켰다. 그리고…. "흐악! 으아아아!" 반응은 바로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뜬구름처럼 표홀하던 내 기운이 한순간에 진득한 살기를 머금은 기운으로 변한것이다. 어떤 존재든 모조리 찢어 발길듯한 뭉클한 살심이 방 안을 가득히 메웠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살심이 솟아오른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감정을 단 한명. 안현을 대상으로 모두 쏟아부었다. 단 5초에 불과한 시간이었다. 조금 더 유지하면 나 조차도 예전의 살심에 물들것 같아 적당한 시점에서 억지로 억눌렀다. 얼른 퍼뜨렸던 기운을 거두고 내부로 갈무리하자 두 다리가 풀렸는지 땅바닥에 앉아 덜덜 떨고 있는 안현이 보였다. 유정이와 솔이 또한 나를 보며 입술을 달달 떠는게 살기의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것 같았다. 나는 현에게로 서서히 다가갔다. 안현은 내가 근접하자 자신도 모르게 흠칫 몸을 뒤로 빼고 말았다. 그러다 이내 핫 무언가 깨달은 얼굴로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현을 일으킬 요량으로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무리 마음을 단단하게 먹어도 마력을 이용한 위압에는 소용 없어. 말 그대로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을 여과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거니까. 어쨌든 고생했다." 안현은 머리가 멍한지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그리고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주저하며 내 손을 잡았다. 꽤나 힘겹게 일어나는게 아직도 충격이 완전하게 가신건 아닌 모양이다. 그러나 몸을 완전히 일으키고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순간 나는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안현의 눈동자에서 호승심이라는 감정이 스친것 같았다. 확실히 안현은 남자라서 그런지 몰라도 유정이나 솔이와는 다른 특별한 호전성을 가지고 있었다. 현을 일으킨 후 나는 아직도 시선을 거두지 못한 세명의 사용자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위압은 아직 너희들한테는 멀고 먼만큼 어떤건지 알고 있는 선으로 해둬. 지금은 감지가 우선이야. 이정도도 못하면 밖으로 나가도 말짱 도루묵일걸? 그러니까 적어도 감지를 한시간 이상 유지할 수 없으면 아예 밖으로 나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마." 감지를 한시간 이상 유지한다는 말을 하자 유정이 나를 보며 급하게 물었다. "그런데 오빠. 오빠는 도대체 언제 이런 기술들을 익힌거야? 수업은 다 비슷하게 받았잖아?" 유정의 물음에 나는 속이 뜨끔 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얼굴을 유지했다. 회귀전에 익혔다는 사실 그대로 말할수는 없는 노릇이라 적당히 대꾸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올린후 검지 손가락을 펴 애들에게 내보였다. "훈련 외 개인 정비 시간을 틈틈히 활용했지. 교관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고. 참고로 나는 감지를 익히는데는 하루 걸렸다. 점유는 2주 정도 걸렸고. 위압은 거의 마지막에 익힐 수 있었지." "아. 그러면 맨날 형이 자기전에 이상한 자세로 앉아서 하시던게 다 감지 수련 이었어요?" 마침 타이밍 좋게 안현이 끼어 들어 내 말의 신빙성을 높일 수 있었다. 내가 그냥 웃고만 있자 안현은 "그냥 명상하는건줄 알고 있었는데." 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애들의 반응에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나는 그정도 걸렸거든. 어디 뛰어 넘을 수 있으면 넘어봐. 누가 먼저 익힐지 조금 기대는 되네." 살짝 도발의 의미를 담은 말 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나는 나를 뛰어 넘어 보라는 의미로 말했는데, 내 말이 끝나자 현과 솔 그리고 유정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열의를 불태우기 시작한 것이다. "뭐. 내가 가장 먼저 성공할것 같은데요. 두고보세요 형." "호호호. 네 마력 능력치가 나보다 높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아, 아니…애들아…." 서로 찌릿하게 바라보는 둘을 보며 나는 땀방울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마치 남매들이 모여 엄마 앞에서 누가 가장 성적이 좋나 경쟁을 하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왠지 가면 갈수록 애들의 엄마가 되가는 기분 이었다. 이론이 끝났다. 시범을 보이는것도 끝났다. 남은건 수련의 본격적인 시작 이었다. 속사정이 어떻든 일단 애들의 태도에 변화가 생긴건 부정할 수 없었다. 마음을 먹자마자 바로 그 자리에서 수련에 들어간 것이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눈을 감은채 부동 자세로 조용히 마력을 조율하는 애들을 보며 나는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마력의 기본 운용은 이미지로 시작 된다. 감지의 기본 원리는 파문과 파동에서 기인한다. 떠올려봐. 잔잔한 바다를, 그리고 그 수면 위로 떨어지는 물 한방울. 그리고 일어나는 둥그런 물의 파문을. 또는 메마른 종이에 물을 한방울 떨어 뜨린다고 생각해도 돼. 최대한 본인이 편하고 친숙하게 상상할 수 있는 이미지를 생성하고 그 느낌 그대로 회로를 따라 마력을 이동하는거야." 솔직히 말하면 감지의 운용 자체는 간단하다고 볼 수 있다. 위압, 파해, 파괴에 필요한 고등 응용 기술과는 다르게 비교적 단순한 원리에 의해 작용하는 컨트롤 어빌리티니까. 감지는 얼마나 깔끔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관건 이었다. 자신이 가진 마력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항상 일정한 흐름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열심히 감지를 펼치고 있는 현과 유정이는 서서히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처음에 마력을 뽑아내고 발 아래로 원을 그리는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내가 내건 조건인 1시간 이상을 유지하는건 얼굴만 봐도 답이 나올 것이다. 조금씩 시간이 지나갈수록 원이 형태가 일그러지고 있었다. 갈수록 원은 울퉁불퉁하게 변하고 마력의 흐름이 불규칙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만만해 하는 얼굴로 뻐기는 미소를 지었지만 갈수록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 서서히 입술을 악무는걸 보며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애들한테 감지를 첫번째로 가르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감지 하나로 사용자의 역량을 측정할 수 있다는 소리가 괜히 나오는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두고두고 써먹을 능력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감지의 장점은 무궁무진하다. 수련 측면에서 보면 언제 어디서나 수련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마력의 상승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체를 내면적으로 극한까지 몰아 붙이는 효과도 있어 다른 능력치의 상승도 기대할 수 있었다. 더구나 이건 내 예상이긴 하지만 나는 내 잠재 능력중 하나인 심안(정)이 감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한다. 항상 내 자신과 주변을 살피고 평점심을 유지한채 전투에 임했다. 그리고 항상 상대방의 공격로를 미리 예측하고 그에 따라 항상 최적의 전투 전개를 하려고 노력했다. 즉 자신에 맞는 잠재 능력의 발현에 도움을 줄 가능성도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항상 일정한 마력의 흐름을 유지하는 습관을 들일수도 있다. 그러면 컨트롤 어빌리티에 관한 기술을 사용할때 쓸데없는 마력 낭비를 막을 수 있을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력 감지 훈련은 무려 일석삼조를 노릴 수 있는 수련이었다. 어느새 감지를 시작한지 10분이 넘어서고 있었다. 안현과 유정의 모습은 말 그대로 가관이었다. 처음 패기 넘치는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다들 땀을 뻘뻘 흘리고 거칠게 숨을 쉬는게 당장이라도 쓰러질듯 보였다. 그런 애들을 지그시 지켜보던 나는 잠시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그동안의 능력치 상승율을 확인하고 싶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이름(Name) : 안현 『능력』 [근력 59] [내구 57] [민첩 74] [체력 61] [마력 49] [행운 61] *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이름(Name) : 안솔 『능력』 [근력 16] [내구 21] [민첩 24] [체력 29] [마력 84] [행운 100] *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이름(Name) : 이유정 『능력』 [근력 48] [내구 52] [민첩 64] [체력 50] [마력 68] [행운 56] * 안현의 장점은 고른 신체 능력치와 높은 민첩을 들 수 있다. 마력과 행운을 제외한 모든 능력치가 고른 상승율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높은 민첩은 창병들에게 상당히 유리하게 작용하므로 앞으로의 성장세만 보인다면 충분히 강해질 소지가 있었다. 물론 마력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남은 포인트도 있고 앞으로 어떤 수련을 받는가에 따라 충분히 보완할 수 있을것이다. 유정이는 전체적인 신체 능력치는 평균을 웃돌거나 아니면 딱 평균이라고 볼 수 있다. 근력 내구 체력이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 이겠지만 그런만큼 민첩과 마력에 소질이 있었다. 무엇보다 근접 계열인데 마력이 벌써 68이라는 소리는 대단한 장점 이요 축복 이었다. 굳이 안현과 유정을 비교한다면 현재로서는 냉정하게 안현의 손을 들 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활용 범위가 넓은 직업인 용병을 선택한 만큼 앞으로 어떤 가능성을 보여줄지 기대가 되었다. 암살자를 했다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용병도 딱히 나쁜건 아니었다. 솔이는 앞선 두명과 비교하면 가장 낮은 능력치 상승율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다른 능력치는 제쳐두고 오직 마력만 주목하고 있었다. 몽크가 아닌 이상 보조가 주인 사제를 고른 만큼 근력, 내구, 체력, 민첩에 목을 맬 필요는 없었다. 그런만큼 솔이 가진 높은 마력과 극에 다다른 행운 수치는 사제와 안성맞춤을 자랑하는 능력치라고 할 수 있다. 초기 능력치인 75 포인트에서 9 포인트가 상승한 84 포인트를 보며 나는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한별이와 비교하면 상승율은 비교도 안되긴 하지만, 80대 중반에 들어서면 능력치 상승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지는것 또한 감안해야 한다. 이제 막 홀 플레인으로 나왔는데 벌써부터 84라는 능력치를 기록했다면 도대체 한계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절로 호기심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드디어 수현이 점점 본격적인 실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네요. 더불어 준비를 위한 준비도 거의 마무리 되었구요. 이번화에 나오는 마력 감지는 앞으로 상당히 자주 나올 소재입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어제 여러분들한테 푸념을 한게 너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오늘 용량을 꽉꽉 넣었습니다. 하하하. 그래도 오늘은 어제만큼 답답하지는 않더라구요. 역시 그런날이 있으면 다른날도 있나 봅니다. 응원해주신 독자분들 모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여러분들 덕분에 한층 더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노력하는 메모라이즈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리리플』 1. 아일릴리아 : 1등 축하드립니다. 다시 챔프 자리를 뺏으셨군요. :) 2. hohokoya1 : 유독 경쟁이 심하더라구요. 하하하. 3. AR0000 : 고맙습니다. 언덕을 넘으니 기쁨이란 감정이 저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 4. 사람인생 : 언젠가는! 분명 하실 수 있을겁니다. 제가 보증할게요. 파이팅! 5. 리인카네이션 : 쿠폰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좋은 내용으로 보답 하겠습니다. 6. 광황 : 질문 감사합니다! 먼저 답변을 드리면 홀 플레인의 식량 상황은 지역에 따라 다릅니다. 다만 북대륙은 평균 이하 ~ 평균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넉넉한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청 쪼들리는것도 아니죠. 그런만큼 클랜에서 특별한 상황(전쟁등)이 아니면 식량을 통제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홀 플레인도 하나의 세상인만큼 당연히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만 그런 사람들은 거의 99.9%가 홀 플레인 거주민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거주민에 대해 설명하면 말이 상당히 길어집니다. 아마 다음화 또는 다다음화에 사용자들과 거주민들의 관계에 대해 자세히 서술할 생각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스포일러가 상관 없으시다면 쪽지 보내주세요!) 7. 봉인된톨스토이 : 하하하. 아닙니다. 컨디션 조절도 온전한 제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절을 실패했다면 제 잘못이죠. 앞으로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8. 블라미 :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그만큼 작품에 관심을 가져 주신다는 거니까요. :) 명문 사용자 집안이라. 하하하. 확실히 기발한 소재입니다. 분명 약간 비슷한 설정이 있기는 합니다. 다만 홀 플레인에서 수현이를 제외하고 10년 이상 살아남은 사용자가 없는 만큼 가문을 설정으로 넣기에는 걸리는 점이 몇가지 있습니다. 비슷한 설정으로는 초반에 언급된 클랜 <오딘>이 있죠.(최상위 사용자들의 모임입니다.) 9. 은빛노을 : 앗. 나름대로 고심해서 쓴건데. 혹시 어느 부분이 접근하기 어려우셨나요? 알려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__) 10. Edward Wong Hau Pepelu Tivrusk : 진행을 할수록 밝혀질 수 밖에 없겠죠. 다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수현이 스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비상을 위한 준비 과정에 불과하거든요. :)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47 / 0933 ---------------------------------------------- Dungeon Of Alchemist 결론을 말하면 애들은 하루만에 감지를 익힐 수 없었다. 내가 요구한 한시간은 커녕 유정이 최장시간인 28분을 채우고 쓰러지고 말았다. 솔직히 처음 한것치고는 칭찬할만한 수준으로 봐도 무방했지만 나는 일부러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소도시 뮬은 개척 도시인 만큼 발견했을 당시의 건물들만 있었다. 새로 올라간 건물이라고 해봤자 꼭 필요한 것들만 올라간 상태였다. 대도시처럼 수련을 전문으로 할 수 있는 장소가 없었다. 그래서 당분간은 감지 수련만 시킬 예정이었다. 애들은이 수련을 하는 동안 나는 정보를 모은다는 명목으로 여관을 나섰다. 아무리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내가 가진 정보가 확실하다는 보장은 없었다. 더구나 굵직한 사건이 아닌 사소한 것들은 확실하게 알아본 후 움직이는게 정답이었다. 다만 그전에 일단락 지을 일이 하나 있었다. 움직이기전 나는 일단 사용자들이 이용하는 창고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사용자 전용 창고는 들고 다닐 수 없는 인벤토리로 생각하면 편할것이다. 홀 플레인의 <설정>으로 분류하는 만큼 다른 사람은 손댈 수 없는 자신만의 공간이지만 오직 GP로 구매한 물품만 보관할 수 있다는 제한이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사용자 전용 창고를 찾은 나는 안에 있는 물품들을 천천히 살펴 보았다. 아끼다가 똥 된다고 지금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은 전부 사용하는게 마음이 편했다. 일단 일부 영약(물약)을 전부 꺼낸 나는 더 볼것도 없이 전부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천사의 눈물을 사용합니다. 능력치 6 포인트가 추가로 생성 되었습니다.』 『체력 상승의 영약을 사용합니다. 체력 포인트가 2 포인트 올라갑니다.』 『비전의 영약을 사용합니다. 능력 1 포인트가 추가로 생성 되었습니다.』 순서대로 떠오르는 메세지들을 보며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얼른 정보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바로 사용자 정보창을 로드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수현(0년차) 2. 클래스(Class) : 검술 전문가(Sword Specialist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검(劍)의 주인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4) 7. 신장 · 체중 : 181.5cm · 75.0kg 8. 성향 : 질서 · 혼돈(Lawful · Chaos) < 능력치(현재 능력치 12 포인트가 남은 상태입니다.) > 1. [근력 94] [내구 92] [민첩 98] [체력 72] [마력 96] [행운 88] < 업적(1) > 1. 통과 의례 보스 몬스터 < 고유 능력(1/1) > 1. 제 3의 눈(Rank : S) < 특수 능력(1/1) > 1. 신검합일(Rank : EX) < 잠재 능력(4/4) > (현재 능력 1 포인트가 남은 상태입니다.) 1. 백병전(Rank : A Plus) 2. 쓰러질 수 없는(Rank : A Plus) 3. 심안(정)(Rank : A Plus) 4. 전장의 가호(Rank : EX) 현재 보유한 능력치와 능력, 그리고 남은 포인트는 보면 볼수록 뿌듯하고 동시에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1회차때 느낄 수 없었던 기묘한 쾌감이 내 몸을 사로잡는것 같았다. 보스 몬스터 2 포인트. 천사의 눈물 6 포인트. 체력 영약 2 포인트. 사용자 임무 보상 4 포인트. 그중 체력 영약 2 포인트를 제외하면 여유 포인트가 총 12 포인트 남은셈 이었다. 그것 말고도 잠재 능력 랭크를 올릴 수 있는 포인트도 하나가 남은 상태였다. 나는 능력치 포인트를 어디에 투자할지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성적으로 따지면 체력에 투자하는게 옳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보니 근력, 마력, 민첩에 자꾸 눈길이 가는걸 막을 수 없었다. 애초에 내가 막을 생각이 없었지만. 이런 고민은 능력 포인트를 봐도 비슷했다. 고유 능력에 투자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쉬웠다. 능력치는 근력. 내구. 민첩. 체력. 마력. 잠재 능력은 백병전. 쓰러질 수 없는. 심안(정). 남들이. 아니 사용자들이 보면 행복한 고민이라고 돌을 던질것이다. 결국 결정을 내리지 못한 나는 이번에도 보류하고 말았다. 일단 모두 체내로 흡수한 만큼 필요할때 언제든지 올릴 수 있을것이다. 생각을 더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 또한 앞으로 어떤 상황이 닥쳐올지 모르니 내가 감당하기 힘든 경우를 대비할 마음도 있었다. 무검과 엘릭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당분간 사용자 창고 안에 보관하기로 했다. 둘 다 후반용 장비들인 만큼 초반에는 꺼낼 일도, 사용할 일도 없었다. 더구나 겉보기 수수한 무검이라도 눈썰미가 좋은 탐험 관련 직업을 가진 사용자가 본다면 귀찮은 일이 생길수도 있었다. 나중에 고위 사용자의 징표인 아공간을 구하게 되면 그때 꺼낼 수 있을것이다. 보유한 골드의 3할에 해당하는 300 금화를 꺼내면서 나는 창고에서의 볼 일을 마무리 지었다. 고개를 돌리자 한가로운 도시의 대로가 보였다. 내가 원하는 정보는 현재 북대륙의 정세가 아닌 우리들이 이룰 목표를 위한 정보였다. 솔직히 주어진 시간만 많다면 아직 안정화가 되지 않은 지역에 가 몬스터를 정리하면서 차근차근 성장하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너무나 촉박하다. 1차 연합 전쟁이 발발하고 클랜들이 들고 일어날 때까지 적어도 정식 클랜 명칭은 달고 싶었다. 대형 클랜에서 지부를 만드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3개월만에 정식 클랜으로 발족하는건 정말 어려운 일에 속한다. 결국 남은 방법은 단시간에 뮬의 노른자만 쏙쏙 빼먹으며 실적을 쌓는 방법 밖에 없었다. 뮬에서 필수로 공략할 장소를 총 3곳 선정할 수 있다. 폐허의 연구소. 고대 연금술사 비비앙의 던전. 절규의 동굴. 절규의 동굴은 2년차를 넘긴 시절 내가 속한 캐러밴이 우연히 밝힌 동굴이다. 그러나 연구소와 연금술사 던전은 소문으로만 들어 나름의 준비가 필요했다. 초보 사용자들의 대부분은 동굴이나 던전의 발견을 어렵지 않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런곳들은 절대로 쉽게 툭툭 튀어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결계 안에 꽁꽁 숨겨진 상태거나 아니면 들어가는데 특정한 물건이 필요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물론 현재 보유하고 있는 제 3의 눈으로 상당 부분 해결이 가능할지도 모르나, 낙관하기에는 불확정 요소들이 너무나 많았다. 나는 일단 도서관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홀 플레인에서 도서관은 온갖 종류의 문서나 기록을 모아 두고 사용자들이 열람할 수 있도록 개방하는 시설로 정의할 수 있다. 주변 시국이 어수선하고 막 출범한 개척 도시인만큼 대표 클랜에서도 일단 도시의 안정화를 최우선으로 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굴이나 던전을 탐험하겠다고 대놓고 나서는건 바보짓 이었다. 도서관을 가는게 미련한건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 안되면 일단 절규의 동굴을 먼저 가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 동굴은 웬만하면 마지막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 나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애들은 확실히 자신의 성장을 보여주고 있었다. 개중에 특히 장족의 발전을 보인 애는 솔 이었다. 처음부터 지닌 마력이 너무 많아 조절하는데 애를 먹은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가진 효율적인 마나 운용 노하우를 알려주고 몇번 마력을 인도하는 방식으로 가르치자 하루가 다르게 부쩍 실력이 늘고 있었다.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애들한테 추가적인 부분을 요구했다. 단순한 부동 상태에서가 아닌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마력 감지를 유지하라고 요구한것이다. 겨우 감지 유지 40분대를 달성한 애들은 무빙을 더하는 순간 제자리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안현과 유정이 불만을 토로했지만 "그럼 전투할때 한자리에 가만히 있으면서 싸울래?" 라는 한마디로 잠재울 수 있었다. 솔이 한테는 요구 하나를 더 추가했다. 사제가 기초로 배우는 신성 주문중 속박(Shackles)이라는 마법이 있다. 치료(Cure)와 더불어 초반에 가장 쓸모있는 신성 주문이었다. 땡! 나는 은화 하나를 꺼낸 후 허공으로 높이 튕겼다. 핑그르 돌며 허공을 날던 은화는 이내 다시 내 손으로 떨어졌다. 옆에서 진지한 얼굴로 보고 있는 솔이를 보며 나는 차분히 수련 방법을 설명했다. "지금 내가 은화를 잡은 부분을 잘 기억해. 마법사나 사제들은 마력 능력치 다음으로 주문 속도가 가장 중요하거든. 얼마나 빠르고, 얼마나 신속하게 네가 의도한 마법을 펼칠 수 있는가. 그게 관건이야. 은화가 완전히 바닥에 떨어지기 전 허공에서 속박으로 잡아내 봐." "네!" 방실방실 웃으며 힘차게 대답하는 솔이를 보며 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자 솔이 갑자기 내 앞으로 머리를 쑥 내밀어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내 솔이 바라는 의도를 파악해 손을 내밀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헤실거리는 솔이를 보낸 다음 다시 도서관에서 가져온 문서에 열중하려던 순간. 문 밖으로 옆 방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있는 방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또 누군가 싶어 고개를 들어올리자 안으로 고개를 빼꼼 들이민 유정의 얼굴이 보였다. ============================ 작품 후기 ============================ 이런. 오늘 분량이 적습니다. 아무래도 어제 달린 17K의 여파가…ㅜ.ㅠ. 그래도 45회 만큼 자괴감이 들지는 않네요. 다행입니다. 그때는 글을 쓰면서 정말 우울했는데 역시 사람은 상황에 따라 바뀌나 봅니다. 많은 분들이 소중한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제 글의 전개는 하나의 원칙을 지킵니다. 필요한 부분은 느리게, 빠른 부분은 빠르게. 하하. 하지만 그 원칙을 지키느라 글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면 단연 제 필력에 문제가 있다는 소리겠죠. 단. 개그는 확실히 제가 잘못 생각했던것 같습니다. 시리어스 개그를 집어 넣고 싶었는데 마음만큼 손이 따라주지 않았나 봅니다. 많은 작가분들과 대화 후 제가 잘못된 점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해당 부분은 지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설명이나 묘사를 최대한 줄이니 용량이 거의 1K~2K는 줄어든것 같네요. 내일은 조금 더 많은 용량으로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독자분들의 양해 부탁 드립니다. :) 『리리플』 1. 아일릴리아 : 1등 축하합니다. 다시 첫코 OP가 되셨군요. :) 2. 에인트제 :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우는것이다! 으하하하. 오랜만에 그 멘트가 생각나네요. 3. GradeRown : 정답입니다. 조금 더 복잡한 설정이 있지만 후기에 쓰려면 너무나 길기에…<잘> 오른다고 답변 하기는 애매하네요. 쪽지 주시면 설정 붙여 보내 드리겠습니다. 4. 포보리 : 네. 수현이가 절대 쓰지 말라고 했거든요. 101 포인트가 엄청 대단한 능력친건 맞지만 행운에 투자하기는 조금 애매한 감이 있거든요.(초반에 나온 능력치 중요도 순서 참조 부탁드려요.) 5. 봉인된톨스토이, 백인티모시, 허허상인 : 소중한 조언 해주신점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덕분에 오늘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고 제가 한단계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발견한것 같습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48 / 0933 ---------------------------------------------- Dungeon Of Alchemist "오빠. 뭐해." 유정은 고개를 들이밀어 내가 있다는걸 확인한 후 냉큼 들어왔다. 뭔가 불만이 있는듯 목소리가 착 가라 앉아 있었다. 뚱한 얼굴로 바라보는게 내 눈에는 또 귀찮게 굴겠다는 일종의 신호로 보였다. 나는 왼손에 들고 있던 기록 하나를 놓은 후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또 왜." 퉁명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자 유정은 대번에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기어코 입을 열고 말았다. "오빠가 자기만 다른 수련을 해도 된다고 허락 했다면서 자꾸 자랑 하잖아. 혼자서 동전 던지고 받고…뽐내는것도 아니고." "뽐낼게 뭐가 있다고. 그리고 솔이 그런걸로 잘난척할 애니." "아 정말이라고. 자꾸 동전을 던지고 받는게…." "속박 주문 연습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하라고 했어." 유정이 하던 말을 무심히 끊어버리자 그녀의 얼굴에 섭섭하다는 감정이 역력히 드러났다. 무시하고 도로 기록을 들려는 찰나 유정의 꿍얼거리는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들려왔다. "오빠 너무해. 나랑 현이는 감지 훈련만 하라고 했잖아." "필요하니까 하라고 하지. 근접 계열은 초반에 감지 수련만 해도 충분해." "그래도오." 분명히 예전에 못을 박았음에도 불구하고 유정은 늘어지는 음성으로 투정을 부렸다.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리속이 한층 더 헝클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는 뭐가 그래도. 솔이는 애초에 기본 마력 능력치가 너보다 높다니까. 보조 계열 애들은 그정도만 해도 충분해. 그리고 동전 수련은 너한테 별로 도움도 되지 않을걸." 나흘이 지난 지금 애들배 감지 최장 시간 타이틀(?) 보유자는 안솔 이었다. 내가 이끌어준 이후 솔이는 자신이 보유한 방대한 마력을 십분 활용하고 있었다. 아무리 교관의 가르침을 받아도 잘 되지 않던게 내가 가르치자 하루만에 실력이 올라가는걸 보고 솔이는 나를 무슨 신이라도 되는양 보고 있었다. 나는 1회차에 48의 마력 포인트로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이룩했다. 그런만큼 마나 운용의 효율에 관해서는 그 누구보다 자신이 있다. 그리고 그 노하우의 일부를 솔이한테 가르쳐 준 것이다. 그 운용술의 효율성은 내가 잘 아는 만큼 어떻게 보면 솔이를 조금 더 편애했다고 볼 거리는 있었다. 유정은 솔한테 추월 당한걸 상당히 분해하는것 같았다. 그후 내가 여관으로 돌아오면 종종 찾아와 자신도 개인 교습을 해달라고 어거지를 부릴적이 많았다. 한두번이면 어떻게든 달래겠는데 자꾸 반복되니까 그것도 상당히 피곤한 일 이었다. "그냥 마력 조절 하는 방법을 조금 알려준것 뿐이야. 아무튼 가서 감지 수련이나 더 해. 솔이를 봐. 한번 마음먹고 하니까 열심히 연습 하잖아." "씨이. 맨날 솔이만 예뻐하고. 그리고 나도 조금 쉴거다 뭐." 유정은 마뜩찮은 얼굴로 칫 한숨을 내뱉더니 이내 털레털레 걸어와 내 옆에 찰싹 붙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유정은 그런 내 얼굴을 지그시 응시하고는 주변에 굴러다니는 종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고대…연금술의…부흥과…종말? 오빠. 이거 무슨 내용이야?" "별 내용은 없더라. 한쪽 구석에 대충 놔둬." 고대 연금술의 문서에 대한 기록을 읽던 나는 펜을 들어 지도의 한 부분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유정은 동그라미가 잔뜩 그려진 지도를 보더니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게 뭔데? 그리고 지도에 동그라미는 뭐야?" "기록. 지도 분석." "아 좀. 요즘 오빠가 뭐하고 다니는지 궁금하다고." 내 단답이 답답한지 유정이 보채는 음성으로 졸랐다. 나는 여전히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은채 말을 이었다. "기록을 조사하는 중이야. 도시 주변에 있는 몬스터만 잡는건 효율이 없거든. 먼 과거 뮬의 도시에 있었던 기록을 보고 장소에 대한 단서를 잡는거지." "그렇구나…. 그런데 이런거 보면 단서를 잡을 수 있어?" "하늘에 가서 별을 따는게 더 나을지도 몰라." 정작 나는 입맛이 썻지만 유정이는 속 편하게 키득거렸다. 연금술사와 연구소 관련 기록들은 모조리 모아온터라 탁자에 쌓인 기록의 양은 제법 상당한 편 이었다. 어느정도 정보를 쥐었을 때 좀 더 자세한 정보를 가늠하기 위해 기록을 보는 경우는 있다. 하지만 단서를 잡으려고 기록을 들추는건 미련한 일 이었다. 왜냐하면 기록의 양이 너무나 많고, 방대하기 때문이다. 사실로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도 없는데 무작정 기록만 보고 따라가는건 어리석은 판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작 그 어리석은 판단을 지금 내가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다른 기록은 일체 관심도 두지 않은것이다. 연구소와 연금술사 던전이 뮬에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거지 아니었다면 그냥 바로 절규의 동굴로 직행했을 것이다. 나는 지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만만하게 발견할 수 있다면 벌써 샅샅이 밝혀졌겠지. 일단 할 수 있는건 다 해보는 수 밖에 없잖아." 내 말에 흥미가 이는지 유정이의 눈에 활기가 도는게 보였다. 유정이 돕겠다고 해 나는 그녀의 호의를 순순히 받아 들였다. 어차피 5분후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눈에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5분이 지나자 유정은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안현과 안솔을 들먹인 후 수련을 핑계로 도망치듯 나가버리고 말았다. 유정의 품성과 소양으로는 이 지루한 과정은 견딜 수 있을리 만무했다. 그 모습을 보며 싱겁게 웃은후 나는 다시 지도와 기록으로 고개를 돌렸다. * 며칠이나 더 지난걸까. 분석을 하는 동안 깨끗했던 지도에는 어느새 동그라미가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언뜻 보면 중구난방인것 같지만 유독 동그라미가 몰린 장소가 몇몇 보였다. 물론 가보기 전에는 몰라도 대강 짚이는 구석은 있었다. 아무튼 일단은 끝났다는 생각에 의자에 몸을 묻었다. 창문을 보니 어느새 어둑한 밤이 내려 앉아 있었다. 문득 애들 생각이 나 감지를 일으키자 옆 방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애들이 수련을 끝내고 자는 모양이다. 그동안 그네들이 보여준 성과를 생각하자 슬며시 미소가 나왔다. 애들은 일주일만에 내가 요구한 선까지 따라오는 열정을 보였다. 가끔 빨리 도시를 나가고 싶어 하는 기색이 보였지만 다행히 수련을 우선으로 두는 내 말에 따라주었다. 지금 애들이 내가 하는 말을 따르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애들이라고 생각이 없는건 아니었다. 우스갯 소리로 "오빠(형) 말만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라고 말할 정도로 그들은 내 결정이 항상 옳다고 믿고 있었다. 통과 의례. 사용자 아카데미.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 말을 들어서 손해본적이 없으니까. 이번 수련도 군말이 조금 나오긴 했지만 분명한 성과가 있었다. 분명 감지 수련만 했는데 마력뿐만 아니라 다른 능력치들도 고르게 올랐으니까. 고작 8일 수련하고 마력이 2 포인트나 올랐다며 신난 현을 보자 조금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임무 보상 4포인트를 보고 아카데미에 들어가긴 했다. 하지만 체력 수련은 정말 열심히 했는데 단 1 포인트도 오르지 않는걸 보며 아쉬운 마음이 드는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튼 내 능력치 문제는 지금 당장 답을 낼 수 없는 문제였기에 나는 바로 생각을 접었다. 다시 화제를 돌리면, 이제는 슬슬 도시를 나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아직 막바지로 고민할 문제가 남아 있었다. 바로 캐러밴의 구성 여부였다. 도시 주변에서 몬스터를 때려 잡는건 어떤 사용자들이 어떤 구성을 하든 괜찮다. 그러나 탐험 또는 공략을 목표로 잡은 이상 밸런스에 맞게 캐러밴을 구성하는건 홀 플레인의 기본 상식이었다. 근접 계열은 차고 넘치지만 캐러밴의 구성에는 궁수(레인저)와 사제는 꼭 필요했다. 하지만 굳이 지금 필요할까? 라는 생각이 드는것도 사실 이었다. 사제는 무조건 필요하지만 이미 솔이가 있었다. 마법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고 길잡이 역할을 하는 궁수는 내가 애들은 인도하면 된다. 제 3의 눈도 있고 뮬에서 활동한 기억도 있는만큼 길을 잃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고 볼 수 있었다. 다만 현재의 구성이 애들의 몸에 습관이 되버리면 골치 아픈 문제가 되버린다. 앞으로 분명 난이도가 높은 탐험 또는 원정을 갈 기회가 생길것이다. 현재 내가 많은 부분을 커버할 수 있다고 해도 언제까지나 애들을 돌볼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처음 나서는 탐험인 만큼 많은걸 배우고 익힐텐데 지금의 구성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했다. 똑똑똑. 한창 캐러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던 도중 이었다. 조용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감지를 펼치니 문 밖에 여성 한명의 기척이 잡혔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네. 누구세요." "나야. 어차피 나인거 다 알고 있잖니." "……." 아직 내 허락은 맡지도 않았는데 여성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물론 여성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상 단순한 여관 주인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이정도 실력을 지닌 사용자가 왜 지금 뮬에 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뮬에 잠시 종적을 드러냈던 여성은 홀연히 사라지고 다시 홀연이 나타났다. 그리고 다시 홀 플레인에 모습을 드러냈을때는 내가 속한 클랜의 적군이 되어 있었다. 예전에 눈 앞의 여성이 한 말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그녀를 먼저 만났더라면 바로 휘하로 들어 갔을지도 몰라. 그만큼 그녀는 매력있는 사용자거든.> 그때 했던 말을 미루어 추측하면 아직 따르는 클랜이 없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문득 라그나로크 포위 섬멸전이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여성은 결국 아군이었던 처형의 공주한테 말 그대로 처형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때 여성이 보였던 무시무시한 위력은 아직도 똑똑히 내 머리속에 각인 되어 있었다. 여성은 예의 나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약간 처진 눈매와 눈 아래 찍힌 눈물점이 돋보이는, 퇴폐적인 매력을 뿜어내는 여성이었다. 여성은 상냥한 어조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잠시 들어가도 되니?" 이미 들어와 놓고 뭔 헛소리를 하는지.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밤이 깊었는데 무슨 일로 오신건가요." 여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천천히 나와의 거리를 줄이고 있었다. 지금 눈 앞의 여성은 방심하면 앗차하는 순간에 내 목숨을 앗을 수 있는 존재였다. 마냥 마음을 놓고 있을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 또한 슬며시 마력을 끌어 올렸다. 여성의 얼굴에는 여전히 나른한 미소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 한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회색빛으로 물드는걸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잔뜩 경계하고 있던 나 또한 반사적으로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고유 능력. 유혹의 눈동자(Lure Eyed)의 발동을 확인합니다.』 『제 3의 눈이 발동 되었습니다. 유혹의 눈동자(Lure Eyed)를 간파합니다.』 얼씨구. "어머…맘에 드는 남자를 꼬시는데 시간을 구분해야 되니?" "…옆방에 애들이 있는데…." 놀고 있다. 어차피 이런 종류의 공격은 음지에서 활동하면서 질릴정도로 받아보았다. 그래서 대응 메뉴얼도 다 알고 있지만, 나는 일부러 눈을 몽롱하게 풀고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일단 어떤 짓을 하는지 두고볼 요량이었다. "괜찮아…그런건 걱정하지 마렴. 그나저나 오늘이 대실 사용 기간이 끝나는 날인데 어떡할거니?" 이런걸 물으러 밤에 찾아올리는 없다. 아마 다른 목적이 있는게 분명했다. 지금 이 말을 꺼낸것도 내가 매혹에 걸린건지 확인차 던진 질문일 것이다. 나는 선선히 입을 열었다. 물론 양념으로 주저하는 태도는 곁들여 주었다. "내일 아침에 도시를 떠날 생각이라서…." "떠나…?" 떠난다는 내 말에 여성은 슬쩍 내 테이블을 훓어 보았다. 곧이어 여성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하는걸 볼 수 있었다. 잠깐 봐서 뭘 알겠냐만은 그래도 지도를 보고 대충 내가 하려는 일을 짐작한것 같았다. "사용자 김수현." "어, 어떻게 내 이름을…." 여성은 내 이름을 거론하며 한 발자국 거리를 줄였다. 이제 여성과 나는 팔만 뻗으면 서로 닿을 거리에 있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규 사용자. 사용자 아카데미의 슈퍼 루키." 여성은 멈추지 않고 다시 한 발자국 내딛었다. 나는 의자에 앉은채로, 여성은 내 정면에 선 채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여성은 어느새 잿빛으로 물든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어쨌든 갓 네달도 채 안된 신규 사용자 잖니." 여성의 손이 뻗어지더니 이내 살며시 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내 왼쪽 볼에서 여성의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나는 일부러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조금씩 헐떡였다. "그날. 나는 정말 놀랐어. 왜…아무리 마력을 약하게 걸었다고 해도. 설마 갓 아카데미를 나온 병아리가 파해를 사용할줄은 몰랐거든." "그건…." "그래서 그동안 나름대로 알아 보기도 했고 지켜도 봤는데…모르겠어. 참 종 잡을 수 없더라.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나도 많이 혼란스러워. 하지만 너를 보면 볼수록 내 예감이 경종을 울리거든…무언가 다른게. 숨기고 있는게 있다고." 아 그러세요. 완전히 매혹에 걸렸다고 느꼈는지 여성의 움직임은 더욱 거리낌이 없어지고 있었다. 한동안 얼굴 전부를 나긋하게 훓던 손길이 막 떨어지려는 찰나 나는 황급히 여성의 손길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보자 여성의 입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진해지고 있었다. "내 예감은 틀린적이 없거든." 나는 일부러 여성의 품 안으로 파고 들었다. 마치 아기가 엄마의 품에 안기듯. 솔직히 말하면 1회차때 눈 앞의 여성에게 한번 안기고 싶은 속셈도 있었다. 그런 내 시커먼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성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내 머리를 끌어 안았다. 나는 그녀의 가슴에 마음껏 얼굴을 들이밀었다. "호호." 여성의 말랑하고 유연한 젖가슴과 향기로운 살내음을 음미한다. 그런 나를 보며 여성은 편안한 미소를 흘렸다. 한동안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길이 이내 딱 멈추더니 이내 내 귓가로 여성의 은근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 무언가 숨기는 거라도 있니? 애들한테 라던가…." "조금…요." "그럼 숨기고 있는걸 나한테만 알려주지 않을래…?" "그건…." 미약한 거부 반응을 보이는 순간 여성은 다시 나를 강하게 끌어 안았다. 그리고 달래는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괜찮으니까…말해봐." 여성의 보채는 목소리에 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이윽고 잠시 고민하던 척을 하던 나는 못 이기는척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실은 전…." "응응. 너는?" 설레는 얼굴로 나를 보는 여성을 보며 나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림자를 좋아하죠." "…뭐?" 나는 방 안에 비친 여성의 그림자를 흘낏 보았다. 바닥에 비친 여성의 그림자가 눈 안으로 들어왔다. 여성의 되물음에 나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림자가 참 예쁘네요." 말을 마친후 다시 시선을 돌리자, 무서울 정도로 굳어진 여성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하하하. 날씨가 많이 풀린것 같네요. 드디어 애들이 도시를 나갈 수 있게 되었군요. 이제 주인공 일행의 거침 없는 행보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그리고…여관 여성이 누군지 다들 궁금하시지 않았나요? 눈치 빠르신 분이면 이번 회에 눈치 채셨을것 같습니다. 상세 정보는 다음회에 나오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리리플』 1. 아일릴리아 : 1등 축하합니다. 오늘 다시 2연패를 하신건가요? 정말 빠르신것 같네요. :) 2. 사람인생 : 아니여라. 언젠가는 분명 1등을 탈환하실 날이 오실거에요.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그날까지! 3. GradeRown : 후후후.(?) :) 4. 유운처럼 : 으하하. 고맙습니다. 솔직히 다 해드리고 싶은데 그러면 정말 글 반 후기 반이 되어버려서(….) 5. 잘나가는행인 : 그렇지요. 그렇게 쉽게 올리게 해주면 아무래도 밸런스가…ㅇㅅㅇ. 6. 악마신전 : 코멘트는 항상 소신껏 받아들이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7. 심심행 : 네. 코멘트 숙독했습니다. 먼저 질문해 주신점 감사합니다. 굉장히 길게 쓰신걸로 보아 쓰느라 고생 하셨을텐데요. :) 메모라이즈. 그리고 홀 플레인의 핵심 문제를 짚어 주신만큼 설명에 들어가려면 <굉장히> 많은 부분을 들어야 합니다. 왜 천사들이 홀 플레인으로 사용자들을 보냈는지. 제로 코드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홀 플레인의 시작이 어떻게 되었는지. 내용이 긴건 둘째치고 크게 저 3개에 대한 설명을 해야하며, 길드 목적과 이루는 목적 방식. 귀환. 대륙 전쟁. 등의 의문을 풀려면 훨씬 더 많은 설정과 이야기를 풀어내야 합니다. 당장 조만간 일어날 1차 연합 전쟁도 지금껏 말씀 드린 내용과 어느정도 연관이 있구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앞으로 전개될 내용에 스포일러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앞으로 전개될 내용을 보셔도 지금 느끼시는 재미의 반의 반도 느끼지 못하실 겁니다. 해서 지금은 차후 진행을 지켜봐 달라는 답변밖에 드리지 못하겠네요. 다만 한가지 답변을 드린다면, <생존>과 연관해 생각하시면 됩니다. 홀 플레인에 있는 사용자들은 귀환도 중요하지만 귀환도 생존한 상태에서만 가능하거든요. 정 궁금하시면 쪽지 보내주세요. 왠만하면 설정을 그대로 복붙 하고 싶지만 그래선 이해가 안가실 가능성이 높으니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정리해서 쪽지 보내드리겠습니다.(원하실 경우에요.) 8. POWERED : 네. 아카데미 졸업은 임무 보상으로 분류 됩니다. 홀 플레인 안에서의 업적은 메인 스트림에 영향을 미칠 정도가 되야 해요. 9. 백인티모시 : 다시 좋아졌다니 다행입니다. :)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드리면. 업적은 기본적으로 메인 스트림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의 사건을 지칭합니다. 쉽게 말해 업적을 쌓을수록 <능력있는 사용자>라는걸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에 따라 보상도 있구요. 그 외에도 더 사용할 수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일정 업적을 해결한 사용자들에게만 해당하는….) 10. 블라미 : 사제는 총 2명의 신을 모실 수 있습니다. 전투 사제 & 보조 사제로 나눌 수 있겠네요. 또한 천사들과의 연결을 통하는 역할도 맡고 있습니다. :) 코멘트. 코멘트. 코멘트!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코멘트좀 많이 주세요! 그리고 추천도…☞☜)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49 / 0933 ---------------------------------------------- Dungeon Of Alchemist 그림자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나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아연실색한 얼굴로 내 품에 안긴 사용자를 바라본다. 그 또한 조금전과는 달리 태연한 표정과 고요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잠잠한 시선에 나는 왠지 모를 소름이 쭈볏 돋는걸 느꼈다. 순간 반사적으로 그림자를 움직이려고 했으나 속마음에서 뭉클이 올라오는 공포감으로 인해 멈추고 말았다. 목덜미에 사늘한 기분이 감돌았다. 내 몸을 감은 그의 팔, 그리고 손이 어느새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죽는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왜. 어떻게. 라는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지금껏 나를 살게 해준 예리한 감각은 그 어느때보다 확실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내가 그림자를 움직이는 그 순간. 내 가슴에 얼굴을 부비고 있는 사용자는 망설임 없이 내 목을 꺾고 비틀어버릴 것이다. 나는 그를 안은 팔에 힘이 조금씩 빠지는걸 느꼈다. * 여성의 팔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여성의 기술은 1회차 시절 어느정도 연구가 진행된 상태라서 그림자를 감지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알고 있다고 해도 절대로 마음을 놓아서는 안되는 사용자인 만큼 조금의 낌새라도 보이면 바로 목을 비틀 각오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성은 무리하지 않았다. 자신의 판단 미스를 인정하고 한발 물러섰다. 선천적인 감도 좋고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지 않는다. 여성이 점점 더 마음에 드는 기분이 들었다. 눈 앞의 여성은 물러설때를 아는 사용자였다. 지금 여성을 처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천천히 제 3의 눈을 발동했다. 이번에는 여성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고연주(5년 차) 2. 클래스(Class) : 그림자 여왕(Queen Of Silhouette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Babara)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한 밤 칠흑색 실루엣을 남기는 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6) 7. 신장 · 체중 : 169.4cm · 51.8kg 8. 성향 : 중용 · 혼돈(True · Chaos) < 능력치 > 1. [근력 89] [내구 90] [민첩 97] [체력 87] [마력 93] [행운 82] < 업적(5) > < 고유 능력(1/1) > 1. 유혹의 눈동자(Lure Eyed)(Rank : A) < 특수 능력(1/1) > 1. 심연의 무리(Abyss Crowd)(Rank : S Plus) < 잠재 능력(3/3) > 1. 그림자 단검술(Rank : A Plus) 2. 기척 차단(Rank : A Plus Plus Plus) 3. 검은 그늘(Rank : A Plus Plus) < 능력치 비교 > 1. 김수현 : 540 / 600 (능력치 포인트가 12 포인트 남아 있습니다.) [근력 94] [내구 92] [민첩 98] [체력 72] [마력 96] [행운 88] 2. 고연주 : 536 / 600 (능력치 포인트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근력 89] [내구 90] [민첩 97] [체력 85] [마력 93] [행운 82] 고연주의 능력치와 능력을 보자 절로 탄성이 나왔다. 능력치를 총 합산해보니 600 포인트 만점 포인트에 536 포인트를 기록하고 있었다. 나와 4 포인트 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과연 이정도의 능력을 갖고 있으니 추후에 <10강>의 한자리를 담당할 수 있었구나. 그래도 나는 고연주를 이길 자신이 있었다. 체력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능력치는 내가 그녀를 상회하고 있었다. 더구나 고유, 특수, 잠재 능력의 수준과 랭크를 포함한다면 나는 고연주를 확실히 압도할 수 있을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을 먹었다. 뮬에서 모든 볼일을 마치고 떠날때 고연주의 처분을 결정할 것이다. 영입을 해보고 안된다면…. 얼굴에 어느정도 내 생각이 드러났는지 내 눈동자를 보는 고연주의 얼굴이 움찔하는게 보였다. 나는 바로 표정을 정리하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림자가 예쁜 여성을 좋아해요. 그래서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 "그러니까…." 고연주는 여전히 얼굴이 굳은채 대답이 없었다. 이번에는 내가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처음과 반전된 상황이 오자 묘한 쾌감이 온몸을 잠식하는것 같았다. "허튼짓은 하지 않았으면 해요." 고연주 정도면 지금 내가 하는말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고도 남을 사용자였다. 이내 그녀의 고개가 미약하게 끄덕이는걸 본 이후 비로소 나는 품에서 얼굴을 떼어냈다. 고연주의 현재 심경은 상당히 복잡해 보였다. 항상 느긋하던 얼굴은 온데간데 없고 복잡함을 품은 눈동자만이 현재 그녀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한숨을 폭 쉬며 입을 열었다. "무슨 뜻인지는 알아 들었어요. 제 입은 나름 무겁답니다." "좋네요. 나는 입 무거운 여성이 마음에 들거든요." 어느새 존댓말로 말투를 바꾼 고연주는 내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정말로 궁금했을 뿐 이에요. 딱히 해할 의도는 없었으니 오해는 말아주세요." "알려주고는 싶지만, 사정이 사정인터라." 그리고 유혹의 눈동자는 아무리 좋은 의도로 사용한다고 해도 일종의 정신 오염 계통이에요. 라고 말을 잇고 싶었지만 오늘은 이정도로 해두기로 했다. 완곡한 내 거절에 고연주는 아쉬운 얼굴을 하더니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눈짓으로 축객령을 내렸고, 그녀는 군말없이 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아침이 되자 애들이 하나둘 졸린눈을 비비며 깨어났다. 하품을 하며 바로 감지 수련에 들어가는 애들을 보자 대견한 마음이 들었다. 평소라면 당연히 장려할 일 이었으나, 오늘은 도시밖을 나갈 생각이라 방으로 세명을 불러 모았다. "무스 일오 불어 모으어에요."("무슨 일로 불러 모은거에요.") 안현이 연신 입을 쩍쩍 벌리며 웅얼거리자 유정이 더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솔이도 민망한 얼굴이었다. 나는 현의 모습에 픽 웃고는 차근히 말을 이었다. "이제 다들 마력 감지는 어느정도 다룰 수 있는것 같던데?" 지금껏 칭찬에 인색했던 만큼 애들은 눈을 꿈뻑이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들 멋쩍은 얼굴을 지음과 동시에 허리를 뻣뻣이 세우기 시작했다. 간간히 헛기침도 하는게 아주 볼만했다. 입술에 슬며시 미소가 나왔지만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다들 일주일동안 수련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느꼈다. 고생 많았어." "형. 그러면…." 설레는 음성으로 현이 묻자 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드디어 도시를 나가는 날이다. "그래. 도시를 나가도 될것 같다. 슬슬 움직일 때가 오기도 했고." 내 허락이 떨어지는 순간 현, 솔, 유정이 사이에 소리 없는 소란이 일었다. 비로소 홀 플레인에 진정한 첫걸음을 내딛는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모두의 얼굴에 또렷한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잘 들어. 수련은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을 제외하곤 언제나 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해." 너무 올라가는 모습들에 바로 덧붙였지만, 건성으로 고개를 까닥이는걸 보니 이미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나는 한소리 더 하려다가 이내 관두고 말았다. 과연 도시 밖으로 나간 후 여러 사건을 겪어도 지금처럼 들뜬 기분을 낼 수 있을지 두고볼 생각 이었다. 폐혀의 연구소. 고대 연금술사 비비앙의 던전. 어디를 먼저 갈지 나름 가늠해본 결과 일단 던전이 더 나을것 같았다. 연구소나 던전이나 난이도는 도찐개찐 이겠지만 비교적 단서를 많이 잡은 연금술사 던전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비비앙의 던전으로 가려면 먼저 뮬의 북문으로 나가 칠흑의 숲 안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칠흑의 숲은 북대륙과 미개척 지역의 중간에 있는 거대한 숲인데 현재 바바라도 초중반부만 안정화를 하라고 지시할 만큼 만만한 숲이 아니었다. 즉 숲의 중단을 넘는 순간 그때부터는 미개척 지역이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소리였다. 그래도 어차피 나한테는 해당 되지 않는 이야기들 이었다. 미개척 지역의 원정에 참여해본 경험도 있어 따로 궁수(레인저)는 구하지 않을 생각 이었다. 나는 일단 캐러밴을 구성하지 않기로 잠정 결정을 내렸다. 사람들이 늘어나면 그만큼 보상을 배분해야 하는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애들 먹이고 입히기도 부족할 판에 다른 사용자들을 신경쓸 여유는 없었다. 너무 신이 나 서로 손을 잡고 쎄쎄쎄를 하는 현과 솔을 보며 나는 가방 하나를 꺼내 들었다. 물품 경량화 주문이 걸린 마법 배낭 이었다. 영구적인 마법 배낭은 너무 비싸 일주일 지속 마법이 걸린 배낭을 구매했다. 이번 탐험을 끝내고 얻는 보상을 일부 판매하고 현재 가지고 있는 금화를 합치면 최소 뮬에서 돈이 부족할 일은 없을것이다. "열심히 수련한 너희들한테 선물이 있다." 선물이라는 말에 애들은 바로 배낭으로 호기심을 돌렸다.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마법 배낭에 대해 듣고 배운적은 있겠지만 이렇게 눈 앞에서 보는건 처음이었다. 어릴적 산타클로스의 선물을 기대하는 어린이처럼 애들의 눈동자는 과도하게 빛나고 있었다. 특히 안현은 눈깔을 희번덕 거릴 정도라서 나를 심히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얼른 꺼내라는 무언의 시선에 나는 굵은 땀방울을 흘렸다. 배낭안으로 손을 넣은후 나는 선물을 차곡이 꺼냈다. 선물의 정체는 바로 무기였다.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애들의 수련을 보면서 나름대로 고심해서 고르고 주문한 것들 이었다. 기다란 창 하나. 단검 두개. 나무 지팡이 하나. "오." "하?" "와아…." 바닥에 놓인 무기들을 보자 현, 유정, 솔이 차례대로 탄성을 질렀다. 동시에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 가져가라는 시늉을 하자 다들 허겁지겁 달려들어 무기를 집었다. 물론 현이 GP 얘기를 꺼낸적은 있었지만 일단 아껴두라고 한 상태였다. 굳이 살 필요가 없는데 쓸데없는데 낭비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창을 집은 안현은 허공으로 몇번 지르더니 만족하는 얼굴이 되었다. 지르는 자세가 어느정도 폼이 잡힌게 나름 손에 잡히는 모양이다. "와. 이거 제법 손에 감기는데요? 내지를 때마다 착 달라 붙네요." 안현의 창술은 처음 내 예상과 달리 아예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검을 사용했으면 베기 위주로 익힐줄 알았는데 오히려 찌르기 수련에 집중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끝을 송곳처럼 벼린 스피어(Spear)형 창을 골랐다. "네 창술은 베기 보다는 찌르기에 특화되 있잖아. 그래서 점 부분을 날카롭게 벼린 창으로 고른거야. 보면 알겠지만 롱 스피어(Long Spear) 형태를 하고 있는만큼 투척용으로 만든거 아니다. 리치를 벌리는데 용이한 만큼 전투할때 간격 유지에 신경 많이 써야 할거야. 방어는 너 하기 나름이고." "혀, 형. 설마 그정도로 절 생각하고 있었다니…. 이러시면 곤란해요." 감동한 얼굴로 시덥잖은 소리를 지껄이는 현. 나는 바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현도 장난으로 말한건지 바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단검을 만지작 거리던 유정은 나와 현의 대화가 끝나자 감초처럼 바로 끼어 들었다. "오빠. 나는? 이 단검들 있잖아. 둘다 날이 한쪽 밖에 없어." "애초에 그렇게 주문 했으니까. 아. 유정이 니꺼는 특별히 주문 제작…." "정말?" 특별히 주문 제작 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유정이 반색하며 말을 끊었다. "네 단검의 원형은 카타나. 즉 일본도야. 그래서 일반 단검보다 검신의 길이가 길어. 보통 카타나의 절반 정도로 보면 돼." "음~조금 어색하긴 한데. 그래도 익숙해지면 이게 더 나을것 같아." "근접 계열인 용병은 난전에 특화된 능력들이 많이 나오거든. 아무튼 한번 사용해봐. 너한테 맞는 무기를 찾는것도 하나의 수련 과정이야." "응. 그런데 오빠. 주문 제작으로 만든 무기가 일반 무기보다 비싸지?" "아무래도 그렇지. 근데 그건 왜 물어?" 내가 간단히 수긍하자 유정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더니 안현으로 고개를 돌렸다. 뻐기는듯한 미소를 날리고 단검을 빙글 돌리는게 왜 저러는지 안 물어도 알것만 같았다. 유정은 이내 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내 선물이 가장 비싼거네? 호호호. 아이 참. 오빠도 좋으면 좋다고 해. 꼭 이렇게 돌려 말해야겠어?" 묵묵히 유정의 말을 듣던 안현은 순간 기막힌 얼굴이 되었다. 솔이는 뭔가 억울하다는 시선을 내게로 보내고 있었다. 정작 억울한건 나였지만 어차피 유치의 극을 달리는 애들이었다. 이정도 헤프닝은 당연히 예상 범위 안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한심한 얼굴로 유정을 응시했다. 그러나 유정이 도발적인 표정으로 윙크를 하는데는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나는 한숨을 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안타깝지만 제일 비싼건 네 단검이 아니라 솔이 지팡이란다." "…뭐? 왜? 저깟 나무 지팡이가?" 유정의 음성이 바로 가라 앉았다. 그리고 저깟 나무 지팡이라는 소리를 들은 솔의 입술이 뾰족히 튀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한번 들먹였다. "당연하지. 마법사나 사제들 무기는 대부분 마법 물품이잖아." "네? 마법이요?" 마법 물품이라는 말에 솔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나는 고개를 한번 주억인후 어떤 마법이 걸려 있는지 설명해 주었다. "응. 시전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마력 조절하는데 효율성을 높여준다고 하더라. 최하급인 만큼 큰 효과는 기대할 수 없지만 그래도 없는것보다 나을거야. 마력양을 늘려주는건 지금 필요 없을것 같아서. 괜찮지?" "네!" 무척 마음에 드는지 힘차게 대답하는 솔이를 보며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저렇게 착하고 귀여운 여동생이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 순간 이었다. 단 찰나에 불과했지만 솔이 유정을 향해 뽐내는 눈길을 보내는걸 잡을 수 있었다. 몰래 유정이로 눈길을 돌리자 그녀 또한 솔의 시선을 보았는지 얼굴이 미약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문득 얼마전 솔이가 얄밉게 뽐내고 다닌다고 들은게 떠올랐다. 당연히 아니라고. 솔이가 그럴리 없다고만 여겼는데 왠지 다시 생각해볼 문제라는 느낌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 5회 설정 변경 사항 입니다. 진수현의 등장 시기가 3년 후 → 1년 후로 조정 됩니다. * 몇몇 작가분들께 들으니 비용을 내고 표지를 구할 수 있다는 곳이 있다고 하시네요. 혹시 좋은 사이트 알려주시는 분이 있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그림자 여왕이 등장 했습니다. 중반부에 <10강>중 한자리를 차지하는 사용자인만큼 매우 강력한 캐릭터 입니다. 이제 어느정도 수현의 현재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약간은 가늠하실 수 있을겁니다. 그리고 드디어 수현이와 애들이 뮬의 밖으로 나갑니다. 첫 목적지는 연금술사의 던전 입니다. 앞으로 연신 대박 행진을 뻥뻥 터뜨리는 수현의 행보를 기대해주세요. 리리플 들어 가겠습니다. :) 『 리리플 』 1. 사람인생 : 드디어 과거의 영광을 다시 재현 하셨군요. 1등 축하합니다! 어제 폭주하셨어요 ㅋㅋ 2. 블라미 : 네. 예를들어 세라프를 보려면 신전을 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외는 있지만, 일반적인 방법은 그렇습니다. 악신도 존재 한답니다. :) 3. 카규 : 네. 12년 3월에 올린분을 리메이크해서 올리는 거죠. 4. Toranoanal : 연애라. 왠지 격하게 공감이 되는 말씀이군요. 아. 제목은 영어 대문자가 아니라 특수 문자입니다.(ㅍ 한자 입니다.) 전부 붙였는데도 조금씩 띄엄이 나오더라구요. 5. 봉인된톨스토이 : 그렇지요. 믿음직한 오빠가 결국에는…후후후. 6. jinny1003 : 정답입니다. 그래도 싹은 파릇파릇한 애들이에요. 하하하. 7. 백인티모시 : 감사합니다. 재밌게 보셨다니 정말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수현이 역시 당연히 남자입니다. 하하하하. 어떤 의미인지는 당연히 아실것이라…. :) 8. 레필 : 와우. 솔직히 말하면 코멘트 보고 놀랐습니다. 수현이와 한별의 초기 설정과 상당히 비슷한 부분이 많거든요. 아주 냉정한 판단을 내리셨네요. 정답입니다. 혹시 어떻게 아신건가요? 한별과 소영이가 서로 겹친다는 부분으로 복선을 넣어놓긴 했는데 이정도로 복잡한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 내실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 9. 최강성녀 : 이번화도 코멘트 ㄱㄱㄱㄱ. :) 10. Lizad : 지금 먹으면 큰일 납니다. 하하하하.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코멘트좀 많이 주세요! 그리고 추천도…☞☜)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50 / 0933 ---------------------------------------------- Dungeon Of Alchemist "소문 들었어? 이번에 뮬에서 던전이 또 하나 발견 됬다고 하던데?" "칠흑의 숲. 고대 연금술사 비비앙의 던전. 나도 다시 한번 뮬로 가볼까. 누가 알아? 아직 남은게 있을지도 모르잖아?" "넌 이미 절규의 동굴을 발견 했잖아. 욕심 부리지 말라고. 그런데 조금 이상한게 있다고. 아무래도 예전에 먼저 발견한 사용자들이 있었다는것 같아." "우연히 발견했다가 결국 실패하고 전부 죽은것 같던데. 아니 죽었다고 보기에는 좀 그러네. 응? 총 세명. 아니 한명이라고 해야 하나. 무슨 말이냐고 하면 말이지…." * 나와 일행은 간단히 짐을 정리하고 여관을 나섰다. 이른 시간인 만큼 고연주는 보이지 않았다. 안현은 <조신한 숙녀>를 떠나는게 아쉬운지 자꾸만 뒤를 힐끔거렸다. 뮬의 북문은 바바라와 비하면 상당히 초라했다. 그나마 경비병 두어명이 문을 통제하고 있지만 겉모습만 봐도 후줄근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개척 도시라고 해도 이런 모습들을 보면 현재 뮬을 통치하는 대표 클랜의 영주의 수완이 좋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고생 하십니다. 언제나 몸 조심히 다녀오시기를 바랍니다. 사용자 분들께 천사님들의 축복을." "고맙습니다." 경례를 하는 경비병들을 보며 답례를 한 뒤 우리는 드디어 북문을 나섰다. 현은 거주민들이 말하는걸 처음 보는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형. 거주민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죠." "거주민? 홀 플레인에 원래 거주하는 사람들. 현이 너도 원래 지구의 거주민이라고 볼 수 있고." "음. 우리들이랑 다른점은 있나요? 다른 사용자들이 말하는걸 들었는데 사용자는 귀족, 거주민은 평민 이라고 하던데요." 귀족과 평민이라. 거주민들은 나약하다. 너무나도 약해 사용자들이 없다면 홀 플레인 안에 산재한 위험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물론 아틀란타로 넘어가고 다시 테라로 넘어가면서 사정이 아주 조금 달라지긴 하지만 적어도 바바라 까지는 사용자들의 보호를 받는게 현재 거주민들의 현주소였다. 그나마 현재 발견 되고 개척된 도시 거주민들은 어느정도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개척 되지 않은 도시의 경우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 이었다. 실제로 남대륙은 이미 폐허로 변해버린 도시가 발견된 사례도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 도시 안에는 거주민은 단 한명도 없었다. 도시를 침략한 무리들에게 떼죽음을 당했을 거라 추측할 뿐 이었다. 그런 무리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사용자를 거주민은 신의 사도라고 생각한다. 홀 플레인에 신이 있다고 믿으며 실제로 몇몇 거주민들은 강림한 천사의 명을 받은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사용자들은 신의 명령과 천사들의 가호를 받아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온 일종의 신의 사도. 실상은 천사들한테 납치 당하고 설정을 이용한 힘을 내는거지만 거주민들은 사용자들의 힘을 신의 축복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용자들을 보는 거주민들의 시선은 기본적으로 호의와 경외를 품고 있다. 현이 말한 귀족과 평민은 사용자들 입장에서 본 관계였다. 그 두 단어로 불리는 사람들은 갑과 을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무한한 자유의 대명사로 불리는 서대륙은 특히 그 정도가 심해 거주민들의 거의 노예 취급을 받는다. 북대륙은 그정도는 아니라도 거주민들을 깔보고 사용자의 아래로 보는 시선은 분명히 있었다. 처음에는 같은 사람, 인간인데 꼭 이래야 하나 조금 서글픈 생각이 들적도 있었다. 현재 발견 되는 도시나 던전, 또 연구소들을 보면 분명 홀 플레인도 융성 했던 시절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거라곤 모종의 이유로 그때 누렸던 번영을 모두 잃어버리고 힘을 모두 소실해 버렸다는것. 그리고 종래에 현재 거주민들은 하루하루 몬스터의 습격할까 불안에 떨며 사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는 이런 부분을 간략히 요약해 현에게 설명해 주었다. 현 뿐만 아니라 애들도 궁금했던지 모두 고개를 주억이는걸 볼 수 있었다. 거주민들을 불쌍히 여길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너무 막 대하는건 썩 보기 좋지 않다는 말로 거주민 얘기는 매듭을 지었다. 그래도 몇명은 보일법도 한데 사용자들이 이상하게 단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새삼 황금 사자 클랜의 움직임이 끼치는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북부 도시가 텅 빈만큼 남부, 서부, 그리고 중앙의 바바라에는 현재 사용자들이 넘치고 있을 것이다. 문득 지금이라도 당장 나도 그들 사이로 들어가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감상적인 기분이 들었지만 그런 기분은 점차 길을 걸음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뮬의 북쪽 방면으로 나아갈수록 주변의 풍경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길은 점점 울퉁불퉁 거칠어졌고 사람의 오가는 흔적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만큼 자연 그대로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살다가 이런 살아있는 자연을 보는건 지구에서 흔한일이 아니었다. 산들 바람이 불자 애들 또한 한결 상쾌한 얼굴로 가끔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윽고 점점 수풀이 우거진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들고있던 지도를 꺼내들었다. 왼쪽은 숲. 오른쪽은 평야. 칠흑의 숲으로 가는 방향은 평야가 아닌 숲으로 들어가는 방향이었다. 혹시나 해서 봤지만 역시나 내 기억과 다른건 없었다. 나는 지도를 다시 곱게 접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앞으로 희미한 여러 갈래의 길이 보였지만 나는 망설임없이 북서 방면으로 난 길을 따라 몸을 틀었다. 초록빛으로 물든 광활한 삼림을 밟으며 걸음을 옮긴다. 뮬의 북문을 나선 이후 이어지는 들판은 아직 싱그러운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칠흑의 숲과 거리가 줄어들수록 그 싱그러운 빛깔이 점차 흐릿해지는것 같았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자 곧이어 검푸른색을 띄는 나무들이 속속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늘 높은줄 모르고 솟아오른 끈적한 나무들은 보기만해도 거대한 존재감을 주변으로 뿌리고 있었다. 칠흑의 숲 초입에 들어선 셈이다. 그동안 졸졸졸 내 뒤를 따라오는 애들을 보며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쯤이 칠흑의 숲 초입일거다. 다들 정신 차리고 마음 단단히 먹어."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음울한 공기가 더욱 진해지는걸 느꼈다. 솔직히 지금 있는 장소를 숲이라고 부르기는 조금 민망한 부분은 있었다. 고지대와 저지대가 뚜렷하게 구분 되어 있고 숲으로 보기에 면적이 너무도 넓었다. 통과 의례에서 거쳤던 숲과 비교하는게 미안할 정도로 말이다. 아직 초반부고 아침이라 간간이 미약한 햇살이 비치고 있었지만 조금 더 들어가면 그마저도 없을것이다. 아침이 이런데 나중에 밤이 되면 말 그대로 칠흑일 거라는 생각에 오늘 안전지대는 필히 확보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지금은 눈 앞을 구별할 정도는 되었기에 일단 주변을 슬슬 돌아볼 예정이었다. 가면서 흘끗 애들을 보니 다들 자신의 무기를 꼭 쥐고 있는데 조금씩 긴장을 타는것 같았다. 그순간. "잠깐만." 애들을 보려고 고개를 돌렸던 나는 이상한 흔적 하나를 발견했다. 말 그대로 우연한 발견 이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수도 있었지만 한껏 예민해진 감각은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흔적 하나를 잡아낼 수 있었다. 주변을 경계하던 애들은 다들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일단 흔적을 발견한 곳으로 이동한 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쭈그려 앉았다. 무표정하게 변한 내 얼굴을 보며 서로 눈치를 보던 애들도 이내 쭈볏쭈볏 내 주위로 모였다. 이건…사람이 지나간 흔적이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었다. 분명 북문으로 나올때 단 한명도 보이지 않았었는데. 다른 방향에서 온 것일수도 있다. 물론 사용자들이 한명도 없는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렇게 간단히 납득하기에는 수상한 냄새가 났다. 왜냐하면 이 흔적들이 오래 되지는 않은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빠. 왜 갑자기 땅을 보는건데?" "……." 나는 잠시 땅을 훓고는 조금 더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내가 미동도 안은채 땅만 보고있자 유정이 조심스럽게 무어라 말하는게 들렸지만 지금은 대꾸하고픈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빠? 오빠!" "언니. 오빠 지금 추적(Trace)중 이시니 잠깐만…." "추적…? 아. 그런게 추적은 궁수나 암살자들이나 하는거 아니야?" "그렇긴 하지만 경험이 많거나 배우면 어느정도 가능하다고 들은것 같아요. 그래도 전문 직업을 가진 사용자들보다 자세히 알수는 없을거에요." "말도 안돼. 그럼 오빠는 그걸 배운거라는 소리야?" 무수히 들어오는 정보들을 거르고 분석하는 동안 유정이와 솔이 웅얼대는게 들렸다. 궁수에게는 길잡이를 하는 능력도 있지만 땅에 새겨진 흔적을 읽을 수 있는 능력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제 3의 눈은 효과가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만큼 흔적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건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솔이한테 미안한 말이지만 아마 그네들보다 내 고유 능력이 훨씬 뛰어날거라는건 자명한 일이었다. 이윽고 모든 정보를 분석하고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지금 내가 한건 솔이 말대로 단순한 추적에 불과했다. 멀뚱히 내 얼굴만 바라보는 애들에게 나는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충 2일, 3일정도 전에 이 장소를 지나간 한 무리의 캐러밴이 있던것 같은데. 인원은 5명…아니면 6명정도 될거야. 북문에서 온건 아닌것 같아. 다른곳에서 탐험을 나온것 같은데…길을 잃어 흘러 온건지 아니면 일부러 온건지는 모르겠어. 그래도 헤맨 흔적은 없는게 아주 실력 없는 궁수는 아니었던것 같다. 어쨋든 방향이 모두 한쪽으로 쏠려 있거든." 지금 그들이 어떻게 되는줄은 당연히 모른다. 그때 있던 일을 볼려면 예전에 통과 의례에서처럼 실제로 과거를 봐야 하지만 지금은 하등 그럴 이유가 없었다. 지금은 그때처럼 급한것도 없었으니까. 현재 남은 흔적들을 모아 추론하는 걸로 충분하고도 남았다. 내 말을 듣자 현과 유정이는 혀를 내둘렀다. 솔이도 설마 내가 이정도로 말할줄은 몰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걸로 대답했다. 유정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궁금한 얼굴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지금 이 숲에 우리 말고도 또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거야?" "글쎄. 있을수도…없을수도." 의외의 면에서 날카로운 면을 보이는 유정이었다. 이 사실은 말하기 싫어 일부러 애매하게 말했지만 유정의 눈이 가늘어지는게 보였다. 나는 한숨을 쉬고는 결국 말을 덧붙였다. "말 그대로야. 숲에 들어간 발자국들은 있는데 다시 나온 흔적이 보이지 않아. 다른 방향으로 나갔을 가능성도 있지만 아직 숲을 배회하고 있을수도 있지. 그게 아니라면…다 죽었을수도 있고." 내 말에 애들은 모두 불안한 얼굴이 되더니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나는 무심한 얼굴로 그런 그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도시 안에서는 실컷 까불고 난리를 쳐도 눈을 감아 주었지만 실전에 들어간 만큼 도시 안에서처럼 넉넉하게 할 생각은 절대 없었다. 내 표정이 굳어지고 아무 말도 없자 나를 따르는 애들의 발소리가 점점 더 작아지는걸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이는게 어지간히 긴장을 먹은것 같았다. 숲 안으로 들어갈수록 울창한 나무들은 하늘을 가릴 정도로 곧게 뻗어 있었다. 그나마 초입부에 희미하게 비추던 햇살은 어느새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한동안 걷고, 또 걸었다. 막 초입부를 벗어낫다고 여길즈음에는 주변에 어둠이 완연히 깔려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컴컴한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이정도니 해가 떨어지면 어떻게 돌지 애들도 대충 예상할 수 있을것이다. 과연 칠흑의 숲이라는 이름이 붙을만한 숲이었다.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애들은 어느새 감지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나마 활성화 한 제 3의 눈과 애들에게 가르쳐논 감지 덕분에 전진 속도를 떨어뜨리지 않고 유지할 수 있었다. 이제 더이상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나는 풀을 스치는 소리와 색색이는 호흡만이 가끔 귀를 간질였다. 그때였다. 크릉. 사사사삭! 내 청각에 한 울음 소리가 걸렸다. 그와 동시에 조용했던 침묵을 가르며 수풀을 헤치는 소리가 들렸다. 꽤나 고속으로 다가오는걸 보니 우리들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습격하기 위해 오는것 같았다. 또다시 내가 걸음을 멈추자 애들 또한 숨이 막히는 모양이었다. 불안감이 달아오른 얼굴로 주변을 경계했지만 아직까지 괴물이 다가온다는건 모르는것 같았다. 다들 감지를 펼치고 있는만큼 일정 거리에 들어오면 알 수 있을테지만 나는 미리 애들에게 경고를 내렸다. "습격이다. 괴물들이 현재 양 방향에서 오고있다. 다들 전투 준비해. 솔이는 중앙으로 들어오고. 현이랑 유정이는 서로 등 마주보고 방진을 구성해." "네…네?" "다음부터 두번 말하게 하지 마. 정신 차리고 솔이를 중심으로 방진 구성해." 습격이라는 말에 애들은 혼란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유정이 되물었지만 차가운 목소리로 일갈하자 몸을 부르르 떨며 단검을 양 손에 쥐었다. 현 또한 비스듬한 자세로 창을 들었고 솔이도 빠르게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진을 구성하는 애들을 보며 나는 솔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프리스트 키퍼를 할 생각 이었다. 허리에 찬 검을 빼어들자, 스릉하고 사늘한 소리가 숲 안을 울렸다. 『특수 능력. 신검합일이 활성화 됩니다.』 『잠재 능력. 백병전이 활성화 됩니다.』 『잠재 능력. 심안(정)이 활성화 됩니다.』 스스스스스! 피이잉! 이윽고 자세를 잡고 각자 전방을 경계하던 우리들은 지척에서 풀이 스치고, 그와 동시에 거친 파공음이 허공을 찢는걸 들을 수 있었다. 감지에 걸렸다고 느낀 순간 숲의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빛을 번쩍이는 꼬리가 날쌔게 뻗어 나오는게 보였다. 타겟은 양 방향을 경계하던 현과 유정이었다. "피하지마! 쳐내!" 회피 자세를 잡는 애들을 보며 바로 외쳤지만 어느새 안현과 유정은 각자 몸을 움직이고 난 후였다. 몬스터의 공격로를 감지를 통해 피한것 같았다. 사이드 스텝을 밟아 옆으로 빠지던 안현은 내 말에 순간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쭉 뻗어 나가는 꼬리를 보더니 이내 앗차한 얼굴로 급하게 창을 휘둘렀다. 그리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중단 부분을 쳐내는걸 볼 수 있었다. 유정이 또한 순간 몸을 숙이는 날렵한 몸놀림을 보였지만, 꼬리를 쳐내라는 내 말은 시행하지 못했다. 피하는건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공격이 끝나는게 아니었다. 꼬리는 유정이 있던 자리를 그대로 지나치더니 살짝 방향을 틀어 뒤에 있던 솔이를 노리고 들어오고 있었다. 한창 주문을 외우던 솔이는 순간 자신을 노리고 들어오는 침을 보며 망연한 얼굴이 되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그동안 실컷 수현이한테 응석 부렸으니 애들이 혼날때가 됬네요. 하하하. 오늘 전회에 몸무게에 대한 코멘트를 보고 아는 누나한테 카톡을 했다가, 욕만 얻어 먹었네요. 크크크. 일단 리리플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리리플 』 1. CrossDie : 1등 축하합니다. 왕의 귀환인가요? 하하하. 오타 수정 완료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2. 유명한 : 하하. 친한 누나한테 170cm에 44kg에 D~E컵이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미친놈 취급 받았네요. 아무래도 수정하는게 나을것 같습니다. 3. hohokoya1 : 그렇지요. 굉장히 쓸데가 많은 여성이거든요. 합류는 아직 생각중입니다. 그냥 죽여버릴 생각도…. 4. GradeRown : 둘다 한국인 입니다. 타대륙에도 10강과 비슷한 존재들은 있어요. 수준은 북대륙이 가장 높습니다. 그리고 언어는 일단 변환 장치가 나올 예정입니다. :) 5. 카이혼 : 아니요. 체력만 제외하면 모두 대폭 오른 상태입니다. 1회차 능력치는 1회에 보시면 나와 있습니다. 6. Zami : 100 이상 올릴 수 있습니다. 101 능력치는 절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천사들의)설정상 만점 포인트가 100으로 나온 거랍니다. 7. 죽^돌^이 : B → B+ → A → A+ → A++ → A+++ → S → S+ → EX입니다. A등급만 가장 세분화 되어있어요. 8. 15420011 : 통과 의례처럼 숨길 필요는 없습니다. 사용자 아카데미를 거친 이상 왠만한건 다 배웠거든요. 그걸 실행하냐, 실행하지 못하냐의 차이지요. 거기다 뮬에 온이상 더이상 거리낄게 없으니까요. 그리고 돈은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주급으로 받은걸로 전부 구매했습니다. 9. rhkdel2 : 주변 애들을 잘 보시면 가능성 있는애 한명 보이실 겁니다. 하하하. 10. 랜슬럿 듀 락 : 오늘 카페 가입 완료 했습니다. 표지 정말 갖고 싶었는데 좋은데를 소개해 주셨네요. 한번 이것저것 보고 추후에 신청할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11. 최강성녀 : 헐;;;그냥 리리플 한건데…진짜로 49회도 코멘트 해주셨네요…. 솔이 생각이 나서 해드렸어요. 50회도 코멘트 좀…. :)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코멘트좀 많이 주세요! 그리고 추천도…☞☜)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51 / 0933 ---------------------------------------------- 우리 오빠(형)가 달라졌어요 멍청하다. 현과 유정은 솔이를 중심으로 짠 방진의 진형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키퍼를 한게 다행이었다. 나는 유정을 한번 강하게 노려본 후 사선으로 날아오는 꼬리를 검면으로 가격했다. 그리고 발생한 현상에 나는 잠깐 넋을 놓고 말았다. 어느정도 힘을 담아 꼬리를 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공격로를 틀게 하는걸 목적으로 한 일종의 방어술 이었다. 그러나 내 검면에 맞은 꼬리는 이내 각질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우리를 습격한 괴물의 구슬픈 울음 소리가 들리자 나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아마도 검술 전문가나 특수, 잠재 능력의 랭크 효과가 발휘된 모양 이었다. 순간 여러 생각이 교차했지만 일단 전투에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마력을 듬뿍 담은 목소리로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놈들은 칠흑 전갈들이다. 꼬리에 달린 침에 맹독이 있으니 절대로 주의하도록. 약점은 눈 또는 배 부분이지만 드러내게 하기 어려우니 마력을 무기에 담고 강하게 찔러.” 말을 마치고 고개를 숙이자 아직도 망연한 얼굴로 입만 뻐끔거리는 솔이가 보였다. 조금전에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크게 놀란것 같았다. 나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나지막히 일갈했다. “안솔. 전투 도중인데 사제가 주문을 멈추면 어떡하자고.” “아….” 내 말에 모골이 송연한지 솔이가 다시 주문을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한숨을 내뱉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전투는 아주 잠시 소강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칠흑 전갈들은 서로 쌍으로 붙어 다니는 경우가 많다. 그런만큼 서로 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꼬리를 바스라뜨린 전갈의 울음 소리가 들리자 안현이 상대하던 전갈이 움찔 몸을 멈춘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 이었다. 이윽고 분노한 전갈의 괴성이 터지며 놈들은 더욱 흉폭한 기운을 흘리기 시작했다. 흉성을 토하며 전진해오는 칠흑 전갈들은 곧이어 어둠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거의 호랑이와 맞먹는 몸집을 보자 애들의 얼굴이 모두 하얗게 변하는게 보였다. 처음은 기습을 당해 선제 공격을 당했지만 다행히 그럭저럭 대비는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칠흘 전갈들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나 전갈들이나 서로 견제를 하고 있는만큼 누가 먼저 공격을 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방금전의 교환으로 미루어 보면 방진을 유지한채 전투하는건 의미가 없는것 같았다. 잠시 전장을 가늠하던 나는 이내 먼저 공세를 취하기로 마음 먹고 입을 열었다. “나와 유정이 한조. 현과 솔이 한조로 한놈씩 맡는다. 솔은 주문으로 전갈의 꼬리를 속박한다. 그 틈을 타 현은 마력을 창 끝으로 모아 일점으로 몸통을 찔러. 각질이 단단하니 절대 벨 생각은 하지 말고. 유정이는 내 뒤로 서. 먼저 들어가서 걷어차 배를 드러내게 할테니 틈을 노려 카운터를 치면 돼. 바로 붙어서 들어오지 말고 꼬리 공격이 지나간 후에 들어와.” 모두들 대답은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는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전갈들은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곧이어 그들이 감지에 걸리고 내가 한발 앞으로 나서는 순간 전투는 다시 재개 되었다. 침이 들어간 꼬리 일부는 바닥에 떨어진 채 펄떡거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놈의 꼬리는 여전히 위협적인 맹독을 갖추고 있었다. 남은 꼬리를 다시 벌떡 세우는 전갈을 보며 나는 전방으로 돌진했다. 다시 한번 대기를 가르는 파공음이 들리고 검푸른 피를 줄줄 흘리는 꼬리가 내 얼굴을 찍을듯 달려 들었다. 놈의 꼬리 공격은 직선적이라 피하는건 일도 아니었다. 한발자국 옆으로 걸음을 옮기자 꼬리는 목표를 상실한채 허무히 허공을 가르며 지나갔다. 그리고 그동안 나는 전갈을 간격에 둘 수 있을만큼 거리를 줄일 수 있었다. 뒤에서 유정이 움직이는 기척을 느낀 후 나는 천천히 검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눈에 칠흑 전갈이 왠지 모를 미소를 짓는게 보였다. “오빠! 뒤!” 뒤통수로 사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칠흑 전갈의 꼬리는 길고, 유연하다. 첫 공격을 할때는 직로로 뻗을 수 밖에 없지만 뻗은 상태에서 이리저리 구부려 도중에 공세를 틀 가능성이 있었다. 아마 내가 피한 순간 꼬리를 U자로 구부려 다시 내 뒤통수를 노린 모양 이었다. 나 또한 전갈을 보며 미소를 짓고는 거의 몸이 근접할 정도로 더욱 걸음을 뛰었다. 막 전갈의 꼬리가 내 뒤통수에 직격하려고 하자 유정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 찰나의 순간 나는 다시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었다. 주먹 하나 차이로 아슬하게 꼬리가 내 볼을 스치는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늘어뜨린 검을 들어 내 볼을 지나는 놈의 꼬리에 살짝 닿게한 후 슬며시 힘을 주었다. 진로가 놈의 눈을 향하도록 수정한 것이다. 설마 바로 눈 앞에서 피할줄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또한 검을 들어 꼬리의 방향을 조정할것도 모르는게 당연했다. 지금 내가 사용한 검술은 곡예나 다름 없는 검술 이었다. 태극은 기본적으로 정통(正統) 원리에 기본을 두지만 사용자에 따라 엄청난 변화를 주는것도 가능했다. 말 그대로 머리속으로 상상만 하고 실전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검술로 부를 수 있었다. 결과는 바로 볼 수 있었다. 칠흑 전갈의 오른쪽 눈에 자기 자신의 꼬리가 보기 좋게 박혀 들어가는게 보였다. “크에에에에에에에!” 울부짖는 놈을 보며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오른발을 뒤로 들었다가, 있는 그대로 얼굴을 걷어 올려 찼다. 발등에 둔중한 충격이 옴과 동시에 전갈의 몸이 허공으로 솟아 올랐다. 어떻게 보면 양 집게를 쩍 벌린채 하늘을 향해 만세를 하는것 같아 상당히 우스운 꼴 이었다. 나는 배를 훤히 드러낸 전갈을 보며 바로 외쳤다. “지금!” 최적의 카운터 타이밍 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어찌어찌 대비는 하고 있었던지 한박자 늦게 내 아래로 파고드는 유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유정은 이내 한발을 강하게 딛으며 발돋움 하고는 양손에 든 단검을 X자로 교차하며 섬광처럼 전갈의 배를 베어 들어갔다. 만족스럽진 않지만 연계 공격은 성공이라고 볼 수 있었다. 괴성을 지르는 칠흑 전갈을 보며 나는 유정의 어깨를 짚고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양손의 검을 높이 올려쥐었다가, 아직도 허공에 체류중인 전갈의 몸 정중앙을 있는 힘껏 내려 베었다. 따로 마력을 담지 않아 근력을 믿고 짓이기려 했으나 내 검은 전갈의 딱딱한 껍질을 두부 베듯 부드럽게 베어 내렸다. 채 10초도 걸리지 않았는데 한놈을 완벽하게 처리한 셈이다. 그러나 아직 한놈이 남아 있었다. 재빨리 몸을 돌리자 마침 솔이 주문을 모두 외우고 하얗게 빛나는 지팡이를 앞으로 내미는 모습이 보였다. 솔이는 내가 말한대로 꼬리를 조준한채 입을 열었다. “속박(Shackles)!” 그순간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듯 번쩍이는 빛이 숲을 가득히 메웠다. 초보 사용자 답지 않은 어마어마한 마력 이었다. 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어느새 자신을 향하던 꼬리가 미동도 않은채 멈춘걸 보고 눈을 빛냈다. "하앗!" 힘찬 기합성과 함께 현이 내지른 창은 칠흑 전갈의 몸에 정통으로 꽂혔다. 꼬리가 움직이지 않자 칠흑 전갈은 커다란 집게발을 들었으나 창의 길이가 더 길었다. 단단간 껍질이 부서수고 들어간 창. 그러나 칠흑 전갈은 낮게 으르렁 거릴뿐 별로 타격을 입지 않은것 같았다. 외피를 부수는건 성공했으나 내부에 타격을 줄만큼 깊이 도달하지 못한것이다. 안현은 당황한 얼굴로 창을 빼고 연속으로 찔렀으나 마침 속박이 풀린 전갈의 꼬리 공격에 한걸음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위협적으로 던진 꼬리가 중간중간 낭창하게 휘어지며 압박해 들어가자 현의 손도 점차 어지러워지더니 종래에는 방어에 급급한 신세가 되었다. “뭐, 뭐야? 쟤 왜 저렇게 고전해?” 유정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멍하니 말하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솔이 또한 우물쭈물 거리며 구경만 하고 있었다. 속으로 기가 막힌 생각이 들었다. 지금 뭐하고 있는거지? 싸우는거 견학하러 온건가? 나는 크게 혀를 차고는 빠르게 앞으로 달리며 외쳤다. “지금 너네들 구경하러 왔어? 보고만 있지 말고 도우라고!” 그때서야 정신을 차렸는지 유정과 솔이 고개를 들었다. 안현은 나름대로 선전하고 있었다. 칠흑 전갈의 꼬리 공격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집게 공격도 간간히 쳐내고 있었다. 다만 그뿐이었다. 방어에만 집중하느라 공격을 할 엄두는 아예 내지를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내 실수를 인정할 수 있었다. 능력치만 보고 애들이 잘할것이라 지레 짐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식의 목숨을 건 근접전에서 비로소 본인의 능력이 드러나는데, 고작 능력치를 기준으로 판단한게 이런 결과를 낳을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애들은 지금 자신이 가진 능력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내 기대치가 높은건 사실이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감지 수련이 아니었다면 무슨 사단이 나도 진작에 났을것이다. 지금이야 고작 2마리 밖에 오지 않았고 그중에 한명은 나와 유정이 처리했다. 한마리에 집중할 수 있어 그나마 저렇게 전황을 유지하는거지 만약 배가 넘는 수의 전갈들이 나와 포위 당했다면 정말 암담 했을 것이다. 가뜩이나 무기를 맞추느라 장갑도 빈약한데 한마리를 가지고 이정도로 헤맨다면 다른 상황은 볼 필요도 없었다. 나는 얼른 뒤를 노리던 꼬리를 쳐내며 현이 전방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여유를 만들어 주었다. “안솔. 다시 한번 속박!” “네! 속박!(Shackles)!” 내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듯 솔이 시동어를 외쳤다. 다시 한번 플래시가 숲을 메웠고, 전갈이 주무기로 사용하던 꼬리가 다시 한번 멈췄다. 안현 또한 전투하면서 방어만 한다는게 분통이 터졌는지 얼굴이 시뻘개진 상태였다. 솔의 속박 주문이 걸리자마자 현은 기다렸다는듯 발을 강하게 튀기며 전방으로 파고 들어갔다. “씨발 새끼!” 거친 욕설과 함께 한번 강하게 창을 내지른 현은 한번으로는 성이 안찬다는듯 되는대로 창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마력을 극한으로 운용하고 있는지 창은 공기를 찢는 파공음을 내며 일초에 한번꼴로 전갈의 외피를 관통하고 있었다. 확실히 이번에는 어느정도 타격이 있었다. 이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붓자 어지간한 칠흑 전갈도 마냥 견디기는 힘든듯 구슬픈 울음 소리를 내며 두 집게발로 전방을 가린것이다. “헉! 헉!” 한동안 그렇게 안간힘을 쓰며 타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칠흑 전갈은 몇걸음 물러난게 다였다. 물론 놈의 외피 또한 걸레짝으로 변해 있었지만 중요한건 안현도 지쳤다는 점 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고 다시 배를 걷어차줄 생각에 앞으로 한걸음 내딛은 순간 이었다. “안현! 비켜!” 옆에 가만히 구경만 하던 유정이 갑자기 뛰쳐 나오더니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양손에 쥔 단검이 웅웅 검음을 흘리는게 유정이 또한 마력을 잔뜩 집어 넣은것 같았다. 자신에게 달려오는 유정이를 보며 칠흑 전갈의 집게발이 하늘 높이 솟았다. 그리고 꼬리도 꿈틀이며 움직이는게 곧 속박이 풀릴 낌새가 보였다. 그러나 이번에 솔이도 가만히 있지 않고 연이어 주문을 시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언니! 보호(Protect)!” 솔이의 말이 끝나자 유정의 주위로 반투명한 막이 생성 되는게 보였다. 현 또한 가만히 놀고 있을 생각은 없는지 다시 창을 놀리며 유정이를 원호하기 시작했다. 이제 좀 손발이 맞아 들어간다는 생각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겼지만 그래도 아직 중구난방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내 현과 유정은 둘이서 맹폭격을 하자 간신히 버티던 칠흑 전갈은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놈의 시체는 정말, 매우 끔찍 했다. 외피가 산산이 부서지고 속살을 전부 드러낸채 검은 피를 사방으로 흘리고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무식한 방법으로 칠흑 전갈을 잡을줄은 몰랐기에 나는 잠시 할말을 잃고 말았다. 현과 솔은 자기들이 맡은 시체에 비해 비교적 얌전하게(?) 갈라진, 남은 전갈의 시체를 보고서야 무기를 거두었다. 한동안 헉헉대던 현과 유정은 이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전갈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통과 의례와는 비교도 안되는 난이도에 시작부터 질려버리고 만 것이다. 잠시 입술을 깨물던 애들은 이내 슬쩍 내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아마 뇌가 있다면 이번에 얼마나 형편 없었는지 본인들이 스스로 잘 알고 있을것이다. “너희들….” 나는 잠시 무언가 말하고 싶어 입을 열었지만, 이내 그냥 닫아버리고 말았다. 내 기대치가 높은건지 아니면 아직 애들이 이러는게 정상인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도대체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뭘 배우고 나온걸까? 내 초보 사용자 시절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이라도 다시 도시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가르치고 싶을 정도였다. “혀, 형.” “오빠….” 내 얼굴에 대놓고 실망 했다는 기색이 떠오르자 애들의 태도가 단번에 안절부절 하는게 보였지만, 나는 일부러 등을 돌려 애들을 무시했다. 아직 갈길이 구만리라는 생각에 그저 한숨만 나왔다. 나는 검을 바닥에 강하게 내리쳤다. 검에 묻어 있던 피는 이내 반월형을 그리며 땅바닥에 흩뿌려졌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첫 본격적인 전투신을 써봤는데 다들 어떠신지…. :) 그리고 애들한테 수현이 기대치가 높은건 있습니다. 칠흑 전갈은 구성을 잘 짠 5인팟은 되야 쉽게 잡을 수 있는 놈이거든요. 그래도 양해 부탁드려요. 수현이 이놈이 워낙 1회차에 아스트랄한 삶은 산 주인공이라서요. 물론 애들 또한 문제는 많죠. 고대 연금술사의 던전편은 실제로 실전에 들어가면서 애들이 그동안 얼마나 주인공이라는 온실 안에 있었는지 깨닫는 편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 리리플 』 1. 사람인생 : 1등 축하 드립니다. 슬슬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 가시는군요. 원조 1등 사람인생님! 2. 광항 : Of Course.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미래는 바뀔 여지가 있습니다. 염두에 두고 보시면 좋을것 같네요. :) 3. GradeRown : 저…일본어 몰라요…. ㅜ.ㅠ 4. 광술사 : 맞아요. 바보나 다름없죠. 애들 이제 수현이한테 무지 혼날거에요. 후후후. 5. 아릴릴리아 : 그러니까요 ㅋㅋㅋㅋ 제 3의 눈은 제가 생각해도 엄청난 사기 스킬이에요. 6. Demodex : 헉. 유용한(?) 정보 하나 얻고 가네요. 감사합니다. ㅎㅎㅎㅎ 7. rhkdel2 : 너무 남발하듯 H신을 쓰는건 싫어서요…. 주인공도 H하기 위해 회귀한건 아니라…-_-a. 물론 노블인만큼 H한 장면은 상당히 나올 예정이긴 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8. 아기림프 : 제가 노렸던 이번편의 이미지를 그대로 받으셨군요! 다행입니다. ㅎㅎㅎㅎ 9. 서비스 : 이론 + 실전을 같이 받았습니다. 홀 플레인에 대해 전반적인 지식 전부를 다루었다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10. Toranoanal : 학원 생활 에피소드를 다루지 못한건 저도 너무 아쉬워요. 한창 전개가 느리다고 많은 분들이 말씀하시던 때라. <아기고양이에서 동료고양이로 조련해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조금씩 비춰지리라 생각이 되네요.> 정답입니다. 다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정말 무지하게 혼이 나야겠지요. 아니에요! 추천을 눌러주신것만해도 무지 감사한걸요. 전혀 죄송하실 필요 없습니다. 작가는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분들이 있다는데 가장 큰 기쁨을 느낀답니다. :)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코멘트좀 많이 주세요! 그리고 추천도…☞☜)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52 / 0933 ---------------------------------------------- 우리 오빠(형)가 달라졌어요 “오빠. 미안해.” “오빠. 죄송해요….” 한참 숲을 걷던 도중 애들이 내 뒤에서 조그맣게 오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순간 맨 앞을 걷고 있던 내 얼굴이 꿈틀였다. 내가 내 표정을 확인하진 못해도 분명 그리 좋은 표정이 아니라는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후….” 애들은 처음 들어보는 후회 섞인 내 한숨에 전전긍긍한 기색을 내비쳤다. 나는 옆으로 따라 붙은 애들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잠시 숨을 가다듬은 후 현재 걸음 속도를 유지한채 입을 열었다. “전갈들과의 전투로 참 많은 생각을 들게 하는구나. 서너마리도 아니고 고작 한두마리로 헤맨다…. 어떻게 보면 내가 지금 너희들을 대하는 방식이 조금 잘못된게 아닐까라는 그런 생각이 든다.” “오, 오빠. 그게 아니라….” “나 지금 말하고 있잖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쏘아 붙이자 유정은 황급히 입을 다무는게 보였다. 눈망울이 조금씩 떨리는게 조금 더 몰아붙이면 눈물이라도 쏟을것 같았다. 그러나 성과를 얻기 전까지 도시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한 이상 마음을 강하게 먹을 필요가 있었다. “나는 항상 어떤 상황에서든 최선의 판단을 내리려고 노력했다. 무수히 많은 클랜들의 오퍼를 거절하고 너희들을 선택한것도 내 판단에 대한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하지만 지금. 처음으로 내 판단에 대한 자신이 서지 않아. 내가 원하는 방향이 너희들에게도 득이 되는 방향이라고 지금껏 믿어왔지만, 어쩌면 그건 내 오만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 말투는 전에 없는 진지함을 담고 있었다. 말을 끊지 말라는 신호를 보낸 이후 애들은 묵묵히 내 말을 듣고만 있었다. 현은 심각한 얼굴로 내 말에 집중하고 있었고 유정과 솔은 서로를 번갈아 보며 그저 시름에 찬 얼굴로 눈을 내리 깔았다. “난 너희들을 너무나 아꼈다. 유정이 네가 도시를 떠날때 우리라고 말했을 때는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매우 기뻤단다. 하지만 그 마음이 이렇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줄은 몰랐구나. 아니. 알고도 외면한건지도 몰라. 물론 그럼에도 그런 방식을 고수한 내 책임도 있겠지만, 그걸 따라온 너희들의 태도도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통과 의례 때부터 걱정했던 것들이 지금 속속이 드러나고 있어.” 안현은 내 말을 듣더니 입술을 짓씹으며 침울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이 본인들이 잘 알고 있을것이다. 진을 무너뜨려 솔이를 위험에 처하게 하고, 중간에 꼬리가 날아온다고 주문을 멈추고, 동료가 전투하는 동안 멀뚱히 구경하고, 힘의 배분을 생각하지 못하고 멋대로 싸운것 등등.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았다. 유정과 솔은 당장에라도 눈물을 떨굴 얼굴 이었다. 나는 일단 이쯤에서 매듭을 짓는걸로 했다. 왜냐하면…. “솔직히 지금이라도 다시 도시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다. 최소한의 캐러밴이라도 꾸리고 다시 출발하고 싶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는 아직도 너희들을 믿고 싶은 마음도 있어. 그래도 될까? 더이상 날 실망시키지 않을 수 있겠니?” 내 물음에 안현은 말문이 막힌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이를 악물고 있는듯 분한 기색 또한 엿볼 수 있었다. 확실히 안현은 앞선 두명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내가 원한건 죄송하다라는 사과가 아닌, 왜 그때 그럴수 밖에 없었을까 라는 분노를 원했다. 나는 힘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키퍼 대형을 변경하겠어. 솔이를 중심으로 삼각진을 구성한다. 선두는 내가 슬테니 현과 유정이는 각각 옆으로 서.” “…….” 안현은 묵묵한 얼굴로 솔의 옆으로 섰다. 창을 꼬나쥐는게 마음을 단단히 먹은것처럼 보였다. 유정이는 슬슬 내 눈치를 보더니 남은 옆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솔은 키퍼 대형을 변경하겠다는 말에 불안한 시선을 보냈지만 나는 무덤덤한 얼굴로 단호히 말했다. “설명은 한번으로 끝낼테니 잘 들어. 삼각진은 키퍼가 없는게 아니다. 굳이 말하면 각 진을 구성하는 인원들 한명한명이 키퍼라고 할 수 있어.” “절대로 진이 뚫리면 안된다는 소리군요.” 나는 잠시 고개를 틀어 앞쪽을 바라보았다. 뭔가가 서서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것이다. 전방을 세심히 살핀 후 나는 현에게만 눈짓을 보냈다. 현 또한 내 신호를 알아 들은듯 슬며시 창의 방향을 이동시켰다. 나는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렇지. 감지를 회피에만 쓰려고 하지마. 상대의 검로를 읽고 받아치고, 틈을 노리는데 중점을 두라고. 이 진이 무너지면 말 그대로 솔이 또한 무너지는거야. 죽을 각오하고 진형을 유지해. 서로 돕고 연계를 위해 방진을 짜는거지 아니면 그냥 혼자 다니는것과 다름없어.” “명심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내가 굳이 선두에 선건 꼭 길잡이 역할을 위해서만은 아니거든. 다른 이유도 있는데. 뭐라고 생각해?” “글쎄요.” 조금 핀트가 어긋난 말을 하는 나와 그걸 대답하는 현을 보며 유정과 솔이 고개를 갸웃거리는게 보였다. 현재 우리는 처음의 반의 반도 안되는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주변의 나무와 스쳐 지나가는 커다란 바위를 한번 쓱 훓어본 나는 털었던 검을 강하게 잡았다. “바로…이런 상황이 올 수도 있거든!” 나는 마력을 잔뜩 담아 지나칠듯 했던 커다란 바위를 크게 베었다. 곧이어 바위가 쩍 갈라지는 동시에 붉은 피가 주변으로 확 솟구쳐 올랐다. 직업이 암살자인듯 애들의 감지를 피할정도로 은신이 괜찮긴 했지만 내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씨발! 종민아!” “미친!” 검을 휘둘러 한놈을 처리한 후 우리들의 주위로 세명의 사람이 순식간에 내려 앉았다. 남자 두명에 여자 한명. 행색을 보아하니 추레한게 부랑자임이 틀림 없었다. 우리들을 노리고 기습을 감행하려 했을것이다. 그러나 내가 먼저 노리고 한명을 처리했으니 들통났다는 생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유정과 솔은 다시 당황한 모습을 보였지만 현은 비교적 침착한 모습이었다. 내가 미리 언질은 준 탓 이었다.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당혹스러운 얼굴이었으나 이내 살기를 풀풀 날리는 부랑자들을 보며 유정과 솔도 바로 무기를 빼어들었다. “개자식! 감히 종민이를 죽였겠다! 으아아아!” “신규 사용자라고 했잖아! 어떻게 은신을 알아챈거야!” “진정해. 너무 얕본감도 있어. 거기 너. 어떻게 바위에 은신한걸 알아챈거지?” 여성 사용자 한명이 나에게 말을 걸었지만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는 부랑자들을 분석한 후 나는 애들에게 재빨리 알아낸 정보를 전달했다. “이놈들을 바로 부랑자라고 부른다. 아카데미에서 배운대로 해. 절대로 말을 섞지 말고 하나의 몬스터로 생각하라고. 같은 사용자라고 생각하는 순간 손에 인정을 두게 된다. 부담없이 죽여. 방패 검사 한명, 도끼 전사 한명, 마법사 한명이다. 수에서도, 직업 구성면도 우리가 절대로 유리하다. 솔. 뭐해? 전투는 개시 됬어. 누굴 맡을지는 감이 오지?” “하…? 까고 있네. 그래봤자 갓 나온 햇병아리들인데! 모두 조져!” “잠시만…!” 내 말을 듣던 전사는 우악스럽게 도끼를 들고는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곧이어 검사도 방패를 상단으로 세우고 도끼 전사의 뒤를 따르는게 보였다. 뒤에서 마법사로 보이는 여성은 이들을 말리려고 한것 같았지만, 이내 늦었다는걸 깨달았는지 이를 악물고 빠르게 주문을 캐스팅하고 있었다. 나는 한심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이들도 홀 플레인에, 그리고 부랑자가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초짜들 티를 역력히 내고 있었다. 방패병이 먼저 우리의 진형을 무너뜨리고, 그 뒤로 도끼 전사가 덮쳐들었다면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겠지만 이들 역시 우리 못지 않게 중구난방으로 덮쳐들고 있었다. 아마 우리가 신규 사용자라는 사실을 알고 얕보고 있는게 분명했다. 그때. 우리 앞으로 달려들던 두 사용자가 슬며시 눈을 감는게 보였다. 그 순간 나 또한 애들에게 빠르게 입을 열었다. “라이트 마법이다! 다들 눈 감아!” 그와 동시에 마법사 여성이 우리들을 향해 환히 빛나는 손을 내뻗고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라이트(Light)!” 기초 마법인 만큼 솔이보다 주문을 빠르게 완성한것 같았다. 이내 우리 일행들의 눈 앞으로 빛의 구체가 생성 되더니 번쩍이며 터지는걸 볼 수 있었다. 시야 방해를 목적으로 터뜨린것 같았다. 문제는, 이미 우리들이 감지를 익혔다는 사실 이었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눈을 감은 채 유정과 현이 방어 자세를 취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동시에 솔이도 이를 까득 깨물고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래. 내가 원한건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잠시 애들의 모습을 살피는 여유를 부린 나는 사늘한 얼굴로 눈 앞의 부랑자를 바라보았다. 라이트 마법에 직격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자 도끼 전사는 당황한 얼굴로 달려오는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그러나 방패 검사는 뒤에 있어 보지 못했는지 도중에 왼쪽으로 진로를 틀었다. 아마 유정이를 노리는것 같았다. 이 놈들 또한 기본도 안된, 속칭 병신 같은 놈들 이었다. 은신해 있던 암살자와 여성 마법사는 제법 실력이 있어 보였지만 앞서 달려오는 두명은 영 아니올시다였다. 막 검을 내리치려는 순간 옆쪽에서 불쑥 내지르는 기다란 창 하나가 보였다. 도끼 전사는 설마 라이트가 터진 이후 옆에서 공격이 들어올줄 몰랐는지 다급한 얼굴로 몸을 틀었다. 안현은 눈을 감은채 절묘한 찌르기로 전사의 진로를 방해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말도 안돼…! 어떻게 초짜들이 감지를…?” “말 돼.” 창을 피하느라 내 앞으로 배를 쑥 내민 전사를 보며 나는 간단히 대답한 후 바로 검을 찔러 넣었다. 푹. 가죽 갑옷이 패이는 소리와 함께 살을 찢고 들어가는 느낌이 검을 통해 전달 되었다. 라이트와 연계해 들어오는 방법은 제법 괜찮았지만, 방심이 이들에게 너무도 뼈아픈 패인 이었다. 허무한 얼굴로 울컥 피를 토하는 전사를 보며 나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가가강! 쇠와 쇠가 긁히는 거친 소음이 주변을 울렸다. 유정이 또한 일자로 단검을 세운 후 안정적인 후진 자세로 방패 검사의 돌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방패 검사 또한 자신의 돌진을 막아낸 유정을 보며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마…말도…근력은 분명 내가….” 실제로 근력은 방패를 든 사용자가 더 높았다. 서로 무기를 맞댄 상태로 앞으로 밀고 들어가자 유정이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그러나, 놈은 유정의 마력 능력치를 간과하고 있었다. 유정은 이내 눈을 번쩍 뜨고는 있는 힘껏 마력을 불러 일으키며 힘찬 기합성을 토해냈다. “이얏!” 모자라는 근력은 마력으로 보완한다. 유정은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배운 기초를 착실하게 응용하고 있었다. 자신의 근력을 보완하고 더 나아가 무기의 절삭력과 강도를 높인듯 단검이 웅웅거리며 검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다른손에 든 검을 들어 공격을 하려고 했지만, 순간 나와 솔이 사이로 다시 한번 기다란 창대가 쑤욱 지나갔다. 나는 칼을 한번 비틀어 빼고는 바로 다시 휘둘러 도끼 전사의 목을 날렸다. 그리고 안현이 날린 창은 허공을 갈라 훤히 빈 방패 검사의 옆구리를 찔러 들어갔다. 방패 검사는 땅으로 툭 떨어진 도끼 전사의 목과, 자신의 옆구리에 박힌 창을 보더니 이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방패를 떨구고 말았다. 전방이 오픈된 사용자를 보며 유정은 잠시 갈등하는 눈빛을 지었지만, 이내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단검 두개를 그대로 상대하던 사용자의 몸으로 박아넣었다. “커헉.” 어디서 우리들이 신규 사용자라는 사실을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놈들도 신규 사용자들이나 다름 없었다. 아마 갓 6개월을 넘겼거나 아무리 잘 봐줘도 1년은 채 지내지 못한 놈들이 분명했다. 어쩌다 부랑자가 됬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놈들은 홀 플레인에서 적응하지 못한 부랑자들의 말로를 보여주고 있었다. 실력도 안되고, 수련도 안하고, 그렇다고 노력도 안하는 말 그대로 비참한 꼴 이었다. 모습을 허물어 뜨리는 사용자를 보더니 이내 유정은 무언가 결심한 표독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아마 내가 자신을 보고 있는 중이라 일부러 그런것 같았다. 놈의 가슴에 박아넣은 단검을 쥔 두 손은 눈에 보일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쉴틈은 없었다. 아직 여성 마법사 한명이 남은 상태였다. 아까부터 조용한게 무언가 큰 마법을 준비하고 있는듯 보였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솔이 또한 주문을 마친 상태였다. 솔은 환하게 빛나는 지팡이를 들더니 이내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여성 마법사를 보며 주저없이 시동어를 외웠다. “속박(Shackles)!” 플래쉬가 터지듯이 환한 빛이 숲을 가득히 메우자 여성 마법사는 콧방귀를 뀌고는 주문을 계속 외우는 채로 한손으로 수인을 맺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내 눈은 이채를 띄었다. 방금 여성이 보여준건 더블 캐스팅 이었다. 도중에 주문 방해를 받지 않도록 입으로는 주문을, 다른 한 손으로는 마력 저항의 수인을 맺은 것이다. 어느정도 집중력이 요구되는 만큼 아무나 할 수 있는건 아니었고 그 말은 눈 앞의 마법사가 어느정도 실력이 있는 사용자라는 말 이었다. 하지만 여성은 간과한점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솔이의 마력 능력치였다. “어…어? 마, 말도 안돼! 내 마력 능력치는 60을 넘는데!” 수인을 맺던 손이 점차 어지러워지더니 이내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유지하던 주문을 포기하고 마력 저항에 집중했다. 나름 빠른 판단이었지만 시작부터 75라는 능력치를 보유한 솔이의 상대가 될수는 없었다. 잠시간 저항하긴 했지만 솔이 펼친 속박 주문은 상쇄되지 않고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다시 바로 달려나가는 현과 유정이를 나는 잠시 붙잡았다. 솔이 또한 속박 주문에 마력을 연결한 채 안간힘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마력 계열의 전투가 어떤지 경험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이윽고 여성 사용자가 풀썩 쓰러지는거로 결과를 볼 수 있었다. 솔의 마력에 끝까지 저항할 수는 없었는지 그녀는 온 몸이 경직된채 허망한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오늘 후기는 매우 긴 관계로 리리플을 생략합니다. 독자분들의 양해를 바랍니다.) 마력 감지는 컨트롤 어빌리티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즉 감지는 기초 기술입니다. 펼치는건 어려운게 없지만 감지는 단순히 펼치는데 의의를 두지 않습니다. 잠시 본문에 나온 내용을 보겠습니다. <감지는 얼마나 깔끔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관건 이었다. 자신이 가진 마력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항상 일정한 흐름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건 컨트롤 어빌리티를 발현하는 원리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어빌리티에 종류가 있는지, 어떤것들이 쓸만하고 중요한지. 수현이처럼 세세한 노하우를 봐주는게 아닙니다. 말 그대로 기본 홀 플레인에 적응하는 방법을 알려줄 뿐이죠. 물론 전반적인 배경이나 직업별 훈련은 혹독하게 시킵니다. 다만 그 이상의 응용 기술은 좀 싹수가 보이는 애들은 클랜으로 영입해 그때서 더 심화된 과정을 가르치는 수순입니다. 통과 의례에서는 수현의 보호 아래. 사용자 아카데미 에서는 혹독한 훈련을 받았지만 전갈들과의 전투처럼 한방에 목숨이 날아갈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애들이 전갈들과의 전투에서 소극적인 태도가 되었구요. 그리고 이번회를 보시면 아셨겠지만. 제가 이번 파트에 여러분들께 전하고 싶은 내용은 애들의 능력이 모자란다가 아닙니다. 수현이한테 의지하려는 태도를 뜯어 고치고 싶은 겁니다. 실제로 처음 보는 전갈들과의 전투에서는 어떻게 대응할지 몰라 진형이 어그러들었지만 비교적 익숙한 사용자들(부랑자)과의 전투는 무리 없이 해냈습니다. 즉 애들이 능력은 있지만 생사가 걸린 상황을 넘어서 생소한, 어느 변수가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할줄 모르는 겁니다.(물론 전갈들과 부랑자들간의 전투의 차이점은 본문에 있습니다. 둘을 동일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수현이한테 한소리 얻어먹고, 자신들의 실수를 반성하자 안현은 바로 태도를 고쳤습니다. 유정이와 솔이 아직 머뭇거리고는 있지만 전갈들과 이어진 부랑자들과의 전투에서 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셨을겁니다. 수현이 전회에 환장한 이유가 이정도 능력치면 그래도 할만하다 싶어 끌고 나왔는데 아직도 자신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모습에 실망한겁니다. 0053 / 0933 ---------------------------------------------- 우리 오빠(형)가 달라졌어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입만 뻐끔대는 부랑자 앞에 다다르자, 여성 마법사는 공포감 가득한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나 또한 고개를 아래로 숙여 무심한 눈동자로 그녀와 시선을 교환했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전형적인 고양이상의 미인 이었다. 문득 덜덜 떠는 그녀를 보자 묘한 기시감에 몸이 사로잡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1회차를 대부분 음지에서 활동했다. 활동에 비해 나를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아는 사람들은 나를 한때 <부랑자 사냥꾼>이라고 불렀다. 나중에 가서는 기존 사용자와 부랑자들간의 경계가 모호해 지지만 원래 부랑자들하면 살인, 강도, 강간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부랑자들의 활동이 심해지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기존 사용자들도 비밀리에 하나의 클랜을 만들었다. 부랑자들을 사냥하는 사용자들의 모임. 그 클랜이 바로 부랑자를 전문으로 사냥하는 사용자들을 지칭하는 말 이었다. 그 클랜은 말 그대로 상대가 부랑자라면 어떤짓을 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노예로 삼든, 인체 실험을 하든, 살인을 하든, 강간을 하든. 부랑자가 상대라면 어떤 쓰레기 짓거리를 해도 뭐든지 용서 받는 권한을 받았다. 얼마나 악독한 일을 저질렀냐면 심지어 사정을 아는 일부 기존 사용자들도 클랜에 몸을 담은 사냥꾼 사용자들을 슬슬 기피할 정도였다. 잠시간 참여하긴 했지만 그때 나도 그 클랜의 일원으로 했던 일들이 떠오른 것이다. 나는 앞서 처치한 부랑자들의 피가 진득하게 붙은 칼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그래도 마법사 치고 제법 실력이나 센스가 있었던 편이라 정보에 대한 호기심이 동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이름(Name) : 이보미(0년차) 『 능력 』 [근력 36] [내구 28] [민첩 42] [체력 34] [마력 62] [행운 40] 역시 내 예상대로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사용자였다. 부랑자로 활동한 경력은 더욱 적을것이다. 마법사인 만큼 능력치를 살펴보면 그래도 준수한 편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현, 솔, 유정의 능력치가 워낙 발군이어서 그렇지 원래 이정도의 수치도 연차로 따지면 나름 평균을 상회하는 숫자였다. 아마 통과 의례에서 만났다면 동료로서의 영입을 고려 했을지도 모르지만, 이러나 저러나 현재 이보미는 우리를 살해하려한 부랑자의 일원 이었다. “흐아아아….” 내 사늘한 살기를 느꼈는지 이보미는 힘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 와중에도 속박이 조금씩 풀리는지 꼼지락거리는 그녀의 손가락을 지그시 밟은 나는 검을 천천히 위로 치켜 들었다. 검에 묻어 있던 피 한방울이 떨어져 볼을 적시자 그제서야 죽음이 눈 앞에 왔다는걸 실감했는지 여성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 살려 주세요!” 나는 그녀의 말을 들은척도 않고 멀뚱히 보고있는 애들로 시선을 돌렸다. “봐. 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잖아. 아무튼 이번 전투는 제법 괜찮았어. 확실히 사용자들과 전투를 해본 경험이 있으니 조금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구나. 물론 이놈들이 방심한 부분도 있지만…나름 괜찮았다.” “하라는대로 할게요! 부탁드려요! 같은 대한민국 사람 이잖아요? 네? 저도 하고 싶어서 이런게 아니에요. 제발, 제발…!” 애들의 얼굴은 매우 미묘했다. 내 칭찬을 들어서 기쁜것 같았지만, 아래서 짓밟힌채 처절히 절규하는 여성의 모습을 보며 난감한 얼굴 이었다. 나는 그런 이보미를 계속해서 철저히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익숙한 전투만 잘하면 안 돼. 물론 앞으로 경험을 쌓으면 해결될 일이지만, 언제나 당황하지 말고 방금처럼 자신의 할 일을 하면 된단다. 그리고 아까 말했던 것처럼 부랑자를 상대할때는 절대 손에 사정을 두지마. 살려두면 귀찮은 존재들…아. 잠깐만. 거 되게 시끄럽네.” “가진거 다 드릴게요! 원하신다면 몸이라도, 아니. 노예라도 될…끄엑!” 쉴 새 없이 주절거리는 그녀의 입이 거슬리자 나는 가볍게 그녀의 목에 검 하나를 박아 넣었다. 이보미의 가느다란 목에 검을 쑤셔 넣자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이내 입에서 울컥 피를 토하며 절명하고 말았다. “아….” “흣…!” 대충 목에서 검을 빼들고 한번 휘둘러 피를 털자, 애들의 놀란 감정이 담긴 음성이 들렸다. 순간 나는 앗차하고 말았다.1회차 부랑자 사냥꾼으로 활동했던 시절의 버릇이 나온것이다. 그냥 습관적으로. 홀 플레인 일회차에서 활동했던 시절처럼 아무 생각없이 죽인건데 지금껏 애들에게 보여준 모습과 조금 괴리감이 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싶어 흘끗 시선을 돌리니 고개를 축 늘어뜨린 여성을 보며 애들의 목젖이 꿀떡 움직이는게 보였다. * 어느새 날이 저물고 있었다. 그나마 약간씩 비추던 햇빛은 어느새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서서히 칠흑 같은 어둠이 주변을 잠식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온 거리를 가늠해보니 아직 중단을 넘고 있었다. 하루이틀만에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마음을 조급하게 먹지 않기로 했다. 확실히 애들은 전투를 치르면 치를수록 성장하고 있었다. 완벽하다고 보긴 어렵지만 극초반과 같은 실수를 범하는 일은 없었다. 오늘 하루만 칠흑의 숲에서 총 6번의 전투를 치렀는데, 아마 마지막 전투만 아니었다면 오늘은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치료(Cure)!” “끙….” 나는 숲에 누워 신음을 흘리는 안현을 바라보았다. 풀에 몸을 누인 안현의 위로 솔이 땀을 뻘뻘 흘리며 치료 주문을 시전하고 있었다. 현의 온 몸에는 늑대에게 물린 상처 자국으로 가득했다. 거진 16마리의 칠흑의 숲 늑대 무리들이 습격해온 탓 이었다.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8마리의 늑대들이 안현에게 달려들어 파고든 탓이라 딱히 뭐라고 할 건덕지가 없었다. 아마 자신이 뚫리면 바로 솔이가 위험하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버틴것 같았다. 늑대가 원래 힘든 상대는 아니지만 칠흑의 숲 버프를 받았기 때문에 보통 늑대와는 궤를 달리하는 공격성과 민첩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물어 뜯기는 와중에도 안현은 내 원호와 적절한 전장 조율에 힘입어 창을 놀리며 분전했고, 종래에는 덤벼든 8마리 대부분을 쓰러뜨리는 쾌거를 이룩했다. 하지만 결국 전투 종결 후 온몸에 피칠갑을 한채 쓰러지고 일은 피할 수 없었다. 나는 얼른 챙겨온 치료 물약을 꺼내 절반은 몸에 바르고, 절반은 고개를 들여 목 안으로 넘겼다. 솔이 또한 현이 다치자 필요 이상으로 치료(Cure)를 퍼부으며 눈물을 죽죽 흘리고 있었다. 어차피 이정도 상처를 입는건 홀 플레인에서 일상 다반사나 다름없다. 물약으로 적절한 조치도 해놨고 사제도 있는 만큼 안현이 목숨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어쨌든 치료를 마치고 안현이 침음성을 흘리며 상체를 일으키자 걱정스런 얼굴로 보고 있던 유정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멍청이. 다행이다.” “칭찬이든 욕이든 하나만 해라.” “걱정인데?” “형. 혹시 오늘 해가 동쪽으로 저물었나요?” 유정은 이내 안현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자신을 놀리는 말임을 깨닫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았다. 일어나자마자 티격태격하는 둘을 보며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몸은 좀 어때?” “…회복된것 같아요. 마디마디가 결리고 힘이 안들어가긴 하지만 이동하는데 딱히 지장은 없어요.” “그럼 오늘 전투는 더이상 속행이 불가능 하겠군. 아무래도 여기서 야영 준비를 하는게 낫겠다. 날도 저물었고. 아무튼 고생했네. 잘 버텼어.” “고생은요. 형의 원호가 없었으면 아마 진즉에 쓰러졌을 거에요.” 정신없이 창을 휘두르는 와중에도 용케 내가 자신을 도와줬다는 사실을 알아챈것 같았다. 늑대들이 얼마나 나오든 나한테는 별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현이 적당히 물리도록(?) 방치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전투중 부상을 입었다가 회복하는 경우 내구 수치의 증가를 노릴 수 있다. 또한 잠재 능력중 하나인 <쓰러질 수 없는>을 발현하는데도 어느정도 도움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하기 떄문 이었다. 안현은 지금 고생한다고 볼 수 있을지 몰라도 분명 추후에 그만큼 보답을 받을 것이다. 날도 저물었고 하루에 6번 전투도 어느정도 했으니 오늘은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야영을 한다는 내 말이 떨어지자 안현을 제외한 유정이의 몸이 분주해졌다. 나는 솔이가 매고 있던 가방을 벗겨 건네 받고는 주섬주섬 안을 뒤져 마력석을 꺼내들었다. 한창 바닥을 쓸며 나뭇잎과 수풀을 정리하던 유정은 내가 꺼낸 마력석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오빠. 그러면 오늘 이 숲 안에서 자는거잖아?” “응. 그런데 왜?” “아니.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밤에 괴물들이 습격할수도 있잖아. 불침번만으로는 조금 불안해서.” “음. 야영에 사용하는 마력석을 사왔으니 어느정도 괜찮을거야.” 스스럼없이 나에게 말을 거는 애들을 보니 다행히 내가 이보미의 목을 찌른데 별다른 거부감을 드러내지는 않는것 같았다. 물론 그렇게 보이는 척을 하는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였다, 너무 무섭다 어쩌니 하면 꽤나 짜증이 났을것이다. 하지만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부랑자들에 대해 철저히 교육을 받은 만큼 통과 의례에서 겪었던 꺼림칙한 분위기는 나오지 않았다. 마력석이란 말에 유정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 그녀는 자신의 무기와 현, 솔이 든 무기를 번갈아 보고 배낭을 보고 빈 물약병을 보고 마지막으로 마력석을 보더니 혼란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 오빠.” “또 왜. 급한거 아니면 일단 야영 준비나 도와.” “아니. 그게 아니라. 급한건 아닌데…도대체 이거 다 어디서 구했어?” “뭘?”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반문하자 유정은 이내 손가락으로 하나씩 일일이 가르키며 말을 이었다. “무기. 여관비. 배낭. 마력석. 물약. 그리고 기타 등등. 그때 우리가 준 돈이랑 오빠가 가진 주급을 합쳐도 10골드 남짓 일텐데? 마력석만 해도 무지하게 비싸다고 들었는데….” “야영에 사용하는 마력석은 그렇게 안비싸. 몬스터를 쫓아내는 기운을 품고 있거든. 그리고 그렇게 좋은 품질은 아니라서 불침번은 서야해.”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도 10골드로 이 모든걸 구했다는건 납득이 안가. 어디서 돈이라도 구한거야?” 유정이 말이 끝나자 안현과 안솔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충 넘기고 싶었지만 호기심 어린 얼굴을 보니 꼭 대답을 듣고 넘어가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나는 마력석 4개를 든채로 야영 지대 설치를 위해 땅을 고르는척 하며 무심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용자 아카데미.” “아카데미? 혹시 뭐 훈련 성적 우수자라고 따로 주는 돈이라도 있었어?” “아니. 클랜 오퍼를 받을때 같이 받았어.” “응? 오빠 다 거절했잖아. 그런데도 줬어?” “형. 설마 그러면 먹튀 하신거에요?” 유정과 현이 번갈아 묻자 나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내 한숨을 본 애들의 몸이 또다시 움찔하는게 보였다. 아무래도 처음에 내가 화를 냈던게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는것 같았다. 고작 한숨 하나 쉬었을 뿐인데 유정은 괜한걸 물었나 싶은 얼굴이 되었고 안현 또한 말실수를 했는가 걱정스러운지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입맛을 한번 다시고는 말을 이었다. “그냥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주더라. 나중에 혹시라도 생각이 바뀌면 오라던가. 단순한 선물이라고 주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잖아.” “오호….” 오호는 무슨 오호. 대충 즉석에서 둘러댄 말이긴 하지만 아주 경우없는 변명도 아니었기 때문에 애들은 대충 납득하는것 같았다. 이렇게 거짓말을 할때마다 속이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과거를 얘기할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저 태연한 얼굴로 답할 뿐 이었다. “괜히 체면 세우는것 보다는 그냥 받는게 나을것 같아서. 그렇다고 엄청 여유가 있는건 아니야. 그렇게 많이 준건 아니거든. 이번 탐험에서 투자한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앞으로 여관은 커녕 밥도 먹을 수 없을지도 몰라.” “헤에. 그건 싫은데. 그래서 아까 부랑자들 소지품을 살펴보라고 한거였구나. 난 그거 쫌 마음에 안들더라.” 칠흑의 전갈들이나 늑대들은 돈이 될만한 거리가 없다. 몬스터들 중에서도 돈이 되는 몬스터들이 있고 돈이 되지 않는 몬스터들이 있다. 부랑자들이 많아지는 이유가 바로 같은 사용자를 죽이면 몬스터를 사냥하는것과 비교도 안될정도로 한방에 많은 돈을 벌수 있기 때문에 성행하는 면도 있었다. 그와 반대로 생각하면 당연히 사용자 쪽에서도 부랑자를 잡으면 꽤나 짭짤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솔직히 애들만 없었다면 남성, 여성 부랑자 가릴것 없이 속옷까지 모두 벗겼 가지고 왔을 것이다. 하지만 비자금도 있고 애들 시선도 있는터라 적당히 겉으로 보이는 것들만 챙겨왔다. 일회차에 워낙 아등바등 살아온터라 아직도 무의식 아래 나오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것 같았다. “배부른 소리 하고 있어. 금화는 땅 파면 나오니. 아무튼 오늘은 이만 쉬고 내일 다시 강행군 할거야. 대충 자리 깔고 야영 준비하자.” 내 말에 벌떡 일어나려는 안현을 다시 눕게한 후 나는 배낭으로 손을 뻗었다. 배낭을 살짝 들어보니 아까 부랑자들을 탈탈 벗겨 먹은터라 출발전보다 조금 무게가 나가는것 같았다. 안으로 손을 넣어 침낭을 꺼낸 나는 저녁을 준비하는 유정과 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둘 다 지친 기색이 얼굴에 역력했지만 따로 쇼크를 받은건 없는것 같았다. 조금 더 보완할 부분은 많고, 더 지켜볼 예정이지만 그래도 일단은 안심해도 될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하하. 작가는 글로서 말한다라고 하는데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네요. 코멘트 하나하나에 신경 쓰다보니 아무래도 본분을 잊고 있었던것 같습니다. 다만 토론을 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앞으로 독자분들이 궁금함을 느끼시는 사항에 대해서는 차후 진행될 내용 전개로서 의문을 풀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소중한 조언을 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 리리플 』 1. 사람인생 : 1등 축하드립니다! 요즘 들어 서서히 1등을 차지하는 비율이 늘어나시네요. :) 2. hohokaya1 : 고맙습니다. :) 3. Toranoanal : 하하. 모든 독자분들의 입맛에 맞추고 싶었지만 요즘들어 불가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솔직히 사용자 아카데미 부분을 2회만에 스킵한게 지금은 조금 후회가 됩니다. 조금 욕을 먹더라도 어느정도 진행할걸 그랬어요. 4. 에인트제 : 이보미는 안녕입니다. ㅜ.ㅠ 5. 드래곤음양사 : 하하. 토론을 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다만 앞으로 내용 전개로 궁금증을 풀어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 6. vkfkd54 : 헛. 고맙습니다. 독자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 7. 이러저런한폐인 : 내용을 보고 이해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쓰면서도 많이 걱정을 했거든요. ㅜ.ㅠ 8. 쉬라야 : 고맙습니다! 9. 백인티모시 : 재밌게 읽으셨다니…눈을 뗄 수 없을 정도였다니…감사합니다. ㅜ.ㅠ 10. 내가변해야산다 : 네. 저도 그래요. 진짜 목숨을 위협 받는 첫 전투인데 너무 능숙하게 굴면 오히려 이상하게 다가갈것 같았습니다. :) PS. 오해하시는 분들이 몇분 있어 말씀 드립니다. 후기에 적는 내용은 용량(K)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조아라에 직접 문의해본 결과 <내용>에 후기를 적는건 큰 문제가 될 여지가 있지만 후기는 얼마든지 적어도 괜찮다고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후기에 관한 쪽지들은 그만 보내주세요. ㅜ.ㅠ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코멘트좀 많이 주세요! 그리고 추천도…☞☜)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54 / 0933 ---------------------------------------------- 우리 오빠(형)가 달라졌어요 한참 달게 자던 도중 누군가 내 몸을 흔들는 느낌이 들었다. 침음성을 흘리며 눈을 뜨자 또렷한 안솔의 눈동자가 내 얼굴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어스름한 새벽 칠흑의 숲의 풍경이 시야 안으로 들어온다. 숲 한복판이라 그런지 차가운 한기가 온 몸을 엄습했다. 잠시 마력을 돌려 온 몸의 감각을 순환시킨 후 나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상쾌할정도로 맑아 기분이 좋았다. “별 이상은 없니?” “네에. 없었어요. 오라버니도 안녕히 주무셨어요.” 안솔은 다 같이 있을때는 오빠라고 부르지만 이상하게도 둘만 있으면 나를 꼭 오라버니라고 불렀다. 조금 민망할 뿐이지 엄청나게 듣기 싫을 정도로 소름 돋지는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꾸벅 고개를 숙이며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솔을 보자 뉘집 딸인지 가정 교육 하나는 참 잘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의 인사에 부드러운 웃음으로 화답한 후 현과 유정이를 깨우려 몸을 돌리자 내 옷깃을 꾹꾹 잡아 당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다시 뒤로 고개를 돌리자 솔이 우물쭈물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뭔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것 같았다. 나는 최대한 자상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응. 솔아.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니?” “오라버니…나….” 내 물음에 솔은 여전히 내 시선을 피한채로 땅만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입술을 꾹 깨물더니 비장한 결심을 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할려고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또한 어느정도 속을 긴장시키며 다음에 나올 말을 기다렸다. “…쉬…하고 싶어요.” “…….” “혼자 가는게 너무 무서워서…오라버니랑 같이 갈래요.” “…하고 오렴.” 나는 허탈한 얼굴을 한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솔이도 물러서지 않았다. 내 단호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솔이는 입술을 꾹꾹 물며 내 옷을 잡은 손길을 놓지 않고 있었다. 언제까지 어리광을 부릴 셈인지 한번 단단히 혼을 내려는 순간 달달 떨리는 솔의 눈망울이 눈에 들어왔다. 결국 이번만큼은 한 발 물러서기로 했다. 하지만 안솔을 보면 의구심이 드는건 어쩔 수 없었다. 홀 플레인으로 들어온지 세달이 넘었고, 그말인즉슨 솔이도 스무살 성인이라는 소리였다. 물론 동안이라 많이 어려보이긴 하지만 정신 연령도 있을텐데 가끔 하는짓을 보면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가끔 보이는 그녀의 행동의 이상하게 보이는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언뜻 보면 모를지도 모르지만 나나 유정이나 솔이와 어느정도 지낸 만큼 그녀의 행동이 이상하다는걸 확연히 느끼고 있었다. 예전에 유정이 한번 안현한테 대놓고 물어본적이 있는데 그때 안현은 슬쩍 대답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솔이에 대해 뭔가 숨기고 싶은게 있는것 같았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물어보리라 다짐한 후 나는 솔이와 함께 야영 캠프에서 걸음을 옮겼다. “대충 이정도면 되겠다.” “…….” “솔아?” “오라버니…저 놔두고 다른데 가시면 안되요?” “가만히 있을게. 걱정 말고 볼일 보고 와.” “꼭 믿을게요. 정말로요. 약속 하신거에요.” 솔이는 두번세번 다짐을 받더니 이내 불안한 얼굴로 내 옷에서 손을 떼었다. 슬금이 안으로 들어가는 솔을 보며 나는 품에서 연초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한모금 빨아들이자 안쪽 수풀에서 사락거리는, 옷을 벗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쪼륵이는 솔이 소변을 보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얘는 도대체 남자를 앞에 두고 부끄럽지도 않은건가. 아니면 내가 남자로 보이지도 않는건가. 어느쪽이든 그다지 유쾌한 사실은 아니었기에 나는 죄없는 연초만 쭉쭉 빨아들였다. 연초 한대가 거의 타들어갈때 즈음 소변 보는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그리고 이내 사박이는, 풀을 밟으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가만히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걸 본 솔이는 눈에 보일 정도로 환해지는걸 보자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습니다아.” “어휴. 정말 어리광만 부리고. 자꾸 그러면 못써.” “헤헤. 죄송해요오.” 뭐가 그리 좋은지 헤실거리는 애를 보며 가볍게 타박한 후 몸을 돌리려는 순간 솔이 내 품으로 와락 안겨들었다. 급작스럽게 안겨드는 안솔을 보며 나도 모르게 물고 있던 연초를 떨구고 말았다. 얘가 왜 갑자기 적극적으로 달려드는거지? 내 당황한 얼굴을 보는게 재밌는지 솔이는 상냥한 얼굴로 가슴에 얼굴을 부볐다. “오라버니.” “응, 응?” “솔직히…어제 오라버니가 조금 무서웠어요.” “…그래?” 역시 그랬던가. 조금 귀찮다는 생각에 칼을 목에 쑥 찔렀던게 잔인하게 보인 모양 이었다. 그래도 현재 내 가슴에 안긴 솔의 얼굴이나 몸이 덜덜 떨리는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잠깐 내 품을 음미하던 솔은 이윽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오라버니는 항상 강하고, 다정해요. 아마 오라버니가 아니었다면 저는….” 더는 말을 잇기 어려운지 말 끝을 흐리고 눈을 감는 솔을 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녀를 안고 있는 지금 기묘한 기분이 드는것도 사실 이었다. 지금 내게 안겨 있는 여성 사용자는 후에 광휘의 사제로 각성하는 유명한 사용자다. 전대륙을 통틀어 최상위 사용자들의 모임이라는 오딘 클랜에서 안솔을 모셔갔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그녀의 위명은 대단했다.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활동했다곤 하지만 명성이나 본신이 지닌 능력으로는 상대도 되지 않는게 사실 이었다. 그만큼 안솔은 당시 내 위치에서 까마득한 높이에 있는 사용자 였는데, 지금 이렇게 내게 안겨있고 의지한다는 사실에 말 그대로 묘한 기분이 온 몸을 잠식하는것 같았다. 그런 기분에 이끌린 나는, 나도 모르게 양팔로 그녀를 끌어 안았다. 솔이는 내 행동에 깜짝 놀란듯 숨을 들이켰다가 이내 얼굴이 점점 따뜻하게 풀어지는게 보였다. 왼손은 그녀의 등을 오른손은 그녀의 흑단 같은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나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어제 그 여성 부랑자를 그냥 살려줄걸 그랬나…? 그래서 내가 무서운거니…?” 내 말에 솔이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탓에 가슴이 간질거렸지만 내가 원하는 반응이 나왔기에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솔이는 내 손길이 마음에 들었는지 처음의 불안한 얼굴은 온데간데 없고 간간히 미소를 흘리는 살랑거리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으으응…아니요. 무서워하지 않을래요. 현이 오빠가 그랬어요. 우리들도 살아 남으려면 수현이 형처럼 해야 된다고…정신 다들 바짝 차리라고. 형 아니었으면 우린 다 죽었을거라고…. 무조건 형 옆에 딱 붙어서 시키는대로 하라고…그런만큼 나도 오라버니 믿을래요. 그러니까 오라버니도…저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그런가. 안현이 그런 기특한 소리를 했던가. 이말인즉슨 내가 이제 확실하게 애들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았다는 말 이었다. 지금까지 애들의 태도가 맹목적인 의지였다면 칠흑의 숲에 들어서는 확고한 믿음으로 바뀐것이다. “버리지 않아. 그리고 현이 말은 틀린게 있어. 시키는대로 하는게 아니라, 다 같이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하는걸 원하는거란다. 이런 어리광은….” “알아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이런때라도 잠시 이렇게 하고 싶은걸요.” 조금 더 안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정도도 조절못할 내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슬며시 그녀를 품에서 떼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솔이는 내 손길이 무색하게 다시 품 안으로 얼굴을 돌진하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열심히 할게요. 오라버니가 흡족하실 수 있을만큼 정말 열심히 할테니까…그러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더 이러고 있으면 안되요?” “…….” “머리도 쓰다듬어 주세요. 얼른요.” 내 무언을 긍정으로 알아 들었는지 솔이는 다시 얼굴을 부비적 거리며 나를 보챘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는 얌전히 손을 들었다. 그래도 오늘을 기점으로 솔이 나에 대한 인식 하나가 확연히 달라진 기분이 들었다. * “몸은 좀 어때.” “가뿐합니다. 오늘 일어나서 확인해보니까 내구 능력치가 1 올랐어요. 정말 제 몸이 맞나 싶을 정도로 회복력이 대단한것 같아요. 전보다 더 유연한 기분도 들구요.” “후후. 근접 계열인 만큼 내구 능력치도 신경써. 안 그러면 유리몸 된다.” “크크크.” 안현은 능력치가 올랐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운지 연신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옆에서 유정이 입술을 삐죽이는게 보였지만 그래도 마냥 좋은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현을 보며 나도 조금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체력 올리고 싶은데…. 본인 능력치의 한계를 한참 초과하는 부상을 입으면 내구도가 하락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약간만 초과하거나, 한계의 바로 아래까지 부상을 입는다면 치료가 완벽하다는 전제하에 내구 수치를 올릴 수 있다. 뼈를 깨끗하게 부러뜨리면 다시 붙을때 더욱 단단하게 붙는것처럼 몸이 어느정도 상처에는 아예 적응하는 것이다. 창을 붕붕 돌리며 몸의 건재함을 과시하는 안현을 뒤로한채 나는 야영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간단한 요기로 아침을 해결한 후 우리는 다시 연금술사의 던전을 향해 출발했다. 칠흑의 숲 초입에서 본 흔적들은 절대 부랑자들이 아니라고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현재 나는 그들의 흔적을 쫓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흔적이 없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걸 보니 꽤나 깊숙히 들어간것 같았다. 칠흑의 숲 중후반부 부터는 어지간한 사용자들도 절대로 만만히 볼 수 없는 곳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무리를 하면서 더 안으로 들어갔다는건 뭔가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나는 그 뭔가를 고대 연금술사 비비앙의 던전으로 추측하고 있었다. “오늘도 으스스한게 떼거지로 몰릴 기분이 드네요.” 우경계를 하던 안현이 앞으로 슬쩍 걸어나오며 말을 걸었다. 아마도 어제 늑대 무리들과의 전투를 겪고 하는 말인것 같았다. 말을 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는 현을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확실히 그 전투가 가장 위험했지. 그렇게 떼거지로 나오는 경우는 드물진 않지만 흔한것도 아니라서. 아무튼 탐험을 끝내고 돌아가면 일단 네 장갑도 구하자고.” “장갑…? 아. 방어구요?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받은 기본 방어구는 입고 있는데….” “그건 가죽이라서 그렇게 큰 방어 효과는 기대하기 힘들어. 창병인 만큼 플레이트 메일보다는 아무래도 활동하기 더 편한 사슬 갑옷이나 비늘 갑옷이 더 나을걸.” “아하. 무기는 조금 알아도 갑옷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요. 하긴 어제 전투를 생각해보면 있으면 좋을것 같기는 하더라구요. 방어를 하지 않는 만큼 창을 더 휘두를 수 있으니까…그런데 그런것들 한번에 구매하려면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지 않을까요.” 나는 현의 말에 고개를 주억였다. 정말 명성있는 제대로 된 방어구 상의 갑옷은 초보 사용자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들이 대부분이다. 방어구 장만은 커녕 당장 하루 먹고 살기도 바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들이 첫 탐험을 나서면서 무기를 새로 마련한것도 다른 초보들이 보기에는 엄청난 사치나 다름 없을것이다. “아무래도 그렇지. 중간에 대박을 터뜨리지 못하는 이상 숙련된 사용자가 돼도 어느정도 수입이 많을거란 보장은 없으니까. 결국 지금부터 돈을 알뜰하게 모아 하나씩 차근히 마련해 나가야겠지.” “정 뭐하면 통과 의례때 받은 GP도 있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기각. 예전에도 말했지만 그건 정말 최후의 수단이야. GP는 무조건 아껴둬. 분명 나중에 쓸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일단은 지금 있는대로 해보자고.” “어휴. 어딜가나 돈이 문제네요.” 입맛을 다시며 벌써 애늙은이 같은 말을 하는 현을 보며 픽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일행중 홀 플레인에 가장 적응을 한 사용자라면 단연 현을 꼽을 수 있었다. 전투때 방어가 약해 갑옷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점과 먼 미래까지 생각하는건 높이 평가할만 했다. 잠시 현과 여담을 나눈후 나는 감지와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먼저 들어간 사용자들의 흔적이 더 진해지는게 이르면 내일, 늦어도 모레 안에는 그들을 따라 잡을 수 있을것 같았다. 물론 그들과 같이 행동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운이 좋아 우리가 먼저 발견하게 된다면 당연히 권리를 주장할 생각이었다. 기존 사용자들 이라면 첫발견에 대한 권리정도는 알고 있을테니까. 그러나 먼저 발견하지 못한다고 생각해도 딱히 걱정은 되지 않았다. <우연히 발견했다가 결국 실패하고 전부 죽은것 같던데. 아니 죽었다고 보기에는 좀 그러네. 응? 총 세명. 아니 한명이라고 해야 하나. 무슨 말이냐고 하면 말이지….> 원래 연금술사의 던전은 지금 밝혀지지 않는다. 2년후 내가 절규의 동굴을 밝혀내고, 곧이어 몇개월 후 밝혀지는걸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현재 앞서 들어간 캐러밴이 연금술사의 던전을 발견한다면. 그리고 내 예상이 맞다면 그들은 곧 싸그리 몰살 당한다는 소리였다. 아마 던전 공략에 실패하고 모두 그 안에서 전멸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이 먼저 발견 했다면 일단 한발 물러서면 된다. 던전 주변에 자리를 잡고 몇일 기다렸다가 들어가보면 시체로 변한 그들을 볼 수 있을테니까. 오히려 입구에 있는 함정이나 몬스터들을 어느정도 처리해주면 추후에 진입하기 더욱 수월할지도 모른다. 또한 그들이 가진 장비들을 챙긴다면 제법 짭짤한 수익을 얻을 수 있을것이다. 속으로 이런저런 계산을 마친 나는 발을 더욱 바쁘게 놀리기 시작했다. 얼른 던전을 처리하고 다음으로 점찍은 폐허의 연구소와 절규의 동굴을 탐험하고 싶었다. 애들은 영문도 모른채 속도를 높이는 내 뒤를 따라올 뿐 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현이도, 솔이도 조금씩 생각이 달라지고 있네요. 이제 유정이만 남았군요…. 과연 솔이에게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는 어떤 얘기일까요? 앞으로를 기대해주세요. :) 『 리리플 』 1. CrossDie : 1등 축하합니다. 역시 명성 있는 첫코 탈환자(?) 답게 다시 1등을 차지 하셨군요. 후후후. 2. 사람인생 : 네! 초심을 잊지 않고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코멘트 달아주시느라 수고하시는 사람인생님 고맙습니다. :) 3. 에인트제 : 54회도 부디 즐거운 감상 시간 보내시기를…. (__) 4. GradeRown : 아하하.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겠군요. 수현이 1회차랑 지금이랑 태도에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정도 괴리감이 느껴지는게 사실이고, 그렇게 의도 했으니까요. 가끔 보이는 본모습이 원래 성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체력 질문은 이번회를 통해 부디 해결 되셨으면 좋겠네요. 5. 幻影 : 차후 진행될 스토리 상으로는. 정답입니다. 부랑자들을 죽이는 이유가 살려두면 귀찮아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죽이는 거거든요. 내용을 다시 읽어 봤는데, 떠드는 소리가 거슬려서 죽인 느낌도 확실히 있었네요. 아…그리고…연참은…음.(후다닥!) 6. kiacel : 괴리감은 의도한 거니 앞으로 진행을 조금 더 지켜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변 동료들의 존재감은 확실히 제가 더 신경써야 겠군요. 소중한 조언 감사합니다. :) 7. 네이샤 : 그렇게 생각하실수도 있어요. 그러나 이미 통과 의례나 사용자 아카데미를 거치면서 수현이는 동료들에게 자신의 <특별함>을 입증 했습니다. 애들 또한 수현이를 엄마라 생각할 정도로 눈에 콩깍지가 씌인 상태구요. 가끔가다 고개를 갸웃거리긴 할지라도, <수현이 형(오빠)이라면 그럴수도 있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정도의 존재감을 지니고 있으니 애들도 군말없이 따라온 거랍니다. 방향성은 아마 내용이 전개 되면서 자연스레 잡힐 예정입니다. 기대가 크시다니 제 부담도 커지네요. 그만큼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8. 암향인 : 오늘회 말고 이전회에 언급된 부분이 있어요. 애들이 수현이에게 GP를 얘기했지만, 일단 아껴두라고 말한 내용입니다. 아마 두세문단으로 끝나서 읽지 못하고 지나치신것 같습니다. :) 9. 15420011 : 네. 애들 똑똑해요. 충분히 자신들이 잘 헤쳐 나갈 수 있는데 그냥저냥 하면서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 못하니까 수현이가 화가 난거죠. 아마 <사람을 죽였다.> 또는 <너무한거 아니냐.> 이런식으로 말했다면 말 그대로 지금까지 헛배운거 인증했을 겁니다. 그만큼 수현이 또한 폭발했을 거구요. 10. 블라미 : Thank You. 응원 코멘트 덕분에 제가 타자를 두드립니다. 흐흐흐흐.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코멘트좀 많이 주세요! 그리고 추천도…☞☜)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55 / 0933 ---------------------------------------------- Dungeon Of Alchemist(2)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이동할 수 있었다. 칠흑의 숲 내부로 진입할수록 나뭇잎과 수풀의 검푸른 빛깔이 조금씩 옅어지는게 보였다. 숲 중단 부분을 어느정도 지나가고 있다는 반증 이었다. 어제보다 행군 속도를 비약적으로 높였더니 예상보다 빠르게 중단을 넘을 수 있을것 같았다. “이상하다. 분명 오늘 꿈에서 몬스터를 무지 많이 만났던것 같은데.” “헥헥. 꿈은 원래 반대라고 하잖아. 오빠. 미안한데 조금 쉬면 안될까? 벌써 반나절은 지난것 같은데 한번도 안 쉬었잖아.”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안현. 숨을 몰아쉬는 유정.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지만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채 입술에 여러번 깨문 자국이 나있는 안솔. 다들 군말없이 따라오긴 했지만 그동안 꾹 참고 있던것 같았다. 이쯤에서 어느정도 대휴식을 취할 필요를 느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땅에 엉덩이를 털썩 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캐러밴의 흔적은 아직 남아 있다. 몬스터의 빈도가 거의 없다는 소리는 우리와 캐러밴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볼 여지가 있었다. 앞서 들어간 캐러밴이 몬스터를 이미 처리 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다만 여기서 두가지의 의문점이 생긴다. 연금술사 던전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면 굳이 주변 몬스터를 전부 처리하면서 갈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 또 하나는 몬스터를 처리하고 갔다면 왜 시체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가. 물론 지극히 나를 기준으로 잡은 의문들이라 충분히 열린 해답들을 추측할 수는 있다. 한동안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입맛을 다시고 머리를 비웠다. 지금 고민해도 정답은 나오지 않는다. 결론은 지금 이 캐러밴의 흔적을 따라 최대한 빨리 연금술사의 던전으로 도착하는것. 최악의 경우 그들이 던전을 잡은게 아니라 그냥 들어온걸수도 있지만 내 기억과 여러 정황을 따진다면 실패보다는 성공 가능성이 높았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잃을것도 별로 없지 않은가. 단순히 전투 경험을 쌓는다고 생각하면 어차피 잃을건 없기 때문이다.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나도 조금 쉬려는 순간 이미 앉은 애들한테서 조금의 소란이 이는걸 들을 수 있었다. 뭔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안솔이 어색한 얼굴로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뭘 쓸데 없는걸 궁금해하고 있어. 네 앞가림이나 잘해.” “미친. 아는게 힘이라는 소리도 모르니? 이 무식한 놈아.” “아는게 힘이라는 말도 있긴 하지. 그런데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어울리지 않아서 그래. 넌 그냥 모르는게 약일것 같다.” “뭐라고?” 안현과 유정이 한창 티격태격 설전을 벌인다. 잠시 상황을 보니 현재 최고의 화두인 황금 사자 클랜과 강철 산맥 원정에 대한 얘기들 이었다. 지금 현실을 따지면 안현의 말에 동감하지만, 그래도 한번쯤은 애들한테 얘기를 해두는것도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멍청아. 지금 우리 실력으로 원정이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하냐. 가봤자 개무시 당하고 손가락만 쪽쪽 빨고 구경만 하고 있을걸?” “누가 뭐래? 그럼 왜 그렇기 기를 쓰고 원정이니 진군을 하려고 하는지 궁금하다고.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말했잖아. 쓸데 없는걸 궁금해 하니까 그렇지. 수현이 형 말을 뭐로 들었어? 지금 우리 상황이나 신경쓰자고. 응? 아니면 너 혹시 김한별한테 열등감 있어서 그러냐?” “뭐야?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씨….” 슬슬 험해지는 분위기가 감돌자 나는 슬쩍 한발 안으로 들어간 후 털썩 앉았다. 막 욕설을 쏟아내려던 유정은 나를 봤는지 뜨끔한 얼굴로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안현 또한 볼을 긁으며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둘을 지그시 바라본 후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궁금해 하는건 문제가 없지. 홀 플레인 안에서 정보는 곧 생명이나 다름 없으니까. 물론 단순한 호기심 또는 원정에 참가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물은거면 문제가 되겠지만.” 내 말을 듣자 유정의 얼굴이 환해지는걸 볼 수 있었다. 아마 내가 자신의 편을 들어줘서 그런것 같았다. 안현은 칫 입을 삐죽 내밀더니 대번에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유정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잠시 뻐기는 미소를 흘리더니 이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오빠. 강철 산맥이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 떠들썩 한거야? 여관에 있을때 가끔 보는 사용자들 마다 다 그 얘기들 밖에 안하더라고.” 유정의 물음에 나는 잠깐 생각을 모은 후 대답했다. “현재 홀 플레인은 동, 서, 남, 북대륙으로 국한되어 있거든. 중앙 대륙으로 진출할 필요가 있는데. 중앙 대륙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강철 산맥을 필수로 점령해야 해.” “그럼 점령하면 되잖아?” “저 멍청이가.” 안현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줬다. 나는 유정의 말에 쓰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렇게 쉽게 점령할 수 있다면 벌써 했겠지. 산맥 안에는 지금껏 우리들이 만난 몬스터와는 비교도, 그리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정도의 괴물들이 살고 있다고 하니까.” “그러면 강철 산맥만 넘으면 중앙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거야? 그리고 중앙 대륙에는 도대체 뭐가 있는데?” 끝없이 이어지는 유정의 질문에 나는 잠시 주춤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안현과 안솔 또한 아닌척해도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말을 조심할 필요는 느꼈다. 그러나 어차피 휴식을 하는 도중이고 이정도는 알아도 상관 없기 때문에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자세히는 몰라. 강철 산맥을 넘어도 바로 중앙 대륙이 나올지, 아니면 또 다른 준비 대륙이 나올지는 가봐야 알겠지. 다만 현재 밝혀진 바로는 북대륙 앞에 아틀란타라는 대도시가 있다는걸 고대 문헌으로 확인 됬다고 들었어. 고대 문헌에 불과하지만 새로운 대도시가 있다는 말에 사용자들이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드려는 거지.” “아틀란타…대도시를 차지하면 뭐가 좋은데? 거길 점령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 “아니. 그건 아무도 몰라. 다만…그전에 한가지 물어보자. 유정아. 너는 개인이 홀 플레인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장 중요한게 뭐라고 생각해?” 유정은 내 물음에 눈을 감고 생각하더니 손가락으로 머리를 배배 꼬면서 대답했다. “힘. 능력. 능력치.” “그렇지. 즉 개인의 능력이 가장 중요하지. 힘이 있다고 무조건 살아 남는건 아니지만 어쨌든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은건 사실이잖아.” “응응. 그러면 아틀란타를 얻는 사용자들이 힘을 얻을 수 있는거야?” 고개를 주억이는 유정을 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비슷해. 북대륙은 현재 점점 포화 상태로 가고 있어. 하나의 대륙이 가지고 있는 던전은 무한한건 아니거든. 왠만한 원정은 전부 이뤄진 상태고. 물론 얼마전 뮬이 발견 되긴 했지만 강철 산맥이니 소도시니 여러 이유 때문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편이야. 뮬을 비롯한 여러 도시들의 안정화가 완료 되면 그 후에는 말 그대로 할게 없어. 간간히 나오는 몬스터를 잡는 수 밖에 없지. 그건 다른 대륙들 또한 마찬가지야. 그러면 완전한 발전과 포화 상태에 다다른 북대륙 사용자들 또한 더이상의 힘을, 그리고 능력을 키울 수 없게 되는거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불투명한데 힘이 없으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잖아. 더구나 새로 도착하는, 전력이 될 가능성이 있는 신규 사용자들을 키울수도 없고.” 조금 길게 말하긴 했지만 아직 부족한 감이 있었다. 나는 목을 한번 가다듬고는 무서울 정도로 내 말에 집중하는 애들을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만약 강철 산맥을 넘어 아틀란타를 개척하게 된다면, 우리는 새로 발전할 여지가 있는 터전을 잡게 되는거지. 새로운 몬스터, 새로운 원정, 새로운 던전, 새로운 장비등등. 무엇보다 지금은 우리들이 비교적 능력치가 낮은편이라 비교적 수월하게 올릴 수 있을지 몰라도 나중에 한계에 다다르면 정말 지독할 정도로 능력치가 안오른다고 하잖아? 몇년전 대도시 바바라를 개척했을 때 업적 보상으로 개척에 참여한 사용자들 모두의 능력치가 어느정도 올랐다고 들었거든. 그 외 짭짤한 보상이 가득한 원정들도 전부 독차지 했다고 하니까. 그래서 기를 쓰고 강철 산맥을 넘으려고 하는거지.” 물론 아틀란타를 점령한 후 또 넘어야 할 산은 있다. 그때는 정말 타대륙 사용자들과 경쟁을 해야 한다. 신대륙이라 불리는 아틀란타, 라그나로크등에 둘러쌓인 중앙 대륙의 대도시 테라. 그리고 테라 안에 있는 제로 코드를 얻기 위해서 치렀던 희생이 생각나자 나는 순간 쭈볏이 소름이 돋았다. 내 말이 끝나자 애들은 모두 벙찐 얼굴로 나를 보았다. 입을 쩍 벌린게 아마 꽤나 놀란것 같았다. 이내 눈만 꿈뻑거리던 안현이 정신을 차리고 살짝 급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혀, 형. 그러면 우리들도 대도시에 남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요. 아. 물론 형의 선택을 의심하는건 아니에요. 그래도 형이 그렇게 말씀 하시는걸 들어보니까 정말 혜택이 어마어마 하잖아요. 우리들도 대도시 바바라에서 어느정도 실력을 키우고 원정대 말석이라도 참가를 한다면….” “그러니까. 김한별 고것이 지금쯤 얼마나 거만하게 우리를 생각하고 있겠어? 아오. 생각만 해도 열받네.” 결국 김한별 이었냐. 안현과 유정은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오직 안솔만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나를 보고 있었다. 눈빛에 신뢰감이 가득한게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 이후로 나를 무조건 믿는것 같았다. 이러다 흔히들 말하는 광신도가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뭔지 모를 기대감도 들었다. 나는 잠시 헛기침을 해 애들을 조용히 시켰다. “흠흠. 예전에도 말했지만. 아.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황금 사자 클랜이 아닌 다른 클랜 출신 교관들의 말을 들어보면 지금 원정을 가는것도, 그리고 원정에 참여하는것도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해. 적어도 내 생각에는 말이다. 물론 확신은 못하지만 난 그들의 말을 더 신뢰할 수 있을것 같아.” 애들은 내 말에 그래도 조금은 안도감이 드는 얼굴이 되었지만 동요하는 기색이 가신건 아니었다. 솔직히 조금 답답한 마음이 드는것도 사실이었다. 그 원정대가 어떻게 개박살이 나는지, 그리고 그 후 황금 사자 클랜이 얼마나 처참하게 몰락하고 욕을 먹는지 알려줄 수만 있다면 당장 알려주고 싶었다. 속으로 한숨만 나왔지만 그래도 애들을 이해 시키려면 그만한 타당성 있는 근거가 필요했기 때문에 나는 계속 설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일단 최소한의 연막은 해둘 필요는 있었다. “휴. 잘 들어. 그렇다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에 불과하니까 너무 껴듣지는 말고. 지금 황금 사자 클랜은 어느정도 북대륙의 안정화가 진행 됬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서둘러 원정을 준비하는것 같아.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영 아니올시다지.” “오빠. 그런데 그 꼭 안정화란걸 한 후 원정이 가능한거야? 조금 무리하더라도 성공만 하면 대박 치는거잖아.” “그건 그래. 문제는 그 도박에 담보로 들어가는게 사용자들의 목숨이라는 거지.” 목숨이라는 단어를 꺼내자 유정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가 조금전에 비해 상당히 무거워진것 같았다. “관심이 있어서 대도시 바바라를 점령했을때 기록을 읽어봤거든. 읽고 나서 처음 느꼈던 감정은 바로 처절함 이었어. 바바라도 그정도인데 그보다 윗선에 있는 아틀란타가 과연 녹록할까? 그렇진 않을거 같아. 강철 산맥의 원정을 성공하려면 현재 자신들이 관할하는 대륙을 포화 상태로 만들어야 해. 완벽하게 포화 상태로 만들어 현재 자신들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전력을 뽑아내고 신규 사용자들도 어느정도 확보한 다음 원정을 생각할 수 있다고. 북대륙은 지금 포화 상태로 진행하는 중이지 아직 포화 상태가 아니잖아. 당장 우리가 있는 뮬만 봐도 원정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여럿 있을것이고. 황금 사자 클랜은 전대 로드의 꼴을 보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것 같으니…쯧.” “응? 전대 로드요?” 순간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에 나는 앗차하고 말았다. 다행히 앞서 기록을 읽었다는 연막을 쳐놨기 때문에 무마할 말이 떠올랐지만, 그래도 앞으로는 말을 더욱 조심해서 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잠시 놀란 속을 가다듬고는 태연한 얼굴로 안현을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대도시 바바라를 점령하는데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라고 하더라고. 너희들도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몇번 들어봤을걸? 대단하지. 고작 일반 검사 클래스로 현재 최고의 클랜이라 불리는 황금 사자 클랜을 창설하고 그정도의 업적을 쌓았다는게.” 내 말에 고개를 주억이는 애들을 보자 나는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원래 홀 플레인도 바바라를 점령하기 전에는 서쪽의 일반 도시 헤일로와 소도시 베스, 도로시를 기반으로 잡고 있었다고 하더라고. 나름대로 동쪽의 도시들을 안정화 한 후 대도시 바바라 공략에 나섰는데 결국 그때 입은 상처를 치료하지 못해 죽었다고 하더군.” “아마 그 사람만 아직 있었다면 벌써 아틀란타로 진입하고도 남았을거라는 하던데요.” 지랄. 순간 밖으로 내뱉을 뻔 했던 단어를 나는 간신히 다물 수 있었다. 실제로 아틀란타로 진입하는 시기는 황금 사자 클랜의 해체 후 몇차례의 내전이 끝나야 간신히 이뤄지는 일 이었다. 바바라를 개척한건 인정하지만 그 사람이 살아 있었다고 해도 강철산맥을 점령할 수 있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튼 홀 플레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개인의 힘도 중요하지만 여러 방면에 걸쳐 많은 지식을 알고있는것 또한 중요했다. 조금 긴 휴식을 취하긴 했지만 그래도 애들한테 유익한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튼 대충 상황은 이러니까 알아 두기만 해. 지금 원정은 참여할 자격도, 의미도 없으니까 그냥 깨끗이 잊어버리고. 지금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돼.” 이번에는 안현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유정을 바라보았다. 유정은 샐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슬슬 제 3의 눈을 사용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 내 예상이 맞다면 아마도 1일~2일 안으로 연금술사의 던전을 발견할 수 있을것이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자. 칠흑의 숲 부분은 이정도로 마무리가 되겠네요. 다음회 부터는 진정한 연금술사의 던전 스토리가 이어집니다. 과연 주인공 일행의 행보는 어떨지, 그리고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 많은 응원과 관심 부탁 드립니다. 1. CrossDie : 하하하. 1등 축하 드립니다. :) 2. 에네르기 : 언제나 성실 연재하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3. 세류인 : 이번회를 통해 일부지만 의문을 해소하셨기를 바랍니다. 홀 플레인의 존재 의의라던가 목표가 벌써 나오면 결말과 관련된 중요한 부분을 이미 알고 가시는거나 다름 없어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단은 <생존>에 초점을 맞추시면 됩니다. 앞으로 전개될 내용을 기대해주세요. :) 4. GradeRown :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리고…시체 강간…음. 조금 끔찍하네요. 원하시는 분들이 많으시면 써볼수는 있겠지만, 솔직히 저 개인적으로는 내키지 않습니다. 5. 幻影 : 후후. 幻影님의 지론은 일반적으로 맞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솔의 성격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에 어느정도 복선이 깔려 있답니다. 앞으로의 전개를 기대해주세요. :) 6. Toranoanal : Toranoanal님의 코멘트는 언제나 절 두근거리게 만드네요.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 완료 했습니다. 7. 카타무네나이 : 아마 첫 H신이 나올 경우 수현이의 정력에 상당히 놀라실듯. 난봉꾼 수현이(?!) 체력 문제마저 해결해버리면 그야말로 답 없는 먼치킨이 되버려서요. 중간중간 보완할 예정은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 8. hohokoya1 : 흐흐. 뮬을 떠날때까지만 좀 기다려주세요. 그때가 되면 진짜로 보시는 분들이 시원할 정도로 행보가 거침이 없어집니다. 물론 지금도 어느정도 본색을 드러내고 있지만요. 후후후. 9. 사람인생 : 어이쿠. 감기에 걸리셨다니…ㅜ.ㅠ 얼른 나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나저나 사람인생님의 계획은…후후후.(?!) 10. 레필 : 하하하. 보내주신 쪽지 감사히 받았습니다. 제 작품을 높게 평가해주신점 대단히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 또한 독자의 입장이라 투베에 오르는 작품들을 항상 재밌게 보고 있는지라. 언제 한번 물량 공세를 계획해야 겠네요.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코멘트좀 많이 주세요! 그리고 추천도…☞☜)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56 / 0933 ---------------------------------------------- Dungeon Of Alchemist(2) “젠장할! 또…늑대 자식들 이라니!” “투덜댈 시간 있으면 얼른 대형안으로 들어와!” 나는 재빨리 안솔의 앞을 막아선 후 안현의 팔을 끌어 삼각진을 구성했다. 눈 앞에 보이는 늑대들의 숫자는 잠시간의 눈대중으로 셀 수 없을만큼 어마어마한 물량을 자랑하고 있었다. 놈들의 폭발적으로 흘리는 흉성에 피부가 따끔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갑자기 캐러밴의 흔적이 감쪽 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흔적이 더 강하게 남아야 정상인데, 어느 순간부터 흔적이 뚝 끊기고 만 것이다. 어떻게든 다른 흔적이라도 찾으려 한동안 주위를 배회 했지만 귀신에 홀린듯 단서를 잡을 수 없었다. 결국 제 3의 눈을 발동하려는 찰나 운 나쁘게 늑대들의 습격을 받은것이다. 칠흑의 숲 늑대들이라고 해도 현재 내 상태로는 100마리도 넘게 홀로 감당할 자신은 있었다. 다만 문제는 애들 이었다. 전에 스무마리가 넘는 숫자로도 헤맸는데 이번에 보이는 숫자는 그 배를 넘을것 같았다. 처음 상대하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얼추 마흔 마리는 넘는 놈들이 우리를 보며 눈깔을 희번덕 거리고 있으니, 갓 나온 햇병아리나 다름없는 애들이 겁을 집어먹는것도 당연한 일 이었다. “오, 오빠.” “물러나지마!” 내 외침에도 불구하고 유정은 자신도 모르게 한발자국 물러나고 말았다. 그러자 늑대들이 일제히 울음 소리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마흔이 넘는 놈들의 소리를 동시에 듣자 안현, 안솔, 유정은 모두 겁먹은 얼굴로 주춤거리고 있었다. 옆에서 안현이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차마 되물어볼 틈도 없이 늑대들은 일제히 우리들과의 거리를 빠르게 좁히고 들어왔다. 이대로면 당한다. 애들을 다독일 틈이 없었다. 유정과 안현 모두 멍한 얼굴이 되었다가 이내 핫 정신을 차리고는 무기를 움켜쥐는게 보였다. 그나마 마지막에 정신을 차린데 위안을 삼을만 했지만 그래도 현재 상황이 불리한건 변함 없었다. 나는 이를 까득 깨문채 검을 뽑았다. “안솔. 잠시 나를 보호로 보조하고 조금씩 뒤로 물러나. 그리고 지금부터 나는 대형을 이탈한다.” “네, 네? 오빠? 오빠!” 대답할 시간도 납득시킬 시간도 없이 나는 검을 쥐고 앞으로 나섰다. 앞으로 툭 튀어 나오는 나를 보자 늑대들은 입을 쩍 벌리며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었다. 뒤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지만 이번에는 단순한 원호로 전장을 조율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정도의 숫자면 애들이 따라올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결국 일단 해답은 내 실력을 조금 더 드러내는 방법밖에 없었다. 곧이어 나와 늑대들의 첫번째 격돌이 시작되었다. 나 또한 한번의 발돋움으로 놈들의 중앙으로 들어간 다음 마력을 담은 검으로 횡으로 휘둘렀다. 그리고 이어진 결과는 내 예상을 벗어나 스스로도 놀라고 말았다. 검술 전문가의 권능이 새삼스럽게 대단하게 다가왔다. 검을 수련한 내 경험과 특수, 잠재 능력들과 내는 시너지 효과는 이전과는 궤를 달리하는 위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단 한번의 베기로 무려 여섯마리의 늑대들의 피분수를 쏟아내며 위로 뛰어오르는게 보였다. “보호(Protect)!” 마침 타이밍 좋게 솔이가 나한테 보호를 걸었다. 기세 좋게 달려오던 늑대들은 설마 한칼에 이정도의 동료들이 당할줄을 몰랐는지 당황한 몸짓을 보이며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에 불과했다. 아직 숫자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너덧 마리는 애들이 있는 곳으로, 그리고 아직 남은 서른 마리는 나한테 들러붙기 시작했다. 양 방향에서 달려드는 늑대 두마리를 순식간에 처리한 나는 바로 곧바로 몸을 돌려 뛰어오르던 늑대의 몸통을 베어 갈랐다. 뜨거운 피가 내 온몸을 적신다. 그 와중에 슬쩍 애들을 보니 다행히 정신을 차리고 사납게 달려드는 늑대들을 상대로 선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늑대들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불리한(?) 전투에 들어선 나는 검을 늘어뜨린채 다시 한번 호쾌하게 주변을 갈랐다. “캐캥!” 스릉! 한번의 칼놀림으로 한마리를 잡는 수준이 아니다. 두마리, 세마리가 기본으로 걸리고 크리티컬이 터지면 아까처럼 6마리가 날아간다. 이미 검은 내가 휘두른다고 생각하기 전에 최선의 검로를 따라 물 흐르듯 베어가고 있었다. 신검합일의 발동 이었다. “캐캥! 캥!” 스릉! 스릉! 연이어 칼을 휘두르자 또다시 정면으로 달려들던 놈들의 몸통이 깔끔하게 베어졌다. 그리고 뒤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몸을 돌리려는 순간, 내 허벅지에 무언가 꽉 무는 기분이 들었다. 일단 뒤로 칼을 휘두르면서 고개를 숙이자 한놈이 내 허벅지에 이빨을 깨문채 끙끙거리고 있었다. “네가 뚫을만한 내구가 아니란다.” 나는 조용하게 속삭이고는 아래로 검을 쑥 내려 찔렀다. 그러자 놈의 머리에서 울컥 피분수가 솟아 올랐다. 원통한 얼굴로 쓰러지는 늑대를 대충 발을 한번 털어 밀친 후 나는 마치 검귀처럼 주변을 날뛰었다. 한동안 실컷 검을 휘두른 후 다시 몸을 돌리려는 순간 나는 주위가 조용해진걸 느낄 수 있었다. 전투는 어느새 소강 상태로 들어가 있었다. 처음 마흔 마리를 넘던 늑대들은 어느새 여덣 남짓한 숫자로 줄어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서른 마리가 넘는 늑대들이 도륙된 것이다. 조금 실력을 내보인다는게 도가 지나친 셈이다. 서서히 몸 안을 지배하는 살육 본능에 진한 미소를 짓자, 낑낑거리던 늑대들이 슬쩍 한걸음 뒤로 물러나는게 보였다. 그에 맞춰 살짝 한걸음 내딛자 그때까지 슬금슬금 눈치만 보고 있던 늑대들은 이내 깽깽거리며 뒤도 안돌아보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딜 도망가려고. 전투에 취해 얼른 몸을 놀리려는 순간 뒤에서 나를 부르는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형!” “오빠!” “오빠아!” 애들의 외침을 들은 순간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등을 돌리고 있어 내 미소를 보진 못했을 테지만 어쨌든 이번 전투는 지나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어떻게 하지? 뭐라고 하지? 라는 생각들이 머리속을 메운다. 그 때. 막 고개를 숙인 순간 온 몸을 피로 적신 몸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 피 냄새를 맡던 나는 이내 좋은 생각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이럴때마다 연기를 해야한다는 사실이 서글프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방금전 내 움직임은 확실히 도를 지나친 감이 있었으니까. 의심은 사소한데서 싹트는 법이니 미리 싹을 잘라두는게 가장 좋았다. “우욱!” “형! 괜찮아요?” 얼른 내게로 달려오는 애들의 기척이 들리자 나는 연속해서 헛구역질을 하면서 몸을 바닥으로 늘어뜨렸다. 물론 일부러 숨을 거칠게 몰아 쉬는것도 잊지 않았다. 피를 토하면 금상첨화 겠지만 그랬다가는 다시 돌아가자고 난리를 부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랐다. “후욱, 후욱!” 온 몸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내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자 애들의 어쩔줄 몰라하는 얼굴이 들어왔다. 현은 얼른 가방에서 물약을 꺼내고 있었고, 솔이는 재빨리 치료 주문을 읊조리고 있었다. 그리고 유정은 얼른 내 옷을 벗기려고 하고 있었다. 뭐, 뭐야. 얘 지금 뭐하는거야? “형! 형! 정신 차려요!” “오빠! 오빠아!” “시, 시끄러워. 떠들지 좀 마….” “형. 얼른 이거 마셔요!” 내 입으로 물약병을 들이미는 안현을 보며 나는 크게 고개를 흔들고는 잠시 손을 저었다. 어느새 내 상의를 반정도 벗긴 유정은 안으로 얼굴을 쑥 들이밀고는 면밀하게 살피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뭐야. 외상은 없는데? 설마…하체를 다친건가?” “크윽…제발 다들 가만히 좀….” 천천히 마력을 돌리던 나는 이내 몸에서 피어오르는 흰 연기를 보며 다급한 얼굴로 솔이를 보았다. 아마 솔이 같은 우등생 이라면 분명 알아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 치료 주문을 외우던 솔은 내 몸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아지랑이를 보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비켜요!” “꺅! 얘, 얘가 갑자기 왜이래?” “비키시라구요!” 지금껏 한번도 보인적 없던 잡아먹을듯 달려드는 솔의 눈빛을 본 유정은 몸을 움찔거리며 물러섰다. 이윽고 솔은 내 가슴에 손을 대더니 천천히 내 몸 안으로 마력을 침투시켰다. 아마 내 몸 안의 상황을 보려고 그런것 같았다. 나는 이때를 노려 화정을 동반한 마력을 거세게 일으켰다. 언뜻 보면 심하게 날뛴다고 볼 정도로. “마…말도 안돼!”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마…마나가 폭주를 일으키고 있어요. 역전 현상 같아요!” “역전 현상? 그러면….” “으아앙!” 솔이는 말을 끝낸 후 울음을 터뜨리며 내 얼굴을 감싸 안았다. 내 얼굴에 솔의 따뜻한 눈물과 숨결이 흘러드는걸 느꼈다. 안현과 유정 또한 마나 역전 현상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는 있는지 망연한 얼굴로 나만 바라보았다. “제길…그때 멍하게 있는게 아니었는데…!” “어떻게 해요…도대체 어떻게….” “…다들 조용히 좀 해라.” 이쯤되면 됬다 싶은 나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는 연기를 했다. 그러자 눈물을 죽죽 흘리던 솔도, 현도, 유정도 모두 대번에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들 무슨 초인이라도 보는 얼굴 이었다. 나는 여전히 온 몸에 피어오르는 흰 여기를 보며 가부좌를 틀었다. 애들은 대충 내가 뭘 하려는지 알고는 얼른 내 몸에서 떨어졌다. “다들…잠시만 주변을 경계해줘.” 1초에 3번씩 고개를 끄덕거리는 애들을 본 후 나는 천천히 명상에 들어갔다. 관조에 한번 들어가면 시간 가는줄 모르니 너무 깊게 빠지면 안될 일 이었다. 어차피 제 3의 눈을 제대로 활용할 일도 있었으니까 지금 하는게 나을것 같았다. 분명 흔적이 점점 더 강해지다가, 어느새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건 결계였다. 다만 결계면 마력의 반응이 느껴져야 하는데 한톨의 기운도 느낄 수 있는게 대응 결계가 아닌 길을 이용한 진로 결계의 종류인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제 3의 눈을 발동후 주변을 중점으로 숲 주변을 자세하게 훓기 시작했다. * “후우….” 분석을 마친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 통과 의례에서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을 보는 만큼은 아니었지만 단순히 정보를 보는것보다는 훨씬 힘들었다. 그래도 사라진 흔적은 발견했다는것에 위안을 삼고 감았던 눈을 번쩍 뜨자 바로 눈 앞에서 나를 보며 깜빡이는 두 쌍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깜빡. 깜빡깜빡. 깜빡? 깜빡깜빡? “…….” “오빠?” “오라버니?” 안현은 살벌한 얼굴로 창을 든 채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애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마침 녀석을 보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서서히 현의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지는게 보였다. 내 얼굴을 미친듯 더듬거리는 애들을 어렵게 떼어낸 후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오빠. 몸은? 몸은 괜찮아? 응?” “일단은. 억눌러 놨으니까 무리만 하지 않으면 돼.” “형. 이거요. 어서요.” “아, 아니. 마나 역전 현상에 체력 물약은….” 소용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안현의 얼굴을 보자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어색한 얼굴로 물약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이 물약을 나에게 먹이고 싶은 모양 이었다. 내가 물약의 마개를 따고 꿀꺽꿀꺽 마시는 동안 애들은 나를 따라 고개를 위로, 다시 아래로 따라오고 있었다. 내가 왜 그러냐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자 유정은 풀이 죽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오빠. 우리 이번에는 이쯤에서 되돌아가는게 좋지 않을까.” “헛소리 하지마.” “솔이한테 들었어. 마나 역전 현상은 한번에 걸쳐 일어나는게 아니라 한번 발현한 완벽하게 치료하지 않으면 다음번에 또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일단 억눌러 놨다고 했잖아. 나중에 도시로 가서 제대로 치료하면 돼.” “그래도….” “그런거 고민할 시간에 현재 너희들…. 어휴. 아니다. 조금 나아지는가 싶더니 다시 원상태로 됬어. 괴물들을 상대로 한발 물러서는건 절대로 하지 말라고 배우지 않았어? 그건 놈들한테 나는 너희들이 무섭다는걸 대놓고 알려주는 셈이라고.” 물론 애들도 조금 억울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한번에 마흔 마리가 넘는 늑대들을 본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아무튼 내가 일말의 재고할 가치도 없다는 말투로 말을 자르자 현과 유정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나보고 왜 멋대로 뛰어 나갔냐고. 대형을 지키지 않은건 너 아니냐고. 이렇게 쏘아 붙이면 단단히 혼을 낼 생각 이었는데 그래도 지들이 잘못한건 알고 있는것 같았다. 내가 타박 했음에도 불구하고 애들은 여전히 걱정스런 낯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마 제 3의 눈을 발동하는 동안 얼굴을 몇번 일그러뜨린게 유효한 모양 이었다.(이건 진짜로 힘들었다.) 나는 잠시 체조로 몸을 풀고는 내 입술만 주시하는 애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되돌아갈 생각은 없어. 나 때문이라면 더더욱. 그러니까 다들 정신들 단단히 잡아. 이번에는 그럴수도 있다고 여기겠지만 다음에 또 똑같은 태도를 보이면 정말 가만 안둘거야.” “혀, 형. 하지만…솔이가 마나 역전 현상은….” “하지만이고 저지만이고. 내 몸 상태는 내가 잘 알아. 아직 할만해. 걱정 말고 너희들이나 잘해.” 내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애들은 느릿하게 자신의 짐을 챙기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얼굴이 다들 시무룩하게 죽은게 늑대들을 만나기전 조금씩 풀리던 분위기가 단 한방에 가라 앉은것 같았다. 순식간에 떨어진 사기를 보며 나는 내가 자리하는 위치를 실감할 수 있었다. 내가 발걸음을 돌리자 애들의 혹시나 하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절대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일단 오던 길을 짚어야 한다. 도중에 흔적이 사라졌던 곳까지 되돌아가 방향을 비틀 필요가 있었다. 내가 흔적을 찾지 못한건 예상대로 진로 결계가 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 한걸음에 다른 세상을 볼 수도 있다는 진로 결계. 드디어 연금 술사의 던전의 실마리를 잡았다는 생각에 절로 설레이는 기분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1. 베스트 지수는 어제 조아라에 문의했습니다. 선작을 고의로 뺀다고 해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하네요. 제가 잘못 들은건지, 아니면 잘못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올릴때마다 항상 선작으로 누가 장난치는 기분이 듭니다. 2. 친인척 한분이 교통 사고를 당하셨다고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평소에 저를 많이 아껴주시던 분 입니다. 문제는. 현재 굉장히 위급하신 상태라고 합니다. 일단 아버지가 급히 내려가셨는데 아직 소식이 없네요. 전화도 안 받으시고…. 리리플을 간단히 하면, 수현이는 현재 사용자들을 통틀어 최상의 위치에 있습니다. 누구를 맞아 싸우던지 초반 20분에 한해서는 우위를 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전력을 다한다는 가정에서요. 다만 체력이 여전히 발목을 붙잡고 있습니다. 1:1을 한다고 해도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해집니다. 스탯 포인트는 "정말로." 잘 주지 않는 편 입니다. 그래서 통과 의례대 포인트를 받은 수현이 굉장히 놀란것이죠. 아마 앞으로 스탯 포인트를 업적 또는 실적으로 받는 일은 극히 드물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쓰다보니 기분이 반영됬는지 엄청 음울하게 됬길래 조금 밝게 바꿔보려고 했는데 전혀 나아진것 같지 않습니다. 일부러 신나게 떠들어도 보고 농담도 해봤는데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니 무서울 정도로 굳어 있더군요. 그러면서 타자는 제 기분과는 다르게 나간다는게 참 무섭습니다. 머리가 복잡하네요.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리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57 / 0933 ---------------------------------------------- Dungeon Of Alchemist(2) “잠시만 대형을 변경하는게 좋겠다.” “네? 아. 네. 어떻게…?” “내 뒤로 한명씩 일렬로. 그리고 뒤에 선 사람은 앞에 있는 사람의 옷깃을 잡아. 잡으면 절대 놓치면 안된다.” 평소라면 왜 그러냐고 한번 반문을 할법도 한데 애들은 내 말이 떨어지자 신속하게 행동으로 옮겼다. 잠시 작은 소란이 일었지만, 곧이어 내 뒤를 선점한 안솔이 씩 웃으며 내 옷깃을 꾹 붙잡는걸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빠릿하게 움직이는지 대충 이해가 가는것 같았다. 내 뒤로 안솔, 유정, 안현이 차례대로 선걸 확인한 후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우리들이 진입할 공간은 진로 결계(進路 結界)라고 한다. 조금이라도 길을 잘못 들어서면 바로 서로간에 길이 갈릴지도 몰라. 그러니까 서로를 잡은 손을 절대로. 절대로 놓으면 안돼. 가능하면 내 발자국을 따라 밟는게 좋고. 그리고…아니다. 그럼 간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절대 놀라지 말라고 덧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말을 아꼈다. 앞으로 어떤 광경으로 변할지는 나 또한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속을 가다듬은 후 천천히 한걸음씩 내딛었다. 애들은 내 말에 착실히 따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가끔식 쏟아지는 의문감을 동동 띄운 시선은 있었다. 나는 일단 제 3의 눈 발동을 유지한채로 신중하게 걸음을 밟아 나갔다. 한걸음. 두걸음. 세걸음…. 발자국을 좇느라 시선이 아래를 향하고 있었지만 내가 제대로 나아가고 있는건 느낌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들의 주변을 둘러싼 풀들의 빛깔이 본래의 영롱한 빛을 되찾고 있었다. 뒤에서 간간히 터져 나오는 감탄 섞인 목소리도 내 확신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렇다고 연금술사의 던전이 곧바로 나오는건 아니었다. 애들은 맘 편히 내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을지 몰라도 정작 나는 고도의 집중력을 유지한 상태로 흔적 하나하나를 짚어내며 걷고 있었다. 제 3의 눈 하나를 오랜 시간동안 유지하는것도 절대로 쉽게 볼 일은 아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걸까. “후우. 이제 그만 손 떼도 돼.” 완전히 결계 안으로 들어선 후 목표하던 장소에 도착했다. 거의 40분을 넘는 추적을 계속한 결과 주위를 감싸던 이질적인 공기가 모두 사라진것 같았다. 나는 한번 숨을 몰아 쉰 후 여지껏 내 옷깃을 붙잡고 있는 손길을 느꼈다. 가끔 꾹꾹 잡아 당기는데 정말 거슬렸다. 살짝 고개를 돌린 후 손을 떼게할 목적으로 솔의 손등을 잡았다. 보드랍고, 따뜻한 감각이 내 손바닥을 통해 들어왔다. 내가 손등을 잡자 안솔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나를 보더니 이내 얼굴을 발그레하게 물들였다. 거슬리니까 손좀 그만 떼라고 하는 와중에 잡은건데…. 손바닥을 빙글 돌려 내 손을 부여 잡더니 이내 놓지 않으려 하는 손을 억지로 떼어낸 후 나는 남은 애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내 신호를 받은 현과 유정도 내 옆으로 속속이 모여들었다. 다들 내 얼굴만 멀뚱히 보고 있어 나는 그들 전부를 더욱 안쪽으로 끌어들였다. “와….” 안현은 눈 앞에 우뚝 서 있는 낡은 대리석으로 세워진 성을 보며 탄성을 흘렸다. 내가 손가락을 들어 앞을 가리키자, 솔과 유정이 또한 멍한 얼굴로 성을 바라보았다. 거무칙칙한 숲만 보다가 영롱한 빛깔을 뿜는 수풀에 둘러싸인 성을 보자 할 말을 잃은것 같았다. 한동안 구경만 하던 안현은 이내 넋을 잃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성은….” “고대 연금술사 비비앙의 던전…으로 추정하고 있어. 어디까지나 들어가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넋을 잃은 애들을 보며 나 또한 속으로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유 능력을 고를때 정말로 많은 고민을 했었다. 다른 엄청난 능력들을 놔두고 제 3의 눈을 선택한건 홀 플레인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그리고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것 같아서였다. 예전에는 정말 갖은 고생을 다해도 동굴이나 던전을 찾기 힘들었는데 이렇게 조금의 정보만 갖고 찾아내자 정말로 선택을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설마 했는데 정말로 발견하실줄은 몰랐어요.” “나도 몰랐어. 그냥 흔적 따라 감 따라 간건데…초심자의 운이라고 해야되나.” 나를 보는 현의 눈에는 대단하다는 눈빛이 가득 깔려 있었다. 나는 겸손하게 대꾸했다. 앞으로 맘 먹고 탐험을 나서는 족족 이런 일을 겪을텐데 벌써 놀라면 어떡하나. 그러나 마냥 기뻐할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금은 겉으로 둘러쌓인 평화로운 광경에 다들 탄성을 지르고 있지만, 그 안이 얼마나 지옥 같은지는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까르르. 오빠. 성 진짜 예쁘다. 던전이라고 하면 무슨 이상하고 음침한 시설을 생각 했는데.” 그거 맞아. 안으로 들어가서 지하로 내려가면 나올걸. 유정의 중얼거림에 나는 속으로만 대답했다. 벌써부터 분위기를 깨놓고 싶지는 않았다. 안솔 또한 설레임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꼭 하나의 요새를 보는 기분이에요. 영화에서만 보던….” 솔이 몽롱한 눈동자로 말하자 현의 얼굴에 씁쓸한 기색이 스치는걸 볼 수 있었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었지만 왠지 영화라는 단어에 키워드가 있는것 같았다. 유정이는 얼른 들어가고 싶어 안달이 난 얼굴 이었다. 한껏 달아오른 몸짓으로 어느새 앞으로 나서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풀이 죽었던 애들이 단순히 환경에 바뀌자 다시 행동이 바꼈다. 얘들도 은근히 기분파인것 같았다. “오빠는 정말 대단해. 분명 아까 지나쳤을때는 성은 코빼기도 안 보였잖아? 도대체 어떻게 이런걸 발견한거야?” “글쎄. 그냥 운이 좋은가 보지.” “에~이. 맨날 오빠가 기록이다 뭐다 보고 있는거 알고 있거든? 정말 오빠 말대로 하늘에서 별을 땃네?” 유정의 말에 나는 미미한 웃음만 흘렸다. 문득 김한별이 머리에 떠올랐다. 지금 뭐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만약에 같이 왔다면….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둘이서만 있을때 또 엄청나게 따박따박 따지고 들었겠지. 아무튼 아직 마음을 놓기에는 이른 감이 있었다. 아니. 이른게 아니라 지금부터 시작이나 다름 없었다. 성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애들도 허둥지둥 내 뒤를 따라왔다. “잠시만.” 성문 앞에서 나는 걸음을 멈췄다. 분명 성 안으로 이어지는 흔적은 있다. 그말인즉슨 이 던전을 발견한 캐러밴이 벌써 안으로 들어갔다는 소리였다. 다만 이번에 흔적을 보아하니 총 5명의 발자국을 잡을 수 있었다. 애초에 5명 이었던가, 아니면 오는 도중 한명이 사망했을 것이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조심스럽게 우리의 앞을 가로막은 문을 열었다. * “휘유.” “오오….” 대망의 성 안으로 진입했다. 성 안으로 들어서자 애들은 모두 내부를 구경하는데 정신이 팔렸는지 고개를 휘휘 휘두르고 있었다. 성 내부의 원형 로비는 빈말로도 깔끔하다고 보기 어려웠다. 부서진 의자들과 깨진 창문들이 눈에 속속이 들어왔다. 고풍스러운 맛은 있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살짝 음산한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그래도 천장이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보기에는 좋았다. 커다란 원형 돔으로 구성된 천장과 천장을 떠받치는 대리석 기둥들. 어떻게 보면 유럽의 교회와 상당히 흡사한 구석이 있었다. “뭐야. 그런데 보물이나 괴물들이 없잖아. 누가 벌써 털어먹은거 아니야?” “…….” 그렇게 쉽게 발견할 수 있을것 같니. 유정의 실망어린 말에 나는 잠시 이마를 짚고는 남은 팔을 들어 중앙을 가리켰다. 내가 가리킨 방향의 바닥에는 철로 만든 쇠고리가 달린 나무문 하나가 바닥에 붙어 있었다. “앗. 비밀 기지.” “…지하 감옥으로 통하는 문이다. 몇살인데 비밀 기지라고….” “치. 그거나 그거나. 오빠는 맨날 나만 미워해.” 아무래도 성을 발견해서 또 들뜬것 같았다. 아까는 꼬랑지 말은 강아지 마냥 눈을 깔더니 또 슬슬 기어오르고 있었다. 일단은 한번 두고볼 요량으로 나는 한발 슬쩍 물러섰다. 던전의 본래 뜻은 지하 감옥이라는 뜻이다. 성 로비에 괴물들이 없는건 의외라면 외외였다. 다만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 아마 처음부터 괴물들이 없었던지 아니면 이미 들어온 캐러밴이 모두 처리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다만 시체나 전투 흔적이 없는걸로 보아 전자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럼 여기로 들어가면 되는거에요?” “그렇지. 기껏 발견해놓고 겉만 보고 돌아갈수는 없잖아.” 나는 간단히 고개를 주억이고는 손잡이를 잡았다. 겉보기에 꽤나 육중해 보였지만 이미 94에 다다르는 내 근력 수치에 비할바는 아니었다. 한번 힘을 쓰면서 들어 올리자 끼릭이는 거슬리는 소리가 나는것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곧이어 바닥에 네모낳고 각진, 커다란 구멍이 하나 생긴걸 볼 수 있었다. “별로 깊지는 않은것 같은데. 그럼 나 먼저 들어갈테니 한명씩 따라 들어와.” 말을 마친 이후 나는 바로 몸을 날렸다. 아래 희미하게 보이는 바닥이 점점 가까워지더니, 어느새 쿵 소리와 함께 착지를 완료할 수 있었다. 현과 유정이 또한 내가 무리없이 내려간걸 보고는 서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동시에 뛰어 들었다. 다시 한번 쿵 소리와 함께 먼지가 풀썩였다. 애초에 신체 능력치가 좋은 안현은 별 부담이 없는지 태연한 얼굴 이었다. 그러나 유정은 한쪽 무릎을 꿇은 상태로 발을 감싸쥐고 있었다. 나는 설마하는 생각에 다가가자 유정이 곧 고개를 들더니 울상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으으…착지를 잘못했어.” 울상이 된 유정을 보며 현과 나는 서로 한숨을 쉬었다. 다시 고개를 위로 올리자 아직 머뭇거리는 솔이 보였다. 솔이는 위에서 잠시 주춤주춤 했지만 이내 현의 “혼자 있으면 귀신이 잡아간다.”는 말에 눈을 감고 뛰어 내렸다. 혼자 있기는 싫은 모양 이었다. 사뿐히 뛰어 내리는 솔을 보며…그런데 눈을 감았다고? “받아주세요!” 솔은 눈을 꼭 감은채로 하강하며 비명을 질렀다. 나와 현은 서로를 물끄러미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런 우리를 유정은 어이없는 눈길로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어디서 한숨을 내쉬어. 철퍽! “꺄앗!” 무언가 부드러운게 짓물르는 소리가 들렸다. 외마디 비명을 지른 솔은 사정없이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엉덩이가 아픈지 몇번 슥슥 쓰다듬더니 이내 배신감에 물든 얼굴로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설마하니 정말 아무도 받아주지 않을지는 몰랐던것 같았다. 우리를 보며 입을 비죽 내민 솔을 보며 나는 무언가 위화감이 들었다. 엉덩이부터 땅에 떨어 졌는데, 쿵 소리가 아닌 부드러운게 짓눌린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재빨리 마력을 일으켜 안력을 돋웠다. 그리고…. ============================ 작품 후기 ============================ 오늘 아버지한테 연락이 왔는데, 아버지가 도착하신 후 친인척 분이 한번 정신이 드셨다고 합니다. 잠시 얘기를 나누신 후 누우셨는데 다시 혼수 상태가 되셨다고 합니다. 아직 희망을 잃지는 않고 있지만, 의사들의 말을 들어보면…. 잘 모르겠습니다. 자꾸만 불안한 기분이 들고, 심박이 빠르게 뛰는것 같습니다. 쾌유를 빌어주신 독자분들 모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간단히 리리플 하겠습니다. 사람인생님. 첫코 축하 드립니다. 블라미님도 항상 응원 코멘트 감사합니다. GradeRown님 쾌유 기원 감사합니다. 마나 역류는 실제로 일어난게 아닌 일어난 <척>을 했습니다. hohokaya1님 기원 감사합니다. 조금 더 힘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체력 70대도 절대로 낮은 수치가 아닙니다. 평균을 상회하는 수치로 보시면 됩니다. 다만 10강이나 대형 클랜 대간부들과 비교하면 손색은 있습니다. 에인트제님. 감사합니다. 그 외 쾌유를 기원해 주신분들 모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제발. 제발. 쾌유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0058 / 0933 ---------------------------------------------- Dungeon Of Alchemist(2) “우…아파. 너무해요오.” 솔은 엉덩이를 슥슥 문지르며 고통을 호소했다. 현이 멋쩍게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으나 솔은 고개를 팩 돌림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현은 충격을 받은 얼굴이 되었다. 나는 굳은 얼굴로 다가가 그녀를 일으켜주었다. 솔이는 입을 비죽 내밀었지만 그래도 순순히 나한테 몸을 맡겼다. “왜…왜 나한테만 그래.” “흥.” 안현은 나와 안솔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며 억울함을 토로 했지만 돌아오는건 싸늘한 반응 뿐 이었다. 다시 현의 좌절하는걸 보며 나는 딱딱한 음성으로 말을 걸었다. “솔아.” “왜요~?” 나한테도 아주 불만이 없는건 아닌지 안솔은 평소의 순수한 “네?”가 아닌 조금 도전적인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나 내 얼굴이 딱딱히 굳은걸 봤는지 바로 눈을 아래로 깔며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그리고. 곧이어 솔의 외마디 비명 소리가 들렸다. “흐아아앗?!” …기껏 일으켜준게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버렸군. 재수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안솔이 딱 그 짝 이었다. “진정해. 진정해. 옳지. 착하다.” 한가지 짚고 넘어갈게 있다면, 왜 굳이. 앞에 있는 현을 매우 절묘하게 피하고 내 품에 안겨 들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도 놀란건 정말인지 눈물을 주렁이 매단채 덜덜 떠는 솔을 보듬은 후 나는 차분히 몸을 구부렸다. 현과 유정이 또한 나를 따라 몸을 숙였다가 흠칫한 얼굴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솔이 아래 깔고 있던것의 정체는 다름아닌 사용자 한명의 시체였다. 그것도 꽤나 기괴하게 뒤틀린 그로테스크한 시체. “우욱…!” 유정이가 결국 참지 못하고 토악질을 하고 말았다. 나 또한 시체를 보며 살짝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이건 예전에 살인 여단놈들 중에서도 악질이나 하던 짓거린데…. 옆에 반으로 동강 부러진 활을 보니 아마도 궁수(Affiliation : Ranger) 사용자로 보였다. 한바퀴 빙글 뒤튼 후 뼈채 뿌리 뽑힌, 상당히 고통에 일그러진 목과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칠흑의 숲 중단과 후미에 걸친 던전까지 들어왔다면 나름 실력 있는 캐러밴 이라고 생각했는데 던전에서 전멸한 이유를 알것 같았다. “멍청하긴…길잡이도 없는데 던전을 기어 들어가? 완전 돌았군. 아니면 욕심에 눈이 멀었던가.” 남 욕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나는 조용히 혼잣말로 중얼거린 후 입술을 짓씹었다. 지상과 지하의 분위기가 반전되리란건 알고는 있었지만 이건 뭐 처음부터 돌직구를 날린 셈 이었다. 이를 딱딱 부딪치며 오들오들 떠는 솔이를 연신 달래며 나는 차분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말 그대로 어둠컴컴한 일자 통로가 전부였다. 나아갈 방향은 앞 아니면 뒤 밖에 없었다. 일단 이제부터는 캐러밴의 흔적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 그네들이 죽고 2년하고 수개월이 지난 후 발견 되는건 안타깝지만 나와는 하등 관계 없는 일 이었다.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킨 후 하나씩 세세하게 둘러보면서 아주 탈탈 털 생각 이었다. 겸사겸사 연금술사도 잡을 생각도 있었다. 던전 마스터인 만큼 괜찮은 장비들을 뱉어낼 가능성이 농후하니까. 속으로 계산을 튕긴 나는 설레는 감정을 품은채 애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대번에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초반에 시체를 본 여파가 큰지 다들 불안한 얼굴을 한 채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유정이는 은연중에 도시로 돌아가고 싶다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애들을 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용자 시체 처음 보니. 홀 플레인에서 이런건 흔한 일인거 몰라? 부랑자들도 죽여본 애들이 시체 하나가지고 왠 호들갑이야.” 내 호통에 애들의 목젖이 꿀떡 움직였다. 그러나 아직도 서로 눈치만 보는게 마음속에 일말의 주저함이 남은것 같았다. 나는 더욱 강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다들 왜 그래. 첫 탐험에 던전 발견했다고 좋아할때는 언제고 벌써 꼬랑지를 말면 어떡해. 이번 탐험 성공만 하면 돌아올 보상이 얼마나 큰지 알기나 해?” “…….” 속물로 보여도 이게 현실이고, 또한 사실이었다. 지금 애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건 아직도 정신적인 면에서 내가 요구하는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홀 플레인에서 사람은 <현대 사람>으로 보면 안된다. 어디까지나 한 사람의 <사용자>로 봐야 한다. “너희들 말대로 첫 탐험에 던전을 발견한게 어느정도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아직도 감이 안오는가 보네. 이번만 고생하면 앞으로가 얼마나 편해지는데…. 보물이 바로 눈 앞에 있는데 걷어 차고 싶어? 발견한데 만족하고 그냥 도시로 돌아갈까?” “아,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아니에요. 형. 아니라구요.” 그래도 가장 먼저 정신을 잡은건 안현 이었다. 연신 아니라는 말을 반복하며 양 손으로 볼을 때리고 얼굴을 휘휘 휘두르는게 다시 새롭게 정신 무장을 하는것 같았다. 답답한 마음이 조금 가시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한심한건 어쩔 수 없었다. 예전에 유현이 형 일행이나 한소영 아래서 행동할때는 정말 따라가기도 힘들었는데. 물론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는건 알지만 초조함이 드는건 어쩔 수 없었다. “다들 똑같아. 원정대는 고사하고 이런 탐험에도 사망자는 고사하고 들어간 캐러밴이 전멸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고. 물론 나는 너희들을 살리고 싶어. 전멸할 생각도 없고. 하지만 혼자서는 힘들어.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해.” “…응. 미안. 알았어. 오빠 미안.” 내가 계속해서 채근하자 간신히 유정이도 정신을 차렸는지 결연한 얼굴로 몸을 일으키는게 보였다. 이를 악물고 연신 다리를 떠는게 아직도 끔찍한 시체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것 같았지만 토악질 보다는 훨씬 나았다. “…휴우. 아무튼…솔아. 이만 중앙으로 들어가고. 그래 그래. 응. 착하다. 출발하자. 다들 대형 구성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 잡는 애들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쉰 후 몸을 돌렸다. 뒤에서 유정이 작은 목소리로 “맨날 솔이만 편애하고.”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딱히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객관적으로 봐도. 주관적으로 봐도. 유정의 말은 틀린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 우리는 삼각진을 구성한 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숲에서 구성했던 삼각진과 조금 다른점이 있는데, 좌우 경계를 맡은 현과 유정의 위치가 각각 내쪽으로 45도 당겨졌다는 점 이었다. 안은 상당히 어두웠지만 솔이 유지하는 라이트 마법으로 어느정도 시야는 확보한 상태였다. 어둠컴컴한 지하를 걸으며 사방을 경계한다. 물론 아직 딱히 감지에 걸리는 함정이나 몬스터틀은 없었다. 가끔 발견하는 것들이래봤자 재로 변해버린 몬스터들이나 이미 열린 함정들 이었다. 아마도 앞서 들어간 캐러밴이 대부분 처리해주고 간 것 같았다. 덕분에 편하게 갈 수 있어 내심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혹시 이러다 미래가 바껴 그들이 탐험 보상을 전부 얻는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애들 몰래 전부 살해한 후 다시 빼앗으면 그만이었다. 앞서 들어간 사용자들이 들으면 기함할 생각들을 하며 나는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솔은 아직 라이트 주문은 불안정한지 구체가 상당히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한곳에 똑바로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상당히 심기에 거슬렸는지 유정은 구체가 자신의 주변에 자꾸 어정거리자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휘저었다. 그러자 구체가 바로 옆으로 둥실둥실 이동했다. 왜 둘이서 신경전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나중에 차차 물어보기로 하고 나는 더욱 감지를 확대했다. “흠.”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침을성을 흘리자 애들 또한 바짝 긴장했는지 무기를 들어 올리며 감지를 펼치는걸 느꼈다. 이제 좀 모양새가 잡혔다는 생각에 속으로 아주 조금 만족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솔 또한 적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주문을 웅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한손을 들어올리며 필요 이상의 경계를 완화 시킨 후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앞에서 무슨 기척이 느껴지는데. 조금 묘하다. 아무래도 가까이 가봐야 겠어.” 내 신호에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던 애들이 손이 다시금 급하게 올라가는걸 보자 절로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좀 한결 같은 모습을 보여주면 좋을텐데. 너무 상황에 따라 행동이 갈리니 나조차도 종잡기 어려운 애들 이었다. 잠시간의 시덥잖은 생각을 정리한 후 나는 바로 안력과 청각을 돋웠다. 아직 어느정도 거리는 있었지만 현재 기척에 걸리는건 괴물이 아닌 사용자였다. 사용자라고 보기에는 너무 크기가 작았지만 간간히 흘리는 신음 소리가 귀에 들렸다. 나는 애들한테 따라오라고 손짓한 후 바로 앞으로 달려나갔다. “으으….” 거리가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사용자가 흘리는 신음 소리가 더욱 확실하게 들리고 있었다. 설마 이렇게 빠르게 캐러밴이 전멸한건가? 아니 그보다 이렇게 쉽게 전멸할리가 없을텐데?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생사 여부의 확인이 가장 중요했다. 살아만 있다면 어느정도 정보를 뽑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흐아…으….” 보인다. 눈 앞으로 바닥에 쓰러진 사용자 한명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나는듯 달려간 후 곧바로 무릎을 바닥에 대었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온 애들도 곧바로 내 뒤에 붙더니 이내 아래 쓰러진 사용자의 형체를 보고 기함하고 말았다. 맨 처음에는 궁수. 그리고 그 다음에는. 현재 우리 앞에 쓰러진 사용자는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문제는 상체와 하체가 왈칵 뜯어진채 바닥에 널부러진 상태였다. “…살아 있는게 용하군.” 떨어진 상체에서 미약한 흰 빛이 흘러 나오는게 필사적으로 치료 주문을 외운것 같았다. 먼저 사용자의 상태를 확인한 후 나는 반사적으로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박남헌(4년차) 2. 클래스(Class) : 일반 사제(Normal Priest Expert)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Babara)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7) 7. 신장 · 체중 : 177.8cm · 79.1kg 8. 성향 : 질서 · 중용(Lawful · Neutral) [근력 36] [내구 57] [민첩 31] [체력 47] [마력 81] [행운 41] *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습니다. * 대(大) 치료 수준의 회복 주문이 필요 합니다. 목숨은 구할 수 있습니다. * 엘릭서 이상의 회복 물약이 필요 합니다. 목숨은 구할 수 있습니다. 살릴 가치는 없다. 4년차인걸 감안하면 말이다. 능력치와 기타 사항을 확인한 순간 나는 살리는걸 깨끗이 포기했다. 남성 사용자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힘겹게 눈을 뜬 후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사제의 능력치로 이정도의 상처를 입고 살아있는게 용하다고 볼 수 있었다. 아마 자체 치료 주문을 걸었거나 아니면 특수, 잠재 능력 덕분인것 같았다. 그래봤자 이정도의 치명상을 입었다면 죽음을 피할순 없겠지만…. “사…사용자…어떻게….” “어떻게 된 일 입니까. 이 던전에 언제 들어오신거죠? 그리고 다른 동료들은?” “다…다행…쿨럭!” “오빠. 이, 일단 먼저 살리고….” 살릴 수 없어. 헛짓 하지 말고 뽑아낼 수 있는 정보나 뽑아내는게 이득이야. 순간 튀어나오려던 말을 간신히 입을 다뭄으로서 막을 수 있었다. 아직은 말을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솔이가 치료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고 유정도 어느새 체력 물약을 나에게 건네고 있었다. 주문에 들어가는 마력이랑 물약이 너무 아까웠지만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물약의 마개를 땄다. “멍청하기는. 그러길래 길잡이도 없으면서 무슨 깡으로 던전으로 들어왔어요. 아무튼. 입 벌려요.” 귓가에 조심스럽게 속삭인 후 남성의 얼굴을 받치고 입 안으로 물약을 흘려 넣었다. 처음에는 조금 마시는가 싶더니 이내 피를 한웅큼 토해버리고 말았다. 그걸 본 솔이 기겁을 하는 바람에 기껏 외운 주문이 무효화되고 말았다. 다시 억지로 마시게 하려고 하자 사제는 고개를 힘겹게 흔들며 거부했다. 이미 자신이 소생할 수 없음을 알고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인것 같았다. 그순간 나는 한가지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담담히 죽음을 받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살아나려고 했다. 조금이라도 더 버티고 싶어했다. 그러나 우리들을 봄으로서 사용자는 삶을 포기했다. 그렇다면 우리들한테 뭔가 전할말이 있다는 소리였다. 이윽고 남성 사용자는 입을 가득채운 피를 쏟아낸 후 힘겹게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오늘 하루도 멍하니 있다가, 오후 즈음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코멘트를 봤습니다. <힘내세요 주위에 있는 분들이 더 힘을 내야 환자분도 힘을 내죠.>라는 코멘트를 본 순간 머리에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이렇게 슬픔에만 젖어 있으면 왠지 또다른 슬픔이 찾아올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예전처럼 밝고 활기차게 지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분명 밝고 활기찬 결과가 오겠죠? 분명 그럴겁니다. 코멘트 주신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많은 분들의 응원을 받으신 만큼 분명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겁니다. 분명히요. 정말로.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__) 1. 할말이음네 : 1등 축하합니다. :) 2. 사람인생 : 하하. 고맙습니다. 물론 전부 읽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__) 3. 응응이 : 벌떡! 벌떡! 벌떡! 그것도 벌떡! 4. GradeRown : 흐흐흐흐흐.(?) 5. 악덕변호사 : 고맙습니다. 덕분에 생각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제가 죽상을 한다고 해서, 그리고 하면 친척분도 기뻐하지 않으실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히 쾌유 하실텐데요. 그날을 위해서 저 또한 예전처럼. 변함없이. 열심히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6. 크리아센 : 이런. 임종을…. 제가 임종을 지키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온 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아마 분명히 쾌유 하실 겁니다! :) 7. Toranoanal : 저희 아버지는 전화 받자마자 바로 내려가시더라구요. 저 또한 따라 가겠다고 했는데 일단 기다리라고 하셔서…. 아마 조만간 내려갈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 또한 좋은일로 내려갔으면 좋겠습니다. 코멘트 감사합니다! 8. 무협소설광 : 예. 조만간 내려가볼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 9. 손아귀여워 : 코멘트 감사합니다. 친인척분도 뼈가 부러지셨는데, 부러지면서 장기를 찔렀다고 합니다.(폐등등….) 저 또한 믿어야 겠습니다. 제가 힘들어 하면 힘든게 찾아오고, 기뻐하면 기쁨이 찾아올것 같거든요. ^^ 10. Demodex : 정말 감사합니다. 많은 분들이 응원해 주신만큼 분명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겁니다. 분명히요. 다시 일어나셔서 온화한 손길로. 웃음으로. 절 맞이해주시겠죠. 언제나처럼. 정말 감사합니다.(__)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코멘트좀 많이 주세요! 그리고 추천도…☞☜)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59 / 0933 ---------------------------------------------- Mage and Alchemist(Rare) “함정…도망….” “함정에 걸렸다. 도망쳤다.” 하나씩 끊어서 단어를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 사제는 굉장히 힘든 얼굴로 말을 잇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어느정도 의미를 알아 듣고 따라 말하자 그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스쳤다. 아마도 우리들을 꽤나 숙련된 사용자로 착각하고 있는것 같았다. 사용자는 미약하게 고개를 한번 끄덕인 후 더듬거리며 다음 말을 이었다. “동료…배신…납치….” “…….” “도와…!” 계속 감기려는 눈이 바르르 떨리는게 보인다. 죽음이 코 앞까지 다가왔지만 필사적으로 견디는 모습 이었다. 이윽고 사제는 모둔 힘을 다 소진했는지 마지막 단어인 “도와.”를 내뱉은 후 그대로 눈을 까뒤집고 말았다. 그나마 간신히 이어가던 생기가 우리들을 보고. 그리고 말을 하면서 전부 소진된 모양 이었다. 내 무릎 위로 축 늘어진 사제를 보며 애들이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를 바닥에 곱게 눕힌 후 손바닥을 들어 눈을 감겨주었다. 주변에 숙연하고 침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특히 솔이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죽음을 볼때마다 무덤덤하게 대응하지 못한다는 반증 이었다. 그러나 이런 감상적인 기분에 젖을 시간이 없었다. 일단 현재로서는 사용자가 남긴 키워드를 조합하고 정보를 추론하는게 우선 이었다. 나는 천천히 그가 뱉은 말들을 되뇌었다. “함정. 도망. 동료. 배신. 납치.” “형. 아마도 부랑자와 연관이 있는게 아닐까요?” 안현 또한 사용자가 한 말을 들었는지 나름의 추리를 내놨지만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어림도 없는 말 이었다. 잠시간 생각을 정리한 후 나 또한 하나의 가능성을 조합할 수 있었다. 애들은 불안한 얼굴 이었다. 입술을 계속 침으로 적시는걸 보니 일단 설명은 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내 입이 열리기만 기다리는 애들을 보며 나는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칠흑의 숲 초입에서. 내가 너희들한테 우리들보다 먼저 들어온 사용자들이 있다고 했었지?” “네. 기억나요…아. 그럼?” 바로 고개를 주억이던 현은 이내 눈에 이채를 띄며 나를 바라 보았다. 평소 소소한 일상을 보면 참 눈치가 없다고 여겼는데 이럴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도 위급 상황에 머리가 회전 하는게 백배는 더 안심이 된다. 나는 긍정하는 신호를 보낸 후 말을 이었다. “그래. 아무래도 그 캐러밴이 우리들보다 먼저 이 던전을 발견한 모양이다. 다만…모종의 사정으로 캐러밴이 전멸. 또는 그에 준하는 사고를 당한것 같아.” “그. 그럼 있잖아 오빠. 방금 사용자가 말한 단어들은 도대체 무슨 뜻이 있는거야? 그….” “음….” 함정. 도망. 동료. 배신. 납치. 유정의 물음에 나는 막연하게 머리속에 그렸던 그림들을 조금 더 자세하게 구체화 시켰다. 나는 지금껏 길잡이의 부재로 캐러밴이 전멸한걸로 예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보면 그 예측은 완전히 빗나가 버리고 말았다. 처음 지하로 진입했을 때 보였던 시체를 자세히 떠올리면 답이 나온다. 잘 생각해보면. 들어오자마자 죽었을리가 없었다. 주변에 그 어떤 위험거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 궁수는 살아서 던전 내부로 진입했을 것이다. 또한 캐러밴에 섞여 던전의 길잡이를 했을게 분명했다. 어느정도 말을 정리한후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마 캐러밴은 현재 우리랑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을 거다. 그런데 방금전에 본 사용자의 몸이 쓰러진 방향을 보면 우리가 가던 방향과 머리가 마주보고 있었어. 하체가 뜯어지고 등에 큰 쿠멍이 있는걸 보면 우리가 걸어오던 방향을 향해 도망치다가 뒤에서 일격을 당한 셈이지. 즉. 먼저 말한 함정과 도망이란 단어는 앞서 던전에 들어왔다가 함정에 걸렸고, 큰 사고를 당해 오던길로 다시 도망치고 있었다는 말이야.” “그럼…동료, 배신, 납치는?” “처음 던전에 들어왔을 때 보였던 사용자는 궁수 였어. 원래는 캐러밴의 동료였겠지. 하지만 도중에 모종의 이유로 배신을 한것 같아. 배신이란 단어는 여러 의미로 쓰일 수 있지만. 던전 내에서 쓰였다면…아무래도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쳤을 가능성이 농후해.” 키워드 배신의 설명이 끝나자 애들의 얼굴에 마이너스한 감정이 휘몰아 치는게 상당히 볼만했다. 그러나 이미 초반에 정신 단단히 잡으라고 말해논만큼 더 이상의 경고는 없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납치를 설명할 차례였다. “그리고 마지막 단어는…아무래도 던전 마스터한테 캐러밴 사용자들의 일부가 납치 당한것 같아.” “그런것도 가능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하는 현을 보며 나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 홀 플레인은 게임이 아니라고.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이야. 연금술사들중 인체로 실험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하니까. 지금 우리들이 있는 던전이 어디인지 잊었어?” 내 말이 끝나자 애들 모두의 얼굴이 핼쑥하게 변했다. * 우리들은 한동안 말 없이 걸었다. 아마 혼돈 쪽으로 성향이 몰렸다면 다들 돌아보지도 않고 바로 도시로 돌아가자고 했을것이다. 그러나 솔과 유정은 질서로 성향이 몰린편이라 납치된 사용자들을 구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남성 사제가 최후로 내뱉은 “도와.”라는 단어가 유효했다. 나야 모로가도 일단 진입만 하면 만족이라 별 불만은 없었다. 지하 통로는 가면 갈수록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지하 통로를 걷던 도중 잠시 손을 들어 걸음을 멈췄다. 평소보다 강력하게, 그리고 광범위하게 감지를 유지하고 있던터라 보다 자세하게, 하나씩 걸리고 있었다. 던전에서의 전투는 나 또한 장담할 수 없는게 많아 최대한 상세한 설명을 해준 후 전투에 돌입하는게 나을것 같았다. “100미터쯤 더 전진하면 하나의 공터가 나온다. 그리고 그 공터에 여러 몬스터 무리가 모여 있어. 수는 대충 스물을 넘어가고…몬스터의 종류는 렌가로 추정된다.” “렌가? 응…들어본거 같은데.” “80cm ~ 1미터의 몸집으르 가진 멍멍이들과 비슷한 몬스터들 이에요. 움직임이 상당히 재빠르고 손 끝에 날카로운 갈고리 형상을 한 발톱을 달고 있다고 들은것 같아요.” “정답. 한가지 더 추가하면 렌가의 꼬리도 상당히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어. 전갈들처럼 유연성은 없지만 파괴력은 발톱 못지 않다고.” 렌가를 멍멍이, 강아지로 표현하는 솔이를 보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아마 렌가들이 지성이 있고 감정을 알아들을 수 있게 표현할 수 있다면 당장에 난동을 부릴지도 모르는 단어들 이었다. 아무튼 조심스럽게 대답하는 솔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그전에 짚고 넘어갈 점이 하나 있었다. “문제는 지금 감지에 걸리는 렌가들이 일반적인 렌가랑은 조금 다른것 같아. 다른건 전부 네가 말한 모양이랑 일치 하는데…이족 보행을 하는 놈들도 걸리는데?” “에에? 그럴리가요! 렌가는 기본적으로 사족 보행을 한다고 들었어요. 혹시 다른 몬스터랑 착각 하신게 아닐까요? 아! 아니에요. 수현이 오빠가 틀릴리 없으니 무조건 제가 틀렸을 거에요.” 마지막 말만 아니었으면 솔이도 다시 봤을지도 모르는데.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하는 솔이를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갈고리도. 꼬리도. 체형도. 전부 일치해. 어쨌든 일단 가보고 난 후 판단하자고. 더 나아가려면 그곳을 필수로 통과해야 하거든.” 안현과 유정은 나와 솔의 대화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둘이 시선을 마주치더니 서로 어깨를 으쓱이는걸 볼 수 있었다. 하긴. 뭘 알아야 대화에 끼어들던가 하겠지. 그러게 평소에 공부좀 해두라니까. 낙낙한 분위기는 딱 거기까지였다. 공터와의 거리가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다시 일행들 사이로 치열한 긴장감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 나는 점점 걸음을 빨리하다가 종래에는 거의 빠른 걸음으로 공터를 향해 들어가고 있었다. 렌가는 1회차에 상대해본 몬스터들 이다. 눈치가 빠르지만 다혈질이고, 전술적인 움직임을 부릴 수 없다. 그렇다면 일단 빠른 돌격으로 최대한 놈들을 처리한 후 분노한 놈들을 유인하며 방어로 전환하는게 나을것이다. 애들 또한 슬슬 내 뒤를 따라 달리며 자신들의 무기를 빼어들고 있었다. 이럴때 궁수나 마법사가 있다면 일단 크게 한방 먹이고 바로 연계 공격으로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을텐데.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만큼 내가 커버하면 되는 일 이었다. “형! 몸은 괜찮으신 거에요!” 달리면서 심호흡을 하는 기행을 보이던 현은 이내 나를 향해 힘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창을 꽉 움켜쥔걸 보니 전투에 들어간다고 하자 특유의 호전성이 나오는것 같았다. 나는 손을 들어 괜찮다는 신호를 보낸 이후 좀더 상세한 전술을 설명했다. “마력을 한계 이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돼. 내 걱정은 말고 다들 진형을 지킨다. 공터로 진입 후 먼저 눈에 보이는 무리로 들어가 재빠르게 돌진, 처리한 후 서서히 벽면으로 물러난다. 렌가는 동족을 끔찍하게 아끼는 습성이 있으니 한마리라도 죽이면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들거야. 방어력은 약하지만 그만큼 움직임이 재빠르고 갈고리가 날카로우니 조심들 하고. 그리고….” “네.” “일반적인 렌가들이랑 다를 수 있으니 염두에 두도록. 곧 돌입한다. 보자마자 사정 보지 말고 앞에 보이는 놈들부터 처리해.” 평소라면 철저하게 전술을 검증 후 차분히 들어갔을 테지만 이번에는 속도전이 생명 이었다. 후각이 발달한 놈들인 만큼 늑장을 부리면 우리가 되려 습격을 당할 공산이 있었다. 힘껏 달리던 와중 내가 예고한대로 네모난 통로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통로 너머로 검은빛 흙을 대지로 삼은 공터가 보였다. 나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통로를 넘어 공터 내부로 진입했다. 곧이어 공터 안으로 스물은 족히 넘는 수많은 렌가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걸 볼 수 있었다. 역시나 눈치 하나는 좋은 놈들 이었다. 공터 내부로 들어가는 순간 렌가들 전원이 바로 나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린것이다.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울음 소리를 흘리는 놈들을 보며 나는 1초만에 돌격할 곳을 정한 후 지면을 박차 올랐다. “스킷! 스킷!” 바로 앞에 있는 놈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 하나의 창이 벼락 같은 속도로 내 앞을 가로질렀다. 힘차게 허공을 가른 창은 이윽고 막 고개를 돌리던 렌가들의 얼굴을 정통으로 부숴놓았다. 찔리는게 아닌 얼굴이 움푹 패인채 산산이 바스러지는 렌가를 보며 뭔가 위화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놈의 몸이 허물어지는걸 보니 죽음에는 큰 차이가 없는것 같았다. “일단 한마리!” 창의 주인공은 안현 이었다. 내가 선두로 들어가는걸 보며 바로 뒤따라 들어온 후, 특유의 긴 사정거리를 이용해 선제 공격을 가한 것이다. 창 끝에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어른거리는게 마력을 듬뿍 담은것 같았다. 안현의 선공으로 여유가 생긴 나는 바로 놈의 주변에 있던 렌가들로 방향을 수정한 후 매섭게 베어 들어갔다. 허를 찌르는 기습이긴 해도 다년간의 경험이 녹은 내 검로를 놈들이 피할리 만무했다. 한번의 휘두름으로 두명의 목을 베는 순간 나는 아까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일단 피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목을 벨때 부드러운 육질을 베는 맛이 아닌, 딱딱한 껍찔을 베는 느낌이 검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이건…키메라였다. “크이이이이!” 기습을 당한 렌가들은 크게 혼란에 빠진것 같았다. 우리들을 인식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우왕좌왕하는 놈들을 보며 조금더 처리할까라는 욕심이 일었다. 그 몇초도 안되는 고민하던 사이 유정이 내 옆으로 빠르게 달려 가는게 보였다. “잠….” 처음 처리한 세명과 약간 거리가 떨어져 있는 한놈을 향해 유정이는 몸을 최대한 앞으로 숙이고 들어가고 있었다. 차마 내가 말릴틈도 없었다. 또한 그녀는 과감하게 단검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유정의 돌진은 좋았지만 한템포 느리게 들어간 감이 없잖아 있었다. 처음과는 달리 조금씩 정신을 차리는 렌가들을 보며 나는 낭패감이 들었다. 당장 유정이 노리는 렌가만 봐도 엉덩이에 붙은 꼬리를 살랑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나도 멋있는 신 넣어줘.” “ㅇㅇ. 다음회에 나옴.” “올.ㅋ” 『 리리플 』 1. Edward Wong Hau Pepelu Tivrusk : 1등을 축하 드립니다. 하하. 언제나 아이디를 치는게 어렵다는…. ㅜ.ㅠ 2. 사람인생 : 언제나 따뜻한 말을 해주시는 사람인생님. 고맙습니다. 일단은 참고 있는 거랍니다. 한두번 말을 해보고 몇번 실전을 경험하게 한 후 문제가 지속되면 그때 터뜨리는 원리죠. 아직 초보들인 만큼 조금 더 지켜보자는 입장 이거든요.(문제는 그 기대치가 너무 높다는게 문제일 겁니다. 하하하.) 3. hohokoya1 : 오늘은 정말 못 올릴뻔 했어요. 마지막에 각성한터라 다다다다다 쓴 탓에 겨우 완성은 할 수 있었죠. 지금 후기를 작성하는데 11시 46분 이네요. ㄷㄷ 4. 황걸 : 네. 고맙습니다. 부디 이번회도 즐겁에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5. 『사랑이란.』: 좀 크게 보면 애들이 아직 쩌리들은 맞아요. 아마 뮬을 떠날때즘이면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한 모습들을 보실 수 있을겁니다. :) 6. GradeRown : 음.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만큼 목숨은 살려도 하체를 붙일 수 없습니다. 하체를 이어 붙이고 다시 제기능을 찾게 하려면 훨씬 고위급의 주문이 필요해요. 7. 잿빛나래 : 케케케케.(?) 이번에도 절단마공! 8. 악덕변호사 : 고맙습니다. 그렇죠. 새해 초반이죠. 매사에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태도로 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9. noc647 : 앞으로 전개되는 내용들을 보시면 차차 아실 수 있을겁니다. 스포일러가 될 소지가 있는 부분이라 노 코멘트 하다록 하겠습니다. 양해해주세요. :) 10. 금원 : 상황만 놓고 보면 어색하게 받아 들이실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정과 연관해 설명을 해드리면 <성향>이 작용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실제로 안현은 가만히 있었고, 솔이와 유정이 살리자고 말을 했죠. 실제로 못 살린다는걸 알면서도 일단 가만히 죽어가는걸 볼수는 없던 탓 입니다. 그외의 이유라면 수현의 강박 관념에 있습니다. 애들 앞에서 입조심을 할 필요를 느낀만큼 일부러 매정하게 보일 수 있는 말은 아꼈던거죠. 충분한 대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질문 감사합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코멘트좀 많이 주세요! 그리고 추천도…☞☜)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60 / 0933 ---------------------------------------------- Mage and Alchemist(Rare) 살랑살랑 흔들며 틈을 노리던 꼬리는 이내 낭창히 휘어지며 앞으로 쭉 뻗어 나갔다. 아래에서 위로 일직선으로 올라가며 나가는걸 보니 유정의 상반신, 그것도 즉사를 노린 목을 목표로 삼은것 같았다. 다급하게 앞으로 나서려던 나는 다음에 이어진 유정의 움직임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흐응!” 야릇한 기합성을 흘린 유정은 이내 몸을 숙인채 그대로 지면을 박차더니 거의 지면과 닿을 정도로 슬라이딩을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당장에 꿰뚫을듯 목을 노리며 들어간 꼬리는 허무히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유정이 한손으로 땅을 짚으며 방향을 전환하자 진로가 반달 모형으로 휘었고, 그에 따라 질주 방향이 바뀌며 순식간에 렌가의 뒤로 돌아간 것이다. 후미를 점령 당한 렌가는 멀뚱한 얼굴로 꼬리를 늘어뜨리다가 핫 하는 얼굴로 바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유정의 단검이 가차없이 렌가의 목을 가르고 지나간 후 였다. 반사적으로 목을 부여 잡으며 몸을 허물어뜨리는 렌가를 확인한 후 유정은 바로 나를 향해 뛰어왔다. 생글생글 웃는 유정을 나는 잠시 멍한 얼굴로 보고 말았다. 안현도 나를 따라 막 앞으로 달리려다 큰 소리로 탄성을 지르는게 어지간히 놀란 모양 이었다. 그동안 유정은 자신의 장점을 전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유정의 민첩 능력치와 마력 능력치의 가능성은 인정한다. 하지만 둘의 전투 스타일은 판이하게 다르다. 근력, 내구, 체력을 앞세운 안현은 기본에 충실하고 정통으로 나가도 평균 이상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민첩과 마력을 앞세우는 유정은 전투를 할때 변칙을 응용한, 일종의 센스 플레이가 나와야 한다. 더구나 리치가 짧은 단검을 두개나 들었으니 난전이라면 몰라도 일반 전투에서는 큰 빛을 보기 어렵다고 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순수 전투 능력을 비교하면 단연 유정이보다 안현을 윗선으로 올려 놓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생각을 수정할 필요가 있을것 같았다. 깔끔하고 단순한 움직임. 그러나 가장 효율적인 움직임. 딱 한번이기는 하지만 방금전 유정이 보여준 장면은 그정도로 나에게 깊은 인상감을 심어주었다. 아마도 방금전과 같은 움직임을 전투시마다 보여줄 수 있다면…. “시이이이이!” 렌가들이 분노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막 대형 안으로 들어와 다시 자세를 잡는 유정을 보며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내 표정을 읽었는지 유정의 얼굴도 한껏 달아오른채 입가에 연신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이번 전투는 뭔가 분위기가 좋게 흐를것 같았다. 칠흑의 숲으로 들어온 이후 내가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그때였다. 파앙! 그나마 근거리에 있던 렌가들 여럿이 흉성을 내뿜더니 이내 하나 같이 허공으로 튀어오른 것이다. 단순한 점프가 아닌 3미터를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크게 뛰어오른 터라 애들 모두가 잠시간 망연한 얼굴이 되었다. 나, 안현, 이유정 모두가 렌가를 살해하긴 했지만 가장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사용자는 이유정 이었다. 동족 살해에 큰 분노를 갖는 렌가들인만큼 놈들은 일제히 유정을 노리고 있었다. 렌가가 저만큼 점프한건 나도 처음 보는 경우였다. 그러나 일단은 놈들이 노리는 바를 아는만큼 유정을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허공에서 아래로 리프 어택을 할 경우 무시무시한 파괴력이 가산 되기 때문에 유정의 신체 능력으로 피해 없이 막기는 요원한 일 이었다. 그러나 기세를 탄 우리 일행은 이번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언니 오빠한테 이대로 질 수 없다는듯, 이번에는 솔이 지팡이를 들고 한걸음 앞으로 나선것이다. 그동안 빠른 속도로 주문을 외우더니 기다렸다는듯 허공에서 내려오는 렌가들을 보며 지팡이를 내밀었다. “속박(Shackles)!” 곧이어 솔의 맑은 음성이 터져 나오자 허공에서 내려오던 렌가들의 몸이 뻣뻣하게 굳더니, 이내 그대로 힘없이 지상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사이좋게 한마리씩 처리한 나와 애들은 대견하다는 얼굴로 솔을 바라보았다. 어떤 주문이든 사용자의 역량에 따라 1인 지정이 아닌 2인, 3인으로 늘릴 수 있는데 이번에 솔이 처음으로 성공한 것이다. 물론 1인 지정으로 펼친 주문보다 위력은 약해도 허공에 떠오른 렌가들의 움직임을 묶는데는 충분했다. 청순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앙칼진 표정으로 렌가들을 보던 솔은 이내 우리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곧바로 얼굴을 풀었다. 처음부터 렌가들 7마리를 처리하고 시작했다. 기습에서 상상을 넘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하지만 아직 열댓마리가 남아 있었다. 모두 눈이 발갛게 변한게 어지간히 열이 받은것 같았다. 다들 손톱을 치켜든채 살기를 흘리고 슬슬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일단 퇴로를 확보할 목적으로 우리가 들어온 통로로 조금씩 물러나며 검을 상단으로 세웠다. “크아!” 렌가들은 우리를 향해 울부짖으며 몇놈이 크게 뛰어 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딱히 걱정이 들지 않았다. 원래 알고 있던 렌가들보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지금 우리 일행은 다들 어떤 흐름을 탄것 같았다. 이 기세를 몰으려는듯 안현과 유정은 평소와는 다른 조금 과감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머리를 쪼갤듯 무섭게 휘두르는 발톱과 내 검이 닿았고, 그 순간이 바로 전투 재개의 신호였다. 직접 공세를 섞으니 확실히 일반 렌가들과 다른점을 세세히 알 수 있었다. 신속한 몸놀림과 내가 가장 강한걸 깨닫고 애들을 함께 공략하는 전술성. 그리고 조금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빼는척 하다가 동료들과 다시 들어오는 차륜전까지. 처음에 유리하게 시작해 조금 여유를 부렸지만 이내 나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전장 조율을 시작했다. 아마 칠흑의 숲 초입에서 첫 전투를 치렀던 애들이라면 진즉에 무너졌을것이다. 그러나 내 적절한 원호를 통한 전장 조율과 신들린듯 선방하는 안현의 창놀림에 버티는걸 넘어서 조금씩 놈들을 압도하는걸 볼 수 있었다. 유정이 또한 방어로 일관하다 틈을 노리는 카운터가 아닌 적극적으로 단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자잘한 상처를 입는게 몇개 보였지만 그만큼 한마리씩 착실하게 렌가를 줄여 나가고 있었다. 난전에 큰 힘을 발휘하는 양손 단검이 빛을 발하는 순간 이었다. 그리고 전세가 기울어진건 다시금 안솔의 목소리가 공터를 울렸을 때였다. “속박(Shackles)!” “썅! 이거야! 안솔! 나이스!” 솔이 지팡이가 향한곳은 유정이 상대하던 렌가들 이었다. 미친듯 단검을 난사하던 유정은 이내 손쉽게 렌가들에 단검이 박히자 기쁨의 비명을 지르며 더욱 날뛰었다. 유정이 바람개비처럼 단검을 뿌리는걸 보며 나와 안현은 전방에 남은 렌가들에 돌진을 시도했다. 나는 렌가들을 상대하는데 조금의 마력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날카로운 발톱을 앞세우고 달려드는 놈에게 정로로 검을 휘두르자 이번에는 부서지는게 아닌 두부 베듯 깔끔하게 잘리는 느낌이 전달 됬다. 검술 전문가의 권능은 보면 볼수록 매력이 넘치는것 같았다. 검에 관한 모든 행동에 긍정적인 추가 보정을 받는다. 이 권능이 가지는 이점은 참으로 대단했다. 뿐만 아니라 EX 랭크에 오른 신검합일도 똑같이 힘을 보태고 있었다. 지금 대충 휘둘러도 무시무시한 위력을 내는데 추후 진심어린 일격을 뽑아낸다면 어느정도의 위력을 낼지 사뭇 궁금했다. 매서운 파공음을 흘리며 검을 밀고 나가자 렌가 무리는 추풍 낙엽처럼 우수수 쓰러졌다. 우리들의 우세를 느끼는건지 아니면 간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대로 창이 나가는건지 안현 또한 덩달아 신이나 한바탕 춤을 추고 있었다. 이윽고 중앙을 완전히 돌파한 현은 나와 마주보고 서더니 다시 신명나게 렌가들의 뒤통수를 후리며 들어오기 시작했다. “라이트(Light)!” 다시 한번 솔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속박이 아닌 라이트 주문 이었다. 곧이어 하얀 구체가 남은 렌가들의 눈 앞에 떠오르더니 이내 번쩍이는 빛을 뿌리며 터졌다. 부랑자들과의 전투에서 마법사가 사용한 전술을 그대로 따라한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솔의 주문은 대단히 유효했다. 잠시간 눈을 실명해 허둥거리른 렌가들 사이로 나와 현, 유정은 포위한 삼각진 형태로 실컷 놈들을 두들겼다. 다시 한번 순식간에 너덧마리를 처리하고 나자 어느새 주변에 남은 렌가들은 고작 두마리였다. 귀를 축 늘어뜨린게 이미 자신들의 죽음을 직감한듯 보였다. 그에 아랑곳않고 현이 눈을 반짝이더니 바로 입을 열었다. “왼쪽 내꺼 찜.” “그럼 오른쪽 내꺼.” “…….” * 잠시 후 우리들은 공터의 모든 렌가들을 처리한 후 정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현과 유정의 몸에는 자잘한 상처들이 많았지만 물약을 마시고 솔의 치료를 받는 그들의 얼굴은 그 어느때보다 환했다. 렌가들의 비정상적인 능력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나는 지금은 입을 다물기로 결정했다. 무조건 호되게 혼내는것 보다는 한번 기세를 타는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번 전투도 애들이 잘했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본인의 한계를 넘어 그 이상을 드러내는 "잘"한게 아니라 원래 가진 실력들을 제대로 활용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슬슬 경험이 쌓여갈수록 본인에 맞는 전투법과 캐러밴간의 조화를 익힐 수 있어 나는 도시를 나간 후 처음으로 뿌듯함이란 감정을 느꼈다. “내가 너보다 많이 잡았을걸.” “넌 창이고 길이도 길잖아. 그만큼 공격도 용이하고. 그런걸 감안하면 내가 더 잘했지.” “정신 승리 돋는다 진짜.” “사실인데? 오빠한테 물어볼까?” 요즘 둘은 시간만 나면 싸우는것 같았다. 그러나 이윽고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보는 둘의 눈을 보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전체적인 점수로는 아직도 현이 높았다. 안정적인 모습을 많이 보였으니까. 그러나 유정이 또한 이번에 자신의 길을 찾은것 같아 꼬집기는 뭐한감이 조금 있었다. “흠.” 내가 안색을 굳히며 신중히 고려하는 기색을 보이자 애들도 덩달아 긴장된 얼굴이 되었다. 아마 누구를 꼽을지 꽤나 기대하고 있는듯 했다. 아니. 저렇게 집중하는 얼굴을 보이면 얘기를 꺼내기가 민망해지는데. 결국 나는 은근히 화제를 돌리기로 결정했다. “둘다 잘했어. 어쨌든 일단은 몸을 회복하고….” “그래도 누가 더. 조금이라도. 잘했을수는 있잖아. 응?”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유정을 보며 나는 난감함을 느꼈다. 일단 시간을 벌 요량으로 나는 손가락만 빨고 있는 솔이로 시선을 돌렸다. “하하. 솔이 생각은 어떠니?” “그. 글쎄요. 전 주문만 외우느라 집중하고 있어서.” 그러나 은근히 고개를 스윽 돌려 시선을 피하는 솔이가 보이자 나는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구원을 빙자한 떠넘기기를 하려고 하자 미리 눈치를 챈 솔이가 발을 슥 빼버린 것이다. 설마 얘가 이럴지 몰라 상처 입은 눈동자로 바라보자, 솔이는 어쩔줄 몰라하는 얼굴로 발만 동동 굴렀다. “뭐. 형 대답을 보니 대충 알겠네요. 나네. 내가 더 잘했네.” “헛소리?” “너가 그렇게 기대하니깐 미안해서 대답을 못하시고 있잖아. 쯧쯧.” “뭐? 이게 정말….” 도대체 언제 철이 들려고 저러는지. 다시금 말다툼을 하는 현과 유정을 보며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동안 실컷 떠들었으니 이제 다시 본연의 분위기로 돌아갈 때였다. ============================ 작품 후기 ============================ …수정을 하고 있었는데 모르고 등록 버튼을 누르고 말았습니다. 아놔…. 일단 1월 28일에 올린걸로 치겠습니다. 분명 습작인줄 알았는데…휴….ㅜ.ㅠ 그러면 1월 29일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후기와 리리플은 곧 수정으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리리플 』 1. 로유진 : 안녕 유진아. 그건 소제목에 &가 들어가서 그런거야. 그러니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렴. 알겠지? 2. 사람인생 : 음. 제가 자신의 리리플을 하면서 뭔가 정체성의 혼란을 느꼈습니다. 흑흑. 3. Ready : 렝가! 렌가! 4. 뿌잉뿌잉a : 뿌잉? 5. GradeRown : 오. TS. 저도 급 댕기네요. 후후후후.(?) 6. 에인트제 : 유정이도 현재 기대주입니다. 저 자신의 초기 설정과 후반에 떠오른 설정과 두가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아마 조만간 벌일 캐릭터 인기 투표가 유정이의 향방을 결정하겠지요. :) 7. 블라미 : 고맙습니다! 이번회도 즐겁게 감상해주세요! 8. 라무데 : 그렇지요. 애들은 맞으면서(?) 헉. 9. 기르히하이스 : 그게 버릇이 되서요. 아하하하. 왠지 복붙을 하면 안될것 같은 강박관념이(…….) 10. 베네트 : 건필하겠습니다! 이번회도 재밌게 즐겨주세요!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코멘트좀 많이 주세요! 그리고 추천도…☞☜)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61 / 0933 ---------------------------------------------- Mage and Alchemist(Rare) 투닥이는 애들을 간신히 달랜 후 다시 출발한지도 어느새 30분이 흘렀다. 30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애들은 여지껏 렌가들과 벌인 전투의 여운이 남은듯 손에 쥔 무기를 꼼지락 거리고 있었다. 처음 사용자들의 시체를 보면서 침체된 분위기가 한껏 오르고 있었다. 흡족한 마음에 나는 연한 미소를 걸은채 걷는 속도를 더욱 올렸다. 렌가들을 정리한 공터에는 또 다른 통로가 있었다. 우리들이 들어온 통로의 반대편에 있는 이동로였다. 그곳을 통해 나온 우리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더욱 내부로 진입하고 있었다. 계속 이런 구조가 이어질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아직까지 던전은 나름 단순한 구조를 보이고 있었다. 솔직히 고대 연금술사 비비앙의 던전이 이정도라면 난이도는 상당히 쉬운축에 속했다. 문득 내 머리속으로 1회차 신규 사용자때 미궁을 탐사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숙련된 사용자들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곳을 들어간다고 깝죽대다가 길을 잃어 근 세달간 단단히 고생하고 말았다. 하긴 그때의 경험이 있는만큼 상대적으로 현재 있는 던전이 쉬워 보이는건 당연한 일 이었다. 처절했던 그때의 기억과 지금을 비교하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예전의 나였다면 상상도 못하는 일 이었다. 그때는 돌다리도 두드려본다는 심정으로, 한걸음을 걷더라도 철저하게 함정 분석과 몬스터의 출현 경로를 전부 점검하면서 걸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조심성이 점점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어떤 일을 하든지 기본적으로 차분히 풀어가는걸 선호하는 편이다. 급하게 먹는 밥이 체한다고, 조금 느리더라도 안전하고 확실하게 밟아가는게 더 낫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본신의 능력이 뛰어나고 그간의 경험을 더한만큼 이전과 같이 하기엔 답답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무엇보다 시간이 넉넉치 않은만큼 급할때는 빠르게 진행하는 과감성도 필요했다. 소도시의 던전이라서 그런지 확실히 일반 도시나 대도시의 원정과는 난이도가 낮은걸 느꼈다. 그래도 미개척 지대와 가까운 편이라 조금 긴장을 했는데 곳곳마다 함정이 설치 되고 조금만 전진해도 몬스터가 튀어 나오는 곳들과는 달라 매우 편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절규의 동굴을 공략했을 때도 맨 마지막에 나온 <그 놈>만 아니었다면 별다른 어려운 일은 없었다. <그 놈>이 마지막에 툭 튀어 나와 캐러밴이 절반이 사망한 기억을 떠올리자 온몸에 소름이 쭈볏 들었다. 어쨌든 마냥 방심할수는 없어 나는 기초 경계는 유지하며 나아갔다. 앞선 캐러밴의 흔적은 이곳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공터를 통과했다는 말인데 몰래 나가기는 무리가 있는만큼 새로 렌가들을 채워놨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느정도 지성이 있는 던전 마스터라는 소리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며 계속 안으로 들어가자 또다른 통로와 함께 이어진 공터를 하나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공터는 렌가들이 있던곳과 비교하면 반의 반도 안되는 굉장히 작은 크기였다. 사람이 오십명도 채 안들어갈 작은 공간과 앞에는 까마득히 깍아지른듯한 절벽이 보였는데, 땅 아래로 뻥 뚫린 네개의 구멍이 보였다. 구멍을 통하지 않는 이상 더이상의 전진을 불가능했다. 이말인즉슨 무조건 한 구멍을 택해 어디로든 들어가야 했다. 공터 안으로 들어서 걸음을 멈추자 애들도 따라 걸음을 멈췄다. 어디로 들어갈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나는 바로 제 3의 눈과 마력 감지를 동시에 발동했다. 네개의 구멍을 면면히 탐지한 나는 이윽고 고개를 주억인 후 막 두번째 동굴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내 눈에 멀뚱한 얼굴로 절벽을 응시하는 솔의 얼굴이 보였다. 솔이 또한 내 시선을 느꼈는지 이내 내게 얼굴을 돌리고는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너무나 귀여운 그 모습에 당장이라도 가서 볼을 깨물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옆에 안현이 있어 겨우 참을 수 있었다. 내가 이리저리 고민하는 낯빛을 짓자 기분파의 대표적 주자인 유정이 옆에서 까불거리며 다가왔다. 또 귀찮은 일에 말릴까 바로 몸을 돌렸지만 유정이 또한 내가 돌리는 방향으로 바로 따라 붙었다. 그녀는 어지간히도 몸이 심심한지 단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입을 열었다. “오빠. 지금 어디로 들어갈지 고민하는 거지?” “…….” 내 무언을 긍정이라 여겼는지 유정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또 무슨 허튼 생각을….” “아이참! 맨날 나한테만 뭐라 그래. 이번에 맡겨봐. 응? 오빠는 그냥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으면 돼. 나한테 아주 좋은 생각이 있어.” 겉으로는 나름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게 또 뭔가 못된 장난을 꾸미고 있는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 어깨를 붙잡고 눈동자를 간절히 빛내는 유정을 외면하는것도 마음에 걸렸다. 주위에 감지를 뿌렸지만 걸리는건 없었다. 나는 일단 유정이 하고 싶은대로 하게 놔두기로 했다. 가끔 유정이는 나도 예측 못한 날카로운 면모를 보일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겸사겸사 경험치도 쌓게 할 의도도 있었다. 내가 입을 다물고 한발 물러서자 유정은 득의양양한 얼굴이 되었다. 이내 그녀는 마찬가지로 창을 붕붕 돌리는 안현에게 말을 걸었다. “현아~?” “미친.” “이…호호호. 그게 아니라. 하나 확인하고 싶은게 생겼거든.” 유정의 간드러진 부름에 안현은 바로 욕설로 화답했다. 순간 유정의 반듯한 이마에 굵은 혈관 하나가 솟아오르는걸 볼 수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예전 입담녀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었겠지만 유정이는 여전히 나긋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은은한 살기가 담긴걸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뭔데.” “저번에 통과 의례에 있을때. 기억나? 네가 말했던거.” “내가 말한게 한두개냐.” “그 도시에서 있잖아. 우리 솔이가 감이 무~지 감이 좋다고 하지 않았어?” 그동안 주변을 구경하기 바쁘던 솔의 귀가 쫑긋해지는게 보였다. 아무래도 자신의 얘기가 나오니 관심이 가는것 같았다. 쟤는 도대체 뭘 믿고 저렇게 귀엽지? 볼 한번 꼬집어 보거나 귀 한번…아니다. 내가 애한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속으로 음험한 상상을 하고 있는 동안 현은 어느새 열정적인 얼굴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여동생 팔불출의 재림 이었다. “아하. 그거 말이냐. 엉. 그렇지. 얘가 얼마나 감이 좋냐면….” “아아. 알아. 나중에 천천히 듣기로 하고. 그거 정말 믿을만해?” “그럼! 백발백중이다.” 좋은 타이밍이다. 적절한 순간에 적절히 끊은 유정을 보며 나는 속으로 엄지 손가락을 세워 주었다. 더불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기분은 지울 수 없었다. 안현 또한 고개를 주억이다가 뭔가 위화감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짓궂은 미소를 흘리고 몸을 돌리는 유정을 보며 안현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야. 잠깐만. 이유정. 야!” 현이 다급히 불렀지만 유정은 들은척도 안하고 솔이를 향해 걸어갔다. 한창 둘의 얘기를 열심히 듣던 솔은 자신과 거리를 줄이는 유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솔이라고 가만히 있는건 아니었다. 그동안 눈칫밥을 꽤 먹었는지, 아니면 행운 100포인트의 발동으로 불안을 예감했는지 바로 내 등 뒤로 도망친 것이다. 안현의 안도하는 한숨 소리가 들리고 유정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내 유정은 온화한 얼굴로 상냥히 입을 열었다. “수현 오라버니. 잠시 솔이를 들어다가 저~기 맨 왼쪽에 보이는 입구에 놓아 주시겠어요?” 앞뒤에서 안현과 안솔이 토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 또한 속이 니글거렸다. 하지만 일단 유정에게 맡기기로 마음 먹었으니 억지로 참고 솔이를 들어 올렸다. 내 옷깃을 꾹 붙잡고 있던 솔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머리 위로 물음표를 동동 띄우고 사심없는 얼굴로 나를 믿는 표정을 보니 벌써부터 뭔지 모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일전에 이렇게 갑자기 들어 올렸다면 놀라 경기를 일으키거나 당장에 울음을 터뜨렸을 텐데 더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설마 오빠가 나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겠어.”라고 말하는 신뢰 가득한 얼굴로 나를 의지하고 있었다. 미래에 광휘의 사제가 될 여성 사용자한테 인정 받은 남자라는 생각에 나는 거만한 얼굴로 솔이를 맨 왼쪽 입구 앞에 데려다 놓았다. 참고로 이 입구는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될 입구중 하나였지만 일단 유정의 다음 행동을 지켜볼 요량 이었다. “혀, 형?” 뒤에서 현이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솔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은 후 한걸음 물러섰다. 솔은 여전히 똘망똘망한, 한치의 의심도 없는 얼굴로 나만 바라 보고 있었다. 유정은 그걸 보며 배알이 뒤틀리는듯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나 또한 왠지 저런 솔의 얼굴을 보자 괴롭히고, 울리고 싶다는 나쁜 감정이 솟구쳤다. 내가 허락한 이상 딱히 뭐라고 하기도 힘든지 안현은 망연한 얼굴로 그저 바라만 보는중 이었다. 유정은 입술을 살짝 혀로 적신 후 멀뚱히 서 있는 솔이에게 다시 다가가 천천히 귓가에 은근히 속삭였다. 나는 얼른 청각을 돋워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자. 솔아. 안으로 들어가보렴. 어서.” “네? 안으로요?” “응. 너 혼자.” “네에? 혼자요? 저 혼자 들어가는 거에요? 언니랑 오빠들은요?” “그렇지. 오빠랑 나랑 현이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일단 혼자 들어가서 위험한게 있는지 정찰좀 하고 와줘. 수현이 오빠도 허락한 일이란다.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하던데?” 유정은 정말로 은근하게 속삭이고 있었다. 그 기세에 압도 되었는지 솔이도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고 있었다. 안현은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들에 표정이 이상했지만 일단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솔이는 워낙 순수한 애라서 고개를 한번 주억이고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눈도 감고 손가락으로 볼도 톡톡 건드리는게 유정의 말을 차분히 곱씹는것 같았다. 가만히 생각을 마친후 눈을 뜬 안솔은 이윽고 떨리는 눈망울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안에는 위험한것들이 많아서…저 혼자 가는건…수현이 오라버니가 그럴리 없어요오….” “아니야. 너는 매우 훌륭한 역할을 맡은거란다. 너는 미끼야. 미끼. 알지? 영화나 그런데서 자주 나오잖아. 너의 희생을 바탕으로 우리는 위험한 장소를 피하고, 룰루랄라 보물을 챙겨 도시로 귀환하는거지. 어때?!” 자꾸만 미끼를 강조하는 유정이를 보던 솔은 이윽고 울먹한 얼굴이 되어 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설마 내가 그렇게 말했을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것 같았다. 너무나도 눈부신 그녀의 시선에 나는 그저 어깨만 으쓱이는걸로 대답했다. 솔은 두어번 눈을 깜빡이고는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오빠.” “…응?” “정말 그러셨어요?” “뭐, 뭐가?” 실제로 나는 아무 허락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그러나 내 더듬거리는 음성을 솔은 다른 의미로 받아 들였는지 바로 눈이 휘둥그래 변했다. 곧이어 입술이 달싹이 떨리고 손을 꼭 쥐었다. 안솔은 최후 통첩을 하는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울거에요?” 나는 그대로 시선을 회피해버렸다. 아까 솔이 내 시선을 회피한것도 있고, 솔이 우는걸 보고 싶다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슬쩍 시선을 돌리며 볼을 긁자 솔이 얼굴은 가히 가관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변했다. 설마 내가 회피할줄을 몰랐는지 심한 충격을 먹은 얼굴로 크게 입을 달싹였다. 이윽고. 내가 원하던 결과는 바로 볼 수 있었다. “으아아아앙!” 솔이 그대로 자리에 주저 앉아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유정은 설마 진짜 울줄은 몰랐는지 멍한 얼굴로 한걸음 물러서고 말았고 안현은 날카로운 눈으로 유정을 노려보았다. 유정은 떠듬거리더니 이내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으앙! 으아앙! 으아아앙!” 연신 꺼이꺼이 대성통곡을 하는 솔이를 보며 나와 안현은 급히 달려들었다. ============================ 작품 후기 ============================ 휴. 오늘은 조금 여유롭게 글을 쓰고 싶었는데. 일이 터져서 거의 서너시간은 날린듯 하네요.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오전후에 조금이라도 써놓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위험할뻔 했습니다. 하하하. 다음회부터는 아마 진도가 팍팍 나갈것 같습니다. 조금 지루하시더라도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 아. 그리고 장난기 오브 레전드란 롤 리믹스 곡을 추천합니다. 어제 들었는데. 아. 정말 유쾌하게 들었습니다. 하하하. 특히 타릭 대사 부분이 참 간드러져요. 『 리리플 』 1. 현오 : 1등 축하드립니다! 아하하. 전개는 조금 느리시게 느끼실 수 있습니다. 아마 이번회도 그렇게 느끼실 수 있구요. 이번회는 그동안 무섭게 달려온 일행들의 쉬게 해주려는 목적도 있구요. 완급 조절겸 넣었습니다. 2. Zami : 하하하. 그런 실수를 하다니요. OTL 제 손가락을 탓해야죠 뭐. ㅜ.ㅠ 3. 라무데 : 아니옵니다. 흑흑흑흑. 부디 선처를 바랍니다. 4. ChaosSoo : 네? 네?? 네??? 5. 에인트제 : 고맙습니다. 이번회도 부디 즐겁게 감상하시길 바랍니다. 6. 사람인생 : No. 아닙니다. 노(로)유진은 12뇨 3월 메모라이즈 연재분에 나온 주인공 이름 임니다. 7. 블라미 : 흑. 제발 양해 부탁드려요. ㅜ.ㅠ! 8. 케도로스 : 아마 제 흑역사가 될것 같습니다. 설마 그런식으로 리리플을 할지는 몰랐기 때문에…. 9. 슬피우는영혼 : 어. 잠시만요. 잠깐만요. 혹시 그리스 로마 신화 연재하시는 작가님 아니신가요? 헐. 오늘 설레여서 잠 못잘것 같네요. 헐. 10. 레필 : 미안합니다. 매우 매우 미안해요. 엉엉.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코멘트좀 많이 주세요! 그리고 추천도…☞☜)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62 / 0933 ---------------------------------------------- Mage and Alchemist(Rare) <회상>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 나도 이럴 수 밖에 없었거든.” “미치지 않았어.” “나를 아직 믿는다고? 정말? 나를 믿어?” “정말 믿는다면…믿고…내 창에 맞아줘. 부탁해.” “죽어…주겠어?” * “어엉…엉….” 안솔은 연신 내 품에 안긴채 눈물을 쭉쭉 흘리고 있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안현은 잔뜩 열받은 얼굴로 유정을 뚫을듯 노려 보고 있었다. 아마 내가 없었다면 당장 손에 든 창을 휘둘렀을지도 모르는 일 이었다. 뭔가 말하고 싶은게 있는지 현이 입을 달싹였지만 이내 꾹 닫은채 씨근거리고 말았다. “솔아. 오빠가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옳지. 착해요. 눈물 뚝.” “흑…흑…정…오빠…나…미끼….”(정말 오빠가 나 미끼로 쓰라고 그랬어요?) 히끅이느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지만 솔이 전하고 싶은 말의 의미는 대충 알것 같았다. 나는 바로 고개를 흔든뒤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솔직히 대강 눈치는 까고 있었지만 유정이 나한테 사실대로 말을 하지는 않은것도 있으니까. 내 대답을 듣자 조금은 안심이 되었는지 그때서야 솔은 울음을 멈추었다. 물론 여전히 딸꾹질에 훌쩍였지만 이정도면 됬겠다 싶어 머리 쓰다듬는걸 멈추고 몸에서 떼어내려 하자 바로 울상을 지었다. 나는 황급히 다시 안으며 머리를 쓰다 듬었다. 얼굴에 눈물 자욱이 선하고 눈물을 슥슥 닦는게 너무나 안쓰럽게 보였다. 유정은 솔이 앞에 무릎을 꿇은채 두 손을 들고 있었다. 참 던전 안에서 웃기지도 않는 짓거리를 한다는 생각에 뭔가 속에서 울컥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나 또한 애들의 분위기에 휩쓸려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일단 안현의 분노가 너무도 컸기에 그냥 모른척 하고 있었다. 유정은 풀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나와 안현 두명의 얼굴이 둘다 심상치 않았고 주변 분위기가 매우 무거웠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실컷 까불딱 거리지만 정작 이럴때는 눈치를 살살 보는게 영락없는 고양이었다. “그럼. 변명이라도 해봐.” 안현의 서슬퍼런 말에 유정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가 다시 싹 들이밀었다. 유정은 솔이를 한번 보더니 이내 주저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내가 왜 그랬냐면….” “아부부부….”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연신 내 품에 얼굴을 비비는 솔이를 보듬었다. 그리고 그걸 본 유정의 눈에 다시 불꽃이 튀는게 보였다. 그러나 지은 죄가 있어서인지 애꿎은 이만 까득 깨물고는 다시 반성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솔이가 감이 좋다매. 구멍이 네개가 있으니까…그…감으로 안전한 구멍과 위험한 구멍을 구별할 수 있을것 같아서….” 구멍 앞에 데려다 놓은 진짜 이유는 그거였나. 흠. 아예 허무맹랑한 얘기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턱을 괸채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나 그 순간을 못참아 안에서 꼼지락 거리며 칭얼대는 솔이를 느끼고 다시 아기 달래듯 등을 두드려 주었다. 내가 지금 정말로 뭐하고 있는걸까? 행운은 능력치중 가장 연구가 되지 않은 분야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해봤자 물리력 행사보다는 마법력 행사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사실 하나 뿐 이었다. 그 외에 자잘한한것 몇개가 더 있긴 했지만 다 근거 없는 낭설에 불과했다. 안현의 얼굴은 애매했다. 그러나 이내 납득했는지 고개를 주억이곤 창 끝으로 유정의 머리를 톡톡 두들겼다. 저거 은근히 기분 나쁠텐데 유정은 딱히 반발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럼 진작 그렇게 하던가. 미끼가 뭐냐 미끼가.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지. 형. 형도 유정이한테 뭐라고 좀 해주세요. 형이 맨날 유정이만 예뻐하고 오냐오냐 하니까 쟤가 이렇게 버릇이 없는 거잖아요.” “미…미안…뭐?” 안현의 말이 끝나는 순간 나와 유정은 기가막힌 얼굴이 되었다. 쟤는 또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지? 유정이 또한 심히 억울한듯 입을 착착 다시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도 일단 유정이 명백히 잘못했고, 솔이 또한 무언가 열망 어린 눈동자를 나를 빤히 보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난감함을 느꼈다. * 한동안의 소란을 수습한 후 우리는 겨우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발갛게 눈이 부은 솔과 시무룩한 유정이. 그리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현을 보며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기껏 기세를 올려놨다 싶더니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오. 뭔가 느낌이 괜찮은데.” 결과적으로 우리들은 두번째 구멍을 선택했다. 일단 한번 시도는 해보자는 의미로 솔이를 네개의 구멍 앞에 전부 세워 봤는데, 결과가 정말 확연할 정도로 달랐다. 첫번째 구멍에서는 몸을 덜덜 떨었고, 두번째 구멍에서는 미묘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번째 구멍 앞에서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으며 네번째 구멍 앞에서는 바로 도망치고 말았다. 제 3의 눈과 감지로 대충의 상황 파악을 하고 있던 나는 속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사제인 이상 마력이 가장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1 포인트만 행운에 투자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운 100 포인트로 불안하지만 제 3의 눈과 일부 비슷한 효과를 내는걸 보니 슬며시 마음이 당기는 기분이 들었다. 내 칭찬이 들렸는지 옆에서 걷고 있던 솔이의 허리가 빳빳해지는게 보였다. 희고 가느다란 목도 오롯이 세우는게 눈은 퉁퉁 부어서 저러니까 솔직히 엄청 웃겼다. 나는 차분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감지했다. 예감상 이정도 걸었으면 한번 더 몬스터들이 나올 즈음 이었다. 곧이어 역시나 감지에 뭔가 걸리는걸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걸음을 멈추자 애들은 흠칫한 얼굴이 되었다. 걸음을 멈출때마다 거진 전투를 치렀으니 자연스럽게 긴장하는것 같았다. “이제부터는 조심하는게 좋겠다.” 내가 묘한 얼굴로 뜻모를 소리를 내뱉자 애들의 얼굴 또한 덩달아 굳어갔다. 지금 눈 앞에 걸리는건 총 두종류의 몬스터들 이었는데, 개체수는 단 세개에 불과했다. 생명체 반응 하나, 그리고 석상 둘. 대충 속내를 짐작한 나는 애들이 혼란에 빠지기 전 나는 미리 언질을 줄 필요를 느꼈다. 다시 걸음을 걸으며, 여지껏 기고만장해 있는 솔이를 보며 나는 자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솔아.” “네에.” 나에 대한 화는 다 풀렸는지 평소의 나긋한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나를 보며 헤실대는 미소를 짓는 솔이를 보며, 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말을 이으려는 순간 이었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우리 주변의 공기를 거대히 울리는 한 여린 목소리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막 설명에 들어갈려는 찰나 놈이 선수를 친 것이다. 예상대로 안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현과 유정의 안색이 급변했다. “형. 아무래도 아까 만난 사용자가 말한 다른 사용자들 같은데요.” “아무래도 이 주변으로 납치….” “그만. 나 말하는 도중 이잖아.” 유정의 말을 끊고 엄한 목소리로 말하자 애들은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다들 초조한 얼굴로 왜 빨리 구하러 가지 않는가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다. 나는 쯧쯧 혀를 찬 후 막 말을 이으려는 찰나였다. “누구 없어요! 부탁 드려요! 제발 도와주세요!” “…….” 역시나 꽤나 영악한 놈 이었다. 그리고 더불어 짜증도 솟구쳤다. 솔직히 방금전 애들과 구멍 앞에서 시간을 허비했을 때부터 열불이 났는데 내 책임도 없잖아 있어 그냥 꾹 참고 있었다. 그리고 애들한테 화풀이 하기 뭐한감도 있었고. 하지만 더는 못 참겠고 이대로 가다간 슬슬 예전 성격이 나올것 같았다. 나는 검을 빼들어 전방을 향해 가볍게 휘두른 후 다시 검을 집어 넣었다. 애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마력을 담은 검파를 쏘아 보낸것이다. 아마 지성이 충만한 놈이면 그만 입좀 다물라는 신호로 받아들일 것이다. “살려주…키에에에!” 내 검파가 놈의 오른팔을 가볍게 자르고 지나간걸 확인한 후 나는 한숨을 뱉었다. 애들은 그저 멍한 얼굴이었다. 눈치채지 못할만큼 고도의 컨트롤 어빌리티 묘리를 부렸으니 아마 후반부에 들린 끔찍한 괴성 소리로 인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것 같았다. “흠흠. 다시 한다. 솔아. 혹시 라믹이라는 몬스터에 대해서 알고 있니?” “에…라믹이요? 우웅….” 골똘히 생각에 빠진 솔을 보며 나는 입맛을 다셨다. 확실히 주요 몬스터로 구분되지 않는 만큼 떠올리는데 조금 어려움이 있는 모양 이었다. 그러나 대답은 엉뚱한 방향에서 날라왔다. 그동안 풀이 죽은 얼굴로 단검만 만지작거리던 유정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올린 것이다. “오빠. 라믹은…그 도플갱어의 변종 아냐?” “흠?” 나는 의외라는 눈길로 유정을 바라 보았다. 계속 해보라는 신호를 담은 눈짓을 보내자 유정은 용기를 얻었는지 이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도플갱어처럼 완벽하고 오랫동안 모습을 변하게 할수는 없어도 목소리는 흉내낼 수 있다고 들었어. 원래 신체 능력은 그닥 뛰어나지 않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숙련된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한거니 신규 사용자들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특히 함정을 파놓고 사용자의 감정을 자극해 함정에 빠지게 하는 경우가 다반사니 절대로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고….” “…정답이다. 그런데 어떻게 안거야? 라믹은 그렇게 비중있게 다루지는 않았을텐데.” “그냥 우연히.” 혀를 쏙 내밀며 대답하는 유정이를 나는 대견하다는 눈길로 응시했다. 안솔이 입을 삐쭉이고는 “나도 알고 있었는데….”라고 말을 흐렸다. 안현은 뜨악한 얼굴로 머리를 흔들더니 이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형. 그러면 설마 방금전에 들린 목소리가 라믹이 낸 목소리라는 건가요?” “그렇지. 아마 침입한 사용자 한명의 성대를 먹고 목소리를 흉내내는 걸거다.” 역시나 상황 판단과 머리 회전은 안현이 제일 이었다. 저기다 기본 지식만 조금 첨가하면 정말 금상첨화일 텐데. 내가 아쉬워하는 사이 안현은 재빨리 창을 유정에게 겨누었다. 순간 내 눈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불똥이 튀었다. 차캉! 핑그르르! 퍼석! 내가 번개와 같은 손놀림으로 검을 꺼내 창을 후려치자 안현은 앗할새도 없이 손에서 창을 놓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창은 거친 회전을 하며 날아가 한쪽 구석에 처박혔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애들 모두가 얼어붙은 얼굴로 입만 뻐끔거렸다. 특히 안현은 커다란 충격을 받은것 같았다. 그는 나와 창을 한번 번갈아 보더니 이내 떠듬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혀, 형. 그냥 장난으로….” “무슨 장난.” “그…유정이 혹시 라믹이 아닌가 의심이 들어서….” 평소라면 당장 나설테지만 내 서슬퍼런 기세에 눌렸는지 유정이 또한 찍소리도 못하고 있었다. 칠흑의 숲부터 꾹꾹 눌러 참아온 울화통이 드디어 폭발한 것이다. 그리고. 고의든 아니든 아군을 향해 창을 겨누는건 내 트라우마였고, 가장 싫어하는 행동중 하나였다. “안현. 안솔. 이유정. 정신들 놓고 아주 놀러 나왔네들. 자꾸만 이럴거니? 이러고 싶어?” “…….” 내 비난에 애들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쏘아 붙였다. “그냥 좋다 좋다 웃고 봐주고 넘어가니까 만만해? 할때는 해야 할거 아냐. 언제까지 널널한 기분에 젖을건데. 그리고 안현. 장난? 장난으로 유정이한테 창을 겨눠? 너마저 이러면 어떡해?” “아, 아냐. 오빠. 나도 솔이한테 그랬는걸. 괜찮아. 나 화 안났어. 그러니까 화풀어~응? 오빠~아~.” “형. 죄송합니다.” 되지도 않는 애교를 부리는 유정과 바로 허리를 숙이는 현이 보였지만 내 화는 풀리지 않았다. 놀면서 하는것도 좋지만 그것도 적당히였다. 렌가들과의 전투 이후 애들의 태도는 급격히 풀어지고 있었다. 자고로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욱 긴장해야 하는데, 어떻게 얘들은 거꾸로 가고 있었다. 본인들도 칠흑의 숲에서 내가 당부했던 말들을 떠올린다면 자신들의 행동이 얼마나 지나쳤는지 알 수 있을것이다. 세상에 이런 캐러밴이 있다는건 듣도 보도 못했고 설령 있다고 해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안현을 일갈했다. “솔이한테 건 장난은 심했지만. 그래도 나름 일리가 있었고 허용 범위 안이니 넘어갈 수 있다고 쳐. 그런데. 지금 던전 안으로 들어와서. 다른것도 아니고 실전중인데. 같은 아군한테 무기를 겨눠? 그게 지금 제정신으로 한 짓이라고? 장난? 나도 한번 장난으로 똑같이 해봐?” 일전에 여관 안에서 내 위압에 당한 전력이 있는 현은 아연실색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얼굴에 반성하는 기색이 어린게 대충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은것 같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지만 나는 사늘한 얼굴로 고개를 까닥였다. 안현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는 주섬이 창을 챙겨 들었다.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솔은 목젖을 한번 크게 꿀떡이고는 지팡이를 움켜 쥐었다. 한동안 세명을 보며 한심하다는 눈초리를 보낸 나는 이내 크게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지금 잠깐 졸다가 일어나서 올리는 거라, 머리가 혼란스럽습니다. 제대로된 후기 및 리리플은 오늘 내로 수정 업로드 하겠습니다. 독자분들의 양해 부탁 드립니다. 0063 / 0933 ---------------------------------------------- Mage and Alchemist(Rare)(2) “이번이 내가 너희들한테 주는 마지막 경고란다. 다음부터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말도 하지 않을거고.” “…….” “그냥. 휴. 아니다.” “그냥 어떻게 되든 말든.” 이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지만 가까스로 삼키고 말았다. 그래도 그동안 같이 행동한 정이 있는데 조금 심한감이 없잖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동안 나도 모르게 애들을 돌보면서 조금씩 변화하는 내 모습에 염증을 느낀것 같았다. 예전에 온 몸에 둘렀던 날카로움이. 부동의 마음이 점점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고작 이런 소꿉 놀이를 하기 위해 회귀한게 아니었다. 이깟 던전에 낭비하는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알게모르게 나태하게 변하는 내 자신을 다잡고 싶었다. 애들은 숨소리마저 죽인채 물끄럼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색색이는 소리와 상처 받은 눈망울들이 보이자 마음이 혹했지만 바로 속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힘있는 목소리로 바로 입을 열었다. “방금전에 들린 목소리의 정체는 바로 라믹이다. 설명은 유정이가 했으니 넘어가겠어. 다만. 좌우로 두개의 석상이 있을거다. 그게 바로 함정이니 사정 보지 말고 발동하기 전에 부숴버려.” 굳이 발동할때를 기다려 애들한테 경험을 쌓게 하는게 아닌, 가장 효과적인 전법을 채택했다. 말을 마친 나는 빠른 걸음으로 앞서 나갔다. 애들 또한 허둥거리며 내 뒤를 따라왔으나 그에 아랑곳 않고 나는 더욱 속도를 높였다. 빠른 걸음은 어느새 뛰는 걸음으로 바뀌고 어느정도 거리가 줄어들었다 싶자 나는 바로 검을 빼어들었다. “챙.” 하는 청량한 금속음이 나고 동시에 사늘한 검광이 주변을 흩뿌렸다. 이제부터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내가 나서 해결할 생각이었다.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자 또 하나의 통로가 눈 앞에 보였다. 통로 사이를 거침 없이 통과하자 예상대로 공터에는 오른팔이 널부러진 눈물을 줄줄 흘리는 사용자 한명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내가 날린 검파가 정통으로 들어간 모양 이었다. “도…도와주세…크엑!” 나는 애들이 나설 틈도 없이 바로 앞으로 튀어 나가 라믹의 목을 잘라 버렸다. 목이 잘린 라믹의 양 옆에는 두개의 석상이 우직하니 서 있었는데, 가고일이나 기타 몬스터가 아닌 갑판 갑옷을 입은 인간형 석상들 이었다. 라믹을 죽였다고 함동이 발동 하지 않는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바로 한 석상을 노리고 검을 찔렀다. 무언가 “그그긍.”거리는 소리와 함께 살짝 팔을 들던 석상은 내 검이 찔러 들어오자 안광에 번쩍이는 빛을 흘렸다. 그러나 그 뿐 이었다. 내 검은 석상의 중앙부를 깨끗하게 관통해 핵을 박살냈다. 한번 비튼후 쑥 뽑아내니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핫!” 안현 또한 가만히 있는건 아니었다. 어느새 몸 주변으로 사늘한 기운을 조용히 풍기는게 다시 정신 무장을 단단히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남은 하나의 석상을 향해 안현은 나를 따라 깊숙히 창을 질렀다. 마력을 가득 담았는지 창은 부담없이 돌갑판을 부수고 들어갔다. 돌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창을 빼낸 석상의 중앙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걸 확인한 후 나는 바로 몸을 돌렸다. “다음. 바로 간다.” 이번에는 별로 체력 손실이 없는 편이라 나는 바로 다음 공터로 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안현은 내 뒤로 따라 붙었지만 유정과 솔은 그저 멍한 얼굴 이었다. 그네들은 점액질로 변한 라믹과 석상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우리들의 몸이 멀어지자 후다닥 달려오는 기척을 느꼈다. “다음은…고블린 무리구나. 무난해. 다들 진형 잡고. 이번에는 렌가들을 칠때와 비슷하게 들어간다.” 다음 공터는 말 그대로 고블린들의 소굴 이었다. 그러나 마냥 만만하게 볼 수는 없는게 고블린 주술사 한마리와 놈을 경호하는 홉 고블린들이 있었다. 저정도로 조합을 갖춘 고블린 무리들이라면 신규 사용자들이 상대하는데 꽤 애를 먹었겠지만 아쉽게도 나한테 통하는 얘기는 아니었다. 공터 안으로 침입한 후 나는 빠르게 대형을 이탈해 고블린 주술사 한마리와 주변을 지키던 홉 고블린들을 베어버렸다. 그리고 남은 고블린들을 유인해 대형 안으로 합류한 후 바로 돌격해 들어갔다. 수가 좀 많기는 했지만 초반에 칠흑 전갈과 칠흑 늑대든 난이도 높은 몬스터들을 상대한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더구나 이끄는 지도자를 잃은 고블린 무리들을 해치우는건 누워서 떡 먹기나 다름 없었다. 전투 종료 후 고블린들이 쏜 독침에 당한 현을 해독하면서 우리들은 휴식을 취했다. 안솔이 안현을 치료하는 동안 나와 유정은 공터를 돌면서 고블린들이 가지고 있는 물품들을 뒤지고 다녔다. 반짝이는걸 좋아하는 놈들인 만큼 뭔가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고블린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나 방어구는 하등 쓸데가 없지만, 챙겨본 결과 그래도 확실히 수익은 있었다. 애들의 분위기는 한껏 가라 앉아 있었다. 저하된 사기를 끌어올릴겸 나는 고블린들 한테서 찾아낸 것들을 보여주었다. 금화는 별로 없어 30골드 정도 밖에 얻지 못했지만, 보석이 세 알이나 나온 것이다. 주머니에 꽁쳐둔 오팔 두 알과 고블린 주술사의 지팡이에서 뽑아낸 붉은 사파이어 하나. 나는 작은 오팔 한알을 던졌다 받으면서 입을 열었다. “봐봐. 오팔의 알이 조금 작긴 해도 빛깔이 탐스럽잖아. 이정도면 알당 적어도 20골드는 받을 수 있어. 두 알이니까 40골드. 그리고 이 굵은 붉은 사파이어는 한 70골드는 나갈걸? 그리고 금화 30골드를 합치면 총 140골드. 우리 네명이 3달동안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모은 돈을 전부 합쳐도 10골드가 조금 넘는데. 이 한번의 전투로 열네배에 해당하는 수익을 얻은거라고.” “그럼 더 안으로 들어갈수록….” “그렇지. 이보다 더한 보물이 있을지도 모르지. 어때. 이제 왜 이렇게 사용자들이 이렇게 던전 탐험에 목을 메는지 어느정도 감이 오지?” 보석을 보자 유정은 눈을 반짝였다. 안현은 엄청난 수익에 놀란듯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의 얼굴 한켠에 안심하는 빛이 서린게 아무래도 내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든데 다들 안도하는것 같았다. 애들의 반응을 보며 나는 속으로 작게 웃었다. 정말로 나를 믿고 따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또 나긋하게 나가면 분위기가 헝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엄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렌가, 라믹, 고블린 소굴을 거친 후 우리들은 말 그대로 거침없는 전진을 보였다. 안현의 치료가 끝나자 바로 출발한 것이다. 애들도 딱히 불만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방금전 직접 수익을 얻은 만큼 다음에는 어떤것들을 얻을지 기대감도 들 것이다. 또다시 나온 통로를 통과한 후, 다음에 맞이한 공터는 거미들의 소굴 이었다. 시커먼 털이 숭숭 나오고 군데군데 칠흑 빛깔을 내뿜는 껍질들을 보니 일반 거미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놈들 같았다. 특히 하나같이 누런 진액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걸로 보아 체내에 독을 품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상대하기 까다롭기는 하지만 이곳만 통과하면 왠지 다음에 목적하던 장소에 도착할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수많은 던전을 거친후 보이는 일종의 체감이라고 봐도 옳았다. 대망의 연금술사 본거지. 서둘러 통과하고 싶은 마음에 막 공터로 한 발자국 들여 놓았을 때였다. 툭! 데구르르…. “삐아!” 갑자기 천장에서 뚝 떨어진 녹빛 구슬 하나가 솔의 머리를 맞고 바닥을 굴렀다. 솔은 귀여운 비명을 지르며 바로 난리를 떨었다. 나는 재빨리 발로 차 구슬을 걷어낸 후 천장으로 고개를 올렸다. 그리고…. “으….” “저, 저…뭐….” 반사적으로 나를 따라 고개를 올린 애들은 곧이어 침음성을 흘리며 아연 실색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얼마나 놀랐는지 입만 쩍 벌린채 손가락으로 가리키켰지만, 따로 말을 잇지도 못하고 있었다. 천장에는 사용자 한명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양 팔에 흰 실이 묶인 채 축 늘어진게 아무래도 거미줄 같았다. 사용자는 여성 사용자 였으며 몸에 걸친 옷이 거의 찢기듯 걸레 조각으로 변해 있었다. 문제는. 여성 사용자의 배가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올라 있다는 것이다. 그 상태를 확인한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하지만 당장에 내가 할 수 있는건 없었다. 그저 바라만 볼 뿐. 땅을 기반으로 감지만 펼친터라 허공에 매달린걸 알아챌 수 없었다. 점유만 했다면 바로 알아챌 수 있었을 텐데…. 스스로의 안일함을 자책한 후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신체가 많이 변하긴 했지만 일단 본 바탕이 인간인만큼 사용자 정보를 불러오는건 가능했다. 겸사겸사 정보를 뽑아낼 생각도 있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정지연(2년차) 2. 클래스(Class) : 일반 마법사(Normal Mage Runner)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Babara)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0) 7. 신장 · 체중 : 161.3cm · 54.5kg 8. 성향 : 중립 · 중용(True · Neutral) [근력 45] [내구 26(-12)] [민첩 34] [체력 17(-25)] [마력 28(-49)] [행운 58] * 누군가의 장난질로 신체에 변이가 일어난 상태 입니다. 지속적인 상태로 내구, 체력에 상당한 손실을 입었습니다. 현재 손실은 진행중 입니다. * 주요 신체 변이 부위는 회음(會陰) 입니다. 현재 강제 수태(受胎) 상태 입니다. * 여성 사용자의 몸 안에서 자라고 있는 거미들은 해당 사용자의 마력을 흡취하며 성장한 후 태어납니다. “으어…아으아…어….” 지연의 신음 소리가 들리고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리고 그녀의 회음 부위가 조금 벌어지더니 이내 허공에서 초록빛으로 번들거리는 구슬들이 또르르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알들은 꾸물꾸물 대다가, 이내 날카로운 다리들이 덩어리를 찢고 밖으로 튀어 나왔다. 일련의 사태를 지켜본 애들은 처음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내 하나 같이 분노를 불태우는 기세를 내비치기 시작했다. 성향의 영향을 받은것 같았다. 정지연의 볼록해진 배와 허공에서 떨어지는 구슬, 아니 거미의 알들. 애들 또한 이 알들이 어디서 나오는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스스로 파악한 것이다. 특히 유정이와 솔이는 같은 여성 사용자라서 그런지 평소보다 배는 될듯한 분노를 뿜어내고 있었다. 나 또한 안타까운건 마찬가지였다. 물론 아직 풋풋한 20살이고, 한창 아름다움을 피울 시기인 여성 한명이 저렇게 되서 안타깝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아직 2년차인데 저정도 능력치면 가히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현재 우리 일행에 필요한 마법사이기도 하고. 손실된 능력치를 전부 더해보니 도시에서 봤다면 앞으로 같이 다녔을지도 모를정도로 나름 성장성이 좋았다.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과거형에 불과했다. 지금의 나한테는 단순히 거미 괴물을 생산하는 모체에 불과했다. 언뜻 엘릭서가 생각났지만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걸 지금 여기서 쓰는건 너무나 아까웠다. 그렇다면. 아마 본인을 위해서라도 죽여주는게 더 나을것이다. 물론 열심히 찾아보면 방법이 없는것도 아니지만 솔직히 귀찮았다. 뭐. 제법 예쁘장하기는 해도 솔직히 좀 싸가지가 없어 보이는게 맘에 들지 않았다. 동료가 될 확신도 없는 사용자한테 귀한 엘릭서를 쓰거나 또는 원상태로의 회복을 위한 수고를 들이기가 싫었다. 그저 얼른 던전을 끝내고 도시로 귀환하고 싶을 뿐. 이게 바로 내 진정한 속마음 이었다. ============================ 작품 후기 ============================ 오늘(?) 깜빡 졸았더랬습니다. 평소에 잘 안조는 편인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너무 뻐근해 찜질방을 갔더랬습니다. 온탕에 몸을 담구니 뼈다귀가 녹는 기분이…. 사우나도 하고 나오니 몸이 조금 가뿐해지는 기분이 들더군요. 그런데 이상하게 목이 타듯 말랐습니다. 땀도 많이 나구요. 오는길에 맥주 두캔 사서 집으로 왔습니다. 실컷 마시기는 했는데 이상하게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타는것 같더라구요. 이상하게 멍한 정신이라 바닥으로 고개를 숙인채 담배만 태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코피가 나더라구요. 아무래도 조만간 병원을 한번 가봐야 될것 같습니다. 하하하. 음…. 그리고. 전개는 이정도 속도면 만족 하시려나요? -_-a 『 리리플 』 1. 사람인생 : 1등 축하합니다. 드디어 예전의 1등 코멘터의 영광을 되찾으셨군요. 하하하. 2. 망치로때리뿔라 : 하하하. 그저 저는 도망갈 뿐 입니다. ㅌㅌ! 3. 라무데 : 문제는 애들이 지금 전혀 반발을 안한다는거죠. 갓 태어난 새끼들이 어미새를 따르는것처럼. 하하하. 4. 뿌잉뿌잉a : 뿌잉? 5. 콰르량 : 어…천편이면…흠. 흠. 흠. 구미가 당기는데요? 하하하. 6. 슬피우는영혼 : 그리스 로마 신화와 북유럽신화 연참좀 부탁 드립니다. 특히 북유럽신화요. 하루에 소소하게 5편씩만 연재해주세요.(진심.) ( --) ~ ♪. 7. 설비연 : 코멘트 감사합니다. 코멘트 앞으로 자주 달아주세요~. :) 8. GradeRown : 네. 라믹은 기척을 알아채는데 귀신 같은 몬스터 거든요. 대외 반응 신체 능력이 떨어지는 대신 다른 부분이 발달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9. 야누스 : 하하하.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곧 성장할 아이들 입니다. 10. 프란딜 : 확실히 한별이가 없어서 조금 아쉬운 부분은 있습니다. 저도 얼른 김한별과 재회하는 장면을 쓰고 싶네요. 다만 전개 속도를 올리면 여러 문제가 생기는 터라…솔직히 조금 고민이 됩니다. 저번에 사용자 아카데미 부분도 2편으로 스킵했다가 진행부에 문제가 터지더라구요.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코멘트좀 많이 주세요! 그리고 추천도…☞☜)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64 / 0933 ---------------------------------------------- Mage and Alchemist(Rare)(2) “형.” 안현이 날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급히 시선을 돌리자 애들 모두가 어쩔줄 몰라하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주위는 어느새 거미들이 다가와 둥그렇게 포위된 상황이었다. 퇴로는 확보한 상태였지만 지금껏 상대해온 몬스터들중 가장 까다로울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애들도 그동안 상대해온 몬스터들과는 다른걸 느꼈는지 다들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나마저 초조한 모습을 보이면 불안감만 증폭시킬 것이다. 진정을 위해 나는 얼른 태연한 얼굴로.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단 거미들을 상대하는데 집중하자.” “그럼 저 여성분은….” 솔이 안타까운듯 뒷말을 흐리며 물어왔지만 나는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이상 일단은 우리들의 생존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안현과 유정이 병장기를 잡는걸 보며 나는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위에 매달린 사용자는 잊어. 아무래도 던전의 주인이 뭔가 장난질을 친 모양이야. 지금부터 우리들의 목표는 사용자들의 구출이 아닌 던전 탐험과 생환을 최우선으로 재설정한다. 온다. 다들 자세 잡아.” 이번 고비만 넘기면 된다. 그러면 이 지긋지긋한 던전도 끝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서둘러 검을 빼어 들었다. 연금 술사를 만나게 된다면 볼기짝을 때려주겠다는 생각과 함께 나는 바로 말을 이었다. “퇴로를 확보한 상태로 방진으로 버틴다. 거미들이 제법 많기는 하지만 덩치가 있는만큼 한번에 달려들지는 못해. 다만 사각에서 파고 들어와 독액을 뿌리는 놈들이 있는데 그런 놈들은 내가 견제하겠어. 다들 자신의 앞에 있는 놈들만 집중해.” 스스슷. 스스스슷. 내 말이 끝나마자마 거미들은 바닥을 스치는 소리를 내며 우리들과의 거리를 줄였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제법 징그럽게 생겼다는 생각을 하며 검을 상단으로 세웠다. 내가 이렇게 느꼈을 정도니 솔과 유정은 말할것도 없었다.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기절 초풍할것 같은 기색을 내비쳤지만 곧이어 허공에서 계속 떨어지는 초록빛 구슬을 보자 얼굴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같은 여성 사용자가 그렇게 당했다는것에 어지간히 분노하는 모양 이었다. 이윽고 전방에 있는 거미들의 입에서 하얀 실선이 뿜어져 나왔다. 바야흐로 던전 탐험의 팔부 능선을 넘는 전투의 돌입 이었다. * “치료(Cure)!” 흰 빛으로 물든 솔의 손이 내 전신을 뒤덮자 온 몸에 따뜻한 기운이 스며드는걸 볼 수 있었다. 괜찮다고 해도 굳이 달라붙어 치료를 퍼붓는데, 도저히 막을 도리가 없었다. “얘들아. 이제 그만 쉬어도 되. 괜찮은것 같아.” “그래도오….” “어서. 너도 좀 쉬어야지.” 사건의 발달은 이러했다. 우리들은 힘겨운 전투를 이어갔고 간신히 전투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물론 내 원호를 통한 전장 조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 이었다. 끝까지 발악하는 거미를 베어 넘기려는 찰나 놈의 입에서 다량의 독액이 튀어 나온 것이다. 나는 재빨리 애들을 밀쳤고 그 독액은 고스란히 내가 뒤집어 쓰게 되었다. 화정을 품은 이상 어지간한 독은 태워버릴 수 있고 내구 능력치가 높아 이깟 거미 독액에 피해를 입을리 만무했다. 그러나 애들이 하도 호들갑을 떨어 억지로 치료를 받게된 것이다. 물론 내가 순간 몸을 휘청인 연기를 한것도 한몫 했을것이다. 거의 화를 낼 정도가 되서야 애들은 내게서 떨어진 후 각자 휴식을 취했는데, 돌아보니 거의 바닥에 눕다시피 하고 있었다. 유정은 아예 바닥에 누운채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안현은 두 다리를 쭉 핀채 똑같이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솔 또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소곳하게 앉아 천장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다. 애들이 대충 왜 그러는지 짐작이 가 나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여성 사용자의 처리를 고심했다. 여성 사용자를 올려다 본다. 아직 배는 불룩하게 나와 있었지만 더이상 거미의 알이 떨어지는건 아니었다. 가끔 인상을 찡그리고 신음을 흘리는게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뭐. 본인 입장에서는 살아도 산게 아니겠지만 말이다. “참…믿겨지지가 않네요. 정말 이 많은 거미들을 우리들이 해치운건지….” 안현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며 입을 열었다. 온 몸에 묻어 있는 거미줄들이 거슬리는지 조금씩 제거하고 있었지만, 그마저 귀찮았는지 이내 벌러덩 자리에 누워버렸다. 온몸이 천근만근인지 팔을 놀리는것도 힘들어 보였다. 유정의 온 몸은 자잘한 상처들로 가득했다. 입고 있는 옷도 갈라져 간간이 발그레한 속살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냥 멍한 눈길로 바라보자 유정이 옷깃을 살짝 내리며 도발적인 눈길로 내게 윙크를 했다. 그러나 내가 엄한 눈길로 물끄러미 바라보자 바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하여간 저 까불이. 조금 있다가.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나 또한 자리에 그대로 앉았다. 순간 애들의 염려 섞인 시선이 모였지만 바로 손을 흔들어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지금 헤롱대는 애들을 윽박질러 억지로 일으킨다면 진짜로 반발이 나올지도 모른다. 대표적으로 유정이는 바닥에 누운 후 긴장이 풀리자 조금씩 몸의 감각이 활성화 되는지 연신 끙끙대며 안솔을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으으…. 아무래도 중독 된것 같아…온 몸이 쑤셔…. 안솔. 언니한테 해독 주문좀 걸어줘.” “네에…잠시만요오….” “기집애. 수현이 오빠는 바로 해줬으면서. 사람 차별하니?” 유정의 톡 쏘는 말에 솔의 얼굴이 확 붉어지더니 이내 손을 방방 내저었다. “그게 아니라아…지금 탈진 상태란 말이에요오….” 마나 탈진 상태라 함은 여기서 마력을 무리하게 운용한다면, 역전 현상이 올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유정은 납득 했는지 고개를 주억이고는 다시 바닥으로 고개를 뉘었다. 그동안 담담한 시선으로 천장을 보던 안현은 이내 피곤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내게 말을 걸었다. “저…형.” “왜.” “저 여성 사용자는…어떻게 하실거에요?” “…….” 나는 잠시 말을 아꼈다. 안현은 유독. 전투 전부터 여성 사용자를 신경 쓰고 있었다. 왜 저렇게 신경을 쓰는건지 내 기준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성이라서 그런가. 제법 도도하고 예쁘장하게 생기기는 해도 저래서는…. 아무래도 안현을 조금 떠볼 필요를 느꼈다. “네 생각은 어떤데.” “구하고 싶어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안현을 보며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안현의 성향은 일단은 중립(True). 그리고 중용(Neutral)이다. 그래도 일단 순수히 구하고 싶다는 마음이라면 추후에 질서나 선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있었다. 기대에 부응하는 대답을 해주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나는 희망 고문하는 취미는 없었다. “글쎄다. 배를 보면 알겠지만 거미의 알을 잉태 했잖아. 즉 강제로 수태 상태가 발생 했을 확률이 높지. 저렇게 신체 내부로 변이가 일어났으면 솔직히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본다. 물론 데려갈수는 있어도…과연 지금 홀 플레인의 흐름에 저 여성 사용자를 위해 나설 고위 사용자가 있을까? 아니. 그래. 있을수도 있으니 살았다고 쳐. 그렇다고 해도 사용자의 앞으로 닥칠 현실은 말 그대로 지옥이나 다름 없을거다. 차라리 지금 죽이는게 본인을 위해서도 더 도움이 될지도 몰라.” “그…런가요. 그렇군요….” “뭐. 본인의 의사를 물어보자고. 그러면 일단 매달린 줄을 끊을 필요가 있지.” 급격히 얼굴이 어두워지는 녀석을 보며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안현은 지친 얼굴로 눈을 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허공에 매달려 있으니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여성의 적나라한 신체를 매달아 놓고 구경하는것과 진배 없었으니까. 일단 떨구고 보자는 생각에 막 몸을 일으킬 찰나였다. “요호호호!” 경박스러운 웃음 소리가 공터 안을 가득히 메웠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애들 모두는 깜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 위에서 사기를 풀풀 풍기는게 드디어 던전의 주인이 오는 모양 이었다. 나는 애들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낸 후 슬며시 검에 손을 얹었다. “남자는~두명. 예! 여자는~이 아니라 도네. 아무튼 두명. 우!” 목소리 톤이 높은걸로 보아 여성 개체인것 같았다. 남자에 환호하고 여자에 야유를 보내자 유정이 발끈한 기색으로 일어섰다. “누구야!” “누굴까~?” “어디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비겁하게 숨지 말고 나오지 그래?” “지금 가요~!” 사사삭. 사사사삭. 마력을 일으켜 청각을 돋우자 확실히 위에서 천장을 타고 내려오는 하나의 개체를 잡을 수 있었다. 그 개체는 내려오면서 쉬지 않고 입을 나불거려 더욱 유정의 화를 돋구고 있었다. “어라? 기 센 인간 암컷이네? 나는 기 센 암컷은 싫어. 하지만 좋기도 해. 모체로는 그런 암컷들이 딱이거든. 지금 천장에 매달린 암컷처럼. 히히히히!” 다시 욕설을 내뱉으려던 유정은 모체라는 말에 얼굴이 핼쑥하게 변했다. 아마도 모체라는 말이 뭘 의미하는지 깨달은듯 온 몸에 소름이 돋는 모양 이었다. 나는 입맛을 다셨다. 위에서 풍겨오는 기세는 가히 지금껏 상대해온 몬스터들과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굳이 비교한다면 통과 의례의 보스 몬스터 정도랄까. 애들의 몸이 컨디션이 좋고 만전을 기한 상황 이었다면 할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 모두의 신체는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나는 한숨을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내가 나서서 해결하는게 정답인것 같았다. “다들 일어서. 아마도 던전의 주인이 등장한것 같구나.” “정답입니다!” 사삭이는, 천장에 무언가 내려오는 소리와 함께 활기찬 목소리가 허공에서 내려왔다. 시선을 올리자 키가 2미터는 넘어 보이는 거미 한마리가 여성 사용자가 매달린 주위로 빙글빙글 돌며 내려 앉아 있었다. 크기도 크기였지만 제일 놀라운건 거미의 상단부 중앙에 인간의 이목구비를 가진 얼굴 하나가 쑥 튀어 나와 있었다. 인면 거미였다. 애들이 놀랄틈도 없이 거미는 도도도 아래로 내려와 바닥으로 풀썩 내려 앉았다. 나름 사뿐하게 앉은것 같았지만 “쿵.”하는 소음이 주변을 울렸다. 고대 연금술사 비비앙의 던전 마스터는 바로 거미였다. 비비앙은 우리를 보며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반갑습니다. 새로운 먹이 여러분.” “먹이라니. 처음부터 무례하잖아.” 내가 여유롭게 대꾸하자 거미는 얼굴을 갸우뚱 기울였다. 그리고 고심하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다시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제 던전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인간 수컷 여러분. 아. 인간 암컷년들은 환영하지 않아요.” “미친년.” 유정의 입담이 바로 거미를 직격했다. 애들은 이 거미를 완벽한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더불어 천장의 여성 사용자. 정지연을 이렇게 만든게 눈 앞의 거미라는걸 체감하고 있는것 같았다. 다들 다리를 후들거리면서 일어났지만 명백히 살기 어린 눈동자로 거미를 쏘아 보는걸 느꼈다. 인면 거미는 우리를 한번 쓱 훓어 보더니 입을 쑥 내밀며 말을 이었다. “어라라. 나름대로 환영의 인사를 했는데. 욕은 그렇다 치고. 왜 다들 그렇게 보는거니?” “병신 같은 년. 너 같으면 얼씨구나 하고 인사 하겠니?” 미친년. 병신 같은 년이라는 유정의 말에 거미는 크게 상처 입은 얼굴이 되었다. 곧이어 그녀(?)는 투덜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쳇. 너 미워. 기껏 환영했더니. 아. 넌 암컷이니까 환영 안했구나. 뭐 좋아. 인정인정. 너도 환영해!” “집어치워. 네 환영 따위 받아도 구역질 나니까.” “우씨. 정말 너무한다. 왜 그렇게 나를 미워하니?” “뭐라고?” 순수한 얼굴로 묻는 거미를 보며 유정은 일순간 기가막힌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이윽고 눈에 독기를 품더니 천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 여성 사용자 안보여? 저 꼴로 만들어 놓고 그딴 말이 나와?” 유정의 신랄한 비난에 거미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곤 대답했다. “그거야 당연한 거잖아. 쟤들이 먼저 내 소굴에 기어들어 왔다구. 거기다 내 소중한 부하들과 자식들과 생활 공간도 파괴하고. 가만히 있는 나를 먼저 건드렸는데, 그럼 곱게 당해줘?” “뭐, 뭐?” “너희들도 똑같아. 아니. 오히려 너희들이 더 분탕질을 쳐놨더라. 정작 화를 낼 거미는 나라구. 나. 봐봐. 내 자식들의 시체를. 어머어머.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애들을 밟아 터뜨려 놨어. 불쌍해서 어떡해. 엉엉.” 굵고 기다란. 털이 숭숭 난 다리로 살짝살짝 눈물을 찍는 거미를 보며 나는 키득 웃어버리고 말았다. 유정은 그저 말문이 막힌 얼굴로 입만 벙긋거릴 뿐 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오늘 노블 소설을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개인적으로 좀비물 또는 생존물을 상당히 좋아하는데, 노쓰우드님의 작품을 읽고 코멘트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코멘트에 제 작품에 코멘트를 달아주시는 분들이 보였습니다. 나름 반가움(?)이 들더군요. 하하하. 참고로 제가 읽고 있는 작품은 노쓰우드님의 아름다운 세계(성인판) 입니다. 이 소설을 추천합니다. 혼자 읽기는 아까울 정도로 재미 있네요. 그럼 리리플 들어 가겠습니다. 『 리리플 』 1. 사람인생 : 이런. 정말 죄송합니다. 상처 입으신 마음을 이루 헤아릴 수 없네요. 앞으로 일주일간은 꼬박꼬박 리리플 해드리겠습니다. 하하하. 2. 프란딜 : 뮬에서 떠난 이후. 그리고 연합 전쟁이 발발즈음에 하나씩 나올 예정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 3. GradeRown : 그렇지요. 살아도 산게 아니게 됩니다. 그 과정을 쓰면 상당히 하드하게 되기 때문에 일부러 후만 썼습니다. 4. 블라미 : 어…? 그러고보니…? 어떻게 노블을. ㄷㄷ 5. 하늘위의신 : 그렇지요. 우리편 아니면 관심 없음! 하하하. 코멘트 감사합니다. 6. AF_베스퍼 : 안그래도 내일 병원에 한번 가볼 예정입니다. 별일 없었으면 좋겠는데요. ㅜ.ㅠ 7. 뿌잉뿌잉a : 소원이 있습니다. 항상 뿌잉으로 달아주십니다. 한번만 다른 코멘트로 달아 주시면 안될까요? :) 8. 심심한짜리 : 감사합니다. 코멘트를 읽으니 저절로 몸에서 활력이 도는 기분이네요. 내일 한번 검사 받아 보겠습니다. 후후. 9. 슬피우는영혼 : Deal. 다만. 조건을 조금 완화시키는데 어떠실런지요. 제가 하루 2연참을 할테니 그리스 로마 신화 2연참, 북유럽신화 4연참. Deal? 10. 에르하시아 : 아니에요. 수현이 열심히 수련 했습니다. 소설에 나오지 않았을뿐 은근슬쩍 넣은 부분을 읽으시면 사용자 아카데미 까지는 오히려 애들보다 훨씬 열심히 수련 했지요. 물론 뮬에서부터는 애들을 가르치고 이것저것 정보를 모으느라 소홀한 감이 있지만요. 무검은 딱히 손에 익힐 필요는 없습니다. 홀 플레인은 어느정도 <설정>이라는 비현실성이 가미된 상태입니다. <신검합일>과 <검술 전문가>만 유지한 상태면 어떤 검을 들어도 100%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거기가 노련한 경험까지 첨가됬으니 금상첨화인거죠. 하하하. 질문 감사합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코멘트좀 많이 주세요! 그리고 추천도…☞☜)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65 / 0933 ---------------------------------------------- 휴재 공지사항 입니다. 음. 먼저 연참이 아닌 공지 사항인것에 양해를 구합니다. 오늘. 저번에 말씀 드린 친인척 분의 부고가 들어 왔습니다. 아버지가 도착하신 후 한번 깨어 나셨다가, 다시 일어나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의사의 말대로는 경과가 괜찮은것 같다고 했는데. 참 모를 일 이네요. 아버지가 이렇게 한명씩 다 떠나가는 구나 라고 말씀 하시는데. 그 흘리듯 하신 말씀이 자꾸 제 가슴을 푹푹 찌릅니다. 머리가 복잡하네요. 지금 바로. 또는 내일 새벽에 내려가봐야 할것 같습니다. 부득이하게 2월 2일(토요일) ~ 2월 3일(일요일)은 휴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독자분들의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로유진 올림. 0066 / 0933 ---------------------------------------------- Mage and Alchemist(Rare)(2) 안현은 잔뜩 경계하는 얼굴로 거미를 노려보는중 이었다. 안솔은 말 없이 지팡이를 들었고 유정은 단검을 꼬나쥔채 스산한 살기를 뿌리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당장에라도 뛰어 나갈듯한 얼굴들 이었다. 그에 반해 인면 거미, 아니 비비앙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동생의 투정을 보듯 무른 미소를 흘리던 그녀는 이내 키득키득 웃으며 다시금 활기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물론 말을 거는 대상은 바로 나였다. “웃어? 웃는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인간 수컷아?” “네 관점에서 본다면 일리는 있다고 봐. 거미 암컷.” “요호호호! 거미 암컷 이라니. 깔깔깔. 농담 터지는구나 정말. 역시 너는 뭔가 달라 보여. 좋아! 오랜만에 선심좀 쓴다. 너는 죽이지 않고…음…생포로 결정!” 비비앙은 정말로 단단히 인심좀 쓴다는 얼굴 이었다. 앞에 있는 두 다리를 들어 팔짱(?)을 끼고 음음 고개를 주억이는데 보면 볼수록 웃겼다. 애들은 웃기지는 않지만 기가 막혔는지 헛바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쨌든 내 기준에서 보면 상당히 유쾌한 괴물이었다. 나 또한 연한 미소를 머금은 후 살짝 장난기가 가미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궁금한게 있는데. 이왕 선심 쓴 김에 조금 더 쓸 생각 없어?” 내 말의 의도를 알아 차렸는지 비비앙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있어. 뭔데뭔데? 다른 애들도 살려 달라고?” “그거 말고. 이곳으로 오면서 사용자 시체 두구를 봤는데…그 두명 전부 다 네가 죽인거니?” 내 물음에 거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내가 했지. 그런데 왜?” “그래도 명색이 연금술사인데. 실험에 인간의 신체를 쓸 일도 있지 않아? 그렇게 버려두고 방치해둔게 이해가 안되서. 안그래 비비앙?” “에~이. 그렇게 갈기갈기 찢어 놓은걸…오잉? 근데 내가 연금술사 비비앙인건 어떻게 알았어?” 비비앙의 반응을 본 후 나는 슬며시 나오려는 미소를 억지로 참으며 태연한 표정을 연기했다. 제법 상쾌하고 어느정도 지성을 갖추긴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예전 연금술사 시절 보였을지도 모르는 고등한 사고력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것 같았다. 일단 원하던 반응을 확인한 이상 거리낄건 없었다. 비비앙은 환한 얼굴로 폴짝폴짝 뛰어 자신을 알아보는 이가 있다는데 기쁨을 표시했다.(여담이지만 한번 뛸 때마다 땅이 들썩여 던전이 무너지는게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 순전히 내 추측일지 몰라도 비비앙은 아마 더 살고 싶다는 욕심에 신체 개조 아니면 의도성이 다분한 감염 분야에 손을 댔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리치가 될 정도로 수준이 높지 못한 마법사 또는 연금술사들의 비참한 말로로 볼 수 있었다. 본인이 만족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아무튼 보기 드문 유형이었다. “처음 다른 인간 수, 암컷들이 들어오긴 했어. 하등한 놈들 주제에 그래도 한가락 하는 애들이 몇명 보이더라구. 덕분에 쓸모 있는 부하들을 잔뜩 잃었지. 너희들. 고블린들이 있는 공터를 통과했지? 원래 걔네들이 쓰던 공터가 아닌데. 원래 있던 놈들이 전멸하는 바람에 급하게 채울 수 밖에 없었지…에잇! 열받아!” 정말 화가 나는듯 볼을 부욱 부풀린 비비앙. 그녀는 이내 턱주가리에서 독액을 왈칵 쏟아내 자신의 분노를 증명하더니 이내 숨을 고르며 높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그걸 보고만 있어? 이대로 두면 안되겠다 싶어 바로 나섰지. 그런데 가관이더라. 딱 모습을 드러내고. 진짜 조금만 힘을 썼는데 한명이 바로 도망을 치는거 있지? 그 활을 들고 있던 놈! 다른 인간들은 버려두고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치는데 보는 내가 다 열받더라. 나참. 뭐. 그래도 덕분에 나머지 놈들도 전의를 상실하긴 했지만.” “그래서?” “솔직히 그놈 먼저 죽이고 싶었지만 다른 인간들이 나를 가만 놔두지 않았어. 특히 그 남자 사제. 마음에 들긴 했는데 자꾸 신을 들먹이면서 거슬리게 하길래 먼저 죽여줬지. 다른 애들을 챙기면서 도망가는데 뒤로 따라가 다리 하나 꽂은후 허리를 반으로 댕강 잘랐어. 음.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냥 그렇게 하고 바로 처음 도망친 수컷을 쫓았거든. 그래서 확인을 못했네. 걔 죽었지?” 비비앙은 이 모든 말을 아주 빠르게 얘기했다. 어지간히 얘기하는걸 좋아하는 성격인듯 싶었다. 애들은 내가 비비앙과 스스럼없이 대화하자 다들 벙찐 얼굴로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안현이 갑자기 앗차한 얼굴로 진중한 얼굴을 짓더니 이내 애들을 향해 눈짓을 하는걸 볼 수 있었다. 아마도 내가 대화로 시간을 끄는 동안 최대한 체력을 회복하라는 뜻으로 오해한것 같았다. 난 그저 정말 궁금해서 물은건데…. 그래도 이런 오해는 하등 나쁠게 없기에 간단히 수긍한 후 비비앙의 물음에 답했다. “응. 죽었어. 그럼 그 궁수 사용자도 결국 너한테 당한건가?” “히히. 오랜만에 대화하니까 너무 즐겁다. 응응! 있잖아있잖아. 솔직히 그런놈들은 내가 봐도 썩 별로거든. 그래서 끝까지 쫓아갔지. 아주 목을 비틀고 뽑는데 비명을 꽥꽥 지르더라. 나 잘했지? 우히히히.” 비비앙은 진심으로 즐겁다는 얼굴 이었다. 그녀는 그때의 일을 회상하는듯 눈을 감고 음미하는 표정을 내보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안현은 차분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얘는 솔이 얘기만 나오면 답이 없는데 이럴때 보면 정말로 싹수가 보이는 놈 이었다. 밀고 당기고 마음에 들었다가, 안들었다가. 이윽고 눈을 반짝 뜬 비비앙은 신난다는 얼굴로 다리를 들어 허공을 가리켰다. “얘! 얘도 물어봐줘! 나 지금 이상하게 너랑 대화하는게 너무 즐거워~히히.” “…그래. 천장에 매달린 여성 사용자는 어쩌다 저 꼴이 된거니.” 내가 자상한 목소리로 묻자 거미는 몸을 배배 꼰 후 발그레 볼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뒤에서 “저 썅년이….”이라는, 유정이 나지막히 욕설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유정아. 지금 괴물을 상대로 질투하는 거니? “꺄응. 위에 매달린 암컷은…그래. 처음 봤을때부터 되게 마음에 안들더라. 오연한 눈깔로 나를 내려다보듯 깔아보는데 정말 짜증났어. 결국 저렇게 될거면서 뭘 그렇게 거만을 떨어? 마음에 안들어안들어.” “아무리 마음에 안들어도…저건 좀 심하다.” 친구와 담화를 하듯 말을 건네자 비비앙은 픽 웃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또다시 회상 모드로 들어간것 같았다. 이미 해치울 기회는 수십번이나 있었다. 그러나 말을 꽤 맛깔나게 해 듣는 재미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딱히 공격하지는 않았다. 물론 나 또한 계속 얘기를 듣는 와중 딴 생각이 슬슬 나고 있어 조만간 처리할 생각이었다. “히히. 너도 같이 봤으면 재밌었을걸? 처음에는 꽁꽁 묶이고도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는데. 정말 부숴뜨리고 싶더라. 그래서 팍팍 돌렸지. 렌가도 받고~고블린도 받고~맨 처음 도망친 인간으로 변한 라믹도 받고~그리고 거미들의 씨받이 역할을 마지막으로 깔끔하게 마무리! 처음에 그렇게 당당하던 년이 혐오하는 괴물들한테 순결을 빼앗기는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선해. 울부짖으면서 발악하던 그 모습…. 그 오연하고 담담하던 얼굴이 눈물 콧물을 질질 짜면서 용서해달라고 싹싹 비는데 어찌나 우습던지. 결국 임신하고 알을 낳으면서 이지를 상실해 버리더라. 히히히힛! 멍청한 년. 그러길래 처음부터 그랬으면 좋았잖아. 그러면 다른 수컷과 암컷처럼 일단 살려두기는 했을텐데 말이지.” “…그럼 아직 살아있는 사용자는 있다는 소리군.” “웅. 고치로 똘똘 말아서 잘 모셔놨지. 뭐 당분간은 살아 있을걸. 그런데 어디에 쓸지 걱정이 들어. 애들 양분으로 줄까…아니면 키메라로 만들까. 흐음. 후자가 더 땡기기는 하는데.” 어느새 애들의 호흡은 상당히 안정 되어 있었다. 나는 슬슬 대화를 마무리 해야겠다는 생각에 슬쩍 내렸던 검을 들었다. 검을 겨누는 나를 보며 비비앙은 아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에…싸우려고? 피차 귀찮은 일은 하지 말자~응? 너는 나쁘게 하지 않을게.” “귀찮긴 한데. 그래도 널 쓰러뜨러야 할것 같거든. 우리 애들이 너를 그닥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것도 같고.” “흥. 칫. 뭐 좋아. 굳이 벌주를 마신다는데. 그래도 나는 네가 마음에 드니까 죽이지는 않는다. 그리고…에라. 또 인심 썼다. 옆에 귀여운 숫컷도 살려준다.” 안현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그러나 나와 현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변할수록 유정과 솔의 분노는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굵은 땀방울을 조금 흘린후 나는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나머지 둘은?” “으음…. 솔직히 모체는 사제년이 더 적합해보여. 마나가 풍부해 보이거든. 그런데 이래저래 너무 연할거 같아서. 그런애들은 모체로 만들기 전에 자살하는 경우도 왕왕 있거든. 그러니 옆에 기가 세 보이는 년으로 할게.” “미친년.” “응. 나 미친년 맞아.” “좃 까는 소리 하네.” “나 좃 없는데?” “!@#$%^&*&^%$#@!” 비비앙의 유들한 대답에 유정은 뭔가 모를 언어를 구사하며 고함을 질렀다. 연신 쏟아지는 유정의 욕설을 빙글빙글 웃으며 듣던 비비앙은 이내 진심어린 얼굴로 순식간에 바꾸며 살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얘기를 할때마다 분위기가 확확 바뀌는 거미를 보며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거미는 아니었다. 한창 걸진 말을 내뱉던 유정은 확연히 느낄 정도로 비비앙의 기도가 달라지자 바로 입을 다물었다. 사뭇 진지한 모습을 보이는 애들을 보며 나도 서서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전적으로 애들한테 맡기기에는 조금 많이 무리인 감이 있다. 이번에는 실력을 드러내보이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나설 생각 이었다. 그렇게 마음 먹고 막 한걸음을 내딛는 순간. 묵묵히 우리들을 탐색하던 거미의 아래턱이 크게 열리며 폭포수 같은 실이 왕창 흘러나오는걸 볼 수 있었다. “이왕 잡기로 한거 상처 입히고 잡으면 아까우니까. 한꺼번에 잡아줄게. 히히히히!” 거미의 웃음 소리와 함께 아랫입에서 번들거리는 은빛의 실들이 뿜어져 나온다. 지금껏 상대한 거미들이 뿜어낸 거미줄과는 비교도 안될정도로 굵고, 엄청난 양을 자랑하고 있었다. 바닥을 향해 쏟아진 실들은 이내 쫙 펴진 우산처럼 흐트러지더니 곧이어 우리들을 향해 화살처럼 휘어져 들어왔다. 너무나 빠른 속도에 나도 순간 앗차한 감은 있었다. 내가 그렇게 느낄 정도로 거미의 실은 창졸간에 우리들의 몸에 닿았다. 이윽고 진득한 실들이 우리의 몸을 휘감아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만 있었다. 순간 하나의 생각이 번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지금 이 상황에 생명의 위협이 없다면 일단 이대로 자신의 비밀 기지로 데려간 후 다시 나오는게 좋을것 같았다. “깜짝 놀랐지? 히히힛.” 나는 그다지 저항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애들은 필사적 이었다. 마음을 놓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내가 반응하지 못할 속도였다. 안현은 뒤늦게 창을 이리저리 휘드르며 실들을 걷어내고 있었지만 헛수고였다. 굵기과 점성도 문제였지만 워낙 양이 많아 중과부적 이었다. 안현이 그러할진대 유정과 솔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들이 용을 쓰자 비비앙은 발랄한 웃음을 터뜨린 후 약올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히히. 헛수고일걸. 내 실이 그런 병장기에 끊어질 만큼 약하게 만든건 아니거든. 연실을 얕보지 말라구. 그냥 담담히 받아들여. 맨 앞의 수컷처럼. 눈도, 입도, 귀도 막히긴 하지만 적어도 코는 막히지 않을거야.” …응? “야. 잠깐만. 코 빼고 다 막힌다고?” “어? 어, 응.” 내가 반색하는 얼굴로 입을 열자 비비앙은 눈을 휘둥그래 뜨더니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주억이는걸 확인한 후 나는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렸다. 실이 몸을 감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애들은 마치 번데기 고치처럼 이미 온 몸에 실을 치장(?)하고 있었다. 고개를 아래로 숙이자 내 몸에도 또한 빠르게 감아오는 실이 보였다. 오감이 차단된다. 그말인즉슨 고치안에 있는 애들은 내가 무슨짓을 하든 보고 들을 수 없다는 소리였다. 문득 비밀이 보장된다면 굳이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정한 나는 바로 몸 안에 잠들어 있는 화정을 일깨웠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상은 무사히 치르고 왔습니다. 사람이 한 줌 재로 변해 유골함에 담겼습니다. 뜨거운 유골함을 들고 걸어가는동안 정말 수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많은 위로 코멘트를 달아주신 독자분들.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코멘트를이 정말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오늘 10시에 집에 들어왔습니다. 평소대로라면 절대 2시간만에 글을 칠 수 없지만 전에 작업했던 양이 조금 있었고 궁지(?)에 몰리다보니 어떻게든 용량은 나오더군요. 2월 2일~2월 3일만 휴재하겠다고 공지했으니 약속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본 회 글의 질이나 양이 마음에 안드시는 분도 있겠지만 오늘 하루 사정을 이해해주세요. 연금술사의 던전도 거의 끝을 보이고 있네요. 아마 3, 4회 안으로 마무리 하고 뮬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지루하신분들은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세요. 앞으로 더욱 재밌고 알찬 내용으로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내일부터는 리리플도 재개될 예정입니다. 독자분들의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0067 / 0933 ----------------------------------------------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화정(火正). 직역하면 불을 맡은 신으로 풀이 되지만, 홀 플레인 안에서는 순수한 불의 결정체로 해석할 수 있다. 존재하는 모든것을 불태울 수 있는 권능. 세라프가 내 몸과 화정의 동화를 맹렬히 반대한 이유는 위의 권능 때문이다. 화정은 말 그대로 존재하는 모든걸 태울 수 있는 신화계급의 염화다. 인간으로서 지배하고 다룰 수 있는 불의 최고 계급인 염계급보다 윗선에 있음은 물론이고, 세라프는 비슷하다고 말했지만 순수한 <파괴> 측면에서 본다면. 팔열지옥 최하층부인 무간을 지배하는 겁화도 한 발 물러설지도 모른다. 내가 연구한 고대 기록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무엇보다 내 모든것을 자를 수 있는 검술 전문가의 권능과 화정의 권능을 합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걸 가르고, 불태울 수 있다.>로 정의할 수 있다. 문제는 화정이 신화계급이므로 신살 속성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즉 나는 지금 마음만 먹으면 세라프를 죽일수 있는 권능이 있었다.(물론 천사들이 만만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 가능할 뿐 이니까.) 어쨌든 그 파괴적인 지옥의 겁화도 한 수 접을 정도인데 고작 인면 거미의 실 따위가 내 화정의 불길을 막을리 만무했다. 애들이 모두 누에고치로 변하고 허공으로 쭈루룩 매달리는걸 확인한 후. 나는 곧바로 마력을 일으켰다. 화륵! “어…어?” 연한 주홍빛의 마나가 피어나고 이윽고 내 몸을 감싼 실들이 아이스크림 녹듯 순식간에 사라진다. 비비앙은 당황한 얼굴로 연신 실을 쏘아댔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잠시 눈을 가늘게 뜬 그녀는 이내 결심한듯 턱주가리를 크게 벌렸다. 누런 독액이 일렁이는게 독액을 쏠 모양인것 같았다. “건방진!” 비비앙이 노호성을 터뜨리고 바로 그녀의 입에서 독내가 물씬 풍기는 액이 나를 덮쳐 들었다. 나는 싱글싱글 미소를 유지한 얼굴로 날아오는 독앨을 부담 없이 맞아 주었다. 내 피부에 닿은 독액은 이내 흔적도 없이 허공으로 산화했다. “히히히히. 어떡하지. 죽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너무 화가 나서 그.” “안 죽었어.” 가볍게 응수한 후 앞으로 걸어나오는 나를 보며 비비앙은 무슨 괴물이라도 본 얼굴이 되며 입을 다물었다. 아. 억울하다. 괴물은 너고 나는 사람인데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받는걸까. 아무튼 나는 뽀송뽀송한 피부를 쓰다듬으며 발걸음을 이어 나갔다. 독액이 체내로 침투하든 체외로 스며들든 화정의 힘을 빌리고 있는 이상 태워버리면 그만이다. “마. 말도 안돼.” “안되긴 뭐가 안돼.” “하…하등한 인간이 어떻게….” “하…하등한 거미가 어떻게….”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거미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두 다리를 들었다. 내려찍을 셈인듯 보였지만 화정의 힘을 빌리고 있는 나는 지금 일정 이상의 실력을 내보이고 있었다. 검을 들고, 한번 휘두른다. 남들이 보면 평범한 일수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담긴 파동의 힘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이윽고 내 마력이 담긴 파동은 거미가 들어올린 다리를 목표로 쏘아지더니. “끼아아아아아아아!” 순식간에 목표를 절단했다. 이 모든 과정은 단 1초 안에 일어난 일이라 차마 다리를 내려칠 틈도 없이 당했다. 비비앙은 격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서더니 이내 되는대로 독액과 실을 내뿜었다. 단순한 고통에 따른 발끈 어택이라고 보기에는 꽤나 처절함이 엿보이는 공격임을 느꼈다. 그냥 몸을 대줘도 괜찮지만 나는 일부러 검을 휘둘러 비비앙의 공격을 받아냈다. 내 방어는 실로 단순하다. 오는 실은 걷어내고, 독액은 흘려낸다. 이런 단순한 공격을 상대로 내가 익힌 고등 검술의 묘리를 펼치는건 태극(太極)에 대한 실례였다. 그러나 당사자는 죽을맛일 것이다. 자기는 온 힘을 다해 공격을 하고 있는데 나는 물러섬 없이, 오히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전진 한다. 사방으로 번뜩이는 검광이 아름답게 수를 놓으며 춤을 춘다. 쏟아낸 실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뿜어낸 독액은 그대로 나를 지나친다. 내가 한걸음 다가갈수록 비비앙은 한걸음 물러섰다. 나는 태연한 얼굴로 조롱하듯 입을 열었다. “그래도 명색이 연금술사 인데. 공격이 너무 단조롭지 않아? 고대 연금술사라는 이름이 울겠다. 비비앙? 대답좀 하라고. 하하하.” 비비앙의 표정은 다급했다. 내 말을 신경쓸 여력도 없는듯 정신 없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비축해둔 독액과 실을 모두 사용했는지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걸 볼 수 있었다. 어떻게든 뽑아내려고 용을 쓰는 모양 이었지만 고작 얇은 실 몇가닥이 전부였다. “키…! 크키…! 크키키…!” 연신 침음성을 흘리던 비비앙은 이내 천장을 보더니 다급하게 벽면을 타고 올랐다. 순식간에 벽을 통해 천장을 타는 거미를 보며 나도 훌쩍 뛰고는 그대로 벽면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같이 가자.” 열심히 벽을 타던 비비앙은 이내 뒤를 바싹 쫓는 나를 보고 기함하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지는 추태를 보이고 말았다. 세상에. 거미가 천장을 타다 떨어지다니. 내가 그렇게 놀랍게 생겼나? “으으….” 문득 거미 아래 신음 소리가 들리자 나는 거꾸로 허공에 매달린채로 이채를 띄었다. 불행하게도 거미가 떨어지면서 여성 사용자도 같이 떨어진 모양 이었다. 먼저 떨어져 거미의 쿠션 역할을 했는지 정지연의 볼록했던 배는 움푹 들어가 있었다. 아래로 군데군데 터진 초록색 구슬들이 또륵이 굴러 다니는게 보였다. 거미가 낙하하다가 의도치 않게 정지연의 배를 눌러 강제로 구슬을 나오게 한 것 같았다.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짜증나는 얼굴로 정지연을 툭 밀어낸 비비앙은 이내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녀를 다리로 감고 내 앞으로 들어 올렸다. 얼굴에 화색이 도는게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나. 나는 순순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일단 어떤 소리를 하는지 들어볼 요량이었다. 내가 아래로 하강한 후 사뿐히 착지하자 비비앙은 기다렸다는듯 정지연을 든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렸다. “히…너, 너도 인간이지?” “응.” “더이상 다가오면. 이 여성을 죽이겠어.” “……휴.” 나는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내 반응을 본 비비앙은 살았다는 안도의 얼굴을 하고는 입술을 할짝였다. 나는 고통에 일그러진 사용자 정지연의 얼굴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 또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정지연의 눈동자는 나에 대한 어떤 열망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히…히. 일단 검에서 손을 놓아 주실까?” “그러도록 하지.” 나는 슬며시 바닥에 검을 내려 놓았다. 반신반의하던 비비앙은 내 행동을 확인한 후 입가에 가느다란 호선을 그렸다. 그에 아랑곳 않고 나는 다시 거미와의 거리를 줄였다. 내가 한발자국 다가설 때마다 비비앙은 흠칫흠칫 몸을 떨더니 이내 더욱 다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거의 내 앞으로 바싹 다가올 정도로. …얘 바보인가. 정지연과 내 눈동자가 서로 시선을 교환한다. 죄책감은 없다. 어차피 사용자 살해를 한두번 한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일말의 미안함 표시로 까닥 고개를 숙인 후 나는 여성 사용자의 흰 목으로 손을 내밀었다. “다가오라는 소리는 안했…?” 손아귀에 여성의 가느다란 목이 잡히고. “소, 손…떼…?” 우드득. 빠각! “끄윽…악….” 그대로 쥐어 비틀어 버린다. 근력 능력치가 94 포인트 이므로 가녀린 여성 사용자의 목을 비트는건 쉬운일이다. 손 안에서 목 뼈가 바스라지는 느낌이 전달된다. 순식간에 혀를 빼물고 절명한 정지연을 보며 인면 거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입만 뻐끔거렸다. 그 얼굴을 즐겁게 감상한 후 그대로 지면을 박차 허공으로 뛰어 오른 후 거미의 얼굴 옆으로 가볍게 안착했다. 나는 멍한 얼굴인 비비앙의 윗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멍청아. 그럴때는 나랑 같이 있는 애들을 잡아야지. 아무 상관도 없는 인간을 잡으면 어떡해.” “하…하지만 같은 인간인데…어째서….” “귀찮고 방해 되잖아. 그리고 나랑 상관도 없는 사람이고. 죽든 말든.” “그, 그래도! 그렇게 함부로 사람을 죽이면 어떡해! 너 정말 인간 맞니?”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뭔가 어색하다 야. 아. 그리고 애들한테 슬금슬금 뻗어 나가는 다리는 동작 그만. 확 뜯어 버린다?” 사늘하게 웃으며 경고하자 비비앙은 뜨끔한 얼굴로 다리를 다시 집어 넣었다. 의뭉스럽기는. 현재 나는 비비앙의 몸에 올라타 있고, 그녀는 어쩔줄 몰라하는 얼굴로 땀만 뻘뻘 흘리고 있었다. 현재 내 손은 연한 주홍빛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화정의 힘을 담은 마력. 첫 선으로 보스 몬스터를 조지는것도 괜찮은 선택 같았다. 간만에 몬스터 다운 몬스터를 잡는다는데 흥분했는지 나는 전신으로 진득한 살기를 흘리고 있었다. 얘를 어떻게 죽일까. 나와 시선을 교환한 비비앙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입술을 덜덜 떠는게 내 존재와 자신의 격의 차를 체감한 모양 이었다. 내가 자신의 처우를 고민하는걸 알았는지 비비앙은 절망적인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살고 싶어하는것 같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을 때마다 덜덜 떨리는 진동과 흘끔흘끔 나를 곁눈질 하는게 그 반증 이었다. 그나저나 이번에 내 힘을 일부 사용해본 소감은. 솔직히 나도 어느정도 놀란 상태였다. 이길거라는 자신은 있었지만 이정도로 쉽게 잡을지는 상상도 못했다. 소도시 주변이긴 해도 명색이 던전 마스터, 보스 몬스터인데. 힘을 가진다는게 이런 기분이구나. “으윽!”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는지 비비앙의 얼굴이 급격히 찡그려졌다. 그녀는 계속해서 내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침을 꼴깍 삼킨 후 입술을 열었다. “있잖아.” “응.” “나 살려주라.” “?” 이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지. 나는 머리를 한두번 긁적인 후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왜. 살려줘. 응? 살려주라.” “…그래도 명색이 던전의 주인이자 보스 몬스터 인데. 자존심도 없어?” “그게 뭐. 난 사는게 가장 중요해. 살려줘. 부탁해.” “…….” 표정을 싹 바꾸고 눈을 초롱초롱히 뜬 채 간절히 애원하는 비비앙을 보자 조금 기가 막혔지만, 이내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홀 플레인이 게임이 아닌만큼 인간은 물론이고 다른 동물, 생물들도 한번 죽으면 그대로 끝이다. 특히 지성을 갖춘 존재라면 당연히 생존에 대한 욕구가 있는게 정상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쉽게 목숨을 구걸하다니 너무 이상하잖아. 자자. 조금 더 싸워보고 결정하자고. 혹시 알아? 네가 이길지도….” “싫어. 왠지 지금 이후로 너한테 덤비면 반항도 못해보고 끔찍하게 죽을것 같은 예감이 들거든. 내가 좋은거 줄게. 그러니까 나 살려줘. 제발. 응?” 감이 좋군. 실제로 나는 이후로 비비앙이 어떤 행동을 취하는 그순간 일장에 터뜨려 죽일 생각 이었다. 그러나 내가 위로 올라온 후 그녀에게서 어떤 살기도 느낄 수 없었다. 굳이 감정을 느낀다면 굴종이라고 할까? 아무튼 좋은거를 준다는 비비앙의 말에 나는 눈을 반짝였다. “좋은거?” “응응. 어차피 여기 들어온 이유가…뭐 다른 이유들도 있겠지만. 어쨌든 내 보물들을 얻으려고 온거잖아.” “흐음.” 고심하는 낯빛을 보이며 턱을 매만지자 비비앙은 재빨리 납작 엎드렸다. 마치 강아지가 주인을 보고 꼬리를 살랑이는 태도 같았다. 일단 나는 비비앙이 토해내는 것들을 곱게 접수하기로 마음 먹었다. “뭐 줄건데? 알겠지만 목숨 값은 제법 비싸단다.” “음…전부 다 내놓을게. 일단 내 공방으로 가자. 가서 보고 마음에 들면 살려줘. 공방은 이 통로를 벗어나면 바로 앞에 있어.” “뭐 그러지. 그나저나 애들은…. 저대로 둬도 당분간은 괜찮지?” “난 상관 없기는 한데…응. 그건 걱정마. 들어가면 아직 살아있는 인간들이 두어명 있을거야. 어제 잡았는데 아직 살아 있어!” 실로 만들어진 고치 안에 있는 셋을 보자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바로 고개를 주억이자 거미는 뒤뚱뒤뚱 몸을 돌리더니 이내 안도한 얼굴로 통로를 빠른 속도로 벗어났다. 몸 위에 나를 태운채.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왜 이렇게 비비앙이 불쌍해 지는 걸까요…. 그러나 비비앙의 불쌍함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던전이 지루하신 분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요. 이제 몇 화 남지 않았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끝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도 뽑아 먹을건 다 뽑아 먹고 가야하지 않을까요. 하하하. 그리고 사람인생님. 위로 쪽지 감사합니다. 지금 봤네요. 정말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사람인생님은 소설 초반부 부터 저에게 정말 큰 힘이 되어 주시는것 같습니다.(__) 『 리리플 』 1. 블라미 : 1등을 축하 드립니다. 이번회도 재미있게 감상하시면 좋겠습니다. 저 또한 더욱 건필하도록 하겠습니다. 2. hohokaya1 : 코멘트를 보니 피로가 싹 날아가는것 같았습니다. 언제나 연참을 못해드려 죄송한 마음뿐 이네요. 아. 요새 2월이 너무 바쁜것 같습니다. 하던 일을 그만두게 되 인수 인계 준비도 해야하고. 설날도 다가오고. 정말 눈 코 뜰새 없이 바쁘네요. 하하하. 3. 리인카네이션 : 실은 초반부 뮬에서 실력을 보이면 이렇게 됩니다. 이번회 처럼요. 하하하. 뮬에서 떠나면 싫어도 실력을 드러내야할 상황이 옵니다.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주세요. :) 4. zeromax : 언제나 글을 쓰면서 한편한편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서는데, 다행입니다. 다음회도 알찬 내용으로 준비해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5. 에인트제 : 흐흐흐. 비비앙이 참. 저도 쓰면 쓸수록 정감이 가는 캐릭터 입니다. 에인트제님도 언제나 행운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알고 보니 행운 101포인트?!) 6. Demodex : 고맙습니다. 정신 다잡고 더욱 집필 하도록 하겠습니다. :) 7. 사람인생 : 하하하. 쪽지 정말 잘 받았습니다. 쉬려고 해도 코멘트를 보니 저절로 손이 키보드에 가더군요. 제가 천성 독자님들을 좋아하나 봅니다. 앗. 이것은 고백? *-_-* 8. GradeRown : 아. 쓰면서 인상을 찌푸리실 독자분이 있을지도 몰라 참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과정도 스킵한 거구요. 지연양은 아쉽지만 여기서 굿바이 입니다. 주인공 주변 여자들은 보호 받는 대신 쩌리 남성, 여성 사용자들이 그만큼 더 곤욕을 치를 예정입니다. 하하하. 9. 현오 : 하하. 이런. 전개가 아쉬운 분들도 분명 몇분 계실겁니다. 현제 전개에 관한 제 모토는 빠를때는 빠르게. 필요한 부분은 천천히 입니다. 하하하. 첫 탐험과 첫 던전인 만큼 여러 내용을 담고 싶었습니다. 부디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__) 10. 슬피우는영혼 : 아하. 세라프 말씀 하시는 거군요. 가장 공들인 캐릭터중 하나입니다. 일단 중요 캐릭터인 만큼 앞으로 나올 일은 무궁무진 하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세라프가 세번째로 마음에 들어요!(그렇다면 첫번째와 두번째는…?)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코멘트좀 많이 주세요! 그리고 추천도…☞☜)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68 / 0933 ----------------------------------------------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비비앙의 말대로 공방으로 가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통로를 나간 후 조금 더 기어(?)들어 가자 또 하나의 통로가 보였다. 지금껏 본 통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 통로를 통과한 후 더욱 안으로 들어가자 바로 연금술사의 공방이 보였다. 공방 안은 수많은 볼거리들이 있었다. 이리저리 흩뿌려진 문서와 기록, 몬스터 사체, 기묘한 연기를 내뿜는 유리병 안에 든 액체들. 그리고 한쪽 구석에는 하얀 실로 칭칭 감긴 고치 두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일전에 잡은 사용자 두명인것 같았다. 비비앙은 잠깐 기다려 달라는 말을 건넨 후 바닥으로 나를 살포시 내려 놓았다. 비비앙은 내게 목숨을 구걸한 이후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하고 있었다. 곧이어 비비앙은 공방을 구경하는 나를 놔두고 분주한 움직임을 보였다. 한동안 이곳저곳을 뒤적이는가 싶더니 비비앙은 하나씩 내 앞에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남이 봐도 정말 열심히 움직이고 있구나.”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낡고 네모난 상자 하나를 툭 떨구는 비비앙을 보며 나는 정말 살려줄까 심각한 고민이 들었다. 기다란 다리를 들어 얼굴의 땀을 닦은 비비앙은 이내 내 눈치를 살살 살피며 입을 열었다. 그동안 보면 기분 전환이 빠른 괴물이기 때문에 언제 또 나한테 이빨을 들이밀지 모른다. 속으로 만반의 경계를 마친후 나는 그녀의 말을 들었다. “휴~우. 다 꺼냈다. 더 있는것도 있지만 네 마음에 드는건 없을걸. 아무튼 인간들 기준으로 쓸모가 있겠다 싶은건 전부 꺼냈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아.” 히히 웃는 그녀를 보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한때 고명한 연금술사였는데, 어떻게 이만큼 지능이 퇴화한걸까. 아니 그전에 지금 나와 괴물의 관계를 보니 완전히 주객이 전도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침입자 또는 도둑이나 다름 없는데 알아서 물건을 바치다니. 하긴 살고 싶다는 욕구 앞에 장사 없으니. 나는 이 어색한 상황을 납득한 후 가장 왼쪽에 있는 커다란 가죽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제법 묵직하고 주머니가 알알이 튀어 나온게 가득 찬것 같았다. 일단 양은 합격. 나는 바로 주머니를 밀봉한 줄을 풀고 입구를 풀어 안을 들여다 보았다. 이건…. “보석…이잖아?” “요호호호. 응. 인간들이 대체로 보석 좋아하잖아? 나도 인간이었던 시절이 있는데, 그때 반짝이는걸 무척 좋아 했거든. 아무튼 다들 질 좋은 놈들로만 골라논 거라구. 그거 한 주머니만 해도 당분간 먹고 사는데 걱정은 없을걸? 어때. 마음에 들지 않아?” “으음.” 비비앙은 불안감을 떨칠 수 없는지 말을 하면서도 슬쩍슬쩍 내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보석의 가치를 들먹이며 열변을 토하는걸 보며 나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비비앙의 말이 틀린건 없다. 주머니 안에 든 보석의 가치는 확실히 대단하다고 볼 수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킨 후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주머니 안에는 영롱한 빛깔을 내뿜는 보석이 한웅큼 들어 있었다. 언뜻 보이는것만 해도 자수정, 아쿠아마린, 다이아몬드, 에메랄드, 루비, 오팔, 토파즈등등. 척 봐도 빛깔이 번들거리는게 최상품이 분명했다. 홀 플레인 안에서 보석은 단순 장식용으로도 인기가 있지만, 그보다 마법사들에 더 인기가 많았다. 자신들의 직업과 관련해 여러 유용한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문득 시크릿 클래스(Secret Class)인 보석 마법사. 김한별의 얼굴이 머리에 떠올랐다. 보석을 주로 소모하는 마법사로 예상되는 만큼 이 주머니를 보여주면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바로 머리에서 한별의 기억을 지웠다. 결국 그녀는 자기 복을 스스로 걷어찬 셈 이니까. 물론 그녀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미래가 변하지 않는다면 황금 사자 클랜의 해체는 기정 사실이었다. 내가 흡족한 미소를 머금자 비비앙의 얼굴이 환해진다. “좋군. 받기가 미안할 정돈데?” “에헤헤. 에이 뭘. 목숨보다 귀한건 없어. 그리고 어차피 나는 별로 쓸데도 없구.” 목숨에 대한 집착이 심하군. 어쨌든 나는 보석 주머니를 한쪽에 둔 후 옆에 있던 다른 가죽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허공으로 들어 올리자 쩔렁이는 소리가 들리는게 아무래도 금화 같았다. 이것 또한 주머니가 빵빵했다. 주머니 안을 보자 예상대로 말간 황금빛을 뽐내는 금화들이 보였다. “흐음. 금화잖아. 대충 200골드 정도 되겠네. 금화가 이거밖에 없어?” 가죽 주머니를 만지작 거리고, 던졌다 받았다를 반복하자 대강 금액을 가늠할 수 있었다. 적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앞선 보석이 너무 대단해 조금 실망한 감이 있었다. 그런 내 기색을 읽었는지 비비앙은 뜨끔한 얼굴로 다리를 꼼지락 거렸다. 이윽고 그녀는 풀죽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 정확히 204골드 27실버 306브론즈인데…금화는 그렇게 욕심이 없었거든. 그래도 있는대로 박박 긁어 모았는데…흑. 정말 그거 밖에 없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이럴줄 알았으면 더 모아두는건데…나를 용서해줘.” 말을 하면서 울먹이던 비비앙은 이내 눈물을 한방울 똑 흘리고 말았다. 나는 깜짝 놀라 황급히 눈 앞의 거미를 달랬다. “아, 아니. 괜찮아. 괜찮다니까. 자자. 울지 말고 고개 들어.” 던전을 털러온 침입자가 위로하고 던전의 주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한다. 아무리 홀 플레인이라고 하지만 정말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졸지에 삥 뜯는 나쁜놈이 되버린 나는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비비앙을 위로했다. 내 위로에 비비앙은 고개를 주억이더니 다리로 눈물을 훔쳤다. …아.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된다. 보석 옆에 주머니를 곱게 두자 비비앙은 결연한 얼굴로 다음 주머니를 가리켰다. 앞선 보석, 금화 주머니보다 서너배는 큼지막한 거의 봉지 주머니 수준 이었다. “요, 요거! 요거는 정말 마음에 들걸!” “어, 어. 그래그래. 지금 볼게. 고맙다 정말.” “응. 얼른 봐봐. 히히.” 손수 주머니를 풀어 주려다 자신의 다리를 본 비비앙은 이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내게로 슥 밀려오는 주머니를 간단히 개봉한 나는 바로 내용물을 확인했다. 저리도 자신하는걸 보니 안에 든 내용물에 호기심이 일었다. 안에는 수많은 색을 띈 액체를 담은 유리병들이 있었다. 아마도 본인이 직접 만든 물약인것 같았다. 가지런히 정리된 물약들을 보며 나는 곧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내가 주머니를 물끄러미 보자 비비앙이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에헴. 그 물약들 보이지? 흠흠! 어떤 종류들이 있냐면 말이.” “상급 치료수들이 좀 있네…흠. 최상급은 없구나. 아쉽다. 마나 회복수들도 보이고…독. 이건 좀 쓸만하겠네. 해독 물약. 음. 독이 있으면 해독 물약도 있어야지. 오? 이건 폭발성 포션 이잖아? 이건 괜찮다. 그리고…엥. 이건 음약이라고?” 제 3의 눈으로 확인한 정보를 중얼거리자 비비앙의 목소리가 중간에 뚝 끊겼다. 이윽고 쏟아지는 요상한 시선에 고개를 들자 뜨악한 얼굴로 나를 보는 한마리 거미가 보였다. 왜 저렇게 나를 보는거지. 그래도 괜찮은 것들을 내놓아 내 마음은 꽤 풀어진 상태였다. 나는 자상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왜?” “너 혹시 연금술사? 검사 아니었어?” “응? 응. 연금술사는 아닌데. 왜그러는데.” “어? 아, 아니. 그러니까…아니야. 응. 아무것도….” 질끈 눈을 감는 그녀를 보며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아. 혹시…막 자랑스럽게 설명하려던 찰나 내가 선수를 치는 바람에 주눅이 든건가. 괜한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나는 입맛을 다셨다. 힘내라는 의미로 녀석의 다리를 토닥인 후 나는 지금껏 받은 세개의 주머니를 계산했다. 어차피 금화는 큰 의미가 없다. 여유분으로 가지고 온 1000골드가 있으니까. 그리고 보석 주머니와 물약 세트는 대박으로 볼 수 있었다. 보석 주머니는 아껴놨다가 추후에 재능 있는 마법사 한명을 영입 후 주거나 여러 무기를 만드는데 사용할 수 있었다. 물약은 말이 필요 없다. 홀 플레인에 있으면 사용할 일은 무궁무진 할 테니까.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마지막 남은 낡은 상자로 손을 내밀었다. 이번엔 주머니가 아닌 상자라는 사실에 즐거운 기대감이 들었다. 낡은 상자를 눈 앞으로 끌어오자 비비앙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불안한 기색이 조금 감도는것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이번에 드러난 감정은 자부심으로 볼 수 있었다. 그녀와 잠시 시선을 교환한 후 나는 곧바로 상자를 개봉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왠 낡은 책 한권이 들어 있었다. 이건…. 『축하합니다. 희귀 직업(Rare Class)을 발견했습니다. 본 책을 읽은 후 습득하면 키메라 연금술사(Chimera Alchemist)로 전직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메세지가 허공에 떠오른다. 그러나 막 읽기도 전 또 하나의 메세지가 연이어 떠올랐다. 『키메라 연금술사는 마법사 직업의 상위 계열로 볼 수 있습니다. 키메라를 직접 만들수도 있지만, 소환진과 연계한다면 타 차원에 존재하는 존재들을 소환하는것도 가능합니다. 마법진 계열의 마법사 또는 소환술을 익힌 사용자가 있다면 계승을 추천합니다.』 『현재 김수현님의 직업은 검사 계열 최상위 비밀 직업(Secret Class) 검술 전문가(Sword Specialist)입니다. 책을 습득할 수 있지만 고유, 특수, 잠재 능력을 판단한 결과 효율은 7할 이하로 감소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마력 능력치 96 포인트 판정으로 감소분의 2할을 복구할 수 있습니다. 다만 습득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오….” “그 책은 바로 내가 연금술사이던 시절과 이렇게 변한후의 과정 등등. 아무튼 내가 익힌 연금술의 정수를 집약해논 책이라구. 아마 마법사 녀석들이 보면 침을 졸졸 흘릴걸?” “…….” “우웅…마음에 안들어?” 내가 허공만 응시하자 비비앙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나는 고개를 잘락이 흔든 후 떨리는 손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1회차에는 그렇게 찾아도 없던 레어, 시크릿 클래들이 이렇게 나오다니. 뭔가 허무하면서도 가슴 벅찬 감정이 전신을 물들였다. 키메라 연금술사는 1회차 활동때 등장하지 않았다. 그때 들은 기억으로는 던전의 주인을 잡지 못하고 놓쳤다고 하는데, 그때 비비앙이 이 책을 들고간것 같았다. 확실한건 책을 습득한 후 직접 봐야 알겠지만 그래도 레어 클래스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초대박을 터뜨렸다. 그동안의 짜증과 고생이 눈녹듯 사라지는걸 느끼며 나는 상기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니. 마음에 든다. 보석보다, 물약보다 이 책이 가장 마음에 들어. 연금술사의 정수를 담은 책이라니. 이건 정말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거야.” “저…정말? 헤헤. 이상한 수컷이네. 헤헤헤. 그렇게까지 좋아하다니.” 그동안 자신이 걸어온 길과 업적을 인정받아서 좋은지 비비앙은 몸을 배배꼬며 수줍은 표정을 드러냈다. 나는 픽 웃은 후 책을 곱게 챙겼다. 다른걸 다 버리더라도 이 책만큼은 무조건 들고갈 생각이다. 물론 다른걸 버릴 생각은 없지만. 그런 나를 본 비비앙은 이내 살랑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럼 만족하지? 나 살려주는거지?” 바로 “응.”이라고 답하려고 했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지금 와서 딱히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이정도만 해도 충분하지만 그래도 뭔가 더 뽑을게 있을것 같았다. 그게 뭔가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딱! 소리가 나도록 손가락을 퉁겼다. 찜찜한게 있는가 싶더니 한개 더 받아낼게 있었던 것이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오늘은 연참을 할 예정입니다. 바로 다음편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음편으로 넘어가시지기 전 추천과 코멘트 한번 달아주시면 진심으로 감사하겠습니다. 30초만 투자해주시면…될거에요.(☞☜) 리리플은 다음회에 이어집니다. 0069 / 0933 ----------------------------------------------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비비앙은 인간에서 거미로 변태했다. 그 과정을 거치려면 신체 개조 또는 감염이 필수인데, 두 과정 모두 필수적으로 <핵>이라는 촉매가 필요했다. 핵은 마나를 품은 물질이라면 어떤것도 가능한데 가장 대표적인건 마나석으로 볼 수 있다. 그깟 마나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비비앙은 일반적인 경우와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체내에 품은 마나석은 시간이 지날수록 몸을 이루는 하나의 핵이 된다. 인간으로 따지면 심장 혹은 마력의 중추로 볼 수 있다. 마력을 품고, 공정하며 하루에도 수많은 마력의 흐름이 거쳐가는 장소. 오랜 시간이 지나면 핵이 된 마나석은 깊은 마나를 간직한 일종의 내단으로 성질이 변하게 된다. 물론 실제로 신수의 신단 또는 영물의 영단과는 비교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혹시 모르는 일 이었고 적어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는 일부러 심각히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음. 조금 부족한데.” “에? 에이~. 좀 봐주라. 정말 이게 다라니까?” “정말?” “응응. 정말정말.” “정말로?” 되묻고 되묻자 비비앙은 억울한 얼굴이 되더니 빽 소리를 질렀다. “이씨. 답답해. 정말이라고! 못 믿겠으면 직접 뒤져봐!” “난 그걸 가지고 싶은데.” 나는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몸을 가리켰다. 비비앙은 내 손가락을 보더니 이내 방향을 따라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곧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보게된 비비앙은 별꼴이라는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보고는 입을 열었다. “인간 수컷아. 궁금한게 있는게. 너 혹시 특이한 성벽이라도 있니?” “성벽?” “응. 예를들면 거미와 교배하는….” “닥쳐.” “힉. 미안!” 나는 바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얘가 지금 뭔 소리를 하는거래. 내가 험한 얼굴이 되자 비비앙은 바로 눈을 내리깔며 오들오들 떨었다. 잠시 그녀를 지켜본 나는 일부러 칼을 들어 빙글빙글 돌렸다. 그럴수록 떨림의 강도가 더욱 심해지는게 보였다. 왠지 저 몸짓을 보자 괴롭히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친다. 그래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나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너랑 성교하고 싶다는 의미가 아니라. 네 안에 있는걸 가지고 싶다고.” “내 안…? 내 안에 쓸모 있는건 없는데. 실이라도 좀 뽑아줄까?” “아니아니. 그런건 괜찮아. 그 말이 아닌데. 너 원래 인간 이었잖아. 그렇지?” “엉.”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비비앙. 왠지 말을 꺼내기가 더욱 미안해진다. 그러나 나는 마음을 다잡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거미로 변했으면 촉매 역할을 한 마나를 품은 물질이 있을텐데.” “그럼. 아까부터 느낀건데 너 정말 해박…어. 잠깐만. 핵 말하는 거니?” “그렇지.” “지금 나한테. 핵을 달라고? 미쳤어?” 역시 그 부분은 기억하고 있는지, 아니면 원래 연구하고 직접 몸에 시행한 부분이라 잘 알고 있는지. 비비앙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게 물었다. 나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내가 수긍하는걸 확인한 후 그녀는 멍한 얼굴이 되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듯 “핫.”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노. 농담?” “농담 아닌데.” “에~이. 노, 농담인거 다 티 나네? 요…호호.” “아니라고. 빨리 핵 내놔. 이것들이랑 핵 주면 곱게 살려줄게. 자. 약속.” 새끼 손가락을 내걸자 비비앙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녀는 뒤로 주춤이 물러나며 높은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미쳤어! 그걸 왜줘!” “걱정마. 그거 뽑는다고 안죽어.” “그건 나도 알고 있거든? 넌 네 심장이나 마력 회로 뜯어 달라면 뜯어 줄래?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나야 당연히 안주지. 어쨌든 줘.” “뭘 은근슬쩍 달라그래! 싫어!” “줘.” “죽여! 그냥 죽이라고! 이걸 주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지! 이걸 주면 나는 그대로…힉.” “그래? 그럼 아쉽지만 뭐.” 검을 들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는다. 내 모습을 보자 소름이 돋았는지 비비앙은 진저리를 치며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이곳은 공방 안. 뒤로 물러나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 이었다. 내 뒤에 통로가 있는걸 봤는지 비비앙은 절박한 어조로 빠르게 입을 열었다. “잠깐만. 잠깐마안! 일단. 일단 검좀 집어 넣어봐. 우리 얘기를 하자. 얘기. 야! 오지 말라고 쫌!” 나는 착하기 때문에 그녀의 요청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걸음을 멈춘후 나는 또박한 목소리로 요구 사항을 다시 말했다. “다시 말할게. 지금 이것들이랑 네 몸 안에 있는 핵을 줘. 그걸로 네 목숨값 퉁치자.” “그게 말이 안되는….” “협상 결렬.”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내 모습에 결국 비비앙은 참고 있던 울분을 터뜨렸다. “야아아아!!!!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아!!!!” “엇. 슬슬 본색을 드러내는군. 역시…. 에이 귀찮다. 그냥 죽이고 직접 빼는게 낫겠네. 겸사겸사 몸체도 한번 해부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다시 걸음을 옮기자 비비앙은 기가막힌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억울함. 분함. 두려움. 여러 마이너스한 감정이 휘몰아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빨리 울었으면 좋겠…아. 나 도대체 왜이러지. 진짜로 이상해진 건가? 잡생각을 없애고 집중을 위해 마력을 일으킨다. 검에 찬연한 검기가 피어오르며 덩달아 내 얼굴도 사늘하게 변한다. 내 표정 변화를 읽었는지 비비앙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탈주로를 찾았지만 헛수고였다. 이미 공방안은 내 살기가 가득히 들어차 있었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못했는자 막 벽을 타 도망치려던 거미를 보며 나는 전광석화와 같은 몸놀림으로 다가가 일검을 휘둘렀다. 부드러운 두부를 베는 느낌과 함께 비비앙의 다리 하나가 바닥을 굴렀다. 비비앙은 고통에 울부 짖으며 떨어지더니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에 아랑곳않고 나는 녀석의 머리 위로 검을 들었다. “잘가. 그래도 넌 꽤 유쾌한 녀석 이었어.” “으으으으으! 기다려! 잠까아안!” “응? 뭔데. 마지막 유언 정도는 들어주지.” 검을 보며 눈을 질끈 감고 소리를 질렀던 비비앙은 내 말에 빼꼼 감았던 눈을 떴다. 내 행동이 멈춘걸 확인했는지 잠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내 자신의 처지를 인식했는지 그녀의 눈망울이 조금씩 떨리는게 보였다. 오오. 드디어 운…젠장. 아무튼 내 눈동자를 본 그녀는 겨우 말이 진심인걸 깨달은것 같았다. 그녀의 자그마한 입술이 열렸다. “…줄게.” “뭐라고? 크게 말해.” “준다고! 줄테니까 죽이지 말라고! 이 나쁜 새끼야아아아! 으허어어어어어어어엉!” 결국 서러움을 참지 못해 울음을 터뜨리는 비비앙을 보며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얼굴만 보면 제법 예쁜데. 인간일적 모습이 궁금하군. 나는 씩 웃으며 치켜 올렸던 검을 다시 거두어 들였다. “잘 생각했다. 하하.” “으허어어엉! 아이고. 아이고오. 으허어어엉! 앙앙앙!” 나는 직접 거미를 다시 일으키는 수고를 해주었다. 그녀는 순순히 내 손길을 받아 들였지만,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남은 다리로 바닥을 치며 꺼이꺼이 우는 비비앙을 보며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그렇게 심하게 대했나. 연신 눈물을 쭉쭉 흘리며 울음을 토하는 거미를 보니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또한 다리가 세개나 잘려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몸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니 더욱 미안했다. “흑어허으허으엉! 으어흐어으어어엉!” “야. 시끄러.” 내 말은 속마음과 반대로 튀어 나왔다. 그래도 내 엄포의 효과가 있었는지 비비앙은 입을 딱 다물었다. 그러나 흐느낌을 멈출 수 없었는지 연시 다리 위(어깨로 예상된다.)를 들썩이며 눈물 콧물을 질질 흘렸다. 그와중에도 비비앙은 망설임이 도는지 “진짜? 진짜로 가져갈거야?”라는 얼굴로 연신 애원하는 눈길을 보냈다. 잠깐 기다리던 나는 짜증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너 지금 시간 끄냐? 줄거면 빨리 주라고. 아. 그냥 베고 편하게 가져갈까.” “알았어 씨발. 주면 될거 아니냐고…으허어엉.” 흔들림 없는 내 확답에 북받치는 설움을 참을 수 없었는지 비비앙은 다시 통곡하며 배를 불룩하게 만들었다. 중앙에 있는 내단을 밀어낼 모양 이었다. 한번. 두번. 세번. 계속 불룩하게 배를 만들던 비비앙은 이내 마지막인듯 절망 어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조용히 검을 들었다. “준다 줘! 흐끅! 이 개새흐끅! 나쁜 새끼! 엉엉!” 비비앙의 악담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윽고 마지막으로 밀어내는 과정을 보인 비비앙의 입에서 울컥이는 액과 함께 검고 동그란 구체 하나가 툭 튀어 나왔다. 그동안 꽤 묵혀뒀는지 크기가 거의 어른 손바닥만 했다. 나는 빠르게 정보를 확인했다. 『연금술사 비비앙의 핵을 습득 했습니다.』 결국 내단을 토해낸 비비앙은 그대로 주저 앉고는 허망한 얼굴로 쓰러지고 말았다. 기력이 다한 모양 이었다. 쓰러진 그녀의 얼굴을 타고 바닥에 눈물이 또르르 굴러 내린다. 나는 만족스런 얼굴로 내단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비비앙이 자그마한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흑…독있어. 흑끅! 그대로 집으면 훌쩍. 너 죽어.” 그 와중에도 걱정을 해주네. 얘 진짜 웃기다. 나는 큭큭 웃으며 내단을 그대로 손으로 집었다. 그러자 비비앙의 얼굴이 다시 요상하게 변하더니, 이내 걱정 반 기대 반인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를 더 놀리고 싶은 마음에 재빨리 내 손을 잡으며 외쳤다. “헉. 갑자기 독이 침투하는것 같아. 악. 죽는다.” “뭐, 뭐? 야! 그러니까 내가…아…이게 아니지. 오예! 꼴 좋다!” 나는 가볍게 손에 화정을 일으키고 그대로 염원을 불어 넣었다. 내가 불어넣은 염원은 내단 안에 있는 <독기>를 제거하는것. 이윽고 마력이 담긴 내 손 안에서 동글동글 돌던 내단의 색깔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티끌 한점 없는 칠흑색이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원래 색깔인 푸른 색깔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게 바로 신화계급의 장점 이었다. 염계급이라면 무조건 불태우기만 하지만 신화계급 화정은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대로 조절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을 신기한 얼굴로 지켜보던 비비앙. 이윽고 공정 과정을 끝낸 내가 품속으로 내단을 집어 넣자 멀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내가 빙긋 웃으며 “실은 뻥 이었어.”이라고 말하자 다시금 입을 삐죽삐죽 내밀더니 결국 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킥킥 웃었다. 한동안의 소란이 지나고 비비앙은 허탈한 얼굴로 그대로 자리에서 주저 앉았다. 나는 자리에 있는 비비앙을 향해 말을 걸었다. 물론 그 와중에 비비앙이 내논 주머니는 전부 챙긴 후였다. “축하해. 약속대로 살려줄게. 하하.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 참고로 정보를 하나 주면…이 던전은 최대한 빨리 떠나는게 좋을걸. 근시일 내로 던전 정보가 밝혀지고 도시 감찰단이 조사를 할 거거든.” “상관마!” “여기 있으면 죽는다니까?” “어차피 핵이 없어진 이상 나는 대부분의 힘을 상실했다고! 밖으로 나가봤자 상황은 똑같아!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윽!” 앙칼진 얼굴로 뇌까리던 비비앙은 이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핵의 상실로 인해 내부를 제어할 수 없는 모양 이었다. “윽…큭…아파…아파아!” 비비앙은 나를 보며 고통을 호소했지만 나는 딱히 해줄게 없었다. 굳이 하나 있다면 죽여줄 뿐.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내 검을 가리키자 비비앙은 배신감에 치를 떠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나쁜놈…흑…나는 몸도 마음도 다 줬는…윽…큭! 아아아아악!” “뭔 헛소리야.” 콧방귀를 끼고 나는 비비앙을 구경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광경을 보며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비비앙의 몸이 강제로 뒤틀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다리가 하나씩 천천히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로봇처럼 하나씩 분해 되고 이리저리 뒤틀리는 몸을 보며 나는 눈에 이채를 띄었다. 설마 이 현상은….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정말 간만에 연참을 해보는군요. 1만자를 넘어가자 머리에 불이 나는 기분이…. 하하하. 과연 비비앙의 몸에 일어나는 현상은 무엇일까요? 원래 비비앙은 살려준다고 하고 뒤에서 죽일 계획 이었는데, 사용자 정지연의 목을 비틈으로 어느정도 수현의 본 성격을 드러냈다는 생각에 방향을 바꿨습니다. 비비앙. 독자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도록. 이로서. 길고 길었던 던전 탐험이 끝났습니다. 다음회에는 뮬로 돌아갑니다. 하하하. 그리고 혹시 전회에 추천과 코멘트를 넘기신 분이 있다면 다시 돌아가 눌러주시면 좋겠습니다. 독자분들의 30초 투자는 제가 30시간동안 힘을 낼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 리리플 』 1. 비극의삶 : 하하하. 다음회를 기대해주세요. 1등 축하합니다. 2. 유운처럼 : 오랜만입니다! 가끔 코멘트 달아주세요. 하하하. 3. GradeRown : 과연 다음회 비비앙이 어떻게 될지 기대해주세요. 후후후. 4. 비도무영 : 음. 버렸다기 보다는…무덤덤해 진거죠. 살인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미친놈은 아닙니다. 다만 필요하면 미친놈이 될수는 있습니다. 5. 사람인생 : 솔직히 저도 쓰면서 비비앙이 불쌍하다고 느꼈어요. 아하하. 만약(?) 살아난다면 솔이와 함께 듀오를 이룰지도…^^. 6. 에인트제 : 아마 그런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수현이가 잘 교육을 시킬겁니다. 하하하. 7. 유이라나 : 의외로 비비앙이 인기가 있어서요. 앞서 희생한 사용자 정지연 덕분에 비비앙이 조금 더 생명을 연장했습니다. 과연 다음회에 어떻게 될지요. 하하하. 8. 밧슈 : 흐흐흐. 비비앙의 본 바탕은 인간…헙! 9. 3d33d : 음. 초반에 설정했던대로 스탯 올려주는 경우는 정말. 극히. 드물어요. 다음회에 핵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나옵니다. 하하하. 10. 전설의유저 : 그렇지요. 아직 폐허의 연구소와 절규의 동굴이 남은만큼 구를 거리는 실컷 남았습니다. 하하하.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코멘트좀 많이 주세요! 그리고 추천도…☞☜)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70 / 0933 ----------------------------------------------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한동안 비비앙의 몸쇼를 구경하던 나는 이내 흥미가 떨어지고 말았다. 일단 내 알바가 아니었고, 더 흥미를 끌 수 있는게 내 품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비비앙에게서 강탈한 핵 이었다. 스탯을 상승시킬 수만 있다면 지옥에라도 들어갈 의향이 충분한 나였기에, 설레는 감정을 안고 품 속으로 손을 넣었다. 습득한 핵의 정보를 제 3의 눈으로 자세히 확인할 생각이었다. “흑…끅! 윽!”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온 몸을 뒤틀며 고통을 호소한다. 그런 비비앙을 외면하는 내 마음은 너무나 아팠다. 하지만 곧 하나의 딱딱한 구체가 손 안 가득히 잡히자 잊을 수 있었다. 원형이 마나석이라 가능성은 낮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이었다. 묵힌지도 제법 됬을테고 거미로 변태하는 과정에서 여러 공정 과정을 거쳤을것이다. 소정의 성과를 기대하며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고대 연금술사 비비앙의 핵』 * 100년을 넘게 거미로 살아온 고대 연금술사 비비앙의 핵 입니다. 거미로 변하는데 중추 역할을 한 최상급 마나석 입니다. 그동안 몸 내부에서 수많은 마력의 흐름을 거치고 품는 동안 영물들이 가지는 일종의 내단과 비슷한 효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내단까지는 확실히 좋았다. 그러나 하지만 이후로 설명을 읽던 내 표정은 점점 실망감에 물들었다. 잠시 집중해서 모든 설명을 읽은 후. 나는 입맛을 다시며 마나핵을 다시 품 안으로 집어 넣었다. 스탯 포인트 상승에 관한 내용은 있긴 했다. 복용시 본인의 마력 능력치에 따라 최소 1포인트에서 4포인트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다만 조건이 붙어 있었다. 그건 바로 마력이 70 이하인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잡은것. 그 이상의 사용자가 먹는다면 단순히 마력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고 또는 안정시키는 용도로 밖에 쓸 수 없었다. 즉 나한테는 치료용에 불과하다는 소리였다. 그래도 현이나 유정이한테 먹이거나 내다팔면 두둑이 챙길 수 있는 물건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쉽지만 꼭 나만 먹으란 법은 없으니 말이다. 이번 던전에서 얻은 물품의 처리를 고심하고 있을때, 어느새 비비앙의 비명 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고 있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나는 고개를 들었다. 설마 죽은건가? 거미 신체를 유지하는 중추가 된 핵을 뽑아낸 후 내부의 폭주가 이루어짐은 자명한 일 이었다. 100년이 넘게 쌓아온 힘을 한번에 빼앗겼으니까. 사용자로 치면 마력은 있으되 그걸 발현할 수 있는 기관을 강탈당한것과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들고 전방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그곳에는…. “헐.” 나는 순간 너무 놀라 헛바람을 내고 말았다. 눈 앞에는 거미가 더이상 없었다. 있는 <사람>이라곤 칠흑빛 검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묘령의 여인 한명이 주저 앉아 있을 뿐 이었다. 또랑또랑한 눈동자로 나를 앙칼지게 노려보는데, 나는 직감적으로 이 사람이 누군지 느낄 수 있었다. “비비앙?” “왜불러. 이 나쁜놈아.” “…….” “불렀으면 말을 하라고.” 인간으로 변한 비비앙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비앙? 이게 네 인간일적 본 모습인가?” “보면 몰라? 있는척, 아는척은 다 하더니.” 비비앙이 톡 쏘는 말투로 대꾸하자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는 경우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흥.” 콧방귀를 뀌는 비비앙의 몸을 나는 더 자세히 보았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비비앙이 아니꼬운 얼굴로 자신의 가슴을 가렸다. 그때서야 그녀가 나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내가 보고자 하는건 그녀의 젖가슴이 아니었다. 나는 뚜벅뚜벅 걸어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저질.” 그녀는 계속해서 악담을 쏟아 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비비앙의 말이 옳았다. 나는 단순히 핵을 뽑아도 죽지 않겠지라고 생각했지만 뭔가 다른 비하인드가 있는 모양 이었다. 적출 후 불완전한 모습을 보이며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녀석을 보며 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찌직. 지지직.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자, 피부가 허물을 벗기듯 떨어져 나간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떼고 말았다. 벗겨진 피부 아래로 발개진 살이 눈에 보였다. 좋은 현상이 아니다. 지금 비비앙은 죽어가고 있었다. “아파아….” 내가 손을 댄 부분에 지진이 난 도로처럼 쩍쩍 갈라진 피부가 보인다. 내외로 고통이 가시질 않는지 비비앙은 연신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나는 멋쩍은 기분이 들어 그녀를 향해 말을 걸었다. 이렇게 된게 내 책임도 없잖아(?) 있었기 때문이다. “의외네. 고작 핵 하나 뽑았다고 인간으로 되돌아온것도 그렇고…곧 죽을 사람처럼 보여.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거야?” “흥. 어차피 네 알바도 아니잖아. 그리고 내가 너한테 일일히 설명할 의무라도 있니?” “하긴.” 내가 가볍게 수긍하자 비비앙은 콧방귀를 탕탕 뀌며 고개를 돌렸다. 입을 꼭 다문게 나는 더이상 너랑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분위기를 팍팍 풍기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한두번 끄덕인 후 바로 몸을 돌렸다. “그럼 잘 있어라.” “…새, 생각해보니. 말해줄수도 있을것 같아.” 한걸음 내딛자 재빨리 내 옷깃을 붙잡는 비비앙의 손길이 느껴졌다. 나는 입가에 가느다란 호선을 띄운 후 키득거렸다. “너 제법 귀엽긴 하다. 큭큭.” “호호. 귀엽다니. 호호. 이래뵈도 인간 시절때는 제법 인기…가 아니라.” 내 칭찬에 헤실거리던 비비앙은 이내 얼굴을 찡그린 후 입을 내밀었다. 나는 할 말 있으면 하라는 얼굴로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나와 눈을 마주친 비비앙은 이내 얼굴을 붉히며 수줍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그렇게 꼭 듣고 싶어?” “아니.” “휴. 그렇구나…응? 야! 가지말라고 쫌!” “아니.”라고 대답한 후 또 몸을 돌리는 나를 보며 비비앙의 소리를 질렀다. 나는 다시 걸음을 멈추고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아 왜. 이제 그만 좀 갈란다.” “나는 어떡하라고!” 답답한 얼굴로 자신의 가슴을 탕탕 치는 비비앙. 그탓에 그녀의 젖가슴이 출렁이는게 보인다. 흠. 꽉찬 B컵이군. 내 얼굴과 자신의 가슴을 번갈아 본 그녀는 입술을 짓씹으며 또 자신의 가슴을 가렸다. “상관하지 말라매.” “상관해! 상관해도 돼!” “싫은데.” 단칼에 거절하자 비비앙은 또 울먹이는 얼굴로 기어와 내 바짓가랭이를 붙잡았다. 얼씨구. 정말 가지가지 한다. “제발 상관해주세요. 흑.” “뭐야. 안 죽이고 살려줬으면 끝이지.” “뭐, 뭐? 야! 네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덜렁 핵을 뽑아버리는 바람에 당사자인 내 몸에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는 있니? 피부 짝짝 갈라진거 안보여? 너야 룰루랄라 가면 끝이지만 나는 아니라고! 너 덕분에 나는 기존에 보유한 힘은 물론 거미로 변한 후 쌓은 생명력이 전부 없어졌다고! 외부는 말할것도 없고 내부는 진탕이고. 어떡할건데!” 나는 깜짝 놀라는 척을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뭐, 뭐라고? 그럼 나 때문에 네가….” “그래 이 바보야! 지금 이대로라면 난 5일 안에 한줌 재가 되어 죽는다고!” “알았어. 비비앙. 지금까지 여러가지 주고 도와준거 고마워. 그럼 안녕히.” “내 말은 그 뜻이 아니라고오. 어엉…제발….” 끝내 또다시 울음을 터뜨리는 비비앙을 보며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화답했다. “네가 준거잖아. 우리 서로 구차해지지 말자. 깔끔하게 끝냈으면 좋겠다.” 내 매정한 말에 비비앙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알아듣지 못할말을 웅얼거렸다. 그 모습이 좀 안된감이 있어 나는 한층 자상한 목소리로 운을 띄었다. “고칠 방법이 아예 없는건 아닌데….” “뭐, 뭔데?” 내 혼잣말을 들었는지(실은 들으라고 의도했다.) 비비앙은 귀를 쫑긋 세우며 내게 물었다.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잡고 눈을 빛내는게, 생에 대한 집착이 어마어마한것 같았다. 왜 그런지 이유가 궁금했지만 나는 일단 묻어두기로 했다. 그전에 비비앙의 정보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킨 후 그녀를 응시했다. < 거주민 정보(Native Status) > * 거주민 정보를 사용자 정보로 변환합니다. 1. 이름(Name) :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2. 클래스(Class) : 키메라 연금술사(Rare : Chimera Alchemist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에스피니온(현재 멸망한 도시(국가)입니다.)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고대 연금술사 · 칠흑의 사냥 거미 · 홀 플레인 6. 성별(Sex) : 여성(24 · 128[?]) 7. 신장 · 체중 : 165.5cm · 48.8kg 8. 성향 : 혼돈 · 중용(Chaos · Neutral) [근력 48] [내구 25(-25)] [민첩 56] [체력 20(-25)] [마력 42(-50)] [행운 49(-25)] * 신체 변화의 중추를 담당하던 핵을 강제 적출함으로서 내부가 폭주하는 중 입니다. 폭주는 현재 진행형 입니다. 키메라 연금술사로서의 능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 인간으로 돌아왔지만 정리된 절차를 밟은게 아닌 알 수 없는 강제성이 가미 되었습니다. 내부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부 능력치가 지속적으로 하향하고 있습니다. * 긴급 치료를 요하는 중상입니다. 이대로 시간이 경과한다면 곧 사망에 이를지 모릅니다. 대(大) 치료 주문을 외워도 내상을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목숨은 구할 수 있지만 후유증이 남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 엘릭서를 한병 이상 사용하면 내외로 완벽한 치료가 가능합니다. 모든 정보를 꼼꼼히 읽은 후 눈을 떼자, 비비앙이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나를 바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당장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침묵하는 내가 답답한지 그녀의 입이 몇번이나 달싹이는게 보였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비비앙의 시선을 피했다. “생각해보니 안될것 같아. 내가 괜한 말을 한것 같네. 그냥 관두자.” “야. 그러는게 어딨어. 우리 인간적으로 최소 말을 꺼냈으면 마무리는 짓자.” “…싫어.” 비비앙을 구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도시에 있는. 사용자 전용 창고에 쟁여둔 엘릭서 두병중 한병을 사용하면 되니까. 그러나 내가 괜히 두병을 준비한게 아니다. 다 주인이 있는 엘릭서들 이었다. 회복시키면 제법 도움은 될지 몰라도, 솔직히 아까운 감이 없잖아 있었다. 결국 내가 몸을 돌리자 비비앙은 다시 나를 붙잡으며 애원했다. 그러나 나는 매달리는 그녀를 걷어찬 후 묵묵히 통로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뒤에서 서러운 울음을 터뜨리는 비비앙의 목소리가 들렸다. “살고 싶어…살고 싶다고…! 너! 인간!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는거지? 네 녀석이 나한테 한 모든짓을 생각하면…난…난….” “사용자의 목을 비틀어 뽑고, 허리를 가르고, 몬스터한테 윤간시키고. 네가 한 일들은 생각지 않는가 보군.” “난 이곳의 주인이야. 나를 방어하고 내 집에 침입한 침입자들을 벌할 권리가 있어. 더불어 내 부하들을 학살한 죄를 물을 수도 있고.” 입술을 부르르 떨며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비비앙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상 그녀의 말이 틀린건 없지만,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다. 하지만 괜한 말싸움할 시간은 없었다. 왠지 이대로 두고 가기에는 뒤통수가 찜찜해 결국 나는 다시 몸을 돌렸다. 지금부터 노는게 아니라, 비비앙의 영입에 대해 진심으로 고려해볼 생각이었다. 내 사늘한 시선을 받는 순간 비비앙은 흠칫하더니 바로 고개를 숙였다. “미, 미안해. 내가 말이 너무 심했어. 잘못했어.” 자꾸만 미안하다고 말하는 비비앙이 보인다. 솔직히 그녀가 화를 낼 입장은 아니긴 한데. 일단 적이라는 생각을 거두고 <아군이 될 수도 있는>이라는 가능성으로 그녀를 대하자 전에 없던 안쓰러움이 물밀듯 들어온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고.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먼저 후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비비앙? 비비앙 : “네. 독자님들. 정말 감사드려요. 원래 68, 69회에 죽는 설정 이었는데, 여러분들의 코멘트에 힘입어 살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정말 열심히 활동하겠습니다.” 김수현 : “흐흐흐.” 비비앙 : “뭐에요! 그 웃음은! 기분 나빠!” 김수현 : “아니야. 아무것도.” 원래 70회에 뮬로 돌아가는 설정 이었는데. 비비앙을 살려준걸 깜빡 했네요. 여분의 과정을 추가하니 1, 2회가 더 소요 되더군요. 그래도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 되오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 그리고 지금 한편이 더 있기는 한데, 오늘 더 올리기가 좀 그래요. 왜냐하면 제가 오늘부로 하던 일을 그만두거든요. 그런데 바로 일을 그만두고 바이바이가 아닌. 인수인계를 할게 굉장히 많습니다. 그 준비가 필요하므로 오늘은 글을 쓸 시간을 많이 내지 못할것 같아요. 더구나 아직 초고 상태라서 수정이 필요한 상태이기도 하구요. 그래도 틈틈이 쓰면서 한번 이리저리 가늠해보기는 하겠습니다. 어제의 연참. 독자분들이 보여주신 성원에 매우 많은 힘을 얻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노력하는 로유진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 리리플 』 1. 하늘사랑K : 1등 축하드립니다! 정말 재밌게 보고 계신다니 다행입니다. 저 또한 앞으로 더욱 좋은 내용으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__) 2. hohokoya1 : 와우. 제 작품에 금칠을 해주시는군요. 쑥쓰…(__ )*. 기대에 보답하도록 더욱 열심히 건필하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달아주시는 코멘트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3. 드래곤음양사 : 드음님! 드음님!! 드음님!!! 드음님!!!! 드음님!!!!! 4. 사람인생 : 흐흐흐. 불쌍한 비비앙 입니다. 앞으로 일행의 불쌍함 담당을 하게 될듯…ㅜ.ㅠ 5. 에인트제: 정답은 20대 여인 이었습니다! 하하하. 6. rhkdel2 : 헛. 비비앙을 살렸습니다! 살렸어요! 물론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7. Toranoanal : 하하. 오랜만에 코멘트를 보는것 같습니다. 마음속으로 은근히 Toranoanal님의 덧글을 기다리고 있었나봐요. 코멘트를 보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펫으로 만들지, 아니면 소환수로 만들지, 방생해 후에 도움이 되도록 만들지, 죽일지. 많은 고민을 했지만 현재 수현의 상황에 가장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인간화로 골랐습니다. 괜히 죄송하네요. ㅜ.ㅠ 뒤의 부조화 관련 내용은 정답입니다. 그리고 후기는 보고 빵 터졌습니다. 하하하. 앞으로 조심하도록 해야겠네요. :) 8. Demodex : 갑자기 추천이 폭등해서 깜짝 놀랐더니 Demodex님이 해주신 거였군요. 감사합니다. 이 추천을 원동력삼아 앞으로 더욱 힘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9. 레필 : 이게 참 연참을 하려고 할때마다 일이 터지네요. 워낙 좋으신 분들이 많은 곳이라 의리상 인수인계를 날로 해줄순 없어서…그저 눈물만 납니다. ㅜ.ㅠ 10. 홍승식 : 마지막 코멘트군요! 아마 비비앙이 독자님들에게 무지 고마워 하고 있을겁니다. 하하하하. 다음회를 기대해주세요!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코멘트좀 많이 주세요! 그리고 추천도…☞☜)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71 / 0933 ---------------------------------------------- 펫 하나 만들기 프로젝트 “조용히 해.” 내 말이 끝나자 비비앙은 입을 딱 다물었다. 그러나 열망 어린 눈동자로 계속 나를 보고 있는게 아직 희망을 놓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문득 공터에서 정지연의 목을 비튼 기억이 떠오른다. 그녀 또한 내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다. 살려달라. 죽여달라. 어떤 의미인지는 본인만이 스스로 알 것이다. 그러나 비비앙은 다르다. 그녀는 확실하게 살고 싶어한다. 조금 더 자세한 정보는 봐야 알겠지만, 레어 클래스와 능력치는 준수한 편이다. 마력 능력치 92 포인트. 이정도면 후반에 들어서도 쓸만한 능력치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외 다른 능력치들도 마법사 치고는 괜찮았다. <10강>이나 최상위 사용자들중 윗선에 있는 사용자들을 상대로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직업이 그 부분을 보완해준다. 문제는 엘릭서 한병이 소비된다는 점 이었다. 다시 GP를 모아서 구매할수는 없다. 이미 77,777GP를 지불해 숨겨진 물품들을 구매 했으니까. 다시 구할길이 없다면 절대로 쓰지 않겠지만 또 꼭 그런건 아니었다. 앞으로 엘릭서를 두병 추가로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지금 당장은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그에 대한건 확실히 기억한다. 그리고 유현이 형과 한소영을 위해 두병을 남겨논 거지만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엘릭서들 이었다. 애초에 그런 상황까지 끌고 가지 않으면 쓸 일도 없으니까. 비비앙의 회복 후 능력치를 따져보면. [근력 48] [내구 50] [민첩 56] [체력 45] [마력 92] [행운 74]로 정의할 수 있다. 이미 극에 달한 상태지만 운이 좋다면 마력 1~2 정도 더 올릴수도 있고. 이정도의 인재가 초반부에 우리 일행에 가세한다면 도움이 될건 자명한 일 이었다. 무엇보다 현재 부족한 마법사 포지션을 메꿀 수 있다. 그리고 최고의 장점은 레어 클래스를 두명 보유할 수 있다는 점이다. 비비앙이 준 책을 사용자한테 익히게 한다면 똑같은 직업이 두명 생긴다. 그리고 이미 본 직업을 어느정도 익힌 비비앙은 앞으로 들일 사용자의 좋은 멘토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마음이 한쪽으로 기우는걸 느꼈다. 결국 어차피 거주민인 만큼 죽음에 대한 부담이 적고(내 기준으로.) 후에 소원을 사용하는데 거리낌이 없을것이다. 여러 방면으로 고심하고 계산을 마친 나는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띄며 비비앙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비비앙.” “응.”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을 바로 잡으며 나는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지금 알몸인 상태의 그녀를 보니 확실히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칠흑 같은 긴 머리카락과 은빛 눈동자. 잡티 하나 없는 흰 피부와(갈라진 곳은 논외로 치자.) 단아한 얼굴. 군살없는 잘 빠진 그녀의 몸매에 시선이 이르자 그녀가 몸을 움츠리는걸 느꼈다. 목젖이 꿀떡이는게 꽤나 긴장하고 있는것 같았다. “연금술사면. 등가교환이라는 말 정도는 알겠지.” “그…럼. 동등한 가치를 지닌 것들을 교환한다는….” “그래. 너는 네가 가진것들을 내놓았고, 나는 너를 살려주기로 했다. 이건 등가교환이 성립될 수 있어. 그러면. 반대로 네가 또 너를 살려주면 너는 뭐를 내놀 수 있을까?” “하…하지만.” “내가 이렇게 된건 나도 안타까워. 하지만 나는 너를 확실하게 치료할 수 있다. 아마 잃어버린 힘도 회복시킬 수 있을지 몰라. 다시 거미로 변하지 않고,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어, 어떻게?” 내 말에 비비앙의 눈망울이 큼직하게 떨렸다. 그 반응을 보아하니 알게 모르게 거미 괴물이 된것에 본인도 후회를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첫 단추는 잘 꿰었기에 나는 더욱 은근한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한손으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다른 한손으로는 등을 쓰다듬는다. 그럴때마다 비비앙의 몸의 떨림이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그건 보면 알겠지. 자. 내가 너의 목숨을 살려주고, 상실한 힘을 돌려주고, 잃어버린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돌려준다면. 너 또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을까.” “…뭘 원하는데? 알다시피 난 지금 줄게 없잖아….” “아니. 하나 남아있지. 그건 바로.” 나는 매만지던 그녀의 등을 쿡 찔렀다. 그탓에 피부가 조금 갈라졌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엘릭서 한병에 전부 고칠 수 있으니까. 아픈지 인상을 찡그린 비비앙은 이내 내 말을 이해했는지 안색을 굳혔다. 이제는 선택의 시간이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우리 둘을 맴돌았다. 하지만. 아까부터 볼 수 있었듯 비비앙은 삶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가지고 있었다. 이내 비비앙의 고개가 미약하게 끄덕이는걸 보며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앞으로 내 말 잘 들어야 해?” “…알았어.” 왠지 모르게 위험한 냄새를 풍기는 내 말에 비비앙은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비비앙이 건넨 물품들과 사용자 고치 두개를 들고 나는 다시 공터로 돌아왔다. 공터에는 고치 네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나는 얼른 고치를 감싼 실을 가른 후 애들을 풀어 주었다. 한명씩 풀어줄때마다, 애들은 내 얼굴을 확인한 후 뛸듯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잠깐의 해후를 나눈 후, 애들의 관심사는 자연스레 묘령의 여인과 고치 두개로 향했다. 일단 비비앙의 문제가 급선무였다. 오기전에 말을 맞춰놓긴 했지만 조금 걱정이 되었는데, 비비앙은 상상 이상으로 잘해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 말에 따르면 오래전 나쁜 마법사한테 당해 거미로 변했다는 거야?” “응. 그렇습니다. 하지만 옆에 이분이 본체인 거미를 구성하는 핵을 적출해 제 자아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거미로 변했다고 해도 기억은 있잖아. 사용자들을 죽이고, 던전을 만들고.” “거미로 변한 이후에는 밖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나가봤자 바로 사냥 당할 테니까요. 그리고 제 몸이 거미에 감염된 이후 핵의 영향으로 지능 또한 몬스터로 퇴하하고 있었습니다. 확실히 기억은 있지만 제 의도라고 보기는 애매합니다. 아마 인간이었다면 절대로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으음….” 유정은 의심어린 눈길로 그녀를 노려보다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바로 입을 열어 그녀의 설명을 부연했다. “그녀의 말은 사실 같아. 아마 비비앙이 아니었다면 나도 죽었을 테니까. 적절한 시기에 내부에서 거미의 행동을 제한하는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들은 다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었어.” 내 말에 유정과 안솔은 고민어린 얼굴이 되었다. 제법 연기를 잘 해주는 비비앙을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진실속에 거짓을 섞는 화술로 나는 지금 애들을 속이고 있었다. 비비앙을 일행으로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지금껏 그녀가 저지른 일들을 어느정도 완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당신이 한 일이란건 변하지 않아.” “물론입니다. 저 또한 회피할 생각은 없슴니다.” “그런데 몸은 왜그래? 어깨랑 등이 좀 갈라진것 같은데….” 안현은 적절히 유정의 질문을 끊어내고 비비앙에게 물었다. 그녀는 나를 한번 보고는 바로 대답했다. “실은 저는 지금 몸이 굉장히 위험한 상태입니다. 핵을 적출함으로 몸이 돌아오기는 했지만, 신체에 부담이 상당해요.” “그럼 곧 죽는다는 소리야?” “아마도요.” “허….” 곧 죽는다는 말을 꺼내자 예상대로 애들의 안색이 조금 흐려졌다. 머리가 혼란스러울 것이다. 나는 다시 끼어들 틈을 노리다 한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일단은 돌직구를 날려야겠지. “일단. 우리는 비비앙과 행동을 같이할 생각이다.” 다시 내가 말을 꺼내자 애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모였다. 안현은 의외라는 표정이었고 유정과 안솔은 얼굴을 찡그리는게 그닥 마음에 들지 않는듯 했다. 그러나 애들이 내 결정에 반하는 경우는 홀 플레인으로 들어선 이후 한번도 없었고, 나 또한 이번 문제는 절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유망주를 영입하는것도 좋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일을 빠르게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성장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사용자 보다는 즉시 전력감으로 볼 수 있는 사용자 또는 거주민을 영입하는게 이치에 맞았다. 지금 우리 일행에 비비앙이 가세한다면 내가 계획한 일을 추진하는데 걸릴 시간이 최소 3할은 줄어들 것이다. “비비앙 본인도 그동안 겪은 일에 상당히 갈등하는것 같아. 혹시라도 살 수 있다면, 속죄 하면서 살고 싶어했어. 물론 그녀가 행한 일이 옳지 않은건 맞지만 정상 참작할 여지는 있잖아. 본인도 반성하는 기색이 보이고. 그러니 일단 도시로 데려가자. 데려간 후 치료 방법을 찾고. 되면 같이 행동하고, 안되면…어쩔 수 없지. 그정도는 가능하지?” 안현은 이런 부분에서는 관대함을 보였다. 오히려 유정과 솔이 걱정이었는데, 그녀들은 여전히 마뜩찮은 얼굴 이었다. 그래도 천성이나 성향이 선하고 나를 살렸다는 말에 많이 흔들리는것 같았다. 곧이어 “곧 죽을지도 모르는데….”라는 말을 덧붙이자 간신히 납득한듯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들을 볼 수 있었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큰 일 하나를 해결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직 미심쩍은 기색을 지운건 아니지만 일단 일행으로 들이는데 성공한만큼 이제는 시간이 해결할 일 이었다. 나는 애들과 시선을 한번씩 교환한 후 사용자들이 누워있는 공간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애들의 시선도 나를 따라 도는걸 느꼈다. 그곳에는 풀어진 고치 두개 위로 남성과 여성 사용자 한명이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바로 먼저 들어왔다가 비비앙한테 붙잡힌 두명의 사용자였다. 솔직하게 말해서 비비앙을 놀리는게 너무 재밌어 이들의 존재를 까먹고 있었다. 아마 막 통로를 나서려는 나를 부르는 비비앙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그대로 놔뒀을지도 모른다. 색색이는 숨소리가 들리는걸로 보아 살아는 있는것 같았지만 얼굴은 꽤나 창백했다. 둘다 모두 마법사 로브를 입은만큼 체력 능력치가 높지는 않으리라. 그들을 물끄러미 보던 유정은 이내 걱정 섞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오빠. 이사람들 이대로 죽는거 아닐까?” “안죽을걸. 그래도 최대한 빨리 도시로 가는게 좋겠다.” “제가 지름길을 알고 있습니다.” 비비앙이 재빨리 손을 들며 나서자 유정이 그녀를 흘기며 톡 쏘아 붙였다. “흥. 말은 잘해요. 애초에 누구 탓에 이렇게 됬는데.” “…….” 비비앙의 얼굴에 발끈하는 기색이 떠올랐지만, 이내 입술을 꾹 씹으며 참는 모습이 보였다. 일단 처음에는 무조건 자제하라는 내 말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걸 보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래도 분한건 어쩔 수 없는지 콧김을 씩씩 내뿜고 있었다. 둘의 신경전에 나는 픽 웃고는 다시 사용자들로 시선을 돌렸다. 일단은 사용자 정보를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막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키려는 순간. 나는 머리가 띵해지는걸 느꼈다. 시야가 흐려지는걸 느끼며 고개를 흔들자, 다시금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주변이 기우는것 같았다. “오빠. 왜 그러세요…?” 나를 죽 지켜보고 있었는지 솔이 금방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 왜…이러지? 내 이상함을 눈치 챘는지 현과 유정, 그리고 비비앙이 내게로 다가왔다. 괜찮다고 말하고 다시 억지로 제 3의 눈을 발동하려는 순간. “어….” “형!” “오빠!” 눈 앞의 시야기 핑 돌더니 온 몸이 무기력해 지는걸 느꼈다. 이 느낌은…탈진 현상인데? 설마. 그순간 세라프가 예전에 해준 말이 머리를 스쳤다. <사용자 김수현. 화정의 힘은 인간이 가벼이 볼 수준이 아닙니다. 순수히 힘 면에서 본다면 나무랄데 없지만, 그걸 조절하고 지배하는건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그나마 제대로 힘을 사용하려면 체력이 101 포인트를 넘어야 합니다. 아니. 적어도 90은 넘어야 그나마….> 그렇게 최대치로 쓰지도 않았는데. 이정도로….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나는 주변이 어두워지는걸 볼 수 있었다. 눈이 절로 감기는 찰나였다. 『잠재 능력. 쓰러질 수 없는(Rank : A+)이 발동합니다.』 허공에 메세지 하나가 떠오르는것과 동시에, 무너지려는 내 몸을 억지로 일으키는 한줄기 의지가 피어 올랐다. ============================ 작품 후기 ============================ 71회는 연참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오늘 인수인계를 마치고 업무를 마무리 짓는데 왜 이렇게 바쁜지 모르겠네요. -_-a 그래서 내일 올릴분을 미리 올리는 겁니다. 이러다가 내일 자정에 올리는것도 불투명할것 같아, 잠깐 접속해 어제 쓰던 초고를 그대로 올립니다. 아마 이것저것 손볼게 많을것 같습니다만.(추후에 아니다 싶은 부분은 수정하겠습니다.) 리리플 하지 못한점 죄송합니다. 하지만 코멘트는 빠짐없이 읽었습니다. 독자분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오늘 인수인계를 마치고 내일부터 다시 열심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0072 / 0933 ---------------------------------------------- 펫 하나 만들기 프로젝트 내가 정신을 잃을뻔한 이후 우리 일행은 부산을 떨며 던전을 빠져 나왔다. 그 와중에 이미 쓰러진 두명의 사용자가 잊혀질뻔한 불상사가 있었지만, 다행히 비비앙이 알려줌으로 한명씩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 여지껏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걸 보니 중간에 비비앙이 야료를 부린게 틀림없었다. 내가 째릿하게 노려보자 그녀가 은근슬쩍 내 눈을 피하는걸보니 확신이 들었다. “오라버니. 몸은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던전을 나온 이후 숲을 걷던 도중 안솔이 불안한 얼굴로 내게 말을 걸었다. 연신 나한테서 눈을 떼지 못하는게 어지간히 걱정을 하는것 같았다. 예쁜 소녀의 걱정은 내 마음을 기쁘게 했지만, 지금 나는 머리속이 어수선했다. 화정의 힘과 내 체력의 상관 관계가 내 예상을 훨씬 빗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솔은 계속해서 말을 걸었지만 나는 사용자 한명을 다시 들처 업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유정도 나와 솔이의 대화를 들었는지 앞장서던 도중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오빠. 힘들면 그냥 내가 업을게. 저번에 마나 역전 현상도 그렇고…너무 마음에 걸리잖아.” “괜찮으니까 앞이나 잘 봐. 나랑 현이 지금 사용자를 한명씩 업은 이상 가장 중요한건 너라고. 물론 여차하면 일단 땅에 두면 되지만 급작스러운 기습에는 어쩔 수 없어.” “칫…누가 몰라서 그래? 걱정 되니까 그러는 거잖아!” “주변은 안전해요. 뮬로 가는 지름길인 만큼 내일안에 도착할 수 있을거에요.” 비비앙이 끼어들자 유정은 그녀를 한번 노려본 후 고개를 돌렸다. 엄한데 화풀이하는 유정을 보며 조금 보듬어주고 싶었지만, 현재 내 머리속은 너무나 복잡했다. 힘을 사용한 직후 나는 탈진 상태에 빠질 뻔 했다. 현기증이라 치부하기에는 강도가 너무나 높았다. 이정도일줄은 몰랐는데, 솔직히 앞으로 이런일이 반복된다면 더이상 가볍게 치부할 일은 아니었다. 물론 아직 남은 능력치 포인트가 있지만 알게 모르게 근력, 민첩, 마력에 투자하고픈 마음이 있었던터라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내가 깊은 생각에 잠긴걸 알았는지 안현은 묵묵히 내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의 등에는 정신을 잃은듯 축 늘어진 여성 사용자 한명이 업힌 상태였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안현을 보며 나는 꼭 기공창술사를 찾아주겠다고 마음먹은 후 다시 생각을 돌렸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하고 생각해도, 능력치 포인트는 내 능력 밖을 벗어난 일 이었다. 남은 포인트를 체력에 전부 때려박고 내가 알고 있는. 그러니까 앞으로 얻을 포인트를 최대치로 계산하면 어떻게든 90은 맞출 수 있을것 같았다. 그러나 그뿐 이었다. 101능력치가 주는 매력은 너무도 커 도저히 한순간에 포기하기 힘들었다. 한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흔들고 안을 깨끗이 비웠다. 바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인만큼 일단은 현재의 상황으로 눈을 돌리는게 더 나을것 같았다. 지금 중요한것은 던전안에서 얻은 물품과 구출한 사용자 두명, 그리고 비비앙의 치료를 위한 도시로의 귀환이었다. 그리고 잠깐 휴식 후 폐허의 연구소로의 탐험 준비도. 굳이 내 능력치 고민이 아니라도 할일은 산더미처럼 있었다. 첫 단추는 나름 잘 꿰었으나 한번의 엇나감으로 모든것을 잃을 수 있는게 홀 플레인 이니까. 어쨌든 뮬로 돌아간 후 오늘 하루는 쉬면서 속을 가다듬기로 결정했다. 생각을 비우고 멍한 얼굴로 애들을 차례로 바라본다. 문득 여자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안을때만큼은 아무 생각없이 안을 수 있으니까. 오랜만에 서로간 살을 섞는 따뜻한 쾌락을 맛보고 싶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유정의 앙칼진 얼굴. 그 아래로 기다란 생머리와 불룩하게 솟아오른 가슴이 눈에 들어온다. 통과의례때는 머리카락이 저만큼 길지는 않았는데. 긴것도 정말 잘 어울렸다. 그리고 솔의 천진한 얼굴과 하얗고 가느다란 목도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조그맣고 앙증맞은 입술도…. 막 비비앙에게로 시선을 돌리던 나는 이내 앗차하고 정신을 차렸다. 내가 지금 애들한테 무슨 생각을 품은거지? 욕구 불만인가. 조만간 여자를 하나 안아 욕구를 해소할 필요를 느꼈다. 오랜만에 나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졌다. 나는 한숨을 내쉰 후 자꾸 아래로 밀려 내려가는 사용자를 다시 들처 업었다. 그나저나 아직 이 사용자들이 누군지도 모르고 있었군. 던전을 나온 이후 계속 화정과 내 능력치에 대해 고민했기 때문에 생각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굳이 앞장서지 않은 이유도 다른데 신경을 쓰기 싫어서 그랬었다. 해답이 나오지 않았지만 일단락지은 만큼 나는 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조금 휴식을 취하고 실컷 치료를 받아서인지 아까처럼 머리가 띵하는 느낌은 없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신상용(2년차) 2. 클래스(Class) : 일반 마법사(Normal Mage Expert)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Babara)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마방진의 진리를 추구하는 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8) 7. 신장 · 체중 : 183.7cm · 69.2kg 8. 성향 : 질서 · 중립(Lawful · True) [근력 40] [내구 42] [민첩 45] [체력 40] [마력 85] [행운 60]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정하연(2년차) 2. 클래스(Class) : 일반 마법사(Normal Mage Expert)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Babara)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호수의 물방울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6) 7. 신장 · 체중 : 166.5cm · 42.8kg 8. 성향 : 질서 · 선(Lawful · Good) [근력 34] [내구 38] [민첩 40] [체력 32] [마력 87] [행운 80] 흠? 별 생각 없이 봤는데 나는 눈을 휘둥그래 뜨고 말았다. 둘다 마법사였고, 2년차임을 감안하면…괜찮다. 처음에는 무슨 깡으로 칠흑의 숲 안으로 들어갔나 싶었는데 능력치를 확인한 후 나는 납득할 수 있었다. 갑자기 뮬로 오는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내가 활동했던 곳이고(따지고 보면 활동 안한곳이 어디 있겠냐만은.) 기공창술사를 찾으러 온건데, 인재면이든 물적인 면이든 예상외의 수익을 속속이 거두고 있었다. 나는 문득 솔이로 시선을 돌렸다. 맹한 얼굴로 자박자박 걸음을 걷는 솔이의 행운과 관련이 있는건가? 등에 업은 사람의 온기를 느끼며 나는 둘의 처우에 대해 고민했다. 둘 모두 영입하면 그래도 꽤나 쓸만한 사람들 이었다. 즉시 전력감인것도 마음에 들었고, 2년차가 한계의 시작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능력치가 전부 개발된건 아니었다. 4,5년차 이후에는 정말 올리는게 하늘에 별따기나 다름 없지만, 그래도 아직은 개인에 따라 올릴 여지는 약간 남아 있었다. 능력치도 좋고, 성향도 괜찮다. 자세한건 나중에 정신을 차린 후 얘기를 해야 겠지만 둘 모두 영입할만한 대상임은 틀림 없었다. * 던전을 나온 이후, 꼬박 하루를 걸은것 같다. 하루밤을 꼬박 새명서 강행군을 하느라 모두 심적으로 지쳐 있었지만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체력 훈련을 받은 만큼 다들 낙오없이 따라올 수 있었다. 무엇보다 비비앙이 알려준 길은 정말로 획기적인 지름길 이었다. 하긴 100년 이상 숲에서 산만큼 왠만한 지리는 빠삭하게 아는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 일로서 애들도 약간이지만 비비앙을 다르게 보는것 같았다. 오후 늦게 귀환을 시작했고 하루가 걸렸으니 해가 저무는 시간에 귀환에 다다를 수 있었다. 고개를 들어 우리가 처음 거쳐왔던 평야를 보고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애들도 이 평야는 기억에 있는지 한층 빠르게 발걸음을 놀리고 있었다. 오는동안 일행의 분위기는 조용했다. 나는 생각할거리가 많아 별로 말을 하지 않았고, 안현 또한 사용자 한명을 업은 상태라 힘이 배로 들었는지 거친 숨만 몰아쉴 뿐 이었다. 그런만큼 유정과 솔은 초조한 얼굴 이었고 비비앙은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가라앉은 분위기가 나쁘단 소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불편한감은 있었다. 우거진 숲을 뒤로 하고 우리들은 서둘러 평야로 난 길을 따라 길을 걸었다. 저기 멀리서 뮬이 보이고 있었다. 시간이 시간대라서 그런지 이리저리 사용자 무리 한두명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리들은 뮬로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점점더 늘어나고 있었다. 마침 딱 밤이 되기전 시간에 맞춰서 온 것이다. 바바라쪽으로 사람이 많이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정도 남아있다는 것에 나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용자들이 꽤 있음을 느꼈다. 애들 또한 오랜만에 사용자들을 보는지 시선을 어디에 둘줄 모르고 있었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도 저 사용자들이랑 똑같아. 초보 티 내지 말고 의연하게 들어가.” 나는 지친 목소리로 어정거리는 애들을 재촉했다. 특히 오랜만에 보는 도시와 사용자들이라서 그런지 고개를 휘휘돌리고 있던 비비앙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푹 숙였다. 문득 시선 몇몇이 우리들에 모이는걸 느꼈다. 비비앙은 처음에는 나체 상태였고, 일단 간단하게 죽은 정지연한테 벗긴 속옷과 로브만 걸친 상태였다. 정지연보다 키가 큰 탓에 꽉 낄 수 밖에 없었는데, 덕분에 몸의 몸매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보기 민망할 정도였다. 얼굴도 나름 아름다운 편이고 몸도 괜찮은 편이니 몇몇 험상궃은 남성 사용자들은 대놓고 끈적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비비앙을 보고 눈짓을 했다. 그녀는 반색을 하며 내 옆으로 딱 달라 붙었다. “야. 안 떨어져?” “오라버니 지금 힘드신거 안보이세요?” 아니 도대체 너네들 왜 그러는데. 눈에 쌍심지를 키며 이를 바득 가는 두 여성 사용자를 보며 비비앙은 찔끔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지켜보던 안현은 쯧쯧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이유정. 안솔. 너네들 도대체 왜 그러냐. 사람 민망하게. 심정은 이해 못하는건 아니지만 일단 형이 말한것도 있으니 너무 몰아세우지 마라. 보는 내가 다 불쌍하다.” 안현이 말이 끝나자 애들의 질투가 한층 더 폭발하고 있었다. 안현. 저 눈치 없는 놈. 비비앙은 얼굴이 확연히 밝아진 얼굴로 안현을 보며 헤헤 웃었다.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꼴 이었다. 그래도 유쾌하고 솔직한 구석이 있어 유정이나 솔이랑 꽤 친하게 지낼것 같아서 데려왔는데 왠지 시작부터 삐걱이는게 영 불안했다. 주변은 한창 떠들썩했다. 이번엔 허탕을 쳤네, 길이 안좋았네, 다들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그래도 다들 입만큼은 쉬지 않고 떠들고 있었다. 간혹 우울한 얼굴로 돌아오는 사용자들도 있었는데 아마 탐험에서 동료를 잃은 모양 이었다.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고, 곧이어 멀리서만 보였던 뮬의 성벽이 바로 눈 앞으로 다가왔다. 처음 우리들을 보았을때 인사를 했던 거주민 경비병들은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용자들을 보며 경례를 붙이는 그들을 보며 우리들은 천천히 문 안으로 들어섰다. 드디어 첫 탐험을 마치고 뮬로 돌아온 것이다. ============================ 작품 후기 ============================ 하하. 안녕하세요. 다들 설은 잘 준비하고 계신지요. 일단 오늘 한편 올립니다. 연참을 약속드린 만큼 오늘 한편을 더 올릴 예정입니다. 아. 그런데. 지금 바로 또 콩나물 까러 가야 되서요. 후딱 까고 또 뭐 시키시기 전에 얼른 도망쳐야 겠습니다. 이것도 지금 심하게 구박 받으면서 겨우 써서 올립니다. 뭔 집안이 이리 떠들석한지 원. 수정과 리리플은 추후에 한꺼번에 모아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독자분들의 양해 부탁 드립니다. 그럼 수북히 쌓인 콩나물을 까고 얼른 73회를 작성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제가 잘 도망칠 수 있도록 독자분들의 기원을 바랍니다. 하하하. 0073 / 0933 ---------------------------------------------- 펫 하나 만들기 프로젝트 뮬을 떠날때 우리들이 나갔던 북문으로 들어온 이후 애들의 얼굴은 눈에 띌 정도로 밝아졌다. 다들 말은 안하고 있었지만 열망어린 얼굴로 나를 보는게 지금 수련이라도 하자고 하면 당장 주저 앉을 기세였다. 나는 피식거린 후 품 안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낸 후 안현에게로 던져 주었다. 사용자 한명을 업고 있던 안현은 당황한 얼굴이 되었고, 다행히 유정이 중간에 끼어 들어 주머니를 낚아 채는데 성공했다. “잘했다.” “칭찬만 하지 말고 보상을 줘.” “여기.” 나는 순순히 몸에 업고 있던 사용자를 끌어 내린 후 유정에게로 건네주었다. 유정을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곱게 그 사용자를 받았다. 조금 걸리적거리는듯 끙하고 힘을 주는 유정을 보며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조신한 숙녀 여관이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지? 돈은 충분하니까 일주일로 방 두개 대실하고. 저녁 먼저 먹고 있어. 먹고 싶은거 아무거나 먹어도 돼. 그리고 다 먹었으면 먼저 들어가서 쉬어.” “오빠는?” “나는 잠시 비비앙이랑 볼 일이 있어서. 그리고 탐험 보고도 해야 되고.” “우리도 같이….” “혼자가 더 편해. 먼저 들어가서 쉬어도 괜찮아.” 유정의 낯빛이 살짝 흐려졌지만 이내 고개를 주억이는걸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현재 휴식을 취하고 싶은 욕구와 배가 고파 얼른 여관으로 들어가고 싶은 모양 이었다. 솔직히 꽤나 귀찮은 일 이었지만 어쨌든 해야할 일 이었다. 애들을 먼저 보내고 난 이후 비로소 난 비비앙과 둘만 남을 수 있었다. 비비앙은 나를 보며 입을 삐죽인 후 한숨을 크게 쉬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뭐가?” “애들이랑 너.” 가는 눈으로 나를 흘겨보는 비비앙을 보며 나는 무음으로 “왜.”라는 단어를 표현했다. 비비앙은 아예 삿대질까지 하며 점점 더 목소리를 높였다. “애들도 무슨 새 새끼들도 아니고. 너만 바라보고 짹짹 거리는데 눈꼴 시려워서 원. 그리고 너도 똑같아. 아주 그냥 애들이라면 사족을 못 쓰더라. 오냐오냐하는거 보고 기도 안차더라. 왜. 아주 궁둥이도 뚜덕여주지 그래.” “나 원래 그런데?” “그래? 그럼 나도 앞으로 막 칭얼거리고 그렇게 해도 돼?” 나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올렸다. 비비앙은 눈알을 한번 돌린 후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막 불평을 터뜨리려던 비비앙의 입이 열리려는 찰나 나는 손을 그대로 비비앙의 머리로 옮겼다. “몸은.” “어, 어?” “몸은 좀 괜찮냐고.” 내 기습에 당황한 비비앙. 그녀는 어버버 거리는 얼굴로 눈알만 도록도록 굴리며 말을 더듬었다. 이윽고 살짝 나를 올려다보녀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그녀가 보였다. “아직은…괜찮아. 견딜만해. 그런데 이 손좀…하우.” 한번 부드럽게 쓸어넘긴 후 나는 몸을 돌렸다. 뒤에서 조금 머뭇거리는것 같았지만 이내 내 뒤를 바짝 따라오는 그녀의 기척을 느꼈다. 같이 행동하기로 한 이상 신뢰를 주고 받고 최대한 뽕(?)을 뽑으려면 간간이 상냥히 대해줄 필요가 있었다. 뮬의 거리는 확실히 우리가 떠나온 아침보다는 소란스러웠다. 대다수의 사용자들이 나처럼 탐험 후 탐험 보고를 하기 위해 신전으로 가는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탐험을 나가는 사용자들도 한두무리는 볼 수 있었다. 이 밤에 나가는 그들을 보며 나는 간단히 명복을 빌어 주었다. 가기전 내가 먼저 들른곳은 사용자 창고였다. 신전과 창고가 완전히 반대편에 있다면 난감할뻔 했을것이다. 조금 돌아가긴 해도 다행히 둘은 어느정도 같은 방향 이었다. 신전으로 가면 갈수록 바바라보다는 아니지만 어느정도 사용자들이 복작이는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사용자들의 시선도 비비앙에게로 모아지고 있었다. 비비앙은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이며 내게로 더욱 몸을 밀착했다. 등에 느껴지는 물컹한 느낌에 나는 기분이 좋았지만 그만큼 질투어린 시선들은 쏟아지고 있었다. 그나마 군기나 치안이 엄정한 북대륙이라서 이렇게 갈 수 있는거지, 서대륙에서 이런 차림으로 거리에 나선다면 대놓고 “저는 당신들에게 따먹히고 싶어서 이렇게 입었어요. 그러니 얼른 저를 따먹어주세요.”라고 광고하는거나 다름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걱정이 드는건 아니었다. 힘만 회복시킨다면 비비앙은 확실히 쓸만한 재목 이었으니까. 아마 어지간한 사용자는 명함도 내밀지 못하고 뼈도 추릴 수 없을것이다. 이윽고 사용자 전용 창고에 도착한 후 나는 곧바로 안에 든 엘릭서 한병과 금화 전부를 꺼냈다. 이제 내가 보유하고 있는 금화는 1200골드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외 보석이나 기타 물품을 판다면 엄청난 거금으로, 초반에 시작하는 사용자 치고는 지나치게 많은 금액이었다.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확실히 앞으로의 계획이 편해진다. 그리고 이미 사용할 곳을 어느정도 정해논 상태라 나는 묵직한 돈주머니를 품 안으로 집어 넣었다. “그건 뭐야?” 밝은 노란색으로 채워진 빈병 하나를 빙글 돌리자 비비앙이 호기심을 표했다. 얼굴을 바싹 들이미는 그녀를 보며 나는 간단히 대답해 주었다. “엘릭서.” 엘릭서라는 말 한마디가 가져온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처음 보는 표정을 짓던 비비앙은 이내 “핫.” 하더니 콧방귀를 뀐 후 내게 손을 까딱거렸다. 이녀석이 어디서. “에휴.” “엘릭서를 아나봐?” “바보. 연금술사들은 물약도 만든다고. 그중 최고봉으로 알려진게 엘릭서인데. 일단 속아준다. 이리 가져와바.” “너가 직접 와서 보시지.” 내 말에 비비앙은 투덜거린 후 고개를 빼꼼이 내밀었다. 잠시동안 꼼꼼이 엘릭서를 살피던 비비앙의 표정은 점점 더 이상해지고 있었다. 막 손을 내뻗으려고 하자 나는 곧바로 엘릭서를 물렸다. 확실히 어느정도 실력을 쌓았던 연금술사라서 그런지 비비앙의 얼굴은 조금전과는 달리 심각해진 상태였다. “이, 이상하다. 잠깐만. 빼지 말고 가까이 좀….” “굳이 그럴 필요가 뭐 있어. 조금 마셔보면 되잖아.” 나는 굳게 마음을 먹었다. 이미 결정을 마친 이상 미적거리는건 내 성격이 아니었다. 과감히 엘릭서를 밀봉안 뚜껑을 개봉한 후 그 뚜껑에 소량의 엘릭서를 따라 비비앙에게 건네 주었다. 얼른 뚜껑을 받아든 비비앙은 잠시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곧바로 목으로 꿀꺽 넘겼다. “음….” “어때?” “잠시…음? 어…어?” 그리고. 잠시동안 맛을 음미하던 비비앙은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벌렸다. 자신의 몸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달은것이다. 나는 곧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이번에는, 제법 강하게 일으켜 속속이 그녀의 정보를 알아낼 생각 이었다. < 거주민 정보(Native Status) > * 거주민 정보를 사용자 정보로 변환합니다. 1. 이름(Name) :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2. 클래스(Class) : 키메라 연금술사(Rare : Chimera Alchemist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에스피니온(현재 멸망한 도시(국가)입니다.)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고대 연금술사 · 칠흑의 사냥 거미 · 홀 플레인 6. 성별(Sex) : 여성(24 · 128[?]) 7. 신장 · 체중 : 165.5cm · 48.8kg 8. 성향 : 혼돈 · 중용(Chaos · Neutral) < 능력치 > [근력 48] [내구 50] [민첩 56] [체력 45] [마력 92] [행운 74] * 엘릭서 소량을 마심으로 몸이 일시적으로 회복 되었습니다. 추가적인 섭취가 없다면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갑니다. < 업적(3) > < 특수 능력(1/1) > 1. 66 마수 군단의 지배자(Rank : A Plus Plus Plus) < 잠재 능력(4/4) > 1. 연금 마법(Rank : A Zero) 2. 정통 마법(Rank : C Plus) 3. 마법 진지 구축(Rank : A Plus Plus) 4. 물약 제작(Rank : B Plus) < 능력치 비교 > 1. 김수현 : 540 (능력치 포인트가 12 포인트 남아 있습니다.) [근력 94] [내구 92] [민첩 98] [체력 72] [마력 96] [행운 88] 2.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 365 (능력치 포인트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근력 48] [내구 50] [민첩 56] [체력 45] [마력 92] [행운 74] 이게 바로 모든 힘을 회복한 비비앙의 실력인가? 나는 작은 탄성을 흘리며 새삼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거듭 말하지만 마법사와 사제는 마력 능력치 포인트가 가장 중요하다. 다른 능력치가 평균 30이라도 마력만 90을 넘으면 그 사용자는 어느 클랜에서든 모셔가려고 혈안이 될 정도다. 홀 플레인에서 마법사들은 그런 존재였다. 특히 A+++랭크 판정을 받은 <66 마수 군단의 지배자>는 어떤 능력일지 정말로 궁금했다. 레어 클래스의 직업은 시크릿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일반 클래스와는 확실히 궤를 달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일반 직업도 잘 키우면 강력하지만, 레어는 전투시 효율성을 더욱 극대화시킬 수 있고, 시크릿은 막강한 <권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용자들이라면 누구나 오매불망 기대하는게 바로 두 클래스였다. 대강 생각을 정리하고 전방으로 시선을 돌린다. 당황한 얼굴로 자신의 몸을 살펴보던 비비앙은 이내 다급한 얼굴로, 아니 다급한 얼굴이 아니다. 저건 아예 눈이 훼까닥한, 정신을 놓은 얼굴이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일순간 정적이 맴돌았다. 그러나 그 정적은 한순간 이었다. 이윽고 이를 까득 깨문 비비앙은 몸을 날려 나에게 달려 들었다. “그거 나 줘어어어!” “얼씨구.” 나는 바로 한손을 내밀어 그녀의 얼굴에 대었다. 두 팔을 붕붕 휘두르며 그녀는 내게 다가오려고 했지만, 역부족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더욱더 발광하며 내 손에 들린 엘릭서를 가지려 용을 썼다. “줘! 줘어! 줘어어!” “그렇게 바로 줄수는 없어. 먹고 입 싹 씻으면 어떡해?” “안그럴게. 정말로. 그러니까 내놔!” 그녀를 강하게 밀쳤지만, 비비앙은 바로 다시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손을 내밀었다. 대신, 이번에는 머리가 아닌 가슴쪽으로 내민게 변화라면 변화였다. 곧이어 내 품으로 달려든 비비앙을 봄과 동시에 오른손 가득히 물컹한 살덩이가 잡히는걸 느꼈다. 오. 느낌 좋은데. “꺄아아앗!” “으음. 좋다.” “흐앗? 꺄앗? 으아앗?” 나는 손아귀에 들어온 젖가슴을 연신 만지작 거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실로 오랜만에 만져보는 여성의 가슴이기에 왠지 모를 쾌감이 밀려왔다. 비비앙은 달려들다 깜짝 놀라 다시 몸을 빼려고 했지만 이번엔 내가 그녀의 가슴을 쥐고 놔주지 않았다. 그 탓에 그녀의 가슴이 내 손에 딸려 나오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비비앙은 두 손을 거두었다. “뭐하는거야! 손 떼! 이 바보!” “멍청이. 그러게 누가 달려들래.” 그녀는 엘릭서를 노리던 두 손으로 내 손을 강제로 떼어 내었다. 조금 아쉽기는 해도 나는 순순히 손을 거두었다. 조금 세게 잡았는지 비비앙은 눈물을 글썽이며 잡힌 가슴을 살살 주물렀다. “흑흑…어떡해…나 더럽혀졌어.” “고작 가슴 하나 가지고 꼴깝 떤다. 아무튼 이걸로 내가 너를 치료할 수단이 있다는 사실은 확인했지?” 내가 한껏 여유를 부리며 거드름을 피우자 비비앙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어떻게 하면 그 엘릭서를 줄거냐는 눈빛에 나는 키득 웃고는 말을 이었다. “어차피 주기로 마음 먹었으니 조금만 기다려. 네가 한가지 약속만 확실히 하면 준다니까.” “던전 안에서 말한거라면 기억하고 있어.” “뭘 하려고 하는지도 모르잖아.” 내 일침에 비비앙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아직 연금술사 시절의 고고한 지성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고, 엘릭서에 마음이 급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 이 시기가 바로 내가 노리는 하나의 <틈> 이었다. 막말로 먹고 도망치거나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귀한 엘릭서 하나를 그대로 날리는것과 다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최소한의 대비는 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후후. 계약을 하자고.” “계약?”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하는 비비앙을 보며 나는 싱굿 웃으며 대답했다. “응. 계약. 일단 신전으로 가자. 가서 탐험 보고도 하고 계약서도 작성해야지.”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더 올립니다. 이로서 연참 약속은 지킬 수 있어 다행입니다. 하하하. 73회도 어찌나 구박을 받으면서 썼는지, 참 서럽습니다. 내일은 자정에 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일일연재는 유지하도록 하겠습니다.(자정에 올라오지 않으면 그냥 기다리지 말고 주무세요. ㅜ.ㅠ) 다음회를 올리면 그때 70회부터 오타와 내용 수정을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리리플도 몰아서 해야겠지요. 지금은 이거 쓰고 올리고 후기 쓰고 하는데 왜 이렇게 눈치가 보이는걸까요. 하하하. 저는 이제 육전을 부치고 오겠습니다. 휴…. ㅜ.ㅠ 0074 / 0933 ---------------------------------------------- 펫 하나 만들기 프로젝트 “어서 오십시오. 오호. 뮬에서는 처음 보는 사용자군요.” “하루에도 수많은 사용자들이 오고 가는데 처음 보는 사용자가 있을수도 있죠.” “아하하. 그렇네요. 아무튼 어서오세요. 요즘 대부분의 사용자들이 바바라나 칸으로 몰려가 영~시원찮았는데 반갑습니다. 어떤일로 오신 건가요?” “그래도 명색이 신전인데 없을리가 있나요. 보석 감정과 계약서 작성 문제로 오게 되었습니다. 겸사겸사 탐험 보고도 하러 왔구요.” 사제복을 걸친 남성 사용자 한명이 넉살 좋은 미소를 흘리며 내게 말을 걸었다. 계약서 얘기를 꺼내자마자 남성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돈이 굴러 들어온다는 생각에 들떴는지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는 부리나케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비비앙은 신전 주변을 구경하는데 여념이 없어 보였지만, 조금만 마력을 일으키면 그녀의 신경이 온통 내 품에 있는 엘릭서에 쏠리고 있다는걸 알 수 있었다. 비비앙의 귀여운 행동에 나는 연한 미소를 머금은채 묵묵히 사제를 기다렸다. 곧이어 2층으로 이어진 계단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명의 사용자가 급하게 달려 내려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신전은 사용자와 거주민이 동등한 입장으로 공존하는 몇 안되는 공간중 한곳 이었다. 대체적으로 거주민들은 천사의 말을 전달하는 입장이었고, 그 외의 일들은 사용자들이 맡고 있었다. 문제는 사용자들이 하는 일의 대부분이 거주민들의 간섭이 들어간다는 점 이었다. 넘어질듯한 기세로 달려온 여성 사용자 한명은 내 앞에서 헥헥이며 숨을 몰아쉬더니 이내 급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 뒤를 이어 남성 사제가 씁쓸한 얼굴로 뒤이어 내려오는게 보였다. 요즘 신전에 돈이 그렇게 급한건가? “어, 어서 오세요. 계약서 문제로 오셨다구요?” “네. 그리고 탐험 보고도….” “요즘 신전이 바빠서 탐험 보고는 받을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건 안하셔도 되구요. 일단 계약서는 어떤 종류를 말씀하시는 거죠?” 탐험 보고를 안한다고? 그녀의 말에 나는 살짝 눈쌀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황금 사자 클랜으로 인한 영향인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탐험 보고를 거르다니…. 그러니까 나중에 가서도 발전을 못하지. 얼른 알맹이만 빼먹고 나르자고 생각한 뒤 나는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인간과 인간…정확히 말하면 사용자와 거주민 입니다.” 여성 사제는 잠시 나와 내 뒤의 비비앙을 보고는 고개를 주억였다. “흠. 사용자와 거주민이면 대체적으로 성립이 가능하죠. 계약서의 내용은 생각해 오셨어요?” “지금 계약서를 주시면 바로 작성이 가능합니다.” “좋네요. 민철아. 이분한테 얼른 계약서 드려라.” 민철이라 불린 남성 사제는 곧바로 오른손에 쥐고 있던 종이 한장과 펜을 나한테 넘겼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바로 내용을 써내려갔다. 지금부터 내가 적을 내용은 간단하지만, 절대로 간단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즉. 이른바 노예 계약을 적을 생각이었다. 종이에 대고 펜을 시원스럽게 써내려간 나는 이윽고 완성된 내용을 다시 읽으면 꼼꼼히 확인에 들어갔다. 1) 사용자 김수현은 비비앙이 원하는 대가 하나를 지불한다. 이후, 비비앙은 그 대가 지불을 위해 이 계약서에 명시한 내용을 따름을 인정한다. 2) 거주민 비비앙은 사용자 김수현의 말을 거스르지 않고 잘 듣는다. 물론 자신의 자유 의지는 있지만 그래도 사용자 김수현의 요청을 우선한다. 3) 거주민 비비앙은 사용자 김수현과 그의 일행(이하 안현, 안솔, 이유정)을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절대로 적대하지 않는다. 대충 이정도면 되겠지. 나는 위험한 미소를 흘리며 계약서의 내용을 먼저 비비앙에게 보여주었다. 비비앙은 급한 얼굴로 대충 읽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로 사인을 휘갈긴 후 나에게 다시 넘겼다. 나 또한 사인을 마친 후 다시 여성 사제에게 종이를 넘겼다. 말 그대로 일사천리였다. 여성 사제는 잠깐 계약서를 읽더니 순간 “풉.” 웃으며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잠시 쿡쿡 웃던 그녀는 손을 치웠지만, 그래도 한쪽 입꼬리가 여전히 올라간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 또한 그녀를 마주보며 빙긋 웃어 주었다. “호호호호호. 정말 이대로 해드려요?” “하하하하하. 강도는 최대한 화끈하게 넣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야 여부가 있나요.” 사이 좋게 웃은 나와 눈을 찡긋하는 여성 사제. 그녀는 곧이어 비비앙으로 시선을 돌린 후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네? 아. 네. 단순히 말을 잘 듣고 돕기만 하면 되는데요 뭘. 적대할 필요도 없고. 그런데 계약이란게 이렇게 오래 걸리나요? 최대한 빨리 해주세요.” 여성 사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딱한 눈빛으로 비비앙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비비앙은 여전히 그녀에게 재촉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윽고 비비앙에게서 시선을 거둔 여성 사제는 엄숙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순간 두분이 계약서의 내용을 읽고, 스스로의 의지로 사인했음을 사용자 이민혜가 증명합니다.” 이윽고 그녀의 말이 끝나자, 그녀가 들고 있던 종이가 환한 빛무리에 감싸이더니 폭죽 터지는 소리가 나며 흰 빛으로 물드는게 보였다. 계약서가 승인되는 과정 이었다. 그 화려한 광경에 비비앙은 정신을 잠시 뺏겼지만 빛무리 사이로 두명의 사용자가 쑥덕이는게 보였다. 나는 얼른 청각을 돋우웠다. “민혜 누님. 이거 너무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끝내는거 아니에요?” “뭔 상관이야. 오랜만에 돈 굴러 들어오는데. 이정도 내용의 계약이면 거의 최상급에 해당한다고.” “그래도….” “그리고 이 내용을 거주민 놈들이 알아봐. 당장에 안된다고 빠꾸 넣지. 아무튼 저 여성 거주민이 조금 불쌍하기는 하지만 뭐…우리가 알바는 아니니까.” 둘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대화했지만 예민한 내 귀는 그들의 대화를 빠짐없이 듣고 있었다. 역시 사용자들한테 맡기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약이 완성 되어가는 과정을 보며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비비앙을 어떻게 지지고, 볶고, 요리하고, 따먹…흠. 아, 아무튼. 일정 시간이 흐르고 환한 빛무리가 사그러들자 허공에서 뚝 떨어지는 종이를 이민혜가 맵시 있게 낚아 챘다. 계약서 작성은 꽤나 시간이 걸리는 편인데, 순식간에 뚝딱 해치우는걸 보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내 얼굴을 읽었는지 이민혜는 방긋방긋 웃으며 어디서 들고 왔는지 모를 저울 하나를 탁자 위에 둔 후 말했다. “걱정마요.야매로 한건 절대 아니에요. 보시면 알겠지만요. 신전에서 일하는 사용자중 계약을 담당하고 있는 사제는 이 부분에 관해서 특별한 권한을 부여 받는답니다. 뭐. 물론 이 짓거리를 그만두는 즉시 없어질 권한 이긴 하지만요.” 저울위에 종이를 올려두는 그녀의 행동을 보며 나는 고개를 주억였다. 앞으로 저울의 추가 가리키는 무게에 따라 내가 지불할 금액이 결정된다. 곧이어 저울 위에 종이가 올려진 후 결과가 나왔고, 그 결과에 이민혜와 민철을 커다란 탄성을 질렀다. 예상한대로 계약서가 지니는 무게는 엄청났다. 한바퀴는 가볍게 빙글 돌더니 두바퀴, 세바퀴를 넘어 거의 8바퀴 가까이 돌은것이다. 나야 이미 예상한 바라서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비비앙은 걱정스런 눈빛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 걱정이 자신이 잘못된 계약을 했다는 걱정이 아닌 예상보다 많이 나온 금액에 내가 과연 지불할까 라는 걱정으로 볼 수 있었다. 잠시 저울의 눈금을 자세히 살피던 이민혜는 만족한 얼굴로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사용자 김수현씨. 혹시 사용자와 거주민을 상대로한 계약이 가지는 효력을 알고 있나요.” “대충은요. 사용자와 사용자의 계약은 제한 받는게 많지만, 거주민은 <설정>의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훗.” 대충 뒷말을 흐리자 이민혜는 나를 한번 곱게 흘기고는 계약서를 넘겨 주었다. “그렇죠. 거주민은 <설정>의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계약서가 발휘하는 효력이 더욱 강력해요. 본인의 내면까지 영향을 미치는…거의 강제성 수준이죠. 아무튼 좋은 노예 하나 생긴거 축하해요. 보니까 얼굴도 제법 예쁜데 앞으로 잠자리가 즐거우실것 같네요.” “하하. 그런용으로 산거 아닙니다.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에이. 지금 입은거 보니까 딱 티가 나는데. 아무튼 789골드 417실버 216브론즈에요. 신전은 할부 안되는거 알죠?” 그녀의 농을 가볍게 받아 넘긴 후 나는 바로 대금을 지불했다. 800골드도 안되는 돈으로 후반까지 써먹을 실력 좋은 일행 한명을 받아 들이는건 절대로 남는 장사였다. 꽤나 큰 금액에 놀라고 있던 비비앙은 이내 주저없이 내가 돈을 꺼내자 감동했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순간 계약서는 완전한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물론 내가 계약서에 명시한 댓가를 지불하는 과정은 남아 있었지만 말이다. 이민혜와 민철에게 작별을 고한 후 나는 계약서를 품에 곱게 넣어두고 신전을 빠져 나왔다. 그녀는 계약이 끝난 이후로 발을 동동구르며 애타게 나를 응시했지만 나는 더욱 으슥한곳으로 발걸음을 놀렸다. “되, 됬지? 이제 정말 된거지?” 사용자들의 인적이 드문곳으로 그녀를 데려온 후 걸음을 멈추자 기다렸다는듯 비비앙이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씩 미소를 짓고는 순순히 엘릭서를 꺼내 건네주었다. 그녀는 재빨리 병을 낚아챈 후 떨리는 눈망울로 엘릭서를 응시했다. “후우. 후우.” 잠시동안 심호흡을 하는 비비앙. 알게 모르게 그동안 거미로 변한것에 대해 커다란 스트레스를 받은것 같았다. 워낙 생에 대한 의지가 강하고, 지성을 잃어 그지경에 이렀지만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정말 기대가 되는 인물이었다. 애초에 거주민으로서 이정도로 실력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어쩌면 세라프한테 한소리를 먹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이미 각오했다. 잡으라고 만든 보스 몬스터 였지만 기록을 통한 헛점을 이용해 그녀를 내 일행으로 만들었다. 내 스스로의 의지로 정당하게 벌인 일이니 나 또한 할말은 있었다. 잠시 애증어린 눈길로 엘릭서를 바라보던 비비앙. 무언가 갈등 어린 기색이 얼굴에 역력했지만, 그녀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뽕! “흐읍. 꼴깍.” 바로 병의 마개를 풀어 병 안에 든 내용물을 원샷한다. 시원한 청량감이 몸 내부로 퍼지는지 비비앙응 몸을 부르르 떨며 쾌감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녀에게 살짝 다가가 몸을 가린 로브를 걷자, 갈라졌던 그녀의 피부들이 서서히 아물어가는걸 볼 수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피부 자체도 더욱 반들거리고 탱탱하게 변하기 시작했고, 뭔가 빛이 바랬던 머리카락은 아름다운 칠흑색을 내뿜으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창백하던 얼굴은 발그레한 혈색이 돌고, 차갑던 그녀의 몸은 피가 도는듯 복숭아빛으로 연하게 물들며 더워지고 있었다. 엘릭서의 최고 장점중 하나는 시간이 걸려서 회복을 시키는게 아닌, 마시는 즉시 몸을 치료하는 즉발성에 있다. 그 효과를 증명하듯 나는 눈 앞에서 완전히 회복한 마법사 한명의 강력한 마나 파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걸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바로 본인일 것이다. 비비앙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자신의 두 손과 몸을 내려다보더니, 이내 환희에 가득찬 얼굴이 되어 양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잃어버렸던 힘을 회복하는 기분이 어떨까. 1회차에 지옥의 나락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세상으로 기어올라온 그 기분과 비슷할까. 한동안 혼자만의 기쁨을 만끽하던 비비앙은 이내 살며시 눈을 떠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전처럼 여전히 멍하고, 백치미가 보였지만 이전과는 다른점이 하나 보였다. 예전의 그녀의 눈동자가 그저 생존만을 원하는 흐리멍텅한 눈동자였다면, 지금은 뭔지 모를 자신감에 차있는 살아있는 눈동자를 내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그녀의 자그마한 입술이 열리는게 보였다. “…수현.” “왜.” “이름이 수현 이었구나. 김수현.” “그러니까 왜 부르냐고.” “수현. 김수현. 김수현. 김수현.” 내 물음에도 아랑곳않고 계속 내 이름을 되뇌이던 비비앙을 보며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품 안이 화끈한게 계약서가 갱신되고 있는것 같았다. 이제 쇼 타임 이었다. 나는 한가지 실험을 하기로 마음 먹고 음흉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칠흑빛 머리에 은빛 눈동자. 그리고 이지적으로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맹한 느낌을 주는 얼굴. 예쁘다. 저정도면 정말 예쁜 편이다. 계약서의 효력을 시험한다는 명분아래 나는 입을 열었다. “비비앙.” “수현. 김수현.” “자. 이리 와서…응?” 막 “내게 안겨라.”라고 말하려고 했던 나는 갑자기 내게 달려드는 비비앙을 보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 그녀는 어느새 눈물 가득한 눈망울로 내 품에 안겨들어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나는 당황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침착하게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왠지 모르게 그녀의 기분을 알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일단 분위기가 좋긴 했지만 내가 원하는건 이렇게 스스로 안겨 오는게 아닌 어디까지나 싫어하는걸 억지로…그러니까 어디까지나 계약서의 내용과 강제성을 시험하는 건데. 이런 내 속마음을 꿈에도 모르는채 비비앙은 연신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고마워…고마워요…정말 고마워요.” “고맙긴. 어차피 계약한건데…야. 잠깐만. 너 지금 거의 나체나 다름 없다고. 이러면….” “정말 인간으로 돌아올줄 몰랐어…. 응. 괜찮아. 너라면 괜찮아. 나 앞으로 말 잘 들을게. 정말정말 잘 들을게.” 뭐가 괜찮다는 건데. 갑자기 적극적으로 변한 그녀의 태도에 나는 한껏 당황한 후 억지로 그녀를 떼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녀는 거미 시절의 본능처럼 양팔 그리고 양 다리까지 나에게 걸쳐 내 몸을 꽉 죄어 들었다. 그렇게 가슴이 벅차도록 기쁜건가? 마치 안솔처럼 계속 내 품에 파고드는 비비앙을 보며 나는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 사정은 아랑곳 않고 연신 내 품에 자신의 몸을 부볐다. 너무나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여성의 육체에 나는 크게 한숨을 쉬고 속으로 다짐했다. 오늘 기필코 여자 한명을 안고 말겠다고.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하하하. 아. 어떻게 오늘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습니다.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제가 글을 쓸때 주변 상황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인데. 그 탓인지 글을 쓰면서도 난삽하고 길다는 느낌을 여러번 받았습니다. 리메를 하고 싶을 정도로요. 그러나 리메를 한번 하면 시간이 무지 걸리는 편이라. 일단 진도를 쭉쭉 빼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자. 힘을 회복한 비비앙 입니다. 이제 이번 탐험에서 얻은것 모두를 정리하고 다음 목적지인 연구소로 향할 시간입니다. 경험도 했고, 강력한 전력이 추가됬으니 이제 진도를 빠르게 뺄 수 있겠지요? :) 『 리리플 』 1. Demodex : 고맙습니다. 오늘은 Demodex님이 1등을 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설 보내십시오. :) 2. 베네트 : 그렇습니다. 아. 오늘 정말 얼마나 심부름을 시키던지. 그래도 심부름 당하는(?) 사람들 중에서 제가 서열이 2위이기 때문에 어느정도 글을 쓸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하하하. 3. 네오3 : 아마 독자분들이 상상도 못하신 방향으로 변할겁니다. 하하하. 기대해주세요. 4. GradeRown : 백치미라. 후후. 앞으로 어떻게 변하는지 기대해주세요. 크크크크(?) 5. hohokoya1 : 쿠폰 감사합니다. 항상 제 글을 애독해주셔서 저 또한 힘이 절로 나는것 같습니다. 따지고 보면 오늘 세편 쓴거라. 하하하. 이 모든게 다 독자님들의 코멘트 덕분입니다. 코멘트를 볼때마다 정신이 번쩍번쩍 들거든요. 6. 드래곤음양사 : 드음님! 드음님!! 드음님!!! 드음님!!!! 7. CrossDie : 그건 바로 수정했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 8. 오리콘 : 흑흑. 그러니까요. 이러다 전 부치는 장인이 될 기세입니다. 9. 사람인생 : 하하하. 앞으로 보실 분들을 위해서 수정할 필요가 있지요. 일단 내일 외갓집에 갔다가 돌아온 이후 대대적인 수정을 해야겠죠. 10. 에인트제 : 곧 74회 올라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코멘트좀 많이 주세요! 그리고 추천도…☞☜)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75 / 0933 ---------------------------------------------- 마법사가 풍년입니다 탐욕스러운 눈길로 비비앙에게 손을 내뻗던 순간. 하나의 기억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스치고 지나간 기억은 내 머리를 강타하며 크게 울렸다. 나는 그 충격에 깜짝 놀랐고, 그덕에 욕망에 잠식당했던 이성을 다시 끄집어 낼 수 있었다. 이것은. 아니다. 이건 아니라는 감정이 내 가슴을 두드린다. 몸안을 가득히 지배하는 성욕을 억누르며 나는 비비앙을 떼어 놓았다. 음욕이 들기는 해도 아무데서나 내 본능이 시키는대로 한다면 그건 짐승이나 다름 없다. 일부러 기회를 엿보고 싶어 으슥한 장소로 데려오긴 했지만 애초에 그 행동부터 잘못됬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내부를 가다듬고, 조절했다. 나는 고자도 아니고, 여자에 관심이 없는 남자도 아니다. 신체 건강한 청년이고 여성에 대한 관심도 있는편이다. 그러나 그것과 내가 지금 비비앙을 안는건 별개의 문제였다. 하고 싶을때마다 하는, 오늘 여자를 꼭 먹고 말겠다고 다짐하는 추한 짐승은 아니었다. 나는 내가 그런 인간이라 생각한적 없고,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 일단 심호흡 한번. 요즘 좀 생각대로 되고 잘 나간다고 주변 상황을 가볍게 여긴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잃어버렸던 인간성을 회복하고는 있지만, 그만큼 예전에 지녔던 칼날 같은 날카로움은 사라지고 있었다. 물론 여자를 안는다는게 나쁘다는건 아니다. 지금도 충분히 비비앙을 안을 자신이 있다. 그러나 방금 말한것처럼 욕망에 내 자신을 휘둘리는 일은 사양이었다. 욕망은 내 손 안에서 조절하고 절제해야 빛을 내는거지, 이처럼 무분별하게 표출하는건 내가 가장 혐오하는 인간이었다. 오늘 꼭 여자 한명을 안고 만다고? 정말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여자를 안고 싶어 다시 돌아온거라면 앞으로 세라프를 다시 보기 부끄러울지도 모른다. “수현? 왜그래? 괜찮아?” “…….” 속을 가다듬고 눈을 다시 뜨자, 비비앙은 머뭇거리는 태도로 내게 말을 걸었다. 내가 그저 가만히 응시하고만 있자 비비앙은 이 침묵을 견디기 어려웠는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니. 그냥 내 기분일지도 모르는데. 다른 사람을 보는것 같아서….” “…그래?” “응. 다시는 그런 표정 짓지마. 갑자기 소름이 오싹 돋는게…으.” 두 팔을 감싸 안은후 비비는 비비앙. 나는 얼른 표정을 풀고는 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제서야 안심이 됬는지 비비앙은 방긋 웃은 후 내 옆으로 다가와 팔짱을 끼었다. 나는 바로 팔짱을 뺀 후 여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히잉.”이라는 비비앙이 투정을 부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수현. 수현.”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걸음으로 내 앞을 앞서나간 비비앙은 몸을 휙 돌린 후 나를 바라 보았다. 그녀의 물음에 무심한 어조로 대꾸하자 비비앙이 입을 삐쭉 내미는게 보였다. “나 그럼 앞으로 너희들이랑 같이 행동하는 거지?” “그러기로 했잖아.” “그렇구나. 그럼 나 고민이 하나 있는…아악!” 뒤로 걷는 걸음을 보여주던 비비앙은 이내 발이 꼬여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벌러덩 나자빠지는 바람에 로브가 활짝 열렸고 그 탓에 그녀의 몸이 그대로 노출 되었다. 머리를 부닥쳤는지 뒤통수를 슬슬 문지르던 비비앙은 내 시선을 보고는 얼른 로브를 가렸다. 그녀의 얼굴이 샐쭉하게 변했다. “변태.” “내가 왜 변태인데.” “거짓말하고 있네. 봤잖아.” “보긴 봤지. 그런데 거짓말한적은 없어. 그리고 방금전은 내가 일부러 들춘게 아니잖아. 니가 멋대로 꼬여 넘어지고 그 탓에 로브가 열린건데 왜 나한테 그래? 엄한 사람 치한으로 몰지마.” 논리정연하고 차분한 내 어조에 비비앙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그러네. 미안해. 그래도 그렇게 정색할 필요는 없잖아. 나 네가 그러니까 너무 무안하다.” 순순히 인정하는 비비앙을 보며 나는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조심하게 다녀라. 가끔 보면 넌 너무 부주의한 경향이 있어.”라고 대답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잡고 일어나는 그녀를 보며 나는 말을 덧붙였다. “아무튼. 무슨 고민이 있는데.” “응…어쨌든 앞으로 우리는 같이 다닐거잖아.” “그건 방금 말했고. 거두절미하고 본론.” “…그 유정이랑 안솔이라고 했나? 걔들이 나를 싫어하는것 같아.” “응. 싫어하는거 맞을걸.” 내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비비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애들이 비비앙을 싫어하는건 사실이었다. 이런 문제는 괜히 어물쩍 넘기기 보다는 자신의 상황을 확실하게 주지시키고 앞으로 태도를 고치게 하는게 훨씬 더 도움이 된다. “그래도 천성은 착한 애들이야. 같이 행동하기로 한 이상 네가 조금 더 참고 좋은 모습을 보이면 충분히 좋게 지낼 수 있어.” “정말?” “물론이지. 애들한테도 내가 따로 말을 해둘게. 그건 너무 걱정하지마.” “고, 고마워. 그런데 나 또 하나 걱정이 있는데….” 내가 말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까닥이자 한동안 주저하던 비비앙은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 옷좀….” 정지연의 로브가 엄청 작기는 했나보다. 발개진 얼굴로 몸을 배배 꼬는 비비앙을 보며 나는 지체없이 상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옷가게에 들러서 마법사용 로브를 산 후 우리는 바로 예전에 묵었던 여관인 <조신한 숙녀>로 들어갔다. 막상 뮬로 돌아오면 이것저것 할일이 많을것 같았지만 일단은 그래도 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대부분 애들과 연관된 일인 만큼 오자마자 급하게 해봤자 좋을것도 없었다. 쉴때는 확실하게 쉬고 할때 집중하는 편이 효율은 훨씬 좋았다. 까슬한 나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이번에는 어느정도 사용자들이 들어선게 보였다. 시간이 시간인만큼 다들 안주거리에 맥주를 시키고 떠들썩하게 얘깃거리들을 나누고 있었다.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던 고연주는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는지 나와 비비앙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사용자 김수현. 다른 애들보다 조금 늦게 오셨네요.” 살풋 미소를 지으며 우아하게 인사를 건네는 고연주. 나 또한 간단한 답례로 화답한 다음 애들은 올라 갔는지 물었다. 고연주는 대답대신 한쪽 구석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애들이 뚱한 얼굴로 앉아 있는게 보였다. 간간이 탁자 위로 음식을 잔뜩 쌓아둔 채 젓가락만 깨작이는 중 이었다. 내가 침음성을 흘리자 고연주는 호호 웃은 뒤 기특한 눈길로 애들을 바라보았다. “수현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네요. 참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애들이에요.” “흠흠. 아무튼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다 돈 받고 하는건데요. 그런데 못보던 분이 한분 늘었는데….” 고연주의 새초롬한 눈이 내 뒤에 멀뚱히 서있는 비비앙으로 향한다. 나는 그녀를 앞으로 끌어 내고는 소개를 덧붙였다. “이번에 새롭게 합류한 일행입니다.” “보니까 마법사인것 같은데, 수완 참 좋으세요.” “뭘요. 그나저나 바쁘신것 같은데.” “앗참. 내 정신좀 봐. 그럼 다음에 뵈요.” 고연주는 조금 더 나와 얘기를 나누고 싶은듯 보였지만, 아직 거주민인 비비앙을 소개하기에는 뭐한감이 있어 완곡히 거절하는 뜻을 담아 말을 건넸다. 그녀 또한 내 말을 알아듣고 순순히 물러났지만 “다음에 뵈요.”라는 말로 또 만날것을 암시했다. 고연주 또한 영입 대상에 포함된 인원이기 때문에 지금처럼 분주한 공간이 아닌 둘뿐만 있다면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애들 또한 나를 발견했는지 한결 밝아진 얼굴로 나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얼른 애들이 앉은 자리로 이동한 후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먼저 먹고 들어가서 쉬라고 하고 있었잖아. 기다릴 필요 없었는데.” “그래도요. 형이랑 비비앙씨 둘만 보내놓고 우리들끼리 편하게 있으면 마음이 안 좋아요.” “그래그래. 아무튼 얼른 먹자. 다 식었겠다.” 안현은 연신 기특한 소리를 내뱉으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만약에 그때 그 자리에서 비비앙과 성교를 했다면 애들은 쫄쫄 굶으면서 나를 더욱 기다렸을 것이다. 괜히 미안한 마음에 나는 애들한테 식사를 권유한 후 수저를 들었다. 비비앙은 수저가 익숙하지 않은지 포크를 들어 한상 가득히 차려진 식탁을 보며 고민하고 있었다. “많이도 시켰다.” “그게 배고프다 보니까. 헤헤. 오빠 미안. 내가 조금 많이 시켰어.” 유정은 솔직하게 자신이 많이 시켰다고 시인한 후 나에게 애교를 부렸다. 남에게 떠넘기지 않는 태도가 마음에 들어 나는 관대한 얼굴로 그녀를 다독였다. “뭐. 돈은 충분하니까. 너무 낭비하는건 좋지 않지만 그래도 이정도는 괜찮아.” “응응. 그런데 간 일은 잘 됬어?” “아…그러고보니…형 신전…꿀꺽.” 안현은 배가 엄청 고팠는지 허겁지겁 음식을 들이키고 있었다. 안솔 또한 조용히 수저를 놀리는데 집중하고 있었고, 비비앙은 오랜만에 맛보는 인간다운 음식에 감동한 얼굴로 입을 꼭꼭 씹고 있었다. 나 또한 빵을 한쪽 쭉 찢어 스프에 양념한 후 입 안으로 넣었다. 입안 가득히 고소하고 따뜻한 향이 퍼지는걸 느꼈다. “신전에 다녀오고, 상점에도 들렀지. 비비앙의 새 옷이 필요했거든.” “하긴 쟤 옷은 내가 봐도 민망 하더라. 옷 잘샀네. 그런데 신전에는 탐험 보고 때문에 다녀온거야?” “겸사겸사. 그런데 요즘 바빠서 탐험 보고는 받지 않더라고. 그래서 비비앙 몸도 치료하고, 계약서도 작성하고. 별 일은 없었어.” “계약서?” 애들은 계약서란 말에 호기심이 이는지 다들 입 한가득 음식을 우물거리며 내게로 시선을 모았다. 나는 그간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한 후 계약서를 꺼내 보여주었다. 비비앙이 살살 내 눈치를 보고 있어 나는 아무래도 말을 조금 더 추가할 필요성을 느꼈다. “다들 보면 알겠지만, 앞으로 비비앙은 우리를 적대하지 않고 물심양면으로 도울 한명의 거주민이라고. 물론 자세한 소개는 하고 싶지만 현재 보는 시선과 듣는 귀가 많아서….”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주변을 스윽 둘러보았다. 그러자 몰래몰래 우리를 훔쳐보던 사용자들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걸 볼 수 있었다. 시선의 대상이 대부분 안솔, 이유정, 비비앙인걸 보면 그들이 어떤 생각으로 우리를 봤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을것이다. 주변의 시선을 어느정도 줄인 후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만큼 앞으로 우리와 같이 행동할 예정이다. 이래뵈도 꽤 실력있는 마법사니까 참고해둬. 자세한 소개는 내일 본인한테 직접 듣는걸로 하고…그리고 다들 심정은 알고 있어. 하지만 비비앙을 너무 안좋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시 인간으로 돌아온 만큼 새마음으로 새출발하려고 하는데…다들 내 말 알아 듣지?” 안현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같이 던전을 나올때부터 이렇게 되리라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솔이는 입을 비죽 내밀었지만 내 간곡한 말에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겉으로는 싫다는 티를 팍팍 내는게 아직 그녀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데는 조금 시간이 걸릴것 같았다. 시간이 답이라고 생각한 후 나는 유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비틀린 미소를 지은 유정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호호호. 절대로 적대하지 않는다와 물심양면으로 돕는다…라고? 호호호.” 뭔가 위험한 미소를 흘리며 계약서를 정독한다. 이윽고 다시 내게 계약서를 건넨 유정은 반짝이는 눈동자로 비비앙을 바라보았다. 비비앙이 어색하게 웃자 이유정 또한 화사한 웃음을 피어내며 화답했다. 묵묵히 그런 모습들을 지켜본 안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형. 너무 걱정 마세요. 제가 잘 지켜볼게요.” “…그래. 참 고맙다.” “그리고. 혹시 우리들한테 뭐 물어본건 없으세요?” 그렇게 먹고도 아직도 들어갈게 남았는지 안현은 큼지막한 고기를 한조각 찍어 들었다. 그가 뭘 말하고 싶은지 알아챈 나는 곧바로 그 기대에 부응해주었다. “그래. 안그래도 지금 물으려고 했다. 우리들이 들고온 사용자들은?” “둘 다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숨을 쉬는걸로 봐서 살아 있는건 확실한데…일단 남자는 형이랑 제 방에, 그리고 여자는 솔이랑 유정이 방에 옮겨 놨어요. 방은 전에 쓰던것보다 조금 큰걸로 잡았구요.” “잘했네.” “어떻게 하실 건데요?”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능력치도 좋고, 성향도 마음에 든다. 자세한건 깨어난 후 대화를 나눠봐야 알겠지만. 그러나 걸리는건 비비앙이 걸렸다. 나만 알고 있는거면 몰라도 비비앙이 던전 마스터인 거미였다는건 애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이었다. 일이 잘 풀려 영입 제의를 한다고 해도, 그 사용자들이 과연 들어오려고 할까? 나는 습관처럼 탁자를 톡톡 두들긴 이후 입을 열었다. 안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일을 하나 해결하면 또 하나가 생기는 기분이 들었다. “내일까지 한번 기다려보고. 뭐 안되면 신전에 다시 들러보도록 하자고. 우리가 마냥 떠맡을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네 형.” 안현은 할말을 다한듯 다시 접시에 고개를 박았다. 음식은 확실히 질이 좋고, 맛도 좋았다. 더 먹으라면 먹을 수 있겠지만 원체 많이 먹는편이 아니라 나는 이만 숟가락을 놓았다. 내가 숟가락을 놓자 빤히 보던 솔은 이윽고 내 접시로 큼지막한 고기를 덜어 주었다. “오빠아. 몸도 안좋은데 많이 드세요.”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보는 솔이를 보며 씁쓸히 웃고는 놓았던 수저를 들었다. 어느정도 긴장이 풀리고 도시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나는지 딱딱한 분위기가 조금 풀려가고 있었다. 나는 문득 고개를 돌려 여관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해는 완전히 저물어 있었고, 땅바닥에는 땅거미가 내려 앉아 있었다. 일단 오늘 하루는 아무 생각 없이 잠들고 싶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네. 드디어 수현이가 고자 타이틀을 땔 수 있는가 싶었지만…아쉽게도 본인의 절제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수현이 자신이 고자가 아니라고 한건 소심한 반항입니다. 하하하.) 비비앙도 이제 곧 일행의 가족이 될 아인데 첫경험을 반강제로 한다면 조금 그렇겠지요. 본인이 벗고 덤비는거면 몰라도 말입니다. 수현이 비비앙와 성교를 하지 않은 이유를 부연하겠습니다. 비비앙은 일단 아군입니다. 수현에게 도움이 될 존재로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상대가 부랑자 또는 적군이었으면 가차없이 윤간 후 목을 잘랐겠지만, 아군인만큼 수현이 또한 어느정도 관용을 보였습니다. 울타리 안에 있는 애들한테는 한없이 자상하지만(김수현 자신 기준에서 말입니다.)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은…지금까지 수현의 행동을 보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계시겠지요. 『 리리플 』 1. MT곰 : 코멘트 1등 축하 드립니다. 그리고 쿠폰 감사합니다. 곰님도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 2. C.Y.B : 이 될뻔 했지만 아쉽게도 수현의 절제로 다음 기회로 넘어 갔습니다. 하하하. 3. GradeRown : 이 계약서는 어떻게 보면 노예 계약보다 더한…. 비비앙. 미안하다. ㅜ.ㅠ 4. hohokoya1 : 하하하. 일단 리메는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무래도 더욱 진도를 빼는게 낫겠지요. 소중한 조언 감사합니다. 5. 사람인생 : 9번에 리리플 있었습니다. 하하하. 못보신듯 하네요. :) 6. zeromax : 저도 제 지갑을 보니 눈물이 주륵 흐릅니다. 조카들의 러쉬에 정말 엄청나게 당했습니다. 오자마자 세배를 하고 두 손을 내미는데. 흑흑흑흑. 7. 뿌잉뿌잉a : 뿌잉? 8. 오리콘 : 그렇지요. 참 예쁜 고양이 입니다. 강아지는 이미 솔이가 맡아논 터라. 누가 더 고양이에 잘 어울리는지 앞으로 비비앙과 유정의 경쟁을 기대해주세요. 하하하. 9. 프란딜 : 음. 저기에 <앞으로 추가되는 일행마다>라는 조건을 집어 넣으면 1200골드 전부를 쏟아 부어도 계약서가 성립되지 않을겁니다. 하하하. 10. 겨울내일 : 재밌으시다니, 다행입니다. 하하하. 쿠폰 감사합니다. 겨울내일님도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코멘트좀 많이 주세요! 그리고 추천도…☞☜)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76 / 0933 ---------------------------------------------- 마법사가 풍년입니다 어슴푸레 눈을 뜨자 사늘한 한기와 따뜻한 햇살이 방 안에 뒤섞여 있었다. 한동안 머리를 툭툭 두드린 나는 어깻죽지를 매만진 후 몸을 일으켰다. 창문 안으로 밝은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몸이 무겁다고 불평했을텐데 2회차를 시작한 후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내구와 마력이 높으니 어지간한 상처나 피로는 자가 회복으로 충분히 메울 수 있었다. 고개를 한번 뒤틀자 “우둑둑.”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잠시 몸 안의 뼈가 꺽이는 짜릿함에 온 몸을 부르르 떤 후 나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지간히 피곤했는지 안현은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고, 그 옆에 신상용이란 남자는 얌전히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이제 슬슬 비비앙이 거미 시절 주입한 마취의 효과가 풀릴때도 됬을것이다. 아마 오늘 내로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오늘 할 일은 손가락으로 센 후 한껏 기지개를 폈다. 창 밖을 보니 해는 이미 하늘 위로 찬란히 솟아 올라 있었다. 온 세상이 환하다. 말 그대로 도시락 들고 피크닉 가기 딱 좋은 맑은 날 이었다. 옆 방으로 감지를 펼치니 네명의 사용자가 고른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바로 기본 무장을 하고 주머니를 챙긴 후 방을 나섰다. 삐걱이는 나무 계단을 내려가자 한산한 여관의 로비가 보였다. 보이는 사용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황금 사자 클랜이 강철 산맥으로의 원정을 당기면 당길수록 이런 현상은 심화될 것이다. 멍청이들. 나는 나지막히 욕설을 내뱉고 자리에 앉았다. 고연주는 훤히 보이는 주방에 의자 하나를 놓고 졸고 있었다. 내가 일부러 의자를 끄는 소리를 내고 철푸덕 앉자 화들짝 그녀의 고개가 들리는걸 볼 수 있었다. <10강>에 이른 사용자인 만큼 이정도 기척을 냈는데 일어나지 않는 거라면 일부러 자고 있는 척을 했다고 봐도 옳았다. 그렇지는 않은지, 고연주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내게 비척이며 다가왔다. 어제는 그래도 사용자들이 조금 있는 편인것 같았는데 그 탓에 무리를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고연주 정도의 체력이면 단순히 여관일에 지칠 일은 없을텐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호기심에 고개를 갸웃 거렸지만 어쨌든 남의 일이기에 나는 인사를 위해 입을 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네에…좋은…아침…요.” 중간중간 나오려는 하품을 맵시 있게 숨기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풀어진 옷차림과 매끈한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괜히 민망한 기분에 메뉴판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침이니 간단한걸 먹는게 좋겠지. 잠시 메뉴를 살핀 나는 곧바로 주문했다. “오늘은 간단히 A코스로….” “흐암…흡. 치사해. 새로 만드려면 시간 좀 걸려요.” “뭐가 치사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제 만들고 남은걸로 주셔도 됩니다.” “사랑해요.” 내 호의에 고연주는 진심으로 안도하는 표정을 지은 후 눈을 찡긋이며 입을 열었다. 맨 뒤에 들은 말은 그냥 흘려 넘길 수 있었다. “어제 많이 힘드셨나 보군요.” “말도 마요. 어제도 힘들었고, 오늘도 힘들었죠. 사용자들이 새벽까지 어찌나 몰려들던지. 술에 취해서 추근덕 대는 남자들이 한둘이 아니었어요. 한명씩 다 쫓아내고. 음식값이랑 깽값도 받아내고. 정말 피곤하군요. 몸이 욱씬거려요.” 고연주는 내 말을 기다린듯 얼씨구나 하고 맞은편 의자에 엉덩이를 찰싹 붙였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일단 깽값이라는 말에 나는 어제 당한 사용자들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부디 하반신이 제 기능을 하기를…. 그런데 도대체 왜 내 맞은편에 앉은거지. 얼른 식사나 가져 왔으면 좋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연신 내 앞에서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사용자들이 너무 들이댄다. 예쁘게 태어난 것도 죄다 등등. 아니 그러면. 그렇게 옷을 입지 않으면 되잖아. 가슴골이 절반 이상 드러나고 다리는 허벅지 위쪽 부분까지 아슬하게 보이는데 그냥 넘어가고 배기겠어요. 혹시 그런거 즐기는거 아니에요? 별의 별 상상이 머리속으로 파고들었다. 해주고 싶은 말은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지만, 나는 억지로 삼켰다. 그저 대답 대신 어깨를 한번 으쓱인 후 품에서 연초를 꺼내들었다. 고연주는 그런 내 반응을 빤히 응시하더니 이내 눈이 가늘어졌다. 입을 삐죽 내밀더니 그녀는 불만어린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머. 너무해라. 나랑 그렇게 얘기 하기가 싫은가요?” “응? 잘 얘기하다가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저는 눈치가 정말 빠른 편이랍니다. 지금 빨리 음식이나 가져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아, 아니에요.” 내 더듬거리는 반응에 한동안 조곤조곤 얘기를 하던 고연주는 샐쭉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굵은 땀방울만 흘리며 연신 어색한 미소만 지을 뿐 이었다. “어제도 완전히 차갑게 축객 하셨잖아요. 흥. 내가 아무한테나 이러는줄 알아요?” “그때는 좀 피곤해서….” 뜨끔한 얼굴로 반문하자 고연주는 나른한 눈가를 살짝 찌푸리고는 콧방귀를 꼈다. 딱히 할 말이 없어 나는 연초를 입에 문 후 불을 붙였다. “참 속이 상하네요. 좋아요. 여관 주인은 얼른 음식이나 가져 오겠어요.” “오해에요. 그런데 음식은 조금 따뜻하게 데워 주세요.” “별꼴이야. 괜히 나만 기다린 사람처럼 보이잖아.” 나 들으라는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녀는 바람 소리가 날만큼 세게 몸을 돌렸다. 곧이어 주방으로 걸음을 옮기는 고연주. 한걸음. 두걸음. 세걸음. 네걸음. 그녀의 뒷모습을 묵묵히 보고 있던 나는 연초를 한모금 쭉 빨아 들였다. 향기로운 연향이 목구멍 가득히 들어온다. 내가 붙잡지 않자 고연주는 결국 다시 몸을 돌리고 말았다. 맛있게 연초를 빨아들이는 내 모습을 보며 그녀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수현씨. 혹시 평소에 눈치 없다는 소리 많이 듣지 않아요?” “네?” “여자가 이정도 말했으면 대충 감이 오지 않나요?” “…일단 음식부터.” 그녀의 기대를 매정하게 배반한다. 여전히 음식을 요구하는 나를 보며 그녀는 눈알을 한바퀴 빙글 돌리더니, 이내 쿵쿵거리는 발걸음으로 나와의 거리를 줄였다. 혹시 모르는 일이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나에게 고연주는 가만히 손을 내뻗더니 이윽고 내 입에 물린 연초를 쏙 빼앗아 들었다. “앗.” “조신한 숙녀 여관은 금연 건물입니다. 손님.” “어제 오후에 왔을때는 아니었잖아요. 사용자들 대부분이 피고 있던데요.” 내 말에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는 바로 내 말에 반박했다. “아침에는 금연이랍니다. 손님.” “…너무하네요.” 시무룩히 말을 건네자 고연주는 내가 피우던 연초를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내가 그녀를 빤히 응시하자 고연주는 내가 한것처럼 똑같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윽고 얄밉게 한모금 빨아들이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후우. 이건 주인 맘. 잘 피울게요.” 그녀는 내 얼굴로 유혹적인 숨결을 뱉고는 다시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엉덩이를 살랑이며 점점 멀어지는 여성 사용자를 보며 나는 다시 연초를 하나 꺼내 들었다.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그녀는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 빵. 스프. 고기 스튜. 간소한 A코스. 말 그대로 간소하다. 그러나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아침부터 거나하게 먹겠는가. 오히려 이정도면 딱 알맞은 편이었다. 고기 스튜를 한 숟갈 떠 입에 넣고 씹은 나는 부드럽게 씹히는 육질에 미소를 지었다. 어제 남은걸 가져온다고 하더니, 아예 새로 만들어온게 분명했다. 멀리서 뚱한 얼굴로 나를 보는 고연주를 보자, 열심히 기록 하나를 읽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 고개를 돌렸데. 그녀에 대해 자세히 안다고 자부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마음에 드는 상대한테는 거리낌없이 대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면 나는 마음에 들었다는 소린가? 뭔가 모를 뿌듯한 마음에 나는 기분이 한결 좋아지는걸 느꼈다. “쯧쯧….” 문득 기록을 읽던 고연주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볼것도 없이 황금 사자 클랜의 행보를 대대적으로 기록해놓은 회보 비슷한거겠지. 그말인즉슨 그녀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어쩌면 영입의 단초가 될지 모른다는 김칫국을 마시며 나는 다시 음식에 열중하려고 고개를 숙였다. 그때였다. 탁. 탁. 탁. 탁. 조용히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안현, 이유정은 내려올때 저런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리고 안솔의 소리는 저 소리보다 조금 더 조심스러움이 포함되있다. 그러나 지금 소리는 무언가 불안하면서도, 절제된 기품을 갖추고 있었다. 사용자들마다 다르긴 하지만 주로 마법사들이 걸음 소리였다. 한동안 들리던 탁탁이는 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계단을 모두 내려온듯 싶었다. 나는 뒤돌아 앉은채 손을 들어 이쪽으로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내 신호를 알아 챘는지, 잠시 머뭇거리던 발걸음은 내가 앉은 탁자 방향으로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내 뒤에 선 한명의 기척을 느끼며 나는 나지막한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깨어 나셨군요.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조금 힘이 없기는 하지만 괜찮아요. 그러면….” “네. 저와 일행들이 던전에서 여러분들을 보고 구출한 일행입니다.” 청아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구출한 사용자중 여성 마법사가 분명했다. 내 옆에 선채로 대답하는 정하연을 본 후 나는 앞쪽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그녀는 내 손가락을 따라 의자에 살며시 앉은 후 고개를 숙였다. “먼저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2년차 사용자 정하연 이라고 합니다. 일반 마법사를 직업으로 갖고 있구요.” 시시콜콜한 얘기 대신 가장 먼저 감사의 인사를 하고 곧이어 자신의 본명과 직업을 밝힌다. 최소한의 기본 도리는 갖춘 사용자라고 볼 수 있었다. 일단 첫인상은 합격점을 내린 후 나는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 보았다. 척 봐도 선한 인상의 미인이 멍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솔직히 안솔, 이유정, 김한별이 워낙 예쁘고 각자만의 매력이 독특해서 그렇지 눈 앞에 있는 정하연도 나름 괜찮은 얼굴이었다. 어깨를 닿지 않는 컷트 머리에 순진 무구한 눈망울.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흐르는 우아한 기품과 지적인 분위기까지. 김한별과 안솔 그리고 비비앙을 섞어놓은 듯한 분위기였다. 아마 당장 대학교 OT에 데려다 놓으면 선배들과 동기생들 인기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할 그런 정도였다. “0년차 사용자 김수현 입니다. 직업은 검사 계열 클래스 입니다.” 0년차라는 내 말에 정하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일행이 있다는 말에 이내 고개를 끄덕인 후 다음에 이어질 내 말을 기다렸다. 점점 더 마음에 드는 그녀의 태도에 나는 얼굴이 한층 풀어졌다. 어느새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다짜고짜 들이대면 대충 대답한 뒤 꺼지라고 할 예정 이었는데 정하연은 자신의 주제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물론 그 말에는 그녀가 알고 싶어하는 정보도 포함 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이 어제 던전에서 구출해서 돌아왔으니…못해도 2, 3일은 기절해 있으셨을 겁니다. 목도 마르시고 시장하실텐데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상냥하시군요. 호의 감사합니다. 고맙게 받아 들일게요.” 나는 고연주를 불러 A코스 1인분을 더 시켰다. 아까전에는 조금 시간이 걸리더니, 이번에는 5분도 되지 않아 음식을 갖고 나왔다. 딱 봐도 식은게 어제 팔다 남은 음식들 같았다. 나는 미미한 웃음을 흘렸다. 내가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하자 그녀 또한 조심스럽게 수저를 들었다. 오면서 몇번 비틀거리는것 같았는데 상당히 공복감을 느꼈는지 그녀는 사양않고 음식을 들었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든건 스프 한그릇과 물 한병을 깨끗이 비우고 난 이후였다. “죄송한데…혹시 다른 일행들은 어떻게 됬는지 물어도 될까요.” “음. 물론입니다. 모두 얘기해 드릴게요. 하지만 일단 식사부터 마치시는게 어떠신지….” 나는 일부러 말을 돌렸다. 까짓거 “신상용 빼고 다 뒤졌습니다. 궁수랑 사제는 온 몸이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구요. 그쪽 동생인 정지연은 몬스터 정액받이가 된 이후 괴물을 낳는 모체가 되 있었어요. 임신을 해서 그런지 배가 볼록하던데요?”라고 말하면 나도 편하긴 하다. 그러나 내가 말을 돌린건 그녀에 대한 완곡한 배려였다. 지금 바로 결과를 알려주면 충격을 먹을수도 있으니 일단 식사 후 기운을 차리라는 의도가 포함 되어 있었다. 그녀 또한 2년간 홀 플레인에서 굴러먹은만큼 내 말이 의도하는 바를 어느정도 깨달았을 것이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는 이내 눈에서 눈물 한방울을 또륵이 흘리고 말았다. 미인의 눈물에 나는 담담히 말을 덧붙였다. “불행중 다행일지 몰라도. 전멸한건 아닙니다. 지금 아직 한명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위에 있거든요. 그러니….” 내 말에 겨우 기운을 얻었는지.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자각했는지. 정하연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고연주는 안타까운 얼굴로 정하연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시선을 맞추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관심 없는척 하면서 전부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간 우리 둘 사이에는 수저를 달그락 거리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스프를 먹어서 공복감을 달랬는지, 아니면 더이상 입맛이 없는지 접시만 깨작이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수그린 정하연을 보며 나는 때가 되었다고 여겨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이럴수가. 우리 수현이가 고자 취급을 받다니. 독자님들. 이래선 안됩니다. 우리 수현이 고자 절대로 아닙니다. 어제 코멘트를 읽고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자리에 들면서 나중에 독자님들이 질릴만큼 정사 내용을 쓰겠다고. 그만쓰라고들 하실때까지 엄청 쓰겠다고 다짐할 정도였습니다. 하하하. 원혜연이 어떻게 죽었는지. 정지연이 어떻게 됬는지. 보신분들은 아시겠지만. 저. 쓰라면 정말 화끈하게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고 있는 노블 수위는 스토리에 필요하면 내용에 포함되도 되지만, 무분별한 정사 내용은 제한하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한 부분을 쓰는게 조금 조심스럽네요. 까닥 잘못하다간 바로 습작행이 될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아무튼 내용은 전개되면서 앞으로 수현이 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첫 타겟은…후후.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드립니다. 미월야님도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오늘 많은 성원에 감사해 연참합니다. 부디 이번회도 즐겁게 감상하시길…. :) 2. MT곰 : 하하하. 복은 배 터지도록 받았습니다. 곰님도 많이 받으셨나요? 3. rhkdel2 : 오라! xxxxx! 제 23군단을 거느리는 xxxx의 주인이여! 키메라 뿅. 이런식은 어떠신가요? 하하하. 4. 사람인생 : 아하. 이런이런. 리리플은 한 회당 한명씩입니다. 하하하. 계약서는 애들한테 보여줄 필요는 있었습니다. 앞으로 가족처럼 행동할 아이들인 만큼 필요한 부분은 드러낼 생각입니다. 그리고 곧…헙.(스포스포!) 5. C.Y.B : 아니에요!!! 거세라니요!!! 아니라구요!!! ㅜ.ㅠ 6. hohokoya1 : 하하. 언제나 코멘트 감사 드립니다. 수현이는 언제나 필요에 의해 움직이는 주인공 입니다. 칠때는 주저없이 치지만, 빠질때는 빠질줄 아는 주인공이죠. 앞으로도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연참입니다! 7. 크리아센 : (발끈) 제, 제, 제가 야설을 못 쓴다구요? 하하하하하! 제 손가락과 제 머리와 제 가슴이 울고 있습니다. 8. 슬피우는영혼 : 감사합니다! 북유럽신화 정주행하고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연참했으니 북유럽신화 연참을…( --). 오히려 세류같은 캐릭터가 부럽지요. 그런데 만약 여기서 수현이 그랬다가는 아마 그날로 척살대가…. ㅜ.ㅠ 9. Demodex : 감사합니다! 붕가붕가. 좋죠. 못 쓰는게 아니라 현재 자제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하하하. 앞으로 전개되면 필연적으로 나올 내용들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 10. Toranoanal : 코멘트 기다렸습니다. 흠흠. (__ )* 75회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데서나 박으면. 보니까 저도 이질감이 들더군요. 내가 이런 표현을 썼던가해서 한창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하하하.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76회 연재후 바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추천도 감사합니다.(__) 그리고 상위조항은 계약서의 내용에 따라 존재할 수 있습니다. 예를들면 비비앙과의 계약서는 1번이 상위 조항으로 볼 수 있습니다. 1번이 우선 시행되야만, 2번과 3번의 계약이 갱신되는 경우로 볼 수 있죠. 질문 감사합니다. 충분한 답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 11. 레필 : 오늘은 한분 더. 솔직히 오늘부터 일일 연재를 할 예정 이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깜짝 놀랐습니다. 왠지 한편 더 안올리면 죄송할 분위기라 부랴부랴 작성하고 올립니다. 하하하. 그럼요. 고자가 아닌걸 확실하게 보여드리죠. 흠흠.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코멘트좀 많이 주세요! 그리고 추천도…☞☜)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77 / 0933 ---------------------------------------------- 마법사가 풍년입니다 처음부터 구구절절 말할 필요는 없다. 간결하게, 그러나 필요한 부분은 모두 포함해서. 던전으로 들어가서 처음 사용자 시체를 발견한 일부터 천천히 얘기를 풀어 놓았다. 정하연은 어느새 숟가락을 놓고 내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기절한 후 곧장 일어나 이정도로 집중력을 보이는게 쉽지는 않을텐데. 나는 속으로 조금 감탄한 후 말을 이었다. 남자 사제를 발견하고, 공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미들과 마주친 후 한명의 여성 사용자를 볼 수 있었다는 말까지. 여성 사용자라는 말에 정하연은 눈을 빛내며 내게 물었다. “지연이…아. 제 동생이에요.” “…유감입니다만….” “설마….” 나는 그 부분은 최대한 완곡하게 말했다. 허공에 매달렸고, 거미들의 모체가 되어 알을 낳고 있었다는 부분은 말했지만 몬스터에 의한 강간과 이지를 상실할 정도로 당했다는 말은 빼놓았다. 세상을 살다보면 모르면 좋은일도 있는법이다. 그리고 조금 고민했지만. “…그래서 그녀를 죽였습니다. 살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지만, 한명의 인간으로서 그렇게 변한걸 보는게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차라리 죽는게 더 낫겠다 싶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그녀를 죽였다는 말을 덧붙인 후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나와 정하연 둘의 사이에는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예상대로 충격 받은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만약 그녀를 영입할 생각이 없었다면 어떻게든 속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 영입 대상으로 올려 놓은 이상 밝힐 수 있는건 전부 밝히고 싶었다. 물론 곧이 곧대로 말하지는 않고, 최대한 내게 유리하게 말하는건 필요했다. 내가 정지연을 죽였다는 사실을 순순히 털어놓은건 한가지 노림수가 있었다. 바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걸 주지 시키는것. 그녀가 조금만 생각을 한다면 내가 죽이고 싶어서 죽였다기 보다는 이미 회생이 불가능한 상황이라 모욕을 받는것 보다는 차라리 깔끔하게 죽였다고 생각하도록 유도하는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한동안 나와 시선을 교환하던 정하연은,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도저히. 도저히 회생할 수 없을 지경 이었나요.” “솔직히…거의 말도 못할 정도 였습니다. 원하신다면 더욱 자세한 묘사는 가능하지만 권유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저를 무언가 바라는 모습으로 보았고, 저는 제 가슴이 시키는대로 따랐습니다. 최소한 고통 없이 끝냈다는건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 그렇겠죠. 항상 도도하고, 자존심에 차 있던 아이니까요. 평소 혐오하던 괴물들한테 당하고…임신을 했다면…그럴만도….”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잇던 정하연은 순간 “흑.”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지연이 나를 보던 눈동자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조용한 여관안에 한명의 여성이 흐느끼는 목소리가 울렸다. 내가 그녀를 그냥 죽인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때 정지연이 나를 보던 눈동자가, 자신을 살려 달라는 건지, 죽여 달라는 건지는 본인만 아는 사실 이었다. 감정이 북받치는지 정하연은 어깨를 부르르 떨며 눈물을 흘렸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곧바로 눈물을 훔치고 목소리를 가다듬는 그녀를 보며 나는 눈에 이채를 띄었다. 마법사들이 대부분 그렇기는 하지만 감정을 다스리고 자기 자신을 조절하는 모습을 보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지금 속은 분노에 점철된 상태일 테지만, 그걸 겉으로 표출하지 않은것이다. “그 괴물은 어떻게 됬나요. 설마 처치했나요?” “결론적으로 처치는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숙련된 사용자 여러명이 달려들어도 힘들었어요.” “거기에도 조금 복잡한 사정이 있습니다.” 나는 애들한테 말했던대로 비비앙을 조금 미화하며 입을 열었다. 우리 일행이 전멸 위기에 몰린 사실과 끝까지 저항하던 나. 그리고 당하기 일보직전 비비앙이 본성을 회복해 그녀가 본체를 제한하고 있는 틈을 타 내가 그녀를 구출한것 등등. 어차피 큰 문제는 넘겼기 때문에 다음부터는 말이 술술 나왔다.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하던 정하연은 얘기를 마친 후 공허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말을 매듭 지었다. 잠시동안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는 몇가지 되짚어볼것이 있는듯 내게 질문했다. “그러면 그 인면 거미는 다시 인간으로 돌아왔고, 현재 이 여관에 있다는 거죠?” “인간으로 변해 지성을 회복한 후 본인이 한 일을 크게 후회하고 있습니다. 악랄한 마법사한테 당해 거미로 변한 후 그에 맞춰 지능이 퇴화 되었다고 합니다. 인간과 같은 고차원적 사고가 불가능한 셈이죠. 분명 본인 의지는 포함돼 있지만, 그게 순수 인간으로서 그녀의 의지로 보기는 힘듭니다.” “이해는 했어요. 그러면 한동안 같이 행동하기로 말씀 하셨는데,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녀가 아니었다면 저 또한 그 장소에서 죽었을게 분명합니다. 우습게 들리실지도 모르지만 제 목숨을 살려준만큼 한번 믿어볼 생각입니다.” “휴….” 정하연의 얼굴은 복잡했다. 그녀의 심정이 어느정도 이해가 가는것도 있어, 나는 너그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시 거미는 사용자 분들을 자신의 집에 침입한 침입자로 인식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하들을 죽이는데 분노했구요. 심정이 화나시는건 알겠지만 현재 인간으로 돌아온 그녀에게 복수 같은건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저희 일행들 또한 그녀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용자가 몇명 있습니다. 그러나 미우나 고우나 일단은 일행 이니까요.” “…모르겠어요. 솔직히 지금 심정으로는 당장 복수를 하고 싶고, 김수현씨가 한 말을 납득할 수 없을것 같아요…. 하아. 모르겠네요. 조금 생각하고 싶어요.” “그거야 본인 마음 입니다. 아무튼 한명의 사용자가 더 일어나면 당시 일행분들이 지녔던 장비와 여러 물품들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정하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살풋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우리들은 던전 공략에 실패했고,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었지요. 홀 플레인의 도리상 그 안에 있는 모든 보상과 물품은 수현씨 일행이 가지는게 맞습니다. 우리들은 목숨을 건진것 만으로도 만족해요.” “그 물품에 사용자 정지연의 유품도 있습니다. 저희들은 던전 내에서 얻은 보상으로 충분합니다.” 내 말에 정하연은 안색을 딱딱히 굳혔다. 그리고. 조금 감동한 얼굴로 나를 바라 보았다. “…0년차라고 하셨나요?” “네.” “저도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온정이네요. 고마워요. 호의는 정말 고맙게 받을게요. 솔직히 김수현씨가 지연이를 죽였다고 했을때는 증오가 일었지만…목숨도 구해주시고. 그리고 이렇게까지 해주시는데 제가 뭐라고 더 할 말이 없네요. 미안해요.” “천만의 말씀 입니다. 그때 정지연씨를 구할 방법이 있었다면 저 또한 수단을 가리지 않았을 겁니다. 사정을 이해해 주시는걸로 만족합니다.” “이곳은 홀 플레인 이니까요. 이 은혜는 기필코 잊지 않을게요.” 말을 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가득했다. 그러나 반대로 내 속마음은 계획대로란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그녀의 성품이나 성향을 보아 빈 말을 할 위인은 아니었다. 그리고 정하연은 상당히 현실적인 인간이다. 지금 당장은 동생의 죽음에 혼란스러울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내 말을 인정하고 내게 빚을 졌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이다. 아직 내 수중에는 500골드가 넘는 돈과 보석 주머니, 물약 주머니, 그리고 레어 클래스로 승급할 수 있는 책이 한권 있었다. 그깟 사용자들이 지닌 물품들을 준다고 해도 그걸로 정하연의 의심을 완화시킬 수 있다면 싸게 먹힌다고 볼 수 있었다. 이걸로 첫 단추는 잘 꿰어 놓았다. 이제 앞으로 이 사용자들을 어떻게 요리할지는 시간이 해결해줄 일 이었다. 앞으로 관계를 이어 나가기 위해서는 최대한 좋은 인연을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시 음식을 들으라는 권유를 했다. 정하연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수저를 드는 그녀의 손은 눈에 보일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 그 뒤로 애들이 한명씩 내려오고, 비비앙도 내려왔다. 그리고 사용자 신상용도 내려왔다. 그는 천성이 선해 보이는걸 넘어서 어수룩함을 느낄 정도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나와 정하연은 그동안 우리들이 대화했던 내용을 그에게 전달해 주었고, 신상용은 과도할 정도로 고개를 숙여 내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더불어 물품들까지 돌려준다고 하자 거의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가, 가, 가,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지, 지금 베풀어주신 은혜,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건지 계획을 묻자, 정하연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긴 본인도 앞으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만큼 내가 성급하게 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우리들보고 계속 여기서 머무를것이냐고 물은걸 보아 한번쯤은 찾아올 생각인것 같았다. 나는 약속대로 그들 일행과 관련한 물품 일체를 인계했다. 정지연의 로브를 꺼내 쓰다듬던 정하연은 비비앙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따지고 보면 당신이 거미였던 시절 가장 먼저 도망친 궁수부터 잘못된것 같아요. 욕하고 원망할 사람은 한둘이 아니죠. 당신의 사정을 이해해요. 그러나. 납득할 수는 없어요. 뻔뻔하다고 욕해도 좋아요. 인간은 원래 이기적인 동물 이니까요. 수현씨를 봐서라도, 그리고 이분이 우리한테 베푼 은혜를 생각 해서라도 당신을 편견 없이 보고 싶지만 아직까지는 그게 안되네요.” 비비앙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눈짓을 하자 그녀는 고개를 한번 숙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정하연과 신상용은 여관문을 나섰다. 신상용은 조금 더 남아 우리들한테 묻고 싶은게 있는것 같았지만, 정하연의 눈치를 보는게 그래도 상황을 구분할 줄 아는것 같았다. 나가기 전, 우리들을 향해 지나치도록 정중하게 인사하는 정하연을 보며 나는 다음에 봤으면 좋겠다는 말을 건넸다. 그녀 또한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걸로 내 말에 화답했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모든 생각과 마음을 정리할즈음 정하연과 신상용은 우리들이 있는곳으로 다시 찾아올 공산이 컸다. 그 시기가 조금 빠르기를 바랄 뿐 이었다. 점점 멀어지는 그들을 보며 우리들은 잠시동안 침묵을 지켰다. 먼저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유정이었다. “저 언니 참 대단하다. 아마 나라면 앞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검부터 휘둘렀을텐데.” “흠. 뭐 멋있긴 하네.” 유정의 감탄에 안현 또한 고개를 주억이며 수긍했다. 안솔은 연신 그녀가 간 방향을 보며 안타까운 눈빛을 뿌리고 있었다. 나 또한 그녀가 나간 여관문을 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게 말이다. 저정도로 자기 수양이 깊은 사용자가 있다는게 놀랍지. 아마 계속 살아 남을 수 있다면 분명 이름을 떨칠지도 몰라.” 방금전 내가 한 말은 진심 이었다. 친동생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정하연은 거의 극도에 가까운 자기 절제를 보여주었다. 예전 친형을 잃었던 나와는 한참 대비되는 태도였다. 어쩌면 나는 지금 새로운 10강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용자와 인연을 맺은걸지도 모른다. “훗. 10강이 그렇게 쉽지는 않지. 나도 참.” “응? 오빠 무슨 소리야?” 순간 별 생각을 다한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만큼 정하연과의 대화때 그녀가 보여준 태도는 내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내 혼잣말에 끼어드는 유정을 꾹 누르며 나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나저나 다들 몸은 어때?” “이상 없어요. 어제는 정말 죽을 정도로 피곤 했는데. 오늘은 괜찮은것 같아요.” “난 마디마디가 쑤시고 결려.” 안현은 팔을 붕붕 돌리며 건재함을 과시했고 유정은 조금 앓는 소리를 했다. 안솔과 비비앙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둘다 고개를 끄덕이는걸 볼 수 있었다. 잠시 비비앙의 볼에 나 있는 희미한 눈물 자욱을 본 나는, 자그마한 한숨을 쉰 후 말을 이었다. “휴식은 어제부로 끝이야. 오늘부터 다시 일도 하고 수련도 할 생각이다. 앞으로 종종 도시를 나가는 일은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연습을 위해서 나갈거야. 다음 탐험은 더욱 완벽하게 준비해서 나갈 생각이다.” 예전 같으면 애들을 앓는 소리를 했겠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모두 결의에 가득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번의 탐험으로 다들 자신의 부족함을 느낀만큼 어느점을 보완할지, 그리고 어떤 연습을 해야할지 대충 감을 잡았을 것이다. 이번 탐험에서 얻은 물품들도 정리하고, 애들 장비도 새로 구매할 생각 이었다. 그리고 비비앙이 새로 추가된 만큼 애들끼리 이루는 합격진 연습도 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일은 고대 연금술사 비비앙의 던전을 찾은것처럼 폐허의 연구소 또한 기록을 뒤지며 찾아야 한다는 소리였다. 일단 애들은 수련을 하게 놔두고 나는 뮬에서 해야할 다른 일들을 처리할 예정이었다. 다음 목적지인 폐허의 연구소를 찾기 위해서는 다시 열심히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오늘 노블 1위를 했네요. 하하하. 과분한 독자분들의 사랑과 관심 덕분에 오늘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신분들. 정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비록 하루에 불과할지라도 오늘 참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독자님들에게 보답하는 길은. 오직 더욱 열심히 쓰는길 뿐이겠지요. 앞으로 더욱 노력하는 로유진이 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__) (쪽지 보내주신 hohokoya1님 감사합니다! 쪽지 정독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그리고 다음회(78회)는 앞으로 재정비를 하는 회가 될 예정입니다. 그런만큼 조금 지루하다고 느끼실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리고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라고 쓰기 보다는 최소한 그 일주일동안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적는게 더 좋다고 판단 했습니다. 원래는 하나하나 더 세세하게 적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100회가 넘어서야 폐허의 연구소로 진입할것 같기에, 조금 더 진도를 빠르게 빼기 위해 그런 결정을 내렸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는 뮬에 들어왔을 당시 설명된 부분이 있으니 읽으시는데 무리는 없을겁니다. 그럼. 앞으로도 메모라이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Ps. 김수현 여자한테 관심 없는 고자 아닙니다. 독자님들 제발…OTL. 이러다 안현이랑 씬 하나 나올 기세에요. 엉엉. 『 리리플 』 1. 사람인생 : 1등 코멘터 탈환 축하드립니다. 소설 초반부 때부터 항상 1등을 차지하시던 사람인생님…오랜만에 영광을 재현하신걸 보니 저 또한 감격입니다. 앞으로도 파이팅 입니다. :) 2. 프란딜 : 1회차 스탯은 1회 초반 부분에 나와 있습니다! 가장 위에 올려 놓았으니 바로 보이실 겁니다. 하하하. 3. 이런남자이니까 : 저는.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의 남성입니다. 이러지 마세요…. ㅜ.ㅠ 4. 악마신전 : 흑. 고맙습니다. 요즘 워낙에 수현이 고자라고 매도(?) 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괜히 제 마음이 아파요. ㅜ.ㅠ 5. 낙화_[落花] : 현재로서는 600회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변동 사항은 있을겁니다. 6. 카즈미 : 헉. 일을 못하실 정도라니. 부끄럽습니다. (__ )* 용량은 하하하. 요즘들어 연참을 하지 않으면 역적이 될 분위기라…. 오늘도 여건만 된다면 연참을 해보겠습니다. 7. 은빛노을 : 저 또한 최대한 타당성 있는 H신을 쓰고 싶습니다. 홀 플레인의 여성 사용자가 남성의 정액받이 성노예가 아닌(물론 필요에 따라서 바뀔수도 있습니다.) 서로 진심으로 사랑을 나누는 신을 그리고 싶거든요.(물론 주인공 주변 여자들에 한해서 입니다.) 8. GradeRown : 좋아 합니…헉. 흠흠. 나쁘게 생각지 않습니다. 하하하. 확실히 자매도 좋은 소재군요. :) 사용자간 임신도 가능하고, 사용자와 거주민간 임신 또한 가능합니다. 하하하. 9. 슬피우는영혼 : 감사합니다! 저 또한 그리스 로마 신화와 북유럽신화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10연참좀….(응?) 10. 노쓰우드 : 오. 아름다운 세계를 연재하는 노쓰우드님! 저 또한 작품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저 또한 파이팅 할테니 노쓰우드님도 힘내세요!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78 / 0933 ---------------------------------------------- 마법사가 풍년입니다 던전 탐험에 성공 했다고 들뜬 기분은 없었다. 아무일도 없었다는듯 최대한 빠르게 나는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도록 노력했다. 그런 내 노력에 부응해 애들도 신나는 기분을 내기 보다는 더욱 정진하는 모습을 보이길 원했다. 원래대로라면 탐험 성공이 도시 전역에 퍼지고 그에 호기심을 가진 여러 사용자들로 들끓어야 정상 이었다. 나 또한 그런 부분은 마음에 걸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신전이 탐험 보고를 당분간 허용하지 않음으로서 우리들만 알고 있는 비밀이 되었다. 지금 당장은 이게 괜찮은 일로 볼 수 있었다. 엄한데 시간을 뺏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영영 이대로 묻어버릴 생각도 없었다. 고대 연금술사 비비앙의 던전을 발견한건 매우 높은 실적으로 인정 받을 수 있다. 후에 클랜을 창설할때 높은 평가를 받을 부분인데 이대로 포기하는건 너무 아까웠다. 애들의 일과는 매일이 똑같은 과정의 반복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감지 수련을 하고, 그다음 내가 개인별 지도를 한다. 그리고 오후가 되면 도시 밖으로 나가 몬스터를 상대로 합격술과 진을 연습한 후, 저녁전 여관으로 돌아와 개인별 정비 시간을 가지는걸로 마무리를 지었다. 저녁을 먹은 후 애들은 개인 정비 시간을 이용해 휴식을 하거나 또다시 수련을 했지만, 나는 그때부터가 더 열심히 돌아다닐 시간이었다. 할 일은 엄청나게 많았다. 그날 얻은 전리품을 정리 및 판매하고 폐허의 연구소를 찾기 위한 기록서를 뒤지는 일은 매사 하는 일 이었다. 던전에서 얻은 물품도 정리하고 애들의 새로운 장비도 고민할 문제였다. 또한 가끔 면담을 요청하는 애들과 얘기를 나누는 일도 잦았다. 어떤 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애들이 어떤 역할에 걸맞는지도 모두 내가 조율할 문제였다. 물론 애들도 어느정도 관련이 있는만큼 자주 부를때가 많았는데, 그 누구도 한번도 귀찮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애들 또한 내가 얼마나 바쁘게 움직이는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인들은 마음만 먹으면 휴식 시간도, 그리고 잠을 잘 시간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모든 일을 끝낸 후 바로 잠자리에 드는게 아니라 새벽을 이용해 내 개인 수련을 했다. 개인 수련이라고 해봤자 검술, 명상, 체력 단련을 할 뿐이지만 이건 실력 상승이 아닌 실력 유지를 위한 수련이었다. 그렇게 수련을 끝내고 나면 나는 한두시간 잔 후 다시 일어나 일과를 시작했다. 어쩔때는 한시간도 잘 수 없었다. 애들은 내 일과를 보고 혀를 내둘렀고, 걱정했지만 나는 “너희들이 얼른 커서 나를 도와주는게 더 이득이다.” 라는 말로 걱정을 물리쳤다. 솔직히 별로 힘든것도 없었다. 요정의 숲이나 지옥에 떨어졌을때는 하루하루를 한계까지 몰아 붙여야 했는데, 그에 반해서 지금의 생활은 천국이나 다름 없었다. 애들의 수련 강도는 더욱 높아졌다. 뮬에 처음 왔을때보다 훈련 강도는 더욱 높아졌지만, 불평은 한번도 들을 수 없었다. 오히려 새벽에 수련을 하러가는 나를 따라올 지경에 이르러 나는 간신히 안현을 달랜 후 돌려보냈다. 나야 현재 육체가 극한에 다다라 별 영향이 없지만, 한창 성장중인 애들은 충분한 휴식과 잠 또한 수련의 일부였다. 그러나 태도는 다들 확실히 달라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번에 칠흑의 숲으로 다녀온건 일종의 모험이요 도박이나 다름 없었다. 물론 그 도박에 김수현이라는 승리의 조커가 끼어 들기는 했지만 위험한 상황이 많았던 만큼 본인들도 느꼈던게 많았을 것이다. 예전에는 억지로 따라오는 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요즘은 눈에 불을 키고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하는걸 보니 마음이 매우 흡족했다. 안현과 유정은 내가 가르치는게 더 나았지만, 안솔을 가르치는 역할로는 비비앙이 더 적합했다. 안솔은 조금 불만인듯 보였지만 그래도 같은 마나 계열 사용자들인 만큼 내 결정에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둘이 같이 수련하면서 서로 조금이라도 친해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던전에서 얻어온 물품들은 내가 보관하고 있었는데, 나는 일단 보석과 물약 주머니 그리고 책은 일반 창고에 보관해두기로 했다. 보석은 팔고 싶은 마음이 없잖아 있었지만 이렇게 질 좋은 보석들을 한꺼번에 구하는것도 쉬운일이 아니라 일단 쟁여두기로 했다. 혹시라도 나중에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외에 모든 물품은 전부 판매했다. 부랑자들의 물품과 고블린들에게서 얻은 보석들 등등. 전부 정리하니 거의 150골드에 해당하는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우리들이 몬스터를 정리하고 얻는 부산물도 하루 적게는 50실버에서 많게는 1골드를 얻을 수 있었다. 더이상 여관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까지는 올라선 것이다. 이 사실 하나만 봐도 초보 사용자는 확실하게 벗어난걸 반증하고 있었다. 그러나 들어오는 돈이 있으면 나가는 돈도 있는법.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할 일은 애들의 장비를 바꾸는 일 이었다. 무기는 바꿀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개선은 필요했다. 현재 내 수중에 남은 돈은 700골드가 조금 되지 않는 정도였다. 나는 과감하게 두당 최소 100골드 이상을 투자하기로 했다. 안현, 안솔, 유정 그리고 비비앙. 비비앙은 이미 어느정도 실력이 검증된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큰 돈을 쓸 필요는 없었다. 본인도 그저 몸을 따뜻하게 유지하고 마나 활성을 도와주는 마법사용 로브(27골드) 하나와 마력 순환을 높여주는 지팡이(63골드)를 골랐다. 솔이 또한 많은 장비는 필요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안쪽에 입는 얇은 미늘 갑옷(38골드) 한벌과 신성 주문의 효능을 높여주는 사제용 로브(46골드) 한벌을 사 입혔다. 지팡이도 바꾸게 하려고 했지만 본인이 꽉 끌어안고 죽어도 내놓지 않을 기세였다. “으으응. 싫어요…. 나 이거 쓸래요. 나는 이게 좋단 말이에요오….” “왜. 더 좋은걸로 바꿔 줄게.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어엉…싫어어…오라버니가 처음 사준거란 말야…어엉.” “…….” 억지로 빼앗으려 하자 결국 눈물까지 글썽이는 바람에 나는 항복하고 말았다. 그래도 간신히 달래 지팡이에 보석을 박아 업그레이드 하는걸로 담판을 지었다. 보석은 61골드 짜리로, 마나의 활성을 매우 큰 폭으로 도와주는 효능이 있었다. 천성이 여자라 그런지 보석을 앞에 두고 이리저리 흔들자 그때서야 안솔은 쭈빗거리며 지팡이를 내놓았다. 그러나 안현과 유정은 근접 계열로 활동하는 만큼 방어구에 많은 신경을 써야했다. 더불어 더 많은 돈이 드는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일 이었다. 특히 안현은 근접 딜러와 탱커 역할을 수행하는 만큼 장갑의 중요성이 다른 애들보다 더욱 크다고 볼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중장갑을 맞추고 싶었지만, 쓸만한 것들로 풀세트를 장만하면 최소 금화 900개는 있어야 했다. 그래서 한번에 다 맞추기 보다는 초반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장비하기로 매듭 지었다. 안현은 먼저 경량화 마법이 걸린 체인 메일(124골드)과 가슴 갑판(48골드) 그리고 다리 보호대(39골드)를 구매했다. 돈이 생각 이상으로 많이 들어 일단 내 장비를 구매할 분의 금화를 안현에게 돌렸다. 그 와중에 안현이 나를 아빠라고 부르다가 한대 얻어 맞은 사건은 소소한 웃음 거리였다. 유정이는 딜러였다. 거기다 난전 특화를 염두에 둔다면 몸을 움직이는데 활동성을 제한 받지 않도록 신경쓸 필요가 있었다. 안으로 입을 수 있는 얇고 가벼운 링메일(92골드) 한벌과 몬스터 가죽으로 가공한 갑옷(71골드) 하나를 구매했다. 원래 가죽 갑옷은 50골드 선에서 구할 수 있는데 가죽의 방어력을 유지하며 부드럽게 만드는 물약을 발라 무려 20골드를 넘게 내야했다. 유정이는 너무 비싸다, 괜찮다 손사래를 쳤지만 그래도 억지로 물약을 바르자 볼을 발갛게 물들였다. 겉으로는 싫다고 해도 속으로는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로서 총 사용한 금액은 약 520골드. 순식간에 500금화가 넘는 지출이 나왔고 남은 금화는 100골드 남짓 이었다. 그러나 아깝지는 않았다. 애들이 모두 마음에 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잘 샀다는 생각이 듬과 동시에 절로 배가 부른 기분이 들었다. 다들 그렇게 차려 입히고 나니 드디어 병아리 모양새를 벗어 던질 수 있었다. 숙련자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장비와 장갑을 갖춘, 사용자 다운 티를 내고 있었다. 흐뭇한 눈으로 애들을 보고 있자 유정이 옆으로 슬쩍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오빠. 안울어?” “내가 왜 울어.” “왜. 부모님들 애들이 교복 처음 입으면 울잖아. 아아. 우리 애들이 이렇게 컸구나. 흑흑. 이렇게 감동스러울 데가.” “까분다.” 딱! “악! 아코…씨잉.” 이마를 살살 문지르며 입을 삐쭉 내미는 유정을 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그런 기분도 조금 들었다. 통과 의례때 어버버 거리던게 엊그제 같은데 설마 지금까지 같이 행동할 수 있으리라곤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처음 뮬에 들어왔을때는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지급된 옷을 입고 이리저리 고개를 두리번 거리는게 영락없는 초보 병아리 였다. 그러나 지금. 어느새 겉으로나마 어엿한 한명의 사용자 모습을 선보이고 있었다. 유정은 새로운 장비를 구매하자 들뜬 기분에 얍얍거리며 내 앞에서 단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나는 엄마 미소를 머금은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 보았다. 이게 바로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이라는 건가…? 신나게 웃고 떠드는 우리 일행을 몇몇 사용자들이 부러운 눈길로 흘깃거리는게 보였다. 장비를 보아하니 우리와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 사용자들 같았다. 그들은 방어구는 커녕 변변한 무기 하나도 없었다. 옷도 한참 헤진게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지급하는 옷을 여지껏 입고 있는것 같았다. 저 사람들은 아직 장비를 맞추는건 머나먼 일이었다. 당장 오늘 내일 먹는것부터 걱정하는 하루 벌어 먹기도 바쁜 사용자들일 것이다. 클랜을 들어가지 못한 사용자들의 현실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탓할 이유는 없었다. 클랜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한달도 채 안되어 이정도 장비를 구매하는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 이었다. 아무튼 뮬에서 떠날때즈음 한번 더 장갑을 업그레이드 하기로 하고 나는 장비 문제를 매듭 지을 수 있었다. 큰 문제 하나를 해결한것 같아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질이 좋다고 말은 못해도(내 기준으로.) 그래도 나름 쓸만한 것들을 장비하고 난 후 애들의 수련 정도나 사냥 속도는 비약적인 증진을 보였다. 물리적인 부분 말고도 정신적으로 뭔가 동기 부여가 된 듯 싶었다. 그 동기 부여가 지나쳐 애들은 다시 탐험해 나가고 싶어 안달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단칼에 애들의 요청을 묵살했다. 고위급 사용자면 몰라도 재정비 후 바로 다시 탐험에 나가는건 숙련된 사용자들도 기피하는 일들이었다. 전에 다녀온 탐험에서 자신들의 행보를 되짚은 후, 부족한 부분은 메우고 필요한 부분은 새로 추가하는 과정을 거친다. 인원, 장비, 경험, 실력. 객관적으로 보면 일행은 모든게 다 부족한 상태였다. 특히 현재 애들의 경험과 실력면에서 보면 탐험을 다녀온 후 그대로 넘기는건 절대로 안될말 이었다. 바둑을 복기하는 과정과 같이 자신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고쳐야 한다. 한명이 자신의 문제점을 해결할수록 일행 전체의 수준이 높아진다. 나는 이번 탐험에서 보인 문제점을 고치기 전까지는 다시 탐험을 나가지 않을것이라고 아예 못을 박아버렸다. 그렇게 우리들은 던전에서 돌아온 후 다람쥐 쳇바퀴 돌듯 똑같은 일과를 반복하며 날을 보냈다. 그리고 애들은, 자신들이 한창 성장기라는걸 과시라도 하듯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예. 오늘도 연참입니다. 독자분들의 성원이 너무도 과분해 몸둘바를 모르다가, 보답할 길은 연참밖에 없다고 여겨 한편 더 올립니다.(아, 앙돼! 내 일일 연재가 어그러지고 있어!) 전회 후기에 말씀드린대로, 이번회는 던전에서 돌아온 후 주인공과 일행들이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에 대해 적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이 흘렀다.”라고 한줄 툭 던져놓는것 보다는(물론 필요에 따라 그렇게 적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흐름으로는 어느정도의 설명은 해두는게 좋을것 같아서요. 마음 같아서는 어떤 수련을 받았는지, 도시로 나간 후 몬스터들과 어떻게 싸우며 경험을 쌓았는지 세세하게 적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정말 100회를 넘어서 폐허의 연구소에 닿을것 같은 불안(?)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하하. 『 리리플 』 1. MT곰 : 1등 축하드립니다. 언제나 화이팅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건필하도록 하겠습니다. :) 2. 라무데 : 음. 클랜 생성 조건은 뮬에 온 후 나온 부분입니다. 가장 중요한건 업적 그리고 실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자세한 부분을 원하시면 쪽지를 주시면 답변 드리겠습니다. 3. 휘을 : 사용자 + 사용자 : 사용자(100%) 사용자 + 거주민 : 사용자(50%)입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는 통과 의례를 치를 필요가 없고, 그대로 사용자로서의 지위를 획득합니다.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4. 슬피우는영혼 : 헉. 5연참이라니. 저를 죽이시옵소서. ㅜ.ㅠ 자. 오늘 제가 연참을 했으니 쌤쌤으로 슬피우는영혼님도 북유럽신화 연참을…후후후후후. 5. 꼬야 : 헐. 이거 괜히 죄송하네요. 그냥 이 이름이 예쁘다 싶어 쓴건데. 하하하; 절대로 특정 인물을 지칭한건 아닙니다. 꼬야님의 양해 부탁드립니다.(__) 6. 사람인생 : 저는 언제나 사람인생님을 믿고 있습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1등을 하실 수 있다는걸! 7. Demodex : 하하하. 안현의 TS화라. 그것도 좋네요. 다만 본편에 BL은 적어도 주인공한테는 절대로. 네버. 없을것을 약속 드립니다. 왠지 BL은 쓰려면 손가락이 오그리 토그리…. ㅜ.ㅠ 8. 당룡 : “형, 수현이형. 잠시만요….” “아, 안현? 너 도대체 왜그래.” “형. 저 오래전부터 형을….” “혀, 현아!” 설마 이런 내용을 원하셨는지요. 하하하하.(혹시라도 불쾌하신 독자분들 죄송합니다. 꾸벅. 한번 적어보고 싶었어요. 엉엉. 내 손가락.) 9. 뿌잉뿌잉a : 아. 맨날 뿌잉만 하시구. 아무 말씀 이라도 좋으니까 한번만 다른 말좀 해주세요. ㅋㅋㅋㅋ 10. 하얀봉황 : 다이아몬드, 멋져요. 사파이어, 멋져요. 오팔요? 멋져요!(타릭….)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79 / 0933 ---------------------------------------------- New Face 비비앙은 우리 일행에 잘 녹아 들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다. 특유의 맹한 행동과 계약서, 그리고 그녀가 그동안 보여준 행동으로 최소한 애들의 경계심은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그러나, 애들은 통과 의례 때부터 동고동락하며 함께 지내온만큼 스스럼없이 지냈지만 비비앙은 그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괴롭힘을 당했다고 보는게 옳을까. 아침 수련을 할때 애들 모두가 감지 수련에 들어가면 홀로 구석에 쭈그려 앉아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었다. 그러다 내가 부르면 언제 울었냐는듯 최대한 숨기고 쪼르르 달려오곤 했다. 볼에 눈물자욱이 선명한 모습으로 나를 돌아볼때는 항상 마음이 아팠다. 원인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단은 놔둘 생각이었다. 여자들 사이에는 여자들만의 세계가 있다고 하니, 괜히 끼어들어 이래라저래라 하면 애들이 비비앙을 보는 시선만 더 안좋아질것 같았다. 그래도 가끔 안솔이 비비앙에게 불쌍하다는듯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게 유일한 위안 거리였다. 동시에 유정은 항상 미묘한 시선으로 비비앙을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그럴때마다 비비앙은 절로 고개를 수그렸다. 유정이는 굉장히 영리했다. 특히 눈치가 백단이라고 볼 수 있었다. 개인 지도를 할때 내가 은연중에 안현을 조금 신경쓰는걸 눈치챈것 같았다. 그래서 나와 안현 둘이 있을때는 항상 살갑게 굴었지만 솔과 비비앙 셋만 있을때는 왕언니 노릇을 하는것 같았다. 특히 비비앙은 유정의 노림수에 아주 좋은 먹잇감 이었다. 예전에 보여준 계약서를 십분 활용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그저 쓰게 웃을 뿐 이었다. 그래도 한마디 하는건 잊지 않았다. “조심하는게 좋을걸.” “응? 오빠 뭐가?” “내가 그러지 않았어요. 나는 몰라요.”라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는 유정을 보며 나는 은근하게 속삭였다. “비비앙은 매우 대단한 실력을 지닌 마법사라고. 지금이야 단순히 지성을 회복하기 전이고 애 같은 면이 있어서 당하고 살지만…나중에는 어떡할래?” “계약서 있잖아.” 그 말을 내뱉은 후 유정은 “앗차.”하는 얼굴로 자신의 입을 틀어 막았다. 나는 잠깐 웃은 후 말을 이었다. “지금 비비앙은 지금 애나 다름없어. 회복이라곤 하지만, 주변 상황에 따라 새롭게 인격이 형성될 가능성도 있다고. 계약서가 있다고는 하지만 네가 작성 주체자가 아닌만큼 무조건 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무엇보다 비비앙한테 자유 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나중에 완벽하게 지성을 회복하게 되면….” “호호. 오빠는 참. 나만 너무 나쁜년으로 만든다. 다 필요한 과정이야.” “누가 뭐래. 난 그저 걱정이 되서 하는 말. 아무튼 힘내.” 나는 유정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유정의 눈은 웃고 있었지만 입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아마 지금쯤 내가 한 말을 속으로 엄청난 속도로 계산하고 있을것이다. 기본적으로 영리한 애인만큼 내가 하고자하는 경고를 충분히 알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날 도시 밖으로 몬스터들과 전투를 하러 나갔을때 비비앙은 내 말을 증명해 주었다. 평야로 나선 후 고블린 한무리들과 맞붙었는데 그녀는 그때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것도 유정이 보는 바로 앞에서 자신의 특수 능력을 발동한 것이다. “오라. 아라냐. 제 32군단을 지배하는 죽음의 거미줄이여!” 66 마수 군단의 지배자가 뭔지 궁금했는데, 비비앙이 본격적으로 실력 행사를 하는걸 보고 나는 하나의 직업을 떠올릴 수 있었다. <오라! 아그니스! 제 24군단을 지배하는 염화의 지배자여!> 1회차에 보았던 시크릿 클래스 정령 소환사. 당시 아틀란타 탈환 전투에서 지옥 대공의 군세를 상대로 전 군단의 정령을 소환해 맞상대 하는 정령 소환사의 모습은 장관 이었다. 시크릿과 레어라는 클래스 차이는 있지만, 키메라 연금술사는 본인이 직접 만든 키메라나 이세계의 마수들을 소환하고 강화시킨다는 점에서 비슷한 면모를 보이는것 같았다. 일단 그점은 차치하고서라도, 키메라 연금술사의 위력은 확실히 대단했다. 유정의 시집살이(?)에 받는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한듯 비비앙은 전투시에는 살기 가득한 얼굴로 몬스터를 학살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혼자서 싸그리 몰살시키고 난 후 다시 맹한 얼굴로 헷 웃는 모습을 보며 유정의 목젖이 꿀떡 움직이는걸 볼 수 있었다. 연금 마법의 일부인 마법진을 소환에 활용하는 장면을 보며 나도 모르게 감탄성을 흘리고 말았다. 지닌 마력 능력치에 비해 정통 마법의 랭크가 낮고 전투에 도움이 안되는 연금 마법의 랭크가 높아 앞으로 어떡하나 걱정이 조금 있었는데, 그녀는 그런 내 걱정을 비웃듯 단 한방에 날려버렸다. 제 66 마수 군단의 지배자 하나만으로 그녀는 일인군단의 면모를 보여줄 수 있고 더욱이 정통 마법로 일행과 소환수를 원호하는 방식으로 싸울 수 있는 전천후 마법사였다. 그때부터 유정의 괴롭힘은 조금 덜해진것 같았다. 아주 가끔씩 살갑게 굴어주고 서로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나는 유정의 영리한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아무것도 모르는 비비앙은 그저 유정의 변한 모습에 좋다고 열심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애들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 또한 가만히 있을수는 없는 일 이었다. 현재 대소사는 모두 내가 결정하고 진행하는 만큼. 그리고 애들과 비비앙마저 나를 믿고 따르는 만큼 나는 항상 그들이 보고 기대하는 그 이상을 보여줄 의무가 있었다. * 이른 저녁이었다. 도시 밖으로 나가 전투를 끝내고 돌아온 후, 애들은 모두 피로한 몸을 이끌고 다시 여관으로 돌아와 있었다. 다들 일단 몬스터들의 피가 묻은 장비들을 정리하고 간단한 세안 후 1층 로비 탁자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아. 짜증나.” 한동안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고 있다가, 유정이 탁자 위로 고개를 박으며 투덜거렸다. “뭐가 그렇게 짜증나는데.” 안현이 반문하자 유정은 손가락만 살짝 구부려 주변 탁자들을 일일히 가리켰다. “우리가 연예인도 아니고. 여기 앉기만하면 자꾸 흘끔흘끔 보잖아. 짜증나게. 할 말 있으면 당당히 오던가.” 유정의 가시 돋은 목소리에 안현은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흠. 확실히 우리 솔이가 조금 예쁘긴 하지.” “아이참. 오빠도. 그런말좀 하지마아.” 안솔은 안현을 곱게 흘기며 핀잔을 주었다. 안현은 그 모습도 예뻐 보이는지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이제 한두번 보는 광경도 아니었기 때문에 유정이 깊은 한숨을 내쉰 후 눈을 감는게 보였다. 내가 보기에도 우리들은 확실히 주목 받는 일행들 이었다. 다만 그 주목은 좋은 의미로 보기 어려웠다. 얼마전까지 사용자 아카데미 초보 복장을 입고 있었는데, 잠깐 안보이는가 싶더니 나름 괜찮은 모양새로 변한 탓 이었다. 나름 머리가 돌아가는 사용자들이라면 우리들이 한번의 탐험에서 대박을 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것이다. 물론 시선의 8할이 남성 사용자들의 시선이란걸 감안한다면 어느정도 흑심이 섞인것도 사실이었다. 확실히 유정이, 솔이, 비비앙은 개인이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미인들 이었으니까. “고생 하셨어요. 주문하신 음식이 나왔답니다.” 조금 더 기다리자 고연주가 음식을 들고 우리쪽으로 걸어오며 말을 걸었다. 고연주가 오자 안현은 삐딱히 앉아 있던 자세를 곧게 세웠다. 그 모습을 본 고연주는 귀엽다는듯 상냥히 눈웃음친 후 정숙한 태도로 식탁에 음식들을 놓기 시작했다. 예전과는 많이 다른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오늘도 조금 힘드시겠어요.” “주인 입장에서는 장사 잘되면 좋죠. 어차피 이 시간대는 사용자들이 조금이라도 있는 시간대라…응?” 내가 주변을 슬쩍 둘러보며 대꾸하자, 고연주는 나긋한 목소리로 화답했다. 그때 우리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안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걸 볼 수 있었다. “도와 드리겠습니다.” 안현은 근엄한 얼굴로 목소리를 잔뜩 깔고는 고연주가 가져온 음식을 나르는걸 돕기 시작했다. 고연주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으나 나는 그저 멀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는게 보였다. “정말 신사적인 분이네요. 고마워요.” “험험. 뭘요. 당연히 도와 드려야죠.” “누구도 이렇게 해주시면 참 좋을텐데….” 나는 일부러 그녀의 말을 무시한채 연초를 꺼내 불을 붙였다. 야심한 밤 둘만 있으면 이런 장난을 받아줄 용의는 충분했지만, 애들이 다 보는 앞에서 이러는건 사양이었다. 더구나 현재 그녀의 눈동자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또 괜한 일에 말려들기 싫어 미리 발을 빼놀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에 불과했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고연주는 뜻모를 미소를 지은채 내 앞으로 돌아와 억지로 시선을 맞췄다. 내가 미간을 찌푸리고 입을 열려는 찰나, 그녀는 내게 최대한 근접한채 그 상태로 몸을 쭈그려 앉았다. “…….” 여기서 내가 바지만 내리면 딱 그걸 하는 모습으로 보일수도 있었다. 애들도 다 보는 마당에 이 무슨 추태인지 싶어 바로 의자를 빼려고 했으나, 그녀는 재빨리 두손을 내밀어 내 의자를 잡았다. 그리고 고연주는 내 다리 사이로 고개를 쑥 내밀며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오후에 두명의 사용자가 찾아왔어요.” “…네.” “김수현씨를 찾길래, 저녁즈음 다시 돌아올거라 했더니 알겠다 하고 돌아가더라구요. 예전에 봤던 마법사 사용자들. 기억하시죠?” “저기요. 지금 뭐하세요? 오빠. 뭐해.” 유정의 말소리가 들리자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고연주는 연한 미소를 지은 후 쭈그렸던 다리를 다시 폈다. 안현은 부러운 눈길을, 그리고 유정을 위시한 여자 사용자들은 애매한 얼굴들로 나를 보고 있었다. 괜히 억울한 마음에 나는 빈정거리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런건 조금 정상적인 자세로 말해주셔도 괜찮을 텐데요.” “어머. 너무 힘들어서 잠깐 앉은건데, 혹시 이상한 상상이라도?” “말을 말죠. 잘 먹을게요.” 고연주는 내 대답에 쿡쿡 웃고는 몸을 돌려 그대로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이어 유정의 “저 사람 뭐야? 재수없어! 너도 그렇지? 안그래?!” 라고 외치는 목소리와 비비앙이 마지못해 수긍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쨌든 음식은 왔고 고연주의 솜씨는 좋았다. 비비앙은 배가 많이 고팠는지 얼른 포크를 들었지만 유정이 얍실한 손놀림으로 비비앙의 포크를 찰싹 때렸다. 포크가 탁자 위를 구르고, 비비앙이 멍한 눈동자로 입만 벙긋거리자 유정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너 내가 뭐라고 했어.” “힝….” “오빠가 먼저 음식 드시기 전에 수저도 들지 말라고 했지.” “미, 미안해요. 배가 너무 고파서….” “변명은 됬고. 잘했어, 잘못했어?” “잘못했어요. 흑.” “어휴. 또 운다 또 울어. 이번에는 봐준다. 다음부터는 그러지마.” 또 비비앙을 갈구는걸 보며 나는 입맛을 다신후 수저를 들었다. 그때서야 유정이 허락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비비앙은 다시 조심스럽게 포크를 들었다. 그러나 고개를 푹 숙인게 너무 안쓰러워 나는 고기의 가장 맛있는 부분을 듬뿍 덜어 그녀의 접시 위로 올려주었다. 비비앙의 순진무구한 눈망울이 나를 향했다. “비비앙. 오늘 고생 많았어. 많이 먹고 내일도 같이 힘내자.” 내 따뜻한 위로에 비비앙은 금방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비비앙?” 유정이 또 태클을 걸자 비비앙은 바로 말을 수정했다. “고, 고맙습니다….” 솔이가 그 광경을 부러운듯 지켜보자 안현은 나와 똑같이 솔이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 주었다. 그러나 솔은 침착한 얼굴로 안현이 덜어준 음식을 고스란히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안현이 좌절하는걸 구경한 후 나는 씹고있던 음식을 삼키며 한번 더 입을 열었다. “밥 먹을때는 그냥 놔둬라 좀. 여기가 무슨 군대도 아니고. 왜 그렇게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야.” “흥. 오빠는 아무것도 몰라. 맨날 솔이만 예쁘다~예쁘다~. 이번에는 비비앙 착하다~착하다~.” 콧방귀를 끼며 고개를 팩 돌리는 유정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비비앙은 고소하다는 얼굴로 키득거리며 내가 준 고기를 먹었다. 한동안 다시 식사에 열중하던 일행들. 한동안 우울한 얼굴로 음식을 깨작이던 안현은 고연주의 얼굴이 아른거리는지 계속 주방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다시 내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형형.” “왜.” “아까 여관 주인 숙녀분이랑 좀 친해 보이시던데. 어떤 얘기를 하신거에요?” 여관 주인 숙녀분이라. 쓸데없이 맞지도 않는 존칭을 사용하는 안현을 보며 나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냥 별거 아닌 말투로 예전에 봤던 사용자들이 오후에 우리를 찾아왔었다고 얘기 하자 다들 관심이 가는지 시끄럽던 탁자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하여간 지들이 호기심 있는 이야기 거리만 나오면 쥐 죽은듯 조용해지지. 평소에도 이러면 참 좋을텐데. 애들은 요즘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와 있었다. 내가 실전에 나가서는 한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지만, 그만큼 도시로 들어오고난 후 어느정도 풀어주는걸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밖으로 나가면 다들 입을 다물었지만 도시로 들어오는 순간 다시 실컷 까불거리는 수법을 쓰고 있었다. “그러면 오늘 또 올수도 있겠다. 난 그 언니 마음에 들던데. 남자는 좀 어수룩해 보여서 마음에 안들어.” “네가 언니일수도 있을걸.” “뭐?” 유정이 씨근거리자 안현은 그녀를 비웃은 후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안솔은 난처한 웃음을 지었고, 비비앙은 겉으로는 유정을 말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 한줄기 가느다란 호선이 걸린게 보였다. 막 다시 음식을 들려는 찰나 안현이 나를 다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음. 실은 오늘 출판 제의가 들어 왔습니다. 부족한 제 작품을 좋게 보아주시는 조아라 분들에게도 감사하고, 항상 과분한 성원과 응원을 해주시는 독자분들에게도 너무 감사하네요. 갑작스레 받은 연락이라 심장이 조금 두근거리지만, 차분히 내일 한번 다시 연락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소제목을 챕터리를 마무리한 후 빠르게 폐허의 연구소로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전개가 느리다고 느껴주시는 분들은 조금만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 『 리리플 』 1. 바보람보 : 1등 축하드립니다! 잘 보셨다니 마음이 놓입니다. 부디 이번회도 즐겁게 감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2. 착한몸매 : 고맙습니다. 왠지 연참을 하지 않으면 안될 분위기라. 원래 하루 한편도 허덕이면서 썼는데 독자분들의 추천과 코멘트가 정말로 원동력이 되더군요. 하하하. 3. 사람인생 : 앗. 그렇군요. 제가 그생각을 못했네요. 흑흑흑흑….(?) 4. 블라미 : 하하하. 고맙습니다. 아마 뮬에서 떠날때 당당해진 수현의 모습을 보실 수 있을겁니다. 그때를 기다려주세요! 5. Demodex : 아마 BL씬을 쓰면 무수히 몰매를 맞을것 같습니다. 앞으로 자제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6. 상흔 : 수련으로 올리기는 <거의> 힘들다고 보시면 됩니다. 다만…헙.(스포 주의!) 7. fw2erfwsd12 : 조만간 노블에 걸맞는 씬 하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 폐허의 연구소를 돌아온 이후가 되겠네요. 그때 조금 멘붕하실 독자분들이 계실지도 몰라 벌써부터 걱정이네요. ㅎㄷㄷ 8. 미련to곰팅 : 해당 내용은 사용자 전용 창고 → 일반 창고로 변경 되었습니다. 소중한 조언과 지적 감사합니다. 제 실수였네요. ^^; 9. 휘을 : 막 도시로 돌아왔을때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있기는 합니다. 100년전 인물이기는 해도 그때와 비교해서 기본적인 의식주가 엄~청 크게 달라진건 아닙니다. :) 10. Toranoanal : 코멘트 기다렸습니다! 두근두근. 하하하. (__ )* 혹시 귀찮지 않으시다면 작성하다 지우셨던 본문 쪽지로 보내 주셨으면 감사 하겠습니다. 어휘 관련해서 저도 항상 고민하던 문제가 있거든요. 물론 나중에 마음 내키실 때, 시간 나실때 보내주셔도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80 / 0933 ---------------------------------------------- New Face “형. 한가지 묻고 싶은게 있어요.” “응?” “혹시 형은 지금…그 사용자들을 기다리고 있나요?” 안현의 말이 끝나는 순간 모두의 움직임이 멈췄다. 막 안현의 정강이를 걷어 차려던 유정도. 옆에 앉아 말리고 있던 비비앙도. 그리고 가만히 구경하고 있던 솔이도. 마치 동작 그만 주문에 걸린것처럼, 숨소리만 들릴뿐 모두의 시선은 안현과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이놈 봐라?”는 눈빛으로 안현을 바라 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정중함 가운데 활기를 띄고 있었다. 예전에 애들이 섣부르게 탐험을 나가자고 얘기를 꺼냈다가 나한테 한번 된통 혼난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는 지들끼리 암묵적으로 쉬쉬하는것 같았는데, 이번에 안현이 우회적으로 돌려 말한것이다. 즉 안현이 현재 내게 한 질문의 요지는 “그 사용자들을 기다리느라 아직 다음 탐험을 나서고 있지 않나요?”로 볼 수 있었다. 나는 우묵한 눈으로 안현과 애들은 한번 바라본 후.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나는 지금 그 두명을 기다리고 있다.” “아….” 안현의 짧은 탄성이 나오는 가운데 나는 애들의 반응을 살폈다. 안현의 고개를 주억이고 있었고, 유정은 그저 멀뚱히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었다. 솔이의 표정은 복잡 미묘했으며 비비앙은 조금 어두운 얼굴 이었다. “그럼 또 일행을 추가 시킬 예정이야?” 유정의 물음에 나는 수저를 내려 놓은 후 손가락에 깍지를 꼈다. 그 위에 턱을 올리고 나는 말을 이었다. “언젠가는 얘기하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지금 얘기하는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일행을 더 받는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것도 있고 더 나아가 우리들이 만들 클랜에 대해서도.” 나는 품 안에 손을 넣어 연초 하나를 꺼냈다. 주변은 시끄러웠다. 왁자하게 떠드는 사용자들, 시비가 붙은 사용자들, 고연주 엉덩이 한번 만져보려다가 쫓겨나는 사용자들, 그리고 일행들끼리 심각한 얘기를 나누는 사용자들. 연초를 입에 물은 후 나는 불을 붙였다. “그런데 그분이 과연 올까요? 우리들은 아직 0년차고 그분은 조금 경력이 되 보이시던데….” 안솔은 말끝을 흐렸지만 애들 대부분은 솔의 말에 공감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틀린점은 없지만 간과한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비비앙 이었다. “그렇긴해도 엄밀히 말하면 현재 마법사는 우리 캐러밴에 별 필요가 없어.” “엥? 우리들 마법사 사용자가 가장 부족한거 아니었어?” “이젠 아니지. 비비앙이 있잖아.” 애들의 시선은 잠시간 비비앙을 향했다. 그리고 마침 남몰래 국수를 후룩 들이키던 비비앙은 딱 걸렸다는 얼굴로 흡입을 멈췄다.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고 비비앙의 입술에서 삐져나온 국수 몇 가닥이 허공에서 대롱거렸다. 이내 점점 울상을 짓는 그녀를 달랜 후 나는 입을 열었다. “비비앙 먹어도 돼. 괜찮아. 너희들도 먹으면서 들어.” 그러나 애들은 단 한명도 수저를 들지 않았다. 비비앙은 더욱 민망한 얼굴로 얼른 국수를 먹고는 얌전히 수저를 놓았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입가에 묻은 음식물들을 정리해 주었다. 비비앙은 조금 거부하는 몸짓을 보였다. 유정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지는게 들리자 나는 바로 손을 거두었다. “너희들도 전에 한번 보았겠지만, 비비앙은 대단한 실력의 마법사야. 일전에 우리들이 통과 의례에서 나온 후 광장에서 본 그 여자 마법사 있잖아. 유빈이라고 했던가.” “그 박현우만 졸졸 따라다니던 년?” “그래. 그녀도 나름 바바라에서는 명성 있는 마법사지만, 그 마법사 두명이 와도 비비앙을 이길 수 없을걸.” 안현과 안솔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비비앙을 바라보았다. 비비앙은 잠시 헛기침을 하고는 허리를 반듯하게 세웠다. 유정은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딱히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근접 세명. 마법사 한명. 사제 한명. 어쩌면 지금 캐러밴의 비율이 딱 맞을지도 모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두명의 마법사를 기다리는건…내가 생각하는 클랜의 영입 대상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잠시 말을 멈추고 연초를 한모금 쭉 빨아 들이고 다시 뱉는다. 허공으로 퍼져나가는 희뿌연 연기들을 보며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애들은 조용히 내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만들고 싶은 클랜은 두가지 특성을 띄고 있어. 하나는 소수정예, 나머지 하나는 용병의 성격을 가진 클랜.” “소수정예랑…용병이요?” 안현은 이해가 가지 않는듯 되물었다. 애들 또한 고개를 갸웃거렸다. 솔직히 용병 형식의 클랜이란건 조금 어려운 얘기들이 포함돼 이해시킬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간단하게라도 설명을 하는게 나을것 같았다. “소수정예는 말 그대로야. 클랜을 만들면 앞으로 클랜원을 받게 될 일이 생기게 되잖아. 그럴때 어중이 떠중이 같은 아무나 받는 클랜을 만드는게 아니라 최상위 사용자, 혹은 그런 사용자가 될 자질을 지닌자들을 따로 가려서 받자는 소리지.” 이건 나만이 가능한 일 이었다. 최상위 사용자는 명성을 보고 데려올 수 있지만, 자질을 지닌 사용자는 나처럼 제 3의 눈을 가지고 있지 않고서는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물론 초반부터 싹수를 보이는 사용자들도 있지만 대기만성형 사용자들도 꽤 있는편이다. 그리고 그걸 가늠하는 척도는 바로 능력치였다. 또한 나는 앞으로 올 신규 사용자들 중 유망주들을 몇몇 기억하고 있었다. 즉 앞으로의 영입 경쟁에서 굉장히 유리하게 시작하는 셈 이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클랜도 명성이 있어야겠지. 우리가 만든 클랜이 단순한 소규모 클랜으로 보이면 영입 제의를 해도 거절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래서 나는 용병 특성을 가진 클랜을 만들고 싶어.” 비비앙과 솔은 열심히 듣고 있었다. 그러나 안현과 유정의 얼굴은 조금씩 찌푸려지고 있었다. 머리가 나쁜건 아니고, 회전도 나름 빠른 편이지만 둘다 이런 얘기를 들을때는 뇌가 회전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잠시 애들에게 생각할 시간도 줄겸 나는 연초를 한모금 머금었다.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성격 급한 유정이었다. “오빠. 나는 이해가 안 돼. 용병 특성을 띈 클랜이랑 명성을 쌓는거랑 무슨 관계가 있는거야?” “용병은 돈을 받고 의뢰를 수행하는 자들을 이르는 말이지. 현재 클랜들중 우리와 비슷한 성격을 띈 곳은 단 한곳도 없거든. 다들 바바라에서 지정한, 그리고 도시의 위치 역할에 해당하는 임무만 주로 수행하고 있잖아. 그 와중에 용병 특성을 띈 클랜이 나오면 아무래도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을걸.” “그래도…그렇게 생각대로는 되지 않을것 같은데…. 기성 클랜들이 다 코웃음 치지 않을까.” 나는 연한 미소를 흘렸다. 뮬에서 떠날때즈음에는, 내가 검술 전문가라는 사실과 비비앙이 키메라 연금술사라는 사실을 알릴 생각이었다. 더불어 우리는 키메라 연금술사 한명을 더 만들 수 있고, 운만 따른다면 안현을 기공창술사로 만들 수 있다. 시크릿 클래스 한명과 레어 클래스 세명이 있는 클랜을 무시한다고? 대답은 절대로 아니오였다. 물론 초반에 의뢰를 맡기는 일은 적겠지만 반대로 어떻게든 합병하려고 용을 쓰는 클랜들이 줄을 설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중립을 지키면서 서서히 세력을 키워나갈 생각 이었다. 내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솔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오라버니. 그러면 오라버니는 자유 용병을 생각하고 계시는 건가요?” “그렇지.” 역시나 우등생 안솔은 내가 생각하던 바를 단번에 맞추었다. 그녀는 잠시 멋쩍은 미소를 짓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가 왜 북대륙 시민으로 등록을 하지 않는지 궁금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구나. 하지만 자유 용병으로 등록하게 되면 사용자 본인도, 그리고 클랜도 일반 시민으로 등록한 사용자나 클랜에 비해 불이익을 겪는다고 들었어요.” “불이익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특혜를 받지 못하는것 뿐 이니까. 그냥 지금 우리들의 생활을 그대로 유지한다고 봐도 돼. 그리고 그 특혜라는 것들도 하나씩 뜯어보면 다들 쓸데없는 것들이야. 미련 가지지 않아도 돼.” 자유 용병 등록. 자유 용병 클랜. 그말인즉슨 북대륙과 북대륙 내 어느 도시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였다. 일단 북대륙에 안에서 살아가는 만큼 일반 사용자들은 전원은 긴급 사태에 소집될 의무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자유 용병들은 다르다. 그런 책임과 의무들에게서 모두 해방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만큼 솔이 거론한 특혜를 받지 못하지만, 그 특혜란것들도 면면이 살펴보면 참 웃기는 것들이 많았다. 나중에 돈을 좀 벌었을때 개인 소유의 집이나 길드용 클랜 하우스를 살때 감면해주는 경우. 또는 부랑자들 한테서 보호해주는 경우. 대규모 원정때 일반 등록 사용자들을 우선으로 뽑는 경우. 아니면 혹시나 탐험에 나간 후 큰 타격을 입었을때 도시 차원에서 일정 이상의 지원을 해주고 재기에 도움을 주는 그런 경우 등등. 언뜻 보면 구미를 당기는 조항들이 많지만 하나씩 상세하게 살피면 다들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후반부로 갈수록 홀 플레인 안에서는 전부 쓰잘데기 없는것과 다름 없었다. 물론 위에 조항들 말고도 더 있겠지만 다들 도찐개찐. 미래를 보면, 그런 실속 없는 특혜들 보다 자유 용병 신분이 지니는 자유의 가치가 훨씬 높다고 볼 수 있다. 그 미래라는건 멀지 않다. 뮬에 온지 한달이 지났으니 앞으로 두달 후 출발하는 황금 사자 클랜을 위시한 강철 산맥 원정. 그 후 일어나는 내전들을 염두에 둔다면 위의 조항들은 전부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자유라는 신분이 빛을 발하는 시기고, 명분이라는 힘이 생긴다. 어느 대륙에도 얽매이지 않고 어느 도시에도 얽매이지 않는. 중립을 지키면서도 어떤 행동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그러한 힘과 명분. 그러나 지금 이런 내용들을 전부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그전에, 애들은 아직 뭐가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단순 전투에 관해서는 조금씩 눈을 뜨고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하긴 이제 갓 홀 플레인에 나온 애들한테 세상의 민감한 흐름에 반응을 요구하는건 조금 무리였다. 그러나 그 흐름을 타지 못하면 결국 우리들은 도태 되어 버린다. 탁자는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어느새 주변의 소음은 매우 줄어들어 있었다. 어느세 우리들 주변을 감싸는 무형의 막을 보며 나는 비비앙을 바라보았다. 비비앙의 눈이 찡긋하는게 보였다. 어느정도 중요한 얘기들이라 판단을 내려 내 말이 새어나가지 않게 보호막을 친 것이다. 나는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하긴. 솔직히 처음 바바라를 떠날때도 똑같았죠. 하지만 형은 보란듯이 성공했어요. 아직 모르는게 많지만 그냥 믿고 따를게요 형.” 안현이 크게 숨을 내뱉고 선언하듯 입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아직까지는 시간이 있으니까 천천히 생각들 해봐. 나는 자유 용병이라는 신분의 가치가 빛을 발할 날은 반드시 올거야. 분명히 그렇게 생각한다.” 유정이는 뭣도 모르는 얼굴로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애초에 솔이 나한테 반항을 하는건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고, 비비앙은 계약서를 작성한 이상 그저 내가 이끄는대로 따라올 뿐 이었다. 오히려 안현은 살짝 안색이 상기된게 소수정예라는 말에 조금 흥분한것 같았다. “음…그러면 오빠는 그때 그 언니가 최상위 사용자가 될 자질이 있다고 본거야?” “그렇지. 그 사용자도. 그리고 너희들도.” “헤…. 그런데 그 누구지? 신상용이라고 했던가? 그 남자는 잘 모르겠던데.” 유정의 말을 들은 나는 곧바로 예전에 보았던 신상용의 정보를 머리에 떠올렸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신상용(2년차) 2. 클래스(Class) : 일반 마법사(Normal Mage Expert)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Babara)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마방진의 진리를 추구하는 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8) 7. 신장 · 체중 : 183.7cm · 69.2kg 8. 성향 : 질서 · 중립(Lawful · True) [근력 40] [내구 42] [민첩 45] [체력 40] [마력 85] [행운 60] 거듭 말하지만 마법사는 마력 능력치의 싸움이다. 근력, 내구, 민첩이 진짜 병신 같을 정도로 낮지만 않다면. 그리고 왠만한 조건만 충족 된다면 1순위로 보는게 마력이었다. 그래서 내가 현재 정하연을 신상용의 윗선으로 두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마력도 높으면서 여타 능력치도 높으면 금상첨화이긴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사기였다. 바로 나처럼. 신상용의 능력치는 2년차인걸 감안하면 준수한 수준이고 상위 사용자로 발돋움 할 수 있는 자질이 보인다. 그러나 나는 아직고 그에 대한 판단 보류하고 있었다. 나는 진명에 그의 최종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을 잡고 있었다. 마방진의 진리를 추구하는 자. 그런 진명은 처음 보기 때문에 나도 함부로 판단하는건 힘들었다. 그때 조금 더 힘을 써 특수 능력과 잠재 능력 전부를 볼걸하는 후회감이 들었다. 그때였다. “김수현씨.” 고연주가 나를 나지막히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고, 내 뒤로 여관문이 열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익숙한 발걸음이 감지에 걸렸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오늘 바로 다시 찾아온 모양 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하하. 제가 너무 섣불리 말을 꺼낸것 같네요. 아직 두근거려서 연락은 못해 봤습니다. 조금 갑작스러운 제의라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한것 같습니다. 내일은 조금 바쁘기도 할것 같구요. 그리고 출판으로 인한 연중은 절대 없을겁니다. 하하하. 독자분들의 관심과 응원 감사합니다. 덕분에 오늘도 연참입니다.(내…내 일일연재!) 『 리리플 』 1. 사람인생 : 하하하. 역시 사람인생님이 1등을 하실 줄 알았습니다. 1등 코멘터의 명성을 새삼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등 축하드립니다. :)(부담부담!) 2. MT곰 : 살려주세요…. 5연참은 너무 힘들어요. T^T 3. 황걸 : 연중은 당연히 안합니다. 네버. 네버. 네버! 4. Toranoanal : 음. 얇은 이라는 단어를 조금 우회해서 표현했는데, 와닿지 않았다 봅니다. 하하하.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50일 연체라니 ㅎㄷㄷ 합니다. 벌금도 어마어마하게 나오셨을것 같은데요. -_-a 5. 만능의자 : 네! 알겠어요! 6. hohokoya1 : 하하하. 저도 조금 더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아무래도 섣불리 결정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워서요. :) 7. 슬피우는영혼 : 헉. 아닙니다. 제가 그런데 지식이 전무한 상태인데 충분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__) 8. Demodex :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저도 너무 섣불리 말을 꺼낸 감이 있어 조금 무서워요. ㅜ.ㅠ 9. 악마신전 : 헉. 그렇군요. 단순히 제의만 왔다고 썼으니 아직은 괜찮겠죠? ㄷㄷ 10. 참좋은아침 : 허허허. 각 회마다 코멘트를 달아 주시다니…황공하옵니다. 고생하셨습니다.(__)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81 / 0933 ---------------------------------------------- New Face 예상대로 여관문을 열고 들어온 사용자들은 정하연과 신상용 이었다. 몸을 돌려 그들의 모습을 보자 빈말로도 좋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신상용은 괜찮아 보였지만 정하연은 그동안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얼굴이 매우 핼쑥해진 상태였다. 그래도 눈동자가 맑게 살아 있는게 마음도 죽은건 아닌것 같았다. 정하연은 왠지 모르게 끌리는 인상을 가진 사용자였다. 단순히 외모만을 말하는게 아니다. 10년동안 홀 플레인을 겪은 경험과 사람을 보는 내 주관적인 눈은 이 여성이 진국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말 그대로 이 사용자를 꼭 잡아야겠다는 말로 설명하기 복잡한 그런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내 속내를 그대로 드러낼수는 없는 노릇. 나는 최대한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한채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오후에 찾아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런에 일행분들이랑 같이 도시 밖으로 나가셨다는 말을 들었어요.” “탐험은 아니고 단순히 전투 경험을 쌓기 위해 잠시 나갔다 왔습니다. 아무튼 괜한 헛걸음을 하게 만들었군요.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오히려 저희들이 더 죄송한걸요.” 예의 바르네. 자신을 낮추지만 기품은 잃지 않는다. 품위가 느껴지는 대답에 나는 고개를 주억였다. 눈치 빠른 유정은 이미 의자 두개를 더 끌어오고 있었다. 우리들은 잠시 정하연, 신상용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후 자리에 앉았다. 잠시간 정하연과 비비앙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비비앙이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조금 어색해진 분위기가 돌아 얼른 식사를 권했지만 그들은 이미 먹고 왔다고 완곡히 거절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음은 좀 정리 하셨나요.” “솔직히 말하면 아니에요. 친동생의 죽음이라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하는건 어렵네요. 지금도 너무나 비통하고, 슬프고, 분노가 차올라요.” 정하연의 솔직한 대답에 애들은 모두 헛숨을 들이켰다. 특히 비비앙은 얼굴을 푹 수그리고 말았다. 직설적인 정하연의 대답에 나는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이런 대답은 나쁘지 않다. 자신의 슬픔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늘어 놓았다면 오히려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옆에서 신상용이 그녀의 로브를 쿡 찌르는게 보이자 정하연의 미약한 미소를 늘어뜨린 채 말을 이었다. “그때 여러분들과 헤어지고 난 후 동생과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여관으로 들어갔어요. 가서 지연이가 입었던 로브를 껴안고 펑펑 울었죠. 거의 하루 종일 울었던것 같아요.” 지금 정하연의 얼굴은 너무나 차분하고 정연했다. 울었다는 사실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애들은 다들 동정하는 얼굴로 정하연을 보고 있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속으로 뭔가 모를 소름이 돋았다. 나 또한 1회차에 친형을 잃은 경험이 있다. 당시 1주일간 미친듯이 날뛰는 한명, 아니 한마리의 살인귀로 변했었다. 수많은 적 사용자들을 죽이고 피가 강을 이룰정도로 날뛰고난 후에야 간신히 분노를 가라 앉힐 수 있었다. 그리고, 여지껏 유현이 형과 한소영을 잊지 못해 지금 다시 이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의 태도는 지금의 나와 너무나 대조되고 있었다. 지금 정하연의 태도가 가식적으로 꾸민거라면 그녀는 확실히 무서운 인재였다. 그러나 그들이 올때부터 나는 제 3의 눈을 발동하고 있었고 그녀의 내면이 지금 진심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잠시 멍한 얼굴로 정하연을 응시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감정을 조절할 수 있나요.”라고 묻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지만, 간신히 삼킬 수 있었다. 내 시선을 조용히 받아 넘기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려 비비앙을 바라보았다. “저는. 우리들은 당신의 부하들을 죽였고, 당신의 자식들을 죽였어요. 그리고 그쪽은 제 동생과 일행들을 죽였죠.” “…네.” “당신의 자식들과 부하들을 죽인건 미안하다고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미안하지도 않구요. 인간은 원래 그런 동물이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일행, 아니 최소한 내 동생에게 몹쓸짓을 했다는것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했으면 좋겠어요.” “…….” “아직도 납득할 수 없어요. 그러나 수현씨가 저희들한테 베풀었던 호의와 해주신 말씀들이 진실이라면. 그리고 괴물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마음이 돌아왔다면 지금 진심으로 그 증거를 보여주세요.” 정하연은 비장한 얼굴로 입을 열고 있었다. 그리고 신상용은 옆에서 안절부절한 얼굴로 하연과 나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주변을 휘감는 부드러운 카리스마에 어느새 나는 입에 가벼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비비앙은 정하연의 결의에 비해 너무나도 쉽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합니다.” “……?” “괴물일때의 제가 한 행동 다 알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의지도 들어가 있었죠. 하지만 만일 제가 인간이었다면, 그리고 인간으로서 지성이 남아 있었다면 절대로 그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때 당시 제 던전에 들어와 부하들을 죽인건 마음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에서는 부하라고 생각하고 있지도 않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당신의 일행들과 동생분께 저질렀던 행동. 도대체 어떻게 용서를 구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지금 이 말 한마디로 부족한건 알지만 그래도 제 속마음은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비비앙의 얼굴은 평소와 달랐다. 항상 보이던 맹한 얼굴이 아니라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평소에 항상 비비앙을 갈구던 유정도 입을 벌린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나 또한 처음 보는 그녀의 모습에 속으로 조금 감탄한 후 다시 정하연으로 시선을 돌렸다. “…….” 정하연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입술을 한번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가. 그리고 다시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가.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는것 같았다. 그녀는 결국 눈을 감고 말았다. 소용돌이 치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것 같았다. 잠깐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곧바로 눈을 뜬 정하연은 메마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비비앙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상태였다. “고개 드세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당신의 속마음이 어떤지는 몰라요. 그러나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태도는 제가 할 말을 없게 만드는군요. 고개 드세요. 그리고 수현씨. 당신 일행에게 이렇게 함부로 대해서 미안해요. 그렇지만….”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정하연은 내 신호를 보고는 살며시 입을 다물었다. “더 말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저 또한 지금 비비앙을 감싸고는 있지만, 그녀가 벌인 일을 곱게 보는건 아닙니다. 또한 사용자 정하연의 심정을 충분히 공감하고, 동정합니다.” “…고맙습니다.” 정하연은 말을 마친후로 비비앙을 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정중이 고개를 숙인 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우리들은 그렇게 하나의 사건을 마무리 한 후 나와 안현이 사용하는 방으로 올라왔다. 앞으로 할 얘기들은 다른 사용자들이 보면 오해를 살 수도 있기에 일부러 방으로 올라온 것이다. 막 나와 안현이 쓰는 방문을 열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기록서들과 무언가 빼곡하게 적힌 지도가 눈에 들어왔다. 정하연과 신상용은 둘 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잠시 내 양해를 구하곤 내가 살핀 기록서들과 지도를 구경했다. 한동안 흥미로운 눈길로 그것들을 구경하는 정하연과 신상용을 보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지금 그들이 보고있는 지도에는 내가 고대 연금술사의 던전을 발견했던 경위랑 지금 탐색중인 폐허의 연구소를 찾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이 내 생각대로 머리가 돌아간다면 탐험에 대한 내 능력이 어느정도인지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있었다. “서, 서, 설마. 혹시 고대 연금술사의 던전을 찾을 때 이렇게 찾으신 겁니까?” “기본적으로 근접한 방법은 그렇습니다. 물론 어느정도 운이 따라준것도 있지만요.” “후, 후와. 이건 정말 대단합니다! 아무런 단서도,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고, 고작 이런 기록들로 이렇게 근접 하다니…후와.” 신상용은 연신 탄성을 흘리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신상용은 평소에는 조금 내성적인 성격인듯 사람들을 대하는데 서툴고 말을 더듬었지만 자신이 관심있고 흥미 있어하는 분야에는 열정을 드러내는 타입 같았다. 정하연 또한 생기 있는 얼굴로 지도를 보더니 이내 감탄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대단하시네요. 정말 이걸 혼자서 조사하신 건가요?” “미련한 짓이죠.” “나쁘게 말하면 그렇죠. 본인의 능력을 낮추지 마세요. 이런 방법은 정작 생각은 해도 실행으로 옮기기 어려운 것들이에요.” “언니. 수현이 오빠가 한게 정말 그렇게나 대단한 일들인가요?” 유정은 넉살 좋게 정하연에게 들러 붙었다. 아까부터 어떻게든 말을 걸고 싶어 안달이 나있더니 기어코 끼어든 것이다. 그러고보니 유정이 저렇게 초장부터 친근하게 구는건 처음 보는 일 이었다. 정하연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유정을 보더니 이내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많은 사용자들이 이런 방법을 하늘에서 별따기,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 또는 로또라고 부르죠. 하지만 수현씨가 한 방법은 모래밭에서 돌맹이 찾기나 일반 복권에 당첨되는 수준으로 확률을 높였어요.” 뭔가 미묘한 칭찬이군. 그러나 유정은 나를 새삼스러운 눈길로 보고는 입을 벌렸다. “헤에….” “대단한 일이냐고 물으셨죠. 네. 대단한 일이에요. 수현씨가 참 고생을 많이 하고 있네요.” 마지막 정하연의 말은 뼈를 담고 있었다. 그녀는 일행들은 잠시 지그시 바라본 후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일행들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그때 나는 정하연의 내면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었다. 어디서 많이 친숙하다고 느껴지나 했더니, 그녀는 김한별과 상당수 닮은 부분을 갖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김한별과 빼다 박은것도 아니고 성격이 다른 부분도 있다. 하지만 비슷하다. 다만 정하연은 김한별보다 세상을 일찍 경험했고, 그만큼 자신의 자존심을 굽힐줄 아는 사용자였다. 즉 김한별이 세상을 좀 더 겪으면 정하연처럼 될 가능성은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생각에 불과했지만. 잠시간 내 기록들을 둘러본던 둘은 이윽고 방 안에 동그랗게 모여 앉았다. 조금 우스운 모양새기는 했지만 그렇게 좋은 여관이 아닌지라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충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침대에 앉을수는 없는 노릇이고. 정하연과 신상용은 서로 한번 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이렇게 찾아온건 비비앙씨 일도 있지만 실은 수현씨한테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네.” 정하연은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왜 그러나 싶어 의아했지만 이내 신상용이 안경을 추켜 올리는게 보였다. 이제부터는 정하연이 아니라 신상용이 얘기를 시작할듯 싶었다. “우, 우리들은 사용자 김수현님한테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모, 목숨도 구출 받고 그리고…에. 그러니까….” 땀을 뻘뻘 흘리며 연신 말을 더듬는 신상용을 보며 정하연이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태연한 얼굴을 유지한채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상황이 그렇다면 누구나 다 똑같이 행동했을 겁니다.” “아. 고, 고맙습니다. 휴우. 긴장되면 제가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어서요. 태어나서부터 지금껏 달고온 천성인지라 쉬, 쉽게 고쳐지지 않아요. 하하하. 그리고.” 신상용은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수현씨는 아직 0년차라서 잘 모르실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 다 똑같이 행동하는건 아닙니다. 에…음. 목숨은 살려줄지 몰라도 그걸 빌미로 그…조금 민망한 요구를 하는 사용자들도 있고…획득한 물품은 본인들이 가지는 전리품으로 생각하는게 당연하거든요. 음…조금 이상하게 들리실수도 있지만 적어도 홀 플레인에서는 그렇습니다. 그, 그래서 그것들은 우리들이 충분히 감사하게 여길만한 일 입니다.” 당연하지. 지금 그들이 내게 이토록 감사하는 이유는 “죽고 싶지 않으면 목숨 살려준걸 고맙게 여기고 당장 꺼져.”라고 말하거나 “음? 여자는 좀 예쁜데? 얘들아. 이년 깨워봐. 맛좀 보자. 살려주는 대신 몸이라도 한번 맛보자구.” 이런 짓거리들을 하지 않은데 있었다. 내가 1회차 시절의 나였다면. 혹은 나 혼자만 있었다면 입은것들까지 홀딱 벗기고 절대 돌려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당연한 거니까. 애들이 보는 눈만 없다면, 그리고 정하연이 마음에 들어 영입할 생각이 없었다면 물품은 둘째치고 귀찮은 마음에 그대로 버리고 왔을지도 모르는 일 이었다. 나는 신상용도 마음에 들었다. 자신들이 2년차라는걸 내세워 0년차인 우리들에게 거드름을 피운다면 속이 팍 상할뻔 했는데 그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조곤조곤 말하고 있었다. 마치 친형이 친동생한테 세상 사는법을 자상하게 가르쳐주듯. 제 3의 눈으로 본 이들의 성향을 떠올리며 나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하하하. 내일 면접이 있어서 원래 오늘 자정 연재가 힘들뻔 했습니다. 간신히 면접 준비를 끝내자 시간이 매우 늦은 상태더군요. 그래도 요즘 많은 관심과 응원을 보내주시는 만큼 독자분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습니다. 하하하.(쓰담쓰담 해주세요. :) ) 급하게 타이핑 하느라 퀼은 자신 없지만, 그래도 이상한 부분들은 추후에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다음회는 이번 챕터가 마무리 되고 곧이어 새로운 챕터로 들어갈것 같군요. 앞으로도 메모라이즈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 『 리리플 』 1. 하미나 : 1등 축하 드립니다. 헉. 한숨에 다 보셨다니요. 하하하. 이번회도 즐겁게 감상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2. 아이카이제 : 이게 그 유명한 쿠폰을 제물로 연참을 소환한다! 로군요. 하하하. 내일은 면접이 있어서 연참이 가능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최대한 노력은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쿠폰 감사합니다. :) 3. juan : 과연 고연주의 미래의 향방은? 하하하. 고연주 양도 의외로 인기가 많군요. 조만간 캐릭터 인기 투표 한번 해야겠습니다. 4. 그로인 : 아하. 고맙습니다. 유빈이 두명이 와도 비비앙을 이길 수 없다는 말 이었습니다. 해당 내용은 조금 더 이해하기 쉽도록 수정 했습니다. 소중한 조언 감사합니다. :) 5. 사람인생 : 하하하. 너무 부담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소한 자정 연재만큼은 언제나 사람 인생님이 1등을 해주실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응?) 6. MT곰 : 여러분들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 입니다. 이 말은 정말 진리입니다.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이 있다는것 만으로도 작가는 큰 힘을 얻거든요. 7. 아릴릴리아 : 푸하하하. 호이가 둘리가 되는군요. 언어유희에 빵 터졌습니다.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 8. GradeRown : 물론입니다. 절차가 있기는 하지만 변경이 가능합니다. 다만, 그 변경 절차가 상당히 까다로운 편 입니다. 물론 주인공은 쉽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후에 방법이 하나 나올 예정입니다. 9. 슬피우는영혼 : 저 연참했어요! 북유럽신화 연참해주세요! 10. 아르테쿠스 : 그렇군요. 아이들 뒷바라지 하고 늙고 병이든 수현이는…어? 설마 뒷방 늙은이로?!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82 / 0933 ---------------------------------------------- New Face 신상용은 정말로 내성적인 성격을 소유한 사용자로 볼 수 있었다. 벌써 5분이 넘도록 본론에 들어가지 않고 말만 빙빙 돌리고 있는걸 보면 조금 답답한 마음이 있었다. 보는 눈들이 많아 억지로 듣고는 있었지만 애들도 조금씩 지루한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상용씨.” 그 기색을 눈치 챘는지 정하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언질을 주자, 신상용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는 잠깐 심호흡을 한 후 이번에는 눈동자를 빛내며 입을 열었다. “혹시 마방진이라는 단어를 들어 보신적 있으신가요.” 마방진이라. 당연히 들어본적은 있다. 다만 지금부터 신상용이 말하려는건 단순 마방진이 아닌 자신의 진명과 연관이 있을것 같아 나는 더욱 집중했다. 그리고 동시에 제 3의 눈도 활성화 시켰다. 도대체 어떤 능력들이 있기에 저런 진명이 나왔는지 궁금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신상용(2년차) 2. 클래스(Class) : 일반 마법사(Normal Mage Expert)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Babara)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마방진의 진리를 추구하는 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8) 7. 신장 · 체중 : 183.7cm · 69.2kg 8. 성향 : 질서 · 중립(Lawful · True) < 능력치 > [근력 40] [내구 42] [민첩 45] [체력 40] [마력 85] [행운 60] < 업적(0) > < 고유 능력(1/1) > 1. 조화(調和)의 마방진(Rank : A Zero) < 잠재 능력(3/4) > 1. 연금 마법(Rank : C Plus) 2. 정통 마법(Rank : B Zero) 3. 고대어 해독(Rank : D Zero) 4. -(아직 개화 되지 않았습니다.) “다들 지금 어느정도 능력을 개화 시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일반 사용자들과 한가지 다른점이 있습니다. 그건…바로 특수 능력이 없습니다. 애초부터 없었던건 아니구요. 원래 있던 특수 능력이 고유 능력으로 진화된 특수한 케이스 입니다.” “그건….” 나는 이채를 띈 눈동자로 그를 응시했다. 그는 내 시선을 담담히 받고는 전에 없는 또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 밝혀서 미안합니다. 그러나 저는 말입니다. 공부하는 머리는 어떨지 몰라도 대인 관계나 사회 생활은 멍청해서, 남에게 속고 남을 속이는 일에 재주는 없습니다. 더구나 앞으로 수현씨 한테 무리한 요구를 하는만큼 적어도 제 사용자 정보는 밝히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부담스럽네요.” “전혀 부담 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멋대로 밝힌 거니까요.” 나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내가 이채를 띈 이유는 특수 능력이 없고, 고유 능력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1회차에도 드문 케이스이긴 하지만 그런 사용자들 몇명을 본 기억은 있다. 다만 조화(調和)의 마방진이라는 고유 능력이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큰 호기심이 일었다. 신상용은 내 신호를 보고는 바로 두 손을 들었다.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신상용의 두 손으로 몰렸다. 단 한명만 빼고. 정하연은 신상용이 얘기를 시작한 이후 여지껏 내 얼굴만 보고 있었다. 아마 그녀 스스로도 속으로 자체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는듯 싶었다. 나는 더욱 날카로운 시선으로 신상용이 올린 두 손에 정신을 집중했다. “지금부터 제가 가진 고유 능력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화륵! 쩌정! 그의 말이 끝난후 신상용이 가벼운 마력을 일으키는걸 느낄 수 있었다. 이윽고 오른손에는 불길이, 왼손에는 얼음이 맺히는게 보였다. 서로 상성을 가진 두 기운 이었다. 설마 조화의 마방진이라는 건…. 내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신상용은 두 손을 손뼉을 치듯 맞붙였다. 그리고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킨 지금 나는 맞붙인 두 손바닥 사이에서 수많은 마법 연산이 이루어지는걸 보고 매우 놀라고 말았다. 급히 표정을 수습하기는 했지만, 그순간 옆으로 보이는 정하연의 눈동자가 진해지는걸 볼 수 있었다. 신상용은 얼음과 불이 공존하고 있는, 이론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기운을 내포한 하나의 기를 두 손으로 소중히 감쌌다. 애정어린 눈으로 그 기운을 내려다보던 그는 이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쁘죠…? 이게 바로 제가 보유한 고유 능력 입니다. 이름은 조화의 마방진으로 되있더군요. 하하.” 곧이어 불과 얼음은 손 안에서 사그라 들었다. 주위에 몇몇 탄성이 들리는게 확실히 외양은 아름다웠다. 정확한 위력은 잘 몰라도 상성 효과로 일어나는 파괴력은 어마어마할게 분명했다. 나는 조화의 마방진이란 고유 능력이 무척 탐이 나는 기분이 들었다. 만약 화정, 그리고 화정과 비견되는 극상성에 있는 기운을 조화의 마방진으로 합칠 수 있다면…. 잠시 생각을 했지만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현재 내 몸에 시술된 고대 무녀의 각인만해도 랭크나 효율면으로 따지면 조화의 마방진보다 윗선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정을 잠시 붙잡아두는게 고작. 조화의 마방진에 화정의 기운이 들어간다면 아마 일거에 깨질것이다. 애들의 탄성에 잠시 쑥쓰러운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던 신상용은 다시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발명가라고 하기는 조금 거창할까요. 저는 원래 대한민국에서 연구소에서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계산하는걸 좋아하고, 무언가를 만드는데 대단한 흥미가 있습니다. 그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분야는 바로 마방진 이었습니다.” 마방진. 자연수를 1로부터 중복이나 빠짐이 없이 하나씩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여 각 군의 수의 합을 일정하게 만드는 수표. “마방진의 원리는 오늘날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잘 모르실수도 있겠지만, 실생활에도 마방진의 원리는 적용된 사례가 굉장히 많구요.” 애들의 얼굴들은 다시금 심드렁해지고 있었다. 특히 안현과 유정은 대놓고 퉁퉁거리고 있었다. 저놈들이 정말. 나는 미안하다는 눈빛을 보냈고, 신상용은 기분 좋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저는 홀 플레인에 오게된 후 마법사를 직업으로 가지게 됬습니다. 사제를 더 하고 싶었지만 담당 천사가 극구 마법사를 권유하더군요. 솔직히 마법사는 저랑 잘 맞았습니다. 다만…저는 일반 마법사들과는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확실히 그렇기는 하다. 특수 능력도 없고, 고유 능력을 저렇게 좋은걸 보유 했으면서 신상용의 잠재 능력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 정통 마술은 마법사들이 필수적으로 배우는거니 그렇다고 치고. 전투에 아무 쓰잘데기 없는 연금 마술과 고대어 해독은 도대체 뭔 심보로 개화시킨 걸까. 지닌바 능력치가 준수해 어떻게든 살아남은 모양이지만. 더 좋게, 더 효율적으로 자신의 직업 특성을 살리지 못한게 아쉬웠다. 정통 마술 랭크가 높다면 그래도 쓸데는 있을테지만 연금이든 정통이든 둘다 B랭크 이하였다. 나는 일단 아무것도 모르는척을 하며 태연한 얼굴로 다음말을 기다렸다. “홀 플레인에서 마법사인 이상 정통 마술과 관련된 것들을 배우는건 정론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개인의 천성일지 몰라도 저는 연금술에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주변의 아는 사람들은 연금 마술을 배우려는 저를 극구 말렸지만 제 개인의 욕심때문에 저는 기어코 배우고 말았죠. 하하. 한심하시죠?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세상에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이상을 좇았다니 말입니다.” 네. 한심합니다. 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차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습니다. 2년동안 이 연금술이 없었다면 나약한 제 자신이 미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이런. 말이 너무 길었네요. 이제 수현씨를 찾아온 이유를 털어 놓겠습니다.” 신상용은 “후우.”하고 숨을 내뱉었다. “고대 연금술사 던전의 정보를 얻게 된건 정말 우연한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평소 알고 지내던 정하연, 정지연 자매들과 정보를 공유했고 비밀리에 캐러밴을 꾸렸죠. 현재 황금 사자 클랜의 영향으로 탐험은 권장하고 있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사용자 정지연이 그렇게 되버린데는 제 책임도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말하지 않았더라면…그 일은 아직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본인들도 그냥 칠흑의 숲으로 들어간게 아니라 최소한의 정보는 쥐고 간 셈 이로군. 내가 고개를 주억이자 옆에서 가만히 듣던 정하연은 조용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받았다. “도의적 책임은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저도 책임이 있어요. 그리고 지연이 본인도 책임이 있구요. 마지못해 따라나선게 아니라, 가능하겠다 싶어 스스로 결정했어요. 그러니….” 정하연의 씁쓸한 말투를 들으며 신상용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정지연 얘기를 더 하고 싶지 않다는걸 느꼈는지 그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비록 던전 공략을 실패했지만 아직 고대 연금술에 대한 호기심은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런 자신이 병신 같다는건 알고 있지만 아마 수현씨 일행이 아니었다면, 혹은 살아났다면 저는 또 그 던전으로 들어갔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신상용은 잠시 말을 멈춘후 내 옆에 멀뚱한 얼굴을 한 비비앙읋 한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앉은 다리를 접더니 이내 꿇어 앉는 형식으로 자세를 바꿨다. 내가 차마 말릴틈도 없이, 그는 그대로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는 내게 정중히 엎드렸다. “던전의 보상이나 물품등을 바라는게 염치 없는 소리라는건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추호도 없구요. 다만 현존하는 거주민 연금술사가 있다는 사실을 듣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제발, 부디 그녀의 아래서 가르침을 받게 해주십시오.” “신상용씨. 일어나세요.” “아니요. 지금 이런 요청도 충분히 뻔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연금술은 홀 플레인에서 주류가 아닙니다. 비주류에서도 천덕꾸러기로 통하고 있어 조언을 얻을 사용자도, 방법도 없습니다. 오직 주먹구구식 독학으로 헤쳐나갈 뿐…지금도 제가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더구나 뭔가 벽에 꽉 막힌듯한 느낌이 반년째 지속되고 있습니다. 아마 이대로 간다면 저는….” 신상용은 여전히 머리를 들지 않은채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그의 말에는 조금이지만 물기가 어린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문득 떠오르는 하나의 기억에 눈을 감고 말았다. 지금 사용자 신상용의 기분을 나는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나 또한 그 누구의 가르침도 받지 못했다. 오직 독학으로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이뤘는데 그 과정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끔 서러운 감정이 들적이 많았다. 내 앞에 거대한 벽이 서 있는 기분. 그 벽을 뛰어 올라야 하는데 너무나도 단단해 깰 엄두도 내지 못할때. 그때 느끼는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절망스럽다. 특히 개인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2년차까지 성장하면 대부분의 능력치는 개발됬다고 봐도 무방하다. 초기처럼 하루가 다르게 쑥쑥 오르는게 아닌 엄청난 노력을 해야 겨우 1포인트 올릴까 말까로 변하는 수준이었다. 나는 무언가 홀린듯한 기분에 차분히 입을 열었다. “예전 책을 읽다가 어떤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의 내용은 너무나도 인상적이라,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습니다.” 신상용은 내 입에서 대답이 나오기 전까지는 절대로 몸을 일으키지 않을 기세인것 같았다. 그러나 내 말에 집중하고 있다는걸 알 수 있었다. 그래도 2년차 사용자로서, 0년차 사용자한테 무릎을 꿇을 정도로 다방면으로 노력하는걸 보니 기꺼운 마음이 드는건 사실이었다. 나는 한층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 벽을 막상 보게 되면 어떻게 뛰어 넘을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벽을 뛰어 넘는건 분명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그 벽을 뛰어 넘게 되면….” 잠시 말을 멈춘다. 조금의 뜸을 들인 후,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벽은 고스란히 자신의 발 아래를 받쳐주는 탄탄한 지지대가 됩니다.” “아….” 내 말에 뭔가 와닿는게 있는지 겨우 고개를 든 신상용을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신상용의 요청. 아직 자세한 사항은 듣지 못해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좋은 기회임은 분명했다. “저는….”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신 만큼, 오늘 면접을 잘 보고 왔습니다. 말이 술술 나오더군요. 같이 면접을 본 여성분에게는 조금 죄송했습니다. 하하하. 부디 결과가 좋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하하하. 집으로 돌아온 후 바로 코멘트 확인하고 82회 작업 했습니다. 어제 많은 분들이 쓰담쓰담 해주셨네요. 그나저나 저도 오늘 드디어 평점 테러란걸 당해 보는군요. 막상 당하니 기분이 참 미묘합니다. :) 『 리리플 』 1. 베지밀군 : 1등 축하 드립니다. 원래 왠만하면 자정에 올리는데 너무 바빠서 12시 18분이 될때까지 정말 치열하게 적었습니다. :) 2. 사람인생 : 퍽퍽퍽! 에잇에잇!(하하하. 농담입니다.) 제가 어제 너무 바빠서요. 면접 준비하랴 이것저것 하느라 참 분주했습니다. 사람인생님의 양해를 구합니다.(__) 3. 제국화격단 : 면접 기원 감사합니다! 이번회도 즐겁게 감상해 주세요. 4. 석양s : 하하하. 상위 버전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정하연은 정하연 나름대로 장점이 있고, 김한별은 김한별 나름대로 장점이 있습니다. 아. 얼른 한별이도 등장시키고 싶네요. 5. MT곰 : 1위는 아무래도 힘들겠지요. 워낙 재밌는 작품도 많고, 요즘은 선작을 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선작 버프(?!)의 영향으로 잠시 영광된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하하하. 앞으로도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6. 라티인형 : 아이쿠. 그러면 당장에 완결까지 가겠군요! 7. 현오 : 저는 머리를 쓰담해주는걸 참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러면 잠이 잘 오거든요. 후후후. 8. 홍승식 : 흐흐흐. 캐릭터 인기투표 1위한 캐릭터가 누굴지 저도 참 궁금합니다. 개인적으로 한별이가 됬으면 참 좋겠네요. 하하하. 가장 공을 많이 들인 캐릭터 거든요. 9. 슬피우는영혼 : 오. 오늘 20회나 올리신다니! 고맙습니다. 우와 200KB. 우와. 하하하. 진담입니다.(?) 10. 에인트제 : 제 3의 눈처럼 세세하고 정확하게 알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냥 추정할 수 있는 능력은 한두개정도 나올 예정입니다. 다만, 그런 능력들은 정확도가 상당히 떨어집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83 / 0933 ---------------------------------------------- 一瀉千里 “신상용씨의 제안이 조금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신상용은 이미 예상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애들은 모두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제안을 넙죽 받아 들이는건 초보 사용자들이나 하는 짓 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는건 알지만, 그래도 얕보일 수 있는 거리를 만드는건 사양이었다. “우리들은 현재 하나의 목표가 있습니다. 귀중한 인재인 비비앙을 신상용씨의 조언자로 삼는건 목표 달성에 많은 지장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이해합니다. 저 또한 막무가내로 이런 부탁을 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지긋한 눈동자로 신상용을 응시했다. “이번 탐험의 실패로 저에게 남은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론 당장에 먹고 사는건 지장이 없지만 그뿐입니다. 무엇보다 드디어 한계에 봉착한 기분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은 운 좋게 살아났지만 아무래도 다음부터 이런 요행을 바라는건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앞으로 김수현씨 일행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옆에서 정하연이 한숨을 내쉬는게 보였다. 확실히 신상용은 너무도 순수한 인간이었다. 정작 중요한 부분으로 들어갔는데. 돌려서 말하는 방법을 모르는것 같다. 좋게 말하면 순수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이용당하기 딱 좋은 인간상 이었다. 내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는 황급히 다음 말을 덧붙였다. “이래뵈도 동년차 사용자 치고는 그래도 쓸만하다고 자부합니다. 정통 마법 하나만으로도 도움이 될 자신은 있습니다. 최소한 짐이 되지는 않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이윽고 무언가 결심한듯 비장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앞으로 같이 다니는 동안 그 어떤 이득도 바라지 않겠습니다. 그저 비비앙씨 아래서 조언을 구하고 가끔 지도만 받는것으로 만족 하겠습니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수현씨 일행의 목표 달성을 위해 견마지로를 마다하지 않고 노력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에 가진게 없어 줄수는 없지만, 자신의 현재 능력을 담보로 미래를 내걸었다. 나는 문득 키메라 연금술사 책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순간 번개가 머리를 치는 기분이 들었고, 나는 바로 비비앙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비비앙.” “난 수현이 시키는데로 해.” 비비앙은 내가 부르자 즉답했다. 매우 기특한 소리였지만 내가 묻고 싶은건 그런게 아니었다. 막 키메라 연금술사가 되려면 최소 어떤 조건이 있는지 물으려고 했지만 나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조화의 마방진은 확실히 대단한 고유 능력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잘만 이용한다면 키메라 연금술사와의 호환성도 상당히 높아 보인다.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신상용은 키메라 연금술사가 되면 잃어버린 특수 능력을 새롭게 생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도 들은 얘기에 불과하지만 시크릿 클래스와 레어 클래스로 승급할때 능력이 새롭게 진화되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고 한다. 조금 다른 경우지만 그래도 클래스가 다른만큼 각 클래스가 필요로 하는 최소 특수, 잠재 능력들이 있다. 일반적인 사용자들은 특수 능력 하나와 잠재 능력 네개를 익힐 수 있다. 그리고 고유 능력을 가진 사용자들은 잠재 능력칸 하나를 소실하게 된다. 나야 고유 능력을 지녔지만 업적 보상으로 고스란히 특수 능력한와 잠재 능력 네개를 보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예를들어 정령 소환사를 얻게 되었을 경우 소환술을 필수로 익혀야 하는데 이미 특수, 잠재, 고유 능력칸을 전부 개화했다면 그 직업은 반쪽자리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신상용의 상황은 다르다. 그는 모종의 이유로 특수 능력이 고유 능력으로 진화했다. 만약 잠재 능력 하나를 개화시킨 후 레어 클래스로 승급을 시킨다면, 낮은 확률로 특수 능력을 생성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만약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지금 보이는 인상이 좋다고 덜컥 레어 클래스로 승급할 수 있는 책을 줄수는 없는 노릇이다. 본인이 직접 요청한만큼 조금더 지켜본 후 믿을만하다 생각돼 넘겨도 늦지 않을것이다. 아무튼 이런 생각을은 잠시 접어두고서라도 신상용이 한 제안은 매우 매력적으로 들렸다. 나름 괜찮은 능력치를 가진 사용자를 비비앙을 붙여주는 조건으로 무상 임대(?)할 수 있다. 그리고 키메라 연금술사의 책을 가지고 있는한 그를 우리 일행으로 포섭하는건 무리가 없었다. 나는 시선을 돌려 정하연을 바라보았다. 원래는 신상용이 이런 제안을 하게 되면 정하연도 같이 넣는 방식으로 둘을 엮으려고 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조금 더 정확히 말을 하면 더이상 신상용을 미끼로 정하연을 낚을 필요가 없다는 소리였다. 조화의 마방진으로 신상용은 단번에 정하연과 동급의 가치를 지닌 사용자로 승격 되었다. 물론 그녀는 여전히 매력적인 사용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내가 매달릴 이유는 없었다. 내 기준으로는 아직도 홀 플레인에서 내가 최고니까. 애초에 정하연에 목을 맬 정도였다면 시크릿 클래스인 김한별을 그렇게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 눈길에 담긴 의도를 깨달았는지 정하연의 고민하는 얼굴이 더욱 깊어지는게 보였다. 방금전 신상용이 말한 “견마지로를 다 하겠다.”와 비비앙이 말한 “수현이 하라는대로 한다.”라는 말들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요지를 말하면, 신상용은 우리 일행에 들어오는 순간 리더로 보이는 내 의견에 전적으로 따르겠다고 선언한 셈이고 나는 비비앙의 대답을 통해 내 위치를 보여주었다. 그에게는 비주류인 연금술을 단련하겠다는 좋은 명분이 있다. 하지만 정하연은 아니었다. 그녀 정도의 실력이라면 다른 검증된 캐러밴에 들어가거나 클랜에 가입 신청을 할 수도 있다. 물론 현재 클랜이 없는걸로 보아 그럴 생각은 없는것 같지만 앞일은 아무도 모르는 일 이었다. 나는 그녀가 고민하는 틈을 타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조금 더 자세히 그녀의 정보를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정하연(2년차) 2. 클래스(Class) : 일반 마법사(Normal Mage Expert)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Babara)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호수의 물방울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6) 7. 신장 · 체중 : 166.5cm · 42.8kg 8. 성향 : 질서 · 선(Lawful · Good) [근력 34] [내구 38] [민첩 40] [체력 32] [마력 87] [행운 80] < 업적(0) > < 특수 능력(1/1) > 1. 호수의 가호(Rank : A Plus) < 잠재 능력(4/4) > 1. 정통 마법(Rank : A Zero) 2. 마법 회로 응용(Rank : B Plus) 3. 질속(疾速) 영창(Rank : B Plus) 4. 항마력(Rank : B Zero) 정하연의 능력을 면밀히 살핀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잠재 능력은 마법사의 정석을 따라갔고, 호수의 가호란 나름 희귀한 특수 능력으로 자신의 특성을 살렸다. 그녀는 아마도 물과 관련된 마법들에 일가견이 있을 것이다. 특히 질속(疾速) 영창과 마법 회로 응용을 익힌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암기력과 계산력이 어지간히 좋지 않으면 익힐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들인데, 모두 B+랭크를 기록하고 있었다. 소도시 뮬에서 만난 사용자 치고는 확실히 대어였다. 나와 정하연이 서로 바라만 보고 있는걸 본 다른 사람들은 다들 긴장된 얼굴로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애들은 내가 애초에 정하연을 받는다고 말해둔게 있으니 그녀의 선택에 따라 신상용의 처우가 갈린다고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후, 꾹 닫혔던 그녀의 입술이 슬며시 열리는게 보였다. * “좋은 아침입니다.” “아. 리더. 조, 좋은 아침입니다. 하하.” 방문을 열고 나오니 신상용이 막 하품을 하며 계단을 올라오는게 보였다. 아침 인사를 건네자 그는 활기찬 미소로 화답했다. 그의 예의바른 말에 나는 미미한 미소를 흘린 후 입을 열었다. “리더라고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들을때마다 제가 민망하거든요.” “그래도 리더는 리더입니다. 지금 일어나신건가요?” “그렇지요. 그런데 신상용씨는 또 밤을 새셨나 보군요.” “요즘 한창 바쁘거든요. 스승님한테 배운걸 되새김질하고, 저 개인 수련 하는 시간만 해도 눈 코 뜰새 없는 지경입니다.” 신상용은 진심으로 즐겁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기분이 조금 부럽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고개를 주억였다. “열심히 하시는것도 좋습니다만 그래도 컨디션 유지는 해주세요. 내일 아침은 다시 도시를 나가 탐험할 예정이니까요.” “안그래도 오늘은 제시간에 잠들 생각입니다. 그런데 리더한테 그런말을 들으니 왠지 기분이 묘, 묘합니다.” 신상용은 자신보다 훨씬 빡빡한 내 스케줄을 지적하고 있었다. 나는 딱히 할말이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그렇게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간만에 터지는 기분 좋은 웃음 이었다. 말을 하면서도 연신 하품을 하는 그가 안돼보여 얼른 들어갈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신상용이 꾸벅 인사를 하고는 방금 내가 문을 열고 나온 방으로 들어가는걸 지켜본 후 나는 다시 몸을 돌렸다. 이제 뭔가 일행다운 일행이 모인다는 생각에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로비로 걸음을 옮기자 역시나 한산한 탁자들과 졸고 있는 고연주가 눈에 들어왔다. 자는 모습이 너무 곤해보여 나는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적당한 자리를 잡아 앉았다. 그리고 얼마전 새로 들어온 신상용과 정하연을 떠올렸다. 결국 둘 모두 우리 일행에 들어오는걸로 결론이 났지만, 신상용과 달리 정하연은 다른 조건을 걸었다. 그녀는 신상용과 똑같이 머무르는 동안 일행을 위해 활동하고 어떤 이득도 받지 않겠다고 했지만. “혹시 제가 나중에 떠나고 싶을때는 자유롭게 떠날 수 있게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게 제 최소한의 조건이에요.” 나는 단숨에 그러라고 했다. 아직 우리가 정식 클랜도 아니고 캐러밴의 구성원들이 도중에 떠나는건 흔하다 못해 발로 채일정도로 있는 일들 이었다. 그러고보면 우리들한테 너무 유리한 조건들이라 나는 신상용한테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떠나라고 말을 했지만, 그는 고개를 한두번 주억일뿐 당분간 떠날 생각은 없는듯 보였다. 원래는 그들이 오자마자 바로 다음날 탐험을 떠나려고 했지만 나는 생각을 바꿔 몇일간 더 도시에 머무르기로 했다. 신상용이 바로 배우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기에 내 나름의 배려를 해준것이다. 덕분에 가장 살맛이 나는 사람은 다름아닌 비비앙이었다. 신상용이 꼬박꼬박 스승님이라 부르면서 기도 세워주고, 무엇보다 유정의 괴롭힘이 현격하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들어 던전에서 보여줬던 유쾌한 모습을 간간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동안 지켜본 둘의 모습은 매우. 아주. 그리고 엄청나게 흡족했다. 좀 오버한감이 없잖아 있지만, 맨날 애들 뒤치다꺼리만 하다가 자기 일들을 알아서 착착착 하는 사용자들을 보자 감동이 밀려올 정도였다. 신상용과 정하연은 동시에 들어왔지만 둘의 행동은 정반대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신상용은 하루하루를 정말 빡빡하게 살고 있었다. 이미 어느정도 경지에 오른 이들이고 나와 직업이 아예 다른터라 딱히 내가 지도할거리는 없다. 하지만 그는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명상을 시작했다. 생활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지금 저 태도들이 내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러는지 아니면 예전부터 성실하게 계속 해왔던 일인지. 어떻게 보면 미련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모습들에 호감을 느꼈다. 그는 천재는 아니지만,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려고 발버둥은 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내 1회차 플레이랑 상당히 흡사한 부분이 많아서 쉽게 호감을 느낀걸지도 모른다. 그에 반해서 정하연은 철두철미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솔직히 인간 시계도 아니고 초단위로 스케줄을 끊어서 생활하는건 나도 질릴 정도였다. 일어나는 시간도, 밥을 먹는 시간도, 잠을 자는 시간도, 본인의 개인 시간을 가지는 시간도 언제나 칼처럼 지켰다. 그리고 깨있는 시간에 무서울정도로 집중하는 모습들을 보였다. 그러나 그와중에 또 융통성 있게 시간을 바꾸는걸 보면 어느정도 융통성은 있는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둘의 생활이 홀 플레인의 한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건지도 모른다. 저렇게까지 노력해도 최상위 사용자가 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애들 또한 느낀바가 많은것 같았다. 본인들도 열심히 수련을 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이 두명은 말 그대로 하루하루를 처절하게 사는 느낌을 전하고 있었다. 그들이 들어온 뒤로 애들의 태도가 또다시 조금씩 변하는걸 보며 나는 긍정적이라고 생각했다. 절실함은 아무리 넘쳐도 부족하지 않으니까. “그러고보니 슬슬 내려올 시간인데.” 내 혼잣말이 끝나는 순간 윗층에서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또각또각 일정한 소리를 내는 걸음 걷는 소리. 나는 싱거운 미소를 지은 후 의자를 세게 끌었다. 슬슬 한창 달게 자고 있는 고연주를 깨우는게 나을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다들 예상하신대로 신상용과 정하연은 주인공 일행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New Face 챕터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정하연은 과연 왜 주인공 일행에 들어오게 된걸까요. 하하하. 아무튼 이제 쉴만큼 쉬었으니 다시 탐험을 하러 가야겠지요? 이번 챕터 제목은 일사천리(一瀉千里)입니다. 메모라이즈에 많은 관심과 응원 해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 『 리리플 』 1. 사과 주스 : 1등 축하 드립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선코멘트후감상 이군요! 하하하. 이번회도 부디 재밌게 감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2. 신유진 : 다음회부터는 조금 빠르게 진행할게요오오오오.(?!) 3. 베지밀군 : 실은 소개글 수정한다고 생각을 하고 여지껏 실행을 못하고 있어요. 도대체 어떻게 수정해야 할까요. ㅜ.ㅠ 4. 당룡 :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는 말이 있죠. 하하하. 조금 더 확실하게 말을 하면 초반에는 안현쪽으로 조금 마음이 있다가(기운건 아닙니다.) 주인공이 일행을 이끌게 된 이후 주인공에게로 확연하게 기울고 있습니다. 일행외 다른 남성 사용자들한테 대하는 태도와 수현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확실히 다르죠. 다만 본래 성격은 당차지만 연애 관련 문제는 젬병인 아가씨라 그 부분에 관해서는 본인 성격처럼 표현을 화끈하게 못하고 있는 거랍니다. :) 5. 아미슈 : 지적 고맙습니다. 일단 확인은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지 거슬릴정도라면 당장 수정을 할 예정이고, 그게 아니라면 추후 리메이크 결정시 한꺼번에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6. 타락한비둘기 : 하하하. 독자분들마다 캐릭터가 와닿는 정도가 다른것 같아요. 어떤분들은 조금 어색하다 느끼시는 분도, 어떤분들은 확실하게 느껴진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네요. 제가 더욱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더욱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 드립니다. 7. 레필 : 네. 한 네분정도가 그렇게 말씀해주신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소개글 수정 해야지, 해야지 생각은 했는데 막상 하려니까 눈 앞이 깜깜. 도대체 어떻게 수정해야 잘 했다는 소문이 퍼질까요. ㅜ.ㅠ 8. 사람인생 : 악. 절대로 때린거는 아닙니다. 그런데 맞는 모션을 취하시다니. 저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흑흑. 9. 라무데 : 하렘 용병단이라. 하하하. 과연 주인공한테 몇명의 여자가 붙을지 저 또한 모르겠습니다. 조만간 인기 투표를 마친 후 확실하게 순애로 갈지, 하렘으로 갈지. 또 하렘으로 간다면 인원을 몇명으로 갈지 다시 설정을 해야겠네요. 10. 라티인형 : 앗. 그러시면 제가 너무 궁금하잖아요. 오늘 잠 못자면 다 라티인형님 책임이에요. 그러니 얼른 알려주세요!(쪼르기 대작전!)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84 / 0933 ---------------------------------------------- 一瀉千里 일행들은 눈 앞에 웅장한 위용을 드러내는 연구소를 보며 다들 할 말을 잃은 얼굴이 되었다. 특히 신상용과 정하연은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지금 상황을 곧이 곧대로 받아 들이는건 아무리 그들이라도 조금 무리가 있던 모양이다. “마…말도 안돼. 아무리 초심자의 운이라고 해도. 이, 이건….” “하. 조금…놀랍네요.” 이윽고 정신을 차린듯한 정하연은 멀뚱한 얼굴로 서있는 안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살짝 웃고는 솔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허리에 양손을 짚었다. “우리 솔이는 정말 복덩이구나.” 자신의 몸에 손이 닿았음에도 솔은 아무런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순진한 눈망울로 내게 고개를 돌렸을뿐. “저는 복덩이에요?” “암. 그렇고말고. 우리 솔이는 정말 최고다.” 그때서야 내가 칭찬을 하는걸 알았는지 솔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나는 그대로 솔이를 번쩍 안아 들고 위아래로 몇번 흔들며 비행기를 태워 주웠다. “와아. 와아.” 솔이 또한 신나는지 양 손을 번쩍 들고 조신한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그런 솔이를 잠시 바닥에 내려 놓은 후 다시 몸을 돌렸다. 뮬을 떠난지 3일째, 우리들은 폐허의 연구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우리들은 아침을 간단히 해결하고 여관을 나섰다. 여관문까지 나와 배웅하는 고연주를 다들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 일을 빼고는 모든게 괜찮았다. 일행의 분위기는 안정 되어 있었고 실력 있는 마법사 두명의 가세로 전력은 더욱 강화된 상태였다. “그런데 언니. 조금 걱정이 들어.” “뭐가?” 유정은 정하연을 굉장히 잘 따르고 있었다. 어느새 말도 놓았는지 둘은 언니, 동생으로 서로를 부르고 있었다. 그동안 천방지축 날뛰던 유정의 고삐줄이 생긴것 같아 내심 마음이 놓였다. 유정은 내 얼굴을 한번 슬쩍 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동안 수현이 오빠랑 우리들은 밖에서 몬스터들을 사냥하면서 나름 손을 맞춰왔거든. 그런데 언니랑 사용자 신상용은….” 유정의 말을 듣던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 오르는것 같았다. 뒤에서 쿡쿡 웃는 정하연의 웃음 소리가 들리자 더욱 그랬다. 맘 같아서는 당장 뒤돌아 볼을 쭉 늘리고 싶었지만 그냥 모르는척 하는게 더 나을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들은 북문을 통과한 후 그대로 북쪽으로 올라갔다. 북서쪽으로 간다면 칠흑의 숲이 나오지만, 북쪽으로는 그냥 평야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그 평야를 넘어가면 끝이 보이지 않는 불모지가 나온다. 이번에는 그쪽 방향으로 가볼 생각 이었다. 이번에는 나 또한 생각해둔 바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조용한 어조로 비비앙을 불렀다. “비비앙.” 비비앙은 한창 신상용의 질문 공세를 받고 있었다. 거드름을 피우며 하나씩 대답하던 그녀는 내가 부르자 조금 불만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요즘들어 살맛 난다고 반항하는 모습을 조금씩 보이고 있었다. 내가 살짝 손을 들어 올리자,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듯 해맑게 웃으며 내 옆으로 찰싹 달라 붙었다. “응. 수현. 불렀어? 히히.” “후후. 한창 얘기하던 도중 불러서 미안하군.”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조심…호호호.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식은땀을 삐질 흘리는 비비앙을 보며 나는 사늘한 미소를 보여준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현재 비비앙의 나이는 24살로 나와 동갑이지만, 거미로서 100년을 넘게 살아온 기억이 있다. 내가 기본적으로 정보를 조사해두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다. “혹시 예전에 말이다. 그러니까 네가 거미가 되기 전의 시절. 뮬의 북쪽 부근에 무슨 연구소 하나 있지 않았어?” “연구소? 응. 있었어.” 낭랑히 대답하는 비비앙의 목소리를 모두 들었는지 일행의 걸음이 조금 주춤해진걸 느꼈다. 나 또한 조금 흥분된 기색으로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러면 어디 있는지도 알아?” “당연히 자세한 위치는 모르지. 나라고 그때 일을 다 기억하는건 아니라구. 그래도 이쪽 방향으로 쭉 가면 나올걸. 알고 가는거 아니었어?” “…….” 단번에 기대를 실망으로 바꾸는 비비앙의 답을 들으며 나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래도 최소한 내가 점찍은 장소가 틀리지 않았다는 정보는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아주 수확이 없는건 아니었다. 폐허의 연구소는 내가 뮬에 없었던 시절 발견된 장소라 그에 대한 큰 기억은 없었다. 그저 뮬에서 다른 캐러밴이 연구소 탐험에 성공했다고 회보를 봤을때 잠깐 관심을 보였을뿐. 비비앙은 떨떠름한 얼굴로 다시 원래 대형으로 돌아갔다. 제 3의 눈을 쓰면 발견할 자신은 있다. 그러나 지금 내가 고민하는 문제는 당위성 이었다. 한두번도 아니고 이제 막 0년차인 사용자가 전문 탐험 능력을 지닌 사용자들도 못하는, 던전을 한번에 팍팍 발견하면 이상하게 생각할건 불 보듯 뻔한 일 이었다. 클랜에 아주 정착하면 몰라도 아직 그들은 완전히 우리 일행들에 정착한건 아니었다. 애들이나 신상용 같이 그냥 좋게좋게 생각하면 만사가 평탄하지만 그렇게 생각대로 흘러갈리가 없다. 내가 보기에 최소한 정하연은 의구심을 품을게 분명했다. 정하연 입장에서는 뭔가 꺼림찍한 면이 있는 클랜에 입단하기 망설일것이고, 내 입장에서도 의구심을 가진 사용자를 영입하고픈 생각은 없다. 책이나 기타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밝힐 예정이라고 애들한테 단단히 입단속을 해논 상태지만 앞으로가 문제였다. 내가 고민하는 모습을 봤는지 옆에서 위로하는듯한 솔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라버니. 괜찮아요.” “뭐가 괜찮은데.”라고 쏘아 붙이고 싶었지만 그러면 또 울먹일게 뻔해 그저 미미한 미소만 지어준 후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하루동안 꼬박 걸은 후, 이틀째가 되어 우리들은 평야를 벗어날 수 있었다. 뮬에서 멀어질수록. 그리고 걸어갈수록 점점 연녹빛 대지들이 적어지고 황토색 빛깔을 띠는 땅들을 밟고 있었다. 불모지로 들어선 후 일행은 화기애애한게 언제인듯 일행들은 조용하게 변했다. 정하연과 신상용은 말할것도 없고, 애들도 그동안 나와 행동한걸 기억하는지 다들 경계하는 눈초리로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그런 우리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몬스터들과의 전투는 금방 일어났다. 마냥 행군을 할수는 없어 중간에 휴식을 취하고 있던 도중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물을 마시고 육포를 씹고 있었는데, 우리들을 향해 다가오는 한 무리의 몬스터들이 내 감지에 걸렸다. 한가지 특이한건 그 무리들은 지하를 통해 우리들과의 거리를 줄이고 있다는 점 이었다. “아무래도 몬스터들이 곧 올것 같습니다. 다들 전투 준비 하세요.” 내 말에 애들은 모두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주변 땅 밑이 불룩불룩 솟아오르는게 눈에 보였다. 예상보다 빠른 도착에 나는 눈살을 찌푸린채 몸을 일으켰다. “뭐, 뭐지? 지진?” 지진일리가 있나. 목소리에 당황함이 있었지만 애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안현은 어느새 창을 뽑고 있었고 유정이 또한 대형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벌써부터 지팡이를 드는 솔이를 보며 나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지진은 무슨. 랜드몰 들이다.” “랜드몰?” “땅 두더지.” 나는 간단히 대답한 후 검을 들었다. 두더지놈들은 주제에 그래도 사냥 본능은 있어서 우리들 주변에 둥그렇게 모여들고 있었다. 하나씩 늘어가는 불룩 솟아오르는 땅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즉 지금 우리들은 놈들한테 포위된 상태였다. 언뜻 보이는 구멍 숫자들은 열개를 넘고 있었지만 감지를 펼치자 아래쪽에서 더 많은 숫자들이 올라오는걸 느낄 수 있었다. 곧이어 닫혀있던 땅이 쩍 갈라지고 거칠고 단단해 보이는 손 하나가 대지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바닥에 손을 집고 몸을 쑥 일으키는걸 보자, 내가 예상했던대로 랜드몰이 지상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연갈빛 둥그런 몸통과 사람처럼 달려 있는 팔과 다리들. 그것들을 보며 나는 얼른 방진을 구성할 계획이었다. 그때였다. “───. 스트림 오브 아쿠아(Stream Of Aqua)!” 고속으로 말하는 바람에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정하연은 단 세 어절로 주문을 마친후 바로 전방으로 지팡이를 뻗었다. 이윽고 지팡이에서 뻗어나온 물덩이들은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조각조각 나뉘어 우리 주변에 생긴 열개의 구덩이를 향해 쏜살같이 하강했다. 주문을 외우는 속도도, 몬스터 대응 방법도, 마법 응용도 모두 만점으로 평가할 수 있었다. 랜드몰들은 땅속에서 생활하는 놈들 이지만, 몬스터로 변한만큼 주로 인육을 먹는 놈들이었다. 사람들이 본래 생각하는 오동통한 두더지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나름대로 돌덩이 같은 몸과 인간과 비슷한 키 그리고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까다로운 녀석들 이었다. 놈들의 몸은 단단하기 때문에 일반 창칼은 잘 박히지 않는다. 굳이 상대하는 방법은 병장기에 마력을 듬뿍 먹인채 찌르거나, 압도적인 힘으로 부수는 방법이 있다. 다만 그건 그냥 맞붙었을때 얘기고 랜드몰을 공략하는 손 쉬운 방법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몸에 물을 뿌리는 것이다. 즉 정하연은 상대 몬스터가 랜드몰인걸 보자마자 가장 적절한 대응을 해준것이다. 기세 좋게 땅을 뚫고 나온 랜드몰들은 올라오자마자 물에 흠뻑 젖은 생쥐꼴이 되었다. 이윽고 점점 적갈빛으로 변해가는 놈들은 처음의 기세와는 다르게 조금 멈칫한 모습들을 보이고 있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신상용 또한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안솔양. 저도 지금부터 마법을 준비하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보호 마법을 준비해 주세요. 그리고 제가 마법을 쏘는 타이밍에 맞춰 랜드몰 들한테 보호 마법을 시전해 주십시오.” “네, 네?” 랜드몰 들한테 보호 마법을 시전해달라는 말을 듣자 안솔은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던 정하연이 재빨리 마력을 끊고 새로운 주문을 외우는걸 보며 허둥지둥 자신도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 신상용은 바로 캐스팅에 들어갔다. 한동안 우물거리던 랜드몰들은 이내 마법사가 또 주문을 외우는걸 보자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놈들도 자신들의 약점을 알고 있는지 물이 뭍은 이상 빠르게 달려들기로 한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 캐러밴에는 마법사가 한명 더 있었다. 그것도 랜드몰은 수백명이 달려들어도 상처 하나 내지 못할 무시무시한 키메라 연금술사. “오라! 아라냐! 제 32군단을 지배하는 죽음의 거미줄이여!” 비비앙 또한 애초부터 준비하고 있던듯 그녀의 몸 아래로는 어느새 형이상학적 문양을 지닌 마법진이 소환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법진이 빛을 발함과 동시에 일전에 본 기억이 있는 거미 한마리가 떠오르는걸 볼 수 있었다. 일반 거미와는 다른 비비앙이 강화 시킨 키메라화된 마수 거미 아라냐였다. “아라냐!” 비비앙의 외침에 아라냐는 이미 속마음을 읽었다는듯 아래턱을 크게 열었다. “시이이이이이이이!” 아라냐의 아래턱에서 뻗어나오는 은빛 줄기들. 그 줄기들의 정체는 바로 거미줄들 이었다. 살아있는 뱀이 춤을 추듯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그것들은 우리 일행들을 절묘하게 피하더니, 이내 달려오는 랜드몰 전원을 실로 휘감았다. “쿠릭? 쿠릭?” 랜드몰들 또한 피하거나 날카로운 발톱으로 실을 끊어보려고 했지만 속수 무책이었다. 끈적히 늘어지는 점성을 갖춘 실들이 점점 더 몸을 죄는걸 보며 랜드몰들은 그저 구슬픈 비명만 내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막 캐스팅을 끝마친 신상용은 왼손을 조준하며 입을 열었다. “안솔양. 지금 갑니다. 최대한 조심은 하겠지만 혹시 모르니 적절한 타이밍에 써주세요.” “에? 네, 네!” “체인 라이트닝(Chain Lightning)!” 신상용의 시동어가 끝나자 지그재그 모양의 번갯불이 연쇄적으로 터지는걸 볼 수 있었다. 길게 나아가던 번개는 맨 선두에 있던 랜드몰에 닿은 순간 하나의 진풍경을 그려내었다. “쿠라라라라라라라!” “쿠리리리리리리리!” “크에에에에에에에!” 물과 번개의 연쇄 합동 마법. 그러나 신상용의 주문은 여기서 끝난게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왼손을 유지하면서, 남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설마 더블 캐스팅을 한건가? “홀드(Hold)!” 신상용이 홀드를 건 대상은 랜드몰들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쏜 기운들 이었다. 출현한 랜드몰 전원에 전기가 닿자마자 바로 더이상 뻗어나가지 못하도록 인위적으로 조절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솔이 나설 타이밍 이었다. “안솔양. 지금 입니다!” “저, 정말로….” “어서요!” 안솔은 여전히 방방거리고 있었지만 신상용의 다급한 말에 입을 질끈 물고 주문을 외웠다. “보호(Protect)!” 이윽고 랜드몰 전원은 아니더라도, 일부 몬스터들한테 둥그런 보호막이 생겨난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틈을 노리고 있던 정하연의 청아한 목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리버스(Reverse)!” “하.” 정하연의 목소리가 들린 그때서야 신상용은 마력을 잇고 있던 연결 고리를 끊어버렸다. 설마 이거를 노리고 있었던가. 나는 감탄한 얼굴로 둘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리버스가 걸린 보호 마법 안에 있는 랜드몰들은, 말 그대로 걸레 조각으로 변하고 있었다. 거미줄에 몸이 붙잡힌채,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라이트닝들이 다시 보호에 막혀 자신의 몸으로 돌아와 고스란히 두들겨 맞고 있었다. 물론 라이트닝이 한번 때릴때마다 보호 주문 또한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지만, 상당히 괜찮은 연계기라고 할 수 있었다. 안솔 또한 자신의 보호가 이렇게 쓰일줄을 몰랐는지 눈만 꿈뻑이고 있었다. 보호 마법은 외부의 충격을 차단하지만, 내부에서는 외부로 타격을 가할 수 있다. 그 성질을 리버스를 걸어 반대로 뒤바꾼 것이다. 리버스는 고등 응용 마법중 하나인데 이토록 쉽게 펼치는걸 보니 나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마법이 풀린 랜드몰들의 몰골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보호 마법 안에 있던 놈들은 이미 걸레로 변해 땅에 누워 있었고, 그 밖에 있던 놈들 또한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반수 이상은 땅바닥에 누워 꿈틀대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반수는 땅을 밟고 있기는 했지만 제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게 딱 봐도 죽기 일보 직전들로 보였다. 이제는 근접 계열들이 나설 차례였다. “안현. 유정.” 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르자 멍하니 구경하던 둘은 이내 정신을 차린듯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이미 무장 해제된 놈들이나 다름 없다. 가서 마음껏 휘젓고 오도록. 나는 여기서 키퍼를 하겠다.” 둘은 서로 한번 바라보고는 이내 나는듯 앞으로 달려 나갔다. 또 승부 근성에 불이 붙은 모양 이었다. 나는 싱거운 웃음을 한번 흘리고는 여전히 검을 든채 정하연이 서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하연은 나를 한번 보더니 싱긋 웃었다. 마치 “내 수준이 이정도에요. 나 잘했죠?”라고 말하는것 같았다. 나 또한 그녀를 보며 마주 웃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검을 들어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요즘 재밌는 작품들이 너무 많은것 같습니다. 저 또할 얼마전까지 노블 독자여서 그런지 취향에 맞는 작품이 올라오면 항상 즐겁게 읽네요. 혹시 이거 정말 재밌다. 적극 추천한다. 이런 작품 추천해주실 독자분 계신가요?(아. 참고로 순위권에 있는 작품들은 거의 다 읽었습니다.) 『 리리플 』 1. 사람인생 : 헉. 참으로 무서운 자작극이군요. 아무튼 오늘 1등을 했으니 소소한 축하를 드립니다. 하하하. 역시 자정 1등 코멘터 답습니다. 2. MT곰 : 하하. 이제 슬슬 내려갈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기대해주시는건 감사합니다만 요즘 너무 재밌는 작품들이 많은지라. ㅜ.ㅠ 3. 아미슈 : 아하. 지금 보고 왔습니다. 당장 수정하고 왔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 4. 하늘위의신 : 아하하. 물론 그렇게 생각하실수도 있지만 그래도 수현이 아주 경우없는 놈은 아닙니다. 자기 할 도리를 다하는 인간들한테는 그래도 해준만큼 대접은 해준답니다. 5. zjekfksqlc :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고유 능력 네개라니. 큰일날뻔 했습니다. 6. 라티인형 : 아아아. 쪽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쪽지는 언제 오실까요~?(칭얼칭얼.) 7. 슬피우는영혼 : 그…그것은…. 실은 저는 숫자 뒤에 무조건 0을 붙여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 얼른 20연참을 해주세요!(억지억지.) 8. 당룡 : 옳으신 말씀이기는 합니다. 초반 부분을 깊게 숙독하셨다면 당연히 의문을 가지실 내용들이죠. 다만 현재 주인공 일행들한테 둘을 잡을 이유도, 그리고 명분도 없습니다.(신상용은 비비앙이 있기는 하지만, 그걸 영구적으로 볼수는 없습니다.) 우리 일행에 들어오는 대신 절대로 나가지 마라. 이러면 들어올 사용자는 거의 없습니다. 차라리 조금 위험을 감수 하더라도 일단 일행에 들인후 천천히 가족으로 만들어가자고 수현이는 생각한 겁니다. 능력은 어차피 소도시 뮬에 있는만큼 일정이상 드러낼 기회는 없습니다. 그리고 책이나 그런것들은 이미 입단속을 시켜둔 상태구요. 당룡님의 이해를 위해 조금 더 설명드리고는 싶지만, 그러면 클랜 생성과 관련 내용 하나와 수현의 속마음에 대한 스포 내용이 나오기 때문에 이만 말을 줄이겠습니다. 혹시라도 정 궁금하시면, 쪽지를 보내주시면 부연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질문 감사합니다. :) 9. 야미이 : 여기 연참입니다. 하하하. 쿠폰 감사합니다. (__) 10. hohokoya1 : 그것때문에 요즘 고민입니다. 소개글 수정하고, 투표도 하고, 여성들과의 관계 진로도 확실히 정해야 하는데. ㅜ.ㅠ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85 / 0933 ---------------------------------------------- 一瀉千里 대지를 쪼갤듯한 기세로 휘두른 검은 정하연의 옆을 지나, 땅속 깊숙히 박혀 들어갔다. 대지에 검을 쑤셔 넣은후 나는 그 상태 그대로 마력을 주입했다. “쿵!” 소리와 함께 검이 꽂히 대지 주변이 울컥 솟아 오르고, 미묘한 균열이 일어났다. 놀란 토끼 같은 눈동자로 나를 보던 정하연은 이내 땅 위로 비죽이 새어 나오는 핏물들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 고마워요.” “별 말씀을.” 그대로 검을 한번 비틀어 뽑아낸 후 가볍게 턴다. 촥 소리와 남과 동시에 검에 묻어있던 핏물이 바닥에 비산했다. 신상용은 내가 검을 들고 덤벼들자 처음에는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차분히 나와 대화를 주고 받는 정하연을 보고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안현과 유정은 서로 누가 더 많이 죽이는지 경쟁을 할 정도로 열심히 뛰어 다니고 있었다. 솔직히 서있는 놈들도 말 그대로 서 있는게 고작이라 전투라고 할것도 없었다. 그저 확인 사살이나 다름없는 과정이었다. “내가 열두마리.” “내가 열네마리. 와. 이겼다.” “칫.”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하는 안현과 부루퉁한 유정을 보며 나와 일행들은 웃을 수 있었다. 이게 바로 제대로 된 사용자들이 치르는 전투였다. 물론 평범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정하연과 신상용은 손을 많이 맞춰본 경험이 있고, 그만큼 수준 있는 전투를 보여주었다. 그동안 항상 주먹구구로 싸우던 애들도 이런 전투 방식은 생소한지 다들 대단하다는 눈동자로 그들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안현의 눈동자에 불타오르는 하나의 감정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분함이었다. 왜 그런지 대강 짐작이 간 나는 그의 어깨를 두어번 다독였다. 불모지는 랜드몰들의 천국이었다. 사용자는 물론이고 어지간한 몬스터들도 이곳에서 사는걸 거부하고 떠날 정도로 척박하다고 볼 수 있었다. 오직 땅 밑 지하에서 사는 랜드몰들만 서식할뿐. 그런만큼 불모지는 랜드몰들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장 백미였던 전투는 단연 랜드몰 100마리와 싸운 전투를 꼽을 수 있었다. 이틀이 지나도록 랜드몰들을 학살하며 오자 꼴에 놈들도 열이 받은듯 단체로 모여 습격한듯 싶었다. 그것도 우리들이 노숙하는 도중에. 그러나 그정도로 대부대가 이동하는데 못 알아차릴 사용자는 없었고, 나 또한 항상 감지를 활성화 시킨 상태였다. 날이 어둡고 사방에서 몰려드는 만큼 이번에는 정하연과 신상용도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마음만 먹으면 처리할 수 있지만, 시야가 제한되는 만큼 아무래도 조심스러워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 이번에는 내 아이(…….)들이 힘을 발휘했다. 자는 도중 일어나 전투하는건 몇번 훈련시켰기 때문에 다들 0년차 사용자로는 생각지 않을 정도로 민첩하게 대응했다. 순식간에 방진을 구성하고, 서로 연계하며 마법사들과 사제를 보호하는데 지금까지 보여준 실력중 그 어느때보다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은근히 낮에 보여준 그들의 실력 행사에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비비앙의 키메라 마수들이 후방을, 내가 전방을 담당함으로 현과 유정의 방어 범위가 좁아졌지만 그것만해도 충분히 대단한 일 이었다. 우리들이 선전한 만큼 마법사들과 사제들이 더욱 편하게 주문을 외울 수 있었다. “놀랍네요. 정말 0년차 사용자들이 맞나요?” 전투가 끝난 직후 정하연이 맨 처음 물어본 말 이었다. 아직 모르고 있을테지만 애들은 이미 0년차 사용자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능력치로 보나 경험면으로 보나 탐험을 한번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타이틀은 왠만한 중견 사용자로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대단하군요. 이정도 방진을 만들고 유지하는건 쉬운일이 아닌데….” 그리고 순식간에 방진을 구성하고 서로 효율적인 연계를 하며 진을 유지한데도 높은 점수를 받은것 같았다. 정하연의 칭찬에 애들의 콧대가 조금 높아진듯한 착각이 들었다. 특히 안현은 헛기침을 하는게 아주 가관이었다. 그래도. 거기까지만 해도 꽤나 기분이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꼭 약방의 감초처럼 끼는 유정이 또 끼어들고 말았다. “언니. 우리 아빠가 가르쳐 줬어.” “응? 아빠?” 유정은 가만히 나를 보고, 이내 몸을 돌렸다. 정하연은 담담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더니 뜻모를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흔들었다. 다만 그후 나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게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왜 그렇게 보시는 거죠.” “…과속 운전을 하셨군요.” “…….” “호호. 농담이에요.” 시체 가득한 곳에서 더이상 잠을 자는건 이롭지 못하다 여겨 우리들은 장소를 옮겨 못 잔 잠을 보충했다. 애들은 잠이 오지 않는다고 칭얼거렸지만 내일 활동에 지장이 없기 위해 억지로라도 자라고 얼렀다. 자장가를 불러주면 자겠다는 유정이의 머리를 기어코 한번 쥐어 박은후, 서럽게 울어재끼는 그녀를 뒤로한채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 잠자리에 들자 역시나 울음 소리는 뚝 그쳤고 곧이어 “쳇.” 이라는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음날. 그러니까 3일째 되는 날 이었다. 이미 내가 점 찍었던 장소에는 도착한 상태였다. 그리고 당연히 폐허의 연구소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라도 또 진로 결계가 있는지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지만, 이번에는 결계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직 내 범위가 닿지 않는 장소에 꽁꽁 숨어있다는 소리였다. 결국 조금 더 나아가기로 한 나는 앞으로 나뉘어진 여러 갈래길을 보고 어디로 갈지 고민하던 찰나였다. “안솔. 어디가.” 갑작스레 들린 유정의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어느새 솔이 주섬주섬 배낭을 메고 사잇길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막 멍한 얼굴로 걸음을 옮기던 솔은 이내 정신을 차린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어?” “어?는 뭐가 어?야. 어?” “아야아. 아파요오.” “그러다 길 잃으면 어떡할라고 개인 행동을 하려고 그러니.” “하우우…그게 아니라아….” 유정에게 붙잡혀 쭉쭉 늘어진 볼을 문지르던 솔은 퉁퉁거리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솔의 말은 아주 간단했다. 그말인즉슨, 그냥 아무 느낌 없이 이 길로 가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배낭을 메고 걸음을 옮겼다는것. 그녀의 말에 일행들 대부분 싱거운 웃음을 지었지만 나와 안현은 아니었다. 안현은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내게 고개를 돌렸다. “형.” “그래.” 물론 겉으로는 나 또한 이 길로 가는게 낫겠다고 생각해 솔이 택한 길로 행군을 했지만, 행운도 엄연한 능력치중 하나였다. 이미 내가 들고온 정보로는 최대한 근접하는게 다였다. 그렇다면 내 맘대로 찍는것보다는 행운 능력치 100포인트를 신뢰하는게 더 나을수도 있었다. 최소한 내 범위가 닿는 근접하게라도 가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가는 도중 전투는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딱히 다들 전투에 지치거나 한건 아니었다. 보급도 부족하지 않고, 중간에 휴식도 충분히 취하면서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랜드몰 100마리와 전투한 후 애들의 실력이 한계단 오른것 같았다. 다들 몸놀림이 점점 더 좋아지고들 있었다. 불모지를 어느정도 벗어나 이제 다시 녹빛이 물든 대지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좋아할 일들은 아니었다. 불모지는 랜드몰들만 상대하면 될 일이지만 여기서부터는 다른 몬스터들도 출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는 말 그대로 미개척 지역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지도로 따지면 미개척 지역은 훨씬 더 위로 표시 되어 있고 지금 우리가 있는 장소 또한 다른 사용자들이 왔다간 흔적들은 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왔다 갔을 뿐이지 들어간 자국만 있고, 나온 자국이 없는것들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아직 뮬이 개척된지 2개월이 채 안된만큼 이곳 또한 미개척 지역의 일부라고 봐도 무방했다. 어느새 솔이는 나와 함께 대열의 맨 선두에 있었다. 조금 불안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래도 뭐가 그리 좋은지 솔이 답지 않게 탐험중 연신 헤실거리고 있었다. 나는 갈림길이 나올때마다 솔이를 앞에 세웠고, 솔은 가만히 한쪽 방향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신상용은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이었고 정하연은 조금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안현의 안솔의 감에 대한 고찰과 애들의 목숨을 구한적도 있다는 내 보증이 들어가자 그때서야 새삼스런 눈길로 안솔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미개척 지역인만큼 온길만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면 어딜 가든지 다 똑같았다. 솔직히 나도 솔을 이런 용도로 쓸지는 몰랐지만, 만약 폐허의 연구소를 발견하게 되면 핑계거리 하나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 길을 인도한건 어디까지나 내가 아니라 솔이니까. 행운 포인트가 높다고 말은 못해도, 초심자의 운이 이어진다고 적당히 둘러댈 아주 좋은 핑계 거리였다. 해가 저물즈음,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였다. 솔직히 숲이라 부르기도 민망한게, 이미 불모지를 벗어났을 때부터 주변은 온통 녹빛 일색이었다. 현대에서는 볼 수 없는 인간의 손을 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광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입구에 뭔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물론 다른 방향으로 가는 오솔길도 보였지만 솔은 자꾸만 입구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했다. 나는 이때즘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킬 때라 여기고 재빨리 마력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순간 나는 입구에 느껴지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 숲의 입구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게 아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입구였다. 나는 흥분된 기색으로 입구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길은 잠시 후 확실히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걸었던 울퉁불퉁한 대지가 아닌 아주 조금이지만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남아 있었다. 가는 도중 오랜만에 망키 한무리와 맞딱 뜨렸지만, 통과 의례에서 질리도록 사냥한만큼 상대하는데 무리는 없었다. 애들은 오랜만에 보는 망키를 반가워하며 순식간에 처리했다. 이전에는 보통 속도로 행군을 했지만, 이번에는 빠른 걸음으로 행군을 유지했다. 그리고, 옆에서 내 손을 꼭 붙잡고 달리던 솔의 입에서 단내가 날때즈음 나는 걸음을 멈췄다. 나는 조용한 눈동자로 전방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토록 사용자들이 찾아 헤매던 폐허의 연구소가 눈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군데군데 낡고 녹슬은 부분들이 보이고 수풀들로 뒤덮여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감에도 건물은 아직도 제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폐허의 연구소는 소도시 뮬과 3일 거리에 있었다. 도대체 왜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도록 발견 되지 않았나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아까 입구에서 느꼈던 기분을 생각하고 고개를 주억였다. 그냥 단순히 숲의 입구로 보고 연구소 건물이 여기에 있을리가 없다고 여겼었다. 아마 입구에 대한 위화감이나 솔이 자꾸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일 이었다. 숲 안에 이런식으로 건물을 지어놨다니, 고대 거주민들은 확실히 대단한 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폐허의 연구소를 발견 했습니다.”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일행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행들은 눈 앞에 웅장한 위용을 드러내는 연구소를 보며 다들 할 말을 잃은 얼굴이 되었다. 특히 신상용과 정하연은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지금 상황을 곧이 곧대로 받아 들이는건 아무리 그들이라도 조금 무리가 있던 모양이다. “마…말도 안돼. 아무리 초심자의 운이라고 해도. 이, 이건….” “하. 조금…놀랍네요.” 이윽고 정신을 차린듯한 정하연은 멀뚱한 얼굴로 서있는 안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살짝 웃고는 솔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허리에 양손을 짚었다. “우리 솔이는 정말 복덩이구나.” 자신의 몸에 손이 닿았음에도 솔은 아무런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순진한 눈망울로 내게 고개를 돌렸을뿐. “저는 복덩이에요?” “암. 그렇고말고. 우리 솔이는 정말 최고다.” 그때서야 내가 칭찬을 하는걸 알았는지 솔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나는 그대로 솔이를 번쩍 안아 들고 위아래로 몇번 흔들며 비행기를 태워 주웠다. “와아. 와아.” 솔이 또한 신나는지 양 손을 번쩍 들고 조신한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그런 솔이를 잠시 바닥에 내려 놓은 후 다시 몸을 돌렸다. 뮬을 떠난지 3일째, 우리들은 폐허의 연구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후기는 아침 이후로 업데이트 하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 2013년 2월 16일 후기 업데이트 입니다. 아. 죄송합니다. 일단 후기 작성 후 바로 다음회 업데이트 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회에 적겠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작품을 추천해주신분들 고맙습니다. 읽은것도 많지만 안읽은것도 굉장히 많네요. 하하하. 요즘 읽을복이 터졌나 봅니다. 『 리리플 』 1. 쌔드 : 하하하. 1등 축하 드립니다. 굉장히 기쁜 말씀이네요. 앞으로도 더욱 알찬 내용으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2. 그로인 : 하던 일을 그만두니 조금 시간이 여유가 남습니다. 새로 일을 구하게 되면 다시 일일연재로 돌아갈지도 모릅니다. :) 3. 타락한비둘기 : 오. 생각해보니 그 포지션도 좋네요. 음식도 잘하고. 한번 고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4. 나는나일뿐 : 주인공은 고자가 아닙니다. 왜 이러세요. ㅜ.ㅠ 5. 슬피우는영혼 : 헐. 그렇게 하시면 안됩니다. 북유럽신화 연참을 학수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른 20연참을…( --). 6. Lizad : 헐. 음. 음. 음…. 도망입니다. (ㅌㅌ!) 7. GradeRown : 정답은 땅 밑에 있는 랜드몰을 잡기 위해서였습니다. 작품 추천 감사합니다. :) 8. 아마벨 : 와우. 굉장히 긴 코멘트군요. 개인적으로 한별을 좋아하시는 분이 생기셨다니 저도 참 기쁩니다. 하하하. 굉장히 많은 공을 들인 아이거든요. 그런데 너무 미움을 받은터라. ㅜ.ㅠ 다음편은 아마 30분내로 업데이트 될 예정입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 9. 압권 : 그렇죠. 그 작품 정말로 재밌죠. 저도 다음회가 언제 나오는지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하하. 10. [priest]프리스트 : 아. 쿠폰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감상 하셨다니 저 또한 기쁘네요. 다음회도 부디 즐겁게 감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바로 86회 초고 수정과 후기 작성에 들어가겠습니다. 0086 / 0933 ---------------------------------------------- 一瀉千里 아마 입구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미 폐허의 연구소에 진입한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면 지금 우리들이 서 있는 장소가 숲 안인지, 아니면 연구소를 앞두고 있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숲 안을 밀어내고 연구소를 설립한게 아닌 있는 자연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건물을 건축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폐허의 연구소는 어떻게 보면 자연 요새와 비슷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전방으로 굳게 닫힌 철문이 보인다. 일행들은 누구도 말할것없이 홀린 얼굴들로 그 철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눈에 봐도 육중해 보이는 철문을 손으로 밀고 들어가자 문에 슬어있던 녹이 우수수 떨어졌다. 더불어 끼익거리는 불쾌한 문소리가 일어났다. 대충 사람 한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만 열어두고 나는 한걸음 내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이어 나를 따라 들어온 일행들은 눈 앞에 보인 광경에 다들 숨을 멈추고 말았다. “라이트 마법이…유지 되고 있어?” “완벽하지는 않아요. 간헐적으로 깜빡이는걸 보니 거의 수명이 다한거나 다름없어요. 그보다 수현씨.” 정하연의 부연 설명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마치 병원 복도를 연상 시키는 하얗고 폭 넓은 복도. 그리고 아직도 희미한 불을 밝히는 라이트 스톤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막을 수 없는듯 전반적으로 건물 모든 부분이 심하게 낡아 있었다. 주변을 맴도는 스산한 한기에 애들은 소름이 끼치는듯 나와의 거리를 더욱 줄였다. 그때였다. “흑…흑….” 문득 들린 미약한 하나의 목소리. 조금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들린 소리였지만 분명 누군가가 낸 목소리임은 분명했다. 일행들은 조용했고, 복도는 고요했다. 나만 들은건 아닌듯 모두의 얼굴을 딱딱히 굳어 있었다. “오빠. 혹시 저번처럼….” 유정의 불안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라믹은 아니다. 전방으로 감지를 뿌리자 분명 사람의 모양새를 한 인영이 기감에 걸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뭔가 미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한동안 고민하던 나는 이내 전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계속 여기 서 있을수도 없는 노릇이고 가까이 가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내 뒤에서 옷깃을 꾹 붙잡는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졌지만 나는 선두에 서 조금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흑…흑…어요?” 복도는 끝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긴 통로 하나와 그 통로를 감싸고 있는 낡고 녹슨 벽. 앞으로 가면 갈수록 미약했던 목소리는 점점 더 명확히 들리고 있었다. “흑…흑…오셨어요?” 흑. 오셨어요. 어느정도 거리를 줄이자 나는 비로소 조금 그 단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흐느끼는 목소리, 그리고 오셨어요라는 말. 그러나 그 말에 담긴 어조는 절대로 환영하는 말이 아닌 명백한 적의를 품고 있었다. 조금 더. 조금 더. 내가 따로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행들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이미 다들 자신들의 무장을 꺼내들고 앞을 경계하는걸 보니 어지간히 겁먹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이건 심리적인데서 오는 공포감 이었다. 눈 앞 자신의 목숨을 위협 받는 물리적인 두려움이 아닌 사람의 정신을 자극하는 심리적 공포. 다들 지구에 있을때 본 공포 영화와 비슷한 상황에 처하니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드는 것이다. 물론 나는 예외였다. 1회차에 지옥의 나락까지 떨어진 경험이 있어 왠만한 귀신들이나 그로테스크한 괴물들은 그냥 애교로 보일 정도였다. 그때 지옥은 정말….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소름이 쭈볏 돋았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본 애들의 불안함은 더욱 증가하고 있었다. 나름 오해가 있는듯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착실히 목소리가 들리는 진원지와의 거리를 줄이고 있었다. 이윽고. 우리들은 드디어 목소리를 내는 형체를 흐릿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아직 거리는 좀 남았지만 간헐적으로 깜빡이는 라이트의 빛 앞에 조신히 꿇어 앉아있는 하나의 인영이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뒤에서 나를 꽉 껴안는 하나의 손길. “솔아?” “가지…마세요….” “안솔. 진정해.” 뒤에서 이상함을 느낀 안현이 얼른 나서 안솔을 다독였지만, 솔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칭얼거림이 아니었다. 그대로 놔두면 발작이라도 할 기세였다. 나는 서둘러 솔의 머리위로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대로 마력을 일으켰다. “아….” 내부로 마력을 침투시키자 딱딱하게 얼어붙은 솔의 마력들이 느껴졌다. 따뜻한 마력으로 하나씩 보듬어주고 달랜다. 이내 조금씩 반응하는걸 보며 나는 끊임없이 안솔을 진정시켰다. 그때서야 조금 안심이 됬는지 창백했던 솔의 볼에 발그레한 혈색이 조금씩 비쳤다. 하지만 아직 공포심은 남은듯 솔은 나를 안은 팔을 풀지 않고 있었다. 잠시동안 몸 안을 도는 내 마력을 음미하던 그녀는 이윽고 더듬거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엄청난 악의…그러니까…저런 맹목적인….” 솔의 말을 들은 애들은 전부 인상을 찌푸렸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그녀의 말들. 솔 또한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인지 자꾸 입을 달싹였지만 표현할 방도를 찾지 못한것 같았다. 다만 정하연만큼은 예외였다. “저 또한 똑같아요. 마법사들이나 사제는 원래 영혼이나 정신의 흐름에 민감한 편이죠. 지금 눈 앞에 어렴풋이 보이는 인영한테서는 굉장한 원망이 흘러나오고 있어요. 솔직히 저도 몸서리쳐질 정도에요.” 정하연의 설명이 이어지자 솔이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상용 또한 마찬가지였다. 안현은 멀뚱한 얼굴 이었지만 꺼림칙한 기분은 느꼈는지 알게 모르게 주저하는 발걸음들 이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가벼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봤자 홀 플레인 안의 괴물입니다. 결국 전진할 수 밖에 없어요. 모두 겁먹지 마세요. 일단 좀 더 접근해보죠.” “오라버니이….” “오, 오빠.” 유정과 솔은 애원하는 눈길로 나를 바라 보았다. 그러나 내 단호한 얼굴을 읽었는지 이윽고 체념하고 무기를 꺼내들었다. 내 몸을 안은 팔이 떨어진 후 우리들은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인영과 거리가 줄어들수록 처음 들렸던 목소리와 인영의 모습이 더욱 명확하게 보였다. 그 인영은 겉으로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얗지만 낡고 빛이 바랜 가운. 그리고 산발이 된 기다란 머리를 한 인영은 뒤돌아 꿇어 앉아 있었다. 즉 우리는 그 인영의 뒤통수를 보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어느정도 그 인영과 근접했을즈음 주변을 울리던 흐느낌이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동시에 싸늘한 정적이 우리들과 인영의 사이에 내려 앉았다. 일행은 숨소리를 죽인채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나는 한걸음 앞으로 나선 후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이 연구소와 관련이 있는 사람인가요.” “…….” 인영의 대답은 없었다. 나는 슬며시 검에 손을 얹은 후 일행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때 막 조용하던 인영의 목소리가 주변의 공기를 타고 내 귀로 들어왔다. “어떻게…오셨어요?” 막 전투에 돌입하기 직전 들린 하나의 거슬리는 목소리. 우리들은 행동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뒤에서 누군가 침을 꿀꺽 삼킨다. 나는 태연한 얼굴로 그 말에 대답했다.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말을 할 수 있다면 우리들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누군가요?” “어떻게…오셨어요?” “또다시 동문서답을 할 경우 우리들은 당신을 명백한 적으로 간주하고 그에 해당하는 행동을 할 생각입니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당신은 이 연구소와 어떤 연관이 있는 사람입니까.” 내 선전포고에 인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침묵은 너무도 을씨년스럽고 불편했다. 그리고…. “이곳에는.” “빠득!” 소리와 함께 인영의 목이 꺾이는게 보였다. “어떻게.” “빠드득!” 뼈가 뒤틀리는 소린가? 인영의 목이 절반쯤 꺾였다. “오셨어요?” “우드드득!” 소리를 마지막으로 인영의 목은 완전히 뒤틀리고 말았다. 몸은 그대로 전방을 향해 꿇어 앉아 있었지만, 그 상태 그대로 목만 180도 회전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서야 우리들은 그 인영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퀭한 눈과 안쪽으로 푹 들어간 코. 이가 다 빠져 헐렁해진 입. 말 그대로 귀신이라 부르기에 부족함 없는 몰골이었다. 그리고 그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적의가 뭉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꺄아아아악!” 그 광경에 솔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뒤에서 유정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 기척이 느껴졌다. 또한 일행들의 숨소리는 모두 거칠어진 상태였다. 다들 어지간히도 놀란것 같았다. 그런 우리들의 반응을 즐기듯 천천히 고개를 까닥이던 인영은 이내 퀭한 눈이 호선을 그림과 동시에 한번 더 입을 벌렸다. “히히히! 이곳에는 어떻게 오셨어요? 히히히! 히히히히!” “수현씨!” 발광하듯 웃는 인영을 보며 일행의 몇몇 인원은 패닉 상태가 되고 말았다. 심리적인 공포를 극복하지 못한것이다. 정하연의 다급한 외침이 들리는 순간, 간간히 복도를 비치던 라이트 스톤의 발광 현상이 더욱 심해지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캄캄한 암흑. 그리고 형광등이 깜빡이듯 중간중간 복도를 비추는 라이트 스톤들. 점멸하는 복도의 불빛에 맞춰 인영의 움직임도 시작 되었다. 라이트 스톤이 한번씩 깜빡일 때마다 몸을 일으키고, 팔다리를 늘어뜨리고, 이리저리 휘저으며 달려온다. 마치 사진을 한장씩 따로따로. 슬라이드 쇼를 보는 기분 이었다. 이윽고 내 앞으로 크게 벌린 입을 들이미는걸 보며 나는 그대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내뻗은 오른손에 무언가 날카로운게 걸리고, 그게 사람의 이빨이 아닌 동물의 이빨과 비슷하다는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일단 급한만큼 나는 그대로 손에 걸린 이빨을 잡고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껙! 께에에에에!” “라이트(Light)!” 손 끝에 무언가 뿌득 뜯어지는 느낌이 전달되고 그와 동시에 정하연의 라이트 마법이 발현 되었다. 훤히 밝아진 시야를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애들 모두 무기를 들고 나에게 달려들기 일보직전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놈들. 설마 배신인가.” 너무 경직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우스갯 소리를 던지가 그때서야 반응이 날아왔다. “어, 어? 아니에요. 분명 형한테 그 귀신이….” 막 주변으로 고개를 돌리던 안현은 이윽고 내 손에 시선을 간 후 충격 받은 얼굴이 되었다. 나는 한번 픽 웃은 후 그걸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데구르 굴러간 하나의 턱주가리는 이내 바닥에 쓰러져 자신의 입을 부여잡고 있는 인영에 닿아 멈췄다. 나를 멍한 눈길로 보는 일행을 보며 나는 어깨를 으쓱거린 후 그자리 그대로 쭈그려 앉았다. 기세 좋게 달려든 인영은 어느새 고통에 몸부림치며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게 고작 몬스터 주제에 뭘 그렇게 분위기를 잡고 등장해. 어차피 이렇게 될 거면서. 감히 우리 귀한 금동이은동이들을 놀라게 한 죄로 좀 손을 과하게 썻지만, 조금도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검붉은 핏물로 더럽혀진 손을 놈의 가운에 슥슥 닦은 후 놈을 자세히 살필 기회가 있었다. 조금 징그럽게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지옥놈들보다는 훨씬 나았다. “시에에….” 바람이 한껏 빠진, 구슬픈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건 오직 이놈에 대한 정보 단 하나뿐 이었으니까. 나는 그대로 놈의 기다란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힘없이 딸려 들어오는 괴물 귀신의 얼굴을 보며 나는 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오늘 새벽 급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새 자정이 가까워지는 바람에 아는 지인한테 업로드를 부탁했죠. 일단 소설만 올려주고, 후기는 나중에 업데이트 하겠다고 써달라고 했는데 그러겠다고 하더군요. 오늘 새벽동안 밖에 있다가 오늘 아침 9시에 들어왔습니다. 도저히 제정신이 아니라 쓰러지듯 잠들고 말았습니다. 허겁지겁 글을 쓰기는 했는데 지금도 조금 멍한 기분이네요. 일단 86회를 올린 후 간단한 샤워라도 해야 할것 같습니다. 하하하. 『 리리플 』 1. MT곰 : 1등 축하 드립니다. 아. 좋게 보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나 연베에도, 노블에도 재미있는 작품들은 무수히 많습니다. 하하하. 2. 사람인생 : 언제나 본인의 희생(?)으로 저를 유쾌하게 만들어주시는 사람인생님. 하하하. 너무 1등에 목메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동안 사람인생님이 보여준 1등에 대한 열정은 충분히 전설이라 불릴만큼 대단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은퇴하시고 후진 양성에…응? 3. zjekfksqlc : 이런. 86회 확인 후 바로 가서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진정 매의 눈을 가지신 독자 분이시군요. 감사합니다. :) 4. 니트로서 : 안솔 “이제 홀 플레인의 던전은 모두 제겁니다.” 솔과 수현이 힘을 합하면 앞으로 더욱 던전을 찾는데 수월하겠죠? 하하하. 5. 라무데 : 나름 노린 내용 이었습니다. 이로서 비비앙에게 빼앗긴 솔의 팬이 다시 돌아올지도…? 6. 타락한비둘기 : 헐. 아닙니다. 건전한…흠. 확실히 20대로 보기는 어렵나요? 하하하. 7. 휘을 : 질문 감사합니다. 너무 급한일이 생겨서요. 네. 100에서 101로 올리는데 1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101 이상으로 올릴수도 있습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 입니다. 그런 사용자가 있을수가 없지요. 수현이만 제외하고서요. :) 8. 아미슈 : 지금 후기 작성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9. 로드워시 : 실은 요즘 아청아청한것들이 너무 마음에 걸리더라구요. 흑흑. 10. 이터시온 : 흐흐. 저 또한 기대가 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87 / 0933 ---------------------------------------------- 폐허의 연구소 머리채를 잡고 들어 올리자 놈의 퀭한 시선이 나를 노려보는게 보였다. 네까짓게 노려보면 어쩔건데. 그 시선이 마음에 안들어 당장이라도 일장에 터뜨려 죽이고 싶었지만, 우선할 일들이 있었다. 내가 폐허의 연구소에 대해 모르는만큼 이놈을 통해 뽑을 수 있는 정보는 속속이 뽑을 필요가 있었다. 나는 곧바로 놈을 보며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눈 앞의 몬스터는 망자(亡者)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일반적인 망자들과는 달리 육체도, 감정도 지닌 존재들 입니다. 고대 홀 플레인이 번성했을 무렵 오만이 극에 달한 거주민들은 하나의 실험을 생각했습니다. 그건 바로 자신들이 신이 되어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에서 출발한….』 그후로 쭉 떠오르는 정보를 훓어본 후 나는 곱게 놈의 머리칼을 놓았다. 철푸덕. 땅에 닿은 놈의 머리를 보며 천천히 발을 들어 올렸다. “비비앙.” “응.” 내 부름에 비비앙은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 비비앙이 망자를 보는 시선은 무덤덤했다. 일행들중 오직 비비앙만이 던전 입구부터 지금껏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도 자신 나름대로 굴곡진 인생을 경험한 만큼 이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다. “혹시 이 연구소에 대해 기억나는거 없어? 아무거라도 좋아.” “으응….” 비비앙은 잠시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지만 이내 망자를 한번 흘끗 보고는 입을 열었다. “잘은 기억이 안나. 그런데 아무래도 실험을 당한 사람들인것 같은데?” “실험?” 내 반문에 그녀는 한두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일행들 모두는 그녀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초반 패기 넘치게 등장한 망자는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응. 예전에 한창 마법 공학은 물론이고 연금술도 어느정도 성세를 이루었던 시절이 있었거든. 그때 새로운 인간을 만든다고 연구소를 설립한다고 얼핏 들은것 같네.” “그리고?” “모름. 뭔지 모를 이유로 폐쇄되고, 묻힌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난다. 아마 지금 보이는 녀석도 그때 실험에 희생당한 불쌍한 인간중 한명일걸.” “그렇군.” 깔끔하게 말을 매듭짓는 비비앙. 나는 들어올렸던 발을 그대로 내리 찍었다. 두개골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복도는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고개를 숙여 놈을 살피자, 일격에 절명했는지 더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애들은 그냥 그런 표정들 이었다. 그러나 이런 내 모습을 처음 보는지 정하연과 신상용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항상 조용한 모습들만 보다가 과감한 행동을 하니 놀란것 같았다. 그런 반응에 아랑곳않고 나는 이번에는 솔이로 고개를 돌렸다. “안솔.” “네에….” 솔은 주눅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얼른 고개를 들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실전에 나온 이상 내가 평소랑은 달라진다는걸 알고 있었다. “신성 주문을 어느정도 연습했었지.” “속박, 보호 그리고 치료…요.” 말을 하는 솔의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홀리 스트라이킹(Holy Striking) 주문이 있다면 매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텐데. 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채 몸을 돌렸다. 솔은 무언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입을 오물거렸지만 지금은 그녀의 앵알거림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일단 더욱 내부로 진입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모를 함정이나 기습에 대비해주시구요. 1차 목표는 퇴로 확보와 현재 통로를 기반으로한 건물 탐색으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정하연씨?” “네.” “라이트 마법은 상시 유지가 가능할까요?” “가능해요. 다만 그럴경우 저는 더블 캐스팅을 사용할 수 없어요.” 질속(疾速) 영창에 더블 캐스팅이라. 마법사로서 필요한건 거의다 배운건가. 어차피 질속(疾速) 영창 하나만 있어도 충분했다. 나는 고개를 주억인 후 대형을 그대로 유지한채 걸음을 옮겼다. * “오라! 퀘리타투스! 14번 군단을 지배하는 절규의 치명자여!” “───. 콘 오브 아쿠아(Cone Of Aqua)!” 떠오른 마법진 위로 깊은 심연속 울부짖는듯한 절규 소리가 홀 안을 가득히 메운다. 이건 비비앙의 키메라 마수 소환술. 그와 동시에 바닥에 흘러넘치는 망자들의 피에서 원뿔 모양의 검붉은 물덩이들이 비죽 솟아오르는게 보였다. 정하연의 솜씨였다. 뒤에서 주구장창 마법을 쏘아대는 마법사들이 거슬렸는지 망자들은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었다. 내 방어술이 워낙 촘촘하자 결국 뒤에 몰리던 일부 망자들이 우회하는게 보였다. 나는 곧바로 목소리를 높였다. “안현. 그쪽 방향으로 망자들이 몰리고 있다. 안솔, 신상용씨. 원호를 해주세요.” “으으. 또요? 우라질! 도대체 뭐 이딴놈들이 다 있어!” “알겠습니다. 리더. ───.” 미친듯이 창을 휘두르는 안현의 고함과 신상용의 침착한 대답이 들리자 나는 곧바로 검을 옆으로 흘리듯 늘어뜨렸다. 무언가 단단한 근육을 베는 느낌이 검신을 통해 들어온다. 아마 내가 잠깐 고개를 돌린 틈을 노렸던것 같았다. “크아아아아!” 어깨를 베어 잠시 주춤하게 만드는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놈은 끈질겼다. 절반 이상 베어진 한쪽팔을 덜렁거리면서도 망자들은 끊임없이 내게 몰려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통과 의례에서 만났던 데드맨들처럼 머리를 부숴야 움직이지 못할것이다. 그러나 애들이 머리를 노리는건 무리가 있었다. 데드맨들이야 망자와 비교하면 속도가 느릿해 머리를 노리기 쉽지만 망자들은 아니었다. 인간과 비슷한 체형, 그리고 훨씬 민첩한 몸놀림으로 쉴새없이 달려드는데 틈을 노려 머리를 찌르는건 아직은 무리한 요구였다. 안현과 유정이 위치한 방진의 지형은 시시각각 밀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티고 있었다. 정하연, 신상용, 안솔, 비비앙의 모든 지원이 그 둘에게로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많은 물량을 감당하는 나는 그 누구의 원호도 없이 혼자서 많은수의 망자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검이 춤을 춘다. 신검합일의 최고 경지를 이룬만큼 검로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은 의도를 담고 있었다. 막 내게 공격을 내지른 망자의 손에 검면으로 방어한 후 슬쩍 흘린다. 이윽고 그 손은 옆에 있던 엄한 망자의 얼굴을 때리는 결과를 낳았다. 나는 멍하니 서로를 보는 둘을 사이 좋게 베어주었다. 한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두명, 세명의 망자들이 바닥에 몸을 누웠지만 그 자리는 곧장 다른 망자들이 밀려 들어왔다. 이미 나 혼자서 서른마리 넘게 눕혔는데 여지껏 줄어들 생각을 안하는걸 보자 조금 짜증은 일었다. 일전에 전투한 랜드몰 100마리의 배는 되는 숫자들과 우리들은 연구소 1층의 홀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 속박(Shackles)!” 안솔이 주문을 외치자 왼편에서 뭔가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들이 들렸다. 고개를 돌려 애들의 상황이 어떤지 보고 싶었지만 입을 쩍 벌린채 이빨을 들이미는 망자의 목구멍에 칼을 찔러 넣는게 우선 이었다. “흐응! 으으응!” 달뜬 신음 소리를 흘리는 유정의 목소리도 들렸다. 뭔가 야하다고 생각돼는 기합성 이었지만 그녀가 저런 신음들을 내뱉을때는 항상 내 기대에 만족하는 활약들을 보여주었다. 특히 이런 난전은 안현보다 유정이 제격이었다. 내 기대에 보답하듯 그녀의 신명나는 칼소리를 반주삼아 나 또한 더욱 검의 속도를 가속했다. 스컥. 스컥. 스컥. 스컥. 퉁! 퉁! 퉁! 퉁!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는 지루한 얼굴로 연신 검을 베어 들어갔다. 일격에 망자의 목이 허공을 갈라 차례대로 땅 아래로 떨어진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 내가 지닌 검술 수준이나 능력치가 너무 높아 뭘 쓰려고 해도 쓸수가 없었다. 1회차 후반부에는 정말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았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골로 가는 전투를 할때는 지루함은 커녕 스릴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런 생활에 젖은만큼 지금 겪는 전투들은 상대적으로 어린애 장난들에 불과했다. 어차피 이번 탐험을 마친 후 정비를 마치고 바로 정식 클랜 신청을 할 예정이기 때문에 더는 실력을 숨길 필요도 없었다. 0년차 사용자들이 2개월도 채 안되어 2개의 던전을 발굴, 그리고 공략했다는 사실은 이미 충분한 주목거리들 이었다. 신청 직후 바로 도시를 나가 마지막 탐험을 할 생각이다. 아마 절규의 동굴을 다녀오는 동안 승인이 나 있을것이라 예상한다. 혹시 그때까지 승인이 나지 않아도 상관 없었다. 그럴 가능성도 적고, 절규의 동굴을 실적으로 추가한다면 100% 승인 받을 자신이 있었다. 그때가 되어 또 내 자신을 숨기는건 말 그대로 찌질하고 미련한 짓이다. 뭐든지 때가 있는 법. 무작정 숨기는것 보다는 흐름을 탄 상태에서 내 실력을 드러내 클랜의 가치를 높이고 인재들이 호기심을 느끼도록 하는게 훨씬 남는 장사라고 할 수 있었다. “어…?” 잠시 딴 생각을 하는동안 내 검이 허공을 무심히 가르는게 느껴졌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조금전까지 끊임없이 달려들던 망자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게 보였다. 놈들 또한 감정을 지닌 존재들이라 두려움을 갖는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갑자기 왜…? 나는 순간 앗차하고 말았다. 하도 지루해 앞으로의 일정을 생각하며 딴생각을 하는동안, 내가 펼치는 검술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던것이다. 본래는 내가 익힌 검술을 되도록 드러내지 않고 최대한 여지를 남겨두며 싸우는걸 연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딴 생각을 하는동안 내 몸에 원래 익은 검술이 자동반사적으로 나와버렸다. 그탓에 어느새 내 앞에는 망자들의 시체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한치의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흔적들. 혹시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고개를 돌렸지만, 다행히 내 걱정은 기우였다. “후아. 비비앙 덕분에 살았다.” “흐에에….” 유정과 안솔은 식은땀을 닦으며 허공을 보고 있었다. 나 또한 그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올리자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뿜어내는 하나의 존재를 볼 수 있었다. 바로 비비앙이 소환해낸, 14군단을 지배하는 절규의 치명자였다. 10번대 군단을 지배하는 마수라 나름대로 힘 꽤나 쓰는 놈인것 같았다. 일행들은 아마 망자들이 치명자를 보고 겁에 질렸다고 생각했겠지만, 놈들의 눈빛은 대부분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아무튼 타이밍 좋게 나서준 비비앙 덕분에 나 또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전열을 정비했다. “허억. 허억. 소, 솔아. 이틈에 치료좀.” “치료? 일단 물약 먹어.” 근접전에 조금 애로사항이 있는만큼 안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안솔을 붙잡았다. 솔은 얼른 물약을 건네준 후 주문을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전투는 잠시 소강 상태로 들어섰다. 정하연은 아직 괜찮아 보였지만 그래도 수많은 마법을 난사한 만큼 얼굴에 조금 피로한 기색이 보였다. 무엇보다 콘 오브 아쿠아(Cone Of Aqua)로 망자들의 다리를 찔러 진로를 엉키게 한건 대단한 한수였다. 신상용이 싸우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유정이 다치지 않도록 잘 원호한걸 보니 그의 활약 또한 준수했으리라. 만일 이들을 만나지 못한채 애들만 데리고 이곳에 왔으면 어떻게 됬을까. 나는 실없는 상상을 하며 키득 웃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멀뚱히 보던 비비앙이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수현. 수현.” “왜.” “어떻게 해?” 그녀는 허공으로 손가락을 올렸다. 그녀 또한 지금 망자들을 단숨에 쓸어버릴 수 있는 실력자. 처음 도시를 나갈때 나는 그녀에게 미리 언질을 주었다. 함부로 나서지 말고 애들이 어느정도 실력을 쌓을 수 있도록 배려하라는것. 그리고 정 힘들다고 판단 되면 그때서야 본 실력을 행사하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이번에 그녀가 내린 판단은 나와는 조금 다른것 같았다. 나는 아직 조금 더 해볼만하다고 여겼는데…. 그러나 일단 소환한 상태로 다시 돌려보내는것도 뭐하니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내 화답에 비비앙은 밝은 얼굴이 되었다. 아마 자신도 긴가민가 했던 모양이다. 이윽고 그녀는 사늘한 미소를 띄우며 자신의 소환수를 향해 명령했다. “뭐해? 퀘리타투스. 전부 쓸어버려. 한마리도 남기지 말고.” 비비앙의 명령에 대답하듯 퀘리타투스는 온몸을 울리는 절규를 내뱉었다. 곧이어 주변에 어둑한 안개를 내뿜는 퀘리타투스를 나는 흥미롭게 구경했다. 1회차에 나오지 않은 직업인 만큼 많은 관심이 있었다. 어떻게 잘만 키우면, 키메라 연금술사 두명이면 그 강력한 시크릿 클래스인 정령 소환사와 쌍벽을 이룰지도 모른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는 동안 망자들의 구슬픈 비명 소리는 홀 안을 가득히 퍼졌다. 이제 애들도 어느정도 적응이 되었는지 잔인한 광경에 눈쌀을 찌푸리지 않았다. 오히려 호전성이 강한 안현은 간간히 소환수를 응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퀘리타투스가 남은 망자들을 쓸어버린건 채 2분도 걸리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오늘 하루는 왜 이렇게 피곤한지요. 아무래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몸이 예전만 못한것 같습니다. 하루 종일 뻐근하네요. 다음 부터는 절대로 새벽에 나가지 말아야 겠습니다. 아. 85회 후기 새로 업데이트 했습니다. 리리플도 새로 등록 했습니다. 당시 밖에 있던 상태라 차마 지인한테 리리플까지 적어달라 할 엄두는 못 내겠더라구요. 하하하. 『 리리플 』 1. 사람인생 : 1등 축하 드립니다. 여기 힐을 빙자(?)한 리리플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얼른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 2. 스야17 : 저도 가끔 깜짝 놀라곤 한답니다. 분명 올리고 바로 클릭했는데 코멘트들이 우루루. 헐? 3. dddfaaaf : 오. 쓰면서 많은 고민을 했는데 다행히 잘 와닿은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 4. 라티인형 : 네. 현재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을 고차원적 사고로 통찰하는 만큼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맹이의 정보도 얻어낼 수 있지요. 하하하. 5. GradeRown : 홀 플레인에는 실제로 지옥이라는 지하 공간이 존재 합니다. 그리고 1회차에 주인공은 모종의 사정으로 그 지옥에 뚝 떨어진 적이 있었죠. 그 지옥에서 다시 기어 올라온 독한 놈입니다. 우리 수현이는 말이죠. 후후. 6. 천지패황 : 그렇지요. 귀신이 운이 없었습니다. 하필 덤벼도 수현이한테…. ㅜ.ㅠ 7. 액면가 :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알찬 내용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쿠폰 감사합니다.(__) 8. 3d33d : 부작보다는, 600회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글쎄요. 따지고보면 1부작을 600회로 예상하는 만큼 2부작이 나올 가능성이 있을까요? 하하하.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렵니다. 9. 아미슈 : 그렇지요. 아래턱을 잡고 그대로 잡아 뜯어버린 겁니다. 귀신 입장에서는 날벼락 입니다. ㅜ.ㅠ 10. 이런남자이니까 : 네. 부디 이번회도 재미있게 보고 가시기를 바랍니다. 코멘트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88 / 0933 ---------------------------------------------- 폐허의 연구소 그렇게 한바탕 전투를 치르고 난 후 나는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조금 이른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이번 한번의 전투로 애들의 체력이 너무나 소모된 상태였다. 내 결정에 유정은 반색하며 바로 엉덩이를 내렸다가, 이내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으…끔찍해.” 현재 우리들 주변은 망자들의 시체가 한가득 깔려 있었다. 나는 괜찮아도 아직 비위가 약한 유정이나 솔은 얼른 다른 장소로 이동하고 싶어했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 나는 망자들이 나온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도 놈들이 복작거린 곳이라 조금 꺼림칙하게 여길지 몰라도 어쨌든 시체 투성이 장소보다는 나았다. 뭔가 실험실과 비슷한 풍경을 기대했지만 방의 내부는 내 기대를 빗나갔다. 내부 공간은 생각보다 협소했다. 어떻게 이렇게 작은 공간에서 저리 많은 망자들이 나왔는지 의문감이 들 정도였다. 낡아 부서진 침대들과 책장등이 보인다. 하나하나도 사소하게 놓칠 수 없었다. 일행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나는 방 곳곳을 둘러보며 뭔가 정보를 얻을거리를 탐색했다. 애들은 가만히 앉아 있고 나 혼자만 둘러보자 가만히 한숨을 내쉰 정하연은 내 행동에 동참했다. 신상용 또한 일어나는걸 보며 애들도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는걸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제 3의 눈으로 대부분 탐색을 마친 뒤였다. “리더. 혹시 뭐라도 얻은게 있나요?” 신상용은 눈을 반짝이며 내게 물었다. 확실히 뭔가 흥미로운게 나오면 더듬거리는 말투가 사라졌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요. 샅샅이 뒤져봤는데 썩 볼만한건 없네요.” 나는 말을 마친 뒤 30골드 가량의 금화와 고대 문자로 쓰인 기록서 하나를 보여주었다. “에…고작 30골드? 너무한다.” 안현의 불만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전 힘든 전투를 마친뒤고, 예전에 공터에서 고블린들과의 전투로 짭짤한 수익을 얻을때와 비교한것 같았다. 유정이와 솔이도 마찬가지였는지 실망한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신상용은 달랐다. “좋군요. 방 하나를 탐색하고 30골드라. 하하하. 아. 기록서는 잠시 저에게 보여주시겠습니까? 제가 고대어 해독 능력이 있거든요.” “물론입니다.” 역시 쓸만하군. 순순히 기록서를 넘기자 그는 먼지가 잔뜩 쌓인 안경을 추어 올리며 기록서를 해독했다. 그의 고대어 해독 능력 랭크는 D-지만, 그정도만 해도 나름 괜찮은 랭크였다.(어디까지나 일반 사용자 기준에서 말이다.) 차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멍한 얼굴로 육포를 우물거리자 그동안 해독을 마쳤는지 그는 다시 기록서를 돌려주었다. 나는 씹고 있던 육포를 꿀꺽 삼킨 후 입을 열었다. “뭐 알아낸 사실이라도 있나요? 중요한 정보라던가.” “으음. 아니요. 그런 내용은 없었습니다. 해독한 기록서는 일기 형식입니다. 아무래도 지금 우리들이 있는 방은 당시 한명의 거주민이 사용하던 방인것 같습니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습니다. 다만…이상하게 창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오더군요. 오늘은 창을 수련하지 못했다, 실패작들을 창으로 처리했다등등. 그런데 도통 연구소와의 연관성을 찾기는 힘이 듭니다.” “창이요?” 실패작이라. 안현이 자신의 창을 들어올리며 반문하자 신상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대답을 들은 나는 머리속으로 떠오르는 한 생각에 눈에 이채를 띄웠다. 단순히 창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왠지 기공창술사와 연관된 단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직 확실한건 없다. 하지만 가능성에 불과해도 이왕 들어온 던전 샅샅이 탐색하는것도 나쁘지 않았다. 기록서의 탐독을 시작으로 나와 신상용은 서로 연구소에 대한 얘기들을 나누었다. 일행들은 쉬면서 얘기를 들었는데 정하연도 신상용의 말을 그저 듣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전투 능력은 더 앞서지만 이런 던전 탐색 분야는 신상용이 더 뛰어난 모양이었다. “제 생각은 그래요. 건물 외관으로 보면 연구소는 최소 3층으로 이루어져 있을겁니다. 그리고 1층은 어느정도의 크기를 가진지 짐작 못하겠지만 방금전 홀을 중앙으로 가정한다면 동서남북 네방향으로 길이 터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단 우리들이 들어온 방향은 제외하고, 나머지 방향 어딘가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겠죠.” “네. 흠. 아무래도…빠르게 위층으로 올라가는것 보다는 1층을 완벽히 클리어하고 2층을 노려보는게 낫겠습니다.” 기공창술사가 어디 잠들어 있을지 모르니까.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을 알리 없는 신상용은 일단 안전하게 가겠다는 내 말에 크게 고개를 주억였다. “옳으신 선택입니다. 지금 있는 1층도 공략은 못해도 하루가 걸릴겁니다. 생각보다 규모가 큼직해요. 그리고 2층에는 1층보다 더 지독한 놈들이 있을수도 있구요.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 최소한의 안전 지대는 확보하고 올라가는게 더 나을겁니다.” 신상용은 말을 할때 최소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사람들일 경우 무의식적으로 계획을 세울때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다. 자기들 나름대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그에 따른 대비책을 세우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조금 답답할지 몰라도 확실히 생존에는 도움이 되는 습관들 이었다. 연구소를 하루만에 클리어하기 어렵다는 말에 애들은 울상을 지었다. 특히 이곳에서 잠을 잘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안솔은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기색을 눈치챈 신상용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니면 1층을 먼저 클리어하고 도시로 돌아가는 방법도 있습니다. 정비후 다시 2층을 공략하는 방법이 안전성은 최고입니다. 물론 조금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지만요.” 그의 말에 나는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나와 비비앙 둘만 있으면 장담컨데 반나절. 아니 6시간도 걸리지 않아 이곳을 점령할 자신이 있었다. 돌아가는건 어불성설. 신상용도 아직 할만하다고 생각하는지 딱히 불만스런 얼굴은 아니었다. 한층씩 완벽하게 클리어 하고, 다음층으로 올라가는것. 그리고 몇일동안 머무르더라도 한번에 끝까지 공략 후 도시로 돌아가는것. 일행들 또한 묵묵히 듣는 동안 아무도 반대 의사를 직접적으로 표시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정하연이 건네주는 물 한병을 받으며 연구소 초기 탐험 목표를 매듭지었다. 원래 휴식은 5분에서 10분으로 제한두지만 이번은 대휴식 이었다. 초반 전투가 너무 격렬해 완전하게 회복한 후 다시 탐험을 나설 생각이었다. 그렇게 다들 침묵하며 보급품을 먹던 도중. 고요히 눈을 감고 있던 정하연이 눈을 조금씩 뜨는게 보였다. 그녀의 시선은 나를 향한 상태였다. 나 또한 그녀를 마주 응시하며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를 보던 도중 정하연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수현씨.” “네.” “궁금한게 있어요.” “네.” “수현씨는 정말로 0년차 사용자인가요?” “네.” 내 간단한 대답들에 정하연의 고요한 얼굴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린 그녀는 고운 눈가를 살짝 흘겼다. 원래는 다른 사람이 저런 표정을 지으면 조금 짜증이 나는데, 정하연이 하니 왠지 모를 품위가 느껴지는 고상한 행동이라고 느껴졌다. “미안해요. 하지만 할 말은 하고 싶어요. 이런 말들을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도…눈으로 봐도 믿을 수 없어요. 방금전 괴물들은 솔직히 0년차 사용자가 혼자서 커버칠 수준이 아니었어요.” 그녀의 말투는 의심보다는 놀라움의 비중이 더욱 컸다. 그러나 아무튼 내가 단독으로 전방의 망자들을 방어한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듯 싶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전처럼 두근거리거나 어떻게 속이지 연기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차피 실력은 점차 드러낼 예정이었고 여기서 괜히 말을 더듬기라도 하면 그편이 더 의심을 살 확률이 높았다. “그런가요? 별 어려움은 없었는데요.” “도대체 어떻게 전투하신거에요?” “간단합니다. 놈들의 저한테 가지는 이점은 고작 수적 우위였습니다. 그 우위를 살릴 방법은 서로 잘 맞춘 합동진이나 차륜전 입니다. 그런데 무작정 밀고 들어오기만 하더군요. 그렇다면 놈들의 공격을 받아치고, 흘리고, 이용하는식으로. 즉 방어에 전념하는 방법으로 전투하면 됩니다.” “…그게 말처럼 쉬운가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혹시 현대에서 검을 배운적 있으신가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배운적은 있습니다만 그거랑은 별 상관이 없다고 봅니다. 그냥 눈 앞의 상황을 이해하고 머리속으로 생각하는 최적의 해답을 떠올립니다. 그걸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면 그만이거든요.” “수현씨는 천재였군요.” “글쎄요.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한적은 없습니다. 그저 노력만 했습니다.” “후후. 리, 리더가 대단한건 맞습니다. 그리고 하연씨도 그만하세요. 리더가 강해 나쁠건 없잖아요. 그리고 0년차 사용자는 사용자 아카데미에 알아보면 바로 알 수 있고, 무엇보다 옆에 일행들도 있잖습니까.” 신상용의 중재에 정하연은 핫 하는 얼굴이 되더니 바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말을 잇다 보니 따지고 드는 형식이 되었네요. 기분 많이 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만큼 수현씨의 능력이 너무 놀라웠거든요.” “천재라는 말에 속이 조금 상하긴 했습니다. 일단은 넘어 가겠습니다. 그러나 다음부터는. 제 노력으로 이뤄낸 결과를 개인의 잣대로 함부로 평가하지 말아주세요.” 내 말에 정하연은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내 말에 뼈가 담긴만큼 그녀를 겨냥한 말임을 알아 들은것이다. “흠흠.” 역시나 애들이 이 심도 깊은 대화를 알아 들을리 없었다. 혹시 모르지. 김한별이 있었으면 알아 듣고 아마 쌍으로 쏘아 붙였을지. 그러나 내 칭찬이 들리자 유정을 비롯한 애들의 목이 빳빳해지고 허리를 곧게 세우는게 보였다. 아니. 칭찬 받는건 난데 왜 자기들이 우쭐 하는거지? 그런 내 생각에 아랑곳않고 유정이 가슴을 쭉 피며 입을 열었다. 그 행동으로 봉긋이 솟은 가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자 신상용은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가끔 헛기침을 하는걸 보니 저 양반 동정인게 분명했다. “호호. 언니. 우리 오빠가 얼~마나 대단한데. 그거 알아? 언니도 사용자 아카데미 같은거 다 했지?” “그럼. 당연하지.” “우리 오빠가 바로 해당 기수 1등이라구. 전체 1등. 클랜에 속한 교관들이 얼마나 오빠를 영입하려고 애썼는지 알아? 나중에는 오빠 숙소 담당 교관을 여성 사용자로 바꿨다니까? 걔가 오빠한테 알랑거리는거 보고 얼마나 웃겼는지.” “어머. 그러니? 그정도나 했어?” 유정이 흥분된 어조로 자랑을 늘어놓자 정하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확실히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1등을 했다는 타이틀은 나름대로 쓸만한 타이틀 이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안솔도 유정의 말을 거들었다. “네에. 맞아요. 그 유명한 황금 사자 클랜에서도 두번이나 오라버니한테 오퍼를 넣었어요. 흠흠.” “화, 황금 사자요? 후와. 거기는 왠만하면 신규 사용자들 한테 오퍼를 넣지 않을텐데요.” “헤헤. 우리 오라버니는 최고니까요.” 그만해. 민망하다고. “그런데 왜 황금 사자 클랜을 거절하신 거죠? 아. 정말 궁금해서 그래요. 다른 뜻은 없어요.” 신상용의 감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하연의 질문이 날아 들어왔다. 그녀 또한 황금 사자 클랜이라는 말에 납득이 가는듯 고개를 주억였지만 다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어조로 물어왔다. 그러나 이번에도 대답한건 내가 아닌 안현이었다. 아니. 내가 말할 기회를 달라고 좀. “우리를 때문이에요. 형과 저희들은 통과 의례때부터 같이 행동해 왔거든요. 우리들은 그 클랜에 오퍼를 받지 못했고, 형 혼자만 받았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저희들이 형의 발목을 잡은 셈이라 항상 미안하긴 해요.” “아니요. 안 미안해해도 돼요. 잘하셨어요.” “?” 갑자기 뜻모를 소리를 지껄이는 정하연의 얼굴로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그녀는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한듯 조금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안현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저희들만 남겨두고 혼자 가기는 마음에 걸리셨나 봐요. 솔이 말대로 졸업식날 다시 온 황금 사자 클랜의 오퍼를 우리들이 보는 앞에서 거절했죠.” “난 그때 울뻔 했다니까. 생각해보면 오빠는 통과 의례때부터 뭔가 좀 달랐던것 같아.” “그렇지. 아마 수현이 형 아니었으면 그때 거기를 통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휴우.” 그때서야 정하연은 새삼스런 눈동자로 나를 돌아 보았다. 안현과 유정이 내 얼굴에 금칠은 해주고 있었지만 듣기 좋은말도 한두번 이었다. 그게 끝을 보이지 않자 조금씩 민망한 기분이 내 전신을 엄습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헛기침을 하고는 휴식을 종료한다고 선언했다. 대충 쉴만큼 쉬었고 경직된 분위기도 풀었으니 다시 탐험에 나설 때였다. 어느정도 규모가 있는 연구소인 만큼 바쁘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방을 나선 뒤 일행들은 다시금 조용해졌다. 수북이 흐트러진 망자들을 밟으며 우리들은 조금 더 내부로 진입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오늘도 연참입니다. 아. 왠지 연참이 이제 일상이 되버린듯한 기분이 드네요. 이 모든게 다 여러분들이 주신 원동력 덕분 입니다. 하하하. 오늘 정하연에 대한 복선이 하나 나왔군요. 혹시라도 찾으신 독자분이 있다면 매의 눈이실 겁니다. :) 『 리리플 』 1. 사람인생 : 에. 뭔가 적으신 글을 보고 워킹 데드가 보고 싶어 졌습니다. 왜 그런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1등 축하 드립니다. :) 2. 이러저런한폐인 : 흑흑흑흑. 상처 받았어요. 상처 받기 있긔. 엉엉. 3. 크리아센 : 빙고. 거기서 가져온게 많습니다. 물론 스스로 만든것도 있지요. 4. 달빛이슬 : ㅋㅋㅋㅋ 정공을 질렸네요. ㅋㅋㅋㅋ 실은 저도 요즘 1등을 누가 하실지 은근히 기대가 된답니다. 5. 휘을 : 네. 66군단 전부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 군단의 지배자만 소환할수도 있고, 특성 군단 전체를 소환할수도 있습니다. 본인의 마력만 가능하다면요. 그리고 정령소환사가 이그니스와 계약한 경우, 다른 사람이 이그니사와 계약하는건 불가능 합니다. 애초에 소환에 응하지도 않을겁니다. 하하하. 6. 파카사리 : 냠. 7. GradeRown : 실은…폐허의 연구소를 끝낸 후 솔이의 읏흥앗흥 씬이 하나 계획중에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후후후. ( --) 8. hohokoya1 : 쿠폰 감사합니다. 하하하. 클랜 이름은 클랜의 성격과 생각해보시면 정답이 나오실 겁니다. 크크. 9. 슬피우는영혼 : 아. 식물이 뭔지 하다가 성장 아이템을 말씀하시는 거였군요. 언제 12레벨이 됬는지 저도 깜짝 놀랐답니다. 요즘은 저녀석 보는 재미도 있는것 같습니다. :) 10. Qhthal : 저번에 클랜 이름을 대대적으로 한번 공모한적 있습니다. 그때 많은 좋은 클랜 이름들을 추천해주셨죠. 저도 작명해보긴 했는데, 천상천하 클랜 이런거밖에 생각을 못해서요. 오글오글…. ㅜ.ㅠ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89 / 0933 ---------------------------------------------- 폐허의 연구소 2층으로 곧바로 길을 뚫는게 아닌 1층을 완벽하게 클리어링한 후 올라간다. 공략 속도를 올리는것도 좋지만 신상용이 읽어준 고대 기록 후 마음을 바꾸었다. 기공창술사를 찾을 수 있다면 2, 3일이 아니라 2, 3달을 투자해도 절대로 아깝지 않았다. 솔직히 조금 회의적인 생각도 들었다. 불과 얼마전 키메라 연금술사를 찾았는데 또 나올까. 내가 너무 욕심을 바라는건 아닐까. 시크릿, 레어 클래스라는것들이 이렇게 술술 내 생각대로 나올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한 기대감을 품은 이유는, 지금의 나는 한 상승세를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사람의 인생이라는게 그렇다. 1회차에서도 떨어질때는 정말 한없이 떨어진다. 실제로 지옥의 가장 최하층으로 떨어진 경험도 있다. 그러나. 내려갈때는 나락까지 내려가도. 그런만큼 올라갈때는 또 꼭대기 끝까지, 한없이 올라간다. 지금의 나는 위로 올라가는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 상승세가 언제까지 이어질줄은 모른다. 그래도 유지 되는 동안 최대한 이 흐름을 활용하고, 기대고 싶었다. 홀의 중앙에서 나는 제 3의 눈을 다시 활성화 시켰다. 참 요긴하게도 써먹는다. “리더. 먼저 어떤 방향으로 가실 건가요.” 어디로 먼저 갈지 결정하라는 건가. 각 방향으로 감지와 제 3의 눈을 혼합해 탐지한다. 신상용의 말대로 홀은 1층 구조의 중앙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걸어 들어온 복도 방향을 제외하면 총 3방향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연구소인 만큼 중간에 걸리는 것들은 무수히 많았다. 그러나 그중 들어갈만한 방, 또는 공간으로 볼 수 있는것들은 몇개 되지 않았다. 서방향 6개와 계단 하나, 북방향 4개. 그리고 동방향은 1개와 계단 하나. 계단들은 2층으로 통하는 층계라는걸 짐작할 수 있었다. “일단 이쪽 방향부터 먼저 가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서쪽으로 난 통로로 발길을 돌렸다. 매도 먼저 맞는게 낫다. 들를 장소가 가장 많은 서쪽부터 공략하는게 나을듯 싶었다. 몸이 힘든 상태들 이라면 동방향 먼저 갔겠지만 지금 우리들의 체력은 휴식으로 다시 차오른 상태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현재 일행의 선두는 내가 선 상태. 선두는 원래 캐러밴의 대장과 레인저가 서는게 원칙이지만 레인저가 없는 관계로 나 홀로 서고 있었다. 다음에 영입할 사용자는 궁수중 한명이기를 바라며 나는 일행들을 이끌었다. 선두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불시에 올지도 모르는 기습을 대비하고 또 어느 방향으로 일행들을 이끄는지에 따라 캐러밴을 흥할수도, 또는 망하게 할수도 있다. 레인저가 없는 우리들은 원래 신상용이나 정하연이 서는게 맞지만 마법사를 선두에 세울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그동안 레인저보다 훨씬 뛰어난 내 선도를 따른 결과 그들은 나를 선두로 세우는데 불만을 갖지 않았다.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복도로 길을 따라 걸었다. 걸음 속도는 보통. 연구소는 언뜻 보면 복잡한 구조를 가진것 같지만, 들어갈 방과 들어가지 않을 방을 구분할 수 있다면 꽤나 단순한 구조였다. 처음 들어왔을때 복도에 한명 있는걸 제외하면 다른 복도에는 어떤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그말인즉슨 방, 또는 공간만 조심하면 된다는 소리였다. 물론 2층과 3층이 1층과 똑같다는 보증은 없기에 이런 생각들은 1층 한정이었다. 잠시후. 우리들은 첫번째 공간을 발견했다. 내 감지에 걸린 서쪽 통로 기준 맨 바깥쪽에 있는 공간이었다. 남쪽으로 오면서 볼 수 있었던 방은 일반 병원의 병실 같은 느낌을 풍겼는데, 이번 공간은 그와는 정반대의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굳게 닫힌 철문과 벽면에는 아직도 희미하게 남은 검붉은 핏자국들이 뭍어 있었다. 그리고 이 안에는…무언가 살아 숨 쉬는 기척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도대체 뭘까. 뭐길래 이 오랜 시간동안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걸까. 나는 철문 앞에 걸음을 멈춘채로 일행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홀의 중앙으로 오기전. 방문 하나를 열었을때 갑작스럽게 놈들이 쏟아져 나와 다들 당황하셨을 겁니다.” 나는 말을 멈추고 유정을 응시했다. “응? 이건 뭐야?”라고 한 후 문을 벌컥 연 주범인 유정은 고개를 숙였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찬 후 말을 이었다. “지금 이 방 안에는 그렇게 많은 기척이 느껴지는건 아닙니다. 하지만 아까처럼 무작정 뒤로 후퇴하는것 보다는 일단 문을 두고 전투하는게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놈 또한 지금 우리들의 기척을 알고 있는것 같으니 문을 열어도 절대로 방심하시면 안됩니다.” 일행들의 얼굴에 긴장된 낯빛이 서렸다. 각자 나름의 준비들을 하는걸 지켜본 후 나는 문 앞으로 다가섰다. “제가 문을 열도록 하겠습니다. 문을 열자마자 바로 공격이 올수도 있습니다. 솔이는 바로 속박 마법을 날리고, 마법사 두분은 놈의 활동을 제한하는 마법을 안으로 넣어 주세요. 그리고 현이랑 유정이는 현재 대형에서 조금 더 전진 배치 하고. 혹시 모르니 측면 경계도 소홀히 하면 안돼.” 대답은 없다. 다만 모두 조용히 내 오더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한마디 말을 덧붙인 후. “어떤놈이 있든 문을 두고 싸우면 우리가 유리합니다. 그럼….” 그대로 철문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뒤에서 유정의 “제발 아무도 없는 빈 방 이었으면 좋겠다.”와 안현의 “형이 있다고 했잖아.”라고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손아귀에 손잡이가 잡히고 나는 끙 하고 힘을 주었다. 원래 혼자서는 열지 못할만큼 육중한 철문이지만 내 근력 능력치에 비할바는 아니었다. 끄르릉. 오래동안 닫혀 있던 문이라 억지로 열자 굳어 있던 기관들이 억지로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더 힘을 줘 한번에 문을 여는 순간, 뭔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기분 나쁜 냄새가 전신을 덮쳐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크아아아앙!” 거대한 주먹 하나가 내 몸을 노리고 들어왔다. 그러나 우리라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속박(Shackle)!” 솔의 주문이 터지고 하얀 빛이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게 보였다. 시기 적절한 타이밍에 들어와 속으로 나이스를 외쳤지만 이어지는 광경은 절대로 나이스가 아니었다. “크으…아아!” 잠시간 멈칫했던 팔은 이윽고 꿈틀거리더니, 솔의 속박 주문을 무시하고 다시 내게로 주먹을 날렸다. 하. 마력 능력치가 80이 넘는 주문에 저항했다고? 놀라운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 검집을 들어 놈의 공격을 방어한다. “수현씨 위험…!” 퍼억! 우당탕탕. 쿵쾅. “케렉! 켈렉! 켈렉!” 힘이 좋은데? 근력의 전부를 끌어온건 아니지만 그래도 놈의 공격을 받은 나는 반 발자국 물러나고 말았다. 그러나 일전에 통과 의례에서 보스 몬스터를 상대로 한번 선보였던 기술을 나는 다시 꺼내들었다. 사량발천근(넉냥의 힘으로 천근을 다룬다.)의 원리에 기초한 나만의 기술. 몸 내부로 들어온 놈의 충격과 내 자신의 근력을 합해 그대로 놈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러자 놈의 오른손이 충격으로 터지는것과 함께 그대로 뒤로 날아가는걸 볼 수 있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발랑 넘어진 놈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거인이군.” “거, 거인을 실제로 보는건 처, 처음입니다.” 방 안에 자신의 손을 부여잡고 있는 놈은 다름 아닌 거인이었다. 5미터가 넘는 키는 가히 장관으로 볼 수 있지만 온전한 거인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몸의 중간중간에 여러 기관 장치와 아티팩트들을 주렁이 매달고 있었다. 아니 이식이라고 봐야 옳을까. 일단 왜 솔의 주문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선천적으로 홀 플레인의 거인들의 몸에 흐르는 피는 강한 마법 저항력을 갖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저항을 넘어서 반사까지 됬어야 정상이지만 눈에 보일만큼 많이 약화된 상태라 그정도까지 가지는 않은것 같다. 눈에 보이는 기관이나 아티팩트를 달음으로 수명은 조금 늘어났지만 시간이 지남으로서 거인의 특성은 약해졌다는 추론을 할 수 있었다. “크르릉…크르릉…후욱, 후욱.” “다들 정신 차리고. 거인이지만 현재 많이 약화된 상태 입니다. 하지만 마법 저항력은 아직 살아 있는듯 하니 마법사 분들과 솔이는 잠시 뒤로 물러나 주세요.” “음…직접적인 도움은 힘들어도, 간접적인 도움은 가능해요.”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유정, 키퍼를. 안현, 비비앙은 내 뒤로.” “형. 서포트요?” “응.” 유정이 아닌 자신이 선택 받자 안현은 나는듯 달려왔다. 비비앙은 연금술사지만 내가 왜 불렀는지 이해하고 바로 내 옆으로 다가왔다. 순식간에 다시 진형을 변경하는 일행들을 보며 나는 다시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거인은 마침 남은 한쪽 팔로 땅을 짚고 일어서고 있었다. 거인의 눈동자와 내 시선이 마주친다. 이 거인도 거주민들의 실험에 당한 한명의 희생양일 것이다. 놈의 눈동자는 숨길 수 없는 적의가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내가 놈을 실험한것도 아니기에 미안함이나 죄책감은 없었다. 거인들은 원래 강력한 종족 특성을 갖고 있다. 실제로 1회차때, 거인들의 수장은 거의 반신으로 불린 놈 이었다. 하지만 천성이 우직하고 순박한 감이 있어 동료로 만들면 꽤나 믿을만한 존재들 이었다. 그렇다고, 눈 앞의 놈을 동료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뒤에서 비비앙이 주문을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모습을 봤는지 거인의 얼굴에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훙. 소리와 함께 놈의 남은 왼팔이 날아오는게 보였다. 본래 갖고 있던 선천적인 근력은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고 있는 거인들의 일격과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이 휘두른 주먹에는 강맹한 위력이 담겨 있었다. 고개를 살짝 뒤로 빼자 놈의 주먹이 허공을 가른다. 그러나 그대로 그 주먹을 놓아주기에는 너무나 아까웠다. 왼손으로 검을 들어 검면을 놈의 주먹에 슬쩍 닿도록 조정했다. 그리고 내가 의도한대로 내 검면과 놈의 주먹이 닿은순간 나는 그대로 마력을 일으켰다. 어디 맛좀 봐라. 이어진 광경은 모두의 탄성을 사기에 충분했다. 나는 1회차 시절 최상위 사용자들에 비해 모자라는 근력과 마력을 보완하기 위해 하나의 검술을 연구했다. 검술의 요체는 태극(太極)에 기초를 둔다. 패도적인 힘과 끊음이 아닌 부드러움과 흘림을 기반으로 삼는다. 거인의 손과 내 검면이 닿아 있을 뿐인데, 내 검이 움직이는 대로 놈의 팔은 이끌려 다니고 있었다. 당연히 놈은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린다. 왼쪽으로 쭉 뺐다가, 오른쪽으로 다시 꺾는다. 마치 고양이한테 실을 보여주고 이리저리 흔드는것과 마찬가지인 모양새. 5미터가 넘는 거구가 한낱 애완동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칠 안현이 아니었다. “하앗!” 힘찬 기합성과 함께 안현은 기다란 창을 내질렀다. 거인의 몸이 흔들리자 일단 타격을 주겠다는 생각으로 몸통을 향해 지른것 같았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명색이 거인의 본능은 남아 있는지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거인은 몸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정확의 창 끝을 보고 자유로운 오른팔의 팔목으로 창대를 후려쳤다. “어엇…!” 그 힘에 안현의 몸은 아래로 기우뚱 기울어지고 말았다. 마력을 힘껏 담았는지 둘의 충돌에 커다란 소음이 났지만, 안현의 공격은 너무 직로를 타고 있었다. 차라리 사각을 노리는게 더 나았을텐데. 그와 동시에 거인이 한번 용을 쓰더니 손과 내 검이 연결하고 있던 마력이 뚝 끊어진걸 느꼈다. 나는 눈에 이채를 띄웠다. 뭐 애초에 가볍게 놀 생각으로 한거라 아쉬움은 없었다. 그리고 나와 안현의 놀음(?)으로 이미 비비앙이 주문을 외울 시간은 충분히 벌어준 상태였다. 그런 내 기대에 화답하듯, 비비앙의 낭랑한 주문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오라! 임프리손! 49군단을 지배하는 강철의 구속자여!” 이제는 익숙한 마법진이 떠오르고 그리고 희뿌연 연기가 방 안에 흘러나온다. 이윽고 비비앙의 소환에 대답하는듯 마법진이 밝게 발동하기 시작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무작정 달려들던 거인은 본능적으로 우리와 거리를 벌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도중. 뒤에서 나를 부르는 비비앙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수현. 이번에 부른 임프리손은 보조 위주로 명령하겠어. 너와 현이 치명타를 먹여줘.” “놈을 구속할 생각인가? 거인의 피는 만만치 않을텐데.” “흥. 내 마수들은 직접 강화한 키메라 마수들이라고. 두고봐. 누구의 힘이 더 강한지 보여주겠어.” “기대하지.” 나와 비비앙은 여유롭게 대화를 주고 받았다. 특히 그녀는 내 말에 넘칠듯한 자신감을 드러내며 미소를 보일 정도였다. 임프리손. 이번엔 어떤 능력을 보여줄지 많은 기대가 되었다. 처음 공격이 실패한게 분한지, 옆에서 현이 창을 꼬나 쥐는걸 보며 나 또한 자세를 잡았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어느새 2월달도 중순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참 시간은 빠른것 같네요. 예전에 독자분들이 추천해주신 작품 참 재미나게 읽고 있습니다. 원래 소설 보는걸 좋아하는지라 참 주옥 같은 작품들이 많다고 느꼈습니다. 오늘은 제가 한 작품을 추천 드리겠습니다. 제가 노블레스에서 하루에 한번씩 꼭 확인하는 작품들이 있습니다.(그중 하나가 노쓰우드님의 아름다운 세계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노쓰우드님의 새로 신작을 연재 하셨더군요. 작품명은 내가 이능력자다 입니다. 1회부터 읽는데 참 시간 가는줄 모르고 봤습니다. 나중에 가서는 한줄한줄 읽는게 아까워질 정도 였습니다. 혹시 수많은 작품들 속 진주를 찾고 계신 독자분들이 계시다면 노쓰우드님의 내가 이능력자다 추천합니다. :) 그리고…오늘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이 엄청 들어 왔습니다. 부족한 작품을 항상 응원해주시는 독자분들에게 진심어린 감사의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꾸벅.(__) 『 리리플 』 1. lDl : 오호. 처음 뵙습니다. 처음 뵙는데 1등을 하셨네요.(이걸 진 로열로더라고 하던가요? 하하하.) 1등 축하 드립니다. :) 2. 애니재니 : 아. 고맙습니다. 부디 이번회도 즐겁게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애니재니님도 편안한 밤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3. 당룡 : 후후. 고맙습니다. 앞으로 거침 없는 주인공의 행보를 보실 수 있을겁니다. 4. RainBows : 해당 답글은 88회 코멘트에 달아둔 상태 입니다. 한번 확인해보시고, 그래도 납득이 가지 않으신다면 예전 연재분을 훓어 보시거나 저한테 쪽지를 주시면 답장 드리겠습니다. 5. 라무데 : 후후. 과연 구할 수 있을까요? 앞으로의 전개를 기대해주세요! 6. 타락한비둘기 : 하하하. 감사합니다. 일을 그만둔 상태라 요즘은 시간이 상당히 여유로운 편입니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저도 연참을 이어나가고 싶네요. :) 7. 악마신전 : 아. 고맙습니다. 보니까 악마 신전님도 거의 초창기부터 제 소설에 코멘트를 달아 주셨더라구요. 지금껏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 드립니다! 8. 꼬야 : 하하하. 어떻게 보면 정하연의 말이 맞는것도 있습니다. 수현이가 워낙 뻔뻔하게 나갔고, 그리고 정하연도 충분히 수재로 불릴만한 수준입니다. 다만 1회차에 워낙 고생했던 수현이라 알게 모르게 울컥하는 마음이 있었나 봅니다. 9. 휘을 : 음. 그렇게 되면 너무도 높은 능력치에 오히려 조절을 못할지도 모릅니다. 뭐, 수련을 하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현재 수현이가 능력치를 올리지 않은 이유는 아직도 고민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크크. 10. 마동포 : 네. 나름 야하다고 생각되는 내용들은 나올 예정입니다.(물론 지금도 좀 나왔다고 생각은 하고 있어요. 원혜연, 이지영, 정지연 등등.) 지금은 도저히 주인공이 정사를 벌일 정도로 한가한 편이 아니라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주인공은 절대 고자가 아니에요. 엉엉.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90 / 0933 ---------------------------------------------- 폐허의 연구소 곧이어 마법진 위로 임프리손이 비죽 떠오르기 시작했다. 외양은 볼품 없었다. 예전에 정령 소환사가 소환하던 정령들은 멋진 놈들도 많았지만, 비비앙이 소환하는 마수들은 솔직히 징그러운 것들이 많았다. 물론 성능은 인정하지만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란 말도 있잖은가. 비쩍 마른 몸에 온 몸에 쇠사슬로 보이는것을 칭칭 감고 있었는데, 이마 위로는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눈알 하나가 보였다. 삼각모로 솟아오른 머리 모양은 왠지 모르게 혐오감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아군인만큼 담담히 보기로 했다. 비비앙은 자랑스러운 눈길로 자신의 소환수 임프리손을 보고는 바로 명령을 내렸다. “임프리손? 앞에 보이는 놈의 양팔을 구속해버려. 49군단의 지배자의 위엄을 여기 있는 모두들에게 마음껏 보여주렴.” “━━━━.” 임프리손의 입이 살짝 열리고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들이 흘러 나왔다. 오직 비비앙의 말에 복종의 의사를 표하는 대답을 했다고 추정할 뿐. 49군단을 지배하는 임프리손은 일전에 소환한 14군단 퀘리타투스보다 조금 떨어지기는 해도 자신의 능력을 유감 없이 보여주었다. 차르릉! 차르릉! 임프리손의 몸을 감고 있던 쇠사슬이 풀린다. 이윽고 그 쇠사슬들은 알 수 없는 기운들을 발산하며 가열차게 거인을 향해 달려 들었다. 거인은 달려드는 쇠사슬들을 보며 몸을 웅크렸지만, 좁은 공간 큰 덩치를 가진 이상 작정하고 달려드는 사슬을 피하는 일이란 요원했다. 나는 그 틈을 타 안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안현.” “예!” 군기가 바짝 든 안현의 대답에 나는 슬며시 웃었다. 표정을 살피니 방금전 공격의 실패로 혹시 내가 실망하지는 않았을까 안절부절한 얼굴이었다. 저기 멀리서 키퍼를 하고 있는 유정의 얼굴에 뭔가 모를 고소함이 떠오른걸 보니 더욱 확신이 들었다. 나는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비비앙의 임프리손이 구속을 마치면 내가 앞으로 나가 놈의 움직임을 원천봉쇄 할거다. 너는 그 틈을타 옆이든 뒤든 창을 깊게 찔러 넣어. 여러번 찌를 필요 없다. 단 한번이면 돼. 무슨 말인지 알아 듣겠지?” “이번에는 꼭…기대에 부응 하겠습니다.” 이를 까득 깨물고 창 끝으로 마나를 모으는 안현을 확인한 후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임프리손의 쇠사슬은 거인의 두 팔에 쇠사슬을 한가득 감는 중 이었다. “크르릉! 크르르릉!” 거인은 어떻게든 저항하려고 했지만 오른손을 터진 상태고 남은 한손으로는 단단히 감아드는 쇠사슬을 벗길리 만무했다. 이미 두 팔에 완벽히 감긴 사슬들을 보며 놈은 구슬피 울부짖었다. 그리고 비비앙의 신호가 떨어지는 순간 나는 힘껏 발돋움했다. 아래쪽으로 들어가면 발로 걷어 차일 수 있다. 상처 입은 짐승은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르니 조심하는게 좋았다. 허공으로 떠오른 나는 검을 최대한 뒤로 뽑았다. 그리고 아래로 하강하고 거인의 몸이 다가오는 순간. 거인의 양 팔이 강제로 뒤로 들리고 그에 따라 놈은 더욱 내게 가슴을 들이 미었다. 비비앙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서포트에 충분히 보답할 요량이었다. 푹. 그대로 팔을 내밀어 가슴 정중앙에 검을 찔렀다. 거인의 피부는 질긴편 이지만 검술 전문가의 권능을 가진 나에 비할바는 아니었다. 내부로 검이 쑥 들어간걸 느낀 후 나는 아직 남은, 하강하는 힘 그대로 크게 아래로 베었다. 썩은 통나무를 도끼질 하는 느낌이 검신을 타고 손으로 들어온다. “크라라라라라라라!” “안현! 끝내!” “하압!” 어느새 뒤로 돌아갔는지 일격필살의 자세로 창을 뒤로 길게 빼고 있는 안현의 모습이 보였다. 내 외침과 동시에 현은 그대로 울부짖는 거인의 목을 향해 창을 질렀다. 어찌나 마력을 가득 담았는지 공기를 찢는 파공음이 방 안을 울릴 정도였다. “크으! 크으으! 크으으으!” 오랜 시간을 갇혀 있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가는게 아쉬운지 거인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분한가보다. 그러나 내 알바는 아니었고 안현의 창질에는 조금의 자비심도 들어 있지 않았다. 시원스럽게 날아간 창 끝은 거인의 뒷목을 세게 가격 했다. “끅…끄르르….” 퍽! 파각! 부서지는 소리. 동시에 거인의 목이 뚫린다. 아니, 뚫린 정도가 아니라 부서졌다고 보는게 옳을까. 입에서 피거품을 잔뜩 쏟아낸 거인은 원통하다는 눈길로 주변을 훓고는 그대로, 천천히 몸을 허물어 뜨렸다. 말 그대로 거인의 최후였다. “후훗. 잘했어, 임프리손. 이제 그만 돌아가.” 비비앙은 신나는 얼굴로 임프리손을 역소환시킨 후 내게 뜻모를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누가 뭐라해도 이번 전투의 1등 공신은 비비앙 이었다. 아마 두 팔을 구속하지 않았다면 안현은 뒤로 접근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내 쓰다듬에 비비앙은 몸을 배배꼬며 뻐기는 미소를 흘렸다. 그래도. 마지막 일격은 나름 괜찮았기에 안현의 칭찬도 잊지 않았다. “안현. 마지막 일격은 좋았다. 수고했다.” “후…. 아직도 심장이 뛰네요. 고맙습니다.” 안현은 내 칭찬에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비로소 웃음지었다. 이번 전투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 신상용과 정하연은 미안한 얼굴이었다. 솔은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는데 안도하고 있었고, 유정은 안현을 보며 낑알댔지만 그냥 무시했다. 다음에 유정한테도 기회를 주면 될 일 이었다. 최소한 오늘 안으로 1층 전부를 돌아볼 생각이었기 때문에 빠르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안을 샅샅이 탐색했지만 이번에는 단 하나도 건진건 없었다. 그렇게 우리들은 싸늘하게 식어가는 거인의 시체를 뒤로한채 방문을 나섰다. “으으. 덩치는 산만해서 완전 개털이잖아. 연구소가 뭐 이래!” 유정이 투덜대는 소리가 들리고 안솔은 조금 눈살을 찌푸렸지만, 나는 속으로 흡족했다. 저런 말을 하는건 드디어 홀 플레인의 생리를 깨닫기 시작했다는 반증이었다. 아직도 생명은 중요하다, 함부로 죽이면 안된다 헛소리를 지껄이면 아마 나도 애들을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들은 서서히 변해가고 있었다. 이제는 눈 앞에서 생명이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만큼. “하긴…그동안 공들인게 얼만데 이정도도 해주지 못하면 곤란하지.” 나는 잠시 혼잣말을 중얼거린 후 대형의 선두로 걸음을 옮겼다. 방금전 격렬한 전투의 여운이 남아 있는지 안현의 숨소리는 아직도 거칠었다. “그럼. 다시 진입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지막한 음성으로 모두에게 말한 후 나는 라이트 빛이 깜빡이는 복도의 그늘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직 들를 방은 5개나 남아 있었다. * “흐아. 5번 연속으로 꽝이라니. 정말 슬프다.” “힘내렴. 조금이라도 건진건 있잖니. 비록 10골드도 채 안되는 돈 이지만….” 뒤에서 유정의 불평에 정하연이 달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씁쓸한 그녀의 음성을 보니 그녀 또한 조금 힘이 빠지는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녀들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그저 묵묵히 앞으로 걸었다. 탐험도 하다보면 재밌는 탐험이 있다. 금화를 많이 발견하고, 여러 마법 무장등 기연들을 발견하는 탐험. 그런 탐험들이 재밌는 탐험들이다. 그런 탐험들은 하면 할수록 더욱더 힘이 난다. “다음에는 뭐가 더 있을까?”라는 기대를 자연스럽게 하게 되니까. 그러나 지금 우리들의 상황은 정반대였다. 하면 할수록 전투로 힘만 빠지고 얻은건 전무했다. 물론 보상을 얻기는 했다. 그동안 거쳐왔던 방을 싹싹 긁어서 얻은 결과물이 바로 소량의 금화였다. 지금껏 거친 전투에 비하면 말 그대로 초라한 보상이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보면, 처음 거인의 있던 방을 포함 무려 5개의 방을 열었지만 얻은 결과는 영 아니올시다였다. 오히려 5개 방중 4개의 방에 몬스터들이 있었고, 다들 만만치 않은 놈들이었다. 1번째 방은 거인, 2번째 방은 망자, 3번째 방은 머드 골렘, 4번째 방은 비어 있었고, 5번째 방은 다시 망자들이 나왔다. 전투는 전투대로 하고 그 와중 얻은건 10골드도 되지 않는 금화 뿐. 물론 나와 비비앙이 있는 이상 죽을만큼 힘든 전투들은 없었지만 그래도 힘이 빠지는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제 서쪽 방향 마지막인 6번째 방을 앞두고 있었다. 이번 방은 전 방들과는 달리 철문이 아닌 나무로 만들어진 문을 갖고 있었다. 앞선 방들과 다른점은 문만이 아니었다. 다른 방문들 앞에서면 안에 무언가 스산한 한기가 흘러나오거나 기척이 느껴지는데 마지막 방은 그냥 평범함 그 자체였다. “여기는 무슨 청소 도구함을 모아 놓은곳 같은데요….” 안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녀석 또한 음성이 살짝 날이선게 불만이 아주 없지는 않는것 같았다. 한술 더 떠, 비비앙도 안현의 말에 뾰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칫. 척 봐도 그냥 창고 같아. 수현. 후딱 열고 빨리 다른데로 가자.” 나는 잠시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알게 모르게 피로함이 차올라 있었다. 그동안 반복된 전투에 다시 몸이 지치는 모양이다. 나는 오직 홀로 조용하게 나를 응시하는 솔을 바라본 후 표정을 굳혔다. 일단 이번 방을 마지막으로 휴식을 취할 생각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짚고 넘어갈건 넘어가야 했다. “다들 정신차려요. 문 앞에 있지 않습니까. 자세들 잡으세요…지금 다들 뭐하시는 겁니까.” 내 일갈에 막 투덜거리던 안현과 비비앙이 찔끔한 얼굴로 물러났다. 세상에. 아무리 성과가 안좋다고 해도 문을 앞두고 있는데. 대책없이 열었다가 막 몰려 나오면 어쩌려고 저러는 거지? 일행들은 그런 내 기색을 읽었는지 각자 무장들을 들며 전방을 경계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그대로 나무로 만들어진 문을 발로 뻥 차버렸다. 철문들과는 달리 부담없이 문이 열렸다. 다행히, 1번째 방에 있었던 거인처럼 열자마자 공격이 날아드는 일은 없었다. 나는 잠시 안을 감지한 후 걸리는 반응들이 없자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흠. 나오는 놈들은 없군요. 그런데 너무 어두운데요.” “─. 라이트(Light)!” 정하연은 곧바로 라이트 마법을 시전했다. 이윽고 밝게 떠오른 구체 하나가 생성되고 두둥실 안으로 들어가는걸 볼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내밀어 안을 더욱 자세히 살폈다. “음…?” 라이트 구체가 들어가 방 안을 밝히자 내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나는 반쯤 뽑았던 칼을 거두고 그대로 다시 집어 넣었다. 막 방 안으로 들어선 나는 눈에 보이는것들을 몇발자국 남긴채 멈추고 말았다. 뒤에서 일행들이 허둥지둥 따라오는게 느껴졌다. 그리고. “우와…!” “와~아.” “오오! 대, 대단합니다!” 일행들 모두의 탄성이 동시에 들려왔다. 내 뒤를 따라 온 일행들은 어느새 나와 같이 서 눈 앞에 보이는것들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방 안은 확실히 창고라 부를만했다. 20평 남짓한방에 그 어떤 가구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놀라운건, 바닥에 이리저리 흐트러진 병장기들 때문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중간중간 반짝이는것들도 보이는게 금화나 보석들도 있는것 같았다. 애들의 얼굴에 순식간에 화색이 도는게 보이자 나는 잔잔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곳은 유사시를 대비해 무기들을 모아논 창고 같습니다.” “그러네요. 그런데 이 무기들은 고대에 만들어진 무기들이 아닌가요? 만약 정말로 고대 무기들이라면….” 정하연도 짜릿한 미소를 지으며 흥분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확실히 번성했던 시절의 고대 무기들이라면 단순히 마나의 효율을 돕는게 아닌 조금 더 직접적인. 예를들어 능력치를 올려주는 무구들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무구들은 정말 드물지만 있기는 있었다. “오…오빠.” 유정이 애원하는 어조로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손을 꼼지락거리는게 어지간히 애가 타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의 기대에 부응해 한번 고개를 주억였다. “일단 쓸만한 것들을 모아 보자고. 혹시 모르니 한명은 문 밖에서 키퍼를 봐주세요.” “에….” 내 말이 끝나자 서로가 얼굴을 돌아보며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가. 다들 이 과정을 놓치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군. 애들의 생각을 알아차린 나는 쓰게 웃었다. 그래도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문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아. 그, 그건 제가 하겠습니다. 리더는 가만히 계십시오.” 신상용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그가 손을 든채 밝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괜찮습니다. 보니까 마법사용 무구들도 몇개 보이는데요.” “아, 아니요. 어차피 저는 탐험에서 얻는 이득들을 받지 못, 못합니다. 그러니 저야말로 괜찮습니다. 제가 망을 보, 보겠습니다.” 이윽고 말을 마친 신상용은 내가 말리기도 전 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나는 그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아무래도 우리 일행들의 분위기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괜한 일로 분란이 일어나는건 보기 싫으니 그런것들은 자신이 대신 하겠다는 건가. 물론 자신도 참가하고 싶을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 좋은 얼굴로 자진해서 빠졌다. 열심히 문 밖을 경계하는 그를 보며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계속 저런 모습을 보여준다면 뭐라도 좀 챙겨주고 싶은게 인지상정 이었다. 그를 잠시간 응시한 후 나는 이내 다시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신상용을 제외한 일행들 모두는 한창 보물 찾기 삼매경 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내가 이능력자다를 어제 추천해 드렸는데 많은 분들이 재밌다고 느끼신것 같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노블 순위를 보고 깜짝 놀랐다죠. 많은 분들이 재밌게 읽으신것 같아 뭔가 모를 뿌듯함도 드네요. 하하하. 저 또한 여러분들이 추천해 주신 작품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 『 리리플 』 1. 사람인생 : 헐. 중간의 “...”들을 보니 뭔가 다시 워킹 데드가 보고 싶어 졌습니다. 하하하. 아무튼 1등 축하 드립니다. 저는 절대로 때리지 않습니다. 해치지 않아요. ^^* 2. zjekfksqlc : 푸하하하. 안솔 빙의란 말에서 웃었습니다. 저는 데드맨들이 생각 났는데 어떻게 보면 안솔로 볼 수도 있겠군요. 아. 완벽한 안솔이 되려면 꼭 뒷말을 늘여야 합니다. “~해요오.” 이렇게 말이죠. 크크크크. 3. GradeRown : 오 그거 참 좋은 생각 이시로군…흠흠. 아.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험험. 4. 은설란 : 아. 그렇군요. H한 내용도 함부로 보면 안될것 같습니다. 아. 그래도 전개상 필요한 내용은 있으니 나올 예정입니다. 무분별하게 나오지는 않겠지만요. 하하하. 5. 샤인나르 : 음. 아마 뮬을 떠난 후 그래도 몇번 보시게 될 겁니다. 지금 주변 몬스터들이나 애들은 솔직히 너무 약해요.(물론 주인공에 비해서 입니다.) 6. 착한몸매 : 음. 용병, 그리스 로마 신화, 북유럽신화, 아름다운 세계, 내가 이능력자다 등등. 베스트만 봐도 요즘 재밌는 작품들이 정말 많습니다. 하하하. 7. 휘을 : 네! 정말 재밌게 읽은 작품들 입니다. 즐거운 감상 하세요. :) 8. hohokoya1 : ㅎㅎㅎ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오늘은 조금 일찍 한편 더 올립니다. 아. 오늘 밤에 약속이 있는데 자정에 무리없이 올리려면 미리 한편 더 써놔야 겠군요. ㅜ.ㅠ 9. 노쓰우드 : 헉. 아닙니다. 저는 추천만 해드렸을 뿐 판단하고, 선, 추, 코를 넣으시는 분들은 독자분들 이신걸요. 아마 노쓰우드님의 작품이 독자분들이 재밌다고 판단하신게 틀림 없습니다. 하하하. 10. 블랙템플러 : 하하. 언제나 초반부는 리메이크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진도를 빼고 있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욱 안정된 내용을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91 / 0933 ---------------------------------------------- 대박, 대박. 그리고 또 대박. “…왠지 모르게 다 낡은것들 같아.” “그러게.” 유정과 안현의 실망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킨채로 무기를 하나씩 짚어내고 있었다. 시간이 오래 흐른만큼 흐트러진 무기들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들이 태반이었다. 그리고 애들의 무기는 얼마전에 맞춘만큼 지금 보는것들이 상대적으로 조금 없어 보이는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것들중에서도 강력한 마법의 힘을 품고 있는 물건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자신의 형상을 유지하기 마련이다. 애들이 대충 보고 휙 던지는것도 다시 주워 하나씩 꼼꼼하게 살피고 있었다. “오빠아. 이게 뭐에요?” 솔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번개 같이 고개를 돌렸다. 행운 100 포인트의 안솔이 골라낸 물건이라면 무언가 범상치 않을거라는 기분이 들었다. 애들 또한 그렇게 느꼈는지 다들 동시에 솔이로 시선을 돌렸다. 모두의 시선이 모이자 솔은 찔끔한 얼굴로 한발자국 물러났다. “왜?” “이거요….” 솔이 내민 물품은 다름 아닌 팔찌였다. 잔뜩 녹이 슬었지만 내 기감에도 걸리는게 있었기에 나는 바로 받아 들었다. 잠시 팔찌를 받고 이리저리 살핀 나는 정하연을 바라 보았다. “하연씨. 혹시 복원(Restore) 주문 사용 가능 하신가요?” “복원 마법이요? 그럼요. 그런데 말 그대로 겉모양과 내부 기능 복원만 가능하지 내구도나 기타 부분은 자신 없어요.” “그건 대장장이들이 할 일이죠. 그정도면 충분해요.” “그럼 이리 주세요.” 이윽고 내가 정하연에게 팔찌를 건네자 심드렁한 애들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새 참지를 못하고 안현이 내게 물었다. “형. 저 팔찌가 뭔데요?” “아직은 몰라. 복원 마법을 걸고 다시 한번 보려고.” 물론 제 3의 눈으로 본 이상 대충 뭔지 감은 온 상태였다. 그리고 이미 안현을 주려고 마음도 먹었고. 복원 마법을 부탁한건 저대로 쓰기에는 조금 뭐한감이 있어 최대한 녹이라도 떨구려고 한 부탁이었다. 정하연은 팔찌를 든채 가만히 주문을 외웠다. 그 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팔찌의 중앙을 가볍게 톡 건드리자, 팔찌 전체가 밝은 빛에 휩싸이는걸 볼 수 있었다. 곧이어 모든 빛이 사라진 후 녹이 우수수 떨어진 팔찌의 표면이 드러났다. 원형을 복구한 팔찌는 은은한 달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확인한 정하연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이거 설마….” “후후. 솔이가 한건 했네요.” 애들은 모두 궁금한 얼굴들 이었다. 정하연은 잠시 팔찌를 들고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부럽다는 표정 한가득으로 내게 돌려주었다. “축하해요. 마나 활용율이 일반 강철보다 훨씬 높아요. 제 추측이기는 하지만…아마도 미스릴이 소량 포함된것 같아요. 즉 본인이 이용하기에 따라 마력을 쫓는 용도로 사용할수도 있겠죠.” “미스릴? 언니 그거 좋은거야?” 유정의 끼어듬에 정하연은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 미스릴은 굉장히 드물게 발견 되는 광물이거든. 일반 강철보다 가볍고, 강도가 단단함은 물론이고. 음…마나 활용율이 대단히 높아.” “비싸?” “…부르는게 값일걸.” 나는 고리에 손가락을 끼운 후 그대로 팔찌를 한바퀴 빙글 돌렸다. 정확히는 미스릴이 5.7% 포함된 팔찌였다. 장착한 사용자의 능력치를 올려주는건 없지만, 그래도 장비하는 것만으로도 마나 활용율을 높일 수 있다. 지금 우리들이 장착하고 있는 그 어떤 장비들보다도 높은 효율을 가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나는 어느새 침을 줄줄 흘리는 안현에게 팔찌를 건넸다. “차봐.” “네, 네? 아니에요 형. 이건 저보다 형이….” “그래? 그럼 그러지 뭐.” 안현의 거절에 나는 쿨하게 팔찌를 다시 거두었다. 그러자 안현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하고, 시선은 끝없이 팔찌를 쫓는걸 볼 수 있었다. 나는 한번 킥 웃은 후 다시 그에게 팔찌를 건네 주었다. “농담. 아무튼 맘에 없는 소리 하지도 말고. 너 안쓰면 유정이한테 준다?” 그 말에 안현은 냉큼 팔찌를 받아 갔다. 일행들의 부러운 눈길속에 안현이 팔찌를 차자, 저절로 그의 팔목에 맞춰 조정 되는걸 볼 수 있었다. 오호. 자동 조절 기능도 있던가. “…어때?” “으음.” 안현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더니 손가락으로 자신의 팔찌를 톡톡 두드렸다. “아직 잘 모르겠지만…몸에 활기가 도는것 같아요. 마나의 흐름 속도도 한층 빨라진것 같구요.” 그정도면 충분하다. 안현은 신기한지 탐색을 멈추고 계속 자신의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우리들은 그런 그를 놔두고 다시 탐색을 시작했다. 안솔 덕분에 한걸 올린 애들은 방금보다 더욱더 열심히 물품을 뒤지는 모습을 보였다. 솔이마저 사방에 널린 물품들을 보며 입맛을 다실 정도였다. 초반에는 이것저것 던지던 애들은 이번에는 정반대로 뭔가 좀 있다 싶으면 꼭 하나씩 내게 갖고와 들이밀었다. 그러나 행운이 낮아서 그런지 아니면 안목이 없어서 그러지 몰라도 애들이 보여주는건 다 고철 덩어리들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도 들이밀길래 결국 짜증을 내고서야 애들은 얌전하게 변했다. 일단 괜찮다 싶은건 모아놓고 나중에 한꺼번에 확인할 생각 이었다. 아무튼 이번 탐험에 오기전 큰 맘 먹고 장비를 마련해서 그런지 장갑 종류중에서는 쓸만한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하다 못해 가슴 보호대나 갑판, 방패등은 지금 애들이 장비하고 있는게 더 나아 보였다. 조금 시간이 걸릴것 같자 나는 아예 여기서 대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주변에 한번 크게 감지를 돌린 후,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신상용을 불렀다. 신상용은 예의상 한두번 거절했지만 내가 계속 오라고 하자 쪼르르 달려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말은 안했지만 어지간히 자기도 참가하고 싶었던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들은 장장 30분간 필요한 물품들을 골라내었다. “휴. 대충 이정도인가.” “언니. 빨리 빨리.” “얘는. 잠시만 기다리렴.” 잠시 후 우리들은 고철 덩어리들은 저기 멀리 던져 놓고 그나마 괜찮은 것들만 중앙에 모아 주위에 둘러 앉았다. 정하연은 물품 하나씩 일일이 복원 마법을 걸고 있었다. 그녀가 복원을 진행하는 동안 나는 먼저 금화와 보석을 계산했다. 일단 돈은 10골드짜리 금화 32개, 1골드짜리 58개로 준수한 성과를 보여주었다. 금화만 총 378골드였다. 보석은 알이 굵은 놈들로 총 8개가 있었는데, 전부 다 루비였다. 하나당 최소 100골드는 족히 나갈 놈들이었다. 정식 클랜으로 신청하기 위해서는 돈이 많이 필요했는데, 비비앙이 준 보석 주머니를 건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애들은 전부 몽롱한 눈동자로 금화와 보석들을 바라 보았다. 그동안의 고생을 한꺼번에 보상해주는 물품들 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정하연이 숨을 몰아쉬는게 보였다. 막 복원 마법을 끝냈는지 아련한 눈길로 물품들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단검 하나, 망토 하나, 반지가 두개 있었다. 총 네개. 안현이 찬 팔찌까지 포함하면 무려 5개나 건진것이다. 나는 재빨리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고 그와 동시에 정하연의 입이 열렸다.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축하한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먼저 단검은 한자루에 불과하지만 아마 착용자의 공격 속도를 올려주는 마법이 걸려 있는것 같아요. 음…그런데 아무래도 전투에 사용하기는 적합하지 않네요. 그냥 장식용적인 의미가 더 강해요.” 그녀가 단검을 들어올렸다. 스틸레토(칼날이 가늘고 예리한 송곳 모양의 단검을 말한다.) 단검과 많이 닮아 있었는데 솔직히 전투에 적합해 보이지는 않았다. 암살자들이 사용하는거면 모를까…. “언니. 좋은거야?” “따지고 보면 이것도 귀한거야. 이런 영구적인 특수 능력이 걸려 있는 무기들은 아무데서나 구할 수 있는게 아니거든.” “아….” 유정은 단박에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담담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뭐.” “아~아!” 차마 그 초롱이는 눈망울을 외면하지 못해,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유정은 흡사 매가 먹이를 낚아채는 속도로 단검을 가져갔다. 내가 마련해준 단검보다 검신의 길이는 훨씬 짧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퍽 만족한 얼굴로 단검을 품에 챙겼다. 정하연은 이번에는 망토를 가리킨 후 입을 열었다. “이 망토는 겉보기에는 빛이 바랜 평범한 망토처럼 보이지만, 마법 저항 마법이 걸려 있는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정도의 수준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아마 도시로 돌아가서 감정을 해봐야 알것 같아요.” “음. 그정도만 해도 충분합니다.” 정하연에게서 망토를 받아든 나는 이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 망토는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망토였다. 염화 계열의 마법을 방어할 수 있는 특성 망토 였다. 아마 블록 오브 파이어(Block Of Fire)라고 불렀던가. 아무튼 데미지로 계산하면 일정 수준의 마법을 방어하고 설마 초과하는 마법 데미지가 들어 오더라도 4할의 데미지를 경감시킬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겉보기에는 그냥 면으로 만들어진 망토로 보이지만, 물리 저항 마법도 면 전체에 걸려 있어 일반 천보다 훨씬 튼튼함을 자랑했다. 저정도면 엄청 싸게 산다고 해도 600골드는 줘야 살 수 있는 물품이었다. 이 망토는 아무래도…. “비비앙.” “와아. 고마워.” 신나서 망토를 받아 몸에 두르는 비비앙을 보여 정하연은 시샘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이내 순식간에 표정을 정리한 후 남은 반지 두개를 집어 손바닥 위에 올려 놓았다. “이 두개의 반지는 아마 지금껏 나온 물품들중 가장 좋다고 평가해요. 이것들은 정말….” 정하연은 두개의 반지를 보고는 잠시 말을 멈췄다.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옆에서 신상용이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내가 원하는 반지가 하나 나온것이다. 다만, 아쉽게도 그 반지는 내게 아무런 효과도 없는것 이었다. 정하연은 내가 점찍은 반지 하나를 보더니 이내 내게 시선을 돌렸다. “수현씨. 이 반지를 한번 껴보시겠어요? 확신은 못하지만 아마 이 반지는 마력 능력치를 올려줄지도 몰라요. 어떤 마법적 이능력도 느껴지지 않지만, 제 손에 들리자 제 몸의 마력이 저절로 반응을 하고 있거든요. 이런 경우는 저도 듣기만 하고 실제로 겪는건 처음이에요.” 순간 모여 있는 일행 전부가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애들도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들어 알겠지만 능력치를 올려주는 물품들은 말 그대로 부르는게 값 이었다. 나는 정하연이 내미는 반지를 순순히 받아 들었다. 그리고 살짝 껴보았다. 이후 바로 사용자 정보를 확인했지만 예상대로 마력 능력치의 상승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쉬움의 한숨을 내뱉었다. 이 반지는 분명히 능력치를 올려준다. 그러나 전에 얻은 비비앙의 핵처럼, 마력이 90 이하의 사용자들 에게만 해당되는 일 이었다. 그리고 귀속 기능이 있었다. 좀 얄궃은 일은 만약에 내가 마력이 89인 상태고 저 반지를 꼈다면 90으로 올랐을 것이다. 그후 마력 능력치가 성장해 90을 넘긴다고 해도 이미 귀속된 반지는 여전히 해당 사용자의 마력 능력치를 올려준다. 그러나 이미 마력 능력치가 96에 해당하는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였다. 나는 아쉬운 한숨을 내쉬고 반지를 손에서 해제했다. 반지의 사용 자격에 해당되지 않는만큼 귀속 됬을 염려는 없었다. “수현씨…?” “솔아. 이리와.” 정하연의 의문에 찬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솔을 불렀다. 안솔은 가만히 구경만 하다가 내가 부르자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이내 종종 걸음으로 내 옆에 달라 붙었다. “이거는 네가 쓰는게 낫겠다.” “에…?” 모두들 놀란 얼굴로 나를 응시하는게 보였다. 그 뚫어질듯한 시선들에 그저 어깨만 으쓱였다. “수현씨. 확실하지 않아 한가지 말을 하지 않은게 있는데 반지에 귀속 기능이 있을지도 몰라요. 잘 선택하세요. 이대로 양보하실지, 아니면….” 알고 있었던가. 그러나 이미 주기로 마음 먹은 이상 거칠것은 없었다. 나는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습니다. 마력 능력치가 중요한 클래스가 사용하는게 더 낫겠죠.” “…지금 그걸 팔면 못해도 2만 골드는 받을 수 있어요.” “돈은 충분합니다. 그보다 솔이가 사용하는게 더 나을겁니다. 솔아. 얼른 끼워.” “오…오라버니….” “우와…. 리더.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 옆에서 신상용의 감탄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정하연도 뭔가 새삼스러운 눈길로 나를 보고 있었다. 원래 탐험 캐러밴의 원칙상 가장 좋은 물건은 대장이 가지게 되어 있다. 그게 캐러밴의 암묵적인 룰 이었다. 그러나 내가 능력치를 포기하면서까지 솔이에게 인도하자 뭔가 다르게 본 모양이었다. 실상은 내게 쓸모가 없어서 그냥 준거지만 이런 긍정적인 오해는 그냥 오해하도록 내버려두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오라버니이…몰라요오. 그냥 오라버니가…. 못 끼우겠어요….” 2만 골드라는 말을 듣자 솔은 부담스러운지 반지를 보며 전전긍긍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한손으로는 솔이의 왼손을, 그리고 나머지 손으로는 들고 있던 반지를 들이미었다. “휴. 손가락 이리내. 애기도 아니고. 언제 철들래.” 솔이는 자꾸만 손을 빼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욱 강하게 붙잡았다. 여리고 여린 손가락을 강제로 피려고 하자 그때서야 솔은 왼손 약지를 살짝 내밀었다. “여기에 끼면 돼?” 솔의 대답은 없었다. 그저 시선을 다른데로 돌리고 한두번 고개를 끄덕였을 뿐. 이윽고 작고 하얀 손가락에 반지가 들어가자 현이 팔찌를 장착했을 때처럼 반지도 자동으로 조정되는걸 볼 수 있었다. 곧이어 사용자 정보를 확인한 솔은 마력 능력치가 1포인트 올랐다고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일행들의 탄성이 방 안을 뒤흔들었다. 다들 그녀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럼 반지는 해결했고. 나머지는….” 나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솔이는 왠지 모르게 평소보다 터질것 같은 붉은 얼굴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 시선을 회피하려고 용을 쓰고 있었다. 설마 커플들끼리나 혹은 결혼할때 하는 비슷한 행위를 했다고 이러는건가? 귀엽다는 생각을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이 행동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불러 일으킬지는, 나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오늘 편의점에 갔는데 소세지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군대 시절이 생각나서(이쑤시개로 겉면을 쭉 긋고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는 소세지 입니다. 아실분들은 아실겁니다.) 하나 사고 집에 와서 돌려 먹었는데, 맛있더라구요. 배고파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하하하. Ps. 독자분 한분께서(긔염xxx님) 성장템을 선물로 보내 주셨네요. 요긴하게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__) 더불어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신분들 모두 진심어린 감사의 말을 드립니다. 꾸벅. 『 리리플 』 1. 조창현 : 오옷. 1등 코멘트 에서는 처음 뵙는 분이군요. 1등 축하 드립니다. 오늘 하루만에 다 보셨다니 ㅎㄷㄷ 하네요. 앞으로도 많은 기대 부탁 드려요. :) 2. 꼬야 : 우리 신상용군은 참 좋은 친구 입니다. 어쩌면 일행들은 신상용을 만난걸 행운으로 생각해야 될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설정하긴 했지만 참 좋은 녀석 입니다. 후후후. 3. GradeRown : 빙고. 그런 장비도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TS의 허리띠라. 하하하. 있으면 정말 난리가 나겠군요. 박동걸을 TS 시킨다면…응? 4. 風月主人 : 와. 그런 생각도 가능하네요. 저는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하하하. 한번 이것저것 본뒤 추후 설정에 넣을 수 있으면 넣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__) 5. zjekfksqlc : 크크크. 저랑 같은…아, 아닙니다. 흠흠. 그렇죠. 솔이는 우는게 제맛…. 아이쿠. ㅜ.ㅠ 6. 미월야 : 이런. 임프라손은 도대체 뭘까요. 하하하. 수정 완료 했습니다.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7. 불곰리즈 : 크앙크앙! 다음회에 코멘트를 달지 않으면 앙 물어 버리겠다! 는 농담입니다. 하하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기체 강녕 하셨는지요? :) 8. 붉은달하늘 : Good.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명색이 비밀 상점에서 산건데, 효능은 좀 좋아야 겠죠? 단순히 단계를 올리는게 아닌, 랭크 자체를 올려 버립니다. 하하하. 엄청 좋은거에요. 9. Final Dragon : 아악! 수현이도 모자라 저도 동정으로 만드시다니. 아니. 고자 취급을 안해주시는게 다행이랄까요. 크크. 탐험이 끝난 후 기대하세요. 물론 정사신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 10. 九靈感 : 하하. 노쓰우드님께 받았습니다. 정말 멋지죠? 저도 드디어 표지를 받았어요!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92 / 0933 ---------------------------------------------- 대박, 대박. 그리고 또 대박. 나머지 하나 남은 반지를 살펴보기 전, 나는 잠시 솔의 사용자 정보를 활성화 시켰다. 그동안의 성장 정도도 궁금했고 제대로 귀속이 됬는지도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곧 떠오른 솔의 정보를 보며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이름(Name) : 안솔 『능력』(잔여 능력치 포인트 4포인트가 남았습니다.) [근력 20] [내구 22] [민첩 24] [체력 30] [마력 86(+1)] [행운 100] 반지의 귀속은 물론이고 다른 능력치도 많은 성장을 보였다. 처음 봤을때 마력, 행운을 제외한 능력치들이 10대를 맴돌고 있던걸 감안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특히 체력 능력치를 30포인트 달성한건 정말로 칭찬해주고 싶었다. “우리 솔이 그동안 노력 많이 하던데 복 받았나보다. 축하해.” 나는 오랜만에 밝은 목소리로 안솔을 높여 주었다. 이대로만 큰다면 정말 1년도 안되어 마력 능력치 90을 달성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남은 1년동안 더욱 노력한다면 정말로 마법사 기준 최상위 사용자 커트라인인 94를 이룰 수 있을것 같았다. 여담이지만 1회차 플레이에 가장 마력 능력치가 높았던 사용자는 101 포인트의 수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용자는 워낙 사기적인 사용자라 무시하고, 그 외의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잡는다면. 최소한 내가 알고 있고 세상에 마력 능력치가 추측 되어 알려진 사용자들은 총 98포인트가 3명, 97포인트는 2명이 있었다. 그리고 <강>과의 싸움에 끼어들 수 있는 마법사들의 마력 능력치는 최소 94는 되야만 했다. 아무튼 내 진심이 담긴 칭찬에 솔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입가에 연한 미소를 머금고 반지를 만지는게 속으로 엄청 기뻐하고 있는게 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러한 광경을 훈훈한 얼굴로 보던 정하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후훗. 그럼 다른분들은 모두 받았고, 이 반지라도 대장이 받아야 그나마 면이 서겠네요. 설마 이것도 거부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음. 이리 주세…그 반지는 뭐죠.” 처음부터 제 3의 눈을 발동했던터라 이미 모든 정보를 알고 있었지만, 정하연의 얼굴을 보는 순간 설명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이 물품은 내가 꼭 설명하고 싶다는 뜻모를 열의가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박력을 인정하는 차원에서 나는 순순히 한 발자국 물러섰다. “마력 능력치를 올려주는 반지에 비할바는 아니지만…이 반지 또한 충분히 값어치가 있는 반지에요.” 그렇겠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인데 저렇게 뜸을 들이니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정하연은 살며시 웃더니 내 손에 반지를 내려 놓았다. “놀라지마세요. 이 반지에는 안티 매직 주문이 걸려 있어요. 그것도 충전 형식인것 같구요.” “오. 놀랍군요. 안티 매직 주문이라니.” 정확히는 하루에 3번 사용할 수 있고 8시간 주기로 1회가 충전된다. 내 교과서를 읽는듯한 대답에 정하연이 눈을 가늘게 뜨는걸 볼 수 있었다. “…별로 놀라지 않으신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충분히 놀랐습니다. 아무튼 여기서 많은 시간을 소비했으니 슬슬 탐험을 지속해야 겠죠.” “…….” 정하연은 뭔가 불만 어린 얼굴이었지만 내 말이 틀린건 없었기에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로운 장비를 착용한 일행들은 희희낙락한 얼굴로 바닥에 둔 금화와 보석들을 쓸어 담았다. 서쪽은 완벽하게 공략을 완료 했으니 이번에는…. 마침 신상용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듯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리더. 이쪽 통로는 모든 방을 돌아봤으니 이번에는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북쪽으로 가죠.”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 북쪽 통로 맨 끝방. 맨 마지막 방의 문을 연 우리들의 앞에는 침을 질질 흘리는 동물이 한마리 서 있었다. “오빠. 저놈은 뭐야? 마음에 안들어.” “흠. 글쎄다. 변종으로 보이는데.” 유정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제 애들은 제법 침착한 음성으로 내게 묻고 있었다. 눈 앞에 보이는 놈은 몸은 늑대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세개의 머리를 달고 있었다. 또 하나의 특이점이라고 한다면 콧구멍과 입에서 자꾸만 불을 내지른다는 점 이었다. “변종? 서, 설마 케르베로스? 마, 말도 안돼.” “설마…그럴리가 없잖아. 당연히 말도 안돼.” 비비앙의 물음을 나는 단호한 음성으로 일축했다. 지옥의 수문장이라는 케르베로스가 지금 나올리는 절대로 없었다. 아니 그전에 진짜 케르베로스는 절대로 저렇지 않다. 키만 3미터를 넘고 온몸에 시뻘건 염화를 일으키는, 말 그대로 무시무시한 놈 이었다. 아마 진짜 케르베로스가 눈 앞의 변종 늑대를 본다면, 그리고 비비앙의 말을 들었다면 분명 억울함에 몸서리칠 것이다. 변종 늑대는 총 한마리 밖에 없었다. 그러나 방의 이곳저곳에 늑대의 뼈가 일부 남아있는걸 보면, 아마 더 많은 변종들이 이곳에 있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종의 이유로 저놈 혼자 살아 남은거고. “크르르르….” 늑대가 원래 영악한 동물이기는 하지만 눈 앞의 놈은 뭔가 달라도 달랐다. 설마 지능 개발 프로그램이라도 이수한 건가. 나는 실없는 생각에 실소를 흘린 후 오더를 내렸다. “비비앙은 키퍼. 안현, 유정….” “크아앙!” 화르륵! 예의가 없는 놈이군. 변종 늑대는 차마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늑대가 기습 공격을 가했다. 중앙에 있는 개대가리가 입을 쩍 벌리더니 진홍빛 붉은 염화를 쏘아낸 것이다. 뒤에서 빠르게 쉴드 주문을 외우는 목소리들이 들렸지만, 나는 담담히 반지를 낀 왼손을 들어 올렸다. “안티 매직(Anti Magic).” 내 반지에서 나온 흰 빛과 염화의 구가 허공에서 부딪치고 곧이어 둘 다 빠른 속도로 소멸한다. 그러자 주문을 외우던 목소리들이 멈추고 탄성과 안도의 한숨이 동시에 흘러 나온다. 그동안 나는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은 내 뒤로. 비비앙은 내가 왜 키퍼로 세웠는지 알고 있지?” “응. 풉.” 그런 내 행동이 웃긴지 비비앙이 끅끅거리는 기척이 들렸다. 비비앙이 입고 있는 블로 오브 파이어(Block Of Fire)라면 저놈의 같잖지도 않은 불은 방어하고도 남았다. 솔직히 불의 정수라는 화정을 품은 후 저정도 불은 보면 그냥 불 같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사들과 솔의 선제 공격 이후 놈의 발이 묶이면 세 방향으로 돌격한다. 머리들은 내가 맡는다. 너희들은 측면으로 돌아가 최대한 괴롭히는 역할을 맡으면 돼.” “Ok. 오빠.” “네 형.” “그럼 그 전까지는 방진 유지하고. 온다. 조심해.” 염화의 구가 간단히 막히자 놈은 조금 흠칫한듯 보였지만 자신을 앞에 놔두고 도라도란 얘기를 나누는 우리들에 매우 열이 받은것 같았다. 설마 들을수도 있는건가? 제 3의 눈으로 놈의 정보를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일단은 우리를 향해 달음박질치는 늑대의 처리가 우선 이었다. 막 내게로 정면으로 달려들던 놈은 나와 어느정도 거리를 남긴 상태에서 순식간에 방향을 급선회 하더니, 이내 유정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마 본능적으로 가장 강한 나를 피하고 약한 유정부터 공략할 생각인듯 싶었다. 설마 자신을 공격할줄은 몰랐는지 유정의 자세가 조금 흐트러질 조짐이 보였다. “핫!” 나는 빠르게 유정의 커버를 들어갔다. 그래도 그동안 놀고만 있던건 아니었는지 유정은 나와 시선을 맞춘 후 빠르게 발돋움해 옆면의 허공으로 뛰었다. 아마도 예전에 보여줬던 것처럼 높은 민첩성을 이용해 허공을 넘어 놈의 후방을 점할셈인것 같았다. 나름 괜찮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어…?” 화르륵! 유정의 도약력은 충분하지 못했다. 제대로 자세를 잡고 뛰면 충분히 가능한데 급하게 뛰느라 자세를 가다듬지 못한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허공으로 고개를 올린 머리의 입에서 불길 하나가 쏘아지는걸 보고 유정은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허공에 떠 있어도 불길에 맞을 판이고 떨어져도 놈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곳에 떨어진다. 속으로 혀를 차고 막 나서려던 찰나였다. “───. 거스트 오브 윈드(Gust Of Wind)!” 유정이 서 있던 자리에 미약한 돌풍이 일어나더니 그대로 바람이 올라와 유정의 몸을 밀어내는걸 볼 수 있었다. 그 타이밍은 그야말로 시기적절해, 놈이 쏘아 보낸 염화의 구는 그대로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고 유정은 애초의 목표대로 후방에 안전하게 안착할 수 있었다. 공격을 피하게 하는 동시에 모자라는 도약력을 높인다. 신상용의 솜씨였다. “아저씨! 잘했어요!” “아, 아저씨 아닌데….” 유정이 환희 어린 목소리로 외치자 신상용의 우물거리는 목소리로 화답했다. 제법이다. 정말로 제법이다. 그동안 정하연한테 밀리는 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이번의 한수로 역시 신상용도 주가를 올렸다. 그러나 질 수 없다는듯 곧이어 정하연과 안솔의 주문 폭격이 시작 되었다. “속박(Shackles)!” “───. 콘 오브 아이스(Cone Of Ice)!” 솔의 속박이 늑대의 몸을 휘감아 움직임을 멈춘다. 그리고 바로 연이어 얼음 덩어리들이 땅 밑에서 생성되더니 비죽이 솟아 오르며 놈의 몸 안에 파고들었다. 아쿠아(Auqa)가 아니라 아이스(Ice)라. 확실히 물 계열 마법은 정통했군. “캐갱! 캥! 캥! 캥!” 늑대는 개 짖는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날뛰었다. 그러나 속박 주문에 걸린 상태라 날뛰는 만큼 얼음 송곳들은 더욱 몸 안으로 파고 들었다. 또한 여기서 끝난게 아니었다. 실력있는 마법사들의 필수품인 고속 신언과 더블 캐스팅을 익인 정하연인 만큼 그녀의 예쁜 입술이 또 한번 열렸다. “브로큰(Broken)!” 파삿! 파사삿! 정하연의 외침이 들리고 놈의 몸 안에 박힌 얼음 송곳들이 이리저리 흩뿌려진다. 밖으로 나와 있던 얼음 조각들이 아름답게 비산하는걸 보며 안현과 유정은 탄성을 질렀다. 가뜩이나 찔린것만해도 아픈데 몸 안에서 그걸 터뜨렸다. 머리 세개는 동시에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게거품을 물었다. “케에에엥….” “개새끼! 나 노리더니 꼴 좋다. 하앗!” 일련의 과정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유정은 아까의 일이 열이 받는지 단검을 꼬나 쥐고 달려 들었다. 마력 능력치를 올린 효과가 있는지 속박은 아직도 유지 되고 있었다. 그말인즉슨 뒤에 있는 유정은 지금이 마음껏 공격할 기회라는 소리였다. 마치 드럼을 난타하듯 단검을 쑤시고, 베는 유정을 보며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아하하하하하하하!” 유정은 광소하며 더욱더 단검질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그에 당하는 놈의 몰골은 처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몸을 뒤로 돌리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였지만 곧 이어진 하나의 기다란 창에 뜻을 이룰 수 없었다. “흡!” “케엑!” 숨을 들이키는 기합성과 함께 안현이 입구멍 안으로 창을 쑥 지르고 말았다. 그리고 그대로 머리 하나는 혀를 길게 빼물고 절명하고 말았다. 옆에서 끼잉거리는 남은 두놈의 머리들이 보였지만 애들은 가차없이 변종 늑대의 남은 수명을 줄여가고 있었다. 보다 못한 나는 그대로 달려 들어 남은 두개의 머리를 한꺼번에 자르고 말았다. 불쌍하다. 보는 내가 다 불쌍할 정도였다. 곧이어 편안한 얼굴로 몸을 허물어 뜨리는 늑대의 몸을 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아직 분이 안풀린듯 한동안 씩씩거리던 유정은 단검 두개를 내밀어 그대로 허공에서 부딪혔다. 이윽고 창, 검신과 검신이 부딪히는 청명한 소리와 함께 유정이 들고 있던 단검에서 후두둑 핏물들이 떨어졌다. 그때서야 조금 기분이 나아졌는지 유정은 상큼한 미소를 짓고는 나를 돌아 보았다. 온몸에 피칠갑을 한채 웃으니 일행들 모두가 한걸음 물러서는걸 느낄 수 있었다. “오빠. 나 잘했지.” “…그래. 잘했다.” “히힛. 칭찬 받았다.” 나는 이례적으로 유정을 칭찬했다. 보통 근접 계열 초보 여성 사용자들은 이렇게 단시간 안에 적응을 하지 못한다. 현대에서 공주님 대접을 받은 여성들일수록 더욱 그런 현상이 심하다. 동물 한마리도 죽이지 않는 여성들인데 몬스터를 떡 갖다 놓으면 알게 모르게 주저하는 경우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심지어 사용자 아카데미를 이수한 사용자들 조차 말이다. 그러나 유정은 그런 내 생각을 비웃듯 제대로 광년의 정석을 보여 주었다. 온 몸에 튄 피도 별로 거리낌없이 닦는걸 보니 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들었다. 이대로 크면 왠지…. 조금 불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쨌든 지금 그녀의 모습은 내게 예쁘게 보이고 있었다. 나는 살짝 손을 들어 그녀의 볼을 살짝 어루 만졌다. 내가 피를 닦아주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잠시 바라본 유정은 이내 내 손길을 음미하듯 가만히 눈을 감았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오늘은 참 바빠서 글을 쓸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는데 다행히 시간 안에 맞출 수 있을것 같습니다. 역시 독자분들이 주시는 원동력들의 힘은 위대합니다. 예전에 하루에 한편 쓰는걸 허덕이던 저를 이렇게 만들어주시다니요. 아무튼 12시 전에는 집에서 나갈 수 있을것 같네요. 하하하. 지금 후기를 쓰는 시간이 11:43분이니 10분안에 리리플을 완성 해야겠죠? :) 『 리리플 』 1. MT곰 : 오. 오랜만의 1등 이시군요. 축하드립니다. :) 곰곰. 곰곰! 2. 카지매스 : 아하하. 센스 있는 코멘트 였습니다. 보고 순간 웃고 말았습니다. 쿠폰 감사합니다. :) 3. hohokoya1 : 차근차근히 성장하는 맛이 있는 법이죠. 하하하.(물론 주인공을 거론 하신다면 뜨끔 합니다.) 온라인 게임을 해도 성장시킬때가 가장 재밌더라구요. 4. AR0000 : 와. 당연히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 5. 라티인형 : 오. 계란 소세지도 있나요? 그것도 한번 먹어보고 싶네요. 여기 연참을 바치겠사옵니다. 감사합니다.(__) 6. 휘을 : NO. 아닙니다. 특수 능력과 잠재 능력이 비어있다면 모를까 꽉 찬 상태라면 능력을 이어 받아도 하등 좋을게 없습니다. 風月主人이 좋은 비유를 들어 주셨네요. :) 7. zjekfksqlc : 흐흐흐. 아주 좋은 취향을 지니셨(…….) 흠흠. 크크크. 기대해 주십시요. 크하하하.(저도 퍽퍽!) 8. 달빛이슬 : 흐흐. 주인공은 양면을 가진 놈 입니다. 자신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면 한없이 자상하지만 적이라고 인식되는 즉시 가차 없어지죠. 앞으로 주인공의 이면들은 많이 나올 예정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 9. 書痴 : 오호. 그랬군요. 후기 작성 후 바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__) 10. KTF[Z1]whdtjs : 아. 아시는군요. 하지만 전 만두가 더 좋았어요. 흐흐.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93 / 0933 ---------------------------------------------- 대박, 대박. 그리고 또 대박. 북쪽 통로의 방들을 모두 클리어링한 후 얻은 물품들은 오직 금화들 이었다. 그러나 북통로에 있던 방들의 수익은 총 102골드. 나름대로 괜찮은 수준이었고 애들도 딱히 불만은 없어보였다. 이미 서쪽 통로에서 엄청난 대박을 얻은만큼 마음이 넉넉해들 보였다. 내가 잠시 휴식을 취할것을 권했지만 애들의 요청으로 그대로 동쪽 방으로 진입하기로 했다. 다들 즐거운 얼굴들 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행들을 보며 나는 입가에 연한 미소를 걸었다. 원래 휴식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애들이 보물들을 보자 눈이 뒤집히는 모양이었다. 폐허의 연구소 1층 공략의 진행은 상당히 순조롭다고 볼 수 있다. 위험한 순간이 없지는 않았지만, 원래 던전을 탐험할때 캐러밴 구성원을 잃는건 드물지 않은 일들 이었다. 그러한 것들을 감안하면 현재 우리들의 공략 속도는 매우 빠르다고 봐도 좋았다. 이 순조로움의 중앙에는 나와 비비앙이 중심이었다. 물론 다른 사용자들의 성적 또한 모두 준수했지만 이미 일정 경지에 다다른 비비앙은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뽐내는 중 이었다. 특히 몬스터를 하나만 상대하는건 몰라도 다수들을 상대할때는 그녀의 마수들이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잠시 후 우리들은 동쪽 통로로 진입 후 첫번째 방을 발견했다. 들어오면서 감지를 해본 결과 사실상 동쪽 통로는 이 방 하나밖에 없었다. 즉 이 방만 공략한다면 1층은 완전히 청소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저 앞에 계단이 보이는군요.” 흘끗 고개를 옆으로 돌린 정하연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 말대로 앞쪽으로 80미터만 더 가면 2층으로 통하는 층계에 이를 수 있을것이다. 눈 앞의 방을 청소한 후 이대로 바로 2층으로 올라갈까, 아니면 아예 야영을 할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모두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저기 보이는 계단은 아마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일 겁니다.” “원, 원래 이런 던전들의 특성상 2층은 더 난이도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상용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 그런건 아니지만 내 경험에 비추어봐도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체감 난이도는 더욱 높아지는게 던전들의 특성이다. 내 다음 말을 기다리는 일행들을 보며 나는 조금 뜸을 들인 후 말을 이었다. “일단 눈 앞에 보이는 방을 클리어링한 후 당일 탐험을 지속할지 아니면 야영을 할지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으. 이 연구소는 창문도 없나.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모르겠어.” 유정이 뚱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한두번 머리를 긁적인 후 문고리에 손을 넣는다. 이제는 딱히 말을 안해도 일행들이 바로 자세를 잡는 기척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감지로 살펴본 방 내부에는 어떤 반응도 잡을 수 없었다. 나는 망설임없이, 그대로 문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달칵. “응?” “왜요 형?” 내가 멈칫하자 안현이 옆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이 방…” 다시 한번 들어가려고 살짝 밀었지만 문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떤 방인지 몰라도 문은 폐쇄된 상태였다. “잠겨 있네.” “어. 그럼 어떡해. 그냥 올라가?” “아니.” 유정의 속 편한 질문에 간단히 대답한 후 나는 발로 문을 뻥 차버렸다. 물론 어느정도의 마력을 담아서. 이윽고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곧이어 폐쇄된 문이 부담없이 열리는걸 볼 수 있었다. 막 긴장을 놓고 있던 일행들은 깜짝 놀라며 무기를 들었지만 이내 방 안에 아무도 없는걸 확인할 수 있었다.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정하연은 한마디 덧붙이는걸 잊지 않았다. “…화끈하시네요.” 방 안으로 들어서자 빛 바랜색을 띄는 대리석들이 깔린 바닥이 보였다. 옆쪽에는 자그마한 침대가 놓여 있었고 시트가 곱게 놓여져 있었다. 구석으로 시선을 돌리자 책상이 하나 보였는데, 그 위는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었다. 깃펜과 굴러다니는 잉크병, 그리고 한쪽에 펼쳐져 있는 기록서 등등. 벽에 걸린 선반에는 헤지다 못해 살짝만 건드려도 스러질것 같은 옷가지들이 걸려 있었다. 이미 반 이상이 훼손되 옷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옷가지들. 잠시 주변을 둘러본 나는 침대로 다가가 시트를 걷었다. 그러자 시트 안에서 인간의 뼈로 보이는 유골이 몇조각 보였다. 즉 눈 앞에 보이는 뼛조각들로 여기 살던 인간은 침대 위에서 최후를 맞이한 모양이었다. “수현. 수현. 이 방도 탐색할꺼야?” 비비앙이 호들갑을 떨며 내게 물었다. 나는 수긍하는 어조로 대답했다. “응. 그러자. 한명이 망을 보고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이 방을 탐색하는걸로 하죠.” 내 말이 떨어지자 신상용은 익숙한듯 대형을 이탈해 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남은 사용자들은 곳곳으로 퍼져 내 오더대로 방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일행들은 별 소득이 없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딱히 뭐 수익이라 부를만한 물품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혹시 몰라 제 3의 눈으로 방 안을 꼼꼼히 살폈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문이 잠긴만큼 쪼끔 기대했는데. 힝. 아쉽다.” “힘내.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는 말도 있잖아.” “응? 힘내라고 말하는것 치고는 문장이 조금 이상한데.” “그런가.” 안현과 유정은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바보들. “오라버니….” 다들 맥빠진 얼굴로 몸을 돌리려는 찰나 미약한 솔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다시 한번 일행들의 고개가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그녀를 향하는걸 볼 수 있었다. 막 손에 무언가를 쥔 채 내게 오려던 솔이는 그들의 시선을 받자 몸을 움찔하는게 보였다. 한동안 가만히 그들의 시선을 받던 솔은 이윽고 입을 삐죽삐죽 내밀여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일행들은 모두 한결 같이 당황하고 말았다. “왜 내가 무슨 말만 하면…왜 나한테만 그래요오…흑.” 이유 모를 서러움이 복받치는듯 입을 달싹이는 안솔. 나는 얼른 그녀에게 다가가 우루루까꿍(?) 달래주었다. 안현도 마찬가지로 바로 솔이한테 달려왔다. “하하. 솔이가 지금까지 복덩이 노릇을 해왔잖니. 그러니 다들 기대가 되서 그러는 거란다.” “그래그래. 우리 솔이는 복덩이에요. 울면 복이 달아난답니다.” “…정말요? 저는 복덩이에요?” 일행들의 기대 어린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건가. 아무튼 한동안 솔이를 달래고 있자 일행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진걸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정하연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는 이내 “킥.” 소리를 내고 말았다. 내 얼굴이 일그러지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그래도 한 손으로 입을 막는게 어지간히도 웃긴 모양새인것 같았다. 잠시간의 헤프닝이 지난 후 나는 솔이가 내민 기록서들을 받아 보았다. 눈 앞에 기록서를 들자 알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가득했다. 아니. 조금 알아볼 수 있는 문자들이 있기는 했다. 능력으로 개화시키지는 않았지만 1회차에 홀 플레인의 대부분에 대해 연구한 상태였으니까. 그 중 문자도 들어가 있었는데 솔직히 조예가 별로 깊다고 볼 수는 없었다. 대충 훓어보던 나는 기록서 중간에 나오는 하나의 단어에서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무언가 걸리는게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현재 내가 보고 있는 부분에는 알고 있는 단어 하나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이게 왜…. 한동안 기록서를 뚫어지게 보던 나는 바로 입구에 있는 신상용을 불렀다. “신상용씨.” “네. 리더.” “고대 기록서 하나를 발견 했습니다.” “지금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나는듯 달려와 기록서를 받아 들었다. 잠깐 기록서를 훓어보던 그는 이내 처음보는 표정인 인상을 찌푸린 얼굴로 다시 내게 고개를 돌렸다. “리더. 너무 어렵습니다.” “네? 그래도…음. 그런가요?” 하마터면 “D 마이너스 인데 그걸 해독 못해요?” 라고 말할뻔 했지만 간신히 중간에 입을 다물 수 있었다. 신상용은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고대어 해독 랭크가 생각보다 높지는 않거든요. 특히 연구소인 만큼 그들만이 쓰던 단어가 포함 되어 있습니다. 중간중간 해독은 가능해도 전체적인 내용 파악은 어렵습니다.” “흐음. 그럼 그거라도….” 나 또한 눈살을 찡그렸다. 눈 앞의 기록서는 단순한 기록서가 아니었다. 아마 이 연구소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았다. 그리고 그 단어를 본 이상 지금 계속 탐험을 이을지 아니면 그만 마치고 돌아갈지 새롭게 생각해야 될지도 모른다. 그때였다. “그럼 내가 읽어주지 뭐. 기록서 이리줘.” “응?” 고개를 돌리자 비비앙이 태연한 얼굴로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내가 무슨 소리냐는 시선을 보내자 오히려 비비앙이 더욱 이상한 얼굴이 되었다. 그 순간. 나를 비롯한 일행들은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하나의 생각에 모두 멍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비, 비비앙. 고대에 사용하던 글자들을 다 기억하는거야?” “…뭐? 나, 날 바보로 아는거야? 그럼 마법은 어떻게 쓰겠어? 응?!” 볼을 빵빵히 불리고 퉁퉁거리는 비비앙을 보자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한거지? 굳이 신상용에 기댈 필요가 없이 고대 문자를 알고 있는 비비앙이 있는데.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기록서를 건넸다. 그러나 비비앙은 콧방귀를 끼며 고개를 팩 돌렸다. “기분 상했어! 해독 안해줘!” “망토 다시 내놔.” 내 말에 비비앙은 자신의 망토를 꼭 붙잡았다. “치사해. 한번 주고 다시 뺏…아, 알았어. 할게. 할게. 호호. 농담도 못해…씨잉. 미안.” 비비앙은 얼버무리려 했지만 내가 지그시 응시하자 황급히 말을 돌렸다. 이윽고 그녀는 자신은 정말 열심히 이 기록서를 읽고 있다는 표정을 내게 보여주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품 안에서 연초 한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괜히 민망한 기분이었다. 막 불을 붙이려는 순간 저절로 내가 문 연초의 끝에서 미약하게 불꽃이 타올랐다. 나는 반사적으로 한모금 빨아 들였다. 고개를 올리자 정하연이 나를 향해 새초롬한 표정을 짓고 있는걸 볼 수 있었다. “센스 좋으시네요.” “별 말씀을.” 정하연이 겸손히 대답하자 신상용은 눈을 꿈뻑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 하연씨. 담배 냄새 싫어하는거 아니었어요?” “응?” 신상용의 말에 연초를 입에서 떼자 정하연은 당황한 얼굴을 보였다. 그러나 신상용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하연이 입을 다물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신상용도 꽤나 눈치가 없는 사용자인것 같았다. 그는 정하연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도 아랑곳않은 얼굴로 계속 입을 떠벌렸다. “아. 예전에 다른 사용자들이랑 캐러밴을 꾸렸을때가 있었는데요. 담배 냄새를 정말 지독하게 싫어 했었거든요. 누가 담배를 피려고 하면 저기 멀리서 피고 오라던가 아니면 아예 담배를 물로 적셔서 못 피게 만든다던가.” “이런. 실수했군요.” 그 말에 담배를 비벼 끄려고 손을 내리자 정하연의 가느다란 손이 내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손을 들어 억지로 다시 내 입에 물려주었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정하연은 한숨을 폭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피세요.” “아니. 굳이 싫으시다면….” “휴. 수현씨라면 괜찮아요. 가끔 피우는 한두대는 참을 수 있거든요. 그리고 참고로 말하자면 그때 그 사용자는 거의 10분에 두세번 꼴로 계속 피워서 그런거에요. 한쪽말만 듣고 저를 융통성 없는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아. 예, 예. 물론입니다.” 뭔가 굉장히 논리 정연하지만 더불어 굉장히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는데. 아무튼 피워도 된다니 뭐…. 그러나. 신상용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그때를 회상하는듯 눈을 감더니 이내 고개를 작게 흔들며 또다시 입을 열었다. “10분에 두세대? 그정도는 아니었는데요…흠.” 다시 한번 정하연이 날카로운 눈동자로 신상용을 노려보는걸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유정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하는것도. 아무튼 괜찮다고 하니 나는 다시 연초를 입에 물고 깊게 한모금 빨아 들였다.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기 위해 천장을 향해 연기를 내뿜었다. 일행들 중앙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내려 앉았다. 그렇게 연초 한대가 다 타들어 갈때즈음 비비앙은 기록서 아래까지 시선을 돌리더니 이내 어이없는 탄성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하.” “해독은 끝났어?” “응. 이 기록서 엄청 재밌네.” “어, 어떤 내용이 있는겁니까? 스승님?” 비비앙은 스승님이란 단어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듯 했다. 그녀는 슬쩍 정하연을 한번 보고는 말을 이었다. “솔직히 나도 이런말할 자격은 못되지만…그래도 최소한 선은 지켰다고 할 수 있어. 그런데 이 기록서에 쓰인 내용이 사실이라면, 미쳤다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아. 그래. 말 그대로 이 연구소는 미친놈들의 모인곳이야.” “그러니까 무슨 내용이….” 신상용이 애타는 목소리로 되묻자 비비앙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나 곧이어 비비앙의 입이 서서히 열리는걸 볼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오늘 자정 연재를 하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어제 오후 6시에 나갔다가 집으로 들어오니 새벽 5시가 넘어 있더군요. 어떻게든 집으로 오고 싶었는데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흑흑. 아침에 일어나니 속이 뒤집히는것 같더군요. 그런만큼 오늘 연참은 잘 모르겠습니다. 마음은 하고 싶지만 과연 할 수 있을지…. ㅜ.ㅠ 라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노력해 보겠습니다. 독자분들이 주시는 원동력들은 세상 그 무엇보다 강력한, 제가 글을 쓰는 힘을 주시는 원동력 이니까요. :) 『 리리플 』 1. MT곰 : 오. 요즘 1등에서 자주 뵙는것 같습니다. 1등 축하 드립니다. :) 2. juan : 음. 텐넨, 메가데레, 쿨데레는 어떤 뜻인가요? 츤데레랑 얀데레는 들어 봤는데 다른 것들은 처음 들어보는 거라서요. 궁금하네요. 하하하. 3. zjekfksqlc : 후후. 굳이 따지면 전투 계열 입니다. 다만 마법도 사용합니다. 후후후. 기대해 주십시요. 후후후…저도 퍽! 4. 쿠로시온 : 크크크. 101을 찍게 되면 정말로 기연이란 기연은 싹 쓸어 담을지도 모릅니다. 5. 잿빛나래 : 오예. 저는 김한별을 응원하는 독자분들이 나올때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요. 저도 많이 아끼는 캐릭터거든요. 그런데 욕을 많이 먹었어요. ㅜ.ㅠ 6. 사람인생 : 아하하. 알람까지 해놓으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역시 자타가 인정하는 1등 코멘터 답습니다. 음! 워킹 데드가 별로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런 제가 다른 좀비물을 찾아 보겠…농담입니다. 하하하. 어제 자정 연재는 정말 여유가 안되서 힘들었습니다. 어떻게든 집에 들어가 보려고 했는데 끌려가 버렸죠. ㅜ.ㅠ 부디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7. 상흔 : 한별이 앞으로 많이 등장할거에요! 기대해주세요! 8. 북성 : 아. 작품 설정에 조만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탐험 후 능력치가 모두 오른 후 올리는게 나을것 같네요. 그러고보니 소개글 수정도 해야 하는데…. OTL 9. guntops : Good. 정답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모른다기 보다는 익숙해지지 않았다고 보시는게 더 가까울겁니다. 시크릿이 괜히 시크릿 클래스가 아니거든요. 다만 앞으로 주인공이 천천히 알아 가야죠. 아마 주인공의 1차적 완성은 헙.(스포 주의!) 중요한건 주인공은 앞으로 발전할 여지가 남아 있습니다. 하하하. :) 10. 블라미 : 헉. 캠프. 부럽네요. 저는 새벽에 나가서 술만 주구장창. -_-a 으흐흐. 배가 고픈데 먹기는 싫은 이상한 기분이. 엉엉. 캠프 재미있게 다녀오세요!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94 / 0933 ---------------------------------------------- 대박, 대박. 그리고 또 대박. “연구소로 막 들어왔을때 인체 실험을 위한 연구소라고 했잖아. 그런데 이건 참…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 “차마 말로 하지 못할 정도로 잔인한 일들이 있었나보군.” 비비앙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응.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라….”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내렸던 기록서를 다시 들어 올렸다. 비비앙의 얼굴이 다시금 찌푸려지는걸 보면서 도대체 어떤 내용이 들어 있길래 그러는지 강한 호기심이 들었다. “실험 대상으로 삼은게…단순히 인간만 대상으로 삼은게 아닌것 같아.” “인간만 한게 아니라면…음. 확실히 우리들이 그동안 만난 괴물들은 인간 모양의 형상을 한 것들만 있는게 아니었죠. 동물도 병행 했다는 겁니까?” 신상용의 물음에 비비앙은 기록서를 바닥에 내던지고는, 가당치도 않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애초에 그정도면 이러지도 않았을거야. 내가 읽은 기록은 이 방을 사용하던 사람이 쓴 일기 형식의 보고서야. 일기 치고는 꽤나 상세한 정보가 들어 있지만….” “그래서.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그렇게 뜸을 들이는데. 답답하게.” 역시나 성미 급한 유정은 애가 타는 표정으로 뾰족한 목소리를 질렀다. 비비앙은 한번 심호흡을 하고는 차분함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일단 말하면 지금 우리들이 있는 일층은 현재 실패작들을 모아논 장소라고 보면 돼.” “실패작이라고 한다면…이해가 안되는데요. 일층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만큼 안정성 확보가 필수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왜 통제가 되지 않는 실패작들을 일층에 풀어논거죠?” 정하연의 날카로운 질문에 비비앙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다 그 질문을 한 사람이 정하연인걸 깨닫고는 거센 기침을 토했다. 정하연은 우리 일행에 들어온 이후로 비비앙과 한번도 대화를 한적이 없었다. 아니, 눈길도 마주치지 않았다. 정하연이 의도적으로 비비앙을 회피하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비비앙에게 말을 거는건 이번이 처음 있는 일 이었다. 비비앙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깜짝 놀란 얼굴로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 그건 나도 몰라요. 그때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현장에 있지 않은 이상 알 수 없는 노릇이죠. 다만 방금 읽은 기록에 따르면 일층에서 우리들이 만난 모든것들은 실패작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원래 다른 장소에 보관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모종의 사정으로 그것들이 나온건지에 대해서는 적혀 있지 않아요.” “일층은 그렇다고 치고, 그러면 이층이나 삼층에 대한 정보는?” 나는 조금 다급한 음성으로 비비앙에게 물었다. 지금 중요한건 실패작들이 아니었다. 내가 본 그 단어가 왜 기록서에 쓰여 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나는 1회차때 홀 플레인에서 활동중 마족과 조우했을 때를 머리속으로 떠올렸다. 만약 그때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온 몸에 소름이 돋는걸 느꼈다. “인간을 잡아 와서 어떤 실험을 했는지도 말하고, 욕하고 싶지만 내 얼굴에 침 뱉는것 같으니 입을 다물겠어. 다만 이층은 실패작들이 아닌 어느정도 성과를 거둔 놈들이 있는것 같아. 하지만, 중요한건 이런것들이 아니라….” 이제 본론에 들어가는건가. 비비앙은 잠시 뜸을 들인 후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들은 성공을 거둔 실험품들중 가장 뛰어난 성과를 거둔 일백의 실험작들을 제물로 삼아 한명의 고대 마족을 소환했다. 기록에 나오는 내용이야. 이놈들…나중에 가서 진척이 더디자 흑마법 그 중 가장 악랄하다는 마족들의 마법에 대해서도 손을 댄것 같아.” “마족…?” 애들은 마족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 보는지 의문문을 흘리는 소리들이 들렸다. 그러나 나는 침음성을 흘렸고 동시에 정하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걸 볼 수 있었다. 일백명의 제물이라. 단순한 하급의 마족을 소환하는데는 지나치게 많은 숫자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소환된 마족은 하급을 넘는다는 소리였다. 비비앙은 우리들의 반응을 살피더니 이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마족. 수현. 혹시 마족에 대해 알고 있어?” “…조금은. 사용자 아카데미 도서관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군.” 입술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홀 플레인에는 마계라는 공간이 존재한다. 정확히는 <포탈>을 타고 들어간다고 해야 되나. 마계는 악마 또는 마족들이라고 불리는 생명체들이 사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들중 일부는…천사들과 대비 되는 존재들로 볼 수 있다. 물론 일반 악마 일수도 있고 천사들과 대비 되는 존재로 부를 수 있는 악마 일수도 있다. 그러나 후자일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그런 악마들은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홀 플레인에 강림하는등 직접적인 개입이 불가하다. 문제는 전자의 악마들이라고 해도 절대로 만만하지 않다는 점에 있었다. 천사들과 반하는 악마들이 만들어낸 일반 마족들 또한 굉장히 강력한 존재들이다. 마족들은 특정 조건이 만족 된다면 홀 플레인에 몸을 드러내는게 가능하다. 그러나 그 힘을 그대로 보유한 채 현신할 수 없고 강한 힘을 가진 마족일수록 그에 비례해 힘이 제한당한 상태로 현신이 된다. 그러나 그 제한을 교묘히 피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가 있는데 그 방법중 하나가 바로 제물을 토대로 마족을 소환하는것. 연구소에 있던 거주민들은 성공을 거둔 범상치 않은 제물 100개를 희생했다. 그게 어느정도인지 지금은 잘 몰라도, 발록급 악마가 나온다면 나 또한 어느정도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나는 문득 골이 지끈지끈 해지는걸 느꼈다. 땅속 지하 깊숙한 곳에서 호시탐탐 틈을 노리는 지옥놈들만 생각해도 머리가 아픈데 악마, 마족들도 상대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질리는것 같았다. 나는 억지로 마음을 비웠다. 당분간은 몬스터를 넘어 사용자들간의 전투가 이어질 뿐이다. 마족이나 지옥놈들이 대대적으로 개입할 때는 아직은 먼훗날이고 지금 고민해도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나는 메마른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100명을 제물로 바쳤다면…도대체 어느정도의 힘을 가진 놈으로 봐야 하는가.” “으응…장담하는데 하급은 넘는다고 봐도 돼.” 듣고 있던 정하연은 떨리는 음성으로 끼어들었다. “그럼…중급이라는 소린가요?” “그 이상일수도 있어요. 제물의 수준을 모르니 확답은 불가능해요. 다만 인간을 기준으로 100명이라면 중급은 소환하고도 남죠.” 정하연의 얼굴에는 공포의 빛이 서려 있었다. 혹시 예전에 마족을 만난 경험이 있나? 나는 슬쩍 그녀의 옆으로 한 발자국을 옮긴 후 입을 열었다. “혹시 예전에 마족을 상대해본 경험이 있나요.” 갑작스럽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놀랐는지 정하연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이내 내 얼굴을 확인한 후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하급 마족 한마리는 우연히….” “그때 어떻게 상대하셨죠?” 잠시 그때의 일을 회상하는듯 정하연은 눈을 감았다. 이윽고 그녀는 눈을 감은채로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냥 자세한 기억은 없어요. 그때 하급 마족은 왠지 모를 이유로 자신의 힘을 봉인 당한 것처럼 보였거든요. 더구나 사용자들이 우르르 몰려 나가서 한꺼번에 놈을 공격했어요. 신성 보조 마법을 잔뜩 걸은채로 집단 공격을 했죠.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마족이 보여준 힘은 충분히 실감했어요. 그들은 절대로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에요.” “그 외에도 남대륙 에서는 중급 마족 하나가 출현했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더 놀라운점은, 당시 중급 마족은 단 한명의 사용자한테 격퇴 당했습니다. 마족이 확실히 무서운 존재들은 맞지만, 놈들 또한 홀 플레인의 일부일 뿐 입니다. 아직 어느정도의 수준인지도 모르는데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아아. 남대륙의 그녀를 말하는건가. 가만히 듣고만 있던 신상용이 안경을 치켜 올리며 정하연의 말을 잇는걸 보며 나는 한 금발의 여성 사용자를 떠올렸다. 아무튼…홀 플레인의 일부일 뿐이라. 하긴 일반 마족들은 그럴지도 모르지. 나는 잠시 고개를 주억이고는 다시 비비앙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현. 걱정하지마. 내가 심각한 얼굴을 한건 마족 소환 자체를 경멸한거지 다른 뜻은 없었어. 하급이든, 중급이든 누가 나오든 내가 이길 수 있어. 고대 연금술사이자 키메라 연금술사인 나 비비앙을 얕보지 말라구.” “그래…든든하구나. 어쨌든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수고했다.” “히히. 아니야. 어쨌든 과거 이 연구소 있던 놈들이 한 짓은 마뜩찮지만 그건 우리들이란 관계 없잖아. 우리들의 목적은 그냥 탐험 아니었어?” “그렇지.” 내가 가볍게 수긍하자 비비앙은 한결 밝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와중 옆에서 누군가 “너도 마수들 소환 하잖아….”라고 말하는게 들렸지만 그건 모르는 소리였다. 서로 상호 동의하고 통제 가능한 마수들과 통제가 불가능한 마족들은 엄연히 구분할 존재들 이었다. “그럼 이층으로 탐험 속행?” 그녀의 말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일행들은 다들 놀란 얼굴로 내게로 시선을 모았다. “오늘 더이상의 탐험은 중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애초의 목표인 일층 공략을 달성 했으니까요. 조금 이른감이 있지만 오늘은 이 방에서 야영 합니다.” 내 확고한 말에 일행들은 그때서야 이해가 가는 얼굴로 각자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래. 비비앙의 말이 맞다. 애초에 난 무엇을 두려워 하고 있었던 걸까. 나도 모르게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지만 설령 지금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전무했다. 그리고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나는 앞으로 헤쳐나갈 자신이 있었다. 나는 허공으로 사용자 정보창을 활성화 시켰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수현(0년차) 2. 클래스(Class) : 검술 전문가(Sword Specialist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검(劍)의 주인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4) 7. 신장 · 체중 : 181.5cm · 75.0kg 8. 성향 : 질서 · 혼돈(Lawful · Chaos) < 능력치(현재 능력치 12포인트가 남은 상태입니다.) > 1. [근력 94] [내구 92] [민첩 98] [체력 72] [마력 96] [행운 88] < 업적(1) > 1. 통과 의례 보스 몬스터 < 고유 능력(1/1) > 1. 제 3의 눈(Rank : S) < 특수 능력(1/1) > 1. 신검합일(Rank : EX) < 잠재 능력(4/4) > (현재 능력 1포인트가 남은 상태입니다. 다만 해당 포인트는 단계 상승이 아닌, 랭크를 상승시키는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1. 백병전(Rank : A Plus) 2. 쓰러질 수 없는(Rank : A Plus) 3. 심안(정)(Rank : A Plus) 4. 전장의 가호(Rank : EX) 1회차 시절의 지금의 나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힘을 보유하고 있다. 단순히 능력치의 상승만을 말하는게 아니었다. 다른 사용자들은 하나만 가지기를 오매불망하는 고유, 특수, 잠재 능력들을 다발로 갖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고대 무녀의 문신을 심장에 각인했고, 몸 내부의 모든 노폐물들을 청소함으로 마력 회로나 마나 활용율은 더욱더 상승했다. 그리고 화정(火正). 애초에 내가 화정을 품은 이유는 바로 아틀란타 탈환 전투에 근거한다. 지옥도 마계와 비슷한 소환 의식을 따르는데, 당시 일천 칠백명의 사용자를 강제 제물로 소환된 존재가 바로 죽음의 겁화, 즉 지옥의 대공이었다. 내가 화정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그 대공을 노렸기 때문이었다. 동일 속성인 염화(炎火)계중 지옥의 겁화와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불. 그런만큼 설령 상급에 해당하는 마족들이 나와도 나는 충분히 단신으로 족칠 자신이 있었다. 지금의 나는 강하다. 1회차 시절에 활동했던 시선으로 볼 필요는 없다. 나는 입맛을 한번 다시고는 눈을 우묵히 가라 앉혔다. 아무튼 가장 좋은 방법은 애초에 소환을 막는게 가장 좋지만 그런것들은 내 마음대로 되는 일들이 아니었다.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쉰후 정보창을 꺼버렸다. 일단 오늘은 이만 쉬면서 소모한 체력을 회복하고 내일 이층과 삼층을 동시에 공략하는게 좋을것 같았다. “오빠. 밥 먹을래. 밥밥.” “돼지.” “병신.” 유정은 자신을 놀리는 안현에게 독설로 화답한 후 깡총깡총 뛰어와 내 옆팔을 붙잡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야영을 한다고 말만 해두고 아직 아무런 오더도 내리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 지금부터 야영 준비를 하겠습니다. 제가 주변에 마나석을 박고 야영 지대를 설치할테니 마법사 분들은 야영에 필요한 기타 마법을 설치하세요. 그리고 나머지 애들은 식사 준비하고.” “오빠. 불침번은?” “예외 없음. 불침번도 당연히 설거야.” 내 말에 유정은 실망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 모습에 잠시 웃은 일행들은 이윽고 다시 엉덩이를 들고 일어나 내 오더에 맞는 행동들을 하는게 보였다. 내게 다가와 배낭을 내밀었다. 나는 묵묵히 그 배낭을 받은 후 안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어쩌면 이번에 능력치와 능력 포인트를 일부 사용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뒤에서 자신을 불침번 가장 마지막에 세워 달라는 유정의 땡깡을 들으며 나는 손에 잡힌 마력석을 꺼내 들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오늘도 어떻게든 연참을 세이프 했네요. 독자분들이 주신 원동력들을 박카스 삼아 키보드를 두드렸습니다. 으하하하…이대로 푹 쉬고 싶지만 자정 연재를 위해 조금 있다가 또 한편 써야 하네요.(지금 잠깐 누울 생각인데 혹시 제가 또 자정에 보이지 않는다면 그냥 잠들었다고 생각해 주세요…. ㅜ.ㅠ) PS. 하하하. 제가 요즘 절단 마공을 연성중 입니다. 대신 그만큼 연참 신공을 연성중 이오니 독자 분들의 양해 부탁 드립니다.(제가 아직 연참 신공은 2성 밖에 성취를 못했는데, 절단 마공은 어느정도 성취 했을까요? 하하하.) 『 리리플 』 1. 블랙크라운 : 1등 축하 드립니다. 이번에는 처음 뵙는 분이군요! 곰님의 강세가 이어지나 싶었는데…흐흐. 부디 94회도 재미있게 감상하시길 바랍니다. 2. zjekfksqlc : 현재 고민중에 있습니다. 일단 뮬을 떠나고 모종의 사건을 진행한 후 실시할 캐릭터 인기 투표 실시가 분기점이 될 듯 합니다. 그리고 과거 1회차에 소드 마스터를 이룬 육체를 계승했고, 검술 전문가는 검사의 동종 최상위 계열입니다. 그러므로 경험치가 그대로 내려 오는걸로 판정 되어 비기너가 아닌 마스터 입니다. 3. 하네뤼 : 수많은 H신도 좋지만, 이런 달달한게 있는것도 좋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것들이 읽는데 더 재밌더라구요. 물론 곧 H신도 나올 예정입니다. 하하하. 4. 창세전쟁 : 아하. 그렇군요. 다들 비슷한 목적을 갖고 있지만 의미가 미묘하게 다르네요. 설명 감사합니다.(__) 5. MT곰 : 오늘 또 달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나가면 진짜 몸이 망가질것 같아요. 스마트 폰을 끄고 잠수를 탈 예정입니다. 엉엉. 6. hohokoya1 : 죄송합니다. 94회는 나중에 나올 중요한 내용의 복선이 될 예정입니다. 크크. 조금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기에 부득이한 절단을…( --). 7. 치우형 : 아. 뜨거운걸 먹어 속을 좀 풀고 싶네요. 하지만 현실은 라면인가요. 엉엉. 8. EastRedwood : 비비앙을 예뻐 하시는군요! 우리 한별이도 예뻐해 주세요! :) 9. 테크노 : 그렇죠. 제가 봐도 애들 진짜 귀여워요. ㅋㅋㅋㅋ 혹시 누가 가장 귀여우세요? 10. 천겁혈신천무존 : 헐. 주인공 레벨 업은 차차 할 예정이에요. 지금 주인공이 답답하시다니. ㄷㄷ 행동면에서 보면 그럴수도 있지만 실력면은 지금 여기서 더 업그레이드 할 경우 진짜 먼치킨이 되어 버려서…. (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95 / 0933 ---------------------------------------------- 따라올 수 있겠어? 나는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앉은 상태로 다른 일행들이 준비를 마치기를 기다렸다. 당연히 야영 철거 작업을 나도 도우려고 했지만, 유정이와 솔이 극구 반대하는 바람에 꾸어 온 보릿자루 역할을 맡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건 여자들이 하는거라나 뭐라나. 그러면서 둘은 안현과 신상용 한테는 잘도 시켜먹고 있었다. 아무튼 덕분에 나는 상당히 여유로운 준비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검을 뽑은 후 가부좌를 튼 채 무릎 위로 올려 놓았다. 스릉, 사늘한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검은 뮬로 온 이후 대장간에서 구매한 일반 철검. 검을 사용하는 검사인 만큼 검을 어떻게 다루고 보관하는지는 너무도 자세히 알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품 안에 손을 넣는다. 나는 검을 닦으면서 담배를 태우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품 안에 잡히는 연초는 단 한대뿐. 즉 돛대였다. 조금 고민했지만 나는 입맛을 다시고 천조각만 꺼냈다. 나중에 탐험을 끝마친 후 도시로 들어가기전 피우고 싶었다. 일행들의 움직임을 한명을 제외하고는 일사불란했다. 다들 자기들이 잔 침낭을 정리하고 아침을 먹은 것들을 청소하고 있었다. 정하연은 아주 군인이 울고 갈 정도로 침낭의 각을 반듯하게 접고 있었다. 그에 반해 안현은 대충 마법 배낭 안으로 침낭을 쑤셔 넣다가 안솔한테 걸려 실컷 꾸지람을 듣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풍경들을 느긋하게 관람하며 나는 천조각으로 검신을 정성스럽게 밀어 닦았다. “리, 리더. 오늘은 그럼 바로 2층으로 올라갈 계획 입니까?” “후후. 말을 더듬는걸 보니 긴장하셨나 봅니다.” “하, 하하. 아닙니다. 이건, 그러니까 제 습관에 부, 불과 합니다. 절대로 긴장하지 않습니다.” 내 농담에 신상용은 창피한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나는 고개를 한두번 끄덕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힘을 주어 검신을 감싼 천조각을 쭉 밀어 올렸다. “일단 2층으로 올라갈 계획이기는 합니다.” “조, 좋은 결정 입니다.” “다만.” 나는 잠시 말을 멈춘 후 시선을 아래로 쏟았다. 반들거리는 검신이 눈에 들어왔다. 품 속으로 천을 집어 넣고 검집에 검을 들여 넣자 처음 뽑았을 때처럼 사늘한 소리가 들렸다. 좋은 소리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후 말을 이었다. “일단 2층으로 올라가 나름 성과를 냈다는 괴물들과 전투를 해야겠지요. 인간 100명이면 본신의 실력을 그대로 보유한 하급 마족 한명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물로 바친 100명이 어느정도인지 확인할 수 있다면 대충 소환된 마족의 등급도 추정할 수 있을겁니다.” “훌륭하군요. 노, 노파심에 한가지 더 말씀 드리면 제물로 바친 100명은 그중 가장 성과가 좋은 녀석들이라고 합니다.” “고맙습니다. 참고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이런게 바로 캐러밴을 구성하는 대원들의 대화란다. 그러니 너희들도 보고 배우렴. 이라는 의미를 담아 애들을 돌아 보았지만 그 누구도 나와 신상용을 보고 있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쉰 후 비비앙을 바라 보았다. 그녀는 졸린듯 눈을 연신 비비고 있었다. 어제 이른 저녁 식사 후 한동안 신상용과 기록에 대한 토론을 했는데, 대체로 질문을 받는 입장이라 많이 피곤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막상 전투에 들어서면 다른 모습을 보일걸 알기에 딱히 다른말을 하지는 않았다. 어느새 일행들은 한명 두명 탐험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안솔이 마지막으로 가방끈을 질끈 매고 어깨에 매는걸 보며 나 또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 되는 가운데 나는 침착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고생들 하셨습니다. 물론 앞으로 더 고생할지도 모르지만 말이죠.” “…….” “그러나 우리들은 어제 연구소 일층을 클리어링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목표는 1차는 이층 클리어링이고 2차는 삼층 진입 입니다.” “…….” 일행들의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안솔에게서 조금 불안한 빛을 읽을 수 있어 나는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막 입을 열기전 나는 의도적으로 까마득한 천장에 매달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밝은 햇살을 응시한 후 입을 열었다. “오늘은 아침 일찍 탐험을 시작하므로 시간은 어제에 비해 매우 여유로운 상황 입니다. 만약 오늘 내로 3층까지 클리어링 할 수 있다면 우리들은 늦어도 내일 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어제 얻은, 그리고 앞으로 얻을 물품들을 가지고 금의환향 하는겁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일행들의 눈에 활기가 감도는걸 볼 수 있었다. 바로 탐험을 나가는것 보다는 이런식으로 사기를 진작 시키는것도 캐러밴 대장이 해야할 일들중 하나였다. 아직 졸음의 여운이 가시질 않는지 조금 푸석한 눈동자로 나를 보던 애들은 전보다는 훨씬 번쩍이는 눈들로 나를 바라 보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계단은 북쪽, 그리고 동쪽. 즉 양방향 통로에 각각 하나씩, 총 두개가 있습니다. 괜히 멀리갈 필요 없으니 동쪽 계단을 이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들은 이층으로 통하는 계단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걸음 올려 놓자 낡은 층계는 금방이라도 부서질듯 삐걱이는 소리를 울렸다. 일행들 모두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한계단씩 차분히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은 생각보다 길었다. 더구나 위로 올라갈수록 나선형으로 꺾어 올라가는 모양새라서 코너를 돌 때마다 보이는 일층의 바닥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한동안 아무런 말 없이 좁은 계단을 오르던 우리들은 이내 이층으로 통하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내가 막 문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수현씨. 잠시만 기다려요.” 잠시 내 행동을 제지한 사용자는 다름아닌 정하연 이었다. 의문 가득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자 정하연은 안솔에게 보호 주문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녀의 속내를 짐작한 나는 희미한 미소를 던졌다. 그녀의 꼼꼼함이 또 한번 힘을 발휘한 것이다. “보호(Protect)!” 안솔의 지팡이가 내 몸을 향하고 이윽고 주위로 반투명한 구 하나가 나를 감싸는걸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정하연은 빠르게 주문을 웅얼거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수인을 맺었다. 더블 캐스팅 이었다. “───. 리플렉트 실드(Reflect Shield)!” 청아한 그녀의 목소리가 채 사라지기 전 그녀의 입은 다시 한번 열렸다. “타겟 지정 보호 주문. 오버랩(Overlap)!” 이윽고 정하연의 말을 끝마치는 순간 리플렉트 실드 마법은 흐물흐물한 물덩이 하나로 변하더니, 내 주위를 감돌고 있는 보호 주문에 녹아 드는걸 볼 수 있었다. 구가 조금씩 반짝이는 황금빛을 띄는걸 보며 애들은 탄성을 질렀다. 나 또한 그녀를 감탄 어린 눈길로 응시했다. 설마 남의 주문에도 간섭할 수 있을줄은 몰랐다. 보조 마법이긴 하지만 굉장히 높은 수준의 마법 응용이었다. “대단하군요.” “현재 우리들이 서 있는 곳은 층계죠. 만약 문 앞에 바로 괴물이 나온다면 위험할 수 있어요. 그에 대비했을 뿐 이랍니다. 수현씨 실력을 못 믿은건 아니에요.” 정하연은 겸손히 대답한 후 살며시 미소를 보여 주었다. 아무튼 이 마법 효과가 사라지기 전에 나는 얼른 문으로 들어갈 일종의 의무(?)가 있었다. 애들은 말은 안하고 있었지만 녀석들의 눈에는 문 너머 괴물들이 있었으면 하는 눈길들 이었다. “지금부터 캐러밴의 이층 탐험을 시작 합니다. 다들 정신들 단단히 잡으시구요. 그럼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차분한 음성으로 말하고는 손에 잡힌 문고리를 크게 열어 젖혔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예상대로, 엄청난 괴물이 튀어 나올리 없었다. 그저 휑한 공간만 있을 뿐. 내가 한 발자국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뒤에서 낮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쳇.” “칫.” 이놈들이. 마음 같아서는 바지를 벗긴채 볼기짝을 뚜들기고 싶었지만 억지로 억누른 후 일행은 안으로 인도했다. 일행 또한 나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눈 앞에 보이는 광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나는 재빨리 감지와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으응…불안해요오.” 기감이 예민한 솔은 두 손으로 자신의 팔을 쓰다듬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일층에 비해 배는 느껴지는 악의에 나는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아무래도 마족 소환은 일단 성공했다는 쪽으로 생각하는게 옳을것 같았다. 마족의 심장을 뽑아 가공 후 애들한테 먹일 생각을 하며 나는 콧노래를 불렀다. 물론 다른 사용자들한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이층의 크기는 일층과 얼추 비슷했지만 구조는 완전히 다르다고 볼 수 있었다. 일층이 동서남북 네방향 통로로 길을 나눈 상태로 각 통로에 방이 배치 되어 있었다면, 이층은 반을 뚝 자른 모양을 하고 있었다. 중간에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는 통로 하나와 그 통로를 기준으로 나뉘어진 거대한 두개의 공간. 나는 일단 우리들이 발을 디딛고 있는 공간을 훓어 보았다. 공간 구조는 상당히 간단했다. 네모낳게 각진 커다란 홀에 이미 세월에 바스라진 여러 알 수 없는 조각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리고 이 방 또한 통로를 제외한 면 하나당 하나의 문을 가지고 있었다. 즉 열 수 있는 문은 총 3개라는 소리였다. “음. 일층과는 다른 구조군요. 어떻게 보면 이층이 더 간단할수도 있겠는데요.”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죠. 하지만 바꾸어 생각해보면 애초에 실패작들보다 성공작들이 더 적을 수 밖에 없어요. 그런만큼 방심은 금물이에요.” 신상용과 정하연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형. 이제 어떻게 할거에요?” “응?” “꼭 이 방문을 모두 열 필요가 있을까요? 그냥 바로 다음방으로 넘어가는게….” “다음방? 건너편 공간에 3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는지 어떻게 확신하니?” 내 말에 안현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내 예상에도 지금 우리들이 있는 공간에는 계단이 없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굳이 모든 방을 탐색하려는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어떻게든 안현을 기공창술사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지금 나에 대한 충성도가 가장 높은 사람은 바로 안현이었다. 안솔이 내게 갖고 있는 감정은 충성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십년을 구른 나조차도 알아낼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감정을 솔이는 종종 내게 내비치고 있었다. 단순히 호의라고 생각하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안솔의 행동. 잠시 생각이 삼천포에 빠지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멍한 얼굴이었나 보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안현의 눈에 정신을 차린 후 곧바로 입을 열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이층은 빠르게 완료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일단 이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문을 차례대로 개방한 후 통로를 넘어 다음 공간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으으…뭐 이렇게 바스라진 조각들이 많지. 걷기가 불편할 정도 잖아.” “조심해. 뼈조각이 있을지도 몰라.” “어머머. 너무 무섭다. 아잉.” 유정의 애교에 일행들은 전부 불편한 얼굴이 되었다. 안현은 내가 앞으로 나아가자 아무런 대꾸도 않은채 따라 왔지만 그의 얼굴에는 일행들에 대한 뭔가 모를 미안함이 가득 했다. 그러나 너그럽게 봐주는것도 여기 까지였다. 가는 도중 자꾸 분위기를 흐트리는 행동을 반복하자 나는 둘을 날카롭게 한번 노려 보았다. 안현과 유정은 바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다시 조용해진 분위기를 유지하며 나는 우리가 올라온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 벽면에 있는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이 총 3개 밖에 없다고 했지만 문 하나마다 주는 위압감은 엄청났다. 멀리서 봤음에도 불구하고 일층에서 봤던 일반적인 문들이 아닌 삐죽한 창이 올올이 솟아오른 거대한 철문들이 사방으로 보이고 있었다. 우리들은 목표로 잡은 문으로 부지런히 걸으며 서서히 거리를 줄였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었는지 일행들은 15분안에 첫번째 목표로 잡은 문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걷는 동안 안솔과 정하연이 걸어준, 내 몸을 감싸던 반투명한 황금빛 구는 어느새 사그라든 상태였다. 나는 잠시 사방을 살핀 후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바로 문을 열겠습니다. 다들 준비들 해주세요.” “형. 이 문은 너무 두꺼워 보이는데요…혼자서는 힘드실것 같아요.” “아니. 나 혼자서도 가능해. 그러니 걱정 말고 대형 유지해.” 내 단호한 목소리에 안현은 그대로 한발자국 물러섰다. 그러나 눈을 동그랗게 뜬걸 보니 조금 놀란것 같았다. 이미 있을 가능성이 높은 마족을 진심으로 상대하기로 한만큼 지금부터는 예전의 야성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과연 일행들이 따라올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됬지만 나는 내 손보다 더 큰 손잡이에 손을 내밀며 생각을 깨끗이 비웠다. 문 안에서는 심상치 않은 기운들이 느껴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하하. 전개가 좀 느리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계신것 같습니다. 많은 말씀을 드리고 싶지만, 그래도 지금 속도에 적응하신 분도, 느리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으리라 생각 됩니다. 모든 독자분들은 만족시키는건 어려운 일이니까요. 다른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최대한 글이 늘어지는 느낌이 없도록 저 또한 주의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번회도 즐겁게 감상해 주십시오. :) PS. 오늘 쿠폰 폭탄이 쏟아졌네요. 독자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꾸벅.(__) 『 리리플 』 1. 귀여운곰돌 : 1등 축하 드립니다. 이상하게 곰과 관련된 아이디를 지니신 분들이 1등을 많이 하시는것 같네요. 하하하. 2. 유운[流雲] : 좋은 질문 감사 합니다. 질문하신 것들은 사용자들이 충분히 의문을 품을만한 사항 입니다. 김수현은 이미 다 알고 회귀를 한 거지만 다른 사용자들은 처음 천사를 만났을때 당연히 위의 질문에 해당하는 의문을 품었습니다. 일전에 세라프가 이런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어떤 질문을 하려는지는 알고 있지만, 하지 않는걸 추천한다. 오직 생존을 위해서만 신경을 써라. 하지만 타 사용자들 시각에서 서술된 내용은 없습니다. 그 이후로 통과 의례를 겪으면서 생존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고 사용자들은 사용자 아카데미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때 등장한 박현우가 이런 말을 하죠. 우리들은 당신들과 똑같은 사용자들이다. 우리들은 당신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사람들이 아니다. 즉 사용자들은 모두 마음속 한구석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다만 그 방법을 모르는것 뿐 입니다. 왜 이곳에 있는가 또한 충분히 품을 만한 의문이지만 그에 대한 해답은 현재 아무도 모릅니다. 물어봐도 대답해줄 수 있는 사용자들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적응해버린거죠. 그 의문을 가슴에 품은채 적응한 자는 살아 남고, 적응하지 못한자는 도태 되어 버립니다.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한구석에 품고 적응한 사람들을 사용자라고 부릅니다.(여기서 바로 부랑자들이 출현한 여러 이유들중 하나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독자님들에게 알려드린게 딱 그부분까지 입니다. 차후 내용을 전개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실 사항들 입니다. 초반부에 아주 조금 언급되었지만 말 그대로 희미하게 나왔고 중간에 아주 약간 보충하는 격으로 조금씩 드러냈거든요. 딱 이정도, 그 미약한 흐름을 느끼실 수 있을 만큼요. 3. 붉은달하늘 : 네! 정답입니다. 다만, 모든 랭크가 동일한 상승 단계를 지니지는 않습니다. :) 4. 키위머루 : 하하. 사용자들마다 차이가 있습니다만, 아무튼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솔이처럼 애초에 마력이 70을 넘는 애들이 비상식적인거죠. 특성화 능력치를 제외하면 애들도 그렇게 능력치가 높다고 볼수는 없습니다. 5. 휘을 : 하하. 추천해드릴 작품은 많습니다. 제가 재미있게 보는 민영모님의 네임드도 재밌고 다른 작가님들 작품으로는 시간의 지배자, 드래곤의 유산도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아. 너무 유명한 작품들 이려나요? 6. zjekfksqlc : 헤헤. 저도 한별이가 좋아요….(퍽퍽) 7. rhkdel2 : Yes. 당연히 나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 8. 지악, 제국화격단, 활의강, deceive, STgomtinge, 휘을 : 코멘트에 쿠폰을 주셨다고 남겨주신 분들을 모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또한 그 외에도 수많은 쿠폰을 주신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꾸벅.(__) 9. 베지밀군 : 하하. 고맙습니다. 저 또한 페이스 조절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 10. 北乾玄龍 : 아직 수현이가 고민중 입니다. 너무 신중한 애라서 고민에 고민을 하고 있죠. 크크.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96 / 0933 ---------------------------------------------- 따라올 수 있겠어? 문을 열자, 기이한 연기가 내부에서 흘러 나오는게 보였다. 동시에 귀 속으로 들어오는 나지막한 울부짖음. “흐르르르….” 그 음성은 숨길 수 없는 악의를 뭉클이 쏟아내고 있었다. 내부로 한걸음 들어선 후 나와 일행들은 눈에 들어오는 넓은 광장을 보며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아니, 광장의 넓이 때문에 말을 잊은건 아니었다. 일층에서 여지껏 거쳐온 방 너덧개를 합쳐도 지금 우리들이 서 있는 방의 크기에 안될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방을 가득 채운 허리를 꼿꼿이 세운 괴물 한마리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높은 천장에 아슬하게 닿는 거대한 몸집. 상체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얼핏보기에는 단단한 근육질로 뒤덮여 있었지만 피부는 연한 인간의 피부라기 보다는 강철과 같은 단단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하체로 시선을 내리면 인간의 두 다리가 아닌, 하나로 합일된 기다란 몸통을 볼 수 있었다. 인간의 상체와 뱀의 하체. “기가스…? 아냐. 그럴리 없어. 신화속 동물이 어째서 홀 플레인에….” 나는 재빨리 제 3의 눈을 발동했다. 이윽고 눈 앞 괴물의 정보를 읽은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과거 홀 플레인의 거주민들은 도대체 무슨짓을 저지른거지? 아니, 그전에 도대체 이놈이 아직 남아 있다는 소리는 제물로 바칠만큼 뛰어나지 못했다는 소리였다. 이정도의 괴물이 제물로 적합하지 않다면 도대체 3층에는 어떤 악마가 있는걸까. “미…친.” “거인….” 일행도 경악성을 내지르며 멍한 얼굴로 눈 앞의 기가스를 올려다 보았다. 한동안 그렇게 우리들은 서로 대치를 하고 있었고 곧이어 기가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게 보였다. 놈은 우리들을 비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순간 나는 눈에 불꽃이 튀는걸 느꼈다. 감히, 한낱 짭퉁 괴물이 나를 비웃어? 발끈한 마음에 진득한 살기를 쏘아 보내자 기가스가 한걸음 물러서는게 보였다. 나는 입술을 짓씹고는 뒤의 일행들을 보며 빠르게 입을 열었다. “비비앙. 키퍼.” “뭐, 뭐?” 비비앙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한다.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척 봐도 강해 보이는 괴물을 상대로 일행들중 가장 활약을 많이 한 비비앙을 키퍼로 돌리는건 합리적이지 못하다. 키퍼는 말 그대로 기본 전투에서 이탈, 일행의 사제나 마법사들을 지키는 역할을 맡는다. 물론 애들과 함께 하는동안 키퍼를 자주 맡았고 방진을 유지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전투에 참여한적은 있지만 원래 대규모 원정대에서 키퍼란 그런 역할이었다. 물론 마법사인 만큼 원거리 지원이 가능하다고 해도, 애초에 마법사를 키퍼로 넣은것 자체가 이상한 일 이었다. “눈 앞에 있는놈은 겉으로 보면 기가스처럼 보이지만, 결국 만들어진 실험물에 불과합니다. 거인과 바실리스크의 합작물이죠. 지닌바 힘은 어떨지 몰라도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만큼 인간이 처리할 수 있습니다. 눈 앞의 놈이 다른 제물 100마리 보다 덜떨어진다는걸 잊지 마세요.” “그, 그래도….” 더듬거리는 모습들이 보였지만 나는 단호하게 내 의견을 전달했다. 솔직히 제대로 성장한 거인이니 바질리스크 한마리는 굉장히 강력하다. 그 두놈을 합친만큼 도대체 어느정도의 위력을 보여줄지는 나 또한 감히 판단할 수 없었다. 따로따로 상대해본적은 있어도, 합일된 놈을 상대해본적은 나도 처음 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일단 거인의 피가 흐르는 만큼 마법사와 사제들은 직접 전투에서 한발 물러나는게 나을것 같습니다. 간간히 보조 마법으로만 서포트만 해주세요. 안현, 유정. 이번에는 프리롤이다. 전방에 내가 먼저 달려갈테니, 너희들은 내 뒤를 공격 보조 하는 역할을 맡는다. 회피를 최우선으로 설정하고 놈의 신경을 분산시키는데 주력해. 그 외는 어디 한번 재주껏 보조 해봐.” 나는 일행들의 머뭇거림을 단칼에 자르며 말을 이었다. 자율 전투라는 말에 애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내가 몸을 돌리자 뒤에서 정하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수현씨! 차라리 방진을 구성하는게….” “방진보다는 이게 더 낫습니다.” “네?” “더 설명할 시간 없습니다. 제가 말한게 더 낫습니다.” “흐르르르….” 내 말이 끝나자마자 드디어 기가스가 움직였다. 거대한 뱀의 몸통이 꿈틀 움직이더니 이내 미끄러지듯 우리한테로 달려온다. 시간이 없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정하연은 내가 말한것들을 곱씹고 있었다. 아마 그녀라면 내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을것이다. 지금 기가스를 상대로 방진으로 대응하는건 우리 캐러밴의 일행 구성을 완벽하게 갖추고, 숫자가 배는 넘을때 비로소 힘을 발휘한다. 지금 우리들의 상태와 구성으로 방진을 펼친다면 어설픈 대응으로 밖에 볼 수 없었다. 물론 내가 말한것들도 문제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요지는 간단했다. 즉 내가 전방에서 홀로 기가스를 완벽하게 틀어 막으면 모든 문제는 해결 된다. 늦지 않게 깨달았는지 정하연이 눈에 이채를 띄우는걸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걱정어린 빛이 떠오르는걸 마지막으로 나는 그대로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주저하던 애들도 내가 앞으로 달려나가자 뒤에서 허겁지겁 달려온다. 겁을 잔뜩 먹어 달려오지 않으면 실망하려고 했는데, 그래도 자기들 형, 오빠인 이상 그냥 놔둘수는 없었나 보다. 나는 슬쩍 웃으며 달리는 속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기가스와 나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고, 놈이 있는 힘껏 오른손을 치켜드는게 보였다. 그대로 나를 내려 찍을셈인가. 그에 화답해 나 또한 검을 상단으로 들었다. 첫번째 격돌에 기를 확실히 죽여놀 생각 이었다. 그순간 하나의 메세지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잠재 능력 백병전(Rank : A Plus)이 활성화 됩니다. 백병전은 근접 무기를 다루는 사람에 있어서는 이미 극한을 넘어선 능력 입니다. 랭크 판정 A+. 단순 전투 능력이 아닌 인간으로서 획득 가능한 최고봉의 상승 경지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근접 전투에 한해서는 절대로 밀리지 않습니다.』 * 정하연은 굳은 얼굴로 전방을 응시했다. 그녀의 머리속에는 방금전 김수현과 나눈 대화가 자꾸 떠오르고 있었다. '수현씨! 차라리 방진을 구성하는게….' '방진보다는 이게 더 낫습니다.' '네?' '더 설명할 시간 없습니다. 제가 말한게 더 낫습니다.' 하연은 입술을 질끈 씹었다. 그는 그렇게 무모한 사람이 아니다. 오래동안 같이 행동한건 아니지만, 그의 지휘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엄청난 센스가 돋보이는건 아니지만 항상 침착하고 논리정연한 정공으로 대응한다. 몇년을 홀 플레인에서 굴러먹은 베테랑들도 그정도로 완숙한 지휘는 못할것이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아니, 이해는 간다. 그리고 대충 그가 노리는 바도 짐작할 수 있었다. 김수현이 말한게 떠오른다. 전투에서 한 발 물러나는게 나을것 같다. 그렇게 말했지만 마지막 마주친 김수현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전투에 방해가 되지 않을 자신이 있으면 재주껏 해보세요.' “안되면 방해가 되니 가만히 있으란 건가….” 하연이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리는 순간 옆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악! 오빠! 오빠아아아! 안 돼애애애!” 그 비명에 놀라 절로 고개를 들자 앞에서 기가스라 불린 괴물과 사용자 김수현이 정면으로 격돌하려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입을 틀어 막았다.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줄 알았는데, 설마 저렇게…. 꽈앙!!!!!!!!!! 그런 생각들이 채 끝나기도 전. 둘의 거리는 완벽하게 줄어 들었고 서로 부딪친 순간, 방안을 뒤흔드는 굉음이 사방을 울렸다. “어, 어서 치료 주문을!” “하고 있잖아요! 언니 오빠들도 가만히만 있지 말고 빨리 가서 도와…?” 평소 얌전하던 이미지와는 다르게 빽 소리를 지르던 안솔은 도중에 뒷말을 흐리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점점 벌려지는 그녀의 입술. 멍한 눈동자로 변하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모두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일행들은 방금전 격돌의 현장에 시선이 닿는 순간, 이어진 광경게 모두들 똑같은 침음성을 흘리고 말았다. “말…도 안 돼.” 말 그대로 말도 안되는 광경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사용자 김수현과 기가스의 격돌은 그 누가 봐도 사용자 김수현의 우위였다. 단 한번의 격돌로 기가스가 뒤로 크게 물러나고 말았다. 모두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도중 오직 비비앙만 조용히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녀는 일전에 수현의 본모습을 일부나마 본 만큼 일행들처럼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물론 이정도일줄은 몰랐을테지만. 이미 함께 하기로 한 이상 모로 가도 좋았기 때문에, 주문을 완성한 비비앙은 낭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라! 임프리손! 49군단을 지배하는 강철의 구속자여!” 비비앙의 목소리가 들리자 주변에 있던 신상용, 안솔, 정하연이 퍼뜩 정신을 차린듯 고개를 들었다. 이로서 비비앙은 키퍼지만 동시에 수현을 원호한다. 어제 한번 본 마수 한마리가 마법진 위로 떠오르고, 이윽고 비비앙의 명을 받아 사슬을 쏘아 내는걸 보면서 하연은 자신도 전투에 참가하리라 마음 먹었다. 이대로 손가락만 빨고 있을수는 없다는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지배했다. '문제는 어떤 마법을 사용하는가 인데….' 하연의 머리에 수많은 주문들이 올라왔다가, 다시 아래로 하강한다. 그리고 올라온 주문중 딱 하나의 주문만이 내려가지 않고 그녀의 머리에 남게 되었다. 하연은 신상용과 안솔의 얼굴을 한번씩 확인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점차 사늘하게 변하고 있었다. “안솔양.” “네, 네?” “속박 주문을 준비하세요. 그리고 신상용씨.” 다른말은 용납하지 않겠다는듯 하연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곧바로 이어 신상용을 부르자, 그는 바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그걸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부탁드려요.” “그거라면….” 신상용은 멀뚱한 얼굴로 정하연을 응시했다. 자신과 그녀 사이에 “그거.” 라고 한다면 생각나는건 단 하나밖에 없었다. 거인에게 마법이 통할지 미지수지만, 마법 응용에서는 자신보다 훨씬 높은 경지에 있는 하연의 말이기에 뭔가 속내가 있을것이다. 그는 결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상성 마법은 어느 계열로?” “염화 계열로 해주세요. 물 계열과 오버랩은 제가 외우도록 할게요.” 둘의 대화는 빠른 속도로 이어지고 있었다. 안솔은 그 대화를 따라가지 못해 그저 고개만 방방 휘두르고 있었다. 어쩔줄 몰라하는 모습. 하연은 답답한 감정이 울컥 치솟았지만 간신히 억누른채 입을 열었다. “타겟 지정도 제가 할게요. 솔양은 그냥 속박 주문을 완성시키 후 신호에 맞춰 쏘시면 됩니다.” “마, 마법 응용을 3개나? 아무리 그래도 그건 무리 입니다.” “할 수 있어요. 그래도 혹시나 모르니 최대한.” 하연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비앙이 쏘아 보낸 사슬은 막 공격하려던 오른팔을 감아드는게 보였다. 거인의 저항으로 완벽하게 구속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잠시 시간을 버는셈으로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사용자 김수현은 땅을 강하게 굴러 발돋움을 하더니 이내 허공으로 떠올라 검을 휘두르는게 보였다. 멀리서도 보이는 검에서 솟아 나온 찬연한 검기가 낭창하게 휘어진다. 마치 채찍처럼 휘어 들어간 검기는 단단한 기가스의 몸통을 세게 후려쳤다. 기가스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연신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저 괴물은 지금 사용자 김수현과의 백병전에서 계속 밀리고만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하연의 목젖이 꼴딱 움직였다. “왼쪽 팔을 타겟으로 설정해 주세요. 한순간의 틈을 만들어 주는거에요. 양 팔을 구속 하겠습니다.” “네에….” “좋습니다.” 신상용은 대답 후 그대로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안솔 또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들을 느꼈는지 가만히 지팡이를 들어 입을 오물거렸다. 그 모습들을 일일히 확인한 하연 또한 조금 시간차를 두고 캐스팅에 들어갔다. 그녀는 가장 늦게 스펠 캐스팅을 시작 했지만 가장 빨리 외울 자신이 있었다. “───. 티스 오브 크리스탈(Teeth Of Crystal)!” “───. 번플레어(Burn Flare)!” 순식간에 하나의 주문을 완성시킨 하연. 그 상태로 조금 기다리자 신상용, 안솔이 차례대로 주문을 완성하는걸 볼 수 있었다. 어느새 하연의 손에는 시릴듯한 얼음이, 신상용은 손에는 녹을듯한 이글거리는 불덩이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둘은 서로 마주본 후 동시에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오늘 96회는 조금 더 일찍 완성하기는 했는데 속이 좀 안좋아 누워버린게 화근이 됬네요. 일어나니 어느새 4시간이 훌쩍.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수정과 퇴고를 하는데 왜 이렇게 억울한 기분이 들까요. 잠이 참 원수입니다, 원수. 하하하. 아무튼 이번회도 즐겁게 감상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 리리플 』 1. 미월야 : 하하. 미월야님도 몇번 뵌 기억이 있는것 같네요. 아무튼 1등 축하 드립니다. 2. 사람인생 : 이런. 얼른 나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몸 조리 잘하세요. 파이팅 입니다. :) 3. MT곰 : 헐. 곰돌이가 얼마나 귀여운데요! 제 소원중 하나가 엄마곰 아빠곰 푹신한 털 베고 자거나 아니면 아기곰 껴안고 자는건데요. 곰돌이 너무 귀여워요 정말. ^0^ 4. Toranoanal : 헉. 그렇군요. 저는 그래도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ㅇ; 용병은 처음 봤을때 충격 이었습니다. 진짜 한줄한줄을 섬세하게 읽게 만들더라구요. 저도 현재 기다리는 도중입니다. :) 5. 자색 : 아. 설정이라면 애들 정보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연구소 탐험 끝내고 대대적으로 업데이트 한번 할게요!(그때 능력치가 오르는 시점 이거든요.) 6. zjekfksqlc : 음. 좋습니다. 한별이 2위인게 아쉽지만. 흐흐. 솔이가 아주 괴롭히는 맛이…흠흠. 아, 아닙니다. 7. 귀여운곰돌 : 맞아요! 곰돌이가 왜요! 곰돌곰돌! 8. Peres : Yes. 김수현에 한해서, 중복 직업 인정 됩니다. 다만. 당시 검술 전문가를 직업으로 삼은 사용자가 없었고, 김수현이 검술 전문가를 골랐습니다. 그순간 홀 플레인에서 검술 전문가가 나올 가능성은 없습니다. 특전을 이용한 목록 활성화는 말 그대로 존재하는 모든 직업을 보여주지만 선택한 이후로는 중복이 불가능 하다는 같은 설정으로 귀결 되니까요. 다만. 비비앙의 경우처럼 아~주 드문 경우도 있습니다. 하하하. 9. 레필 : ㄲㄲ 그렇죠. 그런데 쪼금 걱정이 드는게 연구소 끝나고 솔이 모종의 행동을 할 예정입니다. 그걸 보고 솔이를 좋아하시는 독자분들이 멘붕은 하지 않으실지요. -_-a 10. 오피투럽19 : NO. 아. 천국이라니. 빵 터졌습니다. :) 초반부에 나오는데, 소환의 방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97 / 0933 ---------------------------------------------- 따라올 수 있겠어? 개시의 신호는 신상용이 왼손을 먼저 내미는걸로 시작 되었다. “조화의 마방진(Magic Square Of Harmony).” 예전에 보인 소규모 마방진이 아닌 본격적으로 사용하는 조화의 마방진. 신상용이 짧게 읊조리는 순간 그의 왼 손바닥 위로 입체 마법진 하나가 떠올랐다. 이윽고 예전과는 다른 완연히 보이는 마방진이 솟아오르고, 신상용과 정하연은 그 마방진 위로 자신들이 캐스팅한 주문을 쏘아 보냈다. 마방진에 동시에 도착한 불과 얼음의 주문들은 이내 회오리가 일듯이 빠르게 섞이며 마법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제부터는 신상용의 역량에 달린 일. 첫 단추를 잘 꿰어야 다음에 바통을 이어 받을 정하연, 안솔이 받는 부담이 적어진다. “───. ───. ───.” 신상용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중얼거리는걸 멈추지 않았다. 꿰뚫을듯한 눈빛으로 마방진을 보는게 지금쯤 속으로 엄청난 조절과 배열을 나누고 있을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행히 빠른 시간 안에 해답이 되는 배열을 찾은듯 신상용의 안색이 급격히 밝아지고 있었다. 잠시 후, 마방진 위로 떠오른 마법은 있을 수 없는 형상을 보이며 허공에 체류했다. 둘이 만들어낸 마법은 외부에 삐죽삐죽 솟아있는 얼음 결정들로 덮혀 있었고, 그 결정 위로 작열할듯한 염화들이 감돌고 있었다. 시작은 좋았다. 신상용은 조금 힘겨운 얼굴로 정하연에게 시선을 돌리며 유지하고 있던 마법을 인계했다. 그의 시선을 받고 허공으로 두둥실 날아오는 마법을 보며 하연은 입술에 침을 적셨다. 정말 오랜만에 해보는 자신의 한계에 가까운 마법 조합. 곧이어 마법을 인계 받는 순간 격한 부담이 체내로 밀려 들어오는걸 느꼈다. 그래도 버틸만한 수준이었다. 잠시 마법을 보던 그녀는 젖먹던 힘까지 뽑아내 캐스팅한 주문을 시전했다. “리버스(Reverse)!” 청아한 목소리의 하연이 입을 여는 순간 둘이 만들어낸 마법이 다시 한번 하얀 빛에 감싸인다. 이번에 선택한 반전은 마력 위치 지정. “흐읏…!” 하연은 야릇한 신음성을 터뜨렸다. 마법을 파훼하는게 아닌 마나를 유지하는 목적으로 시전한 마력 간섭이라 머리에 띵한 현기증이 이는걸 느꼈다. 반전에 의한 충격으로 하연한테 막대한 마나 역류가 흘러들어간 탓이다. 그러나 그녀는 억지로 참으면서도 마법 반전을 기어코 완벽하게 성공시켰다. 리버스가 녹아 들어간 마법은, 처음의 모습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달라진점을 말하라면 삐죽 솟아있는 얼음 덩어리 내부로 염화의 불길이 맴돌고 있다는것. 옆에서 구경하던 안솔은 완벽하게 스며든 마법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그러나 또한 한편으로는 불안감도 들었다. 이제 곧 자신이 저 마법을 이어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끝난게 아니었다. 지금 이 주문을 그대로 쏘아 보내도 충분히 위력적인 면모를 보이겠지만 상대는 마력 저항의 대명사중 하나인 거인. 그들이 지닌 피는 선천적으로 마력을 거부하는 특성을 타고난다. 그렇다면 그걸 깨뜨릴만큼 더욱 강력한 마법을 배합할 필요가 있었다. 하연은 아찔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다시 한번 주문을 캐스팅했다. “───. 타겟 지정…속박(Shackles) 주문. 오버랩(OverLap).” 오버랩 주문도 어떻게 보면 조화의 마방진과 상당히 닮은 구석이 있는 응용 마법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마법의 상성 법칙내에서 이루어지는 일. 조화의 마방진처럼 법칙을 무시할수는 없지만 그래도 고등 응용 주문중 하나라는데는 변함이 없었다. 안솔이 시전한 속박 주문 위로 둘이 만들어낸 마법이 흘러 들어간다. 신성 주문과 마법이 닿은 순간, 하얀 빛이 번쩍이며 주변을 가득히 메웠다. 여러 주문들이 하나의 마법으로 귀결 되는 과정은 가히 아름답다고 할 수 있었다. 아무튼 이제 바톤은 안솔에게로 넘어갔다. 지금껏 잘 해왔지만 마지막 시전자인 안솔이 그 부담을 견디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 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연이 혹시나 하는 눈동자로 안솔을 응시하자. “으응….” 인상을 찡그리기는 했지만 어찌어찌 버티는 안솔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현재 안솔의 마력 능력치는 86. 그리고 정하연의 마력 능력치는 87이었다. 물론 정확한 능력치는 하연도 잘 모른다. 아마 알게 된다면 게거품을 물 일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냥 대견하기만 할 뿐 이었다. 안솔은 천천히 지팡이를 들었다. 홀 플레인으로 들어온 이후 처음 느껴보는 엄청난 마력의 집합에 조금 질리기는 했지만, 그만큼 강한 위력이 내포된 반증이기도 했다. 그러나 솔은 아직도 미적거리고 있었다. '…내가 과연 맞출 수 있을까아. 빠, 빨리 해야 하는데에. 어떡해….' 아직 안솔이 익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주문은 단 3개에 불과하다. 속박, 치료, 보호. 해독가 그외 기타 주문도 어찌어찌 사용은 할 수 있지만 호밍 주문을 익히지 않았다. 안솔은 후회했지만 지금 하는 후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기색을 눈치챈 하연은 날카로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쏘세요.” “하, 하지마안….” “쏘시라구요. 계속 유지하다가는 마력은 마력대로 역류 되고 마법은 소멸 되요.” 그 말이 기폭제가 됬는지, 아니면 알게 모르게 쏘아 붙인 하연의 차가운 말이 무서웠는지 안솔은 침을 꼴딱 삼켰다. 지팡이를 들고 전방의 기가스를 겨냥한다. 그럼에도 한동안 주저하던 솔은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속박(Shackles)…!” 그리고. 솔의 주문 발사를 확인한 하연은 한번 더 주문을 준비했다. * 한창 허공에서 칼질을 하던 나는 다시 땅 바닥으로 가볍게 안착했다. 내 앞에는 이리저리 길쭉한 검상을 입은 기가스 한마리가 헐떡이고 있었다. 확실히 놈은 강하다. 거인과 바실리스크를 따로 놓고 보면 기가스는 단연 우위에 있는 놈 이었다. 나름대로 성과를 낸 놈이긴 했다. 그러나 그 뿐 이었다. 보스 몬스터도 아니고 만들어낸 괴물인 이상 놈과 첫 격돌때 나는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다. 어차피 3층의 악마와 전투전 가볍게 몸을 풀 생각인지라 내심 이놈의 등장이 반가운 마음도 있었다. 몸풀기에는 이렇게 덩치 크고 체력이 좋은 놈들이 딱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제 슬슬 끝을 낼 생각으로 나는 다시 한번 도약할 준비를 했다. 애들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간간히 기가스가 몸을 이리저리 비트는걸 보니 내 오더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것 같았다. 그리고 키퍼를 지시 했지만 비비앙은 똑똑하게도 양 팔이 아닌 오른팔만 집중적으로 구속하고 있었다. 이정도만 해도 나에게는 이미 넘칠만큼 충분했다. “슬슬 끝을 내야지.”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마력을 끌어 올렸다. 머리 부터 몸 아래 끝까지 베어낼 생각으로 검을 높게 치켜 들려는 순간 이었다. 파앙! 뒤에서 어떤 주문이 발사 되는 소리와 함께 그 마법은 무서운 속도로 나와 기가스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막 바닥을 박차려고 무릎을 구부린 나는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뭐지. 물러난 마법사들이 어떤 주문을 외우는 기척은 느꼈지만 지금 내 뒤로 오고 있는 마법은 나 또한 맞기 싫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차라리 베어 터뜨리고 말지. 방향이 애매해 이대로 피할까 생각을 했지만 마법은 내 마음을 읽은듯 곧바로 궤도를 바꾸어 기가스의 왼 팔로 날아들었다. “타겟 지정 주문이군.” 정하연의 솜씨인가. 일부러 살짝 도발을 했는데 제대로 먹힌 모양이다. 나는 연한 미소를 짓고는 잠시 기다려주기로 했다. 기껏 마법을 완성했는데 그전에 내가 끝내버리면 예의가 아니잖은가. 그리고 조금 궁금한 마음도 있었고. 초반 기세 등등 내게 달려든 기가스는 내게 신명나게 뚜들겨 맞은 이후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몬스터들이 위세를 부리는걸 정말 싫어하는지라, 일부러 베지 않고 검면으로 퍽퍽 후려친감도 조금 있었다. 잠시간의 소강 상태가 오고 애들도 신속하게 뒤로 빠지는걸 느낄 수 있었다. 참 얘들은 마음에 들었다가~안들었다가. 평소에도 이러면 좀 좋을텐데. 전투를 하면 할수록 안현과 유정은 자신들 나름대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파상 공세를 멈추자 기가스의 얼굴에 한순간 안도의 빛이 스치는게 보였다. 그러나 죽음전 잠시의 안도일뿐. 마법을 구경한후 나는 바로 처리할 생각을 하며 천천히 발 아래로 마력을 모았다. 너무 높게 뛰어 오르면 천장을 뚫고 올라갈지도 모르기 때문에 적당히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이윽고 하얀 빛을 내뿜는 속박 주문이 내 옆을 지나가고, 기가스의 왼팔로 달려드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기가스는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단지 숨을 고르고 있었을 뿐. 미약히 몸을 뒤틀어 피하려는 시도는 한것 같지만 비비앙이 오른팔을 단단히 구속하고 있음에 그냥 맞아주기로 한 것 같았다. 자신의 마법 저항 특성이 완벽한 패인(敗因)이 될거라는걸 모르는채 기가스는 씩씩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옆을 스치고, 그대로 위로 날아 올라간 마법의 모습은 한순간이지만 내게 놀라움을 주었다. 아무래도 기대하던 신상용의 조화의 마방진을 토대로 만들어낸 마법인것 같았다. 자세한 정보를 보고 싶었지만 제 3의 눈을 발동하기도 전. 겉으로 보이는 얼음 덩어리들이 입을 쩍 벌리더니 기가스의 왼팔 어깨를 꽉 깨물어 들어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광경은, 말 그대로 장관 이었다. 파아앗! 솔의 주문인듯 기가스의 왼팔이 하얀 빛으로 물든다. 놈이 왼팔에 빛이 휘감기자 움찔하는 동시에 눈에 뜰 정도로 움직임이 둔해진다. 그리고 그 움찔해버린 순간. 콰악! 쩌저정! 얼음 송곳들이 다시 한번 위 아래로 기가스의 왼팔을 크게 깨물었다. 동시에 팔 전체로 퍼지는 얼음 덩어리들. 이건 기가스도 조금 놀랐는지 황급히 왼팔을 휘저었지만 솔의 주문이 아직 남아 있어 생각대로 마법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마지막 신상용의 주문으로 보이는 염화 덩어리로 마법은 백미를 맞이했다. 기가스의 단단한 살갗 안으로 파고든 얼음 송곳들은 일종의 통로 역할 이었다. 마치 주사기를 주사하듯, 얼음 내부에 갇혀 있던 염화의 기운이 통로로 쭉 밀려 나오고 말았다. 그말인즉슨 거인의 신체 내부로 직접 마법을 투사한 셈이다. 악랄하다면 가장 악랄한 방법이었다. 펑! 퍼버벙! “흐라아아아아아아아아!” 순간 기가스의 왼팔 내부에서 엄청난 폭발 소리가 들리며 놈의 피부가 울룩불룩 솟아올랐다. 아무리 마법 저항 특성이 있어도 몸 내부로 직접 마법을 꽂는데는 도리가 없는지 기가스는 큰 소리로 고함을 질러다. 폭발 소리를 들으니 번 플레어(Burn Flare) 마법이로군. 아프겠다. 나는 하나씩 끊어 구경했지만 이 모든 과정은 단 2초~3초 안에 일어난 일들 이었다. 문득 세명에 대해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저정도면 확실히 어딜 가서도 먹히는 마법으로 봐도 무방했다. 눈에 보이는건 세개의 마법이지만 그 안에 훨씬 더 마법적 처리를 가미 했을것이다. 물론 우리 솔이가 이런 생각을 했을리는 없고, 아마도 정하연과 신상용이 했겠지. 어쨌든 똑똑하다. 그들의 마법은 두수, 아니 세수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폭발성 마법을 몸 안으로 보내 왼팔에 있던 피를 태워버린다. 물론 피 자체에 마력 저항이 흐르는 만큼 전부 태워질리는 없겠지만 왼팔 한정 마법 저항 특성을 약화시키는건 가능하고도 남는 일. 그 증거로 조금씩 힘을 잃어가던 솔의 속박 주문과 정하연의 얼음 마법이 조금씩 힘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노린건 바로 이것으로 그들은 직접적인 타격을 선택하기 보다는 이렇게 내게 한순간의 틈을 만들어 주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렇게 비비앙은 오른팔을, 세명의 마법사는 왼팔을 구속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두 팔이 구속된 이상 눈 앞의 기가스는 차려진 밥상에 불과했다. 지금껏 만난 놈들보다 가장 많은 체력, 내구를 선보이고 있었지만 이미 나와 일행들의 공세로 그마저 상당수 떨어진 상태였다. 아마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리더로서의 위엄이 서지 않을것이다. 나 또한 미리 도약을 준비하고 있던만큼 강하게 땅을 박찼다.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 오른다. 이미 놈의 왼팔은 걸레짝을 연상케 할 정도로 너덜너덜하게 변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두 팔을 휘둘러 내 접근을 방해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특히 얼음 마법에 당한 이상 몸을 무리하게 움직이면 팔이 그대로 찢겨져 나갈수도 있는 노릇 이었다. 기가스의 얼굴에는 수많은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허무함, 고뇌, 경악감 등등. 천장에 머리가 아슬하게 닿을 정도로 도약 했다가, 그대로 하강하는 힘을 이용하기 위해 검을 정면으로 들었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놈의 머리 또한 내 행적을 좇기 위해 고개를 든 상태였다. 놈과 나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그대로 떨어져 내리며 머리를 향해 검을 내리 그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음. 오늘은 죄송할 소식을 먼저 전해야 할것 같습니다. 내일(2월 22일) 제가 매우 중요한 약속이 있습니다. 아마 나가면 다음날 자정을 넘어서 들어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또 자정에 올리지 못하는건가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마침 예약 아이템이라는 아주 좋은 아이템이 있더군요. 해서 약속에 나가기전 한편은 완성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 한편은 23일 자정 예약으로 올리면 되지만 22일 오후에 올리는 연참은 조금 힘들것 같습니다. 물론 글이 팍팍 써지면 몰라도 그런적은 거의 없어서요. ㅜ.ㅠ 그래서 드리고 싶은 말은, 2월 22일(금요일)은 일일연재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즘 연참이 생활화 되서 그런지 혹시 오후에 또 한편이 올라오는걸 기다리실 독자분이 계실지도 몰라 미리 후기에 쓰는게 낫겠다 싶었습니다. 독자분들의 너그러운 양해를 바랍니다. 로유진 올림. 『 리리플 』 1. 쿠로시온 : 1등 축하 드립니다. 요즘 느끼는건데, 1등 쟁탈전이 굉장히 치열한것 같습니다. 예전에 볼 수 있었던 고정 1등 코멘터 분들의 모습이 조금씩 사라지는 기분이네요. 하하하. 아. 악마는…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크크. 2. 쥬레이아 : 이미 수현을 부모로 생각하는 아이들이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엄마 아빠 하면서 졸졸졸 따라갈지도 모르겠네요. :) 3. zjekfksqlc : 흐흐흐. 그 이유는…아시잖아요. ( --) ~ ♪. 4. 당룡 : 크크크. 아주 좋은 선택을 하셨습니다. 제가 장담하는데 김수현 주식은 앞으로 계속 상승할 일만 남았거든요. 하하하. 5. 비극의삶 : 이런. 앞으로 조금 더 재미있게 느끼실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 6. 긔염곰탱이 : 『띠링. 사용자 긔염곰탱이님의 주문이 발동 되었습니다. 해당 소환 주문에 따라 메모라이즈 2월 22일 12:00 97회 연재분이 소환 되었습니다.』 7. Toranoanal : 하하. 지금도 정말 행복한데 개인지까지 나오면 꿈에 젖을것만 같네요. 보내주신 쪽지 잘 받아 보았습니다. 앞으로도 Toranoanal님의 설레는 코멘트들을 보고 싶네요. :) 8. 파브르 : 왜, 왜이러세요. 가, 감사하기는 하지만…저는 남자라구요. 엉엉. 9. 아미슈 : 아하. 그렇게 생각하실수도 있겠네요. 네. 제가 설정에 차이점을 둔건 상시 유지 마법과 조금 유지하거나, 즉발성 마법을 따로 따로 두어서 그렇습니다. 몇분정도 유지하면서 하는 더블 캐스팅은 가능하지만 하루종일 라이트를 유지하면서 하는 더블 캐스팅은 힘들거든요. :) 10. NaManBwa : 조금씩 언급 되기는 했지만 아직은 스포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도 상관 없으시면 쪽지 보내주세요. 현재까지 드러낸 부분에 대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11. hohokoya1 : 으흐. 감사합니다. 저도 요즘 늘어나는 선작만 보면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하하하. 그리고 죄송해요. 22일은 연참이 힘들것 같네요. ㅜ.ㅠ 12. juan : 어떻게 보면 덮치는게 더 나을수도 있죠. 괜히 썼다가 솔이 응원하는 독자분들의 심기를 거스르는게 아닌지 걱정이 들어요. ㅜ.ㅠ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98 / 0933 ---------------------------------------------- 따라올 수 있겠어? 하강하는 힘을 이용해, 그대로 정수리부터 있는 힘껏 베어 내린다. 콰득. 콰득. 투두둑. 마력을 한가득 불어 넣기는 했지만 돌처럼 단단한 기가스의 신체는 단 한번의 걸림도 없이 시원하게 반으로 갈라졌다. 상체의 중앙 절반을 이등분한채로 서서히 몸을 허물어뜨리는 기가스를 보며 나는 그대로 바닥으로 발을 디뎠다. 쿵! 큰 몸집을 가지고 있던만큼 넘어지는 소리도 웅장했다. 힘든 몬스터를 처리했다는 후련함은 없었다. 애초에 첫 격돌 이후 이놈은 내 상대가 아니라는걸 알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평소와는 조금 다른 내 오더에 잘 따라와준 일행들에 고마운 감정이 일었다. “형. 고생 하셨습니다.” 어느새 내 뒤로 붙은 현. 이번에 자세히 살피지는 못했지만 기껏 맞춘 장갑 몇곳이 찌그러진게 보였다. 팔은 나와 마법사들이 거의 묶다 시피 했으니 아마 꼬리나 몸통을 이용한 공격에 몇번 스쳤을 것이다. 안현은 보기 드문, 눈을 반짝이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형은 정말 대단해요.” “뭘. 마법사들이 잘 한거지.” “그래도요. 그렇게 한방에 저놈을 끝장낼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한방은 아닌데….” 나는 애매하게 말을 흐렸다. 현의 표정이 점점 더 부담스럽게 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발을 서둘러 놀렸다. 뒤에서 유정이 같이 가자는 말이 들렸지만 그냥 무시하고 걸었다. 일행들의 얼굴들은 더 가관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한칼에 놈을 처리한게 그리도 놀랍던가. 어쨌든 다들 고생한건 사실이니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대단한 마법 조화네요. 여러분들 덕분에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아…네…사용자 김수현도 대단합니다. 하, 하하.” 신상용은 벙찐 얼굴로 대답을 했지만, 당황한 속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표정만이 아니라 꼬박꼬박 리더라고 부르다가 호칭을 바꾼걸 보니 알 수 있었다. 안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애들의 표정을 살피자, 딱히 이상한점은 찾을 수 없었다. 어느정도 나와 같이 지낸만큼 그냥 “대단하다.” 정도일 뿐 내게 의구심을 가지는건 아니었다. 그러나 신상용과 정하연은 아니었다. 이번의 전투로 나는 그들에게 내 일부를 보였고, 일부에 불과해도 충분히 0년차 사용자를 뛰어 넘는 힘을 드러냈다. 즉 내가 동년차 보통 사용자들과는 다르다는걸 알린셈 이었다. 잠시동안 신상용, 정하연 둘과 시선을 교환한 나는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법을 너무 과하게 사용하셨네요.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괜찮…아요. 그런데….” “그런데.” 까지 말한 정하연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녀의 얼굴에 수많은 갈등 어린 빛이 지나간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파리한 입술이 다시금 열렸다. “…그래도 저희들 덕분에 조금 편하지 않으셨나요?” 정하연은 곧바로 표정을 정리한 후 평소와 같은 깔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미소가 나오려는걸 억지로 참았다. 그렇군. 확실히 김한별과는 다르게 상황을 구분할 줄 아는 여성이다. 일단은 참고 기다리겠다는 건가. 예상을 뛰어 넘은 그녀의 반응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슬며시 미소를 보이고 말았다. “네. 아주 좋았어요.” “후훗. 다음 전투도 기대할게요.” 일행들은 나와 정하연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신상용은 무언가 말하고 싶어 했지만, 정하연이 틈을 주지 않자 머리만 긁적였다. 나는 아주 잠시동안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을 먹었다. 둘 모두 고연주처럼 클랜원의 확고한 영입 대상으로 올려 놓겠다고. 지금 나눈 대화나 분위기를 봐서는 수락할 가능성이 높지만 거절할 경우도 있었다. 그들이 거절한다면…죽일까? 아니. 죽일 필요는 없다. 적이 되면 까다롭겠지만 고연주처럼 1회차에 적으로 나타난게 아니니 조금 더 생각할 필요가 있을것 같았다. 그렇게 일행들이 휴식을 하는 동안 나는 계속 바닥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 결론부터 말하면, 내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기가스의 방을 나온 이후 우리들은 처음 들어온 공간에 남은 두개의 문을 전부 열었다. 그중 하나의 방은 짭퉁 코카트리스가, 나머지 남은 방에서 나온 괴물은 한층 강화된 망자떼들 이었다. 굳이 난이도를 구분하면 기가스, 코카트리스, 망자들 순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어제에 비해 장비도 강화하고 경험도 겪은 우리들은 한층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물론 내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가 컸지만 일행들의 경험치도 무시할 수 없었다. “아, 아무래도 제 예상이 틀린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신상용은 풀이죽은 목소리로 내게 사과를 했다. 현재 우리들은 반으로 나뉜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를 넘어 다음 공간으로 넘어온 상태였다. 이곳에 보이는 문의 수 또한 3개로 전 공간과 똑같았다. 전 공간에는 통로 옆에 하나의 문이 있었는데, 지금 공간에는 통로가 있는곳에 문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저은 후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우리들이 그 시절 살았던것도 아니고 기록서 하나로 모든걸 추론하는건 무리가 있어요. 그리고 기가스가 조금 에러였을 뿐이지 나머지는 다 예상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하….” 내 따뜻한 위로에 신상용은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지금 우리들이 이층에서 확인할 가장 중요한건 몬스터들의 수준. 인간 100명을 제물로 바치면 온전한 하급 마족 한마리를 소환할 수 있다. 이층의 몬스터의 수준은 들쭉날쭉 했지만, 확실한건 일층보다 높다고 볼 수 있었다. “으음. 스승님.” “왜.” “리더가 말한, 기가스와 비슷한 수준의 괴물 100명을 제물로 바친다면 어느 정도의 마족의 소환될 수 있나요?” “흠. 그런데 그럴리가 없잖아.” “그래도요.” 신상용의 보챔에 비비앙은 잠시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가스는 수현 말 대로면 거인과 바실리스크를 합쳤다고 봐도 돼. 그정도면 최상급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최상급?” 내가 날카롭게 되묻자 비비앙은 바로 손을 방방 저었다. “모, 몰라. 그냥…애초에 그럴리 없다고 했잖아.” 나는 콧방귀를 뀐 후 고개를 돌렸다. 최상급이 뉘집 개 이름인줄 아나. 사용자들 입장에서 구분이 편하도록 하급, 중급, 상급, 최상급 등으로 나누고 있지만 마계도 엄연한 계급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최상급이면 못해도 공작 이상의 거물이 나올터. 지금 우리 일행들중 오직 나만이 그를 상대로 승리의 가능성을 점칠 수 있다. 비비앙도 나름 싸울수는 있겠지만, 확실하게 승리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건 힘들었다. 아마 8할 이상의 확률로 패배하겠지. 그리고 나온다고 해도…. “이제 슬슬 이 공간의 탐험을 하는게 나을것 같군요.” 나는 자리를 털며 일어섰다. 일행들의 분위기에 조금씩 불안 기류가 맴돌 낌새가 보였기 때문이다. 내 말이 들렸는지 차분히 눈을 감고 속을 다스리던 정하연은 눈을 뜬 후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동안 조금 무리를 해서 그런지 안그래도 뽀얀 피부는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원래의 정하연이라면 자신의 능력을 적절히 조절 배분하며 왔겠지만 기가스의 방 이후로 그녀는 전투마다 거의 한계에 가까운 본신의 능력을 끌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탐험이 끝난 후 다 매듭을 짓게 될 문제들 이었다. 잠시 동안 몸을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난 일행들. 나는 그 일행들을 이끌고 마음에 가는대로 하나의 문을 선택한 후 걸음을 옮겼다. 가면서 대충 감지를 돌려보니 이 공간은 서쪽과 북쪽의 방에서는 반응이 나왔고, 동쪽의 방에서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마침 첫 타겟으로 선택한 문이 서쪽 방향인 만큼 시계 방향대로 돌면 될 것이다. 가는 동안 일행들 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 앉았다. 다들 조금 피로한 낯빛이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방을 하나 클리어링 할때마다 마족과의 전투가 시시각각 다가온다는 점에 알게 모르게 긴장이 솟는 모양이었다. 또한 도중에 이층에서 얻은 물품등 탐험 보상이 없다는 점도 그러한 기류를 부추기고 있었다. 뭔가 새로운 활력을 주는 전환점이 없다면 전투를 치를수록 몸은 점점 더 무거워진다. 물론 일층에서 얻은 물품들로 이미 대박을 넘어선 성과를 올렸다고 해도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법 이었다. 이윽고 우리들은 거대한 면모를 과시하는 육중한 철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막 문을 열기전 나는 침체된 분위기의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메마른 얼굴들로 내 얼굴에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나는 잠깐 한숨을 내쉰 다음 문고리에 손을 걸었다. 그대로 힘을 쓰자, 예의 끄릉거리는 쇠가 낑기는 불쾌한 소리가 울렸다. 나는 그대로 힘을 주어 문을 활짝 열었다. “그아아아….” 문을 여는 동시에 이번에는 사늘한 한기가 날카롭게 나를 노리고 들어왔다. “보호(Protect)!” 그 순간 내 주위로 반투명한 구가 생기고. 퉁, 소리와 함께 검기가 사그라드는걸 볼 수 있었다. 안솔의 보호 주문이었다. 언제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따로 칭찬을 하지는 않았다. 안솔이 했기 때문에 칭찬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제는 원래 이러는게 당연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행동은 단순한 밥값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괴물이 있습니다. 다들 조심하세요.” 나는 말을 마친 후 검을 들어 또 다른 공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첫 공세 이후 별다른 공격은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은 안으로 진입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한걸음 더 안으로 내딛자, 틈을 노리고 있었던지 다시 한번 검푸른빛이 넘실대는 검기가 덮쳐왔다. 나 또한 대비하고 있던 만큼 검을 휘둘러 간단히 검기를 자른 후 더욱 앞으로 나서 일행들의 안전 지대를 확보했다. 서둘러 일행들이 모두 진입하고 난 이후 그때서야 나는 눈 앞의 괴물을 살필 수 있었다. 이번 방은 다른 방들에 비해 조금 어두웠지만 그래도 육안으로 식별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어둠컴컴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놈은…. “망혼의 기사(Spirit Knight) 로군요.” 내 말에 신상용과 정하연은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 이 연구소는 무슨 마법 저항 몬스터들의 집합소로 보이네요.” 어지간한 정하연도 슬슬 짜증이 나는지 볼멘 소리를 내뱉었다. 두 뿔이 중간에 꺽인 상태로 솟은 투구 안으로 시퍼런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녹이 잔뜩 슬어 있는 갑옷과 군데군데 묻어 있는 시커먼 핏물들. 이미 인간으로 보기는 어려운 모습이다. 다른 부분은 장갑들로 가려져 있지만 아주 조금 보이는 투구안 놈의 얼굴은 분명히 해골이었다. 망혼의 기사는 물리적 공격력도 있지만, 무엇보다 마법 공격도 겸한다는 점에서 까다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본인이 마력을 익힌만큼 자체로 마력 저항, 즉 마법에 대해 강한 내성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바로 정하연이 불만을 터뜨린 것이다. 살아 생전 기사였던 만큼 왠만한 근접전을 수행할 수 있고, 마법도 쓰고, 마법 저항을 갖는다. 물론 죽음의 기사(Death Knight) 전단계에 있는 놈인만큼 보스 몬스터 급은 아니다. 하지만 삼박자를 고루 갖춘 상대이니 쉬운 상대로 볼 수는 없었다. 다만. 위의 말들은 어디까지나 진퉁에 해당하는 말들 이었다. “…수현. 망혼의 기사도 연구소의 결과물 일까?” “마족도 소환하는 놈들인데 뭐. 딱히 이상할건 없지.” 내 명료한 대답에 비비앙은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한번 응시하고는 나는 고개를 돌렸다. “사람의 영혼을 가지고 장난 치다니…연금술사로서 용납 못하는 일이야.” 뒤이어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를 그대로 흘리며 나는 한걸음 더 앞으로 나섰다. 놈도 단순한 검기 공격으로 우리들을 해하는건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서서히 우리들과의 거리를 줄이고 있었다. “그아아아….” “안현. 키퍼. 유정. 내 뒤로. 솔이는 속박 주문 준비하고…마법사들은 보조 마법으로 원호 부탁 드립니다. 그리고….” 나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말을 이었다. 딱히 누구를 지칭한건 아니지만, 오더를 내리지 않은 일행들은 마법사들 뿐 이었다. “너무 무리는 하지 마세요.” 말을 마친후 나는 망혼의 기사(Spirit Knight)를 향해 돌진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음. 그냥 오늘 두편 연재 하기로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내일 자정에 못올릴 뿐이지, 그날 늦게라도 두편 연재하면 될것 같아서요. 내일 자정에 바로 올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최대한 노력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그리고…폐허의 연구소에 이어지는 전투신에 조금 지치신 분들이 계시는것 같네요. 보내주신 쪽지들을 보니 마음이 아파요. 하하. 이층은 다음회 혹은 다다음회로 마무리 한 후, 삼층도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 『 리리플 』 1. MT곰 : 헛. 그, 그런가요? 저는 곰을 원체 좋아해서요. 곰곰곰곰. :) 1등 축하 드립니다. 언제 한번 곰 한마리 소개시켜 주세…응? 2. 사람인생 : 오. 선택 잘 하셨습니다. 오늘 수술 부디 무사 쾌유 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하하. 병원이 가까운데 있다면 병문안도 못할것 없지요. 그리고 말씀해주신 작품은 저 또한 애독하고 있는 작품중 하나랍니다. :) 그리고 바보시인님의 비평은 반박할 수 없습니다. 무작정인 악플과 비난은 충분한 설명과 이해로 납득시킬 수 있으나, 바보시인님의 비평은 예의도 갖추셨고 다른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타당성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후기 끝에 항상 쓰는 말처럼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그저 시인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주관의 차이가 있을 뿐 입니다. 그래도 사람인생님의 기나긴 코멘트를 읽고 많은 힘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오늘 수술 무사히 마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파이팅 입니다! 3. 귀무자 : 오옷. 부길마 님이시군요! 어서오세요!(ㅋㅋㅋㅋ) 4. GradeRown : 실은 그것보다 훨씬 더 심할지도 모릅니다…아니 더 심할거에요. ㅜ.ㅠ 지금도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크크. 울먹울먹….(?!) 5. hohokoya1 : 이 코멘트를 보고 아. 오늘 그냥 연재하고 내일 자정에 연재 못하더라도 그냥 두편쓰자 라고 생각했지요. ㄲㄲ 부디 이번회도 재미있게 감상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6. 라그나-블래이즈 : 오! 이건 운명이에요! 자. 그러니 어서 날을 잡고 식을 올립…응?! 7. zjekfksqlc : 네. 천사들이 설정한 이상 천사들을 상대로 권능을 발휘하는건 요원한 일 입니다. 그러나. 화정이 포함된 이상 권능 또한 부활됬다고 보시면 됩니다. 하하하. 8. 이비앙 : 끄앙끄앙! 끄아앙 우아아앙?! 9. 레필 : 고맙습니다. 저 또한 그날이 기다려지네요. 과연 할 수 있을지 설레이기도 하구요. 하하하. 10. 마황염제 : 쿠폰 감사합니다.(__) 지금 외국에 거주하고 계신가 보군요. 저 또한 들어오시는 그날까지 열심히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099 / 0933 ---------------------------------------------- 수현의 광기 “흐아아아….” 놈이 입을 벌림과 동시에 온 몸에 저릿하게 느껴지는 살기가 올올이 퍼진다. 그러나 나는 달리는 속도를 멈추지 않았다. 지금껏 우리들이 만난 이층의 몬스터들은 전부 짝퉁에 불과했다. 망혼의 기사라고 해도 뭔가 술수를 부렸을게 뻔하기 때문에, 나는 여유로운 감정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진퉁과 짝퉁은 차이가 있는 법이니까. 아. 기가스는 제외하고. 놈 또한 내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방패를 단단히 세우고 검을 휘둘렀다. 다시 한번 검푸른 검기가 피어오르고, 그 기운은 섬뜩한 기운을 흘리며 내게로 날아 들었다. 그러나 애초에 이런 단순한 공격이 내게 통할리가 없었다. 경험을 쌓게 할 의도였다면 아마 안현을 불렀을 것이다. 유정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나는 이미 전투를 빠르게 끝내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스겅! 사르르…. 검술 전문가(Sword Specialist)의 권능으로 검기를 한번에 자르자 투구 안 놈의 불빛이 더욱 거세게 타오르는걸 볼 수 있었다. 나와 놈은 정면으로 격돌했다. 단순히 방패를 단단히 세워 그대로 깨부실 생각이었지만 이윽고 놈의 방패로 검은 기운이 뭉클 스며드는걸 보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뒤에서 정하연이 주문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 아이스 캐논(Ice Canon)!” 아이스 캐논은 물 계열 고위 주문. 아마 내가 들어가기전 방패라도 걷어낼 생각으로 시전한 모양이다. 곧이어 하나의 기다란 얼음빛 통로가 이어지더니, 일자로 놈의 방패에 직격하는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파츠츳! 파츠츠츳! “아…?” 망혼의 기사가 들고 있던 방패에 어린 검은빛 기운과 정하연의 아이스 캐논은 서로 스파크를 내며 힘을 겨루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한동안 줄다리기를 하던 둘은 이내 아이스 캐논이 방패 안으로 먹히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망혼의 기사가 든 방패가 정하연의 마법을 흡수한 것이다. 하여간 연구소 놈들 별 이상한 짓거리를 다 해놨군. 정하연의 의문에 찬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힘차게 발을 걷어 올렸다. 놈이 어떤 술수를 부릴지는 몰라도 방패만 치워버리면 그만이니까. 파각! 이번에는 꽤 진심으로 힘을 담았기 때문에 망혼의 기사는 내 힘을 견디지 못하고 방패를 놓치고 말았다. 놈에게 표정은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당황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휙, 허공으로 떠오른 방패에서 천장을 향해 아이스 캐논이 발사 되는걸 보며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저걸 나한테 되돌리려고 했단 말이지. 괘씸한 마음에 나는 검에 마력을 가득 담아, 그대로 가슴팍을 세게 후렸다. “흐아아아…!” 놈의 가슴 장갑이 한웅큼 함몰 되고 뒤로 주욱 밀려난다. 그리고 그걸 기회로 잡은듯 유정이 내 앞쪽으로 머리를 쑥 들이 밀더니 멀어지는 망혼의 기사를 추격했다. “하앗!” 쳇. 이번에는 야릇한 기합성을 흘리지 않았군. 아니 이게 아니라. 아무튼 뒤로 주르륵 밀려나던 망혼의 기사는 그대로 벽에 강하게 뒤통수를 박고 말았다. 방패를 놓친 만큼 놈의 가드가 일부 비워졌기 때문에 유정은 곧바로 단검을 휘둘렀다. 일전에 선보였던 드럼 난타 단검술 이었다. “핫, 핫, 핫, 핫, 핫, 핫, 핫, 핫, 핫, 핫!” 웃음 소린지 기합성을 흘리는지 이해가 안가는 음성을 내며 유정은 폭풍처럼 단검을 휘둘렀다. 솔직히 안현처럼 자세를 잡고 한방에 깊에 찔러 넣는게 아니라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거지만, 무장 해제된 적을 상대로는 저만큼 좋은것도 없었다. 나는 놈의 상태를 확인한 후 그대로 검을 집어 넣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우리들을 가만히 보던 일행들은 모두 동그래진 눈으로 나에게 시선을 모았다. 막 다른 주문을 캐스팅하던 비비앙 조차도 고개를 기울였을 정도였다. “혀, 형.” “왜.” “그…아니…아직 괴물이….” “음? 끝났을 텐데?” 태연히 중얼거린 후 고개를 돌리자 마침 망혼의 기사가 구슬픈 비명을 지른 후 몸을 허물어 뜨리는걸 볼 수 있었다. 첫 격돌때 놈의 내부를 구성하는 핵을 터뜨렸고 더불어 내면을 뒤흔드는 커다란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어깨를 으쓱인 후 다시 고개를 돌리자 일행들은 어이없는 눈길로 나와 유정을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는 일. 공략 템포를 빠르게 올리기로 한 이상 애들의 경험치를 쌓는 과정은 일부 포기할 수 밖에 없다. “야호! 내가 쓰러뜨렸다! 안현 봤냐?” 조금 기분이 나아진듯 유정은 환호성을 지르며 폴짝폴짝 뛰었다. 정하연이 한숨을 내쉬고, 신상용도 덩달아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둘이서 뭔가 말을 맞춘게 있는지 딱히 다른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안현은 아니었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응?” 갑작스럽게 컴플레인을 거는 안현을 보며 나는 의외라는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형!” “왜.” 내가 차가운 목소리로 되묻자 안현이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내게 고함을 질렀다. “이거 이유정이 한거 아니잖아요! 형이 한거 쟤가 막타만 먹인 거잖아요!” “흠…그렇다면?” 내가 반문하자 안현의 얼굴이 급격히 밝아졌다. 그리고 역시나 하는 미소로 유정에게 시선을 돌렸다. “거봐라. 형도 그러잖아. 막타만 먹은 주제에 어디서 자랑질은.” “…….” 내가 잠시 애들의 본성을 잊고 있었군.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이 둔탱이들아.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에게는 하등 나쁠건 없기에 그저 한숨을 쉬는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정하연은 애들과 나를 번갈아 본 후 매우 복잡한 시선을 보냈다. 한편으로는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뭔가 안쓰럽게 보는 시선도 있었다. “왜 그렇게 안쓰럽게 보시는 건가요.” “…애들 키우느라 참 힘드시겠어요.” “하하…하아.” 내가 씁쓸한 미소를 흘리자 그때서야 정하연은 가벼운 미소를 흘렸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안현과 유정의 말다툼은 계속 되고 있었다. “아니거든? 내 화려한 단검술을 못봤니?” “화려는 개뿔. 마구잡이로 휘두른 주제에.” “풉. 난 누구처럼 춤추면서 창을 갖고 놀지는 않아.” 설마 일층에서 거인과 전투할때 나를 서포트 하던 일을 말하는 건가. 그때 안현은 잘못해서 창을 한번 놓칠뻔 했는데, 아마 그걸 두고 놀리는것 같았다. 안현 또한 그때의 일이 기억나는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 올랐다. 둘은 다시 미주알 고주알 서로를 향해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간간히 욕설도 들리는게 아주 가관이었다. 쓸데 없이 분위기가 험악하게 변하고 있었다. 이것들이 아까 내 말은 개똥으로 들었나. 그래도 나랑 오래동안 함께 다닌만큼 다른 사용자들 앞에서 자존심을 구기게 하고 싶지는 않았건만. 내가 인상을 찡그리고 막 크게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였다. “그만하세요!” 그 순간, 안솔이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빽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고함에 안현과 유정은 순간 입을 딱 다물고 말았다. 항상 얌전하게만 있던 안솔의 분노어린 고함에 둘 다 놀라고 만 것이다. 솔은 자기 스스로는 앙칼지다고 생각하는 표정을 지은 모양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입술을 꼭 깨문게 그저 귀여울 뿐 이었다. “지금 오빠랑 언니 둘 다 뭐하시는 거죠? 아까 수현 오라버니가 하신 말씀 기억 안나세요?” “그…그건….” 나를 들먹이면서 말하자 둘은 내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확실히 할 말이 없겠지. 나는 일단 팔짱을 끼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내가 누누히 말해도 들어먹지 않는 애들이었지만 자기보다 어린 애한테 혼난다면 뭔가 달리 느끼는게 있을법도 했다. “지금 탐험중이잖아요. 그런데 자꾸 그렇게 분위기를 망치시면 저도, 오라버니도, 그리고 마법사 두분도 곤란해요. 오빠가 언니가 그럴수록 캐러밴의 대장인 수현 오라버니의 얼굴에 먹칠을 한다는걸 모르세요?” 얼씨구. 말 잘한다. 이렇게 말 잘하는 애가 아닌데. 혹시 예전부터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건가? 둘은 분한 얼굴이 되었지만 솔의 말을 구구절절 옳다고 할 수 있었다. 한동안 씨근이던 유정은 이대로 숙일수는 없었는지 볼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안현이 자꾸만 먼저 시비를 걸잖아. 나도 열심히 싸웠는데….” 그건 인정한다는듯 솔이는 근엄히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아니. 그런데 지가 뭔데 그걸 인정한다는 거지. “그래요. 그건 확실히 안현 오빠가 잘못했어요.” “야. 그건 쟤가 먼저 나한테 같잖지도 않은 자랑질을 하니까 그렇잖아.” “그런게 아니에요. 오빠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 하셨어요. 그냥 잘했다고 칭찬 한번 해주시는게 그렇게 어렵나요?” 솔의 말에 유정은 뜨끔한 얼굴이 되었다. 내심 놀리려고 한게 맞지만 그래도 자신을 감싸주는 솔이의 말에 끼어들수 없는것 같았다. 지금와서 “아니 놀리려고 한거 맞는데….” 라고 하면 비난의 화살이 누구한테 쏟아질줄은 뻔한 일이니까. 솔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는데 큰 충격을 먹었는지 안현은 멍한 얼굴이 되었다가, 이내 고개를 팩 돌리고 말았다. “하. 칭찬할게 있어야 하지. 난 못해. 아니 안해. 할게 없는데 뭘해?” “휴우…오빠. 그런게 아니라구요.” 막 발끈하려던 유정을 솔이 가로막으며 한번 더 앞으로 나섰다. “그게 다 오빠한테 칭찬 받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구요. 오빠는 항상 유정이 언니 타박하기만 하지 칭찬 한번, 좋은말 한번 해주지 않았잖아요.” “…….” 그래도 안현은 묵묵부답이었다. 솔은 자애로운, 마치 어머니 같은 미소를 머금은 후 안현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살포시 쥐었다. 안현은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솔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그 모습은 마치 아들을 달래는 어머니와 같은 광경이었다. 그에 덩달아 남은 일행들의 분위기도 숙연해졌다. 안솔은 한없이 자상한 얼굴로 남은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춤은 고래도 칭찬하게 한다는 말이 있어요. 오빠가 춤을 추시면 유정이 언니도 분명…아니.” “?” 솔은 말을 하다가 도중에 멈추고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게 뭔가 자신도 잘못됬다는걸 깨달은 모양 이었다. 안솔의 행보에 이목을 집중시키던 우리들은 순간 뭔가 모를 위화감이 들었고, 이윽고 그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 “…….” 순식간에 무거운 정적이 일행들 사이로 내려 앉았다. 나는 내부에서 어떤 이유 모를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해 눈을 감고 말았다. 어떻게든 내부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진정시킬 수 없었다. 내 생애 이런 힘겨움은 정말 오랜만에 겪고 있었다. 까드득. 까드드득. 살풋 눈을 뜨니 정하연 또한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 안에서 까득 소리가 나는게 이를 갈면서 까지 어떻게든 참고 있는 모양 이었다. 신상용 또한 입을 달싹달싹 움직이는게 똑같은 상황이었다. 오직 지구에서 살지 않은 비비앙만이 고개를 갸웃거릴뿐. 그러나 유정은 그렇게 참을성이 좋은편이 아니었다. “푸흡.” “…흠. 제가 말을 잠깐 헷갈.” “푸풉킥!” “흠흠. 아무튼 언니나.” “푸흐흐흐아하하하!” 결국 참지 못한 유정이 먼저 터뜨리고 말았다. 안솔은 어떻게든 분위기를 이어가려고 했지만 유정의 웃음 소리가 들릴때마다 말을 멈추고 있었다. 다른 일행들은 잘 참고 있었지만 유정은 죽겠다고 웃으며 바닥을 치고 떼굴떼굴 구르기 시작했다. 솔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그녀는 더듬거리는 음성으로 다시 한번 빽 소리를 질렀다. “시, 실수에요! 그, 그만 웃어요!” “아하! 춤, 아하하! 칭찬, 아하하하!” “그, 그만좀 웃으시라구요!” 한동안 배를 잡고 웃던 유정은 이윽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단검 두개를 양손에 쥐었다. 이윽고 단검을 이리저리 늘어뜨린 후 그녀는 나를 향한채 엉덩이를 요리저리 살랑살랑 흔들기 시작했다. 뭔가 망측한 춤 이었지만 그녀는 키득이며 입을 열었다. “이건 춤이 아니야. 오빠를 칭찬하는거야. 깔깔깔깔!” 유정의 단 한마디. 그리고. 그게 바로 웃음의 신호탄이 되었다. “까르르르르르르르!” “으하하하하하하하!” 정하연과 신상용도 그 광경에는 견딜 수 없었는지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안현도, 나도 결국 따라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뭔가 한껏 숙연한 분위기를 잡아 놓고 실수를 해 한순간에 떨어 뜨린 모습이 그렇게 웃길수가 없었다. 솔이는 얼굴을 붉힌채로 어떻게든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이윽고 멈출 기미가 안보이자 그대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으아아앙!”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오늘 아침 6시가 넘어 들어 왔네요. 설마 이정도로 오래동안 고문(?) 당할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하. 그리고 코멘트들 잘 보았습니다. 네. 앞으로 글을 쓰는만큼 휘둘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hohokoya1님 코멘트와 쪽지 감사합니다.) 『 리리플 』 1. IDI : 1등 축하 드립니다. 하하. 99회도 부디 즐겁게 감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 파브르 : 고맙습니다. 덕분에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__) 3. williams : 소중한 조언 감사합니다. 확실히 그럴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전개가 조금 지루하실수도 있지만, 제가 한회한회에 최선을 다해 재밌다고 느끼실 수 있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__) 4. Toranoanal : 음. 비비앙의 동영상이 뭔지 궁금해서 찾아 봤는데요. 음. 감사합니다.(?!) 5. 실버링나이트 :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니라구요! 엉엉. 6. aporia. : 좋습니다! 가지겠습니다! 얼른 이리오세…죄송합니다. ㅜ.ㅠ 7. GradeRown : 비비앙은 자신이 한 일도 생각치 못하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 나쁜 비비앙!(?!) 8. 사람인생 : 헐. 포항. 이거 너무 먼데요. 허허허; 100회는 조금 쉬고 바로 작업하도록 하겠습니다. 솔직히 오늘 조금 쉬고 싶지만, 그래도 사람인생님이 기다리고 계신걸 생각하니 쉴수야 없죠! 1분은 무리지만 속좀 달래고 씻고 바로 100회 작업할게요! 파이팅! 9. 마당쇠 : 그렇군요! 결론은 작가의 착취! 아주 좋은 선택…이 아닌것 같습니다. 엉엉. 10. 휘을 : Yes. 가능합니다. 권능이 시도때도 없이 발현되면 곤란한 일이 많거든요. 하하하.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00 / 0933 ---------------------------------------------- 수현의 광기 안솔의 의도치 않은 재롱(?) 덕택에 일행들의 분위기는 한결 밝아졌다. 물론 당사자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눈물을 방울방울 흘렸지만, 어쩌겠는가. 웃긴건 사실인데. 일행들은 조금 머리가 개운해졌는지 다들 즐겁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나도 휴식을 취하고 싶었지만, 안솔이 울면서 나한테 달려 들어 안기는 바람에 그 목표는 무산 되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는 쓰러진 망혼의 기사를 뒤로 하고 탐험을 재개했다. 이층의 다른 공간은 언데드들의 천국이었다. 문을 여는 족족 언데드화 된 연구소의 실험물들이 튀어 나오는데, 그럴때마다 비비앙의 눈동자는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솔직히 내가 보기에는 지가 한 짓이나 연구소의 인원들이 한 짓이나 도찐개찐 인데, 저렇게 화를 내는게 내심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계 방향으로 돌아, 두번째로 다다른 북문을 열었을때는 아무도 없는 빈 공간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내심 북문에 3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을 줄 알았는데, 내 예상을 빗나가고 말았다. 어차피 앙앙 우는 솔을 달래면서 망혼의 기사가 있던 방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했기 때문에 우리들은 바로 이층의 마지막인 동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동문을 열자 우리를 맞이한 언데드는 다름아닌 미라(Mummy)였다. 미라 자체로 까다로운 몬스터로 보기는 어렵지만 놈은 재생 능력을 갖고 있었다. 안현과 유정이 놈을 치는 족족 붕대를 끊었지만, 붕대는 곧바로 재생해 애들을 끊임없이 위협했다. 내가 자르는 붕대들은 재생하지 못하는것 같았지만, 이윽고 내부에서 새로운 붕대들이 튀어 나와 우리들을 매우 곤란하게 만들었다. 결국 해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반지를 낀 왼손을 들어 올렸다. “안티 매직(Anti Magic).” 왼 손가락에 낀 반지에서 하얀 빛이 솟아 오르고, 그 틈을 타 정하연이 자신의 장기인 응용 주문을 시전했다. “타겟 지정 몬스터 미라(Mummy). 오버랩(OverLap).” 이윽고 내 왼손에서 뻗어 나간 하얀 빛은 그대로 미라를 감싸고 있던 붕대로 스며 들었다. 이윽고 미라를 감싸고 있던 붕대들이 흰 빛에 휩싸이더니 순식간에 빛이 바래는게 보였다. 디스펠(Dispel) 같은 고급 주문을 배우지 못한 모양이지만 상황만 주어진다면 그걸 커버할 수 있는게 바로 응용 주문 이었다. 곧이어 유정의 단검이 미라의 붕대를 훓고 놈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안현도 질세라 놈의 복부로 창을 크게 지르고, 나 또한 얼른 처리할 생각으로 놈의 목으로 검을 매섭게 베었다. 미라는 한번 끔찍한 비명을 지르고는 그대로 몸을 허물어 뜨렸다.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가까이 다가가려는 애들의 뒷덜미를 재빨리 낚아챈 후 쓰러진 미라로부터 멀찍이 떨어졌다. 펑! 애들은 잠시 버둥거렸지만 이내 미라의 시체가 터짐과 동시에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걸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간간이 몸을 부르르 떠는게, 아마 가까이 갔으면 저 독액을 고스란히 뒤집어 썼을 것이다. 이윽고 한조각 걸레로 변한 미라를 확인한 후 나는 그때서야 애들을 얌전히 놓아 주었다. “고생 하셨습니다. 정하연씨의 마법 응용은 정말로 대단하네요.” “앞에서 목숨을 걸고 전투하는 근접 전사분들에 비하면 가벼운 재주에 불과하죠.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마세요.” 정하연은 겸손히 대답했지만 그래도 내심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지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옆에서 비비앙이 입을 삐쭉삐쭉, 그리고 안솔도 퉁퉁 부은 눈으로 입을 삐쭉삐쭉 하는게 보였다. 그래도 그들은 정하연과 신상용의 실력을 직접 본만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현재 두명의 마법사가 캐러밴에 포함된 이후. 특히 정하연이 이층 이후 올린 성과는 거의 비비앙과 동수를 다투고 있었다. 동문의 방 내부에는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다. 내가 계단을 가만히 응시하자 신상용이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리더. 이대로 3층으로 올라가실 계획 입니까?” “그래야죠. 다들 몸 상태는 어떠신가요.” 고개를 돌리며 묻자, 일행들은 제각각 개성있는 몸짓으로 자신의 건재함을 드러냈다. 그러나 안현은 뭔가 아쉬움이 남는 표정으로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안현.” “아, 네 형. 괜찮아요.” 내가 부르자 그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현이 바라는게 어떤건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층에서 얻은 물품이 없다고 해도 너무 상심하지 마. 지금 우리들이 얻은 물품들만 해도 이미 대박을 넘어섰다고.” “네…그런데 형. 아까 그 해골 기사가 갖고 있던 물품들 제가 쓸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 그대로 놔두는게 좋아.” 나는 막 “음. 그럼 가져올까?”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비비앙이 먼저 선수를 치고 말았다. 안현의 시선이 비비앙을 향하자 그녀 또한 나를 따라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그런 언데드라 부를수도 없는…. 아무튼 원혼이 붙어 오랫동안 사용한 물품들을 보통 인간들이 사용하면 오히려 해가 될 가능성이 높아. 사용자의 목숨을 지키는 무기들이 반대로 너의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다구.” “음. 스승님. 정화를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요?” “멍청아. 어둠 속성을 지닌 물품들인데 정화 과정을 견딜 수 있겠어? 안그래도 낡아서 내구도도 별로 좋아 보이지도 않잖아.” “아하. 그렇군요. 역시 스승님 입니다.” 아주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주억였다. 그녀의 조리 있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던 안현은, 내가 동의하는걸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직 3층이 남았습니다. 다들 힘 내시구요. 바로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기공창술사를 얻게 되면 꼭 안현한테 선물하리라 다짐한 후 나는 그대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일행들은 조용히 내 뒤를 따라오더니 이내 한명씩 차례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 3층 문을 열어 젖힌 후 우리들의 눈에 들어온건 단 하나의 공간 이었다. 그리고 그 공간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참상을 알리고 싶은듯, 여지껏 그 참혹한 풍경을 간직하고 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잿더미. 말 그대로 잿더미만 남은 공간 이었다. 이 공간 안에서 소규모 전쟁이라도 치른걸까? 중간중간 굴러다니는 조각들과 검고 녹이슨 부스라기들을 보며 일행들은 할 말을 잃은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내가 말을 잃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3층의 공간은 고요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지만, 이내 부스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나의 인영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동안 그 인영이 앉아 있던 의자가 파삭, 소리를 내며 바스라지는걸 볼 수 있었다. “이것 참 오랜만에 보는 인간들 이로군….” 그 인영은 서서히 몸을 돌린 후 우리들을 마주했다. 전체적으로 검푸른 빛을 띄는 피부. 이마 위로 불룩 튀어 나온 뿔. 그리고 등 뒤로 펄럭이는 악마의 날개. 인영의 정체는 바로 마족 이었다. 마족의 존재를 확인한 일행들은 모두 흠칫한 모습들을 보였다. 설마 벌써부터 마족을 마주할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족을 만날줄은 알았지만 설마 <놈>을 이 자리에서 마주할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랜만에 보는 인간들인데.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군. 아 귀찮아.” 틀림없다. 놈이 틀림없다. 거만한 얼굴과 상대방을 내려보는듯한 눈깔. 말 끝에 자주 “귀찮아.”를 붙이는 말투. 얼마나 놈을 다시 만나고 싶었던가. 다시 만나면 얼마나 해주고 싶었던 일들도, 말들도 많았는가. 그동안 그저 마음속으로 바라기만 했던 일들이, 돌아오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묻어 놨던 일들이 깨어나 내 전신으로 스물스물 피어 오른다. 나는 눈을 한번 비비고 다시 놈을 응시했다. 현실이다. 맘 같아서는 볼이라도 꼬집어 다시 한번 현실임을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느끼며 검을 손에 쥐었다. 묵직한 손잡이가 오늘따라 그리 마음에 들 수 없었다. “왜 아무말도 않는지. 어떤 말이라도 해봐라.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인간인데….” “수, 수현씨.” “형.” 심장이 거칠게 두근거린다. 온 몸을 구석이 흐르는 피가 다시금 요동치며 뜨겁게 타오른다. 그동안 애들과 함께 지내면서 잃어버렸던 예전의 나 자신이 돌아오는것을 느낀다. 나는 들끓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만나서…큭…반갑다.” “후우. 예의를 모르는 인간이군. 아무리 내가 말을 하라고 했지만. 얼른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춘후 말하지 못할까. 하등한 놈.” 미친놈. “이몸은 마계에서 백작의 지위를 갖고 있는 긍지 높은 마족 벨페고르. 다시 말한다. 꿇어라.” “아. 시끄러. 아무튼 백작이면…골치 아프네.” 비비앙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린다. 나태함의 악마 벨페고르. 놈은 상급 악마로 분류할 수 있다. 최상급에 비견될수는 없지만 그래도 언제든지 최상급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있는 놈인만큼 나름대로 가진바 힘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나름대로. “알겠으면 차후 말과 행동에 조심하도록. 흠…아무리 나태함의 악마라고는 하지만, 그동안의 오랜 세월을 아무데도 나가지 못하고 갇혀 있는건 너무 싫었거든. 오랜만에 보는 인간들인 만큼 이번 한번만 특별히 자비를 내려주지.” 놈의 말을 들으며 일행들은 전부 불편한 얼굴이 되었다. 나는 악마(마족)들이 싫다. 그 누구보다 오만하고, 그 누구보다 음흉하며, 그 누구보다 못 믿을 놈들.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벌레들. 하지만 그들이 가진 수와 힘은 너무나 강력했다. 그리고 그들이 부린 비열한 수작으로 나는 내 소중한 이를 한명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벨페고르는….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죽여주마. 미친 자식.” <그 사건>의 단초를 제공한 놈 이었다. 벨페고르가 이곳에 있는걸 본 순간 나는 그동안 품어왔던 의문들중 하나가 스륵 풀려 나가는걸 느꼈다. 벨페고르가 폐허의 연구소에 있는건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고 과정은 아직도 알 수 없다. 그러나 1회차에 있었던 일들중 하나가 어떤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조금이나마 이해가 가는것 같았다. 그때를 떠올리자 다시 분노가 차오른다. 나는 비릿하게 웃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내 격한 반응에 몇몇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걸 느꼈다. 그러나 상관하지 않는다. 지금 나한테 가장 중요한건, 눈 앞의 놈을 최대한 처절하게 족치는것. 1회차의 나를 상회하는 실력을 손에 넣었지만 확실하게 이긴다는 보장은 없었다. 무엇보다 놈은 엄연한 상급 악마니까. 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환희가 느껴진달까. 벨페고르는 나를 보며 흥미로운 미소를 띄우더니 이내 정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역시 인간은 재미있어. 크크. 결정했다. 너는 내 의자로 써주마.” “그게 네 유언이군.” “인간. 아무리 벌레만도 못한 네놈들이라 해도 영 거슬리는군. 재롱을 봐주는것도 여기까지다. 허나, 지금의 나는 자비로울 수 있다. 어차피 필멸의 존재들…지금 당장 사과한다면 너를 비롯한 남자 인간 한명은 곱게 죽여주마. 물론 너는 평생을 의자로 나를 받쳐야겠지.” “그래? 그럼 여자 인간들은?” 내가 피식 웃으면서 되묻자 벨페고르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화답했다. “당연한걸 묻는군. 이 위대한 나에게 봉사를 해야지 않겠는가. 예전에 이곳에 있던 빌어먹을 인간놈들이 별 같잖지도 않은 수작을 부려 이 건물에서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거든. 덕분에 꽤나 따분했는데, 간만에 괜찮은 여자 인간들이 들어왔군. 다들 최상품으로 보이는게 아주 만족스러워.” 놈의 말을 듣자 일행들, 특히 여성 사용자들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지는게 보였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한번 확인한 후 조롱하는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별로 너한테 봉사하고 싶어 하는것 같지는 않은데?” “아직 무지한 탓이지. 걱정마라. 내 물건은 그녀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정도로 충분히 굵고 길다. 여자 인간들은 마계의 위대한 마족 백작. 벨페고르에게 봉사하는걸 무한한 영광으로 알아야 될 것이다.” “미친놈이군.” “말 조심 하라고 했는데. 살아 있더라도 의자의 역할이 싫은건가?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빌면 다르게 생각해주마.” “더 들을 필요도 없군. 다들 전투 준비.” 내 말에 일행들은 곧바로 자신들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벨페고르는 한없이 거만한 얼굴로 우리들을 내려다 보다가, 이내 따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꼭 인간들은 실력 행사후 입을 다무는 경향이 있더군…귀찮아.” 말을 마친 순간 놈의 몸 앞에서 검푸른 불길이 솟아 오르는게 보였다. 마족들이 다루는 불중 하나인 암화였다. 그리고 당연히, 화정보다 몇단계는 떨어지는 불 이었다. 뭐, 그 자체로 충분히 강력하기는 하지만. “처음 이곳에 소환 될때는 좋았지. 하지만 제물이 부족했어. 지들이 만들다 만 별 시덥잖은 것들을 내놓는데….” “그럼 온전히 소환된건 아니란 소리군. 잘됐어. 더욱 수월하게 조질 수 있겠구나.” 내 말에 벨페고르는 눈에 이채를 띄웠다. “큭큭. 그래. 네 말이 맞다 인간. 현재 이곳에 소환된 힘은 내 본신의 7할도 채 못미치지…뭘 좀 아는 놈인것 같군. 하지만.” 그는 말을 잠시 멈춘 후 딱 소리가 나도록 손가락을 퉁겼다. 그와 동시에 놈 앞에 피어오른 어두운 불꽃이 나를 향해 쇄도하는걸 볼 수 있었다. 곧이어 벨페고르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넌 너무 거슬려. 봐주는건 여기까지다 인간. 위대한 마족의 염화 앞에 한 줌의 재로 소멸 되거라. 고통에 몸부림쳐라! 하하하하!” 광소와 함께 내게 날아드는 불길을 보며, 나는 천천히 화정의 힘을 일깨웠다. 곧이어 후끈한 열기가 온 몸에 피어오르고 나는 그대로 검을 상단으로 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벨페고르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지어지는걸 볼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드디어 메모라이즈가 100회를 달성 했습니다. 감격, 또 감격 입니다. 많은 독자 분들이 미리 선축하를 해주셨네요. :) 마음 같아서는 폭풍 연참이라도 하고 싶지만, 오늘 2회를 쓰고 나서 하얗게 불타 재만 남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하하. 조금 쉬다가 또 자정 연재를 향해 달려야겠지요.(혹시라도 자정에 또 안올라오면 제가 쓰러졌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동안 응원해준 독자분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__) PS. 벨페고르 저만 짜증나나요? 제가 쓰기는 했지만 쓰는 내내 진짜 엄청 짜증이 나네요. ㅜ.ㅠ(막 심하게 망가뜨리고 싶은 욕구가….) 『 리리플 』 1. 은빛가람 : 1등 축하 드립니다. :) 부디 100회도 즐겁게 감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2. MT곰 : 과연?! 저도 곰님의 100회 1등 코멘트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곰곰 파워! 3. 카지매스 : NO. 아닙니다. 후후. 4. twins7842 : 곧 한번 등장할 예정입니다. 후후후. 5. zjekfksqlc : ㄲㄲ 한별이 등장할 시기는 아직 조금은 남아 있네요. 저도 얼른 한별이를 다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수현이가 알고보면 차도남 이거든요! 6. MKira : 그쵸? 솔이 참 귀엽죠? 저런 여동생 하나 있었으면~하악하악.(?!) 7. 악마신전 : 감사합니다. 항상 응원해주시는 독자분들 덕분에 언제나 힘을 얻습니다. 그들의 방해에 절대 굴하지 않겠습니다. 하하하. 8. 최강성녀 : 흠흠. 흠흠! 사, 살려주세요. ㅜ.ㅠ 9. 랜슬럿 듀 락 : 왜냐하면 너무 달려드니까요. 조카들이 삼촌보고 좋다고 과도하게 달려들면 저는 그때 좀 당황스럽고 부담스럽더라구요. 하하하. 10. sd5963 : 암 쏘 쏘리 벗 알러뷰!(?!) 아하하. 항상 리리플은 평균 10개로 하느라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래도 코멘트는 언제나 읽고 또 읽습니다! 100회 축하 감사합니다.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01 / 0933 ---------------------------------------------- 수현의 광기 그전에, 나는 간단히 왼손을 들어 올려 안티 매직(Anti Magic) 마법을 구현했다. 놈은 현재 자신이 힘을 7할 정도로 얘기 했지만, 원체 못 믿을 놈들 이었다. 반지에서 뻗어 나간 하얀 빛은 나를 향해 달려오던 검푸른 염화와 뒤섞이더니 이윽고 곧바로 소멸하고 말았다. 벨페고르가 쏘아 보낸 암화는 그저 조금 주춤했을뿐, 다시 맹렬히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내가 안티 매직(Anti Magic) 마법을 발동하자 처음에는 흥미롭다는듯 눈을 치켜뜬 마족은 결과를 지켜본 후 비웃음을 흘렸다. “멍청한 놈. 고작 인간의 마법으로 위대한 마족의 불꽃을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 했으면 오산이다. 이 불꽃은 원래 공작급 이상의 분들만이 허락된 영원 불멸한 염화로서….” “아가리 다물어. 미친놈.” “놈! 감히….” 놈의 말은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아니, 더 듣기가 싫어서 일부러 신경을 껐다는게 맞는 표현이리라.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온 암화를 보며 나는 검을 든 후 정면으로 겨누었다. 그리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일어나라 화정. 깨어나서, 저 같잖지도 않은 놈에게 진정한 영원 불멸의 <불>이란게 어떤건지 보여주자. 내 내면의 목소리에 화답해 심장에 시술된 고대 무녀의 각인이 맹렬하게 도는걸 느낄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내 물음에 응답하는 순수한 불의 집합체, 화정. 나는 그 화정의 힘을 담아 그대로 검을 평행으로 베었다. 남들이 보면 단순한 평행 베기로 볼 수 있지만, 이 한수는 한 치의 오차도 군더더기도 없는 극에 다다른 일검이었다. 슥 검을 한바퀴 돌리자 검 끝에 무언가 슬쩍 걸리는 느낌과 함께 폭죽 터지는 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놈이 쏘아 보낸 암화는 너무도 허무할만큼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대로 허공에 멈춘채 타들어가고 말았다. 나는 그대로 검을 아래로 늘어 뜨렸다. 막 방어 주문을 외우던 일행들도, 자신만만한 얼굴로 거드름을 피우던 벨페고르도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번 한번의 공세 교환으로 나는 놈의 힘을 대강 가늠할 수 있었다. “보아하니 7할도 많이 잡은것 같은데. 5할? 아니…6할 인가.” 내 조롱에 마족은 처음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순식간에 표정을 가다듬은 후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놈! 도대체 어떻게 한거지…!” “보는 그대로인데.” “믿을 수 없다! 최상급 마족분들 한테만 허락 되는 마족의 불꽃을 어떻게 되려 소멸 시킬 수 있단 말인가!” “눈으로 보고서도 헛소리네. 네가 말하는 최상급 마족들은 다들 너같이 눈깔이 병신인가 보군. 좋은 정보 고맙다.” “크으으…!” 벨페고르는 발끈한 기색을 내비치더니 다시금 커다란 암화를 불러 일으켰다. 그의 오른손 위로 동그란 구체가 서서히 맺히는걸 보며 나 또한 맑은 진홍빛 투기를 끌어 올렸다. “더이상 그 건방진 입을 놀리지 못하도록 해주마.” 이를 까득 깨물며 말하는 벨페고르를 보며 나는 진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 자랑스러운 마족의 불꽃이 통하지 않는다는건 이미 보지 않았나. 귀찮으니 다른 재롱좀 더 피워보는게 어때.” “그 입 다물라!” 노호성과 동시에 놈의 팔이 다시 힘차게 휘둘러지는걸 볼 수 있었다. 거의 축구공 열배만한 크기의 불꽃이 나를 향해 돌진한다. 예전 같았으면 무조건 돌진해 정면 돌파를 했겠지만, 이제는 그렇게 싸울 필요는 없다. 나는 그대로 심호흡을 한 후 현재 내가 가진 두개의 무기를 느끼는데 집중했다. 검술 전문가(Sword Specialist)의 모든것을 자를 수 있는 권능. 화정(火正)의 모든것을 불태울 수 있는 권능. 그 모든게 일치 되는 순간 나는 망설임 없이 다시 검을 베었다. 펑! 화르르르…! “마, 말도 안 돼….” 벨페고르는 무언가에 홀린듯한 눈으로 눈 앞에 벌어진 광경을 응시했다. 자신이 혼신의 힘을 다해 쏟아낸 불꽃은 반으로 싹둑 잘리고, 잘린 단면으로부터 일어난 하나의 밝은 불꽃에 불태워지고 말았다. 드디어 놈의 얼굴에 내가 원하던 표정이 떠오른다. 재밌다. 밟고 싶다. 찢어 버리고 싶다. 그리고 죽여버리고 싶다. 나는 침착성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더 흥분되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어느새 한껏 거칠어진 숨소리를 다듬으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른거 보여줄거라도 있나?” “무…무슨 말이냐.” “마검 스쿠렙프 소환. 또는 멸망의 콜로서스…아니면.” 나는 잠시 말을 멈춘 후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둠의 동화로 도망칠 준비라도 하고 있는건가?” 자신의 원천 기술들을 줄줄 읊자 벨페고르는 더욱 혼란스러운 얼굴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어, 어떻게! 너는, 너는 누구냐!” “워워. 진정하라구. 네가 그렇게 믿고 따르는 리리스가 이럴때 그렇게 행동하라고 가르치디?” 리리스를 들먹이자 벨페고르의 얼굴이 폭발하는게 보였다. 마계는 강자존의 법칙이 살아 있는 곳. 개인의 자존심은 강하지만 일단 한번 굴복한 상대한테는 충성을 바치는 놈들이다. 물론 마족 한정으로만. 리리스를 들먹이자 벨페고르는 다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네놈…입 조심해라. 네놈이 함부로 입에 올릴만한 분이 아니다.” “왜? 리리스? 마계의 창녀로 유명하던데. 아스타로트한테 한번 패배하고 따먹힌 사건은 누구나 다 아는거 아니었어? 아. 넌 아직 모르나?” 이건 나도 1회차에 우연히 알게된 사실 이었다. 그때는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난 상태였지만 어차피 내가 홀 플레인에 들어오기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이라고 들었다. 그리고 충성심 강한 리리스 휘하의 마족들을 도발할때 이만한것도 없었다. 예상대로, 내 이죽거림에 결국 벨페고르는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다. “크아아앙!” 벨페고르는 크게 울부짖으며 허공을 향해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순간 놈이 서 있는 공간이 뒤틀리고, 뭔가 모를 불길한 기운이 주변을 감싸는걸 느꼈다. 그리고 그때동안 가만히 있던 일행들은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일행들을 향해 몸을 돌린 후 입을 열었다. “안현, 유정은 제자리 대기. 그리고 마법사 분들과 사제들은 본인들이 아는 모든 방어 주문을 동원해 일행들을 보호하세요.” “김수현! 그게 무슨 소리야!” 비비앙은 내게 고함을 질렀다. 일행들의 얼굴도 모두 똑같았다. 그러나 모두 내 서슬퍼런 살기에 눌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뿐. 그나마 비비앙 정도는 되야 내 투기를 벗어나 입을 열 깜냥 정도를 낼 수 있을것이다. “다른 말 안한다. 다른놈은 모르겠는데, 저놈만은 내가 처리한다. 너희들은 물러나.” 내가 말을 하는 와중에도 놈의 기세는 더욱 강렬해지고 있었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벨페고르의 머리카락은 올올이 하늘 위로 솟구쳐 있었다. 입을 계속 웅얼대는게 어지간히 큰 마법을 준비하는것 같았다. 이 마법은 분명 멸망의 콜로서스. 병신이 쓰란다고 진짜 쓰네. “김수현! 장난해? 아무리 그래도 상급….” 자꾸만 쫑알대는 비비앙이 거슬려 나는 그대로 이를 꽉 깨물었다.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들을 너그럽게 돌볼 여유가 없었다. “아니까 입 닥치고 물러나 있어!” “어…어떻게….” 내 고함에 비비앙은 상처 입은 얼굴로 한두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지금 그녀를 보듬어줄 시간은 없다. 나 또한 검을 들고 자세를 잡는다. 지금부터 내가 펼칠 기술은 사용자 능력으로 분류되는 어빌리티의 일종 이었다. 과거와는 달리 엄청난 마력 능력치를 가진 만큼 위력 또한 달라질 터. 그대로 마력을 큰 폭으로 끌어 올렸다. 멸망의 콜로서스는 대단위 마법. 나 혼자서는 어떨지 몰라도 뒤의 일행들은 말 그대로 순식간에 유성우에 꿰뚫려 살해 당한다. 그렇다면 나 또한 그러한 마법에 대항할 수 있는 카드를 꺼낼 수 밖에 없었다. 1회차에는 마력 능력치가 딸려 쓰지 못하다가 이제는 사용이 가능한 어빌리티였다. “<그녀>를 상대하기 위해 개발한 기술인데…이걸 벌써 쓰게 될줄은 몰랐군.” 나는 씁쓸하게 중얼거린 다음 발을 들어 대지를 한번 두드렸다. * 나는 인정할 수 없었다. 위대한 마족인 내가 고작 인간 한명한테 두려움을 느낀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이 지금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 두려움에 밀리듯 나는 결국 내 비장의 기술을 꺼내들 수 밖에 없었다. 몸이 완전하지 못한 상태로 큰 마법을 준비하는건 엄청난 무리가 가지만, 그만큼 효과는 확실했다. 눈 앞의 인간이 어떤 재주로 마족의 불꽃을 소멸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고작 한두개에 불과하다. 암화가 담긴 수백의 소형 유성우 앞에서는 인간은 분명 한줌의 재도 남지 않을것이다. 여자 인간들을 취하지 못하는게 너무나 아쉽지만 그래도 리리스님이 모욕 당한것과 비견 되지는 않는다. 몸 안의 심장이 부담을 느끼지만, 참는다. 주문은 완성. 이제 아래 건방진 인간을 향해 쏘아내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놈을 확인차 고개를 아래로 숙이는 순간이었다. “허억.” 생소한 감각이 전신을 엄습한다. 나도 모르게 기껏 소환한 주문을 취소 시킬뻔 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죽음, 그리고 소멸의 감각. 오랜 세월동안 단련한 예민한 감각은 연신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죽는다고. 피하라고. “죽는다…내가?” 내가 인간한테 죽는다고? 나는 한번 크게 고함을 질렀다. 몸 안을 지배하는 공포심을 떨쳐낼 본능적인 몸부림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 행동에 일말의 용기를 얻을 수 있어, 나는 있는 힘껏 놈을 향해 양 손을 휘둘렀다. 마족불을 포함한 소규모 유성우 마법. 그 이름은…. “흐아아아아아아아!!!! 멸망의 콜로서스!!!!” 이미 다른 생각은 나지 않았다. 그저 눈 앞의 인간을 소멸시키고 한시라도 빨리 내 위엄을 되찾을 생각만이 머리속을 지배했다. 그러나, 그 생각들의 근원이 생존에서 비롯된 것임을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순간 놈의 발이 대지를 한번 박차는게 보였다. 단순히 한번 찼을 뿐인데, 놈을 둘러싼 바닥이 물결치듯 일렁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간에 불과했다. 다시 조용하게 변한 대지를 보며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뭐지? 도대체 뭐지? 어느새 위의 천장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내가 이끌어온 유성우들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서야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멍청한 놈. 내게 시간을 준게 네놈의 패인이 될 것이다. 살짝 고개를 돌리자 뚫린 천장 위로 몰려드는 유성우, 멸망의 콜로서스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때서야 나는 안도할 수 있었다. 완전치 못한 몸으로 무리한 마법을 사용해 되돌아올 페널티도, 억지력으로 건물을 훼손해 내게 걸릴 제재들도. 그 아무런 생각들도 들지 않았다. 그래도 어쨌든 살수 있겠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 그때였다. 잠잠히 있던 놈이 갑자기 검을 들더니 그대로 허공으로 검을 띄운다. 그와 동시에 맑은 진홍빛 불꽃이 칼을 휘감아 들었다. 그 불꽃을 보자 나는 다시금 불안감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저 염화에 닿는 순간 모든게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순간, 묘한 진동음이 주변을 울렸다. 쿠쿠쿠쿠…. 대지에서 무언가 이상한 기운이 흘러 나온다. 그리고 그 기운이 진홍빛 불꽃과 합친 순간, 나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검이 진홍빛으로 타오르더니, 그 수가 늘어난다. 말 그대로 염화검(炎火劍). 하나, 둘, 넷, 여덣, 열여섯, 서른둘…조금씩 그 수를 늘려가던 검들은 어느새 셀 수도 없을만큼 주변을 빼곡히 메웠다. “하….” 입에서는 그저 헛웃음만 흘러 나올뿐. 고개를 숙여 인간과 얼굴을 마주친다. 놈이 웃음을 보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왜지. 왜 저렇게 나를 미워하는 거지. 멸망의 콜로서스를 잇던 마력의 흐름이 끊어질 뻔 했지만, 나는 간신히 붙잡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놈은 처음 나를 봤을 때부터 나에 대해 끝없는 적개심을 피웠다. 그리고 무언가 알고 있는듯한 말투. 나는 치밀어 오르는 반발심에 더욱 더 마력을 가득 퍼부었다. 놈의 얼굴은 너무도 평안했다. 마치 네깟게 나를 이길 수 있냐는듯한 표정. 오연한 얼굴로 서 있던 인간은 이윽고 팔짱을 키더니 미미한 미소를 흘리는걸 볼 수 있었다. 팔짱을 낀 그 상태로, 그는 슬며시 오른손을 들더니 그대로 손가락을 퉁겼다. 그리고, 내 귀에도 들릴만한 손가락 살이 크게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놈의 주변을 메우던 검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쏘아지는걸 볼 수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마침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유성우들을 보며 다시 마음을 먹었다. 놈에게로 쏘아지는 수많은 유성우들. 내게로 쏘아지는 수많은 염화검(炎火劍)들. 마치 폭우를 연상케 하는 두 거대한 폭풍우가 격돌하려는 광경을 보며 나는 이를 까득 깨물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오늘 정말 많은 분들의 100회 축하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폐허의 연구소 파트가 거의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기쁘기 그지 없네요. 이제 우리 나쁜 벨페고르 놈이 처절히 당하는걸 감상하실 일만 남으셨습니다. 하하하.(미리 당부를 드리건데, 다음회 혹은 다다음회 수현의 모습을 보시고 조금 충격(?) 먹으실 분이 계실수도 있습니다. 혹여나 보시기전 미리 마음을 단단히 잡수시고 보시는걸 권장 드립니다.) 그리고…오늘 드디어 수현이가 본신의 능력을 드러냈습니다. 이번에 수현이 사용한 능력은 일종의 어빌리티로, 사용자 본인의 역량, 능력에 따라 펼칠 수 있는 기술들을 일컫는다고 보시면 됩니다. 작게 보면 감지, 검기도 어빌리티의 일부지만 크게 보면 수현이 펼친 기술도 포함 됩니다. PS. 오늘 100회 기념 쿠폰을 주신 분들 정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쿠폰의 바다에서 헤엄치는듯한 기분이 들었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꾸벅.(__) 『 리리플 』 1. 삼팔 : 100회 1등 코멘트 축하 드립니다! 어떤 분이 하실지 기대 되었는데 1등 코멘터로서는 처음 뵙는것 같습니다. 하하하. 다시 한번 축하 드립니다. :) 2. G0 : 감사합니다. 550 ~ 600회 완결 생각중 입니다. 3. 쿠로시온 : 여러분들의 성원에 답하기 위해 수현이 그동한 꽁꽁 숨겨둔 기술 하나를 드러냈습니다! 저거 엄청 강력한 거에요…. 4. 風月主人 : 벨페고르 “난 한번만이라도 햄보카고 시픈데! 햄보칼 수 없어!” 5. 조창현 : 흐흐흐. 외전으로 올릴 생각이지만, 아마 벨페고르가 그때 한 일을 보시면 수현이 이렇게 죽이고 싶어 하는 이유를 이해 하실것 같습니다. 6. guntops : 고, 곰이 얼마나 귀여운데요! 곰돌곰돌! 7. 준호소나애쇼 : 아직 안 나왔을 뿐 입니다. 아마 차후 진행 되면서 나올 예정이오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요. 8. 그여자내껀데 : 에헤헤. 저는 그래도 한별이가 더…. 흠흠. 나중에 캐릭터 인기 투표 한번 할게요. 그때 꼭 소중한 한표를 행사해 주세요! 9. 쉬라야 : 아마 다음회에는 벨페고르 너무 불쌍하다고 하실 분들이 많이 계실듯 합니다. 하하하. 10. 휘을 : 저, 정말요? 어디서 그런 나쁜 소문을 들으셨나요?!(소곤소곤) 오늘은 하나 더! 11. aporia. : 아니에요아니에요아니에요아니에요아니에요아니에요아니에요아니에요아니에요아니에요! 수현이는 고자가 아니라구요! 엉엉엉엉엉! ㅜ.ㅠ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02 / 0933 ---------------------------------------------- 수현의 광기 나는 자꾸만 메마르게 변하는 입술을 침으로 덮었다.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기도 전, 거대한 두개의 폭우(暴雨)는 단 일말의 용서도 없이 서로의 힘을 충돌시켰다. 쿠쿠쿠쿠…! 웅장한 소리가 주변을 울린다. 놈의 표정을 보니 팔짱을 낀 여유로운 얼굴. 그에 반해 시시각각 침을 삼키는 나와 너무나 대조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벌써 승패가 갈린건 아닌가 싶었지만 긍지 높은 내 자존심은 물러남을 허락치 않는다. 누가 뭐라해도 멸망의 콜로서스는 내 최고의 기술. 여기서 물러선다면 리리스님을 뵐 낯이 없다. 나는 더욱 용을 쓰며 마력을 쏟아 부었다. 그런만큼 어느정도 효과를 보았는지 한순간 내 유성우들이 놈의 검들을 압도하는걸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흐아아아아아아아!” 나는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한발한발 부딪힐 때마다 거센 충격으로 내부가 진탕이 되어 버린다. 도대체 왜? 어떻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간신히 몸을 추스를 수 있었다. 분명 내 마법이 인간놈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았으니, 조금만 더 버티면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나는. “큿!” 다시 고개를 드는 순간 망연하고 말았다. 유성우들과 검의 폭우가 서로 충돌하는 광경은 말 그대로 장관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한테는 그 모습들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압도하는 모습은 거짓이었나. 내 유성우들은 검에 닿는 즉시 폭발하고, 그대로 소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의 염화검(炎火劍)들은 폭발에 꿋꿋이 견디며 내게로 밀려들며 주변 공간을 시시각각 점거한다. 아니, 견디는게 아니다. 오히려 내 유성들을 화려하게 불태우고 있다. 그순간 울컥, 나는 피를 한웅큼 쏟아내고 말았다. 동시에 온 몸에서 힘이 쭈욱 나가는 허탈함이 감돌기 시작했다. 설마, 무리한 마나 운용으로 신체의 붕괴와 오래전 인간놈들이 안배한 결계가 작동하는 건가. 하필 왜 지금…! 순식간에 처리하고 그 모든걸 감당할 생각 이었는데, 이건 되려 내가 밀리기 급급하다. 그리고 예정보다 빠르게 찾아온 금제들은 내 마음을 더 급하게 만들었다. 신경이 흐트러진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앗차하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이 가져온 결과는 나를 더욱 암담하게 만들고 말았다. 화르르르르르르르…! 너무도 맑고 순수하게 불타오르는 검들은 내 존재를 말살하기 위해 빠르게 내 마법을 밀어내고 있었다. 여기서 힘을 거두어 들이는 순간, 내 형체는 한줌의 재도 남지 못한채 짓이겨질 것이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마력을 더욱 크게 끌어 올렸다. 나는 아직도 인간에게 진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온 몸에 마력이 요동치는걸 느끼며 양손에 집중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게 내 속마음 이었다. 어둠의 동화를 쓰면. 운이 좋으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내 마음 한구석은 인정을 하지 못하고 자존심을 붙잡고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죽는다는걸 알면서도 마족 백작으로 살아온 세월은 단 한순간의 물러섬도 용납치 않았다. 그러나 하나씩 유성우들이 소멸하고 그 자리를 불타오르는 검들이 채워가는걸 보며 그 자존심도 조금씩 사그라 들기 시작했다. 쉴새 없이 밀려드는 염화검들을 보고 있는 어느 순간. 나는 뒷 공간이 휑한걸 느꼈다. 분명 폭풍 같은 격돌 속에 있는데 내 목덜미는 너무나 사늘했다. 설마, 끝난건가. 내 콜로서스 마법을 전부 불태웠단 말인가. “잘가라.” 인간의 차가운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천지를 뒤덮으며 내게로 달려드는 수많은 검들. 끝끝내 버티던 내 자존심들은, 죽음을 목전 앞에 두고서야 자신들의 발을 한 발자국 물렸다. 그것들이 내 몸을 해체하러 달려들고, 그순간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몸 안에 잠재된 남은 어둠을 끌어 올렸다. …. ……. ………. “허윽, 허억.” 슬며시 눈을 뜨자, 아직 무너지지 않은 새 천장이 보인다. 그와 동시에 위층에서 울리는 굉음들. 첫타격을 받는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도주를 선택했다. 어둠을 통한 공간 이동. 한순간에 펼친터라 고작 두층밖에 이동하지 못했고 도망쳐봤자 연구소 안 이지만, 그 끔찍한 기술에 온 몸이 갈갈이 찢기지 않자 일단의 안도감이 들었다. “쿨럭…!” 다시 한번 한웅큼의 피가 목구멍을 통해 나온다. 쉬고 싶다. 그러나 이미 몸에 놈의 검 몇발이 격중된 상태였다. 내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꼈지만 다시 인간들이 추척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분명 이 연구소 일층 어딘가에 비밀 공간이…. 스윽, 스윽. 거의 한쪽 발을 질질 끄는 형태로 나는 한동안 몸을 끌었다. 그리고 생각했던 목표로 당도하는 순간 그곳의 문이 활짝 열린걸 볼 수 있었다. 비단 이곳뿐만이 아니었다. 올라오기전 이곳에 있던 놈들을 처리하고 왔던가. 일단 방해 없이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에 미소를 짓고 안으로 들어가 문 옆 바닥을 더듬는다. 분명, 분명 여기 어딘가에 있을것이다. “제길!” 벌써 10분이 넘게 바닥을 더듬었는데, 아직도 찾을 수 없었다. 마음이 다급하다. 놈들이 오기전 빨리, 빨리. 순간 땅을 쓸던 손아귀에 뭔가 이질적인 존재감이 하나 스쳐갔다. 드디어 찾았다는 생각에 나는 급히 바닥으로 달려 들었…. 치익, 화르륵. “…….” 뭔가 타오르는 소리. 그래, 아직 놈에게 당한 여파가 몸에 남아 있나보군. 일단 신경쓰지 말고 어서…. “후~우.” “…….” “고귀한 마족 백작이 도망을 치고, 설마 땅을 쓸고 있을줄은 꿈에도 몰랐네. 설마 청소?” 놈이 키득거리는 말이 들린다.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정하기 싫은 마음에 억지로 자기 위안을 했을뿐. 애초에 나는 놈을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와서 착한일 한다고 해도 안봐줘.” 나는 그대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여유롭게 연초를 피우는 그놈이 있었다. * 나는 바닥을 박박 쓰는 놈의 모습을 보며 웃었다. 원래는 나중에 피려고 아꼈지만, 도저히 지금 연초를 꺼내지 않고는 못배길것 같았다. “설마하니 정말로 도망갈줄은 몰랐는데. 어둠의 동화가 참 좋긴 좋아? 예나 지금이나 도망치는거 하나는 참 잘해.” “인간…도대체…어떻게….” 벨페고르는 어지간히도 힘에 겨운듯 겨우 숨을 내뱉는다. 나는 물고 있던 연초를 훅 뱉고는 천천히 놈과의 거리를 줄였다. 내가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벨페고르는 엉거주춤 발을 휘저으며 어떻게든 뒤로 물러나려는 모습을 보였다. 문득, 하복부가 찡하는 느낌을 받는 동시에 욱씬 거리기 시작했다. 이 상황은 내게 너무도 큰 흥분을 가져다 준다. “마…마검 스쿠렙프 소….” “워워.” 놈이 검을 소환하려는 낌새가 보이자 나는 번개 같이 달려가 손을 걷어 찼다. 막 소환된 검은 허무하리만큼 저 멀리 튕겨져 나갔다. 그러자 벨페고르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그저 망연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대로 발을 들어 놈의 머리를 지근, 밟았다. “빌어봐.” “크윽.” “어차피 넌 벌레만도 못한 마족 새끼잖아. 살려달라고 빌어봐. 그러면 살려줄지도 몰라.” “죽여라.” 단호하게 말하는 놈의 모습을 보며 나는 눈에 이채를 띄웠다. 벨페고르는 이미 포기한듯 실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네놈이 지닌바 힘이 대단한건 인정한다. 그러나 너는 어차피 그분들 앞에서는 한낱 벌레와 같은 존재…내 복수는 그분들이 해주시겠지. 그리고 너 또한 그때 나와 똑같은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누구? 네가 그토록 사모해 마지 않는 리리스? 아니면 아스타로트? 사탄? 바알? 아스모데우스? 루시퍼?” “큭…네놈이 어떻게 베일에 쌓인 마계의 군주님들의 이름을 아는지는 잘 모르지. 그러나…컥!” 나는 놈이 말을 하는동안 발을 치운 후 가만히 주저 앉았다. 그리고 그대로 놈의 입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주먹 끝에 무언가 부서지는 느낌이 걸림과 동시에 놈의 조각난 이빨 조각들이 이리저리 휘날렸다. “어쩌냐. 그놈들은 이미 인간들에 의해 전부 죽었었거든.” “노! 자아하지 마아! 그부드으 아지 이가 세사에 가리하시저이 어으시어으!(놈! 장난하지 마라! 그분들은 아직 인간 세상에 강림하신적이 없으시거늘!)”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말대꾸는 꼬박꼬박 해요. 임마. 네가 그렇게 믿고 따르는 그 마계놈들을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다~한번씩 죽여본적이 있으니까 말하는거잖아.” 벨페고르는 내 눈동자를 보더니 흔들리는 얼굴이 되었다. 마족들은 밥 먹듯 거짓말을 하는 놈들인만큼 상대방이 하는 말들이 진심인지, 거짓말인지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물론 절대적이라고 볼수는 없지만 마족을 상대로 사기를 치거나 거짓말을 하는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그런 정도였다. “미…미으수 어아.(미…믿을 수 없다.)” 그러나 놈은 여전히 고개를 흔들었다. 하긴, 위에 나열한 마족들이 실제로 죽은건 어디까지나 1회차로 활동 했을 때 였으니까. 그러나 실제로 살해한적이 있는 내 말 또한 진실이었다. 내 말의 진실 여부를 판단한 벨페고르는 평소라면 콧방귀를 꼈을 말들에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뜬 후 입을 열었다. “거짓말이 아니라구. 아. 나태의 악마니까 넌 리리스의 수하겠지? 확실히 리리스를 살해할때가 엄청 재밌었지. 악마들중 몇 안되는 여성 악마이기도 하고…나름 즐거웠어. 그년의 몸은 정말 끝내줬거든.” 리리스를 들먹이자 벨페고르의 두 눈동자에서 불똥이 튀는걸 볼 수 있었다. 2회차에 놈들이 아직 살아 있는건 사실. 1회차에 내가 놈들을 살해하고 저지른 일들도 사실. 그 두 사실 속에서 진실을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괴리감에 벨페고르는 들끓는 침음성을 흘렸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유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크으….” “어땠는지 알아? 인간들 앞에서 홀딱 벗고 나체로 무릎을 꿇었지. 그리고 양손을 비비면서 싹싹 빌었다고. 제발 용서해주세요~이랬던가? 그년은 정말 비참하게 자신의 목숨을 구걸 했어. 정작 자신들의 부하는 죽어 나가는데도 말야.” “흐아아아!!!!” “역시 마계의 공식 창년은 조임도 끝내주더라. 거기 있는 인간들 전부를 받아들이는 것도 모자라 스스로 엉덩이를 흔들면서 유혹하는데…어이쿠.” “흐아아!!!! 흐아아아!!!!” 놈은 절규하며 내게 머리를 들이 밀었다. 슬쩍 손을 뺀 나는 킬킬 웃으며 그대로 놈의 뺨을 후려 갈겼다. 짝!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놈의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갔다. 나는 그대로 벨페고르의 머리칼을 잡고 들어 올렸다. 놈의 얼굴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나 또한 지금은 미친놈이나 다름 없었다. 미친놈과 미친놈의 대화. 나는 그대로 놈의 머리를 위로 잡아 올렸다가, 그대로 땅에 강하게 처박았다. 쿵! “왜. 왜 화를 내는데. 너네도 똑같은 놈들 이잖아.” “도…도대에 애 아으 그어헤 미어하으 어야….(도…도대체 왜 나를 그렇게 미워하는 거냐….)” 놈의 목소리는 바람이 빠진듯 쉭쉭 소리를 동반했지만 나는 모두 알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너무도 슬프다는 얼굴을 하고 벨페고르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정말 몰라서 물어? 정말로?” “나아 무으 원하으….(나와 무슨 원한을….)” 쿵! 나는 그대로 다시 머리를 내려 찍었다. 놈은 “껙.” 비명을 내지르며 온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나는 너무도 슬프다는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는 그때의 일들을 한번도 잊은적 없는데. “나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는데. 시작은 네놈이 다연이를 그렇게 만들었을 때 부터였지. 그래. 그 일 이후로 나는 너를 미치도록 죽이고 싶었어. 있잖아. 다연이는 그때 나를 보며 웃어주던 몇 안되는 착한 애였어.” 쿵! “그런데 네게 당하고 나서. 그리고 마족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대로 목숨을 끊더라. 그 밝고 활달한 애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었다고.” 쿵! “복수심에 불타오른 나는 너를 쫓았어. 형은 날 말렸지만 그때 나는 눈에 보이는게 없었거든. 그때가 아마 내 최초의 개인 행동 이었지. 하지만…난 네놈이 세운 비열한 술수에 걸려 함정에 빠지고. 붙잡힌 신세가 되었다.” 쿵! “그때 당했던 모욕은 참을 수 있어. 내가 병신이라서 잡힌거니까. 그런데 너가 노리던건 내가 아니더라. 너는 그때 네 편에 선 사용자들, 네가 알고 있는 모든 마족 군주들을 소집해 나를 구출하러 온 내 형을 집중 공격했지.” 쿵! “그래. 그 전투에서 내 형은 죽었다. 그 와중에도 못난 동생은 살리겠다고.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동료들의 목숨을 내던지면서 형은 끝끝내 나를 구했지만 그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잃었어.” 쿵! “끄아아….”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벨페고르의 머리칼을 더욱 끌어 올렸다. 놈의 얼굴이 형체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게 보였다. 그 잘난 얼굴 위로, 나는 침을 퉤, 뱉었다. “그런데 너와의 악연은 거기서 끝이 아니더라. 그때 간신히 도망쳐 목숨을 건진 너는…다시 만났을때는 마족 공작이 되어 있더군. 그리고, 그리고, 그녀를….” 한소영을 떠올리자 지금까지 품어왔던, 그 누구한테도 보이지 않았던 감정의 둑이 한순간에 더욱 거세게 터져 나온다. 분노, 고통, 슬픔, 좌절, 절망. 그런 마이너스한 모든 감정들이. “나는 끝을 쥐었다. 그리고 간절하게, 정말 간절하게 바랬지. 하지만 나는 원하는걸 얻을 수 없었어. 천사들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그때 내가 너희들의 손에 놀아났다는걸 깨달을 수 있었지. 너가 알기나 할까?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 기회를 쥐기 위해 살아왔는지. 그리고 기회를 얻은 후 한발자국만을 남기고 희망을 잃었을때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놈은 입가에서 이미 게거품을 물고 있었다. 얼굴에는 피칠갑을 하고, 항상 거드름을 피우며 자랑하던 뿔은 바스라진지 오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살아 있다. 놈의 코가 벌름거리는걸 본 나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다시 놈의 얼굴을 거세게 바닥으로 찍었다. “그것들을 보고, 그것들을 마음에 간직하고. 항상 죄책감에 몸부림치며 살아왔던 내 심정을 네가 알기나 해?” “께엑…께엑….” “아냐고. 응? 다 너 때문이야. 너만 아니었으면….” 쿵! “너, 너, 너, 너, 너, 너, 너, 너, 너, 너 때문이라고! 이 빌어먹을 자식아!”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쿠우웅! “껙…끄르르륵….” 나는 거칠게 놈을 내동댕이 친 후 다시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내 숨은 한껏 거칠어져 있었다. 그러나 무언가 홀린듯한 기분에 나는 그대로 다시 한번 놈의 머리 위로 발을 올렸다. 잠시동안 그 기분을 음미한 나는 건조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다행이다. 너를 여기서 만나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해. 너를 여기서 죽일 수 있어서, 나는 정말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러니 이번에는 여기서 끝내자. 너와 나의 지긋지긋한 악연을.” 벨페고르는 이미 대답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나는 놈의 대답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놈의 머리를 밟은 발에 힘을 주었다. ============================ 작품 후기 ============================ (이번회는 리리플을 생략합니다. 독자 분들의 양해 부탁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하하. 101회가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조금의 해명이 필요할것 같네요. 먼저, 수현의 성격이 회마다 바뀌는것 같다. 라고 보신분들. 제대로 보셨습니다. 통과 의례에서는 좋은 형, 오빠로. 사용자 아카데미 이후 뮬에서는 엄한 선생님 또는 부모의 모습을. 그 와중 간간히 드러난 수현의 1회차 모습. 그리고 과거 철천지 원수를 만나 지금껏 속으로만 담아왔던 본성의 폭발. 정상인이 아니라고 보셔도 좋습니다. 제로 코드를 손에 쥐고 다시 돌아오는걸 선택한 만큼. 그만큼 간절하게 미친 주인공의 모습을 여러분들에게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물론 아직 메모라이즈에 드러나지 않은것들 천지고 앞선 설명이 충분하지 않으니 몇분 독자분들께서 답답하신 마음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102회를 넘게 달려온만큼, 앞으로 차차 이야기를 진행하며 자연스럽게 풀어낼 생각입니다. 부디 이번회로 독자분들에게 수현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와닿기를 바라며 저는 일단 얘기를 마무리 짓겠습니다. 그리고 좋은 비평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그리고…적어도 악플과 비평은 구분할 수 있습니다. 지금껏 코멘트 지운건 딱 한두번이네요. 도가 지나친 악플도 아직은 놔두고 있습니다. 항상 초심을 잃기 싫어 1회를 올릴때 코멘트가 달렸나 수시로 확인하던 때를 떠올립니다. 제가 항상 후기 끝에 남기지만.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03 / 0933 ---------------------------------------------- 우리 오빠 건드리지 말아요 나는 그대로 힘을 꾹 주어 놈의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약간의 딱딱한 반발이 느껴졌지만, 그대로 더욱 힘을 주자 벨페고르의 머리통을 짓뭉개는 느낌이 발바닥을 타고 들어왔다. 내 발은 놈의 머리통을 짓이기며 조금씩 밀려 내려가더니 이윽고 바닥에 발이 닿는걸 볼 수 있었다. 한두번 발을 비빈후 살짝 떼자 곤죽이 된, 놈의 머리통 이었던 일부분들이 보였다. 나는 훗 숨을 내쉬고는 잠시 그 모습을 감상하다가, 허리를 구부려 놈의 가슴팍에 손을 내밀었다. 왼쪽 가슴에 손을 댔음에도 벨페고르는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숨도 쉬지 않는다. 겉모습만 보면 완벽하게 죽은 그 자체. 그 모습에 나는 태연한 얼굴로 그대로 손을 찔러 넣었다. 푹! 인간의 피부보다는 단단한 살갗을 뚫고 들어가는 감촉. 내게 가슴을 개방 당한 벨페고르를 보며 빈정대는 어조로 입을 연다. “뿔은 괜히 부쉈나. 조금 아깝기는 하네…. 그래도 뭐, 스쿠렙프는 소환 했으니. 남는 장사라고 할 수 있지. 안그래 벨페고르?” 당연히 벨페고르의 대답은 없었다. 놈의 가슴 내부에서 한동안 손을 휘젓던 나는 손아귀에 뭔가 잡히는 순간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있었군. 심장 부근에서 손을 멈춘 나는 이내 손에 쥔 그대로 힘껏 쑥 뽑아 내었다. 그러나. 자신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신체를 강제 적출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벨페고르는 여전히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검푸른 피가 덕지덕지 뭍은, 손에 들린 칠흑빛을 띄는 동그란 구체를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후후. 역시 상급 정도는 되니 이런게 나오는군. 아무튼 검이든 심장이든 고맙게 쓰도록 하마. 그럼 잘 있어. 벨페고르.” 담담히 인사를 건넨 후 막 떠나려는듯 몸을 돌리던 나는 그대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나는 놈의 몸 앞쪽으로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너무하네. 고맙게 쓰겠다고 했고 작별 인사도 했는데 배웅은 해주는게 예의 아니냐.” 묵묵부답. 나는 한숨을 내쉬고 놈의 갈라진 가슴 안으로 다시 손을 집어 넣었다. “…….” “죽은척 하지마. 어차피 너 아직 살아 있다는거 다 알고 있거든?” 그 순간, 벨페고르의 몸 내부에 뭔가 미세한 떨림이 퍼진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기척을 놓치지 않았다. 드디어 잡은 놈의 반응에 크게 웃은후 가슴 내부로 화정을 담은 마력을 한가득 선사했다. “내가 이대로 갈 줄 알았다면 오산이라고 말해주고 싶구나.” 화르륵! 놈의 몸 내부로부터 발화한 맑은 불꽃은 이윽고 놈의 전신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동시에 놈의 몸 안에서 시커먼 연기가 흘러 나오는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연기를 보며 다시 한번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음흉한 놈. 네놈들 하는 짓거리 내 손바닥 안이지. 하하하.” 끄아아. 끄아아아. 어지간히도 억울하고 분한지 시커면 연기는 원망서린 울음을 내뱉었지만 나는 그저 즐겁게 구경만 할 뿐 이었다. 순식간에 벨페고르의 전신을 전부 불태운 화정은 이내 허공을 떠다니는 연기로 불길을 옮겼다. 끼아아…끼아아아…. 나는 그 일련의 과정을 한팔로 턱을 괸 상태로 가만히 구경만 했다. 도대체 누가 뮬로 오자고 한걸까. 오늘 벨페고르를 처리한건 내가 홀플레인으로 되돌아온 궁극적 목적을 달성을 위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곧이어 맑은 불길을 뽐내는 화정 안에서 서서히 희미해지고 곧이어 흔적조차 사라지는 연기를 보며 나는 개운한 기분이 되었다. 이로서 1회차에 나와 기나긴 악연을 맺은 벨페고르는 마족의 영혼까지 완벽하게 소멸 당했다. 혹시 몰라 제 3의 눈을 발동해 놈이 있던 자리를 꼼꼼히 탐색한다. 그리고 아무리 기다려도 정보가 떠오르지 않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순간 나는 그대로 자리에 벌렁 드러 누웠다. 복수를 성공한 후 내면에서 샘솟는 감정들을 음미한다. 누가 복수는 허무하다고 한걸까? 이렇게 달콤하고, 이렇게 시원한데. 오랜만에 전신에 가득 차오르는 행복함을 느끼며 나는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온 몸을 지탱하던 긴장감이 풀리고 안도감이 들자 그때서야 머리에 띵 하는 심한 현기증이 돌았다. 낮은 체력으로 화정을 이용한 대가가 물밀듯 들어온다. 몸과 마력의 반동은 이미 3층에서 기술을 끌어낼 때부터 부담하고 있었다. 잠재 능력 쓰러질 수 없는과 정신력, 그리고 그동안 쌓아온 복수심으로 버티고 있었을 뿐. “하~아.” 그러나 괜찮다. 괜찮은 기분이다. 지금 내뱉은 숨결도 달달하게 느낄 정도로 내 기분은 너무나 유쾌 했다. 이대로 잠들까 싶던 나는 오른손 안에 들린 벨페고르의 심장을 품속에 고이 넣고는 아까 검을 차버린 방향을 더듬어 손을 뻗었다. 휘리릭, 착. “어쭈.”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듯 뭔가 훙 날라오더니 이내 내 손바닥 안으로 착 감기는걸 느낄 수 있었다. 그 정체는 아까 놈이 소환했지만 내 빠른 대응으로 한번 휘둘러 보지도 못했던 마검. 스쿠렙프였다. 나는 검의 행동에 어이없는 음성으로 말을 걸었다. “큭큭. 너. 주인 바꾸는게 너무 빠르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무리 벨페고르가 죽었다고 해도….” 우우웅. 내 말을 알아 들었는지 손 안의 마검 스쿠렙프가 진동하는걸 느꼈다. 이거 웃긴놈이군. 아무튼 스쿠렙프 정도면 홀 플레인이 후반부로 넘어가도 매우 쓸만한 검 이었기 때문에 챙겨 가기로 결정했다.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아니면 파기하지 말아 달라는 것인지 스쿠렙프가 다시 한번 찐득한 울음을 토했다. “알았어, 알았어. 어차피 내가 사용할 생각은 없고, 따로 좋은 주인 구해줄테니 조금만 참아라.” 내가 귀찮은 어조로 중얼거리자 녀석은 그대로 진동을 멈췄다. 살다살다 검한테 애교도 다 받아 보는군. 하긴, 마검이니 자아가 있는건 이상한건 아니지만 얘들도 주인을 아무나 고르는 애들은 아닌데. 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나쁜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대로 스쿠렙프도 품 안으로 넣었다. 눈에 비치는건 그거 빛바랜 낡은 천장 뿐. 보이고 일어나기가 싫다는 감정이 들었다. 일행들은 아직 3층에서 기다리고 있을것이다. 혹시 모르지. 애들이라면 나를 찾아 나섰을지도. 몸을 일으키자는 생각이 없는건 아니었지만 그냥 이대로 푹 자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단순한 졸림으로 치부할 일은 아니었다. 지금 내 신체에 걸린 반동의 여파로 몸이 휴식을 부르짖고 있었다. 어차피 벨페고르를 처리 했으니 폐허의 연구소는 완벽히 공략한 셈. 누운채로 슬쩍 고개를 돌리니 처음 우리들이 들어왔던 일층의 방들이 눈에 들온다. 삼층에서 내 기술에 폭격 당하기 전, 벨페고르는 자신의 장기인 어둠의 동화를 사용해 도망쳤다. 그러나 도망쳐봤자 연구소 안이란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대로 감지를 통해 추적을 개시했다. 그리고 추적을 하기전 보호막 안에 있는 일행들이 눈에 밟혔다. <추적은 혼자 합니다. 다들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요.> 그들은 하나 같이 내게 뭐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여유가 없던 나는 툭 한마디만 던지고 그대로 층계로 몸을 날렸다. 제 3의 눈까지 동원한 탐색 결과 일층에 놈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급히 일층으로 내려가자, 놈은 어딘가로 도망가려는듯 일층의 방 안에 들어간 상태로 미친듯이 바닥을 쓸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그곳에 비밀 통로가 있었던 걸까. 나가기전 그곳도 확인해 봐야겠구나. 또 이것저것 할 일들이 생각난다. 하지만 아무래도 급한 일들은 아무래도 설명이 아닐까. 어차피 실력은 뮬로 돌아가는 즉시 클랜 신청을 통해 밝힐 생각이었다.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 졌을 뿐. 문득 정하연의 얼굴이 머리속으로 불쑥 떠올랐다. 그 아가씨와 담론하려면 만만치 않을텐데. 나는 실없는 생각들을 하며 웃었다. 결국 나는 일단은 휴식을 취하기로 마음 먹었다. 어차피 자연스럽게 닥칠 일들인데 지금 안달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몸 상태는 천근만근 물 먹은 솜처럼 너무도 무거웠다. 조만간 체력으로의 포인트 분배를 진지하게 고려 해봐야 겠다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나는 머리를 깨끗이 비웠다. 그리고 눈을 감자, 내 머리속으로 어둑한 어둠이 점차 깔리는걸 느꼈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난걸까. 푹 잤다고 보기는 어렵다. 기절이나 다름 없는 반강제 수면이니까. 그래도 더이상 머리에 감도는 현기증을 느낄 수 없어 나는 슬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어두운 시야를 확인할 수 있었다. 눈을 한번 깜빡였음에도 불구하고 내 시야는 여전히 어둠컴컴했다. 그와 동시에 내 머리맡과 볼에 느껴지는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정체불명의 무언가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뭔가 하고 싶어 크게 얼굴을 부비적거리자 내 머리맡에 뭔가가 꿈틀거리는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왠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다시 한번 커다랗게 볼을 부볐다. 또 한번 살에 비벼지는 좋은 느낌에 나도 모르게 커다랗게 숨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흐읏…!” 야릇한 신음성과 함께 다시 한번 내 머리를 받치고 있는 말랑이(?)가 꿈틀이는걸 느낄 수 있었다. 이윽고 내 눈을 가린 범인이 걷히고 내 이마에 사늘한 감촉이 닿았다. 그 바람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고 말았다. 혹시나 싶었지만, 그대로 시선을 위로 올리자 찰랑이는 단발 머리와 맑고 청아한 외모의 여성과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그녀는 바로 정하연 이었다. 한동안 그녀와 눈을 마주치던 나는 나름대로 현재의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나는 정신을 잃었고, 일행은 나를 발견 했을 것이다. 그리고 기절한 내 몸을 살피고 그 와중 정하연이 내게 무릎 베개를 했다. 여기까지는 좋다. 두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건, 다른 애들도 있는데 굳이 정하연이 내게 무릎 베개를 해준것 하나. 그리고 왜 내가 그녀의 로브를 파고 들어가 허벅지 안쪽을 베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 둘. 나는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 “머리가 참 편하군요.” 평소와는 다른 말투를 듣자 내 속마음을 느꼈는지, 정하연은 오똑한 코로 숨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미리 말씀 드릴게요.” 정하연의 목소리는 너무도 청아하다. 그녀는 내 이마를 쓸던 손을 뒤로 돌려 뒤통수를 받치고 그대로 약간의 힘을 주었다. 그만 일어나라는 신호로 나는 해석했다. “수현씨가 그곳에 머리를 들이민건 내 의도가 아니에요. 본인이 직접 파고 들어가셨다는걸 알려드리고 싶군요.” 사용자 정하연의 말을 곰곰이 생각한 후 나는 담담하게 반문했다. “음. 그러면 그 발칙한 머리를 다시 꺼내셨으면 되지 않았을까요.” “그 발칙한 머리를 아무리 꺼내고, 다시 원위치를 시켜도 계속 파고드는데 도리가 없더라구요. 7번째 꺼내고 8번째 재시도에 포기 했어요. 축하해요. 7전 8기네요.” “…미안합니다. 절대로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어.” 그녀의 말에는 묘한 가시가 돋혀 있었다. 더이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나는 곧바로 사과를 한 후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순간, 온 몸에 힘이 빠지며 자세를 흐트러 뜨리고 말았다. 세상이 90도 회전해서 보이는게 내가 균형을 잡지 못하는게 분명했다. 결국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던 나는 그대로 다시 뒤로 나자빠지고 말 찰나였다. 털썩, 물컹. 허물어지는 내 몸을 정하연은 얼른 덥석 끌어 안았고 정말 의도치 않게 나는 그녀의 품 안으로 다시 안기고 말았다. 다시 한번 뒤통수를 통해 느껴지는 물컹함에 나는 할말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은 예상외의 크기과 탄력을 자랑했다. “…이런것처럼 말이죠.” “몸을 일으키키 전까지만 해도 믿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방금 일어난 상황이 믿음을 허락하지 않는군요.” 그녀의 말투가 뾰족하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렇게 화가 나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나는 간신히 엉덩이를 방바닥에 붙인 채 상체를 세웠다. 속으로 불쑥 “그러면 애초에 무릎 베개 할 필요가 없었잖아요.”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왠지 그렇게 말하면 진짜로 화를 낼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눈치는 예상외로 날카로웠다. “혹시나 해서 설명을 하나 더 추가 하겠어요. 제가 스스로 수현씨를 보살피겠다고 한건 맞아요. 그러나 어쩔 수 없었어요.” “왜죠.” “안솔양이나 유정이한테 맡기기에는 너무 불안했거든요.” 정하연은 말을 마치고 쓰게 웃었다. 그녀와 대화할때 편리한점은 서로 구구절절 자세하게 늘어 놓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마치 김한별처럼. 그리고 지금 이 상황도 똑같았다. 나와 그녀는 어디까지나 도란도란 만담을 나누고 있었지만, 겉두르는 얘기들에 불과 했다. 어디까지나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가볍게 나누는 말들. 정신을 차린 후 정하연의 반응을 보면 그녀가 지금 나를 배려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어쨌든 그녀의 은근한 뜻을 담은 한마디에 나는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 들였다. 나는 한두번 머리를 긁적인 후 방 안을 살폈다. 아무래도 일층의 방 안으로 나를 들인것 같았다. 그말인즉슨 아직도 우리들은 폐허의 연구소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 혹여나 기절한 나를 발견 후 들처 업고 뮬로 돌아갈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비밀 통로에 들어가지 않고 이대로 귀환하는건 너무 아까우니까. 그러나, 다른 사용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간단히 주변으로 감지를 돌린 후 정하연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다른 사용자들은요?” “3층이요. 잿더미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혹시 뭐라도 건질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녀의 명료한 대답에 나는 한번 끙 신음을 흘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처음과는 달리 어느정도 정신이 돌아오자 허무하리만큼 나는 반듯이 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정하연의 시선이 점점 따가워지는걸 느꼈다. “…오햅니다.” “뭐, 그럴수도 있겠네요. 안솔양이 치료 주문을 거의 난사 수준으로 사용 했으니까요.” “하아.” 나는 심호흡을 한 후 몸을 점검했다. 얼마만큼 쓰러져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오랫동안 기절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조금 더 점검하는 동안 방문 너머 여러개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 지는걸 들으며 나는 반사적으로 속을 가다듬었다. 고개를 돌려 정하연을 응시한다. 그녀 또한 태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알게 모르게 깊게 침잠 되어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스쿠렙프, 저만 귀엽나요? 검에 관련된 모든 행동에 긍정적인 영향은 저런것도 포함 되나 봅니다. 하하하. 이제 수현과 일행들이 다시 얘기를 나눌 시간이 왔습니다. 다음회에 일행들이 어떤 대화를 나눌지 기대해주세요. :) 그리고…벨페고르는 아쉽게도 업적에 포함될 수 없습니다. 분명 고위 마족이기는 하지만, 홀 플레인 <설정상> 업적은 전체적인 흐름에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통과 의례는 최초라는 그리고 상황을 따지면 특수성이 있습니다. 일종의 이벤트죠. 수현의 10년 동안 1회차에 이룬 업적이 스무개 남짓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떠올리시면 조금 이해가 가실 겁니다.) 물론 앞으로 벨페고르의 행동이 홀 플레인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홀 플레인은 현재 그 위험성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단순한 상급 마족으로 볼 뿐 입니다. 지금으로선 그다지 큰 위협이 되지 않았거든요. 아마 마왕 군주급 이었다면 업적으로 평가 받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하하. PS. 새로운 표지, 다들 어떠신가요? 제 마음에는 쏙 듭니다. :D 『 리리플 』 1. MT곰 : 1등 축하 드립니다. 요새 1등에서 자주 뵙는것 같아요! 사람인생님의 뒤를 이으시는 전설적인 1등 코멘터가 되실것 같습니다. 그리고…응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2. hohokoya1 : 저도 요즘 깜짝 놀라는 중입니다. 아. 오늘 hohokoya1님의 코멘트를 보고 어떻게든 3연참을 해야지 했는데, 생각보다 집에도 늦게 돌아왔고 글도 팍팍 나가지 않더라구요. 죄송합니다.(__) 3. 악마신전 : 그러면 수현이가 지금껏 겪어온 경험들이 웁니다! 우리 수현이는 정~말로 용의 주도한 놈이랍니다. 이로서 벨페고르는 완전히 안녕 입니다. 하하하. 4. 유무확인 : 아. 메모라이즈에 대한 많은 관심 정말로 감사합니다. 저 또한 다음회를 기대하시는 독자분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항상 노력 하겠습니다. 꾸벅. 5. 메가케논 : 네, 네? 누구를 부상 시켰다는 말씀 이신지요? @_@ 저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흑흑. 6. 액면가 : 음. 현재로서는 <좋은 꼴은 보지 못했습니다.> 라는 설정 입니다. 혹시 궁금하시면 쪽지 주세요. 간단히 알려 드릴게요. 7. 울리는영혼 : ㅋㅋㅋㅋ 아. 보고 나서 한참을 웃었습니다. 좋네요, 정말. 저도 다음에 이런식으로 후기 인용 해도 될까요? 하하하하. 정말 센스 터지는 코멘트 였습니다. 8. 카아르엠 : 익숙한 닉네임이다 싶었는데 투베에 오른 작가님 이셨군요! 현재 연재하시는 작품들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소설 부탁 드릴게요. :) 9. ㄴㅇㅇㄴㅇㄵㄷ : 음. 결말과 연관된 부분이네요. 짤막히 답변을 드리자면 제로 코드로 <시간을 되돌렸다.>라고 말씀 드릴 수 있겠네요. 해석은 여러가지로 하실 수 있지만, 결말의 즐거움으로 남겨두시는걸 추천 합니다. 그리고 한소영은…음. 그렇게 결말이 좋지는 못했습니다. 현재 설정으로는요. 10. 블라미 : 오랜만입니다! 캠프는 즐겁게 다녀 오셨는지요. :) 쿠폰 감사합니다. 하하하. 어느새 메모라이즈도 100회를 돌파 했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뿌듯해요.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04 / 0933 ---------------------------------------------- 우리 오빠 건드리지 말아요 애들과 신상용이 들어오는 순간 나와 정하연 사이에 감돌던 부드러운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 앉았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하는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만 일단은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해결하는게 급했다. 애들은 방으로 들어온 이후 일어난 나를 보며 처음에는 안도감을 표시했다. 내 건강을 묻는 애들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느새 나를 둥그렇게 둘러싼 애들의 얼굴은 모두 어색함을 담고 있었다. 애들도 바보는 아니다. 내가 이번에 마족을 상대로 보여준 능력은 확실히 본인들이 잡은 기준을 넘고 있었다. 같은 0년차 사용자로는 볼 수 없는 능력들. 한동안 무의미한 침묵의 시간이 흘렀지만, 결국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예상대로 여성 사용자 정하연. 나는 속으로 어느정도 드러낼지 가늠하며 그녀의 질문을 기다렸다. “혹시 일행들에게 할 말씀 없으신가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눈을 감고 고심했다. 애매하게 대답하는건 싫었다. 어차피 이번에 탐험을 끝으로 대부분 밝힐 계획이라 부담은 없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었다. 내가 홀 플레인의 끝을 보고, 제로 코드를 손에 넣고, 모종의 이유로 돌아왔다는 사실들은 절대로 알려줄 수 없는 사항들 이었다. 어느정도 마음을 결정하고 눈을 뜨자 애들은 불안한 얼굴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나지막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있습니다.” “그럼 말씀하세요.” 나는 잠깐동안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밑도 끝도 없이 말하라는 말에 조금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것부터 말하라는 걸까. 그녀의 요구에 나는 우묵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뭉뚱그리는 식으로 대답할 수 없는것들 입니다.” 내 말에 정하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내 말을 곱씹는지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는 이내 사늘한 목소리로 질문을 이었다. “뭉뚱그린다라. 그렇다면 숨기고 있는 것들이 한두개가 아니라는 말씀 이시군요.” “그렇긴 하네요.”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순간 일행들이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당황하는걸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담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이런 자리에서 주눅이 든다면 그건 오히려 내 잘못을 인정한다는 인식을 상대에게 심어줄 수 있었다. 그런만큼, 당당한 태도로 나가는게 내 입장을 전달하는데 더 효과적으로 볼 수 있었다. 정하연은 내 대답을 듣고 바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감은채로 말을 이었다. “당신의 의도는 몰라요. 이유도 모르구요. 하지만 그렇게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아요.” “…….” “일단 제 속마음부터 간단히 말씀 드릴게요. 첫모습에 저는 김수현이란 사용자한테 큰 호감을 느꼈죠.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저는 이 호감을 계속 이어가고 싶은게 제 솔직한 심정이에요.” “저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정하연은 내 대답에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린 후 예의 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말씀해주세요. 아니…제가 질문을 드리겠어요. 그 질문에 단 하나의 거짓 없이 모두 대답해 주시는걸 원해요.” “사용자들은 그 누구나 한두가지 비밀은 가지고 있는 법 입니다.” 내 완곡한 거절에 정하연의 눈이 다시금 날카롭게 번뜩였다. “이거랑 그거랑은 틀려요. 저는 지금 솔직히 당신이 0년차 사용자라는건 고사하고 인간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에요.” “…좋습니다. 그러면 지금 제가 대답을 한다고 해도, 그 말이 사실이라고 그대로 믿으실 수 있습니까?” “그건 저대로 방법이 있어요. 아무튼 방금전 좋다는 말씀을 하셨죠. 그러면 제 요청을 들어 주시는걸로 알겠어요.” 정하연은 말을 마친 후 품 안으로 손을 넣었다. 어느새 얘기는 서서히 본 궤도에 오르고 있었다. 다른 일행들도 그런 분위기를 느꼈는지 다들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이윽고 정하연은 품 안에서 조막만한 동그란 수정구 하나를 꺼내 내 앞에 놓았다. 그리고 그 정체를 확인한 나는 순간 표정을 흐트러뜨릴뻔 하고 말았다. “이걸 여기서 쓰게 될지는 몰랐네요. 미안해요. 하지만 지금와서 고백하건데…저는 그만큼 당신에게 기대를 걸고 싶고, 미련이 남아요. 그러니 이 <진실의 수정>을 사용하는걸 용서하셨으면 좋겠어요.” 진실의 수정을 본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나름대로 희귀한 물품 이었다. 나도 10년간 홀 플레인에서 생활하면서 <진실의 수정>의 사용 현장을 본건 100번도 채 되지 않는다. 일행들 모두의 시선이 수정구로 쏠리자 그녀는 내 앞으로 수정구를 쭉 들이밀며 설명했다. “1년전 우연히 얻게된 물품 이에요. <진실이 수정>의 위에 손을 얹고 마력을 주입하면, 사용자의 내면과 동화 되죠. 그리고 동화된 내면은 일종의 주파수로 변환되 수정구에 나타나요. 그리고 그 동화는 사용자의 음성과 연결 되어 진실, 혹은 거짓을 판별해낼 수 있어요.” “꼭 이런 방법을….” 내가 말을 흐리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름대로 정하연의 심정을 이해할수도 있었다. 일단 저 물품은 굉장히 비싼 가격에 거래가 되는 만큼 사용자로서의 밑천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예전에 그녀를 구출했을 때는 보이지 않았는데, 아마 품 안에 꽁꽁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밑천을 포기하고 지금 이걸 내놓는다는건 그녀로서도 상당히 큰 결심을 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말인즉슨 정하연도 내게 어떤 기대를 품고 있었다는 반증. 어차피 한번 겪을 진통 이었지만 정말 크게 겪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크게 한숨을 내쉬고 <진실의 수정>을 잡으려는 찰나였다. “언니. 그만해요.” 막 손을 내뻗고 수정 위로 손을 얹으려는 순간이었다. 오른편에서 한 가녀린 손이 나오더니 그대로 내 손을 잡아챘다. 그 손의 주인공은 바로 이유정 이었다. “유정아. 가만히 있어.” “언니야 말로 가만히 있으세요.” 하연이 점잖은 말로 타일렀음에도 불구하고 유정은 지지 않고 맞섰다. 두 여성의 시선이 허공을 가르고 서로 찌릿하게 노려본다. 평소 사이가 좋았던 둘인 만큼 유정의 이런 모습은 나름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이건 나에게도, 그리고 너희들 에게도 꼭 필요한 일이란다.” “언니가 뭔데 그렇게 나서는 건데요?” “…….” 유정의 신랄한 말에 정하연은 눈에 보일정도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유정 또한 만만치 않았다. 내 앞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았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로, 평소 친하게 지내던 언니의 얼굴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정하연은 대놓고 불쾌하다는 표정을 드러냈지만 유정은 그에 아랑곳않고 그녀를 더욱 쏘아 붙였다. “막말로 언니랑 신상용씨는 오빠랑 같이 행동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저는, 그리고 우리들은 달라요. 다르다구요. 시작부터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행동했어요. 언니가 지금 이렇게 몰아 세우시는거. 오빠는 어떻게 받아 들이실지 몰라도 저는 되게 짜증나요.” 아까부터 유정한테 뭔가 위화감이 느껴진다 싶더니, 나는 이내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유정은 그동안 형, 언니만 붙이고 말을 편하게 놓았는데 이번에는 처음부터 꼬박꼬박 말을 높이고 있었다. 정하연 또한 그런 낌새를 눈치 챘는지, 그녀는 한껏 가라 앉은 목소리로 유정의 말에 대꾸했다. “아직 어리구나. 아니면 홀 플레인이 어떤 곳인지 감을 못 잡았거나. 이곳은 서로가 속고 속이는 그런곳이야. 조금이라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으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간다. 그게 바로 나를 지금까지 생존하게 해준 신조였어. 나도 다 터놓고 말해볼까? 엄밀히 말하면 너희들이 그렇게 믿고 따르는 사용자 김수현은 지금껏 너희들을 속인것과….” “말 함부로 하지 말아요!” 유정이 크게 소리를 지르자 정하연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유정은 진심으로 분노한듯 어깨를 부르르 떨더니 이내 뾰족한 말투로 그녀를 쏘았다. “그래요. 저는 잘 몰라요. 그런데 최소한 언니보다는 오빠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너….” “내 얘기 아직 안 끝났어요. 오빠가 우리들을 속였다구요? 도대체 뭘 속였는데요? 오빠는 우리를 위해 희생하면 희생했지 속이지 않았어요. 아니, 설령 속였다고 해도 그건 속인게 아니에요. 다 오빠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거니까요.” 정하연도 지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녀 또한 서서히 분노가 오르는듯, 항상 유지하던 태연한 표정은 온데간데 없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그래. 너는 그렇게 편하게 생각할지도 몰라. 그런데 그건 너 혼자만의 착각일거라는 생각은 안해봤니? 다른 애들도 과연 그렇게 편하게만 생각할까?” “뭐라구요?” 유정은 눈을 크게 뜨고 안현과 안솔로 고개를 돌렸다. “야. 안현, 안솔. 너희들도 뭐라고 말좀 해봐. 너희들도 오빠가 우리들을 속였다고 생각해?” 유정의 물음에 안현과 안솔은 당황한 얼굴로 서로의 얼굴만을 번갈아 보았다. 둘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우물쭈물거리는 현과 솔을 보며 유정은 기가 막힌다는듯 “하.” 헛웃음을 뱉었다. 그리고 그런 유정을 보며 정하연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속임이라는 단어가 꼭 나쁜 의미로 볼 수는 없어. 그래. 네 말대로 내가 수현씨를 몰아 붙일 자격은 없는지도 몰라. 그렇지만 설령 내가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고 해도 너희들은 다르잖니. 너희들은 알 권리가 있어. 하지만 네 말마따나 처음부터 같이 행동한 만큼 너희들은 너무 수현씨를 의지하고, 따르고 있잖아. 그래서 내가 대표로 입을 연거야. 그리고 나도 그를 믿…휴. 아니야.” 그녀는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듯 입을 열었지만 이내 다시 오므리고 말았다. 안현과 안솔은 아직도 혼란스러운 얼굴이었고, 신상용은 그저 눈을 감고만 있었다. 그리고 비비앙은 날카로운 눈동자로 정하연을 노려 보는 중 이었다. 어지간하면 그정도 말에 물러날법도 했지만 그래도 유정이는 유정이었다. 그녀는 이해가 안간다는듯, 그리고 어이없는 얼굴로 눈알을 한바퀴 빙글 돌렸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는지 유정의 입 안에서 이빨을 까득 가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그녀의 눈동자가 활활 불타오르고 그 불똥은 안현과 안솔에게로 튀었다. “너희들은 가만히 듣고만 있어? 화나지도 않아? 분하지도 않아?” “이, 이유정. 일단 진정좀 해라. 형을 못 믿는다는게 아니다. 그런데 일단 형의 말을 들어보자고. 듣는건 문제가 되지 않잖아.” “그, 그래요오. 나도 오라버니를 믿어요.” 안현이 안솔이 간신히 더듬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지만, 그건 유정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 하는 꼴이 되었다. “진정? 진정하게 생겼어? 와, 어이가 없네.” “…….” 그 모습들이 답답한지 유정은 한동안 목이 콱 막힌듯 목을 울컥이며 숨을 몰아 쉬었다. 걱정이 되는지 유정을 본 안솔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달래려고 했으나, 유정은 거세게 뿌리쳤다. 그리고 큰 소리와 함께 지금껏 참아온 답답함을 속사포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너랑 솔이랑 통과 의례 때부터 오빠 덕 본건 하나도 생각하지 않는구나.” 정곡을 찌르는 말에 안솔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안현은 최대한 참는듯한 어조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그냥 일단 얘기만 좀….” “얘기? 들을게 뭐 있는데. 그 좀비 새끼들을 유인하고 숲 밖으로 나가게 해준 사람이 누구지? 보스 몬스터에 깔릴뻔한걸 구해주고, 혼자서 우리들이 도망칠 시간 벌어준 사람이 누군데? 그 창창하다는 황금 사자 클랜의 오퍼를 거절하고 우리랑 같이 행동하려고 나온 사람이 누구냐고!!!!” 유정의 고함에 주변은 쥐 죽은듯 고요하게 변했다. 그러나 유정은 아직도 멈출 생각이 없는듯 잠시 씩씩거린후 다시 입을 열었다. “항상 선두에서 괴물들이랑 싸우며 우리들을 보호해준게 누구야? 우리들 장비는 매번 새걸로 사주면서 정작 본인은 다 낡은 검, 낡은 옷 입는게 누구였지? 정작 우리들은 편하게 수련하고, 편하게 쉴때 쉴틈없이 뛰어 다닌 사람이 누군지 알아? 바로 오빠야. 수현이 오빠.” 안현과 안솔은 그저 멍한 얼굴로 유정을 바라 보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외침에는 은은한 물기까지 어린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내심 감탄하고 말았다. 설마 그렇게 나를 생각하고 있었던가. 설마 저만큼 나를 마음에 두고 있을지는 몰랐지만, 안현과 안솔도 그녀 못지 않다. 그저 그들이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말 그대로 궁금 했고, 내 얘기를 한번 듣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오히려 유정이 필요 이상으로 과잉 반응하는 면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나와 함께 해온 유정이의 성격이나 행동을 보면 지금 이 모습 또한 이해가 가지 않는건 아니었다. 조금 민망하기는 해도 나를 저렇게 감싸고 보호하려고 하는데 속마음이 흐뭇한건 사실 이었다. 유정의 고함 뒤로 일행들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 앉았다. 그러나. 이윽고 유정은 다시 고개를 정하연 에게로 돌렸다. “언니도 똑같잖아요. 그때 오빠가 아니었으면 언니랑 사용자 신상용씨도 구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럴 수 있어요? 도대체 오빠가 뭘 잘못했는데요. 좋은게 좋은거잖아요. 우리를 지키려고 한건데…그걸 그렇게….” 말을 하면서 유정은 <진실의 수정>으로 흘끗 시선을 던진다. “그건….” 대답하는 정하연의 얼굴에는 일순간 곤란함이 어렸다. 유정의 폭풍처럼 몰아치는 기세에 일순간 밀리고 만 것이다. 예상외의 유정의 선전에 나는 속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유정이 머리에 절대로 이 상황을 의도했을리는 없지만, 아무튼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멍석을 깔아준 이상 이제는 내가 나설때. 어차피 일부 드러내려고 한이상 일정 이상의 진실을 말할 필요는 있었다. 속으로 여러 상황을 대입하며 가만히 <진실의 수정>을 응시한다. 그와 동시에,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에)로유진 입니다. 예. 조만간 제가 왜 에로유진으로 불리는지 똑똑히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고자라는 불명예를 벗도록 하겠습니다. 후후. 흠흠. 잠시 흥분했네요.(__) 2월 25일, 힘찬 월요일의 시작이네요.(물론 우울하신 분도 있으실 겁니다. ㅜ.ㅠ) 104회를 쓰고 난 후 먼저 든 생각은, 아. 유정이 또 엄청 욕을 먹으려나 싶었습니다. 그동안, 다른 여성들에 비해 유정이는 관심을 많이 받지 못했어요.(욕 말구요….) 유정이 너무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_-a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를 위해서는 저렇게 무턱대고 쉴드도 칠 줄 아는 아이랍니다. 그럼 여러분들 모두 행복한 월요일 보내세요. :) PS. 새로운 소개글이 생각이 안나네요. 도대체 어떻게 쓰면 될까요. ㅜ.ㅠ 『 리리플 』 1. MT곰 : 오. 또 1등을 하셨군요. 축하 드립니다. 저도 파이팅 하도록 하겠습니다. MT곰님도 행복한 월요일 보내세요! 2. 사람인생 : 하하하. 사람인생님의 응원 코멘트 잘 읽었습니다. 몸은 좀 괜찮으신지 걱정도 드네요. 저도 사람인생님응 응원합니다. 그리고…그 상황에서 하연이와 정사를 했다면 순순히 받아 들일지는 의문이고 애들한테 100% 걸렸을 겁니다. :) 3. zjekfksqlc : 하하하.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 되면 후기 Page가 매~우 길어지게 될까봐 그게 걱정이에요. 지금도 충분히 길어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이라, 조금 조심스럽네요. 예전에 후기도 논란이 있던 부분이라서요. 한번 고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4. 으악이 : 아. 그 사용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수현이 형도 대단히 유능한 사용자 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으실 겁니다. 5. 휘을 : 아. 선작 1만이라. 처음 글을 쓸때는 그냥 꿈의 경지라고 생각 했는데요. 2만은 아직도 꿈의 경지네요. 앞으로 꾸준히 이어가는 수 밖에 없을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 6. 레필 : 하하. 어느 부분이 맞고 틀린지 아직 말씀 드릴수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조금 복잡하게 얽혀 있는 설정이기는 합니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세라프는 조만간 한번 만날 예정 입니다.(소곤소곤.) 7. hohokoya1 : 하하. 한소영도 공을 많이 들인 캐릭터 입니다. 아마 독자분들의 인기를 매우 많이 얻을지도 몰라요. 아. 그러고보니 캐릭터 인기 투표를 한별이 다시 만나기 전으로 할지, 후로 할지 고민중 입니다. 8. 자색 : 지도라면 예전에 그림판으로 한번 작업 했다가 좌절 했습니다. 다 그려놓고 보니 지도가 아니라 어린애들 낙서더군요. 흑흑흑흑…. 글로 올린적은 있긴 한데 너무 도시가 많아서 이미지하기 어려우실 거에요. 집 프린터만 작동 한다면 손으로 그린 다음 스캔을 뜨면 되는데, 참 난감하네요. 9. Toranoanal : 오호. 그렇군요. 제작해주신 작가님이 계속 보완해 주신다고 하셨으니, 다음 보완때 한번 부탁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10. Demodex : 털썩. De…Demodex님 마저…OTL. 수현이는 고자가 아니어요. 엉엉.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05 / 0933 ---------------------------------------------- 설정 변경 공지사항 입니다. . ============================ 작품 후기 ============================ 먼저 연참이 아닌것에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메모라이즈의 설정을 몇가지 변경해 공지하려고 부득이 105회를 빌리게 되었습니다. 일단 변경 부분을 말씀 드릴게요. <설정 변경> 1. 심안(정) 있는 그대로의 외형을 보는게 아닌, 대상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눈. 자신을 관조하고 만물을 살피거나 감지하는 능력 또는 비슷한 작용을 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극한으로 다스려진 마음은 S랭크 이하의 정신 오염 마법 아래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 2. 전장의 가호(설명) 평화를 수호하는 전장의 여신 아테나. 오직 전장 한정으로 발동하며 전장 내 한명의 병사로서 누릴 수 있는 여신의 축복. 가호를 받은 사용자는 전장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넓은 시야를 얻으며, 위기에 몰린 아군의 위치를 곧바로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신성이 담긴 가호를 받았기 때문에, 전장 외 발동으로도 포함해 마법적 행사에 의한 데미지를 무조건 감소시킨다.(이는 능력의 랭크와 사용자 본인의 행운 능력치를 적용한 수치로 적용한다.) 사용자 김수현의 행운 능력치는 준수한 수준 이지만, 최고에 이른 가호의 능력으로 적용된 수치보다 1랭크 높은 마법 행사에 대해서는 일부 방어 판정을, 2랭크 높은 마법 행사에 대해서도 감소 방어 판정을 받을 수 있다. 3. 대마력 → 항마력 4. 고속 신언 → 질속(疾速) 영창 5. 정통(연금) 마술 → 정통(연금) 마법 3, 4번은 따로 상세 설명이 나오지 않은 상태 입니다. 그러나 이름에서 알 수 있으시듯 기본적인 특성은 같습니다. 후에 메모라이즈만의 몇가지 제한과 설정을 추가해 상세 설명에 내보낼 예정 입니다. 5번은 마술 용어를 마법으로 변경 했구요. 현재 수정 내역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07회 수현의 능력치 부분 32회 심안 발동 메세지 설명 부분 46회 심안 잠재 능력치 개화 본문 73회 비비앙 능력치 부분 79회 마술 마법 용어 변경 82회 신상용 능력치 부분 83회 본문, 정하연 능력치 부분 84회 본문 87회 본문 일단 1회부터 104회 전부 훓은 결과 총 9회를 수정 했네요. 혹시라도 전 용어들이 아직 남아 있는 부분을 발견 하신다면 알려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로유진 올림. 0106 / 0933 ---------------------------------------------- 우리 오빠 건드리지 말아요 <진실의 수정>이라고 해도 제 3의 눈을 피할수는 없다. 잠깐 물품의 내부 구성을 훓은 나는 대충 고개를 주억였다. 판단이 어떤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분석한 이상 머리속으로 이 난국을 헤칠 방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곧바로 <진실의 수정> 위에 손을 얹었다. 내 행동을 본 일행들을 모두 놀란 얼굴들이 되었다. 특히나 유정은 거의 울먹거릴 정도로 얼굴을 일그러 뜨리더니, 이내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나는 그런 유정과 애들을 돌아본 후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유정이가 나를 평소에 어떻게 생각 하는지 충분히 알았어.” “…오빠.” “울지마 유정아.” 내 따뜻한 목소리에 유정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손을 들어 눈가를 한번 훔쳤다. “너희들이 나를 믿는다면 나도 너희들을 믿어. 그리고 숨긴건 사실이지만,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어. 그리고 어차피…조만간 너희들에게는 모두 고백할 생각 이었고.” 나는 일부러 “너희들에게는” 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내 말이 끝나자 일순간 이지만 애들의 얼굴에 모두 안도의 빛이 스쳤다. 그렇게 애들을 다독인 후 나는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사용자 정하연. 정말 이 방법이 최선이라면, 저는 한치의 거리낌도 없이 마력을 넣겠습니다.” “…좋아요.” “그러나 저에게도 사정이라는게 있습니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춘 후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정하연은 담담히 내 시선을 받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현재 나도 그녀도 서로 알고 있다. 정하연이 이 물품을 꺼내 놓은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그걸 내가 왜 받아 들였는지. 잠깐 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 나는 사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사정을 감수하면서. 그리고 저는 애들이 보는 앞에서 이 수정 위에 손을 얹었습니다. 사용자 정하연의 의문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당신이 이렇게 할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당신도 지금 제가 이 행동을 하면서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 어떤 심정인지 아셨으면 합니다.” “…명심할게요.” “그리고 저도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대답 거부권 인가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진실의 수정>에 손을 얹은 이유는 개인적인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행들이 지금껏 품어온 의문을 풀기 위해서 입니다. 따라서 지나치게 파고드는 질문이나 개인적인 호기심은 애초에 질문을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나는 밑밥을 깔기 시작했다. 영리한 그녀라면 충분히 내가 한 말을 이해할 것이다. 막말로 우리 둘중 한명이 싫으면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호감이 있어 그녀가 나를 몰아 세우는걸 용납했다. 그리고 그녀도 내게 호감이 있다. 그리고 우리 둘은 서로가 호감이 있는걸 알고 있다. 그래서 정하연은 <진실의 수정>을 꺼냈다. 둘 모두 내가 눈을 감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 이었다. 그러나 나는 사족을 붙임으로서 하나의 선을 그었다. 그동안 보여준 능력을 보면 나는 그녀보다 확연히 우위에 있다. 그런만큼, 조금 속된 말로 변환시키면 “더이상 까불지 마라.”고 경고한 것이다. 그녀는 내 경고에 곧바로 대답했다. “공적인 범위를 벗어나지 말라는 말씀 이시군요. 유념 하겠어요.” 정하연이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는걸 확인한 후 나는 그대로 마력을 불어 넣었다. 우우웅…. <진실의 수정>에 마력을 불어 넣자 수정은 푸르스름한 빛을 띄며 미세한 진동을 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허공으로 올라온 푸르스름한 빛은 내 몸에 천천히 스며들더니, 수정구 안으로 자그마한 연한 불꽃 하나가 피어 오르는걸 볼 수 있었다. 아마 내가 진실을 말하면 수정구는 어떠한 변화도 보이지 않을 테지만, 내 말에 조금이라도 거짓이 섞인다면 그 정도에 따라 연한 불꽃은 진하게 변한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진실의 수정>을 파훼하는 방법은 간단하지는 않다. 일단 기본적으로 자체적으로 진실 여부를 판단하는 설정이지만, 무서운점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밖으로 내뱉는 말에 한치의 거짓이 있어서는 안되고 말을 할때는 그 말에 대해 진심이 담겨야 한다는 점. 그러므로 나는 진실을 말하되 스스로 말을 애매하게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다만, 그러한 점이 내게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정하연은 무언가 떨치려는듯 고개를 도리도리 젓더니, <진실의 수정>의 작동을 확인한 후 고운 입술을 열었다. “이름을 말해주세요.” “김수현.” “연차는요?” “0년차.” “김수현씨는 우리들과 같은 똑같은 사용자 인가요?” “그렇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질문과 대답. 그러나 이건 애초에 몸풀기, 또는 전초전에 불과했다. 앞으로 물어볼 것들을 앞서 간단히 하는 질문들. 3번의 질문을 마친 정하연은 수정구를 유심히 살펴 보았다. 그리고, 수정구 안의 불꽃의 빛깔은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주억인 후 차분한 음성으로 다시 질문을 개시했다. “사용자 김수현은 우리들에게 숨기고 있는게 있어요. 먼저 그 사실들을 왜 숨겼는지 알고 싶어요.” “홀 플레인으로 입장한 후, 저는 당분간 힘을 숨기는게 낫다고 판단 했습니다.” “왜죠?” “주목을 받는게 싫었습니다. 당시 신규 사용자에 불과했던 숨기고 있는 힘이 드러난다면 저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무리들이 생겼을 겁니다.” “단순히 그 이유만 인가요?” “일단 힘을 키우고 싶었습니다. 처음부터 귀찮은 일에 말려드는건 싫었으니까요.” 정하연은 어느정도 이해가 가는듯 고개를 주억였다. 김한별도 당시 모종의 이유로 시크릿 클래스를 얻었지만 클랜에서 사용자 보호 차원으로 알리지 않았다.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나 또한 비슷한 이유로 힘을 숨긴 셈이다. 그때 당시의 나는 정말로 초반의 쓸데없는 주목으로 앞으로의 행보에 견제가 들어오는걸 경계 했다. “좋아요. 그러면 그 숨기고 있는게 뭔지 우리들한테 알려줄 수 있나요?” “…알려줄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알려드리는 것들은 일종의 제 사용자 정보에 해당 됩니다.”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숨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제 정보를 알려드리는 대신. 이후에 사용자 정하연과 신상용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할겁니다. 물론 애들과 비비앙은 제외 입니다.” “좋아요. 인정할게요. 다만 그 정보가 사실로 판정 된다면, 그리고 그만한 값어치가 있다면요.” “이, 이하 동문 입니다.” 정하연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확답을 들은 나는 그때서야 마음을 놓았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이들이 약속을 어긴다면…. 나는 속을 가다듬은 후 메마른 목소리로 내 비밀중 하나를 털어 놓았다. “그럼 말씀 드리겠습니다. 먼저, 사용자 김수현은 직업으로 시크릿 클래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 시크릿 클래스. 그 단어가 가지고 온 여파는 확실히 대단했다. 애들 모두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나를 응시했으며 정하연도 조금이지만 목젖이 움직이는걸 볼 수 있었다. 예상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놀랍긴 한가보군. 웅성이는 주변을 무시하고 나는 얼른 다음 질문을 기다렸다. “호, 혹시 어떻게, 아니, 어떤 클래스인지 알 수 있을까요.” “전투 계열 클래스 입니다. 그리고 한번만 더 사적인 호기심으로 질문을 하신다면, 저는 이 <진실의 수정>을 잡은 손을 놓겠습니다.” 내 단호한 말에 정하연은 앗차한 얼굴이 되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웅성거림은 가라 앉지 않았다. 연초 한가치를 피고 싶었으나 가진게 없었기 때문에 그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어느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간신히 소란이 가라 앉자 정하연은 재빨리 수정구를 확인했다. 그리고 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은걸 보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지금까지 하신 말씀들은 전부 진실이에요. 그리고 시크릿 클래스라고 하면 앞에 한 질문에 대한 대답과도 아귀가 맞아 떨어지네요. 납득 했어요…하지만.” 다시 차분함을 되찾은 정하연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당신은 0년차 사용자에 불과해요. 0년차 사용자가 상급 마족을 잡는다? 있을 수 없는 일 이에요. 이 부분에 대해 설명을 요구하고 싶네요.” “잠시만요.” 내가 막 대답하려는 찰나 비비앙이 손을 들었다. 그녀는 멀뚱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나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꼭 짚고 넘어갈게 있어요.” “그럼 빨리 말해요.” 정하연의 채근에 비비앙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3층으로 탐색을 갔을때 재밌는 사실을 하나 발견 했지. 나랑 신상용은 그곳에서 대마족용 마법 결계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어. 그것도 아직까지 유지될 정도로 강력한 결계.” “저는 보지 못했지만, 당시 있었을때 결계의 흔적을 느낄 수 없었어요.” 정하연이 반문 했으나 비비앙과 신상용은 서로 시간차를 두고 대답 했다. “그럴수도 있어요. 마족이 연구소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할 때마다 발동 되는 결계였 으니까. 놈의 마지막 마법에 천장이 뚫리자 마침 그때 발동 된거에요.” “저도 그때 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스승님의 말씀에 동의 합니다. 상급 악마족이 강력하긴 하지만, 애초에 불완전한 소환이라고 스스로 말했습니다. 더불어 결계의 억제력이 가미 된다면 온전한 상급 마족으로는 보기 힘듭니다.” 그들이 나를 변호하자 정하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나는 이게 웬 떡이냐 싶은 마음에 함박 웃음이 나오려는걸 간신히 참는 중 이었다. 일행들이 나를 도와준다. 솔직히 밀린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이건 밀리는게 이상할 정도로 상황이 좋아지고 있었다. 이 틈을 노려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차분히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화정의 마력을 끌어 올렸다. 예의 벨페고르를 상대했던 맑은 불꽃이 피어오르자 모두의 시선이 내 손으로 집중 됐다. “이건….” 나는 잠시간 그들에게 화정을 감상할 여유를 준 후 입을 열었다. “오늘 3층에서 잠깐 보셨을 겁니다. 이 힘은 단순한 염화(炎火)의 힘이 아닙니다. 제 직업인 시크릿 클래스와는 별개의 힘이라고 볼 수 있죠. 그리고 미리 말씀 드립니다. 이 힘은 어떤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힘이 아닙니다. 천사들도 알고 있는, 정당한 절차를 거쳐 얻은 힘 입니다.” 틀린말은 아니다. 천사들도 TANAY등급에 관해서는 함부로 의문을 품지 못하는데 기껏 설정에 불과한 <진실의 수정>이 내 특전을 거짓이라 판단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부터가 중요한 순간 이었다. 아직 정하연은 눈앞의 일에 팔려 생각을 하지 못하는것 같지만 지금 내가 했던 말들이 사실이라고 판단된 이상 지금껏 내가 해온 행보에는 크나큰 모순이 있었다. 지금 그녀가 사용자 정지연의 일을 들먹인다면 <진실의 수정>에 손을 얹고 있는 이상 나는 고스란히 내 혐의를 인정할 수 밖에 없을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내가 해야할 일들은 두가지. <진실의 수정>이 유지 되는 시간은 무한하지 않다. 오히려 그렇게 길지 않다고 해야 할까. 그런만큼 고대 연금술사 던전에서 있었던 일들의 정당화를 위한 하나의 발판이 필요 했다. 나는 당시 칠흑의 숲에서 애들 앞에서 마력 역류 현상을 연기 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상태 그대로 던전으로 강행 했다고 애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일은 결국 연기로 인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나는 정하연이 유지 시간이 끝나고 질문을 하도록 최대한 시간을 끌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군침을 흘릴만한 미끼를 내보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미끼는 바로 화정 이었다. “그 불의 힘이 사용자 김수현의 현재 연차에 맞지 않는 강함의 근거가 될 수 있나요?” “물론 시크릿 클래스도 충분히 강하지만, 저는 이 힘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으므로 충분히 근거로 들 수 있습니다. 이 불은 단순한 불이 아니라 엄청난 위력을 내포한 불 이니까요. 오늘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악마의 마법을 불태울 정도로 이 불의 위력은 저조차 함부로 가늠할 수 없습니다.” 내 설명에 정하연이 수정구를 흘끗 보는게 보였다. 사실이라고 판단했는지, 그녀는 바로 다음 질문을 말했다. “그렇군요. 그렇게 강대한 힘을 어떻게 얻었는지 궁금해요…하지만 정당한 과정을 거치셨다고 하니 제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겠지요. 알았어요. 그런데 분명 천사들도 알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죠?” “네.” “시크릿 클래스는 그렇다고 해도 현재 사용자 김수현이 지닌 다른 힘은 너무나 막강해요. 물론 제 예상을 벗어나는 예외가 있을수도 있지만 천사들은 기본적으로 사용자들을 평등하게 대한다고 알고 있어요.” 아닌데. “그러면 천사들은 그 힘을 사용하는데 아무런 말도 없었나요? 아니, 아예 연관이 없는 건가요.” 내가 뿌린 미끼를 덥썩 문 정하연을 보며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연관은 있습니다. 다만….” 나는 의도적으로 뒷말을 흐렸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거침 없이 말을 쏟아 내던 내가 말을 멈추자 정하연은 바로 얼굴에 호기심 어린 표정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을 확인한 나는 일단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녀는 확실히 제법 똑똑하고 영리하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이 원하는 해답을 얻으려 이곳저곳 다양하게 찔러보는 그녀의 모습이 기특 했지만, 아쉬운건 상대가 나라는 점 이었다. 뭐 애초에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현재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내 페이스 안으로 말려든 상태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에는 2년차 사용자에 불과하다. 홀 플레인의 음지에서 10년을 굴러먹은 나와는 아직은 메울 수 없는 갭이 있었다. 나와 그녀가 하는 질문과 대답은 조금씩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대화를 나누는게 2회면 충분할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3회도 어느정도 걸칠것 같은 느낌 입니다. 그래도 중요한 부분이니 설렁설렁 넘어가는것 보다는 짚고 넘어가는게 맞겠지요. 많이 복잡하지만 이럴때일수록 더욱 꿋꿋하게 흔들리지 않고 소신껏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독자분들이 106회도 편안히 감상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PS. 105회에 설정을 변경한 내용을 후기에 담아 두었습니다. 항상 마음에 걸렸는데 이제는 후련합니다. 하하하. 『 리리플(104회) 』 1. 반도의소설가 : 1등 축하 드립니다. 앗. 그런데 왠지 모르게 닉네임이 탐이 납니다. 츄릅츄릅. 아이디를 바꾸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하하하. 2. 꼬야 : 험험. 유정이도 알고보면 참 좋은 아이 입니다. 너무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ㅇ; 3. 쿤라이 : 오 어느 작가님 추천을 받고 오셨는지요. 궁금하네요. :) 소개글은 정말 생각이 안나서 미치겠어요. 오늘도 멍하니 있다가, 아. 그냥 다음편 먼저 쓸래. 이러고 말았지요. ㅜ.ㅠ 4. dddfaaaf : 독자분들의 코멘트를 보면 본문을 토대로 받아들이고 판단한, 본인의 주관을 내세우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다양한 코멘트들을 볼 수 있지요. 그것도 제 즐거움중 하나에요.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구나, 이렇게 생각할수도 있구나. 많은걸 배울 수 있거든요. :) 5. 레필 : 헐. 엄청나게 긴 코멘트 였습니다. 제가 독자분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도와 가장 가까운 코멘트를 달아 주셨네요. 가끔 보이시는 날카로움에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 리리플(105회) 』 1. misoochensa : 왠만하면 그 시간에 올리려고 노력 합니다. 자정에 한편. 그리고 독자분들 점심 시간인 12시에 한편. 점심 잡수신 후 가볍게 한 편 읽으시면 좋을것 같아서요. 하하. 1등 축하합니다. 2. 베지밀군 :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베지밀군님의 의견에 따라 조금 변화한 질속 영창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하하하. 지금 놓고 보니까 뭔가 조금 야한(?) 단어가 보이네요. 3. [priest]프리스트 : 네! 책임 지겠습니다! 그러니 이리 오세요! 흐흐흐흐! 죄,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돌았나 돕니다. ㅜ.ㅠ 4. 카아르엠 : 하하…. 1회부터 하나씩 Ctrl + F로 일일이 단어 검색 하는데 죽는줄 알았습니다. 100회를 넘어가니까 손이 저리더라구요. 만일 하실 일 있으면 조금씩 나눠서 하시는걸 추천 드려요. ㅜ.ㅠ 5. 유운[流雲] : 오. 저는 그냥 어릴때부터 아무 느낌 없이 듣고 사용하던 단어라 몰랐는데 확실히 검색이 되지 않네요. 순간 쇼크 먹었습니다. 하하하. 말씀해주신 사항은 차후 수정 혹은 리메이크시 적극 반영토록 하겠습니다. 한두번 적은게 아닌것 같은데 어디부터 봐야 할지 감이 안잡히네요. 이럴줄 알았으면 아까 검색 돌릴때 같이 돌릴걸 그랬나 봐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__)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07 / 0933 ---------------------------------------------- 같은 질문, 다른 결과 하지만 이제 겨우 절반에 불과했다. 아직 갈길이 절반이 남은 만큼 방심은 금물이었다. 나는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걸 자세히 말씀 드리는건 조금 그렇지만…말 그대로 천사들은 알고만 있을 뿐 입니다. 저를 담당하는 천사는 당시 제가 이 힘을 이용하고 받아 들이는걸 매우 반대 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힘은 어떻게….” 정하연은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천사들도 반대한 힘을 어떻게 얻었는지 사뭇 궁금증이 이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미 <진실의 수정>을 통한 사실 확인도 마쳤고 애초에 정당한 과정을 통해 얻었다고 연막을 해놨으니 더 파고들 건덕지는 없었다. 정하연의 입술은 바싹 메말라 있었다. 그녀는 그 고운 입술을 자신의 침으로 적시며 닫았던 입을 열었다. “그러면 천사들이 반대를 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정당히 얻은 힘을 반대할 정도면 필연 그 이유가 있을텐데요. 천사들은 그래도 홀 플레인 안에서는 사용자가 올바른 길을 가도록 조언을 하는 역할도 있어요.” 확실히 물었군.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건…벼, 별거 아닙니다.” 그와 동시에 내가 잡고 있던 수정구가 처음으로 진하게 피어올랐다. <진실의 수정>의 변화를 확인한 일행들은 모두 이상한 얼굴들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정하연의 시선을 피한채 바닥을 보고 있었지만 어차피 이것도 모두 계획의 일부였다. 물론 “솔직히 이렇게 다 있는데서 말하고 싶은 부분은 아닙니다.” 또는 “대답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할수도 있지만 그렇게 말해도 <진실의 수정>의 불꽃이 변할 가능성은 있었다. 나는 실제로 정하연에게 하나의 질문을 유도하고 있었고, 그렇다면 두 말이 거짓말로 판명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정하연의 눈은 더욱 가늘게 변했다. 거의 다 잡은 물고기를 보는 심정으로 나는 조마조마하게 그녀를 바라 보았다. “<진실의 수정>이 변했어요. 거짓말을 하셨군요.” “…사정이 있습니다.” “애초에 제가 이 질문을 할 수 있도록 허용 하셨잖아요. 아예 안했다면 모를까, 대답해 주세요. 저를 더는 실망 시키지 말아 주세요. 아니면….” “…….” 묵묵부답. 내 얼굴을 확인한 정하연은 말을 멈추고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저는 첫날 수현씨가 우리들한테 베푼 호의를 잊을 수 없어요. 목숨을 구해준 은인을 어떻게 잊어요? 그 후 애들을 대하는 모습과 캐러밴의 리더로서 보여준 모습은 말 그대로 이상적인 리더였어요. 황금 사자 클랜에 오퍼를 받으셨다고 하셨죠? 저도 그랬어요. 그리고 탈퇴 했죠. 하지만 수현씨와 애들이 지내는 모습들을 보고 마음이 많이 흔들렸어요. 그래요. 마치 홀 플레인에서는 볼 수 없는 가족 같은 느낌이었죠.” 호칭은 사용자 김수현, 당신에서 다시 수현씨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모습들이 부럽고 한편으로는 설레는 기대감도 들었어요. 그런데…그 기대감은 저만 가진 건가요? 저 혼자만의 헛된 기대였나요?” 이제 정하연은 거의 애원조로 내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한번 더 뜸을 들이기로 했다. “이 힘은….” 살짝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할 말들을 가다 듬었다. 화정의 힘은 확실히 많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 순간 나는 고민이 들었다. 지금은 버틸 수 있을지 몰라도 이런 상황이 누적 된다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는 장담하기 힘들었다. 나도 알고 있다. 지금 남은 포인트를 전부 체력 능력치에 투자하는게 옳은 결정이라는 것을. 그러나 101 능력치에 남은 미련은 너무도, 너무도 크다. 10년 동안 홀 플레인에 101 능력치로 알려진 사용자는 총 2명이 있었고, 그 2명은 모두 한 시절을 풍미한 사용자로서 이름을 날렸다. 지금 내가 가진 포인트중 8 포인트를 투자한다면 나는 민첩과 마력 능력치를 둘다 101 포인트로 올릴 수 있다. 하지만 그런만큼, 능력이 올라간만큼 내 몸에 걸리는 반동은 더욱 커진다. 이성은 체력을 올리라고 하지만 감정은 민첩과 마력으로 쏠리고 있었다. 갑자기 답답한 마음이 들어 나는 크게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나는 머리를 세게 털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지. 미안한 마음에 시선을 올리자 정하연의 상심에 젖은 얼굴이 보였다. 내 고민하는 얼굴과 한숨을 정하연은 다른 의도로 받아 들인것 같았다. “저 혼자만의 기대였나 보군요…좋아요. 이만 <진실의 수정>에서 손을….” 그녀의 선언에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 힘은 너무나 강력한 나머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닙니다.” 정하연의 말을 끊으며 들어가자 그녀가 말을 멈추는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겨우 털어놓자 순식간에 숨소리도 죽인듯한 고요함이 주변을 맴돌았다. 그녀는 잠시 내 말을 곱씹듯 고개를 기울였다. “말이 안 되잖아요. 인간이 다룰 수 없는 힘인데…아…?” “하지만 지금 제 몸 안에 잠들어 있는것도 사실 입니다.”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레 수정구로 향한다. 그순간 그녀의 얼굴에 경악이 차오르는걸 볼 수 있었다. “설마…!” “…휴. 그래요. 이 힘은 원래 인간이 다룰 수 있는 힘이 아닙니다.”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고 입이 서서히 벌어진다. 그녀는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틀어 막았다. 몸에 차오르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는건가. 확실히 머리 회전이 빠른 그녀라서 그런지 뒤로 이어질 말들을 짐작한 모양이다. 나는 정말 말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말한다는 말투로 말문을 열었다. “네. 지금 모종의 이유로 제 몸에 잠들어 있는 힘은, 양날의 검 입니다. 이 능력을 발동하면 저는 매우 큰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엄청난 위험도 동반하고 있습니다. 저를 발견 했을때 제 꼴을 보시면 아셨겠지만 이 힘은 한번 끌어 올릴때마다 제 몸에 굉장히 큰 반동을 줍니다. 그 충격으로 저는 정신을 잃고 말았죠.” 일행들 모두는 엄청나게 놀란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더욱 얘기를 이끌어 가야 한다. “담당 천사가 반대한건 이 힘이 언젠가 제 목숨을 해칠거라고 생각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이 힘을 스스로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럴만한 사정이란건 지옥의 대공을 말하는 것. 놈이 부리는 지옥의 겁화와 맞서기 위해서는 화정만한 불꽃이 없다. 얘기를 들은 정하연은 멍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다 이내 또다시 시선을 <진실의 수정>으로 내렸다. 수정 안에는 어느새 다시 옅은 색으로 돌아온 불꽃이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확인한 순간 나는 속으로 진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슬쩍 정하연과 다른 일행들의 안색을 살폈다. 이미 미끼는 확실하게 문 상태. 이제는 타이밍을 노려 끌어 올리는 일만 남았다. 옆에서 애들이 뭐라고 우물거리는 소리들이 들렸지만 일단은 무시한다. 나는 오직 담담한 눈으로 정하연의 얼굴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하기만 급급 했다. 탐험 이후 처음 보는 그녀의 흔들리는 모습. 확실히 내 말은 그녀의 내면을 뒤흔드는게 성공 했다. 그순간 옆에서 내 옷깃을 꾹꾹 잡아 당기는 손길에 나는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오라버니….” 어느새 솔이 엉금엉금 기어와 나를 보며 입술을 덜덜 떨고 있었다. 뒤로 애들과 비비앙 또한 어쩔줄 몰라 하는 표정들 이었다. 옆에서 신상용은 바보처럼 입만 벌리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보자 나는 아주 조금 장난기가 들었다. 이윽고 내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는듯 고개를 끄덕이자 순간 솔의 눈망울에 방울방울 눈물이 매달리는걸 볼 수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얼른 표정 연기를 거두었다. 얘는 도대체 무서워서 뭔 말을 못해. “하….” 그때 앞에서 들리는 한숨 섞인 탄성에 고개를 돌리는 정하연이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있는게 보였다. 아마 혼란스러울 것이다. “믿을 수 없어요.” 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진실의 수정>은 내 말이 사실임을 입증하고 있었다. “그래요…그런데…어떻게…아…. 그게 사실이면요, 아니 사실인데….” 그녀는 머리가 흔들리는지 중간중간 두서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황금 사자 클랜에서 탈퇴 했다고 했는데…그때 무슨 일을 겪었던 건가. 내 생각 이상으로 흔들리는 그녀를 보며 속으로 조그마한 호기심이 들었다. 그러나 호기심 해결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고. 지금은 중요한 순간의 연속이다. 정하연은 본인 또한 경황이 없음을 깨달았는지 정하연은 얼굴을 감쌌던 손을 내려 자신의 턱을 괴었다. 그녀의 눈은 감겼고 입술은 꾹 다물어진 상태였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 아마 그녀 나름대로 내가 말한 사실들과 머리속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것 같았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그리고 일행들중 그 누구도 함부로 나서지 않았다. 나로서는 하등 나쁠게 없었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 그녀가 다시 눈을 뜨고 턱을 괴던 손도 다시 바닥으로 힘없이 늘어 뜨리는걸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이전과는 다르게 상당히 피로함이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잠시동안 나와 눈을 맞추더니 이내 처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만 그 목소리에는 전과 같은 또박또박한 힘이 없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가지 묻고 싶은게 있어요.” “<진실의 수정>을 꺼냈을 때부터 충분한 실례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진실의 수정>은 유지 되고 있습니다. 뭐 한두번 더 실례 하신다고 바뀌는건 없어 보입니다.” 불쾌한 얼굴로 쏘아 붙이자 정하연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그러나 내가 한 말은 전부 다 사실. 더불어 내 개인 정보까지 일부 쥐고 있는 셈. 만약 정하연이 내게 상응하는 댓가를 치르지 못한다면 나는 암묵적으로 그녀를 살해할 수 있는 최소 명분을 지닐 수 있다. “…그래요. 지금까지 수현씨가 하신 말씀들은 전부 진실이었어요. 수현씨 속마음이 어떤지도 모르고 함부로 의심한건…미안해요. 너무 미안해요.”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습니다.” “그래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에요. 저는 아직 궁금한건 많아요. 하지만 그런것들은 제가 알 자격도 없겠죠. 그래도. 그게 아니라도요. 저는 한가지 궁금한게 남았어요. 어떻게 보면 공적인 질문이기도 하지만 사적인 호기심 이기도 해요. 정말 뻔뻔하고 염치 없는건 알지만 이번 한번만 질문을 허락해 주세요. 그리고 대답해 주신다면 저는 스스로 진실의 수정을 깨뜨리겠어요.” 공적인 질문이기도 하지만 사적인 호기심이기도 하다라. 그렇다면 정지연의 일일 가능성은 적을것이다. 나는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한번 주억였다. “일단 말씀해 보세요. 한번 들어는 보겠습니다.” “수현씨는.” 내 허락이 떨어지는 순간 정하연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려고 하시는 거에요?” “……!” 그순간 나는 질문을 하는 정하연의 얼굴 위로 김한별의 얼굴이 겹치는 느낌을 받았다. 김한별과 오두막에서 나눴던 대화들이 내 마음속으로 떠올랐다. <그만하세요. 오빠는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에요?> <그리고 오빠는 어째서 그런걸 애써 숨기려 하시는 거죠?> <그럼 오빠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가요?> 김한별은 그렇게 말하고 나를 떠났다. 그리고 내 예상이 맞다면, 그때와 비슷한 질문을 나는 지금 들으려 하고 있었다.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는지, 정하연은 바로 다음 말을 이었다. “사용할수록 몸을 망가뜨리는 힘이라매요. 그러면 남용하지 말아야 하잖아요. 방금전 마족…물론 수현씨가 혼자서 처리하기는 했어요. 그래도 그런 사정이 있었으면 우리들이랑 같이 싸울 수 있지 않았나요? 꼭 혼자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면서까지 그 힘을 써야만 했나요?” “그건….” “물론 희생적이고 어떤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라는것도 알아요. 하지만 여기는 홀 플레인 이잖아요. 수현씨는 이 홀 플레인이란 곳이 어떤지 아실거 아니에요. 그렇게 자신의 앞가림을 잘 하시는 분이 애들한테도, 그리고 저희들한테도 무엇을 바라면서 그렇게까지 행동하시는 건가요? 도대체 어떤 의도, 어떤 목적이 있길래 그렇게 희생을 자처하시는 거냐구요…대답해 주세요….” 그녀의 절박한 어조에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그러나 속으로는 슬며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드디어 잡았다는 생각에 온몸에 안도감이 맴돌았다. 방금전 정하연이 한 질문이 바로 내가 가장 원하던 질문 이었다. 모두 무언가 타오르는 눈빛으로 나를 본다. 그들의 시선을 음미하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오늘은 기분이 참 편안하고 잔잔하네요. 날이 시원하게 풀려서 그런가 봅니다. :) 이로서 대화도 다음회에 매듭만 지으면 되겠군요. 그리고 H한 부분은요…폐허의 연구소를 벗어난 이후로 잡고 있어요. 일단 뮬로 돌아가서 나름의 정비와 할 일들을 마친후가 될 예정 입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 오늘 연참도 했으니, 슬슬 점심을 먹으러 가야 겠네요. 배가 너무 고파요. 하하하. 그러면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 리리플 』 1. 미월야 : 첫 코멘트 축하 드립니다. 부디 107회 즐겁게 감상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2. MT곰 : 하하. 괜찮아요. 저한테는 응원해주시는 분들과 비록 코멘트는 달지 않으셔도 제 글을 조용히 읽어주시는 독자분들이 훨씬 많거든요! :) 3. ㅡMinTㅡ : 코멘트 보고 따끔 했어요. 정답 입니다. 하하. 4. 미국막빡 : 하하하. 소개글은 정말 미치겠네요. 왜 이렇게 안 떠오를까요. 벌써 지운것만 8개를 넘어가니 원. ㅜ.ㅠ 5. 메날두 : 네. 뮬로 돌아간 이후 업데이트 하도록 하겠습니다. 곧 있으면 또 변화(?!)하는데 성장은 다 한 후 올리는게 나을것 같아서요. 하하하. 6. 라무데 : 오타 지적 고맙습니다. 수정 완료 했습니다. 7. CrossDie : 정하연 나쁜x 만들기 프로젝트! 는 농담이구요. 아무래도 유정의 털털한 성격에 기대해 봐야겠죠. :) 8. gfdrkgdfgkml : 그러니까요. 이 건방진 정하연 같으니! 어디 주인공한테 감히 따지는 걸까요. 에헴. 9. 천겁혈신천무존 : 세라프요? 불쌍해요. 제가 설정하긴 했지만 그냥 불쌍해요. 10. Toranoanal : 하하하. 하하. 하…OTL. 뮬로 돌아간 이후를 기대해 주세요…. ㅜ.ㅠ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08 / 0933 ---------------------------------------------- 같은 질문, 다른 결과 그녀의 처연한 음성이 들린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겉으로는 마음을 정리하는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어디까지나 보여주는 연기. 잠시 숨을 고른 나는 비장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소중한 이들을 잃어본 경험이 있습니다.” 이 말을 할까 말까 많은 고민을 했지만 결국 하기로 결정 했다. 이 말을 듣고 그녀가 사용자 정지연을 떠올릴 가능성은 적다. 지금은 내가 그녀의 물음에 답을 줄 시간 이었고, 손 아래로 느껴지는 <진실의 수정>의 흐름으로 보아 곧 지속 시간이 끝날것 같았다. “그때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프고 절망스럽습니다. 그 경험 이후, 그리고 이 빌어먹을 홀 플레인으로 들어온 이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죽을 힘을 다해 힘을 키우고 적응을 위해 노력 했습니다.” “…….” “힘을 키우고 싶었던건, 목숨을 해칠 수 있는 힘을 알면서도 받아 들인건…말 그대로 살고 싶었기 때문 입니다. 제 목표는 궁극적으로 두가지 입니다. 생존과 귀환. 이 홀 플레인 세상에서 생존하고 다시 지구로 귀환한다는 희망을 저는 아직 놓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혼자서 돌아가는건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애들을 바라 보았다. 안현의 얼굴이, 안솔의 얼굴이, 이유정의 얼굴이 보인다. 애들은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내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물론 내 마음속의 진정한 소중한 이는 애들이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말과 진심에 불과한 일종의 애매한 장난. 나는 다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소중한 이들을 지키고, 그들을 죽게 놔두고 싶지 않습니다. 단 한번의 죽음도 없이 살아서 함께 지구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비록 제가 희생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소중한 이들을 살릴 수 있다면 저는 그 희생을 담담히 받아 들일 수 있을겁니다.” “형….” “오빠….” “오라버니….” <진실의 수정>의 불빛은 연했다. 여전히 연한 빛깔을 유지하며 피어오른다. 그럴 수 밖에 없다. 나는 속으로 친형인 김유현과 한소영을 떠올리며 말했으니까. 그리고 <진실의 수정>은 그런 내 진심을 담은 말을 진실로 판단 했다. 속마음은 이렇지만 어쨌든 지금 내 주변을 둘러싼 일행들은 그 소중한 사람들을 애들로 착각하고 있었다. 특히 나와 시선을 교환한 애들은 다들 탄성과 몽롱함이 뒤섞인 표정들 이었다. 미안하다 애들아. 그래도 너희들이 나를 따르는걸 결코 후회하지 않도록 해줄게. 정하연, 신상용, 비비앙도 매우 감탄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진실의 수정>은 내 말이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는걸 증명 했다. 이로서 하고 싶은 말은 다 끝났다. 하지만 아직 수정구는 유지 되고 있었다. 예상보다 빠르게 끝난 말에 나는 입맛을 다시고 다시 머리를 회전하려는 찰나였다. 그때 지금껏 조용히 듣고만 있던 신상용이 입을 열었다. “하연씨. 이제 그만 합시다.” “네, 네…?” “지금껏 하신 질문들로 충분 하잖아요. 그러니 이제 그만 하자구요. 그리고 리더.” 신상용은 갑자기 말을 중단한 후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내가 말릴틈도 없이 그대로 몸을 엎드리며 머리를 바닥으로 박았다. 나름대로 세게 박았는지 “탁.” 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리더. 미안합니다. 잠깐이지만 당신을 의심 했습니다. 그래서 하연씨가 당신에게 <진실의 수정>을 꺼낼때 말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리더의 진심을 듣고난 후…얼마나 제가 어리석었는지 깨달았습니다.” “오해가 풀려 다행 입니다.”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고, 제 부탁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마음 한켠에 생겼던 의심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오늘 이 말을 한 대가는 뮬로 돌아간 후 톡톡히 받을 생각 입니다. 그리고 그만 일어나세요. 지금 그런 모습 보이시는거 영 보기가 거슬리네요.” 내가 우울한 음성으로 입을 열자 신상용은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에는 후회라는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다시 시선을 돌리니 그런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정하연이 보인다. 신상용을 시작으로 그녀는 나를 비롯한 일행들 얼굴 전부를 훓어보다가, 비비앙 한테서 시선이 잠깐 멈췄다. 그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반짝이는 빛 하나가 스치고 지나간걸 볼 수 있었다. “수…!” “애들아.” 나는 재빨리 몸을 조금 돌린 후 애들을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막 내게 말을 걸려던 정하연은 흠칫한 얼굴로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는 방금전 질문을 마지막이라고 했고, 여기서 더 나를 몰아 붙일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 사람 좋은 신상용도 그만하라고 화를 내면서 말했다. 아마 한번 더 입을 연다면 그때는 정말로 일행들 모두의 분노를 살게 분명 했다. 애들은 모두 우물쭈물한 얼굴로 입만 오물거리고 있었다. 나는 정하연한테는 보여주지 않았던 차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희들도 평소에 궁금한거 있었으면 지금 물어봐.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잖니.” 내 물음에 안현과 유정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너희들이 질문을 하지 않으면 시간이 남는다고. 그런 내 마음속의 부르짖음을 들을리는 없고, 둘은 수줍은 어조로 내게 말했다. “형. 모든 의문을 풀렸어요. 그리고 애초에 의심 하지도 않았구요. 오히려…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형.” “나도나도. 거봐. 이럴줄 알았어. 우리 오빠가 속이긴 뭘 속여…. 우리 오빠 불쌍해서 어떡해….” 뒷말을 흐리며 입을 삐쭉이는 유정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 안되면 신상용과 비비앙도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다는 생각에 나는 안솔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는…방금전부터 몽롱한 눈길로 내 얼굴을 보고만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위험함(?)을 느끼고 비비앙으로 고개를 돌리려 할 찰나였다. “저…오라버니….” “어, 어?” “저 오라버니한테 묻고 싶은게 있어요….” 하지마. 넌 하지마.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랬다가는 당장 울음을 터뜨릴 터. 거기다 다른 애들도 솔이의 질문을 사뭇 궁금해하는 분위기라 딱히 거절할 명분이 생각나지 않았다. 내 침묵을 멋대로 긍정으로 받아 들인 솔이는 이윽고 몸을 배배 꼬며 기어코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는…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쿨럭쿨럭!” 가만히 듣고 있던 안현이 거센 헛기침을 토했다. 나는 올것이 왔다는 생각에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았다. 하하. 어떻게 생각하긴. 철부지 없는 어린애에 항상 괴롭히고 울리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치게 만드는 애라고 생각해…하지만 이 속마음을 그대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 솔은 지금 엄청 용기를 낸듯 두 손을 꾹 쥔채 볼을 발갛게 물들인 상태였다. 대충 말을 뭉뚱그릴 생각으로 입을 열려고 하자 뜻하지 않은 원호가 들어왔다. “어떻게 생각하긴. 항상 어린애 같은 행동으로 폐만 끼치고 뻑하면 울음만 터뜨리는 철부지. 넌 뭐 그런 질문으로 오빠를 곤란하게 만드니?” “그래. 수현이 너무 곤란한 얼굴 이잖아. 그런 질문은 둘이 있는데서 하거나 아예 하지를 마. 때와 장소는 가릴줄 알아야지.” 유정과 비비앙은 나란히 솔이를 타겟으로 쏘아 붙이듯 말을 이었다. 구구절절 옳다고 내심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들의 말투는 필요 이상으로 뾰족하게 변해 있었다. 두 여성 사용자의 반박에 안솔은 아랫입술을 쑥 내밀었다. “어, 언니들한테 물어본거 아니거든요.” “요 꼬꼬맹이 어디서….” “그만.” 나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막 몸을 일으키는 유정이를 도로 자리에 앉혔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갈뻔 했지만 둘의 적절한 도움으로 위기를 타개할 수 있었다. 모두의 이목을 모은 상태서 나는 태연히 입을 열었다. “솔이는 애가 참 착하고 순수해. 가끔 보면 깜짝 놀랄 만큼. 그리고…그런만큼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과는 잘 맞지 않아. 그건 사실이야.” “헤에….” “하지만 솔이는 사제 잖아. 나는 솔이를 짐덩이…보다는 항상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어.” “그렇지만…저는 언니들 말대로 별 도움도 안되고…항상 떼만 부리고…울고….” 잘 알고 있군. 그러나 나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사제라는 직업과 솔이의 성격은 굉장히 궁합이 좋아. 나는 항상 솔이가 최고의 사제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지금 그 마음만 유지할 수 있다면 너는 후에 분명히 최고의 사제가 될거야.” 그래. 너는 나중에 광휘의 사제(Brilliance Priest)될 몸이니까. 그때 가서는 정말 쓸모가 많을테니 지금은 내가 어르고 달래줄게. 나는 빙긋 웃으며 수정구를 잡아 위로 올렸다. 그리고 <진실의 수정>의 불꽃은 여전히 연한색으로 피어 오르고 있었다. 내 확답을 들은 안솔의 얼굴은 눈에 띄게 밝게 변했고, 안현도 신나는 얼굴로 허리를 꼿꼿하게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허공으로 들린 <진실의 수정>의 불꽃을 확인하니 서서히 사그라드는 불꽃의 모습이 보였다. “아….” 전방에서 들리는 탄성에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는 정하연이 전전긍긍한 얼굴로 내 손에 들린 <진실의 수정>을 바라 보고 있었다. 그동안 계속해서 사그라들던 불꽃은 어느새 점이 되어 변하더니, 이윽고 <진실의 수정>의 수정구 겉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쩌적. 쩌저적. 파사삭…. 그 금은 순식간에 전면으로 퍼지더니 이내 한줌의 재가 되어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우수수 떨어지는 수정 가루를 정하연은 그저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모든 가루가 흩날리자, 그녀는 고개를 든 후 복잡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기막힌 타이밍으로 고비 하나를 넘긴 나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애들을 대하던 얼굴 표정을 곧바로 바꾼후 무심한 어조로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궁금증은 다 풀리셨습니까.” “…네.” 한박자 늦게 나오기는 했지만 결국은 “네.” 라는 대답을 받아냈다. <진실의 수정>에 손을 댄 상태로는 대답하기 곤란했지만, 유지 시간이 끝난 이상 얼마든지 변명할 거리는 있었다. 그리고 마침 애들도 모두 알고 있는 좋은 변명거리 하나도 있었고. 아무튼 중요한 일 하나를 일단락 지은 기분은 대단히 후련 했다. 더불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인 벨페고르도 처리 했으니 오늘은 정말로 최고의 날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기분 좋을 일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럼 이시간부로 저는 다시 캐러밴의 대장으로 활동 하겠습니다.” “여부가 있나요.” 신상용의 명쾌한 대답에 고개를 한번 주억이고는 나는 몸을 일으켰다. “지금껏 생각보다 오래 휴식을 취했으니 다시 움직일 생각 입니다. 다들 일어나세요.” 내 명령에 일행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하연은 뜻모를 한숨을 내쉬고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간 후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일은 뮬로 돌아간 이후 정산 하겠습니다. 그때까지는….” “…알겠어요. 그리고 죄송해요.” 그녀의 확답을 들은 후 나는 바로 몸을 돌렸다. 유정은 그 어느때보다 유쾌한 미소를 가득 띄운채로 내게 달려들었다. “오빠. 그럼 이제 뮬로 돌아가는거야? 지금 출발하면 내일 모래쯤 도착하겠네?” “아니. 오늘을 포함하면 돌아가는데 3일 정도 걸릴걸.” “응? 왜?” “지금은 조금 늦기도 했고. 그리고 오늘은 연구소에서 하루밤 더 지낼지도 몰라. 그렇게 알아둬.” 내 말에 일행들은 모두 의문 가득한 얼굴로 내게 시선을 모았다. 나는 방 밖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아까 벨페고르랑 싸울때 비밀 통로 하나를 발견 했거든.” “비밀 통로요?” “그래. 1층에서 놈을 발견 했을때 미친듯이 땅바닥을 긁고 있더군. 바닥 어딘가 지하로 통하는 문이 있는것 같다. 지금도 충분하긴 하지만 혹시 모르잖아. 그 비밀 장소에 더 큰 보물이 있을지.” 내 말에 애들은 다들 솔깃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단 한명 안솔은 예외였다. 그녀는 내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양 손으로 옷깃을 붙잡고 꾹꾹 매달렸다. “오라버니이…우리 그냥 뮬로 가요…. 몸이 너무 걱정 돼요…네?” 나는 그런 솔의 볼을 부드럽게 매만져 주었다. 보드랍고 아직 젖살도 빠지지 않은 말랑한 볼살이 손에 살포시 잡혔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는건 아쉽잖아. 괜찮아. 어차피 이번에 뮬로 돌아가면 조금 오래동안 쉴 생각 이었거든.” “…정말요?” “그래. 그러니까 지금은 일단 가자. 가는게 힘든건 아니잖아. 이미 공략도 끝났고. 알겠지?” “네에.” 착하게 내 말을 듣는 솔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나는 발길을 돌렸다. 어느새 일행들은 다들 대형을 잡은 상태였다. 나는 모두의 얼굴을 확인한 후 그대로 성큼성큼 방문을 나섰다. 그리고 방문을 나서며 나는 입가에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사람을 알게 될 즈음 이별은 찾아 옵니다. 이별을 알게 될 즈음 사람은 찾아 옵니다. 음. 그런데요. 그런데 말입니다. 독자분들. 이별은 아름답다고 하긴 하는데, 그렇게 유쾌 하지는 않은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괜한 넋두리를 했네요. 『 리리플 』 1. KIN뿅 : 1등 축하 드립니다. 잘 보셨다니 다행이네요. :) 2. 유운처럼 :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하하. 과연 누가 처음일까요? 3. 라구아 : 당연히 나옵니다. 다만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 입니다. 4. 쿤라이 : 하하. 고맙습니다. 나중에 소개글을 쓸때 참고 하도록 하겠습니다. 5. 블라미 : 독자분들의 의견도 매우 갈리고, 저도 고민이 많습니다. 하하하. 생각해둔 바는 있지만, 어떻게 할지 확정은 되지 않았네요. 6. 風月主人 : 수정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예. 그런걸 모두 계산해서 결과가 나온다고 보시면 됩니다. 7. 아르테쿠스 : 에. 에. 위험 하시군요. 험험. 그러시면 아니 됩니다. :( 8. 초라한 : 아마 지금 상황을 간단히 넘겼으면 분명 나중에 질문 하시는 독자분들이 생길겁니다. 하하하. 저도 지금 확실히 짚고 넘어가는게 낫다는 판단 아래 꿋꿋이 전개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9. 휘을 : 하하. 맞으신 부분도 있습니다. 비비앙때를 생각하시면 더욱 정답에 가까워 지실것 같습니다. 10. 너초우너 : 첫 코멘트 이시군요! 하하하. 반갑습니다. 좋게 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09 / 0933 ---------------------------------------------- 같은 질문, 다른 결과 예상대로 나와 벨페고르가 교전을 벌였던 장소에서 바닥과 교묘하게 섞인 문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그 문은 고대 연금술사의 던전을 발견 했을 때 성의 로비에서 지하로 들어가는 구조와 비슷했다. 내가 발견하지 못한게 아니라, 그때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현세에서 제 3의 눈을 속일 수 있는건 사실상 없으니까. 지하로 통하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역시나 아래로 통하는 계단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들어가기전 감지를 통해 지하를 꼼꼼히 훓었다. 그리고 위험에 걸리는 반응이 없다는걸 확인한 후 바로 아래로 몸을 날렸다. “라이트(Light).” 따라 들어온 정하연은 곧바로 라이트(Light) 주문을 발동 했다. 곧이어 떠오른 둥그런 빛의 구체가 캄캄한 내부를 확 밝히는 순간 지하에 잠들어 있던 비밀의 방은 우리들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우오….” 안현의 탄성이 들린다. 비밀의 방을 보니 일층에 있던 방들보다 협소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방에는 아직도 형체를 유지하는 나무 상자와 통들이 벽 한면에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그 외에 낡은 침대와 서랍, 탁자, 그리고 탁자 위에 흩어진 그릇들. 어떤 특수 목적을 가졌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침대로 가까이 다가가 시트를 걷어 본다. 얌전히 누워 있는 오래된 뼛조각들이 보였다. 잠시 그 흔적들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나는 다시 곱게 시트를 덮어 주었다. 그대로 몸을 돌린후, 나는 가만히 서있는 일행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 방이 마지막 방 입니다. 어떤게 있을지 모르지만 모두 하나도 놓치지 말고 꼼꼼히 방 안을 살펴주세요.” 내 오더가 떨어지자 애들은 바로 샅샅이 흩어졌다. 이 방만 탐색하면 끝이라는 기대감과 또 뭔가 나올지도 모르는 설레임에 다들 흥분한것 같았다. 곧이어 차분히 걸음을 옮기는 신상용, 정하연, 비비앙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감지와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 잠시 후. 감지를 오래 유지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허리를 숙여 침대 아래로 손을 들이 밀었다. 그대로 한번 크게 손을 반원형으로 쓸자, 팔 안으로 몇개 걸리는 것들이 느껴졌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아무튼 빠르게 하나 발견 했다는 생각에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것들을 모두 끌어내었다. 곧이어 내 팔에 걸린채 나온 물품을들 보며 나는 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처음에는 나조차 반신반의 했던 일들이 하나씩 실제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몸이 떨리는 느낌이다. 물론 아직 정보를 확인한건 아니지만 분명 내가 예상한 그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려 나온 물품은 총 네개. 일반 창보다 살짝 굵고 길쭉한 흑색 창 한자루. 반듯하고 네모난, 한 손에 들어오는 고급스러운 목함 하나. 조금만 건드려도 바스라질것 같은 낡은 책 한권. 그리고 장갑 한짝. 나는 일단 그 장갑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 그 장갑은 블루블랙빛 색깔이 감도는 가죽 장갑 이었는데, 전체적으로 심플하면서도 표면에는 달빛을 번들거리는 체인이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었다. 한켤레가 아닌 한짝이라는 사실이 조금 에러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래도 혹시 한짝이 더 있을지도 몰라 나는 아예 몸을 엎드린채 침대 밑을 더욱더 살펴 보았다. 그러니, 다른 한짝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그냥 다 부숴! 어차피 나가면 끝 이잖아!” “그거 좋지.” 뒤에서 안현과 유정이 상자를 부수는 소리들이 들렸다. 아마 생각대로 풀리지 않자 급한 성질이 튀어 나와 다 때려 부수고 있는 거겠지. 나는 그동안 설레는 마음으로 제 3의 눈을 유지한채 시선을 돌렸다. 눈 앞에 먼지가 쌓인 물품들이 보인다. 그동안의 예상이 빗나가지 않는다면, 이 물품들은 기공창술사가 사용하던 유품일 가능성이 높았다. 계속 그것들을 보면서 제 3의 눈으로 분석을 시도하자, 곧이어 물품들에 대한 정보가 차례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칠흑의 창(Spear Of Raven)』 <강철(85.6%), 미스릴(12.7%), 아다만티움(1.6%)의 합금으로 만들어진 흑색 창 입니다. 고대 어떤 실력 있는 대장장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성능 좋은 창 입니다. 강철을 주 재료로 삼기는 했지만 미스릴을 창 전체에 퍼뜨리는 방식으로 마나 활용율을 대단히 높였습니다. 또한 창신의 중심에 소량의 아다만티움을 한군데 모아 박는 방법으로 창의 강도를 상향 시켰습니다. 다른 마법적 처리는 가미하지 않았지만, 그만큼 단단함과 예리함의 상승에 중점을 둔 실용적인 창 입니다. 다만, 이 창에는 <기공창술사>를 계승할 수 있는 힘이 잠들어 있습니다. 창의 주인이 쓰던 기록서를 발견할 수 있다면 더욱 높은 힘을 얻을 수 있을것 입니다.> 『영약』 <여러 희귀한 영약들을 배합한 영약 입니다. 체력 능력치 70포인트 이하의 사용자가 복용한다면 소량(1 Point ~ 2 Point)의 체력 능력치 상승 효과를 노릴 수 있습니다.> 『고대 창술사의 기록』 <고대 유명한 창술사의 기록 입니다. 본인이 수련을 하면서 느꼈던 깨달음이나 기술, 노하우등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그가 사용하던 흑색 창을 발견할 수 있다면, 해당 사용자는 한단계 더 높은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감소의 장갑(Reduction Of Glove)』 <모종의 사정으로 한쪽밖에 남지 않은 장갑 입니다. 현재 남은 장갑은 왼손용 장갑으로 어떤 물체를 들 때 물체의 무게를 1/5로 줄이는 효과가 있습니다. 만일 오른손용 장갑 한짝을 찾아 한켤레를 완성하게 된다면 무게는 1/6로 줄일 수 있고 소량(2 Point)의 근력 능력치 상승을 노릴 수 있습니다.> “하아….” “드디어 주머니 하나 발견! 오빠오빠! 나 이거…오빠 지금 뭐해?” 뒤에서 유정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대답할 여유는 없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아 물론 고생은 없었지만. 아무튼 기공창술사는 역시 소도시 뮬의 주변에 잠들어 있었다. 키메라 연금술사에 이어 기공 창술사. 이건 절대로 가벼운 일로 치부할 수 없었다. 문득 비비앙에게서 책을 받았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처럼 다시 한번 가슴에 벅차오르는 희열과 기쁜 감정에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참으려고 해도 결국 입가에 미소가 걸린걸 스스로 느끼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오빠? 오빠~? 도대체 왜그래~응?” 옆에서 유정이 앵알거리자 나는 곧바로 손을 내밀어 그녀를 끌어 당겼다. 유정은 처음에는 깜짝 놀란듯 싶었지만 곧이어 부담없이 내 옆에 찰싹 붙으며 애교를 피웠다. 내 어깨에 그대로 머리를 파묻은 그녀는 이내 아래 널린 물품들을 보며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대박을 건진것 같다. 하하하.” “이건 창? 와씨. 안현 자식 복 받았네.” 나는 그대로 유정의 머리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유정이 다시 머리를 들이밀며 강한 거부 의사를 표시 했다. “야. 이제 머리 좀 치워봐.” “씨잉. 안을때는 언제고. 그러지말고 쫌만 더 이러고 있자. 왜 솔이가 오빠한테 맨날 안기려고 하는지 알겠다. 기분 괜찮네.” 그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거두었다. 아무튼 고유 능력을 고를때 제 3의 눈을 고른건 정말 신의 한수였다. 1회차에 그토록 찾아 헤매던 던전, 탐험, 그리고 이런 레어 클래스들이 탐험을 하면 툭툭 튀어 나오고 있었다. 물론 나도 지금 이런 상황들이 어느정도 운 때문이라는건 알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 중요한건 레어 클래스를 2연속으로 발견 했다는 사실 이었다. 설마 했던 일들이 현실이 되고 있었다. 일행에, 그리고 나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안현이 레어 클래스가 된다는건 굉장히 고무적인 일 이었다. 나는 떨리는 가슴을 다듬은 후 가만히 흑생 창으로 손을 내밀었다. 수북이 쌓인 먼지를 헤치고 차가운 칠흑빛 금속을 잡는다. 그순간 내 몸의 내부로 엄청난 힘이 흘러 들어오며, 이번에는 제 3의 눈이 아닌 홀 플레인의 설정 메세지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희귀 직업(Rare Class)을 발견 했습니다. 칠흑의 창을 든 후 내부의 힘을 받아 들이면 기공창술사(Energy SpearMan)로 진화 할 수 있습니다.』 『기공창술사는 창술가들의 상위 계열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특이한 체술과 창술을 지니고 있으며, 몸 내부의 기운을 더욱 효율적으로 활용해 체술, 창술의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습니다. 체술과 창술을 수련할 수 있는 방법은 전승자가 남긴 기록서에 수록 되어 있습니다. 근접 계열들 그중 특히 창을 익힌 사용자가 있다면 계승을 추천합니다.』 『현재 김수현님의 직업은 검사 계열 최상위 비밀 직업(Secret Class) 검술 전문가(Sword Specialist)입니다. 책을 습득할 수 있지만 고유, 특수, 잠재 능력을 판단한 결과 전체적인 효율은 4할 이하로 감소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근력 능력치 94 포인트와 민첩 능력치 98 포인트 판정으로 감소분의 2할을 복구할 수 있습니다. 또한 특수 능력 신검합일의 EX 랭크 판정으로 감소분의 2할을 복구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무기를 쥐어도 사용자 김수현은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검을 드는 것 보다는 효율이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이미 특수 능력과 잠재 능력들을 모두 개화한 상태니 기공창술사의 힘을 습득하는건 추천하지 않습니다.』 별로 넓지 않고 일행들 7명이 전부 방을 털고 있는만큼 탐색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곧이어 자신의 맡은 구역을 모두 끝낸 일행들의 보고가 속속이 들렸다. “형. 개털이에요.” “오라버니. 저는 주머니 하나…히이?” 안현은 손을 내저으며 한숨을 푹 쉬었고 안솔은 막 내게 펜던트를 흔들다가, 나와 유정의 모습을 보고 헛바람을 들이켰다. 나는 곧바로 유정의 머리를 밀쳐냈다. “우씨. 나도 못 찾았어.” “저, 저도 스승님과 이하 동문 입니다.” 비비앙과 신상용은 아쉬운 얼굴로 내게 빈손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서랍을 담당하던 정하연은 무언가 반짝이는 기다란 줄 하나를 내밀었다. “목걸이 하나를 발견 했어요. 어떤 마법적인 기운이 느껴지는것 같아요.” 정하연과 안솔은 얌전히 내게 자신들이 발견한 물품들은 건네주었다. 나는 그 두 물품들을 바닥에 있는, 내가 발견한 물품들 위로 떨어 뜨렸다. 내가 발견한 고대 기공창술사들의 유품을 보자 유정을 제외한 일행들의 눈이 모두 동그랗게 변했다. “아무래도 결산이 필요할것 같지만…일단 급한 일부터 처리하죠.” “급한 일? 나 빨리 도시로 돌아가고 싶은데….” 투덜거리는 비비앙을 지그시 바라보자 그녀는 바로 다시 말을 바꿨다. “와. 어떤 물품들인지 너무 궁금하다. 궁금해~궁금해~!” “…안현. 이쪽으로 와.” “네.” 안현은 내 말대로 순순히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허리를 숙여 칠흑의 창을 잡은 뒤 천천히 들어 올렸다. 안현은 창을 확인하고는 내가 이 창을 줄거라 생각했는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는 곧 그 미소가 경악으로 바뀐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현아. 지금부터 내 말 잘들어.” “후후. 어떤 일이든 분부만 하십시오.” 과도하게 눈을 빛내는 현을 보며 나는 쓰게 웃은후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 창을 잡으면 아마 허공으로 홀 플레인 메세지들이 떠오를거야. 그걸 모두 읽은 후 속마음으로 받아 들인다고 하면 돼. 중요한건 절대로 중간에 창을 떨어뜨리면 안 돼. 알겠지?” “네? 잘 모르겠어요. 그냥 시키는대로만 하면 돼죠? 그런데 이게 뭐길래 그래요?” “어휴. 그냥 내 말들 잘 기억하고 메세지들이 시키는대로만 하면 돼. 그러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거야.” “흐흐. 그렇게 말씀 하시니까 기대 되잖아요. 얼른 주세요 형.” “녀석. 옛다.” 나는 그대로 창을 안현에게 건네 주었다. 그리고 안현이 창을 잡는 순간 그의 몸이 딱딱히 경직 되는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미미한 미소를 흘렸다. 애초에 나는 지닌바 마력이 너무 높고 가호도 있는 상황이라 그 힘을 무리없이 들일 수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마력 능력치가 낮은 안현은 아니었다. “어…어….” 안현의 눈동자가 허공을 응시한다. 그리고 당황함에 물드는 그의 표정이 떠오르자 일행들 사이로 작은 소란이 일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담담히 손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다들 조용히. 계승 의식을 치르는 과정은 생각보다 녹록치 않습니다. 주위가 최대한 조용할수록 좋으니 잠시만 다들 정숙해 주세요. 그냥 지켜만 보시면 됩니다.” “계승…과정?” 내 옆에 서 있던 유정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반문하자, 나는 고개를 한번 주억인 후 대답 했다. “그래. 저 창은 레어 클래스(Rare Class)인 기공창술사(Energy SpearMan)를 계승할 수 있도록 해주는 물품이다. 즉 계승 의식은 현재 안현이 레어 클래스로 진화하는 과정을 일컫는 말이지.” ============================ 작품 후기 ============================ 오늘은 랭크와 단계에 대한 설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Minus, Zero, Plus는 <단계>로 정의 합니다. F ~ EX는 <랭크>로 정의 합니다. 1. EX 2. S → S+ 3. A- → A → A+ → A++ → A+++ 4. B- → B → B+ 5. C- → C → C+ 6. D- → D → D+ 7. E- → E → E+ 8. F- → F → F+ 김수현 고유, 특수, 잠재 능력 설명. 《제 3의 눈(S Zero)》 1. 알 수 없는 힘으로 강제 발현으로 인한 2랭크 다운 2. 화정의 영향으로 1랭크 상승 원래 제 3의 눈은 EX랭크로 나올 수 밖에 없는 고유 능력 입니다. 그래서 현재 1, 2번의 이유로 S Zero 랭크 입니다. 《신검합일(EX Zero)》 1. 다년간의 노련한 경험과 수많은 업적으로 1랭크 상승 2. 직업 보정으로 인한 1랭크 상승 신검합일은 원래 수현의 1회차 시절 순수하게 <능력치>에 맞추면 A 랭크 판정을 받습니다. 그러나 현재 1, 2번의 이유로 2랭크 상승 보정을 받아 EX 랭크 입니다. (이부분은 얼마전 3랭크 상승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현재 2랭크 상승으로 수정한 상태 입니다.) 《백병전(A Plus)》 1. 다년간의 노련한 경험과 직업 보정으로 1랭크 상승(각 능력에 따라 상승 보정을 받는 부분들이 다릅니다.) 백병전 또한 수현의 1회차 시절 B+ 랭크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1번의 이유로 현재 1랭크 상승 보정을 받아 A+ 랭크 입니다.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음. 아마 연참 행진은 오늘이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높네요. 아마 오늘 자정때 후기로 자세히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좋은 말씀 많이 해주신 분들 정말 감사 합니다. 읽으면서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__) 그럼 여러분들 모두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 리리플 』 1. 쿠로시온 : 1등 축하 드립니다. MT곰님의 1등 행진을 끊어 내셨군요. 짝짝짝! 2. 사람인생 : 하하. 아쉽네요. 몸은 좀 어떠세요? 많이 괜찮아 지셨나요? 솔이는 그때 너무 긴장한 상태로 말이 제대로(?) 나왔답니다. 하하하. 3. 무협소설광 : 우오오! 대동단결! 저 또한 독자님들과 대동단결! :) 4. 우드스워드 : 뜨끔. 뜨뜨끔. 5. starland : 하하하. 정하연의 동생을 생각해 보시면 답이 나오실 겁니다. :) 6. CrossDie : 물론 오빠 오해 풀렸다. 우리 언니 다시 친하게 지내요. 이렇게는 저도 맞지 않다고 생각 합니다. 개인적으로 둘의 문제에는 수현도 관여를 할 생각이고, 처음 유정이 하연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 사실을 보시면 아주 해답이 없는건 아니랍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하연의 복선도 하나 깔아논 상태구요. 폰으로 작성하시느라 고생 하셨습니다. 앞으로 둘의 사이가 어떻게 풀릴지 기대해주세요. :) 7. 창랑 : 절대적으로 공감 합니다. 8. 악마신전 : 고맙습니다. 한숨 자니까 조금 마음이 진정 되네요. 하하하…. 9. Toranoanal : 네. 시간이 약인것 같습니다. 아직도 아쉬운 마음은 있지만 차차 나아지겠지요? 10. 칼이조아 : 그렇군요. 조만간 랭크에 대해 후기로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작품 설정에 조만간 사용자들 정보를 올릴 생각인데 그때 같이 올리는게 낫겠네요. 혹시 바로 알고 싶으시면 쪽지 보내주세요. 11. 불곰리즈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불곰리즈님의 초반에 귀여움 넘치던 코멘트가 그립네요. 하하하.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특히 오늘은 더 읽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10 / 0933 ---------------------------------------------- 같은 질문, 다른 결과 (오늘 후기는 매우 깁니다. 하지만 꼭 읽어주세요.) “레어 클래스(Rare Class)? 기공창술사(Energy SpearMan)?” 유정은 내 말을 따라하더니 이내 눈을 휘둥그래 뜨며 큰 숨을 토했다. 다른 일행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시크릿 클래스(Secret Class)인걸 밝혔을 때보다 더욱 소란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동안 보인 실력으로 일행들의 마음에 어느정도 자리를 잡았지만, 안현은 나보다는 이렇다 할 실력을 보이지 못하다가 승급하는거라 더욱 그럴지도 몰랐다. “마, 말도 안 돼! 왜 안현만 저런…!” “이, 이 캐러밴은 행운의 여신이 함께 하는 건가요? 정말….” “쉿.” 살짝 미간을 좁힌 후 검지 손가락을 일자로 세워 입술에 대자, 각각 불만과 탄성을 터뜨리던 유정과 신상용은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안현은 몸을 미친듯이 떨며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본신의 마력 능력치를 훨씬 상회하는 힘을 받아 들이니 몸이 부담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분명히 좋은 현상으로 볼 수 있었다. 아직 능력치와 능력들이 개발 되지 않은 0년차 사용자가 이렇게 상위 클래스로 진화하는건 일종의 기연으로 봐도 무방 했다. 덜익은 육체에 이상 없는 <설정된> 강대한 힘이 들어가는건 본인의 능력이 일정부분 상승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일은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승급은 굉장히 중요한 과정 입니다. 안그래도 힘들텐데 주변이 소란스러우면 더욱 신경이 쓰일지도 모릅니다. 일단 궁금하더라도 참고, 계승이 모두 끝난 이후 묻도록 합시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내 말에 일행 모두가 침을 삼키는 소리를 냈다. 옆의 유정은 대놓고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안현에게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에 애타는 기색이 가득한게 엄청나게 부러워하고 있는게 분명 했다. 나는 품에 있는 마검 스쿠렙프를 한번 쓰다듬은 후 시선을 안현에게 돌렸다. “으…으…아….” 안현은 내 말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 온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지만 두 손에 꾹 쥔 칠흑의 창은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속으로 안현을 응원하며 나는 유정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아 주었다. 오늘 유정의 속마음을 들은 이후 얘를 조금 매몰차게 대한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많이 예뻐해주고, 더 많이 보듬어줄 작정 이었다. “힝…오빠….” 유정은 입을 삐쭉 내밀며 냉큼 내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안솔은 현재 자신의 친오빠를 보느라 정신이 팔려 있는 상태였다. 나는 그대로 유정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안현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도록 주시 했다. 이윽고 안현의 떨림이 조금씩 줄어드는게 눈에 보이기 시작 했다. 간간이 숨도 쉬고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는게 어느정도 끝이 보이는것 같았다. 그리고 드디어 창을 잡은 안현의 팔이 축 늘어지는 순간 그의 몸 전신이 황금빛으로 뒤덮이는걸 볼 수 있었다. “성공이다.” 내가 만족한 얼굴로 입을 열고 그 황금빛은 화려하게 안현의 몸을 감돌더니 이내 순식간에 사그라 들었다. 빛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안현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듯 멍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사용자 정보를 보고 있는것 같았다. 나도 제법 궁금 했기 때문에 당연히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안현(0년차) 2. 클래스(Class) : 기공창술사(Rare Energy SpearMan Runner) 3. 소속 국가(Nation) : -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잊혀진 고대 창술의 진전을 잇는 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2) 7. 신장 · 체중 : 178.8cm · 67.5kg 8. 성향 : 우호 · 온건(Amity · Moderation) [근력 61] [내구 58] [민첩 74] [체력 63] [마력 58] [행운 61] < 업적(0) > < 특수 능력(1/1) > 1. 창술의 달인(Rank : C Zero) < 잠재 능력(1/4) > 1. 호신강기(Rank : E Plus) 2. - 3. - 4. - < 최근 능력치 비교 > 전 : [근력 59] [내구 57] [민첩 74] [체력 61] [마력 49] [행운 61] 후 : [근력 61] [내구 58] [민첩 74] [체력 63] [마력 58] [행운 61] 안현의 사용자 정보를 세세히 읽자 나는 속으로 감탄이 나오는걸 막을 수 없었다. 이정도면 정말로 많이 변했다고 할 수 있었다. 클래스와 진명은 당연히 바뀌는거라고 해도 성향과 능력치 변화 그리고 특수, 잠재 능력 개화는 최고 수준으로 볼 수 있었다. 원래 안현의 성향은 중립(True) 그리고 중용(Neutral) 이었는데 조금 더 선에 치우친 우호(Amity) · 온건(Moderation)으로 변했다. 그동안의 행동이 안현의 내면 성향에 영향을 미친것이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능력치는 근력 2p, 내구 1p, 체력 2p, 마력 9p가 상승해 총 14 포인트가 상승 했다. 뮬에 도착한 이후 2개월도 안되 두자릿수 상승율을 기록한 것이다. 물론 레어 클래스 상승 효과로 마력이 큰 폭으로 오른점도 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두자릿수 상승은 가히 경이로운 수준 이었다. 그리고 창술의 달인과 호신강기.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특수 능력과 잠재 능력 하나를 개화한것도 대단한데, 창술의 달인은 시작부터 C 랭크였다. 호신강기는 랭크가 낮기는 하지만 물리력과 마력 둘 모두를 방어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방어 능력. 말 그대로 엄청난 혜택을 받고 시작하는 셈이다. 나는 속으로 부럽다고, 사기라고 외치려고 했지만 차마 양심에 찔려 생각 조차도 하지 못했다. 하긴 당장에 EX랭크에 오른 신검합일 하나만 봐도 현재 안현이 이룩한 모든 능력들을 찜쪄 먹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뻔뻔한 생각을 버리고 안현의 성장을 겸허히 축하해주기로 마음 먹었다. “형.” “…그래. 축하한다.” 안현은 몽롱함에 젖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밝게 웃으며 안현을 축하 했다. 그러나 안현은 여전히 몽롱한 눈동자로 내게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너무 기쁜 마음에 그럴수도 있다고 이해한 나는 다가오는 안현의 어깨를 살짝 다독여 주었다. 그리고 그순간, 안현이 내게 와락 달려 들었다. “형!!!!” 안현이 이러는게 한두번이 아니었고, 이미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두팔을 벌리고 달려드는 안현을 보며 태연히 발을 뒤로 들었다. 오자마자 뻥 차줄 생각 이었다. * “그럼 폐허의 연구소에서 얻은 물품들을 총 결산 하겠습니다.” 아마 지금쯤 밖은 어두울 것이다. 홀 플레인의 밤은 피하는게 좋다. 폐허의 연구소에서 뮬까지 걸리는 시간은 총 3일. 도중에 노숙은 어쩔 수 없지만 괜히 자청해서 밤 안으로 들어가는건 피해야 할 일들중 하나였다. 차라리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 강행군을 하는게 안전에는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솔직히 아직 내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 조금 회복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왕 자고가기로 한거 연구소에서 얻은 물품들은 전부 정리하기로 했다. 이번 탐험은 말 그대로 대박중의 대박. 애들이 현재 장비하고 있는것까지 합하면 정말 어마어마한 성과를 올렸다. 일단 금전 수익을 계산하면, 금화는 480골드였고 100골드를 호가하는 알 굵은 루비 보석 8개를 얻었다. 그러므로 총 1280골드의 수익이 나왔다. 다음으로 장비를 보면, 안현이 장비한 마나의 흐름을 도와주는 미스릴 팔찌 하나. 유정이 가져간 미스릴이 소량 포함된 장식용 단검. 비비앙이 장비한 블록 오브 파이어(Block Of Fire)의 이름을 지닌 망토. 안솔에게 준 마력 능력치를 1p 상승시켜주는 반지. 그리고 내가 갖고 있는 안티 매직 마법을 3회 사용할 수 있는 반지. 그다음 마족 백작 벨페고르를 처리하고 얻은 마족의 심장, 마검 스쿠렙프. 마지막으로 비밀의 방에서 얻은 칠흑의 창(레어 클래스 상승), 체력 상승 영약, 고대 창술사의 기록, 감소의 장갑, 주머니 안에 있던 펜던트, 그리고 정하연이 발견한 목걸이. 대부분의 물품에 복원 마법을 시전한 정하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펜던트와 목걸이를 내게 건네주었다. 이미 제 3의 눈으로 모든 정보를 확인 했지만,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녀의 말을 모두 들어주었다. “…목걸이는 알겠는데, 펜던트는 별로 특이한게 없는것 같아요. 목걸이 또한 매우 좋은 물품이에요. 지금은 실전된 메모라이즈 마법을…아 확실하지는 않아요. 아무튼 그와 비슷한 종류의 마법을, 그것도 강화시킨 영구 마법이 각인도 있는것 같아요. 이 목걸이에는 총 2개의 마법을 저장할 수 있어요. 그리고 원하는 순간 시동어만 외치면 바로 마법을 발사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마법이 걸려 있어요. 다만 신성 주문은 저장할 수 없어요. 완전히 마법사용이라고 보시면 돼요.” 이름하여 영광의 목걸이(Glory Necklace). 정하연의 말대로 현재는 홀 플레인에서 실종된 메모라이즈(Memorize) 마법이 걸려 있는 목걸이였다. 이 목걸이 또한 굉장히 좋은 물품이지만 안현의 레어 클래스 승급에 비할바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은 비교적 담담 했다. 그리고 펜던트는 말 그대로 펜던트에 불과했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그대로 떨궈 밟아 부수고 싶었지만, 안솔의 전전긍긍한 얼굴을 보자 차마 그럴수도 없었다. 나중에 솔이 안보는데서 버릴 생각을 하고 나는 펜던트를 대충 한쪽 구석으로 밀어 두었다. “흐흐흐.” 안현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음침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 소년의 눈길로 가끔 나를 바라보는데 그럴때마다 나는 내 발끝을 가리켰다. 걷어 차이고 싶으면 얼마든지 오라는 일종의 신호였다. 아무튼 나는 새로 얻은 물품들의 일부도 지금 배분할 생각이었다. 일행들은 모두 기대 되는 얼굴로 내 입만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먼저 안현을 마무리할 생각으로 감소의 장갑과 기록서를 꺼내 들었다. “안현. 너 그 창 조금 무겁지.” “흐흐흐. 전에 쓰던것보다 훨씬 무겁기는 해요.” 자꾸만 함박 웃음을 짓는 녀석을 보며 나는 한숨을 쉬고는 장갑과 기록서를 툭 던졌다. “아까 정하연씨 말을 들어서 알겠지만, 장갑은 네가 든 물체의 무게를 감소하는 효과가 있다. 그렇다고 근력이 실제로 세지는게 아니라, 말 그대로 감소시킬 뿐이니 유념하고. 그리고 기록서는 고대어로 있기는 하지만 아마도 네 창술의 수련과 관련된 부분일 거다. 나중에 도시로 돌아간 후 비비앙한테 해독해 달라고 그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신나는 얼굴로 자신에게 배당된 물품들을 쓸어가는 안현을 나는 물끄럼한 눈길로 바라 보았다. 영약은 어차피 또 내가 복용할 수 없는것 이었다. 그래서 적당한 틈을 노려 먹일 생각 이었는데, 그때 마침 부러운 눈길로 안현을 보는 신상용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옆에 멀뚱한 얼굴로 앉아 있는 비비앙도. 그순간 내 머리속으로 하나의 생각이 번득 스치고 지나갔다. 영약, 정화된 비비앙의 영단, 마족의 심장, 조화의 마방진, 연금술사. 어쩌면…. “혀엉!” “…이제 그만좀 해라 좀.” 내가 생각을 하던 도중 또다시 달려드는 안현을 걷어찬 후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머리속으로 퍼즐을 하나 맞추긴 했지만 그 분야는 내가 자신있는 분야가 아니라 함부로 성공을 장담하기 힘들었다. 영광의 목걸이와 펜던트는 일단 보관하기로 했다. 원래는 비비앙에게 줄까 했지만 마수 소환술을 주로 이용하는 비비앙은 스스로 거절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영광의 목걸이는 비비앙 보다는 정하연이 훨씬 어울렸다. 그러나 지금은 줄 수 없다. 그녀와 본격적인 관계를 맺는건 어디까지나 뮬로 돌아간 이후 우리 둘의 사이를 해결하고 난 이후였다. “쳇. 혼자 들떠서는…. 완전 저놈만을 위한 방 같잖아?” 목걸이와 펜던트를 품에 넣고 야영을 명령하자 옆에서 유정이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대놓고 퉁퉁 거리는게 어지간히 질투심이 폭발하는 모양 이었다. 순간 품 안에 있는 마검 스쿠렙프가 생각 났지만 아직은 건네줄때가 아니었다. 이놈은 엄연히 마검으로 분류 되는 굉장히 위험한 놈이다. 지금은 살살 기고 있더라도 최대한 길을 들이고 난 이후에야 건네줄 수 있었다. 그래도 유정이의 어깨가 축 처진걸 보니 솔직히 조금 안된 마음이 있기는 했다. 아무튼 앞으로 신경 써주기로 한만큼 나중에 그녀의 마음을 직접 풀어주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라서 습격을 받을 위험은 적지만 혹시 몰라 불침번을 세우기로 했다. 안현은 평소에는 느릿하게 야영을 했지만 오늘만큼은 그 누구보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평소에는 과묵한 모습을 보이지만 그래도 저런 모습들을 보니 아직은 어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습이 아니꼬왔는지 유정이 또 빈정거렸으나 오늘만큼은 마음이 넉넉한 안현은 푸근한 미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흠…. 비비앙? 이리와.” “응? 왜?” 안현이 자신을 부르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비비앙이 고개를 기울이며 반문 했다. 안현은 유정이 보는 앞에서 그 어느때보다 자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리 같은 레어 클래스끼리 잘 지내자고. 자자. 내 옆에 침낭 깔어. 중간에는 시크릿 클래스이신 우리 형님 들어갈 자리 놔두고. 그렇지.” 그 말에 안솔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안현을 바라 보았다. 솔만 그런게 아니었다. 정하연과 신상용도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들의 대화를 주시하고 있었다. 내심 엄청 창피 했지만, 그래도 지금 이 기분을 만끽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 뒤로 유정이 안현에게 달려드는건 어떻게 보면 정해진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소소한 헤프닝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매듭 지은 후 우리들은 저녁을 먹었다. 조금 시간이 남긴 했어도 내일 새벽에 일어날 예정이라 일찍 잠들기로 결정했다. 나는 처음 불침번을 나선 비비앙의 뒷모습을 보며 침낭으로 몸을 묻었다. 내일이면 다시 뮬로 돌아가는 귀환길에 오른다. 그렇게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얻은것도 많았다는 공략이라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나는 차분히 눈을 감았다. ============================ 작품 후기 ============================ (오늘 후기는 리리플을 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어느덧 2월도 거의 갔고, 조금 있으면 새로운 3월이 다가오네요. 오늘 이렇게 장문의 후기를 쓰게 된 이유는 연재 주기에 대한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단도직입으로 말씀 드리면, 2월 28일부터 제가 새로운 세상으로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군대를 전역하고 어느새 예비군 2년차를 넘었습니다. 군대 전역후 여러 일을 하다가, 하나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살수는 없다. 나도 하나의 목표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목표를 위해 일을 그만두고 일을 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자리를 하나 구했고, 그때부터 열심히 달린것 같습니다. 그후 나름대로 목표했던 바를 이뤘고, 또 나름대로 좋은 결과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가 12년 12월 이었습니다. 그후 저는 조금 생긴 여유를 즐겼고, 그중 하나가 바로 조아라였습니다. 거의 10년 동안 독자로 지내던 도중 노블 소설들을 읽으면서 하나의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한번 소설을 써보고 싶다. 그동안 여러 네이버, 다음 카페에 소설을 올린적은 많았지만 조아라에 올리는건 2년전? 3년전? 아무튼 그때 이후로 네번째 였습니다. 처음 현대 마법사를 쓰면서 설정 부족을 느꼈고, 그다음 나름대로 짜고 들어간 아포칼립스 크로니클은 독자분들의 호응을 이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던 도중 12년 3월에 연재하다 습작으로 돌린 메모라이즈 였습니다. 해서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미리 짜둔 설정을 변경하고 추가해 이를 악물고 연재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프로가 아닙니다. 글을 쓰는게 전업이 아닌, 아마추어에 불과한 사람 입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대로 들어가보자. 선작 3천개를 목표로 해보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50회 이상은 이끌어 보자. 단단히 마음 먹고 연재를 시작 했습니다. 처음에 호응이 엄청난건 아니었지만, 전작들에 비해 훨씬 나았고 무엇보다 전에 연재분을 기억하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30회, 40회를 넘어가면서 베스트에 한번 오를 수 있었고 목표 했던 선작 3천도 넘을 수 있었습니다. 그뒤로 다시 20위 ~ 30위로 내려갔지만 나름대로 즐거운 날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평소 잘 따르던 친인척분을 사고로 잃었을 때 였습니다. 장례식장에 가야 했기 때문에 휴재 공지를 했고 돌아 왔는데 여러분들의 많은 코멘트를 볼 수 있었습니다. 코멘트들을 하나씩 잃는 순간 뭔가 울컥하는게 올라왔고, 수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 후. 마음을 추스른 후 저는 키보드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한편을 쓰는것도 허덕이던 제가 처음으로 연참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2편씩 쓰기 시작하고, 70회를 넘어가면서 다시 한번 폭발적인 호응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 투베 1위를 했을때. 선작이 하루에 1천개가 넘게 올랐을 때. 하루에 코멘트 다섯개도 달리지 않던 제가 순식간에 수십개의 코멘트가 달릴때. 선작 3천개를 목표로 했던 제가 선작 1만이 넘었을 때. 여러분들은 아실까요? 그때 제 심정이 어땠을 지를요. 하루하루를 꿈 속에서 사는것 같고, 조금 힘들다고 불평해도 코멘트만 보면 다시 기분이 좋아지곤 했습니다. 잠을 자려고 누워도 입가에 미소가 감돌고 악플을 봐도 그저 즐겁기만 했습니다. 코멘트로 리리플로 여러분들과 의사 소통을 하는 날들이 너무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독자분들의 과분한 관심과 응원은 제게 그대로 힘으로 돌아와 더욱 소설에 집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글로 먹고 살지 않는 이상, 이제 원래 목적이었던 제 목표를 위해 달릴날이 다가오고 말았습니다. 이번이 제 인생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있고, 나이가 조금 있는만큼 마지노선이라 정말 최선을 다할 각오로 임할 생각입니다. 지금 당장 봐도 2월 28일은 신입 오리엔테이션이 있고 3월 1일, 3월 2일은 신입들이 모여 저 멀리 산골로 떠납니다. 그리고 앞으로 또 어떤 일들이 있을지도 모르구요. 앞으로 1일 2연참은 힘들지도 모릅니다. 1일 1연재도 깨질지도 모르고, 자정 연재도 어그러질수 있습니다 중요한 일이 있을때마다 휴재 공지도 나올수도 있구요. 하지만 이대로 연재를 포기하는건 싫습니다. 조금 더 쓰고 싶고 조금 더 가보고 싶습니다. 완결은 아직 머나먼 일이지만 주변 여건이 허락하는대로 최대한 이끌어가고 싶습니다. 제가 오직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릴 수 있는건 단 하나입니다. 여유가 있을때 연참을 하겠다는것. 최대한 연재를 이어 보겠다는것.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지지 않겠다는것 입니다. 그날 올리지 못하면, 그리고 중요한 일이 있으면 공지든 후기든 코멘트든 꼬박꼬박 남기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염치 없는 말이고 저 또한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나중에 흐지부지 되기 보다는 지금 확실히 말씀드리는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이 너무 길었네요. 하지만 그냥 이래서 이렇다 툭 말씀 드리기 보다는 제 사정을 최대한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독자분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앞으로 생활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최대한 연재를 이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양해를 구하며 긴 후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111 / 0933 ---------------------------------------------- 어두운 과거 탐험 출발 후 가는데 사흘. 폐허의 연구소를 탐험하는데 이틀. 뮬로 다시 돌아오는데 사흘. 통합 여드레만에 우리들은 귀환을 완료할 수 있었다. 마침 도착 시간대는 막 오후를 넘어서고 있었다. 비슷하게, 도사 주변의 탐험을 마치고 돌아오는 다른 사용자들은 우리들을 힐끗힐끗 보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마 일행들 모두 거지꼴을 면치 못하고 있어 어디를 다녀왔는지 궁금해 하는것 같았다. 그러나 다들 행색은 남루해도 얼굴들만은 밝았다. 이번 탐험에서 얻은게 많았기 때문인지 생생한 표정들로, 마치 개선 장군이 돌아오는듯한 분위기를 풍기고들 있었다. 이윽고 전방으로 여전히 초라해 보이는 북문이 보이자 유정은 신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으으…드디어 돌아왔다. 얼른 들어가서 따뜻한 음식 먹고 씻고 푹 누워서 자고 싶어.” “헤에. 저두요오….” 안솔이 빙긋 웃으며 화답하자 그들의 대화를 듣던 안현은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목을 뻣뻣하게 세운게 내심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것 같았다. 나는 살짝 장난을 걸기로 했다. “안현. 넌 돌아가서 뭐부터 할거니?” 현의 옆으로 가서 슬쩍 말을 건네자 그는 진중한 얼굴로 대답했다. “당연히 수련부터 할 생각 입니다. 갓 탐험에서 돌아왔다고 먹고 놀고 잘 생각은 잘못된 생각 입니다.” “아주 바람직한 태도군. 역시 레어 클래스 다운걸.” “후후. 이정도면 보통 아니겠습니까.”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며 입을 여는 안현. 그리고 옆편으로 유정과 안솔은 그를 한껏 노려보고 있었다. 이윽고, 한동안 씨근대다가 안현의 거드름을 피우는 표정을 참지 못한 유정은 결국 거친 한마디를 뱉고 말았다. “놀고 있네. 니가 잘도 수련 하겠다. 돼지 같이 처먹기만 하겠지.” 유정의 강도 높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안현의 얼굴은 태연함 그 자체였다. “흐음. 어디서 일반 사용자의 냄새가 나는군요. 그것도 질투가 섞인 아주 추악한 냄새 같네요. 아무래도 형과 비비앙 사이로 자리를 옮기는게 나을것 같습니다.” 안현이 아주 고상한 어조로 대꾸하자 순간 유정의 눈동자에서 불똥을 튀는걸 볼 수 있었다. “미친놈. 병신 같은 놈.” “어디서 질투에 미친 동물이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형. 그나저나 오늘따라 날이 아주 맑습니다. 하하하.” “그래그래. 너희 둘다 그만해라.” 내 말에 안현은 여유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유정은 입술을 짓씹으며 이를 북북 가는 모습을 보였다. 어차피 살짝만 건드릴 생각이라 나는 둘 사이를 막으며 팔을 저었다. 신상용과 비비앙은 그런 애들의 모습을 보며 작게 웃었다. 나는 잠시 시선을 정하연 에게로 돌렸다. 그녀는 폐허의 연구소를 나온 이후 줄곧 멍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일행들은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그녀 또한 먼저 입을 여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토록 친하게 지내던 유정도 정하연을 이제 있는듯 없는듯 대하고 있었다. 솔직히 좋은 분위기로 볼 수는 없었다. 미우나 고우나 어쨌든 앞으로 나와 함께할 클랜원으로 낙점한 상태. 당분간 가족처럼 지내는건 무리라도 최소한 처음 뮬에서 만난 후 탐험을 출발할때 분위기는 나와야 한다. 더구나 이번 탐험 이후로 클랜 창설을 신청할 생각이므로 따지고보면 그녀 또한 클랜의 원년 멤버가 된다. 아무튼 오늘 하루는 푹 쉬고 내일이든 언제든 다음에 따로 이야기를 하는게 나을것 같았다. 탐험에서 돌아온것도 있지만 다음 탐험을 떠나기전 대부분의 일을 마치고 갈 예정이라 할 일은 엄청나게 많았다. 하지만 다들 시간만 투자하면 하나씩 차근히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고 정비로 인한 도시에 머무르는 기간도 길게 잡은 편 이었다. 피로를 호소하는 몸을 뒤틀며 나는 북문을 통과 했다. 옆에서 우렁차게 인사하는 경비병들의 경례 소리를 들으며 나는 첫 행선지를 여관으로 잡았다. 소도시 뮬에서 내가 찾는 여관은 언제나 똑같다. <조신한 숙녀>. 시설이 그렇게 좋은건 아니지만 쓸데없이 사용자들이 북적이지 않고(고연주에게 추근대는 사용자들은 예외로 두자.), 음식의 맛이 좋았다. 물론 그런 여관들은 얼마든지 있고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 하다. 내가 진정으로 그 여관에 가는 이유는 고연주의 영입 또는 살해였다. 그러고보니 슬슬 그녀를 처리할 시기도 다가오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 그녀와 홀로 전투를 벌일수도 있다. 부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어느새 도착한 여관의 계단을 올랐다. 꾹 닫힌 나무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침 테이블을 청소하는 고연주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꿀꺽.” 이건 안현이 침 삼키는 목소리. 그녀는 이미 인기척을 느꼈는지 시원하게 테이블을 훔치고 여유롭게 몸을 돌렸다. 곧이어 그녀는 내 얼굴을 확인한 후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어머. 오랜만 이에요.” “오랜만 입니다.” <조신한 숙녀>의 여관문을 들어선 나는 조금밖에 보이지 않는 사용자들을 보며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러고보니 아마 이번달 안으로 부랑자들이 대거 숙청당할 것이다. 아직은 계획 단계에 있겠지만 이미 냄새를 맡은 사용자들은 서서히 북쪽 방면의 도시들을 떠나고 있었다. 고연주는 여전히 노출도 높은 옷을 입고 있었다. 가슴이 절반 이상 드러나는 V넥과 비슷한 상의와 무릎 위 매끈한 허벅지를 보여주는 하의 실종. 그녀는 오랜만의 손님에 사뭇 기쁘다는 얼굴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식사부터 하시겠어요…아니면 목욕? 아니면 저….” 오자마자 또 들이대는 고연주의 말을, 나는 피곤하다는 어조로 단칼에 끊었다. “식사 후 씻는걸로 하겠습니다. 방은 이주일로 끊고, 특실로 3개 주세요. 식사는 항상 먹던걸로.” “칫.” 그녀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것 같았지만, 그냥 넘어 가기로 했다. 옆에서 안현이 보내는 무언의 항의어린 시선을 받으며 우리들은 가까운 테이블로 자리를 잡았다. 곧이어 다들 의자가 삐걱이는 소리를 낼 정도로 크게 앉더니, 하나 같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근데 수현.” “왜.” “방은 왜 3개로 잡은거야? 2개면 충분 하잖아.” “하나는 따로 할 일들이 있어서. 특실이면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공간도 있거든.” 내 말에 비비앙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특실 하나는 내가 사용할 예정 이었다. 앞으로 처리할 일들도 많지만, 무엇보다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목함에 들어 있던 영약을 본 후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마 내 생각이 맞는다면, 최소한 체력 능력치를 1 포인트라도 올릴 수 있을것이다. 또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던 나는 바로 머리를 흔들었다. 오늘은 일단 쉬고 몸 회복에 전념 하기로 했으면서 또 일들을 떠올리다니. 아무래도 1회차에 항상 몸을 한계까지 몰아 붙였던 습관을 버리지 못한것 같았다. 애들은 어느새 대부분 목을 테이블에 걸치고 있었다. 그동안의 전투와 귀환할때의 강행군 때 누적된 피로들이 한번에 터진 모양이다. 도시 안에서는 어느정도 봐주고 있었기에, 딱히 아무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조금 시간이 흐르고, 고연주가 음식을 들고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오빠. 나 술 한잔만.” “…조금만 마셔.” 가벼운 술 한잔도 괜찮다고 여겼기에 나는 유정의 요청을 허락 했다. 유정의 말을 듣자 일행들도 구미가 당기는지 각각 취향에 맞는 술을 추가 했다. 나 또한 건조한 목을 달래고 싶었는지라 주문에 동참한건 당연한 일 이었다. 식사는 가볍게 마칠 수 있었다. 일행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빠르게 눈 앞에 놓인 음식들을 먹었다. 다들 얼른 배를 채우고 위로 올라가 쉬고 싶은 마음이 강한것 같았다. 식사 후 여성 사용자들은 목욕을, 남자 사용자들은 바로 방으로의 직행을 선택 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고연주에게 대금을 지불한 후 간단히 씻는걸 선택 했다. 몸을 씻은 후 방 하나는 놔둔채로 안현과 신상용이 묵은 특실로 들어가자, 코를 고롱고롱 고는 둘의 모습이 보였다. 수련을 한다는 안현은 아예 침까지 질질 흘리며 이불을 걷어차는 만행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혀를 쯧쯧 차고는 조용히 이불을 덮어주고 옆에 남은 침대에 편안히 몸을 뉘였다. * “에휴.”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외치던 나는 결국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창문을 보니 어느새 밖은 어둑해진 상태 였다. 다시 자리에 누워 어떻게든 잠을 자려고 노력 했지만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나는 침대에서 내려오고 말았다. 오랜 세월을 통해 몸에 밴 습관은 무섭다. 고치려고 해도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고 만다. 평소 한두시간만 자다가 오랜만에 푹 자볼려고 했건만 이제는 몸이 알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더욱 문제는, 내 스스로가 이걸 문제라고 여기면서 마음 한 구석은 필요한 과정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침대에 누운지 서너시간쯤 흘렀을까. 평소에 자던것보다 많이 잔편이기는 해도 시간으로 따지면 턱 없는 수면 부족. 이대로 가다가 언제 한번 크게 다칠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능력치는 만능이 아니다. 할 때는 하지만, 쉴 때는 쉬어야 중요할때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옆에 세워둔 검을 잡고 말았다. 몸을 움직이거나 마음을 다스려야 이 싱숭생숭한 속을 달랠 수 있을것 같았다. 시선을 돌리자 또 이불을 걷어 차고 배를 드러낸 안현이 보인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옷을 다시 내려주고 이불은 다시 올려 준다.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부모나 다름 없다는 기분에 입안에 쓴맛이 감돌았다. 곤하게 자는 둘을 훓고 손잡이를 돌려 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문이 열리는 소리가 큰것 같았다. 다시 열었던 방문을 살짝 닫은 후 나는 곧바로 아직 아무도 없는 특실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 내가 있는 층의 특실들은 일행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 이유를 말해보면 다른 사용자들이 현재 특실을 사용할 이유도 없고, 또 특실을 이용할만한 여력을 지닌 사용자들이 현재 뮬에 없다는게 정답일 것이다. 검을 휘두르는게 힘들면 명상이라도 할 생각으로 나는 하나 더 대여한 특실의 문을 열어 젖혔다. 그리고…. “어.” “역시 오셨네요.” “…혼자서 뭐 하시는 건가요.” 어이 없는 얼굴로 입을 열자 정하연이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업무용으로 쓰려던 특실의 방 안에는 평소처럼 말쑥한 인상의 정하연이 들어 앉아 있었다. 따로 음식을 가져왔는지 테이블 위에는 술 한병과 야채를 볶은 안주가 보였다. 내가 잠시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자 정하연은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저는 이런거 하면 안돼나요?” “…그게 문제가 아닌것 같습니다만. 뭐, 안될것은 없지요.” “후훗. 딱딱하게 하지 말고 들어와서 앉으세요. 혼자 마시는것도 참 꼴불견이다 싶었는데 마침 좋을때 오셨어요.” 겉으로 보이는 행동만 봐서는 평소의 정하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일단 나는 순순히 그녀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끌어내 엉덩이를 붙였다. 내가 앉는걸 확인한 이후 그녀는 들고 있던 술을 가볍게 넘겼다. “쫓겨 났어요.” “…….” “…농담 이에요. 그럴 애들이 아니 잖아요. 그러니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정하연의 음성에는 조금의 취가가 섞여 있었다. 쫓겨 났다는 말에 내가 단번에 인상을 찌푸리자 그녀는 빙긋 웃으며 말을 수정 했다. 그리고 푸념 하듯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조금 불편한 분위기는 있네요. 자업자득 이라고 하시면 할 말은 없지만요.” 음. 역시 그랬던가. 알게 모르게 불편한 분위기가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조만간 유정이와 얘기할 필요는 있을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건 그런것들이 아니었다. 처음에 정하연은 분명히 “역시 오셨네요.” 라는 말을 꺼냈다. 그말인즉슨 내가 이 방에 올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것. 그동안 그녀와 함께 지낸 날은 적지만 분명 한결 같은 일과를 보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도 오늘 내가 이곳에 올것을 예측한건 확실히 도박성이 짙은 추측 이었다. 내가 입을 다물고만 있자 정하연은 빈 잔에 술을 가득 채우고는 내게 내밀었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술잔을 받았다. 마시기 전, 나는 담담한 음성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 안오면 어떻게 하실 작정 이었나요.” “뭐. 가능성은 확실히 있다고 생각 했어요. 뭐 안오면 혼자 자면 되니까 편하고 좋죠. 어떤 결과가 나와도 나쁘지 않아요. 그게 바로 홀 플레인 마법사들의 사고방식 이랍니다.” 평소의 청아한 목소리가 아닌 유혹적인 어조의 말들이 들렸다. 계속 잔을 들고만 있자 정하연은 어서 마시라는듯 살짝 고개를 까닥였다. 나는 제 3의 눈으로 잔에 담긴 액체의 성분을 분석한 후 한입에 털어 넣었다. “화끈 하시네요. 그렇게 약한 술은 아닌데….” 또 말을 빙빙 돌리는걸 보며 나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참고로 말씀 드리면. 말 돌리는거 별로 안좋아 합니다.” “…술을 마시니 조금 감상적으로 변한것 같네요. 취해서 이러는거니 이해 해요.” 그녀는 매몰찬 내 말에도 아름다운 미소를 흘릴 뿐 이었다. 그러나 정하연을 응시하는 내 눈빛은 그저 무심하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스스로 술에 취했다고는 말하지만, 거짓말이다. 저 얼굴은 절대로 술에 취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모종의 이유로 연기를 하고 있다는 소리 였다. 먼저 말문을 연건 내가 아닌 그녀였다. “…김수현씨.” “말씀 하세요.” “오늘 밤 시간 있어요…?” 정하연은 나를 한번 부르고는 한쪽 턱을 괴었다. 이윽고 졸린듯한 눈길로 내게 말을 걸었다. 어두운 밤. 둘만 있는 방. 나와 그녀 사이에 있는 탁자 하나. 그녀의 색색이는 숨소리가 들리고, 가끔씩 뿜어내는 달콤한 한숨 소리도 들린다. 한참동안 내 눈동자를 응시하던 그녀는 천천히 고운 입술을 열었다. “시간이 있으면…오늘 밤은 내 얘기를 좀 들어 줄래요?”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제가 어떤 말씀을 드려야 될까요. 좋은 말씀 해주신 분. 격려의 응원을 해주신 분. 기다려 주겠다고 해주신 분. 그저 감사하다는 말 밖에 드리지 못하겠네요. 이번에 두마리 토끼를 잡기로 결심한 만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__) PS. 리리플은 다음회부터 이어 집니다. PS2. 노블 수위좀 알려주실분. ㅜ.ㅠ 0112 / 0933 ---------------------------------------------- 어두운 과거 그녀는 약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나 또한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들은 많았다. 그러나 일단은 그녀의 말을 들어보는게 나을것 같았다. 이런식으로 만나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조금 이른 감도 있지만 어차피 할 얘기라면 빨리 하는것도 괜찮다는 생각도 한몫 했다. 승낙의 표시로 고개를 한번 끄덕이자 그녀는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그전에 하나 묻고 싶은게 있어요. 당신은 평소에 저를 어떻게 보시나요?” 정하연이 하는 질문의 의도는 아직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 내가 <진실의 수정>을 통해 그녀에게 내 일부의 진심을 말해주었듯 지금 그녀 또한 내게 본인의 내면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문득 폐허의 연구소에서 그녀가 <황금 사자> 클랜에 대한 반응을 드러냈을 때가 떠올랐다. “영리하고 실력 좋은 마법사라고 생각 합니다.” “그리구요?” “항상 차분하고 일을 논리대로 풀어가는걸 좋아 합니다. 자신만의 잣대가 있는건 사실이지만 어느정도의 융통성도 있는것 같습니다.” “네. 그리구요?” “…목소리가 맑습니다.” “킥. 그리구요?” 나는 입을 다물고 물끄럼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 했다. 정하연의 얼굴은 전체적으로 보면 웃고 있는것 같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입가에만 가느다란 호선이 걸려 있었고 눈은 깊게 침잠 되어 있었다. 나는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겉으로 보이는 면이 있고, 그리고 자신만이 아는 내면이 따로 있어요.” “겉과 속이 일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니요. 저는 그런 사람은 없다고 믿었어요. 설령 비슷한 사람은 있어도 완전히 똑같은 사람은 없다고 여겼죠. 그런데 당신을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내 믿음이 깨지고 말았어요.” “…….”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물론 나 또한 그녀의 말에 공감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자기 자신한테, 그리고 다른 사람들한테 이토록 실망을 한 걸까? “의심할 건덕지가 하나도 없어요. <진실의 수정>의 효능은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당신의 진심은 조금의 거짓도 없었어요. 세상에 겉으로 보이는 행동과 내면이 일치하는 사람 이라니. 이런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게 너무나 신기 해요.” 잠깐 속이 따끔하긴 했지만 나는 빠르게 가다듬었다. 미안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최소한 형과 한소영에 대한 내 마음이 진심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모든 부끄러움을 견딜 자신이 있었다. 다시 한번 잔 안으로 술을 가득 채운 정하연은 입술을 혀로 살짝 적신 후 말을 이었다. “전에 말씀 드린적 있을거에요. 조금이라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으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간다. 이게 바로 홀 플레인을 살아가는 제 신조에요. 왜 이런 냉냉한 말을 신조로 삼았는지 아세요?” “모릅니다.” “저는 1년전 황금 사자의 클랜원 이었어요.” 그 어떤 준비 과정도, 말 돌림도 없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 그래. 이게 바로 정하연이다. 드디어 본 얘기로 들어간다 싶어 더욱 그녀의 말에 집중 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는듯 싶더니 이내 눈을 뜨고 예의 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놀라지 않으시네요. 좋아요. 어차피 그때 눈치를 채신것 같긴 했어요. 어쨌든 애들이 당신이 황금 사자 클랜을 거절 했다는 사실을 말했을때는 뭐랄까…기분이 독특 했어요.” “그런 미래 없는 클랜에 몸을 두는건 미친짓이죠.” “미래 없는 클랜이라…누가 과연 현재의 황금 사자 클랜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저는 당신의 의견에 공감 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추억을 회상하는 얼굴. 그녀가 다시 말을 이은건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황금 사자 클랜은 전통 있는 클랜이에요. 바바라를 공략할때 당시 8년차 였던 클랜 로드가 사망 했다고 하니 올해 12년차라고 볼 수 있죠. 홀 플레인에서 10년 이상 살아남은 사용자들이 없다는걸 감안한다면 나름대로 이어지는 구성은 갖춘 연합이에요. 그래요. 그때 당시는 어땠을지 모르지만…그들은 변했어요. 바바라를 공략하고 자리를 잡게 되고 힘을 불리기 시작 했을 때부터요. 물론 그 시절에 저는 없었지만 그렇게 감히 평가할 수 있는 자격은 있다고 생각해요.” “…….” “저는 2년전 동생과 함께 홀 플레인에 들어왔어요. 한창 황금 사자 클랜이 잘 나가던 시절이었죠. 그때 대학 졸업반을 다니고 있던 저는 영문도 모르고 홀 플레인에 들어왔어요. 두려웠어요. 통과 의례란 곳에 뚝 떨어진 후 영화에서만 보던 괴물들을 만나고 목숨을 위협 받고,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들이. 그때, 통과 의례에 같이 떨어진 한명의 사용자를 만날 수 있었어요.” 정하연의 말이 너무도 슬프게 느껴졌기에 나는 어떤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며 내 말을 막았다. 그 반응에 나는 한숨을 쉬고는 반쯤 열었던 입을 다물었다. “그 사용자는 정말로 대단했어요.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훤칠하고, 몸도 좋고, 귀티도 흐르구요. 당시 꿈 많은 여대생들의 상상에 부합하는 그런 사람이었죠. 그뿐만이 아니라 당시 같이 떨어진 사람들의 리더가 되어 그 지옥 같은 통과 의례를 탈출할 수 있도록 이끌었어요. 그리고 그 모습에 저는 반할 수 밖에 없었죠. 가진바 실력도 당시에는 대단했고 뭐 하나 부족한게 없는 사람 이었으니까요. 특히 활을 정말 잘 다뤘는데, 쏘기만 하면 백발 백중. 백마만 탔으면 말 그대로 백마탄 왕자님이나 다름 없었어요.” 그렇다면 같은 2년차라는 소리. 그리고 활을 잘 다룬다. 나는 몇명의 사용자들을 떠올렸으나 딱히 그녀의 말과 부합 되는 사용자는 없었다. 황금 사자 클랜의 궁수 사용자들이 한두명도 아니고 명성을 떨친 사용자라면 솔직히 <강>에 오른 선유운 이하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렇게 통과 의례를 탈출하고, 함께 사용자 아카데미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그곳에서도 그는 두각을 드러냈죠. 궁수라는 직업으로 사용자 아카데미의 수석을 차지하는건 쉽지 않은 일 이었으니까요.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와 계속 함께할거라 믿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어요. 그의 발목을 잡는건 싫었으니까요. 그리고 대망의 졸업실 날. 그는 모든 신규 사용자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당당히 황금 사자 클랜의 오퍼를 받았어요. 그리고 동시에 제 꿈도 이루어졌죠.” “꿈 이라면?” “그와 계속 함께 하는거요. 졸업식 날 그는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내게 다가와 제 손을 붙잡고 말했어요. 같이 가고 싶다고. 앞으로도 함께 하고 싶다고. 황금 사자 클랜에 부탁해 한명 더 데려갈 수 있게 해달라고 했나봐요. 당시 제 성적도 썩 나쁘지 않았지만 솔직히 그 클랜에 들어갈 정도는 아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황금 사자 클랜의 스카우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죠. 그래요. 당시 아직 초보에 불과했던 저는 그저 좋다고 따라갔지만 그때 그를 따라갔던게 모든 일의 시발점 이었는지도 몰라요…하.” 잠시 말을 멈춘 정하연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얼른 빈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그리고 이 잔을 마지막으로, 술병의 술은 완전히 비어버렸다. 그녀는 단숨에 내가 따른 술을 마셨다. 목을 좀 축인듯 입술을 혀로 적신 그녀는 이윽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때 통과 의례를 같이 나온 사용자들과 제 동생은 끼지 못했어요. 다른 사용자들은 애초에 사용자 아카데미로 들어온 이후 말도 별로 나누지 못했다고 하더라구요. 하지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아니 오히려 기뻤죠. 나는 열심히 노력해 그와 어울리는 사용자가 되었다. 너희들은 실력이 없으니 그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물론 동생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지연이는 저를 배려 했어요. 나는 마치 공주님이라도 된 기분으로 그와 함께 황금 사자 클랜으로 들어갔어요. 그가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취급해주는게 너무 좋았고, 너무 설레였어요.” 나는 순간 고유 능력인 카리스마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 정도로 냉정히 상황을 파악하는 사용자가 그정도로 홀렸다? 카리스마를 가진 사용자라면…아니. 그때는 그녀가 지금과 같은 이성적인 모습을 갖추지 못했을수도 있고. 나는 머리속으로 마구 떠오르는 생각을 한구석에 묻었다. 그녀의 말이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말이 너무 길었네요. 곧 끝낼게요. 거두절미하고 말씀 드리면 그 클랜에서의 생활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어요. 순수 실력으로 들어온 사용자들의 깔보는 시선과 같은 신규 사용자 출신들은 모두 저를 질투했죠. 당시 그에게 몸을 주고 그 대가로 들어갔다는…심지어 뒤에서 창녀라고 소곤 거리는 말도 들었어요. 위에서도. 그리고 아래에서도. 제 편은 한명도 없었죠.” “그 사용자가 편을 들어주지 않았나요?” 내 물음에 그녀는 이를 까득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이를 가는 소리가 선명히 들릴 정도였다. 한동안 이를, 입술을 짓씹던 그녀는 다시 한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아래로 내린 후 입을 열었다. “어느날 밤 이었어요. 그날도 지친 몸과 마음에 자려고 누웠는데 그날따라 같은 숙소를 사용하는 사용자들이 들어오지 않았어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당시 그런걸 자세히 신경 쓸 여유는 없었죠. 조금 시간이 흐른후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이미 침대에 누운 저는 같은 숙소 사용자라고 여기고 그대로 눈을 감았어요. 그리고 그 순간, 들어온 그 사용자는 제 침대에 올라와 그대로 제 위에 그 육중한 몸을 실었어요.” “설마….” “깜짝 놀란 저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들어온 그 사람은 우악스럽게 제 옷을 찢더군요. 미친듯이 반항 했어요. 원래 그렇게 당할 사람은 아니지만 방심하고 있었던지, 아니면 제 저항이 운 좋게 성공 했던지. 당시 실력 상승을 위해 익히고 있던 질속(疾速) 영창이 정말로 우연찮게 성공 했어요. 불의의 일격을 맞은 범인은 큰 소리와 함께 나가 떨어졌죠. 그때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드니, 절 덮친 범인은 눈 앞에서 온몸에 피를 흘리고 있더군요. 그 사람은 다름아닌 예전 사용자 아카데미로 온 스카우터 였어요. 그는 저를 보자마자 벌컥 화를 냈어요.” “화를 냈다구요?” “네. 오히려 화를 낼 사람은 전데, 어안이 벙벙 했죠. 그때 그가 한 말중 이런 말이 있더라구요. 뭐야 너. 그놈이랑 얘기 다 한거 아니었어?” 그녀의 마지막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한마디로 앞뒤 전후의 사정이 대강 짐작 되는것 같았다. 그녀는 내 반응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너무도 쓰고, 너무도 외로워 보였다. “그래요. 상상하는 그 일이 맞을거에요. 그날 황금 사자 클랜은 발칵 뒤집어졌죠. 저는 그동안 지내면서 잘못한게 손톱만큼도 없었어요. 클랜에서 하라는대로 하고, 시키는대로 묵묵히 했으니까요. 그런 소문들이 나도는걸 제외하고는 흠 잡힐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를 비난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을거에요. 그런데 그 뿐 이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일은 그대로 묻히고 위에서는 조용히 넘기자고 하더라구요. 나보고 탈퇴 당하지 않은걸 다행으로 알라는, 그런 뉘앙스를 잔뜩 풍기면서요. 그리고 그렇게 일이 묻히기로 결정난 날. 통과 의례를 함께 하고 저를 클랜으로 데려온 사용자가 저를 불렀어요.” 2년전부터 그랬다면 지금은 어떨지 알만하군. 확실히 큰 원정을 실패하기는 했지만, 그 다음에 너무 쉽게 무너진 감도 없잖아 있었다. 그 후 2년이 지난 지금이라면 도대체 얼만큼 내부가 썩었는지 보고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것이다. “그래도 유일한 내 편이라고 생각 했기에 저는 위로를 받고 싶었어요. 그리고 슬픈 얼굴로 찾아간 순간 그는 제 얼굴을 보고 차갑게 한마디 내뱉더군요.” “…뭐라고 했는데요.” “병신 같은 년. 똑똑한줄 알았더니 멍청이 였구나.” “네. 그만하세요. 이제 그만 말씀하셔도 됩니다. 전후 사정은 충분히 알았어요.” 이로서 확실해졌다. 여기가 적정선이라고 생각한 나는 손을 들어 정하연의 말을 막았다. 그러나 그녀는 내 배려에도 불구하고 사납게 고개를 흔들었다. 윤기 나는 단발머리가 좌우로 아름답게 찰랑거린다. 계속 얘기 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자 나는 들었던 손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정말 심하게 다투고, 싸웠어요. 저도 그와 함께한 이후로 처음으로 거세게 대들었죠. 종래에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냐고 매달렸지만, 그는 한결 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저를 비난 했어요. 너 때문에 내가 스카우터의 눈 밖에 났다. 그 사람이 얼마나 지금 여기서 강한 힘을 쥐고 있는지 아느냐. 홀 플레인에서 정조를 지키는건 멍청한 짓이다. 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해야 한다. 너야말로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느냐…한동안 설득겸 설교를 늘어 놓던 그는. 주저 앉아 울고 있는 저를 두고 그대로 떠났어요. 그 스카우터는 다시 한번 잘 말해볼테니 너도 그만 현실을 직시하라고 툭 던진게 전부였죠.” “정하연씨.” “거의 다 끝났어요. 조금만, 조금만 더 들어요. 그 일이 있은 이후로 방으로 어떻게 돌아갔는지는 기억도 잘 안나요. 3일 밤낮을 울고 흐느끼면서 지냈죠. 하지만 저는 그때 아직도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가 말하는 현실이 아니라, 제가 보는 현실. 그 남자를 믿고 싶은 마음이 한구석에 남아 있었던 거죠. 결국 오랜시간공안 고민한 저는 그 남자의 말을 인정하기로 했어요. 확실히 주변에 그렇게 살아가는 여성 사용자들도 어느정도 있는 편 이었고, 홀 플레인은 현대 사회에 비해서 정조 관념이 희박 하니까요. 저는 멋대로 상상 했어요. 다 나를 위해서 그러는거다, 나중에 자리가 잡히면 다시 나를 받아 들일 수 있을것이다. 그렇게 헛된 망상에 불과한 자기 합리화로 마음을 가다듬고 몸을 일으켰죠.” “멍청하군요.” 내 비난에 그녀는 곧바고 수긍 했다. “네. 인정해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멍청 했어요. 자랑은 아니지만 저는 그때까지 단 한번도 남자를 받아 들인적이 없었어요. 그런만큼 처음에 대한 환상 같은게 있었죠.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하고 싶다는, 그런거요. 그래서 저는 그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단장하고 최대한 예쁘게 꾸몄어요. 그리고 밤이 되기를 기다리고 몰래 방에서 나와 그의 방을 찾아갔어요. 최소한 처음을 그에게 준다면 앞으로 그런 생활을 하면서 얻을 고통스러움에 한줄기 위안을 삼을 수 있다고 생각 한거죠. 그렇게 저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가 있는 숙소의 문 앞으로 갔어요. 그리고 문고리에 손을 올렸죠. 그런데…” 정하연은 그때의 기억을 회상하자 괴로운듯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손도 떨리고, 눈망울도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까닥하면 그대로 눈물이라도 흘릴 기세 였지만 꾹 참고 있는것 같았다. 한두번 큰 심호흡으로 속을 다듬던 그녀는 이내 목이 메이는 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문 앞에 서는 순간 방 안에서 미약한 소리가 들렸어요. 그래요. 그 소리는 다름아닌 남녀의 신음 소리 였어요. 문고리에 손을 얹은 저는 덜덜 떨리는 손을 붙잡고 한동한 멍하니 있었어요.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듯한 기분으로 문 안을 살짝 열었죠. 그리고 그 방의 안에는…예상대로 그와 한명의 여성 사용자가 서로의 몸을 탐하고 있더군요. 그리고 문을 연 그 순간.” 그순간 말을 멈춘 정하연의 눈동자에 시퍼런 불꽃이 타오르는듯한 착각이 들었다. 너무도 뚜렷히 타오르는 분노에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누워서 그 남자를 받고 있던 여성 사용자와 눈이 마주쳤어요.”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네. 오늘 깜짝 놀라신 분들이 많으실것 같네요. :) 2월 28일에 모임에 참가했는데 2월달에 28일 포함 총 3번 이상 참가한 사람은 굳이 3월 1일 ~ 2일 1박 2일 코스에 참가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네요. 참가하면 좋지만, 3번 이상 참가한 사람들이 모두 우수수 불참하길래 저도 살짝 편승 했습니다. 그리고 몸도 마침 안좋기도 했고 괜히 가서 스트레스 받기 보다는 집에서 쉬면서 글이나 쓰자라는 생각이 들어라구요. 덕분에 오늘 내일은 조금 여유가 있을것 같아요. 여유가 있으면 연참한다는 약속을 지킨만큼,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 PS. 하연이 너무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나름 사연 있는 아이 랍니다. ㅜ.ㅠ 『 리리플 』 1. 휘을 : 1등 축하 드립니다. 2연속 1등 이시군요! 새로운 강자의 출현인가요?! 하하하. 과연 어떤 과정이 일어나길래 수현이 눈을 번뜩인 걸까요? 2. 울리는영혼 : 괜찮습니다! 코멘트를 달으면 아픈 손가락도 나아요! 정말 입니다!(퍽퍽.) 3. 아미슈 : <진실의 수정> : 나…나는 그저 쓰임을 당했을 뿐인데…. ㅜ.ㅠ 4. GradeRown : 네. 그리고 어차피 이런 설정이었고 무조건 유혹하기 보다는 나름의 이유가 다음회에 나올 예정 입니다. 하하하. 여관 주인은 <강>에 오른 한명의 사용자로 1회차에 주인공 세력과 반목 했던 세력의 거물 이었습니다. 5. 당룡 : 너무 노골적이지 않게, 그러나 충분히 야하게 쓸 생각 입니다. 이 부분들은 처음이라 제가 잘 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ㅜ.ㅠ 6. 달을쫓는아이 : 아. 애매한 기준을 가지고 있군요. 고민이네요. 엉엉. 7. 마라마느 : 외치세요! 에로유진! EE…농담입니다. OTL 8. 9597 : 작가가 소환 상태를 점검 합니다. 촉매제 <여유>가 충분 합니다. 9597님의 연참 소환 스킬에 응합니다. 슈우웅~! 9. 이드리얀 : ……. 순간 멍하니 코멘트를 쳐다볼 뿐 이었습니다. ㅜ.ㅠ 10. 괴물물리치자 : 하하. 아마 챕터까지 스토리 진행은 힘들것 같아요. 그래도 고자 누명을 벗는건 꼭 필요…아, 아닙니다. 흠흠.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특히 오늘은 더 읽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13 / 0933 ---------------------------------------------- 어두운 과거 “설마 여동생….” “아니에요.” 정하연은 한마디 말로 내 예상을 일축 했다. 지금도 충분히 막장 드라마지만, 만약 그 여성 사용자가 정지연 이었다면 그건 도를 넘어서는 일 이었다. 다행히 정하연은 단호한 대답으로 내 대답을 부정 했다. “물론 그 아이도 평소 행실이 좋다고 하긴 어렵지만, 저한테는 소중한 동생이에요. 아무튼…그 여성 사용자는 우리들보다 몇개월 일찍 들어온 마법사 사용자 였어요. 이름은 밝히지 않을게요. 다만 그 여성 사용자는 그때 간부 교육을 받을 만큼 대단히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어요. 눈을 마주치고 처음에는 당황하는듯 싶었지만, 이내 얼어 있는 저를 보고 미소를 짓더라구요. 그리고 한창 그짓에 빠진 남자에게 입을 열었죠.” 설마…유빈인가? 성유빈.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는 지금 한창 박현우를 따라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남자가 박현우라고 보기에는 여러 정황상 맞지 않는 점들이 있었다. 잠시 동안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나는 일단 얘기에 더 집중하기로 결정 했다. “아직도 당시 둘이 나눈 대화를 선명히 기억해요. 있는 그대로 들려 드릴게요. 시작은 여자 였어요. 너 따라 다니는 여자애 한명 있지 않아? 응? 아, 걔. 걔는 갑자기 왜? 아니…너랑 좀 특별해 보이던데. 특별은 무슨. 아닌것 같은데. 걔가 너 엄청 좋아하는거 같은데 나랑 이런짓 해도 돼? 아. 괜찮아. 솔직히 제법 미인이긴 한데 내 취향은 아니거든. 난 너같이 정열적인 여자가 훨씬 더 좋아.” 정말로 정하연은 그날의 대사를 줄줄 읊고 있었다. 최소 1년 이상은 지났을 텐데 여지껏 기억하고 있는걸 보면 어지간히도 충격을 먹었던 모양 이다. 그 대화를 들은 후 어이없는 표정을 짓자 그녀는 서글픈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그대로 말을 이었다. “남자의 말에 여자는 기분 좋은지 깔깔 웃으며 말했죠. 그래? 그래도 걔 너무 불쌍하다. 괜찮다고. 뭐 조금 아까운건 있는데…어차피 걔는 뇌물을 목적으로 데려온거야. 뇌물? 응. 황금 사자 클랜 스카우터가 신규 사용자 킬러라는 소문이 있더라고. 그것도 똑똑하고 예쁜, 어린 여자애들을 좋아 한다고 하잖아. 하연이면 제법 실력도 괜찮고 얼굴도 반반하니 딱 마음에 들어 할거라고 생각 했지. 그러면 그 사람이 날 잘 봐줄것 같기도 하고…그런데 그년이 일을 망쳤어. 빌어먹을 아. 아파. 살살해 좀. 미안. 그년 생각 하니까 또 너무 열이 받아서. 아무튼 곧 스카우터 한테 스스로 몸을 바칠테니까 신경 끄자고. 귀찮…아.” 나는 그동안의 대화를 들으며 정하연이라는 여성 사용자한테 소름이 돋는걸 느꼈다. 처음 그녀를 봤을때 느꼈던 수양의 깊이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는 남자라서 그녀의 마음을 잘 모르지만, 여자의 입장에서는 그게 얼마나 가슴이 찢기는 일일지 감히 상상도 가지 않았다. 더욱 무서운건 그녀는 방금 대화를 읊으면서 한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는것. 그녀의 사정을 들은 나는 깊은 한숨이 나오는걸 막을 수 없었다. “그래요. 그에게 있어 저는 고작 출세를 위한 도구에 불과 했던 거에요. 이 지옥 같은 홀 플레인에 떨어졌지만 그래도 그와 함께라면 어디라든 괜찮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그 꿈은 혼자만의 착각 이었어요.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혼자만을 생각하고 나를 이용하려고 했어요.” “그럼 그 뒤로는 어떻게….” “그길로 인사 담당자를 찾아 갔어요. 곤히 자고 있는걸 억지로 깨웠지요. 그리고 바로 그만둔다고 말 했어요. 더 놀라운건, 그는 내 얘기를 듣고 일언반구도 없이 허락 했어요. 어때요. 우습죠?” 그렇겠지. 그대로 안고 있기에는 불안하고, 쫓아내기에는 명분이 없고. 하나도 아쉬울것 없는 클랜이 당사자가 스스로 걸어 나간다는데 말릴리 없었다. 이윽고 모든 말을 마쳤는지 그녀는 크게 숨을 몰아 쉬고는 의자 뒤로 등을 묻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품 속에서 연초를 하나 꺼냈다. 연초를 입에 물자, 끝에서 저절로 미약한 불이 피어 올랐다. 잠시 동안 나와 정하연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탁자를 놔두고 있는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이윽고 한대를 모두 태울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내가 연초를 터는걸 물끄러미 보던 정하연은 홀가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재미도 없고 불쾌한 얘기를 오랫동안 들어 주셨네요.” “별 말씀을. 당신을 이해 합니다.” “입에 발린 말은 싫어요. 어떤걸 이해 하신다는 건가요?” “현재 최고의 클랜과 개인, 그것도 여성이라는 불리한 대립. 약자일 수 밖에 없는 입장에서 오랫동안 참고 견뎌온 과정. 개인의 입장에서는 부당하다 느꼈을 법한 클랜의 처분. 참고 참았으나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남자의 행동에 결국 터져나온 울분. 당신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동정 합니다.” 하나씩 짚어내는 내 말에 그녀는 슬픈 미소를 흘렸다. 그리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러면 이제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갈 때가 되었군요.” 양손에 깍지를 끼고 말을 잇는 그녀를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 반응에 그녀의 눈동자는 동그랗게 변했다. “밤이 너무 늦었습니다. 오늘 너무 많은걸 말씀 하셨구요. 그러니 그만 들어….” “밤은 깊고, 시간은 많아요.” “나머지는 다음에….” “아니요. 저는 오늘 꼭 매듭을 짓고 싶어요.” 정하연은 푸르스름한 불길이 피어오르는 눈으로 나를 응시 했다. 어느새 그녀는 탁자를 짚고 몸을 일으키려던 내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손등 위로 느껴지는 그녀의 손은 차갑고, 시원했다.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는 그녀의 의지를 확인한 후 나는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떤 말을 더 하고 싶은 겁니까.” “제게 말씀 하셨던, 대가를 치르고 빚을 갚는 이야기에요.” 나는 그녀를 묵묵히 바라 보았다. 그녀의 사정은 알았다. 그러나 이것과 그것은 별개로 치부할 일 이었다. 감성에 호소하는 거라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고 말하려 했지만, 그녀의 눈은 그런 의도를 담고 있지 않았다. 나는 자세를 다시 고쳐 잡았다. 이제부터는 폐허의 연구소 이후로 2차전의 시작 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순서가 바뀌어 이번에는 내가 공의 입장에 있었다. “그럼 그 대가를, 빚을 어떤식으로 지불 하실건가요.” 조용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받아 친다. 내 반응에 정하연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고개를 얌전히 흔들었다. “<진실의 수정>을 이용해 당신을 몰아 붙인건 미안해요. 하지만 그날 이후로 저는 상대를 특히 남성을 불신하는 버릇이 생겼어요. 그래서 꼭 확인하고 싶었던 거에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랬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용자 정하연의 행동을 정당화 시킬수는 없습니다. 공과 사는 구별하시기를 바랍니다.” “알아요. 그런데 저는 도저히 모르겠어요. 사용자 김수현은 저한테 뭘 원하시는 거죠?” “그건 본인이 고민해야 되는 문제 입니다. 제가 정하고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단 한마디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의 입장을 동정하지만 봐줄수는 없다. 혹자가 보면 너무 빡빡하다고 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은 홀 플레인. 내 생명과 직결된 정보를 알려준 이상 나는 그녀를 죽여도 되는 최소 명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건 그녀 또한 알고 있는 사실 이었다. 단호한 내 음성에 그녀는 피로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허의 연구소에서 돌아 오면서 많은 고민을 했어요. 하지만…결국 내린 결론은 아무것도 지불할 수 없다에요.” “…자세히 말씀해 보시죠.” “모르는척 하는 건가요?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건가요? 도대체 지금의 제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게 어떤게 있나요?” “…….” “사용자 정보? 금화? 능력? 무료 봉사? 노예 계약서라도 작성 할까요? 당신이 어떤걸 원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니, 실상 제가 드릴 수 있는게 정말로 없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습관적으로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든 생각은…그녀가 마음에 든다 였다. 내가 왜 이렇게 그녀에게 호감이 갔는지 드디어 그 이유를 알것만 같았다. 그녀는, 선을 넘지 않는다. 즉 주제 파악을 잘 한다는 소리 였다. 물론 연구소에서 그 선을 넘은적이 딱 한번 있었다. 그러나 그 행동은 그녀가 선을 넘으면서도 이루고픈, 확인하고픈 목적이 있다는 반증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것을 끌어낼 차례 였다. “방금전 열거한 사항들중 일부는 말씀이 조금 과하신것 같네요.” “훗. 과하다구요? 제 사용자 정보는 당신만큼 가치가 없어요. 금화는 있지도 않구요. 능력요. 그래요. 제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저 실력 좋기는 해요. 그런데 당신만큼은 아니에요. 무료봉사도 똑같아요. 노예 계약서. 계약서는 사용자간에 성립하기에는 너무 제한 되는 사항들이 많죠. 말은 똑바로 할게요. 제가 이대로 당신의 일행에 참가한다고 해도, 그 행동은 절대로 대가를 지불할 수단이 될 수 없어요. 당신에게 있어 저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용자니까요.” “왜 그렇게 자신을 비하하고, 깍아 내리는 겁니까.” “이게 현실이고, 사실 이에요. 그리고….” 한동안 빠르게 말을 내뱉던 정하연은 잠시 숨을 멈췄다. 나와 그녀의 시선이 서로 허공에서 얽힌다. 이윽고 그녀는 처연한 얼굴로 숨을 토해내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저한테는 당신이 필요하니 까요.” 드디어 내면을 조금 드러내는 그녀를 보며 나는 아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대가가 꼭 그런것만 될수는 없습니다. 저는 당신의 진정한 신뢰와 믿음을 원했습니다.” “저를 끝까지 뻔뻔한 여자로 만드려고 하시는군요. 저는 그때를 아직 잊을 수 없어요. 당신이 소중한 이들을 지키겠다고 말했고, <진실의 수정>이 당신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 했을때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죠. 저는 당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요. 그럼 지금 질문을 바꿀게요. 애들은 당신부터 초창기부터 함께 해왔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도, 지금의 제가 당신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방법이 어떤게 있을까요?” “신뢰나 믿음은 그렇게 한순간에 만들 수 있는게 아닙니다. 너무 급한감이 있고, 그걸 모르신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도대체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속으로 그녀가 갑자기 이런 행동을 보이는 이유를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녀는 그때의 일을 트라우마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는 그녀의 트라우마를 뒤흔들었고, 그녀는 지금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두렵지만 잡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이 지금 그녀를 조급하게 만들고 있었다. “당신한테 있어서 사용자 정하연이란 존재는 가치가 없어요. 그러면 결국 남은건 하나밖에 없어요.” “사용자 정하연.” 내 말에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 했다. “사용자가 아닌 여자로서의 정하연. 이게 제가 당신에게 드릴 수 있는 유일하게 남은 가치에요.” 그녀의 말을 들은 후 나는 사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 했다. 그녀는 한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 눈동자로 내 시선을 넘기고 있었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고,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물론 저는 사용자 이전에 남자이고, 여성을 좋아 합니다. 기본적인 성욕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뜸을 들인후 실망 했다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아무 여자와 몸을 섞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 뜻으로 말한게 아니….” 그런 뜻으로 말한게 아니라는건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도 내가 원하는 해답을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고작 이정도라니 실망이군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제가…!” 문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내 발길을 그녀의 낮은 외침이 붙잡았다. “…아무 남자하고나 몸을 섞는, 그런 여자로 생각 하시는 건가요?” 그녀의 울음 섞인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고 몸을 돌렸다. “당신의 말은 확실히 그런 오해의 소지가 있었습니다. 당신은 그런 여자가 아니라는건 알고 있지만, 솔직히 갑자기 이러시는건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내 정론에 그녀는 갈등어린 얼굴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러나 그 갈등은 길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 흐르고 이내 그녀의 입이 천천히 열리는걸 볼 수 있었다. “유정이는 제가 당신을 잘 모른다고 했지만, 저는 당신을 비교적 잘 알고 있어요. 그동안 애들의 수련을 도와주면서 항상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당신은 그와 너무나 비슷해요. 통과 의례에서 리더가 돼 사람들을 이끈것도. 애들의 신뢰를 받는것도.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1등한 것도. 그리고 황금 사자 클랜의 오퍼를 받은것도. 하지만 그들의 오퍼를 거절하고 애들과 함께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와 당신의 길은 달라졌어요.” “그럼 저를 그의 대용으로 생각하시는 건가요.” 내가 혹시나 하는 부분을 꼬집자, 정하연은 다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다만…저는 이제 속고, 속이는 홀 플레인에 지쳤어요. 또한 저는 남을 속일 수 없었어요. 하려고 하면 할 수 있겠지만, 제가 가장 경멸하는 일을 스스로 하기 싫었거든요. 그래서 그때 결심 했어요. 남을 속이지 않고 나 또한 속임을 당하지 않겠다고.” 이래서 그녀의 성향이 그렇게 되어 있던 거군. 하나의 의문을 해결한 나는 다시 발길을 돌려 그녀의 옆에 섰다. 그러자 그녀는 내 가슴에 자신의 이마를 가볍게 대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사용자 김수현은 달라요. 홀 플레인의 사용자들과 다른 무언가가 있어요. 어쩌면 저도 이제 한계일지도 몰라요. <진실의 수정>이후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수현씨를 잡고 옆에 있어야 한다고. 이 사용자야 말로 홀 플레인에서 나에게 온 마지막 기회라고. 분명 저의 신뢰와 믿음을 원하신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내 가슴에 이마를 대고 있던 하연은 그대로 살짝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나 또한 그녀의 시선에 화답해 시선을 더욱 밑으로 내렸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내렸다. 그녀는 내 손길을 음미하듯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솔직히 아직도 남은 의문은 있어요. 그토록 강대한 힘을 가졌으면 지연이를 죽게 놔두지 않았을 텐데. 아니, 않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저는 당신에게 묻지 않겠어요. 이대로 그만 가슴속에 묻어 두겠어요.” “그 부분은 충분히 대답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전에 애들한테 대충 들은 얘기도 있고, 제가 짐작하는 부분도 있어요. 그리고 그 제가 눈으로 확인한 부분도 있구요. 당신에게 듣는것만 못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저는 속는데 지쳤고, 그에 상처 받는것도 두려워요. 하지만 저도 한명의 여자에요. 서로 믿고 의지하던 동생을 잃고난 후 흔들리는 제 자신을 느끼고 있었어요.” “그럼 제게 기대는걸로 흔들리는 자신을 가다듬을 수 있다는 건가요.” 내 물음에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을 확인한 나는 강제로 그녀의 얼굴을 다시 내 품 안으로 끌어 당겼고 그녀는 순순히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그순간 나는 입가에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미안하지만 그녀는 또 하나의 착각을 하고 말았다. 솔직히 정하연이 이렇게 나오리란건 나도 예상할 수 없었다. 그녀의 속사정을 듣는건 나도 이번이 처음 이었다. 그러나, 나쁘지 않다. 현재의 나에게 애매한 믿음이나 신뢰의 가능성은 필요하지 않다. 지금 정하연을 안으면, 나와 그녀의 관계는 확실하게 한층 진일보 할 수 있을 것이다. 양심에 찔리는건 없다. 그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다시 돌아오는걸 선택하면서 그런건 모두 버리고 왔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라면 나는 어떤 일이든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다. 가슴에 무언가 근질거리는걸 느끼며, 나는 심호흡을 한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것도 마법사로서의 사고 방식 같군요.” “…그러네요. 저는 당신에게 믿음을 줄 수 있고, 그와 동시에 나 자신의 안정을 찾을 수 있으니까요. 저에게는 안주하고 기댈곳이 필요해요. 오늘 말한 모든게 현재의 제가 당신에게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신뢰에요. 그러니….” 그녀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어 살며시 내 몸을 타고 올랐다. 정하연이 뻗은 양팔이 내 목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그녀는 그대로 내게 몸을 안기며 입을 열었다. “오늘 밤. 수현씨가 제 신뢰에 화답을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원래는 말이죠. “나는 그대로 문을 열고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정하연이 우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러면 몰매를 맞을것 같아서…. ㅜ.ㅠ 아무튼 111회, 112회로 왜 하연이 그런 행동을 했는지 독자분들께서 공감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번회는…조금의 <사실 경험>도 섞여 있다고 고백 합니다. 어디까지나 조금 이지만요. :) 『 리리플 』 1. 로로로로랍 : 1등 축하 드립니다. :) 닉네임을 보고 순간 롤리팝이 떠올랐네요. 하하하. 2. 괴물물리치자 41회 : 네. 정답 입니다. 다만 기본 마력이 안현보다 훨씬 높아 시크릿 클래스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승율은 그렇게 엄청 높지는 않습니다. 48회 : 랭크를 보면 아시겠지만, 감히 비교조차도 할 수 없는 상위 능력 입니다. 유혹의 눈동자는 제 3의 눈동자의 발 끝도 따라오지 못해요. :) 83회 : 기본 마법을 벗어난, 말 그대로 심화 응용 마법 입니다. 리버스, 오버랩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84회 : 많은 부분을 스킵해서 그렇습니다. 85회를 보시면 이해가 가실듯 합니다. 3. ghdtjdrud : 나름 불쌍한 아이 입니다. 겉으로는 강해도, 속으로는 그때의 아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 아이에요. ㅜ.ㅠ 4. GradeRown : 거의 맞는 말씀 이십니다. 하하하. 그래서 권력이란게 참 무섭죠. 사람을 변하게 만드니까요. 5. 이드리얀 : 에. 앞에 (고)자는 빼주셔도 됩니다. 하하하. 제발요. 제발 빼주세요. ㅜ.ㅠ 6. 블라미 : 흐흐흐. 그것도 좋은 방법 입니다. 그놈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기대해 주세요. 7. 울리는영혼 : NTR은 저도 별로 안좋아 합니다. 적어도 소설에서 주인공 주변의 여자들의 그런 일을 당하는 경우는 없을 겁니다. 8. 사람인생 : 하하. 고맙습니다. 그런데 운현은 누구인지요. ?ㅇ? 9. 꿈꾸는화원 : 헤헤. 고맙습니다. >3< 10. 자색 : 아하. 그렇군요. 일단 기본 도시 설정은 전부 짜여 있습니다. 하하하. 200회 내에는 확실히 올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도시들은 조만간 올라갈지도 모르겠네요.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특히 오늘은 더 읽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14 / 0933 ---------------------------------------------- 어두운 과거 (후기를 읽어 주세요.) 홀 플레인에서 여성의 몸이란 생존의 수단이 될 수 있다. 또는 동침을 통한 암살을 노리는 무기도 될 수 있다. 그런만큼 정조에 대한 관념이 그렇게 딱딱한 곳은 아니었다. 살인, 사망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곳인 만큼 성(Sex)에 관해서는 오히려 개방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방적일 뿐이지 막장은 아니다. 범죄나 강제로 하는건 문제가 된다. 아직 군기가 엄정한 북대륙인 만큼 살인, 강도, 강간이 난무하는 서대륙과 비슷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서로의 마음만 맞는다면 성관계를 가지는건 홀 플레인에서 절대로 드문 일이 아니었다. 아직 현대의 향기를 잊지 못한 0년차 사용자들도 해가 갈수록 홀 플레인의 그런 풍조에 익숙해진다. 정하연은 배신 당했고, 버림 받았다. 아니, 버림 받았다고 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을까. 애초에 그 남자는 그녀를 거둘 생각이 없었던것 같았다. 그녀는 그때의 아픔을 마음 한 구석에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 이후 1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때의 트라우마를 안고 활동 했다. 단순히 남자를 불신하는걸 떠나서 그녀는 사람의 내면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홀 플레인에서 그러한 트라우마를 안고 활동하는건 굉장한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그 이후로 그녀가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불안하고 괴로운 나날들 이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괴로움이 누적 되며 그녀는 서서히 한계에 몰리고 있었다. 그동안은 동생과 함께 하면서 어떻게든 견뎠는지 모르지만, 그녀를 잃은 후 마음속을 채운 상실감이 그동안 억눌러왔던 트라우마를 폭발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현재 자신의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위험하다는 것도, 자신의 마음이 무너지고 있다는것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때마침 나라는 사용자를 만나게 되었다. 예전의 첫사랑과 나는 초반의 행보가 비슷했고 그 이후 나는 그 남자와는 다른 내 행보를 보였다. 예전의 그 남자한테서 바랬던, 그리고 원했던 행동들을 그대로 실행 했다. 그녀는 애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와 그러한 말들은 들은 후 잊고 있었던 감정을 다시 되살렸다. 아마도 <진실의 수정> 이후로 결심을 했을 것이다. 그녀는 나를 통해 자신의 트라우마를 벗어 버리고 싶어 한다. 그리고 기댈 곳을 필요로 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녀가 이렇게 된 데는 내 탓도 일부 있었다. 그녀의 동생을 죽인 사용자는 바로 나였으니까. 그러나 미안한 마음은 없다. 지금 그녀가 이 마음을 유지한다면 앞으로 잘해주면 되는 일 이라고 스스로 납득하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 하면서도 헛웃음이 나왔다. 나 또한 정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 10년 동안 홀 플레인을 거치며 감정이 고장나 버렸다. 하긴 이 지옥 같은 곳에서 10년이 넘도록 정상을 유지하는게 더 이상하긴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하연을 침대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녀를 거의 안은 상태 그대로 침대에 올려 놓았다. 그녀는 순순히 내게 몸을 맡긴채 나를 올려다 본다. 그 시선에 이끌려 나 또한 곧바로 침대에 누운 그녀의 옆으로 몸을 실었다. 그녀의 진심을 확인한 이상 나는 그녀를 받아 들일 필요가 있었다. 나는 스스로 원한다는 여자를 거절할 정도의 위인은 되지 못한다. 후에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 올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녀를 품는게 더 나은 선택 같았다. 나는 그녀의 기분을 풀어줄 목적으로 가볍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같은 침대에 있으니 이상하네요.” “앞으로 더 이상할텐데 벌써부터 이러시면 곤란해요.” 한 방 먹었다. 역시나 정하연은 정하연 이었다. 괜한 말을 꺼냈다가 본전도 못찾은 나는 그저 머리만 긁적이다가 그대로 그녀의 가슴 부근에 머리를 기대었다. 이윽고 그녀의 차가운 손길이 내 머리를 상냥하게 감싸는걸 느꼈다. 나는 더욱 그녀의 가슴으로 얼굴을 밀착했다. 분명 로브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선명한 감촉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 안에서 느껴지는 감촉은 살짝 걸리는 천조각 뿐. 그렇다면 애초에 두꺼운 로브 하나와 안에 속옷만 입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잠시 동안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나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도중에 그만두고 싶으면 언제든지 신호를 보내요. 당장 그만둘게요.” “그럴 일은 없어요. 혹시라도 제가 도중에 어떤 신호를 보내더라도 그냥 계속 해주세요.” 그녀의 당돌한 말에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다시 그녀의 옆으로 올라와 그녀와 눈동자를 맞춘다. 그녀는 내 얼굴을 보며 입을 열었다. “부탁이 있어요.” “말씀 하세요.” “앞으로 저를 부를때, 성은 빼고 이름으로 불러 줄래요?”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하연씨.” “씨도 빼주세요. 이름만.” “…하연.” “좋아요. 그럼….” 내 대답에 그녀는 안도한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나는 천천히 손을 그녀의 로브 위로 올렸다. 하연의 허락을 얻은 만큼 나는 차근차근 로브의 앞섶을 풀었다. 대충 매듭을 풀고, 맨 끝에 비죽 튀어나온 끈을 잡아 당긴다. 그러자 스륵, 그녀의 로브 앞면이 풀어지는걸 볼 수 있었다. 나는 로브 안으로 살짝 비치는 그녀의 내부에 시선을 집중했다. 제일 먼저, 속옷에 둘러 쌓인 보기 좋게 부풀어 오른 가슴의 계곡이 보였다. 아래로 시선을 내리면 가느다란 허리, 아름다운 둔부, 그리고 쭉 뻗은 각선미를 자랑하는 다리도 보였다. 아름답다. 마치 한마리 학같은 고귀한 자태를 그녀는 전신에서 피어내고 있었다. 다시 시선을 위로 올린다. 로브 안 남성을 유혹하는 그녀의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잠시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 만졌다. 그녀 또한 손을 내밀어 내 얼굴을 마주 어루 만진다. 그녀의 찰랑이는 단발머리가 베개 위로 아름답게 흐트러진걸 보며, 나는 남은 손으로 단번에 로브를 활짝 개방 했다. 어느새 밖은 완연한 어둠이 내려 앉아 있었다. 어둑한 방 안에 오직 들어오는 빛은 창문을 통해 비치는 한줄기 달빛뿐. 그 빛에 비치는 자신의 나신이 부끄러운지 정하연은 내게서 살짝 시선을 돌렸다. 그 너무도 신선한 모습에, 나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걸었다. “하연. 힘들면 그만해도 돼요.” “힘들지 않아요. 그저…조금 창피해요….” 처음이라서 그런지 그녀는 어지간히 부끄러움을 타고 있었다. 자꾸만 다리를 오므리고 양 팔로 가슴을 가리며 내 시선을 회피 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빙긋 웃으며 그녀의 행동을 모두 받아주고, 기다렸다. 그녀는 지금이 처음이다. 재촉하지 않는다. 다급함에 서둘로 억지로 하지 않는다. 나는 그녀가 현재의 상황을 받아 들일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기다렸다. 지루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처음인 만큼 나쁜 기억보다는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나와 그녀의 관계는 간단하다. 그녀는 나와 함께 행동하고, 나는 그런 그녀를 보호하고 보듬는다. 하연은 나를 만나기 전까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녀를 내 목적을 위해 이용할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내게 기대고 나를 안식처로 원하는 이상 나는 그 누구보다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줄 자신은 있었다. 나는 차분하게 그녀를 기다렸다. 그런 내 기색을 눈치 챘는지 가슴을 싸맸던 그녀의 팔과 오므렸던 다리가 조금씩 느슨하게 풀리는걸 볼 수 있었다. 하연은 가만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나를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금 그 표정….” “네?” “방금 그 표정 괜찮았어요. 앞으로 자주 보여 줘요.” 뭔가 뜻모를 소리에 고개를 기울였지만 나는 다시 손을 움직였다. 반쯤 풀린 로브를 더욱 풀어 내린다. 가슴을 감싼 속옷 사이로 봉긋하게 솟아오른 깊은 골이 보였다. 그리고 살며시 모습을 드러낸 하얀 젖무덤. 나는 그 위로 손을 얹고는 조금씩 속옷을 아래로 끌어 내렸다. 툭. 툭. 투둑. “아…!” 내려가는 속옷에 끌려 아래 방향으로 압박 당하던 그녀의 가슴은, 내가 완전히 벗겨 내자 이내 미약한 출렁임과 함께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아름답게 솟아오른 두개의 흰 언덕. 나는 무언가에 홀린듯한 기분으로 그녀의 가슴에 시선을 모았다.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는 그녀의 가슴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요함과 요염함이 동시에 감돌고 있었다. “제발…그렇게 빤히 보지 말아요….” “예쁘네요. 너무 아름다워요.” 하연의 모기만한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곧바로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하지만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녀는 내 칭찬에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더니 누운 상태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예전에 불의의 사고(?)로 한번 느낀적 있지만 그녀의 가슴은 겉으로 보는것보다 훨씬 크고, 훨씬 풍만 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것도 아니고, 아주 작은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좋은 크기와 건드리면 녹을듯한 부드러움을 지니고 있었다. “나이가 몇 살 이에요?” 내가 그녀의 가슴만 보자 하연이 내게 말을 걸었다. 말 없는 침묵의 시간이 불편 했던 걸까.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 했다. “24살 이에요.” “이런. 나보다 2살 어리네요.” 알고 있다. 하연의 나이는 26살.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한층 무르익는 시절. 나는 그 관능미 넘치는 가슴에 살며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하연은 작게 웃었다. “…풉. 가슴이 그렇게 좋아요?” “네, 네?” “그렇잖아요. 아까부터 정신 없이 가슴만 보고 있고. 평소 답지 않아요. 이제야 조금 연하다운 맛이 있네요.” 그녀의 반응에 나는 속으로 웃었다. 그녀는 알까. 내가 일부러 이런 모습을 보였다는 것을. 동생이 있었고, 무릎 베개 또는 가슴에 뭍은 내 머리를 감싸 안는 행동들을 보면 그녀는 내면에 모성애가 있는것 같았다. 나는 나름대로 최대한 그녀를 배려하고 있었다. 그 탓인지 그녀는 바짝 긴장 했던 처음과는 달리 지금은 한결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그녀는 허공에서 멈춘 내 손을 잡아 그대로 자신의 가슴으로 이끌어 주었다. 곧이어 내 손바닥에 튀어 나온 그녀의 돌기가 닿고, 손가락은 아래의 언덕을 살짝 움켜 쥐었다. 보드라운 감촉이 손바닥 전체를 휘감는 느낌과 함께 그녀의 몸이 움찔 떨리는걸 느꼈다. “……!” 그녀는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아프다는 비명도, 신음도 내지 않는다. 혹시라도 내게 누가 될까봐 그저 참고 인내한다. 그런 그녀의 호의를 받아 들여 나는 왼손도 그녀의 남은 가슴 위로 올려 놓았다. 조금만 세게 쥐어도 당장 손 안에서 녹아 없어질 듯한 부드러움. 나는 내 손이 움직이는대로 모형을 변하는 가슴의 말랑함을 음미 했다. 언덕의 정상에 볼록이 솟아오른 돌기를 집고, 그 상태에서 한두번 손가락을 움직인다. 드디어 그녀는 달뜬 신음성을 흘리며 살짝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자신의 입을 다물었고 움직임도 잠잠 해졌다. 촉촉한 피부의 촉감이 한차의 여과 없이 적나라하게 손 안에서 펼쳐진다. 그녀의 반응과 손으로 전달 되는 감촉이 너무도 황홀해, 나는 손놀림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한동안 그녀의 가슴을 실컷 만진 후 손을 떼자, 그녀의 하얗던 젖무덤은 발그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이번에는, 가슴 아래로 시선을 내려본다. 어느새 나와 그녀는 더이상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서로가 서로의 행위에 집중해 있었다. 현재 그녀는 하의를 가리는 속옷만 입은 상태 였다. 나는 고개를 조금 뒤로 밀고 그녀의 몸 전체를 감상 했다. 좁은 어깨와 크고 아름다운 가슴. 그리고 가녀린 몸매. 그녀의 몸을 하나씩 하나씩 감상하며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말았다. 나는 살며시 손을 들어 그녀의 나신을 부드럽게 훓었다. 군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허리를 쓰다듬다가, 배꼽 주위에서 손을 멈췄다. 얇고 길죽한 세로로 찢어진 배꼽 주위를 감돌던 손은 이내 맵시 있는 골반이 자신의 존재를 수줍게 드러내자 그곳으로 빠르게 자리를 옮겼다. 내 손이 닿는곳마다 하연은 몸을 꿈틀이며 반응 했고, 평소의 차분하고 이성적인 면모를 보아오던 나는 그녀의 신선한 반응에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걸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에 다가갔다. 영리하면서 우아한 그녀의 얼굴에는 애절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처음 보는 그녀의 뭔가 갈구하는 표정에 나는 무언가에 홀린듯 꼭 닫힌 앵두 같은 입술과 조금씩 거리를 줄였다. 하연은 내가 얼굴을 다가가는 의미를 알아 챘는지 눈을 휘둥그래 떴다. 얼굴이 당황함으로 물드는게 깜짝 놀란듯 싶었지만 이내 다시 차분하게 표정을 회복한다. 처음이면서, 이토록 남자을 배려해주는 그녀의 마음 씀씀이에 나는 그녀의 입에 키스를 하고 싶었다. 새액. 새액. 이윽고. 그녀의 숨소리도 들을 수 있을만큼 나와 그녀의 거리는 줄어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의연한 태도를 유지하던 하연은 어느새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슬쩍 시선을 아래로 빼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잠시 움직임을 멈춘 후 입을 열었다. “입…맞춰도 될까요?” “…저도 한번 해보고는 싶네요. 하세요.” 설마 이것도 첫키스라는 말인가. 어쨌든 그녀의 허락이 떨어진 이상 거리낄것은 없었다. 나는 단향이 풍기는 그녀의 입술 위로 조심스럽게 내 입술을 포개 었다. 처음 맞닿을때 잠깐 움찔한걸 빼고는, 하연은 그저 가만히 내 입술을 받아 들였다. 조금 어색한듯 이따금 입술을 오물오물 거릴 뿐. 내 입술을 타고 들어오는 하연의 감촉은 너무도 달콤하고, 부드럽고, 따뜻했다. 나는 순간 잠깐 이 상태로 잠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리리플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양해 부탁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네. 113회가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코멘트와 보내주신 쪽지 하나하나 다 읽어 보았습니다. H신을 원하시는 분도 그리고 원하지 않으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이렇게 독자분들이 명백히 갈리는 현상은 저도 처음이라 많은 고민이 들었습니다. 그날 잠에 들었는데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고, 결국에는 그당시 시간에 마지막에 코멘트를 확인하고 마음을 한번 바꿨습니다. 아예 바꾼게 아니라 한번 독자분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써보자. 그래서 직접 읽어보자. 그러고 새벽 작업에 들어갔 습니다. 선은 스스로 적당히 타협 했고 기어코 완성은 시켰습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독자인 입장에서 그 글을 읽어본 결과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내용이 제 마음에 들지 않았고, 무엇보다 문제점은 이 회를 억지로 올린다고 해도 다음회의 내용을 이을 수 없었습니다. 이어 구상해논 여러 스토리들이 엉켜버려 더이상의 진도를 빼지 못하는 상황에 이를 수 있었고, 그때서야 저는 밤새 쓴 10KB를 과감히 삭제 했습니다. 메모라이즈는 지금껏 독자분들과 함께 호흡하며 성장한 소설 입니다. 독자분들의 코멘트를 수용하고, 필요하면 차후 내용을 수정하는 피드백도 합니다. 지금껏 자잘한 피드백은 2번이 있었고 차후 진행에 영향을 주는 비교적 큰 피드백 또한 3번이 있었습니다. 수현을 리더로 내세우는것. 초반부 통과 의례에서의 전개 속도. 나머지 하나는 사용자 아카데미 스킵 부분. 결과를 말하면 수현을 리더로 내세우는건 대성공 이었고, 전개 속도는 보통 이었으며 사용자 아카데미 스킵은 실패였다고 개인적으로 생각 합니다. 당시 많은 설정을 설명할 수 있었던 부분을 전개 속도 향상의 목적으로 2회로 스킵 했고 그건 뮬 이후의 회에서 고스란히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 왔습니다. 해서 이번에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나 글을 쓰는것도 저고, 글의 진행을 결정하는것도 저 였으니 좋지 않은 결과는 온연히 제 탓이겠지요. 그러나 사용자 아카데미 스킵 이후로 느낀건 왠만하면 초기의 설정대로 나가자 입니다. 해서 제가 내린 결론은 소신껏 쓰자 입니다. 제가 지금 구구절절 말해도 분명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독자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러면 저 또한 예전처럼 독자분들에게 일일히 설명을 드리는게 아닌, <글>로서 납득을 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코멘트, 쪽지 주신분들. 감사 합니다. 많은 쓴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그만큼 독자분들이 메모라이즈에 몰입해 주시고 관심을 가져 주신다고 생각하니 솔직히 기분은 정말 좋았습니다. 특히 인물 하나하나에 감정을 이입 해주신 분들…. 사랑 합니다. :) 0115 / 0933 ---------------------------------------------- Interesting 때가 된것 같았다. 한동안 그녀의 가슴을 탐하던 나는 서서히 입 안 가득 물었던 그녀의 언덕을 놓았다. 고개를 뒤로 당기자 뽀얗던 그녀의 젖무덤은 확연한 불그스름한 색으로 변하고, 어느새 꼿꼿한 존재감을 드러낸 돌기는 내 타액으로 범벅이 되어 눈부신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나와 그녀는 이미 알몸이 된지 오래 였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 꾹 오므리고 있는 그녀의 다리를 잡자 허벅지 부분 부터 느슨하게 힘이 풀린다. 그리고, 비로소 아름다운 둔부 사이로 그녀의 소중한 곳이 모습을 드러 내었다. 그녀의 음부는 음란하다기 보다는, 청초하고 정갈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가지런히 정리된 음모와 꾹 닫힌 계곡선, 그리고 그 틈새로 배어 나오는 이슬빛 실가락들. “수현….” 하연의 애타는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 앉았다. 이미 애무는 충분히 했다. 더이상의 전희는 필요치 않다. 그녀가 나를 원하고 있었고, 나도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다리를 더욱 좌우로 벌리고 그녀의 허벅지 아래, 침대의 틈 사이로 내 다리를 비집고 들어간다. 그에 따라 꼭 닫혀 있던 그녀의 계곡선이 살짝 열리고, 그 사이로 단단히 솟은 내 남성을 더듬었다. 나는 처음이 아니다. 오히려 1회차 시절 경험은 어느정도 있는 편이라 할 수 있었다. 서로간의 사랑도, 돈을 내고 몸을 사는 매춘도, 강제로 한 겁탈도 경험이 있다. 물론 후자는 부랑자들에 한 했지만, 아무튼 그 경험이 어디 가지 않는 만큼 나는 헤매지 않고 입구를 잘 찾을 수 있었다. “살살…해주세요.” “조금 아플거에요. 힘을 주면 줄수록 더 아플수도 있으니 최대한 힘을 빼시는게 좋아요.” 그동안 내 남성이 자신의 하복부를 스치는걸 느꼈는지 하연은 불안한 얼굴로 나를 응시 했다. 나는 나른한 음성으로 그녀를 위로하고, 두 손으로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붙잡았다. 동시에 입구에 걸친 내 남성에 살짝 힘을 주었다. “흐읏…!” 남성의 머리 부분이 그녀의 안을 아주 조금 침범 했다. 그녀 내부의 매끈한 감촉을 맛보며 나는 무리하게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의 적응을 기다린다. 하연은 두 허벅지로 나를 힘껏 조이다가 이내 숨을 크게 내쉬며 다시 힘을 풀었다. 나는 그동안 계속 그녀를 바라 보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하연 또한 얼굴을 들고는 괜찮다는듯 고개를 미약하게 끄덕였다. 어느새 내 마음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이 내가, 전투가 아니라 이런 육체 행위에 설레임을 느끼고 있다? “왜요…?” 하연이 한번더 입을 열은 순간 두근거림은 곧바로 사그라 들었다. 나는 고개를 한번 기울이고는 천천히 허리를 앞으로 밀며 그녀의 내부로 진입을 시도 했다. “아아…아…!”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하연은 반사적으로 허리를 뒤틀었다. 그녀의 안은 상당히 좁았다. 그러나 내 남성을 단단히 압박하는 그녀의 살을 가르며, 나는 침착하게 안으로 진입 했다. 뜨겁고 매끈한 살들이 남성에 달라 붙는걸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어….” “흣….” 그녀의 내부를 가르던 나는 순간 힘을 빼고 말았다. 동시에 착실히 진입하던 남성 또한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앞에서 얇고 유연한 막 하나가 더이상의 진입을 허락지 않고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그녀의 처녀막. 나는 바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연.” 내 허리를 좌우로 압박하는 그녀의 허벅지. 하연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조금 기다리자, 그녀는 다시 한번 숨을 몰아 쉬었다. “수…현.” 그녀 또한 내 이름을 부름으로 화답한다. 그녀는 애타는 얼굴로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술을 여는게 보였다. “나, 나도….” “…….” “나도…수현의 소중한 이들중 한명이 될 수 있을까요?” 그녀의 애절한 물음에 나도 모르게 멍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잠시 그녀를 보다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것 만큼 좋은 사람은 아니에요. 최소한 스스로는 그렇게 평가하고 있어요.” 하연은 떨리는 눈망울로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침대 위로 늘어뜨린 그녀의 손을 잡고 나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를 좋아하고, 나를 위해주고, 나에게 기대고 싶어하는 사람을 내칠만큼 모질지는 못해요.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은 상관 없어요. 나는 내 주변 사람들 챙기기도 바빠요. 그게 나쁜가요?” “아니요. 좋아요. 괜찮아요.” 하연이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그녀의 반응에 힘입어 나는 조금 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지금 이 마음을 유지해 준다면, 저는 하연을 항상 소중하게 여기겠어요. 정말로 제 소중한 사람이 되어 준다면…당신을 위해 목숨이라도 걸겠습니다.” 아직 그녀는 내 소중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그저 보호하는 사람일 뿐. 그순간 나는 정신이 돌아왔고, 앗차하는 심정이 들었다. 초반에 두근거리던 가슴이 생각나 나도 모르는 사이 감상적으로 변하고 말았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고 내면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하연은 내 대답이 만족스러운듯, 감동한 얼굴로 입을 오물거렸다. “고마워요…그리고 이제 와주세요.” “아플거에요.” “지금은 어떤 아픔이라도 견딜 수 있을것 같아요.” 보듬어 주고픈 마음을 솟구치게 하는 하연의 말에 나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등 뒤로 넣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그녀의 몸을 서서히 일으켰다. 아니, 아직은 그녀가 까치발로 조금 일어선 상태. 하연 또한 내 행동의 화답으로 살포시 내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냥 한번에…. 그게 더 나을것 같아요.” 그녀의 말은 충분히 알아 들을 수 있었다. 하연의 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마주 앉은 자세로, 하연의 허리를 조금씩 아래로 내렸다. 조심, 또 조심스럽게. 어느정도 진입한 내 남성은 앞을 가로 막은 연한 점막을 조금씩 돌파하기 시작 했다. 내 압박이 들어가고 점막의 탄성을 느끼는 순간 나는 있는대로 그녀의 엉덩이를 내렸고, 동시에 내 허리도 힘껏 쳐올렸다. 하연이 몸을 크게 비틀고 내 머리를, 등을 거세게 껴안는다.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꾹 깨문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나 또한 그녀의 가냘픈 몸을 품고 내부의 남성을 더욱 깊게 묻었다. 위에서 아래로 체중이 실리고, 나 또한 아래서 위로 호응하는 통에 내 남성은 그녀의 안 끝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드디어 나와 그녀는 한몸이 되었다. 고통은 상상 이상인듯 하연은 눈물어린 눈동자로 통증을 감내하고 있었다. 살짝 허리를 한번 움직이자 더욱 부풀어오른 그녀의 젖무덤에 자그마한 파문이 인다. “아…아…으…아….” 하연은 내 말대로 힘을 빼려고 하다가 느껴지는 고통에 다시 힘을 주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꿈틀거리며 내 남성을 감싸 안는 그녀의 내부에 나는 말할 수 없는 안락함을 느꼈다. 따뜻하고, 그리고 포근 하다. 잠시 그 기분을 음미하던 나는 조금씩 허리에 움직임을 주었다. 처음인만큼 빡빡한 감도 있었지만 그녀는 어떻게든 나를 받아 들이려 애를 쓰고 있었다. 살짝 허리를 빼고 고개를 숙이니 몸통이 붉은 핏빛으로 번들거리는 내 남성이 보였다. 다시 한번 허리를 움직이자 잠깐 풀렸던 그녀의 내부가 다시 강하게 조여오며 내게 극에 오른 쾌감을 선사 했다. “흐…아…아….” 숨도 편안하게 쉬기 힘든듯 그녀는 연신 헐떡이는 콧소리를 내고 있었다. 한번 허리를 올릴 때마다 그녀의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물결을 이루었다. 달콤한 숨결을 뱉는,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술이 보인다. 나는 곧바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서로 입을 벌린 탓에 내 안으로 그녀의 따끈한 숨이 들어오는걸 느꼈다. 그렇게 잠시 그녀의 감촉을 맛보던 나는 살며시 혀를 들어 그녀의 입술 안으로 집어 넣었다. 그녀 또한 반사적으로 자신의 혀를 들어 반응한다. 서로의 설육이 뒤얽히고 감미로운 타액을 교환한다. 하연은 자신도 모를정도로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하복부에 느껴지는 아픔을 잊으려는듯 그녀는 적극적으로 내 혀를 휘감아 들었다. 쯔읍, 츱, 꿀꺽. 서로의 혀를 빨고 침을 삼키는 음란한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울렸다. 한동안 입 안을 음미하며 그녀를 달랜 나는 슬며시 혀를 거두고 입술을 떼었다. 그러나 나와 그녀의 입 안 사이로 아직도 서로를 잇고 있는 한줄기 은빛 실선이 주욱 늘어지는게 보였다. 이윽고 그 실이 툭 끊어지는걸 신호로 나는 곧바로 허리를 더욱 강하게 올렸다. * 어슴푸레 창문을 통해 비치는 햇살이 얼굴을 두드린다. 슬며시 눈을 뜬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올리자,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하연이 눈에 보였다. 내가 고개를 올린 이유는, 그녀가 나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아기를 안듯 두 팔로 꼭 안고 있어 빠져 나오기 어려울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 듬었다. 기척을 느꼈는지 그녀는 한두번 몸을 뒤척이고는 자신의 품 안으로 나를 더욱 끌어 안았다. 얼굴에 마찰 되는 부드러운 느낌에 나는 연한 숨을 들이켰다. 그녀와 나는 밤새 나신으로 서로를 부둥켜 안고 온기를 교환하며 잠에 들었다. 간신히 그녀의 품을 빠져 나온 이후 나는 침대에 누운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그렇게 몸을 섞은 이후, 그녀가 너무 지친탓에 따로 정리도 못하고 그냥 자버리고 말았다. 그 덕에 침대의 위는, 그녀의 하부에서 흘러나온 초혈로 인한 붉은 핏자국이 그려져 있었다. 더불어 중간중간 보이는 굳어버린 희뿌연 고체들. 어제 그녀의 안에 사정 했지만 아무래도 혈을 타고 흘러 나온것 같았다. 이곳저곳 남은 정사의 흔적들을 보자 절로 쓴웃음이 나온다. 이대로 놔두어도 상관 없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이었다. 나는 최대한 그녀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조심조심 주변을 정리 했다. 나머지는 하연이 일어난 후 고연주한테 부탁하면 될 터. 나는 그대로 색색 숨을 내쉬는 하연의 이불을 덮어준 후 검 하나를 들고 방을 나섰다. 1층으로 층계를 내려가던 도중, 나는 몸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에 고개를 기울였다. 어제만 해도 알게 모르게 몸 내부에 쌓인 피로를 느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말끔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화정(火正) 또한 오늘따라 힘차게 고동치고 있었고 온 몸에 활력이 맴도는걸 느꼈다. 물론 내 내구가 높고 체력도 준수한 만큼(여담이지만, 홀 플레인에서 능력치 72 포인트는 절대로 낮은 수치가 아니다.) 높은 수준의 회복력을 기대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감이 있었다. “설마…요즘 욕구 불만 이었나?” 하연과의 정사가 잠깐 머리속으로 떠올랐으나 이내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일층으로 내려가자 빈 접시를 든채 몸을 바쁘게 움직이는 고연주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사용자는 단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사용자도 없는데 바쁘게 움직이는게 조금 이상했지만,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뚜벅. 뚜벅.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소리가 로비를 울렸다. 누군가 내려오는 기척을 들었는지 고연주는 곧바로 고개를 돌리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아니, 건네려고 했다. “오늘따라 늦게 일어나셨…어머? 그 얼굴 표정은 뭔가요?” “네?” 뜬금 없이 말을 바꾸는 고연주의 질문에 반문하자, 그녀는 눈을 가늘게 흘기며 나른한 목소리를 이었다. “지금 사용자도 없는데 엄청 바쁘게 움직이네. 라고 얼굴에 써 있어요.” 눈치 하나는 귀신 같은 여성이군. 그러나 나는 그녀의 말을 부정 했다. “오해일 겁니다.” “겁니다? 입니다가 아니라요?” “아마도요.” 의뭉스러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인 후, 나는 가까운 테이블에 의자를 끌었다. 털썩 엉덩이를 붙이자 계속 나를 흘기는 고연주의 고운 눈동자가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녀를 향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A코스.” “…정말 이러기에요?” “조금 있으면 애들도 내려올테니 6인분 추가.” “하.” 내 말에 입술을 살짝 깨문 그녀는 들고 있던 접시를 강하게 회전 시켰다. 이윽고 회전한 접시를 손 끝으로 받아내 빙글빙글 돌리는 묘기를 보이는 그녀. 그녀는 나긋하긴 하지만 평소보다 조금 높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흥. 그래도 단골 손님인 만큼 좋은 정보 하나 주려고 했는데요.” “단골인지는 모르겠고…정보는 뭔데요.” “됐거든요. 시간 지났어요. 저 지금 엄청 빈정 상했어요.” “…….” 그렇게 나오시겠다.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품 안에서 연초 두대를 꺼냈다. 그녀가 내 행동을 막으려고 했지만 곧바로 하나를 던져줌으로 그녀의 입을 다물게 만들 수 있었다. 고연주는 빙빙 돌리는 접시를 유지한채, 허공으로 날아오는 연초를 입으로 무는 기예를 선보였다. 역시 그림자 여왕 답다고 생각하며 나 또한 그녀의 기예에 화답해 주었다. 딱. 가볍게 손가락을 퉁기자 나와 그녀가 문 연초의 끝에 미약한 불꽃이 타오르고, 한순간에 사그라 들었다. 찰나간에 불과 했지만 고연주의 눈동자에 반짝이는 빛이 스치고 지나간걸 볼 수 있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고작 연초 한대로는 지금의 속상함을 달래기 힘들어요.” “네.” 내 단답에 고연주는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이내 나른한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이 정보 진짜 대박인데…. 아무한테나 알려주는거 아닌데….” 그녀가 말을 흘리며 여지를 두었으나, 나는 그에 아랑곳 않고 연초를 한모금 깊게 빨아 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연주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맘에 드는 손님이니까. 누나~알려주세요~라고 애교 있는 목소리로 부탁하면 생각해 볼 수도 있어요.” “…휴.” 이대로 두면 음식은 고사하고 한없이 떠들겠다는 생각에 코로 세게 연기를 내뿜었다. 잠시간 입맛을 다신 후 나는 무심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마 지금쯤 내 눈동자는 깊게 가라 앉아 있지 않을까. “헤일로.” “…네?” 헤일로라는 말을 꺼내자 고연주의 얼굴이 순식간에 당황으로 물들었다. 다시 되묻는 그녀를 향해 한숨을 쉬고는, 나는 한번 더 입을 열었다. “SSUN. 부랑자 말살.” 내 말이 끝나는 순간. 그녀는 손 끝에서 돌리던 접시를 놓치고 말았다. 이윽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나는 접시를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네. 드디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어두운 과거> 챕터가 끝났습니다. :) 뮬에서 할 일이 거의 끝나가네요. 고대 연금술사 비비앙의 던전, 폐허의 연구소는 공략 완료. 이제 남은건 절규의 동굴 이지만 이건 이미 수현이 1회차에 다녀온적이 있는만큼 수월할듯 싶습니다. 하하하. PS. 고자는 Good Bye. 안녕! 애증의 호칭이여! 『 리리플 』 1. gfnlkdsfdsa : 1등 축하 드립니다. 부디 다음회에도 연이은 1등을 하시길 기원하며, 부디 이번회도 재밌게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2. 운수대통 : 네. 그래서 필요할 경우 시점을 바꿀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하하. 아무래도 인물들이 많아지면 1인칭으로 쓰는건 한계가 있거든요. 주인공 혼자 다닌다면 모르겠지만, 그럴 일은 거의 없으니까요. :) 3. 엘워네스 : 헤헤. 실은 이미 들어왔어요. 그런데 그냥 출판 안하려구요. 이제 시간도 별로 없고, 많은 시간을 할애할수도 없고. 그냥 지금을 유지하는게 더 나을것 같아요. 4. 로냐로냐 : 믿음. 정말 감사합니다. (__) 쿠폰도 감사 합니다. 앞으로 더욱 알찬 내용으로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5. 칼이조아 : NO. 절대 미안하실 필요 없습니다. 추천, 코멘트, 그리고 읽어 주신다는것 하나만으로 제가 감사를 드려야죠. :)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6. 아그랍파 : 크크. 고자 유진이 아닌게 어딥니까. 에로유진. 좋습니다. 하하하. 7. 미월야 : 잠. 자암. 보고 엄청 웃었습니다. ㅋㅋㅋㅋ 아니에요! 이번 회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절대 아니…. 저도 무슨 말을 하는 걸까요. @_@ 8. 타락한비둘기 : 좋은 말씀 진심으로 감사 합니다. 코멘트 두번 세번 읽었습니다. 암묵적인 동의와 침묵. 이 말이 제일 가슴에 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__) 9. 사람인생 : 안솔인생님!(?!) 어서오세요! 하하하. 알겠습니다. 앞으로도 소신껏 쓰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적절한 피드백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 10. mindrong : Yes. 물론 입니다. 이번회에 이어지는 구조 였습니다. 하하하.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16 / 0933 ---------------------------------------------- Interesting 핑글핑글 돌던 원반 접시는 바닥으로 떨어진 후 조각나 버렸다. 그러나 고연주는 그걸 치울 생각도 하지 않는것 같았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 표정은 사늘하게 변한 상태 였다. 평소의 나른하고 여유로운 얼굴이 아닌, 매섭게 나를 노려보는 얼굴. 나는 쏘일듯한 시선을 담담히 받아 넘기며 연초를 한모금 빨아 들였다. 조금의 친절을 담아, 한번 더 입을 열었다. “…어차피 뮬에 있으니 상관 없어요.” “사용자 김수현.” “네.” 고연주는 입에 물었던 연초를 바닥으로 뱉은 후 나를 지그시 응시 했다. 잠시 동안 나를 보던 그녀가, 이내 입꼬리를 살짝 위로 올리는게 보였다. “당신…역시 흥미로워.” “나 또한 그림자 여왕이 왜 이런 소도시에 있는지 궁금해.” “영락없는 0년차인데…말투나 행동 그리고 기세를 보면 구를대로 구른 놈 같다고. 너무 흥미가 일어서 잠을 설칠 지경이야.” 그녀는 키득거리며 말을 마친후 살며시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 허벅지 위에 슬쩍 자신의 엉덩이를 붙인다. 이윽고 그녀는 넘칠것 같은 퇴폐적인 웃음을 흘리며 내 가슴에 자신의 몸을 밀착 시켰다. 가만히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대는 그녀를 보며 나는 은근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 였다. “어떤것들이 흥미로워?” 내 물음에 고연주는 손으로 가만히 내 몸을 더듬었다. 그에 반응해 나 또한 그녀의 귓가와 목덜미를 쓰다 듬는다. 언뜻보면 연인이 서로의 사랑을 속삭이는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수틀리면 지금 서로의 몸에 닿은 손은 목숨을 빼앗는 무서운 흉기로 변할것이다. 살기 가득한 내 손길에 그녀의 목젖이 꼴딱 움직이는게 보였다. “처음 봤을 때 부터. 0년차 사용자가 파해(破害)를 사용한다니…말이 돼?” “그리고?” “당신이 데리고 다니는 애들도 예사롭지 않아. 처음 왔을때는 병아리 같던 놈들이 어떻게 짧은 시간에 그만큼 성장할 수 있지? 마치 엄청난 베테랑이 붙어 전문적인 훈련을 시킨것처럼….” “후후. 눈썰미가 좋네. 그런데 아직 부족해.” “농담 하지마.” 내 겸양에 고연주는 날카롭게 외치고는 휙 몸을 돌렸다. 이윽고 양 손을 들어 내 어깨 위로 걸치고 나를 완전히 마주 보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더욱 도발적이고 더욱 유혹적인 자세. 혹시나 이번에도 유혹의 눈동자(Lure Eyed)를 사용하는가 싶어 곧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호호. 너무 경계 하지마. 한번 통하지 않은 상대는 다시 쓰지 않아.” “좀 떨어지지 그래. 영~부담스러운데.” “어머? 내 가슴, 내 엉덩이 한번 만지고 싶어서 안달난 사용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독을 품은 꽃은 만지고 싶지 않아. 자칫 잘못하면 쏘이거든.” 냉냉한 내 말에 일순간 그녀의 얼굴에 쓸쓸한 기색이 스쳤다. 찰나간에 불과 했지만, 나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내가 말 실수를 한건가? 고연주는 아무 말도 않고 걸친 손으로 내 어깨를 주물렀다. 의외로, 그녀의 안마는 굉장히 시원 했다. “당신….” 그 상태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가, 막 고연주가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나와 그녀는 동시에 층계로 고개를 돌렸다. 3층에서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고연주는 아쉬운 얼굴로 입술을 조금 적시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A코스 6인분 이라고 하셨죠, 손님?” 다시 바뀐 그녀의 말투에 나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따뜻하게 해서 갖다 주세요.” “그럴게요. 대신 언제 한번 시간좀 내줘요.” “흠.” “아이 참. 너무 빼지 말아요.” 고연주는 눈을 한번 찡긋한 후 몸을 돌렸다. 언제나처럼 요염히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몸 안 가득히 끌어 올렸던 마력을 다시 가라 앉혔다. 고연주는 절대로 방심할 수 없는 사용자 였으니까. * 처음 내려온 사람은 안현 이었다. 내려오던 도중 슬쩍 고개를 내밀어 고연주가 있나 보고는 없는걸 확인하자 실망한 얼굴로 내려 왔다. 그러나 녀석은 이내 목을 뻣뻣이 세우며 내가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레어 클래스 기공창술사 안현 입니다.” “…곧 알리게 되겠지만 그래도 너무 떠들고 다니지는 마라.” “흐흐. 미안해요 형. 그래도 너무 기분이 좋아서요.” 안현은 내 핀잔에도 불구하고 기분 좋은 미소를 흘렸다. 그리고 그런 그를 나는 차가운 눈동자로 응시 했다. 안현은 지금 홀 플레인을 다르게 받아 들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무 느낌도 없었겠지만, 레어 클래스를 계승 함으로써 그의 미래는 보장 되었다. 홀 플레인에서 상위 클래스는 일종의 <힘> 또는 <권력>으로 볼 수 있으니까. 그때부터 사용자들은 그 힘과 권력에 휘둘리기 시작한다. 생존과 귀환이라는 목표가 퇴색 되어 버린다. 어떻게 보면 홀 플레인은 현대의 온라인 게임이나 다름 없었다. 능력치를 올리고, 더 좋은 장비를 갖추는 일종의 RPG. “세이브와 로드가 불가능 하지만.” “네 형?” “…혼잣말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안현을 보며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아직은, 아직은 놔둬도 괜찮다. 비록 엇나간 허영심에 불과할지라도 한창 성장기에 있는 안현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도를 넘어가는 순간 내가 브레이크를 걸어 주겠지만. 나와 안현이 담소를 나누는 동안 고연주가 음식을 나르고, 일행들이 한명씩 내려오기 시작 했다. 안솔, 유정, 비비앙, 안현, 신상용이 차례대로 자리에 앉자 테이블은 순식간에 소란스럽게 변했다. 막 비비앙과 토론을 하던 신상용은 일행들을 한번 전부 둘러본 후 이상하다는듯 입을 열었다. “정하연씨가 조, 조금 늦네요.” “응? 아침에 일어 났을때 방에 없던데.” 유정이 중얼거리자 신상용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 그래요? 이상하네. 시간 하나는 칼 같이 지키는 사용자인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걸까요.” 이 사람…은근히 날카롭군. 마침 위층에서 그녀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입에 침을 바른 후 2층을 가리켰다. “지금 내려 옵니다.” 내 말이 끝나는 순간 2층 문을 열고 나오는 하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일행들은 그녀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내 다들 표정이 어색하게 변했다. 계단을 내려오는 그녀는 어제의 통증이 남은듯 난간을 잡고 한층한층 힘겹게 내려 오고 있었다. 이윽고 의자를 빼고 하부에 손을 짚으며 조심스럽게 앉는 하연을 보며 솔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걸었다. “몸이 많이 안좋으세요?” “그냥 조금…아랫배가 아파서요.” “그날?” 유정이 무덤덤하게 한마디 툭 내뱉자 안솔과 하연은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곧이어 하연이 내게 미안하다는 시선을 보내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 또한 티를 내지 않고 싶었겠지만, 지끈거리는 고통을 감출 수 없었던것 같았다. 아마 일어서지도 제대로 걷지도 못해 기고 싶을만큼 아플것이다. “고통이 심해지면 치료라도 해드릴게요.”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부탁드려요.” 일행들은 모두 하연에게 걱정하는 시선을 보냈다. 혹시 또 몰아 붙이거나 차갑게 대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애들은 그래도 기본 심성이 착한 애들 이었다. 동료 영입에 성향을 하나의 기준으로 둔걸 다행으로 생각하며 나는 먼저 숟가락을 들었다. 그순간 일행들 모두 약속이라도 한듯 나를 따라 수저를 드는걸 볼 수 있었다. 간소한 A코스이긴 하지만 아침에는 이정도로 먹는게 딱 이었다. 따끈한 김이 모락이 피어나는 스프에 빵 한조각을 찍는다. 그대로 입에 집어 넣자 고소한 향이 입안에 솔솔 퍼지는걸 느낄 수 있었다. 실력도 좋고 음식도 잘하는 고연주. 일행으로 넣으면 즐겁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다음 타자로 스튜를 선택 했다. 그렇게 활기찬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일행들은 깨끗이 비워진 테이블에서 따뜻한 차를 홀짝였다. 애들의 얼굴은 모두 편안해 보였다. 어제만해도 항상 경계를 하고 몬스터를 처리 하느라 다들 신경이 곤두서 있었는데, 간만에 맛보는 평화로운 분위기에 젖은것 같았다. “그, 그럼 리더. 앞으로의 일정은 어떻게 계획이라도 있습니까.” 안경을 치켜 올리며 물어오는 신상용을 보며 잠시 생각을 정리한다. 앞으로의 일정. 이번에는 오랫동안 정비를 할 예정이라고 말해두긴 했지만, 확실히 할 일들은 있었다. 절규의 동굴 공략을 마친 후 되도록 빠르게 뮬을 떠날 생각이라 그전에 대부분의 일들을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번에 그나마 좋은건 기록을 탐구하거나 제 3의 눈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점 이었다. 1회차에 내가 속한 캐러밴이 절규의 동굴을 발견 했던 만큼 가는길 또한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는건 무리라도 제 3의 눈으로 보면 찾을 수 있을 정도는 된다. 다만 딱 하나 문제가 있다면 거리 였다. 뮬에서 출발한다고 가정하고 대강 거리를 짐작하면 그곳에 도착하는데만 10일 정도 걸릴것이라 예상한다. 그렇다면 가는데 10일, 오는데 10일. 도합 20일. 거리로만 따지면 공식 원정으로 칠수도 있는 탐험 이었다. 더구나 동굴 탐험을 하는 시간도 합하면 못해도 3주 이상은 걸린다는 소리였다. 현재 우리들이 뮬로 들어온 이후 한달하고도 반이 조금 안되었다. 그말인즉슨 정비 시간은 최소 2주를 넘고, 최대 4주를 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뮬로 되돌아 왔을때 부랑자 몰살 작전이 끝나고, 강철 산맥으로 떠난 황금 사자 클랜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것이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주변은 어느새 조용히 가라 앉아 있었다. 슬쩍 고개를 드니 내 얼굴을 주시하는 일행들이 보인다. 다들 앞으로의 일정이 궁금한 모양 이었다. 나는 잠시 찻잔을 들어 한모금 목을 축인 후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일전에도 말씀 드렸듯, 이번 정비 시간은 조금 길게 가질 생각 입니다.” “저는 좋지요.” 신상용은 사람 좋은 미소 지으며 허허 웃었다. 애들도 알게 모르게 안도한 얼굴들을 하는걸로 보아, 그동안의 강행에 조금 부담을 느꼈던것 같았다. 다만 정비라고 해도 무조건 쉴 생각은 절대 없었다. 어디까지나 다음 탐험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 이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정비 목표는 총 3개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본인의 실력 증진, 다음 탐험을 위한 준비, 그리고 클랜 창설.” “클랜 창설요?” 하부를 슥슥 문지르던 하연은 순간 깜짝 놀란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애들은 이미 들어서 무덤덤한 얼굴들 이었지만 새로 합류한 신상용과 하연은 처음 듣는 얘기들일 것이다. 머리 회전이 빠른 하연인 만큼, 그녀는 이내 내 말을 곱씹더니 고개를 주억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과연…확실히 가능성은 있어요. 아니, 거의 된다고 봐도 옳겠군요.” “두곳의 탐험을 성공 했습니다. 창설 승인이 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거죠. 아무튼, 처음 듣는 말들 이겠지만…두분은 나중에 따로 저와 얘기를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하연과 신상용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들에게 내 클랜이 어떤 클랜인지,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는지 말해주고 그들의 의사를 묻는다. 그러나 신상용은 비비앙이, 하연은 내가 있는만큼 둘다 이미 가입된 멤버라고 봐도 무방 했다. 형식적 절차들이 남아 있을 뿐. “아무튼 이 얘기는 추후 따로 자세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먼저 안현, 안솔, 유정.” “네 형.” “네 오라버니.” “응 오빠.” 아기새들 처럼 대답하는 애들을 보며 나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이번 정비 기간동안 실력 상승을 목적으로 둔다. 내가 따로 호출할 때를 제외하고는 첫째도 수련, 둘째도 수련이란걸 명심 하도록. 특히 안현 너는….” 나는 잠시 말을 멈춘 후 비비앙 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비비앙은 신나는 얼굴로 차를 마시다가, 혀를 데어 앗뜨뜨 혀를 놀리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비비앙.” “엣페페…뜨거워…응?” “신상용씨를 가르치는것도 좋은데, 앞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안현이 가진 기록서 해독좀 도와줘.” “뭐 단순한 해독이라면 문제 없지. 어차피 창을 가르칠것도 아니고.” 비비앙은 별것 아니라는 말투로 대답 했다. 그녀의 시원한 대답에 한번 고개를 주억인 후, 나는 이번에는 하연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연…씨는 솔이의 지도를 부탁 합니다. 클래스가 다르긴 하지만 기본 마나 운용은 비슷 하니까요. 솔이가 아직 많이 부족 합니다.” 하연으로 부르려다가 애들에게 이상하게 들릴 수 있어 호칭을 바꿨다. 그녀는 개의치 않는 얼굴 이었다. “맡겨 두세요.” “네에….” 얌전히 대답하는 둘을 보며 마음을 놓으려는 찰나 조용히 기다리던 유정이 갑자기 끼어 들었다. “오빠 나는?” “응?” 무슨 말이냐는 식으로 반문하자 유정이 대번에 얼굴에 섭섭한 기색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안현은 클래스도 그렇고, 책도 있으니 그렇다고 쳐. 안솔도 가르치는 사람이 있는데…나는 혼자 수련해?” 서운한 감정이 듬뿍 담긴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오늘 몸이 조금 안 좋아서요. 한편 완성하고 잠깐 잠이 들었는데, 그대로 푹 자고 말았습니다.(혹시 몰라서 10시 알람을 했는데 듣지도 못한거 같아요. 오히려 11시 넘어서 카톡 소리에 깨버렸다는….) 눈을 뜨자마자 목이 너무 말라서 본능적으로 더듬더듬 냉장고 물을 꺼내 마셨는데, 세상에 물이 그렇게 달고 시원 하더라구요. 목을 축이는 느낌에 소름이 돋을 정도 였어요. 아휴. 아무튼 일어나서 다행이에요. 보일러는 틀었는데 바닥은 얼음장이나 다름 없네요. ㅜ.ㅠ 여러분들 모두 감기 조심 하세요! 『 리리플 』 1. MT곰 : 고맙습니다. MT곰님도 항상 앞일에 행운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1등 축하 드립니다! 2. 사람인생 : 총 338개 달아 주셨네요. 쪽지는 10개. 으으. 머리가 머리가 너무 아파서 세는게 복잡해요. @_@ 그나저나 대단한 코멘트 숫자로군요. :) 3. 아닫 :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4. hohokoya1 : 하하. 죄송 합니다. 오늘따라 몸이 마음대로 안 따라주네요. ㅜ.ㅠ 5. GradeRown : ㅋㅋㅋㅋ 정말 기발하신 생각 입니다. 그렇게 생각도 가능하군요. ㅋㅋㅋㅋ 6. juan : 과연 고연주의 운명은? 영입 일까요? 살해 일까요? 후후훗. 7. 야우로 : 네. 소신껏 쓰도록 하는 작가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소중한 조언 감사합니다. :) 8. 불곰리즈 : !. 그…그럴수가…. 털썩. 9. 현대사는백수 : 쿠폰 감사 합니다.(__) 부디 이번회도 재미있게 감상해 주세요. :) 10. 테크노 : 그래요! 화정은 변태 였어요! 아하하…. 죄송 합니다. ㅋㅋㅋㅋ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17 / 0933 ---------------------------------------------- Interesting 그러고 보니 유정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혼자 해도 된다고 이냥저냥 넘겼겠지만,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그동안 안현을 위주로 신경쓴 감이 있긴 했다. 안솔은 사제니 예외로 둔다고 해도 나머지 둘을 비교하면 아무래도 안현이 내 입맛에 더 맞는 감이 있어 벌어진 현상 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 없다. 원래 잠재 가능성도 안현이 더 높았고 이번에 레어 클래스를 계승하면서 그 차이를 더욱 확연히 벌렸다. 그리고 내심 안현을 라이벌로 여기고 있는 유정의 속도 마냥 편안하지는 않을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유정이 이렇게 버릴만한 능력치를 가진 사용자는 아니었다. 상위 사용자로서 발돋움 하기 위해 필요한 잠재성은 충분하다. 내가 직접 고르고 데려온 만큼 앞으로 어떻게 가르치고 성장하는가에 따라 그녀도 후일 명성을 떨치는 사용자가 될 수 있다. 요컨대 가능성의 차이 였다. 당분간 안현은 내가 지도하지 않는게 더 나았다. 검과 창의 차이를 차치 하더라도 일단은 그 책을 읽고 몸에 익히는건 부정할 수 없는 필수 과정 이었다. 나는 단지 조언자의 역할을 할 뿐 어설프게 가르치려 들더간 오히려 기공창술사의 원래 효율을 망칠 수 있다.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잠시 동안 생각을 정리한 나는, 입을 삐쭉 내민 유정을 보며 입을 열었다. “유정이 너는…내가 지도하는게 낫겠다.” 안현과 안솔의 눈이 동그랗게 변한다. 단순한 말 한마디에 유정이 또한 내밀었던 입술을 쏙 집어 넣었다. 그 모습을 보자 조금이긴 하지만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 오빠가 지도 한다고? 바쁘지 않아?” “그렇긴 한데…그동안 소홀한 면도 있었고. 어떻게든 짜내면 너 하나 봐줄 시간은 있을것 같은데. 아무튼 하루종일은 힘들더라도 최대한 봐줄 테니까. 그리고 어떻게 보면 검도 단검의 연장선으로 볼 수도 있고. 여러모로 내가 가르치는게 나을것 같다.” “아…아니 그래도…너무 갑작스럽게….” 평소답지 않게 우물쭈물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는 유정을 보며 나는 빙긋 웃었다. “왜. 싫어?” “아, 아니! 아~니! 좋아!” 과도하게 보일 정도로 고개를 흔들고 함박 웃음을 짓는다. 옆에서 “형이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요.” 라고 궁시렁대는 안현과 부러움 반 시무룩함 반의 안솔이 보였지만 무시하고 고개를 돌리는걸로 대답을 대신 했다. 그 후. 나는 30분 정도의 시간을 소비해 이번 정비 기간 동안의 달성 목표를 모두 전달할 수 있었다. 모두 정리 해보면, 먼저 신상용은 비비앙의 밑에서 지도를 받는걸 중점으로 두기로 했다. 애들과 비슷하게 중요한 일이 아니면 호출을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는 2년차 사용자다. 그런만큼 애들처럼 쑥쑥 성장을 바라는 일은 요원했다. 그러나 실낱 같은 성장 가능성이 남아 있을 때 해볼만큼 해보는게 좋았다. 그리고 하연은 프리로 돌리기로 했다. 프리는 말 그대로 개인 행동을 보장한다는 소리 였다. 물론 안솔의 지도를 부탁한 만큼 완전한 프리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내 생각을 아는 하연은 내 오더에 군말 없이 따르기로 했다. 그녀에게 프리를 준건 아는 사람들만 아는 하나의 상징 이었다. 지금 우리들이 클랜을 창설한 상태고 어느정도 구성이 잡혔다면, 프리를 준다는건 그만큼 상대를 믿는다는 뜻 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그녀는 자신의 앞가림을 알아서 잘 하기 때문에 따로 건드릴 건덕지도 없었다. 그러나 소도시에 있는 만큼 문제가 없는것도 아니었다. 그중 화두로 떠오른건 애들이 수련할 장소 였다. 도시 밖으로 나간다면 해결 되기는 하는데, 이번주는 몬스터 사냥을 할 계획이 없었다. 지금껏 주로 해왔던 감지 훈련은 방 안에서 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의 수련은 육체를 움직이는 부분이 상당수 포함 되어 있었다. 아무리 특실이라고 해도 여관방 안에서 그런 훈련을 하는것도 상당히 웃기는 일들 이었다. 하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개척 도시에 불과하고, 강철 산맥으로의 진군으로 개발도 더딘 상태 였다.(애초에 도시의 대표 클랜도 강철 산맥 진군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처음 장소로 소도시 뮬을 선택한 만큼 결국 감내할 일들 이었다. 그렇다고 후회가 들지는 않았다. 그동안 얻은 이득이나 성과를 보면 이정도의 문제는 받아 들일 수 있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대부분의 설명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다음 탐험을 위한 준비나 클랜 창설등의 문제는 내가 도맡아 처리할 일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구구절절 말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짚고 넘어갈 부분은 있었다. 나는 조용히 내 말을 경청하는 마법사 사용자 두명을 지목 했다. “저녁즈음 두분에게는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일과를 마친 후…음. 저녁을 먹은뒤 3층 특실 맨 왼쪽 방으로 와주세요. 중요한 일 입니다.” 이미 클랜 얘기를 꺼냈을 때부터 둘은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연과 신상용은 담담한 얼굴들로 고개를 주억 였다. 그리고 나는 한가지 말을 덧붙였다. “참고로 말씀 드리면…방금전 공지한 맨 왼쪽 특실은 앞으로 제 개인 업무실로 사용할 예정 입니다. 저에게 볼 일이 있으시면 그곳으로 와주시면 되구요. 비비앙?” “엉?” 이번에는 딴짓을 하지 않고 열심히 내 말을 듣던 비비앙. 원래 그러는게 당연하기는 한데 기특한 마음이 드는걸 막을 수 없었다. “너도 방 하나를 따로 잡는게 낫겠다.” “좋긴 한데…. 왜?” “연금술사의 힘이 필요하다. 특실에 공방을 하나 설치할 수 있겠어? 엄청 공을 들이라는 소리가 아냐. 흉내만 내는 정도면 돼.” 공방이라는 단어를 꺼내자 비비앙의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그녀는 눈알을 도록도록 굴리며 고개를 기울이더니 이내 애매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으응…. 요란할 필요가 없으면 가능할것 같기도 한데.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은데?” “지금 꺼내긴 조금 그러네. 나중에 시간 있을때 해줄게. 아무튼 여관 주인한테 따로 말해둘 테니까 올라가서 방좀 보고 있어. 공방 설치에 필요한 것들도 있을것 같은데….” “많지. 아무튼 나야 나쁠건 없어. 그럼 지금 올라가 봐도 돼?” “물론. 1회용 이어도 좋아. 지원은 넉넉히 해줄테니 돈 걱정은 말고. 잘 좀 보고 있어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비비앙은 쾌할한 기세로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옆에서 신상용이 간절한 얼굴로 나를 보는게 느껴져, 마지못해 한번 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둘은 신명나는 얼굴들로 순식간에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 “…….” 그 둘이 윗층 계단으로 모습을 감추는걸 확인한 후, 나는 멀뚱한 얼굴로 있는 일행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 일정 전달은 이정도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들은 이만 올라가서 준비하고 있어. 안현은 내일쯤 비비앙한테 가봐. 내가 따로 말해둘게. 그리고…하연씨는 잠시 남도록 해요. 잠시 할 얘기가 있습니다.” “네.” 간단히 대답하는 하연을 뒤로, 애들은 내 오더에 어기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유정은 자꾸만 내 주변을 알짱 댔지만 내가 한번 지그시 응시하자 곧바로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명이 모두 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보며 나는 한층 누그러든 시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앞에는 다소곳한 태도로 내 말을 기다리는 하연이 있었다. “하연. 몸은 좀 괜찮아요?” “네…. 미안해요. 티내고 싶지 않았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네요.” 내 걱정에 하연은 미약한 미소를 띠며 대답 했다. 그녀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우리 둘 사이는 잠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흔들림 없는 깨끗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연과 시선을 교환한 나는 이내 품 속으로 손을 집어 넣은 후 하나의 물건을 찾아 안을 더듬었다. 이윽고 품 안에서 원하던 물건이 손에 잡히자 나는 곧바로 물건을 테이블 위로 꺼내 놓았다. 하연은 그 물건을 보더니 동그래진 눈동자로 입술을 모았다. 내가 꺼낸 물건은 폐허의 연구소에서 얻은 영광의 목걸이(Glory Necklace) 였다. “이건….” “그때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이제는 주인을 찾을 시간이네요.” “수현.” “감정은 이미 마쳤어요. 과거 영광의 목걸이(Glory Necklace)라고 불린 목걸이에요. 그때 하연의 설명이 거의 맞아요. 다만, 하루가 지나가는걸 기점으로 저장한 마법은 초기화 된다고 해요. 그점 유념 하세요.” 성능을 떠나서, 영광의 목걸이는 겉보기에는 수수해도 계속 시선을 두면 확실히 매력이 있는 물품 이었다. 하연은 테이블 위에 놓인 아름다운 빛깔을 번들거리는 목걸이를 물끄럼한 얼굴로 바라 보았다. 계속 보고만 있길래 내가 한번 더 재촉하자 그때서야 그녀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목걸이를 쥐었다. 곧이어 하연이 그것을 목에 거는 순간 차릉, 깨끗한 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한동안 목걸이를 매만지던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수현. 이 목걸이는 너무 부담 스러워요. 하지만 수현의 성의를 생각해 받을게요. 그리고…지금 저만큼 이 목걸이의 효율을 뽑아낼 일행도 없으니까요.” 평소 하연은 언제나 내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 넘기며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며 띄엄띄엄 말을 잇고 있었다. 문득 짚이는 바가 있어 나는 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큭. 좋으면서 그러시네요.” 웃는 얼굴로 농담을 건네자 그녀 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하연의 귓볼이 아주 살짝 발갛게 변한걸 확실히 볼 수 있었다. “후훗. 그래요. 솔직히 기분 좋아요. 이 물품을 얻어서 기분 좋고, 수현이 나를 프리로 돌린것도 기분 좋아요. 그리고….” 잠시 무언가 더 말을 하려던 하연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윽고 그녀는 애틋한 시선을 보내며 말을 매듭 지었다. “소중히 사용할게요. 아 그리고…오늘 하루만 쉬어도 될까요? 몸이 너무 안 좋아요. 아 물론 어제는 그…아, 아무튼 상태가 너무 별로에요.” 몸의 회복은 중요하다. 그렇기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 였다. 그동안 그녀를 보아온 행동을 토대로 보면, 하연이 저렇게 말한다는건 정말로 몸이 안 좋다는 소리 였다. 그녀는 나처럼 힘들어도 억지로 끌고 가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최선의 몸 상태로 오더에 임하고 싶다는 그녀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앞으로 하연은 프리에요. 무리하지 말고, 쉬고 싶으면 쉬어요.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요.” “그건 수현한테 하고 싶은 말 이에요. 너무 혼자서만 하려고 하지 말고 조금 나누어요.” 그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뿐 이었다. 그런 나를 보며 살짝 웃은 하연은 위층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안솔양의 지도는 할게요. 어차피 같은 방을 쓰는만큼 겸사겸사….” “음….” 같은 방이라. 조금 불편한 감이 있을텐데 괜찮을까? 아니면 하연도 따로 방을 하나 잡아줄까. 내가 고민하는 기색을 눈치 챘는지 하연은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무 심려 마세요. 본 심성은 착한 애들 이에요. 다만 수현을 너무 좋아할 뿐.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런 극단적인 일들은 일어나지 않을 거에요.” “그래요. 나는 애들을 믿어요. 그래도 혹시 힘들면 곧바로 얘기해 주세요. 제가 따끔하게 야단칠 테니까.” 나름 생각해준 말 이었지만, 하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절대로 그러지 마세요.” “그래도….” “수현은 여자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아무튼 여자들은 여자들만의 세계가 있어요. 그리고 이것 또한 제가 감내할 일들 이에요. 또한 스스로 해결할 문제이기도 하죠. 그러니 저를 조금만 더 믿어 줘요. 그게 저를 도와주는 거에요.” 그녀의 말투는 낮았지만 또한 단호 했다. 그리고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딱히 뭐라고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고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 였다. 내 생각에도 안솔은 그럴 애가 아니었다. 유정이 조금 걱정 되기는 하지만 처음 둘의 사이는 괜찮았다. 그리고 하연이 연장자인 만큼 비비앙처럼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휴. 그렇게까지 말씀 하신다면 뭐, 알겠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이만 일어나도록 해요. 그리고 오늘 밤에 제 업무실로 오시구요.” “네. 벌써부터 설레이네요. 기대 하고 있을게요.” 분명 예전의 나라면 그녀가 내가 창설한 클랜에 대한 설명을 기대한다고 해석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와 몸을 섞은 후, 나는 잠시 동안이지만 하연이 말한 기대를 다른쪽으로 해석하고 말았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팔을 내밀었다. “아직 아프시면, 도와 드릴게요. 같이 올라가요.” 하연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인 후 내가 내민 손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그렇게 우리들은 서로 몸을 기댄채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역시 목표를 가지고 살아 간다는것은 행복한 일인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 힘들게 돌아다니긴 했지만 그래도 연신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지를 않네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취미 생활을 한다는건 정말 행복한 일인것 같아요. 행복은 사람이 생각하기 나름이래요. 많이 어렵기는 하지만, 저는 하루하루 행복할 수 있도록 언제나 노력 하겠습니다. 독자분들도 항상 평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PS. 오늘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기침 소리가 많이 들리더군요. 요즘 감기가 유행이라고 합니다. 독자분들 모두 건강 꼭 챙기세요! 아프지 마시구요~. 『 리리플 』 1. 휘을 : 이럴수가. 첫코를 위해 그런 열정을 보이시다니. 하하하. 축하 드립니다! 네. 고연주도 나름 사연 있는 캐릭터에요. 과연 인공이는 고연주를 죽일까요, 살릴까요? 한가지 힌트를 드리면, 인공이는 뮬을 떠날때 위 두 사항중 분명히 한가지 사항을 선택할 예정 입니다. 고연주는 풀어두기에는 너무 위험한 사용자 거든요. :) 2. hohokoya1 : 하하. 고연주도 상당히 인기가 많네요. 요즘들어 솔이 인기가 많이 떨어진듯한 느낌이. -_-a 3. wnstngndk : 주인공보다 센 캐릭터라기 보다는, 주인공을 이길 가능성이 있는 캐릭터로 보시는게 옳을것 같습니다. 물론 <일정 부분>에서 주인공보다 센 사용자는 있습니다. 4. 독서의즐거움 : 음. 뭐라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너무 씁쓸해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한가지 말씀 드리면, 한소영은 수현이 사랑한 여성은 맞습니다. 여러 부분이 있지만, 그 사랑은 동경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5. GradeRown : 홀 플레인에서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모여 클랜을 만들고, 클랜이 모여 연합을 만든다. 같은 클랜 로드의 위치에 있더라도 두 사용자의 만남이 어색하지는 않을 겁니다. :) 6. 햇님사랑 : 홀 플레인에서 만든 겁니다. 다음회에 약간의 설명이 나올 예정 입니다. 능력치로 인한 시력 상승은 매우 미미한 부분 입니다. 아마 그랬다면 지금껏 수현이 시각을 돋우려 마력을 끌어 올리지 않아도 되었겠지요. :) 7. 고간 : 후후. 과연 둘의 비밀스러운 관계는 들키지 않고 유지될 수 있을까요? 8. 불곰리즈 : 고맙습니다. 에헴. 저는 이제 고자가 아닙니다. 후후. 쿠폰 감사 합니다. (__) 9. 참형(斬刑) : 헐. 기쁜 코멘트 입니다. 하하하. 앞으로 코멘트 자주 남겨 주세요~. 10. 홍승식 : 아마 중간 중간 날짜 흐름들이 명시된 부분만 따르면 홍승식 님이 말씀이 맞지만, 중간에 날짜의 흐름을 집어 넣지 않은 경우가 몇번 있습니다. 그 부분들을 포함해 황금 사자 클랜의 원정과 맞췄습니다. 일단 설정에는 그렇게 되어 있는데, 혹시 모르니 추후에 한번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11. 쿤라이 : 1회차에 형을 만난건 훨씬 더 후의 일 입니다. 만난 순서는 형 → 한소영 → 형 죽음 → 한소영 죽음. 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뮬 이후 몇개의 파트가 더 지나야 을 먼저 만날 예정 입니다. 하하하.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18 / 0933 ---------------------------------------------- Interesting 하연은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그녀를 문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현대에 있을때는 여성과 하룻밤을 보내면, 아침에 같이 일어나고 밥을 먹는 경우가 많았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하는데 아무 말도 없이 훌쩍 가버리는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 했기 때문 이었다. 물론 그때는 아직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 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하연한테 보여줄 수 있는 행동은 이런것들 밖에 없었다. 그녀를 방 안으로 들여보낸 후 나는 업무용으로 사용할 특실의 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막 문고리에 손을 대려는 순간 벌컥 문이 먼저 열리고 말았다. “앗, 리더.” 안경을 쓴 눈 앞에 있는 남성 사용자는 바로 신상용 이었다. 그는 조금 상기된 얼굴 이었는데 문 앞에 선 나를 보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구경은 다 끝났나요?” “아, 아니요. 하하. 스승님 명으로 잠시 가져올게 있습니다.” “아…그렇군요.” “네. 그, 그럼 얘기들 나누세요.” 어지간히 급한 일인지 신상용은 고개를 숙이고 내 옆을 그대로 지나쳤다. 도대체 안에서 무슨 말들을 했길래 항상 조용한 신상용이 저러는지 사뭇 궁금증이 일었다. 호기심을 안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 방 안을 둘러보며 고개를 주억이는 비비앙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들어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김수현?” “응.” “얘기는 다 끝났어?” “그래…그나저나 방 보니까 어때. 공방으로 개조 가능 하겠어? 물론 철거는 염두에 두고. 엄한 여관에 피해를 입힐 수는 없으니까.” “음….” 비비앙은 내 물음에 신음성을 흘리더니, 살살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저러나 싶어 미간을 좁히자 그녀는 품 안으로 손을 넣어 길죽한 다리가 달린 물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윽고 그 기다란 물건을 얼굴에 쓰는 비비앙을 보며 나는 어벙벙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너…그건 뭐야.” “엉? 이거 몰라? 신상용 말대로라면 안경 이라고 하던데.” “안경이라고? 농담 하지마.”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자부심이 가득찬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래. 그런데 그걸 네가 어떻게 가지고 있어.” “어떻게라니. 내가 무슨 직업인지 잊었어? 이렇게 간단한 물건 정도는 눈 감고도 만들 수 있어. 어, 어때?” 확실히 현대에 쓰던 물품들중 일부는 홀 플레인 내부에서 구현 할 수 있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 비비앙이 쓰고 있는건 솔직히 안경이라고 보기에 민망한 점들이 많았다. 내 표정이 이상한걸 느꼈는지 비비앙은 볼을 퉁퉁 불리며 입을 열었다. “흥. 이 안경이 뭐 어때서. 잘 어울리잖아.” “누가 뭐래. 그런데 고작 어울리다는 이유로 쓸데 없는걸 만드냐. 애도 아니고.” 내 비난에 비비앙은 발끈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어차피 몸에 해가 되는건 없잖아. 연금술사는 원래 호기심이 왕성하거든?” “코쟁이 같아. 안 어울려.” “남이사!” 비비앙은 빽 소리를 지르더니 일그러진 얼굴로 안경을 거칠게 내렸다. 그러고도 한동안 씩씩 숨을 몰아 쉬더니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얘가 지금 반항 하는 건가? “…휴. 아무튼 얘기나 먼저 해봐. 도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고 공방을 만들라고 그래?” 오랜만에 기나 좀 잡을까 고민하던 도중 비비앙의 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 또한 지금 중요한건 안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순순히 품 속에 손을 넣어 두개의 물건을 꺼냈다. 그리고, 내가 꺼낸 물건을 확인한 순간 비비앙의 눈동자가 빛나는걸 볼 수 있었다. “김수현. 이건….” 확실히 연금술사로서의 비비앙의 눈썰미는 쓸만 했다. 그녀는 내가 꺼낸 두개의 물건을 보자마자 침을 꼴깍 삼켰다. 나는 두개의 물품을 차례로 들어 보이며 설명 했다. “그래. 하나는 연구소에서 만났던 벨페고르의 몸에서 적출한 마족의 심장. 하나는 네 몸 내부의 중추 역할을 하던 일종의 영단. 그러고보니…신상용씨가 없군.” “필요한게 있어서 가지고 오라고 했…김수현. 너 설마….”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하던 비비앙은 신상용을 떠올리자 짚이는 바가 있는지 중간에 말을 바꿨다. 긍정의 의미로 한번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경악한 표정을 드러내고는 이내 눈을 감아 순식간에 자신만의 세상으로 빠져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비비앙을 가만히 기다렸다. 원래 마법사 또는 연금술사들은 직업상 저런 경우가 많다. 내가 대화 상대로 두 직업을 선호하는 이유도 딱히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이 척 하면 알아 듣기 때문 이었다. 물론 한 없이 삼천포로 빠지면 곤란하지만 나는 일단 묵묵히 그녀의 입이 열리는걸 기다리기로 했다. 비비앙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입을 빠르게 오물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하는 혼잣말들을 듣기 위해 나는 더욱 귀를 기울였다. “…확실히 가능성은 있어. 하지만 마족의 심장은 너무 마기가 강하잖아…아. 저번처럼 김수현이 정화시킬 수 있다면 얘기는 달라지지. 그래. 음. 그럴 수 있어. 내것의 격이 조금 떨어지는건 맞아.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마력의 흐름을 거친 만큼 단순한 마나석이라 보기는 어려워. 그리고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격은 의미가 없어지고. 그런데 그러면 효율이 매우 떨어질 텐데. 그렇지. 그래서 신상용이 필요한거야. 두 문제는 조화의 마방진인가 뭔가하는 걸로 한방에 해결할 가능성이…그래. 아주 가능성이 없는건 아닌데….” 머리가 복잡해지는지 비비앙의 미간은 점점 더 좁아지고 있었다. 심각한 얼굴로 빠르게 웅얼거리던 그녀는, 이윽고 감았던 눈을 뜨며 내게 말을 걸었다. “신상용의 조화의 마방진을 통해 그것들을 공정하고 싶은 거지?” “그래. 정답이다.” “확실히…아우, 확실히라고 말하기는 조금 그렇네. 아 근데 정말 애매하다.” “한번 해보자고. 실패해도 탓하지 않을 테니까.” 내 말에 비비앙은 자존심이 상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더니 자신의 가냘픈 손가락으로 입술을 톡톡 건드리며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김수현. 아무래도 공방 건설은 보류하는게 더 나을것 같아.” “응? 아니…왜?” 그녀의 거부는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라 내심 당황스러웠다. 내 반응을 본 비비앙은 한숨을 내쉬고는 차분히 설명을 시작 했다. “하지 말자는게 아니라 보류하고 싶다는 소리야. 간단히 말해서 이곳은 너무 열악해. 간단한 포션 한두개라면 몰라도 그정도의 재료로,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공정 과정은 이곳에서 실현할 수 없어. 아니 굳이 하자고 하면 할 수는 있겠지. 그런데 그러면 최대치 가능성이 너무 떨어져. 아니 그러니까…가능성은 인정해. 말이 조금 두서 없기는 했는데 지금 조금 혼란스럽네. 아무튼 개인적으로 지금 하고 싶지는 않아. 급하게 필요한것도 아니잖아.” “그말인즉슨…재료가 아깝다는 소리야?” 내 물음에 비비앙은 엄숙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물론 일말의 가능성을 현실에 구현하기 위해 연금술사들은 언제나 불가능에 도전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재료를 따지지 않았을 때 얘기거든. 그정도로 높은 가능성과 질 좋은 재료를 고작 이런 여관에서 사용하는건 너무 아까워. 전문적으로 만든 공방에서 해도 애매 한데…. 그러니 어느정도 설비를 갖추게 되고 재료를 더욱 포함해 공정 하면 지금보다 가능성을 비약적으로 높일 수 있어.” “으음….” “이 모든 악조건을 안고서라도 강행한다면, 나는 따르겠어. 하지만 그전에 연금술사 비비앙의 의견을 구한다면 나는 지금은 보류하고 싶어. 한번만 내 말을 들어.” 비비앙의 말은 예전과는 다르게 논리가 정연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하는게 문제가 아니라, 가능성의 문제라는 소리 였다. 그래도 하라고 명령 하면 군말없이 한다고 하니 딱히 할 말도 없었다. 나는 그대로 입맛을 다시고 마음을 정했다. “하긴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으니.” “처음 듣지만, 좋은 말이야. 잘 선택 했어. 호호.” 자기 말을 들어주었다는 사실이 기뻤는지 비비앙은 예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는 미소를 흘리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그녀를 보면 가면 갈수록 예전의 성격이 사라지고 있었다. 물론 앞으로의 일을 보면 나쁜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드는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두 물품을 다시 품 속으로 집어 넣었다. 생각해보니 체력 능력치 포인트에 눈이 멀어 내가 조금 다급한 면도 없잖아 있었다. 그런 내 행동을 기특하다는듯 보는 비비앙의 얼굴을 보며, 나는 의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평소의 비비앙 답지 않은걸. 의심스러울 정도야.” 내 의심에 비비앙은 콧방귀를 뀌고는 피식 웃었다. 그 모습을 보자 왠지 모르게 열이 받았다. 분명 열 받을 상황은 아닌데, 이상하게 화가 나는 기분이 들었다. 비비앙은 한숨을 폭 쉬고는 깐족이는 목소리로 나불거렸다. “에휴~김수현. 내 이름은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지금은 멸망하기는 했지만 한때는 그 이름에 긍지 높은 자부심을 갖고 살았다구. 인간으로 돌아온 이상 나는 예전의 이성을 회복하고 있어. 그러니 예전과 같이 유치하게 굴거라고 생각하면 곤란해. 그때의 일은 내가 생각해도 창피하거든. 그리고 내가 인간의 나이로 따지면 24살 이거든? 아무튼 나이에 맞는 대접을 해줬으면 좋겠어.” 그녀는 이 모든 말을 차분하게 나에게 설명했다. 그러나 어조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후, 나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을 들었다. 제법 위협적인 자세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비비앙은 그저 코웃음으로 일관 했다. “풋. 이제 그런 행동 그만해. 언제까지 애들이랑 나를 똑같이 볼 생각이니? 나도 나름 실력 있는 연금술사 였다고. 네가 아무리 그래도….” 그녀의 말을 듣던 도중 나는 화정의 힘을 손 위로 끌어 올렸다. 이윽고 불이 일렁이는 소리와 동시에 내 손에 피어오르는 맑은 불꽃을 보자, 비비앙은 잠깐 말을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나는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화정을 일으킨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공포감이 맺혔다는 것을. “…내가 눈 하나 깜빡 할 줄 알아?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내가 예전에는 얼마나….” 그녀가 마음껏 지껄이는걸 방관하며 나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흐앗?” “딱!” 소리가 방 안을 울리고 비비앙의 머리카락에 염화가 달라 붙는다. 물론 정말로 그녀를 해할 의도는 담지 않았다. 신화계급 권능인 만큼 의지를 담고 거두는 과정은 조절이 가능 했다. 말 그대로 머리에 불이 붙었을 뿐 이었지만, 비비앙이 그 사실을 알리 만무 했다. “꺄악! 꺄아악! 꺄아아악! 진짜 했어! 진짜 했다고! 꺄아아아악!”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방 안을 이리 저리 뛰어 다녔다. 침대에 머리를 비비기도 하고, 그대로 폴짝폴짝 뛰어 오른다. 단 한순간에 이지적인 태도를 버리고 꿈틀 춤을 추는 비비앙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반응은 즉각 튀어 나왔다. “흐에엥. 하지마아…괴롭히지마아…어엉….” “흠…난 또. 비비앙이 맞구나. 다른 사람인줄 알았네.”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린 후 다시 손가락을 튕겨 그녀에 머리에 붙은 화정의 불길을 꺼뜨렸다. 그러자 불침 맞은 동물처럼 후다닥 자신의 머리카락을 확인한 비비앙은 고스란히 보존 되어 있는 자신의 칠흑빛 머리칼들을 보며 이를 북북 갈았다. “너어어…! 이게 무슨 짓이야! 아니, 그전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 도플 갱어인줄 알았지. 그래서 몬스터 였으면 잡으려고….” “야! 그걸 변명이라고 하니! 이 천하의 나쁜 자식아! 내가 도대체 뭘 잘 못 했는데! 자꾸 이런식으로 나오면 나 또한…!” “호오.” 그녀의 발악에 나는 항상 고이 간직하고 있던 계약서를 꺼내 살랑살랑 흔들었다. 계약서를 보는 순간 비비앙은 말을 멈췄고, 기가 막히다는 얼굴이 되었다. 한동안 할말을 잃은 얼굴로 나를 보던 비비앙은 곧이어 울먹울먹한 눈망울을 내비치더니 이내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입술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눈동자는 울려고 하고, 입은 웃는다. 조금 안쓰러운건 사실 이었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되게 웃긴게 사실 이었다. 나는 잠시 튀어 나오려던 웃음을 참은 후 간신히 가다듬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또한…뭐?” “으, 응? 내…가 뭐~얼?” “천하의…뭐?” “나쁜 자식 이라고 했던가.” 라고 말을 흘리자 비비앙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게 보였다. 그녀는 잠시 심호흡을 했지만 이내 눈동자 위로 가득히 차오르는 물을 참을 수 없는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웃었다. “호호…호호호…호호호호. 내, 내가 잠시 돌…흑, 았었…흑, 나…흑, 봐으…호호…호…허엉…허어엉….” 결국 끝에 가서는 복받치는 설움을 참지 못했는지, 억지로 미소를 짓던 비비앙은 기어코 울음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내 큰 소리로 엉엉 우는 비비앙을 보며 나는 재빨리 달래기 시작 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오늘 독자 한분에게 표지를 받았습니다. 보고나서 이 엄청난 퀼리티에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하하하. 설마 저도 독자분들이 팬아트겸 그리신걸 받을줄은 꿈에도 몰랐거든요. 특히 이정도의 능력자 분들이 계신지 처음 알았습니다. 기분이 정말 좋네요. 익명의 표지를 그려 주신 분, 정말 고맙습니다. :) 그동안 고생들 많이 한만큼 도시에 있을때 만큼은 어느정도 분위기를 가볍게 해보려고 합니다. 이번회는 쓰면서도 비비앙에게 미안하고, 주인공을 너무 밉게 써놨네요. 하하하.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다들 좋은 하루 보내세요. PS. 아. 오늘 자정 연재 늦어서 죄송 합니다. ㅜ.ㅠ 『 리리플 』 1. 쿠로시온 : 코멘트를 보고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ㅋㅋㅋㅋ 1등 축하 드립니다. 2. 아트락시아 : 원래는 조금 일찍 공개할까 싶었는데, 현재는 차후로 미뤄둔 상태 입니다. 하연이 때문에요. 3. 괴물물리치자 : 공개하지 않은 설정이기는 합니다만, 사용자와 거주민의 업적은 서로 기준이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주민들은 홀 플레인의 축복(설정)을 받을 수 없거든요.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시면 됩니다. 4. GradeRown : 단순히 창술 교본에 불과 합니다. 기공창술사 전용인 만큼 직업을 가진 사용자가 익혀야지만 효율을 뽑아낼 수 있습니다. 5. hgkdrgv : ㅋㅋㅋㅋ 보고 저도 미소가 지어졌네요. 정말 그렇네요. 아빠와 애들, 그리고 새엄마. 푸하하핰ㅋㅋㅋㅋ. 6. 천겁혈신천무존 : 고맙 습니다! 아직은 그래도 할만하지만 다음주부터는 어떻게 될줄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말 없이 사라지지는 않을게요~. :) 7. 마황염제 : 생일 축하 드립니다. 그리고 연참은 죄송 해요. ㅜ.ㅠ 오늘은 1회도 겨우 완성한터라, 도저히 2편 쓸 시간이 나지 않았네요. ㅜ.ㅠ 8. 성십자 : ㅋㅋㅋㅋ 물론 그녀를 만날 생각이긴 합니다. 저도 얼른 한별이를 다시 만나고 싶네요. 물론 그녀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9. 가한나 : 음 30개라. 그럼 330KB로군요. 음. 음. 음…. 10. 저녁노을로 : 쿠폰 감사 합니다. 하하하. 클랜 창설 후 새로 영입할 멤버는 이미 계획을 세워논 상태 입니다. 저 또한 설레이네요.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19 / 0933 ---------------------------------------------- 평화로운 일상 재빨리 달려들어 그녀를 달랬지만, 그녀는 결국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를 달래는데 의미 없는 시간을 소비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내 잘못이기는 하지만 비비앙은 거의 한시간이 넘도록 나를 붙잡고 하소연을 했다. “내가 뭘 잘못 했는데에…왜 자꾸 나만 갖고 그래…어엉….” “나 정말 열심히 하려고 했어…그렇게 마음 먹었는데…내가 애들처럼 돌봐달라 했냐고오…! 그냥 상냥하게 대해주면 만족하는데 왜 자꾸 못살게 구는거야…으엉….” 나는 그녀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빼야만 했다. 중간에 들어온 신상용이 내 품에 안긴채 서럽게 울어 재끼는 비비앙, 그리고 그녀를 안고 우쭈쭈 하는 나를 발견하는 사소한 헤프닝도 있었다.(참고로 신상용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문을 닫아 버렸다.) “김수현. 나 싫어 하는거야? 아니지? 응?” “그럼. 내가 비비앙을 얼마나 든든하게 생각 하는데.” “흑…어엉….” 흐끅이며 물어오는 비비앙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솔직한 속마음은 아니었다. 응. 너만 보면 괴롭히고, 울리고 싶어 지거든. 그러니까 앞으로 자주 이럴테니 마음 단단히 먹어. 나를 위해 많이 울어 주렴. “…….” 하지만 이렇게 말할수는 없는 노릇 이었다. 때문에 간신히 그녀의 눈물을 닦아준 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조신한 숙녀> 여관을 나섰다. 또다시 한숨이 푹푹 나온다. 어쩌다 김수현이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 애들과 함께 지내며 내면이 영향을 받는 걸까? 스스로 아니라고 생각해도 가면 갈수록 변태가 되가는 자신을 부정할 수 없을것 같았다. 아무튼 그런 생각들은 잠시 깨끗이 비우고, 나는 빠른 걸음으로 뮬의 거리를 통과해 광장을 넘었다. 오늘 들릴 장소는 보석상. 나는 눈 앞에 보이는 상점들이 몰린 거리 안으로 진입 했다. 일단 오늘 아침 간단히 다녀올 상점은 보석상 한곳 이었다. 앞으로 뮬에서 해결할 일들은 돈도 만만치 않게 드는 일 들이다. 그런만큼 나 또한 어느정도 자금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시간은 넉넉한 편이다. 그러나 앞으로 있는 시간이 많다고 해도 늦장을 부리는건 내 성미상 있을 수 없는 일 이었다. 일은 되도록 빠르게 해치우게 나중에 여유를 가지는게 좋다고 생각 하니까. 다만 일을 해결한 후 또 일을 찾는다는게 문제 지만. 원래 개척 도시는 항상 일정 수 이상의 사용자의 거주를 보장한다. 개척 도시가 이렇게 한산한건 정말로 드문 일 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그만큼 황금 사자 클랜의 강철 산맥 진군 계획이 각광을 받고 있다는 증거 였다. 아마도 바바라는 지금 여관에 자리가 없음은 물론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이고 있을 것이다. 물론 성공하면 대박이다. 남부 도시와 아틀란타를 잇는 안전한 통로 하나만 확보한다면 쏟아져 들어올 이득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내가 직접 강철 산맥 원정에 참여한 만큼 나는 참가에 대한 일말의 미련도 없었다. 장담하는데, 원정대는 강철 산맥으로 들어간 후 이틀만에 전력의 1/4 이상을 소실할 것이다. 그리고 그 피해를 입고도 무리하게 원정에 들어가 결국 5일도 안되 말 그대로 개박살이 나고 소수 사용자들만 거지꼴로 돌아오는걸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 했다. 현실을 정확히 판단하고 미래를 내다본 클랜들은 그때부터 비상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차분히 힘을 비축하고 있었을테니까. 아마 절규의 동굴에서 돌아올 때 즈음이면 많은것들이 바뀌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로 내가 가장 쉽게 생각하는 동굴을 마지막으로 놔둔것이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는 동안 나는 간간이 캐러밴을 구하는 사용자들 몇명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을 그대로 지나치자 어느새 상점가가 밀집한 지역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나는 내 양 옆으로 복잡하게 얽힌 상점들을 천천히 둘러 보았다. 아마 처음 오는 사용자라면 틀림 없이 어디가 어딘지 헤맬게 분명했다. 개척 도시인 만큼 아직 틀이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나조 조금 아리까리 했지만, 이내 기억을 더듬어 내가 목표한 보석상을 찾을 수 있었다. “영감님은 잘 있으려나.” 들어가기전 나는 연초를 한대 피우고 들어 가려다가 이내 손을 털었다. 내가 알고 있는 영감님은 담배 냄새를 싫어한다. 나는 입맛을 다시고 상점 앞에서 간판으로 고개를 올렸다. 그리고 단순한 이름이 써진 검은색 글씨가 눈에 들었다. <영감님 보석상>. 몇번을 봐도 고약한 네이밍 센스라고 생각하며 보석상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보석상 안에는, 보석 하나를 들고 한창 이리저리 둘러보는 사용자 한명을 볼 수 있었다. 하얗게 샌 머리카락과 주름진 얼굴들. 지구로 돌아가면 호랑이 할아버지로 불릴만한 딱 그런 사람 이었다. 나는 슬며시 호기심이 일어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이만성(6년차) 2. 클래스(Class) : 보석 감정사(Rare : Jewel Certified Public Appraiser)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은둔을 원하는 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67) 7. 신장 · 체중 : 173.7cm · 51.2kg 8. 성향 : 중립 · 온건(Neutral · Moderation) [근력 18] [내구 26] [민첩 34] [체력 28] [마력 86] [행운 78] < 업적(0) > < 고유 능력(1/1) > 1. 가치를 탐구하는 자(Value Seeker)(Rank : B Plus) < 특수 능력(1/1) > 1. 보석 세공술(Rank : A Plus) < 잠재 능력(3/3) > 1. 정통 마법(Rank : B Zero) 2. 질속 영창(Rank : D Plus) 3. 물품 감정술(Rank : C Plus) 레어 클래스. 뭔가 애매한 능력치 였다. 하지만 나는 진명을 보고 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확실히 어느정도 나이를 잡수신 만큼 별 욕심이 없는 사람 이었다. 어느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는 그냥 소도시에서 이런 소소한 생활을 하며 삶을 마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정도의 실력이면 아주 들어갈 데가 없는건 아닐텐데. 특히 고유 능력 가치를 탐구하는 자는 전투 계열 능력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현재 그의 직업과 상성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걸로 기억한다. 이만성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보석을 보다가, 내가 가만히 서 있자 비로소 주름진 입을 열었다. “…손님으로 온건가?” “네.” “왔으면 얘기를 하던가. 뭐 그리 가만히 서 있누.” “집중하고 계신것 같아 차마 말을 걸기 어려웠습니다.” “흠.” 그는 내 대답에 들고 있던 보석을 가만히 놓고는 몸을 돌려 앉았다. 가만히 나를 응시하던 이만성은 이윽고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하며 내게 말했다. “흠흠. 오랜만에 보는…아무튼 이리와 앉게.” “감사 합니다.” 나는 확실히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힘을 남용할 생각은 없다. 아직 홀 플레인의 세상은 나를 0년차 사용자로 보고 있었고, 나는 그에 맞게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눈 앞의 노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도 하등 나쁠건 없었다. “그래. 보석을 사러 온건가, 아니면 판매하러 온건가.” 이 영감님은 장황하게 말하는걸 싫어한다. 그렇다면. “보석 판매 입니다. 보석의 종류는 루비 하나고, 갯수는 총 8개 입니다.” “좋아. 꺼내보게.” 사용자 이만성은 다른 사용자들 사이에서는 평이 좋지 않았다. 꼬장꼬장한 성격도 한 몫 했지만 언제나 칼 같은 보석 감정으로 흥정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높게 받으려는 사용자들은 다들 예외 없이 쓴소리를 들었고, 흥정 요구를 거절 당했다. 가끔 성미 급한 사용자들이 덤비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만성은 마법사 사용자의 능력치가 절대 녹록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와는 나름 꿍짝이 잘 맞는 영감 이었다. 쓸데없는 얘기로 시간 끄는걸 싫어하고, 언제나 빠르고 정확하게 보석을 감정해준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용자들은 그래서 이 보석상을 자주 찾곤 했다. 그래도 아주 차가운 성격은 아니라서 자신의 마음에 들거나 단골 손님들은 알게 모르게 보석 가격을 조금이라도 더 쳐주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나는 얼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보석을 넣은 주머니를 꺼내 그의 앞에 놓았다. 그가 곧바로 보석 주머니를 거꾸로 쏟자, 차르르 소리와 동시에 붉은 빛을 번들거리는 루비 8개가 그의 앞으로 흘러 내렸다. 폐허의 연구소 1층에서 발견 했던 보석들 이었다. 그는 익숙한듯 거침 없는 손길로 가까이 있는 루비 하나를 손으로 집어 살폈다. 이리저리 돌리며 전체적으로 훓고, 손으로 톡톡 두들긴다. 그러나 나는 그의 눈에서 마력 연산이 일어난걸 볼 수 있었다. 아마도 고유 능력의 발현 이겠지. 그는 가치를 탐구하는 자(Value Seeker)로 다른 루비들 또한 동일한 과정으로 하나씩 들어 보았다. 감정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5분만에 8개 전부를 감정한 그는, 일렬로 보석을 죽 늘어논 다음 하나씩 손으로 짚으며 입을 열었다. “맨 왼쪽부터 차례대로. 108 골드, 112골드, 102골드, 117골드, 136골드, 122골드, 147골드, 101골드. 도합 945 골드. 참고로 흥정은 받지 않네. 정확한 가격 이니까. 아무튼 이 가격에 팔 생각이 없으면 그대로 나가….” “좋습니다.” “…음?” 일말의 고민도 없는 즉답에 영감은 이채를 띄운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사용자들이 오해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보석을 대충 훓고 가격을 매기는것 같지만, 나 또한 애초에 이 보석들을 개당 100골드 내외로 추정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의 사용자 정보를 확인한 이상 눈 앞의 사용자는 보석에 관해서는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감정 실력을 갖고 있다고 봐도 무방 했다. 잠시 동안 내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 흥정 같은거 안하는가?” “아는 분께 소개를 받았습니다. 감정에 관해서 깊은 조예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 또한 장인의 자부심을 믿습니다.” “그렇게 좋게 대해준 사람이 별로 없는데, 별난 놈 이로군. 자네나, 자네한테 그 얘기를 해준 놈이나.” “하하.” 말은 퉁명스럽게 해도 그는 입에 연한 미소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웃는걸 보면서 헛기침을 연발 했다. “큼큼! 어디서 이런것들을 구했는지는 모르겠네…. 허나 원래 나는 이정도 보석들은 왠만해서는 100골드 이상을 준게 드물어. 그래도 다들 질이 좋고 알도 굵어. 간간히 빛깔이 맑은 놈들도 보이고…오랜 세월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흩어지지 않은 마력의 순도가 높군. 집약성이 높은, 마법사들이 좋아할 보석들이야.” “보석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생각 합니다.” 내가 어떤 의견도 달지 않고 순순히 동의 하자 영감은 별난 놈을 본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야 던전 탐험으로 보석을 길 가다 돌맹이 줍듯 해서 그럴지 몰라도 초보 사용자들이 몬스터를 상대로 보석을 줍는건 나름대로 행운 이었다. 특히 초반에 삶이 쪼들리는 사용자 일수록 어떻게든 높은 가격에 팔려고 흥정을 시도 한다. 그러나 나 또한 별일 인건 마찬가지였다. 1회차에 이곳에 들르면 항상 보석 주고, 돈 받고 나가는 경우가 잦았다. 가끔 주머니가 예상보다 묵직하면 오늘은 조금 더 넣어 줬구나 생각할 뿐 이었다. 나도 그도 따로 말을 한적은 거의 없었는데, 이만성이 그것도 처음 보는 사용자한테 먼저 입을 열었다는건 확실히 드문 일 이었다. 예의를 갖춘 내 대답에 그는 차분한 손길로 서랍을 뒤적이고는 이내 주머니 하나를 내 앞으로 툭 던졌다. “1000골드 주머니일세. 개당 6~7골드 정도 더 쳐주도록 하지.” “엇. 그러실 필요는….” 내가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젓자, 이만성은 심드렁한 얼굴로 더욱 주머니를 내밀었다. 이 영감이 오늘 뭘 잘못 먹었나? “어차피 이번 한번뿐이야. 이정도의 질 좋은 보석을 구하는것도 쉬운건 아니고, 요새 손님들도 잘 안오니까. 다들 원정이다 뭐다 정신이 팔려서…쯧쯧. 그냥 가져가게. 그리고….” “고맙습니다.” 더이상 거절하면 예의가 아닐것 같아 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흘리며 주머니를 집었다. 끽해야 800골드 내외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200골드의 추가 수입을 벌었다. 클랜 창설 신청을 할때 어마어마한 돈이 든다는걸 생각하면 정말로 기분 좋은 일 이었다. 어차피 곧 GP를 사용해 돈을 추가로 가져올 생각은 있었지만, 공돈은 공돈 이니까. 이만성은 넙죽 주머니를 챙기는 나를 보며 한번 더 말을 이었다. “…자주 오게. 저기 건너편으로 가지는 말고. 그곳 보다는 내가 더 나을걸세.” “여부가 있나요.” “흥. 볼일 다 봤으면 그만 나가봐.” 그는 선선한 내 대답에 콧방귀를 뀌고는 다시 보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설마 지금 부끄러워 하고 있는건가. 나는 처음 보는 그의 신선한 모습에 키득 웃고는 보석상을 나섰다. 주머니가 묵직한게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신전으로 갈 차례였다. 탐험 보고를 하고, 증명을 받아야 실적으로 인정이 되니까. 그리고…아마도 지금쯤이면 세라프의 호출이 한번정도 들어왔을 때 였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실은 오늘 12시에 올리지 못한 이유가, 잠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11시 40분쯤에 한편 완성은 했는데, 너무 힘이 들어서 잠시 눕고 싶었습니다. 설마 잠이 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저는 항상 잠을 자면 1시간~2시간을 뒤척이거든요. 그런데 눕고 잠깐 눈을 감았는데, 일어나니 아침 6시 더군요. 순간 헉 하는 생각에 후다닥 일어나 컴퓨터를…. ㅜ.ㅠ 오늘 자정에 기다리신 분들한테는 죄송 합니다. 사죄의 의미로 오늘 연참을 올리니 부디 양해 부탁 드립니다. :) 그럼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저는 이만 나가 볼게요! 여러분들 모두 파이팅~! PS. 과연 사용자 이만성은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요? 하하하. 『 리리플 』 1. 꼬야 : 1등 축하 드립니다! 6시에 1등을 하시다니 엄청 놀랐습니다. 하하하. 2. 천겁혈신천무존 : 후후. 과연 어떻게 될까요? 하연이라면 수현의 부인으로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퍽퍽. 3. 아클레오 : 아하하. 표지는 제 컴퓨터에 저장 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작품 설정으로 올려둘게요! 4. 파카사리 : 흠. 기간을 많이 잡은 만큼 어느정도 회수는 소비할것 같습니다. 이것저것 처리할 일들이 많고, 새로 등장할, 참가할 캐릭터들도 있거든요. 5. SanIkerJIN : 암 쏘 쏘리 벗 알러뷰. 죄송합니다. ㅜ.ㅠ 6. misoochensa : 전 나중에 한별이 나오고 인기 투표할때가 가장 기대 됩니다. 과연 누가 1등을 할지요. 크크크. 7. MT곰 : 곰? 곰곰곰? 곰곰곰곰곰! 곰곰곰, 곰곰곰?(곰 언어 입니다.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8. 단데크 : 이런! 여기 현기증 치료제가 있습니다! 어서 읽도록 하세요! ㅋㅋㅋㅋ 9. 천공의성 : 그쵸? 저도 표지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완전 잘 만드셨어요. :) 10. 잿빛나래 : 뜨끔. 뜨뜨끔. 수현의 정체성이 밝혀 졌습니다! 와! 11. 랜슬럿 듀 락 : Yes. 그럴 일은 절대로, 네버 없습니다.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20 / 0933 ---------------------------------------------- 평화로운 일상 신전 안으로 들어가자 나를 맞이한 사람은 저번에 비비앙과 왔을때 보았던 사용자들이 아니었다. “축복을 다루는 사용자분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사용자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사용자의 이름 그리고 방문 목적을 말씀해 주십시요.” 금빛 머리칼을 가지런히 정리한 선한 인상의 소유자인 신관이 점잖게 고개를 숙인다. 눈 앞의 남성은 사용자가 아닌, 거주민 이었다. 어차피 계약서를 이용하러 온게 아니라 탐험 보고를 하러 왔기 때문에 큰 불만은 없었다. 어떻게 보면 보고는 거주민들을 거치는게 더 나을수도 있었다. 사용자와 거주민은 일반적으로 귀족과 평민의 관계를 지닌다. 그러나 홀 플레인의 설정을 <도와주는> 거주민들 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렇게 <설정 도우미>로 선택된 거주민들의 숫자가 많은건 아니다. 그중 신전에 있는 거주민들은 사용자들과 거의 동등한 입장이라고 봐도 무방 했다. 그렇기에 나 또한 정중한 목소리로 화답 했다. “이름은 김수현. 0년차 사용자 입니다. 방문 목적은 탐험 보고 입니다.” “오. 사용자 김수현 이시군요. 일단 들어 오시지요.” 탐험의 보고 절차는 사용자 입장에서 보면 간단하다. 보고하는 사용자는 본인이 탐험한 내용을 간추려 문서에 기록하고 제출하면 된다. 그러면 신전에서 일하는 거주민들이 제출한 기록서를 먼저 읽고 부족하다 싶은 부분들을 질문한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나면 제출한 내용들을 토대로, 어디까지나 필요한 경우 조사단을 꾸리기도 한다. 대체로 조사단을 결성 하는 경우는 도시를 위협할 수 있는 일들일 경우, 사용자의 탐험이 실적으로 인정 받을 수 있을 경우 였다. 나는 눈 앞의 선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성에게 그동안 짬짬이 기록한 서류들을 건네 주었다. 공손한 손짓으로 서류를 받은 그는 이윽고 진중한 얼굴로 기록을 읽기 시작 했다. “흠.” 한동안 기록을 읽던 도중 거주민의 신음성이 들렸다. 시선을 돌리니 마침 그의 눈매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마 클랜 창설을 맡은 고압적인 거주민 놈들이라면 당장에 기록서를 던지고 소리부터 질렀을텐데 확실히 신전에 있는 거주민들은 침착한 면이 있었다. 그는 애매하다는듯 인상을 찡그리고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보고서는 굉장히 완성도가 높습니다…. 더 질문할 부분들은 없어요. 0년차 사용자 치고는 대단하지만…믿을 수 없군요.” 이윽고 모든 기록을 읽은듯 거주민은 조심스럽게 종이를 내려 놓았다. 그의 얼굴은 상당히 복잡해 보였다. 그도 그럴것이, 평소라면 당연히 조사단을 만들어 진상 파악을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만한 여력이 없었다. 당장 도시의 대표 클랜이 자리를 비울 정도인데 그렇다고 아무 보호도 없이 거주민 들로만 도시 밖으로 나가는건 요원한 일 이었다. “혹시 신전에서 조사단을 모은다면 해당 장소들로 우리들을 안내하실 수 있으신지요.” “힘듭니다. 정비 기간동안 처리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정비가 끝난 후 바로 다시 탐험에 나갈 예정이구요.” 내 단호한 거절에 그는 곤란한 표정을 짓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우리들이 다시 그 장소로 조사단을 안내할 의무는 없었다. “그러면 혹시 증거들을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오해는 하지 말아 주십시요. 너무 엄청난 기록들이고 현재 신전의 상황이 그렇게 좋은편이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다만 이 기록들이 사실이라면 필시 확인할 문제들 입니다. 그렇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조사단을 꾸리려면 우리들을 움직일만한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어려울건 없습니다. 어떤 증거를 원하시나요.” 거주민의 요청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증거를 보여주는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그들의 사정도 어느정도 이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증거를 꺼낼지 묻자, 다시 기록서를 잠깐 살핀 거주민은 두개의 증거를 요구 했다. “칠흑의 숲 안에 있는 던전에서 얻은 거미의 영단과 상급 마족 벨페고르의 심장 입니다.” 나는 곧바로 품에서 한손에 잡히는 구슬을 하나씩 꺼내었다. 탁한 마기가 흘러 넘치는 동그란 구슬 하나와 기이한 마력을 띠는 검푸른빛 구슬 하나. 그 물품들을 확인한 거주민은 곧바로 눈이 휘둥그래 변하고 말았다. 잠시 동안 꼼꼼히 그것들을 관찰하던 그는 전보다 훨씬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내 얼굴과 기록서 그리고 물품을 번갈아 보더니 입맛을 다시며 입을 열었다. “외람 되지만 그분들이 주신 권능을 사용해 사실 여부를 확인한 결과, 두 물품이 기록서에 적힌것과 일치한다는 판정이 났습니다. 이 모든 기록들이 인정되면 어마어마한 실적 증명이 되겠지만…아무래도 지금은 조사단을 꾸리기 힘든 상황 입니다.” “음. 2주 안에는 불가능 한가요? 방금전은 무리를 하신다고….” 내 말에 그는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2주는 절대로 무리 입니다. 아니. 사실대로 말씀 드리면 조사단 결성 조차 불투명한 상태 입니다. 현재 뮬의 상태로는 힘들고 그러면 인근 도시나 바바라에 요청을 해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지금 상황이 이런지라….” 거주민은 말 끝을 흐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이런일이 있을수도 있다고 생각은 하고 왔는지라 당황스러운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쉬운건 어쩔 수 없었다. 클랜을 창설하는것도 하고 싶다고 바로 되는게 아니다. 이 기록들이 증명이 되야 클랜을 창설할 때 실적으로 평가 받을 수 있는데, 지금 증명을 받지 못하면 결국 그만큼 시간이 더 지체 된다는 소리 였다. 내 표정이 딱딱히 굳자 거주민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며 내게 사죄를 구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희들의 사정을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솔직히 지금 여지껏 일반 탐험 보고는 거의 받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커다란 일이 너무 갑작스럽게, 그것도 둘이나 들어온 터라 시간은 배로 걸릴 겁니다. 더구나 고대 연금술사의 던전은 완전한 클리어를 하지 않은 만큼 저희들로만 나가는건 너무나 위험 합니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고는 일단은 할 수 있는만큼 하기로 했다. 안된다는 일을 억지로 시킬수도 없는 노릇 이었다. 무리를 한다고 해서 조금 기대 했는데, 무리를 하는게 다른 도시로의 지원 요청이라니. 나는 입맛을 다시고는 그의 말에 대답 했다. “휴…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대신 최대한 빠른 조사를 해주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상황이 풀리는 순간 이 두 던전의 조사를 최우선으로 삼겠습니다. 아, 그리고….” “거짓말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정도 규모의 기록서를 거짓으로 꾸몄다가는 어떤 페널티를 받을지 알고 있으니까요. 그럼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자, 잠시만요.” 더는 시간 낭비하기 싫어 그대로 몸을 일으키자 거주민은 다급한 음성으로 나를 붙잡았다. 나는 왜 잡느냐는 의도를 담아 그를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물론 그런 조항이 있기도 하고 조사도 확실히 할 생각 입니다. 그러나 이미 증거를 보여주신 만큼 사용자를 신뢰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아 네. 그러면 왜….” “원래 오늘 점심즈음 찾아뵐 생각 이었습니다만, 마침 좋은 때 방문해 주셨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의 축복을 도우는 분께서 신탁을 주셨습니다. 한번 소환의 방으로 들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다. 세라프가 나를 불렀다는 말에 고개를 한번 주억인 후 테이블 위에 놓인 물품들을 챙겨 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훌륭한 선택 입니다. 곧바로 소환의 방으로 갈 수 있는 포탈로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거주민은 말을 마친 후 나를 따라 일어나 기록서를 소중히 품에 넣었다. 이윽고 신전의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뒤를 따르며 나는 한명의 천사를 생각 했다. 오랜만에 보는 세라프였지만, 설레이거나 반가운 마음은 없었다. * 나는 통과 의례를 통과한 후, 홀 플레인으로 입장할 때 사용 했던 포탈로 몸을 들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푸른 바다빛이 눈 앞에 일렁이는게 보였다. 어떤 무형의 기운이 내 몸을 잡아 이끌고, 그대로 포탈을 뚫고 나오자 익숙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내 모든것이 시작된 소환(召喚)의 방. 이곳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앞으로 시선을 돌리자 낯설지 않은 제단이 있었다. 그리고 제단 위에는 투명한 날개를 살랑이는 아름다운 천사 한명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과 달빛을 내뿜는 머리카락. 아름다운 녹수정빛 눈동자를 가진 천사는 바로 세라프 였다. 그녀를 보는 순간, 나는 그나마 괜찮았던 기분이 땅 끝으로 추락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도 천사들을 싫어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이들은, 좋아할 수 없는 존재들 이었다. 세라프는 내가 입장한걸 확인 하고는 예의 고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용자 김수현. 오랜만 입니다. 그동안….” “할 말.” 나는 그녀의 안부 인사를 차가운 목소리로 단칼에 끊어 버렸다. 애초에 천사를 싫어하는것도 있지만, 1회차의 세라프와 지금의 세라프를 동일하게 여길 수 없었다. “…평안히 지내셨습니까.” 그녀는 매몰찬 대답에 잠시 입을 다물었지만, 그래도 끝끝내 말을 이었다. 그런것도 마음에 안들어 나는 한층 더 세라프를 쏘아 붙였다. “알 거 없고. 그리고 어차피 자세히는 몰라도 대충은 알고 있잖아.” “사용자 김수현.” “나 좀 바쁘거든. 할 말만 빨리 하고 보내줬으면 좋겠다.” “…….” 세라프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듯 아무런 말도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언제나 조용하다. 지금도 언제나처럼 고고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나는 그녀가 내심 당황 했다는걸 느낄 수 있었다. “없어?” “…….” 세라프는 여전히 묵묵부답. 확실히 나와 10년간 함께한 세라프와 지금의 세라프는 다르다. 나는 그녀의 반응에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지금 이 장소에 계속 있다가는 약간이나마 좋은 방향으로 변해가는 내 성격이 또 이상하게 변할것…아니, 원래대로 되돌아 갈것 같았다. “할 말 없으면 이만 가겠어. 그리고 다음부터는 이렇게 시간 낭비는 하지 않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사용자 김수현….” 등 뒤로 세라프가 무어라 말을 하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의도적으로 무시해 버렸다. 그때, 뭔가 번쩍이는 빛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아랑곳 않고 포탈로 들어가려는 그 순간. 나는 뒤에서 구현 되는 거대한 마나의 이동을 포착할 수 있었다. 츠츳! 츠츠츳! 빛이 연발적으로 터진다. 동시에 마나의 이동은 내가 있는 소환의 방 안을 뒤덮으려 하고 있었다. 이정도의 기운이 움직이는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다급히 몸을 돌려 세라프를 돌아보자 그녀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당장 그만 두세요!” 방금 세라프가 지른 고함은 나한테 한 말이 아니라는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녀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내가 깜짝 놀란건, 그녀가 뒷말을 <다.>가 아닌 <요.>자로 끝냈기 때문이다. 어지간해서는 요자를 쓰지 않는 세라프인 만큼 이례적인 일 이었다. 펑! 세라프가 손을 한번 휘젓자 허공에 생기던 빛무리가 크게 비틀리고, 이내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곳으로 눈을 돌리니 막 모이던 마나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세라프는 빠르고 침착한 손길로 방 이곳저곳에 생기는 빛무리를 하나씩 처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누구와 대화를 하는듯 끈임없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당신은 상관할 수 없습니다…!” 또한 평소처럼 천사들만의 대화 라인을 통하는게 아니라는 점도 상당히 신선 했다. 아무래도 무언가 내부 다툼이 있는게 분명 했다. 그 와중에도 내가 있는 소환의 방에는 연신 하얀 빛이 번쩍이고, 손이 허공을 가르고, 빛이 터지는 광경이 반복되고 있었다. 츠츳! 츠츠츳! “산달폰. 다시 한번 경고 합니다. 당신은 이곳으로의 소환을 불허 합니다. 이 소환의 방은 저와 사용자 김수현만의 공간. 외부인의 강제적인 침입은 허락지 않습니다.” 츠츳…츠츠츳…. “저아말로 마지막 경고 입니다. 사용자 김수현의 담당 천사는 바로 저 세라프 입니다. 사용자를 교환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츠츳….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소환의 방을 가득 메웠던 빛들이 완전히 사라지는걸 볼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목소리를 내던 세라프도 다시 입만 오물거리며 대화를 이었고, 화났던 표정도 처음처럼 고요하게 가라 앉기 시작 했다. 나는 간만에 좋은 구경 했다 싶어 품 안에서 연초를 한대 꺼냈다. 이윽고 연초를 입에 물고, 한대를 거의 다 피울 시점이 되자 세라프도 문제를 어느정도 마무리 지은것 같았다. 지금 상황은 나로 인해 일어난듯 보이니, 그대로 가기에는 뭐한감이 있었다. 이윽고 세라프는 고개를 돌렸고, 아직 남아 있는 나를 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안도하는 세라프를 보며 물끄럼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 했다. “사용자 김수현.” “왜.” 여전히 날이 서 있는 내 목소리에 세라프는 잠시 나와 시선을 교환 하고는, 달래는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세라프네요. 그러나 시작부터 삐걱삐걱. 그럼 저는 오늘은 이만 물러 나겠습니다. 다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 리리플 』 1. 파카사리 : 1등 축하 드립니다. :) 거의 냠을 자주 하시는. ㅋㅋ 2. 세류화 : 음. 그러지 말아주세요. 무서워요. ㅜ.ㅠ 3. 율라우 : 율라우 님도 무서워요. ㅜ.ㅠ 4. 虛虛空空無不在無不容 : 오타 수정 완료 했습니다. 감사 합니다. 5. rhkdel2 : 암 쏘 쏘리! 비비앙이 너무 귀여워서…. ㅋㅋ 6. MT곰 : 그렇군요! 학교 생활 항상 건강히 하시구, 행복하세요. 가끔 코멘트도 남겨 주시면 기쁠거에요~. :) 7. 쿤라이 : 예. 홀 플레인 + 거주민의 아기는 사용자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홀 플레인 + 홀 플레인은 100% 사용자 입니다. :) 8. 간지남이돌아왔다 : 오. 그런 스토리도 가능은 하겠네요. 하하하. 9. GradeRown : 소원은…만능이 아닙니다. 차차 진행 되면서 알게 되시겠지만, 초반 살짝 드러난 소원의 설정을 보시면 정말…헙.(스포 주의!) 10. ★꼬마돼지★ : 쿠폰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알찬 내용으로 보답 하도록 하겠습니다. (__)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21 / 0933 ---------------------------------------------- 평화로운 일상 # After '수현….' 그가 버린 연초에서는 아직도 잿빛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그가 머물던 자리만 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갑작스럽게 온 몸으로 지독한 고독감이 밀려 오는듯 그녀는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관여를 '못'하는것 보다는…정확히는 '안'하는 거겠지요. 세라프양. 아, 하기 싫은거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명색이 천사라는 애들이 하는짓은 <그놈들>보다 치졸하니…. 쯧쯧.> <어떤 천사가 내 도우미로 오든 절대로 사이 좋게 지낼 생각은 없어.> 그가 뱉은 말들 하나하나가 떠오르고, 떠오른 말들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세라프의 가슴 깊숙히 박혔다. 머리속이 너무나 혼란스러워 세라프는 그가 소환의 방에서 나갈때 잡으려고 뻗었던 손을 아직 다시 거두지도 못하고 있었다. <할 말이 있다더니…별 쓸데 없는 말 이었군. 아무튼 다시는 이런 일로 나 부르지 마.> “그냥….” 분명 소환의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세라프는 입을 열었다. 그녀의 시선은 그가 머물렀던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 또한 아무도 없다는걸 알고 있었지만 마치 그가 듣기라도 바라는듯 기어코 말을 이었다. “잘 있는지…보고…싶었어요….”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마친 세라프는 이내 쓸쓸한 얼굴로 내뻗은 자신의 손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는 방금전 그가 몸을 던진 포탈 안을 하염없이 보고만 있었다. * 1회차 시절. 세라프는 항상 고요하고 침착한 태도를 유지 했다. 물론 가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적은 있지만 그런 모습들을 드러낸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만큼 그녀의 고성과 찡그린 얼굴은 흔하게 볼 수 있는것들이 아니었다. 어느새 세라프는 다시 처음의 태도를 회복한 상태 였다. 그녀는 내가 몸을 돌린걸 보자 조금 마음이 놓였는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 세라프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어딘가 모를 애원조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 나는 1회차 세라프와의 마지막 이별을 떠올리고 말았다. <사용자 김수현은 다시 한번 그 10년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반복하겠다는 겁니까?> <부디 행복하세요….> 어떻게 보면 2회차의 내가 이렇게 상승세를 타는것도 그녀의 덕이 없잖아 있었다. 내 GP를 소비한건 맞지만, 천사의 호의가 섞인 특전이 아니었다면 이정도로 활개 치고 다니는건 사실 힘들었다. 내 1회차 시절 시작 능력치는 내구와 민첩을 제외하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엄청난 성장 속도와 기행(비비앙을 동료로 받아 들인것등.)을 이루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속을 헤집는다. 잠시 동안 많은 고민이 들었지만 일단 이야기를 듣는건 나쁘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사들을 싫어 하지만, 미우나 고우나 <일단> 나와 그녀들은 협력 관계 였다. 그런만큼 일단 말을 들어볼 필요는 있을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한 후 나는 그대로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데. 그리고 산달폰은 도대체 누구야?” 아주 조금 누그러든 음성으로 입을 열었지만 얼굴에 쓴 인상은 풀지 않았다. 그럼에도 세라프는 안도 했다는 얼굴로 말을 시작했다. “모두 말씀 드리겠습니다. 산달폰은 다른 사용자를 담당하는 도우미 입니다. 그녀는 사용자 김수현이 사용자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후 계속 저에게 담당 사용자 교체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흠. 그녀의 대답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즉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담당하는 천사를 변경한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확실히 그런 전례는 없는게 아니었다. 드물지만 있기는 있다. 1회차 시절 담당 천사가 바꼈다는 소리를 몇번 들어본적이 있었다. 일단 홀 플레인으로 들어온 이상 천사들은 자신의 사용자를 좋은…아니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중점은 좋은, 도움이 되는 방향이 아닌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 이라는것. 그렇다면 천사들은 사용자를 통해 뭔가 이루고 싶다는게 있다는 반증 이었다.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순식간에 감을 잡은 나는 결국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하…. 그래? 왜 교체해 달라고 하디.” “…….” 내 물음에 세라프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대강 짐작하고 있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하자, 세라프는 아랫입을 살짝 물었다가 고운 입술을 열었다. “홀 플레인으로 입장한 이후, 사용자 김수현의 행보는 너무나 놀랍습니다. 뮬로 들어간지 한달 남짓한 시간 동안 두곳의 유적을 탐험 했고, 탐험도 모두 성공 시켰습니다. 특히 0년차 사용자로서 상급 마족 벨페고르를 격파한 일은 천사들 전원이 쾌거로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다만….” 세라프는 그녀답지 않게 말을 주저하고 있었다. 얼굴에도 연신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천천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런 내 기색을 읽었는지 세라프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잇는게 들렸다. “…사용자 김수현은 저와의 관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는것 같습니다.” “흠.” 그녀의 선언에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역시나 그런거였군. 예상이 맞아 떨어졌다는 생각에 일단 품 안에서 연초를 하나 꺼내 들었다. 끝을 살짝 입에 물고 불을 붙였으나 세라프의 녹빛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천사 앞에서 연초를 피우는 행동이 조금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그녀는 딱히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하긴 1회차 시절에도 그녀 앞에서 연초를 태운적이 없는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때도 따로 말을 한적은 없었고. 그대로 불을 붙이고 한모금 깊숙히 빨아 들이자, 조금은 속이 진정 되는것 같았다. 그 과정을 담담히 지켜보던 세라프의 입이 다시금 열렸다. “천사들의 역할에 대해서는 또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궁금한게 있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은 왜 그렇게 저를 싫어하는 겁니까?” “너 같으면 이 홀 플레인으로 끌고 들어온 장본인을 잘도 좋아하겠군.” “…확실히 그렇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게 아닌것 같습니다.” “뭐?” 내 말을 부정하는 세라프를 힐끗 바라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젓고 있었다. 내가 헛웃음을 흘리며 반문하자 그녀는 고요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사용자 김수현이 저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닌것 같습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리실지도 모르지만, 그런 기분이 듭니다. 분명 어떤 다른 이유가 있을거라는….” 그녀의 말을 듣고, 한손으로는 연초를 다른 한손으로는 바닥을 톡톡 두드린다. 이번에는 세라프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잠시 동안 속을 가다듬은 후 그녀를 비웃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중요합니다. 당신의 행보는 많은 천사들이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홀 플레인으로 직접적으로 관여를 못하는 만큼 담당하는 사용자들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의 대리나 다름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산달폰이 문제를 삼는것도, 사용자 교체를 요청 하는것도 당신과 저의 관계가 좋지 않은데 있습니다. 저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말씀해 주시면 최대한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관여를 '못'하는것 보다는…정확히는 '안'하는 거겠지요. 세라프양. 아, 하기 싫은거라고 해야 하나?” 내 비아냥거림에 세라프는 할 말을 잃은 얼굴이 되었다. 그런 그녀의 멍한 얼굴과 분산되는 시선을 즐긴 다음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래…나는 네가 싫어. 아니 너 뿐만 아니라 모든 천사들을 싫어해. 모든게 그 이유에서 비롯된건 맞지만 니들의 내면을 보면 정~말 역겨울 정도로 구토가 밀려 온다고.” “왜…왜….” “하는 꼴들을 보면 참 웃기지도 않아. 왜. 이렇게 니들 입맛에 맞게 해주니까 조금 기특하게 보였나봐? 그런데…이러다가 내가 <그놈들>한테 붙을까봐 두려워?” “사용자 김수현. 무슨 말씀 이신지….” 확연히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는 그녀를 보며 나는 날카롭게 외쳤다. “모른다고? 알고 있잖아. 알면서 모르는척 하는 거겠지. 그러지 마. 가증스러우니까. 왜 너희들 진흙탕 싸움에 우리들이 강제로 휘말렸는지. 그리고 너네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지구의 인간들을 데려 왔는지. 사용자들이 그 사실을, 모든 전후사정을 알게 되면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 내 도를 넘은 말에 세라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게 보였다. 나 또한 조금 지나친 감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름 믿고 있는 구석은 있었다. 내가 아직 이쪽에 있는만큼, 그리고 의도적으로 천사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만큼 그녀들 또한 나를 털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나는 거의 타들어간 연초를 한번 크게 빨아들인 다음 바닥에 툭 던졌다. 버린 연초 위로 한줄기 연기가 가느다랗게 피어 올랐다. 나는 내친김에 한번 더 말을 이었다. “아득한 차원 계급을 가졌으면 뭐하니. 하는짓은 꼴 같잖은데. 어떻게 보면 그럼 점에서는 <그놈들>이 더 나을수도 있겠다. 최소한 놈들은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직접 홀 플레인으로 들어갔으니까. 그런데 명색이 천사라는 애들이 하는짓은 <그놈들>보다 치졸하니…. 쯧쯧.” “그…그걸 어떻게….” 세라프의 입술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내가 천사들과, 그놈들과, 홀 플레인을 끼고 돌아가는 비밀을 알고 있다는데 충격을 먹은 모양이다. 나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건 아니었다. 10년 동안 홀 플레인에서 살아 남으면서 나름대로 연구를 했고 제로 코드를 쥠으로써 완벽한 전후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욱하는 마음에 조금 위험한 말을 내뱉기는 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동안 들끓었던 속이 조금이나마 시원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경직된 얼굴로 입만 뻐끔거리는 그녀를 보며 나는 상냥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뭐…너무 걱정 하지는 마. 지금은 너희들보다 그놈들이 훨씬 더 싫거든. 그러니 당분간은 니들 장단에 놀아 줄게. 너희들이 헛짓거리만 하지 않는다면 혹시나 하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을거야.” “사, 사용자 김수현.”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고 뜸을 들이자, 세라프는 긴장된 얼굴로 목젖을 움직였다. 문득 그녀의 목선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차분하게 말을 마무리 지었다. “산달폰인지 뭐인지 한테 똑똑히 전해. 사용자 교체는 내가 싫다고. 어떤 천사가 내 도우미로 오든 절대로 사이 좋게 지낼 생각은 없어.” “…….” “할 말이 있다더니…별 쓸데 없는 말 이었군. 아무튼 다시는 이런 일로 나 부르지 마.” 나는 할말을 모두 뱉은 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세라프가 손을 내뻗고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이윽고 나는 빠른 걸음으로 눈 앞에 보이는 포탈로 걸음을 옮겼다. * 포탈을 타고 나오자 아직도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 신관 한명을 볼 수 있었다. 나와 탐험 보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남성 이었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이하는 거주민을 보며, 나는 내면을 다듬었다. “금방 오셨군요. 그분과의 만남은 즐거우셨나요.” “아니요. 개뿔 입니다.”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천사들을 광적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인 만큼 괜한 말로 척을 질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엄한테 화풀이 하는것도 싫었고. 그렇기에 나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좋은 시간 이었습니다. 신탁을 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그게 바로 제가 할 일인걸요.” 부러운 얼굴로 나를 보는 거주민을 보며, 나는 얼른 신전을 떠나고 싶었다. 그렇다면 대화를 이들이 껄끄러워 할 만한 화제로 돌리는게 가장 좋은 방법 이었다. “네…. 아, 그러면 탐험 보고건은 최대한 빠르게 해주시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아. 네, 네. 여유가 되는데로 바로 조사단을 꾸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조금 시간이 걸릴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못해도 다음달 초중반 안으로는 조사를 완료하고 증명서를 발급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좋습니다. 제가 다음에 다시 신전으로 들르도록 하지요.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내 재촉에 땀을 삐질 흘리고는 헛기침을 냈다. 역시 이 얘기는 부담스러운지 천사에 관한 얘기는 쑥 들어가고 말았다. 어쨌든 그렇게 말을 매듭 지은 후 그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 또한 고개를 주억이는걸로 화답하고는 길게 이어진 통로를 따라 걸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드디어 대망의 금요일 입니다. 오늘만 지나면 주말이 오네요. 와아. :) 하하. 그리고 인공이 중2병 아닙니다. 다른 캐릭터들이 욕을 먹으면 마음이 아팠는데, 이상하게 수현이가 욕을 먹으니 기분이 무덤덤 하네요. ㅋㅋㅋㅋ 아. 그리고 오늘 조아라 관계자 분과 통화를 했는데, E-Book 출판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음이 많이 흔들리네요.(물론 출판한다고 해서 글을 내리지는 않을 겁니다.) 참 요즘 고민이 많네요. 어떻게 보면 행복한 고민 이겠지요. 시간적인 부분도 배려를 해주신다고 하니,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 겠습니다. 그리고…조금 이르지만 현재까지 나온 여성 캐릭터 인기 투표를 해보고 싶은데, 여러분들 생각은 어떠신지요? PS. 뜰에 그동안 만들어 주신 표지들을 올려 놓았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한번 구경하러 오세요! 『 리리플 』 1. 아미슈 : 1등 축하 드립니다. 후후. 제 글에서 1등 코멘터가 되는건 매우 쉽습니다. 요즘에 많이 쉬워졌어요. 제가 늦게 올리는 바람에…. OTL 2. Final Dragon : NO. 후기는 보았습니다만 연참 대전에 끼지는 않습니다. 그저 강 건너 불 구경하는 마음으로 볼 생각 입니다. 하하하. 3. 사람인생 : 오. 저는 도저히 모르겠네요. 이번회 코멘트를 기대하도록 하겠습니다. :) 4. 오피투럽19 : 하하. 천사들이 조금 고약한 짓거리를 하기는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비겁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그 사실을 알게된 김수현이 천사들을 싫어하는 겁니다. 5. ka첨이 : 아마 그게 불신의 시발점이 되었겠죠. 그리고 차후 홀 플레인을 둘러싼 비밀들을 알게 되면서 환멸을 느꼈습니다. 요지는 <왜 인간들이 천사들에 의해 홀 플레인으로 들어온 것인가.>입니다. 6. MT곰 : 알콩달콩은 아니고 살벌살벌 입니다. 어떻게 보면 세라프도 참 불쌍한 아이에요. ㅜ.ㅠ 7. 罰酒 : 저도 그런적이 있습니다. 어렸을적 기억을 떠올리면 추억의 향수에 젖을때가 많아요. :) 8. 쿤라이 : 정답 입니다. 그리고 제 소설에서는 <악마>와 <마족>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염두에 두시면 훨씬 이해에 도움이 되실것 같습니다. 9. 땡벌꿀 : 물론 입니다. 수현이 조금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온 만큼 다 자신의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 입니다. 10. hohokoya1 : 여유가 생기는 날은 꼭 연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22 / 0933 ---------------------------------------------- 평화로운 일상 “크큭. 결국 너희들이나 나나 비슷해. 이겼다고 생각지 마라.” “김수현 이라고 했던가. 그래…그들을 살리고 싶지? 살릴수는 있을거다. 그리고 그년들도 네가 그들을 살리기를 바랄테지. 아마 그렇게 유혹할걸?” “패배자의 개소리라. 그렇게 들릴수도 있겠지. 그러나 명심해라. 너희들은 결국 그년들의 손에 놀아…크아악…!” * 문득 1회차의 회상이 떠오르자 가슴이 들끓는게 느껴졌다. 나는 얼른 세라프에 대한 기억을 떨쳤다. 한때 그녀를 믿었던 적도 있다. 그러나, <그놈들>의 말대로 제로 코드를 손에 쥔 후 달라진건 없었다. 오히려 놈들의 말대로…. 일단 오늘 더이상 들를데는 없다. 보고한 탐험들에 대한 조사가 늦어지는 만큼 이 도시에서의 체류가 지연될 테지만 일단은 원래 계획대로 나가는게 좋을것 같았다. 어쨌든 지연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은 절규의 동굴을 다녀온 후 가늠하기로 했다. 바로 여관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나는 중간에 생각을 바꿔 도서관에 한번 들르기로 마음 먹었다. 절규의 동굴로 가는 길은 분명 기억하고 있다. 그래도 일행들한테 기록을 조사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성은 있었다. 더불어 보여주기에 불과하다고 해도 돌다리를 두드린다는 심정으로 검토하는것도 괜찮을 것이다. 준비는 아무리 철저히 해도 부족 하니까. 기록을 찾는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절규의 동굴에 관한 문서를 찾은 후 나는 곧바로 여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신한 숙녀>는 여전히 사용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틀림없이 망할텐데. 카운터에 앉아 폭폭 한숨을 쉬는 고연주를 애도한 후 나는 3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랐다. 3층으로 들어간 후, 중앙에 있는 특실의 문을 열자 테이블에 비비앙과 안현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테이블 위로 폐허의 연구소에서 얻은 고대 창술사의 기록이 보이는게 아무래도 안현이 고대 문자 해석을 부탁한 모양 이었다. 내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한창 종이에 깃펜을 날리고 있는 비비앙과 안현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흐엣?!” 비비앙은 나를 보자마자 재빨리 얼굴에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어울리지도 않은 안경을 저렇게 죽어라 쓰는게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취향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옆에서 조용히 해석된 기록을 탐독하던 안현은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았다. “형.” “그래. 비비앙이 해석해 주는거야?” “네. 대충 그림도 있기는 한데 그림만 봐서는 잘 모르겠어요.” 안현은 명료하게 대답 했다. 내가 딱히 안경으로 흠을 잡지 않자, 비비앙은 조금은 안도한 얼굴로 안현의 말을 받았다. “엉. 그런데 양이 제법 되네. 한번에 다 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것 같아서. 조금씩 해주고 해당 부분이 끝나면 다시 해주기로 했어.” “음. 나쁘지 않네. 일단 해석한 부분을 확실히 익히고 넘어가는것도 괜찮지.” 안현 또한 그럴 생각 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옆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면서 비비앙이 해독한 기록들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표정이 어두운게 아무래도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것 같았다. 만만치 않음을 느꼈는지 안현은 입맛을 살짝 다시며 내게 말을 걸었다. “형. 저 말씀 드릴게 하나 있는데요. 이 기록 내용을 조금 봤는데 너무 어려운것 같아요. 막히는 부분이 많을것 같은데 저도 가끔 지도해 주시면 안될까요?” “가끔? 뭐…그래. 가끔이면 안될건 없지.” 내가 가볍게 승낙하자 안현의 얼굴이 삽시간에 밝아졌다. 이미 레어 클래스를 얻었으면서도 유정이 내게 가르침을 받는다는 사실이 자못 마음에 걸렸던것 같았다. 앞으로 안현에게 검을 가르칠 일은 없지만, 신검합일이 EX랭크에 오른만큼 나 또한 어느정도 창을 다룰 수 있었다. 아마 조언을 해주는 선에서 그친다면 크게 어긋나는건 없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 업무용 특실에서 사용할 짐을 챙긴 후 다시 해석에 열중하려고 자세를 잡는 비비앙 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에게 중요한 일 하나를 줄 생각 이었다. 원래는 아침에 나가기 전에 말하려고 했지만, 그녀를 울리는 바람에 잠깐 까먹어버린 일 이었다. “비비앙. 그거 어느정도 해석해주고 바로 내가 사용하는 특실로 와.” 막 고개를 숙인 비비앙은 내 부름에 다시 얼굴을 들었다. “응? 왜?” “따로 부탁할 일이 있거든.” “으응…알았어. 곧 끝내고 갈게.” 비비앙은 아침의 일이 생각 나는지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 했다. 자세히 보니 아직도 눈 주위가 발갛게 오른게 정말 서러웠던것 같았다.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짓고는 곧바로 짐을 챙겨 업무용 특실로 들어갔다. 대충 짐을 정리한 후 큰 테이블에 앉아 하나의 책을 꺼냈다. 고대 연금술사 비비앙의 던전에서 얻은 레어 클래스, 키메라 연금술사를 계승할 수 있는 기록 이었다. 나는 그 책을 두고 고민에 잠겼다. 이 기록은 신상용에게 주는게 가장 좋은 선택이다. 조화의 마방진이라는 클래스와 상성이 좋은 고유 스킬도 있고 그는 마법사로서 드물게 연금 마법을 익혔다. 사용자로서 지닌 능력치도 준수하다. 단순한 능력면에서 본다면 내가 그어논 컷트라인을 넘기고 있지만, 그래도 이대로 주기엔 꺼림칙한 마음이 없잖아 있었다. 레어 클래스는 정말로 귀하다. 그런만큼 이 기록은 주는 순간 신상용은 우리와 끝까지 함께 해야 한다는 소리 였다. 그럼 이 사용자를 믿고 맡길 수 있는가가 관건인데 이것도 솔직히 애매한 상황 이었다. 그동안 신상용은 내게 대부분 좋은 인상을 남겼고 일행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도 보였다. 성향도 나쁘지 않다. 그렇다고 덜컥 주기에는 레어 클래스가 지니는 가치는 너무도 거대 했다. 하지만 이대로 어정거리는것도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일단 주기로 했으면 최대한 빨리 주는게 그의 성장에 더욱 도움이 된다. 신상용은 2년차 사용자로서 능력치가 거의 개발된 상태 였지만 비비앙을 만남으로 한계선을 높였다. 이 기세를 몰아 레어 클래스를 계승 한다면 약간 올라간 한계선을 한번 더 끌어 올릴 수 있을것이다. 특수 능력도 새로 생기고, 마력 능력치도 90초반으로 올릴수만 있다면 앞으로 엄청난 보탬이 될 것이다. “원래는 유망주 한명 발굴하고 주려고 했는데…이것참 행복한 고민이로군.” 말 그대로 행복한 고민에 나는 피식 웃으며 혼잣말을 중얼 거렸다. 그 때였다. 내가 속으로 신상용을 이리저리 재고 있는 동안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기척이 들렸다. 나는 바로 고개를 들어 들어오라고 했고, 이윽고 방문 밖으로 불안감이 담긴 목소리가 들렸다. “김수현. 나 정말 들어간다.” “…응? 그래. 들어오라고 했는데.” 재차 허락이 떨어진 후 방문은 조심스럽게 열렸다. 그리고 예상대로 비비앙이 쭈볏한 걸음 걸이로 슬금슬금 방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아침에 조금 심하게 괴롭힌게 여지껏 앙금이 남은것 같았다. “왜 그렇게 들어오니. 아무튼 이리 와서 앉아봐.” “아, 아냐. 나 여기서 서서 들을게.” 내 권유에 바로 손사래를 치는 비비앙을 보며 나는 실소를 흘렸다. 그러나 나 또한 더이상 장난 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바로 웃음을 거두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럼 알았어. 너한테 부탁할 일이 하나 있다.” “응.” “그전에…앞으로 신상용씨를 지도할 일이 많을거 같은데. 네가 보기엔 그 사람 어떤거 같아?” 비비앙은 처음에는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내 진지한 얼굴을 봤는지 이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나보다는 비비앙이 신상용과 지낸 시간이 많으니 그녀가 더 잘 알 수도 있었다. 그러나, 비비앙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말았다. “잘 모르겠어. 중요한 얘기 같은데 함부로 말하기 조금 그래서. 그런데 괜찮은 사람 같기는 해. 예의도 바르고, 착하고. 말이 좀 어눌하기는 하지만.” “흠…지금 당장 판단하는건 힘들다 이거지.” “응. 그동안은 가르치는데 중점을 두었으니까. 단순히 그 모습들로만 얘기를 하라고 하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어.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묻는거야?” 나는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있는 기록을 그녀 쪽으로 쭉 내밀었다. 비비앙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기록을 보자, 그녀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이건….” “축복을 다룰 수 있는 사용자들은 그걸 통해 현재 자신의 클래스보다 상위의 힘을 얻을 수 있어. 그거…일단 네가 보관하고 있어봐. 그리고 때가 되면 신상용씨한테 주고.” “이걸 신상용한테 주라고? 내 마음대로?” “당연히 네 마음대로 하면 안되지. 지금부터 조건을 설명해 줄게.” 큰일날 소리를 하는 비비앙을 보며 나는 몇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일단 오늘 밤 그들과 이야기 후 클랜에 들어온다고 하면 1차 조건에 부합 된다. 그리고 앞으로 비비앙이 신상용을 지도하면서 사람 됨됨이를 보고, 괜찮겠다 싶으면 그게 바로 2차 조건 이었다. 마지막으로 3차는 1, 2차를 모두 클리어 하고 내가 직접 그와 대화를 나누며 최종 검토를 할 생각 이었다. 1차, 2차, 3차로 나눈 과정을 설명하자 비비앙은 나름대로 납득한듯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결국 수현의 최종 허락이 떨어져야 이걸 줄 수 있다는 거네?” “아무래도 그렇지. 그렇게 귀한걸 덥석 주기도 그렇잖아.” “이게 귀해? 에헤. 쑥쓰럽네. 내가 몇권 더 써줄까?” 그녀의 철없는 말에 나는 미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비비앙은 모르겠지만, 저 책은 천사들의 <설정>이 들어간 상태 였다. 솔직히 이번에 세라프를 만났을 때 비비앙에 대해 뭔가 얘기가 나올거라 생각 했는데 딱히 별다른 말을 듣지 않아 조금 의외 였다. 아니면 세라프가 말을 하기도 전에 내가 나온걸수도 있고. 아무튼 천사들이 단체로 미치지 않고서야 비비앙이 찍어내는 책에 동일한 <설정>을 부여할리 만무 했다. “또 써도 지금 눈 앞의 기록만큼 큰 효과는 없을걸. 물론 연금술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참고서로 삼을 수 있겠지만 그뿐이야. 이 기록 안에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잠재된 모종의 힘이 있거든. 그때 연구소에서 안현이 겪었던 과정이랑 비슷하다고 보면 돼.” “흐응. 그렇구나.” 비비앙은 내 말을 들으며 새초롬한 얼굴이 되었지만, 어느새 입가에 연한 미소를 걸치고 있었다. 이 책을 그녀가 직접 기록한 만큼 높은 평가를 받자 기분이 좋은것 같았다. 성격 한번 참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튼 지금 분위기를 이끌어가는게 좋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기에 나는 더욱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일단은 네가 갖고 있는게 더 좋을것 같다. 클랜건은 오늘 밤에 바로 얘기할 생각이고. 결과는 내가 내일 알려줄게. 그런데 거의 들어온다고 봐도 좋을거야. 어쨌든 지금 가장 중요한건 너한테 부탁한 것들이니 단순히 가르치는데 집중하지 말고 신상용이 어떤 사람인지 좀 자세히 봐줘.” “응! 자세히 볼게. 만약 신상용이 통과되면 내 정식 제자가 한명 생긴다는 말이네? 호호.” “그런셈이지. 아무튼 좋아. 할 말은 다 끝냈으니…이만 나가봐.” 비비앙은 금방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의욕을 불태웠다. 그녀가 의욕에 불타오르는 모습을 보며 나는 흡족한 감정이 들었고 곧바로 축객령을 내렸다. 그녀를 보내고 앞으로 그들에게 설명할 클랜에 대한 말들을 정리할 생각 이었다. 그러나, 내 축객령에 비비앙은 곧바로 다시 인상을 찡그렸다. “응? 나가라고?” “어? 어.” 그럼 뭐 할 생각 이었니. 비비앙은 불만 어린 얼굴로 나를 쳐다 보았다. 나 또한 그녀를 보며 종 잡을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시무룩 했다가, 기분이 좋아 졌다가, 다시 불만을 표시한다. 세상이 이렇게나 짧은 시간에 다양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물것이다. 그러나 그게 또한 비비앙의 매력이기도 했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내는것.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비비앙의 말은 내게 커다란 충격을 주고 말았다. “나 더 안 괴롭혀?” “……?” “오늘 나 더 안 괴롭힐 거냐고. 그래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들어 왔는데.” 그녀의 말을 이해하는데는 정확히 2초가 걸렸다. 나는 잠시 손가락을 들어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리다가, 단호하게 방 밖을 가리켰다. 빨리 나가라는 신호 였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입을 삐죽이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내가 밖을 가리킨 손가락을 들고 있는 동안 그녀는 미련이 남는 얼굴로 자꾸만 뒤를 돌아 보고 있었다. 한두걸음 걷다가 나를 한번 보고. 두세걸음 걷다가 또 한번 나를 돌아보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흘끗흘끗 훔쳐 보는 그녀를 보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왠지 나나 비비앙이나 서로 위험한 감정을 일깨운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드디어 금요일 밤 입니다. 룰루랄라 집에 왔는데, 토요일 제사라고 하네요. ㅜ.ㅠ 아마도 내일 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노력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여러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 『 리리플 』 1. 레필 : 레필님 1등 축하 드립니다. 1등에서는 처음 뵙는것 같네요. 하하. 2. 나로다케 : 과분한 응원 감사 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알찬 내용으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 3. wnstngndk : 음. 글쎄요. 세라프는 초기 설정에 굉장히 비운의 캐릭터로 잡혀 있습니다. 차후 수정될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요. 4. 아클레오 : 노쓰우드님의 내가 이능력자다, 자베트님의 짐승, 소이정님의 로벨리아. 이 세 작품이 주말 연참 대전을 한다고 하네요. 후후. 5. 미월야 : 좋은 질문 이십니다. 다만 앞으로 나올 에피소드와 연관이 있어 지금 답변하기 어렵습니다. ㅜ.ㅠ 6. 가한나 : 정답 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식이 쩐다고 보셔도 무방 합니다. 천사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주인공이 1회차에 그들의 비밀을 알아 냈기 때문 입니다. 그리고, 그 비밀은 결코 아름답지 않습니다. 7. 악마신전 : 맞아요. 코멘트들을 보면 정말 많은 추론들이 보입니다. 그걸 읽는것도 하나의 즐거움 이에요. 말씀대로 비슷한것도 있고, 아예 동 떨어진것도 있지만요. :) 8. 천겁혈신천무존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으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행행은 도대체 어떤 의미 인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진짜 읽고 빵 터졌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 9. neosky1383 : 하하. 글쎄요. 과연 세라프가 <착한 천사> 일까요? 10. Toranoanal : 오타 지적 감사 합니다. :) 한번 버릇을 잘못 들이니 자꾸 틀리네요. ㅜ.ㅠ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23 / 0933 ---------------------------------------------- 소소한 반항 “그럼 오늘은 이것으로 일과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나머지 시간은 개인 정비 시간을 갖거나 또는 휴식을 취하는걸로 하세요.” “흐응.” “하우우….”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일행들에게 오늘 일과 종료를 선언 했다. 반응은 다들 달랐지만 두명의 반응이 참으로 볼만했다. 유정은 뭐가 불안한지 자꾸만 다리를 떨며 손톱을 물어 뜯고 있었고, 안솔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테이블에 이마를 묻었다.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가득한게 하연이 가르침을 따라가기 힘들었던것 같았다. 하연은 태연한 얼굴로 차를 한모금 넘기고 있었다. 오늘은 쉬고 싶다고 했지만, 그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안솔을 가르친 모양이다. 하긴 그녀 성격상 설렁설렁 가르치지는 않았을테니 내심 안솔이 어떤 고충을 겪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하연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지도 요청을 받아 준것만 해도 고마운데, 정말로 성심껏 가르치고 있다. 특히 안솔은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어려운 사용자로 볼 수 있었다. 하도 답답해 조금만 목소리를 높이면 울먹울먹한 표정을 지으며 안기려고 하는데, 그럴때마다 난처한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연은 목소리를 높일리 없으니 아마 조곤조곤 타일렀을 것이다. 다만 그 말 한마디한마디들이 찬바람처럼 매서웠을 것이고. 좋은 선생님을 붙였다는 생각에 흡족해 하고 있을 때 였다. “저기 오빠….” 유정은 평소의 쾌활한 얼굴이 아닌 머뭇거리는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응?” 내가 가볍게 반문하며 연초를 하나 꺼내자 유정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늘 밤에…바빠? 또 할 일 있어?” “으음. 그렇지. 하연씨랑 신상용씨랑 할 얘기도 있고. 기록 정리도 해야 하고.” “그럼 내일은?” “내일도 할 일이 있기는 한데…왜?”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하자 유정은 곧바로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녀는 이윽고 “아니야. 아무것도.” 라고 대답한후 가만히 차를 홀짝였다. 유정의 반응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다음 나는 하연과 신상용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하연씨. 신상용씨.” “네, 네 리더.” “네. 말씀 하세요.” “일단 저 먼저 방으로 올라가 있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긴 얘기가 될 지 모르니 다들 하고 있던 일은 마무리는 짓고 제 방으로 올라와 주세요. 두번 얘기하기는 그러니 같이 와주시면 더 좋구요.” “하하. 저야 좋죠. 마침 스승님이랑 마방진과 소환술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었던 중이라서요.” 신상용의 말에 나는 눈에 이채를 띠었다. 비비앙은 평소에는 맹할지는 몰라도 시킨 일에 대해서는 언제나 그 이상을 해내고 있었다. 오늘도 부탁을 들은 후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짚어내고, 그에 맞춰 행동하고 있었다. 기특하다는 얼굴로 비비앙을 보자 그녀는 목을 빳빳이 세우며 우아하게 차를 한모금 마셨다. 저 모습을 보니 또 못살게 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롭히고 싶어.” 라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비비앙은 곱게(?) 눈을 흘기고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더 진행하면 진짜로 내가 아니게 되어 버릴것 같아 나는 간신히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내가 시선을 돌리자 비비앙이 낮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잘 못 들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분명 잘 못 들었을 것이다.) 비비앙은 잘 가르치고, 신상용은 배우려는 의지가 강하다. 좋은 스승과 사제 관계였다. 그러나 안솔과 하연의 경우는 조금 다른것 같았다. 내 말에 하연은 마침 잘 됐다는듯 고개를 끄덕였고, 안솔은 묻었던 얼굴을 번쩍 들며 경악한 얼굴로 나를 쳐다 보았다. 그러나 이어진 하연의 말은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그렇게 할게요. 안솔양? 들으셨죠? 그러니 오늘 1시간 더 추가 지도를 하겠어요.” “으…으우….” 안솔은 아연실색한 얼굴로 나와 하연을 번갈아 바라 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가르쳤길래 저렇게 순한 애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의문어린 표정을 짓자 하연은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 했다. 그러나 지도를 요청한것도 나고, 하연을 믿기로 한것도 나였다. “…잘 부탁해요.” “그럼요. 너무 걱정 마세요.” 결국 내가 한발 물러서자 하연을 살며시 웃으며 화답 했다. 안솔의 연신 앓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철이 없다고 해야 할까. 애들은 다 좋기는 한데 가끔씩 보면 하나씩 안타까운 점들이 보였다. 절박함이 없다. 그리고 애들은 지금 자신들이 홀 플레인에서, 그리고 신규 사용자로서 얼마나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내 탓이 크기도 했다. 통과 의례 때부터 배 한번 고픈적이 없었고, 뭐 하나 부족한게 없었다. 거듭 말하지만 신규 사용자들은 원래 1년차가 되기 전까지는 홀로 살아남기란 요원한 일이다. 나 또한 그랬다. 1회차 초반에는 하루에 한끼도 겨우 먹으며 그날 끼니와 잠자리를 걱정 했고, 항상 광장을 기웃거리며 참가할만한 캐러밴을 찾아 다녔다. 가르쳐주는 스승? 그런건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애들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내가 이것저것 챙겨주는 바람에 신규 사용자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사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만일 지금 그런 사용자들중 한명 데려다가 꼬박꼬박 먹여주고, 입혀주고 그리고 자신을 가르칠 실력 좋은 사용자를 붙여 준다면 당장에 울음을 터뜨리며 내게 삼천배를 할 것이다. 요컨대 공부가 하기 싫다고 투덜대는 학생들과 비슷하다고 할까. 아마 조금 더 연차를 먹고 홀 플레인을 경험한다면 이때의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코스를 밟고 있는지 깨달을 것이다. 아직 머나먼 일 이기는 했지만 나는 애들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으로 달게 받아 들이기로 했다. 아무튼 애들이 얼른 성장하기만을 바라며, 나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결정 했다. 더 있다가는 애들이 투정을 부릴지도 모르는 일 이었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늦어도 상관 없으니, 일은 확실히 마무리 하고 와주세요.” 확실하게 못을 박는 말을 던진 후, 나는 그대로 계단을 올랐다. 뒤에서 내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 “수현. 또 일 하고 있으세요? 탐험 돌아온지 겨우 하루 지났는데 너무 무리하시는거 같아요.” “하연. 괜찮아요. 다음 탐험도 던전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좋잖아요.” 그대로 모임을 끝낸 후, 하연은 한시간즈음 지나고 내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그때 절규의 동굴에 관한 기록을 찾고 있던 중 이었다. 그녀는 내가 또 오자마자 기록을 탐독하고 있는걸 보며 몸부터 걱정 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를 보며 왠지 우리들이 신혼 부부인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만. 그러면 애들한테 있어 하연은 새엄마인가? “또 그런 요행을 바라지는 말아요. 당분간은 도시 주변을 탐험하는 걸로도 충분 하잖아요. 아직도 그 힘의 여파가 몸에 남은것 같은데…수현이 고생할수록 저도 마음이 불안해요. 그러니 저를 위해서라도 오늘은 얘기만 끝내고 바로 주무시도록 하세요.” “그래요. 하연씨가 그렇게까지 말씀 하시니, 그럴게요.” “후훗. 고마워요.” 내 순순한 대답에 하연은 다행이라는듯 기분 좋은 미소를 흘렸다. 나 또한 그녀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1회차 시절에는 거의 느끼지도 못했던 감정들을, 2회차에 들어서 하나씩 알아가고 있었다. 이런 감정에 취할수록 내 안의 날카로운 야성이 사그라드는것 같아 경계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게 서로를 흐뭇히 보고 있을 무렵,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안경을 쓴 사용자 한명이 달려 들어왔다. 볼것도 없이 그 사용자는 신상용 이었다. 그는 나와 하연을 보고는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리, 리더.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습니다.” “아. 괜찮습….” “정확히 17분 늦으셨어요. 오시려면 정확히 시간을 맞춰서 오시거나, 아니면 아예 늦게 오시는게 낫지 않았을까요.” “니다.” 라고 말을 매듭 짓고 싶었지만 하연이 먼저 말을 꺼내는 바람에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신상용을 보며 하연은 나에게 보였던 미소를 싹 지운 후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그녀의 음성에 가시가 돋혀 있다는 묘한 기시감을 받았다. 비단 나만 그런건 아닌지 신상용도 톡 쏘는 그녀의 말투에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한 후 얼른 테이블로 다가와 앉았다. 갑자기 신상용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분위기가 어색해 졌지만, 나는 헛기침을 해 목을 가다 듬었다. 앞으로 할 얘기들은 내 계획의 초석인 만큼 지니는 무게들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나는 잠시 숨을 정리한 후 곧바로 입을 열었다. “오늘 두분을 따로 모신 이유는 다들 짐작 하고 있으실 겁니다.” ““네.””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저는 홀 플레인에서 클랜을 창설할….” 둘은 동시에 대답 했다. 나는 한두번 고개를 끄덕인 후 바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막 본론을 먼저 꺼낼려는 순간 이었다. 똑똑. 벌컥. 방문을 두어번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내 허락이 있기도 전에 방문이 열렸다. 누가 이렇게 예의가 없는지 어이없는 심정에 고개를 올리자, 낯설지 않은 사용자 한명이 안으로 들어와 모습을 보였다. 그 사용자는 바로 고연주 였다. “어머? 혼자 있는줄 알았는데요. 아쉬워라.” “…어떤 일로 오셨는지요.” “이거요.” 고연주는 내 말에 예쁘게 웃고는 조신한 걸음걸이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평소와는 다른 옷차림 이었다. 머리도 맵시 있게 감아 올렸고, 항상 풀어 헤치고 다니던 옷과는 달리 정숙하게 입고 있었다. 오늘따라 또 왜 저러나 싶었는데, 그녀는 두 팔에 안고 있던 쟁반을 우리들이 앉은 테이블 위로 살며시 내려 놓았다.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음식들과 향기로운 질 좋은 술들이 찰랑이는게 보였다. “따로 주문한적은 없습니다.” “네. 이건 단골 손님을 위한 서비스에요.” 고연주는 내 말을 유들하게 받아 넘기고는 신속히 테이블 위로 음식을들 세팅 했다. 뜻하지 않은 야식들을 보며 신상용은 그저 좋다고 웃으며 말했다. “하하. 고맙습니다. 안그래도 머리를 엄청 쓰느라 배가 출출 했는데. 마침 딱 좋네요. 리, 리더. 괜찮죠?” “…음식만은 괜찮겠죠. 잘 먹을게요.” 내 인사에 고연주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 했지만, 역시나 그녀는 내 기대를 배반하고 말았다. “별 말씀을요. 그런데 무슨 얘기들을 하고 있으셨어요?” “아. 지금 중요한 얘기를 하는 중이라서요. 음식은 감사합니다.” 대답은 내가 아닌 신상용에서 튀어 나왔다. 직구로 던진게 아닌 완곡히 돌린 말 이었지만 이만 나가 달라는 소리 라는건 누구나 다 알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고연주는 기어코 몸을 돌리지 않았다. “왜요? 손님도 없어서 심심한데. 저도 같이 들으면 안되나요?” “에…?” 이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신상용은 어벙벙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그녀의 반응에 하연은 눈을 가늘게 만들었지만, 고연주는 그저 여유롭게 웃을 뿐 이었다. 이윽고 하연과 신상용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에 따라 고연주도 내게 시선을 돌렸다. 모두의 시선이 모인 지금, 나는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그녀의 얼굴을 응시 했다. 그림자 여왕 고연주. 어차피 어떤 방식으로든 처리할 필요는 있었다. 우리 클랜으로 영입하든, 아니면 뮬에서 떠나기전 살해하든. 그녀 입장에서는 억울할지도 모르지만 1회차 시절 그녀의 능력치는 차치 하고서라도 정보 수집 능력이 너무 뛰어나 많은 애를 먹었었다. 우정민 일행은 아직 시간이 있다고 여겨 한번 보내 줬지만 고연주는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일행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필히 죽여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한번 떠보는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모두가 내 대답을 기다리자,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앉으시죠.” “네~에. 고마워요.” “수현?” “리, 리더!” 고연주는 그대로 남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고, 하연과 신상용은 당황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그들의 혼란스러움은 이해한다. 그러나 고연주가 정체를 밝히는 순간 어떤 반응들을 보일지 자못 기대가 되었다. “수현. 도대체 이 여성 사용자가 누군지 알고….” “2년차 사용자 정하연.” 하연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을 이으려는 찰나였다. 고연주는 조용한 음성으로 그녀의 말을 가로 막았다. 자신의 연차와 이름을 말했다는 사실에 하연은 눈을 번뜩이며 입을 다물었다. “황금 사자 클랜에서 버림 받은 마법사 사용자. 그리고 옆은…2년차 사용자 신상용.” “흣…!” 하연이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지만 고연주는 틈을 주지 않고 바로 신상용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 네?” 설마 자신도 알고 있을거라 생각하지는 못했는지 신상용은 깜짝 놀란 얼굴로 대답 했다. 그런 그가 귀엽다는듯, 고연주는 유혹적인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을 이었다. “연금 마법을 사랑하는 괴짜 마법사. 그리고….” 둘에게서 시선을 거둔 그녀는 마지막으로 내게로 시선을 돌리며 뜸을 들였다. 나 또한 고연주의 행동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그녀의 쟃빛이 감도는 눈동자를 보고 있자, 그녀의 차분한 음성이 들렸다. “0년차 사용자 김수현. 사용자 아카데미 수석 졸업자…그리고 0년차면서 벌써 두개의 던전을 공략한 이상한 사용자.” “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신상용의 경악한 목소리가 들리고, 나지막하지만 하연이 질속(疾速) 영창을 시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고연주는 태연 했다. 둘의 말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듯 한 손으로 턱을 받치며 나를 바라 보았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그동안 많이 빡빡했던 만큼 조금씩 분위기를 풀어주고는 있는데, 독자분들에게 잘 와닿았으면 좋겠습니다. 아. 오늘 한편 연참이 될지, 아니면 자정 연재를 미리 올리는 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올리고 바로 제사 준비하러 가야 되서요. :) 『 리리플 』 1. 휘을 : 1등 축하 드립니다. 요새 춘추전국시대인 1등 코멘터에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하하하. 2. 센타우르스 : NO. 회상이란 뜻으로 썼습니다. :) 3. archangels la : 아니에요. 비비앙은 나름 24살의 성숙한 몸을 갖고 있는 인간 여성 이랍니다. 4. 싸울아비헌터T : 아하하. 다 제가 부덕한 탓 입니다. OTL 10분만 랜덤으로 뽑아서 하는터라…. ㅜ.ㅠ 5. 라무데 : ㅋㅋㅋㅋ 아 이러다 수현이 캐릭터가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면 어떡하죠. 라지만 이것도 실은 복선의 일부죠. 후후훗. 과연 눈치 채신 분들이 있었을까요. :) 6. 판타지의신 : 아주 정확하게 정답 입니다. 괴롭힘을 받으면 수현의 달래주는것도 즐길(?) 수 있거든요. 7. hohokoya1 : 다행이네요! 하나씩 일을 처리하면서 중간에 소소한 스토리를 넣기로 했는데, 재밌다고 해주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하하하. 8. 콜록123 : 쿠폰 감사합니다. 이게 연참이 될지 자정 연재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노력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__) 9. 사람인생 : 몸은 좀 괜찮으신지 모르겠네요. 힘 내시구요. 코멘트 기대할게요. ^-^ 10. 테크노 : 마지막 리리플은 장문의 코멘트를 보고 있었는데, 테크노님의 코멘트가 제 심금을 울렸습니다. 저도 그렇것 같습니다. 허허허.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24 / 0933 ---------------------------------------------- 소소한 반항 고연주는 나를 보며 웃고 있었지만 이미 하연이 주문을 영창하는것을 알고 있는것 같았다. 바닥에 비친 그녀의 그림자가 꿈틀이는 순간 나는 재빨리 허리에 매었던 검을 출수 했다. 검신이 뽑혀 나오는 맑은 소리와 동시에, 고연주의 그림자가 한바퀴 빙글 돌더니 그대로 하연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하연은 처음 당하는 공격에 매우 놀란듯 보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녀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흰 빛을 뿜는걸 볼 수 있었다. “───. 타겟 지정 그림자(Silhouette). 오버랩(OverLap).” 어떤 공격이 오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그에 맞는 마법을 펼친다. 놀라더라도 할건 한다. 마법사들은 언제 어느 상황에서나 냉철한 이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하연은 말 그대로 마법사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의 목걸이에서 터져 나온 마법과 질속(疾速) 영창으로 펼친 안티 매직(Anti Magic) 주문. 허공으로 뿜어진 흰 빛은 이내 물처럼 흐물해 지더니 그대로 그림자에게 녹아 들었다. 비록 하연의 주문은 그림자를 주춤하게 만드는게 다였지만, 그녀가 벌어다준 2초의 시간은 고연주의 목에 내 검이 닿는데 충분한 시간 이었다. “……훗.” 사늘한 정적이 흘렀다. 고연주는 그대로 턱을 괴고 앉아 있었지만, 그녀의 눈동자가 놀라움에 물드는걸 놓치지 않았다. 물론 장난삼아 가볍게 건드렸겠지만 그래도 2년차 사용자한테 <10강>에 이른 사용자가 한 방 먹고 말았다. 지금은 실전된 메모라이즈(Memorize) 마법이라는 카드를 꺼낸 하연의 판단은 그만큼 유효 했다. 비록 이번 한번에 한해 먹힐 수 있는 방법이지만. “장난은 적당히.”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는 고연주에게 나는 더욱 검을 들이 밀었다. 일전에 한번 그녀의 품에 안겼을때, 그녀는 한 발 물러서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 였다. 1:3이라는 대립 구도와 이미 불리하게 변한 상황. 그리고 턱 바로 아래 살기를 풀풀 날리고 있는 검 한자루. 여기서 고연주가 무리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예상대로 그녀는 얌전히 그림자를 거두고는 두 팔을 들었다. 하연은 스르륵 물러나는 그림자를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다시 한번 하연에게 감탄하며 살짝 검을 물렸다. 동시에 그녀의 목젖이 꼴깍 움직이는걸 볼 수 있었다. 이윽고 검을 완전히 물리자 고연주는 자신의 목덜미를 매만졌다. “휴우. 치사하게 여자들 싸움에 남자가 끼어 들어요?” “할 말은 그것뿐 인가요?” “…미안해요. 장난이 조금 지나쳤네요.” 고연주는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나 또한 그녀가 장난이라는걸 알고 있었고, 사과까지 받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이정도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언뜻 보면 상당히 성의 없어 보일지 몰라도, <10강>에 이른 사용자가 순순히 사과를 했다는 사실이 중요 했다. 그러나 하연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길로 그녀를 응시하다가, 이내 뭔가 이상함을 느낀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림자…설마….” 하연이 중얼거리자 고연주는 살살 눈웃음 치며 입을 열었다. “제 소개를 드려도 될까요?” “기꺼이.” 내 허락이 떨어지자 그녀는 자세를 바로 잡은 후 하연과 신상용을 향해 정중히 몸을 기울 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과의 의미를 담은게 아닌, 자신의 기세를 한껏 끌어 올리는 말 그대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일종의 과시 였다. “안녕하세요. 그림자 여왕으로 불리우는 5년차 사용자 고연주 입니다. 현재는 모종의 사정으로 뮬에서 여관을 운영하고 있구요. 처음의 결례는 대단히 미안 합니다.” “허억!” “…….” 예상대로 신상용은 거의 기겁할 정도로 엉덩이가 뛰어 올랐다. 하연 또한 눈동자가 커지긴 했지만, 신상용과 같은 추태는 보이지 않았다. 하연과 고연주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치고, 고연주의 입가가 살짝 올라가는게 보였다. “미안 하다구요. 인사 대신 이었어요.” “…<10강>에 이른 사용자들은 인사 대신 상대방을 공격 하나 보군요.” 하연의 냉담한 반응에 고연주는 입가를 비틀고는 대답 했다. “어머.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요. 처음 주문을 외우던게 누구셨더라?” “어머. 저도 주문을 외울 생각은 없었던것 같네요.”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는 하연을 보며 고연주는 “이것 봐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연은 고개를 세우고 있었고 고연주는 허리를 숙인 상태에서 고개만 살짝 들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둘은 눈을 마주쳤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지만, 먼저 말문을 연 사용자는 고연주 였다. “사과 한번 했다고 우습게 보여요? 그리고 그딴 눈깔로 저를 보지 말아 줄래요? 진짜 죽이고 싶어 지니까요.” “뭘 잘했다고 그렇게 당당한건지 모르겠네요. 사과에서 진심조차 느껴지지 않구요.” 하연의 말에 고연주는 풋 웃더니 다시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그리고 허리에 찬 단검을 꺼내더니 이내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 했다. “진심? 수현씨가 관심을 갖길래 조금 궁금했는데, 아직 한참 어리네. 홀 플레인에서 뭘 따지는 거에요?” 이 말에는 하연 또한 할 말이 없는지 코웃음으로 일관 했다. 확실히 홀 플레인은 1차적으로 힘과 능력이 지배하는 세상 이었다. 특히 <10강>에 이른 고연주는 원래 일반 사용자들이 우러러 볼 수도 없을 만큼 높은 위치에 있는 사용자. 지금 하연의 태도는 분명히 정상이라고 보기 어려웠지만, 그걸 정당화 시킬 수 있는 이유가 딱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건 고연주 또한 대충 짐작하고 있을것이다. “그림자 여왕도 많~이 죽었네. 새파랗게 어린애 한테 태클이나 받고. 네가 아직 목이 붙어 있는 이유는 알고 있지요?” “그럼요. 믿고 있는 구석이 있으니까 이러고 있죠.” “호가호위(狐假虎威) 하는 입장에 말은 참 잘하네요! 이번 한번은 사용자 김수현의 얼굴을 봐서 넘어 가는데, 다음에도 이러면 국물도 없어요. 호호.” “지금 캐러밴, 클랜이 가지는 의미를 부정하시는 건가요? 개인의 힘이 인정 되면 인맥이 가지는 힘도 인정 하셔야죠. 뭐 다음에 볼 기회가 있을런지는 모르겠네요. 후훗.” “모두 그만.”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칼부림이라도 날 기세라 나는 그대로 선을 끊었다. 두 여성은 모두 서운하다는 얼굴로 나를 돌아 보았다. 나는 그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이 장소에서 가장 높은 사용자는 고연주로 볼 수 있었다. 현대적인 사고로 보면 고연주의 잘못이 더 많지만, 홀 플레인의 사고로 보면 둘의 잘못은 반반 이었다. 그러나 내가 0년차 사용자인걸 감안한다면 객관적으로 하연의 태도는 많이 지나친 감이 있었다. 나는 고연주와 몇번 만남을 가지면서 내가 그녀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렸고, 그녀는 그것을 일부 받아 들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면 고연주의 잘못은 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끼어들고, 조금 심한 장난을 쳤다는 것이다. 보는 사람의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물론 하연이 먼저 주문을 영창 하기는 했지만 뒷조사로 먼저 우리들을 도발한 사용자는 고연주 였다. 하연은 하연대로 평소의 그녀 답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아직 고연주에 비해 한참 떨어짐에도 물러나지 않았고…소위 <대들었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본인의 의지를 표현하는건 자유지만, 만약 고연주가 내 실력을 몰랐거나 내가 고연주보다 처지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면 그대로 죽기 딱 좋은 태도 였다. 물론 2초 남짓한 교전에서 서로의 연계로 우위를 점했고 내 실력을 믿었다는 계산은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하연의 태도는 모두 이해할 수 없다. 오직 여자들만이 느끼는 감정이 일어났으리라 추측할 수 있을 뿐. 굳이 하나를 꼽으라면, 고연주가 하연의 정보를 말할때 그녀의 역린을 건드린듯 싶었다. 고연주가 <버림 받은 마법사 사용자.>라고 읊조리는 순간 하연의 눈매가 위로 치켜 올라가는걸 봤으니까. 항상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그녀의 평소 모습과 비교하면 조금 거리가 있는건 사실 이었다. 그러나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나중에 물어보기로 했다. 하연이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행동들을 하리라고는 생각 되지 않았으니까. 나는 잠시간 생각을 정리한 후 고연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고연주씨. 사용자 정하연은 현재 제 캐러밴 소속 사용자 입니다. 뒷조사도 기분 나쁘지만, 그걸 일부러 흘린건 좋은 의도로 받아 들이기 힘들것 같습니다. 차후 도를 넘는 과도한 행동은 삼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내 말에 하연의 얼굴이 밝아지고 고연주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나는 바로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사용자 정하연 한테는 제가 다음에 말을 묻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하연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고연주가 피식 웃는게 보였다. 나는 하연을 챙겼고, 고연주의 체면을 세워 주었으며 더불어 내 입장도 적절히 정리 했다. 즉 더이상 문제 만들지 말고 이쯤에서 타협 하자는 소리였다. 하연과 고연주도 서로의 입장이 웃기다고 생각 했는지 미약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였다. 한동안 안절부절한 모습을 보이던 신상용은 상황이 정리 되자 겨우 안정한것 같았다. 이윽고 신상용은 안경을 슥 치켜 올리며 고연주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 했다. <10강>에 이른 사용자와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건 매우 드문일 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신상용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연주는 색기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만좀 보렴. 그렇게 뚫어지게 보면 흥분 되거든.” “와…와악…! 죄, 죄, 죄, 죄송합니다! 그, 그게….” 신상용은 고연주가 말을 건네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수그렸다. 그러면서도 고연주를 흘끔흘끔 보는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봐도 비디오 였다. <10강>에 이른 사용자가 직접 말을 건넸다는 사실 하나에 그의 입은 헤 벌어지고 있었다. 고연주는 그의 반응에 조금 기분이 풀렸는지 살살 눈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그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고연주가 계속 재촉하자 신상용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윽고 그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게…평소 말을 들었던 그림자 여왕의 이미지와는 너무 달라서….” “응? 어떤 이미지를 말하는 걸까?” “험험….” 신상용은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고연주는 지금 이 상황이 무척 재밌다는듯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그녀는 이윽고 맵시 있게 묶어 올린 머리끈을 스륵 풀렀다. “고연주씨?” 또 이상한 행동을 할 느낌이 들어 미리 말을 꺼내자, 그녀는 내게 눈을 한번 찡긋 하고는 손을 들어 자신의 윗 옷을 꾹 잡았다. “예를들면…이런 느낌?” 부욱! “헉.” “꺅.” 그녀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자신의 옷을 세게 잡아 당겼다. 그 힘이 얼마나 셌는지, 그녀가 정숙히 차려 입은 옷은 상하의가 한꺼번에 뜯겨 나갈 정도 였다. 옷은 순식간에 걸레 조각이 되고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과감한 행동은 예상 못했는지 하연과 신상용 둘 모두는 낮은 음성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윽고 고연주는 거의 벌거벗은 몸으로 슬쩍 다리를 꼬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알몸은 아니었다. 방금전 입고 있던 옷과 지금 입은 옷의 차이가 너무 심해 괴리감이 있었지만, 엄연히 옷은 입고 있었다. 아슬아슬 하다는게 문제였지만. 어깨가 훤히 드러나고 젖무덤도 절반 이상 보이는 아슬아슬하게 줄인 탱크탑. 오히려 너무 심하게 줄인 감이 있어 살짝만 건드려도 터질것 같은 육감적인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더불어 하의는 허벅지 아랫 부분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는데, 얇은 허벅지가 아니라 아주 살짝 오동통하게 살이 붙어 있었다. 남성이라면 저 허벅지를 본다면 한번쯤 움켜 쥐어보고 싶다는 욕망이 절로 일어날 것이다. 더불어 연한 회색빛이 감도는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리니 영락 없는 퇴폐적인 분위기를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돌리던 단검을 일자로 세우고는 그대로 바짝 조인 자신의 가슴골 정 중앙에 꽂았다. 이윽고 그녀는 그 상태로 손가락 하나를 살짝 얹고는 천천히 아래로 누르기 시작했다. 조금만 엇나가도 베일것 같은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대는 단검이 딱 붙은 가슴골 사이를 주르륵 비집고 들어간다. 너무도 야하면서도 위험해 보이는 그 광경에 신상용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반응을 잔잔히 보던 고연주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만족하니?” 그녀의 치명적인 목소리가 방 안을 나른하게 흔들었다. 더이상의 나긋한 존댓말은 없다. 지금부터는 여관 주인이 아닌 온전한 그림자 여왕으로 우리들을 대하겠다는 소리 였다. 그녀의 온 몸에서 흘러 나오는, 치명적일 정도로 유혹적인 분위기에 신상용과 하연을 숨을 죽였다. 혹여나 하연이 또 나서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다행히 치고 빠질때를 알고 있었다. 지금은 하연이 빠질 때 였다. 고연주는 잠시 달콤한 숨결을 뱉고는 천천히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입술을 혀로 살짝 핧으며 내 옆으로 바짝 다가 앉았다. “술 한잔 따라 드릴게요.” “일단….” “아이 참. 오늘 밤은 길어요. 일단 한잔 받으세요.” 고연주는 내 귀에 후욱 숨을 불어 넣었다. 아까 자신의 면을 세워준 답례로 보기에는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는 너무도 불안정 했다. 아무튼 중요한건 그녀가 둘을 대하는 태도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것. 즉 이제 슬슬 앞으로 나오라는 그녀 나름의 신호라고 해석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유혹적인 눈웃음을 치며 술병을 하나 집었다. 그리고 내 손에 강제로 술잔을 쥐어 주고는 두 손으로 공손히 따르기 시작 했다. 쪼르륵. 고연주는 어느새 은근슬쩍 내 옆으로 밀착해 있었다. 옆으로 바짝 다가온 그녀의 입술에서 달착지근한 향기가 풍기고, 여성 특유의 향기로운 살내음도 풍겼다. 그러면서 내 팔에 자신의 자신의 가슴을 살짝살짝 스치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가 몸을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부드러운 살결과 싸늘한 단검의 예기가 동시에 손을 타고 전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하연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그녀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나에게 조심하라는 신호를 주고 있었다. 어줍잖은 질투가 아닌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그 모습에 나는 조금이지만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녀의 응원에 힘입어 그대로 속을 가다 듬었다. 초반이 하연과 고연주의 기 싸움 이었지만, 고연주가 본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하연이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나설 차례 였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정하연 Vs 고연주. 결과는 하연의 바통 터치. 슬슬 고연주 복선을 회수할 준비를 해야겠군요. :) 아. 제사는 무사히 마쳤습니다. 감사합니다. (__) 집안의 장남이 해외로 나가 있는터라 둘째인 제가 그 자리를 메웠습니다. 중앙에서 절을 하는데 그 쏟아지는 시선들이 왜 이렇게 부담스러울까요. 하하하. 그럼 이만 자러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몸이 피곤하네요. 여러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 리리플 』 1. 블러드헬 : 1등 축하 드립니다. 새로운 1등 코멘터의 출현 이군요!(짝짝짝.) 이번회도 재미있게 감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2. 포닥 : 오옷. 어디서 그런 좋은것을 배우셨…농담 입니다. 맛있게 먹겠습니다. 와구와구! ^~^ 3. 베지밀군 : 엇. 처형의 공주는 이미 한소영 밑에 있다는 설정인데요. 어떡하죠…. 4. juan : 후후. 비비앙은 앞으로…( --). 여기서 고연주를 뎅강 한다면 독자분들에게 몰매를 맞을것 같습니다. 원래 반반 이었는데…. ㅜ.ㅠ 이렇게 된이상 독자분들이 고연주를 싫어하게끔 만들 수 밖에 없군요! 5. 오피투럽19 : 아무래도 제가 요새 너무 음란해진것 같습니다. 뒷조사…흐흐흐흐. 6. 가한나 : 에…고연주는…음…. ㅜ.ㅠ 아직 뭐라 확답을 드리기…. ㅜ.ㅠ 수현이도 이미 멋진 진명이 있답니다! 7. GradeRown : 낄낄. 사방이 적 입니다…는 아니구요. 앞으로 물론 같은편도 나올 겁니다. :) 8. archangels la : 안경 로맄ㅋㅋㅋㅋㅋㅋㅋㅋ. 전 아청아청에 걸리기 싫어요! ㅋㅋㅋㅋ. 9. 게임소설조타 : 이럴수가. 고연주가 정보 수집 따까리 라니요 ㅋㅋㅋㅋ. 10강의 몰락 이군요! 10. Toranoanal : 제 마음에 불을 붙이셨습니다. 절단마공은 대성했다고 생각 했는데, 아직 부족했던 거군요. Toranoanal님의 조언을 적극 수용해 앞으로 더욱 절단 마공을 연성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__) 그리고 <하나씩 삐끗하는듯한 느낌을>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네요. 아마 제가 요즘 느끼는것과 비슷한걸 생각하신것 같습니다. 조금 더 노력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11. 사람인생 : 하하하. 사람인생님은 제 마음속의 영원한 1등 코멘터 입니다. 초창기 시절 사람인생님의 전설은 정말로 대단했었죠. 음음. 초반에 힘든 시절이 종종 있었는데, 그때마다 코멘트와 쪽지를 보내주신 분들이 참 많으셨습니다. 사람인생님도 그중 한분이셨구요. 그당시 사람인생님의 코멘트를 보고 소소히 웃은 사람은 저 뿐만이 아닐겁니다.(D모님도 가끔식 재밌게 보시는것 같더군요. 하하.) 언제나 메모라이즈와 저에 대한 관심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도 많은 응원 부탁 드리겠습니다.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25 / 0933 ---------------------------------------------- 소소한 반항 술이 한순배 돌고 다들 목을 축인 후 나는 설명을 시작 했다. 내가 앞으로 만들 클랜의 특징은 총 2가지를 들 수 있었다. 소수 정예와 자유 용병의 특성과 의뢰를 바탕으로 하는 운영형 클랜. 소수 정예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지만, 고연주와 하연은 자유 용병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는 사용자들은 애들처럼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용자들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자유 용병이라는 신분이 얼마만큼 이득을 가져다 주는지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을 할 필요성을 느꼈다. 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차분히 정리했다. 부랑자 말살 계획의 일부 성공. 그러나 완벽한 말살은 실패. 일부 부랑자들의 도주. 황금 사자 클랜과 우호 클랜들의 강철 산맥 원정 실패로 인한 전력 감소. 그리고 그에 따라 대도시 바바라를 비롯한 북대륙의 통제력 약화. 황금 사자 클랜의 소집령이 나왔으나, 우호 클랜을 제외한 일부 도시들의 독립 선언. 그 틈을 노린 부랑자들의 발호(跋扈). 서대륙 사용자들의 일부 참가로 인한 서쪽 도시와 대도시 바바라 점령. 그리고 황금 사자 클랜 소멸. 우호 클랜들 또한 해체 또는 도주. 일단 여기까지가 1회차에서 실제로 발생 했던 일들 이었다. 그 후로는 바바라가 점령 당하고 난 후 다른 일반 도시 대표 클랜에서 탈환 시도를 하지만, 서대륙 사용자들과 부랑자들의 합공에 패주하고 만다. 그때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다른 클랜들이 연합군을 만들었고 결국 바바라를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모두에게 설명 했다. 물론 모든것들을 말해주지는 않았다. 이야기의 중점은, 강철 산맥의 진군이 실패 가능성이 높다는 점과 부랑자들의 발호,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가져올 결과를 최대한 어필하려고 노력 했다. 내 말에 일행들과 고연주는 깊은 침음성을 흘렸다. 처음의 짜릿하던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고 방 안을 짓누르는 무거운 침묵만이 우리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맴돌았다. 나름대로 홀 플레인의 사정을 알고 있는 사용자들 이지만 내 말을 곧이 곧대로 믿기에는 불확실한 요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건 나도 인정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어찌어찌 말은 되는데, 그 와중에 필수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일들에는 “과연 그렇게까지 될까?” 라는 생각이 드는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고연주가 참가한게 바로 신의 한수였다.(물론 내가 의도한건 아니었다.) 그녀는 5년차 사용자에다가 <10강>의 1인인 그림자 여왕이고 시크릿 클래스를 지니고 있다. 걸어다니는 정보상이라 불리는 고연주인 만큼 그녀가 내 계획을 어떻게 평가할지가 중요 했다. 고연주의 판단은 내 말이 실제로 가능성이 있는지, 아니면 단순한 공상에 불과한지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될 것이다. 신상용은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너무 스케일이 큰 얘기들을 듣자 감이 잘 오지 않는 모양 이었다. 확실히 이 사람은 순수한 학자 타입이라 이런 얘기와는 잘 맞지 않는 감이 있었다. 그리고 하연의 얼굴 또한 애매 했다. 내 말을 모두 이해는 했지만 그것을 곧이 곧대로 받아 들이기는 힘든것 같았다. 다만 얘기를 꺼낸 사람이 나인만큼 함부로 말을 하지는 않고 있었다. 어차피 둘의 반응은 예상하고 있었다. 원래는 이정도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고연주가 낌으로서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조금 더 얘기 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고연주로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 그녀의 심각해진 얼굴을 보자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고연주는 찌푸린 얼굴로 입맛을 다시다가, 눈 앞에 놓인 술 한병을 통채로 들었다. 이윽고 그녀는 예쁜 입술을 살짝 벌려 살며시 병의 입구를 머금었다. 그리고 누가 말릴틈도 없이, 그대로 술병을 거꾸로 들었다. “꼴깍, 꼴깍.” 가득찬 술 한병을 그대로 원샷하는 고연주의 모습에 신상용은 질렸다는 얼굴로 그녀를 응시 했다. 그녀의 입에서 물줄기들이 흘러나오고 목을 타고 내려와 그대로 가슴을 적신다. 곧이어 한병을 깨끗이 비운 그녀는 그대로 병을 테이블 위로 되돌려 놓았다. 그제서야 메마른 목을 어느정도 달랬는지 달콤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고연주는 잠시 동안 헛웃음을 흘리고는 나를 보며 목소리를 냈다. “나참…그냥 심심해서 얘기나 들을까 하고 들어왔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지…사용자 김수현.” “음.” 그녀의 부름에 나는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녀는 뭔가 힘들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 진짜 무서운 사용자네요.” 그녀의 첫마디는 “내가 무섭다.” 였다.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지만 일단은 내 말을 허무맹랑하게 받아 들이지 않은듯 보였다. 어차피 <10강>에 이른 그녀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건 그녀 또한 원정을 달갑게 여기지 않을 가능성이 많았다. 그에 힘입어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떤점에서요?” “그런 상황들을 0년차 사용자가 예측 했다는게 너무 놀라워요. 이건 저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일들 이에요. 아니 그보다…그 틈을 이용하려고 하는게 더 무섭고. 능력형이 아니라 책사형 이었네요? 아니면 둘 모두 가지고 있는 사용자 이거나.” 고연주는 살짝 취기가 오르는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그대로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 모습을 본 하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용자 고연주는…수현이 한 말들을 어떻게 평가 하시나요?” 하연의 물음에 고연주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흘겼다. 그러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 했다. “모르겠어…아니 애매해. 솔직히 방금전 꺼낸 말들중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말들은 모두 맞다고 보면 돼. 실제로 황금 사자 클랜에 불만은 품은 클랜들도 많으니 그들이 원정에 실패한다면 손뼉치고 좋아할 놈들은 많겠지. 그래. 황금 사자 클랜의 통제력이 약해지면 분명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클랜들이 나올수도 있어. 하지만….” 그녀는 내 말을 일부 인정 했다. <10강>에 이른 사용자가, 그것도 정보 수집 능력이 뛰어난 그림자 여왕이 내 의견에 일부나마 힘을 실었다. 하연과 신상용은 고연주의 의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부랑자들에 대한 얘기는 지금 판단할 수 없는 것들이에요. 사용자 김수현의 말들이, 그리고 앞으로 만들 클랜이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부랑자들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여야 하는데…과연 그럴까요?” “거의 그럴겁니다.” “내가 알기로는 이번에 부랑자들도 대거로 모이고 있어요. 하지만 어떻게 됬든 승패를 논하라고 하면 100% 기존 사용자들의 승리. 말살 계획인 만큼 부랑자들의 씨를 말릴텐데 그들이 서대륙으로 넘어가 발호하고, 그 대륙 사용자들을 이끌고 침공 한다구요?” 나는 고연주의 말에 씩 웃음을 지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부랑자 말살 계획은 1차에서 끝난다. 첫번째 교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기는 하지만 그에 만족하고 바로 원정 준비로 눈길을 돌린다. 물론 사용자들 또한 피해는 크게 입는다. 황금 사자 클랜의 우호 클랜중 하나인 서쪽 일반 도시 헤일로의 대표 클랜 SSUN이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니까. 즉 남은 부랑자들은 서로 모인 상태에서 서대륙으로 건너가게 되고, 그들의 원호를 얻어 다시 서쪽 루트를 이용해 침공을 시도한다. 나는 잠깐 동안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강철 산맥 원정으로 눈이 팔린 놈들인데 과연 도주하는 놈들을 일망타진할 생각이나 있을까요? 그렇게 쉽게 잡히는 놈들도 아니고 살아남는데는 일가견이 있는 놈들인데.” “…좋아요. 그럼 서대륙 원호는? 그쪽놈들이 어떤 놈들 인지는 알고 있지만, 과연 대륙을 넘는 위험을 감수할지는 잘 모르겠네요.” “격전지가 헤일로인만큼 도망칠곳은 서대륙 밖에 없겠지요. 다시 북대륙 안으로 기어 들어오는건 자살이나 다름 없으니까. 한번 넘어가는건 어렵지만 그때 부랑자놈들이 순순히 도망만 가리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내 생각에는 복수에 혈안이 되서 어떻게든 대륙을 잇는 길을 하나 뚫을것 같은데…아니면 루트 하나를 만들거나. 지금까지 넘어온 전례가 없는것도 아니고, 북대륙 부랑자들의 희생으로 루트 하나를 확보하면 그놈들 중에서도 해볼만하다고 생각하는 놈들이 있지 않을까요?” “흐응….” 고연주는 그럴싸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이더니 이내 자신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나는 곧바로 그녀의 입에 연초를 물려 주었다. 물론 이왕 꺼낸김에 내가 피울 연초도 꺼낸건 당연한 일 이었다. 화륵, 후욱. 연기를 한모금 내뿜은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말, 부랑자들의 움직임에 대한 관건은 부랑자 말살 계획이 조기 종결이군요. 확실히 놈들의 특성이라면…. 킥, 사용자와 부랑자의 특성까지 계산하는 사용자라. 한층 더 무서워 지는데요. 하지만 확실히 일리는, 가능성은 있어요. 그러면 북대륙은 혼란 상태로 빠져들고, 자유 용병 특성을 지닌 클랜의 활동 범위가 대폭 넓어지는건 자명한 일이고…. 당신이 장차 어떤 사용자로 성장할지 너무 기대되네요. 그런데 궁금한게 몇가지 더 있어요.” 그녀는 이 모든 말을 아주 빠르게 얘기했다. 겉으로는 태연해 보이지만 말이 조금 두서가 없는걸 보니 나름대로 머리를 회전하고 있는 모양 이다. 솔직히 계산한건 아니고, 그냥 미래에 일어난 일들을 줄줄 말했을 뿐인데. 아무튼 일단 하나는 인정하고 하나는 보류를 하겠다는 건가. 나는 가만히 그녀의 다음말을 기다렸다. “과연 그 클랜이 명성을 쌓을 수 있을까요. 물론 지금껏 연차 대비 엄청난 실적을 올렸다고 해도 갓 출발한 클랜에 들어가는건 아무래도 불안한 요소가 많을거에요.” “그래서 애초에 소수 정예라고 했잖아요. 우리야말로 어중이 떠중이를 받을 생각은 없어요.” “오만하군요.” “그 오만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요소들이 있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시크릿 클래스 하나에 레어 클래스 둘. 그리고 실력 좋은, 또는 가능성 있는 사용자들. 누가 이 자유로운 전력을 무시할 수 있을까요?” 시크릿 하나와 레어 둘이라는 말을 꺼내자 고연주의 눈동자가 흔들리는게 보였다. 그녀는 순식간에 안색을 굳힌 다음 입을 다물었다. 고연주가 다시 말문을 연건 내가 연초 한대를 다 태웠을 시점 이었다. 그녀는 혼잣말로 “시크릿…레어 클래스….” 라고 중얼거리더니 이내 조금 복잡해 보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얘기는 잘 들었어요. 하나 더 질문해도 될까요?” “얼마 든지요.” “이런 중요한 얘기들을 왜 나한테 하는거죠. 저기 둘은 네 일행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용자인데요.” 고연주의 말에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신상용과 하연을 지그시 바라 보았다. 내 시선의 의미를 깨달은 둘은 조금은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내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말문을 연 사용자는 신상용 이었다. “리더.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리더의 캐러밴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스승님을 놓치기 싫은 마음도 있구요. 리더만 괜찮다면 앞으로도 쭉 함께 하고 싶습니다.” “수현. 이미 예전에 내 마음은 전달했어요. 오늘 수현이 해준 얘기들은 실감이 잘 안나지만…. 당신을 믿기로 한만큼 저 또한 당신을 믿겠어요.” 나는 둘의 가입 의사를 확인한 후 부드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원래는 좀 더 천천히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먼저 매듭 지을 일이 생긴것 같습니다. 저 또한 두분을 받아 들일 생각이 없었다면 이런 얘기들을 꺼내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 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고생들 하셨습니다.” “고생은요. 하루하루가 즐거운데요.” 하루하루가 즐겁다라. 넉살 좋게 웃는 신상용을 보며 나는 실소를 흘린 후 말을 이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럼 저희들은 이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둘은 내게 간단히 고개를 숙인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막 방문을 나서기 전 하연이 불안한 얼굴로 나와 고연주를 한번 돌아보았다. 나는 괜찮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는 입모양으로 <조심하세요.>라고 전달한 후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이제 방 안에 남은 사용자는 나와 고연주 뿐 이었다. 우리들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고연주는 진한 미소를 머금은채 내 옆으로 바싹 다가 앉았다. “드디어 둘이 남았네요?” “그렇군요. 그런데 말좀 통일하면 안될까요. 다른 사용자들 한테는 반말 했다가 나한테는 존댓말 했다가. 헷갈려요.” 고연주는 내 말에 키득키득 웃고는 교태를 부리는 몸짓으로 내게 몸을 밀착 시켰다. “어쩔 수 없어요. 내 성격이 원래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거든요. 원래 그러니 이해를 해요. 그리고 내가 아무한테나 이러는줄 알아요? 남자들은 이렇게 둘만 있을때 말 높여주면 되게 좋아하던데~?” “그게 무슨…?” “당신도 그렇지 않은가요? <10강>이나 되는 사용자가 이렇게 앞에서 교태도 부리고, 말도 높여주고. 은근히 기분 좋잖아요.” 그녀의 얼굴은 심각했던 아까보다 조금 풀어져 있었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말을 조심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살짝 밀어낸 후 자세를 고쳐 앉았다. 고연주는 내 행동에 새초롬한 얼굴을 하고는 슬쩍 문을 곁눈질 했다. “아까 그 맹랑한 아가씨가 보는 눈빛이 장난이 아니던데. 보는 내가 다 애틋해질 정도였어요.” “…말이 삼천포로 새는군요. 이만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이대로 가다간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들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화제를 다시 되돌리기로 했다. 내 단호한 음성에 고연주는 입을 삐쭉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휴. 재미 없기는. 좋아요. 그럼 다시 물을게요. 도대체 그런 말들을 나한테 해준 이유가 뭐에요?” “그건….”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의 가슴을 바라 보았다. 그녀의 가슴골에는 아직도 단검이 깊숙하게 꽂혀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오늘 날씨가 정말 좋습니다. 너무 좋아서 도시락 싸들고 피크닉이라도 가고 싶네요. 이상하게 몸이 나른해 초반에 글이 안써지다가, 몸을 한번 씻으니 활력이 돋는 기분입니다. :) 고연주가 의외로 인기가 많네요. 쳇.(?!) 다음회는 어떻게 하면 독자분들이 고연주를 미워할지 고민좀 해보겠습니다. 하하하.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PS. 제 절단 마공의 성취도를 평가해 주십시오. 『 리리플 』 1. lDl : 1등 축하 드립니다. 간결한 코멘트 였습니다. 하하하. 그럼 125회도 부디 재미있게 감상해 주세요. :) 2. 골드메달 : 그렇습니다. 자정 1등 코멘트는 전쟁 입니다. 전쟁 이에요! 하하하하!(퍽퍽!) 3. 싸울아비헌터T : 솔직히 말씀 드리면 초기 설정은 죽이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설정 하고나서도 저도 많이 고민했어요. 살릴까, 말까. 그 고민은 현재 진행형 입니다. 지금은 반반 이에요. :) 4. 사람인생 : 하하하. 하연이 이성적이긴 해도 사람 이니까요. 그리고 사람들은 누구나 다 역린을 가지고 있구요. 아마 주인공이 없었다면 꾹 참고 있지 않았을까요? :) 5. pen36 : 정말 극도로 필요할 때 쓸 생각 입니다. 본문 내용은 수현이 아직 고민하는걸로 나와 있거든요. 그리고 지금 능력치로 왠만한 일들은 처리할 수 있구요. 왜냐하면 능력치 포인트 상승이 아주 없는건 아니거든요. 6. 불곰리즈 : 오라! 메모라이즈여! 챕터 <소소한 반항>의 세번째를 담당하는 125회의 내용이여!(ㅈㅅ합니다.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ㅋㅋㅋㅋ. 쿠폰 감사합니다. (__) 7. black44 : 에헴. 제 절단마공이 어떠신지요. 후후후후후. 8. 고장난선풍기 : 엇.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하하. 앞으로도 더욱 노력해서 좋은 내용으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 9. gkgngh : 네. 그때 어떤분이 지적해 주셨더라구요. 제가 그때 수정을 한것 같은데, 아직 안되있나요? 혹시 몇회인지 알려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10. 블라미 : Yes. 정답 입니다. <10강>은 있지만, 교체 되거나 아니면 밀려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렇게 쉽지는 않죠.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26 / 0933 ---------------------------------------------- 소소한 반항 꽉 조인 탱크탑을 조금만 아래로 내리면 그녀의 가슴이 출렁이며 튀어 나올것 같다. 고연주는 내 시선을 보더니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슬쩍 문지르며 도발적인 눈길을 보냈다. 그 눈길에 이끌려 나는 가만히 그녀의 가슴으로 손을 내민다. 내 손길에 고연주는 잠시 움찔 했지만 이내 배시시 웃으며 자신의 상체를 살짝 내밀었다. 마치 마음대로 하라는듯이. 그리고 그녀의 기대에 부응해 나는 곧바로 가슴골 사이 단검 손잡이를 잡고 위로 쑥 뽑아 올렸다. “…….” “아까부터 조금 거슬리더라구요.” 고연주는 내 말에 멍한 얼굴이 되더니, 킥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웃든말든 나는 검신에 살며시 손을 대었다. 젖무덤 사이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는듯 단검은 따끈한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그녀는 놀리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냄새도 한번 맡아 보지 그래요? 오늘 좋은거 바르고 왔으니 향기로울 걸요.”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둘 밖에 없는데 조금 더 대담해져도 되지 않을까요?” 또다시 화제를 이상한 곳으로 몰고 가려는 낌새를 보인다. 나는 손으로 슬슬 쓰다듬던 단검을 테이블 위로 올려 두었다. 손에 날카로운 예기가 전달 되는게 보통 단검은 아닌듯 싶었다. 이제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해줄 시간 이었다. “이런 중요한 정보들을 그림자 여왕한테 말한 이유는….” “흐응….” 그녀는 콧소리를 내며 내 말에 호응했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시선을 돌려 주변을 둘러 보았다. 테이블 위에는 어느정도 먹다 남은 음식들과 빈 술병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나는 조금 남아 있는 술 한병을 집은 후 빈잔 두개에 술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 평가를 받고 싶었거든요.” “평가라…. 나한테요?” 그녀의 되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술을 가득 채운 잔 하나를 고연주에게 건넨다. 그녀는 잔을 받았지만 바로 마시지는 않았다. 연한 잿빛이 감도는 눈동자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추가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살짝 떠보기로 결심했다. “<10강>에 이른 사용자는 제 계획을 어떻게 평가 하는지 듣고 싶었습니다. 특히 그게 그림자 여왕이라면 더더욱 듣고 싶었죠.” 완곡히 돌리는 말에 그녀는 미소를 흘리며 대답 했다. “불확정 요소들이 많다는거만 빼면 무서운 계획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 요소들이 현실이 된다면…시크릿 하나에 레어 둘. 정말 그렇게 되면 주변 클랜들이 군침좀 흘리겠는데요? 그리고 그걸 자유 용병 특성과 의뢰 운영으로 명분을 가지겠다. 뭐…좋아요. 솔직히 나는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홀 플레인에서 용병 클랜은 생각도 못했어요. 그런데….” 일장 연설을 마치고 난 후 그녀는 손에 든 술잔을 단숨에 삼켰다. 나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술맛이 입 안에 남는지 살짝 입 안을 다시던 그녀는 이내 진한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사용자 김수현은 거짓말은 참 못하네요?” 나는 속으로는 따끔 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얼굴을 유지 했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그녀는 까르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거짓말 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런가? 그 이유만은 아니라고 말하는게 더 정확하겠네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당신은 진짜로 말을 할때는 항상 상대방을 똑바로 보면서 얘기하거든요. 그런데 방금전에는 술을 따르고 나한테 건네 줬어요. 그 행동을 핑계로 내 시선을 피했죠.” 그녀의 억측에 나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추측에 불과해요. 단순히 그때 술이 마시고 싶었다면요?” “아니요. 내 추측에 확신이 있어요. 당신의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어요.” 내 말에 고연주는 무서울 정도의 빠른 속도로 대답 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얼굴에는 예의 보이던 나긋함은 완전히 사그라 들었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었고 온 몸 여기저기서 찐득찐득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순간에 달라진 그녀의 기세에 나는 온 몸이 짜릿해지는걸 느꼈다. 내가 1회차에 그녀를 볼때마다 느꼈던 모습. 정말 오랜만에 보는 1회차 시절의 <그림자 여왕> 이었다. 고연주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 나고는 내가 뽑은 단검을 다시 손에 가져갔다. 그리고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거리를 줄였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굉장히 특이하다. 가만히 살펴보면 진로가 일(一)자를 만들고 있었다. 언뜻 보면 참 섹시하게 걷는다고 볼지 몰라도, 그게 그녀만의 독특한 걸음걸이 라는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 상대방과의 거리를 가장 빠르게 좁힐 수 있는 일종의 보법. 본능적으로 차오르는 긴장감에 나는 서서히 온 몸의 감각을 일깨웠다. 하지만 그에 아랑곳 않고 고연주는 살며시 내 가슴에 손 하나를 얹고는 동그랗게 내 주변을 맴돌기 시작 했다. 이윽고 그녀가 반바퀴정도 돌고 내 뒤로 갔을즈음,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 말이죠. 아주 오래전 홀 플레인으로 들어 왔어요. 햇수로 따지면 5년정도 되겠네요.” “그건 아까….” 내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고연주는 나를 슬며시 껴안았다. 그녀의 왼손이 슬쩍 내 가슴을 타고 들어와, 품 안을 빠르게 더듬는다. 곧이어 안에서 연초 두대를 쏙 뺀 그녀는 내 어깨에 턱을 걸친 후 하나를 입에 물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차분히 손가락 끝에 불을 일으켜 연초의 머리에 붙여주자, 그녀는 남은 한대를 내밀어 내 입에 물려주었다. “에헤이. 불은 이걸로.” 고연주는 불이 붙은 내 손가락을 잡고 가만히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입에 물고 있던 연초를 내 쪽으로 더욱 들이밀었다. 나는 코로 크게 숨을 내쉰 후, 고개를 돌려 그녀의 연초와 내 연초의 끝을 서로 맞추었다. 치익. 치이익. 담배 키스. 고연주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연기를 길게 뱉었다. 잠시 동안 연초의 향을 음미하던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이런 행동들을 하는지 궁금해요?” “조금은.” 순순히 인정하자 옆에서 고연주가 소리를 죽이고 웃는걸 느꼈다. “사용자 김수현의 첫 말이 기억나네요. 제가 만들 클랜은 생존과 귀환을 목표로 합니다. 그 말 듣고 속이 엄청 뜨끔 하더라구요.” “지구로 돌아가고 싶지 않나요?” “엄청 돌아가고 싶어요.” 예전에 나는 그녀를 보고 독을 품을 꽃이다, 쏘일 수 있다라는 말을 꺼낸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의 반응이 평소와는 달라 말 실수를 했다고 여겼는데 그녀도 나름대로 사연이 있는것처럼 보였다. 하긴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조금 답답한 마음이 드는것도 사실 이었다. “지구에서 저는 어떤 사람이었을 같나요? 사용자 고연주가 아닌, 대한민국의 고연주는.”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나이가 20대 중반을 넘겼으니 대학생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커리어 우먼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의 행동은 그만큼 남성을 유혹하는 행동을 자주 보이곤 했으니까.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고 있지 않자 그녀는 쓸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요. 그래요. 나 술집 여자였어요.” “…….” “그래도 그렇게 더럽고, 음란하게 논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쪽에 종사하다보면 좋든 싫든 몸을 사용해야 할때가 있죠. 아빠뻘 옆에 찰싹 달라 붙어서 애교도 부리고, 몸에 일부러 술도 흘리고.” “사람마다 사정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간신히 대답하자 내 목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스친다. 그녀는 지금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아~무 사정도 없어요. 가세가 기운것도 아니고, 협박도 아니에요. 그저 돈이 필요해서 그리고 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그곳으로 제발로 들어갔죠. 사용자 김수현은 이런 저를 어떻게 평가 하시나요?”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그녀의 말을 들어야 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고연주 또한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는 지금 하기 싫은 말을 억지로 하고 있다는 뜻 이었다. 내 대답을 원하지는 않지만 듣고는 싶다. 그야말로 모순적인 감정 이었다. 일부러 좋게 말하기 보다는, 나는 그냥 진솔한 내 생각을 말하기로 결정 했다. 그녀도 그걸 원할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모두 한가지 이상의 직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술집 여자라고 하면 아무래도 이미지가 좋지 못한건 사실입니다.” “…킥.” 그녀는 내 대답에 키득 웃음을 흘리고는 감았던 팔을 풀었다. 그녀의 몸이 스르르 내게서 떨어져 나가고, 다시 천천히 내 주변을 걷는다. “이 홀 플레인에 들어오고 난 이후 가장 좋은점이 뭔지 알아요?” “홀 플레인에 좋은점은 없습니다.” 나는 곧바로 즉답 했으나, 그녀는 내 앞에서 손가락을 까닥까닥 흔들었다. “아니요. 적어도 저한테는 있어요. 아까 하연이란 사용자…보니까 참 얼굴이 맑고 깨끗하더라구요. 아마 현대에서는 대학 생활이든 뭐든 나름대로 열심히 살던 여성 이었겠죠. 저와는 달리 말이에요. 솔직히 아까 욱한건 그녀의 태도도 있었지만, 가장 큰건 눈동자. 즉 시선 이었어요.” 고연는 내 말을 거짓말이라고 했고 그 이유를 눈동자라고 답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더욱 귀를 기울일 필요성을 느꼈다. “처음에 그 맑은 눈동자로 나를 고깝게 쳐다보는데, 참 맘에 안들더라구요? 저는 그런 시선이 참 싫어요. 그래서 일부러 옷도 찢으면서 저를 드러냈죠.” “어떤 시선 이었는데요.” “사람을 싸구려로 보는듯한 시선.” 싸구려라. 나는 그때서야 그녀의 내면에 있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즉, 그녀는 홀 플레인에 들어온 이후와 지구에서의 자신을 비교하고 있었다. 일종의 자격지심(自激之心) 혹은 열등감 이라고 해야할까.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내가 1회차에 그녀에게 조금 끌렸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고연주는 모종의 이유로 사람들에게 실망감은 느꼈고, 그로 인해 깊이 믿지 못한다. 내 생각이 맞다면 그녀와 나는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홀 플레인은 참 재밌어요. 현대에서 엘리트였던 사람이 홀 플레인으로 오면 거지가 되는 경우가 있죠. 그 반대로 현대에서 백수였던 사람이 홀 플레인으로 오자 유명 인사가 되구요.” 그녀는 다시 반바퀴를 돌고 발을 멈췄다. 내 앞에 섰지만 몸은 여전히 옆모습만 보인 상태였다. “또한 현대에서는 술집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깔봄을 받던 여자가…홀 플레인에서는 사용자들의 우러름을 받는 그림자 여왕이 될수도 있답니다.” 고연주는 말을 마치고 몸을 절반정도 돌렸다. 그렇게 나와 그녀는 서로 마주보게 되었다. 다시 한걸음씩 다가와 그녀가 내게 몸을 밀착한다. 나는 그녀의 행동에 그저 가만히 있었다. 몸 안의 감각을 예민하게 깨우고 있었지만 그녀의 모습 어디에서도 위협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고연주는 가만히 내 뒤통수에 두 손을 올려 얹은 후 가슴에 머리를 비스듬히 기대었다. 멀리서 보면 사랑하는 연인이 서로를 보듬는 모습 이겠지만 아쉽게도 현재 내가 느끼는 감정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 가슴에 얼굴은 묻은채로,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저는 상대방을 볼때 항상 눈동자를 봐요. 눈동자를 보면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대충은 알 수 있거든요.” 고유 능력 <유혹의 눈동자>. 나는 그동안 단순히 그림자 여왕으로 인해 얻은 능력인줄 알고 있었다. 후천성 고유 능력은 정말로 어지간해서는 생성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그게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너무 시끄러워서 조금 쉬고 싶었어요. 귀찮을 일도 피하고 싶었구요. 그래서 뮬로 내려오고 여관을 하나 땄죠. 설마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 유명한 그림자 여왕이 여기서 여관을 운영하고 있을줄은.” “…….” “예전 생각이 나서 신분을 숨겼어요. 일부러 옷도 야하게 입구요. 걸을때마다 엉덩이도 살랑거리고, 대놓고 교태를 부려요. 예상대로 남성 사용자들은 저를 보며 눈동자에 욕망을 번들거렸고, 여성 사용자들은 꼴 같잖다는 시선을 보내더라구요. 그런것들을 보면서 참 씁쓸하기도 하고 뭐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어요. 지구에서는 그저 당하기만 했던걸 이번에는 반대로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내 뒤통수를 감싼 두 손에 강하게 힘을 주어 내 머리를 숙이게 하고 그녀 또한 비스듬히 기대었던 머리를 위로 치켜 올렸다. 그러자 그녀는 아래에서 위로, 나는 위에서 아래로 그녀를 마주보게 되었다. 거리는 상당히 근접했다. 내 얼굴에 그늘진 그녀의 얼굴이 정말로 가깝게 보였다. 날카롭게 빛나는 눈동자도, 오똑한 콧날도, 예쁜 입술도. 그녀가 한번 숨을 살짝 내뱉자 달콤한 술냄새와 향기로운 연초의 향이 동시에 들어왔다. 내 눈동자를 보는지 꼼꼼히 내 눈 주변을 훓던 그녀는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는 더이상 말을 높이지 않았다. “당신은 다르더라.” “…어떤점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눈동자가 공허해. 내가 아무리 유혹하고, 알짱거려도 당신의 눈동자에서 본 감정은 딱 두가지였어.” 내가 눈동자에 감정을 비친적이 있었던가. 나는 절로 호기심이 일었고,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고연주는 정말 흥미로운 사용자였다. “하나는 내가 귀찮다는 눈동자.” 확실히 조금 귀찮게 굴때도 있었지. 나는 한두번 고개를 주억인 후 곧바로 나머지를 물었다. “나머지 하나는?” 내 물음에 잠시 동안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기어코 내 시선을 회피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우리들은 한동안 서로의 눈동자를 보고 있었다. 이윽고, 고연주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고연주의 엄청난 육탄 공세, 그러나 잘 방어중인 수현. 고연주의 팬 분들이 이렇게 많을줄은 몰랐습니다. 하하하. 지금 와서 느끼는건데, 메모라이즈에는 아픈 사연을 가진 캐릭터들이 참 많은것 같습니다. 고연주 또한 마찬가지구요. 그녀는 과연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 일까요? 후후.(궁금하면 오백원!)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 나겠습니다. 다들 편안한 밤 보내세요!(새로운 한주의 시작은 밝고 희망차게!) PS. <고장난선풍기>님께서 제 뜰에 메모라이즈 캐릭터 팬 아트를 보내 주셨습니다! 모두 한번쯤 오셔서 구경해 주세요!(제 뜰 - 메모라이즈 캐릭터(방문자용.)에 있습니다. 무려 컬러에요! 컬러라구요!) 이 자리를 빌어 고장난선풍기 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꾸벅.(__) 저 오늘 잠자기 글렀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설레여서 어떡해요. 『 리리플 』 1. 마동포 : 첫 1등 축하 드려요! 요새 1등이 참으로 총체적 난국이네요. ㅋㅋㅋㅋ 매번 볼때마다 새로운 분을 뵙는것 같아요. :) 2. 炎天神 : 주말 날씨가 정말 좋더라구요. 도시락 싸고 애인이랑 피크닉 가면 딱! 그런데 애인이 없죠. 네. 없어요. 없다구요. 하하하하하! 하하하흐어어흐으어엉. ㅜ.ㅠ 3. 꼬야 : 건강 걱정 감사 합니다. 안그래도 요즘 몸이 나른하고 피곤한데, 병원이라고 가봐야 할까요. 꼬야님도 환절기 감기 조심하세요! 요즘 감기가 유행이래요. :) 4. 진지무적독자 : 흐흐흐. 그거 아주 좋죠. 흐흐흐흐. 스읍.(?!) 5. 흐뭇한별빛 : 벼…별빛님. 아이디가 탐이 납니다. 정말 탐이나요. 헠헠. 아이디! 아이디…죄송합니다. ㅜ.ㅠ 저도 총총총~. 6. 때구니™ : 아하하. 적어도 홀 플레인에서의 NTR은 없을 겁니다. 다만 캐릭터마다 사연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정도는 이해를 해주실거라 믿어요. :) 7. 아미슈 : 하하하. 감사 합니다. 모든 독자분들이 납득 하시는 그날까지 절단 마공을 수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구…연주는…한번 생각 해볼게요! ㅋㅋㅋㅋ 8. -DarkANGEL- : 장문의 코멘트 감사합니다. 캐릭터를 그런식으로도 활용할 수 있네요. 앞으로의 진행에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 9. 고장난선풍기 : 크크큭. 모든 독자분들이 납득하시는 그날까지 절단 마공은 계속 됩니다. 그리고 저는 돌 무더기를 맞겠죠. ㅜ.ㅠ 아. 팬 아트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저 오늘 잠 못잘거 같아요. 어떡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 10. hohokoya1 : 에헤헤. 뭔가 감사함과 죄송스러움이 동시에 드네요. 하지만 아직 고연주의 처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후훗.(퍽퍽!) 11. 정적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그 부분을 쓰면서 아 정말 섹시하다고 느꼈습니다. 독자분들께 잘 다가간것 같아 다행이에요!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27 / 0933 ---------------------------------------------- 임시 합류 “그건 고민을 하는 눈동자였어. 당신…가끔 나를 보면서 고민을 하는것 같더라.” “…….” 고민이라. 나는 눈을 가늘게 만들었다. 참으려고 했지만, 자꾸만 웃음이 비죽비죽 새어 나올것만 같았다. 나는 최대한 소리를 죽인채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고연주는 천천히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나와의 거리를 슬쩍 벌렸다. 뒷걸음질을 치면서 일(一)자를 만드는 진로를 보며 뭔가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걸 파악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듯, 고연주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고민을 그냥 넘길수가 없더라. 그대로 넘기기에는 너무 위험한 고민 같더라고…. 그거 알아? 당신이 나를 보는 눈동자를 볼때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아. 몸서리 쳐질 정도로.” “흠.” 어느새 내가 물고 있던 연초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것도 마찬가지로 불이 꺼진 상태. 나는 물고 있던 연초를 뱉은 다음 손 안으로 떨궜다. 손아귀에 들어온 꽁초를 이리저리 굴리며, 그동안 너무 넉넉 했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나름대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고 생각 했지만, 그녀는 나보다 한술 더 떠 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고연주 또한 가볍게 손가락을 모아 꽁초를 튕긴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고민이 뭘까. 도대체 당신이 무슨 고민을 하길래 이렇게 내 몸에 소름이 끼치게 만드는 걸까. 너무 궁금했는데, 아주 우연한 기회에 그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지.” “언제 였는데?” “내가 정보를 미끼로 당신한테 까불었을때. 그때 사용자 김수현은 SSUN과 일반 도시 헤일를 얘기했지. 그때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었어. 그 고민의 정체는….” “정체는…?” 고연주는 내 물음에 살풋 웃고는 뜸을 들였다. 그리고 그때서야 나는 위화감의 원인을 알아챌 수 있었다. 막 고개를 돌리려고 했으나, 그 전에 고연주의 한마디가 내 귓가로 날아 들었다. “살기(殺氣).” 앗차. 그녀의 대답을 들은 순간 나는 곧바로 그녀의 위치와 간격을 계산 했다. 그리고, 곧바로 테이블 아래 기대어 둔 검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분명 놓았던 검이 보이지 않았다. “이거 찾아?” 고연주의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올렸으나 바로 침을 삼키고 말았다. 먼저 매끈한 손가락이 보이고, 언제 빼돌렸는지 그녀는 손가락에 검의 손잡이를 걸은채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테이블을 뒹굴던 젓가락 하나를 집은 후 고연주에게 달려 들었다. “호호, 젓가락?” 고연주는 내 재빠른 행동에도 불구하고 여유로운 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그녀의 신형은 마치 땅으로 푹 꺼지듯 사라졌다. 나는 곧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키는 동시에 온 몸에 마력을 한가득 일으켰다. 방금전 고연주가 쓴 기술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아마도 기척 차단과 검은 그늘을 동시에 썼을 것이다. 하지만 두 기술 모두 제 3의 눈으로 대응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나는 고유 능력을 발동한 상태로 내 주변의 그림자를 빠르게 살폈다. 테이블 아래 그늘진 곳에서는 제 3의 눈이 반응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얏. 뒤에 있었~지.” 그순간 바닥에 비치고 있던 내 그림자에서 하나의 인영이 훌쩍 솟구치는걸 볼 수 있었다. 내 뒤로, 고연주의 조롱 섞인 목소리와 동시에 공기를 찢는 매서운 파공음이 들렸다. 찰나의 순간 이었지만, 나는 평정심을 유지 했다.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기술들은 이미 1회차에서 질리도록 당해본 기술들이라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대로 준비했던 어빌리티(Ability)를 시행했다. 스스슷. 척. “…어머.” “뒤가 아니라 앞인데? 그림자 여왕씨?” 나는 그녀의 가느다란 목에 젓가락을 겨누고는, 은근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간단히 상황을 정리하면 고연주는 그림자를 통해 내 뒤를 점하려고 했지만 어빌리티 대응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아니, 실패를 넘어서 오히려 내게 뒤를 점거 당했다. 즉 나는 숨겨둔 어빌리티(Ability)를 꺼냄으로써 되려 그녀의 뒤를 점한 셈이다. 고연주는 설마 이건 예상 못했다는듯 미동도 하지 않은채 서 있었다. 나를 해할 생각은 없었는지 그녀의 단검은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서 있었다. 나 또한 그녀를 아직까지는 죽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더이상 젓가락을 찌르지는 않았다. 이윽고 고연주는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말도 안 돼…이건 이형환위(移形換位)?” “오호. 알고 있었네? 정답.” “이건 분명…그래. 이스탄텔 로우(Eastantel Law) 클랜의 그놈이…. 아니. 아직 개발 중인 기술이라고 들었는데? 그런데 어떻게 네가…!” 아아. 그녀석 말인가. 맞아. 걔한테 1회차 때 배웠었거든. 나도 구명절초 하나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라고 하고 싶었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살짝 찌르자, 고연주의 목이 미세하게 떨리는게 느껴졌다. 이렇게 쉽게 제압 당했다는데 나름대로 충격을 먹은 모양 이었다. 솔직히 방금전 상황은 조금 운이 따른면도 있었다. 고연주가 온 실력을 다하지 않은감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건 내가 그녀의 전투술이나 기술에 익숙해진 상태라는것 이었다. 1회차에서 나는 그녀와 전장에서 수차례 만났다. 고연주는 당시 <10강>의 일인만큼 클랜에서 그녀의 전투 패턴을 철저히 분석했다. 그리고 그 분석에 힘입어 그녀의 전투술을 파악 할 수 있었고, 결국 <그림자 여왕>은 한소영 휘하 <처형의 공주>에게 말 그대로 처형 당했다. 즉 그녀가 전력을 다하지 않았고, 내가 그녀의 실력을 상회하고 있었고, <그림자 여왕>의 기술들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고, 혹시나 몰라 제 3의 눈으로 대비하고 있었다. 이 네박자가 고루 조화를 이뤄 <그림자 여왕>을 단번에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고연주가 만전을 기해 덤볐다면 이길 자신은 있었겠지만 이정도로 쉽게 풀어 나갈수는 없었을 것이다. 뭐니뭐니해도 그녀의 특수 능력 <심연의 무리(Abyss Crowd)>는 정말로 상대하기 까다로우니까. 물론 눈 앞의 여성 사용자가 이러한 사정들을 알리는 만무했다.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는 5년차 사용자가 0년차 사용자한테 제압 당하고 말았다. 아무리 내가 비상식적인 강함을 갖추고 있다고 하지만, <그림자 여왕>이. 그것도 10강에 이른 강자가 0년차 사용자한테 이토록 쉽사리 당했다는건 아무리 고연주라고 해도 받아 들이기 힘들…. “항복.” 받아 들이는군. 그녀는 너무도 가볍게 자신이 들고 있던 단검과 검을 떨어뜨렸다. 그 신속한 반응에 한순간 젓가락을 놓칠뻔 했지만, 간신히 잡을 수 있었다. 내심 어이없는 마음이 들었지만 어떻게 보면 이런게 그녀 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언뜻 보면 자유롭고 통제하기 힘들것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한번 적을 둔 이상 끝까지 의리를 지키는 사용자였다. <처형의 공주>도 그 사실을 알기에 전투 불능에 빠진 그녀를 망설임 없이 찢어 발겼겠지. 목덜미에 겨눈 젓가락을 꾹꾹 누르며 나는 고민에 빠졌다. 죽일까, 말까, 죽일까, 말까. 1회차를 생각하면 죽이는게 맘 편하겠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남았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 여성 사용자를 아군으로 만들 수 있을까? 예전의 그놈들은 어떻게 이 자유로운 고연주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걸까? 내가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는 사이, 고연주의 허탈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아…. 그래. 딱 이런 느낌이었어.” “갑자기 무슨 소리지?” “가끔 당신의 눈동자에서 보이던 살기(殺氣)가 딱 이런 기분 이었거든. 꼭 나를 죽일까 말까…고민하는것처럼 보였어.” 정곡을 찌르는 말에 나는 따로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내심 답답 했는지 고연주는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나 이만 뒤돌아 봐도 돼?” “…천천히. 두 손은 든 상태로.” 고연주는 내 요구에 따라 두 손을 허공으로 들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 그녀는 곁눈질로 내 젓가락을 힐끗거리며 눈치를 주었다. 그녀의 애교에 나는 픽 웃고는 똑같이 젓가락을 떨궜다. 물론 그와 동시에 바닥에 있던 단검과 검을 멀리 차버렸다. 서로 무기는 없는 상태였지만 신검합일(身劍合一)의 랭크가 EX에 오른만큼 상황은 내가 훨씬 더 유리 했다. “어쨌든 결국에는 살려주네. 그런데 나 팔 아파.” “응. 계속 들고 있어. 보기 좋네.” “역시 당신은 변태였어.” “큭.” 나는 코웃음을 치면서 두 팔을 손수 내려 주었다. 고연주는 눈을 곱게 한번 흘기고는 내 옆을 지나쳤고, 그대로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꽤나 세게 던졌는지 침대가 한번 크게 들썩였다. 이제 그녀의 돌발 행동은 왠만한건 담담히 받아 들일 수 있을것만 같았다. 내가 쓰던 침대에 얼굴을 뭍은 그녀는 이윽고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힘들어. 오늘 일진 한번 사납네. 죽을 고비도 넘기고 굴욕도 당하고. 오늘따라 왜 이러지?” “오늘따라 날이 아닌가봐.” 그녀는 내 대답에 새침하게 투덜거렸다. 겉으로는 태연하게 보였지만 아무래도 속이 많이 상한것 같았다. 한동안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그녀는 이내 나와 시선을 맞추고, 침대 한쪽 비어버린 공간을 톡톡 두드렸다. 그녀의 의도를 모르는건 아니었다. 그러나 옆에 같이 눕는것 보다는 그냥 침대 한쪽에 걸터 앉는것으로 화답했다. 더이상 고연주를 경계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나 힘들어요. 전의를 상실 했어요.” 라는 표정을 얼굴에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고연주는 내가 앉은 쪽으로 머리를 쏙 들이밀더니 이내 내 허벅지 위로 자신의 머리를 뉘었다. 졸지에 무릎 베개를 해주게 되자 나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찰나의 공방에 불과했지만 그 결과로 분위기는 많이 어색해지고 말았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건, 내가 그녀를 살려줌으로써 고연주는 내게 목숨빚이 하나 생겼다는 것이다. 10강에 이른 사용자인 만큼 그런 생리를 모르지는 않을것이다. 잠시 내 허벅지를 즐기던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휴~우. 아무튼 이로서 어느정도 확실해졌네.” “뭐가?” 가볍게 반문하자, 그녀는 손을 들어 손가락 끝으로 내 코를 콕콕 찔렀다. “방금전 죽을수도 있다고 생각 했었거든. 그런데 이렇게 살았잖아. 당신…조금전에 분명히 나 죽일지 아니면 살려줄지 고민하고 있었지.”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연주는 새침한 얼굴로 나를 째려 보았다. 내 침묵을 무언의 긍정으로 받아 들인것 같았다. 한참동안 나를 노려보던 그녀는 입맛을 쩝 다시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살려주는걸 선택한만큼…나한테 무언가 바라는게 있다고 해석할 수 있어. 그러니 이제 그만 대답해주면 안 돼? 네가 뮬로 들어오기 전까지 나랑은 일면식도 없었잖아. 그런데 내게 도대체 뭘 원하고, 왜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거지?” “…….” “침묵으로 일관하지 말고 속 시원하게 좀 말해주라. 응? 나도 속사정은 알아야 할것 아니니. 그래야 뭐라고 말이라도 하지.” 그녀는 계속 재촉 했지만 나는 일부러 말을 아꼈다. 고연주는 하연이나 신상용과 다르다. 거듭 말하지만 고연주는 <10강>의 1인이고, 시크릿 클래스를 가진 긍지 높은 사용자 였다. 그런만큼 본인 나름의 생각도 있을것이고 사용자로서 프라이드도 높은건 자명한 일 이었다. 물론 현재 내가 이끌고 있는 캐러밴의 수준이 준수하고, 계획도 높게 평가했지만 단순히 그것들 만으로 앞으로 만들 클랜에 들어오라고 하기는 어려운 감이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그녀가 거절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거절하면 죽여버리면 그만이지만 마음 한구석에 아쉬움이 남는건 사실 이었다. 그녀가 앞으로 일행에, 그리고 클랜에 가세한다면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고민하긴 했지만, 나는 결국 마음을 결정했다. 결론은 “지금 결정을 내릴수 없다” 였다. 고연주는 나한테 흥미를 느끼고 있고, 나는 그녀를 조금 더 보고 싶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나, 그리고 우리 일행들과 지낼 시간을 주고 나 또한 그녀를 더욱 가까이 보면서 자세히 관찰할 기회를 만들 필요가 있을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후,나는 차분히 손을 들어 고연주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내 손길을 느끼듯 살며시 눈을 감았다. “밤이 너무 늦은것 같은데요?” “응? 갑자기 왠 존댓말?” 가만히 내 손길을 음미하던 그녀는 내 말에 다시금 살짝 눈을 뜨며 반문했다. 너가 먼저 말 놓았잖아.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일부러 꾹 참았다. 나는 그녀에게 한가지 조건을 제시할 생각 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거절할 수 없을것이다. 방금전 내게 목숨 하나를 빚졌으니 어지간하면 따라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절규의 동굴 끝에서는 그놈이 나오는 만큼 고연주가 있으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는 계산도 있었다. 나는 입술에 침을 바른 후 그것들이 마르기전 입을 열었다. “요즘 장사도 잘 안되시는것 같던데요. 이왕 이렇게 된거 조금 쉬는건 어떨까요.” “흐응…?” 내 말에 고연주의 콧소리가 간드러지게 변했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확인한 후,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네. 고연주의 처리는 일단 <보류>로 돌렸습니다. 너무나 매력적인 캐릭터라 이대로 죽이기에는 아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진행을 해봐야 알겠지만, <영입>에 무게추가 기운것 같습니다. 하하하. 아. 제 뜰에 <고장난선풍기>님이 올려주신 캐릭터 팬 아트들이 있습니다. 독자분들도 한번쯤 들르셔서 구경하시면 매우 좋을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고연주랑 김수현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특히 고연주 그림을 자꾸만 보게 되네요. 흐흐흐. :) 『 리리플 』 1. 싸울아비헌터T : 1등 축하 드립니다. 올리자마자 바로 달려서 깜짝 놀랐네요. 하하하. 수많은 경쟁을 뚫고 1등 하신것 다시 한번 축하 드리며, 부디 이번회도 재미있게 감상 하셨기를 바랍니다. 2. 쿠로시온 : 네. 저도 가끔 깜짝 놀란답니다. 어떻게 올리는 순간 동시에 코멘트를 달 수 있는 걸까요? -_-a 3. hohokoya1 : 힘드신 직장 생황. 십분 이해 합니다. ㅜ.ㅠ 특히 월요일은 더욱 힘드시겠지요. 제 소설을 읽으시는 동안 잠시나마 그런것들을 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힘이 된다면 더더욱 감사하구요. 파이팅 이에요! :) 4. GradeRown : 으하하하. 나에게 이렇게 대한건 네가 처음이야. 이거 의외로 괜찮네요. 한번 참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ㅋㅋㅋㅋ. 5. 당룡 : Yes. 정답 입니다. 고민, 그중 살기가 키워드 였습니다. 6. 노루다람쥐 : 아, 아니 되옵니다. 신고는 하지 말아 주세요. 제 글은 마약이 아니어요. ㅜ.ㅠ 7. 고장난선풍기 : 고…고연주…하악하악. 하악하악. 하악…헙. 아, 아닙니다. 절대로 팬 아트를 보고 그런건 아니에요. 아니에요 정말. 하악…. 8. 달쿠키 : 제가 잘못했습니다. 부디 도끼는 고이 넣어 주시지요. 무서워요…. ㅜ.ㅠ 9. 오자아자아나 : 일단 조금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어요. ㅋㅋㅋㅋ. 아마 다음주 쯤에는 결론이 나올것 같아요. 10. 심심행 : 10강이 있다고는 하지만, 자리가 비는 경우도 생기고, 새로운 신성이 출현으로 기존의 10강을 밀어내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리고…앞으로 어떤 일들이 발생하고, 그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10강에 많은 자리들이 공석이 생깁니다.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28 / 0933 ---------------------------------------------- 임시 합류 “요즘들어 한숨이 많이 늘으신것 같던데요.” 눈알을 굴리며 능청을 떨자 고연주는 연한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머리가 조금 복잡하기는 해요.” “머리가 복잡할때는 쉬는게 최고에요. 잠깐 일을 접고 기분 전환이라도 해보는건 어때요?” “어머, 설마 데이트 신청인가요? 평소에는 그렇게 꼬셔도 가만히 있으시더니.” 나와 그녀는 어느새 서로 다시 말을 높이고 있었다. 질질 대화를 끌기 보다는 슬슬 말을 일단락 짓자는 소리였다. 그말인즉슨, 고연주가 내 말의 의도를 어느정도 파악했다는 것과 일맥 상통했다. 나는 잠시간 그녀의 이마를 톡톡 두드린 후(이때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하하. 어떻게 보면 데이트 신청이네요. 다음달에 도시 밖으로 다시 탐험을 나갈 예정이거든요. 우리 서로 손잡고 함께 나가보는건 어때요? 좋은데 알아놨는데.” 고연주는 내 말에 실소를 흘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사용자 김수현에게 데이트 라는건 서로 손잡고 웃으면서 몬스터에게 칼을 휘두르는 건가요?” “여관에 박혀서 궁상을 떠는것보다는 낫겠죠.” “내가 말을 말아야지. 기간은 어느정도 생각 하시는데요?” “3주요.” 고연주는 내 명료한 대답에 멍한 얼굴이 되고는, 이내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여관 망하게 할 일 있어요? 이거 짓느라 돈을 얼마나 많이 썼는데.” “어차피 망했잖아요. 사용자들도 우리들 빼고는 별로 오지도 않고.” “…칫.” 내 돌직구에 할 말이 없는지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돌렸다. 여담으로 말하면 그녀는 아직도 내 무릎에 머리를 베고 있었다. 그녀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릴때마다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나는 내 중심으로 돌린 그녀의 고개를 다시 반대로 돌리고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좋은데라고 했잖아요. 너무 걱정 말아요. 이 상태의 여관 3주를 운영하는것보다는 훨씬 이득이 남을겁니다.” “하. 또 던전 하나라도 발견할 예정이신가 봐요.” 그녀의 투덜거림에 나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엇. 어떻게 아셨죠.” “…….” 고연주는 할 말은 잃은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 아침에 명상을 마친 후, 대충 씻고 나오자 여관은 말 그대로 난리가 나 있었다. 지금쯤이면 한창 달게 자고 있을 애들이 모두 일어나 불안한 얼굴로 1층에 모여 있었던 것이다.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가자, 일행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쏠리는게 보였다. “오, 오라버니.” “응 솔아. 왜 그러니.” “큰일 났어요! 여관이 문을 닫는데요.” “…풉.” 안솔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안현과 유정의 얼굴은 상당히 부스스 했지만, 안솔은 비교적 깔끔했다. 아마 오랜만에 일찍 일어나 1층으로 내려왔는데 고연주의 행동을 보고 놀란것 같았다. 그래서 다급히 일행들을 깨웠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이지 않자, 꿩 대신 닭이라고 다른 일행들을 깨웠을 것이고. 한눈에 그려지는 그녀의 행동에 나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태연히 자리를 잡았다. “아…씨. 오빠. 여관 주인한테 뭐 들은거라도 있어?” 유정은 게슴츠레한 눈길로 내 옆에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아마도 한창 자다가 억지로 깨 심기가 불편한것 같았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그녀는 내 어깨에 살짝 머리를 기대었다. 유정의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자, 그녀의 표정이 조금 풀리는게 보였다. 안현은 멍한 얼굴로 고개만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고 안솔은 안절부절한 얼굴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설마 전전긍긍한 이유가 유정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것에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연과 신상용은 가만히 테이블에 앉았다. 아마도 어젯밤의 일로 뭔가 짐작바는 바가 있는것 같았다. 곧이어 여관의 문이 삐걱 열리고 익숙한 사용자 한명이 모습을 보였다. 고연주는 열렸던 문을 꼭 닫은 후 내게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이윽고 내 앞에 가만히 선 고연주를 보며 나는 유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른 아침부터 바지런하게 움직이시네요.” “네. 누구 덕분에요. 치사하게…. 휴. 아무튼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잖아요. 뭐 요즘들어 조금 귀찮기도 했고. 겸사겸사 에요.” 아마 어젯밤 마지막에 목숨값으로 흥정한걸 두고 치사하다고 하는것 같았다. 그녀의 말에는 가시가 잔뜩 돋혀 있었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미리 말씀을 해주셨어야죠. 얼른 남은 날짜 환불해 주세요.” 내 말에 고연주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나를 날카롭게 째려 보았다. “흥. 보아하니 일행들도 다 모인것 같은데 아침이나 먹어요. 뭐 먹을 거에요?” “언제나 똑같이. A코스 7인분.” “A코스 8인분. 나는 뭐 입도 아니에요?” 그녀는 내 가슴을 한번 쿡 찌르고는 그대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와 그녀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애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음표를 동동 띄웠다. 다만 신상용은 진중한 표정을 짓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리더.” “네.” “참 수완이 좋으신것 같습니다.” “하하….” 어설픈 웃음을 흘리자 그때까지 긴가민가 하고 있던 하연이 한손으로 입을 가리며 경악했다. “수현…씨. 설마 그녀를….” “아니요. 거래를 했습니다.” “거래요?” 하연은 미심쩍은 얼굴로 반문했다. 나는 한번 고개를 주억인 다음 아직도 서있는 애들을 보며 의자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멍한 얼굴로 고개만 기울이던 안현과 불만스러운 눈길로 유정을 보던 안솔은 내 신호를 보고 얼른 의자에 앉았다. “자세한 거래 내용은 아직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그녀는 최소 3주 이상 여관의 문을 닫기로 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장사가 잘 되지 않는다는 이유가 있습니다.” 내 말에 일행들은 모두 수긍하는 낯빛을 띠었다. 확실히 그들이 보기에도 요즘 여관에 사용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기간동안 그녀는 우리 캐러밴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로 했습니다. 5년차 사용자인 만큼 캐러밴에 많은 도움이 될것이라 생각 합니다. 일단 간단하게 말씀 드렸습니다만 상세한 사항들은 그녀가 돌아오면 얘기하도록 하죠. 혹시 질문 있으신 분?” 내 말에 비비앙은 곧바로 손을 번쩍 들었다. 나는 고개를 한번 끄덕여 그녀의 질문을 허락 했다. “김수현. 물론 네가 받았으니 나름 생각이 있겠지만, 한가지 걱정이 있어.” “무슨 걱정?” 내가 되묻자 비비앙은 일행들을 한번 둘러본 후 말을 이었다. “3주 이상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그 사용자를 다음 탐험에 데려갈 수도 있겠네?” “아무래도 그렇지.” “그러면 그 사용자가 5년차라고는 하지만, 우리 캐러밴에 잘 녹아들 수 있을까? 꼴랑 여관 주인이나 하는 사용자 인데…. 솔직히 조금 불안해.” 비비앙의 말에 하연과 신상용은 동시에 미소를 흘렸다. 그러나 비비앙의 생각은 아주 경우가 없는것도 아니었다. 인간으로 변한 이후 그녀 나름대로 현대의 홀 플레인에 적응하기는 했지만, 가끔 고대의 홀 플레인과 혼동하는 경우가 있었다. 나는 혀를 쯧쯧 차고는 모두를 보며 입을 열었다. “휴. 비비앙.” “엉.” “네가 방금 그 여성 사용자를 상대로 10분 이상 우세를 점할 수 있으면 내가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않으마.” “으, 응?” “네?” “뭐?” “어.” 비비앙, 안솔, 이유정, 그리고 안현은 차례대로 탄성을 질렀다. 하연이 새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비비앙은 누가 뭐라고 해도 아직까지는 캐러밴의 2인자를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평소의 맹한 성격으로 2인자의 포스를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실제 탐험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항상 유감없이 자신의 실력을 발휘했다. 그런데 그런 비비앙보다 여관 주인을 내가 윗선으로 판단했으니 다들 놀란것 같았다. 솔직한 내 심정으로는 비비앙도 실력이 좋기는 하지만 <10강>에 이른 고연주의 상대는 아니었다. 최고의 군단이라는 1군단을 소환한다고 해도 고연주 또한 특수 능력<심연의 무리(Abyss Crowd)>가 있었으며, 상위 군단을 소환할 시간을 줄지도 의문이었다. 아무튼 고연주와 비비앙이 싸운다면 고연주의 압승으로 끝날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실력은 내가 장담할게. 어때 비비앙?” 내 말에 비비앙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는, 이내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그, 그건 싫어.” “응?” “그, 그건 싫다구.” “자. 그럼 다음 질문?” 위험한 뜻을 내포한 비비앙의 거부에 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다른 일행들이 부디 아무것도 듣지 못했기를 바라면서. 다행히 유정은 처음 뮬에 온 날을 회상하는지 “그래…그때 확실히 이상했어….” 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안현과 안솔은 멀뚱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고, 신상용은 언제쯤 고연주가 오나 자꾸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다만 오직 하연만이 눈을 감고 있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도 어느정도 고연주의 행동에 놀란감은 있었다. 말하고 나서도 조금 시간은 걸릴줄 아았는데, 의외로 그녀는 화끈한 면이 있었다. 아, 의외라고 하기는 좀 그런가. 그때 마침 주방에서 고연주가 카트를 밀고 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안현은 정신을 차렸는지 눈을 희번덕 뜨고는 재빨리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혀, 형. 저 좀 씻고 올게요.” “먹고 씻지 그래.” “아, 아니에요. 빨리 다녀 올게요.” 안현은 내 대답도 채 듣지 않고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어느때보다 신속한 모습을 보이는 안현에 혀를 내두르고는 나는 산뜻한 기분으로 아침을 기다렸다. 이윽고 카트를 우리 바로 앞까지 밀고 들어온 고연주는 들고온 음식을 차분히 세팅한 후 남은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무심한 얼굴로 일행들을 한번 둘러본 그녀는 이윽고 자신을 흘끗흘끗 보는 안솔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안녕 아가. 네 오빠는 어디 갔니?” “그…잠시…씻으러….” 안솔이 쭈볏거리며 대답하자, 고연주는 안들리는듯 귀를 더욱 기울였다. “응? 뭐라고? 좀 더 크게 말해보렴.” “히잉….” 역시나 낯을 심하게 가리는 안솔은 입술을 삐죽이며 내게 구원을 요청했다. 유정은 그런 안솔을 보며 한숨을 쉬고는 바로 입을 열었다. “걔 씻으러 갔어요.” “아하…귀엽네. 아무튼 사용자 김수현. 저에 대한 말은 이미 하셨나요?” “어느정도는요. 나머지는 지금 직접 하시겠어요?” “어차피 지내다보면 저절로 알게 되겠죠 뭐. 나중에 식사 후 모두 모였을때 할게요. 일단 어서들 들어요. 따뜻할때 먹어야 맛이 좋답니다.” 내 말에 고연주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어제에 비해서는 그녀는 침착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옷도 다시 정숙하게 입었고, 표정도 평소처럼 나긋했다. 그런 고연주라 상냥하게 먹으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수저를 들지 않았다. 그녀가 이상한 얼굴로 시선을 돌리자 일행들은 모두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수저를 들어, 가볍게 스프를 한숟갈 떠먹었다. 그리고 내가 한숟갈 먹고난 이후에야 일행들은 식사를 시작했다. 그 모습들을 본 고연주도 태연히 식사를 시작했지만, 입가가 실룩이는게 웃음을 참고 있는게 분명했다. 기필코 이 악습(?)은 조만간 근절하겠다고 다짐하며 나는 유정을 살짝 원망했다.(그녀가 이 악습을 시작한 주범이었기 때문이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위층에서 우당탕 안현이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에 아직 물기가 선명한게 급하게 물만 대충 묻히고 나온것 같았다. 이윽고 급하게 계단을 내려오던 소리는 1층에서 점차 잦아들더니, 이내 절도 있는 걸음 소리가 로비를 울렸다. 로비를 지나 우리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온 안현은, 고연주를 보고는 지금 발견한척 놀랐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정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엇. 오늘은 같이 식사를 하시는군요.” “네. 그렇게 됐어요.” 고연주가 예쁘게 웃으며 대답하자 안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0년차 사용자 안현 이라고 합니다. 직업은 뭐…창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안현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유정은 한창 스튜를 뜨다가 비위가 상한다는 표정을 지었고 안솔은 자신의 오빠임에도 불구하고 모르는척을 하려는 태도가 선명했다. 그 모두의 반응이 웃긴지 고연주는 입을 가리며 쿡쿡 웃다가, 이내 나른한 어조로 대답했다. “반가워요. 5년차 사용자 고연주라고 해요. 직업은…그림자 여왕이에요.” “아 그러시….” “푸웁!” 그순간 물을 마시던 안솔은 입 안에 머금었던걸 격하게 내뿜어 버렸다. 어디서 들었는지는 몰라도, 역시나 우등생 안솔 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네. 죄송합니다. 128회는 리리플을 쉬도록 하겠습니다. 분명 저는 3월 12일 12:00이 되는 순간 올렸는데, 올라간걸 보니 3월 11일 11:59로 되있더라구요. 하아…. 차마 그것을 참을 수 없어 한편 더 올립니다. 오늘 6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미치겠네요. ㅋㅋㅋㅋ. 가끔 보면 제가 결벽증이 있는것 같습니다. 아이고. ㅜ.ㅠ 그럼 저는 이만 자러 가겠습니다. 여러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 0129 / 0933 ---------------------------------------------- 임시 합류 “콜록! 콜록! 앗, 콜록…언니이. 죄송해요오….” “…….” 안솔이 뿜은 물은 유정의 얼굴에 일부 튀고 말았다. 유정은 눈을 감은채로 가만히 있다가 손을 들어 테이블 주변을 더듬었다. 하연은 잠시 주머니를 뒤지더니 깨끗한 천조각을 슬쩍 내밀었다. 유정은 실눈을 뜬 후 천을 잠시 응시하고는, 손이 부딪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낚아챘다. 이윽고 유정은 자신의 얼굴을 꼼꼼히 닦으며 입을 열었다. “솔이 너. 나중에 언니 좀 보자.” “히잉…. 일부러 그런게 아니에요오….” 유정의 서슬퍼런 목소리에 안솔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솔은 다시금 고연주를 흘끗거리기 시작했다. 자꾸만 자신을 훔쳐보는 안솔이 귀여웠는지 고연주의 입가에는 가느다란 호선이 걸렸다. 그런 그녀의 감정을 느꼈는지 안솔은 흠칫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본 고연주의 미소는 더욱 깊고, 진하게 변했다. “아가.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니?” 고연주의 물음에 안솔은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함부로 말하기 힘든 모양 이었다. 그러나 옆에 앉아 있는 비비앙은 뚱한 얼굴로 솔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안솔은 펄쩍 뛰어 올랐다. “안솔. 그림자 여왕이 도대체 뭐길래 그래.” “마, 말할게요오! 그러니까 자꾸 찌르지 마요오….” 비비앙은 목소리는 퉁명스러웠고, 안솔은 우는 목소리로 사정했다. 비비앙의 아랫입술이 톡 튀어 나온게 아무래도 내가 조금전에 한 말들을 속에 담아 두고 있는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비비앙을 무시할 의도는 없었다. 비비앙과 고연주의 전력차는 엄연한 현실 이었다. 비비앙은 레어 클래스에 능력치도 준수하지만, 상대는 시크릿 클래스에 더 좋은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더욱이 상성도 고연주가 훨씬 유리했다. 내가 고연주와 1회차에서 붙어본 경험에 따르면 서로 만전인 상태로 붙는다고 가정해도 <그림자 여왕>이 <키메라 연금술사>를 상대로 승리할 확률은 7할을 넘는다. 그런만큼 실제로 준비할 시간이 없는 전투 상황을 가정하면 비비앙의 승률을 더욱 낮아진다는 소리였다. 한동안 옆구리를 슥슥 문지르던 안솔은 거듭된 비비앙의 재촉에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그러니까…사용자 아카데미에서….” “어. 난 그런거 안 알려주던데.” 유정이 재빠르게 끼어들자 안솔은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말을 이었다. “으응. 그럴거에요. 성비 비율을 따지면 사제는 직업 특성상 여성 사용자들이 조금 더 많거든요오…. 그때 이론 강의 시간에 교관 언니가 잠시 흘리듯 말을 했는데, 들은 기억이 있어요.” “그래? 그때 뭐라고 들었는데. 조금 더 자세히 알려주렴. 궁금하구나.” 고연주는 흥미로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장차 자신이 먹잇감이 될지도 모르는데, 불쌍한 안솔은 쭈볏거리며 대답했다. “그때 홀 플레인의 유명한 여성 사용자들을 몇명 들었어요오. 이스탄텔 로우 클랜의 클랜 로드 <전장의 지휘자(Field Maestro)>. 동일 클랜 <처형의 공주(Princess Of Execute)>. 베일에 쌓인 자유로운 사용자 <그림자 여왕(Queen Of Silhouette)> 등등….” “호오….” <처형의 공주>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고연주의 눈동자에 스산한 살기가 일었다. 그 순간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나는 놓치지 않고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도 고연주와 <처형의 공주>와의 원한은 오래전부터 있었던것 같았다. 그녀와 <처형의 공주>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호기심이 일었지만 지금 알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일단 마음 한구석에 묻어 두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연주는 바로 표정을 정리한 후 빙긋 웃었다. “그래요. 내가 바로 그 소문의 시크릿 클래스 <그림자 여왕> 이에요. 이름은 고연주. 나이는 스물 여섯. 애인은 없음. 참고로 남자만 괜찮다면 애들이 줄줄이 딸린 유부남 이라도 받아 들일 용의는 있어요.” 그녀는 빠르게 소개를 마치고 슬쩍 내쪽을 곁눈질했다. 그리고 막 스튜를 한숟갈 떠먹던 나는 갑작스러운 공세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설마 이런식으로 복수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이번에는 빼도박도 못할 정도로 일행들에게 걸리고 말았다. 눈치 좋은 몇몇들은 고연주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 채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때였다. 탁. 그동안 조용히 듣고만 있던 하연은 물 한모금을 꿀꺽 마신 후 테이블에 소리가 날 정도로 물컵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 그 탓에 컵에서 흘러나온 물이 살짝 주변으로 튀었다. 세게 놓았다고 보기는 애매 하지만, 항상 차분하게 행동하는 그녀로서는 이례적인 일 이었다. 하연은 가벼운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소개는 잘 들었어요. 그러면 우리들 소개도 해야겠죠?” “그거 좋네. 우리도 가만히 있을수는 없지.” 유정이 또한 천조각으로 입가를 싹 닦은 다음 하연의 말을 거들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둘의 대화였다. 물론 온전한 대화라고 보기는 어려웠고, 유정이 하연의 말을 받은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것만해도 충분히 관계 호전의 가능성을 노려봄직 했다…지만. 문제는 도대체 뭘 가만히 있을수는 없다는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두 여성의 반응에 고연주는 여유로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어디 한번 해볼테면 해보라는 신호였다. 그녀의 반응에 두 여성 사용자의 눈길에 시퍼런 불길이 피어오르는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윽고 일행들은 한명씩 돌아가면서 자기 소개를 시작했다. 그리고 한명의 소개를 들을때마다 고연주의 반응은 판이하게 달랐다. 정확히는 <호칭>을 다르게 붙였다고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안현한테는 <군>을, 안솔을 <아가>라고 불렀다. 유정이 한테는 <꼬맹이>라고 했는데, 놀라운점은 유정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는 점 이었다.(물론 꼬맹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한번 매섭게 노려보기는 했다. 아마 그녀로서는 그것만이 지금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 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오만하게 보일수도 있지만 그 누구도 드러날 정도로 고연주를 트집 잡지 않았다. <그림자 여왕>이 가지는 명성은, 그러한 태도들을 당연하다고 여길 수 있는 하나의 명분을 주고 있었다. 애들의 소개가 끝나고 다음은 비비앙 차례였다. 비비앙은 평소와는 다른 냉냉한 어조로 자신을 소개했다.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마법사 계열 레어 클래스. 나이는 스물넷.” 비비앙의 소개가 끝났을때 고연주는 잠시 그녀에게 시선을 두었다. 사용자가 아닌 고대 거주민이었다는 점에서 그녀의 흥미를 끄는것 같았다. 잠시 동안 시선을 교환하던 둘은 이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고개를 돌린 그녀는 호칭을 <당신>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일행들의 표정은 모두 미묘하게 변했다. “김수현 당신은…시크릿 클래스라고 했죠?” “김수현. 검사 계열 시크릿 클래스. 나이는 스물넷. 그런데 다 알고 있었잖아요.” “아니요. 모르는게 하나 있지요. 시크릿 이라고는 했는데, 클래스 이름이 뭐에요?” 은근슬쩍 묻는 고연주를 보며 나는 콧방귀를 끼었다. 물론 클랜을 창설하게 되면 알려지게 될 일들이지만 굳이 그녀에게 지금 정보를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특히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긴 해도, 클래스의 이름으로 해당 시크릿 클래스가 지니는 <권능>을 유추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최대한 조심할 생각 이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고연주는 한번 더 나를 졸랐다. “아이 참. 그냥 속 시원~하게 알려주지 그래요? 내 정보는 다 알고 있으면서.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네. 안 들어요. <그림자 여왕>은 오래 활동한 만큼 알려질 수 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우리들은 아니에요. 그리고 어차피 대충은 짐작하고 있잖아요.” “짐작할 수 없어요. 그러니 알려줘요.” “싫어요.” 내 단호한 거절에 고연주는 새침한 얼굴을 하고는 흘끗 애들을 바라 보았다. 애들은 나와 고연주의 친근한 대화를 보며 다들 서글픈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마치 소중한 무언가가 빼앗긴듯한 표정들. 솔직히 다 좋은데, 하연의 소박 맞은듯한 얼굴은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흥. 알려주기 싫으면 말아요. 앞으로 쭉 가까이 있겠다, 기회는 많거든요.” <쭉>이라는 말이 잠시 걸렸지만 나는 곧바로 대답 했다. “재주껏, 마음대로 하세요.” “후훗. 굳이 본인한테서만 알아내라는 법은 없죠.” 고연주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하는 순간. 나는 얼굴을 굳히고 고개를 들었다. 그 상태 그대로 고연주의 얼굴을 응시하자, 그녀는 뜨끔한 얼굴로 휘파람을 불었다. 나는 계속 그녀를 지그시 보다가,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말씀 드리는데. 애들한테 혹은 일행들한테 <유혹의 눈동자(Lure Eyed)>를 사용한 흔적이 발견 되는 순간 대단히 재미 없을 겁니다.” “어머. 너무 예민하다. 그거 별로 해로운 능력이 아니….” “유혹의 눈동자는 정신 오염 계통으로 볼 수 있는, 일종의 마안 입니다. 한번 침투가 되면 다른 저주가 들어올 수 있는 길이 더욱 열리는 여지를 남길 수 있다는 말 입니다. 혹여나 애들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는 순간 거래는 스스로 파기하는걸로 간주 하겠습니다.” 내 엄포에 이번에 또다시 일행의 표정들이 미묘하게 변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고연주가 대놓고 던진 추파에 분노했었는데, 일행들을 감싸안은 내 말에 곧바로 목을 빳빳하게 세우는게 보였다. <10강>의 사용자를 앞에 두고 캐러밴의 대장이 당당한 모습에 대리 만족을 느끼는것 같았다. 특히 불안한 얼굴로 나와 고연주를 번갈아 보던 유정, 안솔은 안심한 얼굴로 음음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와중에 “역시 우리 아빠야.” 라고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동시에 고연주가 풉 웃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범인을 밝혀내 사정 없이 볼기를 때려 주리라 다짐했다. “칫.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알았어요, 알았어. 치사해서 내가 가만히 있는다.” 고연주는 별꼴이라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가에는 알게 모르게 야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고연주의 얼굴에는 큰 미련이 없어 보였다. 문득 그녀가 이러한 상황을 일부러 의도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그녀는 우리 일행에 굴러온 돌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를 이용해 교묘한 방법으로 박힌 돌(?)들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고연주는 우리 일행들에 녹아들기 위해 나름의 밑밥을 깔고 있었다. 그렇게 따지면 그녀에게서 확실히 고년차 사용자 다운 노련함이 엿보였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 맞다는 전제하에 불과한 일들이지만. 그 후로 나와 고연주는 세부 사항을 추가로 조절했다. 일단 재정비 시간에만 최소 2주, 그리고 최대 4주가 걸린다고 말하자 그녀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말인즉슨 거의 한달하고도 2주 동안 여관을 닫으라는 말 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애초에 고연주는 여관 운영에 큰 미련이 없어 보였다. 그녀 스스로 내가 어젯밤 말을 꺼내자마자 바로 여관 문을 닫은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예상대로 그녀는 내 말에 별다른 태클을 걸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고연주의 예상치 못한 호의를 듬뿍 받을 수 있었다. 물론 그 호의가 나에게만 국한된건 아니었다. 그녀는 우리 일행들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여관을 마음껏 사용해도 된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여관 <조신한 숙녀>의 면적은 절대로 좁은편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1층, 2층, 3층을 모두 사용할 수 있다면 지금껏 고질적인 문제였던 수련 장소를 해결할 수 있었다. 때문에 나는 그녀의 제안을 크게 환영했다. 당장 일층 로비만 해도 테이블을 정리하면 훌륭한 수련 장소로 변할 수 있었다. 고연주가 이렇게까지 통 크게 나오자 일행들은 더이상 그녀의 참가를 반대할 수 없었고, 은연중에 감돌던 불만도 확연히 사그라 들었다. 그녀의 치밀한 계산에 혀를 내두르며, 나는 한가지 요청을 더하기로 마음 먹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염치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앞으로 2달 안으로 영영 못볼수도 있는 사용자 였다. 나중에 영입을 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을경우 필히 죽일 사용자중 한명 이었으니까. 때문에 그전에 최대한 뽕을 뽑는것도 괜찮을것 같았다. 물론 이건 강요가 아니라 하나의 부탁이었다. “정비 시간이 짧지는 않습니다. 그동안 조금 심심하실것 같은데요.” “흐응?” “단도직입으로 말씀 드리면, 애 한명 가르쳐볼 생각 없어요? 많은건 바라지 않아요. 단검술의 기본만 잡아주면 돼요.” “저 비싸요. 시크릿 클래스 라구요. 그에 맞는 강습료 내놔요.” “수강자의 성장을 보고 차후 지불하도록 하지요.” 내 말에 고연주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안현은 내 말에 안달이 난 얼굴로 몸을 배배 꼬았다. 절대로 둘을 붙일 생각은 없기에(왜냐하면 안현이 고연주의 유혹에 가장 잘 넘어갈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당신만한 단검을 다루는 사용자를 만나는건 흔한일이 아니거든요. 하지만 내키지 않으면 관둬도 상관없어요. 이건 어디까지나 부탁이에요.” 내 부드러운 음성에 고연주는 반사적으로 유정을 쳐다 보았다. 한동안 유정을 보던 그녀는 이내 가볍게 한마디 툭 내뱉었다. “뭐, 당분간 심심하지는 않겠네요.”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죄송합니다. 오늘 집에 들어온 이후 그대로 기절을 해버렸네요…. ㅜ.ㅠ 아무래도 어제 새벽에 달린 여파가 컸던 모양 입니다. 눈을 뜨자마자 헉, 소리가 나는데 후다닥 일어났네요. ㅜ.ㅠ 『 리리플 』 1. zjekfksqlc : 하하하. 제가 어제 무슨 정신으로 새벽에 달렸을까요. 몸이 예전만 못하네요. ㅜ.ㅠ 1등 축하 드립니다. :) 2. 이비앙 : 죄, 죄송해요. 순간 흠칫 놀라고 말았어요. 이비앙, 비비앙…. 엌ㅋㅋ. 3. 가한나 : ㅋㅋㅋㅋ 비나이다 보고 빵 터졌습니다. 고맙습니다. 4. Toranoanal : 고맙습니다. 수정 완료 했습니다. 5. 아리스티아 : 오늘 쓴맛을 톡톡히 경험 했어요. 하루 리듬이 엉망이 되더라구요. ㅜ.ㅠ 6. 천겁혈신천무존 : ㅋㅋㅋㅋㅋㅋㅋㅋ. 그 <아힣흥햏홍>은 어떤걸 말씀 하신건지 알려 주시겠어요? ㅋㅋㅋㅋ 7. 天上天下唯我獨尊 : NO. 다만 아주 틀리신건 아닙니다. 제가 지금은 너무 정신이 없어서(새벽 4시고 방금 일어나서요…. ㅜ.ㅠ) 오늘 조금 맑은 정신에 설정으로 올리든, 아니면 130회 후기로 올리든 하겠습니다. 8. 고장난선풍기 : 아이고. 오늘 죽는줄 알았습니다. 세상에 기절이 뭔지 톡톡히 경험 했어요. ㅜ.ㅠ 9. misoochensa : 네.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아주 슬픈 사연이에요. 엉엉. 10. 주디분석 : 쿠폰 감사합니다. 네. 오늘 몸의 한계를 경험 했습니다. 제 몸이 예전만(?) 못 하네요. 흑흑흑흑.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30 / 0933 ---------------------------------------------- 임시 합류 고연주가 선선히 승낙하자 나는 매우 놀라운 감정이 들었다. 확실히 고연주는 다른 <10강>들과는 다른면이 있었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되, 남용하지 않는다. 적당한 선에서 체면은 세우지만 남에게 심한 반감을 일으키는 정도가 아니었다. 물론 기본을 가르친다는 조건이 붙기는 했지만 그래도 진짜 화끈한 사용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유정이 발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흘렸다. “고마워요. 설마 했는데 정말로 승낙 하실줄은 몰랐네요.” “흐~응. 여관을 통채로 내놓은건 별로 안 고마워 하는것 같더니, 이건 정말로 고마운가 보네요. 그런데…. 정작 배울 사용자는 탐탁지 않아 하는것 같은데요?” 그녀의 말에 나는 재빨리 유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유정은 고연주의 말대로 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굳이 그녀의 표정을 말로 표현한다면 “오빠가 가르쳐주기로 했잖아. 그런데 왜….” 라는, 상당히 배신감을 느끼는 표정 이었다. 그녀의 반응에 나는 속으로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저 철딱서니 없는것. 지금 본인한테 얼마나 큰 기회가 찾아왔는지 감이 오지 않는 모양이다. 세부 조절 사항들은 고연주의 일방적인 호의임이 분명했다. 자신은 이렇게 아낌 없이 내놓는데 저런 반응을 보인다면 나라도 기분이 안좋을 것이다. 슬쩍 고연주의 안색을 살피자, 그저 미소만 짓고 있을뿐 딱히 다른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나와 유정을 한번씩 번갈아 보고는 대강 상황을 짐작했는지 배시시 웃었다. “뭐 저는 언제나 준비되 있어요. 다만 가르침에 들어간 이상 살랑하게 하지는 않아요. 그러니까…정말로 배우고 싶으면 나중에 스스로 찾아오렴. 요 철 없는 꼬맹아. 쯧쯧.” 고연주는 마지막에 혀를 차는걸로 자신의 속마음을 대변했다. 그건 화가 났다기 보다는, 아직 홀 플레인의 사용자로서 성숙하지 못한 애들을 보는 마음일 것이다. 이번 기회는 하연도 놓치기 싫었는지 계속 유정에게 얼른 붙잡으라고 눈치를 주고 있었다.(여담으로 옆에서는 안현이 너 하기 싫으면 자기가 한다고 안달을 내고 있었다.) “…으득.” 고연주의 조롱 섞인 어조에 유정은 이를 까득 깨물고 고개를 팩 돌리는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항상 내가 그러듯 고연주는 어깨를 으쓱이며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미안하다는 시선을 보낸 후 이쯤에서 자리를 정리하기로 결정 했다. 조만간 유정이랑 자세히 이야기를 나눠 볼 필요가 있을것 같았다. 그렇게 아침 식사를 끝낸 후 일행들은 다시 본래의 스케줄로 돌아갔다. 하연은 차분한 얼굴로 안솔의 손을 쥐고, 그녀를 질질 끌며(?) 계단을 올랐다. 안솔은 토끼 같은 눈망울로 입을 달싹였지만 누구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고연주는 이왕 말이 나온김에 바로 1층의 테이블을 치우기로 했다. 애들이 수련할 장소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 이었다. 고연주는 혼자서 충분하다고 했지만, 안현은 덤빌듯한 기세로 꼭 돕고 싶다고 외쳤다. 고연주가 “안현군은 참 신사적이네요.” 라고 한마디 해주자 근엄해 보이려고 애쓰는 얼굴로 몸을 배배 꼬았다. 안현이 그러는건 딱히 놀랍지는 않았지만 신상용도 고연주를 돕겠다고 나선건 확실히 의외였다. 그러나 그의 인상 좋은 미소를 보니 아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고맙다는 의미로 살며시 고개를 숙였고, 신상용은 괜찮다는듯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유정은 속이 많이 상했는지 그대로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 나는 유정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예전 같았으면 당장에 혼쭐을 냈을 터였지만, 폐허의 연구소 이후 그녀가 나를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유정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게 아니었기 때문에 살살 달래줄 생각 이었다. 그렇게 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옆에서 이러저리 테이블 배치를 재고 있던 고연주가 막 몸을 돌리려는 내 팔을 붙잡았다. 내 생각을 눈치챘는지,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입을 열었다. “가지 마세요. 그냥 놔둬요.” “네?” “그냥 놔두시라구요. 가끔 이런 모습을 봤는데 예전부터 말해주고 싶었어요. 캐러밴의 대장이라는 사용자가 이런 사소한 문제까지 챙기는 모습은 좋지 않아요. 특히 방금전 문제 같은 경우는 본인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게 훨씬 더 낫답니다.” “그래도….” 내가 조금 주저하자, 이번에는 내 왼손을 붙잡는 손길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니 비비앙이 조심스러운 얼굴로 내 손을 쥐고 있었다. “김수현. 나도 이 여자 말에 동의해. 그동안 조금 말하기 그랬는데, 김수현은 애들한테 너무 끌려 다니는 경향이 있어. 특히 지금 없는 두명한테. 그러니까 가지마.” “그래요 형. 가지 마세요. 연구소에서는 잘난듯 떠들더니, 결국 지도 똑같잖아요. 형이 이런 기회를 만들어준것도 흔한게 아닌데 보는 내가 답답했어요. 그러니 이왕 이렇게 된거…<그림자 여왕>님. 저도 알고보면 정말 괜찮은 사용자….” 거의 초창기 멤버나 다름없는 안현도 거들고 나서자 나는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솔직히 고연주의 말에 틀린데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구구절절 옳은 말 이었다.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우리 애는 그런애가 아니거든요.” 라고 반문하고 싶다는 부모의 마음이 들었고 그래서 더욱 슬픈 마음이 들었다. “호호. 꺼져요. 아무튼 애들의 가능성은 잘 모르겠지만, 홀 플레인은 정신적인 면도 당신이 말한 <생존>의 가능성을 크게 좌우 한답니다. 자. 그러니 일행을 이끄는 리더는 얼른 가셔서 큰 업무들이나 보세요. 자잘한 것들은 당사자를 믿고, 다른 동료들을 믿으세요.” 추근대는 안현을 가볍게 거절한 고연주는 살살 내 등을 떠밀었다.(그녀의 단호한 말에 안현은 크게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녀에게 떠밀림을 받으며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스스로 생각해도 요즈음의 모습은 1회차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부드러운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컨셉으로 생각 했었고, 실제로 상황이 닥치면 당장에 예전으로 돌아갈 자신도 있었다. 어디까지나 나를 믿고 따르는 애들인 만큼…. 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나는 앗차 싶었다. 그와 동시에 쓴웃음이 내부서부터 밀고 올라오는걸 느꼈다. 어쩌면 분위기에 휩쓸린건 애들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 또한 그런 흐름에, 분위기에 취했던 걸지도 모른다. 1회차 시절 나는 혼자였다. 물론 형도 있고, 그녀도 있었지만 그들은 주변에 따르는 사용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나 또한 그 많은 사용자들중 하나였을 뿐이고.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혼자였다는 사실이 옳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가 사용자의 주변에 있는게 아니라, 사용자들이 내 주변에 있었다. 눈을 뜨면 나를 찾는 애들을 보며 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감정들이 일었고, 나름 괜찮은 기분을 주었다. 아마 그래서 나도 모르게 더욱 신경을 썼는걸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내 손을 잡은채 떨어지지 않으려는 비비앙을 억지로 떼고는 차분히 계단을 올랐다. 일단은 업무용 특실로 가서 앞으로의 일정을 조정할 생각 이었다. * “김수현. 김수현.” 계단을 오르고 3층에 이르자 나를 쫄랑쫄랑 쫓던 비비앙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니, 비비앙이 다시 내 옷깃을 꽉 붙잡았다. 나는 재빨리 그녀의 손길을 쳐버리며 입을 열었다. “왜 이래. 이거 놓고 말해.” “아, 알았어. 그런데 궁금한게 있어.” “뭔데?” 도대체 뭐가 궁금하길래 이렇게 애타는 얼굴로 나를 보는걸까. 필시 가벼운 일은 아니다 싶어 귀를 기울이자, 비비앙은 바로 입을 열었다. “우부남이 도대체 무슨 뜻이야?” “…그건 또 왜.” “아까 그 여자가 그랬잖아. 자기는 우부남도 받아 들일 자신이 있다고.” “에휴…. 앞에 말이랑 이어서 해석해 봐. 애 딸린, 이라고 했었지. 정확히는 아내, 즉 부인이 있는 남자라는 소리야.” 내 말에 비비앙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에엑. 너 결혼했었어?” “웃기는 소리 좀 하지마. 이 나이에 결혼 같은거 했을리가 없잖아.” 곧바로 강력히 부정하자, 그녀는 한결 편안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럼 그 여자는 왜 너한테 그렇게 말하는건데?” 비비앙의 말에 재차 한숨이 나왔다. 평소 맹한 비비앙이 이렇게 말한걸 보면 그때 고연주의 말뜻을 다들 알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연주 스스로 잘 정리를 했으니 일단은 넘어갈 생각 이었다. 머리 위로 물음표를 동동 띄운채 고개를 기울이는 비비앙을 보며 나는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애들이 평소에 나를 아빠라고 부르고 그런 의미에서 아내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으며 고연주가 나를 놀리려고 일부러 그런 말을 꺼냈다는것. 나름대로 상세한 설명을 끝내자, 그제서야 이해가 됐는지 비비앙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까르르 웃었다. “호호. 웃기다. 가끔 보면 참 재밌는 말들을 쓰는구나. 우부남 이라니.” “그리고 우부남이 아니라 유부남 이란다. 아무튼 두고봐. 앞으로 누구든지 아빠라든가, 유부남이라든가. 어떤 말을 하든 듣는 순간 볼기살을 펑펑 때려줄거야.” “볼기살?” “엉덩이를 때린다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했지만, 어쨌든 스물넷의 나이에 아빠라고 불리는건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내 말에 비비앙은 한순간 눈을 반짝이더니 이내 볼을 살짝 붉히며 입을 열었다. “그, 그래? 김수현은 아빠, 유부남이라 부르는걸 싫어 하는구나.” “그렇지.” 내가 수긍하자,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김수현은 아빠, 유부남이 아니구나.” “그래.” “그렇구나. 김수현은 애들의 부모가 아니었고, 아내가 있지 않았구나.” 자꾸만 말을 의미 없이 꼬는걸 듣자 조금 심기가 불편해졌다. 해서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으름장을 놓았다. “…너 지금 나 놀려?” 그러나 내 말은 듣지도 않은채, 비비앙은 음음 고개를 주억이면서 몸을 뒤돌았다. 그리고 슬쩍 엉덩이를 빼는 자세를 보였다. “…….” 이대로 엉덩이를 뻥 차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왠지 그녀가 원하는대로 될것 같았다. 그래서, 그저 머리를 한번 톡 건드리고는 3층 안으로 들어갔다. 동료들이 늘어가는건 좋지만 앞으로 한층 소란스러워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 <북부 대륙 대도시 바바라 - 황금 사자 클랜 하우스(Clan House)> “그러고보니 내일 발표 한다매?” “어떤거를…. 아 그거? 응. 나도 들었어. 계획에 앞서 사기도 올리고 사람들을 더 끌어 모을 생각인가봐. 하여간 우리 클랜 과시하려는건 알아줘야 돼.” “얘는. 하여간 걔는 좋겠네. 이번에 황금 사자 클랜에서 완전 밀어주고 있잖아. 나는 정말 죽을만큼 고생하고 겨우 들어왔는데. 누구는 클래스 하나 잘 얻고, 남자 한명 잘 잡아서 1년도 안되서 들어오고. 아 짜증나.” “1년이 뭐야. 0년차인데. 나도 짜증나. 새파랗게 어린년이 눈깔은 도도해 가지고. 마음에 안들어.” “야, 야. 말 조심해. 박현우가 걔 은근히 챙기는거 몰라?” “에휴~. 몰라. 하여간 현대나 홀 플레인이나 다 똑같아. 아무튼…내일 발표하면 그 도도한 얼굴이 더 짜증나질것 같은데? 생각만 해도 재수 없다.” “킥킥. 그건 그래.” 비아냥 거리는 목소리들이 떠나고, 복도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복도의 구석진 곳에서는 한명의 사용자가 어두운 그늘을 받으며 오롯이 서 있었다. 그 사용자는 여성 이었고 굉장히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었다. 블루 블랙 빛깔이 감도는 찰찰한 머리카락은 귀 밑을 훌쩍 넘어 어깨를 덮는다. 오똑한 콧날 밑으로는 작고 앵두 같은 입술이 가지런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중간중간 비치는 살결은 흰 눈을 연상시킬 정도로 뽀얀 빛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너무도 차가웠다. 물론 그 차가운 표정 또한 너무나 잘 어울렸지만, 살짝 미소 지으면 참 예쁠것 같은 아쉬움이 일었다. 그러나 현재 여성 사용자의 얼굴은 차마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얼음기를 풀풀 날리고 있었다.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한 빛을 띠고 있어 오히려 사늘한 기분마저 자아내게 하고 있었다. 마치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하지만 그녀의 표정을 더욱 자세히 탐구한다면, 뭔가 미묘한 것들을 느낄 수 있을것이다. 길고 가느다란 눈썹은 조금 치켜 올라가 있고, 훤히 드러난 이마는 살짝 좁혀져 있었다. 이윽고 고요한 눈동자는 방금 목소리들이 지나간 복도를 하염없이 보기 시작했다. “하아….” 문득, 그녀가 아름다운 입술을 열고 한숨을 내뱉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입술 내부의 뽀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보였다. 한동안 복도를 보던 여성은 시선을 아래로 내린 후 자신의 손을 바라 보았다. 손에는 말간 빛을 뿜어내는 보석 하나가 들려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을 주어 보석을 으스러지듯 쥐었지만, 그녀는 바로 힘을 풀여 그것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툭, 데구르르. 또르르 복도를 구르는 보석을 보고 있자 그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서글픈 빛이 떠올랐다. 이윽고 여성은 공허한 목소리로 한명의 이름을 불렀다. “수현이 오빠….” 여성 사용자의 정체는, 바로 보석 마법사(Jewel Mage) 김한별 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네. 오늘 제가 11시 즈음 원고를 완성하고, 너무 몸이 힘이 들어 잠시 누웠습니다. 잠깐 한번 눈을 감았다 뜬것 같은데, 일어나니 새벽 4시가 훌쩍 넘어 있었습니다. 순간 심장이 두근두근. 해서, 그때 기다리신 분들이 많으셨을텐데 죄송한 마음에 오늘 연참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디 130회를 공물로 받으시고 노여움을 풀어 주십시요. :) 아 그리고…. 제가 소설 쓰는거 원래 저밖에 몰랐는데, 오늘 부모님이 결국 알아 내셨습니다. 아버지는 기어코 지인을 통해 사이트를 알아 내시더니, 몇분의 작가 이름을 거론 하시더라구요. 어떻게 알았냐고 여쭈니 평소 조아라를 자주 읽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몇개의 작품을 말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어머니도 어제 사이트에 접속해서, 제 작품과 코멘트를 읽었다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두분이서 제 필명을 맞추시더니…. 하아.(예전에 흘리듯 살짝 말씀 드렸는데, 설마 알아내실줄은 몰랐습니다. OTL.) 그래서 지금 멘붕할거 같아욬ㅋㅋㅋㅋ. 두분 다 괜찮다고 말씀은 하시는데 어렸을적 일기장을 들킨것 같은 느낌입니다. 아아아. 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글쓰는게 행복하고 좋지만, 막상 부모님께서 알게 되시니 왜 이렇게 몸이 배배 꼬이는지 잘 모르겠네요. ㅋㅋㅋㅋ. PS. 오늘 어머니께서 (에)로유진이 도대체 뭐냐고 물어 보셨습니다. 아무래도 코멘트 보기를 누르신것 같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 PS2. 지금 정상 멘탈이 아니라 리리플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지금은 간신히 멘탈을 잡고 쓰고 있는데, 곧 놓칠것 같습니다. 그러니 왠만하면 보시지 않고 넘어가시는걸 추천 드립니다. 아햏햏. 『 리리플 』 1. 타락한비둘기 : 오호. 새벽 4시에 첫코를 하시다니. 가히 경이롭습니다. 1등 축하 드립니다. 아햏햏. 2. MuGong : 네. 여기 연참 있습니다. 아햏햏. 아햏햏…. 죄송해요. 멘붕 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 3. 음월영검 : 아니요! 모르겠어요! 모르겠다구요! <건핋ㄱㆍ세요>가 어떤 뜻이죠! 알려주세요! 음월영검님! 아하하하하하하하! 4. MKira : 그러게나 말이에요. 히히히. 수현이 너무 불쌍하네요. 이히히히히. 애가 딸렸어요. 아하하하하하. 5. 가한나 : 꺅꺅꺅. 우쭈쭈쭈. 와. 저 우쭈쭈 되게 좋아해요. 우하헤헤. 이스탄텔 로우의 클랜 로드는 과연 누구일까요? 설마 우쭈쭈? 우쭈쭈에요! 와~하~! 6. 水법사龍 : 헤헤 쿠폰 감사합니다. 오늘 연참 드렸어요. 흐하하. 가족이 옆에서 글쓰는거니? 이러시네요. 으하하하. 네. 글써요. 아하하하. 허헣. ㅜ.ㅠ 7. 오피투럽19 : 헤헤. 안현은 절대로 고연주와 맺어질 수 없어요. 왜냐. 고연주는 제 마음에도 들었거든요. 그러니 고연주가 안현에게 관심을 주는 일은 네버 절대 없을 겁니다. 캬캬캬캬. 8. 지리산의늑대 : 아니에요! 한편 더 드릴게요! 하루 더 기다리지 않으셔도 되요! 여기 있습니다! 넙죽! ~(-_-~)(~-_-)~ 9. hohokoya1 : 헤헤. hohokoya1님 저 어떡하죠. ㅋㅋㅋㅋ. 저 어떡하죠 정말 ㅋㅋㅋㅋ. 아니 그분은 왜 아버지한테 그 말을 드려가지고 정말 ㅋㅋㅋㅋ. 곤란해요. 민망해요. 꺅. 10. zjekfksqlc : 후후. 저는 에로 유진 일까요, 고자 유진 일까요. 네! 건강 챙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로유진 이에요! 와! …. ……. ………. 하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진리!)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정말이에요!)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그러지 말아주세요!)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31 / 0933 ---------------------------------------------- 한층 더 성숙해지다 < After > “오빠오빠. 예전에 그 여관에서…. 아 어디였지. 아 맞다. 뮬에 <조신한 숙녀> 여관. 나 아직 0년차 사용자 일때. 오빠가 나한테 단검 하나 줬잖아.” “아. 그때 너 혼자서 꽁 했을때?” “으으…. 그렇게 콕 집어서 말하지 마. 너무 창피하잖아. 아무튼 아마 그때 이후로 내가 변한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 어떤게 변했는데?” “나도 몰랐는데…누가 이렇게 될줄이나 알았겠어? 세상에 피에 젖은 미친년 이라니…아응. 잠깐만, 나 말좀 더 하고, 흐읏.” “오호. 오늘따라 소리가 아주 간드러지네. 악명 높은 북부 대륙의 용병왕(Lord Of Mercenary)이 이렇게 낯 뜨거운 신음성을 흘리다니. 너를 공포의 대명사로 여기는 남성 용병들이 보면 기절초풍 하겠어.” “아이잉. 히잇, 그런 소리 좀 하지 마. 내가 오빠한테만 이러지 다른 으읏, 사람들 한테도 이러는줄 알아…? 휴우. 이렇게 손을 대는것도…꺄앗, 오빠만…흐읏, 나는 오빠꺼니까…흐엉!” “에잇.” “오, 오빠! 정말…. 오늘따라 왜 이러는데!” “좋으면서.” “조, 좋긴한데. 꺄앗! 자, 잠깐만!” * 소형 캐러밴이든, 대형 클랜이든 새로 인원을 받아 들일때는 다들 조심스럽다. 특히나 목숨이 걸린 홀 플레인은 더욱 그런 경향들이 강했다. 그런면들을 감안한다면 고연주의 영입은 임시라는 꼬리표가 붙었지만 최고의 선택으로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배 이상의 일을 해내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애들이 수련할 장소를 만들어주고, 일행들의 식사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아침에 일어날 시간 즈음에는 내 업무용 테이블 위로 항상 향기로운 차가 뜨거운 김을 모락이 피어내며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반듯하게 정리된 서류를 보면 현재 홀 플레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날카롭고 세련될 글씨체로 빼곡히 기록 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고연주는 내가 정말로 클랜을 운영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러한 호의들이 마냥 좋기만 한건 아니었다. 그때 밤에 서로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확인한 만큼 고연주는 나에게 자신을 어필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다면 나도 그에 맞춰 화답할 필요가 있었다. 단순히 <열심히 한다.>라는 모습은 그녀에게 통하지 않는다. 열심히 해도 성과가 없다면 그만한 비참한 일도 없을것이다. 그렇다면 열심히 하는 동시에 그에 걸맞는 성과를 보여줄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성과의 첫걸음은 <절규의 동굴>이 될 예정 이었다. 그래도 나는 조금 더 기록을 탐독하는 모습을 보였다. <절규의 동굴> 뿐만이 아니라 혹시라도 모를, 1회차에서 발견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탐험도 염두에 두기 시작한것이다. 물론 그 확률은 이제 하늘에서 별 따기가 아닌 하늘에서 소행성 따기로 바꼈지만 혹시라도 모르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외부적인 성과는 그렇다 치더라도 더 중요한건 클랜의 내부 사정 이었다. 자금 사정은 어떤지, 일행들간의 사이는 어떤지, 그리고 다들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는지. 하는 행동을 보아하니 고연주도 예전에 어떤 클랜에 잠시 있었던것 같은데, 현재 내부로 들어온만큼 그 모든것을 보고 판단할 것이다. 안현은 그야말로 엘리트 코스의 정석을 밟고 있었다. 일반 클래스 시절 조금 떨어졌던 마력 능력치를 기공창술사를 얻음으로써 일부 보완했다. 고연주한테 정신이 팔리지 않을까 걱정을 했지만 그래도 연습때는 자신을 절제하며 열심히 수련하는 모습을 보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안솔과 하연 또한 꼬박꼬박 하루 일과를 지키고 있었다. 하연이야 원래 내가 건드릴 부분들이 없다고 해도, 안솔이 하연의 스케줄을 따라간다는건 매우 놀라운 일 이었다.(물론 나를 볼때마다 앓는 소리를 내기는 했다.) 서로 클래스가 다른만큼 신성 주문의 다양화를 기대하기는 힘들었지만 마력 운용만 향상 시킬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워낙에 능력치가 좋은 사용자다 보니 속박, 치료, 보호만 사용해도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 비비앙과 신상용 또한 굉장히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특히 비비앙도 고연주 영입 이후로 나름대로 바쁜 일상을 보내기 시작했다. 안현의 기록서를 해독해주고, 신상용을 가르치며 동시에 개인 수련 시간도 대폭 늘렸다. 아마 고연주를 보자 내면에서 호승심이 일어나는 모양 이었다. 신상용 또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애초에 조용한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잘 나서지는 않았지만, 조금 하기 싫은 일들이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손을 들었다. 이런 사용자들이 바로 클랜의 숨은 전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를 대할때 항상 살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다 잘 흘러가는것 같았지만 조금 더 깊숙히 살피면 문제가 아예 없는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유정이었다. 사실상 일행들은 좋은 흐름을 유지 하다가도 가끔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 분위기의 주인공은 바로 유정이었다. 항상 밝은 리듬을 보여주던 유정은 요즘들어 한층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얘기를 할때면 감초처럼 끼어들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조용히 있다가 혼자서 올라가는 경우가 많았다. 일단은 다른 일행들의 말을 들어 가만히 놔두고는 있었지만 볼때마다 답답한 마음이 드는건 어쩔 수 없었다. 아마 1회차 시절의 나였다면 당장에 버렸을 것이고, 통과 의례 시절의 나였다면 병신 같다고 욕을 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런 마음이 없는건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이 조금 더 들었다. 소위 말하는 정(情)은 아니었다. 그동안 같이 지내면서 유정이 잘 따르고 나를 많이 생각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유정이 현재 느끼는 내면에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안현이 레어 클래스를 얻었을 때부터 낌새가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상위1% 사용자들의 모임을 지향하고 있는만큼 계속 받아 들이는 사용자들이 다들 만만치 않은 실력자들 이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라이벌이라고 생각했던 안현은 클래스를 계승했다. 즉 유정은 현재 일종의 자격지심과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었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한다고 해도 따라갈 수 있을까. 엄밀히 말하면 탐험 이후 유정의 활약은 타 사용자들에 비해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래 그러는게 당연한 일 이었다. 물론 안현의 실력이 더 좋아 키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기회도 더 줬다는건 인정한다. 하지만 유정은 안현이랑은 다르다. 클래스나 무기 특성상 전투에 들어가는 순간 거의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것과 다름 없었다. 유정을 아끼려고 한 행동이 독이 든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왔다. 그렇다면 현재 그녀가 처한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이 두가지 있었다. 하나는 똑같은 레어 클래스를 구해다 주는것. 나머지 하나는 지금 상황을 받아 들이고 앞으로 더욱 정진하는것. 즉 스스로 깨닫는 방법 이었다. 전자는 현실적으로 힘들었고, 고연주는 스스로 받아 들일 때까지 기다리라고 조언했다. 아마 고연주가 보기에 유정의 행동이 상당히 우스울 것이다. 비록 본인이 시크릿 클래스를 얻었고 능력치도 좋지만, 그녀 또한 <10강>에 이르기까지 피와 살을 깎는 노력을 했을것이다. 고연주가 그렇게 냉정하게 말한 이유는 유정이 지금껏 했던 노력들은 그녀가 보면 어린애 놀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보는 시선은 그녀와는 많이 다르다. 유정이는 겉으로는 강하고 거칠어 보이지만 속은 굉장히 여린 여성의 내면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해도 사람마다 똑같이 적용된다고 볼 수는 없었다. 아래쪽에 있는 사용자는 그들만이 느끼는 감정들이 있다. 유정이는 1회차 시절, 내가 지겹도록 고민했던 문제들과 맞딱드리고 있었다. 원래 그럴수록 더욱 열심히 노력해야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그렇게 간단한게 아니었다. 그러므로 지금은 내 판단이 더 맞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는 그녀가 한 말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오빠…수현이 오빠 맞아? 다른 사람 아니지?> <나랑 현이랑 솔이가 그동안 주급으로 받은거 싹 다 모아논 돈. 아마 7골드 80실버는 될걸?> <너네가 아니라 우리.> <오빠는 우리를 위해 희생하면 희생했지 속이지 않았어요. 아니, 설령 속였다고 해도 그건 속인게 아니에요. 다 오빠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거니까요.> <정작 우리들은 편하게 수련하고, 편하게 쉴때 쉴틈없이 뛰어 다닌 사람이 누군지 알아? 바로 오빠야. 수현이 오빠.> 나는 한숨을 쉬고 이마를 짚었다. 갈등이 없는건 아니었지만, 나는 한번 더 유정을 보듬기로 결정했다. 다만, 이번에는 확실히 선을 그어놀 생각 이었다. * 늦은 밤. 나는 오늘도 일찍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애들 장비에 대해 고민을 하다보니 생각이 많아진 탓 이었다. 저번에는 깜빡 잊고 추가로 금화를 가지고 오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좋은 장비를 맞추려면 돈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GP는 아직 여유가 있으니 여윳돈을 가지고 장비를 보는것도 나쁘지 않을것이다. 나는 따뜻한 차 한모금을 넘기며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문득 차를 놓고 나가면서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하아? 농담으로 한 말 이었는데,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어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요. 하하.” “어머머, 기막혀. 사용자 김수현? 내일부터는 내가 타주는 차 마실 생각 꿈도 꾸지 말아요. 별꼴이야 정말.” 나는 고연주가 가져다 준 차를 들고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의도적으로 그랬다기 보다는, 1회차 시절에 자주 하던 버릇이요 습관이었다. 고연주는 찻잔을 들고 이리저리 살피는 나를 보며 혹시 독이라도 탔을까봐 그러냐고 까르르 웃었다. 그러나 그 말에 내가 흠칫하자, 그녀는 눈을 대번에 가늘게 만들고 나를 강하게 째려 보았다. 그렇게 내게 엄포를 놓은 후 그녀는 문을 세게 닫고 나갔다. 그래봤자 내일 아침이면 또 테이블 위로 뜨거운 차 한잔과 보고서가 올려져 있겠지. 그녀의 시위에 나는 킬킬 웃고는 차를 한모금 더 들이켰다. 목넘김이 상쾌한게 피로 회복에 좋은 약초를 넣은것 같았다. 다시 천천히 현재 애들이 가진 장비를 보고 있을때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고 입을 열자 땀에 흠뻑 젖은 안현이 문을 벌컥 열며 몸을 불쑥이 들였다. “형. 저 안현이에요. 들어갈게요.” “이미 들어오고도 할 말은 아닌것 같다만. 아무튼 와서 앉아.”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쪽 의자를 가리켰다. 성큼성큼 다가온 안현은 창을 한쪽에 곱게 세우고는 의자에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조금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끈한 열기가 덮치는게 나름대로 열심히 연습을 하고 있던것 같았다. 예상대로 녀석이 방문한 이유는 바로 질문 이었다. 본격적으로 기록서를 익히는 과정에 들어간 후 나를 찾는 횟수가 부쩍 늘어나고 있었다. 어차피 나도 장비 목록만 정리하고 바로 내려갈 생각 이었지만, 그냥 지금 안현을 도와주기로 했다.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저리도 열심히 하는데 절로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안현이 고민하는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들은 후,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기공창술사는 그들만의 특유의 움직임이 있단다. 공격 일변도라고 보기는 어려워. 오히려 전반적인 흐름을 보면…음. 방어와 동시에 견제를 이용해 상대방을 돌려 깎고, 마지막으로 카운터를 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런만큼 기공창술사는 방어술을 중점으로 둔 클래스야.” “형 말씀이 맞는것 같아요. 저도 기록서를 읽어 보니까 이거 완전 생각하던 것과는 다르던데요. 기공이라고 해서 화끈하게 공격하는 클래스일줄 알았는데, 뭔 방어 설명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어요.” 투덜거리는 안현을 보며 나는 빙긋이 웃고는 말을 이었다. “기공술, 즉 체내 마력 운용의 효율성을 비약적으로 높여 체술로 승화시키는게 그 클래스의 요체야. 특히 창을 이용한 방어술을 익히는건 절대로 나쁘다고 볼 수 없어. 이렇게 틈을 엿보는 창술들은 틀림없이 기회를 만들어 주거든. 그리고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다면, 설령 너보다 한두단계 강한 사용자라고 해도 이길 수 있는 흐름을 만들어 주기도 해. 상성만 잘 맞으면 그 이상도 노려볼 수 있고. 그리고 한방이 아예 없는것도 아니잖아?” “흐음. 형…. 죄송한데요. 아직 감이 잘 안와요. 조금만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면 안돼요?” 왜 안되겠니. 안현의 요청을 받은 나는 고개를 주억인 후 잠시 머리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마지막 한모금 남은 차를 깨끗이 비운 후 나는 조금 더 상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그 기록서의 내용대로 따르면, 기공창술사는 굉장히 논리적인 전투술이야. 그런만큼 전투에 들어가기전 네가 캐치해야할 것들이 정말 많잖아. 먼저 탐색으로 상대 사용자가 어느정도 거리에 있는지, 어떤 클래스를 갖고 있는지, 공세를 교환하면서 어느 능력치가 특화되 있는지, 무기는 무엇을 들었고 그것을 어떤식으로 사용할 것인지 등등. 그것뿐만이 아니라 순간적인 상황 판단으로 항상 최적의 체술을 펼쳐야 하니 눈썰미가 굉장히 좋아야 해. 언제 어느 상황이 올지는 아무도 몰라. 다만 그 상황에 따라 어떤걸 조립해서 해답을 내놓는건 온연한 네 몫이란다.” “으어어어어. 어려워요.” “하하하. 그럼 레어 클래스가 쉬울줄 알았니?” 안현은 내 설명에 머리를 부여잡고 괴성을 질렀다. 내가 미미한 미소를 흘리자 그는 한숨을 푹 쉬고는 주섬주섬 기록과 창을 집어 들었다. 어깨가 축 늘어진게 생각대로 되지 않아 어지간히 힘든 모양 이었다. 안현은 아마 처음 레어 클래스를 얻었을 때만 해도 장밋빛 미래를 상상 했겠지만, 현실은 절대로 녹록하지 않았다. 내가 90 중후반 능력치를 갖고도 마력 재능 계열 시크릿 클래스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도 위와 비슷했다. 나는 이미 검사로서 성공이라는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다다렀었고 그 경험치를 고스란히 가져올 수 있었다. 즉 이미 한번 가본 길이고 그 경지를 더욱 심화하는 길을 선택했다. 괜히 어설픈 생각에 미지의 경지를 새로 개척하는것 보다는 이게 더 낫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안현이 기공창술사의 힘을 완전하게 다루는건 아직 머나먼 일 이었다. 힘 없는 얼굴로 꾸벅 인사를 하고 막 몸을 돌리려던 순간, 안현은 앗차한 얼굴로 다시 몸을 돌렸다. “아 맞다…. 형.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응? 뭔데.” 내가 곧바로 반문하자 안현은 잠시 고민하는 낯빛을 지었지만, 이내 얼굴을 굳히고는 바로 입을 열었다. “이유정이요.”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하하. 오늘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걸렸다고 해서 제가 연재를 중단할 일은 결단코 없을 겁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내용에도 어떠한 영향도 가지 않을 겁니다.(설령 고자로 되돌아 간다던지, 고자유진 이라던지요.) 조금 껄끄럽기는 해도 지금껏 나온 정사 내용을 지울 생각도 없고, 앞으로 나올 정사 내용도 그대로 예정대로 쓸 생각 입니다. 애초에 메모라이즈는 그런 H한 부분들을 염두에 두고 들어간 작품 이니까요.(물론 H 난무를 말하는건 아닙니다.) 소신껏 꿋꿋하게 써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제 작품을 사랑하고, 제 작품을 응원해 주시는 독자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오늘 독자분들의 코멘트와 <고장난선풍기>님의 일러스트가 저에게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추진력을 주셨습니다. 멘탈 회복 100% 입니다. 아자아자! PS. 제 뜰에 오시면, <고장난선풍기>님이 수시로 메모라이즈 캐릭터 팬 아트를 업로드 해주시고 계십니다. 한번쯤 오셔서 감상 코멘트를 남겨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 PS2. 오늘의 대화. “코멘트 보니까 고유진이란 애 인기 많은것 같더라. 또 비비앙 이던가?” “(고자 유진인줄 알고 뜨끔.)아, 네. 고연주 일걸요.” “그래. 고연주 맞다. 사람들이 매력이 대단하다고 하던데.” “걔 원래는 살해 당하는 설정도 생각 했었어요.” “죽이지 마.” “…….” 『 리리플 』 1. audwodi12 : 처음 뵙겠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1등 축하 드려요! :) 2. hohokoya1 : 하하. 아닙니다. 생각해보니 창피해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습니다. 소중한 조언 감사 합니다. :) 3. 샤이닝쿠마 : 그렇군요. 코멘트는 처음 이시군요! 이틀에 걸쳐 정주행 하시느라 고생 하셨습니다. 앞으로 코멘트 자주자주 달아 주세요! 4. 테크노 : NO. NO. NO. 절대로 그럴일은 없습니다. 네버, 네버, 네버 입니다. 저는 완벽한 탈고자 선언을 했습니다. 5. 동파 : 그러게나 말입니다. 애들이 언제 철이 들런지 모르겠네요.(?!) 6. 유운처럼 : 오랜만에 뵙습니다! 원년 코멘터(?) 분을 뵈니 정말 반갑습니다. ㅋㅋㅋㅋ. 한별이 너무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지금 한창 마음 고생 하고 있을 애에요. 7. 고장난선풍기 : 하하하. 죄송합니다. 제가 분명 눈 잠깐만 감고 일어나려고 했는데, 눈을 뜨니 새벽 네시…. 네! 절대로 표현의 제약은 없을겁니다. 애초 설정 그대로 나가기로 했습니다. 당당하게요. :) 팬 아트 항상 감사합니다. 시간 날때마다 헤벌레 구경하고 있어요. 아. 이번에 아버지한테도 팬 아트 보여 드렸습니다. ㅋㅋㅋㅋ. 8. rhkdel2 : 어머니가 고려해 보신다고 하시는군요. 저 이제 큰일 났습니다…. :) 9. 희야맘 : 고맙습니다! 몸 관리 철저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멘탈은 정상 회복 했습니다! 하하하. 희야맘님도 환절기 감기 조심하세요. :D 10. sdaas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2:49분. 주무실때 저 혼자 몰래 확인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32 / 0933 ---------------------------------------------- 한층 더 성숙해지다 유정이 일이라. 어차피 염두에 두고 있었던 일 이었기 때문에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안현은 계속 망설이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걸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참을성 있게 안현의 말을 기다렸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안현은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었다. “형. 이거는 제가 고자질 하려는 의도는 아닌데요. 이유정 요즘 행동이나 그런것들이…조금 심한것 같아요.” “너 예전에는 그냥 놔두라고 하지 않았었나?” 빙긋 웃으며 대꾸하자, 안현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기는 한데…솔직히 고연주님 말에 맞장구 치고 싶어서 그랬어요. 물론 지금도 그때 유정이 행동이 잘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다만 최근 하루 이틀을 보면 행동이 도를 넘는것 같아서…. 분위기도 많이 이상하구요.” 고연주님이라. 그새 안현을 조련한건가?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반문했다. “어떤 행동이 심하고, 도를 넘는건데. 좀 더 자세히 말해봐.” 내가 조금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보이자 안현은 확실히 마음을 정한것 같았다. 그는 곧 결연한 눈동자를 하고는 그동안 갖고 있었던 불만들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형도 아시겠지만, 요즘에 다른 일행들이랑 말을 거의 안해요. 보다못해 솔이가 어제 억지로 말을 붙이려고 했는데, 싹 무시하고 그대로 올라간거 보셨어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어제랑 오늘은 1층에 나오지도 않았어요. 아. 물론 제가 없을때 왔을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최근에 수련하는 모습을 못본것 같아요.” “흐음.” 내가 침음성을 흘리자 안현은 내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물론 전에는 그냥 버리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그래도 그동안 함께 해왔잖아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형이 따끔하게 한마디 해주시는것도 나쁘지는 않을것 같아서요.” 안현의 말에 나는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확실히 시간이 흐르면서 안현의 성격도 많이 바뀌었다. 처음 통과 의례에서의 날카로운 모습이 부드럽게 변했다. 우호 · 온건(Amity · Moderation)으로 바뀐 성향이 내 생각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녀석 역시 이대로 유정을 놔두기에는 뭔가 마음에 걸리는게 있었던것 모양 이다. 하긴 그동안 어지간히 다툰만큼 미운 정이라도 들었을 것이다. 안현의 요청에 고개를 한번 주억이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긴…. 그동안 함께한 시간이 얼만데 이대로 놔두는건 말도 안되지.” “그렇죠?” 긍정적으로 답하자 안현은 반색하며 말을 받았다. 나는 그윽한 미소를 흘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버리…흠. 적어도 한번 기회는 주는게 맞을것 같다. 이왕 말이 나온김에 바로 하는게 낫겠다. 안현. 가서 유정이 보고 내 방으로 오라고 해.” 내 말에 안현의 눈동자에는 당황스러운 빛이 스쳤다. 나 또한 그대로 말하기에는 조금 그런감이 있어 <버리더라도>를 <적어도>로 수정했다. 한번의 기회는 말 그대로 내가 그어논 일종의 <선>으로 볼 수 있었다. 그 선을 벗어나지만 않으면 나는 앞으로도 유정을 이끌어 줄 생각이다. 지금 행동이 바르지 않다고는 하지만, 그녀가 내게 가진 마음을 알고 있고 현재의 심정에 공감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계속 이런 태도를 보인다면 아무리 가능성이 보이고 나를 따른다고 해도 유정에 대한 내 입장은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곳은 홀 플레인 이니까. 일단은 내 판단대로 하되, 여의치 않으면 고연주의 의견을 조금 더 강하게 수용할 것이다. 안현은 내 묘한 분위기를 읽은듯 잠시 입을 달싹였지만, 이내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 자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깨워서라도 데리고 와.” “네, 네? 아…. 네 형. 제가 지금 데리고 올게요.” 내 대답도 듣지 않은채 후다닥 방을 나가는 녀석의 모습을 보며 나는 연초 한대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그동안 고이 갖고 있었던 마검 스쿠렙프를 품에서 꺼냈다. 붉게 녹슨 검신을 보자 스쿠렙프가 스산한 살기를 뭉클이 쏟아 내었다. 나는 곧바로 검신을 한번 강하게 퉁겨 주었다. 땅! “이게 어디서 살기를 풀풀 풍기고 있어.” 우웅! “어쭈?” 땅! 땅! 땅! 우우웅…. 연속으로 세번 강하게 퉁기자 스쿠렙프는 슬며시 살기를 거두었다. 비로소 얌전히 내 손에 놓인 마검을 보며 나는 조용히 말을 걸었다. “가만히 있어. 지금 네 주인이 될 아이가 올지도 몰라.” 우웅. 우우웅. “거짓말 아니거든. 정말이라고. 아무튼 다 좋은데…. 너 적당히 해라.” 우웅? 시치미를 뚝 떼고 진동을 울리는 녀석을 보며, 나는 으르렁 거리듯 말을 이었다. “적당히 하라고. 조금 호전적인건 괜찮지만…. 피에 미치게 만드는 순간 뺏어서 똥간에 처박을거야. 아니면 신전 정화대에 올려 놓거나. 내 말 알아 들었지?” 웅…! 우~웅. 우~웅. 우~웅. 나는 손 안에서 이리저리 몸을 비트는 스쿠렙프를 꾹 누르며 안현을 기다렸다. 스쿠렙프는 이리저리 반항을 하고 있었다. 놈은 그럴려면은 차라리 내가 자신을 써주기를 원하고 있었지만, 나는 절대 이놈을 쓸 생각이 없었다. 한동안 애절한 진동음을 내던 마검은 이내 포기한듯 힘없이 검신(?)을 떨구었다. 스쿠렙프를 톡톡 건드리며(놈은 더이상 반응하지 않았지만.) 시간을 보내는 도중, 누군가 쿵쾅쿵쾅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죽은듯 잠들어 있는 놈을 깨우며 다 태운 연초를 슥슥 비볐다. “야. 일어나. 너 주인 오나보다.” 웅! 그순간 스쿠렙프 또한 내 말에 한차례 진동으로 화답했다. 아닌척 했지만 그래도 새 주인을 만난다는 사실에 기뻐하는것 같았다. 그러나 홀로 방문을 열고 들어온 사용자를 보는 순간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사용자는 이유정이 아니라 바로 안현 이었다. 뭔가 안좋은 일이 있었던듯, 안현의 얼굴을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숨은 씩씩거리며 거칠게 몰아 쉬고 있었다. “형!” 안현을 나를 보자마자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에는 억울하다는 어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너…. 왜 그래. 그리고 유정이는?” “아…! 말도 마세요. 잠시라도 그 미친년을 걱정한 제가 미친놈 입니다. 아오 정말. 그걸 콱…. 아우! 열받아.” “왜 그래. 도대체 무슨일인데 그래.” “말도 마십쇼. 안온데요.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길래 억지로 열고 들어갔더니 히스테리가 장난 아니에요. 할퀴고, 때리고, 욕은 바가지로 먹고. 쫓겨나다시피 해서 나왔어요. 이거 보세요.” 안현은 자신의 팔을 내게 들이밀며 연신 억울함을 호소했다. 확실히 안현의 손과 팔 피부 위로는 기다란 손톱 자국과 손바닥 자국이 찍혀 있었다.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말이다. 잠시 물끄럼한 시선으로 그의 팔을 응시한 후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문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는 나를 보며 안현은 다급한 목소리로 내 발길을 붙잡았다. “혀, 형. 지금 가지 마세요. 이유정 지금 완전히 뿔 났어요. 형도 당할 수 있어요.” 이유정이 나한테 욕을 하고 손을 휘두른다? 안현의 말에 절로 코웃음이 나온다. 내가 아는 유정이라면 절대로 그럴리가 없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나는 방문을 나가기 전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안현에게 물었다. “유정이 지금 3층에 있니?” “아니요. 혼자 짐 싸서 2층으로 내려갔어요. 형 근데 정말로….” “오기 싫다는데 내가 가는게 낫겠지. 아무튼 고생했다. 유정이 일은 이만 나한테 맡기고 너도 이만 들어가려무나.” 자꾸만 나를 붙잡으려는 안현의 말을 나는 단호하게 끊어버렸다. 그는 아까 내 기색이 자못 마음에 걸리는지 안절부절한 얼굴로 입술만 달싹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대로 몸을 돌리고는 방문을 나섰다. “형….” 뒤에서 안현의 불안정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더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 안현의 말대로 3층에는 유정의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해서 곧바로 2층으로 내려간 후, 나는 있는 힘껏 마력을 끌어올려 광범위하게 감지를 돌렸다. 거대한 마나의 유동이 2층을 한차례 휩쓸고, 나는 곧바로 복도 왼쪽에 있는 맨 끝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정을 느낀 문 앞에 잠시 몸을 멈춘 다음 나는 가볍게 문을 두어번 두드렸다. 똑똑. 혹시라도 대답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다행히도(?) 유정은 즉각 대답했다. “꺼져.” “…….” 똑똑똑똑. “아…. 씨발 진짜. 야. 꺼지라고 했지. 지금 내 말이 개똥으로 들려? 이 미친 자식아?” 유정은 아마도 나를 안현으로 착각하는것 같았다. 오랜만에 그녀의 거친 입담을 듣자 매우 신선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슬며시 장난기가 돌아 한번 더 문을 두드리기로 했다. 이번에는 리듬을 타서. 똑똑. 똑똑똑. 똑똑똑똑. 똑똑. 리드미컬한 문소리가 나고, 이번에는 한층 더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제발 좀 꺼지라고 이 개 씨발놈아! 여기서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그 여자 보고 창으로 딸이나 쳐달라고 해. 아 진짜…. 별 또라이 같은 새끼가 사람 귀찮게 하고 있어.” 팡팡 터지는 그녀의 욕설에 나는 피식 웃고는 그대로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그렇게 방 안으로 들어가자, 이불을 머리 끝까지 푹 뒤집어쓰고 누워있는 유정을 볼 수 있었다. 이불에 가려 내 모습을 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누가 들어왔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듯 몸을 가린 이불이 한차례 펄럭이는걸 볼 수 있었다. 아마도 안에서 세게 걷어찬 모양 이었다. 유정이 누워 있는 침대와의 거리를 서서히 줄이자, 이불에 파묻힌 뾰족한 목소리가 방 안을 쩌렁이 울렸다. “경고하는데. 아까처럼 처맞고 싶으면 또 내 몸 만져라. 털끝이라도 건드리는 순간 너 죽고 나 죽는거야.” “…….” “분명 오지 말라고 했어. 또 개소리 지껄일거면 그냥 나가.” 개소리라. 도대체 안현이 무슨 말을 했길래 개소리라고 하는 걸까. 추측컨데 안현도 유정을 데리러 왔을때 꽤나 거칠게 말한것 같았다. 어떤 말들을 했는지 강한 호기심이 일었지만, 차차 풀릴 의문들이기 때문에 나는 기어코 그녀의 옆으로 다가섰다. 침대 옆으로 바싹 다가선 후 나는 그녀의 머리가 있다고 추정 되는 곳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내 손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불 안으로 파고 들었다. “……!” 이윽고 내 손바닥으로 보드라운 머릿결이 닿았다. 그리고 내 손이 닿는 순간 그녀의 몸이 크게 움찔이는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대로 유정의 머리카락을 상냥히 쓸어 주었다. 한번, 두번, 세번, 네번, 다섯번…. “으…….” 열번이 넘게 머리를 쓰다듬자 몸의 떨림이 점차 잦아드는게 느껴졌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지금 들어온 사람이 안현이 아니라는것 정도는 알고 있을것이다. 아니, 아예 나라는 사실을 알아 차린것 같았다. 솔직히 조금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고작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로 바로 나인걸 알아 맞추다니. “…오…빠…?”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결국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유정이었다. 나는 맞다는 의미로 그녀의 머리를 살짝 쥐어준 후 손을 뗐다. 살며시 그녀를 감추고 있는 이불을 열려고 하자, 미약한 손길이 이불을 짓누르는듯 열리지 않았다. 안에서 유정이 꾹 쥐고 놓지 않고 있는것 같았다. 나는 연한 미소를 머금고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유정아. 이불좀 들어봐. 잠깐 얼굴좀 보자.” 내 말에 유정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불위로 볼롯이 솟아오른 머리 부분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다시 한번 이불을 들추려고 하자, 유정은 또다시 이불을 꾹 짓눌렀다. 나는 그다지 많은 힘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유정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조금 더 힘을 쓰면 억지로 열 수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 의미 없는 힘 겨루기를 한지 1분쯤 흘렀을즈음. 다시금, 이불 전체가 미약하게 들썩들썩 거리는게 보였다. 그와 동시에 이불을 누르던 유정의 힘이 탁 풀렸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저항이 약해진 이불을 훌쩍 걷었다. 그리고, 침대에 얼굴을 묻은채 어깨를 간헐적으로 떨고 있는 유정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소리를 죽이며 울고 있었다. “유정아. 오빠랑 얘기좀 하자.” 유한 목소리로 말을 걸며 부드럽게 그녀의 고개를 돌리려고 하자, 미약한 반항이 느껴졌다. 그녀는 어떻게든 얼굴을 들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내 끈질기게 시도하는 내 손에 결국 살짝 얼굴을 드러내고 말았다. 드디어 얼굴을 보인 유정은 눈을 꼭 감고 있었고 입술은 잘끈 깨물고 있었다. 닫힌 그녀의 눈 사이로 계속해서 흐르는 맑은 물줄기를 보며 나는 침대에 살짝 걸터 앉았다. “아아앙….” 비로소 고개를 완전히 돌린 순간 유정은 그동안 참아왔던 울음 소리를 터뜨리고 말았다. 뭐가 그리 서러운지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보며, 나는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네. 이제 유정이 파트랑, 마무리 정비 파트만 끝내고 슬슬 뮬을 나가야 겠군요. 그동안 실컷 놀았으니(?) 다시 고생하러 가야죠. 돈도 벌고, 장비도 얻고, 전투도 하고. 그리고 절규의 동굴에서 돌아오면 아마도 많은것들이 바뀌어 있을 겁니다. 아. 얼른 뮬을 떠나는 장면을 그리고 싶네요. 하하하.(아마 절규의 동굴때는 조금 전개가 빨라질지도 모르니,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PS. 뜰에 <고장난선풍기>님이 수시로 팬 아트를 업데이트 해주고 계십니다. 축전도 받았고, 유정이 팬 아트도 수정되어 올라왔습니다. 유정이가 많이 예뻐졌으니 한번 구경하러 오세요! <고장난선풍기>님 감사 합니다. (__) 『 리리플 』 1. 휘을 : 의지의 코멘터 이십니다. 다시 1등을 탈환 하셨군요. 축하 드립니다. :) 부디 이번회도 재미있게 감상해 주세요! 2. ]라디에르[ : 하하하. 확실히 그러는것도 재미 있을것 같네요. 과연 앞으로 한별이는 어떻게 될까요? :) 3. 사람인생 : 헐. 왜 저한테 복수를…. ㅜ.ㅠ 그거 파악하는건 너무 힘들어요…. ㅋㅋㅋㅋ. 요즘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4. 쿠로시온 : 크크크. 과연 머리를 쓰다듬은 걸까요, 몸을 간지럽힌 걸까요, 아니면…?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 5. GradeRown : Yes. <일반 클래스>도 노력 여하에 따라 충분히 강해질 수 있습니다. <강>의 자리에 들 정도로요. 실제로 <강>의 자리에 일반 클래스가 자리를 차지한적도 있습니다. 다만, 동일 조건하에 레어와 시크릿 클래스가 유리한건 있습니다. 6. 카이혼 : 한분은 결제 하셨고, 한분은 코멘트 보기를 누르셨습니다.(버튼이 있더라구요. 그건 또 어떻게 찾으셨는지….) 덕분에 요즘 하루가 스펙타클 합니다. 하하하. 7. 겜마스터 :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하하하. 지금이야 수현이 하하호호 웃고 있지만 과연 뮬을 떠나면서 어떤 모습을 보일까요. 크크. 많은 기대 부탁 드립니다. :) 8. 고장난선풍기 : 축전, 그리고 유정이 팬 아트 수정 감사 합니다! 유정이 너무 예쁘게 바껴서 마음이 너무 좋네요. 어떻게 보면 유정이가 제 이상형…. 쿨럭. 실은 다 이상형 입니다. 하하하. 9. 꼬야 : 예. 제 의지의 강력한 표현 이었습니다. 에로유진의 커밍아웃! 소설은 그대로 소신껏 써나갈 예정 입니다. 10. 슈리a : 아하. 그렇군요. 장문의 코멘트 감사 합니다. 이 부분은 저도 참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도 그렇구요. 다만, 수현이 H를 못해 발정난 그런 인물로 비추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필요에 따라 기타 다른 여성과 관계를 맺을 수 있으나, 난봉꾼이 아닌 다들 나름의 개연성을 부여할 생각 입니다. 소중한 조언 감사합니다.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33 / 0933 ---------------------------------------------- 한층 더 성숙해지다 이유정은 얼굴을 드러내자마자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현재 그녀의 심정은 매우 복잡할 것이다. 자신이 잘못했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기 어린 마음으로 버텼지만, 가면 갈수록 일행들 주변을 겉도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최후의 보루로 여겼던 나마저 찾지 않고 그대로 놔두자 더욱 악이 받친 마음이 들었을 것이고. 나는 두 팔을 안으로 들어 유정의 몸을 일으킨 후 그대로 품에 안았다. 그녀는 더욱 구슬픈 소리로 울었고, 나는 끈임없이 그녀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아아앙…오빠…미안해…미안해…어어엉….” “그래 그래. 우리 유정이 착하다. 그만 뚝 하고. 옳지….” “오빠 미안해…엉엉…내가 잘못했어….” 유정은 끈임없이 “미안해.” 를 되뇌이고 있었다. 그 사과는 매우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솔직히 오면서 자기는 잘못하지 않았다고 뻗대면 조금 심하게 야단칠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유정의 반응을 보는 순간 그 마음은 눈 녹듯 사그라들었다. 평소에 괄괄하고 성미가 급한 유정이지만 그만큼 순수한 면이 있는 아이였다. 나는 괜찮다고 속삭이며 유정을 부드럽게 달랬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렇게 이유정이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는건 처음 보는것 같았다. 발갛게 부은 눈과 얼굴에 선명히 남은 눈물 자국을 살며시 닦아 주며, 나는 온화한 음성으로 말을 걸었다. “이제 실컷 울었니?” “…….” 유정의 대답은 없었지만 가슴팍에서 몇번 끄덕거리는 그녀의 머리를 볼 수 있었다. “하하. 아까 신나게 욕하던 여성은 어디가고 울보만 있을까.” “…그게…오빠한테 한게 아니라…그놈인줄 알고….” 그놈이란 안현을 말하는건가. 도대체 안현이 뭐라고 했는지 궁금했기 때문에 나는 슬쩍 말을 찔러보기로 했다. “그래도 그렇게 할퀴고 때리는건 조금 심했어.” “아니야아…. 흐끅, 그놈이 자꾸만…흐끅, 헛소리를 하니까….” “그렇구나. 안현이 뭐라고 했는데?” 아직 울음기가 다 가신건 아닌지 그녀는 연신 딸꾹질을 삼켰다. 내 물음에 유정은 품에서 얼굴을 들고는, 속상함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짜고짜 들어오더니…다른 사람들 보기 창피하지도 않냐고…너 내가 레어 클래스 얻은것 때문에 배 아파서 그러는 거지 막 이러고….” “그리고?” “그리고…얼마전에 고연주건으로 오빠가 나 되게 안좋게 보고 있다고…빨랑 일어나서 오빠한테 가라고…. 흐끅.그리고 갑자기 이불을 걷어 차면서 막무가내로 잡아 끌잖아…. 안그래도 심란해 죽겠는데…그래서 열불이 치솟아서 그만….” “그렇구나. 나는 그냥 데려오라고 했는데 그런 일이 있는줄은 몰랐네.” “우웅….” 자상하게 말을 받아 주자 유정은 조금은 안심한 표정으로 내 품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찰찰한 머리카락들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엄밀히 말하면 안현의 말이 틀린것은 없었다. 그러나 안현은 여성에 대한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완곡히 돌려 말해도 모자랄 판에, 그것도 유정을 상대로 돌직구를 팍팍 꽂아버리고 말았다. 더욱이 안현은 레어 클래스를 얻은 이후로 알게 모르게 자랑질을 했었기 때문에 고까운 마음이 든 것 같았다. 이유정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나는 잔잔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녀석이 말이 심하기는 했지만 아주 헛소리는 아니라는거…. 알고 있지?” “응…. 솔직히…걔 말을 듣는 순간 반박을 할 수가 없더라. 뭐라고 말을 하고는 싶은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어. 그런데 분한 마음은 계속 차오르고…그래서 결국 욕이랑 손을….” 내 말에 유정은 메마른 어조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내 처량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나 정말 웃기고 한심하다…. 앞에서는 잘난듯 떠들어대고 정작 행동이 이러니. 안현 말대로 다들 나를 얼마나 우습게 보겠어. 동료가 잘됬는데 축하는 못해주고 추한 질투만 하고….” “괜찮아. 그걸 알았으면 됐다. 네가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발전을 위한 최소한의 한걸음은 내딛은거나 다름 없어. 자신의 단점을 직시하고 인정하는것 부터가 위로 가는 첫걸음 이니까.” “정말 그럴까? 오빠는 항상 좋은 말만 해주잖아.” 유정의 시무룩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그대로 그녀의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춘 다음 신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거짓말을 하는게 아니란다. 유정이 너. 정말로 강해지고 싶어?” 내 목소리에 담긴 진심을 읽었는지, 유정은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빠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도 레어나 시크릿 클래스 얻고 싶어. 나 그동안 전투에 별로 도움도 안되고…. 이대로 가다가는 영영 뒤처질것 같단 말야.” “레어나 시크릿이 일반 클래스에 비해 좋은건 부정할 수 없어. 특히 시크릿은 클래스마다 고유의 <권능>이 있으니까 차이가 있는건 사실이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반 클래스가 마냥 밀리는건 아니라고. 그 사용자의 능력, 능력치, 클래스등. 홀 플레인의 <설정>중 어떤 것들을 어떻게 조화시키는지에 따라서 일반 클래스도 큰 힘을 낼 수 있단다.” “그래도…. 정말 그럴까…?” “현재 불리는 <10강>의 10명중 2명이 일반 클래스를 가지고 있다고 하거든. 바꾸어 말하면 8명이 레어, 시크릿 클래스인건 맞지만. 내가 유정이 너라면 그 2명을 롤 모델로 삼고 어떻게든 좁은 문을 뚫어 보겠어. 그리고 네 클래스인 <용병>은 정말 가능성이 많은 클래스 이기도 하고.” 강철 산맥의 원정 실패와 부랑자들간의 전투 그리고 1차 내전을 거치면서 <10강>의 자리에 큰 변동이 생기지만, 그래도 지금 현재로서는 내 말이 맞았다. 아니, 애초에 일반 클래스 였지만 명성을 떨친 사용자들도 분명히 있다. 1회차 시절 내가 기억하는 사용자들도 한두명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레어와 시크릿 클래스를 가진 사용자들이 훨씬 많았지만, 아무튼 유정이도 가능성이 없는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10강>의 수준을 기대하는게 아니다. 차후 나를 백업해줄 최상위 혹은 상위 사용자 정도로 성장을 해도 만족할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유정이 능력치도 0년차임을 감안하면 절대로 떨어지는게 아니었다. 나는 품 안으로 손을 찔러 넣어 마검 스쿠렙프를 꺼내 들었다. 붉게 녹슨 마검을 보자 유정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겉으로는 한 손으로 가볍게 휘두를 수 있는 곡단도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엄연한 마검으로 분류 되는 무서운 검이다. 상급 마족 벨페고르의 마검. 겉으로는 녹슬어 보이지만 매우 단단한 강도와 날카로운 절삭력을 갖고 있다. 한번 베어낸 상처에는 마검의 저주 효과로 인한 지속적인 출혈이 일어나며, 피를 먹을수록 검신이 붉게 물들어 더욱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내는 특징이 있었다. 이걸 지금 줄지 말지 많은 고민을 했었다. 아무리 성능이 좋다고 해도 마검인 만큼, 스쿠렙프를 사용할수록 사용자의 정신은 피폐하게 변한다. 그리고 종래에는 살육과 피를 갈구하는 광인(狂人)이 될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주는데는 2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번째로는 일단 내가 스쿠렙프를 제어할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검술 전문가(Sword Specialist)인지 아니면 진명(검(劍)의 주인)의 영향인지 알수는 없지만 스쿠렙프는 처음 나를 만났을 때부터 굴종했다. 마검의 특성상 사용자를 잡아 먹으려고 안달을 하는걸 감안한다면, 아까전 방에서 스쿠렙프의 진동은 애교나 다름없는 수준 이었다. 유정의 낌새가 조금이라도 이상해지는 순간 나는 곧바로 마검을 폐기할 것이다. 두번째로는 유정이와 마검의 상호 보완성 즉 꿍짝을 맞추는데 있었다. 유정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한없이 약하지만, 싫어하는 사람은 질색을 할 정도로 싫어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껏 치뤄왔던 전투에서 그러한 성격들이 한두번 드러난 적이 있었다. 나는 바로 그점을 노리고 있었다. 스쿠렙프가 그런 유정의 성격을 적당한 선으로 끌어낼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높은 효율을 기대할 수 있을것이다. “오빠. 이 못생긴 단검은 도대체….” 유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스쿠렙프는 “우웅!” 하고 진동음을 흘렸다. 깜짝 놀란 표정으로 얼굴을 떨어뜨리는 유정을 보며, 나는 연한 미소를 지었다. “폐허의 연구소에서 얻은 물품. 마족 벨페고르가 쓰던 마검, 스쿠렙프야.” “마검? 스쿠렙프?” 유정이 고개를 기울이며 손을 뻗으려고 하자, 나는 마검을 슬쩍 뒤로 돌렸다. 멀뚱한 눈동자로 내 얼굴을 응시하는 유정을 보며 나는 곧바로 설명을 시작했다. “잘 들어. 스쿠렙프는 마검의 일종이다. 마검이라 함은 사악한 마력. 즉 슬픔, 욕망, 저주, 재앙등을 뿌리는 힘이 깃든 경우가 많아. 그리고 그 힘들은 대단히 강력하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사용자들의 정신에도 영향을 미치고. 당장 이 스쿠렙프만 해도 적을 앞두고 꼭 피를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놈 이거든.” “…….” “그렇다고 해서 마검이 무조건 나쁘다는건 아니야. 성검 같은 경우도 비슷하거든. 성검의 힘을 사용할 때마다 사용자에게 대가를 요구하니까. 결국 성검이나 마검이나 한끗 차이라는 소리지. 네가 이 마검을 다스릴 수 있다면 분명 지금보다는 훨씬 진일보 할 수 있을거다. 다만…다스리는건 커녕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면 결국 이 힘은 너에게 파멸을 가져다 주겠지.” 물론 그런 사항들에 대해서는 나라는 안전 장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리 없는 유정은 입을 꼭 다물고 안색을 딱딱히 굳혔다. 어느새 내뻗은 그녀의 손을 허공에서 멈춰서 있었다. 나는 유정의 반응을 살피며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많은 고민을 했어. 지금 스쿠렙프를 너에게 줄지 말지 정확한 판단이 서지 않아. 하지만 요즘 힘들어하는 너를 보고서 결국 얘기를 꺼내게 되었구나. 그러니 네가 결정해. 이 마검을 잡고 한번 도박을 해볼지, 아니면 지금 이 상태로 좀 더 경험치를 쌓고 도전하든지.” “도…박?” “그래. 지금 네가 스쿠렙프를 잡는 순간 좋든 싫든 예전의 네 모습은 일부 잃어버릴 수 밖에 없을거다. 그래도 좋다면. 그래도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하고 싶다면. 어디 한번 네 마음대로 해봐.” “오빠….” 불안한 얼굴로 나를 부르는 유정이를 보며 나는 빙긋 웃었다. 나는 스쿠렙프를 테이블 위로 올려다 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이것은 내가 결정할 수 없는 문제란다. 지금 당장 선택하라는 소리는 아니야. 정비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그동안 천천히 생각해봐.” 뒤에서 나를 붙잡고 싶어 하는 시선을 느꼈지만, 나는 그대로 문쪽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막 문을 나서기 전, 나는 잠시 고개를 뒤돌아 보았다. “예전에 유정의 활기찬 모습을 보고 싶네. 그런만큼 내일 아침에는 다시 웃으면서 봤으면 좋겠다.” “으응….” 이유정은 테이블에 놓인 스쿠렙프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홀 플레인으로 들어온 이후 처음의 선택. 아마도 많이 불안할 것이다. 나는 안절부절하는 유정에게 조금의 도움을 주기로 하고 한번 더 입을 열었다. “유정이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나는 네 선택을 존중할 거란다. 약속할게.” 나는 이 말을 마치고 그대로 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여관 <조신한 숙녀>의 2층 복도는 완연한 어둠이 내려 앉아 있었다. 나는 계단으로 몸을 옮기며 방금전의 일들을 곱씹었다. 애초에 염두에 두었던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유정을 다시 원위치로 돌아오게 하는것. 그리고 스쿠렙프는 어디까지나 그녀의 선택으로 남겨두는게 나을것 같았다. 집어도 좋고, 안집어도 괜찮다. 과연 유정이 남은 시간동안 어떤 선택을 할지 기대하며 막 계단을 오르려는 찰나였다. 막 계단을 오르려던 나는 한걸음 걸친 그대로 가만히 한쪽 구석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내 예민한 기감은 피해갈 수 없었다. 내가 물끄러미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위는 쥐 죽은듯 조용했다. 한동안 기다려도 나오지 않자 결국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와요.” 묵묵부답(默默不答). 내 말에도 불구하고 고요한 정적이 계단과 복도 사이를 사늘하게 감돌았다. 보기에는 제법 잘 숨은것 같지만 내 3의 눈을 피할수는 없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품에서 연초 한개를 꺼내고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그녀의 입이 있는 곳으로 연초 하나를 들이 밀었다. “…….” 설마 상세한 얼굴 위치마저 파악할 수 있을줄은 몰랐을거다. 내 예상이 맞는듯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조금 꿈틀이더니, 이내 내가 내민 연초 끝을 살짝 무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하하. 처음으로 서평을 받아 보는군요. 음.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신것 같아 감사할 따름 입니다. :) 금요일 밤 입니다. <불금>이라고도 하죠? 평일동안 학업, 그리고 업무에 지치신 몸을 편히 쉬시는 주말을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저 또한 주말에는 연참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주말에 할게 너무 많아요. 엉엉.) 최대한 힘은 내보도록 하겠습니다.(너…너무 기대는 하지 말아주세요. ☞☜) 코멘트는 언제나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볼때마다 항상 <오. 이렇게도 받아 들일 수 있겠구나.> 또는 <이곳이 조금 부족하구나.> 등등 많이 깨닫게 되는것 같습니다. 비록 현재 부족한 부분들이 많을지라도, 언제나 차후 연재하는 내용으로 독자분들이 부족하다고 여기시는 부분들을 채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 『 리리플 』 1. 휘을 : 오호. 이거 아주 놀랍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2연속 1등 코멘트 입니다. 2연속 이루는게 정말 쉬운일이 아닌것 같던데. 혹시 비법이라도 있으신지요. 하하하. 1등 축하 드립니다. 2. GradeRown : 하하. 라이벌 설정을 집어 넣은 이상 어느정도의 갈등은 있을겁니다. 다만 완급은 시킬 생각 입니다. 3. 하네뤼 : 크크. 유정이 너무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이번에 크게 깨달았으니 앞으로 좋은 모습도 종종 보이지 않을까요? :) 4. 사람인생 : 수술은 잘 받으셨는지요. 기다리시는 동안 많이 심심하실것 같아요. 그럴때는 스마트폰으로 소설을 읽으시면서 빈둥거리시는걸 추천 합니다. 하하하. 5. Goksd : 그래서 수현이도 지금 많이 혼란스러워 하고 있죠. 예전의 야성을 잃어버리는것 같아서요. 하지만 실전에 들어가는 순간 180도 바뀌는 수현의 모습을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적어도 <적>으로 규정한 이들에 대해서는 일말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거든요. 6. 쟁반구슬 : 고맙습니다. 세세하게 적느라 전개가 느린감이 있어 항상 죄송할 뿐 입니다. 종종 빠른 진행도 곁들이도록 하겠습니다. :) 7. 천겁혈신천무존 : ㅋㅋㅋㅋㅋㅋㅋㅋ. 항상 읽으면서 느끼는건데 저를 빵빵 터뜨리는 재주가 있으신듯 합니다. 오늘도 여쭈겠습니다. 도대체 <부으햏힣핳흫홓훟헣>이란 어떤 행위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 8. misoochensa : 와우. 요새 노블레스에 재밌는 작품들이 많습니다. 저도 꼭꼭 챙겨 보는 작품들이 있는걸요. 하나씩 읽다 보시면 분명 misoochensa님의 입맛에 맞는 소설들 여러개를 발견하실 수 있을겁니다. 9. dydqlsl : 오호. 정신병자들이라. 어떻게 보면 확실히 일리 있는 말씀인것 같습니다. 하하하. 10. 당룡 : 하하. 인물 성격을 설정하고 들어가기는 했지만, 항상 이럴수도 있고, 저럴수도 있다는 상황을 가정하고 쓰거든요. 21살이면 확실히 보는 시각에 따라 어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도 21살들을 보면 참 귀엽다는 생각이….(퍽퍽!)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34 / 0933 ---------------------------------------------- 한층 더 성숙해지다 “후우.” “후~우.” 나와 고연주는 계단에 나란히 걸터 앉아 동시에 연기를 내뿜었다. 그녀는 연초를 태우는 내내 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나름 진심으로 숨은것 같은데, 내가 가볍게 간파하자 그러는것 같았다. 나 또한 제 3의 눈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1회차 시절의 나였다면 이렇게 쉽게 알아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서로 연초만 뻑뻑 피우고 있다. 고연주는 아무래도 먼저 입을 열 생각이 없는것 같았다. 그렇기에, 나는 재를 한번 털고 슬며시 말문을 열었다. “도대체 그곳에는 왜 숨어 있었던 겁니까?” “그럼 2층에 그렇게 강한 마나 유동이 느껴지는데. 안 올라오고 배겨요?” 내 의문에 고연주는 톡 쏘는 말투로 대답했다. 마나 유동이라면 마력 감지를 말하는건가. 나는 한번 고개를 끄덕인 후 말을 이었다. “아니, 그러면 대충 살피고 가거나 나와 있으면 되지요. 꼭 숨을 필요는 없잖아요.” “쳇.” 이번에는 딱히 할 말이 없었는지, 고연주는 혀를 차는걸로 패배를 시인했다. 그리고 그녀의 반응에 나는 미미한 웃음을 질렀다. 좋아. 이대로 연초를 다 태운 후 특실로 올라가면…. “가만 보면…사용자 김수현은 참 눈치가 없는 사용자인것 같아요.” 오늘 하루는 좋은 마무리다. 라고 생각하려는 찰나, 고연주의 새로운 반격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실소를 흘릴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눈치가 없다. 홀 플레인에서 10년을 굴러 먹은 내가 눈치가 없다. 정말로 말도 안되는 헛소리였다.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소리 없는 미소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고연주는 그게 아닌것 같았다. 그녀는 내 실소를 보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어이 없다는 식의 웃음은 뭐에요. 설마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저 우스울 따름 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본인이 눈치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아무래도 그렇죠. 왠만한 사용자들 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고연주는 뭔가 핀트가 어긋난것 같다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몸을 조금 돌려 내 어깨에 슬쩍 손을 짚고는 진중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이보세요. 사용자 김수현씨. 미안한 말 이지만, 당신 정말로 눈치 없거든요. 여기서 말하는 눈치란 전투나 그외 기타 사항에서 쓰이는 눈치를 말하는게 아니에요. 남성이 여성에 대해 갖고 있는 눈치를 말하고 있답니다. 아시겠어요?” “하하. 그건 안현 녀석이 없는거죠.” 고연주는 내 가벼운 대답에 기가막힌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잠시 세차게 고개를 흔들고는 조금 더 목소리를 높였다. 고연주의 이런 당황하는 얼굴은 처음 보는거라 나름 재미가 있었다. “아니에요! 최소한 그 애송이가 수현씨 보다는 훨씬 눈치가 있어요. 제 말을 믿어요. 그리고 눈치좀 기르세요. 이러다가 정말 큰일날 거에요.” “나참. 큰일은 무슨 큰일 입니까. 그리고 거듭 말씀 드리지만 저 눈치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아….” 고연주는 내 말에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이런식으로 약점을 발견하게 되다니…. 아니, 약점은 아니고 단점인가.” 라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 태운 연초를 탁 튕겼다. 여관 주인이 자기 여관을 소중히 다룰줄 모르는군. 나는 아직 남아 있는 연초를 한모금 더 빨았다. 고연주는 연초를 모두 태웠음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으로 미루어 보아, 나와 조금 더 이야기를 하고 싶은것 같았다. 지금도 내가 이렇게 다 속마음을 짐작하는데 눈치가 없다고? 나는 콧방귀를 끼고는 조금 더 그녀의 말을 기다리기로 했다. 이윽고 나도 연초를 비벼 끌 무렵, 예상대로 고연주의 입술이 살며시 열리는걸 볼 수 있었다. “결국 다녀오셨네요?” 다녀왔다 함은, 유정이를 얘기 하는건가. 확실히 고연주는 내가 나서는것에 반대했다. 그러나, 나는 나의 판단을 우선해 유정을 달랬다. “네. 보셨다시피.” “보고 듣지는 않았어요. 그나저나 그렇게 가지 말라고 말렸는데….” 그녀가 말 끝을 흐리자, 나는 잠시간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이 문제를 질질 끌어봤자 하등 좋을게 없었다. 그녀가 알든 모르든 내 생각을 그대로 말해주는게 더 나을것 같았다. 해서, 나는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네. 그러셨죠. 하지만 가는게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요?”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연주는 내 대답에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만큼 내가 방금전에 내뱉은 말은 수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고연주는 턱을 괸채 전방을 보며 내 말을 곱씹고 있었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음….” 치켜 올린 한쪽 손가락을 볼을 톡톡 두드리며 혼잣말을 하는 고연주. 그리고 아래로 얼굴을 받치고 있는 맵시 있게 쥔 손가락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안력을 돋워 그녀를 자세히 살폈다. 아름답다. 복숭아 빛이 물든 흰 눈 같은 매끈한 살결, 자그마한 홍조가 깃들어 있는 볼. 그녀의 눈썹은 가느다랗고 연하게 그려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앞을 응시하는 동안 비치는 깊게 침잠 되어 있는 눈동자를 보니 빨려 들어갈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연주는 말 그대로 치명적인 매력을 갖고 있었다. “응…?”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는 몇번 눈을 깜빡이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그 탓에 갸름한 얼굴을 덮는 웨이브진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이윽고 나와 그녀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히는 순간, 그녀는 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눈은 아름다운 호선으로 휘어졌고, 예쁜 주홍빛의 입술은 반원을 그리며 서서히 열린다. “왜 그렇게 빤~히 보시는걸까. 반했어요?” “…반할 뻔 했다고 해둘게요.” 고개를 주억이며 순순히 시인하자, 고연주는 별일이라는 얼굴로 말했다. “하. 정말요? 오늘따라 왜 이러세요. 예전에 그렇게 유혹할때는 죽어도 안 넘어오더니.” “글쎄요.” 나는 애매하게 대꾸하며 어설픈 웃음을 흘렸다. 내가 방금 시선을 뺏긴 이유는, 그녀의 모습에게서 한소영을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소영은 고민할때 턱을 괴고, 손가락으로 한쪽 볼을 톡톡 두드리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한소영은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한소영이 떠오르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나를 보던 고연주는 살짝 엉덩이를 들고는 내 쪽으로 다가 오더니, 어깨를 살짝 붙였다. 곧이어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댄 그녀는 나긋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요.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말을 이해 못했을 거라고는 생각 안해요. 다 이유가 있겠죠. 그리고 당신의 행동은 조만간 결과로 나올테니 천천히 지켜보도록 할게요. 다만, 그 문제는 당신이 아닌 그 꼬맹이 한테 달린 일이라는건 변하지 않아요.” “그건 그렇죠. 아무튼 참 고마운 말 이군요.” 고연주 말인즉슨 그당시 내가 했던 부탁이 아직 유효하다는 소리였다.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에 나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혹시라도 그녀가 변심하면 유정의 결의가 말짱 도루묵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 말짱 도루묵 까지는 아니고 조금 퇴색 된다고 해야 하나. 내 말에 고연주는 살살 눈웃음을 치고는 입을 열었다. “맨 입으로요?” “……?” “여관도 빌려주고, 아침도 먹이고, 차도 타다주고, 보고까지 해주고, 이제는 애도 가르쳐 주겠다는데. 이렇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보셨나요.” “아니요. 못본것 같네요. 그런데 당신은 나무가 아니잖아요.” 내가 생각해도 의미없는 태클 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고연주의 눈동자에서 반짝이는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내가 또 말을 실수한 걸까. 온 몸으로 스멀이 올라오는 불안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내 말에 배시시 웃고는 슬쩍 고개를 들이밀었다. 목에서, 그녀의 뜨거운 숨결이 타고 올라온다. “그래요. 저는 나무가 아니죠. 사람, 아니 사용자인 만큼 어느정도 댓가를 받아야 할것 같아요.” “댓가는 추후 지불하기로 한것 아니었나요.” “상호 거래시 계약금은 최소한의 인지상정(人之常情) 입니다. 고객님.” 현재 그녀와 나의 몸은 어깨를 밀착한 상태. 그 상태에서 조금씩 고개를 들고, 얼굴을 밀고 들어옴으로써 거리는 더욱더 줄어들고 있었다. 그렇게 한마디도 지지 않고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속으로 조금씩 긴장감이 들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분간 유정이좀 잘 돌봐주세요. 가능성이 풍부한 사용자 입니다.” “제 발로 찾아 오면요. 그리고 은근히 화제 돌리지도 마요. 꼭 불리하면 얘기를 딴데로 돌리더라. 어허. 왜 벌써 엉덩이를 들어요? 누가 잡아 먹는데요? 아직 내 용건은 끝나지 않았어요. 어디서 은근슬쩍 자리를 피하려고 해요?” “…내일부터 애를 가르칠 교사가 되실분이 이러시면 안되죠.” “어머. 저는 촌지 받는 교사 랍니다.” “재미 없는 농담이군요.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 “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고연주의 얼굴이 빠르게 나를 덮쳐 들었다. Mouth To Mouth를 노리는것 같아, 나는 뒤쪽으로 고개를 빼들었다. 그때였다. 스슷. 스스슷. 마치 내 행동을 예상이라도 한듯, 그녀의 몸은 잔영을 남기며 사라졌다. 한순간의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단 1초~2초의 사이였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제 3의 눈을 발동하면 늦는다. 내 실책을 탓할 시간도 없었다. 결국 내 기감을 믿기로 하고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처음에는 왼쪽.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흡.” 재차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나는 헛바람을 들이키고 말았다. 막 고개를 돌린 동시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내 입술에 느껴지고 있었다. 내가 완전히 돌리는 타이밍을 맞춰 고연주의 얼굴이 나타난 것이다. “…….” 1회차 시절. 한번쯤 맞춰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입술과 내 입술이 맞닿아 있다. 눈 앞에 빙글빙글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고연주는 내 표정을 보고는 이겼다는 얼굴로 입술을 강하게 오므리며 떼었다. 쪼옥. “호호. 드디어 키스 한번 해보네요.” “방금전 어떻게….” 떨떠름한 얼굴로 묻자 고연주는 손가락을 까닥까닥 흔들었다. 그리고, 한층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전에 당신과 한판 붙었을때 파악 했지요. 일단 거리를 줄일 필요가 있었어요. 대응할 시간을 주면 나의 필패일것 같았거든요. 그렇다면 다음은 25% 확률이죠. 위, 아래, 오른쪽, 왼쪽. 왼쪽으로 먼저 갔다가, 바로 오른쪽으로 가서 기다렸죠. 그리고 당신이 고개를 돌리는 동시에 슬쩍 입술만 내밀었구요.” “…하. 고작 키스 한번 하려고 그걸 노리다니. 치밀하네요.” “왜요. 왜 한숨을 쉬어요. 저랑 키스 하니까 별로에요? 기분 나빠요?” 내가 한숨을 쉬자 고연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음성에서 이상한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그순간 예전에 그녀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요. 나 술집 여자였어요.> <사용자 김수현은 이런 저를 어떻게 평가 하시나요?”> <또한 현대에서는 술집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깔봄을 받던 여자가….> <눈동자를 봐요. 눈동자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알 수 있거든요.> “…아니요.” 내 입술에는 아직 그녀의 따뜻한 입술의 감촉이 감도는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흔들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를 내려다보자, 고연주는 나를 보며 눈을 흘기고 있었다. “그러면 좋았어요?” “네. 솔직히 기분은 괜찮네요. 그 유명한 그림자 여왕과 입을 맞추다니.” “호호. 이제 조금 솔직해 지셨네요.” 배시시 미소를 흘리는 고연주를 보며 나는 한걸음 성큼 다가섰다. 그리고, 곧바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멱살을 강하게 쥐었다. “앗.” “참고로 저는 이런거 할 때는 그런 계산은 할 줄 모릅니다.” 내 선언에 고연주의 눈이 동그랗게 변한다. 그리고 나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고, 똑같이 그녀의 옷을 내 쪽으로 끌어 당겼다. “으읍…!” 조금 강하게 부딪치기는 했지만 다시 한번 고혹적인 감각이 입가에 맴돌았다. 고연주의 숨결과 입술에서 옅은 연초향이 풍겼다. 그녀는 처음에는 놀란 얼굴이 되었지만, 이내 스르르 눈을 감으며 내 입맞춤에 호응했다. 이번의 키스는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혀라도 섞을 기세였기 때문에, 나는 이쯤에서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술이 어찌나 촉촉 하던지 10초 남짓 맞닿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입술에 부드럽게 달라 붙어 가지 말라는듯 진득히 달라 붙는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옷깃을 놓아준 후, 옷매무새를 매만져주며 말을 걸었다. “…어때요?” 고연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눈을 뜨고는 전에 없던 차분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이윽고, 그녀는 혀를 내밀어 자신의 입술을 슬쩍 빨아 들였다. 그렇게 입맛을 다신 후 그녀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분명 안솔이나, 이유정 같은 애들이라면 얼굴을 붉히고 발을 동동 굴렀겠죠. 하지만 저는 아니에요. 겨우 이정도로 제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으셨다면 오산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군요.” “그렇군요.” “그래도 뭐. 눈치가 없다는 말은 취소 할게요. 쑥맥이 아니라 능구렁이 였어. 흥.” “하하하.” 나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린 후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이제는 그만 돌아갈 생각 이었다. 다만, 장비 목록을 정리한다는 생각은 더이상 들지 않았다. 그저 침대로 돌아가 쉬거나, 검을 잡고 휘두르고 싶을 뿐. 계단을 올라 문을 열으려는 순간 뒤에서 고연주의 목소리가 날아 들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 스스로 키스 했어요? 내가 당했으니까, 너도 당해보라는 식?” 고연주는 유달리 <스스로>를 강조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만 뒤돌아 본 후,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글쎄요. 어떻게 보면 비슷하네요. 그림자 여왕에게 당하는게 아니라, 직접 입을 맞추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나 봐요.” 내 대답에 그녀는 미묘한 얼굴이 되었다. 나는 굳이, “1회차 시절의 제가요.” 하는 사족은 덧붙이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죄송하지만 오늘 후기 및 리리플은 한번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12:00에 나가야 하는데 지금 12:00네요. 그래도 어떻게든 맞출 수 있어 다행입니다. 오늘도 최대한 자정 연재에 맞출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PS. 오늘 1시간 늦게 업데이트해서 정말 죄송해요. ㅜ.ㅠ 어 그런데 12:01분 이네요. 빨리 나가야겠어요. ㅌㅌ! 0135 / 0933 ---------------------------------------------- 뜻 깊은 마무리 “흐흥. 흐흐흥. 흐흥. 흐흐흥.” 다음날 아침. 일행들은 테이블에 옹기종기 앉아 아침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이런저런 얘기라도 나누면서 떠들겠지만, 오늘따라 다들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고연주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시선들에 아랑곳 않고 고연주는 열심히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흐흐흥. 흐흥. 흐흐흥. 흐흥.” 고연주는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띠운채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왠지 그 이유를 알것도 같아 아무것도 모르는척 시선을 돌렸다. “식사 왔어요~.” 고연주는 보통보다 배는 나긋한 음성으로 말하며 테이블에 음식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만든 맛깔스러운 음식들이 차례대로 나오고 이윽고 테이블에 모두 세팅된 음식을 보자 일행들은 탄성을 질렀다. 그만큼 오늘 고연주가 내놓은 음식들은 평소랑은 완전히 달랐다. 원래 우리들이 먹는 아침 식사는 A코스 요리였다. A코스는 빵, 스프, 스튜등 나름 간소한 식단을 갖춘 코스였다. 나는 아침마다 꼭 A코스를 시켰다. 너무 배가 부르면,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아침 활동에 지장이 있을수도 있기 때문 이었다. 하지만 오늘 음식들은 훨씬 풍성하고 화려했다. 오히려 지금 나온 음식들은 C코스 보다 더한감이 있을 정도였다. 이윽고 따끈한 김이 폴폴 피어오르는 스테이크까지 나오자, 신상용이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고연주에게 말을 걸었다. “사용자 고연주.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것 같습니다.” “어머. 그래요? 흐흥. 흐흐흥.” “이걸 혼자 만드셨다니 대단한데요. 덕분에 오늘은 아침부터 정말 거하게 먹는것 같습니다. 하하.” “호호. 날이면 날마다 오는게 아니랍니다. 특히 남성 사용자들은 이 기회에 많이 드세요. 정력에 좋은것도 듬뿍 넣었답니다. 많이 먹으면 아마 다음에 진도를 더욱 뺄 수 있겠죠?” “험험. 그런 민망한 말씀을…. 그나저나 진도라구요? 그게 무슨….” “흐흠.” 고연주의 넉살 좋은 말에 신상용은 떨떠름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헛기침을 하자, 그녀는 눈을 한번 찡긋 거리곤 남은 의자에 앉았다. 문득 머리속으로 어젯밤 그녀와 나눴던 입맞춤이 떠올랐다. 가장 먼저 기억 나는건 따뜻하고 말랑했던 그녀의 입술 감촉. 나는 입술을 한번 매만진 후 수저를 들었다.(여담으로 내가 가장 먼저 식사를 시작하고 일행들이 다음에 수저를 드는건 결국 고칠 수 없었다.) 막 스프를 한숟갈 떠먹으려눈 순간,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난간을 타고 흘러왔다. 타박…. 타박…. 타박…. 타박…. 유정의 걸음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자세히 들어보면 걸음과 걸음 사이에 한 템포 쉬는 시간이 있고, 예전처럼 땅을 급하게 밟지 않는다. 여유가 생긴 것이다. 생각할 시간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간 뒤 곧바로 스쿠렙프를 잡은것 같았다. 일행들도 발소리를 들었는지 모두의 시선이 계단을 향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계단을 내려오는 사용자는 이유정 이었다. 가장 늦게 나타난 유정은 나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항상 날카롭던 눈이 조금 누그러 들었고, 머리카락에서는 연한 붉은빛이 감도는것 같았다. 나는 그런 유정이를 보며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수는 없다는 마음이 과감한 결정을 내린것 같았다. 슬쩍 고연주로 시선을 돌리자 그녀 또한 의외라는 표정과 함께 눈동자에 이채를 띠고 있었다. 이윽고 우리들이 있는 테이블로 온 유정은, 모두를 한번 둘러본 후 빈자리에 살며시 앉았다. 일행들 또한 조금 달라진 그녀의 분위기를 느꼈는지 다들 낯설은 얼굴로 유정을 보고 있었다. 예전의 유정이 선머슴 말괄량이 같았다면, 지금의 유정은 몽롱하고 은은한 색기를 뿌리는 여성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조금 있다가, 그녀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피던 안솔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 언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 그래. 너도 잘 잤니.” “네에….” 유정은 평온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원래 마검을 잡은 이후 성격이 급하게 변하는 경우는 드물다. 드물다는 소리는 경우에 따라 있기는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유정이도 그렇게 될 싹을 보이고 있었다. 설마 스쿠렙프가 정말로 지금의 이유정을 사용자로 받아 들인걸까…? 안솔은 그녀의 반응에 이상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여성 사용자라면 보통 행동이 맞기는 한데, 그동안 보아온 유정이 저러자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안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멍한 얼굴로 유정을 응시하던 녀석은 이내 억지로 짜낸듯한 목소리로 시비를 걸었다. “허이구. 네가 어쩐일로 이렇게 시간 맞춰 나왔냐. 애도 아니고 꽁해 있어서는. 그래. 이제 기분이 풀렸….” “야.” “어, 어? 왜. 뭐.” 안현의 말을 도중에 끊어버린 유정은 그를 지그시 노려 보았다. 안현 또한 유정의 눈길에 잠시 움찔했다. 평소와 분명 뭔가 다른것 같은데, 뭐가 달라진건지 정확하게 꼬집지 못하고 있는것이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건 예전이라면 당장에 욕이 튀어 나왔을 유정이 말조심을 하게 되었다는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일행들은 모두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윽고 유정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입좀 그만 다물고 밥이나 먹지 그래. 아침부터 사람 기분 잡치게 만들지 말고.” “뭐, 뭐라고?” “오빠. 수저 들었어?” 안현은 당황한 목소리로 반문했지만, 유정은 그런 그를 무시한채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녀의 반응에 쓰게 웃고는 고개를 주억였다. “음. 너도 이만 식사하려무나.” “응. 와. 오늘따라 진수성찬 이다. 맛있겠네. 오빠도 맛있게 먹어.” “그래그래. 자 그럼 다들 식사 하시죠.” 아직도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애들을 보며 선언한 후, 나는 스테이크를 한조각 잘라 입에 넣었다. 쫄깃한 육질이 입 안을 가득 채우는것을 느끼며 나는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아마 둘은 어젯밤 매우 많은 대화를 나눴을것이다. 정말로 설마설마 했었다. 내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본성이 마검인지라 유정이 더 이상하게 변하는건 아닌가하는 걱정도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내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둘의 상성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 맞는것 같았다. 물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변할지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알겠지만, 일단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오빠. 이거 한번 먹어봐.” 내 그릇에 예쁘게 자른 고기를 놓는 유정을 보며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 “헤헤. 배불러. 행복해.” “아침부터 너무 많이 먹은것 같습니다. 스승님.” “괜찮아~괜찮아~.” 비비앙은 살짝 솟아오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행복한 미소를 흘렸다. 아. 괴롭히고 싶, 아니. 어쨌든(?!) 그녀의 옆으로 신상용이 허허 웃으며 차를 한모금 마셨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용자들은 나를 포함해 총 네명이 앉아 있었다. 아침 식사가 끝난 후 일행들은 다들 내가 내린 오더에 따라 행동하지만, 오늘은 조금 미적거리는 인원들이 있었다. 내 마음에 가장 든 사용자는 단연 하연을 첫손으로 꼽을 수 있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하연은 언제나처럼 안솔을 질질 끌고 계단을 올랐다. 그녀 또한 유정의 달라진점을 느꼈겠지만, 긍정적인 변화라 판단한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의문을 갖지 않고 안솔을 데리고 올라갔다. 이성을 앞세우는 하연다운 판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고연주는 일행들이 모두 식사를 끝내자 당연하다는듯 식기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녀가 식기 일부를 들고 주방으로 들어가자,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유정은 자신이 먹었던 식기를 들고 주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사용자들은 모두 놀라 유정을 보며 어버버 거렸지만 나는 그저 태연한 얼굴 이었다. 그 뒤로 유정은 주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고 있었다.(물론 볼려고 하면 볼 수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다만 주방으로 들어가는 유정이의 얼굴을 한번 볼 수 있었는데, 그녀의 눈동자에도 연한 붉은빛이 감돌고 있었다. 예상을 뛰어넘는 빠른 진행이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고연주는 남은 그릇들을 다시 가지러 왔다. 주방을 나온 고연주의 입가에는 전보다 확연히 진해진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몇몇 일행들은 궁금한지 고연주를 잡으려고 했지만, 나는 그때마다 손을 들어 그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이왕 이렇게 됬으니 어디 한번 고연주 마음껏 휘둘러보게 놔둘 작정 이었다. “아우….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건지 모르겠어요. 형. 이유정 갑자기 왜 저래?” 한참 동안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하던 안현은 이내 머리를 벅벅 긁으며 투덜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비비앙은 길게 하품을 하며 대꾸했다. “흐~암. 냠냠. 맛있다. 뭐 어때. 보아하니 좋게 변한것 같은데. 좋은게 좋은거 아니겠니.” “그렇긴 한데…. 아우. 넌 몰라. 난 초창기부터 쟤를 봤는데, 뭐랄까. 이유정이 여자로 느껴진적은 오늘이 처음이었어. 진짜 어색해서 죽을것 같아. 으아아.” 홀짝. 나는 차를 한모금 마시며 그들의 모습을 바라 보았다. 이제 슬슬 자리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유정이가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데, 천년만년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었다. “안현.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을텐데.” 나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안현을 보며 말했다. 그는 내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더니 침을 꿀꺽 삼키며 반문했다. “네 형? 뭐가 시간이 없어요?” “유정이 왜 고연주를 따라 들어갔는지는 알고 있겠지?” “그거야 뭐…. 저번에 형이 부탁하신 그거 때문에 그러겠죠. 그러게 진작에 한다고 하지. 괜히 분위기만 엉망으로 만들고, 지만 아쉬운 소리 하고. 쯧쯧.” 안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하고 있었지만, 말투의 아래에는 기공창술사에 대한 강력한 자부심이 있었다. 자부심을 갖는건 좋지만 도가 지나치면 오만이 되고 오만은 방심이라는 치명적인 마음을 불러온다. 아무래도 안현도 조금 깨워줄 필요가 있을것 같았다. “후후. 어쨌든 중요한건 유정이 저런 행동을 할 정도로 독기를 품었다는 거거든. 고연주는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 있는 사용자고. 그리고, 내가 어젯밤 유정이한테 강력한 무기를 하나 준것도 있어. 너도 열심히 해. 이렇게 여유 부리다가는 곧 따라 잡힌다.” 안현은 처음에는 심드렁한 얼굴 이었지만, 얘기가 지나갈수록 표정이 심각하게 변하고 있었다. 특히 <강력한 무기>라는 단어를 듣자 꽤나 억울하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 보았다. “형. 너무해요. 왜 유정이만 편애해요.” “…뭐? 이놈이 정말. 창이랑 레어 클래스를 먹고 한다는 소리가.” “아. 그러고보니 제가 조금 오버 했네요. 그런데 형이 그렇게 말씀 하시니까 갑자기 불안해요.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고 여겼는데, 더 늘려야 겠어요.” “나쁘지 않지. 적당한 휴식도 필요하지만, 아직 0년차인 만큼 수련은 아무리 해도 부족하지 않아. 마침 기록서라는 좋은 지침서도 있잖아.” “앗차. 해석본 어제 다 봤어요. 마침 잘 됐네요. 비비앙?” “힝.” 안현은 비비앙을 불렀고, 그녀는 바로 울상을 지었다. 아마도 지금 한창 포만감을 느끼는데 방해 받자 심술이 난것 같았다. 안현은 나를 돌아 보았고, 나는 비비앙에게 시선을 던졌다. 내 지긋한 시선에 비비앙은 입을 삐죽 내밀고, 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가 일어서자 신상용도 따라 일어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모두의 찻잔을 주섬주섬 모으며 입을 열었다. “찻잔은 그냥들 놔두세요. 제가 주방으로 가져다 놓겠습니다. 곧 새로운 목표에 대한 회의가 있을 예정 입니다. 정비 기간이기는 해도 다들 너무 풀어지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그럼 오늘 하루도 보람찬 일과들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네 형.” “예, 리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안현과 신상용은 시원하게 대답 했지만, 비비앙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아마 내가 자기를 두고 얘기하는줄 알고 있는것 같았다. 아무튼 그렇게 일행들을 올려 보내고, 나는 찻잔을 들어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흠. 그래도 구색은 갖췄네.” 주방으로 들어선 후, 주변을 둘러보며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고보니 고연주의 주방에는 처음 들어와 보는것 같았다. 그릇들은 아직 설거지도 하지 않은채 쌓여 있었다. 이것들도 대충 그릇들 위에 올리면 알아서 치우겠다 싶어, 막 찻잔을 놓으려는 순간 이었다. 쾅! “끅!” 주방안에는 문 하나가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고연주는 저 방 안에서 생활하는걸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문 안으로 무언가 크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직감적으로 유정이와 고연주가 벌써 수련에 들어갔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안 일어날래. 내가 김수현씨로 보이니? 1초 안에 일어나.” “끄으으…. 하아아아앗!” “그렇게 마구잡이로 휘두르지 말라고 했는데.” 퍽! 쾅! “쿨럭! 우웁, 으웨에엑.” “…….” 고연주의 목소리와, 이유정의 고통에 찬 비명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그리고 이어진 토악질 소리. 누군가 때리고 맞는 소리는 이미 덤 이었다. 가르친다고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 가르칠줄은 몰랐기 때문에 나는 조금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일단 패고 시작한다. 나는 그런 무식한 방법에 침음성을 흘렸다. 그래도 문득, 고연주도 나름대로 열정을 갖고 가르침에 임하고 있는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명색이 <10강>의 사용자 인데 내가 이래라 저래라하는것도 우스웠다. 한순간 많은 고민이 들었지만, 나는 결국 초심을 유지하기로 했다. 나는 잠시 동안 소리가 들려오는 문을 응시하다가, 조용히 찻잔을 놔두고 주방을 나섰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여러분들 모두 즐거운 주말들을 보내고 있으신가요. 오늘 쓰다가 너무 졸려서 잠깐 누웠습니다. 그때가 아마 10시 41분인가 그랬을 겁니다. 그리고 다행히 11시 1분에 깨어날 수 있었습니다. 깜빡하고 잠들뻔 했지만, 어떻게 잘 일어난것 같습니다. 하하하. 항상 느끼는 거지만 몸이 세개, 아니 두개만 되어도 참 좋겠습니다. 그러면 한층 더 여유가 있어질 텐데 말이에요. :) 『 리리플 』 1. 흠흠;; : 오. 1등 축하 드립니다. <;;>가 닉네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습니다. 하하하. 2. obscura : 저도 고연주가 점점 더 좋아지고 있어요. 원래는 한별이 였는데 말이죠. :) 3. 도래 : 다녀 왔습니다! 4. 하네뤼 : 보고 나서 엄청 웃었습니다. 정말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아 정말 수현이 치사 합니다. 여자측에서 제풀에 지쳐 더러워서 뽀뽀 안한다고 하면 어떡하죠. ㅋㅋㅋㅋ. 5. 고장난선풍기 : 오늘 세라프 업데이트 감사 합니다. 저 또한 그림만 봐도 얼마나 세심한 신경을 쓰셨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팬 아트는 항상 감상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6. 새벽칼날 : 그렇습니다. 한별이가 최고 십니다. 7. 천겁혈신천무존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8. 인페르니우스 : 수현이 고자 아니에요. ㅋㅋㅋㅋ. 저번에 인증 했는데 왜 또 다시 고자설이 불거지나요. ㅋㅋㅋㅋ 9. 트릭스타 : 오호. 그것도 재미 있을것 같네요. 한별의 처우는 아마 독자님들 손에 달릴 겁니다.(?!) 10. zjekfksqlc : 하하. 조금만 기다려 주십쇼. 저도 얼른 한별이를 만나고 싶습니다. 보고싶어 한별아. ㅜ.ㅠ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36 / 0933 ---------------------------------------------- 뜻 깊은 마무리 점심이 되어도 유정은 나타나지 않았다. 가끔식 1층에서 쿵쿵거리는 소음만 날 뿐 이었다. 도대체 안에서 어떤 훈련을 하는지 알고 싶었지만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고연주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건 점심즈음 이었다. 그녀는 그동안 하던일을 유지 하면서 유정을 가르칠 생각인것 같았다. 다만 더이상 식사를 같이 하지는 않았다. 안현의 식사 권유에 그녀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꼬맹이도 굶기고 있거든. 그러니까 나도 먹을 생각 없어.” 나는 유정을 고연주에게 일임(一任)했다고 선언했다. 그 문제는 고연주에게 모두 맡긴다는 소리였다. 일행들 또한 무지 궁금해 하는것 같았지만, 내가 가만히 있고 그냥 기다리라는 말에 따로 묻지는 않았다. 고연주는 상큼한 미소로 내게 화답한 다음 바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결국 저녁이 되어도 유정은 나오지 않았다. 이유정이 고연주의 방을 나온건 <조신한 숙녀>에 어둑한 땅거미가 내릴즈음 이었다. 아래층에서 왕왕이는 소란이 나 내려가보니 안현, 안솔, 비비앙 세명이 한명을 둘러싸고 있는게 보였다. 가까이 다가서자 안솔은 지팡이를 든 채 치료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바닥에 털썩 쓰러져있는 유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유정의 몰골은 매우 처참했다. 피를 흘리지 않은게 이상하다고 해야할 정도였다. 당장에 보이는 곳만 해도 울긋불긋한 멍이 가득 들어 있었고, 몸과 옷은 흠뻑 젖어 달라 붙어 있었다. 땀으로는 저렇게 젖는게 힘드니 아무래도 몇번 물을 끼얹은것 같았다. 그말인즉슨 훈련을 받다가 기절을 했다는 소리였다. 애들은 이러다 죽겠다, 너무 심하다는둥 연신 걱정 섞인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나는 그저 치료 후 방으로 데려가라는 대답으로 모든 말들을 일축했다. 한번쯤 이런 경험을 하는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고연주의 의도도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나와 그녀가 애들을 가르치는 태도는 거의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다. 홀 플레인을 감안하더라도 둘 다 정상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아무튼 굳이 이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연주는 스스로 악역을 자처했다. 단순한 기술 지도가 아니라 아예 정신머리까지 싹 뜯어 고치겠다는것 같았다. 정말로 필요한걸 해주는 고연주한테 고마운 마음이 들었고,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허나 나를 더욱 놀라게 만든 사용자는 이유정 이었다. 안솔이 치료를 난사 수준으로 사용하자 기절했던 그녀의 눈이 반짝 떠지는게 보였다. 그녀가 눈을 뜨자마자 내뱉은 첫마디는 “배고파.” 였다. 그 말에 벙찐 안현은 허둥지둥 1층으로 음식을 가지러 내려갔고, 유정은 끙끙대며 일어나더니 퉁퉁 부은 얼굴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괜찮냐고 물어보지 않았고, 유정이는 힘들다고 징징거리지 않았다. 그저 남은건 피로함과 독기가 섞인 표정일 뿐. 어기적대며 걷는 걸음이 안쓰러웠는지 안솔이 옆에서 부축했다. “언니이. 몸은 괜찮으세요오.” “넌 이게 괜찮아 보이니.” “아니요오….” “하…. 앞으로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너. 언제 어디서든 대기 하고 있어. 나 죽지 않게 치료 주문도 걸어주고.” 유정은 손가락으로 안솔의 이마를 가볍게 튕기고는 더이상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몸을 돌렸다. 죽음에 대한 각오와 인식. 기대 이상의 대답 이었다. 이렇게 고연주의 일행 합류에 대한 진통도 일단락 짓고, 캐러밴은 다시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 또한 가만히 있었던건 아니었다. 지금 해결 되지 않는 문제들을 붙잡고 있을 수 없는 노릇 이니, 다른 일들에 더욱 신경을 쓸 필요가 있었다. 나에게 수련은 일상 생활이나 다름 없었다. 정신을 잃을 정도나 불가피한 일이 아니면 하루에 꼭 한번은 명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 내 신체 능력치는 이미 극한에 다다렀다고 볼 수 있었다. 수련으로는 더이상 올리기 힘든 경지. 아주 불가능 하지는 않겠지만 1포인트를 올리려면 도대체 어느정도의 시간을 투자할지는 감이 잡히지 않을 지경 이었다. 나는 남은 능력 상승 포인트나 능력치 포인트를 두고 매일을 고민했다. 특히 능력치에 대한 고민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체력에 몰아서 지금의 실력을 안정적으로 유지 하던가, 아니면 다른 능력치들을 101로 만들어서 한층 더 높은 경지를 바라보던가. 앞으로 이렇게 능력치 포인트를 또 얻을수는 있겠지만, 그것들은 모두 합해도 3, 4포인트가 고작일 것이다. 그래서 한층 더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언제 어느 상황에서 어떤 능력치가 필요할지 모르니 그때를 대비해 아껴두기로 했다. 지금은 현재 능력치만으로도 차고 넘치는 정도니까. 탐험쪽으로 얘기를 돌리면 <절규의 동굴>로 가는 길은 다시 되새김질 하는데 그쳤다. 혹시 몰라 다른 기록들 또한 탐독하긴 했지만 또 발견하는건 요원한 일 이었다. 아무리 홀 플레인이 변수가 많다고 해도 10년이 가도록 밝혀지지 않은곳을 발굴하는건 현실성이 없었다. 해서, 나는 이 문제들을 깨끗이 접기로 했다. 시간은 점점 흘러만가고, 당장에는 <절규의 동굴> 하나만 해도 충분했기 때문 이었다. 그리고 조금 고민했던 장비에 관한 문제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나는 기어코 사용자 상점을 이용해 1000골드를 더 인출했다. 이로써 현재 캐러밴 보유 자금은 2300골드를 상회하고 있었다. 다만 클랜 신청에 들어가는 돈은 남겨야 했기 때문에 전부 쓸 수는 없었다. 다만 고연주한테 어느정도 보여줄 정도의 자금은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이번에 단단히 작정하고 유정이를 타겟으로 잡았다. 엄밀히 말하면 현재 유정이 가진 방어구가 가장 빈약하다. 지금껏 안현에 투자한만큼 이번에는 유정이에게 대거 투자할 생각 이었다. 한번 흐름을 타고 성장할때 확실하게 밀어줄 생각 이었다. 더구나 유정이는 근접 계열인 만큼 장갑이 튼튼해야 하지만 클래스 특성상 활동성을 제한 받지 않을 아이러니함도 있었다. 유정이는 근접형 딜러. 단검을 든 이상 몬스터에가 가까이 다가가는건 필연적인 일이고, 게다가 용병인만큼 난전 전투술을 특화 시킬 필요가 있었다. 나는 일단 유정이 기존에 입고 있던 장비는 모두 벗겼다. 그리고 상의를 먼저 샀는데 옅은 베이지색 셔츠를 하나 사 입혔다. 이 셔츠는 추후에 산, 아니 지금껏 구매한 모든 장비들을 포함 하더라도 가장 비쌌값을 자랑했다. 한벌에 금화만 520골드를 주었다. 뮬의 광장에서 초보 사용자한테서 구했는데, 같이 다니던 일행이 사망한걸 벗겨온것 같았다. 같이 다니는 캐러밴이 전멸했고 한창 새로 캐러밴을 구하는 중인것 같았다. 나는 판매자의 정보를 확인하고는 영입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왜 다른 캐러밴에서 받아주지 않는지 알만한 능력치였다. 가진 돈도 없으니 장비를 팔아 자금을 마련하는것 같았는데 그걸 보는순간 덜컥 사버리고 말았다. 500골드가 넘지만 그이상의 돈값을 하는 셔츠였다. 방어구의 마법을 상승시키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바로 물약을 바르는 방법과, 마법 효과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었다. 마법 같은 경우에는 영구 주문이 걸려야 하기 때문에 값이 더욱 비쌌으며, 효율도 훨씬 좋았다. 그런면에서 보면 이번에 구매한 셔츠는 물리 방어에 대한 마법 효과를 갖고 있었다. 오우거의 힘줄을 마법 처리를 이용해 실로 뽑아냈고, 그 실로 지어낸 옷이라 매우 질겼다. 또한 물리 방어 상승을 마법, 물약 처리를 전부 해놔 어지간한 공격에는 베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미약하지만 전계열 마법 방어 효과도 있다고 초보 사용자는 설명했다. 그 말에 제 3의 눈으로 살펴본 결과 확실히 효과가 있기는 있었다. 다만 효과가 너무 미약할 뿐 이었다. 추가로 사용자의 마나 활성을 도와주는 기능은 기본 옵션 이었고, 몸을 조금 가볍게 만들어 주는 효능도 있었다. 거기다 다시 한번 값비싼 물약 처리로 신축성을 굉장히 높였다. 방어력과 활동성을 중시하는 유정에게는 안성맞춤인 장비라고 할 수 있었다. 거기다 마무리로 자동 복원 기능까지 있으니 초보 사용자가 입기에는 매우 과분한 장비라고 할 수 있었다. 지닌 금화의 거의 1/4를 지출했지만, 이정도의 장비는 최소한 700골드 이상을 줘야 구할 수 있기 때문에 냉큼 구매하고 말았다. 그 외의 장비들은 위의 셔츠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지금껏 입었던 어느 장비 보다도 훨씬 좋은것들 이었다. 상의와 맞춘 가죽 바지 하나(물리 방어 물약 + 신축성 물약.). 가죽 롱 부츠 한켤레. 가죽 자켓 한벌(물리 방어 물약 + 신축성 물약.). 단검을 걸 수 있는 여성 벨트 하나. 그리고 나는 고연주 요청으로 유정의 무기 하나를 변경하기로 했다. 유정이는 원래 쌍단검을 사용 했는데 이제부터는 하나는 스쿠렙프를,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곡도 형태를 지닌 단도로 바꾸기로 했다. 원래 사용하던건 카타나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도신의 폭을 좁게 만들고 길이를 아주 조금 더 늘려달라고 했다. 장검이라 부르기는 애매하고 그렇다고 단검이라고 부를수도 없는 아주 어중간한 길이를 지닌 곡도였다. 본격적인 이도류를 가르치려는것 같아 나는 군말없이 새로 주문 제작 했다. 그리고 추가로 절삭력을 높이는 마법 처리도 부탁했다. 이 장비도 원래는 300골드 이상을 줘야 하지만 기존에 갖고 있던 링메일과 단검 2개를 주는걸로 대신해 207골드에 협상을 할 수 있었다. 유정이 한명한테 금화를 1000골드 가깝게 썼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아직 더 인출할 수 있는 여력이 남아 있었고, <절규의 동굴>에서도 곧 수익을 올릴 예정이었다. 그리고 뮬을 떠난 후 일반 도시 혹은 대도시로만 진출해도 아직 남은 던전들을 털면 1000골드 정도는 메꾸고도 남을것이다. 모든 장비의 구매를 마친 날도 유정이는 밤 늦게 수련을 끝냈다. 솔이에게 치료 주문을 받은 후, 비척이며 걸어오는걸 잡아 내 방으로 데려왔다. 사온 장비들을 하나씩 꺼내 입히자,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연한 붉은빛이 감도는 그녀의 머리카락과 조금 타이트하지만 딱 붙는 장비들은 너무나 잘 어울렸다. 옷이 날개라고 마치 중견 사용자로 보일 정도였다. 벨트에 단검 두개를 걸고 거울을 보던 유정은 이윽고 서글픈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표정을 보는 순간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전에 장비를 사줬을때 뛸듯이 기뻐하던 때랑은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자, 유정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빠.” “응.” “나 한번만 안아주면 안돼?” “…이리와.” 한순간 많은 생각이 교차했지만 나는 말 없이 그녀를 안아 주었다. 내 품에 폭 안긴 유정은 조금은 안도한 얼굴로 얼굴을 부비다가, 이내 스스로 내 품에서 떨어졌다. 얼굴에는 많은 미련이 남은것 같았지만 억지로 참고 있는것 같았다. 유정은 이내 “오빠. 장비 고마워. 나 정말 열심히 할게.” 라고 한마디 하고는 훌쩍 방을 나가버렸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고연주는 내가 유정의 장비를 중점으로 구매하고 있는 사실을 그녀에게 말한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내가 투자를 하는 이유가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라고, 다음 탐험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지 못하면 앞으로 너는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말을 했던 모양이다. 노력만 한다면 버릴 생각은 없지만, 나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 실력이 떨어지는 사용자는 도태되는게 홀 플레인의 현실 이었고, 그날 이후 유정이 한층 더 수련에 박차를 가한다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안현은 내가 유정의 물품을 구매하는것을 보고도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녀석 또한 장갑이 조금 부족하긴 했지만, 기공창술사의 체술을 익히고 있는만큼 갑주는 당분간 보류할 생각 이었다. 그리고 감소의 장갑(Reduction Of Glove) 하나만 해도 지금껏 유정이에게 투자한것과 거의 맞먹을 것이다. 폐허의 연구소에 있을때 가장 보상을 받지 못한게 유정이었는데, 이걸로 어느정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 외의 일이라면 나는 간간이 비비앙에게 신상용의 근황을 물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비비앙은 대답을 보류했다. 사람이 좋기는 한데 아직 더 지켜봐야 겠다는 뜻 이었다. 아마도 일전에 작성한 계약서가 힘을 발휘한것 같았다. 내가 레어 클래스에 대해 가지는 가치를 인식한듯, 그녀는 그 어느때보다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애들의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고, 일행들 또한 날이 갈수록 안정되는걸 볼 수 있었다. 안현은 초심으로 돌아가 묵묵히 수련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가 한 경고를 단박에 알아 들은것 같았다. 안솔은 더이상 질질 끌려가지 않았다. 신상용과 하연은 둘 다 잘 하고 있었다. 특히 하연은 조금 쉬라고 말할 정도였으나, 내가 쉬면 따라 쉰다는 말로 내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처음에 내가 하나하나 이끌어줄때와는 달리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캐러밴을 보며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점점 내가 추구하는 클랜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번에 <절규의 동굴>을 탐험한 이후 고연주의 영입이 확실해지면 첫단추는 완벽히 꿰매게 될 것이다. 부디 그녀가 우리 클랜에 들어오기를 바라며 나는 천천히 침대로 몸을 들였다. 어느새 날이 점점 밝아지는게 아침이 오는것 같았다. 그래도 1시간은 잘 수 있겠다는 생각에 나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네. 이제 슬슬 다시 뮬을 떠날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마 이번 챕터가 마무리 되면 <절규의 동굴>로 갈 예정입니다. 하하. 오늘은 일요일 이네요. 한주를 마무리하는 시간 입니다. 내일이 월요일이라 우울하신 분들도 있겠지만, 다들 크게 힘내시기를 바랍니다. :) PS. 전개 속도를 조금 빠르게 해봤는데, 이정도 속도면 괜찮으신가요? 『 리리플 』 1. 레필 : 1등 축하 드립니다. 재밌게 보고 가셨다니 다행입니다. 부디 이번회도 즐겁게 감상해 주세요. :) 2. 싸울아비헌터T : 하하. 싸울아비헌터T님의 다음 코멘트를 항상 오매불망 기다리겠습니다. 부디 일이 잘 마무리 되셨으면 좋겠습니다.(__) 3. 프리테즈 : 네. 정신머리좀 싹 뜯어 고치겠다 이거죠. 유정에게는 꼭 필요한 작업 이었습니다. :) 4. masdf : 네에에에에에에에. 고맙습니다. 히히. :) 5. 전설이란이름하에 : 하하. 라이벌 구도가 과열되서 일어난 현상 입니다. 수현이가 있는만큼 서로 뒤통수를 치는 일은 없을겁니다. 6. Juary : 하하. 홀 플레인의 사용자로서 개념이 아직 없는것은 맞습니다. 아직 들어온지 1년도 채 안된 애들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요. 조금 더 함께 하다 보면 정신이 성숙해 질테니까요. 7. 고장난선풍기 : 하, 한별이도 좋은 아이 입니다. 나중에 한별이 나오면 갈아 타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한별이를 좋은 이미지로…. 쿨럭쿨럭. 8. 착한몸매 : 하하. 조금 높여 봤는데 어떠신지요. 슬슬 높일때라고는 여기고 있었습니다. 쿠폰 감사 합니다.(__) 9. Goksd : 정답 입니다. 어느정도 구색 맞추기가 끝났으니 이제는 다시 전진할 일만 남았습니다. :) 10. 쟁반구슬 : 으엌ㅋㅋㅋㅋ. < 고생하고 있는건 아닌지...흑>. 을 보고 빵 터졌습니다. 한별이도 아주 기뻐할 겁니다. ㅋㅋㅋㅋ. 11. hohokoya1 : 하하. 감사합니다. 과연 용병왕은 레어 일까요, 시크릿 일까요? 독자분들의 상상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유정이 용병왕이 되는건 아~주 머나먼 일이니까요. 하하하하. 12. Toranoanal : 아. 항상 염두에는 두는데 까먹는것 같습니다. 어렸을때 부터 무의식적으로 써온터라 쉽게 고쳐지지 않네요. ㅜ.ㅠ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37 / 0933 ---------------------------------------------- 뜻 깊은 마무리 비슷한 일상들이 반복되는 하루. 정비(整備)는 단순한 휴식만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다. 말 그대로 흐트러진 체계를 정리하여 제대로 갖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일행들 전원은 정비를 착실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슬쩍 들려오는 인기척에 눈을 뜨자 침대를 감도는 사늘한 새벽 공기가 느껴졌다. 차가운 공기를 한번 들이마시자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기분 이었다. 반사적으로 테이블 위를 보자, 여느때와 같이 김을 풍기는 차 한잔과 서류 몇장이 보였다. 나는 단번에 몸을 일으켰다. “읏차.” 딱딱히 굳은 몸을 마력을 돌려 살살 풀어주고, 가볍게 뒤틀었다. 우두둑, 뚜둑. 리드미컬한 뼛소리가 툭툭 터져나온다. 잠시 그 시원하면서도 아픈 짜릿함에 몸을 떨다가, 성큼성큼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리고 먼저 새하얀 김을 모락모락 피어내는 찻잔을 집어 들었다. “킥.” 찻잔의 내용물을 보자 절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찻물의 색이 아주 시꺼먼 검정색 이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기껏 차를 타다 줬는데 독이 들어있는지 의심해서 이러는것 같았다. 설마 그때의 앙금을 아직도 갖고 있을 줄이야. 실소를 흘리며 차를 한모금 넘기자 청량한 쾌감이 목 안을 타고 들어왔다. 머리가 한결 맑아지는 동시에 몸이 개운해지는걸 느끼며, 나는 테이블 옆의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좋은 라빈(LaBin) 차 입니다. 잘 끓였어요.” “…흥. 라클(Rekl)도 넣은 귀한 차에요. 이번에도 또 그러면 앞으로 정말 안 타다주려고 했는데, 반성 좀 하셨나 보네요.” 나긋한 음성이 방 안을 울리고, 테이블 옆에서 잔영 하나가 흘러 들었다. 이윽고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고연주를 보며 나는 담담히 대꾸했다. “그래요. 항상 놓고 나가시던 분이 오늘은 어째서 남아 있으신 건가요.” “조금 급해서요. 일단 앞에 놓인 기록을 읽어보세요.” 후룩. 나는 기록을 들면서도 차를 한모금 들이켰다. 맛이 아주 훌륭했기 때문 이었다. 내가 차를 마음에 들어하는걸 알았는지 고연주는 입가에 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행동거지만 조금 더 조신하게 하면 정말 최고의 신부일텐데.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고, 밥도 잘하고, 그일도 잘할것만 같은…아니, 아무튼 나는 기록을 눈 앞으로 들었다. 『…해서, 황금 사자 클랜의 행보가 본격화 되었음. 참가한 클랜으로는 크게 황금 사자 클랜과 서쪽 일반 도시 헤일로의 대표 클랜 SSUN이라고 함.(그 외 산하 클랜들 포함.) 당일 새벽 실력 있는 사용자를 구성으로한 12개의 정찰 수색조의 출발 확인. 특히 이번에 시크릿 클래스 보석 마법사(Jewel Mage)의 출현을 알림으로 사기를 한층 더 끌어 올렸음. 특히 이부분에서 황금 사자 클랜의 정보 통제력을 주목할 수 있음. 산하 연합 클랜원들은 다들 축하하는 분위기지만, 그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았음. 그 반응들로 미루어 보아 사전에 알고 있었던게 아닌가 추측함. 반대로 유로키아 산맥에 자리를 잡은 부랑자들은 새로운 시크릿 클래스의 출현으로 심하게 동요를….』 “으음.” 기록을 읽는 내 눈이 점점 가늘어지는게 느껴졌다. 빌어먹을 황금 사자 놈들. 김한별을 이런식으로 이용해 먹겠다 이건가. 이러면 나중에 김한별을 데리고 올때 고운 소리가 나오지 않을것임은 자명한 일 이었다. 물론 내가 그녀를 받을지도, 그녀가 우리 클랜에 올지도 아직 모르는 일 이다. 나중에 황금 사자 클랜이 망하고 바바라를 들렀을 때 한번 만날 생각은 있었는데, 일이 조금 꼬이고 말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기록을 접었다. 대충 때가 온것 같았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뭐가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가요?” 급작스럽게 옆에서 불쑥 끼어드는 고연주를 보며, 나는 한가지 질문을 던졌다. “사용자 고연주. 혹시 앞으로 우리 일행에 이 보석 마법사가 들어 온다면 어떨까요?” “좋겠죠. 그런데 김칫국은 마시지 않는게 좋을것 같아요.” 명료히 대답하는 그녀의 말에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그럼 레어 클래스는 어떨까요.” 라고 다시 묻고 싶었지만 말장난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그녀에게 한가지 부탁을 더 했다. “오늘 중대 발표를 할 예정 입니다. 전원 시간에 늦지 않게 아침 식사에 참여하도록 전해주세요.” “오. 그러면 조만간 나가시는 건가요?” 반색하며 되묻는 고연주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걸로 화답했다. “그렇죠.” “이야. 신난다. 그럼 로비에서 뵈요.” 고연주는 정말로 신나는 얼굴로 내 방을 훌쩍 나가 버렸다. <그럼 오빠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가요?> 문득 그 차갑도 도도한 얼굴이 떠오른다. 0년차 사용자 치고 당돌했던 여성 사용자. 아마 지금쯤이면 황금 사자 클랜에서 엄청 고생하고 있을것이다. 한동안 그녀의 기억을 되새김질 하다가, 차를 들어 쭉 들이켰다. 달착지근 하면서도 살짝 쌉싸름한 라빈차를 모두 마신 후, 나는 훌렁훌렁 옷을 벗었다. 일단은 씻고 싶었다. * “우와아. 언니이. 너무 멋져요오.” “예쁜게 아니라?” “예쁘기도 하지만 멋져요오. 와아….” 고연주에게 미리 언질을 받았는지, 이유정은 내가 새로 구매한 장비를 모두 입고 내려왔다. 확실히 가죽 셋트는 돈 값을 했다. 홀 플레인 에서는 실용성을 우선으로 치지만, 그래도 외관에 신경을 아주 안쓰는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외양도 예쁘면서 성능이 좋은 장비란 찾기 힘든게 사실 이었다. “오빠아. 유정이 언니 어때? 예쁘지? 응?” “어, 어? 헤, 헤헹. 옷이 날개라는 말도 있잖아. 딱 그 꼴이네.” 안현은 처음 보는 유정의 여성스러운 모습에 넋을 잃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유정의 가슴으로 모아져 있었다. 타이트하게 입은 셔츠가 그녀의 봉긋한 가슴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 시선을 뺐겼다가 안솔이 부르는 소리에 안현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혹시 안현은 여성을 볼 때 가슴을 기준으로 고르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안현은 힐끔힐끔 가슴을 쳐다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눈치챈 유정은 입가에 진한 미소를 그렸다. 예전 같았으면 변태, 치한, 저질이라고 욕을 했을텐데, 고연주에게 배우는 이후로 확실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비비앙은?” “곧 내려 오실 거에요오.” “그렇구나. 아응…. 자켓은 그냥 놔두고 올걸. 괜히 차려 입었나? 조금 덥다.” 유정이는 일부러 기지개를 크게 피며 상체에 솟아오른 가슴을 보여준 다음 자켓을 벗어 의자에 걸었다. 그리고, 가슴 아래로 팔짱을 끼고 슬쩍 테이블에 팔꿈치를 걸쳤다. 조금 미묘했지만, 나는 유정이 크기 조절 기능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주 조금이지만 옷이 전체적으로 줄어든게 보였기 때문이다. 안그래도 타이트한 옷인데. 그탓에 그녀의 가슴은 한층 부각 되었고, 셔츠의 단추 사이가 더욱 벌어졌다. “후. 덥다. 도대체 왜 이렇게 더울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유정은 고혹적인 미소를 흘리며 위에 단추 하나를 톡 풀렀다. 그녀의 윗가슴골이 그대로 드러나버리자, 비로소 안현과 신상용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발갛게 달아오르고, 연신 헛기침을 연발하면서. 그 모습들을 보면서, 이유정은 피식 웃었다. “에휴. 그래도 남자라고.” “호호.” 고연주는 기분 좋은 미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가르친 보람이 있다는듯, 자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순간 만큼은 도대체 뭘 가르쳤냐고 그녀의 목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비비앙이 내려오는 동안, 나는 애들을 중점으로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가장 중요한건 애들인 만큼 그동안의 성장세라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이름(Name) : 안현(0년차) 클래스(Class) : 기공창술사(Rare Energy SpearMan Runner) 성향 : 우호 · 온건(Amity · Moderation) (잔여 능력치 포인트가 4 포인트 남았습니다.) [근력 62] [내구 60] [민첩 75] [체력 63] [마력 59] [행운 61] < 특수 능력(1/1) > 1. 창술의 달인(Rank : C Zero) < 잠재 능력(1/4) > 1. 호신강기(Rank : E Plus) < 최근 능력치 비교 > 전 : [근력 61] [내구 58] [민첩 74] [체력 63] [마력 58] [행운 61] 후 : [근력 62] [내구 60] [민첩 75] [체력 63] [마력 59] [행운 61] *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이름(Name) : 이유정(0년차) 클래스(Class) : 용병(Normal Mercenary Runner) 성향 : 중용 · 욕망(True · Desire) (잔여 능력치 포인트가 4 포인트 남았습니다.) [근력 57] [내구 58] [민첩 76] [체력 55] [마력 70] [행운 53] < 특수 능력(1/1) > 1. 피에 젖은 마음(Rank : D Minus) 『피에 젖은 마음. 피로 물든 마음은 시시때때로 자의와 상관 없는 살의와 욕망을 불러 일으킨다. 어떨 때는 차갑게 굳어버리지만, 또 어떨 때는 활화산처럼 미친듯이 불타오르는 종 잡을 수 없는 마음. 다만, 그 마음은 <죽이고 싶다.>는 근원에서 비롯 된다. 오감 방해와 시야 차단을 쫓는 효과를 지니지만, 지닌 랭크가 높지 못해 그 효과는 미약한 수준에 불과하다.』 < 최근 능력치 비교 > 전 : [근력 48] [내구 52] [민첩 64] [체력 50] [마력 68] [행운 56] 후 : [근력 57] [내구 58] [민첩 76] [체력 55] [마력 70] [행운 53] *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이름(Name) : 안솔(0년차) 클래스(Class) : 사제(Normal Priest Runner) 성향 : 질서 · 선(Lawful · Good) (잔여 능력치 포인트가 4 포인트 남았습니다.) [근력 21] [내구 22] [민첩 24] [체력 31] [마력 87(+1)] [행운 100] < 최근 능력 & 능력치 비교 > 전 : [근력 20] [내구 22] [민첩 24] [체력 30] [마력 86(+1)] [행운 100] 후 : [근력 21] [내구 22] [민첩 24] [체력 31] [마력 87(+1)] [행운 100] 애들의 성장 정도를 보자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안현은 확실히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오르고 있었다. 근력, 내구, 민첩, 마력이 고르게 오른것으로 보아 모든 부분을 염두에 두고 착실하게 수련하고 있는 모양 이었다. 민첩은 조금 올리기 어렵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기공창술사 체술을 익히고 있는 영향이 들어간것 같았다. 유정의 정보는 막 뮬을 들어왔을때를 기준으로 잡았다. 하지만 그런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녀의 성장은 확실히 주목할만 했다. 근력, 내구, 체력은 안현에 비해 부족해도 민첩과 마력이 70을 넘었다. 특히 근접 계열로서 마력이 70 포인트가 넘었다는것과 특수 능력 <피에 젖은 마음>이 개화 되었다는건 확실히 고무적인 일 이었다. 특수 능력은 지금은 D- 랭크지만 B랭크 이상만 올려도 꽤나 쓸만한 능력 이었다. 특화 능력치들만 본다면 이들을 절대 0년차 사용자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만 유정이에게 보이는 행운의 감소와 성향이 바뀐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아마 둘 모두 마검 스쿠렙프의 사용자가 됨으로써 벌어진 일인것 같았다. 중용과 욕망(True And Desire). 중용은 그렇게 나쁘다고만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다른 하나인데, 욕망을 잘 조절해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해서, 일단은 두고보기로 결정했다. 나는 다음으로 안솔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안솔은 셋 중에서 가장 떨어지는 성장을 보였다. 그렇다고, 그녀가 절대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반지로 인해 +1 보정을 받기는 했지만 지금 그녀의 마력 능력치는 하연과 동등한 수준 이었다. 신체 능력치가 많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마법사, 사제들이 80에 오른 마력 능력치를 1 포인트라도 올리는데 엄청난 노력을 투자하는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애들의 능력치를 평가하고 있자, 콩콩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비비앙이 내려온 모양 이었다. 그녀는 헐레벌떡 테이블로 달려오더니,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미안미안. 조금 늦었네. 그런데 아침은?”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지금 가지고 올게요. 미리 내오면 식거든요.” “와와.” 비비앙이 좋아하자 고연주는 싱긋 웃고는 몸을 일으켰다. 나에게 슬쩍 눈짓을 주고 주방으로 가는 그녀를 보며, 나는 차분히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 “수현.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한번 헛기침을 하자, 일행들이 시선이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모였다. 눈치 빠른 하연은 재빨리 멍석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한번 고개를 주억인 후, 모두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슬슬 정비를 마무리 지을 시간이 온것 같습니다.” “…….” 아직까지는 다들 그렇구나 하는 표정들 이었다. 원래는 2달 하고 절반 정도 지나고 나가려고 했지만, 그 시기를 조금 앞당기는게 나을것 같았다. 이왕 탐험 보고 처리와 클랜 창설이 조금 미뤄진 만큼, 차라리 돌아와서 정비를 갖고 뮬을 떠난 후 바로 행동을 개시하는게 나을것이다. 내 말을 기다리는 일행들을 보며, 나지막히 말을 이었다. “황금 사자 클랜이 드디어 본격적인 행보에 들어섰다는 정보를 받았습니다.” 이번의 선언에는, 일행들이 제각각 다른 표정들을 지었다. 하연과 신상용은 얼굴이 굳었고, 애들은 여전히 편안한 얼굴 이었다. 그냥 다음 탐험을 나간다고만 아는것 같았다. 그리고 비비앙은…주방을 돌아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고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전에 한가지 정보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번에 황금 사자 클랜에서 새로운 시크릿 클래스가 출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용자는 저도, 애들도 너무나 잘 아는 사용자 입니다.” “형. 누군데요?” 안현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잠시 유정의 얼굴을 보고는 곧바로 말했다. “너희들도 아는 사용자라고 했잖아. 누군지 한번 생각해봐.” “엥. 우리들도 아는 사용자라면…. 모르겠는데요.” “저두요. 오라버니. 도대체 누구에요?” 남매의 물음에 막 대답하려는 찰나였다. 안현이 머리를 긁적이는 사이, 사늘한 목소리가 귓가로 날아 들었다. “김한별 이구나.” 대답한 사람은 안현이 아니었다. 나는 소리가 들린곳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네. 다시 새로운 한주, 월요일의 시작 입니다. 가슴이 두근두근 벌써부터 설레이네요.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때 편도선이 조금 부은것 같았는데, 지금은 많이 괜찮네요. 아직 제 몸이 팔팔하기는 한것 같습니다. 하하하. 비록 새로운 월요일의 시작에 우울하신 분들도, 힘드신 분들도 계시겠지만.(그 마음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다들 힘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 소설을 읽으시면서 잠시나마 우울함을 달래실 수 있다면 정말 기쁠것 같네요. 네. 이번 챕터만 마무리 되면 바로 <절규의 동굴>로 나갈 예정 입니다. 그리고 <절규의 동굴>은 그렇게 오래 끌 생각은 없습니다.(물론 짚고 넘어갈 부분은 있지만, 가는데 10일이 걸립니다. 그 10일 동안을 전부 묘사하지는 않을겁니다. 하하하.) 김수현 한명만 해도 충분히 사기 캐릭터 인데, 고연주가 합류 했고 애들도 전체적으로 실력이 올랐으니 일사천리 겠지요. 그럼, 오늘도 편안히 감상해 주세요. :) PS. 오늘 쿠폰이 굉장히 많이 들어 왔습니다. 쿠폰 날려 주신분들 모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__) 더욱 열심히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 리리플 』 1. MT곰 : 오오. 오랫만에 1등에서 뵙는것 같습니다. 1등 축하 드립니다. 자정 힐링을 드리겠습니다. 치료!(퍽퍽.) 죄송합니다. 하하하. 부디 이번회도 재미있게 감상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2. 라무데 & 블라미 : 항상 코멘트를 달아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__) 라무데님은 저번에 1등 하셨는데 제가 12시에 나가느라 못 달아 드렸네요. ㅜ.ㅠ 블라미님도 항상 응원 코멘트 고맙습니다! 3. 겜마스터 : Yes. 이미 길을 알고 있고, 제 3의 눈도 있는만큼 그 어떤 던전보다 수월히 찾아낼 수 있을겁니다. 그리고, 수현이에겐 비장의 안솔이 있습니다. 크크. 4. EyeSeeYou : 오오. 그러고보니 안솔의 팬분은 정말 오랫만에 뵙는것 같네요. 고연주 때문에 다른 여성 사용자들의 인기가 전체적으로 내려가 버렸습니다. ㅜ.ㅠ 5. SanIkerJIN : 하하. 여유가 있을때는 연참이 가능합니다. 아직까지는 어떻게 어떻게 쓰고 있습니다. 혹시 휴재를 하게 되면 사전에 공지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6. 고장난선풍기 : ㅋㅋㅋㅋ. 고연주는 뺨치고에 순간 웃고 말았습니다. ㅋㅋㅋㅋ. 맞아요. 수현이는 어르고, 연주는 뺨치고. 항상 팬 아트 그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루에 두세번씩은 꼭 보고 있습니다. :) 저…그리고 혹시 죄송하지만, 나중에 시간이 여유로우시면 한별이좀 부탁 드려도 될까요? 아직은 한별이가 가장 애정이 강한 캐릭터라…. ☞☜ 7. 악마신전 : 뜨, 뜨끔. 가끔보면 악마신전님은 참으로 날카로우신 데가…. 흠흠. 뭐, 그래도 일행들 전력이 있는만큼 어지간한 고난은 뚫을 수 있을겁니다. 하하하. 8. 재밌는건뭘까? : 하하하. 질문 감사 합니다. 그때의 내 창에 맞아 주겠어? 는 1회차에서 일어난 일 입니다. 2회차 일과는 연관이 없다고 보셔도 무방 합니다. 그리고 안솔의 일은…. 네. 곧 떡밥을 회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뮬로 돌아오면 회수를 할지도 모르겠군요. 다만 그건 진지한 떡밥이 아닌 서비스에 관련된 떡밥이라서요. 흠흠. 쿠폰 감사합니다.(__) 9. 카지매스 : 으아ㅋㅋㅋㅋㅋㅋㅋㅋ. 저와 같은 음란 마귀에 씌이셨군요! 10. 놀고싶다 : Yes. 습득하면 강해지는건 맞습니다만, 이미 특수와 잠재 능력을 다 개발한 상태라 소환에 필수적인 능력을 익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본 힘을 온연히 활용하지 못하게 됩니다. 주인공은 원래 가지고 있던 힘을 소실시키는것 보다는, 가족이 될 사용자에게 주는게 더 낫다고 판단 했습니다.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38 / 0933 ---------------------------------------------- 뜻 깊은 마무리 유정의 얼굴은 의외로 태연했다. 말투도 별것 아니라는 어조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꾸며낸 표정과 목소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뜻 모를 욕망으로 조용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피에 젖은 마음. 안현과 안솔이 저렇게 놀라는데, 유정이라고 감정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가슴 속으로 묻어 두고 있을 뿐. 유정은 내 얼굴을 보고 살짝 웃고는 입을 열었다. “시크릿 클래스를 언제 얻었을까? 우리랑 같이 있었을 때? 아니면 황금 사자 클랜으로 들어간 후?” “내가 알아본 바로는 사용자 아카데미에 들어오기 전 각성한 걸로 알고 있단다. 확실하지는 않고. 자세한 것은 본인만 알겠지.” 고연주가 은근슬쩍 정보를 추가로 던지자, 유정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나는 고연주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가끔 보면 고연주도 참 악취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구나. 도대체 뭘 믿고 황금 사자 클랜으로 가는가 했는데, 다 믿고 있는 구석이 있었어. 정말 꿈에도 몰랐네. 앙큼한 년.” “그러게. 그래도 통과의례 때부터 함께 해왔는데 조금 섭섭한 기분이 드네.” 안현도 유정의 말을 거들었다. 녀석의 말투에 잔뜩 가시가 돋힌걸로 보아 배가 아프긴 한 모양이다. 본인도 레어 클래스를 얻었으면서 또 무슨 욕심을 저리 부리는지는 몰라도, 일단은 김한별을 두둔할 필요성을 느꼈다. 만에 하나 나중에 그녀를 영입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지금 이대로 인식이 굳어버리면 그녀를 받아 들일 때 엄청난 진통이 있을 것이다. “너무 그렇게 보지는 마라. 그때 상황을 냉정하게 보면 김한별의 선택은 당연하기도 했어.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우리들과 이미 최고의 클랜에 자리를 잡은 황금 사자 클랜의 오퍼잖아. 나도 아쉽기는 해. 하지만 트집을 잡는 것은 그만둬.” “오빠. 지금 걔 편드는 거야?” “편드는 게 아니라, 개인의 선택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소리야. 너무 감정적으로 대응할 필요는 없잖아. 지금 중요한 건 우리들 이니까.” “흐응….” 나는 조곤조곤한 음성으로 애들을 달랬다. 유정이는 게슴츠레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더니, 이내 미약한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또한, 옆에서 안솔의 “오라버니가 그렇게까지 말씀 하신다면….” 이라는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마음 한 켠이 불안해지는걸 느꼈다. 안솔 마저 그런 소리를 할 줄이야. 도대체 애들은 왜 이렇게 김한별을 곱게 보지 않는 걸까.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 당시에는 조금 배신감이 들기도 했었다. 그녀가 시크릿 클래스를 얻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리고 나를 따라오지 않았을 때. 그러나 조금씩 시간이 흐르면서 곰곰이 생각한 결과, 그녀를 욕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김한별은 당시 상황을 반영해 그녀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 그녀가 클랜의 오퍼를 거절하고 나를 따라올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성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애들은 아직도 감성적인 부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에는 내가 그랬듯이 시간이 해결해줄 일 이었다. 애들이 생각이 더 깊어지고, 홀 플레인을 조금 더 알게 된다면. 후일 그녀에 대한 감정이 우그러들기를 바라며, 이만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아무튼 곧 홀 플레인은 서쪽 일반 도시, 헤일로를 중심으로 한바탕 피 바람이 불겠죠. 사용자들과 부랑자들의 대규모 전투가 일어날 겁니다. 최북단에 있는 소도시 뮬이 영향을 받을 일은 거의 없겠지만, 당분간 분위기가 꽤나 흉흉할 것 같습니다. 해서, 우리들은 당분간 도시 밖을 탐험할 예정 입니다. 이 흐름을 타는 건 좋지 못한 일 입니다.” “그렇군요. 워프 게이트가 활성화 되 있는 만큼 아주 안전하다고 보기는 어려우니까요. 그래도 대규모 전투라면 꽤나 시일이 걸릴 것 같은데요. 다음 행선지는 어디로 잡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나는 하연의 적절한 질문에 고개를 주억이고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번 행선지는 바로 <절규의 동굴> 입니다. 도서관의 기록서 들을 탐독한 결과, <절규의 동굴>이 실재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 했습니다. 방향은 뮬의 북문에서 평야까지 진출한 후 동쪽으로 쭉 나아가면 됩니다만. 아무래도 이번 탐험은 제법 시간이 걸릴 예정 입니다. 거리가 만만치 않거든요.” <절규의 동굴>은 가는 데만 10일 정도를 잡고 있었다. 동굴 공략은 별로 안 걸린다 치더라도, 오는데 걸리는 시일을 합치면 최소 3주는 걸린다는 소리였다. 뮬에 들어온 지 슬슬 2달이 지나고 있으니, 3번째달 첫째 주가 지나기 전 나갈 계획 이었다. 아마 돌아오면 못해도 부랑자 말살 계획은 끝나 있을 거라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왕복에 3주가 걸린다는 말에 일행들의 얼굴을 다들 미묘하게 변했다. 지금껏 탐험했던 던전들에 비해 몇 배는 긴 기간에 다들 꺼려하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애들은 모두 설레는 기대감을 표시했다. 비교적 길었던 정비 기간 동안 알게 모르게 좀이 쑤셨던 걸까. 하긴, 다들 어느 정도 실력이 상승 했으니 스스로의 실력을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을 터였다. 애들의 반응에 나는 한결 마음을 놓고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런 만큼, 3일 안으로 현재의 일과들을 모두 마무리 짓기를 바랍니다.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현재 서쪽 도시는 이미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떠날 수 있게 신속한 준비들을 하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때 고연주가 손을 들더니 나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의 은근함에 나는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한 건가? “사용자 김수현. 질문이 하나 있어요.” “네. 하시죠.” “왕복만 3주라고 하셨잖아요. 원정이라고 부르기는 조금 그렇지만, 기간만 따지면 소규모 원정과 비슷해요. 사용자 김수현의 말을 들어보면 지금 그곳에서 동굴을 무조건 발견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들고 있어요. 혹시라도 동굴을 발견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녀의 말에 하연과 신상용은 동감하는 얼굴을 했다. 확실히 그녀의 말은 타당성이 있었다. 나야 미래에 알고 있던 던전들의 위치와 제 3의 눈으로 나가는 족족 발견하고 있었지만, 다른 사용자들은 꿈에도 못 꾸는 일 이었다. 그러나, 애들은 다들 그녀의 질문에 물음표를 동동 띄우고 있었다. 지금껏 나와 함께 행동한 만큼 던전을 발견하는걸 크게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튼 지금 여기서 “내가 무조건 던전의 위치를 알고 있으니 믿고 따라와라.” 라고 말하면 신빙성이 떨어지므로, 완곡히 말을 돌리기로 했다. “사용자 고연주의 말씀도 맞습니다만, 일차적으로 캐러밴의 목표는 황금 사자 클랜의 행보를 피해 도시를 벗어나는데 있습니다. 괜한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도 싫고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찾아가는 <절규의 동굴>을 포기한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생각으로 조사했고, <고대 연금술사 비비앙의 던전>과 <폐허의 연구소>도 비슷한 방법으로 발굴 했습니다. 그리고 <절규의 동굴>은 그 앞선 두 던전보다 실재할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흐응. 일차 목표라. 그건 그렇다 치고, 일단 믿어보라는 건가요?” “예. 그리고….”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안솔을 바라 보았다. 그녀는 두 손을 꼼지락 거리며 손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 천진난만한 모습에 피식 웃은 후, 유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만에 하나를 대비한 복덩이도 있으니까요.” “네? 복덩이?” “에?” 고연주는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린 채 반문했고, 한창 손장난을 하던 안솔은 복덩이라는 말에 반응해 번뜩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똘망똘망한 눈으로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안솔을 보며, 나는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일행들도 미묘한 눈동자로 안솔을 보기 시작했다. 폐허의 연구소를 발견하는데 그녀의 덕을 톡톡히 본 터라 다들 어느 정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로 사용자들의 시선이 모이자 안솔은 입을 삐죽였고, 고연주는 뜻 모를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휴우. 난 몰라요. 혹시라도 망하면 정말로 그 동안의 여관 수익비, 유지비는 톡톡히 받아낼 거니까 알아서들 하세요.” “그야 여부가 있나요. 뭐 다른 질문은 없나요?” “네. 또 하나 있어요.” 도대체 무슨 질문이 이렇게 많은 거지. 라고 생각하려는 찰나 고연주가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띄우는걸 볼 수 있었다. 그 순간 하연의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그녀가 나를 향해 쓰게 웃고 있는걸 볼 수 있었다. 아마도 일행들 사이에 눈치챈 사용자는 나와 그녀뿐인 것 같았다. 나는 질문을 허락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까닥였고, 고연주는 슬쩍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는 왜 여기 있을까요?” …. ……. ………. “““““어?”””””” 나와 하연을 제외한 모든 사용자들은 고연주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하나 둘씩 입을 벌리는걸 볼 수 있었다. 아침을 준비한다는 고연주는 어느새 우리들 사이로 슬쩍 끼어들어 말도 건네고, 질문도 하고 있었다. 어찌나 교묘하게 끼어 들었는지 일행들 중에서 눈치챈 사용자는 나와 하연밖에 없는 것 같았다. “호호. 그럼 아침 가져 올게요.” 어버버 거리는 일행들을 뒤로 한 채, 고연주는 살랑살랑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탐험 출발 전날 밤 이었다. 3일전 일행들에게 정비 종료를 선언한 후 나 또한 여러 가지 일들을 마무리 지었다. 그 동안 여러 외적인 일들을 처리했다기 보다는, 클랜 내부를 가다듬었다고 보는 게 옳았다. 일행들의 상태를 하나하나 확인하고 혹시라도 모를 문제나 갈등은 사전에 예방한다. 도시 밖으로 탐험을 떠난 후 터지는 것 보다는 아쌀하게 지금 터뜨리거나 또는 해결하고 가는 게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하나의 새로운 갈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고연주와 안솔의 갈등. 아니, 갈등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미묘한 감이 있었다. 나도 최근에 이르서야 안 사실인데, 안솔은 고연주를 꺼려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둘만 남는 상황을 극도로 피하는것 것 같았다. 하연이 옆에 있으면 그나마 평온한 모습을 보였지만 고연주가 조금이라도 다가오면 이유를 불문하고 자리를 피하기 일쑤였다. 그 동안 하연에게 맡기고 신경을 쓰지 않은 것도 있고,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큰 문제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대로 나가기에는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안솔을 붙잡고 몇 번 물어봤으나 그때마다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대답을 거부했다. 그저 아무것도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 싫어서 피하기 보다는,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웬만하면 해결하고 싶었지만 당사자가 거부하는 만큼 나는 일단은 가만히 지켜 보기로 했다. 그리고, 유정은 탐험 전날까지도 고연주 밑에서 수련을 받기로 했다. 내일이 탐험 출발이라 오늘 하루 몸을 쉬는 게 어떨까 조언 했지만, 유정의 강력한 요청으로 끝까지 수련을 받겠다고 했다. 고연주는 그녀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 들였고, 그래도 날이 날인만큼 조금 살살 다루겠다고 웃으며 말했다. 본인이 저렇게 하겠다고 하고, 유정이 어느정도 성장 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더불어 고연주가 이렇게 나오는 만큼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일 탐험이 중요하긴 하지만, 나와 고연주가 있는 만큼 위험한 일은 거의 없을것이다. 결국 나는 유정의 요청을 허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고연주의 호언장담(豪言壯談)을 확실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1층 구석에서 유정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층에서 기다리다 보면 안솔이 유정을 치료하러 내려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접촉할 수 있을 것이다. 겸사겸사 유정의 상태도 살필 수 있고. 한동안 어두운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자, 안솔이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펴본 다음, 주방 맞은편 테이블에 살짝 엉덩이를 붙였다. 안솔은 내가 구석에 있는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 보였다. 그 상태로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이윽고 주방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사용자는 고연주였다. 그녀는 어깨에 유정을 매고 있었는데, 꼴을 보아하니 또 기절한 것 같았다. 도대체 어딜 봐서 살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오늘도 똑같을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질 좋은 치료 물약을 준비한 상태였다. 나는 주머니 속에 챙겨둔 물약을 한번 더듬은 후 조용히 둘을 응시했다. 고연주는 나른한 얼굴로 안솔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유정을 안솔의 옆에 털썩 던지고는 나긋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가 왔구나. 밤도 늦었는데. 오늘도 이 꼬맹이 치료하러 왔니?” “네, 네에….” 안솔이 한껏 주눅든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고연주는 입술을 가리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호호. 안 잡아 먹을 테니 너무 그러지 마렴. 그리고 오늘은 적당히 했으니 치료할 필요는 없어. 내일 일어나는데 지장은 없을 거란다. 그냥 숙소 침대에 던져놔.” “네에…. 그럼 이만 데려 갈게요오.” “어머. 벌써 가려고 하면 너무 섭섭 하잖니. 자, 잠시 이리 와보렴. 언니가 그때는 미안했어. 너무 깜짝 놀랐지 뭐야. 하지만 다 이해한단다.” 고연주는 매혹적인 미소를 흘리며 안솔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도대체 둘이 뭘 했길래 고연주가 저러는지 당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안솔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 달음박질로 계단을 올라가는 안솔을, 고연주는 멍한 얼굴로 바라 보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구석에서 천천히 몸을 드러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격렬한 반응 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다음에 듣기로 하죠.” 나는 기절해있는 유정을 들쳐 업은 후, 멍하니 나를 뒤돌아보는 고연주를 보며 말을 건넸다. 그녀는 억울하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 일 뿐 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이로써 정비 파트를 모두 마무리 지었습니다. 다음회에는 드디어 일행들이 뮬을 떠나고, <절규의 동굴>을 향해 탐험을 시작 합니다. 그동안 한껏 평화롭게 지냈으니 이제 슬슬 분위기를 조일 필요도 있구요. 뭐 고연주까지 있는 마당에 위험할게 있을까 의문이 드네요. 하하하. 그리고 안솔에 대한 새로운 복선을 깔았습니다. 도대체 안솔과 고연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러는 걸까요? 주인공도 모르는 일 이라니. 크크크. 해답은 <절규의 동굴>이 끝나고 난 후 공개될 예정 이지만, 과연 그전에 맞추시는 분들이 계실까 궁금합니다. 만약 맞추시는 분이 있다면 그분의 상상력은 정말로 대단하실 겁니다. 아. 참고로 백합, 레즈는 아닙니다. 혹시라도 음란 마귀가 씌이신 분들이 계실까봐요. :) 『 리리플 』 1. 러브라이크 : 1등 축하 드립니다. 새로운 1등 코멘터의 출현 또한 축하 드립니다. 짝짝짝! 정말 오랜만에 뵙는 신 1등 코멘터 이시군요.(?) 하하하. 앞으로도 종종 코멘트 부탁 드립니다. 2. 쿠로시온 : 헉. 한때 유명한 코멘터로써 떠르르 명성을 울리셨던 쿠로시온님의 포기 선언. 요즘 1등 경쟁이 치열하긴 한것 같습니다. ㅜ.ㅠ 3. 레리꿀 : 스탯 포인트는 더 얻을수는 있어요. 다만 얻기가 어렵고, 그 수치가 많지 않습니다. 앞으로 20 포인트만 얻을 수 있다는 확신만 있어도 수현이가 이런 고민은 하지 않겠지요. 불쌍한 주인공. ㅜ.ㅠ 4. 라무데 : 안솔은 초기 스탯중 마력이 비정상적으로 높았고, 그동안 잘 가르쳤고, 아직 0년차로서 성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수치가 올라갈수록 성장 속도는 떨어지기는 하지만 한계성은 여전히 열려있는 상태 입니다. 다만 주인공은 안솔의 경우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5. 오피투럽19 : 고, 고맙습니다. 그런데 저 남자에요. 설마 이렇게 금단의 사랑을 시작하게 될줄은 몰랐습니다. 흐흐흐. 이리 오시죠.(퍽퍽.) 죄송합니다. (__) 6. gkgngh : 소신 로유진, 연참을 못해 죄를 청하옵니다. 부디 137회로 노여움을 풀어 주시옵소서. 7. 불곰리즈 : 일단 중요 캐릭터는 전부 잡아논 상태 이지만, 그래도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다른 조연들에 넣을수도 있고, 비슷한 캐릭터에는 합칠수도 있거든요. :) 8. zjekfksqlc : 레어, 시크릿 클래스를 얻음으로써 일어나는 성장은 본인의 한계성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아마 차후 조금 더 자세히 나올 예정이지만, 수현의 경우는 해당 사항이 없다는 걸로 알아두시면 됩니다. 9. 고장난선풍기 : 고맙습니다! 앞으로 한별이를 최대한, 매우 자세히 묘사하도록 하겠습니다. 후후후. 10. 흠흠;; : 네. 주인공이 절대로 쓰지 말라고 신신 당부했거든요. 본문의 내용에 보시면 잔여 포인트가 4 포인트 남았습니다. 라는 문구를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39 / 0933 ---------------------------------------------- 연습의 끝 아침이 밝았다. 드디어 새롭게 탐험을 출발하는 날 이었다. 이번에 발굴할 유적은 <절규의 동굴>. 최소 3주가 걸리는 탐험인 만큼 캐러밴의 준비를 단단히 할 필요가 있었다. 여관 <조신한 숙녀>의 문을 열고 나오자, 서늘한 바람과 맑은 공기가 나를 반겨주었다. 잠시 눈을 감고, 그 상쾌한 공기들을 가득 마셨다. 온 몸이 개운해지는 기분 이었다. “와. 날씨 정말 좋네요. 여행 가기에 딱 좋은 날 이에요.” 몸을 돌리자, 찰랑이는 머리 결을 매만지며 문을 밀고 나오는 하연이 보였다. 그녀는 어깨에 자그마한 배낭을 하나 메고 있었다. 탐험용 여행 가방 이었는데, 이번에 새로 구매한 물품 이었다. 기간이 있는 만큼 나름 질 좋은 배낭들 이었고 총 네 개를 구매해 마법사와 사제들한테 맡겼다.(근접 계열들은 전투시 걸리적 거릴 수 있어 배낭을 주지 않았다.) 상큼한 미소를 선보이는 그녀를 보며, 나 또한 부드러운 웃음으로 화답했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여행이나 다름 없지 않을까요. 홀 플레인 에도 경치가 좋은 곳은 많아요.” “호호. 목숨이 위험한 여행은 사양하고 싶어요.” 그녀의 목에는 아름다운 빛깔을 뿜는 목걸이 하나가 걸려 있었다. 일전에 폐허의 연구소에서 얻은 영광의 목걸이(Necklace Of Glory)임이 분명했다. 어떤 마법을 메모라이즈 했는지 궁금했지만, 줄줄이 나오는 일행들을 보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애들 또한 연구소에서 얻은 무구들로 단단히 무장하고 내려왔다. 특히 안현과 이유정은 처음 뮬에 왔을 때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때는 사용자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병아리였다면 이제는 어느 정도 초보 사용자 티는 벗은 느낌을 주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겉보기에 불과하겠지만, 그래도 내가 키운 애들이라는 생각에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으아. 이 장갑을 끼니까 정말 너무 좋은데요. 창이 꼭 수수깡 같아요.” 평소 조금 무겁게 들던 창을 붕붕 휘두르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감소의 장갑(Glove Of Reduction). 본인의 실제 근력을 높여 주지는 않지만, 효용성이 많은 장비임은 틀림 없었다. 창을 붕붕 돌리며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있는 안현 너머로 나는 다른 일행들을 천천히 살폈다. 이윽고 비비앙, 신상용, 고연주가 준비를 마치고 내려오는걸 마지막으로 일행들을 정렬시켰다. 고연주는 여관 문을 대충 닫고 일행의 중앙에 섰고, 선두에 선 나는 그대로 북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가는 동안 사용자 무리들 몇몇을 볼 수 있었다. 지금 이 시기에 뮬에 있는 사용자들 이라면 안 봐도 뻔한 능력치를 갖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연차가 굉장히 낮거나. 그들은 하나 같이 부러운 시선들로 우리를 보고 있었는데, 아마도 하루하루 먹고 살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나 또한 1회차 초보 사용자 시절, 좋은 장비를 입고 이른 아침부터 탐험을 나가는 사용자들을 보면서 부러워하곤 했으니 그들의 심정을 아주 공감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우리들은 경비병들의 힘찬 경례를 받으며 북문을 나섰고, 그와 동시에 일행들의 분위기는 급변했다. 떠들썩하던 분위기는 삽시간에 조용해졌고 들뜬 표정을 하고 있던 애들은 얼굴을 굳히고 주변을 경계했다. 도시 안에서는 마음껏 까불어도 실전에 나온 이상 조금의 장난도 용납 못하는 내 성질을 알기 때문 이었다. 그 동안의 교육 효과가 나오고 있었다. 특히 고연주가 달라진 분위기에 제법이라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더욱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현재 우리 일행들의 인원은 총 8명 이었다. 물론 완벽한 구성은 아니었고(사용자의 능력치를 제외한 구성만 따지면.) 부족한 클래스도 있었다. 그래도 <고대 연금술사 비비앙의 던전>을 공략했을 때와 비교하면 나름 구색은 맞췄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이제는 어느 정도 사용자 개인의 포지션을 세분화 시킬 필요가 있었다. 일단 나는 선두에서 탱커와 동시에 전체를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다. 안현은 나를 돕는 서브 탱커와 동시에 지원 전투를 맡기로 했다. 안솔은 일행의 정 중앙에 섰고 비비앙, 하연, 신상용은 그녀를 둘러싼 삼각 편대를 구성했다. 언뜻 보면 중앙이 약할 수 있지만, 그 약점은 고연주를 키퍼로 둠으로써 모조리 상쇄시켰다. 한가지 특이한 점 이라면 유정이 후미와 동시에 프리를 요청했다는 점을 들 수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헛소리 하지 말라고 단호히 거절 했겠지만, 내 허락을 맡고 프리를 뛰겠다는 조건을 붙이고 수락해 주었다. 그렇게 우리들은 <고대 연금술사 비비앙의 던전>과 <폐허의 연구소>를 갔던 평야에 다다렀다. 나는 지체 없이 방향을 동쪽으로 틀고 일행들을 이끌었다. 애들은 다들 내 오더에 착실히 따르고 있었지만, 그들의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오랜만에 탐험을 나온다는 설렘, 좋은 장비, 예전보다 상승한 실력 그리고 다른 사용자들의 시선. 이 모든 요인들로 인해 애들의 의욕은 평소보다 배는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의욕을 단번에 꺼뜨릴 생각 이었다. 이 기세를 타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는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게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들은 동년차 사용자에 비해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강해졌지만, 홀 플레인 전체로 보면 아직 애송이들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동안 보아온 애들의 행동을 보면 지금 이 자신감들이 자부심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오만으로 변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내가 윽박지르는 것 보다는 하나의 상황을 만들어 스스로 깨닫게 만드는 방법이 효과적 이었다. 일행들은 필요한 얘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한동안 일정 행군 속도를 유지하던 나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몸을 뒤돌아 보았다. 뮬은 까마득히 보이지도 않고 있었다. 어느새 해가 조금씩 떠오르는 게 정오가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잠시 지도를 펼쳐 현재 위치를 가늠한 다음, 살짝 방향을 틀기로 했다. 바지런히 걸음에도 불구하고 몬스터나 부랑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부랑자들은 그렇다고 쳐도, 몬스터가 단 한번도 습격하지 않았다는 건 의외라면 의외였다. 방향을 조금 수정한 상태로 행군을 계속하자, 초반에 극도로 경계 감을 표출했던 애들의 얼굴이 조금씩 풀어지는걸 확인할 수 있었다. 슬슬 내가 계획한 것들을 시행할 타이밍이라 여겨 발걸음을 한층 빠르게 놀렸다. 이윽고, 일행들 앞으로 내가 목표했던 솟아오른 산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춘 후, 일행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우리들은 눈 앞에 보이는 산을 넘을 예정 입니다.” “응? 산을 넘을 필요가 있을까요? 가는데 10일이 걸린다고 하셨는데, 제가 알기로는 직로를 이용해도 길은 결국 똑같아 지거든요. 굳이 산을 타면서 체력을 뺄 필요는 없잖아요.” 확실히 고연주의 말은 타당성이 있었다. 그녀의 말인즉슨 앞으로 10일동안 긴 행군을 해야 하는데 체력 조절이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나는 노리는 바가 있었기 때문에, 구변 좋게 대답할 수 있었다. “혹시 몰라 <절규의 동굴>을 제외한 다른 유적들도 간단하게 조사 했습니다. 원래는 직로 루트로 갈 예정 이었지만 그래도 가는 길에 한번쯤 지나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곳곳마다 자세히 탐험할 수는 없겠지만, 아예 하지 않는 것 보다는 낫겠지요. 조금 길이 비틀리기는 했어도, 도착 예정일은 변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그만큼 행군 속도는 높일 생각 이오니 다들 잘 따라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 그러면 그 <절규의 동굴>을 제외하고도 다른 유적들까지 모두 조사하셨다는 건가요?” “네. 가는 방향이 같은 유적들로만 골라 조사 했습니다. 만에 하나의 경우를 대비할 필요가 있었으니까요.” 나는 겸손히 대답한 후 곧바로 몸을 돌렸다. 고연주는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이상한 얼굴 표정을 지었지만, 지금 캐러밴의 대장은 나였다. 그리고 애초에 <절규의 동굴>을 발견하지 못했을 경우 대응책을 꼬집은 것도 그녀라, 그것의 연장선상이라는 식으로 말했으니 딱히 할말도 없을 터였다. 하연, 신상용, 비비앙 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이것은 꼭 필요한 과정 이었다. <절규의 동굴>은 뮬에서 마무리나 다름없는 하나의 <연습 과정>이었다. 지금이야 사용자들이 별로 보이지 않고, 소도시인만큼 어느 정도는 할만하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 일반 도시나 또는 대도시로 진출만 해도 지금의 상황과는 180도 달라진다. 한걸음만 떼어도 눈에 보이는 사용자들과 조금만 방심해도 뒤통수를 치는 부랑자들. 그리고 훨씬 높은 던전의 난이도와 강력한 몬스터들까지. 그런 틈바구니에 끼어 살아 남기 위해서는 현재 자신의 위치를 자각할 필요가 있었다. 해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행군 이었다. 홀 플레인 안에서 사용자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행군으로 애들의 기를 죽일 생각 이었다. 우리들은 어느새 처음 목표했던 산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멀찍이서 봤을 때는 잘 몰랐겠지만 거대한 산맥이 눈 앞에 보이자 다들 처음과는 다른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산으로 들어가기 전 일행들에게 말을 되새김질 하며 신신 당부했다. “지금부터 눈 앞에 보이는 산을 넘을 겁니다. 이 산의 이름은 아직 붙여지지 않았지만, 도서관에 기록을 조사해본 바로는 총 세 개의 산을 걸쳐 거대한 산맥을 형성하고 있다고 합니다. 산을 타는 것도 힘들겠지만 도착 예정 시간을 늘리지는 않을 겁니다. 다들 제 속도에 맞춰 주시고, 그 속도를 유지하면서 주변 경계도 하셔야 합니다. 산은 몬스터들의 출현 빈도가 높으니까요.” 누군가 침을 꼴깍 삼키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앙증맞은 소리에 한번 피식 웃고는 나는 안현을 유정과 함께 후미로 보냈다. 혹시라도 마법사들이나 사제들이 고꾸라질 경우를 대비해 보낸 것이다. 안현은 아직까지 자신만만한 얼굴로 내 오더를 따랐다. 아무래도 <칠흑의 숲>에서 했던 강행군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는 엄연히 애들한테 맞춰준 강행군 이었다. 다른 일반 사용자들이 평소 어떻게 탐험을 하는지 이번에 톡톡히 맛 보여줄 생각 이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내 말에 일행들은 고개를 한번씩 끄덕였고 나는 곧바로 산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헤엑, 헤엑.” “헉, 헉.” 처음 기세 좋게 산을 오르던 애들은 이윽고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다들 숨을 몰아 쉬기 시작했다. 그 중에 가장 먼저 체력 부족을 호소한 사용자는 안솔 이었다. 역시나 사제인 만큼, 그리고 평소 체력이 부족했던 만큼 가장 먼저 약점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절대로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애들을 제외한 다른 일행들은 다들 이를 악물고서라도 따라오고 있었다. 마법사 사용자들이 저러는데 안현과 이유정이 힘들다고 말하면 그건 그것대로 우스운 일 이었다. 그러나 결국 안솔이 조금씩 처지기 시작했고, 뒤에서 안현과 이유정이 안솔을 끌면서 올라오고 있었다. 그만큼 그들에게 가는 체력 부담은 커질것이다. 뒤에서 조금만 쉬었으면 하는 시선들을 느꼈지만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계속해서 산을 올랐다. 고지대도 거침 없이 뛰어넘는 나를 보며 일행들은 다들 죽을 맛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진형을 어그러지는 순간, 나는 곧바로 해당 사용자를 지적 했다. 그럴 때 마다 애들의 애타는 얼굴들이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바램을 철저히 무시했다. 대신 조금 매서운 말로 그들을 질책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신 차려. 처지지 말고 진형 유지해. 전투를 치른 것도 아니고 고작 행군을 하는데 이것도 따라오지 못하면 어떡하자고.” 그래도 지금껏 해온 과정들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애들은 연신 숨을 토해내면서도 따라오고 있었다. 그 광경을 확인한 후 나는 한층 속도를 높였다. 앞으로는 뮬에서 있을 때가 정말로 행복했다고 느끼게 해줄 작정 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을 추가로 더 행군한 나는, 자그마한 공터를 하나 발견하고 가까스로 걸음을 멈췄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얼굴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사용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잠시 감지를 돌려 주변을 확인한 후, 차분히 입을 열었다. “여기서 10분간 휴식을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망을 볼 테니 다들 편히 들 앉아서 쉬셔도 됩니다.” 내 말에 애들 모두는 그자리 그대로 쓰러지듯 눕고 말았다. 고연주는 오랜만에 운동 했다는 얼굴로 기지개를 쭉 피고 있었고, 비비앙과 하연은 서로 물을 나눠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신상용 또한 자신의 물통을 꺼내 애들의 입가에 한 모금씩 넣어주고 있었다. “행군 속도가 너무 빠른 것 아닌가요?” 유쾌한 얼굴로 경치를 구경하던 고연주는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체력 능력치 50, 아니 45만 되도 따라올 수 있는 속도였습니다. 그 동안 연습한 게 얼만데 이 정도도 따라오지 못하면 곤란하지요.” “호호. 결국 따라오기는 했지요. 마법사들은 말 그대로 간신히 따라왔고, 근접 계열 사용자 두 명은 떨어진 한 명을 챙기느라 체력을 배로 소모 했고요.” 그 말에 고개를 돌리자, 안현이 신상용의 물통을 입에 문채로 나팔을 불고 있는걸 볼 수 있었다. 지닌바 체력은 괜찮지만, 본인도 겨우 따라오는 수준에서 안솔과 데리고 오느라 많은 체력을 낭비했다. 그리고 그건 유정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안솔은 거의 양팔에 끌려가다시피 해서 왔으니까. 얼굴을 보니 입술을 꾹 깨물고 눈망울이 달달 떨리고 있었지만, 용케 울음을 참는 모습 이었다. “단순한 행군에 빌빌대면 곤란해요. 따지고 보면 마법사 사용자들은 잘 따라오지 않았습니까. 결국에는 아직 정신 상태가 글러 먹었다는 소리 입니다.” “어머. 도시에 있을 때와는 판이하게 다르시네. 엄하기도 하셔라.” 고연주는 배시시 미소를 흘리며 입가를 가렸다. 그리고 잠시 동안 애들을 보던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시선을 돌렸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요즘들어 몸이 너무 안좋네요. 얼마전 목이 부은것 같더니 기어코 오늘 콧물이 나고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담배를 태우는데 목도 엄청 따끔거리고 죽겠습니다. 다른데 신경을 쓰지도 못할 정도로 어지럽네요. ㅜ.ㅠ 오늘도 집에 돌아와서 휴재 공지 하루 할까 하다가, 죽어도 컴퓨터 앞에서 죽어야 겠다는 생각에 한편 두드렸습니다. 글을 업데이트 하고 바로 자야할것 같습니다. 한숨 자고나면 조금 나아지기를 바래야겠지요. 여러분들도 모두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__) 아 그리고. 독자님들. 정말 대단 하십니다. 설마 맞추시겠어, 하고 있었는데. 바로 맞추셨습니다. 어떤 코멘트인지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보고서 한동안 멍하니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바로 맞추셨는지요. ㅜ.ㅠ PS. 초회부터 코멘트 정리 시작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피해를 보시는 분들에게는 죄송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 리리플 』 1. 破天魔痕 : 1등 축하 드립니다. 건필 기원 감사합니다. 破天魔痕님도 부디 이번회 재미있게 감상하시기를 바랍니다. 2. 쿠로시온 : 음. 그랬다가는 아마 수많은 독자분들의 반발이 사료 됩니다. 그리고 저도 그렇게 만들고 싶지는 않구요. ㅋㅋ. 3. 사람인생 : 하하. 항상 팬 아트를 그려주시는 분이라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네요. 물론 다른 코멘트를 달아주시는 분들에게도 항상 감사합니다. 리리플은 누구를 딱히 정하는게 아니라, 그날그날 눈에 띄는 아이디와 내용에 따른 랜덤 입니다. 4. 운수대통 : 아니요. 있습니다. 다만 일반적인 탈것들과 조금 다른 개념으로 보시면 됩니다. 예를들면 유니콘, 페가수스등이 있습니다. 5. 타지아 : 그럼요. 물론입니다. 과거는 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 6. pgh21c : 질문해주신 부분들에 있어서는 전부다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럴일은 없을겁니다. 하하하. 7. 베르주라크 : 하하. 100회는 넘었지만, 아직 홀 플레인으로는 6개월도 지나지 않은 애들이니까요. 서서히 성장해 나가는 애들의 모습을 지켜봐 주세요. :) 8. 착한몸매 : 음. 확실히 진통은 있겠지요. 김한별의 영입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많은 기대 부탁 드립니다. :) 9. hohokoya1 : 하하. 안솔의 팬 분들이 보시면 멘붕하실지도 모릅니다. ㅜ.ㅠ 10. letzgo02 : 응원 코멘트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좋은 내용으로 보답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40 / 0933 ---------------------------------------------- 연습의 끝 행군을 하는 3일 동안 우리들은 단 한번도 몬스터와 전투를 치르지 않았다. 몇 번 몬스터 무리들을 조우하기는 했지만, 거리가 조금 있기도 했고 우리들의 행군 속도가 워낙 빠르다 보니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았던 탓 이다. 지금 내가 애들에게 가르치는 건 급속 행군 이었다. 급속 행군은 중간에 만나는 몬스터들은 최대한 피하거나 아니면 그냥 지나친다. 즉 일단 목표 지점까지 최대한 빠르게 다다를 수 있도록 하는데 의의가 있었다. 애들은 첫 날과 이튿날에는 엄청 고생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셋째 날에는 비교적 안정된 모습들 이었다. 무작정 죽어라 따라오는 게 아니라 스스로 호흡과 걸음속도 그리고 마력을 이용하는 방법을 체득한 것이다. 그렇게 산 세 봉우리를 넘고 다시 평평한 땅을 밟았을 때 애들은 모두 기뻐 했지만, 나는 또다시 전방에 보이는 산봉우리로 방향을 틀었다.(여담으로 뒤에서 소리 없는 비명을 들은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동안은 급속 행군과 나름의 행운으로 몬스터와 만나지 않을 수 있었다.(일행들은 이 부분에 관해서 안솔을 굉장히 의심 했다. 안솔은 고개를 푹 숙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 했다.) 그러나 산에는 몬스터들이 부락을 짓는 경우가 많고 그 산을 통과하는 이상 통과 경로에 걸리는 경우는 어쩔 수 없는 일 이었다. 그리고 그 몬스터들이 우리들을 <침입자>로 인식한다면 전투는 피할 수 없는 일 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오빠. 저 흉측한 원숭이들은 도대체 뭐야?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망키 아닌가?” 유정과 안현의 멀뚱한 얼굴들을 보며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현재 우리 일행들의 눈 앞에는 복실복실한 털을 자랑하는 원숭이들이 있었다. 수는 대략 스무 마리 남짓. 키는 2m를 조금 상회하고 단단한 근육들을 지니고 있는 놈들 이었다. 망키를 털보 원숭이에 댄다면 호리하게 보일 정도였다. 지닌 바 힘도 제법 강력하고 머리도 쓸 줄 아는 놈들 이었지만, 그래도 원숭이 놈들에 불과하다. 나는 천천히 검을 빼어 들며 대답 했다. “털보 원숭이. 망키보다 상위에 있는 종이라고 생각하면 돼. 전투 스타일은 비슷하지만 망키보다 모두 우위에 있으니 절대 방심은 하지 말고. 진형은 출발 전 설명한 그대로 갑니다. 그리고 유정이는 프리로.” “야호. 오빠 사랑해.” 스릉, 스릉스릉. 준비 신호를 시작으로 뒤에서 병장기는 드는 소리들이 들렸다. 애들이 자신의 실력을 첫 선으로 보이는 전투. 의욕적으로 웅얼거리는 주문 소리들을 들으며, 나는 놈들에게 손가락 하나를 세운 후 검으로 자르는 모션을 보여 주었다. 더불어 의도적인 비웃음까지. 털보 원숭이들은 특이하게도 수컷보다 암컷이 극명하게 많은 개체였다. 그리고 번식률이 썩 좋은 녀석들도 아니었다. 그래서 수컷들은 태어나면 암컷들의 엄중한 보호를 받고 부락 안에서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 안에서 그저 씨를 공급하는 기계나 다름없는 놈들이 바로 수컷 털보 원숭이였다. 그런 수컷들의 성기를 세우고 자르겠다는 도발을 했으니 암컷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놈들은 곧바로 끽끽 우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벌겋게 물들이고는, 숨을 거칠게 몰아 쉬기 시작 했다. 나는 그저 태연한 얼굴로 검을 까닥였다. 이번에는 내가 직접적으로 나서기 보다는 느긋하게 애들의 실력을 감상할 생각 이었다. “끽끽!” 괴성을 내뱉은 털보 원숭이 몇 마리가 허공으로 뛰어 올랐다. 허공으로 높이 떠올라 그대로 리프 어택을 할 모양 이다. 그러나 공중으로 떠오른 원숭이들은 이내 하나 같이 길게 혀를 빼물며 그대로 지상으로 곤두박질 치고 말았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고연주가 단검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떤 기척도 소리도 없었다. 나는 여유로운 그 모습에 쓰게 웃고는 다시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원숭이들도 조금 놀란 것 같아 보였지만 그들의 눈동자는 한층 더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동족의 죽음에 분노를 한 것 같지만 솔직히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애들 또한 마찬가지인 듯 싶었다. 쿵. 쿵. 쿵. 곧이어 사이 좋게 땅으로 떨어진 원숭이들 사이로 흘러나온 벌건 핏물이 대지를 적셨다. 그것이 바로 전투 개시의 신호였다. “끼끼끼! 끼끼끼끼!” 미친듯한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털보 원숭이들. 그에 맞서 마법사 사용자들은 주문 영창의 목소리를 더욱 더 높였다. 그떄였다. 선두에서 놈들의 진로를 방해하려는 순간, 유정이 앞으로 훌쩍 뛰어 드는게 보였다. 두 손을 번쩍 들며 달려오는 털보 원숭이들을, 유정은 절묘한 틈 사이로 스치듯 파고 들었다. 어느새 그녀의 왼 손에는 이번에 새로 맞춘 카타나 하나가 들려 있었다. 막 옆을 지나치던 원숭이 한 마리가 주춤하는 사이, 그녀는 재빠르게 뒤를 파고들어 주춤거린 원숭이의 등으로 훌쩍 안겨 들었다. “끼익?” 자신의 등에 무언가 매달리자 실컷 달려오던 원숭이는 고개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유정은 놈의 뒤를 점거한 후, 비어버린 오른손으로는 놈의 고개를 꽉 붙잡으며 왼 손에 든 카타나를 목에 들이 대었다. 털보 원숭이 또한 몸을 뒤틀려고 했지만 이미 유정의 다리가 원숭이의 몸과 허벅지를 조이듯 파고들어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 상태였다. 완벽하게 놈의 뒤를 점거한 유정이는, 이내 잔인한 미소를 흘리며 목에 대고 있던 카타나를 쭉 그어 내렸다. “끼에에에에!” 구슬픈 비명 소리와 함께 놈의 목에서 핏빛 분수가 푸슛 터져 나온다. 그리고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다른 원숭이들을 놀라운 속도로 방향을 틀어 유정에게로 달려 들었다. 목에 박힌 카타나가 빠지지 않는지 슬쩍 왼손을 내린 유정은 혀로 살짝 입맛을 다시며 그대로 감았던 다리와 팔을 풀었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분명 유정이는 사방에서 공격을 받게 될 터였다. 하지만 유정의 눈동자는 당황이 아닌, 주변을 빠르게 살피는 기회를 엿보는 눈동자였다. 그 눈동자의 근원은 곧 알 수 있었다. 유정의 그림자에서 기다란 팔 하나가 쑥 솟아 나더니, 쓰러진 털보 원숭이의 목에서 카타나를 뽑아 들고는 크게 반원으로 휘둘렀다. 눈치 빠른 놈들은 재빨리 몸을 물렸지만 한두 마리는 기습적 공격에 기다란 자상을 입고 말았다. 먹빛 손은 다시금 유정의 손에 카타나를 쥐어주고는 자신의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얌전히 그림자로 사그라 들었다. “꼬맹이가 오늘 힘 좀 쓰는데요? 호호.” 고연주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에 화답하듯 유정은 곧바로 오른손에 마검 스쿠렙프를 꺼내 들었다. 다시금 자신에게 달려드는 털보 원숭들을 보며 유정이는 자세를 잡았고, 드디어 이도류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흥미로운 눈길로 그녀의 자세를 바라 보았다. 몸은 살짝 구부린 상태에서 카타나는 아래로, 스쿠렙프는 위로 들고 있다. 그 상태에서 그녀는 예의 야릇한 신음성을 터뜨리며 칼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본인도 스스로 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전방에서 달려오던 원숭이를 슬쩍 젖히며 검빛이 한번 번뜩이자 원숭이의 목에서 길죽한 피가 흘러 내렸다. 한 놈을 확실하게 처리한 후 그녀는 마치 풍차처럼 크게 단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전처럼 한번에 원숭이를 처리하지는 못 했지만, 여러 놈에게 한꺼번에 데미지를 줄 작정인 듯 싶었다. 그렇게 두 마리 원숭이 입에서 비명 소리를 나오게 하는데 성공한 그녀는, 미처 살피지 못 했는지 사각에서 번개 같이 달려든 원숭이에게 한방 얻어 맞고 말았다. 퍼억! 소리와 함께 강력한 주먹이 유정의 등을 강타했고, 그녀의 몸이 허공을 나는게 보였다. “아 씨발.” 이내 우리 쪽으로 데굴데굴 나뒹군 유정이는, 나직한 욕설을 내뱉으며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안솔이 재빨리 치료 주문을 외우려고 했지만, 유정이는 손을 한두 번 저음으로써 괜찮다고 신호를 날렸다. 하긴, 장비가 얼마짜린데 저 정도의 타격은 그냥 넘길 수 있겠지. 이윽고 다시 일행들의 안으로 돌아온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을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무언의 시위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유정은 내게 일종의 시위를 한 셈 이었다. 유정은 격돌전 놈들의 안으로 파고 들어 일차 돌진을 상쇄 시켰고, 여러 마리를 죽이거나 부상 시키는 성과를 거두고 돌아왔다. 그리고 가장 큰 성과는 선두에선 탱커들과의 거리를 남긴 상태에서 마법사들이 주문을 영창할 시간을 벌어 주었다는 것. 예상대로 유정이 돌아오자마자 허공을 울리는 신상용과 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스트 오브 윈드(Gust Of Wind)!” “랜드 오브 아쿠아(Land Of Aqua)!” 거센 바람이 털보 원숭이들 쪽으로 불고, 그 바람 안에 하연은 물을 주문을 외웠다. 바람의 힘에 힘입어 온 몸에 고루고루 물을 맞은 원숭이들을 보며 하연은 다시 한번 준비한 주문을 외웠다. “콘 오브 아이스(Cone Of Ice)!” 쩌저적! 쩌저적! 이윽고 놈들의 몸에 뭍은 물에서 길쭉한 얼음 송곳들이 튀어 나와 그대로 놈들의 내부로 파고 들었다. 하나 같이 고통스런 비명을 내지르며 무릎을 꿇는 녀석들을 보며, 어느새 뒤에서 다가온 유정은 안현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 “가서 뒤처리나 하지 그래? 레어 클래스 기공창술사 안현씨?” 나는 반사적으로 안현을 돌아 보았다. 그러나, 안현은 의외로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녀석의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호승심이 피어 오르고 있었지만, 안현은 조용한 목소리로 그녀의 도발을 받아 쳤다. “나는 서브 탱커 거든. 아직은 자리를 벗어날 수 없어.” “흥. 재미 없기는.” 유정은 슬쩍 내 눈치를 한번 살피고는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앞쪽에는 처참히 몸이 찢긴 털보 원숭이들의 시체가 가득 했다. 나, 비비앙, 안현이 나서지 않고도 캐러밴은 훌륭히 몬스터를 처리 했다. 뒤에서 휘익 소리는 내는 고연주의 휘파람을 들으며, 나는 안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직 남아 있는 놈들이 한두 마리는 있으니 가볍게 몸이라도 풀고 오라는 의미였다. * 어느새 주위에는 완연한 어둠이 내려 앉아 있었다. 나는 일행들에게 야영을 명령한 후 차분히 지도를 살폈다. 원래 속도라면 아직 1할도 못 왔을 거리를 거의 3할 가까이 온 상태였다. 첫째 날과 둘째 날에는 몬스터와 전투하지 않았고, 셋째 날에만 두 번의 전투를 거쳤다. 털보 원숭이들을 상대로는 유정이, 그리고 랜드몰들을 상대로는 비비앙이 선전함으로써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 동안 안현에게 당한걸 모두 풀어 내겠다는 듯 유정은 수 차례 안현을 도발했지만, 녀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단은 내 오더를 우선하겠다는 마음도 있을 것이고 내심 그녀의 비약적인 실력 상승에 놀란 마음도 있을 것이다. 장소를 확보하고 간단히 저녁을 해결한 후, 일행들은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아마도 전투의 피로함 보다는 급속 행군으로 인한 피로함이 더 클 것이다. “리더. 교대 시간 입니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 누군가 내 몸을 살짝 흔드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위로 올리니 신상용이 빙긋 웃고 있었다. 나는 차분히 침낭에서 나오며 좌우로 목을 꺾었다. 목에서 우두둑 거리는 기분 좋은 아픔이 느껴졌다. “별다른 일은 없나요?” “네. 마나 감지와 혹시 모를 알람 마법을 설치 했지만 따로 포착된 기척들은 없었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인수인계는 확실히 받았으니 이만 잠자리에 드세요.” “하암. 네. 그럼 먼저 들어 가겠습니다.” 신상용도 피곤한 듯 크게 하품을 하고는 주섬주섬 침낭 안으로 몸을 꾸겨 넣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수풀이 우거진 주위를 천천히 살폈다. 역시나 성실한 그의 말대로 따로 몬스터의 존재를 느낄 수는 없었다. 다시 일행에게로 고개를 돌린 후, 나는 안솔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와의 거리를 줄였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안솔은 침낭에 얼굴을 묻고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조금 더 자세히 귀를 기울이니, 그녀는 미약한 앓는 소리를 내는 중 이었다. 나는 품 안에 손을 넣어 물약 하나를 집인 후 차분히 그녀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끼고 위쪽으로 들어 올렸다. “우웅. 웅? 어아버이?(오라버니?)” 슬며시 눈꺼풀을 드는 안솔은 이내 깜짝 놀란듯 고개를 휙휙 돌렸다. 그러나 이내 내 얼굴을 봤는지 눈이 다시 풀어지는 게 보였다. 그대로 우루루 달래자 이내 안심한 듯 얌전히 몸을 늘어뜨렸고, 그대로 눈을 감으며 자동적으로 내게 안겨 들었다. 나는 살살 그녀를 끌어낸 다음 가느다란 다리를 들고 양말을 벗겼다. “쯧. 치료라도 쓰지 그랬니.” 하얗고 티 하나 없이 말끔하던 그녀의 발은 무리한 행군으로 인해 이곳 저곳이 갈라진 상태였다. 나는 한번 혀를 차고는 준비한 물약을 따고 그녀의 발에 차분히 바르기 시작 했다. 다시금 처음의 예뻣던 모양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발을 보며 나는 조금 더 손을 대기로 했다. 중간중간에 붉게 얼룩진 곳들을 중점으로 나는 그녀의 발을 전체적으로 주물러 주었다. 안솔은 잠자는 와중에서도 내 손길을 느꼈는지 꼼지락 거리면서도 더욱 내 품 안으로 발을 넣었다. 따뜻한 침낭에서 자다가 밖으로 꺼내니 추운 모양 이었다. 그녀를 다시 침낭 안으로 들여보낸 후, 나는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는 좋은 꿈을 꾸는지 색색 숨을 쉬면서도 내 손에 머리를 비볐다. 예전 같았으면 울며불며 따라오지 못 하겠다고 했을 텐데, 그래도 이번에는 꾹 참고 따라오는 모습이 기특했다. 이윽고 다시 고른 숨소리를 내는 안솔을 확인한 후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너무 일이 잘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나도 말이다. ============================ 작품 후기 ============================ (오늘 하루는 리리플을 쉬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네. 오늘 아침에 일어났는데, 잠깐 몸이 15분 정도 가뿐하더니 다시 열이 오르네요. 가래에서 피가 섞여 나오는게 정상은 아닌듯 싶습니다. 도저히 몸을 움직이고 싶지 않아 웅크리고 있다가, 심심해서 울트라북을 아래로 들고 조용히 소설을 한편 쳤습니다. 누워서 소설을 쓴 적은 이번이 처음인데 허리가 의외로 아프네요. 다음부터는 할게 못 되겠어요. 왠만하면 그냥 버티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병원에 가봐야 할듯 싶습니다. 기침을 할때마다 목이 자꾸만 따끔 거리네요. 여러분은 절대로 감기 걸리지 마세요. 이거 정말 괴롭습니다. ㅜ.ㅠ PS. 전개 속도를 높이면서 쓰는데, 내용이 영 불만족 스럽네요. 독자분들이 느끼시기에는 어떠 하신지요? 자꾸만 뭔가 빠진듯한 느낌이 듭니다. 아니면 지금 머리가 정상적이지 않아 괜히 그렇게 느끼는 걸까요. -_-a 0141 / 0933 ---------------------------------------------- 연습의 끝 인간만사 새옹지마(人間萬事 塞翁之馬)라는 말이 있다. 인생에 있어 화(禍)와 복(福)은 일정(一定)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행운이 불행이 되기도 하고, 화가 복이 되기도 함을 이르는 말 이다. 또한 내가 요즘 들어 자주 되새기는 말 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 내가 있는 곳은 홀 플레인 이라는 하나의 다른 공간이요 세상 이었다. 1회차 시절의 나를 생각하면, 새옹지마라는 말은 거의 들어맞지 않았다. 홀 플레인에 국한한 내 인생은 불행의 연속이라고 느꼈고, 그에 걸맞은 불행을 겪었다. 단 하루도 편안하게 지냈던 기억이 드물었다. 조금의 기연이나 행복감을 맛보면 그 뒤에는 반드시 그 행복함을 깨뜨릴 정도의 불행이 찾아오곤 했다. 아니, 어떻게 보면 맞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행운과 불행이 정확하게 5:5로 양분 되지 않았을 뿐,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면 불행이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차지 했던 것 같다. 갑작스레 떠오른 1회차 생각에 나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쯤 형은 뭐하고 있을까. 한소영은 뭐하고 있을까. 그리고 나와 관계를 맺었던 모든 사용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라고 애초에 형과 그녀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홀 플레인으로 들어온 후, 바로 그들을 찾겠다는 생각도 해보긴 했다. 유현이 형은 사용자의 능력을 떠나서 나를 버릴 리가 없었고, 한소영은 나 정도의 사용자를 절대로 놓칠 리가 없다. 인재에 대한 욕심이 많고, 호인과 악인을 모두 품을 수 있는 게 그녀의 수많은 장점 중 하나였으니까. 그러나 내가 그 두 명을 찾아가지 않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이유로는 이미 그들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혹은 잡고 있는 사용자들 이라는 사실 이었다. 유현이 형은 아마 지금쯤 동쪽 도시 어딘가에서 한창 자신의 이름을 날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후에 만났을 때, 황금 사자 클랜의 강철 산맥 원정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들었으니 부랑자 말살 작전에도 참가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소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미 그녀는 남서쪽의 소도시 모니카의 대표 클랜 <이스탄텔 로우>의 클랜 로드로 있었다. 남부 도시의 대표 클랜들 중 하나로서 작전과 원정에 참여하지 않은 클랜 이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앞으로 황금 사자 클랜의 미움을 받아 서서히 사라질 것이라는 구설수에 휘말리고 있겠지만, 강철 산맥 원정 후 <이스탄텔 로우>의 주가는 급격히 치솟는다. 그런 만큼 지금 내가 그들에게 가봤자 일말의 도움은 되겠지만 내 입맛대로 끌고 나가기 어려웠다. 이미 훌륭한 사용자들을 주위에 수두룩하게 포진 시켰으니 내 의견만 따를 것 이라는 기대는 요원한 일 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답답하게 있느니 차라리 나도 나만의 세력을 만들어 그들과의 만남을 갖는 게 더 좋을 것 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후반부 홀 플레인의 특성상 클랜간의 연합은 필수 불가결한 일 이었다. 나 혼자만의 힘 보다는 여럿이 힘을 보태는 게 훨씬 효율적인 일일 것이다. 두 번째 이유도 위의 이유와 어느 정도 연관이 되어 있었다. 굳이 내가 지금 끼어 들지 않아도, 형과 그녀는 알아서 잘 해내는 사용자들 이다. 1회차 시절 그들이 흐름을 읽는 것만 봐도 그랬다. 괜히 끼어들어 앞으로 술술 풀릴 그들의 미래를 인위적으로 개입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이 부분은 나 또한 많은 고민을 했지만, 뮬에서 레어 클래스를 얻은 것과 상급 마족 벨페고르를 처리함으로써 내 선택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아마 사용자 아카데미를 나온 이후 그들에게 갔다면 이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쉬운 마음은 없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는 이 무거운 중압감은 도대체 무엇일까. 갑자기 엄습해오는 답답한 마음에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人間萬事 塞翁之馬). 지금 우리 일행들은 행운을 타고 있었다. 물론 속내를 살피면 <나>라는 변수가 끼어 있기는 해도, 겉으로 보든 안으로 보든 행운이 끼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들 이었다. 예상하지 못 했던 레어 클래스들과 질 좋은 장비들. 그리고 실력 있는 사용자들과 상급 마족 벨페고르의 처형.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홀 플레인의 활동 기간 동안 불행이 더욱 많았던 만큼, 지금 찾아온 연속 되는 행운에 적응을 하지 못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해서, 나는 뮬을 떠나기 전부터 계속 느껴왔던 불안감을 일단은 깨끗이 정리하기로 했다. 불행이 찾아올 수도 있다. 그러나 찾아올 불행들은 대비할 수 있다. 미래가 있는 그대로 흘러간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큰 흐름들을 알고 있는 만큼 철저히 준비해 다가올 불행들을 최소화 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문득, 어쩌면 급속 행군으로 애들의 기를 죽이고 오만함을 경계하게 하려는 생각은 그런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걸음 속도를 유지 하면서 주변의 경치를 자세히 살폈다. 지금 이 길은 원래 2년 후에 걸어야 할 길 이었다. 그때랑 비교하면 아주 똑같다고 보지는 못 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비슷한 느낌은 남아 있었다. <고대 연금술사 비비앙의 던전>은 어둠컴컴한 칠흑의 숲 안에 있었고, <폐허의 연구소>는 북쪽의 황무지를 지나야 했다. 그러나 <절규의 동굴>은 셀 수도 없을 정도의 수 많은 산맥들 안에 꽁꽁 숨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우리들이 걷고 있는 대지는 산들거리는 초록빛 풀들과 나무들이 오롯하게 서 있는 게 마치 거대한 초원 안을 걷는 느낌이었다. 처음 하연이 말했던, 정말로 피크닉이라도 온듯한 기분이 들었다. “와아. 꼭 무슨 소풍이라도 나온 것 같아요.” “그러게. 꼭 잊을만하면 나오는 몬스터들만 아니면 기분이 괜찮겠는데.” 안솔과 비비앙은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며 행군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비비앙 나름의 안솔에 대한 배려였다. 다른 일행들은 웬만큼 적응한 것 같지만, 체력 능력치가 30대 초반에 불과한 안솔은 가끔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입술을 질끈 깨물고 낑낑 거리며 따라오고 있을 뿐. 군대에서 행군을 할 때도 혼자 하면 힘들지만, 앞이나 뒤로 친구와 얘기를 나누면서 가다 보면 다리의 피로함을 잊을 수 있다. 캐러밴의 분위기를 크게 해치는 것도 아니니, 그 정도의 담소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솔직히 그 동안 애들을 잡는다는 명목도 있기는 했지만 내가 조용한 분위기를 선호해서 필요 이상으로 억압한 것도 어느 정도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고연주는 정말로 눈치가 좋은 사용자였다. 그녀는 사람의 성격이나 감정을 파악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말인즉슨, 상황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치 정말로 기분 전환이라도 나온 듯 탐험을 즐기고 있었다. 원래 <10강>에 이른 사용자들은 어느 정도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권위적인 의식을 갖고 있는 사용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고연주 에게는 그런 딱딱함이 없었다. 도시 밖으로 나온 이후 내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는, 보다 친절하고 배려심 있는 행동으로 애들을 챙기기 시작했다.(그러나 솔직히, 내 눈에는 밀당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도시의 안과 밖에서의 나와 그녀는 기존에 하던 서로의 행동을 맞바꾸었는데, 여기서 그녀의 노림 수가 다분히 들어 있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그녀의 행동을 보면 꼭 내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고연주는 간간이 장단을 맞추면서 비비앙과 안솔의 이야기에 끼어 들었고, 가끔씩 홀 플레인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도 해주고 있었다. 5년차 사용자인 만큼 제법 이야깃거리도 많아 일행들은 그녀의 말에 힘든 급속 행군을 달랠 정도였다. 나 또한 간간이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름 괜찮은 기분으로 일행을 선도 했다. 어느 정도 뮬을 벗어난 만큼 탐험 초기와 같은 운은 없었다. 몬스터와 맞닥뜨리는 일이 가면 갈수록 잦아지고 있었다. 오늘만 해도 아직 야영 시간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몬스터 무리를 네 번째로 만나고 있었다. 방금전에 조우한 무리들은 애들로서는 처음 만나는 몬스터들 이었는데, 바로 머드 마고일들 이었다. 마고일은 골렘형 몬스터라고 보면 된다. 몸은 진흙과 단단한 돌로 되어 있고, 인간형 얼굴을 하고 있는 사악한 놈들 이다. 마법적 공격 기능은 없지만 무시무시한 힘과 자체 복원 능력을 가진 까다로운 놈들 이었다. 그러나, 놈들은 이동 속도나 몸이 굼뜨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 단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나는 마법사들에게 선제 공격을 가할 것을 요구 했다. 그리고 그들은 내 요구에 훌륭히 보답해 주었다. 하연은 이번에는 따로 공격 마법을 펼치지 않았다. 예전에 마고일을 상대 했던 전력이 있는지 대단위 물 주문과 오버랩(OverLap)으로 마고일들의 몸에 물을 묻게 만들고, 더 나아가 골고루 스며들게 만들었다. 진흙을 물렁하게 만들어 근접 계열들이 한층 수월하게 전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이다. 신상용은 체인 라이트닝(Chain Lighting) 마법으로 쿵쿵거리며 달려오는 마고일들의 걸음을 더욱 늦추었고, 비비앙 또한 마수 아라냐를 소환해 마고일들의 몸을 휘감는데 성공 했다. 특히 마고일 들과의 전투에서 비비앙의 활약은 단연 압도적 이었다. 열 마리 남짓한 몸을 전부 휘감고 마치 마리오네트 처럼 놈들의 팔다리를 이리저리 휘두르는데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광경 이었다. 특히 마고일들의 팔다리를 너무 격하게 휘둘러 한두 개씩 뜯어질 때마다 실소가 나오기도 했다. 절대로 만만히 볼 놈들은 아닌데, 적재적소에 따른 사용자들의 능력 발휘로 너무도 쉽게 전투를 풀어가고 있었다. “호호. 안현. 너무 심심해 보이는데?” 멀뚱한 얼굴로 창을 들고 있는 안현을 보며 유정이 다시금 재잘거렸다. 유정은 초반에 활약한걸 무기로 내세워 안현을 계속해서 압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현은 그녀의 도발에 발끈하는 것 보다는 내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흐흐. 그렇지. 수현이 형이랑 내가 너무 할 일이 없네. 암. 네 말이 맞아. 형도 심심하실걸.” 유정은 안현이 나를 걸고 넘어지자 바로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안현을 째려 보던 유정은, “치사하게. 오빠랑 너랑 같아? 오빠를 걸고 넘어지는 게 어디 있어?” 라고 톡 쏘아 붙인 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안현은 탱탱한 엉덩이를 실룩 이며 돌아 가는 유정의 뒷모습을 보다가, 이내 킥 웃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는 그런 안현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 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뭔가 모를 자신감이 숨겨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숨기고 있는 한 수가 있는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자신이 이유정보다 우위에 있다는 확실한 근거. 아무튼 처음 열 마리 남짓한 마고일들이 우리들에게 도달 했을 때는 이미 수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나마 몸이 성한 놈은 한 놈도 없었고 다들 어디 한군데는 바닥에 떨궜는지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그렇게 나, 고연주, 안현, 이유정은 서로 사이 좋게 한 마리씩 맡아 해치우는 걸로 마고일들과의 전투를 종결 지을 수 있었다. 이후 우리들은 다시 눈 앞에 보이는 산 봉우리들 안으로 들어갔고, 행군을 하던 도중 이른 저녁 시간을 맞았다. 원래는 조금 더 행군해도 되지만 산 속이라 어둠이 빠르게 찾아온 것 같았다. 마침 야영 장소로 쓰기에 적당한 장소를 발견할 수 있어 나는 잠깐 고민에 잠겼다. 생각 이상으로 행군 속도가 빠르고, 이미 당일 할당한 거리는 얼추 맞춘 상태라 굳이 더 나아갈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서서히 저물고는 있었지만, 나는 조금 더 행군하기로 결정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빠르게 진도를 뺄 수 있을 때 최대한 빼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충 휴식을 끝내고 다시 행군 선언을 하려는 찰나 고연주가 슬쩍 몸을 일으켜 내게로 다가왔다. “사용자 김수현. 궁금한 게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혹시 지금 목표 지점과 거리가 어느 정도 남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흠. 잠시 만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얼른 지도를 펼친 후 그 동안 걸어온 거리를 계산했다. 오늘만 지나면 뮬을 떠난 지 일주일을 채우게 된다. 그런 만큼 거의 7할 정도는 왔다고 할 수 있었다. 대략적인 거리를 말해주자,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더욱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잠시 동안 다른 일행들을 슬쩍 둘러본 고연주는, 이내 내 귓가에 입술을 대고는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한가지 더 궁금한 게 있어요.” “그냥 물어보셔도 될 텐데요.” 내가 투덜거리듯 말하자, 그녀는 살짝 미소를 머금은 후 다시금 입을 열었다. “꼬리는 달고 가실 건가요? 아니면 떼고 가실 건가요?”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네. 오늘 하루 푹 쉬었더니 몸이 조금 괜찮아진것 같습니다. 특히 여러분들의 쾌유 기원에 많은 힘을 받은것 같습니다. 그 힘 덕에 요렇게 자정 연재도 성공할 수 있었구요. 아직 기침과 콧물이 괴롭지만, 오늘 점심때 보다는 훨씬 낫네요. 앞으로도 스스로 몸 관리에 더욱 열중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PS. 김 작가님이 표지를 보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__) 『 리리플 』(139회) 1. 힘들어도 : 1등 축하 드립니다. 다음에 곧바로 달으신 코멘트를 보고 잠깐 웃었습니다. 부디 푹 주무셨기를 바랍니다. 하하. 2. hohokoya1 : 그렇죠. 특히 몸이 아픈데 주변에 보살펴 주는 사람이 없다는게 왜 이렇게 서럽던지요. 그래서 더욱 hohokoya1님의 코멘트를 찾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고맙습니다.(__) 3. 당룡 : 이런. 요즘 환절기라 감기에 걸리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으신것 같아요. 지하철만 타면 이곳저곳에서 콜록이는 기침 소리가. 특히 편도선 부은거 정말 괴롭죠. ㅜ.ㅠ 도대체 뭘 넘기지를 못할 정도니까요. 당룡님도 이른 시일 안에 쾌유 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 드립니다. :) 4. 고장난선풍기 : 팬 아트, 고연주와 김한별 정말 감사합니다. 어제 오늘 정신이 없느라 뜰을 못 봤는데 오늘 보고 깜짝 놀랐네요. 고연주 묘사를 너무 잘 하시는것 같아요! 5. 레필 : 레필님의 코멘트는 언제나 저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시네요. 하하. 안솔의 떡밥은 <절규의 동굴> 이후 회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안솔의 과거는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니다.>라고 넘기실 수 있지만, 실제로 안솔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시면 <큰 일 일수도 있다.>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음. 떡밥은 안솔이 지금껏 보여온 행동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이었거든요. 그래서 멘붕 주의를 드린 겁니다. 어떻게 보면 <내숭>이라고 봐도 맞을것 같습니다. :) 『 리리플 』(140회) 1. 러브라이크 : 2번째 1등 축하 드립니다. 언제 올라갈지 모르는 점심 연참 특성상 1등 하시기가 힘드실 텐데, 그저 놀라울 따름 입니다. 그럼, 부디 이번회도 재미있게 감상해 주세요. :) 2. 오피투럽19 : 하하. 아닙니다. 실제로 칠흑의 숲이나 폐허의 연구소에서 아주 잠깐 경치가 괜찮은 곳을 지나친 곳이 있습니다. 그때 내용도 그 부분에 약간이나마 서술 되어 있구요. 부주의한 언행이라기 보다는, 한두번 유적을 발굴하면 누구라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말들 입니다.(그리고 음. 이러지 말아 주세요. 저는 남자라구요. ㅜ.ㅠ) 3. Goksd : 저도 그랬습니다. 전투 부분 내용을 8번은 더 본것 같은데, 이상하게 내용이 떠오르지 않더라구요. 머리속에 떠오른 내용을 그대로 묘사하면서 가져오는 경우가 많은데, 오늘따라 이미지가 잘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올리면서도 계속 수정을 생각했다죠. 이렇게 불만족스러운 기분은 정말 처음이라,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답답하네요. ㅜ.ㅠ 4. 곰숭이 : 네? 아니에요. 절대로 목 부러지지 않았어요. 목이 부은 거랍니다. 헐…. 5. 악마신전 : 고맙습니다. 언제나 좋은 코멘트, 응원 코멘트를 남겨 주시네요. 덕분에 오늘 저녁에 한결 몸이 괜찮아진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한회마다 최소한의 의미를 담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 그리고 저는 죽지 않아요! ㅋㅋㅋㅋ.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42 / 0933 ---------------------------------------------- 연습의 끝 나는 잠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 보았다. 의문으로 차오른 내 표정을 읽었는지, 고연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어머. 모르고 있었어요? 뮬에서 나올 때부터 꼬리가 달렸는데요. 그 놈들 떨치려고 일부러 급속 행군을 한 게 아니었나요?” “아아.” 고연주의 상세한 설명이 이어지자 그때서야 이해를 할 수 있었다. 확실히 뮬에서 나올 때 우리들의 뒤를 밟던 몇몇 사용자들의 기척을 느낄 수는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부랑자로 보기 보다는 그 동안 우리들의 급성장을 시샘한 사용자들이 뒤를 밟는 줄 알고 있었다. 가뜩이나 사용자도 없는 뮬인데 탐험을 한번 나갔다 올 때마다 질 좋은 장비들로 도배하니,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는 사용자들 이라면 한번쯤 눈 여겨 볼 법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금 고개를 갸웃거릴 수 밖에 없었다. 굳이 놈들을 떨치려고 급속 행군을 한 건 아니지만, 겸사겸사로 볼 수도 있었다. 이 행군 속도를 따라 오고 있다는 건 아주 초보 사용자들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질문 했다. “분명 1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렸을 텐데. 혹시 그 놈들이 아직도 쫓아 오고 있는 건가요? 그리고 사용자 고연주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 수 있었죠?” “쫓아 오고 있다기 보다는,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따라 오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거에요. 실력이 제법 괜찮은 궁수가 있는지 우리 들이 남긴 흔적들을 보고 추적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누군지 잊으신 건가요? 저는 첫 날부터 그 놈들에게 그림자 하나를 붙였답니다.” 나긋하게 대답하는 목소리를 듣자 비로소 그녀의 첫 마디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달고 갈 것인가, 아니면 떼고 갈 것인가. 그 말인즉슨 지금 이 자리에서 야영을 하면 놈들이 우리를 따라 잡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소리였다. 그들이 단순히 뒤를 밟는 사용자 인지 아니면 부랑자 인지 아직도 감이 잘 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꼬리를 달고 다니는걸 매우 싫어하는 경향이 있었다. 잠시 침음성을 흘리긴 했지만 그렇게 큰 고민 없이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야영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떼고 간다. 하지만 제법 신중한 놈들 같은데 그렇게 쉽게 걸려들까요? 우리 쪽 인원만 해도 여덟 명 이랍니다.” “전부 움직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쪽에서 오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들어가주면 되니까요.” “흐응?” 고연주는 내 말을 듣자 마자 가느다란 콧소리를 흘렸다. 그리고 눈을 살짝 가늘게 만들더니, 찬찬히 내 얼굴을 뜯어 보기 시작했다. 한동안 내 표정을 살피던 그녀는 이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행들의 도움을 받을 수 도 있어요. 아니면 저라도 도와줄 수 있고요.” “괜찮습니다. 초반부라면 모를까, 곧 <절규의 동굴> 포인트에 도착하는 만큼 좋은 분위기를 망칠 필요는 없겠죠.” “일행들은 그렇다 치고. 저는요?” “사용자 고연주는 베이스 캠프에 남아 주세요. 만에 하나의 가능성도 대비해야 하니까요. 아무튼 놈들을 처리하는 건 혼자서 해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혼자서 하고 싶은 게 아니라요?” 갑작스럽게 정곡을 찌르는 말에 나는 바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순간 속을 콕 찔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내 반응을 보았는지 그녀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지어지는 게 보였다. 나는 담담한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하다가, 그대로 몸을 돌려 버렸다. 더 이상 그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고연주와 나는 비슷한 구석이 있었으니까. 비슷한 생각 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만큼 그녀는 내 마음속 내면을 정확히 짚어낸 것 이다. “그거 알아요? 당신, 탐험을 나온 이후로 처음으로 웃었다는 거.” 내가 웃었다고? 나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나는 차분한 손길로 내 입가를 매만졌다. 그러자 등 뒤로, 그녀의 말이 나를 한번 더 나를 붙잡는걸 느꼈다 “하긴, 애들은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걸리적 거리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죠. 알았어요. 대신, 박쥐를 조심하세요.” 나는 차분히 손을 들어 그녀의 말에 화답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옹기종기 모여있는 일행들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이곳에서 야영을 할 생각 입니다.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시간대가 애매하네요.” 오늘 행군을 마치고 이만 야영한다고 선언 하자 일행들은 모두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다들 얼굴 한편에 안도감이 보이는 게, 썩 싫어하는 눈치는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들은 야영 장소를 정리한 후 이른 저녁을 먹기로 했다. 오늘 일찍 자는 만큼 내일 일찍 일어나 바로 출발할 것이라고 말했으니 다들 빠르게 잠자리에 들 것이다. 한층 밝은 얼굴로 식사를 하는 애들을 보며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불침번은 어제와 똑같이 가되, 약간의 변화를 줄 예정 입니다.” 내 말에 일행들은 모두 귀를 쫑긋 기울였다. 나는 은밀히 감지를 돌려 하나의 기척을 확인한 후 마치 들으라는 듯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원래 불침번은 그 동안 한 명이 섰지만 이번에는 한 타임당 시간을 좀 더 늘리고 두 명이 서는 것으로 바꾸기로 했다. 당연히 이렇게 바꾼 데에는 나름의 노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제발 그 놈들 중에서 머리 회전이 조금 되는, 똑똑한 놈이 있기를 바랄 뿐 이었다. 그래야 손 쉽게 놈들이 원하는 바를 파악하고, 처리할 수 있으니까. “해서 오늘 불침번 초번은 저와 사용자 고연주로 하겠습니다. 그 뒤의 인원들은 저와 고연주를 제외하고, 어제 불침번을 섰던 대로 두 명씩 짝을 지으시면 됩니다.” “김수현. 굳이 두 명이 할 필요가 있을까?” 비비앙이 손을 들고 질문하자,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했다. “응. 아무래도 조금 더 경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을 것 같거든. 특히 산 속인만큼 더욱 조심해야지. 그리고 불침번은 원래 2인 1조가 정석이라고. 예전에는 인원이 적어서 어쩔 수 없이 한 명씩 섰지만, 이제는 아니잖아. 원래 이번 탐험에 나설 때부터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깜빡 잊고 있었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바꾸는 게 나을 듯 싶다.” “흠. 확실히 불침번은 한 명 보다는 두 명이 더 낫습니다. 그 동안 건의를 드릴까 말까 고민 했었는데, 역시 생각하고 있으셨군요.” “네. 그리고…아무래도 주변에 우거진 수풀이나 나무들이 많다 보니 시야에 많은 제한을 받습니다. 한 명은 베이스 캠프를 지키고, 다른 한 명은 가볍게 주위를 순찰하면 더욱 효율을 극대화 할 수 있겠죠.” “좋습니다. 저는 찬성합니다.” 안전을 추구하는 신상용이 거들고 나서자, 일행들 사이에서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그러나 내 속내가 어떻든 방금 한 말에는 일말의 하자도 없었다. 결국 일행들은 전원 동의하는 걸로 불침번 문제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그 후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다들 자신의 전과 후 누가 있었는지 따져보는 모양 이었다.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고, 하나 둘 자신의 짝을 확인한 일행들은 다시금 식사를 재개 했다. 그리고 자신의 짝이 고연주가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는 것 같아 보이던 안솔은, 갑자기 이상하다는 얼굴로 우거진 수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웅…?” “솔아. 갑자기 왜 그래?” “아니이. 자꾸만 누가 우리를 쳐다 보는 것 같아서어.”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푸덕이는 소리와 함께 수풀에서 검은색 새 한 마리가 튀어 나왔다. 이윽고 허공으로 멀리 날아가는 <박쥐>를 보며 안현은 별 것 아니라는 말투로 고개를 돌렸다. “새잖아. 별 것 아니었네. 신경 쓰지 말고 저녁이나 먹자. 자. 이 스프 좀 먹어봐. 맛이 아주 기가 막혀.” “새? 아닌 것 같은 데에…히잉. 싫어어. 나 혼자 먹을 수 있단 말이야.” 안솔은 안현이 스프를 뜬 숟갈을 거부하며 입을 삐죽거렸다. 안현이 곧바로 숟가락을 다시 내리는 사이, 나는 고연주와 의미 심장한 시선을 주고 받았다. 그렇게 우리들은 저녁 식사를 끝내고, 곧바로 잠자리를 준비 했다. 일행들은 잠시간 담소를 나누기는 했지만 간만에 따뜻한 식사를 해서 그런지 다들 나른한 표정들 이었다. 이윽고 한명두명 침낭으로 몸을 묻는 사용자들을 보며, 나는 가만히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밤이 되려면 아직 시간이 조금 남은 상태였다. * 확실히 산 안에 있으니 어둠을 빠르게 찾아 오는 것 같다. 어느새 어둑하게 깔린 땅거미들을 보며 나는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있는 탐험 도중 차 한자의 여유라.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고연주가 타다 준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탄 차는 맛도 매우 좋았다. 다시 한번 찻잔을 입에 댄 순간, 고연주가 내게 슬쩍 눈짓을 보내는걸 볼 수 있었다. 나는 태연한 얼굴로 그대로 한 모금 넘겼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먼저 말문을 연 사용자는 고연주였다. “불침번이라는 거. 꽤나 지루하네요.” “지루하긴 해도 중요한 경계 근무 입니다.” “몬스터는 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안 비치는데요 뭘.” 그녀의 말에 나는 크게 기지개를 피며 하품을 했다. 그리고는 졸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후암. 뭐 그렇기는 하네요. 어차피 곧 교대 시간이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마 순찰 한번 돌고 오면 시간이 딱 맞을 것 같거든요.” “귀찮은데. 굳이 갈 필요가 있을까요?” “혹시 모르잖아요. 가볍게 주변만 돌고 올 테니 이곳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제가 오면 곧바로 다른 일행들과 교대하도록 해요. 아. 그래도 이 차는 다 마시고 가고 싶네요.” 우리들은 정말로 형식적으로 말을 주고 받고 있었다. 말 그대로 딱 들릴 정도로만. 나는 최대한 천천히 차를 마셨다. 한 방울, 한 모금 음미하는 것처럼. 솔직히 놈들이 우리가 잠들기를 기다려 무작정 밀고 들어오는걸 대비해 나와 고연주를 초번으로 세운 건데, 생각보다 그렇게 무식하게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틈을 노리거나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뜻. 대화가 끝난 후 거진 30분간 농땡이를 부린 나는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 고연주에게 다녀 오겠다고 가볍게 말을 건넨 후, 그대로 수풀 안으로 몸을 들어섰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 맴돌던 기척 하나가 은밀하게 나를 뒤따라 오는걸 느낄 수 있었다. 주변을 가볍게 돈다고는 했지만 나는 베이스 캠프와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렸다. 이로서, 나는 완전히 일행들과 떨어지게 되었다. 이대로 길을 잃은 척을 할 까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그러나 그건 조금 위화감을 줄 것 같아 그냥 이대로 차분히 걷기로 했다. 나는 일부러 제 3의 눈과 감지도 활성화 시키지 않았다. 미리 알게 되면, 본능적으로 몸이 방어 대응을 해버린다. 이왕 걸려주는 거 완벽하게 걸려줄 생각 이었으니까. 슬슬 주변을 순찰한지 약 10분정도 지난 것 같았다. 도대체 놈들이 어떤 방식으로 나올까 사뭇 호기심이 일어 나려던 찰나였다. “캬아아악!” 내 무릎쯤 되는 수풀 안에서 공기를 찢는 괴성과 함께 먹빛 그림자 하나가 솟구쳐 오르는 게 보였다. 드디어 행동을 개시하는 건가. 그림자의 정체는 아까부터 우리 일행들 주위에 은신해 있던 박쥐였다. 나는 깜짝 놀란 얼굴을 하며 뒤돌아 보았고, 박쥐는 그대로 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으윽! 이 자식이!” 살짝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재빨리 검을 뽑자, 박쥐는 마치 나를 약 올리는 듯 허공으로 유유히 날아 오르더니 이내 내 주변을 이리저리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나는 서투르게 검을 휘둘렀고, 박쥐는 요리조리 피하며 간간히 내 팔에 위협을 가했다. 아무래도 이 박쥐를 조종하는 사용자는 내가 0년차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허점이 많은 작전을 세우지 않았을 텐데. 물론 뮬을 떠난 이후 7일 동안 내가 전투에 나선적이 드물다고는 해도, 이건 완전 나를 병신 취급하는 것과 똑같았다. 나는 입술을 잘끈 깨물며 크게 검을 휘둘렀다. 알면서도 속아 넘어주고, 아무리 연기를 위해서라고 해도 기분이 더러운 건 사실 이었다. 그때였다. “캬아아악!” 박쥐는 고통에 울부짖으며 허공으로 크게 날아 오르더니 이내 비틀비틀 한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분명 아무렇게나 휘두른 검격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쥐의 날개 하나가 우연찮게 걸려들었다. 정작 휘두른 내가 황당할 지경 이었다. 이건 너무 속 보이잖아. 도대체 주인이 어떤 놈인지 어이가 없을 정도로 궁금 했지만, 일단 중요한 건 연기를 유지하는 일 이었다. “거기 서라! 이놈!” 나는 크게 한번 고함을 지르고는 그대로 도망가는 박쥐의 뒤를 쫓았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뻔히 보이는 작전을 펼치는 의문의 사용자들.(혹은 부랑자들.) 그리고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는 우리의 주인공, 김수현. 속 시원한 다음회를 기대해 주세요. :) PS. 쪽지가 굉장히 많이 왔네요. 답신은 하나씩 천천히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답신이 느리게 오면 앞서 다른 분들의 쪽지에 먼저 답변을 하느라 늦는다고 생각해주시면 됩니다. 독자분들의 너그러운 양해 부탁 드립니다. 『 리리플 』 1. 음월영검 : 1등 축하 드립니다. 드디어 1등을 하셨군요. :) 부디 이번회도 재미있게 감상해 주세요. 2. SanIkerJIN : 고맙습니다. 오늘 몸이 조금 괜찮은것 같아 무리를 했더니 다시 도지네요. ㅜ.ㅠ 3. 사람인생 : 그러게나 말 입니다. 기침 한번 할 때마다 목이 찢어지는것 같아요. 물도 삼키지 못해요. 엉엉. 4. 저녁노을로 : 하하하. 살려주세요. 아마 그러면 저는 반드시 앓아 누울겁니다. 5. 오피투럽19 : 헐. 6. 레리꿀 : NO. 동, 서, 남, 북대륙으로 총 네국가의 사용자들이 존재 합니다.(이전 내용에 나왔습니다.) 그중, 대한민국 인들은 북대륙을 위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 7. rkfmak : 으음. 세라프는 워낙 불쌍한 아이라. 솔직히 건드리기 조금 애매한 감이 있네요. -_-a 8. 꼬야 : 험험. 험험험. (__ )* 저는 이상하게 서비스 신이 좋더라구요. 은근슬쩍~한거 있잖아요. 하하하. 9. 열정을 : NO. 마고일은 골렘형 몬스터인 만큼, 체내에 자그마한 핵을 갖고 있습니다. 먼저 하연의 물계열 주문으로 그 핵으로 이르는 길을 만들어낸 다음, 전기를 통해 직접적인 타격을 줬습니다. 다만, 말씀하신 대로 상성으로 완전히 핵을 찢지는 못했습니다. 고작해야 발걸음을 멈추게 한게 다였죠. 다만, 그게 바로 두 사용자가 노린 바 입니다. 10. 레필 : 엇. 음. 이전회들의 본문에 대한민국, 일본, 미국, 영국. 네 나라 사용자들이 현재 홀 플레인에 있습니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ㄷㄷ 레필님만큼 정독 + 날카로우신 독자분이 잊으셨을리는 없는데. ㅜ.ㅠ 어흑흑흑.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43 / 0933 ---------------------------------------------- MenTal IllNess 박쥐는 잡힐 듯 말 듯 아슬한 거리를 유지 했고, 나 또한 더 이상 상처를 입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해서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잠시 동안 벌어진 웃지 못할 추격적은 일정 장소에 다다른 순간 끝이 나 버렸다. 꽁지가 빠져라 허공으로 후드득 날아가는 박쥐를, 나는 멍한 눈동자로 응시 했다. 괜히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튼 박쥐가 없어졌으니 대충 놈들이 일을 벌이는 장소에 들어왔다는 소리였다. 이대로 덮칠까. 함정을 파뒀을까. 아니면 다른 계획이라도 있는 걸까.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놈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 스스스. 스스스스. 수 차례 차가운 바람이 수풀과 나뭇잎을 흔들고 지나갔다. 몇 분이 지나도 놈들은 나오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마력 감지나 제 3의 눈을 돌리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도대체 이게 뭔가 싶어 인상을 찌푸리려는 찰나였다. “……!” “헉…헉…” 미묘한 신음 소리가 바람을 타고 귓가로 들려온다. 울부짖는 것 같지만 묘하게 달뜬 신음 소리. 거칠게 숨을 몰아 쉬는 소리. 그 소리에 이끌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자 저기 앞에서 살짝 드러난 공터가 보였다. 공터 주변에는 커다란 바위나 키 큰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주변을 둘러 보며 천천히 지형을 익힌다. 작전은 병신 같았지만 그래도 기습 전투에 관한 기본 상식은 있는 놈들 같았다. 나는 차분히 심호흡을 한 후, 공터와의 거리를 더욱 줄였다. 그리고 내 눈 앞에 나타난 것은…. “아아앙! 시, 싫어! 싫어어어!” “헉, 헉, 헉, 헉!” “그만, 해…. 제에발…그마안! 요, 용서, 해, 줘!” “헉, 헉! 입 안 다물어?! 헉, 헉!” 나는 할 말을 잃은 얼굴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 보았다. 뜨거우면서 묘한 열풍이 전신을 덮치는 느낌이 들었다. 공터에는 한 명의 남성 사용자가 여성 사용자를 실컷 범하는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여성 사용자는 양 팔과 무릎을 바닥에 댄 체 엎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남성 사용자가 머리채를 쥐어 올린 터라 고개는 들려진 상태였다. 눈에서는 애처로운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입으로는 끝 없이 용서를 바랬지만 그녀의 뒤를 점하고 있는 남성 사용자는 일말이 용서도 없는 듯 연신 가열차게 허리를 내려 찍었다. “아앙! 아아앙! 시, 싫어! 그, 그만! 으읍!” 철썩. 철썩. 살과 살이 맞부딪치는 음탕한 소리가 공터를 가득히 메웠다. 남성은 여성의 신음 소리가 거슬리는 듯, 남은 한 손으로 여성의 입을 틀어 막았다. 그리고 엉덩이를 쭈욱 빼고는 다시금 힘차게 허리를 밀어 붙였다. 여성 사용자의 처절한 절규 소리가 손 틈새로 빠져 나왔다. 한동안 짐승 같은 숨소리를 내며 거칠게 허리를 움직이던 놈은 이윽고 신호가 온 듯 여성의 엉덩이와 자신의 허리를 꼭 붙였다. 그리고 그 상태로, 전신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하으…. 좋구먼.” “윽…. 으윽…. 응…. 흑….” 남성의 몸이 한번씩 떨릴 때마다, 여성의 몸도 간헐적으로 움찔거린다. 그렇게 정사 후 사정을 끝냈는지 잠시 동안 여운을 즐기던 남성은, 꽉 쥐었던 머리카락을 풀어 주고는 굽혔던 무릎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여성은 그대로 몸을 허물어뜨리고 말았다. 살짝 벌려진 여성의 허벅지 사이로 발갛게 변한 그곳이 보이고, 그 사이로 흘러나온 몇 줄기 백탁액이 땅으로 떨어졌다. 비참한 광경 이었다. 가만히 둘을 보고 있던 나는, 그대로 한걸음 안으로 들었다. “누구냐!” 일부러 기척을 드러내자 히죽 웃고 있던 남성이 고개를 돌리며 날카롭게 외쳤다. 이제는 상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곧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승범(4년차) 2. 클래스(Class) : 일반 검사(NorMal Sword Expert)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Babara) 4. 소속 단체(Clan) : 중도(中道) 5. 진명 · 국적 : 그 어느 곳에도 설 수 없는 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7) 7. 신장 · 체중 : 175.2cm · 67.7kg 8. 성향 : 혼돈 · 악(Chaos · Devil) < 능력치 > [근력 86] [내구 64] [민첩 76] [체력 68] [마력 52] [행운 30]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최주현(3년차) 2. 클래스(Class) : 일반 검사(NorMal Sword Runner)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Babara) 4. 소속 단체(Clan) : 중도(中道) 5. 진명 · 국적 : 잘못된 길, 그 내부로의 타락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2) 7. 신장 · 체중 : 161.2cm · 47.3kg 8. 성향 : 기회 · 혼돈(Chance · Chaos) < 능력치 > [근력 60] [내구 55] [민첩 84] [체력 58] [마력 63] [행운 68] “네놈. 언제부터 그곳에 있던 거지?” “끝날 무렵에. 그나저나 지금 이 상황은….” 재빠르게 놈들의 정보를 훑어 본 후 나는 상단으로 검을 들었다. 그리고 잔뜩 경계하는 눈초리를 보내자, 김승범은 곧바로 두 손을 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워워. 친구. 잠시 진정하고 내 얘기 좀 들어보라고. 일단 검은 내려 놓고.” “강간범한테 들을 얘기는 없는데.” “아 정말. 오해라고.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도망가세요! 이 남자 부랑자에요!” 김승범이 말을 이으려는 순간, 죽은 듯 누워 있던 최주현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번뜩 고개를 든 상태로 한번 더 말을 이었다. “이 남자 말 듣지 말아요! 혼자 있는 게 아니에요! 가까운 곳에 동료들이…꺄악!” “이 미친년이. 입 안 다물어?” 김승범은 곧바로 발길질을 했고, 최주현은 그대로 얼굴을 얻어 맞고 말았다.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싸는 최주현을 지그시 밟으며 그는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 거렸다. “아 씨발…. 텄네. 퉤.” 이대로 “네. 도망갈게요. 그럼 안녕.” 이라고 말한 후 몸을 돌리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궁금 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고, 나는 한층 긴장한 낯빛으로 검을 겨누었다. “역시 부랑자 놈들 이었군. 파렴치한 놈들.” “흥. 그래. 인정하지. 나는 부랑자가 맞다. 하지만 너랑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게 무슨 소리지?” 슬쩍 미간을 좁히며 반문하자, 놈이 침을 꿀꺽 삼키는 게 보였다. 어디 어떤 말들을 늘어 놓는지 한번 들어 보기로 할까. “너. 혹시 몇 일전 뮬에서 떠난 사용자 일행들 중 한 명이 아닌가?” “그, 그걸 어떻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황해주자, 김승범은 역시 그렇다는 얼굴로 최주현을 짓밟은 발을 톡톡 두드렸다.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너희들은 미행 당하고 있었어. 바로 이년들한테.” “미행이라고?” “그래. 사용자 여덟 명이 캐러밴을 짜고 너희 일행들을 몰래 따라가더군. 그리고 우리들은 너희들이 아니라, 이년 일행을 따라와 덮친 거고. 얘들이 왜 너희를 따라갔는지는 말 안 해줘도 알지? 어떻게 보면 우리는 너희 일행들의 은인이나 다름 없다고.” “그, 그럼 그 여성의 캐러밴이 우리들을 덮치려고 했단 말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너희들이 유적을 발굴하면 뒤통수를 칠 수도 있었겠지.” 김승범의 말이 끝나고 나서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동자로 여성을 바라 보았다. 그 여성은 당혹한 표정으로 내 시선을 피했고,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김승범은 내 표정을 확인했는지 한층 유들 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뭐 사용자고 부랑자 관계니 은혜 운운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피차 쓸데 없는 싸움은 피하자 이거지. 솔직히 이년 놈들을 잡느라 우리도 피해가 아주 없지는 않거든. 우리는 애초에 목적 달성해서 좋고, 너희는 손 더럽히지 않고 꼬리 처리해서 좋고. 싸움을 원한다면 말리지는 않겠어. 하지만 서로 이러는 게 누이 좋고 매부 좋잖아. 그러니 이만 물러나자고.” “으음.” 나는 침음성을 흘리며 살짝 검을 내렸다. 김승범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고, 최주현은 갈등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서서히 열리는 게 보였다. “속지 말아요! 이 남자와 함께 있는 부랑자들, 그렇게 크게 다치지 않았어요. 기껏해야 한두 명. 거의 압도적 일만큼 순식간에 당했어요. 가서 절대 경계를 풀지 마시고…으윽!” 최주현은 말을 매듭 지을 수 없었다. 김승범이 다시금 그녀에게 발길질을 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몸을 웅크리는 그녀를 보며 그는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가련하고 처량해, 나는 이쯤에서 꿍짝을 맞춰주기로 했다. 더 이상 상황을 끌어도 콩트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만 하지. 부랑자.” 철컥! 나는 내렸던 검을 다시 들어, 힘주어 겨누었다. 신나게 발길질을 하던 김승범은(여담이지만, 가짜로 때리는 게 아니었다. 아마 평소에 김승범이 최주현한테 많은 감정이 있었던 것 같았다.) 우묵한 눈동자로 나를 돌아 보았다. “뭐냐. 그 검은. 서로 좋게 해결하기로 한 거 아니었나.”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그러더군. 부랑자와는 그 어떤 타협도 하지 말라고.” “하. 이래서 0년차 햇병아리들은 안 된다니까. 융통성이 없어요. 융통성이.” 말실수 하나 발견. 굳이 0년차 사용자라는 말을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아무튼 이로서 나는 마음속에 있던 혹시나 하는 마음을 깨끗이 지울 수 있었다. 그렇다면 더욱 거리낄게 없었다. “네 말대로 저 사용자를 곱게 보는 건 아니야. 하지만 어쨌건…넌 확실히 <적>이다.” “뭐. 굳이 벌주를 마시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어. 후회하지나 말라…윽?!” 김승범은 어깨를 으쓱 인 후 허리를 굽혔다. 자신이 벗어 놓은 옷가지와 장비들을 챙기려는 모양 이었다. 막 그의 손길이 얇은 검에 닿으려는 찰나, 그의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이 쌍년이?!” 내가 다시 검을 겨누는걸 확인한 순간, 최주현은 잽싸게 두 팔을 뻗어 김승범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는 오버 액션을 하며 쿠당탕 넘어졌고, 최주현은 그 틈을 타 재빨리 무기를 집고 장비들을 크게 헤쳐 버렸다. “…하아.” 그리고 나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고작 다리를 잡았는데 크게 넘어졌다는 것과 그녀가 집은 검이 남성 사용자가 사용하는 무기 치고 극히 얇다는 것.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게 편할 것 같았다. 최주현은 비틀거리면서도 꿋꿋이 일어났고, 나 또한 그에 화답해 놈과의 거리를 서서히 줄였다. 김승범은 재빠른 몸놀림으로 몸을 일으키고는, 빠르게 뒤로 훌쩍 몸을 날렸다. 놈의 중요 부위가 덜렁이는 게 극히 보기 좋지 않은 풍경 이었다. 한동안 나와 최주현, 그리고 김승범 사이에는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이쪽은 무기를 들고 있고, 김승범은 무기는 커녕 나체로 서 있는 상태였다. 이윽고 이를 까득 깨문 그는, “제길. 두고보자!” 라는 상투적인 말을 남기고 수풀 안으로 사라졌다. 얼른 그를 뒤쫓으려는 자세를 취하자 곧바로 내 옷깃을 붙잡는 한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가지 마세요! 저것도 함정일지 몰라요. 분명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도망 쳤을 거에요.” “…흠.” 그녀의 외침에 나는 주춤하고는, 막 달리려던 자세를 다시 풀었다. 이대로 들어가면 확실히 놈들의 계획대로 일 텐데, 왜 막은 걸까.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불안한 얼굴로 자신의 몸을 가리고 있는 최주현을 보며 비아냥 거렸다. “쯧쯧. 참으로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그러게 왜 따라오셔서….” 조금은 노려보는듯한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하자, 최주현은 할 말을 잃은 얼굴로 입을 달싹였다. 그리고 정말로 후회한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윽고 거의 주저 앉다시피 한 그녀는 내게 거듭 사과의 말을 건네며, 한 손으로 입을 막고 오열 했다. 그리고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처음부터 자신이 저지른 일을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 했다. 막 강간 당한 여성 치고는 참으로 있을법한 태도였다. 하루하루가 고단한 삶. 그 와중 새로 뮬에 들어온 사용자를 보게 되었고, 나날이 갈수록 달라지는 장비들에 나쁜 마음을 먹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몰래 우리들이 뒤를 밟던 도중 자신들을 뒤따라 오던 부랑자 무리들에게 당하고, 다른 동료들은 전부 죽고 자신만 살아 남아 부랑자들의 성욕 처리 도구가 되었다는 것까지. 최주현의 말을 들으며 나는 조금 감탄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나를 이곳으로 유인한 놈과 이 계획을 짠 놈은 다른 놈일 게 분명할 것 이다. 진심으로 자신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계획을 잘 짤 수는 없을 테니까. 확실히 고연주의 말대로 놈들 중에는 제법 신중한 놈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우리들을 바로 덮치는 게 아니라, 혹시라도 있을 성과(유적 등)도 노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만일을 대비해 최주현을 슬쩍 끼워 넣으려고 했을 것이다. 물론 그녀를 이대로 버리고 갈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냥 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해서 0년차 사용자의 인정에 기대는 계산을 했을 것이고. 아마 내가 이대로 그녀를 버리는 순간 나는 돌아가는 와중에 분명히 습격을 받을 테지. 거짓 속에 진실을 섞었고, 진실 속에 거짓을 섞었다. 각본은 제법 잘 지었다고 칭찬하고 싶지만, 놈들이 간과한 게 몇 가지가 있었다. 그건 바로 상대가 나라는 것과 배우들의 연기력 미달. 즉 실수라고 할 수 있었다. 나야 산전 수전 공중전 시가전까지 겪은 10년차 사용자고, 더구나 음지에서 활동한 만큼 웬만한 꼼수는 척 보면 척 이었다. 그러나 만약 진짜로 0년차 사용자였다면, 아니 이 자리에 있는 게 내가 아닌 애들이었다면 정말로 모르는 일 이었다. “돈과 장비에 눈이 너무 멀어서요. 흑흑. 그런데 동료들은 전부 죽었고, 남은 장비라고는…어엉….” 그녀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애처로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나는 구슬피 우는 최주현을 물끄러미 보다가, 한층 누그러든 얼굴로 천천히 다가섰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오랜만에 건강한 몸, 건강한 정신으로 뵙게 되었습니다. 아직 완전히 나은건 아니지만, 거의 다 나았습니다. 하하하. 어제까지만 해도 몸이 아파서 굉장히 우울 했는데 오늘은 기분이 한결 편안하고 좋네요. :) 휴. 저는 아무래도 조금 천천히 쓰는게 적성에 맞는것 같습니다. 일부러 빨리 쓰니까 뭔가 불만족스러운 기분을 떨칠수가 없네요. 그렇다면 전개가 느려지는게 문제인데, 해답은 분량을 늘이거나 연참이겠죠. 네. 그런만큼 오늘 토요일은 한편을 더 올리도록 해보겠습니다. 이놈들과의 문제를 얼른 마무리를 짓고 동굴로 들어가야 겠지요. 하하하. 그 동안 많은 응원, 격려 코멘트 달아 주신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덕분에 많은 힘을 얻을 수 있었고, 빠르게 나을 수 있었던것 같습니다. 어서 이 환절기가 지나가기를 바라며, 독자분들도 모두 항상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PS. 불타는 금요일 + 토요일 새벽 입니다. 야호! PS2. 제가 아픈 동안 수많은 쪽지가 와 있었습니다. 중간중간 답변하기 곤란한게 많아, 답신에 시간이 걸리는 상황 입니다. 현재 2/3정도 남았으니 어느 하나 빠짐 없이 차례대로 답신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 PS3. 뜰에 <고장난선풍기>님의 캐릭터 팬 아트들이 계속 업데이트 되고 있습니다. 최근 고연주 설산 버전, 김한별, 세라프가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한번 구경 오시고, 감상평 달아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 『 리리플 』 1. 쿠로시온 : 오오. 1등 축하 드립니다. 컴퓨터를 새로 사셨군요! 축하 드립니다. 그저 부러울 뿐 이네요. 흐흐흐. 2. 사람인생 : 이런. 5일만에 6Kg. 이거 너무 심각한데요. 아픈게 죄라니, 그런 서운한 말씀 마세요. 지금 사람인생님이 하실 일은 병원의 치료에 잘 따르시고, 푹 쉬시는게 최우선 일 입니다. 조만간 건강한 모습으로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__) 3. 자칭청순파 : 안녕하세요. 저는 자칭미남판(퍽퍽!) 죄송합니다. 하하하. 부디 이번회도 재미있게 감상해 주세요. 4. 뒷목 : 그리고 뒷목을 잡게 되겠죠. 음음. 하하. 농담 입니다. :) 5. 오피투럽19 : NO.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조만간 이북 출판 계약은 할 것 같네요. :) 6. pgh21c : 하하. 미안합니다. 여유가 있을때는 연참을 하도록 해보겠습니다. '~' 7. Goksd : ㅋㅋㅋㅋ. Goksd님. 수현이가 “뜨끔.” 했다고 전해달라고 하네요. 8. zoara2 : 네? zoara2님의 코멘트는 못본걸로 하겠습니다. 안그래도 최근에 재입대 하는 꿈을 꿨거든요. 9. 천겁혈신천무존 : 작품에 관련된 질문이라면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 10. 지리산의늑대 : 그러지 말아 주셔요. 정말로 무섭습니다. ㅜ.ㅠ 세상에 가둬 놓고 글만 쓰게 하신다니….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44 / 0933 ---------------------------------------------- MenTal IllNess 최주현은 한동안 서럽게 울었다. 그러나 내가 위로도, 또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자 스스로 조금씩 울음을 그치기 시작했다. 점차적으로 잦아드는 울음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깐 동안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애초에 이곳에 들어 왔을 때 공격을 받거나, 아니면 뒤따라가서 함정에 빠지는 스토리를 예상 했는데. 하지만 놈들은 이렇게 한 명을 우리 쪽에 포함 시키겠다는 식으로 한 발 물러서고 말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아무튼 나 또한 대응 방식을 조금 변경하기로 했다. 아마 지금쯤 주변에서 쥐 죽은 듯 보고 있을 터. 그렇다면 되려 뛰쳐 나오게 만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최주현은 양 볼에 그득한 눈물 자국을 슥슥 지우고는, 목 메이는듯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냥 죽을 생각으로 있었는데, 도와주셔서 정말로 감사 드려요. 이왕 이렇게 살게 되니, 저도 사용자 이전에 한 명의 사람인지라 조금 욕심이 생기네요. 그러니 한 번만 더 보호를 해주시면 안될까요? 방금 전 부랑자들은 분명히 다시 습격해 올 거에요. 저와 일행들이 저지른 일은 정말 죄송하지만 허무하게 당한 동료들의 복수를 하고 싶어요.” 내가 곤란해하는 표정을 봤는지 최주현은 한층 애처로운 얼굴로 애걸했다. 그 말인즉슨 내 일행에 자신을 포함시켜 달라는 이야기였다. 당연히 그렇게 해줄 생각은 없었고, 해서 나는 그대로 최주현의 양 팔에 손을 얹었다. 최주현은 몸을 살짝 움찔거렸다. “사정은 딱하지만, 어떻게 보면 당신도 그 부랑자들과 똑같은 사용자 입니다. 그런 사용자를 함부로 일행에 받아 들이는 건 많이 곤란하네요.” “하지만 이대로 다시 혼자가 되면 저는 틀림없이 다시 습격을 받을 거에요. 아니면 몬스터들한테 변변한 저항도 못해보고 쓰러지겠죠. 염치 없는 부탁이라는 건 알아요. 그래도 최소한 부랑자들이 다시 왔을 때 한쪽에서 거들기만 이라도 하게 해주세요. 조금이지만 놈들의 정보도 알고 있는 게 있으니, 분명히 도움이 될 거에요.” 대본을 외우듯 줄줄 읊는 그녀를 보며 나는 앞으로 한걸음 더 옮겼다. 깊은 밤. 깊은 산 속. 그리고 나체로 있는 여성 사용자. 방금 전까지 정사를 벌인 탓인지 미묘하게 더운 열풍은 여태껏 공터를 맴돌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 시선을 교환하다가 나는 찬찬히, 위에서 아래로 그녀의 얼굴과 몸을 살폈다. 최주현의 얼굴은 제법 예쁘장하다고 볼 수 있었다. 현대에서는 충분히 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을법한 미모였다. 잠시 동안 품평하듯 쳐다보던 나는, 조금 비열하게 들릴 수도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글쎄요 굳이 그런 것들이 아니라도, 당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있을 것 같은데요.” 히죽 웃으며, 그녀의 보드라운 살결을 쓸어 내린다. 뜻밖에도 최주현의 얼굴 표정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이런 행동들도 계산 안에 두고 있었던 건가. 그녀는 곧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눈을 슬쩍 내리 깔았다. 그리고, 조그마한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이미 버린 몸. 보호만 확실히 해주신다면…. 좋아요. 마음대로 하세요.” 그녀는 말을 끝내고 가렸던 팔을 천천히 풀어 내렸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과 도드라진 둔덕이 눈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미안한 말 이지만, 나는 최주현을 품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애초에 영입할 생각 이었다면 당장에 옷이라도 걸쳐줬을 것이다. 이쯤에서 슬슬 시작하자는 생각에 나는 상냥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네요. 싫어요.” “네?” “싫다고요. 너 같은 더러운 몸 안으면 내 남성한테 미안하잖아요. 그러니까 안고 싶지 않아요.” “그, 그게 무슨. 아니, 그럼 어떻게.” 최주현은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거렸다. 나는 쓸어 내리던 보드라운 손을 그녀의 양팔에서 멈추고, 세게 움켜 쥐었다. 그녀는 아픔을 느끼는 듯 미약한 신음 소리를 흘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귓가에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바로 이렇게.” 말을 끝내고 곧바로 팔을 잡은 손에 크게 힘을 주었다. “뿌지직!” 무언가 거칠게 뜯어지는 소리와 동시에 외마디 비명이 공터를 크게 울린다. 최주현은 갑작스러운 해체에 균형을 잡지 못한 듯 몸을 휘청거렸다. 나는 양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툭 떨어트리고는 그녀의 머리채를 붙잡아 똑바로 세워 주었다. “아아…. 흐아악. 흐아아악!” “주, 주현아!” 최주현의 고통에 찬 비명 소리가 울리는 것과 동시에 수풀 안에서 검은 인영이 훌쩍 뛰어 나왔다. 예의 보았던 김승범이 다급한 얼굴로 튀어 나오는 게 보였다. 아마도 내가 따라가지 않자 가는 척만 하고 주변에 숨어 있었던 것 같았다. 김승범은 경악에 찬 얼굴로, 그리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너, 너 이 자식!” “어. 다시 왔네. 부랑자.” “무슨 짓이야! 이 개 자식아!” “응? 아. 네가 그랬잖아. 얘가 우리들 뒤 따라온 애라며. 그래서 죽이려고 이랬지. 왜?” “아파! 아파아! 도와줘! 승범아 도와줘어어어! 아아아악!” 능글능글한 얼굴로 묻자 김승범은 일순 말문이 막힌 얼굴로 나를 바라 보았다. 그러나 최주현의 비명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이내 이를 빠득 깨물며 으르렁거렸다. “놈…! 좋은 말로 할 때 주현이를 이리 내놔라. 조금이라도 더 손을 대는 순간, 네놈을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주마.” “뭐야. 강간하던 놈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설마 그새 떡 정이라도 든 거야?” “잔말 말고 당장 그녀를 이쪽으로 보내라. 크윽!” 김승범은 정말로 단단히 화가 난 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라 있었다.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 이고는 순순히 대답했다. “알았어. 줄게.” 나는 천천히 최주현의 목으로 손을 옮겼다. 내 손이 이동할수록 놈의 얼굴에 이상함이 물들었다. 그리고 사슴 같은 그녀의 목이 손아귀에 잡히는 순간, 나는 정지연에게 그랬던 것처럼 힘차게 주먹을 쥐었다. 내 근력 능력치 94 포인트를 전부 동원해서. 카득, 카드득! “껙! 께엑!” “자. 여기.” 툭. 데구르르. 부러지다 못해 아주 작살이 난 목덜미를, 나는 마치 볼링을 하듯 머리를 굴려 놈에게로 보냈다. 목에서 흘러나온 피는 가느다란 혈선을 그리며 풀 밭을 데굴데굴 굴렀다. 김승범은 굴러오는 머리를 멍하니 보다가, 이내 크게 충격을 먹은듯한 얼굴로 서서히 무릎을 꿇었다. “주, 주현아.” “이름이 주현이 였구나. 이름 한번 예쁘네.” “아, 아니야 이건. 이럴 리 없어. 주현아. 주현아? 대답해 주현아. 주현아. 주현아…? 주현…주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연신 여성의 이름을 부르던 김승범은, 곧 처절하게 절규하며 크게 고함을 질렀다.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는걸 보니 곧 나에게 달려들 모양새.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차분히 검을 들었다. 오자마자 저 꽥꽥거리는 입에 검을 쑥 찔러줄 생각 이었다. 그때였다. “경거망동 하지 마라. 김승범.” 막 내게로 달려 오려는 김승범을 제지하는, 허스키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날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바위, 나무, 수풀 등 이곳 저곳에서 하나씩 몸을 드러내는 인영들이 보였다. 드디어 메인 이벤트의 등장 이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렇다면 김승범과 최주현을 합쳐 총 7명이라는 소린가. 아까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키면서 어느 정도 파악을 해두었기 때문에,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대신 나는 놈들의 클래스와 능력치를 빠르게 훓어 보았다. “흠.” 별거 없군. 나름 연차와 능력치가 되는 놈들이 있었지만, 딱 그 뿐 이었다. 엄밀히 말해서 내 상대가 되는 놈들은 없었다. 해서 나는 한층 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무신 차승현이 800명의 사용자를 앞에 두었을 때가 이런 느낌 이었을까. 내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김승범은 온 몸을 바동거리며 자신을 붙잡은 손길들을 뿌리치고 있었다. “저놈이, 저놈이 주현이를!” “알아. 아무래도 우리의 계획이 간파 당한 것 같다. 그러니까 일단 진정해. 어차피 놈은 우리에게 포위돼 있어.” 눈 앞의 사용자는 푸근한 인상을 갖고 있었지만, 한구석에 어두운 그늘을 갖고 있었다. 그의 다독거림을 받은 김승범은 한번 숨을 크게 몰아 쉰 후 거칠게 몸을 일으켰다. 지금 보니 어느새 녀석은 간단한 옷과 본래 자신의 무기를 장비하고 있었다. 처음의 울부짖던 눈동자가 살기 어린 시선으로 바뀌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차분히 주변을 둘러 보았다. 검사 한 명. 궁수 한 명. 도끼 전사 한 명. 마법사 한 명. 전투 사제 한 명. 일반 사제 한 명. 지금은 사망한 최주현까지 합하면 나름 괜찮은 캐러밴이라고 볼 수는 있었다. 이윽고 맨 처음 모습을 드러낸 마법사 사용자가 음울한 얼굴로 내게 말을 걸었다. “설마 우리들의 속셈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불침번을 바꿀 때 조금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런 꿍꿍이가 있었군.” “후후. 네 계획도 제법 괜찮았어. 배우들의 연기력이 문제였지만.” “가증스러운 놈. 웬만하면 새로운 성과를 발견할 때까지 그냥 놔두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군. 어디 한번 우리에게 붙잡히고서도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보겠다.” “붙잡는다고? 처참하게 죽이는 게 아니라?” 음울한 놈의 말에 김승범이 날카롭게 반문하자, 그는 음침한 목소리로 키득 웃었다. 아무래도 김승범만 제외하고 다른 놈들은 나름 태연한걸 보니 확실히 부랑자가 맞기는 한 것 같았다. 그리고 김승범은 최주현의 연인 비슷한 관계일 테고. “걱정 마. 결국에는 다 죽일 거니까. 하지만 그 전에 이놈을 붙잡고 곧바로 다른 놈들을 덮친다. 남자 놈들은 모두 죽이고, 여자들은…. 흐흐흐. 전에 도시에서 봤는데 제법 괜찮은 년들이 있더군. 복 받은 놈들이야.” “웃기지마.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주현이는 내…. 크윽. 난 바로 죽여야겠어.” “자자. 진정하라고.나라고 함께 하던 동료가 죽었는데 아주 감정이 없는건 아니야. 일단 이놈 사지를 잘라놓고, 놈이 보는 앞에서 그년들을 범하는걸 보여주는 거야. 그리고 마지막에서는 눈 앞에서 하나씩 목을 잘라주는 거지. 어때?” 이 말에는 꽤 솔깃했는지, 김승범은 얼굴을 찌푸린 상태로 몸을 멈췄다. 그리고 이내 한두 번 고개를 주억이고는 이를 우드득 갈았다. “으득. 좋아. 그것도 나쁘지 않군. 아니, 아주 좋은 생각이야. 똑같이 되돌려주마.” 김승범이 조금은 누그러든 태도로 검을 들자, 옆에서 가만히 구경하던 놈들이 차례대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미리 말하는데, 그 앵앵거리는 사제 년은 내 꺼다. 하면서 엉엉 울 것 같은 게 딱 내 취향이거든.” “난 그 기 세 보이는 입담 좋은 년. 내 아래 깔렸을 때 뭐라고 울부짖을지 궁금해. 낄낄.” 참고로 말하자면, 6명중 5명이 남자였다. 조용히 활을 들고 있는 사용자만 여성 이었는데 이 여성이 바로 우리를 추적한 궁수 사용자인 듯 싶었다. 다른 남성 사용자들이 여유롭게 음담패설을 주고 받는 동안, 그녀는 두건을 얼굴에 감고 시종일관 조용하게 있었다. 아무튼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하는 놈들을 향해 나는 천천히 검을 들었다. 대충 배우도 다 나온 것 같으니 슬슬 막을 내릴 때가 된 것 같았다. 모든 게 드러난 영화는 더 이상 재미가 없으니까. 내가 검을 드는 모습을 봤는지 리더로 보이는 마법사 사용자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꼴에 허세 부리기는. 알고 있었으면서 혼자서 이곳으로 온 게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이번 기회에 홀 플레인의 무서움을 단단히 알려주도록 하지. 그럼 얘들아. 적당히 손좀 봐줘라. 죽이지만 않으면 돼.” “크아아악!” 마법사의 말이 끝나는 순간 김승범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어떠한 자세도, 기술도 없는 능력치 우위의 자신을 바탕으로 하는 마구잡이 돌격. 멍청한 놈. 나는 콧방귀를 뀌고는 틈을 맞춰 검을 아래로 내리 그었다. 놈은 자신의 검을 위로 들어 올리며 안쪽으로 파고 들었고, 당연히 내 검은 놈이 들어 올린 검을 자르고 지나가 머리를 깨끗하게 두 쪽을 내 주었다. 김승범은 끽 소리도 못하고 땅으로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그 순간 자신만만하게 구경하던 부랑자들 사이에서 커다란 동요가 일었다. “김승범! 제길! 커트 마법인가! 마법 무구를 갖고 있었던 건가…. 당황하지 마라! 함부로 들어가지 말고 내 방어 마법을 기다려! 수적 우위를 살리란 말이야!” “아니, 커트 마법 아닌데.” 나는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살짝 왼쪽으로 틀었고, 그와 동시에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화살 한대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칠흑의 숲에서 전갈들에게 했던 것처럼, 앞으로 날아가는 화살에 살며시 검을 스치게 만들었다. 앞으로 쏘아지던 화살은 내가 힘을 흘린 곳으로 따라 완만한 곡선을 그렸고, 끝에 멍하니 있던 사제의 목을 보기 좋게 꿰뚫었다. 좋아. 명중이다. “세 명 처리. 남은 건 네 명인가?” “미친. 혀, 현승아!” “안소연!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야!” “아, 아니! 나, 나는 분명히….”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세 명을 연달아 쓰러뜨렸다. 그제서야 부랑자들은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한 듯 번쩍이는 얼굴들로 무기를 들기 시작 했다. 그러나 더 이상 봐줄 생각은 없었다. 놈들이 전열을 정비하기 전에 최소 한두 놈은 더 끝낼 수 있겠지. 생각을 마친 나는 마치 피에 굶주린 짐승처럼 눈 앞의 마법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미치겠네요. 오늘 12시 30분에 약속이 있는데, 아직 집에서 나가지도 못했습니다. 지금 친구한테 전화 오고 난리 났네요. 친구 녀석이 주선자 거든요. 30분은 늦는다고 했는데, 가자마자 까이지만 않으면 다행일것 같습니다. 하하하. 죄송합니다. 이번회 리리플은 쉬고, 145회에 5개씩 절반으로 나누어 하겠습니다. 얼른 나가봐야 겠네요. ㅋㅋㅋㅋ. PS. 퀴즈퀴즈! 이번회 소제목과 내용의 연관성을 알아 맞추시는 분이 계시다면, 일요일 한편 더 연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정답자 분께는 앞으로 10회 동안 무조건 리리플을…. :) 0145 / 0933 ---------------------------------------------- MenTal IllNess < After > “나 참. 일부러 그런 거에요? 나보고 죽이라고?” “뭐래. 그나저나 정말 요란하게도 했네요. 설마 이렇게까지 할 줄은….” “실망했냐고요? 음~. 설마 그러겠어요? 갑자기 다른 모습을 보이니까 깜짝 놀랐다 이거죠. 말했잖아요. 당신 탐험 나온 이후로 처음으로 웃었다고.” “솔직한 마음? 호호…. 그래요. 솔직히 말하면 좀 흥분한 것 같네요. 아니, 아주 많이.” “역시. 허세만 부리는 마음씨 좋은 샌님은 아니었네.” “어쩔 거에요? 오늘 밤 잠 자기는 글렀네. 혼자만 실컷 재미 보고.” “흥분 했다고 말했잖아요. 숙녀한테 부끄러운 말 자꾸 하게 할래요.” “못 믿겠으면 내 아래 속옷 좀 만져 보시던가? 축축한 게 지금 흠뻑 젖은 것 같거든요.” * 내 앞에는 총 두 명이 있었다. 마법사 사용자 한 명과 도끼 전사 사용자 한 명이 보였다. 갑작스러운 돌격임에도 불구하고, 마법사가 한발 뒤로 빠지고 도끼 전사가 앞을 가로막는 걸로 보아 아주 병신들은 아닌 것 같았다. “───. 실드(Shield).” 그 순간, 허스키한 목소리의 영창과 동시에 전사 사용자의 몸에 반투명한 막이 생성 되었다. 마법을 펼치기 전 다다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의외라면 의외였다. 아마도 정하연처럼 질속(疾速) 영창을 익힌 듯 싶었다. “흐랴앗!” 확실히 지금 내가 들고 있는 검에 절삭력(Cutting Force)을 높이는 주문이 걸려 있다면 똑같은 마법 효과인 실드로 상쇄할 수는 있다. 도끼 전사는 마법사의 실드를 믿는지 방어는 도외시하고 있는 힘껏 도끼를 치켜 들었다. 문제는 내 검은 일반 철검에 불과하고, 절삭력(Cutting Force) 마법이 아닌 <검술 전문가(Sword Specialist)의 권능>이라는 것. 놈의 도끼가 휘둘러지기 전, 나는 궁신탄영(弓身彈影)의 수법으로 한번 더 땅을 박찼다. 급격히 거리를 줄이는 나를 보며 도끼 전사는 눈을 크게 떴지만, 휘두르는 도끼에 더욱 힘을 주는 것으로 화답하는 것 같았다. 내가 완전히 근접 거리에 들어 가고, 위에서 싸늘한 도끼의 날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그 상태로 내 검 끝이 방패 마법에 닿았다. 전사는 의기양양한 웃음을 흘리며 도끼를 내려 찍었다. 그리고…. 파각! 파가각! 내가 찌른 검은 그대로 방패 마법을 찢어 발기고 안으로 짓쳐 들어갔다. 설마 방패 마법을 깨뜨릴 줄은 몰랐는지 놈의 눈에 경악 어린 빛이 서렸다. 그게 놈이 살아서 마지막으로 지은 표정 이었다. 쭉 들어간 검 끝은 도끼 전사의 목젖을 깔끔하게 꿰뚫었으니까. “께륵. 께르륵.” 도끼 전사의 입에서 보글보글 피 거품이 일어나고, 몸을 쪼개듯 내려오던 도끼는 방향을 잃고 애꿎은 대지에 박혀 들었다. “홀리 스트라이크(Holy Strike)! 개 자식! 죽어라!” 도끼 전사의 몸이 채 허물어지기도 전에, 뒤에서 묵직하게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이 들렸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하얀 빛을 내뿜는 메이스와 험상궂게 일그러진 전투 사제(Monk)의 얼굴이 보였다. 확실히 이놈들은 부랑자들이 맞는 것 같았다. 처음 김승범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용자들은 동료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틈을 노리고, 나를 쓰러뜨리는데 주력할 뿐. 그러나 능력치 <민첩>은 1회차 시절에도, 그리고 지금 2회차 에서도 내게 특화된 능력치였다. 먼저 선공을 가했다고 해도 이를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는 게 바로 민첩 능력치. 나는 재빨리 검을 수평으로 세우고, 그대로 몸을 강하게 회전 시켰다. 석둑. 부드러운 육질과 딱딱한 뼈를 자르고 지나가는 생생한 느낌이 검신을 타고 들어 왔다. 가슴 부근이 절반으로 동강난 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땅으로 떨어지는 놈의 상단이 보인다. 내 민첩 능력치는 거의 극에 다다른 98. 따라서 근거리 계열들은 속도를 비약적으로 높이거나, 거리를 굉장히 줄이거나, 내가 선 방어를 하지 않거나, 아니면 다방면으로 공격하지 않는 이상 내게서 선공을 빼앗을 수 있는 사용자는 어지간해서는 없을 것이다. 이로서 처음 최주현을 포함 총 다섯 명을 처리 했다. 이로서 남은 부랑자는 두 명. 음침한 목소리의 마법사 사용자와 두건을 두른 여성 궁수 사용자.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가고 30초도 지나지 않아 절반을 넘는 인원을 격살한 것이다. 나는 가까이 있는 마법사를 먼저 처리하기로 마음 먹고 막 몸을 돌렸다. “───. ───. ───.” 어느새 마법사는 내게서 한층 더 거리를 벌린 상태였다. 뭔가 대단한 마법을 준비 하는지, 양 손에는 수인까지 동원한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별로 두려운 건 아니었지만 괜히 여유를 부리다가 뒤통수를 맞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해서 다시 한번 궁신탄영(弓身彈影)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마법사의 눈이 번쩍 뜨이는 게 보였다. 이래서 질속(疾速) 영창을 익힌 마법사들이 싫어. “───. ───. ───. 불꽃의 창(Flame Spear)! 급속 연발(Rapid Fire)!” 주문을 외움과 동시에 이글거리는 불꽃이 붙은, 길쭉한 창 모양의 마법이 나를 향해 쇄도했다. 한 발, 두 발, 세 발, 네 발, 다섯 발, 여섯 발. 오호. 마법 회로 응용도 익혔었나. 저놈이 리더처럼 보이는 이유가 있었군. 나는 짧은 감탄성을 흘리며 상단으로 검을 들었다가, 이내 다시 내리고 말았다. 시험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방어를 포기한걸 봤는지 놈이 광소를 터뜨리는 게 보였다. “크하하하! 그래 포기해라! 그만 죽어라!” 동시에 허공으로 떠오른 하나의 메시지. 『전장의 가호(Rank : EX)가 발동합니다.』 펑! 퍼펑! 굉음과 함께 내 몸에 작렬하는 불꽃의 창(Flame Spear)들. 자욱한 안개 연기가 이곳 저곳에서 터져 나오고 튀어 오른 불똥으로 주변의 풀들은 까맣게 타 들어간다. 확실히 아까 제 3의 눈으로 본 마력 능력치가 딱 90이었나? 아니 89였던가. 어쨌든 묵직한 충격이 내 몸을 뒤흔드는 게 느껴졌다. “크크크크. 드디어 해치웠다. 아주 제대로 들어갔어. 안소연! 어디 네가 한번 들어가서 확인해 봐라! 크크크크.” 저리 좋을까. 놈의 웃음 소리가 더 듣기 싫어, 나는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섰다. 자욱한 안개 연기를 헤치고 나서자 신나게 웃던 마법사의 웃음 소리가 뚝 끊기는 게 들렸다. 이윽고, 허공으로 여러 메시지들이 떠오르기 시작 했다. 『행운 능력치 88…. 감소 방어 판정. 전장의 가호 EX 랭크 확인. 일부 방어 판정으로 상향 합니다. 사용자 마력 능력치 96 확인. 항마 능력의 부재로 미치는 영향은 감소합니다. 염화 계열 마법 입니다. 체내의 화정(火正)이 반응 합니다. 완전 방어 판정으로 상향 합니다.』 역시. 아마 지금쯤 놈에게도 “완전 방어 판정.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습니다.” 라는 메시지가 떴겠지. 예상대로 허공을 멍하게 응시하던 마법사는 이내 더듬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뭐, 뭐 씨발? 와, 완전 방어? 미친! 말도 안 돼! 어떻게 0년차 사용자가 항마력을? 아니 설령 가졌다고 해도. 어. 오, 오지마! 으아아악!” “항마력 아닌데.” 나는 담담히 내뱉으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마법사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났지만, 충격이 심한지 내게 금방 붙잡히고 말았다. 입을 헤 벌린 채 멍한 얼굴로 응시하는 놈을 보며, 나는 가볍게 멱살을 쥐고 끌어 올렸다. “어, 어버버.” “뭐. 누가 보는 앞에서 애들을 범하고, 누구를 사지를 잘라 죽인다고? 아. 안소연이라고 했나. 너 활 내려라. 활 쏘는 순간 아까 걔처럼 팔을 뜯어 버릴 테니까. 조용히 있으면 곱게는 죽여줄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 했지만, 여성 궁수 사용자가 흠칫 물러나는 기척을 느꼈다. 나는 그대로 검을 들어 놈의 목을 쳐버리려다가, 반짝 좋은 생각이 들어 양 팔로 검을 휘둘렀다. 마치 썩은 통나무를 베듯 놈의 양 팔이 피 분수를 뿜으며 아래로 툭툭 떨어지는 게 보였다. “흐아아! 흐아아아!” 마법사는 쉰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이제 좀 낫네. 아까 전 거드름을 피울 때는 진짜 꼴 보기 싫었는데. 나는 남은 두 다리마저 깔끔하게 자른 후, 그대로 멱살을 놓았다. 대지를 나뒹구는 팔과 다리들 사이로, 몸통만 남은 놈의 얼굴이 보였다. “아아악! 아아아악! 살려줘어어어! 아아아아악!” “앵앵거리는 사제 년은 내 꺼? 하면서 울 것 같다고? 입담 거친 년은 내 꺼? 어떤 소리로 울부짖을지 궁금하다고?” 물론 그것들은 이놈이 말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단초를 제공한 놈 이니까. 이거 은근히 기분 나쁘다. 내가 금이야 옥이야 어떻게 고생하고 키운 애들인데. 나는 괜히 속이 상해서 발을 들어 놈의 입술을 짓뭉개 버렸다. 조금 감정이 들어갔는지 투둑 거리는, 이빨이 부러지는 느낌들이 걸렸다. “에에에! 으여어(죽여줘)! 아오애오(잘못했어)! 으여어어어어(죽여줘어어어)!” 마치 어린 아이처럼 울부짖는 놈을 보며 마음속을 채우던 답답함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뒤에서 사늘한, 마치 쏘일 것 같은 살기가 느껴졌다. 나는 한숨을 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분명 활 쏘지 말라고 했는…. 응?” 피잉! “크엑!” 그녀가 쏜 화살은 나를 지나쳐, 고통에 짖는 마법사의 목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애초부터 나를 노린 게 아니었다. 나는 조금 아쉽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한 마음에 천천히 몸을 뒤돌아 보았다. 그곳에는 어느새 두건을 풀고 나를 매섭게 쏘아 보는, 귀여운 여자 아이 한 명이 나를 조준하고 있었다. 성인은 아닌 것 같다. 얼굴에 아직 젖 살도 빠지지 않았고, 상당히 앳되보이는 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하긴 홀 플레인에 무조건 성인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저렇게 어린 나이에 부랑자들과 함께 행동할 수 있다는 소리는 나름대로 심지가 굳고 지닌 실력도 제법 높다는 소리였다. 나는 한층 호기심이 일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꼬마야. 활 내려 놓으렴.” “…….” 대답은 없었다. 대신, 나에 대한 적의를 활활 불태우며 시위를 당긴 활에 더욱 힘을 주는 것만 보일 뿐 이었다. 이윽고 그녀의 주변으로 무시할 수 없는 마력이 모여들고, 시위에 걸린 화살대 전체에 노란 빛이 점멸하기 시작 했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면서 곧바로 검을 상단으로 들었다. 이 능력은 분명…. “조준선 정렬(Fine Sight).” 앳된 목소리가 귓가로 들어오고 그와 동시에 깜빡이던 노란 빛은 화살촉 끝으로 동그랗게 모여 들었다. 그리고, 안소연은 곧바로 시위를 튕겼다. 울분에 찬 목소리와 함께. “붕괴의 화살(Collapse Arrow)!” 나는 빠르게 마력을 일으켜 내게로 날아드는 화살을 바라본 후, 검을 정밀하게 움직여 화살촉 끝과 내 검날의 접점을 정확하게 계산했다. 설마 궁수 계열 소멸의 고유 능력 중 하나인 파사(破邪)의 화살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불어 조준선 정렬로 그 힘을 한 점에 모으다니. 아마 1회차 시절 이때 당시의 나였다면 화살을 스치는 순간 온 몸이 산산조각 나버릴 것이다. 콰드득. 콰드드득. “흐읍!” 까가강! 까가가강! 이윽고 화살촉과 내 검 끝이 맞물리며 듣기 싫은 쇳소리가 공터를 가득히 울렸다. 주위를 감도는 공기가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 동안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는지 조금 이해가 되는 기분 이었다. 일반 화살로는 타격을 줄 수 없고, 그렇다고 붕괴의 화살을 쓰자니 주변 동료들이 휘말릴까 걱정이 됐을 것이다. 아니면 초반에 자신의 오발로(사실은 오발이 아니지만.) 사제를 어이없게 잃은 게 마음에 걸렸거나. 어느 쪽이든 부랑자 답지 않은 행동들 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건 놀라운 거고, 아무튼 지금은 그렇게 목숨에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내가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 뒤통수를 들이대면 모를까. 처음에 모든걸 붕괴시킬 듯 파고 들었던 화살은 마력을 가득 먹인 검과 부딪치면서 점점 힘을 상실 했고, 이내 폭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나는 가볍게 화살을 반으로 잘랐다. 반으로 갈라진 채 힘 없이 떨어지는 화살을 보며, 안소연이 부들거리는 다리로 주저 앉는 게 보였다. 믿겨지지 않기도 하겠지만, 아마 방금 전 일격에 혼신의 힘을 담은 것 같았다. 나는 일단 호기심을 해결할 생각으로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능력치는 고만고만 했는데, 이번에는 한층 자세하게 살펴볼 생각 이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안소연(3년차) 2. 클래스(Class) : 일반 궁수(Normal Archer Expert)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Babara) 4. 소속 단체(Clan) : 중도(中道) 5. 진명 · 국적 : 파사(破邪) - 제 5번째의 날개를 받은 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18) 7. 신장 · 체중 : 165.8cm · 47.2kg 8. 성향 : 중용 · 방황(Neutral · Wander) [근력 64] [내구 62] [민첩 88] [체력 70] [마력 78] [행운 82] < 업적(0) > < 고유 능력(1/1) > 1. 붕괴의 화살(Collapse Arrow)(Rank : B Zero) < 특수 능력(1/1) > 1. 조준선 정렬(Rank : A Zero) < 잠재 능력(3/3) > 1. 통찰(洞察)(Rank : B Plus) 2. 추적술(Rank : A Zero) 3. 천리안(Rank : C Zero) 근력과 내구가 조금 에러이긴 해도, 궁수 사용자인 만큼 높은 민첩으로 커버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클래스와 특수 능력, 그리고 잠재 능력의 조화가 아주 좋았다. 붕괴의 화살의 랭크가 아쉽기는 하지만, 일단 고유 능력이 있다는데 의의를 두어야 하니까. 아무튼 3년차면 15살에 홀 플레인으로 들어 왔다는 소린데 그렇게 어린 나이, 그것도 여자애가 여태껏 살아 남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능력치는 엄청나게 좋다고 볼 수 없지만, 전체를 포함해서 말 한다면 과장 조금 보태고 흔하게 볼 수 있는 사용자는 아니었다. 나는 휘파람을 불며 그녀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안소연은 아까 전 당차던 얼굴은 온데간데 없고, 겁에 질린 얼굴로 발을 땅으로 밀며 물러서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하하. 오늘 아주 죽는줄 알았습니다. 집에 들어온게 저녁 7시 인데, 엄청 힘들었어요. 강남역에 왜 그렇게 사람이 많은지. 스파게티를 먹으러 갔는데 무려 40분이나 기다렸다죠. 뭐 맛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나름대로 즐거운 하루 였습니다. 이로서 부랑자들과의 사건도 거의 일단락 지었네요. 그리고 많은 코멘트 달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답은, 리리플에서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네분이 정답에 비슷하게 말씀해 주셨네요. 비슷한 분들도 계시지만 제 생각에 최대한 자세하게 쓰신 분을 선정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PS. 제가 지금 여성 캐릭터 인기 투표를 안 하는 이유. 한별이 등장 시키고 할 생각 이어서요. 지금 하면 한별이가 가장 인기가 낮을것 같아서…. ㅜ.ㅠ 『 리리플(143회) 』 1. MT곰 : 1등 축하 드립니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쪽지가 밀려 있어서 보내주신 쪽지에 답장도 못해드렸네요. 현재 절반정도 답신을 보냈으니 곧 답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 합니다! 2. 가한나 : 하하. 감사 합니다. 저 또한 독자분들이 제 작품을 읽어주시고, 추천과 코멘트들을 달아 주실때 가장 행복합니다. 고연주는 후후.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절규의 동굴> 파트가 끝난 후 처분을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3. 자만고양이 : ㅋㅋㅋㅋ. 한 줄 이셨지만 매우 강렬한 코멘트 셨습니다. 맞아요. 푹 찌르면 그만 입니다. 4. 여긴마굴이여 : 맞아요 맞아요. 이런놈들은 달고 다니면 좋지 않습니다. 깨끗하게 죽이는게 마음 편하죠. :) 5. 파카사리 : 생일 축하 드립니다! 맛있는건 많이 잡수셨는지요? 토요일이 생일이시라 부럽네요. 저는 주말이 생일인적이 거의 없어요. ㅜ.ㅠ 『 리리플(144회) 』 1. 카지매스 : 1등 축하 드립니다. 하하하. 이러쿵저러쿵 보다는, 아무래도 상대가 상대인 만큼 당연하게 넘어갈듯 싶습니다.(스포 주의!) 인물은 다음회에 나오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 2. juan : 정신 질환과 폭주가 아주 조금 엇나갔습니다만 아주 틀린 말씀은 아니십니다. 그리고 정답 입니다. 조금 더 순하게 표현하면 <마음의 답답함>이 더 나을것 같네요. :) <일종의 이중인격(사람과 상황에 따라 성격이 다르게 변한다는 의미로.)에 가까울수도 있죠... 사실 수현이는 그동안 자기 본질을 감춰왔었으니까요...>와 <즉 정상인척 하고 있고(상기 내용과 동일)>는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리리플 10회 당첨 축하 드립니다! 3. 罰酒 + 고장난선풍기 : 罰酒님은 단 한줄로 제가 의도한 내용을 80% 맞추셨습니다. <병적인 행동.>이라기 보다는 10년 동안 피에 절어 있던 마음에 <익숙하지 않은 행동.>이라는 말이 더 맞을것 같습니다. 그리고 뒤에 고장난선풍기 님의 <꾹 눌러 참던것이 혼자적들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마음껏 풀어져서 피에 굶주린 짐승처럼 날뛴다 정도...>라는 말씀. 이 두 분의 코멘트는 각각 맞는 부분도, 틀린 부분도 있었지만 맞는 부분들만 조합하면 정답에 가장 가깝습니다. 축하드려요! 짝짝짝! :)(1등은 juan님이 가져 가셨습니다. ㅜ.ㅠ) 4. 열정을 : 뒤에 말씀하신 여자 친구와 관한 트라우마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소제목의 뜻을 가장 정확하게 풀이 하셨습니다. 저도 깜짝 놀랄 정도로요. 설마 맞추시는 분이 있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계셨네요. 축하 드립니다!(1등은 juan님이 가져 가셨습니다. ㅜ.ㅠ) 5. 사람인생 : 하하. 리리플 입니다! 3번은 앞부분까지는 맞으셨 습니다. <잔인하구...손익을 따지고..눈치가 좋구.. .>. 이 부분이요. 다만 상대방을 적이라고 판단한 순간, 강하든 약하든 아주 철저하게 짓밟습니다. 그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요. :) 아 그리고 작품은. 음. 노블 베스트에 있는건 거의 다 읽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한두개만 제외하구요. ^^ 그리구 쪽지는 순차적으로 답신 드리고 있어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ㅋㅋ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46 / 0933 ---------------------------------------------- MenTal IllNess “살려…주세요.” 주저 앉아 버린 여성 사용자에게 가까이 다가서자, 그녀가 내게 건넨 첫 마디는 “살려달라.” 였다. 나는 잠시 무심한 눈동자로 안소연을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검을 늘어뜨린 채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서로 같은 높이에서 시선을 마주치자 그녀가 흠칫 거리며 한 번 더 물러나는 게 보였다. 겁에 질린 궁수 사용자를 보며,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살고 싶니?” “네….”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생존에 대한 강한 열망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애초에 다 죽이지 않고 한 명은 남겨 두려고 했었다. 부랑자들의 행동에 몇 가지 궁금한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나는 살며시 미소까지 지어 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묻고 싶은 게 조금 있단다. 대답해줄래?” “어떤 것들이…. 전부 대답해 드릴게요.” “좋아. 똑똑하구나. 그럼 물어볼게. 어떻게 부랑자들이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거지? 그리고 왜 바로 덮치지 않고 이렇게 귀찮은 짓거리를 한 거니?” “그건….” 내 물음에 안소연의 목젖이 꼴딱 움직이는 게 보였다. 이윽고, 그녀는 입술에 침을 적시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하나하나 대답하기 시작 했다. “흠.” 안소연의 대답을 들은 후, 나는 잠깐 고심에 잠겼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먼저, 이들은 완전한 부랑자들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용자와 부랑자에 하나씩 다리를 걸치고 있는 놈들 이었다. 평소에는 기존 사용자들처럼 행세를 하지만, 필요하면 부랑자 짓거리를 벌이는 놈들. 아직까지 수배가 돌지 않은 것 같았는데, 좋게 말하면 수완이 좋은 거고 나쁘게 말하면 매우 악질적인 놈들 이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더욱 가관 이었다. 이놈들은 내 예상보다 오래 전부터 우리들을 눈 여겨 보고 있었다. 심지어 우리들이 0년차 사용자라는 것뿐만 아니라 얼마 전 사용자 아카데미를 졸업 했다는 정보도 입수 했다고 한다. 그리고 두어 번 캐러밴 탐험을 나서면서 다시 돌아올 때 마다 장비를 업그레이드 하는걸 보고 작업을 치기로 결정 했다고. “혹시라도 캐러밴에 성과를 올리는 것에 대한 능력이나 방법이 있으면 알아내려고 했어요. 그래서 주현이 언니를….” “그럼 내가 만약 탐험에 관련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나 빼고 다 죽였을 거라는 소리야?” “…….” 안소연은 시선을 회피하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내게로 고개를 올리며 애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저…. 살려 주시는 건가요?”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죽여야 할까. 애초에 살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 순간 문득, 나는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라 고개를 주억였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한쪽 방향을 가리킨 후 입을 열었다. “뭐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으니까. 다만 무기는 내려 놓고 저쪽 방향으로 뛰어 가렴. 아마 죽어라 도망가야 할 거야. 안 그러면….” 나는 의도적으로 뒷말을 흐렸고, 안소연의 눈동자에 조금이지만 활기가 돌았다. 확실히 그녀의 행동은 제법 민첩 했다. 살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긍정적인 말을 내뱉는 순간 내 마음이 바뀔 새라 그녀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내 말대로 무기를 얌전히 바닥에 놓아둔 후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은 채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몸을 옮기기 시작 했다. 안소연은 가면서도 흘끗 흘끗 나를 뒤돌아 보았지만, 내가 그 자리에 계속 있는걸 보자마자 조금 뛰는 걸음으로 걸음을 바꿨다. 이윽고 어두운 수풀 안으로 스르륵 사라지는 그녀를 보며 나는 품에서 연초 한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거 한대만 다 태우고 따라가야지. 치익. 치이익. 꺄악. 꺄아악. 따라갈 필요가 없어졌군. 연초 끝이 타 들어가는 소리와 동시에 저기 앞에 어딘가에서 가느다란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두어 모금 연기를 들이키고 내뱉자, 먹빛 인영 하나가 수풀을 헤치고 다시 공터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그 인영은 한 손에 대롱이 매달린 머리를 슬쩍 들어 보이고는, 그대로 땅에 툭 떨구었다. 언뜻 보니 아주 깔끔하게 잘린 안소연의 목덜미가 보였다. 나는 실소를 흘린 후 다시 맛있게 연초를 한 모금 빨아 들였다. 결국에는 살지 못했나. 뭐 애초에 살릴 생각도 없었지만. “나 참. 일부러 그런 거에요? 나보고 죽이라고?”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날아 들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고연주였다. 그녀의 물음에 어깨를 한번 으쓱여 주고는, 나는 차분히 눈을 감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게 은근히 좋은 기분이 들었다. 그 동안 알게 모르게 마음속을 짓누르던 답답함이 싹 가시고, 부랑자를 처리 했다는 상쾌함만이 남았다. 잠시 동안 여운을 즐기던 나는 이내 즐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한 명 남겨 줬잖아요. 맛이라도 보셔야죠.” “뭐래. 그나저나 정말 요란하게도 했네요. 설마 이렇게까지 할 줄은….” 내 말을 간단히 받아 친 그녀는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나 또한 따라 주변을 둘러보자 대지에 나동그라진 부랑자들이 보였다. 그 중 백미는 단연코 사지가 잘리고 목에 화살이 꽂힌 마법사 사용자. 고연주의 시선도 한참을 거기에서 머물렀다. 잠시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이내 고연주는 싱긋 웃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꼭 저렇게까지 해야 했어요? 그리고 그 애도 되게 어려 보이던데. 아. 물론 내가 죽이기는 했지만, 나보고 죽이라고 한 거 같았거든요.” “비슷합니다. 참고로 제가 신조로 삼는 말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어떤 일이 있어도 부랑자와의 타협은 없다.> 입니다. 아무튼 사용자 고연주가 죽이지 않았다면 어차피 제가 죽였을 겁니다.” “뭐 맞는 말이긴 해요. 그래도 평소 애들을 대할 때 하는 행동이랑 지금 모습이랑 너무 괴리감이 들잖아요.” 그녀의 말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린 후,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큭. 그래서 실망 하셨나요.” 내 말에 고연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미묘한 얼굴 표정을 띄운 채 나를 지그시 바라 보았다. 나는 담담히 그 시선을 받아 넘기며 물고 있던 연초를 빼고는 손 끝으로 툭툭 털었다. 이윽고, 그녀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지어지는 것과 동시에 서서히 입술이 열리는 게 보였다. * 다음날 아침. 나는 일행들에게 야영을 정리할 것을 명령하고는 차분히 지도를 들었다. 2일 ~ 3일만 지나면 <절규의 동굴> 포인트로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들어갈 루트를 보고 있을 즈음, 내 옆으로 슬쩍 다가오는 한 명의 기척을 느꼈다. “수현. 뭐 좋은 일 이라도 있어요?” “음? 아 하연. 그런데 좋은 일 이라니요?” 내 옆으로 다가온 인물은 정하연 이었다. 그녀는 평소와 같은 산뜻한 얼굴로 살짝 내 팔짱을 꼈다.(팔짱이라고는 하지만, 가볍게 팔꿈치를 잡는 수준 이었다.) 잠시 동안 내 얼굴을 살피던 그녀는, 이내 궁금하다는 어조로 내 팔을 두어 번 움켜 쥐었다. “오늘따라 얼굴이 편안해 보이고 굉장히 여유로워 보여요. 마치 처음 수현을 만났을 때처럼요.” “하하. 어제까지만 해도 조금 다르게 보였나 보죠?” “네. 말씀 드릴까 고민을 조금 했어요. 탐험을 나온 이후로 뭔가 답답해 하는 것 같고, 약간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거든요.” 나는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뜨끔한 마음이 들었다. 근래 들어와서 느끼는 건데, 여성들은 남성의 마음을 파악하는 레이더라도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귀신 같이 알아채고 맞추는 걸까. 어쩌면 내가 하연과 잠을 자고, 서로 사랑을 나눈 사실을 알고 있는 일행이 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한 명이라도 말이다. 갑자기 든 생각에 등에 식은땀이 흐르려는 찰나, 옆에서 비비앙이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으아?! 뭐야. 가방이 뭐 이렇게 무거워!” “…….” “끄응~차. 아씨. 이상하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가벼웠는데.” 비비앙은 연신 투덜거리며 배낭을 고쳐 매었고, 고연주는 나를 보며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어제 밤 부랑자들을 처리하고 그대로 놔둘 필요는 절대로 없었다. 나름 질 좋은 장비들을 입은 놈들도 보였기 때문에, 훼손된 장비를 제외하고는 홀딱 벗겨 가지고 왔다. 그리고 그 장비들은 전부다 비비앙이 매는 가방 안으로 쑤셔 넣었고. 어제, 아 오늘 새벽이라고 해야 되나. 헷갈리네. 어쨌든 안소연이라는 소녀 생각이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한창 현대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아름다운 시기를 보내야 할 아이인데. 라는 게 본래 사람이 가져야 할 생각들 이지만, 나는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의 능력치와, 능력과, 생존 여부만을 놓고 계속 가늠하고, 저울질 할 뿐. 솔직히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능력치는 그렇다 치고 고유 능력도 있고, 다른 능력들도 천상 궁수에 특화된 여성 사용자였으니까. 지닌바 추적술도 제법 괜찮아 보였고 무엇보다 현재 우리 캐러밴에 궁수가 없다는 사실이 아쉬운 마음에 가장 크게 작용한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결국 죽이는걸 선택 했다. 그래서 일부러 고연주가 숨어 지켜보고 있는 곳으로 보냈고, 그녀가 죽일 것 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만에 하나 죽이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따라가서 직접 죽일 생각 이었고. 아마 부랑자만 아니었다면 어떻게든 영입을 해볼 수도 있었을 텐데. 아무튼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내 알 바는 아니었기 때문에, 미련을 깨끗이 접은 후 다시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물론 하연에게 한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요즘 조금 답답한 마음이 있기는 했었어요. 하지만 해결 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그렇군요. 그런데 걱정을 하고 싶은데 어떡해요.” “흐음. 그러면 나중에 무릎 베개라도 해주셔도 괜찮은데.” “호호. 응큼해요.” “음? 그냥 무릎 베개만 해달라는 소리였는데요. 뭐가 응큼한가요.” “어머. 연구소 에서의 무릎 베개를 생각하셔도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하연은 내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고운 눈을 흘겼고, 나는 할 말이 없어 머쓱한 얼굴로 지도를 더욱 자세히 살폈다. 그러나 옆에서 정하연이 화사한 미소를 내보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평소 항상 침착하고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 이지만 나한테만 이런 보기 좋은 미소를 짓는다는 사실에 조금은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홀가분하기도 하고, 다시금 한구석이 답답해지는 것 같은 모순적이고 알 수 없는 기분.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오라버니이. 야영 정리 전부다 끝냈어요오.” “야. 내가 말씀 드린다고 했잖아. 쥐방울 만한 게 어디서 선수를 쳐?” “히잉. 먼저 말씀 드리는 사람이 임자거든요오.” “아오. 할 말 없게 만드네. 그렇다면 에잇.” 이내 솔이 양 볼을 쭈욱 늘리는 유정과, 양 팔을 바동거리는 안솔을 보며 비로소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대로 지도를 접은 후, 나는 차분히 일행들에게 정렬할 것을 명령했다. 애들은 내가 어제 밤 부랑자들과의 사투를 벌인걸 모른다. 그저 새근새근 잠만 잤을 뿐. 그리고 꼬리가 붙은 걸 굳이 알릴 생각도 없었다. 천사들이 놓은 통과 의례는 끝났을지 몰라도, 나만의 통과 의례는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로 <절규의 동굴>로 가는 일만 남았고, 아마도 이것이 마지막 연습이 될 것이다. * 마지막 산 봉우리를 넘기 전, 우리들은 한 무리의 몬스터들과 마주하고 말았다. 머리에 수 개의 뿔을 갖고 있고, 타조의 형태와 단단한 다리 근육이 있는 몬스터. 라돌로프(LadolRof)였다. 라돌로프 하나만 따지고 보면 그렇게 까다로운 몬스터는 아니었다. 다만, 현재 우리들이 있는 지형이 산악 지형이라는 점과 놈들이 단체 생활을 한다는 점, 그리고 기동성이 좋다는 점들이 갖춰 지면 그리 만만히 볼 놈들은 아니었다. 지금 눈 앞에 있는 라돌로프들은 그 세 박자를 고루 갖추고 있었다. 1회차 시절 가끔 라돌로프는 길들여 타고 다니려는 사용자들도 있었는데, 워낙 인간에 대한 경계심이 강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들 이었다. 특히 라돌로프들은 갑자기 나타난 우리들을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라돌로프의 머리에 나는 뿔은 최소 하나에서 최대 네 개까지 자란다. 뿔이 적을수록 아직 미성숙한 라돌로프라는 소린데, 중앙에 뿔이 한 개 나 있는 놈을 중심으로 서너 개 난 놈들이 빙글 둘러싸고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전투였고, 피할 마음도 없는 전투였다. 나는 곧바로 손을 들어 올려 전투 준비 신호를 내렸다. “라돌로프 입니다. 아마도 본인들 영역을 침범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새끼들도 몇 마리 보이니 평소보다 훨씬 더 거칠 수 있습니다. 놈들이 달려와서 뿔을 들이 받으면 충격이 클 수도 있으니 다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무조건 방진 형태로 가겠습니다. 함부로 나서지 말아주세요.” 마지막 사족은 유정이를 겨냥한 말 이었다. 내 오더에 모두들 빠르게 병장기들을 꺼내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하연에게 한가지 오더를 추가로 요구 했다. “하연. 혹시 스피어 종류 마법 계열을 급속 연발을 이용해서 사용할 수 있나요?”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순순히 입을 열었다. “급속 연발요? 나름 고위급 응용 주문이기는 하지만, 가능은 해요. 하지만 그건 일격필살용으로 쓰는 경우가 많아요. 위력은 좋지만 체력 부담과 마력 부담이 굉장히 심하거든요.”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펼쳐주세요. 가장 자신 있는 계열로.” 내 말에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문을 외움과 동시에 한 손으로 수인을 맺기 시작 했다. 그녀가 든 지팡이에 푸른 빛이 어리고, 목걸이도 반짝이는걸 보니 이번에 뭔가 제대로 할 모양인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네. 많은 분들이 궁수의 영입을 원하셨지만, 아쉽게도 안소연은 죽였습니다. 애초에 죽일 계획 이었고(145회 After에 나온 내용으로 유추하신 분들도 분명히 계실 겁니다.), 나름 희귀한 능력을 갖고 있지만 그게 부랑자에 대한 수현의 타협을 바꿀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 이로서 주말 연참도 완료! 이제 자정 연재분 집필 전까지 공부를 해야 겠네요. '~' 『 리리플 』 1. 쿠로시온 : 1등 축하 드립니다. 하하하. 다음에 노블레스 이용권을 끊으실 때까지, 분량을 잔뜩 쌓아 놓고 있겠습니다! :) 2. 사람인생 : 칭찬칭찬! 잘하셨어요! 사람인생님은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 입니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3. 천겁혈신천무존 : 암 쏘 쏘리. 벗 알러뷰.(?!) 18살 입니다. 아청아청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조심을. ㅜ.ㅠ 4. 무사의한 :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쿠폰도 감사 드립니다. (__) 5. 고장난선풍기 : Yes. 정답 입니다. 수현이는 애초에 고연주가 그곳에서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요. 후후후. 6. 흠흠;; : 수련 + 본인의 성장의 영향을 받습니다. 다만, 고유 > 특수 > 잠재 능력 순으로 올리는 정도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7. 오피투럽19 : 에, 에로씨라니. OTL. 흠흠. After 같은 경우 이번회에 나온 <고연주가 입을 열었다.> 다음에 나오는 내용으로 보시면 됩니다. 혹시 궁금해 하시는 독자분들을 위한 서비스라고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어떤 대화들을 나눴는지 대략적으로 유추가 가능하게끔….) 8. 트릭스타 : 네. 가서 기절하는줄 알았습니다. 다시는 강남역 가지 않으려구요. -_-a 9. 객기 : 부디 이번회를 보시고 여러 의문들이 풀리셨기를 바랍니다. :) 10. juan : 낄낄. 다시 한번 당첨 축하 드립니다. 혹시 MBTI로 조사하신 건가요? 어떻게 보면 둘다 10년 이상 홀 플레인에서 활동 함으로써 생긴 멘탈이라고 할 수 있는데, 두 모순적인 감정이 충돌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갈피를 잡지 못하는 행동을 보여주고 있구요.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47 / 0933 ---------------------------------------------- 절규의 동굴(1) 아직까지 놈들은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 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방진의 형태를 취했다. 라돌로프(LadolRof)들이 작정하고 달려들면 그 돌진력을 무시할 수 없으니, 선제 타격으로 최대한 숫자를 줄이는 게 관건 이었다. 물론 나와 고연주 비비앙 셋만 있으면 라돌로프(LadolRof)정도는 가볍게 찜 져먹을 수 있다. 아니, 셋 중 한 명만 나서도 식후 운동거리도 되지 않는 게 현실이요, 사실 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해서, 나는 내 쪽으로 오는 놈들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을 참 이었다. 이제 애들도 스스로의 위치를 자각하고, 부상도 당해보고, 자신이 맡은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 느껴보게끔 할 생각이다. “───. ───. ───.” “───. ───. ───.” 정하연과 신상용이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린다. 놈들의 숫자는 얼추 서른은 넘는 것 같았다. 그 중 외부의 침입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놈들은 스물 남짓. 스무 마리가 한꺼번에 뿔을 세우고 달려들면 애들이 맡고 있는 어디 한군데는 분명히 뚫릴 것이다. 정하연과 신상용의 선제 타격이 과연 얼마나 숫자를 줄일 수 있을까. 그때였다. “푸욱! 푸욱! 푸욱!” “푸르릉! 푸르릉! 푸르릉!” 홀 플레인의 몬스터들은 대부분 지능을 갖추고 있다. 특히 마나의 유동에 예민한 놈들도 적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마법사들이 마법을 펼치려 마력을 끌어 올리면 대단히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점점 일행들 사이로 모이는 마나의 흐름에 불안감을 느꼈는지, 라돌로프(LadolRof)들은 거친 콧소리와 숨소리를 섞으며 머리를 앞으로 삐죽 내밀었다. 한두 마리가 그러면 몰라도, 스무 마리가 넘는 놈들이 일제히 똑같은 행동을 하는 만큼 그 의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윽고, 맨 앞에 있는 유난히 덩치 큰 놈의 괴성을 신호로 놈들은 일제히 우리들에게 달려들기 시작 했다. 두두두! 두두두두! 쿵쿵쿵! 쿵쿵쿵쿵! 지축을 울리는 발소리는 이내 더욱 가속을 붙인 듯 주기 소리가 시시각각 짧아지고 있었다. 마치 중세시대 말을 탄 기사들이 육중한 랜스를 들고 일제히 달려오는 것 같았다. 나 또한 검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방어 범위를 가늠하다가, 이내 선두로 달려오는 세 마리를 타깃으로 잡았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일행들에게 경고했다. “옵니다. 놈들의 첫 번째 줄은 돌진으로 진을 무너뜨리고, 두 번째 줄은 강한 다리 근력으로 짓밟는 전술을 주로 사용 합니다. 첫 번째 줄에 밀려나지 않음은 물론이고, 반대로 밀어낼 수 있으면 손쉽게 싸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와의 거리를 절반 정도 남겨놨을 즈음 이었다. 모든 주문을 완성 했는지, 뒤에서 크게 숨을 내쉬는 소리들이 들렸다. 초반에 가까이서 진을 구성한 게 아니라,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상태라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울 시간은 충분했다. 그래도 마냥 여유를 부리기에는 놈들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어 얼른 주문을 발사하기를 바라는 순간 이었다. “디그 인 더 그라운드(Dig In The Ground)!” 뭔가 서로 말을 맞춘 듯, 정하연이 아닌 신상용의 첫 번째 타자로 주문을 영창 했다. 직접 공격 마법이 아닌 건 의외였지만, 둘이서 연계 마법을 즐겨 쓰는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라돌로프(LadolRof)들을 상대로 사용한 디그 인 더 그라운드(Dig In The Ground)는 매우 효율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보이지 않는 기운이 놈들이 달려오는 대지 앞으로 한번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푹.” 하는 땅이 파이는 소리가 들리고 동시에 길쭉한 구덩이가 생성되는 게 보였다. 마법 회로 응용을 익히지 않은 만큼 여러 군데 동시에 구덩이를 파는 건 기대할 수 없다. 대신 놈들이 차마 반응할 수 없도록 절묘한 위치에 기다란 함정을 판 것이다. 깊이가 엄청 깊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놈들의 발이 걸리는 데는 충분한 깊이였다. 무엇보다 아무렇게나 마법을 발사하는 게 아니라, 최고의 효율을 노리는 틈을 노렸다는데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었다. 그리고, 마법의 결과는 바로 나왔다. “푸히힝! 푸히히힝!” “푸크락! 푸크크락!” 선두 열에서 맹렬히 달려오던 라돌로프(LadolRof)들 중 너덧 마리가 일제히 앞으로 고꾸라졌고, 다른 놈들도 몸을 크게 휘청거렸다. 그 탓에 아주 조금 거리를 벌리고 달려오던 놈들도 속도를 줄일 수 밖에 없었고, 한꺼번에 우왕좌왕 혼란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이 혼란을 노렸는지 곧바로 정하연의 맑은 목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얼음의 창(Ice Spear)! 급속 연발(Rapid Fire)!” 어제 부랑자 마법사는 불꽃의 창을 사용 했지만, 하연은 물 계열 마법이 특기인 만큼 얼음의 창을 사용 했다. 나는 천천히 생성 되는 창의 숫자를 세고,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특수 능력 <호수의 가호>의 영향인지, 그녀는 온 힘을 끌어내지 않고도 동일한 여섯 개의 창을 생성, 발사 했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날아간 창들은 주로 고꾸라진 놈들을 노렸고, 혼란을 타고 들어온 창을 피할 수 없었는지 보기 좋게 몸에 명중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라돌로프(LadolRof)들의 고통에 겨운 비명 소리가 들렸으나, 아직 정하연의 마법은 끝나지 않았다. 마법 회로 응용은 원래 한 주문에 하나를 담는 게 정석 이었다. 기본 마법보다 난해한 만큼 한번에 두 개를 펼치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비장의 무기인 메모라이즈(Memorize)가 있었다. 그녀의 목에 걸린 영광의 목걸이(Necklace Of Glory)에서 새하얀 빛이 어림과 동시에 그녀는 재차 입을 열어 주문을 발동시켰다. “브로큰(Broken)!” 챙그랑! 챙그랑! 챙그랑! 챙그랑! 챙그랑! 챙그랑! 브로큰 주문이 발동하고, 놈들의 몸에 깊숙이 꽂혀 있던 얼음의 창들은 일거에 산산이 부서졌다. 외부에 나와 있던 얼음들은 곧 파편으로 변했고, 크게 튀어 주변의 적들을 폭풍처럼 휩쓸었다. 그리고 몇몇 놈들이 몸을 크게 뒤틀고 고개를 처박는 걸로 보아, 내부에 박힌 창들은 잘게 조각나 내부를 진창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미안해요. 예상보다 위력이 좋지 않네요.” “아니요. 이 정도면 충분 합니다.” 시무룩한 목소리로 사과하는 정하연을 보며 나는 고개를 휘저었다. 각각 창이 박힌 여섯 마리는 그대로 절명 했고, 주위에 있던 놈들은 몸을 비틀비틀 하면서도 다시 우리에게 달려오기 시작 했다. 비록 절반은 줄이지 못했지만, 놈들의 돌격을 확실히 죽였고 수많은 부상을 입혔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절대로 미안해할 정도는 아니었다.(애초에 내 기대치가 높았던 면도 없잖아 있었다.) 그때 내 옆으로 기이한 마나의 유동이 유유히 기호를 그리기 시작 했다. 뭉게뭉게 연기를 풍기며 마법진이 그려지는걸 보자, 그제서야 나는 정하연에게 팔려 잊고 있던 한 명의 인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우리 측에는 아직 마법사 사용자가 한 명 더 있었다. 그것도 그 앞선 두 마법사보다 훨씬 뛰어난 연금술사가. “오라! 아카시아(Acacia)! 제 29 군단을 지배하는 고통의 여왕이여!” 비비앙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신상용이 파 두었던 구덩이에서 시커먼 꽃들이 피어 올라오는 게 보였다. 매우 빠른 속도로 개화한 꽃은 이내 줄기를 풀어 가까이 있던 라돌로프(LadolRof)들을 수북이 뒤덮었다. 비비앙은 그 광경을 확인한 후 손가락을 맵시 있게 튕겼다. 딱! 푸슛! 푸슛! 푸슛! ““““““푸히히히히히히힝!”””””” 줄기에서 뻗어 나온 뾰족한 가시들은 감싸 안은 라돌로프(LadolRof)들의 몸을 사정 없이 찔러 들어갔다. 줄기의 영향권에 있던 놈들은 구슬픈 비명 소리를 지르며 목을 치켜 들었지만, 곧바로 다시 덮쳐 든 가시들로 파묻히고 말았다. 이렇게 여섯 마리가 또 다시 가시에 희생 되었다. 사정권에서 벗어나 있거나 눈치 빠르게 위로 점프해 피한 놈들은 살아 남았지만, 세 명의 마법사의 합작으로 오기도 전에 12마리를 작살낸 것이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비비앙은 브이(V)자를 그리며 씨익 웃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혀를 차 주었다. 내 반응에 비비앙은 바로 인상을 찌푸리고 투덜거렸다. 처음 괴성을 질렀던 몸집이 커다란 놈은 여태껏 살아 있었다. 군데군데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우리를 향한 적의는 줄어들지 않은 것 같았다. 놈은 다시금 네 개의 뿔이 달린 머리를 숙이고 우리들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 했다. 동족들의 허무한 죽음에 분노한 듯, 살아남은 녀석들도 선두를 뒤따르며 뿔을 내세웠다. 마법사들은 할 만큼 했다. 이제는 근접 계열들이 나설 차례였다. 수가 많이 줄어든 만큼 나는 대형을 살짝 바꾸기로 마음 먹고 입을 열었다. “안현! 이유정! 전진 배치!” 내 말에 안현과 유정이 후다닥 좌우로 나왔다. 고연주에게는 따로 행동을 지시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법사들과 사제를 보호하고, 뒤에서 이따금 지원이나 해주면 족했다. 이윽고 선두에 선 라돌로프(LadolRof)는 울부짖는 고함을 토하며 내게로 달려들었다. 햇빛을 받아 날카롭게 번쩍이는 뿔이 들이밀어지고, 나는 몸을 뒤로 빼며 수직으로 세운 검을 위로 쳐올렸다. 검신으로 무언가 걸리는 느낌과 동시에, 반으로 잘라진 뿔 조각들이 허공에 휘날렸다. 그 여파로 놈의 고개가 치켜 올려지고, 나는 발차기로 놈의 턱주가리를 세게 가격 했다. 묵직한 충격이 발을 타고 들어오고, 몬스터의 목은 채찍처럼 유연하게 휘며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 틈을 타 안현과 이유정은 각각 기합성을 내지르며 옆구리를 노렸다. 푹! 사악! 안현이 창은 몸통을 찔렀고, 유정은 오른쪽 다리 중단을 날카롭게 베었다. 그러나 힘이 부족 했는지, 유정의 카타나는 다리를 완절하게 절단하지 못하고 중간에 멈춰서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가 정체 되어 있는 사이 뒤따라 오던 다른 몬스터 한 놈이 그녀를 덮칠 듯 달려 들었다. “얏!” 그러나 유정이도 그 동안 놀고만 있던 건 아니었다. 박힌 카타나를 잡은 오른손을 역으로 쥐어 몸을 내 쪽으로 끌어 당겼다. 기울어진 체중의 힘을 이용해 더욱 깊게 다리를 잘랐고, 왼손으로는 스쿠렙프를 들어 치고 들어오는 놈을 향해 힘차게 휘둘렀다. “푸흐흥!” “꺄앗!” 완전한 격돌을 피할 수는 없었는지, 유정의 몸이 거세게 흔들리며 나가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오른손으로 잡은 카타나를 지지대 삼아 간신히 버틸 수 있었고, 달려든 놈은 머리에 정통으로 스쿠렙프를 받고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언뜻 보니 유정의 상태도 무사한 건 아니었다. 왼팔이 크게 뒤로 꺾여 스쿠렙프를 잡고 있는 게 용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최소한 피한 것 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은걸 보면 본인도 예상 했다고 볼 수 있었다. “치료(Cure)!” 안솔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듯 바로 유정의 팔을 향해 신성 주문을 외웠다. 따스하게 보이는 하얀 빛이 유정의 왼 팔에 어리고, 그녀는 회복된 왼 팔을 한두 번 돌린 후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안현은 기대 이상으로 선전하고 있었다. 무려 세 마리를 맡고 있었는데, 시종일관 밀리는 듯 보였지만 물러나지 않고 잘 버티고 있었다. 확실히 체술을 중점으로 익혀서 그런지, 놈들의 뿔을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 피하고, 무거운 창을 풍차처럼 돌리며 두들기고 있었다. 간혹 사각으로 들어오는 발차기에 한대씩 얻어 맞기도 했지만 이를 악물고 버티며 탱커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속박(Shackles)!” “실드(Shield)!” “윈드 커터(Wind Cutter)!” 사제와 마법사들이 지원이 다시금 이어지고, 전투는 한결 수월하게 풀리기 시작 했다. 나 또한 아가리를 쩍 벌리며 들이대는 놈의 얼굴을 가볍게 후려친 후, 대장으로 보이는 놈에게 공격을 집중 시켰다. 유정이가 오른쪽 다리를 적절히 묶어 움직임이 날래지 못했고, 덕분에 부담 없이 목을 자를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대지에 몸을 눕히는 라돌로프(LadolRof)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 했다. 내가 대장의 목을 자른 이후 놈들의 사기는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유정은 고연주와 비비앙의 지원을 받아 한층 더 날뛰기 시작 했고, 안현은 안솔과 정하연의 백업으로 맡고 있던 세 마리를 모두 해치울 수 있었다. 쿵! 마지막으로 남은 몬스터의 목에, 유정은 스쿠렙프와 단검을 교차시켜 그은 후 몸을 돌렸다. 자켓과 셔츠의 왼쪽이 살짝 찢어진 게 보였지만, 크게 다친 데는 없어 보였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애들을 위주로 치른 근접 전에서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내가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는 소리는, 일단은 내가 생각하는 기준치에 따라 왔다는 소리였다. 아직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애들이 나름대로 수준 있는 몬스터 떼거리를 상대로 물러나지 않았다. 비록 초반 마법사들의 선전이 있었고 나와 고연주가 서브해 줬다고 하지만 당당히 1인의 몫을 해냈다는데 의의가 있었다. 애들도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 조금 어색한지 다들 조용히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칭찬을 해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고, 애들은 더욱 성장해 언젠가는 이놈들을 벌레 잡듯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해서, 나는 무심한 눈동자로 전방을 주시 했다. 새끼들과 새끼들을 보호하던 놈들은 어느새 자리에서 보이지 않았다. 전투 인원이 모두 전멸하는 순간 잽싸게 도망친 것이다. 주저하는 일행들을 보며 나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도망간 놈들은 추적하지 않습니다. 잡기도 힘들고, 잡을 필요도 없으니까요. 부상자들은 재빨리 물약으로 치료한 후 다시 전열을 정비하시기를 바랍니다. 3분 후 다시 행군을 재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조금은 힘이 빠진 듯한 목소리를 들은 후, 나는 차분히 몸을 뒤돌아 보았다. 고연주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계속해서 연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사건도 정리 했고, 이제 절규의 동굴로 들어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라돌로프들과의 전투로 애들의 전투력도 점검 했고요. 초반에 칠흑 전갈 한마리에 쩔쩔 매던 애들이 이렇게 성장해 주니까 제가 다 감격 스럽네요. ㅜ.ㅠ 그럼 오늘도 편안한 밤 보내세요. 저도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__) PS. 아미슈님. 전회 코멘트 보고 빵 터졌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 리리플 』 1. 리오드리 : 1등 축하 드립니다. 항상 잘 보고 가신다는 코멘트를 달아주시는 분으로 기억 합니다. 하하하. 그럼 이번회도 재미있게 감상해 주세요. :) 2. juan : 하하하. 최주현이랑 주인공을 붙이기에는 너무 주인공이 아까워서요. :) 오 임상 심리학! 저도 심리 강의 듣고 싶어요. 왠지 재미있을것 같아요! 3. 열정을 : 그렇습니다. 뭐 수현이 강경하게 나온다면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이 겠지만, 애초에 수현도 별로 영입하고픈 마음은 없었어요. 후후. 4. 가한나 : 헐. 그렇다면 저는 반대로 고기 반찬주면 한편 연참으로 대응을?! 하하하. 그런데 정말 무섭습니다. 설마 정말로 그러시지는 않으시겠죠? :D 5. 천겁혈신천무존 : 음. 말씀 하신<하앍하앍하고으흐흐흐하고므흐흐흐흣하고아햏흫햏홓햫햏훟헣홓햏하고도아스트랄한짓을하는장면>이란 어떤 장면을 말하는 건가요? 설마 무릎 베게? 아니면…. 그것?! ( --) ~ ♪ 6. 블라미 : 음. 애매하네요. 아마 수현의 이목을 끌 수 있는게 있었다면 한번 생각을 해봤을 수도 있습니다. 보셨다시피 안소연의 성향이 꽤나 애매하거든요. :) 7. 여옥아놀자 :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어디 갔다 오셨어요. ㅜ.ㅠ 큰일 났습니다. 비비앙이랑 고연주 때문에 솔이의 인기가 급격히 하락 했어요! 한별이 등장 후 실시할 인기 투표 파트에서 솔이가 순위권에도 못들면 어떡하죠?! 8. 罰酒 : 네. 애매한 부분이 많습니다. 같은 급의 <권능>이라면 상쇄 라기 보다는, 사용자 본인의 능력에 따라 갈린다고 보시면 됩니다. 여기서 잘 생각해 보시면, 왜 수현이 엄청난 사기 캐릭터인지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하하하. 9. 사람인생 : NO. 1등으로 달아주신 분 한테만 10회권을 드립니다. 그런데 오늘은 보이지 않으시네요. ㅜ.ㅠ 10. 설비연 :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쿠폰 감사 합니다. (__) 가끔 리메 전(12년 3월) 부터 보시던 분들을 보면 신기한 마음이 들어요. 그 작품을 기억 하시다니. :) 11. 객기 : NO. 아닙니다. 이런저런 코멘트를 보는건 제 크나큰 즐거움중 하나랍니다. 언제나 후기 아래에 적듯, 질문과 비평은 항상 환영합니다. 하하하. 12. hohokoya1 : 아니에요. 여유가 있을때는 당연히 연참을 해야죠! 그렇게 약속 드렸는걸요~. 주인공의 본래 성격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으신 것 같네요.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48 / 0933 ---------------------------------------------- 절규의 동굴(1) 고개를 들자, 저물어 가는 노을 빛깔 해가 보였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무성한 수풀과 우거진 나무들을 둘러 보았다. 한바탕 비가 와서 그런지 길가에 난 풀들은 잎새에 작고 동그란 물방울들을 방울방울 매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노을 빛을 담은 이슬들은 초원 전체를 아우르고 있었다. 가히 아름다운 풍경 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뮬에서 동쪽으로 가는 길은 완전한 미개척으로 보기에 애매한 감이 있었다. 서쪽으로는 칠흑의 숲이 있고, 북쪽으로는 황무지가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이 걷고 있는 길은 동쪽의 도시를 잇는 길과 미개척으로 분류할 수 있는 지역의 중간 즈음에 걸쳐 있었다. 평소에 사용자들이 많이 다니지는 않지만, 그래도 탐험한 사용자들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형. 다 온 거예요?” 내가 가만히 서 있자 궁금증이 도졌는지 안현이 옆에서 말을 걸었다.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펼쳐진 지평선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아니. 이제 이 초원만 넘으면 돼. 이 초원을 넘으면 푸른 산맥이 나타나거든. 그럼 포인트 지점에 도착할 수 있어.” “푸른 산맥이요?” “멀리서 보면 푸른빛을 띄는 산들이 잔뜩 모여 있어서 푸른 산맥이라고 하던데. 지도에도 그렇게 표기 되어 있고. 그리고 아직 완전하게 정해진 건 아니겠지만, 그곳이 바로 소도시 뮬과 동북쪽 소도시 에덴의 미개척 지역을 나누는 기준이라고 들었어.” 내 설명에 안현은 한두 번 고개를 주억이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해를 못했다기 보다는, 그냥 그런 가보다 하고 받아 들이는 것 같았다. 아무튼 제대로 찾아온 것 같다. 그래도 <절규의 동굴>은 굉장히 오래 전에 탐험한 곳이라 조금 불안한 마음이 없잖아 있었는데, 이 초원부터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푸른 산맥에서 어느 입구로 들어가고, 어느 갈림길을 따라 가야 하는지도. 1회차 시절 내가 첫 번째로 발굴한 유적이라 비교적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뒤에서 대기하는 일행들은 다들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방금 전 스톤 마고일 열네 마리들과 한바탕 격전을 치러서인지 다들 꼴이 말이 아니었다. 쉬고 싶은 기색들이 역력하게 느껴졌지만, 나는 행군을 지속하기로 했다. 이 초원만 벗어나면 푸른 산맥이 바로 눈 앞에 있다. 그리고 절규의 동굴은 공략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지금 빠르게 행동하는 만큼 뮬에 돌아가는 시간이 앞당겨질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정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시간은 야영할 시간대 이지만, 행군을 지속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철야 행군도 겸할 생각이니 다들 단단히 준비하세요. 지금 여기서 20분 정도 휴식을 취하겠습니다. 혹시 정비할 것들이 있으시다면, 이 20분 사이에 마무리를 지으시길 바랍니다.” 뜻밖에도, 일행들은 단 한 명도 불평 없이 내 오더에 따르는 모습을 보였다. 다른 사용자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애들은 서로 눈치를 한번씩 슬며시 살피고는 축축한 대지에 거리낌없이 엉덩이를 붙였다. 애들은 그 동안 육체적 성장은 몰라도, 정신적인 면에서는 크게 성장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이번 탐험을 기점으로(더 정확히 말하면 라돌로프들과의 전투를 기점으로.)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내가 대부분의 전투를 도맡아 치렀지만, 최근 전투들 에서는 최소 1인분 이상의 몫들을 나눠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색해 하는 모습들도 보였지만 이내 현재의 자신들의 실력이 몬스터들에게 어느 정도 먹힌다는 걸 확인한 이상 많은 생각들이 들었을 것이다. 즉, 더 이상 자신들은 신규 사용자가 아니라는 점 이었다. 거기다 은근한 라이벌 구도 까지. 지금 이대로만 자라 준다면 뮬을 떠날 때는 한층 쓸만한 사용자로 변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절로 연한 미소가 나왔다. 나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 품 속에서 연초를 한대 꺼내 들었다. 가끔 정하연이 몸에 좋지 않다고, 끊으면 안되겠냐고 간곡히 부탁 했지만 절대로 안될 말 이었다. 치익. 치이익. “후우.” 그래도 야간 행군을 한다는 말에 다들 정신이 없는지, 캐러밴은 한층 부산스러웠다. 밤에 이동하는 건 미친 짓이라고 하지만 솔직히 이렇게 탁 트인 초원에서는 이거나 그거나 똑같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가면 갈수록 몬스터들의 출현 빈도가 잦아지는 걸로 보아 지금 야영을 한다고 해도 내일 평화로운 아침을 고스란히 맞이하는 건 요원한 일 이었다. 어제 새벽만 해도 그렇다. 그때는 산 속에서 자고 있었는데, 우리들은 처음으로 몬스터들에게 야습을 받았다. 비록 습격한 몬스터들이 산악 고블린 들이고, 세 명의 마법사가 심혈을 기울려 설치한 알람, 함정 마법에 박살을 내버리기는 했지만 중요한 건 어쨌든 야습을 받았다는 일 이었다.(여담이지만 불침번을 맡고 있던 안솔과 비비앙은 사이 좋게 기대어 자고 있었다.) 초원은 너무도 탁 트인 곳이라 산 속에서처럼 지형을 이용한 경계 마법들의 효율이 크게 반감 되어 버린다. 또 고블린들 이라면 괜찮을지 몰라도 마고일이나 가속을 붙인 라돌로프들이 떼거지로 몰려 온다면 꽤나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해서 빨리 도착하고자, 그리고 귀찮은 일을 피하고자 야간 행군을 결정한 것이다. 연초 한 대를 다 태울 무렵, 누군가 살금살금 내 뒤로 다가오는걸 느낄 수 있었다. 이윽고 사박거리는, 풀을 짓누르는 소리와 동시에 내 등에 마주 등을 기대는 조그마한 무게 감이 밀고 들어왔다. 내 어깨에 자신의 뒷목을 걸친 사용자, 아니 거주민은 살짝 나른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김수현.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물어봐.” “정말? 고마워. 그럼 물어볼게.” “고마울 거 까…야. 어깨 물면 죽는다.” 입을 쩍 벌리며 어깨를 물려던 비비앙은 내 엄포에 이빨을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나는 가볍게 손가락을 들어 들이민 그녀의 이마를 튕겼고, 그녀는 더 때려달라는 얼굴로 몸을 배배 꼬았다. 나는 그녀를 때린걸 곧바로 후회 했다. 그렇게 한동안 실랑이를 벌인 다음, 비비앙은 비로소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방이 너무 무거웠어.” “…….” “그래서 내용물을 확인 했더니, 구석에 지금껏 보지 못한 장비들이 가득 쌓여 있었어.” 그녀의 물음에 잠시 고개를 돌려 애들을 바라 보았다. 안현은 한창 자신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고, 유정은 스쿠렙프를 던졌다 받으며 놀고 있었다. 안솔은 안현의 옆에서 낑낑거리며 발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확인한 후,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 했다. “꼬리가 붙었었거든.” “언제?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했어?” “날로 치면 3일 전. 산 속에서 자고 있을 때. 다 죽였어.” “흐응. 그렇구나. 나는 꿈에도 몰랐는데. 그런데 왜 내 가방에만 잔뜩 넣었어?” “애들한테는 알리기 싫었으니까.” “헤에. 아끼고 보호해주는 거?” “아니.” 나는 단호히 부정의 의사를 보였다. 내 말은 다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지금 한창 미성숙 했던 정신이 새로 변화하면서 자리를 잡고 있는데, 괜한 변수가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을 죽여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예를 들어 안솔 같은 경우에는 조금 흔들릴 수도 있는 위험이 있었다. 나는 다 태운 연초를 멀리 던지며 말을 이었다. “지금 기껏 잘하고들 있는데 새로운 변수를 만들기 그렇잖아. 조금만 틀어져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애들 이니까. 그리고 너는 잘 모를지도 모르겠지만, 애들이 진정한 홀 플레인으로 나온 지는 아직 2개월 밖에 되지 않았거든. 맛보기는 예전에 보였으니 지금은 몬스터들로도 충분해. 과한 건 좋지 않아. 애초에 그걸 모두 소화해낼 수 없는 녀석들이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비비앙은 내 말을 전부 이해할 수 없는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어차피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기 때문에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느새 휴식을 취한지 20분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내 등에 기대어 있는 비비앙을 밀어낸 후,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조만간 실컷 죽이게 될 거거든. 사용자든, 부랑자든. 조만간 말이지.” * 내 걱정이 기우에 불과 했다는 것을 증명 하듯, 우리들의 야간 행군에는 아무런 방해도 없었다. 오늘은 대망의 10일 차. 고연주에게 큰 소리를 쳐놓은 게 있기 때문에, 나는 매우 빠른 행군 속도를 유지 했다. 그 결과 목표 했던 초원을 가로 지르는걸 달성할 수 있었다. 저 멀리서 높게 솟아오른 푸른 봉우리들이 보이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눈 앞에 보이는 웅장한 산맥들은 마치 바다 한복판에 잠겨 있는 듯 아름다운 푸른 빛깔을 뿜어내고 있었다. 나야 몇 번 본 기억이 있으니 시큰둥 했지만 처음 보는 애들은 잠시 그 아름다움에 도취 되었다가, 이내 허둥지둥 나를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다. 어느새 일행들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다들 그만큼 극심한 피로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강행군의 여파는 피할 수 없었다. 심지어 정하연 마저 얼굴에 피로한 기색을 가득 띄우고 있었는데, 이대로 <절규의 동굴>로 들어가면 자살 행위나 다름 없기 때문에 일단 자리를 잡고 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일단은 산맥 주변으로 들어가는 게 우선 이었다. 그렇게 40분 정도의 지루한 여정이 이어지고, 우리들은 겨우 산맥 근방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행군 속도를 조금 늦췄고, 이윽고 바다 같은 삼림이 손에 잡힐 듯 보이는 순간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밤을 꼬박 새면서 걸었는데, 어느새 해는 구름 사이로 비죽이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 보고는 몇 차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다들 고생들 하셨습니다. 지금 바로 눈 앞에 보이는 산들이 바로 푸른 산맥 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들어가고 싶지만, 몇몇 일행들의 체력이 매우 떨어진 것 같으니 이쯤에서 쉬도록 하겠습니다. 식사를 하셔도 좋고, 잠을 자도 좋습니다. 그리고…사용자 고연주. 사용자 정하연.” 내 말이 떨어지는 순간 주변에서 동시에 털썩털썩 거리는 소리들이 들렸다. 내 부름을 받은 두 사용자중 한 사용자는 살랑거리면서 다가왔고, 다른 사용자는 어기적거리면서 다가왔다. 나는 지도를 꺼낸 후 내게 다가온 그녀들을 보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저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설정한 루트에 맞는 초입을 찾아야 하거든요. 그리고 그 동안. 번거로우시겠지만 사용자 고연주는 식사 준비를, 사용자 정하연은 야영 준비를 총괄해 주세요.” “나도 같이 가요.” “혼자서 가신다고요? 위험하지 않을까요?” “아니요. 혼자서도 충분 합니다.” 들어온 질문들은 각각 달랐지만, 하나의 대답으로 모두 물리칠 수 있었다. 뚱한, 그리고 걱정 어린 두 여성의 시선을 뒤로한 채 나는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초입만 찾을 수 있다면 <절규의 동굴>은 이미 발견한 것과 다름 없다. 그 뒤로 나오는 갈래길 들은 지금도 외우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나는 길게 뻗은 풀들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 초입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예전에 왔던 시절과 똑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때 당시에 분명히 입구 앞에서 거대한 나무들이 비틀어진 삼각형을 구성하고 있었고, 좌우로 수풀들이 U자로 펼쳐져 있었다. 나름 독특하다고 기억 했던 것 같다. 그 광경을 발견한 캐러밴의 대장이 이건 예사로이 넘길 일이 아니라고 무작정 안으로 끌고 들어갔고, 정말로 동굴을 찾아낼 수 있었다. 뭐, 그때 대장을 하던 놈은 결국에 동굴 안의 <그 놈>한테 일격에 죽어버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때 캐러밴이 왔었던 방향과 수풀, 나무에 대한 기억을 조합하면 초입을 찾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 3의 눈을 쓸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대충 길을 기억하고 돌아오자 이미 곯아 떨어져 있는 일행들을 볼 수 있었다. 기특하게도, 신상용은 혼자서 불침번을 서고 있었다. 보나마나 또 아무도 서기 싫어하니까 스스로 자청했을 게 눈에 선하게 보였다. 그는 자꾸만 눈이 감기는지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턱 짚으며 말을 걸었다. “그만 들어가서 눈 좀 붙이도록 하세요.” “엇. 리더. 오셨군요…하하. 아닙니다. 캐러밴을 선도하는 대장이 저희들보다 배는 피곤할 텐데요. 이왕 하기로 했으니 계속 서겠습니다. 아, 그리고 원래 두 명이 서기로 했지만 사용자 고연주가 주변은 안전하다고 보증 해서….” 말 하나하나를 참 마음에 들게도 하는군. 나는 억지로 신상용의 등을 떠밀며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아침이니 불침번을 서는 사용자의 숫자는 괜찮습니다. 시야가 확보된 상태니까요. 아무튼, 지금 교대하는 걸로 하죠. 야간 행군 하느라 고생 하셨습니다.” “하, 하지만.” 신상용은 계속 사양했고, 결국에는 내가 짜증을 낼 정도가 돼서야 겨우 침낭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내게 깊게 고개를 숙이고는, 고연주가 만들어둔 음식을 가리켰다. 나는 알아서 먹겠노라고 대답한 후 천천히 주변을 둘러 보았다. 이제는 정말로 <절규의 동굴> 목전에 두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그리고 우리들은 절규의 동굴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라고 적고 싶지만, 그러면 안되잖아요. :) 오늘 샤워를 하다가 손가락을 다쳤는데, 면도날 부분으로 저도 모르게 왼 손 엄지 손가락 부분을 크게 치고 말았어요. 털털 털다가…. ㅜ.ㅠ 도대체 지혈이 되지 않아서 한동안 당황했네요. 다행히 왼손 엄지라 타자 치는데는 별로 지장이 없지만, 그래도 기분이 이상하네요. 하하하. PS.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신 분들. 정말 감사 합니다. (__) 오늘 쿠폰이 왜 이렇게 많이 들어 왔을까요. 왠지 고연주와의 응응을 빨리 하라고 하시는듯한 환청이 들리는건 제 착각일까요?! 『 리리플 』 1. 오호. 일전에 <회상> 부분에 질문을 주신분 이로군요! 1등 축하 드립니다. 처음 1등을 하시는 것 같은데, 더욱 축하 드립니다. 앞으로도 1등을 쭈욱 유지를…. 흐흐. 농담 입니다. 2. 사람인생 : 과외 좋죠. 그리고 예쁜 누나가 과외 선생님 이라면 더욱. 흠흠. 저는 학창 시절에 아쉽게도 그런 로맨스를 누려보지 못했다죠. ㅜ.ㅠ 3. hohokoya1 : 하하하. 고맙습니다. <절규의 동굴>은 폐허의 연구소처럼 길게 가지는 않을 생각 입니다. 해치울거 해치우고! 얻을거 얻고! 그리고 뮬로 가고! 그 다음에는…. 내 애정 캐릭터 한별이가 고연주 급으로 인기를 얻었으면 좋겠네요. :D 4. SanIkerJIN : 어우. 저도 몸은 많이 나았는데 목감기는 도대체 떨어지지 않네요. ㅜ.ㅠ 기다리시느라 고생 하셨습니다. 부디 이번회를 보실때는 몸이 한층 나아지셨기를 기원 합니다. (__) 5. 오피투럽19 : 네, 네? 저 남자에요. 왜 자꾸 이러세요. ㅜ.ㅠ 이러시면 안됩니다.(ㅌㅌ!) 6. juan : 음, 고연주 보다는. 안현과의 포풍, 아니면 박동걸과의…. 하하하. 농담 입니다. 정말로 믿으시면 곤란해요! 정말이에요. 정말 이라니까요. '~' 7. 판타지의신 : 하하. 감사합니다, 라고 쓰려다가 닉네임 보고 흠칫 했습니다. 흠흠. 직접 만든것도 있고, 조금 변경한것도 있어요. 그래도 보시는데는 큰 무리가 없으시게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 8. 최강성녀 : 암쏘쏘리. 벗 알러뷰.(?!) 오늘 진행 속도는 어떠신지요?! 10점 만점에 10점?! 9. 블라미 : 암요! 수현이는 아무하고나 하지 않아요. 최고급만 취급하는 된장남. 비유 보고 엄청 웃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10. zoara2 : 안 갑니다. 안 가요. 절대 안 갑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49 / 0933 ---------------------------------------------- 절규의 동굴(1) “오라버니. 일어나세요. 오라버니이. 헤헤.” 누군가 내 가슴팍을 실컷 만지고 있다는 느낌에 나는 반짝 눈을 뜨고 말았다. 시선을 위로 들어 올리자, 안솔이 발그레한 얼굴로 내 가슴을 이리저리 흔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라더니, 급격히 두 손을 떼어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 그래. 설마 솔이가 그랬을 리는 없지. 나는 기분 탓이라 여기고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일행들은 모두 일어나 있었고, 다들 야영 정리를 마무리 중에 있었다. 조금 황당한 마음이 일어, 나는 건조한 목소리로 안솔에게 물었다. “솔아. 내가 가장 늦게 일어난 거니?” “그게….” “제가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몸을 배배 꼬고 있는 안솔의 입이 열리려는 찰나, 뒤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날아 들었다. 뒤돌아보니 정하연이 나를 보며 살며시 웃고 있는 게 보였다. “너무 언짢게 생각지 말아 주세요. 잘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주무시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어요.” “뭐. 언짢을 거는 없습니다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침낭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는 게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분명 습관 때문에라도 진작에 몸을 일으켰어야 정상이었다. 아니, 그전에 야영을 정리할 정도의 기척이라면 내가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다. 요즘 평화에 젖었다고 이 정도로 감이 떨어진 건가. 내가 입맛을 다시며 자리를 털고 나오자, 내 표정을 읽은 정하연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사용자 고연주와 비비앙씨에게 부탁해 사일런스(Silence) 마법을 주변에 걸었어요. 그래서 아마 못 느끼셨을 거에요. 마법 자체도 굉장히 은밀하게 펼쳤거든요.” 나는 할 말을 잃은 얼굴로 정하연을 쳐다 보았다. 그녀는 조금 쑥스러운 미소와 함께 시선을 돌렸다. 잠시 동안 그렇게 있자, 옆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귓가를 타고 들어왔다. “참 다루기 까다로운 남자라니까요. 그쵸?” 아마도 이번 탐험을 끝내면 여성 사용자들이 갖고 있는 내면의 레이더에 관한 고찰을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녀들의 말에 속이 심히 따끔거렸지만, 일단은 발뺌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여차하면 바가지라도 긁힐 기세였으니까. “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만…웁.” 그러나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보드라운 손길이 내 입을 가로 막았다. 그와 동시에 입 안으로 우겨 들어오는 줄기들을 씹자, 상쾌한 향을 가진 즙이 입 안을 가득히 채웠다. 그대로 꿀꺽 삼키는 순간 온 몸에 새로운 활력이 도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꼭꼭 씹어서 즙 한 방울까지 남김 없이 빨아 먹어요. 제법 귀한 거거든요.” “우물우물. 제법 귀한 거 치고는 너무 인심 쓰시는 것 아닌가요.” “다른 일행들 보기 안쓰러워서 그래요, 안쓰러워서. 어떻게 잠 한번 재우려고 별 짓을 다 해보네요. 이러다가 나중에 입 한번 맞추려면 고개 돌리는 각도 까지 계산해서 덤벼야 하는 거 아니에요?” 고연주의 말에 순간 줄기를 뱉을 뻔 했지만,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홀 플레인에서 <잠>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무리 현대에 있을 때 보다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좋아졌다고 해도, 결국에는 인간이 갖고 있는 몸에는 한계가 있는 법 이다. 사용자의 능력에 따라 감당할 수 있는 선의 고저가 있을 뿐, 나 또한 그 법칙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정신력으로 버티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멀리 볼 필요도 없이, 나 자신을 가장 좋은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피로가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육체가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다. 필요할 때 피로로 인해 본신의 실력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면, 높은 능력들은 갖고 있으나 마나 라고 할 수 있었다. 솔직히 그냥 내가 전부 불침번을 서버릴까 생각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이제 더는 신규 사용자 취급을 하지 않기로 한 만큼 예정대로 불침번을 돌려 버렸다. 그리고 꼭 위의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 또한 스스로 체력을 관리할 필요는 있었으니까. 요즘 들어 수면 시간이 늘어난 걸로 일단은 만족하기로 했다. 아무튼 다 나를 생각해서 벌인 일인 것 같으니 딱히 다른 말을 하지는 않기로 결정 했다. “오빠. 침낭 내가 갤게. 오빠는 한쪽에 앉아서 쉬고 있어.” “그래. 고맙구나.” 어느새 다가왔는지, 유정이 내 어깨를 톡 건드리며 말을 걸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대로 몸을 옮기려던 유정은 이내 발을 멈칫하고 말았다. 어느새 내가 누워 있던 침낭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나와 유정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 배낭을 앞에 둔 채 내가 누웠던 것으로 추정 되는 침낭을 몸에 꼭 품은 여성 사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득달 같이 달려가는 유정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뭔가 깊이 관여하면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되어 버릴 것 같은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쪽 에서는, 한창 안현이 고연주에게 치근거리는 광경이 연출 되고 있었다. “사용자 고연주. 혹시 형한테 주신 것을 저한테도 조금 나눠 주실 수 있으신지요.” “싫어요.” “왜죠.” “그거야 당연하죠. 아깝잖아요.” “형한테 주시는 건 아깝지 않고, 저한테 주시는 건 아깝다는 말씀 이시군요.” “그럼요. 안현군 같은 애송이 사용자한테 주기에는 약초가 너무 아까워요.” 나른하게 웃으며 대꾸하는 고연주와 소리 없이 좌절하는 안현을 보며, 나는 품 안에서 연초를 하나 꺼내 물었다. 그대로 하늘을 올려다보자, 태양이 아직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걸 볼 수 있었다. * 푸른 산맥은 멀리서, 그리고 겉으로 보면 매우 아름답게 보이는 산맥이다. 물론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용자라면 경치가 좋아 보인다고 관광차 들어가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 긴장을 덜게 하는 것도 아주 없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산맥의 초입 부에는 몬스터들이 거의 돌아다니지 않기 때문에 그런 마음들을 더욱 부채질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상황은 판이하게 달라져 버린다. 산맥에 출몰하는 몬스터들은 푸른 빛깔에 어울리지 않는, 온갖 언데드 종류가 망라한 곳 이었다. 처음에는 왜 그렇게 되는지 몰랐는데, <절규의 동굴>을 탐험한 후에야 비로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절규의 안에 <그 놈>이 있기 때문 이었다. <그 놈>의 내뿜는 강력한 사기에 호응해, 그렇게 동굴 주위로 몬스터들이 배회하는 게 틀림 없었다. 나는 미리 봐두었던 초입으로 일행들을 이끈 후 곧바로 산맥 안으로 진입 했다. 여기서부터는 지도를 길잡이로 잡을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기억을 더듬어 차분히 길을 찾기 시작 했다. 지금과 그때 당시의 풍경이 완전히 같지는 않아도 알아볼 수 있는 만큼은 되었고, 정 헷갈리면 비장의 한 수 제 3의 눈도 있었다. “마치 동굴이 어디 있는지 알고 가시는 것 같네요.”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리자, 고연주가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거침 없이 들어가는 게 영 익숙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올해로 5년차가 된 만큼 이런 식으로 유적 또는 던전을 발굴하는 건 거의 처음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하긴 아무리 기록을 조사 했다고 해도 이렇게 뚝딱 발견하는 건 나라도 믿지 못할 일들 이었다.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 이다가, 이내 안솔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다. 안솔은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나를 따라 모두의 시선이 안솔에게 모이고, 그 시선에 묘한 기대감이 담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 어느 정도 겪어서 그런지 안솔은 울먹거리기 보다는 볼을 빵빵 하게 부풀리며 눈을 찡그렸다. 오. 안솔도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복덩이래요. 복덩이래요. 그런데 복덩이가 뭐야?” “후후. 암. 우리 솔이는 복덩이죠. 그렇고 말고요. 그렇지 솔아?” 비비앙은 의미도 모르면서 안솔을 놀렸고, 안현은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솔은 그들의 말에 입을 삐죽 내밀고는 앙칼지게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야! 솔이 복덩이 아니야! 그렇게 부르지마!” “우리 복덩이 오빠 옆으로 오렴.” “네에~!” 안솔은 화를 내다가, 내가 손짓을 하며 부르자 곧바로 해맑게 웃었다. 앞쪽으로 뽈뽈이 달려가는 안솔을 보며, 안현이 두 번째로 좌절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나름대로 진지 했다. <폐허의 연구소>를 찾을 때, 확실히 안솔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쉽게 발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해서, 나는 이번에 한번 실험을 해볼 생각 이었다. <절규의 동굴>은 내가 길을 확실히 알고 있는 만큼 이번에도 길을 비슷하게라도 가면 가볍게 넘길 사안은 아니었다. 만일 안솔이 정말로 <절규의 동굴>로 가는 길을 가리키게 된다면, 지금 애들이 갖고 있는 4 능력치 포인트(사용자 아카데미 수료 보상.)중 1포인트를 행운으로 올리게 할 작정 이었다. 행운은 가장 연구가 되지 않은 분야라 많은걸 알지는 못하지만, 100포인트와 101포인트는 엄청난 차이를 갖고 있었으니까. 원래는 능력치 1포인트에도 벌벌 떠는 나지만, 저번에 마력을 올려주는 반지를 습득 했기 때문에 해볼 만 하다고 여길 수 있었다. 안솔은 처음에는 자신 없어 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단순히 길을 맞춰본다는 내 설득에 긴장된 얼굴로 눈을 감았다.(고연주는 그런 우리들의 행태(?)를 보며 포기한 듯 한숨을 쉬었다.) “긴장하지 말고. 평소 네 감대로…. 그냥 방향을 가리켜 보려무나.” “우웅….” 한동안 눈을 꼭 감은 채 미간을 좁히던 안솔은, 이내 조심스럽게 손을 들며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을 보며 나는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은, 내가 가려는 방향과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 * 우리들은 이곳 저곳 갈라져 있는 초입 부에서 왼쪽 방향으로 가닥을 잡고 행군을 시작 했다. 안솔은 시종일관 긴장한 표정 이었지만, 길이 갈릴 때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걸 보고는 조금 안심한 듯 싶었다. 그러나 <절규의 동굴>은 <폐허의 연구소>처럼 만만히 발견할 수 없는 동굴 이었다. 내가 가늠하기에도 아직 거리가 한참 남아 있었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의 설레던 분위기는 조금씩 가라 앉고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 산맥 안을 헤치자, 일행들의 분위기는 사뭇 무겁게 짓눌리고 있었다. 안쪽으로 파고 들어갈수록 초반의 싱그러운 분위기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탓 이었다. 무언가 불쾌하고 사악한 기운들이 전신을 스물 거리며 타고 올라오는 기분 이었다. 그런 것들에 민감한 안솔은 이따금 주변을 살피며 두려워했고, 어느새 내 옷깃을 꾹 붙잡고 있었다. 우리들의 조용한 행군은 안솔의 소리 없는 비명으로 잠시 멈추고 말았다. 그녀는 굉장히 놀란 얼굴로 눈을 홉떴는데, 그곳에는 처참하게 뜯긴 몬스터 시체 한구가 나뒹굴고 있었다. 전신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세게 뜯긴 상태라, 조금 더 자세히 다가가 살펴보려고 할 찰나였다. <히이이이이이이이.> 바람을 타고 들어온 소리이기는 했지만, 모두 똑똑히 들은 것 같았다. 공기를 사늘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다들 온 몸에 소름이 끼치는 듯 몸을 부르르 떠는 게 보였다. 일행들의 얼굴은 전부 딱딱하게 굳었고, 항상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던 고연주도 처음으로 눈동자를 날카롭게 빛냈다. “반시의 음파에요. 이 소리는 절대로 따라가면 안돼요. 가면 일행들 중 최소 한 명은 무조건 죽어요. 아니, 죽게 돼요.” 다른 사용자도 아니고, <10강>에 이른 고연주의 말 이었다. 나 또한 고개를 주억이며 그녀의 의견에 수긍을 표했다. 반시를 처치할 자신은 있지만, 놈은 단순히 죽이는 게 능사가 아니었다. 만에 하나 일행들 중에서 단 한 명이라도 반시의 저주에 걸린다면 꽤나 골치가 아파질 것이다. 특히 행운 능력치 포인트가 낮은 사용자들은 거의 100% 걸린다고 봐도 무방 했다. “말로만 들었는데, 반시의 저주를 말씀 하시는 건가요?” “반시는 죽을 때 구슬픈 울음 소리와 함께 최후를 맞이해요. 그리고 그 울음 소리를 듣는 사용자는 어지간히 행운 포인트가 높지 않은 이상, 높은 확률로 저주에 걸려요.” “설마 정말로….” “죽냐고요? 네. 높은 신성 주문이나 따로 해주를 하지 않는 이상 한달 안에 무조건 죽어요. 어떤 사유가 붙든 말이에요. 병에 걸려 죽든, 불의의 사고로 죽든, 눈 앞의 몬스터처럼 처참하게 죽든 말이에요. 상대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웬만하면 피하는 게 좋은 몬스터죠. 서대륙의 유명한 사용자 한 명이 호기를 부리다가 일주일도 안돼 머리통이 박살이 나서 죽은 건 유명한 일화랍니다.” 고연주의 상세한 부연에, 정하연은 침을 꼴깍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언데드들은 기본적으로 사용자들이 상대하기 꺼려하는 축에 들어가는 놈들 이었다. 그리고 내가 고연주를 데려온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점도 있었다. 단순히 우리들의 안위가 아닌, 다른 일행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어쨌든 나온다면 아예 찍소리도 못할 정도로 조져야겠지만, 굳이 찾아갈 필요는 없는 게 바로 반시였다. 잠시 동안 시체를 살펴본 나는 더 이상 얻을 게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제 슬슬 초입 부를 벗어날 무렵 이었다. 지금 첫 번째 산을 넘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산의 사이에 있는 <절규의 동굴>로 가면 된다. 슬쩍 옆을 내려다보니 안솔은 입술을 질끈 깨문 채 내 옷깃을 꽉 붙잡고 있었다. 그래도 돌아가고 싶다는 의지는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안솔은 한쪽 방향을 가리켰고, 방향을 가늠하던 나는 다시금 고개를 끄덕인 후 행군을 재개 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오늘 코멘트를 천천히 읽는데, 재미있는 코멘트를 발견 했습니다. 네. 고자 양대 산맥. 민영모 작가님의 작품 네임드의 주인공 태양과 수현이를 비교 하시더군요. 하지만! 저는 탈고자 선언을 했다는 겁니다! 하하하. 라고 뿌듯하게 웃으면서 소설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재밌었어요. 정말 말 그대로 리얼 게임 판타지 였습니다. 예전에도 보기는 했었는데, 1회부터 다시 정신 없이 본것 같네요. 예전에 한창 게임 판타지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느꼈던 즐거움들이 다시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 워낙 유명한 작품이니 다들 알고 계시겠지요? 혹시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강력 추천 드릴게요~! :) PS. 음, 여러분들. 한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지금껏 나온 여성 캐릭터들 중에서 어떤 캐릭터가 가장 마음에 드세요? 여러분들의 취향을 알고 싶어요! 물론 앞으로 차후 진행에 반영할 수도 있고요. 그냥 한번 알아보고 싶어서요. 아. 고연주는 제외해 주세요. 고연주 인기가 너무 높아서 다른 캐릭터들이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일이 생길까봐요. 하하하. 『 리리플 』 1. 破天魔痕 : 1등 축하 드립니다. 네. 앞으로도 건필 하도록 하겠습니다. 破天魔痕님도 부디 이번회 재미있게 감상해 주세요. :) 2. 쿠로시온 : 오오. 술. 저도 오늘따라 시원한 맥주 한캔이 당기네요. 대한민국이 축구 이겨서 너무 기분이 좋아요. :D 3. zjekfksqlc : 에. 혹시, 솔이가 부랑자들한테 당하는걸 기대 하신 건가요? 저는 NTR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ㅜ.ㅠ 4. GradeRown : ㅋㅋㅋㅋ. 그러게요. 둘 다 자면 어떡하라는 건지 정말 ㅋㅋ. 아, 애들 사람 죽여본적 있어요. 칠흑의 숲에서요. 사람은 아니고, 부랑자가 정확 하겠네요. :) 5. ruinmaster : 헤헤. 더 걱정해 주세요. 걱정 받은것을 좋아 합니다. 어서 더 걱정을!(퍽퍽!) 6. 보라우 : 그렇습니다. 둘의 조합은 정말로 잘못이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7. 오피투럽19 : 네. 저는 게이가 아니에요. 저는 게이가 아니에요. 부탁 드려요. 흑흑흑흑…. 자꾸 이러시면 수현이랑 안현씬을 넣어 버릴! 아, 아닙니다. 험험. 제가 잠시 헛소리를. 8. gkgngh : 제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분들이라면, 모든 분들에게 항상 감사하고, 사랑합니다.(응?!) 글을 쓰는 입장에서 제 글을 기다려주시는 독자분들이 계시다는건 크나큰 행복 이거든요. :) 9. 애독자C : 아닙니다. 그럴리 없어요. 절대로 아닐겁니다. NO! 10. 뉴질대디 : 쿠폰 감사합니다. (__) 저도 얼른 <절규의 동굴>에 들어가고 싶네요. 오늘 수요일인데 연참이나 한번 해볼까요?! 전개가 느리면 연참이라도 해야죠! 이 나쁜 작가 같으니라고!(자학자학.)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50 / 0933 ---------------------------------------------- 절규의 동굴(1) 언데드 계열의 몬스터들 에게 보통 무기들은 통하지 않는다. 놈들을 상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제의 축복을 받거나 신성을 가진 무기를 사용하는 것 이다.(대표적으로 은제 무기를 들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마력을 담은 무기들도 일정 데미지를 주는 게 가능하다. 푸른 산맥의 내부에는 고요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오직 들리는 소리라고는 나와 일행들이 밟는 풀 소리뿐. 아주 가끔 귓가를 사늘하게 울리는 울음 소리들이 간헐적으로 들려 왔지만, 나와 고연주의 조언으로 다들 의도적으로 흘려 듣고 있었다. 울음 소리에 이끌리는 순간, 반시를 만나는 건 피할 수 없다. “하아…. 하아….” 안솔은 어느새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었다. 일부러 행군 속도를 늦췄음에도 불구하고 이러는걸 보니, 아무래도 사기의 영향을 다른 사용자들보다 많이 받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간간이 걸음을 멈추기도 하는데, 뭔가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믿기지가 않아. 정말로 지금 우리들이 있는 곳이 아까 밖에서 봤던 푸른 산맥이 맞는 거야? 어떻게 이렇게 한 순간에 분위기가 바뀔 수 있는 거지?” “언데드들이 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대충 짐작할 수 있죠. 이 푸른 산맥은, 저주 받은 땅 이에요. 한걸음 내디딜 때 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원망, 악의가 밀고 들어오는듯한 기분이 드는군요. 불길해요.” 고연주의 대답에 비비앙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나마 둘 정도가 되니까 이렇게 대화라도 주고 받는 거지, 다른 일행들은 안솔과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을 것이다. <폐허의 연구소>에 있던 망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분위기였으니까. 1회차 시절. 당시 내가 있던 캐러밴은 길을 선도하던 궁수 사용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절규의 동굴>로 입성할 수 있었다. 당시 캐러밴의 대장 이었던 사용자는 성질이 열혈이라는 점만 제외하고는, 나름 괜찮은 실력을 갖고 있는 사용자로 기억한다. 그 사용자의 활약 덕분에 캐러밴은 <절규의 동굴> 맨 마지막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동굴의 끝에 있던 방으로 들어가는 순간, 우리들은 악몽을 만나고 말았다. 그 악몽에 의해 항상 열성적으로 우리들을 이끌던 대장은 갈갈이 찢겨졌고, 남은 캐러밴 인원들은 감히 반항할 생각도 못하고 쫓기듯 도망치고 말았다. <그 놈>의 추적에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추가로 찢긴 후에야 남은 인원들은 동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뭐, 동굴 밖도 안전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오라버니. 위험해요.” 산맥부터 계속 나와 길을 맞추던 안솔은, 긴장한 낯빛으로 걸음을 멈췄다. 기특하게도 안솔은 예감만으로 앞으로 일어날 길흉을 거의 때려 맞추고 있었다. 입술을 부들부들 떠는 그녀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나는 차분히 오른손을 들었다. 전투를 준비 하라는 신호였다. “사용자 김수현. 좋지 않아요. 반시는 아니지만 땅을 주기적으로 울리는 소리, 스치는 소리가 동시에 들리고 있어요.” “죽음의 기사. 아니면 리치. 최악의 경우 두 놈 모두 올 수도 있다는 소리군요.” “아니기를 바래야죠. 리치는 반시보다 상대하기 까다로워요. 벌써부터 네임드 몬스터들의 출현이라. 도대체 이 산맥은 어떻게 돼먹은 거에요?” “저도 처음 오는 곳 입니다. 저라고 다 알겠습니까.” “으이구. 내가 정말 못살아.” 내 말에 고연주는 엄살을 부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약간의 뻥을 치고는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선택지는 두 가지가 있다. 맞선다. 피한다. 맞서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정작 문제는 전투시 일어날 소음이 문제가 된다. 안 그대로 우리들이 들어온 후 예민한 신호를 보내는 놈들이 깔렸는데, 지금껏 해온 전투들처럼 요란한 폭음을 낸다면 그 길로 곧바로 포위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개중에는 반시 같은 상대하고 싶지 않은 녀석들도 더러 끼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피하는 건 더더욱 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겠지만, 두 놈이 한번에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리고 설령 등장한다고 해도…. 나는 이내 마음을 정하고는 천천히 앞으로 들어가기 시작 했다. 지금껏 전투한 어떤 놈들보다도 위험할 수 있었다. 고연주의 예상대로 죽음의 기사와 리치가 나온다면, 마냥 여유롭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해답은 하나 밖에 없었다. 다른 놈들이 채 몰려들기 전에 빠르게 언데드들을 제압하고 그 자리를 벗어 나는 것.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5분 정도 걷자, 이윽고 솔이가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저기 앞에서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음울한 기운을 내뿜는 기다란 대열이 우리를 향해 다가 오고 있었다. 잠시 동안 놈들의 전력을 살펴본 나는, 예상이 반만 맞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죽음의 기사는 보이지 않았지만, 유령마를 타고 머리에 왕관을 쓴 로브를 입은 깡마른 해골이 있었다. 리치였다. 그리고 그 주위로는, 나름대로 장갑을 갖춰 입은 해골 병사들이 이빨을 딱딱거리며 리치를 호위하고 있었다. 놈들의 숫자는 열둘 정도 되었지만 대열이 질서 정연하고 엄중한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쪽에서도 우리를 발견한 듯 일직선으로 오고 있었고 이윽고 어느 정도 거리를 남기고 서로 행군을 정지 했다. 놈들은 멈춰선 와중에도 간헐적으로 뼛소리를 울렸는데, 안솔은 침을 삼키며 지팡이를 조금 앞으로 들었다. 리치 또한 선두에 선 내가 대장이라는 사실을 인식한 것 같았다. 움푹 파여 있는 눈구멍 사이로 시퍼런 불길이 나를 응시하는 게 느껴졌다. 그 순간, 뼈만 남은 리치의 구강이 서서히 열리는걸 볼 수 있었다. <흐으으으으으으으.> <흐아아아아아아아.> 뭐라고 말을 했는지는 알아 들을 수 없겠지만, 좋지 않은 것임은 확신할 수 있었다. 주변에 있던 중무장한 해골 병사들이 하나같이 무기를 치켜들며 우리에게 적의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하기야 우리들은 애초에 무기들을 빼 들고 있었으니 할 말은 없지만, 분위기는 절대 좋은 쪽으로 흘러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다가 선공을 당하고 시작하는 건 절대로 사양하고 싶었다. 해서, 나는 검을 중단에 들어 맞춘 후 차분히 입을 열었다. “고위 계열 언데드, 리치 입니다. 시간이 많지 않은 관계로 일단 전술만 바로 설명 드리겠습니다. 진형은 근접 계열 사용자들은 저를 선두로 봉시진을, 원거리 계열 사용자들은 후방 지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사용자 고연주는 키퍼로 두겠습니다. 리치는 제가 맡을 테니 나머지 해골 병사들은 애들의 좋은 상대가 되어줄 겁니다.” 내가 빠른 목소리로 입을 열자 리치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손에 들린 낡은 지팡이가 서서히 올라오는 게 보이자, 나는 지체 없이 돌진 명령을 내렸다. “안현과 유정은 각각 좌우로 달려 들도록. 그럼 간다.” 나는 말을 마치고 곧장 리치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 들었다. 그러자 주위의 해골 병사들이 더욱 경계를 단단히 함과 동시에 지팡이를 들지 않은 리치의 다른 손이 나를 겨냥하는 게 보였다. 스스슷. 파앙! 파앙! 파앙! 놈이 내민 손바닥에 검은빛 구체가 동그랗게 모이고, 이내 나를 향해 연발로 쏘아졌다. 다크 캐논(Dark Canon)이군. 가장 좋은 방법은 피하는 거지만, 다른 일행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으므로 가볍게 검을 휘둘러 터뜨려 버렸다. 해골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왠지 놈이 흠칫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가장 먼저 달려 들었으니 가장 먼저 도달하는 건 당연한 일 이었다. 앞을 가로막는 해골 병사들을 강하게 발을 굴러 뛰어 오르자 나를 향해 지팡이를 조준하고 있는 리치를 볼 수 있었다. 이형환위를 쓸까, 아니면 한번 더 허공을 발돋움 할까. 선택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곧이어 놈의 지팡이 끝으로 쏘아진 뭉클한 검은 기운이 나를 덮쳐 드는걸 보고, 나는 곧바로 발에 마력을 담아 허공을 강하게 박차 올랐다. 그대로 공중제비를 돌아 리치의 뒤로 돌아서자 뒤에서 고연주의 것으로 추정 되는 탄성이 들렸다. 그녀 정도라면 방금 전 내가 벌인 행동이 어느 정도의 클래스를 갖고 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대로 한 바퀴 빙글 돈 나는, 원심력을 이용해 놈의 정수리 쪽 방향을 향해 검을 일직선으로 내려 그었다. 그 순간 리치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반투명하게 물들였고, 구강이 씩 열리는 게 보였다. 나 또한 마주 웃어 주고는 더욱 힘을 주어 검을 하강시켰다. 스팟! 내 검은 단숨에 리치의 몸을 두 쪽을 냈고, 놈의 몸은 마치 연기가 갈라지듯 좌우로 흩어져 버렸다. 원래대로라면 그냥 검만 통과하거나 설령 갈라지더라도 다시 붙어야겠지만, 리치의 몸은 다시 붙지 못했다. 내친김에 유령마의 몸까지 베어버린 탓에 리치는 금방 몸을 허물어뜨리고 말았다. 리치는 죽지 않는다. 라이프 배슬을 파괴하지 않는 한, 몇 일 시간이 흐르면 다시 부활해버리고 만다. 하지만 나에게는 해당 되지 않는 말 이었다. 놈의 몸은 현재 난리가 나 있었다. 유체화 마법으로 내 물리 공격을 피하려고 했는데, 여지 없이 잘라져 버리고 말았다. 반으로 갈라진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놈을 보며 나는 가볍게 손가락을 퉁겼다. 곧이어 전신이 맑은 불꽃에 휩싸이는 리치를 보자 절로 가벼운 휘파람이 나왔다. 내가 리치를 처리하는데 걸린 시간은 채 8초도 걸리지 않았다. 멍하니 나를 보고 있는 일행들을 보고 혀를 찬 후 해골 병사들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리치가 소멸한 해골 병사들은 더 이상 우리의 적이 아니었다. 제법 중무장을 갖추긴 했지만, 마법사들의 지원을 받는 애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방금 전 우리들이 상대한 언데드들이 까다로운 건 어디까지나 리치가 자신의 병사들은 원호하면서 강력한 마법을 난사하는걸 전제로 했었으니까. 하지만 애초에 내가 리치를 먼저 잡음으로써 나머지 해골 병사들을 손 쉽게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일단락 지은 후 곧바로 자리를 벗어났지만, 나는 가는 내내 고연주의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그녀는 조금은 질렸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는데, 그 심정을 조금은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는 약간 진심으로 상대한 것도 있지만, 나 또한 이렇게 쉽게 리치를 잡을 수 있을지는 몰랐다. 문득 내 몸에 있는 능력 하나하나가 정말 치트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이번 전투로 나는 한가지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2회차 초반에 고민한<주문 저격수(Spell Sniper)>보다 <검술 전문가(Sword Specialist)>를 선택한 게 잘했다는 확신. 마법사 사용자들은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 지금 고연주가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방금 전 내 전투는, 홀 플레인에 현존하는 마법사들의 가치를 절반 이상 상실 시키는 것과 다름 없었으니까. 아마도 마법사들이 군단 급으로 떼거지로 덤비지 않는 이상, 일대일로 나를 잡을 수 있는 마법사 사용자가 과연 있을까. 애들의 분위기는 아주 조금이지만 가벼워져 있었다. 처음에만 해도 은근히 자신 없어 하는 애들 이었는데, 내가 리치를 격살하고 본인들도 해골 병사들을 처리하자 자신감을 회복한 모양이다. 초입 부에서 리치를 만났지만, 뒤이어 만난 두 무리의 언데드들은 그런 고위급 몬스터가 포함 되어 있지 않았다. 있어 봤자 심연의 기사(Abyss Knight)였달까. 그렇게 우리들은 나와 안솔이 서로 합의한 방향으로 계속해서 산맥 안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언데드 들은 몰려 있었고, 우리는 처리하자마자 곧바로 자리를 뜨는걸 반복하고 있었다. 살얼음 같은 전투를 치르며 2시간 이상을 행군하자 어느새 두 번째 산 봉우리를 넘을 수 있었다. 즉 포인트 지점에 다다랐다는 소리였다. 나는 곧바로 제 3의 눈을 발동 시키며 주변을 차분히 탐색하기 시작 했다. 일단 찾아야 할 장소는 물이 흐르는 골짜기였다. <절규의 동굴>이 위치한 장소는 물이 흐르는 골짜기, 즉 산맥 안 계곡에 붙어 있었다. 깎아 지른듯한 절벽 형태의 계곡을 더듬다 보면 습지가 나오는데, 동굴 주변에는 여러 나무들과 수풀들이 동그랗게 군락을 이룬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예전 기억을 더듬은 후 살짝 경사진 비탈길을 내려가자 귓가에 미약하게 졸졸졸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 했다. 그 소리를 따라가 고개를 아래로 내미니 예상대로 산 아래로 길고 움푹 들어간 지형이 눈에 들어 왔다. 이제는 계곡 하단부 어딘가에 형성 되어 있는 타원형의 좁은 통로를 찾기만 하면 되는 일 이었다. “지금부터 계곡 안으로 진입 하겠습니다. 목표 지점에 도달 했으니, 다들 긴장을 늦추지 말아 주세요.” 나는 조용한 음성으로 일행들에게 말을 건넨 후 안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 또한 계곡에 들어가는데 불만은 없는 듯, 조심스럽게 비탈길 아래로 한 걸음 내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중간 순위 발표로 리리플을 다음회로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독자분들의 양해를 구하며, 151회에 150회 리리플을 합쳐서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절규의 동굴>이 나왔습니다. 다음 파트에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지금껏 <절규의 동굴>로 들어가기를 기다려주신 분들에게 대단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몬스터를 처치하고, 아이템을 얻고, 금은보화를 얻는 과정은 대단히 즐거울것 같네요. :D 과연 <절규의 동굴>에는 어떤 몬스터들과 재보들이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 그리고 인기 투표 결과 입니다. 고연주를 제외하고 했는데 그래도 고연주에게 투표하신 분들이 많으시더라구요. 한별아 힘내! 아빠가 나중에 진짜 캐릭터 투표 하게 되면 표 많이 나오게 밀어줄게. ㅜ.ㅠ 안솔 : 21표 비비앙 : 15표 고연주 : 7표 김한별 : 6표 이유정 : 5표 정하연 : 5표 세라프 : 2표 암컷 원숭이 : 1표 순위 입니다. 중간 집계는 이렇지만, 나중에 캐릭터 투표에서 1등을 한 캐릭터에게는 아무래도 서비스가 있겠죠. 예를들어, 몇몇 독자분들이 항상 말씀하시는 <맛잇게아힣힣흫햏홓(천 모님의 표현을 빌렸습니다. 양해 부탁 드립니다.)> 같은거 말이죠. 하하하. PS. 저, 저도 딱히 독자분들을 위해서 연참한건 아니에요. 이, 이건 그러니까. 네. 맞아요. 얼른 절규의 동굴로 들어가고 싶어서 연참한 거에요. 흐, 흥!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51 / 0933 ---------------------------------------------- 절규의 동굴(2) 골짜기 아래로 내려온 후 주위를 둘러보자 낯설지 않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1회차 시절에는 이렇게 곱게 내려오지도 못했었다. 당시 언데드 무리에게 쫓기고 있었던 캐러밴은 한 명의 궁수 사용자가 잡히는 사이 다들 이 아래로 몸을 날렸다. 온 몸이 긁히고, 상처 입고, 꺾였지만 그때는 그저 살겠다는 일념에 벌떡 일어서 도망칠 곳을 탐색 했다. 그리고 캐러밴의 대장이 발견한 게 바로 <절규의 동굴> 이었다. “응차. 여기 은근히 가파르네. 김수현. 그럼 이곳 어딘가에 네가 말한 <절규의 동굴>이 있는 거야?” 비비앙이 내려온걸 마지막으로, 일행은 전부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었다. 그녀는 흙이 뭍은 망토를 툭툭 털어내며 내게 물었다. “그래. 혹시 모르니까 너도 주변을 잘 봐둬. 나무나 수풀이 다른 곳보다 빽빽하게 서있는 곳이 있으면 그곳이 동굴 입구일 확률이 높아. 그리고 솔이도 이만 다시 원래 대열로 돌아가렴. 그 동안 수고했다. 그리고 이번 탐험을 마치고 돌아가면 잠깐 오빠랑 얘기 좀 하자.” 안솔은 조금 아쉬운 얼굴 이었지만, 순순히 붙잡고 있던 옷깃을 놓았다.(얘는 틈만 나면 내 옷을 꾹 붙잡는 버릇이 있었다.) 어떤 얘기일지 궁금해하는 표정이 보였지만, 지금 여기 모두가 모여 있는대서 말할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그 동안 나도 곰곰이 생각해봐야겠지만, 아무래도 그녀의 행운 능력치를 101 포인트로 올리는데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졸졸졸졸. 물이 흐르는 골짜기에는 고요한 적막감만이 가득 했다. 오직 물이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 골짜기는 전체적으로 옆으로 누운 V자 형태를 그리고 있었는데, 오른쪽으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절규의 동굴> 입구 앞에 제법 공간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기 때문에, 나는 일단 왼쪽으로 가닥을 잡기로 결정 했다. 행군을 하는 동안 언데드 무리들은 보이지 않았다. 처음 예상했던 것만큼 골짜기 위로는 언데드들이 보였는데, 이상하게 아래쪽에는 스산한 기운만 가득하고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1회차에는 정신 없이 달리느라 느끼지 못했지만, 그때도 별다른 언데드 무리들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놈>이 있는 만큼 호응 면에서 보면 아래에 더 많아야 하는 게 정상일 텐데.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걸까? 20분 가량이 지났을 때 나는 목표하던 지점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내가 아무런 말도 없이 걸음을 멈추고 옆으로 빠지자 일행들의 멀뚱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그에 개의치 않고 마치 무언가를 감싸듯, 동그랗게 모여 있는 나무와 수풀들이 보였다. 나는 가만히 검을 들고 우거진 수풀들을 헤치며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절규의 동굴>의 입구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제 유적이나 던전등을 발굴해도 큰 감흥은 없었다. <고대 연금술사 비비앙의 던전>이나 <폐허의 연구소>는 뛸 듯이 기뻤지만, 이제는 당연하다고 받아 들이고 있었다. 아마 이번에는 내가 잘 알고 있는 곳이라 그런 점이 어느 정도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어찌됐든, 기분이 괜찮은 건 사실 이었다. 내 뒤를 따라 들어온 일행들은 동굴의 입구를 보고는 이내 하나같이 탄성을 질렀다. 이로서 3연속 탐험 성과가 발생한 셈이라(물론 신상용과 정하연은 2회.) 절대로 가벼이 생각할 것들은 아니었다. “하. 정말 이렇게 쉽게 발견해도 되는 건가요? 그냥 동굴 아니에요?” “우리 솔이가 좀 복덩이여야죠. 아닐 거에요.” “어휴.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흥.”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그거야 당연히….” <스아아아아아아아.> 내 말에 의심 가득한 눈동자로 입을 열려던 고연주는, 갑자기 동굴 안에서 들려온 사늘한 소리에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한창 분위기를 고조시키던 일행들도 찬물을 맞은 듯 분위기는 다시 급속히 가라 앉았다. 나는 한두 번 헛기침을 한 후, 다독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마도 절규의 동굴도 푸른 산맥에서 만났던 언데드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 여기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계곡의 너비를 살펴본 결과 그렇게 길고 넓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조금만 서두른다면 아마 내일 아침쯤에는 동굴을 나올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조금 정신을 차린 듯 애들은 하나 둘 등을 피고 어깨를 들었다. 이윽고 일행들을 정렬시킨 나는, 곧바로 <절규의 동굴> 안으로 진입 했다. 드디어 마지막 탐험이라는 생각에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고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발자국 들어가지도 않았는데도 동굴의 안은 캄캄하고 음침한 기류를 자아내고 있었다. 동굴 벽면에 덕지덕지 붙은 이끼들과 축축하고 불쾌한 냄새도 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정하연을 슬쩍 바라보았고, 그녀는 고개를 한번 끄덕인 후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라이트(Light).” 그녀가 라이트 주문을 외우자, 그나마 주위가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전방으로 구체를 동동 띄운 상태로 우리들은 더 깊은 곳을 향해 탐험을 시작 했다. 당연한 말 이지만 <절규의 동굴>은 층이 구분이 없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기다란 통로를 벗어나고 분로에 들어가면 꼭 쥐구멍 같은 여러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선택을 잘 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 와서 고백하건대 그때 절규의 동굴은 완전한 공략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당시 동굴로 들어오기 전 궁수 사용자를 잃어버려 우리들은 굉장히 많은 시간을 헤맸고, 그 결과 의도치 않게 동굴 구석구석을 청소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마지막의 <그 놈>은 처리하지 못하고 도망 나왔으니, 100% 공략이라 보기에는 애매한 점이 있었다.(후에 그 놈은 우리들의 탐험 보고로 꾸려진 조사단에 의해 패퇴 되었다.) 나는 절규의 동굴을 구석구석 다 둘러보고 싶지는 않았다. 해서, 이 통로가 끝나고 나오는 분로에 미리 계산한대로 움직일 계획 이었다. “숨 쉬기가 힘들어. 왜 이렇게 동굴이 습하지? 눅진눅진하고.” “그러게. 차라리 밖이 더 나았던 것 같기도 하다.” 이유정과 안현이 도란도란 얘기를 주고 받는걸 들으며 나는 찬찬히 감지를 돌리고 있었다. 분로가 나오기 전이라고 해도 충분히 몬스터가 튀어 나올 가능성은 있기 때문에, 막 들어가는 건 곤란한 일 이었다. 그렇게 15분쯤 걷는 도중 펼치고 있는 감지의 끝자락에 무언가 살짝 걸렸다가,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계속해서 기척은 걸렸다가 사라지고, 다시 걸렸다가 사라진다. 마치 나를 놀리는듯한 그 행동아 부아가 치밀었지만 재빠르게 가다듬고는 걸음을 멈췄다. “80미터 앞에 이상한 기척이 걸렸습니다. 어떤 놈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층 더 경계하며 나아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일행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 했다. 나는 속도를 조금 더 늦춘 상태로 다시 진입을 재개 했다. 그 상태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우리들은 아까 이상한 기척이 걸렸던 지점에 근접할 수 있었다. 그곳은 온전한 어둠이 내려 앉아 있었는데 이따금 통로의 중앙에서 시퍼런 불길이 번쩍였다가 다시 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라이트 구체를 더욱 앞으로 보내볼게요.” 정하연이 손을 한번 휘젓자 유지하고 있던 구체는 두둥실 앞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구체가 중앙으로 들어가고 주변을 화악 밝히는 순간, 좌우로 일렬로 나열 되어 있는 수많은 동상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동상의 모습을 발견한 일행들은 하나 같이 다들 침음성을 흘렸다. 그리고 나도,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동상은 모두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치 인간의 해골을 허리를 기점으로 뚝 잘라 상반신만 갖다 놓은 것 같았다. 형태는 문제가 아니었다. 분명 내 기억에는, 분로들이 나오기 전 이런 동상들과 전투를 치른 기억들이 없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와중, 무언가 공기를 찢는듯한 스파크가 튀는 소리가 들렸다. 파츳! “어…!” 정하연이 당황한 목소리가 들리고, 앞에서는 하얀 빛과 푸른 섬광이 뒤섞여 연신 번쩍거리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일 같아 나는 반사적으로 제 3의 눈을 발동 시켰고, 눈 앞의 현상을 확인한 후 곧바로 입을 열었다. “라이트(Light) 마법 캔슬하세요! 어서!” “캔…!” 파츳! 파츠츳! 파츠츠츳! 그녀의 호응도 나름 빨랐지만, 아쉽게도 한 발 늦은 것 같았다. 진작에 제 3의 눈을 사용할걸 후회가 들었다. 다 알고 있다고 자신하다가 뒤통수를 맞은 격 이었다. 라이트(Light) 마법은 곧 폭죽 터지는 소리를 내며 터져버리고 말았고 그와 동시에 점멸하던 푸른 불길이 크게 피어 올랐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일단은 모든 생각을 깨끗하게 접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우선 중요한 건 전투였으니까. 나는 곧바로 오른손을 들어올리고 크게 외쳤다. “심상치 않습니다. 모두 전투 준비 하세요!” 화르르르르르르륵!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시퍼런 불길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각각의 동상에 쏘아졌고, 그 불길을 맞은 동상들은 이내 꿈틀거리며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 했다. 이윽고, 쩌적이는 소리와 함께 각 동상들의 표면에 금이 가는 것과 동시에 사방으로 창연한 빛을 뿜었다. 그 빛이 너무도 강렬해, 일행들은 다들 눈을 찡그리고 말았다. 다시 눈을 뜨자, 상반신만 남은 해골에 시퍼런 불길을 일렁인 채 허공을 떠다니는 놈들이 보였다. 수는 열 개체 남짓 되어 보였다. 이놈들의 정체는 바로 레이스(Wraith)였다. <하아아아. 하아아아아.> <흐아아아. 흐아아아아.> 레이스들은 불길로 이루어진 날개를 펄럭이며 우리들에게 스산한 비명을 질렀다. 다른 일행들은 다들 준비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들이 지금껏 영체형 몬스터를 상대한적이 있던가? 애들이 또 당황하기 전에, 나는 재빠르게 오더를 내렸다. “안솔! 홀리 스트라이킹 주문을 안현이랑 이유정한테 걸어. 그리고 안현이랑 이유정은 솔이의 주문이 들어오기 전에 일단은 마력을 끌어 올리고 싸워. 절대로 마력을 담지 않은 보통 무기로 치면 안돼. 알아 들어?” “““네!””” 애들이 힘차게 대답하는 소리를 듣고, 나는 강하게 검을 휘둘러 전방으로 강력한 검파를 쏘아 보냈다. 일단은 준비할 시간이라도 벌어둘 심산 이었다.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나간 무형의 검파에 다행히 몇 놈이 제대로 걸려들었고, 이윽고 산산이 으스러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예상보다 잘 풀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였다. “아직 죽지 않았어요.” 고연주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리고, 으스러진 놈들의 위로 또다시 불길이 치솟아 오른다. 이윽고 그 불길들은 중앙으로 빨려 들어 갔다가, 조각난 뼛조각들 위로 다시금 흘러 들었다. 그리고 이어진 광경은 확실히 고연주의 말대로였다. 조각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뼛가루들까지 다시 착착 조립 되더니, 소름 돋는 비명을 지르며 레이스가 일어나는 게 보였다. 언데드 전용 부활 주문 이었다. 애초에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나 있던 놈들도, 그리고 다시 부활한 놈들도 서서히 우리와의 거리를 줄이기 시작 했다. 해답이 떠오르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너무 많은 경우의 수와 그에 대한 해답들이 떠오를 정도였다. 영체형 몬스터들 사이에서도 마력에 피해를 받는 정도가 각기 다른데 그 중 레이스는 가장 덜 받는 축에 속하는 놈들 이었다. 신상용이 거스트 오브 윈드(Gust Of Wind)로 밀어내고, 내가 낀 반지인 안티 매직(Anti Magic) 마법과 정하연의 오버랩(OverLap) 주문을 결합하기도 했지만 놈들은 보란 듯이 부활하며 계속해서 우리들을 괴롭혔다. 사정이 이럴진대 애들도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신성 주문을 둘렀고, 쓰러뜨린다고 해도 놈들은 꾸덕꾸덕 다시 일어나며 날개를 펄렁거렸다. 이래서 언데드 종류의 몬스터들이 상대하기 까다롭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경우의 상황에 완벽한 대비를 해야 언데드들의 한복판에서 마음 놓고 사냥할 수 있다는 공식이 나온다. 그러나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럽게 걸렸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결국 화정을 쓸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 씁쓸한 미소가 차 올랐다. “사용자 김수현. 잠시만.” 막 화정을 일으키려는 찰나, 내 어깨를 붙잡는 하나의 손길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시퍼런 날개가 내 볼을 스치듯 지나갔다. 아수라장중에 말을 거는 게 조금 짜증 났지만, 나는 한 발자국 물러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잘 들어요. 예전에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어요. 결론만 말하면, 지금 일행들과 맞붙는 레이스 전부를 처리해줘요. 다만 첫 번째 놈을 처리하고 마지막 놈을 처리하시되, 첫 번째로 처리한 놈이 다시 부활하기 전에 모두 해치워야 해요. 할 수 있겠어요?” “할 수 있습니다.” 고연주는 뭔가 감을 잡은 것 같았다. 아까 전 현상에 집중하느라 제 3의 눈으로 읽은 정보를 대충 넘겼는데, 다시 읽고 싶다는 유혹이 들었다. 그러나 일단 고연주를 믿어보기로 하고 나는 차분히 심호흡을 했다. 레이스 한 마리를 쓰러뜨리면, 불길이 가라 앉고 다시 들어가는데 3초 정도가 걸린다. 그리고 내부에서 공정 과정을 거치고 다시 밖으로 나오는데 4초가 걸리고, 그 모습이 완벽한 형상을 갖추는데 또 3초가 걸린다. 즉 레이스가 총 10마리니 1초당 한 마리씩 죽여야 한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1초에 꼭 한 마리를 죽일 필요는 없다. 나는 안현이 상대하고 있는, 네 마리의 레이스를 향해 질풍처럼 몸을 날렸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네, 3월 27일 수요일 기습 연참 이벤트는 다들 즐거우셨는지요? :D 꿀맛 같은 수요일이 지났으니 내일부터 다시 시작이네요. 하지만 목요일, 금요일이 지나면 다시 주말이 돌아오니 한층 더 힘을 내보겠습니다. 아, 그런데 내일 쪽지 시험 있는데 어떡하죠. ;ㅇ;? PS. 오늘 평테가 들어 왔네요. 제 츤을 보시고 비위가 상하신 독자분들이 계시다면 대단히 죄송합니다. 낄낄. 『 리리플(149회) 』 1. MT곰 : 1등 축하합니다. MT곰님도 오랜만에 뵙는것 같네요. 하하하. :) 2. 노루다람쥐 : 하렘이라. 솔직히 말씀 드리면 순애, 하렘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무분별한(예를 들어 수십명 이상의) 여성 사용자를 건드리는건 지양하고 싶네요. 3. 고장난선풍기 : 맞아요. 당시 본인의 상황에서는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선택을 했으니까요. 좋게 말하면 앞가림 잘하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정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하하하. 4. 레필 : 나중에 한소영도 많은 인기를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그때 가서 투표하면 너무 오래 후의 일이니 일단은 한별이 등장 시키고 투표를 해야 겠지요. 아. 어서 투표를 했으면 좋겠네요. 하하하. 5. a조운 : 네~! 애들한테 단단히 일러두도록 하겠습니다! :) 『 리리플(150회) 』 1. 약먹고삽질 : 제가 얼마전에 군에 재입대 하는 꿈을 꿨는데요, 삽질이라는 말을 보자마자 움찔 했습니다. 하하하. 1등 축하 드립니다. :D 2. 현오 : 에로유진 만세! 에로에로! 고자가 아니에요! 아하하하하하하하! 3. Mojito : ㅋㅋㅋㅋ. 저도 가끔 코멘트 보다가 실실 웃으면 부모님이 그러시죠. 에구 이놈아. 그렇게 좋냐? 네 ㅋㅋㅋㅋㅋㅋㅋㅋ. 4. 창세전쟁 : 아니 왜요! 저 연참 아주 안하는것도 아닌데! 의심부터 하시면 어떡해요! ㅋㅋㅋㅋ 5. 시안l : Yes. 여러분. 다들 잊으신것 같은데, 안솔은 성인 입니다. 올해 20살된 여성 입니다. 네.(도주. 그런데 사실이에요.)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52 / 0933 ---------------------------------------------- 절규의 동굴(2) 검을 들어 수평으로 맞춘 후 그대로 앞으로 찌르고 들어갔다. 목표는 미간 정 중앙. 이윽고 찔러 들어간 검 끝은 푸른 불길을 파고 들었고, 목표 했던 미간을 정확하게 맞출 수 있었다. 마력을 가득 담은 탓인지 놈의 두개골이 퍼석 소리를 내며 부스러지는 게 보였다. 그 힘을 그대로 유지한 채, 다음 레이스의 위치를 확인하고 바로 진로를 틀었다. 만일 레이스들이 일렬로 높이를 맞춘 상태서 안현을 압박하고 있었다면 일 점 찌르기 하나로 모두 재로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놈들도 몸을 움직이고 있는 만큼 그것을 바라는 건 요원한 일 이었고, 한 명씩 맞춰서 들어가는 검로를 변화시킬 수 밖에 없었다. 퍼석! 퍼석! 퍼석! 한 놈을 부술 때마다 손잡이를 툭툭 꺾어 바로 다음 놈을 노렸다. 안현은 자신의 옆으로 무언가 스윽 지나가자 놀란 듯 두어 걸음 물러섰지만 이내 대상이 나라는걸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네 번째 레이스를 쓰러뜨리는 순간 첫 번째 레이스의 잔해에서 시퍼런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안현의 입술이 열리는 게 보였지만 지금 들어줄 여유는 없었다. “하앗!” 유정이는 세 마리를 상대하고 있었다. 가는 도중 나에게 덮쳐오는 한 마리를 베어내자 어느새 옆을 점했는지 좌우로 달려드는 레이스들이 느껴졌다. 방해라는 생각과 동시에 달리는걸 멈춘 후 자세를 잡았고, 유정이와의 남은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그리고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놈들이 함께 들어오는 타이밍에 맞춰 왼발을 축으로 시계 방향으로 몸을 반 바퀴 회전 시켰다. 스걱. 스걱. 검신을 통해 썩은 통나무를 자르는 느낌이 타고 들어왔고, 그 여세를 몰아 이번엔 반대로, 오른발을 박차 크게 뛰어 올랐다. “뒤로 빠져.” 크게 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정이는 곧바로 몇 걸음 슬쩍 물러났다. 무언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는지 가장 가까이 있던 놈이 고개를 드는 순간, 나는 강하게 검을 내리쳤다. 아주 내리 그은 게 아니라 두개골 윗부분에서 멈춘 다음, 다시 처음처럼 검을 찔러 들어갔다. 고연주의 요구는 10초 안에 놈들을 모두 쓰러뜨리는 것. 대충 8초 정도 지났을까. 유정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레이스들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지만, 이내 다시금 불길이 올라오는걸 보고는 맥 빠진 표정을 지었다. 고연주는 무얼 하나 싶어 시선을 돌리자, 눈을 감은 채로 양 손을 전방으로 든 채 다섯 손가락을 모두 피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전방에서 퍼런 불길이 다발적으로 치솟는 것 느낄 수 있었다. 레이스들의 부활을 알리는 불길들 이었다. 바로 그때, 그녀는 감았던 눈을 설핏 뜨며 조용히 읊조렸다. “심연의 무리(Abyss Crowd).” 스읏. 스으읏. 그러고 보니 동굴은 온통 그림자 투성이라고 봐도 무방 했다. 그녀가 펼친 심연의 무리는 효용이 굉장히 자유롭다는데 높은 가치를 줄 수 있었다. 특히 이렇게 그늘 투성이인 곳 에서는 두말하면 입 아플 것이다. 레이스들이 부활하는 장소 부근의 어둠에서 슬금슬금 가느다란 먹빛 실선이 뻗어 나오더니, 이내 그 근방을 빽빽하게 메우는걸 볼 수 있었다. 막 우리에게로 다가오려던 레이스들은 실들에 걸린 채 옴짝달싹 못했고, 뒤이어 부활하는 놈들도 똑같은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열 마리의 레이스들이 모두 나타난 순간, 고연주는 “흣.” 야릇한 기합성과 함께 손가락을 한꺼번에 오므렸다. 그리고…. 펑!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아닌, 무언가 대단한 폭발음이 동굴 안을 뒤흔들었다. 허공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튀고, 공기가 찢기는 소음들. 요란한 소음에 인상을 찡그렸던 일행들이 다시 전방을 바라보자, 한 순간에 잘게 잘린 조각들로 변한 레이스들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놈들에게서 아까와 같은 불길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휴우. 오랜만에 쓰려니까 영 적응이 안되네. 끝났어요.” 고연주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그녀를 쳐다 보았다. 그러나 고연주는 귀찮다는 얼굴로 손을 내젓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열 마리를 동시에 모두 처치하는 게 해답 이었군요.” “그래요. 어떤 야료를 부렸는지는 모르겠는데, 열 마리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즉 한 마리라도 살아 있으면 끈임 없이 부활하는 거죠. 언데드니까 가능한 술법이에요.” “그렇군요. 고생 하셨습니다.” “아뇨. 고생은 뭘. 예전에 비슷한 경험을 했었는데, 혹시나 했어요. 안되면 어쩌나 싶기도 했고…. 그나저나 처음부터 되게 성대하게 환영해주네. 케이브 마스터는 도대체 어떤 놈 이길래 초장부터 이러는 거에요?” 엄살을 피우는 고연주를 보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분명 내 기억에는 초반부에 레이스들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부활하는 레이스들은 만나본 적도 없었고. 미래가 바뀌는 건 이해를 하겠는데, 이건 과거가 뒤바뀐 경우라 상당히 난감 했다. 내가 본래 이 동굴을 발견하는 때는 앞으로 2년 후. 그렇다면 그 2년 사이에 무언가 일이 있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예를 들면 내가 알지 못하던 다른 사용자들이 들어왔다가, 입구를 통과하고 도중에 전멸 했다던가. 한동안 고민하던 나는 탐험을 속행하기로 결정 했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이었고 지금 상태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조금 더 들어가면서 혹시 또 달라진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해서, 나는 조금 지쳐 보이는 일행들을 일으켰다. 아직은 휴식을 취할 때가 아니었다. “쉬는 건 뮬로 돌아가서도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여력이 남아 있는 만큼 바로 탐험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정렬 하시고, 대형 갖추세요.” 일행들은 내 오더에 빠릿하게 몸을 움직였고, 나는 레이스들의 잔해를 밟으며 다시 탐험을 재개 했다. 입구의 통로 길이는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조금 늦은 걸음으로 천천히 행군한 우리들은 20분 정도 지나자 앞으로 여러 갈래 갈라진 구멍들을 볼 수 있었다. 구멍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일종의 지하로 들어가는 셈이 된다. 경사가 그리 심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길 자체가 완만한 아래곡선을 타고 있기 때문이다. 맨 처음 들어갈 구멍은 왼쪽에 있는 구멍이었다. 잠시 구멍의 숫자를 세던 나는 계획 했던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입맛대로 고를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일행들은 순순히 내 뒤를 따라 몸을 숙였다. 원래는 여기서도 안솔을 앞세우고 싶었지만, 그 동안 실컷 확인한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 얼른 내부로 들어가 동굴을 공략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일행들은 다들 침묵을 지키며 내 뒤를 따르고 있었다. 동굴 안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지금껏 겪었던 어느 탐험보다 위협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만큼 모두의 얼굴에는 경계의 빛이 잔뜩 어려 있었다. 그러나 그 침묵도 구멍을 빠져 나온 순간 깨어지고 말았다. “우와. 뭐 이리 복잡해.” “으으. 보기만 해도 머리 아파.” 구멍을 나오는 순간 저 앞으로 또 이곳 저곳 갈림길이 난 통로들이 보였다. 고작 갈림길 몇 개에 머리를 짚는 애들이 한심 했지만, 나는 묵묵히 다음 통로를 향해 걷기 시작 했다. “궁수 사용자도 없는데. 이럴 때 사제들의 리드(Lead) 주문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고연주가 한마디 툭 던지자 안솔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보아하니 해당 주문을 아직 익히지 못한 모양이다. 확실히 다른 사용자의 시선으로 보면 현재 캐러밴은 막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남은 방법은 그것밖에 없기도 하고, <절규의 동굴>도 비슷하게 찾아냈기 때문에 크게 문제로 삼지는 않고 있었다. 실제로는 내가 치밀하게 계산한 루트로 움직이고 있는 거지만, 그녀가 그 사실을 알리는 만무했다. “어차피 들어가봐야 아는 법 입니다. 완벽한 클리어는 힘들어도 끝으로 가는 길만 찾으면 됩니다.” “하긴, 언데드들을 잡아 봤자 좋은 것들도 나오지 않을 테니 그게 낫겠네요. 그래도 끝은 봐야겠죠?” “그건 당연하고요.” 고개를 주억이며 대꾸하자, 고연주의 가벼운 콧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1회차 시절과 반대로 움직일 생각 이었다. 구석구석 청소하면서 들어가는 게 아닌, 최소한 들를 곳만 지나치면서 바로 <그 놈>이 있는 장소로 이동할 것이다. <절규의 동굴>의 완전한 클리어는 추후 이 동굴이 밝혀진 후 오는 조사단이나 또는 다른 사용자들에 의해 완료 되겠지. 물론 그전에 알맹이는 쏙 빼먹을 생각이지만 말이다. * 슬슬 한번 나타날 때도 되었는데, 언데드들이 출몰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와 몬스터들의 배회 위치가 똑같을 리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마음 한구석에서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을 잠재우며 계속 걸었다. 가는 도중 갈림길은 계속해서 나타났고 나는 기억대로 하나씩 하나씩 길을 맞추며 통로를 이동했다. “어. 계단이네?” 두 개로 나뉘었던 갈림길의 끝에 다다르자, 지금껏 유지 했던 완만한 경사가 아닌 조금 급격한 굴곡을 지닌 대지가 나타났다. 비비앙의 말대로 그곳은 굴곡인지 계단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는데, 손을 조금 탄 흔적이 있는 걸로 보아 아마도 계단인 듯 싶었다. 면밀히 굴곡을 살피던 고연주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주 약간이지만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남아 있어요. 놀라운 일은 아니에요. 초반에 동상들이 서 있던 것부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 동굴일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저 아래로 보면 커다란 공터가 보이네요. 사용자 김수현. 이곳으로 내려가실 건가요?” 천천히 다가가자, “경사가 심해요. 미끄러지지 않도록 주의해요.” 라고 말하는 고연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말대로 우리의 앞으로는 급작스럽게 경사가 꺾이는 지점이 있었는데, 그 지점 끝으로 거대한 공터가 일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바로 바닥으로 이어지는 길이 아닌 말 그대로 공터 일부가 보이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끝에서 뛰어 내려야 한다는 소리였다. “아주 잘못 오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고연주의 말에 긍정하자, 그녀는 입을 삐죽 내밀고는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 장소 또한 내가 알고 있는 장소였다. 눈 앞에 보이는 공터는 아무런 위험도 없었고, 휴식을 취한 후 하나로 나 있는 길로 들어갔었다. 그 순간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미 일행들은 내 뒤로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다. “보아하니 끝부분과 공터에 1미터 이상 높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들 조심하면서 들어 오세요.” 나 또한 말을 마친 후 천천히 굴곡을 밟고 앞으로 나가면서 감지를 돌렸다. 이제 아래 입구로 나가는 것과는 불과 몇 발자국 남겨놓고 있었다. 혹시라도 몬스터들이 숨어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 이었다. 가볍게 감지를 펼치자 다행히 몬스터의 기척이 걸리지는 않고 있었다. 대신 미약한, 그리고 알 수 없는 마법적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아 일단 손을 들어 일행들을 정지시켰다. 이미 일행들은 어느 정도 내려와 있는 상황. 여태껏 완만한 경사만 걷다가 갑자기 급경사를 걸으니 다들 동굴 한 면을 손바닥으로 집고 있었다. 아까도 방심하다가 레이스들에게 당했으니, 이제부터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속을 가다듬고는 제 3의 눈을 발동시키려는 찰나였다. “엄마아!” 갑자기 뒤에서 낮게 내지르는 비명 소리가 들리더니, 무언가 둔중한 충격이 내 몸을 타고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내 몸이 급격히 앞으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급히 중심을 잡으려고 했지만 원래 내 몸도 앞으로 쏠려 있었고, 나를 덮쳐 든 것이 뚫고 앞으로 나가면서 내 옷깃을 꽉 붙잡아버리는 바람에 덩달아 같이 넘어지고 말았다. “수현!” “오빠!” “솔아!” 일행들이 나를 외치는 소리와 동시에 나는 그대로 앞쪽으로 굴렀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마력을 일으켜 손을 땅에 박으려고 하는 순간, 허공을 부유하는 기분이 전신을 엄습 했다. 굴러간 힘이 제법 되었기 때문에 내가 뻗은 손은 간발의 차이로 입구 턱을 스쳤고, 나는 그대로 공터 안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쿵! “꺄앗!” 나는 떨어지는 와중에도 내 옷깃을 붙잡은 것을 품에 꼭 안고 등으로 받쳐 주었다. 둔중한 충격이 등을 타고 들어왔지만 따로 함정이 있거나 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내 몸을 투과한 충격을 조금 받았는지, 안솔은 얼굴을 찌푸린 채 머리를 떨고 있었다. “너.” 나는 뭐라고 말하려고 하다가 입을 다물고 재빨리 주위를 살펴 보았다. 다행히 언데드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아까 전 느꼈던 불안감이 다시금 몸을 강하게 엄습 했다. “으우우. 죄송해요오. 발을 헛디뎠어요….” 조금 정신을 차렸는지 솔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위에서는 연신 우리들의 이름을 부르는 일행들의 목소리가 들렸고, 이윽고 뻥 뚫린 입구에서 고연주가 고개를 비죽 내밀었다. “괜찮아요? 지금 내려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네. 별로 다친 데는 없습니다. 그래도 제법 높이가 있으니 조심이 내려오세요.” “별로 높지도 않고만 뭐.” 이내 고연주 뒤로 안현, 정하연등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고는 천천히 아래로 발을 내밀기 시작했다. 나 또한 몸을 일으키고 안솔도 마주 일으켜주자, 그녀는 지은 죄를 아는 듯 애꿎은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탐험 중에 조심성이 없다고, 아까 다물었던 입을 다시 열려는 순간 이었다. 팟! 파팟! 갑자기 눈 앞에 플래시가 번쩍이듯 하얀 빛이 점멸했다. 그와 동시에 눈 앞에 여러 메시지들이 동시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심지어 내가 아직 발동시키지 않은 제 3의 눈이 보내는 메시지마저도. 찰나의 순간 아뿔싸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눈은 떠오른 메시지들을 좇고 있었다. 『고대 마법 언컨시어스 리비얼(Unconscious Reveal) 마법의 발동을 확인 합니다. 이 마법은 고위 주문을 각인한 마법 진을 바탕으로 한 주문으로….』 『잠재 능력 전장의 가호(Rank : EX)가 발동 합니다.』 『행운 능력치 88. 방어 판정 실패. 전장의 가호 EX 랭크 확인. 감소 방어 판정으로 상향 합니다. 사용자 마력 능력치 96 확인. 항마 능력의 부재와 강력한 주문 마력으로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정신 계열 마법 입니다. 잠재 능력 심안(정)(Rank : A Plus)이 반응 합니다. 일부 방어 판정으로 상향 합니다.』 “뭐, 뭐라고?” 내 마법 방어 능력을 뚫고 들어온 주문이 있다는 메시지에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마음 속에서 불쾌한 마음이 울컥 솟구치고, 머리에 띵 하는 현기증이 돌기 시작했다. 나는 흩어지려는 정신을 붙잡으며 간신히 몸을 가누었다. 그 때 옆에서 땅을 강하게 밟는 소리가 귓가를 타고 들어왔다. “왜 갑자기 비틀거려요?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괜찮은 거 맞아요?” “오지 말아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고개를 돌리는 순간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이미 한참이나 늦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고연주를 필두로 우수수 떨어지는 일행들을 보이자 절로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파팟! 파팟! 그와 동시에 천장에서 예의 하얀 불빛이 다시 한번 번쩍거렸다. 그리고 그 빛은, 이번엔 우리 일행들을 완전하게 뒤덮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하하하. 우리 인공이가 모르는 일이 계속 터지고 있네요. :D 그리고 던전 탐험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마법 진(함정)이 발동 되었습니다. 다만, 환상이나 환영으로 하면 식상할 것 같아 조금 변화를 주어 보았지요. 과연 주인공 일행들을 덮친 주문은 어떤 마법일까요? :) 『 리리플 』 1. 쿠로시온 : 1등 축하 드립니다! 그런데 모에칸 19번 자료실이 도대체 무엇인지요? 궁금합니다! ?ㅇ? 2. 로로로로랍 : 네. 저도 항상 깜짝 놀랍니다. 이건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아요. 어떻게 업로드 하자마자 코멘트를 다시는건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랍니다. 'ㅡ' 3. 휘을 : 하하하. 저도 요즘 한창 바쁘네요. 집으로 돌아오면 가방부터 벗어 던지고 울트라 북 앞에 앉는다죠. ㅜ.ㅠ 벌써 깬 약속만 8개가 넘어가는 것 같아요. 흑흑. 그리고 그런 경향도 없잖아 있는 건 맞습니다. 다만, 리치 때는 화정이 필요해서 쓴 거에요. :) 4. GradeRown : ㅋㅋㅋㅋㅋㅋㅋㅋ. 전투 중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다. 이거 아주 좋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 행운에 대한 설정은 추후 자세히, 내용을 통해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모에칸이 도대체 뭔가요?) 5. 오피투럽19 : 이,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저는 남자, 오피투럽19님도 남자 입니다. 저는 게이가 아닙니다. ㅜ.ㅠ 6. 천겁혈신천무존 : 네? 네?? 네??? 네???? 네????? 능욕이라니요?!?!?!?!?! (도주.) 7. qklcnw : 그러면 수현이 이길 사용자 없습니다. 진정한 밸붕 이에요. 8. 사람인생 : 제사! 장남이시면 고생 많이 하셨겠네요! 수고 하셨습니다. 저는 차남인지라 조금 수월한 면이 있지요. 후후후. 9. zjekfksqlc : 하하하. 스포일러가 상관 없으시다면, 쪽지 보내 주세요. :) 물론 확정된 건 아니긴 합니다만. 10. 플룻 : 아. 플룻님 말씀도 맞을 수 있어요. 다만, 주인공이 그때 무기나 엘릭서나 능력을 구입한 이유 또한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독자 분들이 보시는 시선과 주인공인 수현이 보는 시선이 다를 수 있으니, 그 점 양해 부탁 드립니다. 해당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앞으로 이해가 되실 수 있도록 풀어 나갈게요. :) 11. 단벌신사 : 오예! 한별이 팬 한분 발견! 한별이 많이 많이 사랑해 주세요. ㅜ.ㅠ 12. 땅ol : 무검은 <절규의 동굴> 이후 사용할 예정 입니다. :) 13. 혼쥬 : 다시 돌아오신걸 환영 합니다. (__)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 드려요! 14. 猫鈴 : 이틀 동안 읽어주셔서 감사 합니다. 낙이라니, 대단히 감사한 말씀 입니다. ㅜ.ㅠ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53 / 0933 ---------------------------------------------- 절규의 동굴(2) “으읏!” 흰 빛이 공터를 아주 잠깐 물들였다. 마치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는 것처럼 눈 앞이 번쩍였다. 안솔도 그 여파를 피할 수 없었는지, 들고 있던 지팡이를 떨어트리며 양 손으로 이마를 누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살풋 찡그린 그녀의 눈동자가 허공을 따라 움직이고, 멍한 음성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걸 들을 수 있었다. “해, 행운 보정? 일부 방어 판정? 도, 도대체 이게 무슨….” 파팟! 파팟! 안솔이 찡그렸던 인상을 채 풀기도 전 흰 빛은 다시금 공터에 번쩍였고, 이번에는 일행들 또한 사정거리에 있었는지 다들 신음성을 흘리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심지어 몇몇은 그대로 자리에 주저 앉고 있었다. 나 또한 그 여파를 피할 수는 없었지만, 본신의 능력으로 어찌어찌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현기증이 도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이번엔 내 의지를 담아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일단은 나와 일행들에게 쏘아지는 정신 주문을 파악하고, 파훼하는 게 급선무였다. 『언컨시어스 리비얼(Unconscious Reveal). 해당 마법은 정신 공격 계열 마법을 가미한 마법 진 형태로 이루어진 고대 마법 입니다. 해당 사용자의 의식을 강제로 무의식 상태로 돌리고 그 안에 잠들어 있는 감정이 표면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작용하는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감정의 출현은 인간의 가장 약한 기억, 즉 약점을 바탕으로 하지만 어떤 감정이 어떻게 드러날지는 각각 사용자의 내부에 잠재돼 있는 욕망과 관련되므로 무작위적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언컨시어스 리비얼은(Unconscious Reveal)은 고대 홀 플레인 시절에서도 최고위급 주문으로 분류할 수 있고, 그 주문들 중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해당 마법은 그 수식이나 들어가는 마력이 너무도 방대해 사실상 단독 발동은 절대로 불가 합니다. 높은 위치에 있는 마법사 수십 명이 마법진의 힘을 빌어서….』 높은 랭크의 항마 능력, 그리고 극에 이른 마력 능력치.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완전 방어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 가끔 극에 이른 행운으로 일부 방어 판정을 받을 수 있는데, 기껏해야 한두 번에 불과하다. 정신 면역이 굳건한 사용자들도 몇 번은 버틸 수 있겠지만, 마법 진에 단발성이 아닌 연발성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버티는 건 힘들다. “이 무슨….” 제 3의 눈이 떠올린 정보들은 읽어 내려가면 갈수록 더욱 가관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내용에 어처구니가 없어 절로 입이 벌어지고 있는 찰나였다. 파팟! 파팟! 다시금 하얀 불빛이 침과 동시에 시야가 점멸한다. 머리에 감도는 현기증이 심해지는걸 느꼈지만 간신히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일행들은 하나 같이 자리에 쓰러진 채 고통에 몸부림 치고 있었다. 오직 고연주만이 자신의 머리칼을 쥐어 뜯은 채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고 있을 뿐. 그렇게 의미 없는 시간이 흐르고, 시간이 흐를수록 일행들의 비명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기어코 무의식이 강제로 발현 되기 시작한 것이다. 무의식이란 자기 자신의 언행이나 현재 상태를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일종의 작용으로 볼 수 있다. 그런 만큼 다들 멍하던 얼굴에 이내 하나씩 감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가장 먼저 반응한 사용자는 바로 정하연 이었다. “시, 싫어! 싫어어어어! 하지마! 아아아아아!” 그녀는 평소와는 다른 거친 음성을 내뱉으며 바닥을 헤집고 있었다. 그 너무도 처절한 외침에,나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섰다. 정하연은 그런 나를 보더니 애절한 표정으로 내게 손을 뻗었다. “가, 가지 말아요. 버리지 말아요! 수현! 도와줘요 수현! 도와줘요 제바아알!” 두근. “수현! 수현! 도와주세요! 가지 말아요! 버, 버리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두근. 두근두근. 그녀의 애절한 외침을 듣는 순간 심장이 크게 두근거리는걸 느낄 수 있었다. 항상 심장 안에 얌전히 잠들어 있던 화정이 절로 일어나며 내 몸을 맹렬히 돌기 시작한다. 처음 화정을 얻었을 때 강제로 몸을 개통하는 과정도, 뇌가 녹아버릴 것 같은 뜨거움도. 그때처럼 엄청난 고통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전신이 녹아버릴 듯한 느낌이 돔과 동시에 안에서 무언가 터져 나오려던 게 조금은 사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휴우우.” 비로소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리고 차분히 내면을 가다듬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한번 더 불빛이 번쩍이고, 몸이 비틀거렸지만 곧바로 가눈 후 일행들의 전반적인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심안(정)으로 인해 다스려진 마음은 캐러밴의 현 상태를 차분히 볼 수 있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소, 솔아. 미안해. 그렇게 놔둬서 미안하다. 오빠가 미안해. 어떻게든, 너만은 살려야 해. 우리 솔이 만은 어떻게든 살려야 해.” “오빠도, 안현도, 김한별도 다들 얻었는데 왜 나만 이지경이야? 버려지기 싫어. 왜, 왜 나만 이런 거냐고! 오빠. 오빠? 나 버리지 말아줘…. 제발….” “주, 죽기 싫어. 사, 사, 살고 싶어. 나, 나는 살아서 돌아가고 싶어. 아아아아악!” 안현, 이유정, 신상용을 보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동안 자신들이 마음 깊은 곳 억누르고 있던 무의식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오, 오라버니.”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평소와는 다른 표정을 하고 있는 안솔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에는 일부 저항한 것 같았지만, 결국 연속된 주문에 계속 저항할 수는 없었는지 그녀 또한 눈동자 어디 한군데가 멍해 보였다. 그리고 안솔은 평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얼굴 표정을 한 채 내게로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안솔.” “죄, 죄송해요오. 소, 솔이는요오. 정말로 못된 아이에요오. 항상 폐만 끼치고, 언니 오빠들에게 짐만 되고….” “솔아. 그건 절대로 못된 게 아니란다. 그러니 정신 차려.” “정말요오? 아니에요. 저 같이, 저 같은 민폐 덩어리는요오. 이런 주제에 밤마다 항상 오라버니를 생각하고, 오라버니에게 안길 생각만 하고 있어요오. 그래요오. 매일 밤마다 오라버니 생각이 들어요. 흐응, 하지만 이런 저를 알게 되면 오라버니는 분명 저를 경멸할 거에요. 그러니 참을 수 밖에 없어요. 하지만 오라버니가 좋은걸. 오라버니에게 자꾸만 만져지고 싶고, 냄새를 맡고 싶고, 그 안에 파고들어 어리광 부리고 싶은거얼. 왜냐하면 오라버니야 말로…흐읍.” 나는 곧바로 손을 내밀어 안솔의 입을 막았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놀란 기색이 없었고 오히려 날름 혀를 내밀어 내 손을 핥기 시작했다. 급히 손을 빼어 들자, 그녀는 마치 상처 입은 강아지 같은 눈망울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안현과 신상용은 좌절하고 있었고, 고연주를 제외한 여성 사용자들은 나에게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즉 알게 모르게 캐러밴의 여성 사용자들이 내게 의지하는 부분이 있고, 그 부분이 크다는 소리였다. 연이은 실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이미 벌이진 일에 자책을 하는 것 보다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능력들과 화정의 도움 그리고 정신력으로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지만, 이렇게 계속 버틸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곳 어딘가에 분명 마법진의 중심, 즉 핵을 이루는 부분이 있을 것이고 그곳을 터뜨리는 게 급선무였다. 나는 다시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고, 재빠르게 공터의 전부를 훑었다. 다행히 제 3의 눈은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 주었다. 신속하지만 꼼꼼하게 공터를 분석하던 나는 곧바로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그 순간, 번쩍이는 플래시 빛이 다시 터지려는 기미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지체 없이 검을 뽑고는 오른팔을 위로 강하게 쳐올렸다. 어떤 자세도, 마력도 담지 않았지만 내 근력 능력치로는 충분히 천장을 파고 들어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이다. 곧이어 힘차게 날린 검은, 공기를 찢을듯한 기세와 함께 일직선으로 세차게 치솟았다. 투퉁! 카앙! “!” 막 목표 했던 지점으로 닿기 전 이었다. 순간 천장의 아래쪽으로 희뿌연 막이 어리더니, 검의 돌파를 간단하게 튕겨 버렸다. 그대로 힘없이 떨어지는 검을 다시 잡으며, 나는 나지막한 욕설을 내뱉었다. 지금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냐. 김수현. 다시 한번 플래시 빛이 터지고, 마음속으로 잠재웠던 불쾌한 것들이 뭉클 깨어나는걸 느꼈다. 이것저것 잴 여유가 없는 상황 이어다. 해서, 나는 크게 마력을 끌어 올리며 다시 허공으로 검을 던졌다. 동굴로 들어온 후 웬만해서는 <그 놈>을 만나기 전까지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화르륵! 허공으로 떠오른 검에 맑은 불꽃이 휘감아 들고, 이내 연한 불꽃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나는 마력을 가일층 끌어 올려 막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에 더욱 힘을 돋웠다. 그러자 피어 오른 불길은 검신을 타고 올라가 거검의 모형을 만들고는 곧이어 폭발할 것 같은 커다란 염화(炎火)를 거세게 내뿜었다. 어느 정도 크기를 키웠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지체 없이 검을 허공으로 쏘아 보냈다. 왠지 예감상 앞으로 주문을 몇 번만 더 맞으면 나도 당할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씨이잉! 씨이이잉! 이글거리는 염화(炎火)의 검은 거친 파공음을 내면서 다시 일직선으로 치솟아 올랐다. 그에 맞춰 이번에도 천장에 흰 방어막이 생겼고, 곧 검 끝과 하얀 막은 거센 충돌을 일으킴과 동시에 커다란 소음을 내었다. 쿠구구, 쿠구구구! 한 쪽은 어떻게든 뚫고 들어가려고 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어떻게든 밀어내려고 하고 있었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서로 맞부딪치는 둘을 보며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뚫어라, 제발…!” 내 간절한 기원이 통한 걸까. 한동안 힘 겨루기를 하던 둘은 이내 막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는 것과 동시에 끝이 나버리고 말았다. 검은 아직 남은 여력과 함께 부드럽게 천장을 파고 들어갔고, 이내 동굴이 뒤흔들릴듯한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 시간은 흐르고, 또 흘렀다. 한동안 부서질 듯 흔들거리던 동굴도 조금 얌전해졌고, 더 이상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허공을 향해 살며시 손을 들었다. 바삭, 내 머리 위로 흙 몇 알갱이가 떨어지고 곧 천장에서 검이 쑤욱 뽑혀 나오는걸 볼 수 있었다. 허공섭물(虛空攝物)로 검을 다시 회수한 후, 제 3의 눈을 돌려 마법진의 파훼를 확인해 보았다. 역시나 고대 최상위 주문 어쩌고는 해도 화정의 힘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는지 흔적도 없이 타버린 중심부를 읽어 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마법 진을 깨뜨려도 일행들은 곧바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잠깐 움찔하긴 했지만, 의식이 다시 수면위로 떠오르는 데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대부분의 일행의 무의식이 아직 떠오른 상태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옅어지는걸 느낄 수 있어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무의식을 드러냈던 정하연은, 바닥에 쓰러진 채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딱히 그녀를 깨우지 않았다. 의식과 무의식의 전환에는 잠을 자는 것 만큼 더 좋은 게 없었으니까. 대부분의 일행들이 무의식이 다시 돌아가는 일환으로 잠을 자고 있었다. 다만, 아직 무의식이 남아 있는 두 명의 사용자는 철저하게 나에게 들러붙는 중 이었다. “도대체 왜 안 만져주는 거에요오. 얼른 머리도 쓰다듬고, 볼도 만져주란 말이에요옷. 아니면 다른 곳 만져도 괜찮으니까아….” “때려줘어. 괴롭혀줘어. 나 김수현한테 엉덩이 찰싹 찰싹 맞아보고 싶어. 부탁할게. 응?” “…그만 자라 좀. 나야말로 부탁할게. 응?” 오늘은 참 많은걸 알고 확인하게 되는 날 이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둘은, 내 품에 안겨서 이리저리 칭얼거리고 있었다. 비비앙은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너잖아.” 라는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었고, 안솔은 조금씩 무의식이 원래 자리로 되돌아 가는지 꾸벅꾸벅 고개를 꺼뜨리고 있었다. 둘의 무의식을 받는 건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윽고 안솔의 눈꺼풀이 닫힘과 동시에 먼저 내 허벅지에 머리를 박았고, 실컷 떠들던 비비앙 역시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는 게 보였다. 일단락 지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싶었지만 다시금 내 몸을 뒤덮는 그림자에 아직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그림자는 내 몸을 베고 누운 두 여성을 툭툭 차며 치우고는, 급격히 몸을 허물어뜨렸다. 그리고 그제서야 잊고 있던 한 명의 사용자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림자는 애들처럼 내게 안기고는 코맹맹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이잉. 연주도 오라버니한테 만져지고 싶고, 엉덩이 찰싹찰싹 맞고 싶답니다.” “…….” “뭐에요. 그 경멸하는 눈빛은.” “……?” “쳇.” 그녀는 김 빠진 얼굴로 콧소리를 내고는, 이내 허벅지로 머리를 기대어 옮겼다. 그림자의 정체는 바로 사용자 고연주였다. 나름대로 대단한 주문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10강>의 사용자라서 그런지 어떻게든 버틴 것 같았다. 물론 그녀의 입술에는, 붉은빛이 감도는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이게 괜찮아 보여요? 꼼짝도 못하고 웅크리고만 있었는데. 머리가 뒤흔들리는 기분이 정말 더럽더라고요. 세상에. 중간에 의식을 놓칠뻔한 것만 다섯 번 이에요.” 내가 말을 걸자 기다렸다는 듯이 투덜투덜 불만을 쏟아내는 고연주. 속사포 같은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슬며시 손을 들어 그녀의 눈을 감겨 주었다. 고연주의 얼굴은 대단히 피로감에 절어 있었고, 옷도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본신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말 그대로 엄청난 정신력 하나로 주문에 저항한 그녀의 내면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였다. “제가 불침번을 서겠습니다. 일단 눈을 붙이시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상세한 설명은 일행들이 정신을 차린 후 해드리겠습니다.” “나는 솔직히 이것보다 그 주문 속에서 당신이 움직이고, 진을 파훼 했다는 게 더 궁금…읍.” “일단은, 주무세요.” 나는 조잘조잘 떠드는 고연주의 입술을 손으로 가린 후 손바닥을 살짝 눌러버렸다. 손바닥에서 오물거리는 입술을 느꼈지만, 곧 포기한 듯 차분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편안한 숨소리가 손바닥을 타고 간질이는 것 같았다. …. ……. ………. “…우욱.” 모든 일행들이 잠든걸 확인한 순간, 갑작스럽게 헛구역질이 나왔다. 마음속의 불쾌함은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커져 자기 혐오감이 물 밀듯 밀려오는 것 같았다. 그랬던가. 마지막에 나도 걸렸던 건가. “뭐가 10년차 사용자고, 뭐가 끝을 본 사용자라는 거냐. 제 3의 눈, 화정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데. 멍청한 놈.” 자조적인 혼잣말을 중얼거린 후 연신 쓴 물이 올라오는 속을 달래기 위해 연초 한대를 꺼내 들었다. 이 미칠듯한 자괴감을 잠시 동안이라도 잊고 싶었다. 나는 연초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아들였다. 문득, 속 안의 것을 연기와 함께 내뱉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캐릭터 좌담회.> 나 “이 놈. 애들만 독자분들에게 혼나다가, 너도 한번 혼나보니까 기분이 어때?” 김수현 “…….” 안현, 이유정, 안솔 “키득키득키득.” 나 “힘 좀 얻었다고 까불지 말고, 잘 하란 말이야. 알겠어?” 김수현 “알겠으니까 나 고자 탈출좀….” (로유진님이 퇴장 하였습니다.) 김수현 “ㅜ.ㅠ….” PS. 조만간 독자분들을 깜짝 놀라게 해드릴게요. :D 그럼 저는 이만 물러 나겠습니다. 다들 즐거운 토요일 보내시구요, 일요일 자정에 뵐게요! (__) 『 리리플 』 1. 쿠로시온 : 1등 축하 드립니다. 에, 세상의 모든 동인지가 있는 곳이요? 그런 좋은, 아, 아니. 흠흠. 조만간 쪽지 한번 드리겠습니다. 흠흠. 2. 파카사리 : 5등 안에 드는것도 굉장히 잘하시는 겁니다. 암요. 1등은 정말 헬 그 자체라서요. 저보고 1등 코멘트 하라고 하면 절대로 못할것 같아요. ㅜ.ㅠ 3. GradeRown : 방어는 가능 하지만, 연속 방어는 힘들다고 보시면 됩니다. 행운은 만능이 아니거든요. :) 4. 無我之境 : 행운이 만능은 아니에요. 그렇게 따지면 초반에 데드맨한테 죽을일도 없었을 거에요. 지금껏 홀 플레인에서 가장 연구가 되지 않은 능력치가 바로 행운 이랍니다. 어디서, 어떻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 5. 꼬야 : 아니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 행운이 그런 능력치가 아니랍니다. 솔이의 <감>과 버무러져 던전 탐색에 어느 정도 효과를 보는건 맞지만, 이것저것 다 챙겨주지는 않아요. :) 6. 메카스타 : 거듭 말씀 드리지만, 행운은 만능이 아니에요. 아무리 행운이 높다고 해도 그걸 뛰어넘는 힘(여러 의미로….) 있으면 행운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D 7. hohokoya1 : 에구에구. 환절기 감기 무서워요. ㅜ.ㅠ 푹 쉬시구 감기 따위 훌훌 털어 버리세요! 8. 워리어 : 이번 챕터에 계획 했던 것을 정확하게 맞추셨습니다. 예전에 몬스터나 부랑자들을 상대할때 간간이 드러냈었죠. 예를들면 <감히>라던가, 자존심이 강하다는걸 어필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더 설명드릴것도 없네요. 정답 입니다. :) 9. rikuru : 아니에요! 항상 코멘트 순위권에 드시려고 노력 하시는 모습 보고 있었습니다. ㅜ.ㅠ 로또보다는~아이스크림을 사서 잡수시는게 어떨까요! 10. 미월야 : 그러게나 말이에요. 멍청한 주인공놈. 독자분들한테 단단히 혼났으니 이제 정신좀 차릴거에요. :) 11. gkgngh :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죄송합니다. 순간 웃음이. 네. 행운 100을 가졌지만 넘어지는것도, 요리를 태우는것도, 그리고 죽는것도 가능 합니다. :) 12. 카르페디엠1 : 헛. 쿠폰 감사합니다. (__) 부디 회사에서 잠깐 쉬실때 보시면서, 조금이라도 업무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푸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번주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54 / 0933 ---------------------------------------------- 절규의 동굴(2) 언제부터였을까? 어떻게 보면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수석을 하고, 여러 클랜에서 오퍼를 받았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항상 잘난 듯이 애들을 가르치고 앞서 행동 했지만 그러한 것들 아래에는 알게 모르게 교만함이 마음에 깔려 있었다. 나는 홀 플레인에서 10년 이상 활동한 사용자니까. 유일무이하게 끝을 본 사용자니까. 실제로 <연금술사 비비앙의 던전>과 <폐허의 연구소>에서 성과를 거두면서 그 교만함은 더욱 커져만 갔고, 내가 알고 있는 <절규의 동굴>에 이르러 터져 나오고 말았다. 1회차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커다란 힘을 얻었고, 그 힘들을 바탕으로 내 멋대로 다루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룬 게 아니라 내가 휘둘러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나라면 다룰 수 있다는 생각에 화정을 받아 들였고, 그 힘이 주는 부담을 알면서도 남용에 가까울 정도로 힘을 사용 했다. 그리고 그것을 지적하는 세라프의 조언은 아예 듣지도 않았고. 유현이 형과 한소영을 구하겠다는 구변 좋은 핑계 아래 지금껏 내 행동을 정당화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새 연초에서는 더 이상 연기가 새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생각을 접고 마음을 깨끗이 비웠다. 어떻게 보면 언컨시어스 리비얼(Unconscious Reveal) 마법에 걸린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으음.” 입에 물고 있던 연초를 떨어뜨리자 미약한 신음성이 귓가에 들렸다. 곱게 눕힌 사용자들 사이로 찰랑이는 단발이 몸을 일으킨다. 맑은 눈동자와 단정한 이목구비. 그녀는 멍한 눈동자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하연을 보며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괜찮습니다. 마법 진은 파훼 되었고, 주변에 언데드 몬스터는 없어요. 조금 더 휴식을 취하셔도 됩니다.” “수, 수현. 하~아. 놀랐어요.”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놀랐는지 가슴을 쓸어 내린 하연은, 조금 비틀리는 발걸음으로 나와의 거리를 줄였다. 다가오는 도중 이곳 저곳 쓰러져 있는 일행들이 눈에 밟히는지 그녀는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내 앞에 살짝 앉은 하연은, 아직 무의식이 강제로 발현된 것에 대한 후유증이 남아 있는지 이마를 가볍게 두드리는 게 보였다. “미안해요. 여기로 따라 들어온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뭔가 하얀 불빛이 번쩍인 이후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요. 다만 굉장히 슬프고 힘든 기분이 드네요. 다른 일행들도 그렇고…. 혹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하연이 말을 하는 도중 내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고연주를 흘끗 쳐다본 기분이 들었지만, 그냥 넘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녀의 물음에 한두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는 그 동안 겪었던 일들을 천천히 말해주었다. 얘기를 들으면서 하연은 역시 마법사 사용자라는걸 느낄 수 있었다. 잊혀진 고대 마법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는데, 마법 진을 산산이 깨부쉈고 어차피 천장에 있어 보지도 못할 거라고 하자 아쉬움의 탄성을 질렀다. 고대 마법들은 하나 같이 강력한 것들이 많기 때문에, 익힐 수만 있다면 본인의 실력 상승에 큰 도움이 될 것은 자명 했다. 본인의 실력 상승은 홀 플레인 안에서 생존 확률을 높여주기 때문에 딱히 흠잡을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얘기를 마치자 하연은 아주 약간 붉어진 얼굴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제 무의식이 어땠는지 들을 수 있을까요?” “듣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요. 꼭 듣고 싶어요. 괜찮으니 얘기해 주세요.” 내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고집을 부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그녀가 했던 말들을 일부 들려주었다.(나를 버리지 말아 달라는 내용은 일부러 제외 시켰다.) 그러나 그것만 듣고도 어떤 말을 했는지, 그리고 어떤 일인지 대충 감을 잡은 것 같았다. 하연의 얼굴에 급격히 그늘이 드리워지는 게 보였으니까. 아무래도 황금 사자 클랜에 있을 당시에 겪었던 일들을 완전하게 끊어내지는 못한 것 같았다. 잠시 동안 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듯 곧바로 표정을 지우며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라고 조그맣게 말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 또한 “미안합니다.” 라는 말로 대답해 주었다. 내 대답이 의외였는지,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고 이내 내 표정을 천천히 탐색한다. 다시 연초를 꺼내려는 순간 이었다. 어느새 다시 침착한 인상을 회복한 하연은 고운 입술을 열고 청명한 목소리를 내었다. “수현. 지금 자책감을 갖고 있군요.” “…….” “수현이 자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던전을 탐험하다 보면 함정에 빠지는걸 피할 수 없어요. 그리고 결국에는 수현이 우리 모두를 구했잖아요? 저는 수현한테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요.” 하연의 말에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책감을 갖고 있는 건 맞지만 조금 핀트가 어긋난 것 같았다. 그러나 내 침묵을 갑갑하게 느꼈는지, 그녀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아래로 내려가기 전, 분명히 수현은 정지 신호를 보냈잖아요. 제가 봤어요. 일행들도 그 신호에 따라 모두 몸을 멈췄고요. 하지만 안솔양이 발을 헛디뎌 부딪쳤고, 채 몸을 가누기도 전에 아래로 굴러 떨어졌어요. 굳이 따진다면 도의적 책임은 그녀에게 있는 거지, 수현한테 있는 게 아니에요.” 나는 잠시 동안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저는 캐러밴을 이끌고 있는 입장 입니다. 저와 안솔을 똑같이 볼 수는 없습니다. 제가 조금만 더 주의 했다면, 조금만 더 신중 했다면 예방할 수 있었을 겁니다.” “수현의 클래스가 궁수는 아니잖아요. 물론 지금껏 잘해오기는 하셨지만, 지금 수현의 모습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파요.” “그렇다면 궁수 사용자를 데려오지 않은 잘못도 있군요.” “정말. 그럼 애초에 <절규의 동굴>에 온 것도 잘못인가요?” 하연은 나를 살짝 흘기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나는 미미한 미소로 화답해 주었을 뿐, 더 이상 대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가 한 말이 틀린 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캐러밴이든, 클랜이든. 하나의 무리를 이끈다는 건 언제, 어떻게 문제가 일어나도 대표로 책임을 져야 하는 입장 이었다. 안솔이 발을 헛디딘 사실은 맞다. 탐험 중 조심하라고 주의를 줄 수는 있어도, 너 때문에 우리가 함정에 빠졌다는 식으로 매도하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는 일 이었다. 이윽고 천천히 내 옆으로(정확히는 고연주가 베고 있는 무릎 반대편으로.) 걸어온 그녀는 고개를 돌려 일행들을 둘러 보았다. 아마도 자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이미 제 3의 눈으로 모두가 자고 있는걸 확인한 터라 나는 담담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 했다. 이윽고,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린 후 양 팔을 뻗어 내 머리를 살며시 안아 들었다. 나는 그 이끌림에 따라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가끔 보면 여성들은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같이 탐험하고, 똑같이 전투 했는데도 그녀의 품 안에서는 나는 좋은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하연은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끔 보면 수현은 뭐든지 혼자서 다 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너무 부담 가지지 않아도 좋아요. 저희들도 충분히 수현을 도울 수 있어요.” “…….” “그리고 아직 0년차 사용자잖아요. 물론 0년차 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노련하지만, 어느 사용자든 항상 완벽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좋은 경험 한번 했다고 생각하고, 다음에 조심하면 되는 거에요. 그러니 이만 기분 풀어요.” 그녀는 말을 마치며 머리를 쓰다듬는걸 멈췄고, 이내 자신의 품 안으로 내 머리를 꼭 껴안았다. 나는 얼굴에서 느껴지는 보드라운 느낌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한동안 그러고 있자 조금은 속이 안정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그녀는 나를 품에서 떼어 놓고는 슬그머니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나와 시선을 똑같이 만든 다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내 입에 자신의 입술을 맞췄다. 쪽. 따뜻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입술에 느껴지고, 떨어진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자 하연은 조금은 쑥스러운듯한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힘 내시라는 의미로 한 거에요. 너무 기분 나빠 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아니, 괜찮습니다. 기분 나쁘지 않아요.” 나는 잠시 내 입술을 매만졌다. 아마 예전 같았으면 네까짓 게 무슨 상관이냐는 식으로 말했을 거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정말로 위로를 받은 기분 이었고 <심지어> 고마운 마음도 들고 있었다. 문득 원래는 전자가 정신병자인 거고 후자가 정상인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내 눈치를 살피고 있는 하연을 보자,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해서 내 무릎을 베고 있는 고연주의 머리를 조심이 내려 놓고는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말처럼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다. 아마 곧 일행들도 깨어날 것 같으니 나 또한 할 일을 해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번에는 반대로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고, 나는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하연. 곧 일행들이 깨어나면 상황 설명을 부탁 드립니다. 너무 크게 동요하지 않도록 해주세요. 일단은 이곳에서 조금 휴식을 취하고 다시 탐험을 재개할 예정 입니다. 다만 큰 진동이 일어났으니 혹시 주변 지형이 바뀐 게 있나 확인해보고 돌아오겠습니다.” “네 알겠어요. 다녀오세요. 대신 너무 멀리 나가지는 마시고 일찍 들어오세요.” 마치 남편을 배웅하는 것과 비슷한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는 눈 앞으로 보이는 통로로 걸음을 옮겼다. * “아마 자신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항상 담담하던 얼굴이….” “그 사람 성격이라면 그럴 수도 있어요. 어떻게 보면 완벽주의자처럼 보이거든요. 홀 플레인 에서 그게 꼭 나쁜 건 아니지만 말이죠. 아무튼 캐러밴을 이끌고 있는 입장이니 그의 심정이 공감이 가네요. 원래 가장 많은걸 가져가는 만큼, 그만한 책임도 뒤따르는 자리거든요. 뭐, 가장 많이 가져가는 게 아니라 가장 많이 나눠주니 그건 해당 사항이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으으. 괜히 우리가 오빠한테 미안해진다.” “저, 저희들도 그 동안 리더한테 알게 모르게 떠넘겼던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깊이 반성해야겠습니다.” 두런두런 들려오는 얘기들에, 안솔은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살며시 눈을 뜨자, 처음 내려왔던 공터의 천장이 보였다. 천장의 중앙에는 커다란 구멍이 움푹 패여 있는걸 보며 그녀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 안솔양도 일어났군요.” “솔아. 머리는 좀 괜찮니?”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걱정 어린 말들을 들으며, 안솔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머리가 멍하고 가슴속에 왠지 모를 창피함과 부끄러운 마음이 가득 밀려오고 있었다. 분명 공터로 들어오고 난 이후 하얀 불빛이 번쩍였고, 그 다음에 허공으로 떠오른 메시지들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불빛이 한번 더 번쩍인 이후로는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마치 필름의 중간을 뚝 끊고 남은 부분을 이어 붙인 것처럼.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 안솔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자 하연이 조용히 다가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수현이 부탁한대로 그녀는, 일행들이 깨어나고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으면 곧바로 다가가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하연의 말은 조리 있고 논리 정연해 그녀의 얘기를 들은 일행들은 하나 같이 고개를 주억였다. 물론 수현에 대해 조금 미화한 부분은 애교로 넘길 수 있을 정도였다.(수현은 일행들을 모두 구해놓고도 미리 예방하지 못한 자신을 반성하는 훌륭한 리더가 되어 있었다.) 안솔은 하연의 얘기를 들으며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잘못이 제일 컸기 때문 이었다. 만일 그때 자신이 발을 헛디디지 않았다면 함정에 빠지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과 지금 수현의 기분이 좋지 못하다는 사실은 그녀의 가슴을 콕콕 찌르고 있었다. 그런 안솔을 보며, 하연은 다독이는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개 들어요. 지금 여기서 안솔양에게 뭐라 할 사용자는 아무도 없어요. 굳이 있다면 수현씨 뿐 이겠죠. 다음부터 조심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는 그걸로도 충분히 만족할거에요.” “그래 솔아. 괜찮으니까 고개 들어. 그리고 나중에 형한테 잘못했어요, 하면 돼. 그리고 사용자 정하연의 말대로 다음부터 조심하면 되잖아.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뭐.” 안현까지 옆에서 거들자 겨우 힘을 얻었는지, 안솔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서로를 감싸주던 모습을 보던 고연주는 이내 팔짱을 끼고 피식 웃었다. 얼굴에 진한 미소가 걸린 게 또 무언가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틀림 없었다. “아, 아무튼 무의식이라니 무섭군요. 그럼 리더를 제외하고는 다 무의식을 드러냈다는 소리인데 혹시 못할 말을 했을지…. 이거 마음에 엄청 걸리는데요.” 침중한 얼굴을 하고 있던 신상용의 말에 일행들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직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용자는 정하연과 고연주 뿐 이었다. 한동안 일행들 사이에서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불안한 빛들이 얼굴에 떠오르고 있었다. 무의식이 떠오름으로 자신의 언행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다들 마음 한 켠으로 찜찜한 구석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가만히 이 분위기를 즐기고 있던 고연주는, 가볍게 손을 들며 입을 열었다. “어머. 나도 그거 들었는데.” “““네?””” 안현, 이유정, 안솔이 동시에 묻자 그녀는 연한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현은 눈을 끔뻑이더니 조금은 떨떠름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전부 다 들으신 겁니까?” “다는 아니고. 나도 주문에 걸리지는 않았거든. 물론 그처럼 움직일 수 있었던 게 아니라 나중에는 몇 번 의식이 끊길 뻔 했었어. 일단 나도 너무 힘들어서 다 듣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중간중간 들렸던 목소리들은 기억하고 있단다. 최소한 너희 3명은 알고 있는데…. 알려줄까?” 고연주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미소는 너무도 위험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웃음을 본 세 명은 다들 흠칫한 얼굴로 침을 꼴깍 삼켰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후후. 저는 독자분들을 속였습니다. 오늘 자정 후기에 <그럼 저는 이만 물러 나겠습니다. 다들 즐거운 토요일 보내시구요, 일요일 자정에 뵐게요! (__)>라고 써놓고 오늘 한편 더 기습했죠. 후후후. 아마 깜짝 놀라신 분들이 분명 몇분 있으실 겁니다. 저는 독자분들이 놀라는게 왜 이렇게 좋을까요. 하하하. :D 는 아니구요. 자정에 이렇게 올리면 지루하게 여기실 분들이 있으실것 같아 한편 더 올리는 거에요. 진도가 느리면 분량을 늘려야 하기 때문이죠. 에헴. 그래도 연참을 했으니 칭찬해 주세요. 머리를 쓰다듬어 주셔도 좋습니다. 에헴에헴. PS. 슬슬 솔이를 한번쯤 울릴때가 되었죠. 네. 그럼요. 『 리리플 』 1. 류연이 : 하하. 1등 축하 드립니다. 어제 151회에 수현이를 호되게 꾸짖으신 독자분들중 한분 이시군요! :D 낄낄낄. 2. 어설픈후니 : 스, 스트롱포요? 혹시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그게 맞나요? ;ㅇ; 3. Goksd : 흠흠. 아, 아닙니다. 제가 얼마나 수현이를 좋아 하는데요. 이 부러운 주인공 놈! 어디 한번 두고…. 아, 말이 헛 나왔습니다. 흠흠. 4. gkgngh : 아 죄송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 행운이 높은데 넘어질 수 있냐는 말을 보니 그냥 까닭 없이 웃음이. ㅋㅋㅋㅋㅋㅋㅋㅋ. 어제 잠자리에 들면서도 계속 피식피식 웃었네요. ㅋㅋㅋㅋ. 5. 유운처럼 : 쿠폰 감사합니다. (__) 하하. 그, 그렇죠? *-_-* 아 솔이 인기 너무 높이면 안되는데요. ㅜ.ㅠ 한별아 미안해…. 6. ghdhddl : 아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코멘트 정말 찰지게 쓰시는것 같아요. 아 이래서 제가 리리플을 끊을수가 없네요. 코멘트 보면 재밌는 코멘트들이 너무 많아요 정말 ㅋㅋㅋㅋㅋㅋㅋㅋ. 근래 보았던 코멘트중 최고의 찰진 코멘트 였습니다. :) 세상에 수현이 싱난다 하고 덮치는걸 생각하니까 엄청 웃기네요 정말 ㅋㅋ. 7. juan : 에. 파이브 섬…. 수현이의 그곳을 박살내실 일 있으신가요…. 세상에 파이브 섬 이라니. 순간 소름이 돋았어요. 아, 아무튼 울지 마셔요! 언젠가는 탈출하게 될 겁니다. 아, 이미 탈출 했는데. ;ㅇ; 8. 겜마스터 : 그럼요. 제가 얼마나 화끈하게 쓸 수 있는데요. 에헴에헴. 9. 악마신전 : 뜨끔.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독자님들께 키득키득 웃음을 날릴까요. 하하하.(키득키득.) 10. 계백수 : 네~. 마법서 있어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마법서를 읽고 익히는 방식이랑은 조금 달라요. 어느정도 현대의 이론이 가미 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 <마력>이 추가 되고, <주문>이 들어간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마법서는 일종이 법칙이라고 보시면 편하실 겁니다.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55 / 0933 ---------------------------------------------- 초심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보면 그냥 따로 불러 몰래 말해주면 되는 일 이기도 했다. 그러나 고연주는 자신도 알고 김수현도 알고 있는데 지금 와서 숨겨봤자 의미가 없다는 말로 연막을 쳐버렸다.(다른 사용자들이 알아야 앞으로 그러한 점들을 더욱 빠르게 고칠 수 있고, 도움도 받을 수 있다는 말도 한 몫 했다.) 고연주의 유혹에 안현, 이유정, 안솔 세 명은 고민하는 낯빛을 띠었다. 그 와중에 그녀는 그것들은 약한 마음의 발로한 것의 일종이며, 약한 마음을 극복해야 한층 더 강해질 수 있다고 약을 팔았다. 셋은 마침 김수현이 자리에 없고 자숙하자고 하던 분위기에 휩쓸려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다만 그 끄덕임은 상당히 마지 못해 하는 감이 있었다. 고연주는 첫 타자를 이유정으로 잡았다. 하지만 애초에 타깃이 아니었던 만큼 실제로 들은 대로 가감 없이 말해 주었고, 그녀의 말을 들은 유정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정말로 고연주가 들은 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정말 그런 마음들이 없잖아 있었고, 그것 때문에 꽁한 적도 있어 일행들과 분위기가 조금 벌어진 것도 확실히 있었다. “마음 속으로 정리한 줄 알았는데 아직 아닌가 보네.” 라고 시원하게 인정한 그녀는 이내 안현을 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내가 먼저 밝혔으니, 다음은 네 차례라는 소리였다. 유정의 신호를 받은 안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연주를 쳐다 보았다. 고연주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살짝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글쎄, 뭐라더라. 안솔을 놔둬서 미안하다? 동생만은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 그거 비슷하게 말한 것 같은데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어. 너네 둘이 혹시 무슨 일 있었니?” 안현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안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빠….” “안솔. 아무런 말도 하지 마.” 안솔은 서글픈 시선으로 안현을 바라 보았다. 안현은 차마 그 시선을 견딜 수 없었는지, 곧바로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일행들은 둘 사이에 무언가 있다는 걸 직감하고 고연주를 향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고연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어깨를 으쓱이며 한걸음 물러섰다. 본인이 원하지 않고 있었고, 안현도 그녀의 타깃이 아니었기 때문 이었다. 그때, 안솔은 고연주가 물러선 만큼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저도 알고 싶어요.” 안솔은 평소의 어눌하고 질질 끄는 말투가 아니었다. 아니, 아주 똑 부러지는 말투로 또렷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안현은 깜짝 놀라 그녀를 제지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안솔이 고개를 척 돌림으로써 몸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안솔의 얼굴에는 비장미 마저 감돌고 있었다. 어여쁜 눈매에는 결연함이 가득 했고 입술은 앙 다물려 있었다. 양 손 또한 꼭 쥔 상태로 있는 걸로 보아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말한 것 같았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기어코 안현이 그녀를 안타까운 목소리로 부르짖었지만, 안솔은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 했다. “언니 오빠도 말했는데 나만 말하지 않을 수 없어. 그리고 수현이 오라버니가 항상 그랬어. 자기 자신의 약점을 직시하는 것부터가 발전의 초석으로 삼을 수 있다고. 더 이상 어린애 취급 받고 싶지 않아. 나도, 나도 더 강해지고 싶단 말이야.” 그녀의 말에 일행들은 동시에 헛바람을 들이켰다. 보통 평소의 안솔을 볼 때는 오냐 오냐 하는듯한 시선이 대부분 이었다. 그만큼 김수현이 그녀를 끼고 돈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 이었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다들 “얘가 이런 면이 있었나?” 라는, 장하고 기특하게 여기는 시선이 듬뿍 들어가 있었다. 고연주는 안솔을 지긋한 시선으로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는 처음으로 안솔의 이름과 말을 살짝 높여 주었다. “의기는 장하군요. 기특해요. 그러나 제 생각에는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참고로 저는 안솔양이 말한 것을 비교적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왜 그런 줄 알아요? 그건 안솔양이 가장 길고, 오랫동안 말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 중에는 듣기에 대단히 충격적인 말들도 있었고요.” “괜찮아요. 우리 오빠의 말을 들으니 정말로 들으셨다고 확신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저 또한 짐작 가는 바가 있거든요. 알고 싶어요. 아직도 그 일이 제 마음속에 남아 있는지….” “제가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그냥 나중에 사용자 김수현한테 따로 듣는 건 어떨까요?” “마음의 준비는 됐어요. 저도, 저도 언니나 오빠랑 똑같이 지금 듣고 싶어요. 더 이상 특별 취급 받고 싶지 않아요.” 안솔은 계속 고집을 부렸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한번 더 간청하자, 고연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아 타협점을 내밀었는데, 정작 당사자가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에 침을 잔뜩 바른 후 바로 입을 열었다. “전 본래 거짓말은 하지 못하는 성미에요. 정말 말하기 시작하면 한 치의 거짓 없이 말할 거에요. 무의식이라고는 하지만, 안솔양의 실체를 알고 실망할 사람들도 여럿 있을 거에요. 그래도 괜찮아요? 후회하지 않겠어요?” 고연주의 엄포에 안솔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일행들은 도대체 무슨 말이길래 저렇게까지 말하는 건가 궁금함이 들었지만, 다들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안솔 개인의 문제였고,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홀 플레인에 있는 한 명의 사용자인 만큼 당사자의 선택을 존중해줄 필요가 있었다. 안솔은 잠시 고민 했지만, 끝끝내 만류하는 안현의 시선을 뿌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하지 않을게요. 말해주세요…. 그렇지만, 수현 오라버니 한 테는…비밀로 해주세요. 때가 되면 스스로 말할게요.” 여지를 남겨두는 말에 고연주는 고민이 들었다. 처음에는 반 장난 삼아 꺼낸 얘기 였는데 어느새 분위기가 무겁게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슬쩍 고개를 들어 다른 일행들의 안색을 훑었다. 안현은 입술을 벌렸다가, 다시 닫기를 반복하고 있었고 다른 일행들 또한 눈가에 걱정하는 빛이 가득 했다. 안솔 또한 나름 씩씩하게 말은 했지만, 눈빛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 내부의 역린(逆鱗)과 관련이 있는 듯싶었다. 고연주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 했다. ‘말해도 상관이 없기는 하지만…. 나는 아직 건드릴 의무도, 자격도 없는데. 그렇다고 어설프게 터뜨리면 정말로 수습 불가가 될 수도 있고. 저 애송이나…. 아니면 최소한 그이한테 맡기는 게 더 낫겠지. 그럼 분위기도 마음에 안 드니 살짝 장난 좀 쳐볼까?’ 아주 잠깐 정말로 말해줄까 고민이 들었지만, 고연주는 곧바로 마음을 깨끗하게 접었다. 그녀 말마따나 정말로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면 몰라도 눈치가 빠른 고연주는 지금 안솔이 가장 분위기에 휩쓸렸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더구나 천성이 여린 만큼, 그리고 동굴을 탐험하는 도중인 만큼 엄한 데서 후 폭풍을 맞고 싶지 않았다. 해서, 원래의 계획(?)대로 나가기로 결정 했다. 고연주는 차분히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현과 이유정의 반응으로 보아 일행들은 이미 그녀의 말에 어느 정도 신빙성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조금씩 열리는 것과 동시에 사용자들의 긴장한 시선이 그녀의 입술로 모였다. 이윽고 고연주는, 아주 진지한 목소리와 아주 진지한 얼굴로 첫 말을 내뱉었다. “김수현 이 놈의 자식! 마음에 안들어!” 가끔 인간들은 어떤 놀라운 일들에 바로 바로 반응을 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건 바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들을 듣고, 경험하고, 맞닿았을 때 일어나는 일들 이었다. 뇌가 이해하고 받아 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지금 안솔과 일행들의 바로 그런 경우였다. 어느새 안솔의 비장한 얼굴 표정은 천천히 풀렸고 본래의 천진하면서 멍한 얼굴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다문 입술 또한 조금씩 벌어짐과 동시에 이내 그 사이로 바람 빠진 소리가 흘러 나왔다. “…………에?” “제길. 김수현 마음에 안 들어 죽겠다고! 힘 좀 있다고 거들먹거리는 거야 뭐야, 짜증나게…. 잘난 척 하는 거 정말 눈꼴 사납네. 내가 이래서 담배를 못 끊는다고. 아오 빡쳐.” “……에에?!” 안솔은 어버버한 얼굴로 주변을 훑어 보았다. 일행들은 전부 멍한 얼굴로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안솔과 고연주를 보고 있었다. 너무도 당황스러운 마음에 안솔은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었지만…고연주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정하연 그 꼰대는 도대체 뭐지? 걔도 실력 좀 있다고 엄청 까불딱 거린 다니까. 내가 정말 더러워서, 퉷. 나중에 실력만 좀 쌓이면 두고 봐. 그대로 갚아줄 테다.” “아, 안솔양…? 가, 갚아요?” 고연주의 말을 들은 정하연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 되었고, 이윽고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았다. 그녀의 상처 입은 표정을 보자 안솔은 다급한 마음에 손까지 휘휘 저으며 극구 부인했다. “에에에? 아, 아니. 잠시만요. 아, 아니에요오. 제가 그랬을 리가 없어요오. 이게 아니란 말이에요오!” “신상용 그 허여멀건 한 놈은 도대체 뭐야? 뭔데 그렇게 나서고 난리야? 지가 무슨 부처라도 되는 줄 아나. 도대체 뭘 얻어 먹으려고 여기에 붙어 있는지 원. 아, 혹시 비비앙 그년한테 꽂힌 거 아냐? 키득키득.” “으, 으음. 흠흠!” “년?!” “아, 아니에요오! 거짓말 이에요오! 흐아앙. 아니란 말이에요오!” “녀~언?!” 신상용은 급격하게 헛기침을 했고 비비앙은 빽 소리를 질렀다. 안솔의 내면은 이제 당황을 넘어서 어둠의 혼돈으로 침잠하고 있었다. 격렬하게 부인하고는 있었지만, 어디선가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지.” 라는 말이 들려왔다. 그 말에 채 반응도 하기 전에, 마치 추임새를 넣듯 고연주의 목소리가 뒤에 붙어 따라 들어왔다. “아오 비비앙 조것은 볼 때마다 짜증이 솟구치네. 정말로 깊은 빡침을 느낀다. 도대체 왜 나랑 캐릭터가 겹치는 거야? 내 입지가 줄어드는 것 같잖아! 어디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돌들이 굴러들어 와서는. 에잉!” “뭐야!!!!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고!!!! 이 요망한!!!!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응? 역시 지금까지의 모습은 다 가면이었어!” “아, 아 아, 아.” 비비앙이 발끈한 얼굴로 일어서자 주춤주춤 물러서던 안솔은 발이 걸려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상처 입고 분노한 일행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안솔의 마음은 하얗게 변했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곧이어 고연주의 결정타가 날아 들었다. “휴우. 이게 끝. 그러게 분명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요. 난 몰라.” 고연주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거짓말 이었다고 밝히는 게 아닌, 완곡하게 돌린 진실 선언. 그렇게 확인 사살이 끝나는 순간,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단 하나 뿐 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앙!!!!” * “도대체 다 큰 어른이 돼서, 애를 데리고 뭐 하는 짓 이십니까? 그것도 홀 플레인의 <10강>이나 되는 사용자가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휘휘~♪” 고연주는 휘파람까지 불어대며 내 시선을 회피 했다. 그녀의 반응에 그저 한숨만 푹푹 나왔다. 혹시라도 달라진 지형이 있을까 싶어 주변 지형을 탐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귀에 들릴 정도의 울음 소리가 귓가로 들어왔다. 뭔 일이 있나 싶어 재빨리 공터로 돌아오니, 일행들 모두가 안솔을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었고 중앙의 안솔은 자리에 주저 앉아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어엉…. 어어엉…. 나, 나, 끅 ,아니, 흐끅, 나 그러지 않았 히끅, 으아앙….” 정하연에게 대충 상황 설명을 들은 나는, 고연주를 날카롭게 째려보며 안솔을 안아 들었다. 고개를 숙이자 안솔은 정말로 서럽다는 얼굴로 눈물을 쭉쭉 흘리고 있었고, 어찌나 크게 울음을 터뜨렸는지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그래그래. 오빠가 너 그러지 않은 거 알고 있다. 사용자 고연주가 솔이를 놀리려고 거짓말을 한 거야. 착하지 우리 솔이. 옳지. 이만 뚝 하렴.” “흐어엉…. 오아버이(오라버니)…. 오아어이(오라버니)….” 안솔은 한층 얼굴을 부비며 내 품 안으로 파고 들었다. 연신 등을 토닥이며 달래자 흐느낌이 조금은 잦아 드는 것 같았다. 가뜩이나 시간을 지체 했는데 또 시간을 의미 없이 보내는 것에 무척 속이 상했지만, 일단은 넘기기로 했다. 그녀는 그냥 거짓말 이었다고만 밝히고 살며시 웃었고, 별다른 사과의 말은 하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고연주의 성격상 조금 맞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이건 나중에 단단히 따지기로 하고 나는 안솔을 안정시키는데 주력 했다. 이윽고 다른 일행들도 합세해서 달래주자 비로소 조금은 진정이 되었는지 안솔은 겨우 울음을 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 자욱이 가득 했고,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입술은 삐죽삐죽 달싹였고, 몸을 간헐적으로 떠는 게 정말로 크게 놀란 모양 이었다. 이 상태로는 도저히 탐험을 속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아예 크게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 그렇게 30분간 더 휴식을 취하자 일행들의 동요는 많이 가라 앉아 있었다. 나는 아직도 내 품에 안긴 솔이를 살짝 떼어 놓고는 명상을 하고 있는 사용자들에게 탐험 재개를 선언 했다. 내 말에 마법사 사용자들은 눈을 반짝 떴고, 근접 계열 사용자들은 팔과 허리를 틀며 몸을 풀었다. “그럼 대열….” 막 대열을 정비하라고 말하려는 순간, 나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애들을 필두로 스스로 대열을 갖추고 있었다. 눈동자도 다들 빠릿하게 서 있는 게 뭔가 이상하게 변한 것 같았다. 푸른 산맥으로 들어오면서 무겁게 가라 앉은 분위기가 상당히 올라와 있었고, 초반의 활기차고 날카로운 분위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 순간 고연주가 슬쩍 고개를 돌리더니 나와 눈을 맞추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한 게 여유가 넘쳐 흐르는 것 같았다. 나는 설마 일부러 그녀가 일을 벌인 건가, 긴가 민가 하며 선두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튼 우선할 일이 있으니까. 내 뒤로 옷깃을 꾹 붙잡고 졸졸 따라오는 솔이의 기척을 느끼는 것과 함께, 나는 제 3의 눈과 마력 감지를 동시에 활성화 시켰다. 우웅! 우우웅! 그 어느 때보다 진한 마력을 넣었고, 넓은 범위의 감지를 펼쳤다. 나는 앞으로 <절규의 동굴>을 내가 모르는 던전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실제로 입구에 있었던 레이스 동상들과, 공터에서 파훼한 마법 진은 내 기억에 없는 것들 이었다. 더 이상 방심하지 않고 아예 모르는 던전을 공략하는 마음으로 나아 가기로 했다. 어느 정도 마력 능력치를 올린 만큼 이제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지, 뒤에서 안솔이 몸을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한번 더 속을 가다듬고는 일행의 선두로 나섰다. 그리고 통로 안으로 일행들을 천천히 이끌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그 동안 바짝 조였으니 이제는 긍정적인 풀어줄 필요도 있겠죠. 참 여러모로 고연주 마음에 드는 캐릭터네요. -_-a 그리고 저 S 아닙니다. 에로는 인정 하지만, S는 아니에요. 왜들 이러세요. ㅜ.ㅠ 『 리리플 』 1. 레일브란트 : 1등 축하 드립니다. 항상 꾸준하고, 한결 같으신 레일브란트님. 부디 이번회도 재미있게 감상해 주세요. :) 2. dhios : 하하. 고맙습니다. 절로 어깨가 으쓱으쓱 하네요. 헤헤헤. :D 3. 고장난선풍기 : 저는 항상 소설을 쓸 때 상상을 하고, 그 상상한걸 글로 표현하려고 해요. 인물간의 성격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죠. 내가 이러면 어떻게 행동할까, 그 사람이 이러면 이 캐릭터는 어떻게 행동할까. 이렇게요. :) 4. kkt6954 : 그, 그럼 코라도 꼭꼭 눌러주세요. ;ㅇ; (죄송 합니다. (__)) 5. 虛虛空空無不在無不容 : 감사합니다. 수정 완료 했습니다. (__) 6. らき☆すた : 오늘 최고의 코멘트 였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정말 제가 생각도 못한 방향으로 받아 들이시는 분들이 계시네요. 정말 좋습니다. 그래요. 안솔의 행운은 수현이에게 안기기 위해 발동한 거였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 7. 가입하기싫다 : 오호. 그렇다면 수현과 신상용의 아힣힣흫햏은 어떠신지요. 는 아닙니다. 농담 입니다. 절대로 100% 농담 입니다. 8. minicate : 헤헤. (로유진이 잠들었습니다.) 아. 정말이에요. 저 그러면 정말 잠이 솔솔 오거든요. 9. 대중적현실 : 쿠폰 감사 합니다. 제가 운이 좋았군요! :D 10. 열정을 : Yes. 여기서 체력을 A, 내구를 B라고 가정 하겠습니다. 일단 간단히 말씀 드리면, A = 육체적 활동을 할 수 있는 몸의 힘, 지구력, 자체 회복력으로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B = 몸의 방어력, 단단함, 맷집등으로 보시면 됩니다. 그중 <자체 회복력> 같은 경우는 A와 B의 교집합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각 능력이 따로 독립적인것도 있고, 상호 보완하는 것도 있거든요. 마력은 지력, 즉 머리의 똑똑함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 11. 리자오르 : 하하. 수현이 일단 키핑해 두기로 했어요. 현재는 아직 버틸만 하고, 앞으로 언제, 어떤 상황에서 쓰일지 모르니 그때를 대비하는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12. 흑단빙화 : 헤헤. 그럼 머리좀 쓰다듬어 주세요! 어서요…. 아, 아닙니다. 흠흠. 순간 정줄을 놓았네요. ㅜ.ㅠ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56 / 0933 ---------------------------------------------- 초심으로 돌아가서 공터를 벗어난 우리들은 계속해서 내부로 진입 했다. 중간에 몇 번의 갈림길도 나왔고, 알고 있는 길들도 있었다. 그러나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다. 계획 했던 루트를 변경할 생각은 없었지만 최소한 앞으로 어떤 길들이 연결 되어 있는지, 그리고 혹시 감지에 걸리는 것들은 없는지 꼼꼼히 체크한 후에야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보니 행군 속도는 자연스레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원래는 논스톱으로 끝까지 갈 생각 이었지만 지금은 하루 정도 야영할 생각도 있었다. 일행들도 이런 내 마음을 헤아린 것 같았다. 그네들은 따로 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평소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정하연, 신상용, 비비앙 세 명이 띄워 놓은 삼각 라이트(Light) 안에서 우리들은 훨씬 밝아진 시야를 확보한 상태로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잠시 정지.” 나는 오른손을 들어 정지 신호를 보내고 감지의 밀도를 높였다. 그와 동시에 라이트(Light) 구체들의 밝기가 점점 줄어들었다. 혹시 앞에 언데드가 있다면 빛의 구체를 발견하고 달려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그란 원형으로 돌리고 있는 감지의 끝에 여러 무리의 기척이 걸렸기에, 나는 그것들을 상세히 살피고 입을 열었다. “전방 200미터 지점 즈음에 언데드 몬스터의 기척을 포착 했습니다. 수는 다섯 마리…아니 여섯 마리 정도 되는 것 같군요. 지금 이 길을 따라 간다면 필시 만나게 될 것 같습니다.” “혹시 어떤 몬스터 종류인지도 알 수 있을까요?” 고연주의 요청에 바닥에 가만히 손을 대어 보았다. 손바닥을 타고 미세한 진동이 타고 들어오는걸 느꼈고, 몇 가지 더 추가 사항을 확인한 후 대답 했다. “바닥이 주기적으로 울리고 있습니다. 외 감지 부분에 걸려 있어 들어오는 정보가 미약 합니다만, 아마도 골렘의 일종이 아닐까 싶습니다.” “언데드 중에 골렘 이라면…블러드 골렘일 가능성이 높겠군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블러드 골렘은 일종의 생체 실험으로 탄생한 몬스터로 볼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인간 여럿을 한군데 섞어 마법적 효과를 가미해서 태어난 괴물 이었다. 애들을 기준으로 잡으면 절대로 녹록한 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영체형 언데드 보다는 나을 것 이다. 어찌됐든 타격을 주는 족족 데미지는 입힐 수 있으니까. 어차피 거쳐가야 할 길 이었기 때문에 나는 피하지 않고 맞붙기로 결정 했다. “블러드 골렘은 자신이 몸에 있는 뼈를 뽑아 무기로 사용 합니다. 공격 측면 에서는 물리력 밖에 내세울게 없지만, 방어 측면 에서는 대단히 높은 자가 복원력을 갖고 있습니다. 타격을 입어도 온 몸에 점철된 피로 바로 복구를 해버리죠. 그런 만큼, 마법사 사용자들의 억제가 들어간 이후 각자 무기에 신성 주문을 두르고 치면 효율을 극대화 할 수 있을 겁니다.” 하나하나 오더를 내린 후, 나는 다시금 행군을 재개 했다. <절규의 동굴>에 들어온 이후 당하기만 했으니 이번만큼은 큰 무리 없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싶었다. 나 혼자만이 아닌 일행과 같이 하는 전투. 마침 캐러밴의 분위기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으니 잘만 하면 이번 전투를 터닝 포인트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80미터 정도 더 전진하자 온 몸에 피를 질질 흘리고 있는 다섯 마리의 블러드 골렘들이 보이기 시작 했다. 키는 보통 골렘들과 비슷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붉게 드러난 근육들과 그 사이로 비죽 튀어 나온 희끄무레한 것들을 보면 절로 불쾌한 감정이 들 것이다. 마치 생체 실험에 실패한 거대 인간 괴물을 보는 것 같았다. 놈들은 널따란 통로를 어슬렁어슬렁 배회하고 있었는데 아직 우리들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정하연에게로 시선을 두었다. “사용자 정하연, 신상용. 환류 억제(Feed Back Control) 마법을 펼칠 수 있나요?” “문제 없어요. 더블 캐스팅과 지금 목걸이에 하나가 비었으니 저장을 한다고 치면 한번에 총 세 번을 사용할 수 있어요. 수현씨 말대로 저들이 레이스와 같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내부 자가 복원만 실행 한다면 충분히 억제가 가능할 거에요.” “죄송합니다. 응용 마법은 능력에 포함 시키지 못했습니다.” 한 명의 긍정적인 대답에 고개를 주억이고는, 신상용도 같은 시야에 두며 말을 이었다. “사용자 정하연은 왼쪽에서 첫 번째에 있는 놈부터 차례대로 환류 억제를 걸어주세요. 오른쪽에 있는 나머지 둘은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어요. 그럼 지금 바로 메모라이즈 저장에 들어갈게요.” 나는 다음으로 안현, 안솔, 이유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솔은 지금 바로 홀리 스트라이킹(Holy Striking) 주문을 외우렴. 이유정은 내 뒤를 따라와. 먼저 나서지 말고 내가 먼저 들어간 후 내 말에 맞춰서 들어가면 돼. 그리고 안현은 이번에 메인 탱커로 나선다. 굳이 데미지를 넣지 않아도 괜찮아. 환류 억제의 시간은 평균 5분 정도 지속 되니, 나와 유정이 돌아오기 전까지 버티기만 하고 있어.” “““네.””” 동시에 입을 여는 애들의 대답을 들은 후, 나는 남은 인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사용자 고연주는 언제나처럼 키퍼를 부탁합니다. 마법사 사용자들과 사제는 본인들의 역할이 끝난 후, 안현을 집중 지원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나는 고연주에게 항상 키퍼를 부탁 했다. 조금 심심할 수도 있지만, 캐러밴의 키퍼는 대장 다음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역할이기 때문에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아 내미는 고연주를 보며 나는 마지막 말을 이음으로써 오더를 매듭 지었다. “비비앙. 블러드 골렘들의 도발을 부탁한다. 직접적인 데미지 보다는 놈들의 움직임을 최대한 둔화 시킬 수 있는 걸로.” “엉. 나를 믿어.” 조금 핀트가 어긋난 말을 하는 그녀였지만, 어쨌든 전투에 있어서는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는 비비앙 이었기에 믿기로 했다. 이윽고 비비앙을 비롯한 여러 마법사 사용자들이 동시다발적인 주문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우리들의 전투는 시작의 신호를 울렸다. “후우. 후우.” 안현의 긴장한듯한 숨소리가 들린다. 슬쩍 옆을 보니 메인 탱커를 맡는다는데 조금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상 후방에 고연주가 있어 전멸할 위험은 없지만, 그래도 자신이 뚫리면 모두가 위험해 진다는 인식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슬쩍 두드려 주며 차분히 다독여 주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라. 레이스이랑 전투할 때처럼 하면 돼. 굳이 데미지를 넣지 않아도 좋다. 나와 유정이 우회하고 두 놈을 처치하면, 곧바로 돌아와서 후방을 두드릴 거야. 그때까지만 버티고 있어.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다.” “후우. 후우우. 네 형. 그때까지 꼭 버티고 있을게요.” 내 말에 용기를 얻은 듯 안현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숨을 정리 했다. “───. ───. ───.” “───. ───. ───.” “───. ───. ───.” 나와 유정의 무기에 차례 차례 하얀 빛이 어리고, 비비앙 주변으로 익숙한 마법 진이 떠오르기 시작 한다. 100미터 앞에서 배회하고 있던 블러드 골렘들은 그제서야 마나의 유동을 느낀 듯 한 놈 두 놈 몸을 돌렸는데, 이내 우리를 발견 했는지 커다란 괴성을 질렀다. “크아아아아아아악!” “크아아아아아아악!” 그리고 놈들은 자신의 몸들에 튀어 나온 희끄무레한 것들에 손을 가져가더니 이내 밖으로 쑤욱 뽑아 내고는 우리들에게 달려오기 시작 했다. 자신의 뼈를 뽑는 그로테스크한 광경에 일행 중 몇몇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윽고 쿵쿵 바닥을 울리며 우리들에게 달려오는 블러드 골렘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비비앙이 소환 주문을 완성한 후였다. “오라! 페트리피(Petrify)! 제 53군단을 지배하는 영원한 어둠이여!” 비비앙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토해내! 페트리피!” 라고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그와 동시에 뒤에서 시원한 바람이 나를 스치고 지나 갔고 그 바람은 앞에서 달려오는 블러드 골렘 전부를 휘감아 들어갔다. 그리고 이어진 광경을 평가해 보면, 비비앙은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크르륵! 끄르륵!” “크으으! 크르륵!” 바람을 맞은 블러드 골렘들의 몸은 전체적으로 서서히 잿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신나게 달려오던 놈들은 갑작스럽게 몸이 둔화되자 몸을 크게 뒤틀었고, 이내 잿빛으로 변한 부분들이 알갱이처럼 우수수 떨어지며 다시 본래의 붉은 빛깔을 되찾았다. 그러나 소환수 페트리피의 공격은 단발이 아니었다. 석화가 풀리는 순간 다시 한번 바람이 휘감아 들어갔고 이번에는 다른 부분이 잿빛으로 변하기 시작 했다. 환류 억제 마법이 들어간 이후 쏘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놈들이 우리를 발견 했고 먼저 들어오는 바람에 돌진력을 죽이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 이었다. 그때였다. “체인지 샌드(Change Sand), 체인지 머드(Change Mud)!” 신상용은 바람 계열과 전기 계열 마법에 조예가 깊은 줄 알았는데, 근래에 보니 대지 계열 마법도 어느 정도 조예가 있는 것 같다. 흙을 진흙으로 바꾸는 마법의 발현. 놈들이 딛고 있는 흙 바닥은 어느새 질척거리는 진흙탕으로 변했다. 흡사 늪지대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던 놈들은 이내 진흙 속으로 발을 푹 찌르며 크게 몸을 휘청거렸다. 골렘의 몸을 하반신 밖에 잠기게 하지 못한 건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일단은 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시간은 충분히 벌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렸던 하연의 주문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환류 억제(Feed Back - Control)!” 세 주문을 동시에 준비하느라 평소보다 늦은 감은 있었지만 그래도 보통 사용자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빠른 시간 이었다.(환류 억제는 응용 마법에서도 상위 계열에 속하는 주문이다.) 하연의 특성답게 푸른 빛을 띠고 있는 빛 덩어리들은 이내 기다란 물빛 잔상을 남기며 내가 지정한 세 마리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나는 더 기다릴 것도 없이 유정의 손을 살짝 잡아 이끌어 오른쪽으로 튀어 나갔다. 그녀의 주문이 닿지 못한 두 놈을 우선 처리할 계획 이었다. 늪지대를 우회한 후 뒤를 점하자, 근방에 있던 놈들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 조금 떨어져 있던 세 마리는 그대로 늪지대를 건너기 시작 했고 가까이 있던 두 마리는 다시금 몸을 돌려 진흙에서 발을 빼었다. 나는 유정이에게 내가 지시하면 곧바로 들어가 찌르기를 하라는 오더를 내린 후 검을 살짝 비틀어 들었다. 가까이서 보는 놈의 몸체는 확실히 유쾌하지 못했다. 유정이 또한 비위가 상하는지 뒤에서 연신 퉤퉤 침을 뱉는 소리가 들렸다. 놈들의 몸에 아직 비비앙의 여파가 남아 있는듯 부분부분에 석화가 걸렸다가 불그스름한 피가 울룩불룩 솟아오면 잿빛 알갱이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작용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윽고 완전히 늪지대를 벗어난 첫 번째 놈은 곧바로 분노의 외침을 지르며 들고 있던 뼈 몽둥이를 휘둘렀다. 나는 진로 계산 후 사이드 스텝을 밟아 간단히 피하고는, 그대로 안으로 짓쳐 들어갔다. 애초에 본신의 몸이 온전한 상태라도 되지 않을 터인데, 비비앙의 마법이 먹혀 들어가 놈들의 움직임은 상당히 제한을 받고 있었다. 뼈 몽둥이를 피하자 들어오는 왼손은 상당히 느릿하게 보였다. 마침 잘 되었다 싶어 나는 검면을 들어 손을 후리기로 했다. 어차피 검날로 벤다고 해도 곧바로 재생할게 눈에 보였기 때문에 베는 것 보다는 터뜨리는 충격을 주는 게 더 나을 것이다. 펑! 나를 짓누르려던 손바닥을 강하게 후려치자, 놈의 왼 손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팔이 크게 뒤로 꺾이는 게 보였다. 블러드 골렘의 몸이 충격으로 반쯤 뒤돌아 가고 나는 터뜨린 왼 손을 재생하기 전에 바로 안으로 파고 들어 두 번 더 후려쳐 주었다. 펑! 펑! 뼈 몽둥이가 날라가 한쪽 구석에 처박히고, 오른 허벅지 근육 또한 파열 시켰다. 놈들의 재생은 무한정 하지 않다. 체내에 있는 마정이 재빨리 복원을 시도 했지만 여러 군데 동시 타격이 들어가면 복구 속도는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몇 걸음 뒤로 물러나는 놈을 보며, 이정도 했으면 되었다 싶어 곧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그리고 유정에게 첫 번째 지시를 내렸다. “블러드 골렘, 몸통 중앙에서 왼쪽 수평으로 3센티미터!” 대답은 없었다. 대신 내 오른쪽에 스쳐 지나가는 유정의 머리 결이 휘날렸고, 나는 혀를 차며 몸을 틀었다. 나름대로 반응 시간은 괜찮아 졌지만 그녀는 아직 전장을 읽는 시야가 좁았다. 오른쪽에서 막 올라오는 남은 블러드 골렘 한 마리가 있었고 그러면 안전하게 왼쪽으로 들어가는 게 맞는 행동 이었다. 애초에 내가 찌르라고 한 부분도 왼쪽에 있었고. 아무튼 그건 나중에 말해주기로 하고, 블러드 골렘은 중간에 유정을 커트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막는 게 우선 이었다. 뒤늦게 올라온 놈은 자신의 눈 앞을 지나가는 유정을 보고, 들고 있던 뼈 몽둥이를 거침 없이 내려 쳤다. 유정은 힐끔 옆을 확인한 후 침착하게 몸을 틀려고 했지만 이내 내가 공격을 걷어내 주자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 들어갔다. “하앗!” 힘찬 기합성과 함께, 그녀는 카타나와 스쿠렙프를 내가 말해준 지점에 동시에 찔러 들어갔다. 신성 주문에 더해 자신의 마력을 담았는지 그녀의 단검은 골렘의 피부를 가볍게 뚫고 들어갔고, 다행히 체내의 마정을 정확하게 찌를 수 있었다. “우어어어엉!” 중심에 데미지를 입은 블러드 골렘은 동굴이 떠나가라 비명 소리를 질렀다. 슬쩍 물러서 상황을 보니 자가 복원은 확실히 멈춘 것 같았다. 왼손은 재생 되어 있었지만, 내가 2, 3타로 날린 부분들은 뻥 뚫려 있었다. 이윽고 놈이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고, 제 3의 눈으로 놈의 상태를 읽은 나는 다급하게 유정에게 외쳤다. “이유정! 거기서 물러서!” “…응?” 유정 또한 조금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바로 몸을 빼려고 했지만 너무 깔끔하게 마정을 찌른 탓에 블러드 골렘의 파괴는 순식간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파박! 파바박! 쏴아아아…. 이윽고 살점이 터지는 좋지 못한 소리가 남과 동시에 근거리에 있던 유정은 그 여파를 고스란히 뒤집어 쓰고 말았다. “…….” 아주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한차례 쏟아진 피의 소나기는 끝났다. 그리고 그곳에는 입을 꼭 다물고 있는, 피 부스러기 범벅이 되어 있는 이유정이 서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일요일 연참 입니다. 오늘 이상하게 몸이 나른해 글을 쓸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래도 울트라북을 키니 저절로 키보드를 두드리게 되네요. 하하하. 이제 <절규의 동굴>도 절반 정도 왔습니다. 부디 이번 탐험을 일행들이 잘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독자 분들의 많은 응원 부탁 드립니다. :D 『 리리플 』 1. MT곰 : 1등 축하 드립니다. 그리고 쿠폰 감사 합니다. (__) 혹시 그 2%가 어떤것인지 알 수 있을까요? 소중한 조언은 언제든지 환영 합니다. 나중에 시간 나시면 개인 쪽지로 보내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__) 2. 사람인생 : 하하. 사람인생님. 오늘 자정에 올린 회 코멘트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다만, 앞으로 과도한 코멘트는 조금 삼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제만 해도 한 회에 거의 40개에 가까운 코멘트를 혼자서 올리셨더라구요. ㅜ.ㅠ 코멘트란은 다른 독자분들과 같이 공유하는 만큼, 사람인생님의 너그러운 양해 부탁 드립니다. (__) 3. 유운처럼 : Ang! 은 쓰지 않겠습니다. 어제는 그냥 후기에 농담 삼아 드린 말씀 이었어요. :) 4. GradeRown : 오. 그러고보니 담배는 피지 않았어요! 뭐? 담배는?! 이렇게 나가는것도 괜찮았을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정말 솔이를 저렇게 만들면 멘붕하실 분들이 한두분이 아닐것 같아서, 차마 실현시킬 수 없었습니다. ㅋㅋㅋㅋ. 5. 罰酒 : 나날이는 아니실 거에요. 제 아이디를 알려드리지 않았는데, 결제는 하신 것 같아요. (…….) 사이트랑 작품명, 그리고 코멘트 보기까지 알고 계시고 있으니 뭐…. ㅜ.ㅠ 6. 천겁혈신천무존 + 오피투럽19 : 저에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천겁혀신천무존님과 오피투럽19님을 각각 소개 시켜 드리겠습니다. 두분이시라면 분명 잘 맞으실 겁니다. 장담 합니다. 자, 어서 만나보세요! 어서요! 7. 비하련 : 후후. 담배는 팔xxxx 라xx를 피고 있습니다. 다른건 이상하게 입맛에 안맞더라구요. -_-a 8. hohokoya1 : 저도 항상 첫코를 보면 전쟁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이번회 올리고 첫코 한번 도전해 보려구요. 낮 이니까 나름대로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하하하. 9. 현오 : ㅋㅋㅋㅋㅋㅋㅋㅋ. 은근슬쩍이라. 기발한 코멘트 였습니다. 안솔이 은근슬쩍 안긴 사실은 맞아요. 낄낄. 10. gkgngh : 순간 머리를 온전한 제 머리로 생각해서 소름이 돋았습니다. 머리카락 말씀하신거 맞죠? 그렇죠? 11. juan : 험험. 아닙니다. 안솔을 괴롭히고 싶은건 맞아요! 비비앙도요! 하지만 S는 아니에요!(?!) 12. 나꼼수 : 헉. 아니에요. ㅜ.ㅠ 쿠폰 감사 합니다. 리리플은 항상 랜덤하게 뽑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번의 리리플로 충격을 회복하세요!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57 / 0933 ---------------------------------------------- 초심으로 돌아가서 유정의 입술은 앙 다물려 있었지만, 뜻밖에도 그녀의 얼굴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아니, 이제 막 변화가 시작 되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유정의 표정 변화에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할짝.” 유정은 분홍빛 혀를 조금 내밀더니 이내 입술 주위에 뭍은 핏자국을 살짝 핥았다. 이윽고 “쩝쩝.” 입맛을 다신 그녀의 목젖이 꼴깍 움직인다. 피를 맛본 그녀의 눈동자에 위험한 환희가 차오르는걸 보자 나는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 들었다. “이유정!” “응? 아, 아. 오빠 미안해.” 다급한 마음에 소리를 지르자 유정이의 얼굴은 다시 평소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오른손이 미묘하게 떨리고 있는걸 놓치지 않았다. 피를 맛보았다는 살의적 환희에 떠는 건지 아니면 스쿠렙프가 진동해서 떠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자 마음 한 구석이 꾸욱 짓눌리는 것 같았다. 당장에 스쿠렙프를 뺏고 싶었지만, 일단 급한 일이 있었다. 해서 나는 조용히 검을 들어 남은 한 놈을 겨누었다. 안현이 있는 쪽에서는 쉴 새 없는 폭음과 번쩍이는 섬광, 그리고 거친 비명 소리들이 들리고 있었다. 얼른 남은 한 마리를 해치우고 본진으로 합류해 원호하는 게 우선 과제였다. 이유정은 머리카락을 길게 쓸어 내리고는 내 뒤로 돌아왔다. 그 바람에 피 부스러기들이 후드득 떨어지고 머리 결 고루고루 핏물이 스며 들었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 이었다. 나는 제 3의 눈으로 블러드 골렘의 정보를 읽어 들였고, 오른쪽 가슴 부근에 마정이 박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오른쪽 가슴 부근, 그러니까 인간으로 따지면 심장 쪽에 마정이 있다. 방향만 반대로 바꿔 찌르면 될 거야. 놈을 묶고 있을 테니 타이밍은 알아서 잡고 들어와.” “라져 댓♪” 유정이는 귀엽게 대답 했지만 하나도 귀엽게 느껴지지 않았다. 방금 전 그녀가 보인 초기 증상이 예전에 유현이 형과 한소영을 잃었을 때의 나와 비슷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 했다. <절규의 동굴> 탐험을 마치고 난 후 스쿠렙프와 필히 면담의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블러드 골렘들은 동족 의식이 없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정보에 한해서는 그렇다. 그러나 새로 늪지대에서 올라온 놈은 아주 크게 화가 난 것 같았다. 뼈 몽둥이를 붕붕 휘두르고 가끔씩 땅도 철썩 찍는 게 자못 재롱을 피우는 중 이었다. “크아아아앙!” 뒤에서 “오빠. 어서.” 라는 유정이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때마침 지른 놈의 괴성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후웅.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이 들리고 나는 발을 굴러 높게 점프 했다.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자 발 아래로 스쳐 지나가는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나는 그대로 살짝 발을 숙였다. 찰나의 순간, 지나가는 몽둥이에 닿게 하고는 그 힘을 빌어 다시 한 번 전방으로 박차 올랐다. 알아서 타이밍을 잡으라고 말은 했지만 기회는 바로 줄 생각 이었다. 놈이 머리가 눈 앞으로 순식간에 다가오자, 나는 이것저것 잴 것도 없이 곧바로 검을 후려쳤다. 펑! 놈의 뒤통수가 터져 나가며 거센 피 분수가 뿜어져 나갔다. 그래도 혹시 몰라 “지금 들어와.” 라고 외치려고 했지만, 어느새 뒤쪽으로 자리를 잡은 유정을 보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녀는 애초부터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머리가 터지는 그 순간. 그녀는 예의 야릇한 기합성과 함께 훌쩍 뛰어 올라 무차별적으로 단검을 찔러 들어갔다. 하얀 빛으로 어린 카타나와 붉은 피를 머금고 있는 스쿠렙프가 교차하고, 등으로 들어간 단검이 이내 너무도 쉽게 앞쪽 가슴을 뚫고 나와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다시 복원하고 있던 블러드 골렘의 머리는 핏물로 변해 산산히 흐트러지고 말았다. 마정이 깨짐에 따라 복원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 제 3의 눈으로 읽어 들이자 아주 깔끔하게 반으로 잘린 마정을 읽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유정이 나를 원호 했던 전투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 정도의 신속함 이었다. 그리고 곧 블러드 골렘의 몸이 덜덜 떨리며 폭발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 했다. 나는 이번엔 따로 피하라는 소리를 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지켜 보았다. 과연 어떻게 나오는지 두고 볼 작정 이었다. 유정이는 등에 단검을 꽂은 상태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차마 뽑기도 전, 블러드 골렘의 몸은 큰 소리를 내며 폭발하고 말았다. 파박! 파바박! 쏴아아아…. 그리고 나는 마지막 순간에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블러드 골렘의 몸이 터지고 다시 한번 피의 소나기가 내리는 순간, 유정은 눈을 차분히 감았다. 마치 샤워기를 틀고 쏟아져 내려오는 물을 맞는 여성처럼, 그녀가 거리낌 없이 피 분수 안으로 녹아 들어가는 게 보였다. * 결론부터 말하면 나머지 세 마리도 큰 피해 없이 처치할 수 있었다. 놈들은 환류 억제가 들어간 이후에도 비비앙의 펼쳐낸 마법의 여파가 남아 있어 쉽게 상대할 수 있었다. 심지어 안현은 운 좋게 한 마리를 쓰러뜨리는 성과를 거두었을 정도였다.(물론 알게 모르게 고연주가 도와준 것 같아 보였지만 따로 물어보지는 않았다.) “형. 고생 하셨습니…으음? 헉!” 막 전투를 마치고 상기된 얼굴로 말을 걸던 안현은, 내 뒤에 서 있는 유정을 보고 낮은 비명을 질렀다. 안현도 물론 몸의 이곳 저곳에 피가 묻어 있었지만, 유정이처럼 대놓고 들이대지는 않은 터라 봐줄 만은 했다. 그러나 유정이의 꼴은 말 그대로 가관 이었다. “응? 왜?” “아, 아냐.” 유정의 기다란 머리카락 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핏물에 샤워라도 하고 나온 것처럼, 그녀의 온 몸은 피에 잔뜩 절어 있었다. 그녀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묻자 안현은 곧바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을 회피 했다. 그리고 그건 안솔도 마찬가지였다. “안솔. 언니 뭐 닦을 거 좀 줘.” “네, 네? 네 언니이. 자, 잠시만요오.” “응♬” 유정은 후다닥 천을 건네는 안솔의 손에 있는 것을 낚아 채고, 즐거운 얼굴로 몸을 얼굴을 닦기 시작 했다. 안현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내게 의문 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나는 그저 한숨을 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해 주었다. 도대체 이놈의 애들은 왜 이렇게 속을 썩이는지 원. 아무튼 겉으로 보면 전투 자체는 성공적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일단은 자체 복구 및 정화 기능이 달린 옷을 사줬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을 수 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유정이 광년에서 탈출하는 동안 일행들은 빠르게 재정비를 했다. 이윽고 다시 모인 캐러밴은 잠시 동안 블러드 골렘의 시체 처리 여부를 두고 토론이 벌어졌다. 유정이 시체를 해부해 마정을 꺼내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였다. “글쎄. 블러드 골렘도 어찌됐든 언데드의 일종으로 본단다. 그 안에 박혀 있는 마정 이라면 필시 사기가 흘러 넘치고 있을 텐데 굳이 가져갈 필요가 있을까? 그것도 직접 해체하는 수고로움을 감수 하면서까지?” “아니 그전에. 이미 두 쪽으로 갈라진 마정을 가져가서 뭘 하려고 그러는데. 네가 쪽 낸 것만 해도 두 놈이라고.” 고연주와 나의 설득에 그녀는 아쉬운 탄성을 흘렸다. 전투 전 이었다면 ‘그래도 얘가 캐러밴을 위해서 의견도 내기 시작하는구나.’ 라고 기특하게 생각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 불안하게 보기 시작하니 계속 불안하게 보게 되는 게 사람의 심리였다. 처음에는 징그러워서 침까지 뱉던 녀석이, 이제는 가까이서 일부러 해부해보고 싶어서 그러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토론을 일단락 짓고 우리들은 다시 행군을 재개 하기로 했다. 블러드 골렘들의 시체로 질척거리는 곳을 지나 앞에 트여 있는 기다란 통로로 들어서자, 어두컴컴한 동굴 내부가 다시 우리를 반겨 주었다. 세 명의 마법사는 다시금 라이트(Light) 주문을 외우며 칠흑 같은 어둠을 조금이나마 몰아내었다. “저기 형. 그런데 유정이 말을 들어 보니까 생각이 나서 그러는데요.” 안현은 내 옆으로 슬쩍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고개를 돌리자 말을 꺼내는 녀석의 얼굴에는 조심스러운 기색이 역력 했다. 계속 말해보라는 식으로 고개를 까닥이자, 안현은 천천히 다음 말을 이었다. “<절규의 동굴>은 언데드들이 주로 나오고 있잖아요. 그런데 아까와 비슷한 이유로 얻을게 없다면, 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보상들은 거의 없지 않을까요?” “흠. 그건 아냐. 오히려 이런 동굴에서 얻을 수 있는 게 더 많을 수 있어.” 내가 단호히 대답하며 고개를 흔들자, 안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용한 통로를 걷고 있는 터라 그의 목소리는 주변을 나지막하게 울리고 있었다. 뒤에 있는 일행들도 안현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곧바로 나긋한 목소리가 날아 들었다. “동굴 초입에서부터 생각해 보렴. 레이스 동상들과 공터의 마법 진. 아직도 이 <절규의 동굴>이 자연 생성으로 이루어진 동굴이라고 생각하니?” “그래요. 백 번 양보해도 동굴 자체는 어떨지 몰라도, 안에 있는 언데드 들이나 지금껏 거쳐온 기관들을 생각하면 인간의 손이 거쳤다는 건 부정할 수 없어요. 아무래도 비밀 시설로 활용 되어진 것 같은데. 그러면 안으로 들어갈수록 거주민의 흔적이 있는 방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어느 집 딸들인데 저렇게 똑똑하지. 정말로 똑 소리가 나는군. 물론 이 생각은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둘이서 모두 해주었다고 볼 수 있었다. 하연의 부연 설명이 이어지자 안현은 그제서야 이해 했는지 힘차게 고개를 주억였다. 나는 여태껏 우리들이 지나온 거리를 대충 가늠해 보았다. 동굴의 공략 정도를 10으로 가정 하면 마법 진이 있던 공터가 2. 그리고 그 이후로 2정도 추가로 왔다고 볼 수 있었다. 예정에 없던 공터 에서 휴식을 취했지만 원래 1차 휴식 목표로 설정 했던 <그 곳>은 5에 해당하는 거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흐흐.” “엑. 형 갑자기 왜 그러세요. 놀랐잖아요.” “아. 아무것도 아냐.” 그 생각을 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것은 나도 근래에 이르러 떠올릴 수 있었던 것들 이었다. 거리 지점 <5>에서 내가 노리는 물품은 바로 카오스 미믹(Chaos Mimic) 이었다. 카오스 미믹은 홀 플레인에서 최고의 보물 상자라고 봐도 무방 했다. 물론 케이스 바이 케이스(Case By Case)인 경향이 있지만, 꾹 다문 상자를 강제로 잡아 뜯고 탈탈 털어내면 어떤 것들을 토해낼지 자못 기대가 되었다. 한마디로 뽑기를 하기전의 설렘 이라고 할까. 1회차 에서는 잡을 능력이 되지 못해 혼돈(Chaos)을 통해 도망가는걸 그냥 눈 뜨고 봐야만 했는데, 이제는 그 여한을 풀 수 있었다. 실제로도 카오스 미믹을 잡은 사례는 굉장히 드물다. 발견하는 것 자체도 대단히 힘들지만 잡고 상자를 여는 건 더욱 어려운 놈들이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상자 내부에 연결 되어 있는 통로로 스스로 도망을 치고, 억지로 잡을라고 치면 그 혼돈(Choas) 안으로 먹혀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화정이 있었다. 다시는 남용을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카오스 미믹은 화정을 써서라도 잡을만한 가치가 넘치다 못해 흐를 정도의 몬스터였다. 더구나 내 기억에 따르면 방 안에 잠들어 있는 카오스 미믹은 총 세 상자나 있었다. 솔직히 특전을 선택할 때나 첫 행선지로 뮬을 잡을 때 이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 때는 미처 떠올릴 수 없었다. 그래도 이제는 충분히 잡을 능력도 되는 만큼, 절대로 전처럼 의미 없이 놓치지는 않을 것이다. 눈 앞에 보장된 보물 상자가 있는데 조금 위험하다고 지나치는 건 바보나 하는 짓 이었으니까. * 그렇다고 해서 내가 행군을 서두른 건 아니었다. 기대는 하고 있는 게 사실 이었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0년차 사용자의 입장에서 철저히 동굴을 탐험하고 있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 길이 틀렸거나 그곳에 방이 없을 경우를 대비해 차선책을 검토하고 있었고. 나머지 1에 해당하는 거리를 가는 동안 우리들은 언데드 무리들과 한번 더 전투를 치러야만 했다. 다만 이번에 만난 놈들은 해골 기사(Bone Knight)들과 해골 병사(Bone Soldier)들 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부담 없이 전투를 치를 수 있었다. 놈들을 모두 처치하고 난 후 우리들은 또 다른 갈림길에 서야만 했다. 길은 총 두 개가 나 있었는데, 하나는 아예 왼쪽으로 틀어지는 길 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완만한 오른 곡선을 그리는 길 이었다. 그리고 5에 해당하는 지점으로 가려면 오른 곡선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야 한다. 잠시 동안 감지를 돌리던 나는 한창 주문을 외우고 있는 안솔을 불렀다. “네 오라버니이. 부르셨어요?” 안솔은 해골 기사의 칼에 베인 안현을 치료 하다가, 내가 부르자 재깍 달려왔다. 이렇게 조신하게 말하면서 그때 그런 말을 했다 이거지. 나는 한두 번 헛기침을 하고는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려 갈림길 앞에 세워 두었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행동에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내 내 의도를 이해 하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잠시 동안의 시간이 흐르고 곧 눈을 뜬 안솔은 애매하다는 표정을 띠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내 옷깃을 잡으려고 해 나는 몸을 슬쩍 뒤로 물리며 입을 열었다. “꼭 옷깃을 잡아야 하니.” “히잉. 피하지 말아요오. 왜 피하시는 거에요오. 혼자서 생각하면 둘 다 들어가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오. 그나마 오라버니를 잡으면 오라버니 입장에서도 같이 생각할 수 있으니까아….” “음?” 방금 전 말은 흘려 들을 수 없어 나는 순순히 옷깃을 잡혀 주었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안솔은 겁이 많은 만큼, 그녀 개인을 위주로 생각 했다면 지금껏 행운을 토대로 보여온 행동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게 어느 정도 있었다. 그 말인즉슨 그녀는 그 동안 나를 염두에 두고 행동을 했다는 말. 대견한 마음은 일단 미뤄두고, 앞으로 행운 능력치를 연구할 귀중한 단서가 될 것 같아 안솔의 말을 기억해 두기로 했다. 그리고 내 옷깃을 잡은 안솔은, 이제는 확실하다는 듯 오른 곡선 방향으로 손가락을 쭉 내밀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네, 새로운 4월이 시작 되었습니다. 더불어 월요일의 시작이니, 정말로 로유로유(?)한 날 입니다. 하하하. 아무래도 요즘 생활 리듬이 바뀐것 같습니다. 원래 제가 아침형 인간이라 아침에 펄펄 날아다니는데, 요즘에는 저녁에 더 힘이 나네요. :D 『 리리플 』 1. 로유진 : 안녕 유진아? 1등 축하해! 응, 고마워! 헤헤! 그런데 너 누구랑 대화하고 있어? 응? 너랑 하고 있잖니. 아, 그렇구나. 하하하. 너 미쳤구나 드디어! OTL 2. MT곰 : 흠흠.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부디 반칙을 용서해 주시어요. ㅜ.ㅠ 3. 성십자 : 후후. 고맙습니다. 그리고 비사는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요. 조만간 조금씩 풀어 내도록 하겠습니다. :) 4. 러브라이크 : 네. 알겠습니다. 러브라이크님. 러브라이크님의 몸, 잘 받아 가도록 하겠습니다. 얼른 이리 오도록 하세요. +ㅁ+ 5. 사람인생 : ㅋㅋㅋㅋ. 1번을 적으면서 제 정체성의 혼란을 느꼈습니다. 하하하. 하하. 하…. 6. 레필 : 암요. 특히 냉장고에 넣어 뒀다고 꽁꽁 얼린것을 한번 빨면 천국이 따로 없습니다. 7. 고장난선풍기 : 하하. 그래서 죄송해서 2번에 넣어 드렸지요. ㅜ.ㅠ 이번회도 재미있게 감상해 주세요! 8. pgh21c : 오늘도 pgh21c님의 코멘트가 달렸군요. 아~기뻐라~. '~' 9. 가한나 : 허허. 백번 양보해서 수현이는 S일 수 있습니다. But 저는 아닙니다. 절대로 제 발이 저리지 않아요. 믿어 주세요. ㅜ.ㅠ 10. 오피투럽19 : 어, 어이쿠. 저도 실수로 연재 등록을 눌렀네요. 어, 어엇! 또 실수로 오피투럽19님을 리리플에 올렸습니다. :D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58 / 0933 ---------------------------------------------- 초심으로 돌아가서 <절규의 동굴> 안으로 진입할수록 초입에서 느꼈던 축축함과 불쾌한 습기는 희미해지고 있었다. 물론 그만큼 스산한 악기(惡氣)는 강해지고 있었지만, 언데드들과 몇 번이나 마주친 만큼 다들 웬만큼 적응 했을 것이다. 나와 안솔의 합의로 우리들은 오른쪽 길로 들어갔고, 장장 30분째 걷고 있었다. 포인트 <5>를 통과하는 순간 대부분의 길은 모로 가도 <10>과 연결 되어 있다. 물론 필수로 <7>을 거쳐야겠지만 갈림길 선택에 대한 부담이 덜해지는 것도 사실 이었다. 추가로 10분을 더 걷자 어느 정도 목표 지점에 도달한 듯 감지 끝에 걸리는 것들이 있었다. 나는 조용히 오른손을 들어 정지 신호를 보냈다. 자박자박 뒤를 따르던 일행들의 발걸음 소리도 동시에 멈추었다. 나는 마력의 밀도를 높여 한층 더 면밀히 살피고, 가라 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200미터. 정확히는 180미터 정도 앞. 감지에 걸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몇 마리 인가요?” “둘. 그런데 움직이지도 않고, 생명 반응이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계속해서 한 자리에 우묵하게 서 있는데 조금 애매하네요. 아무래도 가까이 가 봐야 알 것 같습니다.” “또 레이스와 비슷한 놈들일 수도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하연의 조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전투를 준비 했다. 이 부분은 아주 약간 기억이 아리까리 했기 때문에 확실히 자신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나아가는 게 가장 좋은 방법 이었다. 잠시 동안 정비 시간을 배당한 후 일련의 준비가 끝나자 곧바로 캐러밴을 이끌고 나아갔다. 라이트(Light) 구체는 다시금 빛이 줄어 들었다. 그 대신 안력에 마력을 돋움으로써 어둠 속을 꿰뚫어 보았다. 장시간 안구에 마력을 담는 건 결코 좋지 못한 일 이었지만, 이렇게 필요할 때마다 잠깐씩 사용하는 건 큰 무리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조금의 거리를 남겨 두고 다시 정지 했다. 고연주는 앞으로 살짝 나오더니 전방을 유심히 살피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지킴이 같은데요. 세로로 줄이 그어진 철문을 중심으로, 좌우 하나씩 서 있네요. 사용자 김수현의 말대로 따로 반응은 느껴지지 않아요.” 제 3의 눈으로 읽은 결과, 고연주의 말은 정답 이었다. 여기서 몇 발자국만 더 들어 갔으면 우리를 침입자로 인식하고 움직였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한번 주억이고는 정하연을 호출 했다. 싸우는 것도 좋지만 지금 우리들이 서 있는 장소는 여태껏 거쳐왔던 통로들보다 공간이 협소해 전투에 썩 적합한 지형은 아니었다. 해서, 아예 반응도 못하게 원거리에서 처리할 심산 이었다. “하연. 혹시 예전에 라돌로프(LadolRof)들을 상대로 썼던 마법 기억 하나요?” “급속 연발(Rapid Fire)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기억하고 있어요.” “지금 한번 더 사용할 수 있겠죠.” “물론이에요. 마침 잘 됐네요. 방금 전 정비에서 목걸이에 메모라이즈(Memorize) 했거든요.” 살포시 웃는 정하연을 보자 마음이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녀를 앞으로 잡아 이끌고는 문의 한 쪽 구석을 가리켰다. 하연 또한 마력을 일으키는지 눈동자가 물빛으로 잠시 물들었다가, 다시 본래의 검은빛을 되찾았다. “저곳을 맞추면 되는 건가요?” “네. 따로 마법적 보호 처리는 느껴지지 않지만 혹시 모르니 최소 서너 발은 준비해주세요.” “알겠어요. 지금 바로 영창에 들어갈게요.” 하연은 눈을 감고 바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 했다. 나는 한 발 물러서 멀뚱히 서 있는 고연주와 함께 그녀의 모습을 지켜 보았다. 애들은 문이 있다는 말에 다들 얼굴이 밝아져 있었다. 소도시 <뮬>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보상다운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들뜬 것 같았다. 나 또한 카오스 미믹(Chaos Mimic)을 잡을 생각에 속이 조금 짜릿해지는걸 느꼈다. 되도록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그 놈들은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놈들 이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운이 따라 준다면 체력을 올려주는 영약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얻게 된다면 일전에 얻은 벨페고르의 심장과 비비앙의 영단을 합쳐 연단을 부탁할 것이다. 뭐, 김칫국을 마시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만. “───. ───. ───.” 시원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진다. 귀 밑과 목을 살짝 덮는 하연의 단발 머리가 보인다. 그녀의 아름다운 목선을 감상하고 있자, 이내 모든 준비를 끝냈는지 하연이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목에서 미약한 불빛이 번쩍이고 청아한 목소리가 통로 안을 조용히 울렸다. “얼음의 창(Ice Spear)! 급속 연발(Rapid Fire)!” 예전에 보았던 길쭉한 송곳 모양의 얼음들이 차례대로 생성 되는 게 보였다. 그러나, 하연의 주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피어스(Pierce)!” “흠.” “어머? 피어스(Pierce)까지? 쓸만한 응용 주문은 대부분 익혔나 보네.” 옆에 있던 고연주는 하연의 추가 주문을 보며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녀의 말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다른 사용자들은 나를 <0년차 사용자>로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나는 특전을 부여 받아 이룩한 실력 이었다. 하연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어쩌면 10강에 이를 수 있는 사용자를 만난 걸지도 모르겠다.>고 평가 했다. 그만큼 그녀는 마법사 사용자로서 2년차 답지 않았고, 실력 면에서 높은 완성도를 보이고 있었다. 하연이 살짝 지팡이를 휘젓자 한 발씩 차례대로 쏘아져 나가기 시작 했다. 아마 시간차를 둘 생각인 것 같았다. 이윽고 첫 번째 얼음의 창이 쏘아지고, 그들의 감지 거리 내로 들어왔는지 그긍거리는 소리들이 들렸다. 우묵하게 서 있던 기사 동상은 이내 목을 우리 쪽으로 비틀며 투구 안 붉은 빛을 번쩍였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침침한 목소리들이 흘러 나오기 시작 했다. <침입자 확인. 경계 태세 발동.> <첫 번째 입력 명령 실행. 침입자들에 대한 철저한 말살 수행.> 두 동상 기사가 우리들을 향해 재빠르게 몸을 돌리는 순간, 하연이 쏘아 보낸 첫 발이 내가 지정한 철문의 구석으로 정확하게 꽂혀 들어갔다. 쾅! 콰쾅! 콰콰쾅! <<치직, 침입자 공격 확, 치직.>> 쾅! 콰쾅! 콰콰쾅! <<치지지지지직.>> 하연이 쏘아낸 여섯 발의 창들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철문을 두드렸고, 종래에 이르러서는 철문 속에 박혀 있던 중추를 부수는 것도 모자라 아예 문 한쪽을 박살내고 말았다. 가히 무시무시한 위력 이었다. 그리고, 막 위풍당당하게 우리를 향해 몸을 돌린 기사들은 구슬프게 들리는 소음을 내며 그대로 몸을 허물어트렸다. 마력을 공급 받지 못하는 놈들은 말 그대로 동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끝난 건가요?” “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너무도 빨리 나온 결과에 정작 마법을 사용한 당사자인 하연이 당황하고 있었다. 제 3의 눈으로 놈들의 상태를 확인한 후,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거듭 말하지만 제 3의 눈이 있는 이상 2회차에서 끝을 보는 것도 절대 무리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제 3의 눈이 없었다면 전투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놈들을 움직이는 근원, 즉 중추를 사전에 읽고 파괴함으로써 손 쉽게 해결한 것이다. * 얼떨떨해 하는 일행들을 데리고 나는 철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하연이 한쪽 문을 열어놨기 때문에 따로 힘을 쓸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철문을 통과하는 순간, 여태껏 거쳐왔던 <동굴>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울퉁불퉁하고 어그러져 있는 통로가 아닌 네모 반듯한 길들과 각진 모서리들. 애들은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요상한 기분이 드는 듯 연신 고개를 휘두르고 있었다. 분명히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곳이 바로 <절규의 동굴>의 분기를 가르는 중간 지점 이었다. 나는 잠시 주변을 살핀 후 앞으로 곧게 뻗어 있는 길을 향해 천천히 캐러밴을 이끌었다. 가는 도중, 나는 오른쪽 벽면에 차분히 손을 짚었다. 그리고 톡, 톡, 가볍게 두드리면서 걸었다. 옆에서 걷고 있던 고연주가 갸웃하는걸 느꼈지만, 이내 그녀도 짚이는 바가 있는지 반대편으로 가 나와 똑같은 행동을 하기 시작 했다. 톡, 톡, 톡, 톡, 톡. 리드미컬한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때 분명 캐러밴의 리더가 분노에 친 주먹질이 여기 어디쯤 이었을 텐데. 애들은 뭘 하는 거냐고 물었지만, 대답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비비앙 이었다. 그녀 또한 한동안 던전에서 살았던 만큼 나와 고연주가 하고 있는 행동의 의미를 이해한 것이다. 그래도 “쉿. 비밀의 방을 찾고 있는 거야.” 라는 말은 나를 꽤나 웃기게 만들었다. 톡, 톡, 통, 통, 톡. 걸렸다. 두드리면서 지나가던 벽면들 중에서 다른 소리가 들리는 순간 나는 걸음을 정지 했다. 잠시 몸을 뒤돌아 보자 모두 기대에 찬 얼굴들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연주 또한 내 쪽으로 다가와 몇 번 벽을 두드려 보고는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이 부분들이 다르네요. 비밀의 방을 찾았어요. 하지만 조심해야 해요. 비밀의 방이라고 해서 절대 안전한 건 아니니까.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감을 잡은 거에요? 나도 깜빡 놓치고 있었는데.” 고연주는 이제 영악하게 말을 돌리고 있었다. 어떻게 알아냈냐는 사실이 아닌, 어떻게 감을 잡았냐고 완곡히 우회해서 물어온다. 거기에 당할 내가 아니란다. 나는 언제나처럼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 했다. “그냥 감이요. 그렇잖아요. 갑자기 사람의 흔적을 탄 장소가 나오는데 방이 없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져서요. 그냥 혹시나 했어요.” “지금 저랑 농담해요? 누가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사용자 아카데미 에서요.” 그녀의 말을 끊고 대꾸하자, 고연주는 그 예쁜 눈으로 나를 흘겨 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푸욱 쉬고는 힘 없이 대열로 돌아 갔다.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내 밑천이나 다름 없는 것들을 가르쳐줄 수는 없는 노릇 이었다. 그렇게 고연주를 돌려 보내고는, 나는 제 3의 눈과 감지로 차분히 내부를 살폈다. 안에서 느껴지는 반응은 총 셋. 아마 카오스 미믹(Choas Mimic)들 이리라. 침을 꿀꺽 삼키고, 벽면을 더듬는다. 이윽고 다른 곳들과는 무언가 다른 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고 나는 주저 않고 그 부분을 꾹 눌렀다. 그러자, 한 면이 움푹 들어감과 동시에 벽면 일부의 틈새가 살짝 벌어진걸 볼 수 있었다. 그 상태로 조금 더 힘을 주자 그 틈이 더욱 더 벌어지는 게 보였다. “들어가죠.” 침을 꼴깍꼴깍 삼키는 일행들을 보며 한마디 툭 던지자, 그네들의 눈동자에 기이한 열망이 깃드는 게 보였다. 여담으로, 솔직히 조금 무서울 정도였다. * 틈을 더욱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비로소 비밀의 방이 나왔다. 서랍도, 침대도, 책장도 있는 방. 바닥이나 면이 차가운 대지인 만큼 온전한 방이라고 보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이로서 <절규의 동굴>에 거주민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 되는 순간 이었다. 물론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건 나중에 조사단들이 할 염불 이었고, 사용자들은 잿밥에만 관심을 가지면 되는 일이다. 세 개의 라이트(Light) 구체가 허공 위로 떠오르자 어둠이 깔려 있던 방은 환하게 밝아졌다. 그렇게 시야가 확보 되는 순간 나를 비롯한 일행들은 한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보물 상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이한 점은, 그 보물 상자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들썩들썩 숨을 내쉬고 있다는 점 이었다. “미믹(Mimic)이네요. 땡 잡았어요.” 고연주가 조심스럽게 속삭였지만 나는 그저 미미한 미소를 흘릴 뿐 이었다. 과연 땡 잡은 정도로 끝날까? 겉으로 화려한 보석들을 주렁주렁 매단 상자를 보자 애들은 반색하며 달려들 기세였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애들에게 신호를 보내 입을 조용히 시켰다. 그리고 모두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낸 후, 혼자서 살금살금 걸어 들어갔다. 카오스 미믹(Chaos Mimic). 겉보기에는 일반 미믹과 별다를 바가 없어 보이지만, 그 속사정을 보면 180도 다른 녀석이 바로 눈 앞에 있는 놈들 이었다. 이놈 한 마리만 잡아서 가공만 잘 하고 종속 마법 각인만 새겨 놓으면, 따로 주렁주렁 배낭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훌륭한 배낭이 될 수 있었다. 더불어 혼돈(Chaos)을 이용한 흡수 계열 방어 마법도 있고, 외양도 화려한 만큼 여성 사용자들 특히 사제나 마법사 사용자들 이라면 누구나 오매불망 갖고 싶어하는 물품 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쓸모가 있는데 속까지 꽉 찬 놈이니 정말로 바람직한 몬스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깊이 잠들어 있었던 듯, 놈들은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새근새근 숨을 내쉬는 녀석들을 보며 나는 곧바로 허리를 숙여 한 놈을 집어 들었다. 내 손이 닿는 순간 녀석은 깜짝 놀란 듯 상자(?)를 이리저리 바동거렸다. 이윽고 사람이 눈을 깜빡이는 것처럼 중간에 갈라진 입구를 몇 번 들썩거린 녀석은, 바동거리던 몸을 딱 멈추었다. 왠지 모르게 놈이 나를 지그시 응시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간의 시간이 흘렀다. 곧 지금 상황을 파악 했는지, 카오스 미믹(Chaos Mimic)은 순식간에 크게 입구를 벌렸다. 안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블랙홀 같은 내부가 보인다. 그리고…. “삐에에에에에에에!” 놈은 거친 괴성을 토해 내었다. “꺄앗!” “뭐, 뭐에요 이 소리는?” 뒤에서 일행들이 낮은 비명을 질렀고, 고연주도 보통 미믹과는 다르다는 걸 느꼈는지 당황한 목소리를 내었다. 고연주 정도라면 분명 카오스 미믹의 특징이나 차이점을 알고 있을 텐데. 내 예상은 곧바로 맞아 떨어졌다. 이윽고 “설마?!” 라고 외친 그녀는 열린 입구 안에서 뭉클한 검은 기운이 쏟아져 나오는걸 봤는지, 크게 비명을 지르며 내게 소리쳤기 때문이다. “사용자 김수현! 그거 당장 버리고 물러서요! 미, 미믹이 아니라 카오스 미믹 이에요! 저게 어떻게…!” “그렇군요.” 나는 담담하게 대답 하고는 몸을 풀쩍 뛰었다가, 아래로 강하게 발을 내질렀다. 내가 들어 올린 미믹의 비명 소리에 깨어난 다른 놈들이 도망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놈을 지그시 밟자 고연주는 속이 터지는 듯 한층 더 목소리를 높였다.(참고로 나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일단 그렇게 두 놈을 안전하게 확보한 후 나는 차분히 손을 들어 올렸다. 이내 내 오른손에 맑은 불꽃이 휘감아 들었고, 가볍게 한 번 휘저어 놈이 내뿜는 검은 기운들을 흐트러트렸다. 그리고, 흩어지고 불타오르는 기운들 사이로 보이는 놈의 입구 속으로 재빠르게 손을 찔러 넣었다. ============================ 작품 후기 ============================ (이번 회 에서는 리리플을 쉬고, 다음 회에 같이 하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마침 12시면 제가 한창 감성에 젖어 있을 시간인데, 겜마스터님의 코멘트가 제 심금을 울렸네요. 그 동안 겜마스터님의 달아주신 코멘트들을 쭉 읽어 보았습니다. 연참을 원하시는것도, 이해가 가지 않아 질문하신 것도, 에로 유진이라고 놀리신 것도, 한창 H신 문제로 힘들때 감싸 주신것도, 제 복선을 알아채신 날카로운 것도, 그리고 군대를 가신다는 코멘트도요. 저 또한 군대를 다녀 왔습니다. 올해 예비군 2년차 네요. 이미 주위의 다른 분들이 좋은 말씀들을 많이 해주셨겠지만, 저 또한 하나 말씀 드리자면. 군대는 몸 건강히 전역 하는게 최고 입니다. 저는 신병 교육대에서 크기가 제 배까지 오는, 음식 쓰레기가 가득 찬 짬통을 혼자 낑낑 들다가 허리를 삐끗 했지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설마 그게 2년이 넘도록 저를 붙잡을지 누가 알았을까요. 하하하. 나중에는 너무 아파서 다친 쪽으로는 돌아 눕지도 못했는데, 잠자다가 끙끙 거리니까 강제로 일으키더니, 앓는 소리 내지 말라고 베개에 강타 당한 기억이 떠오르네요.(…….) 뭐 그래도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아무튼, 102 보충대로 가신다고 들었습니다.(저는 306 보충대를 나왔습니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몸 건강을 우선 챙기셔야 합니다. 그리고 군대는 기본이 상하복명이 원칙으로 들어가 있는 곳 입니다. 조금 더럽고, 조금 힘들도, 조금 억울해도 참고, 인내하시면 언젠가 탁 풀릴날이 오실 겁니다. 문득 신교대 중대장이 해주었던 말이 떠오르네요. 아버지가 갔던 길, 형이 갔던길, 이제 내가 가는 길, 나중에 내 아들이 갈 길. 그게 바로 군대 입니다. 시국이 뒤숭숭해 불안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대한민국 대부분의 남성 분들이 다녀오는곳 인만큼, 그리고 그동안 보여 주셨던 겜마스터님의 유쾌함은 필히 즐겁고 건강한 군생활을 만드시리라 믿습니다. 아, 후기가 너무 길었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감성 포텐이 터져서 그래요. 하하. 오늘 아침 강의가 있는데, 가서 졸면 어떡하죠. :) 그럼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2년간의 군 생활 무사히 마치시기를 기원 하면서, 다음 휴가 나오실때 까지 분량은 잔뜩 쌓아두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군대 잘 다녀오세요! ^-^/ 0159 / 0933 ---------------------------------------------- Process Of Growth 입구가 쩍 벌려져 있는 카오스 미믹은(Chaos Mimic)의 내부로 손을 찔러 넣자 기이한 감각이 내 살갗을 파고 드는 게 느껴졌다. 놈은 질펀한 연기를 풀풀 흘리며 곧바로 손을 타고 들어 오더니, 이내 눈 깜빡 할 사이에 내 오른팔 전부를 꿀꺽 삼키고 말았다. “오빠아아아!” “혀엉!” 뒤에서 일행들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놈의 너비나 길이를 따지면 아무리 깊어도 팔꿈치에서 멈춰야 정상인데, 어깨 끝 부분까지 삼켜 들어오자 깜짝 놀란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되려 왼손을 들어 상자가 떨어지지 않게 꽉 붙잡았다. 그리고 적당히 마력을 조절해 바로 화정(火正)의 힘을 터뜨렸다. 차라리 보자마자 도망치려고 했으면 살 가능성이 더 높았을 텐데 오히려 “날 잡아 잡수세요.” 하고 덤벼드니 조금 고마운 마음이 일어날 정도였다. 꾸웅! 내부에서 들려오는 굉음과 동시에 놈의 몸체는 크게 흔들렸고, 입구에서 검은 연기를 보글보글 뿜으며 몸을 축 늘어뜨리는 게 보였다. 그리고 잠시 동안 윗상자를 덜컥 이더니 곧 바람 빠진 풍선처럼 흐물흐물 쭈그러들기 시작 했다. 좋아. 일단 한 놈 잡았고. 말랑말랑하게 변한 카오스 미믹(Chaos Mimic)의 외부를 쓰다듬으며 한 쪽으로 내려 놓은 후 나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내 발 아래 밟힌 나머지 두 놈이 보인다. 물론 혹시 몰라 내 두 발 또한 화정(火正)으로 감싸고 있었던 건 당연한 일 이었다. 나는 처리한 카오스 미믹(Chaos Mimic)을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후, 왼쪽 발 아래 있는 놈을 집어 들었다. 처음 잡았던 놈도 제법 튼실했는데 이 놈도 만만치 않은 것 같았다. 아공간 기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약간이나마 무게 감이 느껴지는 걸로 보아 속이 빵빵 하게 찬 녀석이 분명 했다.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놈의 입을 억지로 벌리고는 아까처럼 손을 안으로 집어 넣었다. 원래 카오스 미믹(Chaos Mimic)들은 전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적을 앞에 두면 불가피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도주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놈들을 발견한 사례 중 포획에 성공 했다는 기록은 정말로 찾기 힘들었다. 그러나 앞 놈도 그렇고, 지금 이 놈도 도망을 치지 않는다. 오히려 철저히 악을 쓰면서(정확히는 혼돈을 내뿜으면서) 격렬히 반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왜 이럴까 약간 궁금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차피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 이었다. 그런 만큼 아까와 똑같은 과정을 거쳐 간단하게 보물 상자를 제압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 놈 더 처리한 후, 나는 마지막 남은 놈을 집어 들었다. “삐에에에에에에에….” 이번에 들어올린 녀석은 앞선 두 놈과 비교해 보면 크기가 조금 작았다. 들어올리자 상자를 슬쩍 열며 구슬픈 울음 소리를 내뱉었는데, 문득 대강 짐작 가는 것들이 있었다. 자꾸만 몸을 바동거리며 한 구석에 축 늘어진 녀석들한테 가려는 행동을 반복하는 걸로 보아 아마도 이 놈이 새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저 둘은 새끼를 지키려고 도망을 치지 않은 건가. 오, 감동적인데. 꾸웅! 그러나 몬스터한테 진짜로 감동을 느낄 만큼 내 감정은 살아 있지 않았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으니까. 그래도 최대한 빨리 내부를 망가트려 주는 것으로 부모의 자식 사랑 마음에 화답해 주었다. 매우 빠르게 터뜨렸으니 크게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윽고 힘 없이 몸을 축 늘어뜨리는 녀석을 바닥에 던지며 나는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몇 번 팔을 돌리고 시선을 내리자, 사이 좋게 누워 있는 세 녀석이 간헐적으로 검은 연기를 뿜어 내는걸 볼 수 있었다. “어머. 어머어머. 어떡해어떡해.” 고연주는 평소와는 다른 흥분한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카오스 미믹(Chaos Mimic)의 출현과 포획은 <10강>에 이른 사용자를 놀라게 할 정도였다. 그녀는 나는 듯 뛰어와 놈들을 향해 막 손을 내뻗다가, 간간히 흘러 나오는 연기에 닿은 땅이 검게 물드는걸 보고는 화들짝 손을 거두었다. “아직 만지시면 안 됩니다. 큰일 나요.” “휴우. 위험 했네. 그나저나 정말로 놀랍네요. 카오스 미믹(Chaos Minic)이라니….” 혹시라도 또 어떻게 잡았냐고 의심하면 피곤해질 일 이었지만, 그녀에게 내가 대답을 꺼린다는 걸 몇 번 보여준 게 유효했는지 더 이상 귀찮게 굴지 않았다. “형! 지금 잡으신 것들이 도대체 뭐에요?” 안현은 대충 일이 끝났다고 여겼는지 재빠르게 질문 했다. 다른 일행들도 구경하는 동안 잔뜩 호기심이 오른 표정으로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살짝 받아 넘긴 후 담담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름은 들었듯이 카오스 미믹(Chaos Mimic). 간단히 말해서 굉장히 수준 높은 아공간을 지닌 마법 배낭이자 홀 플레인 최고의 보물 상자라고 보면 돼. 뭐, 자세한 건 나중에 보면 알아. 사용자 신상용? 지금 매고 있는 배낭 전부 비우고 저한테 주세요. 이 놈들을 담아야 하거든요.” “에엑. 지금 개봉하지 않으실 거에요?” “내부는 망가트려 놓긴 했는데 아직 연기가 흘러 나오네. 저거 다 빼려면 시간 제법 걸릴 것 같아서.” “그래도….” “여기가 도시도 아니고 탐험 도중인데 지금 하는 건 말도 안되지. 나중에 아예 하루 날 잡고 할 거니까 지금은 기대하지마.” 내 단호한 대답에 일행들은 하나 같이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나는 정말로 여기서 할 생각은 없었다. 해서, 나는 신상용이 건네준 배낭을 갖고 놈들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가까이 있는 놈을 하나 잡아 올린 후 정 중앙에 박혀 있는 가장 큰 보석을 빼내었다. 보석은 붉은 빛깔을 띠고 있었는데, 추후에 종속 마법을 각인할 때 필요한 놈들이라 잃어버리지 않고 소중히 보관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차례대로 보석 세 개를 분리한 후, 상자를 꼼꼼히 밀봉하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배낭 안으로 쑤셔 넣었다. 확실하게 확보한 이상 급하게 확인하고픈 미련은 없었다. 그러자 혹시나 하고 나를 보던 일행은 김 새는 얼굴로 어깨들을 축 늘어뜨렸다. 지금 애들은 카오스 미믹(Chaos Mimic)을 단순한 보물 상자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솔직히 정화 작업은 핑계에 불과 했지만 그래도 여기서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아까 공터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했으니 이곳에서 따로 휴식은 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좋은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아직 남아 있는 것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망을 보고 있을 테니 사용자들은 지금 서 있는 이 방을 철저히 수색해 주세요.” “네~에.” 애들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느릿하게 흩어졌다. 비단 애들만 그러는 게 아니었다. 고연주는 입을 삐죽 내밀고 건성으로 침대를 훑었고, 비비앙은 아예 대놓고 퉁퉁거리고 있었다. 하연은 차분한 얼굴 이었지만 가끔씩 뒤를 돌아보는 게 어지간히 미련이 남은 듯 했다. 오직 신상용만이 멋쩍은 미소와 함께 내 오더에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그들의 행태에 나는 한숨을 내쉬고 배낭을 내려 놓았다. 한 편으로는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껏 전투와 행군만 반복한 만큼 다들 알게 모르게 지쳐 있을 것이고, 쌓여 있는 것들도 많을 것이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탐험을 하고 있는 캐러밴의 사기를 올리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성과를 얻는 것 이었다. 그런 것들에 나름 초탈한 고연주 일지라도, 그녀는 카오스 미믹(Chaos Mimic)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알고 있는 만큼 더욱 몸이 달아올라 더욱 저러는 것 같았다. 까짓 거 하나 정도는 지금 풀어도 큰 상관은 없었다. 다만 그러려면 혼돈을 모두 토하게 만드는 시간을 단축시켜야 하는데, 현재 할 수 있는 인위적인 방법으로는 화정(火正)을 이용하는 방법이 유일 했다. 더 이상 그 힘을 함부로 남용하지 않기로 했는데 이렇게 손바닥 바꾸듯 쉽게 바꾸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의 내용물을 쏟아 내는 순간 굉장히 귀찮은 일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 그러나 캐러밴을 이끄는 대장 자리에 있는 만큼 일원들의 불만 또한 해소시킬 의무도 있었다. 결국 나는 일행들의 무언의 시위에 한 발자국 물러서기로 마음 먹고는, 다시 배낭 안으로 손을 넣었다. 대상은 가장 마지막으로 잡았던 애기(?) 카오스 미믹(Chaos Mimic)으로 잡았다. 다른 두 놈보다 크기도 절반에 불과한 만큼 정화에 걸리는 시간이 훨씬 줄어들 것이다. 꾹 닫은 상자를 열자 다시금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흘러 나왔다. 안에 고여 있던 것들을 한번 크게 털어낸 후, 나는 차분히 안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화정을 이용해 내부의 혼돈을 한꺼번에 태워버릴 생각 이었다.(신화계급 권능은 조절이 가능하다.) 화르륵. 이윽고 상자 전체가 맑은 불꽃으로 타오르자, 자연스레 일행들의 시선이 내 손으로 쏠렸다. 나는 일부러 아무것도 모르는 척 혼잣말로 “빨리 끝내면 빨리 볼 수 있을 텐데….” 라고 중얼거렸다. 단순한 혼잣말에 불과 했지만 효과는 확실 했다. 고연주는 눈을 빛내며 그림자까지 동원해 온 방을 구석구석 탐색하기 시작 했고, 비비앙은 서랍의 책을 꺼내며 재빠르게 훑기 시작 했다. 애들 또한 갑자기 배는 빨라진 발걸음으로 그 어느 때보다 열의를 갖고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나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 “그럼 모두 물러서세요.” “오빠. 빨리빨리.” “궁금하다 정말. 그게 그렇게 대단한 보물 상자야?” “보면 알아. 그리고 후회하지 마.” 유정이 보채는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나는 비비앙의 물음에 대꾸해 주었다. 그녀는 내 뜻 모를 대답에 잠시 이상한 표정을 지었지만 다시금 어서 열어보라고 재촉하는 시선을 보내었다. 나는 가장 작은 카오스 미믹의 안을 벌렸다. 더 이상 검은 연기는 흘러 나오지 않고 있었다. 화정(火正)으로 구석구석 깨끗하게 청소를 했고 중추를 담당하는 보석(Jewel)도 분리 했기 때문에 큰 위험은 없다고 봐도 무방 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한번 더 제 3의 눈으로 확인한 다음, 나는 곧바로 녀석을 거꾸로 뒤집었다. 그리고 눈 앞으로 보이는 밑바닥에 해당하는 부분을 가볍게 건드렸다. 그리고 그 순간. 촤르르르르르르르! 금빛으로 빛나는 물결이 열린 구멍을 타고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헐.” “우와~!” “와아. 와아.” 금빛 물결은 하나의 거대한 물줄기처럼 끈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간간이 은빛으로 번쩍이는 것들도 보였고 영롱한 빛깔을 번들거리는 보석들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크기가 있는 물건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저 화폐, 보석류만 가득하게 쏟아지는 중 이었다. 아무래도 나이가 어린 놈이라 작고 반짝이는 것들 위주로 집어 삼킨 것 같았다. 단순히 <수익> 면에서 본다면 분명 지금껏 얻은 어느 성과들과 비교해도 최고 수준 이었지만 성과를 도출한 주체를 카오스 미믹(Chaos Mimic)으로 산정 한다면 조금 꽝 이라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거의 몇 분이 넘도록 계속해서 쏟아내던 녀석은 이내 거의 끝 물이 가까워 지는지 점점 물줄기가 줄어들고 있었다. 이윽고 마지막으로 하얗게 빛나는 동그란 구슬을 툭 내뱉은 녀석은, 자그마한 부스러기들을 뱉으며 한두 번 콜록 였다. 그대로 두어 번 크게 털어내자 안에서는 먼지만 폴폴 나오는 게 보였다. 일행들은 모두 할 말을 잃은 얼굴로 방 주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둥그렇게 모인 우리들 중앙으로 불그스름한 빛을 내는 금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 높이가 자못 대단해, 감히 셀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였다. “이거 정말 세려면 하루 종일 걸릴 것 같은데요.” 신상용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입을 열자 다른 사용자들 또한 모두 공감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이정도 일 줄은 몰랐던 듯, 다들 얼굴에 부담스러운 기색이 역력 했다. 나는 거보라는 얼굴로 혀를 찬 다음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이 있을 까봐 꺼내기 싫었어요. 아무튼 일단 금화나 보석 류들은 다시 집어 넣도록 하죠. 지금 이걸 일일이 세다가는 오늘은커녕 내일 동굴을 공략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에요.” 나는 가방을 중앙에 놓고 곧바로 다시 주워 담기 시작 했다. 일행들 또한 솔선수범하는 나를 따라 금화를 쓸어 담는걸 도와 주었다. 나는 그러는 와중에도 남몰래 액수 견적을 내 보았다. 절반 이상이 금화였지만 백금화도 꽤 보이는 게 얼추 6만 골드는 넘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 금화들이 전부는 아니었다. 못해도 수백 개는 되어 보이는 보석들은 백금화보다 몇 배나 비싼 값어치를 가지고 있을 테니까. 한동안 다시 가방에 금화와 보석들을 옮기는 작업이 이루어졌고, 몇 십 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우리들은 모든 화폐, 보석 류를 다시 상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남은 물품들을 모아보니 총 3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직 어린 녀석이었던 만큼 반짝이는걸 위주로 삼킨 게 분명 했다. 나는 속으로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고는 물품들을 하나씩 천천히 살펴 보았다. 속이 살짝 쓰리기는 했지만 당분간 돈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그나마 한줄기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 희망을 버릴 때는 아니었다. 나는 집어 넣지 않고 따로 빼둔 물품들을 천천히 살펴 보았다. 중요한 건 질이지 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내 눈에 연한 푸른 빛으로 물들여져 있는 작고 예쁜 귀걸이 한 쌍, 내가 집어 넣으려다 따로 빼둔 마름모꼴 자수정 하나, 그리고 마지막 즈음에 굴러 나온 주먹만한 구슬이 눈에 들어왔다. 하연이 복원 마법을 시도하는 사이 나는 재빨리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장비가 별로 나오지 않아 조금 실망한 건 맞지만 아직 튼실한 놈이 두 마리 더 남아 있었고, 이 세 개 장비들의 퀄리티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곧이어 허공으로 떠오르는 글자들을 따라 나는 눈동자를 바쁘게 움직였다. 『바람의 귀걸이(Earring Of Wind)』 <고위급 바람의 정령이 오랫동안 머물다 떠난 귀걸이 입니다. 비록 정령의 힘은 잃었지만 아직 그 힘의 잔재는 남아 있습니다. 한 쌍을 기준으로 착용 했을 경우 바람의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용자의 몸놀림이 한층 날래지고, 더욱 넓은 시야를 볼 수 있도록 도와 줍니다. 단, 한 짝이라도 없거나 잃어버릴 경우 그 효과는 절반 이하로 감소 됩니다.> 『증폭의 보석(Jewel Of Amplification)』 <고대 홀 플레인에서 마법사들의 필수품 이었던 체외 각인용 마법 보석 입니다. 사용자의 특성에 맞는 마나 특성에 대한 긍정적인 요인들을 증폭시켜 줍니다. 보석의 등급이 고급인 만큼 회로 내 마력 흐름 속도 증가, 마력 순도 상승, 마법을 사용하는데 들어가는 마력 감소의 효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개량형(Improved Model) 수호의 방패(Shield Of Defend)』 <주의(사제 전용, 귀속 장비 입니다.)! 개량형(Improved Model) 수호의 방패(Shield Of Defend) 입니다. 고대 홀 플레인 시절, 근접전이나 기습에 취약한 사제들을 위해 신전에서 고안 되어 만들어진 물품 입니다. 구슬은 본인의 자아를 갖고 있고, 귀속된 주인의 안위를 스스로 판단하고 지킵니다. 만일 귀속자에게 위험이 있다고 판단할 시, 스스로 방어 마법 <수호의 방패(Shield Of Defend)>를 발현 합니다.> “아, 아무래도 영 감이 잘 오지 않는데요. 귀걸이는 바람 속성을 지닌 것 같은데 나머지 둘은 잘 모르겠어요. 복원 마법을 썼는데도 들어오는 정보가….” “…….” “수현씨?” “…네?” 나는 잠시 멍한 얼굴로 정보를 읽다가, 하연이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대 장비가 나왔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정신이 팔린 것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무려 두 개나 나왔다. 나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하연을 보자 절로 침이 목으로 넘어갔다. 나는 차분히 숨을 정리하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미 장비들이 주인은 모두 정해져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으아아. 오늘 정말 졸려서 큰일날 뻔 했습니다. 눈꺼풀이 천근 만근. 잠깐 저녁 약속 후 집에 들어오니 8시가 넘어 있더군요. 오자마자 바로 집필을 시작 했는데 다행히 제 시간에 맞춰 올릴 수 있었습니다. 중간에 모르고 깜빡 자버릴뻔 했네요. 아마 누웠으면 100% 잤을 거에요. 그런데 내일 또 쪽지 시험이 있어서, 이제 또 쪽지 시험 준비 해야 되요.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럼 재미 있게 감상해 주세요. ㅜ.ㅠ PS. 추천, 코멘트, 쿠폰 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드립니다. (__) 『 리리플(157회) 』 1. 쿠로시온 : 쿠폰 감사 합니다. (__) 1등 축하 드립니다! 요새 가장 1등에 많이 보이시는 분이 쿠로시온님 이네요. 혹시 무언가 비결이라도 있나요. ?ㅇ? 2. [DeepBLue] : 낄낄. 남은 두 상자의 개봉은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합지요. :) 3. 현오 : 현오님. 어쩜 그렇게 글을 재미있게 쓰실 수 있으신지요. <조 쪼끄마난 계집이 얌체짓 하는거봐.> ㅋㅋㅋㅋ. 안솔 안티팬 분들은 격하게 공감하실것 같습니다. :D 4. gkgngh : 원래는 메모리즈(Memories)로 하려고 했는데 이미 제목이 있어서 그랬어요…. 암기하다의 뜻을 풀면 외워 잊지 아니하다란 뜻으로 풀 수 있거든요. 실제로 지금 수현의 행동과 비슷한 부분도 있구요. 5. 울프신사12 : 대학! 수능을 준비하고 계신군요. 장기 레이스인 만큼 중간중간에 많이 힘드시겠지만, 그래도 꾹 참고 견디셔서 부디 좋은 결과 있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 『 리리플(158회) 』 1. 쿠로시온 : 쿠로시온님은 근래 최고의 1등 코멘터로 임명 합니다. 짝짝짝! 2연속 1등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것 같네요. ;ㅇ; 2. Demodex :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Demodex님의 한결 같은 <잘 봤어요. 재미있네요.> 코멘트와 오타 지적이 보이지 않아 조금 서운 했는데 정말 간만에 뵈니 격하게 반갑네요. ㅜ.ㅠ 3. 악마신전 : 헐. 저, 저, 아니에요. 왜 그렇게 보신 겁니까…! ㅜ.ㅠ 4. 유운처럼 : 매우 공감 합니다. 군대는 건강하게 전역하는게 정말 최고인것 같아요. 5. 고장난선풍기 : 그렇죠? 정하연이 의외로 인기가 없어서 놀랐어요. 얘도 어떻게 보면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인데. ㅜ.ㅠ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60 / 0933 ---------------------------------------------- Process Of Growth “일단 귀걸이…” 는 유정이 가지는 게 낫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나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일행들은 내가 시크릿 클래스라는 것도 불에 관련된 특수한 권능을 갖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제 3의 눈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여기서 장비의 정보를 줄줄 말해주면 당연히 의문이 들 것이고, 그렇다고 그냥 멋대로 분배하는 모양새는 썩 좋지 않았다. “이.” 자에서 잠시 말을 끌다가, 나는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 때를 위해서 준비해온 게 있었기 때문이다. “…랑 다른 것들 모두 감정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함부로 사용 했다가 저주가 걸려 있으면 골치 아플 거에요.” “귀걸이는 대충 알 것 같아요. 바람 계열 마력이 남아 있는 걸로 보아 착용자의 민첩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다른 두 물품은….” “하연. 혹시 본인이 매고 있는 가방이 어떤 용도의 물품들을 넣어 놨는지 잊으신 건가요.”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던 그녀는 내 말을 듣자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그리고 등에 맨 가방을 빙글 앞으로 돌리더니, 곧 입을 벌리며 짧은 탄성을 질렀다. “아앗. 물품 감정 주문서를 깜빡 잊고 있었네요. 내 정신 좀 봐. 미리 말씀해주시지 그러셨어요.” “저도 깜빡 잊고 있었거든요.” 나는 솔직하게 대답 했다. 그 길로 그녀는 배낭을 열어 안을 뒤적거렸고, 이윽고 황토 빛 기록서 세 장을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탐험을 떠나기 전 혹시 몰라 필요하다 싶은 것들을 이것저것 소량씩 구비 했는데, 쓸 일이 생겨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연은 주문서를 바닥에 깔아 놓고 그 위로 이번에 새로 얻은 물품들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올려 두었다. 그리고 고운 입술 사이로 “구즈 어프레이즐(Goods Appraisal : 물품 감정).” 이라고 중얼거리는 순간, 주문서에서 새어 나온 빛들이 위에 있던 물품을 노랗게 물들이는걸 볼 수 있었다. 그 과정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0초 남짓한 시간 동안 물품을 물들이던 빛은 조금씩 희미해지는 것 같더니 이내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다시 기록서 안으로 빛을 감추었다. 그래도 나름 고급 주문서를 샀는데 언뜻 보니 글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는 게 돈 값을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곧바로 내게 주문서들을 건넸고, 나는 그것을 받아 들여 천천히 읽어 보았다. 제 3의 눈 만큼 상세하게 적혀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비슷하게는 기록 되어 있었다. 잠시 동안 장비들과 일행을 가늠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처음 생각했던 대로 나누어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해서, 나는 제일 먼저 귀걸이를 집어 들며 기록을 소리 내어 읽었다. “바람의 귀걸이(Earring Of Wind). 바람의 정령이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고 합니다. 착용하면 바람의 힘을 얻을 수 있는데, 몸놀림을 한층 빠르게 움직일 수 있고 평소보다 더욱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습니다. 아까 사용자 정하연이 말한 대로 민첩에 영향을 주는데, 직접적인 능력치 보다는 순발력 쪽으로 보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말을 마치고 잠시 일행들을 둘러 보았다. 다들 나쁘지 않은 얼굴들 이었다. 특히 여성 사용자들의 눈동자는 은근히 기대감 같은 것을 품고 있었다. 확실히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물빛 귀걸이는 외양이 제법 아름다웠다. 확실히 현대에서나 홀 플레인 에서나 본인을 꾸미는걸 싫어하는 인간 또는 사용자들은 드물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유정. 이 귀걸이는 네가 쓰는 게 낫겠지.” “앗~싸!” 내 호명에 유정은 환호성을 지르며 재빨리 달려 들었다. 그녀의 돌진을 슬쩍 몸을 트는 것으로 가볍게 피해 주었고, 곧바로 허공 높이 그것을 던져 주었다. 마치 물개가 조련사가 던져주는 물고기를 낚아 채는 것처럼 그녀는 위로 폴짝 뛰어 올라 귀걸이를 캐치해 내었다. 이렇게 하나는 처리 했고, 다음 타자는 증폭의 보석(Jewel Of Amplification) 이었다. “이 보석은 고대 시절 만들어진 마법사용 보조 장비 입니다. 체외로 각인해서 사용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보면 문신과 비슷한 부분이 있네요. 물론 탈착(脫着)은 언제든지 가능하다고 하니 너무 걱정 마시고요. 내부 마력 흐름의 속도를 가일층 빠르게 도와주고, 마력의 순도를 높여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법을 사용할 때 소비하는 마력도 감소 시켜주는 효과도 있습니다.” “정확히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 있는지는 나오지 않았나요?” “그렇게 까지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보석의 등급 자체가 고급이라고 하고 고대 시절에 만들어진 물품인 만큼 지금 나오는 양산형 장비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뛰어나겠죠.” 나는 그녀에게로 보석을 내밀며 대답해 주었다. 하연은 내가 보석을 내밀자 멀뚱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다가, 이내 표정을 흐트러트리며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저 달라고 그렇게 말한 건 아니에요.” “알아요. 그래도 이 보석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용자는 정하연 입니다. 어차피 주려고 마음 먹고 있었으니 부담 가지지 말아요.” 안 그래도 더블 캐스팅(Double Casting), 메모라이즈(Memorize), 질속(疾速) 영창을 사용할 수 있는 그녀였다. 여기에 증폭의 보석(Jewel Of Amplification)을 더한다면 위의 모든 능력을 한층 더 효율적으로 구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껏 하연은 동등한 수준의 마법사 사용자와 비교하면 두세 걸음 앞서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이번에 보석을 얻음으로써 그 차이를 다시 배로 늘린 셈 이었다. 더욱 빠르게 주문을 완성 하면서, 더욱 위력적인 마법을 펼칠 수 있다. 앞으로 어떤 모습들을 보여줄지 사뭇 기대감이 들었다. 하연은 조금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윽고 살며시 손을 뻗어 보석을 쥐었다. 나는 기록을 함께 넘겨주고는, 체외 각인에는 조금 시간이 걸리니 탐험 후 도시로 돌아가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 했다. 얼굴에는 미묘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는데, 그래도 입가에 가느다란 호선이 걸리고 보석을 품 안으로 소중히 집어 넣는 걸로 보아 퍽 만족한 듯 싶었다. 이제 남은 물품은 하나였다. 그리고 개인적인 평가로는 이번에 얻은 세 물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 이라고 평가 하고 있었다. 수호의 방패(Shield Of Defend)는 사제들이 주로 익히는 고위급 방어 주문 이었다. 다른 건 볼 필요도 없었다. 스스로 자아를 갖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눈 앞의 구슬은 엄청난 가치를 갖고 있다. 잠을 자는 도중 암살에 당하거나 불시의 기습에 목숨을 잃을 확률이 현저히 줄어 드는 것이다. <생존>에 초점을 맞추는 사용자들이 보면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들 물품 이었다. 그리고 귀속 장비인 만큼 잃어버릴 염려도 없었고. 기록에 적힌 것들을 간략히 설명해주자 대부분의 일행들이 모두 무지하게 갖고 싶다는 낯빛을 띠었다. 다들 이 장비의 주인은 누가 될까, 이번에는 내가 되지 않을까 초조한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심지어 앞선 두 개의 물품에 별반 관심을 갖지 않던 고연주 조차도 솔깃한 얼굴 이었다. 그러나 나는, 한마디 말을 덧붙임으로써 그들의 기대를 배신하고 말았다. “…그런데 사제 전용이라고 하네요. 그것도 귀속 물품이요.” “““…….””” 이 어색한 침묵. 안솔은 사제 전용이라는 말에 잠시 고개를 휘휘 둘러보고는, 이내 “와와.” 소리를 지르며 내게로 달려왔다. 그녀는 두 손의 새끼 손가락을 붙이고 “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 같은 태도를 보여 주었고, 나는 하얀 빛이 감도는 구슬을 쫙 펼친 손바닥 위로 올려 주었다. “귀속 시키는 방법은 간단해. 이 구슬에 네 마력을 주입하는 순간 곧바로 사용자로 등록이 된단다. 지금 바로 해보렴.” “네~에.” 안솔은 이 좋은 장비를 자신이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어지간히 기뻤는지 활짝 웃음꽃을 피우며 대답 했다. 그녀는 마치 강아지처럼 구슬 위에 손을 착 올렸고, 내 말대로 바로 마력을 끌어 올렸는지 구슬이 흰 빛을 내뿜으며 반응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우~웅! 곧이어 개량형(Improved Model) 수호의 방패(Shield Of Defend)에서 나지막한 진동음이 들리기 시작 했다. 진동 울음을 토해내던 녀석은 곧 허공으로 천천히 떠오르더니, 마치 탐색하는 것처럼 주변의 일행들 사이로 빙글빙글 돌았다. 한동안 우리들 사이를 거닐던(?) 녀석은 이내 안솔 앞에서 딱 멈추더니 쏜 살 같은 속도로 그녀의 품 안으로 파고 들었다. “어맛!” 다 좋았는데, 다만 그 파고든 위치가 상당히 애매 했다. 로브의 윗부분에 살짝 벌려진 속으로 파고 들었기 때문이다. 안솔은 깜짝 놀라 자신의 가슴을 추슬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슬은 연신 울음을 토해 내며 그녀의 속살로 들어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 새끼가!” 대한민국 그리고 홀 플레인의 시스터 콤플렉스 대표 주자 안현이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곧바로 거친 노호성을 지르고는 자신의 창을 꼬나 쥐며 달려 들었다. 아니 달려드는 건 백 번 양보해서 이해를 한다고 해도, 창까지 드는 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잘못하다 애 상처 입히면 어쩌려고. 그러나 이어진 결과는 내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음을 증명해 주었다. 성공을 목전에 두고 있던 구슬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파고들어가는 것을 멈추었다. 녀석은 “떨어져라! 이놈!” 하고 달려드는 안현을 보고는 빠르게 품 속에서 튀어 나왔다. 그리고 안현이 막 손을 내뻗으려는 순간, 구슬은 전신에서 새하얀 빛을 둥글게 퍼트렸다. 우우웅! 쿵! 쿠당탕! 쿠당! “으악!” 오호. 리플렉트(Reflect : 반사)라. 개량형이라고 하더니 확실히 몇 가지 기능을 더 추가한 모양이군. 안현은 구슬이 펼쳐낸 방어 마법에 부딪쳐 그대로 볼썽 사납게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구슬은 자신의 할 일을 했다는 듯 다시금 안솔의 품 안에 들어가 청명한 울음 소리를 토해 내며 비비적거렸다. 마치 칭찬해 달라는 어린 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안현은, 충격을 먹은 얼굴로 어버버 거리며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 혹시나 해서 둘러 봤지만, 방 안에는 따로 별다른 것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기록 몇 개와 서적 몇 권뿐. 애초에 이곳에 온 이유도 카오스 미믹(Chaos Mimic)을 잡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나는 별다른 미련 없이 탐색을 종료시킬 수 있었다.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굴러 다니는 구슬을 안솔은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계속해서 좇았다. 이유정은 자신의 귀에 걸은 귀걸이를 연신 만지작거렸고, 하연은 연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다가 나는 슬쩍 고연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부터 조용하게 있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내 시선에 닿은 그녀는 턱을 괸 채 평소와는 다른 얼굴로 깊이 고민에 잠겨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잠시 지켜 보고는,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탐험이 끝나고 뮬로 돌아가는 순간 나와 그녀와의 관계는 둘 중 하나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어쨌든 작은 해프닝을 뒤로 한 채 아무튼 그렇게 우리들은 장비 분배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분배 받지 못한 사용자가 분배 받은 사용자를 부러워하는 것은 인간의 감정상 어쩔 수 없는 일 이었다. 다들 겉으로는 축하 한다고 덕담은 해주었지만, 그 시선들 안에는 일말의 부러움이 섞여 있었다. 물론 아예 대놓고 아쉬움을 드러내는 사용자, 아니 거주민도 있었다. “씨잉. 나 또 아무것도 못 받았어. 분해.” “하하. 스, 스승님. 분할게 무에 있겠습니까. 같은 일행들이 받으면 캐러밴의 전력도 강화 되고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아직 상자 두 개가 더 남아 있으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으으. 넌 참 속 편해서 좋겠다. 솔직히 말해봐. 너도 좀 아쉽지?” “과한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 입니다. 지금 제 분수로는 스승님을 모시고 가르침을 받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 합니다. 리더와 스승님을 만난 것 만으로도 저는 너무나 행복하니까요.” 신상용은 넉살 좋게 웃으며 비비앙을 달래었다. 그의 말에 한숨을 폭폭 쉬던 그녀는, 이내 새초롬한 시선으로 신상용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에 신상용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잠시 동안 신상용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비비앙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입을 열었다. “미안. 왠지 너한테는 괴롭힘 당하기도 싫고, 때림을 당하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어. 아무튼 네 마음은 고맙게 받을게.” “아, 아니 그게 무슨….” 비비앙의 뜻 모를 대답에 신상용은 당황한 얼굴로 땀을 뻘뻘 흘렸다. “휴우. 정말 예쁜 것도 죄구나.” 그리고 머리를 살짝 쓸어 올리며 자리를 벗어 나는 비비앙을 보며, 나는 언제 한번 날을 잡아 단단히 교육을 시켜야겠다고 다짐 했다. ============================ 작품 후기 ============================ 『 1회 대 조아라 메모라이즈 능력 시험 』 만일 독자 본인이 현재 위의 캐러밴의 일원이라고 가정 했을 때, 개량형 수호의 방패를 얻은 안솔을 보며 어떤 심정을 느꼈을지를 서술 하시오.(자유 해답식, 코멘트가 찰질수록 가산점 有.) (모범 답안(157회, 닉네임 현오) : 어머어머 안솔점봐. 또 은근슬쩍 들러붙네. 역시 행운능력치는 무엇이든 은근슬쩍 해낼 수 있게하는 얌체 능력치인게 확실함. 조 쪼끄마난 계집이 얌체짓 하는거봐. 누구는 핏물 뒤집어 쓰고 이것저것 말해야 인정받는데 은근슬쩍 길맞춘걸로 인정받자나.) Quest 보상(찰진 코멘트 발견시.) : 4월 3일 1회 추가 연참. 『 리리플 』 1. 쿠로시온 : 1등 축하 드립니다. 3연속 이라니. 전무후무한 일 이군요. 최초로 3연속 1등을 거머 쥐셨습니다. 정말 대단 하십니다! :D 2. Astrain : Yes. 정답 입니다. 어떻게 아셨는지요. ㅜ.ㅠ 3. 하네뤼 : ㄲㄲ. 과연 어떤게 나올까요? 이미 저는 나올 것들을 대부분 정해 놨답니다. :) 4. 블라미 : 하하 감사 합니다. 원래 미믹으로 하려다가 너무 식상할것 같아서 살짝 변화를 줘 보았어요. 많은 분들이 재밌게 받아 들여주신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네요. :D 5. GradeRown : 1만번째 코멘트의 주인이 되셨음을 축하 드립니다. 에, 그것은 조금 힘들것 같습니다. ㅋㅋㅋㅋ. 6. 노루다람쥐 : 그, 그런가요? 캘록이는 장면을 귀엽다고 생각 하시다니. ㅋㅋㅋㅋ. 음, 지금 생각해 보니까 조금 귀엽게 느껴지기는 하네요. 다만 현실에는 없다는 사실. ㅜ.ㅠ 7. 311te : 수정 완료 했습니다. 감사 합니다. 8. 열정을 : 쿠폰 감사 합니다. (__) 아니에요. 제가 언제나 후기에 적듯, 코멘트와 질문은 언제나 환영 합니다. 저야말로 읽어 주셔서 감사 합니다! :) 9. 오피투럽19 : 에? 설마…. 마지막 말씀은 농담이라고 믿겠습니다. 정말 아니시죠? 10. 에이무 : 쿠폰 감사 합니다. (__) 앞으로 더욱 재밌는 내용으로 보답 할 수 있도록 노력 하고 정진 하겠습니다.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61 / 0933 ---------------------------------------------- Process Of Growth 점점 걷다 보니 복잡하게 얽힌 길들이 나오는 게 보였다. 나는 엉킨 실타래를 푸는 기분으로 천천히, 길을 하나하나 짚으며 나아갔다. 그렇게 가다 보니 캐러밴은 어느새 포인트 <5>를 지나 <6>에 해당하는 지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으이구. 안솔. 그만 좀 만지작 거려라. 그게 그렇게 좋니.” “헤헤. 좋은걸 어떡해요오. 언니도 귀걸이 좋아요?” “…응. 뭐 좋긴 하네. 몸도 조금 가벼워진 것 같기도 하고.” 뒤에서 이유정과 안솔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소리들이 들린다. 물품을 분배 받지 못한 일행들은 모두 조용히 따라 오고 있었는데, 나머지 둘은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직 하연만 분위기를 느끼고 조용히 입을 닫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딱히 제지하지는 않았다. 고대 홀 플레인이 융성 했던 시절의 장비를 두 개나 얻었다는 건 확실히 고무적인 일 이었다. 내가 연구한 것들에 따르면 고대 홀 플레인은 마법이 굉장히 발달한 대륙으로 알고 있었다. 단순히 <마법>만을 놓고 보면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훨씬 높은 수준에 있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지구인들의 현대 지식으로 인해 <마법 회로 응용>과 같은 <설정>으로 인정 받을만한 놀라운 마법들을 만들고, 발전 시키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첨가하는 마법들에 불과 했다. 기존의 베이스로 두는 마법들은 과거의 수준이 더 높다고 자신할 수 있다. 방금 전에 얻은 물품들만 봐도 그렇다. 현재도 마법 장비들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로 수준 있는 물품들을 만들기는 요원한 일 이었다. 그저 비슷한 효과를 내는 수준에서 그칠 뿐, 성능 면에서는 엄청난 격차를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사용자들이 유적 탐험에 목을 매는 것이다. 고대 홀 플레인의 장비를 얻을 가능성이 높은 장소가 바로 유적을 발굴하는 것 이었으니까. 아무튼 가장 땡 잡은 사용자는 바로 안솔이라고 볼 수 있었다. 사제 전용이라는 부분이 조금 아쉬웠지만, 그것은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 이었다. 제 3의 눈으로 읽은 설명 중 <고대 홀 플레인 시절, 근접전 또는 기습에 취약한 사제들을 위해 신전에서 고안 되어 만들어진 물품 입니다.> 이라는 메시지가 있었다. 애초에 사제들을 위해서 만들어서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구슬을 빼앗길 것을 대비해 최소한의 안전 장치를 걸어둔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얻은 만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데 문제는 없었다. 어느새 우리들은 포인트 <6>의 내부로 완전히 진입 했다. 포인트 <5> 이후 언데드들이 보이지 않고 있었지만, 방심은 금물 이었다. 지금부터는 앞서 출현 했던 언데드 들보다 훨씬 강력하고 위험한 언데드들이 출몰할 것이다. 운이 좋지 않다면 푸른 산맥 초입에서 만났던 리치를 또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5>를 떠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한창 감지를 돌리고 있던 도중, 갑자기 감지 외각 부분에서 이상한 기분이 느껴졌다. 마치 감지가 무언가에 먹히는 듯한 기분 이었다. 나는 쉬지 않고 걷던 걸음을 멈추고 일행들을 정지 시켰다. “감지에 걸리는 게 있나요?” 고연주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200미터 정도 앞에, 내 감지가 닿지 않는 지역이 있었다. 감지가 닿지 않는다는 소리는 결계나 비슷한 것들로 마력을 차단하는 파장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가까이 가서 제 3의 눈으로 확인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행군 속도를 줄이며, 나는 천천히 다시 앞으로 나아 가기 시작 했다. 일행들도 내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었는지 다들 나름대로 준비를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방을 경계하며 8분 가량을 걷자 저기 앞에서 둥그렇고 커다란 공터가 눈에 들어왔다. 들어가는 통로의 입구 덕분에 제한된 부분만 보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광장을 연상케 할 수 있을 정도의 너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광장의 중앙에는 시커먼 사기(邪氣)가 뭉게뭉게 내려 앉아 있었다. “몸서리 쳐질 정도의 탁한 기운 이군요.” “괜히 잘못 들어갔다가 아까 공터 처럼….” 일행들 또한 그 광경을 보며 다들 인상을 찌푸렸다. 그 기운이 어찌나 진한지 반사적으로 마력을 돋워 안력을 키웠음에도 불구하고 안을 뚫어다 보지 못할 정도였다. 나는 숨을 한번 들이키고는 곧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그리고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자연스레 침음성이 흘러 나왔다. 시커먼 연기 안에는, 엄청난 몬스터의 무리들이 떼지어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잠깐 숨을 들이켰지만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광장에 함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감지에는 걸리지 않지만 여러 탁한 기운들이 뭉쳐 있는 걸로 보아 쉽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들어가거나. 아니면 우회하거나.” 눈치 좋은 고연주가 곧바로 내 말을 받아 주었다. 그녀의 대답에 고개를 한번 주억이고는 나는 일행들을 향해 비스듬히 몸을 꺾었다. “사용자 고연주의 말대로 입니다. 이대로 정면 돌파해 함정을 분쇄할 것인지, 아니면 시간이 더 걸린다고 해도 왔던 길을 되돌아가 다른 길을 찾을 것인지. 혹시 좋은 의견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캐러밴에서는 아무런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몇몇은 서로 눈치를 살피고 있었고, 나머지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1회차 시절에서는 우회를 선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길로 온 이유는 내가 예측한 루트 계산에 따르면 끝으로 다다르는 길을 비약적으로 줄일 수 이기 때문 이었다. 우회해서 가면 어쩌면 몇 십 분이 더 걸릴지도 모르는데, 이 부분을 지나 멀리 보이는 통로를 통과할 수 있다면 포인트 <6>을 벗어나는데 걸리는 시간을 상당히 줄일 수 있었다. “…….”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다들 무언가 결심에 찬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개중에는 앞으로 나가고 싶다 또는 내 선택을 믿겠다는 시선이 다수 포함 되어 있었다. 결국 다시 최종 결정권은 나에게로 되돌아 왔다. 그리고 나는, 차분히 검을 뽑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 “후우, 후우. 드디어 다 해치운 건가?” “뭐, 뭐 이런 놈들이 다 있어….” “…그런것 같아요. 일반 스켈레톤 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 였어요.” 공터에서의 피 말리는 전투가 끝나고, 일행들은 다들 지친 얼굴로 바닥으로 주저 앉았다. 안솔이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 다니며 치료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차분히 숨을 골랐다. 역시나 포인트 <5> 이후로 난이도가 확연히 상승한 기분이 들었다. 정면 돌파를 선택한 우리들은 잠시 정비 시간을 가진 후 공터 안으로 진입 했다. 우리가 들어가자마자 공터에 있는 기운들은 급격히 반응하기 시작 했고, 이내 주변을 거세게 요동치며 중앙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 했다. 아니, 마치 어딘가로 흡수 되는듯한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내 예상대로 사기(邪氣) 안에는 언데드 무리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해골 기사, 해골 병사, 해골 전사등 해골들로만 이루어진 스켈레톤 군단들 이었다. 개인만 따로 놓고 보면 별 놈들이 아니었지만, 공터에 퍼져 있던 사기들을 흡수한 탓인지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물 밀듯 밀려오는 놈들을 향해 우리들은 철저히 방진을 유지 했다. 중간중간 몇 번 진이 무너질 뻔 했지만 그때마다 비비앙의 적절한 원호로 간신히 뚫리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선두에서 전방으로 들어오는 놈들을 상대로 웨이브(Wave)를 조율 했지만, 워낙 그 수가 많은 만큼 옆으로 빠지는 놈들도 더러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위기도 있었다. 안현과 이유정은 나름 선전 했지만 결국 조금 버티다가 해골 기사의 본 소드에 상처를 입었고, 그대로 마법사와 사제들이 위험에 처하기 직전 까지도 갔었다. 만약 그대로 무너졌다면 분명 사단이 났을 터였다. 그러나 그때, 키퍼였던 고연주가 본격적으로 나섬으로써 간신히 원거리 계열 사용자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 <10강>에 이른 사용자가 나서자 상황은 살짝 풀리기 시작 했고 애들 또한 사제의 치료를 받고 다시 악착 같이 일어섰다. 몇 번 위험한 상황이 있기는 해도 다들 나름 최선을 다한 전투였다. 물론 더 쉽게 풀어갈 수 있었지만 언제까지고 내가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애들이 상처를 입는데 더는 인색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해서, 나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이유정을 억지로 일으키고는 잔소리를 시작 했다. 그녀에게는 블러드 골렘과의 전투 이후부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네가 앞으로 계속 나가려고 하니까 틈이 벌어지는 거잖아. 방진인데 앞으로 나가서 좋을 게 뭐가 있어. 틈 벌어지고, 포위 되면 그만큼 너한테 들어오는 공격로가 넓어지는 거 알아 몰라.” “아이. 오빠 그게…. 해골 기사가 너무 버거워서 먼저 처치하고 싶어서 그랬어. 마침 틈이 보이길래….” “얼씨구. 주변에 있는 해골 병사들은 어떡하고? 뚫고 가기는커녕 가다가 칼침 맞고 죽기 딱 좋겠다. 사용자 신상용이 때마침 거스트 오브 윈드(Gust Of Wind)로 범위를 확보해 주지 않았으면 진작에 사단이 나도 한참 전에 났을 거다. 귀걸이를 착용하면 시야를 넓혀주면 뭐해. 몸은 여전히 따르지 않는데. 그렇게 한곳만 집중적으로 보면 옆이나 뒤에 눈이 달리지 않는 이상 분명히 뒤치기에 당한다고.” “으응…. 오빠 미안해. 다음부터 조심할게.” 유정이는 시무룩한 얼굴로 시선을 내리 깔았다. 일단 유정이는 이 정도로 마무리를 짓고, 나는 안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안현은 막 치료가 끝났는지 배를 슬슬 문지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몸을 흠칫 떨었다. 안 듣는 척 하고 있으면서도 내가 유정이를 혼내는 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혀를 한번 차고는 안현을 내비두기로 했다. 녀석 역시 뚫릴뻔한 건 맞지만, 최소한 자신의 역할에는 충실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저 버티기에는 본인의 실력이 부족 했을 뿐. 대충 그렇게 잔소리 순회 공연을 끝내자, 조용히 한쪽 구석에 기대어 있던 고연주가 내게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호호. 다 혼내셨나요?” “혼냈다기 보다는, 조언으로 정정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고연주는 내 말에 콧방귀를 한번 뀌었다. 그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단순한 해골형 몬스터들 이라고 보기에는 제법 수준이 있었어요. 아마도 그 기운들을 흡수한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제 생각도 비슷합니다. 재생이나 저주 같은 특별한 효과는 없는 것 같지만, 마치 언데드 몬스터로써의 클래스 자체가 상승한 것 같습니다.” “흠. 클래스 상승이라.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네요. 지금은 단순한 해골들이라 클래스가 높아져도 상대할 수 있지만, 죽음의 기사나 리치 또는 아까 상대 했던 블러드 골렘 같은 언데드가 기운을 흡수하면….” “쉽지는 않겠죠. 아무튼 이번에는 불가피하게 우리들이 들어가야 했지만 배회하는 놈들을 발견하면 한번 고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상대하기 버거운 놈들은 기습하거나 아니면 선제 공격으로 어느 정도 타격을 입히고 시작할 수는 있을 겁니다.” “곧 죽어도 전투는 하시겠다는 말씀 이군요. 참고로 말씀 드리면, 회피도 하나의 방법이에요.” 고연주는 쿡쿡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몸을 뒤돌아 보았다. 마법사 사용자들은 방금 전 전투에서 어마어마한 마력을 쏟아 부었는지 핏기가 가신 얼굴들로 명상을 하고 있었다. 비비앙은 그 정도 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방진을 유지하는데 나름 신경을 썼는지 미간을 살짝 좁힌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일행들에게 몸을 회복시킬 만큼의 정비 시간을 준 후, 손바닥을 몇 번 가볍게 두드렸다. 손을 부딪치는 소리에 반응 했는지, 조용히 명상에 빠져 있던 마법사 사용자들이 모두 눈을 슬며시 뜨는 게 보였다. <절규의 동굴>에서 얻을 건 대부분 얻은 이상, 빠르게 공략을 마무리 지을 필요가 있었다. * <절규의 동굴>로 들어온 이후 가장 힘든 전투를 치렀던 공터를 벗어났고, 우리들은 다시금 반대쪽으로 나 있던 통로로 들어갔다. 계속 해서 걷자 다시금 이리저리 갈라지는 갈림길들이 나왔는데, 그 길들을 보며 나는 내 생각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 우회하는 길을 선택 했다면 이 수많은 갈림길들 중 하나를 통해 이곳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그렇게 포인트 <6>을 벗어나고 포인트 <7>로 들어왔다고 여길 즈음 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들은 다시 한번 언데드 무리들과 충돌 했다. 이번에는 오직 해골 기사들로만 이루어진 열 마리의 무리 였는데, 고연주의 걱정처럼 모두 눈에 탁한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물론 이번에는 내가 150미터 즈음 남기고 미리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단단히 준비하고 전투를 시작 했다. 비비앙, 정하연, 신상용은 작정한 듯 엄청난 마법 공격을 쏟아 부었고 그 마법들에 얻어 맞은 놈들은 재빨리 유령마를 타고 공격해 들어왔다. 그러나 아까처럼 많은 숫자가 몰린 건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다르기 전에 무려 4마리를 먼저 쓰러뜨린 상태라 남은 여섯 마리를 상대하는 건 크게 힘들지 않았다. 나한테 몰려든 네 마리와 안현과 유정에게로 사이 좋게 하나씩 달려든 놈들은, 또 다시 사이 좋게 차가운 바닥에 몸을 누웠다. 그렇게 한번의 전투를 더 치르고서야 우리들은 비로소 <5>에서 발견했던 방과 비슷한 방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밀의 방 까지는 아니었지만 꽤나 구석진 곳에 있는 게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일 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곳에서도 성과는 있었다. 성과라고 해도 800 금화와 보석들, 그리고 팔찌 하나가 전부 였다. 보석들을 금화로 환산하면 대충 2000골드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으니 하나의 방에서 3000골드에 가깝게 성과를 올린 셈이다. 금화를 보는 애들의 반응은 시큰둥 했다. 아까 카오스 미믹(Chaos) 미믹 때 너무나 많은 금화를 봐서 그런지 별 감흥이 들지 않는 모양 이다. 당장 10골드가 없어서 벌벌 떠는 사용자들도 있는데, 그런 모습들을 보니 조금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것들도 싹싹 긁어 모아 모조리 배낭 안에 챙겼다. 그나마 관심을 보인 건 팔찌 였다. 물품 감정 주문서를 사용하자, 회복의 팔찌(Bracelet Of Recovery : 하루를 기점으로 본인에게 한번의 회복 마법 사용 가능.)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인밖에 사용을 하지 못하니 전투시 상처를 많이 입는 근접 계열들에게 주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팔찌의 주인을 두고 안현과 유정이를 사이에서 잠시 고민 했다. 그러나 레어 클래스를 얻고 탱커가 가능한 안현 보다는, 리치가 훨씬 짧고 부상 위험도가 높은 유정에게 주기로 했다. 물론 안현도 필요한 건 맞았지만 <생존>에 초점을 맞추면 아무래도 유정이가 갖는 게 더 나을것 같았다. 그렇게 간단히 장비를 분배한 후 나는 대략 남은 거리를 계산해 보았다. 이제 <절규의 동굴>도 거의 끝을 보이고 있었다. 이곳만 벗어나고 포인트 <8>, <9>를 거치기만 하면 <그 놈>이 있는 포인트 <10>에 금방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죄송합니다. 오늘 연참을 했어야 했는데, 일이 있어 결국 하지 못 했습니다. 오늘 조아라 지사에 다녀오느라 조금 바빴거든요. ㅜ.ㅠ 네, 오늘 조아라와 E-Book 계약을 했습니다. 직접 오신다는걸 회사를 한번 구경하고 싶어서 제가 가겠다고 했지요. :) 아, 출판 삭제는 없습니다. 조아라에서 하는 만큼 이북을 내도 연재는 동시에 합니다. 오늘 가서 5시간 정도 미팅을 가졌는데, 대단히 유익한 시간 이었습니다. 메모라이즈에 대해 이것저것 많은 조언을 들을 수 있었어요. 하하하.(이것저것 물어보실때는 솔직히 조금 쫄았습니다. 상상 이상으로 자세하게 알고 계셨어요. ㄷㄷ. 특히 복선들을 하나하나 짚어낼때는 엄청 놀랐습니다. ㅜ.ㅠ) 아무튼, 그 분들에게 많은걸 들었고 많은걸 느꼈습니다. 그 중에 전개 속도에 관한것도 있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 해서, <절규의 동굴>은 최대한 빨리 끝마치려고 합니다. 원래는 공터에서 시커먼 연기를 뒤집어 쓴 놈들과 한바탕 하는게 161회 내용 이었는데, 그냥 쭉쭉 빼기로 했습니다. 앞으로도 너무 느릿하게 가는것 보다는 필요한 부분은 빨리빨리 전개하는 습관을 들이는게 나을것 같네요. PS. 오늘 재밌는 코멘트 달아 주신분들, 정말 감사 합니다! ㅋㅋㅋㅋ. 『 리리플 』 1. 싸울아비헌터T : 오랜만에 뵙습니다! 1등 축하 드립니다! 싸울아비님의 귀환을 축하하며~. 부디 이번회도 재미있게 감상해 주세요. :) 2. GradeRown : 후후. 고, 공이 3개 라니요?! 저는 모르는 일 입니다!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3. MoRaHazaRd : 샤워 할때는 나체라! 그때는 아마 한 구석에 놓아 두고 천이나 보자기 같은 걸로 얌전히 가리지 않을까요? :) 4. juan : 하하 감사 합니다. 어떤 분은 미믹 한마리를 키우고 싶다고 하시기 까지 ㅋㅋㅋㅋ. 연참은 시간이 나면 하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과제다 뭐다 너무 바빠서요. 오늘도 업데이트 하고 또 과제 해야 해요…. ㅜ.ㅠ 5. 破天魔痕 : ! 비, 비비앙이 그럴리 없어요. 아, 생각해보니 그럴수도 있겠네요. 낄낄. 6. 아트락시아 : 음 그렇군요. 앞으로 전개를 조금 더 빠르게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자의 부분에 대해서는 독자분들 개인마다 받아들이시는게 다를 수 있습니다. 다만 후자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추후 시간이 나는대로 설정을 정리해서 올려 드리겠습니다.(아마 시험 이후가 될것 같네요. ㅜ.ㅠ) 아마 마법사와 사제의 차이, 그리고 각인, 귀속, 전용에 대해서 정리를 하면 될것 같아요. :) 7. 사람인생 : 하하. 그래서 유정이가 요즘 들어 장비를 싹쓸이 하고 있지요. 수학 여행중 이시군요! 부디 재미있게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D 8. 현오 : 코멘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문학 소설을 한편 보는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ㅎㄷㄷㄷ. 신상용은 담배 피지 않아요. :) 그런데 코멘트에 작성하신 내용 실제로 겪으신 경험담을 바탕으로 하신 건가요? 9. 罰酒 : 처음에는 넋을 잃고 보다가, 초반의 <형님>과 <지지 않겠어!> 라는 부분을 보고 흠칫 했습니다. 혹시…. 아니시죠? 아니실 거에요. 흠흠. 10. 백인티모시 : 그럼요~기억하고 말고요~. 항상 소중한 조언을 해주시던 분인데요. :) 오늘 귀환하시는 분들이 많네요! 독자분들의 귀환을 환영 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62 / 0933 ---------------------------------------------- Process Of Growth 다행이라고 말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8, 9> 포인트를 통과하는 동안 우리들은 그렇게 애를 먹지는 않았다. 비비앙은 그 동안 나와 애들과 어느 정도 다닌 만큼 내가 어떤 식으로 전투를 하는지 대강은 알고 있었다. 해서, 전투를 이끌 정도로 크게 활약하지는 않았고 어디까지나 선을 그어놓고 그 이상을 자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고연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연주는 애초에 내가 부탁한 키퍼(Keeper)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고, 어지간히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전면으로 나서지 않았다. 다만 간간이 그림자를 통해 애들을 도와주고는 있었는데, 그 정도 도와주는 건 충분히 눈을 감아줄 수 있었다. 아무튼 그런 만큼 그녀들이 처리해주지 <않는> 것들은 자연스레 나머지 일행들에게로 쏠릴 수 밖에 없었다. <8, 9> 포인트에서 애를 먹지 않았다는 뜻은 내가 염두에 두고 있던 언데드 죽음의 기사(Death Knight)와 리치(Lich)들이 떼지어 몰려 출현하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고연주의 말대로 사기(邪氣)를 흡수 했다면 조금 까다롭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는데 다행히 떼로 출현하는 몰상식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캐러밴은 <9> 포인트에 이르러 비로소 리치(Lich) 한 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뻥 뚫린 시커먼 동공에서 어두운 연기가 흘러 나오는 게 직감적으로 사기(邪氣)를 흡수한 놈임을 알 수 있었다. 혼자 있는 게 아니라 주위에 해골들이 대열을 이루고 있었는데, 고위 언데드를 만난 이상 지금껏 해왔던 전투 방식을 조금 변경할 수 밖에 없었다. 변경한 방법은 비비앙에게 전장 조율을 맡기고, 내가 따로 파고들어 리치(Lich)를 처리하는 방법 이었다. 애들에게는 절대로 맡길 수 없었고 다른 일행들에게 맡기자니 조금 불안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고연주는 키퍼(Keeper)를 맡아야 했고 임시 합류인 만큼 논외로 쳤다.) 그리고 나선다면 마법사와 가장 상성이 좋은 내가 나서는 게 가장 모양새가 맞는 일 이었다. 또한 곧 포인트 <10>에 다다를 예정 이었는데 이번에는 보스 레이드도 경험시킬 생각도 있었다. <그 놈>은 절대로 만만치 않은 놈인 만큼 목표를 눈 앞에 두고 일행들의 힘을 최대한 비축시킬 필요도 있었다. 검사(劍士)로서 원거리 계열 적을 만났을 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자신의 간격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적과의 거리를 줄이고 그 적을 살해할 수 있는 수단, 즉 힘이 있으면 된다. 다른 검사 사용자들한테는 간단하다는 말이 에러일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나는 위의 방법을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분명 사기(邪氣)를 흡수한 리치(Lich)는 강력 했다. 흡수하지 않은 놈들보다 배는 강력한 마법들을 구사하고, 마법을 연사 하는 속도도 훨씬 빨랐다. 그러나 마법사를 상대하는데 있어서 나는 말 그대로 전문가(Specialist) 그 이상의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리치(Lich)는 미친놈처럼 마법을 난사 했지만, 결국에는 내게 간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나는 틈을 놓치지 않고 날카롭게 놈의 전신을 훑었고, 결과는 볼 것도 없었다. 차마 유체화를 쓸 틈도 얻지 못한 듯 시체는 차가운 대지에 몸을 눕히고 말았다. 곧 리치(Lich)의 전신에 맑은 염화(炎火)가 피어 올랐고, 나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라이프 배슬을 찾을 시간이 없기도 했고 이대로 두었다가 뒤통수를 맞느니 화정(火正)을 이용해서라도 확실하게 처리하는 게 이득 이었기 때문이다. 포인트 <9>에서 리치(Lich)를 만나기는 했지만, 이상하게도 죽음의 기사(Death Knight)는 출현하지 않았다. 1회차 시절 우회로를 통과할 때는 심심치 않게 만났기 때문에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물론 이미 우회로를 통과하고 중앙 통로로 나왔지만 그래도 한번쯤은 나올 법도 한데, 직선으로 돌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놈들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다시 행군을 재개하던 도중 문득 짚이는 바가 있어 나는 뒤에서 자박자박 걷고 있는 안솔을 앞으로 불렀다. “솔아. 잠시 앞쪽으로 와보렴.” “우웅? 네!” 귀여운 목소리로 대답하고 종종종 달려 오는 안솔을 보자 입가에 저절로 호선이 그려지려고 했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역시나 안솔은 오자마자 내 옷깃을 붙잡았다. “너는 도대체 전생에 옷 못 잡아서 한 맺힌 귀신이 달라 붙었니 왜 이렇게 옷깃을 잡아 당겨. 당장 놓지 못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눈물을 그렁그렁 할 것 같아 꾹 참고 입을 열었다. “아까 공터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다른 좋은 의견 없냐고 물었었잖아. 기억하니?” “웅…. 아아~. 그 까만 연기들이랑 해골 인형들이 있었던 곳이요?” 까만 연기들과 해골 인형들이라. 안솔의 말을 들었는지 뒤에서 누군가 “풋.”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벌겋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간신히 진정시킨 후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래. 혹시 그때 앞으로 가고 싶었니, 아니면 우회하고 싶었니? 아. 물론 둘 모두 가고 싶지 않았겠지만 굳이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말이야.” 단박에 “둘 다 들어가고 싶지 않았어요.” 라고 말할 것 같아 보이던 안솔은 내가 선수를 침으로써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그녀는 그때의 감정을 되살리는 듯 살포시 눈을 감았고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나는 그 동안 주변 200미터 반경으로 감지를 돌리는 동시에 안솔의 청순한 얼굴로 볼록이 솟아오른 앙증맞은 코, 그리고 자그맣고 앵두 같은 입술을 감상 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 탐험을 마치고 돌아가면 애들한테 멀티 태스킹(MultiTasking)도 가르쳐야겠구나. 그렇게 행군을 지속하는 동안, 그녀의 삐쭉 내밀어져 있던 입술이 슬며시 열리는 게 보였다. “너무 애매해요오. 그렇지만 굳이 가라고 떠민다면 그 공터 안으로 들어갔을 것 같아요.” “안 떠밀었어. 아무튼 왜? 감이라는 건 알지만 대충 느꼈던 기분이라도 궁금해서 그래.” “그냥 돌아서 간다고 생각 하니까 마음속으로 굉장히 답답한 기분이 들었어요오.” 안솔은 또렷한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그리고 내 의문을 해결하는 데는 그 대답만으로도 충분 했다. 일단 내 옷깃을 꼭 쥐고 있는 안솔의 손을 억지로 떨어트리고 돌려 보낸 후에야 비로소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살아있는 몬스터는 배회한다. 한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경우가 없다. 언데드를 살아 있다고 규정할 수는 없지만, 원망이나 살육에 대한 감정은 갖고 있는 놈들 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포인트 <5> 이후로는 언데드들의 배치를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안배한 게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앙 통로로 통하는 공터에 해골 군단을 놔두고, 우회로에는 죽음의 기사(Death Knight)들을 배치한다. 그리고 간간이 보이는 리치들. 배치는 사람의 마음마다 다르기 때문에 내가 뭐라고 할 부분은 아니었다. 다만 시간이 흐르고 그 안배가 조금씩 풀리면서 언데드들이 배회 범위가 넓어진 게 아닐까. 그러면 거의 모든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 1회차 시절 우리 캐러밴보다 앞서 들어왔던 사용자들이 있었고, 그 사용자들이 포인트 <5> 이후를 뚫지 못했다는 것. <5>를 기준으로 잡으면 내 <절규의 동굴>에 대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다. 가장 확실하게 확인하는 방법은 우회로로 들어가 죽음의 기사(Death Knight)를 발견하는 방법 이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내 추측이 맞는지 그른지를 가늠할 수 있는 자신은 없다. 그래도 하나의 해답에 가까운 가설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동굴을 걷는 내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 <절규의 동굴>에서 최종 목표로 삼고 있는 <그 놈>은 당시 엄청난 악명을 떨쳤다. 당시 내가 담고 있던 캐러밴은 엄청나지는 않아도, 나름 한가락 실력은 갖고 있는 사용자들이 있었다. 어찌됐든 <절규의 동굴>을 거의 공략 직전까지 몰아 붙였으니까. 그러나 <그 놈>이 출현함으로써 우리들은 대장을 비롯한 여러 실력 있는 사용자들을 잃고 말았다. 살아 남은 인원으로 이루어진 캐러밴이 공중분해 되는 건 당연한 수순 이었다. 아무튼 그 길로 나를 비롯한 살아 남은 인원들은 곧바로 신전에 탐험 보고를 했고, 우리들의 보고를 들은 신전에서는 도시의 대표 클랜에 조사단을 요청 했다. 당시 요청을 받은 뮬의 대표 클랜은 우리들의 의견을 전혀 듣지 않았다. 분명 실력 있는 사용자를 다수 잃은 부분을 강조 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코웃음 뿐 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클랜 내부 서른 명 가량의 그저 그런 사용자들과 거주민을 대동해서 조사단을 만들고 파견 했다. 그리고 보냈던 인원의 7할을 잃고 말았다. 그 소식에 대경한 대표 클랜은 곧장 100여명에 이르는 거대한 조사단과 타 연합 클랜에 있던 유명한 사용자 여럿을 초빙 하기에 이르렀고, 그제서야 겨우 <그 놈>을 격퇴 했다는 보고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때 북 대륙은 마음이 맞는 클랜들끼리 삼삼오오 분열돼 있었는데, 반목하는 클랜 쪽에서 고작 소도시 던전 하나로 쩔쩔 맨다고 비웃음을 날려온 사건도 똑똑히 기억한다. 하지만 그 정도로 <그 놈>을 무시할 수 없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이었다. 놈이 보였던 힘과 살육에 대한 집착은 그 당시 보통 사용자에 불과 했던 나에게 절절히 새겨져 있었다. 그런 만큼, 이 새겨져 있는 감정들을 떨치려면 이번에 놈을 잡는 건 나에게 있어 꼭 필요한 과정 이었다. 문득 놈의 모습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눈동자. 온 몸에 두른 칠흑 빛 갑옷. 그리고 전신에서 줄줄 흘리던 진득한 살기. 당시 뮬의 사용자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그 놈>의 정체는 바로…. “아코!” “잠시 정지.” 열심히 돌리고 있던 감지에 걸리는 게 있어 발걸음을 멈추자, 내 등에 약간의 충격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누군가 내 뒤를 바짝 따라오고 있었던 것 같았다. 천천히 몸을 뒤돌아보자 코를 슥슥 문지른 채 울상을 짓고 있는 비비앙이 보였다. 그녀는 내 담담한 얼굴 표정을 보자 열이 치밀어 오르는지 볼을 빵빵히 부풀렸다. “그, 그런 건 좀 빨리 말하라고!” “네가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던 게 아니라?” “으윽….” “행군을 하는 도중에는 경계를 해도 모자랄 판인데 딴 생각을 하고 있으면 안되지.” 내 말에 비비앙은 할 말이 없는 듯 눈을 슬쩍 내리깔았다. 그 와중에 “네가 항상 위험이 생기면 미리 말해주잖아.” 라고 입을 오물거렸지만, 방금 전 말을 하면서 내 속도 상당히 따끔거렸기 때문에 더는 말꼬리를 붙잡지 않았다. 그리고 정작 얘기할 것들은 따로 있었다. “근방 200미터에 걸리는 반응은 없습니다. 다만, 지금껏 느껴왔던 사기(邪氣)들 중 가장 강력하고 위험한 기운들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혹시 저와 비슷한 기운을 느끼는 사용자들이 있는지 궁금 합니다.” 일행들은 모두 멀뚱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차분히 그들을 응시하자, 이윽고 일행들의 시선은 반으로 갈렸다. 몇몇은 고연주로 향했고, 몇몇은 안솔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안솔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음으로써 대답을 대신 했다. 그녀가 고개를 젓는 의미가 “나는 애초에 이곳에 들어오기 싫었어요.” 라고 받아 들이는 것은 비단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곧 모든 시선은 고연주에게로 쏠렸고, 그녀는 애매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아직 딱 이거다 싶을 정도로 느껴지는 건 없어요. 그래도 사용자 김수현의 말을 듣고 보니 불쾌한 기운이 스물 스물 올라오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고개를 한두 번 주억이고 다시 몸을 돌렸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는 동안 어느새 포인트 <9>도 거의 지난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 <절규의 동굴>내 보스를 목전에 두고 있다는 소리였다. 속으로 무수한 기억들이 떠올랐지만, 이내 빠르게 가다듬고 다시금 행군을 재개 시켰다. 내 말에서 다들 묘한 기시감을 느꼈는지 다들 아무런 말도 없이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렇게 10여분 가량을 추가로 더 걷자, 저기 멀리서 눈동자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검은빛 문이 보이기 시작 했다. 거대한 문이 보이자 일행들 사이에서 약간의 소란이 느껴졌다. 확실히 단순한 방 이라고 보기에는 그 철문은 너무도 거대 했고 마치 심연 같은 어둠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제 3의 눈으로 그 문을 읽은 후에야 다른 일행들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느덧 내 몸은 조금씩 달아오르는 게 느껴진다. 몸 안에 잠들어 있던 화정(火正)이 문으로 다가설수록 저절로 깨어나 내 몸을 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되도록 화정(火正)의 힘을 빌리지 않을 셈 이었다. 일행들과 같이 레이드를 하기로 마음 먹었고, <10강>에 이른 사용자 고연주도 있었다. 쉽지 않은 전투가 되리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현재의 자신감이 오만으로 바뀌지 않도록 주의하며 나는 문과의 거리를 아주 약간 남겨두고 걸음을 멈췄다. 거의 6미터는 넘는 길이와 양 문을 합쳐 3미터는 되어 보이는 너비를 보자 이유정이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가 귓가로 들렸다. “음. 별다른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는데요.” 잠시 동안 문을 바라보고 있자 고연주가 앞으로 나서더니 칠흑의 문으로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문에 살짝 닿는 순간, 고연주는 낮은 신음성과 함께 기겁한 얼굴로 크게 팔을 뿌리쳤다. “흐읏!” “사용자 고연주! 괜찮습니까?” “저 문에 손대지 마요!” 고연주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치자 신상용은 흠칫하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문 상태로 문에 닿았던 손을 연신 주무르고 있었다. <그림자 여왕>이 저토록 격렬하게 반응하는걸 처음 보는지, 다른 사용자들은 모두 깜짝 놀란 얼굴로 그녀를 쳐다 보았다. 한동안 손을 주무르던 그녀는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이내 진저리를 치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흘러나온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달리 매우 많이 가라 앉아 있었다. “말도 안 돼. 이게 도대체 무슨 감정이죠? 고통, 원망, 살의, 독기, 분노, 슬픔, 좌절, 저주, 비통…. 세상의 모든 마이너스한 감정이 집약 되어 있는 것 같아요. 도대체 안에 무슨….” “그건 들어가보면 알겠죠.” 고연주의 말을 끊으며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고연주를 제외한 일행들은 모두 침을 삼키며 나를 주시 했다. 고연주 또한 긴가민가한 얼굴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과연 안에 있는 놈을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지 자신이 서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곧 나와 시선을 맞추고는, 이내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한두 번 끄덕였다. 이제부터는 그녀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해지기 때문에, 들어가기 전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가 필요 했다. 그대로 일행들에게 전투 준비를 지시하자 다들 긴장한 낯빛을 띄우고 각자 준비에 들어가기 시작 했다. 메모라이즈(Memorize)를 준비하는 하연을 보며 나 또한 천천히 검을 빼어 들었다. 이제는 마지막 관문인 <그 놈>만이 남은 상태였다. <그 놈>의 정체는 바로 1회차 시절 악몽(NightMare)이라 불리었던 둠 나이트(Doom Knight). 다른 말로 파멸의 기사 호렌스(Horrence)라고도 불리는 놈 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요즘들어 대단히 바쁘네요. 하하하. 하루가 30시간, 아닌 28시간 이었으면 좋겠습니다. 4시간만 더 있으면 한결 여유로울것 같은데 말이죠. 아마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 독자분들도 꽤 많으실것 같습니다. :) 아무튼 이제 <절규의 동굴>도 슬슬 끝이 보이는군요. 앞으로도 메모라이즈에 대한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 드립니다. (__) 『 리리플 』 1. 외로운솔로 : 1등 축하 드립니다! 쿠로시온님의 1등 행진을 끊으셨군요. :) 그럼 이번회도 부디 재미있게 감상해 주세요~. 2. 아클레오 : 하하. 1등 코멘트가 많이 치열해요. 저도 자정에 올리면 1등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_-a 3. gkgngh : 그렇게 하고는 싶은데요, 그러면 Page가 20 Page를 넘어버려요. 지금도 그런면이 없잖아 있지만 Page 낚시를 되도록 줄이고 싶어서 이러고 있어요. ㅜ.ㅠ 4. 라티인형 :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리고 소중한 조언 감사합니다. 하하. 다들 좋으신 분들이라 서로 유익한 이야기들을 많이 나누었습니다. 훨씬 업그레이드된 내용으로 이북을 출판하도록 하겠습니다. 5. 노루다람쥐 : 흐물흐물 변한 상태로 배낭 안에 쏙 넣어 놨답니다. :) 6. 산사나무 : 그렇죠? 둘이 잘 어울릴것 같죠? 하하하하하. 구슬까지 합치면 완전한 애기들의 모임이네요. :D 7. hohokoya1 : 하하. 감사 합니다. 이북으로 나올때 확 달라진 내용과 퀄리티로 보답 하도록 하겠습니다. (__) 8. lkpoiio : 쿠폰 감사 합니다. 군대 가시는 분들이 많으시군요. 부디 몸 건강히 다녀오세요! 9. 고장난선풍기 : 어우 아니에요~. 정말 열심히 일하고 계시더라구요. 심지어 자정에 올린 부분들까지 모조리 읽으셨던데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10. 라무데 : 그래도 안현한테는 안되요. 하하. 레어 클래스 가치가 너무도 커서…. 앞으로 나올 남은 상자 두개도 기대해 주세요!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63 / 0933 ---------------------------------------------- 악몽 끄릉, 끄르릉. 철문 중앙에 닿은 손으로 조금씩 힘을 주며 밀어내자, 굳게 닫혀 있던 문은 가칠한 소음을 울리며 서서히 열리기 시작 했다. 이윽고 활짝 열린 문 안으로 한 발자국 옮긴 순간 내부에 갇혀 있던 어둠이 마치 파도 치듯 흘러 나오는 게 보였다. 흘러 나온 어둠은 내 몸을 칭칭 휘감아 들었고 고연주가 느꼈던 감정들이 전신으로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 뒤에서 나를 부르는 미약한 목소리들이 들린다. 손을 들어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 주고는, 나는 차분히 눈을 감았다. 이미 문에 손을 닿게 한 상태서부터 무시무시한 사기(邪氣)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배는 될 듯한 어둠이 몸 안을 잠식해 들어오자, 나는 감탄하고 말았다. 사용자 고연주의 말대로 방 안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악의적인 감정을 몽땅 모아 논 것 같았다. 사기(邪氣)에 반응해 날뛰고 싶어하는 화정(火正)을 달래며 잠시 동안 가슴속에 들어오는 감정들을 음미 했다. 그 동안 무뎌졌던 내 마음이 마치 칼날을 갈듯 예리하게 변해가는 것 같았다. 꼭 1회차 시절의 나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한 감정들은 곧 가라앉기 시작 했고 나는 아쉬운 눈길로 눈 앞의 어둠을 바라 보았다. 어디 담을 수만 있다면 담아서라도 가져가고 싶었다. 가뜩이나 요즘 스스로 날카로움을 잃어가는 것 같았는데, 그럴 때마다 이 어둠을 받아 들이면 한층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 오빠. 괜찮아?” 그 순간 이유정의 걱정하는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몸을 돌려 그녀의 물음에 화답하려고 했지만, 앞쪽에서 어둠을 꿰뚫는 거센 파공음이 날아 들었기 때문에 차마 돌릴 수 없었다. 오자마자 바로 시작이라…. 1회차나 2회차나 여전한 놈 이로군.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얼른 검을 중단으로 들어 방어 했다. 파앙! 검면을 타고 둔중한 충격이 파고 들었다. 마치 바위와 정면으로 부딪힌 느낌이라고 할까. 충격에 정통으로 맞은 내 몸은 이내 허공으로 살짝 들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고, 나는 곧바로 자세를 가다듬으며 다시 두 발로 바닥을 디디었다. 그리고 멍한 얼굴로 있는 일행들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구경만 하고 있을 시간 없습니다. 이미 전투는 시작 되었습니다.” “참 성질 급한 놈 이네요.” 고연주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곧바로 방 내부로 진입 했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따라 일행들도 허둥지둥 들어오는걸 보며, 나는 눈동자에 마력을 돋워 전방을 주시 했다. “그르릉…. 그르르릉….” 어떻게 들으면 가래 끓는 소리 같기도 했고, 또는 야수가 울부짖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 소리에는 기이한 힘이 깃들어 있어, 온 몸에 소름이 올올이 돋는 기분이 들었다. 팔을 몇 번 문지르며 서너 발자국 더 앞으로 들어가자 비로소 놈의 형태가 흐릿하게나마 눈에 들어왔다. 대충 봐도 덩치는 2미터를 넘고 있었다. 머리로 추정 되는 것이 고개를 들자, 심연의 어둠 속 붉게 빛나는 두 불빛들이 보였다. 오직 어둠만이 존재하는 공간 안에 살의에 불타는 불빛은 아주 정확하게 우리들이 있는 방향을 직시하고 있었다. 파멸의 기사(Doom Knight) 호렌스(Horrence). 다른 말로는 악몽(NightMare). 말 그대로 파멸만을 위해 존재하는 어둠의 자식. 호렌스는 어떻게 보면 상급 마족 백작 벨페고르보다 윗선으로 볼 수 있는 놈 이었다. 물론 등급 자체는 벨페고르가 훨씬 더 높겠지만,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은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벨페고르가 당시 결계로 인해 본신의 힘을 절반도 끌어내지 못 했다면 호렌스는 지금 100%를 넘어서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 거기다 이번에는 화정(火正)을 꺼내지 않기로 한 이상 마냥 마음을 놓을 수만은 없었다. 『특수 능력 신검합일(Rank : EX)을 발동 합니다.』 『잠재 능력 백병전(Rank : A Plus)을 발동 합니다.』 『잠재 능력 심안(정)(Rank : A Plus)을 발동 합니다.』 허공에 떠오르는 메시지들을 끄자 방 안의 모든 어둠들이 나를 향해 창을 세우는 게 느껴졌다. 아릿할 정도의 살기들이 전신의 감각을 고르게 일깨운다. 애들도 놈의 살기를 느낀 듯 다들 겁 먹은 얼굴로 주춤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 놈만 잡으면 이제는 뮬에서 떠나야 한다. 이제는 더 이상 애들을 돌봐줄 수도, 배려해줄 수도 없다. 해서, 나는 확실하게 못을 박아두기 위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보스 몬스터를 레이드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특별히 일행들 전원에게 프리를 부여하도록 하겠습니다. 따로 오더는 없습니다. 그저 지금껏 해왔던 대로만 해주시면 됩니다.” 내 말이 끝나자 호렌스(Horrence)의 주위를 감싸던 어둠이 점점 더 구체화 되는걸 볼 수 있었다. 주변에 일렁이던 어둠이 하나로 뭉치고, 기사(Knight)라고 부를만한 장비들의 형체를 이루고 있었다. 이윽고 눈에 선명히 보일 정도로 기다란 검이 비죽이 솟아 오르는 걸로 호렌스(Horrence)도 본격적인 전투 준비를 마쳤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애들은 모두 불안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지금까지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왔기 때문에 수동적인 행동이 몸에 배어 있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버릇을 들일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나는 강한 목소리로 한번 더 입을 열었다. “안현, 안솔, 이유정.” “…….” “알고 있겠지만, 나는 이번 전투를 마지막으로 뮬에서 떠날 생각이다. 클랜을 만들고 다른 사용자를 받아들이면서 더욱 본격적으로 홀 플레인으로 발을 내딛겠지. 그렇게 되면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너희들을 기다려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 “…….” 애들은 묵묵히 내 말을 듣고만 있었다. 호렌스(Horrence)가 슬슬 움직일 기미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말을 이어야만 했다. “그런 만큼 이번 전투에서 나에게 보여줬으면 좋겠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 놈에게 상처를 줄 수 없어도 좋고, 너희들이 상처를 입어도 좋다. 최대한 날뛸 수 있을 만큼 날뛰어봐.” “……!” “이 동굴을 벗어난 이후, 앞으로도 <애들>로 불릴지, 아니면 <사용자> 안현, 안솔, 이유정으로 불릴지는 지금의 전투로 판단하마.” 비로소 애들의 눈에 무언가 열기가 어리는 게 보였지만, 더 이상 말을 주절거릴 시간은 없었다. 호렌스(Horrence)가 방을 울리는 울음을 토해내며 나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생각을 정리하고 내게로 오는 놈 에게 온 신경을 집중 시켰다. 그리고, 나 또한 검에 마력을 불어 넣으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놈의 주변에 일렁이는 어둠이 크게 일어서며 나를 압박해 들어온다. 횡으로 크게 검을 휘둘러 기운을 흩트렸으나, 흐트러진 어둠들은 이내 갈라진 줄기 그대로 일어서더니 다시금 나에게로 쏘아져 들어왔다. 그 줄기들이 내 몸을 감으려는 찰나, 나는 곧바로 몸을 숙여 피하고는 오른발을 박차 더욱 안으로 파고 들었다. 그 상태로 아래에서 위로 쓸어 올리듯 검을 베어 들어가자 놈이 들고 있던 어둠의 검이 곧바로 반응해 들어왔다. 카앙! 내 검에서는 불똥이, 놈의 어둠에서는 뭉클한 연기가 흘러 나왔다. 중간에서 맞부딪친 부분에서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무기들은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나, 멈췄던 움직임은 이내 서서히 다시 움직임을 되찾고 있었다. 끄기기기기기기깅. 마력을 담은 내 검은 이내 조금씩 안을 잘라 들어가기 시작 했다. 정확히 말하면, 내 권능이 호렌스(Horrence)의 어둠을 잘라내고 있었다. 이윽고 어둠을 절반 정도 잘라낸 순간, 놈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파도 같은 어둠을 내보내며 슬쩍 뒤로 물러섰다. 그때였다. “오라! 임프리손! 49군단을 지배하는 강철의 구속자여!” “───. 스트림 오브 아쿠아(Stream Of Aqua)!” “───. 체인 라이트닝(Chain Lightning)!” “보호(Protect)!” “───. 리버스(Reverse)! 증폭(Amplification)!” 마치 놈이 물러나기를 기다린 듯 사제와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치는 목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들렸다. 먼저 들어온 마법은 비비앙의 소환술 이었다. 육중해 보이는 묵빛 사슬들이 내 옆을 살짝 스치고 지나가더니 이내 호렌스의 사지를 꽁꽁 묶어버렸고, 그와 동시에 거대한 물줄기 하나가 놈의 몸을 적시는 게 보였다. 거의 시간차도 느끼지 못했을 만큼 완벽한 연계였다. 마법과 주문은 계속해서 연이어 들어오고 있었다. 지그재그로 뻗어 나가는 노란빛 줄기들이 호렌스(Horrence)의 몸에 직격 하는 순간, 타이밍 좋게 놈의 몸 주위로 반투명한 막이 펼쳐졌다. 그리고, 리버스(Reverse)로 보호(Protect) 성질을 앞 뒤로 바꾸고 체인 라이트닝(Chain Lightning)의 위력을 증폭하는 걸로 마법 연계의 대미를 장식 했다. 파자작! 파자자작! 와장창! “그아아아아아아아!” 연계가 들어간 마법의 위력은 대단히 강력 했다. 어찌나 강력 했는지, 안솔이 걸은 보호 주문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깨져나가고 말았다. 그 바람에 노란빛 몇 줄기들이 군데군데 흘러 나왔지만, 체인 라이트닝(Chain Lighting)은 몸을 흠뻑 적신 호렌스(Horrence)를 중점으로 쉴 새 없이 두들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빛들이 잦아들 즈음, 힘찬 기합성과 함께 양 옆으로 쏜살같이 달려드는 두 명의 인영을 볼 수 있었다. 한 명은 바닥에 오른발을 강하게 밟으며 공기를 찢어 가르는 창을 내질렀고, 다른 한 명은 훌쩍 뛰어 오르며 옆구리를 향해 단검을 교차 시켰다. 이윽고 그네들이 질러낸 무기들은 여과 없이 놈의 몸통을 관통해 들어갔다. 단단한 부분을 찌른 게 아니라, 마법 타격으로 움푹 들어간 부분을 노린 것 같았다. 대견한 생각은 뒤로 미루고 일단은 나 또한 이 틈을 놓치지 않을 필요가 있었다. 완벽하게 무력화된 녀석을 향해 나는 마치 야구 배트를 쥐듯 양 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리고, 앞에 잘 놓여진 커다란 공을 향해 힘차게 스윙 했다. 물론 아까 나를 몇 발자국 물러서게 만든 것에 대한 소소한 복수심도 담겨 있었다. 뻐엉! 검에 마력을 가득 담아 놈의 몸통을 시원하게 후려쳤다. 짜릿한 손맛이 검신을 타고 짜르르 전달되는 것 같았다. 내 검게 가격 당해 곡선을 그리며 붕 날아가는 호렌스(Horrence)가 보인다. 나는 이내 쿠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을 나뒹구는 녀석을 자세히 살폈다. 몸통 중앙과 옆 부분은 아예 뻥 뚫려 있었고, 온 몸에 이리저리 어둠이 흐트러진 게 나름대로 타격을 입은 건 분명 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아직도 놈의 몸에는 비비앙이 펼쳐낸 사슬들이 걸려 있다는 점 이었다. 비비앙은 기회를 잡은 만큼 확실히 끝내겠다는 심산인 것 같았다. 그대로 사슬을 들어 놈의 몸을 억지로 일으킨 그녀는, 세우자마자 곧바로 다시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다. 쿵! 쿵! 쿵! 한번, 두번, 세번…. 사슬들이 풀린 건 쉴새 없이 곤두박질 치던 놈의 몸이 한층 더 곤죽이 된 이후였다. 이로서, 첫 격돌은 우리들이 완전하게 기선을 제압 했다고 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좋은 출발에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다시 검을 들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현재 우리 일행들이 가진 전력에 대해 자신감이 생겼다. 방금 전의 첫 격돌은 나와 비비앙의 공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놈의 신경을 내게로 집중 시킴과 동시에 움직임을 제한 시켰고, 그 틈을 타 비비앙이 타이밍 좋게 사슬로 놈의 몸을 구속 했다. 아마 몇 초라도 주저 했으면 상황을 파악한 호렌스(Horrence)가 곧바로 떨쳐냈을 테지만, 서로 말을 맞춘 것처럼 틈을 주지 않고 연이어 들어오는 마법에 그대로 당해버리고 만 것이다. 이런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시크릿, 레어 클래스를 가진 한명의 사용자가 일백 명의 일반 사용자보다 낫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검을 들고 또 다시 전투를 준비하자, 애들은 이상한 얼굴로 나를 쳐다 보았다. “혀, 형. 끝난 거 아니에요?” “응? 끝나지 않았는데?” “하지만 저렇게….” 시선을 돌리던 안현은 눈 앞의 광경을 보고 안색을 딱딱히 굳혔다. 눈 앞에는 곤죽이 되어 있던 호렌스(Horrence)가 보였다. 그러나 어둠이 다시 솟구치고, 여기저기서 속속히 모여드는 게 다시금 형체를 갖추고 있었다. 어차피 이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놈의 재생은 무한하지 않다. 1회차 시절에는 십 수번을 쓰러뜨린 후에야 겨우 다시 재생하지 않았다고 하니 우리도 그와 비슷하게 쓰러트릴 각오는 해야 했다. 다만 한가지 고무적인 사실은 한 번 쓰러트릴 때마다 재생력이 조금씩 약해진다는 사실 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번 첫 격돌에 호렌스(Horrence)를 비교적 쉽게 쓰러트린대 큰 의의를 두는 것이다. 가장 재생력이 강한 상태를 단번에 꺾었으니까. 아무튼 입구에 있던 레이스 처럼 따로 부활 주문이 있는 것도 아니니 어쨌든 끝은 정해져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다시 무기를 드는 애들을 보며, 나는 태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음, 우리 주인공이 호렌스를 상대로 아주 선전하고 있군요. 다만 그 선전이 계속 이어질지는 두고봐야겠죠. 하하하. 뭐 그런데 엄밀하게 말씀 드리면 주인공이랑 호렌스 1:1로 붙여도 주인공이 이깁니다. 화정을 쓰지 않아도요. 그 말인즉슨, 1회차 시절 호렌스를 격퇴한 사용자들을 평균 중위급 ~ 중상위급 100명이라고 가정하면, 김수현은 그들과 붙어도 이길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리고 다르게 말하면 벨페고르 역시 100명의 사용자 한테 격퇴 당할 수 있겠죠. 폐허의 연구소에 있는 결계 안에서 라는 조건이 붙지만요. 하하하. :)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 나겠습니다. 여러분들 모두 재미있게 감상해 주세요! PS. 현재 설문 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독자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 드립니다. (__) 『 리리플 』 1. 破天魔痕 : 1등 축하 드립니다. 보니까 다른 소설들 대부분을 1등 하셨던데 혹시 비결이 뭔가요? 궁금해요! 2. 쿠로시온 : 으어어. 자고 싶습니다. ㅋㅋㅋㅋ. 요즘들어 하루하루 챗바퀴만 도는 기분 이에요. 뭔가 변화가 있어야 힘이 날텐데…. 3. gkgngh : 아하 그렇군요. 다음부토 <그 놈>은 지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4. awkawr : 그래도 호렌스가 그리 호락호락하게 쓰러지지는 않을거에요. 다음회를 보시면 그래도 유령무희낀 마이 정도는 될 겁니다. ㅋㅋㅋㅋ. 5. 오자아자아나 : 90초반이라. 음. 남은 14 포인트를 전부 박으면 86 포인트니까 차후 얻을 포인트롤 모두 투자하면 90은 넘길 수 있을것도 같네요. 6. 현오 : 하하. 고맙습니다. 그, 그런데 할짝할짝 이라니요. ㅜ.ㅠ 저느 남자 입니다. 남자를 핥으시면 어떡해요…. 혀, 현오님. 설마?! 7. lamis : 일단은 여건이 되는대로 적어 나갈 계획 입니다. 중간에 바쁜 일들이 생기면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대신, 코멘트나 공지는 꼭 해두도록 하겠습니다. :) 8. 백인티모시 : 해당 글의 원 흐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수정 완료 했습니다. 소중한 조언 감사 합니다. (__) 9. 타나투스 : 아마 다음회, 혹은 다다음회에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이번 챕터에서 아예 귀환 또는 귀환 직전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터라, 조금 빠르게 나갈 생각 입니다. 10. rkfmak : 쿠폰 감사 합니다. 연참은 시간이 되는대로 꼭 하도록 하겠습니다. ㅜ.ㅠ 11. 오피투럽19 : 오! 설마 그분을 말씀 하시는 건가요?! 두분의 사랑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간절히 기원하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잘 어울리실것 같아요! 하하하! 하하하하!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64 / 0933 ---------------------------------------------- 악몽 묘한 기분이 들었다. 1회차 시절, 호렌스(Horrence)를 물리치기에 앞서 근접 계열들을 수많은 피해를 입었다. 원거리 계열 사용자들이 타격을 입히는 동안 어떻게든 앞에서 잡고 있어야 했으니까. 오죽하면 2차 조사단을 꾸릴 때 1차에서 살아 돌아온 사용자들은 절대로 근접을 맡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연합 도시의 사용자들을 초빙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던 것 이다. 그 정도로, 악몽이라 불릴 정도로 호렌스(Horrence)는 악명이 높았는데 지금 내가 그 놈을 가장 선두에 서서 맡고 있었다. 놈의 어그로를 끄는 것 뿐만 아니라 차곡차곡 타격을 입히기 까지 하고 있었다. 검사(劍士)라면 누구나 갈망하는 딜러와 탱커의 동시 역할 수행. 나는 이 놈을 꽉 붙잡은 채 놓아주지 않고 있었고, 다른 사용자들은 신나게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후웅. 매서운 바람 소리가 들린다. 어둠을 흘리는 검은 내 머리를 쪼갤 듯 짓쳐 내려왔지만, 마력을 한 가득 불어 넣은 장검으로 가볍게 받아 쳐주었다. 흑검은 둔중한 소리를 내며 다시 퉁겨 나가버렸고, 그것을 보며 되려 빠르게 찔러 들어갔다. 놈 또한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뒤로 물러서며 대항하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이것은 1:1 전투가 아니었다. 주변의 어둠이 모여들어 내 검로를 밀어내는 순간, 다시 한번 위에서 빛이 번쩍였다. 이윽고 눈을 한번 깜빡이자 수많은 연계 마법들이 마치 소나기 내리듯 호렌스(Horrence)의 몸으로 쏘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더욱 자세히 보자 무려 여덟 발의 얼음의 창이 놈의 몸 안에 깊숙이 쑤셔 박히는 게 보였다. “브로큰(Broken)!” 하연의 맑은 목소리와 함께 얼음의 창들은 파편으로 나뉘어 어둠을 갈기갈기 찢어 발겼다. 가래 끓는 소리는 다시 한번 허공을 울렸고, 울부짖는 놈의 양 옆으로 안현과 이유정은 냉큼 달려들었다. 둘은 처음으로 전투의 흐름을 읽고 판단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매우 영악하게 행동하는 중 이었다. 전투의 흐름은 매우 단순하게 진행 되고 있었다. 내가 호렌스(Horrence)를 물러나게 하면 곧바로 원거리 사용자들의 강력한 원호가 들어온다. 그리고 그 마법 연계에 당해 놈이 무력화 되는 순간 곧바로 치고 들어가 데미지를 입히는 방법을 쓰고 있었다.(특히 유정이는 찌른 데만 계속해서 찌르는 아주 악독한 짓을 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타격을 주고 다시 훌쩍 빠지고, 내가 그 틈을 타 마무리를 짓는다. 정석적인 보스 레이드 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나와 비비앙이 있음으로써 성립 되는 효율적인 레이드 방식 이었다. 한 명은 창을, 다른 한 명은 단검을 실컷 쑤셔 박다가 이내 놈의 몸이 조금 꿈틀거리는 것 같자 곧바로 무기를 거두며 물러섰다. 나는 장검을 야구 배트처럼 고쳐 잡고는 다시 한번 시원하게 홈런을 날려 주었다. 육체와 영체가 혼합된 녀석인 만큼 베거나 찌르는 것 보다는 검면으로 충격을 넓게 퍼트리는 게 재생력을 깎는데 더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호렌스(Horrence)가 동그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녀석이 허공을 부유하던 도중, 이번에는 바닥에 깔린 어둠에서 시커먼 덤불이 솟아나더니 이내 비죽한 가시들이 튀어 나왔다. 몇 개는 아쉽게도 스치고 지나갔지만 일어난 가시들이 워낙 많은 탓에 호렌스(Horrence)는 순식간에 꼬치에 꽂힌 신세가 되고 말았다. “…….” 곧이어 가시가 다시 사그라 들더니 허공에서 걸레 조각이 하나 툭 떨어져 내렸다. 그 조각들은 흐트러진 어둠을 수습하고, 스스로 스물 스물 움직이면서 다시금 형체를 복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위로 수많은 그림자가 달려들더니, 어둠을 마구 헤집어 놓으면서 복구에 훼방을 놓기 시작 했다. 이쯤 되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쨌든 꾸역꾸역 복구는 계속 진행 되고 있었지만 속도는 확실히 느려져 있었다. 처음에는 제법 빠르게 붙었던 것들이 지금은 느릿하게 형체를 갖추는 게, 서서히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복구 광경을 제법 가까이서 보던 안현과 이유정은 질렸다는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도대체 이게 몇 번째야.” “몰라. 난 열 번 넘어갔을 때부터 세지 않았어.” 애들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힘겹게 형체를 갖춘 호렌스(Horrence)가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여기저기서 달라붙는 그림자들을 몸을 크게 흔들어 한번 털어내는 게 보였다. 놈은 더 이상 막무가내로 달려들지 않았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공격을 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조금 주춤거리며 붉은 눈빛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시선에 찢어 죽일듯한 분노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호렌스(Horrence)는 약하지 않다. 약하지 않은데 이렇게까지 몰리면 나라도 화가 날 것 같았다. 놈이 분노한 이유는 오롯이 나에게 있었다. 일단은 나를 넘어서야 자신을 귀찮게 하는 다른 사용자들을 처리할 수 있는데, 나를 넘기는커녕 오히려 밀리고 있는 와중 이었다. 그렇다고 무시하고 가려니 내가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나에게 등을 보이는 순간 그대로 다시 바닥에 몸을 눕힐 것은 자명한 일 이니까. 어린애 조롱이나 다름 없는 작금의 전투 상황에, 아마 지금쯤 사면초가에 빠진 기분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오오오오….” 호렌스(Horrence)는 허공을 향해 고개를 올려 길게 울부짖었다. 그러자 몸 주위에 두르고 있던 어둠을 마구잡이로 요동치는걸 볼 수 있었다. 흠. 슬슬 시작하는 건가. 나는 차분히 한두 걸음 물러서 놈을 가만히 응시 했다. 애들도 뭔가 불안함을 느꼈는지 내 옆으로 바싹 달라 붙었다. 곧 내 예상은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 했다. 붉게 빛나던 두 눈빛이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아니, 꺼진 게 아니었다. 색깔이 검게 바뀌었을 뿐, 여전히 놈의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놈의 몸을 두르고 있던 어둠 또한 더욱 가라 앉았고, 풍기는 분위기에 살의가 강해지는 게 피부가 한층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크아아아아아아아!> 이전의 목소리가 그저 울부짖음에 불과 했다면, 이번에는 방 안을 온통 뒤흔드는 거친 포효가 퍼져 나갔다. 그때 내 주변에 깔린 어둠 아래로 그림자 하나가 슬쩍 솟아 오르더니, 이내 잿빛 머리를 찰랑이며 나타났다. 나타난 인영은 내 어깨를 한번 톡 건드리고는 말을 걸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사용자 고연주 였다. “사용자 김수현.” “네.” “아무래도 마법 연계를 통한 원호는 당분간 힘들 것 같아요.” “흠.” 나는 잠시 침음성을 흘리며 눈 앞을 바라 보았다. 전방에는 어둠이 마치 파도처럼 물결치고 있었다. 호렌스(Horrnece)의 분노에 어둠이 호응하는 것이다. 그 변화를 보던 고연주도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 또한 몇몇 몬스터들이 죽음을 눈 앞에 두고 비정상적으로 강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고개를 돌리자 비비앙의 몸에 간신히 기대어 서 있는 하연의 모습이 보였다. 다른 사용자들은 비교적 여력이 남아 있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그 동안 많은 무리를 한 것 같았다. 일반 마법으로 호렌스(Horrence)에게 타격을 주기 힘들자 마법 연계라는 방법을 선택한 것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마법을 연계하는 방법은 마무리를 담당하는 사용자에게 대단히 큰 부담을 주기 때문에 한 명씩 돌아가면서 하는 게 정석 이었다. 그러나 하연은 마무리뿐만 아니라 조율과 타겟팅까지 담당한 것 같으니 열 번을 넘게 버틴 게 용하다고 할 수 있었다. 내가 돌아보자 그녀는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이내 다시 몸을 휘청거렸다. 나는 손을 들어 조금 쉬라는 신호를 보내주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고연주를 비롯한 애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프리로 맡겨둔다고 한 만큼, 일단은 지켜볼 생각 이었다. 그리고 정하연은 나와 비비앙 다음으로 공헌도가 높으니 이미 합격선을 넘은 지는 한참 오래 전 이었다. 내부의 변화를 마친 호렌스(Horrence)는 다시 나와의 거리를 서서히 줄이기 시작 했다. 나 또한 그에 호응해 앞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에 따라 고연주도, 애들도 사방으로 흩어지는 기척을 느꼈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마 정하연이 빠진 만큼 마법 원호는 큰 기대를 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생각이 있다면 신상용이나 안솔은 나머지 두 애들을 보조하는 방식으로 가겠지. “오라! 임프리손! 49군단을 지배하는 강철의 구속자여!” 그때 비비앙의 낭랑한 목소리과 들림과 동시에 수많은 사슬들이 한꺼번에 놈을 향해 쇄도했다. 지금은 타이밍이 별로 안 좋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마 비비앙 또한 놈의 변화를 감지하고 간을 볼 생각으로 날린 듯 싶었다. 그리고 그 순간. <크오오오오오오오!> 찰캉! 찰캉! 찰캉! 놈이 크게 포효함과 동시에 몸에 일렁이던 어둠에서 수십 줄기의 어둠들이 튀어 나와다. 몸을 감싸려던 사슬들은 튀어 나온 어둠과 하나씩 엮이더니, 이내 동시에 소멸하고 말았다. 누군지 모를 낮은 신음성이 들렸지만 나는 자세를 비스듬히 틀고 오른손에 든 검을 사선으로 겨누었다. 호렌스(Horrence)가 드디어 몸 안에 꽁꽁 숨겨 두었던 본신의 힘을 드러낸 만큼 나 또한 이번에는 진심으로 상대해줄 생각 이었다. 그렇게 마음 먹은 순간 화정(火正)의 힘에 대한 유혹이 강렬하게 들었다. 화정(火正)의 힘을 썼다면 이미 쓰러트려도 진작에 쓰러트렸을 것이다. 이렇게 열 번을 넘게 눕힐 필요도 없이 말이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고개를 흔들어 그 생각을 털어 버렸다. 더 이상 남용하지 않기로 한 만큼, 당분간은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최선을 다한다는 건 현재 내가 다룰 수 있는 능력선 안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거지, 감당할 수 없는 힘에 기대어 쉽게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리치(Lich)처럼 육체가 완전히 소멸한 놈을 상대로 잠깐 쓰는 것은 몰라도 호렌스(Horrence) 같은 보스 몬스터급을 불태우려면 그보다 몇 십 배나 되는 힘이 필요할 것이다. 미련을 떨치고 정신을 집중하자 사방이 고요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거리를 줄인 순간, 나는 궁신탄영(弓身彈影)의 수법으로 급작스럽게 앞으로 뻗어 나갔다. 내 몸이 앞으로 퉁기듯 달려들자 호렌스 또한 검을 앞으로 세우며 움직였다. 그렇게 서로의 검이 맞부딪치기 직전, 나는 사선으로 들었던 검을 이동시켜 흑검의 면에 닿게 만들었다. 서로의 검이 닿은 순간 육중한 힘이 내부로 밀고 들어왔고, 그대로 검을 슬쩍 비틀었다. 흘린다. 흑검은 내 귓불 아래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흘렸던 검세가 다시 나에게로 꺾어 들어오자, 나는 끝자락을 지나고 있던 검을 다시 한번 강하게 비틀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놈의 흑검 뿐만 아니라 오른팔 전체가 위로 치켜 올려지는걸 볼 수 있었다. 1회차 시절 최상위 사용자들과 비교해 근력이 부족했던 나는 항상 고민 했다. 만일 그들과 붙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까. 목숨을 내놓은 시행 착오와 수많은 연구 끝에, 나는 한가지 방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상대방의 힘을 이용하는 것 이었다. 나는 마력을 일으켜 몸 내부로 침투한 충격을 받아 들이고 조절하는 어빌리티를 갖고 있다. 이 원리는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 : 넉냥의 힘으로 천근을 다룬다.)을 보고 감을 얻어 발전 시킨 고유 어빌리티로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감당키 힘든 충격을 받았을 때 최대한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 익혔었는데, 그것을 유능제강(柔能制剛 :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의 묘리와 함께 검술에 접목시킨 것이다. 흑검이 위로 치솟아 오르자 놈의 왼쪽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그리고 나는 그곳을 향해 주저 없이 검을 찔러 들어갔다. 푸욱, 소리를 내며 내 검은 깊숙하게 박혔고, 그에 멈추지 않고 오른발을 들어 강하게 놈의 몸통을 가격했다. 퍼억! 강렬한 타격음이 들리며 놈이 허리가 꺾여 밀려나는 게 보였다. 그러나 놈은 뒤로 주르륵 밀려 나는 와중에도 얼른 흑검을 바닥에 박아 후진을 멈추었고 다시금 내게로 달려 들었다. 이제는 흑검 뿐만이 아니었다. 비비앙의 사슬을 막았던 것처럼, 놈의 주위를 감도는 어둠이 사납게 일어나며 내 목숨을 노리고 들어온다. 나는 놈이 점할 수 있는 검로를 하나하나 확인한 후, 빠르게 발을 놀렸다. 다시 한번 놈의 검을 흘림과 동시에 몸을 한 바퀴 빙글 돌리며 전진. 짓쳐 들어오던 어둠이 아슬아슬하게 복부를 훑고 지나갔지만 결국에 피해는 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때, 뒤통수로 찌릿한 살기가 느껴졌다. 나를 스치고 지나간 어둠들이 소멸이 아니라 그대로 U자로 꺾어 다시 나를 노리는 것 같았다. 이대로 앞으로 들어갈까 아니면 그대로 파고들까 고민이 들 찰나 내 귓가로 누군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스치듯 지나갔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오늘 연참이 조금 늦었습니다. 과제가 아침부터 도서관에 갔는데 하나 끝내다 보니 조금 시간이 걸렸습니다. 아직 두 개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나를 끝냈다는 사실은 정말로 고무적 입니다. ㅜ.ㅠ 오늘 연참은 조금 힘들것 같았는데 코멘트를 보니까 도저히 그럴 분위기가 아니라서(…….) 이제 또 자정 연재분 집필에 들어가야 겠네요. 여러분들 모두 즐거운 주말 보내고 계신가요?! :) PS. 설문 조사를 봤는데…. 50대 남성, 여성란에 표가 있더군요. 서, 설마 부모님…. ㅜ.ㅠ 『 리리플 』 1. 쿠로시온 : 1등 축하 드립니다! 음, 어쩌면 사람인생님 후로 처음으로 당분간 1등 코멘트를 지배할 분이 나올것 이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습니다. 근래 1등을 엄청나게 하고 계세요. 파이팅 입니다. 하하하. :) 2. 싸울아비헌터T : 오늘 자격증 시험은 잘 치르셨는지요. 비도 오고 날도 눅진눅진한데 왜 하필 이런날에 시험이. ㅜ.ㅠ 부디 좋은 결과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3. 오피투럽19 : 엣헴. 취, 취소 합니다. 고자만은 제발 참아 주세요. 4. 천겁혈신천무존 : 하하하. 탐험 도중 <아햏힣흫햏홓>을 하기에는 조금 그렇잖아요. ㅋㅋㅋㅋ. 조금만 참아 주셔요. :) 그런데 생각해보니 호렌스를 앞에 두고 그것을 하는것도 엄청 웃길것 같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 5. 황걸 : 쿠폰 감사 합니다. 부디 남은 카오스 미믹을 개봉할때를 기대해 주세요! 6. 輝雅 : 저는 지금 벌벌 떨고 있습니다. 눈치가 보여서 여쭈어 볼 수도 없고…. ㅜ.ㅠ 7. A_세드라핌_L + 괴물물리치자 : 화정은 장기적으로 보면 현재의 수현에게 독이 되는 힘 입니다. 그래서 이전 내용에 <남용>으로 표현 했습니다. 내용을 넣어 놨으니 이번회를 보신 후 이해가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 8. GradeRown : GradeRown님.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인것 같습니다. 지치지 않는 체력 이군요! 음. 앞으로 설정에 사제를 요녀로 넣어볼까요? ㅋㅋㅋㅋ. 농담 입니다. :) 9. 두낙 : 음 그렇군요. 소중한 조언 감사 합니다. 앞으로 일반 도시, 대도시로 나갈 예정 이오니 그때는 조금 격에 맞는 적들이 등장할 예정 입니다. 그러니 많은 기대 부탁 드립니다. (__) 10. 고장난선풍기 : 하하. 정답 입니다. 과연 애들이 호렌스와 전투 이후 수현에게 어떤 평가를 받을까요. 여전히 애들로 불릴지, 사용자로 불릴지 저도 사뭇 기대가 됩니다. 뭐 이미 결론은 정해둔 상태 입니다. ㅋㅁㅋ 11. 가한나 : 1명 생겼습니다. 여성분들이 보시면서 혹시 정신에 충격을 받지 않으셨는지 많은 걱정이 됩니다. 아무래도 남성향이 강한 소설이라…. 12. 사람인생 : 땍. 도배 하면 못써요. 둠 나이트 > 죽음의 기사 > > > > > 심연의 기사 순 입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65 / 0933 ---------------------------------------------- 악몽 “멈추지 말고, 계속 들어가요.” 이 나긋한 목소리의 소유자는 고연주임이 분명하다. 지금껏 키퍼를 하던 그녀가 드디어 나서기 시작 했다. 그녀라면 등을 믿고 맡길 수 있었다. 해서, 그녀의 말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에 더욱 가속을 붙였다. 그녀의 말이 들리고 3초도 채 지나지 않아 뒤통수를 쏘고 있던 찌릿한 살기들이 사라지는걸 느꼈다. 호렌스(Horrence)는 다시 어둠을 들어 내 검을 방어하는 자세를 잡았다. 내 검술의 기본은 선 방어에 바탕을 둔 검술 이었다. 그런 만큼 상대가 공격해 들어오지 않는 이상 힘을 역이용 하기는 요원한 일 이었지만, 지금의 나는 1회차 시절과는 다르게 94 포인트에 이르는 근력 능력치를 갖고 있었다. 유영(游泳)하듯 부드럽게 흘러가던 검은 이내 패도적인 기세로 변화하며 어둠을 감싸듯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놈은 황급히 검을 직각으로 내려치며 공격을 끊으려고 했지만, 그대로 살짝 한번 비틀어 주자 여지 없이 퉁겨나가고 말았다. 곧 어둠이 일어났으나 이미 조금의 틈은 생긴 상황 이었다. 그 틈 사이로 다시 한번 내 검이 놈의 가슴을 유린 했다. 강철로 만들어진 나무에 도끼질을 하는듯한 느낌이 검신을 타고 들어온다. 그러나 파멸의 기사(Doom Knight)는 물러서지 않았다. 왼손으로 자신의 가슴에 박힌 검을 꾹 잡더니, 오른손으로 어둠을 일렁이는 흑검을 마주 찔렀다. 나는 재빨리 검을 놓은 다음 땅을 박차 올라 허공을 향해 공중 제비를 돌았다. 그 순간 아래쪽에서 어둠을 가르며 반월을 그리는 은빛 실선이 보였고, 호렌스(Horrence)는 그것마저 감당할 자신이 없었는지 곧바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고연주는 집요 했다. 사방이 어둠 천지인 곳은 그녀의 그라운드나 다름없는 곳 이다. 뒷걸음질 치는 기사의 앞에 급작스럽게 솟아 오른 그녀는 이내 발을 들더니 내 검의 손잡이 부분을 강하게 후려쳤다. 타앙! 끄그긍! 절반쯤 박혀 있던 검은 고연주로 인해 손잡이만 남기고 완전히 파고 들었다. 놈은 거세게 비명을 지르며 분노의 흑검을 휘둘렀지만, 그림자 여왕은 상대방을 약 올리듯 곧바로 다시 어둠에 스며들었다. 이윽고 내가 바닥으로 착지하자, 그녀 또한 내 옆에서 수욱 솟아 오르더니 가슴에 박힌 검을 가리켰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손을 내밀며 허공섭물(虛空攝物)을 일으켰다. 곧 검은 저절로 쑥 빠지며 다시 내 손으로 얌전히 찾아 들었다. 왠지 호렌스(Horrence)에게 얼굴이 있다면, 지금쯤 물끄러미 내 검을 보고 있지 않을까. “어머. 되게 세게 찼는데 별로 타격을 입은 것 같지는 않은데요?” “데미지는 있습니다. 그래도 정신적 충격이 더 클 것 같기는 해요.” “호호.” 나 하나만 상대하기도 버거울텐데 겨우 마법사들의 공격을 버텼나 싶더니 또 다시 방해꾼이 등장 했다. 그것도 나와 비슷한 수준의 사용자가. 고연주는 이윽고 “원호는 내가 해줄 테니 걱정 말고 놀아요.” 라는 말과 함께 다시금 사그라 들었고, 나는 천천히 거리를 줄이기 시작 했다. 다시금 맞붙은 나와 놈 사이로 흑검이 쉴 새 없이 후리고 베어 들어왔다. 그녀가 원호를 해준다고는 했지만, 놈이 각성을 한 이후로 타이밍이 영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하나는 흘리고 하나는 퉁기면서 계속해서 틈을 만들려고 노력 했다. 육체가 있는 이상 찌르고 베는 걸로도 타격은 입힐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영체도 공존한다는 것. 단순하게 보면 검술로는 단연 내가 놈을 압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놈의 몸에 전 방위적으로 터뜨릴 수 있는, 강력한 한 방을 꽂을 수 있는 틈 이었다. 그렇다면 아까와 같은 마법 연계로 놈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어둠이 미처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충격이 들어간, 즉 무력화 됐을 때를 노려야 했다. 그러나 정하연이 리타이어(Retire)됨으로써 마법 연계는 더 기대하기 힘들어 졌다. 아무리 공세를 흘림으로써 허점을 만들어내도 그 틈은 그저 한 번 찌르거나 벨 수 밖에 없을 정도였다. 조금 더 강하게 나가려고 하면 아까와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또한 사방으로 쉴 틈 없이 몰려드는 어둠을 쳐내면서 전진하자니 기껏 만들었던 타이밍이 짧아지고, 노리기 애매해지는 것도 사실 이었다. 조금 더 무리를 한다면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기껏 여기까지 정말 안전하게 레이드를 유지해 왔는데 괜한 행동으로 분위기를 흩트리고 싶지는 않았다. 기다리면 기회는 분명 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나는 꾸준하게 타격을 주며 데미지를 쌓아 나갔다. 잠시간 공세를 교환하던 도중, 이내 물 밀 듯 밀고 들어오는 어둠이 빗나가는 순간 나는 안으로 불쑥 파고 들었다. 옆으로 어둠의 검이 내 허리를 끊을 듯 매섭게 베어오자, 나는 검을 왼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검을 통해 가해져 오는 힘의 방향으로 몸을 크게 회전 시키며 반격 했다. 퍼엉! 반동을 이용한 회전력으로 검을 후려치자 놈의 몸체가 비스듬하게 기울어지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때 마침 놈의 몸이 기울어지는 방향 아래쪽 바닥에서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왈칵 솟아 올랐다. 그림자가 훑고 지나간 호렌스(Horrence)의 몸에는 은빛 실선이 기다란 잔영을 남겼다. 그림자의 정체는 안 봐도 고연주임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그녀 또한 지금이 노릴만하다고 여긴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고연주만이 아니었다. “오라! 퀘리타투스(KuiRitaTooth)! 제 14군단을 지배하는 절규의 치명자여! 쓸어버려!” 아까 임프리손이 별 힘을 못 쓰고 당한 게 상당히 분한 듯 평소라면 달지 않았던 사족을 달며 외치는 비비앙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지금껏 보였던 군단 중 가장 상위의 군단을 소환 했다. 10번대 군단은 폐허의 연구소에서 망자 떼거리를 상대할 때 이후로 별로 본 일이 없었는데, 여기서 다시 보니 나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사자 머리 모양을 한 마수는 엄청난 속도로 놈에게 달려 들더니, 이내 놈의 머리를 향해 입을 쩍 벌리면서 들어갔다. 그러나 몸이 기울어지고 있던 탓에 머리가 아닌 왼쪽 어깨를 크게 베어 물며 지나가고 말았다. 그리고 곧, 호렌스(Horrence)의 왼 팔이 아예 뜯겨 버린걸 볼 수 있었다. 물론 다시 어둠이 몰려 다시 팔이 재생 되겠지만 지금 상황으로 판단한다면 아주 좋은 공격 이었다. 고연주와 비비앙의 예기치 못한 공격에 놈의 몸은 더욱 크게 고꾸라졌고, 나는 드디어 때가 왔음을 느꼈다. 그것은 지금껏 애타게 기다려온 마무리의 신호였다. 이번에 아주 끝장을 낼 생각으로 검을 고쳐 잡고 그대로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핫!” “하앗!” 그러고 보니 나와 고연주만 아니라 다른 두 명도 있었구나. 안현과 유정 또한 그 동안 나와 놈의 공세 교환을 보며 들어갈 시기를 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더구나 고연주가 한번 더 타격을 주자 지금이 완벽한 기회라고 여겼는지 각각 무기를 치켜들고 쏜살같이 달려 들어갔다. 카타나와 창이 하얀 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각자 몸에 반투명한 쉴드(Shield)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사제와 마법사들의 원호를 받은 것 같았다. 안현은 먼저 찌를 심산 이었는지 앞으로 크게 몸을 퉁기며 선두로 들어 갔다. 녀석이 창이 먼저 몸통을 한번 찌르고 곧바로 빠지는 동안 조금 늦은 유정이 단검을 휘두르며 거리를 근접하게 줄일 때였다. 그 순간, 기울어 가던 놈의 몸에서 뜯긴 왼 팔을 중심으로 다시금 어둠이 큰 폭발을 일으켰다. 마치 분수가 쏟아지는 것처럼 어둠은 주변을 빈틈 없이 물들였고 곧이어 푸욱, 거리는 부드러운 살갗을 찢고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고작 눈 한번 깜빡이는 순간 이었다. 1초가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시간 이었는데, 어느새 유정의 몸이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복부에는 어둠이 비죽한 형태로 뚫고 올라와 있었다. “아악…. 쿨럭!”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그 사이 다시 몸을 추스른 놈은 서서히 자세를 바로 잡고는 그녀를 꿰뚫은 어둠을 보란 듯이 들어 올렸다. 마치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처럼, 유정의 허리가 더욱 숙여졌고 그에 따라 기다란 머리카락들이 아래로 흘러 내린다. “그르릉!” 호렌스(Horrence)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놈이 씩 웃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설마 애초부터 나를 노린 게 아니었던가. 나에게 당할걸 예상하고 다른 사용자를 노린 건가. 파멸의 기사(Doom Knight)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내 도발을 위해 다른 사용자를 일부러 노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왜냐하면 놈은 지금까지 자기가 당한걸 그대로 돌려 주겠다는 듯 나를 향해 검을 크게 털었기 때문이다. 쿠당탕, 털썩. 흑검에 꽂혀 있던 유정이 쑥 빠져 나와 허공을 날더니, 이내 바닥에 힘 없이 나뒹구는 게 보였다. 정확히 내 앞으로 내동댕이쳐진 유정은 이내 자신의 몸을 웅크리며 복부를 손으로 막았다. 그러나 그녀의 손에서 배어 나오는 핏물은 너무도 많아 이미 바닥을 조금씩 적시고 있었다. “아…파…. 쿨럭!” 그녀의 입술에서 고통에 젖은 목소리와 함께 선명한 혈액이 흘러 내렸다. 그리고 그녀가 웅크린 모습을 보는 순간, 지금 유정의 모습과 과거 한소영에 대한 기억이 오버랩(OverLap) 되고 말았다. 그녀를 들어 올린 채 광소(狂笑) 하던 벨페고르. 복부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우리들 앞에 던져진 이스탄텔 로우의 클랜 로드. 그리고 그녀의 입가로 흘러내리던 몇 가닥 핏줄기들. 그 순간. 심장이 빠르게 고동치는 게 느껴졌다. 머리 끝까지 피가 솟구치고, 눈 앞이 핑글 돌았다. 가슴으로 이글거리는 분노가 차오르고 코에서는 더운 숨이 뿜어져 나온다. 나는 그대로 한 쪽 무릎을 꿇고 유정을 받쳐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팔을 들고 팔찌를 보여주며 귓가에 “회복.” 이라고 조용히 속삭였다. 유정은 힘겹게 눈을 뜨더니 간신히 입을 열어 내 말을 따라 했다. 그러자, 그녀가 차고 있던 팔찌에서 잠깐 빛이 반짝이는걸 볼 수 있었다. 팔찌에 담겨 있는 회복이 기능을 발휘하고, 그녀의 몸 떨림이 조금은 잦아들었다. 그러나 애초에 상처가 너무 커 이 정도로 치료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나는 어느새 뒤로 빠져 있는 안현을 불러 그에게 유정을 맡겼다. “너랑 유정이는 이만 이탈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안솔에게 데려가서 유정이를 치료해줘.” “혀, 형.” “부탁한다.” 부탁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안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황급히 유정을 받아 들고는 아무 말도 없이 일행들을 향해 달리기 시작 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검을 비스듬히 세워 눈 앞의 호렌스(Horrence)를 바라 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용자 고연주.” “네.” 조용히 어둠에 숨어 있던 그녀가 내 부름에 단박에 나타났다. 나는 호렌스(Horrence)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 “원호는 더 이상 안 해주셔도 괜찮습니다.” “뭐라….” “뒤의 일행들을 부탁 합니다.” “…알겠어요.” 그녀의 말을 도중에 끊자,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물러났다. 그러나 반 박자 느리게 대답이 들어온 게 아무래도 내 말이 의도를 알아챈 것 같았다. 말 자체는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말투로 보면 앞으로 걸리적 거릴 것 같으니 뒤로 빠져 있으라는 소리나 다름 없었다. <10강>에 이른 사용자에게는 실례가 될 말이 분명 했지만, 도발을 해 왔으면 받아주는 게 인지상정(人之常情) 이었다. 그렇게 마음 먹은 나는 몸 안을 돌던 마력을 거세게 이끌기 시작 했다. 1회차 시절 내가 몸을 담았던 클랜 이스탄텔 로우(IstanTel Law)에는 환영의 검사(Phantasm Sword User)라 불리는 사용자가 한 명 있었다. 그것은 그만의 고유 어빌리티 였는데, 나랑은 그나마 친분이 있는 몇 안 되는 사용자 중 한 명 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서 이형환위(移形換位)를 전수 받을 수 있었다. 그때 그는, 전수해주면서 한가지 말을 더해 주었다. <김수현. 너니까 말해주는 건데, 내 마력 능력치는 70을 겨우 넘어가거든. 그런데 이 어빌리티를 쓰면 무리를 해도 열 번 이상은 사용하지 못해. 네 마력 능력치가 어느 정도 되는지는 모르지만, 나보다 높지 않다면 절대로 많이 사용하지 마. 내가 지금 이것을 너에게 전수해주는 이유는 그녀의 부탁도 있지만 네가 죽지 않기를 바래서 이기도 해. 그러니 명심해. 구명절초(救命絶招)로 사용하라는 거지 절대로 남용하라고 가르쳐주는 게 아니야.> 지금 내 마력 능력치는 96 포인트. 그렇다면 과연 호렌스(Horrence)를 상대로 몇 번을 사용할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들어 사늘한 눈동자로 앞의 놈을 응시 했다.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게 해준 대가는 철저히 갚아줄 생각 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휴우. 오늘도 간신히 자정 연재는 지켰습니다. 2월달에 여유롭게 하루에 2편씩 척척 연재하던 때가 그립네요. ㅜ.ㅠ 흠흠. 아무튼 이로써 절규의 동굴도 거의 끝났다고 보시면 됩니다. 오늘 내용 중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게 해준 대가는 철저히 갚아줄 생각 이었다.> 이 말에서 뭔가 위화감을 느끼신 분들은 아마 나름 눈치가 빠르신 분…이실 겁니다. :) 『 리리플 』 1. 기동대대 : 1등 축하 드립니다! 부디 이번회도 재미있게 감상해 주세요. :) 2. 날개접힌새 : 헐. 날접새님. ㅋㅋㅋㅋ. 코멘트 감사해요. :) 3. 센타우르스 : 네. 화정의 힘을 함부로 남용하면 체력 부담이 굉장히 심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은 남용하지 않기로 수현이 마음 먹었어요. 4. 춤추는왼손 : 에. 30대시면 그래도 아직 활발하실 연령이 아니신가요? ?ㅇ? 5. qklcnw : 아니요~. 원래는 정령 소환사를 만들었다가 반대 되는게 있으면 좋을것 같아서 만든 클래스 입니다. 이 자리를 비비앙이 차지하는건 계획에 없었지만 말이죠. :) 6. 천겁혈신천무존 : 그것은 천겁혈신천무존님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7. 아미슈 : 말씀만이라도 감사 합니다. ㅜ.ㅠ 그래도 과제는 제 힘으로 해야 의미가 있을것 같아요. :D 8. GradeRown : 오호. 이화접목! 한번 검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그리고 안솔을 요녀…. 음. 정말 괜찮을것 같은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 9. Blasphemy : 101 <- 100이 90 < - 89로 올라가는것보다 훨씬 상승폭이 크다고 보시면 됩니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에요. 10. Lizad : …………………………. :D 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66 / 0933 ---------------------------------------------- 악몽 이형환위(移形換位). 간단히 말하면 순간적으로 위치를 바꾸는 수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어빌리티(Ability)를 사용하면 원래 위치에서는 잔상(殘像)이 남지만, 이동 후 위치에서는 상대방의 시선이나 의식이 닿기 전에 나타날 수 있었다. 그리고 둔한 놈들은 그것이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남은 잔상에 현혹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물론 위의 말들은 어디까지나 개인별로 차이는 있는 것들 이었다. 상대방의 감각이 좋고 사용자보다 능력이 뛰어나다면 얼마든지 이형환위(移形換位)를 사용 했다는 걸 알아챌 수 있다. 그리고 능력만 되면 파훼(破毁)도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빌리티(Ability)가 높이 평가 받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 가능한 파훼(破毁)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가능> 하기만 할 뿐 실제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용자는 몇 없다고 볼 수 있었다. 애초에 이형환위(移形換位)를 감지할 수 있는 정도의 사용자들도 별로 없는데, 거기에 어느 위치에 나타날지 미리 예측하고 공격을 할 수 있는 사용자들을 따지면 <별로 없는데.>가 <거의 없는데.>로 바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형환위(移形換位)에 대응하는 방법은 대부분 방어로 시작하는 것들이 많다. 나야 어디까지나 구명절초(救命絶招)로 사용했다고 하지만, 나에게 이것을 가르쳐준 사용자는 자신보다 높은 수준의 사용자를 상대할 때 톡톡히 재미를 본 적이 많았다. 그리고 이번에 내가 사용할 기술이 바로 어빌리티(Ability) 이형환위(移形換位) 였다. 김유현과 한소영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 켠이 아릿해진다. 그 둘은 내 역린(逆鱗)이나 다름 없었다. 가슴은 이글거리는 분노로 불타오르고 있었지만, 머리를 통과해 눈동자로 쏟아져 나오는 살기(殺氣)는 사늘하게 변해 있었다. 차가운 눈동자로 호렌스(Horrence)를 쏘아보던 나는, 몸 안의 회로를 타고 있는 마력을 일순간 크게 끌어 올리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다. 그리고…. 스슷. 그 어떤 기척도 나지 않는다. 그저 바람이 흘러가는 희미한 소음만이 들릴 뿐.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 내 눈에는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한 채 마주 보고 있던 호렌스(Horrence)의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이 보이고 있다는 것. 나는 주저 없이 검으로 놈의 등판을 아주 세게 후려 갈겼다. 뻐엉! 공이 터지는 소리가 남과 동시에 놈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고, 등판에 머물던 어둠은 크게 요동 쳤다. 그와 동시에 놈이 주시하고 있던 원위치에 있던 잔상(殘像)도 질 나쁜 TV 화면처럼 비틀리더니, 이내 빠르게 사그라 들었다. “그르릉!” 놈은 황급히 자세를 잡으며 바로 몸을 뒤돌았지만, 나는 이미 놈의 사각(死角)으로 또 이동한 상태였다. 호렌스(Horrence)는 남아 있는 잔상(殘像)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그러나 흑검은 그저 허공을 갈랐을 뿐 나에게 조금의 타격도 오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감각 경험이 지속되어 나타나는 하나의 상에 불과 했으니까. 그리고 뒤를 점한 나는 빈틈투성이들을 향해 있는 힘껏 검을 내려 그었다. 툭. 소리가 나며 파멸의 기사(Doom Knight)는 오른팔을 떨구고 말았다. 내 일수에 깔끔하게 잘린 단면이 보인다. 곧바로 잘린 오른팔 단면의 주위로 어둠이 몰려 들었지만, 복구 속도는 예전만 못했다. 아직 왼 팔도 다 재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른팔로 어둠을 나누자 한층 속도가 느려진 것 같았다. 흡수한 어둠들이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는 반증 이었다. 이로서 호렌스(Horrence)는 두 팔을 잃었다. 어둠을 이용해 공격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면 복구에 힘을 쓰고 있는 어둠을 다시 삼등분 해야 한다. 놈은 이유정을 뚫은 대가로 나와 고연주 비비앙에게 한계에 몰릴 정도의 타격을 입은 것이다. “그르릉….” 호렌스(Horrence)는 이제서야 돌아가는 사태 파악을 했는지 주춤주춤 물러서고 있었다. 그러나 늦어도 너무 늦었다. 나는 단 두 수만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했고, 남은 것은 도발에 대한 응징 이었다. 호렌스(Horrence)는 곧이어 주변으로 크게 어둠을 일으켰다. 흘끗 양 팔을 보니 이제는 복구가 진행이 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멈춰서 있었다. 일단은 살고 보자는 심정으로 전 방위적으로 어둠을 두른 것 같았다. 나는 잔인한 미소를 흘리며 검과 왼손에 마력을 <최대치>로 끌어 올리고는 땅을 박차 앞으로 튀어 나갔다. 순간 어둠에서 이유정을 꿰뚫었던 비죽한 창이 솟아 올랐지만, 나는 가볍게 손을 내밀어 어둠을 잡고는, 그대로 힘껏 뜯어 버렸다. 마치 종잇장처럼 찢어 발겨지는 어둠의 안으로 검고 우묵하게 들어간 두 개의 눈동자가 보였다. 급박하게 몸을 빼는 놈을 향해, 회로를 따라 이형환위(移形換位)의 작용을 위한 마력을 일으켰다. 스슷, 스팟! 한 번. 스슷, 스팟! 두 번. 스슷, 스팟! 세 번. 스슷, 스팟! 네 번. 스슷, 스팟! 다섯 번. 스슷, 스팟! 여섯 번. 스슷, 스팟! 일곱 번. 스슷, 스팟! 여덟 번. 스슷, 스팟! 아홉 번. 스슷, 스팟! 열 번. 스슷…. 열 한번째로 검을 놀리려는 순간, 나는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차례대로 머리, 몸통, 다리, 목을 벤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부터는 어떤 반응도 일어나지 않아 그저 보이는 대로 휘두르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놈의 몸은 대단히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간신히 형체는 유지하고 있지만 마치 비 오는 날 덜 마른 페인트칠을 한 동상처럼 이리저리 어둠이 녹아 내리는 게 보였다.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래도 차분히 오른쪽 눈 구멍 안으로 검을 쑤셔 박아 주었다. 서서히, 놈의 몸이 허물어질 낌새가 보였다. 나는 억지로 손을 내밀어 비틀거리는 놈의 머리를 붙잡은 후, 무릎을 쳐 올리며 내 허벅지 쪽으로 놈의 머리를 끌어 당겼다. 곧이어 무릎에 둔한 충격이 옴과 동시에 무언가 움푹 함몰 되는 느낌이 무릎을 타고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그대로 놈을 바닥으로 똑같이 내동댕이쳐주고는 발로 짓밟으려는 순간 이었다. 탁! “사용자 김수현. 그만해요.” “응?” “그만하세요. 더 이상 반응하지 않잖아요.”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는 느낌에 고개를 돌리자, 언제 왔는지 고연주가 서 있었다. 나는 호렌스(Horrence)의 상태를 제 3의 눈으로 읽어 들였다. 그녀의 말대로 놈은 중간부터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몸에 두르고 있던 어둠들은 서서히 녹아 내리면서 자취를 감추고 있었고, 그에 따라 몸체 또한 반투명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아마 방금 전 크게 일으켰던 어둠의 장막(帳幕)이 마지막까지 아껴두었던 여력이었던 것 같다. 그것을 찢어 발기는 순간 회생 불가능한 타격을 받았을 것이고, 이형환위(移形換位)로 공격을 하던 도중 사멸(死滅)한 게 분명 했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흐르자 파멸의 기사(Doom Knight)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오직 주먹만한 검은빛 구체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나는 허리를 숙여 그것을 집어 들고는, 조용히 품 속으로 넣었다. 가슴으로 증오와 원망 같은 감정이 뭉클 흘러 들어오는 게 왠지 모르게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고연주는 그런 나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생각 외로 차분하네요?” “생각 외는 무슨 말씀 이신가요.” “왜 만화나 소설에서 보면 그런 거 있잖아요. 아끼던 동료가 당했을 때 주인공의 분노 폭발! 아, 폭주라고 해야 하나?” “폭주하지 않았는데요. 폭주한 것처럼 보였나요?” 내 말에 그림자 여왕은 단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한 번 말해보라는 듯 살짝 고개를 까닥이자, 그녀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냥 너무 무리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꼬맹이가 당하기 전까지는 조금 답답하긴 했어도 착실하고 안전하게 공략하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뭐라고 해야 하나. 갑자기 급해졌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렇군요.” 그녀의 말에 나는 연한 미소를 흘리고는 몸을 돌렸다. 마음속이 뜨끔해 더 이상 대답하기 싫었기 때문 이다. 그러나 고연주는 내 뒤를 따라오면서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다만 내 얼굴 표정을 읽었는지 살짝 다른 화제로 돌려 주었다. “아무튼 꼬맹이는 괜찮아요. 빠르게 회복을 사용 했고, 아가가 치료(Cure)를 거의 난사 수준으로 사용 하더라고요. 뭐, 충격의 여파는 조금 남겠지만요.” “극복해야죠. 앞으로 더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는데, 고작 그 정도 상처 갖고 징징대면 곤란해요.” “흐~응? 말은 그렇게 해도 본심은 그게 아닌 것 같은데요? 아까 표정 장난 아니던데. 원호는 더 이상 안 해주셔도 괜찮습니다. 이랬죠?” 고연주는 내 말을 따라 하면서 까르르 웃었다. 그녀는 지금 호렌스(Horrence)를 격퇴 했다는 사실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하긴 애초에 다른 일행들이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고 나와 그녀가 서로 전력을 발휘 했으면 유정이가 다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솔직히 1회차 시절의 기억으로 인해 문을 열 때만 해도 은근히 긴장감이 들었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확신할 수 있었다. 2회차의 나는 강하다는 것을. 내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고연주는 옆으로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은 아픈 것 같네요. 너무 마음 쓰지 마요. 대장이 캐러밴의 일원을 아끼는 것은 흠 잡을 일이 아니에요.” 그 말에 나는 고연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지금껏 장난스러웠던 눈빛과는 달리 조용히 가라 앉은 잿빛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는 무언가 탐색하려는 듯한 기색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자, 결국 그녀는 먼저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흐르는 동안,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분노는 했다. 그러나 내가 분노를 한 이유가 이유정이 호렌스(Horrence)에게 당해서 그런지, 아니면 그녀에게서 한소영의 모습이 오버랩(OverLap)되서 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였다. 아니, 실은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이 고연주의 눈빛과 연결 되려는 찰나. “형!” “오라버니!” “김수현!” 전방에서 일행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나는 일단 방금 전 고연주의 눈빛에 대해서는 생각을 접고, 가볍게 손을 들어올려 화답해 주었다. * “유정아. 몸은 좀 어떠니?” “으응…. 이제 괜찮아 오빠. 으읏!” “아직 조금 남은 것 같구나.” “그거야 오빠가 세게 누르니까 그렇잖아…. 근데 오빠 손 좀….” 유정이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웅얼거리자, 나는 한숨을 쉬며 그녀의 배에 대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 보이는 상처들은 완벽하게 치료 했다. 이리저리 뒹구는 물약을 몇 병을 보아하니 과도한 치료를 한 것 같았다. 그러나 몸 내부의 마력이 크게 놀란 상태라 당분간 안정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야. 근데 너 배꼽 의외로 예쁘다.” “안현. 입 닥쳐. 너 그거 성희롱적 발언이라는 거 알아?” “시발. 형은 아예 대놓고 만졌는데 아무 말도 안하고, 나한테만 이러기냐? 너 지큼 사람 차뵬해?” “흥. 오빠가 너처럼 변태 같은 줄 알아? 그리고 그런 말투로 말 하지 마. 듣기 괴로워.” 안현은 평소와는 달리 되도 않는 개그를 하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이유정 또한 그것이 안현 나름의 위로라는 것을 눈치 챘는지, 가볍게 콧바람만 뀌며 고개를 돌렸다. 그 때, 뒤로 누군가 다가왔고 이내 옆으로 서 내게 말을 걸었다. “수현. 미안해요. 제가 중간에 리 타이어(Retire) 되는 바람에….” 내게 말을 건 사용자는 바로 정하연 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핏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창백 했지만, 그래도 두 다리로 서 있는걸 보니 한결 나아진 모양이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를 향해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대답 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 누구의 잘못이라고 볼 수 없어요. 오히려 보스 몬스터를 상대로 이렇게 까지 선전해 준 일행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내 말에 일행들의 안색이 조금 밝아지는 게 보였다. 다만, 고연주는 한 쪽에서 팔짱을 낀 채 조용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은 아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절규의 동굴> 공략이 완료된 만큼 그녀의 처리 여부를 결정할 때가 성큼 다가왔으니 미묘한 분위기 변화는 그냥 그러려니 넘기기로 했다. 어차피 10일 후에 매듭 지어질 일들 이었으니까. 고연주가 그 동안 나와 일행들을 보며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품 안에 넣은 구슬을 꺼내어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파멸의 기사(Doom Knight)의 중추를 담당하던 마정석. 물론 아직 동굴을 배회하는 언데드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로서 절규의 동굴에서 빼먹을 건 다 빼 먹었고, 어느 정도 공략을 달성 했다고 봐도 무방 했다. 모두들 마정석에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나는 힘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시간 부로 <절규의 동굴> 탐험의 완료를 선언 합니다. 그 동안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지만 아직 완전하게 끝난 것은 아닌 만큼 모두 긴장을 풀지는 말아 주세요. 그럼 약간의 정비 시간을 가진 후에 바로 귀환 길에 오르도록 하겠습니다.” 내 선언에 대부분의 일행들을 맑은 탄성을 지르며 호응해 주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환호하는 일행들을 보는 고연주의 눈이 살짝 호선을 그리는걸 볼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드디어 <절규의 동굴> 챕터가 완료 되었습니다. 음. 이제는 수현네 일행들이 뮬로 돌아가는 여정을 적어야 겠군요. 예를 들어 수현이 한 걸음을 옮겼다. 일행들도 한 걸음 뒤따라 왔다. 잠시 주변을 살피던 수현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럽게 감지를 돌렸다. 이런 식으로요. 그리고 산맥을 다시 나오고, 하루하루의 여정을 아주 세세하게 말이죠. 음음. 50회 정도 연재하면 뮬로 돌아갈 수 있을것 같습니다! 는 뻥 입니다. 네. 자. 독자님들. 손에 드신 돌맹이는 잠시 내려 놓아 주십시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저 오늘 밥을 사준다는 친구가 있었는데 연참 때문에 못나가서 이러는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네, 네. 일단 진정해 주세요. :D(퍽퍽! 끄아악!) ㅜ.ㅠ 다음회에는 뮬로 돌아간 일행들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흑흑. PS. 과연 수현이 분노한 이유가 유정이 다쳐서 일까요, 한소영의 모습이 오버랩 되어서 일까요? 독자분들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 PS2. 설문조사좀 참여해 주세요! 1천명의 독자님들이 참여해 주실줄 알았는데…. ㅜ.ㅠ 부탁 드릴게요. :) 『 리리플 』 1. 천겁혈신천무존 : 오호. 1등을 하셨군요? 축하 드립니다! 어 그런데 수현이가 혹시 저를 먹을 수 있나요? 하하하. 감히 제가 만든 김수현 캐릭터가 작가한테 덤빌 수 있을까요! 2. 카이혼 : 보자. 여기 연참을 바치겠습니다. 그러니 그만 노여움을 푸시지요. 험험. 3. ads123 :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번 회를 보시고 조금이라도 와 닿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표현하는게 조금 애매했네요. ㅜ.ㅠ 4. 사람인생 : 이번에 수현이 <혼신>의 힘을 다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화정을 꺼내지 않았으니까요. 다만 본 실력의 일부를 드러냈을 뿐이죠. 이형환위를 기본기로 치부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번회에 있는 설명을 보시면 조금 이해가 가실것 같습니다. 5. 현오 : 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코멘트는 정말 다른 분들에게도 보여 드리고 싶네요. 세상에 <우헤헿헤>라니 ㅋㅋㅋㅋ. 아 이런 코멘트 완전 제 코드랑 맞아요. 보면서 계속 웃게 되거든요. ㅋㅋㅋㅋㅋㅋㅋㅋ. 6. 블라미 : 크아아아아! 수현이 울부 짖었다! 호렌스가 사망했다! 7. 난니가좋아 : 음…. 하하. 그것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뜨끔 거립니다. ㅜ.ㅠ 8. GradeRown : 아 ㅋㅋㅋㅋ. 예전에 바람의 나라 할때 건곤대나이 떠올렸다가 끝 부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9. 고장난선풍기 : 네 그렇습니다! 이번회에서도 따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아직 여력이 남아 있는 상태 였습니다. :) 10. 흠흠;; : 항마력은 고유 능력으로는 생성 되지 않습니다. 특수 능력과 잠재 능력으로 생성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67 / 0933 ---------------------------------------------- 예상치 못한 만남 그렇게 우리들은 말 많고 탈 많았던 절규의 동굴 공략을 완료할 수 있었다. 동굴 전체를 완벽하게 청소한 건 아니었지만, 보스 몬스터를 잡았고 끝까지 갔으니 할 만큼은 했다고 볼 수 있었다. 아직도 동굴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을 언데드들의 청소는 탐험 보고 후 꾸려질 조사단 또는 다른 사용자들이 할 일로 남겨 두기로 했다. 큰 일을 끝내기는 했지만, 아직 모든 탐험이 끝난 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귀환(歸還) 임무가 남아 있었다. 언데드들이 득실거리는 푸른 산맥을 넘는 것도 일 이었고 무엇보다 안전하게 뮬로 돌아가야 지금껏 캐러밴이 해놓은 것들에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기껏 고생해서 탐험을 마쳤는데, 목표를 달성 했다는 포만감으로 인한 방심으로 목숨을 잃은 사용자들도 더러 있었으니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귀환(歸還) 길에 오른 도중 가장 화제가 된 건 카오스 미믹(Chaos Mimic)에 대한 얘기들 이었다. 안솔의 말에 따르면 “아기 미믹에서 그렇게 큰 게 나왔으니 아빠 미믹이랑 엄마 미믹은 분명 더 큰걸 줄 거에요오.” 라고 말함으로써 일행들의 공감을 샀다. 도대체 뭐가 큰걸 주고, 일행들은 또 뭘 공감하는지 세세한 의미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앞 뒤 문맥상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 것도 같았기에 별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다만 지금 상자를 열자는 의견은 철저히 무시 했다.) 나는 가는 동안 수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고, 그것들을 정리 했다. 가장 궁금 했던 것은 부랑자 말살 계획의 결과와 황금 사자 클랜의 강철 산맥으로의 진군 이었다. 얼른 뮬로 돌아가서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알고 싶었고, 그래서 돌아가는 발걸음을 더욱 빨리 놀렸는지도 몰랐다. 다만 돌아가는 시기가 대단히 애매 했다. 내가 알고 있는 미래에 따르면 부랑자 말살 계획은 한참 전에 끝났겠지만, 강철 산맥으로의 진군은 우리들이 돌아간 후에도 결과가 나왔을지는 미지수였다. 나는 최대한 마음을 느긋하게 먹기로 했다. 마음 한 구석에 초조함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괜히 서두르다가 일을 그르치고 싶지는 않았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으니 차분히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게 정답일 것이다. 어차피 당장에 산재한 일들도 잔뜩 쌓여 있었다. <고대 연금술사 비비앙의 던전>과 <폐허의 연구소>에 대한 실적 증명서도 발급 받아야 했고, 이번에 새로 탐험한 <절규의 동굴> 탐험 보고서도 제출 해야만 한다. 이번 탐험으로 얻은 성과의 처리와 분배, 그리고 장비 업그레이드도 염두에 두어야 했으며 클랜 창설 신청 건도 남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일은 사용자 고연주의 처분에 관련한 일 이었다. 앞으로 처리할 일들을 생각하자 머리에 현기증이 돌고 그저 한 숨만이 나왔다. 그러나 앞서 마음 먹었던 것처럼 하나씩 차분하게 처리하다 보면 분명 좋은 방향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소도시 뮬로의 귀환(歸還) 길을 서둘렀다. * 멀리서 뮬의 북문이 언뜻언뜻 보이기 시작할 무렵에야 나를 비롯한 일행들은 안도의 숨을 뱉을 수 있었다. 잠시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니 어스름하게 깔린 물안개와 이슬을 머금은 풀잎들이 보였다. 사방은 고요 했고, 한 번씩 우리들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만이 간간이 귓가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절규의 동굴>에 도착하는데 10일이 걸렸고 탐험에도 1일이 걸렸다. 여기까지는 예상대로였지만, 우리들은 돌아오는데 하루를 더 지체하고 말았다. 최대한 서두르며 돌아온다고 했지만, 유정이에게 문제가 있었다. 호렌스(Horrence)에게 당한 상처의 여파가 남아 있어 조금만 속도를 높이면 대열에서 뒤처지기 일쑤였던 것이다. 솔직히 나도 처음에는 다른 생각에 빠져 전혀 모르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행군이 조금 버벅이는 느낌을 받기는 했는데, 하연이 살짝 귀띔을 해줌으로써 알아 차릴 수 있었다.(기특하게도 유정은 내게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어떻게든 꾹 참고 걷고 있었던 모양 이다.) 그렇다고 행군의 속도를 줄이지는 않았지만, 느긋하게 마음을 먹기로 한 만큼 중간중간 유정이를 배려하는 시간을 가졌다. 조금이라도 힘들어하는 기미가 보이면 잠깐이라도 휴식을 취해 주며 그녀를 독려해 주었다. 유정의 상태는 시간이 갈수록 괜찮아 졌고, 7일차 ~ 8일차에 이르러서 우리들은 행군과 휴식의 주기를 본래대로 맞출 수 있었다. 그리고 귀환(歸還) 10일차에 이른 날, 우리들은 밤샘 행군을 결정 했다. 뮬에 가까워진 만큼 큰 위험이 없다고 판단 했고, 밤샘 행군으로 인해 지체 되었던 귀환(歸還) 시간을 조금이나마 앞당길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들은 11일 만에 소도시 뮬의 귀환(歸還)에 성공 했다. 지금 우리들이 걷는 길들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수풀로 우거진 초원에서, 울퉁불퉁하지만 어느 정도 사람의 손을 탄 길들이 나오기 시작 했다. 그렇게 꾸준하게 걸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초라한 북문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총 걸린 시일을 계산하면 22일 만에 소도시 뮬로 돌아온 것이다. 3월 첫째 주가 지나지 않았을 때 뮬을 나섰으니, 지금 날짜는 거의 3월 말 이라고 볼 수 있었다. 서서히 북문이 다가오고 오롯하게 서 있는 경비병들을 보자 괜히 가슴이 뛰고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사용자 분들의 생환(生還)을 환영 합니다! 천사의 축복을….” 이윽고 북문에 다다르자 여전히 후줄근한 경비병 두 명이 우리들을 보며 힘차게 경례를 붙였다. 간단히 답해준 후 고개를 돌리자 각각 통일된 표정을 짓고 있는 일행들의 얼굴이 보였다. 여기서 여관 <조신한 숙녀>로 돌아가 수련을 하자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강한 호기심이 들었다. 물론 나만의 실 없는 생각 이었다. 북문 안으로 몸을 들어서자 조용한 거리가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지금 시간은 새벽일 터. 우리들처럼 불가피한 상황에 처해 있거나 미친놈들이 아니라면 굳이 꼭두새벽에 탐험을 나갈 사용자들은 없었다. “으아아. 드디어 돌아왔다.” “나 눈물 날 것 같아. 엉엉.” “와아. 와아.” 지금껏 겪었던 탐험 중 가장 힘든 탐험 이었던 만큼, 애들은 도시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서자마자 환호성을 질렀다. 비비앙은 연신 하품을 하며 입을 두드리고 있었고, 신상용은 졸린 눈으로 고개를 꾸벅이고 있었다. 하연 또한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가득해 보였다. 그리고 고연주는…. 그녀는 뮬에 들어선 순간 지금껏 보지 못했던 굉장히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담담히 그 시선을 받아 넘기자 그녀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나는 그 신호의 의미를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해서, 나는 얼른 여관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일행들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용자 정하연.” “네?” “다른 일행들의 인솔을 부탁 합니다. 먼저 <조신한 숙녀>의 여관으로 돌아가 주세요.” 머리를 귀 너머로 쓸어 넘기며 몸을 돌린 그녀는 내 말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일행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들 내가 갑자기 왜 그러는지 궁금한 얼굴을 지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잠깐 확인할 일이 있습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조금 쉬고 가시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급한 일이 아니라면….” “급한 일이니, 지금 처리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단호한 내 말에 하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근심 어린 시선이 나를 훑었지만, 나는 그녀만 알아볼 수 있도록 살짝 고개를 흔듦으로써 내 의지를 전달해 주었다. 내 신호를 본 하연은 이윽고 살짝 한숨을 쉬었다. “알겠어요. 혹시 우리들이 도울 일이 있으면….” “제가 도울 테니 걱정들 하지 말고 먼저 들어가 계세요.” “사, 사용자 고연주가요?” “그래요. <10강>의 명성이 필요한 일 이거든요.” 고연주가 말을 끊고 들어오자 하연이 생각에 잠기는 게 보였다. 솔직히 이런 새벽에 급한 일이 있다는 건 억지로 볼 수 있었지만, 정 찾아보면 아예 없는 일들도 아니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납득할 수 없겠지만 이미 내 계획을 일부 들음으로써 그와 관련한 일 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애초에 임시 합류인 만큼 고연주와 연관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한동안 나와 고연주를 번갈아 보던 그녀는 곧 고개를 주억였고, 내게만 보이는 방향으로 조그맣게 입을 오물거렸다. <조심하세요>라. 나는 그녀의 걱정에 연한 미소로 화답해 주었고, 내 답을 받은 그녀는 곧 졸려 하는 일행들을 이끌고 여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그네들의 모습이 뮬의 거리 너머로 서서히 사라지는 순간, 드디어 북문 앞에는 나와 고연주만이 남게 되었다. 잠시 동안 나를 보던 그녀는 이내 예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잠시 걸을까요? 물론 북문 밖으로요.” “나쁠 건 없습니다만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는 게 조금 그렇군요.”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그녀는 까르르 웃고는 내 팔을 살짝 잡으며 이끌었다. 그렇게 나와 고연주는 다시 북문을 나섰고 곧 일행들이 밟아온 길을 되짚으며 걷기 시작 했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이윽고 먼저 말문을 연 사용자는 고연주 였다. “길게 말하는 거 싫어해요?” “필요하면 상관 없지만, 빙빙 돌아가는 건 싫어 합니다.” “저도 그래요. 그러면 빙빙 돌리는 얘기는 하지 않고, 직구를 날리도록 하겠어요. 그런데 그래도 조금 길지 몰라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원하던 바 입니다. 경청 하도록 하지요.” <경청을 하겠다.>고 한 순간, 그녀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문득 어디선가 지금과 비슷한 상황을 겪은 것 같다고 느껴졌다. 김한별, 정하연…. 두 여성의 얼굴이 차례대로 떠올랐으나, 이내 고연주의 목소리에 순식간에 지워지고 말았다. “당신, 석연치 않은 점이 너무 많아요.” “흠.” 침음성을 흘리고 입을 열려고 했지만, 그녀는 손을 들어 내 말을 제지 했다. 나는 일단 그녀의 말을 계속 들어보기로 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능력만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물론 그것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지만 말 이에요. 하지만, 따지고 보면 저도 아직 5년차에 불과한 사용자인 만큼 전부 안다고 보기는 힘들겠죠. 그 아가처럼 특별한 능력이 있을 수도 있으니…. 뭐 좋아요. 홀 플레인에서 강하다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요. 누가 뭐라고 해도 그건 당신만의 능력이니까. 개인적인 호기심은 있지만, 파고들 자격은 없겠죠.” 확실히 노련한 사용자인 만큼 그녀가 말하는 것들이 하연과는 다르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외적인 능력에 대해서 저렇게 먼저 인정하고 들어가면, 다른 부분에 대해서 파고들 여지가 있다는 소리였다. 내 예상대로 고연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말을 이었다. “그때 3층 특실에서 당신은 그랬죠. 생존과 지구로의 귀환을 목표로 삼는다. 생존과 귀환. 홀 플레인에 있는 사용자들 이라면 누구든 한번쯤은 생각해 봤을 것들이에요. 그리고 이어진 당신의 말들은 내 마음을 흔들었어요. 단순한 0년차 사용자의 치기 어린 말이 아닌, 정말로 앞의 상황을 예측하고 커다란 그림을 그리고 있었죠. 그리고 실제로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것도 이번에 보여줬어요. …고민 했어요. 지금 이대로 도시로 들어가서 내일 아침 상황을 보게 되면. 그리고 당신의 말이 맞았다는 게 증명 된다면 그 놀라움에 지금 마음속에 품고 있는 불안감이 사라질 것 같았거든요.” “그 불안감의 정체를 알고 싶군요.” “제 불안의 근원은 다른 게 아니에요. 바로 당신. 0년차 사용자 김수현이 제 불안감의 원인 이에요.” “…….” 사사사…. 사사사…. 차가운 새벽 바람이 불고, 풀들은 살랑살랑 흔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우묵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 보았다. 그녀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두 팔을 벌려 불어오는 바람을 한껏 만끽하고 있었을 뿐. 그렇게 한동안 바람을 맞던 그녀의 입술이 다시금 살며시 열린다. “경험에서 발로한 감 이라고 해도 좋고, 아니면 여성 고유의 직감이라고 해도 좋아요. 당신은 알 수 없는 남자에요. 이번에 탐험 동행을 허락한 것도, 당신이라는 사용자를 관찰하고 싶어서 그랬어요.” 어느새 조금씩 가슴이 답답해지고 있었다. 나는 호흡을 정리하며 천천히 숨을 몰아 쉬었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관찰을 해보니 어떻던가요.” “알 수 없다고 했잖아요.” 내 물음에 그녀는 곧바로 대답 했다. 그리고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처음 봤을 때는 그저 애들을 돌보는 마음씨 좋은 사용자. 그런데 가끔씩 나에게 살기를 날리는 무서운 사용자. 그러다가 또 보면 일행들을 위해 희생하는 헌신적인 사용자. 하지만 어쩔 때는…마치 피에 젖은, 일말의 자비도 보이지 않는 살인마 같은 사용자. 결론은, 자신의 일행이 다친 것에 대해 분노한 건지 아니면 단순한 도발에 화가난건 지 알 수 없는 사용자.” “…….” 하나씩 끊어 말하는 그녀의 마지막 말을 들으며, 그제서야 나는 고연주가 호렌스(Horrence)를 처리한 직후 내게 이것저것 말을 걸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눈동자에 탐색하는 빛이 어려 있다고 느꼈는데, 그녀의 물음들은 전부 나를 떠본 말들 이었음이 분명 하다. 딱히 다른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고연주는 내게로 서서히 다가와 뒷짐을 지고는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슬쩍 아래로 시선을 내리는 순간 그녀의 도발적인 눈매가 나를 올려다 보고 있는걸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나와 시선을 맞추고는, 그녀는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생각해도 말이 아귀가 맞지 않죠?” “사람이, 사용자가 꼭 하나의 감정을 가지고 있으리란 법은 없습니다.” “그렇기는 해요. 하지만 당신의 행동에는 딱 하나가 결여 되어 있어요. 그게 뭔지 알아요?” “모르겠군요.” “시치미 떼지 말아요. 일관성 이에요. 아마 각 행동을 할 때마다 얼굴만 바꿔 놓는다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인식할 거에요. 그리고 시치미 떼는 것 같으니 미리 말해 두는데.”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이윽고 훌쩍 몸을 빼며 나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녀는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생존과 귀환. 좋아요. 부정할 생각은 없어요. 그러나 그 구변 좋은 말들로 내 불안감을 덮으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진정으로 궁금한 건 그 아래 깊숙이 숨어 있는 당신의 내면 이니까.” 어느새 바람이 멈췄다. 사방이 고요하다.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럼, 이제 그만 대답해 주시겠어요?” 어느 순간 그녀와 나의 거리는 상당히 벌어져 있었다. 그녀는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을 폈지만 이내 살짝 구부리며 자신의 쇄골 부분에 가볍게 대었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미약하게 한번 끄덕여 주었다. 그것을 확인한 그 순간 그녀의 고운 입술이 천천히 열리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초원에 나른히 울려 퍼졌다. “지금도…저를 죽이고 싶나요?”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네. 황금 같은 주말이 끝나고, 새로운 월요일이 시작 되었습니다. 하하하. 드디어 뮬로 돌아왔네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기대하시던 고연주의 처분도 다음회로 결정이 될 것 같습니다. :D 부디 김수현과 고연주는 각각 어떤 선택과 결정을 내릴까요? 부디 다음회를 기대해 주세요! :) PS. 쿠폰 투척해 주신분들 모두 감사 합니다. 오늘 별 생각 없이 내역을 보다가 깜짝 놀랐네요. (--)(__). 『 리리플 』 1. sereson : 아니! 1등 축하 드립니다! 처음 뵙는 분 이군요. 그동안 왜 비활동 유저 코스를 하고 계셨나요. ㅜ.ㅠ 아무튼 이걸로 드디어 활동 유저로 나오셨으니 앞으로 코멘트 잔뜩 기대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 2. MT곰 : 네! 쪽지 확인 했습니다. 답신도 드렸는데 혹시 확인 하셨나요? :) 3. juan : 하하하. 좐슨 도장이요? 좐슨 도장이 뭔가요! 저는 잘 모르겠으니 아주 자세히, 세세하게 풀어 설명해 주세요. (__ )* 4. 다이린 : 앗! :3 ← 이 표정이 마음에 듭니다. 이 표정은 앞으로, 제 겁니다. 어험. 5. Blasphemy : 하하. 소중한 조언 감사 합니다. 가끔 새로운 몬스터를 생각할 때 머리가 아플적이 있는데, 그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__) 에, 근데 영문이라. 음. 영어 실력 늘리는데 아주 좋겠군요. 6. 메카스타 : 엇. 태블릿. 하나 살까 생각중이긴 한데, 괜찮나요? 울트라북이 있기는 한데 아무래도 손 탈까봐 조금 가지고 다니기 그런 면이 있네요. 7. (魔皇笑)地獄音 : 작품 설정에 있어요! 아직 그대로 랍니다~. :3 8. hohokoya1 : 흠. 현재 설정으로는 남은 12 포인트 스탯을 올리는걸 보류할 생각 입니다. 다만…. 헙. 스포 주의! 큰일날 뻔 했네요. 흠흠! 9. 천화백부 : 1. 노 코멘트 입니다. 2. 가능 합니다. 3. 무지하게 많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 아마 이번 뮬 편에서 3번은 대부분 정리할 예정이오니, 잠시만 기달 주세요. 10. 오피투럽19 : 어, 어이쿠! 저도 모르고 등록 버튼을 눌러 버렸어요! ㅋㅋㅋㅋ. 쿠폰 감사 합니다. (__) 11. UrDREAM : 하하. 그런 기록들도 있기는 하지만, 자유 용병인 수현과 애들이 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해봤자 쓸 데가 없거든요.(애들은 장비랑 금은보화만 쏙쏙….) 그렇게 머리 아픈 것들은 후에 꾸려질 조사단 애들이 하면 됩니다.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68 / 0933 ---------------------------------------------- 예상치 못한 만남 지금도 나를 죽이고 싶나요. 귓가를 타고 들어온 그녀의 말은 내 가슴을 잔잔히 두드렸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정말로 나는 고연주를 죽이고 싶어 하는 걸까? “…….” 아니었다. 아니, 아니라고 볼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녀를 맹목적으로 죽이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다만 죽일 필요성이 있었을 뿐. 해답은 금방 나왔지만 선뜻 말을 꺼내기에는 망설임이 있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머리 속이 복잡이 얽히려고 하자 나는 다시 눈을 뜨고 말았다. 고연주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조용한 얼굴과 차분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받는 순간, 나는 흔들리던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림자 여왕>의 말마따나 어설픈 시치미나 구변 좋은 말들 보다는 숨어 있는 본심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게 나에게나 그녀에게나 더 나을 것 같았다. 나는 품 속에 손을 넣어 연초를 한 대 꺼내 들었다. 그러나 바로 입에 물지는 않았다. “아니요.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거짓말 하지 말아요. 그렇게 말하는 지금 당신의 눈동자에도 그리고 말투에도 미묘한 살기가 담겨 있어요.”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은 건 사실 입니다. 다만….” “다만?” 치익. 치이익.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입술에 연초를 끼워 넣었다. 그렇게 한 모금 깊숙하게 빨아 들인 후, 다시 허공으로 부드럽게 흘려 내었다. “당신을 죽일 필요성은 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잠시 말을 아꼈다. 그녀의 표정을 읽으려고 했지만 읽을 수 없었다. 연초를 절반쯤 태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싶어, 어느새 주위로 가라 앉은 침묵을 깨뜨리기로 했다. “일전에 사용자 정하연과 자리가 있었을 때, 그러셨죠. 죽이고 싶다고. 홀 플레인에서 뭘 따지고 있는 거냐고.” “네. 그랬었죠.” “저 또한 비슷합니다. 조금 억울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신의 말대로 앞으로 제가 그려나갈 그림에서 고연주란 사용자는 너무도 커다랗고,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위험한 변수 입니다.” “변수라. 억울할거는 없어요. 홀 플레인은 원래 그런 세상 이니까.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튈 지 모르는 변수를 사전에 방지하는 차원에서 제거하고 싶다. 그게 저를 죽이고 싶어하는 이유라는 건가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었다. 가볍게 수긍하자 곧 그녀의 입술이 살며시 열리며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묘한 떨림을 담고 있었다. “나라는, 사용자 고연주라는 변수가 위험하다고 확신할 수 있나요? 저는 당신과 당신 일행들한테 그렇게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아요. 혹시 몰라도 후일에 이득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러나 홀 플레인 에서는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적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앞으로의 일은 아무도 알 수 없어요. 당신을 놓아주고 후회 하느니, 그냥 여기서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야릇한 확신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경험에서 발로한 감 이라고 해도 좋고, 아니면 남성 고유의 직감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내게 했던 말들을 그대로 되돌려주자, 그녀는 일순 말문이 막힌 듯 입만 벙긋거렸다. 나는 슬슬 승부수를 던져야 할 타이밍이 온 것을 느꼈다. 이 정도면 할 말은 다 했다고 볼 수 있었다. 해서, 나는 어느새 전부 타버린 연초를 뱉고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이대로 당신을 놔두고 떠나기에는 뒤가 너무 찜찜할 것 같습니다. 당신은 한 클랜의 로드라면 누구나 탐을 낼 만큼 매력적인 사용자 입니다. 제가 당신을 품을 수 없다면. 끌어 안을 수 없다면. 여기서 죽이는 게 개인적으로 옳은 판단이라 생각 합니다. 그러니….” “…….” “이제는 사용자 고연주의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그렇게 본심을 모두 드러낸 순간, 비로소 고연주의 얼굴에 표정이 떠오르는걸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읽는 건 힘들었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했다. 또 어떻게 보면 흥분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북받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고연주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두 번 심호흡을 하는 게 숨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녀는 양손을 들어 머리를 크게 뒤로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나를 가지고 싶은 건가요? 가지지 못하면, 차라리 죽이고 싶을 정도로?”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을 하는 그녀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피어난 것 같았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기 때문에 “네.” 라고 대답해 주었다. “진심인가요? 정말로?” “그렇습니다.” 그녀의 되물음에 목소리에 힘을 주어 한번 더 대답해 주었다. 그녀는 내 확답을 듣더니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좋아요. 마음을 정했어요. 대답은 지금 들려 드리죠.” 말을 마친 그녀는 곧바로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빛을 내뿜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 그녀가 단검을 들어 올린 순간 마음 한 구석에서 공허함이 가득히 밀려 들어 왔지만 품고 있는 호렌스(Horrence)의 구슬이 곧바로 빈 공간들을 채워주었다. 나는 입맛을 다시고는 허리에 걸려 있는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사용자 고연주. 지금 행동을 당신의 대답으로 받아 들여도 되겠습니까.” “그래요. 사용자 김수현. <그림자 여왕>은 당신의 클랜에 들어 가겠어요.” 그 순간 나는 막 뽑으려던 손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지금 눈 앞의 여성 사용자가 뭐라고 한 거지? 핀트가 어긋나도 한참 어긋난 말에 잠시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재빨리 그녀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고연주의 얼굴은 태연 했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뜻 모를 열망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단검을 몇 번 던졌다 받은 후 또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호호. 가지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쳐다봐요?” “…이유를 들어도 되겠습니까.” “별거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상투적인 이유들 이에요. 죽고 싶지 않기도 하고 살고 싶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당신이라는 사용자에게 기대를 걸어보고 싶기도 하고요.” “제가 궁금한 건 단검을 들어 올린 이유 입니다. 오해할 뻔 했어요.” “오해가 아니에요.” 고연주는 눈을 곱게 흘기고는, 허공에 떠올린 단검을 재빠르게 낚아 챘다. 그리고 곧 그것을 내게 정면으로 겨누며 말을 이었다. “당신의 대답은 잘 들었어요. 불안감의 원인도 알았고요. 하지만, 불안감이 표면 위로 떠오르기만 했지 아직 해소된 건 아니에요.” “보기보다 소심 하시네요.” “웃기는 소리 말아요? 불안감 해소는 내가 스스로 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해주어야 하는 거죠.” “…꽤나 거친 해소 방법이 될 것 같군요.” 나는 한숨을 푹 쉬고는 멈추었던 검을 뽑아 들었다. 문득 사용자 창고에 고이 모셔 놓은 무검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번 일만 끝나면, 카오스 미믹에서 꺼낸 척 하고 들고 다닐 생각 이었는데 지금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아쉬웠다. 물론 질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고연주에게 조금 미안하지만 1회차 시절 그녀의 능력이나 기술은 이미 철저히 파악한 상태였다. “미리 말해 두지만, 그 동굴에서 내가 보였던 실력이 전부라고 생각하시면 곤란 하답니다.” “어련하시겠습니까.” “호호. 그럼 저만한 사용자를 영입하는 게 그렇게 쉬울 줄 알았나요?” 네네. 나는 속으로 대답한 후 바로 자세를 잡았다. 이래저래 유리하다고는 해도 고연주 또한 <10강>에 이른 사용자. 방심하다가는 큰 코 다치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질 수도 있었다. 그녀 또한 진한 미소를 흘리며 몸을 살짝 구부리고는, 흥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진심으로 가겠어요. 0년차 사용자 김수현을 죽일 마음으로 말이죠. 그러니 당신은….” 말을 하는 도중 그녀의 주위로 그림자가 수십 개로 분열하기 시작 했다. 이것은 <그림자 여왕 (Queen Of Silhouette)>의 특수 능력, 심연의 무리(Abyss Crowd). 랭크는 S+ 였던가. 시작부터 세게 나온다는 생각에 목구멍에 절로 침이 넘어갔다. 이윽고 그림자가 셀 수 없을 만큼 분열 되는 게 보였고, 고연주는 혀를 날름 내밀어 입술을 슬며시 적셨다. 그리고, 눈가에 가느다란 호선을 그리며 말을 매듭 지었다. “이 불안감을 단번에 날려버릴 수 있을 만큼, 완벽하게 부숴주세요. 당신을 죽일 각오로 달려드는 저를, 이 <그림자 여왕>을 완전히 굴복시켜 보란 말이에요.” “기꺼이.” <완전히> 라는 말이 마음에 크게 와 닿았다. 즉, 그녀의 말 뜻은 <간신히> 또는 <겨우>가 아닌 모자람이 또는 흠 없이 자신을 완벽하게 제압해 주기를 원하고 있었다. 나는 시원한 대답으로 받아 쳐주었다. 그 대답을 함과 동시에, 그녀의 주위를 맴돌던 그림자들은 수십 줄기로 바뀌며 내게로 쏜살같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 슬며시 눈을 뜨자 따사로운 햇살이 창가로 비쳐 들고 있었다. 아침이 다 되어서야 여관에 들어오긴 했지만 평소보다 오래 자기는 했다. 나는 습관적으로 일어나자마자 하는 명상을 마친 후, 곧바로 방문을 나섰다. 1층으로 내려가자 일행들이 하나의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은 서로 실컷 떠들고 있다가, 내가 내려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다들 계단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 사제용 로브를 입은 귀여운 사용자 한 명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반가이 맞아 주었다. “앗. 오라버니다아.” “오 형. 오늘은 웬일로 늦게 일어 나셨어요.” “그러게. 오빠가 우리들보다 늦게 내려오는 거 처음 보는 거 같아.” 나를 보자마자 물 만난 고기처럼 달려드는 애들을 제쳐두고, 나는 가까운 의자에 털썩 앉았다. 원래 잠을 자면 몸이 상쾌해야 정상인데 오늘따라 몸이 약간 뻐근한 느낌이 들었다. “김수현. 그런데 어제 뭐 했어? 기다리다가 하도 안 오길래 냉큼 자버렸는데.” “비비앙? 거짓말은 못써요. 여관으로 오자마자 졸려 죽겠다고 방으로 달린 건 누구였죠?” “윽!” 내게 말을 걸던 비비앙은 옆에서 하연이 태클을 걸자 샐쭉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잠시 실소를 흘린 나는, 주변을 향해 고개를 두리번거린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용자 고연주는 아직 나오지 않았나요?” “그, 그렇습니다. 오늘따라 항상 부, 부지런하던 두 분이 늦네요. 혹시 어젯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불쑥 끼어든 신상용의 말에 분위기가 싸해지려는 찰나 꾹 닫혀 있던 여관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서너 명의 사용자 무리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뮬 에서는 처음 보는 사용자들 이었는데, 모두 여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긴 생머리를 한 여성은 여관 전체를 기웃 이더니 얼떨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 여기 어제까지만 해도 문 닫혀있지 않았어?” “그러게. 다시 문을 연 건가? 아무튼 럭키! 피곤 했는데 잘 됐다. 사용자도 별로 없는 것 같고. 다른 사용자들이 몰려들기 전에 빨리 좋은 방 잡아야겠어.” “그래 그래. 저기요~. 혹시 이 여관에 묵고 계신 사용자들 이신가요?” 벨트에 검을 찬 여성 사용자 한 명이 우리를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그러나 일행들은 다들 멀뚱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다가, 이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새로 들어온 사용자들 또한 나를 쳐다보는 바람에 결국 내가 대답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이었다. “예. 현재 묶고 있는 사용자들이 맞습니다.” “아 그러면요. 혹시 여관 주인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저기 있네요.” 내가 주방 쪽으로 손가락을 가리키자 여성 사용자들이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어느새 고연주가 부스스한 얼굴로 주방을 나서고 있었다. 그녀의 꼴은 꽤나 볼만 했다. 옷은 이곳 저곳이 찢어져 있었고, 언뜻 비치는 속살에는 불그스름한 상처가 간간이 보였다. 거기다 머리는 산발을 하고 눈은 가늘게 뜨고 있으니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흠칫하는 건 당연한 일 이었다. 아무래도 그녀 또한 어제 들어온 이후 바로 침대에 누운 것 같았다. 흠. 어제 너무 심하게 했나. 그녀들은 자기들끼리 쑥덕이더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저, 저기. 혹시 방….” “없어요.” “네, 네? 하지만 이 분들이….” “여기 여관 아니에요. 여기 말고 다른데 찾아보세요.” 그러나 고연주는 여성 사용자들의 말을 도중에 끊어 버렸다. 그리고 귀찮다는 얼굴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맨 처음 말을 걸었던 긴 생머리의 사용자는 그녀의 몰골과 대답에 당황 했는지, 문 밖으로 종종 뛰어간 후 고개를 올렸다. 아마도 간판을 보는 것 같았다. “여기 분명 여관 간판이 있잖아요. 아는 사용자들한테서 추천 받고 왔는데….” “아 거 진짜 귀찮게 구네요. 말귀를 못 알아 들으시네.” 고연주는 끈덕지게 달라 붙는 그녀의 말에 기어코 인상을 찡그리고 말았다. 그리고 느릿한 발걸음으로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서, 똑같이 간판을 올려다 보았다. “보세요. <조신한 숙녀>라는 간판이 분명….” 고연주는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손을 어깨 뒤쪽으로 비틀었다가, 여관의 벽면을 있는 힘껏 후려 갈겼다. 퍼엉! 퍼석! 푸스스…. 쿵! “…….” “이제 됐죠? 여기 더 이상 여관 아니에요. 어디서 잘못 듣고 오신 것 같은데?” 고연주는 한마디 툭 내뱉고는 떨어진 간판 조각들을 주섬주섬 주워 들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던 눈치 빠른 사용자 한 명은 재빨리 다른 한 명의 팔을 잡아 끌며 속삭였다. “예, 예림아. 그만 가자. 우리들이 잘못 온 거 같아.” “으, 응 언니.” 이윽고 둘은 아직도 어버버 하는 남은 사용자를 끌고는 저기 멀리로 사라져 갔다. 멍한 건 떠나간 그녀들뿐만이 아니었다. 일행들 또한 다들 떨떠름한 얼굴로 고연주를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일행들에 시선에 아랑곳 않고 다시금 여관 안으로 몸을 들였다. “미안해요. 새벽에 너무 격렬하게 당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푹 자버렸네. 우리 아가 배고프지?” “아, 아니요오…. 괜찮…. 네? 격렬하게요?” “조금만 기다리렴. 언니가 곧 아침 차려줄게.” 고연주가 안솔에게 말을 걸자, 처음에 손을 내젓던 애기는 뒤의 말을 듣고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과연 새벽에 격렬하게 당했다는 말에 놀란 걸까 아니면 언니라는 말에 놀란 걸까. 그러나 고연주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부스스한 머리가 거슬리는 듯 계속 머리를 쓸어 올리다가, 너덜 하게 변한 옷깃 한쪽을 잡고는 북 찢어 버렸다. 이윽고 고연주는 길게 찢은 옷깃을 입에 물고, 머리를 맵시 있게 감아 올리며 다시 주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녀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던 안솔은 이내 황급히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마도 전자인 것 같았다. 이렇게 탐험 후 첫날의 아침은 한숨으로 시작하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이로서 <그림자 여왕> 고연주의 GET을 완료 했습니다. 모두 함께 박수 세 번 짝짝짝! 하하하. 아 그리고 소제목에 대해 많은 코멘트들이 달렸습니다. 한가지 힌트를 드리자면, 2회차에서 지금껏 만났던 사용자들은 아닙니다. 1회차 사용자중 한 명 이지요. 후후. :) 『 리리플 』 1. 쿠로시온 : 허허. 1등 축하 드립니다. 기어코 1등을 다시 탈환 하시는군요. 요즘 들어 새로운 1등 코멘터의 전설이 출현할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듭니다. :) 2. 레필 : 하하. 요즘 쿠로시온님이 워낙에 강력 하셔서요. 솔직히 저보고 자정 연재에 1등 하라고 하면 저도 못할것 같아요. ㅜ.ㅠ 새로 나오는 사용자는 1회차 시절 매우…. 흠흠. 스포일러를 할 뻔 했군요. 아, 그리고 올릴 능력치는 정해 놨습니다. 당분간 키핑해둘 생각 이지만, 스포일러라도 상관 없으시면 쪽지 보내주세요! 3. gkgngh : 네. 지금 당장은 무리고 뮬에서 떠나기 전에는 해당 내용을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음, 그리고 저는 투영한다고 보는게 옳겠네요. 굳이 저라기 보다는, 사람이 그 상황에 처해 있을때 어떻게 행동할지 상상하면서 쓰거든요. :) 4. 천겁혈신천무존 : 스포일러라도 상관 없으시면, 쪽지 보내 주세요. 정한 능력치도 있고, 정하지 않은 능력치도 있습니다. 5. 황걸 : 헐. 꿈까지 꾸셨다니 ㅎㄷㄷ 합니다. 과연 골드만 나올까요? '~' 6. 破天魔痕 : 오호. 정답을 맞춘 분이 계셨네요. 네. 그렇습니다. 아마 다음회나 다다음회 나올 예정 입니다. 하하하. 7. 현오 : 슬슬 한 명 더 영입할 때는 되었죠. 그런데 어떤 성격을 가진 사용자가 나오는게 좋을지, 요즘 고민하고 있습니다. 8. 카신엠 : 헐. 문화 상품권 까지 사오시다니. 쿠폰 감사 합니다. (__) 연재는 최대한 이어가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9. 메카스타 : 오호 그렇군요! 곧 5월, 6월이 되면 태블릿을 살지 갤럭시 S4로 바꿀지 심히 고민하고 있습니다. 노예 약정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위약금을 물어서라도요. ㅜ.ㅠ 10. Insaneluna + T.Dragon : 쿠폰 감사 합니다. 연참 버닝은…. 여유가 되면 최대한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ㅜ.ㅠ 11. hohokoya1 : 하하. 감사 합니다. 저도 2월이 너무 그립네요. 그때는 정말 시간이 많아서 하루하루 2연재가 가능 했는데, 요즘은 바빠도 너무 바쁩니다. 과제를 해야 하는데 못하고 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 12. 열정을 : 쪽지 시험, 과제, 시험. 폭풍 입니다. 정말 잠 시간이라도 줄여야 겠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바쁘게 사는게 좋은것 같습니다. :D 우리 서로 파이팅 해요!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69 / 0933 ---------------------------------------------- 예상치 못한 만남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모였지만, 나는 담담한 얼굴을 유지 했다. 여기서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가는 고연주의 계략에 그대로 떨어질 것이다. 그렇게 가볍게 콧바람을 쏘아준 후 나는 차분히 해명을 하기 시작 했다. 그간의 일을 간략히 설명함과 동시에 어제 부로 그녀와의 거래가 끝났고, 이번에 새로 창설할 우리 클랜에 새로 입단 되었다는 것까지. 그 와중 서로의 실력 확인 차 살짝 비무(比武)의 시간을 가졌다는 건 소소한 이야깃거리에 불과 했다. 내 말에 일행들은 각기 다양한 반응을 보여 주었다. 나와 고연주 사이에 그런 거래가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애들도, 고연주가 정식으로 우리 클랜에 들어온다는 사실에 놀란 사용자도, 그리고 내 이야기에는 관심도 없고 고연주가 들고 오는 푸짐한 음식들에 놀란 멍청한 거주민도. 내가 10강을 이겼다는 사실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것 같아 조금 슬플 뿐 이었다. 물론 내가 말을 완곡히 돌린 것도 있긴 하지만. 최대한 풀어 천천히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도중에 음식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거의 마칠 무렵에 그녀는 음식을 가지고 왔다. 그것도 그릇을 담는 카트에 음식을 한 무더기 쌓아 놓고서. 고연주의 얼굴에는 처음의 부스스함은 온데간데 없었고, 어느새 생글생글 웃는 낯빛으로 하나씩 음식을 내려 놓고 있었다. “우와. 사용자 고연주. 형한테 얘기 들었습니다. 클랜에 가입하시는걸 환영 합니다.” “응? 호호. 수현씨가 벌써 얘기를 했나 보네. 아무튼 고마워.” 고연주는 아무도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반말을 했지만,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나이는 둘째 치고서라도 연차나 현재의 위치로 보면 당연한 일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애들도 그녀의 말투에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들 이었는데, 처음에 겪던 진통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히려 안현은 신난 얼굴로 음식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나불거리고 있었다. “이 고기는 뭐죠?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게 보기만 해도 침이 넘어 가네요. 그리고 위에 솔솔 뿌린 이것은….” “아아. 파그라(Pagra)라는 이름을 가진 약초. 음식이랑 함께 먹으면 특유의 역한 냄새도 없어지고, 특히 남성의 정력에 아주 좋단다.” “네, 네? 아 그, 그렇군요. 그럼 이 음식은….” “감자를 가늘게 썰어서 불 판에 볶고 위에 살짝 녹인 치즈를 얹었지. 물론 현대의 치즈는 아니고 홀 플레인에서 나는 치즈라고 보면 돼. 특히 남성의 정력에 아주 좋단다.” “…….” “아, 이거는 싱싱하고 아삭아삭한 야채 샐러드. 먹어보렴. 특히 남성의 정력에 아주 좋단다.” 안현은 더 이상 물어보는걸 거부한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연주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음식을 하나 놓을 때 마다 나를 바라보고, 위에 말한 세 음식을 내게 가까운 쪽으로 미는걸 보니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다시 불을 지를 줄은 몰랐기 때문에 이번에는 제법 당황하고 말았다. “하하…. 사,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습니다.”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 즈음, 사용자 신상용은 떨떠름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 시켜 주었다. 몇몇 일행들의 좁혀진 시선 속에서 오직 푸짐한 음식들에 행복해하는 비비앙을 보며, 나는 방금 전 멍청한 거주민이라고 했던 것을 취소하기로 했다. 그렇게 오전에 있었던 해프닝을 넘기고 우리들은, 아니 정확히 나는 간신히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자꾸만 앞서 거론한 음식들을 권하는 고연주의 행태에 분노가 치솟아 올랐지만, 언젠가는 정말 제대로 갚아주리라 다짐하며 꼭꼭 씹어 먹었다.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한 후 일행들이 가장 먼저 꺼낸 이야기는 카오스 미믹(Chaos Mimic)이었다. 애들은 지금 당장 열고 싶어 안달한 모습을 보였지만,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일단 연다고 해도 연기를 다 빼야 물건을 꺼낼 수 있으며, 무검과 남은 엘릭서 한 병도 가져와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뒤의 이유는 얘기할 수 없었다. 해서 나는 혼돈을 다 뺀 이후에 개봉한다고 못을 박아 놓았다. 아마 지금 바로 연기를 뺀다고 해도 오늘 저녁이 되야 다 빠질 것 같으니 개봉은 그 이후의 일 이었다. 시무룩해진 애들을 보며 쓰게 웃은 후, 나는 기운이 날 만한 소식을 하나 들려 주었다. 그것은 바로 오늘 하루 휴가를 주겠다는 것. 사용자 정하연에게 조금의 용돈을 맡겨 놓을 테니 오늘은 굳이 수련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그 말은 조금 마음에 들었는지 다들 표정을 폈는데, 여기에는 나름 노림 수가 있었다. 추후에 애들이 돌아올 때를 기대하며 나는 하연에게 식사 후 집무실로 와달라고 말을 걸었다. * 오랜만에 앉는 3층 특실에 있는 테이블 의자. 방금 전 마구 휘갈긴 기록을 내려다 본다. 나는 복잡한 일들이 있을 때는 항상 기록한 다음에 정리하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습관이라고 볼 수 있었다. 실적 증명서 2장 발급. 탐험 보고서 제출. 카오스 미믹 개봉과 성과 처리. 클랜 창설 신청. 고연주 영입. 나는 그 중에 맨 마지막에 적은 고연주 영입 건에 두 줄을 죽죽 그었다. 그리고, 깃펜을 끄적거려 맨 위에 하나의 내용을 추가 시켰다. 정보 수집. 현재 부랑자 말살 계획과 황금 사자 클랜의 행보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아마도 지금쯤 고연주가 열심히 정보를 모으고 있을 테니 늦어도 내일 저녁 즈음에는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 앞서 애들을 내보내, 대충 도시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똑똑. 그 때, 깃펜을 빙글빙글 돌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 도중 누군가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라고 화답하자 이내 집무실 문이 살짝 열리는 게 보였다. 이윽고 문 안으로 들어선 사용자는 단발 머리를 한 단아한 외모의 미인 이었다. “수현. 부르셨어요.” “네. 하연. 이리 가까이 오세요.” 그녀는 내 부름에 문을 꼭 닫았다. 곧이어 철컥 이는, 무언가 잠기는 소리가 났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그녀는 테이블로 다가와 의자를 내 옆에 바싹 당기고는 그대로 엉덩이를 붙였다. 하연의 얼굴은 대단히 차분 했다. 마치 만들어낸 것 같은 느낌을 줄 정도였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엄습 했지만 나는 일단 서론을 꺼내기로 했다. 그리고 품을 뒤적인 후 미리 준비했던 돈 주머니 하나를 꺼내며 입을 열었다. “하연. 부탁이 있어서 불렀어요.” “애들 돌보기 인가요?” “하하…. 비슷하네요. 오늘 잠깐 도시를 구경하지 않으시겠어요?” “단순한 구경만은 아닐 것 같은데요.” 여전히 날카로운 그녀를 보며, 나는 고개를 주억였다.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갈 때였다. “예. 맞아요. 뮬에 들어온 지 하루도 채 안되기는 했지만 도시가 너무도 조용하네요.” “음. 어떤 말씀인지 감이 잘 안 와요.” “슬슬 사용자들이 들어오는 것 같아요. 그러면 최소한 뭔가 얘깃거리들이 있어야 해요. 부랑자 말살 계획은 그렇다 치더라도 황금 사자 클랜의 강철 산맥 진군이라던가, 아니면 유적 발굴 등에 대해서요. 하지만 그 어떤 얘기들도 들리지 않아요.” “흐음. 아직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어요. 황금 사자 클랜은 공략 중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유적 발굴이면 꽤 큰 이슈일 텐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건 확실히 의심스럽네요.” 역시나 그녀의 머리 회전은 빠르다. 척하면 척 이라고, 내가 문제 삼고 있는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었다. 나는 기록서를 그녀 앞으로 들이밀며 말을 이었다. “그래요. 그래서 지금 바로 신전으로 찾아갈 생각 이에요. 두 유적이 <절규의 동굴>처럼 엄청나게 먼 곳도 아니고, 3주라는 시간 동안 조사를 하지 못했다고 하면 말이 안되죠. 아무래도 무언가 다른 게 있는 것 같아요.” “아하. 그럼 저와 다른 사용자들은 도시를 거닐면서 정보를 모아오면 되는 거군요.” “그렇죠. 그래도 휴가라는 명목이 있으니 너무 힘들게 돌아다니지는 말아요. 적당히 쉬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분위기 파악 정도로만 해주시면 되니까요.” “그 정도야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그런데….” 하연은 기록서를 보며 말을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의 시선은 두 줄이 그어진 맨 아래로 향해 있었다. 한동안 머뭇거리던 그녀는, 이내 시무룩이 눈을 내리 깔며 주머니를 쥐었다. “아, 아니에요. 그럼 이만 나가볼게요.” “잠시만요.” “앗….” 나는 그대로 몸을 일으키려던 하연의 팔을 붙잡고, 억지로 다시 앉혔다. 그녀는 설마 내가 이런 행동을 할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얼굴로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왜 그래요. 표정이 많이 안 좋아 보여요.” “…….” 하연은 아무 말도 않고 내 시선을 회피 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얼굴을 지그시 응시하자, 그녀는 결국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았다. “미안해요.” “뭐가 미안해요.” “저, 저요. 오늘 아침에 수현을 의심하고 말았어요. 그리고 이어진 해명, 아니 설명을 듣고 다시 안심 했고요.” “난 또 뭐라고. 그저 1:1로 전투를 했을 뿐 아직 그 짓은 하지 않았으니 걱정 말아요.” “아직…이요.” 하연은 아직이라는 말을 되풀이 하며 서글픈 미소를 흘렸다. 나는 잠시 말을 실수한걸 느껴 다시 입을 열려고 할 순간 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내 말을 막고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아직 현대에서 살던 감정을 버리지 못했나 봐요. 이곳은 홀 플레인 인데. 당연히 있을 수도 있는 일들인데.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괜한 걱정을 끼쳐 드린 것 같아 죄송해요.” “아니….” “따지고 보면 웃기는 질투죠. 저는 수현을 유혹 했고, 제가 원해서 안겼어요. 애들 입장에서 보면 똑같이 나쁜 년인데, 그리고 저는 수현을 구속할 수 있는 아무런 명분도 없는데….” 평소의 하연 답지 않다. 겉으로는 태연해 보이지만, 말을 횡설수설 하는 게 머리 속이 단단히 뒤엉켜 있는 것 같았다. 이럴 때 도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한동안 고민하던 도중 문득 1회차 시절 두 사용자가 주고 받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아. 혜란이랑 또 싸웠어. 도대체 걔는 왜 그래? 아무 이유 없이 화만 팍팍 내고. 진짜 지겹다 지겨워.> <멍청아. 그건 네가 잘못한 거지. 혜란이가 그냥 스쳐가는 사용자니? 네 여자 친구인데.>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도대체 뭘 잘못 했는데.> <아무리 홀 플레인 이라고 정도가 있다고. 그냥 별거 아닌데 왜 그러냐는 식으로 말하면 그냥 하룻밤 눈 맞아서 거쳐가는 사용자라는 말과 뭐가 달라. 그러니까 원 나잇 몰라 원 나잇? 너는 혜란이를 딱 그 짝으로 취급한 거라니까.> <무슨 헛소리야. 내가 왜 혜란이를…. 아니 그럼 내가 어떻게 행동 했어야 하는 건데.> <아마 나라면 그때 살짝 끌어 당겼을 거야. 그것만 해도 돼. 거기다 사랑한다고 한 마디 속삭여주면 금상첨화지.> <미친놈. 그 닭살 돋는 짓거리를 나보고 하라고? 말하기도 전에 손발이 싹 다 오그라 들겠다.> <껄껄. 여자를 모르는 사용자로구먼. 그래서 네가 왜 허구한 날 혜란이랑 싸우는지 알 것 같다. 그냥 헤어져. 그럴 거면 왜 사귀냐? 에휴. 불쌍하다 불쌍해.> 나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하연을 응시 했다. 항상 차분하고 지적인 모습을 보여주던 그녀가, 지금 내 앞에서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슬퍼 보였지만, 그 슬퍼 보이는 표정과 그녀의 모든 태도가 왠지 모르게 내게 기분 좋은 감정을 주고 있었다. 그때였다. 두근. 단 한번에 불과 했지만 가슴에서 심장의 고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생소하면서 나쁘지 않은 감정들. 아니, 낯설지 않은 걸로 보아 잃어버렸던 감정들 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반사적으로 서랍으로 손을 뻗었다. 어제 밤 서랍에 고이 놓아둔 호렌스(Horrence)의 구슬을 넣어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줄 수 없었다. 하연의 불안감을 알 수 있었다. 아마 고연주 였다면 시원하게 웃어 넘겼을 일들 이었다. 그러나 그런 면에 있어 그녀는 아직도 지구의, 현대의 그림자를 완전히 벗어내지 못한 사용자 였다. 더구나 순결 즉 첫 경험을 나와 한 만큼 더욱 의미를 크게 부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면에서 보면 그녀는 훌륭히 적응한 사용자지만, 확실히 역린(逆鱗)이 있는 부분은 그렇게 쉽게 치유 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녀는 남녀 관계에 대한 현대와 홀 플레인 사이의 괴리감 때문에 혼란스러워 하는 게 분명 했다. “…….” 힘을 주지 못한 게 아닌, 힘을 주지 않았다. 그것은 내 의지에 따른 행동 이었다. 이윽고 나는 손잡이를 잡았던 손을 풀고 말았다. 지금은 몸 속 전신으로 퍼지는 이 감정의 흐름에 한번 편승해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하연은 스스로도 두서 없이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나는 부디 내가 기억하고 있는 두 사용자의 대화가 효과적이기를 바라며, 슬며시 그녀의 어깨로 손을 내뻗었다. 하연은 내가 손을 뻗어 오자 마치 도망치고 싶은 듯 몸을 떨었지만, 기어이 내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은 다음 살짝 끌어 당긴 순간. “아….” 거짓말처럼, 그녀는 내 품 안으로 안겨 들어왔다. 나는 그녀의 떨리는 몸을 그리고 머리 결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하연. 우리가 처음 정을 나누었던 날을 기억하나요?” “그날을…. 어떻게 잊을 수 있나요. 기억하고 있어요.” “그때 하연은 그랬죠. 자신도 소중한 이들 중 한 명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당신은 나를 좋아하고, 나를 위해주고, 나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사람을 내칠 만큼 모질지는 못하다고 했죠.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은 상관 없다고. 나는 내 주변 사람들 챙기기도 바쁘다고. 그게 나쁜 거냐고 물음을 맺었어요.” 내가 그녀의 말을 회상하자, 그녀 또한 내가 다음에 했던 말들을 줄줄이 내뱉었다. 이렇게 정확하게 알고 있는걸 보니 정말로 그날의 일을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 날은 그만큼 그녀에게 인상 깊은 날 이었다는 소리였다. 나는 그녀를 한층 더 강하게 끌어 안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요. 지금 미리 말해둘게요. 그때 말한 것처럼 저는 저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사람을 내칠 수 없어요. 만약 또 하연과 같은 일이 생긴다면, 아마 하연을 실망시킬 일을 할지도 몰라요.” 이 말을 하는 데는 생각 외로 대단한 용기가 필요 했다. 솔직히 최악의 경우 그녀의 눈물을 보게 되는 것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일행들에게 거짓말을 엄청나게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거짓말이라고 해도 거짓말은 거짓말 이었다. 최소한 밝힐 수 없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나에게 몸을 의탁한 사람들에게 웬만하면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게 남녀관계 같은 복잡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하연은 내 품에 고개를 묻은 채로 곧바로 도리질을 쳤다. “으으응. 아니에요. 실은 알고 있었어요. 소중한 이가 되는 게 아닌, 소중한 이들 중 하나가 되는 것. 그 때부터, 그렇게 말했을 때부터 이미 머리로는 알고 있었어요. 다만 가슴으로 받아 들이기는 힘들었을 뿐 이에요. 정말 미안해요. 호, 홀 플레인 인데. 괜한 감정으로 제가 안 좋은 모습을….” “하연.” “…보여 드렸네요.” 너무 자책을 심하게 하는 것 같아, 나는 도중에 말을 끊어 버릴 요량 이었다. 그러나 하연은 기어코 말을 끝까지 잇고 말았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킨 후 그녀를 품에서 떼어내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 보았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숨을 정리하려고 노력 했다. 더 이상 그녀는 차분한 표정을 연기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애절함이 물든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을 뿐. 그런 그녀의 표정에 힘 입어, 목소리에 한층 힘을 주고는 입을 열었다. “지금 여기서 다시 약속 할게요. 그날 말씀 드렸던 것처럼, 당신이 저를 원하는 이상, 저 또한 당신을 소홀히 하거나 버리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에요. 그러니…. 이번 한번만 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나를 믿어주지 않겠어요?” ============================ 작품 후기 ============================ (오늘은 리리플을 하루만 쉬겠습니다. 168회 리리플은 169회와 합쳐 170회에 같이 하도록 하겠습니다. 독자분들의 많은 양해 부탁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이 11:59분 이네요. 예전에는 그래도 여유 있게 집필을 끝낼적이 많았는데, 요즘들어 정말 자정 전까지 피터지게 쓰는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는 너무…12:00이네요. 곧 올릴 준비 하도록 하겠습니다. :) 0170 / 0933 ---------------------------------------------- 예상치 못한 만남 본심을 담아서 말해서 일까. 하연은 말문이 막힌 얼굴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지그시 응시 했고, 어느 순간 하연의 얼굴 전체는 터질 듯 붉게 달아 오르는 게 보였다. 입만 벙긋거리던 그녀는 이윽고 입을 열더니 모기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 믿어요. 믿을게요.” “고마워요. 그럼….” 그녀의 답을 들었지만 맘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1회차 시절에는 이런 것들이 없었기에 애초에 신경을 끄고 살았었다. 물론 홀 플레인 에서 한 명의 남성이 여러 여성을 거느리거나 반대로 한 명의 여성이 여러 남성을 거느리는 건 크게 흠 잡을 일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건 사용자의 능력이라고 볼 수 있었으니까. 앞서 말했지만 단순히 마음이 맞는 사용자끼리 하룻밤을 보내는 것을 넘어서, 오히려 캐러밴 또는 클랜의 보호를 받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치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니 왠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이 아릿해져 오는 게 느껴졌다. 뭔지 모를 감정이 가슴을 쿡쿡 찌르는 게, 그저 미안한 마음만 들고 있을 뿐 이었다. 내가 이 생소한 감정으로 인해 감상에 젖을 무렵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한번 더 내 귓가를 울렸다. “오, 오늘 밤 이 방에서 주무실 건가요?” “네. 그렇죠.” “그, 그럼 오늘 밤에 이 방으로 찾아 올게요. 너무 일찍 주무시지는 마세요.” “음. 일찍 자는 일은 거의 없…네?” 다소 핀트가 어긋난 말에 반문 했지만 더는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말을 끝으로 하연은 눈 앞에 놓인 주머니를 쥐고 후다닥 방을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위 쪽으로 밀어 넣은 기록을 다시 앞으로 가져왔다. 그 순간 갑자기, 예전에 “사용자 김수현. 당신 정말 눈치 없어요.” 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머리를 한번 흔듦으로써 털어버릴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뮬을 떠날 준비를 해야 되기 때문에 시간이 있을 때 바지런히 움직이는 게 좋을 것이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작성하던 탐험 보고서를 마치고 고개를 드니 어느새 노을 빛으로 물든 창을 볼 수 있었다. <절규의 동굴>에 관한 탐험 보고서는 조금 더 상세히 적어야 한다. 앞선 두 유적에 비해 거리가 먼 것도 있지만, 완전한 청소를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겪은 것과 더불어 최대한 예상을 포함해 가능성을 제시한다. 사소한 정보라도 좋다. 정보는 담으면 담을수록 조사단의 피해가 줄어들 것 이니까. 반시가 있어 조금 걱정이 되도 조사단에 참가 하는 것은 실적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대표 클랜에서 선점하지 않는 이상 많은 사용자들이 참가를 희망할 것이다. 원래는 오늘 신전에 들를 생각 이었지만 그냥 다음으로 미루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탐험 보고서를 낼 때 같이 실적 증명서를 받고, 다음에 갈 도시에 있는 신전에서 <절규의 동굴>에 대한 실적 증명서를 받으면 될 일 이었다. 괜히 보고서 한 번, 증명서 한 번 이렇게 두 번 들를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 대충 현재 분위기를 살피고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현 도시의 상황을 파악해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으니까. 해서, 서류상 처리할 일들은 대부분 오늘 다 처리할 수 있었다. 이제는 행동할 일들만이 남아 있을 뿐. 한 쪽으로 곱게 놓인 클랜 신청서 위로 나는 탐험 보고서를 겹쳐 올려 놓았다. 이제 정말로 뮬을 떠난다는 생각을 하니 설레는 감정이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일을 모두 마무리 지은 후 아까 2층에 널어 놓은 카오스 미믹들의 상태를 살피러 갈 생각에 힘차게 몸을 일으켰다. 나는 서랍안에 고이 집어 넣은 무검과 엘릭서 한 병을 소중히 품에 넣었다. 아까 클랜 신청서를 받아 올때 창고에 들러 가져온 것들 이었다. 이것들을 보니, 설렘이 한층 더 배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 1층으로 내려가자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가 로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오늘 저녁은 조금 이른 시간에 먹기로 했다. 왜냐하면 사용자 고연주의 강력한 요청으로 본인의 입단 환영회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무슨 환영회를 하냐고 했지만, 뮬을 떠나기 전 있는 음식 재료를 모두 소비해야 한다는 것과 휴가를 들먹이는 그녀의 말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여관 문 반대편에 있는 주방으로 들어서자 콧노래를 부르며 불 판을 휘젓고 있는 고연주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내가 들어온 것을 알고 있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 손을 들어 이리 오라는 손 짓을 했다. 나는 그녀의 옆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불 판 위를 보니 매콤한 양념을 곁들인 고기들이 노릇하게 볶아지고 있었다. “현재 홀 플레인의 정세에 대한 정보는 모으셨나요.” “저를 누구로 보는 거에요. 이미 점심 때 <그림자>들 한 테 대충 얘기는 전해 받았어요. 당신 말대로 썩 좋지는 않은 것 같아요.” “조금 더 자세히…읍.” “쉿.” 고연주는 고기 하나를 들더니, 이내 벌려진 내 입술 사이로 깊숙이 박아 넣었다. “뭐가 그렇게 급해요. 가끔 보면 당신은 너무 쉬지 않는 면이 있다니까요. 휴가래 매요. 쉴 때는 쉬어요. 안 그러면 몸 축나니까. 뭐 정 알고 싶으면 오늘 밤 제 방으로 오시던가~.”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거 고기만 넣어주면 되는 일 이었는데, 손가락이 목구멍 거의 끝까지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뱉어내려고 했지만 손톱으로 내 목젖을 건드리는 통에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고연주는 배시시 웃으며 손가락을 살살 빼내었다. 쪼오옥. 말랑한 고기와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 그리고 살갗에 뭍은 매콤한 양념 맛이 동시에 전해져 들어왔다. 이대로 그녀의 손가락을 콱 깨물까 했지만, 그러면 고연주가 원하는 대로 될 것 같아 차마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곧 음식이 된다는 그녀의 말을 뒤로 한 채 천천히 주방에서 빠져 나왔다. 보아하니 정말로 오늘 정보를 알려줄 생각이 없다기 보다는 밤에 들어온 정보들을 종합할 생각인 것 같았다. 벌컥. 다시 1층 로비로 나오자 마침 도시 탐험을 끝냈는지 일행들이 우르르 여관 문을 열고 들어서는 모습들이 보였다. 타이밍도 좋았다. 음식이 다 될 즈음 마침 들어오던 사용자들(과 거주민 하나.)은 내 얼굴을 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지 않았다. “형. 다녀 왔습니다.” “오빠. 우리 왔어.” “다녀왔습니다아….” “흐에에….” 차례대로 안현, 유정, 안솔, 비비앙 네 명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하며 그대로 테이블 위로 엎드렸다. 왜 그런가 싶어 고개를 기울이자 하연이 시선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신상용의 멋쩍은 웃음이 보였다. 아무래도 휴가의 의미 보다는 정말로 정보를 모으는 목적으로 도시 곳곳을 구석구석 탐험한 것 같았다. 이리저리 널브러진 애들은 로비에 진동하는 맛있는 냄새에 코를 벌름거렸고, 곧 이어진 환영식이라는 말에 다들 작은 환호성을 질렀다. 내게 다가와 거의 줄지도 않은 주머니를 다시 건네주는 하연을 보니 오늘 애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하연을 잡아 이끌어 한 쪽 테이블로 자리를 잡았다. 그녀도 조금 피곤해 보였지만, 도저히 바깥 상황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오늘 밖으로 나간 일이라고 해봤자 사용자 창고에 들른 것과 클랜 신청서를 받아오는게 전부라서 아직 외부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행히 정보 수집 목적에 충실한 하연 덕분에 그녀는 비교적 상세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뮬의 분위기는 뭐랄까, 너무 우울 했어요.” “우울 하다고요?” “네. 일단 부랑자 말살 계획은 사용자 김수현의 말대로 성공을 거뒀어요. 지금껏 벌어진 부랑자들과의 전투 중에서 역대 급으로 큰 피해를 입혔나 봐요. 그러나, 그만큼 사용자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던 것 같아요. 들리는 소문으로는 서쪽에 있는 일반 도시 헤일로의 대표 클랜 SSUN이 거의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남은 부랑자들은 모조리 서대륙으로 도주했다고 하고요.” “흠.” “그리고 황금 사자 클랜은 오늘 부로 3일전, 강철 산맥 안으로 진입 했다고 해요. 그리고 강철 산맥에 들어가자마자 연결해 있던 모든 통신이 끊겼다고 하니 현재 그들의 상황은 알 수 없다고 해요. 다만….” 하연은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 보았다. 신상용은 환영회을 한다는 말에 탁자를 이리저리 이어 붙이고 있었고, 안솔도 비척거리며 일어나 그를 도우려는 몸짓을 하고 있었다. 안현은 유정에게 주방으로 들어가 음식을 나르자고 했지만 그녀는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음으로써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주변을 살핀 후, 고개를 더욱 기울이며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무래도 황금 사자 클랜의 원정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자체 문제라면?” “자세히 알아내지는 못했어요. 다만 원정에 참여하는 클랜을 상당히 자기 입맛대로 고른 것 같아요. 동쪽에 있는 도시들의 대표 클랜은 아예 포함시키지도 않았고, 심지어 남쪽의 소도시 모니카의 대표 클랜 <이스탄텔 로우>도 참가 시키지 않은 것 같아요. 어떤 이는 황금 사자 클랜의 독단적인 결정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해당 클랜들이 거부했다고 하는 것 같은데. 가장 확실한 건 원정에 참가한 클랜은 다들 친 황금 사자 클랜이라는 거에요. 심지어 소도시 뮬도 이번에 대표 클랜이 새로 바뀌었대요. 원래 대표 클랜은 원정에 참가 했고요. 이번 원정에 아주 사활을 걸은 거죠.” 나는 그녀의 마지막 말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친 황금 사자 클랜의 참가 까지는 미래와 똑같았지만, 설마 지금 시기에 뮬의 대표 클랜이 교체 되는 건 분명히 내 기억과는 맞지 않았다. 가장 확실한 건 지금 뮬은 무주공산으로 있어야 정상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이번에 새로 온 대표 클랜의 이름을 아시나요?” “미안해요. 이것도 겨우 알아낸 거에요.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교체된 거라 알고 있는 사용자가 거의 없더라고요. 친 황금 사자 클랜인 것 같기는 한데, 이번에 원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대신 보상으로 줬다는 소리는 들었어요. 그래도 확실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다른 유명한 클랜들을 제쳐두고 비교적 무명의 클랜에 도시 대표 클랜직을 맡겼다는 걸 보면 아주 신빙성이 없지는 않은 것 같아요. 무엇보다 아직 사용자들이 원정에 관심이 엄청 몰린 탓에….” 그녀의 미안함 가득한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였다. 왜 이렇게 사용자가 생각보다 없나 했더니, 아직 원정 중 이라고 하면 중앙이나 남쪽에 사용자들이 몰려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비로소 대부분의 의문은 풀렸지만 마음속 한 구석에 걸리는 건 있었다. 뮬의 대표 클랜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해를 할 수 있다. 있을 수도 있는 일 이니까. 그러나 사용자들이 모를 정도로 무명의 클랜을 세웠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을 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 일 이었다. 내 고민하는 얼굴을 읽었는지 하연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상당히 안절부절 하는 게 말이라도 꺼내면 다시 밖으로 나가 그 클랜의 이름을 알아올 기세였다. 나는 곧바로 표정을 회복한 후 그녀를 다독여 주었다. 이 정도 정보만 해도 많이 알아온 편이다. 나머지 자세한 사항은 고연주가 알고 있을 테니 그녀에게 들으면 될 일. 나는 깨끗이 생각을 접었다. 마음 속으로는 단박에 대표 클랜 성이나 신전으로 뛰어가고 싶었지만, 고연주의 말대로 느긋하게 사태를 주시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서서히 밝혀질 일들 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시선을 돌리자 어느새 일행들은 모두 일어서서 환영회 준비를 돕고 있었다. 고연주는 대부분의 음식을 마쳤는지 주방에서 나와 이리저리 지시를 하고 있었고, 사용자들은 그에 따라 탁자를 옮기거나 음식을 놓고 있었다. 간간이 술도 보이는 게 오늘 아주 작정을 한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하연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후 차분히 입을 열었다. “오늘 고생하셨어요. 그럼 우리도 그만 가서 도울까요?” “고생은요. 더 정확하게 알아내지 못해 죄송해요. 호호. 그럼 이만 일어나요. 괜히 눈치가 보이네요.” 나와 그녀는 서로 살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하연은 혼자서 낑낑 테이블을 옮기는 안솔을 거들러 달려갔고, 나는 팔짱을 끼고 있는 고연주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어디 클랜인지 알고 있는데~.” 나와 하연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듯, 그녀는 내가 다가서자마자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나는 태연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오늘 아침에 그녀 때문에 당황했던 일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해서, 나는 그녀에게 한가지 부탁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사용자 고연주. 부탁이 있습니다.” “어머. 사용자 김수현이 부탁이라니 황공하네요. 도대체 어떤 부탁이길래 그래요?” “2층에 카오스 미믹을들 널어 놓았는데, 그것들 좀 가져와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제 슬슬 개봉할 때가 된 것 같아서….” “당장 다녀올게요.” 그녀는 잠시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어지간히도 열고 싶었는지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내 눈 앞에서 사라졌다. 아까 들렀을 때 혹시 몰라 내부 청소를 조금 해뒀으니 큰 위험은 없을 것이다. 다만, 2층에 널어 놓은 카오스 미믹이 있는 방이 어떻게 변했는지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윽고. “김~수~현~!” 몇 분의 시간이 흐르자 위층에서 나를 크게 부르는, 고연주의 뾰족하게 늘어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카오스 미믹들을 든 채 계단을 재빠르게 내려오는 모습을 보며 나는 능청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맞아 주었다. ============================ 작품 후기 ============================ 하아. 분명 습작에 올려야 했는데, 자정 연재분 이었는데 왜 연재 작품에 올렸을까요. 미치겠네요. 오늘 발표 과제 끝내야 하는데. 작정하고 점심때부터 썼는데 제가 왜, 하필 이런 날. 아;;; 『 리리플(168회) 』 1. 破天魔痕 : 1등 축하 드려요…. ㅜ.ㅠ 엉엉. 2. 오피투럽19 : 김수현이 말합니다. 누구 맘대로! 3. 패배 : 아니요. 다른 대륙별로 외국인도 나옵니다. 미국, 영국, 일본인들 입니다.(서, 남, 동대륙 순 입니다.) 4. 창궁무한 : 그 부분도 아주 재미있을 겁니다. 처형의 공주의 등장을 기대해 주세요. 후후. 5. POWERED : 다음회에 미믹 열어요. 아. 168회 리리플이니 171회에 열겠네요. :) 『 리리플(169회) 』 1. 破天魔痕 : 혹시 몰라서 168회 확인 했습니다. 두 번 연속 1등 하셨더라구요. 축하 드립니다. :D 2. dark기사 : 하렘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너무 많은건 제가 싫어서요. 그냥 적당히 여러명과 이어나갈 생각은 갖고 있습니다. 3. juan : 하하. 고연주랑 응응은…. 네. 아마도 곧 나오겠죠. 나올지도 몰라요. 하하하. 4. GradeRown : ㄴㄴ해요. 분명 하연이랑은 맛보기 정도로 넘길 예정 이지만, 고연주는 그래도 조금 더 할애를…. 응? 제가 지금 무슨 소리를! 5. 악마신전 : 낄낄. 나올만한 아이템들은 대강 정해 두었습니다. 이제 구체화만 하면 되는데, 문제는 오늘 자정 연재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죠. 하아.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71 / 0933 ---------------------------------------------- 예상치 못한 만남(2) 우리들은 테이블 8개를 이어 붙였다. 너무 쓸데없이 길게 붙이지 않았나 한숨을 쉬었는데, 고연주는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요리들을 잔뜩 만듦으로 내 한숨을 날려 주었다. 각자 자리를 잡는 도중 안솔의 입가에 양념이 살짝 묻어 있는걸 보니, 아마 음식을 옮기면서 배가 고파 몇 개 집어 먹은 것 같았다. 비비앙이 그 사실을 지적하자 일행들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고, 안솔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참고로 비비앙은 웃지 않았다. 아마 정말로 화를 낸 것 같았다.) 고연주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면서 어차피 곧 여관과 음식 재료들을 정리해야 하니 요리는 최대한, 마음껏 먹는 게 자신을 돕는 거라고 분위기를 띄워 주었다. 그 말을 일행들은 조금도 사양하지 않았다. 아니, 사양 정도가 아니었다. 내가 숟가락을 들고 한 입 먹는 순간 애들은 오늘 하루 동안의 배고픔을 보상하려는 듯 걸신 들린 사람처럼 달려 들었다. 거기에 술이 몇 순배 도니 <절규의 동굴>을 탐험하는 동안 알게 모르게 쌓였던 침체된 분위기가 단번에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다들 어느 정도 실컷 먹고 마심으로써 배를 채우자 캐러밴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카오스 미믹(Chaos Mimic)으로 쏠렸다. 안 그래도 발견 당시부터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었는데, 눈 앞에 청소가 완료된 놈들이 보이니 이제는 아예 애원하는 눈길로 내 입술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이제 슬슬 개봉하려고 했었기 때문에 미미하게 웃은 후 의자에 축 늘어져 있는 두 놈을 잡아 들었다. 그 때. 누군가 내 옷깃을 꾹꾹 잡아 당기는 게 느껴졌다. 흘낏 고개를 돌리니 술을 한 잔 마셨는지 안솔이 얼굴이 벌개진 채 양 손으로 내 옷을 쭉쭉 당기고 있었다. 그녀는 살짝 취한듯한 목소리로 어눌하게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이…. 나, 나도 할래애…. 나 엄마 미미익…. 엄마 미미익…. 나도 하고 싶단 말이야….” 대충 앞 뒤 문맥을 듣고 해석한 결과 자신도 미믹에 있는 보물을 꺼내고 싶다는 소리인 것 같았다. 어차피 청소를 완료한 녀석들 이었기 때문에 나는 부담 없이 한 놈을 들어 올렸다. 물론 두 개중 아주 약간 크기가 작은, 안솔의 말마따나 <엄마 미믹>인 것처럼 보이는 녀석을 넘겨주었다. 안솔이 선수를 쳐버리자 애들 사이에서는 분분한 소란이 일었다. 남은 하나를 자신들이 하겠다고 서로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안현과 이유정뿐만 아니라 심지어 비비앙까지 끼어든 싸움 이었으나, 나는 가장 먼저 하고 싶다고 말한 유정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모든 논란을 종식 시켰다. 이윽고 각자 하나씩 미믹을 받아 든 둘은 신나는 얼굴로 중앙 한편에 텅 빈 공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미 미믹에 무검과 엘릭서를 하나씩 넣어둔 터라 큰 걱정은 없었다. 곧 양 쪽으로 떨어져 자리를 잡은 둘은 꾹 닫힌 상자의 입구를 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일행들은 반대로 모두 입을 닫았다. 쥐 죽은 듯 고요한 분위기가 여관을 맴돎과 함께 이유정의 “3, 2, 1….” 이라는 카운트 다운을 세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카운트 다운이 “0.”이 되는 순간, 둘은 동시에 홀 플레인 최고의 보물 상자를 거꾸로 뒤집었다. 촤르르르르르르르! 퉁! 퉁! 텅! 텅! 예전에 아가 미믹을 쏟을 때와는 달리, 무언가 둔탁한 소리들이 울려 퍼지기 시작 했다. 역시 내 예상대로였다. 엄밀히 말하면 화폐나 보석 종류는 예전처럼 넓은 물줄기를 보이지 못했다. 그러나, 반대로 묵직해 보이는 것들이 종종 떨어지는 게 보이고 있었다. 분명 그것들은 돈이나 보석과는 가치를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장비들 이리라. 아기와는 달리 진짜 가치를 알아 보는, 나잇값을 하는 미믹들을 보며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토해내는데 몇 분까지 걸리지는 않았다. 무게가 나가는 것들을 포함해 쏟아지던 물줄기들은, 이내 빠르게 그 너비가 줄어들고 있었다. 화폐와 보석의 양이 적은 대신 다른 것들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 이었다. 이윽고 길고 얇은 나무 상자를 토해낸 아빠 미믹과 둥근 방패를 토해낸 엄마 미믹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아무것도 흘러 나오지 않았다. 이유정과 안솔은 연신 뒷부분을 팡팡 때렸지만 쿨럭 대기만 할 뿐 나오는 것들은 먼지 뿐 이었다. 그리고, 일행들은 내가 놀랄 정도로 매우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 했다. 이미 사전에 말을 맞춰 논 듯 애들은 빠르게 화폐화 보석들을 걷어 내고 장비들을 옮기기 시작 했다. 얼마나 급했는지 안현은 금화가 조금 많이 쌓인 곳이 있으면 뻥뻥 걷어 차는 모습까지 보여 주었다. 지금 당장 10골드가 없어 숙식 해결이 불가능한 사용자들이 보면 비명을 지를 행태를 몸소 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하연, 신상용, 비비앙은 사이 좋게 물품 감정 주문서를 손에 가득 쥔 채 애들이 하나 둘 옮기고 있는 장비를 향해 걸음을 걸었다. 곧이어 고연주 또한 흥미로운 얼굴로 그 사이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나는 여유롭게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먼저, 금화와 보석들을 계산 했다. 저번에는 금화만 6만 골드에 보석은 그 이상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와 비교하면 이번에는 확실히 적었다. 두 놈 모두 합쳐 나온 금화는 3만 골드를 겨우 넘기고 있었고, 보석은 그나마 괜찮게 있는 편 이었다. 최상급 보석들로만 이백 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아마 지금껏 모은 보석들을 전부 합치면 일천 개가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히 어마어마한 수량으로 볼 수 있었다. 그렇게 간단히 금화와 보석을 계산한 후 나는 곧바로 묵직해 보이는 것들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애들이 하나씩 따로 모아두고 있는 터라 한꺼번에 보기에 상당히 편했다. 나는 일단 가장 가까이에 있는 투구를 바라 보았다. 은빛으로 빛나는 투구는 철판을 이리저리 구부려 맞춘걸 보아하니 헬름(Helm) 종류인 것 같았다. 상단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붉은 실 장식이 인상적 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브리건딘(Brigandine)형 갑옷이 보였다. 단단하고 신축성 좋은 가죽 위로 작은 금속판을 리벳으로 몇 겹 박아 넣고, 다시 그 위를 가죽으로 덮은 미늘 갑옷의 형태를 갖고 있었다. 언뜻 봐서는 갑옷을 입었는지 그냥 가죽옷을 입었는지 확인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계속해서 장비들을 갖다 놓는 애들을 보며 나는 제 3의 눈으로 천천히,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 했다. 그러자 곧 허공으로 여러 메시지들이 우수수 떠오르기 시작 했다. 『용맹의 투구(Helm Of Courage)』 설명 : 미스릴(17%)이 다량 함유된 마법 투구 입니다. 상단에 휘날리는 붉은 장신의 과거 마법사들이 득세하기 전, 기사들이 성지로 불린 용맹의 기사단의 상징 입니다. 투구를 착용한 사용자는 공포, 저주 등 상태 이상 효과에 대해서 면역 능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만, 그 효과는 투구를 착용했을 시에만 발휘 되며 최고 강도는 해당 사용자의 마력 능력치에 따라 변화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태양(Mighty Sun)』 설명 : 고대를 넘어 아득한 과거 시절, 홀 플레인에서는 태양의 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무리들에 의해 침략을 받은 신전은, 한 명의 영웅을 내보내 그들과 대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영웅은 적들을 맞아 용감하게 싸웠지만, 끝내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태양의 신은 사후 그를 기리는 뜻으로 갑옷에 작은 축복을 내렸습니다. 태양이 떠 있는 동안에 착용자는 내구 능력치가 소폭 상향(+5) 합니다. 기본 물리 방어력도 상당하지만 신의 축복으로 인해 마력 능력치 75 이하에서 발생한 마법 공격에 대해서 감소 방어 판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 효과는 갑옷을 착용했을 시에만 발휘 되며 사용자의 마력 능력치에 기반 합니다. 『호프론의 전설(Legend Of Hoplon)』 설명 : 직경 60 센티미터의 너비를 가진 둥근 대형 방패 입니다. 고대를 넘어 아득한 과거 시절, 최강의 군대라 불리었던 병사들이 사용한 방패 입니다. 그 중 호프론의 전설은 친정을 나선 왕을 호위하는 정예 병사들이 사용하던 것으로, 당시 만들어진 방패들 중 최강의 방패라 칭송 받던 최고의 방어 무구 입니다. 사용자가 감당할 수 있다면 어떠한 물리적 타격이나 마법적 타격을 반사시킬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능력은 사용자의 마력 능력치와 행운 능력치에 기반 합니다. 『행운의 네 잎 클로버(A Four - Leaf Clover)』 설명 : 행운을 불러온다는 설이 있는 꽃, 네 잎 클로버(A Four-Leaf Clover)가 일 년에 한번씩 맺는 물방울을 열 번 모아 만든 반지 입니다. 외관상 대단히 아름다우며, 착용자의 몸을 보호하는 기능이 있습니다.(상세 : 항상 일정 온도 유지, 저주, 오염 계열 정신 마법에 일부 저항 판정.) 행운 능력치 90 이하의 사용자가 착용하면 해당 능력치의 소폭 상향(+2)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TOPG(트윈 헤드 오우거 파워 건틀릿(Twin Head Ogre Power Gauntlet))』 설명 : 초목의 왕 오우거의 아류 트윈 헤드 오우거로 만든 장갑 입니다. 인간이 아닌 솜씨 좋은 대장장이와 전설의 현자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장갑 입니다. 착용자의 근력 능력치를 <무조건> 소폭 상향(+2)시켜 줍니다. 장갑 내 잠들어 있는 능력인 <분노>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분노 : 장갑에 잠들어 있는 고유 능력. 착용자의 순수 체력이 30% 이하로 하락했을 때, 사용자는 분노에 물들어 근력, 체력, 내구, 민첩이 소폭 상승 합니다. 다만, 현 장비는 어떤 마법적 처리로 인해 착용자의 정신을 흩뜨리지 않고 <분노>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코트 오브 플레이트(Coat Of Plate)』 설명 : 외피도 미스릴로 멋들어지게 장식해서 연회에 사용해도 좋을 것 같은 일체형 코트 플레이트 입니다. 다만 만든 이의 취향이 듬뿍 들어가 일반적인 갑옷 형태가 아닌 가죽 코트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실전용으로 사용해도 될 만큼 높은 물리 방어력와 약간의 마법 방어를 갖추고 있지만 무거운 게 단점입니다. 자체 복원 기능이 있습니다. 『파사(破邪)의 활』 설명 : 파사(破邪) - 첫 번째의 날개. 나쁘고 그릇된 기운을 깨뜨리는 권능이 담겨 있습니다. 마(魔)와 관련한 기운에 대해서는 압도적인 공격력을 자랑 합니다. 다만, 파사(破邪)의 권능은 사용자 본인의 마력 능력치에 기반함에 따라 최대 공격력의 한계는 있습니다. 『하늘의 영광(Glory Of Heaven)』 설명 : 하늘의 영광이라는 이름을 가진 흑색 도복 입니다. 고대 홀 플레인에 악명 높았던, 암수 거미 괴물 중 수놈 아크라네드가 토해낸 실로 짠 옷 입니다. 당시 거미를 토벌 후 이 옷을 신전에 바침으로써 영험한 능력을 얻었습니다. 어지간해서는 베어지거나 찢어지지 않으며, 물리 방어에 있어 굉장히 탁월한 방어력을 갖고 있습니다. 자체 정화, 복원 기능이 있습니다. 『태양의 영광(Glory Of Sun)』 설명 : 태양의 영광이라는 이름을 가진 붉은색 허리띠 입니다. 고대 홀 플레인에 악명 높았던, 암수 거미 괴물 중 암놈 아라크네가 토해낸 실로 짠 옷 입니다. 당시 거미를 토벌 후 이 옷을 신전에 바침으로써 영험한 능력을 얻었습니다. <하늘의 영광>과 같이 입으면 영험한 기운이 서로 반응을 일으켜 비로소 본 힘을 발휘 합니다. <하늘의 영광> 위에 허리띠를 두르면 높은 수준의 항마력이 생성 됩니다. 다만, 이 능력은 사용자의 능력 기반이 아닌 두 옷의 반응으로 이루어지는 현상이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늘리거나 줄일 수 없습니다. 『영약(체력)』 설명 : 체력 능력치 80포인트 이하의 사용자가 복용할 시 총 4 포인트 만큼의 포인트가 상승합니다. 『무검』 설명 : 고대 시절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보이지 않는 검. 사용자에게 귀속 되는 기능이 있습니다. 실체는 정령계에 존재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차원에 있는 존재를 타격할 수 있으며 일정한 조건을 만족시킨다면 현세에 검신을 소환시키는 것도 가능합니다. 절삭력이 굉장히 뛰어나며 웬만해서는 부러지지 않는 튼튼함을 자랑합니다. 또한 전 속성에 대해서 100%의 마법 공격과 마법 방어를 소화해낼 수도 있습니다. 자체 복원 성능이 있습니다. 『엘릭서(x3)』 설명 : 모든 상태 이상 회복. 모든 체력과 마나 회복. 죽지만 않은 상태라면 어떤 사람이든 살릴 수 있는 효능이 있습니다. “…….” 나는 잠시 읽는 것을 멈추고 머리를 부여 잡았다.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이번에 나온 물품들이 내 예상을 뛰어 넘을 만큼 엄청난 장비들 이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처음 용맹의 투구를 볼 때만 해도 이 정도 퀄리티만 유지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주루룩 나온 장비들 대부분이 맨 처음 본 용맹의 투구를 앞지르고 있다고 봐도 무방 했다. 오죽하면 하나씩 읽고 있는 내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어. 나 또 하나 찾았다. 기다란 나무통 이네. 안에 뭐라도 들었나 봐.” “나도 하나 발견! 그런데 이건 뭐지? 꼭 타조 알 같아.” “앗 따거! 히잉…. 뿔에 찔렸어요오.” “에엑. 이 더러운 주머니는 뭐야. 에비.” 툭. 툭. 툭. 툭. 방금 열두 개의 장비를 확인 했는데, 또 하나씩 갖다 놓는 애들을 보며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더는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아 일단은 장비 목록을 확인하기로 했다. 도대체 또 뭐가 나왔길래…. 『일월신검』 『알(페가수스의 알)』 『유니콘의 뿔』 『레어 클래스(황혼의 무녀)』 “쿨럭! 쿨럭쿨럭!” 유니콘의 뿔 까지는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맨 마지막 목록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크게 기침을 하고 말았다. 도대체 저 주머니 안에 뭐가 들어 있길래 레어 클래스라고 목록이 뜨는 거지? 황혼의 무녀를 읽자마자 나는 재빨리 머리 속을 헤집었지만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1회차 시절에 등장하지 않은 클래스인 것 같았다. 이제는 더 놀랄 힘도 없었다. 해서, 나는 가까이 있던 의자에 살짝 엉덩이를 붙였다. 기쁘기는 했지만 한꺼번에 너무 큰 행운이 찾아오다 보니 되려 불안해질 지경 이었다. 아니, 무검은 그렇다 치고 엘릭서는 두 개가 또 나오는 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내가 있는 힘을 다해서(?) 놀라고 있는 동안 애들은 장비를 마치 신주 단지 모시듯이 정렬해 놓고, 금화와 보석을 따로 구분하고 있었다. 꼼꼼히 세는 게 아니라 대충대충 구분한 후 미믹에 쑤셔 넣는걸 보니 이제 그것들에는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 모양이다. 또한 세 명의 마법사는, 각자 주문서를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장비를 감정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품 속에서 조용히 연초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상하게 뭔가 불안한 기운이 가시질 않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최대한 빨리 뮬을 떠나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 아마 그때 나는 모르고 있다기 보다는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앞서 나온 장비들에 정신이 팔려 불안감을 애써 무시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 느꼈던 불안이 곧 현실로 다가올 것 이란 걸 꿈에도 알 수 있을 리 없잖은가. 홀 플레인에서 가장 만나고 싶지 않았던. 조금 정확히 말하면 초반에는 기필코 피하고 싶었던 사용자가 곧 나를 찾아오리란 사실을 전혀 모른 채, 그저 멍하니 장비들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 같다. ============================ 작품 후기 ============================ Reader “어제 실수를 했다고 들었다.” 로유진 “소신의 불찰 이나이다. 심려치 마소서.” Reader “의도치 않은 연참을 했더구나. 좋기는 하다만, 자정 연재는 가능 하겠더냐.” 로유진 “…해보이겠습니다.” Reader “과제가 산더미라 들었다. 그 말에 추호의 거짓도 없는가?” 로유진 “신에게는 아직 꺼지지 않는 화면과, 타자를 칠 수 있는 손가락이 남아 있사옵니다.” Reader “정녕, 정녕 가능하단 말이더냐.” 로유진 “신의 몸이 살아 있는 한, 과제 따위가 감히 자정 연재를 어그러뜨릴 수 없을것 입니다.” 『 리리플 』 1. 破天魔痕 : 헐 또 1등 하셨네요. 이렇게 쉽게 3연속 1등을 하신건 3번째 이신것 같습니다. 축하 드립니다. 휘을님, MT곰 님, 쿠로시온님의 뒤를 이은 새로운 본좌의 탄생 인가요? 2. dydy0114 : 으악. 잡혔어요. 으악으악. 하지만 자정 연재로 탈출 성공! 3. 무협소설광 : 허허. 그런 말이 있었군요. 허허. 허허허. 하아. ㅜ.ㅠ 고통을 치료해줄 사람 어디 없나. 이렇게 놔두다간 의미 없이 덧나.(?!) 4. 혈화 : 고맙습니다. 오늘 진정 초인이 된것 같습니다. 발표 자료랑 과제 PPT 50장을 후다다다다닥 검토 했어요. ㅋㅋㅋㅋ. 5. 아클레오 : NO. 완결은 구상하기는 했는데, 알려드리기에는 조금 그래요. 실은 원래 구상한 엔딩은 있었는데요. 중간에 한 번 바뀌었지요. 하하하. 그리고 바뀐 주체에 김xx이 있습니다. 더 이상은 스포! 6. 신사동코지로 : 쿠폰 감사 합니다. (__) 말투가 특이 하세요. ㅋㅋㅋㅋ. 7. 악마신전 : 오늘 일부 공개 됐습니다. 참고로 하늘의 영광 하나만 해도 지금 유정이가 입고 있는 옷(셔츠)랑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좋습니다. 낄낄. 8. Groover : 카오스 미믹의 안에 있던 혼돈들이 잔뜩 깔려 있었을 겁니다. 고연주의 비명. 여관 다시 팔때 꽤나 고민 하겠죠. ㅎㅎㅎㅎ. 9. 현오 : 하하. 감사 합니다. 과제 따위에 소설이 지지 않도록 항상 노력 하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제발 그만 과제좀 내주세요! 제발! 엉엉!(이곳에서라도 절규를.) 10. letzgo02 : 하하. 전자 출판 계약은 했습니다. 아직 나오지는 않았구요. 아마 나올때즘에는 따로 공지를 해드릴것 같네요. 그리고 그 때는 엄청난 수정을 거친 후 나올 예정 입니다. :) 11. GradeRown : 흥부는 아니고, 알이 나왔습니다. ㅎㅎㅎㅎ. 손가락 쪽쪽(?)이 하드한 플레이라니. ㄷㄷㄷㄷ.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72 / 0933 ---------------------------------------------- 예상치 못한 만남(2) 애들이 대충 금화와 보석을 모두 집어 넣을 즈음, 마법사들도 장비 감정을 모두 마친 것 같았다. 이윽고 감정 주문서에 적힌 장비 설명서를 읽은 일행들은 하나같이 놀라운 탄성을 터뜨렸다. 무엇보다 또 다시 레어 클래스를 발견 했다는 것은 정말로 기적이 따르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 이었다. 매우 고무적인 일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도대체 1회차 시절의 나는 왜 이렇게 발견할 수 없었을까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기분은 곧바로 떨쳐버리고,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일행들이 들뜨는 모습들을 바라 보았다. 1회차는 어디까지나 과거에 불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2회차, 즉 현재가 중요 했다. 한동안 요란한 말들이 오고 갔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일행들은 다들 긴장한 낯빛으로 서로를 주시하기 시작 했다. 워낙 좋은 물품들이 나오다 보니 누가 어떤 장비를 가져갈지에 대해 민감한 기분을 느끼는 것 같았다. 속으로 어떻게 장비를 분배할지 정리하던 도중 문득 조금 아쉬운 마음이 일었다. 지금 나온 장비들은 내가 모든 능력치들 중에서 왜 그렇게 마력을 강조 하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마력 능력치 1 포인트에 벌벌 떠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왜냐하면 근접 계열, 그것도 탱커들이 착용하는 장비들이 많은데 그렇다면 우리 일행들 중에서 안현이 가장 제격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비들에는 <사용자의 마력 능력치에 기반한다.>라는 조건이 붙어 있다. 예를 들어 안현이 호프론의 전설이라는 방패를 든다고 해도, 녀석의 마력 능력치를 웃도는 사용자에게 타격을 입으면 반사 효과는 크게 감소할 수 밖에 없다. 아마 내가 어느 정도 힘을 담아 후려 갈기면 반사는커녕 그대로 나동그라질 것이다. 물론 추가로 행운 능력의 보정을 받는다고는 해도 애초에 불확실한 면은 제외를 하고 생각하는 게 맞았다. 아무튼 지금 당장은 아쉬운 면이 있지만 그 말인즉슨 애들이 성장함에 따라 더 큰 효율을 낼 수 있는 장비들이라는 소리였다. 그렇게 대충 정리를 끝내고서 막 분배를 시작하려는 찰나였다. 가만히 나를 응시하던 정하연이, 갑자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오며 입을 열었다. “수현. 이번에 다른 사용자들을 대표해서 건의하고 싶은 게 있어요.” 나는 막 열려던 입을 닫고 하연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얼굴은 침착했지만 눈동자에는 결연함이 서려 있었다. 대표한다는 말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일단은 잠자코 들어보기로 했다. “지금껏 얻은 성과들은 리더를 맡고 있는 수현의 결정 아래 이루어졌어요. 물론 그것이 대장의 고유 권한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요. 그래도 이번만큼은 저를 비롯해 다른 사용자들의 의견도 반영하고 싶어요.” “그, 그래요 형. 이번에는 우리들의 의견도 반영하게 해주세요.” 하연의 말이 끝나는 순간 안현이 곧바로 동의를 표했다. 그리고 곧이어 안솔, 이유정, 신상용, 비비앙도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하연의 의견에 힘을 실어 주는걸 볼 수 있었다. “흠.” 나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고는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클랜으로 발돋움 하면서, 그리고 소수 정예 클랜을 지향하면 다시 재조정해야 할 문제들 이었다. 조금 일찍 터져 나온 게 의외라면 의외였다. 그래도 지금껏 최대한 많이 몰아 주었다고 생각 했었는데 약간 머쓱한 감정이 없잖아 있긴 했다. 그래도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 이고는 어디 한 번 얘기해 보라는 듯 한 걸음 물러서 주었다. 우선 얘기라도 들어볼 요량 이었다. 그러나 일행들은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내 허락이 떨어지는 순간 서로를 쳐다보더니, 이내 각자 동시에 앞에 놓여 있는 장비들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들을 보면서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용자 개인의 클래스나 능력치에 맞는 것을 골라야 하는데, 지금 하나씩 집은 것을 보니 다들 중구난방 이었다. 특히 하연이 투구를 든 것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아 나는 지금 뭘 하는 거냐고 묻기로 했다. 그렇게 천천히 입을 열려는 순간 이었다. “이얏!” 다시금 입을 열려던 나는, <하늘의 영광>을 든 채 내게로 달려드는 유정을 보며 당황하고 말았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고연주를 제외한 일행들은 모두 내 주위로 몰려들어 나를 미친 듯이 더듬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반항하려고 했지만, 여러 손이 나를 붙잡고 있는 상태였고 근거리에 있는 만큼 크게 힘을 쓰면 다칠 것은 자명한 일 이었다. 아직 상황 파악을 못한 만큼 과하게 손을 쓸 수는 없었다. “너, 너희들 지금 뭐 하냐. 하연. 투구 치워요! 왜 억지로 씌우려는 건…. 야, 너 가슴에서 손 안 치울래?” “가만히 좀 있어 보세요. 자꾸 빗나간단 말이에요.” “맞아요 형. 또 이번에는 형께 다 드릴 거란 말이에요.” “아니 그게 무슨….” “그대로 형한테 맡기면 또 우리들한테 줄 거잖아요.” “와아. 와아. 오라버니 옷을 벗겨라아. 헤헤헤.” “김수현! 이거 체력 올려준대! 얼른 먹어봐! 아~. 어서 아~.” 나는 혼란스러운 와중에 고개를 돌려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고연주를 돌아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 했는지 미묘한 미소만 흘리고 있었다. 그 미소에 되려 불안해진 나는 얼른 도움을 요청하는 시선을 거두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게 고연주의 감정을 자극한 것 같았다. “호호. 모두 살짝 비켜보렴. 원래 남자 옷은….” 곧이어 그녀의 신형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보이더니. “이렇게 벗기는 거란다.” 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내 몸을 무언가 훑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러자 곧바로, 간단하게 입고 있던 상의가 절반으로 북 찢어지는걸 볼 수 있었다. 일행들은 고연주의 솜씨에 환호 했다. “수현. 머리 좀 이쪽으로….” “형. 이것부터….” “와아. 와아. 드디어 오라버니 가슴이….” “화내지 말고 이거부터 먹….” 내 옷이 찢겨져 나가고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순간 내 상체의 알몸은 고스란히 노출이 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일행들이 지르던 환호도 점차적으로 줄어드는걸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내 몸을 내려다 보았다. 내구가 높아진 만큼 예전보다는 나아 졌지만, 그래도 온 몸은 희미한 상처들로 가득 했다. 오래 전에 입은 상처들은 차마 원래대로 되돌아 가지 않는 모양 이었다. 심지어 하연도 놀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일전에 그녀랑 한 번 잠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어두운 방 안에서 관계를 가진 터라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로비 천장에 달린 라이트 스톤이 비추는 빛 아래서 내 몸의 무수한 상처들은 일행들에게 여과 없이 보여지고 있었다. 신나게 떠들던 일행들은 어느덧 쥐 죽은 듯 다들 침묵 했고 얼굴에 어색한 빛을 띄우기 시작 했다. 그리고 그네들의 얼굴에는 공통적으로 미안함이라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나는 묵묵히, 뒤에서 유정에 의해 반쯤 걸쳐진 <하늘의 영광>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비비앙이 들고 있던 <붉은 허리띠>를 잡아 챈 후 <하늘의 영광>을 꼭 동여 매었다. 옷은 마치 내 몸에 맞춘 것처럼 아주 잘 맞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일행들의 얼굴을 천천히 돌아 보자 애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당황해 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비비앙은 볼을 긁적이며 무안한 얼굴을, 고연주는 입맛을 쩝 다시고 있었다. 이윽고 신상용이 크게 한숨을 내쉬는걸 기점으로 하연의 조그마한 목소리가 귓가로 들렸다. “수현. 미,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아, 아까 도시로 나갔을 때 다른 사용자들과 함께 입을 맞췄어요. 이번에 나오는 장비들은 웬만하면 수현에게 모두 몰아주자고…. 수현이 항상 양보하기만 했으니 이번에는 어떻게든 드리고 싶었는데….” “그 마음은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이렇게 하실 필요는 있었을까 싶네요. 말로 하셔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연은 내 말을 듣더니 이내 한 걸음 살짝 물러서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입술을 꾹 깨물고, 눈망울이 덜덜 떨리는걸 보니 곧 눈물이라도 쏟을 기세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그녀의 어깨를 두어 번 다독여 주었다. 솔직히 불쾌한 감정이 들기는 했다. 그러나 상처를 보이는 게 큰 누가 되는 것도 아니고, 다들 좋은 의도에서 한 행동이기 때문에 이번 한 번은 그냥 넘기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런 내 기색을 눈치 챘는지 장갑을 들고 있던 신상용 또한 나를 보며 직각으로 허리를 숙였다. “리, 리더. 정말 죄송합니다. 사용자 정하연은 그저 대표로 나섰을 뿐 이 의견을 처음 낸 사용자는 아닙니다. 그리고 저 또한 찬성한 사용자 중에 한 명 입니다. 저희 딴에는 나름 좋은 생각이라고 여겼는데, 너무 우리들의 입장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렇게 까지 사과를 받으니 그나마 일었던 불쾌한 감정이 많이 사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일행들은 어디까지나 나를 생각해서 벌인 일. 행동 자체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나는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내 기분이 조금 가라 앉았다는 걸 눈치 챘는지, 곧 애들 대표로 나온 것 같은 유정이 입을 열었다. “오빠 미안해. 솔직이 이 의견을 맨 처음 낸 사람이 바로 나야. 신상용씨 말대로 사용자 정하연이 우리들을 대표했을 뿐이고. 그러니 내가 제일 잘못한 거야. 그래도….” 유정은 잠시 말을 멈추고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오물거리는 입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자, 계속 하라는 허락으로 알아 들었는지 유정은 침을 한번 삼키고 말을 이었다. “그 동안 나온 장비들이나 그런 것들 있잖아. 지금껏 오빠한테 간 건 반지 하나 빼고 아예 없었어. 그래서 이번에는 오빠한테 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랬어…. 미안해. 그래도 이제는 너무 우리들것만 챙겨주지 말고, 오빠도 몇 개 가졌으면 좋겠어. 예전부터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지금 오빠 몸에 난 상처들을 보니까 너무 마음이 아파.” 다른 사용자들은 딱히 다른 말을 달지는 않았다. 그러나 살짝 고개들을 까닥이는 게 다들 유정의 말에 동의하는 것 같았다. “…….” 신선한 기분 이었다. 1회차 시절 초보 사용자일 때는 캐러밴을 이리저리 전전하며 다니는 게 일상 다반사였다. 당연히 그 때는 어쩌다 좋은 장비나 물품들이 나오면 서로 가지려고 눈치를 보고, 견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알게 모르게 불평등한 분배를 받은 적도 있었고. 물론 그 때와 지금의 상황은 많이 다르지만, 그래도 이런 태도들을 보니 나름 생소한 감정이 들었다. 일행들은 아까처럼 요란을 떨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손에 쥔 물건들을 내게 들이밀고 있었다. 나는 살짝 헛기침을 하고는 조용히 그들이 건네 준 장비를 하나씩 몸에 걸치기 시작 했다. *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비로소 장비들의 분배를 마칠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근접 계열 장비들이 많이 나온 만큼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받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 했지만, 그들도 지금껏 받은 것들이 있기 때문에 딱히 별다른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유일하게 마음이 걸리는 사용자가 있다면 신상용 이었는데 나는 조만간 비비앙과 따로 자리를 마련할 생각 이었다. 슬슬 얘기를 들어보고, <키메라 연금술사>를 줄만하다고 판단 되면 그에게도 레어 클래스를 선물할 것이다. 이번에 나는 최고로 많은 수의 장비들을 분배 받을 수 있었다. 유정의 말대로 일행들은 이번에 마음을 단단히 먹은 듯, 전혀 욕심을 부리지 않고 서로 양보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우와. 오빠 정말 멋지다.” “칠흑색 도복에 붉은 허리띠라. 나름 잘 어울리네요. 호호.” “헤에…. 오라버니 멋있어요오.” 내 주변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여성 사용자들의 칭찬에 나는 멋쩍은 미소를 흘린 후 사용자 정보 창을 개방 했다. 일단은 변화한 능력치를 한번 살펴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수현(0년 차) 2. 클래스(Class) : 검술 전문가(Secret, Sword Specialist,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검(劍)의 주인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4) 7. 신장 · 체중 : 181.5cm · 75.5kg 8. 성향 : 질서 · 혼돈(Lawful · Chaos) [근력 96(+2)] [내구 92] [민첩 98] [체력 72] [마력 96] [행운 90(+2)] (능력치 포인트가 12포인트 남은 상태입니다.) < 업적(1) > 1. 통과 의례 보스 몬스터 < 고유 능력(1/1) > 1. 제 3의 눈(Rank : S Zero) < 특수 능력(1/1) > 1. 신검합일(Rank : EX) < 잠재 능력(4/4) > (능력 포인트가 1 포인트 남은 상태 입니다.) 1. 백병전(Rank : A Plus) 2. 쓰러질 수 없는(Rank : A Plus) 3. 심안(정)(Rank : A Plus) 4. 전장의 가호(Rank : EX) 엄밀히 말해서 이번에 카오스 미믹(Chaos Mimic)으로 인해 득을 본 사용자는 나와 안현 둘 뿐 이었다. 총 16개의 물품들이 나왔는데 그 중 절반에 해당하는 8개를 내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 목록들을 나열해 보면. 『행운의 네 잎 클로버(A Four - Leaf Clover)』 『TOPG(트윈 헤드 오우거 파워 건틀릿(Twin Head Ogre Power Gauntlet))』 『코트 오브 플레이트(Coat Of Plate)』 『하늘의 영광(Glory Of Heaven)』 『태양의 영광(Glory Of Sun)』 『영약(체력)』 『무검』 『일월신검』 이렇게 총 8개의 장비 및 물품에 대하여 나는 사용 권리를 받을 수 있었다. 남은 8개의 장비들 중 모두가 일행들에게 돌아간 것도 아니었다. 그 중 세 병의 엘릭서와 페가수스의 알, 유니콘의 뿔, 레어 클래스(황혼의 무녀), 파사(破邪)의 활, 호프론의 전설(Legend Of Hoplon) 또한 내가 관리 차원에서 보관하기로 했다. 당장에 사용할 수 있는 사용자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일행들에게 돌아간 물품은 두 개에 불과 했다. 용맹의 투구(Helm Of Courage)와 위대한 태양(Mighty Sun)이 바로 그것 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위대한 태양>에 조금 욕심이 나기는 했다. 하지만 결국 안현에게 양보하고 말았다. 내구 능력치가 체력 능력치 정도로 부족한 것도 아니고, 지금 입은 옷들이 활동하는 데는 훨씬 편했다. 무엇보다 안현을 딜탱으로 키우기로 마음 먹은 이상, 괜한 욕심을 부리기 보다는 안현에게 <위대한 태양>을 입히는 게 정답인 것 같았다. 결국 안현이 <위대한 태양>과 <용맹의 투구>를 가져감으로써 모든 장비 분배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한참 동안 상념에 빠져 있던 나는 아까부터 느껴지는 요상한 시선에 고개를 올려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리고, 나를 보며 헤실 헤실 웃고 있는 안솔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비단 안솔 뿐 만이 아니었다. 다들 무에 그리 기분이 좋은지, 입가에 가느다란 호선을 그린 채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심지어 하나도 받지 못한 사용자들도 나를 보면서 웃고 있는걸 보니 괜히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라면 그네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나 마음 속으로 서운한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을까, 아니면 성향이 다들 선해서 원래 그러는 건가 별 생각이 다 들 정도였다. 이 좋은 장비들을 본인이 가지지 못하게 되면 아쉬운 마음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내가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행들은 모두 만족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나는 의미 없는 한숨을 내뱉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리고, 내 손에 곱게 쥐어 있는 체력 영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지금 먹으면 당장 체력 능력치를 76 포인트까지 올릴 수 있다. 사용자 아카데미를 이수한 보상과 맞먹을 정도의 영약 이었다. 나는 곧바로 삼키지 않고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 보았다. 일전에 폐허의 연구소에서 능력치 70 포인트 이하의 사용자가 복용하면 체력을 2 포인트만큼 올려주는 영약을 얻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전에 GP에서 구매한 체력 전용 상승 영약을 덜컥 섭취함으로써 올릴 수 있는 기회를 날리고 말았다. 그때의 일을 타산지석으로 삼은 후 나는 곧바로 영약을 복용하는 일을 지양하고 있었다. 현재 남아있는 능력, 능력치 포인트를 올리지 않은 이유도 그와 비슷했다. 그때와 같은 과정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해서, 나는 비비앙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에게는 아직 비비앙의 영단, 벨페고르의 심장, 체력 영약 2개(70 이하 +2, 80이하 +4), 그리고 호렌스의 마정석이 있었다. 혹시라도 위의 재료들을 조합하면 더 나은 수준의 영약이 나올지도 모른다는데 얼핏 생각이 미쳤다. 나중에 신상용의 문제로 비비앙을 부를 때 같이 얘기는 꺼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덜컹! 끼이익. “저기…. 혹시 이곳에 0년차 사용자 김수현 이라는 분이 계시다고 들었는데요.”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조금 낯설지만 들어본 기억이 있는 목소리가 여관 입구를 타고 로비로 들어왔다. 청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나를 비롯한 일행들 전부는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내 시선이 닿은 곳에서, 차마 지금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용자를 볼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하하. 많은 분들이 민폐녀에 대해서 걱정을 하시네요. 아마 걱정하시는 부분에 대해서는 절대로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수현이가 바보도 아니고, 눈 뜨고 돈이나 장비들을 빼앗길 애가 아니랍니다.(애초에 그런 내용은 생각지도 않았어요….) 아, 어제 급하게 적다 보니 이전회에서 몇개 수정을 했습니다. 장비들 한두 개에 살짝 수정을 가했으니 크게 달라진 점은 없습니다! PS.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신분들 모두 감사 합니다. (__) 자정 연재에 성공한 탓인지 쿠폰이 우수수…. 황공하옵니다. :) 『 리리플 』 1. 쿠로시온 : 1등 축하 드립니다. 다시 1등을 탈환 하셨군요 축하 드립니다. :) 2. 사람인생 : 많이 슬프실것 같습니다. 부디 힘 내시기를 바랍니다. 그저 이 말 밖에 드릴 말씀이 없네요. 3. POWERED : 하하.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부분들은 이 챕터에서 나오지 않아요. :) 4. 현오 : 제, 제 엉덩이를 때리시면 아니 되옵니다. 고정하소서. 5. wooyu01 : 수현이 이번에 많이 받아 갔습니다. 그래도 애들한테 떨어지는 게 한두 개는 있어야 겠지요? :) 6. 어설픈후니 : ㅋㅋㅋㅋ. 아마 그러면 수현이 가만이 있지 않을거에요. 곧바로 검을 휘둘러서 되려 가지고 있는 장비들 다 탈탈 털어갈걸요. ㅋㅋㅋㅋ. 7. 음월마군 : NO. 무검은 가방에 넣어둔 거고, 행운은 90이하의 사용자에게만 효과가 있습니다. 8. 진지무적독자 : 수현이 바보 아니에요. 1회차 시절에 부랑자 죽이고 속옷까지 싹싹 벗겨 갖다 파는 녀석 인데요. ㅋㅋㅋㅋ. 너무 걱정하지 말아 주셔요. 9. RoCheu : 원래는 450~550회 정도로 잡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더 늘어날것 같습니다. 10. hohokoya1 :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쌍검도 사용할 수는 있습니다. 다만, 쌍검을 사용하면 한손 검을 사용할 때 보다 효율은 낮다고 볼 수 있습니다.(물론 수현이 정도면 크게 의미는 없지만 엄밀히 말해서 실력의 고저는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쌍검도 앞으로 몇 번 가볍게 사용할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한손 검을 비중으로 다룰 예정 입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73 / 0933 ---------------------------------------------- 예상치 못한 만남(2) “안녕하세요! 혹시 0년차 사용자 김수현 이라는 분이 이곳에 계신가요?”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고 정체를 확인한 그 순간, 나는 온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도대체 왜 네가 지금 여기에….” 라고 말을 내뱉을 뻔 했지만 입을 꾹 다묾으로써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 번 멍하게 변한 머리는 쉽사리 회복 되지 않았다. 그 놀라움이 너무도 커, 평소와 같은 냉정한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김수현 이라면 여기 이 사람인데요. 그쪽은 누구세요?” “아~. 역시 계시는구나~. 다행이다아. 아. 저는 이번에 소도시 뮬의 대표 클랜으로 새롭게 부임한 너도밤나무 클랜의 로드이며, 3년차 사용자인 유현아 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남성 사용자는 제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사용자인 차승현 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3년차 사용자 차승현 입니다.” 비비앙이 나를 척 가리키며 말하자, 유현아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옆에 서 있던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성도 시원한 목소리로 우리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여전히 나를 가리키고 있는 비비앙의 손가락을 단 매에 꺾어 부러뜨리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재빠르게 속을 가다듬으며 유현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연한 연갈 빛이 감도는 하늘하늘한 머리카락에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이는 청초한 소녀의 모습. 얼굴은 너무도 선하게 생겨 꼭 껴안아 보듬어 주고픈 충동을 일게 만들었다. 절로 목젖이 꼴깍 움직였지만, 나는 심안(정)의 도움을 받아 계속해서 마음을 다스렸다. 아마도 고유 능력 카리스마를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곧 그녀는 “잠시 안으로 들어가 얘기를 하고 싶어요. 들어가도 될까요?” 라고 말했다. 그리고 차마 내 대답을 듣기도 전 성큼성큼 내부로 걸음을 들였다. 해맑은 얼굴로 웃고 있는 그녀를, 나는 그저 하염없이 바라볼 뿐 이었다. * <성스러운 여왕> 유현아. <무신> 차승현. 둘 모두 내 기억에 있는 유명한 사용자들 이었다. 아니, 유명한 정도가 아니라 홀 플레인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주 긴 시간이 흐른 후의 일 이지만, 유현아는 추후 여러 갈래로 분열된 대륙에서 세 손 안에 꼽힐 수 있는 세력의 수장으로 성장하게 되는 거물급 사용자로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인복이 많아 휘하에 여러 능력 좋은 사용자들을 거느렸는데, 그 중에는 <천하무쌍> 즉, 근력 능력치 101 사용자와 유일하게 견줄 수 있는 <무신>이라 불리는 차승현, <미친년> 반다희, 그리고 마력 능력치 101 사용자를 예로 들 수 있다. 마력 능력치 <101> 사용자를 영입하는 건 조금 더 이후의 일 이었고, 차승현만 보이는 걸로 보아 아무래도 이 자리에 <미친년> 반다희는 데리고 오지 않은 것 같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눈 앞에 있는 두 명의 사용자는 결국 홀 플레인의 끝을 보지 못했다.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활동하기는 했지만 모두 비참하게 사망한 걸로 기억 한다. <무신> 차승현이 타 연합군과 갈등을 빚어 포위 공격으로 사망하고, 복수심에 눈이 멀어 토벌을 떠난 <성스러운 여왕> 유현아는 연합군의 계략에 걸려 참혹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녀는 대단히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들었다. 아마 포로로 잡힌 후 지속 되는 윤간에 견디다 못해 자살한 걸로 기억 한다. 당시 한창 세력이 강성 했던 그네들은 마력 능력치 101 사용자를 앞세워 한창 우리들을 압박하고 있었는데, 연전연승을 하다가 갑자기 돌아가서 이상하게 여겼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곧 상황을 파악한 한소영은 곧바로 해당 연합군과 일시 동맹을 맺었고, 함께 힘을 합해 빈 깡통만 남은 유현아의 세력을 깡그리 쓸어버릴 수 있었다. 이게 <성스러운 여왕> 유현아에 대해 대략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내용들 이었다. 개인적으로 유현아 라는 사용자에 대해서 평을 하자면 그냥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다. “병신.” 이라고. 간단히 말해서 삼국지에 등장하는 유비의 업그레이드 버전을 넘어 최종 진화 형 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바보 같이 착하고, 인정에 휘둘리고, 기회가 와도 잡기는커녕 오히려 뻥 차버려 남 좋은 일만 시키는 클랜 로드. 동료 또는 부하 입장에서 보면 속 터지는 인간 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이라고 하지만 어쨌든 본래 큰 세력을 이끌어갈 그릇을 가졌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능력 좋은 부하들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용자 유현아. 오죽하면 나중에 한 세력을 일구기 전까지의 그녀와 부하들의 행보를 보면 불쌍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 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고, 여기서 이용 당하고 저기서 이용 당하고. 그 와중에 자신의 목숨을 건사한 게 용하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딱 하나 장점이 있다면 주제에 인복이 있다는 점 이었는데, 아마 그녀 휘하에 기라성 같은 사용자들이 몰리지 않았다면 절대로 하나의 세력을 일굴 수 없었을 것이다. 일단은 지금 유현아가 왜 뮬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을 깨끗이 접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이 눈 앞의 민폐 덩어리와 엮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 가히 김전일과 코난을 능가하는 재앙을 스스로 불러 들이는 능력과 한술 더 떠 제 발로 찾아 들어가는 그녀이기 때문에, 절대로 피할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유현아가 이곳에 있다면 부랑자들이 단체로 해까닥 돌아 뮬로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앗. 고맙습니다.” 생글생글 웃으며 내게 말을 걸던 유현아는 고연주가 차를 갖다 주자 꾸벅 고개를 숙였다. 유현아의 뒤로는 차승현이 시립해 있었고, 내 뒤로는 애들을 비롯한 일행들이 테이블 주위를 둥글게 둘러싼 상태였다. 이내 차를 한 모금 홀짝 마시고 행복한 표정을 짓는 그녀와 감탄하는 차승현을 향해 나는 제 3의 눈을 슬쩍 활성화 시켰다. 일단은 기본적인 사용자 정보라도 확인해 볼 생각 이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유현아(3년차) 2. 클래스(Class) : 일반 검사(NorMal Sword Expert)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너도밤나무 5. 진명 · 국적 : 가시밭길을 걷다(Tread a Thorny Path)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3) 7. 신장 · 체중 : 168.8cm · 46.2kg 8. 성향 : 질서 · 순수(Lawful · Pure) [근력 71] [내구 75] [민첩 73] [체력 78] [마력 80] [행운 99] < 능력치 비교 > 1. 김수현 : 544 / 600~ [근력 96(+2)] [내구 92] [민첩 98] [체력 72] [마력 96] [행운 90(+2)] (능력치 포인트가 12 포인트 남은 상태 입니다.) 2. 유현아 : 476 / 600~ [근력 71] [내구 75] [민첩 73] [체력 78] [마력 80] [행운 99] (능력치 포인트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래서 내가 행운을 알 수 없는 능력치 라고 하는 것이다. 다른 건 볼 필요도 없지만 행운 하나만큼은 내 이목을 끌었다. 그러나 1회차 시절 그녀가 겪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절로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도대체 지금껏 뭔 짓을 했길래 진명이 저따위로 생성 됐는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앞으로도 펼쳐질 가시밭길 안에서 높은 행운으로 인해 헤쳐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얼핏 머리를 스쳤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말이다. “헤헤. 너무 그렇게 쳐다 보시면 부끄러워요.” 내가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하자 유현아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속으로 참을 인(忍)을 되뇌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요. 캐러밴 일행들과 어제 도시로 들어온 터라 아직까지 모르는 게 많습니다. 보아하니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아서요. 그 와중에 갑자기 도시의 대표 클랜을 자청하시는 분이 불쑥 찾아와서 그런지 조금 당황스럽네요.” 나름 뼈를 담은 말 이었지만, 대표 클랜 이라는 말이 자못 마음에 드는 모양 이다. 헤실 헤실 웃던 유현아는 이내 다시금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는 모습을 보였다. 고개를 숙임에 따라 그녀의 풍만한 가슴도 따라 아래로 무게가 쏠리는 것도 보였지만, 이어지는 청아한 목소리에 얼른 시선을 거뒀다. “그럼 다시 정식으로 인사 드리겠습니다. 이주일 전 뮬의 대표 클랜을 정식으로 인수 받았습니다. 신전의 거주민 분들께 얘기를 들었는데, 그 동안 무려 2개의 유적을 발굴하신 분들께서 계시다고 들어서요. 뮬의 대표 클랜을 맡은 입장으로써 감사하기도 하고 또 여쭙고 싶은 것도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불쑥 찾아 뵙게 되었습니다.” 마치 국어 교과서를 읽듯 딱딱 끊어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나 이곳으로 오기 전에 할 말들을 연습했어요.” 라는 티를 팍팍 풍기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아까부터 가슴이 턱턱 막히고 숨을 쉬기 힘들다는 느낌이 들었다.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 이 답답한 가슴을 해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용히 심호흡을 하며 태연을 가장한 목소리로 대꾸해 주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 입니다. 그렇다면 신전에 제출한 탐험 보고서를 보셨다는 말씀 같은데….” “네! 정말 깜짝 놀랐답니다. 사용자 김수현님이 제출한 탐험 보고서는 여기 있는 승현씨도 놀랄 만큼의 완성도가 굉장히 높았어요. 덕분에 조사를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고마워요.” 말 끝마다 고맙다, 감사하다 라는 말을 붙이는 게 상당히 거슬렸다. 그러나 일단 조사를 마쳤다는 사실을 듣자 일단은 가슴을 쓸어 내릴 수 있었…. 아니 잠깐만.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아니. 잠시 만요. 분명 3주 전에….” “그런데. 사용자 김수현님에게 외람된 질문을 하나 하고 싶어요." 막 조사에 관련한 문제를 꺼내려는 찰나 바로 화제를 돌리는 유현아를 보자 순간 귀싸대기를 후려 갈기고 싶었다. 아마 주변에 일행들이 없고 차승현도 없었다면 정말 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속으로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녀는 방실방실 웃는 얼굴로 말을 잇고 있었다. “사용자 김수현님께서는 현재 소도시 뮬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가요?” “…….” 갑자기 뜬구름 잡는 헛소리에 나는 어이 없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리고 턱 소리가 날 정도로 이마를 짚었다. 상대방과 대화를 하고 싶으면 논리는 제쳐두고서라도 최소한의 일관성을 지녀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모두 쌈 싸먹은 듯 그녀가 막무가내로 툭툭 내뱉는 말들은 하나씩 내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별 생각 없습니다. 저는 운 좋게 유적 몇 개를 발굴한 0년차 사용자에 불과 합니다. 소도시라고는 하지만 명색의 대표 클랜으로 오셨으면 휘하의 동료, 또는 부하들에게 의견을 구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물론 그렇기는 해요. 그러나 부끄러운 말 이지만, 현재 뮬은, 그리고 우리들은 현재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어요." “…….” “현재 황금 사자 클랜의 강철 산맥 원정으로 인해 개척 도시에 불과한 뮬이 발전을 하지 못하고 있어요. 물론 황금 사자 분들을 비난하는 건 아니에요. 그 분들은 아직 3년차에 불과한 저를 믿어 주셨고, 중임을 맡겨 주셨어요. 원정에 참가하지 못한 건 저 또한 속상하지만 믿고 맡겨주신 만큼 원정이 끝나고 돌아오기 전까지 최대한 노력할 생각 이에요. 하지만 그것이 언제 끝날지 모르고, 현재의 상황을 따져보면 뮬의 상황은 너무도 열악해요. 실력 있는 사용자들은 대부분 원정에 참가 했고, 남아 있는 사용자들은 아직 뮬로 오려고 하지 않아요. 바바라에서, 또는 남쪽 도시에서 그들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죠. 말씀하신 것처럼 저 또한 조금의 세력은 있지만 소도시를 이끌어 나가기에는 부족함이 많다고 스스로 느끼고 있어요.” 아니 그럼 맡지 마시던가요? 그리고 그쪽을 믿고 맡긴 게 아니고, 제가 보기에는 나중에 다시 회수하기 편할 것 같아 잠시 관리해 달라는 차원에서 던져준 것 같아요. 속으로 그녀의 말을 하나씩 반박하던 도중에, 나는 앗 차한 얼굴로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유현아가 뮬의 대표 클랜으로 온 적이 있기는 했다. 다만 그게 지금이 아니라, 바바라를 점령한 부랑자들을 퇴치하고 일어나는 내전 이후였다. 그리고 그때 즈음. 정확히는 2차 내전 시작 전에 어느 정도 개척 도시를 벗어난 뮬을 다른 클랜에게 빼앗겼던 걸로 기억 한다. 도시의 대표 클랜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기간이 짧았고,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바로 기억하지 못한 것 같았다. 조금 아리까리 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내가 헷갈렸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미래가 바뀐 게 아니라, 조금 형태를 바꿔서 앞당겨진 것이다. “역시 이해하고, 공감해 주시는군요!” 갑자기 힘찬 목소리로 말하는 유현아를 보며 나는 정신을 차릴 필요성을 느꼈다. 아마도 내가 앗 차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들자 자신의 말에 공감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도대체 뭘 말하고 싶어 이렇게 중구난방 식으로 말을 빙빙 돌리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래도 내 마음에서 변하는 건 없었다. “갑자기 이런 어려운 말씀을 드려서 죄송해요. 하지만 그만큼 지금 우리들의 사정이 굉장히 절박 하답니다. 하지만 강철 산맥 원정이 끝날 때 까지만 버티면 분명 좋은 날이 올 거에요. 그렇게 믿고 있어요.” “아 네.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그나저나 아까 말씀하신 조사는….” “사용자 김수현님.” 일월신검이 더 날카로울까, 아니면 무검이 더 잘 들을까? 또 내 말을 끊고 들어오는 행태에 짜증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 그러나 더 열이 받는 건, 눈 앞의 사용자가 여전히 방실방실 웃고 있다는 것. 아마도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도, 그리고 지금 하는 말들이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 들일 수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일단 나는 잠자코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유비도 삼고초려 끝에 가기 싫다는 제갈량을 울음을 터뜨림으로써 끌고 가지 않았는가. 이런 타입의 인간은 중간에 무엇을 말해도 듣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다 듣고 단칼에 거절하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것 같았다. “응~.”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그녀는 이윽고 마음속으로 결심한 듯 열망 가득한 눈길로 나를 바라 보았다.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 그녀의 고운 입술에서 나온 말은 확실히 내 귀에 들어왔고, 불길 했던 예상은 그대로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번 조사에서 사용자 김수현님과 휘하 캐러밴 인원들의 힘을 빌리고 싶어요.” “뭐라고요?” “아, 물론 갑작스러운 말이란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들어보세요. 나쁜 이야기가 아니에요. 혹시 생각이 있으시면요….” “……?” 유현아는 이윽고 살포시 웃더니, 살짝 고개를 들어 내 뒤에 서 있는 일행들을 천천히 둘러 보았다. 곧이어, 그녀는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바로 말을 이었다. “인원들 모두 뮬의 대표 클랜인 너도밤나무 클랜으로 들어오시는 게 어떠세요?” 그리고 그녀의 말이 의문문으로 끝나는 순간,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노파심에서 말씀 드리는데, 글의 흐름이나 주인공의 성격으로 보아 독자분들이 걱정하시는 <호구짓>은 절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러니 너무 답답해 하지 말아 주세요. :) PS. 코멘트로 다음에 이어질 수현의 말을 가장 찰지게 쓰시는 분이 있다면, 시험 준비는 잠시 접고 토요일에 한 편 더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D PS2. 오해하시는 분들을 위한 정보. 1. 미믹은 현재 두개 모두 개봉한 상태 입니다. 2. 근력 101 사용자와 차승현은 다른 인물 입니다. 동일 인물이 아니어요.(차승현 = 무신, 근력 101 사용자 = 천하무쌍.) 『 리리플 』 1. 쿠로시온 : 1등 축하 드려요. :) 조금 뜸 하신것 같았는데 요새 다시 1등을 탈환하고 계시는군요. ㅋㅋㅋㅋ. 2. 외로운솔로 : 이번 챕터 끝나고, 뿌려둔 떡밥 회수한 후 바바라로 갈 예정 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하하. 3. salmon : 네. 물론 그런 사용자들도 있습니다. 앞으로 많은 사용자들을 겪게 되니 기대하셔도 좋을것 같습니다. 4. 블라미 : 아하하. 독자분들의 상상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 는 뻥이구요 뒤에 설명 나오지 않은 물품들 설명할때 같이 할게요. ㅋㅋㅋㅋ. 5. 브라운귀때기 : 중복은 가능 합니다. 다만, 제한에 걸리면 먹어도 효과가 없어요. 6. GradeRown : NO. 101이 무난하게 쓸 수 있고, 90이 그나마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는 자격 입니다. 7. 테크노 : 음. 그렇네요. 일단 시험이 끝난 후 차분히 하나씩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200회 전에는 가능할것 같습니다. 하면서 다른 설정들도 올려볼게요. 8. CryingSword : ㄴㄴ. 오늘 쓰면서 저도 유현아라는 캐릭터가 상당히 짜증나더군요. 솔직히 그대로 검을 베어 목을 잘랐다. 이렇게 쓰고 싶을 정도 였어요. ㅋㅋㅋㅋ. 9. 암산 : 영약 아직 마시지 않았어요. 비비앙에게 연단을 부탁할 예정 입니다. :) 10. 괴물물리치자 : 정확하게 맞추셨습니다. 정답 입니다. 뮬의 클랜장 이었습니다. 하하.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74 / 0933 ---------------------------------------------- 예상치 못한 만남(2) “싫은데요.” “얘.” 내가 싫다고 입을 여는 동시에 나른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고연주는 어느새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대어 앉은 채 다리를 꼬고 있었다. 상당히 거만한 자세로 볼 수 있었는데, 앞에 있던 유현아와 차승현은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특히 유현아의 표정은 참으로 볼 만 했다. 내 대답과, 고연주의 말과, 그녀가 언제 자리에 앉았는지에 대한 사실들이 복잡하게 어우러져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에 아랑곳 않고, 고연주는 검지 손가락을 들어 유현아를 가리켰다. 정확히 말하면 손가락 끝은 유현아의 이마 부분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너 도대체 뭐니?” “아….” 고연주가 손가락을 한 번 살짝 까닥이자, 유현아의 얼굴이 뒤로 젖혀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쉽게 말하면 사람의 이마에 검지를 대고 삿대질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다만 고연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상태에서 마력을 쏘아 보낸 것이다. 당연히 당하는 입장에서는 아주 기분이 더러운 행동 이었다. 그러나, 고연주는 한 번으로 멈추지 않았다. “듣자 듣자 하니까 짜증나서 더 못 들어주겠네.” “아.” “그렇게 사람 말 끊어먹고 자기 할 말만 툭툭 던지는 건 누구한테 배워먹은 버릇이니?” “앗.” “대표 클랜으로 왔다고? 그런데 뭐 어쩌라고? 황금 사자 애들도 갈 때까지 갔구나. 너 같은 애를 뮬에 보내는걸 보니 앞 날이 훤 하네.” “읏! 자, 잠….” “입 다물어. 그리고 거기 뒤에 있는 애야. 가만히 있으렴. 함부로 움직이면 목에 상처나요.” 고연주가 말을 한 번 할 때마다 그녀의 고개는 사정 없이 뒤로 젖혀졌고, 그것을 본 차승현은 재빨리 움직이려는 기척을 보였다. 차승현의 능력은 확실히 좋다. 개인에 따라 성장 폭이 다른 만큼 앞으로 더 성장할 여지도 남아 있는 것 같고, 후에 좋은 장비들도 착용하면 확실히 오랫동안 <10강>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방심 했던 걸까, 아니면 거리가 너무 가까웠던 탓 일까. 어느새 유현아와 차승현의 목 부근 주위로 먹빛 그림자들이 날카롭게 칼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제서야 분위기를 눈치 챘는지 유현아는 입을 다물었고, 차승현은 믿을 수 없다는 눈동자로 고연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고연주 덕분에 나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얻을 수 있었고, 손을 뻗어 아직도 내밀고 있는 고연주의 손가락을 곱게 쥐어 주었다. “사용자 고연주. 그만 하시죠.” “리더가 그렇게 말씀 하신다면 얼마든지 거두죠. 호호” “에에! 고, 고연주라면 분명 그림자 여왕…!” “입 다물라고 했을 텐데?” 고연주가 다시 날카롭게 쏘아보자, 유현아는 다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이윽고 그네들의 목에서 그림자가 거두어지자 차승현은 우묵한 눈동자로 우리들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유현아는 십 년 감수한 얼굴로 자신의 목을 쓰다듬고는, 불안한 얼굴로 나를 쳐다 보았다. 그녀의 손가락 틈새로 목젖이 움직이는걸 보며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단 사용자 유현아에게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저…. 그 클랜 가입 건은….아니, 그 전에 <10강>에 이르신 분이 있으신 줄은 몰랐….” “아까 싫다고 했습니다. 헛소리는 이만 집어 치우시고요. 한가지 물어볼게 있습니다. 아까 말씀하신 조사를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리는 무슨 말씀 이시죠? 설마 아직도 조사가 끝나지 않았다는 말씀 이신가요.” “네, 네? 네! 신전에서 요청이 들어 왔는데 제가 조금 미뤘어요.” 처음과는 달리 유현아는 매우 조심스러운 말투로, 그리고 소극적인 태도로 입을 열고 있었다. 그리고 곧 일그러지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황급히 손을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 최대한 하려고는 해 봤는데요! 아, 아니 그러니까. 그게…. 조금 사정이 있어서….” “…….” 설마 설마 했는데, 그 설마 가 현실이 되었다. 속으로 열불이 치솟는 걸 느꼈지만, 겉으로 심하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황금 사자 클랜의 원정이 끝나지 않은 이상 아직 시간적 여유는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뮬은 빠르게 떠나야겠지만, 원 계획과 크게 벗어나는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짚고 넘어갈 것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재미 있네요. 탐험 보고서를 제출한 게 3주가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조사가 완료 되지 않았다 라. 혹시 신전에서 설설 처리해도 된다고 하던가요?” “잠시 제가 대신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물론 보고를 빨리 처리해 달라는 요청은 받았습니다. 신전의 거주민들도 우리들이 오자마자 바로 탐험 조사를 요청 했고요. 그러나 아까 전에 말씀 드렸듯이 현재 뮬의 상황이 매우 어렵습니다.” 안절부절 하던 유현아가 안쓰러웠는지, 조금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고개를 올리니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는 차승현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고연주를 흘낏흘낏 보면서도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원래 소도시 뮬은 다른 클랜에서 대표 클랜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부랑자 말살 계획과 강철 산맥으로의 진군 때문에 인수 인계도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이루어 졌고요. 아무것도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거의 떠넘기듯 받았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의 입장은 이해하지만, 우리들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애초에 대표 클랜으로서의 자격을 운운하실 권리가 있으신지 모르겠네요. 단순히 성을 하나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과한 욕심을 부리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고서는 제대로 읽어 보셨는지요. 단순히 하루 이틀이면 다녀올 수 있는 곳인데 최선을 다하셨다는 게 그 정도 시간을 못 내셨다는 건가요. 못해도 열 번은 왔다갔다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는데 말이죠.” “부족한 상태에서 인수를 받은 건 인정 합니다. 그러나 말을 매우 쉽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조사단을 꾸리고 파견하는 게 그렇게 땅 짚고 헤엄치는 것처럼 가벼운 일들이 아닙니다. 대표 클랜의 자격에 대한 말씀은 철회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글쎄요. 별로 철회하고 싶지 않습니다. 본디 대표 클랜에서 조사에 대해서 선점할 수 있는 권리는 있어도, 그것을 독단적으로 질질 끌고 자기들 멋대로 구워먹을 권리는 없습니다. 분명 빠른 처리를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1, 2일 거리에 있는 유적들에 대한 조사를 지금껏 흐지부지 했다는 게 믿을 수가 없네요. 정 사정이 그러시면 다시 신전에게 넘기거나, 공고를 붙일 수도 있었을 텐데요. 해볼 만큼 했는지 아니면 무책임하게 기다렸는지는 내일 신전에 가보면 알 수 있겠지요.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으신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은 거두셨네요.” “정말 너무 하시는군요!” 내 공격적인 말에 차승현은 그저 마름 침만 삼키며 입을 닫았다. 본인은 욕을 먹어도 참지만, 본인 주변의 인물이 저렇게 몰리는걸 보자 열이 받았는지 유현아는 빽 소리를 지르며 볼을 크게 부풀렸다. 다시 그녀로 시선을 돌리자, 그녀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숨을 씩씩 몰아 쉬는 게 보였다. “너무 이기적이신 것 아닌가요? 저희의 내부 사정도 모르면서 어쩌면 그렇게 비아냥거리실 수 있죠? 서로 조금만 이해 해주시면 되잖아요. 꼭 이렇게 얼굴을 붉히셔야 배배 꼬인 속이 좀 풀어지시나요?” “아니요. 2주라는 시간 동안 우리를 기다리시면서 클랜에 가입시키는 것을 마치 대표 클랜으로서의 도리를 다 한 듯 말씀하시니 기가 차서 드리는 말씀 입니다. 물론 저희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일을 미루실 거면 미리 해당 사용자들에게 허락을 구하셔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계시겠죠. 보고서가 부실하고, 유적의 난이도가 엄청나게 어려운 곳이라면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보고서도 자세히 썼고, 0년차도 살아 돌아온 곳인데 그렇게 사실을 덮으려고 말씀하시는 게 참 꼴불견이다 싶어서요.” “우우….” “거듭 말씀 드리지만 비꼬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본인들의 무책임성을 상대방의 말을 잘라 먹으면서까지 덮으려고 하시는데, 절로 얼굴이 붉어질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왜 탐험을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그저 사정이 힘들다는 말 한마디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시고, 갑작스런 조사 동행 요청과 클랜 가입 권유라니. 뭔가 어긋나도 단단히 어긋났다고 생각지 않으신지요.” 내 신랄한 비난에 결국 유현아도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래. 할 말이 없겠지. 엄밀히 말하면 탐험을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것일 테고 그저 마음씨 좋은 사용자이기를 바라며 우리들이 돌아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렸을 것이다. 이 참에 쓸만해 보이는 클랜원들도 가입 시키고 겸사겸사 우리들이 그 동안 얻은 성과들에 손을 댈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렇게 눈에 뻔히 보이는 짓거리에 넘어갈 내가 아니었다. “더는 말씀이 없으시군요. 하기야 제가 생각해도 할 말씀이 없으실 것 같습니다.” “…흑.” “나 참. 아무튼 내일 신전으로 방문 하도록 하겠습니다. 뮬의 대표 클랜은 조사단을 꾸릴 여력이 없는 것 같네요. 곧 뮬을 떠날 예정이었는데 이렇게 발목을 잡히니 굉장히 유감스럽게 생각 합니다.” “뮤, 뮬을 떠나신다고요?” 뮬을 떠난다는 말을 뱉은 순간, 그녀의 눈망울이 크게 흔들렸다. 살짝 물기가 어린걸 보니 어지간히 분해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반박할 수 없는 말들 이었다. 어쨌든 여기서 더 말을 끌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랑 더 엮이고 싶지 않기도 해서, 그녀의 말에 더는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뒤돌아보니 일행들 모두가 긴장한 얼굴로 테이블을 주시하고 있다가 나에게로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사용자 고연주.” “네 리더.” “먼저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조금 바빠질 것 같네요. 두 분의 배웅을 부탁 드립니다.” “현명하신 선택 이에요. 나머지는 맡겨 놓고, 들어가서 쉬세요.” “자, 잠시 만요!” 뒤에서 나를 붙잡는 말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무시한 채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 여유를 부릴 시간은 없다. 내가 직접 움직여야만 해야 할 것 같았다. 일단은 당장 내일, 신전부터 뒤집어 놓아 임시 증명서라도 발급 받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눈을 뜨자, 하얀 살결이 눈에 들어왔다. 더불어 얼굴에 느껴지는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감촉도. 남성의 기분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기분 좋은 압박감 이었다. 그대로 살짝 고개를 올리자 색색 숨을 내쉬는 하연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무언가 소중한 것을 품는 것처럼 나를 꼭 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어젯밤 나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단순히 일정이 밀리는 건 솔직히 큰 문제가 아니었다. 차질을 빚게 하지 않게 만들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정작 문제로 삼은 것은, 미래가 앞당겨 졌다는 데 있었다. 초반 내전의 진통이 끝나고 뮬의 대표 클랜이 되는 너도밤나무 클랜이 지금 왔다는 사실은 확실히 그냥 넘길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내가 지금껏 잡아 놓은 계획들 상당 부분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해서, 복잡한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연주라도 찾아가 정보라도 들으려는 찰나 하연이 내 방을 방문 했다. 그러고 보니 밤에 찾아 온다고 했던 생각에, 나는 결국 고연주와의 만남을 뒤로 미룰 수 밖에 없었다. 하연이 방문한 목적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문을 꼭 닫고, 주변에 사일런스 마법까지 거는걸 봤으니 모르면 바보나 다름 없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오늘 일을 자못 마음에 걸려 하는 것 같았다. 서로 옷을 벗고 나신으로 침대에 몸을 뉘었을 때, 하연은 서글픈 눈동자와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몸의 상처 하나하나를 짚고, 쓸어 내렸다. 그녀와의 관계는 이번이 두 번째 관계였다. 아직까지 익숙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나는 폭풍 같이 몰아치기 보다는 부드러운 바다처럼 유연하게 그녀를 끌고 나갔다. 결코 내 욕망만 채우려 하지 않고, 그녀 또한 행위에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수 없이 보듬고 속삭여 주었다. 그리고 산의 끝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나와 그녀는 서로 환희를 맛볼 수 있었다.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만족한 얼굴로 그대로 잠이 들었고 나는 예전의 상처들이 그리고 마음 속 불안감들이 위로 받는 느낌을 받았다. 살짝 몸을 일으키자 하연의 아름다운 나신이 눈에 들어왔다. 최대한 부드럽게 한다고 했는데도 흔적은 확연히 남아 있었다. 젖가슴 곳곳에는 붉게 물든 입술 자국이 남아 있었고, 하복부 주변에는 국부에서 흘러 나온 것처럼 보이는 말라 붙은 희뿌연 것들이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었다. 나는 그녀를 바로 눕혀준 다음 이불을 끝까지 덮어 주었다. 그리고 잠결에 나를 껴안아 품에 넣으려는 듯한 그녀의 손길을 피한 후, 살짝 몸을 점검 했다. 혼자서 잘 때는 별로 깊게 숙면할 적이 드물었는데 이상하게 여성 사용자의 품 안에서는 그래도 잠을 잤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코 안으로 스며드는 좋은 향기에 나도 모르게 그 냄새를 따라가고 말았다. 뮬을 떠나기 전 언제나처럼 아침에 일어나면 맡을 수 있던 냄새. 그리고 그곳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나는 헛웃음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시선을 돌린 곳이 테이블 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하얀 김을 뿜어내는 찻잔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네. 토요일 연참 입니다. 아무래도 유현아라는 캐릭터가 독자분들의 엄청난 분노를 산 것 같습니다. 하하하. 코멘트들 하나하나 읽어 보았고, 그중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것들도 보였습니다. 다만 앞으로 최대한 재미 있는 전개로 최대한의 독자 분들을 납득 시킬 수 있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 그리고 갈등 챕터 끝냈으니 진도 좀 빠르게 나가도록 할게요! PS. 정하연과의 H신은 의도적인 생략 입니다. 왜냐하면 곧 있으면 고연주랑…. 아, 아니에요. 흠흠. PS.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신분들 감사 합니다. 꾸벅. (__) 『 리리플 』 1. 쿠로시온 : 1등 축하 드립니다. 마영전 저도 오픈때 한 번 해본 기억은 있네요. 어디 던전에 들어가서 한 것 같기는 한데 그 이후로 다시 잡지는 않았습니다. 하하하. 2. 날개접힌새 : 차라리 똥물이 더 나을겁니다. 유현아가 옆에 있으면 똥물 정도가 아닌 진정한 재앙을 불러 들이기 때문이죠. 하하하. 코멘트 감사 합니다. :) 3. 로유진 : 그래 유진아. 네 말이 맞아. 미믹은 현재 두개 모두 개봉한 상태고, 근력 101 사용자와 차승현은 다른 인물이란다. 몇몇 분들이 오해하는것 같은데 네가 잘 말해 줬구나. 4. 중복인거냐 : 뜨끔. 흠흠. 어험! 험험. 호, 혹시 저를 아시는지요. 5. 감자띱 : 네! 정답 입니다. <무신> 차승현 이었습니다. 하하하. 6. josh96073 : 쿠폰 감사 합니다. 부디 이번회도 재미 있게 읽어주세요. (__) 7. 현오 : 저 현오님 감사 합니다. 저 그런데요. 정말 외람된 질문인데요. 혹시 엉덩이 때리시는 취미가 있으신죠. 왜 자꾸 제 엉덩이를…. ㅜ.ㅠ 8. 레필 : 정답 입니다. 제가 따로 설명드릴 것도 없이 정확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 9. a조운 : 감사합니다! 엄청 고생하셨을것 같네요. 길이를 보니 매우 ㅎㄷㄷ 합니다. 제가 천천히 읽어보고, 따로 수정할 것들이 있으면 쪽지로 답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10. hohokoya1 : 하하 감사 합니다. 그래도 해놓은 말이 있으니 연참 약속을 지켜야 겠지요. :) 그리고 독자분들의 의견한 하나하나 귀담아 듣고 있습니다. 제 멘탈은 강철이며, 어느 한 분의 의견이라도 소중한 조언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D 조언들은 저와 글이 더욱 위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75 / 0933 ---------------------------------------------- 황홀경 생각해보면 고연주는 참으로 다재 다능한 사용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용자로서의 능력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가장 늦게 합류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안으로 부드럽게 파고 들어 착실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10강>의 일인임에도, 아군들에게 눈살을 찌푸릴 정도의 오만을 부리는 모습은 찾을 수 없고 쓸 데 없는 거드름도 피우지 않는다. 필요할 때는 위세를 부리지만 적당한 선에서 멈출 줄 알고 있었다. 당장 어제만 봐도 <대표 클랜>이라는 점을 앞세워 거드름을 떨던 두 사용자를 <10강>이라는 점을 살짝 드러냄으로써 가볍게 잠재웠다. 필요할 때마다 딱딱 나서주는 고연주를 보면 나조차도 상당한 호감을 느낄 정도였다. 나는 방문을 소리 나지 않게 살짝 닫은 후 작성한 서류들과 찻잔을 든 채 계단을 내려왔다. 1층 로비로 내려가니 어느새 테이블들은 처음과 같이 원상복구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그녀의 환영회도 흐지부지 끝났는데,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뜨거운 김을 폴폴 피어 올리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여관 입구의 문을 열었다. 일단은 연초라도 한 대 피울 생각 이었다. “…….” 그러나 밖으로 한 발짝 내디딘 순간,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여관 밖에는 땅으로 이어지는 작은 계단이 하나 더 있는데, 그 계단에 좁은 어깨를 가진 긴 머리의 사용자 한 명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연한 잿빛이 도는 머리카락으로 보아 굳이 앞을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해서, 굳이 뒤에서 말을 걸기 보다는 그녀의 옆에 살짝 앉으며 입을 열었다. “좋은 아침 입니다. 일찍 일어 나셨네요.” 오면서 그녀의 생각을 하고 있었던 터라 절로 고운 말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고연주는 내 인사에 힘 없는 눈동자로 나를 슬쩍 보고는, 다시 얼굴을 파묻으며 내 인사를 받아 주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그런데 일찍 일어나고 싶어서 일어난 건 아니에요.” “흠.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기다렸어요. 당신이 아침에 일어나서 높은 확률로 이곳에서 연초를 태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거든요. 아, 왜 난 안 주는데요. 치사하게.”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막 입에 물고 있던 연초를 쏙 빼앗았다. 어차피 한두 번 당하는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연초를 하나 더 꺼내 들었다. 치익. 치이익. 서로 동시에 불을 붙이고 동시에 연기를 흘렸다. 뱉어낸 연기가 허공 속으로 녹아 없어질 즈음이 되자, 나는 다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환영회도 흐지부지 됐군요. 그네들은 잘 돌아 갔나요?” “네. 다시 한 번 만나게 해달라고 사정하고, 저한테도 매달리는데 그냥 쫓아내 버렸죠. 어지간히 서러웠나 봐요. 가면서 자꾸 눈물을 훔치던데.” “그렇군요. 고생 하셨습니다.” “별 말씀을.” 다시금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둘이 있을 때 대화하면서 어색함을 느낀 적은 처음 이었다. 아마 그렇다면 그녀가 내게 뭔가 불만을 가진 것 같았다. 아니, 불만이라고 하기는 그렇고 투정이라고 해야 할까? <그림자 여왕> 내게 투정을 부린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신선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투정이, 그리 기분 나쁜 투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웃어요.” 내가 피식피식 하는걸 봤는지, 그녀는 새초롬함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아니, 그냥요.” 라고 대답하자 고연주는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흘기고는, 기어코 본심을 드러내었다. “기껏 먹여서 힘 좀 쓰게 만들어 놨는데.” “푸후훗.” “그걸 엄한데 쓰면 어떡해요? 아 그만 좀 웃어요 정말. 호호.” 말을 하는 도중에 자신도 웃긴지 결국 그녀 자신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렇게 한동안 서로를 보며 웃던 우리는 이내 연초를 땅에 떨구었다. “그래도 그렇게 함부로 들어오면 어떡해요. 문도 잠그고 사일런스 마법도 걸어 놨잖아요.” “훗. 그런 것 따위야 <그림자 여왕>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죠.”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러면 그러려니 하고 모른 척 하는 게 인지상정 아닐까요.” “하. 실컷 모아 논 정력을 얌체처럼 쏙 가로챈 게 누군데요. 억울해서 그렇게는 못 하겠더라 고요. 어우, 그런데 그 여성 사용자 신음 소리가 아주 간드러지던데요? 생긴 거랑 다르게 노네. 아앙~수현씨~아앙~.” 고연주는 어젯밤 하연의 신음 소리를 따라 하는걸 보며 나는 잠시 동안 고민에 빠졌다. 분명 나는 아침에 방문을 열고 들어온 후 차를 놓으면서 봤을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그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는 그녀가 내던 신음 소리를 잘랐다. 내가 자르기 전까지 계속 하연의 소리를 내던 그녀는 까르르 웃으며 내 옆구리를 콕 찔렀다. “너무 껴 듣지 말아요. 환영회는 그렇다 치더라도, 좋은 술을 준비하고 야한 옷도 입으면서 까지 기다렸는데 새벽에 나 홀로 신음 소리를 들으며 독수공방 했답니다. 그러니 이 정도 놀림은 양해하세요.” “양해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그것을 보셨다니 마음이 편치만은 않네요.” “어머 왜요? 난 그렇게 아름다운 섹스는 처음 봤는데.” “콜록! 뭐, 뭐라고요?” 이번엔 헛기침이 아니라 진짜로 사래가 들고 말았다. 또 무슨 농담을 하나 싶어 고개를 돌리자, 뜻밖에도 진지한 얼굴의 고연주를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낯빛은 어딘지 모르게 부럽다는 빛을 띠고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매우 쓸쓸해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는 괜히 머쓱한 기분이 들어 슬슬 화제를 돌리기로 마음 먹었다. “흠.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분이 묘하네요. 아무튼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듣고 싶은데요.” “응? 뭘 듣고 싶은데요? 쓰리 사이즈? 3….” “왜 그네들이 지금 뮬에 왔는지 궁금해서요. 겸사겸사 다른 부분들도 어떻게 진행 되는지 궁금하고.” 고연주는 내 말에 고개를 기울이고는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저 앙큼을 떠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음~. 잘 생각이 안 나는데요?” “에헤이.” “에헤이는 무슨 에헤이. 원래 이런 데서는 잘 생각이 안 나고요. 야심한 밤에, 그것도 제 방에 들어가면 기억이 날것 같기도 하네요.” 한결 같은 태도를 유지하는 그녀의 행태에, 나는 한숨을 푹 쉬고 자리를 털고 일어 났다. 여기서 더 있어봤자 그녀의 페이스에 말릴 것 같았기 때문에 자리를 피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네들이 어제 그렇게 돌아간 이상, 가만히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쩌면 <미친년> 반다희가 습격을 해 올지도 모르는 일 이었다. 고연주는 재빨리 내 손을 잡으며 애절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흑. 서방님. 가지 마세요. 소녀가 잘못 했어요.” “일하러 갑니다. 이거 놓으세요.” “아 그렇구나. 서방님 그럼 돈 많이 벌어 오세요. 맛있는 거 만들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찻잔은 두고 가죠.” 고연주는 내 손에 들린 서류를 봤는지 재빨리 표정을 회복한 후 말을 바꿨다. 참 알 수 없는 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들러붙는 걸까? 문득, 방금 전 쓸쓸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머리 속으로 떠올랐다. 싱숭생숭한 기분을 느꼈지만 아무튼 내가 놓아둔 찻잔을 들며 따라 일어나 배웅하는 그녀를 뒤로한 채 나는 신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오늘 밤 정말로 그녀의 방에 한번 들러야 할 것 같았다. 물론 다른걸 기대하는 건 아니고, 순수하게 정보를 들을 목적이었다. 정말로. * 다짜고짜 신전으로 들어간 나는, 말 그대로 아침부터 신전을 뒤집어 엎어 놓았다. 물론 난동을 피운 것은 아니었다. 세라프를 만나게 해 달라는 말과, 어제 겪었던 일을 살짝 말해주며 조언을 얻을 것이라고 하니 신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내게 사죄를 빌었다. 사실상 신관이 잘못한 것도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기 때문에 심하게 몰아 붙이지는 않았다. 다만 협박 아닌 협박으로 임시 증명서를 발급 받은 것은 분명한 성과라고 볼 수 있었다. 임시 증명서는 말 그대로 임시로 발급 받는 증명서로 볼 수 있다. 실적을 증명 받기 전 조사단을 꾸리기가 거리나 난이도로 인해 애매할 경우 미리 발급 받는 증명서였는데, 어느 정도 명성이 있는 클랜이 아니고서야 당연히 발급 받기 굉장히 어려운 편에 속했다. 그러나 일전에 보여준 비비앙의 영단과 벨페고르의 심장도 있었고 무엇보다 이번에는 자신들의 실수도 명백히 있었기 때문에 신속하게 발급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추후 우리들의 탐험이 거짓으로 밝혀지는 순간 모든 게 백지로 변하고 페널티를 받겠지만, 그럴 일은 절대로 없으니 우리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나는 바로 클랜 신청을 하는 곳으로 들러 여태껏 작성한 서류와 임시 증명서를 제출 했다. 또한 추가로, 해당 인원에 대한 신분 변경도 최우선으로 요청해 두었다. <너도밤나무> 클랜이 대표 클랜 이랍시고 같잖은 야료를 부려올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수단이 자유 용병으로 신분을 변경해 두는 것 이었다. 나와 애들은 이미 소속이 없었고 비비앙은 고대 멸망한 국가의 소속이라 영향이 없다고 쳐도 고연주, 정하연, 신상용은 필히 바꿀 필요가 있었다. 신분 변경도 제법 제한이 까다롭다고 볼 수 있는데, 자유 용병형 클랜을 창설하고 해당 클랜원이 되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있으니 크게 신경 쓸 것은 없을 것이다. 일단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다 해주었으니 이제 남은 일은 해당 인원이 각자 들러서 따로 변경 신청을 하고, 그것들이 모두 확인된 후 서류 심사에 통과하면 내게로 소식이 날아올 것만 기다리면 된다. 그러면 다시 담당 거주민의 주도하에 면접을 보는데, 그 면접에서 합격해야만 최종 클랜 신청 승인이 떨어지는 것이다. 간단하다면 간단하고, 복잡하다면 복잡하다고 볼 수 있는 시스템 이었지만 나름의 실적을 요구하는 만큼 클랜을 공으로 생성할 수 없다는 게 요지였다. 그렇게 미연의 연막을 쳐둔 나는 마음에 조금 여유가 생겨 느긋한 걸음으로 여관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미 애들은 모두 일어나 아침을 먹은 상태였는지라 혼자서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외로운 식사를 마치고 신분을 변경해야 하는 사용자들에게 사정을 설명한 후, 나머지 인원들을 불러 간단히 할 일들은 지시 했다.(할 일들이라고 해 봤자 수련 또는 프리 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비비앙에게 시간이 나면 내 방으로 오라고 호출한 후에야 나는 모임을 끝냈고, 곧바로 다시 방으로 올라가 장비 정리를 시작 했다. 금화는 이미 8만 골드를 넘게 보유하고 있었고 보석은 개수만 일천 개가 넘어가는 상황 이었다. 그러나 많다고 해서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해서 부랑자들한테서 벗겨낸 장비들도 팔 생각으로 뒤적이던 도중 마침 그때 미처 확인하지 못한 장비들이 보였다. 그 중 내가 특히 관심을 갖고 있는 건 일월신검 이었는데, 꺼내기 부담스러운 면이 있는 무검을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아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일월신검(日月神劍)』 설명 : 오랜 세월 동안 해와 달의 힘을 받아 간직한 검 입니다. 태양이 떠 있을 때는 햇빛을 받아 검신 에서 고열이 일어나 염화 계열의 성질을 띠게 됩니다. 그리고 달이 떠 있을 때는 달빛을 받아 검신에 한기가 감돌며 절삭력 상승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검이 만들어진 과정으로 인해 나쁘고 그릇된 기운을 깨뜨리는 기원이 담겨 있습니다. 마(魔)와 관련한 기운에 대해서는 평균을 상회하는 위력을 낼 수 있지만, <권능>에 비하면 그 정도는 미약합니다. “좋네.” 나는 간결하게 한 마디 내뱉은 다음 일월신검을 천장을 향해 들어올렸다. 그리고 시선을 들어 천천히 살펴 보았다. 칠흑빛을 번들거리는 칼집에서 검을 뽑자, 스릉 소리와 함께 시리도록 예리한 빛을 반사하는 매끈한 검신이 수줍은 듯 모습을 드러내었다. 첫 인상은 상당히 깔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양날의 검신 안에는 앞 뒤로 고풍스러운 문양이 음각 되어 있었는데, 마치 고급 세공품과 같은 아름다움을 선보이고 있었다. 시험 삼아 한 번 휘둘러보자 깨끗하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손 안에 착착 감기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들고 다닐 만 하겠다는 생각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뜨리고는 다시 곱게 검집 안으로 갈무리해 두었다. 그때였다. “김수현! 나 들어간다!” 누군가 밖에서 나를 부르는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아침 겸 점심을 먹을 때 잠시 호출 했는데, 볼 일을 마치고 들어온 모양 이었다. “들어와.” 라고 답해주자 이내 문이 벌컥 열리며 생기발랄한 여성 한 명을 볼 수 있었다. 예상대로 문을 열고 들어온 거주민은 비비앙 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뭔가 급하게 뛰어온 듯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숨을 약하게 몰아 쉬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역시 담배는 피우는걸 피워야 하나 봅니다. 잠시 다른걸로 바꿔 봤는데 왜 이렇게 입맛에 맞지 않던지요. 하하하. 불타는 금요일, 토요일 이네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아직 일요일이 남아 있으니까요. 독자분들도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 『 리리플 』 1. 날개접힌새 : 오호라! 1등 축하 드립니다. 날접새님의 1등 이라니 상당히 감명이 깊습니다. 하하하. 2. 샤피론 : 고맙습니다. 흑흑. 그래도 글을 쓸 때는 행복해서 고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네요. ㅋㅋㅋㅋ. :) 3. 블라미 : 헤헤. 고연주와의 응응을 기대하시는 분들이 많으신것 같습니다. 아마 제가 그리고 일어나 보니, 아침이 밝아 있었다. 이렇게 쓰면 몰매를 맞겠죠? 4. 천겁혈신천무존 : 에. 무, 무서워요. 제발 이러지 말아주세요. ㅜ.ㅠ 무섭다구요. 흑흑. 5. 오피투럽19 : 하하하. 약간의 조크로 제 닉네임을 넣어 왔습니다. :) 6. 현오 : 하하. 유현아의 아래로 인재가 모여드는 이유는, 한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힌트를 드리자면, 김한별을 처음 봤을 때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때 수현이 놀란 이유가 있는데, 그거와 똑같습니다.(후의 코멘트 잘 봤습니다. 역시 찰지셨습니다.) 7. qklcnw : 그렇습니다. 실은 로유진이 아닌, 료유진 이었습니다. 절대로 제가 아니죠. 후후훗. 8. 베지밀군 : Yes, Sir! 반갑 습니다. :) 정말 오랜만에 뵙는것 같아요. 하하하. 9. UrDREAM : 정답 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림자 다루는 능력이 참 편리하네요. 비밀이 없어요. ㅜ.ㅠ 10. 유운처럼 : 여! 자! 친! 구! 시군요. 여! 자! 친! 구! 요. 아하하하하! 네 농담 입니다. 절대로 부럽 습니다. 아하하하하하하. 하……………………. ㅜ.ㅠ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76 / 0933 ---------------------------------------------- 황홀경 “오랜만의 호출이네. 무슨 일이야?” 테이블에 앉은 후, 비비앙은 생글생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잠시 그녀를 가만히 바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신상용과 얘기를 먼저 꺼낼까 아니면 영약 연단에 관한 얘기를 먼저 꺼낼까 고민이 들었는데, 아무래도 레어 클래스 <키메라 연금술사>로 얘기를 꺼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여러 가지 매듭 지을 일들이 있어서 불렀어. 사용자 신상용에 관한 것도 있고, 연단에 관한 것도 있고.” “아하. 그러면 저번에 얘기해 준 것들?” “그래. 이제 신상용씨에 대해서는 슬슬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왔잖아. 그 동안 꽤 가까이서 지켜 봤을 텐데. 네가 보기에 그 사용자 어떤 것 같아?” “우웅.” 비비앙은 눈을 감고 고심하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약 3분의 시간이 흐른 후, 눈을 반짝 뜬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솔직히 주고 싶어. 사람 됨됨이나 성품 면에서 보면 흠 잡을 데는 없는 것 같아. 거기에 성실하기도 하고 가지고 있는 능력도 상성이 잘 맞을 것 같기도 하고. 아마 후회하지는 않을 거야.” 능력 상성이라면, 조화의 마방진을 말하는 것 같았다. 나와 비비앙은 계약으로 묶인 관계. 그런 만큼 그녀는 내 부탁을 열심히 수행 했을 것이고, 방금 전 한 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답을 말했을 것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기는 하지만 나 또한 그녀의 의견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곧바로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떻게 보면 너무 늦게 주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레어 클래스는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그러면 최대한 빨리 그에게 <키메라 연금술사>를 지급 하고 그에 맞는 교육도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좋아. 이만한 제자는 구하기 힘드니 애초에 바라던 바였거든. 히히. 신난다. 아마 깜짝 놀라겠지?” 비비앙은 어린 아이처럼 웃으며 들뜬 모습을 보였다. 아마 그가 이 사실을 알면 또 얼마나 고맙다고 인사를 할지 벌써부터 쓴웃음이 나왔다. 그 동안 알게 모르게 챙겨주지 못해서 마음에 걸리는 게 없잖아 있었는데, 이로서 조금이나마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신상용씨 얘기는 그렇게 마무리 짓도록 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고.” 말을 마친 나는 미리 준비해둔 것들을 비비앙의 앞으로 꺼내 놓았다. 80 이하 +4 체력 영약, 70 이하 +2 체력 영약, 비비앙의 영단, 상급 마족 벨페고르의 심장, 호렌스의 마정석. 연금술사들이 보면 하나같이 군침을 뚝뚝 흘릴만한 재료들 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재료를 확인한 비비앙도 침을 뚝뚝 까지는 아니지만, 졸졸 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는 흘리고 있었다. “와. 보기만 해도 황홀하다.” 연신 감탄성을 내뱉는 비비앙을 보며, 나는 80 이하 +4 체력 영약을 들어 올렸다. “이 영약을 복용한 사용자는, 체력 능력치를 소폭 상승시킬 수 있어. 내가 원하는 건 그 상승폭을 더 늘리고 싶다는데 있지. 어때. 가능하겠어?” “체력 영약과 이번에 새로 처치한 놈의 마정석을 추가 했구나. 으~음.” 어느새 천진난만하던 표정은 온데간데 없어져 버렸다. 연금술사로서의 비비앙은 항상 진지하고, 진중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평소와는 다른 날카로운 눈빛으로 재료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가끔씩 손을 요렇게 조렇게 움직이는걸 보니 지금쯤 머리 속으로 수많은 계산을 하고 있을 것이다. 조금 초조한 마음은 들었지만, 빨리 대답하라고 윽박지르는 몰상식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저 진득하게 앉아 긍정적인 대답을 기다릴 뿐. 몇 분의 시간이 추가로 흘렀다. 이윽고, 비로소 계산을 끝냈는지 비비앙은 고개를 들며 시선을 올렸다. “그래 어때. 할 수 있겠어?” “김수현. 혹시 내가 예전에 해줬던 말 기억해?” 이 정도의 재료를 이런 열악한 공방 환경 속에서 날리기 아깝다고 했던가. 그녀로서는 드물게 논리 정연한 말을 했었기 때문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고개를 한두 번 주억이자 비비앙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분명히 뮬을 떠난다고 했지? 언제 떠날 생각이야?” “곧. 준비가 최대한 되는대로 빠르게 뮬을 떠날 건데. 그건 왜.” “알겠어. 그럼 당분간 이 재료들은 내가 맡고 있을게. 따로 연구에 들어가봐야 할 것 같거든.” “오호라.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주섬주섬 재료를 챙기는 그녀를 보자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비비앙은 엄숙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쉽지 않아. 아니, 솔직히 모르겠어. 신상용의 조화의 마방진이 없었다면 아마 실패 가능성이 더 높았을 거야. 일단 지금 당장은 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지?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공방도 건설해야 하고, 못해도 일주일 이상은 연단 과정을 거쳐야 해. 부수적으로 들어가는 재료도 어마어마하고. 아무튼 곧 떠날 뮬에서 만들라고 하지는 않을 것 같으니 그 동안 내 나름대로 분석을 하고 있을게.” “그 정도야. 그럼 부탁한다.” “맡겨두셔. 이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의 이름을 걸고 기필코 성공시켜 보이겠어.” “이야. 아주 자신감이 넘치는데. 그러다 실패하면….” 오늘따라 예쁜 말만 골라서 해서 그런지, 비비앙이 더욱 귀엽게 보였다. 막 몸을 일으키는 그녀를 보자 순간 속에서 못된 장난끼가 솟구쳐 올랐다. 해서, “무지 괴롭힐 줄 알아.” 라고 이으려는 찰나,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왜 다물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왠지 이 말을 꺼내면 돌이킬 수 없을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실패하면? 나 벌줄 거야?” 그녀의 음성에는 묘한 톤이 섞여 있었다. 아니 괴롭히기는 했어도 벌을 준 적은 없었는데. 비비앙은 돌이킬 수 없을 것들을, 자신이 아니게 되어버릴 수 있는 것들을 스스로 깨달아가고 있었다. 나는 나의 직감에 감사하며 차분히 말을 바꿀 수 있었다. “…벌은 무슨. 네가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건 알고 있는데 어쩔 수 없지 뭐. 그래도 성공하면 무척 기쁠 거야. 너도 알다시피 지금 나에게 있어 체력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거든. 그런 만큼 성공하면 네 소원을 하나 들어주도록 하지.” “소…원?” “물론 아주 허무맹랑한 건 불가능해. 그러나 들어보고 합당하다고 여기면 말 그대로 소원을 들어줄게.” 그 순간, 나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맹렬하게 피어 오르는 한 줄기 불길을 볼 수 있었다. 그 기세가 자못 대단해, 순간 말을 실수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얼마 있다가 비비앙은 내게 한번 더 확답을 받은 후 몸을 돌려 방문을 나섰다. 그리고 그녀의 발걸음에는, 알 수 없는 비장미가 감돌고 있었다. * <절규의 동굴>에서 돌아온 이후 시간이 한층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어느새 어둑하게 깔린 땅거미와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지금 시간대가 어두운 밤 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고연주가 아침에 말했던 야심한 밤으로 볼 수 있는 시간대였다. 나는 입에 물고 있는 연초에 불을 붙여 한 모금 깊숙하게 빨아 들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 여덟 번, 아홉 번, 열 번. 그렇게 총 열 번을 빨아 들이자 어느새 서서히 연초 끝이 보이고 있었다. 애꿎은 땅을 향해 꽁초를 튕기고 나는 조용히 문을 열어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쯤 일행들은 모두 잠들어 있겠지. 라이트 스톤이 꺼진 1층 로비는, 으레 보던 광경 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으슥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주방으로 고개를 돌리니 미약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일분도 채 지나지 않아 주방 안에 있는 문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후, 그대로 손을 올려 문을 두드렸다. 똑똑. 둔탁한 소리가 두어 번 울리고, 곧이어 “들어와요.” 라고 말하는 고연주의 나긋한 목소리를 들렸다.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돌리고 들어서자 아담한 책상 위에서 유려하게 깃펜을 놀리는 그녀의 손놀림을 볼 수 있었다. “아. 잠시만 기다려요. 거의 다 썼으니까. 부랑자 말살 계획에 의해 도주한 부랑자들이 살짝 불안한 낌새를 보이고 있는 부분인데, 아직 확실치 않아서 들어온 정보를 종합하고 있었어요.”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역시 정보를 말해주지 않았다기 보다는, 온전하지 않은 정보라서 나에게 말해줄 수 없었던 것 같다. 앞으로 약 한달 후 있을 난을 벌써부터 눈치 챈 그녀의 정보력에 새삼 경이로운 감정이 들었다. 이래서 1회차 시절 <이스탄텔 로우>가 고연주를 척살 1순위로 올려 놨었군. 고연주는 내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기록하는데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가끔 주변에 흐트러진 다른 기록들과, 지도를 보더니 작성하던 기록을 찢고 다시 적기도 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 끝났다. 겨우 다 적었네~.” 고연주는 깃펜을 탁 소리가 날 정도로 던진 후, 있는 힘껏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녀는 내게로 몸을 돌렸고, 작성한 기록들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일으켜 그 기록을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가 재빠르게 빼는 바람에 헛손질만 하고 말았다. 고연주는 고개를 여러모로 꼬더니 새침하게 눈을 흘기며 입을 열었다. “이 기록을 지금 드리면, 왠지 받고 그냥 나가실 것 같네요.” “글쎄요.” 내 모호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녀는 미간을 슬쩍 좁혔다. 그녀는 곧 책상 위로 기록을 놓아두고는 손가락을 가볍게 퉁겼다. 손가락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환한 불빛을 내던 라이트 스톤은 일순간 빛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빛은 사라지고 방 안에는 어둠이 찾아 들었다. 그 희미한 어둠 속에서, 나는 고연주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내게로 살며시 다가오는걸 알아챌 수 있었다. “제가 누누이 말씀 드렸잖아요. 사용자 김수현은 조금 쉴 필요가 있어요. 요즘 다시 슬슬 발동 걸리는 것 같은데요.” 어느 틈에 이렇게 근접하게 다가섰는지. 목 부근에 달콤한 숨결이 간질이는 게 느껴졌다. 침을 한 번 삼키고 정면을 바라보자, <그림자 여왕>은 두 팔을 뻗어 곱게 매인 <태양의 영광>의 한 쪽을 잡았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 하나. 이 야심한 밤에 제가 수현씨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뭘까요?” “글쎄요.” “알면서 모르는 척 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정말로 모르시는 건가요?” 아까와 똑같은 대답을 하자 화가 났는지 고연주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눈을 감고 말았다. 여관 밖에서 연초를 태우면서 같이 태웠다고 생각 했던 감정이, 다시금 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 속으로 자꾸만 한 명의 인물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 인물의 정체는 한소영이 아니었다. 바로 사용자 정하연 이었다. 나도 내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첫 만남 때부터 고연주는 나에게 꾸준히 호감을 표시해 왔고 유혹도 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녀가 싫지 않았다. 홀 플레인에서 마음이 맞는 사용자들이 하룻밤을 보내는 건 아무런 일도 아닌데. 그녀에게는 이미 말도 다 해놨는데. 방문을 열 때만 해도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 했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머리 속이 복잡해지려는 찰나, 나는 허리춤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눈을 뜨고 말았다. 시선을 아래로 숙이니 붉은색 허리띠가 스륵이 풀려나가는 게 보였다. 이윽고 완전히 풀린 허리띠는 한 쪽은 고연주의 손에 들린 상태로, 나머지 한 쪽은 땅바닥에 닿은 상태로 떨구어졌다. <하늘의 영광>의 앞섬이 열림과 동시에 고연주는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서며 내 가슴에 기대려는 모션을 취했다. 그리고 그 순간. “아….” 나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서고 말았다. 고연주는 내 반응에 놀랐는지 기대오려던 고개를 멈췄고, 멍한 얼굴로 내 눈동자를 바라 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회피할 수 밖에 없었다. “…….” 그럼에도 거두어지지 않는 시선과 불편한 침묵에, 나는 간신히 그녀를 향해 다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어둠 속 희미하게 보이는 그녀의 표정을 읽으려 애를 쓰자 곧 숨길 수 없는 상처감에 조금씩 물들어가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문득 그 동안 그녀가 여태껏 나에게 했던 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르기 시작 했다. <그래요. 나 술집 여자였어요.> <사용자 김수현은 이런 저를 어떻게 평가 하시나요?”> <또한 현대에서는 술집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깔봄을 받던 여자가….> <눈동자요. 눈동자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알 수 있거든요.> <호호. 드디어 키스 한번 해보네요.> <왜요. 왜 한숨을 쉬어요. 저랑 키스 하니까 별로 에요? 기분 나빠요?> 내가 지금 한 발자국 물러섰다는 것은, 일종의 거부 표시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홀 플레인에서 성관계에 대해 거부를 표하는 경우는 하나가 있다. <나는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혹은 <당신과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 물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고연주를 받아 들이고 싶은 마음과, 사용자 정하연에 대해 갖고 있는 마음에서 어우러져 일어난 괴리감. 즉,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 이었다. 그러나 상대방이 받아 들이기에는 오해의 소지가 충분히 있었다. 이윽고, 고연주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사용자 김수현에게 사용자 정하연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많이 미쳤나 봅니다. 수현이도 알고보면 의외로 순정파 라니까요. 하하하. 후기를 길게 쓰고 싶지만, 밤새 작업한 터라 너무 졸리네요. 한 숨 자고 오늘은 공부 좀 해야할것 같습니다. 여러분들 모두 즐거운 일요일 보내세요. :) PS. 고연주의 행복을 위하여. 『 리리플 』 1. 破天魔痕 : 1등 축하 드립니다. 하하하. 요즘 쿠로시온님이랑 치열하신것 같습니다. 2. 사람인생 : 부활 축하 드립니다. 어서 헤어짐의 아픔을 훌훌 털어버리시기를. 아. 그리고 도배는 하지 말아주세요. 지금껏 많은 부탁을 드렸는데, 이번에 또 도배를 하신다면…. 저도 조금은 화가 날것 같네요. 물론, 더는 도배를 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많은 독자분들이 함께 이용하는 코멘트란 인만큼, 도배는 자제 부탁 드립니다. ^^ 3. 멜퓨리언 : 하하. 고맙습니다. 이상하게 고연주가 인기가 많네요. 제 눈에는 한별이가 가장 이쁜데 말이죠. :) 4. Groover : 하하하. 물론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말이죠. :D 5. 고장난선풍기 : 정작 문제는 수현이한테 터졌지요. 하하하. 사랑을 받는데 익숙하지 않은 아이고, 사랑을 잃는데는 익숙한 아이니까요.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77 / 0933 ---------------------------------------------- 황홀경 “나…. 싫어요?” “…….” 짧지만 수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 조금만 잘못 대답해도 삐끗할 것 같은 느낌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이미 실수는 저질렀다. 물은 쏟아졌고, 아니 계속 쏟아지는 중 이었다. 머리는, 이성은 지금이라도 멈추라고. 그리고 얼른 그녀를 안으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가슴 한 구석에서 피어난 예의 생소한 감정이 지금의 나를 붙잡고 있었다. 내 주저하는 모습을 봤는지 일견 고연주의 얼굴에 씁쓸한 기색이 스쳤다. 그리고 내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결국에는 그녀가 한 발짝 물러서고 말았다. 그것도 상처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미안해요.” “사용자 고연주….” “당신이라는 사용자. 아니 사람에게 한 번 안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젯밤 그녀와 관계를 맺는걸 보며 그 생각을 굳혔죠. 그냥…. 부러웠어요.” “…….” “그런데 제가 너무 제멋대로 굴은 것 같네요. 그 동안 착각 했었나 봐요. 그래요. 싫겠죠. 저 같은 헤퍼 보이는 여자는…. 마음에 들지 않을 거에요. 그래요. 이해해요.” 고연주는 그 말을 마치고 내게 <태양의 영광>을 두 손으로 들었다. 아마 다시 돌려주려고 그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가 그것을 내게로 다시 내밀려는 순간, 나는 지금이 마지막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연주와의 관계를 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 해서, 반사적으로 외치고 말았다. “그게 아닙니다.” 겨우 쥐어 짜낸 듯한 한 마디에, 내게로 오던 고연주의 손짓이 우뚝 멈추는 게 보였다. 그것을 보며 나는 간신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둑 터지듯 터져 나오는 숨소리가 들리고, 고연주는 그런 나를 조용한 눈동자로 응시 했다. 그녀는 내 숨이 진정 되기를 기다렸다가 이내 나지막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요…?” 끝으로 치닫던 관계가 잠시 멈췄다. 쏟아 지던 물병을 겨우 잡아 조금이라도 남길 수 있었다. 고연주의 한 마디에는 아직 여지가 남아 있었다. 나는 메마른 입술을 침으로 적시며 생각 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그저 지금의 감정에 솔직해 지자는 것. 10년차 사용자 김수현은 잠시 넣어 두고, 2회차에 새로 들어온 김수현의 입장에서 그녀에게 말해보기로 했다. 그 동안 모른 척 하고 있던, 가슴속에서 들끓는 이 생소한 감정을 정면으로 바라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서야 나는, 내면에서 소박한 용기가 한 줄기 솟아 올라오는 걸 느꼈다. 후회는 하고 싶지 않다. 후회를 하더라도 할 말은 다 하고 싶었다. 그래야 가슴속을 가득 채우는 답답함에 시달리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옴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 수 있었다. “저 또한 당신에게 호감이 있습니다. 예전에 말했던, 반할 뻔 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에요. 고연주는 저에게 있어 그만큼 매력 넘치는 사용자, 사람, 여성 입니다.” “거짓말. 그럼. 왜 거부하신 거죠?” “거짓말이 아닙니다. 다만….” “다만?” 나는 잠시 입을 다물어 말을 멈추었다. 고연주는 처음과 같은 조용한 눈빛을 띠고 있었지만, 그 속에는 알 수 없는 애타는 시선이 섞여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를 위해 나는 다시금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0년차 사용자 김수현의 입장에서. “당신을 안으려고 하는 순간 하연이 생각 났습니다.” “사용자 정하연이…?” “네.” “그녀를 사랑하시는 건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고연주는 재빠르게 물었고, 나는 재빠르게 대답 했다. 그녀의 얼굴 표정이 미묘함으로 물드는 것을 보며, 나는 오른손을 들어 심장 부근에 대었다. 세찬 고동이 가슴을 타고 손바닥으로 들어오는걸 느끼며 말을 잇는다. “이 감정이 뭔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가끔 그녀를 생각하면, 심장이 두근두근 하고 가슴 한 구석이 따뜻해지는 것 같습니다. 사랑을 몰라서 사랑이라고 확신할 수 없어요. 하지만 당신을 안으려는 순간 이 감정이 저의 목덜미를 붙잡았습니다. 지금도 당신을 안고 싶어요. 하지만 두렵습니다. 한 순간의 욕망에 휩쓸려, 두 여성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게 아닐까….” 고연주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는걸 보며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0년차 사용자로서의 입장을 말했지만, 10년차 사용자로서의 경험도 남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방금 내뱉은 말이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의미 없는 말 들일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슴은 후련했다. 그 순간. “킥.” 고연주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창피함은 더욱 몰려 들었다. 그녀는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웃고 있었지만, 그래도 간간이 새어 나오는 웃음은 들렸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았다. 어느새 <태양의 영광>을 바닥에 떨군 채 입가를 가리고 웃는 고연주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착각 하고 있던 게 아니라, 이것을 착각하고 있었구나. 나도 참. 번지수를 잘못 짚었네요.” 웃는걸 끝낸 후 한숨을 폭 쉰 그녀는 거침 없는 걸음으로 내게로 바싹 다가섰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는 상처감이 옅어지고 있었고, 대신 뜻 모를 안도감이 보이고 있었다. 쓴웃음이 아닌 나른하고 잔잔한 미소를 흘리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나도 조금은 안정 되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녀는, 양 손을 내뻗어 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 부드러우면서 따뜻한 손의 감촉에 절로 눈이 반쯤 감겼다. 그리고 고연주는, 내 얼굴을 감싸 안듯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0년차 사용자였죠? 아직 6개월도 되지 않은.” 수긍하는 의미로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손길이 한층 더 농밀해진 기분이 들었다. 마치 소중한 무언가가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다루는 것 같았다. “그 동안 보여준 행동들이 0년차 사용자 답지 않아서, 저도 모르게 착각하고 있었네요. 호호. 하긴 0년차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아니, 그게 정상이지. 이제 좀 김수현이 사람답게 보이네요. 연하다운 귀여운 맛도 있고. 아이 참.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 “나한테도 호감이 있다고 했죠?” “네.”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이었다. 1회차 시절 그녀를 봤을 때부터, 그렇게 나쁜 감정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2회차로 넘어오고 그녀와 함께 하면서 호감으로 발전한 것 같았다. 내 대답이 진심인걸 확인 했는지 고연주는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도 그래요. 저도 당신을 보면, 잊고 있었던 감정이 되살아 나는걸 느껴요. 마음이 흔들리고, 기대고 싶어져요. 직감이라고 해도 좋아요. 당신에게는 알 수 없는 무언가 확실한 게 있어요.” 고연주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앗 차 싶었다. 나는 지금껏 그녀를 나와 비슷한 부류의 사용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5년차 사용자며, 시크릿 클래스 <그림자 여왕>을 갖고 있는 사용자. 누구에게 기댐을 받을지언정 스스로 기대고 싶어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 “김수현이 주저하고 있는 원인이 뭔지 대강은 알 것 같아요. 하지만 서로 호감이 있잖아요. 서로를 원하잖아요. 홀 플레인 에서는, 그 호감이 이끌어주는 대로 행동해도 크게 흠잡을 거리는 아니에요. 그녀가 이런 말은 안 해주던가요?” “하연이 말을 했다기 보다는…. 그것과 관련한 얘기를 한 적은 있습니다.” 문득 내 자신이 한심하다고 느껴졌다. 그때는 뭐라도 되는 양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믿어 달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주저하는 꼴 이라니. “그녀도 2년차라면 그 정도는 알고 있을 거에요. 물론 아파할지는 몰라도, 이해할 수 밖에 없어요. 이곳은 현대가 아닌 홀 플레인 이라는 세상이고, 당신은 능력 있는 남성 이니까. 시선을 피하지 말아요. 나를 봐요.” 그녀의 말에 나는 슬쩍 피하려던 시선을 다시 고정할 수 밖에 없었다. 고연주는 얼굴을 감싼 손으로 내 턱을 살짝 받쳐 들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원래 먼저 반한 사람이 손해를 보는 법이거든요. 호호. 어쨌든, 그 뜻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당신에게 선택을 맡기고 싶어요.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 “네.” “그녀만큼이나, 저도 사용자 김수현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것을요.” 고연주는 그 말을 끝으로 손을 떼고는, 침대로 다가가 걸 터 앉았다. 그리고 가벼운 손놀림으로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렸다. 그리고 나는, 그 행동을 보는 순간 더 이상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고연주의 손길을 따라 옆에 앉자, 그녀는 상냥해 보이는 미소를 보여 주었다. 고연주가 여기까지 끌고 와준 만큼 이제는 내가 화답을 보여줄 차례였다. 더 이상 주저하는 애매모호한 모습은 보이기 싫었다. 해서, 이번에는 내 쪽에서 그녀를 먼저 이끌었다. 고연주는 내 손길에 따라 얌전히 침대의 가장 자리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 나 또한 그녀의 앞으로 이동한 다음, 그녀의 양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상태로 조금 더 깊숙이 손을 밀어 어깨를 타넘고, 그녀의 등을 안아 내 쪽으로 끌어 당겼다. 아까는 고연주가 스스로 안겨오려고 했고, 나는 그것을 거부 했다. 후에 해명하기는 했지만 그때만큼은 매우 속상했을 것이다. 이제는 내가 먼저 안아줌으로써 그녀의 상처 입은 마음을 풀어주고 싶었다. 드디어 고연주를 내 안으로 품는 순간, 나는 그녀의 몸이 생각보다 가냘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여성으로써 당연한 일 이겠지만, <그림자 여왕>이라고 해서 무조건 버팀목이 되어야 할 리는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몸에서 전해져 오는 따뜻한 체온을 음미하며 나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목표는 그녀의 귀 밑 부분 이었다. “후.” 그곳을 향해 기습적으로 숨을 불어 넣자 고연주의 몸이 미약하게 떨렸다. 그녀는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올려다 보았는데, 이내 눈을 곱게 흘기며 내 품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치 복수라도 하겠다는 듯 이번에는 반대로 자신의 품 안으로 나를 끌어 당겼다. 그 끌어 당김에는 제법 힘이 담겨 있어, 나는 그녀와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과 함께 그대로 침대로 쓰러져 버렸다. 삐걱. 침대가 한번 출렁이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나는, 상체 위로 몸을 실은 자세를 한 채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게 되었다. 그 순간 굉장히 편안한 기분을 느꼈다. 딱히 의미는 없었다. 다만 얼굴을 묻음으로써 밀려오는 무한한 포근함에 그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 잠들면 이만한 실례도 없을 것. 나는 잠을 깨려는 의미로 살며시 얼굴을 비볐다. 얇은 옷 한 겹 사이로 녹아 내릴듯한 부드러움이 내 볼에 마찰 된다. 예전에 몇 번 경험한적은 있었는데, 고연주의 가슴은 상당히 풍만한 편에 속했다. 마치 응석이라도 부리는 행동에 위에서 가느다랗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녀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보듬기 시작 했다. 나는 한동안 그 손길에 취했다. 가냘프기는 하지만 빼빼 마른 몸매는 아니다. 고연주는 오히려 보기 좋을 정도로 적당히 살이 붙은 말랑한 몸매를 갖고 있었다. 이윽고 손길을 거둔 그녀가 앞섬을 살짝 풀어주자, 속옷도 착용하지 않은 그녀의 붉게 달아오른 젖가슴이 슬쩍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곳을 향해 다시 한번 고개를 묻자 이번에는 내 피부로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탄력적인 감촉에 절로 뜨거운 숨이 흘러 나왔다. “아이 참. 너무 가슴만 좋아한다. 그러니까 꼭 아이 같잖아요.” “잠시만….” “호호. 어떡해. 너무 귀여워.” 고연주의 나른한 웃음 소리를 듣자, 절로 노곤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좋은걸 뿌린 걸까? 달착지근한 향기가 내 후각을 자극 했다. 대놓고 남성을 유혹하는 여성의 체취에 한층 흥분감이 차 올랐다. 우리 둘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있다가는 정말로 잠이 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시 몸을 떼어놓자 곧 그 사이를 채우고 들어오는 허전한 공기들로 인해 곧바로 서로를 강하게 껴안았다. 내 몸에 단단하게 밀착된 그녀를 느끼며 살짝 고개를 숙이자 풀어 헤쳐진 앞섬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젖가슴이 내 가슴에 짓눌려 비죽 부풀은 모습이 보였다. 그곳에서 느껴지는 숨이 막힐 정도의 압박감에, 나는 어느새 아래에서 성난 신호를 보내는 남성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하연의 얼굴이 뇌리에 떠올랐으나, 이번에는 순식간에 사그라 들었다. 그녀는 내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는 듯 겉 옷을 들어 올려 자신의 허벅지를 슬쩍 드러냈기 때문 이었다.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적당히 살이 붙은 건강한 허벅지를 보자 안 그래도 치솟아 오르던 성욕이 이제는 부글부글 끓어 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그 정도로 남자의 정신을 홀리고 욕망을 불러 일으키는 치명적인 마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욕망들을 억지로 억눌렀다. 지금 당장이라도 옷을 찢고 달려들어 그녀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흐트러진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짐승 같이 헉헉거리기 보다는 최소한 하연과 했을 때처럼 서로간의 마음을 확인하고, 맞추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해서, 나는 그녀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위에서 아래로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그녀의 머리 결은 내 손 안에서 부드럽게 찰랑이며 한 줌으로 모아졌다가, 이내 가지런히 정돈 되며 곱게 놓였다. 그녀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보며 이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봉곳이 솟아오른 젖가슴 위로 볼록 튀어나온 쇄골이, 그리고 또 그 위로 매혹적인 목덜미가 내 시선을 빼앗았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의 목을 향해 입술을 가져갔다. 그리고 살갗에 입을 맞춘 순간, 혀를 굴리는 동시에 숨을 들이켜 살짝 흡입해 보았다. 목 전체를 훑던 입술은 곧 쇄골로 내려갔고 그 아래 깊게 파인 가슴 골에 이르렀다. 나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상의를 잡았고, 그녀는 벗기기 편하도록 두 팔을 들어 올려 주었다. 이윽고 상의를 완전히 탈의 시킨 순간 비로소 나신으로 변한 그녀의 상체가 눈에 들어왔다. 한 손으로 쥐어도 남을 것 같은 보기 좋게 솟아오른 불그스름한 두 언덕이 보인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도드라진 부분은 꼿꼿하게 서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자 그녀는 내게로 살짝 몸을 기울이며 만지기 편하도록 호응해 주었다. 그리고 곧, 보드랍고 물컹한 젖가슴이 양 손 안으로 가득하게 잡혔다. 그와 동시에 젖가슴의 돌출된 부분이 손바닥에서 찌그려 드는 것을 느끼며 나는 가벼운 환희에 몸을 떨었다. “쿡쿡.” 한참을 만지작거리고 있자, 그녀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갸름한 얼굴, 가느다란 눈썹, 색정적인 눈동자, 작고 예쁜 입술. 그녀는 연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듯 고연주는 한 없이 자애로운 눈길과 손길로 나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 시선에 자신감을 얻은 나는, 탐스럽게 보이는 봉우리를 향해 천천히 입술을 갖다 대었다. 이윽고 입 안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가득 머금은 순간, 돌출된 부분을 혀로 굴리며 숨을 깊숙이 들이 마셨다. 곧 살을 빨아 들이는 음란한 소리가 남과 동시에 내 머리를 더욱 끌어 안는 그녀의 포옹을 느낄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음. 여러분들. 다음회에 내용이 조금 더 이어지는데, 조금 표현법을 바꿔볼까 합니다. 조금 더 직접적이고 자극적인 단어가 나올것 같습니다. 최대한 완곡하게 표현할 생각이긴 하지만, 혹시라도 불쾌감을 느끼시는 분들은 초반부는 넘기시고 중후반부 부터 보시면 됩니다. 감사 합니다. (__) 『 리리플 』 1. 키좀가져가지마 : 영광스러운 새벽의 첫코 이십니다. 1등 축하 드립니다. 하하하. 부디 이번회도 재미있게 감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2. incrudu : 아마도 그럴겁니다. 그때 밤 샘 작업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10개에서 절반으로 줄이기도 했구요. 심심한 유감의 말씀을 드립니다. (__) 3. 바다한스푼 : 쿠폰 감사 합니다. (__) 오. 닉네임이 바다한스푼. 왠지 모르게 탐이 나네요! 저, 저는 구름한스푼으로 만들고 싶어요. 헉 땡긴다…. +ㅁ+ 4. 악마신전 : 하하. 그렇게 보실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런 흔들림은 <좋은 현상>으로 보셔도 무방합니다. 왜냐하면요. 음. 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네요. 흐흐흐. 5. gkgngh : ㅋㅋㅋㅋㅋㅋㅋㅋ. 정말 창의적인 생각 이십니다. ㅋㅋㅋㅋ. 음 그 생각은 못 해봤네요. 아마 0.0000000000000000001초의 오차도 없이 넘길 수 있으면 모르겠는데, 아마 불가능할것 같습니다. :) 6. 샤이닝쿠마 : 엇! 쿠마! 제가 예전에 엄청 좋아하던 쿠마! 저는 말이죠. 곰을 아주 좋아합니다! CUMA! 7. Masterpiece : Masterpiece님. 글을 아주 제대로 읽으셨습니다. 네. 그게 바로 제가 여러분께 드리고 싶었던, 둘의 관계에 대한 메시지 였습니다. :) 정답 입니다. 8. 명박짱의양양합일 : 하. 그게 걱정입니다. 어떡하죠 정말? ㅋㅋㅋㅋ. 글은 쓰고 싶은데 말이죠. 갈피를 못 잡겠네요. 9. 꼬야 : 음. 어. 다른분이 아니라 꼬야님께서 그렇게 말씀 하시니까…. 음. 아, 아닙니다. 흠흠! 10. 시즈프레어 : 네 알겠습니다. 시즈프레어님의 몸. 잘 받아 가도록 하겠습니다. 자. 어서 이리 오시지요. 후후.(?!)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78 / 0933 ---------------------------------------------- 황홀경 나는 젖을 문 채 입을 오물거렸다. 그러자, 젖가슴은 내가 힘을 가하는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모양을 변형 시켰다. 탱탱한 탄력도 있었지만, 그보다 입 안에서 녹아 내릴 것 같은 부드러움이 내 혀를 휘감아 들었다. 그러면서도 남은 한 손으로는 꾸준히 그녀의 왼 가슴을 조몰락거렸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해본 것 같다. 손바닥을 크게 벌려 전체를 원을 그리는 것처럼 문질러 보았다. 쥐었다가 풀어보기도 하고,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도드라진 부분을 살살 누르며 희롱하기도 했다. 혀 끝으로 물고, 비틀고, 잡아 당기기도 하면서 언덕 전체에 나만의 흔적이 남도록 키스를 퍼부었다. 마치 장난감을 갖고 노는 아이처럼, 나는 그녀의 가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한동안 실컷 놀다가 고개를 들자 입가에 가느다란 호선을 그리고 있는 고연주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살짝 상기 되어 있었는데, 내가 노는 동안 끈임 없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마치 응석부리는 아가를 달래는 것처럼 말이다. “맛있었어요?” “흠흠.” 그녀가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자, 갑자기 머쓱한 기분이 들어 물음을 헛기침으로 무마 시켰다. 고연주는 까르르 웃었다. 그 동안 너무 한 부분에 몰입한 것 같아 이제는 슬슬 범위를 확장해 나갈 필요성이 있었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인 듯 내가 따로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옷을 벗고 있었다. 마치 양파 껍질을 까는 것과 같이 하나씩 옷을 벗던 우리는, 이윽고 온전한 나신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진득하게 있으라는 것은 고문이나 다름 없었다. 해서, 나는 살짝 그녀를 밀어 넘어트렸다. 물론 뒤통수에 손을 받친 상태였고 고연주의 몸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완전히 뉘였다. 어둠 속에서도 여왕의 몸매는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폭발적인 매력을 과시하듯, 당당함마저 느껴지는 몸에 나는 살짝 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크기가 너무 커 좌우로 살짝 늘어진 가슴, 그 아래로 잘록하게 모여드는 허리, 볼록한 일자 근육을 내보이는 아랫배와 건강해 보이는 골반. 그리고 육덕진 살들이 붙어 있는 허벅지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방금 전 보았던 부분들은 하나하나 쓸며 내려갔다. 내 손길이 닿을 때 마다 그녀는 미세하게 몸을 움찔거렸고, 허벅지 윗부분에서 잠시 손을 멈췄다. 언제쯤 한번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지금 눈 앞에 있다는 사실에 작은 감동이 밀려 들어왔다. 그녀가 최대한 불쾌감을 느끼지 않는 선에서, 나는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내 뻗었다. 내 의도를 알아 챘는지 고연주는 오히려 다리를 살짝 벌려줌으로써 더욱 들어가기 쉽게 해주었다. 그녀의 허벅지 에서는, 몰캉하면서 뜨거운 감촉이 느껴졌다. 잠시 그곳을 어루만지다가 서서히 위쪽으로 이동하자 곧 가슬가슬한 부분에 손이 닿을 수 있었다. 여성의 몸에서 가장 소중한 부분 이었다. 곧이어 그곳을 가볍게 훑어 올리자, 가슬가슬한 수풀들과 갈라진 틈이 손에 느껴졌다. 그곳을 자극하면 민감할 법도 한데 고연주는 어떠한 저항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다만, 꾹꾹 누를 때 마다 몸이 떨리고 이따금 입술을 깨무는걸 보니 뭔가 느끼는 것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부분을 계속해서 어루만지며 <그림자 여왕>의 나신을 전체적으로 감상 했다. 아름답고, 관능적이고, 농염하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들은 제쳐 두고서라도 지금 눈 앞에 있는 여성이 <그림자 여왕>이라는 것에 나는 더 큰 흥분을 느꼈다. 무언가 꿈이라고 생각 했던 일들이 현실로 나타났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녀와 서로 알몸으로 같은 방 안에 있다는 사실에 가슴을 두들기는 고동이 거세어지고 있었다. 한동안 그녀의 소중한 곳을 애무하던 손을 들어 올리자, 손 끝에 진득한 번들거리는 액이 묻어 있는 게 보였다. 단지 신음성을 내지 않은 것일 뿐 몸은 내 행위에 충분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참을 가슴에서 헤매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전희는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내 남성도 이미 빳빳해질 대로 빳빳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아픔이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 당장 달려들어 그녀의 안을 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한번 더 참기로 했다. 하연은 나와의 첫 날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해주었다. 고연주와의 첫 관계 또한 나만의 욕망을 채우기 보다는 그녀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 되도록 만들어주고 싶었다. 자세를 고쳐 잡자, 지그시 나를 응시하던 고연주의 얼굴 표정에 변화의 바람이 일었다. 그녀는 몸을 살짝 흔들며, 요염하게 혀를 날름거렸다.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있던 입가는 어느새 음란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고,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살며시 끌어 당겼다. 방금 전과는 정 반대의 태도였다. 그리고, 그것을 담담히 보던 나는…. “으응? 읍!” 곧바로 얼굴을 들이밀어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계단 이후에서 서로 한 번씩 했던 것 이후, 두 번째로 하는 입맞춤 이었다. “응…음…쪽….” 코에서 들리는 그녀의 달콤한 숨결이 인중을 간질인다. 처음에는 갑작스런 기습에 당황하던 그녀였지만 이내 입을 벌려 내 입맞춤에 적극 호응해 주었다. 구강 안에서 뜨거운 살 덩어리가 얽히고, 서로의 타액을 탐닉한다. 고연주는 대단히 적극적 이었다. 내 혀를 맴돌며 부드러운 마찰을 일으키기도, 옥죄듯 감싸며 거세게 빨아들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의 등을, 그녀는 나의 목을 안은 채 나누는 감미로운 입맞춤. 나는 그 행위를 유지하며 슬며시 고연주의 위로 몸을 실었다. 자동적으로 그녀의 몸이 침대 위로 출렁이고, 그 위로 나와 그녀의 몸이 겹쳐졌다. 겨우 입술을 떼자, 입과 입 사이로 기다랗게 늘어지는 실선과 그녀의 육체에서 흘러 나오는 살 내음에 핑 현기증이 돌았다. 머리 속 어질 함을 이기지 못해 다시 눈 앞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려는 순간,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조용히 내 귓가를 두드렸다. “수현. 그녀랑 할 때…. 그녀는 처음 이었나요?” “…네.” “미, 미안해요. 나, 나, 나…. 처음이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리고 홀 플레인에서 그러는 건 흠 잡을 일이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이자, 고연주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게, 그게 아니에요. 모르겠어요. 당신과 입을 맞추는 순간 갑자기 그 사실이 너무 후회스럽고, 죄를 지은 것 같아요. 나도 왜 이러는지…잘 모르겠어요.” “고연주.” “미안해요. 하지만 이 더러운 몸 이라도 당신에게 안기고 싶어요.” <또한 현대에서는 술집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깔봄을 받던 여자가. 홀 플레인 에서는 사용자들의 우러름을 받는 그림자 여왕이 될 수도 있답니다.> 고연주는 예전에 자신을 <술집 여자>라고 밝혔다. 그러나 몸을 함부로 굴리지 않았다고 했고 나는 그 말을 믿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스스로는 아니라고 했지만 본인의 과거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그녀가 태도를 바꿨을 때 내가 서두르지 않고 입맞춤을 한 게 그녀의 마음 변화를 이끌어낸 것 같다. 고연주는 어느새 눈물마저 글썽이고 있었다. “그런 슬픈 소리는 하지 말아요. 저도 하연이랑 관계를 가졌어요. 현대에서도 그런 적이 있고요. 그럼 저도 더러운 몸 인가요?” “아니에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에요. 하지만 남자랑 여자는 다르잖아요.” “뭐가 달라요. 하나도 다른 거 없어요. 그렇다고 치면 지금 우리들이 이러는 것도 더럽다고 생각 하시는 건가요? 아니잖아요.” 내 단호한 말투에 고연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탓에 한두 방울 똑 떨어지는 눈물들을 닦아주며, 나는 한층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당신의 몸은 더럽지 않아요. 너무도 아름답고, 매혹적이고, 깨끗하고, 순결해요. 그러니 제 앞에서 다시는 그런 말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고마워요.” 관계 전에는 내가 죄책감을 가졌고, 관계에 들어서자 그녀가 죄책감을 가진다. 확실히 남성과 여성은 서로 다른 감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로서 우리들은 서로 감추고 있던 내면을 조금이나마 털어 놓았다. 단순한 호감으로 관계를 맺는 게 아닌, 서로의 깊은 마음을 일부나마 공유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였다. 그녀와의 완전한 합일. 고연주는 애타는 얼굴로 나를 보며 스스로 허벅지를 벌리고 있었다. 나 또한 슬슬 때가 됐다는 생각에 그녀의 벌려진 다리를 들어 올리며 더욱 몸을 가까이 옮겼다. 그리고 그녀의 소중한 곳에 내 남성이 밀착 되는 순간, 매끈하게 뻗은 다리는 재빠르게 내 등을 휘감아 들었다. 마치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수현…. 어서….” 고연주가 애절한 목소리로 애원하고 있다. 그 말에 나는 얼른 하복부를 들어 그녀의 국부를 더듬었다. 드디어 들어간다는 생각에 급격히 흥분을 했는지 한두 번 잘못된 곳을 찌르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가 스스로 엉덩이를 움직여 줌으로써, 간신히 내 남성의 끄트머리를 입구에 걸칠 수 있었다. “하, 한번에 와주세요.” “그렇지만….” “괜찮아요.” 고연주의 연이은 부탁에 나는 잘록한 허리를 꽉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입구에 걸쳤던 남성에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아아….” 푸욱, 꾹 다물려 있던 살갗을 가르며 파고 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참고 있던 그녀의 신음이 비로소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에 만족하지 못한 듯,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한번 더 입을 열었다. “더, 더 깊게…. 아아…!” 그녀의 부탁 대로 나는 엉덩이를 내 쪽으로 잡아 끌면서 더욱 허리를 전진 시켰다. 내 사타구니와 그녀의 넓적 다리 부분이 맞부딪치는 순간 고연주는 허리를 감고 있던 다리로 나를 더욱 세게 옥죄었다. 그렇게 끝까지 남성을 박아 넣자, 그녀의 하복부가 단단하게 수축해짐과 동시에 내부 끝으로 다다를 수 있었다. 우리들은, 비로소 완벽하게 하나가 될 수 있었다. “…….” “…….” 뜨겁다. 뜨거웠다. 그녀의 안은 너무도 뜨거워 이대로 녹아 없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도, 그녀도 말은 없었다. 나는 그대로 몸을 허물어트려 그녀와 배를 맞췄고, 그런 나를 그녀는 양 손과 양 다리로 거세게 감싸 안았다. 가슴 부근에서 느껴지는 압박감과 남성에서 느껴지는 뜨거움. 그리고 내 몸을 휘감은 그녀의 팔과 다리. 나는 잠시 동안 그 여운에 젖어 있었지만, 이윽고 살짝 왕복 운동을 시작 했다. 그러자 그녀 또한 엉덩이를 흔들며 내 운동에 맞추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삐걱, 삐걱. “아, 아, 아, 아.” 낡은 침대라서 그런지, 최대한 살살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갈리는 소리들이 났다. 그리고 조금씩 속도를 높일수록 그 소음은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침대 소리에 맞춰 추임새를 넣는 것처럼 자그마한 신음을 터뜨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도 야하거나 추잡하게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수천 번은 보듬어 주고픈 아련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목소리였다. 그렇게 쉴 새 없이 움직이자 어느새 내 몸에서도 더운 김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철썩 이는, 물이 흐른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방 안을 간헐적으로 울렸다. 그녀의 표정 위로 떠오른 뜻 모를 환희를 보며 나는 더욱더 남성을 힘차게 움직였다. “아, 아. 그렇게, 좀 더, 세게, 해주세요.” “기꺼이.” 스타카토로 연주하는 것처럼 내 아래 깔려 있는 여성은 한 음절씩 끊어 말하며 내게 요구했다. 나는 그 요구에 따라 한층 더 속도를 높였다. 솔직히 지금도 충분하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더욱 격렬한 것을 원하는 것 같았다.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앙…!” 갑작스럽게 격해진 요동침에, 그녀는 격정을 참을 수 없는 것 같았다. 점점 더 자극감이 오르는지 간간히 지르던 신음은 간드러진 교성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침대가 갈리는 소리도, 하복부의 질퍽이는 소리도 더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너무, 좋아, 요, 너무, 더, 더, 세게, 하앙!” 벌써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아까부터 조금씩 몸을 잠식하던 흥분감이 곧 터져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지금 몸 내부를 지배하는 감각들이 내 그곳으로 서서히 몰리고 있었다. 고연주도 나와 비슷한 감각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를 감고 있는 팔과 다리들이 이제는 한 순간에 나를 터뜨릴 듯 안간 힘을 쓰고 있었다. 내 가슴팍에 짓눌려 부풀어 나온 그녀의 가슴을 보며, 나 또한 마지막 박차를 가하기 시작 했다. 그리고 그녀의 허벅지가 내 허리를 끊을 것처럼 크게 오므려진 순간, 막 기둥 끝까지 들어갔던 그녀의 소중한 곳에서 강렬한 수축 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내 것을 쥐어 터뜨릴 셈인지 내부를 엄청나게 좁혀 들었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흐읏!” 거친 숨소리를 뱉음과 함께 밀려오는 쾌감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말았다. 마치 그 동안 겨우 버티고 있던 둑이 허물어지고 막혀 있던 물이 한 번에 넘쳐 범람하는 것 같았다. “으아아아앙!” 그녀가 미친듯이 몸을 비틀며 안타까운 비명을 질렀다. 평소의 그녀라면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귀여운 비명 이었다. 내가 하복부에 잔뜩 힘을 주자, 그녀 또한 죄었던 다리를 풀고 말았다. 그러나 풀린 다리는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나와 동시에 절정을 맞았는지 허공으로 쭉 뻗어나가는 다리와 빳빳이 펴진 발가락이 보였다. 나는 푸들거리는 그녀의 몸을 거세게 끌어 안았다. “아…! 으…! 읏…! 아…! 으…! 읏…!” 고연주의 몸 안에, 그 동안의 결실을 쏟아 붓는다. 한번씩 정(精)으로 이루어진 줄기가 터져 나갈 때 마다 그녀의 허리가 활처럼 휘어졌다가 다시 내려 앉기를 반복 했다. 퍼덕거리는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나는 계속해서 내부로 진액을 퍼부었다. 이윽고 모든 정을 다 쏟아 붓자, 한 순간에 맥이 풀린 느낌을 받았다. 나와 고연주는 그대로 몸을 늘어뜨렸고, 거칠게 숨을 몰아 쉬었다.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보자 몽롱한 얼굴과 달착지근한 숨소리가 색색 흘러나오는 게 들린다. 나 또한 기분 좋은 홀가분함이 전신을 나른하게 만들고 있었다. 잠시 동안 그 여음(餘音)을 만끽하다가, 일단은 남성과 여성의 결합을 해제하기 위해 허리를 뒤로 빼려는 순간 이었다. 축 늘어졌던 그녀의 다리가 다시금 내 허리를 감아 들었고,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입을 열었다. “잠시만, 잠시만 이대로 있어줘요. 빼지 말아줘요. 제발….”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던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입술을 살며시 내밀었다. 입을 맞춰 달라는 뜻 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또 다시 달콤하게 입을 맞춘 후, 눈을 감아 사정 후의 여운을 음미 했다. 깊은 밤. 그렇게 결합을 유지한 상태로, 우리들은 입술과 육체로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그대로 잠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네, 실은 중간즈음에서 끊고 다음 내용을 이으려고 했는데, 이것저것 넣고 싶은 내용이 있다 보니 한 편을 소비하고 말았습니다. 이왕 시작한 씬인만큼, 제대로 마무리를 짓는게 나을것 같았습니다. 또한 고연주와 첫 관계를 갖는 장면이라…. 전보다 조금 더 강한 표현들을 넣어 보았습니다. 혹여나 불쾌감을 느끼신 분들이 있다면 죄송합니다. 부디 너그러운 양해를 부탁 드리겠습니다. (__) 『 리리플 』 1. 破天魔痕 : 하하. 1등 축하 드립니다. 제가 다른 노블레스 작품들도 많이 읽는편 인데, 많은 소설들의 1등을 차지하시는것 같더라고요. 혹시 비결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 2. 사람인생 : 좋은 자세 입니다. 특히 수학을 풀 때 답지는 보지 않는게 좋다고 들었습니다. 아는 친구의 문제집을 본 적이 있는데, 별표로 친 문제에 <1주일 걸린 문제.>라는걸 보고 적잖은 충격을 먹은적이 있습니다. 저야 5분 ~ 10분 정도 생각한 후 안 되면 답지를 봤지만 말이죠. 하하하. 3. EyeSeeYou : 일단 플래그는 꽂아 뒀습니다. 이제는 비비앙 하기 나름 입니다.(?) 4. 작은히어로 : 안솔은…. 생각해 둔 내용은 있습니다. 하하하. 다만, 조금 후의 일이라 조금 더 천천히 시간을 두고 생각할 예정 입니다. 5. hohokoya1 : 고맙습니다. 이번주, 다음주가 시험 포함 준비 기간이라 연참은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공부도 제게 중요한 일 중 하나니까요. :) 물론 최대한 노력은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6. Fish㏂ : 가능 합니다. 다만, 여성 사용자의 경우 임신 여부를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7. 현오 : 하하. 헬싱에 나오는 부분이군요. 저 또한 재미있게 봤고, 인상 깊게 본 내용중 하나 입니다. 그 후덕한 인상의 안경 쓴 캐릭터로 기억하는데요. 맞나요? :D 8. 레필 : 네. 지금은 뮬이라서 그렇지만, 아마 일반 도시로 가는 순간 많은게 바뀔 예정 입니다. 뮬은 아직 개척 도시에 불과해 실제로 다른 도시들과 많은 차이점을 갖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진행을 기대해 주세요. :) 9. a조운 : 아. 지금 여기서 말씀 드릴게요. 유정이 나이가 22살인데 23살로 되있구요, 하별이 나이는 21살 입니다. 그리고 김수현의 초반 설명 부분에 <회귀 전에도 손 꼽히는 강자 중 한 명 이었지만> 부분이 있는데, 강자는 맞는데 손에 꼽히는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 10. 그기린그림 : 아하하. 진지하게 읽고 있다가 중간에 빵 터지고 말았습니다. 수현이가 자신의 가슴에 비수를 푹푹 꽂으셨다고 전해달라고 하네요. :D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79 / 0933 ---------------------------------------------- 소식 홀 플레인에 들어온 이후 잠을 더 자고 싶다고 느낀 것은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감정 이었다. 나는 고연주와 관계를 가진 이후 물 밀 듯 밀려오는 나른함에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건, 나를 품에 안은 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의 얼굴 이었다. 내 머리를 연신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에 계속 눈을 감고 싶었지만, 이따금씩 들리는 잔잔한 웃음 소리에 결국 살짝 실눈을 뜨고 말았다. 그리고 눈을 뜬 정면에는, 사랑스러워 보이는 미소를 머금은 고연주의 얼굴이 보였다. 잠깐, 방금 전 내가 뭐라고…생각한 거지. “아이구~. 우리 아가 일어났어요?” “……?” “어머 눈 깜빡깜빡 하는 것 좀 봐~. 일어나니까 배고파요? 우리 아가 젖 먹을까요?” “크흐흠.” 나는 크게 헛기침을 하며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어젯밤, 그녀의 젖가슴에 헤어나오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괜스레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에 후끈한 기운이 덮쳐 들었다. 고연주는 그런 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박수를 치며 깔깔 웃었다. “까르르. 아, 정말. 적응 안 돼. 정말로 김수현 맞아요? 잠자리에서는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깨물고 싶어~.” 고연주는 말을 마치고는 내게로 와락 안겨 들었다. 또 하연처럼 무조건 나를 무조건 감싸 안으려고만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음으로써 내가 그녀를 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상태에서 더욱 더 파고 들었고, 나는 결국 돌진력을 이기지 못해 기껏 일으킨 몸을 다시 눕힐 수 밖에 없었다. 풀썩, 이불이 움푹 패어 들고 내 위로 몸을 실은 그녀의 육체에서 여성 특유의 체취를 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옷을 입고 있는걸 본 순간, 나는 그제서야 아직 내가 나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순간 몸을 뒤틀 뻔 했지만 그랬다가는 고연주가 또 웃을 것 같아 간신히 태연한 얼굴을 유지 했다. 내가 정말 왜 이러는 걸까. “호호. 잘 잤어요? 기분은 어때요? 멍~해 보이는데.” “자고 일어나서 그래요. 아무튼 오랜만에 푹 잔 것 같아요. 고연주도 좋은 밤 보내셨나요?” “항상 나른하기만 했는데, 오늘따라 몸에 활기가 넘치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안길걸.” 그녀는 말을 하고 나서 살며시 입술을 핥았고, 나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고연주는 그런 나를 빤히 바라 보다가 이내 살짝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네.”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 어느 때보다 가슴 벅찬 아침을 맞을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어젯밤 너무 좋았어요.” 고연주의 솔직한 말에 나는 그저 머리만 긁적거렸다. 하고 싶은 말은 있었는데, 그저 목구멍 주위에서만 맴돌 뿐 이었다. 결국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나는 그저 내게 고개를 묻은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 행동 만으로도 충분 했는지 그녀가 편안히 눈을 감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우리 둘은 몇몇 사소한 담소를 나누며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최대한 조심한다고는 했는데, 옷을 입어야 하니 이만 나가주지 않겠냐는 말은 결국 다시 한 번 그녀를 웃기고 말았다. 고연주는 내 말을 따르지 않았고, 되려 옷을 입는걸 도와주었다. 마지막으로 허리띠를 꼿꼿이 동여 매어주는 그녀를 보자 마치 아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호. 나가서 연초라도 한 대 피우고 있어요. 정리만 하고 바로 음식 만들게요. 간 밤에 힘 좀 쓰셨으니 보답을 해야겠죠?” “음. 알겠습니다.” 침상을 정리하고 곧 나가겠다는 그녀의 말을 뒤로 한 채 나는 비로소 방문을 열 수 있었다. 어젯밤 이곳이 들어올 때와는 달리 지금은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그 중 가장 확실한 건, 그 동안 애매하게 서 있던 경계가 허물어짐으로써 나와 그녀의 사이가 더욱 깊어졌다는 것 이다. 그렇게 머쓱한 기분을 다듬으며 나는 방을 나와 여관 밖으로 나섰다. 워낙 연초를 좋아하는 터라, 여유가 있으면 아침에 일어나 꼭 한대 태우는 버릇이 있었다. 치익. 치이익. “후욱.” 아침 날씨는 제법 쌀쌀 했다.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찬 바람에 나는 빠르게 연초를 빨아 들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태우던 연초를 탁 튕긴 후 다시 여관으로 들어갈 생각에 문을 열은 찰나였다. 한 발짝 안으로 들어서자 주방 앞에서 기웃거리던 인영이 깜짝 놀라 몸을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청순한 외모와 천진난만한 표정. 인영의 정체는 바로 안솔 이었다. “솔아?” “후아. 오라버니셨구나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안솔은 언제나처럼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 했다. 푹 잤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내 기준 이었기 때문에 시간은 이른 아침 이었는데, 그녀가 이 시간대에 일어난 것은 처음이라 약간의 의문이 들었다. 나는 가볍게 손을 들어 그녀의 인사에 화답해 주고는,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배가 많이 고픈가 보구나. 이른 아침인데 주방을 서성이네. 조금만 기다리렴. 곧 사용자 고연주가 나올 것 같으니 말이다.” “에에?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에요오….” “흠. 꼬르륵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히잉. 아니에요오.” 안솔은 내 농담에 손을 휘휘 저으며 극렬히 부정 했다. 극렬이라고 해도 고개와 손을 절레절레 젓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저 귀엽게 보일 뿐 이었다. “하하. 그런데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나. 무슨 바람이 불어서 네가 이렇게 일찍 일어났을까?” “우웅. 맞아요. 분명히 더 코~해야 할 시간인데에. 이상하게 오늘은….” 그녀의 반응을 더 보고 싶어 가볍게 던진 말 이었는데, 뜻밖에도 안솔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 했다. 미간을 살짝 좁히고 생각에 잠긴 복덩이를 보며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무슨 일 이라도 있는 건가? 그리고, 다음에 이어진 그녀의 말은 나를 충격에 빠트리고 말았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그…불안해서요오. 뭔가 되게 불쾌하고 빨리 일어나야만 할 것 같고, 얼른 주방으로 들어가야만 할 것 같은….” “……!” “히잉. 모르겠다아. 그런데 이상하게 오라버니를 보니까 불안하던 마음이 싹 가셨어요. 헤헤.” 방실방실 웃는 안솔을 보며 나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걸 느꼈다. 여성 특유의 직감인가, 아니면 행운 수치의 적용으로 인한 현상인가. 내게로 아장아장 걸어오는걸 그녀를 보며, 차후 종 잡을 수 없는 그녀의 능력을 한껏 조심할 필요성을 느꼈다. 나는 재빠르게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마침 그녀를 보니 <절규의 동굴> 탐험을 하면서 마음 먹었던 일이 머리 속으로 떠올랐다. 그 동안 이런저런 일들로 까먹고 있었는데, 그녀의 행운 능력치에 관한 이야기였다. 물론 나 나름대로 최대한 어필할 생각이었지만, 우선은 그녀의 생각을 들어보고 의견을 존중해줄 생각 이었다. “솔아. 잠시 오빠랑 이야기 좀 할까?” “네에! 좋아요!” “그래. 그럼 잠깐 이리 와서 앉….” 우웅! 반색하며 달려드는 안솔을 보며 옆의 테이블로 이끌려는 순간 이었다. 정확히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옷 안에서 하얀 구슬 하나가 툭 튀어 나오며 내 앞을 가로 막았다. 웅웅 진동 소리를 흘리며 말간 빛을 내는 게, 여차하면 수호의 방패라도 펼칠 기세였다. 떨떠름한 얼굴로 걸음을 멈칫하자 그것을 확인했는지 안솔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조금 전만해도 졸린 목소리로 말하던 그녀는, 어느새 잠이 깼는지 날렵한 손놀림으로 눈 앞의 구슬을 잡아 채었다. 그리고, 곧 볼을 빵빵히 부풀리며 남아 있는 손을 들어 구슬의 윗부분을 찰싹 때렸다. “너어! 이게 무슨 짓이에요!” 우~웅. “누가 감히 아빠한테 그렇게 버릇 없이 굴라고 했어요! 네?!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나요?” 우웅…. 우웅~. “조용히 해요! 뭘 잘했다고 울어요!” “…….” 나는 할 말을 잃은 얼굴로 안솔과 구슬을 쳐다 보았다. 정말로 신기한 것은, 고작 구슬주제에 불과한 놈이 안솔이 한마디 할 때마다 미약한 진동음을 흘리고 있었다는 것. 진동을 들을 때마다 왠지 모르게 녀석이 풀이 죽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잠깐만. 뭐? “아빠…라고?” 중간에 뭔가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아 한 마디 내뱉자, 한창 “잘 했어요. 잘못 했어요.” 라고 말하던 안솔은, 곧 “혼나야겠어요. 혼나지 않아야 겠…삐아!” 라는 알아 듣기 힘든 괴성으로 말을 매듭 지었다. “…….” “어버버버.” 나는 지그시 안솔을 응시 했다. 그녀는 내 지긋한 시선을 견딜 수 없었는지, 한동안 배배 몸을 꼬았다. 문득 <절규의 탐험> 공터에서 그녀가 내게 했었던 말들이 기억났다. <도대체 왜 안 만져주는 거에요오. 얼른 머리도 쓰다듬고, 볼도 만져주란 말이에요옷. 아니면 다른 곳 만져도 괜찮으니까아….> 언컨시어스 리비얼(Unconscious Reveal) 이었던가. 지금 생각해보니 그녀 치고 꽤나 대담 했던 말들 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별로 관심을 쏟지 않은 것 같아,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려고 한 발자국 더 내디뎠다. 그러나 안솔은, “핫? 힛! 훙? 헷!” 이라는 뜻 모를 음성을 내뱉고는 후다닥 도망가 버렸다. 그 어느 때보다 재빠른 몸놀림으로 계단을 오르는 그녀를 보며, 나는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대로 차분히 앉아 아침을 기다리면 분명 다시 내려오리라. 그때의 반응이 보고 싶었다. 아침 식사 시간은 즐거웠다. 오늘따라 기운이 넘치는 고연주는 자신의 실력을 십분 뽐내었다. 일행들은 요즘 들어 입이 호강한다고 좋아했고, 고연주는 미묘한 웃음으로 대답 했다. 안솔이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것만 제외하면 분명 유쾌 했던 식사 시간 이었다. 그렇게 식사를 끝낸 후, 나는 한 쪽 구석에서 고연주의 방에서 들고 온 기록을 정독하기 시작 했다. “이거 마셔요. 읽으면서 아리송한 게 있으면 따로 체크해둬요. 정보를 더 모아볼게요.” “네. 고마워요.” 그녀가 가져다 준 차 한잔을 마시며 기록을 읽는다. 평화로운 시간 이었다. 문득 황금 사자 클랜의 원정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그네들은 지금쯤 어디까지 들어 갔을까? 내 예상대로라면 지금쯤 한창 박살이 나고 있을 것이다. 특히, 초입에서부터 나타나는 놈들은 매우 강력하고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있기 때문에 단단히 준비하지 않으면 호되게 당할 건 안 봐도 비디오였다. 아니, 아마 당하겠지. “후릅.” “오빠! 누가 오빠 찾아왔다고 하는데!” 여유롭게 차를 한 모금 넘기다가, 갑작스레 들린 유정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멀뚱한 얼굴로 여관 입구 밖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누군데?” “몰라. 클랜 창설 관련 전령이라고 전해달래. 들어오라고 하는데 안 들어오네.” “뭐?” 나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 아비규환(阿鼻叫喚). 강철 산맥의 안은, 그야말로 생지옥을 방불케 하는 처참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사용자들의 수는 이백 명 남짓 될까. 궤멸에 가까운 피해. 그나마 몸 성해 보이는 사용자들은 드물고 대부분 깊든 자잘하든 상처를 한두 개 달고 있었다. 원정에서 물약 보급과 사제들의 편성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것을 감안 한다면, 현재 이들의 상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으아아…. 아아아….” “살려줘…. 사제, 사제를 빨리….” 그들은 모두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처음 출발할 때의 질서 정연함은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아직 이곳에 오지도 못하고 낙오해 한참 떨어진 사용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박현우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본대와의 소식이 끊긴지도 벌써 하루가 지났다. 최대한 흔적을 따라가면서 그들을 찾으려고 했지만 이 이상은 무리였다. 스스로도 한계라고 느끼고 있었고, 무엇보다 더는 사용자들을 끌고 갈 수 없었다. 이제 남은 방법은 이곳에서 캠프를 세워 그저 구조를 기다릴 뿐 이었다. 아니면 몸을 회복한 후 다시 탐색을 하던가. 그러나 두 방법 모두 죽기 딱 좋다는 사실을 박현우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피가 마르는 기분을 느꼈다. 이토록 자신이 나약하다고 여긴 적은 황금 사자 클랜으로 들어온 이후 처음 이었다. 쿵! 그 때, 매우 커다란 진동이 캠프를 덮쳤다. 어찌나 강했는지, 캠프 내 구비해 놓은 물품들이 전부 들썩일 정도였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들을 보며 사용자들의 목 울대가 크게 울렁인다. 박현우 역시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는 긴장된 낯빛으로 그곳을 나섰다. 그러나 그의 속마음은 제발 놈들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그러나 현실은 그의 바람을 철저히 외면 했다. 그 소리가 가까워 질수록 디디고 있는 대지에는 커다란 파문이 일어나고 있었다. “또…. 그 놈들인가?” “아아아!” 누군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부르짖던 사용자들도 어느새 다들 입을 다물고 대지를 통해 올라오는 파동을 느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예상이 틀렸기를, 누군가 그렇다고 말해주기를 바라며 주변을 돌아 보았다. 그러나 사용자들의 얼굴 표정은 모두 똑같았다. 모두 굳은 얼굴로 몸을 덜덜 떨며 겁에 질려 있었다. 그때였다. "크아아아악!" “모, 모두 일어나! 전투를 준비 한다!” “으, 으아아악!” 저기 멀리 오른편에서,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산맥을 크게 울렸다. 박현우는 직감적으로 늦었음을 깨달았다. 자신들을 괴멸로 몰아 넣은 놈들이 추격해온 것이 분명 했다. 재빠르게 전투 준비를 외쳤지만, 곧이어 울려퍼진 또 다른 비명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을 기점으로 이곳 저곳에서 구슬픈 비명 소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 했다. “꺄아아아앗!” “으아아! 저리가! 으아…!” 파삭! 파삭! 콰드득! 콰드득! 터지는 소리, 비명 소리, 씹히는 소리, 다시 비명 소리. 끔찍한 살육의 소리가 시시각각 캠프를 찾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캠프 주변에 있던 사용자들의 육안에도 놈들의 모습이 조금씩 노출 되기 시작 했다. 놈들은 거대 했다. 공룡의 형상을 한 거대한 괴수 수 마리가 날카로운 발톱을 크게 휘두르자, 사방으로 뜨거운 피와 살점들이 허공을 향해 흩뿌려졌다. "끄아악! 살려…. 끄르륵! 끄륵!"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수풀 안으로 도망가려던 사용자 한 명은 이내 허리가 비죽하게 솟아 오르며 허공으로 크게 떠올랐다. 어둠으로 물든 비죽한 발톱은 그 사용자의 복부를 관통해 허리를 뚫고 올라와 있었다. 발톱에 대롱대롱 매달린 그는, 빽빽 소리를 지르다가 몸을 축 늘어뜨렸다. 순식간에 절명한 것이다. “이곳은 도대체 어떤 곳이야…. 도대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리고 가까운 거리에서 그 장면을 목격한 한 여성 사용자는 그대로 자리에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육신을 종잇장처럼 꿰뚫고 찢어 발기는 발톱을 보며 앳된 얼굴의 사용자는 그저 멍한 얼굴로 중얼거릴 뿐 이었다. "희영아! 도망쳐! 도망치라고! 희영아아아!"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때렸다. 그러나 희영 에게는 고개를 돌릴 여유가 없었다. 그저 두 개의 번쩍이는 불빛이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서서히 거리를 줄여오는 섬뜩한 발톱만 보였다. 그녀는 차오르는 공포감을 이기지 못했고, 결국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오늘 리리플은 한 회만 쉬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회 리리플과 같이 합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독자 분들의 양해 부탁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오늘은 통과 의례에서의 사용자 능력치 설정에 대해 일부 공개하고자 합니다. 제가 지금부터 말씀 드릴 설정을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스포일러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 입니다. 해당 설정에 대한 계산식을 공개 하면, 몇몇 수학에 능하신 분들은 0연차의 능력치를 보고 차후 해당 사용자의 성장 정도를 예측하실 수 있습니다. 물론 중간에 몇몇 변수를 끼어 놓기는 했지만 말이죠. 인간이 지구에서 <통과 의례>로 소환 되는 순간 그들은 그 지점부터 <설정>의 적용을 받습니다. 다만 그 시점에서 그들을 <사용자>로 부를 수는 없습니다. 통과 의례에서 자격을 증명한 이들에 한해서 그 설정을 열람하고 더욱 깊게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습니다. 그럼 <설정>의 적용 중 능력치 설정에 대해서 말씀 드린다면, 비율로 볼 수 있습니다. 비율은 X : Y로 나뉘오며 X는 즉 현실 능력을 기반으로 잡고, Y는 각 인간의 잠재성을 더한 값이 능력치로 나타납니다. 다만 두 관계는 비례하지 않습니다.(일전에 본문의 내용 중 이런 말이 나오죠. 엘리트가 거지가 되고, 거지가 엘리트가 될 수 있는 곳이 홀 플레인 입니다.) X가 높다고 해도 Y가 낮을 수 있고, X가 낮다고 해도 Y가 높을 수 있습니다. 다만 추후 성장 정도를 포함 하면 Y가 미치는 영향이 X에 비해 훨씬 큽니다. 그리고 수련 정도, 보상 포인트, 장비들로 인해 그 수치는 변동할 수 있습니다. * 오늘따라 느끼는데 말입니다. 대한민국의 가장, 특히 아버지란 존재는 정말로 존경스러운 것 같습니다. 그제 어제 오늘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쪽지는 무서워서 보기가 꺼려질 정도 이더군요. 어렸을 때는 그저 몰랐는데, 사춘기 때는 마냥 무서웠는데.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부터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정말 거대하게 느껴집니다. 힘들 때마다 많은 조언을 얻습니다. 코멘트 달아 주신 분들. 쪽지 주신 분들. 모두 감사 합니다. 특히 쪽지 중 일부 수위 높은 부분들도 제 성장의 밑거름으로 여기며 받아 들이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서로간에 좋은 말을 할 수 있는 더 고운 말이 있다고 생각 합니다. :) 그럼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__) 0180 / 0933 ---------------------------------------------- 소식 클랜 창설을 신청한 곳에서 전령을 보냈다. 바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소리였다. 솔직히 놀랄만한 일 이었다. 까다롭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거주민들이 클랜 창설 관련 권한을 부여 받은 놈들이었다. 그런 만큼 당연히 서류 심사에 며칠은 걸릴 줄 알았는데, 이건 뭐 내자마자 통과한 것과 진배 없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 했지만 아주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들은 세 달 만에 세 곳의 유적을 발굴 했다. 즉 한 달에 하나씩 탐험한 꼴. 지금껏 유래가 없었던 일 인만큼 나름대로 특혜를 적용한 모양이다. 굳이 다른 가능성을 꼽자면 신분 변경 신청을 하러 간 고연주의 압박을 들 수 있겠지만, 아무튼 시기가 앞당겨졌다는 것은 전혀 나쁜 일이 아니었다. 해서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전령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클랜 창설을 맡는 곳에 도착한 이후 나는 배불뚝이 거주민 한 명을 볼 수 있었다. 나와 얘기를 진행할 거주민 이었는데, 보자마자 속으로 쾌재를 지를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내 기억에 있는 거주민 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자네가 세 곳의 유적을 발굴한 0년 차 사용자로군. 김수현 이라고 했던가? 일단 와서 앉지.” 라고 반말을 찍찍 내뱉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원래 권한을 부여 받은 것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놈들이다. 이러나 저러나 <설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괜한 척을 져서는 하등 좋을 것이 없었다. 적당히 추켜 세워주고 적당히 구워 삶으면 앞으로 꽤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림자 여왕>이 이곳을 방문 했을 때는 깜짝 놀랐지. 앗 차. 내 이름은 콘라드 더글라스.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분들에게 권한을 부여 받은 몇 안 되는 거주민들 중 하나일세. 그럼 자기 소개는 이 정도로 끝내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볼까.” 콘라드 더글라스는 툭 튀어나온 배와 거칠게 자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1회 차 시절 <부랑자 사냥꾼> 클랜을 만들 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태도가 훨씬 낫다고 볼 수 있다. 새삼 <10강> 사용자의 위엄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예의 바르게 대답한 후 가만히 그의 말을 경청 했다. 가장 어려운 관문이 바로 실적을 평가 받는 것 이었다. <설정>중 하나로 당당히 들어가 있는 만큼, 클랜을 개나 소나 만들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부분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직 <절규의 동굴>에 대해서는 탐험 보고만 했을 뿐 이지만, 나머지 둘로도 필요한 실적은 충분히 채울 수 있다. 다만, 그 부분에 관해서 걸리는 것이 하나 있긴 했다. “다 좋은데, 솔직히 사실이라고 믿겨 지지가 않네. 물론 <그림자 여왕>을 의심하는 건 아닐세. 하지만 내가 받은 임시 증명서에는 그녀의 참가 여부를 찾을 수 없군. 백 번 양보해서 마수를 물리치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상급 마족을 해치웠다는 건 영 믿을 수 없단 말이야. 그것도 0년 차 사용자가 말이지. 신전에서도 아직까지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걸 보면 뭔가 좀 애매한 게 있는 것 같은데?” “음. 그 부분에 관해서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해보게.” 더글라스의 거북한 말투를 인내하며,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미 보고서를 토대로 나온 증명서에 모든 내용들이 들어가 있다. 그럼에도 저렇게 나온다는 것은 뭔가 불만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 불만을 해소하려고 하면 안 된다. 아무리 의견을 피력해도 말 꼬리만 잡고 빙빙 돌다가 보류 판정을 받을게 자명 했다. 그렇다면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 되는 일 이었다. 긴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폐허의 연구소>에 결계가 있었다는 점과 증거물들을 보여준 후, 나는 곧바로 화살을 신전에게로 돌렸다. 최대한 빨리 처리해달라고 요청 했음에도 불구하고 힘들다고 징징댄 점. 새로 부임한 대표 클랜에게 떠넘기듯 일을 넘기고 나 몰라라 한 점등 나도 피해자라는 사실을 부각하려 애썼다. 그리고 내 말을 모두 들은 더글라스는, 예상대로 아주 격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뭐? 그게 사실인가? 힘들다고 말을 하고, 대표 클랜에게 일을 넘기고 제대로 마무리를 짓지 않았다고?” “그래서 임시 증명서를 받은 겁니다. 최대한 사정을 이해해 달라고…. 오죽하면 하루 이틀 거리인데 임시 증명서를 발급 받았겠습니까.” “그게 권한을 부여 받은 거주민으로써 할 말인가! 허 참. 내가 다 창피스럽군. 쯧쯧.” 권한을 부여 받은 거주민은 많지 않다. 개중 대표적인 설정 두 개를 꼽으라면 단연 신전과 클랜 창설을 들 수 있는데, 둘은 무척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클랜 창설 권한을 가진 거주민들이 신전의 거주민들을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경향이 있었다. 권한을 부여 받은 것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기인한 적대감 이었다. 더글라스는 마치 기회는 이때다라는 듯 신전 거주민들에 대해 실컷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 했다. 그 분들과 접촉할 수 있는 신분을 가졌으면서 도대체가 책임감이 없다는 둥, 평소부터 마음에 둘지 않았다는 둥 미주알고주알 별 얘기들을 쏟아 냈다. 나는 간간이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며 더욱 흥을 돋궈주었다. “더구나 실적 증명에 관해서는 클랜 창설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일 이기도 합니다. 나뉘어 있다고 해도 서로 동등한 권한을 부여 받았는데, 이토록 허투루 처리 한 것을 보니 실망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크흠! 크흐흠! 성급히 일반화 시키지 않았으면 좋겠군. 동등한 권한을 부여 받았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그 놈들의 허술함에서 비롯된 일일세. 물론 자네의 심정도 이해는 가. 무려 3주를 기다렸는데 제대로 된 조사단도 꾸리지 못했다니, 내가 할말이 다 없구먼.” 그는 엄숙한 목소리로 대답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헛기침을 하며 실적 증명서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표정은 대단히 근엄해 보였지만, 그것이 일종의 <척>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이 정도 실적이면 충분하다, 괜한 트집 잡지 말라, 예정 클랜원으로 <그림자 여왕>이 있다는 등으로 윽박지르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그 방법은 비효율적이다. 보류 판정이 날 가능성이 높고, 만일 된다고 해도 클랜 창성 권한을 받은 거주민들과 단단히 척을 질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니 그렇게 뻗대고 나가기 보다는, 거주민들 사이의 미묘한 틈을 파고드는 방법이 훨씬 효율적 이었다. 이렇게 밑밥을 깔아주고, 자기네들이 다르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 두었다. 이제 남은일은 이네들이 어떻게 걸려드는지 가만히 구경만 하면 될 것이다. 콘라드 더글라스는 나에게 다시 재검토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하는지 상당한 애를 쓰고 있었다. 이윽고 “음. 음.” 이라는 의미 없는 탄성을 내뱉더니, 내게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다시 읽어보니까 딱히 흠 잡을 곳은 없어. 임시 증명서인 게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 그런 사정이 있었다니 어쩔 수 없지. 그런데 알고는 있나? 만에 하나 차후 조사에서 조금의 거짓 사항이라도 있으면….” “페널티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정도가 심할 경우 클랜이 강제 해체될 수 있으며, 당분간 클랜 창설을 하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그 기간이 지나 다시 창설하려고 해도 애로사항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알아는 보고 왔나 보이. 좋네. 자네가 그 모든 것을 감안할 수 있다면, 반대할 이는 아무도 없을 거야.” 나는 의외라는 얼굴로 그를 쳐다 보았다. 물론 표정 연기였다. “어라. 신전에 있던 놈들이랑은 다른데?” 라는 시선을 보내자, 더글라스의 얼굴에는 뻐기는 것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일단 일차 비용으로 일천 골드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이번에 아예 그것도 지불하고 가게.” “…그 말씀은? 설마.” “설마 는 무슨 설마. 아까부터 말하지만 우리는 신전에 있는 놈들이랑은 달라. 철저한 원리 원칙에 입각해 그 분들께서 내려주신 권한을 이행하지. 그리고 그 원칙에 부합한다면 걸릴게 뭐가 있겠나. 이게 바로 선택 받은 거주민의 자세라는 거야.” 이렇게까지 호언장담을 하는걸 보니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나는 더글라스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했고, 그는 손사래를 치며 당연히 해야 할 일임을 거듭 강조 했다. 나는 곧바로 준비해 둔 일천 골드를 넘겼다가, 이내 한번 더 품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일천 골드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묵직한 금화 주머니가 손에 잡혔다. “…이건 뭔가?” 큼직한 저울을 꺼내 막 주머니를 매달던 그는, 내가 또 내놓은 주머니를 보고 흘끔 시선을 올렸다. 나는 태연한 얼굴로 대답 했다. “많지는 않습니다. 200골드 정도 됩니다.” “어허 이 사용자 정말! 나를 뭐로 보고 이러는 겐가. 이런 것 없어도 선택 받은 거주민들은 언제나 정당하게 일을 처리해. 썩 가져가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의 눈동자는 흘끔흘끔 아래를 보고 있었다. 무척 가지고 싶지만 그 동안 한 말들이 있으니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어차피 구실이야 만들어주면 되는 일. 나는 속으로 웃으며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초기 클랜 홍보 효과를 누리는데 있어서, 이들이 영향이 큰 만큼 어느 정도 먹여 놓을 필요가 있었다. 더구나 금화는 거의 10만 골드에 가깝게 있는 상황. 200골드를 아까워할 때가 아니었다. “그런 의도로 드린 게 아닙니다. 이것은 기부금 입니다.” “기부금? 아. 도시 발전 기부금 말인가? 그것은 신전에 내면 되는 일 이네만.” “그것은 그렇지만, 솔직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신전에 기부하는 것 보다 이곳에 내는 게 마음이 더 끌리네요.”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더글라스의 얼굴을 살짝 살폈는데, 그는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입 꼬리는 미묘하게 올라가 있다. 그 반응을 확인한 후에야 나는 한번 더 말을 덧붙여 주었다. “어차피 클랜을 창설한 후 곧 뮬을 떠날 생각입니다. 알아서 좋은 곳에 써주시겠지만, 그래도 신전 보다는 클랜 창설에서 관리하시는 게 그나마 안심이 될 것 같습니다.” “허허. 뮬을 곧 떠난다고?” “네. 하지만 뮬에서 얻은 성과들인 만큼, 약소하나마 어느 정도 환원을 하고 가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실은 약소한 정도가 아니었지만. 아무튼 여기까지 말했는데 알아 먹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얼굴에 잠시 고민의 빛이 스쳤다. 그러나 이내 목을 가다듬으며, 주머니를 잡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확인한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뭐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이해하네. 그런 이을 당했으니 불신할 수 밖에 없겠지. 하지만 권한을 가진 모든 거주민들이 그렇다고 생각은 말아줬으면 좋겠네.” “여부가 있나요. 아무튼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클랜 창설 건은 모쪼록 잘 부탁 드립니다.” “걱정 붙들어 매. 내가 이번에 그 불신감을 완전히 씻어주지. 제대로 일을 처리하는 게 무엇인지 보여줌세. 멀리 나가지는 않겠네.” “하하하.” 나와 그는 서로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서로 인사를 건넨 후, 나는 비로소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는 정말로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한결 가벼운 기분이 들었다. * 클랜 창설을 신청한 이후로 하루라는 시간이 더 흘렀다. 그 날 유현아를 문전 박대한 이후 어떤 야료를 부려올지 몰라 알게 모르고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신분 변경 요청을 했고 클랜도 자유 용병의 형식으로 신청한 만큼 그 어느 조항도 우리를 방해할 수 없었다. 원래는 아무리 빨라야 일이 주는 묶여 있을 거라 생각 했는데 덕분에 시간을 매우 단축할 수 있었다. 더글라스가 호언장담한 것도 있으니 당장 내일이라도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럼 대충 일은 정리 했고…. 떠나기 전에 영감님이나 한 번 뵈어야 할 텐데. 하긴, 한별이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은 일의 추이를 보는 게 나을 것 같군.” 누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눈 앞에 놓인 기록에서 <이만성 영입>을 죽 그어 놓고 옆에 보류라고 적어 놓았다. 대충 앞으로 할 일들을 쓱 훑어본 다음, 기록을 집어 넣으려 서랍을 열은 찰나였다. 서랍 안 한 구석에는, 더러운 보자기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일전에 분배를 하지 못하고 보관해둔 레어 클래스 <황혼의 무녀>로 계승할 수 있는 물건 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동안 자세한 정보도 확인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기록을 반대편에 밀어 넣고 곧바로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음?” 위의 입구를 풀어 헤치자, 안쪽으로 짙은 남빛을 띤 붉은 빛깔의 보석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빠르게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설정 메시지들 또한 우수수 떠오르고 있었지만 일단은 제 3의 눈으로 간단한 정보라도 먼저 읽을 생각 이었다. “아. 궁수용 이었구나. 조금 의외네.” 곧이어 대강 정보를 읽은 나는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녀라고 하길래 마법사 계열일 줄 알았는데, 궁수 계열 레어 클래스였다. 아쉽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슬 궁수 사용자도 영입을 해야 하는데, 현재 파사(破邪)의 활도 보유하고 있으니 좋은 짝꿍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설정용으로 떠오른 메시지들을 읽기 위해 허공으로 시선을 올렸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드디어 주 5일의 절반이 지났네요. 내일이면 목요일이니, 곧 즐거운 주말이 올 것 같습니다.(저한테는 즐겁지만은 않은 주말 입니다. ㅜ.ㅠ) 하하하. 독자분들중 많은 분들이 본업에, 학업에, 또는 여러 일들에 지치셨을거라고 생각 합니다. 제 소설을 읽어 주시면서 잠시 머리를 쉬어 가실 수 있다면, 정말로 행복할것 같아요. 글을 쓰는 사람의 기쁨은 읽어주시는 여러분들이 있다는것에 있거든요. :) PS. 선작, 추천, 코멘트, 평점, 쿠폰 주신분들 감사 합니다. 얼른 평점을 쌓아서 나무가 쑥쑥 크는것을 보고 싶네요. ㅋㅋㅋㅋ. 『 리리플(178회) 』 1. 휘을 : 1등 축하 드립니다. 오랜만에 1등으로 뵙는것 같습니다. 하하하. 요즘 쿠로시온님과 破天魔痕님이 엄청난 강세를 보이고 계셨는데, 휘을님도 역시 강자의 반열(?)에 오르신 분이셨군요. :D 2. 그기린그림 : 헐. 아빠의 침실 아니에요. ㅜ.ㅠ 수현이는 아직 24살 밖에 안된 건장한 청년 입니다. 3. 사람인생 : 쿠폰 감사 합니다. (__) 그 친구가 정말 수학을 잘하기는 했어요. 어떻게 보면 부럽기도 하더라고요. 저는 답이 안나오면 도저히 답답해서 견딜수가 없었는지라. ㅜ.ㅠ 4. 가한나 : 응원 코멘트 감사 합니다! 스킵하시는 분들도 많지만, 다음에는 그런 분들도 같이 읽으실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5. 악마신전 : 둘 다 누님 계열 입니다. 그리고 한소영을 생각해 보면, 자. 수현이의 취향을?! 하하하. 농담 입니다. 실은 제 취향…. (퍽퍽!) @_@ 『 리리플 』 1. 破天魔痕 : 178회 리리플을 쓰면서 179회 1등이 누군지 참 궁금 했습니다.(보긴 봤는데 까먹고 있었죠.) 1등 축하 드립니다. 1등의 비결 좀 알려 주세요! 2. 여생남사!! : 애도 드립니다. (__) 제 글이 힘이 될 수 있다면 정말로 감사하고, 다행으로 생각 합니다. 부디 훨씬 더 좋고, 훌륭한 곳으로 가실 수 있을 겁니다! 3. 고장난선풍기 : 실은 여동생은 아니고, 누나 비슷한 사람은 한 명 있습니다. 참 놀려먹기 좋은 사람 이었죠. 혼나야 돼, 혼나지 않아야 돼는 실제로 제가 들었던 말이라죠. 낄낄. 4. 감자띱 : 아니요! 진명과 잠재성은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다만 잠재성의 의미를 폭 넓게 잡으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요. :) 5. 루디니아 + 사랑하므로 : 그게 어디서 가져온 것이냐면, 군대 신병 교육대 또는 유격 훈련을 받을때를 떠올리고 적용한 것 입니다. 왜냐하면 대답을 할 때 네? 가 아니라 관등 성명, 혹은 훈련병, 올빼미로 대답하잖아요. 물론 홀 플레인으로 적용하면서 그 의미가 달라지기는 했지만, 넣지는 원래 설정으로는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그렇게 받는 것으로 되어 있었어요. 현대의 <인간> 또는 <사람>이 아닌 홀 플레인의 <사용자>로서의 인식을 각인하기 위해서죠. 아 그리고 사랑하므로님. 생각해 보니까 침실에서 그렇게 부르는 건 조금 위화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 되었습니다. 해당 부분은 사용자 부분을 삭제 했습니다. 조언 감사 합니다. (__) 6. 레시테 : 178회, 179회 남겨주신 코멘트 읽었습니다. 감사 합니다. <과정을 그려내기 위해 지금까지의 분위기로 달려온 듯한 느낌.> 네. 맞아요. 최대한 거부감이 들지 않도록 노력 했는데 보상을 받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ㅜ.ㅠ 7. Masterpiece : 소중한 응원 감사 합니다. Masterpiece님과 다른 분들의 응원 코멘트에 굉장히 많은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 물론 모든 분들을 만족시키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앞으로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평점,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81 / 0933 ---------------------------------------------- 소식 『축하합니다. 희귀 직업(Rare Class)을 발견 했습니다. 보석의 힘을 받아 들이게 되면 황혼의 무녀(Medium Of Twilight)로 진화 할 수 있습니다.』 『황혼의 무녀(Medium Of Twilight)는 궁수 클래스의 상위 계열로 볼 수 있습니다. 황혼이란, 해가 지고 어스름 해질 때 저물어 가는 하얀 빛과 새로 찾아 드는 어둠의 중간에 존재하는 중도의 힘 입니다. 원거리 계열들 중 특히 활 또는 석궁을 익힌 사용자가 있다면 계승을 추천합니다.』 『황혼의 무녀(Medium Of Twilight)는 홀 플레인 고대 무녀 부족에 기원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에 나서지 않고 은둔을 원했던 그녀들은, 특유의 토속 신앙 아래 부족의 안녕과 보호를 기원 했습니다. 그녀들의 힘은 총 세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음각을 이용한 문신, 축문을 이용한 비술, 신언을 이용한 강신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힘들은 따로따로 나뉘어 잠들었는데, 눈 앞의 구슬은 축문의 비술을 이용할 수 있는 힘을 담고 있습니다.』 『현재 김수현님의 직업은 검사 계열 최상위 비밀 직업(Secret Class) 검술 전문가(Sword Specialist)입니다. 진주를 습득할 수 있지만 고유, 특수, 잠재 능력을 판단한 결과 전체적인 효율은 8할 이하로 감소 합니다. 그러나 민첩 능력치 98 포인트와 마력 능력치 96 포인트 판정으로 감소분의 4할을 복구할 수 있습니다. 특수 능력과 잠재 능력들의 개방을 확인 했습니다. 남은 슬롯이 없습니다. 황혼의 무녀(Medium Of Twilight)의 습득을 추천하지 않습니다.』 모든 설명을 읽은 나는 잠시 손을 들어 지그시 심장 부근을 눌렀다. 내 심장에는, 고대 무녀의 세가지 힘 중 음각을 이용한 문신의 힘이 잠들어 있었다. 마력의 폭주를 막고 흐름을 안정시키는 기능, 마력을 효율적으로 인도할 수 있게 해주는 기능. 지금 눈 앞의 보석은 축문의 비술만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음각 문신과 신언 강신의 힘을 담고 있는, 또 다른 무녀 클래스가 있을 수도 있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서야 나는 그 강력한 고대 무녀와 연관이 있는 클래스가 왜 레어 클래스로 됐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원래는 시크릿 클래스가 되야 하지만, 세 개를 따로따로 나누면서 힘이 분산돼어 레어 클래스가 된 것 같았다. 이 말인즉슨, 다른 힘을 보유하고 있는 물건들을 모두 찾아내 습득할 경우 시크릿 클래스로 진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였다. 한동안 설명들을 읽은 후 나는 주머니를 다시 동여매 서랍 안으로 집어 넣었다. 그리고 영입할 만한 궁수 사용자가 누가 있는지 한 명씩 되짚으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문득 선유운이 떠올랐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 뮬의 분위기는 미묘 했다. 음울하지는 않지만, 분위기가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다른 사용자들은 평화롭다고 느낄지 몰라도 나만은 폭풍전야 라는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의 탐험 목표가 없다. 물론 그렇다고 일과가 어그러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전보다 한층 여유가 남을 수 밖에 없었다. 한가지 다행인 점은, 이제는 내가 따로 말을 하지 않아도 애들이 스스로 수련을 한다는 점 이었다. 처음 뮬에 왔을 때부터 빠듯한 스케줄로 몰아친 게 효과가 있는지 수련 시간만큼은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지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꺼웠던 것은, 애들이 비로소 스스로 발전하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기 시작 했다는 것이다. 그 예의 하나로써 안현은 내게 호프론의 전설을 써보고 싶다고 요청 했다. 실은 어느 정도 감을 잡고 있었다. 가끔 녀석이 로비에서 수련하는 모습을 보면, 오른손에 항상 끼던 감소의 장갑을 더 이상 끼지 않는 게 종종 보였다. 아직 안현의 근력으로는 한 손으로 들기 버거울 텐데, 뭔가 따로 짐작하는 게 있으리라 여겼었다. “이번에 용맹의 투구랑 위대한 태양을 받으면서 방어력이 비약적으로 올라 갔거든요. 여기서 방패를 착용하면 탱커로서 한층 더 굳건히 자리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흠. 창과 방패라. 나쁘지는 않은데, 그러면 기공창술사의 의미가 반감 되지 않을까. 워낙 체술에 중점을 둔 클래스잖아. 호프론의 전설은 굉장히 무겁다고.” “물론 그렇기는 해요. 하지만 이게 있죠.” 안현은 나와 눈을 맞춘 후 그대로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왼손에는, 감소의 장갑이 있었다. “이 장갑은 대상의 무게를 줄여주잖아요. 창이 가벼워져서 좋기는 한데, 그런 만큼 묵직한 타격을 줄 수 없었어요. 그렇다면 극한의 체술과 압도적인 근력으로 급소를 노릴 수 밖에 없죠. 하지만 방패를 들 수 있으면 달라질 수 있어요. 반사 효과가 걸려 있는 만큼, 잘만 사용하면 기대 이상의 결과가 나올 것 같아요. 그리고 기록에는 한 손으로 창을 다루는 방법도 있어요.” “창의 파괴력을 높이고, 방패를 활용해 방어력을 높인다. 좋은 생각이기는 한데, 지금의 너한테는 어림도 없다는 거 알고 있지? 못해도 근력이랑 체력이 75는 넘어야 네가 원하는 것을 시도라도 해볼 수 있을걸.” “노력할게요 형. 한번만 믿어 주세요. 정 아니다 싶으면 다시 반납할게요. 단순한 기공창술사로 만족하고 싶지 않아요. 실력을 올릴 수만 있다면 이것저것 해보고 싶어요.” 안현이 이렇게까지 부탁하자 마음이 조금 움직이고 말았다. 창의 무게를 다시 원래대로 돌려 파괴력을 높이고, 감소의 장갑을 사용해 호프론의 전설의 무게를 줄인다. 물론 보이는 문제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일반 방패를 들고 싶다고 했으면 헛소리 하지 말라고 했겠지만, 호프론의 전설에는 반사 효과가 걸려 있다. 그런 만큼 확실히 애매한 감이 있었다. 그러나, 일단 가능성은 차치하고서라도 본인이 뭐라도 해보겠다는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예전에 레어 클래스를 얻었다고 거들먹거리던 모습을 봤을 때 했던 걱정이 싹 날아가는 기분 이었다. 정 아니다 싶으면 다시 반납을 하겠다고 하니, 한번 써보라고 주는 것도 괜찮을 듯 싶었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좋다. 대신 근력, 체력, 마력을 꾸준히 수련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 그리고 체술, 창술을 넘어서 방패 활용술도 익혀야겠구나. 앞으로 많이 힘들겠지만 어느 것 하나도 포기한다는 생각을 하지 마. 세 마리 토끼를 잡을게 아니라면, 지금 관둬버려.” “형! 고맙습니다! 꼭 명심 하겠습니다!” 내 조건부 허락에 안현은 큰 소리를 외치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아무튼 안현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나 또한 마음이 흡족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해서 나는 곧바로 집무실에 보관하고 있던 장비들 중, 둥근 방패를 안현에게 건네 주었다. 감소의 장갑 효과가 있는지 안현은 부담 없이 왼 손만으로 방패를 들어 올렸다. 이로써 딜러는 몰라도 탱커로서의 역할은 한층 더 안전해졌다고 봐도 무방 했다. 안현을 메인 탱커로 내세울 수 있다면 그만큼 내 활동 범위가 넓어지니 나에게도 좋은 일 이었다. * 내 클랜 창설을 맡은 콘라드 더글라스는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어제 저녁 즈음 전령을 보내더니, 만장일치로 심의에 통과했다며 내일 점심쯤에 한 번 들르라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더불어 신분 변경을 요청한 사용자들에 대한 것들도 모두 처리 했다고 하니 가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디어 클랜을 창설 했다는 소식에 일행들은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그렇다면 내일 모두를 이끌고 클랜 창설을 담당하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가기 전에 필수로 정해야 할 사항이 있었다. 전령이 주고 간 기록에는 몇 가지 기입해야 할 사항이 있었다. 여러 복잡한 것들은 제쳐 두고서라도 클랜명, 클랜 형식, 초기에 가입할 클랜원들에 대한 정보 등이 있었다. 아마 내일 이 종이를 받는 순간 거주민들은 다시 한 번 뒤집어질게 분명 했다. 클랜원의 절반이 넘는 인원이 시크릿, 레어 클래스였으니까. 그 부분은 내일의 즐거움으로 남겨둔다고 해도 문제는 클랜명 이었다. 종이를 둘러싸 삼삼오오 모여든 일행들은 제각각 괜찮다고 생각하는 이름들을 꺼냈는데, 가관인 것들이 태반 이었다. “형. 클랜명 거인들의 모임 어때요. 저 온라인 게임 할 때 있었던 길드명 인데, 멋지지 않을까요.” “에에. 그건 너무 거만하게 보여요오. 차라리 러브러브는 어떨까요? 사랑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니 분명 좋다고 생각해요오.” “놀고 있네. 거인들의 모임? 러브러브? 어우 미치겠다 정말. 완전 오그라들어. 차라리 너희들 수준에 맞게 거인짱짱맨 이나 응애응애 클랜은 어때? 아하하하!” “씨잉.” “모두 조용히.” 고연주와 정하연은 애들의 대화를 들으며 웃겨 죽겠다고 배꼽을 잡았다. 심지어 신상용도 “큭. 크큭. 푸흐흡.” 거리는, 필사적으로 참는 소리처럼 들리는 웃음을 흘릴 정도였다. 참고로 안솔은 그렇다고 쳐도, 안현의 작명 센스는 나로서도 충격 이었다. 얼굴이 벌개진 채로 나는 가볍게 탁자를 내리쳤다. 애들은 삽시간에 입을 다물었다. 하여간 조금만 틈을 주면 들떠 버리는 게 문제였다. 그대로 한 마디 하려다가, 무언가 허전하다는 것을 느끼고 잠시 고개를 돌렸다. 항상 애들과 함께 추임새를 넣던 한 명이 오늘따라 조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거주민 한 명이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비비앙.” “응.” 고개를 들지는 않았지만 대답 소리는 들렸다. 혹시 어디 아픈가 싶어 강제로 고개를 들려는 찰나, 그녀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너 왜 그래. 어디 아프…헉.” “응.” “아, 아니다. 그냥 자라.” “응. 아니, 아니야. 말은 듣고 있었어. 후아암. 머리가 아파서. 조금만 더 이러고 있을게.” 비비앙의 퀭한 얼굴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키고 말았다. 예전의 낭랑 했던 얼굴은 온데간데 없었다. 연금 술사들은 어떤 것이든 연구에 꽂히는 순간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하는데, 아마도 영약 연구 때문에 저러는 것 같았다. 나야 고마운 일이긴 해도 도대체 무슨 소원을 말하려고 저러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녀를 다시 재운 후 나는 침묵하고 있는 일행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네들은 모두 나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어떤 클랜명으로 정할지 다들 기대가 만발한 얼굴들 이었다. 물론 거인들의 모임, 거인짱짱맨, 러브러브, 응애응애 따위는 절대로 클랜명으로 하지 않을 것이다. “클랜명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클랜의 명성이다. 그 명성을 높이고, 유지하려면 당연히 클랜을 구성하는 인원들의 실력이 좋아야겠지. 명심해. 우리들은 자유 용병형 클랜이야. 어떤 이름을 짓든 나와 너희들이 잘하기만 하면 이름값이 올라간단다. 아무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지. 그런데, 솔직히 너희들이 말한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구나. 정도라는 게 있어. 적당히 좀 하자꾸나. 응?” “““네.””” 애들은 풀이 죽은 얼굴로 동시에 대답 했다. 나는 한 숨을 내쉰 후 천천히 깃펜을 들어 평소에 생각해오던 클랜명을 적었다. 개인적으로 우리들이 용병 클랜이라는 것을 드러낼 수 있으면서, 너무 튀지 않는 적당한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모든 정보를 기입한 후 나는 완성한 기록을 일행들에게 돌렸다. 혹시라도 틀린 정보가 있으면 수정을 하라는 의미였다. 일행들은 한 명씩 자신의 정보를 확인하며 내가 기입한 클랜명을 보았다.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 했는데, 다행히 대부분 고개를 주억이는걸 보니 무난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흠. 심플하네요.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아요.” “그러네요. 간단한 단어지만 클랜의 성격이 드러나 있고, 크게 튀지 않아요. 수현. 혹시 생각해둔 클랜 문양은 있나요?” “클랜명 전체를 문양으로 할 생각 이에요. 맨 앞에 문자를 다른 문자들보다 조금 더 크게 하고, 색은 붉은색으로 할 생각 입니다.” “앗. 리, 리더. 잠시만요.” 한창 고연주와 정하연과 얘기를 주고 받고 있었는데, 옆에서 신상용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그가 눈을 끔뻑이며 자신의 정보가 기입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시 기록을 받아 들자 기록의 하단부에 <신상용(2연차) : 키메라 연금술사> 라고 적혀 있는걸 볼 수 있었다.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네. 혹시 뭐 잘못 기입된 것이라도 있나요?” 말을 하면서도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따지고 보면 신상용 성격에, 레어 클래스를 얻은 이상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못해도 수백 번은 고맙다고 인사를 하러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 비비앙이 말하지 않았다는 건가. “예, 예. 저는 키메라 연금술사가 아닙니다. 아마 스승님 것을 쓰시면서 잠깐 혼동하신 것 같습니다.” “…….” “엣. 왜, 왜 그렇게 보시는지.” 내가 눈을 가늘게 뜨자 신상용의 얼굴이 의문 감으로 가득 차오르는 게 보였다. 그제서야 대강 상황을 짐작한 나는, 조용히 비비앙을 응시 했다. 그녀 또한 나와 그의 대화를 들었는지, 어느새 고개를 든 채 깜빡 잊었다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비비앙.” “미, 미안. 깜빡 잊고 있었어.” “휴우. 그것에도 매달리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그래도 할 건 하고 해야지.” “헤헤. 미안해. 그리고 알았어. 지금 바로 할게. 내 정보도 봤으니, 더 볼 건 없는 거지?” 고개를 끄덕이자 비비앙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신상용의 팔을 잡아 끌었다. 그는 도대체 영문이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와 비비앙을 번갈아 보았지만, 이내 그녀의 재촉에 몸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둘을 보며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 나왔다. 애들은 키메라 연금술사 한 권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크게 개의치 않는 얼굴들 이었다. 그저, 이제 곧 일행들 중 레어 클래스가 한 명 더 추가 된다는 사실에 고양된 얼굴로 서로들 쑥덕거렸다. “오빠. 그러면 신상용씨한테 그거 주기로 한 거야?” “그렇지. 그 동안 비비앙과 얘기를 많이 해봤는데, 괜찮을 것 같더라고. 갑작스럽게 결정한 건 아냐. 정하연씨와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생각해오던 거니까.” “아하. 그렇구나. 좋겠다~.” 나와 유정의 대화를 들은 하연은,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연주를 돌아 보았다. 그러나 고연주 또한 알 리가 없었다. 그저 어깨를 으쓱 이는 게 보일 뿐 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네, 다음 회에는 드디어 클랜 창설과, 클랜 이름이 나오게 됩니다. 그 동안 많은 고심을 했지만 일단 1차 클랜명은 이것으로 정했습니다. 궁금하시죠? 하하하. 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미 대부분의 독자님들이 알아 차리셨을것 같습니다. 워낙 날카로운 분들이 많으시잖아요. ㅜ.ㅠ 그리고 드디어 진짜 소식이 터지겠네요. 후후. :) 『 리리플 』 1. 흠흠;; : 오호라. 1등 축하 드립니다. 왠지 1등에서는 처음이나, 상당히 오랫만에 뵙는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 동안 몇몇 분들이 워낙 빠르게 1등을 하셔서요. 부디 이번 회도 재미있게 감상해 주세요! 2. 패천파월 : 워낙 빠르신 분들이 많으셔서 그래요. 저도 자정 1등은 할 수 없을 겁니다. 아마도요. 하하하. 3. 시즈프레어 : 연참은 나중에 시험 끝나고 할게요. ㅜ.ㅠ 아, 시즈프레어가 혹시 무슨 뜻 인가요? 제 소설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 시즈<플>레어라는 분도 계시더라고요. 4. 푸른산호숲 : 쿠폰 감사 합니다. (__) 아. 쪽지 답신 보냈습니다. 확실히 두 장비들의 이름이 비슷하긴 하네요. 하하하. 5. 오피투럽19 : 아니!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겁니까! 저는 고자가 아니라고요! 수현이도요! 6. 별난놈 :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한별이, 곧 나옵니다. 하하하하하! 얼른 뮬에서 떠나야 겠어요. :) 7. 작은히어로 : 동감 합니다. 그래도 우리 같이 힘내 보아요. 긍정의 힘 이라는 말도 있듯이, 저도 최선을 다해보려고 합니다. 크크. 8. Tiny : 첫번째 코멘트 남겨주셔서 감사 합니다. 저야말로 읽어주셔서 늘 감사하게 생각 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노력해, 좋은 내용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D 9. 돗대이야기 : 아마 안솔의 성격의…. 헙. 스포할뻔 했군요! 흠흠. 아마 그녀도 많은 인기를 얻지 않을까 싶습니다. 후훗. 10. 플룻 : <그나마> 체력을 올릴 <가능성>이 있기는 합니다. 다만, 일전에도 말씀 드렷듯 그 가능성이 굉장히 희박하고, 올라가는 정도도 미미 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평점,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82 / 0933 ---------------------------------------------- 소식 클랜명 작성을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굵직한 일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나는 어서 하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저 기다리기만 했다면 상당히 따분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몇 개의 사건이 터져줌으로써 무료한 시간을 달랠 수 있었다. 그 중 하나를 말하라면, 하연은 드디어 증폭의 보석(Jewel Of Amplification)의 각인을 완료 했다고 말해 주었다. 외견상 크게 변한 건 없었다. 그냥 눈동자를 자세히 보면 연한 푸른빛이 언뜻언뜻 스치고 지나가는걸 볼 수 있었다. 보석을 어디에 각인 시켰는지 궁금 해서 물었는데, 그녀는 싱긋 웃기만 하고 알려 주지는 않았다.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걸 보니 말하기 조금 부끄러운 곳에 한 것 같았다. 도대체 어디길래 이러는 걸까. 증폭의 보석은 사용자의 특성에 맞는, 마나 특성에 대한 긍정적인 요인들을 증폭시켜 주는 기능을 갖고 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보면 마력 흐름 속도 증가, 마력 순도 상승, 마법을 사용하는데 들어가는 마력 감소 등이 있었다. 하연과는 매우 상성이 좋은 보석이었는데, 등급도 고급인 만큼 앞으로 벌어질 전투에 큰 도움 될 것이다. 다른 일로는 신상용의 레어 클래스 계승 건이 있었다. 모임을 파한 후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는데, 얼마 안 있어 누군가 문을 벌컥 열어 젖히는 소리를 들었다. 돌아볼 것도 없이 신상용 이었다. 그는 평소답지 않은, 흥분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입을 크게 여는 게 곧 엎드려 절이라도 할 기세였다. 해서, 나는 한 발 앞서 선수를 쳐주었다. “잠시만요. 네. 괜찮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리, 리더…. 네?” “사용자 신상용의 마음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지금 구구절절 늘어 놓기 보다는, 하루라도 빨리 익숙해지는 게 우리들에게 보탬이 되는 일 입니다. 오히려 일찍 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비비앙 요 녀석이 깜빡 잊었다고 하더군요.” “리…리더….” 신상용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내 말에 결국 입을 닫고 말았다. 바로 엎드리려던 엉거주춤한 자세를 펴며, 그는 눈물을 글썽였다. 겉으로 말하지 않아도 굉장히 감동 했다는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 “고, 고작 저 따위의 사용자에게 이런 귀한 것을 주시다니…. 처음 들어올 때 스승님 아래서 사사 받을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했습니다. 도대체 이 은혜를 제가 어떻게 갚을 수 있겠습니까.” “레어 클래스의 중요성은 저도, 비비앙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용자 신상용한테 드린 것은 정에 이끌려서가 아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했기 때문 입니다. 당신은 스스로의 행동과 실력에 조금 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 같습니다.” “고,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리더의 말대로 현재의 심정을 구구절절 늘어 놓기 보다는, 한시라도 빨리 실력을 높여 제 몫을 다할 수 있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리더가 베풀어주신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길이겠지요.” “하하. 그래 주시면 저도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겠습니다. 레어 클래스를 얻으신걸 축하 드립니다. 그럼 어서 계승 의식을 치르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내 말에 신상용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곧바로 책을 펼쳤다. 각 클래스마다 계승하는 방법, 의식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안현 같은 경우는 <칠흑의 창>에 손을 대는 것으로 계승 했다. 그렇다면 <키메라 연금술사>는 책을 읽음으로써 의식을 치를 수 있는 것 같았다. 신상용의 눈이 잠시 허공을 훑는 게 보였다. 아마 허공으로 떠오르는 메시지들이 있을 것이다. 그는 이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열심히 책을 읽기 시작 했다. 손을 덜덜 떨면서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의 몸은 조금씩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점점 농도가 짙어지는 황금빛에 가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여전히 책장을 넘기는 소리는 끊이지 않고 있었다. 아마 자신의 전신으로 들어오는 기이한 감각에 예전에는 느낄 수 없던 어릿어릿한 자극을 받고 있을 것이다. 10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책 한 권을 읽는 시간 치고는 빠른 편이라고 볼 수 있지만, <설정>의 하나 인만큼 일반적인 잣대로는 판단할 수 없다. 자세한 것은, 오직 그것을 경험한 사용자만이 어떤 과정을 어떻게 거쳤는지 알 수 있을 뿐. 곧이어 그의 주위를 감돌던 황금빛이 희미해지자, 눈을 꾹 감은 채 책을 손에 쥐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재빨리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신상용(2년차) 2. 클래스(Class) : 키메라 연금술사(Rare : Chimera Alchemist Beginn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예정.) 5. 진명 · 국적 : 마방진의 진리를 추구하는 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8) 7. 신장 · 체중 : 183.7cm · 69.2kg 8. 성향 : 질서 · 중립(Lawful · True) < 능력치 > [근력 40] [내구 42] [민첩 46] [체력 40] [마력 89] [행운 60] < 업적(0) > < 고유 능력(1/1) > 1. 조화(調和)의 마방진(Rank : A Zero) < 특수 능력(1/1) > 1. 66 마수 군단의 지배자(Rank : C Zero) < 잠재 능력(4/4) > 1. 연금 마법(Rank : B Zero) 2. 정통 마법(Rank : B Plus) 3. 고대어 해독(Rank : D Zero) 4. 마법 진지 구축(Rank : D Plus) 그의 정보를 읽자 자그마한 침음이 흘러 나왔다. 예전에 처음 그를 봤을 때와는 너무도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민첩이 1만큼, 마력은 4만큼 상승 했다. 안현의 능력치가 상승했을 때와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치였지만 그의 연차와 그 동안 올려둔 능력치들을 생각한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연금 마법은 랭크를, 정통 마법은 단계를 올렸다. 또한 레어 클래스의 영향으로 잃어버렸던(정확히는 고유 능력이 돼버린.) 특수 능력을 복구하고, 그 동안 가르침을 받으며 잠재 능력 <마법 진지 구축>을 개화시켰다. 본디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인 만큼 그 동안 나서지 않았으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 했을 것이다. 잠시 여담으로 말하자면, 시크릿 클래스와 레어 클래스를 구분할 수 있는 차이점이 하나 있다. 레어 클래스를 계승하게 되면, 클래스의 성향에 맞는 고유, 특수, 잠재 능력을 개화시킬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게 초창기에 얻으면 상관이 없지만, 예를 들어 특, 잠재 능력을 모두 개화시킨 상태라면 잠시 고개가 기울어진다. 그러나 설정은 생각보다 빡빡하지 않다. 애초에 천사들이 사용자들의 성향에 최대한 맞추어 클래스를 추천하는 만큼, 그네들의 부여해 놓은 설정 또한 크게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각 상황에 맞게 적용이 된다. 신상용 같은 경우는 특이한 케이스라 잃어버린 특수 능력을 복원해 줬지만, 특, 잠재 능력이 가득 찬 사용자는 최대한 비슷한 능력을 하나 선별해 진화시키는 경우도 있었다.(물론 이것도 정도가 있다. 아예 클래스가 다르고, 능력도 다르면 진화 판정을 받을 수 없다.) 시크릿 클래스는 위의 설정 보다 상위의 <설정>이 적용 되고(더 높은 수준의 능력 개화 등.), 레어 클래스에는 없는 <권능>을 받을 수 있다. 즉 슬롯을 하나 소비하지 않고도 공짜로 능력 하나를 더 받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나야 이미 능력만을 따지면 검사로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최고봉의 경지에 있었다. 아무리 좋은 능력들로 들이댄다고 하더라도 신검합일 하나로 모조리 침묵 시킬 수 있다. 거기다 모든 것을 자를 수 있는 권능에 화정의 힘까지 있었다. <검술 전문가>가 아무리 최고 수준의 시크릿 클래스라고 해도, 겹치는 부분에 대해서는 Tanay가 걸린 특전보다 상위 설정을 적용할 수 없다. 그래서 내게는 권능만 따라온 것이다. <키메라 연금술사>가 된 것을 확인 했는지 그는 결국 차오르는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남자의 눈물 이었지만, 하나도 추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1회 차 시절의 나와 비슷하다고 여겼는데, 항상 꿈에만 그렸던 일들이 실제로 이루어지자 무척 감동한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조용히 다른 일행들을 불러 축하해 주었다. 애들은 앞 다투어 축하를 보냈고, 내 설명을 들은 다른 일행들도 다들 웃으며 그를 격려해주었다. 그는 이런 상황이 어색한지 벌개진 눈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숙였다. 조금 의외인 점은 그 누구도 그에게 질시 또는 질투의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 동안 그가 알게 모르게 캐러밴을 위해 희생한 사실을, 다들 마음 한 구석에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신상용은, 일행들의 진심 어린 축하 속에서 레어 클래스를 계승할 수 있었다. * “클랜 로드 0연차 사용자 김수현. 이하 클랜원 안현, 안솔, 이유정,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정하연, 신상용, 고연주. 이들은 짧은 시간 동안 2곳의 유적을 발굴 하고, 탐험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등 뮬의 안정화에 크게 기여를 했소이다. 또한 0연차 사용자들만 있는 게 아니라, <10강>의 일인도 있고 무엇보다 시크릿 클래스 둘, 레어 클래스 셋이라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구성을 갖고 있소. 또한 푸른 산맥 안에서 또 하나의 유적을 발굴 했고, 탐험 보고를 했다는 구려. 비록 총원이 8명이라 조금 걱정은 되지만 이들의 성장 가능성을 높이 판단, 현 시간 부로 소도시 뮬의 클랜 창설 권한을 부여 받은 콘라드 더글라스는 자유 용병형 머셔너리(Mercenary) 클랜의 창설 승인 및 출범을 선포하는 바외다.” 콘라드 더글라스의 말이 끝나는 순간, 여러 메시지들이 우수수 떠올랐다. 클랜을 창설 했고, 소속단체(Clan)란이 활성화 되었다는 의례적인 메시지들 이었다. 메시지들을 모조리 꺼버린 다음, 나는 차분히 사용자 정보를 개방 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수현(0년차) 2. 클래스(Class) : 검술 전문가(Sword Specialist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D Zero) 5. 진명 · 국적 : 검(劍)의 주인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4) 7. 신장 · 체중 : 181.5cm · 75.5kg 8. 성향 : 질서 · 혼돈(Lawful · Chaos) 이놈 좀 보게. 나는 소속 국가 아래 소속 단체를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무리 시크릿, 레어 클래스가 많다고 해도 갓 출범한 신생 클랜인데 랭크 D를 받았다. 맨땅에서 시작하는 대부분의 클랜은 예외 없이 F를 받고, 엄청 잘 받아봐야 E 랭크에 불과하다. 그런데 시작부터, 그것도 10명도 되지 않는 인원으로 D 랭크를 줬다는 것은 확실히 이례적인 일 이었다. 주변 거주민들의 간소한 축하를 받은 후, 일행들은 각자 메시지와 자신의 정보에 시선을 빼앗긴 상태 였다. 고개를 들자 콘라드 더글라스가 근엄해 보이려고 애쓰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클랜 창설을 축하하네. 문양은 제대로 등록 했으니, 달고 싶으면 일반 도시나 대도시로 가보는 게 좋을 게야. 여기는 아직 발전이 되지 않은 곳이라….” “하하. 아닙니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 합니다.” “음. 그나저나 자네가 기입한 내용들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지 뭐야. 시크릿 클래스 둘과 레어 클래스 셋이라.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그랬나. 보고서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다고.” “아무래도 조사단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다 보니 얻은 성과들에 대해서는 깜빡 한 것 같습니다.” “뭐 괜찮네. 그 정도야 개인 차원에서 이해해줄 수 있는 노릇이고, 성과도 최소한의 증명을 할 수 있을 정도면 있으면 되니까. 참. 그나저나 잠시 나와 얘기 좀 하지. 부탁할 것도 있고, 알려줄 것도 있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무래도 200골드를 먹인 게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부탁>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과 알려줄 것이 있다는 말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외적인 부분도 있겠지만 말이다. 잠시 다른 장소로 자리를 옮긴 더글라스는,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갓 창설한 클랜에 대해서 우리들은 회보를 작성해 이곳 저곳 뿌린다네. 즉 어느 정도 홍보 효과를 주는 셈이지. 물론 클랜 로드의 의견에 따라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자네 생각은 어떤가?”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좋군. 혹시나 하지 않았으면 이라고 대답하면 어쩌나 곤란했는데. 하하하. 아무튼, 원래는 창설 후 즉시 회보를 작성하고 뿌려야 하는데 말이야. 혹시 이 기간을 조금 늦출 수 있을까?” 뜻밖의 말에 나는 잠시간 그를 물끄러미 응시 했다. 그는 턱을 벅벅 긁고는 조금 더 상세한 설명을 시작 했다. 그의 말은, 앞으로 황금 사자 클랜의 강철 산맥 원정이 끝난 후 사용자들을 유치하는데 우리 클랜의 홍보 효과를 이용하고 싶다는 소리였다. 나는 그의 속내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원정에 성공하게 되면 많은 사용자들이 남부로 몰려들게 뻔한 일 이었다. 그런 만큼 소도시 뮬에서 짧은 시간 동안 유적이 세 곳이나 나왔다는 사실을 알려, 유적의 보고(寶庫) 개념으로 도시를 홍보할 셈이다. 이게 사실이든 아니든, 개척 도시인 만큼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물론 앞으로 더 유적이 나오지는 않을 테지만,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차피 곧 소식이 올 것이란 것을 알고 있는 만큼 홍보가 하루 이틀 더 미뤄지는 건 큰 상관이 없었다. 내가 시원하게 수긍해주자 그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만에 하나 원정에 실패 했을 때는 어쩔 거냐고 묻지는 않았다. 실패를 하면 아마 이 계획을 더욱 다급하게 추진하지 않을까? “후하하하! 역시나 시크릿 클래스 사용자는 다르군. 정말 고맙네. 이 계획만 잘 되면, 뮬도 분명 빠른 시간 안에 개척 도시를 벗어날 수 있을 걸세. 암. 그렇고 말고. 대신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홍보는 내 특히 신경 써줌세.” “어련히 알아서 잘 하시겠습니까. 믿고 있겠습니다. 아, 그나저나 알려주실 거라는 건 뭔지….” 얼른 자리를 벗어나고픈 마음에 운을 띄우자, 만면에 웃음을 띄우던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신중하게 변했다. 또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살피는걸 보니, 어떤 말을 할지 자못 궁금해졌다. 이윽고 나와의 거리를 더욱 가깝게 줄인 더글라스는,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73회 비비앙 사용자(화) 정보 수정을 공지 합니다. 3. 항마력(Rank : B Zero)의 잠재 능력을 삭제 했습니다. 특수 능력 1 슬롯 + 잠재 능력 4 슬롯 이어야 하는데 잠재 능력이 5슬롯으로 되어 있더군요. ㅜ.ㅠ)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음. 여러분들. 오늘 제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느꼈는데요, 대한민국에는 아름다우신 여성분들이 참으로 많은것 같습니다. 친구들은 저보고 눈이 많이 낮다고 하는데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 하거든요. 애들이 환장하는 외국 여성들을 보면 그냥 예쁘구나, 생각은 드는데 큰 감흥은 들지 않아요. 오히려 대한민국 여성분들이 훨씬 어여쁘신것 같은데, 저를 별난 종자 취급 하더라고요. 네. 오늘 제가 절대로 <너 고자냐?>라는 소리를 들어서 이러는건 절대로 아닙니다. 그리고 솔로라서 이러는것도 절대로 아니에요. 아니라구요. ㅜ.ㅠ 『 리리플 』 1. 재밌는건뭘까? : 아니! 다른 쟁쟁하신 분들을 제치시고 1등을 하셨군요! 대단하십니다. 1등 축하 드립니다! 2. 전설의유저 : 네. 그 부분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아마 차후 많은 시행착오를 겪을 예정 입니다. 과연 안현이 어떻게 풀어갈지 기대해주세요. :) 3. 푸른산호숲 : 아, Mercenary 잖아요? 이것을 문양으로 한다는 소리였어요. M을 부각하고, 필기체로 멋들어지게 휘갈겼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하하. 4. Zero100 : 수정 완료 했습니다. 감사 합니다. (__) 5. 꼬야 : 아. 팔랑크스도 조금 참고한건 맞습니다. 다만, 그건 개인전이 아니라 집단전 부분이라 안현의 클래스와는 조금 다른면이 있습니다. 차후 어떻게 진행을 풀어갈지 기대해 주세요. :) 6. [DeepBLue] : 후후. 선유운도 많이 강력해질 예정 입니다. 추후 <10강>에 오르는 만큼, 어느 정도 힘은 줄 예정 입니다. 과연 한별이와 어떻게 재회할지, 어떻게 될지, 저도 두근거립니다. 하하하. 7. 미월야 : 네. 가장 중요한건 명성과 인정 입니다. 공란이 생기거나, 기존의 <10강>들을 압도할만한 또는 단독으로 <살해에 준하는 승리를 거둔> 사용자가 나타나면 교체 될 수 있습니다. 조금 애매한 경우에는 늘수도 줄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고 기존의 <10강> 인원들의 자리 지킴이 조금 더 유리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8. 이터시온 : 광휘의 사제는 사제 클래스의 끝판 대장 입니다. 시크릿 클래스 입니다. 단순한 <가치>로만 따지면 검술 전문가와 맞먹는다고 개인적으로 생각 합니다. 9. 탱구리잉 : ㅋㅋㅋㅋㅋㅋㅋㅋ. 거인 짱짱맨은 너무 이상하잖아요. 예를들어 큰일 났습니다! 거인 짱짱맨 클랜의 김수현의 침공을 포착 했습니다! 뭣이! 거인 짱짱맨 클랜의 침공이라! ㅋㅋㅋㅋㅋㅋㅋㅋ. 10. 고룡의반란 : 여.자.친.구. 분께서 말씀 이시죠. 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괜찮습니다. 네 저 솔로에요. 괜찮다구요. 하하하!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허헣흐흐으렁흐읗허헣ㅎ헣. 허헣허헣ㅎ. 흐으허헣헣. ㅜ.ㅠ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평점,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83 / 0933 ---------------------------------------------- The downfall of Golden Lion “오빠.” “…….” “오빠? 오빠!” “응? 응.” 뾰족한 목소리와 동시에 누군가 내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유정의 얼굴이 보였다.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 옆에서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왜 불렀어?” “우리 홀 플레인에 막 들어왔을 때 황금 사자 클랜 애들이 왔었잖아.” “그렇지.” 내가 수긍하자 그녀는 자신의 왼쪽 가슴을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 때 그 사용자들 가슴에 황금 사자 문양이 있지 않았어? 우리들은 그런 게 없는 것 같아서.” “문양을 등록하기는 했어. 그런데 그런 경우는 자동적으로 되는 게 아니라 본인의 장비에 따로 그려야 해.” “아~. 그렇구나~. 나는 또 저절로 되는 줄 알았지. 그런데 오빠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어? 표정이 되게 안 좋아 보인다.” “안 좋기는. 잠시 생각할게 있어서 그랬어.” 문득 방금 전 콘라드 더글라스가 건네준 정보가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어제 말일세. 이 도시의 대표 클랜의 인원들이 방문 했다네. 그리고 자네들의 클랜 생성 여부와, 자세한 정보를 캐물으려 하더군. 일단은 적당한 말로 돌려 보냈네만, 결코 호의적인 눈빛은 아니었네. 조심하게. 떠날 것이라면 얼른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으이.> 유현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나는 절대로 뮬에 남아 있을 생각은 없었다. 사용자 정보 창에 있는 <자유 용병(Free)>를 흘끗 본 후, 나는 하고 있던 생각들을 접었다. 나는 언제나 쫓기듯 행동하는 편 이었다. 흐름을 타지 못하면 도태 된다는 생각에 항상 마음이 다급했다. “사용자 고연주, 사용자 정하연.” 마음을 가다듬고 정하연과 고연주를 부르자, 단박에 내 곁으로 다가오는 두 명의 사용자를 볼 수 있었다. “네. 수현.” “부르셨어요?” “네. 지금 두 분은 다른 일행들을 이끌고 곧바로 여관으로 돌아가 주세요. 여관을 정리하고, 뮬을 떠날 준비를 해주시면 됩니다.” “바로 떠나실 생각 이신가요?” 하연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니요. 마무리 지을게 하나 남아 있어서요. 그래도 최대한 빠르게 준비해 주세요. 이르면 오늘 저녁에 떠날 수도 있습니다. 사용자 고연주는 여관을 어떻게 정리할 거죠? 시간이 좀 필요한가요?” “아니요~. 그것도 생각해 봤는데, 그냥 가지고 있으려고요. 다른 도시에서 자리를 잡으면 이쪽에 그림자를 새로 붙일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러니 짐만 챙기면 된답니다.” 고연주의 판단은 옳다. 앞으로 북 대륙 사용자들끼리 내전이 발생하게 되면 반목하는 도시를 잇는 워프 게이트가 끊기는 상황이 발생한다. 물론 그녀는 지금은 순수 정보 수집 목적으로 말하고 있겠지만, 그 때를 대비해 내부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그녀 휘하 <그림자>가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고연주 정도라면 알아서 잘 하겠지 라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저는 지금 그 마지막 일을 마무리 짓고 오겠습니다. 모든 준비가 끝난 후, 1층 로비에 일행들을 모아주세요. 앞으로의 간단한 계획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뮬을 떠나는 것은 그 이후 입니다.” “맡겨 주세요.” “로드의 명을 받듭니다.” 정하연은 맑은 목소리로, 고연주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대답 했다. 이윽고 일행들을 향해 걸어 가는 둘의 뒷모습을 보며, 나 또한 걸음을 옮겼다. 내가 향하는 곳은 상점가 밀집 지역. 그 중 <영감님 보석상>에 들를 생각 이었다. * <영감님 보석상>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짙푸른 보석을 보고 있는 영감님이 보였다. 하얗게 센 머리와 주름진 얼굴을 여전했다. 그는 내가 들어서자마자 힐끔 눈길을 주더니 이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 “격조 했습니다. 그 동안 기체후 일향 만강(氣體候 一向 萬康) 하셨는지요.” “흥. 어디서 들은 말은 있나 보군. 구매인가, 판매인가?” 그는 내 말이 꽤 웃겼는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조금 연세가 있으신 분이라 예전에 알고 있던 인사말을 해봤는데, 의도치 않게 먹혀 들어간 것 같았다. 나 또한 연한 미소를 흘리며 품 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내 주머니를 받고는 조심스럽게 상 위로 흔들어 털었다. 이윽고 나온 열댓 개의 보석 중 하나를 집어 든 영감님의 눈동자에서 마력의 유동이 일어남을 느꼈다. 이내 하나씩 보석을 돌려보는 영감님을 보며,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지금 내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눈 앞의 영감님이 레어 클래스였기 때문이다. 레어 클래스 보석 감정사.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솔직히 내 기준에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이었다. 그러나 한별이의 클래스를 생각하면, 둘의 상성이 좋을 것 같았다. 원래는 완전 영입으로 가닥을 잡았었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져 보류로 바꾼 상태. 애초에 완전하게 영입을 할 생각 이었으면 김한별을 데려온 후 다시 찾아 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용히 생을 마무리하고 싶어 하시고, 앞으로의 행보에 꼭 필요하지도 않은데 굳이 끌고 갈 권리도 생각도 나에게는 없었다. 더구나 김한별의 입장도 애매한지라, 그냥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식으로 방문한 것이다. “좋군.”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는 사이 영감님은 어느새 보석 감정을 완료한 것 같았다. 그는 두 손으로 보석들을 모아 들고는 감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예전에 자네가 들고 온 것들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야. 이 정도면 최상품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네. 빛깔은 영롱하고, 안이 꽉 찬걸 보니 마력 집약성도 굉장히 높아. 아무리 못해도 개당 이백 골드는 넘어가네. 전부 판매할 생각인가?” “아니요.” “응? 뭐라고?” 그는 내 말이 뜻 밖 이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그러나 곧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게, 뭔가 심기가 불편하신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영입 제의는 맞다. 그러나 눈 앞의 사용자는 말을 빙빙 돌려 하는걸 싫어하니, 처음부터 솔직히 털어 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도, 빠르게 말을 이을 필요성은 있었다. “방금 전 클랜을 창설하고 오는 길 입니다.” “클랜을 창설 했다고?” “네. 그리고 곧 뮬을 떠날 예정 입니다.” “크흠. 그렇군. 그래. 그럼 그 말을 꺼낸 저의가 도대체 뭔가.” 영감님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누그러드는 게 보였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얼마 전에 황금 사자 클랜에서 시크릿 클래스가 출현 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들었네. 그렇게 광고를 때려 대는데 귀가 따가울 정도더군. 뭐, 개인적으로 호기심은 있는 클래스네만.” “그 당사자와 아는 사이 입니다. 아무래도 보석을 주로 이용할 것 같은지라, 영감님의 도움이 있으면 앞으로 한층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물론 그 사용자가 우리 클랜에 올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뮬을 떠나기 전에 영감님께 한 번 여쭤보고는 싶었습니다.” “큭. 그럼 이 보석들은 계약금으로 주는 건가?” “어떻게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신생 클랜이라고 해도 그 정도 보석을 드릴 수 있는 만큼은 됩니다.” 나름 노림 수는 있었다. 상식으로 생각하면 김한별의 영입이 확실치 않은 이상 황금 사자 클랜의 간부 후보를 영입 하겠다는 것은 헛소리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의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 그래도 보석을 보여준 것은, 갓 출범한 클랜이지만 이 정도의 능력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거절하겠네.” 그리고 역시나, 사용자 이만성은 내 제안을 단칼에 거절 했다. 나 또한 그가 허락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물론 나는 그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영감님 입장에서는 그냥 한번 본 사용자가 불쑥 찾아와 클랜에 가입해 달라고 한 짝 이었다. 나라도 그런 경우가 오면 거절할 것이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그의 말은, 내 예상을 빗나갔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군. 다 늙은 사용자를 눈여겨보고 가입 권유까지 해주는 사용자가 있다니. 특이한 청년이로고.” “하하. 이곳을 추천해준 사용자한테 워낙 좋은 말을 많이 들어서요. 혹시나 했습니다.” “제안은 고맙네. 그러나 그 시크릿 클래스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야. 단지 개인적인 호기심 문제일 뿐 이지 그 때문에 가입 권유를 거절한 것은 아닐세. 뭐, 더 이상 구구절절 말하지는 않겠네. 나는 단지 이 곳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싶어. 이리저리 움직일 나이는 지나지 않았나.” “이해 합니다. 오히려 무례한 부탁을 좋게 말씀해 주셔서 오히려 죄송하네요.” 사용자 이만성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보석들을 다시 주머니 안으로 흘려 넣었다. 다시 주머니를 받으려고 손을 내밀려는 찰나,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그래도 혹시 그 사용자를 영입하게 되면, 생각날 때 한번 들러는 주게. 섭섭하게 하지는 않을 테니. 뭐, 굳이 영입하지 않아도 오는 건 상관 없네만.” 영감님의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쓸쓸함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주머니를 받아 품 안에 잘 갈무리해 넣었다. “갓 클랜을 창설 했다면 바쁘겠군. 이만 가보게. 살아서 다시 봤으면 좋겠어.” “하하. 고맙습니다. 꼭 살아남아서, 다시 한번 들르겠습니다.” 그렇게 나와 영감님은 서로 의례적인 말들을 주고 받고 작별을 고했다.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영감님 보석상>을 나섰다. 이제는 여관으로 돌아갈 차례였다. * 여관으로 돌아가자 클랜원들은 착실하게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다들 뮬을 떠난다는 말에 설레는지 들뜬 기색을 엿볼 수 있었다. 나 또한 집무실로 들어가 보관하던 장비들을 분리 보관 했다. 금화, 보석, 장비들이 제법 되었지만 3개의 카오스 미믹에 안에 담고, 그것들을 마법 배낭에 집어 넣자 부피는 크게 줄어들었다. 그렇게 챙길 것은 챙기고, 정리할 것은 정리하자 어느새 해는 뉘 엿이 넘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고연주의 제안으로 우리들은 간단하게 식사를 마쳤다. 뮬에서 먹는 마지막 식사라 다들 기대 했지만, 음식 재료들을 거의 소비한 상태라 전처럼 푸짐하게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원체 솜씨가 좋은 고연주가 만든 음식이니 다들 맛있다는 얼굴로 음식을 들었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 곧바로 워프 게이트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명색이 클랜 로드고, 클랜원인 만큼 주먹구구식으로 끌고 다니는 것은 좋은 모양새가 아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최소한의 설명이라도 해주는 게 클랜 로드로서의 도리였다. 해서, 나는 식사 후 차를 마시는 일행들을 모아놓고 입을 열었다. “그럼 앞으로의 계획을 간단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처음 뮬에 왔을 때와는 달리 사용자가 배로 늘어 있었다. 안현, 안솔, 이유정, 비비앙, 정하연, 신상용, 고연주 그리고 나. 이제는 단순한 일행을 넘어서 내가 이끄는 클랜원들 이었다. 그네들의 주목 된 시선을 받으며, 나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드디어 오늘, 우리들은 클랜을 창설 했습니다. 다행히 첫 단추는 잘 꿴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아직 첫 걸음일 뿐 입니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눈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알싸한 향이 입 안 가득히 퍼져 나갔다. “머셔너리는 자유 용병형 클랜 입니다. 물론 자의적으로 움직일 때도 있지만, 의뢰를 받고, 그 의뢰를 수행하는 것으로 세를 키울 겁니다. 다만 현재 머셔너리가 가진 명성으로는 위와 같은 의뢰를 바탕으로 한 운영은 어렵습니다. 그런 만큼,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건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베이스로 삼을 수 있는 클랜 하우스. 나머지 하나는 명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 물론 새로운 동료 영입도 염두에 두고 있지만 이것은 잠시 논외로 두겠습니다.” “클랜 하우스야 돈이 많으니 그렇다고 치고, 명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으로는 어떤 것들을 생각하고 계시나요?” 고연주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한번 주억이고는 대답해 주었다. “일단은 홍보 효과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의 전력이면 사용자들의 이목이 쏠릴 것이라 생각 합니다. 그리고 관심이 높아지면 자연스럽게 접촉해 오는 곳도 많을 거고요. 하지만 다른 클랜의 산하로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오직 우리들이 이용해야 할 것은 관심이 쏠렸을 때, 그 흐름을 타고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 입니다.” 아마도 합병 문의를 하는 곳이 가장 많겠지. 중요한 것은, 우리들은 우리들의 의지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의 필요에 따라서 또는 어쩔 수 없이 몰리듯 움직이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얕보이지 않을 만큼의 힘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 흐름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탈지에 대해 의문이 들 겁니다. 그에 대한 계획은 이미 세워 두었습니다. 아마 조만간 황금….” 쾅! “황금 사자 클랜이 강철 산맥으로의 원정을 끝낸 이후를 저는 첫 시작으로 잡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갑작스레 들린 소리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클랜원들도 모두 깜짝 놀란 얼굴로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숨을 거칠게 몰아 쉬고 있는 사용자가 한 명이 있었다. 그 사용자는 바로 유현아였다. 곧이어 그 뒤로 두 명의 사용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은 <무신> 차승현, 다른 한 명은 <미친년> 반다희였다. 이윽고 그녀는, 1층 테이블에 있는 우리들과 옆에 정리해 놓은 짐들을 보더니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잠시 동안 나와 유현아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무언가 기이한 열망이 보였다. 이윽고 그녀는, 우리와의 거리를 줄이고는 살며시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음. 벌써 시험이 끝나신 분들이 종종 보이네요. 부럽습니다. 저는 아직 시작도 안했습니다. ㅜ.ㅠ 얼른 공부를 해야 하는데, 이것 참 연재를 끊을수가 없네요. 아무튼 최대한 해보는 데까지는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 부탁 드립니다. :) 『 리리플 』 1. 천겁혈신천무존 : 1등 축하 드립니다. 오랜만에 1등을 하시는것 같네요. 하하. 그럼 부디 이번회도 재미있게 감상해 주세요.(근데 인형이면 예쁘신것 아닐까요? ㄷㄷ) 2. 쏘주처럼 : 앗. 실수 했습니다. 수정 완료 했습니다. 감사 합니다. (__) 3. 랜슬럿 듀 락 : 으음. 그렇군요. 평균 외모가 월등하군요. 그 사실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_@ 4. 뉴마더 : NO. 안솔은 추후 광휘의 사제가 되는 아이 입니다. 물론, 미래는 바뀔 수 있지만 1회차에 시크릿 클래스를 얻었었죠. 5. 테크노 :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어렸을 때 봉사 활동을 하러 갔는데, 혼자서 열심히 묵묵히 일하는 애가 그렇게 호감이 가더라고요. :D 6. 고장난선풍기 : 거인짱짱맨 ㅋㅋㅋㅋ. 정말 그렇게 지으면 너무 이상하잖아요. 거인짱짱맨 클랜 로드 김수현 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7. 사람인생 : 1번. 뜨끔. 2번. 뜨뜨끔. 3번. 음? 4번. 하아…. 5번. 오호. 6번. 저, 저는 날씬한게 좋습니다. 7번. 네. 8번. 그렇죠. 9번. 음. 그런것 같아요.(?) 10. ……. 8. 유운처럼 : 안솔 Ver. 와아! 와아! 너무 감사해요오. 헤헤. 유지니는 유운처럼님께 너무 감사해요오. 와아. 와아. 비위가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__) 9. 레필 : <세상이 그렇게 생각대로만 풀리는 세상이라면.> 말씀에 공감 합니다. 무엇보다 다른 클랜들 또한 몇 년 동안 홀 플레인에서 활동한 만큼, 그들이 그동안 이뤄온 업적도 있습니다. 이번에 수현이네는 카오스 미믹으로 그 차이를 어느 정도 좁혔지요. :) 10. hohokoya1 : 하하. 죄송합니다. 다음주가 바로 시험이라 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ㅜ.ㅠ 시험이 끝나면 간간이 연참하도록 할게요!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평점,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84 / 0933 ---------------------------------------------- The downfall of Golden Lion * 피치 못할 사정으로 <미친년> 백장미의 이름을 반다희로 변경 합니다. 백장미 → 반다희 입니다. 독자 분들의 양해 부탁 드립니다. “오랜만이에요. 사용자 김수현씨.” “…….” “이번에 새로 클랜을 창설 하셨다고 들었어요. 축하드려요.” 유현아는 태연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오면서 표정을 고친 걸로 보아 억지로 담담한 척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뭘 또 주어 먹을게 있다고 기어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축하 인사를 들어도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았다. “클랜은 오늘 낮 즈음에 창설 했습니다. 상당히 정보가 빠르시네요.” “칭찬으로 들어도 될까요?” “그거야 본인 듣기 나름이겠죠.” “제가 귀에는 비꼬시는 것 같이 들려서요. 꼭 일부러 뒤를 캔 것처럼 말씀 하시는군요.” “속담에 도둑이 제 발 저리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청각 장애는 아니신 것 같아서 다행 입니다.” 강도 높은 말로 퉁명스럽게 받아 치자 유현아의 표정이 한껏 일그러졌다. 그와 동시에 뒤에 시립한 두 명의 얼굴 표정도 따라서 변했다. 차승현은 저번에 봤고, 옆으로 돌리니 나를 흥미롭게 쳐다 보는 한 명의 여성을 볼 수 있었다. 특이하게도 그녀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검은색이 아니었다. 진한 붉은빛을 띠는 머리칼을 뒤로 질끈 묶고, 그 아래로 따라 내려오는 갸름한 얼굴 선이 보인다. 쌍꺼풀이 진 눈 아래로 자줏빛 눈동자가 나를 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터운 로브를 입고 있는 걸로 보아, <미친년> 반다희 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윽고 고개를 차승현 쪽으로 살짝 돌리더니, 킬킬 웃으며 입을 열었다. “브라더~? 저 새끼가 언니가 말한 그 새끼야? 쟤 지금 뭐라고 말했니. 완전 싸가지 없는 놈이네?” “반다희. 입 다물어라.” 차승현이 곧바로 주의를 줬지만 이미 내뱉은 말 이었다. 더구나 마치 나 들으라고 한 듯 일부러 목소리를 높인지라, 클랜원들의 표정은 삽시간에 굳어버렸다. 초장부터 분위기가 짜릿하게 흘러가자 그제서야 유현아는 당황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반다희는 어깨를 한번 으쓱 이고는 비웃음을 띠며 콧방귀를 뀌었다. “휴. 잠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듣고 싶지 않습니다만.” “조금만 시간을 내주세요. 방금 전, 굉장히 위급한 소식을 받았어요.” “위급한 소식?” 위급한 소식이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 들었다. 설마 강철 산맥 원정에 관한 소식인가? 나는 두 말 않고 일으키려던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붙였다. 그러고 지그시 유현아의 얼굴을 응시 했다. 그녀는 내 반응을 조심스러운 얼굴로 살피더니, 이내 약간은 떨리는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금 전 강철 산맥 원정에 대한 통신이 들어왔어요.” “흠. 축하 드립니다. 예상보다 원정이 일찍 끝난 모양이군요. 이제 뮬도 개척 도시를 벗어날 수 있겠습니다.” “…….”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유현아의 반응을 살폈다. 예상대로, 그녀는 그저 연분홍 빛 입술만 오물거리고 있었다. 이왕 내친김에 나는 한번 더 선수를 치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도 머셔너리 클랜이 너도밤나무 아래로 들어가는 건 거절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따로 목표가 있고, 그 목표는 뮬에서 이룰 수 없습니다.” “자, 잠깐만요. 그 말이 아니에요.” “네? 분명 저번에는 성공을 한다고 장담 하셨던 것 같은데.” “오해를 하신 것 같아요. 아, 아니 제가 말을 잘못 했어요. 강철 산맥의 원정은…. 실패 했어요.” 역시나. 강철 산맥으로 진입하는 순간, 강력한 마력 파장으로 통신이 두절 된다. 통신이 왔다는 소리는 지금쯤 운 좋은 사용자들 몇 명이 강철 산맥을 벗어났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통신 마법을 다룰 수 있는 마법사 사용자가 구조 요청을 했을 테고. “그것 참 안타까운 일 이군요.” “그, 그렇죠. 급보로 받은 거라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아 네. 그래서 그 정보를 저희한테 말씀하신 이유는요?” 내 물음에 유현아는 할 말을 잃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겠지. 일전에 강철 산맥 원정만 성공하면 뮬에도 여유가 생길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현실은 반대가 되어 버렸다. 여유는커녕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 더구나 성공했다고 해도 떠날 거라고 미리 못을 박아 뒀으니 할 말이 더욱 궁색해질 것이다. “따로 할 말이 없으시면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바빠서요. 안현, 안솔, 이유정. 짐 하나씩 챙겨라. 남는 것은 다른 클랜원들이랑 나눠 들고.” “네, 네 형.” “으응. 네에.” 애들은 나와 유현아를 번갈아 봤지만 이내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 광경을 보며, 유현아가 입술을 더욱 세게 깨무는걸 볼 수 있었다. 이내 조금씩 짐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애들을 보며 나 또한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였다. “거기 셋~. 스톱~!” 그 순간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지켜보던 반다희가 앞으로 나섰다. “짐 들어라. 어물쩍거리지 말고.” 엄한 목소리로 재촉하자, 잠시 멈칫한 애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휴~. 헛바람만 잔뜩 들어서는.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네. 꼴랑 0연차 주제에.” 다시 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그것을 보던 반다희는 한 숨을 푹 쉬었다. 그러더니, 팔짱을 풀고 양 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이윽고 그녀의 손바닥 위로 불그스름한 빛깔을 띠는 구체가 모이기 시작 했다. 그리고 유현아와 차승현이 미처 말릴 틈도 없이, 그녀는 상큼하게 웃으며 간드러진 목소리를 냈다. “브라더~. 시스터~. 다매요~!” 쾅쾅쾅쾅쾅쾅쾅쾅! 반다희가 양 팔을 내리치는 순간, 거센 폭음과 함께 여관의 바닥을 타고 강렬한 충격파가 뻗어 나갔다. 그 충격파는 애들과 짐 사이를 정확하게 갈랐고, 곧 구멍이 드러날 정도로 움푹 패인 바닥을 볼 수 있었다. 이리저리 부서지고 튀어 오른 나무 조각들을 보며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반다희! 너 이게 무슨 짓이야!” “너 분명 조용히 있겠다고….” “깔깔. 언니가 너무 답답하게 굴잖아. 그리고 쟤 태도를 보니까 열도 받고. 아~. 속 시원~하다! 아. 여관 주인한테는 조금 미안하네. 히히.” 이 정도 했으면 제 아무리 대표 클랜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허리춤을 보자 태양의 영광 안으로 곱게 매어진 무검과 일월신검이 보였다. 뭘 쓸까 고민하려는 찰나, 누군가 몸을 일으키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시선을 돌리자 미묘한 웃음을 흘리며 손을 꼼지락거리는 고연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바로 여관 주인이란다.” “어머? 당신이 여관 주인? 그러고 보니 10강 중 그림자 여왕 고연주라고 했던가? 잘 됐다. 한번 붙어보고 싶었는데. 그나저나 그림자 여왕 씨. 궁금한 게 있는데요. 요즘에 10강도 여관 운영을 해요? 먹고 살기 어렵나 봐? 아하하하!” “호호. 너 완전 미친년 이로구나?” “응! 어떻게 알았어요? 내 별명이 미친년이에요. 인정인정!” 반다희는 킬킬 웃으며 계속해서 고연주를 도발 했다. 유현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고, 차승현은 어쩔 줄 모른 채 그녀를 자제 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반다희는 초반부의 이유정과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둘의 차이점이 있다면, 이유정은 내 통제하에 서서히 성격을 변화 시켰고 반다희 같은 경우는 유현아가 통제를 실패 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저렇게 망둥이처럼 날뛰는 거겠지. 나는 마침 잘 됐다 싶어 얼른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그녀 또한 후에 10강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만큼 현재의 정보가 자못 궁금 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반다희(3년차) 2. 클래스(Class) : 일반 전사(Normal Warrior Expert)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Babara) 4. 소속 단체(Clan) : 너도밤나무 5. 진명 · 국적 : 정신 이상 자, 정신에 이상이 있는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2) 7. 신장 · 체중 : 167.2cm · 54.2kg 8. 성향 : 야만 · 욕망(Barbarism · Desire) < 능력치 > 1. [근력 94] [내구 87] [민첩 81] [체력 88] [마력 79] [행운 53] < 능력치 비교 > 1. 김수현 : 544 / 600~ (능력치 포인트가 12 포인트 남아 있습니다.) [근력 96(+2)] [내구 92] [민첩 98] [체력 72] [마력 96] [행운 90(+2)] 2. 고연주 : 536 / 600~ (능력치 포인트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근력 89] [내구 90] [민첩 97] [체력 85] [마력 93] [행운 82] 3. 반다희 : 484 / 600~ [근력 94] [내구 87] [민첩 81] [체력 88] [마력 79] [행운 55] 얘 좀 봐. 물론 10강에 비하면 낫다고 할 수 없는 능력치였다. 그러나 추후 차승현과 함께 10강의 한 자리를 담당하는걸 감안 한다면, 아직 성장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았다는 소리였다. 단순 능력치로만 따지면 대형 클랜 간부를 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속으로 조금은 감탄이 일었다. 어느새 분위기는 사늘하게 가라 앉아 있었다. 고연주는 허벅지에 손을 넣더니 이내 은빛으로 빛나는 단검 하나를 들었다. 반다희 또한 그 모습을 확인하고는 씩 웃으며 자세를 잡았다. 일촉즉발의 상황 이었다. 그러나…. “휴.” 고연주는 곧 가벼운 한숨을 흘리고는 단검을 든 손을 내려 놓았다. 한창 설레는 얼굴로 입술을 적시던 반다희는, 김 샜다는 얼굴로 입을 비죽 내밀었다. 그러더니 혀를 쯧쯧 차며 유감이라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야~. 설마 10강이 꼬랑지를 말은 거야? 와. 완전 실망….” 그때였다. 반다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하는 사이, 먹빛 그림자가 재빠르게 그녀의 얼굴을 훑었다. 짝! “이야…픅!” 귀 싸대기를 휘갈기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반다희의 목이 오른쪽으로 크게 틀어졌다. 보고만 있던 유현아, 차승현도 그리고 일행들도 모두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 보았다.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저절로 반다희의 목이 돌아간 것이다. 그것도 뺨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나는 편안한 얼굴로 고연주를 구경 했다. 그녀는, 지금도 가만히 손을 내린 채 반다희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만. 짝! “악!” 다시 한번 경쾌한 소리가 남과 동시에, 이번엔 반다희의 고개가 왼쪽으로 크게 돌아갔다. 그녀는 분노한 얼굴로 자세를 추스르려고 했지만 고연주의 그림자 싸대기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먹빛 그림자가 그녀의 뺨을 스칠 때마다 볼을 휘갈기는 신나는 소리와 함께 반다희의 고개가 사정없이 돌아갔다. 어찌나 강력하게 후려 치는지, 나중에 이르러서는 얼굴뿐만이 아니라 아예 몸이 끌려 다닐 정도였다. 그러나 고연주는 그녀가 몸을 허물어뜨리게 놔두지 않았다. 강제로 반다희의 균형을 맞추며 쉴 새 없이, 연속으로 뺨을 날렸다. 마치 뎀프시 롤에 얻어 맞는 모습 이었다. “이 쌍년이….” 한동안 실컷 두들겨 맞은 반다희는, 고연주가 그림자 놀림을 멈추자 이내 비틀거리며 몇 걸음 물러났다. 그녀의 양 볼에는 불그스름한 손자국이 잔뜩 나 있었다. 어지간히 화가 치미는지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 했고, 눈동자는 상대방을 찢어 죽일 것 같은 기세를 풀풀 날리고 있었다. “퉤. 진짜 죽여 버릴 거야.” “반다희! 그만해라!” “비켜!” 차승현이 옆에서 말렸지만, 차마 그가 다가가기도 전에 반다희는 재빠르게 몸을 날렸다. 마치 맹호와 같은 몸놀림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그녀는 있는 힘껏 고연주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쿵! 콰그작! 거친 소음이 여관의 1층을 울렸다. 반다희가 주먹을 내지른 곳에는, 애꿎은 여관 바닥만 크게 부서져 있었다. 목표가 빗나감을 확인한 그녀는 성난 목소리로 으르렁 거리며 고개를 휘휘 돌렸다. “뭐야 씨발? 어디 갔어?” “여기 있단다.” 어느새 그림자 여왕은, 반다희의 바로 옆으로 이동해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반다희는 얼른 몸을 돌렸지만, 이미 고연주는 반다희를 박살낼 모든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그녀는 마치 리듬 체조를 하는 것과 같은 동작으로 오른 다리를 하늘을 향해 쭉 뻗어 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개방된 다리 틈으로 물빛 속옷이…. 아니. 아무튼 고연주는 멍한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반다희를 보며 연한 미소를 흘렸다. 그리고, 그대로 반다희의 머리를 향해 한껏 다리를 내려 찍었다. 꽝! “껙!” 잠시 여담으로 말하자면, 고연주와 반다희의 공방전은 채 4초도 걸리지 않았다. 거센 충격파로 풀썩 튀어 오른 먼지가 가라 앉자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반다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뒤통수에는 고연주의 발꿈치가 다소곳하게 박혀 있었다. 고연주는 그 상태에서 발을 살짝 까닥거리며,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이것은 내 여관을 함부로 파손한 죄.” “사, 사용자 고연주!” “이것은 나한테 말을 함부로 한 죄.” 유현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고연주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뒤꿈치를 놀렸다. 오, 이번에는 조금 강한데. 그녀의 발이 흔들리자, 퍽 소리와 함께 반다희의 고개가 앞뒤로 스프링처럼 흔들렸다. 그녀는 대(大)자로 뻗어 있었는데, 마치 죽은 개구리 같은 모양새였다. 간헐적으로 몸을 떠는 것을 보니 아직 살아 있기는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이것은….” 고연주는 이번에는 나를 흘끗 보며 눈을 찡긋 했다. 나 또한 마음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또 다시 고연주의 발이 허공으로 크게 치솟아 오르고, 반다희의 얼굴이 꿈틀거리며 간신히 솟아 올랐다. 그러나. 그녀가 고개를 치켜듦과 동시에 고연주는 자신의 들어올린 다리를, 하늘을 쪼갤 듯 내려쳤다. 꽝! “우리 수현씨한테 함부로 말한 죄~.” 겨우 들어 올린 고개는 강한 충격음을 동반한 채 다시금 아래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제서야 생긋 웃은 고연주는 입가에 진한 미소를 그리며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나 또한 그녀를 따라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온 몸을 푸들거리는 반다희의 사지를 볼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독자 분들. 이번 주말에 연참을 못해서 죄송해요. ;ㅇ; 아시다시피 내일, 아니 이 후기를 보고 계시면 오늘 이겠군요. 드디어 대망의 시험 기간이라 연참이 많이 어렵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올려보겠습니다. 독자 분들의 많은 양해 부탁 드립니다. ㅜ.ㅠ 『 리리플 』 1. 센서티브 : 1등 축하 드립니다. 1등 코멘트에서는 처음 뵙는것 같은데, 맞나요? :) 그럼 이번 회도 부디 재미있게 감상해 주세요. 2. EyeSeeYou : 꾸준한 안솔, 비비앙 사랑 이시군요! 하하하. 혹시 둘 중 하나만 고르라고 하신다면 누굴 선택 하시겠어요? '~' 3. 인페르니우스 : 휴. 우리 같이 힘내요. 한번 훑기는 했는데 혹시 모르니 저도 다시 한번 봐야겠어요. ㅜ.ㅠ 4. 잿빛나래 : 일단 시범타로 <미친년> 반다의 부터 아작 냈습니다. 아하하하. 5. 천겁혈신천무존 : ……. 왜, 왜 이러세요. ㅜ.ㅠ 저는 여성이 아닙니다. 남성 입니다. 자꾸 그러면 무섭습니다. '-' 6. 평화롭군 : 저, 정말요? 제 절단마공이 극성인가요? 아하하하하! 그게 사실이라면 슬슬 연참신공을 익힐때도 되었지요. 다른분들의 평가도 들어봤으면 좋겠습니다. 하하하. 7. 레필 : 유현아가, 어떻게 보면 그럴수도 있어요. 조금 아쉬운 캐릭터 이기는 해요. 초반에는 완전 민폐형 캐릭터로 잡아놔서…. 후반에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요. 후훗. :) 8. gongho7 : 아니어요. 저쪽도 부하가 나왔는데, 굳이 주인공이 나설 필요도 없습니다. 똑같이 부하를 내보내야 구색이 맞죠. 다만 부하가 그림자 여왕이라는게 함정 입니다. 낄낄. 9. 이드리얀 : 김한별이 진짜 호불호가 갈리는 캐릭터 입니다. ㅋㅋㅋㅋ. 이드리얀 같은 독자 분들도 많으시고, 반대로 옹호 하시는 분들도 많으세요. 으엌ㅋㅋㅋㅋ. 나중에 재회할때 어떻게 될까요 과연. :) 10. [DeepBLue] : 이크. 수정 완료 했습니다. 감사 합니다. 초기에 마법사용 설정 복붙을 하고 사용하다 보니까 실수가 많네요. ㅜ.ㅠ 아, 네. 신상용 같은 경우는 땡 잡은 케이스 입니다. :) 11. 악마신전 : 안솔 Ver. 히잉. 죄송해요오.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오. 용서해 주실거죠오? 헤헤. 아이잉~. 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부디 악마신전님의 모니터가 살아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 합니다. :D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평점,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85 / 0933 ---------------------------------------------- The downfall of Golden Lion 나는 의자 뒤로 깊숙이 몸을 묻은 후 반다희를 바라보았다. 고연주의 위력 있는 찍기가 두 번이나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정신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 튼튼함과 근성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었지만, 여전히 살아서 나불거리는 입술을 보면 그런 마음이 싹 가시는 것 같았다. “두겨…버이어아.(죽여…버릴 거야.) 기히어 후어 어이어아.(기필코 죽여 버릴 거야.)” “어머? 얘. 말은 똑바로 하렴. 앗 차. 고개를 처 박고 있었구나. 호호.” 고연주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호호 웃은 후 슬쩍 발을 치워주었다. 그러자 반다희는 단박에 고개를 들었고, 들자마자 거친 욕설을 쏟아내기 시작 했다. 다른 욕설은 그렇다 치더라도 대부분의 욕이 “죽여버린다.” 로 귀결 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자 문득 내 마음 속에서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유현아와 차승현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현아는 안절부절 못한 얼굴로 그 둘을 응시하고 있었다. 차승현은 제법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손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을 보니 내심 당황한 것 같았다. 그 둘을 보자 머리를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기회였다. 예상치 못한 기회가 찾아왔다. 현대가 아닌, 오직 홀 플레인 내에서만 성립될 수 있는 기회. 그러나 한 순간의 감정에 이끌리고 싶지 않았다. 기회가 왔다고 덥석 무는 건 바보 천치나 하는 짓.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주변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냉정한 이성 이었다. 나는 곰곰이 가능성을 따져보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건 명분 이었다. 그렇다면, 명분이라는 단어 아래 반다희의 처분을 가늠해야 한다. 위협용이라고는 해도 그녀는 초반에 애들을 향해 선제 공격을 가했다. 그와 더불어 나를 의도적으로 도발, 그리고 10강 고연주에게 싸움을 걸었다. 고연주는 그에 대응 했고, 반다희는 분노를 참지 못해 “진짜로 죽여버린다.” 라고 내뱉으며 달려 들었다. 이 상황만 보면 고연주에게는 반다희를 즉결 처분할 수 있는 명분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도의상 이라는 말이 있지만, 홀 플레인은 도의 보다는 명목을 우선시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지금 유현아와 차승현이 저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반대로 반다희 역시 고연주에게 뺨을 얻어 맞았으니 고연주를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승자는, 그리고 결정권을 쥐고 있는 사용자는 고연주였다. 그럼 지금 반다희를 죽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과 나에게 미칠 수 있는 위험들을 가늠해보자. 반다희를 처형하면 나는 미래에 적이 될 가능성이 높은 잠재적 10강 한 명을 미리 처리할 수 있다. 확실히 유혹적인 선택 이지만 걸리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아마 나 혼자 또는 고연주와 둘만 있었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전부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도시 안에다가 주변에 있는 사용자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확실한 건, 지금 이 상황에서는 유현아와 차승현을 죽일 명분이 없다는 것. 둘은 꾸준히 반다희를 말렸고, 반다희는 그네들의 말을 듣지 않고 멋대로 행동 했다. 그 둘은 우리들과 싸울 의사가 없었다는 것이다. 설령 그냥 싸그리 죽인다고 해도 너도밤나무 클랜은 소도시 뮬의 대표 클랜이다. 한 도시의 대표 클랜의 로드가 사망한 것은 그냥 가벼이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이르든 늦든 이들을 살해한 사용자들의 정체는 밝혀질 여지가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클랜 로드 유현아를 살해하기 꺼림칙한 이유가 또 하나 나온다. 더구나 앞으로 홍보 효과 이후 상승세를 타야 하는데, 그 상승세에 같은 사용자의 살해라는 사건이 끼면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칠게 분명 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는,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부랑자들이 물러가기 전 까지는 같은 사용자들끼리 지키는 마지노선 이라는 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머셔너리와 너도밤나무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선까지 왔다고 봐도 무방 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위의 위험요소들을 지우거나 하나씩 최소화 할 수 있는 명분 또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조금 더 생각을 확장해 보기로 했다. 위험을 최소화 시키면서 최고의 효율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방법. 그 순간, 문득 차승현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곧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차승현(3년차) 2. 클래스(Class) : 일반 창술사(Normal Lancer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Babara) 4. 소속 단체(Clan) : 너도밤나무 5. 진명 · 국적 : 굽힐 수 없는 신념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7) 7. 신장 · 체중 : 187.5cm · 89.6kg 8. 성향 : 긍지 · 중용(Pride · Neutral) < 능력치 > 1. [근력 92] [내구 91] [민첩 85] [체력 89] [마력 73] [행운 72]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 능력치 비교 > 1. 김수현 : 544 / 600~ (능력치 포인트가 12 포인트 남아 있습니다.) [근력 96(+2)] [내구 92] [민첩 98] [체력 72] [마력 96] [행운 90(+2)] 2. 고연주 : 536 / 600~ (능력치 포인트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근력 89] [내구 90] [민첩 97] [체력 85] [마력 93] [행운 82] 3. 차승현 : 502 / 600~ [근력 92] [내구 91] [민첩 85] [체력 89] [마력 73] [행운 72] 역시나. 3년 차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에다, 아직 성장 가능성이 남았다는 걸 감안하면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만일 반다희 하나였다면 애매하지만, 차승현까지 같이 포함해서 죽이면 수지 맞는 장사였다. 그러면, 차승현을 도발해 우리들에게 선제 공격을 가하게 만들어야 한다. 유현아가 살아 있는 이상 살해 사건은 조명될 것이다. 여기서 바로 유현아를 죽이지 말아야 할 필요성이 나온다. 클랜 로드를 살해한 게 아닌, 단순한 마찰로 해당 클랜의 부하들과 충돌 했다는 것으로 축소 시킬 필요가 있었다. 커다란 사건에서, 아주 없는 일도 아닌 사건으로 끌어 내린다. 그러면 쏠리는 관심을 최소화 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10강 고연주의 위치로 덮을 수 있고. 이 생각이 현실성이 있는 이유는 너도밤나무는 대형 클랜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다 운 좋게 얻어 걸린, 그것도 나중에 토사구팽의 목적으로 세워진 임시 대표 클랜이나 다름 없었다. 명성도 없는 소규모 클랜이 어떻게 되든지, 관심은 있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사용자들이 대부분일 터. 그에 따라 생각해 보면 차승현과 반다희는 능력은 좋지만 아직은 능력에 비해 크게 알려지지 않은 상태일 것이다. 즉, 내 생각대로 일을 진행한다면 단순한 머셔너리 클랜과 너도밤나무 클랜의 마찰에 불과해진다. 더욱이 표면에 고연주를 내세움으로써 “그럴 수도 있겠네.” 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행동에서 최대한의 당위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저 둘을 죽이면 앞으로 유현아의 미래는 크게 변화할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아올지, 부정적인 방향으로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주관적인 생각 하에 추측할 수 있을 뿐.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미래를 논하기 보다는, 지금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잡는 게 현실적인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 도박수가 있기는 있었다. 반다희가 내 예상대로 반응을 해줄지도, 그리고 차승현의 마음을 흐트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그 모든걸 감안 하고서라도 내 마음은 한쪽으로 기울고 있었고, 나는 서서히 생각을 정리 했다. 일단은 해볼 수 있는데 까지는 해보는 게 나을 것이다. “반다희! 너 정말 언니 말 안 들을래?!” “분명 조용히 있겠다고 해놓고 이 난리를 피우면 어떡하자는 거냐!” “씨발! 왜 나한테만 지랄인데! 저 새끼가 먼저 말 좆 같이 했고, 이 쌍년이 뺨 날렸잖아!” 바락바락 악을 쓰는 반다희를 보며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철 없는 년. 먼저 실질적인 위협을 가한 것은 생각도 나지 않은가 보다. 그건 둘째 치고서라도, 어떻게든 자신을 살리려는 유현아와 차승현의 노력을 발로 뻥뻥 걷어 차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몸을 일으켜, 그녀와의 거리를 조금씩 줄였다. 나는 슬쩍 머리를 쓸어 올리며 고연주를 훑고 지나갔다. 아마 그녀라면 내 신호를 알아 들을 수 있겠지. 이윽고 아직도 바닥에 처박혀 있는 반다희의 앞에 쭈그려 앉자, 주변이 순식간에 침묵이 찾아 들었다. 지금 고연주는 내 클랜원이니 나 또한 상황에 관여할 수 있다. 모두의 시선이 모인 가운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과하세요. 더 이상 일을 크게 키우고 싶지 않습니다. 모두에게 사과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모욕한, 저와 고연주 그리고 애들한테 사과를 하시면 이대로 일을 덮겠습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저희도 조금 지나쳤다는 점을 사과 드리겠습니다.” “사, 사용자 김수현씨! 하아~.” “후우.” 내 말이 끝나자, 유현아의 탄성과 차승현이 내쉰 안도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모면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그러나, 내가 반다희의 앞에 쭈그려 앉은 데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 “퉤!” “어머!” “반다희!” 반다희는 나를 죽일 듯 노려보며 침을 뱉었고, 나는 피하지 않고 맞아 주었다. 막 안도하던 유현아와 차승현은 다시금 비명을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반다희의 목으로 싸늘한 은빛을 내뿜는 단검이 들이밀어졌다. 볼을 타고 흐르는 핏덩이 섞인 침을 느끼며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아마도 중간에 몰래 내비친 비웃음도 한 몫 했겠지. “좆 까. 씨발 새끼야. 좆만한 새끼가 어디서 이래라 저래라 야?” “더 지껄여 봐. 그러다 진짜 죽는다 얘야. 아니, 제발 더 지껄이렴. 그래야 당당히 죽일 수 있으니까.” 고연주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나긋하지 않았다. 살짝 이라도 닿으면 베일듯한, 무시무시한 살기를 담고 있었다. 그녀가 진심이라는 것을 느꼈는지 유현아, 차승현 그리고 일행들을 감싼 분위기가 차갑게 굳었다. 등 뒤로 누군가 희미하게 주문을 외우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차분히 단검을 치워 주었다. “사용자 김수현씨! 제가 대신 사과 드릴게요! 죄송해요! 더 귀찮게도 안 할 테니까! 제발!” 옆에서 유현아의 애절한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잠시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금이지만 그녀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 상황이 너도밤나무가 아니라 전성기 시절의 황금 사자 클랜 또는 그에 준하는 대형 클랜 이었다면 나는 깔끔하게 포기했을 것이다. 그녀는 힘이 없다. 아니, 없다기 보다 우리들보다 힘이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런 꼴을 당하는 것이다. “사용자 유현아. 제가 원하는 건, 당신의 사과가 아니라 당사자의 사과 입니다. 다른 사용자가 하는 사과는 필요 없습니다.” “하, 하지만…. 다, 다희야!” “병신. 죽일 테면 죽여봐. 꼴랑 0연차 주제에 허세 떨고 있네.” 얘는 자신의 목에 있는 단검이 고연주라는 사실을 생각도 안 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왔으니 설마 자신을 죽이리라고는 생각지 않는 건가. 그녀의 걸쭉한 욕설을 듣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조금만 참고 인내하면 미래의 10강 중 한 명을 죽일 수 있는데 이까짓 욕이 대수겠는가. “무릎 꿇고 싹싹 빌라는 게 아닙니다. 진심이 담긴 사과 한 마디면 됩니다. 그게 그리도 어렵습니까.” “야. 헛소리 그만하고 닥쳐. 두 연놈들이 지랄을 쌍으로 떨고 자빠졌네? 응? 킬킬. 때려 죽여도 사과 같은 거 할 생각 없거든? 야, 너 김수현이라고 했지? 그리고 그림자 창녀 씨. 너네 둘은 두고 봐. 내가 언젠가는 죽이고 말 테니까. 히히. 언젠가는, 정말로 언젠가는….” 이게 바로 내가 그녀에게서 듣고 싶었던 말 이었다. “진~심으로 죽여줄 테니…끄르락!” 반다희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슬쩍 고개를 아래로 숙이니, 고연주가 가차 없이 밀어 넣은 것으로 보이는 은빛 단검이 보였다. 이윽고 목 부분에서 울컥 피가 솟아 나오자, 반다희는 크게 치켜 뜬 눈으로 나와 고연주를 올려다 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눈동자.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끄륵…끄르륵!” 고연주는 목에 단검을 꽂아 넣은 채로, 팔을 빙글 뒤틀었다. 다시 한번 피가 울컥울컥 토해지고, 그와 동시에 반다희의 눈동자가 까뒤집어지고 말았다. 한 순간에 절명한 것이다. 쿵! 갑작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엉덩방아를 찧은 유현아의 모습이 보인다. 그 옆으로는 입을 멍하니 벌린 채 애꿎은 오른팔만 뻗고 있는 차승현도 보였다. 나 또한 조금 놀란 표정을 연기 했다가, 이내 대단히 유감이라는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아…. 아…. 아…?” “…….” 유현아. 차승현. 그네들은 그저 창백한 얼굴로, 시체가 되어 누워버린 반다희를 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클랜원에 대한 일은 유감 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고, 최후의 권유도 거절 했습니다. 홀 플레인의 사정을 알고 계시다면 공감은 하지 못해도…. 적어도 사리를 분별하실 줄은 아시리라 믿습니다.” “구구절절 말할 필요도, 사과할 필요도 없어요. 로드. 죽어 마땅한 년 이었으니까. 후훗.” 때맞춰 고연주가 옆에서 말을 거들었다. 그녀는 피 묻은 단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나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단검에서 떨어져 허공을 부유하는 핏방울들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져 내린다. 나는 그 핏방울들을 잠시 물끄러미 보다가, 뒤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일행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짐 챙기세요.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나는 한마디 툭 내뱉었다. 물론 그 사이 차승현을 흘끗 살펴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인지 했는지 애들은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몸을 움직였다. 이윽고 클랜원들이 모든 짐을 챙기자, 나는 그 둘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무심한 얼굴로 여관의 입구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이었다. “동작 그만.” 뒤에서,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로비를 뒤흔들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마력은 무시할 수 없을 수준 이었다. 천천히 몸을 뒤돌아보자 우묵한 얼굴로 나를 쏘아보는 차승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겉으로는 침착해 보였지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동자가 이글거리는 게 어지간히 분노한 것 같았다. 빙고.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다행히 오늘 시험은 그럭저럭 본 것 같네요. 다만 내일 시험이 범위가 조금 많다는 문제가. ㅜ.ㅠ 이번회는 고민을 조금 많이 했습니다. 둘을 죽이냐, 살리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수현이의 본성을 잘 살릴 수 있을까 고민을 했죠. “죽여!”, “응. 알았어.” 푹! 은 부랑자한테는 가능하지만, 같은 사용자들 한테는 적용할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는 말이죠. :) 해서, 교묘한 상황을 만들어 최대한의 당위성을 확보하고 그 안에서 최고의 효율을 뽑아내는 가닥으로 잡았습니다. 이왕 죽이기로 마음 먹은거, 반다희 뿐만 아니라 차승현도 같이 처리 하는게 좋겠다고 수현이는 생각 했습니다. 이 때의, 그리고 상황적 혼란에 빠져 있는 유현아가 달려들지는 미지수지만 말이에요. 하하하. :) 『 리리플 』 1. 센서티브 : 오호라. 2연속 1등 축하 드립니다. 수 많은 쟁쟁한 분들을 거치시고 입성 하셨군요! 2연속이라 더욱 뜻이 깊습니다.(?) 그럼 이번 회도 재미있게 감상해 주세요! 2. 신사동코지로 : 하하하. 차마 밝히기는 조금 그렇지만, 정말 피치 못할 사정 이었습니다. 왠만해서는 그냥 가고 싶었는데요. ㅜ.ㅠ 그래도 어쩔 수 없죠 뭐. 3. 초요 : 음.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제 능력으로는 빠르게 넘어갈 수 없는 부분 이어요. 잘못 쓰다가는 세계관이 상당히 어그러질수도 있거든요. 그렇다면 분량을 늘리거나 연참을 해야 하는데, 제가 요즘 시험 기간인지라 하루 한 편 올리기도 힘든 편 입니다. 여유가 생기면 연참을 할 생각 이오니, 그 동안만 이라도 초요님의 양해 부탁 드립니다! 4. 바르톨로미유 : 어설프게 죽이는것 보다는, 아예 후환을 끊어 놓는게 주인공의 성격 입니다. 다만, 너무 걱정 되는게 그렇다고 해서 수현이 무조건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주변 상황과 여건을 따지고 움직인다고 보시면 됩니다. 즉, 예외가 있습니다. 그 둘과 고연주 모두 1회차 시절 자신의 적 이었지만, 고연주는 살려 두었죠. 그리고 통과 의례 우정민 일행들도 그냥 보내주었구요. 유현아는 상황상 죽이기 애매한 감이 있고, 둘을 처리한 이상 망가지거나 거의 끝났다고 봐도 좋기 때문에 배제한 거랍니다. 5. KKKranuse : 아하하. 부랑자와 같은 방식으로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저도 쓰는게 상당히 편합니다만, 아직까지는 기존의 사용자. 그리고 한 도시의 대표 클랜 이니까요. 6. Goksd : 부랑자들이라면 몰라도, 같은 사용자. 그리고 대표 클랜을 살해 했다는 사실은 긍정적인 홍보 효과가 될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는 말이죠. 물론, 사용자에 따라 받아들이는것도 다르기는 합니다. :) 7. sereson : 하하하! 이미지는 원하시는대로 상상하시면 됩니다. 제가 설정해 놓은것도 있지만, 따로 생각하셔도 크게 차이는 없습니다. 독자 분들이 편하신대로 상상 하시는게 소설을 읽으시는데 더욱 도움이 될것이라 생각 합니다. :D 8. Toranoanal : 아. 오랜만에 뵙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뵙는것 같습니다. 그 동안 어디 다녀 오셨나요. ㅜ.ㅠ 오타 지적 감사 합니다! 수정 완료 했습니다. :) 9. 케인지 : 쿠폰 감사 합니다. 완결을 향해 끊임없이 달리겠습니다. 후후훗. 10. pgh21c : 아, 다행 이네요. 나름대로 노린 시리어스 개그였습니다. 그거 봤는데 은근히 웃기더라고요. ㅋㅋㅋㅋ.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평점,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86 / 0933 ---------------------------------------------- The downfall of Golden Lion 차승현과 반다희는 똑 같은 3년차. 3년을 동고동락한 동료가 살해 당했다. 유현아, 차승현, 반다희 셋의 우애는 1회 차 시절에도 유명했다. 최대한 침착 하려고 애쓰는 게 보였지만, 눈 앞에서 동료가 버젓이 살해 당했다. 아군의 수호신으로 명성 높았던 그의 성격에 가만히 있을 리는 없었다. 나를 비롯한 클랜원들도 입구를 벗어나려던 걸음을 멈추고 차승현을 바라보았다. 그 뒤로, 멍한 얼굴로 반다희의 시체를 응시하는 유현아가 보였다. 이따금 입만 뻐끔거리는걸 보니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나 또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아직 반다희는 모든 성장성을 개발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말 그대로 미친년처럼 전장을 누볐던 그녀의 신위를 생각하면 이토록 쉽게 죽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스릉. 뭔가 길쭉한 것이 나를 겨누었다. 곰곰이 하고 있던 생각을 접고 시선을 올리자 차승현의 오른손에 잡힌 단창 한 자루가 보였다. 딱히 특이한 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끝이 뾰족하고, 자루의 길이가 짧은 흔히 볼 수 있는 단창 이었다. 그러나 창 끝에서 흘러나오는 사늘한 예기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과연 추후 무신의 명성을 얻을 사용자라서 그런지, 벌써부터 일당백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 당신의 행동이 갖고 있는 의미는 알고 계시는지요.” “놈. 그 입 다물라.” “창 치우세요. 더 이상 일을 확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일은 저질러 놓고, 확장하고 싶지 않다라고? 헛소리는 집어 치워라. 정말로 위선의 끝을 보여 주는구나.” 차승현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러나 그가 내뱉은 말들은 진득한 살기를 품은 채 우리들의 귀로 똑똑히 파고 들었다. 어느새 반말을 하는 그를 보며 나 또한 말을 놓을까 생각했지만, 그냥 계속 높이기로 했다. 사소한 것 하나에서도 아주 약간의 당위성 이라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서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은 누가 먼저 저질렀는지 잊으셨나 봅니다. 위선? 웃기는 소리 마십시오.” “그러면 다희가 무조건 잘못했다는 것인가? 그래서 그녀를 죽였고?” “그렇게 어설프게 물 타는 식으로 말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홀 플레인 입니다. 누가 잘못했나, 하지 않았나를 떠나서 서로간의 살해가 충분히 성립할 수 있는 상황 이었습니다. 굳이 따지면 직접적인 원인 제공을 한 사용자를 그녀로 들 수 있겠죠.” “아무리 다희가 선제 공격을 했다고 해도, 인간으로서 갖고 있는 기본 도의라는 게 있다. 그저 거슬린다고 사람을, 내 동생을 죽였는데 그것을 이해하고 이대로 지켜만 보라는 소리인가? 서로 한 발짝씩만 양보를 하면 되는 거였는데!” 인간으로서 가질 기본 도의라. 내가 듣기에는 개 풀 뜯어먹는 소리였다. 그리고 확실히 1회 차 시절의 이들과 지금 이들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조금 믿기지 않았지만, 이들은 아직도 사용자 보다는 사람에 가까웠다. “그 조금을 참지 못했나? 충분히 서로 양보할 수 있는 입장이었거늘! 잠시라도 다행이라고, 그리고 아주 경우 없는 놈은 아니라고 여겼던 내 생각이 잘못된 거였어!” 유현아 일행들에게 아쉬운 점이 하나 더 있다면,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사용자가 없다는 것. 최소한 이런 상황이 왔으면 어떻게든 유리하게 이끌어야 하는데, 감정을 앞세우고 있었다. 유현아 아래서 3년간 이렇게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살아 남은 것을 보면 참 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 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양보를 하지 않았던가요?” “…….” 내 말에 차승현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입을 벌리기는 했는데 멈칫한 것을 보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것 같았다. 곧 그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여세를 몰아 조금 더 몰아 붙이기로 했다. “무릎을 꿇으라고 하지도 않았고, 다른 행동을 원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진심을 담은 말 한마디를 원했을 뿐 인데 그녀가 뭐라고 했던가요?” “큭….” “기회는 줬습니다. 그 기회를 차버린 것은 그녀 구요.” “그래도!” 차승현은 처음으로 큰 소리를 질렀다. 단순히 목소리를 높인 게 아니었다. 그 쩌렁쩌렁한 울림에 멍하니 시체만 보던 유현아의 고개가 서서히 돌려졌다. 그러나 정신을 차린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공허해 보이는 눈동자를 보자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양보의 범위는 우리들의 무조건적인 양보였습니까? 그쪽 말마따나 대표 클랜이신 분들이 0년 차 애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10강을 의도적으로 도발하고 아니, 심지어 실제로 덤벼들었죠. 그리고 일을 더 키우지 말자는 제 얼굴에 침을 뱉고 기필코 죽이겠다고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감안하고 저희들이 물러나야 했습니까?” “우리들도! 우리들도 다희를 말리려고 했다.” “저도 고연주를 한번 말렸습니다. 정확히는 통제라는 단어가 더 맞을 것 같군요. 그럼 그 쪽이 클랜원을 통제하지 못하셨다는 소리 입니다.” “…….” 드디어 입질이 오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분명 상황상 굳이 죽이지 않고 좋게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차승현의 말대로 도의상의 문제일 뿐. 하나씩 세세하게 따지고 들면, 명분은 우리에게 있었다. 현재 그의 가슴은 터질 것 같은 답답함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분하겠지. 아끼던 동료를 잃고도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이를 빠드득 가는 소리가 들린다. 눈꼬리는 위로 휘어 올라가 있고, 서글서글했던 인상은 분노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간신히 심호흡을 하더니 이내 쥐어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과장…해석하지 마라. 위협을 가한 것은 맞지만, 다…희도 저 애들을 죽일 의도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고작 한다는 소리가 저거라니. 나는 다분함이 엿보이는 비웃음을 날렸다. 그런 내 모습을 봤는지 겨우 진정시켰던 그의 얼굴이 와락 우그러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대화가 꽤나 지루한 듯 옆에서 하품을 하고 있는 고연주가 보였다. 물론 고연주 또한 표정을 연기하고 있었다. 척 하면 척이라고, 내 신호를 보자마자 속을 짐작해준 그녀가 오늘따라 더욱 예뻐 보였다. “죽일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 그림자 여왕을 도발하고, 덤벼든 것은요? 그것도 죽일 의도가 없었나 봅니다?”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창을 쥐고 있는 손에 한층 힘을 주는지 창 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헛소리도 이 정도면 수준급 이십니다.” “헛소리라고?” “왜 헛소리인지 알려드리죠. 실은 우리도 반다희라는 여성 사용자를 죽일 의도는 없었습니다.”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자, 옆에 있던 고연주가 그렇다는 듯 고개를 한두 번 주억이며 내 말을 받았다. “그래요. 실은 저도 그 멧돼지 같은 년을 죽일 의도는 없었어요. 물론 목에 단검을 찔러 넣기는 했지만, 절대로 죽일 의도는 없었답니다. 그저 위협하기 위해서 그랬지요.” “크허헝!” 고연주의 목소리는 유들 했다. 곧바로 “이게 바로 당신이 한 말이 헛소리라는 증거 입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다급히 일월신검을 빼어 들 수 밖에 없었다. 아마도 방금 전의 대화가 결정타였던 모양이다. 고연주의 말이 끝나는 순간 차승현은 거친 노호성을 외치며 곧바로 창을 찔러 들었다. 그리고 창 끝이 나에게 닿기 전에, 내 허리춤에서도 사늘한 은빛을 내뿜는 칼날이 물 흐르듯 유려히 흘러 나왔다. 쨍! 칼등마루 부분으로, 창 끝을 막는다. 손을 저릿하게 만들 정도의 충격이 일월신검을 타고 들어왔다. 그의 창 날에는 푸른빛을 띠는 마력이 맺혀 있었다. “이게 무슨 짓 입니까.” “닥쳐라! 네놈이…무엇을 안다고! 다희를 죽여놓고 한다는 말이, 말이…!” 지금껏 꾹 억누르던 것들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 같다. 1회 차 시절 자부심 높고 근엄하던 그의 모습과 비교하면 조금 괴리감이 느껴졌다. 그래도, 나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는 어느 정도 기반을 잡은 상태였고, 10강의 위치에 있었다. 물론 3년 차를 초보 사용자로 볼 수 없지만, 그때와 비교하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덜 성숙한 상태겠지. 그리고 그 동안 유현아의 아래에 있었다면 더더욱. 애초에 남을 욕할 처지가 아니었다. 나 또한 형과 한소영을 잃었을 때는, 몇 달간 미쳐 살았으니까. “흐앗!” 분노가 머리 끝까지 차올라 이성을 잠식한 듯, 그는 분개한 목소리로 외치며 창을 횡으로 휘둘렀다. 그 끝에서 쏟아져 나오는 마력의 파장을 나는 의도적으로 받아 넘겼다. 당연히, 믿고 있는 구석은 있었다. “쉴드 오브 리플렉트(Shield Of Reflect)!” 그리고 내 믿음에 화답하듯이 정하연의 주문이 곧바로 터져 나왔다. 속사정은 자세히 모르겠지만, 그녀 또한 나름대로의 대비를 했음이 분명했다. 내심 공격 마법을 펼치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는데, 다행히 방어 마법을 펼쳐 주었다. 나중에 이 사건이 조명 받을 때 공격이 아닌 방어를 했다는 사실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샛노란 황금빛을 띠는 방어막이 클랜원들의 앞에 둘러짐과 동시에, 차승현이 쏟아낸 마력이 리플렉트 쉴드에 막혔다. 이윽고 퉁겨 나온 파장들이 다시 되돌아가는 것을 보며 나 또한 앞으로 크게 뛰어 나갔다. 차승현의 선제 공격을 받음으로써, 이제 나에게도 그를 죽일 명분이 생겼기 때문이다. * 챙! 챙! 챙! 챙! 갑작스럽게 들린 쇳소리에 유현아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김수현과 차승현이 맞붙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목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이내 쉰 바람 소리만 흘러 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목은 굉장히 메말랐음을 느꼈다. 챙! 챙! 챙! 챙! 챙! 챙! 챙! 챙! 튀어 나온 조그마한 창 조각 하나가, 유현아의 얼굴을 얼핏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곧 바닥에 떨어져 있는 깔끔하게 잘린 단면을 볼 수 있었다. 건조한 입 안으로 바람이 들어가자, 그녀는 목젖이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재빨리 침을 삼킨 후 떨리는 숨을 토해 내었다. “하아…. 하아….” 언제부터 싸우고 있었는지, 차승현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윗부분이 잘린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창 끝에서 마력이 줄기줄기 피어 오르고 그것을 다방면으로 놀리며 현란하게 공격하고 있었지만, 놀랍게도 그 공격은 모두 무위로 돌아가고 있었다. 머셔너리 클랜 로드 사용자 김수현. 그의 검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차승현의 필사적인 공세는 여지없이 퉁겨 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시야가 아주 약간 뿌옇게 되어 있어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척 봐도 차승현이 불리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안 돼. 승현, 승현 오빠 만큼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지금은 단지, 이 전투를 말려야 한다는 생각만이 그녀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마저 잃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유현아는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그러나, 기진맥진한 그녀의 몸은 주인의 기대를 배반했다. 쿵, 소리와 함께 유현아의 몸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급히 바닥을 짚어 상반신을 일으킨 순간, 유현아는 새로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흐아앗!” 차승현이 돌연 크게 몸을 뒤틀며 창을 맹렬히 회전시켰다. 근거리로 파고든 김수현은, 미처 그 창을 피하지 못했다. 이윽고 날카로운 창 날이 김수현이 들어온 진로의 사각을 노렸고, 여지 없이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것을 본 유현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러나…. “아….” 분명 김수현의 몸은 반으로 갈라졌다. 그러나 갈라진 부분에서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피도, 내장도 쏟아지지 않는다. 곧이어 김수현의 몸이 허공으로 천천히 녹아 들고, 그제서야 이상함을 느낀 차승현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유현아는, 볼 수 있었다. 어느새 그의 뒤에서 나타나 은빛을 내뿜는 검을 크게 치켜들고 있는 김수현을. “아…. 아…. 아아아아아!” 비로소 유현아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목소리에 반응하듯 차승현 또한 재빨리 창을 뒤로 놀리려고 했지만. “으아아아아!” 이윽고 차승현의 고통에 젖은 비명 소리가 남과 동시에 창을 꼭 잡은 팔 하나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몸을 크게 비틀거리는 차승현의 목을 향해 다시금 쇄도하는 한 빛의 은 줄기. 그 줄기를 보며 유현아는 크게 울부짖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오늘 늦게 오기도 했고, 정말 글도 안 써져서 후기 업데이트가 늦었습니다. ㅜ.ㅠ 온 몸이 피곤하네요. 오늘 시험을 봤는데, 실수를 하나 했어요. 그것도 아주 간단한 실수. 평소 주변에서 그런 말을 들으면서 나는 안 그러겠지, 했는데 드디어 오늘 하나 걸렸네요. 방향을 잘못봐서 부호를 변경하지 못했습니다. 다 풀어놓고 마지막에…. 웃긴건 검토까지 했는데 그랬다는 거에요. 흐엉엉. 남은 시험이라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 겠습니다! 『 리리플 』 1. 센서티브 : 3연속 1등 축하 드립니다! 새로운 강자의 출현 또한 축하 드립니다. 하지만, 이미 본 회 코멘트를 잠시 보고 왔기에 4연속은 실패 하셨군요. ㅜ.ㅠ 아쉽습니다.(4연속은 정말 본 적이 드물어서요.) 그럼, 이번회도 재미있게 감상해 주세요! 2. 꼬야 : 하하. 본문 내용에 이미 나와 있어서 스포라는 판단이 들지 않아, 리리플에 넣었습니다. 유현아를 죽이면 정말 일이 커지거든요. :) 3. 메카스타 : 그렇습니다. 수현이 노리던것도, 바로 그부분 입니다. 4. 겜뭰 : 앗! 쿠폰 감사 합니다. ㅜ.ㅠ 제가 리리플을 달때 코멘트를 확인하지 못했어요. 흑. 5. 랜슬럿 듀 락 : 헐 ㅋㅋㅋㅋ. 그러면 제가 지금까지 뵈었던 랜슬럿 듀 락님은 여러 독자분들 이었다는 말씀 이시군요! 갑자기 신선한 기분이 드네요. :) 6. 블라미 : 과연! 차승현은 죽을지, 살아 남을지. 다음회를 기대해 주세요! 7. 카즈미 : 소원. 물론 있습니다. 100만 포인트 입니다. 중후반을 넘어서는 몰라도, 초반에는 모으기 매우 요원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G.P를 주는 업적에 꼬박꼬박 참여해야 하는데, 평균 이하 사용자들은 100만이나 모으기 어렵다고 보시면 되요. :) 8. 프란딜 : 네. 그 부분에 대해서 질문이 많이 들어오더라고요. 시험 끝나고 어느 정도 여유가 나면 설정을 올릴 생각인데, 그 부분에 대한 설정도 조금씩 정리해 두겠습니다. :) 9. 낮잠을자자 : 정주행하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하루만에 다 보시다니 그저 놀라울 뿐 입니다. ㄷㄷㄷㄷ.(닉네임이 정말 마음에 듭니다. 저도 낮잠을 자고 싶어요. ㅜ.ㅠ) 10. 제임스딘 : 흠흠! 그, 그것은 비밀 입니다. 다만, 정말로 피치 못할 사정 이었습니다. 함부로 말하기는 조금 그런…. :D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평점,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87 / 0933 ---------------------------------------------- 잠시, 바바라 차승현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입을 벌려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표정을 보자 묘한 흥분이 나를 감싸 안았다. 무신 차승현은 1회 차 시절에 상대는커녕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용자였다. 물론 지금 그를 무신으로 부르기에는 많은 부분들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강자를 일대일로 죽인다는 사실에 생소한 감정마저 들었다. 제법 강하긴 했다. 어느 정도 격전을 치르기는 했으니까. 그러나 그 뿐 이었다. 아직 모든 성장을 이루지 못한 그는 지금의 내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체력을 제외한 모든 능력치가 부족하다. 질 좋은 무기와 장갑을 갖춘 나에 비해 그의 장비들은 너무도 허술하다. 특수 능력, 잠재 능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설령 위의 모든 조건을 동등하게 달성 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쓸만한 어빌리티들과 Tanay 특전의 영향을 받은 비장의 무기들을 숨기고 있었다. 애초에 작정하고 화정을 꺼내 들었으면 더욱 쉽게 이겼을 것이다. “아아아아아아아아!” 꽉 막혀 있다가, 갑자기 한 순간에 토해낸 듯한 애타는 부르짖음이 들렸다. 돌아볼 것도 없이 유현아의 절규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일월신검을 멈추지 않았다. 잘라진 오른팔로 인해 몸을 기울이는 차승현의 목덜미를 향해, 있는 힘껏 베어 버렸다. 그리고. “크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서걱, 육질을 자르는 섬뜩한 감각이 칼등마루에서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허공으로 높이 솟구치는 한 명의 사용자의 목. 그 목은 깔끔하게 분리된 채 허공을 부유하다가, 이내 땅으로 완곡한 곡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툭, 툭, 툭, 툭. 털썩. 이윽고 머리를 잃은 몸이 여관 바닥에 힘 없이 곤두박질치는 게 보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차승현의 목은 여관 바닥을 조금 구르다가 유현아의 부근에서 멈췄다. 잘려진 목의 단면에서는 뜨끈해 보이는 피가 작은 분수처럼 간헐적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유현아의 모습은 볼만했다. 바닥에 손을 짚은 채 상반신만 일으키고 있었는데, 차마 말로 형용키 어려울 정도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굳이 표현을 한다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랄까? 다만 “아…. 아….” 라는 신음을 계속 내뱉는 게, 툭 건드리기라도 하면 당장이라도 절규를 터뜨릴 것만 같았다. 일단 유현아는 살려둘 생각이다. 차승현, 반다희는 유현아 본인에게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소중한 동생들 이겠지만, 다른 사용자들이 보기에는 한낱 클랜을 구성하는 일부 클랜원일 뿐. 그러나 그녀마저 건드리면 그때는 일이 조금 피곤해진다. 그녀가 애초에 칼을 빼고 덤벼들었으면 몰라도 그러지 않은 이상 여기서 마무리 짓는 게 선을 지키는 행동 이었다. 당장이라도 실신할것만 같아 보이는 유현아를 보며 나는 잠시 상념에 잠겼다. 앞으로 그녀의 미래는 어떻게 변할까? 예전에도 말했지만, 유현아가 <성스러운 여왕>으로 발돋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의 아래에 정말로 쓸만한 사용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너도밤나무가 최고 성세를 누리던 시절, 10강 중 4명이 그녀의 휘하에 있었다. 그러나 초반 유현아의 수족을 담당하던 차승현, 반다희를 끊어놨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 굉장히 궁금해졌다. 둘 중 하나였다. 이들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고 망가져버리거나,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거나. 어떤 선택지가 나와도 상관 없었다. 가급적이면 전자였으면 좋겠지만, 후자를 어그러뜨리는 방법은 이미 내 계획에 포함 되어 있었다. 앞으로 그녀가 만나고 영입할 사용자들의 대부분을, 내가 미리 가로채거나 아니면 몰래 살해할 생각 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휴.” 나는 가벼운 한숨을 흘린 후 몸을 돌렸다. 이곳에는 더 볼 일이 없었고, 이미 정신 줄을 놓아버린 것 같은 유현아를 상대하고픈 마음도 없었다. 그리고 클랜원들을 바라보자, 예상외의 반응들을 볼 수 있었다. 고연주는 소리 없는 박수를 치고 있었고, 비비앙은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하연은 침착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으며, 신상용은 안타까운 얼굴로 유현아를 보고 있었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애들의 반응은 날카로워진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리게 만들었다. 안현은 살짝 떨고는 있었지만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는 것의 반증 이었다. 이유정은 오른손에 마검 스쿠렙프를 쥐고 있었는데, 오묘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가녀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게 아무래도 마검과 피에 젖은 마음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유정과 마검의 문제도 해결해야 하는데 그 동안 까먹고 있었다. 헌데 지금 반응을 보면 참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단 말이지. 아무튼 지금은 이곳을 얼른 뜨는 게 우선 순위였다. 뮬에 더 이상 붙잡혀 있을 수 없다. 조사를 받아도 다른 도시로 떠난 후 받는 게 나을 것이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침을 꼴깍꼴깍 삼키는 안솔을 보며, 나는 천천히 클랜원들과의 거리를 줄였다. “수고 하셨어요.” “다친 데는 없으세요?” 고연주와 정하연은 차례대로 말하며 나를 맞아주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기는 했지만, 예정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뮬을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저…오라버니이.” “응. 왜?” “저분은….” 안솔은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뒷말을 흐렸다. 나는 아직도 멍하니 있는 유현아를 흘끗 본 후 고개를 저었다. 일이 확대될 가능성이 있고 명분도 부족 했다. 또한 기껏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어 놨는데, 지금 그녀를 살해하면 차승현과 반다희를 살해한 명분의 의미가 퇴색 되어 버린다. 굳이 꼬투리를 잡으라면 잡을 수 있겠지만 앞으로의 행보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다분한 만큼 피곤한 일은 사양하고 싶었다. “가죠.” 한번 더 일행들을 재촉한 이후 나는 곧바로 여관 조신한 숙녀를 나섰다. 클랜원들은 조용히 내 뒤를 따랐고 애들은 조금 당황한듯한 발걸음으로 허둥지둥 나왔다. 그리고 안현은, 빠른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오더니 내 옆에 나란히 서서 걸으며 말을 걸었다. “형. 그래도 도시 안에서 이렇게 됐는데…. 괜찮을까요?” “괜찮아요. 아무리 대표 클랜이라고 해도, 지켜야 할 선은 있어요. 방금 전 상황은 여러모로 따져봐도 충분히 성립할 수 있는 상황 이었어요. 우리들에게 유리하니 따로 수배가 될 일은 없을 거에요.” 대답은 내가 아니라 정하연에게서 나왔다. 그녀의 대답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안현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그의 표정을 읽었는지, 이번엔 고연주가 입을 열었다. “애송아.” “네, 넷.” “너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니?” “네? 그거야….” 안현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고연주의 뜬금 없는 물음에 당황한 것 같았다. 그녀는 잠시 킥킥 웃고는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살짝 얼굴을 들이밀어 그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안현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재빨리 청각을 돋웠다. “내가 항상 너희들에게 웃어주는 이유는, 너희들이 수현씨의 동료들이고, 그가 아끼는 동생들이기 때문이야.” “…….” “그리고 지금은 같은 클랜원이지. 하지만, 그 이전에 나는 그림자 여왕이란다. 네가 지금 이 말을 이해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아마 앞으로 경험하면 할수록 차차 알게 되겠지. 그러니 지금은 아무 걱정 말고, 정신이나 똑바로 챙기렴. 요 꼬맹아.” “아, 알겠습니다.” 고연주는 그 말을 끝으로 내 옆으로 다가왔고 안현은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안도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그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분명히 안도감 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차승현과 반다희를 죽인 것보다, 둘을 살해함으로써 앞으로 닥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걱정한 것 같았다. 가령 수배를 받거나, 아니면 부랑자가 되어버린 다거나 등등. 문득 처음 애들을 만나고 통과 의례에서의 생각이 떠올랐다. 우정민 일행을 향해 화살 한 번 날렸다고 무서워했던 애들 이었다. 그것과 비교하면, 많이 발전하기는 했다. 물론 이유정을 보면 꼭 좋은 방향으로 발전 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서도 말이다. “수현. 그렇게 그들이 미웠어요?” “응?” 갑작스레 옆에서 은근한 속삭임이 들렸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다가왔는지, 고연주가 미묘한 웃음을 흘리며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뒤를 살짝 곁눈질한 후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니, 너무 홀가분하게 보여서요.” 홀가분이라. 확실히 고연주의 입장에서는 애들이나 나나 똑 같은 0년 차 사용자. 나름 표정을 관리한다고 했는데 그녀에게는 들킨 모양이다. 잠시 여담으로 말하자면, 내가 아직 현대에 있을 시절 간혹 소설이나 만화를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여러 상황이 있었지만, 간단히 말해보면 주인공의 영웅 놀음 이었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충분히 적을 죽일 수 있는 상황인데, 충분히 잘 헤쳐나갈 수 있는 상황인데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짓거리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항상 그것들을 보며 혀를 찼고 주인공의 행동에 의문을 남길 적이 일쑤였다. 물론 그렇다고 이것저것 재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나가는 막장을 원하지는 않는다. 1회 차 시절 적 이었다고 해도, 영입할 가능성이 있으면 일단은 두고 볼 생각이다. 우정민 일행들이나, 사용자 고연주가 그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상황이 허락하는 만큼 최소한이라도 할 수 있는 것들은 해두는 게 좋지 않은가. 내가 1회 차를 끝내고 2회 차를 새로 시작한 이유는 뭘까. 영웅이 되고 싶어서? 명성을 높이고 위세를 부려보고 싶어서? 아니다. 고작 그런 애들 딱지 치기 같은 놀이를 하려고 온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내가 진정으로 시간을 되돌린 이유는, 1회 차에서 이루지 못한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일을 이번에는 꼭 이루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목표를 위해서라면 나는 그 누구보다도 잔인해질 자신이 있었다. 그래. 고연주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지금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다. 차승현의 말대로 인간으로서 도의를 저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저, 앞으로 상대하기 껄끄러울 수도 있었던 난적을 손 쉽게 처리한 것에 대한 후련함만이 가슴을 가득 채울 뿐 이었다. 고연주의 물음에 나는 미미한 웃음으로 화답해 주고는 어깨를 으쓱 였다. 그리고 더 이상의 대답은 하지 않은 채 워프 게이트를 향해 빠르게 발걸음을 놀렸다. 약 3개월 동안 있었지만, 뮬에서 너무 많은 일들을 겪어서 그런지 꼭 반년은 체류한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뮬을 떠난다는 사실에 자못 설레는 감정이 전신에 도는 것 같았다. * 그들은 떠났다. 여관 조신한 숙녀는, 어느새 고요한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여관 안에서 벌어진 참극은 그 조용한 분위기가 상반되는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두 개의 피 웅덩이가 고여 있고, 그 웅덩이 위로 각각 하나의 시체들이 놓여 있었다. “흐아아….” 유현아는 고개를 들고 알아 듣기 힘든 음성을 내질렀다. 그녀의 볼에는 메마른 눈물 자욱이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 있었고 입술은 바싹 메말라 있었다. 발갛게 충혈된 눈으로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싸늘하게 식은 엎어져 있는 시체 하나와, 머리와 몸이 분리된 채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시체 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흐아…. 흐아아…. 흐아아아아….” 유현아의 입을 벌어질 때마다, 연신 쉰 소리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 나왔다. 그녀는 차마 그 광경을 계속 마주할 수 없는지, 아니면 현실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지 다시금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 ……. ………. …………. …………….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바닥만 보던 그녀에게서 미묘한 소리가 흘러 나오기 시작 했다. “흐, 흐히. 흐히히. 흐히히히. 흐아흐. 흐으, 흐.” 우는 소리인지, 웃는 소리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의 소리였다. 그렇게 한동안 실성한 사람처럼 소리를 내던 그녀는, 이윽고 “끄르륵.” 소리를 내며 몸을 털썩 고꾸라트리고 말았다. 그녀의 입에서는 하얀 거품이 보글보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녀의 입가는 달싹이며 바람 빠지는 쉰 소리가 쉴 새 없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반쯤 까뒤집혀 있었고, 그 사이로 언뜻 보이는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것 같았다. 입 에서는 흰 거품들이 조금씩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모든 것을 잊고 싶어하는 사람 같았다. 마치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꿈 이었을 거라고 믿고 있는 소녀처럼.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오늘은 독자 분들에게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근래 쪽지가 무척 많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본래대로라면 빠르게 답신을 드리고 싶지만, 아시다시피 제가 아직 시험이 끝나지 않은 관계로 무척이나 바쁩니다. 한두 통이면 몰라도 여러 통이 쌓였고, 그 중에서도 장문의 답변이 필요한 쪽지들이 많습니다. 해서, 모든 쪽지는 시험이 끝난 후 다음주 부터 하나씩 차례대로 답변을 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독자 분들의 하해와 같은 양해를 바라며, 오늘도 재미있게 감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PS. 내일 시험은 아마 최악의 결과를 낳을 것 같습니다. 크크크크. 크허헝. ㅜ.ㅠ PS2. 선작, 추천, 코멘트, 평점, 쿠폰, 쪽지 주신 분들 모두 감사 합니다. :D 『 리리플 』 1. 破天魔痕 : 센서티브님의 4연속 1등을 끊으셨군요. 하하하. 1등 축하 드립니다. 요즘들어 1등을 하시는 분들이 고정 되어 있는것 같습니다. 가끔 과거에 화려한 전적(?)을 보여주셨던 분들과 새로 급부상한 분들이 대결하면, 누가 1등을 차지할지 궁금한 생각도 드네요. :) 2. GradeRown :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할 수는 있지만, <진실의 수정>이라는 아주 좋은 아이템이 있거든요. :) 유현아는 살아 남았습니다. 행운 덕택이 아니라, 김수현의 자비심 덕분 이었죠. 후훗. 앞으로 그녀는 과연 어떻게 될까요? 더불어 말씀 드리면,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왕 불쌍하게 잡은 컨셉이니, 뭐…. 흠흠. 3. dddfaaaf : 네. 그런 대륙도 있고, <아직은> 그렇지 않은 대륙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서대륙 같은 경우는 그 정도가 굉장히 심합니다. 초반 설명중에, <북대륙은 황금 사자 클랜의 영향으로 엄정한 군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제, 황금 사자 클랜이 몰락할 예정 입니다. <아직은> 몰락하지 않았지만요. 그럼, 앞으로 북대륙은 어떻게 될까요? :) 4. Masterpiece : 초반에는 외면/내면의 설정으로 잡았었습니다. 그러나 중간에 다른 성향을 추가하는 방향으로 변화 시키면서, 조금 더 복잡해 졌습니다. 큰 틀은 그렇게 보셔도 되나, 변화한 부분은 로벨리얀님의 말씀처럼 사용자 자체를 기준으로 잡으시면 됩니다. 왜냐하면 초반 설정대로 잡으면 성향이 너무 일방향적으로 나가게 되거든요. 조금 더 다방향 적으로 보내고 싶었습니다. 5. 레필 : 저 또한 레필님의 코멘트를 보면 항상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시거든요. :) 코멘트 감사 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좋은 말씀 부탁 드립니다. 6. 뉴마더 : 도와 달라고 찾아온 거에요. 조사단에 동행하고, 그 와중에 영입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겸사겸사 3개월에 유적 3개를 발굴한 능력도 알아보고 싶었겠지요. :) 대표 클랜으로서, 탐험 보고서를 읽었 거든요. 7. open : 애초에 제 설정에 대해 말씀하시는 거라면, 유현아는 살려두고 나머지 둘은 필히 죽일 계획 이었습니다. 유현아를 살려줬다고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실망 시켜드리는 일 등은 없을 테니까요. 말씀하신 타겟에 대한 피해를 최소하 하기 위해 그녀를 살린 이유죠. 아예 싹 죽여버리는 것도 생각하지 않은것은 아니지만, 초기 설정대로 나아가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8. 엘프카이 : ㅋㅋㅋㅋㅋㅋㅋㅋ. 에이, 그런것은 안되요.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제가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라 순간 빵 터졌네요! :D 9. 위태위태 : 위태위태님. 감사 합니다. 특히 <이번에야 미친년이 알아서 밥상을 차려준 격이지만 사실 인적없는 곳에서 단 둘이 마주쳤다면 명분이고 자시고 따질것 없이 바로 때려 죽였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이 부분에서 소름이 돋았네요. 더 추가할것도, 뺄것도 없습니다. 수현의 행동에 대한 완벽한 정답 입니다. 10. 즐거운날 : 흐흐. 물론이죠. 제대로 된 적도 필요 합니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무궁무진(?) 하게는 아니지만 나올 예정 이오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D 11. juan : 하하하. 초반에 많은 분들이 그 부분을 궁금해 하셨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소설 흐름상 속 시원히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한가지 답변으로 일관 했습니다. <수현이는 바보가 아닙니다.> 단순한 형의 유언 때문이 아니라, 살릴 수 없었던 이유, 설정이 있습니다. 그 부분은 결말과 연관이 된 부분이라 지금 알게 되시면…. 아마 앞으로 느끼시는 재미의 반 이상을 떨어트리실 수 있을 겁니다. 다른 부분들은 몰라도, 결말과 연관이 된 부분이라 해당 부분은 저도 철저히 함구할 생각 이구요. 설정 충돌은 아니니 너무 걱정 하지 마시고 앞으로의 진행을 지켜봐 주세요.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평점,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88 / 0933 ---------------------------------------------- 2013년 4월 26일(금요일) 관련 공지사항 입니다. .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이번에 공지사항을 올리게 된 이유는, 4월 26일(금요일) 휴재를 말씀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왜냐하면 독자 분들도 아시다시피 제가 시험을 치르고 있기 때문에 공부에 시간이 빠듯한 상태 입니다. 다행히 지금껏 봐온 과목들은 나름대로 대비를 해서 그럭저럭 볼 수 있었고, 오늘 과목은 초토화 될 각오를 하고 갔는데 예상 외로 선방을 할 수 있었습니다.(다행이에요. ㅜ.ㅠ) 이러다 보니 학점에 대한 욕심도 조금 나더라고요. 그런데 내일 과목은 중요한 전공 과목이고, 범위도 굉장히 넓고, 무엇보다 제가 준비를 소홀히 한 과목이라 오늘은 정말 소설을 업로드 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해서, 4월 26일(금요일)에는 휴재를 하기로 결정 했습니다. 독자 분들의 하해와 같은 양해를 구합니다. (--)(__) 그러면 자정 혹은 4월 27일(토)에 다음 회를 들고,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 0189 / 0933 ---------------------------------------------- 잠시, 바바라 홀 플레인의 계절은 대한민국과 비슷한 기후를 지니고 있다. 이 세상에서도 눈, 비등 자연 현상에 의해 빚어지는 현상들이 있다. 비록 봄과 가을의 주기가 조금 짧긴 하지만, 적어도 기후로 인해 살아가는데 지장이 있는 만큼은 아니었다. 현재를 지구의 날짜와 비교하면 대충 6월쯤 됐을까. 초여름의 날씨라고 봐도 무방 했다. 날씨는 좋았다. 막 해가 저물어가는 오후였지만, 아름다운 빛깔을 선보이는 노을과 고즈넉한 하늘은 생존이 일상이 되어버린 사용자들에게 편안함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송 완료된 분들은 빨리빨리 나와요!” “남쪽 도시에 있는 대표 클랜들은 뭐하고 있는 거야! 그쪽이 강철 산맥하고 가장 가깝잖아!” “일반 도시 칸의 대표 클랜 푸른 늑대에게 통신은 넣었어요! 하지만 그쪽에서도 당황한 것 같아서!” “씨발! 당황이고 뭐고 구조 요청이 왔으면 당장에 구조대를 파견해야지! 소도시 코란이랑 모니카에서는 그냥 손가락만 빨고 있대?” “그게…. 아시다시피 코란은 여러 클랜들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터라…. 현재 코란을 대표 하고 있는건 수(秀) 클랜인데, 조금 미적거리고 있는 것 같아요. 이스탄텔 로우에서는 일단 푸른 늑대 클랜이랑 상의를 해본다고 했고….” “뭐? 미적거려? 상의를 해본다고? 지금 장난해? 당장 사용자들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뭐?” 워프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수많은 웅성거림이 우리들을 반겨주었다. 오른쪽 가슴 상단에 황금 사자 문양을 찍은 사용자들 몇몇이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고, 때때로 거친 고함성도 들렸다. 분명히 날씨는 좋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날씨 속에 오고 가는 그네들의 절박함을 보자, 뭔가 불균형적 이면서도 기묘한 대비 감각이 느껴졌다. “이 개~자식들! 이따위로 나온다 이거지?! 으드득!” 옆에서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 한 명의 황금 사자 클랜원을 보자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지들이 벌인 일은 생각도 하지 않는 모양이다. 분명히 그들은 전성기 시절 북 대륙을 통제할 만큼의 힘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단일 세력으로 통제한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황금 사자 클랜의 통치를 따르는 우호 클랜들이 있어 그들과 함께 통제를 고깝게 여기는 다른 도시의 클랜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즉 원정 전까지만 해도 힘의 추가 어느 정도 기울어져 있었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그 추는 이제 완전히 반대로 기울었다. 이번 원정에 참여한 사용자들은 참가한 각 클랜의 정예 급 사용자들 이었다. 1회 차 시절 원정대의 생환 율은 10% 남짓. 부랑자 말살 계획에서 일차적으로 힘을 소진시켰고, 강철 산맥 원정에서 지금껏 아껴뒀던 전력을 몽땅 잃었다. 말 그대로 자업자득 이었다. 그들은 원정의 성공을 100% 자신 했고, 그래서 주 전력을 자신들과 우호 클랜 위주로 구성 시켰다. 아마 원정을 성공 시켰다면 추를 자신들 쪽으로 더욱 기울게 할 수 있었겠지만, 그들은 처참히 실패하고 말았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피해를 동반한 채. 연신 고함을 외치는 사용자를 보며 “누가 그렇게 원정대를 구성하래?”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저 입을 꾹 다물고 클랜원들과 함께 워프 게이트를 나섰다. 워프 게이트를 나서자 지금껏 보아온 풍경들과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아, 사용자 아카데미를 겪었으니 아주 없지는 않을까. “와.” “헐~.” 워프 게이트의 바깥. 대도시 바바라의 거대한 규모와 그 사이사이를 잔뜩 메우고 있는 사용자들이 눈에 보인다. 안현과 이유정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만들고 감탄하는 목소리를 흘렸다. 확실히 애들의 눈에는 그 동안 지냈던 소도시 뮬과는 너무도 다른 풍경일 것이다. “…….” 그 순간 또 하나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고개를 돌리자, 한 명의 자리가 비어 있는걸 볼 수 있었다. “안솔은?” “어, 어디 갔지. 아까 분명 워프 게이트에서 같이 나왔는데.” 내 물음에 안현은 앗 차한 얼굴로 잠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정말로 보이지 않자, 마치 발광할듯한 기세를 내뿜기 시작 했다. 다행히 눈썰미 좋은 고연주는 예쁜 손가락을 들어 한 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 있네.” “어, 어디요! 아. 휴우. 솔아아아아!” 안솔의 위치를 확인 했는지 안현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곧, 팔을 크게 휘저으며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나 또한 고연주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멍하니 워프 게이트를 응시하고 있는 안솔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안현의 외침에 고개를 번쩍 돌리고는 이내 아장거리는 걸음으로 우리들을 향해 다가왔다. “한눈 팔면 어떡해! 그러다 길 잃어버리잖아!” “죄송합니다아.” “정말.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그러다 수현이 형한테 이 놈~하고 혼난다.” “네. 다시는 안 그럴게요오. 죄송합니다아.” 옆에서 “이 놈이 아니라 이 년 아니야?” 라고 유정이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지긋한 시선으로 안솔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태도를 보면서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라면 당장에 시무룩해지거나 입술을 삐죽 였을 텐데 지금 그녀의 얼굴 표정은 평소의 반응이 아니었다. 무언가 걱정 거리가 있고, 고민이 있는 얼굴. 하지만 별 것 아니겠지 라는 생각에 금방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방금 전 너도밤나무 클랜과의 충돌 사건 때문에 이러는 것 같았다. 부랑자 또는 몬스터도 아니고, 같은 사용자들이 목이 잘렸는데 그녀의 성격상 고연주처럼 호호 웃으며 넘기기를 바라는 건 요원한 일 이었다. 해서, 나는 일단 목표한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 내 옷깃을 살짝 잡더니 이내 깡총거리며 앞으로 튀어 나왔다. 그러고는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오빠오빠. 나 궁금한 게 생겼어.” “뭐가 궁금한데. 지금 어디로 가는지?” “아니. 그거야 오빠가 알아서 하겠지. 그거 말고 워프 게이트.” “워프 게이트?” 유정에게 되묻자, 그녀는 크게 고개를 주억였다. “사용자 아카데미에 있을 때 배웠는데, 각 도시마다 워프 게이트가 연결 되어 있다고 했잖아. 그리고 거리에 따라서 이용 요금을 지불하고. 그런데 왜 꼭 요금을 지불해야 하는 거야? 통과 의례나 홀 플레인으로 들어올 때는 그냥 공짜로 사용 했잖아.” 유정은 눈을 깜빡깜빡 이며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고는 생각에 잠겼다.(그녀는 활짝 웃으며 좋다고 머리를 부볐다.) 상세히 따져보면 통과 의례와 도시를 잇는 것을 워프 게이트, 시작의 여관이나 신전에 있는 것을 포탈로 구분할 수 있다. 통과 의례는 천사들이 관리하는 설정으로 볼 수 있지만, 도시에 있는 워프 게이트는 설정이 아니었다. 간단하게 정리해 보면, 도시에 있는 워프 게이트는 고대 홀 플레인의 유산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발동 시키고, 유지하는 몫은 전적으로 사용자들에게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각 도시를 관리하는 대표 클랜들에게. 고대 마법들의 효율은 이미 정평이 나 있고, 그런 만큼 유지하는데 큰 비용이 들지는 않는다. 그저 마력을 끈임 없이 공급해주기만 하면 되는 일 이었다. 물론 도시를 잇는 워프 게이트가 만능은 아니다. 명확한 한계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강제성이 없다는 것 이었다. 예를 들어 대도시 바바라에 있는 워프 게이트를 보면 총 12개의 마법 진으로 구성 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마법 진을 구성하는 식이 일방향성이 아닌 양방향성 이라는 점 이었다. 물론 지금 이러한 것들을 말해봤자 알아 먹을 리가 만무하니, 중요한 부분만을 간추려 말해주었다. 유정이는 입을 삐죽 내밀고는 입술을 동그랗게 오물거렸다. “아항. 그렇구나. 그럼 이 자식들은 괜히 지들 잇속 챙기는 거네?” “돈 없는 사용자들이 이용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가격일걸. 어찌 됐든 유지하는데 비용이 들어가는 건 맞기는 한데 생각보다 많이 들지는 않아. 이용으로 인한 수익이 유지비를 훌쩍 뛰어 넘거든. 그런 만큼 워프 게이트는 각 도시에서 언제나 높은 수익을 내는 효자나 다름 없지. 그나마 지금은 거리 별로 가격을 동결 시킨 게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엄청 올랐을걸. 이라고 그때 들었던 것 같다.” 워프 게이트는 편리하다. 떨어져 있는 도시를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면 도시를 이동하는데 있어 습격 받을 위험을 아예 없애버린다. 아무튼, 사용자들이 워프 게이트를 관리한다는 소리는 곧 임의적으로 사용을 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뜻 이었다. 그 방법은 간단하다. 각 도시에 있는 게이트들이 상호 반응을 일으켜야 하는데,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해당 도시를 잇는 마법 진에 대해 마력을 끊어버리면 강제성을 가하지 않는 이상 워프 게이트를 이용할 수 없다. 그리고, 현재 사용자들의 수준으로는 강제성을 부여할 수 없다. 그러니 실질적으로 게이트가 단절 되면 육로를 이용할 수 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워프 게이트를 이용하지 못하게 될 날은 머지 않았다. 곧 부랑자들이 내려온 후 내전이 일어나게 되면 각 도시의 게이트는 폐쇄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그것을 이용해 적군이 대량으로 도시 내로 워프하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추후에 일어날 일들로, 아직 한달 이상의 시간이 남았다. 그러니 그 전에 얼른 우리들이 자리를 잡을 도시로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저런 것들을 설명하며 걷자 어느새 나와 클랜원들은 큰 규모를 갖고 있는 펍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주점 이었다. 슬쩍 계단을 오르려고 하자 마침 옆을 지나가던 후줄근해 보이는 사용자들이 우리를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연주에게는 미안한 말 이지만, 겉으로 보이는 크기만 비교해도 조신한 숙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산들 바람. 여기 되게 비싼 곳으로 들었는데. 확실히 좋아 보이긴 하네요.” “호호호.” 하연이 맑은 목소리로 말하자, 고연주가 작게 웃었다. 나는 클랜원들을 이끌고 펍 산들바람 안으로 들어섰다. 왠지 고연주의 웃음 소리가 그리 좋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그 때, 옆에서 “아우 씨.” 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비비앙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쉴 새 없이 입술을 달싹이는걸 보니 영약에 관해서 연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과연 연금술사의 집중력다웠다. 아마도 욕설을 내뱉은 이유는, 항상 한산하고 조용 했던 뮬에 있다가 갑작스럽게 사용자들이 넘쳐나는 바바라로 오니 정신 집중에 방해 되는 것 같았다. 입술을 질끈 깨물며 씨근거리던 그녀는 결국 소리를 빽 지르고 말았다. “아씨! 여기는 뭐 이렇게 사람이 많아! 짜증나게. 조신한 숙녀는 사람이 진짜 없어서 좋았는데.” “호. 호. 호.” 고연주는 다시 한번 웃음을 흘렸다. 비비앙 저 눈치 없는 것. 혹시나 자리가 없으면 어떡하나 걱정 했는데, 다행히 1층 중간중간에 빈 테이블들이 보였다. 사용자들은 아주 없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빽빽이 차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적당히 차 있는 상태. 가격이 비싼 곳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으로 온 이유는, 정보를 얻는 데는 펍, 고급 주점이 제격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들어올 수 있을 정도의 사용자라면 웬만큼 재력이 있다는 뜻이고, 그만큼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사용자들일 확률이 높았다. 싸구려 주점에 들러 어중이떠중이들이 떠드는 근거 없는 소문을 듣는 것 보다는, 이런 곳에 올 정도의 실력 및 재력을 갖춘 사용자들이 흘리는 말을 듣는 게 훨씬 도움이 된다. “어서 오세요! 총 몇 분이 오셨나요?” “여덟 명 입니다.” “음~.” 문을 열고 입구로 들어서자, 머리를 곱게 묶은 귀여운 인상의 사용자 한 명이 우리들을 맞아 주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웨이트리스일 것이다. 그녀의 눈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살짝 벌어진 눈 틈 사이로 새어 나온 시선은 우리들 전체를 재빠르게 훑었다. 그녀는 지금, 우리들을 품평 하고 있었다, 이윽고 품평을 끝냈는지, 그녀는 활짝 웃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처음 인사보다 더욱 사근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환영합니다! 지금 바로 자리로 안내해 드릴게요!” 웨이트리스는 곧 전망 좋은 자리로 우리들을 안내해 주었다. 그녀에 이끌려, 푹신한 털이 깔려 있는 의자에 앉자 여러 종업원들이 달려들어 테이블을 셋팅해주기 시작 했다. 이윽고 모든 셋팅을 끝낸 후, 처음 우리를 안내한 웨이트리스는 “그럼 천천히 보시고, 모두 결정하셨으면 불러 주세요.” 라고 말하며 눈웃음을 쳤다.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고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어색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는 애들을 보자 괜한 웃음이 나왔다. 원래 이런걸 좋게 생각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접을 받으니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일단 뭐라도 먹을까요.” “형! 방금 전 여종업원이요. 혹시 사용자에요?” 그들이 놓고 간 메뉴 판을 들자, 안현이 재빠르게 끼어들었다. “그럼 당연히 사용자지. 거주민으로 보이니?” “그럼 왜 여기 있어요?” “응? 돈 벌려고 일하고 있겠지. 아르바이트 몰라? 아르바이트.” “네? 사용자가 여기서 왜 아르바이트를 해요? 여긴 홀 플레인 이잖아요?” “뭐, 사용자라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먹고 살려면 돈이 필요하고.” 나는 콧방귀를 뀐 후 한숨을 쉬었다. 대충 반응을 보아하니 안현뿐만 아니라 이유정, 안솔도 머리 위로 물음표를 동동 띄우고 있었다. 그래. 너네 들은 모르겠지. 통과 의례부터 지금까지 배를 한번 곯아 봤니, 아니면 장비 하나 맞추려고 돈을 모아봤니? 거듭 말하지만 실력이 출중하지 못한 사용자들은 다들 이렇게 사는 게 일상 이었다. 하루 먹고 살 걱정을 하는 하루살이들. 그 와중에 장비를 맞춘다고 먹을 거 안 먹고, 잘 거 안 자면서 정말로 치열하게 산다. 애들은 자신들도 나름 힘든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바바라로 온 이후로 부쩍 질문들이 많아진 것 같았다. 지금껏 내가 애들을 얼마나 안에 가두고, 금이야 옥이야 키웠는지 알려주는 반증 이었다. 내가 쓰게 웃자 고연주는 혀를 쯧쯧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참 곱게도 자랐네~.” “우와. 그렇구나. 여기서도 이런걸 하는구나. 뭐, 주점이 크고 좋으니까 종업원도 쓸 수 있겠네요. 하긴 종업원으로 사용자를 쓸 수도 있으니까.” “…….” 안현은 그녀의 말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하는 데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고연주는, 더 이상 웃음 소리를 내지 않았다. 단지 입가에 진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는데 이마에 십자 모양의 혈관이 빠직 돋아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는 하연에게 먹고 싶은 것을 골라 보라며 메뉴 판을 넘겨준 후, 천천히 주변을 둘러 보았다. 확실히 “나 좀 실력 있는 사용자요.” 라고 이마에 써 붙인 듯 보이는 사용자들이 몇몇 눈에 들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 같이 모두 대단히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것 이다. 나는 물을 한 모금 삼키고, 조용히 제 3의 눈을 활성화시켰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이고. 후기를 한 번 잔뜩 썼다가 날아가 버렸습니다. 아이고 아이고. 엉엉엉엉. T0T 일단 후기 따로, 리리플 따로 업데이트 하도록 하겠습니다.(이 XX 인터넷! 왜! 왜! 왜!) 후우. 진정하고. 네. 오늘부로 시험이 다 끝났습니다. 기념으로 저녁에 삼겹살 + 제육 볶음 파티(?)를 하느라 집에 늦게 들어 왔네요. 그래도 열심히 썼으니, 11분 늦은것은 귀여운 애교로 봐주세요. :D 아, 그리고 시험은 잘 봤습니다! 독자 분들의 응원 덕분에 공란 하나도 없이, 찍은것 하나도 없이 모두 풀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주관식도 모두 채웠어요. 헤헤헤. 아무튼 시험이 끝나니까 기분이 정말 좋네요. :)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드디어 실컷 잘 수 있겠군요! 올레! 『 리리플(187회) 』 1. 1등 축하 드립니다. 요즘 들어 1등을 하시는 분들의 닉네임들이 점점 더 익숙해지는것 같습니다. 물론 휘을님도 그 분들 중 한 분 이시구요. 아, 아니에요. 600이라고 써놓기는 했는데, 그 후로 뒤에 ~를 붙였어요. 즉 그 이상도 가능하다는 설정 입니다. :) 2. GradeRown : 물론이죠. 그러한 부분들은 다 고려할 생각 이랍니다. 중점은 영입 or 살해에 두겠지만, 상황에 따라 우호 클랜에 <소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 3. 아자! : 둘 다 있을 수 있습니다. 뮬에서의 사건에 국한 한다면요. 홀 플레인은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니까요. 다만, 후자에 가능성이 조금 더 높습니다. 레인저들의 능력 중에 <추적술>이 있기 때문이죠. :) 4. 오피투럽19 : 검술 전문가의 권능은, <무엇이든 자를 수 있다.> 입니다. 따로 명칭은 없구요. :) 5. 악마신전 : 아니! 왜 앞에 것은 제껴 두시는지요! 하하하. 유현아는, 걱정 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 정말 속 시원히 말씀은 드리고 싶은데 스포가 되면 재미가 없어 지잖아요. ㅜ.ㅠ 엉엉. 『 리리플(188회) 』 1. 다이스케 : 1등 축하 드립니다. 울지 마셔요. ㅜ.ㅠ 다음에 꼭 연참으로 갚을게요. 2. 찌니~ : 시험 잘 봤어요! 저주 내리시면 안되요! 잘 봤으니까 머리 쓰다듬어 주세요! 헤헤헤. 3. saksin : 저, 혹시 당근은 없으신가요? 왜 다 무서운 것들만 준비를…. 4. Toranoanal : 와. 요즘 들어 다시 코멘트를 달아 주시는 군요. ㅜ.ㅠ 한 동안 코멘트가 보이지 않아서 서운(?) 했습니다. ^0^ 시험 잘 봤습니다! 앞으로도 코멘트 많이 많이 달아주세요~. :D 5. 어둠을헤매는자 : 쿠폰 감사 합니다. (__) 헤헤. 연재를 하지 못 했는데 독자 분들이 쿠폰을 많이 주셔서 그저 황송할 뿐 입니다. 기회가 되면 기습 연참(?!)으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평점,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90 / 0933 ---------------------------------------------- 잠시, 바바라 옛 말에 이런 속담이 있다.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이 말은, 아무도 안 듣는 데서라도 말 조심을 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현대에 사는 사람들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웃어 넘길지도 몰라도, 최소한 홀 플레인 내에서는 절대로 입 조심을 해야 한다. 특히 이렇게 사용자들이 바글거리는 곳에서는 더더욱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체내에 마력을 품고 있다. 이 마력들은 사용자 내부 설정으로 들어간 마력 회로를 따라 움직이는데, 이 회로는 온 몸 구석구석이 퍼져 있다. 물론 사용자에 따라 굵기, 단단함, 깨끗함, 미세한 경혈까지의 타동 등의 개인차는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관점에서 보면 눈, 귀와는 당연히 연결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부분에 마력을 보내 증폭 활동을 하면 일시적으로 해당 부분의 기능을 월등히 상향 시킬 수 있다. 이 말인즉슨, 이렇게 사용자들이 많은 곳에서는, 남몰래 귀에 마력을 돋워 우리들이 주고 받는 말들을 훔쳐 듣는 경우도 있다는 소리였다. 실제로는 유적 탐험이나 집단 전투시 주로 사용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사용하는 사용자들도 적지 않은 편 이었다. 어느 정도의 마력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더욱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내가 할 수 있다면 다른 사용자도 할 수 있으니까. 그러한 불안감을 해소하고, 중요한 정보의 흘림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주로 쓰이는 마법이 있다. 바로 블록 필드(Block Field)라는 이름을 가진 공간 범위 형 마법 이었다. 블록 필드는 사용자가 지정한 범위만큼, 해당 공간을 다른 공간과 임의적으로 차단 시키는 무형의 막을 형성한다. 그에 따라 자신들이 하는 말이 새어 나갈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듦으로써 한층 보안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내부에서 나가는 말 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오는 말도 동시에 차단 시키는 만큼, 주점이나 식당에서 쓰기에는 조금 애매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어쨌든 블록 필드를 펼치고 있는 테이블 이라면 다른 테이블보다 어느 정도 중요성이 높은 말들이 오고 갈 확률이 높지 않겠는가. 물론 단순히 청각을 돋우는 걸로 블록 필드를 뚫기란 요원한 일이다. 그러나,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해서, 나는 제 3의 눈으로 블록 필드가 펼쳐져 있는 테이블이 있는지 탐색을 시도할 생각 이었다. “수현. 가격이 너무 만만찮은 데….” “괜찮아요. 금화를 아끼는 것도 좋지만, 가끔 이런 사치도 부려야죠.” 물론 말로만. 애초에 고급 주점에 들어온 이상 최대한 뽕을 뽑을 생각 이었다. 지금 제 3의 눈을 발동한 것도 정보 값을 위주로 최대한 챙겨가려는 속셈이 있었다. 어쩌다 좋은 정보 하나 건질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남는 장사였다. 나는 하연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는 내가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챘는지, 잡았던 팔을 살며시 놓았다. 그리고 나는 1층 전체를 찬찬히 훑기 시작 했다. “…….” 역시나. 총 두 테이블에 무형의 막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는 비교적 가까운 옆 쪽 테이블에 있었다. 블록 필드의 막이 그저 그런 걸로 보아 아주 높은 수준의 사용자들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앞선 블록 필드와 확연히 달랐다. 테이블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반대쪽 끝자락에 있었는데, 막의 두께가 상당히 두꺼웠다. 블록 필드를 이 정도로 펼친다면, 단순한 마력의 양은 비비앙과 얼추 비슷할 정도였다. 과연 누구일지 심히 궁금한 마음이 들었지만, 확인하는 것은 일단 나중의 즐거움으로 미뤄두기로 했다. 해서, 우선 조용히 마력을 일으킨 후 주점 바닥을 향해 마력을 흘려 넣었다. 이윽고 바닥을 타고 흘러 들어간 마력은 하나의 줄기를 만들더니, 이내 두 갈래로 갈라지며 각자 목표한 곳을 향해 뻗어 나갔다. 지금부터 내가 마력을 이용해 벌일 행동은 점유(Occupy) 였다. 마력 방출의 2단계. 쉽게 말해서 그들이 펼쳐 놓은 필드에 내 마력을 녹아 들게 만들어, 영역을 빼앗을 셈 이었다. 내 마력이 섞이고 영역을 차지한 순간 블록 필드에는 일종의 통로가 만들어진다. 즉 통로를 뚫을 수만 있다면 나 하나에 한정해, 그 안에서 오고 가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 번째, 마법을 펼친 사용자보다 내 마력이 월등히 높아야 한다. 두 번째, 마력 컨트롤이 굉장히 좋아야 한다. 해당 마법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은밀하게 섞여야 한다. 그렇다고 조심스럽게 접근해서 어물쩍거리면 상대 마법사가 알아챌 가능성이 농후 했다. 즉 차마 이상함을 알아챌 틈도 없이 한 순간에 휘감을 필요가 있었다. 1회 차 시절 나는 48의 마력 능력치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물론 능력치에 따라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는 선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평균이라는 게 있다. 그 평균이 70 중 후반인 점을 감안한다면 나는 확실히 예외라는 집합에 속해 있었다. 당시, 아무리 노력해도 오르지 않던 마력 능력치 상승을 결국 포기하고 차선책으로 컨트롤을 죽어라 연습 했었다. 나는 현재 96이라는 마력 능력치를 무리 없이 다룰 수 있다. 그리고 1회 차 시절 했던 피나는 노력 덕분에 항상 머리 속으로만 생각 해오던 것들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나는 속을 가다듬으며 뻗어 나가는 마력 줄기에 온 정신을 집중 시켰다. 줄기가 먼저 닿은 곳은 옆 쪽 테이블 이었다. 옅게 둘러져 있는 블록 필드를 향해 내밀하게 안으로 파고 든다. 그리고 그 순간, 제 3의 눈으로 미리 읽었던 대로 마력의 흐름을 맞추고, 무형의 막 안으로 스르르 녹아 들었다. 그리고…. “…아니잖아. 어차피 공공연한 비밀인데.” “그건 그렇지.” 이내 큰 무리 없이 마력의 흐름을 따를 수 있었다. 슬쩍 곁눈질을 하자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 사용자들이 보였다. 이제 통로를 열었으니 그저 듣기만 하면 되는 일. 지금도 자그맣게 들리기는 하지만, 나는 마력을 얼른 귀 쪽으로 끌어 당겼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것 같아. 그 동안 그 쪽에서 알게 모르게 억누르고 있었던 것들이 많았나 봐.” “아 미치겠네. 어떡하냐, 큰일이다 정말. 성공할거라고 호언장담한 게 엊그제였는데,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하. 내 친구도 원정대에 참여 했는데,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아, 너 그거 알아? 지금 구조를 요청하는 통신이 딱 세 번 들어왔대.” “중복 통신 제외하고?” “응. 우리 클랜 대 간부가 흘리는 말을 들었는데, 거의 전멸 했다고 하던데?”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전멸은 심하다. 내로라 하는 클랜에서, 그것도 거진 정예들만 뽑아 갔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잖아.” “나도 몰라. 그냥 듣기만 했으니까.” 한동안 얘기들을 듣다가, 나는 곧바로 영역에서 마력을 철수 시켰다. 나름 원정대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별로 영양가가 없는 것들 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가로질러 반대쪽에 있는 테이블에 신경을 쓰기로 했다. 많이 두꺼운 터라 살짝 긴장감이 들었지만 마치 파리지옥이 곤충을 잡는 것처럼 줄기로 은근하게 막을 감싸 안았다. 제법 거리가 있는 터라, 나는 그 테이블이 있는 곳을 향해 더욱 청각을 돋웠다. 여러 소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들어옴과 함께 뾰족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그 외에 차가운 여성의 목소리도, 낮은 음성을 갖고 있는 남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그건 어디서 들었어?” “최초 구조 요청 통신을 보낸 사용자가 한 말이야. 우리도 겨우 입수 했어. 물론 횡설수설 해서 곧이곧대로 받아 들이기는 힘들겠지. 그래도 조각을 맞춰보면, 선발대는 아예 소식이 닿지 않았다는 것 같아.” “그래? 그럼 싹 다 몰살 당했다는 소리야? 한 놈도 남김 없이?” “그럴 가능성이 높지. 선발대를 이끄는 게 박현우 였던가? 쯧쯧. 간부라고 까불더니 한 순간에 훅 갔네.” “박현우? 아아. 그런데 그 놈이라면 능히 살아 돌아올 것 같은데. 그럼 본대랑 보급 부대는?” “그것까지는 몰라. 애초에 왜 본대랑 보급 부대를 분리 했는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니까.” “선발대로 안전한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 그런 거 아냐? 본대는 나머지 떨거지들 청소하고, 보급 부대는 통로 확보를 목적으로 떨어트렸다고 하던데.” “그래서 멍청하다는 거야. 도대체 얼마나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으면 그렇게 죽기 딱 좋게 진형을 짰을까? 깔깔.” “너…. 너무 좋아하는 것 같은데.” “킥킥. 왜~? 꼴 좋잖아. 푸훗.” “그러면 더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줘야겠군.” “뭔데 뭔데? 말해봐.” “이건 진짜 극비 사항이다. 구조 요청을 보낸 통신 중에서 본대에 있던 사용자가 있었나 봐. 그런데 본대에서 그 황금 사자 클랜….” “잠깐. 이찬우. 너 입 다물어.” “응?” “야. 지금 블록 필드….” 한창 열심히 듣고 있던 도중 갑작스럽게 얘기가 끊겼다. 나는 반사적으로 잇고 있던 마력을 회수했다. 아무래도 마력 능력치가 80후반 또는 90이 넘어가는 마법사 사용자 한 명이 있었던 모양이다. 90이 넘어갈 정도면 내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아쉬운 한숨이 흘러 나왔다. 극비 정보라고 하길래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마침 눈치 좋은 사용자 한 명이 알아챈 것 같았다. 하지만 어차피 미래를 알고 있는 터라 단순한 내용 확인에 불과할 터. 나는 그대로 미련을 끊기로 했다. 일단 확인하고 싶은 정보는 확인한 상태였으니, 큰 미련은 없었다. “휴우.” “김수현. 왠 한숨?” “배고파서.” “음. 생각해보니 나도 배고프다. 얼른 음식이 나왔으면 좋겠어.” 비비앙은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구는 잘 되어 가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냥 그만두기로 했다. 지금껏 연구에만 골몰하다가 내 한숨에 반응하는걸 보니, 알게 모르게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주문은?” “응. 오빠. 그냥 간단한 걸로 하기로 했어.” 유정의 목소리에는 묘한 가시가 돋쳐 있었다. 슬쩍 하연을 흘기는걸 보니, 아무래도 또 그녀의 절약 정신정 발휘된 것 같았다. 내 입에서는 까닭 있는 한숨이 다시 한번 흘러 나왔다. 물론, 하연을 향한 한숨이 아니라 애들을 향한 한숨 이었다. 마침 음식을 다 만들었는지, 새로 보는 웨이트리스 한 명이 살랑거리는 발걸음으로 테이블로 다가왔다. 아마도 우리를 보고는, 팁을 많이 받을 수 있겠다 싶어 주문을 빼앗은 것 같았다. 어디서든 이런 횡포는 있었다. 아마 지금쯤 처음 우리를 안내한 웨이트리스는 눈물을 흘리고 있겠지. “오빠들~. 언니들~. 주문하신 음식들 나왔어요~.” 주문을 빼앗은 주제에, 웨이트리스는 생글생글 웃으며 쟁반을 테이블 위로 올려 놓았다. 새삼 느끼는데, 값비싼 음식점의 공통점은 양이 매우 적다는 것. 눈 앞에 쟁반에는 여성 손바닥만한 샌드위치 여덟개와 쿠키 여덟 조각이 놓여져 있었다. 인원수가 여덟 명인데 도대체 누구 코에 붙이라는 걸까. 나는 입맛을 다시며 가볍게 손가락을 퉁겼다. 괘씸죄로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없잖아 있었지만, 어차피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웨이트리스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튀어 오른 동전을 잡아 챘다. 그리고 손바닥을 본 그녀의 얼굴은, 곧 활짝 피어 올랐다. 내가 그녀에게 준 팁은 1실버 였다. 그녀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자 문득 안현이 금화와 보석을 뻥뻥 걷어 차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가 카오스 미믹 때 였던가? “오빠 멋쟁이!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시고, 필요한 게 더 있으시면 저를 불러주세요!” 그녀는 신나는 얼굴로 허리를 크게 숙인 다음 나는듯한 발걸음으로 달려갔다. 쟁반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손을 올리지 않았다. 제발 이 버릇 좀 고쳤으면 좋겠는데. 일전에 한번 말한 적은 있었는데, 다들 미묘히 웃기만 하고 아무도 따르지 않았다. 몰래 말해준 신상용의 귀띔에 따르면, 클랜 내 여성 사용자들이 식사를 시작할 때마다 묘하게 어쩔 줄 몰라 하는 내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나. 하연은 포크 하나를 들어 샌드위치를 콕 찍어 들었다. 워낙 크기가 작다 보니 따로 늘어지는 모양새도 없이 꼿꼿하게 들렸다. 그녀는 그것을 들고는 내 입과 거리를 서서히 줄이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오래 있지 않을 거잖아요. 여기서는 간단히 입가심만 해두고, 저녁은 여관에서 따로 먹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음? 아, 네. 그렇군요.” “여기 허니 미트 샌드위치가 굉장히 맛이 좋다고 들었어요. 먹어보지는 못했지만, 이름처럼 지구에 있던 꿀과 상당히 유사한 맛을 낸다고 하더라고요. 자, 드셔보세요.” “““…….””” 요즘 들어, 아니 고연주의 영입이 확정된 이후로 하연은 행동을 조금씩 대담하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고연주는 갑작스럽게 목을 꺾었다. 이유정의 눈꼬리가 살짝 휘어 올라가는 게 보였다. 안솔은 개량형 수호의 방패를 꺼내 들더니, 이내 부서질세라 꽉 쥐었다. 비비앙은 샌드위치를 보며 침을 졸졸 흘렸다. “제, 제가 먹겠습니다. 포크 이리 주세요.” 그녀에게서 포크를 빼앗은 후에야, 간신히 그 행동 및 시선들을 억누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광경을 지켜보는 신상용의 머리로 왠지 굵직한 땀방울 하나가 보이는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독자 님들. 혹시 토요일 연참을 기다려주신 분들이 있다면, 소신 로유진 죄를 청하옵니다. _(__)_ 구구절절 변명해도 유구무언 입니다만, 몸이 조금 힘들었습니다. ㅜ.ㅠ 일요일은 꼭 연참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 자신을 채찍질 하기 위해, 새벽 4시 안으로 올려 보겠습니다. 업로드한 후 바로 다음 회 집필하러 가겠습니다. 크아아앙! PS. 쪽지는 일요일 오전부터 차례대로 답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 리리플 』 1. GradeRown : 1등 축하 드립니다. 오오. 1등은 처음 이신가요? :) 하하. 단독으로 가능한 사용자는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단 한 명만 제외하고요.(그 한명이 누구인지는~.) 2. 사용자간달프 : 여, 연참신공! 흠흠. 알겠습니다. 절단마공은 나름 인정 받았으니 이제 연참 신공을 인정 받을 때도 되었지요. 후훗. 3. zjekfksqlc : 소환에 불응해서 심심한 유감의 말씀을. 크흙. ㅜ.ㅠ 딱지 감사 합니다.(__) 4. ]라디에르[ : 1회차 시절, 보석 마법사는 출현하지 않았습니다. 후훗. 그리고 한별이는 통과 의례에서 자격을 증명하지 못했죠. 트랩 포인트 부분에 해당 부분에 대한 복선이 깔여 있습니다. :) 5. EyeSeeYou : 아니 되옵니다. 자. 어서 한 명만 고르세요! 안솔인가요, 비비앙 인가요?! 6. 낮잠을자자 : 그러고보니 장미칼을 등장 시킬까 잠시 생각한적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 생각은 접었습니다. 푸하하하. 7. 비운록 : NO.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운은 살짝, 아주 살짝 띄웠습죠. 그런데 어떻게 보면 별 일이기도 하고 별 일이 아니기도 하고. 독자 분들에 따라 다르게 받아 들이실것 같아요. :) 8. Toranoanal : 아하. 그렇군요. 하하하. 저도 예전에 독자 분들에게 많은 작품을 추천 받았었습니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작품이 욕망과 투쟁(축복 받는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아부 돼지의 군생활(제가 군생활을 그린 만화를 한때 즐겨보던 기억이 있어서요.), 교당출려가 기억에 남네요. 위 세 작품 추천 드립니다! 9. 이드리얀 : 으하하. 김한별 입니다. 한별이 너무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ㅜ.ㅠ 아니, 제가 김한별의 이미지를 직접 변화시키도록 하겠습니다. 후훗. 기대해주세요! 10. gkgngh : 으~음. 무인도나 밀실. 밀실은 잘 모르겠구, 무인도도 잘 모르겠네요. @_@ 무인도는 예전에 재밌게 보던 작품들이 있었던것 같기도 한데. 밀실은 정말로 모르겠어요. ;ㅇ;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평점,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91 / 0933 ---------------------------------------------- Start Inn 가느다란 포크 위에는 자그마한 샌드위치가 푹 꽂혀 있었다. 찔러 들어간 표면에서, 더운 김을 폴폴 내는 뜨거운 액체가 흘러 포크를 타고 떨어졌다. 응고시킨 유제품을 넣었는지 흘러 나온 노란 액체에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있었다. 비싼 값을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맛있어 보이기는 했다. 그대로 입으로 가져와 한 입 베어 물자, 입 안에서 무언가 톡 터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달착지근하면서 상큼한 향이 입 안을 가득 채우는 게 느껴졌다. 내가 먹는걸 봤는지 애들도 각자 앞에 놓인 샌드위치를 향해 잽싸게 손을 뻗었다. 그래도 샌드위치 인데, 아무리 작아도 샌드위치 인데. 안현은 그것을 들고는 단숨에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그리고 게걸스럽게 우물거리더니, 곧 녀석의 목 울대가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제대로 씹지도 않고 삼킨 것 같았다. “와. 엄청 맛있기는 한데, 간에 기별도 안 가네요.” 안현은 입맛을 쩝쩝 다시고는 쿠키를 하나 집어 들었다. 클랜원들 또한 샌드위치를 먹으며 고연주의 음식과 비교하려고 했다. 잠시 동안 샌드위치의 시식이 이어지고, 다행히 평가는 좋게 나왔다. 모두 고연주가 만들어준 음식이 맛있다고 입을 모은 것이다. 그 말들에 그녀는 “됐네요. 아까는 실컷 여관이 어떻다 해놓고서는.” 이라며 콧방귀를 뀌었지만, 입가에는 연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는 이빨 자국이 나 있는 샌드위치를 내려 놓은 후, 하연을 살짝 건드렸다. 하연은 입을 오물거리고 있다가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눈치를 주자 이내 내 뜻을 이해 했는지 한두 번 고개를 주억였다. 곧이어 그녀도 목을 꼴깍 움직인 후 살며시 입술을 열었다. “───. ───. ───.”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이심전심이라기 보다는, 그만큼 그녀가 이런 외적인 부분들을 풍부히 경험 했고 적응이 잘 되어 있는 상태라는 소리였다. 물론 내적인 부분들은 아주 약간 부족할지 몰라도 그러한 것들 것 내가 신경 써줄 수 있는 것들 이었다. 이윽고 모든 주문을 외웠는지 그녀의 맑은 목소리가 차분하게 테이블을 주변을 울렸다. “블록 필드(Block Field). 리버스(Reverse).” “오.” 블록 필드에 리버스까지. 거듭 말하지만 블록 필드는 내외로 나가고 들어오는 소리를 모두 차단 시킬 수 있다. 다만 하연은 마법 회로 응용의 발현으로 외 부분에 살짝 손을 댄 것 같았다. 즉 지금 펼쳐진 무형의 막을 보면 외부의 목소리는 들리지만, 내부의 목소리는 나가지 않는다. 심화 능력을 익힌 사용자와 익히지 못한 사용자의 사소한 차이였다. 물론 이 사소한 차이가 전장에서는 목숨을 판가름 할 것이다. “사용자 고연….” 막 입을 열기 전 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잠시 동안 정리했다. 현재는, 황금 사자 클랜과 우호 클랜들의 강철 산맥 원정 실패로 인한 전력 감소 단계까지 와 있었다. 그리고 이제 대도시 바바라를 비롯한 북 대륙의 통제력 약화와 소집령, 그리고 그 틈을 노린 부랑자들의 발호가 나올 차례였다. 그 틈은 약 한달 이라는 시간을 갖고 있다. 상념을 마치고 고개를 들자 나를 멀뚱히 보고 있는 고연주를 볼 수 있었다. 아마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반응 했다가 잠시 말을 끊자 그러는 것 같았다. 해서, 나는 바로 말을 이어주었다. “주.” “…네. 말씀 하세요.” “강철 산맥 원정에 대한 정보가 필요 합니다.” “안 그래도 알아보려고 하고 있어요.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정확히 어떤 정보들이 필요하신가요?” “참가한 클랜들의 현황과 피해 집계 상황 입니다. 자잘한 것들은 꼭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큰 것들 위주로 알려 주시면 됩니다. 곧 밝혀질 일들이기는 해도, 저에게는 한 발 앞서 정보가 필요 합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음. 알겠어요.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보도록 하죠.” 고연주는 시원스러운 말투로 대답한 후 눈을 찡긋거렸다. 그녀의 반응을 보자 마음 한 구석이 든든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황금 사자의 실수가 연발로 이어진다. 그 중 하나가 이번 원정의 피해를 축소 하려는 것을 들 수 있었다. 자신들이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한 고육지책이나 다름 없는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참고로 그들의 이러한 행동은 추후에 타 도시의 대표 클랜들이 독립할 때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물론 직접적인 원인은 따로 있지만 하나의 구실거리가 되는 셈이다. 그렇게 고연주에게 중요한 일거리를 맡긴 나는, 다른 클랜원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안솔은 울고 있었다. 아마도 안현이 자신의 몫의 쿠키를 날름 먹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내 몫의 쿠키를 줌으로써 그녀의 울음을 그치게 만들었다. 비비앙은 내가 먹다 남긴 샌드위치를 보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포크를 건네주자, 그녀는 마치 걸신 들린 사람처럼 흐르는 노란 액체를 신나게 핥기 시작 했다. 그렇게 분위기를 가라 앉힌 후, 막 본론을 꺼내려는 찰나였다. “야. 다 먹지도 않았잖아. 왜 굳이 일어나려는 건데.” “조용히 좀 해봐. 이상하다고 했잖아. 아무래도 블록 필드가 뚫린 것 같아.” “별 이상 없다면서. 흔적 없다고 했잖아?” “모르겠어. 내가 착각한 건지 아니면 아예 흔적을 못 찾은 건지. 일단 나가자. 만일 후자라면 여기 있는 게 너무 찜찜해.” 앞에서 입구 쪽으로 걸어가는 한 무리의 사용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선두에 서 있는 사용자는 왠지 모르게 낯설지가 않았다. 인상을 본 것은 아니었다. 가지런히 자른 앞머리 옆으로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탓에 얼굴이 정확히 보이지가 않았다. 다만, 몸에서 풍기는 분위기에 익숙한 기분을 느꼈다. 나는 다시금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허유리(4년차) 2. 클래스(Class) : 일반 마법사(Normal Mage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Babara) 4. 소속 단체(Clan) : 리버스(Reverse) 5. 진명 · 국적 : 미친 불꽃의 어릿광대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5) 7. 신장 · 체중 : 165.5cm · 45.5kg 8. 성향 : 호전 · 첨예(Aggressive · Sharp) < 능력치 > 1. [근력 55] [내구 48] [민첩 64] [체력 56] [마력 92(+1)] [행운 52] < 능력치 비교 > 1. 김수현 : 544 / 600~ (능력치 포인트가 12 포인트 남아 있습니다.) [근력 96(+2)] [내구 92] [민첩 98] [체력 72] [마력 96] [행운 90(+2)] 2. 허유리 : 367 / 600~ (능력치 포인트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근력 55] [내구 48] [민첩 64] [체력 56] [마력 92(+1)] [행운 52] 허유리. 리버스 클랜. 선두에 있는 사용자의 정보를 읽은 순간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다 싶었는데 역시나 기억에 있는 이들 이었다. 리버스 클랜은 홀 플레인의 후반부까지 존재하는 클랜이다. 그리고 나름대로 특색 있는 곳으로 볼 수 있다. 그 클랜에는, 10강에 이를 정도의 특출 난 사용자들은 없다. 시크릿, 레어 클래스도 한두 명 있을까 말까였다. 하지만, 나는 한때 리버스 클랜에 들어가고 싶어했던 적이 있었다. 아마도 한소영이 나를 스카우트 하지 않았다면 필히 가입 신청을 했을 정도로 좋게 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리버스 클랜은 노력하는 사용자들의 모임으로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네들은 일반 사용자도 충분히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유명한 일화 중 하나를 꼽으라면, 남 대륙에서 결성된 클랜 오딘과의 일전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오딘은 사용자들의 질로 따지면 최고 수준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사용자들이 많았는데 그 클랜을 상대로 한치 물러섬 없이 전투를 벌였었다. 그 정도로 그들은 호전성이 강했다. 그리고 그 호전성의 정점에 서 있는 게 리버스 내에서 운영하는 척살 조라는 정예 단체였다. 척살조의 명성은 타 대륙 사용자들도 알고 있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부랑자들도 척살 조를 만나면 무조건 피하라고 했었던가. 조금 갑작스럽게, 지금 왜 그들이 지금 여기에 있는지에 대해서 궁금한 기분이 들었다. 순간 오만 가지 복잡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들은 빠르게 입구 밖으로 나가버리고 말았다. 잠시 그들이 나간 입구를 물끄러미 보다가 나는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리버스 라면 적이라고 볼 수 없다. 과거에 동맹을 맺었던 적도 있었고, 1회 차 시절을 비추어 봐도 딱히 마음에 걸릴 건덕지가 없었다. 현재 내가 지향하는 클랜은 오딘 형 소수 정예 클랜. 소수 정예 형 클랜의 가장 큰 단점은 바로 물량이 나오지 않는다는데 있었다. 그렇다면 해답은 다른 클랜들과 동맹을 맺어 물량을 보충해야 한다는 소리였는데 리버스 클랜은 그에 아주 적격인 클랜 이었다. 일반 사용자들이 주를 이루는 만큼 인원수도 충분하고, 후에 전투 명가라 불릴 정도로 강력해지는 클랜 이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잠시 그네들이 떠나간 자리를 보다가 다시금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예상치 못했던 장소에서 옛 인연들을 만나서 그런지 잠시 향수에 젖고 말았다. 그들과의 접촉은 조금 더 후의 일이 될 테니 지금의 만남은 시기상조라고 볼 수 있었다. 어찌됐든 이제는, 슬슬 클랜원들한테 바바라에 온 이유를 말할 필요가 있었다. 머셔너리 클랜을 창설한 만큼, 앞으로의 활동에 베이스를 둘 거점을 잡아야 한다. 자금이 충분하다고 가정하면 아무래도 다들 바바라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절대 바바라에 베이스를 잡을 생각이 없었다. 내전 이후 이 대도시가 어떤 꼴이 날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지금 굳이 이곳으로 온 이유는 현재 사태의 추이를 가늠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손가락을 쪽쪽 빨며 입맛을 다시는 비비앙을 바라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뮬에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이어서 할까 합니다. 다들 경청해주세요.” “““네.””” 애들은 동시에 대답했다. 나는 혹시 몰라 블록 필드를 한번 더 점검한 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들 들으셨겠지만, 황금 사자 클랜은 강철 산맥 원정을 실패 했습니다. 그런 만큼 당분간 사태가 어떻게 흘러갈지 지켜볼 생각 입니다. 추이를 보려면 흐름의 중앙, 즉 가장 민감한 곳에 있는 게 나을 테니까요. 긴 시간은 필요 없습니다. 현재 계획으로는 딱 일주일. 일주일 동안 바바라에 머물고 다른 도시로 떠나겠습니다. 물론 그 일주일을 그냥 놀릴 생각은 없습니다. 혹시, 따로 질문이 있으시면 해주세요.” 내 말에 하연이 곧바로 손을 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질문을 허락해 주었다. “사용자 고연주는 정보를 모아온다고 했어요. 일주일을 그냥 놀릴 생각은 없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다른 클랜원들은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하나요?” “네. 실은 뮬에서 몇 가지 걸리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도시로 떠나게 되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갈 예정 입니다. 그리고 그 전에, 걸리는 일들을 모두 처리할 예정 입니다. 일주일 동안 아마 그 일들에 관련해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것 같습니다.” “걸리는 일….” “그것은 개인 프라이버시와도 관련이 되어 있으니, 이렇게 대놓고 말하기는 곤란합니다. 다만 필히 해결할 문제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말할 수 없으니, 제가 클랜원들에게 개별적으로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바라로 온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방금 말했던 대로 홀 플레인의 흐름을 가장 근접한 곳에서 지켜볼 생각 이었다. 새로운 동료 영입, 장비 정리(미믹의 귀속화), 클랜 문양 등록 등등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일들에 불과했다. 1회 차와는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뮬에서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에, 내가 알고 있는 미래가 그대로 일어난다는 보장이 없었다. 즉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중요한 분기점인 지금, 사태가 어떻게 급변할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기 때문에 변화하는 것들을 확인한 후 그에 맞춰 계획을 수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저런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히 메웠다.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창 밖을 쳐다 보았다. 어느새 노을 빛 햇살을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고, 빈 공간에는 어둑한 땅거미가 찾아 들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슬슬 도시 밖으로 탐험을 나간 사용자들이 돌아올 시간 이었다. 그때 가서 북적거리는 여관을 잡느니 미리 움직여두는 게 더 나을 것이다. 나는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더 설파한 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일어서자 클랜원들 또한 따라 몸을 일으켰다. 계산을 하러 카운터로 가자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는 처음의 웨이트리스가 보였다. 조금 안되 보이기는 했지만 팁을 또 줄 생각은 없었다. “4골드 70실버 입니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여전히 비싸다는 생각이 드는 군것질 값을 계산한 후, 나는 입구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산들바람의 문을 열고 나서자 차가운 저녁 바람이 내 몸을 감싸 안았다가, 이내 풀리듯 지나가 버렸다. 그와 동시에, 김한별에 대한 생각도 잠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다행히 4시 전에 올릴 수 있었습니다. 네. 연참 입니다. 네. @_@ 제가 너무 졸린 관계로, 리리플은 자고 일어난 후 업데이트 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 합니다. (__) 라고 썼는데 그냥 다 쓰고 마음 편하게 자는 게 나을것 같네요. 해서, 리리플 5개를 하도로. 하도럭. 아이고. 왜 이렇게 오타가 날까요. ㅜ.ㅠ 하.도.록 하겠습니다. 『 리리플 』 1. 휘을 : 1등 축하 드립니다. 이번에 만약 리리플을 못했으면 또 휘을님을 슬프게 했을것 같군요.(저번에도….) ㅜ.ㅠ 아무튼, 부디 이번회도 재미있게 감상해 주세요. :) 2. EyeSeeYou : 음. 그러니까 안솔 > 비비앙이라는 말씀 이시군요. 아하하하. 그렇군요. 어라? 비비앙이 너무 슬퍼 하는데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어요! 3. 천겁혈신천무존 : 부라더 다매요. 쾅쾅쾅쾅쾅쾅쾅쾅. 4. hohokoya1 : 항상 감사 합니다. (__) 일단 얼른 자고 싶네요. ㅋㅋㅋㅋ. 눈꺼풀이 천근 만근 입니다. 5. C.E.O : ! 순간 흠칫 했습니다. 저도 그게 항상 의문이에요. 장담컨데, 자정 연재분 첫코는 저도 못할것 같습니다. 오늘 자정에 한 번 도전해 보려고요. 후후훗. 이것은 도전장 입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평점,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92 / 0933 ---------------------------------------------- Start Inn 바바라는 북 대륙의 심장부에 위치한 대도시다. 그리고 뮬은 북 대륙 북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소도시에 불과하다. 그것도, 발전이 더뎌 초기에 발견 했던 개척 도시 수준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대 그리고 소. 단어로 보면 단순한 한 글자 차이였다. 그러나 실제로 체감할 수 있을 경우, 느낄 수 있는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의 거리가 있었다. 크기도, 유동 인구도, 활동하는 사용자들의 수준도. 어느 것 하나 비교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다. 단순히 두 도시만 오고 갔을 경우 처음 바바라를 보는 사용자는 그 규모에 굉장히 낯선 반응을 보인다. 애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사용자 아카데미 일로 3개월 동안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에는 내부에 꽁꽁 갇혀 있었고, 수료 후에는 곧바로 워프 게이트로 직행해 도시 내부 사정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안현, 안솔, 이유정은 바바라라는 대도시를 상당히 낯설어했다. 지금 우리들이 묵고 있는 여관을 둘러싼 주변 환경만 봐도 애들한테는 상당한 정신적 충격으로 다가온 듯싶었다. 여관은 일부러 좋은 곳으로 잡지 않았다. 현재 일주일 동안 방세를 지불해 둔 이곳은 아침 햇살 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는데, 등급으로 따지면 하급으로 볼 수 있었다. 최고급 여관에 묵어도 될 정도로 돈은 차고 넘쳤지만 애들에게 일반 사용자들의 생활을 보이고, 겪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탐험에 나선 후 동료를 잃어 애통해 하는 사용자들. 먹고 잘 돈이 없어 이리저리 구걸하며 다니는 사용자들. 캐러밴에서 쫓겨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동료를 구하는 사용자들. 탐험을 하기에는 능력치가 부족해, 당장에 먹고 살 길이 없어 하루가 멀다 하고 아르바이트를 뛰는 사용자들. 그런 사용자들을 보면서 애들이 나름대로 자신들의 상황을 인식하길 바랬다. 바바라에 온지도 어느새 4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하루가 지날수록 어느 클랜에게는 절망스러운 소식들이, 또 어느 클랜에게는 깨소금 일수도 있는 소식들이 찾아 들었다. 하나 둘 통신이 들어올수록 북 대륙의 흐름은 하루가 다르게 변동하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흐름들을 면밀히 체크하며 내가 기억하고 있는 미래들과 맞춰 보고 있었다. 물론 그런 외부적인 요인들만 신경 쓴 것은 아니었다. 앞서 말했던 대로 클랜 내부, 클랜원들에 대해 미결된 문제들도 짚어내고 있었다. 지금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은 해결하고 최소한 진척 상황이라도 알아볼 생각 이었다. 바바라에 머무는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어느 클랜원에게는 휴식이 될 수 있었고 또 어느 클랜원에게는 문제 해결 및 능력 상승의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지금은 결속력이 좋다고 하지만 클랜 로드의 입장에서 보면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들이 보였다. 반듯하지 않고 이리저리 무분별하게 뻗어 나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 중에는 내 손이 필요한 것들도, 필요하지 않은 것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설령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도 해도 관심을 가지는 게 클랜 로드로서의 도리였다. 가장 먼저 눈 여겨 본 사용자는 신상용 이었다. 그는 뮬을 떠나기 바로 직전에 레어 클래스를 계승한 터라, 아직 자신의 클래스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만큼 자신의 클래스를 이해하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성장해 나갈지 심사 숙고할 시간이 필요했다. 혼자였다면 많이 힘들었겠지만 다행히 좋은 스승인 비비앙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래라 저래라 하기 보다는 믿고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다음 타깃은 안솔로 잡았다. 안솔은 현재 클랜원들 중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사용자였다. 섣불리 건드리는 것 보다는 처리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천천히 해결해 나가는 게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나는 그 동안 벼르고 벼르던 행운 능력치에 관해 얘기를 꺼낼 생각 이었다. 그녀의 행운 능력치에 대해 그 동안 많은 생각을 했고, 종래에는 101로 올리는 게 좋다는 판단이 들었다. 솔직히 보상 포인트로 4 포인트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행운에 투자하는데 아까운 마음은 있었다. 잠시 예를 들어보자. A라는 마법사가 근력 50, 마력 59를 갖고 있다고 가정하고 B라는 마법사가 근력 30, 마력 60을 갖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클래스, 장비 등 다른 모든 변수를 똑같게 맞추고 동일 마법을 사용한다는 전제를 깔면, B라는 마법사가 7할 이상의 확률로 승리한다고 볼 수 있었다. 나머지 2할은 무승부로 끝날 확률이고, 1할이 A라는 마법사가 이길 확률 이었다. 위의 예를 보면 마법사나 사제들에게 있어 마력 능력치의 중요성은 타 클래스들과 궤를 달리한다고 볼 수 있었다. 아마 안솔의 행운 능력치가 100 미만 이었다면, 그리고 폐허의 연구소에서 마력 능력치를 1 포인트 올려주는 반지를 얻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와 같은 마음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101 포인트에 대한 열망이 내게 혹시나 라는 마음을 들게 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도로아미타불에 대한 걱정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1회 차 시절 행운 능력치 101은 본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근력, 내구, 민첩, 체력, 마력과는 달리 행운은 101을 찍는다고 해서 곧바로 효과를 보기 힘들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막상 말을 꺼내려니 많은 망설임이 생기고 있었다. 행운이란 본래 그런 능력치였다. 오죽하면 10년이 넘는 홀 플레인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알 수 없는 능력치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소도시 뮬에서 탐험을 할 때 안솔이 보여준 방향 감각과 불안 감지 요소는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녀가 갖고 있는 두 능력의 가치는 거대했고, 앞으로 더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 이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에 불과하다. 아무리 클랜 로드라고 해도 개인의 욕심을 앞세울 수는 없었다. 그녀가 아군으로 있는 사용자인 이상 한 명의 권리를 존중해주는 것은 당연히 지켜야 할 행동 이었다. 필경 이 결정에 있어서는 안솔의 의사가 가장 중요했고, 최우선으로 삼을 생각 이었다. 애들은 내가 자신들의 사용자 정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사용자 아카데미 시절부터, 나는 항상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언제 어디서나 능력치를 숨기고 다니라고. 그리고 절대로 다른 사용자들에게 자신의 정보를 드러내지 말라고. 그게 설령 우리들 이라도. 그렇게 말한 주제에 지금 와서 말을 바꾸는 것도 대단히 미묘한 일 이었다. 까딱 잘못하면 내가 자신들의 능력치를 알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으니까. 어떻게 하면 안솔을 살살 구슬릴 수 있을까 고민이 들었다. 결국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완곡하게 돌려서 그녀의 의사를 표현하도록 유도하는 것. 그러나, 그녀 <본인의> 의사를 묻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름 준비를 갖추고 그녀와 대화의 장을 마련할 수 있었는데, 나는 2회 차에서 처음으로 체념이라는 감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네! 솔이는요오, 행운 능력치가 100이에요!” “…….” “그리고 다른 능력치는요~. 어디 보자아~.” “아, 아니. 야, 아니 솔아. 잠깐, 잠깐만 있어봐.” 그래. 나는 대화 상대가 안솔이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얘기 전 내가 걱정 했던 부분들은 그녀 스스로의 급진적인 전개 덕분에 모두 덮을 수 있었다. “끙….” “우웅?” 도중에 말을 끊어버리자 안솔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 동그란 눈망울과 방실방실 웃는 얼굴. 분명 보기 좋은 광경임이 틀림 없는데 갑자기 머리에 현기증이 도는 것 같았다. 뭔가,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 같은 느낌? 결국 본론은(행운 능력치를 1 포인트 올려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은), 본인의 사용자 정보 보안에 대한 한차례 강의가 이어진 다음에야 겨우 꺼낼 수 있었다. “그 동안 탐험할 때 알게 모르게 네 도움을 많이 받았잖아. 난 그 능력이 네 높은 행운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알기로는 능력치에 대한 상한선이 없다고 알고 있거든? 즉 100 포인트에서 1 포인트 더 올려보면 어떻게 될까 생각이 들었어.” “네! 좋아요!” “…보상 포인트를 그렇게 소모하는 게 조금 아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마력을 1만큼 올려주는 반지를 하나 끼고 있잖니. 아무튼 오빠 생각은 이런데 솔이 생각도 듣고 싶어서.” “네! 좋아요!” “하…. 아니, 솔아. 들어봐. 오빠는, 나는, 응? 네, 생각을, 듣고, 싶다고, 했잖니. 무조건 좋다고만 하지 말고. 네 능력치고 네 사용자 정보잖아. 생각이라는걸 좀 해보자. 제발.” 뮬에서는 그냥 애들로 봤었다. 하지만 바바라로 들어온 이상, 나름대로 사용자 대우는 해주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게 마음 먹자, 그녀와 하는 대화에서 굉장히 답답함을 느꼈다. 묵직한 속을 간신히 억누르며, 나는 스타카토로 연주하는 것 처럼 하나씩 끊어 말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에는 확실히 말을 들었는지, 안솔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곧이어, 그녀는 머리 위로 물음표를 동동 띄웠고 이내 느낌표로 변했다. 표정만 봐도 그녀의 속내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저도 올리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오!” “음! 그래, 왜 그렇게 생각하지?” “오빠가 그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씀 하셨으니까요!” “…….” 해맑게 웃으며 대답하는 안솔을 보자 충격과 공포가 찾아 드는걸 느꼈다. 이윽고 나는 커다란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말았다. 적이면 당장에 귀싸대기를 후려 갈겼거나 목을 베었을 텐데, 아군인데다가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애라 어떻게 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물론 내 탓이 어느 정도 있다는 생각도 없잖아 있었다.) 결국 안솔과 행운 능력치에 관한 문제는, 본인의 적극적인 태도로 인해 아주 간단히 해결한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안솔은 무서운 사용자였다. 충격과 공포뿐만 아니라 “좋은 게 좋은 거잖아요.” 라는 명언으로 나를 기함하게 만들었다. 아무튼 안솔은 그 자리에서 바로 아카데미 보상으로 얻은 4 포인트 중 1 포인트를 사용했고, 곧이어 행운 능력치를 101로 만들었다고 말해주었다. 물론 갑자기 돈벼락을 맞는 다던지 또는 능력치가 팍팍 늘어났다던지 등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유정이한테 못된 것만 배웠는지 안솔은 갑자기 순진무구한 눈동자로 내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그리고 덥다는 핑계로 로브를 벗어 자신의 어깨를 살짝 드러내었다. 물론 그녀가 내게서 기대하는 뜻 모를 일 또한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세게 쥐어 박은 후 밖으로 내쫓아 보냈다. 일단 주사위를 던진 이상 조급해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탐험 시 방향 선정과 불안 감지에 대한 능력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추후 도시 밖으로 나가서 확인하면 될 일 이었다. 가장 난관이라 여겼던 안솔의 일을 해결한 후에야, 비로소 다른 일들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다른 일이라고 한다면 이유정과 비비앙의 문제를 거론할 수 있었다. 일단 이유정은 조금만 더 지켜보는 걸로 마음을 정했다. 절규의 동굴을 탐험할 때를 생각하면 당장 마검을 뺏고 싶었지만, 그 외적 부분들을 포함해 가늠하면 애매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무엇보다 본인이 너무 마음에 들어 하고 있으니 최소한 바바라에 있을 동안은 놔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비비앙은 요즘 들어 멍하니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물론 연구도 열심히 하고, 신상용의 스승 노릇도 제대로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멍한 얼굴로 그저 허공만 바라볼 적이 많았다. 아무래도 영약 연단에 대한 실마리를 잡은 것 같았다. 내 입장에서 보면 좋아할 일 이었지만, 정작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스트레스가 심한 일 이었다. 비비앙은 초반에 가능성이 있다고 말해 주었다. 하지만 연구를 하면 할수록, 그리고 과정을 구체화 시킬수록 그 안의 세세한 것들 즉 자신의 생각과 상반 되는 요인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80 이하 +4 체력 영약, 70 이하 +2 체력 영약, 비비앙의 영단, 상급 마족 벨페고르의 심장, 호렌스의 마정석. 연구 재료로 들어가는 것들은 하나 같이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녀의 자존심을 봐도, 재료의 희소성을 따져도 실패하면 타격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거기다 내가 무척 기대하고 있다고 생각 하는지, 간간히 한숨을 쉬며 피로해 보이는 표정을 보였다. 나는 괜찮다고 다독였지만 부담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 없었다. 어차피 연단은 자리를 잡은 후 공방을 건설해야 본격적으로 들어갈 수 있을 테니, 그때까지는 그녀를 믿고 기다릴 것이다. 나는 홀 플레인의 흐름을 주시하는 동안에도 클랜 내부를 계속해서 가다듬고, 살펴 보았다. 클랜은 첫 출발이 중요하다. 처음 클랜을 창설한 원년 멤버들이 제대로 굴러가야 차후 들어오는 신규 클랜원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강 내부를 점검 했지만 아직 남아 있는 일이 딱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고연주와 안솔의 모호한 관계였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여러분. 저는 분명히 시험이 끝났습니다. 그런데 왜 책상 앞에 앉아 과제를 하고 있는 걸까요? 그것도 4개나요. 전혀, 시험이 끝났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금요일, 토요일에는 마냥 좋기만 했는데 일요일이 되니까 현실이 다가오더군요. 하하하. 네, 결론은 오늘도 밤을 샌다 입니다. 야식으로 라면이나 끓여 먹어야 겠네요. 냉동 만두 돌려서 같이 먹으면 맛있답니다. :) PS. 쪽지는 차례대로 답신을 드리고 있습니다. 하하하. 아직 받지 못하신 분들은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D 『 리리플 』 1. 아프게했어 : 1등 축하 드립니다. 오. 새벽 롤을 하셨군요. 저도 한때 새벽 롤 유저였죠. 같은 팀랭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PC방에 앉아 밤 새면서 게임 돌리고, 라면 한그릇 먹는게 낙이었죠. 지금은 다들 사는게 바빠 뿔뿔이 흩어 졌지만, 가끔 그때가 그립습니다. ㅜ.ㅠ 2. 김민선이빨 : 하하. 1부는 조금 더 진행한 후 맺을 생각 입니다. 그렇게 맺어 버리면 1부가 너무 빨리 끝나요. :) 3. juan : 후후. 살짝 드리는 정보지만, 한별이는 선발대가 아니었습니다. 시크릿 클래스 이기는 해도, 0년 차 사용자인 만큼 정예로 들어가기에는 무리가 있거든요. 그렇다면 과연 본대 일까요, 후위대 일까요? 4. EyeSeeYou : 아니! 저는 이 교제 반대 입니다! 안솔 말고, 박동걸은 어떠신지요. :) 5. 천겁혈신천무존 : 음. 그것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지요. 하하하. 6. letzgo02 : Yes. 현재 크게 보면 3, 4개의 챕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장, 또는 부로 보셔도 무방합니다. :) 7. 명박짱의양양합일 : ……! 아, 아닙니다. 첫사랑 이라뇨. 애인 이라뇨. 짝사랑 이라뇨. 절대로, 네버 아닙니다. 아이 참. 무슨 말씀을. 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네, 절대로 아닙니다. :) 8. 사용자간달프 : 헐. 굉장히 피곤 하셨나 봐요. 일요일 하루를 거의 잠으로 보내셨다니. 정말로 ㄷㄷ 합니다. 9. 훔냐~~ : 쿠폰 감사 합니다. (__) 이 과제들만 어떻게든 처치하고 연참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각성! 크아아아아아아아! 10. hohokoya1 : 아하하. 마음은 100연참 이지만, 현실은 2연참 이었습니다. ㅜ.ㅠ 몸은 다 나았습니다! 흐흐흐. 제 몸도 아직 죽지 않았나봐요.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평점,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93 / 0933 ---------------------------------------------- Start Inn 뮬에서 우연찮게 볼 수 있었던 둘의 관계. 솔직히 그 관계 자체만 놓고 보면 그렇게 문제가 될 소지는 없었다. 서로 죽어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한 쪽에서 피하기만 하는 관계일 뿐 이다. 그러나. 그 때만큼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지는 않지만, 안솔은 지금도 고연주를 어려워하고 있었다. 가끔 클랜원들 중에서도 안솔을 어린애로 보는 사용자들이 있었다. 아니, 나를 포함해 대다수라고 봐도 좋다. 하지만 안솔은 엄연히 스무 살의 성인이었다. 100% 확신이 아닌 감에 불과했지만, 이 사건을 파고들면 안솔이 유아적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한 단초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동안 안현, 안솔에게 여러 번 슬쩍 운을 띄운 적은 있었다. 그러나 둘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그 부분에 관해서는 절대로 입을 열지 않았다. 내 말은 어지간해서는 듣는 애들인데, 뭔지 모를 사정이 있어 보였다. 그것이 트라 우마와 관련된 것이면 섣불리 건드리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태껏 깊게 캐묻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냥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숨 고르기를 하고 있는 이상 이대로 방치해두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씩,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올릴 생각 이었다. 웬만하면 당사자 입장에서 듣는 게 낫겠지만 그네들의 반응을 보면 그것을 바라기는 힘들 것 같았다. 해서, 일단 초반 방향은 고연주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으로 가닥을 잡기로 했다. 그녀는 지금 내가 요청한 정보를 모으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창 바쁜 사람을 붙잡는 것 보다는, 다음에 보고하러 올 때 같이 묻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머셔너리 클랜 내부의 불안 요소들을 전반적으로 살필 수 있었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것들도 몇몇 있었지만, 앞으로 차차 시간을 두고 지켜볼 성질의 것들 이었다. 이제 다시 외부로 시선을 돌려보자. 바바라로 온 이유는 홀 플레인의 흐름을 가장 민감한 장소에서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현재 내가 기대하는 것들은 총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뮬의 클랜 창설관 거주민들에게 맡기고 온 홍보였고, 다른 하나는 황금 사자 클랜의 소집령 이었다. 먼저 클랜 홍보 건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분명히 예상보다는 늦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지금쯤 강철 산맥 원정의 실패 소식을 접했을 것이다. 그 말인즉슨 거주민들이 아마도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황금 사자의 원정 실패는 애석한 일 이었다. 그러나 다른 누구들한테는 고소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개척 도시 뮬의 입장에서 본다면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우리들의 뮬에서 이루어낸 실적들을 대대적으로 홍보함으로써, 전체적으로 가라 앉은 분위기를 끌어 올리는 동시에 사용자들의 관심을 끌어올 수 있다. 내 입장에서도 그다지 나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두 팔 벌려 환영한다고 할까? 1회 차 에서는 10년의 대부분을 음지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2회 차 에서는 철저히 양지로 나올 생각 이었다. 양지로 나오게 되면 여러 정보들 중 일부는 필연적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때를 기다리는 만큼, 본격적인 홍보에 들어가는 즉시 우리들의 활약상도 더욱 도드라질 것은 자명한 일 이었다. 다음으로 주목할 일은 바로 황금 사자 클랜의 소집령 이었다. 그 동안 황금 사자는 북 대륙 클랜의 맹주 역할을 해오고 있었다. 물론 공식적으로 공표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일 세력으로는 최강의 전력을 갖고 있었고, 그 동안 그들이 이룬 업적과 그리고 다른 어떤 클랜보다 오래된 전통을 겸비한 터라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 되어 있었다. 실제로 사용자 아카데미에 대한 처우를 그들이 주도하는 것만 봐도 그러한 사실 관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독단적인 행보에 불만을 품고 있는 클랜은 한두 곳이 아니었다. 그래도 지금껏 사용자들끼리 서로 싸울 일이 드물기 때문에 겉으로 크게 표시하고 있지 않았을 뿐. 아마 본격적으로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부랑자 말살 계획 및 강철 산맥 원정 계획을 발표했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강철 산맥을 넘어 아틀란타로의 길을 뚫을 수만 있다면 원정에 참가한 클랜들은 장밋빛 미래를 보장 받은 것과 다름 없었다. 가뜩이나 포화 상태로 달려가는 북 대륙인데, 할 것 천지인 신 대륙이 발견 되면 입장 및 활동에 대한 우선권은 당연히 원정에 참가한 클랜들에게 있었다. 그러한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황금 사자 클랜은 해당 계획들의 주축을 모조리 우호 클랜으로 채워버렸다. 막상 뚜껑이 열리기 전, 성공을 장담하는 분위기가 흐를수록 참가하지 못한 클랜들의 불만은 높아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정 반대가 되고 말았다. 강철 산맥에서 겨우 탈출한 사용자들의 구조 요청에 지지부진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위와 같은 이유에서 발로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감정의 골은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지고 있었다. 내가 소집령을 중요한 분기점으로 잡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 소집령이 어떻게 흘러가느냐에 따라서 앞으로의 미래가 원래대로 흘러갈지,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지 알 수 있으니까. 강철 산맥 원정에 대한 실패가 공식화 된 후, 황금 사자 클랜의 입장에서는 지금껏 쥐어온 주도권을 내주기 싫었을 것이다. 그래서 입장 발표 겸 분위기 진작을 위해 도시 대표 클랜 소집령을 공표하는데, 호출에 응한 클랜은 채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쯤이면 대충 눈치를 챘어야 했다. 그러나 그 놈의 자부심이 뭔지. 주 전력으로 볼 수 있는 정예 사용자들을 상당수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영광이 그들의 눈을 멀게 만들었을까. 소집령 불응에 체면이 구겨진 황금 사자는, 불응한 클랜들을 향해 강력한 경고를 날리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황금 사자가 발표한 강도 높은 경고는 그 동안 쌓이고 쌓여온 불만들이 터지는 기폭제가 되었다. 당연히 경고를 받은 클랜들은 코웃음을 쳤다. 예전 같았으면 그저 쥐 죽은 듯 납작 엎드리고 있었을 클랜들은 비로소 외부로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어떤 곳은 대놓고 비아냥거린 클랜도 있었다. 아마 리버스 클랜이 그랬었지? 그렇게 서로의 감정이 깊어질 무렵 드디어 부랑자들의 움직임이 개시 되었다. 애초에 북 대륙에 적을 둔 부랑자들인 만큼, 내부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 했을 것이다. 그리고 서 대륙 사용자들의 힘을 업어 서쪽 도시들을 경유해 대도시 바바라로 진격한다. 부랑자들의 목표는 황금 사자. 부랑자 말살 계획으로 큰 피해를 입은 그들은 절치부심하며 복수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서쪽 일반 도시 헤일로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함락 되어 버렸고, 그 여세를 몰아 그들은 곧바로 바바라를 침공했다. 깜짝 놀란 황금 사자 클랜은 다급하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원정에 참가한 우호 클랜들 중 대다수가 수뇌부를 잃은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소집이 제대로 이뤄질 리 없었다. 오히려 다른 도시로 피난을 가거나, 도리어 아예 탈퇴하고 나 몰라라 하는 사용자들이 속출하고 있는 상황 이었다. 황금 사자와 갈등을 빚고 있던 클랜들은 그들의 지원 요청을 묵살했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차례대로 독립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즉 그 순간부터 바바라로 통하는 워프 게이트를 모조리 차단시킨 것이다. 말 그대로 황금 사자의 몰락을 바란 극단의 조치였다. 아마도 내 생각에 불과하지만, 부랑자들은 그러한 사정들은 면밀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결탁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결과적으로 독립한 클랜들은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식으로 그들의 몰락을 지켜보기만 했다. 부랑자들이 갖고 있는 복수심. 독립한 클랜들의 황금 사자에 대한 갈등과 바바라에 대한 욕심. 이 욕망들이 한데 어우러져 서로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졌다고 볼 수 있었다. 부랑자는 다른 도시를 건드리지 않고, 독립 클랜들은 나서지 않는 암묵적인 관계의 성립. 결국 도시에 남아 끝까지 저항하던 황금 사자 클랜은, 모조리 몰살 당하고 말았다. 그나마 워프 게이트가 열려 있었으면 도망이라도 칠 수 있었을 텐데, 바바라의 함락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인 도시들은 모조리 바바라로 통하는 게이트를 닫아 버렸다. 그 이후 한층 욕심을 부리는 서 대륙 사용자들과 부랑자들의 분열, 그리고 비로소 토벌대를 구성하는 미래가 이어지지만 그것은 아직 한창 남은 일 이었다. 지금 당장은 소집령을 분기점으로 뒤이어질 일들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가늠하는 게 최우선 과제였다.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 속으로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했다. 최초 구조 요청 통신이 들어온 이후로 나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결국 구조대를 파견하기는 했지만 생색내기에 그쳤다고 볼 수 있었다. 황금 사자를 비롯한 우호 클랜들은 산맥 내부에 생존자들이 있을 거라며 제대로 된 구조대를 결성하기를 원했지만, 그 제안은 단칼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이것으로 불씨는 점화된 셈 이었다. 지금 우리들이 있는 대도시의 분위기는 찬 물을 끼얹은 듯 잔뜩 가라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는 차후 북 대륙의 판도를 뒤바꿀 불덩이가 조금씩 크기를 키워가고 있었다. * 고연주가 강철 산맥에 대한 원정 정보를 갖고 온 것은, 바바라에 도착한 이후 엿새라는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아무리 그녀가 정보 수집의 대가라고 해도 이번 요청은 조금 무리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황금 사자 클랜의 축소 공작을 뚫고 억지로 모아온 것이기 때문이다. “고생 하셨습니다.” “휴. 아니에요. 그나저나 얘들은 참 이해가 가지 않네요. 어차피 곧 드러날 일들이고, 구조대를 파견한 클랜들은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텐데 말이죠.”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보입니다.” “쯧쯧.” 혀를 차는 고연주를 뒤로한 채, 나는 시선을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내 손에는 유려한 필체로 가득 찬 기록들이 열 장이 넘게 쥐어져 있었다. 그냥 굵직한 것들만 조사해도 좋았는데 나름 세세한 부분까지 조사한 것 같았다. 잠시 기록들을 훑어본 나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양이 너무 많았다. 하나씩 정독한다고 해도 생각을 가질 시간이 필요했다. 이대로 그림자 여왕을 쉬게 해주고 싶었지만, 일전에 마음 먹었듯 안솔에 대해 물어볼 것이 하나 있었다. 해서 기록은 나중에 천천히 읽기로 하고, 다시금 고개를 올렸다. 고연주는 예쁘게 하품을 하고 있다가 내가 쳐다보자 손으로 급히 입술을 막았다. 그리고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나는 싱겁게 웃은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집무실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렇지만 바바라의 여관 아침 햇살에서도 내 전용으로 사용하는 방 하나를 따로 잡은 상태였다. “벌써 다 읽으셨나요?” “아니요. 조금 시간을 들여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전에, 전부터 사용자 고연주한테 묻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아. 참고로 쓰리 사이즈는 아닙니다.” “쳇.” 고연주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잠시 그녀답지 않은 귀여움을 감상한 후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일전에 조신한 숙녀에서 말 입니다. 안솔이 사용자 고연주를 보고 도망을 간 적이 있지 않았던가요.” “아아. 네. 있었죠. 그렇게 비명을 지르고 도망가는데 잊혀지지가 않더라고요. 나름 상처 받았어요.” “그 후로 안솔은 사용자 고연주를 피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리면,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네요.” “음….” 고연주는 뜻밖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항상 그녀의 시원스런 모습만 보다가 곤란해하는 태도를 보자 색다른 감정이 들었다. “뭐 그렇게 별 일은 아니긴 한데….” 그녀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입맛을 다셨다. 아마도 그때 있었던 일을 회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더니 곧 내게로 시선을 돌려 “꼭 들어야겠어요?” 라는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에, 나는 “네. 꼭 듣고 말겠습니다.” 라는 눈빛을 보내어 응수해 주었다. 그런 내 의지를 확고히 전달 받았는지, 고연주는 푹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 사이로 “절대로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 받았는데….” 라는 목소리가 언뜻 들렸다. 곧이어 그녀는 마뜩잖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알았어요. 대신에 절대로 그 아가한테 티를 내지 않겠다고 약속해줘요. 알고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단 말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요청을 받아 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연주는 조금 주저하는 것 같아 보였다. 도대체 둘이 어떤 일이 있었길래 그녀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속으로 슬며시 호기심이 치밀어 올랐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이윽고 고연주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그 동안 '마뜩찮다.'로 알고 있었는데, '마뜩잖다.' 또는 '마땅찮다.' 가 맞는 말 이었습니다. 하하하. 이 정보를 알려주신 두 분에게 각각 감사의 인사를. (__) 네. 드디어 새로운 에피소드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마쳤습니다. 메모라이즈는 회귀물이다보니 새 챕터를 전개하기에 앞서 어느 정도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고 여겼거든요. 이번 회로 대부분의 일을 마무리 지었으니, 다음 회 부터 다시 진도를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PS. 선작, 추천, 평점, 코멘트, 쿠폰 주신분들 모두 감사 합니다. 오늘 들어온 쿠폰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한 달에 몇 번은 항상 이렇게 놀라는것 같아요. _(__)_ 『 리리플 』 1. 센서티브 : 오호. 오랜만에 1등을 하셨군요. 하하. 이번 자정에는, 제가 1등을 노려볼 생각 입니다. 과연 자정 1등을 제가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죠. -_-a 그럼 이번 회도 재미있게 읽어 주세요. :D 2. MT곰 : 앗. 오랜만에 뵙습니다. 시험은 잘 보셨나요? 저는 시험 후 과제에 찌들어 살고 있습니다. 낄낄. 하우. 언제쯤 여유로운 날이 다시 올까요. ㅜ.ㅠ 3. EyeSeeYou : 하하하. 솔이는, 이미 임자가 있습니다. 하하하하. 저는 이 교제 반대 입니다! 엇험. 4. ads123 : 헐. lomeaes님의 코멘트를 읽고 다시 읽어 보았는데, 빵 터지고 말았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5. 파카사리 : 네. 팀랭 처음 했을때의 기억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말 그대로 찢기고 말았습니다. ㅜ.ㅠ 6. 폭풍마선 : 오호. 그거 아주 좋은 생각 이군요. 저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번 고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호오…. 7. 이드id + 폐인이꿈이다 : 쿠폰 감사 합니다. 앞으로 더욱 좋은 내용으로 보답할 수 있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_(__)_ 8. 사르딘 : 오. 비빔면. 저도 참 좋아 합니다. 팔도 비빔면을 사서, 찬 물에 챱챱 헹구고, 계란 반개 쏙 넣고, 얼음 띄우고, 후루룩 먹으면 낙원이 따로 없죠. 벌써부터 침이 고이네요. 흐흐흐. 9. 놀고싶다 : 가능은 합니다. 다만, 주인공의 체력 문제 및 다른 문제들로 현재 유보하고 있는 상황 입니다. 현재의 능력치에서 더 발전 시키면 몸에 걸리는 부담이 극대화 되거든요. :) 10. 사용자간달프 : 해당 부분에 대해서는 리리플로서는 노 코멘트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김수현을 위주로한 답변을 원하시는것 같은데, 답변에 차후 수현의 성장과 관련한 스포일러가 있거든요. :) 사용자간달프님의 양해 부탁 드립니다! 다만 <10강정도 되려면 마스터에서 또 깨달음이 있어야하나요?>에 대해서는 꼭 있을 필요는 없다고 답변할 수 있습니다. 확률적인 관점에서 접근하시면 됩니다. 10강은 칭호일 뿐이지, 클래스나 사용자의 정보 상태, 설정을 나타내지는 않거든요.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평점,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94 / 0933 ---------------------------------------------- 외전 Part 1 : 그날 있었던 일 * 본 회는 강도 높은 성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원하지 않는 분은 넘어가 주세요.) “그럼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네~. 오늘은 일찍 들어오세요~.” 고연주는 양 손을 흔들며 김수현을 배웅했다. 김수현은 그런 그녀를 보며 잠시 쓴웃음을 짓고는, 앗 차 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 차는 잘 마셨습니다. 그런데 찻잔은 제가 깜박하고 방에 두고 내려왔네요.” “아이 참. 그런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마세요.” “항상 잘 마시고 있습니다.” 김수현은 의례적인 인사를 한 후, 그대로 몸을 돌려 여관의 입구를 나섰다. 점점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연주는 이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그녀의 기분은 항상 좋았다. 아침에 일어나도, 까닭 없이 엔도르핀이 온 몸을 맴도는 것 같았다. 곧 주방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설거지를 보며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흐흥~. 그런데 그이는 이 꼭두새벽부터 어디를 간다는 건지 몰라~.” 고연주는 쓱싹쓱싹 설거지를 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아직 다른 일행들은 한창 잠의 삼매경에 빠져 있을 터. 그네들이 일어나기 전에 웬만한 준비를 끝내놓을 생각 이었다. 곧이어 설거지를 간단히 끝낸 그녀는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성격은 의외로 꼼꼼한 데가 있어, 한번 시작한 일은 꼭 조금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고 꼭 마무리를 지었다. 설거지를 마치려고 하는 순간 김수현의 말이 떠오른 것이다. ‘하여간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도대체 정체가 뭔지.’ 고연주는 혼자서 키득키득 웃으며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1층, 2층을 오르고 3층으로 올라서 내부로 통하는 문을 조금 열은 찰나였다. 지금 시간은 꼭두새벽. 살짝 열린 문 틈으로, 복도에 자그마한 인영 하나가 비틀비틀 걷는 게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쟤는…. 아. 그 꼬맹이잖아? 이름이 안솔이라고 그랬던가?’ 인영의 정체를 확인한 고연주의 입 꼬리가 살짝 휘어 올라갔다. 김수현의 일행 중 유일한 사제 사용자. 그 순간 그녀의 뇌리에 가학적인 감성이 차올랐다. 일전에 여관에서 징징 울던 모습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를 볼 때마다, 고연주는 왠지 모르게 괴롭히고 싶다는 욕구가 몸 내부서 무럭무럭 솟아남을 느꼈다. 고연주는 뜻 모를 미소를 짓고는 살며시 몸을 이동시켰다. 그녀의 클래스는 시크릿 클래스 그림자 여왕. 그녀가 마음을 먹은 이상, 어지간한 사용자가 아니라면 기척을 잡기란 요원한 일 이었다. 복도를 걷고 있는 안솔의 얼굴에는 몽롱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마치 “나 지금 잠에 취해 있어요.” 라고 광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고연주는 한 구석에 서 기척을 차단한 상태로 가만히 안솔을 구경했다. 이윽고 그녀가 몸을 돌리자, 고연주 또한 살금살금 뒤를 쫓았다. 공교롭게도 안솔이 걸음을 멈춘 곳은 특실 앞 이었다. 그리고 그 특실은 고연주가 원래 들어가려고 했던 곳과 겹치고 있었다. 즉 둘의 목적지가 똑같이 김수현의 집무실이라는 소리였다. 고연주는 잠시 고민이 들었다. 원래는 그녀의 뒤에서 “왕!” 하고 놀래 키거나, 기척 차단을 풀어 그녀 스스로 자신을 인식해 놀라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 김수현이 있는 곳을 찾는다는 건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연주는 기척 차단 상태를 조금 더 유지하기로 했다. 그 순간 이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 불과했지만, 안솔의 몽롱했던 눈동자에 번뜩이는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곧이어 안솔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연 후, 고개를 빼꼼히 들이밀어 내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방문을 활짝 열어 들어섰다. 그리고 그녀의 몸은 특실 안으로 사라졌다. 곧이어 방문이 닫힘과 동시에, “철컥.” 하는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아쭈. 문을 잠갔어?’ 그리고 고연주는, 멍한 눈동자로 꾹 닫힌 특실의 문을 응시했다. 처음에는 그냥 가벼운 생각이 들었는데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짧은 시간 동안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조용히 특실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자신의 잠재 능력 중 하나인 검은 그늘을 발동 시켰다. 스르륵, 그녀의 몸이 땅으로 꺼졌다. 곧이어 고연주의 신형은 그림자를 타고 방 내부로 들어가,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제 두 개의 잠재 능력을 활성화시킨 상태였다. 그녀는 자신 있었다. 일전에 김수현한테 한번 걸린 적은 있었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감이 엄청 좋은 사용자라면 몰라도, 고작 0년 차 사용자에 불과한 애송이가 자신을 절대로 알아볼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 안으로 완전히 들어서자 고연주는 뜻밖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안솔은 어느새 김수현이 사용하는 침대 위로 얌전히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는, 자신이 아침에 타다 준 것으로 보이는 찻잔이 고스란히 들려 있었다. 곧이어 침대 위로 몸을 눕힌 안솔은 시트에 고개를 묻었다. 그리고 얼굴을 마구 비비기 시작했다. ‘어머, 어머머? 쟤, 쟤 지금 뭐하니?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까르르.’ 고연주는 하마터면 크게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그와 동시에 잠시나마 진지해졌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그래도 괜찮았다. 앞으로 두고두고 놀릴 거리 하나 잡았다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는 곧 잠재 능력 검은 그늘을 풀었다. 아직 기척 차단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것도 마저 풀 생각 이었다. 그러나 미처 자신의 기척을 모두 드러내기 전에, 안솔의 다음 행동이 이어졌다. “쪽, 할짝, 우웅, 쯉, 쮸웁.” “…….” 안솔은 김수현이 입을 댔던 게 분명한 찻잔을 정성스레 핥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꽤나 적나라하게 고연주의 눈에 들어왔다. 혀를 내밀어 전체적으로 날름거리다가, 어느 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입술을 머금어 강하게 빨아들인다. 그렇게 한동안 찻잔 전체를 자신의 침 범벅으로 만든 안솔은 아쉬운 얼굴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킁킁. 킁킁. 흐읍. 흐읍. 하아. 하아.” 찻잔 플레이(?) 이후 이어진 안솔의 행동은 침대 플레이였다. 그녀는 마치 강아지처럼 침대 구석구석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그러면서 코를 묻어 냄새를 맡고, 간간이 베개를 꼭 안는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 고연주는 할 말을 잃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정체는 5년 차 사용자 그림자 여왕이었다. 잠시 정신을 놓기는 했지만 이내 재빠르게 가다듬었다. ‘그, 그래. 취향은 존중할 필요가 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생기지는 않았는데 조금 의외이기는 하네. 이래서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다니까.’ 고연주는 안솔의 취향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현대에서도 변태적인 남성들은 많았다. 심지어 자신이 신고 있던 스타킹을 달라던 남자도 있었다. 그런 남자들과 비교하면 안솔의 행동은 귀여운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고연주는 한번 더 양보(?)하기로 했다. 그렇게 정신을 다듬고 있을 때, 안솔의 행위가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다음에 그녀가 선보인 행위는 막 회복 중이던 고연주의 정신을 세게 강타하고 말았다. 안솔은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리고 한 손을 자신의 가슴 위로 올리고, 또 다른 한 손은 하의 속으로 집어 넣었다. 이윽고 골반을 타고 들어간 손이 움직이자, 사타구니 부분이 불룩 솟아 올랐다. 곧이어 솟아오른 부분은 아래 위로 들썩들썩 움직였다. 상의로 올린 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손바닥이 가슴을 더듬기 시작함과 동시에 그녀의 자그맣고 예쁜 입술 사이로 비음이 흘러나왔다. “흐응, 응, 으응, 응, 아읏….” 초반 안솔의 손놀림은 굉장히 소극적 이었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 이른 순간, 그녀의 행위가 180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안솔은 감았던 눈을 반짝 뜨고 거친 숨을 토해 내었다. 감질 맛이 나는 듯, 이내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상의를 풀어 헤쳤다. 그리고 다급하게 골반을 비틀어 다리를 하나 빼더니, 그 상태로 남은 다리를 두세 번 걷어찼다. 한번 걷어찰 때마다 조금씩 빠져 나오던 하의는 곧 침대 한 쪽에 널브러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런 안솔의 자태는 고연주의 눈에 여과 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눈으로 나름 봉긋하게 솟아오른 새하얀 젖 무덤과 소중한 곳을 가리고 있는 순백색 속옷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딱딱히 굳어져 있었다. 숨소리마저 죽이며, 고연주는 자신이 검은 그늘을 풀었다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나신을 드러낸 안솔은 끊었던 행위를 잇기 시작했다. 침대로 다시 몸을 눕히고는, 손을 원위치 시켰다. 보드라운 피부를 타고 내려간 손은 다시금 준비 자세를 잡았다. 이윽고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속옷을 옆으로 젖히고는, 훤히 드러난 틈을 살살 쓰다듬었다. “아응, 오, 오라버니이. 이, 이러시면 안돼요. 하, 하읏.” “아, 아니에요오. 실은 이러셔도 되요오. 네, 네에. 마구 해주세요.” “읏! 죄, 죄송해요. 솔이는 못된 아이에요오. 못된 아이니 오라버니한테 혼나야 해요오, 으응.” ‘뭐?’ 고연주는 순간 기함할 뻔 했지만, 입을 꼭 다묾으로써 밖으로 튀어 나오려던 목소리를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 그녀가 스스로를 위로하는 모습을 보자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도 안솔은 김수현을 애타게 부르짖으며, 자기 위로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상당히 어이가 없었지만, 고연주는 간신히 평정 심을 유지한 채 안솔의 모습을 살폈다. 평소 청순하고 순진무구한 그녀와는 다르게, 지금은 굉장히 자극적인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찔걱, 찔걱, 찔걱, 찔걱. 안솔이 행위를 시작한 이후로,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방 안의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라 있었고 음란한 소리는 연신 울려 퍼지고 있었다. 새벽이라 차가운 공기가 감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주위로 후끈한 열풍이 휘몰아치는 듯 했다. 온 몸에는 땀방울들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고, 처음에는 어느 정도 자제하던 신음 소리도 더욱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있었다. 쉴새 없이 주무르는 새하얀 언덕 정상에는, 이리저리 짓눌리고 있는 연분홍 빛깔의 도드라진 부분이 있었다. 다른 한 쪽에서는 빳빳이 고개를 들고 있었는데, 그녀가 몸을 흔들 때마다 조금씩 흔들렸다. 아래로 시선을 돌리면 티 하나 없을 정도로 말끔한 그녀의 음부가 보였다. 그녀의 가냘픈 중지 손가락은 살짝살짝 내부를 파고 들고 있었는데, 한번 들어갈 때마다 음란한 소리가 남과 동시에 투명한 액이 줄줄 흘러 내렸다. 액체의 양은 제법 많아, 허벅지 안쪽을 타고 내려와 시트를 흠뻑 적실 정도였다. “앙, 앙, 앙, 앙, 앙, 아앙!” 안솔의 숨소리가 조금씩 급박해지더니, 이내 숨을 멎을 정도로 가빠지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듯한 호흡과 점점 주기가 짧아지는 신음 소리. 그리고 어느 순간, 안솔의 손놀림이 멈춤과 동시에 그녀의 입술이 크게 열렸다. “으아아아앙!” 울부짖는듯한 비명 소리가 방 안을 가득히 뒤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뽀얀 엉덩이가 살짝 들리고, 두 다리는 급격하게 오므라들었다. 다리 사이 정 중앙에서는 맑은 액체 몇 줄기가 분수처럼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가 빠르게 잦아들었다. 절정에 오른 것이다. “하아…. 하아….” 안솔은 멍한 얼굴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풀썩 이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은 다시금 침대로 떨어졌다. 살짝 벌린 입가에서 말간 침 한줄기가 흘러 내리고 있었고, 반쯤 뜬 눈에는 몽롱한 빛이 가득했다. “…….” 고연주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수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놀리려는 생각은 가신지 오래였다. 그녀는 이 와중에도 방금 전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었다. 하긴 홀 플레인에 들어온 이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매일 밤 자위를 했다는 남성 사용자의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하긴 여성이라고 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남성을 상대로 그러지 말란 법은 없잖아. 조금 과격한 면이 없잖아 있지만…. 아무튼 나한테 걸린 것을 다행으로 여기렴.’ 아마 이것을 들키게 된다면 분명히 죽을 정도로 창피해 하리라. 조금 이해가 안가는 것들이 있었지만 일단은 넘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고연주는 어서 이곳을 벗어나기로 했다. 이대로 그냥 못 본체하고 아무렇지 않게 아침이나 준비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삐아!” 막 검은 그늘을 일으키려는 찰나 귀여운 비명 소리가 고연주의 귓가를 때렸다. 그리고 곧, 무언가 후다닥 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 비명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침대에서 자신이 있는 곳을 쏘아보는 하나의 시선을 볼 수 있었다. 침대 위에는 어느새 시트로 자신의 몸을 가린 안솔이 있었다. 얼굴은 불안함으로 잔뜩 차올라 있었는데, 그 눈동자는 한쪽 구석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 순간, 고연주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고연주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네. 예전에, 후기로 안솔의 모습과 독자 분들의 멘붕에 대해서 언급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원래 폐허의 연구소 탐험 후 보이려고 했는데 다음으로 미루었었죠. 그리고 또 한번 더 언급하며 절규의 동굴 이후로 미뤘었는데, 또 미루고 말았습니다.(코멘트에서도 보였지만, 쪽지의 대다수가 안솔과 관련한 것이었습니다. ㅜ.ㅠ) 그 날 있었던 일은 이로서 밝혔습니다. 솔직히 모르시는 분들이 많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맞추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아 매우 놀랐었습니다.(지금도 어떻게 맞추셨는지 잘 모르겠어요….) 뭐, 중간중간 복선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말이죠. :) 어, 근데 지금 52분 이네요. 리리플 최대한 빠르게 쓰도록 하겠습니다. 슈슈슉. PS. 쿠폰 주신 분들 정말 감사 합니다. _(__)_ 『 리리플 』 1. 破天魔痕 : 1등 축하 드립니다. 그리고, 이번 회는 제가 기필코 1등을 하고 말겠습니다. 창 여러개 띄워놓고 대기하고 있을겁니다. 승부입니다! 후후훗. 2. 로유진 : 유진아. 응? 8등 했구나. 응. 글을 올리는 작가가 8등이라니, 쪽팔리지도 않니? ㅜ.ㅠ 엉엉. 이번에는 꼭 1등 할게. 그래. 1등 못하면 수요일 연참이다. 헐. 그런게 어딨어. 여깄지. 응? 근데 나 누구랑 대화하니? 3. 미월야 : 그러게나 말입니다. 허허허. 정말 어떻게 하시는건지 궁금한데, 절대로 알려주지 않으시더라고요. ㅜ.ㅠ 4. EyeSeeYou : 크크킄. 오늘 안솔의 모습을 보시고 멘붕하셨을것 같습니다. 5. 시즈프레어 : <전자>에 더 가깝다고 보시면 됩니다. :) 6. hohokoya1 : 하하. 안솔의 문제는 본문에서 말했듯 조금씩 수면위로 떠올릴 생각 입니다. 혹시 이번 회로 불쾌감을 느끼셨다면 미리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 (__) 7. 랜슬럿 듀 락 : 하하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정해 놓았습니다. 결말 부분을 기대해 주세요! 8. 오피투럽19 : 실은 어제 너무 분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기필코 1등을 할 생각 입니다. 기필코요. 창 두 개 띄워놓고 대기할 겁니다. 9. 노루다람쥐 : 헤헤, 감사 합니다. 하하하. 앞으로도 독자 분들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는 내용으로 항상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__) 10. [DeepBLue] : 하하하. 한별이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를 세워 놓았습니다. 과연 그녀는 주인공의 품으로 돌아오게 될까요, 아니면 남을까요, 아니면 새로운 곳으로 떠나게 될까요? 후후훗. 앞으로도 많은 기대 부탁드려요! 11. gkgngh : 하하, 네. 제 3의 눈은 주인공만 갖고 있습니다. 제가 제일 마음에 드는 남자 캐릭터는. 음. 글쎄요. 애매하네요. 한번 고민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작품은, 저도 요즘 많이 읽지는 못하고 있어서요. ㅜ.ㅠ 예전에 읽은 것들은 있는데 제목이 기억 안나요오.(안솔 Ver. 죄송합니다. 퍼퍽!)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평점,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95 / 0933 ---------------------------------------------- Start Inn “이상 아가의 자기 위로에 대한 보고를 끝내겠습니다.” “…….” “아. 참고로 자기 위로란 줄여서 자위, 다른 말로는 수음 또는 마스터베이션 이라고도 할 수 있죠. 흔히 쓰이는 말로는 탁탁탁…. 아, 여자는 춉춉춉 이라는 말이 더 나을 것 같네요.” “그만하셔도 됩니다.” 내가 손을 들며 말하자, 그녀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심란한 마음이 들어 품 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동글동글한 연초 한 대가 손가락 끝에 걸렸다. 고연주 또한 머쓱한 얼굴 이었다. 나름 분위기를 바꿔본다고 농담을 던졌는데 정색하고 반응하자 그런 것 같았다. “음. 하나 더 말씀 드려도 될까요?” “이상한 말만 아니라면.” “실은 그녀가 위로를 하는 중간중간 눈동자를 볼 기회가 있었어요.” 나는 입에 물었던 담배를 다시 뱉었다. 그러고 보니, 고연주는 사람을 평가할 때 항상 눈동자를 보는 버릇이 있었다. 그녀 정도의 감각이라면 들어볼 만한 가치는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다음에 나올 말에 집중했다. “솔직히 저도 고등학생 때 비슷한 행동 한두 번은 해봤어요. 아, 알았어요. 한두 번은 아니고요. 아무튼 그럴 때는 정말 취향이 특이하지 않은 이상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떠올리고 하는 경우가 많아요. 예를 들면 연예인이나, 좋아하는 오빠 정도가 되겠죠.” “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네요.” “그런데, 그 아가의 눈동자를 보면…뭐랄까. 굉장히 애틋해 보였어요.” “애틋하다라는 말은 섭섭하고 안타까워 애가 타는듯하다 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아주 이상하다고 볼 수는 없는 것 같은데요.” 고연주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나 또한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좋게 돌려 말할 필요는 없으니, 있는 그대로 말해 달라는 무언의 시위였다. 그런 내 눈빛을 읽었는지, 고연주는 한숨을 폭 쉬고는 말을 이었다. “휴. 좋아요. 정말 좋게 말해서 애틋하다고 했어요. 솔직히 말씀 드리면….” “…….” “굉장히 절박해 보였어요. 자꾸만 자기 자신을 비하하고 스스로 학대하는 모습도 종종 보였고요. 있는 그대로 말씀 드려보면 정신병자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정신병자라….” 나는 의자 뒤로 몸을 깊게 묻었다. 그리고, 뱉었던 연초를 다시 주워 들었다. 나 또한 그녀가 정상인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하게는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스무 살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애 짓을 할 리는 없잖은가. 그것을 제외한 다른 것들이 정상인 같아 보이게 만들 뿐. 물론 처음에는 컨셉 이라고도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후 보아온 그녀의 행동은 항상 똑같았다. 목숨이 걸린 홀 플레인 안에서는 어지간해서는 그러기 힘들 텐데. 그렇다면 정말로 그녀의 성격에 문제가 있다는 소리였다. 그저 한숨만 나올 뿐 이었다. “많이 심란하신가 봐요?” “글쎄요. 그냥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요.” “호호. 그렇다고 너무 무겁게 생각하는 것도 좋지 않아요. 정 뭐하면 제 능력을 사용해서라도 도움을 드릴 수 있는데요?” “거듭 말씀 드리지만, 그 능력은 정신 오염 수준의 능력 입니다. 적에게 쓰는 것은 상관 없어요. 하지만 아군 특히 안솔 같이 면역이 거의 없는 애한테 쓰면 독약이나 다름 없는 능력 입니다. 절대로 불가 합니다.” 고연주가 말을 꺼내자마자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솔직히 조금 혹한 마음도 없잖아 있긴 했다. 트라 우마도 본인이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을 때야 어떻게든 해결 방법을 내볼 수 있다. 그러나 안현이나 안솔처럼 속에 꽁꽁 싸매두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면 상황이 굉장히 어려워진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신에 영향을 주는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다. 한번 통로가 뚫리면, 그 흔적이 몸에 남아버린다. 그 말인즉슨 정신에 영향을 줄수록 다음에 침투하기가 더욱 용이해진다는 소리였다. 내 대답을 들은 고연주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나 입술이 살짝 나온 것을 보니 약간 속이 상한 듯 보였다. 나는 그제서야 앗 차 싶어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지금 보니 필요 이상으로 인상도, 목소리도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녀는 고생해서 정보를 모아오고, 나름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래도 괜한 화풀이를 한 듯싶었다. “흠. 아무튼 안솔에 관한 문제는 차차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고생 하셨습니다. 가져오신 기록은 제가 천천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만 들어가서 쉬셔도 됩니다.” “흐응. 정말 쉬어도 되나요?” 고연주는 가벼운 콧바람을 내며 나를 흘겼다. 고개를 한번 주억이며 “물론 입니다.” 라고 대답하자 그녀의 표정이 한층 미묘하게 변했다. “하긴 요 며칠 동안 고생했으니 재충전이 필요한 시점이죠. 그럼 정말로 허락한 거에요?” “사용자 고연주. 오늘따라 왜 이러시죠.” “아니에요~. 그럼 나 쉬러 갈게요~.” 고연주는 양 손을 흔들며 대답 했다. 나는 불 붙인 연초를 한 모금 빨아 들인 후, 세게 내쉬었다. 일단 안솔의 문제에 대해 감은 잡은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려면 앞으로 기회가 오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금 기록으로 시선을 내리려는 찰나였다. “휴. 그럼 조금 쉬어야겠다.” “응?” 갑작스레 옆에서 무언가 불쑥 솟아 오르더니, 그것은 내 품으로 파고 들어왔다. 흘끗 눈동자를 내리자, 어느새 의자에 걸터앉은 내 엉덩이를 반쯤 밀친 채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고연주를 볼 수 있었다. 가장 좋은 방으로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싸구려 여관이라서 그런지 의자는 불안한 소음을 내며 삐걱거렸다. “뭐 하시는 거죠.” “왜요. 쉬라고 했잖아요. 나는 이게 쉬는 거에요. 아아. 온 몸에 활력이 도는 것 같아.” “…침대에 누워서 쉬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어머. 저야 언제나 환영이죠.” “…….”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오늘 밤만 지나면 목표 했던 일주일이라는 시간 중 엿새라는 지나게 된다. 더불어 구조 활동도 거의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물론 아직도 통신이 간간히 들려온다고 하지만, 끝물이라고 봐도 무방 했다. 바바라는, 아니 북 대륙은 현재 격동 중 이었다. 나를 비롯한 클랜원들이야 별 상관 없으니 무사 태평 이었지만 정작 피해를 입은 클랜들은 난리를 치르고 있었다. 고연주가 가져다 준 정보에는 수많은 사항들이 나름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 대부분은 내 예상과 맞아 떨어졌다. 그녀의 보고서는 나를 조금 웃기게 만들었는데, 왜냐하면 내게 편지를 보내는 형식으로 보고서를 작성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현황을 잠시 살펴 본다면. (원정 참가 현황) 1. 황금 사자(북 대도시 바바라 대표 클랜) : 1000여명 정도 원정 참가. * 특이 사항 : 10강 세 명 참가 했어요. 그 중 한 명은 생존 확보한 상태고요(참고로 황금 사자 클랜의 로드에요.). 그러나 굉장히 위중한 상처를 입었고,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라고 해요. 지금은 정신을 잃은 상태로 치료를 받는 것 같아요. 나머지 둘 중 한 명은 사망 확인 했고, 다른 한 명은 실종 됐다고 하네요. 1. SSUN(서 일반 도시 헤일로 대표 클랜) : 200여명 원정 참가. * 특이 사항 : 앞선 부랑자 말살 계획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어요. 클랜이 거의 반 토막이 났죠. 그 와중에 무리해서 남은 전력 중 절반에 가까운 200명을 참가시켰다고 하는데, 참 멍청하네요. 아무튼 얘네들도 10강 한 명 참가했고, 사망 했어요. 2. 그믐달(서북 소도시 도로시 대표 클랜) : 380여명 원정 참가. 3. 발해(서남 소도시 베스 대표 클랜) : 400여명 원정 참가. * 특이 사항 : 10강 두 명이 참가 했어요. 그리고 사망 했어요. 쯧쯧. 1. 북녘(북 일반 도시 파멜라 대표 클랜) : 500여명 원정 참가. 2. 스텔라(북동 소도시 뮬 전 대표 클랜) : 290여명 원정 참가. * 특이 사항 : 이번 원정에 사활을 걸은 클랜이에요. 너도밤나무 클랜에게 인수 인계를 해준 클랜이죠. 모든 클랜원을 이끌고 참가 했다고 해요.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대부분 선발대에 섞였다고 하는데…. 전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인원 비율로 따지면 거의 수위를 다투는 피해를 입었어요. 3. 멸화랑(북서 소도시 몬타나 대표 클랜) : 330여명 원정 참가. (그 외 유명 우호 클랜 현황) 1. 아이리스 : 150여명 원정 참가. 2. 아크로스 바이노 : 220여명 원정 참가. 3. 하늘지기 : 100여명 원정 참가. 특이 사항으로 참가한 10강 한 명 사망 확인 했어요. 4. 즈믄가락 : 150여명 원정 참가. 5. 미르 : 100여명 원정 참가. 6. 한울 : 150여명 원정 참가. 7. 이향곡예 무악 단 : 100여명 원정 참가. 8. 매지 구름 : 140여명 원정 참가. 9. 높새바람 : 190여명 원정 참가. 10. 사울 아비 : 210여명 원정 참가. 11. 별빛 : 90여명 원정 참가. <결과 : 대략 4700명의 정예 사용자가 강철 산맥 원정 참가한 대규모 원정 이었어요. 기타 산하 클랜원들을 합치면 5000명을 훌쩍 넘을 정도고요. 부랑자 말살 계획부터 따지면, 수치상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은 클랜은 황금 사자와 SSUN 이에요. 황금 사자는 기존 1400명의 인원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번 원정으로 전력이 극심하게 떨어졌어요. 400명을 살짝 웃돈다고 하니 일반 도시 대표 클랜보다도 못한 수준이죠.> <그리고 현재 생존자 현황은 약 500명이 채 되지 않는다고 해요. 세세한 결과는 집계할 수 없었어요. 그러려면 시간이 배로 걸리거든요. 어쨌든 결과적으로 참가 인원의 10%도 생존하지 못했다고 하니 가히 어마어마한 피해라고 볼 수 있을 거에요. 구조 요청은 계속 들어오고 있지만 그것도 점차 뜸해지고 있고요. 제 예상대로라면 생환 비율은 10%를 간신히 넘거나 아니면 바로 아래에서 멈출 것 같아요.> 이상이 고연주가 가져온 강철 산맥 원정 참가 클랜들의 현황 이었다. 세세한 피해는 집계할 수 없었지만, 총 결과를 보면 대강이나마 가늠할 수 있다. 이로서 미래는 비틀리지 않았다. 피해 상황도 1회 차 시절과 얼추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물론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었다. 그 중 가장 크게 달라진 한가지를 꼽으라면 바로 10강 중 한 명이 생환했다는 점 이었다. 내 기억에 따르면, 분명 참가한 10강 중 3명이 생환을 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모조리 사망, 또는 실종 판정을 받았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충분히 있을법한 일이었지만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그 사용자가 황금 사자 클랜의 로드 사실 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특이 사항을 보자 납득할 수 있었다. 살아서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는 굉장히 위급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 그 부분은 조금 더 자세히 알아 봤는데, 팔 하나가 아예 날아가 버리고 온 몸 곳곳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던가. 당장 사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상처였다고 한다. 일단 바바라로 들어온 이상 목숨을 잃지는 않겠지만 정신을 잃은 걸로 보아 내외로 받은 충격이 상당한 듯싶었다. 이로서 웬만한 일은 다 끝났다고 볼 수 있었다. 4일~5일 이후로 구조 요청이 들어온 것은 단 두 번에 불과했다고 한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현재 클랜들의 갈등이 생각보다 빠르게 높아져가고 있다는 사실 이었다. 참가 클랜들은 비 참가 클랜들에게 강철 산맥 내부의 수색을 원하고 있었지만 당연히 허락할 리가 없었다. 4, 5년 전 바바라를 공략할 때 편성했던 원정대가 근 3천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거의 배에 가까운 5000명을 넘는 전력을 편성 했는데, 강철 산맥을 공략하지 못했다. 아니 못한 정도가 아니라 일주일도 안되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물러나고 말았다. 아무리 구조를 위한 목적이라고는 하나 강철 산맥이 일부 밝혀진 이상 목숨을 걸고 들어가고 싶어하는 사용자는 없었다. 그런 만큼 비참가 클랜들은 “우리들은 할 만큼 했다. 이제 어느 정도 추슬렀을 테니 정 하고 싶으면 너희들이 직접 들어가라.” 라는 말로 응수했다. 당연히, 그 말에 참가 클랜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단 하나의 사실만 제외하고 모든 게 예정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현재 바바라의 내부가 심상치 않은 것을 보니 아마도 내일쯤이면 황금 사자 클랜의 소집령이 나올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내일 소집령을 듣고 첫 반응을 본 후 떠나기만 하면 되는 일. 나는 기록을 접고 목을 여러 갈래로 비틀었다. 창 밖을 보니 어둑한 땅거미가 창문을 통해 비쳐 들고 있었다. 보고서를 탐독하고 많은 생각들을 하느라 몰랐는데 어느새 새벽을 맞은 것 같았다. 내일은 조금 바쁠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이곳은 뮬이 아니었고,괜히 달밤에 나가서 체조하는 것 보다는 억지로라도 자는 게 백배 이득 이었다. 그렇게 나는 침대에 몸을 누인 후 억지로 눈을 감았다. ………. ………. ………. 웅성웅성. 잠깐 선잠이 든 것 같은데, 갑작스레 들리는 소란에 눈을 뜨고 말았다. 하급 여관이라서 그런지 방음이 제대로 되지 않아 밖의 소란이 그대로 들어오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방문을 열고 나서자 수 많은 사용자들이 다들 큰 소리를 내며 계단을 달려 내려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흥분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새로운 5월의 시작 입니다. 아, 정말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문득 군인 이었던 시절이 생각 납니다. 그때는 정말 시간이 안 갔는데, 정말 사람이 느끼는 것에 따라 다른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럼 이번 회도 부디 재미있게 감상해 주세요. (__) 『 리리플 』 1. 미월야 : 오호. 1등 축하 드립니다. 이제는 정말 눈이 @_@가 될 정도로 누가 1등을 하실지 예측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 2. 쿠로시온 : 오랜만에 뵈어요~. :) 다시 노블 이용권 끊으신것 축하 드립니다. 하하. 요즘 1등 코멘트 잘하는 분들이 우후죽순 나타나고 계십니다. 쿠로시온님도 예전에는 강자셨지만, 지금은 쟁쟁한 분들이 너무 많아요. ㅜ.ㅠ 3. [엘리시움] : 저 1등 한번 해보고 싶어요. 자정 연재때요. ㅜ.ㅠ 와. 정말 마음 먹고 했는데 제가 못 할 줄은 몰랐거든요. 정말 ㄷㄷ 해요. 4. EyeSeeYou : 쿠폰 감사 합니다. (__) 어, 멘붕 하실줄 알았는데 왠지 모르게 더 기뻐 하시는 것 같은…. 5. 성십자 : 하하하. 네! 두 편 올렸습니다! 연참 입니다! 약속을 지켰습니다. :D 6. 감자띱 : 흑, 과제가 너무 많아요. But. 이제는 하나만 남았다는 사실. ㅎㅎㅎㅎ. 이번 주만 어떻게든 버티면, 다음 주에는 분명 쉴 수 있을거에요. 암 그렇고 말고요. 과제가 더 나오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말이죠. ㅜ.ㅠ 7. 랜슬럿 듀 락 : 아니! 도대체 몇 분이서 보시는 건가요! 그러고보니 코멘트도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 납니다. ㅋㅋㅋㅋ. 8. xornrdnjsrnr : 제가 잠시 착각 했던 것 같습니다. 회상 부분은 삭제 및 수정 했습니다. 조언 감사 합니다. (__) 9. 가을왕 : 첫 코멘트 감사 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코멘트 남겨 주세요! :) 10. 염옥 : ㅜ.ㅠ 죄송해요. 제가 글을 의도적으로 빠르게 쓰기는 힘들어요. 그러면 말씀대로 많이 써야 하는데, 110화 후기에 썼듯이 정말 하루에 한 편 올리는 것도 힘에 부쳐서요. 아무튼 소중한 조언 감사 합니다. 최대한 스트레스 받지 않으시도록, 빠르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은 빠르게 가보도록 하고 여유가 되는대로 연참을 하겠습니다. _(__)_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평점,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96 / 0933 ---------------------------------------------- Opportunity to Come “야, 너 들었어? 이번에 또 열렸다는데?” “정말로? 와 진짜 대~박이다. 완전 믿기지가 않는데. 너무 빠른 거 아니야?” “그러니까. 음. 그 때 이후로 한 6개월 지났나? 나 2년 전에 홀 플레인으로 들어온 이후로 이렇게 빨리 열린 거는 처음 보는 것 같아.” “나도. 그나저나 어떡해. 가뜩이나 요즘 어수선한데, 참 애매하다. 그렇지?” <아침 햇살> 여관을 나서는 순간 보이는 풍경에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바바라의 거리는, 한밤 중 임에도 불구하고 사용자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홀 플레인에서 잠의 의미는 굉장히 중요하다. 탐험으로 지친 몸을 다시 원상태로 회복시켜주는 가장 유효한 요인 중 하나였으니까. 이 시간에 이만큼의 사용자들이 모이는 것은 꽤나 드문 일 이었다. 나는 잠시간 생각을 정리하다가 옆에서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고 있는 두 명의 사용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둘 다 얼굴은 그럭저럭 평균으로 볼 수 있었는데, 실력이 썩 좋지는 못한 듯 허름해 보이는 장비들을 걸치고 있었다. 그래도 일단 전투 장비들을 갖고 있는 걸로 보아 생계 형 사용자는 아닌 듯 보였다. 나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다가가, 그 중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사용자에게 말을 걸었다. “잠시, 말씀 좀 물어도 될까요?” “악, 깜짝 아. 아 뭐에요? 갑자기 뒤에서….” 양 갈래 여성은 말 그대로 깜짝 놀란 얼굴로 신경질을 내며 몸을 돌렸다가 이내 내 모습을 보고는 말을 멈췄다. 이윽고 그녀의 눈동자가 내 위 아래를 전부 훑더니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조금의 시간이 흘렀다. 시선이 내 얼굴에 머무르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좁혀졌던 미간이 다시금 서서히 풀리는 걸 볼 수 있었다. “네. 어떤 것이 궁금하세요?” “저, 저기요. 제가 대답해 드릴게요. 저한테 물으세요.” “야 계집애야. 나한테 물으셨거든. 좀 짜…가만히 좀 있어줄래?” 양 갈래 여성은 나에게는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그리고 같이 이야기 하던 여성에게는 뾰족한 목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더니 이내 내 옆으로 다가와 은근슬쩍 팔을 잡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제 3의 눈을 발동 시켰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다혜(2년차) 2. 클래스(Class) : 일반 검사(Normal Sword Runner)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죽은 물고기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7) 7. 신장 · 체중 : 161.3cm · 58.7kg 8. 성향 : 중용 · 음란(Neutral · Obscene) [근력 51] [내구 56] [민첩 47] [체력 49] [마력 61] [행운 37] 별 볼일 없는 능력치였다. 아무런 미련 없이 정보 창을 닫자, 어느새 내 옷을 살살 쓰다듬고 있는 김다혜를 볼 수 있었다. 기분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그녀는 황홀한 얼굴로 허리띠를 잠깐 만지더니 이내 코맹맹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와. 되게 부드럽다. 이거 어디서 얻으셨어요? 딱 봐도 엄청 좋아 보이는데. 실력이 되게 좋으신 것 같아요.” “…….” “어머, 내 정신 좀 봐. 묻고 싶은 것이 있으셨다고 하셨지요? 호호.” 문득, 홀 플레인에서는 대체로 남성 사용자보다 여성 사용자의 눈썰미가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내가 입고 나온 장비는 <하늘의 영광>, <태양의 영광>, 그리고 <일월신검> 이었다. 셋 모두 나름대로의 멋을 간직하고 있어, 절대로 저급한 장비들이 낼 수 없는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내 허리띠를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슬쩍 치우고는, 입을 열어 궁금한 점을 물었다. “다른 건 아니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이렇게 소란스러운지 궁금해서요.” “아~. 네. 포탈이 열렸거든요.” “포탈이요?” “네. 시작의 여관이 포탈이 열렸다고 하던데요. 그것도 이번에는 강도가 굉장히 진해서, 꽤 넘어올 것 같나 봐요. 저번에 열렸던 게 6개월 전이니 요 몇 년을 보면 엄청 빨리 열린 거죠.” 강도란 그 푸른 막의 두께 및 빛깔을 말하는 것 같았다. “인원수랑 두께 및 빛깔은 별 상관 없는데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급작스럽게 머리를 지배해오는 생각들에 곧바로 몸을 돌려버렸다. 뒤에서 “잠시만요!” 를 외치며 나를 잡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부름에 대답해 줄 여유는 없었다. 나는 달렸다. 포탈이 열렸다는 소리를 들은 순간 갑자기 급한 마음이 들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사용자들의 틈을 비집어 파고들고, 다음으로 번화가의 대로를 질주했다. 라이트 스톤을 박아 넣은 가로등 불빛 사이를 지나 다리를 휘돌자 이번에는 사용자들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는 광장이 보였다. 그곳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차고는 곧바로 방향을 돌렸다. 억지로 파고 들어가지 못할 것도 없지만, 지금은 발 빠르게 달리기라도 해야 이 다급함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다. 곧이어 바바라의 환한 거리는 사라지고,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거리의 풍경이 들어왔다. 상대적으로 사용자들이 몰리는 번화가에 비하면 이곳은 비교적 한산 했다. 빛이라고 해도 가끔 상점으로 보이는 건물에서 비추는 야해 보이는 불빛들이 전부였다. 주변 공기는 코를 톡 쏘는 역겨운 악취들로 가득 했고, 땅 바닥은 더러웠다. 달리는 도중에도 사람 냄새, 맥주 냄새, 마르고 젖은 지푸라기 냄새, 진흙 냄새, 남성과 여성들의 살 내음 등이 뒤섞여 내 후각을 연신 자극했다. 사용자들의 수는 훨씬 줄어들어 진로에 방해를 받는 일이 줄어 들었지만 얼른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가진 민첩 능력치의 전력을 이용해서 달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주변 풍경들은 나를 매우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확실히 도시의 규모가 있어서 그런지 계속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시작의 여관까지는 아직 약간의 거리가 남아 있었다.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달리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시작의 여관이 포탈이 열렸다. 그 일 자체만 놓고 보면 절대로 큰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 마음이 이리도 다급한 이유는 미래가 상당히 비틀렸기 때문이다. 원래 이 시기에는 시작의 여관의 포탈이 열리지 않는다. 잘 생각해보면, 다음 차수 신규 사용자들이 들어오는 때는 1차 내전이 마무리 되고 난 이후여야 했다. 왜 하필 지금 포탈이 열린 걸까.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맴돌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곧이어 불쾌한 냄새들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암흑의 거리를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는 반증 이었다. 그리고 암흑의 거리를 완전히 벗어난 후에야 나는 시원한 밤 공기를 폐부 깊숙이 집어 넣을 수 있었다. 조금은 숨통이 틔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밤 거리의 고요함은, 멀리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에 다시금 깨져가고 있었다. * “모두 안으로 들어가지 마세요! 선 넘지 마시라고요!”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 야?” “뭐라고요? 지금 바바라에서 감히….” “조용히들 하십시오! 포탈은 방금 열렸습니다! 푸른 막이 걷히려면 아직…!” 눈 앞에, 시작의 여관이 있었다. 그리고 양 갈래 여성 사용자의 말대로 여관은 푸른 막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멍한 눈길로 여관을 바라보다가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관 <아침 햇살>이나 주변 거리에서는 볼 수 없었던, 나름 수준 있어 보이는 사용자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감히? 야. 얘 지금 감히 라고 했냐? 와. 어이없네. 푸핫.” “방금 전 말씀은 흘려 들을 수 없네요. 지금 바바라에서 황금 사자 클랜에게 적대 하겠다는 건가요?” “놀고 있네. 원정 실패의 주범인 주제에. 너희들이 지금도 뭐라도 되는 줄 아냐? 어제까지만 해도 구조해 달라고 징징대던 놈들 맞아?” “뭐라고요? 이….” 걸걸한 남성의 목소리가 터지자 근처에 있던 사용자들은 왁자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 반해, 왼 가슴에 황금 사자 문양을 달고 있는 여성과 부근에 있는 사용자들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 그들을 보자 확실히 갈등이 예상보다 빠르게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이유를 10강의 사망에 두고 있었다. 홀 플레인, 그 중 북 대륙 내에서 가지는 10강의 존재감은 생각 이상으로 거대하다. 내가 고연주를 영입한 것과, 차후 10강이 될 차승현과 반다희를 살해한 것에 큰 의미를 두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10강은 개인이 가지는 무력은 차치하고서라도 상징성에 큰 의미를 갖는다. 단순히 능력치만 좋다고, 좋은 클래스를 갖고 있다고 10강이 되는 게 아니었다. 그 둘은 필요 요소일 뿐. 10강이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개인적으로 명성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용자가 어떤 업적을 이뤘는지, 그리고 어떤 난관을 헤쳐 왔는지에 대해서 사용자들이 공감하고, 인정할 때 그 때야 비로소 10강의 반열에 들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초반부터 엽기적인 능력치로 단시간 안에 엄청난 활약을 펼쳐 기존의 10강을 밀어내는 경우도 봤지만, 그것은 드문 일 이었다. 1회 차 시절 그런 식으로 10강이 된 사용자는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번 원정에 참여한 10강의 숫자는 총 일곱 명. 그 중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망 확인 또는 실종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한 명도 거의 초주검 상태로 정신을 잃었다고 하니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온전히 남아있는 10강은 총 세 명 이었고, 고연주를 내가 갖고 있으니 남은 두 명은 비 참가 클랜들에 있다는 소리였다. 1회 차 시절 살아 돌아온 10강은 세 명 이었다. 즉 10강을 보유한 숫자에서는 여전히 참가 클랜들이 앞서고 있었고, 그 상징성이 살아 있어 조금이나마 억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2회 차는 그 상징성이 완벽하게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더불어 기본 전력에서도 확연히 앞서자 그 동안 속에 숨겨 왔던 불만 어린 이빨을 서서히 드러내는 것이리라. 분위기는 점점 더 살벌해지고 있었다. 서로간에 무기를 휘두르는 극단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오고 가는 시선들에는 진한 살기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나는 여관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어 헐레벌떡 달려오기는 했지만 지금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정말로 일어난 사실을 확인하고, 받아 들이는 것뿐. 안 그래도 안솔 때문에 마음이 심란한데 한층 더 복잡하게 얽히는 것 같았다.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습관적으로 품 속을 더듬었는데 평소에는 걸리던 연초가 걸리지 않았다. 기분이 더욱 우울해졌다. 그래도 혹시 몰라 속 안으로 더욱 손을 집어넣자 다행히 얇은 막대기 몇 개가 손에 걸렸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곧바로 연초를 입에 물었다. 사용자들 몇몇은 시작의 여관의 포탈이 6개월 만에 불이 들어온 것에 대해 다들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이번에 원정 실패로 부족해진 사용자들의 수를 보충하기 위해서라는 등 참가 클랜들을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간간히 들을 수 있었다. 솔직히 6개월 만에 포탈에 불이 들어온 것은 그리 놀라운 건 아니었다. 10년의 활동 기간 중에서 그런 일은 몇 번 겪어 봤으니까. 아마 역대 급으로 가장 주기가 짧았던 게 3개월 이었던가? 지금 내 혼란의 중심은 시기의 애매함 때문 이었다. 당장 내일에 황금 사자의 소집령이 나올지도 모르는데, 참 적절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포탈이 열렸다. 이게 앞으로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었다. 시작의 여관이 홀 플레인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대단히 높기 때문이다. 한동안 죄 없는 연초를 쭉쭉 빨아 들이던 나는, 일단 돌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사용자들의 갈등도 누군가의 중재로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고 여기 더 남아 있어봤자 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대강 마음을 가다듬고 몸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우연히 눈에 들어온 푸른 막을 보는 순간, 내 머리 속에 번쩍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제 3의 눈. 사실상 현세의 어떤 것도 제 3의 눈을 속일 수 없으니 어쩌면 시작의 여관에 대한 정보를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심호흡을 한 후 숨을 진정 시켰다. 약간이라도 좋았다. 조금의 정보만 알 수 있다면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시킨 상태로 푸른 막을 응시 했다. 그리고 그 순간, 곧 허공으로 떠오르는 하나의 메시지를 볼 수 있었다. 『시작의 여관(Start Inn)』 통과 의례 참가 인원 : 587명 통과 의례 생존 인원 : 252명(현재 7일차.) 통과 의례 사망 인원 : 335명(현재 7일차.) 현재 완료한 인원 : 2명(5일차 완료.) 생존 인원과 5일차 완료라는 정보를 읽는 순간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물고 있던 연초가 입에서 슥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후훗. 소제목을 정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번 챕터의, 그리고 향후 챕터의 의미를 잘 살릴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이 들었죠. ㅜ.ㅠ 아 그리고. 193회 안솔의 내면을 보고 불쾌 하셨던 분들에게는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 분명히 그냥 빠르게 넘어갈 수도 있는 부분 이었지만, 세세한 표현으로 인해 많이 거슬리신것 같네요. 다만, 그 부분을 기대하는 분들도 많이 있고 저 또한 예전에 후기로 한 약속이 있었던터라 그렇게 넘어가기는 조금 그랬습니다.(다만 해당 행위에 대한 내용 자체는 원래 짚고 넘어갈 생각 이었습니다!) 독자 분들의 하해와 같은 양해를 구합니다. _(__)_ PS. 선작, 추천, 코멘트, 평점, 쿠폰 쏴주신 분들. 모두 정말 감사 드립니다. :D 『 리리플 』 1. 쿠로시온 : 오호라. 요즘 들어 많은 강자 분들이 출현 하셨는데, 쿠로시온님이 위엄을 보여 주시는것 같습니다. 마치 내가 바로 원조 1등이다! 이러시는것 같군요. 껄껄껄! 1등 축하 드려요. :) 2. 청홍의불꽃 : 에, 약속을 해서 말이지요. 코멘트 1등을 못하면 연참을 하겠다는 약속을 말이죠. 허허허. 다시는 그런 객기(?)는 부리지 않으렵니다. 3. juan : 아, 아닙니다. 둘은 정신 적인 교감과 플라토닉한 에, 그러니까 가설라무네. 둘이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큰 만족감은 느꼈을 겁니다! 네. 분명히요.(?) 4. dbgkgus : 쿠폰 감사 합니다. (__) 슬슬 연참 모드도 발동 시켜야죠. 후훗. 절단 마공은 웬만큼 익힌것 같으니 조만간 연참 신공을 익히도록 하겠습니다. :) 5. hohokoya1 : 감사 합니다. 하하하. 아. 한별이는 곧 나옵니다. 곧요. 아마도 곧 나올 챕터에서 주인공이랑 주구장창 부딪치게 될 예정 입니다. 크크. 6. 플룻 : 이번 회를 보셨으면, 나름 감을 잡으셨을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한별이는 분명히 만나게 됩니다. 어떤 형태로든 말이죠. :) 7. 헨젤과그랬데 : 쿠폰 감사 합니다. (__) 이번 주말 연참의 소환에 응하도록 하겠습니다. 껄껄. :D 8. 랜슬럿 듀 락 : 아니! 또 다른 자아라니요! 도대체 몇 분이서 사용하시는 건가요! 한 분은 대단히 날카로우셨던것 같은데, 어느분이신지 모르겠어요. ㅜ.ㅠ 9. 흑선풍이규2 : 즐거운 오후를 맞이 하셨다니 다행입니다. 부디 이번 회로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10. 카신엠 : Yes. 가능 합니다. 예를 들어 보면, 비비앙을 처음 얻었을 때를 생각 하시면 됩니다. 그때 그녀의 마력 및 기타 능력치들은 -(마이너스)가 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평점,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97 / 0933 ---------------------------------------------- Opportunity to Come 조금씩이기는 해도, 도시는 고요함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되찾아가는 도중일 뿐 이었다. 여전히 거리의 소란스러움은 남아 있었다. 대로 끄트머리에 있는 주점 앞을 지나자 삼삼오오 모인 사용자들이 서로 술잔을 부딪친다. 그러면서 열띤 토론을 벌이는걸 보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애써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잠이나 자는 게 더 이득일 텐데, 라고 생각하며 혀를 찼겠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직 하나의 사실만이 내 전신을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 <시작의 여관>의 포탈이 열렸다. 홀 플레인에서, <시작의 여관>에 대한 중요성은 두 말하면 입 아플 정도로 높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대륙 전체로 보든 클랜 내부의 시각으로 보든 신규 사용자들의 출현은 대단히 민감한 사항이었다. 많이 오든 적게 오든 들어오는 사용자들 중에서 최소한 한 명 이상은 높은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북 대륙에서 소소한 농담으로 가끔 던지는 말이 하나 있다. “잘 키운 사용자 한 명, 열 명의 사용자 안 부럽다.” 물론 물량도 주요한 전략이 될 수 있지만, 어중이떠중이 열 명 보다는 제대로 된 한 명의 사용자가 훨씬 낫다는 소리였다. 조금 경우가 다른 극단적인 예일지 몰라도, 멀리 볼 것도 없이 나를 예로 들 수 있다. 막 <아침 햇살> 여관을 나왔을 때 만났던 양 갈래 머리를 했던 여성 사용자. 이름이 김다혜라고 했던가? 그 정도의 사용자 100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 하나를 당해낼 수 없다. 가능성 높은 신규 사용자를 영입 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건 나도 들은 얘기에 불과한데, 머나먼 과거 즉 사용자 아카데미가 설립하기 전에도 홀 플레인은 존재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때는 사용자들이 지금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많이 들어 왔다고 하더라. 심지어 통과 의례도 없었던 때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때는 천명이고 이천 명이고 들어온 시절도 있다고 하니 현재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 이었다. 물론 홀 플레인의 초기 시절에 그랬을 거라고 추측할 뿐, 산 증인이 없는 구전 되는 이야기들 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포탈이 열리는 주기도 길어지고 있었고, 들어오는 사용자들의 수도 급격히 하향세를 타는 추세였다. 그런 만큼 신규 사용자들의 가치는 높을 수 밖에 없다. 초반에는 적응을 위해 조금 엄하게 잡는다고 해도 후반으로 갈수록 잘 대해주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휘이잉. “…….” 문득 고개를 들자 순한 밤바람이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휘감아 들었다. 바람을 맞자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어지러움이 조금은 쓸려 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뱉은 후 걸음 속도를 높였다. 곧게 늘어서 있는 가로등 사이를 지나고, 아까 헐레벌떡 달렸던 다리를 지나쳤다. 바람을 맞으며 나는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자 잠시 잃어버렸던 이성을 조금이나마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느린 걸음으로 바바라의 밤거리를 걸으며, 방금 전 제 3의 눈으로 봤던 <시작의 여관>에 대한 정보를 되새겼다. 『시작의 여관(Start Inn)』 통과 의례 참가 인원 : 587명 통과 의례 생존 인원 : 252명(현재 7일차.) 통과 의례 사망 인원 : 335명(현재 7일차.) 현재 완료한 인원 : 2명(5일차 완료.) 생각해보자. <시작의 여관>은 총 5채가 있다. 그리고 한 채당 평균 열 명에서 서른 명 가량 생존자가 나오는 것이 일반적 이었다. 그 말인즉슨 최근의 수치들을 기준으로 잡으면, 대략 100명 내외로 사용자들이 홀 플레인에 새로 들어온다는 소리였다. 이번에는 통과 의례로 시선을 돌려보자. 통과 의례의 통과 조건은 총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7일 안으로 워프 게이트로 도착하거나, 아니면 7일을 버티거나. 총 587명이 참가한 통과 의례는 현재 7일이 지난 상태였고, 생존 인원은 252명 이었다. 무려 252명이고, 그 중 2명은 5일차에 워프 게이트를 통과했다. 7일차가 넘었으니 아무리 못해도 200명 이상은 들어올 것이다. 무엇보다 2명은 5일만에 사용자의 자격을 증명 했다. 가히 놀랄만한 일 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보스 몬스터의 부활 여부에 따라 상황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세라프가 그랬다. 원래 통과 의례의 보스 몬스터는 잡을 수 없는 존재라고. 최소 수명 이상의 사용자들의 희생을 전제로 도망쳐야만 뚫을 수 있다고. 보스 몬스터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252명이 살아 남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보스 몬스터가 없으면 통과 의례의 난이도가 굉장히 낮아지니까. 두 명이 5일차에 완료 했다는 사실도 납득할 수 있고.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7일이 지나도록 고작 두 명만 워프 게이트를 통과 했다는 사실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있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의문투성이로 변한다. 252명이 살아 남기도 버거울 텐데, 5일차에 완료한 사용자들도 나왔다. 물론 희생을 전제로 도망쳤을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지만, 고개가 갸웃거려짐은 어쩔 수 없었다. 아니면 보스 몬스터를 상대할 모종의 방법이 있었다든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현실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 방향으로 생각을 해봤지만 어느 방향이든 걸리는 한두 개의 결점이 있었다. 완전한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거기다 작금 홀 플레인의 흐름까지 맞물리자 다시금 머리가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억지로 진정시켰던 마음에 불안감이 재발했다. 강박 증이 도진 것이다. 나는 계획을 세우는 것을 상당히 좋아한다. 불가피할 때는 어쩔 수 없지만,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마음의 편안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일들이 나올 경우에는 괜히 짜증이 치솟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답답한 걸지도 모른다. 결국에는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대비할 수 밖에 없다. 비틀린 미래가 다가오면, 그 비틀림을 어떻게든 내게 이로운 방향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여관 <아침 햇살>에 도착했다. 연초를 한 대 피우고 들어갈까, 아니면 그냥 들어갈까 고민이 들었다. 품 속으로 손을 집어 넣고 뒤적거리며 나는 꾸준히 여관과의 거리를 줄였다. 그때였다. 여관의 입구 앞에서 낯설지 않은 한 명의 사용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간신히 잡은 연초를 놓은 후 더욱 거리를 줄였다. 그곳에는 얇은 가운을 입고 양 팔을 감싸 안은 채 주변을 서성이는, 단발머리의 여성이 보였다. 그 여성의 정체는 바로 정하연 이었다. “하연.” 손을 들어 부르자 하연은 깜짝 놀란 얼굴로 몸을 돌아보았다. 곧이어 내 얼굴을 확인 했는지, 그녀는 얇은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앗…. 수현. 지금 오셨군요. 밖에 다녀 오셨나요?” “네. 혹시, 기다리셨나요?” “그냥…. 보이시지도 않고, 조금 걱정도 들었고요.” 내가 걱정을 받을만한 군번은 아닌데. 그러나 누구의 걱정을 받는 기분은, 의외로 썩 나쁘지 않았다. “잠시 소란이 있었거든요. 상황 좀 확인하고 왔어요.” “아. 저도 들었어요. 시작의 여관 포탈이 열렸다고 하던데요.” “네. 하연도 들으셨군요. 휴우.” “…….” 그냥 의미 없는 한숨 이었다. 복잡한 심경에서 절로 나온 것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녀는 다른 의미로 받아 들였는지 고개를 들어 지긋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종종거리는 발걸음으로 내 앞에 다가섰다. “수현.” “네.” “또 얼굴이 안 좋아 보여요.” “응? 뭐 딱히….” 대답을 하는 와중 저절로 시선을 회피하고 말았다. 고연주나, 정하연이나 정말 귀신 같이 나의 현재 기분을 알아 채는 재주가 있었다. 나를 위하고 걱정하는 그 맑은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죄책감이 들었다. 이 죄책감의 정체는 과연 뭘까. “저번에도 말씀 드렸지요. 수현은 자기 자신을 너무 한계까지 몰아 붙이는 경향이 있다고요.” “하, 하연. 그렇지 않아요. 오해에요.” “요즈음 조금 나아진 것 같았는데, 오늘 보니 다시 도지는 것 같아요. 도대체 뭐가 그렇게 불안하신 거죠?” “그냥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서 그래요. 불안하지는 않습니다.” 얼른 인상을 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녀는 믿지 않는 것 같았다. 내 대답에 눈을 가늘게 뜨고는 이내 곱게 흘기며 내 손을 잡아 끌었다. “들어가요. 들어가서, 얼른 주무셔요.” “그래요. 하연도 얼른 들어가요.” 나는 그녀의 말에 선선히 대답했다. 더는 그녀를 걱정시키기 싫었기 때문이다. 하연의 손에 이끌려 여관 안으로 들어간 후, 우리들은 곧장 계단을 올랐다. 특권이라고 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나는 방을 따로 잡은 상태였다. 그렇게 내 방 앞에 도착한 후 그녀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하려는 순간 이었다. 그녀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손수 방문을 연 후 나를 끌고 들어갔다. “하, 하연?” 하연은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잡고 있던 손을 슬쩍 놓더니, 이내 침대 위로 올라가 살포시 무릎을 꿇었다. “하연. 여기는 제 방인데요.” “아, 알아요. 얼른 침대로 오셔서 여기 누우세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하연의 얌전한 허벅지가 보였다. 멍한 얼굴로 눈만 끔뻑이고 있자 곧바로 그녀의 말이 날아들었다. “부, 분명 혼자 계시면 또 별로 안 주무실 거잖아요. 제, 제가 무릎 베개 해드릴 테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주, 주, 주무셔요.” 하연은 이리저리 말을 더듬다가 간신히 말을 매듭지을 수 있었다. 곧이어 그녀는 슬며시 눈을 깔며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 자태를 자세히 살피니, 가느다란 눈꺼풀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귓불은 연한 붉은 빛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음….” 머쓱한 마음이 들어 머리만 긁적이다가, 나는 차분히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섰다. 그게 효과가 있겠냐 만은 “싫어요.” 라고 대답하면 그녀가 무지 상처 입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척 봐도 하연 또한 상당히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이런 거 안 해주셔도 저 잘 자요.” “거짓말 하지 말아요. 한두 번 같이 자본 것도 아니잖아요.” “어. 한두 번 아니었나요?” “후훗. 연구소까지 합하면 세 번 이에요.” 하연의 요청대로 허벅지 위에 머리를 올리며 중얼거리자, 새침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그녀의 허벅지를 베자 뒷목이 굉장히 편안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좋아요. 눈도 감으시고요.” 새침했던 목소리는 이내 잔잔한 목소리로 바뀌었다. 그녀의 보드라운 손이 내 눈을 덮는다. 그 상태에서 일부러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손바닥이 몇 번 꿈틀거렸다. 간지러운 모양이다. 그렇게 잠시 누워 있자 곧 내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속으로 살짝 웃음이 나왔다. 분명 편안하기는 했지만, 나는 애가 아니었다. 이렇게 해준다고 잠들 리가 없잖은가. 그래도 고마운 마음이 들기는 했다. 방금 전 <시작의 여관>을 본 이후로 내 마음은 굉장히 불안정했다. 복잡했다가, 억지로 진정 시켰다가, 다시 불안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무릎 베개를 해주자 헝클어졌던 내면이 조금씩 녹는 기분이 들었다. 꽉 차있던 머릿속이 비워지고 마음이 절로 편안해진다. 그리고…. ………. ………. ………. 한동안 무념무상에 빠져있던 나는 어느새 몸이 굉장히 가라앉은 것을 느꼈다. 내 눈을 덮은,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들이 꿈결처럼 느껴졌다. 바다 정 중앙에 둥둥 떠 있다가, 조금씩 아래로 침잠 되는 기분이었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기분 좋았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도 잠을 자야 하니까. 해서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말하려고 눈을 뜨려는 순간 이었다. 살짝 정신이 깸과 동시에 무언가 머리맡으로 무언가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살며시 눈동자를 열자, 초점이 굉장히 흐릿하게 보였다. 깜짝 놀라, 나는 그 상태로 연신 눈을 깜빡였다. 한번 깜빡일 때마다 흐릿했던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윽고 모든 시야를 회복한 나는, 순간 헛바람을 들이키고 말았다. “하연?” 그녀를 불렀지만, 대답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내 머리 위로 하연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벌떡 몸을 일으킨 후 주위를 둘러보자 내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아래로 흘러 내렸다. 몹시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차분히 마음을 가라 앉히고 다시금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창문으로 시선이 닿은 순간, 창을 통해 비추고 들어오는 환한 햇살을 볼 수 있었다. “…….” 설마…. 나…. 정말로 잠든 건가?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오늘은 설정 변경을 공지하기 위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1) 순서 변경 : 소집령 → 서 대륙 발호 → 독립 선언에서, 소집령 → 독립 선언 → 서 대륙 발호로 바뀌었습니다. 두 부분을 붙여 써 큰 관계는 없으나, 그래도 혹시 몰라 공지 하는 게 더 나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현재 해당 부분은 모든 수정이 완료된 상태 입니다. 참고로, 현재 들어간 부분과 주인공의 예상이 들어간 부분이 수정된 상태 입니다. 즉 차후 전개 내용상 미래의 어그러짐으로 인해 여러 부분이 추가 또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2) 클래스 변경 : 기초 설정으로 잡은 한소영의 클래스를 변경할 생각 입니다. 물론 내부 설정은 그대로 유지하고, 이름만 한 글자 바꿀 예정 이오니 큰 변화는 없습니다. 이 부분은 한 번 언급하기는 했는데, 몇 회에 있는지 현재 찾고 있는 중 입니다. :) 『 리리플 』 1. 센서티브 : 1등 축하 드립니다. 쿠로시온님의 연승 행진을 끊으셨군요.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하하하. 2. 고장난선풍기 : 토닥토닥. 1등은 저도 못하고 있습니다. 포기 했습니다. 포기하면 편해요. 암요. ㅜ.ㅠ 3. 레필 : 아마, 한별이의 과정은 굉장한 난항이 있을것으로 예상 됩니다. :) 결국 영입이 될까요, 아니면 부딪쳐 무산이 될까요? 기대해주세요! 4. 불꽃포심 : NO. 두 사용자 모두 아닙니다. 여담으로 말씀 드리면, 그 중 한명은 현재 홀 플레인에 나온 상태 입니다. 하하하. 아직 명성이 충분하지 않을 뿐이죠. 5. 산사나무 : 안현의 피앙세는 현재 예정 인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하하하.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 6. 라피르and진트 : 아마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실것 같습니다. 확실한것은, 아직 아무도 완벽하게 맞추신 분들이 없습니다. 후후훗. 나름 뿌듯(?) 하네요. 7. 감자띱 : 연참! 좋죠. 오늘만 지나면 대충 급한 과제는 다 끌 수 있습니다. 주말에 한번 해보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__) 8. 가그 : ㅋㅋㅋㅋㅋㅋㅋㅋ. 우와.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겠네요. 솔깃 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닙니다. :) 9. sch6469 : 쿠폰 감사 합니다. (__) 아마 내일이면 본격적으로 행동이 시작될것 같습니다. 다음 회를 기대해 주세요! 수현 일행이 본격적인 비상이 드디어…. 하하하. 10. 석양s : 오호. 다음 회 수현의 고뇌하는 내용을 그대로 맞추셨군요. 대단 하십니다. :D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평점,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98 / 0933 ---------------------------------------------- Opportunity to Come 얼떨떨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잠시 동안 멍하니 창문을 보다가, 별안간 좌우로 몸을 비틀었다. 뚜둑, 뚜두둑! 온 몸이 비명을 지른다. 그래도 억지로 뼈를 뒤틀자 약간의 활기가 내부를 감도는걸 느꼈다. 물론 실제로 그렇다기 보다는 기분상이라는 소리였다. 아무튼 그 기운 덕에 조금 정신을 차릴 수 있어, 한번 크게 기지개를 피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밀려오는 창피함. 애도 아니고 그렇게 해서 잠들 리가 있겠냐고 투덜거렸는데, 정말로 잠들고 말았다. 오늘 하연의 얼굴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걱정을 하며, 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방문을 나섰다. 아니, 나서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똑똑. “오빠. 나 들어간다.” 아침을 시작하는 상큼한 목소리가 들림과 함께 방문이 벌컥 열렸다. 고개를 돌리자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린 채 방 안으로 들어서는 유정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예전의 우당탕탕, 쾅쾅, 벌컥 3단계 보다는 훨씬 진화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오빠 잘 잤어? 오늘은 웬일로 늦잠을 다 잤어? 아무튼 굿 모닝. 그리고 큰일났어.” “…뭐부터 대답해야 되니? 하나만 말해라 좀.” 다짜고짜 들이대는 말에 핀잔을 주자 유정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깔깔.” “그만 웃고. 큰 일이라니? 시작의 여관 포탈이 열렸다는 거?” “앙? 포탈이 열려? 그게 무슨 소리야?” “응?”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식으로 담담히 입을 열자 오히려 유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반응을 보니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 같았다. 이윽고 그녀는 오른손을 내 앞으로 쑥 내밀었다. 그리고 어서 보라는 듯 손에 들고 있는 것을 한두 번 팔랑거렸다. 자그마한 손에는 A4 용지만한 크기의 기록 몇 장이 들려 있었다. 나는 얼른 그것을 받아 든 후 차분히 읽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상단에 큼지막하게 써져 있는 제목이었다. <머셔너리 클랜(Mercenary Clan) 출범 선포.> “…….” 제목을 읽는 순간 절로 숨이 멈추고 말았다. 이것은, 그간 오매불망 기다려왔던 클랜 홍보에 대한 기록이었다. 아마도 구조 활동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다고 판단했는지, 뮬의 거주민들이 그 동안 준비해온 것들을 발 빠르게 터뜨린 것 같았다. “오빠오빠. 어떻게 하룻밤 만에 이런 홍보용 기록들이 바바라로 올 수 있었던 거야? 지금 장난 아니야. 광장 게시판에도, 그리고 거리 곳곳에도 이런 기록들이 뿌려져 있다?” “홍보용 기록들은 미리 준비를 해놨을 거다. 그리고 전송 마법은 폼으로 있냐.” “아하! 그렇구나. 아무튼 빨리 내용 봐봐. 내가 다 화끈할 정도로 좋은 말만 잔뜩 써놨더라고. 연주 언니도 보고 놀라더라. 원래 초기 클랜은 좋게 말해주는 법이 드문데 예외적인 경우라나?” 연주 언니라는 말이 잠시 거슬렸지만, 나는 건성으로 대꾸하며 기록을 빠르게 읽어 내렸다. 내용에 제법 신경을 썼는지 단 한 문장도 막힘 없이 술술 읽을 수 있었다. 차 한잔을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모든 기록을 읽을 수 있었다. 콘라드 더글라스를 매수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단돈 몇 백 골드에 그 이상의 가치를 갖는, 톡톡한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으리라. 그 정도로 지금 내가 들고 있는 기록에는, 우리 클랜에 대한 장점들이 줄줄 쓰여져 있었다. 물론 단점들도 보이긴 했다. 예를 들면 0년 차 사용자가 클랜 로드라는 것과 창설 인원이 총 여덟 명으로 소규모라는 점. 그리고 구성원 중 반수 이상이 0년 차 사용자라는 점 등등. 그러나 더글라스는 여러 이유를 들어 단점들을 장점으로 승화시켰다. 이 정도 인원으로 3개월 이라는 짧은 시간에 3개의 유적을 발굴한 것(물론 절규의 동굴은 탐험 증명서를 발급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짧게 언급 되어 있었다.), 시크릿 클래스 두 명과 레어 클래스 세 명을 보유한 것, 그 중 10강 중 1인 그림자 여왕이 포함된 것 그리고 상급 마족 벨페고르를 처리한 것 등이 굉장히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중간중간 은근하게 뮬을 홍보하는 부분도 보였지만 이 정도는 눈 감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과연. 일 하나는 확실하게 처리해주네.” “응? 뭐가?” “클랜 창설 담당을 맡고 있는 거주민들. 신전에 있는 놈들이랑은 다르잖아.” “아. 그건 그렇지. 그나저나 큰일 났다니까?” 도대체 얼마나, 그리고 무슨 큰일이길래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 걸까. 애초에 양지로 나오기로 마음 먹은 이상 어느 정도 정체를 드러내는 것은 각오한 바였다. 살짝 미간을 좁히자, 내 표정을 읽었는지 유정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오빠. 일단 내려와봐. 지금 오빠 빼고 전부 1층 로비에 있어.” “음 그래. 알겠다.” 곧이어 유정은 다시 방문을 나선 후 나에게 어서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입고 있던 장비들 위로 코트 오브 플레이트를 걸쳐 입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따라 차분히 복도를 걸었다. 그렇게 막 계단을 내려가려는 찰나였다. “야야. 온다 온다.” “지금 여자애 뒤로 내려오는 사용자가 머셔너리 클랜 로드야?”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시크릿 클래스라고 하던데. 어떡해 어떡해. 장비 좀 봐봐. 장난 없는데? 얼굴도 준수하고.” “난 지금까지 뭐했냐. 젠장. 현대서나 여기서나 될 놈만 되는 건가.” 웅성웅성. 1층으로 내려가자, 왜 그렇게 유정이가 호들갑을 떨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침 햇살> 여관의 로비에는 바바라의 사용자들로 득실대고 있었다. 아마도 광장 게시판이나, 거리에 뿌려진 기록들을 보고 호기심에 찾아온 게 분명했다. 내 앞을 걷는 유정의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럽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재빨리 테이블로 뛰었다. 로비의 정 중앙에는 고연주를 위시한 클랜원들이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그 옆으로 여관 주인으로 보이는 사용자가 대단히 조심스러운 태도로 테이블에 음식을 내려놓고는, 황급히 물러서는 중 이었다. 그때였다. 내가 1층으로 내려온 것을 봤는지, 고연주는 도도하게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던 애들과 나머지 클랜원들 또한 서둘러 그녀의 따라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내가 테이블 바로 앞까지 걸음을 옮긴 순간이었다. 조용히 시립해있던 고연주는 이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클랜 로드를 뵙습니다. 편안한 밤 보내셨나요?” “클랜 로드를 뵙습니다.” 고연주가 목소리를 냄과 동시에 클랜원들도 똑같이 고개를 숙이며 목소리를 하나로 모았다. 속으로 조금 머쓱한 기분이 들었지만 굳이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일종의 보여주기를 위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담담히 고개를 한번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고연주가 마련해준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방금 전 보여주기에 대한 반응은 곧바로 터져 나왔다. 행동 자체만 놓고 보면 특이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 고연주라는 변수를 섞으면 엄청난 특이성을 띠게 된다. 그녀가 내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본 사용자들 사이로 경악 성이 흘러나왔다. 그 술렁거림 들은 1층 전체를 휩쓰는 걸로 모자라, 바깥에 있는 사용자들에게까지도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야. 진짜야? 진짜야? 진짜 저 사용자가 10강의 그림자 여왕 맞아?” “입 조심해 병신아. 다 들린다고.” “맞을걸. 클랜 창설 담당자 놈들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잖아.” “와. 그러네. 그럼 방금 내려온 사용자가 정말로 그림자 여왕을 잡았다는 소리잖아.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고.” 여러 시끄러운 소리들이 귓가로 흘러 들어왔다. 나는 잠시 동안 주변을 살핀 후 클랜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고연주는 주변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의 흘러 내릴듯한 움직임이 아닌, 절도 있고 정숙한 태도였다. 정하연과 신상용은 나름 차분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지만, 자꾸만 물을 들이키는 게 나름 긴장한 듯싶었다. 비비앙은 콧대를 높이 세우고 있었다. 거만한 얼굴로 주위를 쭉 둘러본 후, 콧방귀를 끼며 내게 어깨동무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고연주가 날카롭게 째려보자 이내 허둥거리며 다소곳하게 손을 모았다. 안현은 근엄해 보이려 애쓰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입술을 덜덜 떨리고 있었다. 유정은 올라올 때까지만 해도 여유가 있는 것 같았지만, 막상 행동에 들어가자 살짝 긴장한 낯빛을 띠고 있었다. 여담으로 하나 더 말하자면, 안솔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는 내가 여유를 보일 차례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벌써 해가 중천에 떴군요. 무슨 특이한 일이라도 있었나요.” “총 세가지 보고 사항이 있습니다. 시작의 여관 포탈이 열렸고, 우리 클랜에 대한 홍보가 시작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황금 사자 클랜의 소집령이 나왔습니다. 홍보는 오늘 새벽 시간에 시작한 것 같고, 소집령은 포탈이 열린 이후 움직인 것 같습니다. 참고로 소집령에 대해 추가로 드릴 보고가 있습니다만….” 고연주는 잠시 말을 멈추고 흘끗 주변을 살폈다. 나는 단박에 그 의미를 알아 들을 수 있었다. “제가 잠들어 있던 시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군요. 알겠습니다. 일단 자세한 얘기는 식사 후에 듣도록 하죠. 그럼 다들 식사를….” 비로소 내가 말문을 열자 어느새 소란스럽던 주위는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나라고 이런 상황이 어색하지 않겠냐 만은 10년의 경험과 연륜으로 가장하고 있었을 뿐 이었다. 내가 말을 꺼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수저를 들지 않았다. 이번에는 제발 안 했으면 했는데 결국 그 짓거리도 보여주기에 포함된 모양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수저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클랜원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저를 들었다. 그러자 또 한번 술렁거림이 터져 나왔다. 눈 앞에 놓인 말간 스프를 한 숟갈 뜨면서도, 이 행동은 무리수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 남부 도시 모니카. 화려한 인테리어로 치장된 방 안에서 두 명의 여성이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방 내부에는 조용한 침묵이 한껏 맴돌고 있었다. 잔잔하고 은은한 공기가 넘실거리는 게, 아무리 방정 맞은 사람이라도 이 안으로 들어오면 절로 입을 다물 것이다. 그 중 한 명의 여성은 감히 정면에서 응시할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답고 세련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맵시 있게 올라간 눈썹과, 흑 수정을 박아 넣은듯한 아름다운 눈동자. 블루블랙 빛깔이 감도는 기다란 머리카락은 가지런히 정리되어 찰찰 한 윤기를 빛내고 있었다. 꼭 다문 앵두 같은 입술에서는 뭔지 모를 단호함을 엿볼 수 있었고, 눈에서는 사람을 빨아 들일듯한 기이한 자신감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가히 경국지색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미모였다. 그러나 옥에도 티가 있다고, 단 한가지 결점을 찾으라고 한다면 바로 표정을 짚을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전체적으로 싸늘하고 차가운 냉기가 그늘지어 있었다. 물론 그 표정 또한 너무도 잘 어울렸지만, 만일 그녀가 단 한번이라도 미소를 짓는다면 수많은 남성들의 애간장을 녹일 수 있으리라. 그녀는 길쭉한 다리를 살짝 꼰 채 무언가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옥을 깎아 만든 것 같은 가녀린 손가락에는, A4용지 크기만한 기록 몇 장이 들려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그녀는 그것을 모두 읽었는지 기록을 앞으로 툭 던지며 입을 열었다. “머셔너리 클랜 로드. 0년 차 사용자 김수현. 분명 동쪽 어딘가에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사용자가 있었는데.” 비로소 열린 입술 사이로 드러난 하얗고 윤이 나는 치아는, 방 안을 환하게 만들었다. 방 안을 조용히 울린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지만 은근한 색스러움도 섞여 있었다. 그녀의 앞에서 팔짱을 낀 채로 조용히 손가락만 두들기던 또 다른 여성은, 목소리에 반응했는지 흘끗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아아. 그 사용자는 김유현. 수가 아닌 유. 중간 글자가 달라.” “응. 그 사용자도 시크릿 클래스였던가?” “그렇지. 마법사 계열 시크릿 클래스. 뇌제(雷帝).” “맞아. 분명히 뇌제라고 불렸지. 음. 둘 모두 만나보고 싶다.” “아서라, 아서.” “왜?” 대답하던 여성은 잠시 말을 멈춘 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와 동시에 연한 푸른빛으로 물든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녀의 얼굴 또한 굉장한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아찔한 콧날과 가느다란 턱 선은 가히 압권이라 부를 정도로 매력을 힘껏 발산하고 있었다. 다만, 이 여성 또한 얼굴 전체로 냉소적인 인상을 띄우고 있다는 점이 굉장히 아쉬웠다. “일단 김유현. 2년 차 사용자라고는 해도, 그는 이미 우리가 건들만한 위치에 있는 사용자가 아니거든. 아직 클랜 창설만 안 했지 이미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상태라고.” “그래? 그럼 그 남자가 너보다 강해?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10강 중 1인인 처형의 공주보다?” “한소영.” 잠시간, 둘 사이로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음. 독자 분들. 죄송하지만, 한번 더 설정 변경 공지 사항을 해야 할것 같습니다. 다른 건 아니구요 이름 변경 입니다. 1회 차 시절 <(신)다현>이라는 이름의 사용자가 있는데, 잠깐 언급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사용자의 이름을 <(박)다연>으로 변경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너무 마음이 불편하네요. ㅜ.ㅠ 앞으로 새로 이름을 지을때는 최대한 특이한 이름으로 할 생각입니다. 독자 분들의 많은 양해 부탁 드립니다.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 드립니다. 저번에 쪽지로 1등 코멘트 하는 방법 알려 주셔서 감사 했습니다. 다만, 저는 써도 늦을 방법 이더군요. ㅜ.ㅠ 흑흑. 2. MT곰 : 하하하. MT곰님의 멘탈을 지키기 위해 최대한 연재는 이어보도록 하겠습니다. 3. 닉네임중복 : 감사합니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대한 재미있는 내용으로 보답 하겠습니다. 4. ]라디에르[ : 점차적으로 하향세를 타는 추세라서 그렇습니다. 그 전에는 평균 200명은 커녕 배가 되는 인원을 훌쩍 상회한 상태 였습니다.(주기도 짧았던 텀도 있었구요. 본문 내용은 최근을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차후 내용을 더욱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 5. 함께행복하기 : 아. 주무세요, 라고 하려고 하니까 오탈자로 줄이 그어지더라고요. 한번 다른 표현이 있는지 다음 번에는 고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머리가 너무 아파서 이번 회 리리플은 5개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ㅜ.ㅠ)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평점,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199 / 0933 ---------------------------------------------- Opportunity to Come 한 순간 처형의 공주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주위를 감돌고 있던 무형의 기운 또한 거친 성질을 띄우고 있었다. 마치 뾰족한 바늘로 사방을 콕콕 찌르는 것 같은 기운이 순식간에 방 내부를 점령했다. “…….” 그러나 처형의 공주가 한소영의 얼굴을 직시하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분위기는 한 순간에 처음과 같은 침묵이 찾아 들었다. 한소영 또한 처형의 공주와 동급인 <전장의 지휘자>라는 시크릿 클래스를 갖고 있다. 더구나 그녀는 <이스탄텔 로우>의 클랜 로드. 둘의 지위는 명백한 수직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한동안 불편한 침묵이 둘 사이를 감돌았지만, 결국 처형의 공주가 씨근거리는 말투로 말문을 열었다. “잘 모르겠는데.” 그녀의 목소리에는 자존심이 상했다는 티가 팍팍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 아랑곳않고 한소영은 한번 더 그녀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래도 말해봐. 궁금하니까. 그 남자가 10강은 아니잖아. 자신 없어?” “모른다고. 그 남자가 10강은 아니라고 하지만, 이미 실력으로 보나 들려오는 소문으로 보나 10강 급이라고 봐도 무방해. 그 동안에는 먼저 자리를 차지했던 놈들 때문에 10강이라고 불리지 못했을 뿐이고. 그래 솔직히 100%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 “의외네. 네가 그렇게까지 평가를 하는 사용자가 있다니. 더욱 관심이 가는걸?” 한소영은 가벼운 콧바람을 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형의 공주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고개를 팩 돌렸다. 한소영의 시선을 회피한 채로, 처형의 공주는 불퉁거리듯 입을 열었다. “인정할건 해야지. 아무튼 네가 갖고 있는 인재에 대한 욕심은 정~말 잘 알고 있는데, 그 남자를 영입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꿈 깨라고 말해주고 싶네? 비단 그 김유현이라는 사용자뿐만이 아니야. 주위에 우리와 비슷할 정도로 난다 긴다 하는 사용자들이 수두룩하게 포진하고 있는데, 굳이 아래로 들어오려고 하겠어?” “일리 있네. 그럼 김수현은?” 순순히 고개를 주억이는 한소영을 보며 처형의 공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을 듣는 순간 다시금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한소영은 평소에는 필요 이상으로 냉철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보여주지만, 인재와 관련한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처형의 공주는 눈빛을 번쩍이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걔는 싫어. 아니, 안돼.” “싫다고? 왜?” “몰라서 물어? 기록 안 읽어봤어? 그년이 걔 아래 있다고 하잖아! 나보고 고연주랑 같이 한솥밥을 먹으라고?” “읽었어. 너와 그녀의 문제도 알고 있고.” 한소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년, 즉 <그림자 여왕> 고연주의 이름이 거론되자 처형의 공주의 눈에는 스산한 살기가 일었다. 한소영은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 네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나보고 이 남자를 만나지 말라는 소리야?” “…칫.” 처형의 공주는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눈 앞의 그녀, 한소영과는 통과 의례 때부터 동고동락한 사이였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처음과 똑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고 보겠지만, 그녀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한소영이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입을 다물기는 했지만 구겨진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여전히 마뜩잖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한소영은 확실히 못을 박았다. “혹시라도 그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림자 여왕> 앞에서 조금의 실수라도 해봐.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어.” “연혜림.” “아, 알았다고!” 한소영이 재차 묻자 처형의 공주, 아니 연혜림은 백기를 들고 말았다. 그녀는 톡 쏘는 말투로 소리를 빽 지른 후 크게 한숨을 쉬었다. 한소영은 그제서야 만족한 얼굴로 시선을 거두었다. “어휴. 내가 못살아 정말. 그래. 그 사용자가 지금 바바라에 있다는데, 마침 황금 사자 소집령도 떴잖아. 그건 어떻게 할거야?” “응. 생각은 해놨어.” “갈 거야?” “원래는 안 가려고 했지만.” 한소영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품 속에서 곱게 접힌 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봉투 위로 찍혀 있는 사자 문양은 황금 빛깔을 띠고 있었다. 그녀는 엄지와 검지 사이로 끼인 봉투를 서너 번 굴리고는, 은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포탈이 열렸으니 가보는 게 좋겠지. 사용자 아카데미 건으로 소집 요청서를 받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까. 겸사겸사 그 남자도 한번 보고.” “흥. 겸사겸사는 무슨. 전자랑 후자랑 뒤바뀐 게 아니라?” “입 다물어. 아무튼 오늘 해가 지기 전에 가야 하니까 슬슬 준비해. 같이 가는 건 너로 충분하니 굳이 다른 인원을 준비할 필요는 없어. 내가 없을 동안의 일은 다연이한테 위임하고.” 말을 마친 한소영은 곧바로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그대로 몸을 일으키자 육감적인 그녀의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흥.” 상대적으로 빈약한 몸을 가진 연혜림은 잠시 그녀의 몸에 시선을 뺏겼다. 그리고 그 시선에는, 뜻 모를 부러움이 섞여 있었다. * “블록 필드(Block Field). 중첩(SuperPosition).” 하연의 청아한 목소리가 울림과 함께 주변에 무형의 막이 생성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애들은 굳어 있던 표정을 풀며 자리에 널브러졌다. 아마도 <아침 햇살>에서 <산들바람>으로 오기까지의 여정이 꽤나 고됐던 모양이다. 현재 우리들은 처음 바바라에 왔을 때 들렀던 고급 주점 <산들바람>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침 햇살>에서 간단한 식사를 마쳤지만, 조용히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꼭 모세의 기적을 보는 것 같았어. 연주 언니가 오빠 옆에 서자마자 사람들이 쫙 갈라지는데….” “흐에에. 부담스러워 죽는 줄 알았어요오.” “나도. 와, 그런데 3층이랑 1층이랑 완전 풍경이 다른데요? 1층도 좋다고 생각은 했는데 3층은 아예 방 하나를 따로 내어주네.”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유정을 가만히 응시했다. 오늘 아침부터 고연주를 언니라고 부르는 게 상당히 거슬렸기 때문이다. 물론 둘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당장 급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천천히 얘기를 듣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대충 생각을 정리하고 일단은 안현의 물음에 대답해주기로 했다. “3층은 아무나 오는 곳은 아니지. 현대 개념으로 보면 VIP, 즉 귀빈들만 입장할 수 있는 곳이니까.” “하지만 전 아직 0년 차 인데…. 아, 레어 클래스라서 그런가? 훗.” “아니. 너 말고 사용자 고연주 때문일걸. 저번에도 말했지만, 10강의 위치를 조금 더 자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구나.” “난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쓰는데~.” 고연주는 어깨를 으쓱인 후 눈 앞에 놓인 샌드위치 두 개를 집고는 그 중 하나를 내게 먹여주었다. 저번이랑 주문은 똑같이 했는데, 나온 음식은 굉장히 다채로웠다. 저번에는 1인당 하나였다면, 이번에는 두 개는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입 안 가득히 퍼지는 감미로운 단 맛에 취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그럼 사용자 고연주. 황금 사자 클랜의 소집령에 대해서 추가로 보고할게 있다고 하셨는데요.” “네. 수현씨가 깊게 잠들어 있는 동안 조금 많은 일들이 일어났어요. 일단 포탈이랑 홍보에 관해서는 알고 있으신 것 같으니 넘어가도 될까요?” “소집령에 대해서만 자세히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고연주는 샌드위치를 씹으면서도 전혀 발음이 흐트러지지 않는 신기를 보여주었다. 이윽고 목 울대를 꿀꺽 움직인 그녀는 내가 요청한 부분들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새벽, 황금 사자 클랜에서 대대적으로 소집령이 떨어졌어요. 일단 기본적으로 각 도시를 대표하는 클랜은 전부 불렀죠. 한가지 주목할 사실들은 대표 클랜이 아닌 클랜들도 몇몇 불렀다는 사실이랍니다.” “그 외의 클랜이라. 조금 애매하네요.” “네. 대표 클랜은 아니지만, 나름 이름있는 클랜들을 부른 것 같아요. 과거 사용자 아카데미에 대한 권한을 비율로 나누면 황금 사자가 7할, 우호 클랜들이 2할, 그 외 클랜들이 1할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죠. 사용자 아카데미라는 파이는 크기가 일정해요. 더구나 요즘 들어 들어오는 신규 사용자들의 숫자가 뚝뚝 떨어지고 있으니 오히려 작아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죠. 그런 만큼 웬만하면 최대한 적게 부르는 경향이 있었는데, 확실히 의외라고 볼 수 있어요.” “둘 중 하나겠군요. 흐름을 정확히 읽고 순응하거나,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거나.”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손을 내밀었다. 방금 전에 먹었던 샌드위치를 다시 한번 맛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손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옆을 보자 행복한 얼굴로 손가락을 쪽쪽 빨고 있는 비비앙을 볼 수 있었다. 잠시 주변을 살피니 애들은 질렸다는 얼굴로 비비앙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단번에 그녀의 귀를 잡고 쭉 잡아 당겼다. “꺅! 뭐, 뭐야!” “야. 너 혼자 다 먹으면 어떡하냐.” “아, 아니거든! 악! 미, 미안해! 야! 아파! 잘못했다고! 그만…. 아악, 놔…. 앙! 아아앙, 아앙….” 꽥꽥 비명을 내지르던 비비앙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뜻 모를 묘한 톤이 섞여 들고 있었다. 나는 기겁한 마음에 얼른 잡고 있던 귀를 놓아 주었다. 비비앙은 귀를 슬슬 만지며, 불만 어린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과연 아파서 불만을 가진 걸까, 아니면 더 해주지 않아서 불만을 가진 걸까. “휴. 미안합니다. 계속 말씀하세요.” 고연주는 이상한 눈길로 비비앙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그녀가 미미한 낌새를 잡은 것 같았다. “글쎄요. 워낙 자부심이 강한 아이들이라. 꿍꿍이보다는 배째라고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물론 멍청이들이 아닌 이상 어느 정도 양보는 하겠지만, 생색내기에 그칠 것 같고요. 어찌됐든 어제 오늘 홀 플레인의 흐름은 굉장히 급박하게 변화하고 있어요. 시작의 여관, 우리 클랜의 출범 그리고 황금 사자의 소집령. 크게 이 세가지 사건으로 나눌 수 있어요. 그리고….” 현재 홀 플레인의 정세를 줄줄 읊는 그녀를 보며 나는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역시 고연주가 있으니 편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거의 대부분의 정보들이 내 손아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마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쯤 우왕좌왕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고심하고 있을게 분명했다. “아. 그리고 이거.” 고연주는 뭔가 기대하라는 듯 눈을 한번 찡긋하고는 품 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그녀는 이윽고 가슴 골에서 얇아 보이는 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내 앞으로 살짝 밀어 놓았다. 시선을 아래로 돌리자 황금빛으로 빛나는 사자 문양이 찍힌 봉투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뭔지 알 것 같기도 해요. 황금 사자 클랜의 소집령 요청서일거에요.” “하하하.” 그녀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작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나도 봉투를 보자마자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황금 사자 클랜에서 창설한지 일주일 된 클랜에게 소집령을 보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이었다. 고연주는 내 웃음의 의미를 해석했는지 연한 미소를 따라 흘리며 말을 이었다. “1차 소집령은 포탈이 열린 직후 보낸 것 같아요. 그것이 열림으로써 최소한의 명분은 확보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우리 클랜에 대한 홍보는 새벽에 이뤄졌어요. 그리고 이 봉투는 수현이 내려온 지 한 시간 전쯤에 전령을 보내더라고요. 즉 급조된 2차 소집령이라고 볼 수 있죠. 시크릿 클래스 둘에 레어 클래스 셋. 그만큼 현재 머셔너리의 가치가 높다는 반증이에요.” “10강이 있다는 이유가 더 큰 게 아니 라요?” “아잉~. 제 입으로 말하기는 너무 부끄러운걸요~.” 내 말에 고연주는 애교를 부리며 살살 눈웃음을 쳤다. 정하연은 조용히 쿠키를 씹다가, 비위가 상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그녀의 말마따나, 황금 사자가 우리들을 부를 이유는 충분했다. 머셔너리 클랜의 가능성은 차치하고서라도, 남은 세 명의 10강 중 2명은 비 참가 클랜들에 있다. 그렇다면 남은 한 명 즉 고연주가 누구 편에 붙을 지가 중요한 화두로 떠오를 것이다. 자연스레 그녀의 행방으로 시선이 집중되려는 찰나, 머셔너리라는 클랜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홀랑 가로채가 버렸다. 물론 이것뿐만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원정에서 구조된 직후부터 휘하 우호 클랜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으니, 분명 너도밤나무 클랜에게도 연락을 취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알아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 봉투는 단순한 소집 요청으로 볼 수 없는 굉장히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소리였다. 나는 잠시간 봉투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다른 클랜들의 동향은 어떨 것 같나요?” “아직 확실한 건 없어요. 다만 아무래도 올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가뜩이나 현재 시국도 어수선한데, 사용자 아카데미라는 아주 먹음직스러운 먹이가 던져졌으니까요. 어쩌면….” 올 가능성이 높다. 설마 했던 일이 현실로 일어났다. 원래는 소집령을 거부해야 정상이지만 포탈이 열림으로써 그 소집령에 응할 확률이 높아졌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상념에 잠겼다. 하지만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아, 결국 다시 눈을 뜨고 말았다. 고연주는 내 반응을 살피는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다가 이내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쩌면, 이번 소집령에서 아주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질지도 몰라요. 어때요, 수현. 이 소집령…. 한번 응해보지 않겠어요?” “음. 일단 읽어보도록 하죠. 그리고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간단히 대답한 후 곧바로 봉투의 윗면을 찢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시험도 끝났고, 과제도 대부분 해결했습니다. 그래서 간만에 노블레스 소설을 읽고 있었는데, 이게 하도 재미있다 보니 푹 빠져서 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ㅜ.ㅠ 제가 좀비 생존물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아, 그러고보니 저번에 생존물 추천해 달라고 하셨던 분이 계셨는데, 그분께도 추천 드리고 싶네요. 하하하. :) 아무튼 자정 연재에는 차질이 없도록 최대한 노력 하겠습니다. 다음 회는 바로 200회네요! 동시에 많은 분들이 기다리고 있던 그녀도 나온답니다. 후후훗. 『 리리플 』 1. 신화의재현자 : 1등 축하 드립니다. 오호라. 처음 뵙는 분이군요. 수 많은 분들을 제치고 1등을 하셨다니, 놀라울 따름 입니다. 하하하. 그럼, 이번 회도 재미있게 감상해 주세요. :) 2. 破天魔痕 : 아, 제가 어제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집에 너무 늦게 들어와서, 솔직히 처음에는 자정에 맞출 수 있을지도 의문 이었어요. ㅜ.ㅠ 오늘 자정은 최대한 맞춰 보도록 하겠습니다. 3. 낮잠을자자 : 저는 네이버 웹툰 중에서 선천적 얼간이들이 정말 재미있더군요. 크크크. 아, 물론 다음에 있는 미생도 꼬박꼬박 읽고 있습니다. 4. 브리키오 : 분명 수현은 이스탄텔 로우 휘하 남성 클랜원들중 한명이었죠. 다만 그 클랜에서 나름의 위치는 있었고, 수현이 소영을 그리 애틋하게 생각하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하하. 과연 2회 차 시절에는 어떻게 될지, 많은 기대 부탁 드립니다. 5. 고장난선풍기 : 그럼요! 저번에 안현에게 말했던 것처럼, 아군이라서 웃어주는거지 원래 무서운 뇨자 입니다. 껄껄껄. 한별이. 곧 나옵니다. 나오고 말구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 6. 꼬야 : 크크. 제 뜰에 오시면 고장난 선풍기님이 올려주신 팬 아트를 보실 수 있습니다. 거기에 수현이도 있어요!(군인 아저씨하는 말에 비수가 푹푹 꽂힌 1人.) 7. 라티인형 : 그 부분은…. 헙. 순간 스포할 뻔. 흠흠. 여기 오기전의 모습은 아마 김유현을 만나는 순간 자연스레 풀릴 예정 입니다. 하하하. 8. 미월야 : 킬킬. 제대로 보셨습니다. 한소영의 외모는 세계 최고~!(퍽퍽! 악악!) 하하하. 농담 입니다. 다만 최대한 예쁘게 표현하고 싶었어요. :D 9. 하루지온s : 곧 나와요. 곧 나와요. 곧 나와요. 곧 나와요. 곧 나와요. 곧 나와요. 곧 나와요. 곧 나와요. 곧 나와요. 곧 나와요. 10. pslgh : 앗. 어떤 부분이 이해가 가지 않으시는 건가요? 궁금하신 부분 있으시면 쪽지 또는 코멘트로 질문해주세요! 최대한 상세하게 답변 드리겠습니다.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평점,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00 / 0933 ---------------------------------------------- Attention “조금 더 세게.” “머리 상해요.” 내 걱정에도 불구하고 한소영은 눈을 꼭 감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윤기 넘치는 머리카락과 내 가슴이 닿을 듯 말듯한 거리에 있었다. 그녀가 조금만 더 기대준다면, 내가 한 발짝만 더 앞으로 걷는다면 틀림없이 닿을 텐데. 그러나 먼저 행동할 용기는 나에게 없었다. 그저 기다릴 뿐. “…….” 너무 숨을 세게 쉬었나. 긴장을 해서 그런지, 내 숨에 그녀의 위 머리카락이 조금 흐트러졌다. 나는 빗을 들어 다시금 흐트러진 머리를 빗어 내려주었다. 한번 빗질을 할 때마다 그녀의 희고 가느다란 목이 조금씩 떨리는 게 보였다.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요즘 좀 어떠니.” 한동안 빗질을 하고 있자, 그녀의 입에서 은은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여전히 그녀의 머리를 빗으며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냥 그래요.” “이제 그만 밝은 곳으로 나왔으면 좋겠어.” “저는 지금이 좋아요.” “…….” 이미 몇 번을 들었던 질문이고, 몇 번을 반복한 대답이었다. 한소영은 얇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뒤로 머리를 살짝 기울였다. 드디어 내 가슴에 닿은 그녀의 머리를 느끼자, 나는 내면에서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는 기쁨을 느꼈다. “왠지 너랑 이렇게 있으면, 네가 머리를 빗어주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아. 마음이 편해지고 마음속에 담아둔 말도 많이 나와. 왜 이러는 걸까.” “그걸 저한테 물으시면 어떡해요.” “쿡. 그건 그래. 아마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가 봐.” 그녀가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미소는 너무도 순수했고 너무도 환하게 보였다. 폐부 가득히 차오르는 그녀의 향기와 환히 빛나는 미소에 취했는지, 순간 머리가 어질어질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손을 살짝 앞으로 내밀어 그녀의 반듯한 이마를 덮었다. 그녀는 살짝 눈을 떠 나를 올려다 보고는, 이내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부디 이 행복한 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 딱히 특별한 내용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황금 사자 클랜이 보낸 소집 요청서의 내용은 복사 및 붙여 넣기를 한 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물론 기본적인 사항들은 전부 바꿔 논 상태였다. 예를 들면 “머셔너리 클랜 로드 김수현 귀하.” 라거나, “<그림자 여왕> 고연주의 동행을 정중히 요청하는 바 입니다.” 등등. 고연주의 동행 요청은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지만 기록 말미에 붙인 “현재 시국이 어수선하므로, 동행하는 일행의 숫자는 최소화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라는 문장은 나를 웃기게 만들었다. 대강 내용들을 읽어본 후 나는 기록을 테이블 위로 던졌다. 눈을 반짝이던 애들은 득달같이 달려들더니, 이내 서로 먼저 보겠다고 다투기 시작했다. “뭐라고 적혀 있던가요?” “사용자 고연주의 예상이 맞았습니다. 소집 요청서 입니다.” “그렇군요. 혹시 별다른 내용은 없었나요?” “급파를 해서 그런지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몰아치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늘 저녁이 오기 전 황금 사자의 클랜 하우스, 금호관으로 모이라고 하더군요. 그 외에는 당신의 동행을 요청한 것 밖에 없습니다.” 같이 오는 일행의 숫자를 최소화 하라는 말은 일부러 꺼내지 않았다. 나에게는 별 상관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가장 중요한 사람은 클랜의 로드였다. 동행하는 인원은 호위 목적을 제외하면 단순한 보여주기에 불과하다. 굳이 바리바리 끌고 들어갈 필요 없이, 고연주 한 명만 있어도 위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었다. 뭐, 10강이 없는 클랜들은 얼굴을 조금 찌푸렸을 것이다. “동행 요청이라.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너도밤나무와 있었던 사건 언급은요?” 그 말에 클랜원들의 분위기가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차분히 차를 들이키던 신상용도, 이유정이 차지한 기록을 보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빼꼼 내민 비비앙과 안솔도, 모든 클랜원들이 내게로 시선을 모았다. 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 사건은 언급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군요. 걔들이 웬일로 기특한 짓을 하는 거지? 하긴 언급해도 상관 없지만 말이죠.” “너도밤나무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마 지금쯤 연달아 터지는 일들을 조율하는데도 꽤나 골머리를 앓고 있을 겁니다. 우리에게는 나쁘지 않아요.” “그렇죠. 아무튼 우리들한테 소집 요청서가 왔다는 사실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볼 수 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참석하는 것을 권해드리고 싶어요.” 고연주는 재차 내게 참석할 것을 권했다. 나는 푹신한 의자 뒤로 몸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황금 사자 클랜의 소집령. 단순히 클랜들이 소집을 거부한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작의 여관> 포탈이 열렸고 그것은 변수가 되어 미래를 이리저리 비틀고 있었다. 소집령을 두고 볼 것만 생각하고 있었지 설마 그곳에 포함될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고연주는 클랜들 대부분이 소집령에 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은 꽤나 신빙성이 높게 들렸다. 그러나 그들이 오는 이유는 황금 사자 클랜의 원정 처리가 아닌 <시작의 여관>에 목적이 있을 것이다. 즉 그 동안 높아지고 있던 갈등을 품은 채 소집령에 응한다는 소리였다. 한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나는 결국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애초에 바바라로 온 것도 홀 플레인의 흐름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끝에서 조금 많이 엇나가기는 했지만, 좋다고 또는 나쁘다고 속단하기에는 일렀다. 이 소집 요청서로 인해 발생할 일들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을 뿐 새로운 기회임에는 틀림 없었다. “좋습니다. 소집령에 응하겠습니다.” “탁월한 선택이에요. 걱정 마세요. 제가 함께 있는 한, 로드를 무시할 수 있는 간 큰 사용자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눈을 번쩍 뜨며 말하자 고연주가 환하게 웃으며 화답해주었다. 고개를 한두 번 끄덕이다가, 문득 두 명의 사용자에게로 생각이 미쳤다. 형은 소집령을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쯤 동쪽에서 화려한 명성을 휘날리고 있겠지만 형이 클랜을 창설하는 것은 조금 더 이후의 일 이었다. 물론 황금 사자 클랜에서 조금 더 융통성을 발휘한다면 가능할 듯싶었지만, 지금 소집령이 떨어진 클랜만 들어도 엄청난 양보를 한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소영은 다르다. 그녀는 남부 도시 모니카의 어엿한 대표 클랜을 맡고 있다. 도시를 대표하는 클랜 모두에게 소집령을 보냈다고 했으니, 그녀가 참가할 가능성은 높다고 볼 수 있었다. 잠시 그녀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자 설레는 감정과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아릿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형을 잃은 후, 나는 말 그대로 피에 절은 미치광이가 되어버렸다. 아마 그대로 그 상태가 유지 됐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죽었을 것이다. 그때 한번 더 내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준 사람이 바로 한소영이었다. 그리고…. “…….” “수현? 수현!” “응? 네.”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요? 몇 번을 불렀는데 반응이 없어서.” 하연의 물음에 그저 미미하게 웃을 뿐, 자세한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일단 마음을 정했으니 움직이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 찰나였다.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하나의 생각에, 나는 하연을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사용자 정하연.” “네.” “부탁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다른 클랜원들은 걱정하지 마세요. <아침 햇살> 여관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하연은 곧바로 대답했지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었다. “아. 물론 그것도 부탁합니다. 그건 그렇고…. 혹시 빗 가지고 있나요?” “네? 빗이요?” “네. 머리 빗을 때 사용하는 빗이요.” “아, 아니요. 가지고 있지 않아요. 그건 갑자기 왜 찾으세요?” 내 물음이 뜬금 없었는지, 하연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나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문득 한소영의 아름답게 흘러내리던 칠흑빛깔 머리카락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고개를 흔들어 그 상념을 떨치고 나는 몸을 일으켰다. 지금 시간은 정오를 막 지나고 있을 것이다. 조금 시간이 남아있지만, 미리 준비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지금쯤이면 대충 사용자들도 빠졌을 겁니다. 다시 여관으로 돌아가죠. 이것저것 준비할 것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 준비 과정에는, 빗을 사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 <북부 대륙 대도시 바바라 - 황금 사자 클랜 하우스(Clan House)> “지금 그깟 신생 클랜 하나 때문에 황금 사자가 굽히고 들어간다는 겁니까?” “말 조심해. 굽히긴 누가 굽힌다는 거지?” “그럼 도대체 왜 수배를 내리지 않으시는 겁니까. 뮬에서 범죄를 저지른 부랑자나 다름없는 놈들인데 바바라에서 버젓이 활동을…큭!” 듣다 듣다 참지 못하겠는지, 멋들어진 콧수염을 기른 중년이 발을 세게 내질렀다. 퍽, 소리와 함께 마주 서 있던 젊은 남성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입 조심해. 범죄를 저질렀다고? 자네가 데려간 레인저의 보고에 따르면 상호간의 전투 흔적이 남아 있었어. 그것도 너도밤나무 쪽에서 선공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군. 괜한 헛소문 퍼트리지 말게.” “젠장! 믿을 수 없습니다. 현아가, 현아가 그럴 리가….” “그래서 일단 얘기를 들어보자고. 듣고 판단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 그 놈들 얘기만 들어서 뭐합니까? 지금 너도밤나무 클랜 로드의 상태가 어떤 줄은 아십니까.” 바닥에 몸을 누운 남성은, 얻어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고개를 올렸다. 그러나 되돌아온 대답은 싸늘한 한기를 품고 있었다. “들었네.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애초에 그녀한테는 큰 기대도 안하고 있었고.” “그게 무슨 소리죠?” 바닥에 엎어져 있던 그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콧수염 남성의 말에, 눈동자는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쯧쯧. 정신차려 이 친구야. 그네들한테 정말로 대표 클랜을 맡겼다고 생각한 건가?” “부, 분명히 인수 인계를….” “그거야 형식적인 절차고. 어차피 원정에서 돌아오면 곧바로 회수할 작정이었네.” “뭐, 뭐라…!” “신태승.” 젊은 남성이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중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상황을 냉정하게 봐. 지금 원정 실패에, 포탈은 열렸고, 소집령을 발동했네. 처리해야 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야. 우리에게 이빨을 드러내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고. 그런데, 클랜 로드가 사망한 것도 아니고. 고작 클랜원들의 마찰에 불과한 사건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소릴세.” “제가 하겠습니다! 그래서 <진실의 수정> 사용 권한을 달라고 한 것 아닙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정황도 분명하지 않고, 무엇보다 그림자 여왕이 개입되어 있어. 무엇보다 시크릿이 둘에 레어가 셋이야! 안 그래도 다른 클랜에서 침을 뚝뚝 흘리고 있는데, 시작부터 엇나가면 어쩌자는 건가!” “크윽….” “자네 연애 감정은 잘 알고 있네만, 공과 사는 구분하게.” 신태승이라 불린 남성 사용자는 이를 갈았다. 그는 증오 어린 눈길로 중년을 쳐다보더니, 곧바로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중년 남성은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후우. 추한 꼴을 보였군.” “…….” “자네하고는 별로 상관없는 일 이겠지만, 방금 전 일은 함부로 떠들고 다니지 말게.” “알겠습니다.” 냉랭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처음부터 모든 상황을 지켜봤는지, 한 여성 마법사는 책상 옆으로 다소곳하게 서 있었다. “좋아. 그럼 이만 나가봐. 곧 여러 클랜들이 입장할 터이니 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신경 써주게. 뭐, 간부들이 알아서 잘 해주겠지만 말이야.” “네.” “아 잠깐만. 성유빈한테 들은 건데, 그 남자와 아는 사이라고 했지? 이번에 창설된 머셔너리 클랜의 로드와 말이야.” 막 문을 나서려던 또 하나의 발걸음이 멈췄다. 바깥을 향하던 발이 다시금 방 내부로 향했다. “…네.” “김수현이라고 했던가. 그 남자의 가치는 굉장히 높아. 아무쪼록 위에서 지시한대로 잘 해보라고.”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바쁠 텐데 이만 나가봐.” 중년의 남성은 피로한 얼굴로 크게 기지개를 폈다. 이윽고 문 앞에서 멈췄던 발걸음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발걸음에는 오직 자기 자신만 알 수 있을 정도로, 필요 이상의 힘이 담겨 있었다. 대리석 바닥을 꾹꾹 눌러 밟으며 걷던 여성 마법사는 이내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휴. 오늘 이전 회에서 말씀 드린 소설을 보느라 자칫하면 자정 연재에 차질이 있을 뻔 했습니다. (__) 아, 제가 지금 읽고 있는 소설은 <자베트> 작가님의 <짐승>이란 작품 입니다. 좀비 생존 물에 능력 물이 결합된 소설 입니다. 조금 수위가 높기는 하지만, 시원한 글 전개에 드립이 참 찰지더라고요. 주인공의 행보도 굉장히 후련(?), 활발하고요. 하하하. 혹시 높은 수위에 대해 거부감이 없으신 분들은, 한번 읽어 보시는걸 권해 드립니다. :D PS. 200회 입니다. 200회까지 이끌어 오다니, 감격 또 감격입니다. 이 모두가 독자 분들의 많은 관심과 응원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노력하고, 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S. 쿠폰 쏴주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_(__)_ 200회를 앞둬서 그런지 보고 깜짝 놀랐네요. ㅜ.ㅠ 『 리리플 』 1. Dark설 : 오호. 1등 축하 드립니다. 이번에도 새로운 분이 나오셨군요! 감격적인 200회, 아 지금 199회 쓰고 있구나. 아하하. 제가 착각 했네요. 아무튼, 이번 회도 재미있게 감상해 주세요. :D 2. hohokoya1 : hohokoya1님! 1등! 1등! 1등! 언제나 아깝게 1등을 놓치세요. ㅜ.ㅠ 언젠가는, 분명 hohokoya1님이 1등을 여러번 하실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3. 보레아스 : 크크킄. 과연 그럴까요? 다음 회를 기대해주세요! 4. 소심선 : 감사 합니다. (__) 읽어 주시는 것만 해도 너무너무 감사 합니다. 하하하. 5. 시즈프레어 : 저는 그럼 시즈프레어님을 누나라고 부르겠습니다! 누나!!!! 아, 아닙니다. 제가 200회에 기뻐 잠시 정신줄을 놓았나 보네요. ㅜ.ㅠ 6. 푸른산호숲 : 누가 강한지는 이미 결정한 상태 입니다. 껄껄. 알고 싶으시면! 스포일러가 상관 없으시면! 쪽지 주세요! 7. gkgngh : 짐승이에요 짐승! 자베트 작가님의 작품 짐승 입니다! 혹시 수위에 상관 없으시다면 한번 읽어보세요! 재미있어요! 8. 신B : 가능합니다. 그러나, 일부 직업군을 제외하고는 대세가 아니에요! 9. 레필 : 후기 수정 했습니다. 서로 완벽하게 애모하던 사이가 아님은 맞습니다. 그러나, 아끼는 클랜원은 훨씬 상회하는 관계의 설정 입니다. 제가 후기에 말실수를 했다고 여겨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ㅜ.ㅠ 10. 소설정복자 : 쿠폰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좋은 내용으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__)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평점,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01 / 0933 ---------------------------------------------- Attention 나는 항상 그를 생각했다. 그날 밤. 그의 뒤를 따라가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 수료식이 끝나고 헤어진 이후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내 마음속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려고 할 때마다 같이 따라오는 그날 밤의 기억. 그날 밤 그와 나눴던 대화를 하나씩 되새김질할 때마다 가슴이 아릿해지고, 절로 눈을 꼭 감게 된다. <강철 산맥으로의 진군이 성공할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 간부 추천을 한다고 했지만 그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생각은 해봤니? 아니, 그보다 네가 입단하려는 클랜의 사용자들을 정말로 믿을만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그럼 오빠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가요. 입을 벌려 계속 말을 이어보려고 했지만, 목구멍에 무언가가 콱 막힌 듯 더 이상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때를 회상하려고 하면 본능적으로 회피하고만 싶어진다. 한동안 후회 감에 몸부림쳤지만, 이내 입을 닫고 말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그와 함께 했던 시절을 하나씩 되짚어볼 뿐. 지금은 그것만이 나를 지탱해주는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처음 통과 의례를 시작했을 때.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남자의 분란으로 팀이 해체될 위기에 놓였을 때. 괴물들의 시선을 끌고, 그 악몽 같았던 숲 안으로 유인해 들어갈 때. 오두막 앞에서 말다툼을 했을 때. 보스 몬스터를 혼자서 맡고 우리들을 도망치게 만들었을 때. 하지만 보란 듯이 살아남아 다시금 돌아왔을 때. 그리고 홀 플레인으로 들어왔을 때. 아마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어긋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홀 플레인 이후의 기억을 더듬어보려고 했지만, 그날 밤을 제외하고는 생각나는 게 거의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겠지. 내가 의도적으로 피했으니까. “힘들어….” 힘들다. 나도 모르게 약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상황이 너무나 혼란스럽다. 그대로 웅크리고 앉아 양 어깨를 감싸 쥐었다. 고개를 묻고 어깨를 세게 쥐어봤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때였다. “김한별! 김한별! 너 어디 있어! 당장 방에서 안 나와?” 벌컥거리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팔 아래로 묻었던 고개를 들자 잔뜩 화난 얼굴로 숨을 씩씩 몰아 쉬는 한 명의 여성 사용자가 보였다. 성유빈이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절로 욕설을 내뱉을 뻔 했다. 하지만, 간신히 입을 다묾으로써 불상사를 피할 수 있었다. “어후, 담배 냄새. 너 담배 피웠니? 지금 클랜원들 다 밖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데 혼자서 편하게 쉬고 있어? 담배나 처 피우면서?” “…….” “어머. 얘 눈 똑바로 뜨고 노려보는 것 좀 봐. 사람 하나 잡아 먹겠다? 당장 눈 안 깔아?” “…곧 나가려고 했어요.” 성유빈. 박현우의 소개로 황금 사자에 들어온 이후, 나를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는 사용자들 중 한 명이었다. 원정 이후 체계가 어그러져 성유빈이 임시 적으로 나를 담당하고 가르치는 간부가 되었다. 박현우가 있을 때는 그나마 잠잠했는데 그가 부상으로 이탈한 사이 내게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도 과도할 정도로. “하여간. 애초에 버릇을 잘못 들였어. 시크릿 클래스면 뭐해? 답이 안 보인다, 답이.” 무시하자. 괜히 같이 있어봤자 속만 상하고 기분만 더러워진다. 그렇게 막 방문을 나서려는 찰나였다. “야.” “…네.” “미리 말해두는데. 오늘 똑바로 해.” “…….” 고개를 돌리자, 재수 없는 성유빈의 얼굴이 보였다. 얼굴에는 비웃음의 표정이 가득 떠오르고 있었고,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입 꼬리가 살짝 휘어 올라가 있다. 마치 이 기회를 틈타 나를 마음껏 구박할 수 있는데 큰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내 얼굴을 살피는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는, 비열함을 담뿍 담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똑바로 하라고. 알아들어? 참고로 말하는데, 나한테서 박현우를 기대하지마. 나는 현우 오빠가 아니라, 성유빈이야 성유빈. 그 동안 많이 편했지? 대접도 받고 좋았지?” “뭘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그래? 그럼 지금부터 알려주면 되겠네. 당장 따라 나와. 할 일이 산더미니까.” 성유빈은 말을 마치고는 성큼성큼 내 옆을 지나쳐갔다. 지나가면서 그녀의 어깨가 나를 세게 밀쳤고, 그 반동으로 한두 번 비틀거릴 수 밖에 없었다. “어물쩍거리지 말고 빨리빨리 움직이라고. 하여간 느려 터져 갖고는.” 그녀는 기어코 한마디 더 내뱉고는 휑하니 방을 나가버렸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수치심을 참으며, 나는 입술을 깨물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 해가 뉘엿뉘엿 하늘을 넘어가고 있었다. 밤이 찾아오기 전 오라고 했으니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워프 게이트가 있는 만큼 도시간 떨어져 있는 거리의 의미는 크게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바바라 내에 있었다. 엄청 빨리 가지는 않더라도 늦지 않게 도착할 필요는 있었다. 각 도시를 대표하는 거물들의 모임인데 지각으로 인해 건방지다는 인상을 찍어봐야 하등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행하는 인원은 고연주 한 명으로 정했다. 애초에 워낙 큰 자리이다 보니 같이 가고 싶어하는 클랜원들도 없었다. 정하연에게 일행들을 부탁한 후, 나는 혹시 모르니 짐을 미리 챙겨 놓으라고 지시했다. 일단은 소집령이 어떻게 매듭지어 지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지만, 크게 어긋나지만 않으면 기존에 세워둔 계획대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어떻게 보면 좋은 기회였다. 소집령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바로 그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까. 나는 과연 어떤 사용자들이 올까, 어떤 대화가 오고 갈까 상상하며 거리를 걸었다. 물론 그 상상의 중심에는 한소영이 있었다. 바바라는 대도시인 만큼 정비가 굉장히 잘돼있다. 하지만 도시가 너무 크고 방대하다 보니 까닥 잘못하다가는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들 이었다. 바바라는 내게 매우 익숙한 도시다. 1회 차 처음에는 어떻게든 캐러밴을 구하고 싶어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고, 조금 성장한 이후로는 음지를 돌아다녔다. 그렇기 때문에 웬만한 지리는 제법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클랜 하우스는 사용자 아카데미와 가까운 곳에 있다. 황금 사자의 클랜 하우스라면 과장 하나 안 보태고 눈 감고 찾아갈 수 있을 정도였다. 금새 반듯한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고 익숙한 거리가 보인다. 번화가를 지나 다리를 건너고, 광장으로 들어선 나는 고연주를 대동한 채 중앙으로 이어진 길로 걸음을 옮겼다. 이 광장을 지나면 다시금 수많은 건물들이 늘어서있는 번화가로 진입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우리들의 목적지가 있었다. 어느 도시이던 간에 광장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큼지막하게 세워져 있는 게시판에는 수많은 광고들이 더덕더덕 붙어 있었지만, 그 중 단연 압도적인 광고는 오늘 뿌려진 클랜 홍보 기록이었다. 그것은 크게 확대되어 붙여져 있었다. 그 주변으로 한 무리의 사용자들이 모여 있다가 이내 우리를 봤는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또 사용자들이 우글우글 모이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다행히 광장은 비교적 한산했다. 시간대가 아침에 탐험을 나갔다가 돌아올 시간이긴 했지만, 이곳이 대도시임을 감안하면 확실히 적은 편이었다. 일일 캐러밴 또는 동료를 구하는 사용자들이 주로 상주하는 곳이 광장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보이는 사용자들이 적은 것을 보니 <시작의 여관> 포탈이 열린 영향으로 황금 사자 클랜에서 통제를 한 것 같았다. 초보 사용자 시절 이곳에 앉아 있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한 클랜의 로드로써 소집령에 초청을 받는 신분이 되었다. 비록 예상치 못했다고 하더라도 조금 미묘한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는지 주변에 있던 사용자들 중 몇몇이 슬금슬금 모여드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옆에서 팔짱을 끼고 걷고 있던 고연주가 한번 둘러보자 더 이상 거리를 줄이지는 않았다. 나는 다른 방향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목적지를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상점가들이 일렬로 늘어져있는 거리를 지나자 왼쪽으로 하얀 대리석 건물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고개를 올리자 지붕 위로 아름다운 날개가 음각된 동상이 보였다. 바바라의 신전이었다. 뮬에 있는 신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 있는 크기와 너비를 갖추고 있었다. 문득 세라프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바로 머리를 털어냈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전을 돌아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자, 비로소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아오른 건물들이 보였다. 그 중에는 황금 사자의 클랜 하우스와 사용자 아카데미를 상징하는 문양들도 있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자 내 팔을 살짝 끌어당기는 기척이 느껴졌다. 옆을 돌아보니 고연주가 미약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현.” “네.” “긴장했어요?” “아뇨. 왜요?” 고연주는 “아까부터 말이 없어서요.” 라고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 같이 예쁜 여자랑 걸어서 그런가 봐요.” 라고 응수해주었다. 고연주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깔깔. 내가 못살아 정말. 그래도 농담을 던지는걸 보니 긴장은 하지 않은 것 같네요. 응응.”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여쁜 여성의 웃음에 불과한 일이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주위로 웅성거리는 소음이 퍼져나갔다. 지금 내 옆에 팔짱을 끼고 걷는 사용자는 <그림자 여왕> 고연주. 10강이고, 그 동안 베일에 싸여 있었다는 사용자가 드러난 것도 놀라운데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친근해하는 모습을 보이니 믿기 힘든 모양이다. 물론 이것 또한 보여주기의 일종이었다. 아침에 했던 행동이 클랜으로서의 위신을 보여준 거라면, 지금은 나와 고연주 개인의 관계를 보여줬다. 아무래도 10강에 이른 사용자가 0년 차 사용자 밑에 들어간 것을 믿기 힘들어하는 사용자들이 많을 테니, 그녀 나름의 세심한 배려라고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웃으며 거리를 걷던 우리는 곧 목적지 부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눈 앞에는 클랜 하우스 정문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세워져 있었다. 아직 닫혀 있어서 내구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리저리 부산스러운 기척이 느껴졌다. 더불어 누군가 빽빽 날카로운 고함을 지르는 소리도 벽을 타고 귀에 들어오고 있었다. 청각을 돋우면 어떤 말을 하는지 들을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들어갈까요?” “아니, 잠시만 기다려요. 우리가 먼저 들어갈 필요는 없어요.” 고연주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이내 몸을 돌려 나를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가냘픈 손가락 하나를 들어 내 콧잔등을 살짝 훑었다. 이윽고 손가락 끝을 가볍게 부는 그녀를 보는 순간, 나는 주변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고개를 돌려 정문을 보니 어느새 문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열린 틈 사이로 일련의 사용자 무리들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눈동자에 힘을 주자 가장 선두에 선 사용자의 인상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짙은 붉은빛의 로브를 입고 있는 걸로 보아 마법사인 것 같았는데 일전에 광장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아마 성유빈이라고 했던가? 그리고 그녀의 뒤로는…. 차마 뒤를 자세히 살필 틈도 없이 그들은 우리 앞으로 오와 열을 맞춰 걸어왔다. 나는 재빨리 제 3의 눈을 활성화시켰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성유빈(3년차) 2. 클래스(Class) : 일반 마법사(NorMal Mage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황금 사자 5. 진명 · 국적 : 달콤한 입술, 칼을 감춘 뱃속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4) 7. 신장 · 체중 : 170.5cm · 48.5kg 8. 성향 : 욕망 · 음란(Ambition · Obscene) [근력 44] [내구 38] [민첩 56] [체력 50] [마력 94(+1)] [행운 70] < 능력치 비교 > 1. 김수현 : 544 / 600~ [근력 96(+2)] [내구 92] [민첩 98] [체력 72] [마력 96] [행운 90(+2)] (능력치 포인트가 12 포인트 남은 상태 입니다.) 2. 성유빈 : 352 / 600~ [근력 44] [내구 38] [민첩 56] [체력 50] [마력 94(+1)] [행운 70] (능력치 포인트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황금 사자 클랜의 소집령을 받으신 클랜 소속 이신가요.” “예. 머셔너리 클랜 로드 김수현입니다.” 이미 알고 있음에도 물어보는 의례적인 인사였다. 내 말을 받은 성유빈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후 말을 이었다. “황금 사자 클랜의 소집령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옆에 있으신 분이….” 자부심으로 먹고 사는 황금 사자 클랜원이고, 더구나 이 정도의 능력치를 갖고 있으면 분명히 간부급 사용자일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내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는 처음부터 굽히고 들어왔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흘끗 눈길을 돌렸다. 그것을 보고 나서야 나는 성유빈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머셔너리 클랜은 막 창설된 신생 클랜이고 아직까지 다른 클랜들과 별다른 관계를 맺지 않고 있었다. 즉 외교 관계가 백지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머리가 좀 돌아가는 사용자라면 클랜 성향이나 이름을 보고 대강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곧이어, 성유빈이 말을 잇는 소리가 들렸다. “…<그림자 여왕>으로 불리는 고연주님 되시나요?” “그래. 다 알면서 물어보기는. 그런데 너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누구니?” 그녀의 물음에 고연주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내 역할은 처음의 인사를 받아준 것으로 끝 이었다. 성유빈은 클랜 로드가 아니다. 보아하니 대충 중간 간부 정도로 보였다. 그래서 우리 쪽에서도 로드가 아닌 비슷한 직급의 휘하 클랜원이 나선 것이다. 물론 고연주가 초반부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황금 사자 클랜의 3년 차 사용자 성유빈이라고 합니다. 평소 <그림자 여왕>님의 명성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습니다.” “아아~. 현우한테 몇 번 들은 기억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 오늘따라 걔가 안보이네?” “사용자 박현우는 원정에서 돌아온 이후로 부상을 입었습니다. 큰 부상은 아니니, 소집 회의에는 몸을 드러낼 예정입니다.” 고연주는 시종일관 반말로 응수하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 못하는 거겠지. 비록 나는 살짝 말을 높이기는 했지만, 딱히 그녀의 말투를 책잡을 생각은 없었다. 고연주는 그래도 되는 위치에 있었으니까. 설령 상대가 황금 사자의 간부라고 해도 말이다. “아~그래? 난 또 강철 산맥 원정 이후로 대 간부 됐다고 벌써 머리가 굵어졌나 싶었지. 호호. 그럼 이만 안내를 해주렴. 언제까지 세워둘 생각이니?” 고연주가 흘리듯 내뱉은 말에, 성유빈의 몸이 움찔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설마 황금 사자의 내부 사정을 그렇게 상세하게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는 잠시 고연주를 올려다보았다. 무언가 허락을 구하는듯한 시선을 보내자, 고연주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성유빈은 곧바로 나와의 거리를 줄이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내 앞으로 오고 나서야 비로소 뒤에 서 있던 낯설지 않은 사용자 한 명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찰찰 한 윤기를 내는 칠흑 빛 머리카락 속으로 연하게 감도는 블루 빛깔. 감정을 잃어버린듯한 차가운 얼굴. 그 사용자의 정체는, 바로 보석 마법사 김한별이었다. 나는 담담한 눈동자를 들어 그녀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그녀는 그저 조용히, 그리고 공손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마치 일부러 나와 시선을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쉰 후 성유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머셔너리 클랜 로드께서 직접 소집에 응해주신대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럼, 안으로 들어가시죠.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성유빈은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어느새 처음의 정중한 표정은 온데간데 없고, 생글거리는 얼굴로 눈웃음을 살살 치고 있었다. 꼭 애교를 부리는 고양이 같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마침내 김한별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하는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내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잘은 모르겠지만 왠지 성유빈의 뒤통수를 쏘아보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 봤을 때는 몰랐는데 얼굴이 살짝 울긋불긋한 것을 보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문득 방금 전 클랜 하우스 내부에서 들렸던 고함 소리가 머리를 스쳤다. “환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안내를 부탁 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럼 안내해 봐.” 보다는 그냥 무난하게 들리는 말을 골랐다. 이윽고 고연주가 내 뒤로 시립하고, 성유빈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와 동시에 뒤에 정렬해있던 인원들은, 그 상태 그대로 반원을 그리며 나와 성유빈의 뒤로 가지런히 줄지어 섰다. 과연 썩어도 준치라고 한때 북 대륙을 호령한 군기가 살아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오늘 일요일인데 연참을 하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보다 여유롭게 자정 연재는 마감할 수 있었는데, 기다리고 계시던 독자 분들께 그저 죄송한 마음뿐 입니다. 아무래도 시험도 끝나고, 과제도 대부분 해결하다 보니 긴장이 탁 풀린 것 같습니다. 오늘 오후에 잠깐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일어나보니까 4시간이 훌쩍 지났더라 고요. ㅜ.ㅠ 저를 매우 치세요. 엉엉. PS. 200회 기념이라서 그런지 쿠폰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메모라이즈에 쿠폰을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꾸벅. _(__)_ 1. MT곰 : 하하. 제 소설이 활력소라니, 감사합니다. 기분 좋은 말이네요. :) 뜻 깊은 200회에 첫 코를 하셔서 그런지 더욱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1등 축하 드립니다. 앞으로도 메모라이즈에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 2. 평화롭군 : 음. 김한별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함부로 말씀 드리기 곤란하지만, 빨리 내보내는 데는 많은 무리가 따릅니다. 만일 영입하게 된다면 황금 사자 클랜에서도, 머셔너리 클랜에서도 많은 진통이 따르지 않을까요? 하하하. 3. 변삳또 : 원고료 감사합니다. (__) 한결 같다는 말, 저도 참 좋아합니다. 물론 소설인 만큼 항상 절정만 있을 수 없고, 나름의 위기도 있어야겠죠. 다만 주인공이 그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도 앞으로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응원 부탁 드립니다. :D 4. 여옥아놀자 : 여옥아놀자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하. 200회에는 예전에 자주 뵈었던 분들을 많이 볼 수 있어 참 좋네요. 안솔을 그렇게 만들어서 죄송해요. ;ㅇ; 그러나, 앞으로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나갈 생각입니다. 부디, 그때가 오기를 기다려주세요. ^^ 5. 야우로 : 껄껄. 그러고 보니 메모라이즈를 연재하면서 정말로 많은 일들이 있었네요. 무엇보다 부모님께 걸렸을 때가(?) 가장 최고의 위기였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좋은 방향으로 풀렸지만 말이에요. ㅜ.ㅠ 6. 레필 : 네. 제가 그때 후기에 너무 경솔하게 달았던 것 같습니다. 한소영은 1회 차 주인공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사용자 입니다. 간간이 외전으로 그때의 관계를 조금씩 드러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하. 7. 닉네임중복 : 아마, 이번에도 김한별을 둘러싼 많은 논란이 있을 거라고 조심스럽게 예상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때(김수현을 떠났을 때) 거의 안솔 이상으로 호 불호가 갈리는 코멘트들이 달렸거든요. 물론 이번에는 김한별의 거취를 결정한 상태입니다. 설정 그대로 변함없이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8. archangels la : 아니, 그런 전통이 있었군요. 몰랐습니다. 허허허. 그렇다면 저는 그 전통을 깨는 첫 작가가 되겠습니다.(퍽퍽!) 9. 천성녀 : 조언 감사합니다. 확실히 사용자라는 단어의 빈도가 높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는 조금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침실에서 사용자 고연주라고 쓴 건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네요. 하하하.) 10. 서비스 : 음.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미래를 알고 있다는 메리트는 최대한 활용할 생각이에요. 달라진 부분에 대해서는 이제부터 스스로의 분석을 해야겠지만 미래에 대한 언급도 곁들여 대조, 비교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D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평점,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02 / 0933 ---------------------------------------------- Attention 성유빈의 인도에 따라 우리들은 정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정문 안으로 들어선 순간, 마침내 황금 사자의 클랜 하우스는 내부의 웅장한 위용을 드러내었다. 시야로 들어오는 풍경을 전체적으로 한번 훑자 약간은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제는 미래를 장담할 수 없겠지만, 이렇게 좋은 시설이 부랑자들의 발 아래 짓밟힐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조금 아까웠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적당한 보폭을 맞추며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는 인도 중 중앙으로 난 부드러운 길을 따라 걸었다. 그 와중에 금호(金儫)관을 향해 걸음을 옮기면서 내부를 더욱 자세히 구경할 수 있었다. 중심에 떡 버티고 있는 본관도, 그 뒤로 일부분만 슬쩍 모습을 내보이는 별관도, 그 외로 병영, 숙소, 수련장으로 보이는 건물 등등. 확실히 시설 하나하나가 최고급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좋은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분명 내부는 절로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화려함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밋밋하고 심심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한동안 주위를 관찰하던 나는 곧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용자들의 숫자에서 기인한 쓸쓸함이었다. 현재 황금 사자 클랜 소속 사용자들은 약 400명 남짓이라고 한다. 당연히 400명이라는 숫자를 적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최 전성기 시절 보유하고 있던 1400여명이라는 숫자와 비교한다면 손색이 있을 수밖에 없는 숫자였다. 단적인 예로 원정 출범식 때 주변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호화로운 사용자들이 행렬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1000명의 부재가 가져다 주는 상실감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단순히 사람이 없다 정도가 아닌 동료를 잃어버린 아픔이 진하게 베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막 클랜 내부로 들어온 내가 이렇게 느낄 정도인데 실제 황금 사자 클랜원들이 느끼는 상실감은 어느 정도일까?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건재함을 과시하려는 그들이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머셔너리 로드 김수현.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질문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침묵을 지키며 걷던 도중 내 옆에 바짝 붙어 걷고 있던 성유빈이 말을 걸었다. 고개를 돌리자 조심스러운 얼굴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표정을 보자 내부 깊숙한 곳에서 뜻 모를 쾌감 치밀어 올랐다. 그 감정을 자세히 관조하자 곧 쾌감을 이루는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남성들만이 느낄 수 있는 우월감과 정복 욕구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 말인즉슨, 성유빈은 일부러 저런 표정을 지었다는 소리였다. 남자의 감정을 제법 다룰 줄 아는 여자였다. 객관적으로 봐도 꽤나 예쁘장한 얼굴이기는 했다. 하지만 성깔이 좀(실은 많이.) 있어 보이고, 무엇보다 삐쩍 마른 몸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제 3의 눈으로 봤던 그녀의 성향을 생각하며 나는 재빠르게 속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담담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씀하시죠.” “허락에 감사 드려요. 다름이 아니라 머셔너리 로드께서는 6개월 전 혹시 사용자 아카데미를 수료하지 않으셨나요?” “네. 그런데요.” “호호. 그때 분명 수석으로 수료하신 걸로 기억해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어떻게든 붙잡는 거였는데, 아이 참. 너무 아쉬워요.” 고연주의 말에 따르면 새벽에 클랜에 대한 홍보가 뿌려졌다고 한다. 아니면 그 전에 너도밤나무 클랜과의 일을 조사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물론 성유빈이 꺼낸 말이 대단한 정보는 아니었다. 그때 당시 황금 사자 클랜의 오퍼를 거절한 것은 나름 이슈라고 볼 수 있으니 기억하고 있는 사용자 한둘이 있을 법도 했다. 아무튼 한가지 확실한 것은, 황금 사자 클랜 내부에서도 나름대로 뭔가 움직임이 있다는 것. 그녀의 질문을 듣자 그네들의 초점이 일부 내게 맞춰져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의례적으로 몇 번 덕담을 주고 받자 자연스레 분위기는 부드럽게 흘러갔다. 이 분위기를 노리고 있었는지 성유빈은 대화 도중 슬쩍 화제를 돌리며 뜻 밖의 말을 꺼냈다. “호호. 홍보 기록은 인상 깊게 읽었어요. 시크릿 클래스라고 하셨죠? 축하 드려요. 아, 그러고 보니 지금 제 뒤에 걷고 있는 아이도 0년 차에 시크릿 클래스에요. 제가 알기로는 머셔너리 로드님과 같은 시기에 홀 플레인으로 들어왔다고 알고 있는데….” 그녀는 말을 마친 후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뒤에서는 어떤 반응도 들리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지만, 나는 분명 성유빈의 얼굴이 일그러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곧이어, 뒤쪽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귓가로 날아들었다. “…예. 안녕…하세요….” “음. 그래 한별아. 오랜만이다.” “…………네.” 나는 걸음을 살짝 늦추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나 김한별은 여전히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지 않았다. 애꿎은 땅바닥만 보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듣는 한별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동안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그녀의 어조에서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예전에 또박또박 날카롭게 따지고 들던 때와 비교하면 정말 김한별이 맞나 의심될 정도였다. 나와 그녀 사이로 떨떠름한 대화가 오고 가자 잽싸게 성유빈이 끼어들었다. “호, 호호. 이해하세요. 얘가 아직 어색한 것 같네요.” “아 네. 괜찮습니다.” 그녀는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며 아양을 떨었다. 나는 겉으로는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며 웃었지만, 속으로는 콧방귀를 뀌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던 미묘한 기분은 방금 전 성유빈과 김한별이 보여준 행동으로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차라리 원정 참가에 의한 충격으로 저렇게 됐다는 핑계가 더 나을 텐데. 황금 사자에서는 나와 김한별의 자세한 관계까지는 모르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한별이 숨긴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하긴, 모든 정황을 알았다면 이런 짓거리는 세우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사소한 해프닝을 치르는 동안 우리들은 비로소 금호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상아빛 건물 옥상에는 뾰족한 창모양을 하고 있는 조각상이 하늘을 뚫고 솟아 오를 것 같은 늠름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돌을 깎아 만든 계단을 올라 문을 열고 들어서자, 큼지막한 회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회관을 가로지르는 맞은 편에는 윤기가 번들거리는 나무로 만든 커다란 문이 보였다. 아마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약속 장소인 회의실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벽면에 촘촘히 박힌 라이트 스톤들이 뿜어내는 빛 사이를 걸으며 우리들은 점점 문과의 거리를 줄였다. 점점 문이 크게 다가오는 것을 보며,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저희들이 첫 번째로 소집령에 응한 클랜입니까?” “네? 아. 아니에요. 정확히 두 번째입니다. 첫 번째로는, 앞서 도착하신 다른 클랜 분들이 있어요.” 내심 설마 있겠냐 싶었는데 의외의 대답이 되돌아왔다. 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느 클랜인지 묻고 싶었지만, 잠시 의문을 가지는 사이에 문 앞으로 도착하고 말았다. “그럼 저희는 다시 정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곧 오실 분들 또한 안내할 필요가 있어서요. 내부로 들어가시면 각 클랜마다 배정한 자리가 있으니, 그곳에 앉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안내에 감사 드립니다.” 성유빈은 내 말에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다음, 손수 문을 열어주었다. 커다란 나무문의 틈이 서서히 열리더니 이내 한 순간에 활짝 열리는 게 보였다. 열린 문 안으로 보이는 회의실은 어찌나 큰지 고연주의 <조신한 숙녀> 여관 1층 정도는 가뿐히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의 크기를 뽐내고 있었다. 막 문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서려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나를 애타게 쳐다보는 복잡한 시선 하나가 기척에 걸렸다. 그곳을 향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블루블랙빛깔의 머리카락이 찰랑이며 돌아서는걸 볼 수 있었다. 아마도 내가 시선을 돌리는 게 보이자 바로 고개를 피한 모양이다. 어느덧 우리를 안내해준 인원들이 완전히 물러나고 있었다. 힘 없는 발걸음으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나는 도로 열린 문 내부를 살펴보려고 했다. 그러나. “자자. 서있지만 말고 들어가자 고요.” “자, 잠시만요.” 채 자세히 보기도 전에 고연주가 나를 떠밀 듯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렇게 회의실 안으로 진입하자 양 옆으로 기다랗게 늘어진 테이블 두 개가 눈에 들었다. 그리고, 한쪽 테이블 끝자락에 두 명의 사용자가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두 명이 나를 돌아본 것은 아니었다. 보이는 것은 그저 옆모습에 불과했지만, 나는 그녀들의 정체를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이윽고 내가 들어온 기척을 느꼈는지 한 명의 고개가 천천히 나를 향하는 게 보였다.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고개가 천천히 내가 있는 방향을 향할수록 호흡이 가빠지고, 요동치는 심장의 속도는 멈추지 않을 기세로 가속도가 붙고 있었다. 그녀는 그 동안 내가 애타게 그리던, 그리고 너무도 다시 보고 싶었던 한소영 이었다. * 목구멍에서 무언가 울컥 이는 감정 북 받쳐 오르고, 머릿속으로 핑 현기증이 돌았다. 자꾸만 아득해지려는 이성을 간신히 붙잡자, 절로 눈동자가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온 몸에 짜릿한 전율이 멈추지 않고 흐른다. 나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테이블 위를 훑었다. 공교롭게도, 머셔너리 클랜에 할당된 자리는 한소영의 맞은편에 있었다. 그때였다. 내 등을 쿡 찌르는 하나의 손가락이 있었다. 몸을 돌리자 고연주의 얼굴에는 도대체 왜 그러냐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애써 덤덤한 척을 하고 있었지만 가까이 있는 그녀는 내 변화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덜덜거리는 입술과 불규칙한 호흡. 억지로 억누르려고 할수록 내 의지에 반발하듯, 심장은 쿵쾅쿵쾅 고동치는 것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나는 살짝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테이블을 향해 걸었다. 결국 자리에 앉고 나서도 현재 상태를 진정시킬 수 없었다. 언뜻 보면 평온해 보이겠지만,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현재 내 상태를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볼수록 심해지는 가슴의 떨림은 나도 어찌할 수 없었다. 영영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그녀가, 그토록 비참하게 죽었던 그녀가 지금 내 눈 앞에 다시 서 있었다. 그것도 마지막의 절규를 부르짖던 모습이 아닌, 오롯하고 오연한 모습으로. 어느새 한소영의 시선은 나와 고연주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온 몸이 얼음으로 가득 차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오랜만이군요. 그림자 여왕, 고연주.” 은은한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흘렀고, 이내 홀 내부를 살며시 뒤흔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듣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다시 한번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혀를 깨물었다. 조금이지만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네~. 오랜만이에요. 이스탄텔 로우 로드, 한소영.” 고연주가 말을 꺼내자마자 옆에서 가벼운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시선을 돌린 고연주의 눈동자에서 진득한 살기가 폭사되듯 흘러나왔다. “연혜림.” 한소영은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옆에 앉아 있던 여성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연혜림…? 아, 처형의 공주. 쟤도 있었군. 연혜림은 한소영의 지적에 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돌렸다. “…….”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지만 곧 고연주의 살기가 수그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서야 한소영은 작은 한숨을 내쉰 후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기에 당신이 있다는 소리는, 머셔너리 클랜도 초청을 받았다는 소리겠지요. 그렇다면 옆에 계신 분이 머셔너리 클랜의 로드인가요?” “맞아요. 잘 알고 계시네요.” “오늘 홍보 기록을 봤어요. 그럼 소개를 부탁 드리고 싶군요.” “뭐 어려울 것 없죠. 수현?” “…….” 고연주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가만히 있었다. 고연주는 은근한 손놀림으로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주변 공기를 한껏 빨아들였다. 그리고 입에 고여있던 침을 꿀꺽 삼켰다. 뭔가 멋있게 재회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최소한 이런 모습으로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헝클어진 머릿속을 차분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잠재 능력 심안을 발동시켰다. 이리저리 날뛰던 마음이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그제서야 나는 겨우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 옆에서 처형의 공주로 추정되는 인물의 시선 또한 느껴졌지만, 지금 내 신경은 온통 한소영에게로 쏠려있었다. 한소영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녀와 함께 했던 나날이 동시 다발적으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음미하며, 나는 또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제 3의 눈 또한 활성화시켰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뭔가 극적으로 둘의 만남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한소영이 수현을 보고 애틋함을 느껴야 할 이유가 없더군요. 수현이야 이유가 충분하지만 말이죠. 도대체 몇 줄을 지우고 다시 썼는지 모르겠는데, 어떻게 독자 분들에게 수현의 내면이 잘 와 닿았는지 모르겠습니다. ㅜ.ㅠ 이 부분에 대해서 독자 분들께서 어떻게 느끼셨는지 감상을 듣고 싶습니다. 부족하다 싶은 부분은 차후 이북 작업 시 교정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소중한 조언 부탁 드립니다. (__) 1. 센서티브 : 1등 축하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1등은 언제나 쫄깃하죠. 그리고 감칠맛이 나기도 합니다. 껄껄껄. 그럼, 이번 회도 재미있게 감상해주세요. 2. 가한나 : 아닛! 어디를 때찌하신 건가요! 가한나님 너무해요!(?!) 3. KKKranuse : 하하하. 고맙습니다. 맨 앞의 고x라는 단어가 들어가지 않았으면, 더욱 기뻤을 겁니다. 4. 쿠로시온 : 고맙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1등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것으로 사료 되는 현상으로, 에, 가설라무네. 헤헤헤. >3< 5. 사이룰러우 : 아악, 아악. 매, 매우 치라고 말씀은 드렸지만 너무하세요. ㅜ.ㅠ 쿠폰 감사합니다. (__) 6. 레필 : 실은, 쓰면서도 많이 느꼈습니다. 아 답답하구나. 그런데 이 부분이 또 그렇게 빨리 넘어갈 수도 없는 부분이라서, 정말 머리를 쥐어 뜯을 정도였습니다. 일단 레필님 말씀대로, 당분간은(황금 사자 소집령이 끝날 때 까지는) 거의 주인공의 시점으로 진행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7. 유운[流雲] : 유운[流雲]님은 <인간>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 저와 많이 비슷하신 것 같습니다. 물론 캐릭터가 일관성을 가지는 것도 좋지만 말이죠. 하하하. 8. 호박문어 : 하하. 단순한 능력치로만 보면 그럴지 몰라도, 한별이에게는 시크릿 클래스라는 희소성이 있으니까요. 차후 한별이에 대한 내용은 최대한 납득하실 수 있을 만큼 상세하게 풀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9. 브리키오 : 그렇죠. 일단 연금술사라는 조금 다른 클래스를 갖고 있고, 그것에서 진화된 키메라 연금술사니까요. 아마도 둘이서 정통 마법으로만 붙으면 일반 마법사 전투 설정에 따라 성유빈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비비앙은 정통 마법 랭크가 낮거든요.) 다만 레어 클래스로 습득한 능력을 사용할 경우 성유빈 2명을 상대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레어, 시크릿에 그 정도의 메리트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하하하. 10. Masterpiece : 음, 그렇군요. 분명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그 상황에서 한별의 선택은 나름 합리적이라 볼 수 있는 면이 있으니까요. :) 저 그런데 Masterpiece님. 혹시 마지막에 하신 말씀의 의미를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__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평점,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03 / 0933 ---------------------------------------------- Attention “남부 소도시 모니카의 대표 클랜, 이스탄텔 로우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머셔너리 클랜 로드 김수현입니다.” “고마워요. 저도 만나서 반갑군요. 이스탄텔 로우 클랜 로드 한소영이라고 해요. 늦었지만 머셔너리 클랜의 창설을 축하 드려요.” 한소영은 내 말에 대답한 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 또한 그녀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 가벼운 악수를 나눴다. 간만에 잡아보는 그녀의 손길에 짜릿한 감각이 전신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 감촉은 이내 스륵, 사라지고 말았다. 한소영의 손은 여전히 차가웠다. 또한 나를 쳐다보는 눈동자에는 어딘지 모를 냉랭한 빛이 보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받는 순간 온 몸에 오싹한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 그러고 보니 2회 차 시절 나와 그녀는 이번이 첫 번째 만남이었다. 즉 서로 초면이라는 소리였다. 나야 그녀를 살릴 이유로 1회 차에서 되돌아올 만큼 애틋한 감정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일방통행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혼란스럽던 내 마음은 깊게 침잠해 들어갔다. 문득 저 멀리서 서글픈 마음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무사한 모습을 보면서 퍽 안도감이 들었지만,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순간 뜻 모를 아픔이 전신을 엄습하고 있었다. 생각해볼 것도 없이 당연한 현상이었다. 시간을 되돌린 것은 오직 나 하나에 불과하니까. 그러나 1회 차 시절 나를 보던 그녀의 시선과 현재의 차가운 시선에서 비롯한 괴리감을 그냥 받아들이는 건 내게는 너무도 힘든 일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인정하는 수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비록 그녀와의 관계가 백지로 돌아갔지만, 최소한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 간신히 태연한 얼굴을 가장한 나는 곧 속을 수십 번 가다듬었다. 이제부터는 어디까지나 애초의 목표였던 <살리고, 돌아간다.>에 중점을 둘 필요성이 있었다. 방금 전과 같은 사적인 감정을 조절할 수 없으면 앞으로의 일을 그르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위의 전제하에 앞으로 나와 그녀의 관계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재정립한 관계는 1회 차와는 다른 양상을 보일 것이다. 한소영은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다행히 그녀는 인재에 대한 욕심이 많은 사용자였다. 내가 크게 어긋나지 않는 이상, 그리고 내 쪽에서 호감을 표시할수록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보자마자 “그냥 믿고 따라오세요.” 가 아닌, 첫 만남부터 차근차근 신뢰도를 쌓아나가는 게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활성화시킨 제 3의 눈을 한소영에게로 돌렸다. 일단은 그녀의 사용자 정보부터 자세히 파악할 요량이었다. 한소영 또한 추후 10강에 이르는 사용자인 만큼 범상치 않은 능력을 갖고 있을 것이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한소영(4년 차) 2. 클래스(Class) : 전장의 지휘자(Maestro Of BattleField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이스탄텔 로우 5. 진명 · 국적 : 철혈(Blood And Iron)의 여왕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7) 7. 신장 · 체중 : 174.8cm · 55.8kg 8. 성향 : 신념 · 철혈(Belief · Blood And Iron) [근력 78] [내구 84] [민첩 94(+2)] [체력 86] [마력 98(+2)] [행운 88] < 업적(3▼) > < 고유 능력(1/1) > 1. 카리스마(Rank : A Plus) < 특수 능력(1/1) > 1. 칵키드 피스톨(Cocked Pistol) : 여왕의 군대(Queen’s Army)(Rank : S Plus) < 잠재 능력(4/4) > 1. 초감각(Rank : EX) 2. 전장 지휘(Rank : S Plus) 3. 대(大) 마법(Rank : A Plus Plus Plus) 4. 항마력(Rank : B Plus) < 능력치 비교 > 1. 김수현 : 542 / 600~ [근력 96(+2)] [내구 92] [민첩 98] [체력 72] [마력 96] [행운 90(+2)] (능력치 포인트가 12 포인트 남은 상태 입니다.) 2. 한소영 : 528 / 600~ [근력 78] [내구 84] [민첩 94(+2)] [체력 86] [마력 98(+2)] [행운 88] (능력치 포인트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녀의 능력치는 내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들도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보게 되자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확실히 이정도 능력치라면 이미 10강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녀가 10강의 반열에 드는 것은 조금 더 후의 일 이었다. 이 말인즉슨 그녀도 예전의 나처럼 엎드린 상태로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소리였다. 정 나설 일이 있으면 같은 시크릿 클래스인 <처형의 공주> 연혜림을 내세워 그녀의 명성을 높였을 것이다. 그녀는 과감할 때는 한 없이 과감하지만, 기본적으로 대단히 철저하고 신중한 성격이다. 비록 지금 한소영의 정확한 속내를 짐작할 수는 없지만 분명 그녀 나름의 생각이 있을 것이다. 한소영의 사용자 정보를 읽은 후에야 나는 완전히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헝클어졌던 실타래를 풀 수 있는 자그마한 실 하나를 찾은 기분이었다. 그래. 나는 그녀에게 어리광 부리기 위해서 돌아온 것이 아니라, 기필코 달성해야 할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주변 상황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침 침묵을 지키고 있던 한소영은 다시금 내게 말을 걸었다. “머셔너리 로드. 잠시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으신가요.” “물론입니다.” “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홍보 기록을 읽었는데 머셔너리 클랜은 자유 용병형 클랜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어요. 클랜을 왜 그렇게 설정 하신 건가요?” “자유 용병의 갖는 의미를 생각해봤는데, 기존 클랜의 형식보다 여러모로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입니다.” 나는 일부러 말을 완곡히 돌렸다. 물론 왜 그런 형태의 클랜을 만들었는지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해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내가 갖고 있는 위치도 고려해야 한다. 나는 더 이상 그녀 휘하의 클랜원이 아니라, 어엿한 하나의 클랜을 이끄는 로드의 신분을 갖고 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앞으로 한소영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생각이다. 그렇다면 그에 걸맞은 언행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즉 한쪽에서의 일방적인 개통이 아닌, 양방향 소통을 위한 초석을 다지기 위한 나름의 준비과정 이라고 볼 수 있었다. 내 명료한 대답을 들은 한소영은 이내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이해했는지 한두 번 고개를 주억였다. “하긴, 각 사용자마다 어느 가치에 무게를 두는지는 다를 수 있으니까요. 제가 왈가왈부할 거리는 아니군요. 하지만 자유 용병이 된 이상 여러 혜택들을 포기하셔야 하는데, 그 부분은 아쉽지 않으신가요?” “물론 아쉽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두 개를 동시에 고를 수 없다면, 하나를 선택한 만큼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겠죠.” “그래요. 하지만 찾아보면 아주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네?” 나는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찰나의 순간 한소영은 시선이 꾹 닫혀 있는 방문으로 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왠지 빠르게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싶었는데, 아마 언제 다른 클랜이 소집령에 응할지 모르니 그 전에 내게 뭔가를 제안할 생각인 것 같았다.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머셔너리 클랜이 자유 용병형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해도 기존 사용자들과 비슷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소리에요.” “음. 그 부분에 관해서는 제가 잘 모르고 있습니다. 혹시 어떤 방법인지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간단해요. 그건 바로 해당 도시를 관리하는 대표 클랜에서, 해당 클랜에게 직접적으로 편의를 봐주는 방법이죠.” “…….” “참고로, 저는 남부 도시 모니카의 대표 클랜을 맡고 있어요.” 한소영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로 말했는데 어지간히 둔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눈치를 채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말인즉슨 남부 도시 모니카로 오라는 소리였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간다고, 선뜻 대답했을 테지만 지금은 조금 망설임이 일었다. 그녀는 직접적인 영입 제의를 하지 않았다. 일단은 우리들을 모니카로 부르고 그 후 자리를 잡게 할 생각인 것 같았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우리 클랜의 성격을 파악한 게 분명했다. 그녀가 내건 미끼는 일반 소규모 클랜들한테는 대단히 유혹적이었다. 단순히 도시로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대표 클랜에서 이런저런 편의를 봐준다고 하니 분명 솔깃할 법도 했다. 나는, 일단 한번 튕기기로 했다. 거듭 말하지만 머셔너리는 자유 용병 클랜이다. 그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를 가장 큰 가치로 볼 수 있었다. 만일 아까와 같은 상태로 모니카에 갔다면 그녀의 도시에 묶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왜냐하면 지금은 나만 안달이 나 있는 상태였으니까. 나만 안달을 내서는 안 된다. 그녀도 안달을 내야하고, 결과적으로 서로 안달을 부려야 한다. 그래야만이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서로 쌍방향적인 관계로 수평을 이룰 수 있다. 나는 그녀와 그러한 관계를 만들고 싶었다. 서로 대등한 입장에 서서, 옆에서 나란히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조금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는 그녀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쎄요. 일단은 황금 사자 클랜의 소집령을 들어볼 생각이라서요. 행동 지침은 그 이후에 수정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수정이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원래 계획이 있었다는 소리로 들리네요.” “네. 그것은….” 내 보류에도 불구하고 한소영은 전혀 기분 나쁜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궁금하다는 어조로 다음 말을 이었을 뿐. 그녀의 물음에 막 대답을 하려는 찰나였다. 부드럽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고개를 돌리자, 한 무리의 사용자들이 우르르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낭패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성유빈의 모습도 잠깐 보였다. 나는 갑작스럽게 몰려온 사용자들을 향해 멍한 시선을 보냈다. * 회의실에 다른 사용자들이 입장한 순간 나와 한소영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 말을 건네는걸 중지했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거진 10명은 되어 보이는 사용자들이 한 순간에 입장한 것이다. 한 클랜당 데려오는 인원을 최소 두 명, 최대 네 명으로 감안한다면 두세 클랜 정도가 모여서 왔다는 소리였다. 어떻게 보면 있을 수 있는 일 이었지만, 소집령이 지니는 중요성을 생각해볼 때 단순히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행동이었다. 이윽고 그들을 필두로 다른 사용자들도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텅 비어있던 회의실에 사용자들이 들어올수록 불안한 기류가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마치 수술을 앞둔 수술실처럼 사늘한 분위기였다. 물론 그 와중에도 간단한 인사를 하고, 나와 고연주를 힐끗힐끗 보는 사용자들도 있었지만 그 뿐이었다. 대표 클랜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중대사인만큼 다들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한꺼번에 들어온 인원들을 남몰래 살폈다. 그 중에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얼굴도 있었고, 얼굴은 본적 없지만 다소나마 이름만이라도 들어본 사용자들도 보였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한꺼번에 입장한 사용자들이 동쪽 대표 클랜들의 클랜원이라는 사실이었다. 각각 걸치고 있는 장비에 그려진 문양들을 살피니 고려, 달밤, 한 클랜임을 알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오른쪽 어깨에 그믐달 문양을 달고 있었다. 황금 사자의 우호 클랜 중 하나인 그믐달 클랜. 그네들 또한 오른쪽 테이블을 점령한 비 참가 클랜들을 보고는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소집령에 응한 클랜의 숫자는 비 참가 클랜들이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들어오는 사용자들이 많아지고, 어느새 비어있던 테이블은 사용자들로 꽉꽉 채워진 상태였다.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속삭이는 목소리들이 모여 하나의 웅성거리는 소음을 만들고 있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참가 클랜과 비 참가 클랜들의 반목이 뚜렷하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아예 아는 체도 하지 않는 것을 보자 속으로 조금 웃음이 나왔다. 그때였다. “쯧쯧. 뭐가 이렇게 시끄럽나?” 잔뜩 쉰 목소리가 회의실 전체를 강타했다. 그 목소리에는 마력이 충만하게 담겨있어, 회의실 내부에 있는 사용자들의 귀에 똑똑히 들렸을 것이다. 곧이어 목소리를 낸 사용자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것을 확인한 사용자들의 소음은 단번에 멎었다. 살짝 통통하고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여성 사용자의 오른 가슴에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사자 문양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휘적거리는 발걸음으로 당연하다는 듯 상석에 앉았고, 뒤를 따르던 박현우와 성유빈은 상석 뒤로 조용히 시립했다. 드디어 이 회의를 주관할 황금 사자의 대표가 도착한 것이다. ============================ 작품 후기 ============================ (오늘 하루만 리리플을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회 리리플은 다음 회에 합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독자 분들의 양해 부탁 드립니다.) 아, 여러분 죄송합니다. 오늘 예비군 훈련을 다녀 오느라 시간도 늦었고, 몸 상태도 엉망이네요. 널널하게 생각하고 갔다가 크게 뒤통수를 맞았습니다. 세상에 단독 군장에 산을 타고 행군까지 할 줄은 전혀 몰랐는데 말이죠. 왕복 두 시간 거리이다 보니 집에 들어오니 녹초가 되버리더군요. 중간에 조기 퇴소하는 인원들이 어찌나 부럽던지. 이번 회를 쓰면서 다섯 번은 졸은 것 같네요. 하루 휴재 공지도 한 번 썼다가, 그래도 어제 제 부탁에 많은 조언을 남겨주신 독자 분들이 생각나 이 악물고 썼습니다. ㅜ.ㅠ 그럼, 다들 편안한 밤 보내세요! 저는 후딱 자러 가겠습니다. 쿨쿨. PS. 카리스마는 고유 능력이지만 예외로 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른 요인에 의해 발생한 <후천적>인 요인이 아닌 <선천적>으로 발생 되는 경우 잠재 능력의 한 칸을 소비하지 않습니다. 0204 / 0933 ---------------------------------------------- 그것은 착각에 불과했다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홀 플레인의 사용자들 사이에서는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한다. 물론 공식적으로 드러난 게 아닌 암묵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만, 각자의 실력에 따라 차등 대우를 받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요, 사실이었다. 실력이 가장 중요한 것은 맞지만 비단 그것만으로 개인의 계급을 판가름 할 수는 없다. 그 외에도 연차, 인맥, 명성, 장비 등 여러 복합적인 요인들을 포함해 사용자의 계급을 결정한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방금 전에 들어온 사용자는 홀 플레인 계급 표 중에서 최 상단을 차지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여성의 정체는 바로…. “대모(GodMother)님을 뵙습니다.” 홀 플레인에서 대모라는 호칭을 갖고 있는 사용자였다. 그녀가 들어오자 내가 앉아있는 열의 테이블에 있는 사용자들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동시에 입을 모았다. 맞은편에 있는 사용자들은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상석에 앉은 사용자의 이름은 잠시 까먹었지만 누구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과거 바바라 침공 이전부터 황금 사자 클랜을 이끌어온, 그네들의 클랜 내부에서는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부를 정도로 오래된 사용자였다. 아마 현존하는 사용자들 중 가장 오랫동안 생존한 이들 중 한 명이라, 연차 하나만 봐도 경외 받을만한 인물이었다. 뭐, 그래 봤자 1회 차 에서는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겠지만 말이다. 대모의 옷은 두텁고 긴 로브 하나를 걸치고 있었는데, 굉장히 낡아 누더기로 보일 정도였다. 목에 건 굵은 금 목걸이는 가슴을 타고 내려와 복부 주위에서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잡고 있는, 이곳 저곳 손때가 묻은 지팡이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대모의 눈이 왼쪽 테이블에서 오른쪽 테이블로 옮겨졌다. 이윽고 그 시선은 나와 고연주의 사이에서 멈추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입술이 열리며 쉰 소리가 흘러나왔다. “연주야.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구나.” “네, 대모님. 저도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흘흘. 고얀 것. 말은 잘하는 구나. 오랜만인줄 알면 가끔이라도 찾아오지 그랬니.” “호호. 그럴 때마다 뒤에 있는 남자가 하도 귀찮게 굴어서요. 계속 찾아가기가 부담스럽더라고요.” 고연주의 말에 대모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갑작스레 지적을 받은 박현우는 뜨끔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혀를 한두 번 차고는 끌끌 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싫다는 애 자꾸 붙잡지 말라고 한 것 같은데. 쯧쯧.” “며, 면목이 없습니다.” “그러니 네가 이성에게 인기가 없는 거란다.” 잠시간 회의실 안에서 가벼운 웃음 소리가 흘렀다. 그러나 말 그대로 잠시 동안일 뿐 이었다. 워낙 사안이 중대하다 보니 무거웠던 분위기의 본질이 변할 정도는 아니었다. 곧이어 대모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그윽하고 심오한 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담담히 그녀의 시선을 받아 넘겼다. “자네가 그 화제의 머셔너리 클랜 로드인가.” “예. 그렇습니다.” “허이고. 보아하니 스물 초 중반도 되어 보이지 않는데, 무슨 눈동자가 그러누. 인생의 쓴맛만 본 애 늙은이 같아. 보는 내가 안타까울 지경이야. 젊은 사람이 그러면 못써.” “…….” 대모의 말에 몇몇 시선에 내게로 모이는걸 느꼈다. 태연함을 가장하고는 있었지만 속으로 따끔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가만히 있자 그녀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흘리고는 이내 크게 숨을 내쉬었다. “거참. 간만에 앞날 창창한 젊은이를 본 것 같아 얘기 좀 하려고 했더니 옆 놈들 시선이 점점 더 따가워지는구나. 알았다 이놈들아. 이만 본론으로 들어갈 테니 그만 좀 노려보거라.” “크흠! 크흐흠!” 맞은편에 앉은 인원들 중 한두 명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대모는 전체를 한번 둘러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일단 이곳까지 오느라 다들 수고했어. 이제 와서 이렇게 말하기 조금 그렇지만, 원래 나는 이 일에 크게 관심이 없었네. 바바라를 공략한 후 내 한계와 염증을 동시에 느꼈거든. 어차피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조용한 곳에서 유유자적 생활하고 싶었지. 실제로도 그러고 있었고.” “대모님.” “현우 자네는 가만히 있어.” 박현우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그녀를 제지했지만, 이내 그녀의 말에 다시금 물러서고 말았다. “보아하니 내가 나올 줄 몰랐다는 얼굴들이 많아. 비록 은퇴하기는 했지만, 아직은 황금 사자에 적을 둔 몸일세. 그리고 어찌됐든 그 영감태기가 살아 돌아오기는 했으니 아직 연은 남아 있다고 볼 수 있지. 그러니 너무 고깝게들 생각하지마. 날 굳이 황금 사자로 본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그냥 너희들 말대로 대모 그 자체로 봐주면 고맙겠군.” 확실히 대모가 나온 것은 나 또한 의외였다. 황금 사자 클랜이 지금은 이렇게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 때는 아니 원정 전까지는 북 대륙을 호령한 클랜이었다. 그들의 진정한 전성기의 시작은 바바라를 공략함으로써 열렸다고 하는데, 황금 사자의 초석을 다지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 전 클랜 로드와 지금 눈 앞의 대모였다. 내 기억에 있는 대모는 그런 사용자였다. 아무튼 이러나 저러나 결국 관여는 하겠다는 소리였다. 그녀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표정이 각기 미묘하게 변했다. 그때, 맞은편 테이블에서 누군가 손을 번쩍 드는 게 보였다. 그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니 들어올린 오른팔에 음각돼 있는 高麗(고려) 라는 한문을 볼 수 있었다. 고려 클랜은 동쪽 도시의 맹주 역할을 맡고 있는, 원정 후 현존하는 클랜들 중 가장 많은 인원수를 갖고 있는 클랜이었다. 대모는 그에게 시선을 던지고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발언을 허락한다는 무언의 의사 표시였다. “고려 클랜의 외교 간부인 4년 차 사용자 조성호라고 합니다. 대모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참고로 나는, 내가 하는 말이라면 몰라도 듣는 말이 길어지는 것을 상당히 싫어해. 그러니 다음부터는 그딴 허례는 집어 치워도 좋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알겠습니다. 앞서 말씀하셨듯이, 저희들은 설마 대모님께서 이 자리에 참석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강철 산맥 원정에 대한 전후 사정은 전부 알고 계시는 걸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음. 대강은 들어 알고 있네.” 고려 클랜 외교 간부라는 사용자도 어지간한 인물이었다. 대모의 직접적인 말투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대범함을 보이고 있었다. 그가 말을 꺼내자 나와 같은 라인에 있는 사용자들 사이에서 불편한 침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반대로 맞은편 라인의 사용자들은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여쭈어 봤습니다. 그렇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대모님의 고견을 먼저 듣고 싶습니다.” “사용자 조성호. 지금 굳이 그 일에 대한 말을 꺼낼 필요가 있는가?” 그때였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사용자들 중에서 걸걸한 불만 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더니 곧 목소리를 낸 사용자는 똑같이 일어서 조성호를 쏘아보았다. 그의 왼팔에는 발해 클랜임을 알 수 있는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급작스러운 태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성호는 얼굴은 여전히 여유만만이었다. 마치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이. “물론이지요. 이 부분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 아니겠습니까?” “하. 웃기는군. 지금 우리들이 모인 이유는 시작의 여관의 포탈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 자리에서 굳이 그 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 일이라. 정확히 강철 산맥 원정이라고 표현하시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아무튼 참으로 순진하십니다. 설마 소집령을 내린 이유가 정말로 신규 사용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뭣이라, 순진하다고? 같은 말이라고 해도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지. 지금 그쪽 말투가 참으로 불쾌하게 느껴지는데 내 착각인가?” 발해 클랜원은 이를 갈며 성을 내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조성호는 오히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나 참, 당최 왜 화를 내시는지 모르겠군요. 저희들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러 왔고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 도리 아니겠습니까? 아니 그 전에 말이죠. 애초에 그 부분을 짚고 넘어가지 않고 사용자 아카데미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안 그런가요?” “그러게 말이에요. 왜 갑자기 화를 내는지 이해가 안 가는군요. 뭐 찔리시는 거라도 있나 봐요? 호호호호!” “그 말이 옳습니다.” 그의 말에 곧바로 비 참가 클랜들의 호응이 이어졌다. 호응이 길면 길어질수록 발해 소속 사용자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변하며 일그러졌다. 그 순간, 잠자코 지켜보던 다른 사용자가 의자를 크게 끎과 동시에 뾰족한 목소리를 내질렀다. “정말 웃기지도 않네요. 앞서 말씀하신 분 말마따나, 굳이 이런 곳까지 와서 그 일을 들먹이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참 사람들 알만하네요~?” “그렇죠. 알만하죠. 예전에는 포탈이 열리든 말든 관심도 주지 않던 분들께서 웬~일로 연락을 주셨는데요. 그쪽 말대로 참 사람 심성 알만하네요~.” “어머, 지금 비꼬시는 건가요?” “어머, 저는 있는 그대로를 말씀 드렸을 뿐인데요. 그러고 보니 옛 말이 갑작스럽게 떠오르네요. 도둑이 제 발 저리다.” 이번에 대답한 사용자는 조성호가 아닌 리버스 클랜의 허유리였다. 또 다시 그녀의 말에 동조하는 사용자들이 늘어나고, 그와 동시에 지금껏 간신히 억눌러왔던 갈등이 표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대모는 지긋한 눈동자로 그네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귀찮다는 표정이 역력히 떠올라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은 1회 차에 어떻게 죽었더라. 내가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는 동안, 회의실을 오고 가는 말들은 점차 목소리들이 높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종래에 이르러서는, 거의 인신 모독 수준의 공격성을 띠거나 고성으로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큰 소리들이 나오고 있었다. “풋. 그렇게 열등감을 느끼고 계셨나 보네요? 이제 조금 녹록해진 것 같으니까 슬슬 이빨을 드러내시는 건가요? 참 우습네요 정말.” “조금 녹록해진 게 아니실 텐데~?” “어느 클랜 엉덩이 뒤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러는 그쪽들이야말로 요즘 살만한가 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울며불며 징징거리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말입니다. 껄껄껄!” “뭐라고요? 지금 말 다하셨어요?” 어느새 회의실의 분위기는 일촉즉발로 바뀌어 있었다. 다만 가만히 들어보면 우호 클랜쪽이 약간 밀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 이었다. 자기네들 쪽에서 앞서 저지른 일들이 있으니. 실제로 부랑자 말살 계획이나 강철 산맥 원정에서 타 클랜들이 참가를 거절한 것이 아니다. 시작부터 배제를 하고 계획에 들어갔으니 그때 느꼈던 불만들이 지금에야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조금의 시간이 추가로 흐르고, 상황은 난장판을 넘어서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수(秀) 외교 간부의 신랄한 독설에 듣고 있던 성질 급한 멸화랑 클랜의 대리인이 크게 역정을 내고 말았다. 그의 눈동자에서 찐득찐득한 살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오는데 주변에 사람들만 없으면 당장에라도 무기를 꺼낼 기세였다. “그만!” 결국 가만히 지켜만 보던 대모가 더는 못 참겠는지 들고 있던 지팡이를 크게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쉰 음이 잔뜩 섞여 있었지만, 목소리에 마력이 충만이 들어있어 회의실 전체를 뒤흔들고도 남을 정도였다. 막 열기가 올라가던 회의실에는 마치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차가운 냉랭함이 감돌았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씩씩 몰아 쉬는 숨소리들이 여전히 들리고 있었다. 말 그대로 입만 닫았을 뿐, 까딱 잘못하면 2차전이 시작될 기세였다. 대모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들을 돌아보고는 끌끌 혀를 찼다. “쯧쯧. 일단 지금 자리에서 일어난 녀석들은 모두 다시 엉덩이를 붙이도록.” “…….” “한심한 것들. 명색이 도시를 대표하고, 북 대륙을 이끈다는 놈들이 이 꼬락서니를 하고 있으니. 생각보다 훨씬 심해. 전대 놈들이 보면 아주 손뼉 치고 좋아하겠어. 북 대륙이 잘들 돌아간다고 말이야.” “대, 대모님! 하지만 저들이 먼저….” “시끄러워! 애새끼들도 아니고. 그리고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일을 터뜨렸으면 어떻게든 해결할 생각을 해야지, 은근슬쩍 덮으면 만사형통인가?” 그녀의 역정에 우호 클랜들의 사용자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에 반해 비 우호 클랜 인원들은 한결 차분한 표정을 되찾고 있었다. 나는 방금 전 말로 대모가 대부분의 사용자들에게 존경 받는 이유를 비로소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어느 한 쪽에 편향되어 있는 게 아니라, 중립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사용자였다. 그러고 보니 1회 차 시절 그녀가 황금 사자를 등진 이유가 현재 로드와 불화가 있었다는 소문도 돌았던 것 같기도 했다. “염병할 것들. 내 그 영감쟁이를 믿은 게 실수였어. 지금은 잠들어 있는 전 로드가 보면 땅을 치고 통곡하겠군. 아까 자네, 조성호라고 했나? 그래. 전후 상황은 나도 대강 들었네. 이 망할 영감이랑 주변 것들이 아주 제대로 일을 벌려놨거든. 그리고 아주 시원하게 말아먹기도 했고.” “대모님!” “입 다물라고 했을 텐데? 너희들은 여기서 말할 자격도 없어.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는 입도 뻥긋하지 말도록.” “…큭.” “중간까지는 신났겠지. 그리고 결과 이후로는 당장 눈 앞의 것에만 급급하고 말이야. 자네들은 5000명 사용자들의 목숨, 그리고 그 정예들을 잃어버린 여파가 북 대륙으로 어떻게 되돌아올지 생각도 안 해봤나?” “…….”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은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을 확인한 대모는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네들도 말은 좀 가려서 하게. 얘기를 꺼낸 것은 그렇다 치고, 자네 말투에는 진정으로 궁금하다는 것 보다는 상대방을 조롱하고 비꼬겠다는 의도가 묻어나더군.” “그, 그것은.” “어찌됐든 나는 갈등을 중재하러 온 거지, 싸움을 붙이려고 온 게 아닐세. 자네들도 소집령에 응했다는 건 뭔가 원하는 바가 있다는 소리 아닌가. 아무튼 허튼 소리는 그만하고, 숨기고 있는 속마음이나 꺼내보게. 내 한번 들어볼 터이니.” “…….” 난장판이던 회의실에 전체적으로 침묵이 찾아 들었다. 대모의 뒤에 서있는 박현우와 성유빈은 안절부절 못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는데, 이들도 얘기가 이렇게 흘러갈 줄은 몰랐던 것 같았다. 하긴 얼마나 인물이 없으면 이미 황금 사자를 떠난 것이나 다름 없는 대모를 불렀을까. 거꾸로 보면, 지금 이 정도의 자리를 이만큼 통제할 수 있는 사용자가 대모를 제외하고는 황금 사자 클랜에 없다는 소리였다. 그때, 왼쪽 테이블 가장자리에서 누군가 천천히 손을 들어올리는 게 보였다. “잠시 제가 한 말씀 올리고 싶습니다.” “음? 처음 보는 얼굴은 아닌 것 같은데…. 낯설지가 않아. 그런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 자네가 누구였더라.” 대모의 말 뒤로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선 그는 차분한 얼굴로 상석을 응시했다. 나이는 30대 전후로 보였는데, 깔끔한 인상과 입가에 보일 듯 말듯한 미소가 돋보이는 남성 사용자였다. 그리고 그를 보는 순간 나도 그에게 괜한 신경이 쓰이는 것을 느꼈다. 그의 가슴 오른쪽 상단에는, 韓(한) 이라는 문양이 푸른 빛을 번들거리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수면의 욕구가 강렬한지, 하루 내내 꾸벅꾸벅 졸은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예비군 훈련의 여파가 생각보다 큰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 군복만 입으면 왜 그렇게 늘어지고 싶은지, 참 불가사의 합니다.(아마 제 말에 공감하시는 예비역 독자 분들이 많으시리라 예상합니다.) 하하하.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회도 재미있게 감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PS. 평점은 닫았습니다. 자꾸만 1점 테러가 들어와서요. 어차피 현재 나무 성장지수도, 지금이 가장 예쁜 것 같아 그냥 닫은 채로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 리리플(202회) 』 1. 破天魔痕 : 1등 축하 드립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안 보이신 것 같은데, 한때 1등 코멘트를 휩쓸었던 면모를 다시 보여주시는군요. :) 아, 破天魔痕님은 혹시 예전에 4연속 1등을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_@ 2. MThief : 차디찬 얼음 안에 타오르는 불꽃처럼. 203회를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3. 블라미 :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하하. 1000회라. 욕심이 조금 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앞으로도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블라미님의 많은 응원 부탁 드립니다. 4. OLOF : 네. 조아라와 이북 계약 맺었습니다. 아마 방학 이후로 교정 작업에 들어갈 것 같습니다. 고칠게 참으로 많을 것 같네요. :D 5. 미월야 : 오호. 네임드 독자셨군요. 반갑습니다. 하하하. 그리고 쿠폰 감사합니다. _(__)_ 앞으로도 좋은 내용으로 보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리리플(203회) 』 1. 저주의달 : 왜 인지는 모르겠는데, 후하하하 라는 코멘트를 보자마자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ㅋㅋㅋㅋ. 1등 축하 드립니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그 어려운 자정 연재 첫 코멘트를 하셨다니. 부럽습니다.(?) 2. 눈물강 : 후후, 그것은 독자 분들의 궁금증을 유발하기 위해서 입니다.(퍽퍽!) 아, 그것도 있지만 실은 한소영의 정보가 들어간 상태에서 그녀의 정보마저 집어 넣으면 너무 어지러울 것 같아서요. ㅜ.ㅠ 3. 은의칸 : 네? 비 오는데 야간 산악 행군을 사셨다고요? 아니 도대체 그 곳은 어디인가요. ㅋㅋㅋㅋ. 정말 엄청 싫었을 것 같습니다. 4. minicate : 제 말이 minicate님 말과 똑같습니다. 장급은 아니고 연대장은 온 것 같았는데, 참 싫더라고요. 그래도 나름 재미는 있었습니다. 군복만 입으면 개그맨으로 돌변하시는 분들이 많아서요. ㅋㅋㅋㅋ. 5. WitchBizkit : 아오 그러니까요. 집에 와서 보니까 물집이 있더라고요. 정말 어이가 없어서. 지금은 그래도 한결 나아졌습니다. 흑흑.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05 / 0933 ---------------------------------------------- 그것은 착각에 불과했다 “동남쪽 소도시 다나의 대표로 온 한 클랜 소속 성현민입니다. 직위는 클랜 로드를 맡고 있으며, 홀 플레인으로 들어온 지 4년 차 정도 됐습니다.” 성현민의 자기 소개를 듣는 순간, 나는 비로소 그에게 신경이 쏠렸던 이유를 알아챌 수 있었다. 한 클랜의 클랜 로드 성현민. 1회 차 시절 홀 플레인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자. 후반부로 가서는 스스로 뒤로 물러났지만, 그 전까지 홀 플레인의 역사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친 사용자였다. 대모 또한 그의 이름을 듣자마자 생각나는 게 있는지 무릎을 딱 치며 입을 열었다. “아아. 이제야 기억이 나는군. 그 동쪽의 떠오르는 별이라고 했던가? 제법 대단한 수완가라고 들었어.” “하하하. 대모님께서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들은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네. 아무튼 그건 그렇다 치고, 할 말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럼 잠시…. 아차, 말이 조금 길지도 모릅니다. 대모님께서 속마음을 말하라고 하셨고, 이미 방금 전 사태로 서로간에 할 말 못할 말이 전부 나온 상태입니다. 그런 만큼 저 또한 가감 없이 속내를 드러내겠습니다. 맞은편에 앉아계신 분들에게는 불편한 말일지도 모르나,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인 만큼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성현민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흘린 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 의자를 뒤로 빼고 몸을 일으키는 단순한 행동이 이어졌지만, 그가 그렇게 하니 왠지 모르게 매우 품위 있는 행동처럼 보였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회의실 전체를 한번 훑었고, 이내 단정한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 동쪽에 있는 대표 클랜 및 산하 클랜들은 더 이상 황금 사자의 독재를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성현민의 말은 간결했다. 그러나 그 말이 몰고 온 파장은 절대로 무시하지 못할 정도였다. 동쪽에서 한솥밥을 먹고 있는 고려와 달밤 클랜의 대리인들은 비교적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마 사전에 말을 맞춘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외의 클랜들은 모두 굉장히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잠시 동안 심한 웅성거림이 회의실 안을 가득 채웠다. 소음이 멎은 것은, 대모가 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킨 이후였다. “황금 사자의 독재를 두고 볼 수 없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해봐. 이건 조금 길어도 좋으니까.” “부랑자 말살 계획 때부터 타 클랜들을 배제한 것은 더는 입에 담지 않겠습니다. 이미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요.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이번 원정으로 사망한 사용자 5000여명의 목숨에 있습니다. 그 사용자들이 어떤 사용자들입니까? 물론 그 이하도 있겠지만 평균 4년 차 이상으로 구성된 각 클랜들의 정예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잠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그것만으로 한(韓) 클랜을 비롯한 동쪽 클랜들의 선언을 뒷받침 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비 참가 클랜들은 별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명분이 부족합니다.” 북녘 클랜의 문양을 달고 있는 사용자가 점잖은 목소리로 성현민의 말에 태클을 걸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는 마치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과 같은 어투로 말을 이었다. “명분이 부족하다니요. 피해를 입지 않았다니요. 그것은 틀린 말씀입니다. 바바라를 공략한 이후, 4년 동안 신규 사용자들은 황금 사자와 우호 클랜들이 독점했습니다. 사용자 아카데미에 참가하지 못한 클랜들은 수료식이 끝난 후 어디서도 오퍼를 받지 못한 사용자들을 영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죠. 우리들은 상대적으로 지닌 재능 및 잠재력이 떨어지는 사용자들을 아등바등 키우며 이곳까지 올라왔습니다. 그에 반해, 그쪽 분들은 좋은 재능과 깊은 잠재력을 가진 사용자들을 영입해 클랜의 전력을 꾸준히 강화해 왔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물론 그 전부터 10강에 이른 분들도 있겠지만, 원정 전 10강 비율은 7:3에 불과했습니다. 그것도 여태껏 중립을 지키신 <그림자 여왕>님을 제외한다면 원정에 참가할 수 없었던 클랜들이 보유한 10강은 단 둘에 불과합니다.” 성현민은 유독 “원정에 참가할 수 없었던.” 이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확실히 10강에 대한 성현민의 말은 그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참가 클랜들과 비 참가 클랜들의 10강 분포 비율을 들어 지금껏 사용자 아카데미에 대한 독점의 폐단을 꼬집은 것이다. 처음 말을 꺼낸 북녘 클랜 대리인과 그 옆의 우호 클랜 사용자들은 모조리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말은 하고 싶은 것 같이 보였지만, 딱히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예전에는 황금 사자 클랜이라는 단일 세력 독보적인 클랜과 힘을 합쳐 그들의 불만을 억눌렀겠지만 이제는 상황이 반대로 돼버렸으니까. 성현민은 말을 하는 와중에도 절대로 흥분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또렷한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 말재주 하나는 여전히 좋다고 생각하며 나는 계속해서 그의 말에 집중했다. 아직, 그의 입은 닫히지 않은 상태였다. “평균 4년 차를 상회하는 5000명의 사용자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에 따라 북 대륙 사용자들의 평균 연차는 낮아졌고 수준 또한 크게 감퇴했습니다. 단순히 클랜이라는 편협한 시각에서 보자는 것이 아닙니다. 강철 산맥을 뚫고, 신천지를 발견하는 것은 북 대륙 모든 사용자들이 오매불망 기다리던 대규모 프로젝트였습니다. 그것을 본인들의 어줍잖은 욕심으로 망쳐버리고 북 대륙 전체에 피해를 입혔습니다. 다행히 머셔너리 클랜 같은 분들이 때맞춰 등장해 주셔서 아직 희망은 잃지 않았지만, 앞으로 다시 강철 산맥으로 진군을 하려면. 아니, 이번 원정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하려면 도대체 또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지 저는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중간에 머셔너리 클랜이 한번 언급되었을 때 나는 그와 한번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그는 말을 하는 와중 나에게 고개를 숙였고, 나도 살짝 숙임으로써 화답했다. 문득 속이 조금 복잡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1회 차 시절 그와 나는 엄연한 적대적인 세력이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적대적인 세력은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에는 나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사이가 틀어진 것은, 아주 사소한 계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모님께서 지루해하시는 것 같으니 이 말을 마지막으로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원정 계획의 시작부터, 결과에 이르기까지 과정은 절대로 잘못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금 결론을 말씀 드리자면, 황금 사자 클랜은 이번 사태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들은 이 폐단을 더 이상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처음에 독재를 두고 볼 수 없다고 말했지. 그런 이유였군. 대충 무슨 말인지는 알겠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됐어. 애초에 그렇게 말해주니 내 속이 다 시원하구먼. 어찌됐든 지금껏 황금 사자 클랜의 행동을 독재라 규정하고, 두고 볼 수 없다고 했지 않은가. 그렇다면 원하는 것이 있다는 소리인데, 그것을 아직 듣지 못했군.” 막 자리에 앉으려고 하던 성현민은 엉거주춤 다시 일어나고 말았다. 그러더니 이내 주변에 앉아 있는 사용자들을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고려 클랜의 조성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마도 본론은 고려 클랜에서 꺼낼 생각이었지만 현재 분위기가 나쁘지 않게 흘러가니 이대로 성현민에게 맡겨 보겠다는 심산인 것 같았다. “황금 사자 클랜이 바바라를 공략한 후 나름 북 대륙을 안정화시킨 공은 인정하고,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음…. 두고 볼 수 없다고 했지만, 조금 더 순화하면 믿을 수 없다 정도로 말씀 드릴 수 있겠네요. 저희들이 원하는 것은, 앞으로 북 대륙의 명운을 걸 정도의 대규모 계획을 황금 사자 독단으로 정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모든 클랜들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주고 똑같은 참여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첫발은….” 성현민은 말을 잠시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긴장한 표정을 띄운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목 울대가 꿀꺽 움직이고, 곧 서서히 입술이 열렸다. “이번 사용자 아카데미의 균등한 참여부터 내디딜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쪽에서는 기다란 한숨이 다른 한쪽에서는 무거운 침음이 흘러나왔다. 바바라는 대도시로서의 가치도 크지만, 무엇보다 사용자 아카데미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에 가장 큰 가치를 갖고 있었다. 분명히 성현민의 말은 옳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본인 그리고 주변 동료들과 함께 독식해온 파이를 앞으로 나눠야 한다는 사실은 그네들에게 꽤나 뼈아플 것이다. “흠….” 성현민은 말을 그 말을 한 후에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대모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가, 흥겹게 들리는 콧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자신의 목에 걸린 황금빛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눈을 감았다. 깊은 상념에 잠긴 모습이었다. 성현민을 위시한 비 참가 클랜들의 주장은 단순히 이번 사용자 아카데미에 국한하지 않았다. 앞으로 계획할 모든 일들에 대해 관여를 하고 싶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황금 사자 입장에서 보면 그리 달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홀 플레인은 힘이 곧 권력인 세상이다. 지금이야 허울 좋은 말로 포장하고 있지만, 힘에서 밀리면 그만큼 권리도 양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말이야 모든 클랜들의 균등한 참여를 부르짖었지만 그네들이 지금껏 해온 일인만큼 내부 속사정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아무튼 동쪽 클랜들의 선언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는 대모의 결정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그녀가 눈을 감은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이어 살며시 눈꺼풀을 든 대모는, 오른손을 들고 검지 손가락을 까닥까닥 흔들며 박현우를 불렀다. “현우야.” “예. 대모님.” “사용자 아카데미의 포탈 이동이 언제쯤 완료될 것 같니.” “아마 이르면 오늘 밤, 늦어도 내일 새벽에는 완료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박현우는 지극히 공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불안감이 포함되어 있었다. “시간이 별로 없구나.” 라고 말한 대모는 곧 큰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지팡이를 들어 테이블 위로 한두 번 가볍게 두드렸다. 탁, 탁탁…. “자네들의 말은 북 대륙의 대소사에 대한 균등한 기회를 달라는 말이군.” “네. 그렇습니다.” “말 자체로 보면 딱히 흠잡을 것은 없는데 말이야….” “…….” 대모는 한동안 고민하는 낯빛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확고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좋네. 나, 황금 사자의 전권을 위임 받은 사용자 손분례는 지금 이 시간 부로 그대들의 요구를 허락하겠네.” “대모님!” “저, 정말이십니까?” “다만, 조건이 하나 있네.” 대모가 입을 연 순간 박현우와 조성호의 외침이 동시에 들렸다. 그러나 손분례는 이어지는 말로 그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조성호는 전에 없던 흥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름 무리한 요구라고, 그들이 순순히 받아 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뜻밖에 일이 쉽게 풀리자 조바심이 나는 모양이다. “조, 조건이라면….” “간단해. 이번 사용자 아카데미 건은 내가 책임지고 균등한 기회를 부여해주지. 어디 한번 생각대로 해봐. 그리고 한번 지켜보겠네.” “지켜보신다고요?” “그래. 자네들의 말만 번지르르하게 했는지, 아니면 진심을 담아 말했는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단순히 지금의 말만 듣고 판단하기는 어려우니 실제로 한번 보는 게 낫겠지. 이번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만족할만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지금껏 자네들이 느껴왔던 황금 사자의 독재는 더 이상 보이지 않을 것을 약속하지.” 그녀는 말을 매듭지은 이후 더 이상은 번복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탁자를 한번 세게 두들겼다. 그리고, 곧 그녀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기세가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감히 반항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무언의 의미를 표출하고 있었다. 막 대모에게 달려들려던 인원들은 지팡이에서 터져 나오는 마력의 파장에 몸을 살짝 멈칫거렸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갈렸다. 황금 사자를 비롯한 우호 클랜들은 이럴 수는 없다는 얼굴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고, 비 참가 클랜들은 다들 희희낙락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말해두지만 조건을 달았네. 만일 그대들이 폐단으로 정의한 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우리 또한 다른 방법을 찾을 수 밖에 없음을 명심해.” “여부가 있겠습니까. 기필코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겁니다.” “흥. 말은 잘하네 그려.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고. 아무튼 이쪽 애들을 제외하고, 여기서 다른 의견을 가진 사용자가 있다면 말해봐.” 있을 턱이 없었다. 동부 클랜 사용자들은 총대를 맸고, 성과를 거뒀다. 그들의 뻐기는듯한 시선에 남부 클랜 사용자들은 수고했다는 눈길을 보냈다. 아마 조성호와 성현민이 말이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면 남부 대표 클랜들의 지원 사격이 이어졌겠지만, 일이 풀려도 너무나 잘 풀렸다. “좋아. 그럼 사용자 아카데미에 대해서는 이것으로 마무리를 짓도록 하지.” “대, 대모님.” “미리 못 박아두지만 절대로 번복할 생각은 없네. 아무리 너희들에게 좋게 생각해보려고 해도, 저들의 논리에는 어긋난 점이 없었어. 애초에 바바라에서 물러나라면서 막 나왔다면 모를까, 적당히 양보하고 들어왔는데 어쩌겠나. 들어줘야지.” “…….” 애타는 목소리로 대모를 잡은 박현우는, 그녀의 확언을 듣자 이를 까득 깨물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그녀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오기 싫다는 사람 억지로 데려와 놓고 어디서 이를 갈아? 내 분명 오기 전에 말했을 텐데. 이번 일을 해결해주는 대가로 황금 사자의 전권을 위임 받겠다고. 이제 와서 딴 소리를 하겠다 이 말인가?” “아, 아닙니다.” “쯧쯧. 한치 앞도 못 보는 불쌍한 녀석. 잊지 말아라. 아직 우리의 거래는 남아 있다는 것을. 네가 약속을 깨는 행동을 한다면, 나 또한 네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야.” “…알겠습니다.” 박현우는 결국 침울한 얼굴로 한 발짝 물러서고 말았다. 그것을 확인한 손분례는, 이내 흘흘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지팡이를 탁탁 두들기며 회의실을 가로지르는 그녀를 고연주가 예쁜 목소리로 붙잡았다. “어? 대모님, 어디 가세요?” “어디 가긴. 소집령은 이걸로 끝이야. 내 역할을 끝났어. 신규 사용자들이 입장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 사용자 아카데미에 대한 것을 조율해야 하지 않겠니. 설마 그것까지 나보고 해달라는 것은 아니겠지?” “아~. 그건 그렇죠. 그럼 다시 돌아가시는 거에요?” “돌아가기는 개뿔. 가긴 어디를 가. 빈사 상태에 이른 영감태기 살려야지.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참 손이 많이 가는 양반이라니까.” 대모는 쩝쩝 입맛을 다신 후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녀를, 이번에는 성유빈이 다시 한번 붙잡았다. “대, 대모님. 벌써 가시면 어떡해요.” “어떡하긴 뭘 어떡해 요것아.” “하지만 몸도 성치 않으신데…. 최소한 호위라도….” “성유빈!” 성유빈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으려는 찰나, 박현우의 커다란 고함이 회의실을 뒤흔들었다. 그 목소리에 그녀는 깜짝 놀란 얼굴로 황급히 자기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러나 손분례는 별 것 아니라는 말투로 대답했다. “귀청 떨어지겠다 이것아. 흘흘. 아무튼 내 걱정은 말려무나. 일전에 동부 산맥에서 봐둔 것이 있는데 그곳에 다녀올 생각이다. 이왕 다시 나왔으니 한시라도 바삐 움직여야지. 그건 그렇고, 자네들도 지금 단순히 좋아할 시간은 없을 텐데?” “물론입니다. 사용자 아카데미에 관한 것은, 원리 원칙에 입각해 철저하게 균등한 기회를 부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조성호의 말에 대모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고는 “이번만큼은 자네들 마음대로 지지고 볶을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결과라는 것을 명심하게. 내가 돌아온 이후에도 바뀐 것이 없다면 아까도 말했듯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 밖에 없어.” 라고 경고했다. 한쪽에서는 유쾌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침울한 목소리로 그녀를 배웅하는 게 보였다. 그때였다. 나는 인사를 받은 체 만 체 하며 방문을 나서는 그녀를 보며 재빨리 제 3의 눈을 활성화시켰다. 방금 전, 언뜻 들을 수 있었던 성유빈의 말에서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야호. 큰 난관이라고 생각했던 소집령도 어느 정도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 다음 회 또는 완전하게 매듭을 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 요즘 들어 몸이 자꾸 늘어지네요. 아무래도 예비군 훈련의 여파가 아직 가시질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럴 때 독자 분들의 쓰담쓰담이 있다면 큰 힘을 낼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아, 참고로 제 머리카락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하하하. :D 『 리리플 』 1. 신화의재현자 : 오호. 언제 한번 1등을 하신 적이 있는 것 같은데요. 다시 1등을 하시다니 놀랍습니다. 많은 분들의 쟁쟁함을 제치시다니요. 껄껄. 1등 축하 드립니다. 이번 회 재미있게 감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 고장난선풍기 : 하하. 자정 연재는 저도 1등을 할 수 없습니다. 헬 입니다, 헬. 헬 이에요. 그러니 너무 아쉬워하지 마시어요. ㅜ.ㅠ 3. 크래미 : 쿠폰 감사합니다. (__) 요즘 들어 이상하게 힘이 들어가지 않았는데,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아. 추가로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 제가 버프를 받을 수 있습니다. 네, 그렇다고요.(에헴.) 4. rlatjdwn512 : 원하시는 능력 있는 남성 사용자 나왔습니다. 하하하. 앞으로 남성 캐릭터들도 몇몇 추가될 예정이오니(아, 물론 여성도 있지만 말이죠.) 많은 기대 부탁 드립니다. :) 5. 악한녀석 : 헐. 하루 만에 정 주행을 하셨다는 말씀 이시군요. 대단하십니다. 고생 하셨습니다. (__) 6. 無色無臭 : ㅋㅋㅋㅋㅋㅋㅋㅋ. 어색함을 느낄 수도 있을 법한 부분은 수정했습니다. 그래도, 할머니인 만큼 기본적인 말투는 그대로 이어질 예정입니다. 이 할머니 이만성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많거든요. 7. 이터시온 : 사랑합니다. 아, 아니요. 잠시 제가 잘못 말씀 드렸네요. 네, 네.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찾고 있었어요. ㅜ.ㅠ 8. 흑선풍이규2 : 감사합니다. 하하하. 설령 제가 감기에 걸리더라도 연재는 쉬지 않겠습니다. 물론 감기에 걸리지 않는 게 가장 좋겠지만 말입니다. 흑선풍이규2님도 편안한 하루 보내시고, 감기 조심하세요! 9. Cheetos : 켈켈켈. 이것은 절단 마공입니다. 켈켈켈켈. 대모의 능력치는 다음 회에 나올 예정입니다. 켈켈켈!(퍽퍽! 으아악!) 10. 사랑하므로 + UrDREAM : 확실히, 대모에 대한 존재를 조금 더 부각시키고 다가갔으면 조금 더 괜찮았을 수도 있겠네요. 참고로 말씀 드리면 이만성보다 나이 많은 분 입니다. 홀 플레인에서는 노화에 대한 페널티가 존재하지만, 지닌 능력의 출중함 또는 장비로 얼마든지 커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06 / 0933 ---------------------------------------------- 그것은 착각에 불과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손분례(9년 차) 2. 클래스(Class) : 거룩한 심판(Rare Divine JudgMent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황금 사자 5. 진명 · 국적 : 하늘을 거스르는 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78) 7. 신장 · 체중 : 153.2cm · 48.7kg 8. 성향 : 선 · 중용(Good · Neutral) [근력 20(-10)] [내구 18(-10)] [민첩 22(-10)] [체력 38(-10)] [마력 95(+4)] [행운 72(-10)] (마력 회로에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심대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굳어진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마력을 일으킬 경우 심한 부작용을 입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거스르는 힘으로 억지로 마력 회로를 가동하고 있는 상태지만, 등가 교환의 원칙으로 다른 능력치가 하락한 상태입니다.) (역천, 역행으로 유지하고 있지만 불완전한 회복입니다. 그 힘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마력 회로를 가동한다면 지금껏 간신히 억눌러온 부작용들은 한꺼번에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올 것입니다. 절대 안정을 요합니다.) < 업적(8▼) > < 고유 능력(1/1) > 1. 역천(逆天)(Rank : EX) < 특수 능력(1/1) > 1. 역행(逆行) : 강화(强化)(Rank : B Zero) < 잠재 능력(3/3) > 1. 대(大) 마법(Rank : EX) 2. 심판의 낫(Rank : A Plus Plus Plus) 3. 항마력(Rank : S Zero) < 능력치 비교 > 1. 김수현 : 542 / 600~ [근력 96(+2)] [내구 92] [민첩 98] [체력 72] [마력 96] [행운 90(+2)] (능력치 포인트가 12 포인트 남은 상태 입니다.) 2. 손분례 : 233 / 600~ [근력 20(-10)] [내구 18(-10)] [민첩 22(-10)] [체력 38(-10)] [마력 95(+4)] [행운 72(-10)] (능력치 포인트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대모의 사용자 정보를 보는 순간 나는 살짝 놀라고 말았다. 현재 그녀의 신체는 굉장히 좋지 않은 상태였다. 가뜩이나 노화로 인한 능력치 하락이 있을법한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마력 회로가 어그러져 있었다. 레어 클래스 <거룩한 심판>이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진명과 고유, 특수, 잠재 능력으로 미루어보면, 보유하고 있는 능력으로 회로를 억지로 가동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몸이 저 상태가 된 걸까. 잠깐 생각에 잠기고 있는 동안, 어느새 중앙 홀을 가로지르는 그녀의 뒷모습은 서서히 닫히는 문들에 의해 가려지고 있었다. 조금 멍하니 허공에 떠오른 메시지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 옆에서 유쾌하게 떠드는 소리들이 비로소 귓가에 들어왔다. “그럼 대모님도 가셨으니 남은 분들은 슬슬 아카데미 건에 대해서 논의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아요. 포탈이 언제 닫힐지 모르니 얼른 세부 사항 조절을 해야겠죠. 호호.” 비 참가 클랜의 대리인들은 다들 신나는 얼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에 반해서 우호 클랜 대리인들은 반은 침중한 얼굴을, 나머지 반은 원망하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그 시선의 대상은 남은 박현우와 성유빈에게 몰리고 있는 중 이었다. 박현우는 유구무언의 얼굴로 고개만 푹 수그리고 있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비어버린 상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휴. 알겠습니다. 대모님의 뜻을 따라 사용자 아카데미 건에 대한 세부 사항을 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그것을 조절하기 이전에, 일단 기본적으로 통제 교관 및 신규 사용자들을 가르치는데 참가할 클랜들을 선정해야 합니다.” 우호 클랜들은 계속 울상을 짓고 있었지만 이내 박현우가 말을 꺼내자 번뜩 정신을 차린 듯싶었다. 대모가 확실하게 못을 박아두고 간 이상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남은 밥그릇이라도 챙기려는 심보인지, 그네들도 하나 둘 표정을 풀고는 살며시 회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후 아카데미 건에 관한 논의는 꽤나 재미있게 흘러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을 부렸던 이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환상의 찰떡 궁합을 보여주고 있었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시간이 많은 편이 아닙니다. 그런 만큼 최대한 빨리 참가 클랜들을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처음부터 공고를 붙이기에는 많은 애로사항이 있으니, 지금 이곳에 계신 클랜분들로만 구성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만.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동의합니다. 솔직히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곳에 모인 분들은 다들 하나의 도시를 대표하는 분들이 아닙니까. 자격 면에서는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고 봅니다.” “하지만 대표 클랜들만 참여하게 된다면 조금 안 좋은 소리가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예를 들면 대표 클랜들의 나눠먹기 라고 비난하는 사용자들이 있지 않을까요?” “그건 이전부터 나오고 있던…. 흠, 아닙니다. 아무튼 이곳에는 대표 클랜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유명 클랜분들도 있습니다. 이 분들도 포함한다면 그런 사소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리저리 허울 좋은 말들로 포장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결론은 하나로 귀결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클랜들 말고 타 클랜들은 포함 시킬 생각이 없다는 소리였다. 이왕 나누게 된 파이를 조금이라도 덜 나누려는 속셈이었다. 어떻게 보면 자기 합리화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딱히 경멸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찌 됐든 지금 상황의 긴박함을 따지면 명분은 충분했으니까. 다만,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모님이 과연 이것을 보시면 옳다고 여기실까요?” “…….” 누군가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다들 어색한 침묵을 지켰다. 본인들도 말을 하면서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 자신들의 방식을 따지고 보면, 황금 사자 클랜이 하던 짓을 조금 확대했을 뿐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그래. 자네들의 말만 번지르르하게 했는지, 아니면 진심을 담아 말했는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단순히 지금의 말만 듣고 판단하기는 어려우니 실제로 한번 보는 게 낫겠지.> <이번만큼은 자네들 마음대로 지지고 볶을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결과라는 것을 명심하게. 내가 돌아온 이후에도 바뀐 것이 없다면 아까도 말했듯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 밖에 없어.> 문득 대모가 남기고 떠난 말들이 떠올랐다. 다른 사용자들도 그녀가 했던 말들이 생각난 듯 다들 떨떠름한 표정을 띄우고 있었다. 자기들도 지금까지와는 다를 것이라 호언장담을 한만큼 뭔가 걸리는 게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조용히 하품이나 하며 언제 끝나나 기다리던 도중이었다. 막 고개를 내리려는 순간, 깨끗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성현민과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 순간 그의 눈동자에 반짝이는 빛이 스치고 지나간 것을 볼 수 있었다. 착각이라고 여겼지만, 이윽고 그의 입술이 열리는 것이 보이자 불현듯 착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 그 부분에 관해서는 제가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아 네. 좋은 생각이 있으신 것 같이 들리는군요. 경청하겠습니다.” 박현우의 허락이 떨어지자 다시금 모두의 시선은 성현민에게로 모였다. 그는 예의 인상 좋은 얼굴로 나를 부드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한두 번 목을 가다듬고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마도 대모님도 지금 상황을 이해하고 계실 겁니다. 다른 클랜들에게 알리고 지원자를 받을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을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씀을 남기고 떠나신 것은, 아무래도 머셔너리 클랜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 같습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각 도시를 대표하는 클랜 중에서도 높은 직급을 차지하고 있는, 소위 한가락 하는 사용자들 이었다. 즉 어느 정도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소리였다. 단순히 내 클랜명을 언급한 것만으로도 곳곳에서 “아.” 라는 탄성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하나씩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신생 클랜이잖아요. 아, 죄송해요. 무시하려는 의도는 없었어요. 그래도 창설한지 일주일 된 클랜이 사용자 아카데미로 오는 것은 좀….” “흠. 글쎄요. 저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눠먹기에 대한 인상을 약간이나마 완화시킬 수 있고, 무엇보다 10강 고연주가 있지 않습니까? 그녀라면 충분히 교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겁니다.” “아하! 그렇네요. 확실히….”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수(秀) 클랜원의 말을 도중에 끊고, 나는 그들의 대화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러자 성현민과 주위로 모였던 시선이 순식간에 내게로 모였다. 그들의 시선 대부분은 뜻 모를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지금까지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어 신경이 그곳으로 쏠려 있었지만, 그것이 해결되고 나자 머셔너리에 클랜에 대한 궁금증이 도는 모양이다. 나는 그 시선들을 견디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클랜원 고연주는 사용자 아카데미에 참가시킬 수 없습니다. 그녀에게는 소집령 후 나름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 그녀 말고는 할 수 없는 일이라, 아카데미 건으로 참가시킬 수는 없습니다.” “아…. 그렇군요. 저희들이 괜한 설레 발을 쳤네요.” 성현민은 내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잘 됐다는 듯 태연한 목소리로 내게 되물었다. “그렇군요. 그러면 클랜원들 중에서 따로 교관으로 추천할만한 사용자는 없습니까?” “음…. 예. 딱히 추천할만한 사용자들은 없습니다.” 신상용이나 비비앙은 각각 레어 클래스와 영약 연구에 대한 일들을 맡고 있었고, 설령 보낸다고 해도 조금 불안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인원은 정하연을 한 명이었다. 하지만 정하연 또한 황금 사자와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만큼, 그녀에게 아카데미 참가를 부탁하는 것은 썩 내키지 않은 일 이었다. “흐음~. 조금 곤란하네요. 머셔너리 클랜분들께서 참가해주셔야 저희들이 대모님께 드릴 말씀이 있을 텐데 말입니다.” 이번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그의 말투에서, 어떻게든 나를 끌어들이고 싶어하는 기묘한 감각을 느꼈기 때문이다. 성현민은 단순한 머셔너리 클랜의 참가를 원하는 게 아니라 나, 즉 김수현을 참가 시키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의 말을 더 들어보기로 했다. 이윽고, 그는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저는 머셔너리 로드께서 직접 사용자 아카데미로 참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 뭐라고요?” “한(韓) 로드. 그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안 그래도 신생 클랜이다보니 보낼 수 있는 스쿼드, 아 그러니까 인원이 부족합니다. 한창 자리를 잡아야 하는 시점에 클랜 로드가 빠져버리면 도대체 어쩌자는 말입니까.” “그래요. 더구나 그는 0년 차 사용자에요. <그림자 여왕> 고연주님이라면 몰라도, 지금껏 0년 차가 사용자 아카데미를 맡았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어요.” 성현민이 말을 꺼내자 순식간에 격렬한 소란이 일었다. 심지어 그와 같은 동부 대표 클랜도 난색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고개를 젓더니 이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조목조목 말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러분들의 주장도 일리는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먼저 인원 문제에 대해서 말씀 드리면, 오히려 이것은 머셔너리 클랜에게 굉장히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한창 자리를 잡아야 할 시기라 바쁘시겠지만, 사용자 아카데미에 참가하면 신규 사용자들에게 클랜을 홍보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지 않겠습니까? 3개월이라는 시간을 투자하시면 머셔너리 클랜으로 가입하고 싶어하는 신규 사용자들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이것은 부족한 인원을 보충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흐흠. 과연 신규 사용자들이…. 아,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0년 차 사용자가 교관을 맡는 것은 아무래도 조금…. 머셔너리 로드를 비하할 생각으로 꺼낸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곳에 계신 분들은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지금껏 전례가 없었던 일인만큼요.” 북녘 클랜 대리인은 말을 마친 후 내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괜찮다는 얼굴로 연한 미소를 흘렸다. 물론 이미지 관리를 위한 화답이었다. 아무튼, 객관적인 관점으로 봐도 0년 차 사용자가 아카데미로 들어간 것은 나 또한 듣지도 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 의외적인 관점에서 보면 딱히 속상해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성현민의 말은 청산유수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저희들은 대모님께 지금껏 이어온 폐단을 더 이상 답습하지 않겠다고 약속 드렸습니다. 아. 확실히 교관은 나름 연차도 있고, 경험이 풍부한 사용자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저도 동감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시점을 바꿔보십시오. 바꾸어 말하면 그런 교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분들은 이곳에 차고 넘치지 않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굳이 그런 경험이 필요하지 않은 교관 역할도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제는 변화를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약간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똑같은 0년 차 사용자가 교관으로 있다면 신규 사용자들에게도 훌륭한 동기 부여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같은 0년 차 사용자인데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클랜을 창설하고, 수 많은 유적을 발굴하고, 다른 고년 차 사용자들과 동등한 자리에 섰습니다. 아마 제가 갓 들어온 신규 사용자라면 머셔너리 로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뭔가 느끼는 것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똑같은 0년 차 사용자라는 말을 들먹이자 처음 격렬했던 주변의 반응이 조금씩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다들 하나같이 고민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한 면에는 성현민의 말을 일리 있다고 여기는 표정을 띠고 있었다. 그는 주변의 반응을 훑고 이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직 여지를 남겨둔 말을 매듭짓기 위해 한번 더 입을 열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머셔너리 클랜의 인원은 작아도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은 무시무시 합니다. 시크릿 클래스 둘에 레어 클래스 셋. 현재 원정으로 인해 침체된 분위기를 끌어올려준 것은 이 분들이 소도시 뮬에서 이룬 성과와 출현에 있습니다. <그림자 여왕>님도 계신 만큼 앞으로 성장하실 정도를 가늠해보면 차후 북 대륙 내에서 분명 큰 영향력을 발휘하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훗날을 위해 아카데미 역할을 수행하면서 이곳에 있는 분들과 친분을 쌓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아마 우리들뿐만 아니라, 머셔너리 로드께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이 말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용자들이 그 한마디에 다들 은근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겉으로는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이렇게 잘 포장한 말들에 끌려가기 보다는, 나름대로 상황 분석을 하고 가부를 결정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키려는 순간이었다. 내 맞은편에서, 지금껏 조용히 상황을 관전하고 있던 한소영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후기를 쓰는 지금 시각은 11시 55분 입니다. 아, 요즘 들어 집필을 완료하는 시간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래도 10분, 20분 정도 남아 후기 및 리리플을 쓸 시간이 있었는데 요즘은 정말 피가 터지네요. 하하하. 가끔 2월이 그립습니다. 그때는 하루에 꼬박꼬박 두 편씩 올릴 정도로 여유가 많았는데 말이죠. 아, 그리고 장면 전환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못해도 다음 회 내로 소집령은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깊은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꾸벅. (__) 『 리리플 』 1. 신화의재현자 : 와. 믿을 수가 없군요. 연속으로 하신 이상 새로운 강자(?)의 출현으로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쟁쟁하신 분들을 제치고 1등을 계속 거머쥐시다니. 하하하. 1등 축하 드립니다. 그럼, 이번 회도 부디 재미있게 감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 EyeSeeYou : 저도요. 저도 자정 연재 분에서 제가 1등 해서, 저를 칭찬해보고 싶어요.(?) 3. 시즈프레어 : 아니, 잠시만욧. 쓰담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뒤에 <핧짝>은 무슨 말씀이신가요! 4. 카브람 : 헤헤. 유진이는요오. 착한 아이에요오. 오랜만에 나오는 안솔 Ver. 입니다.(퍽퍽! 비위가 상하셨다면 심심한 유감의 말씀을 드립니다. 하하하.) 5. 애독자C + MT곰 : 아니 이 분들이. 왜 저를 납치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납치는 나쁜 겁니다. 다음부터 그럼 말씀 말아주셔욧. 그러고 보니 문득, 전에 어떤 분은 저를 납치하고 연참 한번에 고기 반찬 하나 주신다고 하셨던 분이 기억나네요. 으으. 6. sereson : 여러분! 독자 분들! 안솔이 여기 있습니다! sereson님은 안솔의 화신입니다! 안솔이 여기에 있어요! 고래고래! 7. 추락한날개 : Yes. 그렇습니다. 얼마든지 100 이상으로 능력치를 상승시킬 수 있습니다. :) 8. 악마신전 : 잠시만요. 단순히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했는데 왜 포돌이 아저씨들을 부르시는 겁니까. 그리고 감옥에서도 사식을 미끼로 글을 쓰게 만들려고 하시다니. 헐. 그러고 보니 닉네임이?! 9. Toranoanal : 헤헤. 고맙습니다. 헤헤헤. 아, 더 쓰다듬어 주셔도 됩니다. 더, 더더, 더더더 말이죠.(?) 10. 유수월향 : 죄송합니다. 그래서 최대한 용량을 늘려봤는데, 이것저것 집어넣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고, 나름 중요한 파트였고, 추후 극적 반전을 위해서 복선을 넣다 보니 내용이 늘어났습니다. 다음 회로는 무조건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__)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07 / 0933 ---------------------------------------------- 그것은 착각에 불과했다 “괜찮은 생각이네요.” 한소영의 입술이 열리고, 은은한 목소리는 회의실 안을 은근하게 울렸다. 그녀가 목소리를 낸 순간, 내부에는 순식간에 침묵이 찾아 들었다. 그녀는 성현민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다시금 말을 잇기 시작했다. “확실히 머셔너리 클랜에서 이번 사용자 아카데미 건에 참여하시면 상호간에 많은 발전과 보완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아요. 클랜의 전력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와, 대표 클랜분들과 안면도 쌓을 수 있고, 신규 사용자 분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줄 수 있으며, 나눠먹기 라는 인상을 완화시킬 수 있어요. 그리고 추후 대모님께도 면을 세울 수 있겠죠. 북 대륙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일석 오조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 만큼, 저 또한 머셔너리 로드의 참가를 부탁 드리고 싶어요.” 한소영이 이렇게 말을 길게 하는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 그 와중에도 고유 능력 카리스마가 발동됐는지, 그녀의 말을 듣던 대부분의 사용자들이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특히 남성 사용자들 몇몇은 얼굴까지 붉히고 있을 정도였다. “그렇습니다.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저도 한(韓) 로드의 말에 공감합니다. 확실히 한번 시도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군요.” 간신히 정신을 차렸는지 성현민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박현우는 나름 담담한 얼굴로 그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그리고 황금 사자의 동의를 이끌어낸 순간,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타 클랜 사용자들 또한 앞 다투어 나를 조르기 시작했다. “저도 부탁 드릴게요. 물론 현재 자리를 잡느라 바쁘시겠지만, 앞으로 북 대륙의 발전을 위해서 한번 해볼만한 일인 것 같아요.” “그래요. 혹시 클랜일이 걱정되시면 아카데미 수료 후 남부 소도시 코란으로 오세요. 저희 클랜뿐만 아니라 남부 자유 연합에서 많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거에요.” “저희, 저희 달밤 클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소도시에 불과하지만 최대한 편의를….” “머셔너리 로드. 아까 말씀 드린 제안은 아직 유효해요.” 수(秀) 클랜이 선수를 치자 다른 클랜들 또한 뒤를 이어 로비를 시작했다. 심지어 한소영까지도 회의 전에 나와 나눴던 대화를 상기시키고 있었다. 한두 명이 말하는 것이 아니어서 그런지, 머리가 조금 어지러워짐을 느꼈다. 문득 지금 이 상황이 굉장히 우습다고 느껴졌다. 1회 차 시절 지금 이 시기 때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2회 차에 이른 현재, 어떻게든 우리 클랜을 자기네들 도시로 끌어들이려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씁쓸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때였다. “…….” 점점 높아지던 목소리들이, 한 순간에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여태껏 조용히 있던 고연주가 싸늘한 눈빛을 뿌리고 있는걸 볼 수 있었다. “하, 하하. 흥분해서 그런지 몰라도 너무 저희들의 입장만 말씀 드린 것 같군요.” 눈치 빠른 성현민은 재빨리 상황을 파악했는지,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무, 물론 머셔너리 로드의 의견을 가장 우선할 생각입니다. 너무 앞서나간 점은 사과 드리겠습니다.” “조용히 하세요.” 고연주의 목소리는 나른했지만 사늘한 칼날 같은 기운을 품고 있었다. 성현민은 머쓱한 얼굴로 물러섰다. 분위기가 조금 싸해지기는 했지만 덕분에 겨우 한숨 돌릴 틈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입맛을 다시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것저것 생각할 것들이 많았다. 사용자 아카데미로 들어가는 것도 분명한 이득이 있다. 들어가지 않고, 곧바로 바바라를 떠나 본 계획을 실행시키는 것 또한 이득이 있다. 각자 갖고 있는 나름의 장점이 있었고, 단점 또한 존재했다. 어느 하나를 포기하기 아까울 정도로 각자 비등비등한 이득을 품고 있었다. 내가 본 계획을 뒤로 미루면서까지 사용자 아카데미 건을 고민하는 이유는, 얼마 전 <시작의 여관>에 대한 정보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입장하는 신규 사용자들의 수가 많을수록, 비례적으로 깊은 잠재성을 가진 사용자들이 포함되어 있을 확률도 높아진다. 더구나 이번에는 더욱 확실할 것이다. 무려 5일차 만에 통과 의례를 완료한 사용자가 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이번에 참가하는 클랜들이 너무 많다는데 있었다. 쟁쟁한 클랜들이 수두룩한데 신규 사용자들이 무조건 내 클랜으로 들어온다는 보장이 없었다. 분명 우리 클랜도 내세울만한 것들은 있었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경쟁력에서 밀리는 게 사실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깔끔하게 포기하는 게 낫겠지만, 여기서 또 하나의 변수가 생겼다. 그건 바로 미래가 변했다는 것. 클랜들이 소집령에 응했고, 대모의 중재로 서로간의 갈등을 해소시켰다. 1회 차에는 없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물론 아직 속단하기에는 이르겠지만 앞으로 서 대륙의 발호 이후, 사용자들끼리 내전을 일으킬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졌다. 어쩌면 부랑자들이 침공해 들어오면 구원군을 보낼지도 모를 일이다. 사용자 아카데미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이 생겼으니까. 그러면, 앞으로의 미래는 내 기억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띠게 될 것이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 사용자 아카데미에 자리를 하나 만들어 두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고민을 했지만 얼른 결론을 낼 필요가 있었다. 모두가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계속 질질 끌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음….” 곧이어 마음을 정한 나는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모두들 긴장한 얼굴로 내 얼굴을 응시하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 가만히 손을 들어 고연주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서 쏘아져 나오던 차가운 시선이 곧바로 갈무리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긴장감이 감돌던 사용자들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떠오른다. 무려 10강에 이른 사용자가 한낱 0년 차 사용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보니 신선한 감정이 드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들의 시선을 받아 넘긴 후,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단 시작은 살짝 튕기는 것부터. “현재 머셔너리 클랜은 갓 창설된 신생 클랜입니다. 그러나 앞으로의 행보를 이미 계획해둔 상태라 이번 사용자 아카데미 건이 썩 달갑지만은 않습니다. 어느 분이 말씀하신대로 머셔너리는 현재 스쿼드, 아 인원이 부족한 상태니까요.” “물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저것 할 것들이 많으실 테니 말입니다. 더구나 계획까지 이미 잡아두셨다고 하니….” 성현민은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고는 말 끝을 흐렸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응시했다. 아무리 발전 가능성이 높고 고연주가 있다고 해도, 기본적인 차이는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내게 필요 이상으로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나는 다시금 제 3의 눈을 활성화시켰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성현민(4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검사(Normal Sword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한(韓) 5. 진명 · 국적 : 차가운 불꽃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33) 7. 신장 · 체중 : 178.8cm · 73.8kg 8. 성향 : 온화 · 신념(Mild · Belief) [근력 87] [내구 81] [민첩 84] [체력 85] [마력 90] [행운 76] < 능력치 비교 > 1. 김수현 : 542 / 600~ [근력 96(+2)] [내구 92] [민첩 98] [체력 72] [마력 96] [행운 90(+2)] (능력치 포인트가 12 포인트 남은 상태 입니다.) 2. 성현민 : 498 / 600~ [근력 87] [내구 81] [민첩 84] [체력 85] [마력 90] [행운 71] (능력치 포인트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능력치는 준수했다. 클래스를 포함한 전반적인 정보는 10강들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 손색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성향에 눈길이 끌렸다. 온화함 속에 숨겨진 굳센 마음. 1회 차 시절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의 모습과 거의 들어맞고 있었다. 그는 우유부단하지 않고 책임감이 강한 사용자였다. 특히 클랜원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살피고 챙기는 것으로 유명했다. 추후 대 연합을 아우르면서 불협화음 하나 나오지 않았던 것은, 그의 이런 성향에서 나오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이 들었다. 악 성향은 없다. 무언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지만, 그 속내는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방법이 조금 다르겠지만 한소영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둘의 차이점이라면 한소영은 곧바로 말했을 뿐이고 그는 시간을 들여 천천히 나아갈 생각인 셈이다. 탁 까놓고 말하면, 흐름을 잘 탄 면이 있기는 하지만 너무 잘나가는 것도 피곤한 일이었다. 벌써부터 나를 두고 암묵적으로 경쟁하기 시작했으니까. 말 끝을 흐린 채 아쉬운 얼굴을 하는 그를 보며,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여러분들의 부탁을 이렇게 거절하는 것도 조금 마음에 걸리네요. 그래도 아직 0년 차에 불과한 제가 과연 말씀하신 것만큼 도움을 드릴 수 있을는지….” “아,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 있는 많은 분들이 해볼만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머셔너리 로드.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아카데미에서 경험이 필요한, 귀찮을 만한 일들은 저희들이 대부분 처리할 수 있습니다.” 살짝 여운을 남기자 성현민과 박현우는 재빨리 나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두면 또 한번 일장 연설이 시작될 것 같았기에, 나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음, 그러면 작은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예. 말씀하십시오.” “다른 건 아니고, 제가 알기로는 아카데미 기간 동안 사용자들의 출입을 엄중하게 통제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음, 네, 네. 그…렇습니다.” 박현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상을 따져보면 초반에는 출입을 엄중히 통제하지만, 수료가 가까워질수록 조금씩 풀어주는 경향이 있었다. 실제로 나 또한 오퍼를 받을 때 외부에서 몇 번 식사 대접을 받았으니까. 그때를 회상하며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혹시 그 부분에 관해서 약간의 배려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배려라면….” “클랜의 초반 운영은 굳이 제가 있지 않더라도 시행이 가능합니다. 물론 제가 있는 게 더 좋겠지만 말이죠. 그래도 <그림자 여왕>이라면 제 대리 업무를 충분히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아! 그렇군요. 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림자 여왕>님께 한해서, 사용자 아카데미의 자유로운 출입을 허가해 놓겠습니다.” 어느 정도 수준이 있는 사용자들과 대화하면서 좋은 점은, 아 하면 어 하고 척척 알아 듣는다는 것이다. 구구절절 말할 필요가 없었다. 슬쩍 주변을 살펴보니 다들 대체로 만족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부 사정을 알고 있는 사용자들이라면 내 부탁이 별 것이 아닌, 충분히 수용할만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이쯤에서 밀당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조금 배려해주시면, 저 또한 기쁜 마음으로 사용자 아카데미에 참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그 정도야 쉬운 일입니다.” 이렇게 나도 참가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후에야 본격적인 세부 사항을 조절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 회의 속도는 다시금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신규 사용자들의 영입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기본의 원칙을 지키기는 것으로 간단히 합의할 수 있었다. 누구나 동등하게 본인 소속의 클랜을 홍보할 수 있고, 오퍼를 넣을 수 있다. 그리고 최종 선택권은 신규 사용자 본인이 선택한다고 하니 기본적으로는 클랜의 역량에 달린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럼 일차적인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소집령도 이쯤에서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금 빡빡하다고 여기실지는 모르나, 이번 사용자 아카데미에 참가하시는 분들께서는 워프 게이트로 빠르게 움직이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예. 그러면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오늘 밤이 넘어가기 전, 엄선한 인원들을 데리고 바바라의 광장으로 도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전까지만 황금 사자 클랜분들께서 수고해주십시오.” 그렇게 얘기를 마무리 지은 후, 그들은 의례적인 덕담을 몇 마디 주고받았다. 그리고는 하나 둘 회의실을 떠나기 시작했다. 동부와 남부 클랜원들의 걸음이 바쁜 것을 보니 오늘 이뤄낸 성과를 한시라도 빨리 보고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한소영과 연혜림도 회의실을 나서기 전, 살며시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들은 잠시 동안 나를 바라보고는 이내 곧바로 회의실을 나섰다.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는 박현우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나도 슬슬 몸을 일으켜 나가려는 찰나, 문득 그가 내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걸었다. “머셔너리 로드.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 네.” 나는 막 움직이려던 걸음을 멈칫하고 몸을 뒤돌아 보았다. 그러나 자리에 다시 앉지는 않았다. 나 또한 할 일이 있으니, 최대한 빨리 끝낸 달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그는 내 옆의 고연주에게 한번 시선을 건네고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혹시 지내실 곳이 마땅치 않으면 우리 클랜에서 좋은 장소를 소개시켜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 클랜 내부는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외부에도 클랜원들이 숙박용으로 사용하던 건물이 있거든요.” “괜찮습니다. 이미 잡아놓은 숙소가 있어서요.” “아….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혹시 따로 하실 말씀이라는 게….” “아닙니다.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니, 추후에 어느 정도 일이 마무리 되면 그때 말씀 드리겠습니다.” 나로서는 조금 의외였다. 뮬에 관한 사건을 꺼낼 줄 알았는데, 스스로 은근슬쩍 넘어가고 있었다. 잠시 고개가 갸웃거려졌지만 박현우의 반응을 보니 뭔가 감이 오는 것 같았다. 아마도 황금 사자 내부에서 너도밤나무보다 우리들을 더욱 높게 평가했으리라. 그리고 고연주도 개입되어 있으니 함부로 건드리기도 애매한 감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대로 그냥 넘어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조금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나중에 조사 절차가 들어와도 형식적인 선에서 그칠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튼 배려에는 감사 드립니다. 그럼 저도 이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바라 내에 있다고는 하지만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인수인계를 해야 하는 터라.” “예. 그럼 살펴가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모쪼록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나 또한 그와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후 빠른 걸음으로 회의실을 나섰다. 홀을 가로지르고, 금호관의 입구를 나오자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이 보였다. 온 몸을 적셔오는 시원한 밤바람을 맞자 뜨겁던 몸이 조금은 식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긴 후기를 썼다가 지웠네요. 코멘트는 전부 읽었습니다. 아마 소집령 부분을 재미있게 읽으신 분도 있을 테고, 지루하게 여기신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즈음 연참을 못하고 일일 연재를 하다 보니 더욱 그렇게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쓸데없는 내용이 아닌 나름대로 중요한 부분이라 여겨 두 챕터 조금 안되게 내용을 배당했습니다. 현재 독자 분들의 느끼고 있는 불안감에 대해서는, 그냥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씀밖에 드릴 수 없겠네요. 저도 속 시원히 말씀 드리고는 싶지만 그러면 앞으로의 내용을 보시는데 느끼실 재미가 반감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 만큼 차후 내용으로, 현재 몇몇 독자 분들이 느끼시는 불안감을 없앨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앞으로 필요한 부분은 느리게 갈지 몰라도, 그 외의 부분은 최대한 제 글을 지키는 선에서 좀 더 빠른 진행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리플은 곧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리리플 』 1. 破天魔痕 : 1등 축하 드립니다. :) 신화의재현자님의 1등을 끊으셨군요. 간만에 4연속 1등을 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조금 아쉽습니다. 하하하. 2. 신화의재현자 : 생일 축하 드립니다. 그리고 수술도 부디 성공적으로 하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라고 쓰려고 했는데, 다행히 207회 코멘트를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하루는 마음껏 즐기시길! 3. 명박짱의양양합일 : 음, 그렇다면 이번에는 예의 바른 연참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하하하. 4. 시즈프레어 : 소제목에 주목해주시면, 조금이나마 짐작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5. 액면가 : 그렇군요. 잠시 분위기 완급 조절을 한다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챕터가 바뀌는 부분이다 보니, 어느 정도 설명 및 복선이 많이 들어가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다시 재미를 느끼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6. days0314 : 에, 주화입마에 걸릴 가능성이 높아지는군요. 유념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이따금씩 연참신공도 간간히 연마하고 있으니 양해 부탁 드립니다. 하하. 7. 고의 : 아 그렇군요. 저번에 시점 변환 부분에 대해서 별도로 구분한적이 있었는데, 잘 읽고 있다가 갑자기 몰입도가 확 깨져버린다는 분들이 있어 그렇게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번 고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소중한 조언 감사합니다. 뒤 내용에 대해서도 교정 때 충분히 수렴 및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8. 오시안 : 어느 정도 제 생각과 비슷하신 것 같습니다. 북 대륙 최고의 클랜들이 모인 자리에서 수현의 발언권은 약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발전 가능성이 높고 고연주를 보유함으로써 무시 당하지 않을 정도는 됩니다. 9. Toranoanal :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니,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ㅜ.ㅠ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10. 엘프카이 : 지적해주신 부분 수정 완료했습니다. 감사합니다. (__)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08 / 0933 ---------------------------------------------- 떠나고, 만났다 돌아가는 길에는 생각할 것들이 많았다. 고연주도 그런 내 기분을 알고 있는지 평소와 같은 장난을 걸지 않고 조용히 뒤를 따라왔다. 앞으로 일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고민하다가, <아침 햇살> 여관이 보이는 순간 비로소 클랜원들의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여관 입구를 들어가기 전 나는 몸을 뒤돌아보았다. 언제나처럼 나른한 얼굴의 고연주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용자 고연주.” “네, 수현.” “여관을 떠나기 전에 기다리라고 했으니, 아직 자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먼저 들어가서 일행들을 불러모아주지 않겠습니까?” “집무실…. 아, 아니죠. 그 방으로 부르면 될까요?” “그 방이 제가 혼자 사용하는 방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맞습니다. 연초 한대만 피우고 들어가겠습니다. 정하연보고 짐은 모두 챙겨서 오라고 전해주세요.” “네. 너무 심려 마시고 천천히 들어오세요.” 고연주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나는 짧은 한숨을 토해낼 수 있었다. 밤인데도 불구하고 여관 앞 거리는 어수선한 기척이 다수 느껴졌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용자들도 체감상 곧 <시작의 여관>의 포탈이 닫히고, 신규 사용자들이 입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비록 직접적으로 참가하지 못하는 사용자라고 해도, 때묻지 않은 사람들이 들어온다는 것은 흔하지 않은 구경거리였다. 부드럽고 담백한 향기를 품은 연기가 목구멍 안으로 가득 흘러 들어온다. 나는 입에 물고 있던 연초를 쭉 빨아들이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 미래는 변했다. 아니, 변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비 참가 클랜들은 황금 사자의 소집령에 응했고 원하는 바를 이뤘다. 대모의 활약으로 그 동안 높아져가던 갈등들이 상당부분 해소됐다. 이것 자체만 놓고 본다면,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관계가 극악으로 치닫지 않는다는 것은 여태껏 간신히 지켜왔던 최후의 마지노선을 넘지 않는다는 소리였으니까. 이로서 북 대륙은 불필요한 피를 흘릴 필요가 없어졌다. 난세 혹은 춘추 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클랜들간 대립하는 세상은 오지 않는다. 사용자 아카데미 이후에는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도시 밖을 탐험하고, 유적을 발굴하고, 부랑자들에 대항해 힘을 합치는 등의 세상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손쉽게 인정하고 넘어가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그 중 가장 의문점의 가는 것은 대모의 상태와 주변 인원들의 반응이었다. 손분례의 몸은 거의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성유빈이 대모의 몸 상태를 걱정하자 박현우는 곧바로 고함치며 그녀의 말을 막았다. 꼭 마치 들키기 싫은 일을 감추기 위한 행동으로 보였다. 도대체 왜…. “아.” 갑작스레 연초를 끼고 있는 검지와 중지 사이로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생각에 너무 깊게 잠겨있었는지, 모조리 타 들어간 연초가 피부에 닿아 있었다. 바닥에 떨궈 몇 차례 비빈 후, 그대로 몸을 돌려 입구의 문을 열어젖혔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불확실한 것들이 너무 많아 섣불리 추측할 수 없었다. 여관 내부로 들어가자 몇몇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던 사용자들의 눈길이 모이는 게 보였다. 호기심 어린 시선들을 받아 넘기며, 나는 곧바로 계단을 올랐다. 이윽고 3층 복도로 들어선 후 내 방으로 들어서는 문을 열자, 침대 옆으로 동그랗게 모여 앉아있는 일행들을 볼 수 있었다. * 네모나게 각진 기다란 제단 위로 거대한 타원을 그리고 있는 워프 게이트가 우뚝 서 있었다. 뻥 뚫린 중앙 부분을 이리저리 떠다니는 연 푸른빛 구체를 잠시 보다가, 그대로 시선을 내렸다. 게이트 앞에는 머셔너리 클랜원들이 다들 섭섭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관으로 돌아온 이후 체감상 3시간 정도 흐른 것 같다. 전체적으로 요약하고, 최대한 핵심만 짚어 말해주었지만 워낙 알려줄 것들이 많았다. 소집령에 대한 얘기는 비교적 간단했지만, 앞으로의 계획 및 행동에 대해서는 많은 시간을 잡아먹을 수 밖에 없었다. 알려줄 수 있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구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 제가 없는 동안 클랜을 잘 부탁 드립니다.” “네. 그래도 오래 맡을 생각은 없으니, 얼른 돌아오셔야 해요.” “걱정 마세요. 저희들은 신경 쓰지 마시고, 수현이 몸 조심했으면 좋겠어요.” 고연주와 정하연은 각자의 개성이 드러나는 말로 대답했다. 그 외 클랜원들과도 모두 한번씩 인사를 주고 받은 후, 나는 다시금 시선을 고연주에게로 돌렸다. “고연주. 제가 했던 말들을 기억하시죠?” “그럼요.” “당신의 역할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제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할겁니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녀의 호언장담을 듣자 조금은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 들었다. 시선을 거두자 고연주의 뒤로 뚱한 얼굴로 손가락만 빨고 있는 비비앙이 보였다. 나와 고연주가 없다면 클랜의 실질적인 무력은 그녀가 가장 세다고 볼 수 있었다. 해서, 나는 비비앙에게도 당부의 말을 하기로 했다. “비비앙.” “웅.” “고연주는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녀야 하고, 정하연은 클랜 내부를 다듬어야 해. 그럴 일은 거의 없겠지만, 실제로 무슨 일이 닥쳐왔을 때 가장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알았어.” 비비앙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볼을 불룩 이고 입술을 삐죽 내민 것을 보니 뭔가 대단히 불만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대강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 그저 한숨만 쉬고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그녀의 장단에 맞춰줄 시간이 없었다. “그럼 이만 들어가보세요. 3개월 후에 제가 그곳으로 찾아가겠습니다.” “네. 다시 로드를 뵐 수 있는 그날까지….” 잠시 동안의 작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클랜원들은 쭈뼛쭈뼛 내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특히 애들은 그런 정도가 더욱 심했다. 결국 보다 못한 고연주가 직접 나서 내 인사를 받으려는 순간이었다. “으아아아앙.” <아침 햇살>을 나올 때부터 내내 울상을 짓고 있던 안솔은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종종 걸음으로 내게 달려오는 그녀를 보며 옆으로 피하려는 찰나, 고연주가 말해준 그 일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오라버니!” 나도 모르게 멈칫하는 동안, 내게 폭 안겨 드는 안솔을 반사적으로 받아버리고 말았다. 내 품에 안긴 그녀는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 보더니 이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어어엉…. 가지마아…. 오라버니 가지마아…. 어어엉….” “솔아. 영영 보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길어봤자 3개월이잖니. 솔이가 이럴수록 오빠가 난처해져요. 자, 울음 뚝 하렴.” “싫어어…. 여기 있으면 안 된단 말이야아…. 같이 가아…. 어어엉….” “이미 하겠다고 한 이상 어쩔 수 없어. 안솔 너 자꾸….” 자꾸 어리광을 부리니 조금은 짜증이 치솟았다. 그래서 조금 다그치려는 찰나, 그녀가 마지막으로 뱉은 말에서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아가야. 참고로 말하는데 5초안에 이곳으로 오렴. 어차피 네가 이곳에 남는 것도, 로드가 우리를 따라오는 것도 허락해줄 리가 없거든. 자꾸 투정부리면 재미 없을 줄 알아.” “야! 너 창피한 줄 알아라 좀. 누구는 안 아쉬운 줄 알아? 어쩔 수 없다고 하시잖아. 짜증나게 굴지 말고 빨리 오라고.” 저기 앞에서 고연주와 이유정의 뾰족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전에 그녀를 억지로 떼어놓으려고 하자, 안솔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아…. 어엉…. 불안하단 말이에요오…. 어어엉….” “불안…하다고?” 안솔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싸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안 그래도 소집령 이후 내내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일단 담아두고만 있었는데, 그녀의 말이 기폭제가 된 듯 갑작스럽게 의혹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워프 게이트 앞에 있던 나는, 뒤에서 거대한 마나가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흐름을 느낀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리, 리더. 아무래도 신규 사용자들의 입장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이미 와, 완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렇죠. 얼른 가봐야겠군요.” 신상용의 말에 나는 떠름한 기분을 느끼며 대답했다. 안솔은 나를 꼭 안은 채 한사코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아니, 잠시만요.”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껏 겪어온 여러 가지 일에 대한 생각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나는 아직도 울고 있는 솔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준 후 그대로 살짝 무릎을 굽혔다. 그녀와 눈높이를 맞춘 후, 자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솔아.” “흑…. 네…. 어엉….” “그래. 네가 불안하다면 아마 사실이 가능성이 높을 거다. 그게 어떤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결정을 뒤집기는 힘들다고 보인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려무나. 네 말을 흘려 듣지 않으마. 항상 조심하고, 정신 차리고 있을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오빠는 네 말을 믿는단다. 솔이도 오빠를 믿을 수 있겠지? 믿는다면, 이만 뚝 울음 그쳤으면 좋겠구나.” “흑…. 흑…. 하지마안…. 그렇지마안….” “안솔! 형이 곤란해 하고 있잖아. 아후, 오늘따라 왜 이래 정말. 형 죄송해요. 제가 직접 데리고 갈게요.” “흐끅…흑…윽…끅….” 결국은 보다 못한 안현이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왔다. 그 와중에 안솔의 눈동자는, 눈물이 맺혀있기는 했지만 맑고 깨끗했다. 이렇게 보니 단순히 어리광을 부리는 눈동자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형. 3개월 뒤에 뵙겠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히잉…. 놔아…놔아아…. 으아아앙…!” 안솔은 다시금 울음을 터뜨리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나 안현은 그녀의 반항을 가볍게 제압하며 억지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그녀를 향하는 곱지 않은 시선들을 보며 나는 기다란 콧숨을 내뱉었다. 순간 속마음이 흔들리기는 했다. 그러나 지금 엄연히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안솔의 감이 아무리 잘 맞는다고 해도, 이미 소집령에서 얘기를 끝낸 상태라 번복하고 바바라를 떠나는 것은 절대로 옳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래도 일단 정신을 단단히 차릴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괜찮다. 네가 죄송할 것은 없지. 너무 무리하지 말고, 말 잘 듣고. 그리고 솔이도 좀 챙겨주려무나. 뭐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다만.” “네. 마음 푹 놓으세요 형. 열심히 하고 있을게요.” 억지로 끌려가는 도중에도 안솔은 손을 멈추지 않으며 안현을 마구 때렸다. 이대로 있으면 언제까지고 서로 바라만보고 있을 것 같으니, 내가 먼저 떠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발 아래에 둔 마법 배낭을 집은 후 조금 더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먼저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수현! 몸 조심하세요!” “네~. 그럼 나중에 봐요~.” “김수현 바보! 멍청이! 엉덩이도 안 때려주고!” “오빠! 꼭 혼자 와야 해! 둘이나 셋이 돼서 오면 안돼!” “리, 리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 동안 기필코…!” 클랜원들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나도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든 후 곧바로 몸을 돌렸다. 뒤통수로 꽂히는 여러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한 채 더욱 바삐 걸음을 놀렸다. * 영원한 이별도 아니고, 잠시 동안 떠나는 거라서 그런지 별로 마음에 불편한 점은 없었다. 솔직히 말하라면 아주 조금이지만 후련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1회 차 시절에는 혼자 다니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 만큼 오랜만에 맛보는 자유에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기는 했다. 헤어지기 직전 안솔이 내뱉었던 말들이 계속해서 내 안을 맴돌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행운 101 능력치는 인정하지만, 당최 전혀 알 수 없는 능력이었다. 그녀가 느끼는 불안에 대해서는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다. 모종의 위험에 대한 감지인지, 아니면 예전에 고연주와 첫 밤을 보냈을 때 느꼈을 불안감인지, 아니면 또 다른 내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것들인지. 즉 내가 느끼고 있는 불안보다 그녀가 느끼는 불안이 훨씬 다 방향적이라, 내 생각과 일치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주어진 정보가 너무도 적었다. 하나는 황금 사자 클랜에서 볼 수 있었던 대모의 상태와 박현우의 반응. 다른 하나는 안솔의 불안 감지. 문제는 둘 모두 구체적이 아닌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들만으로 계획을 세우기에는 너무도 불확실한 요소들이 많았다. 나는 일단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인지하지 못하는 불안이라고 해도 벌써부터 벌벌 떨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지금껏 그녀가 감지해왔던 불안감과 대면했을 때 수월하게 처리한적도 있었다. 물론 방심은 금물이었다. 안솔에게 장담했던 대로 뭔가 조심할 필요성은 있었다. 최후의 방법으로는 재빠르게 발을 빼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최후의 방법이었다. 넋 놓고 있기 보다는 할 수 있는 만큼 알아보는 게 좋으리라. 이 마음을 가슴에 새긴 채, 나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신상용이 말대로 지금쯤이면 신규 사용자들이 <시작의 여관>으로 입장했을 것이다. 일차적으로 황금 사자 클랜에서 그들을 광장으로 인도하기로 했고, 타 클랜들은 광장 연설이 끝나기 전까지 필요 인원들을 차출하기로 했다. 고년 차 사용자들이 다수 사망하기는 했어도 그 동안 쌓아온 것이 있는 만큼 인도인접 정도는 문제없이 해낼 것이다. <아침 햇살>에서 <시작의 여관>까지 거리는 조금 있는 편이지만 워프 게이트에서 출발하면 훨씬 가까운 편 이었다. 아무도 없는 광장을 지나면서 나는 약간 의문이 들었다. 신규 사용자들을 인도하는 과정에서 관계자들을 제외한 타 사용자들의 접근은 철저하게 막기 때문에 기존 사용자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장을 통제하는 인원은 고작 서너 명만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의문은, <시작의 여관>으로 도착한 후 이해할 수 있었다. “씨팔! 여기는 어디야! 어디냐고! 어, 어? 이거 안 놔? 안 놔?!” “가만히 있으세요! 가만히 좀 있어 보시라고요!” “여기가 어디야? 어디냐고! 지구가 아니잖아! 거짓말을 했어! 다, 당신 누구야!” “빨리 통제하지 않고 뭐하고 있어!” 웅성웅성. <시작의 여관>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개판이었다. 이리저리 오가는 고성과 몸부림치는 사용자들.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 발 빠르게 뛰어다니는 황금 사자 클랜원들. 신규 사용자들의 몸짓에는 혼란스러움이 가득했고, 통제 관들은 바쁘게 뛰어다니고는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설퍼 보였다. 분명 통과 의례를 거쳤을 것이고, 천사들에게 충분한 설명도 들었을 것이다. 간혹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기는 했다. 그러나, 아무리 입장 인원이 많다고는 해도 이것은 정도가 심하다고 볼 수 있었다. 잠시 혀를 차고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이곳으로 오자마자 맨 처음 들었던 걸걸한 음성이 귓가를 세게 때렸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죄송합니다. 오늘 저녁에 약속이 있었습니다. 집에 들어오니 22시 즈음 되었더군요. 다행히 나가기 전에 조금 작성한 부분이 있어 크게 늦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ㅜ.ㅠ 아 그리고 독자 분들. 제가 전개를 천천히 쓰는 버릇이 있어서 이번에 조금 높여보았습니다.(물론 필요하다고 여기는 부분은 천천히 나갈 생각입니다.) 앞으로 되도록 높여볼 생각인데, 혹시 어색한 부분이 보이신다면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독자 분들의 소중한 조언이 제가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꾸벅. (__) PS. 쿠폰 주신분들 모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_(__)_ 『 리리플 』 1. 날개접힌새 : 오호라. 날접새님! 날접날접한 날접새님! 1등 축하 드립니다. 하하하.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올리자마자 1등을 하셨는지요. 역시 우리 둘은 천생연분입니다.(퍽퍽! 농담입니다.) :) 2. qklcnw : 시험 공부! 분명 과정은 힘들지만, 시험이 끝났을 때의 그 기분은 정말로 짜릿하죠. 부디 좋은 결과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3. sigma815 : 아 네. 그 부분은 저도 미흡함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차후 이북 교정할 때 내용을 추가하거나, 다음에 외전 또는 회상 부분으로 집어 넣도록 하겠습니다.(현재는 진도 나가는데 집중할 생각입니다.) 4. 랜슬럿 듀 락 : 하하. 조금만 참아주세요. 소집령에서는 수현이의 발언권이 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신생 클랜 로드인만큼 이미지 관리를 할 필요도 있고요. 사용자 아카데미에서는 답답하지 않게 나가보겠습니다. 5. 너구리날개 : 쿠폰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좋은 내용으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__) 6. 라티인형 : 오호. 그 부분을 짚어 내셨군요. 하하하. 과연 어떤 관계였을까요? 가끔 1회 차 시절의 수현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7. 레시테 : 헉. 극찬을 해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코멘트 보고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__) 8. 명박짱의양양합일 : 음, 육xx라는 말을 보고 흠칫 했습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_-+ 9. 하루지온s : 김한별은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안솔은 하루지온s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아, 김한별은 나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정말 한번 상상해 보시라고 말씀 드린 겁니다.(혹시라도 오해하시는 독자 분들이 있으실까 봐….) :) 10. 배짱남 : 해당 부분에 대한 것은 나름 계산을 해둔 상태입니다. 차후 진행하는 내용으로 차차 풀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몇 가지 조언을 드리자면, 이번 사용자 아카데미를 기준으로 잡으시면 안됩니다. 37회, 197회를 보시면 차후 진행 내용을 보시면서 더욱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09 / 0933 ---------------------------------------------- 떠나고, 만났다 “이 개 육시랄 놈아! 좆 까는 소리 그만하고 빨리…. 어, 어?” “이 미친 새끼가 진짜…!” 퍽! 쿠당탕! 짧은 고함 소리가 들리고 둔탁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얼른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인상 더럽게 생긴 남성 한 명이 바닥을 나뒹구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위로는, 숨을 씩씩 몰아 쉬며 씨근거리는 사용자가 있었다. 황금 사자 문양이 있는 걸로 보아, 통제 교관으로 뽑힌 황금 사자 클랜원인 것 같았다. 그 사용자는 한대 친 걸로는 분이 안 풀렸는지 바닥에 뒹굴고 있는 남성을 향해 발길질을 시작했다. “지금, 감히, 바바라에서, 황금 사자, 클랜에게, 반항하는, 거냐?” “큭, 악, 끅, 윽!” 쓰러진 남성을 한번 걷어 찰 때마다 교관의 목소리도 한번씩 끊겼다. 남성은 고통에 겨운 비명을 질렀고, 자연스레 그쪽으로 주변의 시선이 쏠렸다. 웅성거리는 소음이 심해 모두의 주목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초조함에 떨고 있는 주위 신규 사용자들의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는 인원들의 눈동자에는 두려운 감정이 설핏 떠오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 절로 고개를 젓고 말았다. 엄밀히 말하면 정당한 통제를 했음에도, 도가 지나칠 정도로 불응하고 분위기를 선동하는 인원들에게는 통제 교관의 고유 권한으로 적절한 제재를 가할 수 있었다.(물론 그것도 정도란 것이 있다.) 내가 2회 차에 들어왔을 무렵에도 그랬다. 당시 박동걸은 광장 중앙으로 얻어맞은 채로 끌려왔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수모를 당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을 따져보면 공개된 장소에서 제재 방법을 구타로 선택한 것은 실수였다. 아직 홀 플레인을 직접 체감하지 못한 백지나 다름없는 사용자들이다. 그때 한 순간은 억압에 의한 효과를 볼지 몰라도, 그만큼 신규 인원들에게 악랄하다는 첫인상을 심어줄 것이다. 차라리 박동걸처럼 몰래 두들겨 놓은 후 나중에 상황 설명이 끝난 뒤 공개적으로 이유를 말했으면 모를까. 어찌됐든 황금 사자 클랜은 저 사용자를 통제 교관으로 뽑은 것을 후회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뜻 봐도 고년 차가 아닌 그럭저럭 실력 있는 2, 3년 차 티가 나고 있었다. 고년 차였다면 노련하게 통제를 했거나 아니면 은근슬쩍 그를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갔을 것이다. 하지만 교관을 보아하니 현재 소속한 클랜의 상황 파악은커녕 자부심이라는 감정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 예전의 영광에 파묻혀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교관을 보자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더 이상 예전의 황금 사자가 아니다. 그때는 최고의 클랜이라는 자부심으로 모든 것을 덮을 수 있었겠지만, 이제는 다른 클랜들과 똑같이 배가 고픈 상태로 추락했다. 즉 이제는 그들의 드높은 자부심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소리였다. 사용자들 영입에 대해 클랜들의 경쟁이 치열할 것임을 생각하면 아무튼 두고 볼 일이었다. 그나마 옆에 몇몇 통제 교관들은 그나마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지, 뒤늦게 동료를 말리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지나칠까 하다가 번뜩 좋은 생각을 하나 떠올릴 수 있었다. 갓 들어온 신규 사용자들, 즉 하얀 도화지는 황금 사자로 인해 얼룩져가고 있다. 그네들한테는 미안하지만 이것은 반대로 내게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앞으로 3개월간 여러 클랜들과 암암리에 경쟁을 펼쳐야 할 텐데, 지금부터 하나씩 좋은 이미지를 쌓아나가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나는 천천히 그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남성은 얻어맞는 와중에도 이 놈이 사람을 팬다느니, 이것 좀 보라느니 등등 끊임없이 입을 나불거리고 있었다. 보통은 몇 대 맞으면 조용해지기 마련인데 악바리 근성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통제 교관도 나름 한 성깔 하는 놈인 듯 아예 팔까지 걷어붙이고 있었다. 동료들을 물리친 그의 팔이 뒤로 크게 젖혀진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 남성을 향해, 주먹이 아래로 내리 꽂히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재빨리 그들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팡! 통제 관의 주먹과 그것을 잡은 내 손바닥의 마찰 소리가 넘실거리듯 퍼져나간다. 꽤 힘을 실었는지 손에 느껴지는 충격이 자못 묵직했다. 미미한 마력 반응 또한 느껴지고 있었다.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정당한 통제라고 해도 이것은 도를 지나쳤다고 볼 수 있었다. “뭐, 뭐야! 너 누구야!” “어…? 어! 야!” 막 주먹을 휘두른 교관도 조금 놀랐는지, 높은 목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빠르게 잡아채는 가냘픈 손가락. 마침 옆에서 말리던 동료 사용자는 내 얼굴을 알고 있는지 크게 기함했다. 1, 2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곧바로 교관의 뒤통수를 치며 기겁한 소리를 내질렀다. “아 씨…. 갑자기 왜 때리….” “조용히 해 이 병신아 쫌. 머셔너리….” 그녀는 내게 들릴 정도의 큰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다가 이내 내 눈치를 슬쩍 살피고는 통제 교관의 귀를 잡아 당겨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씨근덕거리던 얼굴은 조금씩 당황하는 표정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을 본 후에야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소란이 심해서 와봤습니다. 무슨 일이 있길래 이리 시끄럽습니까.” “머, 머셔너리 로드를 뵙습니다. 아 그게 아니라…. 이 놈이 통제에 불응하고 하도 시끄럽게 굴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방금 전 주먹은 그리 가볍지는 않던데요. 신규 사용자들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힐 정도였습니다.” “아, 아니…. 그게…. 이상하게 날뛰는 인원들이 많아서…. 그….” 이제야 정신을 조금 차렸는지 그는 사색이 된 얼굴로 말을 더듬거렸다. 어차피 이 두 사용자를 끝까지 몰아붙이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쯤에서 풀어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무튼 알겠습니다. 일단 저도 관계자인만큼 상황에 참가하는 게 낫겠군요. 보아하니 손이 부족해 보입니다.” “가, 감사합니다. 호호. 이번에 입장 인원이 예상보다 많아서 말이죠.” 통제 관이 머뭇거리자 옆에 있던 여성 사용자가 빠르게 끼어들었다. 나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멍한 얼굴로 우리들을 응시하는 남성이 있었다. “일단 일어나시죠. 몸은 좀 괜찮습니까.” 손을 내밀며 말하자, 남성의 얼굴에 “핫.” 하는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 망설이는 것 같아 보였지만 이내 그는 내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나는 곧바로 손에 힘을 주어 그의 몸을 강제로 일으켰다. “씨, 씨발. 다, 당신 도대체 누구…. 헉!” 일으켜 세운 남성은 제법 우람한 덩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190을 훌쩍 넘을 것 같은 신장에, 상반신은 돼지 근육으로 똘똘 뭉쳐져 있었다. 그런 덩치를 내가 한 손을 잡은 상태로 가볍게 일으키자, 주변에서 자그마한 놀라움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잠시 동안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던 거한은 이내 크게 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이, 이보쇼! 당신이 저놈 윗사람이요? 대관절 이곳이 어디길래 내가 이런 좆 같은 경험을 해야 하는 거요? 응? 우, 우린 무려 일주일 동안 그 통, 통과…뭐? 아무튼 이상한 장소에서 괴물 같은 놈들한테서 살아남아야 했다고!” “마, 맞아요! 여기는 어디에요? 대한민국 아닌가요? 일본? 아니, 지구가 맞기는 해요?” “집에 보내주세요! 제발, 제발 집에 보내주세요!” “여긴 또 어디야…. 겨우 살아 남았는데…. 엄마…. 아빠…. 보고 싶어…. 어엉….” 두 사용자를 통제하는 모습을 보며 나를 무슨 높은 사람으로 봤는지, 거한이 말을 시작으로 질문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나는 참을성 있게 그들의 말이 수그러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누군가 울음 소리 내가 잠시 시선이 그쪽으로 모였고, 나는 그 틈을 타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통과 의례를 겪고, 천사들을 만났을 테니 아주 모른다고 생각은 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현재 여러분들의 혼란스러움은 이해합니다.” “그래! 통과 의례라고 했어!” 남성은 내 말에 으르렁거리듯 대답했다. 나는 눈에 미약한 살기를 품어 그를 쏘아 보냈고, 곧 움찔거리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다음에 서서히 살기를 꺼트리며 말을 이었다. “한가지 말씀 드리자면, 지금 여기에 있는 저희들도 여러분들과 똑같은 상황입니다. 비슷한 통과 의례를 거쳤고, 천사들을 만나 이 홀 플레인이란 곳에 입장했습니다. 다만 먼저 들어왔는지 나중에 들어왔는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나지막이 말했지만 마력을 담았으니 모두의 귓가에 똑똑히 들렸을 것이다. 소란스럽던 사용자들 사이로 순식간에 침묵이 찾아 들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옆쪽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손을 드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그러면 우리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말인가요? 아직 더 뭔가 남은 건가요?” 울먹임이 약간 있었지만 상당히 앳되어 보이는 목소리가 귓가로 날아들었다. 이 부분에 관해서 대답해주면 말이 길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이쯤에서 말을 아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목에 더욱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곧 설명이 들어갈 예정입니다. 곧 자리를 옮겨 현재 상황에 대해 자세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 이렇게 소란스러운 상황에서는 뭘 말해도 들리지가 않거든요. 그러니 궁금해도 조금만 참아주시고, 지금은 통제 교관들의 인도를 따라주시면 됩니다.” 내 말이 끝나자 완전히 는 아니었지만 그나마 소란이 진정됨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옆에 서 있던 통제 교관들은 민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미안하기는 했다. 앞서 통제 교관이 실컷 두드려 놓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놓았는데, 그 틈으로 살짝 끼어들어 상황을 정리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도 내 능력이 일부 들어가기는 했지만, 어쨌든 인생은 타이밍 이니까.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된 것 같자 나는 몸을 뒤돌아 두 교관을 바라보았다.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광장에 관계자들이 별로 없던데, 어떻게 된 일인가요?” “아, 그게 예상외로 신규 사용자들이 많이 입장한 상태입니다. 클랜 하우스에 인원 지원은 요청한 상태이긴 한데, 일단 급한 대로 광장에 있는 인원을….” “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인솔을 부탁 드리겠습니다.” “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둘은 고개를 숙이며 내게 감사를 표했다. 슬쩍 보니 목덜미가 살짝 붉어진 게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들이 통제할 수 있도록 자리를 조금 비켜주었다. 이윽고 두 교관은 다시 통제에 들어갔다. 신규 사용자들의 눈에는 아직 불안감이 가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전보다는 비교적 진정된 태도를 보여주었다. 나는 몇 걸음 물러서 전체적인 상황을 살펴보았다. 지원 인원들이 하나 둘 도착하고 있는지 시간이 흐를수록 소란은 약간이나마 나아지고 있었다. 여전히 웅성거림은 남아 있었지만, 개판에서 개판 5분전까지는 회복한 상태였다. 곧이어 마지막으로 5관의 입구가 개방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50명이 넘는 인원들이 우루루 몰려 나오기 시작했다. 간신히 안정을 찾아가던 와중 추가 인원이 들어옴으로써 다시 혼란스럽게 변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제법 노련한 사용자들이 있는지 순식간에 수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잠시 그곳을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로서 여관 5개가 모두 개방되었다. 이제는 광장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될 일이었다. * 대도시 바바라 중앙 광장. 약 40여분 정도 흘렀을 즈음 신규 사용자들을 인솔하는 첫 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못해도 1시간은 걸릴 줄 알았는데, 의외라면 의외였다. 그리고 분위기도 아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내가 있을 때만 해도 짙게 깔려있던 불안감이 지금은 상당히 풀려있었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저기 갈래 길에서 중앙 무대로 들어오는 박현우와 성유빈이 보였다. 이윽고 그들은 중앙 무대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더니 이내 가벼운 인사를 건네며 입을 열었다. “머셔너리 로드. 일찍 오셨군요.” “아니요. 포탈이 닫히기 전 왔어야 했는데, 사정이 있어서 조금 늦었습니다.” “괜찮습니다. 충분히 빨리 오신 편입니다.” 박현우는 씁쓰레한 얼굴로 고개를 젓고는 광장 계단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도 따라 시선을 돌리니 교관들이 신규 사용자들을 클래스별로 분류해 각 층에 맞춰 앉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중 여성 사용자 한 명이 슬쩍 빠져 나오더니 이내 나와 박현우가 있는 쪽으로 쪼르르 달려오기 시작했다. 낯설지 않다 싶어 자세히 보니 아까 전 흥분했단 통제 교관을 말리던 사용자였다. 그녀는 박현우 옆에 서있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띄웠다. 나는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고는 한 발짝 물러섰다. 편하게 이야기하라는 뜻 이었다. 내 배려에 한두 번 목을 가다듬은 그녀는 곧 앙증맞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인원 보고 하겠습니다. 1관 47명, 2관 51명, 3관 52명, 4관 50명, 5관 52명 입니다. 총원은 252명 입니다." “많군. 4년 전이랑 비교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지만 최근에 들어온 인원과 비교하면 두 배 가깝게 들어온 것 같은데. 혹시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지 알고 있나?” “엣, 그, 그건.” 그것까지는 모르겠는지 여성은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때 뒤에서 가만히 있던 성유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1관 19명, 2관 43명, 3관 22명, 4관 29명, 5관 17명으로 총원은 130명 이었습니다." 아. 내가 들어왔을 때를 말하는 건가. 박현우는 한두 번 고개를 주억인 후 다음 말을 이었다. "클래스별 분류 인원은?" "근접 전투 계열 126명, 원거리 전투 계열 59명, 마력 재능 계열 38명, 사제 29명 입니다. 시크릿, 레어 그리고 기타 직업은 아직 상세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아. 그리고 특이사항으로 보고 드릴 것이 하나 있습니다." “특이사항?” 박현우가 되묻자 여성은 계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듯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던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누군가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살며시 열렸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오늘은 연참이 많이 늦었네요. ㅜ.ㅠ 이것이 다 안솔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안솔에게는, 김수현이 다른 여성 사용자들과 하하 호호 하는 동안 손가락만 빨고 있게 할 생각입니다.(퍽퍽! 하하하. 농담입니다.) 후기를 길게 쓰고 싶은데, 제가 얼른 저녁을 먹고 자정 연재 분을 집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월요일에 또 오전 강의가 있어 오늘은 일찍 잠들기도 해야 하고요. 그런 만큼 리리플은 다음 회랑 합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독자 분들의 많은 양해 부탁 드립니다. PS. 208회 내용 수정했습니다. 수현의 내면을 더욱 자세히 드러내고, 안솔과의 대화 부분을 추가시켰습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은 다른 부분으로 대체했습니다. 감사합니다. 0210 / 0933 ---------------------------------------------- 떠나고, 만났다 “5관에서 약간 특이한 사용자를 봤다는 보고가 들어왔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특이한지 말을 하라고. 짜증나게 굴지 말고.” 성유빈은 인상을 찡그리며 날카롭게 여 교관을 몰아붙였다. 그 목소리에 찔끔했는지, 그녀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게….” 이어진 여 교관의 말은 확실히 흥미로웠다. 5관에서 거진 50명에 달하는 사용자들이 한꺼번에 몰려 나왔는데, 다른 여관과는 달리 신규 사용자들의 태도가 굉장히 차분하고, 침착했다는 것이다. 문득 광장으로 오기 전, 5관이 열렸을 때의 광경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그때의 상황을 상세히 묘사했고 덕분에 5관 통제를 맡은 교관들이 손 쉽게 인도인접 할 수 있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럼 저기 신규 인원들은 왜 가리킨 건데.” “네. 5관을 맡은 교관의 말을 들어보니까요, 저기 중앙에 앉아있는 검은 머리 남자 보이시죠.” “검은 머리가 한두 명이니? 얘도 엄청 답답하네.” “아, 죄, 죄송해요. 마력 재능 계열 3번째 계단이요. 왼쪽에서 5번째에 앉아 있어요.” 여 교관의 말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곧 깔끔한 인상의 남성 한 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얼굴도 매우 준수하고, 신체 조건도 좋아 보였다. 무엇보다 특이한 점은 얼굴 표정이 대단히 여유롭고, 침착한 태도를 갖고 있다는 것. 초조함이 가득한 다른 사용자들과는 확실하게 달라 보였다. 그를 보자 절로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와 더불어 알게 모르게 신경이 쓰이는 기분도 들었다. 혹시 1회 차에서 활약했던 사용자인가 싶어 기억을 뒤져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혹시 내가 아는 사용자가 있을 수도 있어 신규 인원들을 전체적으로 훑어봐도 낯익은 사용자는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봐야 알겠지만, 아무래도 이번에 들어온 인원은 아예 새로운 사용자들일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누군가 싶어 입맛을 다시는 동안 옆에서 여 교관이 말을 잇는 소리가 들렸다. “저 남자가 5관 인원들의 중심에 있었다고 해요. 오히려 통제하려는 교관들을 도와주기까지 했다는데….” “확실히 특이한 놈이군.” “글쎄요. 현우 오빠. 그냥 단순히 무사태평한 사람이 아닐까요?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럴 수도 있겠지. 아무튼 그냥 넘기지는 말고 한번 자세히 알아봐. 그나저나 이제 슬슬 시작해야 할 것 같은데. 다른 클랜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성유빈은 그렇다고 대답한 후 양 손을 들어올렸다. 아마도 음성 증폭 마법을 실행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간의 짬을 틈타 재빨리 데 3의 눈을 활성화시켰다. 혹시 나 말고 또 다른 회귀자 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제로 코드는 하나인 만큼 그럴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지금은 머리 아프게 생각하는 것 보다는, 직접 사용자 정보를 보는 게 더 나을 것이다. 활성화된 제 3의 눈으로 다시 그 남자를 보자 이내 여러 메시지들이 주루룩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박환희(0년차) 2. 클래스(Class) : 일반 마법사(Normal Mage Beginner) 3. 소속 국가(Nation) : -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외면과 내면의 불일치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6) 7. 신장 · 체중 : 185.5cm · 80.5kg 8. 성향 : 중용 · 혼돈(Neutral · Chaos) [근력 36] [내구 30] [민첩 42] [체력 40] [마력 52] [행운 62] (능력치 포인트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 고유 능력(1/1) > 1. 카리스마(Rank : D Minus) “흠.” 사용자 정보를 보자 절로 고개가 기우는 것을 느꼈다. 물론 이 사용자가 앞으로 발전할 수 있는 내면의 잠재성도 있고, 지금 태도로 보면 홀 플레인에 대한 적응력도 손에 꼽을 만큼 발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제 3의 눈으로 본 능력치로만 판단해보면, 그냥 준수한 수준이었다. 시크릿, 레어 클래스도 아니었다. 즉 “아, 얘는 정말 너무 대단해서 꼭 영입하거나 아니면 나중에 귀찮아질 가능성이 있으니 필히 죽여야 한다.” 가 아닌 “있으면 밥값 이상은 하겠네.” 혹은 “상위 사용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이 보이네.” 정도였다. 하지만 다른 정보로 눈을 돌리자 조금은 생각이 바뀌고 말았다. 진명, 성향, 고유 능력. 이 3개를 보는 순간 머릿속을 헤집던 퍼즐 조각이 일거에 맞춰졌다. 그와 동시에 내가 왜 이렇게 신규 사용자에게 신경이 쓰였는지 조금이나마 이해가 가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겠지만, 어쩌면 나와 비슷한 사람을 본 동질감을 느꼈다고 할까? 제 3의 눈을 끄고 다시 그 놈을 보니 이제서야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침착하고, 여유롭고, 간간히 웃으면서 옆에서 떨고 있는 사람을 다독이고 있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인위적인 냄새가 강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여 교관의 말은 사실이었다. 꽤 노련하게 인원을 통제한다고 생각했는데, 박환희라는 신규 사용자에게 도움을 받아서 그랬던 건가. 5관의 인원들은 저 남자를 중심으로 통과 의례에서 생존했을 것이고, 그런 만큼 그의 말을 따라 통제에 응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귀중한 정보를 하나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저 남자는 절대로 5일차에 통과한 두 명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 아무튼 재미있는 놈 하나 발견했다는 생각에 속으로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때였다. "통과 의례에서 살아남은, 사용자로서의 자격을 증명한 분들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수현씨, 수현씨!” 박현우의 말이 음성 증폭을 통해 광장 널리 퍼져나갔다. 동시에 누군가 갑작스럽게 내 팔에 팔짱을 끼는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성유빈이 양 손으로 내 팔을 감싸 안은 채 살살 끌어당기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상황을 이해하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몸을 향했다. 그렇게 우리 둘은 잠시 무대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박현우의 연설 시간이 온 것이다. “연설에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그 동안 우리 둘은 오붓하게 뒤에 있어요. 아, 죄송해요. 제가 머셔너리 로드께 말 실수를 했네요.” 성유빈은 “앗 차.” 한 얼굴을 연기하며 내 팔을 자신의 가슴으로 은밀하게 끌어당겼다. 곧 그녀의 가슴에 닿은 부분에서 뭉클한 감각이 느껴졌다. 아까 여 교관을 몰아붙이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내게는 사뭇 색스러운 교태를 부리고 있었다. 눈웃음을 살살 치는 그녀를 보며 잠시 동안 오만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내게 아양을 떠는 이유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솔직히 매우 불쾌한 기분이 들어 매몰차게 팔을 빼고 싶었지만, 그녀는 황금 사자 클랜에서 나름 입지를 가지고 있는 사용자였다. 앞으로 최소 3개월 동안은 미우나 고우나 부딪칠 일이 많을 것이다. 괜히 어색한 관계를 만드는 것 보다는 적당히 꿍 짝을 맞춰주며 성유빈을 구워 삶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이용해먹을 가치는 충분한 여자였다. "죄송한 말이지만 우리들은 당신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현재로서는 그럴 방법도, 능력도 없습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귀를 기울이니 박현우의 연설이 초입 부에 들어가고 있었다. 내가 들어왔을 때와 비교하면 한결 순화된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소음에 그녀가 고개를 돌린 틈을 타, 나는 재빠르게 굳었던 표정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연한 미소를 흘리며 그녀의 시선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말실수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오히려 머셔너리 로드란 말이 딱딱하게 느껴지던 참입니다. 하하.” “와~. 그럼 앞으로 계속 수현씨라고 불러도 되요?” “물론이죠. 저야 유빈씨 같은 분이 그렇게 불러주면 기분이 좋은걸요.” “어머. 너무 기뻐요~.” 나 또한 살짝 호칭을 바꿨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성유빈은 어울리지 않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정말로 기쁘다는 것을, 얼굴 표정으로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나도 마주 웃어주며 화답했지만 속으로는 코웃음이 나왔다. 이윽고 무대 뒤편의 으슥한 곳으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사이 좋게 붙어 박현우의 뒷모습을 감상했다. 자세히 말하면 그녀가 내게 달라붙었다는 표현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한동안 그의 연설을 듣고 있던 도중 다시금 성유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교관들한테 들었어요. 가장 먼저 도착하시고, 소란을 진정시켜주셨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감사 드려요.” “감사는요 뭘.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낯간지럽네요.” “그래도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호호. 어? 혹시 지금 긴장하신 거 아니에요? 몸이랑 팔에 힘이 조금 들어가신 것 같은데~.” “그럴 수 밖에 없죠. 미인과 이런 어두운 곳에서 단 둘이 있으면, 남자는 절로 긴장할 수 밖에 없거든요.” 그건 내가 긴장한 척 하기 위해 일부러 힘을 준거란다. 물론 속으로만 생각했고, 유들 하게 대꾸함으로써 그녀의 기분을 띄워주었다. 내 말에 성유빈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소리 죽여 웃었다. 그러고는 부끄럽다는 얼굴로 내게 더욱 안겨 들었다. “아이 참~. 예전에 뵈었을 때랑은 너무 다르시다. 완전 적극적이셔.” “예전이라고 해도 고작 몇 시간에 불과합니다.” “몰라요 정말. 그래도 기분 좋네요. 후훗.” 얼굴에 홍조를 피우고 눈을 슬쩍 내리까는 그녀는 정말로 부끄러운 소녀처럼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팔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압박감은 더욱 거세어지고 있었다. 얼굴은 예쁘장한 편이었지만 몸이 삐쩍 말라 내 취향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느끼는 그녀의 가슴은 몸에 비해 제법 있는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물론 정하연과 비교하면 미안하고, 고연주와 비교하면 실례였다.) 지금 단언하건대, 성유빈은 남자를 후릴 줄 아는 여자였다. 아마 작정하고 달려들면 남자 여럿은 잡아먹으리라. 속으로 음란한 년이라고 욕하다가 이내 그녀의 성향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러자 할 말이 없어졌다. 박현우의 카랑카랑한 연설이 이어지는 동안 나와 성유빈은 계속해서 대화를 나눴다. 나도, 그녀도 별로 중요한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여우 같은 면이 있어 섣불리 접근했다간 내 의도를 알아챌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만큼 그냥 서로 에두르는 이야기만 나누며 친목을 다졌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럼 이로서 기본적인 설명을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아직 궁금하신 사항들이 많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질문을 몇 개 받고는 싶지만, 현재 시간이 너무 늦었으므로 일단 숙소로 이동하는 게 나을 것 같군요.” 박현우의 연설도 슬슬 끝이 보이고 있었다. 목소리가 깊게 잠긴 것을 들으니 꽤나 피로한 모양이다. 내 옆에서 깔깔 웃던 성유빈은 이내 아쉬운 얼굴로 계속 붙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슬슬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곧 신규 인원들을 아카데미 숙소로 인솔해야 해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다른 클랜 분들은 아직 도착을 안 하셨네요…. 일단 저 먼저 가볼게요. 마법 캔슬도 해야 하고, 이것저것 지시도 내려야 해서요.” “네. 아, 제가 뭐 도와드릴 것은 없나요?” “괜찮아요! 그냥 저희들이랑 천천히 아카데미로 가시면 되요. 아, 나중에 타 클랜에서 보낸 교관들이 도착하면 그때 한번만 모여주세요. 소집령에서 정하지 못한 세부 사항들을 결정해야 하거든요.” 성유빈은 고개를 살살 흔들며 눈을 찡긋거렸다. 그리고 살랑거리는 걸음으로 앞으로 내달았다. 순식간에 앞으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나는 차분히 품 속에서 연초 한대를 꺼내 물었다. 그녀가 팔짱을 끼고 가슴을 비볐던 오른팔에는 아직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나는 불을 붙인 연초를 한 모금 깊숙이 빨아들였다. 그리고 왼 손을 들어, 그녀의 몸에 닿았던 오른팔을 강하게 털었다. * “최근 1, 2년간 신규 사용자들의 유입이 급감해 조금 걱정이 들었는데, 이번에 다시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것 같아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아 그렇군요. 예전에는 더 많이 들어왔었나 봅니다.” “예. 제가 올해로 4년 차 입니다. 최근 2년만을 따져보면 포탈이 열리던 주기도 1년이었고, 유입 수도 급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4년 전에, 그러니까 제가 갓 들어온 시절에는 지금보다 주기도 짧았고 들어오는 사용자 수도 훨씬 많았습니다.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죠.”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1회 차 시절에는, 내가 들어온 이후 몇 년 동안은 그와 비슷한 상황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주기가 불규칙하게 변하고, 들어오는 사용자 수도 들쭉날쭉해졌었다. 앞으로 포탈이 어떻게 바뀔 줄은 모르지만, 괜한 얘기를 해 그의 기대를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박현우는 피곤한 얼굴로 기다란 줄을 잇고 있는 신규 사용자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그늘져 있었는데, 매우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아마도 타 클랜에서 차출한 인원들이 늦게 와서 그러는 것 같았다. 나를 제외하면, 가장 먼저 도착한 클랜은 <높새바람>이었다. 그 시점이 광장에서의 연설이 끝나고 막 아카데미로 이동하려고 할 때였으니 박현우의 안색이 어두울 만도 했다. 인도인접, 연설, 숙소로의 인솔 준비 같은 귀찮은 일들을 모두 마친 후에야 얌체처럼 도착했으니 꽤나 얄미울 것이다. 그러나 교관을 아무나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인원 선정에 시간이 걸렸다고 뻗대면 뭐라 할 수도 없었다. 그런 만큼 그저 속만 태우고 있는 게 눈에 선히 보였다. “참, 머셔너리 로드.” “네.” 한동안 아카데미를 향해 묵묵히 걷다가, 박현우가 내게 말을 걸었다. 고개를 들고 대답하자 곧바로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클랜에서 이번에 홀로 참가하지 않으셨습니까?” “네. 그렇죠.” “그렇다면, 한가지 도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아니, 제안이라는 말이 더 맞겠군요.” 도와, 아니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고? 도대체 뭘까 하고 생각하다가, 일단 들어나 보자 싶어 한번 고개를 까닥였다. 내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그는 방금 보다는 약간 생기가 도는 눈동자를 보여주었다. 박현우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다행히 오늘은 자정 연재에 맞출 수 있었습니다. 19시 조금 넘어서 집필에 들어갔거든요. 다행, 또 다행입니다. 하하하. 아무튼 이로서 꿀맛 같은 주말이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내일은 다시 우울한 월요일이 돌아오는군요. 학생분들, 직장인분들, 군인 분들(?), 그 외 모든 독자 님들 모두 힘내세요! 독자 분들께서 제 글을 보시고, 우울한 월요일이 아닌 활기찬 월요일을 맞으실 수 있다면 정말로 좋겠습니다. :) 『 리리플(208회) 』 1. 로유진 : 안녕, 유진아? 너 1등 했구나. 드디어. 응. 정말 오랜만에 1등 하는 것 같아서 너무 기분이 좋아. 하지만 이것은 무효란다. 아니, 왜? 네가 늦게 올렸잖아. 정확한 자정이 아니면 의미가 없어. 흑흑. 그렇구나. 알았어. 그래. 다음에 꼭 1등을 하렴. 2. 오피투럽19 : 에, 그렇군요. 그런데 3000회 까지는 생각하고 있지는 않아요. (…….) 아마 그렇게 쓰면 완결이 엄청나게 오래 걸리겠죠. :) 3. Renea : 쿠폰 감사합니다. (__) 말투가 재미있으세요. ㅋㅋㅋㅋ. 4. 타락한비둘기 : 한편이 더 나왔습니다! 209회가 나왔습니다! 조금 늦게 올리기는 했지만요. ;ㅇ; 5. 현오 : 으잉? 신부 이야기가 뭔가요? 아무튼 저녁 즈음에 홍대에 가신다니, 고생 많으십니다. :) 역시 지하철에서 스마트 폰으로 읽는 소설이 최고죠. 후훗. 『 리리플(209회) 』 1. 약먹고삽질 : 역시 오후 연참 분 1등은 새로운 분들을 자주 뵙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1등 축하 드립니다. 그럼 이번 회도 재미있게 감상해주세요! 2. 쿠로시온 : 헛! 부페! 부럽습니다. ㅜ.ㅠ 엉엉. 맛있게 드세요. 엉엉. 3. sereson : 여러분! 안솔 팬 분들! 안솔의 화신이 여기 있습니다! 여기 있어요! 얼른 sereson님을 잡아가세요!(?!) 이분이 안솔의 화신입니다! 에, 그런데 ㅇㄷㅂㅇ라면 설마 그것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 에이, 설마 아니시겠죠? 4. 잔마그나 : No. 제 3의 눈으로 해당 직업의 클래스를 판별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이 알고 있는 것도 있고, 모르는 것도 사용자 정보 창에 나온답니다. :) 5. hohokoya1 : 감사합니다! 모두 독자 분들의 끈임 없는 관심과 응원 덕택입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__)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11 / 0933 ---------------------------------------------- 떠나고, 만났다 “혹시 아카데미의 교관 체계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6개월 전에 아카데미를 수료하기도 했고, 나름대로는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은 나름대로 아는 정도가 아니라 매우 세세하게 알고 있었다. 박현우는 내 대답에 다행이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렇군요.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네. 그러시죠.” “이번에 머셔너리 로드께 정교관직을 맡길 예정입니다만…. 아무래도 클랜에서 혼자 오신 만큼, 부 교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박현우는 지긋한 시선을 던지다가 이내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교관도 역할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크게 보면 교육 교관, 통제 교관, 생활 교관들이 있죠. 그것들 모두 정교관직과 부교관직을 공통으로 갖고 있습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 교육 교관을 맡기실 리는 없을 것 같고….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요.” “아, 어떻게 보면 그렇기도 합니다. 하지만 부 교관은 있어서 나쁠 것은 없습니다. 정 교관이 직접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면, 그들이 활동을 더욱 편하게 만들어주는 존재가 부 교관입니다. 분명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겁니다.” 나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박현우 말은 틀린 게 없었다. 부 교관을 둬도 나쁠 것은 없다. 내가 수긍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전보다 은근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소집령에서 약속한 만큼, 정교관직이라고 해도 비교적 자유로우실 겁니다. 그래도 부 교관이 있으면 더욱 편하게 지내실 수 있을 겁니다.” 어느새 말을 하는 그의 눈동자는 기이한 열망을 띠고 있었다. 이로서 박현우의 의도는 대충 알 것 같았다. 아마 혼자 온 나를 도와준답시고 황금 사자 클랜원 중 부 교관 한 명을 붙여줄 것 같았다. 이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그는 곧바로 결론을 꺼냈다. “원래 정 교관과 부 교관은 같은 클랜으로 이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머셔너리 로드는 사정이 여의치 않은 만큼…. 저희 쪽에서 한 명 붙여드릴 수 있습니다.” “자꾸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추천하고픈 클랜원이 있는 것 같으신데요.” “바로 보셨습니다. 원래는 신규 사용자들의 인솔을 끝낸 후 말씀 드리려고 했지만, 지금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혹시 같은 시기에 아카데미를 나온 김한별이라는 사용자를 아시는지요.” “…….” 웬만하면 거절하려고 했지만, 뒤이어진 말을 들은 순간 잠시 생각을 고쳤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그의 말에 순간 웃음이 터질 뻔 했다. 아무튼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조금 긴가민가한 면이 없잖아 있었는데, 황금 사자는 성유빈 또는 김한별을 어떻게든 나와 엮으려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부 교관을 나와 똑같은 0년 차로 붙여준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다. “아…. 네. 뭐, 어느 정도 안면은 있는 사이입니다.” “한별이 말을 들어보니까 어느 정도가 아니라 꽤 각별한 사이 같던데 말입니다.” “그거야 본인 나름이겠죠. 아무튼 이번에 그녀도 참가한다고 하니 조금 놀라운데요.” “아.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아이도 머셔너리 로드와 똑같은 시크릿 클래스고, 제법 공들여 교육을 시켰습니다. 물론 이번 부 교관으로서의 참가도 경험을 쌓기 위한 측면이라는 것도 있습니다만. 영리한 사용자인만큼 부 교관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머셔너리 로드, 어떻습니까.” “놀고 있네.” 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 뻔 했지만, 입술을 꼭 깨묾으로써 간신히 자제할 수 있었다. 꽤 각별한 사이라. 김한별 성격에 나와 있었던 일을 전부 말했을 가능성은 낮다. 그렇다면, 아마 클랜에서 억지로 등을 떠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섞어 슬쩍 운을 띄워보기로 했다. “그렇게까지 배려를 하고 싶어하시는데 거절하면 도리가 아니겠죠. 그렇게 해주세요. 다만 당사자가 제 부교관직을 희망한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하하하. 생각 잘하셨습니다. 애초에 본인이 무척 하고 싶어 했으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신경 잘 써달라고 따로 말해놓을 터이니, 염려 놓으십시오.” 내 부교관직을 무척 하고 싶어하는 김한별이라. 감히 상상할 수 없겠는데. 나는 실소를 흘리다가 그에게 고맙다는 의례적인 인사를 건넸다. 박현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당연히 해드려야 하는 거라고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말을 하는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배인걸 보니 본인도 퍽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사용자 아카데미로 입장하겠습니다!” 그렇게 서로 덕담을 주고 받으며 걸음을 옮기던 도중, 선두에서 누군가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올리자 어느새 도착했는지 사용자 아카데미 건물이 위용을 뽐내는걸 볼 수 있었다. 신규 사용자들은 안 그래도 현대와는 다른 풍경에 애꿎은 고개만 휘휘 돌리고 있었는데, 아카데미에서 기가 질린 것 같았다. 나는 그런 그들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카데미로 향하는 발걸음을 더욱 빠르게 놀렸다. 잠시 여담을 말하면, 다른 클랜들은 아직 태반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 신규 사용자들을 숙소로 들여보내는 일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각각 인원수 별로 나누느라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다행히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은 없었다. 7일 동안 통과 의례에서 시달리다가, 간만에 목숨의 위협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잠자리를 보자 맥이 풀린 것 같았다. 박현우는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굳이 앞으로 나서며 통제 교관들의 인솔을 도와주었다. 물론 순수한 마음으로 도와준 게 아니라, 당연히 제 3의 눈을 활성화시켰다. 250명이 넘게 들어온 만큼 미리미리 한 명씩 확인할 생각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별 소득은 없었다. 한두 명 괜찮다 싶은 사용자는 발견할 수 있었으나, 5일차 만에 통과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수준이었다. 신규 인원들을 숙소로 인도하는 건 별 불협화음 없이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끝내고 나서야 비로소 교관들은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타 클랜에서 차출한 인원들은 느지막이 찾아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형식적인 사과를 했지만, 그네들의 사과를 받으며 끊임 없이 참을 인을 되뇌는 박현우를 보니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각 클랜에서는 적게는 한두 명, 많게는 서너 명까지 교관 인원들을 이끌고 왔다. 참가한 클랜들이 한둘이 아닌지라 교관들 숫자만 50명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내일, 아니 오늘(교관 회의실에 들어설 때는 이미 한창 새벽이었다.) 곧바로 교육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상세한 역할분담을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교육을 맡든, 통제를 맡든, 생활을 맡든 자유로운 활동을 약속 받았기 때문이다. 해서, 회의실 테이블에 앉은 채 남몰래 차출된 인원들을 살펴보는데 주력했다. 한가지 놀라운 것은, 이번 인원 구성에 북 대륙의 남은 10강 네 명중 절반이 모였다는 점을 들 수 있었다. <이스탄텔 로우>에서는 <처형의 공주> 연혜림을 보냈고, <고려> 클랜에서는 일반 검사로 10강의 자리에 오른 서진우를 참가시켰다. 이 부분에서 박현우도 꽤나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10강이 사용자 아카데미에 참가한 전례가 없지는 않지만, 원정 비 참가 클랜들의 적극적인 태도에 속이 쓰린 듯싶었다. 그러나 비 참가 클랜들의 인선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0강보다는 격이 떨어지지만 <리버스> 클랜 소속의 부랑자 학살로 명성 높은 김덕필도 있었고, <한(韓)> 클랜에서는 아예 클랜 로드 성현민이 직접 참가하는 강수를 두었다. 그 외에도 <푸른 늑대> 클랜 소속 시크릿 클래스 <죽음의 기사> 유지태, <남부 자유 연합> 소속 시크릿 클래스 <태양의 검투사> 박태진, <달밤> 클랜 소속 레어 클래스 <우아한 인형사> 나승혜 등이 참가한 호화 인선을 보여주었다. 오죽하면 그들을 따라온 명성 있는 일반 클래스 몇몇이 아무렇지 않게 보일 정도였다. 어찌됐든 원정 비 참가 클랜에서는 하나같이 고르고 고른 정예들을 선발했다. 그에 비해 원정 참가 클랜들의 인선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어디 가서 무시당할 정도의 사용들이 아님에도, 방금 보았던 사용자들과 비교하면 확실히 손색이 있었다. 우호 클랜 인선 중 그네들과 그나마 견주어 볼만한 이가 박현우임을 감안한다면 그 수준을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한 내 생각을 말하라고 한다면, 이것은 적극적인 태도를 넘어선 횡포라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실력 좋은 사용자들이 교관으로 오는걸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다. 너무 속이 보인다. 신규 사용자들은 평균적으로 99.9%가 노멀 클래스를 갖고 있는데, 노말과는 궤를 달리하는 능력을 지닌 시크릿, 레어 클래스를 보냈다는 사실은 제법 거슬릴만한 소지가 있었다. 많이 아는 만큼 더 잘 가르칠 수는 있다고는 하지만, 본인이 갖고 있는 실력과 그것을 남에게 전달해주는 것은 엄연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고려 클랜>에서 보낸 서진우는 훌륭하다고 볼 수 있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막말로 내 알 바도 아니었고, 나 또한 시크릿 클래스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네들이 가르치는 실력이 좋다면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조용히 입 다물고 있는 게 백배 이득이었다. “연혜림님, 유지태님, 나승혜님은 어느 과목을 배당해야 할지, 전혀 대책이 서지 않는군요….” 박현우는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후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교관 업무 특성상 신규 인원들과 가장 많이 맞부딪치는 역할은 당연히 교육 교관이었다. 그런 만큼 그 자리를 놓고 열띤 논쟁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는데, 박현우는 그들 사이에서 중재를 맡느라 정신이 없었다. “일단 내일부터 1주일 동안은 기존에 맡고 있던 클랜들이 교육을 맡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쟁쟁하신 분들이 많은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매우 다른 문제입니다.” “그럼 1주일 동안 우리보고 교육 교관들을 졸졸 쫓아다니며 배우란 말인가요?” “졸졸 쫓아다니란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첫 번째로 참가하시는 만큼 돌아가는 분위기나 방식 정도만 파악해주시면 됩니다. 1주일 동안 눈에 익히신 후, 교육 교관 역할을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쳇. 가르치는 게 뭐 별거라고. 따지고 보면 그쪽들도 처음인 사용자들 많은데요? 클랜에 교관 노하우라도 있나 봅니다?” 중간중간 추임새 넣듯 들리는 비꼼에 그의 얼굴은 계속해서 붉어졌다가, 푸르러졌다 가를 반복했다. 박현우는 자신이 지구에 있을 때 학원 강사로 활동했던 전력까지 들먹였고,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간신히 반발 인원들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시간이 너무 늦었군요. 1차 교관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오늘부터 진행하는 교육은 말씀 드린 대로 따라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불만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차후 회의를 통해서 의견을 맞추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이러다가는 밤을 새도 끝나지 않겠습니다.” “자자, 오늘은 이만합시다. 저도 피곤해 죽겠습니다. 이러다가는 오늘 교육에 교관들 단체로 지각하는 게 아닌가 모르겠네요. 하하하.” 다행히 10강 서진우가 넉살 좋은 말로 박현우의 말을 거들자, 그때까지 불만을 토로하던 사용자들은 모조리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얼굴에는 여전히 온갖 불평을 드러내고 있어, 앞으로 아카데미가 무난하게 만은 흘러가지 않을 것 같았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난장판이었던 1차 교관 회의를 끝낼 수 있었고, 간신히 회의실을 나올 수 있었다. 회의 끄트머리에 알려준 교관 전용 숙소를 기억하며 나는 크게 기지개를 폈다. 왠지 모르게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 내게 배정된 숙소는 아카데미 본관 1층에 있었다. 가는 도중 창 밖을 보니 새벽 안개가 깔릴듯한 조짐이 보였다. 아마 몇 시간후면 해가 떠오를 것이라는 생각에 쓴웃음이 나왔다.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프리(Free)였다. 쉽게 말하면 대리 교관이라고 할 수 있었다. 1차적으로 통제 및 생활을 맡지만 경우에 따라 교육 교관으로 참가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물론 무기를 다루는 전문적인 교육 보다는 정신 교육 시간에 들어갈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되새김질 하는 동안 나는 전용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생활 교관을 맡은 사용자들과 간단한 인사를 마친 후 나는 곧바로 방문을 열었다. 오늘 하루는 정말 길었기 때문에, 간만에 머리가 피로를 호소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방 안으로 들어서자, 혼자 쓰기에는 제법 큼지막한 방 하나를 볼 수 있었다. 그래도 돈은 많이 들였는지 3개월 동안 사는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 “코….” “…….” 아니, 혼자가 아니었다. 혼자 쓰는 방이 아니었다. 나는 다급히 나와 방을 확인했고 이내 내 숙소가 맞는다는 사실을 재확인 할 수 있었다. 다시 방 안을 자세히 살피자 침대가 두 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중 한 침대 위로 여성 사용자 한 명이 비스듬히 걸터앉은 채 고개를 꾸벅꾸벅 꺼트리고 있었다. 잠시 멍한 기분으로 그 사용자를 바라보다가, 순간 그 자태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둥글게 둥글게~. 둥글게 둥글게~. 키~보드 두드리며 글을 씁시다~. 담배를 피면서~. 노래를 부르며~. 랄라랄라 즐겁게 글쓰자~. 절단절단절~단 절단절단절~. 단절단절단절…. 죄송합니다. 잠시 정신 줄을 놓았습니다. 하하하. 간신히 자정 연재에 맞출 수 있었습니다. :) 월요일은 잘 보내셨습니까! 이상하게 월요일만 되면 몸이 노곤해지는 것 같습니다. 월요병이라는 게 진짜로 있나 봐요. 이제 월요일이 지났으니, 월요병은 가볍게 털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D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 드립니다~! 그러고 보니 미월야님도 요즘 슬슬 스퍼트를 올리시는 것 같군요. 후후훗. 방금 전 올린 회를 보니 또 1등을 하셨던 데, 이번에 부디 10연속 1등 대기록을 세우…. 농담입니다. :) 하하하. 211회 재미있게 감상해 주세요! 2. 용아랑 : 미안해요~. 제가 월요일에 오전 강의가 있어서 일찍 잠들고 말았습니다. ㅜ.ㅠ 혹시 지금 이 글을 보실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몸 건강히 다녀오시기를 바랍니다. 3. Goksd : 박현우도 나름 생각이 있는 만큼 그러지는 않았어요. ㅋㅋㅋㅋ. 설령 그런다고 해도 수현이 성격에 좋다고 받아들일 리도 없죠. 크크. 4. demuri21 : 오호라. 정확히 보셨습니다. 어찌 아셨는지요. 껄껄. 혹시 궁금하신 클래스라도 있으신가요? 5. 아일리아 + 남동생고기 + LookSiam : 쿠폰 감사합니다! 연참은, 다음에 여유가 되면 필히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ㅜ.ㅠ 6. 하루지온s : 대충이요? 음~초반에는 550회 정도로 잡았었는데요, 그 이상도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7. 카신엠 : 굉장히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각 개인에 따라 다르다고 보시면 됩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을 들 수 있는데, 더 말씀드리면 스포일러네요. 혹시 스포일러 상관 없으시면 쪽지 보내주세요~. 8. 닉네임비공개 : 헤헤, 아닙니다. 읽어 주시는 독자 분들께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음에도 여유가 나면 연참하도록 하겠습니다~. 9. letzgo02 : Yes. 그렇습니다. 정확히 보셨습니다. 100% 정답입니다.(?!) 10. f천륜 : ㅋㅋㅋㅋ. 네. 강하게, 꼼꼼히 털었습니다. 부정 탈라 라는 코멘트 보고 킥킥 웃었네요. ㅋㅋㅋㅋ.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12 / 0933 ---------------------------------------------- 살아나는 갈등 낯설지 않다. 살짝 웨이브 진, 어깨를 덮어 내려가는 찰찰한 머리카락. 언뜻 보이는 갸름하고 새하얀 얼굴. 조금 더 자세히 살피자 부드러운 곡선을 타고 올라가는 얇은 눈꺼풀이 보였다. 그녀의 정체는 나 그리고 애들과 함께 통과 의례를 겪었던 김한별이었다. 그녀는 애처로운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한동안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하다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한껏 소리를 죽인 발걸음으로 그녀와의 거리를 줄였다. “코….” “…….” 미약한 콧소리를 내는 그녀의 얼굴은 예전과는 달리 무척이나 수척해져 있었다. 분명 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간이 살짝 좁혀져 있었다. 뭔가 나쁜 꿈이라도 꾸는지 간간이 앓는 소리도 내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한별의 주변을 감도는 분위기 자체가 상당히 음울한 빛을 띠고 있다는 느낌이 전해져 들어왔다. 나는 차분한 손길로 한별의 몸을 안아 들었다. 가냘픈 몸이 내 품으로 안겨왔다. 다른 뜻은 없었다. 어차피 두세 시간 후에 해가 뜰 터, 괜히 깨우기 보다는 남은 시간이라도 편히 자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응….” 나름대로 신경을 썼다고 여겼는데 내 기척을 느꼈는지 한별의 눈이 살며시 열리는 게 보였다. 벌어진 틈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 안으로 혼탁한 빛깔이 감돌고 있었다. 예전에 종종 드러냈던 날카로움, 총명함은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오…하…?(오…빠…?)” “응. 자. 괜찮으니까 더 자도 돼.” 수면에 취한 한별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는 그녀를 어르며 침대위로 눕혔다. 입술이 몇 번 더 오물거리는 게 보였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들만 흘러나왔다. 곧이어 그녀는 한두 번 몸을 뒤척이는가 싶더니, 이내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들어왔을 때보다는 훨씬 안정된 표정으로 잠이 든 한별이를 보며, 나는 잠시 동안 상념에 잠겼다. 아카데미 수료 후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 기간 동안 한별이 생각도 몇 번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아마 그녀가 나를 선택하지 않았을 때 들었던 섭섭함은, 보석 마법사(Jewel Mage)를 놓친 것에 대한 아쉬움의 발로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보니 아무런 기분도 들지 않았다. 아, 조금 안타까운 감정이 일기는 했다. 정확한 속사정은 모르지만 클랜 내에서 적응을 잘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재회하면 뭔가 좀 특별한 감정을 느낄 줄 알았는데, 그냥 무덤덤한 게 현재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나는 기다란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렸다. 처음 침대를 하나로 봤던 이유가, 두 침대가 아주 약간의 틈을 둔 상태로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그냥 널찍한 침대 하나로 보일 정도였다. 대충 장비들을 벗어 옆에 놓은 후 나는 곧바로 빈 침대에 몸을 뉘였다. 그대로 눈을 감자 문득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이 중구난방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홍보, 소집령, 한소영, 대모, 클랜원들, 안솔, 아카데미, 교관 회의…. 어쩌면 안솔이 울음을 터뜨린 이유가 여기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머릿속으로 서서히 어둠이 찾아 들기 시작했다. ………. ………. ………. ………. ………. ………. 잠을 자긴 했다. 그러나 깊이 잠들진 못했다. 정하연, 고연주의 품에서는 푹 잘 수 있었는데. 참 불가사의한 일 이었다. 선잠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아예 자지 못한 것보다는 나았으므로, 그만 불평을 거두고 천천히 눈을 뜨기로 했다. 옆에서 빤한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 고개를 들어 시선을 보내자 내 옆에 조용히 서있는 김한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 표정은 차갑고, 조용했다. 나와 시선을 마주친 순간 잠시 눈가가 떨렸으나, 이내 빠르게 차분함을 되찾고 있었다. 한별은 입을 열지 않았고, 나 또한 입을 열지 않았다. “오빠가 왜 여기 있어요.” 또는 “여기는 내 숙소인데.” 라는 말들은 우리 둘 성격에 의미 없는 대화였다. 서로 어떤 사정인지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나는 바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후 담담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보네. 아, 어제 봤으니까 오랜만은 아닌가?” “…오랜만에 뵈어요. 오….” “그래. 어제 박현우씨한테서 얘기는 들었어. 앞으로 3개월 동안 잘 부탁할게.” “…네. 잘 부탁 드려요.” 왠지 쥐어짜는듯한 한별의 목소리. 아직 나와의 관계를 어색하게 여기는 모양이다. 나는 담담한 태도를 보여주기로 했다. 어느 정도 눈치가 빠르고 머리 회전이 돌아가는 애니 내 행동이 뜻하는 바를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괜한 부담을 주고 싶지도 않고, 불편함을 느끼는 것도 싫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녀와 나의 관계에 확실히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다. 정 교관과 부 교관이라는 업무적 관계. 해서, 나는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행히 깊게 잠들지는 않은 것 같네. 오늘 오전 스케줄 혹시 알고 있니?” “…….” “몰라?” “…생활 교관들이랑 같이 신규 사용자들을 기상시키고…. 통제 교관들에게 인도하시면 되요.” “아, 그래. 고마워.” 한번 더 되묻자 그녀의 입술에서 냉랭하게 들리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잔잔한 슬픔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간단한 화답을 한 후 몸을 돌렸고 눈 앞에 보이는 방문을 열어젖혔다. 어차피 자기 앞가림은 잘 하는 애다. 분명 지금의 고달픔 쯤은 스스로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빠른 발걸음으로 숙소를 나섰다. *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찌됐든 사용자 아카데미는 교육 개시의 신호탄을 울렸다. 거의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일을 처리한지라 과연 잘 돌아갈까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박현우의 필사적인 역할 분담이 힘을 발휘한 듯, 첫 주는 그럭저럭 돌아갔다고 평할 수 있었다. 내가 본 계획을 뒤로 미루면서까지 사용자 아카데미로 들어온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단순히 신규 사용자들을 돕기 위해 본 계획을 미루면서까지 교관 직을 수락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 만큼, 나름대로 다 방향적으로 행동할 생각이었고, 또 그럴 필요도 있었다. 첫째 이유로는 친분을 다지기 위함에 있었다. 미래가 비틀렸든 비틀리지 않았든 홀 플레인에서 인맥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이번에 사용자 아카데미의 교관으로 각 클랜의 내로라하는 인원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들도 분명 나에게 관심이 있을 것이고, 나 또한 그들과 되도록 좋은 관계를 유지할 생각이었다. 비록 프리(Free)를 부여 받기는 했지만 나는 최대한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이따금 내 행동을 관찰하는 모종의 시선들을 느꼈기 때문이다. 통제, 생활 교관들이 내 평소 생활을 같은 클랜의 교육 교관에게 전달할 것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발전 가능성만 믿고 불성실한 태도를 보인다면 그것은 스스로 내 가치를 떨어트리는 일 이었다. 그렇게 보여주는 좋은 모습들은 차후 각 클랜에서 입지를 가진 교육 교관들과의 만남 때 호의 어린 징검다리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새로운 클랜원으로 받아들일만한 사용자가 있는지도 살펴볼 문제였다. 어쩌면 이게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5일차에 통과 의례에서 자격을 증명했다는 소리는, 그 사용자의 비범함을 드러내는 100% 보증 수표였기 때문이다. 조금 미련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나는 첫날부터 신규 사용자 한 명 한 명을 대상으로 제 3의 눈을 활성화시켰다. 단순한 능력치만 본 게 아니었다. 사용자 정보를 최대로 개방해 혹시 놓치는 게 있을까 하나하나 꼼꼼히 읽고 계산하고 경우를 따져보았다. 내가 이 짓거리를 멈춘 것은 무려 사흘이 지난 이후였다. 약 30명 정도를 확인하자 이 방법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대로 간다면 언젠가는 모두 볼 수 있겠지만, 하나의 사용자 정보 창을 놓고 여러 경우의 수를 따져보는 건 상당히 피곤한 일 이었다. 그렇다고 한번 슬쩍 보고 넘기자니 나중에 발견하지 못했을 경우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한다는 사실이 무척 싫었다. 어차피 시간은 많았기 때문에 나는 조금 꾀를 내기로 했다. 아직은 1주차라 간단한 맛보기만 보이고 있었지만, 곧 전문 교육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때가 되면 조금씩 사용자들의 수준이 갈리기 시작한다. 개인이 지닌 능력치 및 잠재성에 따라 한계를 돌파하거나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즉 전투 사용자로서의 적합성 여부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는 소리였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있다.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이란 뜻으로, 재능이 아주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조금만 기다리면 서서히 두각을 드러내는 사용자들이 나올 터, 그때 가서 전투 인원들만 따로 판단하면 될 것이다. 만일 그때도 나오지 않는다면 정말로 전수 조사를 해야겠지만 말이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고, 나는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목표로 천천히 계획을 진행시켰다. 물론 그 와중에 제법 신경 쓰이는 것들도 한두 가지는 있었다. 안솔이 바바라를 떠나기 전 내뱉은 말들은 항상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낌새도, 징조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황금 사자 클랜 대모님 몸이 안 좋으신 것 같던데, 어쩌다 그렇게 되셨어요? 그리고 요즘 뭔 일 있나요? 이상하게 불안하네요.” 라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해서 일단은 아카데미 계획을 진행하며 잠시 동안 대기하기로 했다. 내 걱정이 기우에 불과할 수도 있고, 섣불리 떠들고 다닐 수도 없는 문제였다. 내부에서 뾰족한 방도가 없으면 외부의 힘을 빌려야 한다. 그러니 2주차가 끝나고 찾아올 고연주와 상의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 외의 일이라면 김한별의 일을 들 수 있었다. “머셔너리 로드. 혹시 교관 생활에 불편한 것은 없으신지요.” “수현씨. 아카데미 생활은 어때요? 부 교관이 많이 도와주나요?” 박현우와 성유빈은 가끔 내가 찾아와 은근슬쩍 운을 띄우곤 했다. 솔직히 이럴 때마다 한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정하연한테 들었을 때만 그냥 그렇구나 싶었는데, 직접 체감해보니 썩긴 썩었다는 사실이 확연히 피부로 와 닿고 있었다. 그네들이 그렇게 물어올 때마다 내 대답은 항상 동일했다. “예. 김한별은 매우 유능한 사용자입니다. 그때 왜 그렇게 말씀 하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부 교관으로 붙여주시니 확실히 편하네요.” “하하. 김한별 부 교관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녀 덕분에 아카데미 생활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미안하지만 나는 김한별을 안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의 의도에 놀아나는 것도 싫었고, 지금 황금 사자와 깊은 관계를 맺으면 득 보다는 실이 많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여러 클랜들에서 나를 보고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지금은 졸졸 흘리는 정도지만, 곧 줄줄 흘리게 만들 생각이었다. 괜한 오해를 받을 수 있는 행동은 사전에 차단하고 싶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김한별의 입장이었다. 나와 간부 사이에 끼어 꽤나 곤란할 듯싶었는데, 다행히 지금까지는 별다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보면 내 신호를 알아들은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의 어색함은 많이 사라지고 있었고, 본연의 모습을 종종 보여주곤 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가끔 얼굴이 벌개져서 숙소로 들어올 때가 있었는데, 한두 번 의례적으로 묻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예를 들면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요. 별거 아니에요.” 등등. 조금 안타깝긴 했지만, 내가 도와줄 성질의 것도 아니었고 본인도 말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렇게 정신 없던 아카데미의 대망의 첫 주가 지났다. 1주차가 끝난 후 사용자 아카데미는 이례적으로 퇴소 인원 0명을 기록했다. 이번에 아카데미는 전회 차에 비해 1주차 난이도를 상당히 낮게 잡고 시작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딱히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배가 잔뜩 부른 상태에서 다시 고픈 상태로 변했으니, 어떻게든 최대한 끌고 갈 생각인 것 같았다. 뭐 2주차부터는 조금씩 올린다고 하는데, 두고 볼 일 이었다. 아무튼 1주차가 지난 이후로, 식당에서 박현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나름 첫 단추를 잘 꿰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아카데미는 이제 시작일 뿐 이었다. 아직까지 클랜들간의 갈등은 남아있는 상태였고, 미약하지만 신규 사용자들을 두고 은근한 경쟁 심리까지 드러내고 있었다. 심지어 생활 및 통제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몇 차례 묘한 긴장감이 형성된 적도 있었다. 그 정도가 심하지 않아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갈등을 빚는 클랜들이 스물 가까이 되는데 결국에는 터질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누가 첫 시작을 끊는가의 차이일 뿐. 그리고 2주차 시작 후 중반 즈음, 내 생각을 증명해주는 사건이 기어코 터지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오늘은 정말 급하게 올렸네요. 퇴고를 마치니 23시 57분. 연재란 에 업데이트하기 전에, 습작에 먼저 올리고 한번 천천히 훑어봅니다. 원래는 여유를 많이 두고 읽는데 이번에는 정말 정신 없이 읽었습니다. @_@ 역시 어떤 일을 하든 병행하는 것은 쉬운 게 아닌 것 같아요. ㅜ.ㅠ 오늘도 강의 끝나고 같은 과 애들이 밥 먹고 가자는 거 뿌리치고 오는데 어찌나 미안하던지. 저보고 비싸게 좀 굴지 말라네요. ㅋㅋㅋㅋ. :D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 드립니다. 이번으로 2연속 1등을 달성하셨군요! 과연 3연속 달성하셨는지 궁금하네요. 제가 아직 최신 회 코멘트는 보지 못했는데, 두 근 반 세 근 반 설레는 맘으로 기대하겠습니다. :) 2. 엔조이플레이 : 쿠폰 감사합니다. (__) 앞으로 더욱 재미있는 내용으로 보답하고 싶어요~. 3. 신유진 : ㅋㅋㅋㅋ. 이해합니다. 저도 한층 노블 독자시절에 작품 하나 읽고 항상 짧다고 아쉬워했어요. 그때는 몰랐는데, 하루에 일일 연재 하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더라고요. ㅜ.ㅠ 4. 개차반왕자 : 네. 아~주 예전에는 사용자 아카데미가 없었어요. 아카데미는 과거 어느 사용자가 설립했고, 그것의 효용 가치를 알아본 천사들은 수료 시 임무 보상 4포인트라는 <설정>을 부여했죠. 아카데미에 관한 건은 여기까지. 더 이상 들어가면 네타 및 스포일러 있거든요. :)(참고로, 다른 대륙에도 사용자 아카데미 비슷한 시설은 있습니다. 다만 원조는 북 대륙 입니다.) 그리고 뒤에 해주신 질문은(바바라 공략 전) 간단히 말씀 드리면 미개척(북 대륙) → 소도시 → 일반 도시 → 대도시 순으로 옮겨졌다고 보시면 됩니다.(이것 역시 설정이 들어가 있습니다.) 5. sereson : sereson님은 sereson님이 좋아요~? 아니면 안솔이 좋아요~? 6. brisingr : ㅋㅋㅋㅋ.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주인공 성격에 휘둘리겠습니까 설마. 7. 오피투럽19 : 고맙습니다! 오타 수정 완료했습니다! :D :D :D :D :D :D :D :D :D :D 8. 고장난선풍기 : 에, 지하철 타고 집에 오는데 갑자기 그 노래가 생각이 나서요. 헤헤헤. 둥글게 둥글게~. 9. 정육면체체스판 : 음, 제가 이해를 못했습니다. 색깔 별, 종류별 수집이란 코멘트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요? 10. 밀린방세 : NO. 추락한 황금사자의 위상을 보여주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뒤이어 나오는 호화 인선과 연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차후 이북 교정 때 밀린방세님의 코멘트를 필히 참고해 좀 더 매끄럽게 연결하도록 하겠습니다. 소중한 조언 감사합니다.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13 / 0933 ---------------------------------------------- 살아나는 갈등 이스터 에그(Easter Egg)라는 말이 있다. 프로그램 제작자가 자신의 작품 속에 숨겨 놓은 재미있는 것들이나, 혹은 깜짝 놀라게 하는 것들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물론 이 비유와 다른 면이 무척 많겠지만, 내가 이 장소를 발견했을 때는 흡사 이스터 에그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하기야 이 넓은 부지에 건물들로만 채워져 있는 것도 아니니 하나 정도 있을 법 하다마는, 그래도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산뜻한 숲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더구나 1회 차에 이곳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은 신선한 감정을 더욱 부추기고 있었다. 향긋한 나무 냄새와 들판의 비옥한 냄새를 맡으니 절로 머리가 개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가뜩이나 근래 선잠을 이루는 경우가 많아 머릿속이 복잡했는데, 간만에 상쾌한 내음을 맡자 조금이지만 활력이 도는 것 같았다. 앞으로 그나마 원활한 활동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잠깐의 휴식 시간이었다. 내 옆에 반듯하게 놓인 네모난 천 조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맛깔스러워 보이는 쿠키들이 여러 개 놓여있었다. 한별이가 가져온 것으로, 정 교관들에게 주는 간식이라는 말을 들었다. 단순한 주전부리라고 보기에는 꽤나 고급스럽게 보였다. 원정이 망한 뒤로 클랜 내 자금도 제법 쪼들릴 텐데 이런 사소한 데까지 돈을 사용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해를 떠나 받아먹는 입장으로선 나쁠 것이 없었기에, 기꺼이 가까이 있는 쿠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달콤한 내음이 코를 타고 흘러 들어왔다. 쿠키는 비비앙이 보면 환장하고 달려들 정도로 맛있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많이 변하신 것 같아요.” 옷 위로 떨어지는 가루를 치우고 있는 와중 뒤쪽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대로 몸을 뒤돌아보자, 그곳에는 여성 마법사 한 명이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김한별이었다.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한별을 응시했다. 지금껏 서로의 대화는 교관 업무에 대한 얘기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상태 또는 안부 인사를 나눈다고 해도 간단하게 끝날 적이 많았다. 즉 그녀로서는 처음으로 사적으로 파고들어갈 여지가 있는 얘기를 꺼낸 셈이다. 마지막으로 옷깃에 뭍은 가루를 가볍게 털어낸 후, 싱겁게 들릴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글쎄요. 예전에는 쉴 새 없이 어떤 거라도 하시려는 경향이 조금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 알겠다. 이만 일어나면 되잖아. 그냥 그만 쉬고 일 좀 하라고 하면 되지 뭘 그렇게 돌려서 말해.” “…그런 뜻으로 말하지 않았어요.” 물론 농담이었다. 한별이는 새침한 얼굴로 나를 살짝 흘기더니 이내 입을 다물었다. 나는 오른쪽 손을 그녀에게 내밀고, 왼쪽 손으로는 과자 주머니를 집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한별은 내 양손을 보고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곧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결제 판을 내 오른손에 안착시켰고, 과자 주머니를 받아들였다. “입맛에 맞지 않으세요?” “아니, 괜찮았어. 그나저나 오늘 오전 일과는 전부 끝냈는데 오후에 남은 거라도 있니? 아. 너도 좀 먹어봐.” “괜찮은….” “어디 보자.” 대충 대꾸해주며 결제 판을 넘기자 세련된 필체로 빼곡하게 적혀있는 글씨들이 보였다. 하나하나를 꼼꼼히 읽던 도중 이상한 내용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해당 부분에 대해 물어보려고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푸.” 김한별은 조심스럽게 쿠키 하나를 깨물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쳐다보자 당황한 듯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흘렸다. 그 탓에 기껏 물었던 쿠키는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궁금한 게 있는데 오늘 오후 교육 통제 지원은 뭐야?” “마력 재능 계열 시범 교육을 맡은 나승혜 교관님의 지원 요청이에요. 교육 인원이 너무 많으니 통제를 도와달라고 하셨어요.” 한별은 대답 속도는 매우 빨랐다. 나는 영문이 가지 않아 한층 고개를 기울였다. “말도 안돼. 마력 재능 계열들을 가르치는데 통제 교관을 지원해달라고?” “아직 전문 교육이 아닌, 시범 교육이라서 그래요. 사용자 전원을 대상으로 잡았어요.” “아, 그렇군. 그래도 조금 이상한데. 전부를 대상으로 잡았으면 가용할 수 있는 통제 교관들도 많지 않아?” “…교육이 끝나고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고 했어요. 한(韓) 클랜 로드의 전언이에요.” 한별의 추가적인 설명이 이어진 후에야 앞뒤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성현민과 나승혜 둘은 각기 다른 동부 소도시의 대표 클랜에 속해있으니, 달밤에서 한(韓)에게 부탁한 게 틀림없었다. 그래도 3주는 지나고 슬슬 입질이 올 줄 알았는데 고작 1주일 만에 행동을 개시할 줄이야. 한숨을 내쉬고 결제 판을 덮었다. 어찌됐든 성현민 정도면 친분을 다질만한 인물이었다. 왠지 모르게 소집령 때부터 끊임없이 구애를 보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잘못된 방향으로 엇나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예를 들면 커밍아웃(Coming-Out)이라던가. “그럼 슬슬 가야겠네.” 실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점심 이후로 약 1시간 정도 지났으니, 슬슬 교육 인원들이 모이고 있을 것이다. 멀리서 들리는 희미한 기합 소리들을 들으며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뒤에서 얌전한 걸음 소리를 내며 나를 따라오는 한별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뭘까, 이 묘한 기시감은. * 사용자가 사용자를 가르친다고 할 때, 그 가르치는 방법은 각자에 따라 다르다고 볼 수 있다. 크게 보면 이론 위주와 실전 위주로 나눌 수 있지만, 세세히 들어가면 그 갈래는 순수 문학을 두고 여러 해석이 있는 것과 같이 상당히 복잡해진다. 심화 과정으로 들어갈수록 방법에 따른 효율의 차이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기본은 대부분 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다. 즉 기초 과정에서 수준 차이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소리였다. 마력은 모든 클래스가 공통으로 사용하는 만큼 가장 중요한 능력치로 볼 수 있었다. 사용자 아카데미에서는, 처음에 마력에 대한 정의와 기초 이론 교육에 들어간다. 그 이후 시범 교육에서 1주차에 받았던 이론 교육을 바탕으로 마력을 일으키는 방법과 다루는 방식들을 알려준다. 사건의 발단은 한 사용자의 질문에서 터져 나오고 말았다. 질문을 요약하면 “이론 교육에서 배웠던 것과 지금 실제로 일으키는 방법에 차이가 있다.” 정도였다. 여기서 교육 교관을 맡은 나승혜가 한 발짝만 양보했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개인 해석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자신의 주관을 강조하지 않고 기존의 방법을 따라가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승혜는 그러지 않았다. 질문한 사용자를 일으켜 세우고는 이론 교육에 대해 하나하나 들어보더니 이내 노골적인 비웃음을 선보였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수준 낮고 비효율적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습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여태껏 배워왔던 마력 관련 이론들은 그냥 잊어버리시는 게 낫겠어요.” “아하. 그렇습니까.” “네. 처음 배울 때 길을 잘 들여야 해요. 도대체 누가 이렇게 가르쳤는지 모르겠지만 영 납득이 가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에요. 아주 신규 인원들 수준 떨어트리려고 작정을 하셨나~?” 그 장소에는 나 말고 다른 클랜들의 통제 교관도 나와있었다. 아니, 애초에 1주일 차 교육을 맡은 교관도 나와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신규 인원들의 시선은 곧바로 전 교육 교관에게 몰렸고, 그녀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그대로 교육 장소를 나가버리고 말았다. 일단 시범 교육은 어찌어찌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으나, 당연히 그대로 묻힐 리가 없었다. 교육이 끝나고 신규 사용자들이 퇴장한 후 달밤 클랜과 그믐달 클랜의 교관들이 우르르 몰려온 것이다. 그들의 선두에는 각기 나승혜와 전 교육 교관 조은영이 있었다. 슬쩍 제 3의 눈으로 확인하니 조은영도 나름 괜찮은 능력치를 갖고 있었다. 물론 나승혜에 비해 손색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나 참. 이렇게 멋대로 가르쳐놓고 교육 교관을 바꾸면 어떡해요.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야 하잖아요.” “뭐, 뭐라고요? 어머 기가 막혀.”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에요. 마력 교육이 체력 교육이랑 똑 같은 줄 아시나 봐요?” “저기요. 말씀이 너무 심하시잖아요. 아무리 그쪽이 레어 클래스라고 해도….” 박현우가 나름 머리를 짜내어 내놓은 1주일 후 교육 교관 교체가 이런 폐단을 불러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박현우의 잘못으로만 단정할 수 없었다. 내 시선에도 눈앞 광경이 단순한 트집 잡기, 또는 깎아 내리기 이상으로 볼 수 없었으니까. 그렇게 강 건너 불구경을 하던 도중, 기어코 폭발한 조은영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굉장히 억울하고 분한 듯 그녀의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고, 심지어 미미한 울음도 섞여있을 정도였다. “그럼 지금 와서 저보고 어쩌라고요!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미리 말씀을 해주시던가요! 1주차 교육 때 나오지도 않으셨으면서 이제 와서 어떡하라는 건데요?!” “아우, 시끄러워. 목소리만 커서는. 뭐, 딱히 어떻게 하기를 바라지는 않아요. 믿고 맡겼다가 또 귀중한 시간을 잡아먹으면 어떡해요. 아무튼 실력이 없으면 그냥 조용히 구경이나 하고 있어요. 괜히 나서서 설치지 말고.” 나승혜의 신랄한 독설에 결국 조은영이 폭발하려는 찰나였다. 때맞춰 여러 클랜들의 인원이 도착했고, 그들은 급히 두 클랜의 중재에 들어섰다. 그들의 말림에 두 클랜의 충돌은 흐지부지 되었지만, 이 사건은 대모의 중재로 간신히 억제시켰던 갈등이 다시금 살아난 것을 알리는 신호탄과 다름없었다. 앞으로 신규 인원들에게 클랜을 홍보하겠다는 명분 아래 얼마나 서로를 견제할지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었다. 나승혜를 말리고 돌아가는 와중에도 성현민은 내게 찾아와 오늘 저녁 약속은 뒤로 미뤄야겠다고 미안해했다. 나는 괜찮다고 웃으면서 화답해준 후, 김한별을 데리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교관 숙소로 발걸음을 향하던 도중이었다. 문득 사용자 아카데미를 맴도는 불안한 기류가 전신으로 느껴졌다. 점심 후에 만끽했던 상쾌한 기분과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그 원인을 관조하자, 나는 한 명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박환희. 광장에서 내가 눈여겨봤던 사용자였다. 그리고 나승혜에게 질문을 던진 사용자였다. 나 또한 그녀의 교육에 참가했으므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그때 느꼈던 위화감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정말 궁금해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닌 뭔가 노리는 게 있는 묘한 얼굴이었다. 비단 그 녀석뿐만이 아니었다. 박환희 주위에 있는 신규 인원들 대부분이 묘한 기색을 얼굴에 떠올리고 있었다. 방금 전 감지했던 기류는 아무래도 사용자 아카데미를 두고 뭔가 불안한 일들이 벌어질 것 같은 흐름이었다. 주변은 고요했다. 그것은, 어떠한 일이 일어나기 직전의 고요함…. 마치 폭풍전야와 같다는 생각이 언뜻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할까요?” 고연주는 잠시 발을 멈췄다. 그러자 그녀의 뒤를 따르던 6명의 사용자들도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그 상태에서 고연주는 반 바퀴 몸을 빙글 돌리고는 자신의 뒤에 있는 사용자를 향해 강하게 발을 후렸다. “큭!” 퍽, 소리와 함께 고연주의 발길질에 채인 안현은 그대로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그가 굴러간 바닥 위로 불그스름한 액체들이 흔적을 남겼다. 본인이 흘린 피가 아니라, 장비 표면에 묻어있던 것들이 바닥에 쓸리며 자국을 남긴 듯 했다. 그가 그렇게 나뒹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다들 긴장한 얼굴로 숨소리를 죽일 뿐, 안현을 일으켜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이리라. 고연주는 오연한 눈길로 그를 내려다보고는 사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맞는지는 알고 있니? 애송아.” “네, 네.” “벌써 몇 번째 말하는지 모르겠구나. 수현씨가 실력 좋은 애들이니 잘 가르쳐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그의 말이 틀린 걸까, 아니면 네가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걸까?” “죄송합니다.” 안현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고연주는 서슬 퍼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난 맘씨 좋은 수현씨와는 달리 한번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애들을 보면 답답함을 느끼거든. 이거 말고도 할 일이 천지인데, 자꾸 이렇게 발목을 잡으면 아무리 그이 부탁이라도 굉장히 하기 싫어진단다.”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꼭 주의하렴. 다음에 나올 때 또 방패 들고 나오기만 해봐. 그때는 정말로 가만히 두지 않을 테니까.” 고연주는 차갑게 내뱉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던 일행들은, 다들 안타까운 시선을 안현에게 던지고 고연주의 뒤를 따랐다. 그네들의 뒷모습을 보던 안현도 서둘러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어지간히도 세게 깨문 듯, 그의 입술에는 선명한 이빨 자국이 찍혀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요즘 들어 찌는듯한 더위가 가시질 않는 것 같습니다. 아침, 저녁에는 나름 괜찮은데 점심이 정말로 덥네요. ㅜ.ㅠ 아, 그리고 오피투럽19님의 생일을 축하 드립니다. 하하하. 리 코멘트에 해달라고 하셨지만, 기념일인만큼 후기란 에 축하축하를. :D 생일에 선물도 잔뜩 받으시고, 맛있는 것도 많이 드시길 바래요. 저는 오후 강의까지 잡혀 있느라 꼼짝없이 대학교에 잡혀 있어야겠습니다. ^ㅅ^ 리리플은 곧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 『 리리플 』 1. 미월야 : 껄껄. 1등 축하 드립니다. 요즘들어 신규(?)분들이 많이 보이셨는데, 올드(?)의 강세가 다시 이루어지고 있군요. :) 하하하. 아무튼, 이번 회도 재미있게 감상해주세요. 2. 자사팍 : 그렇습니다. 저도 무섭습니다. 자정 연재는 저도 첫 코멘트를 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포기했어요. 포기하면 편해요. 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3. rikuru : 글쎄요! 과연 한별이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황금 사자에 잡혀 있을 수도 있고, 버림 받을 수도 있고, 다른 데로 갈 수도 있고, 주인공이 데려갈 수도 있어요! :D 앞으로의 내용을 기대해주세요~. 4. 야우로 : 쿠폰 감사합니다. (__) 저도 독자였을 때, 항상 올라오던 소설이 안 올라오면 x줄 타는 기분으로 기다리곤 했습니다. ㅜ.ㅠ 5. 묵향사촌 : 오호. 메모라이즈가 요구르트처럼 새콤달콤 하시군요? 하하. 농담입니다. 어, 그런데 갑자기 얼린 요구르트가 먹고 싶어졌어요. 꼴깍. 6. 사용자간달프 : 대마력 = 항마력입니다~. 원래 대마력이라는 설정이었는데, 항마력으로 변경했어요~. 7. 사이룰러우 : 음, 그것은 참아주십시오. 매달린 상태에서는 글을 쓸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이곳 저곳 뛰어 놀게 해줘야 글이 나온답니다. 껄껄껄! 8. 테크노 : 그것은 아마, 수현의 행운 능력치가 다른 방향으로 발전돼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속닥속닥.) 9. 랜슬럿 듀 락 : 궁금합니다. 본인이신가요, 또 다른 자아님이신가요. ?ㅇ? 10. Lunaluce : 쿠폰 감사합니다. _(__)_ 앞으로도 더욱 좋은, 그리고 알찬 내용으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14 / 0933 ---------------------------------------------- 살아나는 갈등 나름 순조롭다고 생각했던 사용자 아카데미의 1주차. 중간중간 미묘하게 섞여있던 삐걱거림은 2주차의 불협화음을 예고했던 걸까. <달밤> 클랜의 나승혜와 <그믐달> 클랜의 조은영이 부딪친 이후로, 내면으로 들어갔던 갈등은 다시금 표면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사건을 보고받은 박현우는 한번 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 내가 듣기로는 나승혜에게 그냥 원래 가르치던 방향대로 나아가자고 정중하게 부탁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승혜는 박현우의 부탁을 깨끗하게 거절했다. 본인이 남은 9주 동안 교육 교관으로 배정된 이상 교육 방법은 자신의 고유 권한이라는 주장을 했다나. 분명 틀린 말은 없지만 누가 봐도 합법적인 억지였다. 나승혜는 황금 사자와 우호 클랜들의 눈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장을 그대로 강행했다. 물론 그녀가 그저 깡 하나만으로 그것을 강행했을 리는 없었다. 겉으로만 보면 <달밤>과 <그믐달>의 충돌에 <황금 사자>가 중재를 한 모양새였지만, 수면 아래로는 수많은 클랜들이 힘겨루기를 했을 것이다. 결국 신규 인원들은 마력 이론 교육을 다시 받게 되었고, 그 순간부터 간신히 메웠던 갈등의 골은 다시금 파이기 시작했다. 아직 초기에 불과했지만 갈등의 징조는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확실한 것을 들어보라면, 교관 업무에 대한 비협조적인 태도를 들 수 있었다. 친한 클랜들끼리는 서로 업무 협조가 잘 이루어졌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지원 요청을 받아도 거절하는 일이 잦아지자 종래에는 아예 지원을 하지 않는 상황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 지경에 이르자 여태껏 지극한 인내로 참고 참았던 박현우도 드디어 포기하고 말았다. 황금 사자의 미적지근한 입장에 그나마 우호 입장을 갖고 있던 클랜들의 불만이 날로 높아져 가고 있었고, 이대로 억지로 교육을 공유하다가는 또다시 제 2의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에 따라 내 입장도 상당히 애매해졌다. 자유 용병 클랜으로써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주변에서 가만히 놔둘 리 만무했다. 양측에서는 내게 소위 <러브 콜>을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한동안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어느 한쪽과 친해지는 순간 다른 한쪽이 서운해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물타기였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잠재 가치만 높지 아직 확고한 인지도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 상태로 어설프게 물타기를 했다가는 양측에서 고깝게 볼 가능성이 다분했다. 결국에는 한 쪽의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는데, 고심 끝에 비 참가 클랜들이 보낸 줄을 잡기로 결정했다. 여러 가지를 저울질해본 결과 비 참가 클랜들과 손을 잡는 게 앞으로의 행보에 더욱 이득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겉으로 확연한 티를 낸 것은 아니었다. 지금껏 배려 받은 것이 있는 만큼 최소한의 의무, 즉 밥값은 할 필요가 있었다. 김한별을 통한 지원 요청은 동일하게 받아들였다. 다만 그 외 사적인 만남은 웬만하면 비 참가 클랜들과 어울렸다. 어떻게 보면 여지를 남겨둔다고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렇게 아카데미의 내부 사정에 적절히 대처하면서도 나는 본분을 잊지 않았다. 나승혜와 조은영이 부딪쳤을 때, 신규 인원들의 얼굴 표정에서 느꼈던 알 수 없는 위화감이 계속해서 뇌리에 남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박환희가 있었다. 처음 광장에서 봤을 때는 그냥 재미있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자세히 살필 가치가 있는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내부에서 은밀하게 흐르는 여러 갈래들 중 하나가 박환희와 연관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해서, 나는 당분간 그 놈을 예의주시하기로 했다. 2주차 동안 박환희를 보면서 느꼈던 것들은 어떻게 보면 이상하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별 것 없기도 했다. 겉으로 보이는 태도에는 딱히 문제가 없었다. 품행단정에 예의도 바르고 성적 또한 신규 인원들 중에서는 최상위권에 속했다. 교육, 통제, 생활 교관 모두가 박환희에 대해서는 호평일색이었다. 오죽하면 벌써부터 박환희를 놓고 치열한 영입 경쟁에 들어갈 정도였으니 박환희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가지 걸리는 점이 있다면, 주위의 신규 사용자들이 그 녀석을 지나칠 정도로 따른다는 것 이었다. 가끔 보면 그 놈이 통제 교관처럼 보일 정도였다. 통과 의례에서 많은 활약을 했다는 소리를 들었고, 선천적 고유 능력인 카리스마도 있으니 참작할만한 여지는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제 3의 눈으로 놈의 사용자 정보를 확인한 상태였다. 그런 만큼, 겉으로 보이는 태도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사건 이후로 나름대로 이리저리 움직여보았지만, 2주차에서는 별다른 소득을 얻을 수 없었다. 그나마 얻은 정보라고 해봐야 수박 겉 핥은 정도에 불과했다. 물론 아카데미 수료까지 두 달이 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날수록 차오르는 답답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갑갑한 날을 보내고 있을 때 나는 뜻밖의 방문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아니, 뜻밖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었다. 분명 사전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으니까. 그 동안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용자 아카데미에 신경을 쏟느라 그녀와 약속을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다. 연락은 약속 전날 한별이를 통해 받을 수 있었다. 그 약속이라 함은, 바로 <그림자 여왕> 고연주가 나를 찾아왔다는 것. 그것도 애 한 명을 추가로 데리고 방문한다고 하며 출입증 하나를 더 요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 갑갑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하나의 묘안을 떠올릴 수 있었다. * 오늘로서 아카데미의 2주차가 끝난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3주차에 돌입하게 될 것이다. 현재 교육 강도는 내가 있었던 시절과 비교하면 굉장히 낮다고 할 수 있었다. 확실히 1주차에 비해서 오르긴 했지만 형식적인 상승이었다. 예전의 악명 높은 북 대륙의 훈련 강도는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단적인 예로, 원래는 사용자들끼리 무기를 들고 겨루기를 벌이는 주말 특별 훈련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던 훈련이었는데, 이번 주는 특별 훈련 시간을 없애버리고 휴식으로 채워 넣었다. 교관 입장에서는 쉴 수 있어 큰 불만은 없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소집령 때만해도 뭔가 제대로 굴러갈 것만 같던 북 대륙이 조금씩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교관 숙소를 나섰다. 김한별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 또한 오늘 휴식을 받았지만, 아침부터 일이 있는지 점심이 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본관을 나서 정문으로 향하는 도중 때맞춰 멀리서 걸어오는 두 명의 사용자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둘을 보자마자 순간적으로 내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연락 받은 대로 고연주는 혼자서 오지 않았다. 옆에 다른 한 명을 데리고 왔는데, 안력을 돋워 보니 어제 들었던 안솔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중요한 점은, 안솔이 고연주의 손을 꼬옥 잡은 채 오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이리저리 손을 흔들면서 아주 생기발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라버니이이이이!” 안솔 또한 맞은편에서 내가 걸어오는 것을 봤는지, 양 팔을 활짝 벌린 채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뛰어와 나에게 안겼다. 나는 반가운 기분으로 그녀를 안아 들며 반사적으로 등을 토닥토닥 보듬으려 했지만. “킁킁킁킁.” 이어진 그녀의 행동에 기겁해 떼어내고 말았다. 안솔은 불만 어린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녀의 빵빵 하게 부풀은 볼을 한번 콕 찌르고는 땅으로 내려놓았다. 안솔은 곧바로 다시 내게 달라붙었다. “오라버니. 보고 싶었어요오.” “…어 그래.” “헤헤.” 한숨을 푹 내쉬고 있자 어느새 거리를 줄인 고연주가 나른한 웃음을 흘리며 나와 안솔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흐뭇함으로 가득 차올라 있었다. 마치 오랜만에 아빠를 만나는 아이를 대견한 눈길로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머셔너리 로드를 뵙습니다.” “그런 얼굴로 그렇게 말하니 전혀 무게 감이 느껴지지 않는군요.” “이런, 들켰네요? 호호. 보고 싶었어요. 수현.” “그래요. 저도…. 아, 솔아. 잠깐만. 너무 그렇게 비비지 마 쫌. 야, 야! 너 지금 어디에…!” “우웅. 우우웅.” 1초에 머리를 두세 번 비비는 신기를 보여주는 안솔을 겨우 떼어 논 채, 나는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어젯밤에 방문 연락을 받았을 때 조금 놀랐어요. 솔직히 아카데미 일이 여러모로 바빠서 까먹고 있었거든요.” “아아. 괜찮아요. 대충 돌아가는 사정은 알고 있거든요. 완전히 개….” 고연주는 고개를 한두 번 끄덕이며 말하다가, 도중에 말을 멈추고 입을 닫았다. 이윽고 그녀는 진중한 눈길로 주변을 살펴보고는 이내 조금 전보다 확연히 낮춘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수현. 혹시 따로 좋은 장소 없나요? 여기는 너무 트여있네요.” “아. 그렇군요. 그럼 좋은 곳을 알고 있으니 그쪽으로 가죠. 그런데 용케도 기존 사용자들이 모여들지 않네요? 무려 <그림자 여왕>이 아카데미를 방문했는데 말이에요.” “아~. 그거요 미리 언질을 해놨죠.” “언질이요?” 고연주는 내 옆으로 다가와 살며시 팔짱을 꼈다. 그러고는 왼손을 들어올렸다. 그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보자기로 덮인 큼지막한 바구니가 보였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뜻으로 눈을 끔뻑이자 그녀는 눈을 찡긋거리며 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직접 만들어온 도시락이에요. 그 동안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 먹느라 고생하셨을 거에요. 제 음식 솜씨가 그리우셨죠?” “네? 음, 아뇨. 딱히….” “아, 언질이라고 해도 별거 없었어요. 수현씨와 오붓한 시간을 보낼 예정이니 같잖은 이유로 방해하면 죽여버린다고 했지요.” “…가시죠.” 나는 재빨리 하려던 말을 멈추고 고연주를 이끌었다. 나와 그녀가 걸음을 옮기는 것을 봤는지 안솔은 날렵한 몸놀림으로 우리 둘 사이를 파고들었다. 고연주는 순순히 틈을 내주며 그녀의 왼손을 잡았고, 안솔은 남은 오른손으로 내 왼손을 잡았다. “와아. 소풍이다. 소풍. 와아와아.” 안솔은 나와 고연주의 손을 꼭 쥔 채 마구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분명 최대한 무섭게 몰아붙여달라고 했고, 원래 안솔은 고연주를 어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그런데 고작 2주 만에 그녀의 태도가 180도 달라져버렸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연주에게 물었다. “고연주. 얘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들뜬 거죠?” “호호. 오늘 날씨 정말 좋네요.”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호호호호. 아이 배고프다. 자, 얼른 가요. 그 장소가 어디에요?” “…….” * 이스터 에그라 이름 붙인 장소에 도착하기까지 고연주는 끝내 내 시선을 회피한 채 물음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계속해서 궁금증이 일었지만 일단 개인적인 호기심은 접어두기로 했다. 어차피 나중에 가면 전부 알게 될 일이었고 바바라를 떠나기 전, 훈련을 시켜주면서 적당한 당근도 곁들여달라고 했었다. 어찌됐든 고연주가 알아서 어련~히 잘했을 거라 생각하며 나는 그녀가 건네준 빵 하나를 베어 물었다. 고연주가 손수 만들어온 음식을 먹으며, 2주 동안의 클랜원들의 근황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클랜원들은 모두 잘 지내고 있어요. 하루가 멀다 하고 저한테 깨지는 애도 있고, 평소와 같이 헬렐레하게 사는 애도 있고.” “깨지는 애는 안현이겠죠. 제가 정신 좀 차리게 해달라고 단단히 부탁했으니까요. 그나저나 누가 헬렐레하게 산다고요?” 그녀는 대답대신 전방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와아. 거기서라아~! 거기서라아~!” “…어째 증상이 더 심해진 것 같군요.” 안솔은 아장아장 걸어 다니며 뭔가를 열심히 쫓고 있었다. 어이없는 심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자, 옆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다. “아니요. 꼭 그렇게 보실 것만도 아니에요.” “그게 무슨 소리죠?” 고개를 돌리자 처음의 나른한 얼굴이 아닌 눈동자에 힘을 준 고연주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안솔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수현. 제가 일전에 저 아가를 보고 정신병자라고 했었던 적이 있었죠?” “네. 그 일…때문이었죠.”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고연주는 안솔에게 보내던 시선을 나에게로 돌렸다. 잠시 동안 나를 뚫어지듯 바라보던 그녀는 이윽고 또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말. 취소하겠어요.”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오늘 저녁으로 팔도 비빔 면을 먹었습니다. 군대에서 먹었을 때는 그렇게 맛있었는데, 오늘 오랜만에 먹으니 그때 먹었던 맛이 나지 않더라고요. 하하하. 저는 가끔 군대에 있을 적에 먹었던 음식들을 떠올리면 군침이 돌아요.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반합에 끓인 라면이었죠. 그때 발갛게 익어 김을 폴폴 날리던 라면의 맛을 잊을 수 없네요. ㅜ.ㅠ 『 리리플 』 1. 센서티브 : 1등 축하 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아쉽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합니다. 하하하. 오랜만에 4연속, 5연속 1등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죠. :) 아무튼 오랜만에 1등 하신 것을 다시 한번 축하 드립니다. 이번 회도 부디 재미있게 감상해주세요! 2. 사람인생 :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 동안 안 보이신다 싶었는데 시험 기간이셨군요. 하하하. 갑자기 달린 장문의 코멘트에 엄청 놀랐어요. :D 말씀해주신 부분에 대해서는 차후 진행으로 하나씩 풀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 코멘트 감사합니다. 3. ads123 : 생일 축하 드립니다. 의외로 생일이신 분들이 많으시네요. 부러워요. 제 생일은 아직 한~참 남았지요. ㅜ.ㅠ 하긴 근래에 들어서는 생일이어도 별로 축하를 받은 기억은 없네요. 쩝. -_-a 4. 쿠로시온 : 허허허. 아마 그랬다가는 독자 분들의 몰매를 맞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뭐, 그래도 요즘은 고자 소리 안 들어서 만족하고 있습니다. 쿡쿡. 5. BloodArk : 하하. 간만에 본 빵 터지는 코멘트였습니다. 하지만 고연주가 마냥 때리기만 한 것은 아니에요! 적당히 당근도 주고, 격려도 해주고 있죠. 과연 안솔은 무슨 일을 터뜨렸을까요? 6. 오피투럽19 : 봤어요! 리리플 보다는 후기에 직접 써드렸는데. ;ㅇ; 후기가 더 낫지 않나요? ㅜ.ㅠ 7. 현오 : 하하하. 아마 여성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그리고 동물의. 응? 아, 아닙니다. 제가 방금 헛소리를 했네요. 험험. 8. sereson : 에, sereson님께서 자정 연재 첫 코멘트를 하신다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시는지요. 9. 레필 : 레필님의 코멘트는 언제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하하. 단순히 한번 보고 지나갈 수 있는 장면에, 그렇게까지 생각을 하신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 10. 너구리날개 : 쿠폰 감사합니다. _(__)_ 연참은, 음. 한번 노력해보겠습니다. 껄껄. 아, 출근 축하 드립니다. 저도 얼른 직장인이 되고 싶네요. 뭔가 멋있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일하는 모습이 상상돼요. ㅋㅋㅋㅋ.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15 / 0933 ---------------------------------------------- 살아나는 갈등 고연주의 말을 듣자 부쩍 흥미가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말을 번복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 그녀의 얼굴 표정은 더없이 진지해 보였다. 잠시 안솔과 고연주를 번갈아 보다가, 나는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안현, 안솔이 입을 열었나요?” “아니요. 열지 않았어요.” 그녀는 곧바로 대답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는 고연주의 시선은 다시금 안솔에게로 꽂혀있었다. 솔이를 보는 그녀의 이목에서는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묻어 나오고 있었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정적이 흐르는 동안 오직 안솔이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소리만이 간간이 고요를 깨뜨렸다. 문득 현재 고연주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뮬에서 마지막으로 <절규의 동굴>을 탐험할 적 선보인 안솔의 위력에는 그녀도 놀라움을 표시했다. 비단 고연주뿐만이 아니었다. 정하연도, 신상용도 처음 그녀의 능력을 접했을 때는 믿을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었다. 행운이란 그런 능력이었다. 알 수 없고, 정의할 수 없고, 상식 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능력. 고연주는 뭔가 말을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내면을 헤아려, 먼저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일어난 사실들을 되짚어가며 하나의 가설 만들어내는 것. 그렇다면 가장 먼저 말을 번복하게 된 계기를 물어야 한다. “정신병자라는 말이 딱히 듣기 좋지는 않았습니다. 미우나 고우나 일단은 내 새끼…. 아니, 클랜원이니까요. 저로서는 환영할만한 일이네요.” “푸훗. 방금 전에 새끼라고 말하려고 하셨죠?” “잘못 들으셨을 겁니다. 아무튼, 왜 취소한다고 하는지 이유가 궁금하네요.” 내 부정에 고연주는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뒤이어진 내 질문에 회상을 하려는지 눈을 감더니, 차분히 입을 열었다. “처음에 수현씨 부탁을 듣고 잘됐다 싶었어요. 그 동안 같이 지내면서 답답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거든요. 안현이야 그 셋 중에서 그나마 제일 나았고 이유정은 제가 두들겨 패면서 가르쳤죠. 하지만 안솔은 수현씨가 끼고 도는 경향이 강해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웠어요.” “…….” “그때도 그랬어요. 바바라를 떠나던 날. 워프 게이트를 통과하고도 앙앙 우는걸 보며 엄청난 짜증이 치솟더라고요. 오죽하면 귀싸대기부터 올려 붙이고 시작할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하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어요.” “왜죠.” 나는 그녀의 말을 주의 깊게 들으며 되물었다. 고연주는 뭔가 생각하는 게 있는 듯 한 템포 말을 멈췄다가, 이내 리듬을 타듯이 천천히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한번 알아내고 싶었거든요. 도대체 왜 그러는지. 어차피 수음을 들킨 일로 매우 어색해진 상태라 관계를 호전할 필요도 있었고요. 그래서 저는 수현씨의 빈자리를 채워주기로 했어요. 왜냐하면 그 동안 수현씨에게 엉겨 붙는 모습들을 보면, 혹시 어릴 때부터 애정을 받지 못하고 자라서 그러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애정결핍이라….” “아무튼 그렇게 마음먹은 이후로, 안현이나 이유정은 조금만 잘못해도 두들겨 팼지만 안솔만큼은 그러지 않았어요. 언제는 엄마처럼, 또 언제는 언니처럼. 정말 애 하나 돌본다는 생각으로 그녀를 대했죠. 아마 증상이 조금 심해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거에요. 지금은 아빠, 엄마가 모두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그럼 성과는 있으셨나요?” “아주 없지는 않았어요. 일단 처음 목표했던 관계 회복은 이뤘지만…. 그 이상은 들어갈 수 없었어요. 가끔 직접 파고들어가려고도 했지만, 그때마다 거의 병적으로 움츠러들더라고요. 마치 뭔가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 가로막고 있는 기분…? 결국 본질적인 문제에는 다가가지 못했어요.” “음….”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결국에는 알아낸 게 없다는 사실에 아쉬움이 들려는 찰나, 고연주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떨어지던 집중력을 다시 끌어올렸다. “1주일 정도가 지났을 때 식사 시간에 우스갯소리를 하나 던졌어요. 그 동안 훈련 성과가 가장 좋은 클랜원은 수현씨를 만나러 갈 때 데리고 가겠다고 했죠.” “하하. 안솔이 갑자기 각성하던가요?” “그랬으면 오죽 좋았겠나요. 솔직히 진심으로 한 말도 아니었어요. 뭐 그 뒤로 다들 한층 열심히 하기는 했지만, 말 그대로 우스갯소리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죠. 그러던 어느 날…. 정확히는 이틀 전이었어요.” 이틀 전이라는 말에 저절로 귀에 힘이 들어감을 느꼈다. 그때는 내가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아카데미 일에 한창 답답함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나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한밤중에 안솔은 갑자기 나를 찾아왔어요. 그녀가 스스로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는 조금 놀랐지요. 그 동안 많이 친해지기는 했지만, 아직 적극적인 태도를 보일 단계는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저를 찾아오며 다짜고짜 내뱉은 말들은 저를 더욱 놀라게 만들었죠.” 고연주는 이야기 도중 한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계속해서 눈을 감은 채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잇고 있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마치 그날의 일을 조금 더 선명히, 조금 더 자세히 느끼기 위함인 것 같았다. 드디어 클라이맥스로 들어간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어요. 늘어붙지 않는 또박또박한 말투. 뭔가 비장함이 감도는 표정. 또렷하게 살아있는 눈동자. 그리고…. 그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기운.” “기운이요? 솔이가 뭐라고 말을 했죠? 혹시 저를 보러 올 때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했나요?” “그래요. 처음에는 두말할 것도 없이 거절했어요. 헛소리하지 말고 잠이나 자라고 했죠. 그런데…. 그때였어요. 처음 그녀가 들어왔을 때 느꼈던 알 수 없는 기운들이 꼭 저를 휘감는 기분을 느꼈어요. 그리고 그 순간. 안솔의 말이 이어졌어요.” 어느새 훤히 드러난 고연주의 팔에는 오돌토돌한 소름이 돋아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행운 능력치를 떠올렸다. 그 동안 그냥 생각만 해왔던 행운에 대한 조각들이 일부나마 맞춰지고 있었다. 행운이 100에서 101로 올라감으로써 생긴 변화. 안솔의 알 수 없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사실이, 조금이지만 실마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데려가 주셔야 할 것 같아요. 오라버니는 지금 저를 필요로 하고 있어요. 아마, 혼자 가시게 되면 크게 후회하실지도 몰라요. 저는 오라버니가 후회하는 게 싫어요. 굳이 데려가 주지 않으신다고 하면 따로라도 가겠어요.” 고연주는 안솔의 말을 흉내 내듯이 말했다. 곧이어 그녀는 서서히 눈을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촉촉히 젖어있는 연한 잿빛의 눈동자가 보였다. “정말 재미있는 게 뭔지 알아요?” “그녀가 평소와는 다른 태도로 말을 했다는 것?” “아뇨.” 이윽고 고연주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는 아직도 열심히 뛰놀고 있는 안솔을 슬쩍 봤다가, 이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런 주제에, 이 나를. 그림자 여왕 고연주를 압도했어요. 물론 마력적인 측면에서 눌린 건 아니에요. 다만….” “다만?” “정말로 그래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꼭 내 안의 무언가가 강제로 움직이는 것 같았죠. 차마 거절할 생각도 못하고, 저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어요. 그리고 저 애는 그때서야 다행이라는 미소를 흘리더니 곧바로 몸을 돌려 나가더라고요. 그때만큼은 정신병자 같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정상인이라기보다는…. 쯧, 잘 모르겠네요.” 고연주는 비로소 할 말을 다했다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곧 그녀의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꼭 뭔가에 홀린 것 같더라니 까요. 믿겨져요? 제가 저 아가에게 한 순간이나마 끌려갔다는 게?” 가능합니다. 101 능력치가 발현되었을 경우에는 말이죠. 나는 속으로만 대답했다. 아직은, 아직은 얘기를 꺼낼 단계가 아니었다. 실마리를 잡은 이상 이제는 실험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 실험을 거치고 일부의 사실이나마 분명히 할 수 있다면. 그리고 내 생각이 맞는다면 나는 앞으로 큰 무기를 손에 쥘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더는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내가 이야기할 차례였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네.” “아까도 말씀 드렸듯, 연락을 받기 전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라버니이이이이!” 안솔은 드디어 잡은 듯 앞에서 뭔가 들어올린 채 해맑게 웃고 있었다. 나 또한 마주 손을 흔들어주며 화답한 후, 침착히 말을 이었다. “안솔을 데려오신 건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하. 이럴 수가. 저 아가를 믿는 구석이 있나 보군요.” “네 그렇습니다. 석연치 않은 부분이 아직 있지만, 기대해 볼만한 부분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끙. 저는 잘 모르겠어요.” 고연주는 기어코 한탄하는 말을 내뱉더니 벌러 덩 드러눕고 말았다. 나는 그녀를 보며 잠시 실소를 흘리다가 안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여전히 쫄랑거리는 걸음으로 뛰놀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곧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시켰다. * “얌얌얌얌.” 실컷 뛰어 놀자 배가 고픈지 안솔은 열심히 도시락을 흡입했다. 그녀는 입 주위에 부스러기를 잔뜩 묻히고 먹다가, 고개를 번쩍 들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마도 사라진 고연주를 찾는 것 같아 보였다. “오라버니이. 엄마…. 아니, 언니 어디 갔어요?” “잠시 볼일이 있다고 해서. 나중에 데리러 온다고 했으니 그때까지는 오빠랑 있자꾸나.” “아~. 네에~.” 고연주는 실제로 볼일이 있다고 했다. 한창 영약을 연구하고 있는 비비앙이 바바라에서 연구 재료 몇 가지만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물론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고, 내가 안솔을 필요로 하는걸 확인하자 일부러 자리를 비켜준 것 같았다. 여럿이 있는 것보다 둘이서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어차피 나도 때가 되면 알려줄 생각이었기 때문에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열심히 도시락을 먹는 안솔을 보다가 나는 허공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는 방금 전 띄운 그녀에 대한 사용자 정보가 떠올라있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안솔(0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사제(Normal Priest Runn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D Zero) 5. 진명 · 국적 : 빛을 인도하는 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0) 7. 신장 · 체중 : 160.1cm · 45.7kg 8. 성향 : 질서 · 선(Lawful · Good) [근력 22] [내구 22] [민첩 26] [체력 32] [마력 88(+1)] [행운 101] (능력치 포인트가 3 포인트 남은 상태 입니다.) 몇 가지 바뀐 것들이 보였지만, 나는 그 중 진명에 주목했다. 빛을 인도하는 자.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행운이 101이 된 것에 대해 영향을 받지 않았나 조심스레 추측할 수 있었다. 물론 아직도 모르는 것은 많다. 이것을 만능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간신히 잡았던 실마리가 다시금 꼬여버린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매번 발동할지, 그리고 그 범위에 대해서는 아직도 아리송한 면이 많았다. 해서, 나는 일단 그녀의 특화 능력을 불안 감지와 방향 탐지에 두기로 했다. 이렇게 범위를 좁혀두면 지금껏 보여왔던 그녀의 행적에 대한 신빙성이 굉장히 높아진다. 물론 여기서도 한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있었다. 여태껏 그녀는 능력을 발휘함에 있어 상당히 자기 방어적인 성향이 짙었다. 예를 하나 들어보면, 유적을 탐험할 때 갈래길 앞에 혼자 두면 벌벌 떨며 더 이상 나아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옷깃을 잡는 순간 그 태도는 달라졌다. 즉 다른 사람의 입장이 섞여들 여지가 있다는 소리였다. 그러면 분명 나와 안솔은 떨어져 있었는데, 내가 답답해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느꼈을까? 나는 그 질문에 두 가지 가설을 낼 수 있었다. 첫 번째는 행운이 101로 됨으로써 범위 한정 자체 능력을 업그레이드 시켰다는 것. 두 번째는 일전에 트랩 포인트에서 나와 마력을 섞은 적이 있었는데, 그 잔재가 남아 있었다는 것. 둘 모두 따로 놓고 보면 허점들이 보이지만, 그것을 합치는 순간 얼추 맞아떨어짐을 알 수 있었다. 그때였다. 한창 고개를 파묻고 있던 안솔이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며 입을 삐죽거렸다. “우우. 오라버니.” “응. 왜?” “죄송해요오. 하도 배가 고파서 전부 다 먹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녀는 울상을 지었고, 나는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괜찮아. 오빠는 솔이가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른걸.” “헤헤. 정말이요? 헤헤.” 내 말에 안솔은 몸을 배배 꼬며 부끄러워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이만 생각을 접기로 했다. 이렇게 파고 들어가면 한도 끝도 없는 일이라, 차후 많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알아내는 게 더 나으리라. 그런 만큼 일단 그녀가 온 이상 현재 당면한 일에 최대한 활용하는 게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우자. 치우자.” 안솔은 자신이 먹은 것을 주섬주섬 정리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보다가, 나는 차분히 들릴만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음. 혹시 이번 회가 어려우신 분들은 몇 가지만 기억해주시면 됩니다. 1. 행운은 만능이 아니다. 2. 안솔의 행운은 불안감지와 방향 탐지에 특화되어 있다. 3. 안솔의 행운 능력은 업그레이드 되었다. 4. 주인공은 언제나 보정을 받는다.(?) 아, 마, 마지막은 실숩니다. 실수에요. :) 아. 그리고 토요일 연참 하겠습니다. 머리가 아파서 그냥 쉴까 했는데, 이 부분은 토요일 안으로 마무리 짓는 게 맞을 것 같아서요. 꼭 이렇게 공표해서 스스로를 몰아 붙여야만 연참을 하게 되더라고요. ㅜ.ㅠ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 드립니다. 오호, 요즘 첫 코 하시는 게 쉬우시군요? 아마 몇몇 분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셨을 것 같습니다. 껄껄껄! 2. 破天魔痕 : 아아, 5연속은 저도 보지 못한 것 같아요. 4연속은 한두 분 본 것 같기도 하네요. :) 3. 타카츠키 : 제 생각인데, 아마 그 이상으로 갈 것 같습니다. 떡밥은 모두 회수하도록 하겠습니다. 4. 대바기 : 크, 그 맛 알고 있습니다. 맛 다시 아닌가요? 입맛도 없는데 밥에 썩썩하게 비벼서 먹는 그 맛이란! 5. hohokoya1 : 이상하게 요새 연참이 힘들군요. 하하하. 석가탄신 일은 오늘 외출할 일이 있어서 하지 못했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세요. 넙죽. _(__)_ 6. Hiranya : 헉. 그런가요? 용량은 언제나와 비슷한데 말이에요. ㅜ.ㅠ 7. letzgo02 : 원래는 이번 회에 한번 더 절단을 하려고 했는데, 그만뒀습니다. 하하. 다음 회는 드디어 수현이 실험 + 아카데미의 실마리를 잡게 되죠. :) 8. sereson : 안솔이 욕을 먹고 있어요. 슬퍼하지 말아요. 그녀는 추후 독자 분들의 여신(?)으로 추앙 받을 터이니…. 9. 알디스 : Yes. 정답입니다. 100과 101이 차이를 이번 회를 통해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10. gkgngh : 하하하하하. 절대로,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ㅅ^ 저번에 예비군 훈련 받을 때도 엄청나게 힘들었어요. ㅜ.ㅠ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16 / 0933 ---------------------------------------------- 전조 “솔아.” “네?” “오빠가 솔이한테 궁금한 게 있어.” “우웅? 어떤거요오? 어떤 게 궁금하세요?” 안솔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동동 떠오른 것 같은 착시가 일어났다.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고, 나는 부드러운 눈길로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다. 잠시 동안 서로만 바라보다가, 솔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를 즈음 말문을 열었다. “예전에 워프 게이트 앞에서 오빠한테 했던 말들 기억나니?” “네? 네에….” “그러면 지금은 어때? 아직도 불안해?” 안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풀이 죽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오. 오라버니가 제 말을 믿어주셨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제가 자꾸 그런 모습을 보이면요. 오라버니께 괜한 걱정을 끼쳐드리는 것 같아서….” 뜨문뜨문 말을 잇는 안솔을 보자 속으로 흐뭇함이 샘솟는 게 느껴졌다. 이래서 아빠들이 그렇게 딸을 귀여워하는 거구나. 흡족한 마음에 손을 내밀어 그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자, 안솔은 배시시 웃었다. “그래. 오빠는 항상 솔이 말을 믿는단다. 실제로 지금까지 우리 복덩이 말을 믿어서 도움을 받은 적도 많고.” “헤헤. 아이, 아니에요오. 항상 민폐만 끼치는 것 같아서….” “민폐는 무슨. 아무튼 그래서, 이번에도 솔이 도움을 받고 싶어.” “네에? 도움이요?” 안솔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나는 고개를 한번 주억인 후 진중하게 보일만한 표정을 지었다. 얘는 앞뒤 다 자르고 말하면 알아 듣지를 못하니, 하나씩 차분하게 단계를 올려나갈 필요가 있었다.(이 대화법은 예전 안솔의 행운을 101로 올릴 때 익힐 수 있었다.) “요즘 아카데미에서 하는 일이 생각만큼 풀리지가 않아서 말이야.” “에….” “솔이라면 이 답답함을 풀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 그렇지마안. 저는 아카데미 일도 잘 모르고…. 그리고 제가 어떻게 감히….” “하하. 설마 너보고 교관 업무를 도와달라고 하겠니. 내가 도움을 받고 싶은 건 다른 일이야. 그리고 그 일 자체는 아주 간단하단다.” 내 말을 곡해해서 받아 들였는지, 안솔은 손을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불안함을 내비쳤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작은 웃음을 터뜨린 후,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안심시켰다. 더불어 너만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고 양념을 치자, 그제서야 조금이나마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나는 잠시간 그녀를 다독인 후 훌쩍 몸을 일으켰다. 덩달아 몸을 일으킨 그녀는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작스럽게 보내는 전폭적인 신뢰가 부담스러운지 전반적으로 자신 없어하는 것 같았다. 분명 나를 후회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왔으면서, 막상 멍석을 깔아주니 주저하고 있었다. ‘단순한 오해라고 보기에는 조금 이상한데. 어쩌면 일단 이곳에 오면 내가 자신을 어떻게든 해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안솔은 분위기를 타는 아이였다. 여기서 다그치기 보다는, 살살 구슬리며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게 백배 이득이었다. 그렇다면 일단 그녀가 부담감을 느끼지 않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었다. 해서, 나는 살짝 장난스러운 표정을 보이며 농담을 건넸다. “걱정 마. 그냥 오빠가 하라는 대로만 해주면 돼.” “아~. 하라는 대로요? 알겠어요오. 뭔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라버니만 믿으면 되는 거죠?” “그럼. 오빠 믿지?” 한번 더 분위기를 풀기 위해 손만 잡고 잘게 라는 농담을 던지려고 했지만, 안솔의 뜨거운 눈동자를 보고 관두기로 했다. 이윽고 그녀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이제는 안솔의 행운 능력을 시험해보는 것만이 남았다. 과연 어떤 형태로 내 답답함을 풀어줄지 자못 많은 기대가 들었다. 능력을 발동한 후 내게 어떤 해답을 가져다 줄까? 나는 설레는 마음을 품고 이스터 에그(Easter Egg)를 나섰다. *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안솔 마음대로 휘젓도록 놔두는 게 첫 번째 계획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모든 불안을 털어버리라고 종용한 후, 본관 앞까지 걸음을 옮겼다. “자. 네가 가고 싶은 데로 가보려무나.” “네? 제가 가고 싶은 곳이요?” “그래. 일단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아도 좋아. 동물원에 놀러 왔다고 생각해봐. 이곳 저곳 가고 싶은 데가 많겠지? 네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장 끌리는 곳으로 가면 돼. 불안해하지 말고.” “으응….” 안솔의 장점 중 하나는 내 말을 상당히 잘 따른다는 것이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뭔가 반짝 떠오른 듯 힘차게 걷기 시작했다. 나는 벌써 촉이 온 건가 싶어 놀라운 마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처음 이스터 에그로 갈 때는 막 주변도 둘러보면서 신기해하는 표정을 지었는데 이번에는 주위로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즉 정말로 마음이 이끌리는 곳이 있다는 소리였다. 나는 두 근 반 세 근 반 설레는 감정을 다스리며 계속해서 안솔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그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면 갈수록 익숙한 풍경이 자꾸 보이는데, 그것을 볼수록 되려 내 마음이 불안해지는걸 느꼈다. 분명 이곳은 아침에 일어난 후 내가 항상 걷는…. “오라버니, 오라버니이. 나아, 나아. 저기 들어갈래요.” 이윽고 안솔은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한 방향을 가리키며 칭얼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린 순간 나는 크게 기함하고 말았다. “소, 솔아. 여기는 안돼.” “우웅? 왜요?” “아무튼 여기는 들어가면 안 된단다. 들어가면 무서운 아저씨가 이놈! 하고 혼내요. 그러니 어서 이리 오렴.” “시, 싫어어. 들어갈래요오.” 그녀가 걸음을 멈춘 곳은 다름아닌 내 전용 교관 숙소였다. 재빨리 감지를 돌려 내부를 확인해보니 천만다행으로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다만 김한별도 그곳에서 생활하는 만큼, 그녀가 쓰던 용품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더구나 딱 붙어있는 침대까지. 맹하긴 해도 안솔도 천성 여자였고, 아주 바보가 아닌 이상 눈치를 챌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안솔은 내 반응을 보자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잽싼 몸놀림으로 앞으로 뛰었다. 그러나 나 또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애초에 민첩 능력치에 엄청난 차이가 있는 만큼 뛰어봤자 벼룩이었다. 열심히 달리는 안솔의 허리를 잡고 번쩍 들어올리자, 그녀는 허공에 뜬 상태로 손과 발을 버둥거렸다.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모양이다. “갈거야아. 들어갈거야아.” “자자. 착하지. 오빠 말 들어요.” “우에엥. 왜 못 들어가게 하는 거에요~.” 안솔은 볼을 빵빵 히 부풀리며 불만 어린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냥 가고 싶은 대로 가라고 한 것은 맞는데, 이곳은 아니었다. 역시나 행운 능력은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튄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나는 연신 투덜거리는 솔이를 달랬다. 결국, 우리 둘은 얼른 본관 앞으로 다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솔아.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해보자.” “에, 다르게요?” “그래. 혹시 예전에 도시 밖을 탐험했을 때 기억나니? 푸른 산맥에서 이 방향 저 방향으로 길을 가리켰잖아.” “네.” “좋아. 아까 오빠가 했던 말 기억하지? 이번에는 그 말들을 생각하면서 갔으면 좋겠어.” “네. 그럼…. 응?” 그때였다. 안솔은 대답을 끝내지 못하고 의문 성을 터뜨렸다. 마치 무엇이 잘못된 것을 깨달았을 때 터뜨리는 말투. 그녀는 곧 인상을 찡그렸고, 찡그림은 이내 다급함으로 물들었다. 얘가 도대체 왜 이러나 라고 생각하는 순간, 안솔은 빠른 속도로 걸음을 놀리기 시작했다. 안솔은 이번에는 옆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 또한 서둘러 그녀의 뒤를 쫓으며 그녀가 가는 방향을 가늠해보았다. 여러 건물들이 있었지만, 확실한 건 본관에는 더 이상 볼 일이 없는 것 같았다. 무에 그리 급한지 안솔은 한동안 입도 열지 않으며 걷는 데만 주력했다. 그렇게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걷던 도중, 신규 사용자들 몇몇이 모여 킥킥거리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는 사용자들도 있었고, 넓적한 바위에 드러누워 낮잠을 자고 있는 사용자도 있었다. 오늘 하루 휴식을 부여 받기는 했지만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광경이었다. 잠깐 통제를 할까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왠지 모르게 안솔도 바빠 보였고, 저기 멀리서 신규 사용자들에 둘러싸여 함께 웃음을 터뜨리는 통제 교관이 보였기 때문이다. 백 번 양보해서 좋게 보면 고작 2주밖에 지나지 않아 저렇게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을 높이 쳐줄 수 있지만, 예전과 비교하면 너무도 느슨해진 분위기에 자꾸만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 사이를 지나치며 걷자 여러 건물들이 눈 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 부지는 부속 건물들이 제법 모여있는 곳이라 여러 갈래로 나 있는 좁은 길들이 많은 곳 이었다. 그 동안 뒤만 따라가고 있어 잘 모르고 있었는데, 안솔의 옆얼굴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언제 바뀌었는지 몰라도 그녀의 얼굴 표정에는 아까의 맹 함이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뭔가에 대단히 몰입해 있었다. 그 정체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도 서서히 그녀가 그 몰입 감에 빠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느낌이 극에 오른 것 같아 보이는 순간, 안솔은 다시금 걸음을 멈췄다. 나는 재빨리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솔아. 갑자기 왜 그래?” “오라버니 죄송해요.” “죄송하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계속 급한 마음이 들어요. 빨리 갔어야 했는데…. 자꾸만 그런 느낌이 들어요.” 안솔의 대답은 재빠르고 날카로웠다. 나는 이때다 싶어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그녀의 얼굴은 평소의 청초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주변을 잔뜩 흘기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아무 말도 내 옷자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그녀의 손길을 피하고 싶었다. 웬만하면 옷자락을 잡지 않은 상태로 두고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 몸을 비틀려는 순간 뭔가 모를 위화감이 나를 감싸 들었다. 그 정체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문득 고연주가 말해줬던 알 수 없는 기운이 나에게로 스며드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옷자락을 순순히 내주고 말았고, 안솔은 그제서야 만족한듯한 신음을 내었다. 잠시 동안 이곳 저곳 탐색하듯 건물을 바라본 그녀는 한쪽 방향으로 나를 이끌었다. “…….” 드디어 그녀가 목표로 잡은 건물이 서서히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은 건물 내부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사이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안으로 진입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에 따라 나도 서서히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사용자 아카데미는 대강 알고 있을 뿐이지 구석구석 안다고 하기는 힘들었다. 1회 차 시절 인연이 없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워낙 부지가 넓고 건물도 제법 있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 솔이가 이끄는 곳은 건물들이 밀집한 미로 같은 좁은 길 지역이었다. 그렇게 안솔은 나를 조금씩 으슥한 곳으로 이끌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중간에는 건물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간신히 만들어진 틈 사이로 컨테이너처럼 보이는 창고도 있었고, 뭔가 묵직해 보이는 상자들이 쌓여있는 곳도 있었다. 아마 이곳이 현대라면 수업을 땡땡이 치고 숨기 딱 좋은 그런 곳 이었다. 안솔은 다시 한번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의 걸음을 멈춘 곳 앞에는 길이 총 4개가 나있었다. 반듯한 사거리라고 보기에는 어려웠지만 어쨌든 앞, 뒤, 왼쪽, 오른쪽으로 길이 나 있었다. 그녀는 그때 내 옷자락을 놓고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언뜻 보니 무척이나 고민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으응.” 한창 고민하던 솔이는 이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딘가 바짝 날이 서 있다고 해야 할까? 물론 외모랑 표정 자체가 부드러워 전체적으로는 자애로운 분위기였지만, 어딘가 범접하지 못할 분위기를 흘리고 있었다. 그래. 이 느낌은 꼭 나중에 각성한 <성스러운 여왕> 유현아에게서 받을 수 있었던 느낌과 비슷했다. 한동안 옆쪽을 번갈아 보던 그녀는 양 손을 들어 왼쪽과 앞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러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기서는 오라버니가 고르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나는 그녀의 말에 잠시 멍해졌다. 나보고 고르라고?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하나씩 차근하게 묻기 시작했다. “뭘 고르라는 소리야?” 내가 되묻자 안솔은 재빨리 양 손을 들어 왼쪽 방향과, 앞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상하게 여기서는 제가 고를 수 없어요. 둘 다 가고 싶은 기분인데, 한 쪽만 가야 할 것 같아요. 그러니 오라버니가 어서 하나를 골라주세요.” ============================ 작품 후기 ============================ 216회 후기 생략합니다. 216회 리리플은 217회에 포함하도록 하겠습니다. 독자 분들의 많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0217 / 0933 ---------------------------------------------- 전조 “2, 2차 타격이 온다! 피해라!”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그러나 나는 그 외침대로 피할 여유가 없었다. 간신히 고개를 들자 허공을 가득히 메워오는 공격 마법들을 볼 수 있었다. 노란 번쩍임도, 이글거리는 불타오름도, 날카로운 바람소리도. 명백한 살기를 담고 찢어발길 듯 다가오는 마법들을 보자 망연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든 땅을 짚고 일어서려고 했지만, 시냇물처럼 흐르는 핏물에 미끄러져 연신 몸을 고꾸라뜨리고 말았다. 나는 혼란스러움을 무릅쓰며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동안에도. 온 몸이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선제 타격은 우리가 먼저 했는데.’ 문득 까닭 없이 유현아가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살짝 웨이브 진 연갈색 머리카락. 빙긋 웃고 있는 자애로워 보이는 얼굴. 흰 어깨를 훤히 노출한, 자신의 육감적인 몸매를 뽐내는듯한 하얀 발키리 코트. 상대편 사용자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성스러운 여왕> 유현아. 항복을 종용한 <성스러운 여왕> 유현아의 권고에 코웃음을 친 우리들은 곧바로 선제 공격을 가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군 마법사들의 선제 타격에 나직이 한숨을 쉬더니 이내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었다. 그 순간 그들의 군세를 감싸는 거대한 희뿌연 막이 전방으로 펼쳐졌다. 이윽고 그 막은 아군의 마법들을 막아내는 걸로 모자라, 모조리 튕겨내는 신기를 보여주었다. 그것도 정확히 우리들을 향해서. 그토록 짧은 시간 안에 그 정도의 대단위 방어 마법을 펼칠 수 있다는 사실은 지금껏 본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김수현! 일어나! 일어나라고!” 누군가의 외침이 다시금 내 몸을 강타했다. 그 목소리에 정신이 들어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펑! 펑펑! 펑펑펑! 뭔가 강렬한 충격이 전신을 뒤흔듦과 함께, 어느새 내가 허공을 부유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미끄럼틀을 거꾸로 타는듯한 기분이 들다가 어느 순간 땅바닥을 거세게 나뒹굴었다. 그와 동시에 입으로 들어오는 찝찔한 피를 뱉을 새도 없이, 나는 그대로 눈을 감고 말았다. * 안솔의 말투는 비교적 침착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다급함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차분히 속을 가다듬었다. 나도 솔이를 믿고 솔이도 나를 믿고 있다. 여기서 자꾸 캐물으며 어물쩍거리기보다는, 그녀 말대로 재빠르게 행동할 필요를 느꼈다. 다만, 그 전에 짚고 넘어갈 부분은 있었다. “그래 알겠다. 그 전에 하나만 물어볼게. 이 두 개를 모두 선택할 수는 없을까? 가령 한쪽을 먼저 간 다음에, 다른 한쪽을 가면 될 것 같은데.” “그래서 죄송하다고 한 거에요. 지금 두 개를 선택하기에는 너무 늦었어요. 일단은 빨리 하나를 고르셔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둘 다 늦을 거에요. 그런 느낌이 들어요.” 안솔의 말을 지금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아무튼 여지가 없다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곧장 그녀가 가리킨 방향들을 응시했다. 앞쪽, 그리고 왼쪽. 이윽고 나는 망설임 없이 한 방향을 선택할 수 있었다. “왼쪽으로 가자.” “네. 이대로 쭉 가시면 되요.” 안솔은 자신이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한층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 마력 감지를 서서히 끌어올리기로 했다. 길은 낯설었다. 이스터 에그2로 이름을 붙여도 될 정도로 생소한 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감정에 젖어있을 시간이 없었다. 다급히 안솔을 데리고 막 좁은 길을 빠져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전방으로 아무렇게나 쌓인 무거운 박스들과 살짝 낡은 컨테이너가 비죽 모습을 드러낸 찰나, 감지 끝자락에 뭔가 알 수 없는 기척이 걸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그 기척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걸린 부분에 대해 집중적으로 감지를 확장시키자, 곧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둘. 둘이다.’ 두 명의 사용자가 이 근방에 있었다. 이대로 나가면 둘에게 내 몸을 노출시킬 수 밖에 없고, 빙 돌아서 가면 그만큼 시간이 소비될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자 다행히 오른쪽 사이로 사잇길이 나 있는걸 발견할 수 있었다. 딱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틈이라고 봐도 좋았다. 나는 얼른 그 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 “……!”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가던 도중, 뭔가 얘기를 나누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더욱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고 이내 그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장소 끝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그 상태로 살짝 고개를 내밀어 최소한의 시야를 확보한 후, 바로 마력을 일으켜 안력과 청각을 동시에 돋웠다. 그리고…. “왜 자꾸 나한테 그러는 건데. 나는 관심 없다고 말했잖아.” “너는 관심이 없겠지만, 나는 아니거든.” “하! 토, 통과 의례에서 너한테 당했던 일을 잊었을 것 같아?” “너….” ‘박환희잖아? 저 놈이 왜 여기에 있지?’ 전방으로 트인 공간에는 두 명의 사용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사용자였다. 그리고 박환희 앞으로는, 키가 조금 작아 보이는 사용자 한 명이 주눅든 자세로 서 있었다. 신장도 작고 체구도 왜소해 언뜻 보면 여자의 몸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나는 가만히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백한결. 아니, 한결아. 그때 일은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진정하고, 잠시만 내 말을 들어줬으면 좋겠어.” “웃기는 소리 집어치워! 자, 자꾸 이러면….” “…이러면?” “네, 네 실체를 모두에게 까발리겠어. 그때 나랑 누나랑 너 때문에 겪었던 일을 모두에게 공표할거야.” “큭. 뭐라고?” 백한결이라 불린 사용자가 발악하듯 외치자, 박환희는 미묘한 웃음소리를 냈다. 이윽고 그는 백한결 앞으로 한 걸음 성큼 다가섰다. 백한결은 재빨리 몸을 빼려고 했지만, 낚아채듯 그의 어깨를 잡은 박환희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해봐.” “뭐?” “해보라고. 네가 그런다고 내가 눈 하나 깜짝할 줄 알아? 그때 나와 너희들 말고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 기억 안나?” “그, 그건.” 백한결은 더듬거리는 소리를 냈다. 박환희는 매서운 눈길로 그를 쏘아보다가, 이내 부드럽게 표정을 풀며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잡았던 손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이 답답한 친구야. 그래.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하지만 그때 그건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너희 둘을 그렇게…하지 않았다면, 그러면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 것 같아?” “그래서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 달라는 소리야? 그때 죽을뻔했던, 간신히 살아남고 배신감에 치를 떨던 우리 입장은 생각도 안하고?” “그래. 화가 날 거야. 나라도 화가 나겠지. 이해해. 그래도 일단 사적인 감정은 집어넣어봐. 현실을 보자고. 지금 우리들은 지구, 현대와는 다른 아주 다른 세상에 와 있잖아.” “됐어. 그 얘기는 지겹도록 들었어. 네 정신 나간 계획에 왜 나랑 누나를 끌어들이려고 하는 거지?” 백한결이 박환의를 향해 정신 나간 계획이라고 말을 하는 순간, 풀렸던 그의 표정은 다시금 급격히 얼어 붙었다. 이윽고 그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백한결을 매섭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정신이 나갔다고? 왜 그렇게 생각하지?” “어, 어찌됐든 여기 있으면 안전하잖아! 그냥 순순히 따르면 될 일을 왜 그렇게….” “멍청아. 3개월, 3개월만 있으면 이 안전도 끝이야. 그때부터는 잠잘 곳도 없어지고, 밥도 먹여주지 않는다고. 우리들이 알아서 살아야 해. 그럼 클랜에 오퍼를 받지 못한 사용자들은 어떻게 될 것 같아?” “흥. 너한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닐 텐데. 왜 그런걸 신경 쓰는 거지?” “왜 해당이 없어. 통과 의례 때부터 함께 동고동락해온 동료를 이대로 버리라고?” “네, 네가 동료를 언급하니 되게 웃긴다. 그리고 너도 어차피 그 사람들이랑 거래를 했다며? 그런 주제에 그렇게 말할 자격이나 있어? 그, 그리고….” 백한결의 말에 박환희는 얼굴을 무섭도록 일그러뜨렸다.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확인했는지, 백한결은 이내 서서히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박환희는 숨을 거칠게 몰아 쉬며 지그시 응시하다가 곧 한숨을 토해내듯 입을 열었다. “거듭 말하지만 미안해. 진짜 미안해. 그렇지만 네게 말해준 계획은 내 최선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어. 우리는 지금 여기에 아무것도 기반이 없으니까. 거래라고는 하지만, 모두가 살 수 있는 최고의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왜 이걸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나, 나는 그런 거 몰라. 좋아 좋다고. 네 계획에 또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의도는 좋다고 쳐. 그, 그럼 하고 싶은 사람들이랑만 하면 되잖아. 왜 애꿎은 나랑 유나 누나를 끌어 들이려고 하는 건데? 제발 부탁이야. 조용히 입 다물고 있을게. 그러니 우리한테 관심 좀 가지지 말아줘. 제발….” 백한결은 혼신의 힘을 다한 듯, 말을 마치자 곧바로 몸을 허물어뜨렸다. 박환희는 곧바로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백한결은 잡지 않았다. 이윽고 주저앉은 그를 가만히 응시하던 박환희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한 발짝 물러섰다. 그때였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나는 박환희의 눈동자를 스치고 지나가는 차가운 빛을 놓치지 않았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르고, 그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네 힘이 필요해. 네 힘은, 이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에서 굉장한 영향을 미칠 수 있어.” “뭐? 네가 그걸 어떻게…. 아, 아니. 뜬금 없이 무슨 소리야? 힘이라니?” “시치미 떼지마. 유나씨가 이미 다 얘기한 상태라고. 네가 가진 힘으로, 우리는 돌파할 수 없었던 그곳을 너는 5일차 만에 통과했다고 들었어.” “뭐, 뭐라고? 누나가?!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럴 리가…. 설마 너희들 누나한테…!” ‘뭐라고?’ 박환희의 말을 들은 순간 놀란 건 백한결뿐만이 아니었다. 나 또한 대략 머리가 멍해지고 말았다. 둘의 대치가 이어지는 가운데, 나는 빠르게 정신을 찾았다. 그리고 곧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시켰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백한결(0년차) 2. 클래스(Class) : 신의 방패(Arousal Secret Aegis Beginner) 3. 소속 국가(Nation) : -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천의 재능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18) 7. 신장 · 체중 : 173.7cm · 58.8kg 8. 성향 : 질서 · 선(Lawful · Good) [근력 38] [내구 54] [민첩 36] [체력 48] [마력 62] [행운 74] < 업적(0) > < 고유 능력(1/1) > 1. 되비침(Rank : D Zero) < 특수 능력(1/1) > 1. 이지스 시스템(Aegis System)(Rank : C Plus) < 잠재 능력(3/3) > 1. - 2. - 3. - ‘미친, 각성 시크릿 클래스? 아니, 신의 방패는 또 왜 지금 등장해?’ 각성 시크릿 클래스. 1회 차에 단 두 번 등장한 직업. 그것을 본 순간 크게 소리를 지를 뻔 했지만, 간신히 입을 다물어 비명을 삼킬 수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는 기쁨, 그리고 사기적인 사용자 정보에 대한 놀라움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한꺼번에 밀고 들어왔지만, 나는 애초에 정신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안솔이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 감정들은 잠시 미뤄두고, 눈 앞의 일을 해결하는 게 옳았다. 자꾸만 들뜨려는 마음을 다듬으며 나는 계속해서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우리는 네 여자친구한테 손끝 하나 건들지 않았어. 아니, 오히려 그녀 스스로 나를 찾아왔다고.” “거, 거짓말 하지마. 누나가 그랬을 리 없어. 어째서 너 같은 놈한테….” “한결아. 형이야. 그렇게 말하지마. 그리고 그건 네가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잖아. 금방 들통날 일 가지고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형은 무슨. 우릴 버리고 튄 주제에….” 그의 주장에 할 말이 없는지, 백한결은 침음하는 소리만 흘렸다. 박환희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천천히 쭈그려 앉으며 백한결과 눈 높이를 맞췄다. “한결아.” “…….” “네가 왜 그토록 스스로를 숨기고 싶어하는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오죽 답답했으면 네 여자친구가 나한테 찾아왔겠어? 똑같은 일을 겪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이 나를 미워할 텐데 말이야. 왜 나한테 그 정보를 알려줬는지 잘 생각해봐.” “그, 그럴 리 없어. 누나가, 누나가 그걸 너한테 말했을 리 없어….” “널 위해서 말한 거야. 생각해 봐. 너도 지금까지 직접 보고 들었을 거 아니야. 네가 보기에 이 사람들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자기네들끼리도 대놓고 치고 받고 싸우는 사람들을? 지금이야 우리를 위해주는 척 하지만 수료 후에는 몇몇 인원들을 제외하고는 관심도 가지지 않을 사람들이라고.” “하, 하지만.” “그래. 네게 말한 대로 나는 거래를 했어. 하지만 그건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고 생각해. 어찌됐든 우리들은 아직 힘이 없는 상황이니까. 하지만 이리저리, 자기네들 입맛에 따라 여러 갈래로 찢기느니 나는 내 방법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해. 그리고, 네 힘은 앞으로 우리들이 자리를 잡는데 굉장히 도움이 될 거야.” 우리가 아니라 너 자신이겠지. 나는 씹어먹듯이 내뱉고는 차분히 속을 진정시켰다. 여전히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초반에 완강히 거절하던 백한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손을 움찔움찔 거리는 것을 보니 박환희의 말에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박환희 또한 백한결의 상태를 캐치했는지, 한층 진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나야 저 표정이 완벽하게 만들어진 것 알 수 있었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로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고 볼 정도였다. 곧이어, 그는 아래 주저앉은 사용자를 향해 부드럽게 손을 내밀었다. ============================ 작품 후기 ============================ 곧바로 다음 회 올리겠습니다. 0218 / 0933 ---------------------------------------------- 전조 “약속할게. 다시는 너희를 버리는 짓은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도와줘. 아니, 한번만 더 나를 믿어줘. 너랑 함께할 수 있다면 현재의 불투명한 계획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정 못 믿겠으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아. 네 여자친구가 직접 나를 찾아왔으니, 그녀를 믿는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유…나를…?” “그래. 첫째 날에 같이 불침번을 서면서 네가 나한테 말해줬잖아. 어렸을 적부터 항상 너를 위해 헌신해온 여자라고. 그런 그녀도 믿지 못하는 거야?” “으…. 그건….” 백한결은 미약한 신음을 내듯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거의 다 넘어왔다고 생각하는지, 박환희의 얼굴에 미묘한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윽고 바닥을 짚은 백한결의 손이 조금씩 움직일 무렵 누군가 내 등을 살짝 떠미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안솔이 양 손을 쥔 상태로 내게 “파이팅!”을 외치고 있는 게 보였다. ‘이 녀석이?’ “아.” 떠밀리듯 나왔지만, 두 걸음 안에 균형 감각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조용하던 주위에 발걸음 소리가 울렸고, 그 탓에 둘의 이목을 끌 수 밖에 없었다. 회심의 미소를 짓던 박환희도, 어물쩍거리던 백한결도 모두 놀란 얼굴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담담한 얼굴로 그 둘을 응시했다. “여기는 꽤나 외진 곳인데. 신규 사용자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머, 머셔너리 클랜 로드를 뵙습니다.” “히, 히익.” ‘이놈 봐라.’ 박환희는 일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재빠르게 표정을 회복하며 몸을 일으켰다. 내 클랜명과 직책을 정확하게 말하는 녀석을 보자 약간이지만 감탄이 일었다. 놈이 말하는 상세한 계획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벌써부터 모종의 행동에 들어갔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잠시 박환희를 강하게 쏘아보았다가,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맞기는 한데, 네 신분에 그렇게 말하면 안되지. 지금은 엄연한 통제 교관이거든.” “아, 죄송합니다. 워낙 다른 교관 분들께 들은 소리가 많아서요. 하하.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넉살 좋게 말을 하는 박환희에 비해 백한결은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뒷모습만 보고 있어서 몰랐는데, 앞에서 얼굴을 보자 선하고 고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미 사용자 정보를 확인한 상태라 성별을 착각하는 불상사는 없었다. 참고로, 녀석은 아직도 주저앉은 상태였다. ‘이런 성격으로는 통과 의례 보스 몬스터를 따돌리기 힘들었을 텐데…. 쯧. 평소에는 이러다가 한번 필 꽂히면 돌변하는 성격이라도 갖고 있나?’ 백한결을 보자 문득 통과 의례 첫날 안솔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다가, 살며시 마력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앞으로 있을 정신 교육 시간에 참가할 예정이니, 보기 싫어도 몇 번은 보게 될 거다. 그나저나 이곳은 교관들도 자주 오지 않는 곳이야. 왜 둘이 여기 있었는지 물어도 되겠어?” “그, 그건….” “아, 혹시 그거? 괜찮으니 말해봐.” “에이, 아닙니다. 저는 정상적인 연애 관을 갖고 있다고요. 하하하!” 일부러 빠져나갈 구멍을 틔워주자 박환희는 잽싸게 빠져나갔다. 나는 픽 웃다가, 조금은 엄하게 들릴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니면 다행이고. 아무튼 숙소 주변을 잠깐 돌아다니는 건 괜찮지만, 신규 사용자들이 이런 외진 곳에 있는 것은 썩 좋게 보이지는 않아.” “네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자, 한결아. 가자.” “나, 나는….” 박환희는 곧바로 대답한 후 백한결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백한결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입만 오물거리고 있을 뿐 이었다. 박환희는 잠시 나와 그를 번갈아 봤지만, 이내 허리를 꾸벅 숙이고 뒤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일이 성사되기 직전이라 미련이 남을 법도 한데 꽤나 과단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윽고 박환희가 저 멀리 사라지자, 백한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마 죽어도 그 손을 잡기는 싫었는데 여자친구라는 말에 흔들렸고, 분위기에 휩쓸려 잡을뻔했던 것 같다. 마지막에 박환희가 내미는 손을 결국 잡지 않은 것을 보며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었다. 일단 방해꾼은 보냈다. 나는 그제서야 백한결을 더욱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각성 시크릿 클래스 <신의 방패>. 각성 시크릿 클래스란, 다른 시크릿 클래스 자체와 놓고 보면 큰 차이점은 없었다. 다만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클래스를 얻는 방법의 차이에 있었다. 일반적으로 시크릿은 장비, 책, 보석 등 설정을 포함하고 있는 물품을 얻음으로써 클래스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레어 클래스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각성 시크릿 또는 각성 레어 클래스는 물품이 필요하지 않다. 설정이 들어간 물품이 없어도 <일정 조건>을 만족시키면 클래스의 진화가 이루어진다고 알고 있었다. 각성 시크릿 클래스에 대해 알고 있는 부분은 딱 거기까지만이었다. 나도 그 이상은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1회 차 시절 각성 시크릿 클래스가 등장한적은 단 두 번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성 사용자들도 그저 얻는 방법의 차이만 있다고 말했을 뿐, 자세한 과정은 밝히지 않았다. 대충 각성 클래스에 관해 생각을 정리한 나는 한숨을 내쉬며 눈 앞의 사용자를 내려다보았다. ‘백한결은 무조건 영입해야 한다.’ 일반 전투 계열이 아닌, 희귀한 보조 계열을 갖고 있는 만큼 그 가치는 엄청나다고 볼 수 있었다. 즉 필수로 영입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물론 석연찮은 부분도 있기는 있었다. 그 중 가장 큰걸 들어보라면, <신의 방패>가 지금 출현했다는 점에 있었다. 1회 차에 등장한 직업이기는 하지만, 못해도 몇 년 후에 출현하는 걸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신의 방패>를 계승한 사용자의 성별은 확실히 여성이었다. ‘휴. 모르겠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감돌았지만, 일단은 한쪽 구석으로 묻어두기로 했다. 어차피 미래가 비틀린 게 한두 번도 아니었고, 지금은 더욱 중요한 일이 내 앞에 있었다. 집단 전투시 <신의 방패>가 얼마만큼의 위력을 발휘하는지는 실제로 뼈저리게 느껴본 적이 있었다. 1회 차든 뭐든 발견하게 된 이상 무조건 영입하는 게 이득이었다. 문득, 아래서 끔뻑거리며 나를 올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곧바로 박환희를 상대할 때 엄했던 얼굴을 풀어, 전보다 훨씬 누그러든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자상한 목소리로 물으며 백한결을 잡아 일으켰다. “왜 그렇게 계속 주저앉아 있어. 어디 아프니? 몸이라도 안 좋아?” “네, 네? 아, 아니요! 죄, 죄, 죄, 죄송합니다!” 그는 내가 억지로 잡아 일으키자 깜짝 놀라며 몸을 움츠러들었다. 나는 괜찮다는 듯 녀석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주었다. 백한결은 내 눈치만 살피며 어색한 웃음을 짓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들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근데 정말로 머셔너리 클랜 로드가 맞으신 가요?” “응. 그런데 어떻게 알고 있는 거니?” “네, 네! 교관님들한테 많이 들었어요. 저희랑 똑같은 0년 차 사용자인데도 불구하고 그 엄청난 실적을 쌓으셨다고…. 특히 시크릿 클래스라고 들어서요….” 백한결은 유독 시크릿 클래스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의 속내를 짐작한 나는 연한 미소를 흘리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화답해주었다. “하하.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말해주니 조금 쑥스럽네. 뭐, 너희들도 열심히 하면 나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정말요?” “그럼. 지금은 비록 많이 혼란스럽겠지만 말이다. 이번에 들어온 신규 인원들은 모두 열심히 한다고 들었거든. 아무튼 그건 그렇고, 내가 방금 전에 와서 잘 모르겠는데…. 혹시 괴롭힘 당하고 있던 것은 아니니?” “예? 아,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그저 잠깐 말다툼을….” “뭐 아니면 됐고. 아무튼 알겠다. 차후 교육 중 정신 교육에 자주 들어갈 예정이니 앞으로 많이 볼 수 있을 거야. 혹시 지금 말하기 곤란한 거면, 나중에라도 말했으면 좋겠구나. 나는 통제 교관이면서 교육도, 생활도 겸하고 있거든. 교육 시간에 잠깐 신호를 보내도 좋고, 아니면 숙소로 찾아와도 돼. 참고로 내 숙소는 1층에 있단다.” “아, 네, 네! 감사합니다.” 백한결은 엄청난 영광이라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와중 녀석이 나를 보는 눈빛에는, 뭔가 모를 동질감이 섞여 있었다. 나는 이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박하게 전진하기 보다는, 서로 비슷한 점을 시사해(솔직히 전혀 비슷하지 않았지만.) 여지를 주며 천천히 다가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마치 친근한 형처럼 굴며 백한결을 격려해주었다. 다행히 그게 어느 정도 먹혀 들었는지, 그는 초반의 어색함을 조금이나마 떨친 채 한두 번은 진짜로 웃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곧 저녁 시간이 될 거 같은데. 일찍 들어가고, 내일부터 다시 훈련이니 열심히 해.” “네, 네! 고맙습니다. 그럼 저도 이만 들어가보겠습니다…!” 숙소까지 같이 가지 않겠냐고 권했지만, 그가 극구 손사래를 치는 바람에 혼자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왼쪽으로 뛰어가듯 걸어가는 그를 보다가, 이내 몸이 좁은 길로 사라진 순간 나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사용자 아카데미를 감싸고 있던 의문들 중 몇 개가 풀린 기분이었다. * “고생하셨어요오. 오라버니.” “고생은 뭘. 오히려 네가 더 고생했지.” “헤에. 저 잘했어요?” “그래 그래. 우리 복덩이가 최고다.” 안솔이 타이밍 맞게 나를 밀어줌으로써 나는 박환희의 흉계를 저지할 수 있었다. 더불어 그 동안 전혀 진전을 보이지 않았던 답답한 일들을 일부나마 풀어낼 수 있었다. 박환희의 계획. 신규 사용자들의 동조. 모종의 거래. 그리고 <신의 방패> 백한결. 오늘 얻은 정보가 굉장히 많았기 때문에, 차분히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더불어 앞으로의 계획에 몇 가지 추가시킬 일들도 있었다. 갑자기 할 일들이 늘어나자 절로 즐거운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헤헤. 오라버니 기분 좋으신 거 보니까 저도 좋아요오.” 안솔은 자꾸 예쁜 말을 하며 나에게 응석을 부렸다. 어느새 아까의 날카롭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원래의 맹한 안솔로 되돌아와 있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좁을 길을 빠져 나왔다. 안솔은 내 허리에 팔을 감아 팔자걸음을 걸어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오늘만큼은 너그러이 넘어갈 생각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해가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신규 사용자들이 가득 메우던 쉼터는 어느새 상당히 한산해져 있었다. 슬슬 저녁을 먹을 시간인 만큼 다들 준비에 들어간 것 같았다. 이제 슬슬 고연주와 안솔을 보낼 시간이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고연주 또한 볼일을 다 봤을 것이고 이스터 에그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마 제법 기다렸을 거라는 생각에, 얼른 그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타닥! 타다닥! “흑.” 갑작스레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옆쪽 좁은 길에서 튀어 나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모습의 사용자 한 명을 볼 수 있었다. 그 정체는 바로 오늘 아침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은 김한별이었다. 아마 내가 왼쪽 좁은 길에서 빠져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쪽 길로 나온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아까 전 선택하지 않았던 앞쪽 길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럼 만약에, 그때 앞쪽 길을 선택했더라면…. 그녀 또한 뛰쳐나오다가 나를 발견했는지 걸음을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살짝 미간을 찡그리고 말았다. 그녀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평소의 차갑고 도도하던 눈에는 서글픔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볼에는 눈물 자욱이 그득하게 찍혀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한 손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위로 살짝 빠져 나온 불그스름한 손자국을 완전히 가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 “아…?” 김한별과 안솔은 서로를 알아봤는지, 동시에 당황함을 섞은 소리를 내뱉었다. 이윽고 한별의 시선은 안솔에게서 다시 내게로 옮겨졌다. 그녀는 곧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이내 몸을 돌려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오, 오라버니이. 방금…. 한별이 언니 맞아요?”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안솔의 머리를 몇 번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처량히 달리는 그녀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네, NTR에 대해서 많은 코멘트를 달아주셨습니다. 일단 수현이는 1회 차 시절 NTR과 비슷한 경우를 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이 직접 NTR 비슷한 행위를 한적도 있죠.(물론 당했을 경우 그 여성이 수현의 애인이라고 보기에는 미묘한 부분이 있습니다.) 2회 차에 들어서는 NTR은 없습니다. 다만, 아예 없는 게 아니라 주인공 주변의 여성들에 한해서만 NTR이 없을 예정입니다. 그 외의 남성, 여성들은 NTR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이미 나온 상태군요.(가령 예를 들어 통과 의례에서 원혜연이나, 유적에서 정지연 등을 예로 들 수 있겠네요.) 한별이 당하지 않았어요. 그저 구박 좀 (심하게) 받고, 뺨 얻어 맞았을 뿐 입니다. ㅜ.ㅠ PS. 김한결 → 백한결 수정 완료. 『 리리플(215회) 』 1. 센서티브 : 1등 축하 드립니다. :) 센서티브님도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개인적으로 미월야님의 독주를 한번 보고 싶었는데, 아쉽기도 하네요. ㅜ.ㅠ 아무튼 오늘 연참했으니 부디 재미있게 감상해주세요. 2. 랜슬럿 듀 락 : 101 이상으로 올릴 수 있습니다. :) 아, 본인이신가요, 또 다른 자아 분이신가요? 3. 오피투럽19 : 체력, 근력은 행운과 다릅니다. 직접적인 <설정>이 들어간 부분으로써, 포인트를 올리는 즉시 상승 적용이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4. 미월야 : 음, 제 생각에는 4연속으로 하시는 분이 과연 나오실지 싶습니다. 진짜 3연속도 엄청난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ㅜ.ㅠ 저도 못하는 첫 코멘트를 어찌 그리들 잘 하시는지…. 5. 백인티모시 : 1. 주인공의 육체는 1회 차 시절의 육체를 로드 했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업그레이드가 됐다고 보시면 됩니다. 2. 수현이 수련하는 부분이 나오긴 나왔습니다. 사용자 아카데미에서부터요. 다만 애들처럼 세세히 나온 게 아니라 제가 살짝 만 언급하고 넘어갔습니다. 3. 마력은 이해하신 것 같으니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1회 차 시절 근력 86, 민첩 96 이었습니다. 그리고 호렌스를 상대할 때는 근력 94, 민첩 98이었죠. 근력은 8, 민첩은 2 차이가 났네요. 물론 90이상의 능력치는 단순히 1에 불과하더라도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그러나, 총합 10의 차이는 그 동안 1회 차 시절 수현의 노력, 경험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더불어 2번에서도 언급했듯이, 수련을 했다는 내용은 언급되어 있습니다. 1, 2, 3번을 합쳐 생각하시면 조금이나마 납득이 가실 듯 합니다. :) 『 리리플(216회) 』 1. 타락한비둘기 : 1등 축하 드립니다. 하하. 자정보다는 비교적 1등이 쉬우시죠? 실은 제가 하고 싶었는데, 너무 힘들어서 그대로 늘어지고 말았습니다. ㅜ.ㅠ 아무튼, 다시 한번 축하 드려요! 2. a조운 : 물론입니다. 하하. 아마 그 부분이랑 똑같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비슷한 내용을 끝자락에 실을 예정입니다. 많은 기대 부탁 드립니다. :) 3. kingofking : 쿠폰 감사합니다. _(__)_ 오늘 자정에 2편 올렸습니다. 헤헤헤. 칭찬해주세요! :D 4. 輝雅 : 輝雅님 코멘트를 보는 순간 벌떡 일어나서 집필에 들어갔습니다. 그 덕분에 오늘 2편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껄껄껄! 5. sereson : 지, 진정하세요. 왜 이러세요. ㅜ.ㅠ 자꾸 이러시면 때찌때찌 합니다. 어험.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19 / 0933 ---------------------------------------------- 전조 “수현. 이만 가볼게요. 클랜원들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련히 잘 하시겠죠. 아무튼 잘 부탁 드립니다.” “오라버니. 바이~바이~.” “그래. 솔이도 안녕. 말 잘 듣고 훈련도 열심히 해야 한다.” 고연주와 다시 합류한 이후 우리들은 곧장 워프 게이트로 향했다. 그냥 정문에서 헤어지는 것 보다는 끝까지 배웅해주는 게 더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다. 고연주와 안솔은 모두 환한 미소를 선보이며 내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다른 건 몰라도 예전처럼 울면서 헤어지는 게 아닌, 웃음꽃이 활짝 핀 솔을 보자 적이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둘을 보낸 후 나는 곧바로 아카데미로 되돌아왔다. 간단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앞으로의 계획을 수정하는 동안, 어느새 시간은 흘러 밤이 되고 말았다. ‘오늘은 아예 들어오지 않을 셈인가?’ 신규 인원 명단에서 <차유나>라는 이름을 찾은 후, 나는 한숨을 내쉬며 방을 둘러보았다. 한별이 사용하는 침대에는 사늘한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잠시 그녀가 사용하는 물품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라이스 스톤을 소등시켰다. 어쨌든 잠은 자야 하니까. 방 내부는 삽시간에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대로 침대 위로 몸을 던지며, 나는 밀려오는 수마에 스르르 눈을 감았다. ………. ………. ………. ………. ………. ………. 끼익, 끼이익. 갑작스레 들려오는 문 여는 소리에 반짝 눈을 뜨고 말았다. 본래 예민한 편이기는 하지만(고연주, 정하연과 동침하는 경우는 예외로 두자.) 요즘 들어 선잠을 드는 일이 잦았다. 살며시 숨을 들이키자 허공을 맴돌던 차가운 공기가 콧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잠시 내 침대 앞에서 주춤거리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이내 그녀는 맞은편 침대 위로 조심스레 몸을 뉘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지금 와서 괜찮은지 묻기도 그렇고, 본인도 그냥 없었던 일로 하고 넘어가는 게 더 마음이 편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잠을 청하려는 순간이었다. “흑…. 흑…. 끅….” 한별이 흐느끼는 소리가 조용히 귓가를 타고 흘러 들어왔다. 그 와중에도 내가 들을까 싶어 억지로 소리를 죽이고 있는 티가 한껏 묻어 나오고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지만, 나는 결국 반대로 몸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흐느낌은 잠시 끊겼다가 이내 다시금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 처량히 들리는 울음 소리를 반주 삼으며, 나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문득, 귀를 막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다음날 아침. 우리 둘 사이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나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녀를 대했고, 한별도 언제나와 같은 태도를 보였다. 발간 눈동자가 약간 걸렸지만 애써 무시하고 숙소를 나서려는 찰나였다. “저기….” 한별의 자그마한 목소리가 내 발길을 붙잡았다. 그냥 고개만 돌릴까 했지만 아예 몸을 뒤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미묘한 불안감으로 물들어 있었고, 가냘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어려운 말을 꺼내기 직전의 모습과 흡사했다. “응. 왜?” “오늘 오후 교육 일정을…. 혹시 바꿀 수 있을까요?” “오후 교육 일정을? 그건 이미 정해졌잖아. 갑자기 왜?” “그게…. 마력 재능 계열 교육이 있는데 통제 교관이 부족하다고 하셔서….” “부족하다고? 그건 말도 안되지. 근접이나 체력도 아니고. 내가 알기로는 사제 계열도 포함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부탁 드려요.” 완곡한 거절에 한별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가늘게 어깨를 떨기 시작했다. 이제는 거의 히스테릭 비슷한 증상까지 보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잠깐 입맛을 다시다가, 이내 크게 숨을 뱉으며 말을 이었다. “쯧. 일단 일정표 줘봐.” 한별에게서 결재 판을 건네 받은 나는 찬찬히 오늘 일정을 훑어보았다. ‘잠시만. 백한결이 분명 마력 재능 계열이었던가.’ 각성 시크릿 클래스 <신의 방패>. 어제 명단을 확인한 바로는 백한결은 마력 재능 계열로 분류되어 있었다. 내구, 체력, 마력이 특기 능력치인만큼 본인이 소속할 계열을 정하기 조금 애매한 감이 있다. 어쨌든 마력 계열로 갔다면 크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아니, 어쩌면 아주 좋다고 볼 수도 있었다. 거듭 말하지만 능력치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다름아닌 마력이었으니까. 애매한 클래스를 갖고 있는 만큼 골고루 올리되, 보조의 성격에 맞춰 마력을 주력으로 삼는 게 가장 무난하리라 여겨졌다. 나는 일정을 바꾸는 걸로 마음이 기우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 동안 몇 번 마주쳤겠지만 그때는 백한결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박환희 말마따나 설마 본인 스스로 숨고 싶어하는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것도 모르고 성적 좋은 애들의 정보만 죽어라 확인했으니 발견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어차피 교관 업무는 최대한 동일하게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변경하는데 큰 부담은 없었다. 나는 결재 판을 열심히 살피는 척을 하며 고민하는 표정을 연기했다. 그리고 전혀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알겠다. 한번 바꿔볼게.” “아…!” 내 허락이 떨어지자 한별은 작은 탄성을 질렀다. 결재 판을 돌려주며 표정을 살피자 약간이나마 화색이 돌기 시작하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내미는 것을 얼른 받고 자신의 품으로 꼭 움켜쥐더니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 그리고 박현우 대 간부가 언제 한번 식사를 같이 하고 싶다고 전해달래요.” “식사? 그건 또 왜?” “긴히 말씀 드리고 싶은 게 있다고 하셨어요. 바쁘시면 이번 주차 교육이 끝나고라도 자리를 만들고 싶어하시는데….” ‘뮬, 너도밤나무와 관련한 일이겠군.’ 그 동안 많은 일들로 묻힌 감이 있지만 어쨌든 한번은 짚고 넘어갈 일이었다. 오히려 조금 늦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잠잠했다. 나는 한번 더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내 반응을 확인한 한별은 아련한 눈길로 나를 응시했다. 그 시선에 뭔지 모를 호의가 담겨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내가 자신의 사정을 짐작하고 배려해준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다음부터 교관 업무 스케줄은 일찍 좀 말해줘. 급하게 바꾸러 다닐 필요 없이 미리 조정하면 좋잖아.” “죄송해요.” “죄송할 것까지는 없고. 그래도 너 덕분에 상당히 편하게 생활하고 있으니까. 아무튼 이제 그만 밥 먹으러 가자.” 그렇게 얼추 대화를 매듭지은 후 나와 한별은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내 뒤를 따르는 그녀의 발소리가 살짝 가벼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예정대로 근접 계열 집체 교육에 통제 교관으로 참가했다. 해당 교육 교관은 <처형의 공주> 연혜림으로, 2주라는 시간 동안 매우 친밀한 관계를 다질 수 있었다. 중요한 자리에서는(예를 들어 한소영이 있을 때라고 그녀가 말해줬다.) 예의를 지키지만 그 외 자리에서는 서로 말을 놓을 정도였다. 거의 한소영만큼이나 성격이 까다로운 그녀지만, 클랜 로드에게 뭔 말을 들었는지 오히려 먼저 다가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 또한 연혜림과는 1회 차서 오랫동안 한솥밥을 먹었으니, 서로간 기호를 맞추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도, 나와 그녀는 교육 중 휴식시간을 틈타 하하 호호 수다를 나누고 있었다. “정말 정말? 그년…. 아니, 걔가 정말로 그렇게 울었다고?” “울었다기보다 울부짖었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지.” “그 살기 덩어리가? 까르르! 아, 대~박이야 진짜. 상상도 못하겠어. 평소에 나만 보면 살기를 있는 대로 뿌려대더니. 하긴, 머셔너리에서 고연주를 영입했다는 기록을 봤을 때는 한창 떠들썩했지. 오죽하면 네 물건 크기랑 테크닉으로 사로잡았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니까? 푸훗.” “그게 뭐야. 아무튼 얼마나 귀여운데. 직접 보고 듣지 않으면 몰라. 으아아아앙! 하고 비명을 지르는데 나도 모르게 꼭 껴안아줬다니까.” “으아아아앙? 으아아아앙 이라고? 아하하하! 아, 아, 배 아파. 진짜 너무 아쉽다. 어제 아카데미 왔었다면서. 간만에 놀릴 기회였는데. 킥킥.” ‘얘가 큰일날 소리를 하네. 놀리기는커녕 칼부림 안 나면 다행이지.’ 정말로 웃겨 죽겠는지 연혜림을 배꼽을 잡으며 웃어 젖혔다. 그녀가 관심을 가지는 주제는 고연주와 성(Sex). 1회 차에는 고연주를 대상으로 성적으로 욕할 적이 많았는데, 이번에도 그 전략이 유효했다. 물론 방금 대화에서 고연주를 성적으로 깎아 내렸다는 소리는 절대로 아니었다. 그저 나와 그녀가 가졌던 잠자리의 일부를 말해준 것에 불과했으며, 홀 플레인 에서 너그러이 받아들일 수 있는 농담의 일종으로 봐도 무방했다. 연혜림은 처음에는 본연의 새침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비상한 관심을 드러내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쓴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주변의 다른 통제 교관들은 모두 우리 둘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10강과 요즘 한창 주가가 오르는 머셔너리 클랜의 로드. 시선에는 자기도 끼고 싶어 죽겠다는 빛이 역력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주위에서 어정거리고만 있었다. 오전 교육을 끝내고 <리버스> 클랜의 김덕필과 점심 식사를 함께했다. 그는 식사 후 항상 내 연초를 뺏어 피는 못된 버릇이 있었는데, 나는 오늘 아예 한 갑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받지 않았다. 되려 연초는 남의 것을 뺏어 피는 게 제 맛이라는 궤변을 힘주어 말해 주변 흡연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이게 그 나름대로의 친근함의 표시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애연가로서의 속상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더러운(?) 기분을 안은 채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는 비로소 오후 교육에 참가할 수 있었다. 오늘 마력 재능 계열 교육을 맡은 교관은 <황금 사자>의 우호 관계를 갖고 있는 <북녘> 클랜. 1주차가 지난 이후로 대부분의 교육을 원정 비 참가 클랜들이 맡게 됐지만, 그래도 2할에서 3할 정도는 점유하고 있었다. 이전과 비교하면 상황이 거의 반대로 뒤바뀌었다고 볼 수 있었다. 교육 시작 전, 나는 먼저 교육 장소로 입실했다. 교육 교관이 오기 전에 미리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안으로 들어선 순간 소란스럽던 강의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내가 따로 통제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마력 재능 계열 인원은 총 38명. 통제 교관은 나 말고 한 명도 오지 않은 상태였지만, 인원이 적어 큰 무리는 없었다. 나는 그들을 전체적으로 둘러보며 중앙 단상위로 올라섰다. 그네들의 시선은 모두 내게로 집중되어 있었고, 이따금 소곤거리는 소리들도 들렸다. 아무래도 박환희, 백한결이 말했던 것처럼 교관들이 내 얘기를 몇 번 한 모양이었다. 솔직히 그 동안 나는 잘 모르고 있었는데, 아마도 내가 없는데 서만 이야기한 것 같았다. 내 시선에 가장 먼저 걸린 사용자는 박환희였다. 그는 중앙에서 조금 위쪽으로 앉아 있었는데, 나와 눈을 마주치자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나도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은 후 그의 주변에 앉아 있는 사용자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했다. 이윽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맨 끝자락에 앉아있는 백한결을 발견할 수 있었다. 최대한 박환희와 떨어져 앉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묻어 나오고 있었다. 백한결은 전전긍긍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시선을 보내자 화들짝 놀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나는 박환희때와는 다르게, 가느다랗게 미소 지으며 화답했다. 내가 아는 체를 한 게 기뻤는지 그는 옆에 앉은 여성 사용자의 팔을 잡아 당기며 들뜬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마 그 여성이 백한결의 여자친구인 차유나일 것이다. 이 교육에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그녀 또한 마력 재능 계열일터, 나는 차분히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백한결에게 헌신적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첫인상은 퉁명스러워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선이 고와 전체적으로 예쁘장한 얼굴이기는 해도, 솟아오른 눈썹과 고양이 같은 눈 모양을 보니 새침데기라는 인상이 강해 보였다. 굳이 비교하자면 이유정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래 봤자 우리 유정이가 훨씬 예쁘기는 하지만.’ 내가 아빠 마음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 실제로 유정이가 훨씬 예뻤다. 곧 실없는 생각을 마친 후 나는 시선을 유지한 채 제 3의 눈을 활성화시켰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차유나(0년차) 2. 클래스(Class) : 일반 마법사(Normal Mage Beginner) 3. 소속 국가(Nation) : -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자격을 증명한 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0) 7. 신장 · 체중 : 167.3cm · 52.7kg 8. 성향 : 선 · 욕망(Good · Ambition) [근력 22] [내구 16] [민첩 25] [체력 28] [마력 47] [행운 39] ‘별거 없는데…. 성향이 선, 욕망이네?’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상반 속성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차유나는 자신을 잡아 당기는 백한결을 손을 꽉 잡고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백한결을 본 게 아니었다. 그녀의 이목은 박환희가 있는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확인한 순간, 차유나의 시선에 미묘한 감정이 담겨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황금 같은 3일 휴일이 지났습니다. 하하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 하하. 하. 하…. 새로운 월요일의 시작입니다. ㅜ.ㅠ 월요병은 정말로 강력한 것 같아요. 아, 한별이에 대한 많은 코멘트들이 달리고 있습니다. 이미 이 아이에 대한 결말을 정해 논 터라, 아마 그대로 밀고 나아갈 것 같습니다. 슬슬 새로운 사건이 터질 예정이니, 앞으로 그 사건과 함께 한별이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기대해주세요! PS. 오늘 쿠폰이 정말 많이 들어왔네요.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__) 『 리리플 』 1. 센서티브 + 리오드리 : 오, 리오드리님.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센서티브님과 리오드리님 두 분 1등 축하 드립니다. 자정에 2편을 올려 어느 분이 1등을 할지 궁금했는데, 각각 1등을 차지하셨네요. :) 2. dbss : 아니에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여유가 되면 2편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3. 산사나무 : 헷갈리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서 이름 바꿨어요~. 김한결에서 백한결로 변경 완료 했습니다! 4. 꼬야 : 아니에요! 저는 S가 아닙니다. ;ㅇ; 한별이에 대한 것은 제 계획(?)대로 가고 있습니다. 크흐흐흣.(?) 5. 쉬라야 : 봐준다고 보기보다, 귀엽게 보는 거죠. ㅋㅋㅋㅋ. 박환희 이놈이 잘나 봤자 우리 주인공한테 어딜 감히! 우리 수현이는 무려 보정(?!)도 받는다고요! 6. 그들 : 응? 헐. 아니에요. 백한결은 여성스럽게 생기긴 했지만, 남성입니다. 남 to the 성. 7. 불꽃포심 : 정답입니다. 유나는 얹혀온 거죠. ㅋㅋㅋㅋ. 앞으로 더욱 흥미진진한 내용으로 호기심을 채워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8. sereson : 후후.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함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알고 있지요! 궁금하시죠? 아하하하!(퍽퍽!) 끄앙! 9. 지클런트 : 아, 저도 기억합니다. 아마 그게 NTR에 대한 첫 교육(?) 이었던 것 같아요. 참고로 그 이후로 더는 보지 않았습니다. 아니, 보지 못했다는 게 맞는 말 같네요. 너무 충격을 받아서요. ;ㅇ; 10. Estaia :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 완결은 초반에는 550회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이상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설령 어느 독자 분 말대로 1000회를 가는 한이 있더라도 무조건, 무조건 완결은 볼 생각입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20 / 0933 ---------------------------------------------- Many ‘뭔가 조금 이상한데.’ 딱히 꼬집어 말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그 흐름에서 뜻 모를 이상한 내음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말았다. 강의실 문이 열리고 북녘 클랜의 교육 교관이 입실했기 때문이다. 형식적인 인사를 나눈 후, 나는 교육 교관에게서 감사의 인사를 받을 수 있었다. 요즈음 손이 부족했는데 지원을 와주셔서 감사하다. 앞으로도 종종 부탁 드린다 등의 의례적인 인사말이었다. 나 또한 웃으면서 화답을 해주긴 했다. 그러나 그 말이 당연히 거짓말임을 알고 있었기에, 속으로는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교육에 들어간 이후 나는 신규 사용자들의 얼굴을 철저히 익히기로 마음먹었다. 박환희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 넘어가고, 그의 주변에 앉아있는 사용자들의 얼굴을 되새김질하는데 주력했다. 일전에 들었던 이야기로 미루어보면 그의 계획에 동조하는 인원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중간 백한결과 차유나의 동태를 살피기도 했는데, 초반을 제외하고는 딱히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교육 중 가끔 서로 바라보며 빙긋 웃는 모습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교육에 집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나는 내 감을 믿기로 했다. 아까 처음 느꼈던 묘하게 불쾌한 감정이 너무도 강렬해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머셔너리 로드. 죄송하지만 부탁 드릴게 있습니다.” “네? 네. 말씀하시죠.” 이론 교육 시간이 끝나고 잠시 휴식이 주어졌다. 그 와중에도 한창 제 3의 눈을 돌리고 있었는데, 옆에서 교육 교관이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고유 능력을 비활성화시킨 후 고개를 돌리자 겸연쩍은 표정을 짓고 있는 북녘 클랜원을 볼 수 있었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그러고 보니 서로 통성명도 못하고 있었네요. 저는 북부 일반 도시 파멜라의 대표 클랜, 북녘 소속 장윤호라고 합니다. 부족하지만 간부라는 직책을 갖고 있죠. 갓 4년 차로 올라간 사용자 입니다.” “아 네. 머셔너리 클랜 로드 김수현입니다. 0년 차 입니다.” ‘별로 궁금하지는 않은데.’ 나는 간단하게 대꾸했다. 장윤호는 어색한 미소만 흘리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하. 부탁이라 함은 다름이 아니고…. 다음 시간에 교육을 조금만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교육이라면…?” “시범 교육 때 <우아한 인형사> 나승혜씨가 제법 꼬아서 가르쳤거든요. 제법 난이도가 있다 보니 신규 사용자들이 실제로 연습하는데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실전 교육에 들어가게 되면 한 명씩 붙잡고 개인 지도를 해야 하는 사용자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정 그러면 부족한 사용자들만 따로 모아 보충 교육을 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전체 인원도 38명에 불과하니 별로 많이 나올 것 같지도 않은데요.” 내 말에 장윤호는 과도하게 보일 정도로 손을 휘젓더니,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 그게 말이죠. 이 교육이 끝나고 또 곧바로 수업 일정이 있다고 합니다. 황금 사자 클랜의 성유빈양이 주도하는 수업이라 무조건 참가시켜야 해서요. 그리고 본 교육과 연계되어 있는 만큼…. 그래서 웬만하면 보충 교육은 피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제가 실전 교육에 직접 참여하는 건 별로 내키지 않네요.” “아아. 많은걸 바라지는 않습니다. 머셔너리 로드께서도 아카데미를 수료하신 만큼, 신규 인원들이 마력 회로를 통제하는데 한두 마디 노하우라도 건네주시면 안될까요? 이론 교육에 너무 많은 시간을 잡아먹어서 시간이 굉장히 빠듯합니다. 한 명이라도 덜 볼 수 있다면 그만큼 여유를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지랄하고 있군.’ 지금껏 신규 인원들의 태도가 너무 풀렸다고 생각했었는데, 교관들도 그들 못지않은 물렁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물론 구실도 있고 사정을 이해한다고 쳐도, 통제 교관. 그것도 0년 차 사용자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건 상당히 웃기는 일이었다. 아무튼 한두 마디 노하우 정도는 별 부담이 없었기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정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휴식 시간이 끝나면 왼쪽부터 차례대로 돌도록 하겠습니다.” “오오. 감사합니다. 덕분에 한시름 놓았습니다. 휴. 솔직히 저도 이 교육 방법이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효율이 좋다고 해도….” 장윤호는 이때다 싶어 나승혜의 교육론에 대해 실컷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왼쪽열의 사용자들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눈을 감은 채 양 손을 모으고 있는 백한결을 볼 수 있었다. 내부로 마력을 일으키고, 회로를 따라 인도하는 과정을 연습하는 모습이었다. 가끔 밝은 얼굴로 차유나를 돌아보는 것으로 보아 나름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휴식 시간이 끝나고 이론 수업을 토대로 한 실전 교육이 시작되었다. 장윤호는 신규 인원들에게 직접 마력을 통제해보라고 주문하며, 잘 되지 않는 사용자들은 자신이 도와주겠노라고 말을 이었다. 곧 그가 오른쪽 열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걸 보며 나는 천천히 왼쪽으로 이동했다. 내가 왼쪽부터 돌겠다고 굳이 밝힌 이유는, 당연히 백한결 때문이었다. “잘되니? 뭐 잘 안 되는 거라도 있어?” “네, 넷? 아, 아니요! 그, 그냥 그럭저럭….” 가까이 다가서 말을 걸자 백한결은 펄쩍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그 반응에 잠시 실소를 흘린 뒤, 그의 등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흘끗 고개를 돌리자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는 장윤호의 뒤태가 보였다. “에, 에엣.” “침착해. 배운 대로 마력을 일으키고, 차분히 회로를 따라 마력을 이끌어봐.” 내 손길이 닿자 당황한 음을 내던 백한결이었지만 이내 주문에 따라 천천히 마력을 일으킴을 느낄 수 있었다. 곧이어 이어진 마력의 흐름은, 숨기려고 그러는지 아니면 긴장해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상만큼 뛰어난 솜씨는 아니었다. 매끄럽지 못하고 버벅거리는 부분을 몇 개 짚을 수 있었다. 나는 그의 내부를 향해 부드럽게 마력을 침투시키며, 달달 떨리는 귓가에 속삭였다. “저항하지 말고. 가만히 내가 인도하는 흐름에 마력을 맡겨보렴.” “네, 네.” 별로 대단한걸 가르쳐줄 생각은 없었다. 아마 회로의 복잡함 때문에 주춤하는 것 같으니, 머뭇대는 부분을 살짝 비틀어 조금 더 쉬운 방향으로 이끌어줄 생각이었다. 딱 지금 어려워하는 부분만 해결할 수 있도록. ‘마력이 참 선하긴 한데, 소심하네.’ 예전 트랩 포인트에서 안솔의 마력을 안정시켰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전해져 들어왔다. 그렇게 천천히, 섬세하게 회로를 타는 도중이었다. ‘이놈 봐라?’ 갑작스레 속력이 붙기 시작한 흐름에 나는 눈이 가늘어짐을 느꼈다. 처음 한 바퀴를 돌 때까지만 해도 허겁지겁 따라오던 마력은 이내 두 바퀴가 시작되는 순간 조금씩 돌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세 바퀴, 네 바퀴를 회전할수록 처음과는 180도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제는 내 마력 밀어낼 듯 질주하는 녀석을 보며 나는 한층 더 속도를 높여보았다. 그 와중 슬쩍 백한결의 얼굴을 살피자 우묵해진 얼굴로 굉장히 몰두해있는걸 확인할 수 있었다. 실로 무서운 집중력이었다. 가일층 속도를 높인 내 흐름을 무리 없이 따라오는 마력을 느끼며 조금은 감탄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백한결의 진명인 <천의 재능>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윽고 여덟 바퀴를 끝으로 마력을 거두어들이자 멍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는 백한결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더 해달라는 기색이 역력히 묻어 나오고 있었다. 천부적 재능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무아지경에 빠졌다가, 그 순간에서 깨어나오니 아쉬운 모양이었다. “나쁘지 않네. 나름 괜찮았어.” 대놓고 칭찬하면 주위의 이목이 쏠릴 염려가 있기에 완곡히 에둘러 입을 열었다. 대신에, 사적인 칭찬의 뜻을 담아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감사합니다!” “그래. 그럼 수고하렴. 다른 인원들도 봐줘야 하거든.” “저, 저기 교관님 잠시만요! 혹시 모르는 게 생기면 다음에 또 여쭤봐도 될까요?” “기회가 또 올지는 모르겠네. 난 교육이 아니라 생활, 통제 전담이거든. 오늘은 예외로 참가했지만 원래는 불가능해. 뭐, 교육 시간이 아니라면 몰라도….” 나는 여운을 띄우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얘가 바보가 아니라면 일전에 얘기했던, 내 숙소로 찾아오라는 말을 기억할 것이다. 아무튼 이놈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영입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지며, 나는 차분히 몸을 돌려 다른 사용자를 향해 이동했다. 어딘가에서 박환희로 추정되는 찌릿한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 그날 지도한 보람이 있는지, 아니면 나와 자주 마주치게 돼서 그런지 몰라도(물론 내가 의도적으로 일정을 조절했다.) 백한결은 확실하게 나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나는 같은 0년 차 사용자와 시크릿 클래스 라는 점을 은근히 어필하며 마치 친형처럼 그를 돌봐주었다. 일단은 서서히 친밀도를 높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교관과 신규 사용자로서 지켜야 할 선은 최대한 지키려 노력했다. 무조건 내가 다가가기 보다는, 그쪽에서 스스로 다가오게끔 만들 필요도 있었다. 이 최소한의 거리는 내가 줄이는 게 아니라 그가 줄여야 할 몫이었다. 즉, 그가 나를 믿고 마음을 완전히 열 수 있을 만큼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게 백한결을 향한 내 공략 방침이었다. 그렇게 영입 계획을 서서히 진행시키면서 새롭게 추가된 일들도 함께 신경 썼다. 지금까지는 통제를 주로 했지만, 생활 교관에 대한 업무 비율을 비약적으로 높였다. 신규 사용자들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숙소로 들어가려면, 교육에 많은 시간을 뺏기는 통제보다는 생활이 훨씬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나는 박환희를 대상으로 잡지 않았다. 장윤호의 교육 시간에 박환희 주변에 앉은 사용자들의 얼굴을 외운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아주 약간의 낌새만 눈치채고 있어 상세히 파헤치지 않았다고 해도, 놈은 무려 2주나 되는 시간 동안 내 눈을 피해 계획을 진행시켰다. 굉장히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박환희보다는 주변의 인물들을 짚다 보면 분명 한번은 걸릴 거라는 예상이 들었다. 그리고 이 방법이 눈치 채일 가능성이 더 적기도 하고. 그리고, 내 예상을 사실로 입증할 기회는 머지 않아 찾아왔다. 모든 교육 일과가 끝나고 개인 정비 시간이 주어졌을 때였다. 순찰을 목적으로 숙소를 돌던 도중, 낯익은 신규 사용자 한 명이 주위를 살피며 걸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분명 그때 박환희의 주변에 앉았던 사용자중 한 명이었다. 나는 바로 순찰을 중지하고 그녀의 뒤를 쫓았다. 곧이어 그녀는 생활관 안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한 명의 여성을 데리고 나오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끌려 나온 여성은 다름아닌 차유나였다. 둘은 생활관 앞에서 잠시 소곤거렸는데 차유나는 일방적으로 듣는 입장 같았다. 이윽고 모든 얘기를 들었는지 그녀는 고개를 한번 주억이더니, 생활관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복도를 걸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전에 있었던 교육 시간에서 차유나가 박환희를 바라보는 눈길이 걸려 항상 예의주시하고 있었는데, 마침 잘 걸렸다 싶어 나 또한 그녀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그녀의 뒤를 밟던 도중 나는 묘한 기시감을 받을 수 있었다. 분명 어딘가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주변 광경이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차유나가 걸음을 멈춘 장소에 도착하고 나서야 비로소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다름아닌 내가 이스터 에그라 이름을 붙인 곳이었다. ‘이런 젠장. 나 혼자만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속으로 투덜거리며, 나는 기척을 죽이고 안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0년 차 사용자 주제에 작정하고 몸을 숨긴 나를 찾을 리는 없겠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무성한 나무 위를 소리 없이 타고 오른 후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어느새 안으로 들어간 차유나와 그 앞에 서 있는 한 명의 남성을 볼 수 있었다. 그 남성의 정체는 역시나 박환희였다. 그는 환한 미소를 선보이며 차유나를 향해 뭐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재빨리 청각을 돋웠다. “아. 유나 왔구나. 하하. 기다리고 있었어. 와줘서 고마워.” “또 왜 부른 거야?” “응? 아아. 너무 경계하지마. 이제는 한 배를 탄 사인데….”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차유나는 사납게 눈을 치켜 뜨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막 다가서려다 주춤한 박환희를 보며 뾰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너한테 협력하고 한결이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 것은 너를 위해서가 아니야. 나와 한결이를 위해서지. 한 배를 탔건 뭐건 좋은데, 더 이상 다가오는 건 그만둬 줬으면 좋겠는데.” “이런. 나 아직도 미움 받고 있구나.” “그거야 당연한 거 아냐? 네가 한 짓을 생각하면 뺨 한대로는 부족하다고 생각 안 해?” 신랄한 그녀의 말에 박환희는 자신의 오른쪽 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휴. 그건 그렇지. 미안해.” “네가 말하니까 전혀 진실이 담겨있는 것 같지 않아. 애초에 그냥 말하면 될걸 굳이 이곳으로 불러낸 것도 그렇고.” “아, 이상한 뜻이 있는 건 아냐. 아직은 비밀을 지켜야 하니까 되도록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어서 그랬어. 그리고….” “그리고?” 차유나의 날카로운 반문에 박환희는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조금 풀이 죽은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결이한테 더 불안을 안겨주기 싫었거든. 주변에서 내가 너랑 만났다가 한결이가 봐버리면 분명 걱정할 것 같아서.” ‘제법 혀 좀 굴리는데? 표정 연기도 일품이고.’ 현재 박환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백한결과 대화했던 내용을 저울질하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는 한층 흥미가 돋아 더욱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의 연기가 먹혀 들어갔는지, 차유나는 의외라는 얼굴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한결이가 유나 너한테 의지하는 면이 많잖아. 가뜩이나 나를 신뢰하지 않고 있는데, 오해할만한 여지를 주기 싫었어.” “흐, 흥. 정말로 그랬다면 됐고. 아무튼 빨리 불러낸 용건이나 말해.” 겉으로는 여전히 쏘아붙이고 있었지만 날이 서 있던 목소리는 처음과 비교하면 많이 누그러진 상태였다. 그는 곧 풀이 죽은 얼굴에서 연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표정을 바꿨다. “아 다른 건 아니고. 저번에 내가 너한테 계획의 대부분을 말해줬잖아.” “그렇지. 먼저 듣고 판단하는 조건으로 한결이의 정보를 걸었으니까.” “응. 실은 그 계획에 조금 문제점이 생겨서.” “문제점…? 설마 한결이?” 박환희는 대답대신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고, 이내 대단히 진심 어린 얼굴로 문제점을 토로했다. 별다른 내용은 아니었다. 한결이에게도 계획을 얘기했는데, 자신을 믿지 못해 동조하려 하지 않는다고 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직접 보고 파토 낸 만큼 이미 알고 있는 지루한 얘기들이 이어졌다. “내가 너한테 자기 정보를 얘기했다는 소리도 했어?” “했지. 그런데 당최 믿으려 하지 않더라고. 누나가 절대 그럴 리 없다면서.” “쯧. 이 바보 멍청이가. 왠지 요즘 들어 이상하다 싶었는데.” “응? 뭐가 이상해?” 박환희는 눈을 빛내며 재빠르게 물었다. 그러나 차유나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별거 아냐. 그냥 교관 한 명 얘기를 자꾸…. 아무튼 그래서 어쩔 거야?” “그게 나도 잘 모르겠어. 물론 내 잘못이 크긴 하지만 그렇게 격렬히 거부하는걸 보니 조금 충격이기도 하더라. 그만큼 미안하기도 하고, 어쩔 줄 모르기도 하고. 정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휴우.” 진정 안타까운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리는 박환희. 잠시간의 시간이 흘렀다. 차유나는 그 모습을 흘낏흘낏 바라보다가, 이내 조심스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냥 내가…. 말할까?” “저, 정말? 그래 줄 수 있어?” “꺄, 꺄악!” 마치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박환희는 펄쩍 뛰어올라 차유나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고, 그는 “앗 차.”한 얼굴로 허둥지둥 어깨를 짚은 손을 거두었다. 중요한 점은, 차유나는 움츠러들기만 했지 손을 치우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다가오지 말라고 했잖아!” “미, 미안!” “가, 갑자기 잡으면 어떡해…! 놀라서….” “나, 나도 모르게 그만. 너무 기뻐서 그랬어. 나도 참. 하하하.” ‘만남이 이번 한번이 아닌 모양이군.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정말로 기쁜 듯 벙글벙글 웃는 박환희가 부담스러운지, 차유나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목덜미는 약간이지만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광경을 확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전보다 더욱 진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후후. 고마워. 하지만 말은 내가 다시 해볼게.” “뭐, 뭐? 한결이가 믿지 않으려고 한다고 했잖아. 그 말까지 했는데도….” “그래. 하지만 내가 저지른 일이니, 내가 다시 신뢰를 회복시키고 싶어.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고, 진심을 보여주면 한결이도 곧 알아줄 거야. 유나 너처럼 천성은 착한 녀석이니까. 그러니 내게 조금만 더 기회를 주겠어?” “무, 무슨 소리를 갑자기. 뭐 마, 마음대로 해! 나중에 가서 도와달라고 울지나 말라고.” “응. 걱정 마. 실망시키지 않을게.” 간신히 표정을 유지하던 차유나는, 어깨가 잡혔던 시점부터 시시각각 무너지고 있었다. 박환희의 빤한 시선을 견디지 못하겠는지, 그녀는 이내 “할 말 없으면 갈 거야.” 라는 말만 남기고 휙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 그러나 차유나의 발걸음은 묘한 비틀거림을 담고 있었다. “휴.” 이윽고 저 멀리 사라지는 차유나를 확인한 순간 강한 한숨 소리가 이스터 에그에서 흘러나왔다. 다시 고개를 아래로 숙이자, 방금 전 대화에서는 일절 볼 수 없었던 표정을 띄우고 있는 박환희를 볼 수 있었다. 살짝 입 꼬리가 올라간 그 표정은, 명백한 비열함을 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하하. 오늘 분량이 조금 많지요? 진도는 빼야 하는데, 이것저것 넣을 내용이 많다 보니 평소 분량보다 훨씬 초과해 버렸네요. 하하하. 아무튼 힘든 월요일이 지났습니다. 오늘 힘을 너무 많이 썼는지 배가 너무 고파요. 아무래도 라면이라도 끓여 늦은 저녁을 먹어야겠습니다. :) PS. 전개가 느리고 지루하다고 느끼시는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전개 속도에 관해서는 처음 드렸던 말씀을 지킬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로> 필요 없는 부분은 빠르게 갈 수 있지만, 필요하다고 여기는 부분은 진행이 느리다고 욕을 먹더라도 천천히 갈 예정입니다. 많은 답답함을 느끼신다면 어느 정도 묵히셨다가, 독자 분들 개인이 만족할만한 분량이 쌓이셨을 때 한꺼번에 몰아서 보시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아마 전개 속도에 관해서는 이게 마지막으로 드리는 말씀이 될 것 같습니다. 『 리리플 』 1. EyeSeeYou : 안솔바라기 EyeSeeYou님! 1등 축하 드려요~. 하하하. 위에 바로 2등은 안솔의 화신(?)님께서 하셨군요. 혹시 이게 첫 1등이신가요? 1등 코멘트로는 처음 뵙는 것 같아서 말이에요. :) 2. 불곰리즈 : 아 불곰리즈님 ㅋㅋㅋㅋ. 오랜만에 뵈어요. 그 동안 어디 가셨다가 이제 오셨나요! 3. 破天魔痕 : 예. 저도 이상하게 렉 걸리더라고요. 등록 누르고 다른 사이트 맵을 누르면 로딩 화면만 떠요. 4. 엔조이플레이 : 서평 감사합니다. 인물들 능력치 하나하나 찾기 어려우셨을 텐데,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__) 5. Dicho : 그렇죠. 선과 욕망. 자기 합리화의 극치와 잘 어울리는 조합이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6. 으라라랏 : 예. 완결은 꼭 볼 생각입니다. 일단 부 또는 장으로 나눌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ㅋㅋㅋㅋ. 전개 속도는 위에서 말씀 드렸는데, 제 본 페이스를 지키기로 했습니다. 많은 독자 분들의 코멘트와, 지인 작가 분들의 소중한 조언에 힘입어 결단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필요 없는 부분은 빠르게 가지만, 필요하다 여기는 부분은 천천히 갈 생각입니다. 이 생각에는 더 이상 변함이 없을 겁니다. :) 7. 달리다쿰 : 네! 감사합니다! 전개가 느려서 답답하게 여기실 수도 있으니, 추후에 조금 많은 분량이 쌓였을 때 다시 들러주세요! 8. 석양s : 물론 석양s님처럼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 다만, 본 내용에 대해서는 지금 답을 드리기 보다는 차후 진행 내용으로 의문을 풀어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9. 눈물강 : 성향에 관해서는 저도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중간에 중립 또는 중용으로 바꾸는 게 나을까 싶었지요. 이 부분은 지금도 고민하고 있고, 눈물강님의 의견도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소중한 조언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심안은 중간에 설정을 한번 변경시켰습니다.(105회) 눈물강님이 말씀하신 본질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 힘드나, 아직 부각되지 않았다기 보다는 <제 3의 눈>으로 인해 묻혔다고 보시면 됩니다. 10. 으허 : 쿠폰 감사합니다. _(__)_ 앞으로 흔들리지 않고 본연의 자세를 지키며, 언제나 열심히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21 / 0933 ---------------------------------------------- Many 박환희와 차유나의 밀회를 목격한 이후, 나는 둘의 관계를 재조명할 필요성을 느꼈다. 물증 없는 심증뿐인 의심이긴 해도, 박환희의 연기와 차유나의 반응을 보자 뭔가 감이 오고 있었다. 차유나의 남자 친구인 백한결을 생각하면 고민이 들었지만 일단은 지켜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설프게 터뜨리기보다는, 이 부분을 어떻게 잘 매만지면 내가 원하는 구도를 그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백한결 영입 건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으니 이제는 더욱 상세한 정보를 모아야 할 때였다. 엄밀히 말하면 신규 인원들이 꾸미고 있는 계획의 본질에는 아직 다가가지 못한 상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 일상이 크게 바뀐 것은 없었다. 언제나처럼 통제와 생활 교관 업무를 겸하며 신규 사용자들의 동태를 살피는데 주력했다. 그렇게 외적으로는 조용하지만, 내적으로는 치열한 아카데미의 생활을 보내기 시작했다. 3주차에는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그 중에서 한가지를 꼽으라면 박현우와의 식사 약속이 미뤄진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거부한 게 아니라 황금 사자에서 김한별을 통해 의사를 전달해왔다. 그러고 보니 박현우와 성유빈은 가면 갈수록 아카데미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다른 바쁜 일에 정신이 팔려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일이 자못 궁금했고, 한별이를 통해 떠보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죄송해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뿐이었다. 가르쳐줄 수 없다라는 것 보다는 정말로 모른다는 뉘앙스가 강했다. 어차피 아예 취소된 게 아니라 미뤄진 일이라고 하니 일단은 기다려보기로 했다. 박환희가 말한 계획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결론적으로 딱히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뭔가 위화감은 느껴졌다. 신규 인원들답지 않게 굉장히 조직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네들이 겉으로 보이는 행동들은 신규 사용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도무지 꼬투리를 잡을 건더기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이미 계획에 대한 대부분이 추진되었다는 것. 나는 박환희가 말한 거래라는 단어에서 키워드를 잡을 수 있었다. 신규 인원들 주제에 이렇게 용의주도하게 움직이고, 3주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속도감 있게 일을 추진시켰다. ‘그 놈들 뒤를 봐주는 다른 클랜이 있다.’ 박환희는 굉장히 똑똑한 놈이었다. 그 놈이 미치지 않고서야 단순히 신규 인원들만을 규합해 단독 세력을 일으킬 리는 없다. 그런 짓을 벌일만한 클랜을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너무 많이 떠올랐기 때문에 곧바로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튼 대강 속내를 짐작한 나는, 결국 백한결을 제외한 다른 인원들 모두를 포기하는 초 강수를 두기로 했다. 확실한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클랜을 흑막으로 두고 있는 놈들을 건드릴 순 없다. 그리고 몇몇 괜찮은 사용자들은 보였지만 백한결 한 명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대신, <신의 방패>만큼은 어떻게든 뺏기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문득 현재 아카데미의 내부 상황이 상당히 복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환희를 필두로 한 신규 인원들의 계획. 그 뒤를 봐주고 있는 클랜. 황금 사자에서 흘러나오는 불안한 움직임. 김한별. 백한결과 차유나의 관계 등등. 하지만, 왠지 모르게 지금 이 상황들이 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현상들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알 수 없는 커다란 문제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터질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되려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조건 박살내고 깨부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처절한 암투는 오히려 익숙해 반가울 지경이었다. 설령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 흐름 속에서 살아남을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살아남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생존을 넘어서 그 흐름을 타고,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고, 그 속에서 최대한 이득을 취해야 한다. 그게 바로 사용자 아카데미에서의 내 최종 목표였다. * 박현우와의 식사 약속(을 빙자한 대담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은 교관 업무를 시작한지 한 달 하고도 절반이 넘었을 때야 다시 잡을 수 있었다. 박현우와 성유빈이 바쁜 동안 김한별은 별로 터치를 받지 않았는지, 나름 안정된 모습을 보였었다. 하지만 다시금 이야기를 꺼낼 때 내 눈치를 살피는걸 보니 아직 완전히 떨쳐내진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선선히 승낙함으로써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냥 너도밤나무와의 일로만 부르는 건 아닐 것 같았고, 황금 사자 내부에서 일고 있던 불안한 분위기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7주차가 끝나는 시점에 박현우와 다시 대담할 수 있었다. 그 동안 무척 많은 일이 있었는지,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수척해져 있었다. 박현우는 피로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최근 머셔너리 로드의 교관 업무에 대한 활동 보고를 받았습니다. 통제, 생활 교관들 중 가장 많은 지원과 활동을 하셨더군요. 정말 저희 클랜 산하 교관들이 보기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그저 추천해주신 분들께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했을 뿐입니다. 그리 칭찬하시니 부담스럽네요.” 첫 대화의 시작은 훈훈한 분위기로 출발선을 끊었다. 이윽고 우리는 천천히 식사를 하며 조금씩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덕분에 한별이도 많은 것을 배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끔 볼 때마다 항상 머셔너리 로드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귀가 떨어질 지경입니다.” “오히려 제가 항상 고맙죠. 그녀 덕분에 교관 업무를 더욱 편하게 할 수 있으니까요.” “여전히 겸손하시군요. 다른 클랜들이 머셔너리 로드에 대한, 그리고 머셔너리 클랜에 대한 평가를 좋게 내리는 이유도 알 것 같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일이 바빠 근황도 여쭈지 못했네요. 혹시 지내시는데 따로 불편한 점은 없으신지요. 예를 들어 숙소 생활이라거나….” 뻔히 알고 있으면서 저렇게 물어오니 얄밉기도 하고, 한별이가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씹고 있던 음식을 억지로 목구멍으로 밀어 넣은 후,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서로 성별이 다르다 보니 처음에는 불편함이 없지는 않았지요. 그래도 지금껏 서로 배려하고 양보했기 때문에 크게 거북스럽지는 않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말투에 은근한 날이 서 있는 것 같았다. 박현우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애매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아 그렇군요. 그때 하도 상황이 어지러워 그저 평소대로 나눴을 뿐인데, 차마 생각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크게 불편하지는 않으시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염치 불구하지만, 앞으로도 한별이를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하하.” ‘곧 죽어도 방을 바꾸겠다고 하지는 않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내부에서 쓴 물이 계속해서 올라왔다. 통과 의례 시절 예리하고 총명했던 한별의 모습이 떠올리자, 마음 속 씁쓸함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 애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내몰린 걸까. “아. 그러고 보니 머셔너리 로드께 알려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식사 후 가지는 티타임에서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는 동안, 박현우는 이 분위기를 반전시킬 묘수가 있는지 잠시 품 속을 뒤적거렸다. 이윽고 그는 동그랗게 말린 기록 하나를 내게 건네주었다. 중앙 부분에 황금 사자의 문양이 찍힌 것을 보니 클랜 내부에서 작성한 보고서 같았다. 나는 순순히 그것을 받아 든 후 차분히 펼쳐보았다. 그리고 상단에 적혀있는 제목을 보는 순간, 눈이 한껏 가늘어짐을 느꼈다. ‘북부 소도시 뮬의 대표 클랜 너도 밤나무와 머셔너리 클랜간의 충돌 보고. 담당 간부 성유빈.’ “이건….” “일단 계속 읽어보시죠. 얘기는 그 후에.” 호의 어린 얼굴로 미소 짓는 그를 흘끗 바라봤다가, 이내 다시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곳에는 뮬에서 있었던 너도밤나무 클랜과의 충돌이 간략히 적혀있었다. 그것들을 주루룩 읽어 내리자, 곧 하단부, 즉 결론을 적는 곳에 한 줄로 써져 있는 문장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너도밤나무 클랜의 선공 사실 확인.(머셔너리 로드 클랜의 정당방위 입증 가능.)>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성유빈이 힘을 쓴 건가? 아니야. 그것 말고도….’ 조사를 받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일이 정리됐다. 잠깐 동안 생각을 정리한 나는 기록을 다시 건네주며 묘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도밤나무 클랜과의 충돌은 사실입니다. 그 과정에서 산하 클랜원 두 명을 죽인 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조사를 받은 기억이 없는데….” “아. 조사야 흔적으로 판별하기 어려울 때 하는 일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큰 일도 아니었고…. 아무튼 흔적이 잔뜩 남아있어 생각보다 손쉽게 진상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음. 그런데 개인적으로 몇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여쭤봐도 될까요.” “그러시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머셔너리 클랜은 떳떳합니다. 숨김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하하. 지금 와서 조사를 하자는 게 아닙니다. 선공을 당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명분은 확실하거든요. 분명히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만큼의 위력이 담긴 흔적이 몇 개나 발견되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굳이 너도밤나무의 산하 클랜원들을 살해하실 필요까지 있었나 싶어서 말이죠.” “네. 있었습니다.” 단호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박현우의 표정은 침착했다. 하기야 이미 기록으로는 결정이 난 상태였고, 그 또한 마음을 정한 것 같아 보였다. 지금 이 대담은 그저 형식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마치 조금 더 자세한 속사정을 궁금해하는 것처럼, 말 그대로 개인적인 질문에 불과하다는 티를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첫 만남은 절규의 동굴이란 곳을 탐험한 후 뮬로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이미 이 때를 대비해 우리에게 유리하게 말할 수 있는 말들을 잔뜩 준비해두고 있었다. 사실상 준비랄 것도 없었다. 있는 그대로만 말해도 우리가 혐의를 받을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유적 조사가 미뤄진 것부터 앞뒤 정황을 모두 자르고 가입 권유를 한 사실. 그 권유에 은근히 우리가 이루어낸 성과를 탐내고 있었다는 뉘앙스. 0년 차에 불과한 애들을 향해 목숨을 위험하게 할 수준의 위협을 가했다는 점. 반다희의 고연주를 향한 도발. 그리고 10강을 향해 실제 공격을 가한 후, 제압당한 뒤 내 얼굴에 침을 뱉은 것 등등. 마지막으로 차승현에 대한 얘기로 마무리를 짓자, 헛웃음을 흘리는 박현우의 얼굴이 보였다. “허…. 설마 그런 말들이 오고 간 줄은 몰랐습니다. 그 사용자의 정신 상태가 의심스러울 정도에요. 아. 그런데 그 반다희라는 사용자는 그림자 여왕이 직접 처형을 했다고요?” “예. 정중한 사과를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제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오히려 언젠가는 저와 고연주를 죽여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하더군요. 그 말을 들은 순간 그녀를 제압하고 있던 고연주가 곧바로 단검을 찔러 넣었습니다.” “더 볼 것도, 들을 것도 없겠군요. 알겠습니다. 어차피 그 건에 대해서는 저희 내부적으로 결론을 낸 상태니 더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산하 클랜을 통제하지 못한 저희들이 사과를 드려야겠군요. 휴. 어쩌다 그런 클랜을 대표 클랜으로….”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때는 한창 원정 중이라 차마 신경 쓰지 못하셨을 게 당연합니다.” “하하.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뭔가 원하는 게 있군.’ 황금 사자는 필요 이상으로 저자세로 나오고 있었다. 물론 조금 더 자세히 파고 들었어도 어차피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이긴 했다. 거기다 <그림자 여왕> 고연주가 개입되어 있고, 박현우가 인정한대로 명분도 충분했다. 그러나, 어찌됐든 산하 클랜의 일이라 외부적으로 공론화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 일을 처리해주었다. 이것은 그들 나름의 분명한 호의라고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황금 사자에서 뭔가 내게 원하는 바가 있다는 소리였다. 다시 기록을 받아 든 박현우는 태연한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더니 허리를 똑바로 세우며 입을 열었다. “그럼 너도밤나무에 관한 건은 이정도로 마무리를 짓고…. 이제 그만 다른 화제로 넘어가고 싶군요. 아니, 본론이라고 해야 옳을까요.” “…….” “실은 오늘 머셔너리 로드를 따로 초대한 이유는, 긴히 부탁 드리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올게 왔군.’ 대충 예상하고 있었지만, 나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마치 황금 사자에서 내게 부탁할 일이 있느냐는 듯이. 그는 내 반응을 보고 미약하게 웃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음. 일전에 그림자 여왕에게 출입증을 부여한적이 있잖습니까. 그 이후로 지금껏 두세 번 정도 아카데미를 방문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다음 방문 일정을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왜 궁금해하시는 거죠.” 내 반문은 클랜 로드로써 당연히 갖고 있는 권리였다. 그러나 박현우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가 내 얼굴을 봤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가 내 얼굴을 봤다가. 뭔가 굉장히 고민하고, 망설이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실제로 고연주는 7주차가 지나는 동안 총 두 번 방문했고, 8주차에 다시 한번 방문할 예정이었다.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는 이렇다 할 일이 없었기에 그냥 보고만 받고, 잠시 같이 시간을 보낸 후 돌려보냈었다. 나는 아쉬울 것 없다는 표정을 드러내며 차분히 차를 한 모금 삼켰다. 머리가 상쾌해지는 청량한 감이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차를 서너 모금 넘겼을 무렵이었다. 비로소, 꾹 닫혀있던 박현우의 무거운 입술이 조금씩 열리는 게 보였다. “머셔너리 로드. 지금부터 말씀 드리는 것은, 꼭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독자 분들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몸이 너무 안 좋네요. ㅜ.ㅠ 후기는 이번 회 생략하고, 리리플은 다음 회와 합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독자 분들의 많은 양해 부탁 드립니다. 0222 / 0933 ---------------------------------------------- Many ‘비밀이라. 역시 최근에 일이 있었나 보군.’ 속으로 나이스를 외쳤지만, 겉으로는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지어주었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한번 끄덕여주자 박현우는 입술을 침으로 적셨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렇게 긴장하고,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는 걸까? “음…. 그러면 믿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제는 거의 두 달 가까이 지난 일이네요. 혹시 소집령으로 여러 클랜들이 모였던 때를 기억하시는지요?” “물론입니다.” “그럼 대모님도 기억하고 계시겠군요.” “그때 한번밖에 뵙지 못했지만,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모. 9년 차 사용자 손분례. 과거 황금 사자의 초석을 마련하고, 클랜의 전성기를 이끈 전설적인 인물. 사용자 개인 능력을 떠나 여러 거물들이 모인 자리를 통제하는 모습은 제법 볼만했던 만큼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설마 그녀가 언급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나는 다음에 이어질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군요. 그럼 바로 그 이후의 이야기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당시에 대모님은 소집령이 끝난 이후 곧바로 길을 떠나셨습니다. 강철 산맥 원정에서 큰 부상을 입은 저희 클랜 로드를 치료하기 위해서였죠.” “아. 아직도 별다른 차도가 없으신가 봅니다.” “예. 간신히 목숨은 건졌습니다만…. 아무튼 그때 대모님은 단순히 동부 산맥으로 간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자세한 행선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으셨고요.” ‘클랜 로드의 상태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주기 싫나 보군.’ 묻어가는 식으로 한번 찔러봤지만, 박현우는 이미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만 슬쩍 언급하며 말을 아꼈다. 이윽고 그는 양손에 깍지를 끼며 말을 이었다. “일전에 봐두신 치료약을 찾으러 가신 것 같은데…. 솔직히 말씀 드리면 시작의 여관 포탈이 열린 이후로 단 한번도 연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무려 7주가 지나도록 말이죠.” “언제 돌아오신다고 말씀은 하셨나요?” “그건 아닙니다.” “그러면 딱히 이상할건 없을 것 같은데요. 치료약을 찾는데 예상외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 “정 불안하시면 추적 능력이 뛰어난 사용자들로 조사단을 구성해 파견하시는 것도….” “실은 이미 파견한 상태입니다.” 박현우는 우울한 목소리로 대꾸하고는 연초 한대를 꺼내 들었다. 양해를 구하는 눈빛에 나 또한 연초를 마주 꺼내는 것으로 화답해주었다. 마나 스톤을 점화시켜 서로 불을 붙여준 후 우리들은 동시에 잿빛 연기를 내뿜었다. “…내부에 복잡한 사정이 있습니다. 클랜원들을 제외한. 아니, 간부와 몇몇 클랜원들을 제외하면 이 사정을 모르고 있는 이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자세한 말씀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이해합니다.” “감사합니다. 어쨌든 그 사정은 차치하고서라도, 대모님은 얼른 복귀하셔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외적인 상황을 봐도 그렇고, 내적인 상황을 봐도 그렇습니다. 머셔너리 로드께서는 홀 플레인으로 들어 오신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잘 모르시는 것들이 많으실 겁니다. 지금, 북 대륙은 혼돈 그 자체입니다. 너무나도 뒤숭숭하단 말입니다….” 박현우의 표정에는 일말의 거드름도 찾을 수 없었다. 어찌 보면 하소연을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만큼 그는 오롯한 진심을 담아 당장에라도 쓰러지고픈 얼굴로 간신히 말을 잇고 있었다. 나는 박현우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그저 애꿎은 연초만 쭉 빨아들였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조사단은 진작에 파견했습니다. 그저 연락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다 까놓고 밝히자면, 클랜 내 제일의 추적 능력을 갖고 있는 사용자가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대모님을 찾지 못했습니다.” “흔적이 지워져 있었던가요?” “정확히 말하면 동부 도시로 들어가시기 전까지의 흔적은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의 흔적은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워낙 신묘하게 움직이는 분이시기도 하지만…. 의도적으로 흔적을 지우실 분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흔적을 지웠다는 말씀처럼 들리는군요.”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애초에 워프 게이트를 이용하신 이상, 누군가 계획적으로 움직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조사단은 현재 동부 산맥으로 임의로 진입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대모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는 보고만 연일 들려오고 있습니다.” ‘확실히 이상하게 여길 만도 하네. 하지만 대모 정도의 사용자라면 그렇게 걱정을…. 아.’ 문득 회의실을 나서는 그녀의 정보를 확인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그녀 또한 내부적으로 깊은 상처를 떠안고 있었다. 예전 전설로 불리던 시절과 비교하면 상당히 약화된 상태였다. 박현우는 설명은 다 끝냈다는 듯 크게 숨을 내쉬며 연초를 털었다. 아직 남아있는 불씨가 춤추듯 흩날리다가, 허공 속으로 천천히 녹아 들어갔다. 잠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진중했던 처음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내부의 힘으로 안 된다면 외부의 힘이라도 빌려야 할 판입니다.” “그래서 고연주의 방문 일정을 물으신 거군요.” “예 그렇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린다면 그녀의 능력을 꼭 빌리고 싶습니다. 10강에 이른 그림자 여왕의 추적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납니다. 분명 그녀라면 저희 클랜에서 놓친 다른 뭔가를 발견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머셔너리 로드께도 부탁 드립니다. 설령 성과를 얻지 못해도 좋습니다. 부디 이번 한번만 도와주신다면, 황금 사자는 절대로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부탁하는 박현우를 보며 나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 여러 생각들이 휘몰아치듯 떠올라 머릿속을 빠르게 점령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현재 진행하고 있는 클랜일들과 저울질하고 있는 도중이었다. 공기를 타고 흘러오는, 나를 꿰뚫을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살며시 고개를 들어올리니 얼굴은 여전히 피로하지만, 형형히 빛나고 있는 박현우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 시선을 똑바로 맞받아치며, 나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건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 박현우와의 대담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그저 작은 정보라도 하나 건질 수 있을까 싶어 초대에 응했는데, 뜻밖으로 거대한 이야기를 들어버렸다. ‘거절했을 때 표정은 꽤나 볼만했지.’ 내 완곡한 거절을 들은 박현우의 얼굴을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힘들 것 같습니다.” 라는 말은 완전한 거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는 곧바로 8주차가 끝날 즈음 그녀가 방문할 것이라는 얘기를 해줌으로써 그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부탁을 거절하고 그냥 초반 계획대로 일을 진행시키는 것도 좋다. 부탁을 들어주고 황금 사자 클랜에게 빚을 하나 지게 하는 것도 좋다. 둘 모두 일장일단이 있지만, 나는 결국 판단을 고연주에게로 유보했다. 그곳에서 내가 직접적인 판단을 내리기 보다는, 현재 클랜의 계획을 도맡아 하고 있는 그녀가 더욱 좋은 결정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그 동안 받아먹은 것들이 많아 단칼에 거절하기도 조금 그랬으니, 고연주에게 가부 여부를 돌린 게 여러모로 최선의 방법이었다. 어느새 해는 저물고 있었다. 조용한 아카데미의 공터를 가로지르자 저녁 공기의 따뜻한 내음을 맡을 수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현재에 대해서. 1회 차 시절에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엄밀히 말하자면 잘 모른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이때는 고작 0년 차 사용자에 불과했고, 나 하나 앞가림하기에도 바쁜 시절이었다. 물론 미래는 비틀렸다. 이건 확실했다. 본래 지금쯤 서대륙의 발호와 서쪽 도시들의 함락이 이어져야 정상인데, 발호는커녕 어떤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가 여전히 살아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비틀린 부분을 바로 잡을지, 아니면 흐름을 따라 다른 방향으로 튈지는 내가 아직 가늠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문득, 방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하게 느껴졌던 공기들이, 갑자기 더 없이 불쾌하게 변한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숙소로 향하는 걸음을 바쁘게 놀렸다. * 사용자 아카데미의 8주차가 시작되었다. 총 수료 기간은 주로 따지면 13주에서 14주 사이로 볼 수 있었다. 즉 이제 절반을 조금 넘어가는 상황이었다. 훈련 강도는 1주차부터 서서히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있던 때와 비교를 해보자면, 8주차 훈련의 강도가 1주차와 비슷하다고 여길 정도였다. 어쨌든 신규 인원들도 지금껏 배운 게 있는 만큼 대부분 잘 적응하고 있었으며, 퇴소하고 싶어하는 인원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한번 의구심을 갖게 되니 모든 게 다 의심스럽게 보이는군.’ 현재 아카데미는 겉으로 보기에는 별 문제가 보이지 않았다. 다른 클랜들도 교육에 참가하고 있는 만큼 한두 명은 의심할 법도 한데, 다들 박환희를 칭찬하느라 여념이 없을 정도였다. 그네들이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해봐야 신규 사용자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가 좋다는 것 정도? 아이러니하게도 박환희의 그러한 점은 그의 가치를 한층 더 끌어올려 주고 있었다. 박환희를 영입할 수 있다면 그와 친한, 재능 있는 사용자들을 스카우트 하는데 더욱 용이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의 뒤를 봐주는 클랜이 있다고는 하지만, 박환희의 처세술이 꽤나 뛰어나다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나는 오늘 아침 한별이에게 받은 결재 판을 확인한 후 교육이 잡혀있는 강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오전 교육은 이미 마친 상태였고, 오후에는 체력 집체 교육이 있었다. 중앙 운동장으로 걸음을 옮기자, 멀리서 옹기종기 모여있는 신규 사용자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춰 그들의 대열을 살펴보았다. 언뜻 보면 그냥 무분별하게 흩어져 서로들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러나 마력을 일으켜 안력을 돋우자, 곧 이상한 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곧바로 그곳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뭐해?” “아. 아? 아! 안녕하세요…!” 한쪽 구석에 푹 수그리고 있던 백한결은, 내가 어깨를 짚자마자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묘하게 힘이 없었고, 얼굴 곳곳에 그늘이 져 있었다. 얼른 일어서려는 그에게 “아직 교육 시간은 조금 남았으니 괜찮아.” 라며 억지로 다시 앉힌 후, 천천히 그의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내가 자기 곁으로 온 게 상당히 반가웠는지, 그는 거의 눈물까지 글썽이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뭐 힘든 일이라도 있니? 왜 혼자서 궁상 떨고 앉아있어.” “그게….” 내 말에 조금 상처를 받았는지 백한결은 금세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이목이 향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재미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박환희를 둘러싸고 있는 사용자들. 그들 중에서 잔뜩 눈을 흘기고 있는 차유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눈길에는 못마땅함이 담겨 있는 게 아닌, 곱게 흘기는 눈초리 정도에 불과했다. 거기다 무에 그리 즐거운지 서로들 하하 호호 웃으며 상당히 유쾌해 보이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항상 꼭 붙어 다니던 예전과 비하면 굉장히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백한결은 아련한 눈길로 그곳을 보다가, 다시 의기소침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여자친구랑 싸웠니?” “…….” “그럼 헤어졌어? 대답은 없었다. 대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가, 다시금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얼굴은 굉장히 서러워 보였다. 입술을 비죽비죽 거리는 게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굴 것 같이 보였다. 나는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준 후, 입술에 침을 바르며 말했다. “헤어진 게 아니라면 다행이네. 그러면 여자친구랑 왜 다퉜는지 말해줄 수 있을까? 이래봬도 연애에 관해서는 제법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하거든.” “저, 정말이요?” “그럼. 내가 한때….” “김~수~현!” 내 말에 희망을 얻었는지 백한결이 눈을 반짝이려는 순간이었다. 저기 멀리서, 새침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내 귓가를 강하게 때렸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아마도 교육 교관인 연혜림이 온 것 같았다. 나는 쓰다듬던 그의 머리를 세게 헝클어트린 후 몸을 일으켰다. “이런, 교육 교관이 왔구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힘내렴. 혹시 힘들면 내 숙소로 찾아와도 괜찮아.” “저, 정말 그래도 되요?” “그럼. 거듭 말하지만 나는 통제 말고도 생활을 담당하고 있으니까. 신규 사용자들의 고민들 들어주는 것도 내 일이라고.” 발랐던 침이 점점 말라가고 있었다. 더 이상의 거짓말은 힘들 것 같아, 나는 마지막으로 힘주어 말한 후 연혜림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새침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반갑게 손을 흔드는 언밸런스 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오늘 하루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하니까 상당히 몸이 가뿐해졌습니다. 어제 다른 일은 아니고 차에 치일 뻔 했습니다. ㅜ.ㅠ 그게 차 잘못이라고는 보기 어려워요. 분명 도로에 아무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골목길에서 도로로 진입하려고 한 것 같은데, 저는 거리랑 속도를 보고 내가 그곳을 건너기전에 지나가겠구나 싶었죠. 그런데 잘 지나가던 차가 갑자기 멈추고, 계속 걸어가던 제 몸이랑 비끼듯 퍽 부딪친 겁니다. ㅇ(자동차)  ㅇ(자전거) ㅇ(저) 그림으로 표현하니 저렇게밖에 안 되는군요. 아무튼 다행히 지나가던 도중에 멈췄고, 저도 급하게 몸을 틀어서 그냥 부딪친 정도로 끝났어요. 뭔 일인가 싶어 보니까 교복 입은 학생 두 명이 자전거에 탄 채로 자동차 앞을 지나가고 있더군요. ㅡ_ㅡ 자동차에 탄 아저씨 십년감수한 얼굴로 있다가 도망치는 자전거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지르시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흑흑. 『 리리플(220회) 』 1. 미월야 : 1등 축하드립니다. 본의 아니게 4, 5연속 1등 코멘트를 제가 훼방을 놓은 것 같아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__) 그, 그래도. 이런 역경을 헤치고 하는 코멘트야 말로 진정한 1등 코멘트 입니다!(퍽퍽!) 2. Diableret : 답변은 주인공 보정으로 해드릴 수 있겠습니다. 네. 소설상에서 주인공이 어떤 행동을 하든 그것은 무조건적인 이득으로 변환해 되돌아오는 것으로…. 아, 아닙니다. 제가 잠시 헛소리를 했습니다. 흠흠. 3. 뒷골목꼬맹이 : 감사합니다. ㅜ.ㅠ 그, 그런데 화는 내지 말아주시어요. :) 4. 현오 : 현오님의 찰진 코멘트가 그립습니다. 그때 안솔의 행동을 보고 정확히 집으셨던 코멘트는, 여태껏 제 머릿속에 남아 저를 간간이 웃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찰진 코멘트의 정석 현오님의 코멘트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어요. 후후후. :D 5. 와룡선생a + 열혈소설소년 + [priest]프리스트 : 죄송해요. 저도 그 기분 잘 알고 있어요. 예전에 본의 아니게 처음 NTR을 접하고 그날 하루 멘붕 상태에 빠졌었죠. ㅜ.ㅠ 그래도 이미 말씀 드린 만큼, 아마 앞으로 내용에 직접적인 NTR(주인공 주변 기준)은 나오지 않고, 간접적인 NTR은(주인공하고는 상관 없는.) 나올 수도 있어요. 다만, 그 행위가 나오는 이유에 대해서는 납득하실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노력해서 내용을 전개해보겠습니다. 꾸벅! (--)(__) 『 리리플(221회) 』 1. 破天魔痕 : 1등 축하 드립니다. 하하. 낚으려고 한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조금 빨리 올릴 수 있었어요. ㅜ.ㅠ 저는 거짓말쟁이가 아니어요! 아, 아무튼 다시 한번 1등 축하 드려요. :) 부디 이번 회도 재미있게 감상해주세요. 2. 블라미 : 아무래도 다음부터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다녀야 할 것 같아요. 노래 들으면서 내용 구상하고 있다가 갑자기 눈 앞에 불빛이 번쩍이는데, 정말로 놀랐어요. 3. 설위 : 헉. 많이 복잡하셨어요? 조금 더 쉽게 쓸걸 그랬나 봐요. ;ㅇ; 혹시 이해가 가지 않으시는 부분 있으면 질문해주세요. 최대한 상세히 답변 드리겠습니다. :) 4. 딸기파이 : 죄, 죄송해요. 딸기파이님의 코멘트를 본 순간 왠지 모르게 귀여우시다고 생각해버렸어요. +ㅁ+ 5. letzgo02 : 헛! 결혼을 하신 독자 분이셨군요! 부럽습니다. 저, 저도 얼른 제 짝을 찾고 싶어요. 요즘 가끔 외롭습니다. ㅜ.ㅠ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23 / 0933 ---------------------------------------------- Many 백한결과 차유나의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완벽하게 갈라선 것은 아니었다. 아마 박환희의 거듭된 설득에도 불구하고 백한결이 넘어오지 않자, 결국 차유나가 직접 나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둘의 입장 차이에 따른 말다툼이 있었을 것이다. 박환희의 작전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번에도 파토를 내주기로 결심했다. 해서, 그날 이후 통제 지원을 아예 백한결의 시간표와 똑같이 맞춰버렸다. 교육 시간마다 백한결은 언제나 홀로 입장하고, 혼자 교육을 받았다. 이따금 박환희 옆에 앉은 차유나가 그를 향해 눈짓하는걸 봤지만 나름 고집이 있는지 고개를 돌리곤 했다. 그러나 얼굴 한 켠으로 외로움이 가득한 게 눈에 보이고 있었다. 그 와중 내가 할 일은, 차유나의 빈자리에 내가 대신 들어가는 것 이었다. 이 전략은 상당히 유효했다. 그전까지 많이 친해진 감은 있어도 서로 일정 거리를 두고 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형으로서 잘 챙겨주고, 외로움을 달래주자 약간 남아있던 거리감은 순식간에 좁혀졌다. 살짝 과장을 보탠다면 이후의 백한결은 한창 시절의 안솔이 생각날 만큼 나에게 들러붙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관계를 급진전시키는 동안, 나는 고연주와 한번 연락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카데미에 와서 바로 결정하는 것 보다는 미리 얘기해주고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외출증을 받으러 가자, 내 생각을 들은 박현우는 황금 사자의 통신 시설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제안은 단호히 거절했다. 클랜 내부에 있는 통신시설은 도청 또는 기록이 남을 위험이 있었다. 차라리 돈을 조금 들이더라도 바바라 내부에서 1회용 통신을 이용하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한두 번의 권유가 더 이어졌지만 결국 외출증을 끊을 수 있었고, 전령을 보내 고연주와의 통신 일정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고연주와 통신 예약이 잡힌 날. 내 말을 주의 깊게 들은 그녀는,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머. 미친놈.) “…….” (아. 우리 여보 한 테 한 말은 아니에요.) “아니 잠시만요. 방금 전 호칭은 뭐죠. 제가 잘못 들은 건가요?” 내 태클에 고연주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까르르 웃었다. (사소한 건 넘어가요. 아무튼 박현우 그 놈. 심히 건방지네요.) “고연주. 그렇게 가볍게만 생각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장난스럽게만 받아들이는 것 같아 살짝 핀잔하는 어조로 말하자 그녀는 곧바로 웃음을 그쳤다. 그러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윽고, 가느다란 호선을 그리고 있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수현. 황금 사자를 믿지 말아요.) “…….” 황금 사자를 믿지 말라. 단순한 몇 마디에 불과했지만, 너무도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고연주는 또렷한 눈동자로 나를 한번 보고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 자리에서 결정하지 않은 건 정말 좋은 선택이었어요. 미리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덕분에 조금 알아볼 시간을 벌었어요.) “고생하는 건 제가 아니라 고연주인데요. 미안합니다.” (아이 참.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원래 출장 나간 남편을 내조하는 건 부인의 역할이랍니다~.) “하하.” 어색한 분위기를 풀고 싶은지 <그림자 여왕>이 내 앞에서 애교를 피웠다. 그것을 보자 절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고연주의 얼굴에서 부담을 느끼는 기색은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살살 눈웃음치며 간드러진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마 걱정하지 말라는 그녀의 우회적인 표현이리라. “알겠습니다. 그럼 8주차 이후로 만날 수 있겠군요.” (앗. 벌써 끊으시려는 건가요?) “다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럼 뽀뽀 한번 해주고 가요. 안 그러면 못 보내요.) 고연주는 서운한 표정을 짓고는 수정구에 대구 오므린 입술을 들이밀었다. 나는 잠시간 그녀의 얇고 부드러운 살을 응시하다가 이내 화면에 보이는 입술 위로 살짝 내 입술을 덮었다. 그 순간 <그림자 여왕>의 얼굴이 당혹감에 물들더니 눈이 크게 떠지는걸 볼 수 있었다. (……?!) “그럼 다음에 봅시다.” (수, 수현? 수현!) 놀라움이 뒤섞인 목소리가 들렸지만, 곧바로 통신을 끄고 수정을 쥐어 부쉈다. 산산이 나뉘어 조각조각 떨어지는 파편들을 지르밟은 후, 나는 사용자 아카데미로 걸음을 옮겼다. 문득 얼굴을 감싸는 바람이 무척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8주차도 서서히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아니, 사실상 교육은 끝났다고 봐도 좋았다. 이미 특별 훈련은 폐지된 지 오래였고, 주말은 신규 인원들이 쉬는 날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니까. 내일은 고연주가 아카데미로 방문하는 날이었다. 그러나 내게로 바로 오기보다는 박현우를 먼저 찾아가 담판을 짓는다고 했으니 약속 시간을 조금 늦추기로 했다. 아무튼 내일 하루는 쭉 비워둘 필요가 있어, 오늘 내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몇 가지 있었다. ‘벌써 해가 넘어가네.’ 나는 아침에 백한결을 찾아갔다. 저번에 외출했을 때 사온 군것질거리들을 전해주기 위함이었다. 숙소 한구석에 콕 박혀있는 녀석을 보자 무척이나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참 박환희나 차유나나 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박환희는 나처럼 사람의 성격과 감정을 이용하고 흔들 줄 아는 놈이었다. 백한결은 여자친구에게 의지를 많이 하고 외로움을 잘 타는 성격이다. 아마 내가 없었으면 진작에 흔들려 넘어갔을 것이다. 몰래 불러내 사온 간식들을 전해주자 백한결은 환하게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남자 주제에 정말 고운 선을 가지고 있어 순간 아찔함을 느꼈을 정도였다. 나와 같이 먹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오후에도 할 일들이 많아 그 요구에는 응해줄 수 없었다. 점심 즈음에 9주차 교육 회의에 들어가고, 성현민의 강력한 요청으로 함께 식사를 하자 어느덧 날이 저물고 있었다. 처음에는 한(韓) 클랜만 동석했던 게, 리버스 클랜을 필두로 하나 둘 늘어나다 보니 제법 시간이 길어지고 말았다. 밤 끝까지 달릴 기세라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1주중 6일째(홀 플레인의 시간은 현대와 동일한 시간을 따른다.)를 매듭짓고 거처로 걸음을 옮겼다. 막 복도를 돌아 들어가려는 찰나, 내 숙소의 문이 활짝 열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응? 왜 쟤들이….’ 숙소 문 앞에는 총 두 명의 사용자가 있었다. 한 명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김한별이었고, 다른 한 명은 내게서 몸을 뒤돌 린 상태라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낯설지 않았다. 좁은 어깨,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몸.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우물쭈물 거리는 태도. 나는 곧바로 그를 향해 말을 걸었다. “한결아?” “아. 오빠…. 교관님?” “아, 아!” 분명 백한결을 불렀는데, 한별과 백한결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한별이는 묘하게 날이 선 얼굴을 하고 있다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백한결은 서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나를 본 순간 마치 구세주라도 본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곧장 그들에게로 걸어갔다. “무슨 일이야? 왜 둘이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어?” “그게. 신규 사용자가 교관님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요.” 김한별은 이해가 가지 않는듯한 눈초리로 백한결을 쏘아보았다. 둘의 태도를 보자 곧바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얼른 자리를 빠져 나오지 않았다면 이 좋은 기회를 놓쳤을 것이다. 나는 십년감수한 기분으로 백한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한별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드는 게 보였다. “한결아. 무슨 일로 왔어?” “그, 그게….”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자 백한결은 수줍은 얼굴로 손을 들어올렸다. 그 손에는, 오늘 아침에 건네준 군것질거리들이 가득 담겨있었다. 대충 양을 가늠하니 거의 줄지 않은 상태였다. ‘거의 먹지 않았네. 설마 돌려주려고 가져온 건가? 왜?’ 내 의문은, 다음에 이어진 그의 말에 깨끗이 날아가버렸다. “혼자 먹기 싫어서요…. 형이랑 같이 먹고 싶어서….” “혀, 형?” 김한별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다그치자 백한결은 곧바로 목을 움츠렸다. 일단은 상황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손을 들어 한별을 진정시켰다. 그녀는 여전히 의아함이 가득 찬 눈동자로 내게 시선을 던졌다. “둘만 있을 때는 내가 그렇게 불러도 된다고 했어.” “아, 아무리 그래도. 하. 알았어요. 그럼 여기는 왜 찾아온 거에요? 이곳은 엄연한 교관 숙소에요. 신규 사용자들이….” “내가 찾아와도 된다고 했어. 오지 말라는 규칙도 없고, 그 정도는 내 재량으로 바꿀 수 있는 거잖아.” “하지만….” 아카데미에서 다시 만난 이후 한별은 웬만하면 내 말을 따르고 양보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예전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백한결의 방문은 나로서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로 놓칠 생각이 없었다. 나는 그의 등에 손을 얹고 곧장 숙소 안으로 입실했다. “자. 들어와.” “고, 고맙습니다.” 백한결은 아직도 멀뚱히 서있는 한별에게도 고개를 슬쩍 숙이고는,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결재 판을 한쪽 구석으로 치우고 백한결을 자리에 앉혔다. 그는 교관 숙소는 처음 보는지 신기해하는 눈동자로 이곳 저곳을 둘러보다가 이내 나와 눈을 마주치자 얼굴을 붉혔다. 아직까지는 뭔가 불편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나는 백한결이 들고 온 주전부리들을 테이블 위로 쏟은 후, 한별이에게 마실 것을 부탁했다.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지만 내 부탁에 따라 상자를 뒤적였다. 백한결은 내 눈치만 조용히 살피고 있었다. 아무래도 먼저 말을 꺼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래. 오늘 나를 찾아온 이유가 단순히 이걸 나눠먹고 싶어서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혹시 뭔가 고민이라도 있는 걸까?” 백한결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좋아. 무슨 고민이야?” “그게….” 백한결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한층 자상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다독여주었다. “한결아. 여기까지 왔잖아. 그리고 형 앞인데 그렇게 주저할 필요가 있을까?” “아, 아니요!” “그럼 말해봐. 허심탄회하게.” “실은…. 그게요…. 여자친구 때문에….” 탱! 탱그르르…. 갑작스레 들린 소음에 고개를 돌리자 한별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백한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음료수를 들고 오다가 떨어트린 것 같았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한번 휘저은 후, 다시금 시선을 집중시켰다. “아 걔? 차유나라고 했던가? 설마 아직도 화해 못한 거야?” “네. 최근 일주일 동안은 말도 한마디 못했어요.” “그래? 내가 보기엔 아니던데. 가끔 서로 눈 마주치는 것도 봤지.”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에요! 유나는…. 유나 누나는 지금 속고 있는 거에요.” ‘슬슬 본론인가.’ 백한결은 속이 굉장히 복잡한 듯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마침 한별이 갖고 온 연녹색 음료 하나를 컵에 따랐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놓은 군것질거리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군것질거리라고는 했지만 주전부리라고 보기에는 제법 가격이 나가는 것들도 있었다. 이윽고 작은 물방울 모양의 덩어리 하나를 집어 든 후, 컵 중앙으로 그것을 툭 떨구었다. 그리고 물방울과 음료가 닿은 순간이었다. 부글거리는 기포가 분수처럼 솟아오르더니 이내 맥주거품처럼 넘치듯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컵을 흔들어 잘 섞은 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한결에게로 곧바로 그것을 건넸다. “마셔봐. 체력 회복용 음료이긴 해도 수정을 섞었으니 내부를 진정시키는 효과도 있을걸.” “와. 감사합니다.” 아까부터 고맙다,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건지. 나는 빙긋 웃으며 컵을 들어올리는 백한결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거품을 한 모금 꼴깍 마신 그는 토끼 같은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내가 살짝 웃어주자 그제서야 헤실 헤실 웃으며 남은 음료를 한꺼번에 들이켰다. 곧 컵을 내려 놓은 그의 얼굴은 처음에 비해 한결 편안해져 있었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 “네!” “그래. 그럼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 “네. 자, 잠시만요. 잠깐 생각 좀….” 백한결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눈을 꼭 감았다. 그 순간 내 어깨를 톡톡 건드리는 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한별이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남아있는 의자를 보며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그녀는 곧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잠시 동안의 시간이 흘렀다. 컵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한별에게 “너도 만들어줄까.” 라는 시선을 보낼 무렵, 백한결이 눈을 뜬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저기…. 형은요. 박환희라는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환희? 글쎄. 드러난 것만 보면 예의 바르고, 품행단정하고, 성적 좋고, 인기가 많다는 것 정도? 한별이 너는 어떻게 생각해?” “다른 데는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성적은 괜찮다고 들었어요.” “역시….” 한별이다운 대답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와 한별의 대답을 들은 백한결의 안색에는 약간이지만 분하다는 기색이 서려있었다.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왜?” 의아한 얼굴로 되묻자, 백한결은 나와 만난 이후 처음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형이 잘못 알고 계신 거에요. 박환희는 그런 착한 사람이 아니에요. 위선자 불과한 사람이라고요. 모두가 그 남자한테 속고 있어요.” “한결아. 진정하고 차분하게 말해봐. 갑자기 그렇게 말하면 내가 아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는 없잖아.” “아. 죄, 죄송해요. 하지만 박환희는 정말로 나쁜 놈이에요. 이건 확실해요.” “그래. 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아. 그럼 네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들을 수 있을까?” “네. 지금 말씀 드릴게요. 대신 이건 꼭 비밀을 지켜주셔야 해요.” “그럼. 내 입은 무겁단다.” 내 장담에 백한결은 안심한 듯 살짝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는 바로 말하려는 듯 하다가, 김한별을 보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재빠르게 백한결을 안심시켰다. “괜찮아. 말해도 돼. 나랑 잘 아는 동생이야. 통과 의례도 함께 해왔으니,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애니까.” “아. 정말이요? 통과 의례…. 그럼 저도 안심하고 말씀 드릴게요. 실은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릴 것도 통과 의례에 대한 이야기에요.” “통과 의례라…. 좋아. 말해봐.” 내 말을 들은 순간 한별의 표정이 굳어진 것을 느꼈으나, 이어진 백한결의 말에 딱히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또렷한 눈동자와 시선을 맞췄다. “통과 의례로 떨어지고 난 후…. 그러니까 막 1일차가 시작된 날이었어요.” 백한결의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그 날을 회상하는 듯, 녀석의 눈가는 반쯤 감겨져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휴. 드디어 슬슬 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마 다 다음 회 즈음에는 터뜨릴 수 있을 것 같군요.(?) :) 아.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독자 분들 중에 몇몇 분들이 현재 결혼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실은 저는 결혼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환상(?) 비슷한걸 가지고 있었거든요. 예를 들어 제가 회사를 다녀오면,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아이들이 배꼽인사를 할거에요. 그리고 부인이 차려놓은 맛있는 식사를 하고, 새근새근 잠든 애들에 뺨에 입을 맞추고. 그리고 부인과 사랑을 속삭이며 같이 침대에 누워 하루를 마무리하는! 그런데 주변에 결혼한 형들이나, 가끔 코멘트나 듣는 얘기로는 다들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다.>라는 말로 귀결되더라고요.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_-a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걸까요? ;ㅇ;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 드립니다. 하하. 역시 자정에 올라오는 건 미월야님이 강세를 보이시는군요. 부디 원하시는 4, 5연속 1등을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이번 회도 재미있게 감상해주세요! 2. 센서티브 : 센서티브님도 충분히 빠르십니다. 하하. 아마 미월야님의 1등 코멘트를 끊으실 분이라면 센서티브님이 매우 유력하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3. GODTOP : 네! 괜찮습니다. 병원에 다녀왔는데, 이상은 없다고 하더라고요. 다행이에요~. 4. 힘쎈청년 : 네. 일은 곧 터질 예정이지만, 아카데미는 아직 조금 남은 상태에요. 혹시 많은 답답함을 느끼신다면, 조금 묵혀두셨다가 한꺼번에 읽으시는 것을 권해드리고 싶어요. :) 5. ads123 : 헐. 그래요? 저도 면허를 따기는 했는데. 흠. 그렇게 무단횡단을 한 경우에도 더 물어줘야 하나요? 잘 기억이 안 나네요. @_@ 6. 현오 : ㅋㅋㅋㅋㅋㅋㅋㅋ. 뭔가 의미심장한 코멘트였습니다. ㅋㅋㅋㅋ. 그렇죠. 허리는 남자의 생명(?)입니다. 에, 그런데 안현이 허리를 다쳤던가요? 기, 기억이…. 7. 키위머루 : 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습니다. 꼭 1000회를 넘기겠다는 소리가 아니라, 그냥 스스로 메모라이즈의 완결을 보고 싶어요. 8. 설위 : 오늘 조금 달달 한 부분을 섞어봤어요. 메모라이즈를 읽으시면서 웃은 적이 없으시다는 말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소중한 조언 감사합니다. (__) 9. 재밌는건뭘까? : 죄송해요. 그런데, 진행이 느려도 이게 맞는 것 같아요. 특히 다음 회, 다 다음 회는 아카데미에서 꼭 필요한 회거든요. 그걸 제대로 쓰지 않고 넘어가버리면, 차후 이어질 내용 또는 설정에 구멍이 생겨버려요. 무슨 말이냐 하면 독자 분들이 내용을 읽으시면서 이해를 못하시는 상황이 발생하고 말아요. 그리고 그건 저도 똑같아요. 설정에 구멍이 생기면, 어느 부분을 쓸 때, 스스로 이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게 느껴져요. 그렇게 되면 저도 쓰기 싫어지고, 그게 바로 리메이크의 욕구 또는 슬럼프로 이어져버리거든요. 그러니 제가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독자 분들의 깊은 양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__) 10. letzgo02 : 흠. 후기에도 말씀 드렸지만, 저는 결혼에 대한 환상이 있습니다. letzgo02님. letzgo02님의 말씀이 사실이신지요. 아, 아니라고 말씀해주세요. 제발 요. ㅜ.ㅠ 흑흑흑흑….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24 / 0933 ---------------------------------------------- 오해는 오해를 낳고 “그러니까요. 소환의 방…이라고 해야 하나? 그곳에서 깨어난 후, 천사 님들의 인도에 따라 통과 의례로 들어가게 됐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유나가 보였고, 그 외에 몇몇 사람들도 공터에 빙 둘러앉아 있었어요.” 백한결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약간 더듬거리긴 했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 녀석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려보았다. “여러 명의 사람들이 보였어요. 설명을 들었다고는 해도 다들 혼란스러워했고, 불안해하고 있었죠. 그런데 그 중에서 유달리 침착한 남자가 한 명 있었어요. 그는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 중앙으로 나섰고, 순식간에 이목을 끌었죠. 그게 바로 박환희와의 첫만남이에요.” 박환희를 언급할 때 이를 까득 깨문 백한결은 이내 작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이윽고 이어지는 1일차, 2일차의 이야기는 솔직히 말해 별 것 없었다. 그저 박환희가 사람들을 이끌고, 숲을 탈출하고, 포인트를 발견하고, 또 다른 생존자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행동했다. 그리고 그 와중 박환희의 리더십이 빛났다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우리들은 2일차를 넘길 수 있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박환희를 철썩 같이 믿고 있었죠. 이 남자라면 우리가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이끌어줄 수 있을 것이다. 정신적으로 불안한 와중에도 그 지옥 같던 곳을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살고 싶다는, 그리고 살 수 있다는 희망 덕분이었어요. 그리고 그 희망의 중심에는 박환희가 있었고요. 그렇게 지옥 같은 이틀을 보내고 3일차를 맞이한 날이었어요.” 이어지는 말을 들어보자 처음 공터 인원부터 시작해서 그 후로 총 세 번의 생존자 무리들을 마주쳤다고 한다. 그리고 박환희는 그 생존자들을 모조리 자기 팀으로 끌어들였다. 겉으로 내세운 명분으로는 함께 힘을 합쳐 이곳에서 살아남자고 했을 것이고, 고유 능력인 카리스마도 한몫 거들었을 것이다. 불협화음만 조절할 수 있다면 덩치를 불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일단 한 명이라도 많을수록 전투력은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협화음은 둘째 치고서라도, 통과 의례에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식량 부족 문제. 한두 팀이면 몰라도 네 팀이 합친 상태라면 한 포인트에 있는 식량으로는 하루는커녕 한두 끼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때 저희 팀 인원은 남성의 비율이 굉장히 높았어요. 식량은 최대한 아끼고 아꼈지만, 그나마 다들 입에 풀칠하는 정도였죠. 이상하게 2일차 동안 생존자는 많이 만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반대로, 그때까지 포인트는 딱 한번밖에 발견하지 못했고요.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지만 결국 3일차를 맞이한 날. 가지고 있던 식량이 전부 떨어지고 말았어요.” “그럼 식량을 구해야 했을 텐데.” “네. 그때까지만 해도 안으로 진입할 때를 제외하고 최대한의 안전을 추구하던 박환희도 결국 멀리까지라도 식량을 구해야겠다는 말을 꺼냈어요. 그리고 식량을 구하러 나가는 지원자를 모집했지요. 하지만 밖에는 괴물들이 득실거리는데 누가 선뜻 지원하고 싶었겠어요? 저도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놀라운 일?” 내 반문에 백한결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바로 입을 열었다. 녀석이 말한 놀라운 일은, 다름아닌 박환희가 가장 먼저 지원자로 나섰다는 것이었다. “식량 때문에 다들 불만은 있었지만 그래도 다들 박환희를 신뢰하고 있었어요. 어쨌거나 그는 리더로서는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고, 결과도 나쁘지 않았으니까요. 그 희생 정신에 감동했는지 그때까지 눈치만 보던 사람들은 한 명 두 명 지원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저와 유나 누나도 그 지원자들 중에 한 명이었고요.” “식량을 모으러 나가는데 지원을 했다라.” “네. 솔직히 저는 남자들 중에 많이 어린 편이었고 유나 누나는 몇 없는 여자였어요. 창피하지만 거의 깍두기 같은 존재였거든요. 눈치도 조금 본건 사실이었지만 뭐라도 돕고 싶었어요.” 백한결의 대처는 나름 적절했다고 할 수 있었다. 통과 의례 같은 생존이 중요시되는 곳에 대규모의 인원들이 모이면 언제가 됐든, 한번 정도는 어떤 불만이라도 터져 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 불만의 화살은 팀에서 가장 기여도가 낮은 인원들에게 쏠리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며 계속해서 그의 말에 집중했다. 박환희가 먼저 지원함으로써 식량을 탐색할만한 인원은 꾸릴 수 있었다. 거진 열명이 넘는 인원들은 그때까지 얻었던 무기들로 단단히 무장을 하고 식량을 얻으러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다행히 반나절을 탐험한 끝에 새로운 포인트를 발견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많지는 않지만 하루는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식량을 얻을 수 있었다고 백한결은 말했다. “우리는 그 장소를 기억해놓기로 했어요. 2일차에 발견한 세이브 포인트는 하루 이상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있었거든요. 몇몇 인원을 남겨 놀까도 생각했지만 다 같이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 서로 식량을 나누어 들었고,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기로 했어요.” “아아. 세이브 포인트. 용케 그런 규칙을 확인했네.” “네. 그런 것들 모두 박환희가 세세하게 체크했었거든요. 아무튼 그렇게 되돌아가던 도중, 누군가 한 명이 의문을 제기했어요. 세이브 포인트의 안전은 하루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식량을 구하기까지 반나절이 걸렸으니, 아침에 소비했던 시간을 생각하면 기다리는 인원들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나 봐요. 박환희는 그 말을 일리 있다고 여겼고, 많은 고민 끝에 결국 방향을 틀기로 결정했어요.” “방향을 틀었다면…. 흠.” “갈 때는 산을 빙 돌아서 갔는데, 되돌아가는 길에는 그 산을 일직선으로 넘기로 했어요. 그러면 반나절이 걸리는 거리를 상당히 줄일 수 있었거든요.” ‘미쳤군. 아니, 애초에 숲을 겪어봤으면 웬만하면 그런 쪽은 피하고 싶었을 텐데?’ 이런 내 의문에 답하듯 곧바로 백한결은 말을 이었다. “물론 애초에 숲에서 시작한 사람들은 들어가기 꺼려했어요.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왔던 길을 되짚어가야 하지 않겠냐고…. 하지만 그 길이 또 안전하리라는 보장도 없었고 다들 신경이 곤두서있어서 조금 지쳐있는 상황이었어요. 또 나름대로 무장도 한 상태였고, 최악의 상황에는 식량도 있으니까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봐요. 결국 우리들은 산 안으로 진입했어요. 그리고 그건 최악의 선택이 되고 말았죠.” 이때까지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던 백한결은 드디어 말을 한번 멈췄다. 얼굴에는 침울한 빛이 가득한 게 아직 그때의 트라 우마를 떨치지 못한 것 같아 보였다. 나는 그 틈을 이용해 아까 만들어주었던 음료를 한번 더 만들어주기로 했다. 이윽고 거품이 흘러 넘치는 컵을 건네주자, 백한결은 약간이나마 밝아진 얼굴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음료를 한 모금 홀짝인 후,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괴물들이 모였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갑자기 왠 원숭이 같은 놈들이 우리를 쫓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마치 가지고 놀 듯 한 명씩 차례대로 낚아채가더라고요. 세 명이 연달아 괴물들에게 당해버렸고,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한 우리들은 죽어라 도망치기 시작했어요. 도망치는 와중 뒤에서 들리는 비명소리는…. 정말이지 끔찍했어요.” “싸울 생각은 안 했어?” “모르겠어요. 아니, 솔직히 못한 것 같아요. 맨 앞에 있던 박환희가 달리는 순간 그를 따라 정신 없이 달렸거든요. 그때 처음으로 그의 다급해하는 표정을 볼 수 있었죠. 그때 그는 혼잣말로 계속 중얼거리면서 앞으로 뛰어나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욕 같기도 했어요. 그렇게 우리들은 계속 뛰었지만, 동료들은 한 명 한 명 없어져갔어요. 그 원숭이들한테 잡힌 사람들도 있고 급하게 뛰다가 넘어진 사람도 있었을 거에요. 그렇게 산의 절반을 넘자, 처음 열명으로 출발했던 인원은 결국에는 다섯 명밖에 남지 않게 됐어요.” “그 중 세 명이 박환희랑 너, 그리고 여자친구야?” “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나 유나 누나는 보호 명목으로 일행들의 중앙에 있어서 끝까지 남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무려 5명이 넘는 사람들을 잡아갔지만, 그 원숭이들은 끈질겼어요. 하지만 겨우 정상을 넘고 내리막길을 타는 순간 저희들도 어느 정도 속력이 붙기 시작했어요.” “그래도 망키들을 따돌리기는 어려웠을 텐데. 걔들은 산을 정말 잘 타거든.” 망키라는 말에 백한결은 잠시 동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뭔가 짚이는 바가 있는 듯 “아.” 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망키요? 아, 그 원숭이들. 네. 아까처럼 가지고 노는 것 같은 상황을 일어나지 않았지만 꾸준하게 거리를 줄이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체력이 약한 유나 누나는 계속해서 뒤쳐졌어요. 누나를 끌고 달리던 저는, 앞서 달리던 박환희를 간신히 쫓아갈 수 있었죠. 계속해서 늘어지는 누나 때문에 저는 같이 가자고, 도와달라고 소리쳤어요. 제 말을 들었는지 그는 서서히 달리는 속도를 늦추더라고요. 저는 역시 리더라고 생각하면서 정말로 고마운 마음을 느꼈어요. 하지만, 그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어요.” “믿을 수 없는 일?” 내 반문에 백한결은 다시금 말을 멈췄다. 그때의 일을 정확하게 떠올리려는 듯 눈을 꼭 감았다가 다시 뜨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서너 번 반복했을 즈음, 그는 씹어먹을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네. 속도를 늦춰 제 옆으로 다가온 박환희는 발을 뻗어 한창 달리던 제 다리를 걸었어요.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은밀하게 말이에요.” “뭐…라고?” “저는 반사적으로 넘어지고 말았고, 덩달아 유나 누나도 함께 바닥에 부딪쳐서 구르고 말았죠. 당연히 망키들의 시선을 우리들에게 쏠렸어요. 그리고 그 틈을 타 박환희는 다시금 속력을 높여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나갔어요.” “그럼 다른 사람들은?” “가증스럽게도 우리들의 비명 소리를 듣고 잠시 시선이 쏠렸던 순간, 박환희는 곧바로 우리를 향해 팔을 내뻗었어요. 그리고 고민하는 표정을 내비치면서 몸을 돌려 달아나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해요. 그때 저를 마지막으로 응시하던, 그 비웃는 눈동자를요.” 백한결은 말을 마치고 차분히 음료를 들이켰다. 그것을 연거푸 마시게 한 효과가 있는지 말을 하는 중요한 부분을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꽤나 담담했다. 하지만, 눈동자만큼은 분노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동안 백한결을 보다가 이내 슬쩍 운을 띄워보기로 했다. 이것은 정말로 알고 싶어서 묻는 게 아닌, 일종의 시험용 질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옆에서 사늘한 목소리가 백한결에게 쏘아졌다. “한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네? 어떤 거요?” 김한별은 예의 예리한 눈동자로 백한결을 주시하고 있었다. 간만에 과거 그녀의 성격이 부활한 듯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는 점을 깨달은 것 같았다. “네 말이 사실이라고 치고. 그러면 그 괴물들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니? 넘어졌다면 뒤따라온 망키들에게 1순위로 표적이 되었을 텐데.” “그, 그건….” 백한결의 시선은 김한별의 얼굴에서 가슴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름답게 솟아오른 가슴 위로 황금색으로 빛나는 사자 문양을 본 순간, 그의 목 울대가 꿀꺽 움직였다. “그냥 천운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잘 기억은 나지 않아요.” ‘큭. 김한별은 믿을 수 없다는 건가? 뭐 나야 상관없지만.’ 김한별은 백한결의 대답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이내 내게로 고개를 돌렸고, 한별의 질문이 불안했는지 백한결도 내게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그 시선에는 뭔가 애원하는 어조가 섞여있었다. 마치 제발 믿어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김한별은 한번 더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하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들거든? 네 말이 거짓말일수도 있는 거니까.” “거, 거짓말이 아니에요!” “그럼. 그 박환희란 신규 사용자를 불러서 삼자대면을 할 수 있겠어? 자신 있니?” “할 수 있어요! 하, 하지만….” “그만.” ‘얘 오늘따라 정말 왜이래?’ 김한별의 말투는 왠지 모르게 백한결을 싫어하는 것 같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둘의 말다툼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곧바로 한별이에게 “입 조심해.” 라고, 더 이상 끼어들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내 신호를 받은 김한별은 미묘하게 분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백한결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는 울먹울먹한 눈동자로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그는 나와 김한별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심호흡을 한 후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많이 늦었습니다. 지금 바로 다음 회 쓰도록 하겠습니다. (__) 225회에는 몇 KB를 넣든, 223회에 말씀 드린 부분을 맞출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후기, 리리플은 225회에 합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0225 / 0933 ---------------------------------------------- 오해는 오해를 낳고 “거짓말이 아니에요. 제발 제 말을 믿어주세요.” “한결아 잠시만.” 금방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말투에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안심시켰다. 촉촉히 젖은 눈망울을 보자 남자가 맞나 의심이 들었지만, 제 3의 눈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아무튼 지금부터는 중요한 물밑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나는 머릿속을 채우는 실없는 생각들을 깨끗이 지운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나는 네 말을 믿는다.” “정말이요?” “그래. 정말로. 그런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네 말대로 박환희가 발을 걸었고, 너희들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어. 좋아. 박환희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른 표리부동한 사용자야. 그렇다고 쳐. 그래서?” “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다는 거야?” 내 질문은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한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예전에 박환희와 백한결의 대담에서 들을 수 있었으니까. 백한결은 서글픈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내 말의 의도를 깨달았는지 이내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요. 그런 일을 당했지만, 복수도 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겠지.” “…….” “네 심정은 이해해. 하지만 그걸 지금 와서 문제 삼기에는 너무 늦었어. 이곳은 홀 플레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현재 박환희의 평판이 어떤지는 알고 있잖아.” 한 명은 교관들에게 평판이 좋고 신규 인원들의 중심에 서 있다. 다른 한 명은 실제 잠재성은 가장 좋지만, 스스로 은둔함으로써 그저 그런 사용자로 평가 받고 있다. 물론 개인적인 복수심은 가져도 좋다. 하지만 현재 상태로는 박환희에게 복수는커녕 끌려가지만 않아도 다행인 상태였다. 어떻게 보면 잔인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지금 와서 뒤집기에는 둘 사이에 엄청난 격차가 벌어져있었다. 일단 현실을 다시 자각하게 해주었으니, 이제는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물어볼 차례였다. “네가 지금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뭐야? 네 억울함을 진정으로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야?” 백한결은 내 말을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윽고 그는 커다란 한숨을 내쉬며 쏟아내듯 입을 열었다. “하아. 아니요. 모르겠어요.” “네가 맨 처음 했던 질문을 떠올려봐.” “여자친구…. 유나….” 내 말에 백한결은 아릿한 눈길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입을 열어, 비로소 마음속 깊숙이 감추어두었던 속내를 하나씩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내가 짐작하고 있는 대로였다. 처음에는 박환희를 죽일 듯 미워했던 차유나였지만, 어느 날을 기점으로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거듭된 사과와 진심에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종래에는 자기의 곁에 있기 보다 그의 곁을 떠도는 경우가 잦아졌다고. “아무리 봐도 헤어진 것 같은데.” “크게 다투기는 했지만 헤어진 건 아니에요. 다만 계속해서 저한테 박환희와 다시 친하게 지낼 것을 요구하고, 그의 힘이 되어주기를 원하고 있어요.” “힘이라고?” “그냥…. 그 놈 주변에 신규 인원들이 많잖아요. 저보고 거기에 들어오라는 소리에요.” 백한결은 말을 하는 도중 계속해서 김한별을 의식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첫 대면부터 단단히 미운 털이 박힌 것 같았다. 실제로 내가봐도 한별이 조금 주제넘게 나섰던 감이 없잖아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너는 곧 죽어도 그 놈이랑 다시 관계를 쌓기 싫다 이 소리고.” “네. 하지만 유나 누나의 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요. 최근에는 서로 말도 안하고 있지만, 마지막으로 그랬거든요. 너는 그럼 나도 믿을 수 없는 거냐고…. 지금껏 몇 년 동안 함께 했고, 같은 일을 당했잖아요. 오죽하면 누나가 그랬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박환희는 믿을 수 없지만, 차유나는 믿을 수 있다.” “네.” 백한결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시 동안 조용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조용히 컵만 쥐었다 폈다 하던 그는 이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형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도 유나 누나가 저를 위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요. 지금은 화가 나서 서로 말도 안하고 있지만 조금 미안하기도 해요. 누나 말대로 제가 너무 의심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중증이군.’ 역시나 백한결의 차유나에 대한 의존도는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우선은 이 의존도를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할지 잠시 동안 고민하다가 이내 한가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한결아.” “네.” “형이 한가지 얘기를 해봐도 될까?” “네! 좋아요. 꼭 듣고 싶어요.” “혹시 인연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알고 있니?” “인연. 단어는 많이 들어봤는데,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지는 잘 모르겠어요.” 솔직하게 대답하는 백한결을 보며 나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 살살 타이르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도 너랑 똑같은 0년 차 사용자야. 6개월 전에 통과 의례를 거쳤고 지금은 한 클랜을 이끌고 있는 로드의 역할을 하고 있지. 그리고 지금 나와 함께하고 있는 클랜원들의 절반이 함께 통과 의례를 거친 애들이야.” “아. 맞아요! 형이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황금 사자의 오퍼를 받았지만, 동생들을 위해서 오퍼를 거절했다고 들었어요!” “그, 그건 또 어디서 들었니.”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반짝이는 그를 보자 절로 땀이 솟아나왔다. 나는 한두 번 목을 가다듬은 후 차분히 말을 이었다. “구구절절이 말하지는 않을게. 다만 한마디 해주고 싶은 건, 그 애들은 나에게 신뢰를 주었고 나는 그 믿음에 보답하고 싶었어. 그리고 그 과정 동안 우리들의 신뢰에 금이 갈만한 일들은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았단다. 그리 결과 우리들은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었지. 바로 지금처럼.” “아….” 그 순간, 옆에서 작은 비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김한별이 얼굴을 딱딱히 굳힌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시선을 돌렸다. 왜 저러는지 궁금했지만 일단 중요한 게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다시 백한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내 말을 곱씹는 듯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너는 너 스스로 박환희랑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해?” “하, 하지만 유나 누나가….” “여자친구가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지마. 네가 판단할 수 있고, 지금도 하고 있잖아. 왜 자꾸 네 생각에 여자친구를 결부시키는 거야? 지금 여자친구의 말을 듣는다고 해서, 네가 박환희와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을 것 같아? 그 놈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너를, 아니 너희들을 이용하지 않겠다고 장담할 수 있어? 내가 보기엔 아니오 야. 한번 배신한 이상 두 번 배신하는 건 더욱 손쉬운 일이거든.” “그래도 누나가….” ‘그 놈의 누나누나. 미치겠네. 엄마냐?’ 아직도 차유나에 대한 미련을 끊지 못하는 그를 보며, 나는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이미 네 여자친구는 너를 떠난 것처럼 보인다.” “아, 아직 헤어지지 않았어요.” “어떤 구실을 갖다 붙이든 이미 몸은 떠났어.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아무리 오랜 시간을 함께 했고, 같은 일을 당했다고 하지만…. 솔직히 내가 너라면 그렇게 떠난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을 것 같아. 냉정하게 생각해봐. 네가 직접 경험하고, 겪은 만큼 느끼는 게 있을 거 아냐. 지금 그녀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해?” 백한결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가 곧 힘없는 얼굴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더욱 힘주어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네가 고민할 것은 차유나의 말을 따를 것이냐, 아니냐가 아니라고. 솔직히 나는 그 여자가 박환희한테 넘어간 이유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아무튼 그렇다면 오히려 흔들리는 내면을 다잡고 그녀를 일깨워주는 게 정답 아닐까?” “하지만 자기 말을 들을 생각 없으면 다시는 말도 붙이지 말라고 했는걸요.” “그럼 간단하네. 헤어져. 상황만 놓고 보면 누가 봐도 박환희를 의심스럽게 볼 거야. 이대로 그녀의 말을 따라서 사이 좋게 다시 한번 이용당하느니, 아예 미련을 버리거나 어떻게든 구출하는 게 맞겠지.” “그러니까 형 말은, 절대 흔들리지 말고 제 뜻을 지키라는 거군요.” “그렇지. 그녀가 정말 너를 위한다면 네가 진정으로 하는 말을 무시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뭐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나는 강하게 일침을 놓듯 말을 마무리 지었다. 백한결은 더 이상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얼굴에 조금씩 결연함이 깃드는걸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도 내 말을 듣고 다시 마음을 단단히 되새긴 듯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이 정도면 쉽게 넘어가지는 않을 것 같아 적잖이 마음이 놓였다. 그 동안 8주, 아니 6주 동안 형 노릇을 해줬던 게 지금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윽고 백한결은 뭔가 결심한 듯, 곧바로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형. 감사합니다.” “하하. 감사는 뭘.” “아니에요. 지금 생각하면 되게 뜬금없는 말이었는데, 제 말을 들어주셨고, 믿어주셨고, 그리고 진심으로 조언도 해주셨어요. 형이 아니었다면 정말….”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란다. 도움이 됐으면 다행이지. 별 말을 다하네.” 내 말에 그는 헤헤거리며 웃더니 문으로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저 지금 바로 누나한테 가볼래요. 시간이 지나면 이 결심이 흐지부지 될 것 같으니, 지금 바로 가서 이야기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조금 다른 경우긴 하지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하잖아. 혹시 마음을 돌리지 않더라도 끈질기게 네 진심을 전해봐. 그녀가 정말로 너를 위한다면 네 진심을 이해해줄 거야.” “네 형!” 백한결은 예의 바르게 인사한 후 곧바로 문을 열고 숙소를 나섰다. 이윽고 그 문이 완전히 닫히려는 찰나, 차가운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오빠.” “응. 응?” 긴 대화를 나눠 피곤한 마음에 침대에 누우려는 순간이었다. 오랜만에 오빠라는 소리를 들어 나도 모르게 당황하고 말았다. 고개를 돌리자 김한별이 여전히 의자에 앉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굉장히 어두웠는데, 전체적으로 복잡한 심경이 얽혀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나를 부른 후 잠시 주저했지만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아이 말. 정말로 믿으세요?” 한별의 말이 끝나는 순간, 방문이 완전히 닫혔다. 나는 흘끗 그곳을 바라보고는 평소보다 커다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결이? 응. 당연히 믿지!” “왜요? 제가 보기에는 그 애 말 중에 이상한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에요. 오빠가 그걸 모르실 리도 없을 것 같고요.” “글쎄. 그건 사람마다 다르다고 생각해. 최소한 내가 지금껏 알아온 한결이는 거짓말할 애는 아니거든.” ‘아. 입에 침 안 발랐다.’ 나는 재빨리 입에 침을 발랐다. 그리고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들이 생각나, 곧바로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근데 그건 갑자기 왜 묻는 거야? 너 오늘따라 조금 이상해.” “그냥 조금 당황스러워서요. 제 눈에는 오빠가 신규 사용자에 불과한 애를 그렇게 잘 대해주는 게 더 이상해요. 보니까 성적도 그저 그렇고, 딱히 별다른 건 없어 보이는데요. 영입할 구석이 보이지 않잖아요.” “성적? 한별아. 나는 한결이를 그런 생각으로 대하고 있는 게 아니야.” “그럼요?” “그냥. 힘들어하는걸 보니까 조금 안쓰럽기도 하고, 도와주고 싶기도 해서. 이상하게 한결이를 보니까 애들 생각이 나더라. 아무튼 여러 가지 이유랄까?” 그때였다. 내 말이 끝난 순간 한별의 표정이 더없이 차갑게 변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뜻 모를 실망감, 배신감, 서운함, 섭섭함 등을 내비치고 있었다. 한별은 떨리는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더니 이내 메마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도와주고 싶었다고요? 통과 의례도 함께 거치지 않고, 그냥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처음 봤잖아요.” “응. 그렇지. 근데 이상하게 마음이 가더라고. 애가 참 순수하고, 맑아. 어떻게 보면 솔이랑 비슷해 보이는 것 같고. 아무튼 나는 그 애가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힘이 되어주고 싶을 정도야.” “하….” “왠 한숨?” “그럼 저는…. 저는…. 전 왜….” 의미 모를 말을 내뱉던 김한별은 이윽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라고 말을 매듭지었다. 그리고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반응에 나는 어깨를 으쓱인 후, 차분히 감지를 돌려 방문 밖을 살펴보았다. 밖에선 문에 귀를 대고 있는 한 명의 사용자가 감지에 걸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김한별의 대화가 끊긴 순간 백한결이 조심스럽게 문에서 귀를 때고 복도로 걸어가는 게 느껴졌다. 조금씩 감지를 벗어나는 그를 보며,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 어둑한 땅거미가 내려앉은 산 속은 으스스한 분위기가 맴돌고 있었다. 무성하게 우거진 나무와 수풀들이 흔들리고, 사이사이로 찐득찐득한 바람이 새어 나왔다.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바람은 더웠다. 속으로 미묘하게 비릿한 내음을 품은 바람은 곧 전방으로 날카롭게 흘러나갔다. 스슥, 스스슥. 그와 동시에,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수풀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 인영은 상당히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자세히 본다면 한쪽 팔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쪽으로는 섬뜩함을 풍기는 커다란 낫을 비스듬히 들고 있었는데, 둥그런 곡선을 그리는 날에서 배릿한 액체들이 간헐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냄새는, 바람에 묻어있던 냄새와 비슷했다.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액체를 인영은 발을 휘두르며 모두 받아내었다. 곧이어 그 인영이 완전히 수풀을 헤치고 나오자, 그 뒤로 수명의 인원이 차례대로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후.”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인영은 짧게 한숨을 내뱉으며 몸을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한번 크게 몸을 기울었는데, 한쪽 팔이 없기 때문에 그런지 균형을 잡기 어려워 보이는 것 같았다. 간신히 몸을 다잡은 후, 낮은 목소리가 인영에게서 흘러나왔다. “총 몇 명이 살아남았지?” “대장까지 합해서 일곱.” “그럼 몇 명이 죽은 거지?” “미개척 지역을 통과하면서 여덟 명 보냈고. 방금 전 전투에서 두 명 죽었네.” 질문하는 목소리는 거칠었고, 대답하는 목소리는 가느다랬다. 잠시 동안 침묵이 내려앉았다. 거친 목소리를 내는 사내는 힘겨운 얼굴로 뒤의 동료들을 훑어보았다. “앞에 여덟 명은 어차피 미끼였으니 상관없고. 현준, 진경이 당했나? 이건 좀 아까운데.” “씨발. 대장, 우리들도 좀 보소. 다들 완전 만신창이가 됐다고! 한 명한테 이게 뭐야? 쪽 팔리게.” “그 할망구 부상 입은 거 맞아? 그 놈들이 준 정보 확실해?” “미친 거지. 누가 그렇게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공격할 줄 알았냐? 아, 미친. 생각만 해도 소름 돋는다.” 처음 욕설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불만 어린 목소리들이 터져나 왔다. 그것은 동시다발적으로 새어 나왔고, 남녀 목소리가 혼재되어있어 누가 누구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잠시 동안 그 불만들을 들은 선두의 사내는, 다시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너무 얕본 것도 있고, 방심한 것도 있고. 또한 재빠르게 처리하지 않은 것도 실수라고 할 수 있지. 어쨌든 정보는 확실했어. 그래도 북 대륙의 전설 중 한 명인데 약간의 피해는 어쩔 수 없다고 본다.” “전설이라. 킬킬! 대모 그 할망구 마지막 표정 죽여주던데. 설마 배신자가 있는 줄은 생각도 못했나 봐. 켈켈켈켈!” “그런데 대장, 갑자기 왜 이렇게 빠르게 움직인 거야? 원래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던 거 아니었어?” 처음 질문에 대답했던 여성의 물음에 대장이라 불린 사내는 피로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박현우가 냄새를 맡은 것 같더군.” “그 놈들? 헛다리만 짚고 있었잖아. 조금 더 확실한 기회를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새로 정보가 들어왔다. 곧 그림자 여왕이 움직일 낌새가 보인다고 하더군. 머셔너리 로드와 박현우의 회동이 포착되었다고 한다.” 그 말이 끝난 순간, 뒤에 있는 인원들 주위로 심한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어머나 씨발. 고연주가 온다고? 진짜 좆 될뻔했네?” “왜? 혼자 오면 좋잖아. 와 잘됐다. 예전부터 내 소원이 그년 입구멍에 내 물건을 끼우는 거였어. 낄낄!” “미친놈. 그림자 여왕이 잘도 혼자 오겠다.” “안 그래도 쫌 불안하긴 했는데. 휴, 그나마 미리 처리한 게 다행이네.” “흔적은 확실히 지웠겠지?” 뒤에 있는 인원 중 지금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인영에게서 처음으로 말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순간 실컷 떠들고 있던 모든 인원은 약속처럼 입을 다물었다. 서로가 서로의 얼굴만 번갈아 보자, 선두에 있던 사내는 혀를 차고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다시 되돌아간다.” “왜!” “그림자 여왕이니까. 남은 시체 일부도 저 멀리 던져놔야 하고, 흔적을 지우는 게 아니라 장소를 아예 통째로 날릴 필요가 있겠어. 미리 말했어야 하는데 심한 부상을 입은 지라 차마 생각을 못했다. 미안하다.” “아오 그 씨발년 때문에. 아주 씨발 만나기만 해봐. 제발 용서해달라고 싹싹 빌 때까지 안에다 싸 갈겨 줄 테니까.” “아서라 아서. 이미…. 그 누구였더라. 아무튼 클랜 로드랑 배 맞췄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아 그만 좀 해 미친 새끼야! 2년 전에 달려들었다가 개 털린 주제에 누가 누굴 따먹어? 그리고 걔가 너한테 따 먹힐 년이냐?” “썅! 그럴 리 없어! 그리고 난 뭐 말도 못하냐!” 두 목소리가 동시에 힐난하자, 비난의 대상이 된 남성은 억울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잠시 동안 왁자한 웃음 소리가 그들 사이를 휩쓸었다. 그들을 따라 미미하게 웃던 대장이라 불린 사내는 이내 순식간에 표정을 회복하고 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 현구의 그림자 여왕 사랑은 이쯤에서 접어두고. 다들 정렬하자고.” “““““““네.””””””” 사내가 정색하고 입을 열자 조금 전의 풀렸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우그러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내며 재빠르게 열을 정렬시켰다. 그들 사이를 휘적휘적 가로지른 사내는 이내 칠흑 같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흔적 정리가 끝나고 곧바로 이곳을 이탈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럼 그곳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아니. 일단은 다른 데서 대기. 남은 건 그 놈들이 잘해주기만을 바래야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말을 마친 사내는 곧 처음 나왔던 수풀 안으로 조용히 몸을 들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남은 인원도 발소리를 죽인 채 그 뒤를 따라 들어가더니 이윽고 동시에 자취를 감췄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비릿한 혈 향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간간히 스쳐가는 바람에, 조금씩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덥습니다. 매우 더운 날입니다. ㅇ<-< 선풍기를 트는데도 더운 바람만 나오네요. 그래도 한숨 자고 나니까 조금 나은 것 같습니다. 저녁으로 시원한 냉면이나 먹었으면 좋겠어요. :D PS. 조아라가 왜 이렇게 느린지 모르겠네요. 저만 이런 건가요? 『 리리플(223회) 』 1. 미월야 : 1등 축하 드립니다. 224회, 225회를 제가 이상하게 올려서 그저 죄송할 따름입니다.(절대 고의가 아닙니다. ㅜ.ㅠ) 2. 오피투럽19 : 오피투럽19님.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남자고 오피투럽19님도 남자입니다. 저는 동성 연애를 선호하지 않는다고요! 3. 현오 : 감사합니다. 현오님 덕분에 좋은 동영상 볼 수 있었습니다. 보는 내내 설렜습니다. 왠지 제 첫사랑이 떠오르더라고요. T^T 4. 소식가 : 왠지 모르게 짧지만, 강렬했습니다. 저랑 같이 태우시죠. T^T 5. 겜마스터 : 하아. 고생하십니다. 훈련소라니, 세상에 훈련소라니! 우웨에에에에에엑! 죄, 죄송합니다. 순간 구토가 나와서요. 날씨도 더운데 쉬엄쉬엄 하세요.(?) 다시 말씀 드리지만 군대는 몸 건강히 전역하시는 게 최고입니다. :) 『 리리플(224회) 』 1. 한방모드 : 1등 축하 드립니다. :) 1등 코멘트에서는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 하하. 왠지 닉네임을 보는 순간 시즈 모드를 생각해버렸네요.(?) 2. 타락한비둘기 : 오호라. 조금 더 세세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대략적으로는 정답입니다. 3. lovejin : 감사합니다. lovejin님의 코멘트 덕분에 정말 많은 힘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페이스 조절에 대해서도 다음부터는 신경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음 그리고 요즘 들어 제가 코멘트에 너무 휘둘린다는 코멘트들이 종종 보이고 있네요. 최근에는 오히려 너무 고집을 부린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는데, 참 미묘합니다. :) 4. ekar : 코멘트에 휘둘린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네요. 나름 소신껏 밀고 나가는 부분은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ㅜ.ㅠ 설령 악플이라도(인신모독 등등은 제외합니다.) 모든 독자 분들이 남겨주시는 코멘트는 버릴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제가 소신을 과도하게 세우는 부분도 있고, 또 너무 휘둘린다고 보이시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 모든 건 메모라이즈라는 작품이 망가지지 않고, 발전하는데 1순위를 두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소중한 조언 감사합니다. (__) 5. 아이유설리소희지영태연수지 : ㅋㅋㅋㅋㅋㅋㅋㅋ. 닉네임이 정말로 예쁜(?) 닉네임이세요! 하아하아.(?) 아, 저도 아이유설리소희지영태연수지님의 코멘트 읽고 번뜩 그런 생각이 들었네요. 아이 창피해라~.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26 / 0933 ---------------------------------------------- 오해는 오해를 낳고 ‘야. 정말로 멍청해서 알아듣지 못하는 거니, 아니면 알아듣지 못하는척하는 거니?’ 앞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김한별의 머릿속을 뾰족하게 파고들었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곳에는 다리를 꼰 채로 거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성유빈이 있었다. 그녀는 오른손에 끼고 있던 연초를 한 모금 빨아들이더니 이내 가느다랗게 내뱉었다. ‘그렇게 눈치가 없어? 뭐? 모르겠다고? 아하하하!’ 분명 성유빈은 웃었다. 아니, 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눈 앞에 앉아있는 성유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날카롭게 자신을 노려보는 시선에 김한별이 자신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서려는 순간이었다. “아.” 김한별은 탄성을 내뱉었다. 보이지 않는 사슬로 온 몸을 구속당한 것처럼 한 발짝도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움직이지 않자, 곧 그녀의 얼굴에 서서히 절망감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럼 지금 말해줄게. 귀 깨끗이 씻고 똑똑히 들어. 너, 그 놈한테 다리 한번 벌려줘. 그 잘난 몸뚱어리, 머셔너리 로드한테 한번 대주라고. 응? 이제 알아듣겠어? 꼭 이렇게 대놓고 말해줘야 해?’ “싫어….” 김한별은 간신히 쥐어짜낸 듯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몸의 구속은 풀리지 않고 있었고, 눈 앞의 성유빈은 이제 조롱이 섞인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고개를 돌릴 수도, 귀를 막을 수도, 눈을 감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윽고 그녀의 주위로 잊고 싶은 기억들이 흘러 들었다. ‘걱정 마. 일단 일만 치르면 뒤는 우리들이 도와줄 수 있으니까. 눈 딱 한번만 감아. 그리고 스스로 벗어서라도 그에게 안겨.’ “이렇게는 싫어…!” ‘호호. 왜 너 혼자만 깨끗해지려고 그래? 억울하게 생각지 말라고. 나도 황금 사자에 가입했을 때….’ 그때였다. 기억이 흘러 들어오던 도중 성유빈의 몸이 기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김한별의 뇌리를 따끔하게 찌르던 말들도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었다. 아직 몸의 자유를 찾은 건 아니었지만 김한별은 겨우 안도의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성유빈이 사라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턱턱 막히던 그녀의 숨통을 틔워주고 있었다. 그러나. 일그러지던 성유빈의 형상은 이내 다시금 하나의 얼굴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오연 한 눈동자, 오뚝한 콧날, 담담히 다물 린 입술, 단정한 이목구비, 그리고 전체적으로 무심해 보이는 표정. 이윽고 완전히 재구성된 얼굴을 보는 순간 김한별은 약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이번에 눈 앞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아닌 김수현이었다. 곧이어 김수현과 김한별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잠시 멈춰서 있던 흐름은 이내 새로운 기억과 함께 물밀듯 밀려오기 시작했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 그리고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과.’ ‘그래도 가족 같은 사람이 한두 명 정도는 있었으면 했거든.’ “아니야….” 사용자 아카데미 수료 전날의 기억. 김한별은 부정했다. 어떻게든 부정하려고 고개를 흔들려고 했지만 애꿎은 눈물만이 몇 방울 똑똑 떨어질 뿐이었다. 그러나 그에 아랑곳 않고, 이번에는 최근에 겪었던 기억들이 새롭게 흘러 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 동안 우리들의 신뢰에 금이 갈만한 일들은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았단다.’ “아니야! 아니라고!” ‘솔직히 내가 너라면 그렇게 떠난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을 것 같아.’ “아니야아아아아아아아아!” * 아침에 눈을 뜨자 머리가 멍하니 울리는걸 느낄 수 있었다. 잠을 설쳐서 그런지 온 몸이 피로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간밤에 한별이 앓는 소리에 몇 번 잠을 깼었는데 아마 악몽을 꾼 모양이다. 반사적으로 옆 침대로 시선을 돌리자 말끔하게 정리된, 비어있는 침대가 보였다. 내가 일어나기 전 아침 일찍 나간 것 같았다. 나는 의미 없는 한숨을 내쉰 후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반가운 이가 방문하는 날. 8주차에서 가장 기다렸던, 바로 고연주가 아카데미를 방문하는 날이었다.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애들의 소식을 듣고 싶기도 했고, 박현우의 제안에 그녀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도 알고 싶었다. 간단한 세안을 마친 후 숙소를 나서자 살짝 소란스러운 아카데미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주말이 휴식으로 굳어진 만큼 원래는 한산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오늘따라 이렇게 부산스러운 이유는, 고연주와 박현우의 만남이 있기 때문이리라. ‘황금 사자에서 몸이 어지간히 달아올랐나 보군.’ 황금 사자 내부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혀를 끌끌 차며 걸음을 옮겼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은 상태였지만 미리 이스터 에그에 도착해 고연주를 느긋하게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머릿속 복잡함이 가시질 않아서, 풀 내음이 섞인 신선한 공기가 그리운 이유도 한몫 했다. 산보하는 걸음으로 이스터 에그에 도착한 후 나는 크게 기지개를 펴며 풀밭에 누웠다. 콧속으로 앞다투어 밀려들어오는 상쾌한 공기가 느껴졌다. 곧이어 따뜻한 햇살이 나를 비추고, 그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불자 몸 내부에 녹아있던 피로가 조금씩 씻겨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혹시라도 누가 들어올까 싶어, 나는 감지를 활성화한 채로 잠시 동안의 휴식을 즐겼다. 그렇게 계속해서 시간이 흐르고 곧 점심 시간임을 알려주는, 배꼽 시계가 울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침을 걸러서 그런지 약간 허기가 진 게 느껴졌다. 혹시 고연주가 늦게 올지 모르니 식당에 들러 뭐라도 먹고 올까 생각한 순간이었다. 오른쪽 방향에서 누군가 이스터 에그로 진입하는 기척을 잡을 수 있었다.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자, 곧이어 연한 미소를 머금은 고연주가 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냄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왼팔에 걸려있는 바구니를 보며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여보~.” “오랜…만입니다.” 초반부터 들어오는 그녀의 적극적인 공세에 나도 모르게 살짝 말을 더듬고 말았다. 헛웃음을 흘리며 그녀를 보자 평소와는 다르게 차려 입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예전에는 전체적으로 살짝 야릇한 느낌이 있었는데, 오늘따라 마치 정숙한 아내 같은 인상을 주고 있었다. 아무튼 그 모습도 의외로 꽤 잘 어울렸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그녀의 옷차림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이윽고 서로 꼭 포옹함으로써 해후를 나눈 우리는, 풀밭에 나란히 앉아 바구니를 펼쳤다. 고연주가 직접 만든 맛깔스러운 음식들을 보자 오늘 아침을 먹지 않은 게 다행으로 느껴졌다. “배고프죠? 일단 먹고 얘기하는건 어때요?” “나쁠 것 없죠.” 나는 고연주가 만들어 온 음식들을 먹으며 그녀가 해주는 이야기들을 들었다. 내가 식사를 하고 있는 만큼 그저 가벼운 얘깃거리들이 주를 이루었다. 편안한 식사를 위한 그녀 나름의 배려였다. 그 중 애들의 훈련 과정은 내 주된 관심사라 세이 경청했는데, 다행히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고 하니 매우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아카데미를 수료하는 날이 가까워져 오는 만큼, 다시 만나게 되는 날 전보다 더 성장한 모습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윽고 비비앙이 나를 무척 보고 싶어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대부분의 음식을 해결할 수 있었다. 부른 배를 슬슬 쓰다듬고 있자 고연주는 조신한 손놀림으로 잔재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묘하게 순종적인 그녀를 보자 약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에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풀밭 위로 깔았던 천을 차곡차곡 접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충 들을 건 다 들었으니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때였다. “고연주.” “네?” “박현우의 제안, 어떻게 됐나요?” “아~. 네. 승낙했어요. 조금 도와주는 게 아무래도 나을 것 같아서요.” 승낙이라. 고연주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어차피 예상범주 안이었기 때문에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그녀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이유는 궁금했다. “황금 사자를 믿지 말라고 했잖아요?” “네. 그랬어요. 물론 저도 황금 사자를 믿지 않아요. 하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이 일을 조사해볼 가치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얘기는 대충 들으셨죠?” “네. 고연주 생각에는 어때요? 정말로 대모님이 실종된 것 같나요? 아니면 황금 사자의 기우인가요?” 내 물음에 고연주는 바구니를 정리하던 손길을 멈추고는 생각에 잠긴듯한 표정을 지었다. 약 1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나를 돌아보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처음 수현의 말을 들었을 때, 그리고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웬만하면 거절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이후로 나름대로 조사도 해보고, 오늘 박현우가 건네준 기록들을 보자 마음이 바뀌었어요.” “그럼 대모님이 실종되었다는 건가요?” “아직 확실한 건 없어요. 하지만 최소한 황금 사자에서 엄살을 부리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그리고?” “뭐 일단은 직접 가봐야 알 것 같네요. 그런데 이상하게 불안한 기분이 들어서요.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고연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끝을 흐리더니 이내 바구니의 뚜껑을 덮었다. 이윽고 그것을 한쪽 구석으로 밀어놓은 후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내게로 돌아앉았다. “출발은 내일 하기로 했어요. 일단 현재 나가있는 조사단을 불러들이고, 우호 클랜에서도 지원 병력을 차출했다고 하니 딱히 위험할 일은 없을 것 같네요.” “그럼 고연주가 그들을 지휘하는 건가요?” “물론이죠. 일단 산맥 진입 여부에 대한 1차 조사를 하고, 내부 진입이 확인되면 2차 조사도 해야 되요. 1차에서 끝나면 일찍 끝날 것 같기도 한데, 2차까지 가면 최소 2주일은 걸릴 거예요.” “이런, 2주일이나요? 애들이 엄청 좋아하겠군요.” 진심을 담아 말했는데, 농담으로 받아들였는지 고연주는 깔깔 웃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하연씨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란 말로 나를 안심시켰다. “아차. 하연씨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내일 출발한다고 하니 미리 위임을 해둬야 해요. 원래 거절할 생각으로 온 거라 깜빡 잊고 못하고 왔어요.” “통신으로 해도 될 텐데요. 아무튼 오늘은 제법 바쁘겠군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인수인계도 해줘야 하고…. 이후 조사단이랑 프린시카에서 합류하기로 했어요.” “고생하시는군요. 안 힘들어요?” “힝~. 수현~. 나 힘들어요~.” 내 위로에 고연주는 곧바로 애교를 피우며 안겨 들었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녀를 안아 들었다. 왠지 얼굴 표정에서 처음의 조신한 기색이 서서히 사라지고, 본래의 기색을 되찾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자꾸만 어수선해지는 마음을 억지로 가다듬자 묘하게 달뜬 고연주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본격적인 출발은 내일이에요. 합류는 오늘 오후니까 다행히 아직 시간은 조금 남아 있네요.” “흠. 그래도 미리미리 준비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러고는 싶은데 지금 제 온~몸이 방전된 상태라서요. 얼른 누군가가 충전을 시켜줘야 해요.” “하하. 그렇다면 제 몸을 껴안는 게 충전이겠군요.” 나는 예전의 일을 떠올리며 씁쓸히 대꾸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고연주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것도 충전이 맞긴 한데,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려요. 그러니 조금 더 직접적인, 빠른 충전이 필요하답니다.” “네? 빠른 충전이요?” “네. 얼른 고연주라는 제품에 에너지를 넣어줘야 해요. 안 그러면 지쳐 쓰러질지도 몰라요.” “그게 무슨….” 내 반문에 고연주는 은근한 미소를 짓고는 자신의 허벅지를 좌우로 벌렸다. 그러고는 검지를 내려 벌려진 곳의 중앙, 즉 자신의 은밀한 곳을 가리켰다. “자. 이곳이 바로 콘센트. 그럼 어서 플러그를 꼽아주시겠어요?” 곧이어 말을 마친 그녀의 시선이 내 하부로 꽂혔다. 나는 반사적으로 허벅지를 오므린 다음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연주. 이곳은 아카데미 내부이며 개방된 장소입니다.” “뭐 어때요. 가끔 야외 플레이도 괜찮잖아요. 나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아니 잠시만요. 왜 얘기가 그렇게 흘러가는 거죠.” “에잇! 그러게 누가 먼저 그렇게 유혹하랬어요?” 고연주는 힘찬 기합 성을 지르며 내게로 달려들었다. 도대체 내가 언제 유혹했냐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그 순간 일전에 그녀와 나눴던 수정 통신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저 가볍게 한번 입을 맞췄을 뿐인데 그게 어째서 도발이 되는 걸까. 그러나 내게는 생각할 시간도 대응할 찰나도 없었다. 재빠른 손놀림으로 내 바지를 움켜쥐는 그녀를, 그저 망연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 천만다행으로 그날의 야외 플레이는 무사히 치를 수 있었고(걸리지 않았다는 소리다.), 고연주는 퍽 만족한 얼굴로 돌아갔다. 원래는 내가 그녀를 배웅해야 했으나 오히려 그녀가 본관까지 나를 부축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말았다. 잠시 여담으로 말하자면, 어기적거리며 숙소로 들어서자, 침대에 걸터앉은 채 내 교관 복을 개고 있던 김한별은 내 얼굴을 보고서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그렇게 고연주를 보낸 이후 9주차의 시작과 함께 <그림자 여왕>을 필두로 한 조사단이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대놓고 공표한 게 아니라 박현우가 슬쩍 말해준 것에 불과했지만, 이곳 저곳에서 지원병력을 받은 만큼 일부 클랜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그녀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라며, 나는 조금씩 마무리로 접어드는 아카데미의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김수현 이 의뭉스러운 녀석. 좋으면서 당황한 척 하기는. T^T 너 조금만 기다려라. 아, 방금 전 말은 잊으셔도 됩니다. 그저 간단히 수현의 복상사에 대한 계획을 짜고 있던 중….(퍽퍽!) 험험. 즐거운 주말입니다!(화제 돌리기!) 얼마 전에 결혼에 관해서 독자 분들에게 여쭤본 적이 있었는데, 제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은 코멘트가 달려서 놀랐습니다. 적어주신 코멘트들 하나하나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느낀 점은요. 1. 부부 하기 나름이다. 2. 작가가 갖고 있는 환상은 깨는 게 낫다. 3. 돈 이 셋으로 압축할 수 있었습니다. 하하하. OTL 무엇보다 남편 분들이 용돈을 받아 생활한다는 코멘트도 심심치 않게 보였는데, 금액을 보고 충격….(정말 그렇게 받으시나요? ;ㅇ;) 『 리리플 』 1. 리만 : 1등 축하드립니다. 역시 정오 연재분은 새로운 분들을 1등 코멘트에서 만날 수 있어 참으로 신박합니다.(?) 하하하. 부디 이번회도 재미있게 감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2. psinfx112 : 엇! 정말이신가요?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누군지 알고 싶습니다! 궁금해요! 3. 쉬라야 : 그렇죠. 오히려 박환희 같은 사용자를 환영하는 클랜도 있을 겁니다. 4. sereson : 안솔의 화신 독자 분께서 떠나시는군요. ㅜ.ㅠ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다시 돌아오실 그날까지, 분량 잔뜩 쌓아놓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5. 하루지온s : 하하. 아카데미도 이제 후반부로 접어들었습니다. 짚을건 짚고 넘어가겠지만, 그 외 부분은 최대한 빠르게 넘어갈 생각입니다. :)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6. letzgo02 : 흑흑. 한별이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라지만, 제게는 그녀를 위한 비장의 무기가 아직 하나…. 헙! 아, 아닙니다. 하마터면 스포일러를…. 흠흠. 7. 전설의유저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전설의유저님의 코멘트는, 제 실생활에도 비출 수 있겠군요. 곧 있으면 기말고사랑 과제 시즌이 다가오는데, 이번에는 미리미리 준비해볼 생각입니다. 하하. 8. 오시안 : 아카데미 이전에, 어떻게든 주인공의 속마음이 한번은 드러날 예정입니다. 그때 한번 읽어주시고, 여전히 이상하다 싶으시면 한번 더 조언 부탁 드려도 될까요? 차후 수정이나 이북 교정 때 필히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__) 9. sk456ttt : 소중한 조언 감사합니다. 저도 물론 주인공 활약하는 거 좋아합니다. 클랜 운영하고, 던전도 돌면서 명성도 쌓으며 입지 구축 등등. 다만 지금 아카데미가 내용이 산으로 가는 게 아니라, 차후 메모라이즈의 주요한 흐름과 주인공의 행보에 더 나은, 더 활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고 있는 과정이라 보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말투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습니다. sk456ttt님 정도면 매우, 굉장히 예의를 갖춰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예전에 어떤 분들보다 말이지요.(…….) 10. 코티카르테 : 물론입니다. 요즘 제가 너무 소신을 세우는 나머지 아집으로 비출까 걱정도 들지만, 일단은 계획한대로 밀고 나갈 예정입니다. 다만 독자 분들의 코멘트는 빠짐없이 읽어봅니다. 제가 항상 옳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27 / 0933 ---------------------------------------------- 오해는 오해를 낳고 “우리 헤어져.” “누나.” 백한결은 서글픈 눈동자로 차유나를 응시했다. 그러나 차유나의 얼굴은 확고했다. 예전에 서로 손을 잡고 마주보며, 빙긋 웃어주던 다정함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백한결은 그녀에게 다가서려 했지만 그럴수록 차유나도 똑같이 물러났다. 결국 그는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이제 누나도 지친다.” “미안해. 하지만….” “듣기 싫어!” “누나….” 백한결의 아렴풋한 말이 붙잡았지만 차유나는 매정히 몸을 돌려버렸다. 이윽고 그녀는 아무도 없는 복도를 느릿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한결이 더는 붙잡지 않자, 우뚝 발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절반만 돌렸다. 그녀의 시선에 아직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걸렸다. “헤어지자는 말. 거짓말이라는 거 다 알고 있어. 누나가 나한테 그럴 리 없으니까.” “하…. 한결아. 그렇게 누나를 못 믿겠어?” “누나는 믿어. 하지만 박환희는 못 믿어. 그리고 앞으로도 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야. 어떻게든 누나를 그 놈에게서 구출하고 말 거야.” “너무해. 난 박환희의 말을 받아들였어. 그럼 결국 못 믿겠다는 소리 아냐. 너 요즘 내 하루하루가 어떤지는 알고나 있니?” 차유나는 울먹이는 목소리를 냈다. 그럼에도 백한결이 움직이지 않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여기는 홀 플레인 이잖아. 현대가 아니잖아.” “그래. 그래서 박환희가 위험하다는 거야. 우리 같이 그 일을 겪었으니까.” “그만두자. 같은 말 계속하기 싫어. 나는 한결이 네가 현실을 직시했으면 좋겠어.” “…….” “나를 구출하겠다고? 나야말로 기다리고 있을게. 제발 나를 더 이상 실망시키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차유나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빠른 걸음으로 걷더니 이내 복도를 돌아 자취를 감추었다. “하~아. 현실을 보라고….” 백한결은 먹먹하게 들리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잠시 차유나가 사라진 방향을 보다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가 발길을 돌린 방향은, 차유나와 반대 방향을 이루고 있었다. * 고연주가 출발한 이후로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기간 동안 나는 백한결의 영입을 최우선순위로 삼았다. 신규 인원들을 모두 포기한다고 했지만, <신의 방패>만은 가져가리라 벼르고 있었기에 아무래도 가장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런 내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백한결은 드디어 머셔너리 클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내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 틈틈이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데, 스스로 말을 꺼냄으로 그런 걱정을 덜어주었다. “여자친구랑은 어때?” “얼마 전에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어요.” “뭐? 그래서?” “물론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거에요. 그건 제가 잘 알아요. 그런데 저보고 현실을 봤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현실이라. 어떻게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1회 차 시절 나는 아카데미에서 클랜 영입 제의를 받을 수 없었다. 계속 아카데미에 머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교육 주차가 끝나갈수록 크게 불안해했던 걸로 기억한다. 곰곰이 생각하던 도중 백한결의 결연한 목소리가 귓가로 날아들었다. “형.” “응?” “머셔너리 클랜은 어떤 클랜이에요? 가입 조건이 따로 있나요?” “소수정예 클랜. 물론 있어.” 내 말에 백한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축약해서 말해서 그런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태우고 있던 연초를 떨궜고, 밟아 비빈 후 말을 이었다. “아무나 받아들일 생각은 없다는 소리야.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용병 클랜이거든. 그리고 홀 플레인 에서 용병은 중립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어.” “중립….” “그래 중립. 중립을 지키려면 가장 우선시되는 덕목이 바로 실력이거든. 그런 만큼 어중이떠중이들을 받을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최상위 사용자, 또는 최상위 사용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을 지닌 사람들만 골라 받을 생각이야.” “그, 그럼 저는 가입할 수 없겠군요.” 백한결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 슬쩍 내 눈치를 살피는걸 보니 내 반응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 숙인 녀석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그리고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제 아카데미 성적 아시잖아요. 그렇게 뛰어나지 않다는 걸….” “하하. 물론 신규 인원을 판단하는데 아카데미 성적이 가장 중요하긴 해. 그래도 그게 다가 아니잖아.” “그럼요?” “방금 말했잖니. 최상위 사용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사람도 받겠다고. 내가 예전에 잠깐 가르쳐줬었지? 그때 느꼈는데, 너 정도면 충분해. 조금만 노력하면 충분히 높은 경지를 이룩할 수 있을 거야. 혹시 네가 가입할 생각이 있다면, 머셔너리에서는 환영할 의향이 있단다.” 내 말에 백한결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져나가고 있었다. 백한결은 여태껏 내게 각성 시크릿 클래스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아직 대외적으로는 변변치 못한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한결 같은 태도를 보여주자 감동한 것처럼 보였다. ‘아마 김한별과 나눴던 대화를 들은 게 가장 컸겠지.’ 곧이어 백한결은 굉장히 열성적인 태도로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는 여자친구에 대한 것도 있었는데, 그 부분은 이미 생각한 바가 있어 막힘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솔직히 차유나는 가입시키기 싫었지만 말이다.) 나는 클랜 내부에서 활동하는 비 전투 사용자들의 역할에 대해서 설명했고, 전투 요원보다 훨씬 안전하다는 말로써 그를 안심시켰다. 얘기로 가장한 홍보를 들은 백한결은 드디어 고민 하나를 해결했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형. 정말이죠? 지금 거짓말하시는 거 아니죠? 정말 저랑 유나 누나랑 형 클랜에 가입할 수 있는 거죠?” “그럼. 내가 클랜 로드인데 그 정도 권한도 없겠니.” “와! 고맙습니다!” 백한결은 뛸 듯이 기뻐하며 나를 꼭 안아 들었다. 분명 남자인데, 외관은 여성스러워 별로 이상함이 느껴지지는 않…. 아무튼 백한결은 진정으로 여자친구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현실을 보라는 말에 아카데미 수료 후를 생각했을 것이고, 가장 먼저 나를 떠올렸을 것이다. 백한결은 계속해서 허리를 굽히며 고맙다는 말을 하다가, 내가 화를 낼 정도가 돼서야 겨우 여성 사용자 숙소 방향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조금씩 멀어져 가는 그를 보며 나는 한번 더 연초를 꺼내 들었다. 속 안이 제법 가벼워진 걸로 보아 근시일 내로 연초 보급을 해야 할 것 같았다. * 아카데미가 11주차를 넘어서고 어느새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로 수료식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에 따라 통제 분위기가 전보다 훨씬 부드럽게 변했고, 교육 도중에 자신의 클랜을 홍보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 잠잠했던 클랜간의 갈등들이 다시금 일어나려는 조짐이 보였다. 그 동안 조용했다고 해서 서로간의 갈등이 해소된 건 절대로 아니었다. 처음에는 신규 인원들 앞에서 말다툼을 벌일 정도로 격렬하게 부딪쳤지만, 시간이 지나고 서로 교관 업무에 대한 지원을 끊음으로써 무시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홍보에 들어간 이상 각 클랜의 입장 차이에 따른 갈등, 즉 부딪침이 생겨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황금 사자와 우호 클랜의 강철 산맥 원정 실패는 한쪽 입장에서 매우 써먹기 좋은 가십거리라, 이미 신규 인원들도 알고 있는 공공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내가 보기에는 다들, 아니 대부분 헛수고 하는 것 같은데.’ 사실이 그랬다. 박환희가 신규 인원 252명중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유망한 사용자들은 전부 포섭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네들이 어떻게 하든 내가 관여할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조용히 백한결을 낚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소소한 바람이라면, 백한결과 차유나의 사이가 갈라져 박환희가 그녀를 데려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11주차에 들어서면서 내 교관 업무에 교육이 추가되기 시작했다. 정신 교육에 들어가는 일이 잦아진 것이다. 주된 명목은 0년 차 사용자로서 북 대륙에 기여한 바를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면 간간이 내가 겪었던 실제 경험을 예로 들 수 밖에 없었는데,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으니 조금 각색해서 말해주곤 했다. “우스갯소리기는 하지만, 초심자의 행운이 따르면 반드시 가혹한 시험으로 끝을 맺는다고 하죠. 비록 저와 클랜원들 또한 운이 좋아서 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더욱 북 대륙의 안정화와 발전에 기여할 생각입니다. 자, 많이 지루하신 것 같은데 강의는 잠시 멈추는 게 나을 것 같군요. 약 10분간 휴식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네~.” 오늘은 오전에 정신 교육이 잡혀있었다. <고대 연금술사 비비앙의 던전>을 탐험할 적의 이야기와 초심자의 행운을 섞어 간략히 말해준 후 휴식을 선언했다. 다음 시간에는 부랑자를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해줄 생각이었다. 몇 명은 아쉬운 얼굴로(그 중에 백한결은 과도할 정도로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몇 명은 반가운 얼굴로 대답했다. 딱딱한 강의가 아니라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나 다름없기 때문에 실상 그렇게 지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질질 끌면 좋아할 사용자는 없었고, 나 또한 밖에서 연초 한대를 피우고 싶었기 때문에 적당한 구실을 들어 휴식 시간을 가진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강의실 문을 나가려는 찰나 몇 번 들어본 기억이 있는 목소리가 강의실 전체를 울렸다. “김수현 교관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자 손을 들고 막 자리에서 일어서는 박환희를 볼 수 있었다. 그는의 얼굴 표정은 정중했고 전체적으로 공손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저 모습이 꾸며낸 것임을 알고 있기에, 나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교육과 관련이 있는 질문입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꼭 하고 싶었던 질문입니다.” “…알겠습니다. 해보시죠.” 내 허락이 떨어지자 박환희는 주위를 한번 훑었다. 그러고는 입 꼬리에 연한 미소를 걸치며 질문을 던졌다. “교관님이 클랜 로드로 있는 머셔너리 클랜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머셔너리 클랜에 대해서요?” “예. 이번 주차부터 여러 교관님들께서 소속된 클랜을 홍보하시고, 많은 것들을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김수현 교관님은 저희와 같은 0년 차 사용자라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희와 비슷한 입장인 만큼 다른 기성 클랜과 어떤 점들이 다른지 알고 싶습니다.” ‘이놈 봐라.’ 겉으로 보면 별 문제가 없지만 마치 자기네들이 클랜을 고르고, 평가하고 있다는 말투였다. 그러나 놈의 속내는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코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머셔너리 클랜에 관심이라도 있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하하. 물론이죠. 그 동안 다른 교관님들이 몇 번이나 언급하셨거든요.” “그렇습니까. 그럼 그때 충분히 들으셨겠네요. 그렇다면 거절하겠습니다.” “예…. 예?” 설마 내 거절은 생각지도 못했는지 박환희는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거렸다.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진 그의 얼굴을 감상하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머셔너리 클랜은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홍보를 할 계획이 없습니다. 기준에 적합한 사람이 보이면 직접 다가가 얘기를 하고, 상대방의 동의를 이끌어낸 후 스카우트를 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아…. 예.”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사용자 박환희는 저희 클랜의 가입 기준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아니, 미달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군요. 뭐, 아무튼 관심은 감사합니다. 충분한 답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환희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똥씹은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곧 강의실은 사용자들의 술렁거림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살며시 귀를 기울이자 ‘헐. 박환희가 거의 수석 확정 아니야? 근데 기준이 미달돼?’ 또는 ‘그런데 저 교관도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했다는데. 커트라인이 엄청 높은가 봐.’ 라는 말들이 귓가로 흘러 들었다. 나는 더 질문이 있냐는 뜻으로 고개를 기울였고, 박환희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내 시선을 회피했다. 그리고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키득키득 웃고 있는 백한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수선한 소란을 뒤로하고 다시 강의실을 나가려는 찰나였다. 막 한 발짝 옮긴 순간, 저절로 눈 앞의 문이 열리는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열린 문 사이로 너덧 명의 사용자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고 있었는데, 특이한 건 모두 공통적으로 묵 빛깔 플레이트 메일을 착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오른 가슴에는 황금빛을 번들거리는 사자 문양이 찍혀있었다. ‘이놈들은 흑 사자인데? 산하 무력 단체가 갑자기 왜 들이닥쳤지?’ 내가 의문을 품는 동안 그들은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투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머셔너리 로드. 황금 사자 산하 단체 흑 사자에서 나왔습니다. 갑작스런 말씀이겠지만, 잠시 같이 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밑도 끝도 없군요. 아직 교육시간 남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교육은 이만 종료하셔도 됩니다. 다른 모든 교관님들도 호출한 상태고, 교육은 저희들 중 한 명이 남아 통솔하겠습니다. 한시가 급한 상황입니다.” “제가 왜 가야 되는지 설명을 먼저 듣고 싶습니다만.” 자신들을 흑사자 단체라고 밝힌 사용자들은 곤란한 얼굴로 왼쪽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강의실 내 소음은 완벽하게 멎은 상태였고 신규 인원들은 모두 우리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선두에 선 남자는 내 앞으로 슬며시 다가왔다. 그리고 얼굴을 내밀어 자그마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대 간부 박현우의 전언입니다. 그림자 여왕께서 돌아오셨습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오늘은 정말로 만족스러운 날입니다. 제가 항상 당하기만 했는데, 오늘 드디어 갚을 수 있었거든요. 아하하하!(혹시 그 분이 이 글을 보실지 모르겠지만 말이죠.) 그래서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하하하. 여러분! 드디어 아카데미가 끝이 보이고 있어요! 이제 1/10 정도 왔으니, 9/10만 더 가면 됩니다! 이제 김수현이 숨도 쉬고, 한 걸음 걷고, 고개 돌리고 그걸 하나씩 세세하게 표현을….(퍽퍽! 퍽퍽퍽퍽! 퍽퍽퍽퍽퍽퍽퍽퍽!) 죄, 죄송합니다. 농담이에요. ㅜ.ㅠ PS.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신 독자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D 『 리리플 』 1. eres : 1등 축하 드립니다. 하하. :) 이제 1등으로 새로운 분을 뵙는 게 익숙하네요. 이번 회도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2. 아리이느 : 첫 코멘트를 환영합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3. gkgngh : 얼마 전 첫사랑을 만나서, 그 여성과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어요. 참 행복하게 살고 싶거든요. 하하하. 그런데 결혼에 대한 환상이 깨졌습니다. ㅜ.ㅠ 4. 사람인생 : 헐. 또 아프시다니. 오랜만에 뵙습니다. (__) 몸 조심하셔야 해요! 5. 산사나무 : 예. 아마 고연주를 어떻게 하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주인공 주변 여자들은 NTR 없어요. ㅎㅎㅎㅎ 6. hgkdrgv : 감사합니다. 다행히 한별이 필살 기는 진도를 빼면서 쓸 수 있는 내용이라서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 이제 흔들 수 있고, 회수할 때도 됐죠. 7. 라크렌 : 다음 회부터 회수 작업 들어가야죠. :) 아, 살짝 알려드리는 건데 그 중 하나는 지금 회수할 수 없는 성질입니다. 하하하. 8. 엘프카이 : 아! 그 뜻이었군요! 엘프카이님 코멘트 보고 한참 웃었습니다. 설마 스킵이 그런 의미를 갖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9. 워리어 : 어떻게 보면 주인공의 매력이기도 하고, 비 호감이 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하하. 아직 자신의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지만, 앞에 여러 번 떡밥을 던졌으니 그에 관한 부분도 서서히 언급할 생각입니다. :) 10. 輝雅 : 필살 기(?) 부분에 나올 예정입니다. 그때 필요한 부분이 있거든요. 껄껄!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28 / 0933 ---------------------------------------------- 파국 흑 사자들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장소는 아카데미의 교관 회의실이었다. 나를 인도한 사용자들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주었다. 곧장 회의실 내부로 걸어 들어가자 왼쪽 테이블을 삼분지 일 정도 채우고 있는 동부 클랜 교관들이 보였다. “아. 머셔너리 로드도 오셨군요.” 회의실을 가득 메우던 수군거림이 멈추고 몇몇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심각한 얼굴로 서진우와 이야기를 나누던 성현민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는 체를 해왔다. 그가 안내해주는 자리에 착석하자 성현민의 기다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정신 교육 중에 갑자기 호출을 받았습니다. 조금 당황스럽네요.” “네…. 저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군요. 혹시 무슨 일 때문에 이러는지 알고 계신가요?” “후….” 그는 대답 대신 한번 더 한숨을 내뱉었다. 보아하니 모르는 눈치는 아닌 것 같은데, 말하기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항상 침착한 태도를 보이는 성현민이 이 정도로 혼란스러움을 내비치는 것은 드문 일이었기에, 뭔가 중대한 일이 터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가다듬었다. 박현우와의 대화, 고연주와의 만남 그리고 방금 전 성현민의 반응으로 대충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복잡한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은 회의에 집중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저 가만히 앉은 채로 기다리고 있자 회의실에 들어왔을 때 보이지 않던 사용자들이 속속히 도착하기 시작했다. 내 뒤로 도착한 인원들은 대부분 남부 클랜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네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불쾌한 기색이 어려있었다. 이윽고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털레털레 들어온 김덕필을 마지막으로, 비 참가 클랜들에서 파견 나온 교관들이 전부 모이게 되었다. 나는 차분히 그들의 동태를 살폈다. 남부 클랜 교관들은 전부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그에 반해 동부 클랜 교관들은 일부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동남부 클랜들의 반응이 미묘하게 갈리고 있었다. “아 짜증나. 간만에 교육 없어서 쉬고 있었는데 이게 뭔 꼴이야.” “하여간 요새 좀 잠잠~하다 싶더니 또 이러는구먼. 아주 지들 멋대로야, 멋대로.” 연혜림이 발칵 짜증을 내자 김덕필은 곧바로 말을 받으며 걸걸한 목소리를 터뜨렸다. 그리고 한 명 두 명 동조하는 것을 보며 역시나 갈등은 더욱 깊어지면 깊어졌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황금 사자의 호출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가던 도중, 외부서 수십 명의 사용자들이 걸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곳에 있는 사용자들 모두가 한가락 하는 만큼, 모두들 쏟아내던 말들을 멈추고 문 쪽으로 시선을 쏘아 보냈다. 그리고. 쾅! 문 앞에 다다랐다 싶을 즈음 부서질듯한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성현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짐과 동시에, 흰머리가 드문드문 보이는 남성 사용자가 한 발짝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거만한 눈길로 우리들을 훑더니, 으르렁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흥. 올 사람은 다 온 것 같군.” “…….”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방금 들어온 남성이 입을 여는 순간 왼쪽에서 날카로운 기세들이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성은 그에 아랑곳 않는 얼굴로 중앙을 휘적휘적 가로지르더니, 맨 위쪽에 위치한 상석에 큰 소리가 날 정도로 엉덩이를 붙였다. “뭐해? 안 들어오고? 아. 그림자 여왕도 들어오시지요. 그건 중앙에 놔주시면 됩니다. 여기 있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말이죠.” 남성의 문 쪽을 향해 손짓하자 그 동안 바깥에 서있던 인원들이 차례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선두에 황금 사자를 필두로 서부, 북부의 교관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중앙에 고연주가 보였는데, 그녀는 양 팔에 길고 넓은 나무상자와 고급스러워 보이는 천으로 감싼 뭔가를 들고 있었다. 한꺼번에 많은 인원이 입장함으로써 조용하던 회의실에 발자국 소리들이 왕왕 울렸다. 나는 이 틈을 타, 재빨리 상석에 앉은 남성을 향해 제 3의 눈을 활성화시켰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도영록(7년차) 2. 클래스(Class) : 일반 마법사(Normal Mage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황금 사자 5. 진명 · 국적 : 구제불능의 지저분함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56) 7. 신장 · 체중 : 184.8cm · 88.3kg 8. 성향 : 비열 · 더러움(Low - Down · Stain) [근력 47] [내구 54] [민첩 69] [체력 63] [마력 93(+3)] [행운 75] ‘아. 도영록. 기억났다.’ 조금 긴가민가한 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사용자 정보를 본 후에야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잠시 동안 허공에 떠오른 정보들을 응시한 후, 나는 다시금 고연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단은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보여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고연주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녀는 도영록의 말대로 품고 있던 두 물품을 중앙에 내려놓은 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와 시선을 마주치자, 곧장 옆으로 다가와 앉더니 내 어깨에 슬며시 머리카락을 기대었다. 체취가 진하게 풍겨져 오는 걸로 보아 2주 동안 많은 고생을 한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더욱 내어주었다. 이윽고 방금 전 한꺼번에 입장한 중앙, 서부, 북부 클랜 소속 사용자들이 오른쪽 테이블에 모두 착석했다. 왼쪽은 원정 비 참가 클랜이, 오른쪽은 원정 참가 클랜이 앉음으로써 서로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뭐 대부분 내 얼굴을 알고 있겠지만, 새롭게 보는 사람도 있을 터이니 간단히 소개를 하도록 하지. 아. 그래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말은 살짝 높이는 게 좋겠군. 나는 황금 사자 클랜의 대 간부이며, 현재 클랜 로드 직을 대리 수행하고 있는 도영록이라는 사람이올시다.” “…….” “아마 다들 궁금할거요. 아카데미서 열심히 일들하고 계시는데, 왜 이리 갑작스레 여러분들을 호출했는지.”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 불렀겠죠. 안 그래요? 사용자 도영록씨.” 이미 문을 거칠게 열고 거만한 태도로 상석에 앉았을 때부터 기세 싸움은 시작되었다. 아니, 황금 사자에서 나온 도영록이 저런 말투를 보인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싸우자는 것과 다름없었다. 도영록이 고자세를 보이자 가뜩이나 심사가 비틀려있던 연혜림이 비꼬듯 대답했다. 도영록은 그런 그녀를 보며 빈정대는 웃음을 짓고는 이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있고 말고.” “사용자 도영록. 잠시 진정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훗. 진정하라고?” “지금 당신의 태도는 마치 아랫사람을 대하는 것 같아 상당히 불쾌합니다. 당신의 그 동안 쌓아온 실적과 지위는 인정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당신과 동등한 위치에 서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 연혜림에 이어 서진우도 불쾌함을 드러냈다. 10강 중 2명이 지적했으면 아무리 황금 사자라 해도 찔끔할 법도 한데, 도영록은 오히려 적대감을 내비쳤다. 그 반응에 서진우의 표정이 굳어질 즈음 도영록은 거세게 몸을 일으켜 중앙으로 나섰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중앙에 놓인 곱게 쌓인 천을 걷어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물건이 드러난 순간, 싸늘한 침묵이 왼쪽 테이블로 내려앉았다. “이게 뭔지 알고 있나?” “그건…. 대모님의…. 설마.” 풀려진 천 위에는 갈기갈기 찢겨진 빛 바랜 로브와 여러 조각으로 나뉜, 평소 대모가 들고 다니던 지팡이가 들어있었다. 누군가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말을 더듬거리자, 도영록은 이번엔 나무상자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상자에는 뭐가 들어있을 것 같나?” “…….” “이유는 지금 말해주도록 하지. 어제 동부 산맥으로 파견을 나간 조사단이, 대모님의 사망 사실을 확인했다.” “뭐라고? 믿을 수 없다! 갑자기 뭔 개 헛소리….” “김덕필. 그럼 이리 와서 확인해보던가? 아니, 내가 직접 열어주도록 하지. 눈 크게 뜨고 똑똑히 보시라고들.” 도영록을 말을 마친 후, 덜덜 떨리는 손으로 기다란 나무 상자를 조심스럽게 개봉했다. 문득 내 어깨에 기대어있는 고연주의 숨소리가 거칠어짐을 느꼈다. 이윽고 상자가 개봉되고 내부가 드러난 순간,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던 오른쪽 테이블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 이럴 수가!” “아…!” “읏….” 대모의 시체는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일부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고, 또한 끔찍했다. 한동안 그들의 반응을 보던 도영록은 다시 상자를 닫고 천을 감쌌다. 마치 신주 단지를 모시듯 소중하게 끌어 모으며, 그는 분노에 찬 목소리를 뱉어냈다. “이래도 내가 진정할 수 있겠나? 대모님의, 대모님의 시체를 눈 앞에 두고 내게 진정하라고?” 도영록의 공격적인 말투에 서진우는 어두운 얼굴로 입술만 짓씹었다. 하지만 이내 침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모님의 사망은 저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가라앉히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꽤나 담담하게 말하는군. 마치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저희 또한 통신을 통해 한발 앞서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 난 조사단에게 여기저기 떠벌리라고 명령한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알았지?” “조사단 분들은 대모님의 사망을 확인한 후 저희가 관리하는 도시로 들어왔습니다. 저희 한(韓) 클랜에서 그들에게 숙소를 제공했고, 그때 알 수 있었습니다. 함부로 떠벌리고 다닌 점은 죄송합니다만 괜한 오해는 받기 싫군요.” 서진우와 도영록의 대화가 오가는 도중 성현민이 부연설명을 곁들였다. 잠시 지긋한 눈초리로 성현민을 응시한 도영록은, “구변 하나는 좋군.” 이라는 말과 함께 끌어안은 것들을 들고 자리로 되돌아갔다. 다시 상석에 앉은 그는 기다란 한숨을 내쉬며 양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았다. 누가 봐도 대모의 갑작스런 죽음에 슬퍼하고 분노하는 모습이었다. 불편한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문득 이상한 기분이 전신을 엄습했다. ‘그런데 한창 대모가 활동했던 시절 둘 사이가 엄청 나빴다고 들은 것 같은데. 애초에 대모를 축출하는데 앞장선 것도 저놈이라 들었고.’ 1회 차의 기억을 더듬자 뭔가 석연찮은 기분이 느껴졌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몇몇은 얼굴을 미묘히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곧이어 도영록은 한두 번 크게 심호흡을 했고,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후…. 그래. 아랫사람 대하듯 말한 건 사과하도록 하지. 그럴 의도는 없었으니 이해해줬으면 좋겠군.” “이해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대모님이시니까요. 그런데 혹시 사망 사인을 알 수 있을까요? 아니면 흔적이라던가….” “모르겠다. 애초에 1차 조사단은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다행히 머셔너리 로드가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그림자 여왕의 도움으로 대모님의 시신은 발견할 수 있었어. 하지만 그게 다야. 그 이상의 추적은 불가능했어. 도대체 누가, 왜, 이런 일을….” 왜 갑자기 태도를 진정시켰나 했더니 도영록은 나와 고연주를 언급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우리들이 용의자에서 벗어났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당연히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머셔너리는 건드리지 않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그때였다.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던 도중, 우호 클랜들이 앉아있는 테이블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마 대모님께 원한을 가진 사용자가 저지른 일이 아닐까요?” “원한이라…. 무슨 뜻이지?” “뭐, 대모님의 귀환을 반기지 않는 어디어디의 조직적인 소행이거나….” “뭐라고요?” SSUN 클랜 소속 여성 사용자가 머리를 배배 꼬며 말을 흐리자, 허유리가 곧바로 발끈하며 되받아 쳤다. 맨 처음 나온 말은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는 것. 그렇다면,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뒤에 이어진 말이라는 소리였다. “방금 그 말은 우리들은 겨냥한 말인가요?” “어머?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제가 당신들이 저질렀다고 말하기라도 했나요?” 성현민은 얼른 허유리를 향해 진정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에 결국 입은 다물었지만, 그녀는 전방을 노려보는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회의실에는 일촉즉발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깨트리고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도영록이었다. “그러고 보니 대모님께서 돌아오시고 사용자 아카데미를 판단하겠다는 보고를 들은 것 같군.” “사용자 도영록!” “그 동안 아카데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박현우한테 세세히 들어 알고 있었다.” 진득하게 참고 있던 서진우는, 도영록의 말에 크게 노호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도영록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사늘한 얼굴로 왼쪽 테이블을 훑었고 그대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개판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더군. 그러나 참았다. 그리고 참으라고 했다. 황금 사자를 강도 높게 비난하고 아카데미에서 입맛대로 휘두른 일은 참고 넘길 수 있다. 솔직히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리고 어느 클랜 말마따나 우리들은 강철 산맥 원정을 실패했고, 북 대륙에 악영향을 끼친 주범이라 해도 할 말이 없었지. 내가 그때 나서지 않았던 이유는 당분간 자숙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도영록은 아픈 부분을 교묘하게 찔러 들어오며 서진우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서진우를 비롯한 비 참가 클랜들이 할 말이 없는 부분이었다. 그가 이 자리에서 굳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아마도 주도권을 잡기 위함일 것이다. 그 말인즉슨, 지금부터 그의 본심이 나온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정도라는 게 있다. 지금 와서 밝히는 거지만, 대모님의 신체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클랜 로드를 치료하기 위해, 불완전한 몸을 이끌고 동부 산맥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몸이 불완전하셨다니….” “그래. 하지만 대모님은 사망하셨고, 클랜 로드를 치료할 희망은 사라져버렸다. 더불어 그나마 남아있던 클랜의 정신적 지주를 잃어버렸고. 이 명백한 적대 행위에 대해 황금 사자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범인을 잡고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내려야겠지요.” 도영록의 물음에, SSUN 클랜 소속 여성 사용자가 곧바로 대답했다. 잠시 동안 회의실 내부는 술렁거림으로 가득히 차 올랐다. 이윽고 소란이 천천히 사그라지자 바로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 모인 모든 클랜이 대모님을 살해한 범인을 잡는데 도움을 줬으면 좋겠군. 정말로 자신들이 결백하다면 설마 거절할 리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배후를 밝히고 범인을 잡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말씀대로 철저한 조사가 선행되어야 하며, 그 전에 서로 오해가 생길만한 말들은 자제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직 결백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 게 좋겠지요. 현재로서는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니까요.” “큭. 그 말은 협조를 하겠다는 말로 받아들여도 된다는 건가?” “여기 있는 교관들 중에서는 결정 권한을 가지지 못한 이들도 몇 명 있습니다. 최소한 각자 소속한 클랜에 이번 사건을 전달하고 의견을 구할 시간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진우의 논리 정연한 말에 도영록은 고개를 주억였다. “좋다. 그럼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하도록 하지. 참고로 말하자면, 황금 사자 산하 클랜들은 모두 이번 수사에 협조하기로 했으니 그리 알고 있으면 좋겠군. 박현우! 나는 곧바로 클랜 하우스로 돌아가겠다. 나머지는 네가 마무리를 짓도록.” “예. 알겠습니다.” 자신의 할 말만 끝내고 몸을 일으킨 도영록은, 대모의 유해를 끌어안은 채 비틀거리며 중앙을 가로질렀다. 이윽고 막 문 앞에 다다랐을 무렵, 그는 비척거리던 몸을 똑바로 가누며 걸음을 멈췄다. “사용자 아카데미는 참았지만 이번 일은 절대로 참을 수 없다. 아니 참지 않을 것이다. 황금 사자는 대모님의 사망에 관해 철저한 조사에 들어갈 것이며, 배후를 밝히기 위해 모든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배후를 밝히는 그 순간.” 잠시 말을 멈춘 도영록은 절반 정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누군가를 씹어먹을 듯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그들에게, 아직 황금 사자의 이빨이 녹슬지 않았다는 것을, 똑똑히 각인시켜주도록 하겠다.” 곧장 문을 열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자 왼쪽 테이블에 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방금 전 도영록의 말은, 황금 사자가 비 참가 클랜들에게 경고하는 일종의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네, 많은 독자 분들께서 걱정을 해주신 점,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곧 한꺼번에, 여러 일들이 터지겠지요. 클랜간의 갈등도, 한별이도, 박환희와 백한결(+차유나)도, 신규 인원들도, 부랑자도. 물론 수료 이전에 모두 터지지는 않습니다만, 대부분 터질 겁니다. 이제 아카데미에서 남은 기간은 앞으로 2주~3주 가량 되는데, 최대한 어지럽고 복잡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하나씩 진행하지 않았습니다.(하나씩 하면 저도 편하긴 하지만요.) 그래서 묵묵히 복선만 깔고 있었어요. ㅜ.ㅠ 아카데미도 후반부로 접어들었습니다. 이왕 여기까지 끌고 온 것, 부디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그리고 독자 분들이 최대한 이해하시기 쉽게 최선을 다해 사건을 배열하고, 묘사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 리리플 』 1. 센서티브 : 오호라. 다시 센서티브님이 1등을 탈환하셨군요. 축하 드립니다. 하하하.(오랜만에 뵙는 것 같네요. ㅋㅋㅋㅋ.) 2. 이슬며르 : 에헤헤.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부끄러워요. 저, 저도 이슬며르 님이 참 좋, 좋습…. @_@ 3. 리메르스 : 쿠폰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좋은 내용으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_(__)_ 4. GODTOP : 아하하. 아니요. 물론 농담이었습니다. 이제는 지금껏 깔아둔 복선들을 대부분 회수해야죠. :) 5. 현오 : ㅋㅋㅋㅋㅋㅋㅋㅋ. 메모라이즈 고교 ㅋㅋㅋㅋㅋㅋㅋㅋ. 아프니까 청춘이다 와 뒤에 별표 보고 한동안 혼자서 킬킬 웃었습니다. :D 6. 개차반왕자 : 헐. 쿠폰 감사합니다. _(__)_ 저, 절단 마공은 실은 패시브 스킬 이어서 말이죠. 제 본의와는 상관없이 나온답니다!(퍽퍽!) 7. 오피투럽19 : 오피투럽19 님. 실은 그것은 말이죠, 홀 플레인의 연금술사들 중 애연가들이 만들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속닥속닥.) 8. 순수혈통 : 구상은 마친 상태입니다. 이 구상이 독자 분들에게 잘 와닿을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지만, 최선을 다해 묘사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 9. 창궁무한 : 수현의 비상이 멀지 않았습니다. :) 후후후. 아, 한별이는 아마 곧 크게 터질 예정입니다. 아마 그때 많은 독자 분들이 저와 한별이를 질타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껄껄! 10. BlackJoey : 미안해요! 엉엉엉! 아카데미가 단순히 박환희가 중점이 아니라, 차후 홀 플레인의 흐름에 중요한 시발점이 되는 역할을 하는지라 어쩔 수 없었어요! 엉엉엉!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ㅜ.ㅠ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29 / 0933 ---------------------------------------------- 파국 황금 사자 클랜의 정신적 지주, 9년 차 사용자 손분례. 통칭 대모라 불리는 사용자가 동부 산맥에서 살해당했다. 그녀의 시체는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만큼 끔찍하게 훼손당했으며, 시신을 발견한 곳과 전투가 벌어졌다고 추정되는 장소에서는 명확한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즉 대모를 살해한 실범(實犯)은 추적 능력에 일가견이 있고 의도적으로 흔적을 지웠다는 소리였다. 대모의 사망 소식은 북 대륙 전역으로 재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 인해 강철 산맥 원정 실패 후 간신히 진정되어가던 북 대륙은 다시금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9년 동안 대모가 홀 플레인, 북 대륙에 끼쳤던 영향은 가히 전설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전설이 갑작스러운 의문사를 당했으니, 시끄럽지 않고 조용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아카데미 교관 회의실에서 들었던 도영록의 선전포고 이후 황금 사자 클랜은 굉장히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일이 터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모 사망 사건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발표했고, 진상을 밝히기 위해 각 도시 대표 클랜들의 대대적인 협조를 요청한 것이다. 명분은 완벽했다. 어디 굴러다니는 사용자가 아닌 무려 대모의 죽음이었다. 그 이름값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아, 북 대륙의 사용자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사망에 대한 비밀이 밝혀지기를 원하고 있었다. 내가 이러한 사실들을 자세히 알 수 있었던 이유는 고연주 덕분이었다. 그녀는 동부 산맥에서 돌아온 이후 당분간 사용자 아카데미에 머무르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전해주는 아카데미 외부의 정세는 제법 흥미로웠다. 특히 날이 갈수록 대모의 사망에 대한 갑론을박이 가열되고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현재 북 대륙의 포커스는 “도대체 누가, 왜, 대모를 살해했는가.” 에 맞춰져 있었다. 웃기게도, 아직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건의 범인은 북 대륙 내부의 소행이라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부랑자들이 벌인 일이라고 말했지만, 그들의 주장은 큰 힘을 얻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얼마 전 부랑자 말살 계획 이후 그들 대부분이 서대륙 쪽으로 도주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이후로 북 대륙 내에서 부랑자들의 출현 빈도가 거의 없다는 사실도 한몫 거들어, 잠시 이야기만 나오다가 쑥 들어가고 말았다. 그렇게 범행이 북 대륙 내부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분위기가 형성되려는 즈음, 곧바로 황금 사자 우호 클랜들의 대대적인 성명이 이어졌다. 그들은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라면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겠으며, 협조 요청 또한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힘으로써 일반 사용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북부 도시와 서부 도시의 대표 클랜들이 입장을 밝혔으니, 이제 남은 건 남부 도시와 동부 도시의 발표였다. 원정 참가 클랜과 비 참가 클랜들의 갈등이 심하다는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기 때문에, 모든 사용자들은 그들의 발표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앞서 발표한 클랜들 보다 며칠 늦은 시점에 비 참가 클랜들의 성명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성명은 우호 클랜들에 비하면 굉장히 간결했다. 발표 내용의 핵심인즉슨 바로 “대모 사망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데 동의한다.” 그것 하나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황금 사자의 협조 요청을 받아들이는 걸로 볼 수 있겠지만 그간의 갈등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미묘한 감이 없잖아 있는 발표였다. 아무튼 앞으로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당장은 알 수 없어도, 일단은 도영록의 의도한대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었다. 곧 이어진 황금 사자의 행보는 한때 북 대륙의 패권을 쥐었던 클랜이라는 사실을 재 입증하듯 매우 신속했다. 자신들의 성명에 동의를 표한 모든 대표 클랜들의 내부 중요 인사들을 향해 바바라로 불러들인 것이다. 그 중 출석을 요구 받은 대상이 모두 클랜 로드나 외교를 맡고 있는 대 간부급이었으며, 그 외의 인원은 최대한 제한한다는 조건이 주목할만했다. 황금 사자의 요청에 따라 각 클랜의 거물들이 하나 둘 바바라로 모여들자 자연스레 일반 사용자들의 시선 또한 중앙으로 쏠리게 되었다. 그렇게 모두의 관심이 모인 가운데, 북 대륙을 지배하는 대표 클랜들의 회동이 막을 열었다. * “이 개 같은 새끼들!” 쾅! 김덕필은 우렁찬 고함을 지르며 테이블을 있는 힘껏 후려갈겼다. 그 탓에 그가 앉아있는 테이블 윗면이 부스러지고 파편들이 폭삭 내려앉는다. 분명 무례한 행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아니, 이곳에 모여있는 모두가 다들 하나같이 분노를 내비치고 있었다. ‘동의한다라는 말은 말 그대로 동의만 한다는 말이었군.’ 나는 쓴웃음을 짓고 생각에 잠겼다. 근 5일 동안 이어진 세 차례의 회동은 일방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거두절미하고 핵심적인 내용만 말해보자면, 비 참가 클랜에서는 동부 산맥으로의 조사단을 다시 파견하는 것을 원했다. 범인에 대한 단서를 잡을 수 있는 장소가 그곳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대표로 나선 조성호는 이번에는 양 클랜이 힘을 합쳐 대규모로 조사단을 꾸리고, 동부 산맥 전체를 세세히 살피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황금 사자에서는 조성호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이미 자신들이 충분한 조사를 끝냈으며, 다시 조사하는 건 인력, 시간을 낭비하는 꼴이라고 주장했다. 비 참가 클랜들도 순순히 물러서지는 않았지만, 도영록의 “그림자 여왕보다 추적 능력이 뛰어난 사용자를 데려오면 납득하겠다.” 라는 말 한마디에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솔직히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여기까지는 들어줄 만했다. 그러나 황금 사자로 턴이 넘어오고, 뒤이어진 그들의 발언은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들이 다음에 발언한 내용은 바로 각 클랜에 대한 내부 감사를 실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말인즉슨, 감사를 받게 되는 클랜은 자신들의 정보 일체를 황금 사자 클랜에게 여과 없이 드러내야 한다는 소리였다. 당연히 비 참가 클랜들 모두가 거세게 반발했다. 하지만 황금 사자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경한 태도를 보였고, 우호 클랜들 또한 “거리낄게 없다면 내부 감사에 응하라.” 는 말로 반발하는 클랜들의 태도를 지적했다. 내가 봐도 황금 사자의 직접적인 내부 감사 발언은 조금, 아니 한참 도를 넘었다는 감이 있었다. 애초에 감사를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상당히 굴욕적으로 여겨지는 일이라고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금 사자의 발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뒤이어 자체적인 감사 과정에서 의심스럽다는 판단을 내린 내부 클랜원들에게 <진실의 수정>을 사용하겠다고 연이은 충격타를 날렸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여기서 한술 더 떠, 현재 <진실의 수정> 수량이 많이 부족하니, 모자라는 물품은 각 클랜에서 조달 받겠다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비 참가 클랜들의 공분을 샀다.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는 굴욕 정도라고 볼 수 없었다. 도영록의 충격적인 발언 이후로 회담 사이로 한동안 거친 고성이 오고 갔다. 그리고 고려 클랜을 비롯한 원정 비 참가 클랜들은 차라리 자신들이 자체적으로 내부 감사를 시행하겠다고 했다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일단 내부 감사 발언에 따라준다는 것만해도 상당 부분 양보했다고 볼 수 있었는데, 황금 사자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들은 이번 사건의 피해자는 황금 사자 클랜이라는 점을 부각시켰고, 범행을 저지른 클랜이 잘도 투명한 내부 감사를 할 수 있겠냐는 이유를 들어 그들의 의견을 묵살했다. 결국 그 이후로는 서로 말꼬리만 붙잡는 얘기들이 이어졌다. 회담은 3차까지 이어졌지만, 서로의 갈등과 반목만 재확인하는 시간이었을 뿐 딱히 이렇다 할 성과를 거뒀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내부 감사에 대한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회담은 파국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리고 회담 이후, 아카데미 사건으로 남아있는 교관들만 상당히 애매한 입장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미친놈들. 결국 우리들 말은 무시하고 강행하겠다는 소리잖아!” “강행하겠다는 소리가 아니라 이미 실행에 옮겼어요. 2차 회동이 끝난 시점에서 이미 찬동을 표한 북부, 서부 도시 대표 클랜들의 내부 감사에 들어갔다고 하네요.” 김덕필은 분기를 감추지 못하며 계속해서 씨근거렸고, 나승혜는 사늘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정정했다. “참나. 내부 감사? 그 놈들이 잘도 공정하게 하겠습니다. 눈에 불을 키고 샅샅이 뒤질게 눈에 보이는데요. 어떤 꼬투리라도 잡으면 그것 가지고 또 달려들게 눈에 보이는데 어느 정신 나간 사람이 찬성하겠습니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내부 사정이야 어찌됐든 우리들은 황금 사자의 협조 요청을 거절한 꼴이고, 여론은 우리에게 안 좋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어요.” 이들의 말대로 현재 홀 플레인의 여론은 비 참가 클랜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단순히 내부 감사를 거절할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각에서는 내부 감사는 확실히 과한 처사라는 말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2차 회동이 끝난 이후 황금 사자는 내부 감사에 찬동한 북서부 클랜들을 대상으로 실제로 직접 감사에 들어갔고, 해당 클랜들을 적극적인 태도로 감사에 응했다. 그와 동시에 대모가 소집령 이후 떠났던 이유와, 아카데미를 두고 한 말들이 알게 모르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사전에 이야기를 맞춘 것처럼, 상황은 교묘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뭐, 누가 퍼뜨렸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지만.’ 사용자 아카데미를 두고 일어난 클랜들의 갈등. 황금 사자 클랜 로드의 치료를 위해 동부 산맥으로 떠난 대모. 이후 동부 산맥에서 발견한 대모의 시신. 알게 모르게 퍼지기 시작한 내부 소행으로 단정짓는 분위기. 그리고 원정 비 참가 클랜들의 내부 감사 거부. 이 모든 흐름이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하자, 그전까지 내부 소행이라고만 단정짓던 흐름의 방향이 일거에 한쪽으로 쏠리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들도 가만히만 있으면 안될 것 같습니다.” “…….” 그 순간, 지금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서진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답답한 한숨만 푹푹 내쉬던 사용자들은 단박에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어차피 지금 이곳에 계신 분들의 처지는 다들 비슷할 터이니 그냥 개인적인 생각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서진우는 예의 부드러운 인상을 싹 지운 채 딱딱히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는 도영록이 진심으로 대모님의 죽음에 분노하고, 원인을 밝히기 위해 이렇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저랑 생각이 똑같으시네요. 애초에 대모님이랑 활동하던 시절 대립 각을 세우고, 추후에 축출에 앞장선 이가 그가 아니었나요? 저는 그렇게 들었는데.”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허유리는 곧바로 동의를 표했다. 둘의 대화에 모두들 짐짓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대모님의 죽음을 밝힌다는 명분이 있지만 그들은 필요 이상으로 과도하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도가 지나쳤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솔직히 그네들의 저의가 의심스러울 지경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대모를 일부러 살해했다는 말씀이신가요? 이런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너무 앞서나가시는군요.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다만 지금 그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어느 정도 알 것 같습니다. 그냥 보고 듣고 넘기기에는 그 동안 그들이 보인 행동이 너무도 발 빠르고 계획적입니다. 마치 회담 전 그네들끼리 사전에 이야기를 나눈 것처럼 말이죠.” “설마.” “예. 까놓고 말하죠. 제 눈에는, 그들이 강철 산맥 원정으로 잃어버렸던 명성과 주도권을 이번 사건을 통해 다시 되찾겠다는 발버둥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권 다툼이란 말이군. 정확하게 봤네.’ 서진우의 직접적인 말에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그 동안 서로 암묵적으로 담아두고 있던 말이었지만 직접적으로 꺼내자 뭔가 와 닿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속이 타는지 서진우는 냉수 한잔을 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회의실 내부에 있는 인원 전부를 둘러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내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입가에는 뭔지 모를 연한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서진우는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그와 같은 동부 소속의 성현민과 나승혜를 위시한 인원들도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냉랭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아마 현재 직접적으로 의혹을 받고 있는 이들인 만큼 현재 감정 상태가 굉장히 날카로울 것이다. “말씀대로, 현재 여론은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당분간 앞으로도 그렇겠지요. 하지만 저희 또한 이대로 순순히 주도권을 내줄 생각은 없습니다.” “그 말씀은 이권 다툼에 본격적으로 나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글쎄요. 그건 지켜보시면 곧 아시게 될 겁니다. 다만, 애초에 우리 동부 클랜에서는 소집령에 응할 때부터 말이죠. 아주 많은 생각들을 하고 왔습니다. 누군가 들과 단단히 척을 질 각오까지 했었죠. 그러나 대모님의 중재로 잠시 그 각오는 접어두었었는데, 여기까지 온 이상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애초에 진흙탕 개싸움을 시작한 건 저쪽이었습니다. 설마 대모님의 사건으로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도발을 했으면, 응당 받아들이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제 생각도 그래요. 눈 뜨고 코 베일 수는 없으니까요.” 그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짜릿한 소름이 돋는 것을 것 느꼈다. 서진우의 말을 받은 성현민과 나승혜의 표정은 미묘했다. 마치 이런 날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예상했고, 뭔가 단단히 대비를 해두었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은데. 황금 사자에서 패를 하나 꺼내 들었으니, 자기네들도 슬슬 꺼낼 때가 되었다는 건가. 하긴, 이 사람들도 진흙탕 개싸움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간들이었지.’ 이윽고 그들은 차분히 문을 향해 걸어나가다가 남부 클랜들의 앉은 테이블 앞에서 다시금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서진우는, 푸른 늑대 클랜의 대표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얘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저희들은 이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아닐 오늘부터 제법 바빠질 것 같거든요.” “바빠지신다 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기대만 하고 계실 건가요?” 나승혜가 옆에서 재빠르게 끼어들었다. 그러자 푸른 늑대 클랜 소속 교관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갑자기 고사성어 하나가 떠오르는군요. 순망치한이라고 하던가요?” “큭. 알아들으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남부 클랜의 긍정적인 화답에 서진우는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들은 순간 남부 클랜 교관들의 눈동자 또한 번쩍이는걸 볼 수 있었다. 그 광경을 확인한 순간, 이것은 바야흐로 두 클랜의 본격적인 개싸움의 서전을 알리는 하나의 신호탄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늦어도 아침에 올리다 고는 했는데, 새벽 작업에 익숙지 못한 관계로 잠들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ㅜ.ㅠ 어제는 정말 부득이한, 뺄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일단 14시에 또 약속이 있는 관계로, 급하게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리리플은 다음 회에 합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독자 분들의 많은 양해를 구합니다. 0230 / 0933 ---------------------------------------------- 파국 많은 이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은 회담은 그렇게 찝찝한 갈등만 남긴 채 파국을 맞이했다. 그 결과 기껏 바바라까지 발걸음을 한 타 클랜들 중 일부는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자신들이 관리하는 도시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그 동안 잠시 교육이 중지되어 있던 사용자 아카데미는 회담이 끝난 이후로 다시금 돌아가기 시작했다. 클랜 정상들의 회담의 영향은 아카데미에 대해서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동부, 남부, 북부 클랜들이 맡고 있던 수많은 교관 직들 중 몇몇이 보류 처분이 내려졌다. 그리고 공석으로 변한 자리는 황금 사자와 우호 클랜 소속 사용자들이 대체해서 들어오고 말았다. 교체 명목은 이것저것 복잡했지만, 간단히 말해보면 내부 감사를 마친 검증된 클랜의 사용자들만이 신규 인원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보류 판정을 받은 교관들 중 절반이 동부 클랜 소속이었다는 것을 주목한다면, 그저 내부 감사를 수락하라는 일종의 압박과 동시에 아카데미에 대한 권한을 서서히 되찾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이 부분도 사실상 문제가 불거질 요소가 컸지만, 동부 클랜 교관들은 별다른 말을 않고 순순히 물러나는 쪽을 선택했다. 엄밀히 말하면 동부, 남부 클랜 뿐만이 아니라 아직 내부 감사를 받지 못한 북부, 그리고 일부 서부 클랜들에게도 똑같은 보류 처분이 내려진 상태였다. 그리고 사실상 황금 사자의 내부 감사를 거절했을 때부터 일반 사용자들 중 태반이 고운 시선을 보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 흘러가는 분위기상 일단 조용히 말에 따라주는 게 낫다고 여긴 것 같았다. 하지만 원정 비 참가 클랜들이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리는 없었다. 특히 3차 회담이 끝나고 한번 모였을 때 서진우, 성현민, 나승혜들이 남기고 간 말들은 자신들 그러한 점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일들을 터뜨리려고 하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어차피 곧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는 1회 차 시절 그들의 모습에 비추어보면, 절대로 이대로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 놈들이었기 때문이다. * 사용자 아카데미는 드디어 13주차에 접어들게 되었다. 수료 기간은 총 100일이지만 원래는 14주 이전에 모든 교육이 종료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회담으로 인해 잠시 중지한 기간이 있었기에, 추가로 교육을 시킨다는 명목으로 14주 끝까지 진행하는 방침으로 바뀌고 말았다. 내가 생각한대로 머셔너리 클랜은 대모 살해 사건의 직접적인 영향권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물론 교육 쪽으로 참가하던 부분이 취소되기는 했지만 통제와 생활 교관은 그대로 수행할 수 있었다. 오후 교육의 통제 지원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자 화장실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김한별이 몸을 씻고 있다는 생각에 침대에 누워 몸을 반대쪽으로 돌리려는 찰나, 몸 아래로 들리는 “바스락.” 소리와 함께 뭔가 구겨지는듯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고 곧 내 옆구리에 깔린 기록 서너 장이 눈에 밟혔다. 그것들을 집어 들자 유려한 선을 그리는 익숙한 필체가 보였다. 고연주가 항상 내게 보고를 할 때 볼 수 있었던 필체였다. 나는 화장실을 한번 흘끗 쳐다본 후 빼곡하게 적혀있는 기록을 천천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손에 닿은 부분이 살짝 번지는 걸로 보아 갓 나온 따끈따끈한 기록인 것 같았다. ‘황금 사자 클랜원 17명 탈퇴 선언? 그리고 간부 신태승의 폭로?’ 최 상단에 위치한 제목을 읽는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기록을 한 장, 두 장 넘길 때마다 자연스레 읽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지막 네 번째 장을 넘기고 고연주의 보고를 모두 읽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 기록에는 꽤나 재밌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간략한 내용만 말해보자면, 황금 사자 클랜의 중간 간부인 신태승과 휘하 16명의 클랜원이 황금 사자를 탈퇴했다는 내용이었다. 더불어 황금 사자에 대한 폭로를 했다고 하는데, 바로 도영록과 대모의 과거 관계를 재조명한 것이다. 그 내용에는 그 당시 도영록이 대모와 사사건건 대립 각을 세우고 후에 그녀를 축출하는데 앞장섰던 일들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첨언으로 “현재 황금 사자를 이끌고 있는 도영록은 대모가 살해당한 사건을 이용해 강철 산맥 원정 실패로 떨어진 위신을 어떻게든 세우려고 한다. 이미 서부, 북부 클랜과 모두 이야기를 끝낸 상태며 동부, 남부 클랜이야말로 진정한 피해자로 볼 수 있다.” 라는 말은 나를 꽤나 웃기게 만들었다. 설마 어떤 식으로 일을 터뜨릴까 싶었는데, 돌 직구도 이만한 돌 직구가 없었다. ‘아까 잠시 소란스럽더니, 이 일 때문이었나.’ 그때였다. 막 상념에 잠기려는 찰나 문이 발칵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돌리자 천으로 온 몸을 살짝 가린 여성이 화장실에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여성은 김한별이 아니라 고연주였다. 그녀는 물에 젖은 머리를 매만지며 나를 향해 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몸을 보고 웃고 있는 건 아닌 것 같고. 기록을 보셨나 보네요?” “네. 덕분에 잘 봤습니다. 설마 숙소 안까지 들어올 줄은 생각도 못했네요.” “보고 싶어서 왔죠. 그런데 너무 일찍 왔어요. 교관 업무 끝날 때까지 할 일도 별로 없었고, 심심해서 적어봤어요. 예전 기분 나지 않아요?” ‘할 일이 별로 없다고?’ 고연주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그녀는 곧 들고나온 옷들을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적나라하게 보이는 그녀의 나신에 잠시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얏.” 이윽고 모든 옷을 입은 그녀는 내가 누워있는 침대로 폴짝 뛰어들었다. 내 품에 안겨 드는 그녀의 몸에서 향기로운 살 내음을 맡을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몸을 감싸 안고 머리에 코를 묻은 채 눈을 감았다. 그 동안 여러 일들로 머리가 복잡했는데 잠시나마 잠잠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 둘은 서로를 껴안은 상태로 잠시 동안 침묵을 지켰다. 기록에 관한 얘기는 더 이상 꺼내지 않았고, 꺼낼 생각도 없었다. 이미 고연주가 하고 싶은 말은 모두 그곳에 적혀있었으니까. 다만 축 늘어진 그녀의 몸에서 왠지 모르게 지쳤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한동안 그녀의 머리를 매만지다가,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모님 일은…. 이제 괜찮나요?” “대모님이요? 네. 이제 괜찮아졌어요.” “그때 많이 슬퍼 보였어요.” “그럴 수밖에 없죠. 제가 처음 홀 플레인에 들어왔을 때 대모님이 많이 이끌어주셨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괜찮아요.” 그녀는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몸을 한번 굴러 내 위로 타고 들어와, 내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미 친분이 있는 사용자들의 죽음은 숱하게 겪어봤어요. 물론 슬프기는 해요. 하지만 말 그대로 슬플 뿐이지, 그것이 제 행동에 영향을 주는 일은 없을 거에요.”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고연주다운 대답이었다. 그녀의 호언에 안심한 나는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오른손에 쥐고 있던 기록을 들었고 마력을 일으켜 그대로 태워버렸다. 고연주는 그 광경을 묵묵히 보다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뭐 궁금한 것은 없어요?” “없습니다.” “수현. 지금 상황은 너무도 복잡해요.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고요.” “상황에 대한 부분은 인지하고 있습니다. 뭐 따로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요?” “네. 있어요.” 고연주는 여전히 내 위에 올라탄 상태였다. 그녀는 그 상태 그대로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고, 곧 가슴이 간지러워짐을 느꼈다. “수현. 이만 발을 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당신은 중립을 지키고 싶겠지만, 주변에서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에요. 특히 이런 상황일수록 더욱 조심하는 게 좋아요.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이제는 서로 막 나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거든요. 이곳에서 버티면 버틸수록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 심하면 험한 꼴만 당할 가능성도 있어요.” “후후. 천하의 고연주가 이런 걱정을 해주다니. 신선한데요?” “걱정이 되니까 그렇죠. 제가 도와줄게요. 여기서 발을 빼고, 바바라에서 떠나는 게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정답인 것 같아요.” “아카데미 수료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내가 곧바로, 그리고 단단히 못을 박듯이 말하자 고연주의 숨이 멈춘 것이 느껴졌다. “이 일이 어떻게 마무리 되는지 여기서 끝까지 지켜볼 생각입니다. 그때쯤이면 다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내부 정황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그것들은 앞으로의 행보를 결정하는데 있어 굉장히 중요할겁니다.” “하지만.” “그리고 단순히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아직 제가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훌쩍 돌아가버리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여기서 그 동안 해왔던 모든 것들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3개월이라는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요. 최소한의 유종의 미는 거두고 싶습니다.” “그러다 이리저리 휘둘릴 수도 있어요.” “단언컨대,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내 생각을 바꿀 수 없다고 여겼는지, 고연주는 한숨을 쉬었다. 나는 이왕 내친김에 한가지 더 말하기로 했다. “사용자 고연주. 지금부터 클랜 로드로서 하나의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말씀하세요. 클랜원으로서, 클랜 로드의 명을 받들겠어요.” “현재 맡고 있는 일은 모두 집어치우고 지금 바로 남부 도시 모니카로 돌아가도록 하세요. 물론 사용자 정하연이 있기는 하지만, 클랜원들을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놨습니다. 당신은 돌아가 그 동안 지친 몸을 쉬게 하고, 내부를 가다듬길 바랍니다. 제가 돌아갔을 때를 대비해서요.” “…수현이 여기서 이러고 있는데 저보고만 편히 쉬라고요? 저만 발을 빼라는 말씀이신가요?” “네. 참고로 이 건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이의도 받지 않습니다. 더 이상의 발언은 불허합니다.” 더 이상 고연주를 이곳에 붙잡아둘 필요가 없었다. 물론 그녀가 있으면 편하기는 할 것이다. 그녀 덕분에 여태껏 외부의 돌아가는 상황을 전달받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충분했다. 이 정도면 타 클랜에 어느 정도 성의는 보인 셈이다. 여기서 더 나빠질 상황도 없기 때문에, 이제는 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고연주는 고개를 들었고 우리들은 잠시 동안 뜨거운 시선을 교환했다. 그녀의 눈빛이 내 구석구석을 훑다가 이내 떨어져나가는 게 보였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몸조심하셔야 해요.” “제 몸 하나 건사하는 것은 자신 있으니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고연주의 말은 최대한 가슴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저를 믿으신다면 지금은 제 말에 따라주셨으면 좋겠군요.” “치사해. 그렇게까지 말하면 믿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뭐가 치사하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믿어주신 것 같으니 다행입니다.” 고연주는 그제서야 조금 마음을 놓았는지 “믿어요.” 라고 말했다. 곧 걱정 어린 시선은 거두었지만 억지로 배시시 웃는 얼굴을 보며 나는 진심으로 그녀에게 웃어주었다. 문득 진심으로 웃었다는 생각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갈수록 긴장이 되야 정상인데, 왜 이렇게 즐거운 기분이 드는 걸까? * 황금 사자의 클랜 하우스. 그 내부에는, 도영록이 기분 좋은 얼굴로 고급스러워 보이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아래에 무릎 꿇고 있는 누군가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나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차피 그 놈은 머셔너리랑 너도밤나무 충돌이 일어났을 때부터 불순한 싹이 보였어.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마. 나갈 놈이 나갔다고 생각해. 어차피 간부 자격도 없는 놈이었어.” “츄웁. 츄웁.” “이럴수록 의연하게 대처하는 거야…. 흐으…. 큭!” “쭈웁! 욱…. 꼴깍…. 꼴깍….” 도영록은 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다가 갑자기 탄성을 지르며 몸을 곧추세웠다. 그리고, 그의 허벅지 쪽으로 머리를 묻고 있는 여성에게서 뭔가를 맛있게 삼키는듯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도영록이 남성에서 배출된 액을 모두 마셨는지, 여성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여성은 혀로 입술을 날름날름 핥으며 도영록을 올려다보았다. “쩝쩝. 그런데 정말 괜찮을까요? 따지고 보면 배신자인데, 잡아들일 수도 있어요.” “아냐. 우린 어디까지나 피해자 입장을 고수할 필요가 있어. 정신적 지주, 대모의 죽음에 분노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그러니까 그냥 그 놈이 말한 것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선에서 그쳐. 지금도 충분히 과한데 괜히 일을 크게 키울 필요는 없잖아.” “필요라…. 치. 거짓말. 어차피 그 놈이 나갔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야 앞으로 자기가 이끌게 될 황금 사자에 불필요한…. 응? 잠깐…. 아악!” 도영록은 몸을 숙여 이야기를 하는 여성의 허리를 잡아 들었다. 살며시 벌린 그녀의 다리 사이로 아직도 건재함을 과시하는 남성을 조준하고는, 그대로 세게 꽂아 내렸다. 여성은 펄쩍 뛰어올랐지만 이내 도영록이 억지로 앉히는 바람에 더욱 깊숙이 아래쪽으로 내려가며 자지러지고 말았다. 잠시 그 반응을 흐뭇하게 보던 도영록은 곧바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큭큭. 네 안은 언제나 기분이 좋단 말이야. 아, 그렇지. 어차피 대모가 죽었을 때부터 이기고 들어가는 게임이었어. 우호 클랜들이 우리에게 등을 돌리지 않는 이상 주도권은 다시 되찾을 수 있을거다.” “그래도, 하앙, SSUN한테, 하앙, 그들을, 하앙, 넘긴 건, 하앙, 너무, 하앙, 아까웠어요!” “SSUN놈들인 이번에 가장 큰 피해를 입었으니까. 그쪽 클랜들의 불만을 막으려면 필요한 일이었어. 이제 여기까지 온 이상 다른 건 필요 없어. 애초에 대모가 소집령을 그딴 식으로만 망치지 않았다면 이렇게 할 필요도 없었다고. 아무튼 일이 생각보다 잘 풀려서, 현재 여론의 절반이상이 우리편이야. 클랜원이야, 새로, 모으면, 되고, 바바라를, 지키고, 있는, 이상, 신규, 인원은, 계속해서, 들어올, 거야.” “으아아아아아아앙! 자, 잠시만! 잠시만요! 제발!” 여성의 애원에 도영록은 막 템포를 끌어올리던 허리놀림을 멈췄다. 그녀는 잠시 몸을 늘어뜨렸다가, 이내 쭉 다리를 뻗어 올려 도영록의 허리를 휘감았다. 그리고 양 손으로 그의 등을 끌어안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 쉬었다. 그녀가 진정하는 동안 그녀의 안을 음미하던 도영록은, 곧 앗 차한 얼굴로 여성의 등을 두드렸다. “아. 그러고 보니 머셔너리 말이 나와서 말인데. 어떻게 됐지? 포섭에 성공했나?” “아직…. 넘어오지 않았…. 하고는 있는….” “보니까 우리보다는 동부랑 남부 쪽이랑 더 어울리던데. 아니, 그런데 꼭 그렇게 해야 해? 보니까 걔도 제법 아깝던데. 엄한 놈한테 주는 것보다 다른 좋은 방법도 많잖아.” “우리한테만 좋은 방법이겠죠. 하악. 아무튼 본인이 이번 주 내로 확실하게 끝낸다고 했으니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하악. 자기 말대로 지금도 충분히 과한데 괜히 꼬투리 잡힐 필요는 없잖아요…. 하아아…. 지금 그는 알게 모르게 모든 클랜들의 주목을 받고 있기도 하고요.” 여성, 아니 성유빈은 달콤한 숨결을 내뱉었다. 그리고 간신히 숨을 진정시켰는지 방금 전보다는 훨씬 안정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도영록을 곱게 흘기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런 애가 도대체 뭐가 아까워요? 나만으로는 만족 못해요?” “큭큭. 이거 이거 성유빈이 그런 어린 계집한테 질투하는 건가?” “몰라요. 아무튼 나는 걔 마음에 안 들어요.” “물론 너 같은 화끈한 스타일을 좋아하지만, 그런 도도한 스타일도 가끔은 먹는 맛이 있거든. 아무튼 좋아.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조금 기다리도록 하지. 그래도 이번 주 안으로 꼭 성과를 낼 수 있도록.” “Ok. 제가 조금 더 신경쓸게요. 처녀성 때문에 주저하는 것 같기도 한데 정 뭐하면 한번 뚫어주면 되겠죠. 어쨌든 걔들은 걔들끼리 놀라고 하고, 우리도 다시 시작해야죠?” “어차피 금방 울부짖을 거면서 허세 떨기는.” 도영록은 씩 웃으며 다시금 허리를 높게 쳐올렸다. 그에 맞춰, 성유빈도 이번엔 스스로 엉덩이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동안 황금 사자 클랜 내부의 클랜 로드실 안에는 남녀의 교성이 오랜 시간 울려 퍼졌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아 죄송합니다. 이번 주가 정말 눈코 뜰새 없이 바쁩니다. 오늘도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몇몇 독자 분들이 느끼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요즘 들어 부쩍 체력이 달린다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휴식이 필요하다는 말씀에는 동의해요. 그런데, 솔직히 무서워서 못 쉬겠습니다. 한번 쉬면 계속 쉬게 되거나, 아니면 휴재가 버릇이 될까 봐요. 정말 어쩔 수 없으면 휴재를 한 경우는 있지만, 지금은 시험 기간이 아니라서요. 그래서 독자 분들에게 양해를 한가지 양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바로 내일 발표할 조별 과제 자료를 완성해야 해서, 밤을 새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만큼 리리플은 이번 주 금요일까지만 쉬었으면 좋겠습니다.(물론 코멘트는 빠짐없이 읽습니다.) 지금도 급하게 적느라 두서가 없는 게 느껴지네요. 죄송합니다. ㅜ.ㅠ 아무튼 할 수 있는데 까지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사용자 아카데미는 미리 말씀 드린대로 본 예정대로 나아갈 계획입니다. 다만, 용량을 늘리든 연참을 하든 이번 주말 내로 끝내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S. 어떤 분이 동명의 다른 소설에 서평을 쓰셨더군요. 아무리 작가에게 화가 나더라도, 다른 작품에 그런 짓을 하는 건 비 매너라고 생각합니다. 0231 / 0933 ---------------------------------------------- 파국 어느덧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천장에 가지런히 박혀있는 라이트 스톤은 소등된 상태라 방 안으로는 어둠이 슬금슬금 찾아 들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어둠이 미치지 못하는, 왼쪽 벽면에 달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공간이 남아있었다. 그곳은 진한 노을빛깔을 띠고 있다. 그리고 그 빛이 비추고 있는, 1인용이라 보기에는 조금 넓은 침대 위로 한 명의 여성이 널브러져있는 게 보였다. 여성의 얼굴은 청순하다기 보다는 유혹적이고 매혹적인 선을 갖고 있었다. 침대 위로 이리저리 흩뿌려진, 산발이 된 머리와 이따금 얼굴 위로 늘러 붙은 머리카락이 보여도, 그것은 지저분히 보이지 않고 오히려 여성의 섹시함을 한층 부각시켜 시켜주고 있었다. 여성의 몸매는 전체적으로 마른 편이라 볼 수 있었다. 그래도 가슴은 봉긋하게 솟아올라, 보기 싫을 정도로 깡마르지는 않았다. 여성의 정체는 바로 성유빈 이었다. 성유빈은 고른 숨소리를 내다가 이내 와락 얼굴을 찡그리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몸을 한두 번 털어 신체를 가리고 있는 로브를 벗었고, 양 손으로는 하의를 내린 후 허벅지를 벌렸다. 이윽고 고개를 숙여 자신의 국부를 자세히 관찰한 그녀는, 곧바로 거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 씨발. 또 부었네. 적당히 좀 하지 미친 새끼.” 성유빈은 자신의 소중한 곳을 슬슬 쓰다듬다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로브를 뒤적거렸다. 곧이어 그녀는 로브에서 유리병 하나를 꺼내 들었고, 급하게 마개를 따 발갛게 부풀어오른 그곳을 향해 쏟아 부었다. “아, 아, 아. 진짜 존나 아파. 개 좆 같은 새끼 때문에. 아, 아, 아.” 투명한 액체가 국부를 적실 때마다 성유빈은 움찔움찔 몸을 뒤틀며 고통에 젖은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약효는 확실한지, 유리병 속의 액체가 줄어들수록 그와 비례해 붓기도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담겨있던 모든 액을 쏟아 부은 후 그녀는 가는 손가락으로 병을 톡톡 치다가 뒤로 휙 집어 던졌다. 그러자 곧 챙그랑, 소리와 함께 병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 이제 좀 살겠네.” 하의를 다시 주섬주섬 끌어올린 성유빈은 팔을 활짝 벌리며 맥없이 뒤로 자빠졌다. 그리고 눈을 감으려는 찰나,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또다시 욕설을 내뱉었다. “누구야!” “클랜원 김한별이에요. 호출하셨다고 들었어요.” “김한별? 아 그렇지.” “…들어갈게요.” 조심스레 열린 문 사이로 김한별이 모습을 보였다. 방 내부로 두 발짝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성유빈 앞에 시립했다. 잠시간의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성유빈은 김한별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침대에 누운 상태서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불렀~게?” “…….” “대답이 없네. 하긴 이제는 말 안 해도 알겠지? 벌써 몇 번째 물어보는지 이제 나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 일은 어떻게 돼가고 있어?” “…….” “여전히 진척이 없나 보네.” 김한별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실제로 그 동안 위에서 내려온 명령은 조금도 진행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그녀는 곧 들려올 불호령 아니면 또 뺨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온 성유빈의 말은 김한별의 예상을 빗나갔다. “야. 너 그냥 그거 그만해라. 하지마.” “…네?” “하기 싫으면 관두라고.” 김한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곧이어 눈을 뜬 그녀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성유빈은 한숨을 내쉬다가 다시금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다리를 꼬며 찌뿌드드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상부에서 명령이 내려왔어. 굳이 이 방법을 고수하지 않아도 좋다고.” “아 네. 그러면 머셔너리 로드는 포기하기로 한 건가요?” “미쳤니? 그 반대야. 방법을 고수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은, 어떤 방법을 써도 좋단 소리지. 도영록이 이번 주 안으로 무조건 성과를 내라고 했거든. 아무튼 위쪽에서 하루빨리 소식을 원하는 이상, 다양한 방법을 시도할 필요는 있어.” 성유빈은 말을 하는 와중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진심이라는 것을 느꼈는지 김한별의 얼굴에 한 순간 안도의 빛이 스쳤다. 그러나 그 순간, 김한별의 머릿속으로 뭔가 번뜩 떠올랐고 이내 눈동자를 커다랗게 치켜 떴다. “방법을 바꾸신다고요?” “응. 일단은 너 말고 내가 접근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고. 어떻게 생각해?” “네?” “그 남자랑 몇 번 떡 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서. 솔직히 그 정도면 얼굴도 준수하고 몸도 나름 괜찮잖아. 그리고 그도 나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으니 앞으로 좋은 관계를 위해 서로 좋은 일 하자는 거지. 틀린 말은 아니잖아? 나는 황금 사자의 간부고, 그는 앞날이 창창한 0년 차 사용자고.” “하, 하지만 그게 꼭 잘된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다가가면 오히려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요?” “그렇지. 그게 문제야. 그런데 누구 덕분에 우리가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 이제 곧 아카데미가 끝나니까, 최소한 이번 주 안으로는 일을 매듭지어야 해. 아무튼 아직 확정된 건 아니고 여러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정 힘들면 최후의 방법을 써야겠지만, 그건 말 그대로 마지막 보루니 아껴둬야지.” 성유빈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최후의 방법이라는 말에 김한별은 멍한 얼굴이 되었다. 명확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말에서 본능적으로 위험한 냄새가 풍겨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느낀 순간, 김한별의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물들었다. 평소에는 빠르게 회전하던 머리가 멈추고 가슴속으로 누군가에 대한 걱정이 무럭무럭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여전히 눈 앞에서 고민하는 성유빈의 모습을 보자, 김한별은 자신도 모르게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내뱉고 말았다. “제가 할게요!” “아씨 깜짝 아. 조용히 좀 말해! 안 그래도 머리 아파 죽겠는데…. 그런데 뭐라고?” 김한별의 외침에 성유빈의 미간이 한껏 좁혀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 뭔가를 느꼈는지 곧바로 얼굴을 들며 반문했다. “제, 제가 할게요. 제가 하게 해주세요. 부탁 드려요.” “뭐? 아니 잠깐만. 너 하기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 갑자기 왜이래?” “그냥 조금 망설였을 뿐이에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면 확실한 성과를 낼 수 있어요.” “그 놈의 기다려달라. 그게 벌써 몇 번째인지 알아? 이러다 일 망치면 어쩔 건데. 네가 책임질 거야?” 성유빈의 회의적인 목소리가 들려오자 멈췄던 김한별의 머리가 다시 맹렬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는 흔들리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머셔너리 로드는 많은 클랜들의 주목을 받고 있어요. 이때 간부님이 성적으로 접촉을 하거나 다른 강경한 방법들을 쓰게 되면 뭔가 안 좋은 소리가 나올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굳이 꼬투리를 잡힐 필요는 없잖아요.” “뭐 일리는 있네. 그런데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냐?” “아니에요. 저와 머셔너리 로드는 통과 의례 때부터 함께 해온 전력이 있어요. 물론 이것도 완벽하다고는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간부님이나 다른 방법보다는 훨씬 모양새가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쨌든 빠져나갈 구멍은 있잖아요.” “그렇지. 그 부분을 어떻게 잘 매만지면 쓸만한 구실거리 한두 개는 나올 테니까. 아니 그러니까. 그건 우리가 애초에 바라던 바였다고. 그런데 갑자기 왜 마음을 바꾼 거니?” 성유빈은 이상하다는 말투로 고개를 기울였다. 김한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요즘 간부님들이 많이 고생하시는 게 눈에 보이기도 하고…. 그 동안 도움도 많이 받았고…. 또 예비 간부로써 클랜을 위해 뭔가 보탬이 되고 싶기도 하고….” “…흐응.” “제, 제가 지금껏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죄송해요. 솔직히 그 동안 스트레스가 심했지만, 이제는 저도 그런 것에서 자유로워지고 싶기도 해서….” “…킥.” 앞서 떠듬떠듬 말할 때는 연신 이상한 눈초리를 보냈지만, 뒤이어진 말에 성유빈은 작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는 잠시 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김한별을 응시했다. 곧이어 성유빈의 표정이 미묘하게 물들며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성유빈은 가만히 서 있는 김한별의 주위를 거닐다가, 한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처음으로 조금 마음에 드는 말을 하네.” “…….” “그래. 그 자세야. 잘못한 건 인정을 하고 클랜을 위해서 뭔가 하겠다는 태도. 아직 넌 예비 간부지, 간부가 아니잖아?” “네. 간부님 말씀이 맞아요.” 김한별의 말을 듣자 성유빈은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곧이어 그녀의 손이 어깨에서 내려가, 가슴을 흘러, 배를 타고 내려갔다. 김한별은 차오르는 수치심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입술을 꾹 깨물며 버텼다. “내가 정말로 너를 믿어도 될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어요.” “킥. 그래. 지금은 예비 간부지만 곧 전무후무한 0년 차 간부가 될 몸인데 뭔가 성과 하나는 있어야지. 좋아. 아마 이번일 만 잘 마무리 지으면…. 알지?” “네.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기특해. 아주 기특해. 우리 고귀한 보석 공주님께서 스스로 가랑이를 벌리기를 이렇게 애원, 아니 부탁하는데 내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어? 좋아! 그럼 이 건은 너한테 맡겨볼게.” 성유빈의 뾰족한 말이 한번 더 김한별을 할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세게 물며 눈을 감았다. 워낙 의심이 많은 여자니 지금 일부러 자신을 시험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한 김한별은 되려 살짝 고개를 숙이며 복종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이윽고 성유빈은, 김한별이 비로소 자신에게 진심으로 굴복했다고 생각하는지 통쾌한 얼굴로 이를 드러냈다. 한동안 소리를 죽이며 웃던 그녀는 고개 숙인 여성의 어깨를 감싸며 한껏 다독인 후, 잘해보라는 말을 속삭여주었다. “아하하하! 아하하하!” 곧이어 성유빈의 숙소를 나서는 김한별의 뒤로 성유빈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김한별은 힘을 잔뜩 주고 있던 턱을 간신히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랫입술에 선명히 찍힌 이빨 자국과 아직도 꽉 쥐고 있는 양 손 사이로, 가느다란 선혈 한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고연주는 내 말에 따라 곧바로 바바라를 떠났다. 그녀는 끝까지 나를 걱정하는 눈빛을 지우지 못했지만, 지금의 내 마음은 너무도 편안했다. 지금 이렇게 까닭 없이 내 마음이 잔잔한 이유를 알고 싶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나는 천천히 상념에 잠기며 지금껏 일어난 일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현재 가장 큰 이슈는 대모의 사망사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뜨거운 감자는 도대체 누가, 왜 대모를 살해했냐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경우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내부 소행인 경우와 내부 소행이 아닌 경우. 내부 소행이라고 단정한다면 다시 두 갈래로 길을 나눌 수 있었다. 황금 사자와 우호 클랜들이 저질렀거나, 아니면 원정 비 참가 클랜들이 저질렀거나. 객관적인 관점에서 판단해보면 둘 모두 대모를 살해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녀를 죽임으로써 그네들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확실히 있었으니까. 그러나. 분명 뭔가 감이 잡힐 듯 말 듯 하면서도 하나를 놓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랫동안 그 두 방향으로 생각을 되짚었지만, 아리송한 기분이 가시질 않는다. 해서, 이번에 제 3의 방향으로 길을 틀어보기로 했다. ‘만약 내부 소행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부랑자들이 뭔가 목적을 갖고 대모를 살해했다. 물론 그 과정에 석연치 않은 것들도 있지만, 일단은 결과만을 놓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부랑자들은 왜 대모를 죽인 걸까? 어떤 목적을 위해서? 그들이 당한 일이라고 해봐야 부랑자 말살 계획으로 인한…. “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이었다. 머리를 번쩍 스치고 지나가는 하나의 기억에 나는 벌떡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문득 가슴 한 켠이 섬뜩해지는 기분이 든다. 이 일에 대해서는 그 동안은 미래가 비틀렸다고 생각해서 의도적으로 1회 차 기억을 참고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1회 차 시절 부랑자들은 확실히 북 대륙으로 쳐들어왔다. 그들은 황금 사자에 복수하기를 원했고, 서대륙을 등에 업은 그들의 복수를 동남부 클랜들은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래. 그 세가지 경우를 따로 놓을 필요가 없었어. 그것들을 모두 하나로 포함시켜서, 정답이라고 생각한다면….’ 맞물린다.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것을 깨닫자 전신으로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내가 이토록 마음이 편안했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동안은 미래를 알 수 없어 은근히 불안해할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지금의 상황은 내부 사정만 다를 뿐 1회 차 시절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때였다. 뭔가 머릿속에서 하나의 퍼즐이 맞춰지려는 찰나 옆에서 아련한 목소리가 내 상념을 일깨웠다. “저기…. 오빠.” “……?” “안 주무세요?” “아. 잠이 별로 안 와서. 너도 그러니?” 고개를 돌리자 한별이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걸 볼 수 있었다. 잠시 동안 우리 둘 사이로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입술이 서서히 열리는걸 볼 수 있었다. “오빠.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있으세요?” “주말? 또 식사 약속이라도 잡혔어?” “아, 아니요.” “그럼 왜?”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싱겁기는.” 한창 중요한 생각을 하는데 방해 받아서 짜증이 조금 일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의 말이 한번 더 귓가로 흘러 들었다. “그, 그래도 숙소에는 들어오실 거…죠?” 담담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자, 한별은 시선을 내리깔며 말끝을 흐렸다. 나는 “아마 그러겠지. 잠은 자야 하니까.” 라고 대충 대꾸해준 후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녀 또한 이 이상 할말은 없는지 더는 내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새벽이어서 그런지 사늘한 공기가 숙소를 감돌고 있었다. 나는 이불을 더욱 끌어올리며 아까 전 생각한 것들을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한쪽은 주도권을 되찾기를 원한다. 다른 한쪽은 주도권을 빼앗기를 원한다. 천상 갈등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상황. 그리고, 그 갈등이 일어남을 원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미래는 변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여러분들의 쪽지, 코멘트 덕분에 큰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조언을 해주셨고, 많은 분들이 걱정해주셨습니다. 현재 아카데미 챕터에 지루함을 느끼시는 분들! 곧 끝납니다. 오늘 4월 달부터 준비해오던 커다란 발표 과제 하나를 끝냈습니다. 다음주부터는 시험 준비에 들어가야겠지만, 이번 주말에는 다행히 어느 정도 짬을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연참을 하든, 분량을 늘리든 이번 주까지 사용자 아카데미 챕터를 마무리할 예정이오니, 부디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PS. 대학생, 또는 예비 대학생 분들에게. 어떤 조별 과제를 하든 절대로 조장은 맡지 마세요. ㅜ.ㅠ PS2. <고장난 선풍기> 님께서 제 뜰에 김수현, 김한별의 이미지를 새로 올려주셨습니다. 추후 작품 설정에 캐릭터들 능력치를 올릴 때 이미지도 함께 넣을 생각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고장난선풍기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PS3. 다음 회부터 리리플도 다시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0232 / 0933 ---------------------------------------------- 백한결 그리고 김한별 줄기를 잇따라 진행되는 과정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원류(源流)는 바뀌지 않는다. 엇나간 줄기들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결국 하나의 커다란 흐름으로 되돌아온다. 이 생각을 맹신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건대, 처음 미래가 비틀렸을 때 너무 안일하게 대처하고 행동한 것 같았다. 어쨌든 현재 내가 직면한 상황은 지금 남아있는 시간이 별로 없고, 더 이상 지켜볼 여유도 없다는 것. 이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지금껏 충분히 기다렸으니 이제 슬슬 흐름에 맞춰 움직여야 할 때였다. 다만 그 움직임 사이로 언제든지 발을 뺄 수 있는 여지는 두어야 한다. 13주차에 접어들면서 이제는 단순히 갈등으로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양 클랜들의 대립은 격화되고 있었다. 동부 클랜에서 대응을 시작한 이후 남부 클랜은 곧바로 그들의 입장을 지지했다. 물론 단순 지지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네들은 동부 클랜과 힘을 합쳐 지속적으로 황금 사자 클랜의 지나침을 비판했고, 이미 탈퇴한 클랜원들을 이용해 남아있는 클랜원들과 비밀리에 접촉시켰다. 그리고 새로 탈퇴하는 인원이 나오는 즉시 관할 도시에 황금 사자를 성토하며 여론을 흔드는 수법을 쓰고 있었다. 신태승의 비리 폭로를 전면으로 부정하기는 했지만, 뜻밖에도 황금 사자는 탈퇴하는 인원에 대해서는 미온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에 대한 대처라고 해 봤자 피해자 코스프레의 고수 및 부각시키는 게 전부였다. 탈퇴한 인원을 자세히 살피면 대부분 하위 클랜원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어떻게 보면 그냥 탈퇴할 놈들은 탈퇴하라고 놔두는 것 같기도 했다. 대신 황금 사자는 처음 터뜨린 대모 살해사건을 동남부 클랜의 소행으로 몰아가는 일에 주력했다. 그와 동시에 그 동안 빼앗겼던 주도권을 차츰차츰 되찾는 일도 진행시켰다. 그 중심에는 사용자 아카데미가 있었으며 날이 갈수록 동남부 클랜 소속 교관들이 보류 처분을 받는 경우가 잦아졌다. 그 결과 새로 생긴 공석들은 당연히 서북부 클랜 소속 인원들이 속속히 채우고 있었다. 서로 방어는 도외시하고 공격만 하는 꼴을 보자니 누구 말마따나 마치 진흙탕 개싸움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문득 고연주가 바바라를 떠나자고 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대모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지 않고, 자신들의 밥그릇만 챙기는 꼬락서니를 보면 없던 정도 떨어져나갈 것이다. 재밌게도 이 싸움은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동남부 클랜에게 조금씩 우세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 사건은 다름아닌 황금 사자에서 탈퇴한 여성 사용자중 한 명이 성 상납 비리에 대해 폭로한 것이다. 그리고 그 여성은 나도 알고 있는 인물로, 서지윤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보자면 예전에 나와 같이 아카데미를 수료한 인원 중 한 명으로써 황금 사자 클랜의 오퍼를 받은 다섯 명 중 한 명이었다. 서지윤은 가입 후 스카우트의 강압으로 강제적인 성관계를 맺었으며 이후에도 비겁한 방법으로 계속 시달렸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이 사건은 곧바로 시끌시끌하게 변했다. 아무리 성에 관해서 개방적인 홀 플레인이라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서로 마음이 맞을 경우에 한하는 말이었지 강간, 겁탈이 허용되지는 않는다. 더구나 지금껏 엄정한 군기를 유지하는데 선도한 곳이 황금 사자 클랜인데, 오히려 내부에서 그런 일이 터졌다고 하자 일반 사용자들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황금 사자도 이 사건은 가만히 있기 어려웠는지 다시금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서지윤과 스카우트는 서로 원해서 맺은 관계였으며, 상황이 어렵게 돌아가니 괜한 구실을 붙여 탈퇴하는 비겁자라 몰아붙였다. 그러나 황금 사자에 우세하던 여론은 서지윤의 눈물 어린 호소로 다시금 평행을 맞춰가는 중이었다. 그 이후로 비록 하위 클랜원들이라고 하지만 황금 사자를 탈퇴하는 인원이 조금씩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초반에 17명을 탈퇴한 것을 시작으로 어느새 총 30명을 훌쩍 넘어 40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이는 현재 남은 황금 사자의 총 1/10에 해당하는 인원이었다. 물론 강철 산맥 원정의 실패와 클랜 로드의 부재 그리고 대모의 살해로 황금 사자의 미래에 회의를 느낀 인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 절반이 넘는 인원이 여성임을 감안한다면 그 동안 클랜 내부가 얼마나 썩어있었는지 반증해주는 사례로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밖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지만, 사용자 아카데미는 조용했다. 아니, 겉으로 조용함을 가장하고 있었다. 어느덧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내부 감사를 모두 마친 서북부 클랜들에게는 혐의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고, 아카데미 복귀가 속속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감사를 거절하는 동남부 클랜들에게는 보류가 유지되고 잇따라 처분이 내려지고 있었다. 동남부 클랜은 보류 처분에 대해서는 초반 제법 잘 참는 듯 보였지만, 결국에는 성질 급한 김덕필이 난동을 피우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는 황금 사자의 고압적인 태도에 폭발해, 자신들이 왜 내부 감사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항의했다. 리버스 클랜은 도시를 대표하는 클랜은 아니었지만 평소 강도 높게 황금 사자를 비방해온 이유로 감사 대상에 포함된 상태였다. 그러나 똑같은 말만 연신 되풀이하는 황금 사자에 김덕필 또한 보류 처분을 피할 수 없었고, 그는 결국 악담과 함께 아카데미로 들어온 리버스 클랜원 전부를 이끌고 사용자 아카데미를 나가버리고 말았다. 황금 사자는 워프 게이트로 향하는 그들을 잡지 않았다. 다만 이때다 싶어 “찔리는 게 있다.” 또는 “애초에 교관 자격이 없는 사용자였다.” 라는 등 리버스 클랜을 집중 조명 및 대대적으로 규탄했다. 그런 일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황금 사자는 보류 처분을 내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종래에는 거의 7할을 점유하고 있던 동남부 클랜 소속 교육 교관 직이 어느새 세 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남아있는 인원이라고 해도 10강 중 2명인 서진우, 연혜림과 한(韓) 클랜 로드인 성현민이 전부였다. 하지만 세 명 또한 곧 보류 처분이 내려질 거라는 소문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이 교육 교관으로 나서는 일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나는 백한결을 최우선으로 확보할 필요성을 느꼈다. 일전에 머셔너리 가입 건에 대해서 이야기해뒀지만 아직 박환희와 차유나의 관계가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워낙 귀가 얇은 녀석이니 내가 없는 동안 여자친구의 말에 흔들렸을 가능성도 없잖아 있었다. 솔직히 그 동안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주변이 하도 시끄럽다 보니 예전처럼 신경 써주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마침 당일 잡혀있는 교육 중 통제 지원으로 만날 수 있었기에, 수업이 끝난 후 그와 이야기를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마력 재능 계열 교육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디에서도 백한결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교육이 끝난 후 나는 친구들과 깔깔 웃으며 강의실을 나가는 신규 사용자 한 명을 붙잡았다. 그리고 백한결에 관한 근황을 물어보니, 뜻밖의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아~. 그 찌질 이요?” “찌질 이?” “쿡쿡. 네. 걔 되게 유명해요. 맨날 여성 숙소 앞에서 기다리다가 여자친구가 만나주지 않아서 완전 폐인이 다 됐다는데요? 그게 뭔 꼴이람.” “여자친구라고? 혹시 둘이서 무슨 일 있었니?” “음~. 그건 잘 모르겠어요. 애인이랑 몇 번 다투는 건 본적이 있는데 애초에 그리 눈에 띄지도 않는 녀석이라서 말이죠. 솔직히 걔, 주변에서도 이미 포기한 상태에요. 도대체 아카데미가 끝나고 어떻게 하려는지…. 쯧쯧.” “…그래 알았다.” 신규 인원은 혀를 차더니 곧바로 강의실을 나가버렸다. 분명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을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폐인이 됐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내가 관심을 두지 못하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할 수 있다. 그때였다. 잠시 동안 자리에 멍하니 서있자,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야. 머셔너리 로드. 오늘도 통제 지원을 나와주셨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하하하.” “아 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돌리자, 빙글빙글 웃고 있는 장윤호가 보였다. 그의 얼굴은 이전과는 달리 활짝 웃음꽃이 핀 상태였다. 지금껏 눈치만 보고 살다가, 동남부 교관들이 보류 처분을 받고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자 살맛 나는 모양이었다. “저는 이번 교육을 끝으로 3일 동안 쉬게 됐습니다. 오늘 이후로 잡힌 교육이 없거든요. 머셔너리 로드는 어떻습니까?” “정신 교육 일정이 하나 더 남아있습니다.” “아이고. 아쉽네요. 오늘 북부 클랜 소속들끼리 모여서 거하게 한잔하기로 했는데 말입니다. 오늘 부로 13주차 교육이 끝나고 주말 휴식이 오니 다들 밤새 달릴 모양입니다.” “정규 교육은 끝나겠죠.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13주차부터 주말에 추가 교육을 실시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 그러네요. 제 실수입니다. 하하하. 그래도 괜찮습니다. 주말 교육은 황금 사자와 서부 소속 클랜원들이 맡기로 했으니, 우리들은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아차. 주말에는 시간이 좀 나시나요? 머셔너리 로드에 궁금해하는 동료들도 많은데…. 어떻습니까. 같이 한잔하시죠?” 장윤호는 아무래도 내가 참가해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럴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기에 “주말에도 지원이 잡혀있어서요.” 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해주었다.(실제로 토요일 오전, 오후로 빽빽하게 잡혀있었다.) 내 완곡한 거절에 장윤호는 아쉬운 얼굴로 다음 기회를 기약했다. ‘주말 통제 지원이 끝나고 바로 가보는 게 좋겠군.’ 지금 중요한 건 모임에 참가하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장윤호의 말대로 오늘이 지나면 13주차의 정규 교육이 종료된다. 그렇다면 주말에 일정이 잡힌 오후 추가 교육 지원을 마친 후 곧바로 백한결을 살펴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마 그가 폐인이 된 이유에는 필시 말 못할 사정이 있을 것이다. 부디 그 이유가 내 생각과 맞기를 바라며, 나는 긴 한숨과 함께 강의실을 나섰다. * 모든 클랜이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공통으로 공감하는 게 딱 한가지 있었는데, 그건 바로 교육 강도가 이전에 비해 무척이나 낮아졌다는 것이다. 물론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니 누굴 탓하겠냐 만은 지금 와서 겨루기를 부활시키는 데는 많은 무리가 있었다. 해서 특별 교육을 대체해서 들어온 게 추가 교육이었다. 취지는 신규 사용자들의 수준을 회복하는데 있었지만, 솔직히 내 눈에는 어떻게든 교육 주기를 맞추려는 몸부림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전, 오후에 빡빡하게 잡혀있던 통제 지원을 끝내고, 나는 미리 사둔 저녁거리와 함께 곧바로 남성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숙소에 도착하자 모두 저녁을 먹으러 갔는지 휑한 내부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생활 교관일 적 기억을 더듬어 2층을 향해 계단을 올랐다. 이윽고 백한결이 묵고 있는 숙소 앞에 도착하자 조용한 침묵만이 나를 맞아주었다. 설마 이놈이 없는 건가 싶어 문을 열고 내부를 들여다보자 한쪽 구석태기에 둥그런 침낭이 웅크리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침낭 속에 백한결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결아.” “…….” “한결아? 한결아!” “…….” 침낭 위로 올린 손에는 분명 묵직함이 느껴졌는데 아무리 흔들어봐도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다급한 손놀림으로 침낭을 벗겼고 이내 눈을 꼭 감은 채 쓰러져있는 백한결을 볼 수 있었다. ‘미친놈들. 이지경이 되도록 애를 놔둬?’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후 나는 바로 침낭에서 한결을 끌어냈다. 그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지 핼쑥하게 변한 얼굴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더구나 군데군데 보이는 눈물 자국을 보자 한층 더 분노가 샘솟았다. 어떻게 발견한 <신의 방패>인데…. 코에 손을 대보니 다행히 숨은 미약하게 쉬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그의 심장에 손을 얹었고 천천히 마력을 투하시켰다. 기운이 약해진 내부를 보듬으며 나는 아리송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도대체 어떤 일을 겪었길래 정신을 잃을 정도의 충격을 받은 걸까? '정말로 차유나가 배신이라도 한 건가.' 그렇게 한동안 내부를 다듬어주자 조금씩이지만 백한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내친김에 마력을 퍼부으며 활력을 북돋워주었고 끊임없이 옆에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내 재빠른 내부 조치가 유효했는지, 곧이어 백한결은 힘겹게 눈꺼풀을 드는걸 볼 수 있었다. 이윽고 눈을 뜬 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옆에 내가 있음을 확인했는지 바싹 마른 입술로 입을 열었다. “형…?” “그래. 한결아.” “형…? 형…?” “그래 그래. 형이야. 형이 미안하다. 내가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형…! 혀엉, 혀어엉, 어어어어엉….” 백한결은 처음에는 잔뜩 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러다 한두 번 눈을 깜빡이고 확실히 인식하는 순간, 나를 애타게 부르짖으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예전의 똘망하던 귀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건조한 울음 소리만이 흘러나와 방안을 구슬프게 울렸다. 왠지 모르게 그 모습이 너무나도 서글퍼 보였다. 나는 곧바로 그를 안아 들고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그리고 백한결은 내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 이었다. ============================ 작품 후기 ============================ 다음 회 초반부에는 독자 분들이 굉장히 불쾌하게 느끼실 만한 장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NTR 장면입니다.) 해당 장면을 원하지 않으시는 독자 분들께서는 초반부를 빠르게 넘어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곧바로 다음 회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0233 / 0933 ---------------------------------------------- 백한결 그리고 김한별 “죄, 송해, 요! 요, 용서, 해주세요!” “죄송하다는 말로 끝낼게 아니라고.” “아흑! 거, 걱정하지 말아요! 수료하는 날에는! 분명히! 데리고! 올 테니까! 아흐흑!” “차유나. 너 네 말에 책임질 수 있어? 요즘 들어 그 놈 동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차유나는 팔 다리를 짚고 몸 전체를 길게 뻗은 상태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에 따라 양 갈래로 땋은 머리카락이 좌우로 찰랑거렸다. 잠시 쉬던 박환희가 연이어 허리를 움직이자, 그녀의 비명이 허공으로 뾰족이 솟아올랐다. 차유나는 간신히 숨을 진정시킨 후 앞뒤로 흔들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머, 머셔너리, 클랜으로, 같이, 가자고, 들었어요.” 남자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그는 곧 헛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래서?” “허, 헛소리 하지 말라고 했어요. 앞으로 계속 그런 말 할 거면 차라리 헤어지자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잘했어. 그런데 그러다가 정말로 헤어지면 어떡하려고 그래.” 박환희는 다시금 허리를 돌진시켰다. 차유나는 기분 좋은 신음을 흘리며 호응하기 시작했다. “거, 걱정하지 마세요. 한결이는, 분명 저를, 따라올 거에요. 그 애가, 저를, 배신할 리, 없어요.” “너무 자신이 넘치는데. 아무래도 믿을 수 없을 것 같아. 유나야. 아무래도 우리 관계도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아, 아니에요! 정말 잘할 수 있어요! 수, 수료 전까지는 꼭…. 아앙!” “큭큭. 과연 한결이가 이런 네 모습을 보고도 너를 신뢰할지 궁금해지는데.” 박환희는 조소를 흘리며 빈정거렸다. 그러나 차유나의 반응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예전의 날카롭게 그를 쏘아보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은 그저 살과 살이 맞부딪칠 때마다 천박한 교성을 지르는 한 마리 암캐에 불과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 아니에요. 저는 단지 한결이를 위해서….” “워워. 그래 알았어. 네가 이러는 거는 어디까지나 한결이를 위해서니까. 그러니까 그냥 순종적으로 만들어서 조용히 내 품으로 데려오면 돼. 이제 피하는 것도 적당히 하고. 알아들어?” “네, 네! 알겠습니다!” “좋아. 아주 좋아.” 박환희는 킥킥 웃으며 차유나의 말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가득히 어려있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자기 합리화의 극치를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동안 용두질을 하던 두 남녀는 이내 남자의 몸이 부르르 떨리고 여성이 축 늘어지는 것으로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숨죽여 지켜보던 여성, 아니 여성처럼 보이는 남성 한 명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눈 앞의 광경을 지켜보는 내내 믿을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여성의 몸이 늘어진 순간 그와 동시에 쓰러지며 혼이 나간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저, 그저 들어올린 오른팔은 의미 없이 허공을 휘저었고, 핏기가 사라진 입술은 오직 달싹이기만 할 뿐이었다. * 나는 한동안 백한결을 진정시키는데 진땀을 빼야만 했다. 계속해서 마력으로 내부를 더듬어 진정시켜주고, 혹시 몰라 가져온 심신안정 효과를 지닌 간식들을 억지로 먹이자 간신히 울음을 그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해보라는 내 다독임에 그의 말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동안 누구에게 말하지도 못해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백한결의 말은 일종의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간략히 설명하면, 백한결은 계속해서 내 말대로 차유나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심지어 어렵사리 머셔너리 클랜에 가입할 수 있다는 얘기까지 꺼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차유나와 계속 접촉하려 했지만, 나중에는 여성 숙소에 출입 금지 처분까지 받았다고 억울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혹시라도 차유나가 나올까 여성 숙소 앞을 서성이던 백한결은 그녀가 홀로 숙소를 빠져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턱대고 다가서면 또 자신을 피할 까봐 그는 조용히 차유나의 뒤를 밟았다. 그리고 그녀는 인적이 뜸한 곳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이내 나무와 수풀이 그득한 곳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때 나는 반사적으로 이스터 에그를 떠올릴 수 있었다. 예전에 그곳에서 박환희와 차유나의 밀회를 한번 목격한적이 있었으니까. 예상했던 대로, 백한결 또한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자 박환희와 함께 서 있는 차유나를 볼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내가 이전부터 짐작했던 일들이 그 안에서 벌어졌다. 백한결은 차유나가 배신한 과정을 똑똑히 설명하지 못했다. 너무나 감정이 북받치는지 중간중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들렸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상황은 이해할 수 있었다. 솔직히 예전에 둘을 본 이후로 그런 낌새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백한결은 가슴에 담아뒀던 모든 말을 모두 털어내자 잠시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시 동안 이었다. 그는 곧 내 앞으로 쓰러지며 다시금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믿고 의지하던 여자친구의 배신을, 그것도 우연치 않게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되자 충격을 어마어마하게 받은 게 분명했다. “한결아 울지마. 너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누나가, 누나가 너무 불쌍해요…. 어엉….” “하. 차유나가 불쌍하다고? 뭐가 불쌍해?” “그렇게 당하면서도 박환희한테 잘못했다고 싹싹 비는 모습이…. 흑, 믿을 수 없어요…. 그렇게 다정하고 강인하던 누나가…. 도대체 왜…. 왜애애애애!” 백한결의 혼란스러워하는 태도를 보는 순간 뭔가 낯설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그와 함께 나 또한 가슴 깊숙한 곳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감정을 재빨리 억누르며, 지긋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몰라. 나에게나, 한결이에게나.’ 백한결에게는 미안한 말이겠지만, 어떻게 보면 정말 잘된 일이었다. 솔직히 차유나는 나도 마음에 들지 않던 참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백한결의 마음을 바꿀 수 있고 둘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을 여지가 생겼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몰라도 내 클랜으로 들어온 후에도 계속해서 여자친구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곤란한 일이었다. “후. 한결아.” 나는 커다란 한숨을 내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실컷 울었는지 백한결의 눈에서는 더 이상 눈물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끅끅 흐느끼는 소리는 여전히 나오고 있었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어느새 흐느끼는 목소리도 점차 사그라질 즈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몸을 기대오는 백한결을 보며 말문을 열었다. “미안하다.” “…네?” “너를 혼자 놔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했어.” “아, 아니에요…. 끅. 실은…. 형을 찾아갈까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요즘 되게 바쁘신 것 같아서….” ‘아. 오그라든다.’ 하지만 현재 눈 앞에 있는 사용자는 무려 <신의 방패>였다. 백한결을 얻기 위해서라면 이까짓 오그라듦 쯤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 나는 자꾸만 우그러드는 손가락을 억지로 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백한결은 눈을 감았다가 이내 처음보다는 약간이나마 진정된, 그러나 허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 “응.” “저는 누나한테 버림받은 걸까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네가 보고 들은 광경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그럼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까요?” 내 클랜으로 들어오면 돼. 물론 곧바로 이 말을 내뱉을 정도로 개념 없지는 않다. 최대한 너를 위한다는, 완곡하게 에두르는 식으로 말해야 한다. 어떻게 말할까 잠시 동안 고민하고 있자 문득 1층에서 여러 인원들이 올라오는 기척이 걸렸다. 아마도 저녁 식사를 마치고 오는 것 같았다.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그건 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돼.” “지금의 저는 스스로 판단할 수 없어요. 그리고 최소한의 조언은 구할 수 있잖아요…. 모르겠어요….” 백한결은 현재 가장 의지하던 상대를 잃어버리고 상실감에 젖은 상태일 것이다. 그의 심리 상태를 헤아리며 생각을 정리한 후, 천천히 말을 이었다. “혹시 그 이후로 차유나와 접촉한적이 있니?” “아니요. 잘 모르겠어요. 그때 이후로 어떻게 숙소에 돌아왔는지도 생각이 안나요. 그냥 하루하루 울면서….” “그렇단 말이지. 그럼 내 생각에는 차유나와 관계를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그럼 그 후로는요?” “그걸 네가 판단하라는 소리야. 박환희, 차유나에 관해서는 이미 할 말은 다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예전에 너에게 해줬던 말들 기억나니? 숙소에서, 그리고 밖에서.” “네. 이제는 어쩔 수 없다고….” 백한결은 고개를 끄덕끄덕 주억였다. 그의 반응을 확인한 후 나는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재빠르게 내 손을 잡았고, 상처 입은 강아지 같은 눈망울로 어디 가냐는 눈빛을 뿌렸다. 하지만 잡은 손을 부드럽게 걷어내며 나는 자상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가, 가지 말아요. 형 가지 말아주세요. 저 버리지 말아주세요.” “버리지 않아.” “그럼…!” “한결아. 딱 한번만이라도 좋으니까 혼자서 잘 생각해봐. 지금 네 여자친구가 정말로 너를 위해서 이러는지, 아닌지. 지금껏 그녀와 지내왔던 추억은 모두 지우고 현실만 놓고 판단하는 거야.” “…….” “너도 지금 속으로는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정하기 싫겠지. 그리고 현실을 외면하고 싶겠지.” 정곡을 찌르는 말에 백한결의 몸이 움찔한걸 잡을 수 있었다. 신규 인원들이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백한결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복도를 한번 쳐다봤다가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이쯤에서 승부수를 띄우기로 했다. “다음주에 아카데미 교육이 끝이 난단다. 그 후로 오퍼를 받은 사용자는 클랜에서 데려가고 받지 못한 사용자는 홀로 밖을 나서게 되지.” “네, 네?” “그리고 나는 예전에 너에게 말했던 것처럼. 아카데미를 수료하는 날 네 앞에 설 생각이다. 네 마음이 아직 변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때는 지금처럼 다 죽어가는 게 아닌, 모든 관계를 정리하고 마음을 결정한 너를 봤으면 좋겠구나.” 준비했던 말을 꺼내자 잠깐이지만 백한결의 눈망울이 흔들리는걸 볼 수 있었다.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여운을 남겨두었으니 이제는 걸려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리고. “형, 형! 잠시만요. 제발, 제발 이거 하나만 대답해주세요. 형은, 형은 도대체 왜 이렇게 제게 잘해주시는 거에요? 따지고 보면 형이랑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곧바로 걸려들었다. 나는 예전에 김한별과 대화를 나눌 때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때 백한결은 방문 밖에서 우리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네가 시크릿 클래스니까. 는 아닌 것 같고. 예전에 한별이한테 뭐라고 말했더라.’ 잠시 머리를 긁적인 후, 나는 애꿎은 허공만 쳐다보며 대답했다. “글쎄. 솔직히 털어놓으면 나도 너랑 비슷한 경험을 한적이 있거든. 그래서 방금 전 네 얘기에 공감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혀, 형도요? 정말이요?” “응. 그리고 다른 이유를 들자면…. 예전에 통과 의례를 거쳤을 때 너랑 굉장히 비슷한 애가 한 명 있었거든. 물론 지금도 같이 있지만 잠시라도 가만히 놔둘 수 없는 애였어. 아무튼 너를 보니까 그 애가 떠오른다고 해야 하나? 하하하.” 나는 일부러 어색한 척 얼버무렸다. 그런 내 모습이 신선한지 백한결의 표정에서 조금씩 생동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왕 내친김에 나는 한가지 말을 덧붙이기로 했다. “신규 사용자들이 오니까 이만 나가볼게. 말을 더 못 들어줘서 미안해. 하지만 네 사정은 충분히 알고 있고 힘냈으면 좋겠다.” “형.” “아. 그건 두고 가도록 하마. 그거 먹고 건강 좀 챙기렴. 그리고 이번 주 교육을 빠진 만큼 주말 추가 교육은 꼭 참여하고. 원래의 너로 돌아와. 지금 여기서 혼자서 궁상 떤다고 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백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을 오물거렸지만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향해 연한 미소를 보여준 후 서둘러 방문을 나섰다. 신규 인원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것도 있거니와 그의 눈동자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속으로 백한결이 남자라는 사실을 수없이 되뇌었다.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복도를 걸어 계단을 내려가자, 마침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신규 사용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려오는 나를 흘끗 흘끗 쳐다봤지만, 그런 시선들은 모조리 무시한 채 숙소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걷는다, 걷는다, 그리고 걷는다. 실은 아까 백한결과 대화를 하던 도중 까닭 없이 속이 끓어올랐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가만히 이유를 생각하자 문득 백한결이 놀란 얼굴로 내게 반문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형, 형도요?’ 비슷한 경험이 있다는 말.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까 낯설지 않은 느낌을 받은 이유가, 나는 진심으로 그의 내면에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경우는 많이 다르지만 사랑하고, 동경하고, 아끼던 여성을 잃은 경험은 나 또한 분명히 있었다. 교관 숙소로 이동하는 동안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복잡하게 떠올랐다. 박다연, 한소영. 박다연은 벨페고르에게 당해 마족의 아이를 임신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한소영은…. “젠장.” 잊고 싶었던 더러운 기억들을 떠올리자 내부로 오랜만에 느껴지는 감정들이 가득히 차오른다. 아까 부글거리며 솟아오른 감정이 점차 격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감정은, 명백한 살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나는 교관 숙소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방향을 비틀었다. 갑작스레 주체 못할 정도로 살심이 끓어올라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절규의 동굴>을 마지막으로 그 동안 잘 억눌러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백한결의 말이 뭔가 내 내부의 역린을 건드린 것 같았다. ‘벨페고르는 죽었어. 벨페고르는 죽었어. 벨페고르는 죽었어.’ 나는 벨페고르를 죽였을 때를 끈임 없이 상기하며 내부를 가다듬었다. 어느덧 주변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어둑한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둘러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했고, 그대로 그늘 안으로 들어가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천천히 명상을 시작했다. 살기를 풀풀 날리면서 숙소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 ………. ……….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뜨자 어느새 완연히 어둠으로 물든 세상을 볼 수 있었다. 간만에 치솟은 살기라 그런지 진정시키는데 조금 시간이 걸린 모양이다. ‘바꾸기 위해서 돌아왔는데 아직 예전의 기억들에 괴로워하다니. 나도 아직 멀었구나.’ 고작 감정 하나 조절하지 못하는 내 처지에 전신으로 무력한 자괴감이 찾아 들었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바지를 한두 번 툭툭 털은 다음, 교관 숙소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이번 주가 13주차. 다음주면 정규 교육이 종료된다. 그리고 100일째 되는 날 아카데미가 끝나니까….’ 양 클랜의 대립이 이번 주에 끝날 리가 없다. 그리고 14주에 무엇을 할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때쯤이면 이미 끝물이나 다름없으니, 설령 움직인다고 해도 예상치 못한 변수를 대처하기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웬만한 일은 이번 주 안으로 끝내놔야 한다는 소리였다. 다행히 내일은 일요일. 토요일 오전, 오후 교육에 모두 통제 지원을 나간만큼 일요일은 교관 일정이 잡혀있지 않았다. 나는 지금쯤 보류 처분을 받아 가만히 처박혀있을 사람들을 떠올리며 내일 움직일 계획을 점검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걷자 곧 본관이 보였고, 걸음 속도를 한층 높여 빠르게 내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제 당분간 헤어질, 어쩌면 파괴되어 영영 보지 못할 복도를 꺾어 돌자 이제는 익숙한 교관 숙소를 볼 수 있었다. ‘그래도 백한결을 확실하게 잡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내일 그들을 만난 후 이제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 동안 바쁘게 움직인 보람은 있어.’ 나는 문 손잡이를 돌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숙소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다행이라는 내 생각을 비웃듯 미처 내가 예상치 못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막 들어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 ‘오빠.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있으세요?’ ‘그, 그래도 숙소에는 들어오실 거…죠?’ 새벽에 대모 살해에 관한 상념에 잠겨있을 때 김한별이 나에게 했던 말들. 주말이라고는 하지만 설마 오늘일 줄 몰랐고, 솔직히 그냥 흘려 넘긴 것도 없잖아 있었다. 숙소 안에서는 테이블을 두고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김한별이 있었다. 백 번 양보해서 술을 마시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옷차림이 보통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살짝 충격적일 정도로, 김한별은 자신의 나신을 필요 이상으로 노출하고 있는 야한 옷을 걸친 상태였다. 그리고 방 내부를 감도는 뭔지 모를 야릇한 분위기도 떠돌고 있었다. 평소의 김한별을 생각하면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나는 숙소 안으로 들어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얼 떨떨히 그녀를 불러보았다. “한별…아?” “아. 오빠. 드디어 오셨네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김한별은 취한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윽고 그녀가 슬며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자, 연한 홍조가 피어 오른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밤늦게 들어오지 않자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모양이다. 그녀는 나를 보며 매혹적인 미소를 흘렸고, 곧 테이블 아래로 손짓했다. 그녀의 바로 옆에 빈 의자가 있었는데, 가까이 와서 앉으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미약한 불안감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별의 행동 어딘가에 뭔지 모를 어색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녀의 손짓에 한 발짝 들어가는 대신, 나는 반사적으로 제 3의 눈과 감지를 활성화시켰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먼저 NTR 장면에 심한 불쾌감을 느끼셨을 독자 분들께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_(__)_ 실은 원래 중간 과정을 더 쓸 생각이었습니다. 차유나가 박환희에게 넘어가는 부분을 추가시키고 싶었는데 어느 독자 분께서 그러시더군요. 장르 문학은 독자 분들의 감성을 생각해야 한다고. NTR은 저 또한 굉장히 예민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라, 그 분의 말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해서 그 동안 깔아 놓은 장면들로 이만 마무리를 짓고 곧바로 결과만 올리기로 했고요. 굳이 이 장면을 집어넣은 이유를 하나 더 말씀 드리자면 더 이상 애 키우기를 하기 싫어서 그랬습니다. 차후 서서히 변해가는 백한결의 행동을 보시면 납득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꾸벅. 하. 그리고 아카데미 부분이 원래 토요일 2연참, 일요일 2연참으로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쓰다 보니 안될 것 같더군요. 앞으로 남은 양이 분량 좀 높이면 3회, 아니면 4회 정도는 필요합니다. 즉 주말 중 하루는, 아니 어쩌면 이틀 모두 3연참을 해야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 하하. 하. 하…. 괜찮습니다. 오늘 레드불 반, 핫식스 반, 박카스 절반 섞어 섭취한 상태입니다. 이거 의외로 효과 좋아요. 여러분들에게도 추천 드립니다!(농담입니다. 정말 이대로 드셨다가는 정신적 공황을 겪으실 수 있습니다. 저처럼요. 히힣헤헿.) 아무튼 한번 약속 드린 건 변하지 않습니다. 저도 얼른 아카데미를 끝내고 싶으니, 곧 죽어도 이번 주 안으로는 무조건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하늘이시여! 제게 글을 쓸 수 있는 힘을 주소서! PS. 고장난선풍기님이 또 팬 아트를 업데이트 해주셨습니다! 뜰에 오시면 김수현, 그리고 예쁜 김한별과 이유정의 모습을 보실 수 있어요!(아카데미 끝낸 후 차차 작품 설정으로 업데이트 할게요!) 고장난선풍기님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김한별 두 번째 버전 정말로 마음에 듭니다. ㅜ.ㅠ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 드립니다! 그리고 암 쏘 쏘리 벗 알러뷰 입니다!(?!) 아마 한별이 일만 정리하면 빠르게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병행이 가능하거든요. 지금껏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_(__)_ 2. 현오 : 감사합니다. 확실히 학점은 좋은데, 정말 스트레스가 장난 아닙니다. 그냥 혼자서 다 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진짜 미치는 줄 알았어요. ㅋㅋㅋㅋ. 3. 페라나도 : 소중한 조언 감사합니다. 리리플은 독자 분들과 조금 더 원활한 소통을 하고자 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독자는 리리플 보다는 이야기내용을 더 좋아합니다.' 라는 말은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NTR은 워낙 민감한 부분이라 첨언했습니다. ㅜ.ㅠ) 4. 시룡 : 시룡님 닉네임을 보니까 당룡님이 문득 생각나네요. ㅜ.ㅠ 하하하. 아카데미는 일요일에 마무리 될 예정입니다. _(__)_ 5. 결빙화 : 다음 회에 해답이 나올 예정입니다. 그리고 눈치 빠르신 독자 몇몇 분들은 이미 눈치를 채신 것 같더라고요. 솔직히 놀랐습니다. ㅋㅁㅋ 6. 초혀니 : Yes. 정확히 보셨습니다. 원래는 되지 않는 경우지만, 되게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흐름을 정확히 짚으셨네요. 아마 다음 회에 나름의 이유들이 나올 예정입니다. :) 7. Goksd : 실은 Goksd님이 가장 정답입니다. 네, 맞습니다. 주인공 보정은 위대합니다! 위대하죠! 아하하하!(퍽퍽!) 8. Astrain : Of Course. 그 부분에 대한 약속은 확실하게 지킵니다. 제가 이것을 한번이라도 어기면 그날로 10연참 들어가겠습니다. 9. 잠든괭이 : 헐. 헐…. 헐……. 헐………. 아껴놨던 이유중 하나가! ;ㅅ;…. 흑흑흑흑…. 10. 輝雅 : 그 부분에 대한 설명도 주말 안으로 나올 예정입니다. ㅋㅋㅋㅋ. 개인적으로 수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10년 차인데, 당하겠어요? 관록을 보여줘야죠. :D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34 / 0933 ---------------------------------------------- 백한결 그리고 김한별 ‘천장.’ 위로 시선을 올리지는 않는다. 내가 알아챘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이미 제 3의 눈과 감지로 뭐가 있는지 정도는 파악한 상태였다. 나는 담담히 한별을 응시했다. 문을 열었을 때부터 시종일관 유혹적인 눈길을 던지는 그녀를 보자 참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찰나의 순간 오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모두 한꺼번에 묻어버렸다. 그리고 방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오빠. 나 오늘 오빠 엄청 기다렸어요.” 한별이 살포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러나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테이블로 다가가 의자를 잡았다. 그녀는 옆쪽으로 빼주려고 했지만 내가 의자를 강하게 끌어당김으로써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그 순간 한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가 바로 풀리는 게 보였다. 나는 그녀를 마주보며 앉은 후 지긋한 눈길로 응시했다. 그에 아랑곳 않고 한별은 계속해서 어색한 표정, 어색한 말투로 내게 말을 걸었다. “일찍 좀 들어와주지. 너무해요.” “…….” “오빠. 나 어때요? 예쁘지 않아요?” “…….” “왜 이렇게 말이 없어요~. 혹시 나 혼자 마셨다고 화난 거에요? 알았어요. 한잔 따라드릴게요.” “…….” 한별은 어울리지 않는 깜찍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내게 잔을 건넸다. 그러나 받지 않았다. 그녀는 머쓱히 웃으며 홀로 잔을 따르더니 이내 내 앞에 조심스레 놓아주었다. 나는 그 잔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너.” “네?” “도대체 왜 이렇게 됐니.”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다음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총명하고 날카롭던 한별이는 어디 가고 당장이라도 부서질듯한 유리조각만 남았을까? 나는 그녀가 따라준 술을 검사한 후 한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안타까운 한숨을 뱉으며 말을 이었다. “후…. 그래. 이런 자리는 갑자기 왜 마련한 거야?” “그냥~. 아카데미도 곧 끝나잖아요. 아쉬워서요. 그 동안 못한 얘기도 나누고 싶고…. 왜요? 저는 이러면 안돼요?” “뭐가 아쉬운데?” “오빠를…. 더 보지 못하는 거요.” 한별의 말투가 잠시 원래대로 됐다가 되돌아감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짚었다. 가슴이 너무나도 답답해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테이블을 엎고 그대로 나가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보이는 호소 짙은 눈빛이 내 행동을 가련히 붙잡고 있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호호. 저도 여자라고요.” “한별아.” “네. 아 잠시만요. 술을 잔뜩 마셔서 그런지 너무 덥네요.” 한별은 살살 눈웃음치며 한 손을 어깨위로 올렸다. 안 그래도 이미 노출이 심한 옷이었다. 그러나 간신히 걸치고 있던 끈을 풀자 한쪽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고, 그녀의 소담스러운 가슴 또한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거기서 더 진행하려는 그녀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는걸 확인한 순간 나는 결국 참지 못했고,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 “…네?” 내가 말을 꺼내자 조금씩 움직이던 한별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이윽고 마치 인형이 고개를 돌리듯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며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게 무슨….”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하나씩 끊어 말하며 내 의지를 강조했다. 그러자 한별의 표정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나를 봤다가 이내 고개를 떨궜다. 시선을 어디다 둘지 몰라 하는 것 같았다. 결국 옷을 벗기던 그녀의 손이 아래로 떨어지고 애꿎은 테이블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해서 한별의 얼굴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녀는 내 시선을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테이블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물끄러미 한별의 옆모습만 보던 중 문득 그녀가 고개를 드는걸 볼 수 있었다. 조용한 침묵만이 주변을 감싸 안았다. “…….” “…….” 한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한별의 숨이 점점 거칠어진다. 한별의 입술이 달싹달싹 움직인다. 지금,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가면이 벗겨지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차분한 음성으로 한번 더 입을 열었다. “한별아.” “오빠….” “굳이 술에 취한척해서,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말이 결정타였다. 마지막으로 주저하던 모습을 보이던 한별은, 그 순간 “흑.” 울음을 터뜨리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흑…. 흑…. 흑….”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너진 한별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이렇게 된 이상 과연 어디까지 가나 두고 볼 생각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만일 그녀가 선을 넘는다면 나도 더 이상은 가만히 있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흐느끼던 김한별이 갑작스레 고개를 쳐들더니 옆에 놓인 술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윽고 술병에 장식된 자그마한 수정 하나를 떼어낸 그녀는 몸을 일으켰고,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울음이 조금 섞이긴 했지만 간드러진 게 아닌 본래의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 ───. ───.” 나는 가만히 품속으로 넣어 연초를 꺼낸 후 입에 물었다. 그리고 점화 석으로 불을 붙이는 순간, 한별의 주문이 완성된 소리가 들렸다. “Penetrate(꿰뚫어라.). Blossom Of Crystal(수정의 꽃.).” 흘끗 고개를 올리자 한별의 손바닥 위에 놓인 수정이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는걸 볼 수 있었다. 수정은 이내 휘황찬란한 빛을 일으키며 아름다운 꽃 모양을 이루었고, 이윽고 중앙에서 끝이 뾰족한 빛 하나가 거침없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이 쏘아지는 방향은 천장을 향하고 있었다. 쩡! 파사사사! 영상 기록 수정이 깨지고 파편이 이리저리 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쥐고 있던 점화 석을 위로 던진 후,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딱!” 살과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거센 불길이 휘감아 들었다. 피어 오른 불길은 비처럼 쏟아지던 파편을 모두 태워버렸다. 이윽고 제 역할을 마친 점화 석은 다시 내 손으로 곱게 안착했다. “하아.” 한별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어느새 가면을 벗은 원래의 표정대로 되돌아와 있었다. 눈동자는 총명하게 빛나고 어딘가 모를 날카로운 기세를 뿌리고 있었다. 흡사 통과 의례에서의 그녀를 보는 것 같았다. 한별은 잠시 동안 허공으로 흩날리는 불씨들을 보다가 비로소 나와 시선을 맞췄다. 뭔가를 결심한 눈빛. 아까처럼 거북한 기분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윽고 그녀는 사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빠.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응.” “황금 사자에서 오빠를 노리고 있어요.” “자리에 앉아. 그리고 자세하게 말해봐.” 이미 예상하고 있어 담담히 대답하자 한별은 조용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의자에 앉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나는 중간에 단 한번도 끊지 않고 한별의 얘기를 들었다. 황금 사자에서 한별이를 이용해 나를 옭아매려 한 사실은 이미 대충 눈치채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최후의 방법을 쓸 수도 있다는 말을 듣자 등골이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인지 듣지는 못했지만, 한별의 말투를 들어보니 분명 좋지 않은 의도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야기를 끝낸 후 한별은 후련한 표정으로 크게 숨을 몰아 쉬었다. 그러다 계속 자신을 쳐다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몸을 가렸다. 나는 그녀가 옷을 걸칠 여유도 줄 겸 고개를 돌리고 생각에 잠겼다. 한별은 곧 본래 입던 로브를 꺼내 걸쳐 입었다. 이윽고 다시 나를 마주보며 앉는 그녀를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일어난 궁금증에 대해서 입을 열었다. “한별아. 한가지 궁금한 게 있어.” “네. 말씀하세요.” “그래. 고맙긴 한데. 이걸 왜 나한테 얘기해준 거야? 넌 황금 사자 클랜원이잖아? 그리고 중간까지 그들의 말을 따라 행동했고.” “…….” 내 질문에 한별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실제로 천장에 영상 기록 수정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한번 어디까지 가나 두고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지노선을 넘지 않았고, 한술 더 떠 클랜 내부의 계획을 폭로해주기까지 했다. 여전히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한별(0년 차) 2. 클래스(Class) : 보석 마법사(Secret Jewel Mage Runner)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황금 사자 5. 진명 · 국적 : 별에서 비롯된 자 · 아름다운 빛과 광택을 다루는 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2) 7. 신장 · 체중 : 170.5cm · 43.8kg 8. 성향 : 무기력 · 상처(Lethargy · Scar) [근력 50] [내구 58] [민첩 70] [체력 52] [마력 88] [행운 68] (능력치 포인트가 4 포인트 남은 상태 입니다.) ‘고르게 키우긴 했네. 애들 보다 성장도가 높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런데 무기력? 상처? 이건 또 뭐야?’ “잘 모르겠어요. 그냥 오빠한테 더는 이러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한별의 능력치와 성향에 대해 생각할 즈음 기어들어가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용자 정보를 끄고 고개를 올리자 이제는 초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별이 눈에 보였다. 대답하기 싫어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나는 계속 물어보기로 했다. 그녀의 진위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래. 네 덕분에 나는 위험을 대비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럼 수료 후 나는 바바라를 떠나겠지. 그러면 앞으로 너는 어떻게 되는 건데?” “…잘 모르겠어요.” “다 모르겠다고 하면 어떡해.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른 일이야?” “…….” 순간 내가 너무 몰아붙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한별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저 슬픔으로 물든 얼굴로 내 말을 묵묵히 받아 넘기고 있었다. 톡톡. 나는 습관적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리고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상태로 조용한 정적만이 흐르고, 그것은 불편한 분위기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생각해봤자 머릿속만 복잡해지고 가슴만 답답해진다. 나는 결국 모든 생각을 멈추고 제 3의 눈을 믿기로 했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건 그녀와의 대화였다. 해서, 나는 하나씩 차분하게 질문을 던져나가기로 결정했다. 그렇다면 먼저 이 어색한 분위기를 살짝 풀 필요가 있었다. “너랑은 얘기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답하기 곤란한 것은 안 해도 되지만, 그래도 최대한으로 답변해줬음 좋겠다.” “…네.” 간신히, 미약한 대답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는, 실은 가장 궁금했던 첫 번째 질문을 그녀에게 던졌다. “너. 도대체 그런 명령을 받으면서까지 황금 사자에 남아있는 이유가 뭐야?” “…….” “사실상 그렇잖아. 아무리 상부의 명령이라고 해도 옳은 것과 그른 것은 있으니까. 설마 네가 당하는걸 즐기는 취향이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고.” “그런 취향은 없어요. 하지만 저는…. 이곳을, 황금 사자를 탈퇴할 수 없어요.” 비로소 입을 연 한별은, 낮지만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음성에는 숨길 수 없는 증오가 섞여있었다. * 주점에 도착한 후 나는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늘은 통제 지원이 없는 일요일이라 별로 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아카데미가 서서히 끝이 다가오면서 출입도 자유롭게 풀리고 있었기에, 부담 없이 외출할 수 있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어차피 내가 손님이 아니라 초대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조금 기다리는 건 상관없었다. 텅 빈 3층에 홀로 있자 곧 웨이트리스 한 명이 사뿐사뿐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혼자 오셨어요?” “아니요. 곧 두 명 더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럼 주문은 그때 하시겠어요?” “그냥 지금 하도록 하죠. 여기서 자신 있는 거 전부 가져와주세요. 물론 주류도 포함해서요.” “네?” 나는 대답 대신 주머니 하나를 던져주었다. 웨이트리스는 허공을 가르는 주머니를 익숙한 손놀림으로 받아 들었다. 그리고 주머니 안을 살짝 열어보더니 이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내가 주문을 취소할세라 빠른 발 놀림으로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크게 기지개를 폈다. 오늘 새벽 늦게까지 한별이와 대화를 했기 때문에 전신이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었다. 살며시 눈을 감고 머리를 비우려고 했지만 김한별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를 않는다. 나는 그녀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천천히 상념에 잠겼다. 0235 / 0933 ---------------------------------------------- 백한결 그리고 김한별 그래. 솔직히 말해서 처음 사용자 아카데미로 들어올 때는 김한별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물론 아주 예전에는 그녀를 다시 영입할까고 생각한적도 있었다. 원래 미래대로 흐른다면 그녀는 바바라에서 최후를 맞이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명색이 시크릿 클래스인데 부랑자한테 넘기느니, 잠시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내가 품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적도 있었다. 하지만 미래가 비틀렸다고 느꼈을 때부터, 그 생각은 포기했다. 만일 대모가 살해당하지 않고 중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면, 그래서 북 대륙의 평화가 유지된다면 한별이를 영입하는데 많은 애로사항이 생겨버리기 때문이다. 그저 그런 하위 클랜원도 아니었고 예비 간부에 부랑자 말살 계획 때 이름을 알린 시크릿 클래스였다. 기껏 심혈을 키워놓은 애를, 그것도 갓 출범한 신생 클랜이 훌쩍 데려가 버리면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황금 사자 클랜이었다. 그네들이 가만히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으니 보복을 감수하면서까지 데려올 가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별이와 대화를 나눈 이후 다시 생각해볼 문제라고 여겨졌다. 어젯밤부터 오늘 새벽에 이르기까지, 나와 한별은 서로 설전 아닌 설전을 벌였다. 그 동안 그녀가 마음속에 담아뒀던 고민거리를 털어내고 그것을 하나씩 짚어냈던 시간이라고 하면 정확할 것이다. 한별은 처음에는 클랜원으로서의 도의적인 책임과 계약서를 작성한 것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리 그들이 너를 키워줬다고 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명령은 정당화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간단히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일전에도 터지기는 했지만 내부에서 빈번히 이루어지는 성 상납은 황금 사자 클랜의 명백한 치부거리였다. 계약서 또한 문제될 것은 없었다. 언뜻 들으면 묶여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을 들어보니 소위 먹고 튀는걸 방지하기 위한 계약서였다. 애초에 사용자와 사용자간 작성한 계약서는 큰 효력을 지니지 못하고, 비용 부분은 갚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내가 차근차근히 설명해주자 한별은 수긍한 것처럼 보였다. 아니, 어쩌면 본인도 거기까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에 그녀가 꺼낸 속마음은, 애매한 부분이 있어 함부로 잣대를 내리기 어려운 문제였다. 시크릿 클래스 보석 마법사.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보석 마법사는 돈 먹는 하마였다. 보석을 주로 사용하는 만큼, 촉매가 없으면 일반 마법사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클래스였다. 클래스가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유지하는데 드는 예산이 굉장히 높아, 일반 사용자 여럿을 키우는 것과 비교해보면 비효율적인 면이 있었다. 한별은 황금 사자가 아니라면 감당할 수 있는 클랜이 많지 않을 거라고 했고, 설령 탈퇴해서 다른 클랜에 가더라도 상황은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라 말해주었다. 더구나 황금 사자가 자신을 순순히 놔줄 리도 없다는 말에, 그녀의 속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이후의 일을 홀로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한별은 설령 모든 일을 감수하고 타 클랜으로 간다고 해도, 과연 그곳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회의감을 표시했다. 듣고 보니 황금 사자에서 시기 및 질투에 많이 시달린 것 같은데, 여느 클랜도 다를 바 없다고 여긴 것 같았다. 다시 한번 그 고통을 반복하느니 그냥 이곳에서 버티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했다고 심정을 토로했다. 어떻게 보면 피해 의식이라고 볼 수 있지만 또 아주 무시할 수도 없는 말이었다. 한별의 말에 나는 많은 고민이 들었다. 그녀의 심정에 대한 고민이 아닌 앞으로 김한별에 대한 처우의 문제였다. 성향을 보면 답이 나온다. 구해줄 것인가, 말 것인가? 잠시 동안 고민했지만 일단은 빼내오는 걸로 가닥을 잡기로 했다. 상황은 달라졌다. 비틀린 줄 알았던 미래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고 황금 사자를 탈퇴하는 인원들은 속출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는 간부도, 그리고 성 상납 사건을 폭로한 여성 사용자도 있어 나름 기회라고 볼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다만 박현우와 성유빈의 최 측근으로 알려진 그녀에게 줄이 들어오지 않았을 뿐.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었다. 걸리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한별의 의지였다.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애써 힘을 쓸 필요는 없지만, 스스로 탈퇴를 원한다면 다시 생각해볼 문제였다. 그리고 나는, 한별이 현재 느끼는 심정에 대한 해답을 주기 위해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개인적으로 성 상납을 당연하기 여기는 쓰레기 클랜에 붙어있는 건 좋은 선택이라고 여겨지지는 않아. 네가 너무 단적으로만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모든 클랜이 황금 사자와 똑같을 리가 없잖아.’ ‘…….’ ‘뭐 네 걱정도 아주 없는 경우는 아니니까. 그럼 이거 하나만 대답해줄래? 너, 아직도 황금 사자에 미련이 남아있는 거니? 그 모든 굴욕과 수치를 감수하고서라도 남고 싶어?’ “이쪽으로 오세요.” 내 질문에 비장미가 감도는 눈동자로 나를 쳐다본 한별의 얼굴이 떠오르는 순간, 웨이트리스의 말이 귓가를 때렸다. 나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계단을 올라오는, 딱딱히 굳은 얼굴의 서진우와 그를 뒤따르고 있는 성현민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연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내 손을 보고 마주 인사를 하는 그들을 보며 나는 한별에 대한 생각을 매듭지었다. 질문에 대한 김한별의 대답은 “아니요. 솔직히 이제 그만두고 싶어요.” 였다. 그리고 그녀의 대답을 들은 순간, 나는 한가지 좋은 생각을 번뜩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은 두 마리 토끼를 한번에 잡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 “초대를 받았을 때 정말 놀랐습니다. 설마 머셔너리 로드께서 먼저 초대해주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하하. 초대에 감사 드립니다. 머셔너리 로드.” 서진우가 우울한 말투로 중얼거리자 성현민이 어색하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급하게 끼어들었다. 어느새 우리들의 테이블에는 여러 맛깔스러운 음식들과 고급 주류가 가득 채워진 상태였다. 나는 그 중 하나를 집어 들어 개봉한 후 그들을 향해 살짝 기울였다. “예. 정말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주위 사정이 하도 급박하게 돌아가다 보니 이래저래 신경 쓸 일이 많더군요.” 나는 살살 달래는듯한 말투로 그들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서진우는 앉은 내내 시큰둥했지만 성현민은 과할 정도로 예의 바르게 잔을 받았다. 그래도 아주 경우가 없지는 않은지, 서진우는 곧바로 병을 잡아 내 잔을 마주 채워주었다. “그래도 조금 섭섭합니다. 머셔너리 로드께서 저희는 아예 잊고 계신 줄 알았거든요. 그러고 보니 요즘 많이 바쁘지 않으십니까? 다른 클랜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초대를 받고 계시다던데.” “사, 사용자 서진우.” 무려 10강에 이른 사용자임에도 불구하고 보류 처분을 받은 게 꽤나 분했는지, 서진우는 연신 불퉁거리고 있었다. 성현민은 당황한 얼굴로 서진우를 말렸다. 나는 괜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한두 번 주억인 후 술잔을 들어올렸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초대를 받은 건 사실입니다만, 모조리 거절했습니다.” “아니, 왜요?” “별로 친해지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뭐 별로 내키지가 않았습니다.” 조금 더 에둘러 말할 수도 있지만 눈 앞의 두 사용자는 모두 산전수전을 겪은 놈들이다. 운만 띄워도 충분히 알아먹을 것이다. 역시나 내가 말을 시작한 순간 시종일관 음울했던 서진우의 표정이 바뀌었다. 권태로웠던 그의 눈동자에 번뜩임이 치솟고, 억지 웃음을 짓던 성현민도 우묵한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허공으로 들어올린 술잔을 한번 찰랑이자, 그들 또한 천천히 잔을 들어 호응했다. 곧이어 수정과 수정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테이블을 울렸다. “그 동안 통제 지원이 빽빽하게 잡혀 짬을 낼 수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복잡한 문제가 생기기도 했고 말이죠. 아무튼 두 분을 잊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처음 아카데미에 들어왔을 때 이것저것 챙겨주신 점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크흠흠! 아, 아닙니다. 머셔너리 로드. 제가 잠시 추태를 보였습니다. 요즘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기분이 조금 다운되어 있었습니다. 혹시 제 태도에 불쾌하셨다면 깊은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예. 사용자 서진우의 말마따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서진우와 성현민은 곧바로 자세를 곧추세우며 내게 말을 건넸다. 나 또한 이들이랑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럼 이 자리는 서로의 서운함을 푸는 자리가 되겠군요.” 라는 말로 화답해주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화기애애하게 변했다. 잠시 동안 환담을 나누다가, 서진우와 성현민은 내게 적정한 수준의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나 또한 선을 지키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러나 대답 하나하나에 조심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것은 그들의 확인 절차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저도 곱게 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행태는 누가 봐도 지나치다고 생각할겁니다.”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는군요. 머셔너리 로드의 위로를 받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지네요.” “하하. 사실을 말씀 드린 건데요 뭘. 솔직히 저는 얼른 아카데미가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클랜원들도 보고 싶고, 어떻게 잘 돌아가는지 걱정되기도 하고요.” “아 그러고 보니 한창 자리를 잡고 있는 중이셨죠. 혹시 추후 계획이 어떻게 되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글쎄요.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습니다만 아마 동남부 중 한곳에서 활동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현재 클랜원들도 남부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고요.” “하하하! 좋군요. 사석에서 이런 말씀 드리기 조금 그렇지만, 저희 동부 도시도 꽤나 괜찮을 겁니다.” 서진우와 성현민은 동시에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로 보아 내 입장을 이들이 충분히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서로 친목을 다지는 시간을 가질 즈음, 성현민이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머셔너리 로드. 그런데 아까 개인적인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듣고 싶습니다만. 저희가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 네. 실은 요즘 그것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답답한 와중에 술이라도 마실까 싶었는데 여러분들이 생각나더군요.” 척하면 척. 성현민은 황금 사자에게서 돌아서겠으니 도와달라는 내 의도를 단숨에 짚었다.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로 내 말을 경청하는 그들을 보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요즘 들어 황금 사자 클랜원들의 탈퇴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이라 말할 수 있는 아주 용기 있는 사용자들입니다.” “혹시 새로운 클랜원이 필요하십니까? 원하신다면 몇 명 소개시켜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서진우의 제안에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물론 황금 사자라면 최소한 평균 이상은 되겠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이어질 내 말을 기다리는 두 사용자를 향해, 나는 한두 번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꼭 비밀을 지켜달라고 신신당부한 후, 간밤에 겪었던 일과 한별이와 나눴던 대화를 상세히 말해주었다. 그들은 모두 굉장히 집중한 얼굴로 내 말에 빠져들었다. 이윽고 김한별이 탈퇴하고 싶어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모든 얘기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둘의 반응을 기다리는 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 간부를 성 접대에 이용? 영상 기록 수정? 최후의 방법? 제가 지금 잘못 들었습니까?” “믿을 수 없군요. 아무리 황금 사자라 하더라도….” “단 한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입니다.” 이제부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한별이를 빼내겠다고 결심은 했지만 나 혼자서 모든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빠져나갈 여지를 만들어두거나 아니면 최소한 비빌 언덕이라도 있어야 했다. 서진우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김한별. 확실히 들어본 이름입니다. 다만 박현우와 성유빈의 최 측근으로 알려져 있어 차마 접촉할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예. 그녀 또한 탈퇴하고 싶어하지만 아무래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쉬울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죠. 그래서 앞에 계신 두 분의 힘을 빌리고 싶은 겁니다.” “흠.” 서진우는 내 직설적인 말에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주변을 한번 둘러본 ,후 고개를 앞으로 숙이며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머셔너리 로드.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워낙 사안이 중대해서요. 정말 그 말이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제가 여기서 뭐 하러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혹시 증거 자료라도 있습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아쉽게도 없다고 합니다. 근래에는 간부와 대면할 때 어떤 마법 물품도 구비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용의주도한 놈들.” 혀를 끌끌 찬 서진우는 고개를 돌려 성현민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는 내게 한번 눈길을 던졌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과정은 분명 찰나의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길게 느껴졌다. 이윽고 서진우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먼저 본심을 보여주셨으니 믿고 말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은 아카데미를 수료하는 날 한번 더 대규모 탈퇴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거의 첫 번째 탈퇴와 비견될만한 인원입니다.” ‘떠나기 전에 분탕질 한번 치겠다는 속셈이군.’ “그렇다면….” “물론 한번 만나봐야겠지만 탈퇴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끼는 것은 손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혹시. 저희들이 그 사실을 조금 퍼뜨려도 되겠습니까? 툭 까놓고 말하면, 서지윤의 사건은 제법 재미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어진 연타를 먹일 수 있다면 분명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사용자 서진우. 그건 조금 그런데요. 머셔너리 로드도 연관이 되어있지 않습니까.” “아아. 그렇군. 하지만 너무 아쉬워서 말이지.” 그러면서 나를 흘끗 쳐다보는 서진우를 향해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실은 저나 사용자 김한별이나 이 일을 최소한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특히 본인이 그렇게 하고 싶다고 강하게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일부 비난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그녀의 탈퇴는 충분히 주목 받을만한 일이니까요. 차라리 공개적으로 터뜨려 서지윤과 비슷한 경우를 만들어주는 것도 나쁘진 않습니다.” “황금 사자의 여론 조작이 너무 뛰어나서요. 그리고 김한별은 요즘 들어 심적으로 굉장히 힘들어하는 상태입니다. 현재 클랜에서 너무 당해서 그런지 피해 의식이 생긴 것 같더라고요. 일정 비난을 감수할 각오는 되어있지만 그래도 필요 이상의 구설수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어질 말을 할까 말까 고민이 들었지만 결국 하기로 했다. 원래는 아껴둘 생각이었지만 내가 원하는 바와 이들의 적극적인 태도를 이끌어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그녀가 어떤 클랜에 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잘 적응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네? 그럼 머셔너리 클랜에 가기로 되어있던 게 아닌가요?” “정확한 얘기는 되어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하지만 통과 의례를 함께 해온 동생 같은 녀석이라 못 본 척 하고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어쨌든 그 뒤의 선택은 그녀에게 맡겨둘 생각입니다.” 내 말인즉슨 예민한 최상등 품에 억지로 흠집을 내지 말라는 소리였다. 말에 담겨있는 신호를 알아들었는지, 그들은 동시에 눈을 빛냈다. “알겠습니다. 무슨 뜻인지는 알아 들었습니다. 아무튼 간부 하나가 끼면 그만큼 효과도 커질 테니까 오히려 환영할만한 일입니다. 다만 머셔너리 로드의 말씀대로 최대한 묻어가는 모양새로 진행시켜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곧 김한별과 자리를 한번 더 마련하겠습니다.” “예. 그럼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비로소 내게서 시선을 거둔 서진우는 나를 앞에 두고 성현민과 얘기를 시작했다. “그들이 과연 가만히 있을까? 김한별은 조금 애매한 감이 있는데.” “둘 중 하나지요. 이대로 피해자 코스프레를 계속하며 잠잠히 보내주거나, 결국에는 기어 나오거나. 솔직히 어느 사태가 오든 상관없습니다. 대대적으로 밝히지만 않으면 될 뿐이지, 사정을 알고 있다는 뉘앙스 정도는 풍길 수 있으니까요.” 내게 동의를 구하는 성현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나는 사이즈를 키워준다. 그리고 그들은 방패가 되어준다. 서로 윈윈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된 것이다. 이 둘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래도 안솔 말마따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들은 웃으며 주점을 나올 수 있었다. 아카데미로 돌아가면서 드디어 무거운 짐을 모두 벗은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끝냈다. 이제는 약간의 연기를 하며 기다리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0236 / 0933 ---------------------------------------------- 비틀린 신념 13주차에 워낙 빡빡하게 진행해서 그런지 14주차는 굉장히 여유 있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오후 교육을 마지막으로 아카데미의 모든 정규 교육의 종료가 선언됐다. 이제 남은 공식 일정은 내일 오전으로 일정이 잡힌 수료식뿐이었다. “오빠. 아 하세요.” “아.” “맛있어요?” “응. 맛있어.” “어머! 머셔너리 로드? 이곳은 타인과 함께 사용하는 식당이라고요!” 내 옆에 앉은 한별이가 먹여주는 음식을 삼키자 높은 하이 톤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흐뭇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성유빈을 볼 수 있었다. “켈록. 켈록켈록.” “오빠. 물 드세요.” “내, 내가 마실게. 이리 줘.” 내가 당황하는 모습이 재밌는지 성유빈은 소리 높여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아이참. 농담이에요. 그렇게 격하게 반응하실 필요는 없는데~.” “하하. 실례했습니다.” “농담이라니까요 정말. 그런데 둘이 왜 그렇게 갑작스럽게 친해진 거에요? 그러니까 꼭 둘이 사귀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서, 성유빈 간부님!” “얘는 딱딱하게 간부님은 무슨. 언니라고 불러 언니.” 성유빈의 시선을 회피하는 척 하며 한별을 훔쳐보자 고개를 푹 숙인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애초에 자신 없으면 절대로 시선을 마주치지 말라고 했는데 다행히 내 말에 잘 따라주고 있었다. “칫. 눈빛들을 보니까 방해꾼 취급을 당하는 것 같네요. 알았어요. 이미 사라져줄게요.” “아. 유빈씨. 잠시만요.” “네?” “어젯밤 북부 클랜원들의 모임에 참여했는데 말입니다. 이번 원정으로 바바라에 빈 땅이 몇 개 생겼다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에 관한 자료를 받을 수 있을까요?” 내 말에 성유빈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러다 ‘아.’ 하는 얼굴과 함께 손바닥을 마주쳤다. “아! 네 있어요. 제가 관련 자료는 한별이 편으로 상세하게 보내드릴게요. 걱정 마세요.” “감사합니다.” “내일이 수료식이니까 미리미리 준비하려고요.” 라고도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 앞서나가는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이윽고 성유빈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는 말과 함께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우리 곁을 떠났다. 그리고 그녀가 식당을 나서는걸 확인하는 순간 바닥만 노려보고 있던 한별이 고개를 들었다. “푸.” 그 동안 어렵사리 숨을 참고 있었는지 한별은 풍선을 부는듯한 숨소리를 흘렸다. 눈을 깜빡이고 비비는 그녀에게서 수저를 빼앗은 후 나는 다시금 식사를 시작했다. 이윽고 주변을 스윽 둘러본 한별은 이내 내 쪽으로 얼굴을 바싹 들이밀며 속삭였다. “그런데 북부 모임에 참가했다는 말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의심 많은 여자잖아. 여러 상황을 드러내서 믿게 만들어야지. 혹시 자료 주면 군말 말고 받아와.” “네. 아마 오늘 바로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왜?” “방금 가기 전에 저한테 호출 신호를 보냈거든요.” 한별의 말에 나도 모르게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왠지 모르게 리 액션이 과하다 싶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던가. 나는 한두 번 고개를 끄덕인 후 말을 이었다. “마침 잘됐네. 나도 식사 후 한결이랑 만나기로 약속했거든. 나중에 숙소에서 만나면 되겠다.” “그럼 먼저 일어나볼게요.” “그래. 꼬투리 잡히지 않도록 조심하고.” “네.”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한 한별은 곧 조심스레 몸을 일으킨 후 식당 밖으로 걸어나갔다. ‘내일이 기대된다.’ 홀로 남은 나는 몇 개 남지 않은 미트볼을 휘젓다가 하나를 푹 꼽아 들었다. 서진우, 성현민과 한번 자리를 마련한 이후로 한별의 얼굴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녀의 성향을 보면 알겠지만, 그 동안 절망과 상처 속에서만 살다가 희망이란 불빛이 내려오니 다시 활기가 도는 것 같았다. 그때 모인 자리에서, 우리들은 세세한 계획을 정할 수 있었다. 한별은 수료식 날 터뜨릴 탈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나는 황금 사자에서 허튼 움직임을 보이지 않도록 남은 날 동안 연기를 하기로 했다. 한별과 동침한 척, 황금 사자와 우호 클랜과 친하게 지내는 척. 말 그대로 척을 하기로 한 것이다. 솔직히 조금 우습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이 우스꽝스러운 광대놀음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그 동안 잘 참았다고 스스로 자화자찬하며, 나는 꽂은 미트볼을 입 안으로 던져 넣었다. * 원래 조금 일찍 숙소로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한결이를 만나고 얘기를 듣는 게 너무 즐겁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말았다. 녀석 덕분에 내일 수료식에 대한 설렘이 한층 더 높아지고 말았다. 가뿐한 마음으로 숙소에 들어오자 침대에 걸터앉아 내 교관복장을 개고 있는 한별이 보였다. 내가 들어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그녀는 살짝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가까이 다가가려는 순간 한별은 곁눈질을 하며 모종의 신호를 보냈다. 나는 곧바로 제 3의 눈과 마력 감지를 활성화시켰다. ‘천장에 둘. 사선 배치. 바닥에 둘. 사선 배치. 합치면 사각 배치. 미친놈들인가.’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쉰 후 침대에 누웠다. 막 교관복장을 정리한 한별은 이내 두툼한 기록을 내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아까 식당에서 말씀하신 거에요. 성유빈 간부님이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오 그래. 고맙다고 전해드려.” 나는 잠시 동안 기록을 열심히 살폈다. 내 말을 멋대로 해석했는지(실은 그럴만한 여지를 주기는 했지만.) 클랜 하우스를 짓거나 매입할만한 상품들을 소개해주는 기록이었다. 그래도 신경은 써준 듯 생각보다 가격이 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봤자 대도시 값이 어디 가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한동안 기록을 읽는 도중 한별의 움직임이 조용해진 것을 느꼈다. 지금 아래위로 사각 배치된 수정구는 영상 기록용이 아니다. 통신 영상 기록용이라는 정보를 읽을 수 있었다. 쉽게 말해 음성, 움직임이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양방향용이라는 소리였다. 지금쯤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나와 한별의 정사를 기대하는 관음증 환자에게 간단히 애도를 올린 후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참 징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네.” “그러네요.” “이대로 자기는 좀 아쉽다. 잠깐 산책이라도 나가지 않을래?” “너무 늦지 않았어요? 내일 수료식도 있는데 그냥 주무세요.” “그러지 말고 나가자. 가끔 야외에서 노는 것도 좋잖아.” 한별이는 스스럼없이 대답하며 알아서 꿍 짝을 맞춰주고 있었다. 나는 자꾸만 빼는척하는 그녀의 팔을 잡고 억지로 밖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우리 둘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한별은 방금 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직도 의심하고 있어?” “성유빈이 아무래도 확실하게 해두고 싶은가 봐요. 그래도 거의 믿고는 있어요.” “년이었군.” “네?” “아. 아무것도 아냐.” 나는 대충 말을 얼버무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방금 전 걸었던 길을 다시 되짚으며 숙소 밖으로 이동했다. 이왕 이렇게 나온 이상 시간을 때울 필요가 있으니 정말로 산책을 할 생각이었다. 잠시 동안 나와 한별은 조용히 걷기만했다.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곳은 바로 이스터 에그였다. 정나미가 떨어진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유일하게 애착이 가는 곳 이었다. 이윽고 여러 길을 따라 수풀을 헤쳐 이스터 에그로 도착한 순간 한별의 탄성을 들을 수 있었다. 그녀를 이곳에 데려오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한별도 이곳은 간만에 오는지 신선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들은 아무 말도 않은 채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언제나처럼 눈을 감고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자 나직한 목소리가 등 뒤로 흘러 들었다. “오빠.” “응.”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정말,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천만에. 그리고 아직 하루 남았지만 미리 축하할게.” “네….” 뒤에서 뭔가 우물쭈물 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한두 번 심호흡을 하다가, 툭 던지는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네.” “해봐 그럼. 지금 아니면 영영 못할지도 모르잖아. 예전에 오두막 앞에서처럼 하면 돼.” 살짝 맞닿은 등에 한별이 움찔하는 게 전해져 들어왔다. 나는 속으로 킥킥 웃었다. “정말 해도 되요?” “응.” “그럼 절대 화내지 않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약속해줘요.” “뭐야 그게?” “왜냐하면 제가 하고 싶은 말들은 오빠 입장에서는 전혀 공감되지 않으실 거니까요. 그리고 저도 스스로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거든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길래 이러는 걸까. 어쨌든 아카데미 마지막 날이다. 하고 싶은 말 정도는 실컷 하도록 놔두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 보고픈 호기심도 있었다. 나는 담담히 “해봐.” 라고 대답해주었다. 내 허락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고요한 정적이 찾아 들었다. 그렇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혹시 사용자 아카데미에 있던 시절 기억나세요?” “아아.” “제가 그때 오빠를 떠나갔다고 생각하시나요?” “…….” “당시 제 속마음은요. 그때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요. 누군가를요.”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를. 그 누군가를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대상이 나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이윽고 한별의 목소리는 마치 노랫가락처럼 아름답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알아요. 그 상황을 제가 스스로 자초했다는 건. 그래도 한번쯤은 알아봐주기를 기대했어요. 한번쯤은 찾아와주기를 기다렸어요.” “…….” “특별 취급을 원한 건 아니에요. 그래도 최소한 다른 애들이 받은 관심 정도만. 아니, 그래. 믿어도 돼. 이 한마디와 함께 그 누군가가 저를 억지로라도 끌고 가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죠. 그럼 못이기는 척 끌려갔을 거예요.” “뭔….” 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냐고 반문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차피 끝난 일이었고, 한별이도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미리 연막을 쳐 논 상태였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문을 던졌다. “한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백한결 알지? 걔한테 왜 그렇게 날카롭게 군거야?” “부럽고 질투 났으니까요. 제가 오빠한테 받지 못하던 관심을 그 애는 한껏 받고 있었잖아요. 마치 그 애들처럼.” ‘얘도 애 같은 면이 있구나.’ 한별의 고백에 나는 실소를 터뜨렸다. 뭐라고 대꾸하고픈 마음도 들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발끈하며 하나씩 받아 쳤겠지만, 이 말을 하느라 큰 용기를 냈을 한별을 생각하니 그냥 웃음만 나왔다. 아마 지금쯤 속으로 무지 창피해하고 있겠지. 슬슬 돌아갈 시간이 된 것 같았다. 고연주와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야외 플레이를 1회 했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최소한 조루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그래. 잘 들었다. 약속대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게. 아무튼 서운했던 기억은 모두 잊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일부터 새 마음으로 새 출발도 해야지.” “아직도 걱정이 들어요. 과연 제가 잘 할 수 있을지.” “조금 힘들 수도 있겠지. 그래도 사람 하기 나름이니까. 아무튼 이만 들어가자.” 과거 얘기는 이쯤에서 마무리 짓고 다시 걸으려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내 팔을 와락 붙잡는 한별의 손길이 느껴졌다. “오빠. 아직 더 남았어요.” “너도 참….” “죄송해요.” “……?” 갑작스레 들려온, 예상치 못한 한별의 사과에 나는 발걸음을 멈칫하고 말았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환한 달빛 속에서 나를 아련하게 응시하는 한별이 있었다. 곧이어 그녀의 찬연한 입술이 살며시 열리는걸 볼 수 있었다. “오빠. 잘못했어요.” “한별아.” “잘못…했어요.” “너.” “오빠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알아요. 그래도 오빠 말대로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말하지 못할 것 같아요. 그때 오빠를 잘못 생각했던걸 떨어져있던 내내 꼭 사과 드리고, 용서를 구하고 싶었어요. 오빠. 정말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한별의 목소리는 간만에 고요함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는 그녀의 눈에서는, 한 줄기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멍한 얼굴로 한별을 응시하다가, 나도 모르게 손을 내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말았다. 곧이어 얼굴을 어루만지던 손을 어깨로 이동하고, 살짝 끌어당기자 한별은 마치 자석처럼 내게 안겨 들었다. 내 품에 안긴 한별의 신체는 가냘펐다. 아니, 가냘픈 정도가 아니라 깡말랐다고 볼 수 있었다. 아주 조금 안쓰러운 마음에 잠시 동안 그녀의 등을 두드린 후, 조용히 얼굴을 묻고 있는 한별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건 내 잘못도, 네 잘못도 아니야.” “…….” “그냥. 그때 서로가 가려던 길이 달랐다고 생각한다. 그저 그뿐이지, 네가 배신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단다.” 애들의 관점에서 보면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지금의 내 입장에서 보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한별이는 황금 사자를 선택했고, 나는 내 자신을 선택했다. 지금 와서 그 선택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다. 그때는 서로 맞지 않아 떠나갔을 뿐. 아마 내가 그때의 김한별이었다면 나 또한 황금 사자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미안해요….” 한별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귓가를 스친다. 이스터 에그를 비추는 달빛과 바람이 스쳐 살랑 이는 풀빛 들판 위에서. 소리 죽여 눈물을 흘리는 한 명의 여성을 안은 채, 그렇게 마지막 밤은 깊어만 갔다. * 사용자 아카데미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오늘 일찍 깨기는 했지만 일부러 늑장을 부렸다. 수료식이 상당히 지루하기도 하거니와 일찍 가봤자 귀찮을 일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문득 고개를 돌리자 나와는 달리 일찍 나가버린, 비어있는 한별의 침대가 보였다. 잠시 어젯밤 그녀와의 일을 회상하다가 주섬주섬 장비들을 챙겨 입었다. 교관복장을 벗어 던지고 간만에 본 장비들을 착용하니 감회가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대충 이 정도면 끝났겠다고 느껴질 즈음 나는 대강당을 목표로 천천히 이동했다. 목표 지점으로 가는 도중 무척 많은 사용자들을 볼 수 있었다. 간간이 동남부 소속 문양도 보였지만, 대다수가 서북부 클랜원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아마 황금 사자에서 또 뭔가 야료를 부린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들이 새롭게 맞이할 홀 플레인 이라는 세상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위험하고, 어지럽습니다. 수많은 단체, 즉 클랜들은 서로가….” 대강당으로 가까워질수록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궁금한 마음에 발걸음을 빠르게 놀리자, 무대 위로 진귀한 광경이 펼쳐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들은 신규 사용자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부로 신규라는 단어는 졸업했습니다. 홀 플레인 에서 당당히 개인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신분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고통 받는 이들을 버리지 않는, 약하다고 외면 받는 이들을 품을 수 있는. 약자들의 편에 설 수 있는 단체를….” 확실히 수료식은 끝났다. 그러나 수료식이 끝난 이후 박환희가 무대 위에서 연설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황금 사자를 비롯한 우호 클랜들은 다들 미묘하게 웃는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소수 동남부 교관들은 다들 한방 먹은 얼굴이었다. “그러므로 이번 신규 사용자들의 대표인 저를 포함한 217명의 인원은 어느 클랜에도 들어가지 않을 예정입니다. 우리들은 중립을 지키는 입장에서 따로 독자적인 행동을 하기로 입을 모았습니다. 좋지 않게 보시는 분들이 있겠지만, 저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북 대륙의 발전에 기여할 테니 지켜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윽고 연설이 끝났는지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박환희는 무대에서 걸어 내려오며 꾸벅 고개를 숙였고, 박수 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의 주변으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신규 인원들이 대거 몰려들기 시작했다. ‘대충 알겠군.’ 박환희는 분명 독자적으로 움직일 것을 천명했다. 그러나 그건 대외적인 명분을 위함일 것이다. 내부적으로는 예전에 들었던 대로 다른 클랜과 거래를 한 것이 분명했다. 지금 그의 주위로 걸어가 축하해주는 몇몇 SSUN 클랜 소속 사용자들만 보니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단체로, 서쪽 도시로 가서 터를 잡기로 한 것이다. 박환희는 주위의 인사를 받느라 정신 없는 듯 보였지만 이내 누군가를 발견했는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주변의 인파를 헤치고 손수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정말로 환영하고, 반갑다는 태도였다. 곧이어 그가 마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역시나 손을 흔들며 달려가는 차유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묵묵하게 걷는 백한결도 볼 수 있었다. ‘형의 말을 듣고, 많은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마음을 정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이대로 아무 말도 않고 그냥 물러나기에는 너무 분해요.’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니 입가에 연한 미소가 걸쳐져 있다. 그러나 그 미소의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는, 현재로서는 나뿐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잠시 동안 그들을 바라보다가, 나 또한 그쪽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0237 / 0933 ---------------------------------------------- 비틀린 신념 대강당은 순식간에 축제 분위기로 들썩거렸다. 드디어 아카데미를 수료했다는 기쁨도 있겠거니와, 박환희의 연설에 다들 기분이 고양됐는지 떠들썩한 정도가 아니었다. 황금 사자와 우호 클랜들은 신나게 날뛰는 신규 인원들을 말리지 않았다. 아니, 되려 몇 명은 그 사이로 들어가 함께 축하해주는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동남부 교관들이 생각나 고개를 돌리자, 방금 전에 봤던 광경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주위에도 신규 사용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수는 수십에 불과했다. 이윽고 잠시 나와 눈을 마주쳤다가 이내 클랜원들을 인솔하며 밖으로 이동하는 서진우를 볼 수 있었다. 슬슬 클랜에서 마중 나온 인원들과 함께, 황금 사자를 탈퇴할 인원들과 합류할 생각인 것 같았다. 얼른 뒤따라가야 한다고 느꼈지만, 일단은 백한결의 끝마무리를 지켜보는 게 우선이었다. “어때. 환희 오빠. 내 말이 맞지? 우리 한결이, 결국에는 다시 올 거라고 했잖아.” “그래 정말 고맙다. 유나도 고맙고, 한결이도 고맙다. 하하하!” “…….” 박환희와 차유나가 반가운 해후를 나누는 게 보였다. 그리고 백한결은 묵묵한 태도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어젯밤 백한결과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녀석은 현실 도피 경향과 의존적인 성격은 있지만, 지금껏 내가 보아온 그의 행동에 비추어보면 정상인의 범주에 있었다. 박환희가 환하게 웃으며 쳐다보자 백한결은 불쑥 손을 내밀었다. 곧 둘이 손을 맞잡아 악수를 하자, 차유나가 흐뭇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악수를 마친 후 백한결은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형. 연설 감동적이었어.” “오. 드디어 다시 형이라고 불러주는구나.” “그래. 그리고 축하해.” “축하? 하하하. 그래. 아무튼 다시 나를 믿고 돌아와준걸 환영한다. 잠시 길이 갈라지기는 했지만, 이제는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 축하해줘서 고맙다.” “응? 무슨 소리야? 내가 축하한다는 소리는 그런 의미가 아닌데?”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지만 박환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주변은 여전한 소음으로 시끌시끌했다. 박환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가까이 가져가자, 비로소 백한결은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지금껏 참고 참아온 모든 울분을 담아 토해내는 하나의 비명이라 봐도 좋았다. “유나 누나랑 사귀는 거 축하한다고!” 백한결의 목소리는 컸지만, 대강당 전체에 일어나는 소음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박환희의 주위에 있는 사용자들에게는 확실히 들려 순식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박환희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그러나 그는 재빠르게 표정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한결아. 그게 무슨 소리야? 유나는 네 여자친구잖아? 내가 왜….” “말은 똑바로 하자고. 차유나는 내 전 여자친구잖아? 그리고 지금은 형 여자친구고.” “유, 유나가 내 여자친구라고?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유나와 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그래? 그럼 둘이서 왜 몸을 섞은 거야?” 밑도 끝도 없는, 말 그대로 뜬금없는 폭로였다. 하지만 침묵이 찾아온 순간을 노린 효과는 더없이 확실했다. 비록 일부에 불과했지만 얼어붙었던 정적 위로 조용한 술렁거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차유나의 반응이 궁금해 자세히 살펴보자, 시시각각 변하는 얼굴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심장이 멎은 것 같은 반응을 보이다가, 곧이어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하지만 백한결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누나가 숙소에서 나오는걸 보고 몰래 뒤따라간 적이 있었어. 그리고 그날 수풀 안에서 누나랑 박환희랑 서로 섹스 하는걸….” “백한결! 헛소리하지 마라!” “한결아! 아니야! 오해야!” 웅성웅성. “뭐, 뭐야 쟤?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아. 그 찌질 이잖아 찌질 이. 맨날 숙소 앞에서 여자친구 기다린다는 애.” “뭐야. 그럼 진짜 그랬다는 소리야?” “야. 설마 환희가 그럴 리 없잖아.” 그래도 그 동안 박환희가 쌓아 올린 인맥이 제법 있어서 그런지 사람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박환희와 차유나가 연달아 부정하자, 곧 분위기는 백한결이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곧이어 죽일듯한 눈빛으로 박환희를 노려보던 백한결은, 이번엔 차유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동안 누나에 대한 많은 생각을 했어.” “우리 한결이. 한결아. 진정하고, 착하지? 응? 일단 누나 말 좀 들어봐. 누나잖아. 누나가 다 설명해줄 수 있어.” “처음에는 무조건 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자책감에 몸부림쳤지. 그래 누나니까. 누나가 나를 버릴 리 없으니까. 설령 그랬다고 해도 나한테 뭔가 잘못된 게 있을 거니까.” “하, 한결아. 제발 누나 말 좀….” “그런데 누가 그러더라. 누나 입장에서 생각하지 말고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라고. 현실을 도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직시하라고. 있는 상황 그대로만 놓고 보라고 하셨어.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해보니까.” 백한결은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부르르 떨리는걸 보니 아직 모든 감정을 정리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눈을 감은 시간은 길지 않았다. 곧 부릅뜬 눈과 함께 그는 씹어먹을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밉더라. 누나가 미워지더라. 박환희와 차유나라는 인간이 증오스러울 정도로 원망하는 감정이 일어나더라. 그래. 나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이건 모두 누나 잘못이야.” “즈, 증오스럽다고?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흑!” “백한결. 마지막 경고다. 헛소리도 정도껏 해라. 더 이상 멋대로 지껄인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 차유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고 박환희는 부드러운 말투를 버렸다. 그를 둘러싼 사용자들도 모두 백한결을 비난하며, 적당히 좀 하라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해라. 오해라고? 오해라고?! 거짓말하지마! 차라리 정말로 내가 싫어서 버리고 갔으면 이해는 돼. 그런데 아니잖아. 그 놈이랑 붙어먹으면서 나 이용해먹으려고 한 거잖아!” “아니야! 아니라고! 엉엉!” “끝까지 거짓말을 하겠다 이 말이네. 그럼 대답해봐. 그때 몸 섞으면서 박환희한테 사랑한다고 했잖아? 저놈 품에 안겨서, 헉헉거리면서, 나 꼭 데려온다고 하면서, 환희 오빠 사랑해요 라고 속삭였잖아!” “아니야! 그래도 환희 오빠를 사랑한다고 하지는 않았어! 나는 어디까지나 널 위해서…!” “차유나!” 차유나도 결국은 참지 못했는지 폭발하고 말았다. 그 순간 앗 차 싶었는지 박환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 사랑한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래. 사랑한다고 하지는 않았지만 한 순간의 실수로 얼떨결에 다른 말을 인정해버린 셈이었다. 설마 이것을 노렸다면, 대단하다.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 말을 끝으로 이번엔 대규모 침묵이 다시금 내려앉았다. 이곳을 중심으로 찾아 든 정적은,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슬금슬금 대강당 전체를 점령한 상태였다. 어느새 모두가 세 명을 주목하고 있었다. 박환희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지고 차유나는 멍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그리고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태도로 박환희와 백한결을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끝냈는지 백한결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크게 내쉬며, 후련함이 담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하~아. 날 위해서라는 말은 하지마. 가증스러우니까. 아무튼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니 속은 시원하다. 아. 아니다. 아직 하나 남았어.” “…….” “나는 이만 꺼져줄게. 그러니까 잘 살아.” “한결아! 기다려! 한결아아아아아아아아!” 그때였다. 백한결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 차유나가 실성한 사람처럼 울부짖으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백한결의 앞으로 뭔가 희뿌연 막이 번쩍이는걸 볼 수 있었다. “아아악!” 쿠당탕탕! 잡아먹을 기세로 달려들던 차유나는 곧 막에 부딪쳐 반대 방향으로 튕겼다. 거세게 나동그라지는 그녀를 보며, 소란을 정리하려 달려오던 SSUN 클랜원이 멈칫하고 말았다. 아무런 준비도, 주문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규 사용자가 나름 수준 있는 주문인 반사 능력을 사용하자 놀란 것 같았다. 이제는 내가 나설 차례라는 생각에, 이만 구경은 멈추기로 했다. “한결아.” “혀, 형. 이건….” “괜찮아.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 그 동안 고생했고, 수고했어. 그리고 여기는 공석이잖니. 형이 아니라 클랜 로드라고 불러야지.” “네, 네! 클랜 로드님!” 백한결은 나를 향해 미약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슬퍼 보였다. 나는 차분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박환희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을 이제 더 찌푸려질 곳도 없이 잔뜩 일그러져있었다. 원래는 민폐 덩어리를 떼어내 줘서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흥겨운 분위기에 휩싸여있던 강당은 어느새 불쾌한 소음만이 감돌고 있었다. 박환희는 백한결이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가 시크릿 클래스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자신에게 쏠리던 주목이 줄어들 거라는 생각에, 완전하게 자신 아래로 두기 전까지 숨기려고 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반사 주문은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가르치지도 않는다. 방금 일과 관련해서, 의도적으로 숨긴 사실이 드러난다면 아마 꽤나 곤란한 상황에 처하지 않을까. “씨발…. 병신 같은 년….” “어?” “후. 지금 바로 사람들 끌어 모아. 바로 나갈 거니까.” “어, 어.” 이곳이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했는지 박환희는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신규 인원들은 모두 떨떠름한 얼굴로 느릿하게 그의 뒤를 따랐다. “화, 환희 오빠? 아, 아니 한결아?” “그럼 우리도 갈까?” “네. 클랜 로드님.” 힘있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한결의 손을 잡고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뒤쪽에서 둘을 번갈아 부르짖는 차유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반대쪽으로 걸어가는 박환희도, 내 옆을 따라오는 백한결도. 그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다. ‘여자만 불쌍하게 됐군. 쯧쯧.’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듣기 싫은지 한결의 걸음 속도가 계속해서 빨라지고 있었다. 그의 걸음 속도에 맞추며, 나는 강당 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놀렸다. 하나의 판은 정리했지만, 아직 하나가 더 남아있어 마음이 다급했다. 이윽고 우리 둘이 입구에 다다를 무렵. 뒤쪽에서 누군가가 울부짖는 비명이 구슬피 울려 퍼졌다. * 두 번째 판이 벌어지는 곳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강당을 나서고 정문 쪽으로 걸어가자, 서로 일렬로 늘어선 채 대치하고 있는 두 개의 무리가 보였다. 비록 한쪽이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를 보이고 있었지만, 어느 쪽도 밀리지 않는 치열한 냄새가 콧속으로 흘러 들었다. 황금 사자 클랜원들 사이로 김한별의 뒷모습이 먼저 눈에 들었다. 그리고 나와 마주보는 방향으로, 조성호를 앞세운 동남부 클랜원들도 눈에 보인다. 그들의 뒤로는 황금 사자 클랜 복장을 입은 클랜원 여럿이 있었다. 얼추 세어봐도 거의 20명 가까이 되는 인원이었다. 첫 번째 판을 정리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려서 그런지, 도영록과 조성호는 이미 서로 한창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아무튼 당신들의 행태에는 이제 질렸습니다. 이번에 왜 이렇게 신규 사용자들의 영입이 없나 싶었는데 보아하니 또 개수작을 부리셨더라고 요.” “너야말로 뭔 개소리를 하는 거지? 이번에 신규 사용자들은 그들의 스스로의 뜻으로 일어난 사용자들이야. 그네들이 독자적으로 움직이겠다고 하는데, 뭐 어쩌겠는가. 뜻을 존중해줘야지. 안 그런가?” “참 구변 하나는 좋으십니다. 평소 황금 사자의 여론 조작이 누구 손에서 이루어지는지 알 것 같습니다. 아. 뜻을 존중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 이분들 또한 당신의 행동이 그릇됐다고 여기고 스스로 탈퇴 선언을 한 사용자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웃기는군. 그거야말로 네놈 말마따나 개수작이라고 볼 수 있겠지. 아무튼 마음대로 짖으라고. 이런다고 내가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아?” 백한결은 눈 앞에 펼쳐지는 살벌한 풍경에 깜짝 놀랐는지 내 뒤로 바싹 따라붙었다. 그들과의 거리를 거의 줄였을 무렵, 묵묵히 서 있던 황금 사자 클랜원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사용자 도영록. 우리들은 당신을 더 이상 믿을 수 없어요. 솔직히 무리한 원정 감행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그 이후로 계속해서 실망만 안겨주고 있군요. 이제는 당신의 진심으로 대모님의 죽음을 애도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에요. 차라리 이쯤에서 모든걸 인정하시고 깔끔하게 입장을 발표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우리 클랜원인거 같은데 누군지 기억은 안 나는군. 아무튼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데 누가 대본을 주기라도 했나 봐? 큭큭. 말이야 옳은 말로, 황금 사자가 잘 나갈 때는 철썩 달라붙어 있던 연놈들이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기도 안 차는구나. 차라리 너희들이야말로 사실대로 말하지 그래. 상황이 조금 힘들어지니 살살 눈치만 보다가 이 때를 틈타 탈퇴하려고 한다! 이게 너희들의 진정한 속마음 아닌가!” “끝까지 실망만을 안겨주시는군요. 성 상납 비리부터 정이 떨어졌었는데, 이젠 일말의 미련도 없어졌네요.” “그런 헛소문을 믿다니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하긴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놈들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지. 어쨌든 자네 같은 비겁한 사용자들은 우리 클랜에 필요 없고, 오히려 나가준다니 고마울 따름이야. 굳이 붙잡을 생각은 전혀 없으니, 여기서 알짱대지 말고 이만 나가줬으면 좋겠네.” “하. 좋아요. 그럼 저를 비롯한 클랜원 19명은 이 시간 부로 황금 사자 클랜을 탈퇴하겠어요.” “아아. 신경도 쓰지 않으니까 마음대로 하라고. 참고로 다시 기어들어올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도영록의 말이 꽤나 속을 긁었는지, 뒤에 있던 인원들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한꺼번에 클랜 복장을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 동안 묵묵히 서 있던 한별은 다른 인원들과 맞춰 옷을 벗기 시작했다. 이윽고 황금 사자가 그려진 로브가 힘없이 땅으로 떨어지고, 그녀는 그 틈에서 빠져 나와 반대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앞쪽을 가로질러 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자연스레 여러 사용자들의 시선이 쏠렸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성유빈의 황당한 목소리가 들렸다. “김한별! 너, 너 지금 뭐해?” “저도. 황금 사자를 탈퇴하겠어요. 참고로 방금 말한 19명중에는 저도 들어가 있어요.” “뭐, 뭐? 미쳤어? 너 지금 장난해? 빨리 안 돌아와!” “장난 아니에요. 명단 확인해보세요.” 김한별은 차갑게 대꾸하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 또한 합류할 생각으로 황금 사자 옆을 지나칠 즈음,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성유빈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머셔너리 로드!” “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아니, 지금 어디 가시는 거죠?” “네?” 되려 이상하다는 얼굴로 반문하자, 성유빈이 눈이 번뜩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방금 전에 수료식 끝났으니까 돌아가라고 하던데요. 음성 증폭으로 들었어요. 아. 그래도 한 명은 스카우트 했습니다. 하하.” 나는 한결이의 손을 들어올리며 빙긋 웃어주었다. 그 순간 성유빈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하는걸 볼 수 있었다. 제법 머리는 똑똑한 듯 보이니, 현재 돌아가는 상황이 어떻게 된 줄은 곧바로 파악했을 것이다. “호…. 호호…. 호호호…. 김한별! 이 씨발년이 이렇게 뒤통수를 쳐? 야. 네가 우리한테 이러면 안되지, 응?” “뒤통수라니요? 말씀이 심하시네요. 그리고 뭐가 안되나요.” “아가리 찢기 전에 다물어. 네가 감히 나를 농락해? 흑사자! 뭐해? 지금 당장 저년 잡아와!” 부글부글 끓는 목소리로 말하던 성유빈은 이내 한별을 가리키며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일전에 본 기억이 있는, 검은 갑옷을 입은 사용자들이 앞쪽으로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동남부 클랜쪽에서도, 두 명의 사용자가 걸어 나와 김한별을 마중했다. 그 둘의 정체는 바로 서진우와 연혜림이었다. 흑 사자들은 발걸음을 멈칫한 후 성유빈을 바라보았다. 그 틈을 타, 그들 사이로 쏙 들어가는 한별을 보며 그녀는 죽겠다는 양 발만 동동 굴렀다. “김한별! 너, 너 설마 가입할 때 작성한 계약서를 잊은 건 아니겠지?” “걱정 마요. 청구하세요.” “뭐? 뭐라고?” “다 갚을게요. 떼어먹을 생각 없으니까 청구하시라고요.” “어머. 진짜 찌질 하다. 어떻게 클랜에 가입시키면서 계약서를 작성해?” 한별이 차갑게 받아 치자 나승혜가 기다린 듯이 빈정거렸다. 그녀는 일전에 1순위로 보류 처분을 받았는데, 그때의 일을 심히 마음속에 쌓아두고 있던 것 같았다. “그만!”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도영록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는 성유빈을 강하게 쏘아보다가, 고개를 들어 한별을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년.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나?” “그저 조용히 탈퇴하고 싶을 뿐이에요. 그냥 보내주셨으면 좋겠어요.” “누구 마음대로. 넌 안 돼. 너는 경우가 다르지.” “아 잠시. 아까는 시원하게 보내주신다는 분이 갑자기 왜 이렇게 태도가 바뀌셨습니까.” 성현민이 타이밍 좋게 앞으로 나서며 도영록을 지적했다. 그는 끼어들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성현민은 콧방귀로 대응했다. 이윽고 황금 사자를 지나쳐 내가 합류하자마자, 그는 나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다른 클랜원들은 잡지 않으시면서 굳이 사용자 김한별씨만 잡는 건 이상하게 생각되는데요. 혹시 머셔너리 로드께서는 그 이유라도 알고 계십니까?” “음. 글쎄요.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군요. 그런데.” 잠시 말을 멈췄지만, 이내 흑 사자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흑 사자들이 한 발짝만 더 앞으로 나선다면 기억이 날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여러 사용자들이 실소를 터뜨렸다. 자신들을 비웃는 이들을 보자 도영록은 머리 끝까지 화가 치솟았는지 콧김을 세게 뿜고 있었다. 대치 상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도영록은 실시간으로 표정 변화를 보여주며 우리 전체를 찬찬히 훑고 있었다. 잠시간의 시간이 흐른 후. 도영록의 떨어진 입 사이로 분노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연놈들 데리고. 썩 꺼져라.” “킥. 결국에는 또 웅크리겠다는 거구만.” “지금 당장 꺼지라고 했다. 그리고 너희들은 다시는 바바라에 발을 붙일 생각도 하지 마라. 오늘 부로 출입 금지 처분을 내릴 생각이니까.” “킥킥. 어차피 당분간은 그럴 생각도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라고?” “아. 아닙니다. 그럼 다시 뵙는 그날까지 부디 몸 건강 하시기를. 말씀대로 이만 물러나도록 하죠. 자. 다들 이 냄새 나는 곳에서 떠납시다.” 조성호도 더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이쯤이면 물러날 때라고 판단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확실한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드디어 대치 상황이 해소되고 우리들은 몸을 돌려 아카데미 정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찰싹!” 거리는, 누군가 뺨을 맞는 소리가 들렸지만 의도적으로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카데미의 정문은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그렇게 막 정문을 나서려는 찰나 문득 예전 안솔이 내게 해줬던 말이 머리를 스쳤다. ‘싫어어…. 여기 있으면 안 된단 말이야아…. 같이 가아…. 어어엉….’ ‘그러고 보니 부랑자들 중에는 동성 연애자가 꽤 있다던데.’ 앞으로 박환희가 어떻게 될 줄은 모르겠지만, 기어코 서쪽으로 간다면 그의 앞날을 잠시 애도하기로 했다. 부디 그의 항문이 남아나기를 바라며, 나는 마침내 아카데미 정문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 순간 자유로운 해방의 바람이 전신을 휘감아 드는 게 느껴졌다. * 한별은 나오자마자 나와 거의 비슷할 정도의 인파에(태반이 스카우트였지만.) 둘러 쌓였다. 그녀는 그 와중에도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을 찾아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모든 일이 끝났다. 나는 그 동안 가까이 지낸 인원들에게 작별인사를 고했다. 성현민을 비롯한 몇몇 사용자들은 나와 조금 더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클랜을 너무 오래 비워뒀다는 말에 그들은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추후에 한번 도시에 들르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곳을 빠르게 빠져 나왔다. 겉으로는 꽤 담담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지만, 백한결의 눈동자에는 연신 복잡한 기색이 얽히고 있었다. 이따금 입을 오물거리는 게 뭔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가, 이내 다시 한숨을 쉬기도 했다. 당장은 그가 마음을 정리할 수 있도록 천천히 기다려주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장을 지나고 거리를 따라 걷자, 어느새 워프 게이트가 눈 앞에 보이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지만 내 뒤를 열심히 따라오는 한결이를 보자 애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클랜원들의 얼굴도 연이어 떠올랐다. 이제 곧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절로 연한 미소가 머금어지는 순간이었다. “저, 클랜 로드님!” 빠르게 워프 게이트 입구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갑작스레 나를 부르는 한결의 소리에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백한결을 쳐다보자 뒤쪽으로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까부터요. 무서운 누나가 계속 우리를 따라오고 있어요.” “무서운 누나? 누구…. 푸훗.” ‘실은 광장에서부터 알고 있었어.’ 천천히 몸을 돌리자 멀리서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한별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녀가 있는 방향을 응시하며 가만히 기다렸다. 이윽고 그녀는 내 쪽으로 천천히 거리를 줄이기 시작했다. “저기….” “늦었네.” “이, 인사 좀 하느라 요.” “나한테도 인사하러 온 거야?” 짓궂게 물어보자 한별은 머뭇거리는 태도와 함께 발로 바닥만 긁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워프 게이트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깜짝 놀란 듯 보였지만 이내 내가 일부러 천천히 가고 있는 것을 알아챘는지, 금방 따라붙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오, 오빠.” “남부 도시 모니카. 3명입니다.” “오빠…!” “일단 들어가자. 들어간 다음 얘기하자꾸나.” 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대로 활성화된 포탈 안으로 몸을 묻었다. 시원한 마력의 흐름이 내 전신을 뒤덮는 찰나, 문득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 그러고 보니 연혜림이 같이 가자고 했었는데.’ ============================ 작품 후기 ============================ 일단 올립니다. 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 나중에 가니까 힘이 달려서…. 조금만 쉬다가, 후기 업데이트 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20:42) 여러분 죄송합니다. 제가 자정 업데이트를 하고 싶은데, 정말 힘들 것 같습니다. 지금 눈도 너무 아프고 졸리고 몸이 피로해서요. 이번 주 주말 업데이트 분량을 보니 85KB네요.(내 8회 연재 분! 으아아앙!) 대신 아주 쉬는 게 아니라 설문 조사도 새로 바꾸고, 캐릭터 설정도 업데이트 하는 등등 여러 가지를 손보겠습니다. 내일 아침 강의가 있어서, 오늘도 밤을 새면 진짜로 페이스가 흐트러질 것 같아요. 뭔가 좀 짬도 나야 리리플도 하고 그럴텐데…. 원래 연재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무리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독자 분들의 하해와 같은 양해 부탁 드립니다. _(__)_ 0238 / 0933 ---------------------------------------------- 비틀린 신념 깊은 밤. 한 명의 여성이 침대서 상반신만 일으킨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다. 그 상태로 고개를 조금 숙이자 어둠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은, 칠흑 빛을 뿌리는 단발머리가 앞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벌어진 손가락 틈 사이로 뜨문뜨문 보이는 입술에서 메마른 한숨이 슬며시 흘러나온다. “하…. 수현….” 이윽고 이마에 닿아있던 손이 떨어졌다. 양 팔 또한 힘없이 축 늘어졌다. 그러나 숙여진 고개는 들리지 않았다. 손을 내림으로써 드러난 얼굴은 이지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려고 했지만 군데군데 그늘지어있는 어둠이 미색의 표출을 우그러들게 하고 있었다. 여성의 입술에서 다시 한번 느른한 숨소리가 빠져 나온다. 클랜 로드의 부재. 그 3개월 중 여성이 맡은 기간은 1개월도 채 되지 않지만 그녀는 자신의 역량 부족을 절절히 실감하고 있었다. 하루가 흘러갈수록 분위기가 침체되어가고 클랜원들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감돌고 있었다. 억지로 웃고 다니는 이들도 몇 명 있었지만 그것은 생동감이 보이지 않는 미소였다. 이후 그림자 여왕의 복귀에도 불구하고 한번 수렁에 빠진 분위기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단 한 명의 공백에 불과했지만, 그 빈자리는 그녀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크기였다. 나름대로 노력했다고 생각했지만 명백한 능력 부족이다. 이제는, 이제는 그저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빨리 돌아오세요….” 전해질 리 없는 말을 홀로 읊조리며 하연은 스르르 몸을 뉘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얼른 내일이 오기를 기대하며 천천히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 “와.” 처음 워프 게이트를 이용한 게 신기했는지, 한결은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하며 탄성을 질렀다. 낯설지는 않지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자 그리운 감정이 솟아올랐다. 대표 클랜 <이스탄텔 로우> 관할 하에 있는 남부 소도시 모니카. 주변을 맴도는 공기를 듬뿍 들이마신 후 차분히 워프 게이트를 나선다. 대도시에 비하면 규모나 성장 정도는 아무래도 손색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같은 소도시 뮬을 생각해보면, 천양지차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정비된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형. 아니 클랜 로드님.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러브 하우스.” “네?” “그런 게 있어.”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러브 하우스라는 어감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새삼 고연주에게 수료식 날 마중 나오지 말고 할 일이나 하라고 말했던 것들이 후회스러워졌다. 하기사 호텔이 아니라 하우스인 것을 다행히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 모니카는 최남단에 위치한 소도시로 강철 산맥과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있는 지역이다. 그런 만큼 도시 목표도 원정 대비에 관련한 정책 위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번 원정에 참여하지 못한 게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였다. 그래도 한소영의 수완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사용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도시라고 할 수 있었다. 해가 중천에 있었지만 어느 정도의 사용자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는걸 볼 수 있었다. 3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더 이상 머셔너리 로드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이 모이는 일은 없었다. 가끔 흘끗 시선을 던지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우리들은 아무 말도 없이 거리를 걸었다. 한결은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들에 눈을 빼앗기고 있었고, 한별은 연신 내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러브 하우스>의 위치에 대한 기억을 더듬던 도중 나는 문득 한별이 생각이 떠올라 고개를 돌렸다. “한별아.” “네.” “그냥 말할게. 나는 네가 왜 나한테 왔는지 잘 모르겠다.” “…….” 솔직히 사실이 그렇다. 아무리 머셔너리 클랜이 최근 명성을 얻고 있다고 해도 기존의 전통 클랜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상태였다. 더구나 그녀는 시크릿 클래스 보석 마법사. 물론 보유한 보석이 많다고는 하지만 한별이 우리 클랜 내부 상황을 알리는 없을 테고. 그러면 도대체 왜 나를, 그리고 머셔너리를 선택했는지 자못 궁금했다. 한별은 우물쭈물한 태도로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동안 그녀의 응답을 기다렸지만, 대답하기 곤란한 것 같아 먼저 말문을 열기로 했다. “일전에 내가 너한테 했던 말들은 내 입장에서 말한 것에 불과해.” “…….” “다른 클랜원들. 예를 들어 애들이나…. 특히 유정이. 걔들 입장은 다를 수도 있다는 소리야. 알겠지?”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걱정 마세요 오빠.” 머리가 영특하니만큼 단박에 내 의도를 알아들었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한별을 보며 우선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가뜩이나 사이가 안 좋았던 둘인데 한쪽이 적응을 위한 의지를 가진 이상 돌파구는 열린 셈이다. 걸음을 빠르게 놀렸더니 어느새 중앙 광장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잠시 방향을 가늠하다가 이내 왼쪽으로 트인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 현재 내 클랜원들이 묵고 있는 <러브 하우스>는 본디 주점이지만 숙박 역할도 겸하는 고급 여관이다. 그러나 내 기억에 따르면 한가지 특수한 성격을 띠고 있는 여관이었다. 1회 차 시절 이용한적은 없지만 몇몇 사용자들에게 모니카의 명물이라는 비꼼을 들은 기억은 있었다. 어느새 여관 <러브 하우스>를 눈 앞에 두고, 나는 심호흡을 한 후 똑똑 문을 두드렸다. 잠시간의 시간이 흘렀다. 곧 자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열린 문 사이로 앳된 얼굴을 한 꼬마 한 명이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러브 하우스를 방문한 사람입니다.” “응? 방문자요? 죄송한데 여기는 남성 출입 금지에요.” “알고 찾아왔습니다. 이곳에 제 일행이 묵고 있습니다. 잠시 제 일행을 불러주실 수 있을까요?” 꼬마는 빤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곧이어 그녀의 입술이 살포시 떨어진 순간 내부서 “선영아. 누구니?” 라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몰라요. 남자인데 러브 하우스 방문자래.” “그래? 누구신지 여쭤보렴.” “응. 그럼 누구세요?” “머셔너리 로드입니다.” “머셔너리 로드라고요?!” 꼬마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이내 안쪽에서 누군가 문 쪽으로 걸어오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고개만 내밀 수 있을 정도로 열렸던 틈이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한다. 이윽고 활짝 열린 문 사이로 한 명의 여성이 환한 웃음과 함께 나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머셔너리 로드님. 러브 하우스에 방문하신걸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림자 여왕님께 이미 얘기는 들었어요. 그럼 뒤에 계시는 일행 분들과 함께 안쪽으로 들어오시겠어요?”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아름답네.’ 여성의 안내를 받아 들어가는 도중 문득 우리를 맞이한 여성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는 내 또래 정도 되 보였는데 가지런히 정리한 긴 생머리와 단정한 이목구비가 단아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얼굴을 전체적으로 선해 보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행동 하나하나에서 기품이 한껏 흘러 넘치고 있었다. 마치 한 떨기 청초한 꽃을 보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가슴이 날씬한 허리에 비해 아주…. ‘어쩌면 고연주보다 클지도 몰라.’ 아무튼 실없는 생각은 이만하기로 하고, 나는 여관 내부에서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을 받아들였다. 1층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보였는데, 한 명도 예외 없이 모두 여성이었다. 한별은 담담히 있었지만 한결은 이런 시선들이 익숙지 않은지 내 옆으로 바싹 붙었다. 바로 앞에서 사뿐사뿐 걷고 있던 여성은 곧 걸음을 멈추며 오른쪽을 가리켰다. “이쪽 테이블이 비었네요. 잠시 이곳에 앉아서 기다려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클랜원들은 현재 이곳에 있나요?” “그림자 여왕님과 정하연씨, 신상용씨는 외출을 한 상태에요. 다른 분들은 지금 3층 아니면 4층에 계실 테니 지금 바로 불러올게요.” “아. 제가 올라가도 됩니다만.” “아. 생각해보니 그런 방법도 있었네요. 그럼….” 다시 계단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나도 그녀도 동시에 멈칫하고 말았다. 아까 그 꼬맹이가 어딜 뛰어가나 했더니 2층 계단 중간에서 씩씩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그리고. 꼬맹이 뒤로 입을 함지박만하게 벌리고 있는 안솔 그리고 비비앙을 볼 수 있었다. 그녀들을 보자 절로 기분 좋은 미소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막 동시에 내려오려던 둘은 이내 서로를 바라보며 멈칫했다. 하지만 먼저 선수를 친 사람은 안솔이었다. “와아아아! 오라버니다아아아!” “소, 솔아. 천천히….” “오라버니이이이이! 아앗!” “어휴.” 내 저럴 줄 알았다. 2층에서 스카이 콩콩 뛰듯 뛰어오던 기어코 1층 계단 서너 개를 앞두고 넘어지고 말았다.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몸을 튕기자 나를 뒤따라오는 하나의 기척이 느껴졌다. 찰나의 순간 나는 그녀가 들어올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을 내주기 위해 왼쪽으로 두 보정도 몸을 비켜주었다. 곧이어 허공을 가르는 왼쪽 팔을 잡았고 한 템포 늦게 안솔의 오른팔을 잡는 여성을 볼 수 있었다. “삐아!” 안솔 전용 비명이 들림과 동시에 나와 여성은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반응도 좋고. 이 정도면 속도도 괜찮은데?’ “감사합니다.” “벼, 별말씀을요. 대단하시네요.” 나도 제법 놀랐지만, 그녀는 더욱 놀랐는지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냥 가볍게 웃어준 후, 나는 잡았던 안솔의 팔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곧바로 그 행동을 후회하고 말았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오라버니!” “그래 그래.” 안솔은 곧바로 붙잡혀있던 나머지 한 팔을 거세게 털었고(이때 여성은 깜짝 놀라며 한두 걸음 물러섰다.), 곧장 내게 찰싹 안겨 들었다. 역시나 내 가슴에 실컷 얼굴을 비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2층을 향해 시선을 올렸다. 그곳에는 비비앙이 나와 안솔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이윽고 다음 타자인 비비앙의 행동이 개시되었다. “와아아아. 김수현이다아아아.” 일정한 목소리를 내며 내게 달려들던 비비앙은 정확하게 안솔이 넘어졌던 지점에서 발을 굴렀다. 그것도 나를 마주보는 방향으로. 나는 당연히 안솔을 데리고 오른쪽으로 몸을 피했고, 비비앙은 사정없이 바닥에 부딪치고 말았다. “어머! 비비앙씨!” 비비앙은 대답하지 않았다. 부딪친 여파로 이마를 감싸 쥐며 바닥에 엎어진 채 낙지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고, 그녀는 매우 화가 나있다는 걸 표현하듯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김수현 너!” “비비앙. 오랜만이다.” “응! 오랜만이야! 헤헤…. 아니 이게 아니지. 야! 너 왜 나는 안받아주는데! 앙?!” “목소리 좀 줄여라. 여기 너만 있는 거 아니잖아.” “그럼 차라리 때려주기라도 하던가!” “?” 어떻게 하면 이렇게 갑작스러운 결론이 나올 수 있는 걸까.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다가 이내 의문을 표시하는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옆에서 은근슬쩍 엉덩이를 들이미는 비비앙을 무시하며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시켰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임한나(3년차) 2. 클래스(Class) : 일반 궁수(Normal, Archer, Expert)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꺾이지 않는 가련한 꽃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4) 7. 신장 · 체중 : 168.7cm · 52.4kg 8. 성향 : 질서 · 신념(Lawful · Belief) [근력 72] [내구 84] [민첩 92] [체력 68] [마력 88] [행운 90] < 능력치 비교 > 1. 김수현 : 544 / 600 (능력치 포인트가 12 포인트 남아 있습니다.) [근력 96(+2)] [내구 92] [민첩 98] [체력 72] [마력 96] [행운 90(+2)] 2. 임한나 : 490 / 600 (능력치 포인트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근력 72] [내구 80] [민첩 92] [체력 68] [마력 88] [행운 90] ‘490? 괜찮은데?’ 허공으로 떠오른 사용자 정보를 살피고 있자 임한나가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소개가 늦었네요. 이곳 러브 하우스를 관리하는 3년 차 사용자 임한나라고 해요. 그림자 여왕님께 많은 이야기 들었어요. 편하게 임마담이라고 불러주세요.” “머셔너리 클랜 로드이며 0년 차 사용자 김수현입니다.” “우웅. 오라버니. 오라버니이. 오라버니이이.” “우웅. 김수현. 김수혀언. 김수혀어언.” 계속해서 비벼대는 안솔과 비비앙에 곤란한 표정을 짓자 임한나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녀들은 뒤에 있는 김한별과 백한결을 보이지도 않는지 연신 내게 찰싹 달라붙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둘을 밀어내는 내 손길도 그다지 힘이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 그냥 오랜만에 느끼는 생소하되 낯설지는 않은 기분에 잠시 편안함을 찾고 싶었다고 할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둘을 안은 상태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긴장한 김한별과 안솔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백한결을 볼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여성 캐릭터 인기투표를 시작했습니다. 현재 설문조사에 올려놓은 상태입니다. 독자분들께서 참여해주시면 무척 감사하겠습니다.) 네. 어떻게 보면 쉬어가는 한편이지만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입니다. 난 여자가 좋아요. 아, 방금 전 말은 무시하셔도 됩니다. 아무튼 이제 주 스토리는 본격 안솔 Vs 백한결의 구도로 흘러갈 예정입니다. 아. 죄송합니다. 오늘따라 뭘 잘못 먹었는지 자꾸만 헛소리가 흘러나오네요. 하하하. :D 월요일 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쿠폰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_(__)_ PS. 많이 고민한 결과 리리플은 유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리리플 』 1. geranium1 : 1등 축하 드립니다. 1등에서는 처음 뵙는것 같네요. 하하하. 오랜만에 리리플을 하려니 어색합니다. 아무튼 이번 회도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2. hohokoya1 : 쪽지 감사합니다. 부디 시험 잘 보시고 이루고자 하시는 바 꼭 이루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날 동안 hohokoya1님을 위해 연재 분을 잔뜩 쌓아놓고 있겠습니다. :) 3. 다크사이드 : 다음 회 이유정의 생각을 그대로 하셨군요. 놀랍습니다. 하하하. 4. 영재킬러 : 그 부분도 맞습니다만. 한가지 팁을 드리자면 한결의 능력 중에 몇 개는 무 영창으로 펼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앞으로 전투를 하든 탐험을 하든 신의 방패는 굉장히 유용하게 쓰일 겁니다. 5. 난행복해 : 제 생각인데. 박환희가 아무리 난다 긴다 하더라도 과연 부랑자들을 상대로 통할지 모르겠습니다. 부랑자들은 미친놈들이잖아요. 하하하. 아.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 6. 즐거운날 : 현재 페이스를 조절하고 있습니다. 소중한 조언 감사합니다. _(__)_ 7. deadwood : 본격 캣 파이트를 시작하겠죠. 다만 수현이가…. 아, 아닙니다.(스포일러!) 8. 지카프 : ㅋㅋㅋㅋㅋㅋㅋㅋ. 차라리 백한결을 TS 하도록 하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보고 엄청 웃었습니다. :) 9. 고장난선풍기 : 고장난선풍기 님. 존경합니다. 올려주신 안솔을 보고 감동 먹었습니다. T^T 10. rlatjdwn512 : A 이하와 S의 등급 차이를 조금 더 심화하는 설정이어서 그렇습니다. 두 직업은 모두 똑같이 마력을 기반으로 잡습니다. 사제는 전투 사제, 치유 사제로 나눌 수 있습니다. 다만 마력 회로 가동 방식이 다릅니다. 사제가 <교환 & 발현>이 키워드라면 마법사는 <공정 & 발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39 / 0933 ---------------------------------------------- 비틀린 신념 1층에서 간단한 해후를 나눈 우리들은 이어진 임한나의 안내를 받아 4층으로 오를 수 있었다. 그녀가 안내해주는 방으로 들어선 순간, 나는 살짝 놀라고 말았다. 눈 앞으로 보이는 방의 풍경은 평수가 널찍한 건 둘째 치고서라도 여러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이리저리 배치되어있는, 마치 고급 호텔의 로열 스위트 룸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이것저것 신경 쓴 흔적이 역력히 보이고 있었다. 이토록 호의를 베푸는 이유가 궁금해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어서 들어오라는 그녀의 손짓에 결국 몇 발짝 안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이윽고 그녀가 손수 꺼내주는 테이블 의자에 앉자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흘러나왔다. “그림자 여왕님 아니면 하연씨가 가끔 사용하던 방이에요. 언젠가 클랜 로드가 돌아온다면서 스스로 관리도 하셨죠.” “얘기를 들어보니 4층을 전부 대실 한 것 같더군요. 어차피 곧 클랜 하우스를 구입할 예정이라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아무튼 감사합니다. 대금은 확실하게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괜찮아요. 이미 그에 준하는 도움을 받았고, 또 받고 있으니 부담 없이 사용하셔도 되요.” 도움을 받았다는 말이 궁금했지만 나중에 고연주가 돌아오면 자연스레 알게 될 일이라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임한나는 다른 인원들을 부르겠다며 곧바로 방을 나갔고, 나는 그제서야 클랜원들을 더욱 자세히 살필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한별은 러브 하우스에 들어왔을 때부터 시종일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살짝 긴장한 기색이 있는 걸로 보아 곧 애들을 만난다는 사실에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 비비앙의 관심은 오롯이 내게로 쏠려있었다. 그녀를 보자 문득 영약의 진행 상황을 묻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일단은 말을 아끼기로 했다. 추후 들어오는 클랜원들과 인사를 나눈 후 그때 일괄적으로 물어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한별과 비비앙에서 눈을 뗀 순간이었다. 몸에 갑작스러운 무게 감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자 내 몸을 꼭 끌어안은 채, 전방을 지그시 응시하는 안솔을 볼 수 있었다. 도대체 누굴 이렇게 보나 싶어 다시 고개를 들…. “…너네 둘이 갑자기 왜 그러니.” 황당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내가 시선을 돌린 곳에는 안솔과 한결이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둘의 시선은 절대로 호의적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필생의 천적 또는 라이벌을 보는듯한 눈빛이었다.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안솔은 팩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렸다. 한결은 묵묵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한동안 백한결을 흘끔흘끔 쳐다보던 안솔은 이내 뾰족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새로 보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오.” “응. 이번에 총 두 명을 새로 데려왔거든. 먼저 네 앞에 있는 사용자는 이번에 새로 입장한 신규 사용자고. 다른 한 명은 누군지 잘 봐봐. 너도 아는 사람이란다.” 그제서야 새로 온 사람들에게 관심이 생겼는지, 안솔은 사선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그녀의 시선에 한별이 걸리자마자 안솔의 표정은 빠르게 굳어버렸다. “안녕.” “어….” “오랜만이야.” “아…. 네에….” 한별이 미약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하자 안솔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얼굴에는 떨떠름함이 가득했다. 보이는 그대로 말하자면, 전혀 반기는 얼굴이 아니었다. 마지못해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그 시선에는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라는 의문이 가득했다.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한별은 씁쓸하게 웃었다. “…….” “…….”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비비앙은 한별, 안솔, 한결을 번갈아 보고는 이내 나를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나 또한 어깨를 으쓱 이며 화답해주자 그녀는 눈을 일자로 만들며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러나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걸 알아챘는지 더 이상 입을 열지는 않았다. * 임한나가 꽤나 신속하게 소식을 전했는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한 명씩 내 방으로 들어오는걸 볼 수 있었다. 먼저 온 이들을 제외하고, 가장 처음 방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안현이었다. 쿵쾅쿵쾅 소리가 들려 안현일까 이유정일까 맞추고 있는 사이, 문이 벌컥 열리며 땀으로 흠뻑 젖은 안현이 들어온 것을 볼 수 있었다. “형!” “오랜만이다.” “형! 정말 형 맞죠! 돌아오신 거죠! 형!” “응.”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하는 짓이 안솔이랑 판박이군.’ 속으로 킥킥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자 안현은 나를 껴안을듯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행동은 안솔의 노려봄으로 멈출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그는 땀으로 흠뻑 젖은 자신의 전신을 훑어보더니 이내 머쓱하게 웃으며 한별의 옆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하하. 미안해요 형. 훈련을 하느라 땀을 잔뜩 흘렸네요.” “좋은 자세야. 그런데 여기에 훈련할 장소가 있어?” “네…. 응?” 막 의자를 빼어 앉으려는 찰나. 그때서야 한별을 발견했는지 안현은 잠깐 동작을 멈추었다. 조용히 안현을 바라보던 한별은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너는…. 김한별?” “네. 오, 오랜만….” “너 뭐냐. 네가 왜 여기 있어?” 안현은 나를 봤을 때와는 달리 상당히 공격적인 어투로 입을 열었다. 한별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녀석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일단 앉으라는 신호를 보내주었다. 안현은 입맛을 한번 다시고는 빼던 의자를 거세게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발길을 돌려 정 반대편으로 이동해 의자에 앉았다. 한별의 고개는 더더욱 숙여졌다. 생각보다 그녀에 대한 애들의 배신감은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어쩌면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내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말을 걸었다. 적당히 대꾸해주며 기다리고 있자, 이윽고 외출한 인원이 돌아왔는지 고연주, 정하연, 신상용이 한꺼번에 방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고연주는 그나마 정기적으로 만남을 가졌지만 정하연과 신상용은 바바라에서 헤어진 이후 처음이라 확실히 반가웠다. 부드럽게 웃으며 오랜만이라는 인사를 건네자 둘은 동시에 허리를 숙이며 내 말을 받았다. 둘 모두 침착한 성격을 갖고 있는 만큼 앞선 애들처럼 호들갑을 떨지 않는 게 마음에 들었다. “리, 리더. 아니 클랜 로드. 격조했습니다.” “하하. 사용자 신상용. 오랜만입니다. 클래스 상황은 어떻습니까?” “더, 덕분에 많은 발전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하하.” 신상용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간단한 악수를 나누자, 그는 내 손을 부드럽게 감싸는 걸로 반가움을 대신했다. “수현. 어서 오세요. 무사히 돌아와주셔서 정말 기뻐요.” “사용자 정하연. 저와 고연주가 없는 동안 클랜을 맡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하연과 많은 말을 나누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를 보는 그녀의 눈빛은 상당히 애잔했는데, 진심으로 내가 무사히 돌아와서 안심하는 눈동자였다. 이윽고 둘은 새로 온 인원들을 한번 쓱 보고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이로서 대부분이 자리에 모였지만 아직 한 명이 마저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문 밖을 한번 슬쩍 쳐다보다가, 안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안현. 유정이는? 여기 있는 거 아니었어?” “아. 아까 방으로 들어가는 거 같던데요. 잘 모르겠어요. 가서 불러올까요?” 안현이 대답하는 순간. 복도에서 도도도도 달리는 소리가 문을 투과해 들어왔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클랜원들은 모두 제각각 웃음을 터뜨렸다. 곧 복도를 질주하는 소리가 멈추고, 문이 활짝 열림과 함께 유정이 날렵한 몸놀림을 보이며 안으로 뛰어들었다. 몸을 씻느라 늦었는지 그녀의 젖은 머리가 찰랑이며 물방울들이 우수수 흩날렸다. “오빠! 오빠 왔다며!” “응. 네가 가장 늦었어.” “잠깐 몸 좀 씻느라…. 아. 진짜 오빠다. 오빠!” “안녕.” “끼얏호!”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는지 그녀는 테이블을 훌쩍 넘어와 내 목을 끌어안았다. 격하게 반가워 해주는 건 고마웠지만, 어째 애들의 반응이 하나같이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목을 끌어안고 비비는 유정의 턱을 간질여주자, 그녀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비틀었다. 그러면서도 킥킥 웃는걸 보니 마치 고양이를 보는 기분이었다. 자꾸만 들러붙는 유정을 겨우 떼어놓자, 그녀는 부산을 떨며 내 옆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그러나 내 양 옆은 이미 안솔과 한결이 차지한 상태였다. 실망한 얼굴로 몸을 돌리려던 유정은, 한결을 봤는지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기 뉴 페이스가 있네? 오빠. 이 예쁘게 생긴 여자애는 누구야?”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규 사용자야.” “아~. 새 클랜원으로 데려온 거야? 그럼 다른 한 사람은….” 한결은 여자애라는 말에 충격을 먹었는지 다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나 또한 실수했다는 생각에 말을 정정해주려는 순간, 앞쪽을 확인한 유정의 입이 딱 다물 린 것을 볼 수 있었다. 반달처럼 휘어있던 그녀의 눈은 휘둥그래 변했고 얼굴 전체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그러나 놀람이 어이없음으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 “하. 어이가 없네.” “유정아. 일단 앉아.” 내 귀환으로 떠들썩하던 분위기는 유정에 의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녀는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하는 듯 입술을 꾹 물었다가, 곧 코웃음을 치며 안현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사정을 모르는 클랜원들은 다들 이상한 얼굴로 유정을 응시했지만 안현과 안솔은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호호. 다시 돌아온걸 축하 드려요. 지금 기분이 어떠신가요?” “음. 나쁘지 않아요.” 잠시 동안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지만 다행히 고연주가 말문을 엶으로써 원상태로 회복할 수 있었다. 간만에 모두 모인 자리라 테이블 전체를 훑어 클랜원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나와 시선을 마주치는 사람마다 신뢰감 가득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는걸 느낄 수 있었다. 그 중 몇몇은 그 동안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듯 보였지만, 고연주의 눈치만 보이는지 입술만 달싹였다. 나는 한두 번 헛기침을 한 후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특히 다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보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클랜 로드께서도 고생하셨어요. 그 혼란의 중심에서 무사히 돌아와주셔서 저희야말로 기쁘기 그지 없어요.” 고연주가 대답하자 모두들 동의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조금 머쓱하긴 했지만 나를 걱정했다는 사실에 뭔가 모를 위로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태연한 태도를 유지하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혼란의 중심이라. 그렇죠. 여러분들을 만나 무척 반갑고 조금 더 해후를 나누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똑같은 마음이시겠죠. 하지만.” 나는 잠시 말을 멈춘 후 깍지를 끼고 턱을 괴었다. “돌아오자마자 이런 얘기를 꺼내게 돼서 저도 마냥 편하지만은 않습니다만. 고연주를 통해 여러분들도 어느 정도 얘기는 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만큼 현재 홀 플레인 의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미래가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만큼. 여유를 부리는 것보다는 조금 더 부지런히 움직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어요. 그래도. 저희야 나름 계획적인 일정 아래 틈틈이 휴식을 취했지만 클랜 로드께서는 지금 막 돌아오셨잖아요. 3일. 아니 못해도 하루 정도는 푹 쉬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지금 억지로 쉬어도 쉬는 게 아닐 겁니다. 마음이 불편하거든요. 걱정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현재 저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쉴 틈은 없습니다. 이게 현재의 제 생각입니다.” “휴. 알겠어요.” 고연주는 내가 없는 동안 2인자의 자리를 확실히 굳힌 모양이었다. 현재 그녀를 제외하고 아무도 입을 열고 있지 않았지만, 고연주의 말은 클랜원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뉘앙스였다. 어쨌든 완곡한 거절의 의사를 밝히자 고연주는 한숨을 쉬었다. 고연주나 정하연이나 언제나 내게 휴식을 취하라고 권하곤 했다. 아마 그들이 보기에도 내가 평소에 굉장히 타이트하게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다음 도시로 모니카를 택한 데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바바라에서 떠나기 전 제가 몇몇 클랜원들한테 맡긴 몇 가지 일들이 있을 겁니다. 일단 그 부분에 대한 성과 보고를 가장 먼저 받고 싶습니다만….” 잠시 말을 멈추고 아까부터 분위기에 섞이지 못하고 겉도는 둘을 응시한다. 일단은 이 둘의 소개부터 시작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누구를 먼저 할까 고민하다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한별을 먼저 소개하기로 결정했다. “그전에 새로 보이는 얼굴들부터 소개를 하는 게 우선인 것 같군요. 먼저 내 앞에 있는 여성은 이번에 황금 사자를 탈퇴한 사용자입니다. 예전에 통과 의례를 함께 헤쳐 나온 인연도 있고요. 사용자 아카데미 이후로 잠시 헤어졌다가, 어떻게 연이 맞닿아 데려오게 되었습니다. 한별아?” 내가 부르자 한별은 올 것이 왔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까닥이며 일어나라는 신호를 주자, 그녀는 쭈뼛쭈뼛 몸을 일으켰다. 모두의 시선이 한별에게로 쏠린다. 성향이 바뀔 정도로 큰 상처를 받아서 그런지 아니면 애들 앞이라서 그런지. 예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살짝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다.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사용자들은 모두 머셔너리 클랜원들이란다. 앞으로 한솥밥을 먹게 됐으니, 너도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네. 안녕하세요. 김한별이라고 합니다. 오빠…. 아니 클랜 로드께서 말씀하신 대로….” 한별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모두들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물 린 입은 쉽사리 다시 열리지 않았다. “사용자 김한별? 설마 황금 사자 클랜의 시크릿 클래스. 보석 마법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아. 클랜 로드. 개인적인 호기심이 있는데 몇 가지 질문을 해도 괜찮을까요?” “허락합니다.” 한별이 입을 열지 못하자 하연이 재빠르게 손을 들며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주자 그녀는 곧바로 김한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2년 차 사용자 정하연이에요. 나이는 스물여섯에 일반 마법사 클래스를 갖고 있어요.” “네.” “그럼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본인의 소개를 먼저 부탁 드려도 될까요?” 황금 사자를 탈퇴했다는 말에 동질감을 느꼈는지, 보석 마법사라는 사실에 호기심을 느꼈는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그녀를 이끌어주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이유정의 태도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어쩌면 넷 모두일지도 모르지만 지금 분명한 것은 하연은 김한별을 도와주고 있었다. 하연이 이끌어주자, 그에 힘입어 한별이 간신히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그 동안 옆쪽에서 따가운 시선을 보내던 유정이 참지 못했는지, 기어코 입을 열고 말았다. “킁킁. 아우. 이게 뭔 냄새야? 되게 역겹네.” “어? 미안. 내 땀냄새일걸. 나 훈련 좀 하고 오느라. 그런데 역겹다니 좀 심하다.” 안현이 투덜거리며 대답하자 유정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냐 아냐. 이건 네 땀냄새가 아니야. 네 땀냄새는 확실히 불쾌하지만 이 정도로 역겹지는 않아.” “칭찬이냐 욕이냐. 뭐야?” “음~. 이 냄새는….” 유정은 코를 틀어쥐고 입술을 비틀었다. 하지만 눈은 전혀 찡그리지 않은 상태였다. 이윽고 손을 내리고 한별이 있는 방향을 향해 코를 벌름거리던 그녀는, 명백한 비웃음을 띠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배신자의 냄새 같은데?”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여성 캐릭터 인기투표를 시작했습니다. 현재 설문조사에 올려놓은 상태입니다. 독자 분들께서 참여해주시면 무척 감사하겠습니다.) 흠. 아마 해후 챕터는 다음회로 끝날 것 같군요. 이제 슬슬 다음 챕터로 넘어가야죠. 바로 전쟁으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중간에 챕터 하나가 있을 예정입니다. 중간에 남는 시간이 조금 있거든요. 아. 그리고 고은솔은 개인적으로 예쁘다고 생각하는 이름이라 넣었는데, 헷갈려 하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습니다. 고연주나 안솔이랑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시는데 많이 불편하시면 이름을 바꿀까요? 김한나라는 이름을 생각해놓았습니다. 수정하는 거야 어렵지 않으니 여러분들의 소중한 조언 부탁 드립니다. PS. 현재 여성 캐릭터 인기 투표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독자 분들께서 참여해주신다면 무척 기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생각하기에 적혀있는 대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원하시는 대사를 저에게 알려주세요. 괜찮다 싶으면 바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 드립니다. 역시 자정에 정확히 올리면 미월야님이 가장 강세를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개인적으로 유정에 투표해주셨으면 좋겠어요. ㅜ.ㅠ 2. 산사나무 : 땡! 틀렸습니다! 안현의 짝은 따로 정해져 있지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헤헤헤. 3. 유매리 : 그렇습니다. 이제 둘은 수현을 두고 투닥투닥 싸우겠죠.(?) 4. [DeepBLue] : 하하하. 그냥 터뜨리면 재미없죠. 최대한의 효과를 노릴 생각입니다. 일단은 이어받기(?)부터 해야겠지요. :) 5. 현오 : 정답입니다. 愛로라. 좋습니다. 저는 사랑을 추구합니다. 껄껄껄! 6. 하루지온s :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마지막에 삐아! 하시는 거 보고 순간 웃고 말았습니다. 7. 라피르and진트 : 아닙니다. 독자 분들께서 불편을 느끼신다면 충분히 수정할 수 있습니다. 이번 회에 독자 분들의 코멘트를 보고, 의견이 많은 쪽을 따를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8. 오시안 : 하하. 영약 관련한 내용은 다음 회에 나올 예정입니다. 먹는 것은 아직 조금 남았지만요. 비비앙이 그만큼 신경 쓰고 있는 중입니다. :) 9. 저녁노을로 : ㅎㅎㅎ 그렇죠. 다만 앞으로 수현이 한소영 앞에서 찌질(?)대는 모습은 나오지 않을 예정입니다. 그건 소집령 때로 충분하니, 이제는 본래 돌아온 목적을 이루기 위해 차근차근 나아가야겠죠. 수현의 본 성격대로요. :) 10. Lea : 쿠폰 감사합니다. _(__)_ 세라프는 영약 파트와 겹쳐서 등장할 예정입니다. 현재 계획으로는 전쟁 직전이 되겠군요. :) 헤헤. 감사합니다. 헤헤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40 / 0933 ---------------------------------------------- 키워주는 시간은 지났다 배신자의 냄새. 유정의 말이 비수가 되어 꽂혔는지 한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걸 볼 수 있었다. 이곳에 들어올 때 나름 각오를 한 것처럼 보였지만,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돌 직구를 듣자 감당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테이블을 떠도는 공기가 서늘해졌다. 사정을 모르는 클랜원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일부는 감을 잡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적을 동반한 분위기가 다시금 내려앉았고 속으로 답답함이 느껴졌다. “후.” 결국 갑갑함을 이기지 못해 숨을 길게 몰아 내쉬자 클랜원들의 시선이 쏠리는걸 볼 수 있었다. 솔직히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새삼 축제 분위기가 파토 났을 때 박환희의 기분이 느껴졌을 정도였다. 나는 유정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거듭 말하지만 둘만 있는 자리도 아니고 모두가 모인 자리였다. 여기서 내가 대놓고 한쪽 편을 들어버리면 모양새가 굉장히 좋지 않다. 완곡히 에둘러 말할 필요가 있었다. 해서, 조용히 침묵만 지키고 있는 고연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고연주는 성과 보고를 따로 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요.” “네?” “방금 전 애들의 행동이나 말을 보아하니 딱히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아서요.” “…죄송합니다.” 유정이를 직접적으로 혼내지는 않는다. 다만 방금 전 내 말은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었다. 고연주 입장에서는 굉장히 억울하겠지만 내 뜻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클랜원들도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당황한 표정으로 나와 고연주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다들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을 즈음 한별의 풀이 죽은 목소리가 들렸다. “김한별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스물두 살 이에요. 보석 마법사라는 시크릿 클래스를 갖고 있고…. 전 황금 사자 클랜원이었습니다. 앞으로 머셔너리에서 열심히 활동하겠습니다.” “수고했다. 이만 자리에 앉아도 돼. 그럼 다음으로…. 한결아?” 한별은 힘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찬 후, 곧바로 다음 타자로 바통을 넘겼다. 자기 소개의 시간을 얼른 넘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 안녕하세요. 백한결이라고 합니다.” 백한결은 조심스레 일어나며 눈치를 살폈다. 이 분위기가 자못 어색한지 자꾸만 침을 삼키고 있었다. “나이는 열여덟 살이고요…. 에…. 또….”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규 사용자라고 했지요?” “네, 네.” “그럼 본인의 클래스가 뭔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정하연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백한결은 주저하는 태도를 보이다가 이내 나를 흘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실은 형. 아니 클랜 로드님. 한가지 말씀 드릴게 있어요. 죄송해요.” “죄송할거 없어.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으니까. 오늘 강당에서 보고 알 수 있었다.” “네? 그럼 왜 말씀을….” “뭔가 사정이 있겠다고 생각했거든. 네가 먼저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은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백한결은 한결 안도한 얼굴로 숨을 쉬었다. 아마 그 동안 나를 속였다는 사실에(엄밀히 말하면 속이지는 않았지만.) 꽤나 노심초사했던 모양이다. 나는 미미한 미소와 함께 멍석을 깔아주기로 했다. “그래도 자세한 얘기는 듣고 싶구나.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다시 한번 네 힘을 보여줄래?” “네. 잠시만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백한결은 곧바로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어떠한 주문도 어떠한 준비과정도 없었다. 그러나 찰나의 순간 뭔가 미약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고 동시에 그가 들어올린 손에서 새하얀 빛이 생성되는걸 볼 수 있었다. 이윽고 그 빛은 백한결의 오른손을 감싸 안으며 자그마한 막의 형태를 만들었다. “음…. 제 클래스를 보면요. 사용자 정보에 신의 방패라고 적혀있어요.” “신의 방패라. 범상치 않은데. 클래스 이름 앞에 적힌 단어가 뭐야? Normal, Rare, Secret 중에서.” “Secret이요. 그런데 그냥 Secret이 아니라 Arousal Secret라고 적혀있어요.” 백한결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작은 탄성들이 터져 나왔다. “신의 방패? 시크릿 클래스? Arousal? 이것들은 또 뭐에요?” “Arousal의 뜻? 불러일으키다, 자극하다, 분발하게 하다, 각성시키다.” “직역하면 각성 시크릿 클래스라는 소린데…. 일단 방어계열 성향이라는 느낌이 강하군요.” “호, 혹시 어떤 권능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백한결을 향해 동시다발적으로 질문이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내게 도움을 구했고, 나는 손을 들어올림으로써 백한결의 기대에 부응했다. “그만.” “도대체 어디서 시크릿 클래스를 구한….” “아. 이건 나도 궁금하다. 한결아. 너 어떻게 시크릿 클래스를 계승할 수 있었어?” “에….” 이 부분은 굉장히 중요했기 때문에 꼭 짚고 넘어갈 필요성이 있었다. 백한결은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진심으로, 내가 알고 있는 부분들을 제외하고 뭔가 다른 하나의 단서라도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어진 백한결의 답변은 내 기대를 어긋나고 말았다. “죄송해요. 잘 기억이 안나요. 그냥 갑자기 몸 내부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끓어오른다 싶더니 눈 앞이 하얗게 변했어요. 그때는 상황이 너무 급해서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아…. 그러니.” “죄, 죄송….” 나는 괜찮다는 표정을 보여주며 안절부절 못하는 백한결을 앉혔다. 그러나 속으로는 강한 아쉬움이 일었다. 그리고 경악한 얼굴로 백한결을 응시하는 안솔을 향해 흘끗 시선을 던졌다. 안솔도 통과의례에서 비슷한 경험이 있다. 내가 데드맨들을 유인하는 동안 레이스에 시달리는 애들을 구한 게 바로 그녀였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는 그때 일과 관련해서 혹시 안솔이 각성 시크릿 클래스와 연관이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클랜원들은 모두 놀란 얼굴로 백한결을 두고 얘기하고 있었다. 딱히 나쁜 얘기들은 들려오지 않고 다들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앞선 김한별의 소개 때와는 극명히 다른 반응에 씁쓰름한 마음이 들려는 찰나 조용히 상황을 보던 신상용이 불쑥 말을 꺼냈다. “그, 그럼 이번에 리더. 아이고. 자꾸 말 실수를 하네요. 그럼 클랜 로드께서 데려온 두 분이 모두 시크릿 클래스라는 말씀이군요. 보석 마법사 김한별양과 신의 방패 백한결군.” “그렇죠? 그럼 우리 클랜은 시크릿 클래스만 총 네 명이군요.” “저, 정말 대단하십니다. 하하하!” “후훗. 저도 개인적으로 보석 마법사에 관해 관심이 많았어요. 같은 마법사끼리 앞으로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둘이 말을 꺼내자 클랜원들도 웃음을 터뜨리며 동조했다. 문득 신상용과 정하연을 영입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랜 로드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언제나 중립적인 입장에 있어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어느 한쪽에 편향되는 입장을 보인 순간 그게 바로 내부 불화를 야기하는 문제가 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가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스스로 자정 작용을 해주는 둘을 보자 무척 고마운 기분이었다. “자기 소개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새로 가입한 클랜원들에 대해 궁금하신 것들이 많겠지만 잠시만 참아주시길 바랍니다. 나중에 따로 자리를 마련해드릴 테니 지금은 회의를 이어가도록 하죠.” “네. 알겠습니다.” 고연주가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그때까지 간간이 이어지던 지방 방송이 완전히 끊겼다. 그녀는 내게 지적을 받은 이후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고연주를 잠시 쳐다보며 아주 살짝 웃었다. ‘어차피 애들 얘기는 아카데미로 올 때마다 몇 번 들었잖아요. 내 마음 알죠? 미안해요.’ 네. 이해해요. 저는 걱정 마시고 계속 볼일 보세요. 라는 의미가 담긴 시선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천천히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비밀로 부탁했던 일은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서 꺼낼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고연주의 보고는 차후 시간을 내서 듣도록 할게요. 그럼 사용자 정하연?” “네. 듣고 있어요.” “클랜 하우스 건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간략히 말씀 드리면 총 두 곳을 선정해 논 상태에요. 다만 결재 승인까지는 가지 않았어요. 그 건과 관련해서 필히 보고드릴 사항이 있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말하기는 좀….” “알겠습니다. 오늘 바로 그 두 곳을 보러 갈 테니 상세한 얘기는 그때 같이 듣도록 하겠습니다.” 정하연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다음으로 나는 비비앙과 신상용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영약 진행 상황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수식은 다 완성한 상태야. 장비도 다 선별해놨고. 그런데 문제가 두 가지 있어.” “말해봐.” “마족의 심장과 호렌스의 마정석 때문에 너무 한쪽에 힘이 편향되어 있어. 아무리 조화의 마방진이 있다고는 하지만 정화된 내 영단만으로는 부족해. 그럼 여기서 선택은 두 개로 나눌 수 있거든?” “한쪽의 힘을 북돋거나, 아니면 다른 한쪽의 힘을 떨어뜨리거나.” 비비앙은 고개를 주억이며 수긍했다. 잠깐 동안 생각했지만, 이것 역시 자세한 얘기를 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좋아. 다른 하나는?” “이건 클랜 하우스와 관련된 문제야. 오늘 클랜 하우스 보러 갈 때 나도 따라갈게.” “그렇게 해.”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어느 정도 일은 진행시켜 논 것 같지만 거의 끝자락에서 멈추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자기들의 독단으로 결정하기 힘든 문제가 하나씩 껴있다는 소리였다. ‘자세히 들어봐야 알겠지만 나쁘지는 않다.’ 이 정도면 얼추 마지노선은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후 나는 천천히 주변을 훑기 시작했다. 내 시선이 닿은 클랜원은 어김없이 긴장과 함께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 그 동안 자신들의 성장 정도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엿보이고 있었다. 각자 할 말이 많다는 건 알고 있지만 하나씩 듣다 보면 끝이 없을 것이다. 해서, 나는 개인적으로 듣고 싶었던 것만 물어보기로 했다. “사용자 안현.” “네? 네!” 안현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눈이 휘둥그래진걸 보니 사용자라는 단어가 제법 생소한 모양이다. “호프론의 전설은 어떻게 됐지?” “아…. 실패했습니다.” “왜?” “아직 창도 익숙하게 다루지 못하는데 방패는 과욕이더라고요. 반사 효과를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는데 결국 이도 저도 아니게 됐습니다. 사냥을 나갔다가 욕만 잔뜩 먹어서…. 죄송합니다.” “그렇군. 그럼 호프론의 전설은 반납한 걸로 알겠다.”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어디서 본건 있는지 팔랑크스를 흉내 내려 한 것 같은데, 그건 개인전이 아닌 집단 전에 특화된 전술이었다. 어차피 안현에게 여러 경험을 쌓게 하는 게 본래 목적이었다. 본인은 제법 아쉬운 듯 보였지만 이렇게 되든지 저렇게 되든지 큰 상관은 없었다. 나는 이쯤에서 얘기를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마음 같아서는 클랜원들을 하나씩 붙잡고 세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그것은 앞으로의 일을 병행하며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애들의 나를 봐달라는 눈길을 회피한 후 나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몇 개 더 남아있기는 하지만 일단 중요한 것들은 제 승인만 남아있는 상태네요. 상세한 얘기는 들어봐야 알겠지만 말이죠. 아무튼 잘 알겠습니다. 그럼 앞으로의 행보가 문제인데….” 잠시 말을 멈춘 후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처음에는 모든 손가락을 핀 상태였지만 이내 엄지와 소지를 접고, 전보다 목소리를 조금 더 높였다. “3일. 3일안에 현재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 후에 새로운 계획을 발표할 예정이니 혹시 개인적인 일을 진행시키고 있는 클랜원이 있다면 이 3일 안으로 끝내주시길 바랍니다.” “네? 3일이요?” “물론 고연주의 얘기를 들어봐야 정확히 정해질 것 같습니다만. 제 생각이 맞는다면 딱히 변동은 없을 것 같군요. 자세한 브리핑은 3일 후에 하도록 하죠.” 내 확언에 고연주와 정하연의 얼굴이 살짝 굳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마 브리핑이라는 소리에 대강 감을 잡았으리라. 그녀들은 뭔가 말하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내가 앞서 말해놓은 것들이 있는 터라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그럼 회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신상용씨? 새로 들어온 인원들에게 숙소를 배정해주고 함께 식사라도 하시겠어요? 클랜에 대해서 이것저것 알려줄 겸 말이죠.”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클랜 로드께서도 식사를 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지금 할 일이 있어서요.” “오라버니. 같이 밥이라도 먹어요. 이것저것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에….” “저녁에 같이 먹자. 얘기도 그때 들을게.” 서운해하는 안솔의 얼굴이 보였지만, 이제부터 내가 돌아왔다고 해서 분위기가 풀리는 것은 사양이었다. 머셔너리는 현재 완전히 양지로 나선 클랜이다. 그리고 예전에도 말했었지만, 뮬을 떠난 이상 더 이상은 낙낙하게 할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 빠르게 긴장된 분위기를 형성한 후 앞으로 다가올 일들에 대비할 생각이었다. “그럼 모두 나가보세요. 하연씨는 잠시 여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주시겠어요? 곧 따라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나는?” “아. 너도 간다고 했지. 너도 같이 기다리고 있어. 그럼 다들 나가서 일들 보세요. 아마 오후 즈음에 돌아오지 싶습니다.” 내 축객령에 클랜원들은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돌아오자마자 급하게 몰아치는데 적응할 수 있을까 조금 걱정이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몇몇 사용자들은 얼굴 한 켠에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뭔가 안심하고 있는 표정이라고 할까?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김한별과 백한결에게 다가가는 신상용을 보며 생각을 접었다. 그리고 막 의자를 집어넣는 유정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사용자 이유정.” “응? 네, 네!” “잠시 남도록 해.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내 말에 유정은 단박에 어깨를 꺼뜨리며 고개를 숙였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여성 캐릭터 인기투표를 시작했습니다. 현재 설문조사에 올려놓은 상태입니다. 독자 분들께서 참여해주시면 무척 감사하겠습니다.) 잘 전달되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현재 수현의 마음은 모종의 이유로 다급한 상태입니다. 소소한 일상 이야기. 저도 참 좋아합니다. 그래도 지금 상황상, 수현의 마음에 맞춰 사건 전개를 중점으로 삼는 게 정답인 것 같습니다. 물론 꽉꽉 쪼이기만 할 생각은 없습니다. 분위기 완급 조절을 위해 중간중간 독자 분들이 원하는 부분도 들어갈 예정입니다. 이로서 해후 파트도 끝났네요. 하하하. 설마 배신자의 냄새라는 말이 이렇게 큰 반응을 얻을 줄은 몰랐습니다. 독자 분들이 보시기에 유정이와 애들의 태도가 철없다고 여겨지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씀 드리고 싶지만, 그냥 앞으로의 내용을 지켜봐 달라는 말로 줄이겠습니다. 언젠가 독자 분들에게 “그래도 애들이 이 부분은 성장했구나.” 혹은 “이 부분은 바뀌었구나.” 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참 뿌듯할 것 같네요. :) 『 리리플 』 1. 破天魔痕 : 하하. 제가 항상 미월야 님만 언급했더니 곧바로 破天魔痕 님께서 1등을 탈환하시는군요. 1등 축하 드립니다. :) 2등, 3등도 함께 축하 드립니다. ㅋㅋㅋㅋ. 2. 악마신전 : 아아. 제 마음을 뜨끔하게 하셨습니다. 기말고사에 관한 공지는 곧 올라갈 예정입니다. 그때는 연참이나 가끔 휴재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독자 분들의 양해만 그저 바랄 뿐입니다. ㅜ.ㅠ 3. 감자띱 : 지금 임한나라는 이름이 가장 마음에 끌리고 있습니다. 조금 더 생각해보고 있지만, 큰 무리가 없다면 임한나라는 이름으로 변경할 것 같습니다. 확정되면 변경 후 후기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4. 오시안 : 날카로우시네요. 하하하! 맞습니다. 두 여성이 과연 수현이를 밤에 쉬게 해줄지 의문이네요. :) 5. 재밌는건뭘까? : 응응 일 순위라기 보다는, 1등 캐릭터에 관한 재밌는 에피소드들을 보여드릴 생각입니다. 최대한 내용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말이죠. :D 6. 전설의유저 : 그럼요. 열 받죠. 감히 클랜 로드가, 그것도 본인이 판단 하에 데리고 왔는데 대놓고 면전에서 저렇게 말하면요. 다만 반 죽여버리기 보다는(무서워요. ㅜ.ㅠ) 수현이 앞으로 차차 조절을 할 생각입니다. 어쩌면 유정이한테는 그게 더 무서울 수도 있겠네요. 7. juan : 정답입니다. 역시 심리를 전공하셔서 그런지 잘 꿰고 계신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수현이라는 울타리는 유지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실제로 홀 플레인 의 처절한 현실에 맞부딪치게 되겠죠. 8. 너꼼수 : 아카데미 파트 때는 조금 무섭게 느껴졌지만, 다시 멘탈 잡았습니다.(부끄럽네요.) 1회부터 천천히 보니까 독자 분들께 코멘트를 구걸하는 후기가 보이더군요. 하하하. 독자 분들의 코멘트는 하나하나 읽고 있습니다. 보다 보면 저도 생각지 못한 방향의 코멘트들이 나오고, 저를 즐겁게 만들어요. 9. ilovemeen : 껄껄껄! 남자 맞습니다. 군대도 전역했지요. :) 화끈하신걸 좋아하시는 분이로군요. :) 네. 평소에 조금 섬세하다는 말은 듣는 편입니다. 10. 하네뤼 : 빡 시게 굴리는 것도 있겠지만, 이제부터는 스스로 따라와야 합니다. 따라오지 못하면 도태되고 말겠죠.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41 / 0933 ---------------------------------------------- 키워주는 시간은 지났다 정하연이 방문을 닫고 나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방 안에는 나와 유정이 둘만 남게 되었다. 유정은 내가 불렀을 때, 그 자세 그대로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까이 와.” 유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말은 확실히 들었는지 한걸음 두 걸음 힘겹게 발을 떼기 시작했다. 곧 내 앞으로 바싹 다가선 유정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풀이 죽은 표정으로 시선만 내리까는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살며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배를 살짝 쓰다듬었다. “꺅…! 오, 오빠?” “배는 좀 괜찮니?” “어, 어?” “예전에 동굴 탐험했을 때 한번 꿰뚫린 적 있잖아. 생각해보니 뮬을 떠난 이후로 신경을 써주지 못한 것 같아서. 따로 후유증은 없어?” 어느새 유정의 얼굴은 당황함으로 한껏 물들어있었다. 분명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자상한 목소리로 상태를 묻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응, 응! 조금 흉이 남긴 했지만…. 그래도 움직이는 데는 아무런 지장도 없어.” “다행이다.” 안도의 웃음을 지어 보이자 유정은 비로소 나와 눈을 맞추기 시작했다. 아직 조금 남아있기는 했지만, 처음의 불안함은 한결 가신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나와 유정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 들었고,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너만 남겼냐고 하면…. 따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남겼어.” “오빠. 내가 잘못했어.” “유정아. 오빠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그리고 앞으로 잘못했다는 말은 함부로 하지마.” “응?” 나는 손수 의자를 끌어 아직도 서있는 유정을 앉혔다. 그 와중에 그녀는 자꾸만 자신의 머리를 매만졌다. 연한 붉은빛으로 물든 유정의 머리카락이 눈에 밟혔다. “일단 미안하다. 너희들이 한별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는데, 일언반구도 없이 갑작스럽게 데려와서 많이 놀랐을 거야.” “오, 오빠? 아니야 오빠! 그런 말 하지마! 미안해하지마!” “응?” “지금껏 오빠 믿고 따라온 건 난데. 이번에도 분명 오빠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텐데. 내가 한 순간 분을 못 이기고 철없이 행동했어. 오빠 미안해! 그러니까 제발 그런 말은 하지마….” 내 사과에 유정은 머리카락이 좌우로 찰랑일 정도로 격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그녀가 진정하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여태껏 보아온 유정의 행동에 비추어보면 확실히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 마치 발톱을 날카롭게 세운 고양이 같다고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녀를 내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런데 있었다. 정하연이 폐허의 연구소에서 나에게 진실의 수정을 사용했을 때 그녀의 태도를 생각한다면 유정이 내게 갖고 있는 마음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유정의 발톱은, 단 한번도 나를 향한 적이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너희들의 마음도 이해는 가. 내 생각과 다를 수도 있겠지. 그래도 내 입장을 너희들에게 강요하고픈 생각은 없어.” “오빠….” “하지만 잘못된 점은 짚고 넘어가야겠지? 내가 지적하고 싶은 건 회의 때 보인 네 태도를 말하고 있는 거야.” 유정이 자세를 고쳐 잡는다. 내 말을 경청하겠다는 태도를 보여주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속으로 웃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더 이상 너희들을 애들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 그래. 안솔은 사정이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너랑 안현은 충분히 정상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 “내가 방금 전 너희들의 이름 앞에 사용자를 붙인 이유는 말이다. 이제부터 어엿한 한 명의 클랜원으로 취급을 해주고 싶어서야. 지금 홀 플레인 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대충 들어서라도 알고 있지?” 유정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의 심각성을 깨달아가는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상황은 굉장히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어. 그리고 그 가운데 머셔너리는 수많은 사용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고. 그리고 사용자들은 나를, 너를, 그리고 우리들을 보고 머셔너리 클랜을 판단하겠지. 더 이상 너희들은 신규 사용자가 아니라 머셔너리 클랜원이라고. 그러면 내가 유정이 너에게 머셔너리 클랜원으로서의 행동을 기대하는 게 잘못된 기대일까?” “으으응….” “방금 전에도 그래. 모두가 모인 공식적인 자리에서 내 소개로 한별이를 소개하는 시간이었잖아. 거기서 배신자의 냄새가 난다고 비꼬아버리면 다른 클랜원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비단 한별이만 욕먹는 게 아니야. 그녀를 데려온 나도 이상하게 생각할 테고 중요한 회의 분위기를 흐린 너도 곱게 보지 않겠지.” “미안해 오빠…. 나 정말 그렇게까지 될 줄은 생각도 못했어….” ‘몰랐다 라.’ “그래서 오늘은 이 정도로 넘어가는 거야.” 나는 사늘함을 가득 담은 시선으로 유정을 응시했다. 그녀 또한 갑자기 변한 내 시선을 느꼈는지 몸을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지금부터 말할 것들은 내 입장에서 일종의 최후 통첩이었다. 조금 분위기를 잡더라도 유정이 머리에 똑똑히 새길 수 있도록 확실히 말해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 네가 알고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래. 모를 수도 있지. 하지만 봐주는 건 이번까지만이야. 예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난 두 번 말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거든.” “…….” “너희들 마음은 이해한다고 했어. 귀를 닫겠다는 소리가 아니야. 이제부터는 불만이 있으면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 컴플레인을 해. 아니면 따로 사적인 자리를 마련하던가. 알아들어?” “네.” 유정이 거의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 되어서야, 나는 몰아붙이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조금 기다리다가 나는 유정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분위기를 풀었다가 조였으니, 이제는 다시 풀어줄 차례였다. “네가 시작의 여관에서 살아 돌아온 나를 보고 펑펑 울었을 때. 광장에서 애들한테 돈을 걷어서 나에게 건네줬을 때. 폐허의 연구소에서 나를 감싸줬을 때. 모두 기억하고 있어. 여태껏 나를 믿고 따라와준 건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오빠….” “하지만 나는 이제 머셔너리의 클랜 로드야. 누구 하나만을 편애할 수 없는 입장이라고. 그리고 앞으로 클랜원이 늘어갈수록 너희들에게 신경 쓸 시간도 적어지겠지. 만일 또 한번 이와 비슷한 일이 생기면 그때는 단순히 내 애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넘어가지 않을 거야. 나를 위해서도, 너를 위해서도, 그리고 머셔너리 클랜을 위해서도.” “죄송해요….” 나는 일부러 “내 애들.” 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유정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손으로 눈을 닦았다. 부디 그녀가 내 말을 잘 알아들었기를 바라며 나는 유정의 어깨를 잡고 함께 의자에서 일어났다. “울지마. 내 말이 심했다고 생각하니?” “으으응. 아니에요. 생각해보니까 오빠 말이 맞는 것 같아. 앞으로 명심할게요.” “말투는 하나로 통일하자. 갑자기 헷갈린다.” “응. 클랜 로드님.” “또.” 가벼운 농담을 건네자 유정은 울먹이면서도 배시시 웃었다. 그 표정은 상당히 기괴해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방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유정은 주춤대더니 이내 내 어깨에 살짝 몸을 기대었다. 하연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나는 얼른 방문을 열었다. 오늘의 대화는 이쯤에서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한별이랑은 이곳으로 오기 전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어. 그녀도 황금 사자에서 굉장히 힘든 생활을 했던 것 같아. 하지만 본인이 다시 출발하고 싶다는 의지가 있었고, 스스로도 변하고 싶어하는 것 같더라. 그러니까 너희들도 선입견은 잠시 넣어두고 지켜봐 줬으면 좋겠다. 당분간 그녀가 적응할 때까지만이라도.” 내 말에 유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내 어깨에 기댄 그녀의 고개가 살짝 끄덕여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유정이를 데리고 1층으로 내려간 후. 나는 클랜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러브 하우스를 나섰다. 그리고 밖으로 나서니 하연과 비비앙이 서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나를 기다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저 둘도 친해지기 어려웠을 텐데. 어떤 의미로는 대단하군. 아. 친하다고 보기는 어렵나?’ 털레털레 계단을 내려가 가까이 다가가자, 둘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겨주었다. “수현. 이제 오셨네요. 유정이 많이 혼내셨어요?” “둘이서 무슨 얘기했어?” “혼냈다기 보다는….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 좀 했습니다. 그럼 정하연씨가 봐둔 클랜 하우스를 보러 갈까요?” “네. 자세한 얘기는 일단 가면서 설명 드릴게요. 가까운 곳부터 가도록 해요.” 곧이어 하연은 내 왼쪽으로, 비비앙은 내 오른쪽으로 각각 자리를 잡았다. 그대로 걸음을 옮기며 그녀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격은 생각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장소를 선정하는데 많은 고민이 들었어요. 아시다시피 모니카는 북 대륙 중에서도 안정화로만 따지면 손에 꼽을 정도의 도시니까요. 부지 값도 부지 값이지만, 건물을 세우는데 드는 비용도 엄청나더라고요.” “아마 신분이 자유 용병이라서 그럴 겁니다. 할인 혜택을 받지 못하니까요. 아무튼 머셔너리는 용병 클랜인만큼 의뢰를 받고 운영하려면 최대한 접근성이 좋은 곳에 세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너무 구석진 곳은 웬만하면 피하고 싶군요.” “당당히 양지에서 자리를 잡겠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죠. 홀 플레인 에서는 아직 용병 클랜이 정식으로 출범한 역사가 없잖아요?” 그저 그런 사용자들의 눈높이에 맞추면 클랜을 만들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단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창설 허가가 떨어졌다고 해도 클랜간의 격차는 엄연히 존재한다. 그 격차를 판가름 할 수 있는 사실 하나가 바로 클랜 하우스의 소유 여부였다. 홀 플레인 에서 자신만의 집을 가졌다는 소리는 숙식(宿食) 중 숙(宿)을 해결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개인을 클랜의 개념으로 확대해보면, 한 클랜에서 클랜 하우스를 소유했다는 사실은 숙(宿)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다. 일반적인 사용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집 없이 이곳 저곳을 떠도는 클랜보다는 한곳에 자리를 잡은 클랜을 신뢰하는 게 사실이었다. 수많은 유적을 발굴했고, 탐험에 성공했으며, 성과를 이루어냈다라는 사실을 과시할 수 있는 셈이다. 특히 소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안정화로 이름 높은, 땅값이 비싼 모니카에서는 더더욱 그런 사실을 부각시킬 수 있다. “이번에 사용자 아카데미에 다녀오면서 머셔너리의 위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직 주목 받을 거리가 많습니다. 보석 마법사와 신의 방패의 영입도. 출범한지 3개월을 넘긴 클랜이 클랜 하우스를 구매했다는 사실도. 그리고 용병형 클랜이라는 사실도.” “시기와 질투를 받는 건 불가피한 일이겠군요.” “어차피 출범 선언을 한 순간부터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좋은 일만 일어난다고 보기 어렵겠죠. 그래서 클랜원들의 정신을 재무장시킬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이해했어요. 아. 여기에요.” 하연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첫 번째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주변의 거리를 살펴보았다. 하급 주점, 하급 여관, 낡아 보이는 상점들. 번화가가 맞기는 하지만 거리에는 전투로 먹고 사는 사용자들 보다는 생계형으로 보이는 사용자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굳이 비유해보면 바바라의 밤의 거리와 비슷한 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홀 플레인 에서는 몸을 파는 것도 하나의 생존수단이니 아주 고깝게만 볼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닌 당분간 활동할 도시에서 터전을 잡는 일이었기 때문에 조금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고 보니 러브 하우스와 가까운 거리에 있네요.” “후훗. 일단 들어가요. 들어가서 말씀 드릴게요.” “그냥 들어가도 되나요?” “네. 이스탄텔 로우의 클랜 로드께서 얼마든지 출입해도 된다고 하셨거든요.” ‘한소영이?’ 분명 정하연은 클랜 하우스 구매건과 관련해서 내게 얘기하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그것이 이스탄텔 로우 클랜과 연관되어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서 접촉을 해왔군요.” 목소리를 죽이고 말하자 하연은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출입 허가는 받으셨다고 했죠? 일단 들어갑시다.” “김수현! 김수현!” “왜.” “나도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둘이서만 말하고.” 비비앙은 시무룩한 얼굴로 입을 삐죽이고 있었다. 아마 이곳으로 오면서 나와 하연만 이야기를 나누니 소외감을 느낀 것 같았다. 비비앙의 말에 하연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녀는 약간 녹이 슬긴 했지만 꽤 육중해 보이는 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그리고 하연이 문을 여는 동안, 나는 살며시 오른손을 내밀어 비비앙의 엉덩이를 찰싹 쳐주었다. 통통하면서 손에 착 감기는 감촉이 여과 없이 손바닥을 타고 들어왔다. “들어가서 얘기하자니까.” “흐비에!” 비비앙은 펄쩍 뛰어올랐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먼저 오늘 연참을 기대하신 분들에게는 넙죽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_(__)_ 다름이 아니고 제가 지금 곧 다가올 기말고사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물론 기말고사만 있는 게 아니라 그에 따른 과제들도 폭탄처럼 이어지고 있습니다. ㅜ.ㅠ 해서, 당분간 페이스 조절이 필요합니다. ㅇㅅㅇ 혹시 공휴일에 2편이 올라오지 않으면 제가 열심히 공부와 과제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주시면 됩니다. :) 아직 기간이 쫌 남은 만큼 비축 분도 만들어둘 생각이지만, 혹시라도 휴재를 하게 되면 필히 공지를 남기도록 하겠습니다.(이번에 전공 과목 중 2과목이 중간고사 때 봤던 범위를 포함한다고 해서 멘붕 중 입니다. 깔깔깔.)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 드립니다. 두 분이 번갈아 가시면서 1등을 나눠 드시고 계시군요! 하하하. 이번 회도 재미있게 감상해주세요. :) 2. sereson : 삐아! 다시 오셨군요. 복귀하신 것을 축하 드립니다. ^ㅂ^/ 3. 라피르and진트 : 유정의 조련(?)이라기 보다는 그냥 적절히 타이르는 선에서 그쳤습니다. 너무 몰아붙일 수는 없잖아요. ㅎㅎ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4. dsafddd : 영약은 아직 조금 남았습니다. 이번 에피소드가 끝난 이후 등장할 예정입니다. :D 5. koaa123 : 아무래도 하연이와 유정이를 밀어줄 필요가 있겠군요. 켈켈켈켈! 6. 네플니초프 : 네. 이번에 비비앙을 한대 때렸습니다.(?!) 7. rlatjdwn512 : 아니에요. 솔직히 말씀 드리면 이것은 취향차이인 것 같습니다. 저는 유정이 같은 여자친구 있으면 참 좋은 것 같은데 말이죠. '3' 8. 조아죽겠네 : 수현이도 단번에 애들과 한별이의 사이가 해결되기를 바란 건 아닐 겁니다. ㅎㅎㅎ. 한별이는 의지를 보이고 있고, 애들은 무턱대고 배척하기보다는 변화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많은걸 느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9. 이터시온 : 그래야 하는데 다들 영약에 너무 많은걸 바라시는 것 같아요. ㅜ.ㅠ 천사의 눈물이 +6 포인트로 수십만 GP가 들었거든요. 물론 체력 한정이 아니라 입맛대로 올릴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15를 말씀하신 분도 계시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 10. 다크사이드 : 연참하지 못한 저를 용서하세요. ㅜ.ㅠ 유정이는 글쎄요. 수현이가 최후 통첩을 날렸으니 앞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합니다. 하하하.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42 / 0933 ---------------------------------------------- 키워주는 시간은 지났다 “야!” 비비앙의 비명에 하연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다. 나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얼른 앞으로 나섰다. 뒤에서 비비앙이 꽥꽥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열린 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내부로 들어선 순간 들쭉날쭉 돋아나있는 넓은 풀밭이 눈에 들어왔다. 크기로 따지자면 평범한 초등학교의 부지 넓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다. 풀밭에는 총 두 개의 건물이 세워져 있었는데 전체적인 모양을 보면 기역자를 이루고 있었다. 먼저 중앙 앞쪽으로는 넓은 직사각형의 건물이 떡 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눈대중으로 높이를 살피니 총 4층 건물임을 알 수 있었다. 높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워낙 평수가 넓어 딱히 불편하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다음으로 오른 방향을 따라 시선을 이동시켰다. 그러자 연립 주택처럼 보이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1층부터 위쪽 방향으로 가지런히 박힌 창을 세어보자 똑같은 4층 건물임을 알 수 있었지만 너비는 앞서 본 건물의 절반 정도 되는 수준이었다. 건물의 외관은 평범했다. 단번에 시선을 빼앗을 정도의 화려한 모양은 아니었지만 부담 없고 무난하게 생각되는 건물이었다. 그리고 연한 회색 빛 벽면 일부에 보이는 형이상학 기호들은 약간이지만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어때요?” “글쎄요. 첫인상은 현대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쿡쿡. 맞아요. 저도 보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괜히 그리운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래도 이런 건물들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요. 원래 다른 클랜이 사용하던 클랜 하우스인가요?” 하연은 대답 대신 손가락을 들어 정면을 가리켰다. 눈에 마력을 돋워 자세히 살피자 P라는 알파벳이 그려져 있는 건물 정문이 보였다. “바로 보셨어요. 이곳은 예전에 피스타치오라는 클랜이 거주지로 삼던 클랜 하우스에요.” “피스타치오?” “네. 얼마 전 강철 산맥 원정에 참가한 클랜이죠. 북 대륙 전체로 보면 잘 모르겠지만, 모니카에서는 제법 이름을 날린 클랜이에요. 이스탄텔 로우에서 그렇게 말렸는데 결국에는 참가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클랜원 전원이 사망했어요. 단 한 명의 사용자도 돌아오지 못했죠.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이 클랜하우스에 대해서는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어요. 현재는 규칙에 따라 대표 클랜으로 다시 회수된 상태에요.” 하연의 말을 듣자 갑자기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뭔가에 홀린듯한 기분으로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걸어나갔다. 부지는 전체적으로 성인 남성만한 크기의 돌담에 둘러싸인 상태였다. 그리고 담을 타고 있는 줄기들은 말라비틀어져 이리저리 고개를 내려뜨리고 있었다. 말라붙은 잡초가 둥둥 떠다니는 작은 연못을 지나치고 정강이를 스치는 풀들을 헤친 뒤에야 가까스로 정문 부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살며시 손을 들어 벽면을 쓰다듬자 뽀얀 먼지가 손바닥으로 묻어 나왔다. 햇빛에 익어서 그런지 따뜻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졌다. “김수현. 안으로 들어가보자!” “내부는 그렇게 기대하지 말아요.” 어느새 뒤따라왔는지 비비앙은 정문의 문고리를 잡으며 당장에라도 안으로 들어갈듯한 자세를 잡고 있었다. 하연은 쓰게 웃으며 미리 언질을 줬지만 비비앙은 설렘이 가득한 표정으로 힘차게 문을 열었다. 나는 벽면을 쓰다듬던 손을 강하게 턴 후 곧바로 하우스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내부로 들어서 1층을 둘러보자 외부에서 느꼈던 괜찮다는 감정이 확 깨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연이 왜 기대하지 말라고 했는지 단번에 납득할 수 있을 정도였다. 1층은 난장판이었다. 낡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 동안 관리를 받지 못해서 그런지 굉장히 지저분한 모습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시꺼멓게 변색하여 있었다. 1층은 로비 겸 응접실. 아니면 식당 등으로 사용한 모양인데 솔직히 성한 구석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지러웠다. ‘강철 산맥 원정이 100% 성공할거라고 생각했나? 완전 개판을 쳐놓고 갔네.’ 나는 좌우로 길게 뻗은 공간을 살펴보다가 이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외부나 내부나 개축하는데 드는 비용도 고려해야겠군요.” “그래도 부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새로 짓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요.” “우리 클랜의 재정 상황과 이곳의 가격은 어떻게 되죠?” “현재 순수 금화로 약 8만 골드가량 보유하고 있어요. 부지의 본래 가격은 5만 8천 골드 정도 되고 이정도 규모의 건물 2개를 새로 지으려면 2만 7천 골드가 추가로 들어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국가 등록이 되지 않은 상태라 어떤 할인 혜택도 받을 수 없죠. 물론 대출도 불가능하고요.” “부지 가격은 그렇다 치고. 건물 가격이 생각보다 높은데요? 아무리 새 건물 두 채라고는 하지만 2만 골드를 넘어간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요.” 내가 질문을 던지자 하연은 입을 꼭 다물었다. 갑자기 왜 말을 하지 않나 의문이 들려는 찰나 옆에서 비비앙이 쭈뼛쭈뼛 손을 드는걸 볼 수 있었다. “미, 미안. 실은 아까 말하려다 말았는데.” “응.” “2만 골드를 넘은 건 내 탓이 커. 그, 그러니까. 김수현이 예전에 공방을 건설하는데 돈을 아끼지 말라고 했잖아? 팍팍 지원해주겠다고 했잖아. 그래서 이것저것 끼워 넣다 보니….” “아아. 그래서 얼만데.” “8, 8천 2백 골드.” “아주 작정을 했구나.”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입술을 씹음으로써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분명히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있었다. 잠시 동안 곰곰이 생각했지만 살짝 고개가 기울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넉넉하게 나눈다고 가정해도 건물 두 채를 합하면 못해도 2, 3백 명은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그러나 현재 머셔너리 클랜은 9명에 불과하다. “입지 조건은 차치하고서라도. 현재의 머셔너리 클랜이 사용하기에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네. 그래도 총 클랜원을 몇 명을 생각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클랜은 발전 가능성이 굉장히 높잖아요. 모니카에 완전히 자리를 잡으실 계획이라면 이번 기회를 놓치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고 보니 이스탄텔 로우에서 접촉을 해왔다고 하셨죠. 뭐라고 말하던가요?” “부지, 건물을 통째로 넘긴다는 조건하에 원가의 40%로 해주기로 했어요.”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한번 더 되물었다. “총 금액에서 30%를 할인해주는 게 아니라 원가의 40%로 해준다고요?” “네. 그럼 총 3만 4천 골드만 지불하면 되죠. 물론 외부, 내부의 개축 공사는 저희가 부담해야 해요. 이 부분은 세부 사항을 정해야겠지만 그래도 2만 7천 골드보다는 훨씬 싸게 먹힐 거예요. 일단 건물은 들어선 상태니까요.” 너무나도 파격적인 조건에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때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비비앙이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금 이상해.” “뭐가?” “그렇잖아.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렇게 해준다는 게 이해가 안 돼. 뭔가 우리한테 바라는 게 있지 않을까?” 나야 한소영의 인재 욕심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확실히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의심할법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비비앙의 말도 꽤나 일리가 있었기에 나는 하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스탄텔 로우에서 다른 말은 없었나요?” “있었어요. 그런데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할지. 참….” “있는 그대로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애초에 처음 찾아왔을 때부터 의도를 확실하게 드러내더라고요. 머셔너리 클랜이 모니카에서 오랫동안 활동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남부의 안정화에 많은 기여를 해주기를 바란다. 이게 다에요. 이 두 마디를 제외하고는 어떤 조건도 걸지 않았어요.” “머셔너리가 용병 클랜이라는 것은 알고 왔을 텐데요.” “네.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오히려 굉장히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주시더라고요.” 하연의 대답에 나는 한두 번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한소영과 소집령 때 나눴던 대화들이 머릿속으로 찾아 들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머셔너리 클랜이 자유 용병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해도 기존 사용자들과 비슷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소리에요.’ ‘간단해요. 그건 바로 해당 도시를 관리하는 대표 클랜에서, 해당 클랜에게 직접적으로 편의를 봐주는 방법이죠.’ “수현?” “아 네. 무슨 말인지는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어떻게 하실 거에요?” “지금 당장 선택하기보다는 조금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곳은 거리가 가까우니 내일 한번 더 오는 걸로 하죠. 이번에는 다른 장소를 보고 싶군요.” “네? 더 안 둘러보셔도 되나요?” 굳이 올라가지 않아도 위층의 풍경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스탄텔 로우의 조건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간에 어차피 내부는 모조리 개축할 필요가 있었다. 해서, 나는 담담히 고개만 끄덕이고 발길을 돌렸다. 잠시 동안 멍하니 있다가 이내 문을 나서는 순간 허둥지둥 내 뒤를 따라붙는 둘의 기척을 느꼈다. 곧이어 내 왼쪽에서 조심조심 걷는 하연을 보며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하연. 한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네. 다음 장소가 궁금하신가요?” “아니요. 아까 제가 현재 클랜의 재정 상황에 대해서 물어봤잖아요. 그때 왜 보석은 제외하고 금화만 말씀하셨죠? 제가 알기로는 현재 보유한 보석만 1천 개가 넘고 개당 평균 2백 골드로 잡으면 무려 2십만 골드인데요.” “그건….” 하연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나를 곁눈으로 슬쩍 흘겨보더니 조심스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냥 예전부터 느꼈거든요. 왠지 보석을 사용하지 않고 일부러 모으시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어서요. 그리고 이번에 실제로 김한별양을 데려오시기도 했고….” “보석 마법사라는 클래스가 그렇게 보석을 많이 소비하나요?” “네. 알고 계시는 것 아니셨어요? 그녀 말에 따르면 온전한 힘을 이끌어내려면 주문 하나당 최소 보석 한 개는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주문 하나당 보석 한 개라. 어마어마하군요.” 하연은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 한두 번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내 속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문득 아까 잠시나마 돈을 걱정했던 일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1회 차 중반까지 워낙 부족하게 살았고 낭비를 해본 기억이 없기에 습관이 되어버린 것이다. 김한별. 애초에 감당하지 못할 거라면 데려오지도 않았다. 그만큼 나는 보석 마법사라는 클래스를 유지할 자신이 있었다. 아니 최소한 앞으로 돈에 관해서는 쪼들리지 않을 생각이 있었고 그럴 예정이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유적들 중에서 내가 알고 있는 것만 몇 개던가. 그 중에 절반만 탐험에 성공한다고 해도 홀 플레인 을 클리어할 때까지 골드, 보석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정 안되면 보석의 숲에 한번 다녀오면 되겠지 뭐. 아 그런데 그건 원래 형이 발견할거라서 조금 미안한데…. 그러고 보니 형은 잘 있으려나.’ 모니카에 옴으로써 한소영의 옆에 있게 됐지만, 유현이 형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형은 지금쯤 한창 동부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을 것이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앞으로 계속 승승장구할 형이기 때문에 보류하고 있었다. 나도 아직은 힘을 더 모을 필요가 있었고 또 내가 괜히 끼어듦으로써 형의 찬란한 미래에 조금의 변수라도 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래가 또 어떻게 비틀릴지 모르니 고연주에게 서 대륙과 함께 형의 소식을 부탁해 논 상태였다. 만일 조금의 이상한 낌새라도 보이면 모든 일을 제쳐두고서라도 달려갈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며 걷고 있자 순간 내 오른쪽 앞으로 후다닥 달려나가는 비비앙을 볼 수 있었다. 곧이어 그녀는 달려나가는 것을 멈추고 옆쪽으로 뭔가를 휙 집어 던지더니 깜짝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앗! 돈을 떨어뜨렸다!” 이윽고 그녀는 허리를 숙이며 떨어뜨린 물건을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문제는 내가 지나가는 방향으로 그녀의 엉덩이가 과도하게 실룩거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딱 내가 지나가는 방향에 오른손의 높이에 맞춘 상태였다. 과연 연금술사라서 그런지 가히 치밀한 계산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보며 나는 잠시 오른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아까의 탄력적인 감촉이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참 차졌는데 말이지.’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에. 몇몇 독자 분들이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연중을 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시험기간에 독자 분들께 미리 양해를 구하고 하루 이틀 휴재를 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T^T 하하하. 아 그리고 표지 바꿨습니다. 이번 표지는 항상 엄청난 팬 아트를 그려주시는 고장난선풍기 님의 고연주입니다. 보자마자 꼭 표지로 사용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전에 허락을 구하지 않고 미리 표지로 올린 점 죄송합니다. 그런데 너무 자랑하고 싶었어요. ㅜ.ㅠ) 아. 다음 계획은요 이번 챕터 끝내고 다음 챕터 안으로 도시를 나가는데 있습니다. 지금은 이 정도만 알려드릴게요. 여러분들의 코멘트는 하나하나 읽고 있습니다. 코멘트는 작가를 응원하는 곳도 될 수 있고, 제가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조언을 해주시는 역할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의 방향을 결정하는 건 오롯한 저의 몫이지만 그 과정에 독자 분들의 의견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싶습니다. 가끔은 휘둘릴 때도 있고, 가끔은 고집을 부릴 때도 있지만 여러분들의 조언은 항상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 리리플 』 1. 破天魔痕 : 1등 축하 드립니다. 요즘 들어 느끼는데 1등 코멘트는 나눠 먹히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하하. 항상 보이는 분만 보입니다. 그만큼 대단하시다는 거겠죠. :) 다시 한번 1등 축하 드립니다! 이번 회도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2. 거친파도 : 쿠폰 감사합니다. _(__)_ 앞으로 더 좋은 글로 보답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3. 자사팍 : 앞으로의 진행은 많은 분들이 납득하실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마음에 안 차시는 분께서도 계시겠지만 그래도 노력해볼 생각입니다. 하하하. 4. LOVE가을 : 제가 후기나 리리플에서 언급했었는지 모르겠네요. 다만 수현의 시점에서 보면 102는 미지의 영역입니다. 안솔 같은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사제는 마력을 최우선으로 올려야 합니다. 마력의 효과는 보증된 상태니까요. 저번에 폐허의 연구소에서 +1 반지를 얻지 않았다면, 그리고 안솔이 보여준 감각적인 행동이 없었다면 아마 올리지 않았을 겁니다. 수현의 경우에는 102 이상으로 올려도 현재 체력이 낮아 부담만 커지기 때문에 보류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면서도 101이 주는 매력을 알고 있으니 차마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거죠. :) 5. 렌프리드 : No. 보시면 <600~>으로 되어 있습니다. 600 이상도 가능합니다. 6. rlatjdwn512 : 안솔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떡밥은 다른 의미가 숨어있습니다. :) 바바라에서 보시면 알겠지만 안솔의 감각은 미래가 비틀린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는 다시 되돌아왔습니다. 이 부분을 잘 생각해보시면 감을 잡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7. 스온 : 그럼요. 슬슬 한탕 뛰어야죠. 주인공 보정은 위대합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잠시 헛소리를 했군요. 하하하. 8. 현오 : 항상 좋은 동영상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번에 소개해주신 남자와 여자가 나오는 동영상이 아직도 기억에 남네요. 그 동영상은 볼 때마다 감수성이 폭발하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9. 조아죽겠네 : 질문이 있습니다. 물론 모험, 전쟁, 득템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뒤에 섹크스와 원피스는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요? 아주 정확한 사전적 의미를 설명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흐흐흐. 10. 자유도령 : 죄송합니다. 왠지 모르게 저 때문에 이상한 취미(?)에 눈을 뜨신 분들이 계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함께해요.(?!)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43 / 0933 ---------------------------------------------- 키워주는 시간은 지났다 1. 오늘 후기 있습니다. 한번 읽어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 고은솔의 이름은 임한나로 변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연의 안내를 받아 다음에 도착한 곳은 솔직히 말해 별볼일 없는 장소였다. 광장의 거리에 건물이 있는 만큼 입지 조건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부지가 굉장히 좁았고 건물(사실 건물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였지만.)도 하나뿐이라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9명이 생활하기에는 충분했지만 문제는 좌우로 빽빽이 들어선 상점가들로 인해 증축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하연에게 두 번째 장소의 가격을 듣는 순간 나는 마음이 한쪽으로 기우는 것을 느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이 있다. 1, 2만 골드 차이가 있다고 해도 앞으로의 발전을 생각해보면 첫 번째 장소가 더욱 끌리는 게 사실이었다. ‘문제는 이스탄텔 로우의 호의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인데.’ 두 장소를 모두 돌아본 후. 나는 하연과 둘이서 오붓하게 돌아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하연은 웬만하면 받아들였으면 하는 눈치였다. 물론 재정이 문제가 된다면 이 기회를 놓칠 수 없겠지만, 앞으로의 계획에 비추어보면 딱히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비비앙의 말대로 이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게 되면 자유 용병의 취지가 훼손될 우려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출범한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은 머셔너리가 클랜 하우스를 구매했다. 이 속사정이 드러나게 되면 곱지 않은 시선이 쏟아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 호의를 받아도 되는 합당한 명분이 있다면 모를까. 여러 방향으로 가늠해봤지만 득보다는 실이 많은 제의였다. 한소영에게는 미안하지만 거절하고 원가에 구매하리라 마음먹은 찰나 옆에서 맑은 목소리가 귓가를 타고 들어왔다. “수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네? 아. 이스탄텔 로우의 제안을 생각해보고 있었어요.” “후훗. 너무 일에 관한 생각만 하지 마시고 머리 좀 식히세요. 벌써 러브 하우스에 도착했어요. 배도 너무 고픈데 일단 늦은 점심이라도 드시는 게 어떨까요? 임 마담의 요리 솜씨가 제법 괜찮답니다.” “그래요? 기대되는군요.”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하연 말대로 어느새 도착한 러브 하우스의 계단을 차곡차곡 오른 후, 꾹 닫힌 문을 살짝 열어젖혔다. 그렇게 입구로 들어서자 마침 1층 계단에서 내려오는 안현과 마주칠 수 있었다. 녀석은 나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아는 체를 해왔다. “앗 형! 지금 오셨어요?” “응. 다른 클랜원들은?” “다들 지금 하는 일들 마무리하느라 정신 없어요. 아 그런데요. 형 혹시 비비앙이랑 무슨 일 있으셨어요?” “비비앙? 왜?”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천연덕스럽게 되묻자 하연이 소리를 죽이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안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 형이랑 같이 나갔었잖아요. 그런데 펑펑 울면서 혼자 돌아오길래….” “울면서? 이상하다. 왜 울었지?” “모르겠어요. 아. 엉거주춤 하면서 계단을 올라가던데요. 혹시 어디 다친 게 아닐까요?” ‘확실히 축구공 차듯이 걷어차 버리기는 했지. 너무 심하게 걷어차 버렸나?’ 계속 엉덩이를 실룩거리는 꼬락서니가 보기 좋아서 몇 번 뻥뻥 걷어차주었을 뿐인데, 설마 꺼이 꺼이 울면서 달려갈 줄은 몰랐다. 심란한 마음에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자 줄곧 입을 가리고 웃던 하연이 간신히 입술을 여는 모습이 보였다. “쿡쿡.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러신 거에요?” “자꾸 일부러 들이미는 것 같아서요. 정하연은 그렇게 느낀 적 없나요?” “알게 모르게 있기는 했죠. 그래도 너무 심하셨어요. 달래주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글쎄요. 저도 모르게 그만. 아무튼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자 하연은 결국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오직 안현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 하연과 늦은 점심을 먹은 후 나는 비비앙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달래주려고 간 것도 있지만 본론은 그녀가 연금술에서 겪는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함이었다. 나는 왼손에 유니콘의 뿔을 든 채 비비앙의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비비앙.” “누구야!” “나야. 들어간다.” “들어오지마!” 곧바로 날카로운 반응이 터져 나왔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자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는 자세로 끙끙 앓고 있는 비비앙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뭐가 그리 서러운지 두 눈두덩은 퉁퉁 부어있었고 볼에는 눈물 자국이 그득했다. 그 처량한 모습에 절로 안쓰러운 마음이 일어, 나는 가까이 다가간 후 자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지금 내가 괜찮아 보여?” “아니. 많이 아파 보여.” “그래. 그럼 이게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해?” “잘 모르겠는데.” “뭐? 몰라? 지금 나 놀려?” “응.” 담담한 얼굴로 대답하자 비비앙은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러더니 곧이어 빽빽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울음이 절반 이상 섞여 뭐라고 말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지금 굉장히 기막히고 억울하다.” 라는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너무 화내지 말라고. 정신 건강에 안 좋아.” “!@#$%^&*()_+” “알았어. 알았다고. 살살 문질러줄게. 엉덩이 들어.” “뭐, 뭐? 미쳤어!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유니콘의 뿔을 한쪽에 내려놓은 후 나는 그녀의 골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비비앙은 깜짝 놀란 얼굴로 손을 휘저으며 극렬히 저항했다. 그러나 저항을 가볍게 뚫고 골반을 잡은 순간 그녀는 허리를 들며 엉덩이를 치켜 올려주었다. 마치 벗기기 편하게 만들어주겠다는 자세처럼 보였다. “…….” 어이없는 얼굴로 쳐다보자 그녀는 재빠른 몸놀림으로 허리를 내렸다. 그러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게 무척이나 창피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서 비비앙을 비웃으면 더 놀릴 거리가 생기겠지만,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기분을 풀어준다는(?) 소기의 목적은 이미 달성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녀를 방문한 진짜 목적을 얘기할 차례였다. 골반에서 손을 떼고 다시 유니콘의 뿔을 집어 들자 비비앙은 퍼뜩 일어나며 자세를 잡았다. “비비앙. 오늘 아침에 회의에서 말한 것 말인데.” “…뭐.” “네 영단만으로는 벨페고르의 심장과 호렌스의 마정석을 감당할 수 없다고 했잖아. 그럼 이건 어때?” “이게 도대체…. 어? 아 맞다! 유니콘의 뿔! 이게 있었지.” 처음에는 우울한 목소리로 대답하더니 유니콘의 뿔을 꺼내 들자마자 비비앙의 눈동자가 급변했다. “와! 그런데 진짜 이거 써도 돼? 이거 되게 귀한 거거든. 마법사들이 보면 아마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들걸?” “효과만 확실하다면.” 내 말에 비비앙은 진중한 얼굴로 뿔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긴. 어차피 마족이나 호렌스의 상극에는 이만한 것도 없긴 한데…. 문제는 마정석의 편을 들어줄 수 있느냔데. 2:2 구도가 아니라 2:1:1 구도가 되 버린다고…. 김수현!” “깜짝 아. 왜.” “있잖아. 차라리 심장과 마정석의 힘을 조금만 정화시키는 게 어떨까? 왜냐하면 그게 훨씬 더 안전성이 높거든.” “힘을 줄이면 그만큼 성과도 낮아질 것 같은데.” “걱정 마. 나라면 못해도 본전은 뽑을 수 있어.” 본전이라. 현재 연단에 들어갈 예정인 영약은 총 두 개로 각각 체력에 관해서 +2, +4의 상승치를 가지고 있었다. 이 말인즉슨 본전이라면 +6을 노릴 수 있다는 소리였다. 확실히 천사의 눈물과 맞먹을 정도로 높은 상승치 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비비앙. 단순히 본전만으로는 부족해.” “어, 어?” “부담을 주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 하지만 이번 영약 연단은 나에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야. 가장 중요한 건 체력이야 체력. 체력을 우선순위로 삼아야 한다고. 알겠지?” “응, 응.” “다른 능력 상승치는 필요 없어. 있으면 좋겠지만 지금 내 상태로는 큰 효과를 보기 어렵거든. 아무튼 정화하는 건 어렵진 않지만 일부러 힘을 떨어뜨릴 수는 없어. 조금 복잡해도 유니콘의 뿔을 섞는 방향으로 생각해봐.” 내 목소리가 진심이란 것을 느꼈는지 비비앙의 표정이 굉장히 신중해졌다. 이로서 연단에 들어가는 물품에 하나가 더 추가됐다. 영약 2개, 비비앙의 영단, 벨페고르의 심장, 호렌스의 마정석, 유니콘의 뿔. 장비를 제외하고 지금껏 탐험으로 얻은 알짜배기들이 모두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간 셈이다. 연금술사로서 한번쯤 꿈꿔 보고픈 연단을 눈 앞에 두고 있었지만 비비앙은 부담스럽기 그지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꾸 강조해서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체력 부족은 그만큼 내게 절박한 문제였다. “공방 건설 비용이 8200골드라고 했나?” “응.”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그 배가 든다고 해도 지원해줄 테니까.” “아, 아니야!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해!” “그래? 알겠다. 그럼 아무쪼록 잘 부탁한다.” 나는 비비앙의 어깨를 서너 번 토닥거린 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유니콘의 뿔을 꼭 쥐고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내 호승지심으로 불타오르는 눈동자와 함께 입을 열었다. “좋아. 까짓 거 다시 해주겠어. 김수현. 약속이나 잊지 말라고.” “아아. 확실히 기억하고 있어.” 곧이어 비비앙은 나보다 한발 앞서 방을 달려나가 큰 목소리로 고함쳤다. “신상요오오옹! 스승님의 호출이다아아! 얼른 나와라아아아!” 문을 뚫고 들어오는 비비앙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살짝 웃어버리고 말았다. * 밤이 깊었다. 많은 일을 겪은 것 같지만 바바라를 떠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았다. 일단 클랜 하우스에 대한건 잠정적으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고 비비앙의 연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클랜원들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일들은 다시금 마무리를 향해 서서히 나아가고 있었다. 다만, 아직 하나가 남아있었다. 고개를 들자 눈 앞에서 고연주가 나를 보며 쉴 새 없이 입술을 달싹거리는 게 보였다. 그녀는 일전에 내가 부탁했던 김유현의 행보와 서 대륙에 관한 보고를 하고 있었다. “아무튼 수현이 말한 사용자 김유현의 행보에 관한 정보는 방금 전 이야기한 게 전부에요. 아. 얼마 전에 황야의 사막에서 피라미드형 고대 유적을 발굴했다는 소식을 빼먹었네요. 그 때문에 요즘 동남부 소도시 다나가 떠들썩하다고 해요.” “그렇군요. 이제 왕의 무덤을 발견했나….” “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김유현에 관한 별다른 소식은 없나요? 아무 거라도 좋아요.” 재빨리 말을 바꾸며 화제를 돌리자 고연주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글쎄요. 행보는 방금 전에 전부 말씀 드렸고. 개인 정보에 관해 말씀 드리자면 2년 차 사용자며, 마법사 계열 시크릿 클래스 뇌제(雷帝)라고 불리고 있어요.” “2년 차 사용자면 별 것 아니겠군요.” “수현. 절대로 아니에요. 지금껏 그가 이루어낸 실적만 봐도 웬만한 고년 차 사용자도 한 수 접어야 할 정도에요. 그리고 아직 클랜은 창설하지 않았지만 그의 주변에 있는 사용자들도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은 사용자들 이에요.” “그런가요? 대단하네요. 하하.” 나는 순순히 수긍했다. 고연주는 더욱 이상한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 그러나 지금 내게 중요한 건 현재 형의 신변에 이상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잘 나간다는 소리를 듣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나는 한껏 기지개를 펴며 몸을 뒤틀었다. 뼈마디가 뒤틀리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울렸다. “알겠습니다. 서 대륙은 그림자가 닿지 않는다고 하니 어쩔 수 없고. 뭐 김유현은 개인적인 관심이 있어서 부탁했네요. 고생하셨습니다.” “흠. 그러고 보니 김수현 그리고 김유현. 이름이 비슷한데요? 뭔가 관계라도 있나요?” “후후. 그저 개인적인 관심입니다.” 나는 싱겁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조금 쉬고 싶은 마음에 이대로 축객령을 내리려는 찰나 번뜩 떠오른 하나의 생각에 다시금 입을 열고 말았다. “아. 사용자 고연주. 한가지 부탁할게 더 있습니다.”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에요. 클랜 로드. 어떤 것이든 따를 준비가 되어있답니다.” “다른 건 아니고 내일 아침에 이스탄텔 로우에 전령을 넣어주시겠어요? 오후 즈음에 제가 찾아 뵙는다고요.” “아. 이스탄텔 로우에 방문하실 예정이신가요?” “네. 정하연에게 들어보니 제가 없는 동안 이것저것 많이 신경 써주셨다고 하더군요. 개인적으로 매듭지을 일도 있지만…. 어쨌든 감사의 표시도 할 겸 찾아 뵐 생각입니다.” 하연에게 자세한 얘기를 들어봤는데, 클랜 하우스 건을 도와준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몇 번 찾아오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한소영 나름의 속내는 있겠지만 일단은 도시를 대표하는 클랜인만큼 답례로 방문할 필요는 있었다. “알았어요. 내일 아침 일찍 전령을 보내놓을게요.” “네. 자세한 건 내일 아침 식사 시간에 공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나가보세요. 저도 오늘은 이만 쉬고 싶군요.” “글쎄요. 과연 쉬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네?” 갑작스레 들려온, 고연주의 뜬금없는 말에 되묻자 그녀는 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윽고 고연주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순간 밖에서 누군가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 끝났어요. 보채지 말아요. 지금 나갈 테니까.” 고연주의 고개가 방문을 향한 걸로 보아 나에게 한말은 아닌 것 같았다. 곧이어 방문이 살짝 열리자마자 그녀는 아쉬운 얼굴로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미안해요. 오늘은 져서 함께 있어줄 수 없어요.” “아니 잠시만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는 찰나 문 쪽에서 우리 둘에게로 가까이 다가오는 하연을 볼 수 있었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까닭 없이 숨이 멎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연은 잠시 동안 나와 시선을 잠시 마주치고는 이내 고연주를 향해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이군요. 일부러 시간 끄는 줄 알았는데요.” “오늘은 제가 아깝게 졌지만 다음에는 지지 않을 거예요.” “그림자를 이용해서 반칙패 하셨잖아요. 제가 모를 줄 알았나요?” “흥. 난 그런 거 몰라. 수현. 그럼 잘 자요.” 고연주는 혀를 살짝 내밀며 입을 삐죽이더니 곧 살랑살랑 방문 밖으로 뛰어나가버렸다. 내가 어벙한 얼굴로 입만 뻐끔거리자, 하연이 수줍은 미소와 함께 내가 앉아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하연. 이게 대체.” “아아. 별거 아니에요. 그저….” 하연은 하던 말을 멈추고 입고 있던 옷을 살며시 벗기 시작했다. 이윽고 로브 안으로 감춰져 있던 새하얀 어깨가 드러났고, 그곳에 시선을 빼앗긴 순간이었다. 멈췄던 그녀가 청아한 목소리가 이어서 흘러 들었다. “수현이 없을 때 저와 고연주씨랑 많은 이야기를 했거든요.” “…….” “참고로 오늘은 제가 이겼어요. 종목은 가위 바위 보였죠. 세상에. 그림자를 써서 반칙을 하려고 했다니까요?” 하연은 예쁘게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가, 가위를 내었다가, 손을 활짝 피며 보를 만들었다. 곧이어 이겼다는 말과 함께 브이자를 그리는 그녀의 손가락을 보는 순간. ‘헉.’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오늘은 리리플을 하루만 쉬도록 하겠습니다. 후기에 중요한 내용을 적을 예정이니 독자 분들의 양해 부탁 드립니다. 다음 회에 이번 회 리리플을 합쳐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성 캐릭터 인기투표를 시작했습니다. 현재 설문조사에 올려놓은 상태입니다. 독자 분들께서 참여해주시면 무척 감사하겠습니다.) 1. 앞서 말씀 드렸지만 고은솔의 이름은 임한나로 변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좋은 이름을 지어주신 감자띱 님께 깊은 감사의 말을 드립니다. 2. “이제 초반처럼 던전 같은 데는 가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홀 플레인 이야기가 계속 되는 건가요?” 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일단 말씀 드리면 소제목을 보면 아시겠지만 웬만하면 4편으로 나눠 챕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어제 후기에도 말씀 드렸듯이 다음 챕터 때 도시를 나갈 예정입니다. 참고로 다음 챕터 소제목은 “첫 번째 의뢰”이니 날카로우신 분들은 앞선 회와 관련해서 대강 감을 잡으실 것 같습니다. 그러니 대답은 아니요 로 드릴 수 있겠네요. 아직 갈데 많아요…. 3. 어제 오늘 노블레스 분위기가 많이 험악하네요. 분위기를 풀고 싶어 조금 오늘 글을 재밌게 써보려고 했는데, 보시면서 한두 번 피식 웃어주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직 조아라에서만 연재할 예정입니다. 몇몇 분들이 걱정하시는 코멘트를 달아주셨는데요. 그 부분은 걱정 붙들어 매셔도 좋습니다. :) 4. 많은 분들이 오해하고 계시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ㅜ.ㅠ 지금 시험기간이 아니에요. 기말고사 치르려면 아직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범위가 굉장히 많고, 과제도 “콰오카옼왕콰아ㅗㅋ아ㅗ아ㅗㅋ” 하면서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미리미리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최소한 일일 연재는 유지할 생각이오니 독자 분들의 하해와 같은 양해 부탁 드립니다! 코멘트를 쭉 훑어보니 갑작스런 사태에 당황하신 분들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부디 화를 가라앉히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글을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나 부족한 작품을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셔서 그저 죄송하고,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_(__)_ PS. 쪽지가 폭탄처럼 쌓였습니다. 하하하! 하나씩 읽어보고 답변 드릴게요…. :D 0244 / 0933 ---------------------------------------------- 첫 번째 의뢰 다음날. 아침식사 시간에 나는 고연주와 정하연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거기에는 뚜렷한 이유가 없었다. 분명 예전에 운을 띄운 적도 있었고 또한 홀 플레인 에서는 욕먹을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향해 밝게 웃는 그녀들을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콕콕 찌르는 게 느껴졌다. 가시방석 같았던 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대로 회의를 열어 클랜원들에게 차후 진행 방향들을 공지했다. 그렇게 오전은 회의로 시간을 보내고, 점심에는 장비 점검에 들어갔다. 엘릭서 세 병, 페가수스의 알, 황혼의 무녀(레어 클래스), 파사(破邪)의 활, 호프론의 전설(Legend Of Hoplon), 카오스 미믹 3개, 비비앙의 물약 주머니 등등. 금화와 보석 주머니들은 구태여 포함하지 않았다. 굳이 내가 손대지 않아도 각각 큼지막한 주머니에 쌓여 깔끔하게 나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보자 절로 흐뭇한 마음이 일었다. “영차. 여엉차.” 안솔은 낑낑거리며 내가 말하는 대로 장비를 정리하다가 이내 기역자로 접혔던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녀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이윽고 복덩이는 내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짠.” 이라는 소리를 내뱉으며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양 손 사이로 타조 알보다 크기가 2배정도 돼 보이는 누런 알이 하나 끼어있었다. 페가수스의 알이었다. “오라버니! 혹시 여기에 뭐가 들어있는지 아세요?” “병아리.” “병아리…요? 그럼 커다란 계란인 거예요?” “응. 나중에 파티라도 할 때 고연주에게 부탁해 부쳐먹을 거야. 맛있는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 먹자꾸나. 그러니 일단은 거기 놔둬.” “에…?” 뭔가 대단한걸 기대한 걸까. 안솔은 충격 먹은 얼굴로 알을 꼭 품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렇게 개 풀 뜯어먹는 소리와 함께 장비 정리를 마무리 지으려는 찰나 황혼의 무녀와 파사의 활이 눈에 밟혔다. ‘임 마담. 아니 임한나라고 했던가.’ 모니카의 명물 러브 하우스를 관리하는 마담 임한나. 머셔너리를 소수정예로 만들겠다는 내 취지에 딱 들어맞는, 3년 차 사용자임에도 꽤나 괜찮은 실력을 갖고 있던 사용자. 성향도 질서, 신념으로 아주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고 보니 궁수 사용자도 한 명 필요한 시점이기는 한데.’ 나를 보고 상냥하게 미소 짓던 임한나의 얼굴이 떠오른다. 잠시 고민하다가 나는 몸을 돌려 장비를 놔둔 방을 빠져 나왔다. 일단은 이스탄텔 로우에 전령을 보냈는지 확인도 해야 했고 겸사겸사 임한나에 궁금한 점도 있었기에 고연주를 찾을 생각이었다. 복도로 나서자 뒤쪽으로 종종 걸음으로 따라붙는 안솔의 기척이 느껴졌다. 고연주는 4층에 없었다. 그녀가 사용하는 숙소를 한번 훑어본 후 나는 곧바로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말끔하게 닦인 디딤판을 딛고 중간마다 나선으로 꺾어지는 층계를 내려 밟자 곧 로비로 도착할 수 있었다. 1층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우리야 고연주 덕분에 예외라고는 하지만 러브 하우스는 본래 여성, 그것도 밤의 꽃들만이 주로 사용하는 주점이라고 알고 있었다. 어젯밤에서 오늘 새벽까지 밖에서 열심히 남성들을 상대했을 테니 아마 지금은 다들 곤히 자고 있을 것이다. 로비는 한산했지만 다행히 내가 찾는 사람은 발견할 수 있었다. 고연주는 하연, 임한나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즐거운 얼굴로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이따금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도 터져 나오는 중이었다. “어머. 수현? 언제 오셨어요?” “장비 정리는 다 끝나셨나요?” “머셔너리 로드. 안녕하세요.” 테이블로 가까이 다가가자 고연주, 정하연, 임한나가 차례대로 입을 열었다. 나는 임한나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후 고연주가 끌어주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나를 뒤따라오던 안솔이 멀뚱히 서있자 임한나가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안솔은 헤실 헤실 웃으며 임한나가 비워준 자리에 앉았다. “머셔너리 로드. 마실 거라도 한잔 가져다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언니. 나 이거. 나 이거어.” “이거? 아하. 우리 솔이 잠깐만 기다리렴. 언니가 금방 갖다 줄게?” “응!” 임한나는 안솔이 귀여워죽겠다는 듯 그녀의 말랑한 볼을 살짝 꼬집었다. 곧 몸을 돌려 사뿐사뿐 걸어가는 그녀를 보자 약간이지만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안솔은 사람을 가리는 경향이 조금 심한 편인데 거부 반응을 보이기는커녕 “언니.” 라고 부르며 친근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성향이 비슷해서 그러나…. 눈치도 나름 괜찮은 것 같고. 그런데 왜 이런 사용자를 한소영이 아직 놔두고 있는 걸까? 그녀라면 모를 리 없을 텐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임한나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 옆에서 속닥이는 은밀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고연주와 정하연이 서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귀엣말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소리들이 내게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역시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그렇죠? 친한 동생이기는 하지만 솔직히 같은 여자가 봐도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잖아요. 기품도 넘치고….” “휴…. 그러길래 제가 숙소는 다른 데로 잡자고 했잖아요. 안 그래도 경쟁자가 많은데….” “아니에요. 실력은 제가 보증한다니까요. 마침 궁수 사용자가 필요한 시점이잖아요. 수현이 기뻐할 거예요. 그리고 저는 수현을 믿어요….” 기가 막힌 얼굴로 그녀들을 바라보자, 내 시선을 느꼈는지 둘은 곧바로 붙어있던 얼굴을 떼었다. 그러더니 이내 시침 뚝 떼며 서로 다른 방향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 솔직히 말하면 속이 따끔하기는 했다. 더구나 어젯밤 가위바위보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임한나에 대한 물음은 잠시 접어두기로 마음먹었다. 아니,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나도 많이 변했어. 아니 겉모습만 변한 걸까…?’ 1회 차 시절에는 느낄 수조차 없었던 생소한 기분이 들자 절로 씁쓸한 감정이 일었다. 아무튼 둥글어지는 것도 괜찮지만 본래의 날카로움을 잃어서는 안 된다. 나중에 비비앙에게서 호렌스의 마정석을 잠깐 빌려야겠다고 생각한 후 나는 한두 번 헛기침을 해 시선을 끌었다. “흠흠. 고연주. 어젯밤 부탁 드린 일은 어떻게 됐나요.” “아. 전령은 보냈어요. 그런데 방금 전에 답신이 왔네요?” “답신이요?” “네. 오실 것까지 없으니 직접 이곳으로 방문하신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군요. 고생 하셨…. 네?”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묻자 고연주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반응을 보아하니 잘못 듣지는 않은 모양이다. 입술 사이로 절로 기다란 한숨이 새어 나온다. 한소영. 평소엔 그렇게 냉철하고 앞가림 잘하면서 왜 인재 욕심이 발동되면 앞뒤 분간을 못하는 걸까. 나는 속으로 강하게 투덜거리며 고연주를 향해 물었다. “언제 오신다고 했죠?” “명확하게 적혀있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아마 곧 올 거라 생각되는데….” “쯧.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지금 가봐야겠습니다.” “네? 그쪽에서 온다고…. 아. 알겠어요. 혹시 수행인원은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머리 회전이 빠른 고연주라서 그런지 금방 내 말을 알아먹은 것 같았다. 수행인원을 물어보는 그녀의 대답에 나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습니다. 혼자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저를 데려가시는 게….” 아니. 싫어. 그림자 여왕을 데려갔다가는 까딱 잘못하면 사단이 날수도 있기에, 되려 가장 피해야 할 인원 중 하나였다. 차라리 하연을 데려갔으면 데려갔지. 살기가 가득 찬 공간에서 한소영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단호하게 “싫습니다.” 라고 대답한 후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앗. 머셔너리 로드님….” 공교롭게 마침 음료를 다 만들었는지 임한나가 쟁반에 컵 두 개를 들고 걸어오는 게 보였다. 분명 괜찮다고 했는데 내 것까지 만들어온 것 같았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려고 했지만 그래도 안 좋은 이미지는 주기 싫다는 생각에 막 나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잠시 나갈 일이 생겼습니다. 아마 솔이가 두잔 먹을 수 있을 겁니다.” “아. 후후. 그럴게요. 다녀오세요.” “그럼.” 그렇게 입구로 나가는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 안솔의 “나 돼지 아니에요오….” 라고 말하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 민첩 98의 힘은 위대하다. 아주 약간만 힘을 주고 걸어도 자전거를 타고 가는 이상의 속도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느긋하게 걷지 않고 속도를 내며 달린 것은 정답이었다. 마침 이스탄텔 로우 클랜 하우스의 정문에서 수행인원을 한 명 데리고 나오는 한소영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이스탄텔 로우 클랜의 내부로 들어가자 감회가 새로웠다. 내가 있을 때와 완전하게 똑같지는 않지만 기억과 거의 비슷할 정도의 광경을 간직하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아마 2백 명을 상회할 정도의 클랜원을 갖고 있을 텐데, 내부에는 2, 30명의 기척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대표 클랜치고 적다고 할 수 있는 인원이지만 그만큼 개개인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아마 내부 정비 인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밤낮 가리지 않고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머셔너리 로드께서는 제값을 주고 클랜 하우스를 구매하겠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제안해주신 건 감사하지만 아무래도 저희 클랜 성격에 비추어보면. 그렇게 하는 게 이치에 맞는 일 같습니다.” “왜죠.” “머셔너리는 신생 클랜이니까요.” 한소영은 내 대답을 듣더니 이내 깊은 생각에 잠긴듯한 표정을 보여주었다. 나는 잠시 그녀의 옆자리 즉 나와 마주보는 방향으로 앉아있는, 너무나도 오랜만에 보는 박다연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처음 그녀를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이 일어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나를 보며 볼을 퉁퉁 불리고 있는 박다연을 보자마자 걸음을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정문에서 둘을 만난 후 나는 사정을 설명하고 응접실로 안내 받을 수 있었다. 박다연은 처음과는 달리 현재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웃는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다. 박다연은 이스탄텔 로우의 재정을 담당하는 사용자였다. 아마 처음 나를 보고 볼을 부풀렸던 건 한소영이 나를 직접 찾아간다는 사실과 우리에게 클랜 하우스를 판매하는 과정에 있어 불만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내가 먼저 찾아오는 예의를 보이고 클랜 하우스를 그냥 원가에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곧바로 얼굴이 환해지는걸 보여주었다. 표정 관리를 못하는 건 여전하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손수 타다 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찻잔을 내려놓자 생각을 끝냈는지 한소영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머셔너리 클랜이 모니카에 와주신 건 감사하게 생각해요. 그래서 나름 호의를 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일전에 소집령에서 말씀 드린 바도 있으니까요.” “물론 그때 말씀해주신 것들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그걸 바라고 모니카로 온 것은 아닙니다.” “클랜 하우스 구매건과 관련해서는 저희 쪽에서 철저히 비밀에 붙일 수 있어요. 아니 설령 드러난다고 해도 이스탄텔 로우의 허가가 들어가있는 이상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거예요.” “영원한 비밀은 없고 모난 돌은 얻어맞는 법이죠. 더욱이 현재 모니카에는 이스탄텔 로우의 산하 클랜이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산하 클랜이 아닌 저희에게 그렇게 필요 이상의 신경을 써주신다면 알게 모르게 불만이 불거질 우려가 있습니다.” 바닥에서 박다연이 발바닥을 교대로 부딪치는 기척이 느껴졌다. 가만히 그 기척을 느끼자 왠지 모르게 신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 표정에는 후련함이라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아마도 자신이 할말을 내가 해주자 속이 시원한 모양이다. 나는 내친김에 한마디 더 덧붙이기로 했다. “알고 계시겠지만. 저희들은 자유 용병의 신분이며 클랜 성격도 프리입니다. 기존 사용자들이 받는 할인이 30%인데 그것을 넘어선 60% 할인은…. 솔직히 많이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럼 관행대로 30%를 할인해주시면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는 말씀인가요?” “아니요.” “그럼 29%는요?” “…….” 문득 이 상황이 굉장히 우습게 느껴졌다. 관리자는 할인을 해주겠다고 하고 구매자는 할인을 받지 않겠다고 한다. 나는 이 사용자 좀 말려달라는 의미로 박다연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그녀는 축 늘어진 얼굴로 어깨를 한번 으쓱이더니 귀엽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클랜 로드님. 저도 물론 머셔너리 클랜분들이 모니카로 와주신 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분들은 기존의 클랜들과 다른 성격을 갖고 있잖아요? 과한 호의는 상대방에게 부담을 넘어서 욕심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잖아요.” “욕심…? 욕심 맞는데.” “아 진짜 언니…. 아니 클랜 로드님. 제발 정신 좀 차려요. 머셔너리 로드께서 말씀하셨듯이 이분들 입장도 생각해주셔야죠. 우리가 할인 혜택을 주어야 하는 이유도, 그리고 머셔너리 클랜이 그것을 받아도 되는 명분도 없잖아요. 거진 9만 골드 짜리를 3만 골드에 넘기면 다른 클랜에서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이유…? 명분…?” 한소영은 고개를 기울이며 눈알을 도록이 굴렸다. 박다연은 답답해 죽겠다는 얼굴로 발만 동동 굴렀다. 그리고 나는 무심하게 박다연을 쳐다보는 한소영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삐쳤다.’ 겉으로는 무표정해 보이지만 눈꼬리가 살짝 늘어져있다. 한소영이 토라졌을 때 가끔 비치는 나만이 알고 있는 버릇이었다. 한소영은 한동안 지긋한 시선으로 박다연을 응시했다. 이윽고 그녀가 뾰로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한소영은 비로소 시선을 거두고 다시금 내게 얼굴을 돌렸다. “이유 그리고 명분이라. 확실히 일리는 있네요.” “이해해주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래도 호의를 베풀어주신 점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네. 그런데 머셔너리 클랜은 용병 클랜이라고 하셨죠?” “네? 네.” 한소영의 물음에 속으로 다시 긴장이 일어났다. 그녀는 알고 있는 사실을 두 번은 물어보지 않는 성격이다. 그러나 이렇게 물어봤다는 것은 속으로 뭔가 꾸미는 게 있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사용자들의 의뢰도 받아서 해결하시겠네요.” “아무래도 그렇…죠.” “그럼 지금껏 의뢰를 받아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출범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클랜 하우스도 없는 상태니까요.” 그 말을 하는 순간 한소영의 입가에 아주 얇은 미소가 걸렸다. 워낙 미모가 뛰어나다 보니 그 모습도 살 떨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기에,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전에 한소영의 입술이 빠르게 떨어지고 말았다. “잘됐네요. 마침 머셔너리 클랜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었어요. 그림자 여왕의 힘이 필요한 일이거든요. 아…. 부탁이 아니라 의뢰라는 표현이 더욱 정확하겠네요.”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에. 노파심에서 말씀 드리는데. 글을 쓰면서 이따금 수현의 성격을 드러내는 문장을 한두 개 집어넣곤 합니다. 가끔 한두 분께서 그 부분을 짚어주실 때는 참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수현은 절대로 선인이 아닙니다. 물론 울타리 안에 있는 아군까지 까닭 없이 적대하는 미친놈은 아니지만, ‘적’으로 규정한 사람에 대해서는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면 일전에 뮬에서 탐험을 나갔을 때 부랑자를 상대했을 때의 모습을 들 수 있겠네요. 예전에 어떤 분이 수현의 성향을 지적해주신 적이 있었는데 지금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이북으로 교정할 때는 성향을 질서, 혼돈이 아닌 중립, 혼돈으로 바꿀까 생각하고 있어요. 처음 초기 설정에서 외면/내면으로 설정해서 그렇게 나간 건데 중간에 성향을 다양화시키는 작업으로 살짝 어그러졌네요. T^T PS. H신을 기대하신 분들에게는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런데 H신을 추가하면 이번 챕터 안으로 도시를 나간다는 약속을 맞추지 못할 것 같아서요. :) 『 리리플 』 1. 미월야 + 천겁혈신천무존 : 두분 각 회 1등 축하 드립니다. 오늘은 스마트 폰으로 보신다고 하니 1등은 힘드실 것 같다는 코멘트 봤습니다. 하하하. 아무래도 5연속 1등은 여러 여건들로 인해(제가 늦게 올릴 때도 있으니까요.) 힘들 것 같습니다. 이번 회도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 2. 겸땡 : 예. 상급이 보석일수록 뽑아낼 수 있는 위력이 달라집니다. 3. 플룻 : 수현이 비비앙을 봐주는 이유는, 할 때는 확실히 하기 때문이죠. :) 4. 살찐양이 : 아. 추천이요? 제가 지금껏 추천한 작품은 음. 내가 이능력자다(노쓰우드 님), 네임드(민영모 님), 짐승(자베트 님) 정도 있습니다. :) 5. 고장난선풍기 : 부디 기운을 차리셨으면 좋겠습니다. ㅜ.ㅠ 힘내세요! 6. [DeepBLue] : 수정 완료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약은 최대한 개연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만들 생각입니다. :) 7. 남궁천룡 : 김유현은 김수현의 친형입니다. 그리고 2년 전에 먼저 들어왔으니, 통상대로라면 당연히 지구에서 난리가 나고 궁금하게 여길 사항입니다. 한가지 말씀 드리면 "지구에서는 난리가 나지 않았다." 로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천사를 초월하는 존재가 연관되어 있고…. 라는 게 현재의 설정입니다. 더 말씀 드리면 아예 결말의 일부를 말씀 드리는 거라 이 정도로 말을 아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8. 노쓰우드 : 코멘트 감사합니다. 이토록 멋진 세상 연참해주세요! 9. NaSIS : 이런. 수정 완료했습니다. 날카로우십니다. 감사합니다. _(__)_ 10. Toranoanal : 계속 읽어주고 계셨군요. ㅜ.ㅠ 보고 싶었습니다. 흑흑….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45 / 0933 ---------------------------------------------- 첫 번째 의뢰 반사적으로 입술을 살짝 열자, 들러붙은 입술 살이 죽 늘어지는 게 느껴졌다. 바로 다물긴 했지만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가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나도, 그리고 한소영도 알고 있다. 다음에 이어질 대답으로 이야기의 방향이 달라질 것이라는걸. 겉으로는 의뢰라는 표현을 썼지만 그녀의 말에 담긴 뜻은 명분을 만들자는 소리였다. 정말로 거절하려면 지금밖에 기회가 없었다. 물론 얘기를 듣고 가부 여부를 결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의뢰.’ 라는 단어를 꺼낸 한소영의 말을 무시할 경우 “머셔너리는 앞으로 이스탄텔 로우와 관계를 맺기 싫다.” 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소지가 있었다. ‘정말 어지간하구나.’ 한 순간 몸을 타고 솟아오르는 온갖 느낌들이 머릿속을 교차한다. 그 중에서, 나는 내가 2회 차로 돌아온 목적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그러자 망설임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곧 하나의 해답을 내릴 수 있었다. 이스탄텔 로우와는 앞으로 쭉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한소영과 대립각을 세우려고 돌아온 건 아니니까. 오히려 그 반대였으니까. 수초의 시간 속에서, 나는 하나의 느낌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멍석을 깔아주시는데…. 거절하기 힘들게 만드시네요.” “부담 가지지 않으셔도 되요.” 한소영의 명료한 대답에 절로 쓴웃음이 나온다. 슬슬 밑바닥이 보이는 차를 꿀꺽 들이킨 후, 나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우선 의뢰 내용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에요. 다연아? 나가서 그것들 좀 가져오렴.” 아까 한소영의 시선이 강렬했는지 박다연은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구시렁거리는 기색이 가득했지만, 그녀는 순순히 문을 열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탕.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한소영은 곧바로 의뢰 내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뭐부터 말씀 드려야 할까요. 저희 모니카는 남부 도시 중에서 남서쪽에 위치한 도시에요. 위쪽으로는 바바라와 연결되어있고 아래쪽으로는 강철 산맥과 연결된 중요 요충지죠. 혹시…. 동쪽으로 연결된 지형 중에 환각의 협곡이라고 알고 계신가요?” “망상의 고원에 있는 협곡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곧장 대답하자, 한소영의 눈에 이채가 스치는걸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잠시 동안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네. 맞아요. 한가지만 여쭤볼게요. 모니카하면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죠?” “강철 산맥과 맞닿아있는 도시, 그리고 안정화로 이름 높은 도시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안정화로는 거의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고 들은 기억이 나네요.” “소문은 그렇게 퍼져있죠. 하지만.” 한소영은 말을 멈추고 앞에 놓인 찻잔을 처음으로 들어올렸다. 곧이어 잔이 기울어지며 입술에 맞닿고, 그녀의 희고 가느다란 목이 훤히 드러난다.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그녀의 목 울대는 뇌쇄적인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었다. 문득 목이 바짝 타는 느낌이 들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후. 전보다는 훨씬 촉촉해진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 들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 “지금까지는 워프 게이트가 망가지는걸 대비해, 바바라와의 안전한 통로 확보와 강철 산맥의 공략에 중점을 두고 도시를 안정화시켰어요. 하지만 하나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고 다른 하나는 당분간은 요원한 일이 돼버렸네요.” “음…. 무슨 말씀인지는 대충 알겠습니다.” 황금 사자와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뒤틀렸고, 강철 산맥의 공략은 앞으로 얼마 동안은 꿈도 꾸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만큼 이제부터는 비교적 소홀했던 부분에 시선을 돌리겠다는 의미였다. 한소영은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서론이 길었네요. 이제 의뢰 내용을 말씀 드릴게요.” “예. 경청하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두 달 즈음 전이네요. 이스탄텔 로우 산하 클랜중 한곳인, 여울가녘 클랜에서 환각의 협곡을 목표로 원정을 떠났어요. 망상의 고원까지의 거리를 가늠해보면 왕복 3주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거리죠. 하지만 8주를 훌쩍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돌아오지 않고 있어요.” “8주…. 중간에 모종의 이유로 사망한 게 아닐까요?” 내 말에 그녀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부정을 표시한다기보다는,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 “6주전에 여울가녘 클랜원의 개인 통신 장비로 한번 통신이 들어왔다고 해요.” “구조요청이었나요?” “비슷해요. 하지만 상황을 설명한 게 아니라 딱 한마디만 남겼다는 보고가 들어왔어요.” “그 한마디가….” “구해줘.” ‘구해줘…? 설마 환각의 협곡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한 건가? 망상의 고원을 돌파하기는 꽤 어려웠을 텐데. 그리고 구해달라고 했다면…. 아마도….’ 확신까지는 못하지만, 한소영의 말을 듣자 대강의 전후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고원과 협곡은 1회 차 시절 내가 직접 공략에 참여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워낙 유명한 원정이라 그 안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고,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제법 상세히 알고 있는 편이었다. “그 한마디 이후로 곧바로 통신이 끊겼고, 지금까지 통신이 이어지지 않고 있어요.” “원정을 떠난 지 2주 만에 통신이 왔다는 소리네요. 6주나 지났으면 살아있다고 생각되기 힘든데요. 혹시 그 동안 구조대는 파견되지 않은 건가요?” “통신이 들어온 지 1주 후. 여울가녘이랑 평소 사이가 좋았던 두 클랜에서 힘을 합쳐 구조대를 파견했어요. 하지만 그들 또한 현재 전혀 연락되지 않는 상황이에요.” “음….” 잠시 생각에 빠지려는 찰나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박다연이 뚱한 얼굴로 이것저것을 한아름 안은 채 들어서는걸 볼 수 있었다. “클랜 로드. 가지고 왔어요.” “마침 잘 왔어. 기록 먼저 줄래?” “꿍얼꿍얼.”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네 맘은 알고 있단다.” 한소영은 툭 한마디 던지고는 건네 받은 기록을 빠르게 훑어보기 시작했다.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고, 그녀는 곧 몇 장을 간추리며 입을 열었다. “원래는 사망했다고 봐야겠지만, 구해줘 라는 말 한마디에 많은 사용자들이 희망을 걸고 있는 상황이에요. 솔직히 저 또한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지만…. 모니카를 대표하는 클랜의 로드로서. 이 일을 책임지고 진상을 밝힐 의무가 있어요.” “그럼 머셔너리가 2차 구조대 임무를 맡는걸 원하시는 건가요.” “아니요. 그런 위험한 일까지 맡길 수는 없어요. 저희가 원하는 건 오직 하나. 망상의 고원에서의 수색활동이에요.” “수색활동이요.” “네. 기록을 보면 지금껏 망상의 고원으로 원정을 떠난 사용자들의 생환율은 45.7%. 환각의 협곡은 27.8%를 기록하고 있어요. 물론 전멸한 사용자들의 수치를 포함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비율은 더 낮을 수도 있어요. 염두에 두세요.” 한소영은 잠깐 말을 멈추더니 내게서 시선을 거둬 박다연에게로 돌렸다. 잠시간 둘을 서로를 가만히 응시했지만, 이내 박다연이 다시금 투덜거리며 품에 꼭 안고 있던 상자 하나를 꺼내놓았다. 나는 그 상자로 흘끗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이건 뭔가요.” “최상품 정심단 스무 알이에요. 망상의 고원에서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영약이죠. 이 정심단이 있으면 망상의 고원에서 하루는 무리 없이 버틸 수 있을 거예요. 다만 만들기가 어려워 수량이 적다 보니 이 이상 드리기는 힘들어요.” “인원은 10명이니 수량은 충분합니다.” “다행이군요. 머셔너리 로드. 그럼 여기서 다시 한번 정식으로 의뢰 드리겠어요. 제한된 시간 안에 이 정심단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사용자는 그림자 여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환각의 협곡까지 들어가는 건 바라지 않아요. 단지 이 정심단이 허락하는 시간 동안 최대한의 수색을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한소영은 간추렸던 기록을 내게 넘겼다. 대충 훑어보자 망상의 고원에 대한 정보가 빼곡하게 적혀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차. 보상을 말씀 드리지 않았군요. 수색을 다녀와주시면 딱히 성과가 없더라도 클랜 하우스를 구매하는데 무조건 30%를 할인해드릴게요.” “성과가 없더라도요?” “물론 원정 보고는 받아야겠지요. 저희가 2차 구조대를 파견할 때 큰 도움이 될 수 있거든요. 그리고 기대 이상의 성과를 가져오실 경우 그 이상으로 할인해드릴 용의도 있어요.” ‘망상의 고원. 그리고 환각의 협곡. 확실히 재밌는 카드를 꺼내 들었네.’ 단순 손해 면에서 보자면 이스탄텔 로우의 출혈이 어느정도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대표 클랜으로써 충분히 메울 수 있을 정도였다. 중요한 건 이 수색을 기대 이상으로 성공시킬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보다 더 없을, 말 그대로 완벽한 명분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대로 고개를 한두 번 주억이자 한소영은 느른한 숨을 내쉼과 함께 내게 물었다. “어떠신가요. 저희의 의뢰를 받아들여주시겠나요?” “저는….” 물끄러미 기록을 훑자, 내 기억과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되려 비교해보면 오히려 내 기억에 더 중요하고 자세한 내용들이 들어있었다. 나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한소영은 배웅해주겠다고 했지만, 극구 사양함으로써 간신히 홀로 클랜 하우스의 정문을 나설 수 있었다. 마지막에 잘 부탁한다고 서로 고개를 꾸벅인걸 생각하자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러브 하우스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나는 내 손에 들린 여러 기록들과 상자를 다잡으며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의뢰에 대해서는 확답을 하지 않았다. 우선은 받아들일 용의가 충분히 있으며, 클랜원들과 회의를 거친 후 내일 답신을 보내겠다는 걸로 자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름의 대답은 했다고 생각한다. 기록과 상자를 들고 옴으로써 웬만하면 의뢰를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는 전한 셈이었다. 이번 의뢰는 겉으로 보면 조금, 아니 많이 무리한 부탁이었다. 신생 클랜에 기존의 클랜들도 가길 꺼려하는 장소를 수색해달라는 의뢰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척하면 척이라고. 굳이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한소영의 의도는 알 수 있었다. 우리를 사지로 내몰려고 했다면 애초에 생환율에 대한 얘기나 정심단을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 정심단이 만능은 아니다. 최상품인 만큼 효능이 좋고 유지 기간도 긴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망상의 고원이라면, 내부로 진입할수록 필드 효과가 강해지기 때문에 그와 비례해 정심단의 효능도 약해진다. 수색을 하고 흔적만 가져오면 최소 30%는 할인해주겠다고 했다. 더구나 머셔너리에는 추적술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림자 여왕이 있다. 그녀가 있다면 의도적으로 흔적을 지우지 않은 이상 어느 정도의 성과는 보장된 일이었다. 결국에는 무리해서 내부로 들어가지 말고, 대충 외곽만 수색하고 흔적 몇 개만 집어오라는 소리였다. 물론 나는 전혀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다. 이스탄텔 로우에 이런 식으로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민폐는 1회 차에 끼친 걸로 충분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만에 하나 우리가 별볼일 없는 성과를 가지고 온다면 한소영의 선택에 의심을 가지는 인원들이 생겨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나로 인해 문제가 생기는 일은 절대로 피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에게 있어 전혀 나쁜 제안도 아니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꿩 먹고 알 먹고.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모니카에 온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환각의 협곡을 공략하기 위함도 있었다. 제 3의 눈과 심안이 있는 이상 그곳은 내 안방이나 다름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어차피 공략할 곳, 조금 일찍 공략하는 것뿐이다. 그곳에서 얻을 명성이나 성과들을 차치하고서라도(실은 이게 훨씬 컸지만.), 단순 금액만으로 최소 2만 7천 골드에서 최대 9만 골드에 달하는 일거리를 맡은 것과 진배없었다. ‘그러고 보니 머셔너리를 만들고서 첫 번째 의뢰를 맡은 건가?’ 장사에 첫 마수걸이라는 속담이 있다. 장사의 시작이 좋아야 이후의 장사가 계속 잘된다는 뜻으로, 시작을 무척 중요하게 여기는 말이었다. 물론 의뢰와 장사를 동일시 여기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첫 의뢰 한번 거하게 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생각들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멀리서 연한 분홍빛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해는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도시를 나선 전투 사용자들이 돌아오고, 생계형 사용자들은 슬슬 영업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이제 남은 일은, 클랜원들에게 의뢰를 말해주고 설득하는 일만이 남아있었다. 어떤 말들로 동의를 이끌어낼까 이것저것 고심하며, 나는 빠르게 놀리던 걸음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음…. 여러분. 죄송합니다. 코멘트를 하나하나 읽어봤는데…. 비비앙 때문에 그런데(?) 눈을 뜨신 독자 분들이 몇 분 계신 것 같습니다. ;ㅇ; 음…. 어…. 네. 때려야죠. 때리고 달래줘야 하는데. 아…. 그러니까요. 왜 이렇게 갑자기 죄책감이 들까요. ㅜ.ㅠ 그러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요. 네. 주인공 보정은 위대하다는 말로 결론을 짓겠습니다.(?) 도주! ㅌㅌ! PS. 쿠폰 주신 독자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_(__)_ 『 리리플 』 1. dsafddd : 오호라. 1등 축하 드립니다. 럴수 럴수 이럴 수가. 정말 오랜만에 자정 연재에 새로운 분을 뵙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제가 다 신기하네요. :) 1등의 기분은 어떠신지요. ㅜ.ㅠ 아. 아기 페가수스, 아기 미믹, 개량형 수호의 방패랑 알콩달콩 솔이도 현재 생각 중에 있습니다. 하하하. 2. 음월영검 : 감 사 합 니 다 . 앞 으 로 더 욱 열 심 히 연 재 하 겠 습 니 다 . : ) 3. juan : 자자. 베드신보다 더 좋은 액션과 모험과 보물과 카타르시스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으흐흐흐. 4. 기린일세 : 감사합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_)_ 5. 나르엘 : 한소영은 주인공을 거둬주고, 목숨을 구해주고, 민폐에 가까운 짓거리를 모두 감싸준 여성입니다. 수현이 형이랑 똑같은 존재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김수현이 형이랑 한소영에게 죽고 못사는 거랍니다. :) 6. dbss : 죄송해요. ㅜ.ㅠ 리리플은 랜덤으로 뽑아서 그래요.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또 쿠폰도 감사합니다. _(__)_ 부디 기분을 푸셨으면 좋겠습니다. :D 7. 輝雅 : 좋습니다. 나중에 외전을 쓰게 되면 고연주와의 야외 플레이와, 하연과의 재회신도 넣겠습니다. 아. 살벌한 가위 바위 보는 나중에 본문에 등장할 예정입니다. ㅋㅋㅋㅋ. 8. Goksd : 그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다만 수현이 1회 차에서 직접적으로 겪어보지 못했던 감정에 대한 '일시적인' 낯섦이라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9. Lea : 좋은 지적입니다. 수현은 왜 1회 차에 그들을 살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세라프가 그렇게 말한 부분이 있습니다.) 제로 코드로 그들을 살려서 돌아가지 '못'한 걸까요? 아니, 애초에 소원을 쓸 포인트가 넘쳤음에도 불구하고 왜 둘을 살리지 않았을까요? 거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답니다. :) 한가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수현은 그들을 살리는걸 넘어서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2회 차로 시간을 되돌렸다는 것입니다. 10. Toranoanal : 많이 주셨군요. 앞으로 좋은 작품이 많이 올라와서 Toranoanal 님이 읽는 작품이 잔뜩 늘어나기를 바래봅니다. _(__)_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46 / 0933 ---------------------------------------------- 첫 번째 의뢰 차갑게 식은 새벽 공기가 느껴졌다. 미약하게 숨을 들이키자 달콤한 살 내음이 공기에 섞여 폐부를 깊숙이 찔러 들었다. 새벽 공기들은 벌거벗은 몸의 등을 연신 두드리고 있었지만, 살과 살이 맞닿은 앞부분은 감히 침범치 못하고 있었다. 내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는 품 속에서, 나는 마치 따스한 봄바람과 같은 안락함을 만끽했다. 이대로 다시 잠들고 싶다는 마음이 한가득하였지만 침잠해가는 정신을 억지로 일깨웠다. 잠은 충분히 잤다. 어젯밤 비교적 일찍 잠자리에 들기도 했지만, 아카데미에서 매일 선잠을 잤던걸 생각해보면 지금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고개를 올리자 편안한 표정으로 색색 콧소리를 내는 하연의 얼굴이 보였다. 문득 어젯밤 2연승을 했다고 자랑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틀 전에 서로 몸을 섞을 때, 배꼽 아래 각인한 증폭의 보석을 들켰을 때 부끄러워하던 모습도 떠올랐다. 잠시 동안 그 얼굴을 조금 더 보다가, 나는 슬며시 몸을 일으켜 서둘러 옷을 입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안솔이 각성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기본 장비들을 모두 입은 후. 마무리로 무검과 일월신검을 허리띠 안쪽으로 집어넣는 순간 달그락, 두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큰 소음은 아니었지만 쥐 죽은듯한 새벽이어서 그런지 유난히도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소음에 반응했는지, 엄마 미소를 머금은 채 곤히 자고 있던 하연의 눈이 반짝 떠지는걸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가물가물함으로 가득 찬 눈을 서너 번 깜빡이더니, 곧 초점을 맞췄는지 연한 푸른빛이 감도는 눈동자가 나를 쳐다보았다. “수현….” “더 자요. 아직 아침이 되려면 조금 남았어요.” “어디…가세요?” “도서관에 좀 다녀오려고요. 오늘 회의 때 필요한 자료들이 몇 개 있어서요.” 막 잠에서 깨서 그런지 하연의 목소리는 깊게 잠겨있었다. 그녀는 몸을 살짝 비틀며 활짝 기지개를 피며 일어나다가, 이내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가슴을 가렸다. 곧 창피한 표정을 짓는 하연을 보며 쿡쿡 웃고는, 차분히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을 먹은 후 4층에서 회의를 가질 예정입니다. 어제 말씀 드린 대로, 각자의 생각을 들어볼 터이니 모두 준비하라고 일러주세요.” “음~. 네. 그런데 굳이 제 생각도 필요할까요?” “…하하.” “호호. 농담이에요. 말씀하신 대로 준비해둘게요.” 하연의 장난기 어린 말에 나는 쓴웃음을 내비쳤다. 우리가 원정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곧바로 자리 잡기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러면 도시에 남아 일을 진행시킬 클랜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번 원정에 모두를 데려갈 수 없다는 소리였다. 사용자 아카데미 이후로 고생만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현재 행정 업무를 겸할 수 있는 클랜원은 고연주 아니면 정하연뿐이었다. 전투용 사용자도 좋지만, 앞으로 클랜을 운영하게 되면 행정 업무를 전문으로 보는 사용자도 필요할 것이다. “미안합니다. 조금만 더 고생해주세요. 몇 명 수행 인원은 남겨놓고 가겠습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죄송하죠. 수현은 나가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저야 도시 안에서 편하게 있으니까….” 하연은 차분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 둘은, 서로 마주보며 동시에 웃었다. “그럼. 아침 식사 전에는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말을 마친 후 문 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방문을 열고 나온 순간 뒤쪽에서 “다녀오세요.” 라는, 하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각 도시마다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도서관은 신전과 같이 거의 하루 내내 운영된다. 모니카의 도서관 같은 경우는 밤 늦게 닫고 아침 일찍 여는 걸로 알고 있다. 지구의 시간으로 따지면 밤 12시와 새벽 4시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스탄텔 로우에서 충분한 자료를 받기는 했지만, 정작 내가 확인하고 싶은 기록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망상의 고원과 환각의 협곡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가 아니라 협곡 내부에 있는 유적에 관한 정보였다. 도서관에 다다르자 마침 한 명의 남성이 문을 열고 있었다. 마법사용 로브를 입은걸 보니 거주민, 생계형 사용자가 아니라 아르바이트를 뛰는 전투용 사용자임이 분명했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어려있었는데, 설마 이 시간에 찾아올 줄은 몰랐는지 나를 보자마자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그 반응을 가볍게 무시하고 그대로 도서관 내부로 들어가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고대…. 신화…. 전설….’ 한동안 서고에서 기록을 뒤적이자 이윽고 내가 찾고 있던 기록을 몇 개 발견할 수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기억으로 상당 부분 축소시키긴 했지만, 그럼에도 손에 쥔 기록의 양은 제법 두둑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기록을 읽기 시작했다. “…….” 초반에는 빠르게 훑고 넘기는 기록들이 많았다. 또 어느 기록은 앞에 몇 장만 보고 다시 꼽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쥐고 있던 기록의 두께가 얇아지고, 거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무렵 비로소 내 기억과 연관이 있는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한 줄씩 정독했다. 기록 자체는 열한 장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읽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마지막으로 읽은 기록만 제외하고, 다른 기록들을 모두 제자리에 꼽은 후 발걸음을 입구로 돌렸다. 카운터에는 처음 문을 열어주었던 사용자가 있었는데, 책 하나를 펼친 채 고개를 처박고 졸고 있었다. 순간 깨울까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조용히 대여 명단에 기록 이름과 사용자 정보를 적기로 했다. 이윽고 옆에 꽃다발처럼 꽂혀 있는 커다란 지도 하나를 뽑아 든 후 카운터 위로 있는 그릇에 동전을 떨어뜨렸다. 곧 짤랑 이는 동전소리가 그릇을 울렸지만 남성의 고개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휘파람을 불며 그대로 밖으로 나섰다. * 아침 식사는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식사 후 중요한 회의가 있다는 걸 공지한 터라 고요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나를 비롯한 머셔너리 클랜원들은 곧바로 4층으로 직행했다. 회의실은, 내가 사용하는 가장 크고 좋은 방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머셔너리 클랜의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침에 사온 지도를 집무실 벽에 붙이고 뒤를 돌아보자 총 9명의 클랜원이 각자의 자리에 앉은걸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은 집무실 안에 있는 커다란 테이블에 둥그렇게 둘러앉아 있었지만 오직 고연주만이 내 옆으로 다소곳이 손을 모은 채 서있었다. 각각의 얼굴을 한번씩 확인하고, 나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중요한 내용은 어제 대부분 알려드렸습니다. 그러나 몇몇 클랜원들이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었죠. 자세한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 의뢰의 가부여부를 결정할 필요가 있기에, 해당 사용자들의 생각을 먼저 들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어제 이스탄텔 로우에서 돌아온 이후 나는 클랜원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그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지금까지는 대부분 독단적으로 일을 결정하고 이끌어왔다. 물론 지금도 그런 경향은 있지만, 앞으로 클랜 하우스를 세우고 차차 자리를 잡으면서 클랜원들의 의견도 구할 생각이었다. 더구나 이번 의뢰는 첫 번째 의뢰였고, 독단적으로 결정하기에는 너무도 큰 사항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내 말이 끝나자 신상용이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손을 들었다. 내 의견에 보류를 요청한 클랜원은 총 두 명이었는데, 한 명이 고연주였고 나머지 한 명이 바로 신상용이었다.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자, 신상용은 한두 번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흠흠. 그, 그럼 발언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의뢰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은 아닙니다. 어제 클랜 로드께서 주신 기록을 쭉 읽어봤는데, 망상의 고원은 이스탄텔 로우에서 받아온 정심단으로 충분히 대비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보상도 좋고 성공 가능성도 높지만…. 클랜 로드가 추가로 말씀하신 환각의 협곡으로의 진입은 조금 무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음. 이유를 들어도 될까요.” “네, 네. 이 기록에 적힌 생환율을 보면 환각의 협곡에서의 생환율은 30%도 넘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심단은 망상의 고원을 대비할 수 있지만, 환각의 협곡에서는 효용이 절반으로 떨어진다고 알고 있거든요. 그렇다고 수량이 엄청 많은 것도 아니고…. 그, 그러니까.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협곡에 들어가기 보다는 조금 보상이 적어지더라도 안전하게 망상의 고원만 수색하고 나오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신상용은 말에 몇몇 클랜원들의 고개를 주억인다. 신상용은 그들의 반응을 보더니 이내 “이상입니다.”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크게 숨을 내쉬었다. 다음으로 고연주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녀 또한 신상용의 의견에 공감하는 얼굴이었다. “제 의견도 신상용씨와 비슷해요. 물론 클랜 로드의 의견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요. 하지만 망상의 고원까지는 몰라도, 환각의 협곡은 확실히 위험해요. 저와 수현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클랜원들의 문제가 된다고요. 만일 저와 수현 둘만 들어간다고 하면 저는 찬성하겠어요.” 고연주의 말인즉슨 나와 자신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곳에서는 다른 클랜원들까지 보호할 자신이 없다는 소리였다. 환각의 협곡의 필드 효과를 생각해보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의견이었다. 이로서 보류 신청을 낸 두 명이 모두 의견을 피력했다. 나는 잠시간 뜸을 들이다가, 담담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환각의 협곡에 대한 대비책의 미비로 진입하기 어렵다는 말씀이시군요.” “그, 그렇습니다.” “그럼 말이죠. 환각의 협곡에서 환각에 걸리지 않을 방법이 있다면 어떡하시겠습니까?” “네…?” “방법이 있습니다. 그 강력한 필드 효과를 억누를 수 있을 정도의 효과를 지닌 사용자가 현재 우리 클랜에 있습니다.” 내 말에 대답한 사람은 신상용이 아닌, 고연주였다. 이윽고 한번 더 힘주어 말하자 클랜원들 사이로 작은 소란이 일었다. 그 소란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나는 백한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차분한 말투로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사용자 백한결이에게 듣기론 신의 방패의 고유 권능이 되비침이라고 합니다.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어떤 물리적, 마법적, 정신적 피해에 대해서 반사시켜버리는 가히 사기적인 권능이죠.” “아…! 화, 확실히 일리는 있습니다. 제가 그 생각을 못했군요. 하지만 백한결군은 아직 0년 차 사용자 아닙니까? 저희를 모두 덮을만한 보호막을 일으킬 수도 없고, 설령 할 수 있다고 해도 오랜 시간 지속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러나 굳이 백한결이 무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저번에 보여줬던 만큼의, 손바닥만한 보호막만 일으켜도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용자도 지금 이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용자 김한별?” “네.” 나는 틈을 주지 않고 곧바로 한별을 불렀다. 이윽고 내 부름에 대답한 그녀는, 곧 조심스럽게 일어서 입을 열었다. 이윽고 그녀는 보석 마법사의 권능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는데, 그 권능이란 바로 <보석 증폭> 이었다. “그, 그러니까. 보석만 있다면 어떤 마법에 대해서라도 그 효과를 증폭시킬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네. 보석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요. 백한결씨의 파장에 맞는 보석만 있다면, 그에 관한 모든 긍정적인 효과를 증폭시킬 수 있어요.” “서, 설마! 그렇다면 보석에서 마나를 가공해서 뽑아내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온전한 마력을 뽑아내고,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네. 정답이에요.” 한별의 확답을 들은 신상용은 허탈한 얼굴로 눈을 빙글 돌렸다. 대충 주변을 둘러보니 고연주를 비롯한 클랜원들 모두가 새삼스런 눈길로 한별과 한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바로, 내가 다른 모든 신규 인원을 포기하고서라도 백한결만큼은 데려오겠다고 벼르고 벼르던 이유였다. “클랜 로드? 말을 바꾸죠.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요. 찬성할게요.” “저, 저도 보류 신청을 철회하겠습니다. 아직까지 확신은 들지 않지만, 클랜 로드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고연주가 얍삽하게 선수를 치자, 신상용도 허둥거리며 말을 바꿨다. ‘아 사실이라고. 쟤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골머리를 썩었는데. 아. 한결이 때문은 아니구나.’ 갑작스레 시선이 쏠리자 부담스러운지, 백한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이유정은 대견한 눈길로 그를 보다가 신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진짜 대박이네. 그럼 애초에 망상의 고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거 아냐?” “멍청이. 그건 아니지. 보석이 얼마나 들어갈지 알고? 일단 망상의 고원은 정심단으로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잖아. 거기서도 비싼 보석들을 쓸래? 돈 아깝게.” “아아. 듣고 보니 그렇구나. 그런데 너 왜 이렇게 말투가 더러워?” “미안. 아무튼 진짜 복덩이는 따로 있었구나.” 안현이 한마디 툭 내뱉자, 원조 복덩이 안솔의 입술이 삐쭉 튀어나오는 게 보였다. 어쨌든 이로서 모든 클랜원들의 동의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허리춤에 걸려있던 일월신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검집의 초봉(稍峰)을 지도 한 부분에 갖다 댄 후 입을 열었다. 초봉은, 정확하게 망상의 고원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마 여러분들은 궁금하실 겁니다. 망상의 고원만 수색하고 나와도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제가 왜 이렇게 환각의 협곡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지.” 지도를 가리킨 순간부터, 주변은 이미 조용해져 있었다. 마음에 드는 분위기였다. 나는 망상의 고원을 가리키고 있던 일월신검을, 모니카를 향해 사선으로 쭉 그어 내렸다. “모니카로부터 망상의 고원까지 걸리는 기간은 대략 10일에서 11일 사이입니다. 그리고 망상의 고원으로 진입할 경우. 환각의 협곡은 하루 아니면 이틀 거리에 있습니다. 즉 14일이면 환각의 협곡에 들어가고도 남는다는 소리죠.” “…….” “여울가녘 클랜에서 2주 만에 통신이 들어왔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단 한마디, 구해달라고 말입니다.” 나는 클랜원들을 등진 상태서 지도를 보고 있다가, 슬며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제가 바로 이상하다고 느낀 부분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와. 드디어 수현이가 다음 회에 도시를 나가요! ^0^ 요즘 들어 생략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ㅇㅅㅇ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계단을 오르고 회의실로 들어가는 4파트로 나누는 게 아니라 앞 3파트를 한 파트로 때려놓고 회의에 곧바로 들어가는 등등. 이게 참 진행하는데 좋더라고요. :D 저는 이만 기말고사 대비 공부하러 가겠습니다! 우리 모두 신나는 탐험과, 보물과, 액션과, 주인공 보정을 느껴봐요! 아, 죄, 죄송합니다. 마지막은 잊어주세요.(퍽퍽!) 『 리리플 』 1. 미월야 : 허허허. 새로운 분이 등장하는가 싶더니 곧바로 미월야님께서 탈환하시는군요. 껄껄! 1등 축하 드립니다. 이번 회도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2. 하루지온s : 힘내세요. ㅜ.ㅠ 코멘트 ㅜ 하나로 하루지온s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모바일인데 순위 권이면 엄청 잘하신 거예요! 3. 輝雅 : 그럼요. 데려왔으면 써먹어야죠. 쿄쿄쿄. 이번 파트는 한별과 한결의 대활약(?) 일까요? 아니죠. 본격 수현의 깽판입니다. 4. 오피투럽19 : 아닙니다. 리리플은 언제나 랜덤입니다. 하하하. :) 5. 저녁노을로 : 암 쏘 쏘리 벗 알러뷰 입니다. 시험 준비 기간이라서 연참이 힘들어요. ㅜ.ㅠ 6. 밍긔 : 헐. 7. 프리맨 : 아마 영약 이후로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8. 추락한날개 : 아, 아니에요. 저는 소프트 소프트입니다. 그렇고 말고요. 에헴. 9. 플룻 + KeaR、Royal : 헉. 죄송합니다. 리리플 업데이트 하고 곧바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0. Tantania : 이번 회에 수현이 클랜원들을 납득시킬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물론 다른 것들도 있지만요. 하하하.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47 / 0933 ---------------------------------------------- 첫 번째 의뢰 “이상하지 않나요? 보통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있을 경우. 구해달라는 말보다는 살려줘, 도와줘 가 더 자연스러울 텐데요.” “그러면…. 클랜 로드의 말대로라면. 아직 그들이 고립된 환경에 처해있고,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때 당시에는요. 그래서 여울가녘과 우호 관계에 있는 두 클랜에서도 구조대를 파견했겠죠. 뭐, 지금은 시간도 많이 지났고. 이 경우는 아예 연락도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만.” 지도에 닿아있던 일월신검을 떨어뜨리자, 고연주가 일리 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인다. 애들은 아직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다른 몇 명은 감을 잡은 것 같기도 했다. 찬찬히 기록을 살피고 있는 하연을 흘끗 본 다음,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애당초 여울가녘의 환각의 협곡 원정을 이스탄텔 로우에서는 말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대표 클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굳이 원정을 감행했습니다.” “뭔가 냄새를 맡았던 걸까요?” “글쎄요. 직접 들어가봐야 알겠지만,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흔적을 쫓는다면 뭔가 답이 나오겠지요.” “똥싸개들이네. 똥은 지들이 싸고, 치우는 건 우리고. 체.” 비비앙은 불만 어린 얼굴로 투덜거렸다. 가뜩이나 새로운 연구로 바쁜데 원정에 시간을 뺏기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대답으로 “하지만 보상은 확실한 똥 치우기니까. 그리고 똥 속에서 진주를 발견할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라고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맞은편에서 비위가 상했다는 얼굴로 입을 가리는 하연을 보자 그냥 그만두기로 했다. ‘이제 슬슬 인선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데…. 쯧. 어째 사제가 한 명밖에 없나.’ 왼손바닥에 칼집을 톡톡 두들기며 클랜원들을 훑다가, 안솔을 보고서 혀를 차버렸다. 여러 방향으로 대비를 해두긴 했지만 막상 진입하게 되면 내외로 어떤 변수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필드 효과를 생각한다면 변수에 가장 노출돼있는 인원이 바로 안솔이었다. 최대한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나는 미리 생각해둔 인선을 발표하기로 했다. “어제도 말씀 드렸듯이. 이번 원정에 모두를 데려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의뢰를 받아들이고 도시를 나가면 곧바로 클랜 하우스의 기초 공사에 들어갈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아. 공사 금액은 이스탄텔 로우의 보증으로 후불로 지불하기로 했습니다.” “기초 공사라 하시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건물 구조는 거의 살리는 방향으로 가기로 했고, 무엇보다 청소를 우선으로 하기로 했으니까요. 관계자를 보내주기로 했으니 크게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군요. 이것 참 팔자에도 없는 감독 역할을….” 전공에 관련해서는 똑소리 날 정도로 똑똑한 하연이었지만 건축에 관해서는 은근히 자신 없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안심시킨 후, 이번엔 비비앙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러 가지 대비책을 마련하긴 했지만 망상의 고원이나 환각의 협곡은 기동성을 중시해야 합니다. 그런 만큼 현재 머셔너리 클랜에서 가장 많은 클래스인 마법사들을 위주로 제외할 생각입니다. 그럼…. 사용자 정하연.” “네. 알겠어요.” 이미 얘기를 해둬서 그런지 하연은 시원스럽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마주 고개를 끄덕인 후 곧장 다음에 제외할 인원을 불렀다.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응? 나도?” “그래. 이번에 유니콘의 뿔 때문에 조금 어지러울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굳이 원정에 참가하지 않아도 좋아. 남아서 연구에 신경 쓰도록 해.” “웅…. 괜찮긴 한데…. 근데 이제 규모가 규모인 만큼 나 혼자서 하려면 조금 힘들어.” 물론 그렇겠지. 하연은 클랜 하우스 공사. 비비앙은 영약 연구. 이렇게 일을 나눠놨지만 각자 혼자 맡기에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으니 중간에 끼어서 둘을 도와줄 인원이 한 명 더 필요했다. 아마도 이 일에 가장 적합한 사용자는…. “사용자 신상용.” “네, 네. 저도 제외인 겁니까?” “그렇습니다. 다만 신상용씨는 영약 연구뿐만이 아니라 정하연의 일도 겸해서 도와야 할겁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신상용이라면 정하연과 친분이 있었고, 비비앙의 연구에 중추를 맡고 있는 인물이었다. 성향이 호전적이라면 원정 제외에 불만을 품을지 모르나, 애초에 안정을 추구하는 만큼 큰 불평은 없을 것이다. 그의 낯빛을 확인한 후 나는 확언하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제외는 여기까지입니다. 이번 원정 인선은 저, 사용자 고연주, 안현, 안솔, 이유정, 김한별, 백한결. 이상 7명이 가는 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참가 인원들은 의외라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와 고연주를 제외한다면. 어떻게 보면 셋은 머셔너리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사용자들이었다. 그러나 머셔너리는 아직 스쿼드가 두텁지도, 고르지도 못하다. 여기서 더 데려갈 수도 또는 남기고 갈수도 없는 노릇이니, 모든 사항들을 감안하면 지금이 딱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가지 사항만 더 알려드리고, 곧 회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조용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다들 수긍한 눈빛을 나에게 보내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대강 중요한 내용들은 전달했으니 이제는 마무리를 지을 차례였다. “사용자 김한별, 백한결.” “네.” “네!” “창고를 개방할 테니, 그곳에서 백한결의 파장에 맞는 보석을 골라봐. 그리고 둘은 오늘부터 바로 서로 호흡을 맞추는 연습에 들어가도록 해. 그리고…. 안현? 회의가 끝나면 둘을 데리고 장비들이 있는 방으로 안내해줘.” 내 지시를 받은 안현은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보석이 못내 아까운지 아쉬움이 묻어나는 얼굴로 입맛을 쩝쩝 다셨다. “안솔, 이유정. 너희 둘은 이번 원정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도록. 물자 목록은 내가 알려주마.” “네에.” “알겠어요, 오빠.” 둘은 선선히 대답했다. 반말을 하지 않는 이유정의 말투가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것도 나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용자 고연주. 이스탄텔 로우에, 의뢰를 받아들인다는 전령을 보내세요.” “알겠습니다. 클랜 로드.”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하는 고연주를 끝으로, 나는 모두를 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혹시 다른 의견을 내고 싶은 분이 있다면, 지금 여기서 말씀해주세요.” “…….” “없는 것 같군요. 참고로 원정 출발은 사흘 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각자 배당된 역할은 웬만하면 이틀 안으로 끝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잠시 말을 멈추고, 나는 양 손에 쥐고 있던 일월신검을 떨어뜨렸다. 곧 칼집의 초봉이 바닥에 부딪치는 탁, 소리가 남과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하늘은 몹시 맑았다. 입구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보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눈에 보인다. 클랜원들은 아직 한 명도 내려오지 않은 상태. 나는 그네들을 기다릴 겸 품속에서 연초 한대를 꺼내 들었다. 원정 중에서는 자주 못 피울지도 모르는 일이니 지금 실컷 태울 생각이었다. 그렇게 막 불을 붙이려는 찰나, 누군가 또각또각 1층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 “어.” 연초를 입에 문채 고개를 돌리자, 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임한나를 볼 수 있었다. 나는 머쓱한 마음에 물고 있던 연초를 다시 빼어 들었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내게로 다가왔다. “괜찮아요. 태우셔도 되요.” “음. 러브 하우스는 금연 아니었습니까?” “방에서 몰래 피우는 애들도 있는데요 뭐. 그러니 괜찮아요.” “아니 그래도….” 어물쩍거리자, 임한나는 연초를 끼고 있는 내 손을 잡아 올리며 직접 내 입술에 맞춰주었다. 문득 내 손을 감싼 그녀의 손이 참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익, 치이익. 결국 손수 불까지 붙여주는 임한나의 성의를 거절하지 못해,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만족한 기분으로 길게 연기를 내뱉자 그녀의 상냥한 목소리가 재차 귓가로 흘러 들었다. “위층이 바빠 보이던데, 오늘 도시를 나가시나 봐요?” “클랜원들이 말 안 해주던가요?” “근래에는 이야기도 거의 못 나눴어요. 다들 머셔너리 로드께서 오신 이후로 무척 바쁘게 지내고 있거든요.” “그렇군요…. 예. 오늘 원정을 나갈 생각입니다. 거리가 거리인 만큼 조금 걸릴 것으로 예상되네요. 그래도 다 가는 게 아니라 몇 명 남기고 가는 거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이참. 괜찮다니까요.” 임한나는 손사래를 치며 미미하게 웃었다. 그에 따라 아주 살짝 흔들리는 가슴으로 내려가는 시선을 붙잡고, 일부러 계단으로 눈길을 돌렸다. 다행히 마침 계단을 내려오는 클랜원들이 한 명 두 명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두 명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철회해야만 했다. 그 두 명은 나와 임한나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다가, 곧 걸음을 멈추고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역시….” “아, 아니에요…. 수현이 그럴 리 없어요…. 분명 한나가 꼬리를 쳤을….” “수현도 마음이 있을 수도…. 그러면 둘이 마음이 있다는….” “확실히 그럴 가능성도…. 어쩌면 이미 늦은 걸지도….” 분명히 속닥이는 모양새는 취하고 있었지만, 말은 일부 들리고 있었다. 일부러 들으라고 흘리는 말들이 분명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 코를 통해 연기를 세게 내뿜었고, 임한나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양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어, 언니들. 그런 게 아니에요.” 임한나가 해명을 했지만 둘의 의심스런 눈초리는 거둬지지 않았다. 이윽고 그 시선이 내게로 돌려질 즈음, 나는 얼른 물고 있던 연초를 빼며 몸을 돌렸다. 딱히 그 시선을 견디기 힘들어서가 아니라 바깥으로 연초를 버리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애꿎은 바깥만 바라보던 고개를 다시 안으로 돌릴 수 있었던 건, 곧 준비를 마친 클랜원들이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할 때였다. 다음으로 내려온 인원들 중에서 가장 앞에 선 사용자는 안현과 백한결이었다. 백한결은 더 이상 사용자 아카데미 복장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따로 좋은 장비를 맞춰준 건 아니었고, 가죽 갑옷을 비롯해 상점에서 사 입힌 기본 복장이 전부였다. 하지만 한 손에 끼고 있는 검은색 장갑과 양 손으로 들고 있는 호프론의 방패가 특이하다면 특이하다 볼 수 있었다. “형. 고맙습니다.” “고맙기는 뭘. 큭큭. 너 임마. 감소의 장갑 잃어버리면 안 돼. 그거 진짜 귀한 거란 말이야. 당분간만 빌려주는 거야.” “헤헤. 네. 꼭 잃어버리지 않을게요. 근데 정말 괜찮으세요? 창이 굉장히 무겁다고 들었어요.” “응? 어 괜찮아. 수련도 많이 했고 양 손으로 들면 되거든.” 안현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은 듯 좁은 계단에서 칠흑의 창을 들어 붕붕 휘둘렀다. 그러자 캉, 소리와 함께 뒤쪽에서 약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곳에는 하얗게 빛나는 하나의 막이 번쩍이고 있었다. 안현이 멋모르고 창을 휘둘러 뒤에 있던 안솔을 맞출뻔했지만, 다행히 제때 개량형 수호의 방패가 튀어나와 막아준 것이다. 안솔은 십년감수한 얼굴로 어버버 거리다가, 곧 안현을 향해 빽 소리를 질렀다. 안현이 황급히 고개 숙여 사과하는 모습을 보자 절로 한숨만 나왔다. “오빠. 준비 끝! 모두 내려왔어요~.” “너 말투 좀 하나로 통일하라니까.” “히히. 갑자기 고치려고 하니까 익숙하지가 않아서. 요.” “공석과 사석만 구분하면 돼. 아무튼 클랜원들 밖에 정렬시켜. 곧 따라나갈 테니까.” “응! 아니 네!” 유정은 물빛 귀걸이를 슬슬 쓰다듬으며 멋쩍게 미소 짓고는 바로 나는 듯 달려나갔다. 잠시 동안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 문득 감회가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뮬에서 처음 <고대 연금술사 비비앙의 던전>을 출발했을 때만해도 참 초라했는데, 어느새 누가 봐도 실력 있는 원정대라는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나가는 사람은 나가고, 남는 사람은 남는다. 곧 이번 원정 참가하는 클랜원들이 입구를 나섰고, 나는 내부에 남아있는 네 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하연을 필두로 비비앙, 신상용, 임한나가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현. 꼭 돌아오셔야 해요. 저희는 걱정하지 마시고요.” “김수현! 혹시 좋은 재료 발견하면 꼭 가져와줘!” “리, 리더. 이렇게 남게 돼서 죄송합니다. 대신 일은 확실하게 진행해놓도록 하겠습니다.” “머셔너리 로드. 몸 조심하세요….” 신상용까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마지막 임한나의 말에서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분명 그녀는 우리 클랜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 끼어 말하는 게 그리 낯설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가 이내 끄덕이며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크게 문제는 없을 겁니다. 약 3주 정도 걸릴 예정이니, 그 동안 수고 좀 해주세요.” 입구 밖으로 시선을 던지자 클랜원들을 정렬시키고 있는 고연주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하늘은, 여전히 몹시 맑았다.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원정 나가기 딱 좋은 날이라고 할까. 간만에 칼질을 한다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금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개운한 기분으로 계단을 내려간 후, 나는 정렬해있는 클랜원들의 선두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형. 어느 쪽 문으로 나가실 거예요?”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으니까…. 동문으로 가자고.” 내 옆에는 탱커 역할을 맡은 안현이 서 있었다. 제법 익숙하게 창을 매만지는 것을 보니 얼른 밖으로 나가고 싶은 모양이다. 그의 기대에 부응해, 나는 빠른 걸음으로 동문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그러자 곧이어 내 뒤를 따라오는 여러 발자국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 발자국 소리들과 함께, 우리들은 환각의 협곡. 아니, 추후 <변절자의 도시> 라고 불릴 곳을 향해 원정의 첫 시작을 알렸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음, 독자 분들. 한가지 죄송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일전에 알려드렸다시피 제가 요즘 다가오는 기말고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럼 공부를 해야 하는데, 소설과 병행하다 보니 아무래도 시간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오늘만해도 어제 공부한 부분만 다시 풀고 새로 진도는 나가지 못했어요. ㅜ.ㅠ 해서, 최대한 시간을 짬짬이 아껴볼 생각입니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연재는 최대한 이어볼 터이니 시험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후기 및 리리플을 잠시 쉬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코멘트를 읽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이건 모바일로도 확인이 가능하니까요.) 꼭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저 또한 코멘트를 이용하거나 쪽지를 이용해 답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독자 분들의 하해와 같은 양해를 바라며,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얼른 시험이 끝났으면 좋겠어요. 하아. 0248 / 0933 ---------------------------------------------- 부수입 동쪽 성문을 나서는 우리들을 향해 거주민 경비병들이 힘차게 경례를 올려붙인다. 그 모습을 보자 새삼스레 모니카와 뮬, 두 도시의 차이가 느껴졌다. 경비병들이 입고 있는 갑옷만 봐도 뮬의 후줄근함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성문을 나서자마자 보이는 풍경은 절로 고개를 끄덕여지게 하였다. 넓게 펼쳐진 광활한 녹색 대지 사이로 난 잘 닦여진 길들은, 저기 멀리서 우뚝이 박혀있는 이정표와 함께 여러 갈래로 보기 좋게 나뉘어져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분명 도시 외부임에도 불구하고 성벽 또는 주위에 세워진 아름드리 나무들 아래로, 많은 수의 사용자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는 게 보인다. “와하하! 효과가 정말 장난 아니었다니까? 내가 오늘 꽃 데리고 러브 하우스로 돌아가는데. 아주 맥을 못 추더라고! 아주 그냥 내 팔에 꼭 붙어서는….” “와 씨발, 부럽다. 너 그런데 돈이 어디서 나서 정력 증가 물약을 사 마셨냐. 그거 좀 비쌀 텐데.” “킥킥. 형님이 얼마 전 원정에서 한 건 했다는 거 아니냐. 숲 속에서 운 좋게 고블린 부락을 발견했거든. 거기서 금화랑 장신구 좀 챙겼지.” “고블린 부락? 아직도 남아있었어? 이야, 완전 날로 먹었구먼.”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뮬에 비하면 이곳은 공원이 아닐까. 그리고 저 사람들은 공원에 산책, 소풍을 나온 사람들이 아닐까 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부락이라고 해도 대박이 아닌 이상 2, 300골드를 넘기는 힘들 텐데.’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 중 한 명의 등을 보고서야 사정을 알 수 있었다. 클랜 문양이 있는 걸로 보아 제법 실력 있는 전투 사용자들인 모양이다. 클랜에 들 수 있을 정도라면 일반 고블린들 정도는 가볍게 상대할 수 있을 터. 그렇다면 아마 공돈을 벌었다는 이야기인 듯싶었다. 아무튼 나와는 상관없는 말들이었기에, 이만 신경을 끄기로 했다. 나는 곧장 지도를 들어 대강 방향을 가늠한 다음 맨 왼쪽에서 두 번째로 나있는 길로 원정대를 이끌었다. 일단 최소 오늘 하루는 아무리 걸어봤자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0%에 수렴하기 때문에, 급속 행군을 하더라도 최대한 진도를 뺄 생각이었다. “지금부터 급속 행군을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뒤처지지 않도록 신경 써서 따라와주세요.” 뒤를 돌아보며 속도를 높일 것을 주문한 후, 나는 느긋하게 걷던 걸음의 템포를 서서히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 걸음 속도에 비례해 대지를 구르는 발소리들의 주기도 점점 짧아지는걸 느낄 수 있었다. 한동안 우리들은 거의 말도 나누지 않은 채 행군에 집중했다. 애들에게 맞춰주는 게 아닌, 내 능력치들에 맞춰 속력을 조절해서 그런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쭉쭉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아니 우리들은 거의 가벼운 달리기 수준으로 한없이 걷고 걸었다. 약 여섯 시간 정도 지났을까. 그 동안 단 한번도 쉬지 않고 급속 행군을 유지해서 그런지, 뒤에서 거칠게 몰아 쉬는 숨소리가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잠깐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침에 출발할 때만해도 구름 속에 숨어있던 해는 어느새 완연히 모습을 드러내어 따가운 햇살을 내리쬐고 있었다. 콧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상쾌한 공기 속에 클랜원들의 땀 내음이 섞여 들어올 즈음, 이쯤이면 됐다 싶어 조금씩 걸음을 늦추어주기로 했다. 내가 행군을 멈추고 휴식을 선언한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이 더 흐른 후였다. 현재 우리들이 멈춘 곳은 땅이 비탈지고 조금 높이 솟아오른 곳, 즉 언덕이 듬성듬성 올라와있는 삼림의 초입이었다. 그 중 하나의 언덕위로 올라서자 빽빽하게 모인, 키 큰 나무들이 시야를 가렸다. 먼저 위에 올라서 주변을 살피는 동안, 곧 땀으로 젖은 머리를 찰랑이는 클랜원들이 하나 둘 올라오는걸 볼 수 있었다. 순간 아래서 들리는 찰박이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내리자, 넓고 오목하게 팬 땅에 물이 괴어있는 곳에, 고연주가 발을 담근 채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는 나를 보며 활짝 웃고는 양 손을 흔들었다. “학, 학.” “하앙, 하앙.” “학, 야. 너 무슨, 숨 차는 소리가, 그러냐. 꼭, 헐떡이는, 소리 같잖아, 학.” “하앙, 시끄러워. 힘들어, 죽겠는데. 왜, 꼴리냐? 하앙.” 안현과 이유정이 서로 투덜거리며 언덕에 오른다. 작정하고 달린 거라 따라올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근접계열이기도 하거니와 그 동안의 단련이 헛되지는 않은 듯싶었다. 이윽고 둘이 천천히 심호흡을 할 즈음, 아래쪽에서 조금 쉬다 왔는지 안솔, 백한결, 김한별이 차례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래서 숨은 골랐는지 호흡은 괜찮아 보였지만, 세 명 모두 체력이 약한 클래스들이라 얼굴이 하얗게들 질려있었다. 안현은 연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기를 반복하다가, 곧 괜찮아졌는지 조금은 진정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형. 이번 행군 속도 정말 장난이 아닌데요?” “알고 있어. 그래도 당분간은 이 속도를 유지할거야.” “헐. 무, 물론 저나 이유정은 괜찮겠지만 말이죠. 다른 클랜원들이 따라올 수 있을까요?” “다른 클랜원들?” 안현의 말에 흘끗 시선을 던지자, 세 명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따라갈 수 있으니 괜찮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하자, 안현은 멀뚱한 얼굴로 눈만 끔뻑거렸다. 이곳이 위험 지역이거나 미개척 지역이었다면 체력 관리에 신경 쓰며 행군했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그때를 대비한 체력은 남겨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모니카는 안정화가 굉장히 잘 되어있는 지역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그저 안정 지역을 빠르게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었다. 지금 내가 이리도 서두르는 이유를, 클랜원들은 아마도 먼저 들어간 사용자들의 구조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환각의 협곡에 있는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나는 클랜원들에게 10분뒤 출발이라고 말해준 후(여기서 누군가의 소리 없는 비명이 들린 것 같았다.) 그대로 아래를 향해 훌쩍 뛰어내렸다. 팍! 이리저리 흩어진 나뭇잎을 지르밟고 굽힌 무릎을 세우자, 고연주가 여전히 물에 발을 담근 채 나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 알아낸 거라도 있나요.” “네. 적어도 지금까지는 제대로 왔어요. 정말 대단해요. 이 속도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흔적을 쫓다니.” “대충 가늠했을 뿐입니다. 그림자 여왕에 비할 바는 아니에요.” “호호.” 살짝 띄워주자 고연주는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간드러지게 웃었다. 그리고 발을 거둬 신발을 신고는, 펄쩍 뛰어올라 공중제비를 돌았다. 이윽고 그녀가 착지한 곳은, 아주 살짝 이기는 했지만 한쪽 방향을 가리키는 풀들이 듬성듬성 돋아난 곳이었다. 고연주는 가볍게 쓱, 땅을 훑더니 고개를 주억이며 입을 열었다. “여울가녘은 10명. 그리고 1차 구조대는 14명으로 구성되어있었네요. 멍청이들.” “다른 흔적은 없나요?” “있어요. 하지만 방향이 이리저리 비틀려있네요. 이스탄텔 로우에서 얘기해준 시기와 맞춰 생각해보면 제가 보고 있는 흔적들이 맞을 거예요.” “그럼 일단은 이 방향을 따라 삼림을 나서고, 다시 흔적을 찾아야겠군요.” 나는 시선을 동쪽 방향으로 돌렸다. 지도에 나온 거리에 따르면 지금부터 대략 하루 정도는 걸려야 벗어날 수 있겠지만, 현재 속도를 유지할 수 있다면 반나절도 가능할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삼림을 벗어난다면, 그나마 덜 안정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통곡의 평야가 나온다. 속으로 이런저런 주판을 튕기고 있자, 언덕 위에 있던 클랜원들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분명 아래서 쉬고 있으라 했는데, 어차피 내려올 거면 왜 따라 올라온 걸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내려온 클랜원들을 정렬시켰다. “안현 선두. 안솔, 백한결 중앙. 김한별은 둘 바로 뒤로. 이유정은 후방으로. 고연주? 키퍼로 들어가세요.” 그리고 신속하게 진이 잡히는 순간, 곧장 급속 행군을 재개했다. 출발한다는 소리와 함께. * 어느새 해는 저물었고, 그 자리를 대신해 거울 같은 달이 떠오른다. 어둑한 땅거미가 대지를 점령하려고 그러는지 달빛과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결국 우리들은 꼬박 하루의 대부분을 급속 행군한 덕분에, 울창한 삼림을 벗어나 통곡의 평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솔직히 야간 행군도 해볼까 생각해봤지만, 오늘 걸어온 거리가 충분하기도 했고 아직 햇병아리에 불과한 백한결을 위해서라도 이쯤에서 멈추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한결. 확실히 뭔가 있는 놈이었다. 아직 익숙지 않은 만큼 한두 번은 낙오할 법도 한데, 오히려 이를 악물며 아무런 불평 않고 따라왔다. 그 점이 나를 조금이나마 감탄하게 만들었다. 야영 장소를 고르는 데는 딱히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평야 한복판에 있는 만큼 거기서 거기라고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원정용 마정석을 사방에 깔아 야영 준비를 마친 후, 우리들은 간만에 솜씨를 발휘한 고연주 덕분에 저녁을 해결할 수 있었다. 저녁을 먹자 급격히 졸음이 쏟아지는지 안솔과 백한결은 사이 좋게 고개를 꺼뜨렸다. 누가 누가 가장 체력이 낮을까 대결을 시킨다면 둘이 1, 2순위를 다툴 것인 만큼, 약간의 배려를 해주어 불침번의 마지막 순서로 돌려주기로 했다. 타닥, 타닥. 혹시라도 화재가 날 우려가 있어, 풀들을 제거하고 약간 파둔 구덩이 안의 나뭇가지 사이로 은근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안솔, 백한결은 각기 침낭 안에 쏙 들어가 색색 숨을 내쉰 지 오래였다. 고연주와 이유정은 다음 불침번 차례이기 때문에, 방금 전 잠자리에 든 상태였다. 깊은 밤. 오직 나, 안현, 김한별만이 아무 말도 없이 둥그렇게 둘러앉은 모닥불만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물끄러미 모닥불만 보던 안현이 고개를 들었다. “형.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그게요. 회의에서 형이 환각의 협곡에….” 아아아아아아…. 그때, 평야의 바람을 타고 누군가 통곡하는 소리가 귓가로 흘러 들었다. 막 말을 이으려던 안현도, 무릎을 끌어안은 채 눈만 빼꼼 내밀던 한별이도. 둘 모두 그 소리를 들었는지, 움찔한 모양새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잠시 고개를 들어 달의 모양을 확인하고는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계속 말해.” “아, 아니. 방금 전 분명 울부짖는 소리가….” “아까 말해줬잖아.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통곡의 평원이라고. 별거 아니니까 신경 꺼.” “으으. 귀신이에요? 귀신은 싫은데.” 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고 하려다가, 한별의 목 울대가 꿀꺽 움직이는걸 보고 그냥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안현은 엄살이 아닌 듯, 입술을 침으로 적시며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씨. 괜히 신경 쓰이네.” “별거 아니라니까. 원래 이런 곳이야. 통곡의 평원은 굉장히 넓은 지역이거든. 아. 어떻게 보면 이곳의 특성은 굉장히 재밌는 곳이라고 할 수 있어.” “어떤 특성이 있는데요?” “아주 가끔씩 그냥 까닭 없는 통곡이 평원 전체로 메아리 친다는 거지. 하하. 너무 그렇게 겁먹지 말라고. 이곳은 그래도 꽤나 안정화가 진척된 곳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아마 한번 울리면, 적어도 몇 시간은 잠잠 할거다.” “아 그래요? 그러면 뭐….” 아아아아아아. 그러나. 그런 내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곧바로 또 한번의 통곡이 야영지 주변을 아련하게 울린다. ‘어라. 두 번?’ “…….” “…….” 안현과 김한별의 시선이 내게로 모인다. 내가 잘못 들었나 잠시 생각할 즈음, 푹 자고 있는 줄 알았던 누군가가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 느껴졌다. 일어난 사람은 고연주였다. 그녀는 막 잠이 들려다 깨서 짜증이 났는지,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주변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현. 방금 소리 들었어요?” “들었습니다.” “몇 번 들었나요?” “두 번입니다.” 고연주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있었다. 그러나 두 번이라고 대답한 순간, 그녀는 튕기듯 일어나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 상태 그대로, 고연주는 한번 더 입을 열었다. “가끔씩 들리는 한번은 아무 이상 없는 거고. 두 번째 통곡은…. 아 뭐였더라.” “통곡의 평야 어딘가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는 신호죠. 위험 경고입니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안현과 김한별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네들에게도 일어나라는 신호를 주며, 허리춤에 맨 일월신검에 손을 가져간 순간이었다. 아아아아아악! 어느 때보다 확실한 통곡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비단 나만 들은 게 아니었다. 지금 깨어있는 모두의 안색이 급격히 굳어가고 있었다. “세 번째네요. 이건….” 확실하게 잠이 깼는지, 고연주의 목소리는 원래대로 되돌아와있었다.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말을 매듭지어주었다. “안 좋은 일이 일어난 곳에서. 누군가 죽었다는 소리입니다. 안현, 김한별. 지금 자고 있는 사람들 모두 깨워라.”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아, 정말 감사합니다. 리리플을 못해드려서 정말 죄송했는데, 많은 독자 분들이 이해해주셔서 그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_(__)_ 공부 열심히 하고, 시험 끝나면 간간이 연참도 하도록 하겠습니다! 0249 / 0933 ---------------------------------------------- 부수입 ‘이대로 대기할까, 움직일까.’ 세 번의 통곡이 메아리쳤다. 이 말인즉슨 통곡의 평야 어딘가에서 누군가 살해당했다는 소리였다. 통곡은 사건이 발생한 뒤에 울린다. 일단 우리는 무사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문제는 사건이 발생한 장소를 알아내기 어렵다는 점에 있었다. 사건 장소가 야영지에 가까이 있을지, 아니면 멀리 있을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안솔…. 백한결…. 이유정…. 빨리 일어나….”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간다는 걸 느꼈는지, 안현은 소란을 피우지 않고 조용히 애들을 깨우고 있었다. 잠시 주변의 기척을 향해 귀를 기울이다가, 나는 고연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고연주도 딱히 걸리는 건 없는 모양이다. 한동안 주변을 살피던 그녀는 곧 어두운 낯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일단 주위에는 없는 것 같아요.” “방심하지 마요. 혹시라도 그녀가 나타났다면 거리의 유무는 큰 의미가 없어져요.” “그녀요?” “통곡하는 소녀.” 나는 짧게 답해준 후 일월신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한별이는 언제 꺼냈는지, 왼손 손가락에 보석을 알알이 끼고 있었다. 곧이어 그녀는 내 옆으로 바짝 다가오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빠. 통곡하는 소녀라뇨? 상황 설명을 조금만 해주시면 안될까요?” “일단 지금 뭔 일이 일어났다는 것 정도는 이해하고 있지?” “네. 아까 누군가 죽었다고….” “그렇지. 그러면 살해 상황은 총 세가지 상황으로 나눌 수 있거든? 첫 번째. 사용자가 같은 사용자한테 살해당했을 경우. 두 번째. 사용자가 몬스터한테 살해당했을 경우. 세 번째. 어떻게 보면 두 번째 경우와 비슷하기는 한데. 통곡의 평야를 떠도는 망령, 통곡의 소녀에게 공격 당했을 경우. 뭔 소린지 알겠어?” 평소보다 빠른 말로 대답했기에 알아들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한별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주변만 경계하는 상태로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사위는 한없이 고요해져만 갔다. 고연주는 사방을 관찰하는 자세 그대로 뒷걸음질치더니 이내 내 쪽으로 거리를 줄이며 물었다. “하지만 통곡의 소녀는 사람 앞에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이 드물다고 알고 있는데요. 일부러 자극하지 않는 이상 큰 해를 입진 않을 터인데….” “그렇죠.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녀를 화나게 했을 경우 뒷감당을 해야 한다는 소립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통곡의 소녀를 화나게 했다는 소린가요? 어떻게요?” “그냥 가능성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리고 방법이야 많겠죠.” “그럼….” 고연주가 말을 이으려는 찰나, 누군가 옆에서 급하게 뛰어오는 기척을 느꼈다. 아마 애들을 깨우러 간 안현인 듯싶었다. “형! 큰일났어요!” “뭔 큰일. 그리고 조용히 말해.” “아, 네. 다른 게 아니고 지금 안솔이 이상해요.” “솔이가…? 아직 안 깨어났어?” “아뇨. 깨긴 했는데 깨자마자 헛소리만 자꾸….” 그 말을 들은 즉시, 애들이 자고 있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백한결과 이유정은 진작에 일어났는지, 각자의 장비를 들고 슬금슬금 물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안솔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상태였다. 침낭에 들어가 상반신만 일으킨 채 멍한 눈동자로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그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안솔?” “…….” “안솔. 대답해라.” “늦었어요.” 밑도 끝도 없는, 말 그대로 뜬금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안솔의 말을 듣는 순간, 뭔지 모를 섬찟한 기운이 등골을 쭈르륵 훑으며 내려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온 몸으로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건….’ 예전에 아카데미서, 백한결을 찾으러 갈 때 느꼈던 기운. 마음속으로 복잡한 감정이 일었지만 나는 그러한 감정들을 재빠르게 가다듬었다. 이미 안솔의 불안감지 효과는 증명된 바가 있다. 그렇다면, 일단은 당면한 일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다. “뭐가 늦었다는 소리지?” “둘 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봐.” “기다리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뭐….” 안솔이 꺼낸 말은, 내가 방금 전 했던 생각들과 거의 비슷했다. 속으로 밀려드는 놀라움에 가슴이 먹먹해지려는 찰나, 한줄기 바람이 야영지 주위를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그때였다. 스스스스스스…. 어두운 평야에서 수풀을 가르는 소리가 적막한 밤하늘을 울렸다. 그 소리는 너무도 미약해 언뜻 들으면 바람소리처럼 들릴지 몰라도, 나는 아까부터 청각을 예민하게 만들어 논 상태였다. 소리의 진원지는 야영지로부터 제법 떨어져있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 소리가 이곳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스스스스스스스스. “웅…? 오라버니?” 이제 약발이 떨어졌는지, 안솔은 몽롱한 눈길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안솔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어 그녀를 끌어내고는, 클랜원들이 있는 곳으로 곧장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하체를 질질 끌리면서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만 갸우뚱 기울였다. “수현. 뭔가 오고 있어요.” “저도 들었습니다. 모두 방진으로. 전투 준비.” 조용히 뇌까리듯 말했지만, 클랜원들은 착실히 내 명령에 따라주었다. 각각의 무기가 뽑히는 차가운 소리가 귓가로 흘러 들었다. 그 와중 한별이 라이트 마법을 준비할지 물었지만, 그냥 준비만 해두라는 말로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스스스스스스스스스스! 처음 소리가 우리와 떨어져있던 거리는 삽시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신속하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애매모호한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클랜원들의 귀에도 뭔가 걸리는 게 있는지, 모두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김한별과 안솔이 조용히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리고, 그로부터 조금의 시간이 더 흘렀을 때였다. “마, 맙소사.” 스슥, 스슥! 스슥, 스슥! 스슥, 스슥! 스슥, 스슥! 아직 거리는 남아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리고 우리가 동시에 시선을 돌린 곳에서는 소리를 내는 범인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정체는 바로 다름아닌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람이었지만. 서서 걸어오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대지에 몸을 붙인 채, 드러누운 자세 그대로 미끄러지듯 달려들고 있었다. “저, 저게 뭐야? 사람…? 꺅!” 유정은 더욱 자세히 보려고 했는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가, 순간 비명을 지르며 다시 걸음을 물렸다. 우리를 향해 일직선으로 쇄도하던 사람이 야영지를 앞두고 순간적으로 방향을 비틀었기 때문이다. 옆구리 부분이 곡선으로 휘고, 그와 함께 흉부와 복부가 파도 치듯 순간적으로 꿈틀거렸다. 나는 당황하는 클랜원들을 추스르며 가만히 그 움직임을 관찰했다. ‘누군가에게 끌리고 있다.’ 안력을 돋우며 모습을 자세히 살피자 몇 가지 이상한 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사용자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몸의 이곳 저곳이 심하게 훼손되어있었고, 입에서는 검붉은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었다. 부릅뜬 눈이 닫히지 않는 걸로 보아 이미 절명한 것처럼 보였다. 스슥, 스슥! 스슥, 스슥! 스슥, 스슥! 스슥, 스슥! 놈은 곧바로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간을 보는 것처럼 야영지 주위를 S자로 옮겨 다니며 이리저리 배회하고만 있었다. 그 와중에 덜렁덜렁 달려있던 팔 하나가 뜯어지고, 발목도 데구루루 구른다. 가히 그로테스크한 광경이라 할 수 있었다. “야, 야! 너 마법사잖아! 저거 어떻게 좀 해봐!” “네, 네?” 안현의 말에 깜짝 놀랐는지, 김한별을 말을 더듬다가 내게로 시선을 돌리며 허락을 구하는 눈초리를 보냈다. 나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맞출 수 있어?” “네?” “100% 맞출 수 있냐고. 참고로 쟤한테는 유도 마법도 안 통한다. 저 정도 기동이면 어지간한 좌표 계산이 아니면 빗나갈 거다.” “그, 그럼….” 맞출 수 있냐는 말에 자신이 없는지, 김한별의 얼굴에 무거운 빛이 스쳤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앞으로 나섰다. 지금 저 움직임은 너무도 빨라, 하연이 있었다고 해도 자신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앞으로 나서자 등 뒤로 “수현. 제가 할까요?” 라고 말하는 고연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용맹의 투구를 고쳐 쓰며 연신 목 울대만 움직이는 안현에게 왼손을 내밀었다. “창 줘봐.” “네?” “창 좀 잠깐 빌려달라고.” “아, 네.” 놈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야영지 주변만 뱅뱅 도는 게, 조금이 틈만 보이면 곧바로 달려들 것이다. 나는 왼손으로 받은 창을 오른손으로 넘긴 후 왼발을 앞으로 크게 내밀었다. 참고로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 하나가 뭐냐면. ‘별것도 아닌 놈이 앞에서 까불어댈 때.’ 창을 든 오른팔을 살짝 뒤로 젖히자, 자연스레 몸의 방향이 오른쪽을 따라 곡선으로 휘었다. 그 상태를 이으며 왼발이 땅에 닿는 순간, 나는 미리 계산해둔 지점을 향해 들고 팔을 크게 내리쳤다. 쐐액! 오른손과 팔이 일직선으로 뻗어지고, 칠흑의 창은 어둠을 날카로이 가르며 곧게 뻗어나갔다. 명중에 중점을 두느라 많은 힘을 싣지는 않았지만, 워낙 근력 능력치가 높다 보니 공기를 찢는 파공음도 무시 못할 정도였다. 이윽고 내가 예상한 진로에서 선회를 하느라 놈의 기동이 잠시 멈추는 순간. 푹! 칠흑의 창은 여지없이 사용자의 몸을 꿰뚫었다. 그 여파로 남아있는 팔과 다리가 허공으로 치솟음과 동시에, 놈의 움직임도 거짓말처럼 정지하는걸 볼 수 있었다. “오, 명중! 형! 잡은 거예요?” “아니, 아직 살아있다.” “그럼….” “약간이지만 타격은 입었을걸. 이제는 직접 나오게 만들어줘야지.” 이미 아까부터 제 3의 눈과 마력 감지는 활성화해둔 상태였다. 나는 클랜원들에게 가만히 있으라 지시한 후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움직임을 멈춘, 누워있는 사람의 몸이 조금씩 크게 보이고 있었다. 왼쪽 허리춤에 꽂아둔 일월신검을 빼어 들자 시원한 소리와 함께 눈부신 검광이 주변을 적신다. 지금을 달빛이 충만한 만큼, 사기 (邪氣)로 물든 놈을 상대하는 데는 이만한 것도 없으리라.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갔음에도 불구하고, 사용자의 몸은 미동도 없었다. 잠시 어떻게 할까 고민했지만 곧 좋은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놈에게 달빛에 반사된 검광을 몸이 쓰러진 장소 주변에 잔뜩 뿌려주기로 했다. “가르르르륵!” 효과는 확실했다. 일월신검에 반사된 달빛이 사용자의 몸을 이곳 저곳 비추자, 견디지 못하겠는지 곧바로 신호가 온 것이다. 곧 쓰러진 사용자의 몸 아래서 뭔가 검은 인영이 하나 쑥 튀어나왔고, 나는 놈이 오는 방향으로 왼발을 내밀어주었다. 이윽고 양 손이 땅을 급하게 헤집는 소리와 함께 놈이 입을 쩍 벌리며 내밀어진 왼발을 노리고 들어오는 것을 확인했다. 나는 차분히 발을 뒤로 빼며 유인했다. 그리고 놈이 내 발목을 노리고 쫓아 들어왔을 즈음, 곧바로 칼을 아래로 찍어 내렸다. 푸슉! “카라라라라!” 연한 맛은 없었지만 그래도 썩은 통나무는 뚫는 느낌은 받을 수 있었다. 고개를 내려 자세히 살피자, 목 부분에 칼이 박힌 채 몸부림치는 머리긴 소녀 한 명이 보인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살가죽이 너덜너덜해 뼈가 보일 정도고 하체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그 말인즉슨 양 팔로 땅을 짚으며 그 정도의 속도를 냈다는 소리였다. 수족관에 갇힌 물고기를 퍼 올리듯 검을 들어올리자, 검 등에 꿰뚫린 채 아우성을 치는 모습을 더욱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흑!” “끄, 끔찍해….” 클랜원들의 눈에도 보였는지, 탄식이 담긴 목소리들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얘가 바로 통곡의 소녀구나.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데.’ 1회 차에서는 이름만 들었지,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몰골은 1회 차의 명성만큼 확실히 끔찍했다. 눈동자는 어디 갔는지 퀭한 눈구멍만 자리잡고 있었고 코는 짓뭉개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입은 검게 변색한 잇몸이 훤히 노출되어있었는데, 그 주위로 검붉은 진득한 액체와 살점 찌꺼기들이 번들거리며 끼어있었다 곧이어 고개를 내려 실종된 허리 아래로 뭔가 주렁주렁 매달린 줄기를 확인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혀, 형! 조심하세요!” “응?” 안현의 경고에 고개를 올리자, 검 등을 쭉 타고 내려오며 이빨을 부딪치는 통곡의 소녀가 보였다. ‘어이쿠.’ 그 동안 쌓인 사기 또는 원혼이 꽤 되는지 일월신검에 뚫린 상태서도 제법 활기차게 움직이는 모양이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태연히 벌려진 입 사이로 손을 넣어주었다. 그러자 망령은 얼씨구나 하며 내 손을 콱 깨물었다. 탁! 이빨과 장갑이 부딪치는 소리. 패기는 마음에 들었지만, 애초에 내구와 TOPG를 뚫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그대로 손을 우그러뜨리며 살짝 힘을 주었다. 뿌각! 뿌가각! 이빨이 부서지는 감촉이 장갑을 타고 내부로 짜릿하게 전해져 들어온다. 그렇게 입 안을 완전하게 박살낸 후, 손을 툭툭 털자 이빨 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방방 허공을 휘젓는 손을 손수 감싸 쥐어, 똑같이 바스러뜨려주었다. ‘이 정도면 됐나?’ 이빨을 박살냈고, 양 손도 조각 냈으니 설령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공격 수단은 상실한 것과 마찬가지일터. 나는 한결 안심한 마음으로 검 손잡이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렇게 혹시 다른 위험한 게 있나 살펴보다가, 나는 왼손으로 통곡하는 소녀의 머리채를 쥐어 올렸다. 그리고 멍한 얼굴로 나를 보는 클랜원들을 향해 내밀며, 자랑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잡았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네. 요즘 들어 이상한 소문이 들리더군요. 제 이름이 로유미고, 성별이 여자라는 소문이요. 후…. 독자 분들. 저는 본명이 로유미도 아니고, 성별이 여자도 아닙니다. 엄연한 남성입니다. 항공모함급 모함에 속지 않으실 거라 믿었는데, 코멘트를 보고 많은 슬픔을 느꼈습니다. 정말 하체 인증이라도 해야 믿어주실는지요…. 0250 / 0933 ---------------------------------------------- 부수입 한 손으로 머리채를 쥐어 들어올리자 애들이 흠칫한 얼굴로 한 발짝 물러났다. “아까 얘기해줬지? 얘가 통곡하는 소녀야. 나도 실물은 처음 본다 야.” “오, 오빠!” “?” “그것 좀…. 으….” 이유정은 통곡하는 소녀를 보다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비단 이유정뿐만이 아니었다. 클랜원 대부분의 얼굴에는, 못 볼걸 봤다는 표정이 띄워져 있었다. 그 중 오직 고연주만이 처음의 담담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소녀를 향해 시선을 흘끗 던지고는 이내 시체가 있는 쪽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얘가 그렇게 무섭나?’ 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쥐고 있던 왼손을 풀고, 꽂아놨던 검을 더욱 가까이 가져왔다. 통곡의 소녀는 예의 그로테스크한 모양새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리 심한 거부감이 들지는 않는다. 앞을 향해 다시금 시선을 던지자, 여전히 두려움에 물들어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두려움. 확실히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잠재되어있는 공포에 대한 불안감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 또한 인간인 이상 공포,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갖고 있다. 다만 내가 애들과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공포를 느끼게 되는 한계선이 다르다는 것. ‘지옥 최하층까지 떨어졌을 때. 그때 진짜 죽여줬는데.’ 팔열 지옥 중 최하층을 담당하는, 가장 악질적인 녀석들만 모여있는 무간 지옥. 나는 그곳에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적인 면에서 온갖 공포를 느껴야만 했다. 개인적으로 1회 차 홀 플레인 활동 중 최고의 행운을 지옥에서 다시 생환한 것을 꼽을 정도로, 그곳은 끔찍한 곳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항상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게 했던 지옥의 사자들과 비교하면 통곡하는 소녀는 그냥 애완용 토끼 수준이었다. 들고 있던 일월신검을, 반 바퀴 정도 비틀어 뽑아내자 통곡하는 소녀가 아래로 툭 떨어진다. 땅으로 떨어진 직후 남아있는 상반신은 삽시간에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완전히 회색으로 변한 몸을 가볍게 걷어차자 그것은 이내 한줌 부스러기가 되어 허공으로 흩날렸다. 웅장하게(?) 등장한 것 치고는 초라한 퇴장이었다. “혀, 형. 죽은 거예요?” “글쎄다.” “네?” “고연주. 뭐 알아낸 거라도 있나요?” 고연주는 쭈그려 앉은 상태로 시체를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내 물음에 허벅지를 짚고 힘차게 일어서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별로 특이한 건 없어요. 이리저리 심하게 물어 뜯긴 걸로 보아 통곡하는 소녀에게 당한 건 확실한 것 같은데….” “뭐 건질만한 건?” “개털이에요. 애초에 시신 훼손이 너무 심해요.” “쯧.” 혀로 애꿎은 어금니만 핥고 있자 고연주는 내게 팔랑팔랑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실 거예요?” “뭘 어떻게 해요.” “나도 설마 통곡하는 소녀를 그렇게 무식…. 아, 아니 그렇게 잘 잡을 줄은 몰랐거든요. 일단 일말의 위험은 없어지긴 했지만, 아무래도 저 남자 혼자 당한 것 같지는 않네요.” “흠….” 확실히 고연주의 말이 맞다. 정신 나간 사용자가 아니라면 이 밤에 혼자 탐험을 나올 리가 없으니까. 나는 잠시 동안 고민하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통곡의 소녀가 여기까지 온 흔적은 잡을 수 있겠군요.” “두말하면 잔소리죠.” “뭐, 어차피 오늘밤은 잠자기도 그른 것 같으니….” 깨어있던 애들은 물론, 한창 달게 자다가 일어난 애들도 잠이 싹 달아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그냥 다시 자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뭔가 정황이 미묘한 게 없잖아 있었다. 그러면 일단 흔적을 쫓아보고, 그 흔적이 길어진다면 그때 중지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 안되면 그대로 야간 행군을 하면 되겠지.’ 속으로 애들이 들으면 비명을 지를 생각을 하며, 나는 야영지를 향해 살짝 고개를 까닥였다. “야영지 정리하자.” * 야영지를 정리한 후 우리들은 고연주를 앞세워 통곡의 소녀가 들어온 길을 되짚어갔다. 그녀의 추적 능력은 확실히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아직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행군을 단 한번도 멈추는 것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다행히 추적은 우려했던 만큼 엄청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냥 이쯤에서 포기할까 생각이 들 즈음, 야영지를 발견한 것 같다는 고연주의 보고를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공기중의 냄새를 맡다가, 대지를 자세히 살피다가 하더니 이내 손가락을 들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 보이시죠? 풀이 다른 곳보다 짧게 눌린 곳. 아무래도 저기인 것 같은데요.” “음. 가봅시다.” 고연주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가자 곧이어 고요한 평원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참한 광경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거리가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이리저리 널브러져있는 시체들과, 산산이 부서진 야영용 마정석이 더욱 눈에 밟히고 있었다. “와.” “으악!” 이윽고 야영지에 가까이 다가서자, 역한 피비린내가 코를 찔러 들었다. 눈 앞에 벌어진 참혹한 광경에 몇 명은 할말을 잃었고, 또 몇 명은 약한 비명을 질렀다. 그 동안 잘 참아오던 백한결도 이번에는 도를 넘어섰는지 결국 그 자리에서 엎드려 구토를 하고 말았다. 야영지에는 총 세 명의 사용자가 쓰러져있었다. 남성 두 명, 여성 한 명. 즉 아까의 남성까지 합하면 총 네 명으로 구성된 캐러밴이 평야에 있었다는 소리였다. 두 명의 남성 중 한 명은 목이 크게 뜯겨져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복부의 장기가 줄줄 흘러나올 정도로 파헤쳐져 있었다. 그래도 둘의 사체는 여성의 시체에 비하면 그나마 낫다고 볼 수 있었다. 하얀 사제 복을 입고 있는 여성의 경우는 아예 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찢겨진 사제 복 사이로 드러난 젖가슴은 크게 물어 뜯겨진 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주변에 흩어진 눈알, 살점 등의 파편 조각들을 보면 이들이 어떻게 당했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조금 이상하네요. 복장을 보면 그렇게 실력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 “통곡의 평야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필드입니다. 통곡하는 소녀를 자극하면 안된다는 걸 몰랐을 리는 없는데.” “자극하는 것 자체가 어렵잖아요? 애초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도 않는다고 들었어요.” “피해 상황이 아주 없는 건 아닐 겁니다. 바바라의 도서관에 있는 예전 기록들을 살펴보면 몇 번 피해를 입은 사례가 있어요. 그래서 통곡의 소녀를 자극하지 말라는 말이 나온 겁니다.” 고연주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반박하기는 했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지금 상황을 놓고 보면 이들이 일부러 통곡의 소녀를 자극했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때 백한결의 등을 두드려주던 김한별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사용자들도 피해자가 아닐까요?” “응? 피해자?” “네. 자세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해야 아귀가 맞아 떨어질 것 같아서….” “피해자라고….” 만약 그렇다면, 통곡의 소녀를 자극한 누군가가 어그로를 일부로 이들에게로 돌렸다는 소리였다. 일리는 있는 소리였다. 그럼 그런 짓거리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용자의 소행일까?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으로 떠오른다. 정보는 부족하고 열려있는 방향은 너무도 많았다. 나는 일단 이쯤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여기서 더 머무른다고 해도 추가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대로 더 이상 시간낭비를 하느니, 통곡의 소녀로 인해 어그러진 계획을 최대한 원위치 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그냥 돌아가기는 아쉬워 뭐 챙길 거라도 없나 살펴봤지만, 안타깝게도 개털이었다. 입고 있는 장비들을 벗기려고 해도 대부분이 심하게 훼손된 상태라 거의 쓰레기 수준이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한숨을 쉬었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 어스름한 새벽빛은 평야 전체를 비추어 서서히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날이 샐 무렵에 끼는 안개로 인해 시야가 조금 제한을 받았지만, 행군에 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시체들이 있는 야영지를 벗어난 이후로 나는 결국 야간 행군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최대한 빨리 통곡의 평야를 벗어날 셈이었다. 클랜원들의 얼굴에는 피로감이 가득했고, 분위기는 무거웠다. 당장 몇 시간 전에 끔찍하게 살해당한 시체를 봐서 그런지 다들 말없이 묵묵히 내 뒤를 따르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럼 이쯤에서 잠시 휴식할까.” 그저 걷기만했던 야간 행군이 상당히 힘들고 지루했는지,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안솔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예전 같으면 너무 힘들다, 못 따라가겠다 징징거렸을 터인데, 그래도 이번에는 군말 없이 따라오는걸 보니 조금이나마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저, 저기. 클랜 로드님. 물 드세요.” “어. 한결아? 속은 좀 괜찮아?” “네, 네. 괜찮아요. 익숙해지려고 노력 중이에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헤헤.” “큭. 그래. 물은 고맙다.” 백한결은 현재 자신의 처지를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성능 좋은 시크릿 클래스 신의 방패라고 해도, 현재는 자신의 능력이 제일 낮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전투에 도움이 되지 못하니 다르게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고 행동하는 것 같았다. “아이고 힘들다.” 백한결에게 물을 한 병 건네 받은 안현은, 죽는 소리를 내며 내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넘기다가 문득 모닥불에서 안현과 나눴던 말들이 떠올랐다. “안현.” “네?” “그러고 보니 너 아까 나한테 물어볼게 있다고 하지 않았냐. 모닥불 앞에서.” “아아. 그거 실은 별거 아니었어요. 그냥 환각의 협곡에 정말로 유적이 있을까 궁금해서요.” 안현은 정말 별 것 아니었다는 말투로 싱겁게 웃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클랜원들은 다들 말없이 이곳 저곳에 앉아있었다. 애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어두운 그림자가 그늘지어있었다. 이 밍밍한 분위기를 쇄신할 겸, 그리고 휴식 시간도 때울 겸 나는 한가지 이야기를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 보니 환각의 협곡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가 있는데. 들어볼래?” “형 말이면 당연히 들어야죠. 피가 되고 살이 되는데요. 어떤 이야기인데요?” “홀 플레인 고대 기록.” “고대 기록? 신화나 전설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슬쩍 시선을 돌리니, 내 쪽을 향해 모여드는 시선과, 쫑긋쫑긋 움직이는 귀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미미한 웃음과 함께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초반부는 별것 없는 이야기였다. 그냥 어디 흔한 동화나 소설에서처럼, 고대 홀 플레인 의 대륙에는 위기가 있었고 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용사들이 모였다. 인간 검사, 인간 사제, 인간 마법사, 요정 궁수, 용족 마법사 등등 여러 명의 실력 있는 용사들. 그들은 숱한 고난과 역경을 헤치며 결국 마지막 관문인 악의 세력과 대결했고, 마침내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결국 홀 플레인 의 대륙은 평화를 되찾았다는 내용이었다. 안현은 처음에는 진지한 얼굴로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홀 플레인 이 평화를 되찾은 후, 용사들의 대장이었던 인간 검사와 궁수를 맡은 요정 여왕이 약혼식을 올렸다는 말을 듣자 김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에이. 뭐에요. 되게 흔한 얘기잖아요.” “여기까지는 그렇지. 그런데 정말 재밌는 점은,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점이야. 아까 내가 말해줬던 인간 마법사 기억나니?” “음. 마지막 전투에서 용사들 대부분이 죽었고, 살아남은 이들 중 한 명이었죠?” “그렇지. 영웅, 요정 여왕, 대마법사, 성녀. 이렇게 총 네 명이 살아남았거든. 그런데 기록을 보면 대마법사가 요정 여왕을 남몰래 흠모했다는 내용이 몇 번 나와.” 안현은 아직까지 물을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금 손을 놀려 물 뚜껑을 열려다가, 이어진 내 말에 다시 멈추고 말았다. “에에. 대마법사 엄청 늙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요정도 나이가 많은가? 그래도 외관상 차이가 심할 것 같은데…. 아무튼 그 후의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데요?” “둘의 약혼식이 끝난 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영웅과 요정 여왕을 자신의 본거지로 초대하지. 그곳이 바로 환각의 협곡에 있는, 협곡 도시라고 하더라고.” “오호. 그렇구나. 그리고요?” “그게 끝이야.” “네?” “뭐라고요?” 대답은 한 명에서만 나오지 않았다. 다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 이야기에 푹 빠져있었는지, 허무한 결론이 나오자 맥이 빠지는 모양이었다. “영웅과 요정 여왕은 기꺼이 대마법사의 초대를 받아들였어. 그리고 환각의 협곡으로 들어갔지. 그게 끝이라고. 그 이상의 이야기는 없어. 이제 왜 이걸 신화나 전설이 아니라고 하는 줄 알겠지? 그 뒤에 일어난 사실을 알 수 없으니 기록이 거기서 멈춘 거야.” “형. 그러면 그 세 명은 그대로 행방불명 된 거예요?” “히잉. 말도 안 돼. 그럼 다른 사람들이 본거지로 사라진 용사님들을 찾으러 가면 되잖아요오….” “그게….” 안솔의 칭얼거림에 막 대답을 이으려던 나는, 순간적으로 말을 멈추고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감지 끝자락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기척이 잡히는 순간, 탐험 후 처음으로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이건…. 네 발자국 소리?’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실은 오늘 후기를 자크를 풀고 “제가 바지를 벗으면 믿어주시겠습니까?” 라고 말씀 드리고 싶었습니다. 몇몇 분들이 짐작하신, 또는 “아.” 하고 느끼실 그것입니다. 그런데 아는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그러다가 독자 분들이 진짜로 “응. 벗어봐. 그럼 믿을게.” 라고 하면 어떡할래? 라고요. ……. 네. 그래서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사태가 잠잠해질 때까지, 그냥 조용히 있겠습니다. ㅜ.ㅠ 0251 / 0933 ---------------------------------------------- 부수입 드드드드…. 드드드드…. 미세한 진동이 대지를 울린다. 여러 발걸음 소리가 이리저리 뒤섞여있었지만, 잘 분석해보면 그 소리는 일정한 주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살며시 눈을 감고 풀빛 대지 위로 손바닥을 겹쳤다. 그러자 끝자락에 걸린 기척이 둥글게 펼쳐놓은 감지 중앙 부근으로 빠르게 줄어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땅을 울리는 소리가 강하다. 네발을 가졌다. 몹시 흥분한 상태다.’ 마력 감지가 전달해주는 수많은 정보들이 머릿속으로 속속히 들어온다. 그리고 기척이 절반을 넘어 오고 있을 즈음, 나는 비로소 바닥에서 손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사용자 고연주. 혹시 통곡의 평야에 출현하는 네발 달린 괴물을 알고 있습니까.” “네? 그런 것까지는 일일이 기억 못한다고요. 그런데 이제는 통곡하는 소녀를 제외하고 거의 출현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갑자기 왜요?” “동북쪽 전방에서 괴물의 출현을 감지했습니다. 정체는 아무래도 뤼노케로스 같고, 수는 여덟 마리 정도 됩니다.” “뤼노케로스요? 그 괴물이 왜 통곡의 평야에…. 분명 평야 다음으로 넘어가는 지역에 서식하는 녀석들인데….” 고연주와 대화를 나누고 있자 주변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그러나 침묵은 한순간이었다. 안현이 먼저 몸을 벌떡 일으키는 것을 시작으로, 클랜원들 모두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유정은 빠른 걸음으로 안솔의 옆으로 붙었고, 스쿠렙프와 카타나를 꺼내 들며 말했다. “오빠. 뤼노케로스가 어떤 괴물이야?” “응? 모니카에 있을 때 상대 안 해봤어?” “네.” “…글쎄. 쉽게 말하면 코뿔소라고 하면 되려나.” 최대한 정확한 비유를 들어 말해주었지만 이유정은 상상이 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을 해주기보다는 천천히 손을 들어 사선 방향을 가리켰다. “안력을 높이고 내가 가리킨 방향을 보고 있어봐. 백 번 설명을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게 나을 거다. 아, 그래도 다들 전투 준비는 해야지?” 내 지시가 떨어지는 순간 클랜원들이 신속하게 진형을 꾸리기 시작했다. 원정 중 전투가 발생할 시 머셔너리의 기본 전술은 무조건 방진을 채택한다. 나는 선두에 서 칠흑의 창을 다잡고 있는 안현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선두에 멈춰 안현과 같이 서는 게 아니라, 그대로 지나쳐 중앙으로 이동했다. 안현은 심호흡을 하다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안솔과 백한결의 오른쪽을 막아 섰다. 그러자 뒤에서 고연주의 새된 목소리가 날아왔다. “어머. 키퍼는 저 아니었나요?” “왼쪽 옆구리가 비었습니다. 고연주는 그 부분을 커버 쳐주시면 됩니다.” “흐~응. 그럼 앞은요?” “메인 탱커는 안현입니다.” 그 말을 꺼낸 순간 클랜원들, 특히 애들이 눈빛이 확연히 달라졌다. 메인 탱커를 안현으로 확정한 순간 내가 선두에서 물러난 이유를 다들 조금이나마 깨달은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동안 뜸을 들이다가, 곧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뤼노케로스가 전방 250미터 내로 진입했습니다. 동북쪽 53도 방향으로 접근 중입니다. 방향이 완전히 일치하고 있지는 않지만, 부근으로 올 경우 100% 우리를 향해 달려들 겁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250미터라면 안력을 돋우면 충분히 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아까부터 대지를 울리던 진동이 점점 강도를 더해가는걸 느꼈다. 수초가 흐르고 클랜원들 사이로 한 명 한 명 침을 삼키는 소리들이 들렸다. 내가 짚어준 방향에는 자욱한 흙먼지가 뭉게뭉게 피어 오르고 있었다. 이윽고 흙먼지는 거리가 줄어들수록 점점 더 커지더니, 곧 흙먼지 사이를 뚫고 웅장한 체구를 지닌 뤼노케로스들이 뛰쳐나오는걸 볼 수 있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꾸어어어어어어엉!” “꾸어어어어어어엉!” 역시나 근방으로 오자 우리를 발견했는지, 뤼노케로스들은 거친 괴성을 내지르며 살짝 꺾어 달려오고 있었다. 몸의 길이는 약 3미터, 몸무게는 1.5톤 정도 될까. 척 봐도 단단해 보이는 각질로 덮인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피부위로 솟아있는, 주둥이 위로 솟아오른 누런 뿔이 위협적으로 흔들린다. 안솔의 키와 비슷한 어깨높이를 가진 놈들은, 네발로 사정없이 대지를 두드리며 우리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조금 이상한데?’ 안력을 돋워 놈들을 자세히 관찰하다가, 나는 몇 가지 이상한 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먼저 눈알이 비정상적으로 굉장히 시뻘겋게 변해있었다. 물론 괴물이 흥분을 하면 눈동자 색깔이 변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건 그 정도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온 몸에서 땀을 비 오듯 흘리는 게 마치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온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도중 다시 한번 놈들의 괴성이 귓속을 찌르자, 나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오늘 새벽부터 이상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의문이 가시질 않았지만 일단 당면한 일을 해결해야 생각할 여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혹시 몰라 일월신검을 허리춤에서 뽑아 들었다. 그러나 아직 칼은 뽑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보석만 꼼지락거리는 김한별을 보다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김한별. 뭐해?” “네?” “저 돌진력을 그대로 받을 생각이야? 전투는 이미 시작됐다고.” “아. 네! ───. ───. ───.” ‘그럼 어디 한번 볼까….’ 김한별은 곧바로 주문 영창에 들어갔다. 내 불호령에 비단 김한별뿐만이 아니라, 애들도 각자의 자세를 잡는 게 보였다. 나는 검초(劍鞘)를 손톱으로 톡톡 두드리며 한번 더 입을 열었다. “너희들 예전에 칠흑의 숲에서, 칠흑의 전갈을 처음 잡았을 때를 기억해봐.” 쿵쿵쿵쿵! 쿵쿵쿵쿵! “참고로 말하자면 집단전이라면 몰라도, 개인으로 따지면 칠흑의 전갈이 뤼노케로스보다 강하다.” “───. ───. ───. Radiant(찬란하게 빛나는). Hugging dawn(포옹하는 새벽의 여명).” 내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김한별의 주문이 곧바로 이어졌다. 그녀의 왼손이 허공으로 치솟고, 그 위에 놓여있던 수정이 두둥실 떠올랐다. 확! 허공으로 떠오른, 엄지 손가락만한 보석은 주문 그대로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그 빛이 너무도 밝아 새벽의 어스름함마저 물리칠 즈음, 김한별은 시위를 당기는듯한 움직임으로 오른팔을 당겼다. 그리고 앙칼진 목소리와 함께 마법을 발현시켰다. “Driving hit(몰아쳐라)!” 촤촤촤촤! 그것은 푸르스름한 빛깔을 내는 하나의 파도였다. 그녀가 손을 쫙 피자마자 보석이 산산이 바스러지며 전방을 뒤덮는 빛의 파도들이 뤼노케로스를 덮쳐 들었다. 이윽고 파도처럼 밀려들어간 빛깔은 놈들의 전신을 뒤덮더니, 번쩍 폭발을 일으켰다. “““꾸어어어어어어엉!””” 빛은 너무도 강렬해, 선두에 선 안현이 시선을 돌릴 정도였다. 방금 전 한별의 마법은 하연처럼 치밀하게 마법을 배합하고 연쇄 폭발을 노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단 한번의 단발성 마법에 불과했지만, 곧이어 드러난 보석 마법사의 위력은 클랜원들은 잠시나마 술렁이게 만들었다. 기세 좋게 달려오던 뤼노케로스들 중 선두에 있던 세 마리는 하나도 예외 없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단단하던 각질은 발기발기 찢어져 있었고, 곳곳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쓰러진 놈들 중 한 마리가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대지를 기었지만, 약간이나마 들리던 몸은 다리를 절룩임으로써 다시 바닥으로 처박혔다. 남아있는 다섯 마리 또한 돌진을 멈춘 상태였다. 사방으로 내동댕이쳐진 걸로 보아 폭발의 여파로 인해 강제적으로 퉁겨진 모양이다. 하지만 곧 다리를 꼿꼿이 세우는걸 보니, 그나마 뒤쪽에 있어 선두에 있던 놈들보다는 피해를 덜 받은 것 같았다. “꾸우우웅! 꾸우우웅!” 일어난 뤼노케로스들은 곧바로 다시금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 정도 폭발이면 크게 놀라 정신적 후유증으로 비틀거려야 정상인데,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였다. 마치 어떻게든 우리를 죽이기 위해 달려오는 흡사 미친 전사와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일단 놈들의 돌진력을 죽였고 3마리의 상태를 아예 불능에 가깝게 빠트렸으니 김한별은 제 몫을 해줬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근접 계열들의 차례였다. 앞으로 원정에 있어서 전투 중 오더를 최소한으로 내릴 계획이었다. 해서, 이번 전투로 과연 얼마만큼 성장했는지 확인할 생각이었다. 곧이어 폭발 속에서 달려온 다섯 마리가, 드디어 방진의 근거리에 접근한 순간이었다. “보호(Protect)!” 미리 주문을 외워뒀는지 안솔의 귀여운 목소리가 대기를 울렸다. 그리고 지팡이를 앞으로 뻗자, 안현의 앞으로 둥그렇고 투명한 막이 생성되는걸 볼 수 있었다. 그곳으로 뤼노케로스 세 마리가 거세게 뿔을 부닥쳤지만, 보호막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앞에 있는 놈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창술사격!” ‘오. 창술사격?’ 차차창! 소리와 함께 칠흑의 창이 몇 갈래로 갈라지는가 싶더니, 기다란 창신이 각각 놈들의 전신을 사정없이 파고들어가는 게 보였다. 아마도 기공창술사의 능력 중 하나로 보였는데 아직 성취도가 낮아 제 힘을 끌어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구슬픈 비명이 울렸지만, 안현에게 몰린 건 세 마리였다. 좌우로 외곽에 있던 뤼노케로스 두 마리는 각기 양쪽으로 파고들더니 이내 중앙을 노리고 짓쳐 들어왔다. “가만히.” 고연주는 곧바로 움직이려 했지만 나는 일월신검으로 그녀의 배를 지그시 눌렀다. 고연주는 빤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오른편으로 달려드는 놈을 향해 흘끗 시선을 던졌다. 나는 유정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몸을 살짝 뺐고 동시에 오른발을 쭉 내밀었다. 이윽고 날카로운 뿔이 내 복부를 스쳐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밀었던 발등으로 뭔가 묵직한 것이 걸렸다고 느낀 순간, 나는 곧바로 전해져 들어오는 힘을 되돌려 있는 힘껏 위로 걷어 올렸다. 퍽! 훙. 뭔가 허공으로 비산하는 소리가 들리고, 어두운 그림자가 위쪽으로 크게 벗어나는 게 보였다. 나는 여전히 시선을 떼지 않으며 천천히 일월신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유정이 치고는 드물게, 그녀는 굉장히 집중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정이 양 손으로 쥐고 있는 스쿠렙프 그리고 카타나에는, 순도 높은 마력이 푸르스름한 빛을 띠며 날카로움을 과시하고 있었다. 곧이어 유정과 뤼노케로스의 간격이 리치가 닿을 정도로 짧게 줄어들었다. 자신에게 달려오는 한 마리의 뤼노케로스를 바라보던 그녀는, 곧 급격히 몸을 회전시켰다. 그러더니 앞쪽을 향해 발을 가져다 대며 양 손에 든 단검을 힘껏 옆구리에 쑤셔 박았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윽고 그녀가 단검을 잡은 상태로 대지를 살짝 뛰어오르자, 아래서 검은 그림자 두 개가 뻗어 나와 유정의 양 발을 움켜잡았다. “이거 쟤랑 나랑 연습한 거예요. 그러니 뭐라고 하면 미워요.” 고연주는 입술을 살짝 삐죽이며 구시렁거렸고, 그림자를 향해 살짝 손가락질을 했다. “꾸어어어어어어엉!” 들어올려진 유정의 허리가 반원으로 휘는가 싶더니 마치 물구나무를 서는 모양으로 뤼노케로스의 등을 따라 올라갔다가, 반대쪽으로 다시 내려오기 시작했다. 놈이 고통에 울부짖으며 몸을 뒤틀었음에도, 유정은 오히려 단검을 꽉 쥐며 악착같이 긁어 내렸다. 뤼노케로스가 쓰러지는데 걸린 시간은 단 5초였다. 고연주의 역할이 크긴 했지만 흡사 하나의 곡예를 본 기분이었다. 이유정은 원숭이처럼 땅에 쭈그려 앉는 자세로 착지하고는, 쉬지 않고 곧바로 안현의 측면을 향해 몸을 날렸다. 나는 한두 번 고개를 주억인 후 준비해두고 있던 일월신검을 빼어 오른쪽으로 뻗었다. 벗어났던 그림자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검 날을 위쪽으로 세우는 것은 잊지 않았다. “───. ───. ───. 속박(Shackles)!” 처음 걸렸던 보호막은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안솔과 김한별의 적절한 지원사격이 이어지고, 어느새 한 마리를 쓰러뜨렸는지 안현은 창을 신명 나게 휘두르며 두 마리를 상대하는 중이었다. 뜨뜨뜨뜨뜨뜨뜨뜩! 곧 끔찍한 소리와 함께 오른팔을 타고 들어오던, 육질을 가르는 느낌이 사라지자 나는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곳에는 깔끔하게 반으로 갈린 뤼노케로스 한 마리가 바닥에 누워있었다.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리자, 누런 번개가 지그재그로 뻗어가며 뤼노케로스의 눈을 정통으로 때렸다. 놈이 목을 크게 뒤트는 틈을 놓치지 않고, 안현은 지체 없이 창을 목으로 찔러 넣었다. 이윽고 찔러 넣은 창을 한번 크게 휘젓고 뽑아내자 뤼노케로스는 그대로 몸을 허물어뜨렸다. “오호호호! 아하하하!” 그리고 그 옆으로. 속박에 걸린 마지막 한 마리를, 즐겁게 난도질하는 유정을 볼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네, 이로써 부수입 분야가 끝났습니다. 다음 분야의 소제목은 망상의 고원입니다. 왜 소제목이 부수입인지 궁금하신 분들이 계실 것 같은데,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이건 돌아가면서 챙길 예정이거든요. :) 원래는 부수입의 징조라고 적고 싶었는데, 뭔가 말이 안 맞는 것 같아서요. (눈치 빠르신 분들은 벌써 알고 계실지도….) 아. 시험은 내일부터 시작입니다. 한 주 동안 열심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PS. 독자님들. 자꾸 놀리시면 곤란합니다. 계속 이렇게 놀리신다면, 저 또한 생각이 있습니다. 네. 삐뚤어지도록 하겠습니다. 일명 삐뚤유진이라고도 하지요. ( --) 0252 / 0933 ---------------------------------------------- 망상의 고원 “정지.” 행군의 선두에 있던 김수현이 걸음을 멈추고 손을 들어올리자, 옆에서 걷던 안현은 덩달아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김수현은 잠시 동안 주변을 쓱 둘러보더니 곧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독 승냥이 무리가 오고 있습니다. 수는…. 좀 많군요. 서른여덟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빨에 독이 묻어있으니 물리지 않도록 주의하시길.” 아무렇지도 않은듯한 목소리였지만 안현은 목구멍으로 절로 침이 넘어감을 느꼈다. 독 승냥이라면 모니카에서 한두 번 상대해본 적이 있는 괴물이었다. 승냥이답게 교활하고 영민한 움직임은 물론이요, 일반 말승냥이보다 몸집이 두 배나 큰 괴물이었다. 일전의 전투에서 실수로 둘러싸여 여러 번 물린 결과 거의 반나절 동안 정신을 잃고 누워있어야 했다. 그때의 잊고 싶은 기억이 떠오르자, 안현은 몸 내부의 긴장을 한껏 끌어올렸다. 한 오 분 정도 지났을까. 앞쪽으로 무성히 우거져있던 수풀이 조금씩 들썩들썩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현은 살짝 허리를 굽히고 몸 안의 회로를 따라 마력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온다.” 김수현은 한마디 툭 내뱉고 곧장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수풀을 헤치고 나온, 강건한 신체를 가진 승냥이 한 마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첫 번째로 나온 놈을 시작으로 뒤를 따르던 놈들이 우후죽순처럼 수풀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다섯 마리…. 아홉 마리를 넘어갔을 무렵 안현은 세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열 마리 남짓에 불과했지만 이윽고 사방에서 비슷한 수의 늑대들이 나왔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완벽한 포위 진형이었다. 놈들은 처음에는 눈치만보며 섣불리 달려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뭇한 눈가에 진득한 살기가 번들거리는 걸로 보아 호시탐탐 틈만 노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 ───. ───. 차가움을 머금은 꽃잎은, 새벽 폭풍 아래 부서진 섬광이 되어.”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고, 김수현이 정지를 말했을 때부터 주문을 준비했는지 김한별의 고요한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울려 퍼진다. 그러자 말간 빛을 내뿜는 보석 하나가 그녀의 손바닥위로 천천히 떠오르더니, 클랜원들의 주위서 미약한 돌풍이 감돌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퍼져라!” 이윽고 모든 준비를 마친 그녀는 사늘한 시선으로 독 승냥이들을 훑었고, 날카롭게 외쳤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껏 이어진 탐색전을 깨뜨리고, 전투의 개시를 알리는 하나의 신호탄이 되었다. “캐캥! 캐캥!” “캐캥! 캐캥!” 군청색을 띠고 있던 보석은 곧 알갱이로 화하며 주변을 맴도는 돌풍 사이로 섞여 들었다. 그리고 시동 어를 외친 것을 기점으로, 돌풍은 원반처럼 납작해지더니 원형으로 넓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안현은 독 승냥이들을 노리고 들어가는 마법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안구에 마력을 돋우자 돌풍 바깥쪽으로 수없이 점멸하는, 번쩍이는 칼날 모양을 이룬 마력의 집합체를 볼 수 있었다. 흡사 톱니바퀴를 보는듯했다. 속으로 환호하려는 찰나, 이어진 독 승냥이들의 움직임을 보고 안현은 욕지거리를 내뱉고 말았다. 놈들은 돌풍 안에 담긴 무시무시한 기운을 느꼈는지 재빠른 몸놀림으로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돌풍이 닿을 즈음에는, 미처 피하지 못한 승냥이들 몇몇은 위쪽으로 크게 솟구쳐 오르며 회피 동작을 보였다. 썩둑! 썩둑! 썩둑! 썩둑! “깨갱! 깨갱!” “깨갱! 깨갱!” 칼날을 품은 돌풍이 애꿎은 수풀과 나무를 베고 지나가고, 그 사이로 타이밍을 맞추지 못한 승냥이들의 비명이 간간이 새어 나왔다. 김한별은 애초에 독 승냥이 전부를 노리는 범위 마법을 펼쳤지만, 승냥이들의 발 빠른 대응으로 생각한 만큼의 효과는 보지 못했다. 어찌됐든 상황은 처음보다는 나아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처음 거진 마흔에 가까웠던 독 승냥이들은 삼분지 일은 줄은 상태였으니까. 그러나 아직 남아있는 놈들은 스물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캐애애앵!” 마법에 공격을 당해서 그런지 아니면 동료가 당해서 그런지 몰라도, 독 승냥이들은 곧바로 찢어질듯한 괴성을 내지르며 거침없이 몰려들었다. 안현은 자신을 향해 2미터가 넘게 훌쩍 뛰어오르는 승냥이 세 마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창을 들어 조준하고, 준비하고 있던 잠재 능력을 발동했다. “창술사격!” 차창! 차차창! 순식간에 칠흑의 창이 세 갈래로 갈라졌고 그것은 허공으로 비산한 승냥이의 복부에 정확히 꽂혀 들었다. 이내 배가 푹 들어간 상태로 대지로 힘없이 떨어지는 놈들을 보며 안현은 다시금 앞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전방에는, 또 다른 승냥이 세 마리가 이빨에 누런 침을 뚝뚝 떨구며 위협적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안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특수 능력 창술의 달인을 발동하자 칠흑의 창에 짜르르 마력이 흘러 들었다. 딱딱해 마지않던 창신이 엿가락처럼 말랑해지고, 한쪽을 당기자 시위를 잔뜩 당긴 활처럼 구부러졌다. 그리고 놈들이 주둥이를 쩍 벌리며 달려드는 순간, 안현은 당기고 있던 창 쪽을 강하게 퉁겼다. 뻑! “깨갱! 깨갱!” 튕겨 들어간 창은, 동시에 달려들던 세 마리를 한꺼번에 후려갈겨버렸다. 승냥이들은 각기 피 분수를 뿜어내며 사방으로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단 두 번의 공방으로 여섯 마리를 해치운 안현이었지만 그는 방심하지 않으며 더욱 마음을 다잡았다. 예전에도 초반에 조금 활약했다고 무작정 돌격했다가, 곧바로 둘러싸여 온몸을 깨물렸다. 다행히 입고 있던 장비들 덕택으로 깊게 물린 상처는 없었지만, 하다못해 이음새 부분이나 다른 노출된 부분을 집중적으로 물렸다면 결과는 암담했을 것이다. 잠깐 앞이 비자, 안현은 뒤쪽을 돌아보았다. 왼쪽에는 이유정이 혼자서 대여섯 마리를 맞아 분투하고 있었다. 그녀의 몸 주위로는 반투명한 막이 생성되어 있었는데, 안현보다 상대적으로 장갑이 약한걸 감안해 안솔이 걸어준 보호막이었다. 유정은 쉴 새 없이 단검을 놀리며 한 마리씩 착실히 줄여나가고 있었지만, 승냥이들의 수는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고연주는 오른쪽으로 오는 승냥이들을 완벽하게 틀어막고 있었고 김수현은 키퍼와 후방을 막는데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 우, 후방이 틀어 막히자 결국 승냥이들이 선택한 곳은 가장 약한 좌 방향이었다. 안솔이 쿨타임이 돌아올 때마다 속박으로 지원해주고 있었지만, 처음 걸렸던 보호막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결국 안솔이 속박 주문을 멈추고 보호막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굼뜬 행동을 보이던 승냥이들이 다시금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창술사격으로 도움을 주려고 자세를 잡으려는 찰나, 안현은 막 유정을 향해 지원 마법을 준비하던 한별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안현을 보며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빠! 뒤에요!” “응?” “체인 라이트닝!” “뭐, 뭐야?” 짜작! 짜자작! 김한별은 준비하던 마법의 방향을 돌리고 안현에게로 쏘아 보냈다. 그러나 안현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뒤편에서 거뭇한 그림자 하나가 훤히 드러난 목을 덮쳐 들었다. 이윽고 그의 목을 씹으려는 순간 한줄기 노란 번개가 주둥이 안으로 곧바로 쳐 들어갔다. “끄르르르륵!” 독 승냥이는 그 자리에서 몸을 까뒤집으며 바르르 떨었고, 안현은 뒤늦게 창을 갈겼다. 그러나 바닥으로 철퍼덕 쓰러진 놈의 입에서는 이미 시커먼 연기 몇 줄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고 있었다. 안현이 십년감수한 얼굴로 한숨을 내쉴 즈음, 오른쪽과 후미는 상당히 안정적인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김수현과 고연주는 각자가 맡은 지점을 거의 다 정리해가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꺄아악!” 가장 많은 승냥이들이 몰려있는, 왼쪽에서 높은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유정은 점점 늘어만 가던 승냥이들을 감당치 못해 슬슬 물러나고 있었지만, 이내 뒤에 안솔과 백한결이 기척이 느껴지자 뒷걸음질을 멈췄다. 여기서 더 물러나면 중앙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억지로 버티면서 다시금 거리를 확보하려 하다가 무리를 한 모양이었다. 근근이 버티던 보호막이 깨지자 기회만 노리고 있던 승냥이 열 마리가 일제히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뒤늦게 주문을 완성한 안솔이 재빨리 보호막을 걸었지만, 결국 한 마리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데 성공해 이유정의 허벅지에 어금니를 박아버린 것이다. 이유정이 무너지는 순간 왼쪽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이때다 싶어 달려드는 승냥이들의 울음소리와 여러 명의 사용자들이 외치는 비명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커다란 혼란이 발생하려는 찰나였다. 그러자, 그때까지 키퍼와 후미에 열중하던 김수현은, 이유정의 비명이 들리는 순간 곧바로 몸을 돌려 왼쪽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유정의 허벅지에 이빨을 박은 승냥이를 가볍게 베어 떼어내고는 곧바로 주변을 향해 일월신검의 칼끝을 돌렸다. 섬뜩한 빛을 내뿜는 일원신검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독 승냥이 한 마리가 여지없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는 자신을 향해 사 방향으로 달려드는 승냥이 떼를 가만히 보다가, 이내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하나씩 찔러 넣었다. 분명 뛰어오른 것은 놈들이 먼저였다. 하지만 각자의 공격들이 김수현에게 채 닿기도 전에, 한 마리씩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독 승냥이 한 마리를 더 물리친 안현은, 멍한 눈길로 김수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김수현의 움직임은 고요했지만, 주변은 절대로 고요하지 않았다. 마치 폭풍과 맞닥뜨린 것처럼 승냥이들은 추풍낙엽같이 쓸려나가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발 아래 깔려 신음하는, 남은 한 마리를 향해 칼을 내리 꼽는 것을 마지막으로 독 승냥이들과의 전투는 막을 내렸다. * “야, 고개 안 돌려?” “아오. 걱정돼서 와봤더니만. 안 본다 안 봐. 네 허벅지 살 봐서 뭐가 좋다고.” 안현은 바지를 벗은 유정이 있는 곳을 향해 슬쩍 고개를 들이밀다가, 그녀에게 한 소리 먹고는 몸을 돌렸다. 이내 투덜거리며 바닥에 놓인 승냥이를 치우는걸 보며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떠셨어요?” “네?” “이번 전투요. 마음에 안 드세요?” “음. 뭐, 숫자가 많았으니까요. 괜찮습니다.” 나는 고연주의 물음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방금 전 전투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생각들을 하나씩 정리하다가, 다시금 고연주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처음 내게 말을 걸었을 때부터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드디어 쳐다봐주네. 말해봐요. 혼자서만 고민하지 말고.” “혹시 방금 전 전투에서 뭔가 이상한 점 못 느꼈습니까?” “글쎄요. 솔직히 유정이 부상은 의외였죠. 어느 정도 피해만 입으면 꽁지 빠져라 도망가는 놈들인데 이상하게 악착같이 달려들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유정이에게 몰린 거야 놈들의 습성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마지막까지 도망가지 않은 것은 일반적인 경우와는 다르죠.” 나는 말을 마치고 잠시 동안 상념에 잠겼다. 탐험은 어느새 8일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8일동안 우리들은 통곡의 평야를 벗어난 후 칼 바람의 습곡을 거쳐왔고, 현재는 망상의 고원을 앞둔 우거진 삼림의 중간에 있었다. ‘전투가…. 방금 전까지 합하면 열한 번째였나?’ 우거진 삼림에서 괴물을 만나는 것은 딱히 이상하게 여길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열한 번의 전투 대부분이 비교적 안정화가 잘된 지역인 통곡의 평야와 칼 바람의 습곡에서 치렀다는 점은 확실히 의문을 가질만했다. 물론 모든 변수를 포함해야 하는 홀 플레인 이기도 하고, 그렇기에 괴물의 이동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뤼노케로스부터 시작된 괴물들의 이상 행동은, 여러 가지로 열어놨던 생각의 방향 중 한쪽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본다. 전투가 끝난 주변은 조용했다. 안솔은 유정이를 치료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백한결은 얼어붙은 얼굴로 열심히 전장 정리를 하고 있었다. 안현으로 시선을 돌리자, 녀석은 혼자서 외로이 땅만 긁다가, 이내 김한별을 발견하고는 한마디 툭 내뱉었다. “아 김한별. 아까는 고마웠다. 너 덕분에 살았어.” “아니에요. 발견해서 다행이에요.” “근데 그거 말이야. 아, 체인 라이트닝. 원래 유정이 지원해줄 마법이었지?” “…네.” “씨발. 그럼 결국 내 잘못도 있다는 거네. 아직 멀었구나 멀었어….” 고연주를 제외한 클랜원들의 신경은 각각이 분산되어있었다. 안현이 자학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나는 한껏 소리를 죽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용자 고연주.” “네.” “제 생각인데 말입니다. 아무래도….” “…….” 아직 말을 꺼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연주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는걸 볼 수 있었다. 어쩌면 그녀 또한 약간이나마 눈치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음은, <그림자 여왕>으로써 단서를 잡지 못한 데서 오는 애매함이리라. 그리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이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우리들 몰이에 당한 것 같습니다. 아니, 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이지 말입니다. 예전에 말씀 드렸던 대로, 일반 도시부터는 원정이나 주변 사용자들의 수준이 많이 올라갔지 말입니다. 앞으로는 유적에 들어가면 예전 비비앙이나 호렌스처럼 갖고 노는 일은 웬만하면 적어질 것 같지 말입니다. 뭐, 그만큼 보상은 짱짱해지겠지만 말입니다. PS. 제 말투가 무척 여성스럽다고 해서, 말투 바꿨지 말입니다. 앞으로는 최대한 제 거친 모습과 야성미를 보여드리겠지 말입니다. 자꾸 놀리시면, 어떤 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김수현 + 안현 or 김수현 + 신상용 or 김수현 + 백한결 or 김수현 + 도영록 or 김수현 + 박동걸 베드신 써버리지 말입니다. 흥이지 말입니다. 0253 / 0933 ---------------------------------------------- 망상의 고원 1회차 시절. 난 단 한번의 잘못된 판단으로, 친형을 죽음에 몰아넣은 적이 있다. 원래는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형은 못난 친동생 하나 살리겠다고 급히 가까운 동료들만 데리고 달려와, 기어이 나를 구해냈고 대신해서 죽었다. 내 성격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형의 무조건적인 보호에 반발해 앞뒤 안 가리고 나서려고 했던 성질머리는, 그 일이 있은 이후로 180도 바뀌었다. 어떻게 변했느냐면, 일단 한발 물러서서 숙고하고 지켜보려는 성향이 강해졌다. 오죽하면 진명이 바뀌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습관은 2회차에 다다른 지금에도 잔재가 남아있어 내 행동의 방향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뭔가 의심스러운 상황이 벌어지면 나는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방향에 대해 가능성을 두고 대응을 시작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내 생각을 기우라고 말할 정도로 답답하게 여기곤 했다. 지금도 그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오늘 독 승냥이들과 전투를 끝낸 직후. 고연주는 “몰이를 당하고 있는 것 같다.” 는 내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간신히 고개만 끄덕이는 걸로 동의를 표했을 뿐이었다. 뭔가 심증은 가지만 물증은 없는 상황이었다. 나도, 고연주도 기척을 잡을 수 없다. 이 말인즉슨 현재 우리에게 몰이를 하는 사용자, 혹은 부랑자 들의 실력이 좋고 굉장히 조직적이라는 소리였다. 타닥, 타닥! 불똥이 튀어 오르는 소리에, 나는 상념에서 깨고 말았다. 처음 활활 타오르던 불덩이는 어느새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옆을 더듬자 손바닥에 나뭇가지 몇 개가 잡힌다. 나는 불이 타오르는 구덩이 안으로 잡힌 땔감을 던져 넣었다. 야영지 주변은 조용했다. 이따금 들리는 벌레 우는 소리는 깊어가는 밤의 정적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야밤에 습격을 받은 것도 심심치 않게 있었기에 차분히 주변으로 감지를 돌리자, 옹기종기 침낭이 모인대서 누군가 꿈틀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 기척은 한동안 꿈틀꿈틀 움직이더니 이내 번쩍 몸을 일으켰다. 그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곧 모닥불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한 명의 사용자를 볼 수 있었다. 긴 머리를 찰랑이며 다가온 여성은, 조금 거리를 남기며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내게 말을 걸었다. “오빠 나야. 불침번 교대하자.” “아직 교대하려면 시간 좀 남았는데.” “괜찮아. 내가 조금 더해도 돼.” “…….” 이유정은 곧 내 옆 방향으로 다가오며 조심스레 엉덩이를 붙였다. 그녀가 걸어오는 모양새나, 앉는 태도는 굉장히 부자연스러웠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무릎을 반으로 접으며 안은 상태서 물끄러미 모닥불을 보던 그녀는, 한쪽 무릎에 얼굴을 기대며 말했다. “오빠 안자? 걱정하는 거라면 괜찮은데. 잠깐 동안 혼자 보다가, 시간됐다 싶으면 같이 하는 애 깨울게. 백한결이었던가?” “아아. 그런데 깨우지 마라.” “응? 왜?” “밤 늦게까지 열심히 연습하다가 방금 전에 잠들었거든. 딴에는 조금만 자고 다시 불침번을 설 계획이었나 봐.” 내 말에 이유정은 새삼스런 얼굴로 침낭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킥 웃음을 터뜨리며 가늘게 어깨를 떨기 시작했다. “아하하. 탐험에 나와서 수련을 하다니.” “비웃을 건 아니지. 그만큼 열정이 있다는 거니까.” “그런가? 그럼 오빠가 보기에는 어때? 잘 하는 것 같아?” “연습을 할 때는 기가 막히게 하더군. 문제는 실전을 연습처럼 하지 못한다는 거지.” 이유정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웃다가 이내 살포시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나 곧바로 표정을 지우는걸 보니 내색하지 않으려는 듯싶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정은 잠시 동안 입술을 깨물다가 조금은 안정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긴, 내가 누구를 비웃을 처지는 안되지. 정작 나도 어제 부상당했는데. 미안해.” “뻘 짓거리하다 입은 부상이 아닌, 나름 이유는 있는 행동이었으니까. 굳이 사과할 필요는 없어.” “헤. 나 실은 아까부터 오빠 화났나 눈치만 살피고 있었는데. 다행이다.” “화나긴 했어. 방금 전부터.” “?” “일어나봐.” 나는 일부러 고압적인 말투로 목소리를 높였다. 이유정은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보다가 쭈뼛이 몸을 일으켰다. 앉은 상태 그대로 몸을 돌리자 한쪽이 살짝 떠있는 그녀의 다리가 눈에 들었다. 나는 사뿐히 양손을 들어올려 일전에 사주었던, 앞을 동여매고 있던 가죽 바지의 끈을 풀러 내었다. “오, 오빠?” “가만히 있어.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고.” 유정은 움찔거리며 한 발짝 물러섰지만, 다시금 이어진 내 명령에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가죽 끈을 푼 후 나는 지체 없이 그녀의 바지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러자 눈 앞에, 중앙으로 살짝 튀어나온 금이 가있는 둔덕을 덮고 있는 하얀색 속옷과, 양 방향으로 쭉 뻗은 매끈한 넓적다리가 보였다. 위쪽에서 급하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아….” “유정아. 손 가린 거 치우고 허벅지 조금만 벌려봐.” 유정은 얼른 손을 내려 자신의 속옷을 가렸지만, 나는 억지로 걷어내어 얼른 그녀의 허벅지를 벌렸다. 그러자, 곧이어 모음근(다리 안쪽을 구성하는 근육)이 있는 부분을 살피자 싯누렇게 변색된 피부를 볼 수 있었다. “…….” “역시나 걸음이 조금 부자연스럽더니.” “…미안.” “휴…. 일단 손 좀 댈게. 치료하는 거니까 놀라지마.” 이미 바지를 벗긴 주제에 할말은 아니었지만, 다행히 유정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이 보였지만, 나는 곧 허벅지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내부에 잠들어있던 화정을 일으켜 손 쪽으로 밀어 넣었다. 뮬을 떠난 이후로 웬만하면 화정은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그런 결심보다는 유정이를 치료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고, 치료용으로 가볍게 일으킨 만큼 큰 부담은 없을 것이다. 화끈하게 달아오른 손을 말랑한 허벅지에 대고, 그대로 마력을 투과시킨다. 이윽고 넓적다리로 투여한 화정을 천천히 이동시키자 안쪽 깊숙이 침투한 듯 남아있는 독 승냥이의 독기가 느껴졌다. 아마 안솔이 치료했을 때는 잠시 괜찮아졌겠지만, 안쪽 끝까지 침투한 독을 잡아내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조금 이상해도 참아.” 나는 지체 않고 치료를 시작했다. 제법 끈질긴 독이긴 했지만 신화계급 능력 앞에서는 모든 게 무용지물이다. 화정이 따스하게 내부를 보듬으며 독기를 태울수록 뻣뻣했던 유정의 허벅지가 느슨하게 풀리는 게 보였다. 그와 동시에 노랗게 뜬 피부 또한 서서히 원래의 빛깔을 되찾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도망 다니던 독을 태워버리고 손을 떼자, 유정은 재빠르게 바지를 잡고 위로 끌어올렸다. 어지간히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나는 양 손바닥을 부딪치며 탁탁 털고,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단 독기는 전부 태웠다. 혹시 모르니까 해독 물약 반은 마시고, 반은 피부 위로 발라. 그리고 지금 안솔 깨워서 치료해달라고 그래.” “지, 지금? 하지만 자고 있는데….” “안솔이 말번초였으니까, 한결이랑 순서 바꾸면 돼. 내가 지시했다고 하고 사정은 네가 설명해줘.” “아…. 응. 그럼 오빠는 이제 자려고?” 유정은 끈을 동여매다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내게 물었다. 나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원래는 정신이 있는 거냐고 한 소리 해주고 싶었지만 지금 얼굴 표정을 보아하니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미련하다는 생각이 가시질 않아, 침낭으로 가기 전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독은 어설프게 치료하면 다시 살아나는 경우가 많아. 다음부터 아프면 참지 말고 바로 말해줘. 오늘 고원에 도착할 예정인데 뭔가 사단이라도 났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미안….” “쯧. 아무튼 무리하지 말라고. 그럼 이만 자러 갈게. 불침번 끝나기 전에 꼭 치료해야 한다.” “응! 오빠도 잘자.” 유정은 얼굴을 푹 숙이고 있다가 끝났다 싶었는지 곧장 고개를 들며 활짝 웃어 보였다. 이윽고 안솔을 깨우러 걸어가는 그녀를 보며 나 또한 비어있는 침낭 안으로 몸을 묻었다. 그렇게 막 잠을 청하려는 찰나, 나는 잊고 있던 한가지 사실을 문득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냥 말을 놓기로 한 모양이군.’ * 중천으로 치솟아 오른 태양은 따가운 직사광선을 내리쬐고 있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부드러운 흙과 구부정하게 박혀있는 커다란 바위들이 산맥의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왼쪽으로는 파인 길을 따라 흐르는, 하나의 물줄기가 졸졸 소리를 내며 햇빛을 반사시키며 눈부시게 반짝였다. 통곡의 평야, 칼 바람의 습곡, 삼림을 벗어난 우리들의 눈 앞으로, 넓게 펼쳐진 풀빛 초원이 끝없이 이어져있었다. 그리고 초원의 중앙에는 하늘 구름을 뚫고 올라간 거대한 산이 떡하니 세워져 있었다. 산의 넓이는 뒤의 너무도 거대했고, 봉우리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게 솟아올라있다. “와….” “우와….” 안현과 안솔은 동시에 탄성을 지르며 고개를 끝까지 꺾어 올렸다. 오늘은 모니카를 떠난 지 9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원래는 10일에서 11일 정도 걸리는 거리이고, 중간에 전투를 치르느라 조금 지체하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래도 초반에 진도를 많이 빼고 나머지 시간에 최대한 서둘렀던 게 유효했는지 예상보다 일찍 목표 지점 바로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산 쪽에서 흘러나오는 선선한 바람이 온 몸을 부드럽게 휘감았다가, 이내 스쳐 지나간다. 잠시 동안 그 상쾌한 공기를 음미하다가, 나는 모두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이 바로 우리가 목표하는 망상의 고원이 있는 산, 섬망의 산입니다.” “섬망의 산? 경치는 참 좋은데 이름이 이상하다.” 새벽에 확실하게 치료를 받았는지, 유정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섬망의 산의 경치는 좋았다. 여기가 지구라면 한가로이 누워 소풍을 즐기는 것도 좋겠지만, 아쉽게도 이곳은 홀 플레인 이었다. 이곳 저곳에 드러누워 풀을 벗삼아 주변을 구경할 여유는 없는 것이다. 앞으로 못해도 최소 2000미터는 올라야 망상의 고원이 나오기 때문에, 최소한으로 올라갈 수 있는 입구를 찾으려는 즈음이었다. 곧 익숙한 지형이 보이는 곳으로 출발을 알리려고 하자, 뒤에 조용히 서있던 고연주가 가만히 눈짓을 하는 게 눈에 띄었다. 나는 순발력을 발휘해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을 도로 집어넣고, 재빨리 새로운 말을 꺼내 들었다. “서둘러 올라가면 오늘 밤이 오기 전에 망상의 고원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미약하기는 하지만, 섬망의 산에 들어간 순간부터 필드 효과가 일어납니다. 그러니 산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정비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내 지시가 떨어지자 곧 클랜원들 사이로 분주한 움직임이 일었다. 안솔은 상처를 살피려는지 유정에게 다가가고 있었고, 김한별은 가방에 손을 넣어 보석을 세고 있는듯했다.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며 잠시 거리를 떨어뜨리자, 그 와중에 고연주가 은근슬쩍 다가옴이 느껴졌다. 이윽고 그녀는 내 옆에서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수현. 할 말이 있어요.” “네. 뭔가 알아내기라도 하셨나요?” 빠른 직구에 그녀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하긴 9일동안이나 우리 이목을 피했는데 하루 만에 잡히기를 기대하는 건 요원한 일이었다. 계속 말하라는 신호로 입을 다물자 고연주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여전히 은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건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한데. 산을 오르고 나서부터는 굉장히 주의를 기울이셔야 할 것 같아요.” “자세히 말씀해보세요.” “어제 수현의 말을 들은 이후로 내내 생각해봤어요. 뭐, 결국 진전은 없었지만요. 그런데 이런 경우를 몇 번 겪은 적은 있어요. 그리고 그때마다 제가 꼭 생각하는 버릇이 하나 있거든요?” “어떤 버릇인데요?”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는 버릇이요. 즉, 스스로가 몰이꾼이 되 보는 거죠. 아무래도 제가 지금 몰이를 하고 있는 입장이라면, 지금을 적기로 여길 것 같아요.” “음.” 고연주의 말인즉슨, 몰이꾼들이 망상의 고원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를 노릴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였다. 일리는 있는 말이었다. 망상의 고원은 정심단이나 필드 효과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고년 차 사용자들에게도 꽤나 부담스러운 장소였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 주억이며 대답했다. “어차피 처음부터 주의는 충분히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마력 감지를 돌리고 있으니, 직접적으로 행동을 취해오면 곧바로 대응할 수 있을 겁니다.” “알겠어요. 저 또한 나름의 대비를 해두고 있을 테니, 혹시라도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바로 신호를 드릴게요.” “네.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내 확답에 고연주는 할 말을 마쳤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클랜원들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윽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경계하며 걸어가는 그녀를 보며 나는 천천히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입장을 바꿔본다. 그럼 내가 만약 몰이꾼이라면…. ‘나라면 차라리 망상의 고원을 나온 이후를 노릴 텐데…. 어?’ 그렇게 생각한 순간 문득, 하나의 생각이 번뜩이며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1. 200회 변경 사항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김수현과 한소영의 회상 신에 박다연이 살아있었다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때는 이미 박다연이 죽은 시점으로써 설정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잘못 적었어요….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 _(__)_ 2. 아시다시피, 현재 제가 기말고사를 보고 있는 기간입니다.(기말고사는 이번 주 금요일에 끝납니다.) 일단 내일은 업데이트가 가능할 것 같은데, 목요일 아니면 금요일 이틀 중 하루를 휴재할 수도 있습니다. 일찍 시작한다고는 했는데 범위가 중간고사의 두 배라 나름 준비를 했음에도 부족함이 느껴지네요. 혹시라도 휴재를 하게 되면 잊지 않고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독자 분들의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월요일, 화요일 시험은 선방했습니다. :D) 3. 쪽지가 폭주하고 있습니다. 네. 로유미, 로유리, 로유나, 여군, 빽 or 구두 사줄 게는 그렇다 치고요. 응원, 의견 등의 쪽지도 많이 받는 중입니다. 일단 주신 쪽지 모두 읽었습니다. 제가 현재 상황이 부족해 일일이 하나씩 답변 드리기가 힘들어요. ㅜ.ㅠ 혹시라도 답신이 안되더라도 제가 이미 읽어보았고, 그 부분은 차후 골라내어 수용할 계획입니다.(많은 부분을 바꿔야 할 때는 완결 후 리메이크나, 이북 교정에 참고할 생각입니다. 일전에도 말씀 드렸듯 연재 중에는 웬만하면 리메이크를 지양하려고 합니다.) 혹시라도 꼭 답변을 받아야겠다는 분께서는, 번거로우시겠지만 제게 답신을 원한다는 쪽지 한 통만 넣어주세요. 시험이 끝난 이후 다음주 즈음에 답신해드리겠습니다. 0254 / 0933 ---------------------------------------------- 망상의 고원 시기는 당연히 하나를 꼭 집어 말할 수 없겠지만 기준은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망상의 고원에 들어가기 전, 망상의 고원에 들어간 후, 그리고 모든 일을 마치고 망상의 고원에서 나올 때. 시기에 맞춰 일어날 가능성은 두 번째가 가장 낮고, 첫 번째와 세 번째는 엇비슷했다. ‘세 번째면…. 조금 재밌어지겠는데.’ 그 생각을 하자마자, 나도 모르게 피식거리는 싱거운 웃음이 나왔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 맞는다면, 그리고 세 번째라면. 아마 망상의 고원에서 나올 때까지 꽤나 귀가 간지러울 것이다. “형! 준비 끝났어요!” “아.”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자, 앞쪽에서 안현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새 준비를 끝냈는지 다들 각자의 지점에 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클랜원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오묘했는데 순간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마 방금 전 내 모습은 혼자서 상상에 빠져 실실 웃고 있는 변태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으리라. 나는 재빨리 얼굴 표정을 정리한 후 예의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흠흠. 지금부터 섬망의 산 안으로 진입하도록 하겠습니다.” “헤헤.” 내가 웃으니까 자기도 마냥 좋은지, 안솔은 방실방실 웃으며 나를 따라 웃었다. 잠시간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섬망의 산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섬망의 산. 여기서 섬망이라 함은 현대에서 의학적 용어로 쓰이는 말입니다. 원래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지만, 홀 플레인 에서는 단 하나의 단어로 필드 효과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의식 장애를 말씀하시는 거죠?” “예. 정답입니다.” “상품은요?” 고연주는 즉각 대답하고는 살며시 한쪽 눈을 감아 윙크를 보냈다. 그 눈길을 받자, 왠지 모르게 그녀가 원하는 상품이 뭔지 대강이나마 감이 잡혔다. ‘정력을 높여주는 물약이라도 사먹어야 하나….’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나는 진의 선두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섬망의 산, 망상의 고원, 환각의 협곡. 이 세 장소의 무서운 점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필드의 효과가 중첩된다는 것이죠. 즉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에….” 안현의 옆에 서자, 녀석은 안솔을 한번 흘끗 보고는 백한결과 김한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내게로 고개를 돌리는데, 그 낯빛에는 걱정이라는 감정이 듬뿍 담겨있었다. 그의 내심을 짐작할 수 있어 나는 곧바로 말을 이어주었다. “다른 두 곳과 비교하면 섬망의 산의 필드 효과는 상당히 미약한 편입니다. 몇몇 사용자들은 과잉 행동과 비슷한 모습을 보일 수 있지만, 웬만큼은 조절할 수 있을 겁니다. 혹여라도 못 견디겠다 싶다면 저에게 말씀해주세요. 바로 정심단을 꺼내드리겠습니다.” “네…!” 내 말에 한결 위안을 받은 듯 안현은 약간은 나아진 얼굴로 대답했다. 이윽고 내가 먼저 한걸음 떼는 것을 시작으로, 우리는 1차 목적지인 망상의 고원으로의 출발을 알렸다. * 망상의 고원은 구별을 하자면 산간고원(산맥으로 둘러싸여있는 고원.)으로 분류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섬망의 산은 하나가 아니다. 다만 초원에 도착하면 처음 보이는 산을 섬망의 산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 모습이 너무도 웅장해 이어지는 산들과 비교하면 거의 군계일학 급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는, 고원을 둘러싸고 있는 산맥을 제외한 다른 곳은 필드 효과가 사라진다는 점도 한몫 했다. 섬망의 산은 칠흑의 숲처럼 음침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라고나 할까. 한걸음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 아래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산의 초입을 벗어난 지는 오래였다. 현재 우리들의 눈 앞에는 거대한 나무들이 곳곳이 서있고, 나무에서 떨어진 나뭇잎들이 부드러운 흙 갈 빛 바닥을 덮고 있었다. 30분간 비탈진 흙 길을 오르며 나무로 그늘진 곳을 빠져 나오자, 이윽고 뻥 뚫린 하늘이 보인다. 초원에 있을 때만해도 짱짱하게 내리쬐는 햇빛에 조금 더운 감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원하게 부는 산바람 덕에 별로 덥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헥! 헥!” “하응…! 하응…!” 지금껏 했던 행군 중 가장 빠른 급속 행군으로 단숨에 올라서 그런지 뒤를 따르는 클랜원들의 체력이 생각보다 빠르게 떨어지는 모양이다. 나름 근접 계열인 안현과 이유정이 숨을 몰아 쉴 정도니, 고연주를 제외한 다른 클랜원들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문득 느끼건대, 이유정의 기합 또는 신음은 상당히 특이하다. 백 번 양보해 안현의 숨차는 소리는 들을만하고 쳐도, 이유정의 소리는 영 적응이 되지 않는다. 비단 나만 그런 게 아닌지 그녀의 앞에서 걷는 몇몇 사용자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물들어있는 게 보였다. “잠시 쉬었다 가자.” “헉헉. 아이고 살았다.” “앉지마. 숨만 고르고 갈 거니까. 주변 경계 늦추지 말고.” “아. 네, 네!” 내 말에 뜨끔한 사람이 많은지, 대부분이 자리에 앉으려다가 엉거주춤 일어나는 모양새를 보였다. 나는 왼쪽으로 굽어져 있는 바위에 몸을 기댄 후 연신 주변의 기척을 느끼는데 주력했다. 고연주도 산을 오르기 전 나와 나눈 이야기를 잊지 않았는지 남몰래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애들의 얼굴은 아직 살만해 보였다. 처음 산을 오를 때는 필드 효과 때문에 은근히 자신 없어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스스로도 충분히 조절할 수 있음을 느꼈는지 곧 원래의 자신감을 되찾았다. ‘망상의 고원으로 들어서는 순간 중첩 효과로 위력이 뻥튀기된다는 게 문제지만.’ 어느 지점에서 정심단을 복용해야 잘 썼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바위의 겉면을 톡톡 두드리고 있자, 앞에서 누군가 비척비척 다가오는 낌새가 느껴졌다. “저기…. 오빠.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응? 뭔데.” 고개를 들어올리자 창백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는 김한별이 있었다. 그녀는 서서히 호흡을 정리하는 중인지 한두 번 배를 들썩이고는 이내 목 울대를 꿀꺽 움직이고 내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섬망의 산에는 괴물이 출현하나요?” “당연히 출현하지. 갑자기 그건 왜 물어?” “오른 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 아직 한번도 만나지 않아서요. 그럼 혹시 어떤 괴물이 출현하는지 알려주시면 안될까요? 대충 특징이라도 알면 어떤 마법으로 대응할지 미리 준비할 수 있거든요.” “아아. 까마귀?” “네?” “아, 아니다. 잘못 말했네.” 순간적으로 말을 실수하자 고연주가 깔깔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괜히 머쓱한 마음에 볼을 긁적인 후 천천히 설명에 들어갔다. 이곳에서는 조류 괴물이 등장한다. 특이하게도 산을 자신들의 안방으로 삼는 괴물들인데, 정확한 명칭은 검은머리수리라고 불리는 놈들이었다. 특징이라고 함은 발톱이 날카롭고, 머리가 좋으며, 급강하를 시도해 먹이를 낚아채거나 공격을 시도하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잠시 여담으로 말하자면, 까마귀는 일부 사용자들이 그냥 편하게 사용하는 말이었다. 말로 하는 설명이라 잘 알아들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머리가 영리한 김한별은 단번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내 깊은 생각에 잠기는 그녀를 보며 나는 곧 출발하려던 마음을 접고 5분만 더 기다려주기로 했다. 그렇게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한 후 우리들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산은 타면 탈수록 더욱 가팔라졌고, 종래에는 주변의 지형지물을 짚고 올라가는 일도 잦아졌다. 하지만 나는 길을 바꾸지 않았다. 지금 이 길이 망상의 고원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앞서 들어간 원정대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운이 좋으면 들어가기 전 뭐라도 하나 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현재 내 오감은 극도로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그 중 특히 청각에 마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는데, 한 굽이를 오르자 문득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가 잡혔다. 그 소리를 따라 가파른 길을 오르자 어느 순간부터 경사도가 다시금 완만해짐이 느껴졌다. 그렇게 200미터를 더 전진한 순간이었다. “잠시 정지.” 방금 전 걸었던 지형에 비해서는 훨씬 평탄한 지형에 들어서, 나는 손을 들어 클랜원들의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수현. 왜 그래요?” “고연주. 잠시 이리 와보시죠.” 내 말에 나는 듯 달려온 그녀는 곧 내가 가리킨 방향을 보며 침음을 흘렸다. 내 손가락이 지적한 곳에는 여러 흔적들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흐응…. 갈렸네요.” “하나는 이대로 위쪽으로 올라갔고, 나머지 하나는 우회했습니다.” “이거 조금 애매한데요. 그냥 위쪽으로 올라가는 게 어떨까요? 어차피 이 속도대로 간다고 치면, 한두 시간 후 망상의 고원에 도착할 것 같은데요.” “음. 잠시만요.” 고연주의 말처럼 어디로 가든 상관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그녀는 내 시선을 받고는 살짝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오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나는 곧바로 그녀가 보는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우회해서 가봅시다.” * 우회를 결정한 후 우리들은 반원형으로 휘어진 산길을 따라 행군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뭔가 이상한 기분이 엄습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더없이 상쾌하고 선선했던 공기가 조금씩 눅눅하고 끈적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청명했던 나무와 수풀은 조금씩 드문드문해지고 있었고 부드럽게 밟히던 흙 또한 점점 딱딱해졌다. 하지만, 흔적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동안 흔적을 살피는데 신경을 쏟고 있던 나는, 갑작스레 앞에 보이는, 주변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광경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어. 저건 뭐지.” “꽃…. 처럼 보이는데.”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안현과 이유정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나는 자세히 그곳을 살폈다. 확실히 이상했다. 전방 70미터쯤 앞에는 꽃이 수북하게 널브러져있었다. 문제는 꽃이 피어있는 게 아니라 줄기가 뚝뚝 끊긴 꽃이 수북하게 쌓여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저 장소에 꽃을 모으기라도 한 것처럼. ‘안솔이 이곳으로 오자고 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텐데…. 방향 탐지인가, 불안 감지인가.’ 내가 신호를 보낸 이후로 일행들 사이에서는 쥐 죽은듯한 고요만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전방으로 살짝 손을 구부려 전진 신호를 보냈다. 이내 뒤에서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무기를 뽑는 소리와 함께, 우리들은 서서히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주변은 아무런 살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을 감도는 이 묘한 기류는 도대체 뭘까. 나는 지금껏 올라왔던 것처럼 빠른 걸음이 아닌, 경계하며 나아가는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 꽃이 모인 곳으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육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는, 고개를 까닥이며 입을 열었다. “일단 꽃 좀 걷어보자.” “네.” 안현은 내 지시에 앞으로 나섰고, 창으로 슬슬 꽃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몇 번의 휘두름으로 꽃을 걷어낸 안현은 이윽고 갑자기 미간을 좁히며 안을 자세히 보더니 이내 “헉.” 소리와 함께 재빨리 물러났다. “혀, 형. 안에….” “수현. 잠시만요.” 고연주의 말이 끝나는 순간 앞에서 어두운 그림자 몇 개가 땅을 훑더니, 아직 약간 남아있는 꽃 더미를 모두 흩어내었다. 그리고. 이윽고 꽃 더미 아래로 드러난 것을 확인한 순간 클랜원들의 급하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들이 들렸다. 그러나 미처 그것을 자세히 보기도전에, 꽃 더미 안에 숨어있던 무언가가 반짝이는 말간 빛을 쏘아 올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마력을 일으켜 그 빛에 저항했고 이내 빛나던 물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수정구였다. 통신용 수정이 아닌, 기록용 수정구. 그리고 그 수정구를 소중하게 품에 안고 있는, 완전하게 썩어버린 시체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시체 하나 발견. 어우. 흔적 좀 살피려고 했더니 시체 훼손이 심하네요.” “글쎄요. 일단은….” 고연주의 말에 나는 허리를 굽혀 수정구를 주워들었고, 반으로 접혔던 복부를 피며 대답을 마무리 지었다. “이것부터 보는 게 낫겠죠?” 나는 바로 수정구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잠시 지지직 비틀리던 화면이 이내 하나로 고정되더니, 곧 중년의 남성과 함께 중 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혹시라도 이 수정구가 발견될지는 모르겠군요. 하지만, 누군가가 이것을 발견해준다면 초면에 염치불구하고 꼭 하나의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이 수정구를 남부 도시 모니카로 가져가주십시오.) “…….” (아. 노파심에 먼저 말씀 드립니다. 먼저 잠시 주변을 살펴보시는걸 권장 드립니다. 혹시나 이 수정구를 발견한 장소가 여전히 음침한 섬망의 산 한가운데라면…. 뭐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만 말이죠. 하하. 아. 혹시 구조대이신가요? 구조대든, 아니면 탐험에 나온 사용자든 좋습니다. 일단은….) 나는 수정구를 가까이 가져와 들었다. 화면에는 척 봐도 두터운 장갑을 입은 남성 한 명이 나무에 기대어 쓰러져있었다. 그리고 화면 뒤로 보이는, 아주 조금 보이는 지형을 분석하자 이곳과 아주 흡사한 곳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가지 주목할 점은, 화면의 남성이 입가에 몇 줄기 피를 흘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세 번의 기침을 한 후 힘겹게 말을 이었다. (이 빌어먹을 산에서 바로 내려가세요. 지금 바로, 뒤도 돌아보지 말고요. 어서요!)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조금씩 체력이 달리는 게 느껴지네요. 목요일, 금요일에 중요한 시험이 있는지라 준비하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과연 저 남자는 어떤 일을 겪었을까요? 하하하. 아무튼, 저는 다시 시험 준비하러 가보겠습니다. 다들 재밌게 읽어주세요. :) 0255 / 0933 ---------------------------------------------- 2013년 6월 20일(목요일) 공지사항입니다. .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먼저 최신 회 업데이트인줄 아시고 들어오신 독자 분들께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예전에 한번 후기로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253회 2번 후기), 죄송하지만 오늘 하루 휴재를 할 예정입니다. 아시다시피 현재 기말고사를 보는 중입니다. 어떻게든 연재는 이어보려고 했는데, 내일 끝을 앞두고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입니다. 지금 이 상태로라면 학업, 소설 모두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아 아무래도 내일 보는 과목에 열중을 하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내일 보는 과목이 가장 중요한 2과목중 하나라서요. ㅜ.ㅠ) 해서, 오늘 딱 하루만 휴재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독자 분들의 하해와 같은 양해를 바라며, 오는 주말 6월 22일(토요일)에 256회를 들고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PS. 절대로 삐뚤어지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아닙니다. 정말로, 진심입니다. 믿어주세요! 0256 / 0933 ---------------------------------------------- 망상의 고원 “흠.” 남자의 말이 끝나자 안 그래도 서늘했던 주위의 공기가 한층 더 싸하게 느껴진다. 나는 담담히 콧숨을 내쉬었다. 남자의 말은 제법 흥미를 돋우어주고 있었다. 나는 가까이 들었던 수정구를 다시 내리고, 모두가 잘 들을 수 있도록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클랜원들, 특히 애들은 숨소리조차 죽인 채 수정구를 따라 시선을 이동시켰다. (부디 제 말을 들어, 지금쯤 바로 몸을 돌려 내려가고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말이죠…. 아까부터 분위기가 가라앉은걸 보니, 곧 있으면 그 놈들이 저를 찾아낼 것 같네요. 그러니 저는 바로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제 신분을 밝히자면, 저는 여울가녘 클랜의 4년 차 사용자 정성웅이라고 합니다.) 점점 죽음이 가까워져 오는지 남자의 말투는 힘겨운 기색을 담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하나씩 말하기 시작했다. (모든 일의 발단은 환각의 협곡으로 들어간 이후에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차분히 남성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어진 그의 이야기는 환각의 협곡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나열하고 있었다. 처음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별것이 없었다. 그저 협곡 안으로 들어서고, 이틀 만에 유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유적 안으로 들어선 원정대는…. (유적에 첫발을 들어선 순간 희희낙락해있던 우리들이 직면해야 했던 광경은, 바로 무수한 시체더미였습니다. 이곳 저곳에 곳곳이 널브러져있는, 반쯤은 썩어 들어가는 시체들을 보는 순간 뭔가가 잘못됐음을 직감적으로 느꼈죠. 그때 발을 돌렸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유적에 눈이 멀어….) ‘응? 뭔가 조금 이상한데?’ 계속해서 남성의 말을 듣던 도중이었다. 그의 말에서 나는 아직까지는 뭔지 모를,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일단 협곡 도시를 발견했다는 부분까지는 딱히 틀린 점은 없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전개 방식 자체가 미묘하게 초점이 어긋나고 있었다. 처음에 그렇게 심한 상처를 입고서도 논리 정연해 보이던 말이, 가면 갈수록 앞뒤가 맞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곳은 하나의 도시라고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이상했던 점은 분명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정상적인 도시의 면모를 갖췄다는데 있습니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고 할까요…. 그리고 도시 안으로 들어선 순간, 우리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시의 내부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저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각자 무기를 빼어 든 상태로요. 바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 사람들은 바로 부랑자들이었습니다.) 남성은 말을 하다 말고 다시금 기침을 시작했다. 한번 기침을 토할 때마다 입에서 핏물이 한 움큼씩 터져 나왔는데, 용케도 수정구에는 묻지 않고 있었다. 손에 살짝 힘을 줘 수정구 내의 마력을 느껴보니 잔존 마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즉 재생 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는 소리였다. 시시각각 죽음이 다가올수록 힘겨워지는지, 한동안 괴로워하던 곧 남성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저에게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은 것 같네요. 두서없이 말해서 죄송합니다. 마음이 급해서요. 아무튼 일전에 황금 사자 클랜에서 부랑자 말살 계획을 주도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들 대부분은 서쪽으로 도망갔다고 알려졌지만 일부는 다른 길로 도주한 모양입니다. 제 생각을 말씀 드리자면 비교적 사용자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환각의 협곡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는 걸로….) ‘부랑자라고? 놈들의 시체를 발견하게 아니라 살아있었다고?’ 남성의 말에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우리는 감히 싸울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무조건 도망이라는 선택밖에 없었으니까요.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동료들이 당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가장 후미에 있었고…. 부끄럽지만 정말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렸기 때문에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아니, 도망쳤다고 생각했습니다. 하하…. 하지만 동료를 버린 벌을 받았는지 결국 이 모양 이 꼴이 되고 말았네요.) 남성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이라는 듯 쥐어짜낸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비록 얼마 안 남은 목숨이기는 하지만…. 부랑자들에게 잡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느니, 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대로 죽기보다는 최대한 흔적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부디 이 수정구를 보고 계신 분께서는 재빨리 도시의 대표 클랜에 이 사실을 알려주십시오. 그럼 부디 이곳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가기를 기원합니다. Good Luck.) 그 말이 마지막이었는지 곧 수정구의 화면은 ‘팟’ 소리를 내며 꺼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본연의 번들거리는 빛을 내는 수정구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다들 어두운 그늘이 져있는 클랜원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부랑자라…. 이거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수현. 어떻게 하실 건가요?” 조용히 수정구를 품 속에 넣고 입을 다물고 있자, 고연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말을 걸었다. 클랜원들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러나 내 말을 듣자 다들 서로를 돌아보는 게, 아무래도 돌아가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고연주는 내가 그대로 강행하고 싶어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간곡히 설득하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부랑자들이 모여있다면 솔직히 조금 꺼려지지 않나요? 그 수정구면 충분한 증거가 될 것 같아요. 그러니 이만 돌아가는 게 어떨까요?” “사용자 고연주. 한가지 묻겠습니다.” “말씀하세요.” “주변에서 원정대의 이어지는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고연주는 침착히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했다. “네. 들어오고 나간 흔적은 확실하게 있어요. 조금 많이 섞여있기는 하지만요.” “그럼 이 사용자가 정신 계열의 마법을 당했는지 알 수 있습니까?” “네? 갑자기 무슨…. 그런 것까지는 알 수 없어요.” “그렇군요.” 나는 허리를 굽혀 주변에 흐드러진 꽃들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러자, 곧 익숙하게 알고 있는 하나의 꽃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중에 하나를 집어 든 다음 나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들어올렸다. “이 꽃은 하이드 플라워라고 불리는 꽃입니다. 소량으로 지니고 있으면 냄새를 없애주고, 대량을 갖고 있을 경우 기척도 어느 정도 줄여주는 신비한 효능을 갖고 있죠. 이게 왜 여기에 있을까요?” “글쎄요. 주변을 배회하는 괴물들에게서 수정구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을까요? 실종 당한 사용자들이 다잉 메시지를 남기는 방법들 중 하나니까 딱히 이상할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뭐, 자주 쓰는 방법은 아니지만 말이죠.” “그렇죠. 그런데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뭐가 이상한데요?” 남자의 말은 언뜻 들어보면 제법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사용자치고는 너무도 차분하고 침착하다. 물론 원래 그런 성격의 사용자들도 더러 있기는 했지만 문제는 그가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방식에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의 이야기는 “구해줘.” 혹은 “도와줘.” 의 뉘앙스보다는 뭔가를 억지로 설명하려는 뉘앙스가 강했다. 내 기억 속의 부랑자들은 유적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하지만 남성은 놈들이 아직 살아있다고 한다. 남성은 간신히 도망쳤다고 했다. 하지만 부랑자들이 그를 그렇게 순순하게 놓쳤을까? 그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갔다고 했는데, 어떻게 다른 동료들이 잡히거나 당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까? 그는 도망치는 도중 추적을 받았고, 결국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위중한 상처를 입었다. 그런 상황에서 하이든 플라워를 찾아 다니고, 자신의 시체를 보호하기 위해 수정구를 남겼다. 부랑자들은 과연 이 남자의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을까? 이 남자의 품속을 한번이라도 뒤져보지 않았을까? 그리고 처음 구해달라고 들려온 통신은 도대체 뭐였을까? 아니 애초에…. ‘망상의 고원, 환각의 협곡은 그렇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아니거든. 그리고 고작 부랑자 수십 명에게 그 놈이 당했다고 믿기도 어렵고. 나도 화정이 없으면 자신할 수 없는 상대인데….’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이어 물고, 여러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힌다. “저는 원래 계획대로 강행할 생각입니다. 머셔너리는 환각의 협곡으로 진입합니다.” 나는 내가 느끼는 의문들 중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을 들어, 최대한 자세하게 일행들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적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이 의문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조금은 더 진입해보자는 쪽으로 이야기를 이끌었다. 다행히 몇 명은 내 의견에 공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여주었지만 그래도 어두운 기색은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그 반응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고 결국 마지막 수단을 꺼내 들기로 했다.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기로 하죠. 제 생각은 아까 전에 말씀 드렸듯이 계속해서 탐험을 진행하자는 쪽입니다. 여기서 각자의 의견을 듣고 돌아가자는 의견이 많다면 발길을 돌리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각자의 의견을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시작은 사용자 고연주부터.” “저는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솔직히 부랑자 수십 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수현과 제가 있다면 질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하지만 그쪽에서도 저희와 비슷한 인물이 있다면 얘기는 달라져요. 미안해요. 하지만 단순한 증거 확보에는 수정구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고연주는 즉각 대답했다.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제껏 주저하던 클랜원들이 한둘씩 의견을 꺼내기 시작했다. “형. 저도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형 말은 공감하지만, 그래도 그 수정구가 있으니 소기의 목적은 이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반대해서 죄송합니다.” “음.” 안현도 반대를 표했다. 생각보다 수정구의 이야기를 진실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은지, 무리는 하지 말자는 쪽이 많은 것 같았다. ‘여기에 진짜 괜찮은거 많은데….’ 정말 이대로 돌아가야하나 싶어 절로 씁쓰름한 마음이 들려는 찰나였다. 그때, 조용히 상념에 잠긴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김한별이 가만히 눈을 뜨는 게 보였다. “저는 찬성할게요.” “응?” “이대로 계속 원정을 이어갔으면 좋겠어요. 남성의 말을 가만히 들어봤는데…. 뭐랄까.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자세히 말씀 드리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오빠 말씀대로 조금 더 탐험해볼 가치는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좋아. 그럼 2 대 2인가?” 나는 의외라는 눈길로 잠시 김한별을 바라보다가 한결 안도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녀의 옆에 있던 이유정은, 내 반응을 보며 잠시 머뭇거리던 기색을 보이더니 곧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때였다. “저도 오라버니 의견에 찬성할게요오.” “찬성 셋.” “너, 너까지? 으…. 모르겠다. 난 그냥 오빠 말대로 따를게. 솔직히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껏 오빠 말을 들어서 손해 본 것은 없으니까. 아주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조금 더 흔적을 살피는 정도라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찬성 넷.” 안솔이 찬성하고 나서자 그때까지 주저하던 이유정도 얼른 재청하며 나섰다. 이로서 찬성 넷, 반대 둘로 이미 사안은 결정이 나버린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아직 한 명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직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은 클랜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미 결론은 났지만, 그래도 들어는 봐야지. 한결아 너는 어떻게 하고 싶니?” “저, 저요? 저,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럼 기권?” “네. 기권할게요. 아직 탐험도 감이 잘 안 잡혀서요.” 백한결의 기권했다. 나쁘지 않았다. 나는 반대를 표한 둘을 바라보았다. 고연주는 애초에 내 말도 일리가 있다고 여겼는지, 가도 안가도 큰 상관은 없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안현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내 눈치를 흘끔 살피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처음으로 내 의견에 반대를 낸 게 자못 마음에 걸리던 모양이었다. ‘돌아가면 얼른 클랜이 자리를 잡을 필요가 있겠군. 여러 가지 규칙도 만들고…. 그 동안 너무 혼자서만 이끌어왔어.’ 나는 남성의 시체 위로 흐드러진 꽃을 대충 발로 쓸어 덮었다. 이윽고 어느 정도 시체가 가려지자, 이내 확정하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찬성 넷, 반대 둘, 기권 하나입니다. 투표 결과로 일단 탐험은 계속하는 것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점을 걱정하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 또한 무리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희가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온다면 그때는 부담 없이 발을 돌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목숨을 최우선시하겠다는 여지를 주자 애들의 무거웠던 얼굴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지는걸 볼 수 있었다. 이윽고 나는 흔적이 남아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클랜원들은 신속히 내 뒤에서 다시금 방진을 만들었다. 클랜원들은 아직 괴물들이 나오지 않았음에도, 대부분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수정구 이후로 다들 바짝 긴장감이 드는 모양이다. 그런 그들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나는 곧바로 출발 신호를 알렸다. * 나는 일부로 행군 속도를 높였다. 일단은 불안해질 분위기를 완화시킬 생각이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묘한 분위기가 감도는 이곳을 얼른 벗어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체가 있던 곳을 벗어날수록 음습하고 끈끈한 기운은 점차 희미해져 갔다. 그러나, 불쾌한 기분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앞선 기운이 벗어난 공간을 뭐라고 말하기 미묘한 공기들이 대신해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수현. 잠시만요.” 선두에서 걷던 도중 뒤에서 고연주가 행군 정지를 요청했다. 다른 사용자에 의한 중간 정지는 내가 머셔너리를 이끈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몸을 돌리자 안색이 하얗게 질려있는 안솔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안솔. 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하아…. 하아…. 죄송해요오.” “힘들어서 그래?”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아…. 이상하게 아까부터 자꾸 답답한 기분이 들어서요. 괘, 괜찮아요. 참을 수 있어요.” ‘아마도 거의 다 온 모양이로군.’ 정심단을 먹일까 생각도 해봤지만, 아직은 괜찮다는 안솔의 말에 지금은 행군을 재개하기로 했다. 대신 선두에 선 안현을 안솔의 옆에 보내, 그녀의 반응을 재깍재깍 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우리들은 다시 산길을 타기 시작했고, 완만한 지형을 벗어나 다시 가파른 지형으로 접어들었다. 그렇게 30분정도 지났을까. 뭔가 이상한, 형이상학적인 기운이 전신을 무겁게 짓누르듯 다가오다가 이내 가볍게 풀리는 게 느껴졌다. 『잠재 능력 심안(정)(Rank : A Plus)이 발동됩니다.』 『잠재 능력 전장의 가호(Rank : EX)가 발동됩니다.』 나는 급하게 손을 들어 행군 정지를 알렸고 빠르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현재는 내가 가장 선두에 선 상태였다. 이 말인즉슨 방금 전 넘은 선을 기준으로 한층 강력해진 필드 효과가 발동됐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뒤에서 누군가 풀썩 쓰러지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혀, 형! 안솔이…!” “그래. 한결아. 가방 이리 줘.”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있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힘겨워한다는 느낌은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섬망의 산, 망상의 고원, 환각의 협곡. 이 세 필드의 효과는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안솔에게는 쥐약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나는 지체 않고 백한결이 들고 있던 가방을 건네 받은 다음, 안쪽에 고이 모셔둔 정심단이 든 상자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채 온 몸을 부르르 떠는 안솔을 눕히고 억지로 입을 열자 옆에서 안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혀, 형. 어떻게 된 거예요?” “야. 앞쪽으로 넘어가지마. 거의 다 왔으니까. 아무래도 안솔이 민감해서 그런지 조금 일찍 느꼈나 보다.” “네? 그게 무슨.” “그러니까. 이곳만 넘으면….” 나는 안솔의 입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정심단을 넣어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혀에 닿은 동그란 환이 침에 스르르 녹아 사라지는 게 보였다. 곧이어 안솔의 떨리던 몸이 조금씩 잦아드는걸 확인한 후, 나는 차분히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망상의 고원에 도착한다는 소리야.”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간신히 시간에 맞췄네요. 다른 몇몇 작가 분들이 그러시는데, 한번 연재를 끊으면 계속해서 쉬고 싶어진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오늘 시험 끝난 기념으로 친구들이랑 저녁을 먹고 들어와서 늦게 집필을 시작했는데, 자꾸만 몸이 휴식을 요구하더군요. 하하. 다행히 오늘 새벽에 마신 레드불의 효과가 남아있는지, 집필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네! 시험이 끝났고, 망상의 고원 파트도 끝났습니다. 다음 파트 소제목 일부를 말씀 드리면, 환각의 협곡이 들어갑니다. 하하하.(본 진입은 망상의 고원이 다음 편부터 진행되지만, 본문 내용에도 나와있듯 환각의 협곡까지는 하루 거리입니다. 다음 챕터에 둘 다 나오고, 조금 빠르게 이으면 내부 진입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차후 내용은 완전히 맞추신 분은 아직 안 계시지만, 비슷하게 맞춘 분은 계시네요. 하하하.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시험이 끝나서 기쁘기도 하고, 간만에 푹 잘 수 있어서 너무 좋네요. PS. 다음 회부터 리리플 부활합니다! 올레! 0257 / 0933 ---------------------------------------------- 환각의 협곡,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 안솔을 진정시킨 후. 나는 정심단 다섯 환을 꺼내 각각 일행들에게 나눠주었다. 나 또한 한 알을 먹을까 생각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의미 없는 복용이었다. 제 아무리 필드 효과가 강하다 하더라도, 심안과 전장의 가호를 뚫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해서, 나는 만일을 대비하는 마음으로 정심단을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총 스무 알 중, 이제 남은 것은 열네 알이었다. 안솔은 쓰러졌을 때보다는 한결 나아졌지만 복용 후에도 낯빛이 썩 좋은 건 아니었다. 그런 그녀를 다독여 스스로 추스르게 만들고, 그 후에야 우리들은 비로소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비탈길을 넘을 수 있었다. “와! 여기가 망상의 고원이에요?” “우와…. 엄청 넓은데?” 이윽고 위로 올라선 안현과 이유정은 눈 앞에 펼쳐진 넓디넓은 벌판을 보며 동시에 탄성을 터뜨렸다. 망상의 고원은 나도 직접 와본 적은 드문 터라 꽤나 신선한 마음으로 주변을 구경할 수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군요.” “산 자체가 워낙 넓으니까요.” 고연주는 한 손을 직각으로 세운 채 눈 위를 가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차분하게 주변을 살피다가, 나는 몸을 돌려 뒤에 있는 클랜원들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복용한 정심단이 최상품이라서 그런지 대부분이 아직은 별다른 이상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이 초입이라는 점을 감안해야지.’ 메마른 입술을 연신 침으로 적시고 있는 안솔을 바라보다가,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들 몸 상태는 괜찮습니까.” “아무 문제 없어요. 평소랑 똑같은데요?” “나도 이상 무!” “정심단 효과가 좋은 것 같아요. 내면을 저절로 고요하게 만들어주고 있어요. 집중도 잘되고요.” 내 질문에 안현, 이유정, 김한별이 차례대로 대답한다. 고연주야 당연히 물어볼 것도 없었지만, 문제는 백한결과 안솔이었다. 백한결은 살만한 얼굴이었다. 나와 눈을 마주치자 살짝 고개를 숙임으로써 괜찮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에 반해서 안솔은 아까의 충격이 가시질 않는지 처음 출발했을 때와 비하면 낯빛이 많이 어두워져 있었다.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자 내 시선을 느꼈는지, 안솔은 어설프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괘, 괜찮아요. 오라버니. 조금 힘들긴 하지만…. 아직은 견딜 수 있어요. 혹시라도 힘들면 바로 말씀 드릴게요. 죄송합니다아.” “응. 그래. 안현, 안솔의 상태 좀 봐줘. 또 이상한 반응이 나오면 아까처럼 바로 알려주고.” 괜찮다고는 했지만 그것은 누가 봐도 억지웃음이었다. 안현은 내 말에 “네.” 라고 대답한 다음 재빨리 그녀 옆으로 붙었다. 안솔의 머리를 보듬는 안현을 보다가 나는 모두에게로 시선을 확장시키며 말했다. “지금 보고 계시다시피 망상의 고원은 무척 넓습니다. 그러나 이 곳을 모두 돌아볼 필요는 없습니다. 철저하게 흔적 위주로 탐사할 예정이며, 거리상으로 따져도 환각의 협곡까지는 하루면 갈 수 있습니다.” 어느덧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수많은 사용자들이 망상의 고원을 기피하는 이유는 바로 야영을 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필드 효과가 이어지는 곳에서 야영을 하는 미친 짓을 저지를 수는 없으니, 결국 오늘 야간 행군은 확정이나 다름없다는 소리였다. 일단 환각의 협곡으로 들어서게 되면 정심단의 복용은 멈추고 김한별과 백한결의 능력을 사용할 예정이었다. 둘, 특히 백한결의 부담이 커지긴 하겠지만 지금껏 전투에 참가하지 않음으로써 체력을 어느 정도 비축해뒀을 것이다. 그리고 협곡으로 들어가게 되면 유적을 찾는 것이야 금방이니 그전에 한번은 쉴 틈이 나올 것이다. 나는 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마친 후 전방으로 몸을 돌렸다.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벌판이 비죽비죽 돋아난 풀들을 살랑거리며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들은 최종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해, 망상의 고원 횡단을 위한 여정을 위한 첫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막 고원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선 순간, 한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몰이꾼들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군. 그렇다면….’ * “형. 한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응.” 한창 행군을 하던 도중이었다. 안솔이 이제 괜찮다는 말에 다시 앞으로 나온 안현은 내 옆을 따르던 도중 조용조용한 말투로 내게 말을 걸었다. 이어지는 흔적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대답하자, 곧 녀석의 말이 이어서 귓가로 흘러 들었다. “처음 원정을 떠나고 며칠 동안은 이상하게 전투를 많이 치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섬망의 산으로 들어선 이후로는 또 이상하게 전투가 거의 없는 것 같아서요.” “별로 이상할 것까지는 없는데.” “아, 그래요?” “응. 출발 전에 기록 좀 읽어보라고 했더니…. 자세히 안 읽었구나?” 살짝 놀리듯이 말하자 안현은 민망하다는 얼굴로 “헤헤.” 웃었다. 엄밀히 말하면 망상의 고원에도 출현하는 괴물이 있다. 출현하는 괴물의 종류는 딱 한 종류가 있는데, 그것은 아까 애들에게 말해줬던 ‘검은머리수리’ 라는 괴물이었다. 애당초 섬망의 산에서 주로 서식하는 놈들이라 약간의 내성이 있을지는 몰라도,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필드 효과는 인간과 괴물을 가리지 않는다. 다만 이 효과는 곧바로 나타나는 게 아니었다. 약간이기는 해도 서서히 시간을 두고 나타나는데, 영악한 놈들은 이 약간의 시간차를 이용하는 경우가 드물게도 있었다. 이 부분을 차근차근 설명해주자 안현은 아리송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우리가 순순히 당할 리가 없잖아요. 그 틈을 노린다면 정말 순식간에 우리를 쓰러뜨려야 하지 않을까요?” “굳이 쓰러뜨릴 필요는 없지. 아까 내가 한별이한테 해줬던 말을 생각해봐.” “?” “급강하를 시도한다고 했었지? 공중에서 목표를 설정하고 빠른 속도로 내려와서, 부리나 발톱을 이용해 먹이를 낚아채거든. 그리고 그 속도 그대로 다시 하늘로 날아올라 필드 효과를 벗어나는 거지.” 정말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고 나서야 안현은 “아.”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은 어쩔 때보면 마음에 들 정도로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는 반면에, 또 어쩔 때보면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런 유형이 잘 키우면 제법 쓸만해 지기는 할 텐데…. 뭐, 아직 부족한 점은 많지만.’ 이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제 애들은 더 이상 사용자가 아니었다. 사용자보다는 ‘머셔너리 클랜원’이라는 말이 더욱 어울리는 신분을 갖게 되었다. 이 말인즉슨 얼른 한 명의 클랜원으로서의 자각을 갖춰야 한다는 말이었다. 실력을 상승시키는 것도 시급한 일이긴 하지만 이것은 짧은 시간 안에 해결을 볼 수 없는 문제다. 일단 원정을 끝내면 얼른 클랜이 자리를 잡아야겠다는 다짐을 재차하며, 나는 행군 속도를 한층 더 높이려는 순간이었다. 끼요오오오오오오. 갑작스레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유유히 허공을 배회하는 한 마리 커다란 새를 볼 수 있었다. 전체 길이는 2미터정도 될까. 새까만 머리와 부리부터 꼬리 끝까지 광택을 잃은 흑갈 빛을 띠는 색과 발 아래로, 갈고리처럼 휜 발톱이 눈에 들어왔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한마디 툭 내뱉자 찰떡같이 내 말을 알아 들었는지, 김한별이 곧바로 주문을 외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빠른 대응이 기특하기는 했지만 나는 왼손을 휘저어 그녀의 주문을 멈추게 했다. “오빠?” “마법으로 대응하는 것도 좋지만, 잠시 가만히 있어봐.” “하지만….” “아아. 마침 한 마리밖에 없으니까 잘됐네. 안현, 이유정. 망상의 고원에서 근접계열이 저놈을 상대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마. 잘 봐.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백 번 말해주기보다는 한번 보는 게 더 나을 게다.” 간만에 내가 시범을 보인다고 하자 애들은 자못 기대가 되는지 다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일월신검을 빼어 든 채 일행들과 약간 거리를 벌렸다. 머리가 영악한 놈들이니 이렇게 홀로 서있기만 해도 내 쪽으로 올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어그로를 끌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있다. 나는 매끈하게 빛나는 검을 들어올려 햇빛을 반사시켰다. 끼요오오오오오오! 아마 검은머리수리의 시점에서 보면 뭔가 번쩍이는 빛이 자신을 비추고 있을 것이다. 역시나 효과가 있었는지 놈은 살쾡이 같은 눈을 내게 번뜩이고는, 창공을 빙그르르 유영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속도는 점점 더 가속이 붙기 시작하더니 이내 고원 너머 반대쪽으로 쭉 날아가버렸다. 아니, 날아가버렸다는 생각이 들 찰나였다. 사라질 것처럼 날아가던 검은머리수리는, U자를 그리며 급작스럽게 방향을 선회하더니 곧 다시금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쏜살같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온다.’ 나는 얼른 들어올렸던 검을 내렸다. 슬쩍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자 만일을 대비해 고연주가 단검을 던졌다 받았다 하는 모습이 보였다. 일단 도발을 해놓기는 했지만 원래는 멀리서 숨어있다가 먹이를 발견하고 기습적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게 놈들의 특징이었다. 더구나 머리가 영악한 놈이니만큼 언제 다른 방향으로 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크에에에에에에엑! 검은머리수리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하강하고 있었는데, 예상대로 놈이 선택한 수단은 발톱으로 낚아채기였다. 나는 놈이 들어오기를 가만히 기다리며, 몸통이 밀고 들어올 경로를 계산했다. ‘왼쪽으로 두 걸음하고 반.’ 적어도 새대가리가 계산한 경로보다는 내가 나을 것이다. 예측한 지점으로 걸음을 옮긴 후 나는 일월신검을 쥐고 있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반원처럼 펼쳐진 날개, 중앙으로 보이는 볼록 솟아오른 배 그리고 아래로 쭉 내밀고 있는 발톱이 점점 크게 보이고 있었다. 이윽고 남은 거리가 1미터도 채 되지 않을 즈음 나는 바닥을 겨누고 있던 일월신검을 상단으로 세워 일(一)자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오른쪽 발을 내밂과 동시에 강하게 땅을 밟아, 지축으로 삼았다. 이걸로 모든 준비는 끝. 이제는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썩둑! 스거거거거거거걱! 기세 좋게 발을 내밀었던 검은머리수리는 발톱이 먼저 썩둑 잘렸고, 가속을 이기지 못해 그대로 내 검을 향해 몸을 돌진시키고 말았다. 원체 붙은 가속도가 무시무시하긴 했지만, 아쉽게도 내 능력치와 권능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충격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앞을 디디고 있는 발에 조금 더 무게를 주며 몸을 기울였다. 가로로 들어올린 일월신검의 날에서 딱딱한 고깃덩이를 자르는 느낌이 전해져 들어온다. 더운피는 얼굴에 끼얹어지는 걸로 모자라, 흘러내려 코트 오브 플레이트를 줄줄이 적셨다. 이윽고 날에서 들어오는 느낌이 끝났다 싶을 즈음 내 뒤쪽으로 “쿵, 쿵.” 거리는, 육중한 몸이 각기 땅을 나뒹구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사서 고생하는군.’ 나는 깔끔하게 반으로 잘린, 바닥에 놓인 검은무리수리의 사체를 확인한 후 곧바로 애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백한결이 건네주는 천으로 얼굴을 닦으며,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면 돼.” “네, 네?” “어때, 참 쉽지?” “…….” 애들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 하늘 높이서 쨍쨍한 광선을 내리쬐던 햇살은 시간이 지날수록 따가움보다는 은근함으로 변하고 있었다. 해는 지고 있었다. 석양이 질 무렵 야트막한 하늘 아래로 노을 빛으로 물들은 벌판이 은은하게 살랑인다. 나는 해 질 녘 망상의 고원을 둘러보았다. 우리들은 벌판의 중앙에 있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그저 풀들뿐. 얼마나 걸어왔는지 모르겠지만 마치 망망대해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그 중 남겨진 것이라고는, 오직 앞선 원정대들이 남기고 간 흔적을 지표로 삼아 걸어갈 뿐이었다. 클랜원들의 분위기는 조용했다. 지금껏 강행군을 해와서 그런지 망상의 고원에 들어온 이후 변변한 휴식도 취하지 못하자 다들 부쩍 피로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솔직히 그냥 한번 정도는 쉴까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곧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긴장을 유지하는 편이 나았다. 휴식을 하면 자연스레 긴장이 풀리게 되는데, 정신력이 약한 사용자라면 필드 효과가 벌어진 틈을 비집고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섬망의 산이 두려움에 의한 의식 장애를 일으킨다면, 망상의 고원은 병적으로 생긴 잘못된 판단이나 확신을 그대로 구현시키는데 있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포괄적인 말이었는데, 자기자신의 망상 즉 사고의 이상 현상을 섬망 효과와 연결해 현실로 나타내는 만드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내게 정심단, 심안, 전장의 가호 이 셋 모두가 없었더라면, 그리고 최악의 상황이 일어났다고 가정한다면. 지금쯤 우리는 이곳에서 지옥의 대공을 만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실시간으로 일행들의 상태를 체크했다. 초입에서는 대부분 괜찮아 보였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효과는 더욱 강력해진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백한결의 능력을 사용하고 싶었지만, 녀석의 마력 파장과 맞는 보석이 드물었기에 많은 수량을 들고 오지는 못했다. 그런 만큼 일단은 정심단으로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다시 마음을 다지고 나는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그때였다. “오, 오빠. 잠깐만.” “응?” 뒤에서 들려온 유정의 목소리에 몸을 돌리자, 옆에서 꺽꺽거리며 호흡 곤란을 일으키는 안솔이 보였다. “소, 솔아? 갑자기 왜 그래?” “비켜봐.” 안솔의 얼굴을 보자 그녀의 내면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나는 빠르게 안솔에게 다가선 후 아까 품속에 넣었던 정심단을 하나 더 꺼내 들었다. 그리고 침착히 그녀의 입을 벌리고 환을 입 속으로 넣어주었다. 이윽고 연분홍 빛 혀 위로 정심단이 스르르 녹아 없어지고, 안솔의 호흡도 점차 정상으로 되돌아오는 게 보였다. “괜찮아?” “가, 갑자기…. 갑자기이…. 앞에서어….” 도대체 뭘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안솔은 헐떡이며 입만 벙긋거렸다. 말을 마무리 짓질 못하고 있었다. 차분히 그녀가 진정되기를 기다렸지만, 이내 안솔은 고개를 세차게 흔듦으로써 대답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반응을 보는 순간, 나는 왠지 모르게 낯설지 않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느낌은 마치…. ‘혹시…. 트라우마와 관련된 것을 본걸까?’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음냐음냐. 머리가 어질어질하네요. 생각보다 체력 회복이 더딤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났다가, 점심 약속 때문에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잤다가 일어나니까 어느새 오후. @_@ 휴. 몸이 정말 예전만 못하네요. 군대를 다녀온 이후로 하루하루 늙어가는 몸을 느끼고 있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정말로 슬픈 일이에요. 음음. 아마 다 다음 회 안으로 협곡으로 들어가고 유적을 발견하지 싶네요. 조금 빠르게 가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 여러분들의 양해를 부탁 드려요. 설정상 망상의 고원까지는 별다른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지라. 저도 얼른 유적 내부로 들어가고 싶거든요. :D 그리고 들어가면 말이죠…. 크흐흐흣…. 『 리리플 』 1. 미월야 : 돌아온 리리플! 1등 축하 드립니다! 리리플의 부활은 역시 미월야 님의 1등과 함께하는군요. 하하하! 시험 다 끝났어요! 체력 회복하는 즉시 달리겠습니다! 2. 마당쇠 : <아무리 비뚤어지려고 하셔도 독자들을 대량으로 등장시킨 뒤 대량학살로 복수하는 그런 모습까지 보이실 리는 없으니.> 호오…. 이런 방법이…. 호오…. 아, 아닙니다. 하하하. 호오…. 3. 눈물강 : 절반은 맞으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숨겨진 게 하나 있습니다. 쿠쿠쿠쿠. 4. 시즈프레어 + 드림장이 : =ㅁ= 탕! 탕탕! 탕탕탕! 5. 펜 : 네. 어떤 게 나오냐 면요. (소곤소곤) 이것이 나온답니다! 6. 당장 + 심심행 : 오호라. 다수결을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군요. 알겠습니다. 이 부분은 당장 수정하기 보다는, 저도 한번 천천히 숙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소중한 조언 감사합니다!(왠지 다수의 횡포라는 말이 마음에 찔리네요. ㅜ.ㅠ) 7. 객기 + 심심행 : 아, 그렇군요. 이 부분은 문맥상 오류이니 리리플 끝나고 바로 수정하러 갈게요! 감사해요! (PS. 고현주가 아니라 고연주에욧. ㅋㅋㅋㅋ.) 8. 헤브키냐 : ㄴㄴ해요. 실은 수현이는 잘못 없어요. 다 제가 빨리 유적 들어가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에헴(?). 9. c그라탕 : 그저 작품 내용에 관한 코멘트가 달린다는 것 하나만으로 행복합니다. 암요. 10. 달리다쿰 : 흠.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면 한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헤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58 / 0933 ---------------------------------------------- 환각의 협곡,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 속사정을 묻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말하기 싫다는 애를 억지로 다그칠 분위기는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은 원정 도중이었으니 엄한 일에 시간을 낭비할 여유도 없었다. 해서, 나는 아무런 말도 못한 채 고개만 푹 숙이고 있는 안솔을 한두 번 다독인 후 다시금 행군의 재개를 알렸다. 해는 조금씩 뉘엿거리며 넘어갔고 그에 따라 날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해가 완전히 진 후의 어스레함이 고원 전체를 물들였을 무렵, 주변의 경치는 처음 봤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흘리고 있었다. 바람이 한번씩 고원을 스칠 때마다 나뭇잎과 풀잎이 떠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주변을 울렸다. 이따금 사이사이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울음 소리와 당장 육안으로만 봐도 캄캄한 풍경은 으스스한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려주고 있었다. 행군을 하는 중간중간 등뒤에서 휴식, 야영을 바라는 애들의 눈빛이 가끔씩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시선들을 묵묵히 받아 넘기며 여전히 행군을 고집했다. 왜냐하면 망상의 고원을 횡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걷기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필드 효과는 내면을 직접적으로 끄집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사용자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질 좋은 환으로 내면을 다스리고,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는 불안심리는 급속 행군으로 대체하자는 게 현재 내 생각이었다. 체력이 지속적으로 하락한다는 문제점은 있지만, 되려 힘들면 힘들수록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데 온 신경을 쏟을 것이다. “훅, 훅.” “헉, 헉.”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야간행군을 선언한지도 어느덧 몇 시간은 지난 것 같다. 현대의 시간으로 계산하면 새벽 3시에서 새벽 4시 사이? 나와 고연주만 제외하고는 대부분 거친 콧소리를 내뿜고 있었다. 개중에 몇몇은 일부러 나 들으라는 듯이 크게 몰아 쉬고 있다는 느낌도 있었다.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입가를 억지로 당기며 아주 약간 속도를 늦춰주었다. “오, 오빠.” “응.” “조, 조금만 쉬었다가 가면 안될까.” “…흠. 휴식도 좋지만…. 지금은 행군을 유지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된다.” 일단 내 생각을 말하며 슬쩍 고개를 돌리자 땀을 뻘뻘 흘리는 안현과 이유정이 보였다. 근접 계열들이 그러할진대 원거리 계열 사용자들은 상태가 훨씬 더 안 좋았다. 그러나 나는 걷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저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돌려 흔적을 쫓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마 여기서 몇 명은 망상의 고원을 쉽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을 거다. 아까 안현이 그랬던 것처럼 섬망의 산 이후로 괴물들과 몇 번 마주치지 않았으니까. 그저 행군의 연속이니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 법도 하겠지.” “아, 아니…. 딱히 그렇게 생각했다기 보다는….” “아, 아니에요 형.” “뭐 혼내려고 한 말은 아니야.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니까.” 내가 일부 인정을 해주자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는 바로 말을 잇지는 않았다. 잠시 고개를 들어올려 찬란한 빛을 뿌리는 달을 보다가 이내 주위로 무수히 박혀 반짝이는 별빛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아름다운 광경에 조금 더 응시하고 싶었지만, 흔적을 놓칠까 싶어 결국 시선을 떼고 말았다. 이윽고 다시 고개를 원상태로 돌리며, 나는 뜸을 들이던 것을 멈췄다. “조금 뜬금없겠지만, 재밌는 얘기 하나 해줄 테니 들어봐. 대한민국의 해병대들이 받는 훈련 중에 외줄타기라는 훈련이 있거든?” “…….” “그런데 외줄을 타기 전에 개인당 팔 굽혀 펴기를 엄청 시킨다고 하더라. 양 팔이 후들거릴 때까지 말이야. 오직 양 손에만 의지해 줄을 잡고 건너야 하는데 왜 훈련 직전에 그런 행동을 했을까?” “응…. 퍼지지 말고 긴장하라고 그러는 건가?” 정답이었다. 고개를 끄덕거리자 유정의 “헤헷.” 하는, 멋쩍은 웃음 소리가 들렸다. 참 별것도 아닌 일로 좋아한다고 생각하며 나는 약한 콧숨을 내쉬었다. “맞아. 그럼 다른 데를 안보게 되거든. 모든 신경이 줄을 잡는 것에만 쏠리게 된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그렇게 훈련을 시키면 오히려 사고가 적어진다고…. 나는 망상의 고원을 행군하는 것도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 “그 동안 누누이 말했었지만 쉬는 것도 좋고, 휴식도 중요해. 하지만 망상의 고원에서는 예외야. 여기서 휴식을 취하게 되면 분명 한두 명은 긴장을 풀고 빈틈이 생기겠지. 그리고 필드 효과는 틀림없이 그 빈틈을 노리고 들어올 거다. 운이 좋아서 별 것 아닌 놈이 나타난다면 또 몰라. 하지만 만에 하나 감당키 힘든 놈이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으응. 그렇구나.” 애들이 앞으로 홀 플레인 에서 어떤 일들을 겪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나는 이것 하나는 자신할 수 있었다. 연차를 쌓아나가고 탐험을 계속 나가다 보면 언젠가 한번은 지금보다 더 힘든 상황이 올 것이라는 것. 단순한 행군만으로도 지금과 비슷한 피로를 겪으면서 괴물들이 습격이 잦았다면 어땠을까? 솔직히 현재 섬망의 산 이후로 거진 행군만 했기에 어느 정도 따라왔지만, 위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면 벌써 몇 명은 녹다운 했을 것이다. 후일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가장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실력에서 얻을 수 있다. 지금 당장은 힘들다고 느끼더라도 이러한 경험 하나하나가 후일에 비슷한 상황이 닥쳤을 때 소중한 지표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없을 때라던가…. ‘버텨라. 어떻게든 참아서 끝까지 이겨내라.’ 결국 내가 애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들뿐이었다. 부디 애들이 나중에라도 이런 내 마음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늦추었던 행군 속도를 정상 속도로 되돌렸다. 아무튼 지금으로선 얼른 환각의 협곡으로 들어가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 풀잎들은 새벽 이슬을 머금었는지 다리의 일부가 살며시 촉촉해짐이 느껴졌다. 시간은 쏜살같이 지났고, 어느새 동쪽 하늘에는 어스름한 동이 터 오르고 있었다. 주변은 희끄무레한 안개가 자욱이 깔려있다. 그러나 서서히 떠오르는 해는 안개를 뚫는 따스한 빛을 내뿜으며 고원 전체를 따스하게 감싸 안아 들고 있었다. 여명의 빛은 여태껏 남아있던 땅거미를 몰아내려는 듯 고원 전체의 들판 곳곳에 은은히 스며들었다. 이내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하게 빛나는 고원의 아침을 보며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상쾌한 새벽 공기와 뒤섞여있는 물 내음이 아릿하게 코를 찔러 들어온다. 그 내음을 음미하며,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정지 신호를 위해 손을 들어올리려는 순간이었다. “악!” “어머!” 약한 비명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애들 몇몇이 서로 얼굴을 감싸 쥔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꾸벅꾸벅 졸면서 걷다가 앞을 보지 못하고 부딪친 모양이다. 그런 그네들을 보며 고연주는 몇 번 혀를 차고는, 약간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들 정신차리렴. 거의 다 온 것 같으니까.” “네….” 클랜원들의 목소리에는 힘이 담겨있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히 행군의 여파로 보기는 어려웠다. 나 또한 미약하지만 전신을 짓누르는 필드 효과를 느끼고 있었다. 내가 이럴 정도인데 다른 사용자들이 느끼는 부담은 몇 배는 클 것이다. 간밤에 버티기 힘든 인원을 추려 한번 더 환을 복용시키긴 했지만, 불안한 감이 없잖아 남아있었다. “수현. 어디서 물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공기에 물기도 섞여있는 것 같고.” “소리도 들리고 냄새도 맡아집니다. 아무래도 조금 있으면 환각의 협곡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결국 내가 나서 고연주의 말을 거들자 그제서야 애들의 축 처졌던 눈동자에 조금씩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윽고 안현은 주변으로 코를 벌름거리더니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이상하네. 난 물소리는 하나도 안 들리는데. 오히려 비릿한 냄새만 맡아져.” “원래 물 냄새가 조금 비릿한 것도 있지 않아?” 이유정이 반사적으로 대꾸하자 안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이유정의 주변을 킁킁거렸다. 이유정은 눈에 쌍심지를 돋우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딱히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안현은 그런 이유정의 호의를 무시하고 크게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야. 이건 물 냄새가 아니라 꼭 피 냄새 같은데. 야, 너 혹시 생리했냐? 인간적으로 이럴 때는 자제 좀 하….” “뭐? 이, 이 미친 새끼가!” 이유정은 안현의 다리에 거칠게 발차기를 날렸다. 녀석이 죽겠다고 펄쩍펄쩍 뛰는걸 보자 절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단 나뿐만 그런 것은 아닌지, 여성 사용자들은 다들 짐승을 바라보는 것 같은 눈길로 안현을 쏘아보았다. 아무튼 안현의 의도치 않은 희생으로 잠시나마 분위기를 전환시킨 우리는, 다시금 흔적을 따라 행군을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이번에는 채 20분도 안되어 다시 정지 신호를 알릴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얼마 틈을 두지 않고 걸음을 멈추자 클랜원들을 하나 둘 사방을 둘러보며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아침이 오기는 했지만 아직 안개는 남아있었다. 다른 곳은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었지만 유독 우리들의 앞에는 안개들이 자욱이 몰려있는 상태였다. 전방에서 흘러나온 안개가 우리들의 발을 휘감는 순간 아까 맡았던 공기와 들었던 물소리가 조금 더 확실해진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다들 뒤로.” “수현?” 고연주가 내게 의문에 찬 말을 던졌지만 나는 묵묵히 고개를 저으며 일월신검을 뽑아 들었다. 햇빛을 받아 바르르 떨리던 일월신검의 검신에서 불그스름한 기운이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검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세 발짝 더 앞으로 나섰다. 딱히 거창한 자세를 잡지는 않았다. 아니, 어떻게 보면 지금 이 자세가 내 기본 자세라고 봐도 무방했다. 어쨌든 현재 검을 쥔 목적은 누구와 싸우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곧바로 검을 왼쪽 어깨 위로 끌어올렸다가 이내 강하게 내리치는 자세로 그어 내렸다. 쉬잉! 바람을 가르는 거친 파공 소리가 허공으로 쏘아지고, 쏘아진 파동은 몰려있던 안개를 거칠게 찢어발기며 아래쪽으로 쇄도하며 들어갔다. 그리고. 꾸웅! 푸스스스! 첨벙첨벙! 쿵쿵! “뭐, 뭐야?” “파동이 안으로 사라졌어?” 무언가에 부딪치고, 터지고,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가 차례대로 들린다. 쏘아낸 파동이 일으킨 풍압이 제법 강력했는지 전방을 가득 메우고 있던 안개는 상당부분이 걷힌 상태였다. 그리고 뻥 뚫린 구멍 사이로 빛이 비추어 들자, 비로소 우리들은 그 속에 숨어있던 절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는 양쪽의 벽이 가파르게 깎아질러 급경사를 이루는 깊은 골짜기였다. 안력을 돋워 천천히 살피자 절벽 아래로 아찔한 현기증이 날 정도로 깊이 있는 협곡의 높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바닥에는 하나의 이어지는 풀과 같은, 투명한 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광경이 희미하게나마 보이고 있었다. 협곡 아래로는 가히 신비로운 기운으로 가득 찬 연기와 사이사이 보이는 여러 지형지물들이 기가 막히게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다시 고개를 전방으로 돌리자 내 파동이 닿은, 거대한 구멍과 이곳 저곳이 금이 가있는 벽면이 보였다. 아마 떨어진 돌덩이들은 일부는 땅으로, 일부는 강물 아래로 떨어졌을 것이리라. 나를 비롯한 클랜원들은 한동안 입을 다문 채 아래를 구경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나는, 높은 곳이 무서운지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는 김한별을 향해 입을 열었다. “김한별. 가지고 온 보석이 총 몇 개라고 했지?” “꺅! 네, 네? 아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답지 않게 귀여운 비명을 내지른 그녀는 이윽고 황급히 가방을 뒤적였다. 이윽고 그녀는 말간 빛을 뿜어내는 보석을 한 움큼 꺼내 들어 내게 보여주었다. “생각보다 많지는 않아요. 유지 효율도 그렇게 좋다고 보기는 어렵고…. 저번에 가장 알맹이가 작은 보석으로 시험했을 때는 두 시간 정도 유지할 수 있었어요.” “두 시간? 아무런 효과도 받지 않은 상태서 두 시간이라면, 여기서는….” “아마 한 시간…도 안될지도 몰라요.” “결국은 시간 싸움이라는 소리군. 애들도 슬슬 한계에 다다른 것 같으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차분히 김한별이 쥐고 있는 보석의 개수를 세어보았다. 그리고 희망적인 예측을 할 수 있었다. ‘저 정도면 충분하겠네. 잘하면 어느 정도 남길 수도 있겠다.’ 아마 내 추측이겠지만 여울가녘은 제법 확실한 정보를 잡고 온 것 같았다. 지금 우리들이 서있는 방향으로 협곡 아래를 내려갈 수 있다면, 유적이 있는 곳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하긴, 그 정도의 확신은 있어야 환각의 협곡을 공략할만한 엄두라도 내보았을 것이다. 나는 크게 기지개를 펴고 김한별과 백한결을 번갈아 보았다. 방금 전까지 축축 늘어져있던 분위기는 환각의 협곡의 발견으로 일부나마 살아나고 있었다. 걱정했던 몇몇 클랜원들도 제법 잘 버텨주기는 했다. 한두 번 안솔이 위태롭기는 했지만 다행히 잘 참고 견뎌주었다. 이제 남은 건 유적 안으로의 진입뿐. “그럼 김한별, 백한결….” “수현. 잠시만요. 이쪽으로 와보세요.” 막 둘을 부르려는 찰나 고연주가 먼저 선수를 치고 말았다. 왜 그러냐는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아무 말도 않고 아래를 가리켰다. 고연주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은 몇 개의 큼직한 바위가 떨어져있었다. 아마 내가 쏘아낸 파동으로 인해 떨어진 돌덩이들 이리라. “저게 왜요?” “안력을 한번 돋워보시겠어요? 쿡쿡.” 말끝에 이어진 고연주의 웃음에 뭔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곧장 마력을 끌어올려 시각, 청각, 후각을 있는 힘껏 돋우었다. 그러자, 시야가 크게 확대되며 곧 한 손에 잡힐듯한 협곡 하부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파동의 여파로 떨어진 바위 부근을 자세히 관찰하는 순간, 나는 크게 눈을 뜨고 말았다. “뀨….” ‘뭐, 뭔가 깔려있어?’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오늘의 카톡. 나 “저교 님하.” 나 “님 와이파이 비밀번호점여.” 형 “********” 나 “기역 시옷.” 형 “소설은 잘 읽고 있네.” 나 “???” ??? 『 리리플 』 1. 한방모드 : 1등 축하 드립니다. 오랜만에 새로운 1등 코멘트를 뵙는 것 같군요. 후훗. 2. 사람인생 : 오랜만에 코멘트 달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건가욧! 타앙! 탕탕! 3. 꼬야 + 뜨거운이상 : 쿠폰 감사합니다. _(__)_ 노블 정기 결제를 하고 계셨군요! 저랑 똑같으십니다.(…….) 4. 도롱 : 아니요! 각성은요! 더 괴롭힐 거예요! 그래서 마구 울릴 거예요! 으하하하!(퍽퍽!) 5. 감자띱 : 마계 군주 급이 100% 힘을 발휘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우세하겠지요.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럴 일이 없습니다. 더 이상 말씀 드리면 스포일러가 돼버립니다. 하하하. 6. 아듀마르 : 그 부분은 '기록'의 유무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예를 들어 뮬에서 나왔던, 탐험 또는 원정 후 실적을 쌓기 위해 신전에 보고를 하죠? 그것들은 하나의 기록들로 만들어져 사용자들에게 공개가 됩니다. 그리고 수현이는 도서관에 들락날락 거리며 그것들을 읽었다는 인상을 주었다는 거죠. 7. 레이네시스 : 아니요. 절대로 아닙니다. 항공모함급 모함에 속으시면 아니 되어요. 8. hohokoya1 : hohokoya1 님 죄송해요. T0T 요즘 이상하게 몸이 축축 늘어져요. 엉엉엉엉. 절대로 로유미라고 놀림 받아서 연참 안 하는 것은 아니에요. T0T 9. QuistA.Gw*() : 재미있으시군요! 알겠습니다. 여기 재미 드리겠습니다. 재미야! 인사 드려라! 재미 “네! 안녕하세요?” 여기 재미있습니다! 하하하!(퍽퍽퍽퍽! 푹푹푹푹!) 죄송합니다.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거듭 사죄 드립니다. _(__)_ 10. rose-mary : 켈켈켈켈! 안솔은 괴롭혀야 제 맛입니다. 이제 유적 안으로 들어가면 마구마구 굴려서 울릴…. 흠흠. 아, 아닙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59 / 0933 ---------------------------------------------- 환각의 협곡,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 “돌덩이에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아래에 뭔가 깔렸다는 건 확실해요. 수현은 정말로 대단하군요.”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은 꼴이네요. 까르르.” “아직 죽지는 않은 것 같은데…. 일단 내려가서 직접 확인하는 게 낫겠네요.” 고연주의 장난기 다분한 말투에 괜히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별 생각 없이 쏘아 보낸 파동인데 갈라진 돌덩이가 아래서 잘 쉬고 있던 괴물의 몸을 깔아버렸다.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 아니 돌 벼락이라고 해야 할까.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우리 둘을 멀뚱멀뚱 쳐다보는 애들을 향해 고개를 돌린 후, 나는 시선을 김한별과 백한결에게로 고정시켰다. “김한별, 백한결. 이제 슬슬 준비하자.” “네. 알겠어요.” “네, 네!” “긴장하지 말고. 나머지는 한별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너는 발현을 유지하는 것에만 신경 쓰면 돼.” 차분히 대답하는 김한별과는 달리 백한결은 자못 긴장이 되는지 목 울대를 살짝 움직였다. 백한결은 가지고 있는 사용자 정보도 괜찮고 재능도 있는 편이다. 무엇보다 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는 사용자였다. 첫 원정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군소리 않고 따라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옥에도 티가 있다고 딱 한가지 문제점을 꼽으라면…. ‘이상하게 실전을 연습처럼 못한다는 말이지.’ “한결아. 지금 바로 시작하자. 다른 분들도 저희 주위로 모여주세요.” “후우. 후우.” 김한별은 한 움큼 쥐었던 보석 중 몇 개를 골라내더니 백한결에게 되비침의 발현을 요청했다. 이윽고 나를 비롯한 클랜원들이 주위로 모여들고 진형을 잡자, 백한결은 한두 번 심호흡을 함과 동시에 오른손을 앞쪽으로 들어올렸다. 번쩍! 들어올린 백한결의 손에서 찬란한 빛이 나타났다. 그리고 오른손을 부드럽게 감싸는 희뿌연 막을 보며 김한별은 곧바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 ───. ───.” 김한별의 고유 능력은 보석 증폭. 언뜻 보면 별로 대단치 않은 능력처럼 보이지만, 자신에게 한정되는 게 아닌 타인의 마법도 증폭시켜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급상승한다. 그리고 단순 증폭을 넘어서 실력이 허락하는 한에서 다른 능력을 섞을 수도 있다고 하니, 김한별도 어떻게 보면 복덩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복덩이보다는 보석 먹는 하마라는 표현이 어울리겠지만 말이다. “대상 지정 되비침(Glance Back). 사용 보석 애주라이트 화이트(Azurite White).” 김한별의 주문이 이어지자 주먹 쥔 그녀의 손가락 틈새 사이로 환한 빛이 줄기줄기 뻗어 나오는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살며시 피는 순간, 보석은 두둥실 떠오르더니 백한결의 오른손으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이윽고 애주라이트 화이트가 그의 손에 부드럽게 안착한 순간, 김한별의 마지막 주문을 위해 입술을 열었다. “보석 증폭(Jewel Amplification).” 우웅. 시작된 보석 증폭. 그것은 하나의 고요한 흐름과 같았다. 호기심이 일어 마력의 흐름을 읽어보자, 되비침의 영역 안으로 들어간 보석은 내부의 마력을 한껏 폭발시키는 것이 느껴졌다. 우웅! 우우웅! 폭발된 마력은 백한결의 마력 파장에 무리 없이 섞여 들었다. 그러더니, 다시 한번 빛을 환하게 내뿜는 것과 함께 오른손에 한정되어있던 되비침이 서서히 넓어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오. 이것 좀 신기한데?” “흥~.” “신통방통~.” “…….” ‘신통방통? 신기방기가 아니라?’ 안현, 이유정, 안솔은 한마디씩 소감을 내뱉었다. 지금껏 김한별이 하는 일에 대부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녀석들이었지만 이번 광경은 꽤나 신선한 모양이었다. 다만 안솔의 마지막 말은 조금 웃겼던지 김한별은 미약한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되비침은 조금씩, 천천히 범위를 넓혀갔다. 주위에 있는 안솔을 시작으로 이유정 고연주에게로 그 범위를 넓혀가더니 곧 가장 선두에 있는 나에게까지 둥그런 막이 밀고 들어온다. 그리고 되비침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클랜원들은 각자 기묘한 탄성을 내질렀다. “어, 어? 뭐야 이거? 우와!” “콜록! 콜록!”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이전까지 미미하게 내 전신을 짓누르던 필드의 중압감이 단번에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반응이 가장 격한 사용자는 안솔이었다. 필드 효과를 가장 강하게 받고 있어서 그런지, 몇 번 기침을 하고는 이내 휘둥그래진 눈으로 입을 벙긋거렸다. “와. 아까까지만 해도 되게 지쳐있었는데 갑자기 활력이 샘솟는 기분인데.” “그렇지? 나도 머리랑 몸이 가뿐해진 것 같아.” 지금껏 중압감에 시달리다가 한 순간에 벗어나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둘의 입 또한 함께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현과 이유정의 칭찬을 들은 백한결은 한결 안도한 얼굴로 숨을 내쉬었다. 김한별은 백한결의 손 주위로 떠오른 보석을 유심히 살피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보고했다. “오빠. 완료했어요.” “수고했다. 상태는 어때?” “확실히 연습할 때보다는 빠르게 떨어지고 있어요. 유지 시간은 조금 더 지켜봐야 알 것 같고요.” “그래 알겠다. 그럼 일단 협곡을 내려가야 할 텐데….” 여울가녘 클랜원들은 그냥 바로 벽을 타고 내려간 것처럼 보였다. 나나 고연주는 내려가는 게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현재 우리들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무엇보다 환각의 협곡으로 들어서는 순간 3중첩 필드 효과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을 성질의 것이었다. 잠시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자, 누군가 옆에서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고연주가 오른쪽 방향의 허공으로 연신 손가락을 찌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수현. 설마 이대로 내려 가시게요?” “그건 힘들겠죠. 그랬다가 발 한번 잘못 디디면 기껏 펼쳐놓은 되비침의 영역에서 벗어날 확률이 높으니까요. 그런데 그 손가락은 뭐죠?” “아무래도 1차 구조대는 이쪽 방향으로 간 것 같은데요? 흔적이 또 갈려있어요.” “흠. 그렇기는 한데….” 나는 여태껏 여울가녘 클랜원들의 흔적을 중심으로 쫓아왔다. 그들이 환각의 협곡 내 유적을 발견했을 가능성이 높으니, 흔적만 따라가면 따로 기억을 더듬어 길을 찾지 않더라도 유적이 나올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동안 고민이 들었지만 나는 결국 고연주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대신 흔적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니 협곡 아래 지형을 기억해두기로 했다. “그럼 이쪽 방향으로 가도록 하죠. 아마 걷다 보면 내려가는 길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요.” “현명하신 선택이에요.” 고연주가 가리킨 방향으로 발길을 돌리자 그에 맞춰 클랜원들이 다시 진형을 잡았다. 이제부터는 되비침의 막 안에서 행군을 해야 했기 때문에, 김한별과 백한결을 생각하고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우리들은 쩍 갈라져있는 협곡을 오른쪽에 끼고 다시금 행군을 시작했다. 햇빛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고, 협곡 안을 메우고 있던 안개는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유적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내면에 잠재되어있던 긴장을 천천히 일깨웠다. 그렇게 나름의 준비를 하며 걷던 도중이었다. 문득 보석 증폭으로 잠깐 잊혀진, 내 돌 벼락을 맞은 생물체에 생각이 미치자 갑작스레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협곡 안에서 제약을 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괴물이 있었나?’ * “여기 어디쯤인 것 같은데요.” “네. 아마 앞으로 조금 더 걸어가면 나올 것 같아요. 그나저나 정말 까마득하네요. 이곳을 내려왔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위를 올려다보자 고연주의 말대로 까마득히 높이 서있는 협곡의 벽이 보인다. 흔적을 쫓아 출발한 이후 다행히 아래로 돌아 내려갈 수 있는 비교적 완만한 경사 지형을 발견할 수는 있었다. 다만 완만하다고 해봤자 어디까지나 직각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해서, 결국 원거리 계열 몇 명은 나와 고연주의 옆으로 붙어 내려가는 것으로 결정을 봤다. 까딱 잘못하면 아래로 구를 수 있는 경사를 갖고 있었으니까. “씨이….” “…칫.” 협곡 아래로 내려온 이후 안솔과 백한결은 서로를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 옆으로 붙은 인원은 안솔과 백한결이었는데(고연주의 옆으로는 김한별이 붙었다.), 내려오는 내내 내 몸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겠다고 다퉜기 때문이다. 대놓고 말다툼을 벌인 건 아니었지만, 그들이 잡은 부위는 엄연히 내 신체의 일부였다. 그런 만큼 내 허리를 잡은 그네들의 손에서 암암리에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은 딱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너 임마. 이제 유지를 좀 잘하는 것 같은데? 예전에는 말도 못 걸 정도로 집중하더니, 여유가 생겼잖아?” “아, 그, 그런가요?” “응. 너 탐험 중에도 계속 연습했다며? 오빠한테 들었어. 열심히 하네~.” “헤, 헤헤. 감사합니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안현과 이유정의 칭찬을 받은 백한결이 쑥스러운 미소를 짓는 게 보였다. 둘은 그런 백한결이 귀여운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막 내부를 물들 무렵, 어디선가 싸늘한 한기가 몰아치는 게 느껴졌다. 한기의 진원지에는 당연히 안솔이 서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와락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녀석들의 만담을 들으며 열심히 전방을 살피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 더 앞으로 전진하자, 곧 20미터 앞으로 돌덩이 몇 개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게 눈에 들었다. 주변 지형과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내가 떨어뜨린 돌덩이들이 확실했다. “찾았습니다.” 나는 한마디 툭 내뱉은 후 바삐 걸음을 놀리려다가, 다시 원래의 속도로 맞췄다. 내 말에 실컷 떠들던 클랜원들의 입에 삽시간에 침묵이 찾아 들었다. 아까 위에 있을 때 나와 고연주의 대화를 들었으면, 돌 아래 뭔가가 있다는 사실은 눈치로 알고 있을 것이다. 차르르. 차르르. 우리들의 왼쪽으로는 폭 넓은 강물 사이로 물줄기가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강물에 걸쳐있는 대지에는, 돌 아래로 하얀색 앞발 두 개가 내밀어져 있었다. 앞으로는 다리 두 개, 뒤로는 힘없이 살랑 이는 하얀 꼬리털 하나. 나는 돌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멍한 기분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하얀 다리, 하얀 꼬리…. 설마?’ “형, 저게 뭐에요?” “헤에, 꼬리가 살랑거려어…. 아직 살아 있나 봐요….”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조금 더 앞으로 걸어갔다. 그에 따라 막이 이동하고, 곧 돌이 되비침의 범위 안으로 들어온다. 나는 다급히 앞쪽으로 걸어가 돌덩이를 잡았다. 그러자 조금씩이기는 해도 바르르 떨리는 진동이 손을 타고 전해져 들어왔다. 나는 곧바로 돌을 위로 올려 집어 던지고, 그 아래에 있는 괴물의 정체를 확인했다. 첨벙! “뀨….” “어머!” “헉.” “어?” 돌이 강물에 빠짐과 동시에 아래에 깔려있던 괴물이 정체를 드러냈다. 아니, 그것은 괴물이라고 볼 수 없었다. 크기는 자그마한 망아지 정도나 될까. 온 몸을 덮고 있는 하얀 털과 머리 위로 비죽 솟아오른 은은한 빛을 내뿜는 뿔. 그 정체는, 다름아닌 유니콘이었다. 그것도 다 자란 성인이 아닌 아가 유니콘. “어머 어머! 말도 안 돼. 이거 유니콘 아니에요?” “맞습니다. 안솔! 얼른 이쪽으로 와라!” 유니콘은 돌이 걷어지자 힘없는 얼굴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대지에는 생각보다 많은 양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빗겨 맞아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몸과 다리가 심각히 보일 정도로 짓이겨져 있었다. 녀석은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더니 이내 앞다리를 기어 내게서 멀어지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다. “부, 불쌍해….” “가방에 있는 치료 물약 서너 개 꺼내주고, 바로 치료 주문 들어가. 한두 번으로는 안될 터이니 내가 그만하라 할 때까지 계속 외우고.” “뀨우….” “그래. 도망가지 마. 옳지 착하다. 해치지 않아요. 지금 바로 치료해줄게.” ‘큰일 날뻔했네.’ 나는 십년감수한 기분으로 안솔이 건네는 물약을 받아 들었다. 땅바닥을 기어가는 유니콘을 안아 들자, 녀석은 힘없이 몸부림치며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아마 몸이 아픈 상태서 처음 보는 인간들이 무서운지, 구슬픈 울음 소리를 내며 진주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이윽고 평평한 대지에 녀석을 눕힌 나는, 재빨리 치료 물약의 마개를 돌렸다. * 너무 늦은 걸까 걱정이 들었지만, 빠른 조치가 유효했는지 천만다행으로 유니콘을 완치시킬 수 있었다. 그에 상급 치료 물약 네 개가 소비됐지만 하나도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뀨우, 뀨우!” “호호. 얘 좀 봐. 애교 부리고 있어.” “아잉, 간지러워. 하지마아….” “아하하! 안솔 한 테 얼굴 비비는 것 좀 봐. 진짜 귀엽다, 귀여워.” 유니콘의 치료를 완치시킨 후, 나는 여기서 잠시 휴식하기로 했다. 어차피 유적은 여기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다. 들어가기 전에 한번 체력을 보충할 필요도 있으니, 애당초 이곳에서 대 휴식을 가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치료를 끝내고 팔팔해진 유니콘은 여성 사용자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녀석도 우리가 자신을 치료해줬다는 걸 깨달았는지, 처음의 두려워하는 모습보다는 보다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태도를 보였다. 물론 그것은 여성 사용자들에게만 한정된 말이었다. 유니콘은 습성상 남성보다는 여성을 따르는 경향이 강하다. 그 중에서도 순위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처녀 여성, 비 처녀 여성 그리고 남성 순으로 따르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남성 이후로는 거의 친해질 기회가 없다고 봐도 좋다. 안현은 처음 유니콘을 만지려고 하다가 퇴짜를 맞자 뿔이 났는지, 입술이 삐쭉 튀어나온 상태였다. “형.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응? 뭔데?” “저놈 데려가실 거예요? 유니콘이라고 하셨잖아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보기만해도 엄청 희귀한 녀석일거 같은데요.” “희귀하기는 하지. 특히 뿔이나 피는 쓸 데도 많다고 알고 있거든. 하지만 데려갈 수는 없단다.” “왜요?” “유니콘은 어떻게 보면 하나의 신수나 다름없는 동물이거든? 스스로 따라오는 거면 몰라도, 신수를 강제할 수는 없어. 설령 강제한다고 해도 어떤 형태로든 보복이 되돌아온다고 하더라. 푸른 산맥 기억나지? 어떻게 보면 반시보다 더한 녀석이라고 보면 돼.” 나도 모르고 저지른 일이기는 했지만, 홀 플레인 에는 유니콘을 죽이면 반시보다 보다 범위가 넓고, 더욱 강한 저주를 받는 설정이 있다. 반시의 저주는 한달 내로 ‘무조건’ 죽는다는 설정인데, 그보다 더 강한 저주가 덮쳤으면 꽤나 골치가 아팠으리라. “헷, 아깝네요.” “스스로의 의지로 우리를 선택하거나, 자연사한 시체를 거두는 정도라면 모를까. 아무튼 이대로 놓아주는 게 최선일 게다. 그래도 신수는 빚을 지우면 확실히 은혜는 갚는 특징도 있으니, 이대로 보내주면 언젠가는 보답이 되돌아올 수도 있고. 그러니 이만 미련을 버리렴.” ‘솔직히 빚이랄 것도 없지만.’ 안현은 의문이 해소됐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아쉬운 눈길을 보냈다. 현재 유니콘의 주위로는 안솔, 이유정, 고연주가 있었고, 약간 떨어진 곳에서 김한별과 백한결이 막을 유지한 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따금 백한결 내미는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 걸로 보아, 확실히 유니콘이 남성보다는 여성을 좋아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 어? 백한결의 진정한 성 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움 찾아올 즈음이었다. “어어, 유니야! 어디가아~?” “뀨뀨~.” 안솔의 부름에 유니콘은 고개를 돌려 대답하고는 이내 내 쪽으로 아장아장 걸어오기 시작했다. 안현은 부러움이 가득한 눈길로 그곳을 보다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유니콘을 보더니 급히 흥분하기 시작했다. “오오! 온다, 온다! 형! 우리한테 오고 있어요!” “이상하네….” “뭐가 이상해요? 흐흐. 드디어 만져볼 수 있겠구나.” “아, 아니야.” 이윽고 나와 안현이 있는 곳으로 다가온 유니콘은, 내 발아래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초롱초롱한 눈길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마주보았지만, 나는 함부로 손을 내밀지 않았다. 남성의 손이 함부로 닿으면 무척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때였다. 이대로 쳐다보고만 있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자, 곧 아가 유니콘이 방긋 웃으며 기분 좋은 소리로 울었다. “뀨우~.” 그리고 내 바위에 걸터앉아있는 내 다리에 고개를 들이밀고는, 슬쩍슬쩍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다. 비비적, 비비적. “어머! 어떡해 어떡해! 오빠 다리에 얼굴 비비는 것 좀 봐. 너무 귀여워~.” “어머? 의외네. 유니콘은 남성은 어지간해서는 따르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 응?” 고연주는 말을 하다 멈추고는 백한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그녀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지는 것으로 보아, 아마 나와 똑같은 의문을 품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앞장서서 치료해줘서 이러는 건가?’ 설마 나에게 친근감을 드러낼지는 몰랐기 때문에 조금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그저 내 다리에 얼굴을 비비는 녀석을 가만히 보고 있을 때였다. 옆에서 그것을 보고 있던 안현은 샘이 났는지, 음침한 웃음소리를 내며 두 손을 내밀었다. “흐흐. 이놈! 나도 좀 안아보자.” “뀨뀨?!” “오. 역시나 부드러운…. 악!” “뀨! 뀨뀨!” 안현이 녀석을 들어올려 거칠게 품으로 안으려고 하자, 아가 유니콘은 재빨리 꼬리를 휘둘렀다. 곧이어 안현의 뺨에서 철썩, 소리가 들리고 약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가 유니콘의 갑작스런 공격에 안현은 녀석을 놓치고 말았고, 이내 벌건 자국이 난 볼을 쥐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유니콘은 후다닥 도망가더니, 얼른 내 다리 사이로 몸을 숨겼다. “이, 이자식이!” “뀨뀨!” “꺄하하! 대박 웃겨! 때리고 오빠 다리 사이로 숨었어!” “정말 이상한 일이네…. 왜 백한결이랑 수현은 따르면서 쟤는 따르지 않는 걸까….” 안현은 화를 내며 뒤로 돌아가 잡으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유니콘은 바위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도망쳤다. 한동안 추격전이 벌어졌지만, 유니콘은 의외로 잽싼 몸놀림을 보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바위에서 내려온 후 막 내 앞으로 뛰어가던 유니콘을 안아 올렸다. 녀석은 깜짝 놀란 기색으로 나를 돌아보더니, 아까와는 다르게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내 품에 덥석 안겼다. “헉, 헉! 뭐야! 왜 형은 되고 나는 안 되는데!” “뀨뀨!” 안현의 호통에 유니콘은 고개를 한번 번쩍 쳐들고는, 다시금 내 품에 얼굴을 비볐다. 여성 클랜원들은 어떻게든 한번 더 유니콘을 안아보고 싶은지, 모두 슬금슬금 다가와 내 품으로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내 품에 안긴 녀석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오직 내 품에 안겨 기분 좋은 울음과 함께 네다리를 휘적거리는 중이었다. 김한별은 우리들이 모인 것을 확인하고는 휴식 때문에 조금 넓혔던 범위를 살짝 줄였다. 그리고는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유니콘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어떻게 유니콘이 이곳에 있을 수 있었던 걸까요?” “유니콘의 피에는 강한 마법 저항이 흐르거든. 자신에게 해로운 마법은 거의 건들지도 못할 정도지.” 김한별의 물음에 간단히 대답한 후, 나는 녀석을 위로 들어올렸다. “그런데 너, 왜 여기에 있었니?” “뀨뀨?” “혼자 온 거야? 네 아버지나, 어머니 유니콘은 없어?” “뀨. 뀨뀨, 뀨뀨뀨. 뀨, 뀨뀨, 뀨뀨뀨뀨뀨.”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녀석은 알아듣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고 녀석을 살살 보듬었다. 언제까지고 여기서 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쉴 만큼 쉬었고, 보석은 무한하지 않다.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유니콘은 강제로 데려갈 수 없는 동물이었다. 신기한 신수를 보는 것도 좋지만, 어차피 먹지 못할 그림의 떡. 다행히 아직 어려서 그런지 내가 다치게 했다는 사실까지는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니, 그렇다면 여기서 이만 놓아주고 이제 서로 갈 길을 가는 게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주목하세요. 10분 후 다시 출발할 예정입니다.” “오빠, 얘 데려가면 안 돼?” “안 돼. 유니콘은 다시 놓아줄 거야. 얘 멋대로 데려갔다가는 큰일난다.” “오라버니이~.” 이유정과 안솔의 칭얼거림을 무시하고, 다시금 살며시 녀석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아가야. 잘 들어. 혹시라도 우리를 따라올 생각이 있으면 따라와도 좋아. 하지만 주변에 잠시 놀러 나왔거나, 아니면 다른 유니콘들이 있다면 이만 돌아가렴. 아마 지금쯤 네가 없어져서 많이 걱정하고 있을 게다.” “뀨?” 아가 유니콘은 내 말에 고개를 갸웃갸웃 기울이더니, 이내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대답을 확인한 후 나는 차분히 녀석을 대지로 내려주었다. 그러자 아가 유니콘은 천천히 몸을 돌려 우리가 왔던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오, 오빠. 진짜 이대로 보낼 거야? 정말로 안 데리고 갈 거야?” “에헴. 이유정, 진정하라고. 그 이유는 이 몸이 설명해주지. 들어봐. 유니콘은 신수야. 보낼 수밖에 없어.” ‘…아주 포괄적으로 말하는구나.’ 안현은 내게서 들은 말을 가지고 아는 체를 하고 싶었는지, 아쉬워하는 클랜원들에게 침을 튀기며 설명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는 사용자는 거의 없었다. 그녀들의 시선은 오직 꼬리를 살랑거리며 걸어가는 유니콘에게로 꽂혀 있었다. “유니야 잘 가~! 우리 또 보자~.” 섭섭함을 이기지 못했는지, 안솔은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를 내며 손을 흔들었다. 유니. 명명화시키는 감각 한번 참 고약하다는 생각이 드려는 찰나였다. 자박자박 걸어가던 아가 유니콘은 고개를 한번 슬쩍 돌리더니 이내 앞쪽 오른발을 들어올리며 “뀨.” 하고 울었다. 여성 클랜원들은 그 모습에 다시 한번 자지러지고 말았다. 이윽고 유니콘이 협곡 저편으로 사라지자, 클랜원들은 한두 명씩 아쉬운 말을 토해냈다. “아, 정말 홀 플레인 은 모르겠네요. 저도 길들은 유니콘을 본적은 딱 한 번 밖에 없는데. 설마 여기서 볼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아쉽다.” “…….” “수현? 수현! 왜 그렇게 멍하니 있어요?” “네? 아, 아닙니다.” 고연주가 배시시 웃으며 옆구리를 찌르자, 나는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방금 전 유니콘의 행동을 본 이후로 나 또한 녀석이 사라진 방향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유니콘은 분명 헤어지기 전 앞쪽 오른발을 들어올렸다. 1회 차에서 유니콘을 길들인 사용자가 적은 기록을 본 적은 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방금 아가 유니콘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분명히 있었다. ‘뭐였더라. 또다시 보자…였었나? 아닌데…. 다른 의미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때는 유니콘이라는 동물이 나와 인연이 없다고 여겼던 터라, 그다지 관심 깊게 읽어보지 않았다. 한동안 미간을 좁히며 정확한 내용을 기억하려 애썼지만 애매하기만 할 뿐, 더 이상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나는 결국 떠올리는 것을 포기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천천히 기다려보면 알겠지.’ 아무튼 뜻하지 않은 유니콘의 출현으로, 제법 즐거운 분위기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쉬는 시간 동안 다들 체력도 어느 정도 회복했을 터이니, 이제는 본업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휴. 죄송합니다. 원래 이번 회 후반부에 유적을 발견하고 들어서는 것으로 잡아놨었는데, 유니콘 떡밥이 너무 길어졌네요. _(__)_ 아, 혹시 모르니 유니콘과 반시의 저주 설정에 대해서 알려드릴게요. 1. 유니콘(반시)이 사망을 제외한 피해를 입었을 경우 : 저주를 내리는 ‘주체’는 유니콘(반시)이다. 이 경우는 강력한 저주가 아닌 보복 행동 또는 보복 저주 정도로 볼 수 있다. 2. 유니콘(반시)이 강제적으로 사망했을 경우 : 이 경우는 설정의 발동으로 자신을 사망케 한 대상에게 강제적으로 강력한 저주가 내려진다. 설령 그 대상을 모르는 경우가 발생하더라도, 여기서는 ‘무조건’ 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3. 위의 경우에 대해서, 해당 저주에 대해서 미리 방어하거나, 설령 받더라도 해주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한다. 『 리리플 』 1. 한방모드 : 어? 저번 회도 1등 하지 않으셨나요? 덜덜 합니다. 하하하. 1등 축하 드립니다. 이번 회도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2. 사람인생 + KKKranuse : =ㅁ=…. 기관총이 필요하겠군요. 3. 랜슬럿 듀 락 : 그렇습니다. 비 호감입니다. 모든 것은 저의 탓입니다. ㅜ.ㅠ 4. 야우로 : 예. 형 맞습니다. 누나 아닙니다. 5. hohokoya1 : 오늘 분량 빵빵히 넣었습니다. 하하. 솔직히 유니콘 떡밥이 이렇게 길게 잡힐 줄은 저도 미처 예상치 못했네요. -_-a 축하 감사합니다! 6. Morph : 네. 초반 보스 몬스터가 준 GP와 수현이 모은 게 워낙 많아서 그렇지, 원래 GP는 모으기 어려운 편에 속합니다. 세라프는 원정 후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한번 나올 예정입니다. 7. 에르하시아 : 아아. 기억나요. 그때 아마 몇몇 분들이 하차하셨을 겁니다. ㅋㅋㅋㅋ. 그때 그분들이 뭐라고 하셨냐면…. 아, 주인공 이외의 하렘은 보지 못한다고 하셨던 기억이 나네요. ㅜ.ㅠ 8. 레필 : 오호라. 그렇군요. 하지만 안솔은 유적으로 들어가고 강제적으로…. 아, 아닙니다. 제가 모르고 스포일러를 할 뻔 했군요. 껄껄! 9. podytop : 일단은 사그라질 때까지 참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저 또한 생각이 있습니다. 저 혼자 멘붕할수는 없잖습니까. 후훗. -_-+ 10. 오피투럽19 : 음, 그것은 그 작품 작가님께 조금 죄송한 일이네요. 원래 작품에는 내용에 관한 코멘트가 달려야 하는데…. 제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걸까요. ?ㅇ?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60 / 0933 ---------------------------------------------- 환각의 협곡,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 신비로운 일들을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예전에, 가끔 홀 플레인 에서 활동하는 도중 내가 모르는 부분들에 대해 궁금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 지역을 넘으면 어떤 지역이 나올까? 미개척 지역에는 어떤 유적들이 잠들어 있을까? 등등. 완전히 똑같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유니콘을 본 경우도 그와 비슷했다. 그것은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닌 드문 경우였다. 그렇게 아쉬움 속에서 아가 유니콘을 보내고, 우리들은 흔적을 쫓아 다시금 행군을 시작했다. 고연주, 김한별은 그래도 빠르게 감정을 정리한 듯 행군에 집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안솔, 이유정은 유니콘을 그냥 보낸 게 자못 아쉬운지 이따금 뒤를 돌아보며 얇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금껏 만나면 전투를 벌여야 하는 괴물이 아닌, 살살 애교를 부려오는 신수 동물을 처음 봤으니 생소한 감정이 들었으리라. 내 방에 고이 잠들어있는 페가수스의 알을 생각하며, 나는 샅샅이 주변을 훑어보았다. 협곡은 전체적으로 알파벳 V를 눕힌 형태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가는 방향은 점점 폭이 넓어지는 쪽이었다. 환각의 협곡에 있는 유적은 유니콘을 만난 곳을 기준으로 1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다. 그리고 지금 행군을 재개한지 약 40분정도 흘렀는데, 가면 갈수록 목적지에 다다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안개가 점점 깊어지고 있다.’ 아침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강물 위를 부유하는 안개는 물기를 머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무거워 보였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협곡은 점점 깊어지고, 고요해졌다. 우리들이 걷는 발자국 소리를 제외하면 시원하게 흐르는 물소리만이 찾아오는 정적을 두들기는 중이었다. 우직. 바닥에 널브러진 마른 나뭇가지를 밟자 그것이 반으로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신호를 주자마자 내 뒤를 따르던 발자국 소리들이 동시에 멈추는 게 느껴졌다. “수현. 무슨 일이에요?”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네?” “흔적이 끊겼습니다.” 눈에 보이는 길은 남아있었다. 그러나 지금껏 잘 이어지던 여울가녘 원정대의 흔적이, 어느 지점에 이르러 마치 거짓말처럼 뚝 끊겨버리고 말았다. 담담히 대답하자 고연주는 곧장 앞으로 나와 전방 지역을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아리송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말 그렇네요.” “…일단 흔적이 끊긴 곳으로 가봅시다.” 딱히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마음속으로 몇 가지 짚이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스무 발자국 정도를 더 걸어갔지만, 별다른 이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길은 이어지고 흔적은 사라졌다. 해당 지점을 여덟 발자국 정도 남긴 상태서, 나는 고연주에게 다시 한번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여기일 가능성이 높겠네요.” 짬은 폼으로 먹은 게 아닌 듯 고연주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그녀는 감 잡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손가락으로 허공을 콕콕 찌르며 말을 이었다. “마법 경계, 아니 결계인가? 아무튼 문제는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건데…. 어떻게 들어가실 생각이죠?” “방법도 없이 왔을까요. 잠시 물러나있어요.” 원래 결계를 해제하는 정식적인 절차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고 까다로운 편이었다. 조금 무식해 보일지는 몰라도, 가진 힘으로 억지로 찢는 게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일월신검을 뽑으며, 나는 백한결을 스쳐 지나가듯 흘끗 바라보았다. 녀석이 조금 더 성장하면 이런 경계마저 되비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능력을 익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지난 이후의 일이다. 아직까지 결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조차도 못하는데, 증폭으로 겨우 범위를 넓히고 유지하는 게 백한결의 현주소였다. 아무튼 지금의 수준으로는 이곳 전체를 뒤덮는 필드 효과와 직접적으로 맞부딪치게 되면 되려 잡아 먹힐 가능성이 훨씬 높다. 나는 검을 상단으로 들며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그러자 역시나 협곡을 벗어나는, 어쩌면 섬망의 산 전체를 감쌀지도 모르는 대규모 결계를 감지할 수 있었다. 잠시 동안 그 엄청난 위용에 혀를 내두르다가 이내 뒤에서 멀뚱히 서있을 클랜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원정대, 그리고 구조대의 흔적이 이곳에서 동시에 사라졌습니다. 추측하건대, 아마 이곳이 유적으로 통하는 입구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여기까지 오느라 그 동안 다들 힘들었으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입구를 눈 앞에 두고 여기서 원정을 그만두기에는 조금 억울한 생각이 드는군요.” “…….” 내 말인즉슨 이대로 원정을 강행하자는 소리였다. 실제로 잠을 못 자고 행군만 하느라 힘들었지 따로 괴물들과 전투를 벌인 것은 아니었다. 즉 별다른 위험한 상황은 없었다는 말. 더구나 방금 전 휴식도 취하며 사기를 진작했고, 말 그대로 유적의 입구를 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다. 그네들의 의향을 묻자, 다행히 클랜원들 모두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원정은 속행하겠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주문할 것은 단 두 가지입니다. 이 앞에는 마법으로 이루어져있는 하나의 경계가 있을 겁니다. 그 경계를 넘는 순간 어떤 현상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 말하건대, 설령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놀라지 말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를 바랍니다.” “네. 걱정 마세요.” 고연주의 대답을 들음과 동시에, 나는 주저 없이 되비침의 범위를 벗어났다. 그러자 뒤에서 다급히 나를 붙잡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하지만 손을 들어올려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주었다. 『잠재 능력 심안(Rank : A Plus)이 발동됩니다.』 『잠재 능력 전장의 가호(Rank : EX)가 발동됩니다.』 시야가 한번 흐릿해졌다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느껴지는, 전신을 짓누르는 미묘한 감각. 비록 그 효과가 미미하기는 했지만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검 끝을 겨누고 무릎을 굽혀 찌르는 자세를 취한다. 결계의 약점은 보이지 않는다. 제 3의 눈에 보이는 전체적인 면이 고른 구성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무데나 찔러도 똑같다는 소리였다. 곧이어 일월신검에서 불그스름한 기운이 피어 오르는 순간, 나는 일말의 주저함 없이 땅을 박차 뛰어 들어갔다. 푹! 첫 시작부터 좋았다. 결계에 닿기 전에 심한 방해를 받을 줄 알았는데, 처음부터 결계에 검을 꽂아 넣을 수 있었다. 권능의 힘이 생각보다 강하게 들어간 모양이다. 그래도 명색이 대규모 결계라서 그런지, 곧 내 찌르기에 반발하는 막강한 마력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파직! 파직! 파직! 파직! 결계는 어떻게든 나를 밀어내려고 한다. 나는 어떻게든 밀어 넣어, 결계를 찢으려고 한다. 서로의 마력이 맞부딪치자 일월신검과 결계가 교차하는 면에 푸른빛 스파크가 튀며 허공을 어지럽힌다. 대규모 결계인 만큼 척력이 장난이라고 볼 수준은 아니었지만, 나는 내 능력과 권능을 믿었다. 서서히 마력 강도를 높여가는 결계에 대항해, 있는 힘껏 마력을 일으키며 전방으로 더욱 몸을 기울였다. 프즈즈, 프즈즈즈! 프즈즈, 프즈즈즈! 쯔적, 쩌저적! ‘좋았어.’ 종잇장을 찢는 느낌이 검을 타고 짜르르 흘러 들어온다. 한동안 서로 팽팽하게 힘을 겨뤘지만, 결국 저울의 추는 조금씩 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검의 손잡이를 잡은, 가슴에 맞닿을 정도로 눌려있던 양손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에 힘입어 그대로 비틀어 쑤시자, 내부를 찢어발기는 느낌이 한층 더 높아지려는 찰나였다. 우우웅! 결계의 구멍이 점점 커져만 가던 도중이었다. 마력이 흐름이 급격히 쏠리는, 웅혼한 소리가 주위를 울린다. 주변의 결계를 이루고 있던 마력이 모두 한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전신을 짓누르는 중압감도 더욱 무거워졌다. 아마도 강제로 결계를 찢을 때 주변으로 마력이 몰리는 현상이 일어나, 내 주위의 필드 효과가 덩달아 일시적으로 강해졌을 것이다. 날로 먹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에, 입맛을 다시고 검을 고쳐 쥐었다. 그때였다. ‘오빠….’ “응?” 어느 전조도 없이, 갑작스럽게 귓가로 들리는 여성의 목소리. 전혀 낯설지 않은 아련한 목소리에 그만 퍼뜩 고개를 올리고 말았다. 그러자, 눈 앞으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진 것을 볼 수 있었다. “뭐…?” 절로 불신감이 깃든 목소리를 내뱉는다. 그곳은, 그 광경이 있는 곳은 바로 내 머리 위 허공이었다. 허공에는 총 두 명이 서로 붙어 있었는데, 모두 내가 익히 아는 얼굴들 이었다. ‘아앙…! 제발 그만…. 아앙…!’ “박다연…? 벨페고르…?” 허공에는, 박다연과 마족 한 놈이 앉아있었다. 벨페고르는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한 손에 턱을 괸 상태로 굉장히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다리 중앙에 불뚝 서있는 남성은, 한 명의 여성이 자신의 소중한 곳으로 덮은 상태였다. 벨페고르가 가끔씩 한번씩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여성은 축 늘어진 팔다리가 흔들거리며, 깊은 신음을 흘렸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다시 한번 광경이 바뀐다. ‘수현아…. 도망쳐라…. 도망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라….’ 형이 보였다. 형은 흙 대지에 몸을 누운 상태서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복부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로, 나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또다시 광경이 바뀐다. ‘보지마…. 보지 말아줘…! 수현아 부탁이야…. 보지마…!’ 이번에는 한소영. 그녀는 눈물 섞인 얼굴로 고개를 흔들며 내게 애원하는 어조로 말하는 중이었다. “이 개 씨….” 잊고 싶은 기억을 강제적으로 꺼냄으로써, 눈 앞에 불꽃이 튀어 오르려는 찰나였다. 문득 허리 부분에 강한 화기가 일어나 시선을 내리자, ‘태양의 영광’이 벌겋게 달아오른걸 볼 수 있었다. ‘침착하자. 환각이다.’ 나는 재빠르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뜻밖의 광경에 정신을 빼앗기기는 했지만 곧바로 정신을 추스르며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일단은 결계를 찢고 보자는 생각에 고개를 흔들고 시야를 회복시키자, 다행히도 크게 밀리지는 않은 상태였다. 이렇게 된 이상 속전속결. 심장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힘을 한껏 뽑아내며, 나는 다시 한번 일월신검을 향해 힘을 잔뜩 쏟아 부었다. 화륵, 화르륵! 쯔적, 쯔저적! 마력에 화정의 힘을 섞자마자 그때까지 치열하게 저항하던 결계의 힘이 순식간에 사그라지는 게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고온의 불에 아이스크림이 녹는 것과 흡사한 현상이었다. 이윽고 조금씩 구멍이 넓어지던 결계는, 결국 한 순간을 넘기지 못하고 쭈르륵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잠재 능력 쓰러질 수 없는(Rank : A Plus)이 발동됩니다.』 “하아, 하아.” “오빠…!” 등 뒤로 김한별의 애타는 외침이 들렸다. 곧 클랜원들은 다급한 발걸음으로 달려와 나를 되비침의 범위 안으로 포함시켰다. 어쨌든 입구를 만든 것은 성공했다. 위험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잠시나마 환각에 걸린 것이 의외라면 의외였다. 숨을 고르며 호흡을 안정시키자 고연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 “수현. 그 힘은…. 괜찮아요?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여요.” “괜찮습니다. 부담은 있지만 견딜만할 정도입니다.” 나는 간단히 대꾸한 후 몇 걸음 물러서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동굴의 입구라고 봐도 될 정도로 크게 녹아 내린 하나의 구멍이 있었다. 주변에 자잘한 스파크가 튀는 걸로 보아 복원작업을 하려는 것 같았지만, 화정의 여파가 남아있는지 되려 범위는 넓어지는 중이었다. 나는 기다란 한숨을 내쉰 후, 차분한 동작으로 다시 일월신검을 집어 넣었다. * “와. 형이 결국 또 하나 찾아내셨네.” “그러게. 저기 구멍 뚫린 것 좀 봐봐.” “헤헤. 우리 오라버니가 만든 거예요. 에헴!” “…응. 대단하네.” 애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초를 쭉쭉 빨아들였다. 방금 전 보았던 세 개의 환각. 그것은 내 역린 인만큼 당연히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그 분노는 뜨겁지 않다. 오히려 머리를 차갑게 식혀주고, 사늘한 살기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전화위복이라고 말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그래도 그 동안 알게 모르게 무뎌졌던 예전의 날카로움이 다시 날을 바짝 세운듯한 기분이 들었다. 끝까지 태운 연초를 튕기고 몸을 일으키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그럼 이만 안으로 들어갑시다.” “수현. 조금 더 쉬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고연주를 비롯한 클랜원들의 걱정 어린 눈빛들이 쏟아졌지만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도 열기가 가시지 않은 칼집을 두드리며 연신 출발을 종용하자, 그제서야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들어가기 전. 구멍 안으로 살짝 보이는 풍경은 바깥과 비슷했다. 부딪침으로 일그러져 보이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경계의 내외로 이어지는 경치에 큰 차이는 없다. 그러나 말 그대로 겉모습만 비슷할 뿐이었다. 이윽고 구멍 안으로 한 발짝 걸친 순간, 극심한 괴리감이 온 몸을 엄습했다. 그리고 구멍을 완전히 통과하자 나는 그 차이점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생동감의 유무였다. 이 괴리감은 외부적인 요인이 아닌, 내면에서 느껴지는 요인이다. 급작스럽게 변화되는 환경이 어색해 몸이 저절로 반응하는 것이다. 내가 최선두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연주가 완전히 구멍을 통과하자,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조용히 몸을 뒤돌아 클랜원들을 응시했다. 다들 얼굴이 멀뚱멀뚱한 기색이 가득해 있었다. 위화감이 너무 강해서 혼란스러운 건지, 아니면 아직도 유적의 입구를 발견했다는 놀라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지. 들어오자마자 눈치를 챈 애들은 없었다. “얘들아. 다들 기분은 어때? 괜찮아?” “조금 이상해요오….” “어떻게 이상한데?” “그냥…. 잘 모르겠어요. 너무 조용하고,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고. 그리고…. 으응…. 꼭 온 세상이 멈춰있는 것 같아요.” 내 질문에 안솔은 머리위로 물음표를 동동 띄우며 대답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착시 현상이었다. 그녀는 딱히 알맞은 말을 고르지 못하겠는지 입을 삐쭉 내밀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나 나는, 안솔의 대답을 듣자 속으로 약간이지만 감탄이 일었다. ‘여전히 감이 좋군. 그런데 저 물음표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아주 잠깐 그 물음표를 향해 손을 뻗어보고 싶다는 유혹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픽 웃으며, 여전히 어리둥절한 애들을 위해 오른쪽으로 손가락을 가리켜주었다. 그곳은 강물이 흐르는 곳이었다. 애들은 순순히 내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이동시켰다. 그리고 그네들의 시선이 강물에 닿은 순간, 멍하던 눈동자가 급격히 커지는 광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 “뭐, 뭐야?” “가, 강물이 흐르지 않아?” “어? 멈춰있어? 멈춘 거야?” “아직 놀라기에는 이른데….” 슬쩍 말을 내뱉으며, 이번에는 손가락을 위쪽으로 가리킨다. 흐르지 않는, 멈춰있는 강물을 보던 애들은 이번엔 고개를 쭉 젖히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눈은 더 이상 커지는 것을 거부했는지, 하나같이 입을 쩍 벌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을 따라 나도 고개를 하늘로 올렸다. 시선은 까마득한 벽을 타고 올라가, 곧 환한 빛을 내리쬐는 태양으로 닿았다. 그 순간 옆에서 안현의 탄성이 귓가로 흘러 들었다. “도시다…!” 협곡의 벽면 위쪽에는 수많은 건축물들이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세워져 있었다. 그것은 지금껏 우리들이 목표로 하던 환각의 협곡의 진정한 유적이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식 명칭은 마법 도시 마지아(Magia). 훗날 사용자들에게 변절자의 도시라 불리는 곳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허허. 그 동안 웬만하면 후기로는 반응을 자제하려고 했는데, 여전히 그 이름이 불리고 있군요. 심지어 다른 작품 코멘트에서도요. 네. 서서히 멘탈에 금이 가고 있습니다. 제가 일전에 분명히 말씀 드렸을 겁니다. 저 혼자만 멘붕하기에는 너무 억울하다고요. 요즘 제가 BL을 읽고 있는데 말입니다. 아주 재밌는 단어가 있더군요. 그것은 바로 공, 수입니다. 대충 알아본 결과 공은 공격(하는 입장) 그리고 수는 수비(당하는 입장)이라고 하네요. 흠! 공은 백한결, 수는 김수현. 이거 참 좋을 것 같은데 말이죠. 뭐, 그렇습니다. 참고로 저 한번 마음먹으면 정말 화끈하게 쓰시는 거 여러분들 대부분이 알고 계실 겁니다.(고연주와 첫 관계를 가졌던 파트) 부디 제가 마지막 선을 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협박협박!) ^ㅅ^ 『 리리플 』 1. MT곰 :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 동안 평안히 지내셨는지요! 하하, 저는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을 했습니다. :) 1등 축하 드립니다! 2. 최강성녀 : 과연 암컷일까요 수컷일까요~. 알아맞혀보세요!(퍽퍽!) 3. 이그자리오 : 음음. 간장게장은 맛있습니다. 그렇습니다. 4. starland : 기연? 아니죠. 주인공 보정? 맞습니다! 5. 꿈속의활로 : ……! 자자, 큼큼! 흠흠! 음, 오늘 날씨가 좋군요. 아주 예리하고 날카로운 날씨입니다. 6. 사람인생 : 누나가 아닙니다. 형이라고 해주세요. 네. 자꾸 이러시면 정말 BL 쓸 겁니다.(진지) 7. 요수리 : 포니요? 아니요, 죄송해요. 잘 모르겠어요. 처음 들어본 말이랍니다. :) 8. 악마신전 : 헤헤, 빗겨 맞아서 살 수 있었습니다. 마법 저항이 특별하기는 하지만, 다 자란 성인이 되면 꽤나 튼튼한 녀석입니다. 9. 현오 : 긴 코멘트에 감동을 하면서 첫 문장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잘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긴 생머리에 꽤나 건강한 모습을 하고 있다. 가는 허리에 쾌활한 웃음 을 띈 그녀... 유니콘을 타고 다니는 이유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로유미' 그녀는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였다.> 이 부분에서 순간 뿜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묘사력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D 10. 놀고싶다 : 아, 전회 후기에 보시면 사망을 제외한 보복을 입었을 경우, 저주를 내리는 주체는 유니콘입니다. 즉 본문 내용에는 아가 유니콘이 수현이 자신에게 해를 입혔는지 모르는 상황이에요.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61 / 0933 ---------------------------------------------- 시작부터 보스? “우으…. 그럼 다시 위로 올라가야 하는 거예요?” 실컷 구경하던 도중에 얼핏 생각이 들었는지 안솔이 울상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고연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뭔가 번뜩 생각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그녀는 옆에 있던 안솔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입 꼬리를 살짝 올리고는 그녀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이번에는 저 아이한테 꼭 이기려무나. 파이팅.” “네…?” “잘 생각해보렴. 만약 네가 지게 된다면…. 네가 존경하는 오라버니는 남자들이 득실거리는 세계에 빠져들게 될 거야. BL, 아니 Boys Love라고 하던가?” “!” ‘제발 쓸데없는 바람 좀 넣지 말라고…. 아니, 넌 또 왜 전의를 불태우는 건데?’ 고연주의 말을 들은 순간. 안솔의 머리 위에 동동 떠다니던 물음표는 삽시간에 느낌표로 바뀌었다. 이윽고 양손을 꾹 쥐고 두 눈동자를 이글이글 불태우는 그녀를 보자 그저 한숨만 푹푹 새어 나온다. 머리가 지끈거리듯 아파왔지만, 어쨌든 “올라갈 때는 각자 올라가겠습니다.” 라는 말로 간단히 그들의 계획을 분쇄시켜주었다. 잠시 주변 경치를 돌아본 후 우리들은 정비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정비라고 해봤자 그저 간단한 점검과 진형을 정렬했을 뿐이지만 분위기를 쇄신하는 데는 이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었다. “딱히 시체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데요….” 수정구에서 들었던 말이 신경 쓰이는지 김한별이 조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직 이곳이 입구라고 보기는 어려우니까. 진짜 입구는 위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나올 수도 있겠지. 그리고….” 슬며시 운을 띄우자 조금씩 풀려가던 얼굴들이 다시금 긴장으로 물드는 게 보였다. “그 남자의 말을 완전히 믿을 필요는 없잖아.” “네? 하지만….” “참고는 하되 맹신할 필요는 없단 말이지. 지금부터는 우리가 보고 겪을 것만 믿으면 돼.” “…….” 나는 목소리에 한층 힘을 주어 말하고, 일행의 선두로 걸음을 옮겼다. 눈에 안력을 돋워 앞쪽을 살피자 끊어졌던 흔적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흔적은 조금 오래된 것까지 포함하면 과할 정도로 많았다. ‘어쩌면 부랑자가 아직 살아있다는 말은 사실일지도 몰라.’ 잠시 동안 곰곰이 생각했지만, 일단은 부딪쳐봐야 제대로 된 해답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상 지금 이곳으로 들어온 것도 원래 1회차에 비하면 엄청나게 앞당긴 상태였으니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는 드디어 유적 탐사를 위한 첫 신호를 알렸다. “그럼 출발하자.” * 마법의 경계를 넘어 유적으로 진입한 후. 확인해본 결과, 역시나 유적 내부에서는 필드 효과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이곳에서는 더 이상 보석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였다.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Magia). 홀 플레인 이 얼마나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용자는 아무도 없다. 다만 도시에 남아있는 고대 기록에 따르면 아득한 세월을 거친 만큼 전체적으로 융성했던 시절도, 아니면 멸망에 가까울 정도로 쇠퇴하던 시절도 있었다는 것. 예를 들면 거주민들 입장에서는 지금이 멸망에 가까울 때라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마지아는 고대에 융성했던 시절 세워진 마법사들의 도시, 즉 마법사의 탑을 도시로 만들어놓은 것으로 봐도 무방했다. 약 1시간여를 쫓은 끝에 비로소 입구로 올라가는 계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세월이 묻어있어 낡고 허름한 흔적은 있었지만 원체 단단하게 지어놔서 그런지 오르는데 별다른 불안감은 없었다. 단 계단의 길이가 너무 길다는 것이 애들에게는 또 다른 좌절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여기서 살면 따로 운동할 필요도 없겠어요 형.”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조금만 더 참아.” 육중한 장비를 몸에 걸치고 오르는 게 힘들었는지 안현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나는 거의 다 왔다는 말로 녀석을 다독이고, 시선을 돌려 협곡과 도시의 구성을 차분히 살펴보았다. 가파른 협곡 위에 이어 붙이는 형태로 세워져 있는 도시는 말 그대로 절경이었다. 협곡을 타고 쭈르륵 이어져있는 건물들을 보자 흡사 천혜의 요새를 보는 기분이었다. 고대 홀 플레인 의 마법 수준이 제법 괜찮았다고 하는데,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도시였다. “후. 다 올랐다.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야, 아래 좀 봐봐.” “응? 헉.” “장난 아니다 진짜. 아찔하다는 게 이런 느낌이었구나.” 끝이 보이지 않던 계단을 모두 올랐다. 허벅지를 주무르며 떠드는 애들을 뒤로하고 전방을 보자, 머지 않은 곳에서 넓게 트인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보였다. 그리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길수록 경계를 넘은 후 처음 느꼈던 괴리감이 한층 심해진 것이 느껴졌다.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도시에서는 일말의 생동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생동감. 이 말은 단순한 생명체에 국한되는 말이 아니었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는 물론이고 하나의 사물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는 그들만의 고유한 활력. 하지만 눈 앞에 보이는 입구로 서서히 다가갈수록 생기(生氣)가 죽어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 대해 내릴 수 있는 해답은 두 가지였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공간을 조작했거나, 아니면 모종의 사건으로 생기보다 사기의 영향력이 커다란 곳이라거나. ‘마지아의 경우는 전자의 가능성에 더욱 무게를 두는 게 맞겠지.’ 우리들은 주변을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이미 입구를 지난 순간부터 무기를 빼거나, 주문을 미리 외워두는 등 각자 준비에 들어간 상태였다. ‘유적에 첫발을 들어선 순간 희희낙락해있던 우리들이 직면해야 했던 광경은, 바로 무수한 시체더미였습니다. 이곳 저곳에 곳곳이 널브러져있는, 반쯤은 썩어 들어가는 시체들을 보는 순간 뭔가가 잘못됐음을 직감적으로 느꼈죠.’ ‘그리고 도시 안으로 들어선 순간, 우리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시의 내부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저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체도 없고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협곡 도시의 내부는 넓었다. 건물들이 하나하나 높고 커다랗긴 했지만, 빽빽하게 밀집되어있는 게 아닌 서로간에 꽤 거리를 두고 지어져 있었다. 천천히 앞쪽으로 나아가면서 벽면에 그려진 고대 벽화를 관찰하고 있자 등 뒤로 고연주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체는…. 보이지 않네요. 그럼 그 남자가 잘못 봤거나 거짓말을 했다는 말인데…. 뭐, 조금 더 들어가봐야 알겠지만요. 그럼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요?” “오빠. 저기는 어때? 왠지 비싼 것들이 잔뜩 있을 것 같지 않아?” 고연주가 중얼거리자 이유정이 금방 나서며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마치 성당을 보는 것 같은 거대한 돔형 건축물이 웅장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유정의 말대로, 확실히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간직한 초호화 건물이었다. “와아. 크다아.” “저 건물…. 확실히 그렇네요. 창문도 수정으로 되어있는 것 같아요.” 김한별의 말이 이어지자 클랜원들은 곧장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창문조차도 보석의 일종인 수정으로 되어있다고 하니 아무래도 관심이 쏠리는 모양이다. 탐험의 끝은 언제나 보상으로 끝난다. 그렇기에 보상에 대한 욕심을 부리는 것을 욕할 수는 없지만 아쉽게도 마지아는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어쨌든 그 속사정을 자세히 말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나는 다른 방법으로 관심을 돌리기로 했다. “저곳에 들어가는 것도 좋지만, 일단은 도시 탐사에 더 집중하자꾸나.” “수현. 갈 곳을 정하셨나요?” “네. 첫 목표는 바로 저곳입니다.” “어디…. 오?” 현재 우리들이 걷고 있는 거리를 따라 멀리 앞을 쳐다보면 또 하나의 갈라진 협곡이 보인다. 환각의 협곡처럼 길고 자연적인 협곡이 아닌, 일부러 만든듯한 인위적인 냄새가 나는 틈이라고 봐야 할까? 약 80미터정도의 폭을 가진 그 틈의 중앙에는 저 너머 또 다른 곳을 잇고 있는 일직선 다리가 있었다. “설마 다리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도시가 나누어져 있는 걸까요?” “비슷합니다. 원래 이곳은 마법사들의 천국으로 불린 도시라고 합니다. 이쪽의 건물들을 둘러보니 그냥 일반 거주민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반대쪽은 마법에 뜻을 가진 자들이 주로 드나들었던 곳일 겁니다.” 저쪽에 더 큰 떡고물이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일단은 시간 낭비 말고 가보자는 소리였다. 내 말에 몇몇 클랜원들의 눈빛이 반짝인다 싶은 순간,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안현이 뭔가를 깨달은 얼굴로 말했다. “아, 그럼 그 용사와 요정 여왕을 납치한 마법사는 이곳의 수장이었을 수도 있겠네요?”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후후. 역시 그렇군요. 에헴!” “…….” ‘…나한테 칭찬을 듣는 게 그렇게 좋은가?’ 그냥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인데 안현은 갑자기 목을 뻣뻣하게 세우더니 안솔과 이유정을 돌아보았다. 더 이해가 안가는 점은, 아랫입술을 삐쭉 내미는 둘의 반응이었다.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감지를 돌렸다. 여전히 걸리는 것은 없다. 그저 모두가 사라진 도시에 우리들만 배회하는 듯 개미 새끼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여전히 느릿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첫 번째 난관이라 여겼던 계단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오를 수 있었다. 남은 포인트는 두 개였고 최종 포인트는 세 번째 목표는 탑으로 들어가는 것. 그렇다면 그 전에 두 번째 목표인 다리를 넘을 필요가 있었다. * 처음 이상함을 느꼈던 것은, 다리를 향한 지 약 30분정도가 흘렀을 때였다. 느릿하게 걸어갔다고 해도 30분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이상하게 다리가 있는 곳으로 다다를 수 없었다. ‘역시나. 이제부터는 슬슬 넘어가지만은 않겠다는 건가.’ 딱히 별다른 피해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나 또한 가볍게 생각할 수만은 없었다. 나는 곧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한 후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에 잠시 헛웃음을 지었다. 클랜원들의 눈에 보이는 광경과 많은 차이가 있을 것 같아 초입에는 일부러 켜두지 않으려고 했지만, 수준 높은 장난질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다른 것은 무시하고 다리 주위만 훑자, 꽤나 넓은 범위의 둥근 형태로 진로 결계가 펼쳐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일전에 <고대 연금술사 비비앙의 던전>을 찾을 때 보았던 결계와 비슷한 성질의 것이었지만, 수준은 이쪽이 훨씬 더 높았다. 한 발만 삐끗해도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고약한 결계였다. 그 상태로 나는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내딛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 우리들은 진형을 변경해 각각 일렬로 서서 걸어가는 상황이었다. 중간에 한 명밖에 건널 수 없는 길이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한 결정이었다. 그렇게 다들 집중한 상태서 내가 발자국을 남긴 곳만 밟던 도중이었다. 가까워지지 않던 다리가 조금씩 거리가 줄어듦에 잔뜩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당연히 감지 또한 돌린 상태. 그러나 나는 열심히 걷던 도중 갑작스레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차가우면서 오싹한 기운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간다. 까닭 없는 소름에 눈을 부릅뜨고 앞을 살펴보았다. ‘누군가 있다.’ 걸음을 멈추고 기다리고 있자, 뒤에서 애들이 기웃거리는 기척만이 느껴졌다. 감지에는 걸리지 않았지만 내가 걸음을 멈춘 이유는, 뭔가 불안한 감각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금껏 수많은 아수라장을 헤쳐온 나 자신만의 고유한 감각. 그때였다. 또각또각. 발소리의 전조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방금 전에 들린 소리였다. 눈 앞에 아무도 없는 상태였는데, 말 그대로 홀연히 한 명의 사람이 나타났다. 갑작스러움을 뒤로하고 그 사람을 살펴보자 기다란 생머리에 눈 아래 눈물 점이 찍힌, 고양이상을 가진 여성임을 알 수 있었다. 얼굴만 보면 지구인 혹은 사용자라는 느낌이 강했는데, 입고 있는 옷은 하녀들이나 입을법한 복장이었다. “안녕하세요~.” 곧 우리에게 걸어온 여성은 약간의 거리를 남겨두고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과도하게 웃음짓고 있었다. 이윽고 양 손으로 치마 끝을 살짝 잡아 올리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여성을 보자, 뒤쪽에서 클랜원들의 웅성이는 소란이 일었다. 손을 들어 진정시킨 후, 나는 곧바로 그녀의 정보를 읽어보았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권소라(4년차) 2. 클래스(Class) : 일반 마법사(Normal Mage Expert) 3. 소속 국가(Nation) : -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강제적 꼭두각시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5) 7. 신장 · 체중 : 168.2cm · 52.8kg 8. 성향 : 인형 · 악(Marionette · Evil) [근력 45] [내구 38] [민첩 51] [체력 39] [마력 71] [행운 63] (능력치 포인트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강력한 정신 계열 마법에 세뇌 당한 상태입니다. 그 시간은 1년이 지난 상태로, 정신은 이미 죽어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육체는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는 상태입니다. 현 상태를 유지하는 마력이 없어진다면, 본 사용자의 상태로는 하루도 버틸 수 없습니다.) (엘릭서 한 병으로 육체의 상태는 완전히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회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법 도시 마지아를 방문하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라고 주인님이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뭐, 저는 아니지만 말이에요. 불청객 여러분? 호호.” 여성은 숙였던 허리를 다시 들어올리고, 살며시 눈웃음을 지우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벌어진 눈 틈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어버린 진한 회색 빛을 띠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목요일입니다. 내일 조아라에 놀러 가기로 했어요! 는 뻥이고요. 어쨌든 조아라에 방문하기로 한 날입니다! ㅇㅁㅇ/ 예전에 있던 곳이 다른 데로 이사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이북 이야기도 하고, 작품 이야기도 하고, 그리고 제 작품을 담당하실 편집자 분도 오실 수 있다고 하네요!(저번에 갔을 때도 한번 뵌 기억이 있어요. 준수하게 생기신 분이에요.) 메모라이즈를 모두 읽어보셨다고 하니 그저 감개가 무량할 따름입니다.(예전에 갔을 때 그, 어디였죠? 아. 절규의 동굴에서 언컨시언스 리비얼에 당했던 부분에 대해서 여쭤봤는데 막힘 없이 대답하시는 거 보고 놀랐었죠….) 아무튼 그 외에도 이것저것 재밌는 이야기들을 많이 해주신다고 하니 기대 만발입니다! :D 『 리리플 』 1. 눈물강 :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눈물강 님의 1등을 축하합니다~.(다른 버전으로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하하하. 2. Nodens : 그, 그러게요. 저도 보고 조금 당황해버렸습니다. 3. 사랑이별이후 : 쿠폰 감사합니다. _(__)_ 이번 회도 재미있게 봐주세요! 4. M.K : 다 좋았습니다. 그러나 뒤에 있는 언니라는 단어는 제 멘탈에 더욱 금이 가게 만드셨군요. 크큭. 5. 가연을이 : 이번 소제목을 주목해주세요. ㅋㅋㅋㅋ. 개인적으로 재밌을 것 같기는 합니다. 6. 그기린그림 :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저번에 그기린그림 님이 말씀해주신 아빠 침실을 엿보는 것 같다는 코멘트는 매우 신선했습니다. 제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ㅋㅋㅋㅋ. 7. 불곰리즈 : 크앙크앙! 그럼 도영록과 박동걸은 어떠신지요! 8. 현오 : 엌ㅋㅋㅋㅋㅋㅋㅋㅋ. 메모라이즈 문학ㅋㅋㅋㅋㅋㅋㅋㅋ. 중간에 궁금한 단어가 생겼습니다. 다른 분들이 부녀자, 부녀자라고 하시는데.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지요?(저도 시험 끝났습니다!) 9. 쉬라야 : 네. 도시를 찾았습니다! 저…. 그리고 죄송하지만, 예전에 좋아하던 작품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쉬라야 님의 코멘트를 보게 되었습니다. 잊고 싶은 기억이시겠지만, 그래도 항상 응원 코멘트 달아주셔서 그냥 지나치려니 마음이 아팠어요. 오지랖이라 여기실지 모르겠지만, 부디 힘내셨으면 좋겠습니다. 꾸벅. _(__)_ 10. Diableret : 원정 후 도시로 돌아가고, 그리고 클랜 자리 잡고 영약 이후로 나올 예정입니다.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62 / 0933 ---------------------------------------------- 시작부터 보스? ‘역시나. 이미 먹혀버린 건가. 그러면 결국 변한 것은 없다는 소리.’ 여성의 눈웃음이 사그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입 꼬리는 올라가있었다. 그것은 명백히 비웃는 표정이었다. 어쨌든 제 3의 눈으로 여성의 정보는 확인한 상태. 그러자, 계단을 오를 때까지 열어두었던 수많은 생각들이 하나씩 닫히기 시작하더니 이내 하나의 가능성으로 합쳐지는 게 느껴졌다. 권소라는 나를 응시하며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다시 말을 이으려는 듯 조막만 한 입술이 서서히 떼어지려는 찰나였다. 그런 그녀보다 한 발 앞서,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환영한다는 말은 일단 손님 대접을 해주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네! 주인님이 정중히 모셔오라고 하셨어요.” “정중히 모셔오라고 한 것치고는 재밌는 장난질을 쳐놨더군. 마음에 안 들어.” “어머? 애초에 결계를 찢고 침입한 불청객이 누구 셨더라?” 내 불평에 권소라는 유들 하게 받아 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혀를 쯧쯧 차면서 검지와 중지를 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뭐, 불쾌하셨다니 일단 결계는 해제하셨다고 하네요. 아무튼 말이죠. 주인님이 그쪽. 그래요, 맨 앞에 준수한 남자분? 그쪽한테 아주 약~간 호기심이 있으시거든요.” “…….” “여기서 여러분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 첫 번째! 조용히 나를 따라와 주인님의 초대에 응한다. 그리고 두 번째!” 권소라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양 손뼉을 짝짝 마주치며 살며시 눈웃음 쳤다. 그러자 그녀가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주변으로 족히 수십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동자는 권소라와 똑같은, 모두 회색 빛으로 죽어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한번 둘러보고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의미 없는 반항을 하다가 잔뜩 쳐 맞으시고 기절 상태로 강제로 끌려간다. 자, 고르세요.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어요?” “세 번째. 너희들을 모두 죽이고 네 주인이란 작자도 쳐죽이는 것으로 선택하지.” “아~. 두 번째요? 에이, 얼굴값 너무 하시네. 한번 바꿀 기회를 드릴게요. 첫 번째를 선택하시면 나름 손님 대우는 해드릴 수 있거든요. 그런데 두 번째는요, 남성분 같은 경우는 팔다리 절단. 그리고 여성분 같은 경우는 강간이 옵션으로 들어간답니다!” “미친년. 전원 전투준비.” 더 이상 말을 들을 가치를 못 느껴, 곧바로 일월신검을 빼어 들었다. 맑은 검신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자, 등 뒤로 클랜원들이 각자의 무기를 곧추세우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녀는 우리들의 반응을 보고 정말로 슬프다는 표정을 짓더니, 푹 한숨을 내쉬고 손을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다시금 활짝 웃음 지으며 말했다. “굳이 벌주를 마시겠다는데 어쩔 수 없죠 뭐. 험한 꼴 좀 당하셔야겠네. 얘들아~?” “…….” “모두 조져! 아, 죽이지는 말고. 일단 살려는 둬야 너네 들도 조금이나마 즐길 수 있지 않겠니?” “───. ───. ───.” 권소라의 명령이 떨어진 순간 몇몇 사용자들의 입에서 일제히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껏 치러왔던 전투와는 다르다. 그 동안은 선 방어를 기본 전술로 채택하여 싸워왔지만, 그것은 적들 중 원거리 계열이 없다는 가정에서 싸워온 전투였다. 그러나 이번에 맞이한 적은 똑같은 사용자였다. 수는 얼추 마흔 명 남짓. 근거리 계열이 압도적으로 많기는 했지만 그 중에는 궁수도, 마법사도 당연히 포함되어있었다. 하지만…. “고연주.” “알았어요~.” 내 부름에 등 뒤로 나른히 대답하는 고연주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와 동시에, 활을 겨누거나 주문을 외우고 있는 사용자들의 그림자위로, 각각 어두운 그림자가 하나씩 불쑥 솟아올랐다. 이내 그 그림자들은 가볍게 사용자들의 목덜미를 스쳤고, 곧 열한 명의 목에서 동시에 피 분수가 뿜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털썩, 털썩. 생글생글 웃고 있던 권소라의 얼굴에서 삽시간에 미소가 사그라졌다. 그리고 눈이 화등잔만 하게 확대되려는 찰나, 김한별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오른쪽을 조준했다. 그것은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미리 준비하고 있던 주문이었다. “───. ───. ───. 찬란하게 빛나는, 포옹하는 새벽의 여명.” 보석이 두둥실 떠오르고, 밝게 작열한다. 곧이어 보석이 부서지는 것과 함께 찬란히 빛나는 빛의 파도가 한 무리를 덮쳐 들었다. 일전에 뤼노케로스를 상대로 한번 선보였던 대단위 마법이었다. “끄아아아악!” “꺄아아아악!” 김한별의 표정은 차가웠지만, 또한 고요했다. 그녀의 마법에 휩쓸린 사람들은 정신이 개조 당했어도 고통은 살아있는지, 하나같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몸을 꿈틀거렸다. 이윽고 주변을 휩쓸던 빛의 파도가 지나가자, 그들은 온 몸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대지에 차례대로 몸을 뉘였다. 단 두 번의 공세에 불과했지만, 무려 스무 명에 가까운 인원을 줄일 수 있었다. 시작부터 절반에 가까운 전력을 깎고 전투를 시작하는 셈. 더구나 고연주가 죽인 사용자들이 원거리 계열들임을 감안하면 실제 이득은 더욱 높다고 볼 수 있었다. “어, 씨발.” 권소라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는지, 처음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보였다. 그리고 주춤주춤 물러서더니 이내 털썩 엉덩방아를 찧으며 입술을 뻐끔거렸다. 심각성은 인지했지만 어지간히 당황한 듯 보였다. 아직 주변에 남아있는 적들은 있었다. 그러나 그에 아랑곳 않으며, 나는 칼날을 톡톡 두드리면서 앞으로 걸었다. “마, 말도 안 돼…. 씨, 씨발! 오, 오지마!” “선택지는 셋. 첫 번째, 내 검에 죽는다. 두 번째, 내 동료들에게 죽는다. 유정이가 아까부터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거든. 강간당한다는 소리가 거슬렸나 봐. 그리고 세 번째, 자살한다.” “도, 도와줘! 뭣들 하는 거야! 빨리 이 새끼 처리 안 해?” “발악하지마.” 권소라의 능력치는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명령하는 폼을 보아하니 우리를 포위한 사용자, 혹은 부랑자들을 지시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듯싶었다. 그녀의 명령에 남은 스물의 적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당연히 내 클랜원들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애초에 40대 7의 수적으로 불리한 전투였다고는 해도 전력의 차이가 너무 컸다. 고연주의 말대로 우리와 비슷한 수준의 사용자 네댓 명 정도만 있었어도 제법 힘든 전투를 벌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로 강한 사용자는 없었고, 다들 그저 그런 수준의 사용자 정보를 갖고 있었다. “끅!” “켁!” 다시 한번 검은 그림자들이 주변을 스치는가 싶더니, 단말마의 비명이 허공을 타고 울려 퍼졌다. 고연주는 어느새 스물에 다다른 인원을 그림자로 은밀하게 붙잡은 상태였다. 그 동안 전투에서 키퍼만 하느라 꽤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그녀는 10강에 이른 <그림자 여왕>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수현. 다 죽여도 돼요? 아니면 어떻게 처리할까요?” “거 몇 명은 좀 내버려두시지. 안현이랑 이유정이 할 일이 없잖습니까.” “어머, 실수. 호호.” “의욕이 넘치는 건 좋은데, 눈치껏 합시다. 눈치껏.” 그런 고연주와 한두 마디 농담을 주고받으며, 나는 권소라와의 거리를 더욱 줄였다. 그리고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권소라는 흡사 괴물을 보는듯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으, 으아아아악!” 약 다섯 걸음 정도 남았을 무렵이었다. 그녀는 빠르게 몸을 일으키더니 괴성과 함께 반대쪽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속박!” “아악!” 쿠당탕탕, 쿠당탕. 권소라의 도주는 오래가지 못했다. 역시 미리 준비하고 있었는지, 안솔의 주문이 발현됐기 때문이다. 뒤쪽에서 날아든 하얀 빛은 정확히 그녀의 등을 맞췄고, 이내 뻣뻣하게 굳어진 몸과 함께 그대로 땅을 떼굴떼굴 구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안솔의 적절한 속박 덕분에, 나는 느긋한 걸음으로 결국 권소라의 머리채를 잡아 올릴 수 있었다. “꺅!” “있잖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기다란 생머리를 쥐어 올리자 머리카락이 모두 올라가며 마치 뒤집어진 파뿌리 같은 형태가 되었다. 바로 죽일 생각은 없었다. 이들이 말하는 주인이 누군지는 대강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 작자가 어디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궁금했으니까. 괜히 이 넓은 도시를 헤맬 필요는 없으니, 그것은 알아내고 죽이는 게 좋지 않겠는가. “주, 주인님! 도, 도와주세요.” “야, 궁금한 게 있다고. 헛소리 하지 말고 눈 좀 떠봐.” “도와주세요! 주인님! 살려주세요!” “잘 생각해보니까 네 주인의 초대에 응하고 싶어서. 그러니 어디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가르쳐주지 않을래?” 철썩! 처음의 기세 등등함은 어디로 갔는지. 두 눈을 꼭 감고 오들오들 떠는 모습을 보자 약간 짜증이 일었다. 검으로 가볍게 뺨을 후려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오직 도와달라는, 주인님을 찾는 말만 되풀이할 뿐. 해서, 그냥 죽이는 것으로 마음먹고 검을 쑤셔 박으려는 순간이었다. 우웅! 그 순간, 허공이 가볍게 떨림과 함께 묘한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것은 낯선 소리가 아니었다. 일전에도 들어본, 마치 공간이 일그러지는 것 같은 익숙한 소음이었다. 잠시 검을 멈추고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지상에서 2미터정도 떨어진 허공이 서서히 반으로 갈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포탈 마법? 아니, 공간 이동인가?’ “오오! 주인님! 주인님! 주인님이 오셨어!” “주인님?” 이윽고 갈라진 공간은 서서히 넓어지며 하나의 둥그런 구멍을 만들었다. 권소라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주인이라는 작자가 직접 이곳으로 온 모양이었다. 수고를 덜었다는 생각에, 나는 얼른 겨누고 있던 검을 그녀의 목에 밀어 넣었다. 그러자 권소라는 “께륵!” 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품 섞인 피를 울컥 토해내었다. 그녀는 눈을 부릅뜬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자신의 목을 감쌌다. 그런 권소라를 바닥에 휙 던지고, 나는 허공을 주시하며 말했다. “고연주, 잡은 놈들 아직 살려뒀나요?” “네? 네. 몇 명은요.” “지금 바로 죽여요.” “알겠….” “그렇게는 안되지.” 그때였다. 갈라진 원형의 공간에서 양 손과 발 하나가 슬쩍 나오는 게 보인다. 이윽고 드러난 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붙이더니, 온화한 목소리를 냄과 함께 가볍게 튕기는 모습을 보였다. 딱! “어머?” 쓱! 쓱! 쓱! 쓱! 손가락의 살이 맞부딪치자, 재밌는 현상이 벌어졌다. 마치 지우개로 지우는 것처럼 사용자들을 구속하고 있던 그림자가 강제로 지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단순히 그녀가 일으킨 그림자만이 지워진 게 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지에 그려져 있던 모든 그림자가 요상한 소리와 동시에 하나씩 사라졌다. 말 그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이런 경우는 설마 고연주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곧바로 단검을 들며 자세를 잡았다. “소라야. 늦어서 미안하구…. 뭐야, 벌써 죽였나? 에잉. 성질도 급하기는. 쯧쯧.” 이윽고 완전하게 구멍을 통과하고 나타난 인영은, 노인으로 봐도 될 정도로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노인은 바닥에 쓰러져 목을 붙잡고 있는 권소라를 보며 끌끌 혀를 차더니, 이내 그림자에서 해방된 부하들을 보며 말했다. “보아하니 네놈들이 상대할만한 녀석들은 아니구나. 다들 뒤쪽으로 물러서거라.” ‘오호라. 이놈이 권소라의 주인님? 그렇다면….’ 조금 이른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나는 노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는 키는 컸지만 매우 메마른 몸을 갖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긴 머리와 배꼽까지 내려와있는 수염은 거의 반백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흰색이 섞여있다. 눈가에는 잔주름이 많았지만, 방금 전 들린 목소리와 100% 매치될 정도로 온화한 인상이었다. 지금도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말하는 게, 마치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라는 느낌이었다. 내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것을 느꼈는지, 노인은 내게 흘끗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이 아이를 죽인 게 자네인가?” “그렇다면?” “고얀놈. 늙은이한테 하는 말투하고는. 거 조금만 기다리지 그랬나. 그래도 내가 제법 아끼던 아이였다고.” “아, 네. 그런데 얘가 남자는 팔다리를 절단하고, 여자는 강간이 옵션이라고 하더군요. 손님 대접이 영 마뜩잖아서 말이죠.” “됐다 이놈아. 그렇게 배배 꼬면서 존댓말을 하면 누가 듣기 좋다고 하더냐?” 허공에서 나타난 노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방금 전 전투를 치름으로써 부하들이 반수가 넘게 널브러져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인의 얼굴에는 전혀 아까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직 귀찮다는 기색만 역력할 뿐. 그는 짜증난다는 얼굴로 머리를 벅벅 긁더니,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휴. 그나저나 소라가 자네들을 절단하고 강간하라고 했다고? 나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는데…. 그저 정중히…. 아, 또 정신이 원래 성향의 영향을 받아 튀어버린 건가. 쯧. 역시 실패작들은…. 아무튼 정말로 그렇게 말했다면 미안하게 됐네. 많이 불쾌했을 것 같으이.” 노인은 이따금 비비앙이 그러는 것처럼 혼잣말을 하고는, 나를 보지도 않은 채 무성의한 사과를 건넸다. 분위기는 이상한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현재 나와 노인의 사이에는 하나의 여유라고 봐도 좋을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그 분위기의 정체는 자신의 실력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어떤 상황을 맞이하더라도 태연함을 유지할 수 있는. 그리고 수많은 아수라장을 헤쳐 나온 자들만이 보일 수 있는 여유였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연신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느새 그림자에서 벗어난 사용자들은 슬금슬금 물러나 노인의 뒤로 자리를 옮겼고, 내 클랜원들 또한 새로 진형을 잡으며 전방을 경계했다. 잠시 동안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노인은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더니, 이내 입맛을 쩝쩝 다시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래. 자네들은 그…. 사용자라고 불러야 하나?” “…흠.” “흠? 대답 좀 해라 이 버릇없는 사용자 녀석아. 뭐, 아무튼 내가 자네들을 아니 정확히 자네를 초대한 것은 사실이네만. 뭐 좀 불협화음이 있기는 했지만, 좋게 좋게 넘어가자고. 그런 의미에서 잠시 칼을 거두고, 내 성에서 이야기라도 나누면 어떻겠는가?” 노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온화했다. 물론 내용 자체는 웃기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과거에도 지성이 있는 괴물들에게 이와 비슷한 제안을 받은 적이 있기에,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저 말로 대답해주는 대신 일월신검을 상단으로 들어올림으로써 행동으로 보여주었을 뿐. 그와 동시에, 노인을 향해 제 3의 눈을 활성화 했다. “…….” 그리고. 이윽고 허공으로 떠오르는 수많은 정보들을 읽는 순간, 나는 절로 눈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오늘 조아라 본사에 다녀왔어요! 매우 재밌고, 아주 유익 + 유쾌한 시간이었습니다. 하하하. 아무튼 드디어 이북 교정에 들어가게 됐네요. 당장 내일부터 시작할 생각입니다. 학기 중에는 할 시간이 별로 없으니, 이번 방학에 진도를 많이 빼놔야겠죠. :D 곧 불타는 금요일이 다가옵니다! 직장인분들 모두 힘내시고 파이팅 하세요!(학생 분들은 방학 중이실 것이라 믿습니다(?)) 『 리리플 』 1. MT곰 : 1등 축하 드립니다. gg. 갑자기 스타크래프트가 생각나네요. 정말로 재밌게 했었는데 말이죠. ㅜ.ㅠ 2. 破天魔痕 : 정답입니다. 높은 수준의 마법사가 등장했습니다. 과연 누구일까~요? 3. 레필 : 네! 정말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조아라 분들이 상상 이상으로 사이트 운영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시고 있으세요. :) 4. 현오 : 흠흠. BL은 저도 농담이었습니다. 설마 제가 정말 BL을 쓰겠습니까! 내용에는 절대로 BL이 들어가지 않을 예정입니다. 후후. 5. hohokoya1 : 상대도 만만치는 않은 양반입니다. 그러나 수현의 클래스와, 권능과, 숨기고 있는 힘을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실 듯 합니다. 이번에 힘 좀 드러낼 생각이거든요. 벨페고르와 맞붙었던 것처럼요. :) 6. 파뱐 : 그렇죠. 근데 부랑자애들 고연주한테 털렸어요. ㅜ.ㅠ 역시 10강은 강합니다. 음음. 7. dkapqk : 그러고 보니 저도 유니콘이라는 생물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특히 아가 유니콘이요. 잘 때마다 베고 자거나 아님 꼭 품고 자보고 싶어요. ㅋㅋㅋㅋ. 8. rhkdel2 + 소시는걍쩌는듯 : 아니, 제 작품 편집자 분이세요. 이북 담당해주시는. 근데 잘생긴 건 맞으세요. ㅋㅋㅋㅋ. 음음. 가만히 생각해보니 부럽네요. 내면도 굉장히 착하신 분이에요. :D 9. 시드엘 : 에, 김한별은 이미 여성입니다. 혹시 백한결을 말씀하신 것은 아니신지요. 10. 라티인형 : 1. 북 대륙 기준으로 55%~65%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하지만 제로 코드를 얻기 위해서는 그 부분을 전부 정복할 필요는 없습니다. 2. 천사, 악마에 관해서는 말을 아끼도록 하겠습니다.(스포일러 방지 차원입니다.) 3. 사용자. 정확히는 천사들의 설정을 부여 받고,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User'. 그래서 사용자라는 명칭이 붙었습니다.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63 / 0933 ---------------------------------------------- 시작부터 보스? <회상(Reminiscence)> “수현아.” “…….” “너 왜 또 그렇게 얼굴이 퉁퉁 부어있어.” “퉁퉁 부어있지 않았어.”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말투에는 내가 들어도 숨길 수 없는 불퉁거림이 섞여있었다. 기껏 바라 마지않던 형이 찾아왔다. 그러나 일부러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런 내 불만을 알고 있는지 방문 쪽에서 형의 것으로 추정되는 한숨이 귓가로 흘러 들었다. “어휴. 이번 원정에 데리고 가지 않아서 화난 거야? 정말 위험한 원정이어서 어쩔 수 없었어.” “이번 원정만이 아니잖아. 그리고 나만 위험해? 형도 클랜원들도. 위험한 건 똑같잖아.” “말했잖아. 나는 위험해도 돼. 그런데 너는 안 돼.” “그건 또 무슨 논리야? 형은 몰라. 다른 형, 누나, 동생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알고나 있어? 만날 형 그늘 아래서 벌벌 떠는 겁쟁이로 보고 있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먹고 자는 무전취식 자.”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어느새 다가왔는지,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이쯤에서 고개를 돌려줄까 싶었지만 한번 더 참기로 했다. 이번만큼은 어떻게든 다음 원정에 참여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려고 벼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는 일이 없다니. 누가 그래? 오직 원정만 나가지 않을 뿐이잖아. 그 외의 일은 네가 모두 도맡아서 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어. 다들 너를 굉장한 살림꾼으로 알고 있다고. 하하.” “형 앞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겠지. 그리고 나라고 좋아서 그런 일 하는 줄 알아? 할게 없어서 하는 거야, 할게 없어서.” 흡사 아이를 달래는듯한, 형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린다. 일순 마음이 약해지려고 했지만, 다시금 단단히 다잡았다. 지금껏 이와 비슷한 경험을 몇 번이나 했던가? 여기서 넘어가주기에는 그 동안 오매불망 기다리며 바득바득 이를 갈던 나날이 의미가 없어져버린다. 하지만…. “자, 이거는 선물.” “이게 뭔데.” “원정 보고. 이번에 우리 클랜의 원정뿐만 아니라 저기 옆 동네에서 이번에 환각의 협곡에 있는 유적을 발견하고, 탐사에 성공했다고 하더라고. 그 과정을 담은 기록들이야. 읽고 싶어했지?” “흐, 흥. 어, 어차피 시간만 지나면 자연스레 풀리게 될 것들인데 그렇게 의기양양해하지 말라고.” 형이 내밀어준 여러 장의 기록들에 나는 단숨에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아차 싶은 마음에 고개를 멈칫거리긴 했지만, 이미 시선을 마주쳐버리고 말았다. 빙긋 웃고 있는 얼굴을 보자 절로 짜증이 일어, 매가 먹이를 낚아채는 것처럼 기록을 휙 잡아채듯 가져왔다. “환각의 협곡,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 마법 도시?” “아, 뒷장에 나오는데. 아득한 과거에 세워졌던 마법사의 탑과 비슷한 도시라고 하더라고. 줄여서 마탑이라고 부른다지? 아무튼 그것을 도시화했다고 보면 돼.” “호.” “그런데 정말 재밌는 게 뭔지 알아? 그 유적의 보스가 말이지….” 대규모 원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만큼, 내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가 바로 원정 기록을 읽는 것이었다. 해서, 지금부터 읽을 예정이니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하려던 찰나였다. 그런 내 즐거움을 훼방 놓고 싶었는지, 형의 입술은 내가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열리고 말았다. “못해도 수백 년은 묵은, 고대 시절에 활동했던 마법사라고 하더라고.” “…….” “그런데 그 놈이 엄청 강력했나 봐. 그 유명한 이스탄텔 로우에서 이끌었던 원정인데 한 번 실패했으니까 말 다했지. 그래서 이번에 단단히 마음먹고 거의 토벌대 수준으로 구성해서…. 수현아? 왜 그렇게 형을 쳐다보니?” “그걸 미리 말해버리면 어떡하라고…!” * < 거주민 정보(Native Status) > 1. 이름(Name) :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 마지아(Magia) 2. 클래스(Class) : 일반 마법사(Normal Mage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거짓된 신을 꿈꾸는 변절자 · 아르실리온(멸망한 국가입니다.) 6. 성별(Sex) : 남성(276) 7. 신장 · 체중 : 187.6cm · 67.2kg 8. 성향 : 미치광이 · 변태(Lunatic · Perversion) [근력 56] [내구 48] [민첩 52] [체력 40] [마력 100] [행운 92] (300년 전 홀 플레인 의 모든 마법의 정점에 있던 마법 도시 마지아의 정수를 몸에 담은 상태입니다. 그 힘은 자연의 섭리를 일시나마 강제적으로 거스를 정도로 강대합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하나의 마법 도시와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자연의 섭리를 일시적으로 거슬렀을지는 몰라도, 결국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 고유 능력(1/1) > 1.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Rank : S Zero) < 특수 능력(1/1) > 1. 정신 조작(Rank : A Plus Plus Plus) < 잠재 능력(3/3) > 1. 고대 마법(Rank : EX) 2. 꺼지지 않는 지혜의 빛(Rank : S Zero) 3. 무(無) 영창(Rank : S Zero) ‘이게 그 놈이었나.’ 멍하니 사용자 정보를 읽어 들이자, 절로 헛웃음이 인다. 고대 홀 플레인 의 대마법사. 마법의 정점에 다다른 자,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이름 뒤에 붙은 도시명과 진명, 성향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정보 하나만큼은 나무랄 데 없을 만큼 훌륭하다. “뭐지, 갑자기 불쾌한 기분이 드는데?” 마볼로는 미간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손을 휙휙 젓는 것으로 보아 내가 제 3의 눈으로 자신을 읽고 있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다. 과거형 이기는 해도, 역시나 영웅이라는 칭호는 딱지치기로 얻은 것은 아닐 터. 지금껏 치러왔던 보스전과는 달리 쉽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나름대로의 사과와 정중한 초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겨누고 있는 일월신검이 치워지지 않자, 그는 한쪽 눈을 슬쩍 치켜 올리며 말했다. “그 흉흉한 것 좀 치우게. 콱 부러뜨려버리기 전에.” “…….” “정말 까다로운 손님이군. 뭐, 알았다고. 굳이 성까지 갈 필요는 없겠지.” 딱! 마볼로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주변을 감싸고 있는 대기가 미약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차분히 그러한 흐름들을 읽어보자, 곧 덜덜 떨리는 진동들이 마볼로를 주변으로 둥글게 퍼져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이 도시의 주인이 직접, 다시 한번 환영해주도록 하지.” 마볼로는 예의 인상 좋은 표정을 지으며 온화하게 말했다. 그때였다. 분명 우리들이 서있는 바닥은 네모난 돌들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그러나 진동이 울려 퍼지는 곳부터 시작해서, 주변의 경치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돌들은 하나씩 녹아 내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액체 상태로 변했다가, 연갈 빛 색을 띠는 보드라운 흙으로 변했다. 이윽고 흙 바닥으로 변한 대지에서 살랑거리는 풀들이 도드라지게 솟아오르고,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도 간간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공기를 한번 깊게 들이키자 망상의 고원에서나 맡을 수 있던 청량한 내음이 머리를 개운하게 해주었다. 살짝 놀란 마음에 시선을 앞으로 돌리자, 언제 생성했는지 한가로이 나무 의자에 앉아 나를 바라보는 마볼로가 보였다. 그는 오른손에 들고 있는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법 도시 마지아에 온걸 환영하네, 사용자들이여. 나는, 이 도시의 주인인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라고 한다. …음. 이 정도면 손님 대접은 충분히 한 것 같은데. 그럼 눈 앞의 의자에 앉아주겠나?” “이건….” “별 것 아닌 잔재주에 불과하네. 자자, 일단은 앉으라고. 싸우는 것은 언제든지 가능하지 않은가. 나로서도 최대한 자네를 온전한 상태에서 맞이하고 싶으니 부디 내 마음을 거절하지 말아주게.” ‘확실히 미치광이로군.’ 그의 마지막 말은, 꽤나 의미심장한 뜻을 담고 있었다. 이윽고 내 쪽으로 쓱 미끄러져오는 의자를 보며 나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 확실히 상황은 애매하다. 의자는 마주보는 방향으로 단 두 개밖에 없는 상태였다. 마볼로의 말에 따르면 “각 세력을 대표하는 수장들이 이야기하는데 부하 나부랭이들이 어딜 감히 끼어들려고.” 라고 함으로써, 결국 나 혼자만 의자에 앉고 말았다. 원래는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바로 전투를 벌일 예정이었지만, 지금은 한번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자리에 앉혔군. 자자, 그럼 얼른 이야기에 들어가도록 하지. 자네에 대해서 궁금한 것 투성일세.” “저도 약간 궁금한 게 있으니, 질문은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아, 그런가. 에잉. 그, 뭐라고 했더라. 자네들의 원래 나라에서는 노인을 공격하는 방법도 안 가르쳐주는 건가?” “공격이요? 할 줄 압니다. 보여드리죠.” 가볍게 대지에 닿아있던 발을 한번 굴러 파동을 일으키자, 마볼로는 마뜩잖은 얼굴로 손을 들더니, 역시나 가볍게 내 파동을 상쇄시켰다. “고얀놈. 말 실수였다.” “시간 낭비하기 싫습니다. 바로 질문에 들어가도록 하죠. 그 사용자 설정은 어디서 알아내신 겁니까?” “쳇. 급하기는. 그러니까 예전에 우연찮게 이곳을 찾은 사람들, 그러니까 자네와 같은 사용자들이 있었네. 그 놈들을 처리하면서 자네들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지.” “처리라고요?” “백 번 말해주는 것보다 한번 보여주는 게 더 낫겠지. 그럼 잠시 실례하겠네.” 피잉! 마볼로가 말을 끝낸 순간이었다. 가볍게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나를 스쳐 지나가더니, 뒤에서 약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꺅!” “됐군. 잠시 뒤를 돌아보겠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김한별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고개를 돌리자 진귀한 풍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 김한별은 양 팔을 하늘로 올렸다가, 손이 이내 하트 모양을 그리듯 정수리 방향으로 곡선을 그리며 모였다. 더구나 살짝 무릎을 굽히기까지. 평소의 그녀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앙증맞은 모습이었다. 물론 얼굴은 당황함으로 가득 물들어 있었지만. “어, 어? 어?” “홀홀. 좋구나. 이게 바로 내 능력 중 하나인 정신 조작 1단계. 그리고 2단계는…. 응?” 펑! 다시 한번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앉아있는 상태서 주저 없이 검을 휘둘렀다. 곧 허공에서는 폭죽 터지는 소리가 났고, 막 춤을 추던 김한별은 실이 풀린 인형처럼 비틀거리듯 자세를 잡았다. 마볼로는 진심으로 놀랐다는 얼굴로 내게 시선을 집중했다. “뭐, 뭐야 방금 전에? 어떻게 한 건가? 터뜨린 건가? 아, 잘랐다고 해야 하나?” “자른 것. 당신이 알고 있다면 사용자 설정 중 하나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리고 보여주려면 그쪽 부하들에게 하시죠. 괜히 엄한 내 동료들 건드리지 말고.” 쏘아붙이듯 말하자, 마볼로는 쩝쩝 입맛을 다시며 손을 거두었다. 아무튼 방금 전 보여준 능력으로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아마 놈에게 설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사용자(혹은 부랑자)는, 정신 조작에 당해 알고 있던 정보를 털어놓았으리라. “아, 그러고 보니 이따금 특출 난 클래스를 갖고 나오는 사용자들이 있다고 했었지. 좋아. 질문에 대한 대답은 충분히 받은 것 같군. 이제 다시 자네 차례네.” 서로 하나씩 질문을 주고받는다. 따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약속처럼 이뤄지는 상황이었다. 그 속에서, 사위로 흐르는 여유롭지만 은은한 살기를 담고 있는 분위기에 익숙한 감정을 느꼈다. 서로에 대한 자신이 너무 확실하기에 나올 수 있는 여유였다. 문득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니 지금 이 상황을 굉장히 재미있어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에 이곳으로 들어온 사용자들이 있을 겁니다. 두 차례에 나눠서요.” “확실히 그랬지. 시간이야 내게 의미가 없는 일이니 정확한 때는 모르겠지만, 두 번으로 나눠온 것은 확실하네.” “그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음. 일부는 내 성안에 가둬놨네.” 일부는. 명료한 대답이었지만, 그 말인즉슨 여울가녘 10명, 1차 구조대 14명중 몇 명은 이미 사망했다는 소리였다. 나는 한두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볼로를 향해 살짝 고개를 까닥였다. 이제는 그가 질문할 차례였다. “…….” 그러나. 마볼로는 곧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나를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에는 흥미로운 빛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이윽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저 양반이 더위 먹었나 하고 생각할 무렵 그의 입술이 서서히 열리는걸 볼 수 있었다. “이상하군, 이상해. 확실히 여느 놈이랑은 달라.” “질문 안 하실 겁니까?” “할까 말까 고민했지만, 그래도 궁금하니 물어봄세. 자네, 내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나?” “…….” “대부분의 인간들은 이곳에 처음 발을 디디고 나를 보면 꼭 하는 첫마디가 있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결국 본질은 당신은 누구지? 이런 말이야. 그런데 자네는 전혀 나에 대해 궁금하지 않은 것 같아 보여. 분명 방금 전 나한테는 시간이 의미 없다, 라는 말을 던졌음에도 어떤 흥미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말일세. 그래…. 마치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야.” 마볼로의 말을 듣자 속이 따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며, 연초를 하나 꺼내 물어 불을 붙였다. 문득 안현에게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치익, 치이익. “누군지는 대강 알고는 있습니다. 고대 홀 플레인 의 대마법사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그의 이름을 꺼낸 순간, 마볼로의 얼굴이 살짝 굳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에 아랑곳 않고 나는 느긋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악의 세력을 물리친 영웅이 되었지만 요정 여왕을 사모한 나머지 그녀와 용사를 납치한 변절자…. 라고 기록이 적혀있더군요.” “변절자라…. 변절자…. 그렇군. 기록이라. 그렇다면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지. 큭큭. 그래도 궁금한 것은 남아있을 텐데? 예를 들면 어떻게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는지 등등 말일세.” “사용자들은 그런 자질구레한 것에는 관심 없습니다. 그래 봤자 우리들에게는 유적의 주인 그 이상, 이하도 아니죠. 즉 우리들은 유적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만큼 당신은 그저 쓰러뜨릴 대상 중 한 명입니다.” “과연. 헛소리는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소리인가.” 마볼로는 곰곰이 내 말을 곱씹는듯하더니, 미약한 웃음소리를 내며 수긍했다. 그러고는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 또한 자네들에 대해 큰 관심은 없었네. 이곳에서 원래 목표했던 바는 이뤘으니, 그것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 일이거든. 하지만 최근에 문제가 하나 생겨버렸지.” “…….” “자네는 알고 싶지 않다고 했다만 나는 이 도시 자체나 다름없네. 마지아는 고대 홀 플레인 의 마법의 기술이 총체적으로 집약된 곳이지. 나는 그 정수를 내 몸에 받아들여, 하나의 신과 같은 능력을 얻었다네.” ‘반 쪽짜리 신이겠지.’ “말도 안 돼.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내가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 있는 사이, 대답은 뒤쪽에서 들려왔다. 김한별은 아까 강제적으로 몸을 조작 당한 것이 꽤나 유감스러운 듯 차가운 얼굴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볼로는 나와의 대화에 끼어든 불청객이 꽤나 불쾌한지, 얼굴을 찡그리며 한쪽 팔을 걷어 보여주었다. “그건.” 그의 팔에는 온갖 형이상학적인 문양들이 빼곡히 음각되어있었다. 나머지는 로브에 덮여 보이지 않았지만, 오직 팔 한쪽에만 끝나는 것이 아닌 듯 문양은 안쪽으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사용자. 자네들은 천사라는 존재에 설정을 부여 받고, 그 능력을 사용한다고 하더군. 어떻게 보면 부럽기도 해. 그렇게 쉽게 쉽게 능력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하지만.” “하지만? 아이야. 나와, 그리고 거주민들은 달라. 어렸을 때부터 피나는 노력을 거쳐서 조금씩 마력을 쌓아나가고, 머리가 터져라 마법 책을 읽고, 손가락이 부서지도록 주문을 맺으며 연습한다는 말이야. 그러니 별 꼴같잖은 수련 같지도 않은 수련을 하고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주제에, 우리들의 이루어놓은 성과를 의심하지를 말았으면 좋겠구나. 아무튼 대답은 가능하다, 라고 해주마. 그러니 아이야.” “…….” “나는 네 주인과 대화를 하러 온 거지, 네 년 따위와 말을 섞으러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니란다. 감히, 한번만 더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리면. 내 친히 네 허벅지를 벌려서 가랑이부터 반으로 찢어 죽여주마.” 그의 말투는 여전히 온화했다. 표정도 부드러웠고, 딱히 살기도 내뿜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김한별도 그 진심을 일부나마 느낀 듯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색색거리는 콧소리만 내쉬었다. “후. 미안하군. 나는 대접할 가치가 있는 이에게는 나름 관대해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는 벌레처럼 보는 경향이 있어서. 자네 부하이긴 하지만 내 인생 철칙 중 하나이니 존중해줬으면 좋겠네.” “그거야 제 알 바는 아닙니다. 질문은 끝났습니까?” “성질 급한 녀석. 뭐, 자네도 빨리 끝내고 싶어하는 것 같고 나도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으니, 예정을 조금 앞당겨볼까? 서로 마지막으로 하나씩만 질문하고 끝내도록 하지. 이번에는 내가 먼저 하겠네. 자네, 내가 쳐놓은 결계를 찢고 들어왔던 힘의 정체가 뭐지?” “불입니다.” 매우 간단한 대답. 당연히 내 말이 마음에 안 드는지, 그는 미간을 찡그리며 재차 질문했다. “조금 더 자세히. 그건 고작 개인의 힘 따위로 열 수 있는 결계가 아니야. 앞선 놈들은 내가 일부러 열어주었기에 가능했네만, 자네는 오히려 막으려고 집중했을 정도였거든. 하지만 자네는 아주 간단히 뚫어버렸지. 이게 바로 내가 자네에게 호기심을 가진 진짜 이유일세.” “이것도 사용자 설정의 일부라고 볼 수는 있습니다만. 뭐, 조금 더 말씀 드리면 천사와의 정당한 거래를 통해 얻은 힘이라고 해두죠.” 일부러 열어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최근에 문제가 하나 생겼다고 했다. 여기서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방법이 있을 것이고, 그 방법은 바로 사용자. 정확히는 사람이라는 제물이 필요하다는 것. 1회차의 기억을 더듬자 그 문제라는 것을 대강이나마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조용히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그는 내가 더는 대답하지 않으리라고 여겼는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어쨌든 질문은 다시 내 차례로 돌아왔다. 무엇을 물어볼까 생각하다가, 나는 문득 떠오른 하나의 생각을 골라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용사와 요정 여왕은 어떻게 됐습니까?” “로이드와 마르가리타? 둘 다 초인의 경지에 오르긴 했지만 시간이 꽤 지났으니까. 로이드는 이미 죽은 지 꽤 시간이 지났네. 애당초 살려줄 생각도 없었고.” “그럼 요정 여왕은?” “마르가리타는….” 1회차에서는 그녀 또한 시체로 발견됐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시체의 상태가 비교적 깨끗해서,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읽은 기억이 있었다. 혹시 그렇다면 지금은 살아있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궁금한 마음에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 마볼로는 처음으로 음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귓불에 닿을 정도로 입가를 끌어올리고는, 낄낄거리는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쎄. 어떻게 됐을 것 같은가?” “…그냥 관두죠.” “고깝게 생각지 말게. 자네도 딱 이 정도만 대답해줬으니. 나는 적어도 절반이라도 대답해주지 않았는가.” “괜찮습니다. 어차피 어른 대접도 이쯤에서 슬슬 끝낼 예정이었거든.” “그런가. 조금 아쉽군. 천사에게 받은 힘이라면 인간이 다룰 수 없는 힘일 텐데. 규격 외의 힘을 가진 자들끼리는 조금 통하는 게 있으리라 여겼건만.” “전원 전투준비.” “정말로 나를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이 도시 안에서라면 신이나 다름없는 나에게?” 마볼로의 여유만만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일월신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대신 그 옆에 걸려있는 무검의 손잡이를 쥐고, 제 3의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글쎄, 내 눈에는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와 반 쪽짜리 신밖에 보이지 않는걸.”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흠. 생각해봤는데 메모라이즈는, 특히 여성 독자 분들이 읽으시기에 조금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겠군요. 이해는 합니다. 저도 다른 장르 소설들 중 몇몇은 보기 거북한 장르들이 있거든요. 그분들께는 심심한 유감의 말씀을 드립니다. _(__)_ 해답 편은 유적이 이어지기 전까지 쭉 이어질 예정이지만, 감이 특출 나게 좋으신 분은 이번 회로 어느 정도 감을 잡으실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네요. :D 『 리리플 』 1. HammerofWar : 1등 축하 드립니다. 요즘 들어 1등 코멘트에 새로운 분이 많이 보이네요. 하하하. :) 이번 회도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2. SeoRiHan : 고연주요? 감사합니다. 꼭 보내주세요. 제가 꼭 붙잡아서 말이죠. 아, 아닙니다. 흠흠. 3. 거친파도 : 아마 티 스토어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4. hohokoya1 : 음. 연참도 해야겠죠. ㅜ.ㅠ 대신 오늘 분량을 빠방하게 넣었습니다. 헤헤. 5. 와룡선생a : 3. 분량을 늘린다. 이건 어떠신지요. :) 6. 전설이란이름하에 : 부차적인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둘의 범위가 워낙 크기 때문에, 조금 묻힌 감이 없잖아 있네요. 7. 황걸 :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럽네요. 해답은, 예전에 수현이 벨페고르의 머리를 연구소 바닥에 처박을 때 조금 드러냈습니다. ㅜ.ㅠ 8. 고장난선풍기 : 네. 무검도 슬슬 세상 빛을 보게 해줘야죠. 하하하. 9. 라티인형 : 저, 저는 물고기였었군요! 퍼덕퍼덕! 퍼덕퍼덕! 10. 자유도령 : 이런. 살아있는 설정입니다. -_-a 어떻게 보면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는 거주민으로 볼 수 있거든요. 비비앙보다 훨씬 상위 버전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64 / 0933 ---------------------------------------------- 시작부터 보스? 내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마볼로는 아주 잠깐 경직된 표정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곧 그의 눈매가 반달처럼 휘어 올라가고 입 꼬리도 귓불 아래로 쭉 찢어지며, 입가에 진한 미소가 머금어지는 게 보였다. “흐흐. 반 쪽짜리 신이라. 그렇지. 원래는 화가 나야 정상이겠지만…. 이상하게 별로 화가 나지는 않는군.” “사실이라서 그렇겠지.” “홀홀. 일부는 인정하지. 하지만 그것보다는 말일세….” 마볼로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찬찬히 의자에서 일어나며 검지 손가락을 앞뒤로 까닥거렸다. 그것을 하나의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곧 그의 뒤에 있던 사용자들이 회색 빛 눈깔을 희번덕거리며 슬금슬금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마볼로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한 손을 들어올렸다. “자네도 결국 나와 똑같은 신세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딱! 그는 놀러 나온 사람처럼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사용자들의 신체가 은은한 은빛으로 휩싸였다가 이내 팍 사그라졌다. 얼른 제 3의 눈으로 분석에 들어가자, 그들의 신체 능력이 대폭 상승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마법사의 버프를 받은 것이다. “자, 그럼 부하들은 부하들끼리 놀라고 하자고. 자고로 세력을 대표하는 자는 그와 격이 맞는 이와 싸우는 게 도리 아니겠는가.” “그것도 인생철학인가. 아무튼 그래 봤자 내 동료들한테는 안될 것 같은데.” “이건 인생철학보다는 대마법사의 자부심이라고 해주게. 그리고 얕보지 않는 게 좋을 게야. 거창하게 여러 주문을 복합적으로 터뜨리기보다는, 깔끔한 하나로 마무리 짓는 게 더욱 나은 법이지.”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고연주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여기는 걱정하지 말고 자신한테 맡기라는 소리였다. 다른 클랜원들이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고연주를 믿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내가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를 일대일로 붙잡아두는 게 다수의 전투보다 더 유리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궁금한 표정이군. 내가 왜 정신조작을 사용하지 않는지 말이야.” “사용해도 돼. 일일이 자르거나 아니면 그전에 너를 죽이면 되니까.” “홀홀. 자신감이 넘치는군. 아주 좋아. 계속 그런 태도를 유지해달라고. 그래야지 나중에 붙잡혔을 때 굴복시키는 맛이라도 있지 않겠는가.” “변태 영감이었군. 나잇값 좀 하시지 그래.” 지속적으로 도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볼로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아까부터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로 흥얼거릴 정도였다. “킬킬. 취향이니 존중해주게. 나이가 들어먹으니 평범한 것들에서는 쾌감을 얻기 힘들어서 말이야…. 뭐, 자네도 한번 맛들이면 그 카타르시스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걸세.” ‘알고 있어. 리리스를 굴복시킬 때 비슷한 감정을 느껴봤거든.’ 문득. 천사와 동급인 악마 주제에, 눈물콧물 질질 흘리며 알몸으로 목숨을 구걸하던 리리스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쥐고 있던 무검의 손잡이를 뽑아 들었다. 대마법사는 그런 나를 묘한 눈길로 응시했다. “…….” 그러고 보니. 어떻게 보면 이번이 무검의 첫무대나 다름없었다. 일월신검이었다면 검을 뽑는 사늘한 소리라도 났을 텐데, 무검은 그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손잡이만 덩그러니 나온 상태였다. 검신이 보이지 않는다. 무려 제 3의 눈을 활성화한 내 눈에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 귀속 효과를 받아서 그런지 내 감각에 확실히 걸리는 모양이 있었다. 손잡이를 으스러지도록 쥐며, 그것을 눈 앞의 마법사를 향해 일직선으로 겨누었다. 마볼로도 보이지는 않지만 뭔가 위협적인 기세는 느꼈는지,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손잡이로 던지고 있었다. “오호라. 보이지 않는 검이라. 자네는 정말 나를 여러 번 놀라게 하는군. 아, 너희들은 먼저 가있으려무나. 너희들은 실패작이라서 얼마든지 죽어도 좋단다. 죽어도 시체만 남으면 되니까, 지지만 말아다오. 홀홀.” “드디어 오네? 다들 자세 잡으렴. 수현! 여기는 신경 쓰지 말아요. 몸 조심해요!” 마볼로가 가볍게 손짓하자 뒤에 가만히 서있던 사용자들이 비로소 슬금슬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고연주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귓가를 강하게 때렸다. 그런 그녀의 말을 받아들여 나는 온 신경을 마볼로에게 집중시키기로 했다. 아무리 고대의 집약된 버프를 받았다고는 해도 고연주라면 능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부하들이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대표들이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는가. 우리도 슬슬 시작해야겠지?” “…….” “어이쿠 이놈 눈빛 좀 보게. 눈빛만으로도 잡아먹겠다 인석아! 홀홀.” 마력 능력치 100. 이 정보가 시사하는 바는 절대로 가벼이 넘길 수 없다. 더구나 눈 앞의 마법사는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베테랑중의 베테랑. 손짓 하나도 쉬이 넘길 수 없는 노 괴물. 물론 질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마볼로도 마찬가지일 터이니, 방심은 절대로 금물이었다. 아무리 내 클래스가 마법사에 강한 성향을 갖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일단 화정은 아낀다. 장기전이 될 수도 있으니, 처음부터 사용하면 체력이 어떻게 될지 몰라. 본 실력으로 확실한 기회를 만들고 마무리용으로 사용하는 게 나을 터.’ 요행은 바라지 않는다. 그런걸 바랄만한 상대가 아니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이곳은 마볼로의 홈 그라운드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어차피 첫 격돌은 탐색전이 될 가능성이 높으니 초반 격돌에서 확실한 이득을 취하고, 상대방이 먼저 밑천을 드러내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었다. “흠~. 이상한 힘을 숨기고 있고, 마법을 자를 수 있고, 보이지 않는 검을 사용한다. 그리고 입고 있는 옷을 보아하니 마법 방어 능력도 어느 정도 있는 것 같은데…. 마법 방어는 충분히 뚫을 수 있겠지만, 검은 조금 위험할 것 같기도 한데…. 음….” “…….” 속으로 이런저런 계산을 하는 동안 마볼로는 나를 앞에 두고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마법사나 연금술사의 종족 특성인 듯, 아예 턱을 매만지면서 깊은 생각에 잠긴듯한 표정까지 보여주었다. 곧 고심하던 그는 곧 흥미로운 표정을 내비치며 말했다. “뭐야, 그럼 어떻게 싸우라는 건가? 흐흐…. 응?” “차가움을 머금은 꽃잎은, 새벽 폭풍 아래 부서진 섬광이 되어.” 선공을 가할 셈인지, 김한별이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렸다. 마볼로의 얼굴은 또 뭔가 재밌는 것을 발견했다는 표정을 띠더니 재빠르게 그쪽을 향해 시선이 돌아갔다. “퍼져라!” 그리고 뒤쪽에서 앙칼진 목소리와 함께 마력의 흐름이 물씬 덮쳐 드는 순간, 나는 곧장 앞으로 뛰어들었다. 그때였다. “어딜!” 휘리릭! 콰앙! 역시나 대비하고 있었다. 전방에서 내가 달려드는 기척을 느꼈는지, 마볼로 또한 나를 향해 바로 손을 뻗은 것이다. 그러자 주변에서 무형의 밧줄이 나를 감싸 듦과 동시에, 손바닥에서 나온 푸른빛을 띠는 거대한 광선이 일직선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피하지 않는다.’ 나는 전력으로 맞부딪쳐보기로 했다. 확실히 마력 능력치가 100이라서 그런지, 파동에서 느껴지는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무검을 일자로 세워, 정확하게 광선의 정 중앙을 찌르며 들어갔다. 콰콰콰콰! 이윽고 무검과 광선이 닿은 순간이었다. 파동은, 마치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듯 거짓말처럼 반으로 갈라졌다. 분명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저항감은 거칠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부담이 훨씬 적었다. 마볼로도 자신의 마법이 이렇게 쉽게 잘리자 깜짝 놀랐는지, 환희에 가까운 표정을 보여주며 감탄을 흘렸다. “오호!” 바인드 마법은 애당초 신경 쓰지도 않았다. 허리를 감싸고 있는 태양의 영광이 뜨거울 정도로 작열하고 그에 반응한 하늘의 영광이 푸르스름한 막을 내뿜는다. 그러자, 나를 감싸 안으려던 밧줄들은 막에 흡수되듯 스르르 사그라졌다. 마볼로는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했다. “이야, 재밌군! 너무 재밌단 말이야! 그럼 이것도 한번 실험해볼까?” “그전에 네 걱정이나 하시지.” “예끼 이놈, 어딜.” 끈임 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광선의 파동이 끝났다. 그것들을 모두 자르며 헤쳐 나오자, 마볼로는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그렇게 검기가 들어갈 사정범위를 계산하고 막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그의 몸이 투명하게 유체화되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게 보였다.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양 옆으로 밀려드는 거대한 압박감들. 이것을 그대로 받으며 억지로 들어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더 좋은 방법이 있다. 나는 곧바로 이형환위를 사용했다. 꽝! 스르르…. ‘중력 마법이었나?’ 거대한 굉음과 함께 방금 전까지 내가 있던 자리에 거대한 충격파가 발생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간은 흡사 압축기를 사용한 것처럼 이리저리 짜부라지며 뒤틀리고 있었다. 그 위력 충만한 마력에, 허공에 남아있던 잔상은 깃발이 나부끼듯 펄럭이더니 이내 허공으로 사르르 녹아 들었다. “뭐야, 설마 겨우 이거에 당한…. 응?” 마볼로의 고개가 갸웃거리며 기울어지다가, 번뜩이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나는 이미 놈의 뒤로 돌아간 상태였고, 검을 내리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단 1초의 순간. 나와 마볼로의 시선이 마주친다. 하지만 그는 당황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애당초 처음부터 내가 자신의 마법을 뚫고 들어올 것을 계산했었는지, 몸은 이미 반투명하게 변한 상태였다. 나는 그가 더욱 여유를 부리길 바라며, 정수리를 쪼갤 듯 무검을 내리쳤다. 그러나 앞서 생각했던 대로 요행은 일어나지 않았다. 검을 내려치는 와중에도 빠르게 몸을 이동시키는 바람에, 처음 머리를 노렸던 검로를 수정시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훙! 싹! “쯧.” 무검은 아쉽게도 마볼로의 왼쪽 어깨를 베고 지나갔고, 곧이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앙상한 팔 하나를 볼 수 있었다. 툭, 툭툭. 연이어 공격을 하려고 했지만, 이동 마법을 썼는지 마볼로는 재빠르게 나와의 거리를 벌린 상태였다. “아쉽다. 끝낼 수 있었는데. 확실히 나이는 똥구멍으로 처먹은 것은 아닌 것 같군.” “…허허. 이럴 수가.” 마볼로의 얼굴은 볼만했다. 나와 전투를 벌인 이후로 처음으로 믿을 수 없다는, 살며시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표정을 회복했다. 그리고 자신의 잘린 왼쪽 어깨와 바닥을 나뒹구는 팔을 보며 박수라도 치려는 듯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물론, 외팔로 그것은 불가능했기에 박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한 손만이 의미 없이 허공을 가를 뿐. “허허, 정말로 대단하구나.” “…후.” “방심했군. 실수했어. 직접 당해놓고도 믿기지 않아. 분명 이곳에서 물리력은 나한테 통하지 않을 텐데? 아니, 그전에 잘린 팔이 재생도 되지 않고 있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군.” “큭, 꼭 너 같은 놈들이 그러더라.” “응?” 전투 중 입을 열지 않고 있던 내가 말을 걸자, 마볼로는 마치 기다리던 사람처럼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몸은 투명해진 상태에서 서서히 원래의 빛깔을 되찾고 있었다. 아마도 방금 전 사용한 마법은 자신의 육체를 다른 차원으로 옮겨 물리력을 무효로 만들어버리는, 근접 계열들에게는 아주 고약한 마법이었을 것이다. 물론 굉장히 고난도의 마법이기는 했지만, 애당초 그런 회피 마법은 내게 통하지 않는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무검의 특성 중 하나가 바로 모든 차원의 존재를 타격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검술 전문가의 권능, 즉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자를 수 있는 권능도 있다. 예전에 리치가 이와 비슷한 마법을 펼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때, 나는 권능 하나만으로 직접적인 타격을 입혔다. 그것이 무검의 특성과 합쳐짐으로써 상승 보정을 받아 말 그대로 ‘팔을 잘랐다.’ 라는 완벽한 판정을 나오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마볼로가 신이든 악마든, 내 앞에서는 그저 한 명의 인간 마법사와 별다를 바 없다는 말이었다. 나는 무검을 빙빙 돌리며, 이죽거리는 목소리로 도발했다. “얕봤다, 실수했다, 방심했다. 꼭 실력 없는 것들이 그러더라고. 인생도 아니고 목숨을 건 전투잖아. 왜 그렇게 손해보고 살아?” “큭큭. 재밌는 녀석. 그래 네 말이 맞다. 아주 말하는 것마다 쏙쏙 맘에 드는구나. 아마 네가 로이드였다면 제법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터인데. 나야말로 아쉽구나.” “그건 내가 사양하지.” “홀홀. 계집애처럼 튕기기는. 뭐, 그럼. 자네가 바라는 대로 나도 슬슬 전력을 다해볼까 하는….” 파앙! 파앙! 말하는 게 꼬락서니가 꼴 보기 싫어, 나는 위협용으로 가벼운 검기를 날렸다. 마볼로는 느긋하게 말하던 도중 깜짝 놀랐는지, 기겁하며 남은 손으로 검기를 소멸시켰다. 그리고 여태껏 지켜온 온화한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외쳤다. “씨발, 말 좀 하자 새끼야 쫌! 이 성질 급한 새끼야! 뭐 급한 게 있다고 그렇게 쉴 새 없이 몰아붙여!” 나는 멍한 얼굴로 마볼로를 바라보았다. 지금껏 아무리 도발해도 허허 웃으며 받아넘겼는데, 말하던 도중 공격했다고 벌컥 화를 내다니. 확실히 성향에 적혀있는 대로 미치광이가 분명했다. “그, 그냥 검기 한두 개만 날렸을 뿐인데….” 머리를 긁적이며 자세를 바로잡는다. 소기의 성과는 거두었다. 예정대로 정수리부터 쪼갰다면 어쩌면 전투가 끝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아쉬운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었다. 탐색전에서 한 팔을 날리는 이득을 얻었으니 절대로 손해는 아니었다. “후유, 미안하네. 잠시 실언을 했군.” 마볼로는 한두 번 심호흡을 하며 하나만 남은 팔을 들어올리더니 이내 쥐었던 손바닥을 쫙 펼쳤다. 그러자, 마치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맑은 빛이 그의 손바닥 안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을 무척 소중히 앞으로 가져오고는 흡사 피아노를 치듯 손가락으로 가볍게 어루만지는 모습을 보였다. 이윽고. 빛은 길쭉한 막대처럼 늘어나면서 하나의 지팡이와 같은 형태를 이루어냈다. 쭉 늘어난 빛은 처음보다는 사그라졌지만 여전히 전체를 덮은 상태로 형형한 빛을 비추고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꺼내보는군. 아무튼 소개하도록 하지. 나와 일생을 함께해온 동반자일세.” “오. 비싸 보이는데.” “뭐? 오르도를 보고 고작 한다는 말이 비싸 보이는데? 킬킬킬킬! 다른 마법사들이 들으면 기겁하겠구나!” “고작 무기 하나 꺼냈다고 너무 자신만만해하지 말라고.” 마볼로는 잠시 동안 미친놈처럼 웃더니, 곧 자신의 눈을 쓱쓱 닦으며 말했다. “흐흐, 걱정 마시게나. 여기서 끝낼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자네의 소원대로 정말로 전력을 다할 생각이거든.” 말을 마친 마볼로는 다시금 오르도를 하늘 높이 올렸다. 그리고 우리와 대면한 후 처음으로 입을 열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 ───. ───.” 드드드드. 드드드드. 그 순간이었다. S Zero 랭크로 되어있던 무 영창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마법인지, 주문을 외우자마자 이곳 저곳 펼쳐져 있던 경치 좋은 수풀들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경치 좋던 풍경은 그렇게 순식간에 원래의 광경으로 돌아왔고, 곧 도시 전체가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설마 이 능력을 고작 한 놈한테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래 솔직히 인정하도록 하지. 이것을 쓰지 않으면 왠지 모르게 내가 질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고 있네.” 쿠쿠쿠쿠! 쿠쿠쿠쿠! “자네의 마법 저항 능력은 경이로울 정도야. 이것은 대마법사의 칭찬이니 자부심을 가져도 좋네. 아무튼, 이것은 자네가 원한 일이기도 하니 부디 치사하다고만 하지 말아주게.” “치사하군.” “…망할 놈.” 그 순간 마볼로의 몸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오르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그 범위는 너무도 거대해, 무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궁신탄영으로 한번 뛰어오르고, 이형환위.’ 마법이 완전히 발현되면 귀찮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막 대지를 박차올라 허공으로 뛰어오르려는 순간이었다. 우웅! 우웅! 우웅! 우웅! 우웅! 우웅! 우웅! 우웅! 대지를 디딘 곳곳에서 연녹색 마법진이 우수수 떠오르더니 무수한 방어 마법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단순한 방어 마법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저주, 디버프 등 온갖 종류의 마법들이 내게로 쇄도하며 마볼로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제한을 걸으려고 했다. 무검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그것들을 파훼하긴 했지만, 결국 초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없었다. 그리고…. 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공기를 울리는 웅혼한 마력의 소리. 그 거대한 흐름에 살짝 침을 삼키고 주변을 둘러보자, 도시를 이루는 바닥에서 수많은 마법진들이 형형색색의 빛을 뿜어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푹! 쨍그랑! 스멀스멀 바닥을 타고 오는 마력의 흐름에 무검을 바닥으로 꼽자, 조각난 파편이 비산하며 와장창 깨져버린다. 그러나 진의 수는 너무나도 많았다. 수십, 아니 수백은 가볍게 넘어갈듯한 마법진을 보자 절로 감탄이 일어날 정도였다. “어떤가?” “?” “이것이 바로 나만의 고유한 능력. 질서의 오르도를 이용하는 대 결계, 마법 도시 마지아의 정수일세.” “흠.” 문득 허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약간 노출되어있는 그의 피부에는, 아까 봤었던 문양들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예의 여유로운 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각오하는 게 좋을 걸세.”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캐릭터 좌담회를 들려드릴게요! <캐릭터 좌담회> 로유진 (수현이 언제오나….)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이보세요. 로유진 님.” 로유진 “아 네 안녕하세요.”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안녕 못하고요. 하나만 물어봅시다. 오늘 연참하실거죠?” 로유진 “네? 네. 요즘 분량을 많이 넣고는 있는데 아무래도 독자 분들이 감질나 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로유진 님 컴퓨터에 저장되어있는 다음 회 분량을 읽고 왔거든요. 내가 다른 말은 안 할게요. 우리 인간적으로 이러지는 맙시다.” 로유진 “네?”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아니, 인간적으로 이러지는 말자고요.” 로유진 “아니, 그게 무슨….”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미친 화정 개 존~나 사기, X 사기잖아요. 아 완전 어이없네. 오늘 회에 뭔가 있는 것처럼 적어주셨는데 왜 이렇게 찌질 하게 끝나….” 로유진 “ㅋ.” (로유진님이 퇴장하셨습니다.)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하…. ㅜ.ㅠ”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 드립니다. 오랜만에 1등 코멘트에서 뵙는 것 같습니다. 하하. 역시 마음먹고 하시면 1등을 하실 수 있군요. :) 2. MT곰 : 이북 교정 준비하고, 하루 연재 분 준비하랴 정신이 없습니다. 아직 많이 어색한 부분이 있네요. 그래도 주말에는 웬만하면 연참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3. dbss : 쿠폰 감사합니다. _(__)_ 이번 전투는 다음 회에 끝낼 예정이어서요. 저도 얼른 즐거운 보물 탐험 시간을 가지고 싶어요. :D 4. 프리맨 : 아, 그렇군요. 저, 죄송한데 할리퀸이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요? 네이버에 검색해봤는데 영 감이 안 오네요. ㅜ.ㅠ 5. asa2289 : 뀨? 뀨, 뀨뀨뀨뀨뀨. 뀨뀨뀨, 뀨뀨뀨뀨뀨. 뀨, 뀨뀨뀨뀨뀨! :) 6. 한방모드 : 이번 회에 장비 하나 나왔…. 흠흠. 아마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헤헤. 7. EH연 : 오호. 이틀 만에 정주행 성공이라니. 대단하십니다. 저는 200회 넘어가는 건 아무리 빨라도 4일~5일 정도 걸리더라고요. ㅜ.ㅠ 8. 몽미르 : 헤헤, 감사합니다. 여관은 극 초기 시절에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차차 지나고 대도시, 일반 도시 정복을 진행하면서 <시작의 여관>이라는 하나의 설정이 부여됐습니다. 천사가 설정을 부여한 사용자 아카데미와 아주 약간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9. 라티인형 : : 로유진은 고민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낚시일까, 아닐까! 10. 노트님 : 음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다음 회에 전투 끝내고 성으로 들어갈 예정인데…. 고민 중입니다. 조금 보기 편하시도록 수위를 낮출까, 아니면 예정대로 진행할까 고민하고 있어요. 쩝.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65 / 0933 ---------------------------------------------- 미치광이 마법사와 망가져 버린 이들 조금 이른 감이 있기는 했지만 과단성 있는 결정이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방금 전의 격돌로, 내가 마볼로보다 우위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어쨌든 상대방이 먼저 숨겨진 패를 꺼내 들었다. 지금까지는 예정대로 진행됐지만, 그만큼 살얼음을 걷는 기분이었다. 한쪽이 사소한 실수라도 하는 순간 그대로 골로 갈 터이니. ‘그러고 보니 클랜원들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에 당황했을까 걱정이 들어 고개를 돌아보려는 순간이었다. 핑! 공기를 찢는 미약한 파공음이 들린다. 나는 곧바로 무검을 들어올려, 쏘아져 들어오는 자그마한 마력 화살을 걷어내었다. “워워, 고개 돌리지 말게. 친구여.” “누구 멋대로 내가 네 친구냐?” “홀홀. 자네도 규격 외의 힘을 지닌 자라면 알고 있을 걸세. 이 힘을 본격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이 얼마나 몸에 커다란 부담을 주는지를. 그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드러냈는데, 다른데 신경 쓰지 말아주게.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모든 신경을 내게 쏟아달라고.” “미친놈.” 욕을 했음에도 마볼로는 낄낄 웃으며 진심으로 기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힘을 발휘하면 발휘할수록 처음의 온화했던 표정은 급속하게 바뀌고 있었다. 부드러웠다가, 날카로웠다가. 기뻐하다가, 화를 낸다. 말 그대로 미친놈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긴, 거의 300년동안 제정신을 유지했다고 보기는 어려운가.’ 생각은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공중을 부유하는 마볼로의 등 뒤로 물가에 파문이 일 듯 허공이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그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는 지팡이에서 강렬한 빛이 깜박거리듯 터져 나오더니 이내 명멸하는 동그란 구체 하나가 두둥실 떠올랐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렇게 물량으로 처리하는 방법은 원래 내 취향이 아니지만….” 그의 지팡이가 한번씩 흔들릴 때마다 수많은 마법진들이 반응한다. 마치 하나의 수식을 짜듯 진 하나를 배열할 때마다, 파문은 점점 커지며 동시다발적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현재 자네를 쓰러뜨릴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을 것 같아서 말일세. 좋아…. 됐다.” 번쩍! 우우웅! 마볼로의 말이 끝난 순간이었다. 허공에 일렁이던 파문은 이곳 저곳에서 동그란 구체들을 하나씩 토해내었다. 그리고 빛의 구체는 순식간에 수십, 아니 수백 개로 분열하는가 싶더니 곧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가히 어마어마한 물량이었다. 그는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고대 마법 증폭, 복사, 분열을 섞었네. 어때, 막을 수 있겠는가?” “…….” “대답이 없군. 혹여나 피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걸세. 안 그러면 이 빛의 구체들이 저~기 뒤에 있는, 아주 아주 열심히 싸우고 있는 동료들을 덮치게 될 테니까 말이야. 킬킬!” 섬뜩한 웃음 소리와 함께, 마볼로는 나를 향해 힘껏 지팡이를 내리쳤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명멸하는 수백의 섬광들이 일제히 사방에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정확히 내가 있는 지점을 향해서. ‘옛날 생각 나게 만드네.’ 내려온다. 천천히 내려온다. 천천히 내려오다가 허공으로 떠오른 마법진을 통과하는 순간, 내려오는 속도에 점점 가속이 붙어 내려온다. 그것은 하나의 폭우였다. 갑자기 세차게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불 붙어 곤두박질치는 유성우처럼. 무수한 빛의 빗방울들이, 섬광과 같은 속도로 나를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수웅! 수웅! 수웅! 수웅! 수웅! 수웅! 수웅! 수웅!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는다. 양 발로 바닥을 단단히 딛고 무검을 오른손에, 일월신검을 왼손으로 나누어 들었다. 그것들이 들어오는 궤도를 하나하나 예측하고 모조리 다 쳐내야 한다. 아니, 솔직히 모두 쳐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대한 쳐낼 수 있을 만큼 쳐내고 남은 것은 내 항마력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홀홀!” 노인네의 주접스러운 웃음 소리를 뒤로한 채, 나는 몸을 살짝 구부렸다. 그리고 섬광이 지근거리로 다가온 순간, 눈을 부릅뜸과 동시에 있는 힘껏 쌍칼을 휘둘렀다. 펑! 펑! 펑! 펑! 펑! 펑! 펑! 펑! 무검과 일월신검을 풍차처럼 휘두르며 섬광의 접근을 차단한다. 사위로 수십의 검광이 번쩍이고, 그것은 종래에 하나의 정교한 검막을 만들 정도였다. 검광이 번뜩일수록 그에 비례하여 폭발음도 늘어갔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가끔씩 몸에 미약한 진동이 느껴지고 태양의 영광이 필요 이상으로 뜨거워짐이 느껴졌다. 그것은 한두 개 놓친 것들이 내 항마력을 두들기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신들렸군 신들렸어. 정말 대단한 광경이야.” 다시 한번 조롱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쓸 여유는 없다. 구체가 내 마지막 보루인 전장의 가호를 뚫고 한번이라도 신체를 곧바로 칠 경우, 몸이 크게 흔들리고 말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검이 어지러워지고 틈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일월신검을 들고 있는 손아귀에서 이따금 강렬한 진동이 울리는 게 느껴졌다. 온 몸으로 흘러 들어오는 진동이 팔은 물론 머리까지 울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펑! 펑! 펑! 펑!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볼로 말대로 한동안 신들린 듯 춤이라도 춘 기분이었다. 그리고 공세가 처음에 비해서 조금 뜸해졌다 싶을 즈음, 뭔가 미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놈이 조용하다?’ 아주 조금 생겨난 여유에 간신히 고개를 올리자, 마침 나를 보고 있었는지 마볼로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섬뜩하리만치 흐뭇해 보이는, 정신병자 같은 미소와 함께 쉴 새 없이 주문을 웅얼거리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후속타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어차피 나도 자네도 이 정도로 끝나리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네. 그렇잖은가?” “…….” “킬킬킬킬! 그건 시간 끌기 용이었고, 진짜는 이거지…!” 조금 줄어들었을 뿐이지 빛의 구체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마볼로는 어느새 주문을 모두 외운 듯 나를 향해 오르도를 겨누는 것을 마친 상태였다. 그리고 일말의 틈도 주지 않고 오르도의 빛이 번쩍 내뿜어진 순간, 양 옆으로 서로 상반된 기운이 물씬 피어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마법진이였다. 내가 확인한 것은 딱 그 정도였다. 그저 느낀 것이라고는, 한쪽에는 전신을 얼릴듯한 냉기가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글거리는 열기가 맺혀있었다는 것. “이번 마법은 나로서도 꽤 힘들었네. 소환 그리고 합일이지. 그럼 이것을 받아내고, 바닥에 널브러져 목숨을 구걸하는 자네를 기대하겠네.” 딱! 마볼로의 유들유들한 목소리와 함께, 마법진이 좌우 방면으로 쇄도한다. 그 속도는 너무도 빨라, 눈 한번 깜빡 하는 사이에 내 항마력을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이건…. 위험하다.’ 그렇게 인지하자마자, 나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심장에 잠재되어있는 힘을 폭발시키며 바닥을 한번 강하게 굴렀다. 그리고 대지가 일렁이는 순간, 거대한 굉음과 함께 눈 앞에 불이 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꽝! 쿠오오오오오오오! “끝났군. 홀홀. 음, 그런데 너무 심했나?” 거대한 굉음과 함께 눈 앞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마볼로는 기꺼운 얼굴로 그곳을 바라보다가 이내 쯧쯧 혀를 찼다. 간만에 발견한 좋은 재목인데 죽어버리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그 괴물 같은 저항 능력을 뚫으려면 이 정도는 돼야지, 암.” 마볼로가 사용한 마법은 상극의 기운을 억지로 합일시켜, 그에 따라 나오는 폭발력을 이용하는 마법이었다. 더구나 이번에 소환한 기운은 중간에는 존재하지 않는 다른 세계의 기운이었다. 따로 놓고 봐도 매우 강력한 기운인데, 그것을 억지로 합일시켰으니 위력은 딱히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마볼로는 온 몸이 찌뿌듯한지 크게 기지개를 피며 말했다. “에잉, 가뜩이나 요즘 몸도 안 좋은데 너무 무리했군. 어서 결과를 확인하고 해제를….” 방금 전 김수현이 있던 장소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 오르고 있었다. 마볼로는 가볍게 투덜거리며 오르도를 한번 휘저었다. 아니, 휘저으려는 순간이었다. 화륵, 화르륵!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에 마볼로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계산대로라면 두 기운은 맞부딪친 순간 동시에 소멸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아직 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린다면 마볼로가 계산을 잘못했다는 소리였다. 오랜만에 발휘한 능력이기는 했지만 약간의 오차가 생겼다는 사실에 대마법사의 얼굴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역시 나이는 속이기 힘들어…. 응?” 그때였다. 화륵, 화르륵! 자욱한 연기를 뚫고 맑게 타오르는 검 하나가 비죽 빠져 나왔다. 그것들은 연기를 뚫고 속속히 모습을 드러내더니, 곧 마볼로를 향해 쏜살같이 쏘아져 들어왔다. 허공을 가득 메우는 수십 개의 열화검에 마볼로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도 경험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라 그 동안 쌓아온 노련함으로 곧장 오르도를 들어올리자, 그에 대응하는 수십의 마법진이 차곡차곡 앞으로 쌓이기 시작한다. 마볼로는 우선 안도했다. 그리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시선을 아래로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어….” 자신의 몸에 박힌 이글이글 타오르는 검들을 보자, 마볼로는 반사적으로 침음을 내뱉었다. 곧이어 그의 얼굴이 멍하니 전방을 향했다. 겹겹이 쌓여있던 마법진은 아주 깔끔하게 녹아내려 군데군데 구멍이 나있는 상태였다. 그 순간 하나의 생각이 마볼로의 머리를 스치듯 지나가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바닥이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설마….” 쿵! “흐아아아아아아아!” 내부로 침투한 불이 폭발하듯 온 몸을 만신창이로 헤집는다. 뒤늦게 통증이 찾아왔는지 마볼로는 고통에 찬 비명을 울부짖으며 바닥을 굴렀다. 어떻게든 마력을 끌어올려 진화해보려고 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불은 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마력이 들어가는 족족 태워 없어지고 있었다. “하, 씨발.” 그리고 그때. 마법진의 폭발로 연기가 자욱한 중앙에서, 한 명의 남성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바로 김수현이었다. 양 손에 하나씩 검을 든 채로, 낭패한 얼굴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모습도 정상은 아니었다. 옷의 군데군데가 찢어지고 그을린 게, 확실히 어느 정도의 타격은 입은 게 분명했다. “이 새끼 진짜 사람 열 받게 만드네. 깜짝 놀랐다 정말. 설마 지옥의 여섯 번째 불, 초열이랑 만년설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개 같은 새끼.” 아까의 담담한 목소리는 어디 갔는지, 지금은 분노로 가득 찬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만이 가득했다. 평소의 마볼로라면 드디어 화를 내게 만들었다고 기뻐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왜냐하면 대마법사는 정말 오랜만에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 그걸 어떻게…. 큭! 아, 아니 애초에 어떻게 거기서….” “어떻게 긴. 나도 밑천을 드러냈지.” “놈! 크윽, 이런 힘을 숨기고 있었구나…!” “알고 있었잖아. 결계 찢을 때 사용했다고 알려줬는데.” 내부를 진창으로 만드는 고통을 참으며 마볼로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까지 능력은 유지되고 있다. 이대로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기에는 지금껏 살아온 대마법사로서의 자부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한 마볼로는 겨우, 천천히 오르도를 겨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거 내려라.” 화륵, 화르륵! 김수현이 차가운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맑은 불꽃 수십 개가 다시금 그를 향해 엄습해 들어왔다. 마볼로는 이를 악물며 마력을 일으켰다. 우웅! 쾅! 불꽃들과 오르도의 마법진이 격돌했다. 불꽃에 대응하는 마법진이 순식간에 수십 개가 떠올랐다가, 순식간에 녹아 내린다. 이윽고 마볼로는 두 눈을 버젓이 뜬 채 허무하리만치 열화검의 접근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푹! 푹! 푹! 푹! “흐아아! 흐아아아!” 온 몸에 주렁주렁 타오르는 검을 박은 상태서, 마볼로는 용케도 다시 쓰러지지 않았다. 남은 한 손으로 오르도를 으스러져라 쥐며 마치 어린아이처럼 크게 울부짖었다. 그것을 묵묵히 보던 김수현이 한 순간 자세를 잡는가 싶더니, 가볍게 땅을 한번 박차 올랐다. 퉁! 마볼로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두 발짝 주춤주춤 물러섰다. 머리는 피하라고, 이성은 얼른 피하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몸이 말을 따라주지 않는다. 새로 꽂힌 열화검들이 다시금 새로운 불꽃을 내뿜으며, 전신을 불태우고 있었다. 마볼로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이를 악물며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오르도를 들어올릴 뿐이었다. 한 순간 거리를 줄인 김수현은, 자신에게 내밀어진 오르도의 빛이 번쩍이기 전 칼등으로 크게 후려쳤다. “컥!” 곧이어 퍽, 소리와 함께 오르도는 핑글핑글 돌며 허공으로 솟구쳤고, 마볼로의 몸도 허공을 붕 날았다. 쿠당탕탕, 쿵탕! “쿨럭!” 이윽고 바닥을 나뒹구는 마볼로는, 한 됫박은 됨직한 피를 울컥 쏟아내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향해 김수현은 비틀거리듯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다가갔다. 저벅저벅. 그리고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들은 순간, 비로소 마볼로의 눈에 공포라는 감정이 찾아 들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밤 꼴딱 샜어요. ㅜ.ㅠ 일단 먼저 올리고 자러 갈게요. 리리플은 다음 회에 합쳐서 할게요! 너무 힘들어요. 흑흑. 그, 그래도 머, 머리를 쓰다듬어주신다면 내일도 연참을…. 헤헤. 0266 / 0933 ---------------------------------------------- 미치광이 마법사와 망가져 버린 이들 공포라는 감정을 맛본 순간 마볼로는 흠칫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한쪽밖에 남지 않은,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입가를 닦는다. 바닥을 짚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키자 아직 마르지 않은 미적지근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약 300년전, 아직 일말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던 시절. 마볼로는 당대 최고의 마법사였다. 만인의 존경을 받으며 모든 마법사들의 정점에 서 있는 대마법사. 마법 도시 중 으뜸으로 불리는 마지아(Magia)의 수장이었고, 홀 플레인 의 구원에 앞장선 선구자였다. 물론 그 과정이 탄탄대로만은 아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아온 적 또한 무수히 많다. 하지만 마볼로는 그때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았고, 자신에게 대항하는 적을 짓밟으며 승리를 쟁취했다.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난 후, 소중한 동료였던 용사 로이드와 요정 여왕 마르가리타를 납치해 ‘변절자’ 라는 오명을 듣기 전까지. 그는 영웅이라 불리며 모든 이들의 우러름을 받았다. 그렇게 살아온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였고, 그에 걸맞은 경험을 한 대마법사였다. 추후에 모든 일의 전말을 알아낸 성녀 그라치아가 토벌대를 이끌고 왔지만 그것마저도 자신의 능력으로 격퇴했다. 중간중간 고난과 역경은 있었을지 몰라도 결과만 놓고 본다면 마볼로는 분명 승리로 점철된 인생을 걸어온 마법사였다. 그래서, 인정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쿨럭!” 다시 한번 마볼로의 입에서 엄청난 양의 피 분수가 일었다. 수많은 치료 마법진이 속속히 그의 주위로 몰려들고 있지만 오는 족족 녹아 없어지는 중이었다. 전신에 박혀있는 이글거리는 열화검들은 마법사의 내부를 찢어발길듯한 기세로 환히 타오르고 있었다. 내부로 밀려들어오는 염화(炎火)에 마볼로는 고통에 젖은 신음을 토하며 이리저리 몸을 뒤틀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다시 오르도를 쥐기 위해 한 발짝 내디뎠다. 그때였다. 공기를 찢는, 정확히 자신의 머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파공음에 그는 급히 몸을 비틀었다. 서걱. 툭. “어, 그걸 피해? 되게 끈질기네…. 그래도 명색이 대마법사라는 건가….” “끄르륵.” 김수현은 아쉬운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피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머리가 반으로 쪼개지는 것을 간신히 피했을 뿐 남아있던 오른팔마저 땅으로 떨어졌으니까. 마볼로는 비명을 질렀다. 아니, 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다시 목구멍에 피가 차오른 듯, 부글거리는 피 거품만이 흘러나왔다. 현재 그의 심경은 이리저리 헝클어진 상태였다. 이성은 자신의 패배를 그리고 죽음을 용납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지만, 김수현을 직시하자 느껴지는 본능적인 감정은 소름 그 자체였다. “쿨럭, 쿨럭! 자, 잠시….” 퍽! 쉴 새 없이 차오르는 피를 연신 게워내고 간신히 입을 열었을 무렵, 별안간 마볼로의 시야가 와짝 일그러졌다. 곧 그의 눈 앞에서 별이 튀고 일순간 기억이 뚝 끊겼다. 가까스로 기억의 필름을 이어 붙이자, 마볼로는 자신의 머리가 차가운 바닥에 처박혔음을 깨달았다. 반사적으로 끙, 악을 쓰며 일어나보려고 했지만, 양 팔이 없는 몸은 마치 벌레처럼 꿈틀대었다. 고개를 들려고 해도 뒤통수를 지그시 내리 밟는 무거운 중압감에 더더욱 아래로 처박고 말았다. 그리고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사늘한 살기를 인지하는 순간, 비로소 마볼로의 내면에 남아있던 이성은 완전히 사그라졌다. “사, 살려주게!” “응?” “자, 자네들 유적에 관심이 있다고 했지? 살려만 준다면…. 깍!” “듣기 싫어.” 김수현은 조금의 주저도 없이 곧장 목덜미로 검을 내려꽂았다. 그는 애당초 마볼로를 살려줄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이미 승패는 명확히 갈라진 상황이었다. 괜히 얘기를 듣는답시고 살려뒀다가는 뭔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패배자의 입장에서 지껄이는 감언이설에 혹하기보다는, 그냥 깔끔하게 죽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요 김수현의 철학이었다. 이윽고 그는, 목의 뒤쪽 부분에 꼽힌 무검을 향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화정의 힘을 불어넣었다. * 작정하고 화정을 불어넣어서 그런지 마볼로의 신체는 삽시간에 불덩이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후에야 나는 겨우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이놈이 미친척하고 있는 힘 없는 힘 모두 끌어내어 동료들에게 정신 조작이라도 걸면 어쩌나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 대한 대비로 내부의 마력을 진창으로 헤집어놓기는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끄아아아아아아악!” 울부짖는 마볼로의 모습은 꽤나 우스꽝스러웠다. 발을 동동 구르다가 온 몸을 이리저리 비트는 게 꼭 애벌레 같은 모습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대마법사였을지는 몰라도, 결국 최후는 여느 적들과 다를 바 없다. 나는 한동안 그의 시체가 연소되는 과정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어느 순간 마볼로의 비명소리가 뚝 끊어졌다. 그리고 그의 피부에 음각돼있던 문양이 시꺼멓게 썩어 들어가기 시작하고, 전신이 삽시간에 한 줌의 재로 사그라진다. 나는 살짝 몸을 비틀거리며 화정의 힘을 거둬들였다. 그 순간, 나는 바람이 한번 살랑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멈춰있던 도시에서 바람이 불었다. 그와 동시에 타고 남은 가루가 바람을 타고 흩날리더니 이내 춤추듯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렇게 나는,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Magia)의 수장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의 최후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 약한 한숨을 내쉰다. 마디마디가 쑤시고 결렸지만, 기분은 괜찮았다. 아니 오히려 무척 홀가분할 정도였다. 비록 거주민이기는 해도 마력 능력치 100에 이르는 마법사를 단신으로 이겼다. 1회차에서 이스탄텔 로우에서 한번 실패했을 정도로 난이도 있었던 원정을 성공시킨 것이다. “수현!” “형!” 문득 클랜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다행히도 모두 무사히 서있음을 볼 수 있었다. 고대 마법사의 버프가 생각 이상으로 강력했는지, 그네들도 꽤나 고초를 겪은 듯싶었다. 반수이상은 바닥에 널브러져있었지만, 나머지 반은 여전히 무기를 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마볼로는 저들을 실패작이라고 평가했다. 그 말인즉슨 정신 조작에 실패했다는 소리였다. 아마 마볼로가 쓰러진 순간 그들을 움직이게 하던 마력이 끊겼을 것이고, 그래서 실 끊긴 인형처럼 서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만히 놔둬도 곧 죽음을 맞이할 놈들이었다. “수현,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애들은…. 어?” 담담히 대답하고 막 몸을 돌려 걸어가려는 찰나였다. 그 순간, 갑작스레 클랜원들의 모습이 비틀려 보이더니, 땅이 훅 꺼지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얼른 정신을 차려보자 한쪽 무릎이 고꾸라져 바닥에 닿아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을 찾아 드는 띵한 현기증. ‘염병, 역시나 부작용인가.’ 나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내가 쓰러지는 것을 봤는지 클랜원들은 기겁한 얼굴로 달려오고 있었다. 어떻게든 다시 통제권을 찾아보려고 애써봤지만, 몸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이윽고 볼에 차가운 바닥이 닿을 무렵 전신이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지더니, 곧 머릿속으로 서서히 어둠이 찾아 들기 시작했다. * 어차피 한두 번 겪는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에,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비교적 담담히 작금의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전신은 물 먹은 솜처럼 노곤했다. 폐허의 연구소 이후 체력은 정말 끔찍이도 아껴왔고 회복시켰다. 그것을 이번 한번의 전투로 모조리 까먹은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 “으응…!” “?” 분명 정신은 차린 상태였다. 그리고 기절해있는 동안 잠들어있던 감각이 서서히 일깨워지자 얼굴이 따뜻하고, 옆 목이 꽤나 편안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득 묘한 데자뷔가 느껴졌다. 그렇게 느낀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하나의 생각에 번쩍 눈을 뜨고 말았다. 그리고. “…….” ‘침착하자 김수현. 분명 예전에도 이런 상황은 있었어. 그때를 떠올리는 거야.’ 눈 앞에는 푸른 로브가 보였다. 뒷목으로 부드러운 대기가 느껴지는 게 저번처럼 안으로 파고들어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목에서 말랑말랑한 감촉이 있는 걸로 보아 사람의 허벅지가 분명하다. 즉, 나는 무릎베개를 받고 있고 누군가의 복부로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오빠? 정신이 들어요? 오빠!” “응, 어. 응.” 무릎베개의 장본인은 다름아닌 김한별이었다. 그녀는 아주 약간 발개진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얼른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것은 악수가 되어 돌아왔다. 팔에 힘이 쭉 빠지더니, 다시 얼굴을 엄한데 처박고만 것이다. “꺅!”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묘한 시선들. 김한별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나를 받쳤다. 그녀의 부축을 받아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앉자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지금 내 주변으로는, 눈이 퉁퉁 부어있는 안솔과 마찬가지로 입술을 달싹달싹 떨고 있는 백한결이 남아있었다. “오빠, 몸은 괜찮으세요?” “형님, 아니 클랜 로드님! 몸은 좀….” “어어엉….” “응, 괜찮아. 솔아 울지마. 오빠 안 죽었어.” “어엉…. 그게 아니라아….” 차분한 목소리로 안솔을 달래자,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더니 ‘나 지금 굉장히 서럽다.’ 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엉…. 내가 치료해줬는데…. 왜 내가 무릎베개해주니까 인상 찡그리면서 막 피하고, 싫어하고오…. 한별이 언니가 해주니까 얼굴 파묻으면서 달라붙고오…. 어어엉.” 멍한 얼굴로 안솔을 보다가, 진짜냐는 의미를 담아 김한별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얼굴을 확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얼른 화제를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구나. 그런데 내가 쓰러지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어?” “30분정도 될 거예요….” “30분. 고연주, 안현, 이유정은?” “오, 오빠를 치료한걸 확인하고 주변을 탐사하러 떠났어요. 그 마법사가 쓰러진 이후로 갑자기 도시가 변해서…. 잠깐 주변만 돌아보고 온다고 하셨으니 곧 오실 거예요.” ‘자꾸 말 흐리지 말라고. 더 이상해지잖아.’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는 처음 들어왔을 때와 비교하면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허름한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말끔하고 웅장한 위용을 드러냈던 마지아였다. 하지만 멈춰져 있던 시계가 한꺼번에 돌아간 듯 지금은 온통 너저분한 모습만이 남아있었다. 군데군데가 검게 썩어있고 금이 간 건물들은 황폐한 느낌마저 자아내고 있었다. “오빠. 많이 당황하셨어요?” “응? 아니, 별로.” 클랜원들이야 많이 놀랐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도시의 진면목을 알고 있었다. 진로 결계를 깨뜨렸을 때부터 제 3의 눈을 활성화했기 때문에 딱히 당황하지는 않았다. 체력은 조금씩이지만 회복되고 있었다. 내 기억에 따르면 앞으로 이곳에서 더는 전투를 치를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대비하기 위해서 고연주와 아이들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얌전히 쉬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는 동안, 클랜원들과 사용자들의 전투 과정을 듣기로 했다. 전투 중이라 정신이 없었을 터인데 김한별은 그때의 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전달해주었다. 예상대로 고대 마법의 버프를 받은 사용자들은 처음처럼 쉽지만은 않은 상대였다고 한다. 특히 물리 방어와 마법 방어가 대폭 강화된 탓에 꽤나 애를 먹기까지 했다고. “처음에는 버프의 정체를 몰라 거의 일방적으로 공격만 당했거든요. 어쩌다가 공격을 성공시켜도,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지 끈덕지게 들어오고…. 아, 그래도 그림자 여왕님의 활약이 대단했어요. 그림자가 발동되지 않음에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시면서 전장을 조율하시더라고요.” “우웅….”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은 점점 나아졌어요. 중간에 위험한적도 몇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백한결이 적절하게 되비침을 사용해줘서….” “우우웅….” 김한별을 말을 하던 도중, 힐끔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안솔이 내 품에 안긴 채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도 울어 젖히는 바람에 결국에는 달래주고 만 것이다. 나는 그녀의 등을 연신 토닥토닥 해주며, 계속 말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까닥였다. 김한별은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 내 정신 좀 봐. 오빠. 보여드릴 것이 있어요.” “뭔데?” “잠시만요. 백한결. 그것 좀 잠시 꺼내줄래?” “네, 네!” 조용히 우리들의 얘기를 듣고 있던 백한결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녀석은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더니, 조심스러운 손길로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아, 찾았어요.” 바로 찾았는지 백한결은 환한 얼굴과 함께 내게 살포시 감싸 쥔 주먹을 내밀었다. 그리고 주먹의 틈새로는, 하얗게 빛나는 빛 줄기가 아른아른 새어 나오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네. 생각 외로 많은 독자 분들께서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셨군요. 헤헤. 어쩔 수 없네요. 오늘도 연참을 하는 수 밖에. 뭐, 솔직히 말씀 드리면 딱히 여러분들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셔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마지아에서는 즐거운 시간만이 남아있으니, 제가 얼른 그 부분을 쓰고 싶어서 연참하는 것뿐입니다. 그렇고말고요. 흠흠! PS. 수위는 그냥 있는 그대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PS2. 쿠폰 주신분들 모두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깜짝 놀랐네요. _(__)_ 『 리리플 』 1. 미월야 + 단연월 : 오오. 한 분은 원래 1등 터줏대감이시고, 한 분은 새로운 분이군요. 1등 축하 드립니다. 새벽 5시에 올렸는데 바로 코멘트를 다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 이번 회도 재밌게 읽어주세요! 2. 1인자 : 쿠폰 감사합니다. 지금 리리플만 쓰고 바로 다음 회 집필하러 갈게요. 헤헤. 3. 여옥아놀자 :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하하, 지팡이는 오르도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과연 지팡이의 주인은 누구한테 갈까요~? :D 4. 과인디 : 고생하십니다. ㅜ.ㅠ 저는 방학 중이라서 그래도 조금 여유는 나네요. 하지만 이북 교정이 OTL. 공부 열심히 하셔서 시험에서 좋은 성적 거두세요~. 5. 꼬꼬임 : 헐, 비듬이라니요! 저는 12살때부터 하루에 머리 최소 2번, 평균 3번, 최대 5번은 감은 사람이에요. 비듬은 없습니다. 그럼요. 정말입니다. Real. 6. hohokoya1 : 하루가 행복해지신다니, 과분한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앞으로 더 더 더 더 열심히 집필하겠습니다! 7. 백인티모시 + [DeepBLue] : 두 분 쿠폰 감사합니다. 많은 조언을 해주시는 분들이라 더더욱 감사합니다. 후후. 말씀만 하시지요. 비비앙, 어떻게 괴롭혀드릴까요.(?!) 8. 이터시온 : 오르도가 나온 순간 뙇! 끊어주는 센스! 절단절단절단~. 절단절단절단~. 죄송합니다. _(__)_ 오늘 점심 전에 한편 더 올릴 테니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주세요. 9. f천륜 : 암 쏘 쏘리 벗 알러뷰!(헐.) 수정 완료했습니다. 감사합니다~. 10. 판타지니아2 : 우리 모두 다같이, 일일 연재의 매력에 푹 빠져보아요! 11. 플룻 : 저 유정이 좋아합니다. 하하하. 유정이도 곧 성장할 예정입니다. 고연주는 1회 차 적대 세력은 맞지만, 유현아 부하는 아니었습니다.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67 / 0933 ---------------------------------------------- 미치광이 마법사와 망가져 버린 이들 꽉 쥐면 부서질세라, 백한결은 빛나는 구체를 조심스럽게 건네주었다. 이윽고 구체를 받아들인 후, 손바닥 위로 올려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말 그대로 그냥 빛이 나는 동그란 구체에 불과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대강이나마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마볼로가 나를 상대로 꺼내 들었던 지팡이. 나중에는 발로 차버린 오르도. 그것이 손에서 지팡이처럼 길쭉하게 늘어난 것을 봤기 때문에 분명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 터였다. ‘이게 1회차에 등장했었던가? 가물가물하네.’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는 곧장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질서의 오르도(Ordo Of Order)』 (일반 설명 : 질서의 오르도. 고대 홀 플레인 의 대마법사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가 사용하던 마법 도시 마지아의 열쇠이며 수장의 증거입니다. 과거 고대의 마법적 지식이 총체적으로 집약돼있는 하나의 정수나 다름없는 구체입니다. 오르도의 주인으로 인정받으면 마지아에 대한 모든 권한을 위임 받을 수 있습니다.) (상세 설명 : 1. 마법사, 연금술사, 사제 클래스 전용 장비입니다. 2. 주인 의식을 치르는 과정이 있습니다. 의식에 성공할 경우, 질서의 오르도는 해당 사용자에게 귀속됩니다.(단, 사용자 사망 시 귀속은 자동 해제됩니다.) 3. 사용자의 모든 마법적 속성에 대해서 150%의 출력을 낼 수 있습니다.(신성 계열 주문도 포함합니다.) 4. 사용자의 마력 회복률이 30% 상승합니다. 5. 사용자의 마력을 100%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단 이것은 주인의 자격을 얻은 이에만 해당되는 능력이며, 7일을 기점으로 다시 재충전됩니다. 6. 하루에 3번 디스펠(Dispel) 주문을 사용할 수 있으며, 사용자의 마력과 행운 능력치에 기반합니다. 하루를 기점으로 다시 재충전됩니다. 7. 기본적인 마법 저항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8. 잠재되어있는 무(無) 영창 능력을 익힐 수 있습니다.) “…….” ‘헐.’ 허공에 떠오른 메시지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세 명의 집중되는 시선에 퍼뜩 정신 줄을 붙잡았다.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가슴은 마치 방망이질이라도 하는 듯 두근두근 요동치고 있었다. 절로 침이 꿀꺽 넘어가고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가를 억지로 당기며, 나는 오르도의 구체를 백한결에게 되돌려주었다. “한별아. 이거 어디서 주웠어?” “그게, 어디서 왔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아까 오빠를 데려올 때 마법사가 쓰러진 장소 위로 저절로 날아오더니, 그 위를 동동 떠다니더라고요. 그래서 얼른….” “잘 챙겼네. 일단 넣어두고 나중에 도시로 돌아가면 한번 분석해보자꾸나.” “네.” 정말 객관적으로 봐도 이번 원정은, 오르도 하나를 건짐으로써 차고 넘치는 보상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난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분명 마볼로의 본거지 안에는 내가 기억하는 물품들이 잠들어있을 터. 그것까지 모두 가져갈 생각을 하자 자꾸만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지려고 발버둥쳤다. 나는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고연주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오르도를 확인하고 10분 정도 흘렀을까. 저기 멀리서, 바닥으로 쓰러진 시체들을 건너 저벅저벅 걸어오는 인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네들이 누군지는 딱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드디어 고연주, 안현, 이유정이 주변 탐사를 끝내고 다시 돌아온 것이다. 고연주는 비교적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안현과 이유정의 볼은 빵빵 부풀려져 있었다. 도시는 아까와 같은 웅장함이 많이 퇴색된 상태였다. 이곳으로 오면서 지나쳤던, 수정으로 만들어진 창문이 지금쯤 너덜너덜한 누더기로 변한 것을 보고 적잖이 실망했으리라. “수현. 일어나셨군요.” “형! 깜짝 놀랐어요 정말.” “오빠~. 몸 상태는 괜찮아? 아프지 않아?” 곧이어 우리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다가온 후. 세 명은 내가 일어나있는 것을 보고 다행이라는 표정과 함께 안부를 건넸다. 이러나저러나 몸 상태를 먼저 걱정해주는 모습들을 보니 가슴 한 켠으로 고마운 마음이 일었다. 그에 대한 답례로 한두 번 고개를 주억이고,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금 힘이 없기는 하지만 거동에 불편이 있을 정도는 아닙니다. 그나저나 탐사를 하셨다고 들었는데 주변은 어떻던가요? 혹시 여울가녘이나 구조대의 흔적은 발견했습니까?” 인사를 받고 바로 탐사에 대해 물어보는 내 태도에 질렸는지, 고연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요. 흔적은커녕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냥 황량한 유령 도시 같은 느낌이랄까요? 그냥 주변 건물 몇 개만 들어가봤지만 반응에 걸리는 것은 없더라고요.” “음. 다리는 아직 건너가보지 않으셨고요?” “네. 그곳까지 들어가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아서 말이죠. 일단은 수현이 깨어나기를 기다렸어요.” “Ok. 알겠습니다.” 고연주와 대화를 나누고 바로 몸을 일으키자, 아니나다를까 곧장 머릿속을 덮쳐오는 띵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러나 균형을 잡는데 신경 써서 그런지 다시 넘어지는 추태를 보이지는 않았다. 고연주는 내 상태를 체크했는지 재차 휴식을 권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여기서 휴식 같지도 않은 휴식을 취하기보다는 서둘러 일을 마무리 짓고 얼른 도시로 돌아가서 쉬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나는 크게 기지개를 펴고 다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 번째 달성 목표라고 여겼던 다리였는데, 건너기도 전에 보스를 정리할 수 있었다. 내가 슬슬 선두에 서자 이제는 자동적으로 진형을 짜는 클랜원들이 보인다. 곧이어 방진을 구성하는걸 보며 “그럼 보상을 가지러 가봅시다.” 라고 말하려다가, 나는 잠시 생각한 후 말을 바꿨다. “어쩌면 늦었을지도 모르겠군요.” “네?” “이곳에 먼저 들어온 사용자들 말입니다…. 일단은 출발하겠습니다. 주변에 별다른 위험은 감지되지 않으니, 빠른 속도로 가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것 같습니다.” 나는 말을 마치고, 말 그대로 빠른 걸음으로 구조 및 탐사를 위한 행군을 시작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다리를 건넌 우리들은 넓게 트인 대로를 따라 앞으로 쭉 직진해 들어갔다. 확실히 다리를 건너기 전과 후는 보이는 광경이 오묘하게 다른 면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목표하는 장소는 다른 쭉정이 건물이 아니었다. 오로지, 저기 앞에 보이는 우뚝이 솟은 성 하나를 목표하고 있었다. ‘마력 영약, 무기, 클래스 등등…. 마볼로의 연구 성과들도 얻을 수 있고 말이지. 하연과 비비앙이 좋아할 거야. 이야 신난다.’ 1회차에서 마볼로를 토벌했을 때. 제법 많은 클랜들이 참여하느라 각자에게 돌아간 보상은 적었다는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것을 독식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 이게 바로 내가 어떻게든 클랜원들을 끌고 오려고 했던 이유였다. 마지아는 하나의 보물창고나 다름없는 곳이다. 300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버티며 잠들어온 수많은 금은보화들이 잠들어있기 때문이다. 성으로 향하는 대로의 주변으로는 여러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밋밋한 건물이 아닌 마법사들의 취향이 듬뿍 들어간 건물들이 한가득이었다. 그래도, 다리 건너에 있는 건물들은 폐허로 불릴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멀리서 보이던 성이 점점 크게 다가올수록 멸망스러울 정도였던 수준이 점차 나아지고 있음을 느꼈다. 물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는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애들의 표정이 조금씩 풀어지고 설렘이 감돌고 있다는 게 그 반증이었다. 아무튼 사용자들을 구한다는 명목아래 다른 건물들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걸어간 결과, 우리들은 생각보다 빠른 시간 안에 목적지의 앞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후유. 드디어 성에 도착했네요. 그런데 이곳에 과연 사용자들이 있을까요?” “놈이 분명 그랬습니다. 일부는 가둬놨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본거지인 성에 가둬놨을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고연주의 물음에 적당히 대꾸해주며 나는 눈 앞의 성을 올려다보았다. 말 그대로 고성(古城)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성이었다. 외관은 예전의 영광을 간직하고 있는지, 약간이나마 남아있는 당당한 위용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성벽을 책임지고 있는 벽돌은 거무죽죽한 빛을 띠고 있었고, 세게 차버리면 부서질 듯 헐거운 이음새가 곳곳에 보였다. 심지어 어떤 곳은 구멍이 뽕뽕 뚫려있는 곳도 있었다. 전체적인 외형은 잘 잡혀있었지만 죽은 성이라는 분위기가 물씬 풍겨져 나왔다. “에…. 이게 성이라고? 왠지 개털 냄새가 폴폴 풍기는데?” “야, 이유정. 우리는 사용자들을 구하기 위해서 온 거잖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미친놈. 뭐래. 누가 안구한대? 그럼 넌 딱 그 사람들만 구하고 돌아갈 거야?” “농담이야, 농담. 그러니까 애초에 기대하지 말자 이런 뜻이었어.” 과연 동료들이 안에 붙잡혀있었다고 해도 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까? 처음 통과의례 때의 애들을 떠올리면 슬픈 현상이기도 했지만, 딱히 둘의 대화를 저지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야말로 홀 플레인 에 적응해나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애들이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황량한 기운이 감도는 성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애당초 성문은 활짝 열려있어 들어가는데 아무런 부담도 없었다. * 바깥의 풍경과는 달리 성의 내부는 비교적 잘 정돈되어있는 편이었다. 어디까지나 비교적이었지만 말이다. 입구로 들어서자 양 옆으로 지팡이를 멋들어지게 들고 있는 마법사 동상이 눈에 밟혔다. 동상의 대부분이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었지만, 눈과 지팡이 끝에는 뭔가 반짝이는 게 달려있었다. 보석이었다. ‘일을 마치고 나올 때 싹싹 빼가야겠군.’ 어차피 성의 구석구석을 뒤지며 탈탈 털어갈 생각이었기에, 보상에 대해서는 최대한 느긋한 생각을 가지기로 했다. 그렇게 입구로 들어선 후, 우리들은 누군지도 모를 초상화가 걸린 벽면을 두리번거리며 기다란 통로를 걸었다. 이윽고 우리들은 굉장히 넓은 공간을 갖고 있는 홀로 도착했다. 천장에 달려있는 아름다운 장식물들과, 부드러운 U자를 그리며 올라가는 2층 계단. 그리고 때가 타기는 했지만 반듯하게 달려있는 네모난 창문들까지.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압권이었던 것은 눈 앞 정면으로 보이는 매우 거대한 벽난로였다. 높이는 2미터, 너비는 1미터정도 되어 보이는 벽난로의 내부는 매우 어두컴컴했다. ‘이제 지하로 가야 한다.’ 애들의 시선은 대부분 2층으로 꽂혀있었다. 내부 구조는 2층에서 3층으로 이어지고, 3층에서 다시 4층으로 이어졌다. 기억과는 다른 점이 있을 수도 있기에 계단을 올라가볼까 생각하다가, 문득 고연주를 돌아보았다. “고연주. 혹시 감지를 돌려봤습니까?” “들어오자마자 돌렸죠. 그런데 최소 1층이랑 2층은 아무런 반응도 느껴지지 않고 있어요. 뭐, 그 위로는 올라가봐야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요.” “그럼 잡혀온 사용자들이 어디쯤에 있을까요?” “흐~응. 뭐, 그림자 여왕으로서의 제 의견을 물어보시는 거라면….” 고연주는 잠시 말을 멈추고 위쪽으로 발을 쭉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이내 세게 내리치며 말을 이었다. 쾅! “지금 보면 마력이 아래쪽으로 쭉 투과되고 있거든요. 예전에 뮬에서 운영하던 여관도 제가 비슷하게 지하를 만들어놨어요. 저는 이 성 어딘가에 지하로 통하는 문이 있고, 그곳에 사용자들이 있을 거라는데 제 몸을 걸겠어요.” “그렇군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럼 지하로 통하는 문을 찾는 게 관건이겠네요.” “호호. 제가 맞췄죠? 자, 그럼….” “자, 그럼은 뭐가 자, 그럼입니까.” 톡 쏘아붙이듯 대꾸하자 고연주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홀의 중앙을 가로질렀다. 마력을 밀도를 가일층 높이고 부채꼴 모양으로 감지를 돌린다. 후방부터 차분히 돌리기 시작하자 등 뒤로 천천히 뒤따라오는 클랜원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실은 지하로 통하는 문이 어디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으로 들어오고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쏙쏙 찾아내면 분명 의심스러운 시선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고연주에게 살짝 운을 띄운 것이다. 조금 답답하기는 했지만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고 했으니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마력 감지가 천천히 돌아 벽난로를 스쳤을 무렵 역시나 뭔가 이질적인 것이 걸림을 느낄 수 있었다. “벽난로 안이 수상한데요.” “확실히 크기가 조금 별나기는 하네요.” 잠시 동안 벽난로를 쳐다보다가, 나는 곧장 안으로 들어섰다. 워낙 크기가 컸기 때문에 아무런 부담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단지 오래된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러 들었지만, 그럭저럭 참을만한 수준이었다. “───. ───. ───. 라이트(Light).” 눈치 빠른 김한별은 따로 지시를 내리지 않았음에도 알아서 라이트 주문을 외웠다. 곧 그녀가 발현한 주먹만한 빛의 구체가 두둥실 안으로 들어간다. “…….” 예상대로 벽난로의 내부는 필요 이상으로 깊었다. 라이트는 약 5미터정도 둥실둥실 들어가더니, 어느 지점에서 멈추며 사방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그리고…. “어? 저거 뭐야. 안에 뭐가 있는데?” “문 같은데? 와…. 벽난로 안에 문이 있네.” 우리들은 벽난로 내부에서 굳게 잠겨있는 하나의 육중한 철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벽난로 안의 철문이라. 냄새가 폴폴 나는군요.” “서두릅시다. 일단은 구조가 우선입니다.” 클랜원들을 재촉하며 나는 얼른 문 앞으로 섰다. 그리고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자, 문이 잠겨있지 않음을 알아챘다. 안현은 내 옆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 이게 지하로 통하는 문일까요?”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오, 그럼 이곳에….” “일단 열고 들어가보자.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다들 진형 잡고 무기 꺼내고. 그리고 한별이는 라이트 마법 유지해줄 수 있지?” 나는 잠시 동안 클랜원들이 나름의 준비를 하는 것을 기다렸다. 이윽고 그네들이 모든 준비를 끝마친 것을 확인하고, 동그란 문고리를 향해 곧장 손을 뻗었다. 끼이익! 철로 만들어진 이음새가 끄르는 불쾌한 소음이 들린다. 하지만 꾹 닫혀있던 철문은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완전히 문의 손잡이를 끌어당긴 순간, 눈 앞으로 아래쪽으로 길게 뻗어있는 암청색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빙고.’ 라이트 마법이 먼저 들어가며 계단을 비춰주었다. 살짝 밝아진 내부를 보자 생각보다 계단의 길이가 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뒤에서 탄성을 흘리는 클랜원들에게 미끄러지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해준 후, 나는 천천히 계단을 밟아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 묘한 향내가 계단을 가득 메우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쾌한 공기는 대기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고 약 20분 정도 흘렀을까. 하나씩 조심조심 내려왔다고는 해도, 지하 계단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계단이 곧 끝날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왜냐하면 점점 콧속으로 흘러 드는 향내가 점차 강렬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것은 더 이상 향내가 아니었다. 피비린내, 밤꽃 냄새, 체취, 액 냄새 등 여러 냄새가 복합적으로 뒤섞인 악취였다. 점점 강해지는 냄새에, 결국 나는 후각을 돋우던 마력을 멈추고 말았다. 그때였다. 한창 아래로 내려가던 빛의 구체는 뭔가 막힌 듯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가장 선두에서 앞서가다가, 그 광경을 확인하고 내려가던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리고 라이트 주변을 세심하게 살피자, 그 앞으로 흑색으로 칠해진 커다란 나무문을 볼 수 있었다. “…….” 사위는 고요했다. 전투는 끝났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긴장감이 주변을 감돌기 시작한다. 나는 일월신검을 언제든지 출수할 수 있도록 마음을 먹고, 나무문과의 거리를 줄였다. 이윽고 문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딱 내 눈높이 정도에 하나의 글귀가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고대어로 적혀있었지만 그 분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다. 가만히 그 글자를 해석하고 있자 뒤에서 어깨를 톡 건드리는 기척을 느꼈다. 뒤를 돌아보니, 고연주가 손가락을 조용히 입에 대고는 안쪽을 서너 번 찔러 보였다. 내부에서 반응이 느껴진다는 일종의 신호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일월신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막 문을 열고 들어가기 직전에, 나는 다시 한번 문에 적힌 글귀를 읽어보았다. ‘그날을 기억하자. 감정을 버리고, 한 마리 짐승이 되자.’ ============================ 작품 후기 ============================ 둥글게 둥글게~. 둥글게 둥글게~.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춥시다~. 손뼉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며~. 랄라랄라 즐겁게 글쓰자~! 절단절단 절단 절단절단절 단절단절 단절 단절단절단~! PS. 리리플은 다음 회에 합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오전 9시에 나가야 해서 빨리 자러 가야 해요. ㅜ.ㅠ PS2. 독자 분들. 절단마공은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손에 든 돌멩이는 잠시 내려놓아주세요. 0268 / 0933 ---------------------------------------------- 미치광이 마법사와 망가져 버린 이들 ‘성향대로 노는군.’ 제 3의 눈으로 훑었던 마볼로의 정보를 떠올려보면 나름 납득이 가는 글귀였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단번에 나무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한 발짝 앞으로 내디딘 순간, 전신으로 묘한 열풍이 밀어닥쳤다. 그 바람은 순식간에 몸을 감싸 오르더니 후각을 강렬히 자극해 들어왔다. “에…? 내, 냄새…. 이상한 냄새가아….” “우욱.” 여성이라서 더욱 예민하게 받아들이는지 안솔과 이유정은 코를 감싸 쥐면서 내 뒤로 물러섰다. 다른 클랜원들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모두 비위가 상했으리라. 내가 그렇게 느낄 정도로 냄새는 뜨겁고, 지독했다. “한별아. 라이트 취소해도 되겠다.” 계단을 내려오는데 걸렸던 시간을 가늠해보면 지하는 제법 깊은 곳에 있다. 창문도 보이지 않아 빛이 한줌도 새어 들어오지 않아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천장에는 라이트 스톤이 촘촘히 박혀있었고, 벽면에는 횃불이 띄엄띄엄 걸려있어 시야를 환히 밝혀주고 있었다. 이윽고 빛의 구체가 스르르 사그라졌다. 우리는 주홍빛을 반사하는 오돌토돌한 벽돌을 따라 걸었다. 처음에는 앞으로 쭉 뻗어있는 통로를 따라 걸었지만 곧 양 옆으로 통로가 나뉘고, 전방은 큰 벽으로 가로막힌 곳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오른쪽, 아니면 왼쪽.’ 아쉽게도 성의 지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애초에 기록에 구조가 자세히 언급되어 있지는 않았으니까.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클랜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클랜원들 모두가 마력 감지를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 “서로간의 간격도 조금씩 더 벌리도록 하세요. 전체적인 원형 감지를 해도 되고, 밀도를 높여 각자가 맡고 있든 방향 탐지를 해도 좋습니다. 조금이라도 걸리는 게 있다면 바로 저에게 보고해주세요.” 단순히 사용자를 찾으라는 게 아니라 지하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니 만일을 대비하라는 소리였다. 내 지시에 클랜원들은 곧바로 마력 감지를 펼쳤다. 곧이어 바닥으로 퍼지는 각양각색의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왼쪽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고연주. 아까 들어오기 전에 반응이 느껴진다고 하셨죠?” “네. 지금도 느껴지기는 해요. 그림자들이 알려주고 있으니까요.” 그녀의 선선한 대답에 나는 멀뚱한 시선을 보내주었다. 하지만 이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연주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것은 아마 내가 가는 방향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반증일 것이다. 아니면 어느 방향으로 가도 상관없다는 소리던가. 그렇게 약 5분 정도를 걸쳐 통로를 통과했을 즈음이었다. 성의 지하는 고요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통로를 걷는 우리들의 발자국 소리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와중에 점점 통로의 너비가 좁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려는 찰나, 미약한 낯선 소리가 귓가로 들렸다. 찰그랑…. 찰그랑…. “수현.” “네. 들었습니다.” “쭉 앞으로 가다 보면 통로가 오른쪽으로 꺾이는 부분이 나올 거예요. 그때부터는 통로가 굉장히 좁아져요. 사람 두 명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 소리의 진원지는 그곳이에요.” “진형을 2열로 바꾸도록 하죠. 그리고 왼쪽에 있는 클랜원이 두 발짝 앞으로 나오세요. 지금부터는 그 상태로 들어가겠습니다.” 고연주는 자연스럽게 맨 뒤로 이동했다. 이윽고 사선으로 자리를 잡은 클랜원들을 확인하고, 전보다 속도를 높여 걷기 시작했다. 그녀 말대로 통로는 이제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로 좁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눈 앞에 꽉 막혀있는 벽면이 보일 무렵, 나는 오른쪽 방향으로 새롭게 꺾여 있는 또 하나의 통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을 돌자마자 눈 앞에 보이는 광경에 우리들은 다시금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대충은 알겠다.’ 이어진 통로는 고연주의 말대로였다. 그곳의 너비는 두 명이 간신히 지나갈 만큼 좁았고, 오른쪽 벽면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매우 커다란 구멍이 하나씩 뚫려진 상태였다. 그리고 구멍의 위아래에는 여성의 팔뚝만한 쇠창살이 올올이 박혀있었다. 지금 눈 앞에 보이는 벽을 거대한 네모라고 생각한다면 아마 반대편에도 이와 비슷한 구멍이 나있을 것이다. “지하 미로가 아니라…. 지하 감옥이었군요.” 김한별의 말대로 이곳은 하나의 지하 감옥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멍하니 서있는 클랜원들을 이끌고 통로로 들어가자 처음 느꼈던 역한 냄새들이 더욱 강렬해졌다. 앞선 통로를 통과하면서 그나마 익숙해졌다고 여겼는데 구멍으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악취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철그렁…. 철그렁…. 아까 전에 들었던 쇠사슬 소리가 다시 울려 퍼진다. 이윽고 구멍 앞으로 이동한 나는, 조심스럽게 쇠창살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맨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구멍의 안은 5평 정도로 보이는 굴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세, 세상에….” “너무해…. 흑….” 공동의 천장에는 한 명의 여성 사용자가 매달려있었다. 양 팔은 사슬로 칭칭 감겨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정작 클랜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것은, 척 봐도 그녀의 몸 상태가 굉장히 심각했기 때문이다. 온 몸이 발가벗겨져 알몸으로 매달려있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어디 한구석 성한 데가 없었다. 온 몸에 멍이 들어있는 것은 물론이고 여성으로써 예민한 곳에는 날카로운 채찍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피비린내와 함께 공동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남성의 밤꽃 내음과 여성의 입술, 가슴, 국부에 집중적으로 묻어있는, 딱딱하게 굳은 희멀건 한 고체까지. 그 자국들만 보아도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안솔. 치료 주문 준비해라.” “흑…. 네!” 나는 곧바로 일월신검을 빼어 들고 철창의 끝부분을 자르기 시작했다. 고작 강철 따위가 내 권능을 막을 리는 만무해, 곧바로 사람이 들어갈만한 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 “형, 그, 그런데. 저 사슬을 어떻게 내릴….” 그리고 공동 안으로 들어간 다음, 바로 허공의 사슬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핑! 서걱! 철그렁! 안현은 장치나 열쇠를 찾아보려는 듯 주변을 돌아보다가, 사슬이 툭 끊겨 내려오는 여성을 봤는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정확히 내 품에 떨어지는 여성 사용자를 받은 후, 나는 곧장 그녀를 바닥에 눕혔다. 숨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배가 약간이나마 들어갔나 나왔다 하는 것을 보니 아직은 살아있는 상태였다. “───. ───. ───. 치료(Cure)!” 바닥에 누워 신음하는 여성을 향해 따뜻한 빛 무리가 스며들었다. 하지만 치료 한번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얼른 백한결이 건네주는 치료 물약을 몸 전신에 골고루 뿌리자, 하얀 연기를 내며 생채기들이 아물어가기 시작했다. “으응….” 여성이 간신히 눈을 뜬 것은, 이어지는 3번의 치료 주문과 물약을 2병 소비했을 때였다. 그녀는 가물가물한 눈으로 우리들을 바라보더니 이내 눈을 크게 부릅뜨며 재빨리 몸을 엎드렸다. “정신이 들어요?” “꺄아아아아아아악!” “저기요, 잠시만요.” “사,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 비명으로 시작한 여성의 첫마디는, 목숨을 구걸하는 말과 함께 대성통곡으로 끝맺었다. 애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나는 단번에 그녀의 턱을 잡고 세우며 눈을 마주쳤다. 여성의 눈동자는 극도의 공포심으로 물들어있었다. 그녀는 겨우 세웠던 턱을 다시 아래로 처박으며 울부짖었다. “잠시만 진정하고, 여기 보세요.” “살려, 제발 살려주세요. 한번만 용서해주세요.” “마법사는 죽었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당신들을 구출하기 위해 파견된 2차 구조대입니다. 그러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용서…. 살려…?” 마력을 가득 담아 말했으니 귓가에는 똑똑히 들렸을 것이다. 양손을 싹싹 빌며 고개를 조아리던 여성은, 내 말에 아주 약간이지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떨리는 시선으로 우리 전체를 훑는가 싶더니, 이내 눈을 까뒤집으면서 기절해버렸다. “…수현. 이 여자는….” “아마 잡혀온 사용자중 한 명이겠죠.” “그건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제 어떻게….” “숨은 쉬고 있습니다. 정신이 극한으로 몰려있다가 긴장이 풀려서 기절했을 겁니다.” 나는 담담히 내뱉은 후 안솔, 김한별, 백한결에게 손짓했다. 셋은 쓰러진 여성을 보며 쭈뼛쭈뼛 다가오더니 목 울대를 꿀꺽 움직이며 나를 응시했다. “생각보다 사용자들의 상태가 심각한 것 같습니다. 그럼만큼 지금부터 각자 역할을 분담하겠습니다…. 먼저 너네 세 명. 너희들은 치료조로 편성할게. 안솔이 치료를 시작하면 김한별이 보조해줘. 그리고 한결이는 옆에서 물약 같은 거 바로 바로 꺼내주고.” “““네.””” “나는 지금부터 감옥을 돌면서 쇠창살부터 끊어낼 거야. 그리고 유정이는 나를 따라와. 혹시 사용자를 발견하면 애들이 바로 치료할 수 있도록 밖으로 꺼내놓고.” “응. 오빠.” “고연주, 안현. 둘이 한 팀을 이룹니다. 고연주는 이곳 말고 다른 통로에 감옥이 있는지 확인해주세요. 그리고 상태가 정말로 심각하다 싶은 사람이 있으면…. 안현.” “네 형.”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들고 있던 일월신검을 안현에게 내밀었다. “일월신검을 빌려줄게. 창보다는 이게 더 나을 거야. 너 정도면 충분히 쇠창살을 자를 수 있을 게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물약 몇 개 챙겨가고. 고연주가 얘기해주면 바로 안솔한테 데려와. 알겠지?”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움직여.” 이윽고 일월신검을 건네 받은 안현은, 고연주와 시선을 한번 맞추고 달려나갔다. 이윽고 쓰러진 여성을 바깥으로 끌어내는 유정을 보며, 나 또한 새로이 무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창백한 얼굴로 서있는 세 명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들도 바로 시작하자.” * 사제가 한 명밖에 없기 때문에 구조 작업은 더딜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각자의 역할을 분담한 것이다. 구조 작업은 간단했다. 내가 쇠창살을 끊으면 이유정이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 사용자를 데리고 나온다. 그러면 대기하고 있던 치료 조가 곧바로 치료를 시작한다. 간혹 내가 들어갈 때도 있었는데, 그럴 경우는 첫 번째 여성처럼 높이 매달려있거나 온 몸이 구속되어있는 경우였다. 간혹 가다 누군가 갇혀있었던 흔적은 있지만 텅 비어있는 감옥도 있었다. 어쨌든 일단은 사용자들의 치료가 우선이기에, 나는 쇠창살을 끊고 좀 더 치료가 용이하게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내 판단은 정확했다. 통로에 나열되어있는 감옥 하나당 적게는 한 명 많게는 두 명의 사용자들이 갇혀있었다. 문제는 가면 갈수록 감옥 안에 있는 사용자들의 상태가 심각해졌다는데 있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모두 심각한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첫 번째로 발견한 여성 사용자는 그나마 양호한 상태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아니, 두 번째, 세 번째로 구조한 온 몸이 시퍼렇게 물든 남성과 배가 볼록 튀어나온 여성 사용자까지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사지는 멀쩡하게 달려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뒤로 구조하는 사용자들의 상태는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만큼 비참하고, 처참했다. “헤….” “오, 오빠. 얘 상태가 조금 이상해!” “헤헤….” 구조 작업을 시작한지 약 30분정도 흘렀을까. 비로소 첫 구조를 위해 들어섰던 통로의 마지막 감옥에는 나체로 수감되어있는 한 명의 소년이 있었다. 겉보기에는 딱히 이상이 없어 보였다. 적어도 어디 한군데 구멍이 뚫리거나, 비참한 일을 당한 사용자들보다는 훨씬 상태가 양호했다. 다만 눈에 초점을 잃은 채 죽어있는 얼굴로 연신 바람 빠지는 소리만 흘리는 중이었다. “오, 오빠. 얘 왜 이러는 거야?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보이는데….” “정신적으로 무너진 상태겠지. 일단 끌어내.” “응. 근데 상처가….” “…뒤집어서 눕혀놔. 엉덩이 부분이 보이도록.” “응?” 내 말에 이유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년의 뒤를 살펴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에서 “꺅.” 거리는, 약한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년의 뒤쪽은 피 칠갑이 된 상태서 말라붙어있었고, 아주 처참하게 짓뭉개진 상태였다. 이유정은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얘, 얘도 건드린 거야? 같은 남자인데?” “…모르지. 여성 부랑자들이 건드렸을 수도 있고.” “이 미친 변태 새끼들이!” 이유정의 얼굴이 안쓰럽게 변한다 싶더니, 벌컥 화를 내며 분노를 터뜨렸다. 척 봐도 소년은 육체보다는 정신에 큰 충격을 입은 상태였다. 표정이 전체적으로 결여되어있었다. 그 모습을 담담히 보다가,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겨우 하나의 통로를 돌아봤다. 전방에는 감옥이 없었으니, 이제 남은 두 면을 돌아볼 차례였다. 그렇게 막 몸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으아아악!” “으아아앙!” 갑작스럽게 들린 구토와 울음이 뒤섞인 소리에, 나는 급한 발걸음으로 공동을 나섰다. 그러자 방금 전에 구해내었던 사지가 기형적으로 꺾인 남성 사용자 앞에서, 안솔과 백한결이 동시에 엎드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옆에 있는 김한별은 그 정도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상태였다. “오, 오빠.” 김한별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아래의 사용자에게도, 내게도 꽂혀있지 않았다. 정확히 내 뒤에 있는 누군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형….” 안현이, 누군가의 허리를 잡은 채 서있었다. 엉덩이 아래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양손에는 사지가 절단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한 명의 남성 사용자가 있었다. “… 그 사람 아직 살아있어?” “네. 아직은 살아있다고 하셨어요. 일단은 데려가라고….” “그래. 알겠다. 얼른 치료하자. 이쪽으로 데려와서 눕혀.” “네, 네.” 안현은 재빠른 몸놀림으로 남자를 바닥에 눕혔다. 그에게서는 어떠한 미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연주의 말대로 살아는 있었지만,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김한별에게 둘을 데리고 오라고 손짓하며 안현을 향해 물었다. “통로는 어디까지 돌아봤어? 그리고 그쪽에는 몇 명이나 갇혀있었고?” “그게…. 두 통로 전부요. 그리고 이 남자 한 명밖에 없었어요.” 안현의 말에, 막 건네 받은 물약의 마개를 따던 내 손이 멈추고 말았다. 한 명. 여울가녘 클랜원 10명. 1차 구조대 14명. 그 중 한 명의 죽음을 확인했으니 총 23명이 잡혀왔다는 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통로에 누워있는 사용자들을 세어보았다. 모두 7명이었다. 그 말인즉슨, 16명이 모두…. “아 형. 그리고 연주 누나가 이 말을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고연주? 뭐라고 전해달라고 했는데.”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통로를 발견하셨다고….” 그 말을 들은 순간, 마볼로와 나눴던 대화가 잠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마르가리타는…. 글쎄, 어떻게 됐을 것 같은가? 낄낄.’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오늘 약속 때문에 집에 늦게 들어와서 간신히 집필시간에 맞췄습니다. 호오, 그런데 제가 아주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BL을 쓴다는 말에도 꿈쩍도 하지 않으시던, 오히려 웃으시던 독자 분들이셨는데. 절단마공에는 반응을 해주시는군요! 호오…. 호오……. 호오………! PS. 오늘 연참 예정은 불투명한 상태입니다. 헤헤. 낮 12시가 지나도 올라오지 않으면 저를 매우 쳐주세요.(?!) 『 리리플(266회) 』 1. 한방모드 : 1등 축하 드립니다. 요즘 들어 1등에서 가장 자주 뵙는 분인 것 같습니다. :) 이번 회도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2. dbss : 쿠폰, 추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_(__)_ 3. 조아죽겠네 : 아카데미…. 아직도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납니다. ㅜ.ㅠ 4. 어쩌다저러니 : 흐, 흥! 저, 저도 딱히 어쩌다저러니 님 보라고 쓴 거 아니에요! 그, 그저 얼른 아이템도 얻고, 그러고 싶어서 썼을 뿐이에요! 쿠, 쿠폰은 고마워요! _(__)_ 5. 현오 : 헠헠. 살려주세요. ㅜ.ㅠ 오늘 연참은 많이 불투명합니다. 조금만 쉬다가 깜빡 잠들면…. ㅜ.ㅠ 『 리리플(267회) 』 1. 천해령 : 으라차! 1등 축하 드립니다! 역시 연참은 새로운 분이 1등에 많이 보이세요~. 2. 지리산의늑대 : 자정에는 운영자(?)도 1등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1등을 하고 말겠습니다. :D 3. 전략기동군 : 살려주세요.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ㅜ.ㅠ 4. 破天魔痕 : 페가수스 부화 가능합니다. 정말 생각만해도 엄청 귀여울 것 같아요. 하지만 페가수스의 알은 이미 계란 프라이로 운명이 정해졌….(퍽퍽!) 5. 센터러널 : 응원 감사합니다. 여유가 되면 꼭 연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제가 오후 늦게 들어와서 일찍 집필을 못해서요. ㅜ.ㅠ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69 / 0933 ---------------------------------------------- Tears Of Elf Queen (이번 회와 다음 회는 ‘매우’ 잔인하고 ‘굉장히’ 불쾌한 내용이 포함되어있습니다. 해당 내용을 원하지 않는 독자 분들께서는 생략하시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기록(Record)> 요정은 ‘사용자’들과는 종류가 다른 ‘정령’이라는 존재를 다루는 초자연적인 존재로 정의할 수 있다. 그들은 세계수 ‘유그드라실’을 부모로 여기고 자연과 정령을 벗삼아 살아가는, 엄연한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있는 높은 품격을 지닌 객체들이다. 지금껏 보고된 바로는 동, 서, 북 대륙에서 발견된 바가 없으며 오직 남 대륙의 ‘요정의 숲’이란 곳에서만 출현한다고 알려져 있다. 요정의 겉모습은 인간과 거의 비슷하지만 분명히 다른 점도 존재한다. 그들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관계없이 하나같이 뛰어난 미색을 지닌 가인들이라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거기서 조금 더 자세히 들어가보면, 먼저 귀는 인간처럼 둥글둥글한 모양새가 아니라 잎새를 닮은 조금 더 뾰족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들의 등에는 잠자리 날개와 비슷한 날개가 달려있는데, 그것은 요정들만의 계급을 나누는 기준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육체적 활성화 정도가 대단해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생명력을 체내에 품고 있다. 그렇다면 요정들의 고유한 특성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남 대륙(영국) 사용자들은 요정들을 가리켜 흔히 ‘고귀한 빛을 노래하는 자연의 종족’이라고 말하고들 한다. 그만큼 그들은 고상하고 순결한 자태를 갖고 있으며 음악을 사랑하는 평화적인 종족이다. 하지만 매사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기 때문에, 자신들의 ‘적’으로 규정한 이들에는 가차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요정의 몸놀림은 대단히 가볍고 민첩하다. 특히 숲 속에서는 그들의 안식처나 다름없는 곳이라 그들의 모든 행동에 긍정적인 보정을 받는다.(어떤 이들은 숲의 가호와 비슷한 능력을 요정들이 가지고 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지만 필자가 확인한 몇 안 되는 요정들을 보면 꽤나 신빙성이 있는 설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껏 요정의 숲에서 그들의 출현을 확인하고 보고된 기록은 굉장히 많다. 그것들을 모두 살펴볼 수는 없겠지만, 딱 한가지 공통점으로 들어간 사실이 있다. 그것은 감정 조절에 자신이 없다면 요정들 앞에서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것. 요정의 눈동자를 보면 굉장히 맑고 깨끗하다. 그들의 눈은 천리안 B Rank Zero와 비슷한 효율을 지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차분한 시선으로 인간의 감정을 읽고 내면을 귀신같이 파악하는 능력도 있다고 한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었는데 요정들도 인간과 비슷한 사회 체계를 이루고 있다. 그들의 계급은 등에 달린 날개로 판단한다. 일반적으로 갓 태어난 아기 요정들은 자그마한 한 쌍의 날개를 달고 태어나며, 약 30년에 걸쳐 완전한 날개로 만들어진다. 또한 요정 사회에는 ‘왕’이 존재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여성들만이 그들의 수장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에 오직 ‘여왕’만이 존재할 뿐이다. 요정들의 여왕. 그 자리는 뛰어난 요정들 중에서도 특히 선택 받은 요정을 위한 자리로, 그 우아함과 고결함은 가히 고대에 몇 번 현신했었던 여신들과 견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현재 요정들의 여왕은 공석이 되어버린 상태. 약 300년전 여왕으로 선출된 ‘마르가리타 달란트 비트라이스’라는 요정이 있기는 하지만 현재 행방이 묘연하다고 알려져 있다. ‘위그드라실’이 새로운 여왕의 선출을 허락하지 않는 걸로 보아 북 대륙 어딘가 살아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자세한 내용은 300년전 홀 플레인 의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Magia)에 대한 기록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따금 요정들 사이에서도 임시나마 요정 여왕을 선출하자는 의견이 모인 적도 있지만 대부분의 요정들이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 즉 마르가리타라는 요정 여왕의 영향력은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그녀는 다른 요정들이 감히 넘볼 수 없을 만큼의 성스러움과 고귀함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홀 플레인 대륙의 구원 때 모습을 드러낸 여왕의 고결한 성품과 우아한 미색은 당시 많은 회자가 되었는지, 아직도 그에 관한 기록들이 발견되고 있다. 남 대륙 중앙 대도시 ‘마리포사’ 대도서관, E열 15번째줄의 원정 기록 ‘요정의 숲’ 참조. * 일단 1층에 있는 사용자들을 구조하는 작업은 끝마쳤다. 구해낸 사용자는 총 7명. 개중에는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듯한 이들도 끼어있었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은 해줬다. 남은 것은 오롯이 얼마나 끈질기게 목숨을 붙잡고 있는지에 달렸다. 그들은 그 동안 심한 고초를 겪은 듯 한 명도 예외 없이 기절한 상태였다. 구해낸 사용자들은 좀 더 넓은 통로에 가지런히 눕힌 후, 나는 가만히 안쪽 통로를 응시했다. 다시 돌아온 고연주의 말에 따르면 반대편 벽면에 오른쪽으로 뚫린 통로가 있고, 잠깐 확인해본 결과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엉엉….” 아까부터 그치지 않는 울음 소리에 문득 상념에서 깨어났다. 울음 소리의 정체는 안솔이었다. 팔 다리가 모두 절단된 남성을 본 충격이 엄청났는지, 그녀는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악착같이 치료 주문을 외우는 안솔을 보다가,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한별, 백한결, 안솔. 너희 셋은 이곳에서 대기한다. 치료는 멈추지 말고 계속 하도록 하고, 치료 도중에 사용자가 깨어나면 절대적으로 안정시켜. 그리고 안현 너는 이곳에서 애들 좀 보호하고 있어. 혹시 모르는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 경계 철저히 하고.” “네 형. 걱정 마세요. 아, 이거 돌려드릴게요.” 안현은 단박에 대답하며 내게 일월신검을 돌려주었다. 그것을 칼집에 꽂아 넣은 후, 이번엔 고연주와 이유정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고연주. 아까 발견했다고 했던 통로로 저를 안내해주세요. 구조된 사용자들의 숫자가 예상외로 적으니 그쪽도 한번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유정이 너는 어떻게 할래? 따라올래, 아니면 남아있을래.” “따라갈래. 응. 따라갈 거야….” 이유정의 표정이나 목소리에는 평소와 같은 활기참이 보이지 않았다. 하긴 그 동안 괴물을 사냥하는 입장에서 익숙해졌을 뿐이지, 되려 괴물들에게 당하는 입장에 섰거나 그것을 보았던 입장은 거의 없었다. 그런 만큼 지금 이 상황에서 나 또는 고연주 정도의 비위를 기대하는 건 요원한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총 네 명을 남겼고, 세 명만 대동한 채 고연주가 발견한 또 다른 지하통로로 이동했다. 그곳으로 가던 도중, 나는 내가 보지 못했던 다른 면의 감옥을 지나쳐야만 했다. 물론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곳 저곳에 잔뜩 묻어있는 자국을 보자 갇혀있던 사용자들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윽고 우리들은 고연주가 발견한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입구를 발견했고, 문을 열어 천천히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며 우리들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아마도 점점 진하게 코를 찔러오는 피비린내에 2층의 상황을 대강이나마 짐작하고 있어서 그럴 것이다. 성에서 지하 1층으로 내려왔을 때와 같이 많은 시간이 걸린 것은 아니었다. 우리들은 채 5분도 걸리지 않아 지하 2층으로 통하는, 은빛을 번들거리는 또 다른 문 하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문 앞에 서는 순간 역한 비린내가 전신을 덮침과 함께 후각을 강렬히 자극시키는 것을 느꼈다. 1층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덮쳐오는 냄새는 엄청난 ‘악의’를 풍기고 있었다. 문은 잠겨있었다. 뭔가 마법적 처리가 되어있음을 미약하게 느꼈지만, 제 3의 눈으로 확인해본 결과 위험할 정도의 함정은 아니었다. 96의 근력이라면 순수 능력치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억지로 문을 밀고 들어가려는 찰나, 나는 잠시 강도를 높이던 힘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들어가기 전 이유정에게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경고라도 해줄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유정아.” “으, 응? 왜, 왜 그래 오빠?” 이유정은 뭔가 몰래 하다가 들킨 어린 아이처럼, 화들짝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그녀는 급하게 오른손을 숨겼지만 이미 내 눈에는 걸린 상태였다. 이유정은 오른손을 덜덜 떨면서도 스쿠렙프를 강하게 쥐고 있었다. 나는 얼른 그녀에게 다가가 강제로 스쿠렙프를 빼앗아 들었다. 그 와중에도 뺏기지 않으려는 듯 약한 저항감이 느껴졌지만, 억지로 힘을 주자 마검은 곧 내 손으로 옮겨졌다. 이유정은 흔들리는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진한 붉은색으로 물들어있었다. “오빠….” “차라리 구토를 해. 뭐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너희들 심정 이해하고 있고, 그 정도로 빡빡하게 굴지는 않아.” “그게 아니라….” “내가 분명히 말했었지? 의존하지 말고, 휘둘리지 말라고. 그런데 지금 스쿠렙프에 의지하고 있잖아. 방금 전에도 그러려고 했고. 아니야?” 그래도 끔찍한 광경에 제법 잘 버틴다 싶었는데 그 동안 마검에 의지하고 있던 모양이다. 자신이 조절할 수 없다면 그것은 성향이라는 그릇에 독을 붓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이유정은 할 말이 없는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에 한숨을 쉬고 “너는 돌아가면 나랑 얘기 좀 하자.” 라는 말과 함께, 나는 스쿠렙프를 품에 넣고 다시 문 앞으로 섰다. 중앙에 손을 얹자 손바닥을 타고 묵직함이 전해져 들어온다. 나는 서서히 몸을 기울이며, 육중한 철문을 밀고 들어갔다. * 지하 2층은 1층과 같은 구조를 갖고 있지 않았다. 쇠창살로 닫힌 여러 감옥으로 나뉘어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대감옥이라 봐도 될 정도로 커다란 방이었다. 크기는 약 60평 정도 될까. 방 곳곳을 채우고 있는 고문 기구와 그 와중에 간간이 보이는 침대, 욕조와 같은 가구에서 오는 불균형적인 감각. 분명 이상하게 여길법한 상황이었지만 그런 것들은 둘째로 쳐야 할 정도로, 그만큼 내부에는 충격적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방 안은 피 냄새로 가득했다. 냄새의 근원은 이곳 저곳에 매달려있거나 널브러져있는 시체들이었다. 담담히 그것들을 보고 있자 문득 권소라와 마볼로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런데 두 번째는요, 남성분 같은 경우는 팔다리 절단! 그리고 여성분 같은 경우는 강간이 옵션으로 들어간답니다!’ ‘한 번만 더 그 예쁜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면, 내 친히 네 허벅지를 벌려서 가랑이부터 반으로 찢어 죽여주마.’ 그들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미 해봤기 때문에 그렇게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권소라의 말대로 한쪽 바닥에는 인간의 것이 분명한 여러 부위가 가지런히 모아져 있었다. 그 중 목 부분은 따로 떼어져 있었는데, 가만히 보니 남성의 얼굴이었다. 그의 얼굴은 주변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고문 기구로 보이는 삼각목마가 세워져 있었는데, 위에 여성의 시체가 걸려 있었다. 마볼로가 했던 말처럼 되어버린 상태로, 목마 위로 걸쳐진 상태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의 광경은 마치 푸줏간을 보는듯했다. 온통 시체 천지였다. 주렁주렁 부위별로 매달려있는 인간의 시체, 커다란 그릇에 담겨있는 시체 등등. 바닥은 매달린 시체들에서 흘러나왔는지 피가 흥건히 고이다 못해 흐를 정도였다. 잠시 동안 가만히 그것들을 보고 있자 누군가 내 팔을 살짝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수현. 저기…. 좀 보세요.” “네?” 고연주 또한 눈 앞의 끔찍한 참상에 할 말을 잃은 얼굴이었다. 그녀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이번에는 나 또한 “헉.” 신음을 지르고 말았다. 아무리 끔찍하다고는 하지만 10년 동안 어지간한 일은 겪은 상태라 크게 비위가 상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광경은 확실히 내 예상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곳에는 성체 유니콘 한 마리가 누워있었다. 그것도 뿔이 뽑히고, 네 개의 다리가 잘려있고, 배가 반으로 갈라져있는 굉장히 처참한 상태였다. “우웨에에에에에엥!” 결국 여기서 참지 못했는지 이유정은 허리를 굽히며 엄청난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이 비참한 광경에 오열하는, 목놓아 우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녀의 입에서는 말간 침들과 함께 방울진 눈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우웨엥, 우웨에엑! 어어엉!” “…….” 연신 구역질을 하는 이유정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등이라도 두드려주려고 다가가려는 순간이었다. 부스럭, 부스럭부스럭. 그때 누군가 마른 이불을 헤치고 몸을 일으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소리는 침대에서 들렸다. 나는 곧바로 방의 한쪽 구석에 있던 침대로 시선을 돌렸다. “응…? 주인님 오셨어요…?” 그리고 아름답고 침착하게 들리는 목소리를 들은 순간, 사르르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결 좋은 은발의 머리카락을 볼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음, 네. 결국 오늘 연참을 하지 못했네요. ㅜ.ㅠ 죄송해요. 왜 하루 2연참을 하지 않냐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물론 방학 중이라 시간이 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제가 현재 이북 출판 계약을 한 상태고 대학생이라서 학기 중에는 교정 작업이 거의 불가능합니다.(연재를 하지 않으면 가능하겠지만 그건 절대로 안될 말이니까요.) 초반에 수정할 것이 많다손 치더라도 제 욕심이 너무 큰 건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두 달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최대한의 이북 진도를 빼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물론 연참도 아예 안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루에 제가 수정하는 양을 정해놓고 있는데, 그 양을 일찍 끝내면 글을 쓸 시간이 조금 더 많아지겠지요. 그래서 드리고 싶은 말씀은요. 독자님들! 저 좀 살려주세요. 그래도 방학인데 저도 어디 1박 2일이라도 잡고 놀러 가보고 싶어요…. 흑흑엉엉…. ^_ㅠ PS. 불쾌한 장면은 다음 회까지 이어집니다. 원하지 않으시는 분께서는 생략하고 넘어가시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 리리플 』 1. 한방모드 : 1등 축하 드립니다. 헤헤, 요즘 들어 자주 뵙는 것 같습니다. 요즘 절단마공을 의도치 않게(?) 익히고 있습니다. :) 2. 장마와방 : 과연 그럴까요? 하하하. 다음 회에 정답이 나올 예정입니다. 다음 회를 기대해주세요! 3. 플룻 : 현재 예상으로는 3회 ~ 6회 안으로 귀환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아이템 설명을 빼면 조금 더 일찍도 가능할 것 같고요. 4. vkfkd54 : 헐. 아무래도 저랑 독자 분들이랑 느끼는 체감이 다른 것 같네요. 제가 어제 약속 때문에 집에 늦게 들어왔었거든요. 그래서 쓰면서도 '아 너무 배경 묘사나 설명이 부족한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오히려 많다고 느끼시다니. 이 부분은 차차 고려해보겠습니다. :) 5. GradeRown : 오늘 첫 문단에 경고 문구를 띄워놓았습니다. 아마 다음 회에는, 정말로 불쾌하실 수도 있습니다.(…….) 6. 달리다쿰 : 곧 있으면 주인공 일행이 알아낼 예정이지만, 부랑자(부하)들은 들어온 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새로 잡혀온 사용자들은 잡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였고요. 그 두 사건 사이로, 마볼로가 말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서 그렇습니다. 7. 유리켄느 : 첫 코멘트 감사합니다! 수, 수현 앓이라니 대단하십니다!(오늘 내로 돌아오지 못해서 죄송해요. ㅜ.ㅠ) 앞으로 코멘트란 에서 자주자주 뵈었으면 좋겠어요. :) 8. 브리키오 : 호오…. 호오……! 의연하시군요! 그렇다면 오늘의 절단은 어떠신지요! 9. 지리산의늑대 : 앞으로 여성이 남성을 '그렇게(?)' 대하는 장면도 간간이 포함할 예정입니다. 도시로 돌아가면 말이죠.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10. 천냥보은 : 싫어요! 앞으로도 막 절단할거예요! 절단마공을 막막 쓸 거란 말이에요! ( --)(퍽퍽!) T^T…. 죄송합니다. 갑자기 생떼를 부려보고 싶었어요. ㅜ.ㅠ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70 / 0933 ---------------------------------------------- Tears Of Elf Queen (이번 회는 ‘굉장히’ 불쾌한 내용이 포함되어있습니다. 해당 내용을 원하지 않는 독자 분들께서는 생략하시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기록(Record)> 홀 플레인 이라는 세상은 ‘죽음’이라는 말을 끼고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다. 그만큼 죽음이 빈번하다는 것은 병아리들도 아는 사실이다. 또한 이곳에서 살아가다 보면 누구든지 좋든 싫든 지인 또는 타인의 죽음을 마주한적이 있을 것이다. 지금 이 보고서를 쓰고 있는 필자도 몇 년 전에 있었던 원정에서 통과의례 때부터 함께해왔던 동료를 잃은 적이 있다. 그 녀석이 죽기 직전에 남겼던 말은 딱 한마디. 바로 “허무하다.”였다. 그 한마디를 남기고 눈물을 몇 방울을 흘리더니, 결국 눈을 감고야 말았다. 나는 녀석이 했던 말과 흘린 눈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주마등’이라는 말이 있다. 주마등의 기본적인 뜻은 돌리는 대로 그림의 장면이 다르게 보이도록 만든 등을 뜻한다. 그것은 워낙 빨리 돌아가기 때문에, 사물이 빠르게 변해 돌아가거나 세월의 빠름을 빗대어 말하기도 한다. 즉 무엇인가 언뜻언뜻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고도 말할 수 있다는 소리다. 사람들은 평소 또는 죽기 전에 흔히들 말하고는 한다. “인생은 주마등 같다.”, “인생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마 내 친구녀석이 허망하다고 말한 것은 독에 당해 숨을 거두기 직전 순식간에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 것은 아니었을까? 혹시 지금 이 기록을 보고 있는 사용자들은 필자를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맞는 말이다. 분명 기록 초반에 홀 플레인 은 죽음과 친숙해져야 한다고 적어두었으니까. 내가 이번 기록에서 진정 다루고 싶은 주제는 ‘눈물’로 정의할 수 있다. 예전에 큰 화제가 됐던 ‘천사의 눈물’이라는 물약에 대해서는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사용자 상점의 비밀이 밝혀진 직후 어느 운 좋은 사용자가 거금의 Gold Point를 사용해서 선점했고 무려 6 능력치 포인트의 상승 효과를 얻었다. 애초에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사례도 드문데 한꺼번에 6포인트를, 그것도 자유롭게 올릴 수 있다는 사실에 엄청난 부러움을 샀다고. 그때 이후로 능력치 상승에 눈이 뒤집힌 사용자들 사이에는 ‘눈물’을 얻기 위해 엄청난 열풍이 불었고 그것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확실히 인간의 눈물이야 아무짝에도 쓸모 없겠지만, 다른 존재의 눈물에는 비슷한 효능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얼마 전 우리들은 남 대륙을 중심으로 뭉친 타 대륙 연합군들을 격퇴했다. 그 과정에서 상당수의 사용자들을 포로로 잡았고 개중에는 남 대륙과 동맹을 맺은 요정들도 다수 끼어있었다. 전후 처리과정에서 대부분의 요정들은 노예로 전락했는데, 사용자들은 ‘천사의 눈물’로 시작한 열풍을 요정들에게로 돌렸다. 비슷한 전례(前例)가 있는 만큼, 요정에 대한 가능성은 필자도 꽤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뭐 결과적으로는 아직까지 요정의 눈물이 효능을 발휘한 것에 대해 보고된 사례는 없다. 나는 그 문제점을 사용자들이 요정의 눈물을 얻는 방식에 대해 지적하고 싶다. 물론 요정들의 특성을 따져보면 눈물을 잘 보이는 종족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들의 감정은 평상시 지극히 고저가 없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요정들도 엄연히 하나의 인격을 갖고 있는 객체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런 그들을 광장에 걸어놓아 차례대로 돌리면서 윤간시키거나, 또는 도를 넘어서는 폭행을 함으로써 눈물을 얻으려는 행태를 보면 그저 기가 찰 뿐이다.(물론 요정에게 동료를 잃어 순수하게 복수를 하고 싶었던 마음이라면 상관없겠지만 말이다.) 감정이란 것은 상당히 오묘해 나 또한 함부로 잣대를 내리기는 어려운 주제이다. 그래도, 적어도 그때 내 친우가 죽으면서 흘린 눈물과 요정들이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일들을 당하면서 흘리는 눈물에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딱 뭐라고 꼬집어 말하기는 애매하지만 눈물에 담긴 ‘진심’ 혹은 ‘감정’의 차이라고나 할까. 강제적인 (성)폭행으로 인한 억지가 가미된 눈물에는 ‘천사의 눈물’과 같은 효능을 바라기 요원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요정의 눈물에는 오직 스스로에서 일어난, 그들 본연의 오롯한 감정을 담을 수 있다면 효능을 한번 기대해봄 직하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이 기록을 읽고 요정을 가진 사용자들이 노예를 죽이는 것은 그들의 자유지만, 설령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해서 필자에게 칼을 들이미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PS. 요정들도 각기 계급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로서도 한가지 궁금한 점은, 그렇다면 요정의 눈물도 계급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과연 고귀한 요정들의 정점에 서있는 요정 여왕의 진실된 감정을 담을 수 있다면, 그 눈물에 어떤 효능이 담겨있을지 필자는 정말로 궁금한 바이다. 북 대륙의 고명한 탐험가 양기덕(7년차 사용자)의 저서 ‘현재 홀 플레인 에 부는 열풍, 눈물에 관한 고찰’에서 발췌. * 요정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요정 여왕을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뾰족한 귀를 쫑긋 세우는 요정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불 사이로 드러난 뽀얗고 풍만한 가슴과, 백옥 같은 나신을 보자 절로 호흡을 멈추고 말았다. 마르가리타는 정말이지 망가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흘러 넘치는 기품과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매력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는 1회차 시절 내가 기억하는 일반 요정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고결했고, 섬세했으며, 아름다웠다. 이윽고 찰랑이던 은발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연한 푸른빛을 띠는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이었다. “주인님!” “…….” “헤에, 주인님 또 모습을 바꾸셨구나. 주인님~. 왜 자꾸 마르를 시험에 들게 하세요~. 마르는요. 이제 절~대 그런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답니다.” 마르가리타는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곧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우아한 태도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더니 이내 가슴과 배를 바닥으로 향하고, 양손과 양발을 하나씩 놀리며 내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오기’ 시작했다. 그 충격적인 모습을 보며, 나는 반사적으로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 거주민 정보(Native Status) > 1. 이름(Name) : 마르가리타 달란트 비트라이스 2. 클래스(Class) : 요정의 여왕(Tribe, Queen Of Elf,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요정의 숲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날개가 잘려버린 요정의 여왕 · 위그드라실(Yggdrasil) 6. 성별(Sex) : 여성(788) 7. 신장 · 체중 : 171.8cm · 48.7kg 8. 성향 : 음란 · 복종(Obscene · Obey) [근력 14(-76)] [내구 2(-76)] [민첩 28(-72)] [체력 12(-70)] [마력 4(-92)] [행운 0(-98)] (근 300년에 이르는 동안 육체적, 정신적으로 수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고결하고 강인한 성품을 지닌 여왕이었다고는 하지만, 사악한 마법사의 지속적인 세뇌 및 조교에 결국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이미 본연의 정신은 붕괴되어, 과거 요정들의 여왕과 영웅으로써의 풍모는 모조리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사악한 마법사에게 당해버린 마르가리타의 현재 상태는 한마디로 내외로 ‘부서져버렸다.’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본래의 이지를 상실한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은 마법사의 입맛에 맞춰 다시 ‘만들어진’ 상태입니다.) (마르가리타는 현재 자신에게 허락된 세월을 초과한 상황입니다. 고대 마법의 대규모 결계와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는 마법사의 모종의 노력으로 억지로 수명을 늘리고는 있지만, 결국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마르가리타의 육체는 살아있지만 이미 사망한 것과 다름 없는 모순적인 상태입니다.) (마르가리타의 목숨을 연장해주던 고대 마법이 끊겼음을 확인했습니다. 그 동안 억지로 그녀의 수명을 이어온 행동이 독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3시간 후 그녀의 육체 능력치가 0이 되는 순간, 요정 여왕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미 육체가 죽어버린 상태라 엘릭서 한 병을 사용해도 현재 육체 상태의 ‘모순’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끊어진 마력이 다시 이어진다면 약간의 수명 연장은 가능할 것입니다.) 그 동안 도대체 어떤 일들을 당했길래 이런 엄청난 정보들이 뜨는 걸까. 순식간에 허공을 빽빽이 메우는 메시지에 나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언제 다가왔는지 마르가리타의 늘씬한 등이 보였다. 원래는 열두 쌍의 날개가 있어야 할 텐데, 모조리 뜯겨버린 듯 단 한 쌍의 날개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곧 죽는다는 소린가.’ “왕왕! 주인님 어서 오세요. 왕왕!” “뭐…?” 충격적인 언행이 이어지는 동안 마르가리타는 바로 내 앞에서 기어오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마치 주인이 오자 반갑다고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호호….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이 개 좆 같은 자식이…!” “흐으…. 흐으으…!” 문득 양 옆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폭사되듯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지간하면 내 앞에서 욕설을 자제하던 고연주도, 구토를 하는 와중에도 으르렁대는 이유정도. 둘은 한 여성을 망가뜨려버린 마볼로의 행태에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요정 여왕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눈 앞의 마르가리타는 비참했고, 처참했다. 방 내부를 순식간에 채워가는 살기를 느낀 듯 마르가리타는 “히익.” 하고 울었다. 그리고 양 팔로 내 다리를 덥석 안으며,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울먹였다. “주, 주인님. 잘못했어요. 때리지 마세요. 마르는요 주인님께서 시키신 것들을 충실하게 했단 말이에요. 보세요! 유니콘 고기도 절반이나 먹었고요, 물도 싹싹 핥아 먹었어요. 그리고 주인님께서 주신 사탕도 전부 먹었단 말이에요. 그러니 벌을 내리지 마세요. 흑…. 잘못했어요….” 마볼로는 확실히 미치광이에 변태였다. 요정에게 유니콘의 고기를 먹였다. 물은 인간들의 피를 말하는 것 같고 사탕은…. 아마 그녀의 수명을 억지로 늘리던 마볼로의 모종의 연구물이 아니었을까? 다만 그 재료는 아마 이곳에 널브러져있는 수많은 것들이 주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내 다리를 끌어안고 머리를 비비는 마르가리타를 살며시 떼어냈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춘 후, 그녀의 귓가에 똑똑히 들리도록 마력을 담아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의 주인이 아닙니다. 당신이 과거 홀 플레인 을 구원한 영웅들 중 한 명이며, 요정의 여왕으로 알려진 마르가리타가 맞습니까?” “웅…? 아, 네! 마르는요오. 예전에 주제도 모르고 그렇게 불린 적이 있었어요! 그때 오만하게 굴어서 죄송해요 주인님.” “…요정 여왕. 예전에 당신을 구속했던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는 현재 사망한 상태입니다. 이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 한마디씩 힘을 주며 또박또박 말해주자 약간이나마 마르가리타의 표정이 바뀌었다. 해맑던 표정이 사라지고, 눈매가 동그랗게 변했다. 그러나 여전히 눈동자는 흐리멍덩했다. 나와 그녀의 시선이 중간에서 얽히고 곧이어 고운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아….” “정신이….” “아이참~. 속지 않는다니까요 주인님!”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마르가리타는 배시시 웃고는 이내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더니 요염한 표정과 함께 바닥에 발랑 드러눕고는, 새침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주인님은 정말 아직도 저를 시험하고 싶으신 것 같아요.” “…….” “걱정 마세요. 그렇다면 마르가 직접 주인님에 대한 복종을 증명해드릴게요. 마르는요~. 실은 오늘도 주인님을 떠올리며 힘차게 자기를 위로를 했답니다. 그 증거를 보여드릴게요.” 말을 끝마치자마자 마르가리타의 손이 그녀의 소중한 곳을 더듬는다. 이윽고 꽃의 내부를 파고들어간 그녀의 집게 손가락은, 안에서 얇고 기다란 원뿔형 기둥 하나를 쑥 뽑아내었다. 기둥의 겉면에는 끈적끈적한 액으로 점철되어있었지만 은은한 빛이 어린 상태였다. 그것은 유니콘의 뿔이었다. “…쯧.” “수현. 제가 보기엔…. 이미 끝난 것 같아요.” 가만히 혀를 차고 있자, 옆에서 침중한 기색이 담긴 고연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말이 맞다. 처음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만해도 남아있었던, 여왕으로서의 기품과 고아함은 눈 녹듯 사라진 상태였다. 지금 내 눈앞에는 마치 퇴폐적인 창녀처럼 욕망을 갈구하는 구제 불가능한 요정만이 남아있을 뿐. 다시 살릴 수도 없고, 이 상태로는 동료로 만들 수도 없다. ‘그렇다면….’ 잠시 동안 마르가리타의 처분에 대해서 고심하다가,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한 발짝 앞으로 걸었다. “흐응. 주인님. 있잖아요 이상하게 아까부터 마르의 몸이 식어가는 것 같아요. 막 숨도 차고, 자꾸만 졸려요. 어서 주인님이 뜨겁게 만들어주세요.” “당신은 요정들의 여왕입니다.” “네! 마르는요. 주인님을 위해 언제나 봉사할 준비가 되어있는 애완용 암X입니다!” 마치 교육을 받은 듯 마르가리타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결국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마음을 정한 이상, 이제는 재빠르게 행동으로 옮길 필요가 있었다.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일 푼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거기에 걸어보고 싶었다. 어차피 모 아니면 도니까. 게다가 그녀는 곧 죽을 운명이었다. 억지로 생명을 연장시키거나 이대로 내버려두어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게 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여기서 깔끔하게 끝내주는 게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어디까지 저를 부끄럽게 만드실 거예요. 히히. 그래도 와주셨으니 기뻐요. 그럼 부디 이 마르의 음란한 구….” “그만.” 헐떡이며 스스로 허벅지를 좌우로 벌리던 마르가리타는, 내 말에 곧바로 행동을 멈췄다. 나는 침착하게 그녀를 일으켜 앉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춘 후, 요정의 심장이 있는 쪽에 손을 뻗었다. 손가락 위 마디에 말캉한 가슴이 느껴졌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 상태로, 나는 심장에 잠들어있는 화정을 서서히 일깨웠다. “헤헤, 주인님. 오늘따라 너무 상냥하세요.” “…그래요.” “이런 주인님도 좋지만 조금 더. 아니, 많이 격렬하게 해주셔도 좋아요.” “…….” 할 수만 있다면 입을 다물게 만들고 싶었다. 나는 차분히 힘을 이끌어 마르가리타의 내부에 투사했다. 그러자 화끈한 기운이 그녀의 내부를 조금씩 잠식하는걸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파괴를 위한 작업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것은 똑같지만, 나는 화정에 전에 없이 강하게 기원했다. 그녀의 내면을 잠식한 모든 악의적인 것들을 불태워달라고. 그리고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기억들도 모두 불태웠으면 좋겠다고. “아 따뜻해…. 주인님 이건 뭐에요…?” “…….” “너무 따스하고…. 포근하고…. 이건 마치….” “…마치?” “꼭 숲……………………. 어…?” 비로소 화정이 온 몸을 잠식하고 뜨겁게 불타오르는 순간. 마르가리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나는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뒷목을 받치며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마르가리타 달란트 비트라이스. 요정의 숲의 수장이며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가장 고귀한 요정.” “어…. 어…. 어…?” “과거 당신은 홀 플레인 을 구원한 영웅 중 한 명이었습니다. 비록 저는 그것을 보고 자라지는 않았지만, 아직까지 기록이 남아 회자되고 있는 당신의 업적을,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어…. 응….” 마르가리타는 이미 수명을 다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을 마볼로가 억지로 이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강제로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짓거리는 99%가 그릇된 방법일터. 요정의 순결한 몸을 사도의 방법으로 일구려고 했으니 ‘모순’이라는 정보가 크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 상태를 유지하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방 내부는 고요한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간혹 마르가리타의 앓는 소리가 간간이 허공을 울릴 뿐. 화륵, 화르륵. 드디어 몸 내부를 깨끗하게 정화했는지, 어느새 몸의 외부까지 돌출되는 맑은 불꽃이 보인다. 300년간 쌓여진 악의였다고 해도 화정의 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마르가리타의 수명을 이어주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자, 곧이어 서서히 반응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르르…. 사르르…. 온몸에서 환한 빛이 새어 나온다. 발끝부터 금빛 가루가 휘날리고 있다. 그렇게, 그녀는 서서히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듯 소멸의 절차를 밟고 있었다. 애당초 마볼로는 ‘파괴’로 조절해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였지만 마르가리타는 ‘정화’로 조절해 최대한 편안하게 해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아…. 으.… 아….” ‘아직 반응은 없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마르가리타의 전신은 금빛 가루를 휘날리며, 아주 조금씩 닳아 없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몸은 억지로 정화시켜도, 오랜 세월 동안 망가져버린 정신을 단번에 회복시키는 건 어려운 모양이다. 그녀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앓는 소리만 내는 중이었다.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그녀의 귓가에 한번 더 소곤거렸다. “당신의 약혼자였던 용사 로이드는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 “부디 살아생전 못다 이룬 꿈을 하늘에서나마 다시 이루시기를….” “…….” ‘떠올려라 제발.’ 어쩌면 지금 정말로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읽었던 기록을 성공한 사용자는 없었던 걸로 알고 있지만, 그 기록이 100% 바르다고 확신할 수도 없으니까. 그 와중에도 마르가리타의 몸이 사라지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발, 다리, 팔 몸에 이르기까지. 찬란한 금빛 가루들이 휩싸인 가운데 남아있는 것은 그녀의 가슴 윗부분뿐. 하지만 그것도 어느새 목을 지나고 있는 상태였다. 끝난 건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다시 화정을 일으켜 몸이 뻐근하긴 했지만, 그래도…. “로…이…드…?” 그때였다. 아쉬운 마음은 남았지만 사실상 포기하고 나가려는 찰나, 미약한 음성이 귓가로 조용히 흘러 들었다. 깜짝 놀라 반쯤 돌렸던 몸을 다시 되돌리자, 마르가리타의 코까지 덮여있는 불빛이 보였다. 하지만 회광반조(回光返照)의 현상인지, 시종일관 흐리멍덩했던 그녀의 눈동자는 한 순간 빛을 되찾은 듯 또렷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똑…. 마르가리타의 오른쪽 눈에서, 눈물 한줄기가 주룩 흘러내렸다. 탁탁…. 데구르르…. 흘러내린 눈물 한줄기는 곧 하나의 동그란 형태로 모였고, 이내 바닥으로 떨어지며 톡톡 굴렀다. 그것은 요정 여왕의 눈물이었다. 확! 사르르…. 사르르…. 곧이어 화정이 한번 크게 불타오른다 싶더니, 금빛 가루가 춤추듯 주변으로 크게 흩날린다. 더 이상 마르가리타는 보이지 않는다. 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고통 받았던 요정 여왕은 성의 지하에서 본래의 소멸을 맞이했다. ‘그 양반 말이 맞았군.’ 한동안 그 광경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나는 담담히 땅에 떨어진 것들을 주웠다. 오른손에는 유니콘의 뿔을. 왼손에는 요정 여왕의 눈물을.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그것은, 딱딱한 고체의 느낌을 전해주고 있었다. 화정의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눈물을 쥔 왼손이 뜨겁게 느껴졌다. 몸을 돌리자 숙연한 얼굴로 서있는 두 명의 여성이 보인다. 그런 그들을 지나치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만 올라갑시다…. 아.” 그대로 계단을 올라가려다가, 문득 생각이 미쳐 침대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하얀색 신수 한 마리가 예의 처참한 상태로 누워있었다. ‘저것도 가져가야겠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먼저, 이번 회로 불쾌감을 느끼셨을 독자 분들께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넙죽. _(__)_ 나름 심하다 싶어 어제 경고 문구를 썼었는데, 달아주신 코멘트들을 보고 제가 조금 울컥했나 봅니다.(?) 실은 다 써놓고 보니 너무 심하다 싶은 감이 있어서 중간 부분을 아예 쳐냈습니다.(정확히는 수현이 “그만.” 이라고 말하지 않았지요.) 원래는 여왕과의 대면이 2회 정도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냥 1회로 압축해서 올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후유. 이제 감옥을 나갈 차례네요. 얻을 것은 얻고, 풀 것은 풀어야겠죠. 감사합니다. _(__)_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 드립니다. 하하. 이제 슬슬 메모라이즈도 1등을 도맡으며 하실 수 있는 분이 나오셨네요. 개인적으로 정말 대단하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번 회도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 2. 하루지온s : 암 쏘 쏘리 죄송합니다. _(__)_ 많은 고민을 했지만 초반 계획했던 대로 나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 LumpOfSuger : 그래서 오늘은 절단을 없앴습니다. 하하하. 4. 엘JH : 다음 회 여기 바치겠습니다! 이얍! 5. 파뱐 : 그러고 보니 멕시코는 갱? 이라고 해야 하나요? 멕시코 카르텔? 하여튼 그런 범죄가 정말 엄청나게 많이 일어난다고 본 것 같아요. ㄷㄷㄷㄷ. 6. 현오 : 두, 두루치기! 저도 두루치기 정말 좋아합니다. 고기에 두부에 김치 얹고 먹으면 정말로 꿀맛이죠. :) 7. 사룸 : 1회 차에서는 사망한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즉 결국 그녀의 생명을 이어주던 '독'들이 터져버린 셈이죠. 8. NinthSky : 음, 참다 참다가 결국 유니콘의 시체에서 터졌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9. 유리켄느 : 하하, 수현앓이를 하시는 분들이 많으시다니. 의외라고 생각되면서도 많이 기쁘네요. 메모라이즈에서야 주인공 보정(?) 때문이지만, 실제로 좋게 생각해주시는 분들이 많을줄은 몰랐어요. :) 10. GradeRown : 많은 분들이 윌사쿠, 윌사쿠 하시길래 뭔가 했더니 그것이었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 예전에 노블에서 재밌게 읽던 소설이 있었는데요. 막 이프리트 술탄도 나오고 흡혈귀 베르치카? 갑자기 제목이 기억이 안 나네요. ㅋㅋ. 거기서 작품 설정에 나오는 윌사쿠 말씀하시는 줄 알았어요.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71 / 0933 ---------------------------------------------- Tears Of Elf Queen 끔찍한 광경을 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 지하 2층에서 얻은 물품은 심하게 훼손된 유니콘의 시체, 유니콘의 뿔, 요정 여왕의 눈물로 총 세 개였다. 그 중 특히 요정 여왕의 눈물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고연주와 이유정 둘 모두가 그곳에서 얼른 벗어났으면 하는 눈치였다. 해서, 우선은 챙길 것만 챙기고 곧바로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되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1층에 남아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던 일행들은 내가 들고 있는 유니콘의 시체를 보자 하나같이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특히 마음이 여린 몇 명은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 만났던 애기 유니콘을 떠올렸는지, 필요 이상으로 슬퍼하는 감정을 내비쳤다. 어차피 클랜원들의 반응은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시체를 들고 온 이유는 나 또한 애기 유니콘에 대한 생각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홀 플레인 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는 해도 협곡에서 유니콘을 우연히 만났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지금 들고 있는 유니콘의 뭔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집단의식이 강한 동물들인 만큼 실종된 이 유니콘을 찾고 있지 않았을까? 만약 내 생각이 맞는다면 그리고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다면, 나는 그들에게 이 시체를 돌려줄 생각도 있었다. 괜히 돌려주지 않아 척을 지기보다는 은혜를 잊지 않는 종족임을 생각해 언젠가 보답이 되돌아오리라는 계산이 있었다. 물론 만나지 못한다면 그냥 가져갈 생각도 있었고. 유니콘의 시체는 일부라고 해도 엄청난 고가에 거래되고, 꼭 팔지 않더라도 비비앙에게 주면 환장하며 달려들 재료였다. 아마 그녀가 이곳에 있었으면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내 팔에 매달렸을 것이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속으로 웃으며, 나는 차분히 쓰러져있는 사용자들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구조한 사용자들 중 아직 깨어난 사용자들은 없었다. 그래도 내가 없는 동안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보살핀 듯, 거의 가망이 보이지 않는 한두 명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호흡이 비교적 안정된 상태였다. 이후 약간의 시간을 소비해 모든 사용자들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클랜원들에게 구조 작업의 종료를 선언한 후 이곳을 벗어나 성의 홀로 되돌아갈 것을 지시했다. 클랜원들도 이 기분 나쁜 곳에서 한시라도 빨리 나가고 싶었는지, 재빨리 사용자 한두 명씩을 들쳐 업으며 내 뒤쪽으로 진형을 잡았다. 그런 그들을 보자 이제 웬만한 급한 일은 끝났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성의 탐사뿐이라는 생각에 절로 느긋한 숨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마지막으로 남은 여성 두 명을 고연주가 양 옆구리에 끼는 것을 바라본 후, 성 내부의 홀로 통하는 계단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얼른 탐사를 시작하고 싶었다. * 약 30분 정도의 시간을 할애하자, 우리들은 다시 벽난로를 통해 성의 홀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아무래도 사용자들은 한두 명씩 업은 상태라 조심하며 올라올 수밖에 없었으니, 아무튼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릴 수밖에 없었다. 지하에서 나오자마자 클랜원들 대부분이 어색한 표정을 내비쳤다. 지옥도나 다름없는 지하의 광경과,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감돌기는 했지만 조용한 성의 풍경은 그만큼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내가 만일 정의감에 불타는 사용자였다면, 또는 지금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용자들이 형이나 한소영이었다면 잴 것도 없이 도시로의 귀환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들은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우리들은 임무는 ‘구조’가 아니라 ‘흔적’을 모으는 것이기도 했다. 감옥에서 구해주고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의 치료를 해준 것만해도 원래 임무를 초과해서 달성해준 셈이다. 더구나 이곳이 유적 인만큼 우리들은 ‘탐사’를 우선시할 권리가 있었다. 해서, 나는 홀의 중앙에 유니콘을 내려놓고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일단 이곳에 사용자들을 모아놓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형. 잠시만요.” 각 층으로 나눠 탐사를 시작하자는 말을 꺼내려는 순간 안현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왜 그러냐는 시선으로 응시하자, 녀석은 자신이 들고 있던 신체 건장한 남성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 사람 상태가 이상한 것 같아서요.” “어떻게 이상한데?” “아까까지만 해도 조용히 있었는데 계단을 올라오면서부터 자꾸만 숨소리도 거칠고, 앓는 소리도 내고….” “그래? 어디 한번 보자. 한결이는 물약 꺼내. 진정용으로 하나, 치료용으로 하나. 그리고 안솔은 힘들겠지만 치료 주문 좀 다시 한번 외워줘.” “어, 어떡하죠. 올라올 때 제가 너무 몸을 흔들었나 봐요.” 남성을 내려놓은 안현의 어조에는 걱정스러운 어조가 담뿍 묻어있었다. 말하는 게 아직은 0년 차답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천천히 그의 상태를 관찰했다. 남성은 약 30대 중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워낙 고초를 겪어서 그런지 군데군데 생채기가 나있었지만, 얼굴을 이루는 전체적인 선이 곧아 다부지다는 인상을 받았다. 안현의 말대로 그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신음을 흘리는 중이었다. “───. ───. ───. 치료(Cure)!” 그때 마침 안솔이 주문을 끝냈는지 하얀 빛 무리가 남성의 몸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 미약이 떨리던 그의 눈매가 한번 크게 움찔거렸다. 콧숨은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지만, 약하게 내쉴 때보다 훨씬 고른 주기를 찾아가고 있었다. “혀, 형. 혹시 이대로 죽어버리는 게 아닐까요?” “그건 모르지. 그리고 안타깝지만 죽으면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고. 그런데 내가 보기엔 눈을 곧 뜰 것 같은데.” “아 그래요?” “아무튼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호들갑을 떠는 안현에게 진득하니 기다릴 것을 주문하고 조금의 시간이 추가로 흘렀다. 그리고 아주 서서히 남성이 눈이 뜨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눈꺼풀이 반쯤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다시 올라갔다가, 내려간다. 갑자기 밝은 빛을 봐서 그런지 아니면 초점이 흐릿해서 그런지 남성은 몇 번이고 깜빡임을 반복했다. 이윽고 그의 눈꺼풀이 절반 이상 열리고 더는 내려가지 않을 무렵. 완전히 시야가 회복됐는지, 혼란스러움이 배인 채 허공을 배회하던 시선이 서서히 우리들에게로 옮겨졌다. “어…. 으….” 남성은 입을 열어 벙긋거렸지만 메마른 목소리만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의 목을 받치고 진정 효과가 있는 물약을 꺼내 목 안으로 조금씩 부어주었다.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점과 하는 행동으로 봐서 자신을 도와주려는 것을 깨달았는지 남성의 얼굴에 한결 안도감이 물드는걸 볼 수 있었다. “꿀꺽. 커흐…. 커흐으….” “정신이 좀 드시나요?” “크으. 여, 여기는….” “성의 1층 홀입니다. 저희들은 이스탄텔 로우의 의뢰를 받아 당신들을 구하러 온 사용자들입니다. 당신들을 구속한 마법사는 퇴치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 그렇다면.” 아직 혼란스러움이 가시진 않은 듯 보였지만 남성은 꽤나 침착한 태도로 내 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심지가 굳세거나 경험이 많은 노련한 사용자인 모양이었다. 내 말을 곱씹으려는 듯 그는 다시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약 10초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남성은 힘겹게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으…. 구해주셔서…. 감사….” “별 말씀을. 아무튼 지금은 안정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예. 저…. 혹시 저 혼자…. 다른 사람….” 말하는 것만해도 힘에 부치는지 남성의 목소리는 띄엄띄엄 이어졌다. 나는 유니콘의 시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언제 내려놨는지 구조한 사용자들이 가지런히 눕혀져 있었다. 그리고 각자 가지고 있던 로브를 벗어서 덮어준 듯 몸의 일부를 가려주고 있었다. 다시 남성과 시선을 맞추며,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전부 구했습니다. 현재 할 수 있는 한 모든 조치는 취해 논 상태입니다.” “잠시…. 그들을….” 내 말을 듣자마자 남성은 끙 하며 몸에 힘을 주었다. 구해낸 동료들을 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나는 입고 있던 코트 오브 플레이트를 벗어 그의 알몸을 가려준 후, 목을 받치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남성을 일으키고, 내 몸에 기대게 했다. 그는 내가 이끌어주는 대로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이유정은 눈치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는 남성이 동료들의 얼굴을 보기 편하도록 옆으로 누워있는 사용자들의 똑바로 돌려주었다. 이윽고 그는 누워있는 사용자들을 향해 하나씩 시선을 던졌는데, 가끔은 인상을 찌푸리기도 또 가끔은 다행이라는 표정을 보였다. 그리고 곧 모든 얼굴을 보았는지, 남성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호, 혹시…. 미희는…. 없었습니까…?” “미희요? 누굴 말씀하시는 거죠.” “아, 여, 여성…. 그러니까…. 음. 머리가 허리까지 길게 내려오고, 피부가 살짝 가무잡잡…. 아…. 저와 같은 곳에 갇혀있었는데…. 혼자서만 끌려나가서….” 남성의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중간에 뚝뚝 끊겨 두서가 없기는 했지만 대강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미희라는 여성과 감옥에 같이 갇혔었는데 그 중 그녀만 끌려나가고 자신만 남게 되었다는 소리 같았다.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 가무잡잡한 피부. 문득 절반으로 찢어져 삼각목마에 걸쳐져 있던 시체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왜 미희라는 여자만 끌려나갔는지 궁금했지만, 일단은 대답이 우선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주었다. “주, 죽었습…?” “…말씀해주시는 정보만으로는 미희라는 여성분이 누군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은 2차 구조대입니다. 이곳에 들어온 사용자들은 여울가녘 클랜원 10명과, 1차 구조대 14명입니다. 그 중 현재 구조된 사용자들은 총 7명에 불과합니다.” “그, 그러면….” “그 여성분 혼자만 끌려나가셨다고 했는데, 지하 2층으로 내려가본 결과 많은 수의 시체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곳에서 사망하셨을 확률이 높습니다.” 홀 플레인 에서 오랫동안 굴러먹었으면, 여기까지 말해줘도 대충은 알아먹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 동료도 아니고 소중한 이를 잃은 충격은 그 누구도 담담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현재 남성의 눈은 예전에 내가 형을 잃었을 때의 눈과 점점 닮아가고 있었다. “그, 그럴 리가. 그, 그럼 시신, 시신이라도…. 제가 직접….”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지하 2층에서 발견한 시신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습니다.” “하….” “일찍 구해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한 최선은 다했습니다.” “크흐흐…! 크흐흐흑…!” 내 말투에서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는지, 말을 마치는 순간이었다. 남성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더니 종래에는 무너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바싹 메마른 줄 알았던 눈동자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오고, 구슬픈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마 미희라는 여성과 꽤나 가까운 사이였을 것이 분명했다. “크흐어어…! 미희…. 미희야…. 미안해…! 흐으어어엉!” “…….” 남성은 곧 바닥에 벌렁 드러누우며 목놓아 울었다. 클랜원들은 모두 안쓰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또한 잠시 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솔, 백한결. 둘은 1층에 남아서 저 남성분 좀 좀 돌봐드리고 있어라. 최대한 진정시켜드려. 아, 가방은 현이랑 유정이한테 넘기고.” “네…. 알겠어요.” “그래. 혹시 무슨 일 생기면 크게 소리쳐서 불러. 각 층마다 개방된 형태로 되어있으니 누구든 바로 들을 수 있을 거다.” 안타깝기는 했지만 더 이상의 지체는 시간 낭비라는 생각에, 바로 탐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또한 가려놨다고는 하지만 사용자들을 이 이상 알몸으로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버리지만 않았다면 아마 이곳 어딘가에 사용자들의 장비들이 놓여져 있을 것이다. 어찌됐든 지금 바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면 한시라도 빨리 이동하는 게 우리들이나 저 남자에게나 이득이었다. 나는 잠시간 천장을 올려다본 후,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럼 둘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지금부터 성의 탐사에 들어가겠습니다. 성은 1층을 포함해 총 4층으로 되어있습니다. 먼저 김한별?” “네 오빠.” “너는 1층을 둘러봐. 딱히 별다른 것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창문 틀이나 동상 같은 거 꼼꼼히 보고. 그리고 천장에 매달린 장식물들 보이지? 저것들은 커터 마법으로 다 끊어내.” “알겠어요 오빠.” 온순하게 대답하는 김한별을 뒤로한 후, 나는 각 층마다 탐사할 인원을 배정해주었다. 2층은 고연주가 하기로 했고 3층은 이유정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리고 문의 수가 가장 많은 4층은 나와 안현을 배정했다. “미희야아…. 미안해…. 미희야아…. 크흐허엉….” “아저씨 울지 마세요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충격이 컸는지 아직도 흐느끼는 목소리가 홀을 울리고 있었다. 그런 그를 옆에서 다독여주는 안솔과 백한결을 보다가,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탐사의 시작을 알렸다. * “오빠. 난 그럼 3층 둘러볼게.” “그래. 나랑 안현은 4층으로 올라가마. 그리고 혹시 비밀의 방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마력 감지는 꼭 활성화 해두고.” “응.” 2층에서 고연주가 탐사를 시작하고 3층에 도착했다. 이유정은 침울하게 대답하며 몸을 돌려 걸어갔다. 난간을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 안현이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형. 도대체 지하 2층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그건 왜.” “연주 누님이랑 유정이가 그곳에서 올라온 이후부터 표정이 너무 안 좋잖아요. 그렇게 탐사 탐사 노래를 부르던 이유정이 저렇게 힘없이….” “뭐, 확실히 끔찍한 광경을 보기는 했지. 특히 유정이는 충격이 제법 클 게다. 아무튼 그건 나중에 말해줄 테니 우리도 탐사를 시작해야지. 가방은 받아왔지?” “그럼요.” 안현은 오른쪽 어깨에 맨 마법 배낭을 툭툭 치며 대답했다. 이윽고 우리 둘 또한 한층 더 계단을 올라 4층으로 올라섰고, 문이 많은 만큼 각자 양쪽으로 찢어지기로 결정을 내렸다. “내가 왼쪽부터 둘러볼 테니까 너는 오른쪽부터 둘러봐.” “네. 그럼 가방은 제가 갖고 있어도 되요?” “응. 뭐 발견하면 부를 테니까.” “알겠어요 형. 그럼 중앙에서 만나요.” 안현은 순순히 대답했다. 이윽고 우리 둘은 동시에 몸을 돌린 후 각자가 맡은 방향으로 난간을 돌아 갈라졌다. 그리고 내가 첫 번째로 걸음을 멈춘 곳은 난간을 돌아 열 발자국 정도 걸었을 즈음이었다. 내 앞에는 조금 낡기는 했지만 고풍스러운 빛을 띠고 있는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 있었다. 마력 감지로 일말의 위험을 감지한 후, 나는 손잡이를 잡아 돌리며 문을 슬쩍 밀고 들어갔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다음 회, 다 다음 회, 다 다 다음 회. 음. 아마 곧 도시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꾸 무거운 분위기가 이어지니 저도 덩달아 무거워지네요. ㅜ.ㅠ 비도 오고 말이에요. 그리고 와이파이는 자꾸만 끊겨서 저를 슬프게 만들어요. 탐사 이후로는 지금보다는 밝은 분위기를 써볼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 『 리리플 』 1. 미월야 : 하하. 1등 축하 드립니다. :) 저도 많은 생각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이번에 달아주신 코멘트들을 보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생각을 바꿔야 할 것 같아요. ㅋㅋㅋㅋ. 솔직히 조금 충격을 먹기도 했고요. 제가 쓰기는 했지만 솔직히 중간중간에 '와 너무 심한 거 아닌가.'라는 생각도 종종 했거든요. ㅜ.ㅠ 2. LumpOfSuger : 아마 대부분의 장비는 다음 회에 나올 예정입니다. :) 이것도 대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ㅎㅎ. 3. 레필 : 저도 나름의 선을 지키면서, 모든 독자 분들을 끌어안고 싶습니다. 정말 어려운 일이기는 하겠지만요. 아마 앞으로 제가 노력해야 할 부분이겠지요. ㅜ.ㅠ 4. 사람인생 : 하하. 저는 누나가 아니랍니다. 저는 남자라고요. :) 5. juan : 헐.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가 초보라니요. 정말 대단하군요. ㅎㄷㄷㄷ.(저, 정말이에요?) 6. 파카사리 : 뜰에 올려주신 것 봤습니다. 롤을 한적은 있는데 저런 아이디를 쓴 적은 없어요. ㅋㅋㅋㅋ. 로유미라니. 저도 보고 깜짝 놀랐네요. ㅋㅋ. 7. 잠든괭이 : 그럴 경우는, 유니콘을 죽인 '주체'에게 저주가 내려집니다. :) 8. 꼬야 : 지금 수현의 정신력이 강철을 넘어서 워낙 튼튼한 수준이어서 억지로 참고 있는 겁니다. 하하하. 그리고 쓰러질 수 없는 도 발동하고 있지요. 아마 긴장을 풀거나, 도시로 돌아가면 꽤 휴식을 취해야 할 듯 싶습니다. 9. le.miser + 솔직히뭐라쓸까고 : 쿠폰 감사합니다. _(__)_ 요정 여왕의 눈물은 과연 어떤 효능을 지니고 있을까요? 후후. :) 10. 즐거운날 : 어떻게 보면 맞는 말씀이기도 해요. 1순위로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니까요. 거기서 탈락된 사용자들은, 남성은 남성대로 여성은 여성대로 비참을 길을 걷게 되는 거죠. ㅜ.ㅠ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72 / 0933 ---------------------------------------------- Tears Of Elf Queen <기록(Record)> 동료들을 방패로 삼고, 많은 희생을 바탕으로 하나하나 도시의 마법진을 해제한 후에야 우리들은 마법사를 쓰러뜨릴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아마 처형의 공주가 재생, 치유와 관련된 마법진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그 원정은 다시 한번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중략.) …있었지만, 결국 성과를 크게 얻은 곳은 총 두 곳으로 나눌 수 있다. 한곳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방이었고, 한곳은 마볼로의 연구실이었다. 그 중 가장 압권이었던 것은 연구실이 아니라, 아무 생각도 없이 들어간 방이었다. 그곳에 있던 장비들 중 일부는 이미 과거의 영웅들이 사용하던 것이라고 밝혀졌다. 그러나 그것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건대, 나머지 장비들은 그들을 구하러 온 고대 거주민들의 사용하던 것들이 아닐까…. 그냥 그렇게 한번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왜냐하면…. 고대 마법도시 마지아(Magia) 원정 보고서 Page 17 발췌. * “별 것은 없네.” 첫 번째로 들어간 방은 말 그대로 별 것 없는 방이었다. 처음 봤을 때는 화려한 귀빈실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찬찬히 살펴보니 하나도 건질 게 없는 쭉정이였다. 한마디로 실속이 없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방은 많다. 4층에는 총 7개의 방문이 있으니 남은 6개를 살펴보면 분명히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나오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방문을 닫았다. 쾅. 쾅. 문득 귓가로 거의 동시에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옆을 돌아보니 안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녀석 또한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어깨를 한번 으쓱여 보였다. ‘5개 남았나.’ 각각 방 하나씩을 둘러본 우리 둘은, 남은 방을 탐사하기 위해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통로를 따라 여덟 걸음 정도 직진하자 이번엔 하얗게 칠해진 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쾅! 쾅! ‘미친놈.’ 방 안의 엄청난 광경에 속으로 나직한 욕지거리를 내뱉고 말았다. 한숨을 내쉬고 방문을 닫는다. 불현듯 이러다가 허탕을 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록을 읽어봤기 때문에 어떤 장비들이 나오는지는 대강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3번째로 살펴본 방에도 건진 것이 없자 슬슬 느껴졌던 불안감이 점점 가속화되는 것을 느꼈다. 결국 나와 안현은 마지막으로 남은 방에서 동시에 마주치고 말았다. 녀석 또한 얼굴에 실망스러운 감정이 그득한걸 보니 나와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힘들게 들어왔는데 참 힘 빠지게 만드네요.” “아직 탐사가 끝난 건 아니잖아. 여기도 아직 안 열었고 다른 층도 남아있으니까. 일단 이곳만 둘러보고 아래로 내려가보자고.” 마지막으로 남은 방문을 톡톡 두들기며 말하자 안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요 형. 그래도 방문은 참 좋아 보이는데요.” 확실히 안현의 말대로였다. 그래도 거주하는 곳들은 꽤나 신경을 썼는지 적어도 사람 사는 냄새는 풍기고 있었다. 특히 눈 앞에 보이는 문은 다른 문들과는 유난히 다른 점도 있었다. 문틀과 경첩 부위에 보이는 문양과 윤기가 자르르 흘러 번들번들한 빛을 띠고 있었다. ‘마볼로가 평소 사용하던 방인 것 같은데. 이거 정말 기대되는군.’ “제가 열게요. 들어가요 형.” “음.” 안현이 앞장서서 방문을 열었다. 문은 제법 관리를 잘해놨는지 삐걱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고 부드럽게 열렸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방의 내부는 제법 넓은 평수를 보여주고 있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양쪽 벽면을 모두 차지하는 책장이었다. 그리고 그 중앙으로 널찍한 책상이 하나 있었는데, 커다랗게 네모진 창문을 등지는 위치였다. 그 외에도 벽에 걸린 그림과 몇 개의 가구가 보였지만 이 정도만해도 내 예상이 맞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화려하지는 않다. 어떻게 보면 수수하기도 했지만 곳곳에 세월이 깊게 배인 흔적이 남아있어서 그런지 오히려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즉 한마디로 ‘마법사의 방’이라는 기분이 느껴졌다. 방 내부로 걸어 들어가며,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왼쪽 벽면의 책장에는 두터운 책들이 빼곡히 꼽혀있었고, 오른쪽 벽면에는 특이하게도 수백 개의 수정구들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감지를 돌렸지만 딱히 숨겨져 있는 것들은 없었다. 이윽고 책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중앙에 놓여있는 커다란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직도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안현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쪽 책장 좀 훑어보고 있어봐. 제목 보고 혹시 고대 마법이 적혀있는 책이라도 보이면 무조건 챙겨.” “형. 저 고대어 읽을 줄 모르는데….” “…그럼 그냥 책상이나 둘러보고 있어.” “네!” 지금 내 손에 들려있는 책은 굉장히 많은 내용이 있을 거라 추측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두께를 자랑하고 있었다. 겉면을 살펴봤지만 제목은 적혀있지 않았다. 금으로 감싸인 모서리를 한두 번 매만지다가, 나는 곧장 책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그러자 한 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고대어들이 보였다. 거주민들처럼 줄줄 읽을 수는 없겠지만 다행히 1회차 시절 어느 정도 익혀놓은 터라 70% 정도는 해독할 자신이 있었다. 나는 종이에 뭍은 먼지를 살며시 털어내고 첫 문단부터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오늘 드디어…. …시행했다. 비록 모든 도시의 주민들을 …로 사용했지만, 그리고 나 또한 이제 도시를 벗어날 수 없는 몸이 되었지만…. 후회는 없다. 아마 지금쯤이면 로이드와 마르가리타가 오고 있을 터. 이제는 …의 시간이 도래….」 「붙잡힌 둘의 얼굴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마르가리타는 예상대로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나를…. 했다. 과연 앞으로도 이 태도가 유지될 수…. 큭큭.」 ‘설마 마볼로가 기록해놓은 건가? 그렇다면….’ 계속해서 쭉 아래를 읽어보자 로이드와 마르가리타를 초대하고 납치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나는 일단은 계속 읽어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바로 한 장을 더 넘겼다. 「오늘 드디어 마르가리타의 처녀를…. 처음으로 보는 그녀의 …에 더욱 흥분하고 말았다. 로이드를 앞에 두고 마르가리타를 강제로…. 드디어 그녀가 다른 반응을 보였다. 방 안을 가득 메우는 울부짖는 소리에….」 「드디어 …을 눈치챈 것인가? 그라치아가…. 토벌대를 이끌고 온…. 물론 토벌대는…. 역시나 도시 안에서라면 나는 신이나 다름없다. 웬만하면 그라치아도 붙잡고 싶었는데, 주변 놈들의 워낙…. 결국 놓치고 말았다. 제법 대단한 실력이기는 했다. 특히…. 그래도….」 「나의 소중한 마르가리타. 평소에 생각이나 했을까? 고귀한 요정 여왕이 설마 괴물들에게 둘러싸여 강제로 …을 당할 줄은. 그녀의 반응을 하나씩 이끌어낼 때마다 너무나도….」 「좋은 생각이 났다. 로이드의 죽음을 확인한 이후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마르가리타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기 위해…. 그라치아로 변신하고 구출해주는 척을….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다시 …로 변하자 멍해지는 마르가리타의 얼굴을.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크크크크.」 “…….” 그대로 덮어버릴까 하다가, 이왕 여기까지 읽은 거 조금만 더 참아보기로 했다. 대신 앞장은 아예 넘겨버리고 뒷부분을 중점으로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해서, 페이지 한 뭉텅이를 잡고 한번에 넘겨버렸다. 「…마르가리타가 임신했다. 하루가 다르게 배가 불러오는…. 솔직히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머릿속이 복잡하다.」 「결국 마르가리타는 …을 낳았다. 마르가리타가 보는 앞에서 부수려고 했지만 일단은 …했다. 내 아이일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괴물의 아이일 가능성도 크니까. 나와도 한적은 있지만 근 1년간은 괴물들과 더욱…. 바로 부화시키기보다는 일단은 보존해두기로 했다. 협박할 때 써먹어야지. 낄낄!」 「오늘 도시로 이상한 …들이 들어왔다. 붙잡아서 정신을 조작해본 결과 ‘사용자’라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사용자? 흥미가 돋는다. 자세히 알아봐야겠다. 마침 …했는데 잘됐거든.」 「오늘…. 결정했다. 마르가리타에게도 정신 조작을 …하기로. 어쩌면 여왕의 본 모습을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제는 …을 보고 싶어졌다.」 팔랑! 팔랑! 팔랑! 팔랑! 팔랑! 팔랑! 팔랑! 팔랑! 팔랑! 팔랑! 팔랑! 팔랑! 「바깥은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토벌대는 더 이상 오지 않는다. 대신 ‘사용자’라는 놈들이 들어오는 빈도가 잦아졌다. 처음에는 그냥 죽이기만 했지만 그래도 꽤나 재밌는 …를 뱉어낼 줄도 안다. 뭐 둘이…. …했으니 …들을 만들어볼까 생각 중이다. 물론 정신 조작을 걸어서….」 「큰일이다. 설마 무한한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마르가리타가 죽는다면.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 오늘부터 연구에 들어갈 생각….」 「여러 방향으로 시도해봤지만 연구에 진척이 보이지 않는다. 홧김에 부하 놈 한 명을 죽여버렸는데, 설마 여기서 길이 보일 줄은 몰랐다. 역시 그냥 죽으란 법은 없지. 인간을 제물로. 인간이 더 필요하다. 지금 있는 놈들 가지고는 부족해도 너무 …하다. 나는 도시를 나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밖에서 인간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부하들이 …하다.」 「…가 부족하다 남아있는 부하들을 모두 죽일까 고민할 즈음 싱싱한 인간 10명이 들어왔다. …이다. 하지만 곧바로 죽여서는…. 이놈들을 어떻게든 …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이란 거에 …한단 말이지. 그렇다면 지금 내게 …한 건….」 「감옥을 둘러보는 중에 감히 몰래 통신을 시도하는 사용자를 발견했다. 마르가리타를 살리는 …때문에 신경을 …있지만, 설마 귀에 …를 꽂았을 줄이야. 재밌는 발상이기는 했다만 본보기로 반으로 …버렸다. 마침 마르에게 먹일 …도 떨어지고 있었으니….」 「오늘 추가로 14명…. 쳐놓은 …에 걸린 모양…. 하지만 아직도 부족….」 탁. “후유.” 한숨을 내쉬며 책을 덮은 후, 나는 책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앞부분은 마르가리타의 조교 일지를 다룬 거지발싸개 같은 내용이 주를 이루었지만, 뒷부분은 마법사나 연금술사의 입장에서 보면 읽을만한 것들이 있었다. 특히 비비앙의 경우는 같은 거주민이니만큼 마볼로가 적어놓은 연구 경과들을 보면 큰 도움을 얻을지도 모른다. 수준 높은 마법사가 흘리듯 써놓은 한마디라도 실력을 상승시킬 수 있는 발판이 될 수도 있으니까. 잠시 동안 고민했지만, 결국 책을 잡았던 손에 힘을 풀고 말았다.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가져가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먹은 후 나는 벽면으로 걸음을 옮겨 빼곡히 꽂힌 책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형. 뭐 건지신 거라도 있으세요?” “몇 개는. 근데 확실하지는 않아. 너는?” “개털이에요. 책상이나 서랍 같은 데는 전부 뒤져봤는데 도저히 쓸만한 게 보이지를 않네요.” “내가 더 살펴볼게. 그럼 뒤에 있는 수정구나 뭔지 확인해봐.” 책들의 제목을 훑으며 대꾸하자 안현은 “네 형.” 이라고 대답하고 내 뒤로 걸어갔다. 약 5분정도 흘렀을까. 몇 개의 책을 뽑으며 하연에게 도움이 될만한 책들을 차곡차곡 쌓던 도중이었다. 문득 등뒤로 야릇한 신음이 귓가로 흘러 들었다.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당신이 이런 짓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어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당신이 진정으로 내 동료라면….) “어, 어.” “안현? 거기서 뭐해?” “혀, 형. 이, 이거….” 안현은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뭔가 하고 봤더니, 가지런히 놓인 여러 수정구에서 영상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책장에 있던 것들은, 영상 재생 수정구였다. “너 저거 건드렸어?” “네, 네. 보니까 영상 재생 수정구들이길래 그냥 눈에 보이는 거 몇 개 틀어봤는데…. 갑자기 이상한 장면들이….” (부탁이에요 마볼로! 아직 늦지 않았어요. 지금이라도 죄를 뉘우치고 저희들을 풀어준다면….) (지금 이 비열한 행동이 즐거운 건가요? 실망이에요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제가 사람을 잘못 봤어요. 정말로 구제가 불가능한 쓰레기였어요. 비록 제 몸을 가졌다고는 해도, 제 마음까지는 가질 수 없을 거예요.) (싫어, 싫어! 괴물들한테 당하기는 싫어! 로이드! 도와줘요 로이드으!) (흐아앙…. 흐아아앙….) ‘기대한 내가 병신이지.’ 나는 비로소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를 그렇게 쉽게 죽여버린 것을 살짝 후회했다. 설마 기록도 모자라 영상까지 저장해뒀다니. 이건 벨페고르를 넘어서는 행동으로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 광기 어린 집착에 오소소한 소름을 느끼며, 나는 곧장 수정구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안현이 이곳 저곳 틀어놓은 수정구는 계속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그라치아! 구하러 와줬군요! 정말 고마…. 그라치아…? 마…볼…로?) (로이드으으으으으!) (헤…. 헤에….) (흐, 으, 으, 응! 마, 볼, 로, 님! 아앙! 좋아요오! 더, 더 세게…! 하앙! 아아앙!) “형. 이거 설마 형이 말씀해준 요정 여왕 아니에요?” “안현. 뒤로 물러서.” “네, 네?” “내 뒤로 물러나라고. 다친다.” 담담히 내뱉고, 벽면의 정 중앙에 섰다. 마침 앞에서 중간 열에 틀어진 수정구에는, 마볼로를 꼭 껴안고 열심히 엉덩이를 흔들고 있는 마르가리타가 재생되고 있었다. 나는 오른 다리의 무릎을 앞가슴에 닿을 정도로 구부렸다가, 마력을 한껏 일으키며 허공을 향해 다리를 강하게 차올렸다. 펑! 앞발을 강하게 내지른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한번 크게 일렁이고, 이내 강렬한 충격파가 벽면의 전체를 덮쳤다. 와장창! 쨍그랑! 이윽고 벽면에 붙어있던 책장이 여러 조각으로 쪼개지고, 충격의 여파로 놓여있던 수정구들이 모조리 박살 난다. 충격으로 튄 파편들은 허공으로 비산하더니 곧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르르…. 사르르…. 이윽고 튀었던 파편들이 모두 바닥으로 가라앉을 무렵, 나는 들고 있던 책 전부를 안현에게 넘겨주었다. “안현. 이거 전부 가방에 넣어놔.” “아. 네 형. 그런데요….” “?” “방금 수정구에 나온 여자 있잖아요. 진짜 요정 여왕이에요?” 허둥지둥 가방 속으로 책을 쑤셔 넣는 안현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이었다. 다다다다! 문득 바깥쪽에서 누군가 급히 복도를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가만히 방문을 쳐다보고 있자 이내 한 손에 카타나를 들고 잡아먹을 듯 쳐들어오는 이유정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굉장히 다급해 보였는데, 나와 안현이 멀뚱히 서있는걸 보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유정아 왜 그래?” “오, 오빠. 괜찮아? 갑자기 뭔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려서.” “아아. 별일 아니야. 아무 이상 없어.” “그렇구나….” 이유정은 바닥을 물들인 수정 파편들을 보며 어색한 표정을 내비쳤다. 그러다가, 곧 뭔가 생각난 얼굴로 번쩍 고개를 올렸다. “아 오빠. 4층 탐사 끝났어?” “거의. 너는?” “나랑 연주 언니 모두 끝냈어. 그리고 연주 언니가 빨리 오빠 모셔오래.” “그래? 뭐 발견이라도 했대?” “응. 나 하나 발견했고, 연주 언니 하나 발견했고. 근데 2층 먼저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 확신에 찬 이유정의 목소리에 일단 4층 탐사는 이쯤에서 끝내기로 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4층에 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다른 층에 있었던 모양이다. 이유정의 독촉 어린 시선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후, 나와 안현은 그녀를 따라 방문을 나섰다. *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 2층에 다다르자, 방 앞에서 팔짱을 끼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고연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우리들이 내려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리고는 한쪽 손을 빼어 흔들었다. “오셨네요. 4층에서는 뭐라도 좀 건지셨나요?” “아주 없지는 않지만 조금 두고 볼 것들입니다. 고연주는요? 2층에 뭐가 있던가요?” “호호. 급하기도 하셔라. 이 방안에 있으니 직접 와서 보세요. 아마 깜짝 놀라실 거예요.” 내 말투나 걸음에서 조급함이 느껴졌는지, 고연주는 잔잔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윽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선 나는 곧바로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 내부는 깨끗했다. 일부러 이곳만 깔끔하게 청소하기라도 한 듯 문틀을 기준으로 내외의 바닥 색깔이 차이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미 제 3의 눈은 활성화한 상태. 이윽고 시선을 위로 올리고, 동시에 등뒤로 애들이 빼꼼 고개를 내미는 기척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칼리고 아브락사스(Caligo Abraxas)』 『파라디수스 플레이트 메일(Paradisus Plate Mail)』 『오로쓰로스 롱 부츠(Orthros Long Boots)』 『찬란한 섬광 : 라우라 필리스(Laura Phylis)』 『위그드라실의 나뭇잎을 이어 만든 옷』 『리자 부츠(Rhiza Boots)』 『순결의 머리띠(Headband of Innocence)』 『찢겨진 요정 여왕의 날개(12쌍)』 『푸른 달의 마도사(Book, Magician of the Blue Moon, Secret Class)』 『여명의 검투사(Sword, Gladiator of the Dawn, Rare Class)』 『섬백(蟾魄)』 『티르빙(TyrFingr)』 방 내부를 훑자마자 온갖 정보를 담은 메시지들이 허공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얼떨떨한 마음에 그것들을 멍하니 보자, 옆에서 고연주의 나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기하죠? 딱 봐도 심상치 않은 기운들이 느껴져요. 아무래도….” “이건….” “축하해요, 수현.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시더니, 이번 원정도 대박을 터뜨리셨네요.” 고연주의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비로소 하나를 발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후유. 원래는 방 안을 들여다보는 곳에서 끊으려고 했는데 그러면 독자 분들이 저를 매우 치실 것 같아서요…. OTL 저번 회는 심심하셨겠지만, 나름대로 필요한 회였습니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단순히 쉬어가기나 완급 조절은 아니었어요. :) 아마 계속 읽다 보시면 “아.” 하시는 날이 오실 거예요. 하하하. 아. 그리고 연참을 못한 저를 용서하세요. 대신 오늘 분량 빵빵~하게 넣었어요. ^_ㅠ 아, 도시는 2~3회 안으로 돌아가지 싶습니다. 『 리리플 』 1. 신화의재현자 : 오잉. 미월야 님, 한방모드 님이 보이실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1등에서는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하하. 1등 축하 드려요! :) 이번 회도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2. 디반 : 도시로 돌아가고 나서요. 후후. 3. 플룻 : 퇴고가 손에 붙어야 하는데, 노력 중에 있습니다. 하하. 그리고 오전이나 오후에 약속이라도 하나 잡히면 정말 힘들어요. ㅜ.ㅠ 4. 24소설 : 지금은 조금 줄였습니다. 600회 정도? 아마 많이 가도 700회 안으로 완결 나지 싶습니다. 완결을 조금 많이 앞당겼거든요. 5. 사람인생 : 정말 어쩌다 그렇게 팍 꼬이셨는지요…. 토닥토닥. 힘내세요. ㅜ.ㅠ 6. 추락한날개 : 그냥 무엇을 얻었는지 만 보여드리고, 설명은 도시로 돌아간 후 차차 보여드릴 예정입니다. 하하하. 다음 회는 잘하면(?) 협곡을 나간 일행들을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7. 고장난선풍기 : 다음 회에 애기 카오스 미믹 등장 예정입니다! :) 8. LOVE가을 : GP 100만을 모은 사용자가 없습니다. 아틀란타 공략 전까지는 굉장히 얻기 힘들어요.(그렇다고 공략하고 나서도 쉽다는 건 아니지만요.) 후후. 9. 기분임 : 쿠폰 감사합니다. _(__)_ 앞으로도 더욱 재밌는 내용으로 보답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10. 유리켄느 : 헐! 대, 대단하십니다. 지인 분이 누구신지 궁금할 정도에요. 그렇다면 도영록(황금사자 털보 남성) + 박동걸(통과의례 배불뚝이 남성)은 어떠신지요! 이 조합에 고견을 들어보고 싶습니다!(퍽퍽!) 11. 홍쎄바 : 1. 체력은 수현의 특성화 능력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2. 수현의 잠재성은 이미 전부 개발된 상태입니다.(1회 차 육체를 로드. 그래서 몸에 상처도 남아있는 거죠. 겉으로는 1년차지만, 이미 10년차 사용자나 다름없습니다.) 12. 센서티브 : 지금 기준으로 2년 뒤로 보시면 됩니다. :) 그리고 아쉽지만 '전체적인 흐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업적이 될 수 없습니다. 하하.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73 / 0933 ---------------------------------------------- 귀환 중 일어난 특별한 일 고연주의 말에 애들은 일제히 탄성을 터뜨렸다. 특히 벽에 걸려있는 장비들 중, 몇 개는 스스로 빛을 반짝일 정도였다. 그 고운 자태를 보며 나를 제외한 세 명은 넋을 잃은듯한 얼굴로 용사들의 유물을 응시했다. 그러나 막상 발견하자, 내 속내는 생각보다 담담했다. 왜냐하면 애초에 마지아(Magia)로 온 이유가 이것들을 얻기 위함에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기공창술사’ 하나만 보고 갔었던 뮬에서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성과를 거두었을 때 더욱 놀라운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객관적으로 보면 대박은 맞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차피 예상했던 범주 안에 있었다. 기분이 좋을지언정 넋을 잃을 정도의 커다란 감흥은 일지 않는다. 해서, 나는 아직도 멀거니 서있는 클랜원들을 보며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쳤다. 짝짝. “언제까지 넋 놓고 바라만보고 있을 겁니까.” “어머. 내 정신 좀 봐.” 손뼉을 치며 주의를 환기시키자, 고연주가 손등으로 입을 쓱 닦으며 중얼거렸다. 그제서야 애들도 정신을 차리고 머쓱한 표정들을 지어 보였다. 탐험 끝의 보상은 언제나 사용자들을 기분 좋게 만들어준다. 아까까지만 해도 묘하게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아주 약간이나마 풀리기 시작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였다. “오라버니!” 문득 문 밖 1층에서 안솔이 크게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청각을 돋우고 귀를 기울이자 곧이어 “흐~읍.”하는, 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키는 기척이 느껴졌다. “다른 사용자 분들이 깨어났어요오!” “…안현. 이유정.” “네 형.” “응 오빠.” 둘은 동시에 대답했다. 그러자 둘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고는, 또 동시에 인상을 구겼다. 둘의 얼굴에는 왜 따라 하냐는 표정이 한껏 드러나있었다. “너네 지금 어디보고 있냐. 아무튼 유정이 너. 아까 3층에서도 발견한 곳이 하나 더 있다고 했지?” “으, 응. 꼭 연구실 같았어. 금방 나오느라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그럼 너네 둘이 먼저 올라가있어. 나랑 고연주는 여기 정리하고 바로 올라갈 테니까.” “알았어 오빠.” “가방 하나 줘. 그리고 가면서 안솔한테 20분 안에 내려간다고 말해주고.” 안현은 약간 아쉬운 얼굴로 내게 가방을 건네주었다. 이것들을 직접 챙기지 못하는데 미련이 남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내 둘은 설레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아마 새로운 성과를 보러 간다는 사실에 또 다른 기대감이 돌고 있을 것이다. 이윽고 빠른 발걸음으로 문 밖으로 나가는 둘을 보다가, 고연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얼른 이곳을 정리하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막 떼려던 입술을 도로 붙일 수 밖에 없었다. 고연주는 굉장히 무르익은 표정으로 나를 곱게 흘기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시는 거죠.” “후유, 수현도 참~. 내가 못살아 정말. 평소에는 무심하다가, 꼭 이럴 때 귀엽다니까요.” “?” “모르는 척 하지 말아요. 저랑 둘만 남고 싶어서 그러셨다는 거 다 알고 있어요. 호호.” 고연주는 예쁘게 웃으며 살살 눈웃음 쳤다. 어이가 없었다. 해서, 그 모습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숨으로 화답해주고 묵묵히 벽면으로 이동했다. 이럴 때는 무시가 정답이었다. “쿡쿡.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내가 가장 먼저 챙긴 것은 나뭇잎을 이어 붙여 만든 옷이었다. 아까 위그드라실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걸로 보아 소싯적 요정 여왕이 입고 다니던 옷이 분명했다. 확실히 옷 전체에서 풍기는 숲의 청량하고 싱그러운 향기는 참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 그 반응은 뭐에요 수현!” “헛소리는 그만하고 장비나 챙겨요.” 고연주의 말투에는 발끈했다는 기색이 잔뜩 서려있었다. 담담히 대꾸해주며, 나는 옷을 내 앞으로 들어 보였다. ‘입고 다니면 시원하기는 하겠다.’ 옷은 전체적으로 일체형 원피스 형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순수 나뭇잎으로만 이루어졌다 보니 중간중간에 구멍이 보이는 곳이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 아닌 문제였다. 쇄골과 가슴 윗부분은 아예 훤히 드러나 있었고 아래도 속옷 부분을 간신히 가려주는 수준이었다. 아래는 엄청 짧은 핫팬츠를 보는 기분이었다. “흑흑. 변했어. 죽일 정도로 갖고 싶다고 했으면서. 이제 잡혔다고 소홀해지는 것 봐.” 요정 여왕의 주무기는 활이었다고 한다. 그럼 궁수로서의 소양이 있을 터. 거기에 생각이 미치는 순간 문득 임한나에게 생각이 미쳤다. 어떻게 보면 그녀는 요정 여왕과 상당히 비슷한 분위기를 흘리고 있었다. 청초하면서도 가련한 얼굴. 희고 고운 피부. 별빛 같은 눈망울. 상냥한 기품. 그리고 고연주보다 클지도 모르는…. 아, 음.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 옷을 입은 임한나의 자태가 자꾸만 머리 속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결국 옷을 내리고 머리를 크게 털어 잡스러운 생각을 털어내려는 찰나, 등뒤로 고연주가 내는 서글픈 목소리가 귓가를 쿡쿡 찔렀다. “엉엉. 한나를 소개해주는 게 아니었어.” “…….” 마음 같아서는 왜 임 마담 얘기가 나오냐고 항의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순간, 섬찟한 기운이 등골을 서늘하게 훑고 올라오는걸 느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이것저것 챙긴 듯 한아름 들고 있는 고연주를 볼 수 있었다. 우는 소리는 꾸며서 낸 모양인지 그녀의 입 꼬리는 끝이 살짝 올라가있는 상태였다. 당했다. “천하의 그림자 여왕이 어쩌다가 독수공방하는 신세가 됐는지. 수현. 정말 나 기다리게만 할 거예요? 아니죠?” “솔아! 조금만 기다려! 곧 갈 테니까.” “응? 까르르. 그래요. 고마워요. 그럼 수현의 말을 믿고 기다릴게요.” 타이밍 좋게 안현이 1층을 향해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이놈이 하필이면. “흐흥, 흐흐흥. 하연씨한테 자랑해야지~.” 아니 그전에.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면 안현의 말을 내가 대답한 것으로 치환시킬 수 있는 걸까. 태클을 걸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여기서는 참아야 했다. 임한나 얘기가 나왔을 때 돌아보지 말고 의연하게 대처했어야 했다. 눈치가 100단인 그녀인 만큼, 또 어떤 것을 걸고 넘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을까? 결국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감지를 통해 외부에 누가 있는지 확인한 후, 나는 가방을 열고 차분히 고연주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눈을 찡긋거리더니, 들고 있는 것들을 넣으려는지 살짝 몸을 숙였다. 그리고 그 순간. “응…? 수….” 나는 재빠르게 각도를 계산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입술을 목표를 신속하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고연주의 얼굴에 당황이 차오르고, “읍…!” 쪽. 이윽고 내 입술에, 뭔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살며시 겹쳐졌다. * “아 오빠! 왔어?” “그래. 2층에 있던 건 다 챙겨왔다. 여기는 어때?” “어휴 말도 마. 마침 잘 왔어 오빠. 약간의 금이랑 보석이 있길래 일단 그것부터 집어넣었는데, 가방이 다 차버려서. 아직 물품은 집어넣지도 못….” 쉼 없이 이어지던 이유정의 말은, 내가 메고 있는 마법 가방을 보자 뚝 멈추고 말았다. 나 또한 가방에 있는 대로 쑤셔 박았기 때문에 이미 거의 닫히지가 않을 정도였다. 아무튼 유정의 시선이 뜻하는 바가 뭔지 알 것 같았기에, 메고 있던 가방을 앞으로 돌려 들었다. “괜찮아. 일단 물품들은 어디에 놨는데?” “하나 빼고 바닥에 다 모아놨어.” 이유정의 말대로 바닥에는 여러 물품들이 가지런히 모여 있었다. 다채로운 색깔을 띠는 물약, 손바닥 크기만한 나무상자, 검붉은빛을 띠는 이상한 덩어리 등등. 그것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하나를 뺐다는 소리가 다시 고개를 들어올렸다. “하나는 왜 빼놨어.” “그게….” 이유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쪽 방향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그녀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눈을 살짝 크게 뜨고 말았다. 그곳에는 제법 신기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거의 사람 얼굴만한 알 하나가 파란 막에 휩싸인 채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알의 주위로 파란 구슬 하나가 시퍼런 빛을 내뿜으며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중이었다. “뭔지 궁금해서 손은 넣어봤는데 그냥 부담 없이 잡히더라. 그래도 혹시 몰라서 그대로 놔뒀어.” “잘했어.” 나는 대충 대꾸해주고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요정(여왕)의 알』 『마볼로의 보존용 마력 구슬』 ‘여왕의 알이라. 여기서 알을 얻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저게 뭔가 고민하고 있자 문득 4층에서 읽었던 기록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마르가리타는 임신을 한번 했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그렇다면 아마도 이 알은 그녀가 낳은 것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메시지 정보에도 요정 여왕의 알이라고 되어있으니까. ‘부쳐먹든 깨먹든 일단은 가져가는 게 낫겠다.’ 결국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알 구경 삼매경에 빠진 둘에게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그림자 여왕님. 이게 바로 제가 발견한 것입니다. 꼭 알처럼 보이는군요.” “호호…. 그렇구나….” “후후. 그렇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호호…. 알…. 좋지…. 좋고말고….” “여, 연주 누님?” “호호…. 알은…. 사랑의 결실인걸…. 나도 수현의 알을….” 고연주가 다행히 뒷말을 흐렸기에,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다. 그래. 아마 못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직도 홍조가 가시질 않은 상태였고, 사정을 모르는 안현은 그저 뜨악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한숨과 함께 가방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뒤적거렸다. 아까 챙겨놓은 책 몇 권과 여러 장비들의 감촉이 느껴졌다. 더욱 아래로, 끝까지 넣자 비로소 뭔가 물컹한 것이 손에 닿았다. 그것을 지체 않고 잡아 올리자 이유정이 옆에서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쳐다보았다. “오빠. 그거 설마 카오스 미믹? 챙겨온 거야?” “응. 잘 알고 있네.” “아빠야, 엄마야, 애기야?” “애기.” 문득 바로 바로 대답을 하는 내가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졌다. 세상에 ‘애기 카오스 미믹’이라니. 괴물 주제에 뭔가 귀엽잖은가. 고개를 숙여 카오스 미믹을 바라보자 주둥이 부분(입구)을 딱 다물고 있는 녀석이 보였다. 괴물로서의 힘은 대부분 상실했지만 녀석을 통제할 수 있는 ‘붉은 보석’은 아직 새로 갱신하지 않은 상태. 즉 간단히 말해서 개개고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카오스 미믹의 양 주둥이 부분을 잡은 다음, 단번에 쫙 찢어 벌렸다. “삐엑!” 갑작스럽게 울리는 비명 소리에 놀랐는지, 일행들은 다들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자, 살펴보는 건 나중에들 합시다. 도시로 돌아간 다음에 해도 충분하잖아요? 일단 보이는 건 모두 챙겨 넣읍시다.” “삐에에…. 삐에에에….” “시끄러워 이 녀석아.” 퍽. “삑!” 카오스 미믹은 계속해서 구슬프게 울어 젖혔다. 하지만 조용히 하라는 식으로 한대 세게 때리자, 이내 울음을 뚝 멈추고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비로소 시끄러운 소음이 사라지자 나는 울고 있는 애기 카오스 미믹을 이유정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그것을 몇 번 쓰다듬다가, 이내 내 눈치를 슬슬 살피며 물건들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삐…. 삐…. 삐이….” 그렇게 우리들은 카오스 미믹의 흐느낌 속에서 하나 둘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 물건을 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약 20분 정도의 시간을 할애해 우리들은 2층과 3층에 있던 물건을 싹싹 쓸어 담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하나같이 빵빵 해진 가방을 갖고 내려오자, 계단 아래서 이리저리 서성이는 김한별이 보였다. 그녀 또한 계단을 내려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곧바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 오빠. 탐사는 끝나셨어요?” “응. 1층은 어때.” “말씀하신 대로 장식물은 다 끊거나 떼어내서 가방 안에 넣어놨어요.” “잘했어. 그리고?” “그…. 이런저런 장비들을 좀 많이 발견했는데요. 아무래도 여기 사용자들이 사용하던 것들 같아요.” 김한별은 아직 그것들을 넘기지 않았다고 덧붙이며 조용히 내 대답을 기다렸다. 사용자들의 장비라. 확실히 알몸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그들의 장비는 다시 돌려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미 사망한 사용자들의 장비까지는 돌려줄 생각이 없었다. ‘구출’에 관해서 홀 플레인 의 관례는 상당히 특별한 편이다. 물론 도의상 돌려주는 일도 종종 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도의였다. 생존해있는 사용자들에게 장비를 돌려주는 것만해도 충분히 도의를 지켰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남은 장비들에 대해서는 머셔너리가 1차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김한별은 확실히 영리했다. 아마 안솔이었다면 내 허락은 구하지도 않고 이리저리 부산을 떨며 사용자들에게 전부 건네줬을 것이다. 어쨌든 아까부터 대답을 기다리는 김한별을 보며,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원래는 모두 가져도 크게 흠 될 것은 없지만, 이러나저러나 그들은 이스탄텔 로우의 산하 클랜의 클랜원들 이었다.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일단 구조된 사람들이 입고 있던 옷은 전부 넘겨줘. 알몸으로 밖으로 나갈 수는 없잖아. 그리고 다른 건 주지 말고 전부 챙겨놔…. 아, 그 맨 처음 깨어난 사람 기억하지? 혹시 장비 중에 미희라는 사람 장비도 남아있으면 그것도 같이 건네주고. 그 사람한테만 말이지.” “다른 사람들도 달라고 하면 어떡하죠?” “그렇게 말할 리는 없을 거다. 그 정도는 다들 알고 있을걸? 도시로 돌아가서 해당 클랜에서 다시 사들이던가, 아니면 우리들이 자체 처분해야지.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네 오빠.” 김한별은 온순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계단에서 얘기를 끝낸 우리들은 곧 홀의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유적 밖으로 벗어날 차례였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죄송합니다. 오늘 하루만 리리플을 쉬도록 하겠습니다.(다음 회 합쳐서 같이 할게요. ㅜ.ㅠ) 오늘 두통이랑 배탈이 너무 심해서요. 차가운 것을 너무 많이 먹었는지, 아니면 선풍기를 틀고 자서 그런지. 이게 말로만 듣던 냉방병일까요…. 조금만 깊게 생각하려고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듯 아파오더라고요. 하루 쉴까 하다가 그래도 하루 쉬면 계속 쉬고 싶어질 것 같아서…. 그냥 조금 힘을 빼더라도 꾸역꾸역 적는 게 나을 것 같았습니다. 독자 분들의 양해를 부탁 드리며, 이번 회도 재밌게 감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_)_ 0274 / 0933 ---------------------------------------------- 귀환 중 일어난 특별한 일 2층과 3층에서 얻은 고대 물건들은 단연 압권이었다. 그러나 그 외의 성과도 절대로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유니콘의 뿔과 시체는 일단 보류였지만 질서의 오르도와 요정 여왕의 눈물만 해도 엄청난 값어치를 지니고 있는 것들이었다. 오죽하면 김한별이 1층에서 싹싹 긁어낸 고급스러운 장식품들이 하찮게 보일 정도였다. 지금 당장이라도 하나하나 붙잡고 정보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나도, 그리고 클랜원들도 한시라도 빨리 모니카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아까부터 참고는 있었지만 화정을 사용함으로써 몸에 걸리는 부담이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휴식을 부르짖는 몸의 요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서라도 도시로의 귀환을 우선한 것은 옳은 결정이었다. 1층 계단에서 김한별과 입을 맞추고, 우리는 곧바로 홀의 중앙으로 이동했다. 안솔의 말대로 깨어있는 사용자는 총 4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구조한 사용자들이 본래 장착하던 장비들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아직 깨어나지 못한 사용자들의 장비는 깨어난 사용자들의 도움을 받아 알아내, 손수 입혀주었다. 그래도 경우는 있는 사용자들인지 그들은 아무 조건 없이 장비를 넘겨주는 나의 결정에 상당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더욱이 맨 처음 깨어난 남성에게는 유품을 명목으로 미희라는 여성이 사용하던 장비도 골라내라고 하자, 거의 눈물을 흘릴 듯 한 얼굴로 연신 허리를 숙였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남은 상당량의 장비를 전부 챙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무런 불만도 표시하지 않았다. 깨어난 사용자들 중 체력이 엄청나게 떨어진 2명은 부축을 해야만 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용자들은 여유가 남는 클랜원들이 업고 가기로 했다. 그렇게 진열을 정비한 후 처음 들어왔을 때 봤던, 통로에 서있던 마법사 동상의 보석을 떼는 것을 마지막으로 우리들은 드디어 성을 벗어날 수 있었다. 원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모니카로 무사 귀환을 해야 하는, 매듭을 지어야 할 마지막 단추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 졸졸졸. 졸졸졸. “와, 와아! 오라버니! 저것 좀 보세요!” “응?” “아까 멈춰있던 강물이 다시 흐르고 있어요…!” “아, 그러네.” 안솔의 말대로였다. 우리가 처음 들어왔을 때 멈춰있던 강물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맑은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흘러가고 있었다.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강물을 보고 있는 와중, 등 뒤로 나를 부르는 고요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여성 사용자 한 명을 부축하고 있는 김한별이 보였다. “저기…. 오빠. 한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응? 뭔데 한별아?” “계단에서 내려왔을 때부터 세어봤는데요. 우리들 내려온 지 약 3, 40분은 지나지 않았나요.” “대충 그 정도 됐을걸.” “그런데 아까 오빠가 만들어놓은 입구도 보이지 않고…. 그리고 보호막도….” 김한별은 백한결을 한번 흘끗 살폈다가 다시 내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자 그녀가 뭘 걱정하고 있는지 눈치 챌 수 있었다. 들고 있던 유니콘의 시체를 한 번 고쳐 잡고, 나는 안심하라는 말투로 대답해주었다. “아. 이제 환각의 협곡에서는 더 이상 보호막은 필요하지 않을 거다. 강물이 다시 흐르는걸 보니까 이미 결계는 풀린 것 같다.” “정말요?” “응. 멈췄던 강물이 다시 흐르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보는 게 옳겠지. 아마 경계 자체도 풀렸을 거야. 그래서 입구가 안 나오는 거고.” “아…. 그렇구나. 그럼 이대로 그냥 올라가실 계획이세요?” 김한별의 말에 시선을 내려 양 팔에 들린 유니콘을 바라보았다. 이건 생각 좀 해볼 문제였다. 지금 이대로 걸어간다면 우리들은 약 50분 안에 협곡 위로 올라갈 수 있다. 솔직히 지금껏 걸어온 40분 동안 알아서 찾아와줄 줄 알았는데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유니콘의 시체를 그냥 가지고 갈 것인가, 아기 유니콘에게 시체를 돌려줄 것인가. 원래는 후자를 선택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가능성이 높다고 해도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다. 추측 하나만 믿고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유니콘을 주구장창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와 김한별의 대화를 들었는지 강물을 보고 약간 일었던 소란이 바로 잦아들었다. 얼른 도시로 귀환하고 싶다는 부상자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장비도 챙겨줬겠다, 내 결정에 불만이 있으면 알아서들 돌아가면 되는 일이었다. “음….” 계속 걸으면서 고민을 했지만 결국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이것은 어떻게 잘만 만져보면 유니콘과 연을 맺을 수도 있는 기회였다. 나는 손가락으로 유니콘의 배 부분을 몇 번 두드리다가,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바로 올라가지는 않습니다.” “…….” “도시로 들어가기 전 머셔너리 클랜원들은 아기 유니콘을 한 번씩 봤을 겁니다. 일단 그 장소로 이동한 후 그 자리에서 30분 정도 대기하겠습니다. 만약 30분이 지나도 시체를 찾는 유니콘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바로 도시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경력 있는 사용자들이라면 본인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모니카까지의 거리는 최소한으로 줄여도 10일이다. 더구나 부상자들을 달고 가는 상황이니 10일보다 더 걸릴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고작 30분 늦게 출발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오십보백보였다. 이견이 있으면 말하라는 의미로,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몇몇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그늘지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클랜원들은 물론 사용자들도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내 말에 수긍했음을 알렸다. 그 반응들을 확인하고, 목소리를 조금은 부드럽게 내려고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아마 2, 30분 정도 걸으면 해당 지점이 보일 겁니다. 그럼 그쪽으로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확언하듯 내뱉은 후 나는 다시 전방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기 유니콘을 만났던, 내가 돌을 떨어뜨렸던 지점을 머릿속으로 더듬으며 행군을 재개했다. * 예상대로 20분 정도 직진하자 우리들은 유니콘을 만났던 장소에 다다를 수 있었다. 아기 유니콘이 깔려있던 지점의 바위는 물가로 던졌지만 다른 바위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30분의 휴식을 지시했다. 깨어난 사용자들은 정신을 차렸을지는 몰라도 몸은 아직 완전하게 회복된 상태가 아니었다. 덕분에 안솔만 잔뜩 바빠졌지만, 그녀는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열심히 주문을 외우고 치료했다. 나 또한 잘 보이는 곳에 유니콘의 시체를 놓아둔 후 주변 바위에 걸터앉아 몸을 쉬게 했다. 앞으로 못해도 10일 동안 행군을 해야 한다. 예전 같았으면 식후 운동거리도 안되는 일이었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어느 정도 부담으로 다가올 만큼, 스스로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저 클랜 로드의 입장으로써 굳이 내색하고 있지 않을 뿐이었다. “머셔너리 로드님.” “후…?” 휴식 중 태우는 연초가 꿀맛이라고 느낄 즈음, 중후한 남성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성에서 처음 깨어났던 남성 사용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미소를 부드럽게 머금고는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슬픔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가만히 그를 응시하고 있자, 남성은 곧 꾸벅 고개를 숙이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4년차 사용자 신재룡이라고 합니다. 다시 한 번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다 의뢰 받아서 하는 일인데요 뭐. 아무튼, 0년차 사용자 김수현입니다.” ‘사용자 정보.’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신재룡(4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사제(Normal Priest Expert)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여울가녘(Rank : C Plus) 5. 진명 · 국적 : 불굴의 노력, 굽힐 수 없는 의지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42) 7. 신장 · 체중 : 176.2cm · 73.8kg 8. 성향 : 선 · 열정(Good · Passion) [근력 78] [내구 82] [민첩 74] [체력 90] [마력 84] [행운 68] < 능력치 비교 > 1. 김수현 : 544 / 600 (능력치 포인트가 12 포인트 남아 있습니다.) [근력 96(+2)] [내구 92] [민첩 98] [체력 72] [마력 96] [행운 90(+2)] 2. 신재룡 : 486 / 600 (능력치 포인트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근력 78] [내구 82] [민첩 74] [체력 90] [마력 84] [행운 68] 나는 신재룡의 손을 맞잡으며, 그의 사용자 정보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의 나이를 보고 한 번 놀랐고, 그의 클래스를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아니, 놀랐다기보다는 재밌다고 해야 정확할까. 가지고 있는 능력치 정보가 준수한 것은 둘째치더라도, 사제를 선택한 게 이해가되지 않았다. 물론 마력도 나름 괜찮은 수준이고 클래스 선택은 자유라고는 해도…. 아마 근접 계열 클래스를 가졌다면 지금쯤 깨나 이름 날리고 있을 텐데. ‘하다못해 전투 사제(Monk)도 아니고….’ “정말 0년차 이셨군요. 세상에 0년차 사용자가 클랜을 만들고 그 유명한 그림자 여왕을 클랜원으로 두다니. 정말로 놀랐습니다.” “어, 알고 계셨나요?” “예. 저희들을 치료해준 귀여운 꼬마 아가씨가 이야기해주더군요. 두서가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법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하하하.” “하하…. 그렇군요.” 지금 당장에 안솔의 옷깃을 붙잡고 도대체 뭘 얘기했냐고 짤짤 흔들고 싶었지만, 참을 인을 되뇌자 간신히 억누를 수 있었다. 이윽고 신재룡은 내 옆에 앉아 잠시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정중히 부탁했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이어진 신재룡과의 대화는 나름대로 괜찮았다. 나는 주제를 아는 사람을 어느 정도 좋게 보는 경향이 있다. 혹시라도 남은 장비를 돌려달라거나, 지금 바로 귀환을 해야겠다는 등의 얘기를 꺼냈으면 꽤나 불쾌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얘기는 일체 꺼내지 않았다. 구출에 대한 감사, 여울가녘 클랜의 원정 출발부터 붙잡히고 난 이후의 일까지의 간략한 설명 등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 와중에 미희라는 여성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는데, 신재룡이 홀 플레인에 들어온 이후 서로 마음이 맞아 가정을 꾸린 여성 사용자라고 했다. 소중한 이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슬픔을 삼키고 정확한 사리 판단을 하려는 태도가 참 괜찮아 보였다. “그럼 7명중 여울가녘 클랜원이 3명, 1차 구조대가 4명이라는 말씀이신데…. 클랜의 타격이 제법 클 것 같습니다.” “큰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해체나 다름없습니다. 저희는 총 인원이 스물도 안 되는 소규모 클랜입니다. 그래도 지금껏 열심히 노력했다는 자부심 하나만 가지고 아등바등 살아왔는데…. 원정 한 번에 친구도, 사랑도. 잘못된 선택 한 번에 4년간 쌓아온 모든 게 와르르 무너진 기분입니다.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목숨을 건진 것을 위안으로 삼고는 있지만….” 신재룡은 내게서 얻은 담배를 피우며 씁쓸하게 웃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래도 신재룡의 사용자 정보는 쓸만한 수준이었다. 다시 하고자하는 의지만 있다면 어딜 가든지 굶어죽지는 않으리라. “그래도 이스탄텔 로우 클랜의 산하에 있는 만큼 그쪽에서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상황이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을 거예요. 사용자들에 대한 복지하나는 바바라와 견줄 만큼 괜찮은 곳이니까 말이죠.”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래도 당분간은 좀 힘들 것 같네요. 제가 천성이 강하지 못한 놈이라 오늘 일을 묻으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하하. 하….” 신재룡의 한숨을 뒤로하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다 보니 30분은 훌쩍 지난 상태였다. 그리고 유니콘은 나타나지 않았다. 조금 아쉬운 마음은 있었지만 이제는 그만 출발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도시로의 귀환이 우선이겠군요. 아무래도 이만 출발하는 게 나을 듯싶습니다.” “어, 하지만 유니콘을 기다리신다고….” 자리를 털고 이어서자 신재룡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살짝 기지개를 폈다. “아까 말씀드렸던 30분이 지났거든요.” “아. 저희들 때문이라면 괜찮습니다. 더 기다려도 상관없습니다. 물론 도시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이곳에서 휴식하며 체력을 회복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혹시 저희들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제가 1차 구조대 사용자들과도 안면이 있습니다. 잘 이해시킬 자신이 있습니다.” 신재룡이 나를 따라 일어나며 미안함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히 그의 말도 일리는 있었지만 그래도 아까의 얼굴들은 얼른 도시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리고 굳이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동족의식이 강한 유니콘이 1시간이 넘게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미 협곡을 벗어났을 것이다. 즉, 시간 낭비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였다. 한동안 대화를 나누던 우리가 일어나는 것을 봤는지 클랜원들과 사용자들이 시선이 모인다. 그들을 보며 나는 이만 휴식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5분 후….” 자박자박. 그때였다. “출발하겠습니다.” 라고 말을 매듭지으려는 찰나, 주변으로 펼쳐놓았던 감지 외부에 어떠한 기척이 걸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혹시나 하는 얼굴로 그곳을 쳐다보았다. 내가 말을 하다 말고 오른쪽을 쳐다보고 있자, 사람들도 덩달아 내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뀨….” 자박자박 땅을 밟는 네 발이 달린 동물의 발소리. 그리고 아주 미약했지만, 익숙한 울음소리가 내 귓가에 똑똑히 걸렸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하하. 몸은 어제보다는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아직 배탈 증상이랑, 이따금 찾아오는 오한은 있지만 머리를 많이 나았어요. 진짜 어제는 조금만 깊게 생각하려고해도 머리가 지끈지끈거렸는데, 오늘은 그냥 평소보다 약간 무거운 정도네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내일 병원에 가고, 헬스도 더욱 열심히 다닐 생각입니다. 앞으로 건강관리도 열심히 할게요. :) 『 리리플(272회) 』 1. HammerofWar : 1등 축하합니다.(알고 보니 축하드립니다가 틀린 표현이었더군요. 덜덜합니다.) 하하. 어, 그런데 272회가 더 잔인했나요? ㄷㄷ. 그냥 기록과 영상만 보여드렸을 뿐인데…. ㅜ.ㅠ 2. 눈물강 : 후후 글쎄요. :) 장비 결산을 기대해주세요. 한 가지 힌트를 드리자면, 오르도의 사용 조건 중에 클래스 조건도 붙어있습니다. 3. [DeepBLue] : 섬백, 티르빙. 둘 모두 결과적으로 수현이 사용할 것은 아닙니다. 아마 여성 2명에게 갈 것 같습니다. :) 4. 유리켄느 :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죄송합니다. 보자마자 엄청 웃었어요. ㅋㅋㅋㅋ. 제가 멘붕을 드렸군요. 죄송합니다. _(__)_ ㅋㅋㅋㅋ. Ps. 퀴어물이 뭔가요? 5. GradeRown :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곧 그 끼(?)를 이어받은 후계자가 탄생할 예정입니다. 여담이지만, 이 후계자는 독자 분들이 탄생시킨것이나 다름 없죠. 하하하. 『 리리플(273회) 』 1. 눈물강 : 헐. 1회 2개의 리리플 이라니. 설마 다음회에서 1등을 하셨을줄은 몰랐습니다. 1등 축하드립니다. :) 네. 마르는 마르가리타의 애칭입니다. 2. 장마와방 : 하하. '개기다.'는 '개개다.'의 잘못된 표현이랍니다. 저도 처음 알았을때는 깜짝 놀랐어요. 3. 황걸 : 작품 추천이라. 하하.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 요즘 애정하는 작품이 하나 생기긴 했는데…. 4. dkeogu2001 : 네. 리리플입니다! 모니카의 유적 중 굵직한 것 하나 먹었으니, 이제 자리 잡고 슬슬 일 하나 벌여야죠. :) 5. Mable Fantasm : 닉네임이 멋있으세요. 마블 판타즘이라니. 왠지 모르게 부럽….(?) 해당 떡밥은 다음 회에 언급될 예정이기는 한데, 떡밥 내용이 변경 되었습니다. 지금 부수입 파트 소제목 바꿀까 고민 중이에요. ㅋㅋㅋㅋ.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75 / 0933 ---------------------------------------------- 귀환 중 일어난 특별한 일 오지 않을 줄 알았다. 협곡을 이미 떠났을 거라는 생각에 그만 출발을 알리려는 순간, 마치 거짓말처럼 유니콘의 기척이 잡힌 것이다. 문득 내 다리에 얼굴을 비비던 아기 유니콘의 모습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살짝 설레는 감정이 생기려는 찰나였다. 자박자박. 자박자박. 자박자박. 자박자박. 자박자박. 자박자박. 자박자박. 자박자박. ‘응…? 발자국 소리가…. 너무 많은데.’ 갑자기, 감지를 펼치고 있는 범위 안으로 매우 많은 수의 기척들이 느껴졌다. 이것은 결코 한 마리가 낼 수 있는 발소리가 아니다. 아무리 못해도 열 마리, 아니 어쩌면 스무 마리가 넘을지도 모른다. 가만히 오른쪽만 바라보고 있자 안현이 슬그머니 창을 잡는다. 그러자 녀석을 필두로 애들이 하나둘 무기를 집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손을 들어 올려 그만두라는 신호를 보냈다.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굉장히 강한 유니콘이기 때문에 괜히 자극할 필요는 없다. 사위를 살펴보자 희뿌연 안개 같은 기운이 주변을 서서히 잠식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오는 방향에 맞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주위를 감싸 안는 기운에 클랜원들도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사용자들을 부축해 내 뒤로 이동했다. 이윽고 저기 앞에서부터 발자국의 주인공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안력을 돋우자 더욱 확실히 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말과 비슷한 몸통을 가졌지만 온 몸을 덮고 있는 은백색의 털, 이마 정 중앙에서 솟아있는 은빛으로 빛나는 뿔, 그리고 칠흑빛을 띠고 있는 눈동자. 예상대로 나타난 유니콘은 한 마리가 아니었다. 앞에서 걸어오는 아기 유니콘을 선두로 무려 스물에 달하는 유니콘들이 무리를 지어 오고 있었다. 그리고 아기 유니콘의 옆으로는, 다른 유니콘들보다 몸집이 2배는 돼 보이는 성체 유니콘이 함께 걸어오는 중이었다. 척 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을 흘리는 게, 얼굴에 “내가 대장이요.”라고 써져있는 듯 했다. 그렇게 가만히 서있기만 한 상태로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계속해서 걸어오던 유니콘들은 비로소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와의 거리를 줄이고 있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떼 지어 오는 유니콘들을 확인하자, 클랜원들과 사용자들 사이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형! 저, 저거….” “맙소사.” “와아…. 뀨뀨들이 잔뜩 온다아….” “쉿.” 얼른 고개를 돌려 검지를 입술에 붙이자 소란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무척 예민한 놈들이기 때문에 조용히 맞이하는 게 여러모로 최선의 선택이었다. “절대 유니콘들을 놀라게 해서는 안 돼.” 특히 다짜고짜 무기를 꺼내려고 했던 안현에게 신신당부하며, 나는 다시 유니콘들이 오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후르르르…. 후르르르…. 후르르르…. 후르르르…. 성체 유니콘이 내는 울음소리는 아기 유니콘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윽고 그들 또한 우리를 발견한 듯 서서히 속도를 늦추더니, 약 10미터 정도의 거리를 남기고 걸음을 멈췄다. 후르르르…. “…….” 주위로 숨이 막힐 것 같은 침묵이 내려앉는다. 이따금 대장으로 보이는 유니콘이 자그마한 소리를 낼뿐, 나도 그리고 클랜원들도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본지 10초가 흐르고, 나는 아까 강가 가까이 놓았던 유니콘의 시체를 곁눈질했다. 그러자, 대장 유니콘 또한 그쪽으로 흘끗 시선을 던졌다. 그때였다. “뀨!” 그 순간, 가만히 서있기만 하던 아기 유니콘이 갑작스럽게 앞쪽으로 튀어나왔다. 이윽고 누워있는 유니콘쪽으로 아장아장 걸어가는가 싶더니 시체 주위를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쓰러져있는 유니콘이 누군지 확인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그리고 곧 살펴보는 걸 끝냈는지 아기 유니콘은 겉도는 것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조용히 무리의 선두에 있던 유니콘에게 고개를 돌리며, 나직하게 울부짖었다. “뀨….” 후르르르…? “뀨…. 뀨우…. 규우우…. 규우우우….” 대장 유니콘 대답이 이어진 순간, 아기 유니콘에게서 눈물이 왈칵 터져 나온다. 녀석은 고개를 한 번 작게 끄덕이고는, 그 자리 그대로 주저앉아 구슬프게 울어 젖혔다. 그러면서도 시체에 끈임 없이 머리를 비비는걸 보니 죽어있는 유니콘과 뭔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본 대장 유니콘은 지그시 눈을 감았고, 뒤에 조용히 서있던 유니콘들 사이로 나른한 숨소리들이 연속해서 흘러나왔다. “규우우우우…. 규우우우우우….” 앙앙 울던 아기 유니콘은 곧 눈물을 뚝뚝 흘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목 놓아 우는 그 모습이, 왜 살려서 데려오지 못했냐고 절규하는 어린 아이를 보는듯했다. 나는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기만하다가, 울음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조용히 앞으로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선두에 있던 대장 유니콘도 나를 따라 서서히 앞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한 발짝 두 발짝 가까이 다가간다. 그런 나를 주시하는 대장 유니콘의 눈길은, 경계의 빛이 서려있을지언정 적대감을 내비치지는 않고 있었다. 곧이어 여전히 구슬피 우는 아기 유니콘을 가운데 두고, 나와 대장 유니콘의 걸음이 동시에 멈췄다. 동족의식이 강하고 새끼를 끔찍이도 아끼는 그들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더 이상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서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친다. 그의 눈초리가 나를 유심히 살펴보는가 싶더니, 이내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걸 볼 수 있었다. 무언의 허락의 표시였다. 대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한쪽 무릎을 꿇어앉으며 아직도 시체에 얼굴을 묻고 있는 아기 유니콘을 향해 양 팔을 내밀었다. “미안하다.” “뀨….” 아가 유니콘은 눈물이 그렁그렁 달려있는 눈망울로 고개를 들더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앞다리를 뻗어 내게 안겨들었다. 내 품에서 서러운 눈물을 적시는 아가 유니콘의 등을 연신 토닥이며,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여주었다. “좀 더 일찍 구하지 못해서 미안해. 우리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뀨…. 뀨우….” 위로의 감정을 담아 등을 쓰다듬어주고 있자, 대장 유니콘은 새끼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나와의 거리를 더욱 줄였다. 유니콘은 지능이 굉장히 높은 동물이다. 아가에게서 우리와 만났던 이야기를 들었다면 대충 전후사정은 파악하고 있을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후사정을 말해주기로 했다. “혹시나 해서 말해두지만 저 시체는 우리들이 벌인 일이 아니야.” 후르르르…. 흡사 알고 있다는 듯이, 대장 유니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어떻게 될지 몰라 나름 대비하고 있었는데, 대답을 듣자 일단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범인은 이 협곡의 결계 안에서 살고 있던 괴물이었어. 사람이되, 사람이 아닌 마법사였지. 우리들도 볼일이 있어 그 마법사를 처리하러왔고, 그 과정에서 이 시체를 발견했다. 이게 전부야. 시체는 그냥 가지고갈까 했지만…. 그래도 갑자기 이 유니콘이 떠오르더라고. 그래서 가져온 거야.” 후르르르? “아, 그 괴물은 뒤에 있는 내 동료들과 함께 확실하게 처리했다. 복수는 확실하게 했으니까 더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후르르르…. 후르르르…. 문득 이건 조금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놈들은 오히려 내 말을 알아듣는 듯 보이지만, 나는 당최 알아먹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냥 내 말에 대한 반응을 보며 추측할 뿐이라 약간 답답한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어느덧 아기 유니콘의 울음소리는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아직까지 미약한 흐느낌은 남아있었지만, 아까처럼 심금을 울리는 소리는 점점 사그라지고 있었다. 대장 유니콘은 내 품에 안긴 채 훌쩍이는 아기 유니콘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내 앞으로 조용히 고개를 들이밀었다. ‘위에 올려달라는 뜻인가?’ 멋대로 해석하고 목 위로 살며시 놓고 물러나려고 하자, 순간 아가 유니콘을 내 손을 덥석 물었다. 그리고 자기 쪽으로 낑낑 끌어당기는 게, 마치 가지 말라는 행동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대장 유니콘의 길쭉한 꼬리가 출렁이듯 올라와 내 손을 물고 있는 아가 유니콘의 머리를 슬슬 보듬어주자, 녀석은 힘없는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전에 만났을 때는 쉼 없이 팔랑거리던, 얇은 꼬리가 축 늘어지며 물고 있던 손을 얌전히 놓아주었다. 후르르르! 대장 유니콘이 한번 크게 울어 떨쳤다. 그것은 하나의 신호였는지 여태껏 꼿꼿이 서있던 다른 유니콘들이 비로소 네 발을 움직였다. 나는 죽은 유니콘이 있는 곳에서 몇 발짝 물러선 상태로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유니콘들은 곧 시체의 주위를 동그랗게 둘러싸고는, 이내 한 마리씩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죽은 유니콘을 떠나보내기 전에, 동료애가 강한 그들만의 의식이 시작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입맞춤을 끝낸 유니콘들은 곧 대장 유니콘의 등에 축 늘어져있는 아기 유니콘에게도 얼굴을 비비거나, 등을 핥아주는 등 위로의 행동을 보여주었다. 나는 유니콘들의 의식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일행들이 있는 곳까지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들이 행동이 끝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 유니콘들의 의식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 마리당 걸리는 시간이 약 30초 정도였으니, 총 10분도 걸리지 않은 셈이다. 나와, 클랜원들과, 사용자들의 분위기는 조용함 그 자체였다. 처음 죽은 유니콘을 봤을 때만 해도 눈을 휘둥그래 뜨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스무 마리가 넘는 놈들을 보고, 그들의 의식을 보자 다들 정신없이 구경하는 중이었다. 일전에 아가 유니콘을 우연이 마주쳤던게 정말 드물게 일어난 일이라면, 이번에는 홀 플레인에서 활동하면서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라고 봐도 좋았다. 애들이 처음 유니콘들을 봤을 때처럼 소란을 피우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분위기를 파악하는 눈치 정도는 갖고 있었다. 간간이 서로 귓속말로 소곤거리기만 할뿐 대체적으로 침묵을 지켰다. 곧 아가 유니콘과 조금 더 큰, 거의 비슷한 크기의 유니콘의 행동을 마지막으로 그들의 의식이 완전히 마친 듯 보였다. 대장이 한 번 낮은 소리를 내자, 건장한 유니콘 서너 마리가 걸어와 죽은 유니콘의 시체를 두 마리 등에 걸치도록 물어 올렸다. 그리고 모든 의식을 끝낸 대장 유니콘은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나와 일행들에게로 다가왔다. 후르르르. 후르르르. 후르르르. 후르르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뭐라고 말하려는 것은 분명한데, 솔직히 뭔 말인지 영 감이 오지 않는다. 아무튼 이로서 확실히 빚을 지우는 데는 성공했다. 여기서 대놓고 보상을 바랬다가는 나름대로 무난하게 쌓았다고 생각한 인연을 해칠 우려가 있었다. 해서, 일단은 여기서 만족하기로 하고 이만 작별을 고하기로 마음먹었다. “죽은 유니콘은 확실히 건네줬다. 그럼 우리도 이만 가봐야겠어. 보시다시피 우리도 그 괴물한테 당한 사용자들이 있어서. 도시로 서둘러 옮기고 치료를 받게 해야 돼.”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말해주자, 대장 유니콘을 비롯한 모든 유니콘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 뒤로 꽂혔다. 이윽고 그들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지는 것을 보니, 아마도 사지를 절단당한 사용자를 본 듯싶었다. ‘좋았어. 이걸로 공동연대도 구축.’ 한마디로 나도, 너도 같은 괴물한테 동료를 잃었으니 같은 아픔을 지니고 있다는 소리였다. 물론 진실은 사용자들은 생판 모르는 남이었고, 가능성에 불과한 만큼 나 또한 그냥 해본 생각이었다. 어쨌든 이제는 정말로 돌아갈 차례였다. 나는 귀환 선언을 위해 몸을 돌리고 클랜원들을 바라보았다. 안솔과 이유정이 주춤한 모습을 보였다. 왜 그러냐는 시선을 담아 고개를 까닥이자, 이내 안솔이 아기 유니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저기 오라버니….” “왜.” “우리 유니 한번만 쓰다듬어주고 가면 안 될까요? 너무 슬퍼하는 것 같아서…. 이대로 그냥 가기에는 너무 마음이 아파요…. 위로해주고 싶어요오….” 유니(?)는 여전히 대장의 등 위에 죽은 듯 늘어져있었다. 작별을 말했음에도 고개도 들지 않고 있다. 서운 하다기 보다는, 그 마음이 이해가 돼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잠시 측은한 마음으로 아기 유니콘을 쳐다본 후,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솔의 말은 지금에 와서는 약간 무리가 있는 요구였다. 아까 상황 설명을 위해 같이 나갔을 때라면 모르겠지만, 지금 아기 유니콘의 주위에는 많은 수의 유니콘들이 서있는 상태였다. 물론 그들을 뚫고 쓰다듬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냥 여기서 헤어지는 게 가장 깔끔했다. “그냥…. 응?” 그래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냥 가자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후르르르. 이제는 익숙하게 들리는 울음소리와 함께 우리들 사이로 파고 들어오는 발자국 소리들이 들렸다. 깜짝 놀라 몸을 돌리자, 일행들 앞으로 한 마리씩 다가가는 유니콘들이 보였다. 그리고 내 앞에도 처음 보았던 대장 유니콘이 다가와 우두커니 나를 바라보았다.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려는 순간 이어진 유니콘들의 행동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대장 유니콘은 네 발을 접어 얌전히 내 앞에 앉은 것이다. 그리고 길쭉한 꼬리를 들어, 자신의 등을 찰싹 후려쳤다. “…응?” 후르르르. 찰싹! “지금 등에 타라는 거야?” 끄덕끄덕. 황당한 눈길로 주변을 돌아보자, 각 일행들 앞으로 유니콘들이 등을 보인 채 한 마리씩 앉아 있었다. “혀, 형!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글쎄다. 네 앞 유니콘에게 물어보렴. 이건 나도 잘….” “저, 저기 있잖아. 나 타라고 이러는 거야? 정말로?” 안현의 앞에 앉은 유니콘은, 기다란 속눈썹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예쁘게 흘겨보고는, 이내 대장과 똑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현은 감동한 얼굴로 울먹이며 눈가를 손등으로 쓱 훑었다. 유니콘은 뭔가 불쌍하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이내 구조한 사용자들의 표정에 설렘 반 다행 반이라는 기색이 섞여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확실히 걸어가는 것보다는 타고 가는 게 훨씬 낫다. 도시 끝까지 갈수는 없겠지만, 유니콘을 타고 갈 수만 있다면 귀환에 걸리는 시일을 비약적으로 단축시킬 수 있으리라.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결국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내렸다. 어떻게 보면 더 좋은 기회가 될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미미하게 웃으며, 우물쭈물하는 몇몇 클랜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유니콘들이 호의를 베풀어주려는 것 같습니다. 마침 부상자들도 있으니 어떻게 보면 잘 된 일인 것 같네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용자는 두 명이 같이 타도록 하시고, 유니콘은 조심스럽게 대해주세요.” 말을 마친 후, 먼저 시범을 보이기 위해 먼저 대장 유니콘의 등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자, 유니콘이 접었던 발을 들어올리고, 내 발 또한 서서히 땅에서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방학인데 왜 이렇게 방학처럼 느껴지지가 않을까요. ;ㅅ; 아침 기상, 청소, 병원, 헬스, 집으로 돌아옴, 친구 점심 약속, 오후 학원, 이북 교정, 집필까지. 오랜만에 운동을 시작해서 그런지 몸도 약간 피곤하네요. 운동 하고 씻으면 참 몸도 탄력이 느껴지고, 개운하고 좋은데 졸음이 솔솔 오는…. ㅜ.ㅠ 도시로의 빠른 귀환을 위해 원래 있던 부수입 떡밥은 뒤로 미뤄두고, 유니콘을 타고 가는 것으로 했습니다. 그냥 간단히 ‘그렇게 우리는 모니카로의 귀환 길에 올랐다. 그리고 10일 후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보다는 중간에 하나 집어넣고 그것을 가져가는 게 낫겠다 싶어서요. 아마 다음 회에 도시로의 귀환은 완료될 것 같습니다. 이제 수현이 잠시 쉬게 해주고, 새로운 파트를 위한 판을 짜야겠지요. :) 『 리리플 』 1. 플룻 : 헛. 플룻 님이 1등을 하시는 것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1등 축하합니다. 하하하. 나중에 안솔의 옷깃은 정말로 한 번 흔들어 보겠습니다. :) 2. 마리루리 : 그것은 말이죠. 제 짧은 생각으로는 마리루리 님의 누님 분께서 '새침데기(츤데레)'가 아니실까 생각이 듭니다. 아마 다음에 마리루리 님께 맛있는 음식을 사주지 않으실까요. :) 3. ototyrxr : 연참이요. 하하. 암 쏘 쏘리 벗 알러뷰. 제가 더 힘내볼게요. ㅜ.ㅠ 4. hohokoya1 : 원래 오늘 도서관도 가려고 했는데 약속 때문에 못 갔어요. ㅜ.ㅠ 5. 유리켄느 : 예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박현우요. 음! 박현우. 하하, 유리켄느 님. 오늘 해가 짱짱한게 정말로 날씨가 좋더군요. 하하하. 6. 블라미 : 후후. 유니콘과의 관계는 다음 회에 정리가 될 예정입니다. 항상 코멘트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7. 오피투럽19 : 저도 코멘트 보고 독자 분들께 정신을 못 차렸어요. 너무들 귀여우셔서…. 보면서 연신 미소를 지었답니다. :) ☞☜ (__ )* 쿠폰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쓸게요! _(__)_ 8. 그릴자유 : 요정 여왕의 알도 가지고 왔어요! 지금 가방 속에 고이 잠들어 있답니다. :) 9. 메카스타 : 메카스타 님 질문이 있습니다~. 코멘트에 가끔 '홍' 이라고 다실 적이 아주 가끔 계시는데 의미가 궁금해요! 10. dbss : 쿠폰 감사합니다. _(__)_ 하하. 아마 수현이 유니콘을 타면, 그리고 그 유니콘이 만약 대장 유니콘이었다면. 음. 그때는 진짜로 일반 사용자들 중에서는 수현의 마방을 뚫을 사용자들이 없을 것 같네요. ㄷㄷ. 유니콘 설정 중에 그런 게 있어서요….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76 / 0933 ---------------------------------------------- 귀환 중 일어난 특별한 일 <기록(Record)> “유니콘을 길들인 방법? 간단하지는 않아. 녀석들은 동족이 죽으면 굉장히 슬퍼하는 경향이 있거든. 그리고 부모나 자식이 죽었으면 그런 경향이 더욱 심하지. 그대로 가만히 놔두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라고 할까? 바로 그때를 노리는 거야. 특히 어린 녀석들은 자신들의 상실감을 채워줄 무언가를 필요로 하거든. 물론 처녀 여성이라는 점과, 유니콘이 혼자 있다는 전제 조건이 붙어야겠지만.” 북대륙 대도시 바바라(Babara) 중앙 도서관 ‘유니콘을 길들이는 방법’에서 발췌. * 동쪽 하늘에서 희끄무레한 동이 터오고 있었다. 수줍은 새색시마냥 초원의 눈치를 보던 태양은 이내 먼발치서 슬금슬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햇살을 머금기 시작했는지 어두운 초록빛으로 덮여있던 들판은, 조금씩이지만 새하얀 빛으로 물들어가는 중이었다. 서서히 찾아오는 초원의 아침은 고요하지만, 아름답다. 새벽 내내 어두운 밤으로 가득했던 들판은 삽시간에 선명한 빛을 반짝였다. 이윽고 흰 빛이 초원의 외진 곳까지 구석구석 밝힐 즈음 햇살은 풀을 깔고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한 명의 사용자를 비추었다. 온 몸을 감싸고 있는 로브 때문에 얼굴이나 체형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약간 헝클어지기는 했지만 후드 아래로 삐죽 빠져나와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본다면, 어쩌면 여성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추측할 수 있었다. 얼굴을 물들이는 햇빛을 느꼈는지 사정없이 흔들리던 고개가 한 번 움찔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올라가 하늘을 바라보더니, 이내 얄따란 손가락이 후드를 움켜쥐고 뒤로 젖혔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얼굴은 확실히 여성의 외모를 갖고 있었다. 오뚝한 콧날, 꽉 다물려있지만 가늘고 긴 입술, 상대방을 흘겨보는 듯 살짝 치켜 올라간 눈썹이 돋보이는 미인이었다. 이런 경치 좋은 곳에서 잠을 자고 일어났으면 개운하게 느낄 법도 한데, 졸림 가득한 여성의 눈에는 짜증스러운 기색이 다분히 묻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인중을 타고 흐르는 콧물을 “킁.” 소리가 나도록 들이키고는 어깨를 한껏 움츠러들며 고운 입술을 열었다. “아, 추워.” “지랄을 해요 지랄을. 이년아, 지금까지 실컷 쳐 자놓고 한다는 말이 추워?” 반사적으로 들려온 대답에 놀랐는지 여성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방금 자다 깬 여성을 한심한 눈길로 쳐다보는, 역시나 로브로 온 몸을 둘둘 감고 있는 여성이 똑같이 앉아있었다. 여성은 가물가물한 눈으로 그녀를 유심히 살펴보고는 한숨을 폭 내쉬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는 언니도 잔 얼굴인데 뭐.” “야, 설민희. 네 눈에 달려있는 눈곱이나 떼고 말하시지. 그리고 내가 너보다는 일찍 일어났거든?” “내가 언니보다 늦게 잠들었어. 그러니 쌤쌤.” “어휴. 하여튼…. 관두자. 생각해보니 너나 나나 뭐 잘한 일이라고.” 언니라고 부른 여성의 말에 동의했는지, 설민희는 크게 하품을 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 대화를 끝으로 두 여성은 한동안 말없이 앞만 바라보았다. 아침 해가 떠올랐지만 초원 깊숙이 스며있는 냉기를 몰아내기에는 아직 부족한지, 냉랭한 기운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전방을 주시하는 설민희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알게 모르게 전신에서 피로감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호오. 호오.” 밤새 얼어붙은 몸을 녹일 요량인지 설민희는 양손을 싹싹 비비며 가운데로 숨을 불어넣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에 연초 한 대를 끼우며,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라 언니. 나 추워.” “자고 일어나서 그래. 그리고 연초 태우지 마. 아침부터 냄새 맡기 싫어.” 설민희는 소라의 제지에 아랑곳 않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나는 꼭 밥을 먹어야만 피우는 누구랑은 달리, 자고 일어나면 피워야 하는 버릇이 있어서. 싫으면 고개 돌려.” 라고 대답한 후, 크게 숨을 들이켰다. “후읍, 후우욱. 콜록! 콜록!” “하지 말라고 했는데, 꼴좋다 쌍년.” 너무 힘껏 빨아들여 연기가 목에 걸렸는지, 그녀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몇 번 기침을 했다. 소라는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비웃었다. 설민희는 눈동자에 맺힌 눈물을 쓱 닦으며 입에 고인 침을 퉤 뱉었다. 그리고 다시 살살 한 모금 빨아들이고는 탁한 연기를 내뿜었다. “후우. 소라 언니.” “한 번만 더 춥다고 하면 네 입술을 찢어버리겠어. 정말로.” “우리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해?” “…….” 이 질문은 선뜻 대답하기 궁색한 듯 소라라 불린 여인은 입을 딱 다물었다. 하지만 그녀를 쳐다보는 시선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이번에는 기필코 대답을 듣겠다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소라는 한동안 입맛만 다시다가 오른손을 옆으로 쭉 내밀었다. 설민희는 네가 웬일이냐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는, 내밀어진 오른손에 얌전히 연초를 쥐어주었다. 이윽고 소라 또한 그녀와 마찬가지로 연초를 부드럽게 한 모금 들이켰다. “휴. 모르겠어. 일단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려봐야지.” “연락은 어제 왔잖아. 수정구로.” “어제…? 아, 그거? 너는 그 헛소리를 믿니?” “대기조에 있던 애가 확실히 봤다고 했잖아. 흔적도 발견했고.” “우리 순수한 민희 아가씨. 그건 말 그대로 그냥 네발달린 동물이 대규모로 지나갔다는 흔적이라잖아요. 뭐 하얀색 말 수십 마리가 사람을 등에 태우고 지나갔다고? 유니콘이니?” 소라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다시 연초를 입에 물었다. “개소리 말라 그래. 필시 너처럼 꾸벅꾸벅 졸다가 헛것을 봤겠지.” “…….” 설민희는 가만히 고개를 갸웃 기울이고는 아직 젖살이 남아있는 볼을 살짝 부풀렸다. “그래서 계속 이대로 기다리고만 있자고? 우린 몰이조야. 애초에 울창한 삼림에서 할 일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잖아. 기다리고 덮치는 건 대기조가 하는 건데 왜 우리가 이러고 있어?” “그쪽에서 그렇게 하라고 지시가 떨어졌는데 어쩔 수 없잖아. 그리고 이번에 작업 칠 사용자들 중에 그림자 여왕도 있다고 했고. 그림자 여왕이라고, 무려 그림자여왕. 몰라? 당장 한 명이 아쉬울 판국인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이번에는 설민희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곧 그림자 여왕의 명성을 떠올렸는지, 그녀의 목울대가 일순 꿀꺽 움직인다. 이어진 설민희의 표정은 납득은 했지만, 그래도 불만이 가시질 않는지 볼은 여전히 부풀려진 채였다. 그런 기색을 눈치 챘는지, 소라는 톡 쏘던 말투를 약간 누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나도 짜증나. 그래서 내가 그렇게 들어가기 전에 덮치자고 했는데 들어먹지도 않더라고.” “그럼 언니가 다시 말해봐.” “나보고 뭘 어쩌라고. 이대로 망상의 고원으로 들어가자고? 미쳤어?” “싫으면 그냥 이쯤에서 접던가. 그래도 승구 오빠가 언니 말은 귀담아 듣는 편이잖아.” “염병, 베갯머리송사는 질색인데. 아무튼 다음에 통신 들어오면 넌 가만히 입 다물고 있어. 어제처럼 길길이 날뛰지 말고.” 소라는 더 이상은 말을 듣지 않겠다는 얼굴로 딱 끊어서 얘기한 후, 들고 있던 연초를 가볍게 튕겼다. 아직 발갛게 타오르던 연초는 대기에 불씨를 흩날리더니 풀 속으로 몸을 숨겼다. “…….” “…….” 이윽고, 두 여성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 홀 플레인의 경치는 언제 봐도 기분을 좋게 만들어준다. 현대에서는 볼 수 없는, 자연이 기지개를 피며 아침을 맞이하는 풍경은 그만한 신비스러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침낭에 몸을 묻은 채 고개를 비죽 내밀어 밖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넓게 펼쳐져있는 통곡의 평야가 눈에 박혔다. 풀을 스치는 얼굴에 물기가 묻는다. 평야 전체에는 희미한 물안개가 서려있었고, 풀들의 겉면에는 이슬이 영롱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뀨….” 살짝 몸을 움직이자 잠에서 깼는지, 내 품안에서 잠들어있던 뭔가가 미약한 소리로 울었다. 시선을 내리자 고른 숨을 내쉰 채 등을 들썩이는 아기 유니콘이 보였다. 어젯밤 불침번을 끝내고 잠을 자던 도중 내 침낭 안으로 기어들어온 범인이었다. 살며시 등을 쓰다듬어주자 녀석은 기분이 좋은지 짧은 꼬리를 좌우로 팔랑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손을 떼자 이내 힘없이 축 늘어졌다. 쓰다듬으면 다시 팔랑거리고, 손을 떼면 축 늘어지는 것을 반복한다. “뀨.” 내가 더는 쓰다듬어주지 않자, 녀석은 얼굴을 비척비척 들더니 간신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것을 보자 입가에 절로 연한 미소가 지어졌다. 또다시 아기 유니콘의 등을 쓰다듬으며 나는 통곡의 평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곰곰이 되씹었다. 솔직히 말해서 유니콘들이 망상의 고원만 벗어나게 해줘도 만족할 생각이었다. 아니, 최대한 가봤자 섬망의 산을 내려가는 것을 끝으로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생각은 철저하게 빗나갔다. 유니콘은 섬망의 산을 내려오고서도, 무려 울창한 삼림을 지나, 통곡의 평야까지 데려다주는 호의를 베풀었다. 그 덕분에 귀환에 걸리는 시일을 비약적으로 단축한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유니콘을 탄다는 것은 나도 겪어보지 못한 굉장히 신비한 경험이었다. 바람 같은 속도는 둘째로 치더라도, 무엇보다 거친 지형마저 평야와 같이 질주하는 능력에는 그저 감탄만이 나올 뿐이었다. 몇몇 애들은 말을 타는 것에 익숙지 않은지 중간 중간 불안감을 내비쳤지만, 하루가 지나자 그런 걱정은 씻은 듯 사라져버렸다. 더구나 산을 내려온 뒤로는 대부분이 평탄한 지형이라, 꼭 자동차를 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유니콘은 정말로 한 마리 꼭 갖고 싶을 정도로 최고의 시승 감을 자랑했다. 이들은 알아서 균형을 잡아주고,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능력이 있었다. ‘그냥 한 마리 납치할까?’ 스스로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건 알지만 그만큼 유니콘은 매력적인 신수요 동물이었다.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조용히 잠들어있는 아기 유니콘을 응시했다. 앙앙 울어 젖히기만 하던 첫날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이 녀석은 아직 슬픔을 걷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애들도, 주변 유니콘들도 많이 신경써주는 듯 보였지만 금세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곤 했다. 하지만 유독 나와 있을 때만큼은 가끔이지만 웃는 모습을 보였다. 솔직히 이건 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처녀 여성도 가려서 따르는 놈들이 바로 유니콘인데, 성별도 다르고 처녀도 아닌(?) 나를 이토록 따르는 게 정말로 신기했다. ‘혹시 화정이랑 연관이 있는 걸까…?’ 대장을 비롯해 다른 유니콘들의 반응도 대체로 호의적인걸 보면 아주 경우 없는 추측은 아니었다. 아무튼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 나중에 따로 알아보리라 생각하며, 나는 곤히 잠들어있는 아기 유니콘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 침낭에서 벗어난 후, 몸을 일으켜 야영지를 가로질렀다. “뀨우, 뀨우.” 따뜻한 침낭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추운지, 아기 유니콘은 꾸물거리며 더욱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런 녀석을 슬슬 보듬어주며 나는 사용자와 유니콘이 공존하는 광경을 구경했다. 어느새 해는 완연히 솟았는지 하늘에서 쏘아져 내려오는 빛은 평야 전체를 아우르고 있었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침낭들과 무리를 지어 자고 있는 유니콘들. 그리고 서로 사이좋게 머리를 맞대어 자고 있는 안솔과 이유정까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그녀들과의 거리를 줄였다. 둘은 아주 코까지 골며 잘도 자고 있었다. * “여기까지면 충분해. 데려다줘서 고마워.” 후르르르…. 호의를 담뿍 담아 말을 건네자, 대장 유니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이 마치 전혀 아니라고, 오히려 우리가 고마웠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결국 유니콘들은 통곡의 평야 끝자락까지 우리들을 데려다주었다. 이제 모니카와 남은 거리는 넉넉잡아도 이틀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애들은 유니콘들과 조금 더 함께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그게 이제는 조금 힘들어졌다. 안 그래도 평야 초입에 들어서고 나서부터 몇몇 사용자들과 마주친 상태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유니콘들에게는 지금도 위험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었다. 대장을 비롯해 스무 마리가 있다고 해도 눈이 회까닥 돌은 놈들한테 사냥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히잉….” “잘가….” 이미 작별 인사를 나누기는 했지만, 등 뒤로 연신 아쉬운 기색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특히 안현은 마지막에 유니콘의 목을 붙잡고 마구 비비는 바람에, 결국 꼬리에 뺨을 얻어맞고 말았다. 눈앞 대장 유니콘의 뒤에 있는, 예쁜(?) 유니콘은 연신 불쾌한 기색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한 번 쓰게 웃고는, 아까부터 계속해서 나를 보고 있는 아기 유니콘에게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이제는 그만 헤어질 시간이네. 너도 슬픔은 그만 털고, 힘내려무나.” “뀨….” 울먹울먹. 이제 진짜 헤어질 때라고 여겼는지, 아기 유니콘은 금방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자 이상하게 나도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 최대한 빠르게 이별하기로 마음먹었다. 해서, 나는 손을 흔들며 대장 유니콘에게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이제 그만 헤어지는 게 나을 것 같다. 혹시 모르니까 돌아가는 길 조심해. 그럼.” 나는 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러자 하나같이 아쉬운 얼굴을 하고 있는 클랜원들이 보인다. 그 눈빛이 뜻하는 바가 뭔지는 알 것 같았지만, 이건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클랜원들이 업고 있는 사용자들에게 시선을 던진 후,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만 도시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다행히 세 명이 아직까지 숨이 붙어있습니다. 이제는 정말 목숨을 건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제야 사용자들은 정신을 차린 듯 간신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게 막 출발을 알리려는 찰나였다. 한 발짝 걸어가려는 순간 뭔가 내 옷깃을 꾹 잡아당기는 기분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자 아기 유니콘이 아니라, 대장 유니콘이 내 코트를 물고 있었다. 대장이 나를 물은 것은 처음이었다. 깜짝 놀라 가만히 보고만 있자, 놈은 이내 옷깃을 놓고는 미미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후르르르…. “왜?” 후르르르…. 후르르르…. 후르르르…. 후르르르…. “아니 그렇게 말해봤자…. 무슨 소리인지 모른다고.” 대장 유니콘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가득했다. 어깨를 으쓱이자 뒤로 고개를 돌리더니, 곧 무겁게 고개를 한 번 끄덕거렸다. 그때였다. 후르르르…. 아기 유니콘은 울먹이는 얼굴로 가만히 서 있는 상태였다. 그때 대장 유니콘의 신호를 받은 성체 유니콘 한 마리가 앞으로 나오더니, 가만히 있는 아기 유니콘을 살짝 밀었다. 그것도 내가 있는 방향으로.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죄송합니다. 오늘 업데이트도 늦고, 분량 조절에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ㅜ.ㅠ 원래 도시 안으로 들어가서 러브 하우스까지 갈 예정이었는데, 떡밥 하나를 변경하고 새로운 인물 하나 등장시킨다는 게 예상외로 분량을…. 저를 매우치세요. 엉엉. 『 리리플 』 1. 미월야 : 으어어. 1등 축하합니다. 그리고 이번 회 늦어서 죄송합니다. _(__)_ 뒤에 도시 들어가는 부분 쓰다가요, 이 부분은 도저히 보여드릴 수 없다고 생각돼서 과감히 쳐냈습니다. 그리고 바로 퇴고에 들어가니 11:55분…. 최대한 빨리 끝낸다고 했는데, 많이 늦었어요. ㅜ.ㅠ 2. HammerofWar : 감사합니다. 나름 노린 부분이었는데 웃어주셔서 다행이에요. :) 3. -yS- : 헉! 아니에요. 1등분을 제외하고는 리리플은 랜덤하게 하는 거랍니다. 코멘트는 항상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4. 살구살구 : 에, 탈수는 있어요. 그런데 거구의 성인 남성이 타면 아마 등이 상하지 않을까요? ;ㅅ; 5. 천연천연 : 유니콘 나이트 좋은데요? 일각수의 기사. ㅋㅋㅋㅋ. 갑자기 번뜩 떠올랐습니다. 6. 저주의달 : 저는 예전에 랭겜 3연패 하고 극심한 정신 붕괴를 당했지요. ㅜ.ㅠ 7. 천냥보은 : 에, 감사합니다. 음. 음…. 죄송합니다. 천냥보은 님을 보니까 왠지 모르게 생떼를 부리고 싶어졌어요. 왜, 왜이럴까요.(덜덜.) 8. 추락한날개 : 여, 연참이요. 하, 하하. 하하하. 추락한날개 님의 아름다운 날개에 달게 맞도록 하겠습니다. 자! 저를 매우 치세요!(퍽퍽! 찰싹!) 9. 그리이그 : 쿠폰 감사합니다. 지금 스케줄이 자리가 잡히면 꼭 연참 해보겠습니다. _(__)_ 10. Morph : 페가수스 프라이, 요정 아기 프라이. 어떤게 마음에 드시나요! 한가지 골라주세요! 11. hohokoya1 : 항상 코멘트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템 정보는 일단 일을 모두 정리한 후 드러내도록 하겠습니다.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77 / 0933 ---------------------------------------------- 조금 쉬세요, 제발 “뀨?!” 후르르르…. “뀨뀨?!” 후르르르…. 후르르르…. 아기 유니콘은 깜짝 놀랐는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성체 유니콘의 행동은 변함이 없었다. 아기 유니콘이 어떤 반응을 보여도 그저 묵묵히 엉덩이를 떠밀 뿐이었다. 그 힘에 못 이겨 한발 두발 앞으로 밀려오는 찰나, 나는 그것을 묵묵히 보고만 있는 대장 유니콘에게 말을 걸었다. “잠깐만, 너희 지금 뭐하는 거야?” 당연히 대답은 없다. 아니, 설령 했다고 해도 알아듣지도 못한다. 대장 유니콘은 우묵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우두머리는 내 앞으로 몇 발짝 걸어오더니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 나는 어안이 벙벙한 기분을 느꼈다. 그 경계심 강하고 자존심 강한 유니콘이, 그것도 무려 우두머리 격인 놈이 남성에게 머리를 숙인 것이다. “뀨우, 뀨우!” 그렇게 잠시 당황하고 있는 동안, 어느새 아기 유니콘은 내 부근까지 떠밀려오고 있었다. 녀석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진 듯 고개를 연신 이리저리 돌렸지만, 다른 유니콘들중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그저 슬픔이 가득한 눈동자로 떠밀리는 아기 유니콘을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혹시 이건….’ 빠르게 속을 가다듬는다. 어지간히 눈치가 없지 않고서야 여기까지 왔는데 대장 유니콘의 뜻을 모를 리가 없다. 여전히 숙여져있는 고개를 들게 만들고, 나는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너희들, 내가 아기 유니콘을 맡아줬으면 하는 거야?” 후르르르…. 후르르르…. 대장 유니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을 확인한 순간 목구멍으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안 그래도 유니콘이 한 마리 있었으면 했는데, 이건 저절로 굴러들어온 셈이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도 잠시. 나는 재빨리 표정관리에 힘쓰며 이제는 내 발목 아래까지 밀려온 아기 유니콘에게 흘끗 시선을 던졌다. 이젠 자신도 갈피를 잡지 못하겠는지, 녀석은 다시금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새끼를 이곳까지 데려온 성체 유니콘은 자신의 할 일을 다 했다는 양 터벅터벅 제자리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고요한 침묵이 흐른다. 대장 유니콘도, 아기 유니콘도, 아니 여기 있는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어떻게 말해야할까 생각을 정리하려는 순간, 등 뒤에서 미약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혹시…. 잠시 맡아 달라는 게 아닐까요?” 방금 말을 꺼낸 사람은, 우리들이 지하 감옥에서 맨 첫 번째로 구조한 사용자였다. 또한 감옥에서 크게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 오면서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거의 없었던 여성이기도 했다. 허나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낮지만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아는 사용자들 중에 유니콘을 길들인 언니가 있거든요. 그 언니가 예전에 그러셨어요. 부모를 잃은 유니콘은 굉장히 큰 상실감에 빠지게 되고, 그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심각한….” “잠시 만요. 하지만 이 유니콘은 혼자가 아닙니다. 지금 앞만 봐도 스무 마리가 넘게 함께 행동하고 있는데요.” “오면서 보셨겠지만 동료들이 있다고 해도 유니콘의 슬픔은 간단히 회복되지 않아요. 하지만 오직 머셔너리 로드님과 함께 있을 때는 가끔이지만 웃는 모습을 보였잖아요?” “그건….” “저도 어째서 아기 유니콘이 그렇게 머셔너리 로드님을 따르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래도 지금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현재 이곳에 있는 모든 존재들 중, 아기 유니콘의 슬픔을 걷어 내줄 가장 큰 가능성을 지닌 존재가 바로 머셔너리 로드님이라는 점이에요. 이곳으로 오는 동안 유니콘들도 그것을 느꼈고, 그래서 부탁하려는 게 아닐까요?” 조금 길기는 했지만 똑 부러지게 말한 여성은, 이내 살짝 고개를 숙이곤 입을 다물었다. 아마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모두 이야기한 모양이다. 나는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대장 유니콘의 시선을 마주하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뒤에 여성분말대로, 나보고 아기 유니콘과 같이 있어달라는 소리야? 내가 너희들보다…. 이 녀석의 상실감을 채워줄 수 있는 존재로 가장 적합하다는 뜻이니?” 끄덕끄덕. “음…. 그럼 내가 잠시 맡는다고 치면, 나중에는 다시 돌려보내야겠네?” 대장 유니콘은 이번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아기 유니콘을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울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그것은 그때 가서 이 아이의 결정에 맡기겠소.”라고 하는 것 같았다.(물론 어디까지나 내 멋대로의 해석이었다.) 아기 유니콘은 꼬리는 물론이가 귀까지 축 접힌 상태였다. 하지만 내가 양손으로 안아들자마자, 곧바로 귀가 쫑긋 올라가고 꼬리가 팔락인다. 도대체 내 안의 무엇이 이런 반응을 이끌어내는지 정말 궁금했지만, 일단은 아기 유니콘을 얼굴 높이로 들어 올려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녀석의 또랑또랑한 눈동자를 보며,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가야,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뀨?” “나와 잠시 같이 있어볼래, 아니면 그냥 동료들을 따라갈래.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나는 네 선택을 존중하겠어. 그리고 네 선택이 가장 중요하기도 하고.” “뀨….” 아기 유니콘은 금세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를 한 번 봤다가, 대장 유니콘을 봤다가. 다시 내 뒤에 있는 동료들을 보다가, 또 유니콘들을 보다가. 그렇게 번갈아 고개를 돌리던 녀석은 이내 여전히 갈등어린 눈빛을 유지한 채 네 다리를 버둥거렸다. 곧장 바닥으로 내려주자, 녀석은 대장 유니콘에게 쪼르르 다가가 나지막이 울어 젖혔다. “뀨, 뀨뀨, 뀨뀨뀨.” 후르르르…. 후르르르…. 후르르르…. 후르르르…. “뀨뀨뀨뀨, 뀨뀨뀨뀨뀨.” 후르르르…. 후르르르…. 후르르르…. 후르르르…. 둘은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곧 아기 유니콘이 대장 유니콘의 다리에 쓱쓱 머리를 비비기 시작했다. 대장 유니콘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녀석의 머리에 천천히 입술을 비볐다. 그리고 머리부터 시작한 입맞춤은 목, 등을 지나 엉덩이 부분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서로의 신체를 비비는 과정은 1분이 넘도록 끝나지 않았다. 이윽고 모든 부위에 입맞춤을 끝낸 후. 대장 유니콘은 전에 없던 강렬한 시선으로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훌쩍 몸을 돌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기 유니콘 또한 그에 발맞춰 유니콘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 “저런….” ‘쯧.’ 애들에게서 아쉬운 탄성이 흘러나온다. 결국 아기 유니콘은 나를 택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이게 정상적인 선택이겠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남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인연을 이을 수 있을 것 같아 조금 에둘러 말한 건데, 차라리 조금 더 직접적으로 말할걸 그랬나 보다. 속으로 혀를 차며,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기 유니콘의 뒷모습만 보다가 나 또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정말 아쉽지만 유니콘들과 나쁘지 않은 관계를 맺었다는 것에 만족해야할 것 같았다. 그때였다. 우우우우…. 우우우우…. 우우우우…. 우우우우…. 유니콘들의 웅혼한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대기를 울린다. 번뜩 고개를 돌아보자 중간쯤에 멈춰선 아기 유니콘과, 녀석을 바라보며 길게 울부짖는 유니콘들이 눈에 박혔다. 곧이어 아기 유니콘은 예전에 우리와 헤어졌을 때처럼 앞쪽 오른발을 들어 올렸다. 그것은 우리를 향하는 게 아닌, 반대편에 있는 유니콘들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웅혼한 목소리들이 잦아드는 순간, 녀석은 반대로 몸을 돌려 우리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포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생각이 단번에 뒤집어지는 걸 느꼈다. “어? 오는 거야? 진짜 오는 거야?” “유, 유니야아!” 이윽고 내 앞에서 걸음을 멈춘 아기 유니콘은 방긋 웃으며 “뀨!” 하고 울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녀석의 환한 미소였다. 안솔과 이유정은 역시나 환히 웃으며 달려 나왔고, 무척이나 기뻐하며 아기 유니콘을 안아 올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기 유니콘이 간 것은 작별 인사를 위해서였다. 그 말인즉슨 나를 선택했다는 소리였다. 안솔의 품에 안겨 네 다리를 휘적거리는 녀석을 보며 나는 잠시 헛웃음을 흘렸다. 전방으로 시선을 옮기자 어느새 천천히 몸을 돌리고 있는 유니콘들이 보인다. 그들은 몸을 돌리면서도 걸어가면서도 계속해서 아기 유니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에 마지막으로 몸을 돌리던 대장 유니콘의 고개가 돌아가려는 찰나, 나와 놈의 시선이 한 번 더 허공에서 얽혔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대장 유니콘의 눈동자는 매우 쓸쓸해보였다. 한동안 바라보고만 있다가, 순간 대장 유니콘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그러더니 곧 완전히 시선을 돌려버렸다. “…….” 그렇게 조금씩 멀어지는 유니콘들을 보고 있자, 누군가 등 뒤로 나를 톡톡 건드리는 게 느껴졌다. 뒤에는 안솔이 방실방실 웃으며 양팔로 아가 유니콘을 휘감고 있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유니가 오라버니한테 안기고 싶은가 봐요!” “뀨뀨!” 아가 유니콘은 방긋 웃으며 나를 향해 양 다리를 내밀었다. 그 다리들을 붙잡아주며 나 또한 연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아가 유니콘의 등을 두드리며,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추후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이왕 이렇게 들어온 이상 최대한 보내지 않을 생각이다. 왜냐하면 들어오는 것은 마음대로였을지 몰라도…. ‘나가는 것은 아니니까.’ * “사용자분들의 생환을 축하합니다!” “모니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동문으로 들어서자 성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의 힘찬 경례소리가 우리들을 반겼다. 이틀, 정확히는 하루하고도 절반을 조금 넘겼다. 유니콘들과 헤어진 후 모니카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이윽고 동문을 완전히 통과하자마자, 성문 주변에 있던 수십 개의 시선이 우리들에게로 꽂혔다. 그들의 시선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업혀있는 사용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익숙한 건지, 아니면 자신의 일이 아니라서 그러는 건지. 곧 여기저기서 들리는 혀 차는 소리와 함께 대부분의 시선이 나가떨어졌다. 조금 더 걷다가, 성문의 대로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쓴웃음을 내비치는 신재룡을 향해 입을 열었다. “원정 및 구조 임무는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은 바로 신전으로 가시죠.” “아, 아닙니다. 여기까지 도와주신 것도 충분히 감사한데요. 저와 다른 사람들은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했으니, 저희들이 신전으로 데리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음, 그래도 힘드실 텐데요.” “하하, 오는 동안 한 게 없는데요 뭘. 오히려 머셔너리 분들이 훨씬 고생하셨지요. 혹시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는 꼭 이 은혜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구조 임무는 끝났다. 간단한 치료를 해주고 도시로 안전하게 데려다준 것만으로도 우리들이 할 일은 다한 셈이다. 어차피 나도 예의상 꺼낸 말이었고, 신재룡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예의 인상 좋은 얼굴로 고개를 젓고는 안현에게 다가가 그가 업고 있던 사용자를 받으려고 했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다른 사용자들도 한명씩 사람들을 넘겨받으려는 듯 몸을 움직였다. 난처한 얼굴로 나를 보는 애들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준 후, 나는 잠시 신재룡을 관찰했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같은 클랜원이 아닌 사용자도 군소리 않고 그의 말을 따르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명망이 제법 깊은 사용자인 것 같았다. “그럼 저희들은 먼저 신전으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예. 원정 보고는 최대한 빨리 올려드릴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하하. 감사합니다.” 신전에 정식으로 원정 보고를 제출하고, 대표 클랜에서 조사단을 창설하는 게 일반적인 절차이다. 아직 마지아(Magia)에는 사용자들의 시체가 남아있는 상태. 홀 플레인이라고 하더라도 소중한 이의 시체를 수습하고픈 마음은 있을 것이다. 나는 조용히 미소 짓는 신재룡에게 다가가, 미리 준비해두었던 주머니 하나를 넣어주었다.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렸다. “많지는 않습니다. 200골드 정도 됩니다.” “아. 이, 이러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정 받기 뭐하시면 뒤의 여성분의 말씀해주셨던 정보 값으로 하죠.” 내 말이 들렸는지 유니콘에 대한 정보를 건네준 여성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화답했다. 신재룡은 곤란한 얼굴을 보였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 스스로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 여울가녘이 해체 수순을 밟고 나면, 앞으로 자신을 비롯한 클랜원들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것을. ‘지금 당장 치료비도 걱정해야 하겠지.’ 클랜원들과 간단히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신재룡을 필두로 한 사용자들은 광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뒷모습은 초라했다. 원정을 출발할 때만 해도 꿈에 부풀어있었겠지만 간신히 돌아오고 나서 직면한 현실은 암담할 것이다. 그런 그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나는 클랜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안현, 안솔, 이유정, 고연주. 네 명은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이내 동시에 씩 웃었다. 힘든 원정을 하나 더 성공시켰다는 개운함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김한별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로브를 보듬고 있었다. 아마 답답함을 느낀 아기 유니콘이 몸부림을 치는 모양이다. 백한결은 첫 원정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왔음을 실감했는지, 울먹울먹한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해가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사용자들이 원정에서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조금씩 땅거미가 내려앉는 성벽에는, 귀환하는 사용자들의 시끄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신나게 웃고 떠드는 사용자들은 뭔가 성과를 거두고 돌아온 이들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지금부터 그들의 대열에 동참할 필요가 있었다. "날이 곧 저물 것 같으니, 일단은 남은 클랜원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많은 말은 필요 없다. 나를 비롯한 6명의 클랜원들은, 서둘러 러브 하우스로 향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유니콘 Get! 도시 귀환 완료! 하하하. 이로서 원정을 하나 더 완료했습니다. 이제는 쉬는 시간이 이어질 예정입니다. 그동안 꽉 조인 것도 있으니, 수현이 몸도 쉬게 할 겸 약간 풀어줘야겠지요. 세라프도 슬슬 등장할 시점이고…. 아, 아이템 정보를 원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아쉽게도 바로 나오지는 않아요. 우선순위에 있는 일들을 빠르게 처리하고 바로 확인할 예정입니다. 이르면 다음 회에, 늦으면 다 다음 회 즈음에 나오겠네요. 일단 플롯은 그렇게 짜놓기는 했는데, 오차로 +- 1회 정도는 있을 수 있습니다. 하하. :)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합니다. 하하. 오늘은 기필코 자정 연재에 맞추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오늘은 모바일로 보시는군요. OTL 어찌 이리도 엇갈릴까요. 하하하. 2. RandomStyle : 네~. 후기에 적긴 했지만, 조금 더 기다리셔야 나올 거예요~. :) 그리고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 완료했습니다. _(__)_ 3. Nodens : 하하, 주인공 보정보다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짐작하고 계실것 같습니다. 4. 時人 : 유니콘들은 아마 잘 돌아갔을 겁니다. 한동안 기묘한 일로 회자는 되겠지만요. 후후. 5. 라마루아 : 암 쏘 쏘리 벗 알러뷰! 미안해요! 저도 연참하고 싶어요! 하지만 이북 교정은 저에게 연참을 허락지 않고 있어요! 엉엉. 6. 파뱐 : 엄훠. 오해이빈다. 오해이고말고요. 절대로 당황해서 오타를 낸 것은 아닙니다. 7. bella donna : 망아지보다 더 작다고 보시면 되요. 가녀린 성인 여성이 한 팔로 안으면 쏙 들어올 수준? 그정도 입니다. 많이 어린 아이에요. 하하하. 8. 감자띱 : 근력 101 사용자는 현재 홀 플레인에 있는 상태이고, 마력 101인 아직 안들어온 상태입니다. 하하. 근력 101은 모니카에서 일들 마무리 지으면 등장할 것 같네요.(예정이긴 하지만요.) 9. 노트님 : 흐흐, 몰이 사용자들의 묘사에 괜히 그만큼 페이지를 할당한게 아니지요. 재등장 예정도 있습니다. 근데 뭐 등장해봤자…. 수현이랑 1:1로 붙으면 별 위협이…. OTL 10. 타락한비둘기 : 이번 파트에서는 클랜원들 사이에서 달달한 분위기나, 갈등이 약간이나마 해소되는 장면도 나올 예정입니다.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78 / 0933 ---------------------------------------------- 조금 쉬세요, 제발 러브 하우스로 가는 도중, 나는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장소는 모니카의 중앙 광장이었다. 그런데 평소보다 유난히 사용자들이 많다. 게시판에 특별한 공지가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분위기도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말 그대로 순수하게 사용자들이 늘어나 있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래도 러브 하우스로 가는 걸음을 늦추지는 않았다. “수현. 갑자기 왜 그래요?” “네?” “광장에 들어오고부터 계속 고개를 두리번거리던데요? 누구 찾기라도 해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흐~응.” 고연주는 내 옆으로 불쑥 걸어 나오더니 살짝 눈을 흘기며 콧소리를 흘렸다. 입가에 연한 미소가 지어진걸 보니 또 뭔가 못된 장난을 꾸미는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그녀가 장난을 거는 빈도가 잦아졌다. 정확히 말하면 정하연에게 2연패를 당한 이후로 더욱 심해졌다고 할까. ‘억울해.’ 내가 그렇게 하라고 한 적도 없거니와 솔직히 가위 바위 보로 동침을 정하는 것도 상당히 웃긴 일이었다. 그러한 뜻을 담아 억울하다는 표정을 보였지만 고연주의 뜻 모를 장난은 멈추지 않았다. “흐~~응.” “…….” 문득 고연주가 뭘 원하는지를 알 것 같았다. 갑자기 처음 모니카를 나섰을 때 성문에 있던 사용자들이 나누던 대화가 떠오른다. 일단 휴식이 최우선이기는 해도, 앞으로 몸이 버티려면 정말로 정력을 높여주는 물약을 구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나는 광장에서 왼쪽으로 트인 대로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이번에는 애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등 뒤를 가득히 울렸다. “야, 백한결. 첫 원정을 다녀온 기분은 어때?” “네? 아하하. 그, 글쎄요. 그냥 뭔가 후다닥 지나가버린 것 같아서….” “언니, 언니이. 돌아가면 뭐부터 하실 거예요?” “목욕, 밥, 잠. 씻지를 못했더니 죽을 것 같아.” “아, 아가야. 거의 다 왔으니까 조금만 더 가만히 있으렴. 응?” “뀨!” ‘많이 답답한 모양이군.’ 현재 유니콘은 김한별의 로브 안으로 파묻힌 상태였다. 물론 도시로 데리고 들어온 이상 공개할 생각도 있었고, 끝까지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가뜩이나 피곤해 죽겠는데 사람들이 몰릴만한 일은 사양하고 싶었고,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만큼 클랜 하우스의 개축 공사는 진행 상태일터. 러브 하우스에 피해를 줄 가능성이 있는 일을 벌이기는 싫었다. 유니콘의 공개 시기는 클랜 하우스로 들어간 이후로 잡고 있다. 아무튼 이제는 거의 애원 조에 가까워진 김한별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걸음 속도를 한층 높였다. * 드디어 러브 하우스에 도착했다. 건물을 바로 눈앞에 둔 클랜원들의 눈빛은 무서웠다. 아마 내가 앞에 없었다면 당장에라도 뛰어 들어가 문을 박차고 들어갈 것만 같은 기세였다. 등을 콕콕 찌르는 무언의 압박을 느끼며, 나는 까끌까끌 한 감촉이 느껴지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렇게, 막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선 순간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문을 열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광경은 굉장히 미묘했다. 밖은 조금씩이지만 어둑한 빛이 조금씩 내려앉고 있었다. 일반적인 사용자라면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도시로 돌아올 시간이지만, 밤의 꽃들은 반대로 지금부터 활동할 시간이었다. 안 그래도 막 나가려고 했던 참인 듯, 야릇한 옷을 입은 몇몇 여성들은 모두 불안한 얼굴로 1층을 에워싸고 있었다. 러브 하우스는 원래 남자가 출입할 수 없는 구역이다. 하지만 1층 카운터 앞으로 한 명의 남성이 버젓이 서있었다. 그 뒤에는 전투용 장비를 걸친 서너 명의 사용자들이 흥미로운 얼굴로 카운터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으로, 임한나가 45도로 허리를 굽히고 있는 상태였다. 이윽고 맨 앞에 있던 남성이 말했다. “한나씨. 정말로 제 마음을 받아줄 수 없는 겁니까?” “정말, 정말 죄송해요.” 임한나는 거듭 사과를 하고, 남성은 씁쓸한 표정을 내비친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주시했다. 이대로 그냥 무시하고 들어가기에는 아까 말했던 대로 뭔가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침묵이 흐른다. 고요하다. 남성은 태연한 표정을 보이려고 애쓰는 듯 보였지만 눈가가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피가 날세라 입술을 한 번 짓씹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유, 알겠습니다. 제가 곤란하게 해드렸군요.” “마음은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고개 드세요. 더는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 그만 가볼 테니 오늘 일은 이만 잊어주십시오. 임 마담.” “…….” “가자.” 남성은 차갑게 내뱉더니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뒤에서 팔짱을 낀 채로 가만히 구경하고 있던 동료 중 한 명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꼴값 떠네. 하여간 고작해야 마담 주제에 자존심만 더럽게 높아요.” “말씀이 너무 심하시네요.” “신예슬. 그만해라. 빨리 안 나와?” 여인의 독설에 임한나는 굽혔던 허리를 들며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예슬이라 불린 여성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발끈한 기색을 보였지만, 곧이어 이어진 남성의 제지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더니 아니꼬움으로 가득 찬 시선을 던지고는, 팩 소리가 날 정도로 몸을 돌렸다. 나는 그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몇 걸음 옆으로 비켜주었다. 불청객처럼 보이는 이들은 썰물처럼 모두 빠져나갔다. 클랜원들도 방금 전 상황을 봤는지 다들 어색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어머. 머셔너리 로드? 돌아오신 건가요?” 그리고 그제야 우리들을 발견했는지, 임한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목소리를 내었다. 나는 한두 번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아, 네. 방금 전에 돌아왔습니다만…. 조금 안 좋을 때 온 것 같군요.” “호호. 아니에요. 늘 있는 일인걸요.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아무튼 다시 돌아오신 것을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그럼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얼마든지요. 자자, 너희들도 가만히 있지만 말고. 얼른 할 일들 하렴.” “언니….” 밤의 꽃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어두운 그림자가 그늘진 상태였다. 그러나 임한나가 괜찮다고 다독이며 재촉하자, 그녀들은 쭈뼛쭈뼛 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우리들을 테이블로 안내한 임한나는 어느새 표정을 회복했는지, 예의 상냥한 표정을 내비치며 말했다. “일단 오셨는데 식사부터…. 아, 일행들을 불러드릴까요?” “지금 전부 있습니까?” “하연 언니와 신상용씨는 클랜 하우스를 보러 나간다고 하셨어요. 오늘 조금 늦으실 수도 있다고 하셨고…. 비비앙씨는 지금 2층에 계실 거예요. 지금 바로 불러올게요.” “아, 괜찮습니다. 안현. 네가 좀 다녀와라.” “네 형.” 막 자리에 앉으려던 안현은 내 말에 쏜살같이 계단으로 튀어갔다. 계단이 부서져라 올라가는 녀석을 보다가, 나는 테이블에 엎어져있는 애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설마 이 시간에 둘이 없을 줄은 몰랐네요.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니, 그 동안 다들 식사라도 하시겠습니까?” “네! 네! 네! 네!” “와아! 와아!” “찬성~.” 내 말에 일행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찬성했다. 아니, 찬성 정도가 아니었다. 애당초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날은 맛있는걸 마음껏 먹는 날로 거의 굳어져있었다. 다들 그 동안 말린 고기와 딱딱한 빵으로만 달랬던 입을 호강시키려는 듯, 본인의 취향에 맞춰 양껏 주문하기 시작했다. 임한나는 와르르 쏟아져 들어오는 주문에 깜짝 놀라더니, 쿡쿡 웃으며 차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머셔너리 로드님은 주문하지 않으실 건가요?” “음….” 배는 별로 고프지 않다. 그저 하연이나 신상용이 있으면 그 동안 있었던 이야기나 들으려고 했는데, 늦게 들어온다고 한다. 나는 잠시 동안 고민했다. 유적을 나오고 나서부터 몸에서 느껴지는 피로감이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기다릴까, 먼저 잘까 고민하다가, 결국 먼저 일어나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늦게 들어온다면, 제대로 된 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이후 몸의 추이를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제 주문은 괜찮습니다. 그럼 먼저 올라가서 자고 있을 테니, 다들 적당히 먹고 오늘은 휴식을 취하도록 하세요. 그럼 내일 아침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어? 오빠, 먼저 들어가게?” “응.” “그럼 물품감정은….” “어차피 지금은 구즈 어프레이즐(Goods Appraisal)도 준비되어있지 않잖니. 수현. 먼저 들어가서 주무세요. 푹 쉬세요.” 그 동안 숨긴다고는 숨겼는데 역시 고연주는 눈치채고 있던 모양이다. 나는 쓰게 웃고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임한나가 주방으로 가는 것을 확인한 후, 얼른 김한별에게서 로브 덩어리(?)를 건네 받았다. 아기 유니콘은 어느새 지쳐 잠들었는지 로브는 약간만 뒤척일 뿐, 심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뻐근한 어깨를 두드리며 계단을 오르려는 찰나, 마침 내려오는지 안현과 비비앙이 함께 내려오는걸 볼 수 있었다. 비비앙은 다급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오다가 이내 나를 봤는지, 서서히 속도를 늦추었다. 그리고 한껏 무게를 잡으며 여유로운 얼굴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1층 계단에서 마주치자마자, 나를 지금 발견한 척을 하며 거만히 인사를 건넸다. “호오. 이게 누구야. 김수현이 왔군!” “어, 비비앙. 오랜만이다. 나 지금 피곤해서 바로 올라가니까 내일 보자.” “어, 어?” 내가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 그대로 지나치자, 비비앙은 곧바로 표정을 무너뜨리며 눈을 끔뻑거렸다. “형. 저녁 안 드셔도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 몸이 조금 피곤해서 그래. 나중에 정하연씨랑 신상용씨 오면 대충 상황 좀 설명해주고.” “아, 네 형. 그럼 주무세요.” “그래.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말고.” “자, 잠시만…! 이게 아닌데!” 아래서 뭔가 울먹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나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 “그럼 그렇게 된 거야…?” “네…. 그래도 항상 한나씨, 한나씨 꼬박꼬박 불러주다가 갑자기 임 마담이라니. 너무 속보이잖아요.” “호호.” 어느새 테이블은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그릇과 술병들. 아무렇게나 업어져 자고 있는 사용자들. 일찍이 자제한 안솔, 김한별, 백한결, 비비앙은 진작에 숙소로 올라갔지만 나머지 둘은 코까지 골며 한창 꿈나라를 헤매는 중이었다. 오직 고연주와 임한나 둘만이 멀쩡한 정신으로 남아, 여유롭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게 한잔을 모두 비웠을 즈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여성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에서는 찬바람을 맞은 듯 얼굴이 살짝 발개져있는 정하연과 신상용이 들어서고 있었다. 고연주는 그들을 보며 미미한 웃음과 함께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어서 와요. 오랜만이죠?” “어머!” “사, 사용자 고연주?” 정하연과 신상용은 한걸음 들어서자마자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고연주를 보며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고연주는 자고 있는 안현과 이유정을 가리킨 후, “쉿.” 하며 검지를 입술에 세웠다. 두 명은 잠시 헛웃음을 흘리다가, 조심스럽게 테이블로 다가와 앉았다. “언제 오신 거예요?” “오늘 오후요. 두 분은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클랜 하우스를 보러 갔다가, 이스탄텔 로우에 갔었거든요.” “이스탄텔 로우에요?” “네. 머셔너리의 귀환이 너무 늦는 것 같아 걱정이 되셨나 봐요. 바로 구조대를 파견하신다고 해서 상황 설명 좀 해드리고 왔어요.” “그렇군요.” 고연주는 납득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이더니 다시 술잔을 잡았다. 임한나가 얼른 술병을 집으려고 하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업어져 있는 둘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괜찮아. 한나 너는 저기 애들 좀 데리고 가줄래? 침대에 눕혀줘.” “네 언니.” “저,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임한나가 벌떡 일어서자, 신상용도 곧바로 따라 일어섰다. 이윽고 임한나는 이유정을, 신상용은 안현을 부축하고 사이 좋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후~. 너무 많이 마셨나~.” “…….” 두 시간 전만해도 떠들썩했던 테이블은 어느새 다시 고요해졌다. 정하연은 질렸다는 얼굴로 난장판이 된 테이블을 보다가, 또 술잔을 채우는 고연주를 보며 말했다. “일은 어떻게 되셨어요?” “아직 소문이 안 퍼졌나? 아예 뽕을 뽑았죠. 사용자들도 구하고, 유적도 발굴하고. 이번에도 완전 대박 쳤어요.” “아. 그렇군요. 잘됐네요…. 그러고 보니 수현은요?” “하연씨가 늦는다는 소리를 듣고 바로 올라갔어요. 많이 피곤한 모양이에요.” 그때, 정하연의 얼굴에 한 순간이지만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 그리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걱정이 담뿍 묻은 어조로 물었다. “혹시…. 이번 원정에서 그 힘을 사용했나요?” “네. 그런데 상대가 만만치 않았어요. 오는 내내 내색하지는 않았는데, 조금 많이 힘든 모양이에요. 저도 겨우 눈치챘어요. 솔직히 수현 성격에 웬만해서는 기다렸을 텐데, 이번엔 먼저 쉬어야겠다고 말을 꺼내더라고요. 정말 힘들긴 한 것 같아요.” “어떡해….” “일단은 기다려봐요. 쉰다고 올라갔으니까, 내일 반응을 살펴야죠.” 고연주 역시 폭 한숨을 내쉬며,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가득 차 있던 술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그에 비례해 그녀의 목 울대도 사정없이 움직인다. 정하연은 한쪽 턱을 괸 채 손가락으로 볼을 톡톡 두드리다가, 잔을 내려놓는 고연주를 보며 말했다. “안 피곤하세요?” “저는 별로.” “그럼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겠군요.” “호호.” 정하연이 자세를 고쳐 잡으며 말하자 고연주는 나직하게 웃었다. 그리고 의자 뒤로 몸을 묻으며 오른다리가 위로 가도록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연초 한대를 꺼내 입에 물고는 나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깜짝 놀랄 준비나 하세요.”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떡밥 2개 투척! 아, 독자님들. 오늘 후기, 리리플 하루만 쉴게요.(리리플은 다음 회 합쳐서 할게요~.) 오늘 병원에서 준 약을 먹었거든요. 의사 선생님이 독하다고 말씀은 해주셨는데, 역시나 머리가 많이 어지럽네요. :) 독자분들의 양해를 부탁 드리며, 이번 회도 재밌게 감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279 / 0933 ---------------------------------------------- 조금 쉬세요, 제발 눈을 뜨자 천장이 빙글 돌았다. 온 몸에 힘이 없고 머릿속이 심하게 어지럽다.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보려고 했지만 배를 짓누르는 무거운 중압감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하…. 돌겠네 정말.”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갑작스레 허탈한 감정이 찾아 들었다.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현기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몸의 구석구석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마력 회로는 괜찮고…. 감각도 이상 무. 그런데 힘이….’ 양손을 몇 번 쥐었다가 펴보자 체력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마력은 고유의 성능도 있지만 행운을 제외한 모든 능력치들의 출력을 배가시켜주는 역할도 한다. 그리고 체력은 그것을 버티고 유지하게 만들어주는 기둥이요 근간이다. 그런데 체력이라는 ‘뿌리’가 부족한 상태에서 화정이라는 고효율의 마력을 운용했다. 당연히 몸이 배겨날 리가 없다. 아마 그 동안 쌓아온 인내와 ‘쓰러질 수 없는’이 아니었다면 내가 먼저 쓰러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비로소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해서 하룻밤을 자고 나니 몸이 회복되기는 했다. 확실히 어제보다는 상태가 괜찮으니까. 하지만 예전만큼 회복되지는 않았다. 즉 회복력이 떨어졌다는 소리였다. 아마 이 상태로 계속 간다면 뭔가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날것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더는 미룰 수 없다.’ 나는 근시일 내로 체력 문제를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설령 모든 잔여 포인트를 체력에 투자하더라도, 더는 좌시할 수 없었다. 가만히 누워 눈만 깜빡이자 뱅글뱅글 돌던 천장이 이내 원래대로 고정됐다. 어지럼증도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복부를 꾹 누르고 있는 중압감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살짝 들어 아래를 쳐다보자, 나를 덮고 있는 이불의 중앙이 둥그렇게 솟아오른걸 볼 수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아래위로 천천히 들썩이고 있다. 얼른 이불을 걷어내니 아니나다를까. 배 위로 몸을 동그랗게 만 채 꿈나라로 여행을 간 아기 유니콘이 보였다. “규우…. 규우….” “…네가 범인이었냐.” 나는 새근새근 잠자는 아기 유니콘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녀석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몸을 일으킨 후 살며시 방문을 열었다. 그렇게 밖으로 걸어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덥석. “응?” 언제 잠을 깼는지, 아기 유니콘은 비몽사몽 한 눈으로 내 뒤꿈치를 물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눈을 마주치자 “뀨.” 하고 울며 뒤꿈치를 놓았다. 졸린 와중에도 나를 빤히 응시하는 것을 보니 자기만 혼자 두고 가지 말라는 뜻 같았다. 나는 곧장 녀석을 안아 들고 밖으로 나가는 방문을 열었다. 그것이 꽤나 만족스러웠는지, 아기 유니콘은 까닥까닥 고개를 주억이며 복도를 둘러보았다. 그때였다. “어휴, 바쁘다 바빠.” 복도로 나서자마자 어두운 그림자가 앞을 휙 스치고 지나갔다. 누군가 하고 자세히 보니 비비앙이었다. 그녀는 뭐가 그리 바쁜지 연신 “바쁘다 바빠.”를 연발하며 계단 쪽으로 걷고 있었다. 나는 일단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아! 깜박하고 뭘 놓고 와버렸네? 어쩔 수 없지. 다시 방으로 돌아가서 가져와야겠어!” 이윽고 복도를 모두 통과하고 계단에 점점 다다를 즈음, 비비앙의 걸음이 눈에 띌 정도로 느려지기 시작했다.(슬로우(Slow) 마법에 걸렸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그러더니 결국 계단 앞에 다다라서는 손뼉을 짝 치며 나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기까지. 아침부터 내 속을 웃겨준 그녀에게 경의를 표하며, 보답으로 기대에 부응해주기로 했다. “비비앙?” “응안녕김수현잘잤어좋은아침이네.” 부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돌아보는 비비앙. 미리 준비해둔 티가 풀풀 나는 아침 인사였다. 속으로 웃겨 죽을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으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어. 너 뭐가 그렇게…. 킥. 바빠?” “아~. 그냥 조금 바쁜 일이 있어서~. 근데 그건 뭐야?” “유니콘. 어제 못 들었어?” “아! 들었어! 어제 진짜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고연주가 김수현 방으로 절대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꾹 참았지 뭐야.” 비비앙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헤이스트(Haste) 마법이라도 부린 모양이다. 이윽고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녀는 허리를 슬쩍 숙이며 아기 유니콘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유니콘도 이제 완전히 잠이 깼는지, 본연의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비비앙을 응시했다. 그렇게,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헤~. 얘가 바로 유니콘이구나. 예쁘다…. 이름이 뭐야?” “아직 공식적으로 정하지는 않았어.” 비비앙은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로 쳐다보다가, 손을 흔들며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뀨.” “안녕?” “뀨?” “안녕!” “뀨!” ‘그만해, 제발.’ 비비앙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아기 유니콘의 눈꼬리 또한 살짝 휘었다. 도대체 둘의 대화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 건지 최선을 다해 이해하려는 순간, 그녀가 허리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리고 활짝 웃음꽃을 피우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야~! 너 정말 좋은 녀석, 아니 유니콘이로구나?” “뀨~!” “호호! 마음에 들었어.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바로 이곳의 2인자…. 일지도. 아, 아무튼 앞으로 내가 네 뒤를 봐주도록 하겠어. 그러니 마음 놓고 지내도록 해!” “뀨뀨~!” ‘뭐, 뭔가 통하고 있어?’ 짝! 얼씨구. 이제 하이파이브까지. 무에 그리 좋은지, 둘은 서로를 보며 방실방실 웃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나는 한동안 멍하니 바라만 보아야 했다. * 소소한 해프닝은 있었지만, 비비앙을 아침 복도에서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녀를 통해 아침 식사를 방으로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바쁘다고 한 비비앙이 자기 몫까지 들고 온 것은 에러였지만, 그래도 아기 유니콘과 너 한입 나 한입 서로 음식을 먹여주는 흐뭇한 광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물론, 식사 도중 영약에 대해 물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원래는 각자 아침 식사를 해결하게 하고 간단한 결산 회의를 열 예정이었다. 하지만 클랜원들 대부분이 점심 즈음이 되어서야 비척비척 일어나고 말았다. 딱히 그들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어제 도를 넘을 정도로 먹고 마신 것은 부차적인 이유다. 그들 또한 원정에서 쌓인 피로가 있을 테니, 잠을 통해 충분히 풀어줄 필요가 있었다. 정하연이 늦게 일어난 것은 조금 의외였지만. 아무튼 그런 이유에서, 내가 결산 회의를 열 수 있었던 것은 점심을 한참 지나고 나서였다. “유니야아, 유니야아.” “뀨뀨, 뀨뀨.” “아침 점심 맛있게~. 먹었니~. 먹었니~.” 안솔은 아기 유니콘을 자기 앞으로 세우고는, 양손으로 앞다리를 쥔 채 인형 춤을 추게 하고 있었다. 아기 유니콘은 클랜원들 앞에 내놓자마자 인기를 독차지했다. 벌써 비비앙, 이유정, 김한별을 거쳐 안솔에게로 건너간 상태였다. 그쯤 되면 약간 귀찮을 법도한대, 녀석은 그런 내색 하나 없이 연신 즐거운 얼굴로 뀨뀨거리고 있었다. “수현.” 안솔과 유니콘이 놀고 있는 것을 보던 도중, 정하연의 청아한 목소리가 귓가를 살며시 노크했다. 고개를 돌리자 푸른빛을 띠는 맑은 눈동자가 보인다. 원래 단아한 외모였는데, 증폭의 보석을 각인한 뒤로 이지적이고 신비스러운 인상이 강해졌다. 가만히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자 그녀의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왜, 왜 그렇게 보시는지….” “그냥이요. 그나저나 왜 불렀어요?” “아. 혹시 유니콘을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건지 생각해두셨나 해서요.” “글쎄요. 일단은 클랜 하우스가 완공되기 전까지는 숨기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두 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내 양 옆으로는 각각 고연주, 정하연이 앉은 상태였다. 크게 기지개를 피며 물어보자, 둘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각자 생각하는 바를 내게 꺼내놓기 시작했다. “음~. 어차피 공개할 생각이시면 굳이 숨길 이유는 없다고 봐요. 그리고 우리들만 알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미 다른 사용자들도 알고 있으니, 어떻게든 소문은 퍼질 거예요. 혹시 한나를 걱정하시는 거라면, 염려 붙들어 매세요. 제가 잘 말해 놓을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어제 이야기를 들어봤는데, 불쌍한 아이잖아요. 가둬놓고 답답하게 하면 오히려 우울증이 심해지지 않을까요? 그냥 자유롭게 놔두는 게 우리들이나, 아기 유니콘이나 낫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둘의 말이 정론이었다. 나는 언제나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한다. 이 버릇은 원정을 다닐 때나 목숨이 위태로울 때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실생활에서는 불편할 적이 많다. 아마 정하연은 몰라도, 고연주는 내 뜻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밤의 꽃들 중에는 손버릇이 나쁜 여성들도 있으니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하기야, 지금껏 물건을 도둑맞은 일은 없으니까. 확실히 공개를 앞당겨도 상관없기도 하고. 오히려 이번 원정을 홍보하는데 도움도….’ 속으로 주판을 튕기다가, 결국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완공 전까지 굳이 대놓고 공개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필사적으로 숨길 필요도 없다. 물론 유니콘을 철저히 보호하는 것은 앞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이었다. “야, 그런데 이름이 유니는 좀 아닌 것 같아.” “뭐, 뭐라고요? 왜, 왜요오~?” “사실이 그렇잖아. 유니가 뭐니, 유니가. 솔직히 너 이름 진짜 못 지어. 그리고 또 뭐냐. 누누? 그 하얀 구슬 덩어리. 걔 이름도 이상해.” “누, 누누요? 루루거든요! 그리고 유니가 어때서 그래요오….” 이유정과 안솔의 사이로 찌릿한 전기가 흐른다. 안솔이 유니콘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 것에 불만이 생겼는지, 아니면 정말 이름이 마음에 안 드는지. 솔직히 나도 유니는 별로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심 이유정의 말이 반갑기도 했다. 차라리 뀨뀨라면 모를까? 둘이 툭탁 이는 것을 구경하다가,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연주.” “네, 수현. 자! 모두 조용히.” 고연주는 곧바로 대답한 후, 바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입이 떨어진 순간, 소란스럽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사그라졌다. 유니콘도 뭔가 다른 분위기를 느꼈는지, 안솔의 품에서 쏙 빠져 나와 곧바로 나에게 달려왔다. 역시 영리한 녀석이었다. 이윽고 내 앞에 조용히 다리를 접은 유니콘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이유정과 안솔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름은 나중에 천천히 생각하도록 하자. 이 녀석 보기보다 영리하거든. 아마 자기가 마음에 드는 이름이 나오면 틀림없이 반응을 보일 거야.” ““네.”” 둘은 얌전히 대답하고 자기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모였을 즈음, 나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말했지만 원정을 다녀온 클랜원들, 그리고 도시에 남아 일을 처리해준 클랜원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모두의 표정에 간만에 생기가 도는 것을 보니 저도 기분이 좋네요.” “…….” “하지만 조금 자중할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적당히 즐기는 것은 좋지만, 뭐든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아직 일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잖아요? 아직 진행중인 일들이 남아있습니다. 다들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조용해지기는 했지만 전처럼 살얼음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냥 몇몇 애들이 머쓱해하는 정도? 그러나 나 또한 사기의 중요성을 알고, 눈치 없는 상사는 되고 싶지 않았기에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해서, 다소곳이 앉아있는 정하연을 향해 첫 번째 안건을 물으며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사용자 정하연. 클랜 하우스에 대한 진행 상황을 보고하세요.” “네. 바로 시작할게요. 로드께서 예정보다 일찍 돌아오셔서, 아직 완공된 클랜 하우스를 보여드리지 못했네요. 하지만 거의 끝낸 상태라고 보셔도 무방해요. 건물의 기본 골격은 유지했지만, 외부는 깔끔하게 재단장을 완료했고 내부는 개축 공사의 마무리만 남겨놓고 있어요.” “떠나기 전 제가 추가로 요구한 것은 어떻게 됐나요?” “개인용 수련 장소를 말씀하시는 거죠? 완공했어요. 늦어도 5일만 있으면 모든 공사가 끝날 거예요. 물론 내부에 들일 가구 및 고용인들의 문제가 남았지만….” “알겠습니다…. 어차피 오늘 나갈 일도 있으니 돌아오면서 한 번 보도록 하죠.” 정하연은 두툼한 기록을 꺼내며 싱긋 웃었다. 나는 싱거운 웃음을 흘리며 손을 저었다. 살펴볼 생각이기는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사용자 신상용. 오늘 아침 비비앙에게 대충 듣기는 했는데…. 사실입니까?” “네, 네? 어, 어떤 게….” “비비앙이 그러더군요. 영약 연단을 성공할 확률이 원래는 5할이었는데, 신상용씨가 8할로 높였다고요.” “하, 하하. 무슨 그런 말씀을. 애, 애당초 스승님께서 주도하셨고, 그저 성공 가능성만 높였을 뿐입니다. 우, 우연이었지요. 그리고 효능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미 사정을 다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음에도 신상용은 겸손히 대답했다. 그런 그를 보며 부드럽게 웃고는, 이번엔 비비앙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고 했지?” “엉.” “워프 게이트 문제라니. 무슨 소리야?” “나도 잘은 몰라. 김수현이 돌아오기 전전날에 수정구로 소식을 받았거든. 그런데 바바라에서 주문한 재료들이 갑자기 늦게 온다네.” “조금 더 자세히.” “솔직히 조금 넉넉히 주문했었거든? 김수현이 막막 지원해준다고 했고, 미리 실험할 것도 있고 해서…. 그런데 갑자기 그러니까 뭐, 나도 조금 그렇지. 그래도 3일 안으로는 무조건 온다고 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애초에 바바라에서만 공수해올 수 있는 것들이기도 하고.” 비비앙도 그 동안 놀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확률을 높이려 대도시 바바라까지 가서 재료를 찾고 연금에 필요한 기구들을 살폈다고 한다. 하지만 워프 게이트에 이용 문제가 생겨 배송에 차질이 생겼다고 아침에 살짝 이야기를 들었다. “흠….” 워프 게이트는 원칙적으로 도시의 대표 클랜에게 소유 권한이 있다. 즉 게이트의 이용에 차질이 생겼다는 말은, 황금 사자에서 중간에 야료를 부렸다는 소리였다. 나는 가만히 테이블을 두드리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어차피 클랜 하우스가 완공돼야 연단도 할 수 있으니까. 아무튼 3일 안으로 무조건 해결된다는 소리지?” “응. 그쪽에서 정 안되면 다른 도시를 경유해서라도 갖다 주겠다고 하더라. 히히. 많이 사니까 잘해주는 건가?” ‘다른 도시도 비슷할 것 같은데….’ 황금 사자가 미치지 않고서야 벌써부터 워프 게이트를 완전하게 끊을 리가 없다. 다만 통행에 뭔가 수작을 부렸을 가능성은 있었다. 그런 경우는 신물이 날 정도로 겪어봤기 때문에 새삼 놀랍지도 않다. 어쨌든 대략적으로나마 진행 상황은 들었다. 그러나 가만히 기다리는 것은 시간 낭비나 다름없었다. 나는 고개를 한두 번 주억인 후 모두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앞으로의 방침을 여러분께 간략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일단 저는 오늘 원정 보고 때문에 조금 바쁠 것 같습니다.” “원정 보고요? 설마 벌써 작성하신 건가요?” 정하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죠. 그래도 이스탄텔 로우에 지금쯤 소식이 들어갔을 겁니다. 아마 한시라도 빨리 해주기를 원하겠죠. 오늘 직접 신전을 방문하고, 구두로 약식 보고를 할 생각입니다. 아마 모니카에서라면 이것만 해도 충분히 조사단을 창설할 수 있을 겁니다.” 너도 밤나무와 뮬의 신전이 워낙 병신 같았을 뿐이지, 이스탄텔 로우가 구축한 모니카의 시스템은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였다. 어쩌면 지금쯤 신전에 이스탄텔 로우 관계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용자 고연주.” “말씀하세요.” “혹시 모르니까 워프 게이트에 관한 내용을 좀 알아오세요. 오늘 오후 늦게 돌아올 예정입니다.” “클랜 로드의 명을 받듭니다.”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그리고…. 사용자 백한결.” “네, 네!” “너는 회의 끝나고 나 좀 따라와. 같이 갈 데가 있다.” “알겠습니다!” 무척 긴장하고 있었는지, 백한결은 뻣뻣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속으로 웃으며 이번엔 애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안현, 안솔, 이유정. 세 명에게는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그저 아기 유니콘을 잘 달래주고 있으라고만 했을 뿐. 하지만 안현은 유니콘의 보호에 대한 의도를 확실히 알아들은 듯, 걱정 말라고 대답하며 자신의 가슴을 탕탕 쳤다. ‘저놈은 꼭 이럴 때만 번뜩인단 말이야.’ 평소에도 그러면 좀 좋을 텐데. 아무튼 비비앙과 신상용이야 애초에 하고 있는 일들이 있으니, 따로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면 내가 아직 부르지 않은 클랜원은 두 명. 나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남은 두 명을 보며 입을 열었다. “사용자 정하연. 사용자 김한별.” ““네.”” 듣기 좋은, 고요한 목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내가 그들에게 지시할 것은, 모두가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둘은 구즈 어프레이즐 주문서를 준비하세요.” “구즈 어프레이즐 이라면…. 아.” “그리고 창고에 있는 장비들도 모두 꺼내놓고요. 제가 돌아오는 즉시 성과 확인 및 분배를 실시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두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회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지금 바로 나가볼 테니, 오후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말을 마친 후 성큼성큼 문 쪽을 향해 이동했다. 그러자, 백한결이 급히 일어나더니 허둥지둥 뒤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곧바로 방문을 열어젖혔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아하하. 네. 실은 이번 소제목은, 제 심정을 반영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하하. 하하. 하. 어헝헝헝. 저 방학 맞죠? 그렇죠? 독자님들. 어헝헝헝. ^_ㅠ 오늘 조아라 분과 통화를 했는데요, 제가 너무 징징거렸나 봐요. 이북 교정에 너무 그렇게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위로까지 받았어요. ㅋㅋㅋㅋ. 근데 솔직히…. 초반 부분을 보면…. 으앜ㅋㅋㅋㅋ. 내 손 발ㅋㅋㅋㅋ. 으아아앜ㅋㅋㅋㅋ. 이런 상황이더라고요. 쳐낼 것도 많고, 많이 바꿀 예정이에요. 제가 욕심이 너무 많나 봐요. 그래도 초반을 잘 넘기면 점점 속도가 붙는다고 하시니, 열심히 해볼래요. 새삼 여기까지 같이 와주신 독자분들이 존경스럽게 느껴져요. 큭큭. :) 감사합니다! Ps. 쿠폰 주신 모든 분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 리리플(277회) 』 1. 눈물강 : 1등 축, 축, 축, 축,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눈물강 님의 1등을 축하합니다! 능력치 포인트는, 오늘 수현의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모두 사용할 생각은 없지만, 확실히 체력은 보충해야죠. :) 2. 블라미 : Yes. 정령사는 Secret 클래스입니다. 존재합니다. 매우 강력크한 클래스입니다. 현재 설정으로 잡아놨는데, 비비앙이랑 1:1 뜨면 비비앙이 집니다. '지금의' 비비앙이 말이죠. 후후. 3. 신유진 :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유니콘이 팔이라니. ㅜ.ㅠ 4. 브리키오 : 아이템 정보는 다음 회에 나올 예정입니다. :D 5. Lea : 그럼요~. 유니 방도 만들어야죠! 클랜 하우스도 최고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아, 지금 이북 교정하고 있는데요. 초반에 세라프랑 김수현 사이를 조금 부드럽게 할 생각이에요. 지금 보니까 수현이 완전 틱틱대네요. ㅋㅋㅋㅋ. 『 리리플(278회) 』 1. 민lkj : 엇. 1등을 하셨군요! 1등 축하합니다! 처음 뵙는 것 같네요. 하하하. :) 2. 라마루아 : 토닥토닥. 힘내세요. ㅜ.ㅠ 흑흑흑흑. 연참을 하지 못하는 이 죄를 어찌 청해야 하나요. 3. 사람인생 : 하, 하나 틀리면 잘하신 거잖아요. 'ㅅ' 물론 그 맘은 이해하죠. 하하. 아마 그분도 사람인생 님의 노력을 알아주시지 않을까요. :) 4. uther : 네. 오늘 15KB 대령했습니다! 5. 타락한비둘기 : 보고 싶어하는 분들이 계셔서 표지 바꿨습니다. 물론 이것도 좋고, 고장난선풍기 님께서 그려주신 고연주 표지도 좋아요.(그건 정말 대박이었어요.) 원래는 안솔 표지도 올리고 싶었는데, 제가 글자를 그리는 것에 재주가 없어서요. ㅋㅋㅋㅋ.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80 / 0933 ---------------------------------------------- 조금 쉬세요, 제발 “머셔너리 로드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환대에 감사 드립니다.” “별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모니카의 신전에 방문하자마자 여성 신관 한 명이 나와 백한결을 맞이해주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미리 연락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확실히 뮬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권한’을 부여 받은 여성은 여느 거주민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퀭한 눈에 창백한 인상을 하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날카로웠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굉장히 사무적인 태도라는 것. 시선에 따라서는 싸가지 없다고 볼 수 있겠지만, 이런 부류들은 적어도 맡은 일 하나만큼은 꼼꼼하게 처리해준다. 사용자들로 북적이던 입구와는 달리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내부는 점차 한산해졌다. 이윽고 신관이 안내해준 테이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 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실 거라도?” “괜찮습니다. 바로 보고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들어보죠.” 백한결은 한껏 주눅이 든 상태였다. 한기를 풀풀 날리는 신관의 태도에, 혹시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곰곰이 생각하는 모양이다. 여전한 성격에 실소를 흘리자, 눈앞에 기록과 깃펜을 들고 받아 적을 준비를 하는 신관이 보였다. 나는 곧바로 구두 보고(약식)를 시작했다. 원정 보고는 굉장히 중요한 과정이다. 이 과정은 기록으로 남으며, 남겨진 기록은 도서관으로 이송돼 적합한 카테고리에 배치된다. 후에 섬망의 산이나 환각의 협곡에 가는 사용자들은 필수적으로 도서관에 들를 것이고, 내 기록을 읽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만일 기록에 잘못된 정보가 기재되어있다면, 그것은 사용자들의 목숨과 직결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에 원정 보고를 할 때 허위 보고는 절대로 지양해야 할 사항이었다. 괜히 실적을 높인답시고 뻥튀기를 했다가, 조사단에 의해 거짓이라는 점이 밝혀지면 빼도 박도 못한다. 어쩌면 지금의 나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나름 명성 있는 클랜들도 허다하게 실패한 게 환각의 협곡 공략이었다. 그런데 D Zero에 랭크된 클랜이, 그것도 신생 클랜의 사용자들이 공략을 해낸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꽤나 꼬치꼬치 캐물었겠지만 웬일인지 여신관은 차분히 내 말을 받아 적기만했다. 아마도 이스탄텔 로우의 입김과 지금쯤 신전 어딘가에서 치료받고 있을 사용자들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백한결은 안절부절못한 듯 보였지만 나는 나름대로 훈훈한 기분을 느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유니콘들은 우리를 통곡의 평야 끝자락에서 내려주었고, 도시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이상입니다.” 이윽고, 약 1시간에 걸쳐 원정 보고를 끝마칠 수 있었다. 슬쩍 시선을 내리자 빼곡히 채워진 기록들이 가지런하게 쌓여있었다. 그 정도 썼으면 손이 아플 법도 한데, 조금의 찌푸림도 없이 처음의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깃펜 끝을 물고 조용히 입을 오물거리던 그녀는 이내 크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후. 잘 들었어요.” “고생하셨습니다.” “이게 제 일인걸요. 아무튼 그건 그렇고. 중간에 몇 개 납득할 수 없는 게 있기는 한데….” “어떤 부분인지요?” “아니요, 보고하실 때 이미 해당 사항에 대해서 부연 설명을 하시더라고요. 몰이를 당한 것 같다고 하셨죠?” 나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관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는 깃펜을 휙 돌렸다. “다른 건 이스탄텔 로우의 증언과 살아 돌아온 사용자들이 있으니 충분히 증명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건….” “거짓말이 아닙니다. 저희들이 통과한 경로에 흔적들이 남아있을 겁니다.” “거짓말이라는 소리가 아니에요. 그만큼 가벼이 넘길 수가 없다는 소리죠. 그리고 머셔너리는 이스탄텔 로우의 일을 위임 받아 간 클랜이에요. 그런 분들에게 몰이를 했다는 것은, 모니카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했다는 소리에요. 안 그래도 요즘….” 신관은 입맛을 한 번 다시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 건에 관해서는 제가 따로 조사를 해보고, 이스탄텔 로우에 보고하겠어요. 물론 머셔너리 로드님께도 연락을 드릴게요.” “아, 아니. 안 그래도 바쁘실 텐데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이스탄텔 로우에서는 머셔너리 클랜에 굉장히 많은 관심을 갖고 있어요. 부담 가지지 않으셔도 되요. 당연히 해야 될 일이니까요. 아무튼 임무 달성 및 원정 성공은 축하해요. 조사단은 빠르면 오늘, 늦으면 내일 안으로 창설할거예요. 이 정도의 실적이라면 조사가 끝난 후를 기대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말이 되게 빠르네.’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박진감 넘치게(?) 넘어가니 약간이지만 허탈한 기분까지 느껴졌다. 어찌됐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기분 좋은 관심으로 받아들이면 그만이었다. 할 말은 다 했으니 이제는 조용히 결과를 기다리면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결아, 일어나.” “잠시만요.”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 찰나, 신관의 말이 나를 붙잡았다. 나를 따라 의자에서 일어나던 백한결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몸을 멈칫했다. “오늘 아침 이스탄텔 로우에서 연락이 왔어요.” “네.” “혹시 시간이 되시면, 머셔너리 로드의 방문을 원한다고 하시더라고요.” “하하…. 알겠습니다.” 어차피 한 번은 찾아갈 필요가 있다. 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조금이지만 신관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것을 보니 평소 이스탄텔 로우와 신전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은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따로 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요. 내일쯤 제가 직접 그곳으로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네.” * 원정 보고를 마치고, 나는 백한결을 데리고 주점 ‘날아라 병아리’로 들어갔다. 원래는 그냥 길거리 음식을 사서 클랜 하우스 내부를 구경하며 먹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원정 보고가 생각보다 일찍 끝나는 바람에 이른 저녁을 먹기로 결정한 것이다. 척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내부 구조에, 흡사 서양의 집사를 연상케 하는 종업원들. 백한결은 이런 곳은 또 처음 오는지 연신 조심스러운 기색이었다. 이윽고 남자 웨이터가 주문한 음식을 갖고 와 테이블에 정중히 내려놓기 시작했다. 팁으로 은화 하나를 던져준 후, 우리들은 음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안현이랑 유정이가 네 칭찬을 많이 하더라고.” “헤헤, 형님도…. 아. 죄, 죄송해요.” “괜찮아. 너도 이제 우리 식군데 뭘. 둘만 있을 때는 형이라 불러도 돼.”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그런데 너 아까 보니까 되게 얼어있더라. 신관이 그렇게 무서웠어?” 백한결은 따뜻한 빵을 찢어 수프에 찍다가, 이내 여성 거주민 신관이 생각났는지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냥 처음 봤을 때 이유 없이 소름이 돋더라고요. 태도도 고압적이고.” “하하. 원래 권한을 부여 받은 거주민들이 그렇지 뭐. 단순한 태도로 그들을 평가할 수는 없어. 어찌됐든 우리들은 도와주는 존재임은 분명하니까.” “그래도 그런 태도를 계속 유지했다가는 사용자들이랑 마찰을 빚지 않을까요?”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 하지만 웬만큼 미치지 않고서야, 그러기는 힘들걸? 우리는 거주민들이랑 땔래야 땔 수 없는 사이거든. 친하게 지낼수록 활동하기가 더욱 편해져. 그러면 그 반대는 어떨까?” “불편해지겠죠.” ‘물론 쓸모 있는 녀석들에 한해서지만.’ 나는 뮬을 떠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백한결은 볼을 불룩 이며 고개를 끄덕끄덕 주억이고 있었다. 간만에 나와 둘이 있자 아카데미 생각이라도 났는지, 머셔너리에 합류한 이후 볼 수 없었던 모습을 간간히 볼 수 있었다. 백한결은 예쁘다. 문득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은하수 같은 눈망울에 오뚝한 콧날, 참해 보이는 외모. 거기다 분홍빛 입술을 달싹이며 음식을 오물오물 씹는 모습까지. 심지어 웨이터가 흘끔흘끔 쳐다보며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헤헤. 맛있어요 형.” “응? 아, 많이 먹어.” “네. 형님도 많이 드세요.” 내가 굳이 백한결을 데리고 나온 것은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우리 중에서 가장 늦게 들어왔고, 오자마자 힘들었던 원정을 떠나야만 했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을 하고 있지만 아직 지구의 향기가 진하게 남아있을 터였다. 내상이 없을 리가 없다. 내색하지 않으려는 속내가 기특하긴 해도, 망가지지 않도록 한두 번 보듬어줄 필요는 있었다. 무엇보다 녀석은 발전 가능성이 아주 많은, 각성 시크릿 클래스 ‘신의 방패’니까. “그래…. 그나저나 클랜에 들어오니까 어때? 뭐 힘든 건 없어?” “네. 괜찮아요.” “안 괜찮은 거 아니까 말해봐. 형 앞에서는 다 말해도 괜찮아.” “으응….” 부드럽게 타이르자 백한결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슬쩍슬쩍 내 눈치를 살피는 게, 확실히 뭔가 걸리는 것은 있는 모양이다. “그게…. 꼭 힘들다기 보다는….” “조금 서운하네. 한결이가 형 앞에서 숨기는 게 있을 줄이야.” “아, 아니에요 형님! 그냥 제가 괜히 분란만 일으키는 것 같아서….” “그걸 해결하는 게 내 일이기도 하지.” 백한결은 여전히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한 번 두 번 계속 채근하자, 결국 한숨을 폭 쉬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실은….” * 식사를 마친 후 나는 백한결을 먼저 돌려보냈다. 일을 다 보기는 했지만, 러브 하우스로 바로 돌아갈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가는 길이니만큼 중간에 클랜 하우스에 한 번 들러 얼마나 바뀌었는지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클랜 하우스 앞에 도착하자, 들어가는 정문부터 바뀌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전의 녹슨 문이 아닌 결 곱고 윤기가 반드르르 흐르는 나무문이었다. 그리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아름드리 나무와 꽃, 풀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정원이 보였다. 그것은 마치 자연의 일부를 뚝 떼어 가지고 왔다고 착각이 들만큼 빼어난 풍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물론 풍경만 좋은 게 아니었다. 거주, 이동을 세심히 고려해 설계했는지 여러 갈래로 길이 트여있었다. 건물 또한 예전과는 달리 말끔한 외관과 세련된 위용을 내뿜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자연 그 자체 같기도 했지만, 또 어떻게 보면 정원 위에 세워진 휴양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부로도 들어가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문에 휘장이 쳐진 상태였다. 아직 내부 개축 공사는 끝나지 않은 모양. 정원 한구석에 있는 깨끗한 물이 채워진 연못을 보다가, 나는 문 밖으로 발길을 돌렸다. 고용인들을 구하고 가구를 채워야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첫 시작임을 감안하면 매우 훌륭한 클랜 하우스였다. 하늘은 점점 어스레한 빛을 띠고 있었다. 원정 보고, 식사, 클랜 하우스를 돌아보니 그래도 시간이 꽤 흐른 상태였다.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나는 클랜원들이 기다리고 있을 러브 하우스로 직행했다. 굳이 찾아보면 할 일들을 더 찾을 수 있겠지만 얼른 오늘 일을 마무리 짓고 몸을 쉬게 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러브 하우스의 문을 밀고 들어가자,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문이 열리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1층에 있던 고연주가 바로 달려나오며 나를 맞이했다. “수현!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 네. 그런데 잠시만요. 이게 무슨….” 1층의 중앙에는 아까 내가 하연에게 지시했던 일이 벌어져 있었다. 이번 원정에서 얻은 성과들은 물론 뮬에서 얻었던 성과들까지 가지런히 나열된 상태였다. 거기다 이미 구즈 어프레이즐(Goods Appraisal)을 대부분 끝낸 듯, 각 장비 위에 놓여진 주문서가 빛을 번쩍이고 있었다. “야, 이 지팡이 옵션 좀 봐! 질서의 오르도? 장난 아니야. 크크크크.” “이 옷은 뭐지. 너무 야한데?” “응. 넌 입지 마라.” “미친 새끼. 너 나 자꾸 건들래? 요즘 참으니까 눈에 뵈는 게 없지?” 1층은 굉장히 복작였다. 테이블은 모두 한쪽으로 치워져 있었고, 클랜원들은 장비를 둘러싸고 한창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부러운 듯이 쳐다보고 있는, 러브 하우스에 거주하는 밤의 꽃들과 임한나. “이걸 왜 1층에 깔아놓으셨죠.” “그게, 수현의 방이 제일 크잖아요? 그런데 장비를 하나씩 놓으려니까 공간이 부족해서….” “고연주.”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자, 고연주는 뜨끔한 얼굴로 혀를 쏙 내밀었다. 그러더니 눈동자를 한 바퀴 빙글 돌리며 말했다. “실은 한나의 부탁이 있어서요.” “임 마담이요?” “네. 여기서 일하는 아이들 중에, 충분히 전투 사용자로서 나갈 수 있는 애들이 몇 명 있거든요. 그런 애들에게 동기부여를 해주고 싶다고 하길래….” “흠.” ‘그래 봤자 썩 괜찮은 애는 없던데. 임한나 빼고.’ 생계형 사용자들 중 낮은 능력치에 지레짐작 포기하거나, 목숨이 아까워하는 이들도 있긴 있다. 그러나 이미 러브 하우스 내부의 인원은 진작에 제 3의 눈으로 살펴본 상태였다. 고연주의 말대로 노력하면 한두 명은 가능할지도 모르는 인원이 있지만, 솔직히 머셔너리에 들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애초에 관심도 두지 않은 거고. “아잉~. 수현~. 화내지 않을 거죠? 네?” “…다시 올려놓으려면 제법 고생 좀 해야 할겁니다.” 고연주는 내 표정이 굳은 것을 봤는지 팔짱을 끼우며 애교를 피웠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돌리자, 밤의 꽃들이 나를 흘끔흘끔 보는 것이 느껴졌다. 몇몇이 경악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걸 보니, 그림자 여왕이 애교를 피운 사실이 자못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녀들 뒤로 가만히 서있던 임한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까닥인 후 장비들이 진열되어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뀨뀨!” 장비 사이를 거닐며 뛰놀던 아기 유니콘은, 귀신같이 내가 왔음을 알아채고는 곧장 달려오기 시작했다. 녀석은 이 떠들썩한 분위기가 좋은지 무척이나 즐거운 얼굴이었다. 아기 유니콘을 안아 들자, 장비에 정신이 팔려있던 클랜원들이 그제야 한 명 두 명 나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어, 형!” “김수현! 김수현이다!” “오빠. 언제 왔어?” “리더!” 안현, 비비앙, 이유정은 그렇다 치더라도. 도대체 뭣 때문에 평소 차분한 신상용까지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 걸까. 내 품에 머리를 빛의 속도로 비비는 유니콘을 달래며 가까이 다가가자, 이내 클랜원들은 순식간에 나를 에워쌌다. “형! 형! 장비들 좀 보세요! 완전 대박이에요! 질서의 오르도 이거 완전….” “김수현! 나 저거 줘! 나 저거 갖고 싶어!” “오빠~. 나 이제 스쿠렙프 돌려주면 안 돼? 그리고~.” “알았다, 알았다. 잠시만. 잠시만 좀 보고 얘기하자.” 새 새끼처럼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애들은 젖히고 나서야, 나는 간신히 장비들이 있는 곳으로 도달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정하연과 김한별이 열심히 남은 성과들을 향해 구즈 어프레이즐 주문을 외우는 중이었다. 둘은 나를 보며 일어서려고 했지만, 나는 손을 들어 만류했다. “죄송해요. 워낙 감정이 어려운 것들이 많아서….” “괜찮습니다.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더 고생해주세요.” “네. 그럼 일단 물품 감정 먼저 끝내도록 할게요. 거의 끝났어요. 한별씨, 다시 시작해요.” “네.” 둘 다 입이 부르트도록 주문을 외웠는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볼에 착 달라붙어있었다. 이윽고 다시 주문을 외우는 그녀들을 보며, 나는 감정이 완료된 장비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니, 살피는 척만했다. 제 아무리 구즈 어프레이즐이라고 해도, 제 3의 눈이 훨씬 정확하다. 해서 나는 곧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칼리고 아브락사스(Caligo Abraxas)』 (설명 :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고대 용사 로이드가 사용하던 검, 아브락사스 입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검이지만 일정 이상의 마력을 주입하면 본래의 진정한 위용을 드러냅니다. 전설에 따르면 봉인이 풀렸을 경우, ‘세계를 베어 갈랐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전설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잠재되어있는 힘은 마왕을 쓰러뜨렸을 정도로 강력합니다. 다만, 지금은 사악한 마법사에 의해 강제적으로 타락한 상태입니다. 원래 이름은 신검 아브락사스였지만, 현재는 칼리고(Caligo : 어둠)가 붙어 마검의 성질을 띠게 되었습니다.) 『파라디수스 플레이트 메일(Paradisus Plate Mail)』 (설명 : 대천사의 축복을 받은, 윗몸에 두르는 흉갑 형태의 갑옷입니다. 착용자에게 가해지는 모든 ‘물리’ 데미지를 ‘마법’ 데미지로 변환시켜 반사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돌아가는 데미지는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최대 20%입니다. 만일 흡수할 수 있는 충격을 넘어서는 데미지를 받았을 경우 반사 효과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로쓰로스 롱 부츠(Orthros Long Boots)』 (설명 : 아득한 과거 홀 플레인의 고대 왕국에 ‘별’이 떨어진 적이 있습니다. 당시 이것을 수상하게 여긴 왕은 떨어진 별을 궁으로 옮겼고, 당대 최고의 마법사들과 대장장이를 불러 별을 분석하고, 일부는 떼어내 장비들을 만들었습니다. 이 부츠는 별의 일부로 만들어진 부츠로서, 1000일째 되는 날 아침 해가 떠오르는 시간에 완성되어 오로쓰로스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언뜻 보면 원석으로 만들어져 굉장히 투박하고 무거워 보이지만, 경량화 마법과 사용자의 발에 맞추는 유연화, 자동 조절 마법이 걸려있습니다. 또한 고대 최상위 마법 래피드(Rapid)가 걸려있어, 착용자가 이것을 제어할 수만 있다면 그 누구도 따라잡지 못할 신출귀몰한 움직임을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명으로 래피드와 별을 합쳐 래피드 스타(Rapid Star)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찬란한 섬광(Brilliant Flash) : 라우라 필리스(Laura Phylis)』 (설명 :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나뭇가지를 꺾어 만든 활입니다. 축복받은 나뭇잎으로 촘촘히 감싸 요정의 호수에 100년 이상 담갔다가 꺼내어, 오랜 세월을 거쳐 내려오며 하나의 ‘신기’를 품게 된 전설의 무구입니다. 시위도, 화살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마력만으로 찬란한 빛으로 이루어진 화살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쏘아진 화살은 하나의 ‘섬광’과 같다 하여 ‘찬란한 섬광’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위그드라실의 나뭇잎을 이어 만든 옷(Yggdrasil's Leaves Clothes)』 (설명 :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나뭇잎을 이어 만든 옷입니다. 일반 나뭇잎이 아닌, 10년에 한 번씩 피어나는 위그드라실의 꼭대기에 피어나는 나뭇잎으로만 만들어졌습니다. 그러한 나뭇잎의 향기는 많은 효과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급박한 상황에서 최고의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으며, 정신 오염계열 마법에 강한 저항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수’ 계열 마법을 흡수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단 한가지 단점이라면, 가릴 수 없는 부분은 방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리자 부츠(Rhiza Boots)』 (설명 :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뿌리를 잘라 만든 부츠입니다. 착용자의 몸을 가볍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으며, 숲 안에 있을 시 그 효과가 더욱 배가됩니다. 만일 ‘요정’이 아닌 ‘인간’이 이 부츠를 착용했을 경우 요정과 비슷한 몸놀림과 점프력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수현, 어때요? 괜찮은 것들이 많이 있죠?” 허공에 떠오른 메시지들을 읽으며, 나는 간신히 침음을 삼켰다. 옆에서 고연주의 황홀한 목소리가 들린다. 분명 이런 장비들을 얻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갖게 되니 감회가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머리띠도, 정체불명의 단검 두 자루도, 클래스를 계승할 수 있는 것도, 마볼로의 연구실에서 얻은 성과들도 남아있다. 그리고 요정 여왕의 눈물도 잊으면 안 된다. 두근대는 마음을 추스르며, 나는 남은 물품들을 향해 제 3의 눈을 돌렸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으어어어. 장비 설명 부분을 적어보니 총 3KB더라고요. 최소 11KB를 올린다고 가정하면 장비 설명에 30%를 할애하는 건 좀 많은 것 같아 그냥 아예 분량 자체를 늘려버렸습니다. 다음 회는 장비 설명을 약 6개~7개를 해야 해요. 나머지는 굳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고요. ‘ㅅ’ 다음 회부터는 설명을 조금 줄이는 방향으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장비 하나하나에 전설, 기록을 넣다 보니…. OTL PS. 영어는 추가로 넣었습니다. 소중한 조언 감사합니다. _(__)_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합니다. 장비 설명이 많아서 둘로 나누는 게 좋다고 여겼습니다. 남은 설명까지 들어가면…. 설명이 본 분량의 50%를 넘을 것 같아서요. ㅜ.ㅠ 2. 추락한날개 : 양해 부탁 드려요…. 연참을 안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못하는 상황입니다…. OTL 시간이 남으면 리리플도 자정에 딱딱 올릴 텐데, 연재 분량도 간신히 맞추고 있어요…. ;ㅅ; 흑흑흑흑…. 3. 불타는감자 : 에, 뀨뀨. 귀엽지 않나요? 뀨뀨야~. 하면 뀨~. 이러면 되게 귀여울 것 같은데요. ㅋㅋ. 4. 브리키오 : 오그라드는 것도 있지만 이상한 문장도 많더라고요. ㅋㅋㅋㅋ. 일단 통과의례에서 이상한 부분이랑 중간에 나오는 뜬금없는 개그 부분은 싹 다 삭제할거예요. 한별이랑 헤어지는 장면도 조금 부드럽게 바꾸고요. 5. 오피투럽19 : 오호라. 오피투럽19 님 말씀도 일리가 있네요. 안솔의 성향을 설정할 때, 그때는 성향이 되게 범위가 좁았거든요. 중간에 성향을 다양화시켰고요. 그 부분은 이북 교정 때 참고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6. 큐베개객끼 : 쿠폰 감사합니다. _(__)_ 네. 쿠폰을 작가 분들한테 주시면 작가 분들한테 원고료가 들어오고요, 큐베개객끼 님은 아마 노블 이용 기간이 늘어날 거예요. 7. 천냥보은 : 이북 교정이 쉽지가 않더라고요. ㅜ.ㅠ 솔직히 초반은 진짜…. ㅋㅋㅋㅋ. 8. 파르나르 : 음~. 아마 클랜 하우스 만들고, 영약을 먹으면 그 이후로 나오지 않을까요? 이번 휴식 + 자리 잡는 챕터 끝부분에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9. 난행복해 : 수정 완료했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10. 유리켄느 : 엇? 마지막에 하신 말씀의 의미가 궁금합니다. 정확하고, 자세하고, 상세한 설명을 요청합니다. 궁금해요!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81 / 0933 ---------------------------------------------- 머셔너리, 자리를 잡다 『순결의 머리띠(Headband of Innocence)』 (설명 : 요정 여왕 마르가리타를 상징하는 물건 중 하나입니다. 그녀의 미모에 반한 솜씨 좋은 드워프 대장장이가 선물한 것으로, 여왕은 머리띠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순결이란 여성의 처녀성을 의미하는 게 아닌 마음에 사욕, 사념 등 더러움이 없는 깨끗함을 의미합니다.) 『찢겨진 요정 여왕의 날개(Wings of Elf Queen, Ripped, 12쌍)』 (설명 : 여왕의 자리에 오름으로써 허락된, 요정들에게는 유일무이한 12쌍의 날개입니다. 사악한 마법사에 의해 강제로 찢겨짐으로써 제구실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러나 아직 신기를 품고 있어, 다른 것과 섞을 수만 있다면 예전의 힘을 되찾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습니다.) 『섬백(蟾魄)』 (설명 : 고대 홀 플레인의 유명한 여전사, 달빛 고양이(MoonLight Cats) 오브아나 알카트라츠가 애용하던 카타나입니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달빛을 뿜는 궤적이 남는다고 하여 달의 다른 이름인 ‘섬백’이라고 불립니다. 어떠한 마법적 효과도 없지만, 절삭력과 강도가 매우 뛰어납니다.) 『티르빙(TyrFingr)』 (설명 : 한 번 뽑히면 피를 묻히기 전에는 칼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마검, 티르빙입니다. 흉포한 마검인만큼 주인을 가리는 경향이 심합니다. 조금이라도 주인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소유자를 파멸시키는 무시무시한 마검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티르빙이 주인을 마음에 들어 할 경우, 착용자는 마검의 가공하리만치 파괴적인 마력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푸른 달의 마도사(Book, Magician of the Blue Moon, Secret Class)』 (설명 : 이미 닦여있는 마법을 따라가는 게 아닌, 자신만의 창조적인 길을 개척하길 원하는 자들입니다. 사실상 고대의 마법은 모두 이런 자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발전해왔습니다. 언제나 창조와 변화를 추구하며 오롯한 마도의 길을 걸어가는 자. 신념을 굽히지 않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자. 그들이 바로 ‘푸른 달의 마도사’입니다.) 『여명의 검투사(Sword, Gladiator of the Dawn, Rare Class)』 (설명 : 고대 홀 플레인에는 다종의 수인족이 존재했는데, 그 중 묘(猫)족은 굉장히 호전적이며 전투를 즐기는 종족이었습니다. 과거 검투 경기가 홀 플레인 전역을 물들였을 무렵 묘족의 전사들은 스스로 용병이 되어 경기에 참가했습니다. 묘족은 한 번 경기에 참가하면 밤이 새도록 경기를 치렀는데, 날이 밝으면 항상 마지막까지 서있는 검투사는 묘족의 용병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새벽빛을 받으며 항상 승리의 함성을 질렀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묘족들을 가리켜 '여명의 검투사’라는 칭호를 붙였습니다.) 『요정 여왕의 눈물(Tears Of Elf Queen)』 (설명 : 요정 여왕 마르가리타의 진실된 감정이 담겨있는 눈물입니다. 사악한 마법사에 타락한 그녀는, 최후의 순간을 맞이해 자신의 모든 감정을 눈물에 담아 내보냈습니다. 복용 시 능력치 포인트가 2포인트만큼 새로이 생성됩니다. 추가된 능력치 포인트는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올릴 수 있습니다.) “후유.” 허공을 빼곡히 메울 정도로 떠오른 수많은 메시지에 크게 숨을 내쉬었다. 한 번 숨을 고르고 나머지 성과들도 마저 살폈다. 요정 여왕의 알, 마볼로의 보존용 마력 구슬, 다채로운 빛깔을 띠는 물약, 마력 영약(마력 95포인트 이하 일시, 마력 2포인트 상승), 썩어버린 위그드라실의 과실. 그리고 뮬에서 얻은 장비들까지. 천만다행으로 엘릭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고연주 나름대로 생각은 했던 모양이다. 잠시 동안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을 꼴깍꼴깍 삼키는 클랜원들. 그리고 사위를 둘러싼 밤의 꽃들. 그녀들의 눈에 담긴 감정을 실로 복잡하고도 미묘했다. 부러움, 질투, 시기, 탐욕, 자괴감 등등. 모니카는 북 대륙에서도 치안이 좋기로 손꼽히는 도시다. 그리고 어차피 걸치고 다닐 것들이기에 공개될 수밖에 없는 것들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정당한 권리를 갖고 있고, 이것을 빼앗기 위해 공개적으로 협박하는 행동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힘들다면 수면 아래로 은밀하게 움직이는 행동이 있을 수도 있다. 물론 그림자 여왕으로써 뭔가 믿고 있는 구석이 있겠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이번 행동은 경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원정 홍보와 유니콘과 맞물려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겠지만, 다음부터는 필히 주의해야 할 행동이었다. 클랜원들은 여전히 꺅꺅 비명을 지르며 장비들을 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너무 흥분했어.’ 달아올라도 너무 달아올랐다. 적당한 흥분은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어주지만 이건 도가 지나친 감이 있었다. 거기다 주변 상황도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제 3의 눈으로 정보를 모두 읽은 후, 나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눈치 빠른 클랜원 몇 명이 조금씩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소란이 조금씩 가라앉을 즈음, 구즈 어프레이즐을 끝냈는지 정하연과 김한별이 땀을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정하연, 김한별. 수고했습니다.” “아니에요.” “두 분은 이만 쉬어도 될 것 같습니다.” “네?” 정하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는다. 김한별도 멍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가장 중요한 결산이 남았는데 쉬라고 했으니 이상하게 여길 만도 했다. 이윽고 모두의 시선이 모였을 즈음, 나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이번에 얻은 성과들이 무척 많습니다. 그리고 겹치는 것들도 꽤 있군요.” 한 순간이지만 클랜원들의 얼굴에 미묘한 빛이 스쳤다. 스스로들 느끼고 있을 것이다. 사람, 아니 사용자인이상 좋은 장비에 대한 욕심이 없을 수가 없다. 하지만 한 명이 원하는 장비를 얻게 되면 다른 한 명은 포기할 수밖에 없는 노릇. 그 과정에 불협화음이 생기지 않도록 최대한 배분을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결산은 오늘 하지 않겠습니다. 내일 아침으로 미룰 예정입니다.” “…….” “생각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아니면 각자 통하는 상대랑 대화를 하셔도 좋고요. 밤 동안 곰곰이 생각해보시고, 내일 아침 회의에서 저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한 번 들어보고 타당하다 싶으면 허락하도록 하죠.” ‘질서의 오르도가 가장 심하겠지.’ 차라리 클래스 제한이 하나로 걸렸다면 깔끔했을 텐데. 마법사, 연금술사, 사제가 걸려있는 바람에 꽤나 상황이 애매해졌다. 내 말이 끝나자 클랜원들 중 몇몇은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클랜원들을 믿기로 했다. 다들 자신들의 처지를 인식하는 만큼 대화를 우선하지 필요 이상으로 다투지는 않을 것이다. 문득 안솔, 정하연, 비비앙이 서로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상상이 들었다. ‘그건 그것대로 웃기겠는데.’ 속으로 피식피식 웃으며, 나는 아까부터 내 눈치만 보고 있는 고연주를 돌아보았다. “고연주. 1층에 펼쳐놓은 장비들은 책임지고 올려놓도록 하세요. 이후의 관리에 필히 신경 써야 할 것입니다.” “클랜 로드의 명을 받들겠어요.” “그럼 내일 아침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고연주는 지나치게 정중할 만큼 내 지시를 받았다. 그런 그녀를 지나쳐, 나는 곧바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 다음날 아침. 나는 간만에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껴야 했다. 몸을 쉬게 할 목적으로 일찍 잠에 든 것도 있지만 난 원래 상당히 일찍 일어나는 편이다. 그렇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고롱고롱 잠든 아기 유니콘을 머리에 얹고 문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찌뿌듯한 몸을 퍽퍽 두드리며 계단을 내려가자, 모든 클랜원들이 깨어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이미 모두 아침 식사를 마쳤고 내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간단한 세안을 끝내고 아침 식사를 끝내자, 이미 내 집무실은 장비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대부분 목을 길게 빼고 있는 게 내가 언제오나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항상 이렇게만 해주시면 참 좋을 텐데요.” 어제 살짝 경직시켰던 분위기를 풀기 위해 가벼운 농을 던지자, 몇몇이 짧게 실소를 터뜨리는 게 보였다. 아마 자기들이 스스로 생각해도 웃기겠지. 품 안에서 칭얼대는 유니콘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나는 상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럼 우선 결산부터 해볼까요…. 사용자 정하연.” “네.” “현재 머셔너리 클랜의 보유 자금을 말씀해주세요. 금화, 보석은 따로 해서.” “처음 모니카로 왔을 때 자금은 8만 8천 골드가량 갖고 있었어요. 보석의 개수는 1000개가 넘었고요. 그리고 이번 원정에서 7천 골드 가량의 금화를 확보했고, 장식물에서 떼어낸 보석들이 총 300개를 넘어가네요. 현재 확정된 지출 내역은 비비앙씨가 주문한 기구와 재료들로, 약 1만 골드 정도 지출이 있을 예정이에요. 그것을 제외한다면, 여전히 8만 골드 이상의 금화와 1000개를 넘는 보석을 소유하고 있어요.” 내가 질문을 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는지 정하연은 줄줄 외듯이 대답했다. 여기서 7천 골드라 함은 마볼로의 연구실에서 얻은 성과일터. 그 동안의 생활비를 뺀다고 해도 아직 8만 골드가 넘게 남아있다는 것은 확실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물론 앞으로 지출이 꽤 있겠지만. “사용자 안현.” “네, 네! 네 형! 아, 클랜 로드님!” 내가 자신을 부르자 깜짝 놀랐는지, 안현은 고개를 화들짝 들며 대답했다. 솔직히 그 동안 클랜 내부의 내정을 너무 고연주나 정하연에게 맡기는 경향이 있었다. 앞으로는 서서히 애들도 관심을 가지게 할 필요가 있다. 그 첫 타자를 안현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원정에서 얻어온 주인 없는 장비들이 있을 텐데.” “그, 그렇죠. 네 그렇습니다.” “그건 어떻게 됐지?” “하나도 빠짐없이 창고에 잘 모셔놨어요.” “장비들이 뭐가 있는지, 대충 견적을 알 수 있을까?” “그, 그건 잘….” 안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끝을 흐렸다. 정하연이 얼른 대답하려고 하자, 나는 슬쩍 손을 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오늘 저녁까지 알아와서 나한테 보고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내게 지적 받은 안현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창피하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내가 자신을 지목한 게 자못 기뻤는지 한껏 상기된 얼굴이었다. 참 미스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다음 차례는 드디어 장비들이었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사용자는…. “사용자 고연주.” “네. 클랜 로드.” “어제보단 보이는 장비들이 좀 적어 보이는군요.” “네. 자체적인 판단 하에, 주인을 가릴 수 없다고 생각한 장비는 창고에 남겨놨어요. 즉, 보류죠.” “잘하셨습니다. 그럼 그 보류 목록들을 알 수 있을까요?” 진작에 이럴 것이지. 짧게 숨을 내쉬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고연주 또한 막힘 없이 술술 대답했다. 보류 목록은 꽤나 많았다. 엘릭서 3병, 황혼의 무녀, 파사(破邪)의 활, 페가수스의 알, 요정 여왕의 알, 찢겨진 요정 여왕의 날개, 마볼로의 보존용 마력 구슬, 비비앙의 물약 주머니, 마볼로의 연구실에서 발견한 물약, 썩어버린 위그드라실의 과실, 찬란한 섬광 라우라 필리스, 위그드라실의 나뭇잎을 이어 만든 옷, 그리고 리자 부츠까지. 라우라 필리스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옷과 리자 부츠를 보류 목록으로 남긴 것은 꽤나 의외였다. “위그드라실의 나뭇잎 옷과 리자 부츠도 보류했나요?” “네. 일단 요정 여왕의 장비는 전부 보류 처분했어요. 특히 말씀하신 두 장비는 다른 클래스도 사용할 수 있겠지만, 궁수용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요.” “흠. 원하는 클랜원들이 없었나요?” “나뭇잎 옷은 없었고, 리자 부츠는 요정 여왕 장비에 함께 남겨두자는데 다들 동의했어요. 혹시 클랜 로드께서 원하신다면 바로 가져올 수 있어요.” 그렇다는 말이지. 아무래도 고연주의 눈치를 봤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지만,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말 그대로 보류시켜둔 것에 불과했으니 사용을 요청하는 클랜원이 있으면 얼마든지 내주면 되는 일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방 내부에 진열되어있는 물품 및 장비들을 바라보았다. 이것도 만만찮게 많다. 칼리고 아브락사스, 파라디수스 플레이트 메일, 오로쓰로스 롱 부츠, 질서의 오르도, 순결의 머리띠, 푸른 달의 마도사, 여명의 검투사, 섬백(蟾魄), 티르빙, 요정 여왕의 눈물, 호프론의 전설, 마볼로의 연구 기록, 마력 영약. 여기에 있는 대부분이 오늘 새로운 주인을 맞이할 것이다. 어떤 것을 먼저 시작할지 고민하다가, 나는 결국 하나를 정할 수 있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가장 논란이 일 것 같은 질서의 오르도를 처음으로 잡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클랜 로드. 잠시만요. 발언권을 요청하고 싶어요.” “?” 고연주가 발언권을 요청했다. 또 뭔 얘기를 하려고 그러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요청한 만큼 중요한 이야기일 듯싶었다. 표정도 심상치 않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그녀는 모든 클랜원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실은 어제 클랜 로드께서 먼저 올라가신 후, 저희들끼리 이야기를 나눴어요.” “네.” “저희들에게 먼저 분배하시는 것도 좋지만, 클랜 로드께서 먼저 선택권을 드리는 게 맞지 않나 싶어서요. 그래서 이야기를 해본 결과 모두 칼리고 아브락사스, 파라디수스 플레이트 메일, 오로쓰로스 롱 부츠, 티르빙, 요정 여왕의 눈물에 대해서는 일체의 권리도 주장하지 않기로 입을 모았어요.” “하하….” “부디, 저희들의 요청을 수락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고연주의 말에 클랜원들 또한 동의한다는 듯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의 반응에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총 12개중 5개를 나한테 몰아준다고 했다. 즉 5개를 먼저 가지고, 남은 7개 중 우선 선택권을 준다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고연주가 저리 공손한 어조를 취하는 이유는, 내가 이번 원정의 1등 공신이라는데 이유가 있었다. 실제로 의뢰를 받아온 것도, 유적을 발굴한 것도, 마볼로를 쓰러뜨린 것도 전부 내가 주도했다. 그 다음이라고 해봤자 고연주, 백한결, 김한별 정도라고 할까. 아무튼 이 정도까지 성의를 보인다는데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나는 연하게 웃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칼리고 아브락사스, 오로쓰로스 롱 부츠, 요정 여왕의 눈물에 대한 권리는 받겠습니다. 대신, 파라디수스 플레이트 메일과 티르빙을 되돌리고 우선 선택권을 없애도록 하죠.” “하지만….” “더 이상의 이의는 받지 않겠습니다.” 딱 잘라 말하자, 고연주는 입을 다물었다. 검이야 이미 차고 넘치도록 많고, 흉갑은 내게 딱히 필요가 없다. 아무리 권리가 있다고는 해도 내가 그 정도로 독식하는 것은 좋은 모양새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어쨌든 같은 클랜원이니 필요한 사용자에게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는가. 어차피 보류 장비들도 모두 내 관할 하에 있기 때문에 지금만해도 차고 넘치는 수준이었다. “그럼….” 이제는 진정한 결산에 들어갈 시간이었다. 내 표정에서 그것을 읽었는지 여기저기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어젯밤 나름의 생각 또는 대화들을 하셨을 겁니다.” “…….” “긴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럴 것이라 믿고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시작은 질서의 오르도입니다. 이 장비를 원하시는 클랜원들에게는 자유 발언을 허락합니다. 그리고 두 명 이상이 원하는 경우에는, 최대한 원만한 대화를 통해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말이 끝난 순간 쥐 죽은듯한 고요가 찾아 들었다. 내 아래 잠들어있는 유니콘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윽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허공으로 손이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손은 총 두 개가 올라가고 있었다. “비록 원정은 다녀오지 못했지만, 염치 불구하고 손을 들었네요. 양해 부탁 드려요.” 한 명은 예상대로 정하연이었다. 마법사인만큼 질서의 오르도가 탐이 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미안하지만, 나도 원정은 다녀오지 못했어. 그래도 손 들어도 되지? 뭐라 안 할거지?” 바로 비비앙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오늘 목욕탕에 다녀왔습니다. 펄펄 끓는 물에 몸을 담그니 참 좋더라고요. 뼈다귀가 살살 녹는 기분이었어요. 그리고 사우나 15분 하고, 집에 돌아와서 맥주 한 캔을 마셨는데 참 좋았습니다. 피로가 쫙 풀리는 기분이랄까요? 몸이 정말 가뿐해지더라고요. 하하하. 자, 장비 결산에 들어갔습니다. 몇몇 분들은 아쉬우시겠지만, 실은 장비 결산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습니다. 아마 다음 회 중반 즈음? 중반은 조금 넘을 것 같네요. 질서의 오르도만 마찰이 생겼고, 나머지는 이미 주인들이 정해졌거든요. :) 여러분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질서의 오르도, 정하연이 가지게 될까요, 아니면 비비앙이 가지게 될까요?(안솔, 신상용은 포기 선언한 상태입니다.) 답은 이미 정해졌지만, 여러분들의 의견도 궁금해요~. :D 『 리리플 』 1. HammerofWar : 1등 축하합니다. 하하. 백한결은 남성입니다. TS라니요. 하하하. 조금 끌리기는 하네요.(?) 2. 블라미 : No. 정령사는 일반 클래스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레어, 시크릿 클래스(진화)에 존재합니다. 하하. 다만, 한 명은 아닙니다. 원소 별로 나뉘어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 외라면 요정들을 들 수 있겠군요. 3. 輝雅 : 전 회 것들은 좋고, 이번 회 것들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것들입니다. 하하.(뒤에 3개는 제외하고요.) 아마 한나도 지금 많~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예요. 4. 신속정성배달 : ㅜ.ㅠ 죄송해요. 제가 영어에 자신이 없…. 흠흠, 아, 아닙니다. 이번 회는 영어까지 붙이게 되면 너무 어지러울 것 같아서 삭제했어요. 음~. 섬백은 한글만 넣으니까 뭔가 좀 밋밋해서 한자도 같이 넣었습니다. :) 5. Astrain : 엄밀히 말씀 드리면, 성별 제한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 6. starland : 그래서 일부러 성과 부분은 잘랐습니다. ㅋㅋㅋㅋ. 그것들은 차후 차차 드러내도록 할게요! 7. 음........... : 저 지금은 롤 안 해요~. 지운지 좀 됐습니다. ㅋㅋㅋㅋ. 8. 고장난선풍기 : 그럼요~. 그런 개인적인 프라이버시 부분은 당연히 숨깁니다. 요지는 허위 정보만 기재하지 않으면 되요. 하하. 9. 황걸 : 해당 내용은 쪽지로 답신 보내 드릴게요! 아마 사용자 정보는 애들 한 명씩 곧 업데이트 예정이라서요. 하하. 10. 눈물강 : 정확히 보셨어요. 다만, 마력을 그렇게 생각만큼 많이 소비하지는 않습니다. :) 물론 많이 소비하는 경우도 있어요. 마력을 많이 모으면 그만큼 위력이 강해지고, 그에 비례해서 소모성도 커집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82 / 0933 ---------------------------------------------- 머셔너리, 자리를 잡다 이번 마지아의 원정을 선택한 이유는 총 세 가지였다. 모니카의 주변에 있는 유적들 중 가장 노른자위에 해당하는 장소였고, 클랜원들에 도움이 될만한 장비와 클래스가 있었으며, 이스탄텔 로우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 박자가 어우러진 원정은 이제 막 결실을 거두려 하고 있었다. 정하연, 비비앙이 질서의 오르도에 대한 권리를 요청했다. 혹시나 해서 조금 더 기다려보았지만 추가로 손을 드는 클랜원은 없었다. 미미한 미소를 머금은 신상용은 그렇다 치더라도, 안솔은 의외였다. 원정에 참여해서 활약하기도 했고 사제도 사용 가능하다 적혀있으니 분명히 가능성은 있었다. 그러나 무에 그리 좋은지 해맑은 얼굴로 헤실 헤실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검지로 애꿎은 테이블을 두드리다가,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그러자 둘은 동시에 손을 내렸다. 장비를 분배할 때는 간을 보지 말아야 한다.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최대한 깔끔하게 끝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상황은 이미 공지했다. 그러니 빙빙 돌리기보다는 직구가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네가 질서의 오르도를 원하는 이유를 말해봐.” 내 말을 들은 순간 비비앙의 입술이 꾹 깨물렸다. 클랜원들의 얼굴에 역시나 하는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질서의 오르도는 정하연에게 더욱 어울리는 장비였다. 그녀는 실력 있는 마법사 사용자이다. 거기다 이미 잠정적으로 예정되어있는 시크릿 클래스 ‘푸른 달의 마도사’까지 합친다면 2, 3년 후 정말로 10강에 견줄만한 실력자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방금 전 내 말은 암묵적으로나마 정하연의 손을 들어준 것과 진배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잠시 동안의 침묵. 손에 깍지를 낀 채 기다리고 있자, 이윽고 서서히 비비앙의 입술이 열렸다. “물론 질서의 오르도가 정하연에게 어울린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나도 잘 사용할 자신이 있어.”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소리고. 내가 원하는 말은 그런 게 아니야. 네가 이것을 가지게 되면 어떤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그런 것들. 즉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라는 소리지.” 비비앙은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보자 문득 이 상황이 무척 흥미롭게 느껴졌다. 푼수기가 다분한 그녀이지만, 내가 비비앙을 그대로 놔두는 이유는 할 때는 하는 녀석이기 때문이다. 애들과는 다르다. 지금이라도 당장 내가 지시만 내린다면, 헤헤 웃으면서 학살도 거리낌없이 저지를 그녀였다. 그게 바로 비비앙의 본성이었다. 곧이어 비비앙의 눈이 번뜩 떠졌다. 그녀의 눈동자는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어제 질서의 오르도에 붙어있는 구즈 어프레이즐을 세심히 살펴봤어. 그 중 내가 주목하는 옵션은 네 가지야. 전 마법 속성 150% 출력, 마력 100% 회복, 무 영창 능력, 마지아의 열쇠.” “마지아의 열쇠는 그렇다 치고…. 앞선 세 개의 옵션은 네 키메라 마수들과 연관이 있는 건가?” “어. 정확히는 마수와 계약을 맺고, 내 임의로 강화시킨 애들이야. 솔직히 내가 66마수 군단의 지배자라고는 하지만 완벽히 지배하고 있는 건 아니거든? 무엇보다 내 능력이 부족한 만큼 마법진의 도움을 얻지 않는다면 군단은커녕 최상위 녀석들은 소환자체도 어려워. 예를 들면 4군단 이내에 있는 애들이라든지.” “흠….” 난 비비앙의 말을 경청했다. 내가 그녀에게 기대하는 것은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다. 현재 나를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클랜원들이 정하연에게 쏠려있는 상태였다. 비비앙도 그것을 느꼈는지 말을 잇기 앞서 한 번 목을 가다듬었다. 지금부터가 본론이었고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질서의 오르도를 가진다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150% 출력 조건으로 소환수들은 더욱 강력해질 테고, 7일이라는 조건이 있지만 지금 내 마력을 100% 회복시킬 수 있다면 군단 자체를 소환하는 것도 가능해져. 그뿐만이 아니야. 무 영창 능력을 익힌다면, 마수와 독자적으로 연결되어있는 주문들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압축시킬 수 있거든? 소환 시간 자체도 굉장히 줄어들 거야. 그리고 이건 추측이기는 한데, 만일 마법 도시를 다시 일으킬 거라면 내가 제법 도움이 될 거야.” “호. 그 군단 소환에 대해서 조금 더 추가로 듣고 싶은데.” “자세히 말하면 너무 길어져.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질서의 오르도로 마법진을 대체할 수 있다는 소리야. 최상위 군단이라면 하나. 하위에 있는 녀석들은 어쩌면…. 두 군단도 가능하지 싶은데. 아무튼 하고 싶은 말은 다했어. 얘기는 여기까지 할게.” 조금 관심을 비추자 비비앙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말을 매듭지었다. 나는 턱을 매만졌다. 그녀의 말을 듣자 솔직히 마음이 조금씩 끌리고 있었다. 비비앙의 말대로 군단을 소환할 수 있다면 앞으로의 계획에 큰 도움이 되리라. ‘정하연을 확실하게 밀어주느냐, 아니면 일부를 비비앙에게 돌리고 동시 성장을 노려보느냐?’ 어떻게 보면 행복한 고민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고민에 빠지기보다는, 이제는 남은 한 사람의 말을 들어볼 차례였다. 그래야 확실하게 판가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막 정하연에게로 고개를 돌린 찰나였다. “그렇군요.” “사용자 정하연?” “비비앙씨의 말은 잘 들었어요. 클랜 로드, 질서의 오르도는 제가 포기할게요.” “?” 너무나도 쉬운 포기.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 난 정하연의 시선이 푸른빛을 띠는 책을 스치고 지나간 것을 알아챘다. 비비앙마저도 당황한 시선을 보내자, 그녀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입가에 밝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말씀해주신 것들이 사실이라면, 저보다는 비비앙씨가 가지는 게 더 알맞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냥 그렇게 생각이 들었을 뿐이에요. 확실히 아쉽기는 하지만, 너무 욕심부리고 싶지도 않고요.” “저, 정말? 정말 나 가져도 돼?” “수현씨가 허락하신다면요.” “와!” 비비앙이 뛸 듯이 기뻐하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내 시선은 여전히 정하연에게로 고정된 상태였다. 그런 내 눈길을 느꼈는지, 그녀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미약이 고개를 저었다. “정하연! 고마워! 정말 고마워!” “고맙긴요. 당신은….” 정하연은 말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실력 있는 연금술사니까요.” 문득 정하연이 중간에 말을 바꾸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동생 정지연을 비비앙에에 잃은 입장이었다. 그렇다면 꽤나 불편한 관계가 되었을 법도 한데, 뮬에서부터 지금까지 그것을 손톱만큼도 내색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친하다고는 못해도 클랜원으로써 정상적인 관계를 보여주었다. ‘어쩌면 내 속내를 읽은 걸지도 몰라. 그래서….’ 어느 쪽이 사실이든 간에 정하연의 마음가짐은 본받을만했고, 또한 고마움까지 느껴졌다. 새삼 뮬에서의 영입이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정하연이 저리 선언함으로써 추는 확실히 기울었다. 고개를 돌리자 오매불망 내 말만 기다리고 있는 비비앙이 보였다. 마치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전전긍긍한 표정이었다. 나는 이쯤에서 질서의 오르도는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 질서의 오르도는 비비앙에게 양도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주인 의식을 치르는데 실패할 경우는 정하연에게 권한을 양도하도록 하죠.” “그럴 리는 없으니, 걱정 붙들어 매셔!” 비비앙은 흠칫한 얼굴을 하더니, 빽 소리를 질렀다. * 그렇게 질서의 오르도는 비비앙이 가져가게 되었다. 정하연의 양보 덕분에 가장 난관(?)이라 여겼던 부분을 훈훈하게 넘길 수 있었다. 질서의 오르도를 해결함으로써 팔부능선을 넘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뒤의 분배 과정은 일사천리였다. 남은 장비들 대부분이 이미 상당히 범위가 좁혀진 상태였다. 먼저 파라디수스 플레이트 메일과 호프론의 전설은 백한결에 배분되었다. 그의 고유 능력 ‘되비침’과 두 방어구들의 상성이 찰떡궁합이라는 데는 모두 이견이 없었다. 파라디수스는 혹시나 해서 안현에게 물어봤지만, 녀석이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도 녀석은 위대한 태양이 더 좋은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백한결이 그것들을 익숙하게 사용하려면 어느 정도 능력치를 올려야 했다. 그때까지 보류한다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녀석은 그저 감사한 얼굴로 받아들였다. 마볼로의 연구 기록은 볼 것도 없이 비비앙것이었고, 시크릿 클래스 푸른 달의 마도사 또한 당연히 정하연에게로 돌아갔다. 질서의 오르도는 정말 깔끔하게 포기했는지, 그녀는 어떤 아쉬움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퍽 만족한 얼굴로 내가 건네준 푸른 책을 꼭 끌어안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레어 클래스 여명의 검투사, 그리고 섬백(蟾魄)은 이유정의 차지였다. 여명의 검투사야 애초부터 생각하고 있었고 섬백은 단검인 만큼 그녀의 주 무기였다. 낡은 검과 은백색 단검을 받는 이유정의 표정은 꽤나 담담했다. 아니, 담담해 보이는 척을 하고 있었다. 눈망울은 바르르 떨리고 있었고, 입은 연신 달싹였다. 손도, 다리도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그토록 소망했던 클래스 계승을 이룬 만큼 그녀가 지금 느끼는 속내를 내심 짐작할 수 있었다. 티르빙은 분배하기에 조금 애매했다. 먼저 검신을 본다면 단검이라고 말하기엔 조금 길고 그렇다고 장검이라고 보기엔 너무 짧았다. 굳이 따진다면 단검에 가깝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런 이유는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했고, 마검이라는 사실이 더욱 상황을 애매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주인이 정해졌다. 아니 애초부터 정해져 있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내가 티르빙이 소유권을 포기한 순간, 그것을 다룰만한 사용자는 고연주 한 명밖에 없었다. 특히 그녀의 성향인 혼돈과도 잘 어울릴 것 같아, 결국 티르빙은 고연주가 가져가는 것으로 결정을 보았다. 이로서 남은 물품은 순결의 머리띠와 마력 영약이었다. 이 두 개는 그 누구도 소유권을 요청하지 않았다. 아마 가지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치가 보여서 그런 것 같았다. 특히 마력 영약은 그런 경향이 더욱 심했다. 물품을 받은 클랜원은 더 가져가기 미안했을 것이고, 받지 못한 클랜원중 마력 영약을 먹을만한 이들은 안솔, 신상용이었다. 문제는 그 둘 모두 영약을 날름 가져갈 만큼 넉살이 좋지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그 두 물품에 대한 선택권은 나에게로 돌아왔다. 나는 클랜 로드로써 이것을 적합하게 처리할 의무가 있었다. 내 앞에 놓인 두 개를 묵묵히 응시하다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클랜원들의 시선은 모두 내게로 모여있었다. ‘정하연은 시크릿 클래스로 각성하면서 마력이 오를 테고…. 그럼 안솔, 신상용 둘 중 한 명한테 줘야 하는데…. 왜 둘 다 저러는 거야?’ 신상용은 뭔가 좀 말하려고 치면 고개를 홰홰 돌리며 손사래를 치는 탓에 내심 어이가 없었다. 안솔도 마찬가지였다. 아까부터 내 시선을 피하고만 있었다. 차라리 자기가 갖겠다고 싸우는 게 낫지, 이렇게 서로 양보하겠다고 난리를 쳐대니 더욱 난감해짐을 느꼈다.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순결의 머리띠를 집어 품 안으로 밀어 넣었다. 머리띠는 정했지만 마력 영약은 조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시간만 끌수록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높으니 이번 결산이 끝나기 전까지는 무조건 처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정권이 내게로 넘어온 이상 어느 정도 생각할 시간은 필요했다. “후유, 알겠습니다. 이 두 물품은 제가 임의대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전에.” 잠시 말을 끊고 클랜원들을 둘러보았다. 고연주, 비비앙, 정하연, 이유정. 네 명의 여성은 각자 분배 받은 장비들을 소중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연한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잠시 머리도 식힐 겸, 클래스 계승과 주인의식을 치르는 과정을 구경할까요?” * 해는 중천에 떠올라 빛을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 점심이 찾아 든 러브 하우스의 내부는 한산 그 자체였다. 밤의 꽃들은 모두 잠자리에 든 상태였고 1층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테이블이 모두 비어있었다. 어찌나 장사가 안 되는지, 가게를 보는 마담이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용자와 수다를 떨고 있을 정도였다. “다른 분들은?” “으응~. 상용이 오빠는 아직 오라버니랑 얘기 중이시고~. 안현 오빠는 알아볼게 있다고 밖으로 나갔고~. 다른 언니들은 다들 방에서 장비 보느라 여념이 없을 거예요.” “아하. 그렇구나. 그런데 우리 솔이 섭섭해서 어떡해?” “꼴깍. 응? 뭐가요오?” 안솔은 임한나가 가져다 준 음료를 쪽 빨아들이며 되물었다. “이번에 아무것도 분배 받지 못했다고 했잖아?” “아~. 헤헤. 괜찮아요오. 저는 지금까지 많~이 받았거든요. 그리고 전 아직 0년 차라서 성장 가능성이 많은데, 상용이 오빠는 거의 닫혔잖아요. 그래서 저는요, 오히려 상용이 오빠가 받았으면 했어요.” “그렇구나. 우리 솔이 참 착해요.” “헤헤.” 안솔은 하얀 구슬과 반지를 들어 보이며 방실방실 웃었다. 임한나는 그런 그녀를 흐뭇하게 쳐다보다가, 누군가 내려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계단에는 신상용이 지친 얼굴로 내려오고 있었다. 신상용은 비틀거리듯 내려오다가 이내 둘을 봤는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머셔너리 로드님과 대화는 끝나셨어요?” “하, 하하. 방금 전에 끝냈습니다. 하아….” 신상용은 한 손에 쥔 나무상자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더니 상자를 열어 안에 있던 내용물을 손으로 집었다. 이윽고 그의 집게 손가락에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는 검은 구슬이 들렸다. “헤에. 축하해요.” “축하해요. 정말 부럽네요.” 두 여성의 축하에도 불구하고 신상용은 쓴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안솔은 발을 구르며 재촉했다. “얼른 드세요. 얼른요오.” “하하. 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먹겠다고 했지만, 신상용의 손은 올라가지 않았다. 대신 테이블과 거리를 한 걸음 한 걸음 줄이며 다가오는 중이었다. “원래 이 영약은 안솔양에게 가는 게 바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에게 주실 줄은 몰랐죠. 많은 고민이 들었지만, 제 마음 가는 대로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클랜 로드의 말에 따를 생각입니다. 그러니 부디 안솔양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그런 생각하지 않으셔도 되요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네요. 아, 그런데 안솔양?” 이윽고 테이블에 다다른 신상용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안솔을 불렀다. 임한나가 둘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가운데, 안솔은 크게 입을 벌리며 하품을 했다.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졸린 모양이다. “흐아암. 조오여어. 에에?” 그리고, 그것을 보는 신상용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그는 곧바로 문 쪽을 가리켰다. “어, 밖에서 안솔양을 누가 부르고 있는데요?” “흐암. 네? 누가요오?” 안솔은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입구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솔의 머리위로 물음표가 동동 떠올랐다. 그러면서도 입이 벌어지는 게 자꾸 하품이 나오는 모양이다. “하아암. 아우오 어으에요오…?” 안솔은 연신 하품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가 웅얼거리듯 말하며 다시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아직 벌려져 있는 입을 향해, 신상용이 손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읍!” 꼴깍.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음, 조금 놀랐네요. 다른 장비들이야 그렇다 쳐도, 설마 순결의 머리띠를 누구에게 줄지 맞추신 분이 있으실 줄은 몰랐어요. 하하. 그분의 추리에 경의를 표합니다. 아~. 영약에 많은 분들이 관심이 있으신 것 같네요. 하하. 보자, 영약은 클랜 하우스를 완공하면 만들 수 있거든요. 이미 준비는 다 끝내놨고, 만드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아요. 아마 지금 예상으로는 285회쯤에 등장할 예정입니다.(+, - 오차 1, 2회 정도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10회, 20회 까지 가지 않아요. ㅜ.ㅠ 세라프도 그 즈음에 나오겠죠. :) PS. 1. 장비로 인한 포인트 상승은 곧바로 이루어집니다.(이것은 +로 표현되며 사용자의 잠재성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2. 영약으로 인한 포인트 상승은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먼저 ~전용 잔여 포인트로 표시되고, 사용자가 사용자 정보창으로 직접 올렸을 경우 상승합니다. 예전에 김수현도 함부로 체력 2포인트를 올렸다가 후회한 것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초반 가지고 있던 포인트가 14포인트였다가, 후에 직접 2포인트를 올렸었죠) :) 안솔의 잠재성은 조금도 타격받지 않았습니다!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합니다. 하하. 네, 맞추셨어요. 이유정은 앞으로 예쁜 고양이가 될 예정이랍니다.(?) 야옹~. ㅋㅋㅋㅋ. 2. 현오 : 하하. 그 시간은 제가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플롯을 처음에 짜기는 하는데 쓰다가 좀 아니다 싶으면 중간에 바꾸기도 하거든요. 올려주시는 메모라이즈 문학은 항상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3. 삭졍이 : 수정 완료했습니다. 감사합니다! 4. 드림장이 : 허허. 저는 남자입니다. 그래서 여탕을 잘 몰라요. ( --) 5. 황당한이야기 : 아, 그럴 때는 조금 묵혀두셨다가, 몰아서 보시는걸 권해드릴게요. 그럼 조금 덜하실 거예요. :) 6. 감자띱 : 하하하. 이미 원하는 클랜원들이 있어서요. 주인공 형은 뭐, 감자띱 님께만 살짝 알려드리겠습니다. 굳이 질서의 오르도 주지 않아도 충분히 잘나가고 있습니다.(소곤소곤) ㅋㅋㅋㅋ. 오죽하면 김수현이 자기가 찾아갔다가 미래가 어그러질까 봐 일부러 참고 있는 중이죠. :) 7. 유레이네드 : 에, 전에 살짝 언급하기는 했는데 물약 주머니는 공용입니다. 그리고 쓰기도 조금 애매해요. 음약 같은 게 있어서….(수현의 전리품입니다.) 8. Rain_Maker : 이열치열이란 말도 있잖아요. ㅋㅋㅋㅋ. 진짜 땀 쫙 빼고 나오는데 개운하더라고요. 9. 홍승식 : 고양이 보다는 조금 더 큽니다. 하하. 모습만 말이랑 비슷하고, 아기 때 크기는 훨씬 작다고 생각하시면 되요. 알에서 태어나는 녀석들이거든요. :) 10. approximate : No. 수현의 체력은 '영구적으로' 떨어졌습니다. - 표시가 붙지 않았어요. 화정을 받아들일 때 아예 그만큼의 수치를 잃어버린 거죠.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83 / 0933 ---------------------------------------------- 머셔너리, 자리를 잡다 “웩웩!” “억, 억지로 토하려고 하시면 안됩니다. 몸에 해로워요.” “웩웩 웩웩!” “아, 안솔양. 제발 그만….” 신상용이 만류했지만 안솔의 검지는 쉴 새 없이 목구멍을 넘나들고 있었다. 하지만 영약은 이미 식도를 타고 내려간 지 오래였다. 또한 이미 그녀의 허공에는 『마력(전용) 잔여 포인트가 2포인트만큼 추가되었습니다.』 라는 메시지도 떠오른 상태. “어엉….” 수번의 헛구역질에도 영약이 도로 나오지 않자 안솔은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숙였던 허리를 올렸다. 신상용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뒷목만 긁적이다가, 자상한 목소리로 달래듯 입을 열었다. “아, 알고 계시겠지만 혹시나 해서 말씀 드립니다. 지금 바로 포인트를 올리시는 건 정말 좋지 않은 선택입니다. 최대한 아껴놨다가, 2년이 지나고 능력치 상승이 정체될 즈음 한 번 고려해보는 게 좋으실…. 헉!” “으앙!” 하지만 되돌아온 것은 터져 나온 안솔의 울음과 온 힘을 다한 머리 박치기였다. 불시에 일격을 맞은 신상용은 복부를 감싸며 허리를 숙였고, 그녀는 엉엉 울며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이윽고 2층에서 “오라버니!” 라는 소리가 들리는 걸로 보아 김수현에게 일러바치러 가는 모양이었다. “하, 하하. 이것 참….” 비록 힘껏 들이 박히긴 했지만 별로 아프진 않았는지, 신상용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배를 쓰다듬었다. 임한나는 방금 전 일어난 일련의 과정을 모두 구경했다. 그리고 신상용을 보는 그녀의 표정은 놀라운 반 흥미로움 반이 뒤섞인 상태였다. 잠시 동은 그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임한나는 서서히 입술을 떼었다. “괜찮으세요?” “네, 네? 아, 네. 뭐….” “그래도 머셔너리 로드께서 직접 내려주신 건데…. 화나셨겠다~.” “네, 뭐. 저라도 화날 것 같습니다. 그, 그저 죄송할 뿐이죠. 그래서 잠깐 도망치려고 합니다.” 어울리지 않는 익살스런 말을 내뱉는 신상용에게선 단 한 올도 아까워하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후련한 기색이 엿보이고 있었다. “아쉽지 않나요? 솔이야 0년 차니 아직 성장 가능성이 남아있지만, 신상용씨는 아니시잖아요.” “저도 사용자입니다. 솔직히 아쉽지 않을 리가 없지요.” “그럼 왜….” “저는 리더와 함께한 이후로 이미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리더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제가 지킬 차례니까요.” “약속이요?” 임한나가 고개를 갸웃하자, 신상용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뭔가를 떠올리는 듯 눈빛이 아련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연금술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근본이 마법사라고는 해도, 제 욕심을 이기지 못해 연금술을 배웠었죠. 하등 쓸모 없는 연금술을 말입니다.” “…….” “저는 원래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원래대로였다면 지금쯤 뮬의 어디 한구석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겁니다. 하지만 천운이 있었는지 머셔너리 로드에게 목숨을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리더는, 정말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사용자가 아닌 사람으로써 말이죠.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임한나는 깍지를 낀 채 검지를 톡톡 부딪쳤다. 신상용은 오랜만에 말을 길게 한 게 어색한지 목 울대를 한 번 꿀꺽 움직였다. 그러더니 짧게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리더는 아무 조건 없이 장비를 모두 돌려주었고, 스승님에게 배우고 싶다는 제 무리한 요청을 들어주셨으며 후에 레어 클래스까지 주셨습니다. 덕분에 저는 꽉 막혔던 벽을 돌파할 수 있었죠. 그때 느꼈던 감정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아, 목숨 빚을 지셨구나. 그래도 영약을 먹고 그만큼 실력을 높여서 앞으로의 계획에 기여한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괜찮을 것 같은데요. 상호승리했다고 볼 수 있잖아요.” “저는 지금 일행들과 합류하면서 견마지로를 다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란 참 간사한 동물입니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걸 권리인줄 착각하게 되죠. 저는 그때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습니다. 마력 영약을 받는 순간 초심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은혜를 불의로 갚는 금수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신상용은 단숨에 모든 말을 마쳤다. 그리고 “어?” 라고 내뱉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마도 단 한 번도 말을 더듬지 않은 자신에 스스로 놀란 모양이다. 그러다가 아차 한 얼굴로 계단을 흘끗 보고는, 어설피 웃으며 걸음을 돌렸다. “이, 이런. 아마도 로드께서 내려오시는 모양입니다. 죄는 나중에 청하기로 하고 일단은 피해야겠군요. 근 한 시간 동안 받는다, 안받는다 다투느라 진이 다 빠져버렸거든요.” “왼쪽으로 가세요. 오른쪽으로 가셨다고 말씀 드릴게요.” “그래 주시면야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얼른….” 신상용은 김수현과 나눴던 대화에 질렸는지 허둥지둥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윽고 왼편으로 사라지는 그를 보며, 임한나는 깍지를 꼈던 손을 움직여 팔꿈치를 감싸 안았다. 그러자 가뜩이나 커다란 가슴이 자연스럽게 중앙으로 모이더니, 자신의 풍만함을 한껏 뽐내었다. “흐응. 부럽네.” 임한나는 묘한 시선으로 계단을 보고는, 혀를 살짝 내밀어 입술을 적셨다. * “절대로, 무조건 잡아야 해요.” 이스탄텔 로우의 클랜 하우스. 찾아온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응접실 내부는 박다연의 목소리로 왕왕 울리는 중이었다. 화려하게 꾸며진 응접실 안에는 총 세 명이 앉아있는 상태였다. 윤기를 반들거리는 테이블에는 박다연과 연혜림이 서로 마주보는 방향이었고, 상석에는 한소영이 표정 없는 얼굴로 앉아있었다. “아씨, 언제와? 어제 신전에 연락을 보냈는데 아직도 안 오는 건 어떤 경우야?” “혜림 언니. 방금 전에 온다고 연락을 받았잖아요. 진득하니 기다려요 좀. 그리고 혹시나 머셔너리 로드 앞에서 절대로 그런 말하지 말아요.” “괜찮아. 우리 둘은 친하거든. 아카데미에서 친분 좀 쌓아뒀지. 호호. 아니 그전에. 너 원래 걔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았어?” “그거야 소영이 언니가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했으니까 그렇죠. 하지만 이제는 달라요.” 박다연의 말에 연혜림은 알듯 말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슬금슬금 손을 내뻗고는, “뭐가 다른데?” 라고 물으며 박다연의 몸을 슬며시 더듬기 시작했다. 박다연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연혜림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리고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댔다. “상황이 좀 달라졌다고요. 머셔너리의 주가는 이미 하늘로 치솟고 있어요. 다른 데서 침 못 바르게 얼른 찜 해둬야죠.” “그 정도야 나도 알아. 원래 그럴 예정 아니었어?” “증명의 차이가 있죠. 솔직히 뮬에서의 기록은 워낙 홍보성이 짙어서 긴가민가했거든요. 그런데 머셔너리는 보란 듯이 환각의 협곡 원정을 성공했고, 사용자들까지 구출해서 돌아왔어요.” “아니 그러니까 그게 전이랑 지금이랑 뭐가 다르냐고?” “아오 진짜! 머셔너리가 왜 자리잡는 것을 미루면서까지 의뢰를 받아들였겠어요? 한마디로 자신을 뽐낸 거예요. 우린 이정도 실력을 갖고 있다! 뮬에서 이뤘던 실적들이 뻥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라고요. 거기다 이번 원정을 성공해서 더욱 강해지겠죠. 아직도 뭔 소린지 모르겠어요?” 결국 박다연이 성질을 부리며 타박하듯 말하고 나서야 연혜림은 입술 삐죽이며 나쁜 손을 원위치했다. 박다연은 연혜림을 향해 콧숨을 세게 내뿜더니, 이내 어깨춤을 추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흐흥 흐흥. 안 그래도 고려 클랜놈들이 프린시카에서 해밀 클랜 나왔다고 거들먹거리는 꼴 보기 싫었는데. 잘됐네 잘됐어. 흐흥 흐흥.” “해밀? 해밀이 뭔데?” “얼마 전에 김유현이 클랜 하나 만들었잖아요? 그 클랜 이름이 해밀이에요. 비가 온 뒤에 맑게 갠 하늘이라는 뜻이라고 하던데요.” “김유현? 아, 뇌제?” “네. 아무튼 우리도 머셔너리를….” 고작해야 세 명이 있었고, 그 중 입을 열고 있는 사람은 두 명뿐이었다. 그러나 무에 그리 할말이 많은지 응접실을 메우는 데시벨은 점점 커져만 가는 중이었다. 어떻게 보면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워낙 치안이 좋은 모니카이다보니 도시 내부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해봤자 항상 비슷하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머셔너리가 이번 원정으로 몰고 온 돌풍은 심심함에 찌든 사용자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기에 차고 넘치는 사건이었다. 내부를 짜르르 울리던 소란이 잦아든 건, 머셔너리 로드가 응접실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령으로 받은 이후였다. “모두 조용히.” 그에 가만히 앉아 찻잔만 기울이던 한소영이 입을 열자, 박다연과 연혜림을 곧장 입을 다물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는 사이, 짧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곧,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대답한 사람은 박다연이었다. 그 목소리는 아까 호들갑을 떨 때와는 너무나 다른, 은은한 어조를 품고 있었다. 연혜림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는 사이 닫혀있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벌어진 문 사이로 고용인의 안내를 받은, 코트형 플레이트를 걸친 한 명의 남성이 모습을 보였다. 그는 내부의 인원을 쓱 둘러보고는,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머셔너리 로드. 이쪽에 앉으세요.” “네. 그럼.” 고용인이 문을 닫은 후 남성, 아니 김수현은 한소영이 안내해준 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한소영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는 김수현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예전에 보았던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꼭 다물고 있는 입술과 사늘한 빛을 내뿜는 눈동자. 여전히 차가운 인상이었지만, 오늘따라 어딘지 모르게 수심이 그늘지어있었다. “괜찮으세요?” “네? 아, 네. 괜찮습니다. 뭐….” 입술을 한 번 열었다가 닫는다. 한소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내 한가지 추측을 떠올릴 수 있었다. 원정도 성공했고 성과도 많이 얻어왔으니 당연히 기뻐해야 할 터였다. 그런데도 근심을 보인다는 것은 클랜 내부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아마 장비 분배에 갈등이 생겼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소영 또한 한 클랜을 대표하는 이인만큼 그것이 얼마나 예민한 사안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약한 한숨을 내쉬며 그를 위로했다. “힘내세요. 그럴 때일수록 클랜 로드의 입장이 중요하니까요.” “네?” 김수현이 눈을 끔뻑거리며 되물었다. 그 순간, 한소영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내가 잘못 짚었나, 라고. 그녀는 얼른 찻잔을 집어 한 모금 들이킨 후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이번 원정에 대한 보고는 신전을 통해 들었어요. 고생하셨어요, 머셔너리 로드.” * 마이클은 클랜 창설 권한을 부여 받은 모니카의 거주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요즘 들어 날이 갈수록 불쾌지수가 치솟는 중이었다. 클랜 창설이다, 실적 인정이다 등등 가뜩이나 하루가 멀다 하고 처리할 일들이 쏟아져 들어오는데, 설상가상으로 주변마저 시끄러워 그의 심기를 긁고 있었다. 그 이유를 대강이나마 알고 있기는 했지만, 조용한 분위기에서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로서는 전혀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미친놈들. 이걸 실적으로 인정해달라고? 양심이 있어야지, 양심이.” 한창 씨근거리며 기록을 살피던 마이클은 읽고 있던 서류를 팩 내던지며 코웃음 쳤다. 몰려오는 피로감에 콧등을 주무르고 다음 기록을 살피려는 찰나, 누군가 헐레벌떡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이보게! 마이클!” “헨? 뭐 급한 일이라도 있나?” “그림자 여왕이 다녀갔다고! 그림자 여왕이!” “그림자 여왕? 아, 10강?” 마이클이 대수롭지 않은 듯 중얼거리자 헨은 급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종이를 퍼뜩 앞으로 내밀었다. “그래. 이것 좀 보게. 그녀가 놓고 간 클랜원 갱신 신청서야.” “염병, 10강이 10강이지.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뭔 그리 호들갑인지. 쯧. 줘보게.” 심기가 불편하기는 했지만 마이클은 잠자코 헨이 내미는 기록을 받아들였다. 자신과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는 헨인만큼 분명 호들갑을 떠는 데는 이유가 있으리라 여긴 탓이다. 이윽고 그는 천천히 상단부터 살펴보았다. 기록의 위에는 헨의 말대로 ‘클랜 갱신 신청서’라 써져 있었고, 옆으로는 ‘머셔너리 클랜(Mercenary Clan)’이라는 글자가 둥글둥글한 필체로 적혀있었다. “머셔너리? 총 열 명이라….” “일단 넘기고. 중단쯤에 클랜원 인적사항 좀 보게나. 내 눈이 이상해졌는지, 아니면 부여 받은 권한이 오류가 생겼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네.” “흠.” 마이클은 얼른 시선을 중단으로 내렸다. 그곳에는 클랜원들의 이름과 클래스가 가지런하게 적혀 있었다. 김수현 : Secret, 검술 전문가(Sword Specialist) 안현 : Rare, 기공창술사(Energy SpearMan) 안솔 : Normal, 일반 사제(Normal Priest) 이유정 : Rare, 여명의 검투사(Gladiator Of the Dawn)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 Rare, 키메라 연금술사(Chimera Alchemist) 정하연 : Secret, 푸른 달의 마도사(Magician Of the Blue Moon) 신상용 : Rare, 키메라 연금술사(Chimera Alchemist) 고연주 : Secret, 그림자 여왕(Queen Of Silhouette) 김한별 : Secret, 보석 마법사(Jewel Mage) 백한결 : Secret, 신의 방패(Aegis) 별거 있냐는 눈길로 한창 기록을 읽던 도중이었다.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는지 마이클의 눈썹이 세게 꿈틀거렸다. “잉? 씨벌, 이거 뭐야?” “어떤가?” “총합이 열 명인데 시크릿 클래스가 다섯 명? 레어 클래스는 네 명?” “일반 클래스가 한 명일세. 맞지?” “뭐야 이거? 진짜야?” 마이클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헨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다행이다. 권한이 사라진 게 아니었어.” 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죄송합니다. 오늘 후기 및 리리플은 하루 쉴 예정입니다.(리리플은 다음 회에 합쳐서 하겠습니다.) 여러모로 일도 있었고…. 음, 뭐라 말씀 드리기 애매하네요. 빨리 페이스를 찾아야 하는데, 오히려 이틀 연속 어그러지고 있네요. 쩝…. 시간이 너무 아까워요. 정신차려야 하는데 말이죠. 부디 독자분들의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_(__)_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편안한 밤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 0284 / 0933 ---------------------------------------------- 머셔너리, 자리를 잡다 ‘또 멋대로 추측하고 걱정을 하신 모양이군.’ 한소영은 더 물어볼세라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시침 뚝 떼고 앉아있는 모습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급박한 상황이 터졌을 때는 유감 없는 철혈의 면모를 보여주지만, 평시에는 아주 가끔 이런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한소영답지 않은 귀여운 모습이었다. 어쨌든, 지금 입을 열면 웃음이 터질 가능성이 농후했기에 입술을 꼭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꽤나 곤란한 상황이었다. 이윽고 우유 빛을 띠던 한소영의 목덜미가 살짝 발개졌을 즈음, 난 목구멍까지 넘어오던 웃음을 간신히 삼킬 수 있었다. 슬슬 입을 열려고 했지만 이 상황이 창피한지 한소영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돌아오실 때까지 걱정 많이 했어요. 귀환이 예상보다 늦으시는 것 같아서….” “흔적은 빠르게 잡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다시 도시로 돌아가는 건 시간을 너무 지체하는 것 같아, 그대로 속행하기로 자체 판단을 내렸습니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원정 보고를 읽어본 결과 머셔너리 로드의 판단은 옳았으니까요. 모니카의 대표 클랜으로써 깊은 감사를 표하는 바에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과분한 칭찬은 부담스럽습니다.” 칭찬과 겸손이 오고 간다. 그럴수록 처음 경직돼있던 분위기는 조금씩 훈훈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렇게 한소영과 대화를 나누자 문득 묘한 기분이 들었다. 1회차에서 나는 일개 클랜원이었고, 그녀는 클랜 로드였다. 명성으로나 직위로나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위치. 지금도 아주 대등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적어도 한 클랜을 대표하는 입장은 똑같다. 한소영과 부드러운 대화를 이어가던 도중이었다. 양 옆으로 앉아있는 두 여성이 시선에 밟혔다. 박다연은 대화에 끼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이었고, 연혜림은 뾰로통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 들어올 때 인사를 하기는 했지만 그 후로는 거의 한소영하고만 이야기를 나누어서 그런 것 같았다. “아무튼 고생하셨어요. 조사단은 이미 창설됐고 내일 출발할 예정이에요. 조사단장은 여기 있는 처형의 공주 연혜림이 맡기로 했죠.” “흥.” “연혜림?” “수, 수고했어요. 머셔너리 로드. 나머진 내가 마무리 지을게요.” 한소영이 미간을 좁히자 연혜림을 곧바로 태도를 바꿨다. 나는 괜찮다는 표시로 미미한 웃음을 흘렸다. 어쨌든 내일 바로 조사단을 파견한다고 하니 굉장히 신속한 일 처리임은 틀림없었다. “그럼 이제 보상 문제를 마무리 지어야겠군요.” “원래 정하고 간대로 주시면 됩니다. 30% 할인에 만족하겠습니다.” “그럴 순 없죠. 그리고 원래 보상도 성과에 따라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는데요.” “그럼요 그럼요.” 한소영의 말투에선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박다연의 맞장구까지. 박다연은 이때다 싶어 끼어들려는 듯 입을 크게 벌렸다. “그 부분은 제가….” “일단 개축한 클랜 하우스는 무상으로 제공해드리겠어요.” 하지만 한소영의 말이 한 박자 빨랐다. 박다연은 입을 벌린 채로 나와 그녀를 번갈아 보다가, 울상을 지으며 하품하는 척을 했다. 옆에서 연혜림이 킥킥 숨죽여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 일단이요. 조금 과하지 않을까요?” “전혀 과하지 않아요. 단 한 명의 사용자를 구해오셨다고 해도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어요. 하지만 머셔너리 로드께서는 7명의 목숨을 구해왔고, 큰 골칫거리 중 하나인 환각의 협곡을 공략하셨지요. 오히려 클랜 하우스로는 부족한 감이 있군요. 어디 보자…. 다연아?” 이제서야 기회를 주려는지 한소영은 나직한 목소리로 박다연을 불렀다. 박다연은 볼을 퉁퉁 불린 채 입술을 삐쭉 내밀고 있다가, 내가 쳐다보자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었다. 문득 안솔과 박다연을 붙여놓으면 꽤나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또 웃을뻔했다. ‘젠장, 전투보다 이게 더 힘들군. 방심할 수 없어.’ “이스탄텔 로우의 박다연이에요.” “저번에 한 번 뵈었던 기억이 나네요. 반갑습니다.” “네. 확실히 그랬죠. 반가워요.” 얼굴 표정이나 말투나 제법 고고했다. 옆에서 연혜림이 “푸.” 웃음을 터뜨리려다가 참은듯한 소리가 들렸다. 아 제발 웃지 좀 말라고. 나도 간신히 참고 있으니까, 제발. 나는 계속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박다연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가리고 있는 연혜림을 째려보다가,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 이번 원정에서요. 사망한 사용자들의 장비를 갖고 있지 않으신가요?” “네. 갖고 있습니다.” 그것도 제법 짭짤한 부수입은 될 수 있겠지만 주는 될 수 없다. 우리가 수거한 장비들이라고 해봤자 대부분 서브형 장비들로, 주 장비들은 부랑자들과 전투를 치러서 그런지 대부분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즉 그것들은 제값을 받기 어렵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서브 장비들도 온전한 것은 거의 없기도 했고. 아무튼 내 나름대로 계산을 해본 결과 전부 팔아서 8천 골드를 얻으면 굉장히 잘 팔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장비들의 상태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산하 클랜에서 회수를 도와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어요. 세 클랜, 그 중 특히 여울가녘의 사정은 굉장히 어려워져서 직접 말씀 드리기 어렵다고 하시더라고요.” “이해합니다. 그렇게 많이 받을 생각은 없고, 적당히 넘겨드릴 용의도 있습니다.” “감사한 말씀이네요. 원래는 각 클랜에서 4천 골드를, 그리고 이스탄텔 로우에서 4천 골드를 보태어 장비를 구매할 예정이었어요. 하지만 그전에 한가지 여쭤볼게 있어요. 일단 곧 있으면 개축 공사가 끝나기는 하는데, 이제는 내부를 꾸며야 할 차례이시잖아요?” “그렇죠.” “혹시 머셔너리에는 건축 지식을 갖고 있는 사용자를 보유하고 있나요?” 건축 지식을 갖고 있는 사용자라. 잠시 신상용이 떠올랐지만 이내 생각을 지웠다. 그는 현실에서 연구원이었지 건축가는 아니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좌우로 젓자, 박다연은 눈을 반짝였다. 바닥에서는 발바닥을 딱딱 부딪치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이스탄텔 로우에서는 지구에서 건축 설계와 실내 디자인을 전문적으로 하다 오신 분이 있거든요. 지금 이스탄텔 로우의 클랜 하우스도 그분들이 설계에 많은 관여를 하셨고요.” “흠.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한두 번 고개를 끄덕이자 박다연은 씩 미소를 지었다. “공방 같은 특수 목적용 방은 지원해드리기 어렵지만! 응접실, 식당, 숙소 등등 기본적인 가구와 실내 디자인은 저희 쪽에서 도와드릴 수 있어요. 다른 클랜에서 의뢰를 받는 일도 심심치 않으니 절대로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만약 이 제안을 수락하신다면 먼저 저희 쪽에서 4천 골드는 드리겠어요. 그리고 장비들을 돌려받는 대신 4천 골드는 내부 비용으로 충당하는 거고요. 이거 한 번 보시겠어요?” 박다연은 속사포처럼 다 다 다 다 말을 쏘아내고는 우아한 손놀림으로 내게 기록 몇 장을 건네었다. 나는 그것을 천천히 읽어보며 속으로 이런저런 계산에 들어갔다. 솔직히 말하면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아니 첫 줄을 보자 오히려 조금 과한 감도 없잖아 있었다. 담장에 알람 마법을 걸어주고, 클랜 하우스 전체에 외부 마력 간섭을 제한하는 마법 진 각인만해도 충분히 3천 골드 값은 한다고 볼 수 있었다. 그 외에 여러 실생활에 이로운 마법이나 최고급 가구들이 쭈르륵 적혀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총 들어가는 비용은 4천 골드를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흠….’ 대충 어떤 속인지는 알 것 같다. 이것저것 복잡하게 말할 필요도 없이, 간단히 말해서 머셔너리에 침을 바르겠다는 소리였다. 아마 다른 도시의 대표 클랜이 이랬다면 한 번 생각해봄직 하겠지만, 상대가 이스탄텔이나 후에 형의 클랜 로드로 있는 해밀 클랜이라면 하등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모니카에 자리를 잡을 만큼 이스탄텔 로우와 돈독한 관계를 과시한다면 헛짓거리를 하는 녀석들도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아니면…. 그냥 골드로 드릴까요?” 전보다 약간은 조심스러워진 목소리. 기록을 조금 더 살펴보다가, 나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아니요. 귀찮은 부분을 도맡아 해주신다는데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호호. 아니에요. 그럼 콜? 아, 죄송해요. 제안을 받아들이시겠어요?” “물론이죠. 호의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기록을 다시 건네주자, 박다연은 경박하게 웃으며 거보란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이로서 원정에 대한 일은 대강이나마 마무리 지은 셈이다. 그곳에서 얻은 성과도 엄청났지만 의뢰로 딸려오는 보상들도 하나같이 만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한소영은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다가, 얘기가 잘 풀렸는걸 알았는지 불쑥 입을 열었다. “훌륭한 선택이에요. 머셔너리 로드님과 클랜원분들의 마음에 들도록 각별히 신경 쓰겠어요.” “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 나한테 말해. 그 아저씨들 나랑 잘 아는 사이니까, 내가 얘기하면 두말 않고 바꿔줄 거야. 요.” 연혜림을 다리를 꼰 채로 거만을 떨며 말하다가, 한소영이 쳐다보자 황급히 자세를 바로 했다. 여기 조금 더 남아 담소를 나누는 것도 좋겠지만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마음먹었다. 내일 조사단을 파견한다고 하니 이스탄텔 로우도 바쁠 것이고 나도 볼일이 몇 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해서,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돌아가서 장비들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한소영도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앞에 멈춰서 살며시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마주 손을 내밀어 악수에 응했다. 그러자 차갑지만, 뭔지 모를 따스함이 느껴지는 그녀의 손길이 느껴졌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머셔너리 클랜에는 많은 기대를 하고 있어요.” 구구절절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몇 마디만으로도 한소영의 의도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이윽고 서서히 손을 떼어낸 후, 난 그녀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나를 바라보는 한소영의 흑 수정 빛 눈동자는 깊게 침잠되어 있었다. * 시간이 흘러, 어느덧 우리들은 클랜 하우스의 완공을 다음날을 앞두고 있었다. 이미 짐은 모두 챙겨두었다. 오늘이 러브 하우스에서 지내는 마지막 날이니만큼 나와 클랜원들은 1층에 모여 간식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물론, 밤의 꽃들은 모두 영업에 나간 터라 모임에 임 마담도 은근슬쩍 끼어든 상태였다. “으흐흐. 내일이면 드디어 완성되는구나. 기대된다 기대돼.” “힝. 솔직히 도시에서 쇼핑 좀 해보고 싶었는데.” “아서라. 전문가들한테 맡기는 게 낫지. 그리고 가구도 최고급이고 가격도 엄청 싸다잖아. 괜히 쇼핑한답시고 이래저래 돈 쓸 필요 있어? 하연이 누나가 그랬잖아. 돈 엄청 굳었다고.” “아 짜증나니까 설교 좀 그만해! 누가 뭐래? 아무튼 내일 보고, 마음에 안 들면 당장 바꿔달라고 할거야.” 일부 클랜원들은 내일 완공되는 클랜 하우스에 대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뀨뀨뀨뀨!” “아이 너무 귀여워~!” “와아! 와아! 우리 유니 잘한다아~!” “하하….” 나머지 클랜원들은 옹기종기 모여 아기 유니콘이 춤추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한쪽 구석에 앉아 고연주에게 한창 보고를 받는 중이었다. 일전에 부탁한 워프 게이트 제한 내용에 대해 고연주가 보고를 요청한 것이다. “그럼 황금 사자에서 일방적으로 트집을 잡는 거군요.” “네. 말 그대로 일방적인 트집이죠. 그나마 모니카나 코란은 사정이 좀 나아요. 칸이나 동부 도시는 진짜 심각한 수준이라고 하더군요. 고려에서 몇 번이나 강력히 항의했지만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오고 있더라고요.” “사용자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화살을 누구에게 돌릴 지가 애매해요. 어쨌든 비비앙씨가 주문한 것들도 이틀 전에 오기는 했잖아요? 즉 이용을 아주 금지한 것은 아니고, 황금 사자의 언론 플레이는 아직 살아있고요. 그리고 좀 식기는 했지만, 놈들은 아직도 명분을 물고 늘어지고 있으니까요. 뭐, 황금 사자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바로 제한을 풀겠다고는 했지만 그걸 받아들이겠나요? 쯧.” 고연주는 혀를 차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일이 어찌될 줄은 명확히 짚어낼 수는 없지만 뭔가 심상찮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아주 미약한 기운이었지만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기운.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하나하나 생각해보자 살짝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수현. 너무 머리 아프게 생각지 마세요. 아직 어떻게 될 줄 모르는 일이고, 또 내일이 클랜 완공 일이잖아요. 일단 다가오는 것들부터 하나씩 받아들이시는 게 어떨까요?” 내가 또 깊은 생각에 잠겼는걸 알아챘는지 정하연이 옆에서 맑은 목소리로 위로했다. 그녀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내가 직접 바바라로 쳐들어가 당장 워프 게이트를 활성화하라고 윽박지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게 할 생각도 없었다. 정하연 말대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일단은 일의 추이를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싶었다. 잠시 동안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다가, 나는 문득 생각이나 정하연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시크릿 클래스를 묻지 못했군요. 어떤가요?” “아주 좋아요. 특수 능력도 진화했고, 잠재 능력도 진화했고, 능력치도 올랐어요. 고마워요 수현.” “뭘요. 고유 능력은 생기지 않았나요?” “아쉽게도요. 하지만 충분히 만족해요.” 정하연은 배시시 웃으며 내 손을 슬쩍 잡았다. 옆에서 고연주의 서운한 눈길이 느껴졌지만, 나는 곧장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정하연(2년 차) 2. 클래스(Class) : 푸른 달의 마도사(Secret, Magician Of the Blue Moon,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실적 평가 중에 있습니다.) 5. 진명 · 국적 : 푸른 달의 물방울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6) 7. 신장 · 체중 : 166.5cm · 52.8kg 8. 성향 : 질서 · 선(Lawful · Good) (변경 전) [근력 34] [내구 38] [민첩 40] [체력 32] [마력 87] [행운 80] (변경 후) [근력 36] [내구 40] [민첩 41] [체력 34] [마력 91] [행운 81] (잔여 능력치 포인트가 0포인트 남은 상태 입니다.) < 업적(0) > < 특수 능력(1/1) > 1. 푸른 달의 가호(Rank : A Plus Plus Plus) < 잠재 능력(4/4) > 1. 고대 마법(Rank : A Plus) 2. 마법 회로 응용(Rank : A Minus) 3. 질속 영창(Rank : B Plus) 4. 항마력(Rank : B Plus) ‘많이 성장했군.’ 뭣보다 마력이 90을 넘고, 특수 능력과 잠재 능력이 진화했다는 것은 확실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정하연뿐만 아니라 클랜원들의 전체적인 성장 정도를 체크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재정비의 시간 동안, 최대한 이번에 얻은 것들을 소화시켜야 한다. 그래야만이 뭘 하든 다음에 나아갈 행동 방향을 정할 수 있다. 우선은 내일 클랜 하우스의 완공을 기다린다. 그리고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나나 클랜원들이나 당분간 바빠질 것이 분명했다. 앞으로 뭐부터 해야 할지 천천히 정리하며,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귓가로 들리는 주변 소리는 여전히 시끄러웠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캐릭터 설정 업데이트 예정입니다. 일단 오늘 후기, 리리플, 쪽지 답신을 보내드린 후 캐릭터 설정을 업데이트 할 예정입니다.(사용자 정보, 장비 현황 등등) 한꺼번에는 조금 힘들고, 한 명씩 차례대로 업데이트 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달라진 능력치들 또한 소설 내용 내에서 한 명씩 드러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s. 284회 기준 김수현 클래스 권능, 능력치, 장비 업데이트했습니다. 작품 설정 – 번호 3번 김수현(1)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리리플(282회) 』 1. 미월야 : 1등 축하합니다. 김한별도 김수현과 만남 파트 있습니다. 조금 짧기는 하지만요. :) 2. 눈물강 : 하하. 물론이죠. 당연히 공유합니다. 아마 비비앙의 해석이 먼저일겁니다. :) 3. 조아죽겠네 : 다음 회에 아마 영약이 나올 것 같기도 하네요. 1~2회 안에는 완료될 것 같습니다. :) 4. 피네이로 : 영약은 굉장히 비싸고, 매물도 잘 안 나와요. :) 사용자들이 있으면 먹는 경우가 많아서, 능력치 올려주는 장비보다 배는 비싸고 나오는 게 드물다고 보시면 됩니다. 5. 오피투럽19 : 그렇죠. 그런 경우는 최대한 사용자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시면 편할 겁니다. 하하. 『 리리플(283회) 』 1. 소시는걍쩌는듯 : 1등 축하합니다. 머셔너리 클랜 스펙이 엄청나죠? 하하. 앞으로 더 엄청나질 예정입니다. :) 2. 판Er지ㅁH니아 : 쿠폰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노력해 좋은 내용으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_(__)_ 3. 순수혈통 : 에, 오늘 같은 경우는 18:30분에 시작해서 11:57분에 끝냈습니다. ( --) 중간중간 밥 먹은 시간은 있어요. 4. 플룻 : 머리띠는 내용이 따로 잡혀있어요. ㅋㅋㅋㅋ. 5. hohokoya1 : 항상 감사합니다. 얼른 페이스 되찾도록 하겠습니다. _(__)_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85 / 0933 ---------------------------------------------- 체력 조루 탈출! 중천에 떠올랐던 해는 이제 슬슬 서쪽으로 넘어갈 준비를 하려는지 석양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해가 저물어갈수록 하늘의 풍경은 붉은빛 물감을 덧칠하듯 서서히 퍼져나가는 중이었다. 볼을 스치는 더운 바람에 문득 고개를 들어 시선을 올렸다. 유유히 떠다니는 뭉게구름에 진홍색 물결이 넘실거리듯 그림처럼 하늘을 수놓는 게 보인다. 시원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덥지도 않은 적당히 따뜻한 날이었다. 우리들은 약 네 시간 전 드디어 머셔너리의 클랜 하우스가 완공됐다는 소식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 예정보다 시간을 약간 지체했지만 모두의 낯빛에는 설레는 감정이 감돌고 있었다. 클랜 로드로써 차분한 태도를 보여주려고 해도, 덩달아 부풀어오르는 마음을 꺼뜨리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연락이 오기 전부터 짐은 모조리 챙겨둔 상태였다. 우리들은 임 마담과 간단한 작별을 나누고 근 4개월 동안 신세를 졌던 러브 하우스를 빠져 나왔다. 인사를 나눌 때 임한나는 평소처럼 상냥히 웃어주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기색이었다. 그때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고연주의 눈짓에 일단은 밖으로 나와 클랜 하우스를 향해 걷는 중이었다. 러브 하우스와 클랜 하우스의 거리는 멀지 않다. 걸음 속도가 매우 빠르긴 했지만 5분도 채 안되어 정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실제 공사는 점심 즈음에 끝났지만 뒷정리에 시간을 많이 소비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지금쯤이면 얼추 시간이 맞을 터.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나무로 만들어진 문을 밀고 들어갔다. “오.” “우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등 뒤로 클랜원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일전에 보기는 했지만 노을 빛을 뿌리는 정원은 또 다른 환상적인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살랑살랑 흔들리는 수풀 위로 짙은 황혼을 머금은 건물 두 채가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연한 잿빛으로 물든 건물의 외관은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고즈넉하면서도 웅장한 위용을 드러내었다. 내부에 사람들은 몹시 많았다. 정원 수풀에 아무렇게나 앉아 완공된 클랜 하우스를 보며 웃고 떠드는 중이었다. 다시 한 번 바람이 불어 그들의 땀을 식혀주는 사이,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온 우리를 발견했는지 크게 소리를 질렀다. “대장! 머셔너리 로드께서 오셨습니다!” “어이쿠! 오셨구나!” 저 앞에서 나무에 기대어 앉은 사용자 한 명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휘휘 돌리더니 이내 문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자 아는 얼굴 두 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봉팔 아저씨, 예현이 누나.’ “하하! 오셨군요, 머셔너리 로드!” “반갑습니다. 머셔너리 클랜 로드 김수현입니다.” “이스탄텔 로우 클랜 박봉팔입니다! 이번에 클랜 하우스 건축 설계를 맡았지요. 아, 이쪽은 내부 디자인을 맡은 신예현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신예현이에요.” 넉살스레 인사를 건네는 봉팔 아저씨와 수줍게 웃는 예현이 누나. 둘 모두 이스탄텔 로우 소속인 만큼 1회차에 이들과 한솥밥을 먹은 사이였다. 제법 좋은 사람들로 기억하고 있어 반갑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리라. 어찌됐든 여전한 성격들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가 내민 손을 굳게 맞잡았다. “아이고. 완공이 예정보다 이틀 늦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추가 요구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괜찮습니다.” “하하!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고요. 추가 사항에 대해서는 조금 시간이 짧기는 했지만 각별히 신경 썼습니다. 물론 마음에 안 드시는 점이 있다면 기탄없이 말씀해주세요.” “저, 대장….” 나와 봉팔 아저씨가 환담을 나누는 동안 이곳 저곳 퍼져있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모여들고 있었다. 입고 있는 복장이 꽤나 후줄근한 것으로 보아 인부로 들어온 거주민들인 것 같았다. 이윽고 그들의 대표로 보이는 거주민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자, 한창 신나게 떠들던 박봉팔은 퍼뜩 고개를 돌렸다. “응? 아아. 머셔너리 로드께서 오셨으니 이만 가봐. 고생했어.” “헤헤. 알겠습니다. 그런데…. 공사도 끝났는데 이거 한잔 안 하십니까?” 거주민이 헤헤 웃으며 잔을 꺾는 시늉을 하자 박봉팔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으허허허! 안 할 수야 있나! 인마, 그래도 난 이분들을 안내해야 하지 않나. 그러니 돈 걱정은 말고 먼저들 가서 마시고 있으라고. 끝나면 바로 따라갈 테니.” 확실히 모니카는 다르다. 다른 도시였다면 보통 거주민을 노예, 벌레 보듯 하는 경향이 있는데 눈앞의 봉팔 아저씨는 오히려 친근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의 거주민들은 이스탄텔 로우를 굉장히 좋게 생각하고 지지하는 편이었다. 그런 그들을 흐뭇이 바라보다가 난 정하연에게 살짝 눈짓을 보냈다. 그녀는 내 신호를 받고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신한 몸가짐으로 거주민들이 모여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곧 내 옆을 지나치는 정하연의 늘씬한 뒤태가 눈에 들었다. 이제는 어깨를 넘어 등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이 연한 푸른빛을 반사하며 찰랑거렸다. 정하연이 다가오자 왁자하게 떠들던 거주민들은 삽시간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다들 멍한 눈길로 그녀에게 시선을 모았다. 시크릿 클래스 ‘푸른 달의 마도사’를 계승한 이후 정하연의 분위기는 한층 성숙하고 깊어졌다. 그에 따라 미모 또한 한층 물이 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동안 고생하셨어요. 많지는 않지만 작은 성의를 담았어요.” “아, 아이구! 아이구!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정하연이 품 속에서 꺼낸 작은 주머니 하나를 건네자 거주민은 기겁하며 양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긋나긋한 손길로 거주민의 손을 살포시 붙잡아 기어이 주머니를 쥐어주었다. 그러자 거주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어쩔 줄 모르겠다는 시선을 사방팔방에 뿌려댔다. “아우. 꽤 두둑해 보이는데요?” “50골드입니다. 많지는 않아요.” “이야, 인원이 좀 있긴 하지만 10골드면 떡을 칠 텐데요.” “짧은 시간 동안 많이 고생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오늘 충분히 회포를 푸셨으면 하는 마음에 드린 겁니다.” 박봉팔은 내 말에 “흐흐.” 웃고는 거주민들에게 크게 외쳤다. “이놈들아! 머셔너리 로드님께서 호의를 베푸셨다. 다들 감사히 받아들이도록!” “만세!” “아이쿠 여신님. 감사히 쓰겠습니다 요!” “네? 쿡! 전 여신이 아니에요. 쿡쿡.” 정하연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예쁘게 웃더니 바로 몸을 돌려 내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박봉팔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자 거주민들은 환호성과 함께 밖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야호! 오늘 마시고 죽자 죽어!” “야, 너 잠깐 손 좀 줘봐. 아까 여신님께서 친히 잡으신 손이 이쪽 손이여?” “나, 난 주머니…. 주머니 좀 잠깐 줘보아.” “부정 탄다 이것들아! 놔! 놓으라고! 앞으로 이 손은 절대로 씻지 않을 테니…!” 거주민들이 나가면서 내뱉은 말에 정하연이 살짝 낯빛을 붉히는 것을 봤는지 박봉팔은 헛웃음을 흘렸다. “에, 나쁜 뜻은 없었을 겁니다. 워낙 단순한 놈들이라서요.” “괜찮아요.” “하하! 감사합니다. 그럼…. 응? 혹시 꼬마 아가씨가 안고 있는 게 그 소문의 유니콘인가요?” “네? 네에….” “뀨뀨!” 박봉팔은 이제서야 발견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바로 멋쩍은 웃음을 흘리는 걸로 보아 아기 유니콘이 매몰찬 반응을 보인 모양이었다. 그는 궁금해죽겠다는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클랜원들의 얼굴을 읽었는지 호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유니콘은 소문으로만 들었지 처음 보는지라. 아무튼 제가 너무 오래 세워두었군요. 일단 정원부터 둘러보시죠. 하나씩 설명 드리겠습니다.” “정원은 괜찮습니다. 전에 한 번 들른 적이 있어서 미리 둘러보았거든요. 이 정도면 만족합니다.” “그렇습니까? 다행이네요. 그럼 바로 내부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본관부터 가시는 게 나을 겁니다. 하하하. 아, 예현이 너는 어떡할래?” “저도 같이 갈래요. 머셔너리 분들의 평가를 듣고 싶어요.” 신예현은 얌전히 대답했다. 박봉팔은 그러라고 대답한 후 눈앞의 커다란 건물로 오른팔을 내밀었다. “그럼 들어가시죠.” 이윽고 나와 박봉팔은 선두서 나란히, 클랜원들과 신예현은 뒤를 졸졸 쫓으며 정원을 가로질렀다. 가는 도중에도 아저씨는 경박하지만 상세한 설명을 들려주었다. “클랜 하우스 내부의 공간들이라고 하면 여러 목적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크게는 목적용, 공공생활용, 개인용 그리고 임시용으로 구분할 수 있지요. 목적용이라 하면 공방, 연무장 등 어떤 목적을 가진 공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공공생활용은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식당 또는 목욕탕을 을 예로 들 수 있겠지요. 개인용은 숙소, 집무실로 볼 수 있고 임시용은 말 그대로 임시로 비워놓은 방입니다. 일단은 비워놓고 추후에 필요한 공간이 생겼을 때 새로이 개축하는 곳입니다.” “그렇군요.” “아. 그리고 임시용 공간 말이 나와서 말씀 드리는데, 원래 이곳은 피스타치오 클랜이 사용하던 클랜 하우스입니다. 클랜원만 90명에 고용인 30명까지 합쳐서 총 120명이 생활하던 공간입니다. 그것을 개축하다 못해 증축까지 했으니 임시용 공간이 제법 많습니다. 아마 당분간 방이 부족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하하하.” 그거야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부지가 넓은 곳이기도 했지만 10명이 생활하기에는 과분할 정도로 넓다. 어차피 첫술에 배부를 수 없는 노릇이니 앞으로 차근차근 채워나가면 되는 일.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자 박봉팔은 곧장 말을 이었다. “두 건물은 앞서 말씀 드린 네 가지 성격을 모두 갖추고 있지만, 어떤 것을 우선하는지 정도로는 구분할 수 있습니다. 임시용을 제외하면, 지금 앞에 있는 건물은 목적용의 성격이 강합니다. 그에 반해서…. 끙.” 이윽고 계단을 올라 문 앞에 선 박봉팔은 몸을 돌려 별관을 가리켰다. “저기 보이는 별관은 개인용, 공공생활용의 성격이 강하죠. 미리 알려드린다면 지하층과 1층은 공공 목욕탕 및 휴게 시설이, 2층과 3층은 숙소 그리고 4층은 임시용으로 비워두었습니다. 아쉽게도 원래 숙소용으로 지었는지 별관에 옥상은 존재치 않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본관 구조는 어떻죠?” 내 물음에 박봉팔은 씩 웃고는 문 손잡이를 잡으며 대답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내부를 직접 보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박봉팔이 힘껏 팔을 잡아당기자 굳게 닫혀있던 문이 활짝 열렸다. 이윽고 우리들은 그의 안내를 받아 내부로 들어갔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꽉 막혀있던 1층의 벽면은 중간중간에 박아 논 거대한 창틀이었다. 그 안을 사각형 수정으로 채워 넣어 내부에서는 바깥이 보이도록 만들어놓은 상태였다. 그것을 보자 뭔가 답답한 분위기를 탈피해 시원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천장까지의 높이는 4미터 가량 될까? 반들반들 윤이 나는 매끈한 바닥이 보이는 1층은 상당히 길고, 넓었다. 천장은 연한 주홍빛을 띠는 라이스 스톤이 촘촘히 박혀있어 내부의 분위기를 깔끔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중앙으로는 적 빛의 둥근 카펫이 커다랗게 깔려있었는데, 주위로 소파, 의자, 벽난로 등이 보기 좋게 배치되어 있는 걸로 보아 그곳이 로비인듯 싶었다. 옛 흔적들이 아주 약간 남아있기는 했지만, 내외로 모두 깨끗하게 개축해서 그런지 오히려 간간히 보이는 흔적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로비에서 휴식을 취할 수도 있겠군.’ 클랜원들 또한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진 내부를 보며 동시에 탄성을 터뜨렸다. “여기는 제가 설명 드릴게요. 일단 이쪽을 보아주시겠어요?” 여태껏 조용히 침묵을 지키던 신예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녀는 가녀린 손가락을 들어 로비 옆에 붙어있는 곳을 가리켰다. “머셔너리는 의뢰를 받아 운영하는 용병 클랜이라고 들었어요. 그렇다면 1층에는 그와 관련된 업무를 접수하고 안내하는 접수대가 필요해요.” 신예현이 가리킨 곳은 둥근 곡선을 그리는 커다란 안내 데스크가 세워져 있었다. 그 뒤로는 기둥에 짙은 자줏빛의 커튼이 예쁘게 둘러져 있었고, 중앙에 노출된 공간에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Mercenary’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그 다음은 계단에 대해 말씀 드릴게요. 1층에는 위아래로 통하는 계단이 총 4개가 있어요. 먼저 1층의 양 끝으로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로비 너머로 두 개의 계단이 있어요. 하나는 똑같이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지만 나머지 하나는 아래층. 즉 머셔너리 로드님께서 요청하신 지하 연무장으로 가는….” 신예현이 설명이 이어지고 클랜원들이 정신 없이 듣는 동안 내 옆으로 박봉팔이 다가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다시피 현대의 향기가 진하게 남아있는 건물입니다. 그래서 많은 고민을 해야 했지요. 홀 플레인과 현대의 건축 양식은 많은 차이가 있으니 말입니다. 뭐 솔직히 실생활에는 마정석, 마법 진이 쓰이긴 했지만요.” “그러고 보니 그것들은 일체형인가요, 아니면 개별형인가요?” “개별형입니다. 일체형이 관리는 편해서 좋긴 하지만, 퀄리티는 개별형으로 하는 게 훨씬 낫습니다. 관리가 귀찮다는 단점이 있지만, 마법 진에 자체 복원력이 있으니 고의로 훼손하지 않는 이상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 마정석은 주기적으로 갈아주어야겠지만요.” 박봉팔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차분히 고개를 주억였다. 어차피 그것은 추후 고용인들을 고용하면 알아서 해결해주니 크게 신경 쓸 문제도 아니었다. “자, 그럼 이번엔 식당으로 가보도록 할게요.” 이윽고 개략적인 설명을 끝냈는지 신예현이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뒤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그 후 우리들은 몇 시간을 걸쳐 클랜 하우스 내부의 안내와 설명을 받을 수 있었다. 평수가 넓은 만큼 그 내용도 굉장히 방대하고 복잡했다. 그것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1층은 로비와 카운터를 제외하고 총 네 개의 공간으로 나눌 수 있었다. 카운터를 기준으로 왼쪽 통로에는 응접실, 휴게실, 대기실이 주를 이루었고 오른쪽 통로로는 커다란 내부 광장과 식당이 주를 이루었다. 그 중 가장 압권은 식당이었다. 일반적인 휴게소 식당이 아니라 흡사 하나의 주점을 뚝 떼어 갖다 놓은듯한 광경이었다. 수십 개의 테이블과 널찍한 주방이 자리잡고 있는 그곳은 마치 카페테리아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주방 내부에는 식량 저장고와 수납 공간도 충분하고, 기본적인 요리 기구들도 갖춰놨으니 아마 요리사들이 요리할 맛이 날 거라고 박봉팔은 호언장담했다. 1층 구석구석을 돌며 쉴 새 없이 들리던 설명이 조금씩 뜸해지기 시작한 것은 2층에 오르고 나서부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본관이 목적형 건물인 만큼 2층과 3층은 그에 준하는 공간이 들어서야 했기 때문이다. 즉 이곳은 임시용 공간들이 주로 몰려있는 곳이었다. 2층은 정보 처리, 내정 운영, 장비 창고를, 3층은 연금술사 공방, 마법사 연구실, 도서관, 소 회의실 등을 운영할 예정이었다. 그렇기에 소 회의실을 제외하고, 텅 비어있는 방에 해당하는 특수 기구들은 자체적으로 구매해야 했다. 해서, 어디에 어떤 공간이 있는지에 대해서만 간략히 설명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3층에서 단 하나 특이한 점이 있다고 하면 비비앙이 3층에서 구경을 포기하고 바로 연금술사 공방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녀는 박봉팔에게 공방용 공간이 어디 있는지를 묻더니, 신상용을 데리고 그대로 공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공방을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이 여기는 만큼 다른 장소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게 분명했다. 신상용은 조금 더 구경하고 싶은 듯 보였지만, 비비앙의 독촉에 빵빵한 카오스 미믹 두 개를 질질 끌며,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그녀를 따라갔다. 이렇게 3층 설명이 끝나고, 우리들은 대망의 4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4층은 한마디로 클랜 로드 전용 공간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곳의 주 공간이라고 하면 집무실, 회의실(대), 귀빈실 정도랄까? 즉 애초에 목적용보다는 나만을 위한 공간이라 보는 게 옳았다. 그렇기에 공간 하나하나가 넓기도 했고 임시용 공간수도 훨씬 적었다. 그렇게 4층 또한 빠르게 탐사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옥상에 들른 후, 우리들은 비로소 본관 탐사를 마칠 수 있었다. * 어느덧 해는 완전히 저물고 어두운 밤이 찾아왔다. 박봉팔과 신예현은 본관을 끝내고 기어이 별관까지 설명을 마쳐주었다. 그리고 한 번 생활해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다면 언제든지 이야기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들은 클랜 하우스를 떠났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애들은 은연중에 투덜거렸는데, 막상 구경을 하고 난 후 잽싸게 행동을 개시했다. 솔직히 내가 보기엔 숙소는 거의 똑같았다. 그럼에도 먼저 방을 고르겠다고 달려나간 것이다. 그 후로 자유 시간을 줬으니, 아마 지금쯤 몇 명은 내부를 구경한다고 돌아다닐 테고 몇 명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을 터. 나 또한 본관 4층 집무실로 되돌아온 상태였기에 일단 하루 이틀은 마음껏 구경하라고 놔둘 생각이었다.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지금 내가 있는 장소인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집무실은 내 마음에 쏙 들 정도로 넓고 고급스러운 퀄리티를 보이고 있었다. 부드러운 카펫, 안락한 소파, 길쭉한 테이블과 결 좋은 책상 등등. 여러 가구들이 집무실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책상 뒤로 보이는 테라스였다. 1층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수정이 창문 역할을 해주고 있었으며, 중앙에는 테라스로 나갈 수 있는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 보였다. 그곳으로 나가면 클랜 하우스를 전체를 비롯해 모니카의 전경이 한눈에 잡힐 듯 보인다. 가끔 머리가 아플 때 밖으로 나가 휴식을 취하면 안성맞춤일 것이다. 테라스 밖을 보며 이대로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잠시 옥상으로 올라가볼까 고민이 들던 찰나였다. 이내 마음을 정하고 막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복도에서 다급히 뛰는 소리가 들리더니 집무실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어이없는 마음에 고개를 돌리자 붉게 상기된 얼굴로 숨을 몰아 쉬는 비비앙이 보였다. “헉, 헉. 김수현! 안자고 기다리고 있었네?” “네가 그러라고 했잖아.” “히히히. 그랬지!” “후유.” “응? 왠 한숨?” 밤이 깊었음에도 내가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있는 이유는 바로 비비앙을 기다리는데 있었다. 그녀는 3층에서 공방으로 가기 전, 내게 딱 두 마디를 던졌다. ‘김수현. 오늘 밤 너를 위해 완전히 승부를 보겠어.’ ‘자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알지? 오늘은 우리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날이라는 거. 히히. 기대하고 있으라고~.’ 사정을 아는 사람이야 그런가 하구나 하고 넘어가지만, 박봉팔과 신예현은 아니었다. 박봉팔은 “화끈한 여성분이군요. 부럽습니다.” 라고 말하며 부러워했고, 신예현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그때를 생각하자 절로 주먹이 쥐어졌지만, 꼴을 보아하니 거사를 앞두고 있는 것 같아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괜한 짓을 했다가 부정 타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비비앙을 응시했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이내 내 옷깃을 잡아 꾹꾹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빨리 가자. 빨리 빨리. 지금 느낌 좋아.” “준비나, 체력이나. 조금 더 만전을 기해야 하지 않을까?” “이번 연단 과정은 신상용의 능력, 재료가 중요해. 기구는 완전히 설치하지는 않았지만 연단할 수 있을 정도는 충분하다 못해 넘치게 설치해놨어.” 비비앙은 뭐가 그리 급한지 한 손을 펄럭펄럭 흔들며 대답했다. 나는 지끈거리는 관저놀이를 꾹꾹 누르며 하나 더 질문했다. “체력은.” “난 참고로 밤 시간대가 최고조야.” “너 말고 신상용씨.” “치. 걔도 나 따라서 밤샘 많이 했으니 괜찮아. 아무튼 만전에 만전을 기했으니까 따라오기나 하셔.” 비비앙은 입을 삐쭉 내밀며 손을 팍 늘어뜨리고는 휙 소리가 날 정도로 몸을 돌렸다. 이윽고 문 밖으로 나가는 그녀를 보며 나 또한 책상을 벗어나 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토록 자신하니 뭔가 믿는 수가 있는 게 분명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아. 오늘 첫 시작할 때 클랜 하우스 내부를 전부 묘사하리라 마음먹었는데요. 엌ㅋㅋㅋㅋㅋㅋㅋㅋ. 그거 다 묘사하려면 영단 작업을 못 들어갈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이번 회는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정도로만 파악해주세요. ‘ㅅ’ 나머지는 천천히 클랜 하우스에서 생활하면서 묘사로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합니다. 제가 아는 모 작가님이 1등 한 번 하시려고 벼르고 계십니다. 그래서 미월야 님을 보시고 전의를 불태우고 계십니다. ㅋㅋㅋㅋ. 2. 츄파츕스틱 : 지, 진정하세요. 세라프 알고 보면 불쌍한 아이입니다. ㅜ.ㅠ 3. 신유진 : 유니콘입니다. 네. 유니콘이요. 하하하. 앞으로 브레이크 댄스, 나이키도 보여드리겠습니다!(퍽퍽!) 4. zorney : 총 2개의 권능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푸른 달의 마도사에 대한 설명에서 힌트를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 5. 눈물강 : 오호. 푸른 달을 품은 호수라. 그거 괜찮은데요? 한 번 고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6. 유운처럼 : 오랜만에 뵙습니다! 쿠폰 감사합니다. _(__)_ 7. 모리타시노부 : 그 어려운 공부를…. 고시 공부 파이팅입니다! 가끔 제 작품을 읽으시면서 머리를 휴식할 수 있다면 참 기쁠 것 같네요. :) 8. 가을왕 : 순간 애쉬를 떠올렸습니다. ㅋㅋㅋㅋ. 곧 프리딜 하는 애 한 명 올 예정입니다. :) 9. 스르오 : 하하. 한소영 히로인이요. 이건 노 코멘트를 하고 싶습니다. 결정은 됐습니다만, 미리 알아버리면 재미가 없잖아요. :)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10. 테샨 : 몸무게, 키 비율 검색해서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86 / 0933 ---------------------------------------------- 체력 조루 탈출! 3층의 통로는 어두웠다. 밤이 찾아 들고 라이트 스톤도 소등해서 그런지 주변은 무척이나 캄캄했다. 그러나 통로를 걸으면 걸을수록 실루엣만 남기던 비비앙의 뒤태가 조금씩 눈에 잡히기 시작했다. 서서히 통로에 빛이 비치고 있다. 고개를 좀 더 들어올리자, 통로 끝 방의 문틈에서 미약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비비앙은 약간만 열려있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뒤를 따라 들어가자 그녀와 신상용이 꾸며놓은 공방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솔직히 꾸몄다기보다는 이리저리 어질러져 있다는 표현이 더욱 정확할까? 공방은 제법 넓고 천장도 꽤나 높은 편이었다. 호롱 빛이 일렁이는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자 문득 ‘고대 연금술사 비비앙의 던전’에서 보았던 공방이 떠올랐다. 아주 똑같다곤 볼 수 없지만 왠지 모르게 그곳의 흔적이 이곳 저곳에서 눈에 띄었다. “준비는 거의 다 끝났어. 곧 시작할거야. 원래는 우리 둘끼리만 하려고 했는데, 그래도 김수현은 연단 과정을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난 괜찮아. 방해가 된다면 나가있을게.” “아니. 그냥 한쪽에서 조용히 있어주면 돼.” 그 정도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구석으로 걸음을 옮기자, 비비앙 또한 중앙에 놓인 커다란 흑색 화덕으로 이동했다. 공방의 바닥에는 3개의 마법 진이 그려져 있었다. 바닥 전체를 아우르는 큼직한 마법 진 하나, 화덕 아래 그려진 마법 진 하나, 커다란 마법 진 안에 그려져 있는 작은 마법 진 하나. 하지만 그것들은 눈에 보이는 마법 진들일 뿐이었다. 안쪽에 그려진 마법 진은 육망성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각 삼각형의 꼭지점 끝에는 마족의 심장, 호렌스의 마정석, 비비앙의 영단, 유니콘의 뿔, 체력 영약 2개가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신상용은, 그 마법 진 앞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상태였다. 신상용은 눈을 감고 있지 않았다. 내가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고개도 돌리지 않고 실눈을 뜬 채 마법 진만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그런 태도를 보자 무척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마법사나 연금술사들은 중요한 연구를 진행할 때 극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치밀한 계산이 들어간 만큼 조금이라도 어긋나버리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신상용의 머릿속에는 연단을 이루어내는 과정밖에 들어있지 않으리라. “김수현. 시작한다. 걸리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을 거야. 끽해야 30분…. 어쩌면 덜 걸릴 수도 있고.” “30시간도 기다릴 수 있어.” “그러면 내가 못 버텨. 신상용? 오르도를 소환할거야. 준비하고, 타이밍 잘 맞춰야 해.” 신상용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까닥 고개를 끄덕였을 뿐. 그러나 비비앙은 개의치 않고 오른손을 옆으로 내뻗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으로 환한 빛을 내뿜는 빛의 구체가 나타나더니, 이내 길쭉하게 늘어나는 모양새를 보였다. 그것은 얼마 전에 주인 의식을 치르는데 성공한 ‘질서의 오르도’였다. “후.” 한 번 숨을 고른 비비앙은, “─.” 마법 진을 향해 오르도를 겨누며, 짧게 주문을 외웠다. 그 순간 화덕 아래 그려져 있던 마법 진에 붉은빛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허공으로 이글거리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우우웅. 화덕이 달아오르고 마법 진에서 피어오른 불빛도 널리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퍼져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언뜻 보면 중구난방인 것처럼 보여도 수식에 따라 일정한 흐름을 보이고 있었다. 이윽고 붉은빛이 커다랗게 그려진 마법 진으로 흘러 들어가자 방 내부가 삽시간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웅! 시간이 갈수록 소음은 더욱 거세어졌다. 마법 진이 발동되는 소리가 점차 커질수록 그에 비례해 내부의 온도도 일직선으로 치솟고 있었다. 그리고 화덕의 밑동이 뻘겋게 변하고 안에서 액체가 야단스럽게 끓을 무렵, 외부에서 슬금슬금 밀고 들어오던 적 빛이 육망성의 꼭지점에 닿았다. 그리고, 지금껏 가만히 있던 신상용이 드디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 ───. ───.” “───. ───. ───.” 비비앙은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리고 신상용의 주문이 시작되자, 둘의 말소리가 기묘한 화음을 이루어 공명한다. ‘질서의 오르도’는 어느새 육망성을 겨눈 상태였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사이로 수많은 마력이 오고 감이 느껴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둘의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즈음, 한동안 현 상태를 유지하던 연단이 드디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녹는다?’ 말 그대로였다. 꼭지점에 배치된 재료들은 아주 조금씩이기는 하지만 서서히 녹고 있었다. 그렇게 스멀스멀 액체로 변하던 여섯 개의 재료들은 이내 5분의 시간에 걸쳐 완전히 녹아 내렸다. 그리고 각기 차지하고 있던 삼각형을 가득 채웠다고 느낄 즈음, 비비앙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신상용! 곧 해제할거니까 준비해! 절대로, 터럭만큼도 섞이면 안 돼!” 이제는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다. 평소 어설프게 웃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눈동자를 형형히 빛내며 양 손을 앞으로 내뻗는다. 이윽고 활활 타오르던 육망성이 빛이 확 사그라지는 순간이었다. 실눈을 유지하던 신상용이 한 번 눈을 크게 부릅뜬다 싶더니, 양손에서 찬연히 빛나는, 마력으로 이루어진 마법 진이 솟아나왔다. 쭈르륵. 지금까지 재료들을 가두고 있던 육망성이 빛을 잃자, 액체로 화한 재료들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아니, 퍼져나가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조화의 마방진(Magic Square Of Harmony).” 비로소, 신상용의 첫말이 떨어졌다. 솔직히 갑작스레 상황이 변하기 시작한 터라 반응을 살피고 있었는데, 우려를 보내던 비비앙의 눈빛이 안도로 바뀐 것으로 보아 일단은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다시 한 번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냥 다물고 말았다. 나는 영단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하나도 놓칠세라 빠짐없이 구경했다. 육망성이 사라진 곳에 조화의 마방진이 대체해서 들어가고, 그 순간 액체들이 마방진 안에서 서로 몸을 비볐다. 처음에는 잘 섞이지 않았다. 하얀색, 검은색, 푸른색을 띠는 액체가 힘겨루기를 하듯, 물과 기름처럼 서로를 허용치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신상용이 손이 부드럽게 유영하듯 움직인다. 말을 더듬는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유려한 손놀림이었다. 비비앙은 육망성에 마력을 끊은 후 화덕을 살피는 중이었다. 중간중간 신상용을 흘끗거리곤 있었지만 일단 1차적인 임무는 끝낸 모양이었다. 그러나 오르도를 아직 역 소환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직 그녀가 해야 할 과정이 남은 것 같았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간헐적으로 울리던 소음의 주기는 점차 짧아지고 있었다. 그냥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별것 아니게 보일지 몰라도, 정작 당사자는 죽을 맛일 것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수식 아래 수많은 마력의 이동이 느껴졌다. “크윽! 크으윽!” 한 번 진동이 울릴 때마다 신상용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을 보며 내가 어떻게라도 도울 수 없을까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비비앙의 말대로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구경하는 것뿐이었다. ’섞인다.’ 비비앙이 예고했던 대로 20분을 지나 25분을 향해 달려가자, 두 번째 변화가 시작되었다. 슬금슬금 비비며 간을 보던 액체들은 어느새 완전히 섞여 하나의 거대한 액체를 이루고 있었다. 합쳐진 액체의 색깔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검은색을 띠었다가, 흰색을 띠었다가, 푸른색을 띠었다가, 다시 검은색으로. 한 번 눈을 깜빡일 때마다 색깔이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조절하는 신상용은 이제는 비 오듯 땀을 쏟아내고 있었다. 한 번 감을 틈도 없이 여전히 눈을 부릅뜬 채로 조화의 마방진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윽고 계속해서 바뀌던 액체의 색깔이 변화를 멈췄다. 멈춘 색깔은 검은색이었다. 하지만 칠흑처럼 진한 검은색이 아니라, 맑게 보일 정도로 연한 흑색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색깔의 변화가 멈춘 순간 지금껏 꾹 다물려 있던 신상용의 입술이 힘차게 열렸다. “됐습니다!” “───. ───. ───.” 신상용의 외침이 들리자 한치의 오차도 없이 비비앙의 주문이 이어졌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오르도를 겨누자, 마법 진 하나가 나타나 액체의 주위를 살며시 감싸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전체를 감싸 안았을 즈음, 그녀는 왼손을 내밀어 서서히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마법 진이 위로 떠오르고, 액체 또한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그러더니 비비앙이 주먹을 쥔 모양으로 서서히 뭉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액체가 적당한 크기의 구슬 모양이 된 순간 비비앙은 그것을 조심스럽게 이동시켜, 화덕 안으로 풍덩 빠트렸다. “───. ───. ───.” “───. ───. ───.” 그리고 다시 한 번 시작된 둘의 주문. 이번에야말로 둘의 공동 작업이 이루어지는지, 비비앙은 화덕을 향해서, 신상용은 화덕 안의 내용물에 각자 맡은 역할을 이행하고 있었다. 화덕에서는 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이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고개를 빼꼼 내밀어 안을 살펴보자 화덕을 가득 채우던 내용물이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마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면, 합쳐진 영약에 서브로 구비한 재료들을 흡수하는 과정일 것이다. 곧 화덕을 채우던 액체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바닥을 드러내자, 둘은 시간차를 두고 숨을 터뜨렸다. 비비앙이 먼저, 그리고 신상용이 다음으로. 그리고 밝게 물들어있던 빛도 서서히 사그라지는 것으로 보아 대강이나마 작업이 완료된 듯싶었다. 비비앙과 신상용은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숨을 거칠게 몰아 쉬고 몸을 약간 비틀거리는 게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둘은 고개를 들어 서로를 바라보더니 이내 동시에 내게 고개를 돌렸다.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신상용이었다. “리, 리더.” “고생하셨습니다.” 내 대답을 들었는지 신상용은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그대로 눈을 까뒤집으며 쓰러지고 말았다. 바닥과 부딪친 머리에서 쿵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바로 기절한 것 같았다. 비비앙도 정상은 아니었다. 입술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거슬리는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가, 퉤 하고 뱉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김수현. 끝났어. 가져가도 돼.” “그래. 너도 고생했….” 풀썩. 비비앙의 체력 소모도 별반 다르지 않은 듯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몸이 옆으로 꺾였다. 그 와중에도 간신히 손가락을 들어 화로를 가리키는 것을 보아 얼른 가져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내부는 아직도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있었다. 두근대는 마음을 추스르고, 나는 차분히 화덕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삼분지 이를 넘게 채우던 액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단 하나. 오직 찬연한 황금빛을 내뿜는 조막만 한 영약 하나뿐이었다. * 창문을 등지고 앉아있자 문득 뒤쪽에서 맑은 빛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슬쩍 고개를 들자 어두웠던 방안이 조금이나마 밝아진 게 보였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책상으로 시선을 내렸다. 책상에는 두 개의 구슬이 반짝이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제 3의 눈으로 또다시 그것의 정보를 읽어 들였다. 『요정 여왕의 눈물』 (설명 : 요정 여왕 마르가리타의 진실된 감정이 담겨있는 눈물입니다. 사악한 마법사에 타락한 그녀는, 최후의 순간을 맞이해 자신의 모든 감정을 눈물에 담아 내보냈습니다. 복용 시 능력치 포인트가 2포인트만큼 새로이 생성됩니다. 추가된 능력치 포인트는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올릴 수 있습니다.) 『사랑과 존경이 담긴 영약』 (설명: 체력이 부족한 한 명의 사용자를 위해, 한 명은 사랑을, 한 명은 존경의 의미를 담아 만든 비전의 영약입니다. 들어간 재료도 재료지만 빛과 어둠이라는 섞일 수 없는 상극의 성향을 ‘조화의 마방진’이라는 능력으로 합일시켜 최고의 효율을 이끌어냈습니다. 1. 체력 능력치 포인트를 10포인트 상승시켜줍니다. 다만, 체력 72포인트 이하의 사용자만 복용할 수 있습니다. 2. 마력 능력치 포인트를 2포인트 상승시켜줍니다. 다만 마력 90포인트 이하의 사용자만 복용할 수 있습니다.) 연단에 지쳐 기절한 둘을 숙소로 옮겨준 후, 나는 다시 4층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곳에서 꼬박 밤을 새고 말았다. 체력 10포인트 상승. 정말 어마어마한 수치였다. 물론 체력 영약 2개가 들어가 6포인트를 기본으로 깔았겠지만, 그래도 설마 이만큼 더 상승시킬 수 있을지는 꿈에도 몰랐다. 자유성은 없지만 예전에 홀 플레인을 들썩였던 ‘천사의 눈물’보다 4포인트나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이것을 읽으며 새벽 동안 오만 가지 생각에 잠겼고, 수많은 경우의 수를 따져보았다. 예전과 같은 실수는 더는 하기 싫었으니까. 그리고 아침이 찾아오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체력을 지금 바로 올려버리면, 앞으로는 제한에 걸려 영약으로 체력을 높이는 일은 요원해진다. 그건 알고 있다. 그러나 애초에 이번 영약을 만들기로 마음먹으면서 체력 포인트는 무조건 해결할 생각이었다. 내 몸 상태는 잘 알고 있다. 더 이상 체력을 방치하다가는, 추후 정말로 돌이킬 수 없을 상황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그런 만큼 더 이상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즉 이것은 단 한 번의 기회였다. 70대 포인트로써 가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공교롭게도 현재 능력치에도 딱 걸린 상태고…. 10포인트 상승이면…. 앞으로 이보다 더 올릴 기회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겠지. 마력이 아깝긴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는 체력이 부족해서 골골거리는 일은 사양하고 싶었다. 그렇게 마음을 정한 후, 나는 뭔가에 홀린 듯 두 영약을 한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내 앞으로 가져와, 한 입에 털어 넣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싸, 싸, 싸, 싸, 싸랑하는 독자님들! 안녕하세요! 하하. 오늘 조금 늦었어요. 용서해주세요~. :) 오늘 약속은 굉장히 중요한 약속이라서, 조금 시간이 필요했거든요. ㅜ.ㅠ 하하. 수현이도 드디어 체력 조루 탈출입니다. 뭐, 여전히 화정을 사용하기엔 부족하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훨씬 나아졌지요. 헤헤. 아, 그리고 제가 우선이라고 올리는 이유는 일단 내용 먼저 올리고 그 다음에 후기, 리리플을 업데이트 한다는 소리에요. :D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합니다. 네. 그렇죠. 체력 올렸습니다. 이제 수현이한테 까불던 여성 캐릭터들을 더욱 혼내줄 수 있습니다! 아, 아니요. 죄송합니다. 제가 기뻐서 잠시 실언을 했네요. 험험. 2. 현오 : 네! 사용했습니다! :) 이미 꿀꺽했다가, 한 번 실수했지요. ㅜ.ㅠ 3. 라무데 : 뜨끔! 오, 오늘 날씨가 좋은데요? 그쵸 라무데 님? 네?! 4. 사람인생 : 시험 고생하셨어요! 하하하. 시험은 잘 보셨나요? 5. Nodens : 그렇죠. 이제 고연주도 아주 콱 그냥 아주. 아, 죄, 죄송해요. 잊어주세요. 자꾸만 말이 헛 나오네요. ㅜ.ㅠ 6. 몽구헌터 : 꿍수 입니다! 꿍스 꿍스 꿍스 꿍스 꿍스 꿍스 꿍꿍따리 꿍꿍따…. 아. 저 오늘 왜 이러죠. 약을 안 먹어서 그런 것 같아요. 마저 먹고 리리플 달겠습니다! 네, 먹고 왔습니다. 하하. 황혼의 무녀는 궁수에요. :) 7. 컴비 : 오호. 그믐밤의 호수라. 이름이 괜찮은데요? 감사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후후훗. 8. uther : 예. 그렇습니다. 정확히 맞추셨습니다. 후후. 9. hellhoy : hellhoy 님은 진짜…. 후…. 너무 잘생기셨을 것 같아요….(?) 아무튼 어떤 것 때문에 그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죄송합니다.(과, 과민반응인가요?) _(__)_ 10. dlckdfla : 실은 동시에 삼킨 영약이 상호 작용을 일으켜서 체력이 100배로 뻥튀기 됩니다. 그리고 수현은 짱짱맨이 되겠지요. :) 노, 농담이에요. 그렇게 나가면 정말 막장이 될 거예요. ㅋㅋㅋㅋ.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87 / 0933 ---------------------------------------------- 체력 조루 탈출! ‘요정 여왕의 눈물’의 크기는 보통 구슬만하다. 그리고 ‘사랑과 존경이 담긴 영약’은 그보다 조금 더 큰, 조막만 한 정도였다. 두 개를 한꺼번에 넣긴 했지만 입을 크게 벌리자 무리 없이 집어넣을 수 있었다. 그렇게 혀를 살살 굴리기 시작한 순간 입 안에 들어온 영약이 톡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맛있다.’ 처음에는 톡 쏘는 탓에 약간 얼얼한 맛이 느껴졌지만 이내 시원하고 청량한 맛이 입안 가득히 감돌기 시작했다. 혀 전체를 부드럽게 자극해주는 게 입안에 계속해서 담아 두고픈 정도였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기에, 나는 적당히 녹았다 싶을 즈음 바로 꿀꺽 삼켰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기대감과 함께 허공에 떠오를 메시지들을 기다렸다. 『요정 여왕의 눈물을 복용했습니다. 자유 능력치 포인트가 2포인트만큼 추가되었습니다.』 『사랑과 존경이 담긴 영약을 복용했습니다. 체력 전용 능력치 포인트가 10포인트만큼 추가되었습니다. 마력 능력치 포인트는 제한에 걸렸으므로 추가분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체.” 허공에 나타난 메시지들을 보자 나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마력 전용 2포인트가 아까워 혹시나 같이 먹어본 건데, 당연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쉬움에 계속 혀를 차고 있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킥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배가 불렀지.’ 1회차에는 이런 것 하나 못 구해서 아등바등했을 적이 있었다. 물론 이번엔 그만큼의 재료가 들어가기는 했지만 솔직히 10포인트만 해도 엄청난 성과였다. 그래도 사용자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지 아까까지만 해도 시원했던 입안에서 쓴맛이 느껴졌다. 그렇게 한두 번 입맛을 다시며 마음을 가다듬은 후, 나는 곧바로 사용자 정보창을 개방했다. [근력 96(+2)] [내구 92] [민첩 98] [체력 72] [마력 96] [행운 90(+2)] (잔여 능력치는 자유 능력치 14포인트와 체력 전용 10포인트로 총 24포인트입니다.) 총 24포인트. 그 중 10포인트가 체력 전용이라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어차피 올려야 할 것을 감안한다면 가히 어마어마한 수치였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체력을 올리려 손가락을 올렸다가, 반사적으로 행동을 멈췄다. 분명 체력을 해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 마음에는 아직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어쩌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기회가 또 한 번 더 찾아올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이 잔여 능력치들을 전부 올리는 게 아니라 80대를 유지하면 영약 상승을 한 번 더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 하지만 지금 몸 상태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을 텐데.’ 지지부진한 체력 회복. 그것 또한 잘 알고 있다. 마법 도시 마지아의 원정을 다녀오며 생겨난 후유증은 여전히 체내에 축적된 상태였다. 이 말인즉슨 체력 72포인트로는 감당키 어려운 수준의 내상을 입었다는 소리였다. 이것을 원래대로 되돌리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그리고 80대로 올렸다고 해도 내상이 치유될지 어느 것 하나 장담할 수 없다. 새벽 내내 고민했지만 딱히 이렇다 할 해답은 내리지 못했다. 애꿎은 테이블만 검지로 톡톡 두드리다가,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무척이나 답답했지만 그렇다고 충동적으로 올렸다가 후회하는 일은 사양하고 싶었다. 한동안 고민을 하다가 나는 결국 사용자 정보창을 꺼버리고 말았다. 지금의 나에게는 누군가의 조언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렇다면, 화정에 대해 나보다 잘 알고 있는 이를 찾는다면, 단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세라프. 비록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1회차 시절 마지막을 제외하면 최소 그녀의 말을 들어서 손해본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사용자의 도우미 역할을 맡고 있는 천사로써 항상 적절한 조언을 해주는 존재였다. 어느새 방 안을 채우던 어둠은 완전히 걷혔다. 따뜻한 햇살이 창문을 통해 빛을 비추고 있었다. 지금쯤 한 명 두 명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었다. 일단 나가보자는 생각에 책상에서 벗어나 문을 밀고 나가는 순간, 갑작스레 영약의 이름에 대해 생각이 미쳤다. ‘그러고 보니…. 영약 이름이 뭐라고?’ * 예상대로 일어난 클랜원들은 모두 1층의 식당으로 모였다. 하기야 어젯밤 빨빨거리며 클랜 하우스를 돌아다니다 늘그막이 잠자리에 들었으니 배고프기도 할 터였다. 바지런한 고연주가 새벽에 음식재료를 사온 듯, 우리들은 간만에 솜씨를 발휘한 그녀의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야, 이유정. 너 화장실 들어가봤어?” “응. 오늘 아침에 일어나고 바로 들어갔지. 뭔가 여관에서 쓰던 거랑은 다르더라. 으흐흐.” “돌을 톡 건드리니까 마법 진에서 물이 쫙 쏟아져 나왔어요오. 역시 뭔가 달라도 달라요오.” “나는 나중에 공중 목욕탕도 한 번 써보고 싶어. 거긴 욕탕은 물론이고 사우나도 구현해놨다고 하더라.” “그렇군요. 우리 머셔너리의 여신 하연 누님.” “현이 너. 자꾸 놀리면 혼나.” 이 커다란 식당에서 고작 테이블 하나만 차지하고 앉은 게 어색하지도 않은지, 클랜원들은 음식을 퍼먹으며 한창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비비앙과 신상용은 보이지 않는다. 영약을 만드는데 꽤나 기력을 소비한 듯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다나. 고기가 듬뿍 들어간 스튜를 한 숟갈 뜨자 아까부터 흘끗흘끗 내 눈치를 살피던 고연주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수현. 식사는 입맛에 맞으세요?” “고연주가 만들어준 음식은 항상 맛있네요.” “고마워요. 참, 어제 영약은 어떻게 되셨어요?” “그럭저럭 잘 됐습니다.” 스튜를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고연주는 들고 있던 포크를 살며시 놓았다. 그리고는 내 쪽으로 반쯤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혹시 오늘 오후에요. 따로 잡은 일정이 있으신가요?” “예. 신전에 들를 예정입니다. 조금 중요한 문제라…. 그런데 왜 그러시죠.” “아~. 다른 건 아니고요. 이제 클랜 하우스도 생겼겠다 내부를 정비해야 하잖아요? 예를 들면 고용인이라던가….” “고용인이야 뭐 금방 구하겠죠. 차고 넘치는 게 거주민인데요. 그 외에는 뭐, 일단 오늘까지는 대강 둘러들 보고 필요한 게 있으면 적어두세요. 그리고 내일 회의 때 제출해주시면 됩니다.” “…아, 네.” 한 박자 늦은 대답.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지만 대답 전 표정도 살짝 굳었었다. 별 생각 없이 말한 건데, 혹시 말실수라도 했나 내뱉은 말을 더듬으려는 순간이었다. 맞은편에서 유니콘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던 김한별이 살짝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저기…. 오빠. 오늘 신전 가실 거예요?” “응.” “저도 오늘 신전에 갈 일 있는데…. 예전에 호출이 들어왔거든요. 너무 늦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 그럼 같이 가면 되겠네. 창고 정리 끝내고 바로 갈 거니까 준비하고 있어.” “네 오빠.” 김한별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을 쩍 벌린 채 기다리고 있는 아기 유니콘을 향해 다시 음식을 먹여주기 시작했다. 그녀가 “맛있니?”라고 묻자 녀석은 방긋 웃으며 “뀨!” 하고 울었다. 잠시 그 광경을 잔잔히 보다가 나도 마저 남은 음식을 먹으려는 찰나였다. “오빠오빠!” 실컷 떠들었는지, 이번엔 이유정이 내가 음식을 먹는 것을 방해했다. 막 뜨려던 수저를 놓자 그녀는 뭔가 간절히 원하는 표정을 지으며 양 손을 맞잡았다. “나 그거~.” “그거 뭐.” “그거~~.” 마치 고양이가 애교를 부리듯 이유정은 나를 계속해서 조르며 어깨를 흔들었다. 안현과 안솔이 사이 좋게 토하는 것을 보며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이내 그녀가 원하는 것을 눈치챈 후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아앙~. 왜~. 이제 그만 돌려줘~. 응? 응?” “돌려주기는 할건데 아직은 안 돼. 면담 끝나고 돌려줄게.” “응? 면담? 나랑?” “아니, 너 말고. 아무튼 조금 더 기다려.” “치.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은 알았어.” 이유정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나는 그녀에게 건넬 스쿠렙프와 순결의 머리띠를 생각하다가, 문득 생각이 들어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그러고 보니 이유정도 이제 어엿한 레어 클래스를 가진 사용자였다.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이유정(0년 차) 2. 클래스(Class) : 여명의 검투사(Rare, Gladiator Of the Dawn, Runn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실적 평가 중에 있습니다.) 5. 진명 · 국적 : 앙칼진 암고양이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2) 7. 신장 · 체중 : 166.3cm · 52.3kg 8. 성향 : 첨예 · 호전(Sharp · Aggressive) [근력 67] [내구 69] [민첩 78] [체력 65] [마력72] [행운53]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4포인트입니다.) < 업적(0) > < 특수 능력(1/1) > 1. 피에 젖은 마음(Rank : C Zero) < 잠재 능력(2/4) > 1. 양손 단검술(Rank : C Plus) 2. 묘(猫)족 체술(Rank : E Zero) 3. - 4. - ‘역시 레어 클래스를 준 게 정답이었어.’ 성장한 것도 성장했지만 무엇보다 성향이 변했다는 게 무척 마음에 들었다. 예전에는 까딱 잘못하면 피에 미친 살인귀가 될뻔했는데, 그것을 다시 원위치로 돌린 것이다. 아니 원위치라 보기에는 조금 그런 감은 있었지만, 이유정 성격을 생각해보면 이 정도는 한 번 두고 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렇게 한동안 살펴본 후 사용자 정보창을 해제한 후에야 겨우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약간 식긴 했어도 원래 솜씨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닌지 여전히 맛은 괜찮았다. 식사 도중 문득 생각이 들어 고연주를 돌아보자 거의 비어져있는 그녀의 그릇들을 볼 수 있었다. “고연주.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아. 아니에요. 저도 아직 확실치는 않은 거라. 내일 회의 여신다고 하셨죠?” “네.” “조금 더 알아보고, 내일 회의 때 말씀 드릴게요.” “음, 알겠습니다.” 고연주의 나른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차분히 대답했다. 그러자 어디서 흘렸는지 모를 약한 숨 소리가, 공기를 타고 귓구멍으로 흘러 들었다. * 남부 도시 모니카, 러브 하우스. “정말 죄송해요, 한나씨. 저번에 저희 클랜원들이 한나씨에게 저지른 무례는 제가 대신해서 사과 드리겠어요.” 러브 하우스의 1층에는 두 명의 여성이 있었다. 한 명은 머리를 말끔하게 빗어 넘기고 마법사용 로브를 단정히 차려 입은 여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러브 하우스의 마담 임한나였다. 그 중 단정한 잿빛 로브를 걸친 여인이 임한나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는 중이었다. 임한나는 그런 여인을 보며 난처한 얼굴로 양손을 흔들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오히려 그때 그렇게 거절해서 저야말로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는걸요. 그리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셔도 되요.”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마워요. 솔직히 저희도 좀 복잡하거든요. 예슬이 고것이 현규를 좋아하는데, 현규는 정말 눈치도 없이….” “호호. 같은 여자로써 그 마음 이해해요. 저도 두 분이 얼른 잘됐으면 좋겠네요.” 여인은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둘은 서로를 보며 아름다운 웃음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싱거운 웃음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려는지, 여인이 한두 번 목을 가다듬었다. “아 그리고…. 한나씨. 한가지 더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요.” “…네.” “결국 오늘 부로 러브 하우스를 일반 주점으로 바꾸는 것으로 최종 승인이 났어요.” “아…. 그렇군요.” “후유. 정말 미안해요. 그분께서 한나씨를 얼마나 아끼셨는지 알고 있어요. 그걸 생각하면 저희가 이렇게 해서는 안되지만, 정말 사정이 안 좋아졌어요. 그나마 있는 거라도 쥐어 짜내야 할 판이죠. 사과 하러 온 길에 이런 말씀 드리기는 뭣하지만 그래도 겸사겸사….” 임한나가 생각 외로 쉽게 수긍하자 여인은 기다렸다는 듯 준비한 티가 팍팍 나는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여인의 말을 들으며 임한나는 미약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굴에는 어쩔 수 없다는 빛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여인은 임한나의 얼굴을 한 번 살피고는, 방금 보다 살짝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시잖아요? 러브 하우스에 대한 시선이 너무 안 좋다는 거. 그분도 이번 구조대 사건으로 돌아가셨고. 저희로서는 더 이상 이곳을 유지할 여력이 없어요.” “…….” “그러니까 한나씨. 이왕 이렇게 된 거 지금 와서 바꿀 수는 없잖아요. 혹시 이후에 저희 클랜에 들어올 생각은 없으신가요? 나쁘게 대우해드리지는 않을 거예요. 혹시 그 둘 때문에 그러신다면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요즘 머리가 좀 복잡해서요. 애들 문제도 있고…. 어떻게 할지는 차차 생각 중이에요. 말씀해주신 제안도 한 번 생각해볼게요.” “그러세요. 아, 러브 하우스는 일단 7일 후에 간단히 개축에 들어갈 예정이라서요. 그럼 그때까지 잘 좀 부탁 드릴게요.” 여인은 할 말을 다했는지 다시 한 번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이윽고 문 밖으로 또각또각 걸어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임한나는 아무런 말도 못한 채 그저 조용히 응시할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아하하. 자, 잠시만요 독자님들. 진정하세요. 네 달아주신 코멘트 많이 읽어보았습니다. 능력치에 대해 많은 말씀들이 있으셨는데, 안타깝게도 이미 체력을 어느 정도 올릴지는 모두 정해둔 상태입니다. 이번 회를 마무리 지으면서 내용에 드러냈듯, 이번 기회를 통해 체력 문제를 ‘일부’ 해결할 생각이라서요. 자세한 내용은 다음 회에 등장하는 세라프와 짝짜꿍 하면서 알려드리겠지만요. 그러니 부디 손에 쥐고 계신 돌은 거두어주세요. ^_ㅠ PS. 그런데 한가지 신기한 것은…. 제가 얼만큼 올릴지 이미 맞춘 분이 계시네요. -_-a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합니다. 하하. 네. 화정의 최소 사용 조건이 90인 것은 맞습니다. 101이 완전 사용 조건이지만, 90만 되도 지금과 같은 체력 조루는 탈출할 수 있을 겁니다. 2. 오리콘 : 더 이상 수현이는 체력 조루가 아닙니다. 다음 회는 당당한 수현의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 특히 침대에서 더욱 당당해지지 않을까요…? 3. 고장난선풍기 : 팬 아트 감사합니다! 보고 나서 한참을 웃었습니다. ㅋㅋㅋㅋ. :D 4. 우드스워드 :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하하. 화정이 워낙 만만한 녀석은 아니어서요. 솔직히 지금껏 버텨온 것도 용하죠. 다음 회에 자세히 나올 거예요. :) 5. 가입하기싫다 : 제한이 문제에요. ㅜ.ㅠ 나쁜 제한입니다. 도대체 제한을 건 사람은 누구일까요?(저, 저?!) 6. 현오 : 수정 완료했습니다! 감사합니다! 7. [DeepBLue] : 하하. 이번 회가 아니라 다음 회 입니다. 다음 회를 기대해주세요. _(__)_ 8. 으악이 : 101. 100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 추후 정확한 묘사가 나오겠지만, 정말 강합니다. 하하. 9. 천냥보은 : 이번 회도 재밌게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저번에 쿠폰 감사합니다. _(__)_ 10. 플룻 : 하하. 아, 비비앙은 말이죠. 무엇을 상상하시든, 그 이상을 보게 되실 겁니다. 이번 챕터는 전조에 불과하죠.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88 / 0933 ---------------------------------------------- 체력 조루 탈출! 3층의 창고에서 장비 정리를 끝낸 후. 쫄랑쫄랑 뒤따라오는 안솔과 아기 유니콘의 생떼를 물리치고, 나는 김한별과 함께 간신히 신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솔직히 나야 이번엔 내 쪽에서 볼일이 있어 가는 거지만, 김한별은 담당 도우미가 호출했다고 하니 공교롭게도 일정이 겹친 것이다. 천천히 걸어 신전에 도착한 후 우리들은 각자 신관의 안내에 따라 포탈이 있는 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신관이 문을 닫고 나간 지금. 나는 푸른빛으로 일렁이는 포탈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중이었다.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천사를 떠올리고, 반사적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차분히 추스른다. 물론 천사들은 도우미 역할을 할 때 굉장히 헌신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렇다고 해도 어찌됐든 이번엔 내가 손을 벌리는 입장이었다. 나는 능력치에 대해 스스로 해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런 만큼, 괜한 감정을 내세워 초를 치는 태도는 지양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깊은 심호흡으로 내면을 다듬다가, 한 번 크게 숨을 들이키며 단박에 포탈 안으로 뛰어들었다. 바다 빛이 일렁이는 공간으로 몸을 들이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이 나를 감싸 안는다. 끌어당기는듯한 기운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뜨자 어느새 들어왔는지. 깜빡이는 시야에 익숙한 풍경이 보이고 있었다. 소환의 방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곳의 풍경은 언제나 변함없이 똑같다.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다가 앞으로 시선을 돌리자 낯설지 않은 직사각형 제단이 보였다. 그리고 제단에는 천사 한 명이 앉아 있을 것이다. 고개를 들어 시선을 올리자, 역시나 투명한 날개를 일렁이는 아름다운 천사 한 명이 나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장난기 가득한 얼굴과 황금빛을 반짝이는 분홍빛 머리카락…. 응? ‘뭐?’ 의문을 채 내뱉기도 전에, 제단 위에 앉아있던 천사는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오, 드디어 왔네? 안녕~.” “?” “안 그래도 조만간 호출하려고 했는데 잘됐다~. 반가워! 난 이번에 새롭게 너를 담당하게 된 도우미, 산달폰이라고….” “야.” 중간에 말을 끊어버리자, 나를 향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산달폰이 눈을 휘둥그래 뜬다. 하지만 이내 살살 눈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꼴을 보자, 왠지 모르게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빠르게, 그러나 차분히 현 상황을 분석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아무래도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도우미 교체가 일어난 모양이었다. 아주 없는 일도 아니었기에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지끈지끈 아파오는 관자놀이를 몇 번 꾹꾹 누른 후,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는 천사를 향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사용자의 동의도 없이 도우미 교체를 하냐? 얼른 다시 세라프로 바꿔.” “아이참. 왜 이렇게 급해? 너무 그러지 말고 이리 와서 앉아봐. 우리 처음 만나는데 이야기나 해보자. 응?” “꺼져.” “그러지 말고~. 난 네 도우미 해보고 싶단 말이야~. 그리고 너 세라프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난 세라프 그 융통성 없는 것과 다를 거야. 응?” “꺼지라고 좀. 아, 세라프? 듣고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5초 안에 나와. 안 그러면 다시는 소환의 방 안 올 거니까. 알아서 해.” “Yes.” 내 말이 끝나자마자 산달폰이 앉아있는 제단 옆쪽에서 찬연한 빛 하나가 번쩍이며 나타났다. 이윽고 빛 무리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천사는 예상대로 세라프였다. 그녀는 예의 고요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산달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의기양양이(?) 들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1계급 치천사 산달폰. 아쉽게도 사용자의 원상복구 요청이 확인되었습니다. 미리 약조했던 대로 원래 자리로 돌아가 주셔야겠습니다.” “잠깐만! 이런 게 어딨어! 아직 제대로 된 얘기도 나눠보지 못했단 말이야!” “그거야 당신의 사정입니다. 그리도 자신하지 않았습니까? 산달폰은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싫어! 이대로는 못 가! 야! 야! 잠깐만! 이건 너무하잖아!” 산달폰은 어떻게든 반항하려고 했지만, 세라프가 손을 가볍게 휘젓자 순식간에 빛에 휩싸이고 말았다. “뭐가 너무합니까? 처음 약조했던 대로의 계약을 그대로 이행하는 것뿐입니다.” “……!” 산달폰은 뭐라 더 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미 역 소환이 완료된 듯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이윽고 산달폰은 순식간에, 그리고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세라프는 무표정하지만 기분 좋아 보이는(?) 발걸음으로 제단위로 올라서고는 사뿐히 엉덩이를 붙였다. “미안합니다, 사용자 김수현. 정말 오랜만에 뵙는데 불미스러운 일을 겪게 해드렸습니다.” 세라프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왜 그런지는 대강 짐작이 갔기에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보면 내 잘못도 아주 없다고는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됐어. 보아하니 다른 천사들이 내 태도를 문제 삼았을 것 같은데…. 아무튼 다음부터는 멋대로 교체하지나 말라고. 대 천사 가브리엘이나 미카엘 정도라면 모를까, 누가 그런 덜렁이랑….” “그리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가브리엘님과 미카엘님이면 도우미를 바꾸실 의향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내가 여기서 응 이라고 대답하면 또 다른 천사가 나타나는 건가?” “가브리엘님께서 현재 대기하고 계십니다.” “오지 말라 그래. 걔네 들은 담당하는 사용자도 없어?” “예. 지금 바로 전하겠습니다.” 세라프는 한결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바쁘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착각인지 환청인지는 모르겠는데, 어디선가 미약한 콧노래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세라프는 모든 작업을 마쳤는지 성스러움이 감도는 옥빛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솔직히 사용자 김수현이 먼저 찾아와주셔서 놀랐습니다. 조만간 호출할 예정이긴 했지만 도우미 관련 일로 조금 지체된 상황이었습니다.” “아. 네 조언이 필요한 일이 있어서.” “제 조언이 필요한 일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면….” 세라프는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을 보이더니 곧 “아.” 하는 표정을 내비쳤다. 나는 재빨리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가고 입술이 세모나게 열리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또 한바탕 잔소리를 할 것이 틀림없다. 해서, 나는 먼저 선수를 치기로 마음 먹었다. “뭔지 알 것….” “잠시만. 세라프. 일단 입 좀 다물어봐.”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에 분명히 그러지 않았습니까? 이대로 가다 보면 분명 체력에 문제가….” “아니, 알겠다고. 그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 문제가 생겼으니까 지금 온 거잖아.” 기막히다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세라프는 겨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연신 걱정스런 눈빛을 보내는 게 당장이라도 체력을 올리라 속사포를 내쏠듯한 기세였다. 나는 품 안에서 연초 한대를 꺼내었다. 그리고 연초를 입에 물기 전, 조용히 중얼거렸다.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는 이미 알고 있어. 그래도 내가 굳이 너를 찾은 이유는 화정에 대해서 조언을 들을 대상이 너밖에 없기 때문이야.” “…….” “네가 정말 내 도우미라면 내 얘기를 한 번이라도 들어봐. 나를 위한답시고 네 입장만 얘기하지 말고. 넌 예전부터 항…. 아무튼, 한 번. 한 번 정도는 내 입장에 서서 생각해줄 수도 있는 거잖아.” 하마터면 “항상 그랬어.”라는 말을 내뱉을뻔했지만, 간신히 삼킬 수 있었다. 잠시 여유를 찾기 위해 연초를 물고 불을 붙이자, 따갑던 세라프의 눈길이 조금 약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치익. 치이익. “후.” 그리고 가느다랗게 연기를 내뿜는 순간 전방에서 세라프의 자그마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Yes.” “좋아. 중간에 말 끊기 있기 없기.” “없기입니다. 좋습니다. 일단 사용자 김수현의 말을 세이 경청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최대한 당신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저도 물러날 생각은 없습니다. 무슨 말을 들어도, 체력을 올리는 것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Okay.” 천사들은 약속을 무조건 지킨다. 저렇게 말한 이상 일단 내 할 말은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뒷말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나도 일부 동의하는 바였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다시 연기를 한 모금 깊게 들이마신 후, 나는 조금은 편안해진 속을 느끼며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 세라프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내 머릿속은 굉장히 복잡했다. 현재 능력치에 관한 내 고민. 그리고 그에 관한 내 개인적인 생각과 앞으로의 계획. 체력은 적당히 올려두고, 다른 능력치들을 101로 올리고 싶다. 하지만 화정이 걸린다. 그렇다고 반대로 체력에 모두 투자하자니 101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다. 아니면 여기서 조금 더 버텨보고도 싶다. 체력을 80대로 유지하고 있으면 한 번 더 영약의 효과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몸 상태는 엉망진창에 가까웠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 결국에는 화정이 문제였다. 이윽고 모든 이야기를 끝마친 후, 나는 어떠냐는 눈길로 세라프를 바라보았다. “지금껏 사용자 김수현의 말을 경청했습니다. 확실히 당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네 생각을 듣고 싶은데.” “이해했다고만 했지 납득한 것은 아닙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해봐.” “알겠습니다. 그럼 사용자 김수현.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현재 당신 몸 상태가 어떤지, 그리고 그 상태로 101로 능력치를 올려버리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고는 있는 겁니까? 아니, 알고 있습니다. 방금 전 말을 들어보면, 사용자 김수현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나쁩니다. 당신은 제가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라도 하신 겁니까.” “…….” “애초에 화정을 드리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린 건데 도대체….” 다다다다다다다다. ‘기대한 내가 병신이지.’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쓴맛을 곱씹으며, 연초를 한대 추가로 꺼내 들었다. 어느덧 내 주위에 떨어져있는 꽁초가 열 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런 내 기색을 눈치챘는지, 맞은편에서 약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용자 김수현.” “응.” “저는 약속대로 사용자 김수현의 말을 전부 들었습니다. 이제 제가 말씀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그럼 지금까지 말한 건 뭔…. 아니, 아니다. 그래 해봐. 마음대로 해보세요. 쯧.” “감사합니다. 그럼 이것을 보아주십시오.” 딱! 세라프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눈앞으로 네모난 그래프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래프 안에 사용자 김수현의 신체를 구현하겠습니다.” “이게 내 신체 상태라고?” “Yes. 아마 온 몸이 붉은색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상황이 보이실 겁니다.” 전방 허공에는 네모난 그래프와 그 안으로 인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것은 1회차에서도 몇 번 본 적이 있기에 그리 놀랍지는 않다. 다만 세라프의 말처럼 모든 곳이 붉게 물들어있다는 사실에 눈이 번쩍 뜨일 뿐이었다. “앞서 다급한 마음에 조금 두서없이 말씀드린 것은 사과 드리겠습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보면, 사용자 김수현은 검사입니다. 마법사, 사제 같은 클래스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전투를 치르는 방법 자체가 굉장히 판이합니다. 즉 검사는 직접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클래스인만큼 체력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헌데 지금 상태로 다른 능력치들을 101로 올리겠다. 좋습니다. 체력을 90까지 올리고 앞으로 절대 화정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체력을 80까지 올리고 다시 한 번 영약으로 체력을 상승시킨다. 좋습니다. 앞으로 원정은 물론이고 모든 전투를 중지하십시오. 그리고 최소 1년, 넉넉잡아 2년 동안은 무조건 체력 회복에 전념하며, 영약을 만들기 전까지 화정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십시오. 말리지 않겠습니다.” “…….” 일단 듣는다. 세라프는 잠시 내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기어이 한마디를 추가로 덧붙였다. “과연 또 그런 영약을 만들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겠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사용자 김수현의 입장에서 생각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저한테도 마지노선이라는 게 있습니다.” 세라프의 말을 들으며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우선, 화정을 쓰지 않을 수는 없다. 특전으로 괜히 화정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한동안 바닥을 톡톡 두드리다가, 나는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심각한 건가? 정말로?” “거짓말이 아닙니다. 제가 무슨 억하심정으로 사용자가 능력치를 높여 더 높은 신위를 이루는 것을 방해하겠습니까?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이지 않겠습니까…. 있는 그대로 말씀드린 겁니다. 사용자 김수현. 당신의 신체는 이미 진작에 무너졌어야 정상입니다. 지금 상태로 버티는 것도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혹시 처음 화정을 받아들일 때가 기억나십니까?” 기억난다. 화정을 받아들임으로써 몸의 구석구석을 청소하긴 했지만, 그 여파로 영구적인 체력 하향을 당했다. 마이너스가 붙은 것도 아닌, 말 그대로 영구적 체력 하향. 그때를 떠올리자 문득 한 생각이 번뜩 머리를 스쳤다. “설마….” “그렇습니다. 장담컨대 앞으로 한 번만 더 화정을 사용할 경우 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겁니다. 영구적 하향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이너스가 되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합니다. 정녕 그것을 원하시는 겁니까?” “뭐야. 그럼 결국 올릴 수 밖에 없다는 말이잖아.” “저도 상태가 이렇게까지 빠르게 악화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습니다. 아니, 도대체 화정을 일부러 남용하지 않고서야….” 세라프가 푸념하듯 말하자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렸다.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아무래도 마볼로와의 일전은 남용으로 누적된 데미지를 일거에 폭발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한 모양이었다. “저는 사용자 김수현을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뵙고 싶습니다. 앞서 말씀해주신 욕심도 사용자로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불투명한 미래보다는 현재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지만, 그래도 차차 정리되고 있었다. 내 생각이 아주 틀리지는 아니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세라프의 말을 들음으로써 서서히 구체화되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득 제단에서 펄렁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앞으로 신성한 기운이 점점 가까워져 오는 것을 느꼈다. 살짝 시선을 들자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온, 애틋한 눈동자로 나를 보는 세라프가 있었다. 그녀는 양손을 내 밀어 내 왼손을 감싸 올리고는, 자신의 가슴에 살며시 갖다 대었다. 그러고는 애원 조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무례하게 들렸을지도 모르지만 제 말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껏 제가 사용자 김수현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정말 기쁘지만, 그래도 한 번 더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부디 체력을 올려주십시오. 지금 사용자 김수현의 몸은 정말로 위험한 상태입니다. 마치 터지기 일보직전의 모터와 같습니다. 지금 체력을 올리지 않는다면 정말로….” 세라프는 미약이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쥐고 있는 손을 더욱 강하게 감싸고 끌어당기는 것을 보니 그 진심이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왼손에서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지만, 정신을 차리고 손을 뺄 수 있었다. “사용자 김수현….” “후유.” 조금 더 고민하긴 했지만 결국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사용자 정보창을 불렀다. * [근력 96(+2)] [내구 92] [민첩 98] [체력 90] [마력 96] [행운 90(+2)] (잔여 능력치는 자유 능력치로 총 6포인트입니다.) ‘마음 같아선 모든 잔여 능력치를 체력으로 올리시도록 하고 싶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지금도 아주 안전한 상황은 아닙니다. 비록 체력을 90으로 맞추긴 했지만, 단 하나라도 타 능력치를 101이상으로 만드는 순간 몸에 걸리는 부담은 그만큼 상향할 것입니다.’ ‘물론 영약으로 인한 상승은 앞으로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업적 보상도 있고, 장비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것도 불투명한 미래는 맞습니다. 그래도 우선 당장은 현재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았습니까?’ ‘아무튼 그것을 모두 긁어 모을 수 있다면, 어쩌면 5포인트를 추가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잔여 포인트가 총 11포인트가 생깁니다. 그것을 모두 체력에 투자한다면, 사용자 김수현은 화정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굳이 다른 능력치를 올리지 않아도, 사용자 김수현은….’ 세라프와의 대화가 끝난 후, 포탈을 통해 홀 플레인으로 돌아왔다. 밖에서는 신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따라 밖으로 나서는 동안, 나는 사용자 정보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결국에는 체력을 올렸다. 세라프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그녀의 말을 따라 체력을 올리는 것에 동의했다. 물론 완전한 동의는 아니었다. 모두 체력을 올린 것이 아니라 6포인트는 남겨두었다. 앞으로 언제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이 6포인트는 만약을 대비한 여유 포인트였다. 여기서도 조금 논쟁이 있기는 했지만, 필요한 상황에서 적절히 능력치를 올리겠다는 말로 간신히 합의점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세라프의 말대로 하는 것도 아주 나쁘지는 않다. 화정을 온전히 사용할 수만 있다면 101 능력치 하나를 갖게 됨과 동시에 굉장히 강력한 무기를 갖추게 되는 셈이다. ‘하긴, 내 육체 능력치가 그리 꿀리는 것도 아니고….’ “후유.” 아무튼 이왕 올린 거, 더 이상 미련을 갖는 건 미련한 일이었다. 그리고 세라프 말마따나 능력치 감소가 일어날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면 체력을 올린 건 꼭 필요한 선택이라 볼 수 있었다. 효과는 확실히 느껴졌다. 오전부터 신전에 오기까지 내내 무거웠던 몸이 지금은 한결 가벼워진 상태였다. 그런 만큼, 오늘 잠에 들면 내일 상태가 어떨지 자못 기대도 되었다. 이윽고 통로를 모두 지나친 후, 나는 신관의 배웅을 받으며 신전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계단을 밟고 내려가려는 순간이었다. 계단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채, 밖을 구경하고 있는 늘씬한 뒤태가 보였다. 내가 내려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여성은 살며시 고개를 돌렸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여성의 정체는 바로 김한별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경축! 김수현이 드디어 체력 고자를 탈출했습니다! 와! 짝짝! 아하하. 제가 예전에 도시를 돌아오면서 후기, 리리플로 몇 번 남긴 적이 있는데, 세라프는 원래 이때 등장할 예정이었습니다. 수현의 능력치에 조언 겸 등장할 예정이었죠. 물론 6포인트가 남기는 했는데, 원래 6포인트 남길 생각이었습니다. 어디에 쓸지는 통과의례 때부터 미리 정해둔 상태여서요. 조금 극적으로 구상한 내용이오니 그때를 기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PS. 뜰에 수현이 체력 조루 탈출 기념으로 그려주신 고장난선풍기 님의 작품이 있습니다. “난 이제 체력 조루 아님!” 이라고 적혀있네요. 감사합니다! ^^ PS. 자베트 님이 그려주신 MEMORIZE 만화를 공지에 올렸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추후 몇 회 더 추가될 예정입니다.)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합니다. 저번 회, 이번 회에 설명했지만 혹시나 해서 추가로 설명 드릴게요. 김수현은 몸을 직접적으로 움직이며 전투하는 검사입니다. 체력 90에 민첩 101이상이면 문제가 없으나, 그 상태서 화정을 사용해버리면 문제가 됩니다. 화정은 마력을 통해 발현됩니다. 그리고 마력은 모든 능력치를 배가시켜주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체력을 90으로 올렸다고 해도) 화정만 해도 몸에 걸리는 부담을 좌시할 수 없는데, 그 상태서 민첩을 비롯한 다른 능력치들을 101 이상을 찍어버리면 부담이 더욱 배가되는 거죠. 그리고 영약을 먹지 않는 꼼수는 부릴 수 없습니다. 그랬다가 만에 하나 체력이 73으로 올라버리면 아예 영약을 먹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니까요. 차라리 바로 먹고 잔여 포인트로 남겨두는 편이 훨씬 안전합니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한 내용은 언급되어 있습니다. :) 2. 플룻 : 원래 이번 회 마지막에 드러내려고 했는데, 너무 길어서 잘랐습니다. 다음 회 소제목에 다시 등장할 예정입니다. ^^ 3. 피네이로 : 언젠가 도전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있겠죠. 다만 그것이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만해도 충분한데, 괜한 위험 부담은 감수할 필요가 없지요. 아무튼 체력에 관해서는 정답을 맞추셨습니다! 대단하세요. :D 4. 풀초초 : 군대라, 그립네요. 아, 그렇다고 다시 가고 싶다는 말은 아니고요. 하하하. 군생활 열심히 하세요! 5. Lizad : 곧 해결될 것들도 있고, 조금 시간이 걸릴 것들도 있네요. 세라프는 글쎄요. 하하. 6. 상상속과일 : 아니요. 이미 먹었다면 게임 끝입니다. 다만 영약을 먹지 않았다면 먹어봤자 효과를 보지 못했겠지요? :) 7. 황걸 : 대신 요즘 분량이 정말 빵빵 하지 않나요? 헤헤. 정말 빵빵 하게 올리는데…. 8. 홍쎄바 : 하하. 101은 100보다 훨씬 강합니다. 그것은 지금껏 은연중에 드러냈습니다. 다만, 그런 만큼. 검사로써 그것을 감당할만한 체력도 있어야 합니다.(수현이는 체력 90이면 민첩 101 하나는 감당할 수는 있는데, 화정이 문제가 된 겁니다.) 9. [DeepBLue] : 그래서 수현이 안타까워했죠. 이상한 특수 능력이 개방됐으니까요. But, 제가 유정이를 그리 놔두겠습니까. 일전에 유정이가 어떤 클래스를 갖고 있었죠…? 하하. 힌트로, 황혼의 무녀는 세 개의 힘을 모으면 시크릿 클래스 승격입니다. :) 10. 감자띱 : 지금 수현이 능력치가 워낙 높아서 그렇지, 100만 되도 충분히 초인의 경지입니다. 거인의 우두머리는 반신 맞습니다. 거인 로드는 다른 의미에서 반신이라, 능력치로 정의하기 조금 애매하네요. 하하.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89 / 0933 ---------------------------------------------- 비비앙의 각성 & 그것을 바라고 오지 마세요 내가 세라프와 오랫동안 대화한 것에 비해 김한별은 금방 볼일을 마치고 나온 모양이었다. 클랜 하우스로 돌아가는 도중 슬쩍슬쩍 엉덩이를 주무르는 것을 보니 제법 긴 시간 동안 앉아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옆에서 조심조심 걷는 김한별을 보며, 나는 잠시 동안 상념에 잠겼다. 처음 모니카에 왔을 때는 정말 깡말랐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였는데, 요즘 들어 잘 먹여서 그런지 그때보다 약간이나마 살이 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발그레한 혈색이 감도는 보기 좋은 뺨을 보고 있자, 한 순간 김한별과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는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이며 시선을 피했다. 잠시 동안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지만, 나는 먼저 말문을 열기로 마음먹었다. “기다리지 말고 돌아가지 그랬어. 오래 기다렸을 텐데.” “아, 아니에요. 그렇게 많이 안 기다렸어요. 그냥….” 우물쭈물한 태도. 그것을 보는 순간 문득 생각이 들어, 얼른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한별(0년 차) 2. 신장 · 체중 : 170.5cm · 47.7kg 3. 성향 : 노력 · 상처(Effort · Scar) (변경 전) [근력 50] [내구 58] [민첩 70] [체력 52] [마력 88] [행운 68] (변경 후) [근력 51] [내구 59] [민첩 70] [체력 53] [마력 88] [행운 68] (능력치 포인트가 4 포인트 남은 상태 입니다.) 능력치는 예전보다 많이 오르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모니카로 데려온 이후 곧바로 탐험에 나서 수련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력이라. 이건 너무 광범위한 성향인데.’ 어떤 것을 노력하는지는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아직 내면의 상처는 아물지 않은 듯 보이지만, 그래도 하나가 바뀌었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어찌됐든 김한별이 더욱 좋은 방향으로 바뀌기를 바라며 나는 허공에 떠있던 사용자 정보창을 해제했다. “요즘 어때?” “네?” “클랜 생활이라던가…. 아니면 이번 원정 얘기도 좋고. 할만하니?” “아…. 네. 행복해요.” 행복. 행복이란 단어를 말하는 김한별의 목소리는 한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 밝은 톤이었다. 그것을 듣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마 황금 사자에서 생활했던 때와 비하면 지금은 정말 행복할 수도 있다. 그녀가 진정으로 그렇게 느낀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그러고 보니 너 이번에 장비 분배도 받지 못했네?” “괜찮아요 오빠. 보석을 사용하는 것만해도 죄송한걸요.” “죄송할 것까지야. 물론 보석 마법도 좋지만, 정통 마법도 등한시하면 안 돼. 알고 있지?” “네 오빠. 열심히 수련할게요.” 꼬박꼬박 대답하는 것을 듣자 마치 온순한 양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또 말없이 걷다가, 나는 왼손에 장착한 TOPG를 해제했다. 그리고 약지에 낀 반지를 빼 그녀에게 내밀었다. “오빠…?” “받아. 안티 매직(Anti Magic) 주문이 걸려있는 반지야. 횟수는 3회, 충전은 하루. 이번 원정 장비보다는 조금 못해도, 꽤 쓸만할 거다.” “아, 아니에요 오빠. 생각해서 주시는 거라면 정말 괜찮아요. 저는….” “그냥 받아. 어차피 난 이거 쓸 데도 별로 없어. 내 마력 저항력 봤잖아?” 얼른 가져가라는 의미로 반지를 흔들었지만 김한별은 쉽사리 손을 내밀지 않았다. 몇 번 가볍게 다그치고 나서도 손을 꼼지락거리기만 하자, 그녀의 손에 직접 쥐어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손을 쫙 피며 의미 없는 반항을 해 결국 약지에 손수 끼워주고 말았다. “오, 오, 오, 오, 오빠?” “후유. 참 반지 하나 주려고 별 짓을 다한다, 별 짓을.” “아, 아, 아, 아. 가, 감사….” “?” 왜인지는 모르지만 김한별은 귀를 시뻘겋게 물들이며 말을 더듬었다. 그러면서 오른손으로 반지를 낀 왼손을 감싸는 것을 보니 무척이나 기꺼운 모양이다. 이윽고 다시 고개를 푹 숙이는 그녀를 보며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그렇게 좋은가?’ * 고요한 지하 연무장. 나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주먹을 서서히 쥐어 올리며 마력을 일으켰다. 심장에 잠들어있는 기운과 함께. ‘안녕?’ 누구야 넌? ‘바보. 네 안에 있는 것도 몰라?’ 갑자기 말을 거니까 놀라서 그렇지. ‘멍청이! 그거야 네가 약하니까 그 동안 말을 걸지 못한 거고. 그리고 처음 네 안으로 들어올 때 분명히 말 걸었거든?’ 그랬나? 그러고 보니 확실히 그런 기억이 있다. 화정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머리를 남겨두었을 때 ‘그만할까?’ 하고 은근한 속삭임이 있었다. ‘겨우 기억했나 보네. 이 바보야. 아무튼 이제야 약~간 쓸만해 졌네. 그래도 조심하라고. 아직 부족하니까. 그럼 다음에 봐~.’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내면에서 들려오는 속삭임은 들리지 않았다. 조금 더 말을 걸어보았지만 되돌아오는 것은 잠잠한 침묵뿐.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눈을 번쩍 뜨자 맹렬히 타오르는 맑은 불꽃이 보인다. 이제 됐다. 아직 회복기에 있는 만큼 시험한답시고 터뜨릴 필요는 없다. 차분히 화정의 힘을 회수하자 불꽃이 천천히 사그라졌다. 하지만 화정이 빠졌다고 해도 남아있는 마력의 기운은 여전히 주먹에 맺혀 무시무시한 기세를 피우고 있었다. “조심해.” 전방을 향해 나직이 뇌까린 후, 나는 오른 방향을 향해 있는 힘껏 주먹을 후려갈겼다. 꽝! “삐아!” 뻗어나간 주먹이 허공을 강하게 치는 순간, 텅 빈 공중에서 강렬한 폭발이 일었다. 대기가 크게 꿀렁이고 그에 따른 충격파가 연무장의 벽을 타고 전체로 퍼졌다. 바닥을 디디고 있는 발바닥에서 미세한 진동이 울리는 것을 느끼며, 나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이윽고 전방을 주시하자 입을 딱 벌린 채 나를 보고 있는 안솔이 보였다. 그녀는 깜짝 놀란 듯 계속해서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꿀꺽 목 울대를 움직였다. “오, 오라버니. 괜찮으세요오?” “응. 전보다 훨씬 낫네. 몸이 아주 가벼워.” “와아. 오라버니는 정말 대단해요!” “뭘. 어젯밤 너한테 치료를 받아서 그런가 봐.” 물론 진짜 공로자는 따로 있지만 마냥 좋은지 안솔은 몸을 배배 꼬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천천히 손을 거두며 몸 상태를 점검하자 확실히 다른 점이 느껴졌다. 천근만근 무겁던 몸은 깃털처럼 가볍고 지지부진한 회복 속도는 급상승을 보이기 시작했다. 체력이 90임에도 이 정도의 효과를 보인다면 101이 되면 얼마나 큰 효과를 보일까? ‘체력 101도 우선순위로 넣어야겠구나.’ 이것은 확실히 고려해볼 만한 문제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어느새 다가온 안솔은 내 옷깃을 꾹꾹 잡아당겼다. “오라버니. 오라버니이. 모두 3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오.” “소회의실? 다 모인 거야?” “네!” “알았어. 가자.” 힘찬 목소리로 대답하며 나는 안솔과 함께 지하 연무장을 빠져 나왔다. 이윽고 3층에 올라 소회의실의 문을 밀고 들어가자, 안솔 말대로 모두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클랜원이 열 명 남짓해서 그런지, 분명 소회의실임에도 불구하고 비어있는 자리가 많이 보였다. 인사를 건네는 클랜원들의 행동을 모두 받아준 후, 나는 상석에 앉아 모두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문득 내 의자 아래서 낑낑대는 아기 유니콘의 기척이 들렸다. 얼른 안아서 허벅지 위로 올려주니 녀석은 얌전히 다리를 접곤 눈을 감았다. 그것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회의를 위한 첫마디를 열 수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 아침이라고 하기엔 조금 늦었군요…. 아무튼 오늘 전원을 호출한 이유는 다들 알고 있을 겁니다.” “네.” “클랜 하우스에 들어온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습니다. 휴식은 충분히 취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재정비에 들어갈 시기죠.” “…….” 조용한 침묵. 아래로 슬쩍 시선을 내리자 수북한 기록은커녕 단 한 장의 기록만이 보일 뿐이었다. 기록의 제출자를 확인하자 고연주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것을 보며 두어 번 혀를 찬 다음, 다시 시선을 들어 입을 열었다. “사용자 신상용. 이제 클랜 하우스도 생겼는데, 이제 개인용 공방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네, 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직 스승님께 배울게 많기도 하고…. 그, 그리고 제가 감히, 어떻게 개인용 공방을….” “배우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본인 스스로 공부할 것들도 있으실 텐데요.” “하하. 그, 그렇긴 합니다만.” 신상용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이 웃었다. 그것을 보다가, 나는 다음 타자로 시선을 돌렸다. “사용자 정하연, 김한별.” ““네.”” “둘은 어때요? 별관에 숙소 말고 본관에 연구실도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나요?” “여, 연구실이요? 아, 네. 뭐…. 있으면 좋죠.” 정하연은 떨떠름히 대답했고, 김한별은 조용히 눈만 깜박거렸다. “너희들도 마찬가지. 뭐 필요한 거 없니?” 그리고 쥐 죽은 듯 듣고만 있던 나머지에게 화살을 돌리자, 애들은 불침 맞은 망아지처럼 퍼뜩 고개를 치켜 올렸다. 그러나 멀뚱히 서로를 번갈아 보는 것을 보니 오십보백보인 것 같았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답답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고연주야 그렇다 치더라도, 나머지는 정상적인 클랜 생활을 했다고 보기 어려웠다. 아니면 아예 하지 않았거나. 항상 치이고만 살다가 갑작스레 맞이한 생활에 생소하기도 할 터.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그런 것들에 적응해야 할 필요가 있다. “분명 저번에 필요한 것들을 생각하고 회의 때 제출하라고 말씀을 드렸을 겁니다. 헌데 제 눈에는 아직 여러분들이 과거에 대한 기억이 조금 남아있는 것 같네요. 이곳은 머셔너리 클랜의 클랜 하우스입니다. 그 이상, 이하도 아닙니다. 이제는 여관에서 잘 필요가 없습니다. 눈치보지 않고 수련할 공간도 생겼습니다.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빈 공간은 차고 넘칩니다.” “…….” “갑작스레 맞이한 넉넉한 상황에 혼란스러운 건 이해합니다만…. 그래도 개인 수련에 필요한 책, 물품, 기구, 하다못해 장비. 그게 아니라면 클랜 생활에 필요한 물품이나, 이런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등등. 그런 것들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 “물론 비비앙처럼 한 번에 모든 것을 갖출 필요는 없어요.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처럼 갈피조차 잡지 못하는 태도는 분명히 지양해야 할겁니다.” 화났다는 기색을 내비치거나,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았다. 최대한 기존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조곤조곤 타이르는 어조를 유지했다. 굳이 얼굴을 붉히지 않아도 머셔너리 클랜원들이라면 충분히 알아들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앞에 놓인 기록을 집으며, 나는 마지막으로 클랜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클랜 하우스는 무상으로 받았고, 얼마 전 이스탄텔 로우에서 5천 골드를 받았습니다. 보유 자금은 9만 골드에 가까우며, 보석까지 합치면 못해도 20만 골드입니다. 이 돈들 묵혀둬서 뭐하겠습니까? 이자놀음이라도 할까요? 필요한 게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말씀을 해주시면 됩니다. 얼른 내부를 정비해야 다음 원정을 잡든, 도시를 나가든 뭐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저 그럼….” 재촉은 여기까지 하고 막 기록을 읽으려는 찰나, 정하연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자, 그녀는 잠시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혹시 클랜 로드께서는 개인적으로 생각해두신 공간이나 물품이 있으신가요?” “개인적으로요? 공간이야 지하 연무장을 마련했으니 일단은 됐고. 물품으로는 호출석을 장만하고 싶군요.” 호출석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몇몇 클랜원들의 얼굴에 “아.” 하는 빛이 스쳤다. 호출석이 있으면 굳이 누군가를 찾아 다니며 전하지 않아도 클랜원을 편하게 호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양방향이 아닌 일방행적이라는 단점은 있지만, 그것을 감안하고서라도 클랜 로드 입장에선 꽤나 쓸만한 물품이었다. “확실히 그렇네요. 오늘 마법 상점에 들를 생각이니, 제가 구해올 수 있을 거예요.” “그럼 호출석은 정하연에게 부탁하겠습니다.” “아, 혹시 수량이나 세부 조건 같은 것은 어떻게 할까요?” “클랜원들에게 돌아갈 것들 하나씩 하면 총 아홉 개,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것까지 치면 또 아홉 개. 그러니 총 열여덟 개면 되겠는데…. 혹시 모르니까 너덧 개 추가로 구매하세요. 범위는 도시를 아우를 수 있을 정도로 해주시면 됩니다. 그 정도가 아마 최대한도일 겁니다.” 정하연은 확실히 알아들었는지 얇게 미소 지었다. 나는 다음으로 고연주가 제출한 기록을 읽어보았다. 기록에 적힌 내용이 생각보다 길긴 했지만,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녀 특유의 정보처리능력 때문인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있었다. “사용자 고연주는 클랜내 정보 길드를 만들고 싶은 것 같군요.” “아~. 뭐 그건 너무 거창하네요. 아직 길드 수준은 아니에요. 호호.” 기록을 모두 읽고 쳐다보자, 고연주는 여유로운 얼굴로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이 기록에 관해서는 조금 더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은데요.” “네. 다만 여기서는 조금 그러네요. 따로 자리를 마련하고 싶어요.” 고연주의 요청을 나는 곧장 수락했다. 그녀가 이렇게 따로 요청할 정도라면 필시 뭔가 이유가 있으리라. 이후 모두 읽은 기록을 테이블 위로 뒤집어엎어 놓으며, 나는 시선을 들어 모두를 시야에 담았다. “일단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따로 저한테 볼일 있는 클랜원은 있습니까?” “나!” 내 말이 끝나자마자 비비앙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 또한 비비앙에게 볼일이 있었기에 흔쾌히 고개를 주억였다. 다른 클랜원들은 오늘 내 지시사항을 바로 이행할 생각인지 미약이 고개를 흔드는 중이었다. “알겠습니다. 회의는 조만간 다시 열 생각이니 그때는 지금보다 더 준비된 태도를 기대하겠습니다. 그리고…. 고연주, 비비앙은 4층 집무실에서 따로 보도록 하죠. 사용자 고연주? 미안하지만 비비앙과 먼저 얘기하겠습니다.” “네. 저도 그게 좋아요.” 고연주는 괜찮다는 얼굴로 시원하게 웃음지었다. 그렇게 회의 종결을 선언하고, 나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 “마침 잘됐다. 나도 너한테 볼일이 있었거든.” “응? 김수현이? 무슨 볼일?” 의자에 몸을 기대며 입을 열자, 비비앙은 문을 닫고 돌아서며 되물었다. 나는 서랍 안에 보관해둔 두툼한 책 한 권을 꺼내 책상 위로 놓았다. 이것은 일전에 비비앙이 놓고 간 마볼로의 일기였다. “이거 주려고. 너 저번에 질서의 오르도 얻는데 성공했다고 기뻐 날뛰었잖아. 그래서 잊었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두고 갔더라.” “에헤, 미안미안. 신상용한테 전해줘도 됐는데…. 근데 이 두꺼운 책이 뭔데? 무슨 내용이야?” “한 번 봐봐. 마지아 원정에서 가져온 건데, 마볼로의 연구가 들어간 일기 같더라고. 그놈도 연금술에 일가견이 있었던 것 같은데 너한테 약간이라도 도움되는 내용이 있을까 싶어서. 아. 너는 마볼로 알지 않아?” 비비앙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손뼉을 짝 치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나보다 훨씬 전의 사람이라서. 자세히는 모르고 이름은 대충 알아. 그나저나 이거 정말 기대되는데…. 그럼 잠시 읽어보겠어.” 비비앙은 금새 다가와 책을 집어 들더니, 이내 활짝 펼치며 눈동자를 굴리기 시작했다. 팔랑, 팔랑, 팔랑, 팔랑. 한 장을 넘기고 두 장을 넘긴다. 그리고 장수를 넘길 때마다, 초롱초롱했던 비비앙의 표정이 미묘하게 물들어간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읽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너 고대어 해석 가능하지? 나중에 신상용도….” “아니 잠깐만. 김수현, 이거 뭐야?” “뭐가.” 내 반문에 비비앙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러고는 이윽고 소리 내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마르가리타를 홀딱 벗겨놓고 채찍을 때렸다. 그 고운 살결에 자국이 하나 새겨질 때마다 마르가리타는 아름다운 비명을…. 뭐야 이거?” “아, 내가 미처 말을 못했네. 마르가리타는 요정 여왕이야. 마볼로가 용사랑 요정 여왕을 납치했었잖아? 그게 사실이더라고. 쯧…. 이리 줘봐. 그 부분은 내가 따로 빼고서 줄게. 아마 뒤편에 약에 관한 내용이 나올 거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의자에 묻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책을 향해 손을 내뻗으려는 순간이었다. “아, 아냐! 내가 알아서 보지 뭐!” 비비앙은 순간적으로 눈을 크게 뜨더니, 신속하게 물러서며 책을 꼭 안아 들었다. “그래? 보기 좀 불쾌한 것들이 많을 텐데.” “불쾌는 무슨. 잘 가져왔어. 그리고 이런 건 한 줄 한 줄을 세심하게 읽어줘야 한다고. 어디에 단서가 있을지 모르거든.” “하긴. 그럼 그렇게 해. 그런데…. 너도 볼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에 나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볼일에 대해 물어보자,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비비앙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아. 소원! 영약 만들면 소원 들어준다고 했잖아!” “아, 그랬지. 아무튼 영약은 고맙다. 너 덕분에 문제를 일부 해결할 수 있었다.” “후후. 내가 믿으라고 했지? 아무튼, 약속은 잊지 않았겠지!” “잊지 않았어. 내 선에서 해결 가능한 거면 뭐든 들어줄게. 말해봐.” “소원은 이걸 읽고 결정하겠어.” “뭐?” 뭔 소리를 하냐는 의미를 듬뿍 담은 시선을 보내자, 비비앙은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그러니까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거야!” “뭐야. 그럼 왜 왔어.” “화, 확인 차였다고! 아무튼 나는 이만 나갈 테니까!” “야, 야! 나가는 건 좋은데, 고연주보고 들어오라고 해.” “알았어!” 쾅. 후다닥. 비비앙은 내가 말릴 틈도 없이 발 빠르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갑자기 왜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연금술사라는 특이성을 생각해보면 나름 이해할 수도 있다. 원체 호기심이 많은 게 연금술사들이니까. 그렇게 고연주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나는 연초 한대를 꺼내 물었다. * 하지만 그때는 아직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그때 비비앙에게 책을 그대로 건네준 것이, 후에 내가 아니게 되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줄은, 나는 조금도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오늘 날씨가 정말 습하네요. 비는 내리고, 날은 덥고, 습도는 높고. 더구나 월요일인 점이 직장인 및 학생 독자분들을 더욱 괴롭힐 것 같네요. 그렇다고 저처럼 찬 음식 많이 먹다 탈이 나시면 안됩니다. ㅜ.ㅠ 독자분들의 코멘트는 하나하나 읽어보았습니다. 문득 든 생각이, 글을 쓰는 데는 정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저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있고, 또 다르게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모든 분들을 만족시킬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것은 많이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하하. :) 물론 알고 있습니다. 저야 이미 후에 어떤 상황에 처할지, 어떻게 능력치를 올리게 될지 모두 알고 있지만 독자분들은 모르시는 상태니 답답하게 느끼실 겁니다. 더구나 일일 연재에 전개 속도도 느리니 그저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속 시원히 미리 알려 드리고픈 마음도 있지만, 제가 지금 무척 후회하는 것 중 하나가 예전 수현과 유정의 After를 적었을 때입니다. 제가 무슨 생각으로 미리 스포일러를 해버렸나 싶었죠. ㅜ.ㅠ 남은 6포인트는 분명히 후에 요긴하게 쓰이는 상황이 올 겁니다. 물론 1부는 아니고 2부에서요. :)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고 써나가되, 독자분들의 코멘트도 필히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코멘트는 제가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밑거름이 됩니다. :D 항상 메모라이즈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응원과 비평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_(__)_ 『 리리플 』 1. days0314 : 오. 1등 축하합니다! 세상에, 미월야 님이 1등을 못하신 것은 정말 오랜만에 보네요. 하긴 그분은 워낙 ㅎㄷㄷ한 분이시라. ㅜ.ㅠ 정말 1등 맞습니다! 다시 한 번 축하합니다! 2. 간지남이돌아왔다 : 우와, 하와이! 부럽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부터 하와이에 대해 환상이 있었거든요. ㅜ.ㅠ 저, 정말 그런가요?(응?!) 3. 으악이 : 물론 으악이 님 말씀도 맞습니다. 다만, 김수현이 화정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히 있습니다. 앞으로 나올 더욱 강한 적들도 있거니와, 화정으로밖에 대적하지 못하는 적도 나오지 않을까요? 권능과 화정은 분명한 차이가 있으니까요. :) 4. Grabity : 육체 붕괴 리바운드에 대해서는 확실히 제 묘사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이북 교정 때 추가할 내용이 더 늘었네요. 감사합니다! 5. 상흔 : 하하. 상흔 님이 많이 답답하셨나 보네요. 96으로 체력을 올렸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습니다. 다만, 90보다 상황은 낫겠지요. 저번 회는 수현의 체력에 대한 능력치의 생각 순위를 바꾸는 회로 보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6. 천겁혈신천무존 : 에, 저, 천겁혈신천무존 님? 한결…. 이가 들어가있는 것 같은데요? ?ㅇ? 7. 보리볕 : 죄송해요. 곧 1부를 마무리 지을 에피소드가 나와서, 그전에 이것저것 정리해야 될 것 같아서요. ㅜ.ㅠ 확답은 못 드리지만, 늦어도 7월 말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 8. 자유도령 : 자, 자유도령 님…. 주륵…. ;ㅇ; 9. 레필 : 정말 오랜만에 레필 님의 날카로운 코멘트에 감탄했습니다. 아마 다음에 천사를 만나게 되면, 다른 천사도 또 등장시킬 계획도 있습니다. 지금 수현은 주목 받고 있으니까요! 10. 플룻 : 하하. 능력은 진화가 가능합니다. 유정이는 아직 레어 클래스지만, 가능성이 남아있는 아이입니다. 차후 성장을 지켜봐 주세요! 고유 능력은 선천적으로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크릿 클래스(혹은 레어 클래스) 를 얻는다고 해도 모두 똑같이 고유 능력을 얻지는 않아요!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90 / 0933 ---------------------------------------------- 비비앙의 각성 & 그것을 바라고 오지 마세요 비비앙이 달려나간 이후 문은 닫히는 듯싶더니 곧바로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고연주였다. 아마 문 부근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비비앙이 나오자마자 바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들어오세요. 아니, 더 들어오지는 마시고요. 거기 앞 소파에 앉으세요.” 문을 닫고 들어오는 고연주에게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넸지만 곧장 검지로 소파를 가리켰다. 내게 다가오는 그녀의 발걸음이 묘하게 빠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역시나 예상이 맞았는지, 고연주는 “치.” 소리를 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간만에 오붓한 시간 좀 가져보려고 하니까! 너무한 거 아녜요?” “공과 사는 구분합시다. 아직 업무시간입니다.” “그래요~. 그래요~. 이미 잡은 연주고기라 이거죠?” “자, 그럼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소파에 앉고 나서도 투정은 이어졌지만 유들 하게 받아 칠 수 있었다. 고연주는 얄미워죽겠다는 얼굴로 나를 흘겨보다가 한숨을 폭 쉬며 입을 열었다. “후유. 일단 말씀 드리기에 앞서 잠시 물어볼게 있어요. 수현, 앞으로 클랜원은 어떻게 모집할 생각이세요?” “생각 중입니다. 막연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고연주도 뮬에서 들었던 것들뿐입니다. 방법의 구체화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먼저 알아볼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요. 소수정예. 그런데요, 실력도 좋지만 이제 슬슬 클래스 비율도 신경 쓰셔야 하지 않을까요? 머셔너리는 현재 마법사들의 비율이 너무 높잖아요.” “나중을 생각해보면 마법사들이 많은 게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확실히 부족한 클래스가 있는 것도 사실이죠.” 나와 고연주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도 매우 일리 있는 소리였다. 현재 머셔너리에 없는 클래스를 적절히 섞을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 배는 상승한 전투력을 갖출 수 있다. “저는 개인적으로 궁수가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갑자기는 아니고,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이번 원정을 다녀오면서 생각을 굳혔고요. 원거리에서 자유롭게 원호사격을 해주는 애가 있다면….” “확실히 좋겠죠. 그리고 궁수라고 콕 집어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한 명이 떠오르는군요.” “이런, 들켰나?” “임 마담. 아, 사용자 임한나.” 고연주는 혀를 쏙 내밀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열 손가락을 서로 엇갈리게 바짝 맞추어 잡고, 예전에 보았던 임한나의 사용자 정보창을 떠올렸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임한나(3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궁수(Normal, Archer, Expert) 3. 진명 · 국적 : 꺾이지 않는 가련한 꽃 · 대한민국 4. 성향 : 질서 · 신념(Lawful · Belief) [근력 72] [내구 84] [민첩 92] [체력 68] [마력 88] [행운 90]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근력과 체력은 약간 아쉽다. 하지만 민첩과 마력이 높고 궁수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 가치는 급상승한다. 엄밀히 말해서 임한나는 여느 클랜에서 군침을 뚝뚝 흘릴만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이 정도면 머셔너리에 충분히 들일만하다고 생각한다. 성향을 봐도 딱히 모난 곳은 없었으니까. 내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고연주는 바로 자세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두절미하고 상황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임한나는 현재 꽤나 애매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러브 하우스의 원래 취지는 생계형 사용자들 중 먹고 살기 어려운 밤의 꽃들을 위해 지어놓은 건물이다. 하지만 건물인 이상 건물주는 당연히 존재한다. 건물주가 살아있을 때는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취지를 이어갔지만, 최근에 모종의 사건으로 건물주가 사망했다고 한다. 그 모종의 사건이라 함은 바로 여울가녘 클랜의 구조에 나선 1차 구조대 이야기였다. 그 구조대에 바로 건물주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비록 건물주는 사망했지만 건물주가 소속해있던 클랜은 유지되고 있어요. 하지만 건물주는 이번 구조대에 참가했다가 사망하고 말았죠. 그래서 모든 권리가 클랜에게 돌아가게 된 거예요. 클랜에서는 이번에 입은 타격을 어떻게든 만회하려나 봐요. 러브 하우스를 주점으로 바꾸는 것도 그 과정의 일환인 것 같고요.” “그래서 건물주는 사망했고 취지가 바뀐 이상 임한나는 그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오갈 데 없는 그녀를 받아들이자는 말인가요?” “그게 가장 쉬운 방법이기는 해요.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아요. 솔직히 한나는 제가 아는 애라서가 아니라 정말 실력 있는 아이에요. 지금도 두 곳 정도의 클랜에서 러브 콜을 받고 있다고 하니 입맛대로 골라가면 되겠죠. 그런데 떠나지를 못하고 있어요. 원래 책임감이 강한 성격이기는 한데, 예전 건물주한테 뭔 말을 들었는지. 지금 보살피고 있는 밤의 꽃들을 이대로 버릴 수가 없나 봐요.” “그럼 임한나를 데려오려면 그 밤의 꽃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면 된다…. 아, 잠시만요.” 양해를 구하자 고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편히 묻는다. 문득, 얼마 전 식사 도중 나눴던 대화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오늘 오후에요. 따로 잡은 일정이 있으신가요?’ ‘아~. 다른 건 아니고요. 이제 클랜 하우스도 생겼겠다 내부를 정비해야 하잖아요? 예를 들면 고용인이라던가….’ 설마 그때 이 일을 말하려고 했던 건가. 잠시 동안 그것을 곰곰이 생각하자 이내 정리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고연주는 머셔너리에서 밤의 꽃들을 고용인으로 두기를 원하는 거군요.” 다시 눈을 뜨자,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고연주가 보였다. “왜 수현은 이런 일에만 눈치가 빠른 걸까요?” “글쎄요. 아무튼 밤의 꽃들이라.”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자, 고연주는 재빠르게 말을 걸었다. “사용자들을 고용인으로 두는 클랜은 많아요. 혹시 보안을 걱정하시는 거라면….” “보안은 자신이 있습니다. 다만 전문성의 문제입니다. 거주민들 중에는 고용인의 역할에 최적화된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현대인들, 그것도 밤의 꽃을 하던 사용자들이 고용인을 할 정도의 전문성을 갖추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요.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한 달만 가르치면 충분히 익숙해질 수 있어요.” “그건 조금 이상한데요. 미리 가르치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원래 건물주가 살아있을 때는 따로 교육을 시켰나 봐요. 그리고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싶으면 소개를 받아 다른 생계직종으로 가고, 그와 동시에 러브 하우스를 나가는 구조였죠. 그런데 새로운 밤의 꽃들이 들어오고, 건물주가 구조를 나간 시기가 비슷해요.” 참 공교롭기도 하다. 고용인의 역할은 단순한 청소나 식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클랜 하우스의 편의시설을 유지하는 중추가 마력석이나 마법 진인 만큼, 그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은 갖추어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사용자들이 들어온 이후 손을 조금 봤다곤 하지만 그에 관한 지식들은 홀 플레인에 있던 것을 기반으로 잡은 것이다. 고용인 역할을 할 정도의 관련지식을 가진 거주민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생계형 사용자, 그 중에서도 밤의 꽃들이라면…. “복잡하네요.” “수현. 어렵게 생각할거 없잖아요? 아까워서 그래요, 아까워서. 한나 정말 실력 좋은 아이에요. 그건 제가 보증할게요. 한나를 얻는 대가로 보살피고 있는 아이들에게 좋은 일 한 번 해준다고 생각해요.” “…임한나와 이야기는 다 된 겁니까?” “그럼요. 이야기는 이미 꺼냈어요. 저번에 1층에서 장비들을 꺼내놨던 사건 기억하시죠? 걔가 항상 웃는 것 같아 보여도 나름 사연 있는 아이에요. 아마 그것을 보면서 본인도 동기부여가 됐을 거예요. 수현이 결재만 해준다면 한나를 둘러싼 영입경쟁에서 필히 이길 수 있을 거예요.” 고연주는 자신의 왼쪽 가슴을 가볍게 치며 자신감을 드러내었다. 문득 고연주와 임한나가 어떻게 해서 만났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나와 만나기 전까지는 그녀는 베일에 싸인 사용자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인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지만 말이다. “러브 하우스에 있을 때 보니 거주하는 밤의 꽃들이 약 스무 명 가량 되는 것 같더군요. 미리 말씀 드리는데 전부를 고용할 수는 없습니다.” “걱정 마요. 그래서 제가 오늘 회의 때 그 기록을 보여드린 거잖아요?” 내가 그 말을 할 줄 알았다는 듯 고연주는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을 보자 절로 “아.”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내가 어떻게 나올지 미리 예측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잠시 동안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다가, 결국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임한나와의 자리를 주선해주세요.” * “오랜만에 뵈어요 언니.” “아이고~. 우리 임 마담 왔네?” 임한나가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고연주는 환히 웃으며 반겨주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마담 이름표도 사라져요.” “아 벌써 그렇게 시간이 됐나? 하긴, 요즘 너 바쁜 것 같더라.” “죄송해요. 미리 일정을 잡아둔 것이 있어서 이곳 저곳 뛰어다니느라….” “어때? 성과는 있어?” 고연주의 물음에 임한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고연주는 한두 번 고개를 주억이다가 이내 임한나의 손을 잡아 끌었다. “아무튼 잘 왔어. 애초에 오늘로 약속을 잡은 거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일단 들어가자.” “네 언니. 그럼 실례할게요.” 이윽고 고연주의 안내를 받아 클랜 하우스 내부로 들어간 임한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탄성을 질렀다. “어머!” “예쁘지?” “네, 너무 예뻐요. 꼭 서양식 정원을 보는 것 같아….” “호호. 구경만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자. 수현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임한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살짝 낯빛을 붉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주위를 힐끔거리는 것을 보니 정원이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둘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정원을 가로질렀다. 본관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둘의 귓가로 희미한 기합소리가 흘러 들었다. 그리고 한눈에 담지 못할 정도로 본관으로 다가갔을 즈음 무언가 불쑥 둘의 앞을 막아 섰다. 그 몸놀림은 실로 굉장히 절묘해, 흡사 고양이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어? 마담 언니?” “유정이 안녕. 오랜만이야.” 둘의 앞을 막아선 이의 정체는 이유정이었다. 한창 수련을 하고 있었는지 선선한 날임에도 불구하고 사위로 후덥지근한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머리에 낀 은빛 머리띠가 거슬렸는지, 그녀는 거칠게 머리띠를 벗었다. 그러자 빛나는 땀방울들이 후드득 땅으로 떨어져 점점이 자국을 만들었다. 이유정은 섬뜩한 빛을 내뿜는 단검으로 자신의 뺨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어떻게 된 거예요? 왜 한나 언니가….” “유정이 너. 오늘 아침에 내가 뭐라 그랬지?” “네…? 아 맞다! 오빠 지금 지하 연무장 들어갔는데!” “내가 못살아 정말. 너는 도대체…. 수현이 직접 수행인원으로 지명까지 해줬는데 이러면 곤란해요?” 약 1초 동안 곰곰이 생각하던 이유정은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펄쩍 뛰어올랐다. 고연주가 혀를 쯧쯧 차며 핀잔을 주자, 그녀는 어설프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고연주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너한테 말하면서도 혹시나 했는데, 그냥 직접 말할걸 그랬어.” “히히. 미안 언니. 내가 지금 바로 가서 말할 테니까 집무실에 들어가있어요.” 이유정은 그 말을 끝으로 본관 안으로 후다닥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중간에 뚝 걸음을 멈추고는 몸을 뒤돌아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마담 언니 걱정 마요! 내가 잘 말해줄게!” “으, 응. 고마워. 근데 아직 결정된 건 아닌데….” 다시 도도도도 달려들어가는 이유정을 보며 임한나는 어색이 중얼거렸다. “얘는. 여기까지 왔으면 얘기 끝난 거지 뭘 그리 뜸을 들여?” “그래도 왠지 긴장돼서요. 조금 무리한 부탁을 드리는 것 같기도 하고….” “산전수전 겪은 애가 긴장은. 아무튼 들어가자. 집무실에 있으면 그이가 곧 올라올 거야.” “어, 언니? 잠시만요 제가 갈게요.” 고연주가 옆에서 살짝 어깨를 치며 은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소매를 세게 잡아 끌자, 당황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렇게 둘은 서서히 본관 안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방은 어둡고 차가웠다. 그리고 고요했다. 차가운 냉기가 방안을 가득 메우고 그에 걸맞은 싸늘한 침묵이 맴돌고 있었다. 그 침묵 가운데 유일하게 들리는 소리라면, 두 개의 숨소리뿐. 침대에서 들려오는 숨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미약한 숨소리였고, 침대에 기대어 그것을 보고 있는 남성에게서 들려오는 숨은 조용했다. 남성은 누가 봐도 잘생겼다는 탄성이 나올 정도로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아찔하리만치 날카로운 콧날과 턱 선이 가히 압권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였다. 입을 꼭 다물고 있는 모습은 전체적으로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와, 냉소적인 인상을 풍겼다. 아래를 쳐다보는 눈동자는 침대를 얼릴 듯 차가웠지만 더 없는 안타까움과, 진지함을 담고 있었다. 끼익. “김유현….” 그때였다. 닫혀있는 문이 살짝 열리며 살짝 거슬리는 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소음의 정체는 쭈뼛쭈뼛, 김유현의 뒤로 다가섰다. 그러나 그는 몸을 뒤돌지 않았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망연히 침대에 누워있는 여성을 응시할 뿐이었다. “신전에서도 더는 방법이 없다고…. 조금 늦추는 게 고작이래….” 처음으로, 김유현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그는 비로소 몸을 뒤돌아 자신의 뒤로 다가온 여성을 바라보았다. 전체적인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전보다 눈매가 훨씬 매서워져 있었다. “효을이가…. 반시에게 당한지 어느 정도 지났지?” “2주일. 신전에서는 앞으로 길어봤자 3주라고….” 한동안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여성이 대답에 김유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는지 살며시 눈을 감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내 뭔가 생각난 듯, 완전히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현재 클랜에 남은 자금은 얼마지?” “1만 골드도 채 안 돼.” “그럼 내 장비들을 팔아야겠군.” “김유현!” 김유현이 담담히 말하자, 여성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되돌아온 날카로운 시선에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다시 몸을 돌려 침대에 누워있는 여성을 바라보았다. 얼굴은 핏기가 보이지 않고 푸른빛이 돌고 있을 정도로 창백했다. 이따금 몸을 떠는 것을 보니 온몸으로 한기가 엄습하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방안의 냉기는 침대 위의 여성에서 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김유현은 여성이 덜덜 떠는 모습을 안스러이 내려다보다가, 이내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주먹을 꾹 쥐었다. “효을이를 이대로 잃을 순 없어. 지금 바로 광장으로 가서 광고를 붙여. 엘릭서를 구한다고. 프린시카뿐만 아니라 북 대륙 전체로. 어떤 값을 치르고서도 구하겠다고 해.” 김유현의 일말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고 딱 잘라 말했다. 그것은 절대로 침대에 누워있는 여성을 잃을 수 없다는, 강렬한 의지가 포함된 목소리였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오늘은 몇 가지 설명 드릴게 있어서, 잠시 후기를 빌리겠습니다. :) 홀 플레인에서 건물에 대한 소유권 순서는 1. 건물주 2. 건물주가 계약서에 명시한 사용자 3. 건물주가 소속한 클랜 4. 도시를 관리하는 대표 클랜 순서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이번 회에 등장하는 건물주가 만일 계약서에 임한나를 언급했다면, 러브 하우스는 임한나것이 되었을 겁니다. 다만 사후 계약서를 남기지 않았고, 그래서 3번으로 해당되어 소속 클랜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물론 예외는 있습니다.(공동으로 소유한 경우나, 건물주가 소속 클랜이 없는 경우도 있지요.)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합니다. 오호. 비비앙의 성향이 변태라. 그거 조금 끌리는데요? 하하하. 농담입니다. 갑자기 독자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시니 저도 부담스럽습니다. -_-a 2. 나꼼수 : 예. 실은 혹시나 해서 그런 소제목을 추가로 덧붙인 건데, 저도 지금 허허허…. 3. 조아죽겠네 : 그, 그렇게 많이 기대하지 말아주세요. SM은 나오더라도 그냥 가볍게 나올 예정이에요. ㅜ.ㅠ 하드한건 조금 그렇잖아요…. T^T 4. 오피투럽19 : 1부, 2부로 나눴습니다. 1000회는 조금 무리고요. 솔직히 할 수만 있다면 600회~700회 사이로 끝내고 싶어요. ^^7 5. 피네이로 : 아하하. 600회가 1부 완결이라니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2부 연재를 시작하면 전개 속도를 많이 높여보고 싶어요. 물론 적절한 생략도 들어가야겠지요. 6. 콰오아 : 아이 생겨요. 드물지만 그렇게 가정을 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 7. 드림장이 : 감사해요. 2부는 소소한 이야기보다는 사건 위주로 전개하는 게 어떨까 싶어요. 세세한 건 아직 구상 중이지만요. :) 8. 엔젤릭나이트 : 아니에요 괜찮아요. 내구랑 체력은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차이점이 더 커요. 내구는 쉽게 말씀 드리면 강도(Def)로 보시면 됩니다. :) 가끔 수현이 생각했죠? 네가 내 내구를 뚫을 리가 없다. 이런 식으로요. 하하. 9. CemeteryGates : 아. 호출석 설명을 자세히 해드렸어야 했는데. 다음 회에 호출석이 나오니 기대해주세요!(그런데 솔직히 그렇게 대단한 내용은 아니라서…. -_-a) 10. 살구살구 : 유일하게 그 부분에 주목해주셨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엉엉.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91 / 0933 ---------------------------------------------- 비비앙의 각성 & 그것을 바라고 오지 마세요 2 Months Ago 편한 복장을 입고 있는 한 청년이 광장의 분수대에 걸터앉아있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얼굴만 보면 동네 마실 나온 인상 좋은 청년처럼 보였다. 하지만 분수대에서 간헐적으로 솟아오르는 핏빛 물줄기와 사위에 끔찍하게 널브러져있는 시체더미들, 그러한 광경을 배경으로 두고 있다면 연한 미소를 머금은 청년을 마냥 평화롭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저벅저벅. 한동안 흥얼거리던 청년의 콧노래는 무거운 발소리가 들리자 뚝 끊겨버렸다. 청년은 실눈을 뜨고 앞을 주시하더니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셨군요. 떠돌이.” “떠돌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매번 그렇게 들으려니 조금 그렇군. 차라리 부랑자라고 불러다오.” 낮은 음성. 고저는 없지만 그 목소리에는 몸서리쳐질 만큼의 소름 끼치는 살기가 담겨있었다. 그러나 청년은 오히려 즐겁다는 듯 빙글빙글 웃고만 있는 중이었다. “이런, 죄송합니다. 아까부터 통역 마법을 활성화했는데 아무래도 단어 선택이 잘못되었나 봅니다.” “죄송할 필요까지야. 어차피 아쉬운 소리를 하러 온 쪽은 이쪽인데 괜한 투정을 부렸다.” “하하하! 괜찮습니다! 그 정도로 속이 좁지는 않아요.” “그런가. 그럼 다행이고. 아무튼 나도 이만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지. 그게 예의인 듯싶으니.” 그 말이 끝나자마자 피가 덕지덕지 묻은 천 조각을 걸친 남성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거대한 낫을 빗겨 들고 있었는데 양발은 땅을 비스듬히 디딘 상태였다. 날카로운 예기를 내뿜는 낫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며 땅을 적시자, 청년은 처음으로 흥미로운 표정을 띠었다. “오. 친구들의 환영이 조금 거칠었나 보군요.” “거친 건 둘째치고 소름이 끼쳤어.” “응? 왜요?” “한 놈이 다짜고짜 덤비길래 때려눕혔다. 죽일 생각은 없었어. 그런데 놈이 갑작스레 킥킥 웃더니, 칼을 들어 스스로 모가지를 자르더군.” 다시 한 번 박장대소가 터져 나왔다. 청년은 남성의 말이 정말로 웃겨주겠는지 박수를 치며 꺽꺽 대었다. 이윽고 그는 눈을 쓱쓱 닦으며 숨을 진정시켰다. 쉴 새 없던 어깨의 들썩임이 약간 사그라질 즈음 청년은 더없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군요. 이해하세요. 원래 그런 친구들이에요.” “서대륙의 소문은 많이 들었지. 하지만 올 때마다 느끼는 건데, 오히려 소문이 축소된 감이 있는 것 같아. 말 그대로 미친놈…. 무법지대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남성이 슬쩍 눈치를 살피며 말을 바꾸자 청년은 따뜻해 보이는 미소로 화답했다. 이윽고 청년은 분수대 안으로 손을 뻗어 주섬주섬 뒤지더니 이내 무언가를 손에 잡아 쑥 들어올렸다. 청년의 오른손에는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는 한 남성의 머리가 들려있었다. 죽을 때 굉장히 고통스럽게 죽었는지 표정은 와짝 일그러져있었다. “이자는 재컬린, 이명으로는 배신자라고 불렸죠. 서대륙에서는 꽤 힘있고 따르는 무리도 많았던 친구입니다.” “그러는 당신이 바로 학살자 시몬인가?” “그렇게들 부르더군요. 별로 달가운 이름은 아니지만 말이에요….” “그럼 시몬으로 부르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시몬이라 불린 청년은 뭔가를 생각하는지 잘린 머리를 쓰다듬다가, 꽉 쥐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시몬의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이 친구가 죽은 이후로 서대륙이 심심해진다 싶었는데…. 확실히 떠돌이들의 제안은 나름 재밌었습니다. 저희 쪽에서도 나름 조사해본 결과 떠돌이들의 말과 어느 정도 일치하고 있습니다.” “재미라…. 부탁하는 입장에서 이런 말하기 우습지만, 너희들은 이 일에 재미를 따지는 건가?” “통역 마법이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해석의 차이가 있을 겁니다. 어찌됐든 서대륙은 이젠 각 대륙에서 쫓겨난 쓰레기들이 모이는 곳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쓰레기들이라….” 남성은 씁쓸함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시몬의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기에 잠자코 받아들였다. 살육, 강도, 강간, 전쟁. 근 몇 년 동안 서대륙의 사용자들은 그런 단어들과 무척이나 익숙해져 있었다. 아니, 익숙한걸 넘어서 골수 깊숙한 곳까지 뿌리가 내렸다고나 할까? “재키, 아. 애칭입니다. 어쨌든 재키가 죽은 이후 그가 채우고 있던 공간이 너무 크게 비었습니다. 평화는 어울리지 않아요. 칼 끝을 돌릴 수 있는, 그러한 것들을 능히 받아줄 수 있는 곳이 필요했지요. 뭐 이쪽에도 여러 단체가 있고, 각 단체마다 나름의 복잡한 사정은 있으니 푸념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세히 말하려면 얘기가 길어지니까요. 그리고 당신은 별로 관심도 없는 것 같고요.” “확실히 통역 마법을 이용해서 그런지 중간중간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들려.” “아하하! 그 부분은 저도 어쩔 수 없으니 부디 양해를. 자자, 재미없는 얘기는 이쯤 하도록 하고. 재밌는 얘기로 다시 돌아가볼까요?” “그러지. 공식적으로는 이번이 너희들과 세 번째로 만나는 건가?” 시몬은 눈동자를 굴리며 하나씩 손가락을 피더니 이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되겠군요.” “두 번째에 만났을 때 네 부하가 조건을 한가지 걸더군. 그 말을 들어 우리는 대모를 살해했고 약속을 이행했다. 그래야지 너를 만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증거자료는 확실히 건네 받았습니다. 그럼 제가 왜 대모를 죽이라는 조건을 걸었는지 궁금하시겠지요?” “그 이유부터 알려주는 게 다음 이야기를 진행하게 해줄 초석이 되어줄 테지.” 초석이라는 말이 와 닿지 않는지 시몬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은 학살자라는 악명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순수해 보였다. “대모의 살해는 보험을 위해서였지요. 물론 확신 없는 보험이지만 가능성은 꽤 놓은 보험.” “조금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 “물론 해드리겠습니다. 혹시….” “혹시?” 잠시 말을 멈추고 뜸을 들이던 시몬은 입 꼬리를 히쭉 올려 보였다. 그러고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각 대륙을 수호하는 자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 허겁지겁 달려온 이유정의 볼을 살짝 꼬집어주고, 나는 곧장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4층의 집무실로 들어가자 얌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는 두 여성을 볼 수 있었다. 홀짝. 임한나는 한 손으론 잔을 받치고 한 손으론 손잡이를 쥐어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나긋나긋하면서도 자신감이 엿보이는 그 모습은 숨길 수 없는 고상한 기품을 드러내고 있었다. 비유가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풍성한 드레스 하나 입혀놓는다면 꼭 귀족 가문의 귀한 영애 같아 보일 것이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이번 환각의 협곡 1차 구조대에 지인 분이 포함되어있었다고요.” “네….” “미리 말씀을 주시지 그러셨어요. 그러면 무리를 해서라도 더 일찍 갔을 텐데.” “아니에요. 머셔너리 로드께서도 목숨을 걸고 나가시는데 괜한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그리고 최선을 다하셨다고 연주 언니한테 듣기도 했고….” 이번 구조대 사건으로 사망한 지인이 떠올랐는지, 임한나의 눈동자에 슬픔이 스쳤다. 나는 한두 번 고개를 주억이고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침묵이 흘렀다. 임한나가 원래 표정을 회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고연주와 어느 정도 얘기를 진행했다고 들었습니다.” “네. 저. 머셔너리 로드께서 받아주실 의향만 있다면, 염치불고하고 부탁을 드리고 싶어요.” “저 또한 그럴 생각이 있기에 이번 자리를 마련한 겁니다. 다만 그전에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이에요.” 임한나의 시선이 옆을 바라본다 싶더니 이내 어색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옆으론 고연주가 다소곳이 시립해있었다. 아마 그녀의 이런 모습이 익숙지 않은 모양이다. “먼저, 제가 듣기론 다른 클랜에서 사용자 임한나에게 영입제의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을 물리치고 머셔너리를 선택하신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밤의 꽃 때문인가요?” “물론 그 이유가 가장 크긴 해요. 영입제의를 해준 곳은 총 두 곳인데 모두 이번 1차 구조대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거든요. 제 부탁을 수락할 정도의 여유가 없다고 했어요.” “다른 이유도 있나요?” “그리고…. 머셔너리 클랜원분들이 러브 하우스에서 생활하시면서 많이 친해질 기회가 있었어요. 분위기가 여느 클랜들과는 다르게 참 가족 같다고 느꼈어요. 그러면서 점점 호감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또 연주 언니가 가입한 클랜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호기심도 있었고요.” 무난하지만 그만큼 진심이 깃들어있는 대답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기는 했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고민이 일었다. 이 질문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아무래도 하는 게 좋겠지.’ 조금 예민한 부분이 있어 갈등이 일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부분은 꼭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한가지 더 궁금한 게 있습니다. 조금 실례가 될 수도 있어요.” “괜찮아요. 부담 없이 질문해주세요.” “그럼. 임한나는 실력 있는 궁수 사용자로 알고 있습니다. 혼자서 앞가림을 하기 충분할 정도로요. 그런데 굳이 그렇게 밤의 꽃들에 얽매이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 임한나는 전처럼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갈 뿐. 혹시 내가 잘못 물은 건가 생각이 들 즈음 탁,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얘기가 길어질 수 있어요.” “경청하겠습니다.” 내 대답이 떨어지자 이윽고 임한나의 눈가가 아련해지는가 싶더니,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러브 하우스의 건물주는 얼마 전까지 꽤나 잘나가는 4년 차 사용자였다고 한다. 크고 작은 것을 합하면 거의 매년 하나씩 유적을 발굴했을 정도라고 하니 대강은 짐작이 가능했다. 임한나는 우연한 기회에 건물주가 이끄는 캐러밴에 들어갈 수 있었고, 거기서 실력을 인정받아 나름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년 전 건물주가 이끌던 캐러밴은 원정 중 큰 사고를 당했고, 그 여파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건물주와 임한나를 비롯해 몇 명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캐러밴을 다시 꾸리기에는 턱도 없을 만치 회생 불가능한 타격이었다. 그때 일로 임한나는 큰 충격을 받았고 당분간 활동을 중지를 선언하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그리고 건물주는 남은 인원들을 모아 다른 클랜에서 들어온 합병 문의에 응했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임한나의 이야기였다. “충격은 조금씩 회복할 수 있었지만 몇 달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려니 조금 무섭더라고요. 그때 들어온 게 러브 하우스의 마담 자리였어요. 오빠는 항상 느긋한 성격이었죠. 당장 저를 끌어오기보다는 먼저 일거리를 주고 서서히 다시 홀 플레인에 나오게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렇군요. 오빠라고 하는걸 보니 남성 사용자인 것 같은데, 러브 하우스란 건물을 생각하다니 의외네요.”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그렇지만…. 오빠가 당시 여자친구가 있었거든요. 그 언니가 현대에서 그와 비슷한 일을 했던 것 같아요. 워낙 마음이 착한 것도 있지만 이런저런 말을 들어서인지 밤의 꽃들을 특히 가엾게 여기셨어요. 항상 저한테 애들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할 정도였죠. 1차 구조대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도 그것이었고요. 지금은 둘 다 세상에 없지만…. 그래도 저를 항상 아껴주셨던 만큼 유언으로 생각하고 확실하게 마무리를 짓고 싶어요.” “흠….” 나는 잠시 침음을 흘렸다. 임한나의 말을 들으면서 느꼈던 점은, 뭔가 더 숨겨진 사연이 있을 거라는 점이었다. 물론 그것은 감에 불과했다. 그리고 더 파고들어가면 정말로 실례가 될게 분명했기에, 이쯤에서 이야기를 매듭짓기로 했다. “얘기는 잘 들었습니다. 그런 사정이 있는지는 몰랐네요. 하지만 죄송한 말씀을 먼저 드려야겠습니다. 머셔너리에서는 밤의 꽃들을 모두 고용할 수 없습니다.” “네. 들었어요. 하지만 나머지는 연주 언니께서 생각이 있으시다고….” “그렇긴 하지만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고연주 개인에게 맡기는 일이라서요. 혹시 지금 보살피는 밤의 꽃들이 몇 명이나 되죠?” “25명이에요. 그 중 20명이 고용인으로 들어오기를 희망하고 있어요.” 그렇다는 소리는 나머지 5명은 밤의 꽃을 계속해서 이어가겠다는 소리였다. 밤의 꽃들 중에서도 잘나가는 여성은 제법 괜찮은 수익을 올리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전투 사용자보다도 말이다. 아무튼 나야 수가 줄수록 기꺼운 일이었다. “10명. 일단은 절반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많아 봤자 12명…. 괜찮으시겠습니까?” “정 안되면 제가 지금껏 모아온 돈을 나눠줄까도 생각하고 있었어요. 수가 줄수록 애들에게 가는 돈은 그만큼 커지겠지요. 이게 가장 좋은 선택인 것 같아요.” “얘기가 빨라서 좋네요. 동의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머셔너리의 가입을 축하합니다.” “무례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 드려요. 앞으로 정말 열심히 활동할게요. 잘 부탁 드려요.” 나와 임한나는 가볍게 악수를 나누었다. 옆에서 고연주가 작게 박수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맞잡았던 손을 떼던 도중 문득 생각이 났는지, 임한나는 조심스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그럼 고용인으로 들어올 애들은 제가 알아서 데려올까요?” “아니요.” 나는 딱 잘라 말했다. 보안에 자신이 있다곤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각에 불과하다. 클랜 하우스 보안계획은 지금 내 머릿속에 우선순위로 들어있는 것들 중 하나였다. 넋 놓고 있다고 보안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기에, 스스로 관심을 가져야지만 마음을 놓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이, 사람을 가려서 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닥이 보이는 찻물을 마지막으로 들이킨 후, 나는 힘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용인으로 들어올 사용자들은 제가 직접 가려 뽑겠습니다. 미처 말씀 드리지 못했는데, 그게 마지막 조건입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오늘 원래 호출석을 사용하는 내용을 집어넣으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ㅜ.ㅠ 오늘 후기는 호출석에 대해서 간단히 알려드릴게요. :)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호출석은 마력석(마법 진을 각인해 마력을 가둬놓은 돌) 두 개가 한 쌍을 이룹니다. 하나는 호출용, 하나는 받는 용입니다.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볼게요. A와 B가 각각의 마력석에 자신의 고유한 마력 파장을 저장하면 호출석을 바로 활성화 할 수 있습니다. 이때 A가 호출용 B가 받는 용을 가졌다면, A가 자신의 마력을 불어넣었을 경우 B가 가지고 있는 호출석(받는 용)에 모종의 신호가 가게 됩니다. 신호를 받은 B는 그러면 A가 자신을 부르는구나 라고 알 수 있죠. 언뜻 보면 편리해 보이지만, 단점도 많습니다. 호출석이 많을수록 어느 게 누구 것인지 구별하기 어려우며, 받는 사람은 단순히 불렀다라는 사실만 인지할 뿐이지 장소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미리 구별을 잘해두고, 호출 장소를 정해놔야겠지요. :) PS. 고장난선풍기 님! 세라프, 비비앙 팬 아트 감사합니다! 비비앙이 너무 예뻐서 허락 없이 표지로 올렸습니다. 혹시 코멘트나 쪽지 주신다면 바로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_(__)_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합니다. 그렇죠. 실제로 헤어졌던 시간이 꽤 길고, 김수현은 많이 변했으니까요. 특히 김유현이 기억하는 건 현대에서의 김수현이니 괴리감이 더욱 심할 겁니다. :) 2. 소수영서 : 네. 김유현은 김수현의 친형입니다. 엘릭서는 새로운 에피를 넘어 2부를 여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입니다. 이제 슬슬 떡밥이 보이실 거예요. 하하. 3. shadowΞghost : 임한나 일 마무리 짓고, 클랜 하우스 정리된 것 보여드린 다음 새로운 챕터입니다. 1부의 마지막을 알릴 챕터지요. :) 4. 몽구헌터 : 제가 정말 지금 말씀 드리고 싶은데, 죄송해요. 거론하신 것 두 개 모두 이번 챕터에 나올 예정입니다. 그러니 내용을 기대해주세요! 5. 추락한날개 : 과연 그럴까요? 하하. 지은 죄가 있으니 유구무언입니다. 그래도 한달은 가지 않도록 해보겠습니다! :) 6. 신유진 : 그렇죠. 전에 내용에도 드러냈듯, 원래 엘릭서 하나는 유현이꺼였습니다. 과연 효을이가 엘릭서를 사용할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후후. 7. 달리다쿰 : 네. 보육소는 안 되요. ㅋㅋㅋㅋ. 조금 불쌍하게 묘사될 수도 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8. kussen : 아 저도 그럴 수는 있어요. 어려운 것이고 아니고 복붙만 하면 되니까요. 근데 가끔 장문의 코멘트도 있고, 그것을 모두 복붙하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요…. 9. 마늘이랑 : 그럼 저는 두 손들고 벌서고 있겠습니다! 10. 현오 : 현오 님 코멘트 짱짱 데스네! 안솔 코멘트 차짐 데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92 / 0933 ---------------------------------------------- 비비앙의 각성 & 그것을 바라고 오지 마세요 부랑자는 의아한 얼굴로 시몬을 응시했다. 실제로 두 번째 만남 때 들었던 이야기는 ‘대모를 살해하면 생각해보겠다.’ 라는 것뿐이었다. 부랑자는 서서히 긴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눈앞의 청년은 겉모습만 보면 유약한 학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 내면은 무법지대 서 대륙을 좌지우지하는 거물들 중 한 명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악랄하다고 불리는 ‘학살자’ 시몬. 그것이 바로 청년의 본 모습이었다. “대륙 보호자? 그런 건 모른다.” “이런, 그렇게 들리는 모양이네요. 대륙을 수호하는 자. 또는 이끄는 자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인도하는 자라….” “인도하는 자? 뭐, 그렇게 생각하셔도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시몬은 그 정도면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분수대 안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부랑자는 청년이 들추는 분수대의 정체를 알고 있다. 시몬은 서 대륙의 큰손인 만큼 적도 많았는데, 그에게는 고약한 취미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상대한 적들 중에서 나름 재밌었다고 여기는 이는 시체를 분수대안에 모아두는 것이었다. 역시나 예상이 맞았는지 시몬은 이번엔 다른 머리를 쥐어 올리며 해맑게 웃어 보였다. 시체를 분수대에 던지고 나서 꽤 시간이 지났는지, 그가 들어올린 머리는 해골이었다. 이따금 듬성듬성 보이는 빛 바랜 금빛 머리카락과 골격을 보면 원래 여성이 아닐까 하는 추측은 할 수 있었다. “이 해골이 바로 서 대륙을 수호하고 이끄는 자였습니다. 이름도 참 예뻤어요. 로렌스.” “그 로렌스라는 해골이 대모를 살해한 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 거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 “떠돌이도 사용자인만큼 담당 도우미로 있는 천사가 있겠지요?” “그거야 당연하지. 지금이야 못 본 지 꽤 됐지만 말이야.” 부랑자는 즉답했다. 담당 천사가 있는 소환의 방으로 가려면 무조건 도시 안에 있는 신전의 포탈을 통해야 한다. 사용자의 탈을 쓴 부랑자라면 모를까, 지금 낫을 들고 있는 부랑자는 공식적으로 수배령이 내려진 몸이었다. 도시 근처로만가도 바로 척살당할게 눈에 보이는데, 신전으로 들어가 천사를 만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쉽게 말씀 드리면 떠돌이와 정 반대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끄는 자는 일반 사용자보다 천사와 보다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작게는 개인, 크게는 단체를 비밀리에 돕는 이를 가리킵니다.” “흠. 나도 나름 연차가 되는데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는걸.” “그러실 겁니다. 이끄는 자의 실체는 극히 비밀로 다뤄지는 정보거든요.” “흥미가 돋는다. 조금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 아니, 최대한 자세히.” 부랑자는 처음보다는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지는 어느새 핏물이 흘러 질척이고 있었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는듯했다. 시몬은 왜 안 되겠느냐는 얼굴로 자상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약 10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한 명은 이야기를 이었고 다른 한 명은 조용히 듣기만했다. 이윽고 시몬이 모든 이야기를 마쳤는지 가벼운 콧숨을 내쉬자, 중간에 한 번도 끊지 않고 듣고 있던 부랑자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꽤나 애매하게 말하잖아. 속 시원한 게 하나도 없어.” “어쩔 수 없습니다. 저도 대략적인 것만 알고 있지 자세한 속사정은 모르니까요. 이것도 정말 우연찮은 기회에 알게 됐습니다. 솔직히 추측도 88%가량 섞여있는 건 인정합니다.” “그 쓸데없이 정확한 퍼센트는 뭐지. 아무튼 그럼 12%는 사실이라는 소리…. 너는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었지? 네 말대로라면 정말로 극비로 다뤄야 할 정보인 것 같은데?” “저도 한때 이 사람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거든요. 그때 기회가 닿아 단서를 잡을 수 있었지요. 아, 혹시라도 이것을 퍼뜨리시면 곤란합니다. 다음에 출현할 수 있는 이끄는 자가 제가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꽁꽁 숨어버릴 수가 있거든요. 그럼 조금 귀찮아져요.” 히죽. 시몬이 해골을 잡아 올리는 것을 보며 부랑자는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딱히 거부감이 드는 건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로렌스란 수호자 또한 시몬이 죽였을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시몬은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이는 부랑자를 보고는 미묘히 말아 올렸던 입 꼬리를 내렸다. “어찌 보면 떠돌이 말대로 정말 애매한 사용자입니다. 일차적으로 ‘사용자 정보’가 지배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홀 플레인을 이끌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끄는 자라고 해서 절대로 목적 없이 활동하는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용자로써 천사들에게 특별한 권한을 부여 받았다는 것은 그네들과 엮인 게 있다는 소리지요.” “목적이라….” “냉정하게 생각해보세요. 천사들이 괜히 이곳으로 사람들을 데려왔겠습니까? 저는 뭔가 목적이 있어서 데려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이끄는 자를 조금 더 직접적인 대리인으로 내세운 거고요.” “천사들의 알 수 없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비밀리에 활동한다 라. 좋았어, 대충 감은 잡았다. 그럼 시몬은 대모를 북 대륙을 인도하는 자로 생각한 것이로군.” 짝짝. 그 말이 정답이었는지 시몬은 가벼운 박수를 두어 번 쳤다. 부랑자는 건조해 보이는 얼굴을 들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닐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아니, 그렇다 해도 대모를 꼭 죽일 필요는 있었을까?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거야.” “가능성은 저도 확신할 수 없어요. 그래서 보험이라고 말했잖아요. 그리고 죽일 필요는 있었습니다.” “북 대륙을 망치기 위해서인가?” “비슷합니다. 그렇게 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정확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고 해두죠. 왜냐하면…. 저는 북 대륙 사용자들이 무섭거든요.” 뜻밖의 말이었는지 지금껏 담담함을 유지하던 부랑자의 표정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시몬은 말을 해놓고도 쑥스러운지 살짝 머리를 긁적였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사실이에요. 이곳 서 대륙으로 들어오는 여러 대륙 사용자들이 제법 있거든요. 솔직히 동 대륙이야 별거 없는 멍청이 노예들이고, 남 대륙은 그럭저럭 쓸만해요. 그런데 북 대륙 사용자들을 보면 말이죠, 이야 정말 죽여주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북 대륙에서 패배해 쫓겨났다고 생각하니 그 대륙 사용자들의 수준을 익히 짐작할 수 있더군요. 혹시 정말로 괴물들이 모여있나요?” “그럴 리가 없잖아…. 즉 깽판은 치되 복수가 두렵다는 건가.” “처음엔 재미라고 말씀 드렸지만 어쨌든 저희도 노리는 바가 있으니 제안에 응한 겁니다. 그래서 당신들을 이용하는 거고요. 아차, 죄송합니다. 혹시 기분 나쁘셨나요?” “전혀. 오히려 그렇게 나와주면 고맙지. 마음껏 이용하라고. 우리도 똑같이 이용해줄 테니.” 둘은 동시에 웃었다. 한참 동안 소리 죽여 웃던 부랑자는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튼 오늘 이야기는 유익했다. 왜 대모를 죽이라고 했는지도 확실히 이해했어.” “가능성에 불과합니다. 아닐 수도 있고, 설령 맞는다고 해도 북 대륙이 서 대륙처럼 되리란 법은 없어요. 홀 플레인을 이끌어가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사용자들이니까요.” “한계가 있다고…. 하기야 새로운 인도자가 출현할 수 있다고 했으니. 그래도 가능성은 제법 높아 보여. 우연이라고 하기엔 그 동안 일어난 일들이 너무 아귀가 맞아떨어지거든.”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강철 산맥 원정 실패, 은둔해있던 대모의 귀환, 대모의 죽음, 그리고 현재. 은둔해있던 기간이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그 동안 북 대륙이 최고의 성세를 누렸음을 생각해보면 아주 이해 못할 것도 아니지요. 굳이 나설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시몬은 바지를 툭툭 털며 분수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양팔을 쫙 벌려 크게 숨을 들이키고는, 기분 좋아 보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 앉아있었더니 엉덩이가 아프네요. 이만 일어나실까요? 장소를 옮기자고요.” “응?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아있는 건가?” “하하. 많습니다. 많고말고요. 저만의 성으로 가시죠. 맛있는 차를 대접해드리지요. 부디 거절하지 말아주시길.” “흠. 그럼 초대에 응하도록 하지.” 부랑자는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비스듬히 땅을 디뎠다. 이윽고 두 남성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부랑자는 시몬의 등을 보며 걸었다. 그리고 약 열 발자국 정도 걸었을까. 앞장서서 걷고 있던 시몬에게서 갑작스레 말소리가 흘러 들었다. “그런데…. 저도 한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떠돌이.” “뭐지?” “갑자기 재밌는 생각이 하나 떠올라서요. 예전에 대모를 죽였을 때 어느 길을 이용하셨어요?” “쉽지 않은 길이었지.” 부랑자는 씩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그럼 다시 한 번 잘 부탁 드려요. 최대한 빠르게 연락 드릴게요.” “저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너무 서두르지 않으셔도 되니, 천천히 준비하시고 연락해주시면 됩니다.” “감사해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 나가는 길은 알고 있으니 굳이 나오지 않으셔도 되요.” “알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임한나는 정중히 가슴을 숙이며, 아니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이윽고 사뿐사뿐 복도를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난 천천히 문을 닫고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고연주가 득달같이 달려와 내 무릎 위에 엉덩이를 올렸다. 그대로 허벅지를 쳐올릴까 하다가, 임한나를 데려온 공로도 있고 하니 참아주기로 했다. “수현. 궁금한 게 있어요. 왜 한나한테 얘기 안 하셨어요?” “네?” “한나 걔, 궁수잖아요. 머셔너리에는 궁수용 레어 클래스도 있고, 궁수용 장비도 거의 세트로 있잖아요.” “…….” 나는 대답에 앞서 고연주의 허리를 살며시 잡고 위로 힘을 주었다. 이만 일어나라는 신호였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아래쪽으로 힘을 주며 내게 더욱 몸을 밀착시켰다. 허벅지를 꾹꾹 짓누르는 고연주의 엉덩이를 느끼며, 나는 가볍게 숨을 쉬었다. “만일 임한나가 들어온다면 장비는 클랜원 자격이 있다면 대여 형식으로 빌려줄 수는 있어요. 나중에 그녀가 클랜을 나가는 일이 생겼을 경우엔 회수하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레어 클래스는 달라요. 황혼의 무녀는 한 번 계승하면 회수가 불가능하죠.” “흐응~. 그래요?” “물론 그림자 여왕의 보증이 있지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안현이나 이유정은 통과의례 때부터 나를 따라온 애들이고, 정하연과 신상용도 캐러밴 시절부터 함께해왔어요. 하지만 임한나는 달라요. 안 주겠다는 말은 아니지만,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소리에요.” “호호. 수현.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 왜 말하지 않았냐고 따지는 게 아니에요. 아마 수현이 다짜고짜 그 얘기를 꺼냈다면, 제가 몰래 한나를 따라가서 말했을 거예요. 잘하셨어요. 쪽. 쪽.” 고연주는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내 뺨에 입술을 맞추기 시작했다. 볼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것이 그녀 나름대로의 애정표현이란 것은 알지만, 그래도 가끔 고연주나 정하연이나 나를 아이 취급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특히 침대에서. 내가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것을 봤는지, 고연주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 표정이 왜 그래요? 이래봬도 저 인기 좋아요? 뭇 남성들이 바라마지않는 그림자 여왕의 입맞춤을 받았으면 좀 더 기뻐해 보라고요.” “별로 기쁘지는 않군요.” “거짓말. 그럼 아까부터 제 엉덩이를 콕콕 찌르고 있는 딱딱한 건 뭐예요?” “…….”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고연주는 다시 깔깔 웃으며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조용히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자, 너무 귀엽다는 둥 조만간 새벽에 몰래 방으로 찾아가겠다는 둥 신나서 떠드는 목소리가 귓가로 들렸다. 나는 사용자 정보창을 켜 체력 능력치를 확인한 후 서서히 눈을 감으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래, 어디 한 번 들어와봐. 아주 그냥…. 그날 두고 보자고.’ * 테라스에 서서 보는 클랜 하우스의 정원은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해는 중천에 떠 정원 전체를 아우르는 따뜻한 햇살을 비추고 있었다. 간만에 느끼는 편안한 기분을 음미하며, 나는 차분히 상념에 잠겼다. 본격적으로 클랜 하우스 정리 및 재정비가 시작된 이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회의에서 다그쳤던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한 주일 전만 해도 슬슬 눈치만 보던 클랜원들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앞다투어 필요한 물품들을 요청해온 것이다. 오죽하면 이번 주 지출만 7천 골드가 넘었을 정도였다. 임한나와 밤의 꽃들의 일은 원만히 처리할 수 있었다. 그녀는 결국 러브 하우스의 마담을 그만뒀고, 밤의 꽃들을 데리고 나와 인근 여관에서 지내는 중이었다. 이것저것 인수인계를 마치고, 밤의 꽃들에게는 고용인으로써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소양이나 복장을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모든 것을 사비로 충당하고 있다고 하니, 임한나가 정말로 전건물주의 유언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용인으로 선발한 밤의 꽃들은 총 12명이었다. 고용인을 직접 고르겠다고 한 이유는 제 3의 눈으로 사용자 정보를 확인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1차적으로 성향으로 걸러내었으며, 2차적으로는 진명과 능력치를 중심으로 선발했다. 선발되지 못한 밤의 꽃들은 실망스러운 기색을 드러내었지만 내 알 바는 아니었다. 그리고 고연주가 계획하고 있는 것도 있으니 그에 대해선 천천히 경과를 보고받을 생각이었다. ‘내일이면 임한나랑 고용인들이 들어온다고 했고….’ “야아. 너 몇 살이야…!” “가,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세요….” “너 열여덟 살이라고 했잖아아…. 그, 그리고 나 스무 살이거든? 내가 더 누나니까 내 말이 맞아!” “그, 그런 게 어딨어요!” ‘응?’ 그때였다. 테라스에 서 일광욕을 하던 도중 아래서 앙칼진 목소리들이 왕왕 울렸다. 궁금한 마음에 힐끔 고개를 내밀며 안력과 청각을 돋우자, 의외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테라스 아래의 정원에는 두 명의 사람과 한 마리 신수가 보였다. 사람은 안솔과 백한결이었고, 신수는 당연이 아기 유니콘이었다. 아기 유니콘은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아름드리 나무 아래서 대(大)자로 누운 채 고롱고롱 잠들어있었다. 이따금 주둥이를 쩍쩍 벌리며 입맛을 다시는 모습이 참 행복해 보였다. 그에 반해, 옆에서는 안솔과 백한결이 서로 대치중인 상태였다. 무에 그리 화가 났는지 안솔은 양손을 옆구리에 짚은 채 허리를 빳빳이 세우고 있었고, 백한결은 어수룩하게 서있긴 했지만 그래도 불만스런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얘 이름은 뀨뀨가 아니라 유니라고오! 유니이!” “아, 아직 정해진 이름은 없잖아요. 저는 그냥 제 마음에 드는 이름으로 부를 거예요.” “…조, 좋아. 그건 그렇다고 쳐. 그럼 왜 내가 유니라고 부르는 거보고 비웃었어?” “비웃지 않았어요! 솔직히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수현이 형님도 뀨뀨가 더 낫다고 해줬어요!” 그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안솔은 멍하니 옆구리를 짚고 있던 양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목 울대를 꿀꺽 삼키고는 빽 소리를 질렀다. “그, 그럴 리 없어어…. 아니야아! 유니가 더 나아!” “저, 전 뀨뀨가 더 낫다고 생각해요.” “아니야! 유니야!” “뀨뀨에요!” ‘……………….’ “으앙!” 결국 백한결과의 말싸움에서 패배한 안솔은 울음을 터뜨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조용히 연초를 한대 꺼내 입에 물었다. 왠지 모르게, 요즘 들어 까닭 없는 한숨이 늘어난 것 같았다. * 팔랑! “호오!” 팔랑! 팔랑! “호오…!” 팔랑! 팔랑! 팔랑! 팔랑! “호오………!” 머셔너리 클랜 하우스, 비비앙의 개인 숙소. 비비앙은 침대에 엎드린 상태로, 눈동자에 뜨거운 불길로 활활 불태우며 연신 감탄을 터뜨리고 있었다. 굉장히 열중해있는 얼굴로 두꺼운 책을 한 장 한 장 주의 깊게 넘긴다. 이따금 중요한 부분은 밑줄을 치며, 한쪽을 접어놓을 정도까지. 밤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라이트 스톤을 킨 채 책을 탐독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정말 연구심이 깊은 연금술사구나.’ 라고 볼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그 순간 비비앙이 뭔가를 발견했는지 눈가가 번뜩이는가 싶더니, 옆에 빼곡히 적어놓은 기록에 추가로 깃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엉덩이 찰싹찰싹…. 줄로 꽁꽁 묶기…. 털 밀기…. 수치 노예…. 강아지…. 채찍…. 삼각 목마….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후유~.” 뭔가 위험한 냄새가 짙게 풍기는 말을 하나씩 내뱉는 비비앙. 그녀는 깃펜을 내려놓은 후 기록을 소중히 책 안으로 갈무리했다. 그리고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책을 덮고 아련한 눈길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한참 동안 천장을 응시하던 비비앙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럽다.” 뭐가 부럽다는 걸까? 이윽고 비비앙은 주섬주섬 몸을 일으켜 자신이 베고 있던 베개를 뒤집어 벽에 기대놓았다. 그러자, 어떤 남성의 얼굴이 그려진 베개의 뒷면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녀는 그 앞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어앉고는, 한두 번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수, 수현 주인님….” 아직은 뭔가 어색한지 비비앙은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이내 굳게 마음을 먹은 듯, 눈동자에 힘을 주며 기어이 다음 말을 이었다. 몸을 배배 꼬면서. “부, 부디 이 음란한 비비앙에게…. 수현 주인님이…. 마음껏 벌을…. 내려주세요…. 끼야아아아아아앙!” 간신히 말을 끝마친 순간, 비비앙은 양손을 불끈 쥐더니, 높은 비명을 지르며 침대서 떼굴떼굴 구르기 시작했다. “했어! 했다고! 꺄아아앙! 몰라몰라!” 꺅꺅거리는 비명과 함께 베개에 머리를 정신 나간 듯 비비고, 다리로 이불을 미친 듯 쓸어 내린다. 이윽고 비비앙이 이불 안으로 재빠르게 파고들어가자, 곧이어 퍽퍽 소리와 함께 이불이 불룩불룩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마도 안에서 이불을 세게 걷어차며 난리를 쳐대는 모양이었다. 발광은 약 3분간 이어졌다. 3분이 지나자 스스로도 힘이 빠지는지 쉴 새 없이 들썩이던 이불이 잠잠히 잦아들었다. 얼마 있다가 이불 속에서 머리만 불쑥 내민 비비앙은, 뜨거운 숨결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설렘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한껏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우히히히.” 뭔가 위험한 냄새를 잔뜩 풍기는 미묘한 웃음소리. 그렇게 수현이 모르는 곳에서, 비비앙의 위험한 각성은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후유. 이로서 휴식 챕터는 이것으로 대강 마무리 지었네요. 새 에피소드를 위한 떡밥도 대강 뿌려놨고, 이제는 거두면서 터뜨려야죠. :) 수현이도 많~이 쉬었으니 만족하겠죠?(응?) 하하하.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독자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합니다! 네! 고장난선풍기 님이 그려주신 팬 아트로,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에요. 참 예쁘죠? :) 2. 크라우디스 : 쿠폰 감사합니다! _(__)_ 3. alsdkniqe : 황혼의 무녀는 바로 주지 않고 조금 더 지켜볼 생각이고요, 밤의 꽃은 수현이 치밀하게 골라냈습니다! 4. 천냥보은 : 이번 회도 재밌게 보고 가셨으면 좋겠어요~. :) 5. 낙원환상곡 : 이번 에피소드를 장식할 전쟁에서 진가를 드러낼 예정입니다. 하하. :) 6. 오피투럽19 : 하하, 죄송해요. 그런데 어제 오늘 올린 서 대륙 이야기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에요. 정말로, 굉장히요. 후후. 7. 가식적썩소 : 수정 완료했습니다! 감사합니다! 8. KeaR、Royal : 아, 그러셨군요. 서 대륙이 미국인들이 주로 모이는 곳이라 외국 대륙이라는 것을 드러내려고 영어로 썼어요. 하하. :) 9. mc레코2 : 그럼요! 당연히 아니요~. :) 10. ads123 : 각 클래스의 특성화 능력치는 다른 능력치의 보조를 받습니다.(보조를 받는 경우, 정도 또한 클래스에 따라 다릅니다.) 현재 수현의 체력이 90이면 민첩 101은 감당할 수 있습니다. 다만 현재 화정을 품고 있는 상태라, 화정을 같이 쓰게 되면 체력 90으로 완전히 는 감당할 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앞으로 화정을 꼭 사용해야 할 일이 있으므로 신체의 균형을 위해 포인트를 남겨둔 겁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모두 체력에 몰아넣자니, 앞으로 벌어질 일에 101로 올리지 않으면 미묘한 불안감을 느끼는 거죠. 앞으로 나타날 상대가 화정과 비슷한 힘을 지니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으니까요.(여기서 중요한 건, 화정과 101 능력치를 똑같이 보시면 안됩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93 / 0933 ---------------------------------------------- 분기점(分岐點) 머셔너리 클랜 하우스, 3층 소회의실. 세로로 놓여있는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테이블이 보인다. 그 테이블의 좌우에는 각각 5명의 사용자들이 가지런히 앉아있었다. 항상 어느 한쪽에 자리가 하나 비어있었는데, 이번에 한 명을 추가로 영입함으로써 수를 맞추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회의는 새로 들어온 클랜원이 첫 번째로 참가하는 회의였다. 묘하게 만족스런 기분을 느끼며, 나는 떠듬떠듬 보고하는 안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어제 부로 창고에 마력의 파장을 이용한, 출입통제 마법 진 설치를 완료할 수 있었습니다.” “어제 확인했어. 그럼 현재 창고 출입가능 인원 현황은 어떻게 되지?” “형이랑…. 아, 죄송합니다. 클랜 로드님과 사용자 고연주, 사용자 정하연입니다.” “그래 알겠다. 수고했어. 사용자 신상용도 수고했습니다.” 안현은 안도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다가 깜짝 놀라며 나를 돌아보았다. 옆에서 빙긋 웃고 있던 신상용 또한 마찬가지였다. 둘은 서로를 쳐다보더니 이내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나 또한 그들을 보며 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안현이 처리한 일 치고는 워낙 깔끔해서 말이지.’ 안 봐도 비디오. 안현은 본인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었으니 신상용에게 도움을 청했을 것이다. 허나 그것을 굳이 문제 삼을 생각까지는 없었다. 도움을 청하는 게 나쁜 일도 아니거니와, 이러면서 클랜원들간의 교류를 활성화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다음으로 정하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 머셔너리 클랜에 의뢰가 하나 들어왔어요.” 척하면 척. 정하연은 내 시선을 받자마자 입을 열었다. “호. 의뢰요? 궁금하네요. 어느 클랜에서 의뢰가 온 거죠?” “클랜은 아니고…. 개인 의뢰에요. 그리고 의뢰라고 하기도 좀 그런 게 있어서….” “개인 의뢰? 의외네요. 아무튼 괜찮습니다. 말씀해보세요.” “그게…. 응….” 내 기대 어린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정하연은 어색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더니 아래, 정확히는 내 허벅지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녀를 따라 고개를 숙이자 회의가 지루한지 하품을 쩍쩍 하는 아기 유니콘이 보였다. 녀석은 내 허벅지 위에서 얌전히 다리를 접은 채 꼬리를 살랑거리는 중이었다. 요즘 들어 부쩍 건방져진 아기 유니콘을 보고 있자, 정하연의 조심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유니콘의 피를 뽑을 수 있겠냐고 했어요. 비싼 값에 사겠다고….” “뀨뀨?!” 화들짝! 그 말을 들은 순간, 아기 유니콘은 몸을 한 번 움찔하더니 테이블 위로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이윽고 녀석이 원망이 뚝뚝 묻어나는 소리로 울어 젖히자 정하연은 안절부절못하며 고개만 좌우로 저었다. 이내 눈물이 가득 괸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아기 유니콘의 등을 쓰다듬으며,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미친놈이군요.” “그럼 그렇게 답신을 보낼까요?” “아니요. 정중히 보내세요. 아직 유아 유니콘이라 그런 의뢰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알겠어요. 클랜 로드.” 그렇게 확답을 해주자 비로소 안심했는지, 아기 유니콘은 내 복부에 볼을 비비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중간중간 날카로운 뿔이 배를 긁어 잠시 방향을 돌리려는 찰나, 똑똑 소회의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렴.” 그리고 고연주가 상냥히 입을 열자,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끼익. 방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적당히 속살을 드러내는 하녀 복장의 여성이었다. 밤의 꽃에서 클랜 하우스의 고용인으로 들어온 사용자. 누가 옷을 입혔는지 참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훤히 노출된 허벅지에 가터벨트가 보인다는 것이었다. “아, 아, 아, 아, 안녕하세요…. 마, 마실 것 좀 가져왔어요….” “그래 고맙구나. 그럼 테이블에 하나씩 놓아줄래?” 고연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그림자 여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 고용인의 목 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하아…. 하아….” 그 순간 어디선가 들리는 불쾌한 호흡. ‘저놈이.’ 마실 것을 들고 들어온 고용인은 귀여운 인상을 한 여성이었다. 뭐가 그리 무서운지 한껏 긴장한 얼굴로 마치 아기 새처럼 떨고 있었다. 그리고 고용인을 보는 안현은, 하녀 복장에 취향이 있는지 연신 불쾌한 신음을 흘리며 콧김을 푹푹 내뿜는 중이었다. 탁탁탁! 탁탁탁! 이상한 소리는 아니었다. 그저 내 쪽으로 걸어오는 도중 너무 심하게 떨었는지, 찻잔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다만 이유정이 짐승을 보는 눈길로 안현의 손 위치를 확인했고, 녀석은 아무리 그래도 때와 장소는 가린다는 눈빛으로 항변했을 뿐. “그, 그럼 이,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이윽고 테이블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에게 찻잔을 내려놓은 후, 고용인은 허둥지둥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럼 보고 받을 것도 거의 받았고…. 잠시 휴식 시간을 가져볼까요?” 클랜원들은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에 놓여진 찻잔을 들고 코로 향기를 음미하자 절로 인상이 찌그러질뻔했다. 솔직히 못 탔다고는 할 순 없지만, 고연주가 타주던 차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하지만 그런 기색을 내뱉으면 임한나가 눈치를 볼 수도 있기에 묵묵히 참고 찻물을 들이켰다. “웩! 맛없어! 무슨 맛이 이래!” “퉤! 아우, 연주 언니가 타주는 차랑 왜 이렇게 차이가 나?” ‘…….’ 하지만 이어진 안현과 이유정의 퍼포먼스는 대단했다. 역시나, 임한나는 미약이 미소 짓곤 있었지만 얼굴에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바로 화제를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얼마 전 백한결의 교육을 정하연에게 부탁했기에, 주의 돌리기 좋은 화젯거리도 있었다. “사용자 정하연.” “후룩. 네?” “그러고 보니 백한결의 교육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아.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어요. 머리도 똑똑하고, 재능도 있고, 무엇보다 참 노력을 많이 해요.” 정하연은 입술에 묻은 찻물이 마르도록 백한결을 칭찬했다. 녀석의 진명은 천의 재능. 확실히 이름값을 하는 모양이었다. 기꺼운 마음에 백한결을 쳐다보자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뚱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안솔은 덤이었다. 귀엽게 노는 둘을 보며 속으로 웃던 도중, 문득 임한나가 눈에 밟혔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껏 새로운 클랜원을 받을 때마다 한 번씩 홍역을 치렀던 터라, 임한나가 그런 분위기를 반전시켜주기를 어느 정도 기대하고 있었다. 나는 찻잔을 기울이며 가만히 그녀를 주시했다. 임한나는 어제 부로 정식으로 머셔너리 클랜에 가입했고, 클랜원으로써 처음으로 참가하는 회의였다. 과연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못 궁금했다. ‘회의 때도 조용하고. 아직은 크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응?’ 그때였다. 과연 궁수라서 감이 좋은지, 임한나는 순식간에 고개를 들어 나와 시선을 맞췄다. “…후룩.” “…홀짝.” 그리고, 나를 응시하는 임한나의 눈동자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집무실 의자에 몸을 묻은 채 차분히 기록을 읽는다. 오른손에 들고 있는 기록에는 머셔너리 클랜의 현재 스쿼드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있었다. 클랜 하우스의 기초 정비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고 봐도 좋았다. 이제 남은 것은 클랜원을 확충하는 것이었다. 고연주의 말대로 머셔너리는 마법사들이 많다. 하지만 그것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면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근접 계열, 사제를 들이면 지금으로서는 좋고 궁수도 한 명 더 들이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결국에는 어떤 클래스를 받아들여도 크게 상관은 없으되, 가장 중요한 건…. 똑똑! 한창 생각을 하던 도중, 집무실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벌컥!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사람은 이유정이었다. 그녀는 평소와는 다른 조신해 보이는 걸음걸이를 보이더니, 내게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곱게 입을 열었다. “소녀 이유정, 클랜 로드님을 뵈어요.” “푸. 그래, 어쩐 일로 방문하셨는지요? 호출도 안 했는데요.” “소녀 클랜 로드님의 수행원으로써 꼭 보고해야 할 것이 있어 감히 문을 두드렸나이다.” “장난은 그만하고. 이리 가까이 와.” 스스로 해놓고도 웃겼는지, 이유정은 배를 잡으며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저번 주 회의에서 이유정을 클랜 로드 수행원으로 선발했다. 본인은 뭔가 대단한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솔직히 열 명 남짓한 클랜에서 무에 대단할 게 있겠는가? 내가 그녀를 수행원으로 선발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스쿠렙프를 돌려준 이후, 주의 깊게 지켜보기 위해서라는 것. ‘순결의 머리띠만으로는 영 불안해서 말이지.’ 이윽고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이유정을 보며, 나는 가볍게 한마디 툭 던졌다. “앞으로 클랜원들한테도 그렇게 해보는 게 어때? 특히 안현이 좋아하겠다. 바로 사귀자고 할지도 몰라.” “오빤 농담도. 안현이랑 사귀느니 차라리 김한별이랑 사귀어서 레즈비언을 하겠어.” 수행원을 함으로써 거둘 수 있었던 예상치 못한 소득 중 하나는 이유정에게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김한별의 이름을 들으면 표정부터 굳어지곤 했는데 지금은 상당히 나아진 상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둘이 친하게 지낸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아직도 애들과 김한별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얼음 벽이 쳐져 있었다. “그래. 보고할게 있다고 했지?” “응. 오빠 어제 이스탄텔 로우의 조사단이 귀환한 건 알고 있지?” “알고 있어.” “방금 전 카운터에 있던 고용인한테 전령이 왔다네? 신전에서 오빠를 한 번 뵈었으면 좋겠다고 했나 봐.” ‘신전?’ 문득 일전 백한결을 대동하고 신전에 방문했던 기억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차분히 머리를 굴렸다. 이스탄텔 로우의 조사단은 어제 귀환했다. 신전이 나를 보길 원한다. 두 사건의 연관성을 더듬어보자, 곧바로 하나의 해답을 내릴 수 있었다.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까. 내일 내가 방문하겠다고 해.” “아니, 아니야.” “?” “신관이 직접 오겠다고 했어. 오빠만 괜찮다면 내일 조금 늦더라도 클랜 하우스에 방문하고 싶다는데? 그…. 어디였지? 아 맞다. 이스탄텔 로우의 클랜 로드와 함께.” ‘뭐라고?’ 저번에 들은 부랑자 일이겠다 싶어 고개를 주억이다가, 정작 중요한 내용을 뒤에 말한 탓에 살짝 놀라고 말았다. 이유정의 말은 권한을 가진 거주민이 직접 방문하겠다는 소리였다. 특히 신전의 거주민들은 권한의 정점에 서있는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직접 클랜 하우스를 방문한다는 일은 드물다. 더구나 이스탄텔 로우의 클랜 로드, 한소영까지 함께 온다고 했으니 분명 보통 일은 아니리라. “어떻게 할까? 오라고해?” “응. 그리고 정하연한테…. 아니다. 그건 내가 호출해서 얘기할 테니까 일단 너는 바로 답신 보내.” 그렇게 대답한 순간이었다. 근래 들어 잔잔했던 심장이, 까닭 없이 다시금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 “읔! 으읔!” 고통에 젖은 신음이 방안을 울렸다. 소리의 근원지는 침대였다. 침대에 누워있는 여성의 상태는 무척 심각해 보였다. 손은 덜덜 떨면서도 이불을 그러쥐고 있었다. 식은땀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은 얼굴의 이곳 저곳에 들러붙어있다. 얼굴빛은 창백하다 못해 시퍼런 빛이 나돌 정도였다. “해밀 로드. 이분께서 어쩌다 이지경이 되신 겁니까.” “…반시에게 당했습니다.” “반시라면…. 아니 왜 그런 위험한 곳을….” “…….” 방에는 여성 홀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두 명의 남성이 침대에 누운 여성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한 명은 해밀 클랜의 로드로 불렸으니 김유현일 테고, 다른 한 명은 한(韓) 클랜의 로드로 불렸으니 성현민이 분명했다. “악! 아악!” 다시 한 번, 여성의 커다란 신음이 방 내부를 왕왕 울린다. 김유현은 귀를 막고 싶다는 얼굴을, 성현민은 착잡한 표정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둘은 고통스러워하는 여성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는지, 하염없이, 그저 하염없이 여성을 보고만 있었다. 한동안 눈을 질끈 감고 있다가, 성현민이 차분히 표정을 가라앉히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렇게 알려주시고, 이야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저희를 찾아올 생각을 하셨는지요?” “추측이었습니다. 효을이 저에게 오기 전에, 한 클랜에 있었다고 하더군요.” “아…. 그렇군요. 일단 저희도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뿐만 아니라 고려 클랜도 발벗고 나서는 중입니다. 일단 남부에는 연락을 넣어놨는데…. 아시다시피 중앙, 북부, 서부에서 지금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저희도 놀고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 2주…. 아니, 2주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이러다 남은 시간 안에 엘릭서를 구하지 못한다면….” “해, 해밀 로드.” 그 뒤의 상황은 차마 상상도 하기 싫은지 둘은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효을’이라 불린 여성의 고통이 깊어질수록, 두 남성의 시름 또한 점점 깊어져만 갔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챕터 분기점(分岐點), 시작하겠습니다. :) 이번 챕터를 기획하게 된 중심은 바로 ‘단축’에 있습니다. 하하. 김유현과의 만남은 4편 기준으로, 아마 이번 챕터 마지막 또는 다음 챕터 1편에 걸쳐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물론 오차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도 매의 눈인 독자분들이 몇 분 보이네요. 설마 그걸 기억하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예전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해주신다는 것은 저로서는 정말로 기분 좋은 일이거든요. :) 『 리리플 』 1. 스이린카 : 응? 헉! 1등 축하합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이번 회도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 2. DrayBurn : 페가수스의 알, 요정 여왕의 알의 부화에는 조금 시간이 걸릴 예정입니다. :) 3. 변함없는하루 : 침대 내용은 곧 나올 예정입니다. 물론 불편하실 분들을 위해 스킵은 상단에 적어놓겠습니다! 4. 디럭스샌드위치 : 음. 그러셨군요. 아무래도 비비앙의 특성을 조금 부각시키려다 보니 몇몇 분들의 심기를 거슬리게 한 것 같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들 드리겠습니다. _(__)_ 5. ads123 : 전 회 리리플에 답변이 있습니다! 혹시나 해서 여기서도 말씀 드릴게요. :) 6. CemeteryGates : 그 부분을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읽으시다가 잠깐 웃으셨으면 하는 소박한 소망이 있네요. :) 7. hohokoya1 : 항상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부를 장식하기 전에 101 사용자 한 명 출현할 예정입니다. :) 8. 시룡 : 어 정말요? 저는 무척 마음에 들어요. 하하. 뭔가 오묘~히 바라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 후후. 아, 안솔에 관해서는 음. 몇몇 분들은 눈치채신 것 같기도 한데, 노 코멘트 하도록 하겠습니다! 용서해주세요!(정 궁금하시면 쪽지로….) 9. 와룡선생a : 와룡선생a 님! 지금 비비앙의 성향을 무엇으로 바꿀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ㅜ.ㅠ 10. 푸른산호숲 : 아앗. 푸른산호숲 님! 쉿! 쉿! 으어엉. ㅜ.ㅠ 헤헤헤.(?) 그래도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94 / 0933 ---------------------------------------------- 분기점(分岐點) 다음날, 클랜 하우스는 아침부터 분주해졌다. 이스탄텔 로우 클랜과 신관의 방문 요청. 바꾸어 말하면 대표 클랜과 모니카의 신전이 찾아온다는 소리였다. 특히 둘이 동행해서 온다고 하니 가벼운 방문이라 여기기엔 뭔가 심상찮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다. 정하연은 깔끔한 것을 선호해서 그런지, 이 소식을 받자마자 물 만난 물고기가 되었다. 솔직히 많이 올 것 같지도 않았고, 그런 만큼 4층 귀빈실에서 접대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클랜 하우스에 입주한 이후 줄곧 닫혀있었던 대회의실을 개방하고 내부를 청소하는 등 앞장서서 대청소를 진두 지휘했다. 그에 따라 고용인들은 들어온 지 이틀 만에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그렇게 맞이할 준비를 모두 마쳤을 때는 이미 해가 하늘의 한가운데에 올라가 있었다. 그러나 중천에 떠있던 해가 서서히 서쪽으로 넘어가고, 정원에 짙은 황혼이 뿌려질 즈음에도 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고용인들은 모두 퇴근한 상태였다. 몇몇 눈치 빠른 밤의 꽃들은 필요하면 남겠다고 해주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녀들이 없는 게 더 도움이 되었다. 어찌됐든 조금 늦을 수 있다는 말은 어제 들었다고 해도, 공연스레 김샜다는 기분은 떨칠 수 없었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은 채 나는 천천히 귀빈실을 둘러보았다. 아름다운 문양이 그려진 높은 천장, 화려한 장식물로 치장된 실내장식은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해주고 있었다. 방의 중앙에는 예쁜 원형 탁자가 놓여있었는데 사위로 세 개의 소파가 둥글게 배치되어있었다. 몇 명은 오늘의 대청소를 퍽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았지만 난 의미 없이 하루를 날린 기분이었다. 귀빈실 안이라곤 해도, 지금 마음 같아서는 연초를 태우고 싶을 정도였다. 잠깐 고민했지만 결국 품속에서 연초를 한대 꺼내고 말았다. 귀빈실의 벽면에는 공기를 정화해주는 주문이 걸린 마법 진이 각인되어 있기에 다른 사람만 없으면 괜찮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점화석을 들어 불을 붙인 찰나였다. 우당탕! 쿵쾅쿵쾅! 벌컥! “오빠! 큰일났어!” “푸! 콜록콜록!” ‘하여간 꼭 이러더라.’ 현대에서도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다가 포장마차 오뎅 하나 집어 들면 내가 기다리던 버스가 오곤 했다. 나는 세게 기침을 해 목에 걸린 연기를 뱉었다. 그리고 활짝 열린 방문을 바라보자, 급하게 뛰어올라왔는지 다급해 보이는 얼굴을 한 이유정이 보였다. “무슨 큰일이길래 그렇게 급해. 숨 먼저 골라.” “아, 아니! 오빠! 지금 어제 온다는 사람들 왔단 말이야! 그런데 연주 언니랑 싸움이…!” “뭐? 싸움?” “빨리빨리! 분위기 완전 살벌해! 지금 완전 난리 났어!”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복도로 달려나갔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직 빨리 1층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4층, 3층, 2층 계단을 내려가 1층으로 가까워질수록 온몸을 짜릿하게 찌르는 뭉클뭉클한 살기가 느껴졌다.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이만큼이나 짙은 살기라면, 거의 10강 급 사용자 두 명이 맞붙어야 나올 수 있는 수준이었다. 전속력으로 달려서 그런지 계단은 순식간에 주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1층이 일부 보이는 계단을 한층 남기고,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1층에는 여러 명의 사용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둘러싸고 있는 중앙에는, 두 명의 여성이 서로의 숨결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대치하고 있었다. 살기의 근원지는 바로 그곳, 고연주와 연혜림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어디서 썩은 밀대 냄새가 풀풀 나나 했는데, 걸레의 공주께서 오셨네?” 내가 도착했음을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도도히 팔짱을 끼고 있던 고연주는 문득 한 손으로 코를 살며시 쥐고선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말투엔 빈정거림이 듬뿍 묻어나고 있었다. “네 그림자에서 나는 냄새가 아니라? 그나저나 걸레의 공주라니…. 창녀의 여왕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 이에 질세라 양손을 옆구리에 짚고 허리를 빳빳이 세우던 연혜림 또한 만만찮게 반격했다. 그러자, 둘은 함께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분명 옥구슬이 흘러가는듯한 웃음소리였지만 눈을 맞추고 있는 둘의 시선에는 진득한 살기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예전에 소집령이나 사용자 아카데미에서는 잘 참는가 싶더니, 결국엔 터져 나온 모양이었다. 이대로 계속 두면 커다란 사달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기에, 나는 멈췄던 걸음을 바삐 움직여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연혜림!” 날이 서렸으면서 차가운, 그러나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로비를 쩌렁쩌렁 울렸다. 위에서는 시선이 닿지 않던 공간이 계단을 내려가자 비로소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1층 입구에는 한소영과 예전에 한 번 본 기억이 있는 여성 신관이 서있었다. “잠시 나가있어.” “크, 클랜 로드.” “두 번 말 안 해. 나가서 기다리고 있든, 먼저 돌아가든 해.” “…….” 차마 내가 나서기도 전에 한 명이 나서 상황을 정리했다. 한소영의 ‘명령’은 거부할 수 없는 서릿발 같은 매서움을 지니고 있었다. 처형의 공주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지만, 이내 고연주를 날카롭게 쏘아보며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윽고 휙 몸을 돌리는 연혜림을 보며, 고연주는 나른히 비웃었다. 아니, 비웃으려고 했다. “호호. 잘 가렴, 꼬맹이….” “사용자 고연주.” “크, 클랜 로드?”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제야 내가 온 것을 느꼈는지, 고연주는 당황하며 몸을 돌렸다. 천천히 중앙을 향해 나아가며,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숙소로 돌아가 있으세요.” “…알겠어요.” 연혜림이 먼저 물러나서 그런지 고연주는 생각보다 얌전히 대답했다. 어느새 로비를 가득 채우는 어색한 분위기. 나는 바로 한소영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직접 안내할 생각이었다. * 결국 한소영과 여성 신관은 내가 직접 귀빈실로 안내해주었고, 그것으로 소란을 잠시 진정시킬 수 있었다. 까닥 잘못하면 일이 크게 번질뻔했지만 한소영의 신속한 대처와 나의 때맞은 등장으로 일단락 지을 수 있었다. 물론 단순히 거기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죄송해요. 머셔너리의 클랜 하우스에서 소란을 피운 것은 진심으로 사과 드려요.” “괜찮습니다. 사용자 고연주와 연혜림 사이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더군요.” “바로 보셨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혜림이를 데려오는 게 아니었는데…. 오늘 일은 단단히 일러둘 테니 너그러이 넘어가주셨으면 좋겠어요.” “정말 괜찮습니다. 저 또한 고연주에게 주의를 주도록 하겠습니다.” 한소영의 적절한 조치와 선(先) 사과. 대표 클랜, 클랜 로드의 신분임을 감안한다면 나름대로 양보를 했다고 볼 수 있었다. 나 또한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그녀의 사과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어찌됐든 이젠 사과도 충분히 받았으니,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였다.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는 깜짝 놀랐습니다. 설마 두 분이 함께 오신다고 하실 줄은 몰랐거든요.” “원래는 조금 더 일찍 올 생각이었는데, 다른 곳도 들르다 보니 조금 시간이 지체되었어요.” “예…. 그렇군요. 그럼 어떤 일로 방문하셨는지 들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에요.” 한소영은 깍듯이 대답하고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여성 신관이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예의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손가락을 덜덜 떨고 있는 상태였다. 아마 10강의 살기를 근접한 거리에서 받아 그 여파가 아직도 남은듯했다. 이윽고 신관은 기다란 숨을 한 번 내쉬더니 이내 살며시 입술을 열었다. 이윽고 시작된 신관의 이야기는 솔직히 말해 예상범주 내에 있었다. 이번 조사단이 머셔너리가 이루어낸 성과를 확인했으며 그에 따라 클랜 랭크가 상승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의 흔적을 따라가던 도중 ‘몰이’의 가능성이 높은 단서를 발견했고, 섬망의 산 주변에서 부랑자들의 흔적 또한 찾았다는 것이었다. 그 중 한가지 흥미를 끌은 것이 있었다면 부랑자들이 다시 모니카로 돌아온 흔적을 찾지 못했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그렇다면 사용자의 탈을 쓴 부랑자가 아닌, 천생 부랑자라는 소리군요.” “아니요. 조사단이 출발하기 전 제가 따로 요청을 했어요. 혹시 부랑자가 도시서부터 머셔너리 분들을 따라갔는지 흔적을 잡아달라고 했죠. 흔적이 너무 많아 잡지는 못했지만, 아마 다른 문을 통해서 옆쪽으로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어요.” “그럼 도시에서 나갔되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 말인가요?” “확실하진 않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고 있어요.” 한참 동안 얘기해서 목이 마른 지 신관은 다시 찻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딱히 벌벌 떨 일은 아니었다. 탈을 썼든 뭘 썼든 부랑자야 원래 이곳 저곳 돌아다니는 놈들이었으니까. 다만, 이대로 넘기기에는 뭔가 꺼림직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아직까지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은 낮은데…. 여러 부분을 염두에 두어야겠군.’ 아무튼 이 정도만해도 큰 수확이었기에, 나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단일만해도 신경 쓰이셨을 텐데, 따로 알아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굳이 찾아오실 필요까지야…. 제가 찾아 뵈었어도 되는 일이었는데요.” “아, 실은 한가지 말씀 드릴게 더 있어요. 실은….” “?” “헤르세. 잠시만요.” 여성 신관의 이름이 헤르세였던가. 한소영은 간간이 한두 번 부연한 것을 제외하고는 지금껏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나서자, 헤르세는 눈빛을 형형히 빛내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 어딘가에는 뭔지 모를 간절함이 섞여있었다. 한소영은 살짝 숨을 정리하는 듯싶더니 이내 나를 똑바로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풍기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앞선 얘기들이 들러리였고, 지금부터가 본론인 모양이었다. “머셔너리 로드. 이제부터는 제가 말씀 드릴게요.” “경청하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리겠어요. 혹시 머셔너리 클랜에서 엘릭서를 보유하고 있나요?” “네…?” 너무도 갑작스러운 말에, 나도 모르게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말았다. 의아한 어조로 되묻자 한소영은 그것을 나름대로 해석했는지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없으신가 보군요…. 하긴…. 아, 미안해요.” “아, 잠시만요. 엘릭서는 갑자기 왜 찾으시는 거죠?” 한소영의 얼굴이 삽시간에 피로감에 물들기 시작했다. 혹시 오늘 그녀가 늦게 온 이유가 엘릭서를 찾으러 이 클랜 저 클랜 돌아다닌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내 물음에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꾸만 사과의 말씀을 드리게 되네요. 미안해요, 머셔너리 로드. 이유를 밝히곤 싶지만 복잡한 속사정이 얽혀있어 자세히 말씀드릴수가 없어요.” “머셔너리에서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혹시 이번 조사단에서 이스탄텔 로우에 부상자가 생겼나요?” “아니에요. 조사는 성공적으로 끝마쳤어요. 이스탄텔 로우에서 필요한 게 아니라, 동부 도시에서 요청이 들어온 거예요. 동부 클랜에서 엘릭서가 필요할 정도로 목숨이 굉장히 위급한 사용자가 있거든요. 그 사용자는 제가 잘 아는 사람이에요.” “그렇군요. 궁금한데, 전혀 알려주실 수 없으신 건가요?” 한소영은 잠시 생각하는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번에 새로 창설한 클랜에 해밀 클랜이란 곳이 있어요. 그곳에서 엘릭서가 필요하다고 해요. 이게 알려줄 수 있는 전부….” “네? 해밀 클랜이요?” 그 말을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은 기분이 들었다. * 밤이 깊었다. 본관 4층에 마련한 개인 숙소에 들어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해보았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엘릭서. 현재 머셔너리에서 보유하고 있는 엘릭서는 총 세 병이었다. 원래 두 병을 갖고 있었는데 한 병은 비비앙에게 사용했고, 후에 카오스 미믹에서 추가로 두 병을 얻었다. 이미 사용용도는 모두 정해놓은 상태였다. 한 병은 내 것, 한 병은 김유현, 한 병은 한소영. 한소영의 목숨이 위급에 처했다면 두말하지 않고 바로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필요한 사용자는 한소영이 아니었다. 그녀와의 대화가 끝난 이후 머릿속이 너무도 복잡했다. 나는 눈을 꾹 감은 채 그녀와 나눴던 대화를 천천히 떠올려보았다. ‘해밀 클랜이요.’ ‘김유현? 해밀 클랜의 로드와 아는 사이인가요?’ ‘아니요. 필요한 사용자는 김유현은 아니에요.’ ‘반시에게 당한 사용자인데, 현재 목숨을 구할 방법이 엘릭서밖에 없다고 해요. 2주도 채 남지 않았다고 하니….’ 처음에는 해밀 클랜이라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친형 김유현이었다. 나는 곧바로 되물었고, 김유현이 아니라는 대답에 안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복잡함이 가신 것은 아니었다. 1회차 시절, 이때의 나는 평범한 사용자에 불과했다. 광장에서 당일치기용 캐러밴을 구하는 게 일상인, 하루 벌어먹고 하루 살기 바쁜 몸. 내가 형과 우연히 만나고 해밀 클랜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훨씬 더 이후의 일이었다. 물론 형의 행보는 대략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해밀 클랜은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승승장구해 후에 최고의 클랜 중 하나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러나 내가 가입하기 이전 시절의 세세한 속사정까지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말인즉슨, 현재 해밀 클랜에서 엘릭서가 필요한 사용자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알려주지 않는 걸까…. 누구길래?’ 생각이 점점 많아질수록 잠이 싹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한동안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지만, 결국 자는 것을 포기하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지하 연무장에서 땀이라도 한 번 빼야 잠이 올 모양이다. 싱숭생숭한 마음에 침대에서 나와 일월신검을 잡은 순간이었다. 끽…. 그때, 문이 조심스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오늘 독자분들께 한가지 알려드릴게 있습니다. 점심에 아는 작가님께 말씀을 들었는데요, 몇몇 노블레스 이용자 분들께서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아 오해를 풀고자, 그리고 혹여나 독자분들께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는 분들이 있을까 싶어 후기를 빌리게 되었습니다. :) 조아라에 소설을 올릴 때 보면, ‘내용’과 ‘후기’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내용은 말 그대로 연재 내용을 올리는 곳이고, 후기는 작가의 후기 내용을 올리는 곳입니다. 그리고 후기에 들어가는 내용은 ‘용량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즉 후기는 용량에 포함되지 않으니 베스트지수 산정에도 직접적으로 포함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예전에 이 문제로 조아라에 한 번 문의한적이 있습니다. 그때 받았던 답변을 그대로 붙여드릴게요. 로유진 회원님! 안녕하십니까. 조아라 고객센터 '블루'입니다. 연재란이 아닌 후기란은 연재분량으로 처리되지 않습니다. 리리플 등을 연재란에 작성할 경우 연재 분량으로 인식되어 큰 문제가 되나, 후기란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점 안내 드립니다. 조아라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조아라는 1회를 기준으로 10K이상 올리면, 그 회에 대해서 가장 높은 베스트지수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9K이하부터는 베스트지수를 얻는데 손해가 있지만, 10K이상부터는 12K를 올리든 16K를 올리든 10K와 동일한 점수를 얻습니다. 그리고 저는 최근 순수 연재 분량 11K(메모장 기준 10K)로 업데이트하고 있고요. 그러니 후기를 길게 써서 용량을 늘린다는 오해는 거두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 오늘 리리플은 하루 쉬겠습니다.(이번 회 코멘트랑 합쳐서, 다음 회에 함께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D PS. 다음 회는 성애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분께서는 해당 부분을 생략해주세요! 0295 / 0933 ---------------------------------------------- 분기점(分岐點) (이번 회는 성애 장면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원하시지 않는 분께서는 해당 부분을 생략해주시길 부탁합니다.) “수현, 자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고연주였다.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은 잿빛 눈동자 한 쌍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일어나있었네요.” 내가 일어나있는 것을 봤는지 달덩이 같던 눈동자가 일순 예쁘게 휘었다. 고연주는 가볍게 웃으며 내게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박. 자박. 한걸음 한걸음. 느릿한 걸음소리. 창가를 통해 들어오는 달빛은 어슴푸레하면서 흐릿했다. 소리는 월광이 스며있는 장소에서 멈췄고, 그제야 비로소 고연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윽고 달빛에 반사된 그녀의 자태는, 살짝 충격 먹을 정도로 외설적이고, 유혹적이었다. 어깨는 물론이고 가슴 골까지 훤히 드러내는 상의. 상의와 이어지는 하의는 속옷이 비쳐 보일 정도로 짧고 투명했다. 분명 야하기 그지없는 일체형 원피스였지만, 고연주가 입으니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치명적이라 느껴질 만큼 유혹적이지만 천하지 않다. 살짝 되바라진 느낌은 있지만 깊숙한 맛 또한 존재했다. “어젯밤 일을 사과하려고 찾아왔어요. 미안해요. 연혜림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이성을 잃었네요.” “알만한 사람이 그랬습니까? 쯧…. 아무튼, 다행히 일은 잘 덮었습니다. 개인적인 원한이 있다는 건 들었지만 다음부터 조심하도록 하세요. 경고는 이번 한 번으로 끝내겠습니다. 두 번은 없을겁니다.” “네, 그 말씀 가슴 깊이 새길게요.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다음부터는 먼저 시비를 걸어오지 않는 이상 그냥 무시하도록 하겠어요.” “알겠습니다.” 고연주의 목소리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녀 정도라면 허언을 할 리가 없으니 믿어도 될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려는 찰나, 고연주가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 “호호. 고마워요. 정말 조심할게요. 하지만…. 말로만 하는 사과는 진정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서 몸으로도 사과하겠다는 건가요?” 참 핑계 한 번 좋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스스로 말하고도 어이없다 여겼는지, 고연주도 민망한 눈웃음을 보였다. 아무튼, 내 반응을 무언의 승낙으로 받아들인 듯 그녀는 나를 향해 천천히 손을 내뻗었다. 이윽고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나긋한 손길이 느껴질 즈음, 나는 다시 침대로 몸을 눕게 되었다. 그러자 고연주는 쓰러지듯 몸을 허물어뜨리며 내 위로 몸을 겹쳤다. 콧속으로 농익은 육체의 향기가 진하게 흘러드는 것을 맡으며 나는 차분히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미약한 숨이 가슴이 간질이고, 보드라운 살결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잠시 동안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고연주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성심을 다해 모실 테니, 부디 저의 사과를 받아주시겠어요?” “사과가 기대되는군요.” “제법 달콤하실 거예요. 그런데 걱정이 하나 있어요.” “?” 갑자기 고연주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감돌았다. 의아히 바라보자, 고개를 치켜든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고연주의 눈매는 아까보다 더욱 휘어져, 초승달처럼 예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음~. 지금쯤 다들 별관에서 자고 있을 거고. 본관에는 아무도 없으니…. 오늘은 마음껏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그렇죠. 근데 뭐가 걱정인가요.” “그런데 그렇게 격렬하게 하기에는 수현의 체력이 너무 걱정 되서요. 혹시 오늘 너무 힘들어하시는 건 아닐지….” “…하.” 표정으로 보나 말로 보나 이것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예전에 했던 다짐을 되새길 수 있었다. *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아아아아아! 수, 수현! 아, 안 돼! 제바아아알!” 고연주가 미친 듯이 도리질을 치며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난 그녀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양손으로 젖가슴을 꾹 눌러놓고 있었다. 한 번 손을 강하게 그러쥐어 보자, 말캉한 감촉과 함께 압력에 따라 젖 무덤이 와짝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내 남성은 고연주의 소중한 곳을 사정없이 헤치며 뿌리 끝까지 들락날락하고 있는 중이었다. 예전과는 사뭇 다른 격렬한 정사에 고연주는 울부짖는 소리를 내었다. 그녀의 약한 모습을 보자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1회차 시절에는 오를 수 없는 나무라 여겼던 그림자 여왕이 지금은 내 아래 깔려 교성을 내지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미소를 베어 물고 말았다. “그, 그만! 수현! 자, 자, 잘못…! 제발 그마아아안!” 다시 한 번 강하게 파고 들어갔다. 고연주는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러대었다. 그에 아랑곳 않고 한층 허리를 세게 놀리자, 등뒤로 허우적거리는 그녀의 다리가 느껴졌다. 양손은 시트를 찢어져라 잡은 채 심하게 떨고 있다. 어느새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심란함은 깨끗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 자리는 짐승과 같은 욕망으로 점철된 정복욕이 대신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풀 수 없는 답답함과 복잡함을 고연주에게 대신 배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꽉 쥐고 있던 고연주의 젖가슴을 놓고 잘록한 허리로 손을 옮겼다. 그리고 깊숙이 박혀있던 남성을 빼내고 잠시 허리를 들었다. 그녀는 드디어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기대를 곧바로 배반해주었다. 허리를 쓰다듬던 손은 순식간에 엉덩이와 정강이를 거쳐 발목을 잡았다. 그대로 아래쪽에서 번쩍 들어올리자, 힘을 못 이겼는지 배가 안쪽으로 접히며 엉덩이가 올라왔다. 이윽고 고연주의 늘씬한 다리는 좌우로 살짝 늘어진 젖가슴 위를 지나 그녀의 머리를 사이에 두게 되었다. 고연주의 눈이 다시 절망감에 물들고 입술이 벌어진다. 나는 꽉 접힌 그녀의 발가락부터 V자를 그리고 있는 다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이윽고 꼭지점을 맡은, 치켜 올려진 엉덩이에 시선이 닿은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고 말았다. 진득한 액체로 번들거리는, 발갛게 부어 오른 소중한 곳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아래로 단 한 번도 본적 없는 고연주의 부끄러운 분문(糞門)이 수줍게 모습을 내밀고 있었다. “수현…! 제발 보지 말아요…! 부끄…! 흑!” 애원조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나는 다리를 더욱 넓게 벌렸다. 둥그스름한 엉덩이가 활짝 열리자, 그에 따라 소중한 곳들 또한 좌우로 벌어지며 자신의 음란함을 한껏 뽐내었다. 고연주는 신음을 내며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 상태를 유지하며 나는 불그스름한 구멍에 남성을 맞추었다. 그대로 음부를 향해 살짝 진입을 시도하자, 고연주의 허리가 이리저리 비틀렸다. 어떻게든 피해보려는 것 같지만 이미 끝부분은 걸친 상태였다. 오히려 그러한 행동은 더욱 커다란 쾌감과 함께 남성이 안으로 딸려 들어가는 결과를 불렀다. 고연주의 안에서 약한 저항이 느껴졌지만, 이미 밤새 수백 번은 들락날락한 곳이었다. 이미 길은 만들어져 있었다. 그대로 살짝 힘을 주자 남성은 이내 수월하게 안으로 파고들어 갔다. 그리고 나와 그녀의 사타구니가 맞부딪치는 순간 고연주의 몸이 크게 떨어 울렸다. 푹! “악!” 쑥, 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한 번에 뿌리 끝까지 들어가버렸다. 고연주의 안은 언제나처럼 뜨겁고, 포근했다. 내벽이 반사적으로 남성을 강하게 조여 들고 기분 좋은 압박감에 절로 신음이 흘러나온다. 꽉 물었다는 표현이 이럼 느낌일까? 당장이라도 사정할 것 같은 감촉을 즐기며 나는 여전히 발목을 붙잡은 채 아래로 힘을 실었다.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아, 아, 아, 아….” 고연주는 다시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직도 좁다고 생각되는 그녀의 안을 맛보며, 나는 천천히 허리를 흔들었다.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삐걱! 하지만 이내 빠르게 속도를 올리기 시작하자, 풍만하다 못해 커다란 가슴이 위아래로 덜렁이듯, 박자에 맞추어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고연주의 비명이 커지고 몸은 사정없이 흔들렸다. 붙잡고 있는 발목에서도 이따금 덜덜 떨리는 느낌이 전해져 들어왔다. “아, 아, 아, 악! 아, 아, 아, 악!” 서서히 배출하고픈 욕구가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나는 바로 손을 놓고 고연주의 상체를 덮어 눌렀다. 그러자 그녀의 젖가슴이 내 가슴에 짓눌리며 묘한 압력을 선사해주었다. 젖가슴 중 꼿꼿이 서있는 부분이 가슴팍에 이리저리 짓뭉개지는 감촉을 즐기며, 나는 더욱 열심히 허리를 놀렸다. “수, 현! 읔, 읔! 부, 부, 탁, 해, 해, 요! 이, 제, 그, 읍!” 고연주의 애원. 그 대답으로, 그녀의 고운 입술에 내 입술을 겹쳐주었다. 그러자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입술이 살짝 열렸고, 뜨거우면서 달콤함 숨결이 입안으로 흘러 들었다. 그것을 흠뻑 들이마시며, 나는 주저 없이 혀를 밀어 넣었다. 혀와 혀가 섞여 들자 비로소 지금의 뜨거운 열기를 체감할 수 있었다. 고연주의 입안에선 단내가 풍겨왔고, 살과 살이 맞부딪치는 곳은 서로의 땀이 비벼져 번들거릴 정도였다. 한 순간 고연주의 양손이 내 어깨를 밀어내는 움직임을 보였다. 나는 그것을 가볍게 털어낸 후, 오히려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스스로 느끼기에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더욱 거칠게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아, 끅! 아, 흑! 흑…. 아앙! 아아앙! 아아아아앙!” 철썩! 철썩! 철썩! 철썩! 철썩! 철썩! 철썩! 철썩! 물이 튀기고, 살과 살이 마찰하는 음란한 소리가 고연주의 비명과 이중주를 이루며 아름다운 화음을 울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 흑…. 아…. 흑…. 아….” 이제는 목소리를 낼 힘도 상실했는지, 고연주는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내며 몸만 움찔거리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끊을 듯이 허리를 휘감던 다리도, 격렬히 등을 긁던 손도 모두 힘없이 널브러져있다. 그것은 마치 실이 툭 끊긴 인형처럼, 내가 움직이는 대로 덜그럭거리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도 감각은 살아있는지 남성이 한 번 뽑혔다가 다시 들어갈 때마다 가냘프게 흐느낄 뿐이었다. 그 순간 아까부터 서서히 차오르던 사정의 욕구가 머리 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나는 허리를 들고 양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물결치듯 흔들리던 젖가슴을 쥐어 내 손안에 고정했다. 그러자 실처럼 가는 상태를 유지하던 고연주의 눈동자와, 힘없이 벌어져있던 입술이 일순 크게 열리었다. 그 반응이 기폭제가 되었는지, 나는 마지막으로 최대한 깊숙이 박음과 함께 움직임을 멈췄고, 그와 동시에 폭발하듯 터지는 절정감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새벽 내내 뜨겁게 달구어진 피가 남성으로 몰리고, 그것은 이내 고연주의 안으로 세차게 분출되었다. “헉…. 헉….” “아아아아…!” 꿀렁꿀렁! 꿀렁꿀렁! 남성은 진액으로 이루어진, 끈적거리는 액체를 거침없이 토해내었다. 내벽을 두드리듯 흘러 들어가는 새하얀 정(精)들. 한 번 토해낼 때마다 고연주는 약한 신음과 함께 몸에 경련을 일으켰다. 그렇게 사정의 여운을 즐기던 도중 도대체 몇 시간에 걸쳐 정사를 벌인 걸까, 얼핏 생각이 들었다. 이내 모든 정을 분출한 후 고개를 들자, 어느새 어렴풋하게 침대를 비추는 아침 햇살이 보였다. ‘설마 진짜 밤새…. 응?’ 그때였다. 쉬…. 조금 황당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무렵, 뭔가 하복부를 적시는 뜨끈한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깜짝 놀라 고연주의 소중한 곳과 결합돼있던 남성을 빼내었고, 얼른 허리를 일으켰다. 그리고 아래로 고개를 떨궈 사정없이 벌려진 그녀의 다리 중앙을 응시했다. 쉬…. 고연주의 소중한 곳에는, 하얀 액체가 흘러내림과 함께 노란빛이 감도는 물줄기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중이었다. 그녀가 실금을 해버리고 만 것이다. “고, 고연주.” “흑…. 흑….” 얼떨떨한 마음에 이름을 부르자, 고연주는 순간 눈물을 터뜨렸다. 그 와중에도 다리를 오므리려고 애쓰는 것 같았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 듯, 미약이 움직일 뿐이었다. 소리 죽여 우는 고연주를 보며 나는 멍한 기분을 느꼈다. 언제나 당당하고 여유 있던 그녀인데, 지금 내 앞에서 서럽게 울고 있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실수했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강하게 지배했다. 나는 뭔가에 홀린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손을 내뻗었다. “미안해요.” “흑…. 끅….” “고연주,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흑…. 왜…. 흑…. 너무…. 흐아앙…. 으아아앙….” 고연주는 뭔가 말하고 싶었는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결국 서글픔을 이기지 못한 듯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가, 반사적으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등을 보듬으며 달래기 시작했다. * 고연주를 안고 달랜지 30분 정도 지난 것 같았다. 그녀는 내 사과에 어떤 대답도 않은 채 그저 눈물만 흘리다가, 지쳤는지 까무룩 잠들고 말았다. 한동안 새근새근 잠들은 고연주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조심히 이불을 덮어주고 방문을 열어 밖으로 나와버렸다. ‘…….’ 착잡하다. 멍하니 복도를 걷고 있자 가슴을 콕콕 찌르는 죄책감이 느껴졌다. 문득 고연주와의 첫 관계를 가졌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지금보다 덜하긴 했지만, 둘 다 만족했고 서로의 감정을 확인했던 관계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머릿속의 복잡함을 떨치려고 그랬다는 것도, 고연주의 도발에 넘어갔다는 것도 모두 유치한 변명이었다. 오직 고연주를 남성으로써 정복하고 싶다는, 1회차서부터 이어져온 추레한 욕망이 지금 와서 폭발한 것이다. 그저 한숨과 함께 4층의 계단을 내려가며 나는 또다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다짐했다. 나중에 고연주가 일어나면 오늘 일은 정식으로 사과하겠다고. 그렇게 쓰디쓴 입맛을 다시며 계단을 돌아 3층 복도로 들어서려는 찰나였다. 타박타박. 그 순간, 누군가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자 2층 계단에서부터 사뿐사뿐 올라오는 한 명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발소리의 정체는 임한나였다. “안녕하세요.” “어머! 클랜 로드!” 임한나는 나를 보자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빡였다. “아침이라고 하기엔 조금 이른데요. 일찍 일어나셨네요.” “아, 네…. 원래 잠이 많은 편이 아니기도 하고, 새로운 곳에서 잠들려니 조금 낯설어서요. 그리고 클랜 하우스 이곳 저곳 좀 구경해보고 싶기도 했고요. 혹시 실례일까요?” “사용자 임한나도 머셔너리 클랜원입니다. 실례될 리가 없지요.” “너그러이 보아주셔서 감사해요.” 임한나는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살포시 미소 지어 보였다. 그리고 찾아온 조용한 침묵. 그녀도 대화가 끊기자 어색함을 느꼈는지, 내 시선을 피한 채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럼 이대로 잘 가라고 할까 고민하고 있자, 문득 임한나의 말문이 열렸다. “그런데 클랜 로드님께서는 어쩐 일로….” “잠시 3층에 창고 좀 들를 생각이었습니다.” “아…. 그러시구나….” “…괜찮으시면 같이 창고 구경하시겠어요?” 임한나는 여전히 바닥을 응시하며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내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해주었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복도를 앞장서서 걸으며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러브 하우스에서의 임한나는 상냥한 면모를 보이긴 했지만 부끄러워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나와 밤의 꽃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도 부탁할지언정 비굴한 면모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감 있고 흘러 넘치는 기품을 엿볼 수 있었달까. 마침 나이도 동갑이고 하니 적어도 어색하진 않을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어려워하는 기색이 보이고 있었다. 이윽고 창고 앞에 도착한 후 나는 중앙에 그려진 마법 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손바닥에 차가운 감촉이 닿는 순간 천천히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법 진은 파랗게 빛나며 반응하더니 이내 안에서 철컥, 잠금 장치가 풀리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현재 창고에 출입할 수 있는 인원은 저를 비롯해 총 세 명입니다. 보유하고 있는 장비가 조금 있는 편이라, 부득이하게 관리하는 중이에요.” “아, 들어봤어요. 마법 진으로 출입자를 판별하는 거군요.” “맞아요. 그럼 들어갈까요?” “네.” 나는 바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의 내부에는 저번 결산에서 보류 판정을 받은 장비들이 보기 좋게 진열되어있었다. 장비의 일부는 벽에 걸려있거나 진열대위에 놓여져 있었고, 나머지 알이나 금은보석 등 기타 물품들은 바닥에 가지런히 모아져 있었다. 그 중 물약들이 있는 곳을 헤치다가, 나는 조심조심 두리번거리는 임한나를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사용자 임한나는 몇 살이에요?” “저요? 스물네 살이에요. 그럼 클랜 로드께서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저도 스물넷입니다. 동갑이네요.” “아, 정말요? 다행이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자 한마디 툭 던졌을 뿐인데, 임한나의 반응은 의외로 놀라웠다. “뭐가 다행이에요?” “아. 그냥 동갑을 만났다는 게 좋아서요. 저는 이상하게 주변 사람들이 모두 연하 아니면 연상이었거든요. 그래서 친구 하나 있었으면 했거든요.” “친구라. 머셔너리에서 스물넷은 저 한 명인데. 그럼 저랑 친구할까요? 공식석상에서는 힘들겠지만, 사석에서는 말도 놓고요.” “아, 아니에요! 제가 어찌 감히 클랜 로드께….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건 아니었어요.” 사용자들은 모두 현대인들이다. 공식석상에서는 예를 갖추더라도, 사석에서 말을 놓는 경우는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 대단한 카리스마를 지닌 한소영도 몇몇 클랜원들에게는 사석에서 말을 편하게 하라고 허락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연혜림이라던가. 물약이 모아져 있던 곳을 보고 있자, 이윽고 노란 액체가 채워져 있는 세 개의 물병을 발견했다. 그 중 한 병을 집어 들고, 나는 숙였던 허리를 일으키며 말했다. “난 괜찮아요. 보니까 너무 어려워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런 태도가 이어지면 곤란하잖아요.” “그, 그럼…. 죄송하지만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네? 네. 말씀해보세요.” “저…. 저는 당분간 말을 높일 테니까, 클랜 로드께서는 저한테 말을 놓아주시면 안될까요? 그리고 저는 오빠라고…. 아. 이, 이건 아니에요.” ‘뭐지?’ 임한나의 표정은 어느새 발갛게 물들어있었다. 창고 구경하라고 데려왔는데 구경은커녕 모든 신경을 나에게 쏟고 있다. 문득 회의실에서 그녀와 눈을 마주쳤던 것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임한나의 눈동자는 기묘한 열망으로 차올라있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크게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그럼 앞으로 말 편하게 할게. 임한나.” “가, 감사해요. 저는 당분간 높이다가, 나중에 편해지면 그때 말씀 드릴게요.” “그러던가. 아. 나는 이만 나갈 건데, 조금 구경하고 있을래?” “으으응. 아니요. 저도 나갈래요.” 임한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윽고 창고에서 나와 문을 닫자, 그녀는 내 손에 들린 물병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병은 뭐에요?” “엘릭서.” “와…! 그게 엘릭서구나.” “응. 우연한 기회에 구할 수 있었지. 음…. 임한나. 이른 아침이긴 하지만, 부탁하나 해도 될까?” 임한나는 “그럼요.” 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고연주의 일도, 임한나도 일단은 한구석으로 밀어 넣는다. 지금 당장은 한소영에게 들은 이야기에 초점을 맞출 때였다. 해밀 클랜에서 엘릭서가 필요하다고 한다. 마음 같아서는 물불 안 가리고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단순히 형만 아니라, 클랜원 한 명 한 명이 내게는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모든 일에는 절차와 순서라는 게 있는 법이다. 마음만 먹으면 동부 도시로 가서 형을 만나는 일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동부와 남부가 암묵적인 동맹을 유지하고 있으니 워프 게이트를 이용하면 1시간, 아니 30분도 걸리지 않는다. ‘해밀 클랜. 반시의 저주를 받은 사용자. 남은 시간은 2주도 안된다. 엘릭서로 목숨을 구원할 수 있다.’ 나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임한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잠시 외부에 나갔다 올 생각이야. 조금 시간이 걸릴 수도 있어. 일부러 깨우지는 말되, 클랜원들이 일어나면 3층 소회의실로 모여달라고 해주겠어?” “어렵지 않은 부탁이에요. 그런데 어딜 다녀오실 생각이세요?” “신전.” “신전이요?” 지금 필요한 건 정보였다. 현재 내가 들고 있는 엘릭서는, 일단 목숨만 붙어있으면 어떤 상태이상도 회복시켜주는 하나의 목숨과도 같은 천고의 영약이다. 그것을 단순히 감정에 이끌려 사용하는 것은 사용자로서도, 그리고 클랜 로드로서도 절대로 지양해야 할 행동이었다. 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담당 천사를 만나고 올 생각이야.”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음, 지금 와서 솔직히 밝혀보면요. 제가 마르가리타 사건 이후로 독자분들께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습니다. 물론 굉장히 심하다 싶어 과감히 절반을 쳐낸 게 크긴 했지만, 타격은커녕 여유롭게 코멘트를 달아주시는 것을 보고 충격을 먹었습니다. 뭐, 뭐지? 나는 정말 고자였던 건가? 라고 생각할 정도였지요. 그래서 이번엔 정말 화끈하게 써보자! 라고 마음을 먹고 작정하고 썼는데, 다 적어놓고 보니까…. 아, 뭐라고 해야 할까요? 이것도 고요히 웃으시면서 겨우? 이게 강해? 라고 하실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OTL 아무튼, 독자분들의 이번 회를 보시고 어느 정도 감(?)이 오셨는지 궁금하네요. 아. 물론 이번 회에 불쾌감을 느끼셨을 분들께도 사죄를 드립니다. 다만 메모라이즈는 성애 장면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 작품입니다. 그런 만큼 부디 독자분들의 너그러운 양해를 부탁합니다. _(__)_ PS. 내일 제 이모님이 스마트 폰을 장만하실 계획입니다. 현재 갤럭시S3랑 옵티머스 G 프로를 염두에 두고 계십니다. 대리점에 가서 구매할 계획인데, 저보고 도와달라고 하시네요. 이것저것 검색은 해봤는데 할부원금(?)만 건졌고 나머지는 먹먹하네요. 혹시 갈 때 어떤 점을 염두에 두면 좋을까요? ;ㅅ; 『 리리플(293회) 』 1. 플룻 : 1등 축하합니다. :) 미월야 님이 잠시 1등을 놓으신 이후, 1등에 여러 많은 분들을 뵐 수 있어서 좋네요. 하하. 그럼 이번 회도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2. 카아르엠 : 아, 오랜만에 뵈어요! 반갑습니다. ㅜ.ㅠ 하하. 혹시 새 작품 연재하고 계시다면 읽으러 가겠습니다. :) 3. 삼극무쌍 :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코멘트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4. 사용자간달프 : 쉿. 비장의 무기입니다. 김수현은 아직 성장할 여지가 남아있어요. :) 5. MT곰 : 쿠폰 감사합니다. _(__)_ 하하. 요즘도 제 작품이 MT곰 님께 힐링이 되는지 궁금하네요. :)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하는 소소한 바람이 있습니다. 『 리리플(294회) 』 1. RandomStyle : 1등 축하합니다. :) 정답입니다. 수현은 그때 형과 만나지 못했고, 그리고 유현도 딱히 수현에게 그녀의 존재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효을은 1회차에서 이때 죽었거든요. :) 2. dbss : 메모라이즈는 기억하다, 암기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자세히 풀어보면 외워 잊지 아니하다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지요. 김수현은 1회차를 기억하고, 외웠으며,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행동하고 있고요. 이렇게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D 3. asfdgads : 입대하시는군요! 그저 눈물만 나네요. ㅜ.ㅠ 몸 건강히 다녀오세요! 파이팅! 4. 연우진 : 정답입니다. 형이 죽은 건, 김수현이 '삽질' 아니, 오히려 '민폐'라고 볼 수 있지요. 물론 그런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도 할 생각입니다. 다만, 엘릭서는 대비를 위해서 구비하고 있습니다. :) 5. 천운처럼2 : 아무래도 그럴 것 같습니다. 쳐낼 부분도 많고, 스스로도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이북은 아마 8월 이후로 나올 예정입니다.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96 / 0933 ---------------------------------------------- 분기점(分岐點) 7일 전. 한밤의 숲은 조용하고 어두웠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칠흑 같은 어둠. 하늘에 뜬 달은 찬연한 빛을 뿌리고 있었지만, 빽빽이 자란 나무와 검푸른 빛의 무성한 수풀은 숲을 비추는 빛을 차단하고 있었다. 부스럭, 부스럭. 그때, 마른 잎과 검불을 밟는 소리가 숲의 고요를 나직이 깨뜨렸다. 소리의 근원지는 숲 안 어딘가의 언덕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곳엔 한 명의 남성이 언덕을 조심스레 오르고 있었다. 조심히 언덕을 오르던 움직임이 순간 멈췄다. 그러자 소리는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남성은 근 10초 동안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살금살금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남성의 사위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벌레 소리, 새소리 등 어디서 들리는지도 모를 여러 울음소리가 이따금 그의 귓가로 흘러 들었다. 그리고 싸늘한 바람이 언덕을 한 번 지나칠 즈음, 남성은 비로소 언덕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칠흑의 장막이 내려앉은 숲. 너무나 어두워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남성의 움직임은 시야가 탁 트여있는 것과 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이윽고 언덕 중앙에 자리를 잡더니, 눈을 크게 떠 이곳 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순 남성의 눈동자에 연한 호박 빛이 어리는가 싶더니, 번개 같은 속도로 한쪽 방향에 시선을 고정했다. 곧이어 뭔가를 관찰하는 듯 한동안 먼 곳을 바라보던 인상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남성이 바라보는 곳에는 미약한 불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빛의 주위는 고요한 숲과는 어울리지 않는 낯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길쭉한 나무 위 나뭇가지에 세 명의 여성이 알몸으로 매달려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배는 될법한 무리들이 나무를 둘러싼 채 낄낄거리며 희롱하는 중이었다.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던 남성은, 이내 한심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친놈들. 때와 장소를 구분하지 못하는 건가.” “네가 이해해~. 벌써 이곳에서 대기한지 7일이나 지났잖아? 저 정도 재미 보는 건 너그러이 넘어가 줘야지.” “아까 느꼈던 기척이 너였군.” “히히. 들켰나?”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였지만 남성은 담담히 대꾸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시선을 둔 곳엔, 몸에 달라붙어 꼭 끼는 타이츠(Tights)를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남성이 언제 왔냐는 시선을 보내자, 여성은 어깨를 으쓱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무런 말도 않고 남성 옆으로 다가온 여성은 이내 바닥에 풀썩 주저앉으며 입을 열었다. “후유. 다음 이동 시간은 언제야?” “2일 후. 그때 미개척 지역을 벗어날 예정이다.” “그럼 2일째 되는 날에는 칠흑의 숲으로 들어가는 거야?” “얼마 전 본대에서 연락이 왔다. 드디어 죽음의 늪지대에 들어섰다고 한다.” 남성은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여성은 생각에 빠진듯한 표정을 짓더니 “그럼 얼추 시간은 맞겠네.” 라고 중얼거렸다. 잠시 동안 남성의 눈치를 살피던 여성은, 곧 대지에 벌렁 드러누우며 말을 이었다. “근데 걔네들 있잖아, 제법 빠르지 않아? 서 대륙에서 출발한지 이제 두 달 하고도 조금 지나지 않았어? 그런데 벌써 죽음의 늪지대면….” “북 대륙과 서 대륙의 통로는 이미 개척된 상태니까. 그래도 죽음의 늪지대를 벗어나면 조심해야 할거다. 사용자 놈들의 눈에 띌 가능성이 높아져.” “그렇지. 그래서 우리가 여기 온 거잖아.” “그래 봤자 사나흘 차이야. 아무튼 당분간은 본대에 신경 끄라고. 우리는 우리 할 일만 잘하면 돼.” 뭔가 심기가 불편한 게 있는지, 남성은 무뚝뚝히 대답했다.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조용함이 찾아 들었다. 남성의 시선은 여전히 무리들이 여성을 희롱하는 광경에 꽂혀있었고 여성은 대(大)자로 누운 채 하늘을 보고 있었다. 둘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이어지던 침묵은 여성이 먼저 말문을 엶으로써 깨져버렸다. “있잖아, 현. 우리들 성공할 수 있을까…?” “기습이 제대로 이루어진다고 가정하면 성공할 수 있다.” “고작 2000명을 간신히 넘는데? 아무리 개척 도시라고 해도….” “아직 모두 모인 것은 아니다. 결행 그날까지 인원은 계속 모일 거고, 내부에서 호응하는 인원도 기백 명은 된다. 무엇보다 우리들은 한 명 한 명이 미개척 지역을 넘어온 역전의 용사들이다. 설령 도시에 두 배, 아니 세 배가 있다 하더라도 이길 수 있다.” 남성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깃들어있었다. 그러한 반응에 여성은 소리를 죽이며 웃다가, “그래, 기습이 성공한다면.” 이라 되뇌며 더욱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실컷 웃었는지, 여성은 허리를 올려 펄쩍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탄력적인 몸놀림으로 남성의 목에 팔을 휘감으며 그의 귓가에 소곤소곤 속삭였다. “얼른 그날이 왔으면 좋겠어. 그놈들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날이.”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걱정하지 말고 믿고 있어라.” “후후. 믿음직스럽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대장의 말에 따라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게요~.” “…….” 여성은 익살스런 목소리로 말하곤 까르르 웃으며 언덕 아래로 뛰어 내려가 버렸다. 남성은 그런 그녀를 무심한 눈길로 쓱 훑고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아까 보고 있던 곳을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숲 속의 밤은 깊어만 갔다. * “사용자 김수현?” “오랜만…. 은 아닌가.” 소환의 방으로 들어서자 언제나처럼 제단에 앉아있는 세라프가 보였다. 끝소리를 묘하게 올리는 것이 내가 두 번 연속 스스로 방문했다는 게 꽤나 놀라운 모양이다. 하기야 예전에는 한 달에 한 번은커녕 세 달에 한 번 찾아올 정도였으니 의아히 여길 만도 했다. 세라프는 얼른 표정을 회복한 후 고요한 목소리로 말했다. “또…. 와주신 겁니까?” “응.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 “따로 호출도 드리지 않았는데 찾아와주셔서 놀랐습니다.” “최근 방문도 호출해서 찾아온 건 아니었잖아.” 나는 대충 대꾸해주며 세라프와 마주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연초를 한대 꺼내며 바로 용건으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아무튼, 화정에 대해서 물어볼게 있어서.” “예. 말씀해보십시오. 성심 성의껏 답변해드리겠습니다.” “음….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그래, 간단히 말해서. 예를 들어 반시의 저주에 걸린 사용자가 한 명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사용자의 저주를 화정의 힘으로 해주 할 수 있을까?” “가능합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즉답. 하지만 그 정도는 나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건 조금 더 상세한 설명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세라프는 바로 추가로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반시의 저주는 굉장히 효력이 강한 고 랭크의 저주입니다. 어지간한 마력, 행운, 항마력으론 대항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화정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저 또한 간단히 말씀 드려보면, 격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화정의 격과 반시의 저주의 격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미안할 정도입니다.” “좋아. 그럼 화정은 전투용이 아니라, 치료용으로도 꽤나 쓸만하다는 소리지?”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화정을 치료용으로 사용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 방금 전 세라프의 말이 바로 내가 진정 알고 싶은 것이었다. 지금껏 전투를 제외한 다른 용도로는 막연히 사용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경계를 명확히 해둬야 앞으로의 사용에 차질을 빚지 않을 수 있지 않겠는가? “화정은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전투용 또는 치료용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조금 애매한 감은 있습니다만. 만일 치료용으로 사용한다고 가정해보면, 그것은 단순 정화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즉 완전한 치유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가령 사용자 김수현이 아까 말씀해주신 사용자를 치료했을 경우, 반시의 저주는 확실히 태워 없앨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주로 인해 발생한 후유증은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래?” “다른 예를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어떤 사용자가 정신 오염에 걸린 상태라면 오염을 정화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용자가 오염으로 인해 정신병이 발생했을 경우 자체적으로 발생한 정신병은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뭐야, 생각보다 제한이 많잖아. 모든 것을 불태울 수 있는 거 아니었어?” 문득 마르가리타에게 화정의 힘을 사용했을 때가 떠올랐다. 나는 그때 분명 나쁜 기억을 태워달라고 의지를 불어넣었다. 후에 요정 여왕의 반응으로 보아 잘하면 가능성이 있겠다 싶었는데, 눈앞의 세라프는 그 가능성을 전면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때는 정말 우연이었다는 말인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생각에 잠겨있자, 세라프의 차분한 어조가 귓가로 흘러 들었다. “화정의 이명은 영원히 타오르는 염화입니다. 모든 것을 불태울 순 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불태우는 것에 불과합니다. 파괴 활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치료는 부가적인 요소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현재 사용자 김수현이 지닌 화정의 등급이 S랭크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유념해주시길 바랍니다.” “결국 목숨은 구할 수 있으되, 그 이후의 일은 장담하지 못한다 이 소린가…. 쯧.” 그렇다면 완전 치유는 엘릭서밖에 해답이 없다는 소리였다. 품에 넣어둔 엘릭서를 꺼내며 혀를 차자, 세라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엘릭서? 설마 사용자 김수현은 엘릭서를 사용할 생각이십니까?” “그럴까 생각 중이야.” “구하려는 사용자가 사용자 김수현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일단 지금 하고 계신 생각은 보류하는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후유증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갈수록 증세가 심해질 수도, 현 상태를 유지할 수도, 아니면 시간이 지날수록 차차 호전될 수도 있습니다. 엘릭서, 그것은 하나의 목숨과도 같은 천고의 물약. 도대체 누구에게 사용할지 모르겠지만, 허튼 사용은 확실히 지양해야 할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응. 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기야, 일단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여유는 생기니까. 이후 추이를 지켜볼 필요가 있겠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세라프의 눈동자에 오묘한 빛이 떠올랐다. 세라프 말은 확실히 일목요연했다. 지금 가장 급한 건 목숨이니 급한 일부터 해결하고 여유를 챙겨라. 그리고, 물론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다짜고짜 사용해서 엘릭서를 낭비하지 말자는 소리였다. 아무튼 세라프와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어느 정도 복잡했던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이쯤이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모두 얻었기에, 나는 사뿐히 몸을 일으키며 무심코 한마디 툭 뱉었다. “잘 들었어. 아무튼 이만 가볼게. 고맙다.” “예, 예?” “응?”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용자를 돕는 것은 도우미의 역할입니다.” ‘갑자기 왜이래.’ 세라프의 반응이 조금 미묘했지만, 결심이 섰기에 얼른 몸을 돌렸다. “사용자 김수현.” “?” 그리고 포탈로 몸을 던지려는 찰나, 등 뒤로 예의 고요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저…. 다음에 또 찾아와주시겠습니까…?” “…….” 나는 곧장 포탈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세라프와의 만남을 끝내고 신전을 나왔다. 그리고 광장으로 이동해 공용 게시판을 살펴보는 것으로 볼일을 마친 후, 나는 클랜 하우스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새벽이 지나고 완연한 아침이 찾아와있었다. 임한나는 내 지시를 충실이 이행해놓은 상태였다. 본관으로 들어가 바로 3층 소회의실에 들어서자, 열 자리에 앉아있는 클랜원들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그 중 몇 명은 부스스한 얼굴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른 아침부터 어딜 다녀오셨어요?” “신전, 광장에 볼일이 있었습니다.” 상석에 앉은 후 나는 안현이 안솔과 이유정을 흔들어 깨우는 것을 구경하며, 고연주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 순간 문득 생각이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고연주는 언제나와 같은 태도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용자 고연주.” “호호. 네, 일은 잘 풀리셨어요?” “잘 풀렸습니다.”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에요.” 고연주의 마지막 말은 나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현재 그녀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을 읽어주었는지, 고연주는 살포시 미소 짓고 있다. 간밤에 그렇게 심하게 범해졌음에도 여전히 웃어주는 그녀를 보자 마음 한구석에서 뭔지 모를 따스함이 느껴졌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나는 괜찮다. 마치 그렇게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반응을 보자 한결 안심이 되었지만, 그래도 살짝 부어있는 눈가를 보면 역시 마음이 편치 않다. ‘사과는 하되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하자. 지금은 집중하자.’ 고연주도 이런 태도를 원하고 있으리라. 그녀의 속 깊은 배려에 고마움을 느끼며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클랜원들을 모두 돌아본 후, 힘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들 눈동자에 졸음이 가득하네요. 굳이 깨우진 말라고 했지만, 그래도 평소보다 일찍 모여주니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규우….”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여러분들을 모이게 한 이유는, 한가지 급히 말씀 드릴게 있기 때문입니다. 거두절미하고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늘, 저를 비롯한 몇몇 클랜원들은 이틀에서 삼일 정도 클랜 하우스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엑! 왜? 요?” 클랜 하우스를 떠난다는 말에 놀랐는지 비몽사몽 하던 이유정이 후다닥 잠에서 깨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반응이 가장 심하긴 했지만, 비단 이유정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여겨 나는 차분히 어젯밤부터의 일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해밀 클랜에 반시의 저주에 걸린 사용자가 있고, 그곳에서 다방면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 그들의 부탁을 받아 이스탄텔 로우에서 도움을 찾고 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정으로 반시의 저주를 치료할 수 있고, 오늘 아침 담당 천사를 통해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왔다는 것까지. 물론 있는 그대로를 설명한 것은 아니었다. ‘엘릭서는…. 일단 넣어두자. 일단 상황을 보고 정 필요하다 싶으면….’ 형이나 한소영이 위험한 것은 아니니까. 조금 서운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만일 후유증이 호전되는 성질이라면 아까운 한 병을 날리게 되는 셈이다. 그렇기에 품에 넣어둔 엘릭서는 일단 창고에 되돌리기로 속으로 결정한 후, 나는 비로소 설명을 끝맺을 수 있었다. 이윽고 모든 설명을 들은 클랜원들은 한 명 두 명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 첫 타자는 단연 정하연이었다. “클랜 로드. 하지만 그 힘을 사용하면….” “얼마 전 체력 능력치를 올린 건 알고 계실 겁니다. 치료용으로 사용할 때의 출력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정하연은 곧바로 걱정의 목소리를 내었지만, 바로 입을 다물게 만들 수 있었다. 그때, 지금껏 가만히 듣고만 있던 고연주가 조용히 손을 들어 발언권을 요청했다.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여 발언을 허락해주었다. “무슨 말씀인지는 대강 알아들었어요. 해밀 클랜에서는 반시의 저주에 걸린 클랜원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구하고 있어요. 그리고 클랜 로드께선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고요.” “그렇죠.” “그러면 궁금한 게 있어요. 클랜 로드께서는 이번 일을 도와줌으로써 해밀 클랜에게 어떤 것을 원하시고 있는 건가요? 보상인가요 아니면 동맹인가요? 물론 잘 아시겠지만, 목숨 값은 제법 귀하답니다.” “물론 그러한 이유도 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표면적인 이유가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 말고도 한가지 더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라 아직 자세히 밝힐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한가지 확실하게 말씀 드리면, 개인적인 이유가 제 공적인 판단에 영향을 줄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딱 잘라 말해주자 고연주는 만족한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고연주의 말인즉슨 이왕 해주는 거 공짜로 해주지 말고 챙길 것은 챙기자는 소리였다. 그리고 한 클랜의 클랜 로드로 있는 이상, 그 책임감은 나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보류 물품이 내 손아귀에 있다고 해도 사용하기 전에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정도는 클랜원들에게 알려줄 생각이었다. “어찌됐든, 해밀 클랜은 동부 도시에서 굉장히 유명합니다. 일전에 제가 드렸던 말씀을 기억하고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용자가 모여 클랜을 만들고, 클랜이 모여 도시를 이룬다. 머셔너리로서는 해밀 클랜에 거의 공짜로 빚을 지울 수 있는 기회입니다. 제가 조금의 수고를 감수한다면 앞으로 해밀 클랜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초석을 닦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클랜 로드의 몸에 무리만 가지 않는다면, 저는 찬성하겠어요.” “확실히 클랜을 만든 이상 주변의 관계도 중요하죠. 뭐, 동부 도시의 클랜인게 조금 걸리긴 하지만 이스탄텔 로우에서 도와달라고 요청했으니 걸릴 건 없어졌네요. 저도 찬성이에요.” “좋군요.” 내 말이 일리가 있다 여겼는지 고연주와 정하연은 밝은 낯빛으로 찬성해주었다. 사실상 현재 클랜 내에서 나 다음으로 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둘이 찬성했으니, 반대하는 인원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윽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여전히 졸지 않으려 용쓰는 안솔만 빼고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애당초 나만 가는 것이 아니라 몇 명을 데리고 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미 데려갈 인원은 정해져 있었다. “사용자 고연주.” “네~.” “사용자 김한별.” “네?” 고연주는 여유 있게, 김한별은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죠. 준비가 끝나는 대로 바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그러니 두 명은 이 회의가 끝나고 바로 떠날 준비를 해주세요. 아, 아무리 많이 걸려도 3일 이상은 걸리지 않을 테니, 그에 맞춰서 준비해주시면 됩니다.” “잠깐 해밀에 갔다 오는 거면 하루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해밀 클랜은 동부 일반도시 프린시카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볼일을 마치고 바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뮬에 한 번 더 들를 예정입니다.” “뮬에요?” 고연주의 의아한 목소리. 나는 차분히 고개를 주억이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잠시 김한별을 쳐다보자, 아직도 얼떨떨해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흥. 1000골드네. 조금 더 넣었네.’ ‘혹시나 보석 마법사를 영입하게 된다면, 한 번 데리고 와주겠나?’ 뮬에서 아직도 보석상을 하고 있을 영감님을 떠올리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뮬에서 만나고 싶은 사용자가 한 명 있습니다. 그곳에서 활동할 때 한가지 약속을 한적이 있거든요. 아, 약속이라기보다는 부탁에 가깝지만…. 아무튼 저에게 제법 잘해주신 분입니다.” 물론 겸사겸사 영입제의를 할 생각도 있었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고연주를 보며 나는 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영감님 또한 ‘보석 감정사’라는 레어 클래스를 가진 사용자였다. 영감님을 영입할 수 있다면 어쩌면 김한별에게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비록 영입에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그때의 기반과 지금의 기반을 비교해보면 그만큼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자, 그럼….” “에? 뮬에요오…?” 그때였다. 지금껏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안솔은, 흡사 찬물이라도 맞은 듯 화들짝 고개를 치켜 올렸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로유진 “꿈을 꾸었습니다.” Reader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로유진 “아닙니다. 메모라이즈 독자분들에게 성애 내용에 관해 칭찬을 듣는 꿈을 꾸었습니다.” Reader “허허, 칭찬이라. 그거 좋구나.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로유진 “그것은, 어제 현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PS. 표지가 바뀌었습니다. 표지의 주인공은 세라프입니다. 표지, 공지, 뜰, 작품설정에 올려두었으니, 크게 보시고 싶으신 분들은 구경하러 오세요! 그리고 감상 평도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일러스트레이터 SILVESTER 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_(__)_ 『 리리플 』 1. 한방모드 : 1등 축하합니다. 1등에서는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하하. 이번 회도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2. BandSVIVA : 아, 죄송해요. 코멘트 도중 '조으다.' 라는 말을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귀엽게 느껴졌어요. ;ㅅ; 조으다 조으다 완전 조으다~. :D 3. 패깊 + 무영서귀 : 감사합니다. 덕분에 3년 약정 하시려는 거 2년 약정으로 맞췄습니다. :) 4. 소울소울 : 감사합니다. 오늘 총 다섯 곳 들렀어요. 발이 많이 아팠지만, 다행히 만족스러운 가격에 좋은 기기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 5. 요수리 :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세상에, 닉네임이 안솔이라니요! 6. 이비앙 : ……. 네! 비웃으세요! 마음껏 비웃으시라고요! 엉엉! ;ㅇ; 7. GradeRown : 고연주와의 감정은 다음 회에 잠깐 풀 예정입니다. :) 하하. 정글의 게임 보셨군요! 저도 그거 재밌게 봤어요! 8. 안식. : 아, 아니요. 중심이 아니라, 염두에 두고 들어간 작품이라는 말이었어요. :) 9. 미월야 : 푸하하하하. 아 보고 나서 엄청 웃었습니다. 세상에 소금이라니요. ㅋㅋㅋㅋ. 10. 압권 : 하하, 김수현은 아직 모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굳이 예를 들어보면, 임한나가 스스로(?) 플래그를 꼽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고 보시면 될듯합니다. :) 11. 위태위태 : 하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고연주와의 관계도 되새김질하고 싶었고, 체력을 드러낸 단발성 이벤트라고 보셔도 좋습니다. 실은 진짜 이유는 따로 있지만, 아무래도 수현의 내면이 독자분들께 잘 와 닿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것은 온전히 제 능력 부족이겠지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준비를 철저히 해서 다시 한 번 독자분들께 접근을 해보고 싶습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97 / 0933 ---------------------------------------------- 나비효과(Butterfly Effect) 안솔의 눈은 지금 막 잠에서 깬 것치곤 제법 또렷했다. 가만히 그녀를 들여다보고 있자 순간 이상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보이지 않고 눈동자는 깊게 침잠해있다. 오직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고 있을 뿐 평소의 헤실 거리는 기색은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안솔의 입술이 느릿하게 떼어졌다. “오라버니. 제가 깜빡 졸아서 오라버니 말씀을 놓치고 말았어요. 죄송해요.” “응? 응.” “그런데 혹시, 어느 도시로 가신다고 했는지 다시 한 번 들을 수 있을까요?” “…첫 번째 목적지는 동부 일반 도시 프린시카. 두 번째 목적지는 북부, 정확히는 북동쪽 소도시 뮬. 뮬에서 일을 해결하고 모니카로 돌아올 생각이야.” 안솔도 도시 위치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상세한 위치를 덧붙인 이유는 그녀의 말투나 태도가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안솔의 말을 들은 순간, 바바라의 워프 게이트와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겪었던 일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설마 또 발동이 걸린 건가?’ 사정을 알고 있는 고연주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띄우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클랜원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안솔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만큼 방금 전 그녀의 태도는 지금껏 보여온 행동과 비교해보면 엄청난 괴리감을 풍기고 있었다. 이윽고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 안솔을 보며,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안솔(0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사제(Normal, Priest, Runn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Rank : D Plus) 5. 진명 · 국적 : 빛을 인도하는 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0) 7. 신장 · 체중 : 160.1cm · 46.7kg 8. 성향 : 질서 · 선(Lawful · Good) [근력 25] [내구 28] [민첩 27] [체력 35] [마력 88(+1)] [행운 101]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자유 3포인트, 마력 전용 2포인트로 총 5포인트입니다.) ‘빛을 인도하는 자….’ 다른 것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안솔의 진명은 뭔지 모를 의미심장함을 품고 있었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봤지만 딱히 이거다 싶은 건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후에 시크릿 클래스 ‘광휘의 사제’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추측만 할 뿐이었다. “오라버니. 이번 수행에 저도 데려가 주세요.” “그래. 알았다.” “저도 오라버니 따라가고…. 네?” “데려가 달라며. 너도 같이 가자고.” 나는 단언하듯 말했다. 안솔은 내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는지 눈을 휘둥그래 뜨며 입술을 오므렸다. 행운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능력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101이라는 엄청난 수치를 기록하고 있었다. 101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는, 직접 체감해본 적이 있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그리고 안솔의 행운을 101로 만든 것은 다름아닌 바로 나이기에. 그녀의 말을 무시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나는 자기도 데려가 달라는 애들의 눈빛을 사뿐히 무시했다. 그리고 더 이상의 추가인원은 없다는 의미를 담아, 전보다 높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고연주, 김한별 외 안솔을 추가 인원으로 넣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클랜 로드. 바로 준비에 들어갈까요?” “그러도록 하죠. 회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아침부터 고생하셨습니다. 고연주, 김한별, 안솔. 이 세 명은 지금 바로 떠날 준비를 해주세요.” “네 그럴게요. 얘, 그리고 솔아. 너희 둘은 나 좀 따라오렴.” 고연주는 둘을 손가락을 콕콕 찍으며 몸을 일으켰다. 김한별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고, 안솔은 방실방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새 그녀의 표정은 예전처럼 되돌아와 있었다. 참으로 변화무쌍한 표정이라 생각하며, 나는 정하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사용자 정하연. 길어야 사흘 안으로 돌아옵니다. 그때까지 클랜을 잘 부탁합니다.” “걱정 마세요. 그리고 몸 조심히 다녀오세요, 클랜 로드.” 정하연은 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 대답을 듣자, 적이 안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회의를 파한 이후 클랜원들은 곧바로 준비에 들어가주었다. 원정이 아닌 용무에 가까운 수행이라서 그런지 준비에 많은 시간이 걸린 것은 아니었다. 갑작스레 출발이 잡혔음에도 불구하고 정오가 되기 전 모든 출발 준비를 끝마칠 수 있었다. 이대로 바로 출발할까도 생각해보았지만, 안솔의 배가 꼬르륵 소리를 내는 바람에 간단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출발하기로 했다. 그리고 고용인들이 차려준 맛없는 음식들을 먹으며,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많은 애를 써야만 했다. 드디어 형을 만나러 간다. 그리고 형의 동료들을 만나러 간다. 그들에게 있어, 나는 죄인이었다. 단 한 번의 잘못된 판단은 모두의 목숨을 빼앗는 결과를 불렀고, 아이러니하게도 살아남은 것은 나 혼자뿐이었다. 지금껏 형을 만나지 않은 것은 앞으로의 행보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자 그것은 단순한 핑계였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내 가슴속에 묻어둔 죄책감이 알게 모르게 그들과의 만남을 꺼려했던 게 아닐까? 나 때문에 죽었다. 내가 문제였다. 나만 아니었다면. 내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그때’를 떠올렸다. ‘아이고~. 우리 수현이~. 누나 기다렸어요? 우쭈쭈쭈. 조금만 기다려? 곧 구해줄게~.’ ‘어찌할 거야! 이 바보야! 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서는…. 차라리 나를 좋아하던가!’ ‘하하. 걱정 말려무나. 여기는 내가 맡고 있을 테니까, 얼른 도망가라! 어서!’ ‘멍청한 놈. 조금만 기다려라. 앞에 있는 놈만 조지고 바로 두들겨 패줄 테니까. 그러니까 그전에 최대한 빨리, 그리고 멀리 도망가도록.’ 이미 1회차에서 수없이 후회했고, 죄책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 후로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을 찢어발기는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을 그리도 간단히 잊어버리기에는, 나를 구하러 온 해밀 클랜원들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들이 너무도 기억에 남는다. 솔직히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물론 형의 명령을 따라서 오긴 했겠지만, 그들은 죽어가면서 조금의 원망도 내보이지 않았다. 과연 인간이, 아니 사용자가 그럴 수 있을까…? 결국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나는 숟가락을 놓고 말았다. 형을, 그리고 1회차의 동료들을 다시 만난다고 생각하자 도저히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 쏴아아아! 쏴아아아! 아침만해도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하늘인데, 막 출발하려고 하자 비가 미친 듯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조금의 전조도 보이지 않던 갑작스러운 폭우였다. 하지만 나는 출발 시간을 늦추지 않았다. 그 동안 맑은 날이 이어져 방수용 로브를 구비해두지는 않았지만 상점에서 구매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상점은 워프 게이트로 가는 길에 있었으므로 딱히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었다. “우웅. 오라버니. 저 사람들은 왜 저러고 있어요오?” 안솔은 머리를 푹 눌러쓰다 못해 얼굴까지 가리는 후드가 답답한지, 살짝 후드를 집어 올리며 말했다. 나를 비롯한 세 명은 현재 모니카의 워프 게이트에 도착한 상태였다. 그리고 안솔 말대로, 워프 게이트 주변엔 사용자들이 바글바글 모여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이구동성으로 워프 게이트 이용에 대해 불만을 외치고 있는 중이었다. “동부 도시로 가는 분들을 제외하곤 잠시 대기해주세요! 어제부터 서부, 북부 도시도 통행 제한을 시작했다고요!” “씨발! 왜 파멜라로 못 간다는 건데! 빨리 가야 한다고!” “누가 욕했어요? 입 안 다물어요?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통행을 끊은 건데 저희보고 뭐 어쩌라고요!” “아오, 아오! 날씨도 지랄 맞은 데 서북부 새끼들도 왜 갑자기 덩달아 지랄들이야! 비도 오는데 언제까지 기다리라고!” ‘서부, 북부도 막혔다고? 일이 묘하게 흘러가는데….’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아무튼 동부 도시로 가는 데는 큰 문제가 없는 듯 보였다. 나는 안솔의 손을 꼭 잡고 사용자들을 헤쳐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워프 게이트 앞에 다다르자, 땀을 뻘뻘 흘리며 상황을 설명하는 여성 사용자 한 명을 볼 수 있었다. 봉긋하게 올라온 가슴팍에는 이스탄텔 로우를 상징하는 클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여성은 숨을 씩씩 몰아 쉬며 우리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 지금 뮬로 갈 수 있나요?” “중앙, 서부, 북부 통행이 지금 완전 제한되어있어요. 일단 우리 쪽에서는 계속 열어두고 있으니까 나중에 뮬에서 열어주면 다시 이용할 수 있을 거예요. 그때까지 기다려요.” “그럼 프린시카는요?” “가능해요. 이쪽에 요금 넣어주시고,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요. 지금 바로 바꿔줄 테니까.” 여성 사용자는 금화가 들어있는 통을 가리키더니 워프 마법 진을 향해 후다닥 달려갔다. 혼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이 참으로 바빠 보였다. 요금 통에 4인분의 이용대금을 집어넣은 후, 나는 흘끗 안솔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원래는 그녀의 반응을 볼 생각으로 데려왔는데 뮬의 통행이 불가능하다 하니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안솔의 얼굴은 평온 그 자체였다. 아니, 오히려 내가 손을 잡아주어서 그런지 이따금 실없는 웃음을 보이기도 했다. 그냥 나랑 같이 가고 싶어서 수를 쓴 건가 생각이 들 무렵, 마법 진으로 달려간 여성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프린시카 맞죠? 들어가세요!” 빗소리에 약간 묻힌 감은 있었지만, 워낙 목소리가 컸기에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앞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푸른빛으로 물든 워프 게이트를 볼 수 있었다. “수현? 안 들어가요?” “들어가야죠.” 바로 들어가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자, 막 발을 내디디던 고연주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속으로 차분히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그리고 셋을 센 순간, 나는 곧바로 워프 게이트를 향해 몸을 묻었다. * 한 명의 사용자가 대지를 질주하고 있었다. 특화 능력치가 민첩인 모양인지 남성이 달리는 속도는 가히 어마어마했다. 이윽고 뾰족이 솟아오른 건물 앞에 다다른 남성은 문을 박차듯 밀고 들어가 바로 계단을 뛰어올랐다. 1층, 2층, 3층을 지나 4층에 다다르자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넓은 통로가 나왔다. 남성은 다급해 보이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통로의 오른 방향으로 곧장 내달리기 시작했다. “헉헉!” 복도를 거침없이 질주하던 남성은 이내 살짝 틈이 벌어져있는 방문 앞에서 발을 멈췄다. 그리고 한두 번 거칠게 숨을 몰아 쉬며 호흡을 고르더니 방문을 활짝 열며 크게 외쳤다. “김유현! 김유현!” 쾅! 어찌나 세게 열었는지, 끝까지 벌어졌던 방문은 남성이 들어가자마자 큰 소리를 내며 닫히고 말았다. 그리고 방안에는, 여러 명의 사용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침대를 둘러싼 채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다가, 서서히 방문 쪽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남성이 일으킨 소란이 반갑지 않은지 하나같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이어진 남성의 말에 급변했다. “왔다! 왔어! 반시의 저주를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찾아왔다고!” “뭐라고요?” 시종일관 싸늘한 표정을 내비치던 김유현은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남성은 터벅터벅 침대 쪽으로 걸어가 누워있는 여성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상태가 위중해 보였지만, 아직까지는 미약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여전히 눈을 부릅뜬 채 대답을 재촉하는 김유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남부에서 왔다고 한다. 엘릭서는 없지만, 반시의 저주를 치료할 수 있대.” “엘릭서가 없는데 치료를…? 그 사용자 이름이 뭐죠?” “이름은 못 들었어. 아! 머셔너리 클랜이라고 하더군. 그 모니카에 요즘 잘 나가는 클랜 있잖아!” “머셔너리 클랜이라면…. 이름은 한두 번 들어봤습니다. 혹시 이스탄텔 로우에서 연락이 왔었나요?” 김유현의 물음에 방안에 있던 사용자는 모두 고개를 저었다. 남성은 이 상황이 무척 답답한지, 가슴을 쾅쾅 치며 입을 열었다. “그게 뭐가 중요해! 일단 치료할 수 있다잖아!” “그 말이 맞습니다. 지금 그 사용자는 어디에 있나요? 지금 바로….” “혼자 온 게 아니었어. 클랜 로드랑 클랜원 몇 명이 같이 왔더라고. 아무튼 나는 이거 알려주려고 바로 달려왔고, 혜린이가 안내하고 있으니까….” “실례합니다.” 그때였다. 똑똑,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나더니, 벌컥 방문이 열렸다. 이윽고 문 밖으로,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로브를 입은 사용자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후드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아,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 점심에 약속이 있어서 집에 약간 늦게 들어왔는데, 막 집필을 시작한 찰나 이모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어제 구매한 스마트 폰(결국 갤럭시4 LTE-A로 구매하셨습니다.)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셔서 거의 세 시간 동안 가르쳐드렸습니다. 연세도 50이 넘으셨고, 018 피쳐폰을 거의 7년 동안 사용하신 터라 하나씩 세세하게 알려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하. 그래도 만족하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은 꽉 차더라고요. 그래도 최대한 빨리 올리려고 노력했으니, 부디 독자분들의 하해와 같은 양해를 바랍니다. _(__)_ 『 리리플 』 1. 카네사다 : 1등 축하합니다. 하하. 코멘트로는 두 번째로 뵙는 것 같습니다. :) 이번 회도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2. 플룻 : 에, 플룻 님. 한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뒤'를 어떤 의미로 말씀하신 건지 궁금합니다. 정확히, 아주 상세한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켈켈!) 3. 신유진 : 아, 죄송합니다. 제가 글을 쓰다가 문단이 이어지면 앞에 'ㅋㅋㅋ'를 붙여 문단을 붙여 정확히 띄우는데, 급하게 올리느라 지우지 못했습니다. ㅜ.ㅠ 4. 이터시온 : 오호. 상당히 날카로우시군요. 아마 다음에 세라프를 만나면 그 부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예정입니다. :) 5. dark기사 : 그냥 문득 생각이 들어 패러디 해보았습니다. 하하. :) 6. 유리켄느 : 물론 임신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마법 또는 물약으로 피임하는 방법도 존재합니다. 오히려 현대보다 피임이 확실하다는 설정입니다. 출산 또한 가능하지만, 대부분의 사용자들이 지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 물론, 예외는 존재합니다. 7. 노트님 : 이번 챕터 끝나고, 다음 챕터 제목을 서대륙의 발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음 챕터를 기대해주세요! 8. 트릭스타 : 제가 미처 생각지 못한 적절한 비유입니다. 정답입니다. :) 9. 부산오야붕 : 쿠폰 감사합니다! _(__)_ 요즘 이북 교정 속도가 서서히 붙고 있습니다. 하하. 10. 적유하 : No. 없었습니다. 이미 미래는 상당히 뒤틀렸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이미 서대륙의 발호는 이루어졌어야 정상이지만, 미래가 변함으로써 시기가 늦추어졌습니다. 앞으로 많은 것들이 바뀔 예정입니다. 이번 챕터의 소제목 나비효과는, 변화의 단초를 제공하는 소제목입니다.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98 / 0933 ---------------------------------------------- 나비효과(Butterfly Effect) 세찬 바람이 불었다. 대지에서 일어난 흙먼지가 얼굴을 두드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이윽고 바람이 멎었음에도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은 더욱 예민해지고 있었다. 죽음의 공포에 요동치는 심장도, 덜덜 떨리고 있는 입술도,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마족의 손길도. 그리고 대지를 밟고 있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어둠의 기운들도. 쿵쿵. 쿵쿵. 쿵쿵. 쿵쿵. 그때, 무릎을 꿇고 있는 대지에서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땅을 울릴 정도로 거친 발걸음이었다. 진동은 점점 강해지다가 이내 지척에 다다른 순간 거짓말처럼 뚝 끊기고 말았다. 그대신 쇠를 긁는듯한 불쾌한 목소리가 귓구멍을 강하게 찔렀다. “벨페고르님. 보고 드릴게 있습니다. 정찰부대에서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뇌제의 출현을 확인했습니다.” “큭!” 일순 머리칼이 뽑혀져 나갈 것 같은 아픔이 정수리로부터 밀려들었다. 하지만 고통은 금방 사그라졌다. 방금 전 들은 믿지 못할 소식에 고통보다는 놀라움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그래?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은 있었는데, 진짜로 왔군. 킬킬! 그런데 설마 뇌제 혼자 온 것은 아니겠지?” “출현 확인 후 바로 연락이 끊겼다고 합니다. 다만 마지막에 일천 명은 족히 넘는 인원이 보였다고….” “일천 명이라…. 그럼 해밀 놈들이 모조리 왔을 수도 있겠군. 아무튼 알겠다. 비록 수는 우리가 훨씬 많지만, 절대로 방심하지 마라. 놈들은 한 명 한 명이 얕볼 수 없는 놈들이야.” “예. 명심하겠습니다.” 쿵쿵. 쿵쿵. 쿵쿵. 쿵쿵. 발소리는 다시금 멀어져 갔다. 그리고 난 놀라움을 다스리려 노력하며 작게 숨을 토해내었다. 형이 온다. 형과, 동료들이 나를 구하러 왔다. 그 말을 듣자마자 공포감으로 젖어있던 심장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직도 내 정수리에 손을 얹고 있는 벨페고르에게서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이, 김수현. 눈을 뜨라고. 네 형이랑 동료들이 널 구하러 왔단 말이야.” “…….” “그러고 보니 참 신기해. 너 같은 덜 떨어진 놈 하나 구하겠다고 그 엄청난 놈들이 우르르 밀려오다니 말이야. 솔직히, 뇌제 정도면 이게 함정이란 걸 눈치 못 챌 리가 없잖아. 안 그래?” 나는 벨페고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심경이 너무도 복잡했기 때문이다. 분함, 수치심, 안도감, 불안감 등 여러 종류의 감정의 내 안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무엇보다 할 말이 없었다. 모두가 말렸던 일이었고,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행동했다. 함정에 빠진 것은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온전한 내 탓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작스레 무력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저 감고 있는 눈에 더욱 힘을 주고, 피가 나올 정도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 뿐이었다. 문득,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놈 앞에서 약한 모습은 보이기 싫었다. 어떻게든 참으려고 했지만 결국 울걱울걱 올라오는 감정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오른 순간이었다. 꽈르릉! 꽈르릉! “응?” 앞쪽 멀리서 요란한 천둥이 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귀를 의심해보았지만, 벨페고르의 의문성도 같이 들린 것으로 보아 잘못 듣지는 않은 모양이다. “뭐야. 벌써 온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분명 앞쪽에 전위부대가….” 주위는 점점 어수선해지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쥐 죽은 것 같은 고요함을 유지하던 마족들이 뇌제의 출현 이후 기척만 느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우웅! 짜릿짜릿한, 낯익은 마력의 흐름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공간을 웅웅 떨어 울릴 정도로 강력한 마력의 파동이었다. 이윽고 물결치던 파동이 잦아들 즈음, 사방을 울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지금껏 꾹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고 말았다. (벨페고르.) “호! 이 목소리는…. 뇌제로구나! 꽤 거리가 있는 것 같은데 통신을 걸다니. 역시 대단해~. 킬킬!” (경고하지. 지금 당장 수현이에게서 손 떼라.) “뭐? 오늘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왔는데, 이제 와서 손을 떼라고? 크하하하! 지금 보니 농담도 제법 수준급이야, 뇌제?” (그 뜻이 아니라….) 우웅! 우우웅! 마력의 흐름은 이어지고 있었다. 목이 돌아가는 한에서 사방을 둘러봤음에도 어떠한 조짐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문득 대지에 서서히 어둑한 빛이 드리워진걸 확인한 순간 난 퍼뜩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찰싹 달라붙어있었지만 한두 번 고개를 털자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늘에는, 언제 몰려왔는지 먹구름들이 잔뜩 밀려드는 중이었다.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벨페고르는 나와 똑같이 고개를 올려 들었다. 그리고 먹구름 사이서 눈에 보일 정도로 파직거리는 황금빛 전류를 본 듯 정수리에 얹은 손이 움찔 경직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꽈르릉! 꽈르릉! 그 순간, 다시 한 번 천둥이 치는 소리가 천지를 울리고, (수현이 머리에서 그 더러운 손 떼라고.) 잠시 끊어졌던 형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그와 동시에,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수많은 빛줄기가 노란빛을 내뿜으며 지상에 내리꽂혔다. * 방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자마자 심장이 한 번 크게 고동쳤다. 곧 구해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던 진하 누나. 차라리 자기를 좋아하라고 했던 새침데기 가희. 이곳은 내가 막을 테니 걱정 말고 가라고 했던 태원이 아저씨. 흠씬 두들겨 패버리기 전에 멀리멀리 도망가라고 했던 준성이 형. 나중에 보자고 밝게 손을 흔들어주었던, 이곳까지 우리를 안내해준 혜린이 누나. 그리고 나보고 끝까지 살아남으라고 했던, 친형 김유현. 다들 익숙한 얼굴들이었고, 다들 알게 모르게 나를 아껴주었던 사람들이었다. 그 동안 미친 듯이 보고 싶었고, 다시 만나게 되면 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하지만 입이 꽁꽁 얼어붙은 듯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다들 오랜만이에요. 아니야. 이건 안 돼. 정말 죄송했어요. 아니, 이건 더 이상해. 형. 보고 싶었어. 이것도 아니야. 안녕하세요. 머셔너리 클랜 로드 김수현…. “반시의 저주를 치료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까?” “…………네.” 머릿속을 어지럽게 부유하던 수많은 생각들은 “네.” 라는 하나의 대답으로 일축되고 말았다. 식당에서부터, 아니 형을 다시 만날 날을 꿈꿨을 때부터 생각해왔던 말들은 지금 모두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엘릭서는 가지고 있지 않으시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어떤 치료 방법을 사용하실 것인지, 그리고 지금 바로 치료가 가능한지 알 수 있을까요?” 형의 목소리는 차갑고 건조했다. 그 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눈그늘이 내려와있었고 얼굴도 수척해 보였다. 하지만, 예전의 싸늘한 눈동자는 그대로였다. “지금 듣고 계신 겁니까?” “수현…! 갑자기 왜 그래요?” 쿡, 내 등을 찌르는 기척과 함께 고연주가 소곤거렸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생각해보면 처음 한소영을 만났을 때도 이랬었다. 마음이 안정이 안되고,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추한 꼴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자꾸만 가슴속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솟아오른다. 두꺼운 로브로 가리고는 있었지만 입술이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모든 숨을 내쉬었을 즈음.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가 이내 다시 크게 들이마시며 나는 한 발짝 한 발짝 방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불현듯 어쩌면 내가 재회에 뭔가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했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멋있는 재회를 바랬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을 그리워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껴안고 눈물을 흘리는 낭만적인 상황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애당초 그런 상황을 바라는 것이란 불가능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저, 내가 2회차로 돌아온 목표에 초점을 맞추면 될 일이었다. 그래. 그러면 될 것이다. 형과의 걸음을 몇 발자국 남기고,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한두 번 목을 가다듬은 후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사용할 치료방법은 정화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완전한 치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사용자의 몸에 걸려있는 반시의 저주 자체를 해주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치료에 들어가야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저주로 생긴 후유증은 조금 더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겁니다.” “반시의 저주를 해제하면 일단 목숨은 구할 수 있어요. 현재로서는 그것만으로 충분해요. 그럼 지금 바로 치료가 가능한가요? 아니면 시일이 조금 걸리나요?” 대답한 사람은 진하 누나였다. 나는 연하게 웃어 보이려고 하다가 이내 아직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곤 바로 입을 열었다. “해주는 지금 바로 가능합니다.” “정말인가요? 그럼 어서…!” “잠시만요. 치료에 들어가기 전,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지금 상황이 급해요!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상황이에요. 보상이라면 충분히….” 나는 차분히 손을 들어 진하 누나의 말을 막았다. 그리도 다시 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치료에 들어갈 테니, 해밀 로드님을 제외하고는 이곳에 계신 분들께서 잠시 자리를 비켜주셨으면 합니다.” “저희가 치료과정을 볼 수는 없는 건가요?” “치료가 끝나고 해밀 로드님과 잠시 나눌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잠시만.” 모두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오를 무렵, 준성이 형이 내 말을 가로막았다. “남부 도시 모니카. 머셔너리 클랜에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름과 얼굴을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하여간, 의심 많은 성격은 여전하네.’ 겉으로 보면 쌀쌀맞고 냉담한 태도를 보이지만, 실상은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이 바로 준성이 형이었다. “머셔너리 클랜의 클랜 로드를 맡고 있는 김수현입니다.” “아. 클랜 로드가 직접…. 네?” “머셔너리 클랜 로드. 김수현입니다.” “김…. 수현?” 준성이 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현이 형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후드를 벗으려 손을 올리려는 찰나였다. 지금껏 싸늘한 표정을 유지하던 유현이 형의 얼굴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형은 단순히 이름이 비슷하다고 해서 흔들릴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저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내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김수현’이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 뭔가 뜻 모를 위화감을 느꼈을 것이다. 형은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을 보이다가 이내 차분히 고개를 흔들며 “그럴 리 없어.”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시선은 내게로 고정한 상태였다. 이제는, 밝힐 때였다. “형.” “……네?” “혹시나 했는데, 형이 맞았구나.” “어…. 어…. 너…. 어…?” 겨우 진정되어가던 표정이 삽시간에 경악에 물들었다. 앞뒤 사방으로 엄청난 시선이 쏟아져 들어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형이 나를 보고 있는 만큼 나도 형만 보는 중이었다. 형이라 불렀음에도 반신반의하는 것을 보며, 나는 후드를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아래로 잡아 끌었다. 이윽고 탁 트인 공기가 답답했던 얼굴을 시원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형의 눈과 입이 크게 벌어졌다. “마, 말도 안 돼….” “나야. 형의 친동생 김수현이라고.” “수현이? 수현아…?” 형은 한참 동안 입만 뻐끔거리고 있다가, 이내 뭔가에 홀린 듯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이윽고 형의 양손이 내 어깨에 닿았다. 어깨에 있던 손은 볼을, 입술을, 코를, 눈을, 이마를 거쳐 머리까지 닿았다. 그제야 반신반의했던 형의 얼굴이, 확신으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형의 손길을 받으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형.” “너, 너….” “해밀 클랜 로드의 이름이 김유현이라고 들었을 때 혹시나 했어. 그런데 마침 기회가 닿아서 찾아오게 됐는데…. 설마 진짜 형일 줄은 몰랐지.” 평소 형답지 않은 반응이었지만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담담히 말하고 있는 내가 더 이상한 걸지도 모른다. 형은 말 그대로 나를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에서 ‘처음’ 만나는 것일 테니까. 형의 손은 곧 주르륵 미끄러지듯 내려가, 다시 내 어깨에 안착했다. 형의 표정은 실로 미묘했다. 지금 내가 느끼는 ‘반가움’이라는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친동생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난 후, 형의 눈동자엔 슬픔, 안쓰러움, 괴로움, 번민, 애틋함, 초조, 안타까움 등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걱정’이라는 하나의 감정을 말해주고 있었다. “수현아….” “…….” “네가, 네가 왜….” “…….” 목이 메여 말이 나오지 않는 듯 형의 목 울대가 살짝 움직였다. 그리고 내 어깨를 부서져라 꽉 쥐더니, 이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외쳤다. “네가 왜 여기 있어어어어어어어!” 방이 떠나가라 울리는 형의 목소리는, 마치 절규를 연상케 할 정도의 비통함을 품고 있었다. *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이효을(8년 차) 2. 클래스(Class) ① 북 대륙의 수호자(Guardian of the Northern Continent) : 활성화 ② 일반 마법사(Normal, Mage, Master) : 비활성화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해밀(Clan Rank : 실적 평가 중에 있습니다.) 5. 진명 · 국적 : 빛을 인도하는 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7) 7. 신장 · 체중 : 168.7cm · 49.3kg 8. 성향 : 중립 · 중용(True · Neutral) [근력 25(-22)] [내구 40(-23)] [민첩 48(-21)] [체력 20(-21)(+2)] [마력 82(-17)(+3)] [행운 89(-10)]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반시의 저주를 해주 했습니다. 티끌도 남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정화해, 하락했던 능력치들이 절반에 가깝게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후유증은 아직 남은 상태이며, 오랫동안 저주에 시달려 내구(-3), 체력(-5)의 일부 능력치를 영구적으로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관리만 잘하면 하락상태에 있는 능력치는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치료자체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세라프의 말대로 ‘격’의 차이가 너무나 커서 그런지, 반시의 저주는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화정 앞에 말끔히 연소되고 말았다. 몸 상태는 괜찮다. 오른팔에 아주 살짝 찡한 느낌은 있었지만, 예전과 같은 부담은 느껴지지 않았다. ‘영구적으로 하락한 능력치는 어쩔 수 없지만, 엘릭서를 쓸 필요는 없겠군. 그나저나 북 대륙의 수호자…? 빛을 인도하는 자라고…?’ “믿을 수 없어. 도대체 어떻게 치료하신 거죠? 몸을 감싸고 있던 저주의 기운이 완벽하게 정화됐어요! 마력의 흐름도, 몸 상태도 훨씬 안정됐고요!” “정말이야? 흑….” “후유. 한시름 놓았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사용자 정보에 잠시 생각에 잠길 즈음, 이효을의 상태를 살피던 가희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기쁨과 환희가 뚝뚝 묻어 나오고 있었다. 이곳 저곳에서 들리는 탄성에 조용히 대답하려고 하자, 순간 다시 내 팔꿈치를 잡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수현아. 수현아?” “형? 아, 치료는 했어. 목숨은 구했지만 아직 후유증이 남아있거든? 그러니까 앞으로 회복에 특별히….” “수현아. 일단 형이랑 얘기 좀 하자. 응?” “어, 응.” 아까까지만 해도 이효을에게 쏠려있던 걱정은 지금 오롯이 나를 향하는 상태였다. 애절히 부탁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바라보자, 다들 어색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만큼 형은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아마 항상 냉철하고 위엄 있는 모습만 보아오다가, 갑자기 이런 모습을 보니 저런 눈길을 보내는 것이리라. “이준성. 자꾸 오라 가라 해서 미안한데, 클랜원들좀 데리고 다시 좀 나가…. 아 수현아. 혹시 뒤에 있는 분들은 네 일행들이니?” “응.” 고연주, 김한별, 안솔은 형과 만난 이후 입도 벙긋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들 또한 해밀 클랜의 로드가 내 친형이라는 사실에 대단히 놀란 모양이었다. “그럼 우리가 나가서 얘기하자꾸나. 가희랑 혜린이는 여기 남아서 효을이 좀 살피고 있어. 그리고 준성이, 태원이 아저씨, 진하는 동생 일행 분들 좀 응접실에 안내해드리고.” “알겠어요.” 진하 누나가 대답하자마자 형은 곧바로 나를 끌고 밖으로 나섰다. 나는 형에게 붙잡혀 질질 끌려나가기 전, 간신히 세 명을 향해 잠시 기다리고 있으라는 신호를 보낼 수 있었다.(셋은 아직도 로브를 벗지 않은 상태였다. 심지어 후드마저도.) 형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내가 익숙히 알고 있는, 정원이 훤히 보이는 테라스였다. 밖에는 아직도 비가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후드득 튀기는 빗물을 보다가 나는 습관적으로 품에 손을 넣어 연초를 꺼내 들었다. “응? 수현아, 너 연초 태우니?” “어? 으, 응.” 그때였다. 형은 몸을 돌려 난간에 등을 대다가, 내가 연초를 입에 무는 것을 보고 기함하며 물었다. “너 연초 안 태웠잖아?” “그게…. 어쩌다 보니.” “몸에 해로우니까 피지마. 얼른 이리 줘.” ‘아니야. 안 해로워, 형.’ 형은 당연하다는 듯 내 손에서 연초를 빼앗았고, 나는 순순히 뺏겨주었다. 이 애매모호한 상황에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형은 연초를 반으로 접어 밖으로 던진 후,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디까지 얘기했었지?” “내가 왜 여기 있냐고 까지 했어.” “맞아. 그랬지. 수현아, 너 도대체….” “잠시만. 그럼 형은 왜 여기 있어?” 내가 반대로 되물은 순간, 형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방금 전 질문으로 스스로 깨달았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질문인지. 현재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지만, 만약 내 생각이 맞는다면 북 대륙의 전체 사용자 인구는 약 4만 명 ~ 6만 명 사이로 추산하고 있었다. 굳이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그 중에 서로 아는 사람이 엇갈려서 들어와 만나는 경우는 드물지만 있었다. 실제로 내가 알기로는 한창 인기몰이를 하던 걸 그룹 멤버나 유명한 연예인이 들어와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것은 1회차 이야기였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세상에는 아무런 혼란도 없이 그저 고요했다는 것. 그 말인즉슨…. ‘내가 홀 플레인에 들어오기 전, 확실히 형은 현대에 있었다.’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지금 형은 2년 차 사용자일 테고, 그렇다면 내 머리에서 잊혀졌거나 실종이 됐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확실히 형은 가족으로써 존재했다. 내가 군대에 있는 동안 편지도 자주 보냈고, 면회도 여러 번 왔었다. 그래, 그것은 조금의 의심할 여지도 없는 내 형이었다. “그래도 듣고 싶어.” 너무 오랫동안 생각에 빠져있었을까. 상념에서 깨어나자,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형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어차피 지금으로서는 그러한 비상식적인 상황에 대해 정의할 수 없고, 어차피 형과 얘기하게 되면 또 나올 이야기였다. 대강 생각을 정리한 후, 나는 최대한 태연한 목소리를 내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별거 없어. 전역신고를 하고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깜빡 잠이 들었거든. 그런데 깨어나보니까 소환의 방이었지. 뭐, 나도 형이 왜 이곳에 있는지 궁금하긴 하다.” “뭐? 전역하고 돌아오는데 소환됐다고? 이 천사들을 그냥….” “됐어. 그렇게 따지면 여기서 억울하지 않은 사용자가 어디 있겠어. 지금 와서 따지는 건 크게 의미 없잖아.” 픽 웃으며 고개를 흔들자 형은 꽉 쥐었던 주먹을 천천히 풀었다. 곧이어 얼굴에서, 형이 내 이곳 저곳을 유심히 살피는 시선이 느껴졌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여전히 비는 시원하게 내리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형의 시선을 피해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어색하게 느껴질 법한 잠잠함이 이어질 즈음, 부드러운 목소리가 고요를 깨뜨렸다. “수현이 너, 많이 변했구나.” “…그런가.” “하하.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솔직히 내 동생이 아닌 것 같아. 다 컸네 우리 수현이.” “…….” 형은 고개를 끄덕끄덕 주억이며 다가와, 가벼운 웃음과 함께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방금 형의 말은, 왠지 모르게 내 가슴에 깊숙이 찔러 들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음, 독자분들께 한가지 말씀 드릴게 있지 말입니다. 제 생각에는 굳이 원정이나 탐험에서만 장비를 얻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지 말입니다. 하하. 뭐, 단서는 이번 회에 꼭꼭 숨겨두었습니다. 아무리 매의 눈이라고 하셔도 이것은 눈치채지 못하실 겁니다! 다음 회를 기대해주세요! 아마 다음 회는 왠지 모르게 김유현 찬양이 이어질 것 같은 느낌이…. -_-a 『 리리플 』 1. 카네사다 : 1등 축하합니다. 전회도 1등 하셨는데 이번에도 1등을 하셨군요.(혹시 새로운 강자의 출현?!) 하하. 이번 회도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 2. 유이버 : 아무래도 그런 감이 있습니다. 곧 다가올 전쟁에 아마 몇몇 장비는 진가를 보실 수 있으실 거예요! 3. 플룻 : 하하, 빛을 인도하는 자에 대한 떡밥이 궁금하시죠? 이 부분은 약간 꼬아놨습니다. 조금 복잡해요. 한가지 말씀 드리면, 천사들도 바보는 아닙니다. 후후. 4. 지카프 : 죄, 죄송합니다. 제발 그것만큼은 거두어주세요. 흑흑. ㅜ.ㅠ 5. 정연 : 쾅쾅쾅쾅쾅쾅쾅쾅! 6. 와우우우우~~ : 정주행 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쿠폰 감사합니다! _(__)_ 7. LOVE가을 : 하하, 화정의 정확한 힘은 음. 저번에 세라프를 만날 때 적으려고 하다가 내용이 너무 길어지고 굳이 그때 넣을 필요가 없어 잘랐습니다. :) 2회차에는 사용자들 중 101을 초과하는 사용자는 나오지 않을 예정입니다. 주인공 빼고요.(생각 중에 있습니다.) 8. 멜리스 : 수정 완료했습니다. 제가 D Minus 랭크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9. Lea : 하하, 그때는 능력은 있었지만 태도에는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다만 이번엔 갑자기 태도까지 변하니 다들 놀란 것이죠. 101의 힘입니다!(응?) 10. 감자띱 : 허허허. 코멘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특히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하실 때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D 마지아에서 권소라가 나올 때의 내용이 떠오르더라고요. :) 핫!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299 / 0933 ---------------------------------------------- 나비효과(Butterfly Effect) 돌연히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알고는 있다. 형이 지금 기억하고 있는 김수현이라면, 홀 플레인에서 10년 동안 굴러먹은 김수현이 아닌 현대의 김수현일 테니까. 스스로는 잘 기억나지도 않는…. “수현아?” 걱정이 듬뿍 묻은 목소리에 고개를 올리자, 노심초사 나를 바라보는 형을 볼 수 있었다. 내 얼굴을 읽었는지 혹여 말실수를 했나 무진 속을 태우는 모양이었다. 나는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고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군 전역 날에 왔으면…. 그럼 정확히 언제 홀 플레인에 들어온 거야?” “아직 1년도 안됐어. 사용자 정보로 말하면 0년 차. 형은?” “2년 조금 넘었지. 아무튼 0년 차라…. 그럼 네가 나보다 2년 가량 늦게 들어왔다는 말이네. 그때 난….” “있었어. 확실히 봤어. 그때는 내가 아직 군대에 있을 때잖아? 편지도 보냈고, 부모님이랑 함께 면회도 왔었어. 그뿐만이 아니야. 전역하기 전날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마중 나오지 못할 것 같다 전화까지 해주었지.” “…그렇군. 아버지, 어머니는 잘 계시지?” 나는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형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다소 씁쓸한 기색은 보였지만 의외로 큰 충격은 받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형도 2년 동안 활동해온 만큼 한 번 정도는 이야기를 들어봤을 것이다. “후유,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구나.” “어쩔 수 없지. 천사들에게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똑같잖아. 알려줄 수 없다. 걱정하지 마라.” 후드득! 후드득!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어찌나 세차게 내리는지, 흡사 폭포를 눈앞에 두고 있는 기분이었다. 형은 아직도 내 머리에 손을 얹은 상태였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정수리에서 조심스레 움직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나도 그래.” “이곳에 소환되고 나서도 네 생각을 참 많이 했다. 군대는 잘 전역했을까, 밥은 잘 먹고 다닐까, 학교는 잘 나가고 있을까, 좋은 친구들이랑 잘 사귀고 있을까….” “형도 참. 내가 어린애야?” 나는 괜히 쑥스러운 마음에 머리에 얹혀있는 형의 손을 걷어내었다. 일부러 밝게 말해보았지만, 형의 얼굴에 어린 근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가끔 힘들 때 널 몇 번 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어. 하지만 막상 이렇게 보게 되니 괜스레 죄책감이 드는구나. 어쩌면 내가 그런 생각을 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게 어딨어? 괜한 궁상은 그만둬.” 형과 나는 동시에 미소 지었다. 그리고 형은 다시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아 적당히 쓰다듬으라고 좀. “후…. 아무튼 정말 미안하고, 고맙다.” “형이 미안해할 필요는 없고, 뭐가 고마워?” “그냥 전부다. 나를 도와주러 온 것도,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그리고 지금껏 살아있어 준 것도.” “아 자꾸 왜 그래. 하지마. 이상하단 말이야.” 저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까닭 없이 몸이 배배 꼬이고, 내면에서 부끄러운 감정이 가득 차오른다. 아까부터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는 손을 떼어내기 위해 이리저리 머리를 비틀려는 순간, 형의 말이 한마디 더 이어졌다. “지금까지 많이 힘들었지?” 그 한마디에, 나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방금 전 형의 말은 통과의례 또는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에서 살아왔음을 뜻하는 것이리라.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힘들었다고 생각하는 시절과 형이 말한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이것은 터놓고 말할 수 없는…. ‘아니, 그냥 말을 해버릴까…?’ 문득 고민이 들었다. 내가 지금 2회차를 시작했다는 사실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었다. 하지만 형은 다르다. 형이라면 분명 내 말을 헛소리로 치부하지 않고 진지하게 들어줄 것이다. 같이 고민해주고 공감해줄 것이다. 그리고 계획에 힘을 보태어줄 가능성이 농후했다. 아니, 분명히 그래 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수현아, 네가 홀 플레인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해주지 않을래? 너 어릴 때는 마음 약해서 벌레 한 마리도 제대로 죽이지 못했잖아. 하하. 갑자기 궁금하다.” 나는 차분히 고개를 들어 형과 시선을 맞추었다. 형의 눈동자에는 따뜻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타인을 대할 때는 싸늘해 마지않은 눈이지만 나를 향할 때는 항상 온기를 품고 있었다. 잠시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그 눈동자에 이끌려 서서히 입을 열었다. “형. 잘 들어. 지금부터 모든 것을 얘기해줄게.” “그래. 귀 기울여 들을게.” “실은….” “두분 여기 계셨네요~.” 딸랑! 그때였다. 테라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발랄한 목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말을 멈추고 시선을 돌리자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진하 누나를 볼 수 있었다. “방해했다면 미안해요. 그런데 클랜 로드, 혹시 식사 생각 없어요? 근래에 로드나 우리들이나 언니 걱정에 식사도 제대로 못했잖아요. 지금 가희 빼고 다들 모여있어요.” “식사? 백진하. 분명 동생이랑 얘기를 나누고 있겠다고 했을 텐데.” 형은 조금 전까지 따뜻했던 태도는 어디 갔는지 순식간에 태도를 돌변했다. “도련님도 같이 오시면 되죠? 도련님이랑 같이 오신 분들도 지금 식당에 있거든요. 식사하면서 얘기 나누시면 되잖아요.” “수현이도? 아, 그러고 보니…. 그렇군. 내가 미처 그 생각을 못했다.” ‘뭐?’ 식사에 나를 끼워 넣자마자 쌀쌀맞던 형의 태도가 180도 돌변했다.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도련님이라는, 은근슬쩍 갖다 붙인 호칭에 일순 어안이 벙벙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진하 누나의 입 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가있는 것으로 보아 노리고 말한 것이 분명했다. “수현아 미안하다. 형이 궁금한 게 많아서 네 생각을 못했다. 배고프지? 일단 밥부터 먹고 얘기하자꾸나.” “아, 아니. 괜찮아. 나 클랜 하우스에서 식사하고….” “백진하. 요리사한테 말해서 고기 좀 많이 내오라 그래. 수현이가 고기를 잘 먹거든. 아, 국수 요리도.” “네네~. 그럼 도련님이랑 천천히 오세요~.” 형은 다시 내 팔을 잡고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하 누나는 입술에 가느다란 호선을 그리더니, 이내 깡총깡총 복도를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 문득 떠올릴 수 있었다. 진하 누나는 1회차 때 형을 사모한 많은 여성 사용자들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을. * 식당에는 진하 누나 말대로 열 명 남짓한 사용자들이 옹기종기 테이블에 모여있었다. 아까 방에서 봤던 사람들과 고연주, 김한별, 안솔이 보였다. 얼굴 표정들이 제법 안정된 것을 보니 형과 내가 형제관계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 듯싶었다. 이윽고 음식이 나오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머셔너리 클랜원 세 명은 몸을 가리는 후드를 벗은 상태였다. 원래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고연주 스스로 밝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림자 여왕이 눈앞에 있음에도 해밀 클랜원들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냥 “와, 그림자 여왕이다.” 이정도? 하기야 애당초 여기 있는 개개인도 나름 실력에 자부심이 있는 이들이고 엄밀히 말해서 해밀 클랜의 현재 위치는 머셔너리 클랜보다 높다고 볼 수 있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인사를 드리지 못했네요. 효을이 언니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 드려요. 도련님.” “말을 들어보니 사제 클래스도 아니신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정화하신 거예요? 도련님?” 각자 마음이 맞는 상대와 이야기 꽃을 피우며 식사하던 도중, 진하 누나와 혜린이 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부드러운 것을 보니 이효을의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에 한결 근심을 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자꾸만 내게 뭔가 먹기를 강요하는 형에게서 이때다 싶어 고개를 돌리자, 서로를 쳐다본 채 찌릿 시선을 맞부딪치는 두 여성을 볼 수 있었다. “수현이가 대답하기 곤란해하잖아. 이상한 거 묻지마.” ‘그래. 그러고 보니 형도 둔감 대 마왕이었지.’ 곧바로 중재에 나선 형을 보며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고연주의 것으로 추정되는 한숨 소리가 들렸지만, 환청이라 여기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수현아. 아직 너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 같은데?” “응?” “아까 하려다가 만 이야기 있잖아. 뭐 통과의례를 어떻게 통과했는지 라던가. 아, 사용자 아카데미는 수료했겠지? 그리고 그 이후의 일이나 옆에 있는 동료들은 어떻게 만났는지 등등. 형은 너한테 궁금한 게 너무 많구나.” “아 뭐…. 그냥….” 나는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이렇게 된 이상 이 자리에서 모든 사실을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꼭 듣고야 말겠다라는 의지를 빛내는 형의 눈동자를 보자 어떻게든 이야기를 해야 할 듯싶었다. 해서, 나는 왼쪽 방향으로 쭈르륵 앉은 클랜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자주 애용하는 전형적인 화제 돌리기(?)였다. “고연주.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해밀 로드는 제 친형입니다. 제가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스스로 소개하는 게 어떨까요?” “물론이에요. 오히려 원하고 있었어요.” 원하고 있었다는 말에 일말의 불안감이 느껴졌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고연주는 얌전한 태도로 수저를 놓더니 살며시 웃었다. 언제나처럼 유혹하는 미소가 아닌 여느 여염집 규수 같은 단아한 미소였다. “안녕하세요. 현재 머셔너리 클랜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용자 고연주에요. 부끄럽지만 10강이라는 과분한 칭호로 불리기도 하지요.” “음. 그렇군요. 10강이라고 하시면…. 당신이 그림자 여왕이겠군요.” “네, 맞아요. 아주버님.” “푸.” 탕. 탕. 탕. 탕. 고연주의 말이 끝난 순간, 나는 마시던 물을 세차게 내뿜고 말았다. 비단 당황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동시다발적으로 수저를 떨어뜨리는 소리가 식당을 조용히 울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다시 이야기가 시작된 것은 테이블 끝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준성아.” “말하지 마요.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으니까.” “저 형제들은 전생에 나라라도 구했나 봐.” “아 말하지 말라고요.” 준성이 형과 태원이 아저씨는 각기 젓가락을 깨작거리며 침울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크흠흠!” 형은 근엄한 얼굴로 크게 헛기침을 하고는 앞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탁 소리가 나도록 컵을 내려놓더니, 조금은 불편하게 들릴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버님이라니, 너무 이른 호칭 같군요.” “불쾌하셨다면 사과 드릴게요. 하지만 다른 분들이 우리 클랜 로드를 도련님이라 부르시길래.” “그것은 제가 필히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호호.” 형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진하 누나와 혜린이 누나를 쏘아보았다. 둘은 찔끔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고연주의 소개를 간신히 넘긴 후, 김한별의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해밀 클랜에서도 그녀를 알아보는 사용자들이 몇 명은 있었다. 하기야 황금 사자에 있을 시절 그렇게 보석 마법사라고 광고를 해댔으니 아주 이해 못할 일도 아니었다. 김한별은 소개 내내 불안한 얼굴을 했지만, 왜 황금 사자에서 머셔너리로 왔냐는 질문이 나오지 않자 안도한 얼굴로 자기소개를 끝마쳤다. 그렇게 무난했던 소개가 끝나고(이때 김한별에게 무척 고마운 감정이 들었다.), 드디어 안솔의 차례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오. 저는 안솔이라고 합니다아. 오라버니와는 통과의례 때부터 함께해온 사이에요오.” 안솔의 말을 듣자 겨우 가라앉았던 불안감이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니, 왜 자꾸 나한테 초점을 맞추는 걸까? 자기소개를 하라고 했지 나와의 관계를 소개하라는 말이 아니었는데. 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었다. 또 폭풍이 몰아치기 전에 대충 이 정도에서 끝내야…. “오, 통과의례 때부터 함께해왔다고요?” “네에! 첫 시작부터 지금까지 쭉~~~~. 함께 있었어요오.” 쭉~~~~. 이라고 말할 때 눈을 꼭 감고 입술을 쭉 내민 게 자못 귀여웠는지, 꺅꺅 약한 비명을 지르는 누나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쭉 함께 해왔다니, 그건 좀 궁금하네요. 혹시 우리 동생이 그 동안 어떻게 지내왔는지 잠깐 들을 수 있을까요?” “형. 잠시만. 얘한테 그걸 왜 물어봐. 그건 내가….” “수현 오라버니는요, 정말 대단해요~.” “하하. 역시 그렇군요. 그런데 어떻게 대단했나요? 조금 더 자세히….” 형은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 보이며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안솔은 고연주를 향해 뻐기는듯한 미소를 흘리더니 이내 손을 방방 휘저으며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는요, 통과의례 때 우리들을 위해 막~. 괴물들도 유인해주셨고요. 사용자 아카데미에 들어가서는요. 막~~. 수석도 했어요. 아! 황금 사자에서 오퍼도 받았는데 우리들을 챙긴다고 그것도 거절하셨어요!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나오고서는요, 막~~~. 유적도 발굴하고 막~~~~. 탐험도 해서 클랜 하우스까지 세우셨어요오!” 그만해. 제발. 나는 결국 그대로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전투도 하지 않았는데 뭔가 하얗게 불태운 느낌이었다. * 폭풍 같던 식사시간이 지나간 이후, 우리들은 여유로운 티타임을 가졌다. 안솔의 활약으로(?) 분위기는 한층 유쾌해져 있었다. 물론 나한테는 전혀 아니었지만. 그 와중에도 형은 앞으로 자신이 지켜주겠다고,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어떻게든 보호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다행히 진하 누나와 혜린이 누나가 뜯어말려 줬기에, 본연의 이야기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곳에 계속 남아 경과를 보곤 싶지만 현재 제가 맡고 있는 역할이 있어 바로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반시의 저주는 확실히 해주 했습니다. 목숨은 구했다고 볼 수 있지요.” “수현아. 그냥 형 클랜으로 들어오면 안될까? 너도 알다시피 홀 플레인은 굉장히 무서운 세상이야. 형은 너무 걱정….” “하….” 또 같은 말을 반복하는 형. 그에 질려 가만히 한숨을 내쉬자, 진하 누나와 혜린이 누나가 급히 소곤거렸다. “클랜 로드! 오늘따라 정말 왜 이래요? 머셔너리 클랜이라잖아요, 머셔너리! 그것도 클랜 로드!” “수현이는 내 동생이야. 그것도 친동생이라고. 너희가 지금 내 마음을….” “현실을 보자고요 좀. 지금 1년도 안돼서 유적만 네 개 발굴했고, 시크릿 클래스 5명, 레어 클래스 4명을 보유하고 있는 클랜이에요. 거기다 그림자 여왕까지….” “아니 그건 알고 있는데.” “알긴 뭘 알아요! 지금 클랜 로드가 한 말은 머셔너리 클랜보고 해밀 클랜에 들어오라는 소리잖아요. 아무리 친동생이라고 해도. 다른 클랜원들도 앞에 있는데, 그게 얼마나 실례되는 말씀인지 몰라서 이러는 거예요?” 형은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바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한 번 날카롭게 쳐다보자,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다물어주었다. “미안해요. 머셔너리 로드. 우리 로드께서 도련님을 뵈니까 정말 반가우신가 봐요. 평소에는 이런 분이 아닌데 저희도 당황스럽네요.” “괜찮습니다. 원래 현대에서도 항상 걱정을 달고 살았거든요. 이해합니다. 아무튼 이야기를 계속해보면, 치료를 하긴 했지만 후유증은 아직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그것도 굉장히 심하게요. 하지만 지속적인 간호를 해주면 필히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걱정 마세요. 우리 쪽에서도 능력 있는 사제가 많으니 후유증은 능히 치료할 수 있을 거예요.” “신성 주문뿐만 아니라 약과 치료를 병행하면 치료 시기를 앞당길 수 있을 겁니다. 아무튼, 그 부분은 맡기겠습니다.” “네. 그럼 이제 치료해주신 것에 대해 보상을 드려야 하는데…. 혹시 어떻게 치료하셨는지 대충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진하 누나는 말끝을 흐리며 슬쩍 형을 돌아보았다. 지금 대화는 그녀가 주도하고 있었다. 궁수 클래스이긴 하지만, 성격이 꼼꼼하고 셈이 빨라 해밀 클랜의 내정을 전반적으로 담당하고 있을 것이다. “수현아. 너 아까 사제가 아니라 검술 전문가라는 시크릿 클래스를 가졌다고 했잖아? 그럼 효을이를 치료해준 힘은 뭐야?” 보상 문제는 애매하다. 면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최대한 쥐어짜냈을 테지만, 왠지 형 앞에서는 그러기가 싫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냥 공짜로도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곳으로 오기 전 회의에서 해놓은 말이 있는 터라 그럴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냥 있는 대로 말해주고 적당히 생색을 내는 수준에서 그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냥 규격 외의 힘이라고 보면 돼. 출력을 체력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높일 경우 몸에 무리가 가지만, 단순한 치료용으로는 그렇게 부담되지 않아.” “뭐라고?” “아니. 치료용으로는 괜찮다고.” “음…. 검술 전문가. 즉 근접 계열 클래스라는 말이지….” 형은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형은 검지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더니, 목 울대를 꿀꺽 움직이는 진하 누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백진하. 저번에 왕의 무덤을 발굴했을 때 얻었던 검 있지? 일단 그거 가져와봐.” “왕의 무덤이라면…. 빅토리아의 영광이요? 그거 지금 효을이 언니가 귀걸이로 차고 있잖아요….” “반시의 저주는 해주 했다니까 상관없잖아.” 형은 무심하게 한마디 툭 내뱉고는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수현아. 그 힘을 사용하면 체력에 부담이 간다고 했지?” “응? 응. 아 그런데 출력을 조절하면 돼.” “잘됐다. 형이 예전에 왕의 무덤이란 유적을 발굴했거든. 빅토리아의 영광이라고 체력을 올려주는 검이야. 검을 쓰는 클래스인 만큼 네게 딱 맞을 거다. 그 외에도 여러 옵션이 있으니 기대해도 좋아.” ‘무검, 일월신검, 칼리고 아브락사스…. 나 검만 세 자루인데….’ 하지만 체력을 올려준다는 말은 제법 솔깃했다. 더구나 귀걸이로도 형태를 변하게 할 수 있다고 하니 확실히 구미가 당겼다. “그러고 보니 너 투구는 없니?” “응? 응. 불편하기도 하고 굳이 필요가 없어서.” “그럼 안되지. 근접 계열들은 항상 머리를 조심해야 해.” “아니 뭐 꼭….” “보니까 갑옷도 입지 않았고. 쯧, 전체적으로 장갑이 부실하구나.” 하늘의 영광과 태양의 영광이 자아가 있었다면, 아마 발끈하지 않았을까? 형은 내 장비를 전체적으로 훑으며 혀를 쯧쯧 차고는, 훌쩍 몸을 일으켜 내게로 다가왔다. “안되겠다. 백진하. 너는 일단 빅토리아의 영광부터 가져와. 그리고 수현이 너는 잠시 형이랑 창고 좀 가자. 전체적으로 손 좀 봐야지 안되겠어.” “…….” 내 손을 거세게 잡아 일으키는 형을 보며, 지금 나는 떠올렸다. 형에게서 보호받던 시절을. 우리 형이 심각한 브라더 콤플렉스라는 사실을.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드디어 김유현의 본성이 나왔습니다. 원래 성격은 차갑고 카리스마 있는 냉정한 남성이었습니다. 다만 친동생(김수현)에게는 예외지요. 중증의 브라더 콤플렉스(동생 바보) 김유현입니다. 하지만, 아무튼 다음회에는 진행을 위해 Bye Bye를 해야겠지요. :) 혹시나 해서 말씀 드리는데 메모라이즈는 BL이 아닙니다. 김유현이 김수현을 끔찍이 아끼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친동생으로써 아끼는 것입니다. 둘 모두 정상적인 이성관을 갖고 있습니다. 하하하. 그러니 BL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독자분들이 저를 로X미라고 놀리시지 않는 이상 제가 절대 BL을 쓰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D PS. 오늘 새벽에 형을 깨울 생각입니다. 제 형이 공군을 나왔는데, 저벅가(맞나요? 그 초반에 저벅저벅 소리 나오는…. 제가 공군을 나오지 않아서….)를 틀어주며 “기상, 기상. X병장. 기상합니다.” 라고 말해줄 생각입니다. 반응은 내일 후기로 알려드리겠습니다. 후후. 『 리리플 』 1. 휘을 : 1등 축하합니다! 오랜만에 뵈어요 휘을 님. :) 그 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하하. 이번 회도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2. 유이버 :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유이버 님의~. 생일 축하합니다~! 와! 짝짝짝짝! 선물로는 제 뽀뽀를 -3-.(퍽퍽!) 3. Astrain : 정확하게 맞추셨습니다. 예. 김유현은 브라더 콤플렉스를 갖고 있습니다! 4. 피네이로 : 정답입니다! 김수현은 1회차 때 찌질 + 민폐 캐릭터입니다. 그것을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변화한 인물이지요. :) 5. J.F : 그렇지요. 김유현이 그래서 김수현을 보고 어색하다고 했고, 아직 현대의 기억에 남아 그대로 수현이를 대하는 것이지요. 6. 디럭스샌드위치 : 그 부분은 고민 중에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무리라도, 언젠가는 밝힐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7. 로노에 : 코멘트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_(__)_ 그리고 늦었지만 둘째 축하합니다! 충성! 8. 고라온 : 쿠폰 감사합니다. _(__)_ 앞으로도 더욱 좋은 내용으로 보답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9. 멜리스 : 매의 눈이시군요. 설마 그것을 잡아내실 줄은 몰랐습니다. :) 10. 도영 : 정주행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많은 코멘트를 남겨주시니 더욱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먼저, 초반 부분에는 도영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때 당시 많은 분들이 코멘트에 휘둘리지 말고 소신껏 써나가라고 하셨지요. 독자분들의 코멘트를 소중히 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에 대한 온전한 책임은 저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쓰고 전개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오롯한 저의 권한이니까요. 여자관계는, 글쎄요. 한가지 확실한 것은 절대 문어발로 갈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예를 들면 수십 명의 여자를 거느린다는 등등.). 홀 플레인의 인구는 제가 직접 계산해보았는데, 4만 ~ 6만 사이가 적당한 듯싶습니다. 사실상 이 부분은 굉장히 복잡한 설정이 들어가있습니다. 시작의 여관을 통해 들어오는 사용자의 수는 굉장히 심하고, 불규칙한 편차를 보이고 있습니다. 적게 들어올 때는 100명대로 들어오지만, 많이 들어올 적은 2000명이 넘게 들어온 적도 있지요.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확실히 도영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전에도 그 부분을 지적해주신 분이 있었어요. 생계형 사용자들은 확실히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제가 지금 1회부터 천천히 수정하고 있는데, 그 부분은 필히 짚고 넘어갈 예정입니다.(출산은 사용자들이 선호하지 않습니다. 관계를 맺더라도 피임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충분한 답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300 / 0933 ---------------------------------------------- 나비효과(Butterfly Effect) “헉, 헉, 헉, 헉!” 한 남성이 숲을 죽자고 달리고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힘껏 달리다가 발이 꼬인 듯 앞으로 크게 고꾸라졌다. 지금껏 달려오면서 붙은 가속력이 어마어마했는지 무려 서너 바퀴는 뒹굴고서야 구르기가 멈추었다. “큭…. 읍!” 남성은 고통에 젖은 신음을 내뱉다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지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지만, 그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절대로 입에서 떼지 않았다. 이윽고 손 떨림이 잦아들 즈음 남성은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서서히 내렸다. “하………….” 혹여나 누가 들을세라 남성은 숨을 가느다랗게 몰아 쉬었다. 그는 바로 일어서려고 했지만 이내 다시금 주저앉고 말았다. 남성은 발목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 꼬여 넘어졌던 탓인지 발목이 퉁퉁 부어있었다. 한가지 이상한 점은 일반적으로 부어오르면 발갛거나 또는 싯누런 색을 띠어야 정상인데, 그의 발목은 시퍼런 색으로 변색하여있었다는 것이다. “빌어먹을 새끼들….” 남성은 나직이 욕설을 뱉고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게 혹시 누가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세심히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남성은 꽤나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두터운 가죽갑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이곳 저곳이 심하게 그을리거나 찢어져 있었다. 오죽하면 갑옷이 아니라 걸레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더구나 찢어진 갑옷 틈새로 피가 배어 나오는데 그 양이 제법 상당했다. 긁히거나 굴러서 다쳤다고 보기엔 심각할 정도라 누군가에게 고의적인 공격을 받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읔…. 읔….” 남성은 주머니에서 꺼낸 물약을 발목에 붓고 있었다. 이윽고 붓기가 슬슬 가라앉자 몸에 난 상처에 골고루 뿌리더니, 한 모금 정도 남았을 즈음 입가로 가져갔다. 꿀꺽, 목 울대가 움직이고 그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군데군데 상처가 보였지만 전보다는 훨씬 편안한 표정이었다. 남성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간 가량 달렸을까? 남성은 폭이 좁은 호젓한 길에 다다른 순간 갑작스레 걸음을 멈췄다. 그는 바로 자세를 낮추고 으슥한 곳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고개만 살짝 내밀더니 한쪽 방향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이윽고 그의 눈동자에 푸른빛이 어리는 순간, 길의 반대편에서 여러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남성은 긴장감 가득한 얼굴로 그들을 살펴보았다. 반대편에서 나타난 사용자들의 수는 총 여섯 명이었다. 시선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내리다가, 일순 그의 표정에 화색이 감돌았다. 남성은 바로 몸을 일으켜 사용자들에게로 후다닥 달려갔다. “잠시만, 잠시만요! 헉, 헉.” “모두 정지.” “혹시, 혹시 뮬의 대표 클랜 지상낙원의 클랜원 분들이 아니십니까?” “…….” 사용자 여섯 명의 행동은 민첩했다. 남성이 뛰어 나오자마자 바로 경계태세를 갖추었던 것이다. 선두에 선 사용자는 잠시 남성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꼴을 보니 딱히 해가 되지는 않겠다고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맞습니다. 그런데, 많이 다치신 것 같군요. 일단 치료를….” “아닙니다! 치료는 괜찮습니다! 일단은, 일단은 빨리 도시로 돌아가야 합니다!” “음…. 도시로 돌아가야 한다뇨?” “지금 숲 속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동료들은 모두 당했고, 저만 간신히 도망쳤습니다! 놈들이 저를 추적하기 전에 어서 이 사실을 도시에 알려야 합니다!” 남성의 처절한 외침에 사용자들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때였다. 그들 사이로 “아무래도 찾은 것 같은데?” 라는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순간, 남성은 눈을 크게 부릅떴다. 이윽고 사제가 주문을 외우며 서서히 거리를 줄여오자 그의 얼굴에 공포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주춤주춤 물러설 새도 없이, 사제의 지팡이가 남성을 겨누었다. “───. ───. ───. 치료(Cure).” “어…?” 남성은 의아한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사제는 긴 생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상냥히 말해주었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네…?” “일주일 전부터 이상하게 실종신고가 많이 들어왔어요. 우리는 대표 클랜에서 보낸 칠흑의 숲 조사단이에요. 오늘 아침에 떠났는데 이렇게 빨리 단서를 잡을 줄은 몰랐네요.” “그렇다면…!” “네. 아무래도 실종사건에 대해서 뭔가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저희에게 알려주시겠어요?” 남성은 거의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드디어 살았다는 사실에 무척 감격한 듯 보였지만 이내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비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니, 말하려고 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일단 이곳을 피하는 게 우선….” 핑그르르! 푸슉! “깍!” 어디선가 공기를 가늘게 찢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사제의 이마가 반으로 갈라지며 날카로운 검 끝이 비죽 모습을 드러내었다. 여성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대로 몸을 허물어뜨렸고, 남성은 반사적으로 시체를 받았다. “희선아!” “젠장, 습격이다! 정신차려!” “혀, 형! 저 남자랑 희선이는….” “남자는 빨리 데려오고, 시체는 놔둬! 빨리 움직여!” 사용자들의 이런저런 외침이 들리는 가운데, 남성은 풀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모양이었다. 그에 따라 사제의 시체는 바닥에 엎어졌고, 크게 터져나간 후두부가 보였다. 단순히 단검을 날린 것치고는 가히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후두부에서 흘러나온 뜨끈한 핏물이 바닥을 적실 즈음, 남성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가까운 곳에서 무성한 수풀을 헤치며 달려오는 수십의 기척들을. * 나는 기어이 창고까지 끌려가고 말았고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눈앞에서는 형이 눈동자를 이글이글 불태우며 장비를 훑고 있었다. 마치 어떻게든 동생만은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젖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장비를 하나하나 골라내는 형을 보며, 나는 지금 걸치고 있는 장갑들을 설명하느라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TOPG, 오로쓰로스 롱 부츠, 그리고 하늘의 영광과 태양의 영광까지, 나는 정말 침이 튀기도록 설명하고, 또 설명해야만 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형은 내 장비들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한 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지금 내 마법 방어력이 굉장히 높다는데 까지만 설명했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난 사족을 덧붙이고 말았다. 형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럼 물리 방어는 어때?”라고 되물었고, 난 코트 오브 플레이트가 있지만 걸리적거려서 입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그게 바로 실수였다. 잠시 멈췄던 형의 손이 다시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진하 누나가 중간에 빅토리아의 영광을 갖고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날 해밀 클랜의 창고에 있던 검사용 장비들은 거덜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결국 그렇게 두 시간을 넘게 옥신각신하고 나서야, 간신히 창고를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탁자 위에는 총 세 개의 장비가 아름다운 빛깔을 번들거리고 있었다. 하나는 새하얀 광채가 어린 고급스러운 귀걸이였고, 하나는 은은한 금빛을 내뿜는 부드러워 보이는 티셔츠였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잔잔한 바다 빛이 파도 치는, 소매 없이 어깨위로 걸쳐 둘러 입도록 만든 외투. 즉 망토였다. 세 장비에는 모두 구즈 어프레이즐이 붙어있었다. 약한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드니, 여전히 불만족스러워하는 형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해밀 클랜원들까지. 뚱하니 쳐다보자 형은 금방 표정을 고치며 어설프게 웃었다. 그리고 슬쩍 눈짓을 보내는 게 일단 설명을 읽어보라는 것 같았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빅토리아의 영광(Victoria's Glory)』 (일반 설명 : 아득한 고대 시절, 최강국이라 불리었던 빅토리아 왕국을 상징하는 ‘왕의 검’입니다. 지금껏 수많은 왕국들이 탄생하고 멸망했지만, 빅토리아는 가장 오래 장수한 왕국들 중 하나입니다. 다른 왕국 사람들은 빅토리아를 가리켜 ‘전투민족’이라 부를 만큼 그들은 호전적인 국가였습니다. 비록 200년에 걸친 무리한 정복 전쟁으로 쇠락의 길을 걸었지만, 분명한 것은 빅토리아는 한때나마 홀 플레인 대륙의 통일을 노려볼 정도로 융성한 국가였다는 것입니다. ‘빅토리아의 영광’은 왕가에 전통적으로 내려온 유서 깊은 검이며, 오직 왕의 자질을 지닌 사람만이 검의 진정한 힘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상세 설명 : 1. 대대로 이어진 왕의 검인만큼 검의 자존심이 굉장히 강합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해서 주인을 가립니다. 만일 주인 될 자격을 갖춘 이가 나타난다면 스스로 귀걸이의 형태를 해제해 검의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착용자가 원하면 다시 귀걸이 형태로 변환할 수 있습니다.) 2. 체력이 2포인트 상승합니다.(다만, 처음 효과를 받아들일 때 95포인트를 초과하는 사용자가 착용한다면 효과를 받을 수 없습니다.) 3. 사용자의 몸에 활력을 불어 넣어줍니다. 신체 활동과 마력의 흐름이 한층 자유로워지며(능력치 상승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저주, 사기 등 악한 기운이 내부로 침투할 시 일부 저항해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4. 귀걸이 형태를 해제해 본 모습을 드러냈을 경우, 착용자는 본인의 마력 능력치에 기반해 그에 준하는 위엄(카리스마)을 내뿜을 수 있습니다. 5. 귀걸이 형태를 해제해 본 모습을 드러냈을 경우, 검에 잠재되어있는 능력 ‘검광(劍光)’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노블 미스릴 셔츠(Noble Mithril Shirt)』 『푸른 용기사의 외투(Blue for the Dragon Knight's Coat)』 ‘헐.’ 설명을 읽다가 나는 멍 입을 벌리고 말았다. 노블 미스릴 셔츠와 푸른 용기사의 외투는 1회차에서 본적이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빅토리아의 영광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얼굴을 들자, “어때, 마음에 들지?”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형이 보였다. “형 이거….” “괜찮아. 가져. 검이 워낙 자존심이 세서 그런지 우리 클랜원들 누구도 인정받지 못했어.” “그래도…. 나도 인정받지 못할 수 있잖아.” “그래도 가져. 그거 귀걸이로만 착용해도 제법 효과는 좋을 거다. 아, 너 체력 능력치가 95포인트를 넘는 건 아니지?”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체력 능력치라는 말을 듣자마자, 문득 형의 사용자 정보가 궁금해졌다. 아직 제 3의 눈은 활성화한 상태였다. 나는 곧바로 형을 쳐다보았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유현(2년 차) 2. 클래스(Class) : 뇌제(Secret, The Lord of the Thunder,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해밀(Clan Rank : 실적 평가 중에 있습니다.) 5. 진명 · 국적 : 천둥과 벼락을 다스리는 자, 동생 바보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6) 7. 신장 · 체중 : 180.7cm · 70.8kg 8. 성향 : 철혈 · 냉정(Blood and Iron · Cool) [근력 70] [내구 87] [민첩 88] [체력 97] [마력 97(+2)] [행운 94]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 능력치 비교 > 1. 김수현 : 562포인트. [근력 96(+2)] [내구 92] [민첩 98] [체력 90] [마력 96] [행운 90(+2)] (잔여 능력치는 자유 능력치로 총 6포인트입니다.) 2. 김유현 : 533포인트. [근력 70] [내구 87] [민첩 88] [체력 97] [마력 97(+2)] [행운 94]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 형의 능력치를 보고 맨 처음 떠오른 것은 물음표였다. 아니, 솔직히 아주 당황스러웠다. 능력치 총합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마법사는 마력이 높은 대신 신체 능력치들이 조금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 만큼 마법사들을 능력치 총합으로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것은 마법사임을 감안하면 좀 충격적인 능력치였다. ‘이래서 그렇게 펄펄 날아다닌 건가…?’ 아래 업적과 고유, 특수, 잠재 능력은 살펴볼 생각도 못한 채 입만 벌리고 있자, 진하 누나의 상냥한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요 도련…. 머셔너리 로드. 이미 창고에서 이야기는 끝났어요. 너무 그렇게 부담 가지지 않으셔도 되요. 어차피 엘릭서를 구하러 장비들 몇 개를 내놓을 생각도 했고, 실제로 경매에 내놓은 것도 있어요. 이제 그것들을 모두 회수할 수 있게 됐어요. 그것을 생각하면 우리도 나름대로 지출은 줄였다고 볼 수 있어요.” “그렇지. 솔직히 클랜 로드 장비 중에서 민첩이랑 행운 능력치 올려주는 장비는 조금 아까웠거든. 아무튼 다행이다.” ‘딱히 부담을 가진 건 아닌데…. 그런데 뭐라고?’ 저기서 또 민첩이랑 행운이 올라간단 말인가? 물론 나도 빅토리아의 영광을 가진다면 체력 능력치가 올라가겠지만, 아무튼 놀라움은 가시지 않았다. “그래 수현아. 오히려 형이 더 못 챙겨줘서 정말 미안해.” “아, 아니. 이것만해도 충분해.” “그래. 설마 이것도 받지 않으려고 했으면 강제로라도 입히려 했는데 다행이구나. 그럼 얼른 빅토리아의 영광에 손을 얹어보지 않으련? 결과가 궁금하다.” “…….” 문득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형은 빙긋빙긋 웃으며 안 되도 너무 실망하지 말라고 나를 격려하는 말을 덧붙였다. 잠시 고개를 돌리자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나를 쳐다보는 안솔과, 웃겨 죽겠다는 얼굴로 손으로 입을 가린 둘이 보였다. 왠지 형을 만나고 나서 지금껏 쌓아온 클랜 로드로서의 위엄이 와르르 무너진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후유. 너무 기대는 하지마.” “알아. 나도 거부한 녀석인데 뭐. 그래도 수현이 너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너무 부담 가지지 마. 하하.” 뭔 소리야 도대체. 부담을 가지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나는 서서히 손을 들어 귀걸이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그때였다. 우웅!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귀걸이는 내가 손을 대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검으로 모습을 변환했다. 테이블에는 어느새 새하얀 광채를 은은히 뿜어내는 매끈하고 위엄 넘치는 검이 자신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얼떨떨한 마음에 고개를 들자, 아까 전 내 표정을 똑같이 답습하는 사용자들을 볼 수 있었다. 형을 포함해서. * “수현아! 형이 곧 모니카로 갈게!” “수현. 아주버님께서 부르시는데요?” “못 들은 척합시다.” “수현아! 몸 조심해야 해! 꼭이야! 수현아!” 형의 목소리가 들릴수록 나는 더욱 걸음을 바삐 놀렸다. 보상 문제가 끝난 이후, 나는 곧바로 형과의 작별을 고했다. 형은 어떻게든 나를 붙잡아두려고 저녁까지 먹고 가라고 했지만 일이 있다는 핑계로 딱 잘라 거절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를 위해서였다. 그렇게 만나고 싶었던 형이었고 나라고 더 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형의 말을 받아들여 조금 더 머무를 경우 그 이후가 무서웠다. 왠지 한 번 이렇게 기대기 시작하면 두 번, 세 번도 기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형에게 다시 보호받기 위해서 2회차를 시작한 게 아니었다. 아무튼 이렇게 형과의 해후는 끝났다. 하지만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두어 개 남아있었다. 첫 번째는 이번에 내가 살린 사용자가 북 대륙의 수호자라는 것, 두 번째는 형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 거기에 대해서는 고민을 해보았지만, 지금은 판단을 유보하기로 했다. 이효을은 후유증을 어느 정도 회복하기 전까지 깨어나지 못할 것이고, 수호자에 대해서는 아주 약간이지만 알고 있는 정보가 있었다. '북 대륙 수호자를 살렸다. 그리고 이효을의 진명과 안솔의 진명. 마지막으로 형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 이 세 가지에 대해서는 당장 감정에 끌려 판단을 내리는 게 아니라, 시간을 갖고 깊은 생각을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당면한 일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다. ‘일단은 영감님 영입부터 끝내자.’ 그래. 일단은, 서로 살아있음을 확인했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있었는지, 중천에 떠오른 해는 서서히 노을 빛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이제는 워프 게이트로 향할 차례였다. “수현아! 그냥 형이 바래다줄게! 응? 딱 바래다주기 까지만…!”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 나는 결국 뛰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 추가 : 300회 축하해주신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 예. 이로써 형과의 해후 파트가 끝났습니다. 이별도 조금 상세히 하고 싶었지만 그냥 이 정도에서 끝내는 게 낫겠다 싶었습니다. 어차피 앞으로 종종 만날 테니까요. 하하. 그리고 그때는 효을이도 깨어나겠지요. 이번 소제목 나비효과는 바로 이효을을 살린 것에 중점을 둔 파트입니다. 하하. 더 자세히 말씀 드리고 싶지만 이효을과 안솔이 만나는 날을 위해 여기서 말을 아끼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는 뮬로 갈 차례입니다! PS. 다시는 형을 저벅가로 깨우지 않겠습니다. 솔직히 형은 전역한지 3년 차 인데, 아직도 격하게 반응하네요. 일어나자마자 흉신악살의 얼굴로 저를 응시하는데 오금이 저렸습니다. 바로 끈 게 다행이었어요. 후유. 『 리리플 』 1. 미월야 : 오랜만에 1등을 하셨군요! 축하합니다. :) 하하. 이타치라.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전부 읽은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에 동생 이마를 치는 장면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ㅜ.ㅠ 2. mfsm : 에. 군만두요? 고기 반찬 주세요! 샐러드 주세요! 생선도 주세요!(퍽퍽!) 3. 플룻 : 아 플룻 님. 저번에 달아주신 코멘트가 너무 재밌어요. ㅋㅋㅋㅋ. 안솔이 삐아~. 삐아~. 하면서 대륙 수호자 역할을 한다니. 생각만해도 너무 웃겨요. ㅋㅋㅋㅋ. 4. 추락한날개 : 실은 얼마 전 조아라 편집자 분한테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북 원고를 원하시더군요.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했습니다. 너무 무섭습니다. 흑흑. ;ㅅ; 5. 고장난선풍기 : 후후. 딸 바보도 좋지요. 아마 형이 아니라 누나였다면 다른 분들의 반응이 어땠을까 궁금합니다. :) 6. 유리켄느 : 쿠폰 감사합니다. _(__)_ 그 지인 분께서 혹시 코멘트를 다신적이 있으신가요? 닉네임이 궁금합니다. 하하. 아. 혹시 김유현 공, 김수현 수는 어떠신지요.(농담입니다. 농담이에요! 죄송해요!) 7. 레플리온 : 눈빛만보고 바로 굴복했습니다. 엄청 싸늘한 게 정말…. ㅜ.ㅠ 8. 虛空_달바라기 : 호. 저를 자극하시는군요? 하하하. 장소는 마련되어있습니다. 클랜 하우스에 대목욕탕도 있겠다, 우연히 마주치면…. 퍽퍽! 노, 농담입니다. @_@ 9. 알리 : 엇, 정말요? 어디서 근무하셨어요? 진주인가요? 사천인가요? ㅋㅁㅋ 10. 와룡선생a : ……. 하하하. 하하하. 하하하. 그렇군요. 제 안에 잠재되어있는 그것을 깨우시려 하시는군요! 크오오오! 이렇게 된 이상! 일수다공으로…! 하아, 하아. 아,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자꾸 그러시니까 제가 자꾸…. ;ㅇ;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301 / 0933 ---------------------------------------------- 부랑자의 눈물 『노블 미스릴 셔츠(Noble Mithril Shirt)』 (설명 : 미스릴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그 중 노블 미스릴은 최상위로 분류되는 금속으로써, 보통 미스릴 10Kg을 채취했을 때 노블 미스릴은 10g 이하로 나올 정도로 귀한 금속입니다. 이 셔츠는 노블 미스릴만을 따로 모아, 거기서 다시 한 번 실을 뽑아내어 가공한 셔츠입니다. 효과 자체는 보통 미스릴과 크게 다를 바는 없지만 효율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차이를 보입니다.) 『푸른 용기사의 외투(Blue for the Dragon Knight's Coat)』 (설명 : 고대 홀 플레인에는 용이 존재했고, 인간들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닌 용을 경외하고 숭배했습니다. 용기사는 용과 계약을 맺은 인간을 뜻합니다. 이따금 인간들 중 용과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는 특출한 자들이 출현했고, 그럴 때마다 용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것은 푸른 용(Blue Dragon)이 자신과 계약을 맺은 인간에게 선물로 준 외투입니다. 용의 외피로 만들어진 만큼 가죽이 굉장히 질기며 마법에도 내성이 있습니다.) 이번에 해밀 클랜에서 받은 세 개의 장비는 지금 모두 착용한 상태였다. 빅토리아의 영광은 귀걸이로 변환해 오른쪽 귀에 걸어두었고, 노블 미스릴 셔츠는 하늘의 영광 안으로 해서 입었다. 푸른 용기사의 외투는 고연주가 직접 내 어깨 위로 걸쳐 둘러주었고. 착용감은 확실히 좋다. 셔츠는 마치 깃털과 같이 가벼워 입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외투는 뭐랄까, 마치 물을 둘렀다고 해야 할까? 길이나 두께가 얇은 것이 아닌데도 전혀 걸리적거리는 게 없었다. 좋긴 좋다. 하지만 아까부터 괜히 받았다는 생각이 가시질 않는다. 빼앗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빅토리아의 영광이야 그렇다고 쳐도, 셔츠나 외투는 원래 주인이 정해져 있던 장비들이었다. 솔직히 체력 능력치를 90포인트로 올렸으니 치료 과정에서 위험을 감수했다고 보기는 힘들었고, 내가 보유한 장비들이 미진한 편도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이미 내 손안에 들어왔고, 이제 와서 돌려준다고 해도 받을 것 같지도 않다. 추후 계획중인 원정에 해밀 클랜을 팍팍 밀어주리라 다짐하며, 나는 감사히 받아들이는 것으로 마음을 정리했다. “수현은 참 마음이 복잡하겠네요.” “네…?” 장비에 대한 생각을 마무리 짓고 워프 게이트로 걷던 도중이었다. 고연주는 걸음을 바삐 놀려 나와 나란히 서고는, 장난기가 살짝 감도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예전에 해밀 클랜의 정보를 알아봐달라고 했을 때부터 약간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요. 이름이 비슷해서 혹시나 싶었죠.” “하하. 그렇죠. 저도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제법 담담해 보이던데요? 아주버님께서는 대단히 혼란스러워 보이시던데~.” “일부러 참은 겁니다. 저라고 뭐….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일부러 아쉬운 표정을 짓고 목소리를 내리깔자, 고연주는 흠칫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조금 더 머무르셔도 됐는데….” 라고 중얼거리더니 이내 슬며시 걸음을 늦췄다.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살며시 고개를 돌아보자 묵묵히 내 뒤를 따르는 세 명이 보였다. 그 중, 맨 뒤에서 조용히 따르고 있는 김한별이 눈에 밟혔다.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수심 가득한 얼굴이었다. 혹시 자신도 홀 플레인 어딘가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는 어느덧 뉘엿뉘엿 저물어 짙은 황혼 빛을 뿌리고 있었다. 우리는 이후 약 10분 가량 걸은 후에야 워프 게이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할 때만해도 점심이었는데 오후가 훌쩍 지나가버린 것이다. 지금부터는 사용자들의 대부분이 도시로 돌아와 휴식을 취할 시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워프 게이트의 입구는 생각보다 사람이 없었다. ‘지금도 통행제한이 걸려있다면 조금 곤란한데….’ 열릴 때까지 주구장창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면 일단은 모니카로 돌아가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입구 안으로 들어선 후, 우리는 워프 게이트의 이용을 맡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여성과의 거리를 줄였다. 그녀는 오늘도 홍역을 치렀는지 의자에 푹 퍼진 상태로 앉아있다가, 우리를 보며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눈가가 퀭하고 미간이 찌푸려진 게 꽤나 스트레스를 받은 모양이었다. “워프 게이트 이용하러 오셨어요?” “네. 지금 혹시 통행제한이 풀렸나요?” 통행제한이라는 말을 듣자 여성의 얼굴에 역시나 하는 빛이 스쳤다. 그녀는 잠시 마법진을 살펴보고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어디로 가시게요? 그래도 다행히 뚫어서는 갈 수 있을 것 같네요.” “뚫는다는 게 무슨 말이죠?” “통행제한이라고 말씀하신걸 보니 중앙, 서부, 북부로 가실 것 같아서요. 일단 지금 바로 중앙으로는 갈 수 없어요. 바바라와의 워프 게이트가 활성화된 도시로 먼저 가신 다음, 그곳에서 다시 워프 게이트를 이용하는 거죠. 예를 들면…. 지금 서부에 하나, 북부에 하나. 이렇게 열려있네요.” “그게 무슨…. 자기들 마음대로군요.” “제 말이요. 그나마 지금은 이렇게 일부라도 열려서 다행이지, 아침부터 점심까지는 장난 아니었어요. 빌어먹을 자식들…. 아무튼 서부는 베스, 북부는 뮬 이렇게 열려있어요.” 공교롭게도 여성의 입에서 뮬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렇다면 굳이 돌아서 갈 필요는 없다는 소리였다. 운이 좋다는 생각을 하며 뮬로 가는 게이트를 열어달라는 찰나였다. 돌연 내 옷깃을 꾹 잡아당기는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나를 빤히 쳐다보는 안솔이 보였다. “안솔?” “으응….” “갑자기 왜 그래?” “으으응….” 안솔은 까닭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한껏 불안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문득 오늘 회의에서 안솔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라버니. 어느 도시로 가신다고 했는지 다시 한 번 들을 수 있을까요?’ 나는 잠시 여성에게 양해를 구한 후 약간 허리를 굽혀 안솔과 시선을 맞추었다. 모두의 시선이 쏘아지는 가운데, 그녀는 풀이 죽은 얼굴로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었다. 어차피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었다. 다짜고짜 다그치기보다는 살살 달래어 의중을 물어보는 게 훨씬 낫다. “뮬에 가기 싫어?” “네에….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막 불안해서요오….”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자, 안솔은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이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다시 허리를 피고 고연주를 응시했다. 사정을 모르는 김한별의 의아한 눈길이 느껴졌지만, 고연주는 직접 경험한적이 있어서 그런지 곰곰이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고연주. 혹시 요즘 뮬에 이상한 일이라도 있었나요?” “아니요….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요즘은 뮬에 그다지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거든요. 최근에 알아본 거라고 해봤자…. 아.” “?” “그러고 보니 하나 있어요. 예전 일이기는 한데, 뮬의 대표 클랜이 바뀌었어요. 정확히는 바뀐 게 아니라 합병이라고 해야 할 것 같네요. 새로 대표 클랜으로 부임한 지상낙원 클랜이 원래의 너도 밤나무 클랜을 흡수 합병했으니까요. 솔이가 불안해하는 것은…. 아마 그때 그 일 때문이 아닐까요?” 그때 그 일이라 함은 너도 밤나무 클랜과의 충돌사건을 말하는 것이리라. 나는 그때 이후 ‘성스러운 여왕’으로 자라날 유현아를 짓밟기 위해, ‘무신’ 차승현과 ‘미친년’ 반다희를 살해했다. 유현아가 아무리 본성이 착하다곤 해도 사람인 이상 앙심을 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가는 게 좋겠지.’ 고연주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라면 뮬에 가는 게 구미가 당기는 선택이었다. 그때는 상황이 만들어지지가 않아서 죽일 수가 없었지만, 뒤통수가 제법 찜찜한 것은 사실이었다. 계속 그대로 놔두느니 차라리 호랑이 굴로 제발로 걸어 들어가, 영감님도 영입하고 겸사겸사 유현아도 처리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먼저 시비를 걸어온다는 전제조건이 있어야 하겠지만. ‘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다른 일이 일어날수도 있잖아. 가령….’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게 버릇이 되어버린 지라, 나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고 말았다. 이런저런 가능성을 생각해보고 있자 문득 옆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수현. 또 고민을 시작했군요. 외람되지만 예전부터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었어요. 조금 주제 넘을 수도 있지만, 허락해주신다면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네? 물론입니다.” “수현은 클랜 로드에요. 애초에 계획하신 것들이 있잖아요? 물론 중간에 계획을 변경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오롯이 클랜 로드의 권한이라고 생각해요. 클랜원의 의견은 참고만할 뿐이지, 거기에 좌지우지되는 것은 옳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 “저번에 바바라의 워프 게이트 앞에서 있었던 사건을 기억해보세요. 그때도 솔이가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결국에는 무사히 귀환하셨잖아요?” 고연주의 말인즉슨, 내가 중요한 일이 생길 때마다 안솔의 결정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는 소리였다. 그녀의 말에는 날카로운 뼈가 들어있었다. 스스로는 신중하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는 다르게 비춰진 모양이었다. 나는 차분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몰아쳤다. 일반적으로는 고연주의 말이 맞지만 안솔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두 의견에서 중간지점을 잡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참 어려운 일이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몰라.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발생하기는 한다는 것.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 아니면 없을지는 결국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을 매듭지을 수 있었던 것은, 옆에서 여성의 하품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워프 게이트 앞에서 몸을 돌리자 지루한 기색 하나도 없이 내 대답을 기다리는 클랜원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녀들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뮬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 계획을 변경하지 않겠다는 선언에 고연주와 김한별의 얼굴은 한결 밝아졌다. 하지만 안솔은 바닥 쪽으로 눈을 내리깔며, 기죽은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안솔.” “네에….” “뮬에서 볼일은 최대한 빨리 처리할게.” “아, 아니에요오…. 제가 괜한 말로 심려를….” 안솔은 양손을 설레설레 저으며 도리질을 쳤다. 말은 저렇게 하고 있었지만, 표정에는 여전히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녀에게로 한 발짝 다가가,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괜한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예전에 내가 했던 말들 기억하지? 네가 해주는 말은 항상 염두에 두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혹여나 무슨 일이 발생해도 너무 걱정하지마. 내가 항상 옆에 있을 테니까. 알겠지?” 그제야 조금 기분이 나아졌는지, 안솔의 볼에 발그레한 홍조가 피어올랐다. 이내 미약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확인한 후, 나는 지금껏 기다려준 여성 사용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원래 기분이 좋아지면 안면에 홍조가 피어오르던가? “뮬은 열려있다고 하셨죠?” “잠시만요. 음…. 네. 다행히 열려있네요.” “그럼 뮬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워프 게이트를 가동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총 네 명이니 8골드 주시면 되겠습니다~.” 드디어 우리를 보낸다는 사실이 자못 기쁜지, 여성은 사근사근한 어조로 요금통을 내밀었다. 그곳에 정확히 금화 여덟 개를 떨어뜨린 후, 나는 활성화된 포탈로 향해 바로 몸을 묻었다. 그러자, 언제나처럼 청량한 느낌이 내 몸을 휘감아 들었다. * 눈을 한 번 감았다 뜨자, 익숙하면서도 낯선 도시가 눈에 들어섰다. 뮬에 도착한 것이다. 뮬은 빈말로도 좋다고 해주지 못할 만큼 여전히 후줄근한 풍경을 갖고 있었다. 물론 전보다 많이 나아지기는 했다. 하지만 워낙 모니카에 오랫동안 있다 보니 미진한 부분이 상대적으로 더욱 부각되는 게 사실이었다. 이윽고 등 뒤로 나를 따라 차례로 들어오는 클랜원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나는 한껏 긴장을 끌어올렸다. 최대한 넓게 마력 감지를 퍼뜨리고, 언제든지 검을 출수할 수 있도록 자연스레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 상태를 유지한 채, 워프 게이트의 입구로 나가 번화가 주변을 전체적으로 둘러보았다. 마침 번화가에는 오른 방향에서 여러 명의 사용자들이 걸어오는 중이었다. “으읔, 아파죽겠어….” “킥킥. 그러니까 누가 멋대로 뛰어들어가래? 아무튼 빨리 신전이나 가자. 그렇게 깊지도 않고 물약도 뿌려놨으니 완치할 수 있을 거야.” 뮬의 거리는 한산했다. 전방 번화가를 지나치는 사람들 중에서, 이곳 저곳에 피가 묻거나 장비가 일부 파손된 사용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시간대를 따져보면 막 사냥에서 돌아왔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자, 오늘 사냥은 대박이라는 둥 맨날 이랬으면 좋겠다는 둥 시답잖은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호호. 별로 이상한 일은 없는 것 같은데요?” “…….” 어느새 뒤로 다가왔는지 고연주는 나른한 말투로 말을 걸었다. 그녀 말대로 이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말 그대로 평범한 홀 플레인 내 도시의 풍경이었다. 나는 허리에 얹었던 손을 내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긴장은 풀지 마세요. 아무튼 지금 바로 목표지점으로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앗. 잠시 조신한 숙녀에 들르면 안될까요?” “그건 나중으로 미룹시다. 상황을 좀 보고요.” “힝~.” 고연주는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아쉬움을 표했다. 그리고 나는, 영감님 보석상이 있을 상점가를 향해 곧장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아, 독자분들. 죄송하지만 오늘 하루만 후기 및 리리플을 쉬겠습니다. 오늘 머리도 조금 무겁고, 몸이 많이 피곤해서요. 독자분들의 하해와 같은 양해 부탁합니다. _(__)_ (리리플은 다음 회에 합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0302 / 0933 ---------------------------------------------- 부랑자의 눈물 워프 게이트를 나오자마자 나는 ‘영감님 보석상’으로 직행했다. 시간도 많이 늦었지만 뭣보다 안솔의 말이 자꾸만 걸렸기 때문이다. 대충 처리할 일만 처리하고 바로 모니카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런 내 마음과 달리 뮬의 거리는 지나칠 정도로 평화로웠다. 오죽하면 한껏 긴장하고 있는 내가 우습게 여겨질 정도였다. 하지만 대비는 아무리 지나쳐도 나쁠 게 없다는 게 평소 지론이었기에,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가에 들어서도 주변을 살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후 약 15분의 시간이 흘러, 우리는 목표했던 보석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 저곳 흠이 가있는 나무문을 밀고 들어가자 예의 날카로운 인상의 영감님이 어떤 기록을 열심히 읽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찌나 열중하고 있는지 내가 들어온 기척도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영감님.” “으, 응…?” 기록에서 눈을 떼고 한숨을 폭 내쉬던 영감님은 내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차분히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시선이 마주치고 3초의 시간이 흐르자 이내 영감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자, 자네?” “오랜만입니다. 그간 기체 후일 향만 강(氣體 候一 向萬 康) 하셨는지요.” “…그 특이한 인사말은 여전하군 그래?” “하하. 다행히 기억해주시는군요. 뭐, 자주 쓰지는 않습니다.” “그, 그렇군. 그나저나 요즘 한창 바쁠 텐데 뭐 하러 여기까지 왔나? 여기 뭐 볼게 있다고…. 흠흠.” 말씀은 저렇게 하셨지만, 이미 몸을 일으켜 손수 의자를 내어주는 중이셨다. 나는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클랜원들을 데리고 의자에 몸을 앉혔다. “그래도 살아있는 것을 보니 반갑기는 하구먼.” “예. 예전에 약속한 것도 있고, 잠시 다른 도시에 방문할 일이 생겨서 겸사겸사 들렀습니다.” “아이고. 뭐 그리 대단찮은 약속 때문에 이곳까지…. 오기 좀 찜찜했을 터인데.” “아. 알고 계셨습니까?” 찜찜했다 함은 대표 클랜과의 충돌사건을 말씀하시는 것이리라. 의아한 기분에 되묻자 영감님은 별 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에는 제법 떠들썩했으니까. 대표 클랜과 칼부림이 일어난 것이 흔한 일은 아니잖은가?” “그렇군요. 혹시 뭐 그때 영감님께서 아는 사람이라도 있었는지….” “없네. 하여튼 추후 정당방위로 처리되었으니 다행일세. 욕 봤네.” 영강님은 대수롭잖은 태도로 화제를 돌렸다. 나는 한두 번 고개를 주억였다. 이미 무죄 판결이 나온 이상 크게 상관은 없지만, 계속 이야기를 끌고 나가기에는 민감한 화제였다. 그것을 알기에 영감님도 이쯤에서 화제를 돌렸을 것이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내려 진열대를 훑었다. 진열대는 아까 영감님이 읽고 있던 기록들이 가지런하게 놓여져 있었다. “그런데 뭘 읽고 계셨습니까? 저희가 들어와도 알아차리지 못하실 만큼 열중해서 읽고 계시던데요.” “응? 이, 이것들 말인가? 아무것도 아닐세! 보, 보지 말게.” 영감님은 급히 기록들을 그러모으셨지만, 이미 내 눈은 기록들을 상당부분 훑은 상태였다. 그리고 진열대에 있던 기록들은 모조리 머셔너리 클랜에 관한 내용들이 적혀있었다. “어흠! 어흐흠!” “…….” 문득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영감님은 재빨리 기록을 덮으셨지만 이미 내가 봤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목덜미가 벌겋게 변한 상태였다. 나는 호흡을 조절하여 웃음을 참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조금 갑작스럽지만, 그때 그냥 같이 가셨으면 참 좋았을 텐데요.” “무, 무슨 말인가?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그저 심심해서 읽은 것뿐이라네.” “오호. 그렇군요.” “그, 그래. 요즘 들어 손님도 없고 해서….”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냥 순수히, 그때 같이 가셨으면 좋았다고 말한 것뿐입니다.” 나만한 참을성은 없는지, 좌우로 쿡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끼. 못 본 사이 넉살만 늘었구나. 그래도 그때는 제법 시원시원하고 기개가 보였건만.” “농담입니다.” 농담 한 번 던졌다고 기개 없는 청년이 되어버렸다. 어찌됐든 분위기는 부드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해후로 인한 환담은 이 정도면 되었을 것이다.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갈 때였다. “김한별.” 손짓하여 부르자, 김한별은 즉각 몸을 일으켜 옆쪽으로 다가오더니 약간 거리를 남기고 걸음을 멈췄다. 손을 내밀어 그녀의 팔을 잡자 움찔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김한별을 천천히 내 쪽으로 잡아 이끌며, 나는 영감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영감님. 이 아이가 바로 보석 마법사입니다. 한별아, 인사 드려.” “아, 안녕하세요….” 조금 말을 더듬긴 했지만, 김한별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영감님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며 안경을 치켜 올리고는, 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호. 이 참해 보이는 처자가 보석 마법사라니. 그래, 반갑구나…. 그나저나 황금 사자에서 용케도 데려왔구먼. 대단하이.” “오. 그것도 알고 계셨군요.” “이익!” 영감님은 콧김을 세게 내뿜으며, 나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 붉게 물든 하늘은 끝자락부터 서서히 어둠이 드리우고 있었다. 태양은 서쪽으로 넘어갈 준비를 마쳤고, 대지에는 어슴푸레한 땅거미가 지고 있다. 곧 있으면 저녁이 찾아오고 칠흑 같은 밤을 맞이할 준비의 시간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발길이 오고 가던 상점가의 거리는 어느새 드문드문해진 상태였다. 하기야 저녁 시간대에 활성화되는 거리라 하면 딱 세 군데일 것이다. 잠을 자는 여관, 술을 파는 주점, 아니면 성매매. 상점가에 있는 모든 건물의 불이 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수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갑작스레 들린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나와 똑같이 보석상의 벽면에 몸을 기대고 있는 고연주가 보였다. 현재 나와 고연주는 보석상 내부에서 잠시 나온 상태였다. 물론 안에 있어도 상관없겠지만 영감님이 김한별과 더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라는 나름의 배려였다. 물론 나 또한 목적이 있었다. 그 목적이라 함은 고연주와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안솔의 거취(?)가 문제였는데, 다행히 내부를 가득 채우는 보석을 조용히 구경하겠다는 조건으로 안에 두고 나올 수 있었다. “잠시 이런저런 생각할게 있어서요.” “그렇구나…. 그런데 저 할아버님이랑은 어떻게 알게 되신 거예요?” “예전에 뮬에서 활동할 때 알게 됐습니다. 저한테 잘해주신 분이에요.” “하긴 겉보기와는 달리 귀여운 면이 있으시더라고요. 호호. 아, 그나저나 정말 놀랐어요. 설마 보석 감정사라는 레어 클래스가 있는 줄은 몰랐거든요?” “그래요?” 김한별이 보석 마법사라는 사실을 밝힌 이후, 영감님은 곧바로 자신의 클래스를 밝혔다. 물론 나야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냥 가벼이 놀라는 척만 해주었다. 하지만 클랜원들은 비 전투 클래스처럼 보이는 직업에도 레어 클래스가 있다는 사실이 자못 충격적이었는지 꽤나 놀란 모양이었다. 심지어 고연주마저도. 하지만 나는 보석 감정사라는 클래스를 천사들이 괜히 만들어놓았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어딘가에 쓸 데가 있었기에 레어 클래스라는 설정을 부여하지 않았을까? 어디까지나 감이기는 했지만 보석 마법사라는 클래스와 좋은 짝꿍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영감님을 영입하는 것은 추후 클랜 운영면에서 보아도 확실한 이득이었다. 아무튼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영감님의 영입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아직 클랜의 규모도 크지 않으니 벌써부터 운영을 생각하는 것은 김칫국을 마시는 일이었다. 대강 생각을 정리하고 옆을 바라보자 고개를 아래로 숙인 채 발장난을 하는 고연주가 보였다. 나는 잠깐 그녀를 바라보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고연주.” “네~?” 고연주는 예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윽고 연한 잿빛 눈동자 한 쌍이 나를 쳐다보았다. 가만히 눈가를 응시하고 있자, 곧이어 부드럽게 휘어졌다. 나에 대한 한 점의 섭섭함도 찾아볼 수 없다. 내가 만약 여성이었다면, 그리고 그렇게 짐승같이 당했다면 분명히 기분이 불쾌했을 것이다. 실제로 고연주는 눈물까지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연주는 아침에 일어난 이후로 지금껏 일말의 원망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미안한 걸지도 모른다. “미안해요.” “수현…?” “미안합니다. 오늘 새벽에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그것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고연주는 아주 잠시 동안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 그러다가 이내 연하게 미소 짓더니, 슬금슬금 나와의 거리를 줄였다. 이윽고 그녀는 문을 한 번 슬쩍 바라보고는 양 팔을 쭉 내밀어 나를 와락 껴안았다. “난 또 뭐라고. 사과는 오늘 아침에 충분히 받았어요. 더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되요.” “우는 것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많이 아팠어요?” 그 순간 고연주는 킥 웃음을 터뜨렸다. 한동안 가슴에 얼굴을 묻고 가늘게 어깨를 떨던 그녀는, “하여간 둔감한 건 유전이라니까.” 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파서 울었던 게 아니에요.” “…….” “뭐랄까…. 실은 저는요, 관계하는 내내 수현과의 첫날밤을 떠올렸어요. 그때의 수현과 오늘 새벽의 수현의 눈동자는 달라도 너무 달랐죠. 그냥 까닭 없이 슬프고, 무서웠어요. 그리고 관계가 끝나는 순간 갑작스럽게 서글픔이 봇물처럼 터지더라고요. 그래서 눈물을 흘린 거예요. 뭐, 솔직히 실금은 저도 예상하지 못했지만요. 호호. 그러고 보니 오줌싸개가 되어버렸네? 비밀로 해주실 거죠? 아, 소금이라도 얻어올까요?” 고연주는 애잔한 눈빛으로 하나씩 말하다가 이내 활짝 웃으며 까르르 웃었다. 마지막을 농담으로 끝낸 것으로 보아 그냥 이쯤에서 덮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천천히 마주 껴안아주었다. “고연주.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심이에요. 그때는….” “저야말로 정말 괜찮다니까요? 수현의 마음은 잘 알고 있어요.” “제가…. 읍.” “그 얘기는 이제 그만. 수현은 정말 제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은 거예요? 자꾸 그러니까 부끄럽잖아요. 그리고 따지고 보면 제가 먼저 도발한 것도 있는데요 뭐.” 그저 진심을 전달하고 싶었을 뿐인데, 고연주는 한 손으론 내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가슴을 쿡쿡 찔렀다. 그리고 이내 내 손을 살며시 쥐곤 보석상의 문을 향해 사뿐히 이끌었다. “정 뭐하면 하연씨 말고 나한테 더 잘해주던가~. 아무튼 이제 그만 들어가요.” “네? 하지만 아직 얘기가….” “얘기 끝났어요. 실은 아까부터 엿듣고 있었거든요.” 벌컥! 그때였다. 문 부근으로 다가간 순간 공교롭게도 보석상의 문이 활짝 열리며 김한별이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오빠. 얘기 끝났어…요?” 그리고 문 앞에 바로 서있는 우리를 보고는, 말끝을 미묘하게 올렸다. * 한 남성이 숲 밖으로 비죽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한 번 쓱 훑더니 이내 가볍게 손짓했다. 사삭! 사사삭! 이윽고, 숲에서 수백은 되어 보이는 사용자들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었다. 남성은 뒤에 서있는 사용자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들을 바라보는 남성의 시선에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김갑수, 백서연.” 이윽고 남성이 조용히 두 명을 호명했다. 그러자 우락부락한 근육을 지닌 남성과 꽉 조인 타이츠를 입은 여성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어제 본대에서 연락이 왔다. 사전공지는 이미 했겠지만, 결행 일은 오늘 밤이 넘어가기 전. 다들 각자 맡고 있는 부대에 확실히 전파해두었겠지?” “완료했습니다.” “그럼~.” 시원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남성은 곧 우락부락한 남성, 김갑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김갑수. 내부 인원들은 어떻게 됐지?” “지금 다들 북문 근처, 그리고 워프 게이트 근처에서 숨죽이고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리고 북문이 뚫리는 순간, 각각 문을 열고 워프 게이트를 점거할 예정입니다.” “좋아. 내가 먼저 부대를 이끌고 북문을 들이친다. 북문이 뚫리고 안에서 한바탕 휘저어 놓을 테니, 너는 문이 뚫리는 순간 바로 서문을 공략을 시작한다. 그리고 워프 게이트는…. 확실히 전했겠지?” “예. 확실히 전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남성은 이번에는 여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서연. 솔직히 네게 이 임무를 맡겨야 될지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어머, 서운하네. 내 실력 못 믿어서 그래?” “실력이 문제가 아니다. 너는 정이 너무 많아. 부랑자답지 않게 말이지.” “그만큼 효과도 확실하지? 걱정 말고 맡겨나 두셔. 현이나 갑수보다 내가 먼저 동문을 뚫고 워프 게이트로 도달할 테니까.” 서연이라 불린 여성은 자신 있다는 듯 단검을 휘휘 돌리며 고개를 까닥였다. 김갑수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이내 현의 눈치를 보며 표정을 가라앉혔다. “명심해라. 이건 전쟁이야. 전쟁인 이상 죽을 수 밖에 없어. 그때처럼 또 대책 없이 날뛰어버린다면….” “걱정하지 마세요~.” “…알겠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남문은 남겨둔다. 생각 같아서는 한놈도 남김없이 깡그리 몰살시키고 싶지만, 그래도 구멍 하나는 틔워주어야겠지. 그놈들이 그랬던 것처럼.” 현은 말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칼날같이 사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김갑수. 백서연. 지금 바로 각자 부대를 이끌고 목표지점으로 이동해. 신호는 확실하게 줄 테니, 혹여나 먼저 행동하는 일은 절대 없도록 주의해라.” 그 말이 끝난 순간 김갑수와 백서연은 번개같이 좌우로 튀어나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숲 안에서 느껴지던 수천의 기척 또한 좌우로 갈라졌다. 바야흐로 복수를 위한 전쟁의 시작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독자님들 죄송합니다. 곧 후기와 리리플을 올리려고 했는데…. 방금 전까지 잠깐 누워있었습니다. 머리가 여전히 무겁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를 않네요. 죄송합니다. 오늘 딱 하루만 더 후기, 리리플 쉬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하루 자면 웬만큼은 회복되는데, 이상하게 요즘 컨디션이 계속 난조를 보이네요. 내일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제대로 된 후기와 3회 합친 리리플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독자분들의 하해와 같은 양해를 부탁합니다. _(__)_ ㅇ<-< 0303 / 0933 ---------------------------------------------- 부랑자의 눈물 “어떻게, 얘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김한별의 알림에 다시 보석상 안으로 들어가자,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는 영감님을 볼 수 있었다. 이따금 고개를 한두 번 끄덕이시는 걸로 보아 퍽 만족하신 모양이다. 영감님은 기분 좋아보이는 미소를 흘리고는 잔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음. 근래에 들어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네. 특히 보석의 힘을 온전히 끌어내는 광경이 백미였지.” “저도 많은 가르침을 받았어요. 보석에 대해 정말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신 것 같아요.” 영감님과 김한별은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해주는 중이었다. 실제로 나가있던 시간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데, 그 시간 동안 꽤나 친근해진 모습이었다. ‘서로 상성이 잘 맞는 모양이군.’ 전혀 나쁜 일이 아니었기에 나 또한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해줄 수 있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의자에 앉으며, 나는 슬쩍 창문을 쳐다보았다. 어둑어둑한 빛이 내려앉은 게 곧 밤이 찾아올 모양이었다. 웬만하면 오늘 안으로 떠나고 싶었기에, 빠르게 이야기를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무튼 이것으로 약속은 지켰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응? 그게 무슨 말인가?” “모르는척하시는 거 다 티 납니다. 그때의 대답을 다시 한 번 듣고 싶습니다.” “흠….” 조금 뻔뻔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나름의 생각은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적 진열대 위에 놓인 기록들을 보고 확신으로 바뀌었다. 내 말투에 담긴 진심을 느꼈는지 영감님의 얼굴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서서히 영감님의 말문이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자네의 제안에 조금 혹한 것은 사실이네.” “하지만 여생을 조용히 마치고 싶다고 하셨지요.” “그렇지. 그리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네. 허나….” 여기까지는 그때와 똑같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아직 말이 끝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실망하기에는 이르다. 나는 조용히 다음에 나올 말에 집중했다. “그…. 자네 덕분에 보석 처자랑 대화를 나눌 수 있었어. 그리고 보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네.” “아마 김한별이 배운 게 많을 겁니다.” “하…. 솔직히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러니까 자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를 잘 모르겠네. 늙어빠진 늙은이에게 관심을 주는 게 고맙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고…. 그…. 얘기를 해보니까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있을 것도 같은데…. 물론 저번에는 그냥 조용히 지내고 싶다고 말을 했지만….” 횡설수설. 예전 보석을 감정하실 때 보였던 날카로운 면모는 어디 갔는지, 말이 두서가 없이 아무렇게나 어질러지고 있었다. 답지 않은 모습에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영감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영감님은 지금 미안해하고 있었다. 예전의 머셔너리와 지금의 머셔너리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판이하게 다른 상태였다. 즉 그때는 거절했으면서, 기반이 탄탄히 잡힌 지금에 와서 요청을 수락하는 게 자못 민망하게 느껴지시는 모양이었다. ‘영감님도 어떻게 보면 순수하신 면이 있네.’ 나는 가볍게 웃으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개인적으로 영감님의 생각을 존중합니다. 조용한 곳에서 여생을 마무리 짓고 싶다. 그것을 바꾸어달라고 제가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요. 하지만 어느 정도의 양보는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양보?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인가?” “영감님께 앞으로의 원정 또는 탐험에 참가해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냥 간단히 말씀드리면 거주지만 옮긴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까 말씀을 들어보니 손님도 별로 없고 지루하다고 하셨는데…. 머셔너리로 오시면 적어도 지루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영감님의 손길이 필요한 일들이 잔뜩 있거든요.” “크흠….” 이로써 내가 할 말은 끝났다. 멍석은 깔아줄 대로 깔아주었으니, 이제 남은 건 영감님의 대답이었다. “그러면….” “예.” “뭐 그렇게까지 말해주는데…. 흠흠. 아무튼 그 자네들 클랜 하우스에 빈방 하나 있는가?” 이 한마디를 꺼내는 게 그렇게 어려우셨는지, 영감님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채 연신 헛기침을 연발하고 있었다. 어쨌든 드디어 성공했다는 마음에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대답했다. “빈방이야 차고 넘칩니다.” “크흠! 그렇군.” “머셔너리 클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옆에서 클랜원들이 미약이 박수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른손을 내밀자 영감님은 비로소 나를 돌아보았다. 나와 시선을 맞춘 영감님의 얼굴에는, 쑥스러움이라는 감정이 진하게 배어있었다. “…고맙네. 그리고 미안하네.” 영감님은 나직이 중얼거리며 바로 내 손을 맞잡았다. 쭈글쭈글한 주름이 가득한 손이었지만, 그만한 연륜이 묻어나는 손길이었다. 이윽고 맞잡았던 손을 떼어내자 영감님은 애틋한 눈길로 보석상 내부를 둘러보았다. “후후. 이것도 정리하려면 만만찮게 걸리겠군. 뭐 그래도 규모가 작으니 빠르게 정리할 수 있을 걸세. 그럼….” “영감님. 말 나온 김에 바로 하는 건 어떨까요?” “으, 응?” “지금 바로 말입니다. 저와 클랜원들이 도와드리겠습니다. 일단 건물은 놔두시고, 필요한 것들만 챙겨서 모니카로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내 요청이 꽤나 뜬금없다고 여기셨는지, 영감님은 휘둥그래 눈을 뜨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 날은 금방 어두워졌다. 사방이 캄캄해지고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했고, 공기는 까닭 없이 불쾌하리만큼 끈적끈적했다. 흡사 비가 내릴 것을 예고하는 것처럼. 아니나다를까. 이어서 습한 대지에 빗방울이 한두 방울 뚝뚝 점을 찍기 시작했다. 점의 개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더니 이내 눅눅했던 대지를 순식간에 진창으로 만들었다. 후드득! 후드득! “으음…. 씨발.” 빗소리는 조금씩 거세어지고 있었다. 그때 거리 한구석에서 웅크려있던 한 남성이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그는 졸음 가득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서글픈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형찬아, 형찬아. 너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느냐?” 스스로를 형찬이라 부른 남성은 한동안 비를 맞으며 망연히 서 있었다. 하지만 빗방울이 옷에 자국을 만들고 내부를 축축히 적시기 시작하자, 그는 조용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형찬이 몸에 걸친 옷은 남루했고, 형색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비를 피하기 위해 정처 없이 돌아다녔지만 마땅한 곳이 보이지 않는 듯 이곳 저곳을 배회할 뿐이었다. 이윽고 쏟아지는 비에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었을 즈음, 형찬은 유흥가가 몰린 거리를 지나게 되었다.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주점의 곳곳이 불이 켜져 있었고, 안에서는 왁자한 소리가 떠들썩하게 터져 나오는 중이었다. 주점의 거리에는 고소한 음식 냄새가 물씬 풍겼다. 형찬은 꼬르륵 소리를 내는 배를 쓰다듬으며 코를 벌름거렸다. 벌컥! 음식 냄새를 가장 진하게 풍기는 주점 앞에서 코를 벌름거리고 있자,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리며 두 명의 남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형찬을 한 번 쓱 쳐다보고는 이내 빠르게 지나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빠. 우리 어디로 갈까?” “저번에 거기. 네가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했던 곳 있잖아.” “거기? 진짜~? 거기 되게 비싼데.” “걱정하지마. 오늘 수입이 나름 괜찮거든. 아무튼 비 맞기 전에 빨리 가자.” “꺅! 오빠 변태~!” 남성은 거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윽고 여성의 어깨에 걸친 손을 안으로 파고들어 은근히 젖가슴을 움켜쥐자, 그녀는 얇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곧 살살 눈웃음을 치며 아양을 떠는 것으로 보아 성매매를 하는 밤의 꽃이 분명했다. 형찬은 저 멀리 사라지는 둘을 한동안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씨발…. 팔자 좋구먼. 누구는 싸구려 여관에서 잘 돈도 없는데 누구는 계집질…. 하….” 형찬은 한참 동안 그들이 사라진 거리와 주점 안을 기웃거렸다. 하지만 이내 여기 있어봤자 떨어지는 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다시 정처 없이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점점 더 세차게 쏟아지는 빗방울에 형찬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전방을 바라보았다. 전방에는 허름한 성문과 낡은 성벽이 있었다. 성벽의 주위에는 형찬과 비슷한 행색을 한 이들이 이곳 저곳에 쭈그려 앉아있었다. 형찬은 이번에는 성문을 바라보았다. 두 명의 경비병이 세찬 비를 맞으면서 성문을 좌우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혀를 쯧쯧 차다가 이내 스스로의 처지를 인식했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였다 핑!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온 매서운 파공음이 허공을 찢었다. 핑! “컥!” “칵!” 연이은 소리에 형찬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외마디 비명이 들린 순간 퍼뜩 고개를 들었다. “뭐, 뭐야? 갑자기 뭔….”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세차게 내리는 빗방울도. 성벽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사용자들도. 그리고 성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 “어?” 성문을 보는 형찬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꿋꿋이 성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이었는데, 어느새 바닥에 쓰러져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들의 목에는 각각 한대의 화살이 꽂혀있었고 흘러나온 핏물은 빗물에 섞여 슬금슬금 퍼져 나가는 중이었다. 단지 잠시 눈을 떼었을 뿐인데, 상황은 너무도 달라져있었다. 마치 거짓말 같은 현실에 형찬은 한두 번 눈을 비볐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성문을 바라본 순간이었다. 핑! 다시 한 번, 화살이 날아들었다. 형찬은 본능에 따라 잽싸게 상체를 옆으로 기울였다. 싸늘한 빛을 뿌리는 빛줄기가 그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화살이 날아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은 성문 부근이었다. 그리고 성문 너머로, 아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수많은 그림자가 시시각각 거리를 줄여오고 있었다. “헤. 그걸 피했네?” “병신. 저런 놈 하나 못 맞추고….” “그럴 수도 있지. 아무튼 다시 간다.” 형찬은 반사적으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여기저기 널리 퍼져있었던, 자신과 비슷하다고 여겼던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내 사방에서 빗소리와 섞여 들려오는 수많은 발소리들을 들으며,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성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자신을 향해 석궁을 겨누고 있는 사용자가 있었다. “으아아아!” 형찬의 비명을 지르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허둥지둥 뛰어가는 그를 보며 사용자, 아니 부랑자는 정확히 등을 겨누었다. “뭐해? 빨리 안 쏘고?” “아. 잠깐만 기다려봐. 어차피 문은 뚫었잖아? 그럼 이제 몰이를 시작해야지.” “일단 먼저 쏘라고. 신호는…. 아, 별 상관없나?” “그렇지. 겸사겸사 처리하겠다는 말이야.” 동료의 독촉에 부랑자는 씩 미소를 머금은 채 하늘높이 석궁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마력을 모으는 듯 팔을 부르르 떠는가 싶더니 이내 힘찬 기합성을 내지르며 석궁에 걸린 화살을 쏘아 올렸다. “합!” 쐐애애애액! 이윽고 석궁에서 뻗어져 나간 화살은, 수십 가닥의 광선으로 변해 허공으로 뻗어나갔다. 하늘을 향해 올라간 광선은 허공에서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대지를 향해 쏜살같이 하강하기 시작했다. 쾅쾅쾅쾅! 그리고 광선이 대지에 꽂힌 순간, 요란한 굉음이 울리며 거리의 주위로 엄청난 흙탕물이 튀어 올랐다. * “영감님. 이제 대충 정리된 것 같은데요.” “그런 것 같으이. 고생했네.” “그냥 대충 자루에 담고 가면 좀 더 빨랐을 텐데 말이죠.”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 아무튼 이제 짐만 챙기면 되니 거기 자고 있는 아이나 깨우시게.” 보석 별로 꼼꼼히 나뉘어있는 자루를 보며 질린 목소리로 말하자, 영감님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어느새 뮬에 온지도 세 시간 가량 흘러있었다. 영감님은 바로 가자는 말에 조금 당황한 듯싶었지만, 다행히 고개를 끄덕여주셨다. 건물이야 영감님 소유니 따로 문제될 것은 없었고, 남은 것은 내부를 가득 채운 보석들과 영감님의 개인 짐들이었다. 이것저것 최대한 빠르게 정리한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하나의 상점인 만큼 어느 정도 시간을 소비한 것은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애초 이것도 최대한 빠르게 정리한 건데…. 뭐가 그리 급할꼬….” “할아버지. 이건 어디에 둘까요?” “아, 그건 이리 주려무나.” “오빠. 이거는요?” “예끼! 어디 말만한 처자가 함부로…!” “까르르.” 정리 내내 계속 투덜거리셨지만 정작 앞장서서 짐을 정리한 것은 영감님이었다. 거기다 간간히 휘파람까지 부실 정도로 즐거운 모습을 보이셨다. 고연주가 영감님을 놀리는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크게 웃은 후, 나는 안솔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안솔은 보석상 한구석에서 한창 달게 자는 중이었다. 새근새근 숨을 내쉬며 이따금 열심히 냄새를 맡는 잠꼬대까지. “색~. 색~. 킁카킁카….” “안솔.” “음…. 할짝…. 헤헤헤….” “…….” 잠시 동안 안솔이 자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왠지 귀여워 보이는 인중을 꼭꼭 찔러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잠깐 코를 벌름거렸고, 갑작스레 혀를 삐쭉 내밀어 인중을 찌르는 손가락을 핥았다. 나는 깜짝 놀라 얼른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손가락에 묻은 침을 닦으며 안솔을 약하게 흔들었다. “우웅…?” “안솔. 일어나. 곧 떠날 예정이다.” “우우웅…. 오라버니이…?” “그래 그래.” 안솔은 부스스 눈을 뜨더니 나와 눈을 마주치곤 스스럼없이 품에 안겨 들었다. 내 등을 꼭 쥐는 그녀의 앙증맞은 손길을 느끼며, 나 또한 안솔의 등을 토닥토닥 해주었다. “그런데 클랜 로드에게 안겨있는 처자는 도대체 나이가 어떻게 되는고?” “왜요?” “보아하니 한참 어린 나이 같은데…. 이런 데까지 끌려온 게 안쓰러워서 그래. 꼭 내 손녀를 보는 것 같아서….” “스무 살이요.” “뭣이?” 영감님이 기함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어리광은 이쯤에서 그만 받아주어야겠다는 생각에, 내 등을 꽉 안고 있는 손을 풀려는 찰나였다. “으응….” “안솔?” “오라버니이….” “너 왜 그래?” 손이 풀리지 않는다. 아니, 안솔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에 뭔가 이상함을 느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려는 순간이었다. 콰콰콰콰쾅! 그 순간, 멀리서 요란한 굉음이 귓가로 흘러들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다음 회 예고. 부랑자 : 크하하하하하하하! 파티의 시작이다! 복수다! 전쟁이다! 사용자 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려라! 김수현 : 뭐? 부랑자 : 아이고, 아닙니다 요. 제가 귀인을 몰라 뵙고…. 헤헤, 헤헤헤! 자자! 이쪽으로 나가시죠. 얘들아 뭐하냐! 얼른 길 비켜드려라! 김수현 : 음. 그럼 수고하게. 부랑자 : 네이 네이. 살펴가십쇼! (시간이 흐르고.) 부랑지(2) : 갔냐? 부랑자 : ㅇㅇ…. 시발 괴물 같은 새끼…. 야야, 건들지마. 우리 X된다. PS. 농담입니다. 곧이곧대로 믿으시면 곤란해요! PS. 쪽지가 많이 쌓였네요. 근시일안에 답신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리리플(300회) 』 1. 블라미 : 300회 1등 축하합니다! 블라미 님 정말 감사합니다. ㅜ.ㅠ 정말 1회 올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저도 감회가 새롭네요. 지금껏 재밌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D 2. hohokoya1 : 항상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_(__)_ 하하하. 1천회는…. 사, 살려주세요! 3. 가한나 : 저, 저는 고자가 아닙니다. 수현이도 고자는 탈출했어요! 정말입니다. :) 『 리리플(301회) 』 1. 카네사다 : 1등 축하합니다. :) 근래에 느끼건대 새로운 1등 코멘트의 강자가 출현한 것 같습니다. 하하하! 이번 회도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2. 악마신전 : 제 생각에도 요즘 수현이 너무 착하게만 살아온 것 같아서요. 전혀 그런 애가 아닌데 말이죠. 이번 챕터는 조금 거부감이 있으실 수도 있습니다. ㅜ.ㅠ 3. 사엘v : 아닙니다! 독자분들께서 주시는 것 하나하나가 항상 소중한걸요.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리리플(302회) 』 1. dbss : 1등 축하합니다! dbss 님께서 1등을 하셨어요! 와! 와!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dbss 님의 1등을 축하합니다! 짝짝짝짝! 2. dark기사 : 이효을을 살린것이 하나의 커다란 어긋남이었다면, 수현은 여기서도 한 번의 인연을 만나고, 한 번의 어긋남을 만듭니다. :) 3. 소설광자님 : 예! 슬럼프 따위는 뻥뻥 걷어차버리고, 연재는 칼같이 이어나가겠습니다! 크크. 4. 랜슬럿 듀 락 : 아니! 랜슬럿 듀 락 님은 누구신가요! 항상 저에게 따끔한 지적을 해주시는 분이신가요, 아니면 항상 응원을 해주시는 분이신가요!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군대 몸 건강히 다녀오세요! ;ㅅ;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304 / 0933 ---------------------------------------------- 부랑자의 눈물 ‘심상치 않다.’ 안솔의 뜻 모를 반응과 미약이 들린 폭음소리. 그 순간 하나의 생각이 번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아기 코알라처럼 떨어지려 하지 않는 그녀를 억지로 떼어낸 후, 나는 곧바로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해는 완전히 저물어있었다. 상점가의 거리는 어두웠다. 하지만 도시, 정확히 북쪽구역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도시를 환하게 밝혀주는 것의 정체는 다름아닌 치솟아 오르는 불길이었다. 나는 지체 없이 발을 굴러 대지를 박차 올랐고 보석상의 평평한 건물위로 몸을 안착시켰다. 건물 자체가 낮은 탓에 도시 전체를 아우를 수는 없었지만, 바닥에 있을 때보다는 보다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나는 북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안구에 마력을 돋우었다. ‘습격이다.’ 비록 일부밖에 볼 수 없었지만 상황을 보자마자 단정할 수 있었다. 치솟아 오른 불길 사이로 헤아릴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들이 파도처럼 들이닥치는 중이었다. 섬뜩한 빛이 불빛과 불빛 사이를 가를 때마다 어김없이 피 분수가 흩뿌려지고 있었다. 그것은,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허둥지둥 나오는 사용자들은 사방에서 쏘아지는 빛살에 무참히 도륙 당하고 있었다. 운 좋게 살아남은 몇 명은 몸을 돌려 도망치는 듯 보였지만 그림자는 순식간에 그들에게 따라붙었다.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그때, 다시 한 번 땅을 흔드는 굉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양쪽에서 거의 동시에 들렸고 밖에 나와있던 터라 더욱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고개를 번갈아 돌리며 좌우를 확인하자 동문과 서문 쪽에서도 수많은 그림자들이 물밀 듯 밀려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내 동쪽과 서쪽에서, 북쪽과 같이 삽시간에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나는 그것을 보며 일순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뮬에 습격? 도대체 누가? 왜?’ 확실한 것은 안솔의 예감이 적중했다는 것. 나 또한 나름의 대비를 한다곤 했지만 그것의 초점이 유현아에게 맞춰져 있던 게 문제였다. 사방에서 점점 가까워져 오는 함성소리에 머릿속이 복잡해지려는 순간, 문득 떠오른 기억이 머리를 강하게 강타했다. 부랑자. 서 대륙의 발호. 1회차와 비교해보면 이미 한참 전에 발생했어야 정상이었다. 그리고 뮬이 아니라, 서쪽의 도시를 침공하는 게 원 수순이었다. “어이, 거기 청년! 지금 뭐가 이리 시끄러워? 뭔 일이라도 일어났어?” 이런저런 생각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을 때 아래쪽에서 구수한 목소리가 들렸다. 흘끗 시선을 내리자 뒤늦게 어슬렁어슬렁 나오는 상점가의 사용자들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겨우 혼란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정신차려라, 김수현!’ 삼 방향에서 넓게 퍼져 밀고 들어오는 어둠에서 호의란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살을 엘 정도의 찌릿찌릿한 적의만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미 일은 벌어졌다. 상황파악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지금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뮬에서 몸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나는 홀몸도 아니었다. 고연주야 그렇다 치더라도 김한별, 안솔 그리고 영감님까지 데리고 뮬을 벗어나야 하는 입장이었다. 몇몇 사용자들은 대답을 기다리는 듯 여전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바로 바닥으로 착지했다. 그리고 곧장 보석상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내부로 들어서자 내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두의 시선이 빠르게 모여들었다. “수현.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습격입니다.” “네?” “다시 한 번 말하겠습니다. 지금 뮬은 습격을 받고 있습니다. 아직 습격자들의 정확한 정체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부랑자들 같습니다. 장난이 아니라 실제 상황입니다.” 습격을 받았다는 말에 모두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내 말투와 바깥에서 연이어 들려오는 굉음에 서서히 심각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이상 상황을 설명할 시간도 지체할 시간도 없다.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영감님. 짐은 이만 챙기시고 바로 떠나겠습니다.” “알겠네. 이미 중요한 것들은 마법 배낭 세 개에 담아두었네. 지금 바로 떠나도 상관없어.” “하나는 영감님이 들고 나머지 둘은 김한별과 안솔에게 나눠주세요. 그리고 고연주.” “네.” 나는 문득 생각이 들어 어깨에 걸친 푸른 용기사의 외투를 풀었다. 그리고 아직도 떨고 있는 안솔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몸에 꼼꼼히 둘러주었다. “오, 오라버니…?” “조용히 해. 사용자 고연주. 지금부터 우리들은 워프 게이트로 달릴 예정입니다.” 안솔의 몸에 외투를 둘러준 후 나는 고연주를 돌아보았다. “광장을 통해 일직선으로 달려갈 예정입니다. 오는데 15분 정도 걸렸으니, 빠르게 달리면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었어요.” “좋습니다. 그럼 키퍼를 부탁합니다.” “네…?” 마지막 말이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는지 고연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한 번 숨을 삼키고 조금 더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는 도중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제가 앞장서서 길을 뚫겠습니다. 다만 어디서 공격이 날아올지 모르니 고연주는 세 명을 완벽하게 보호해요. 제가 보호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이요.” “원호도 하지 말라는 말씀인가요?”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키퍼가 최우선 순위입니다. 명심하세요.” “…최우선 순위란 말이죠. 알겠어요.” 납득하지는 못한 것 같았지만 고연주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의 대화를 마치고 나는 남은 세 명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어느새 어깨에 하나씩 배낭을 메고 있었다. “제 계산에 따르면 지금부터 워프 게이트까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달리면 그럭저럭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 당황하셨을 테지만, 다들 마음 단단히 먹고 제 뒤를 따라와주시길 바랍니다.” 말을 마친 후 나는 안솔을 응시했다. 솔직히 지금 가장 걱정되는 게 바로 그녀였다. 안솔은 내가 둘러준 외투를 양손으로 꼭 붙잡고 있었다. 그렁그렁한 눈망울은 금새 눈물을 뚝뚝 떨굴 것 같았지만 꾹 참고 있는 모습이었다. 잠시 동안 안솔을 바라보다가, 나는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젖혔다. 목숨을 건 탈출의 시작이었다. * 보석상을 나온 이후 나는 광장을 향해 달렸다. 가끔가다 아직도 상황파악을 못한 사용자 한두 명이 붙잡았지만, 거세게 뿌리치며 내달렸다. 북문에서 먼저 습격이 들어왔고, 동문과 서문에서 잇따라 공격이 들어왔다. 워프 게이트는 정 중앙에 위치한 것은 아니지만 중앙광장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아까 언뜻 보기는 했지만 습격자들의 기습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슬슬 일부나마 저항하는 사용자들이 나올 것이다. 아니 하다못해 저항이 아닌 일방적인 학살이라고 해도 그들은 죽이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 모든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가 먼저 워프 게이트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생각에 불과했다. 시가지 전투는 이미 1회차에서 질리도록 경험한바 있었다. 부랑자들의 지휘관의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라면 앞으로 발목을 잡을 일들이 여럿 생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가장 탈출 가능성이 높은 선택지에 가능성을 두는 수밖에 없다. 이윽고 상점가를 벗어나고 중앙광장으로 가는 길을 접어들면서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몸의 감각은 최대한 활성화한 상태였다. 전방에서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 폭염이 터지는 소리, 비명소리가 뒤섞여 중구난방으로 귓가에 흘러 들었다. 아직 문에서 들어온 습격자들은 도달하지 못했을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내부에 호응해준 놈들이 있다는 소리였다. ‘어쩌면 워프 게이트도 이미 점거 당했을지 몰라.’ 하지만 나는 발걸음을 되돌리지 않았다. 최후의 방법으로는 성문 밖으로 도망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워프 게이트를 포기했을 경우였다. 설령 내부 인원에게 워프 게이트가 점거 당했다고 해도 깡그리 처리하고 다시 빼앗으면 된다. 지금의 나에게는 충분히 그럴 자신도 능력도 있었다. 달리던 도중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서는 고연주를 위시한 네 명이 나와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채 뒤따라오고 있었다. 내 역할은 최대한 어그로를 끌고, 튀어나오는 놈들을 정리해 길을 뚫는 것. 난 다시 전방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중앙광장이 서서히 보이고 있었다. 펑! 펑! “끄아아악! 아아악!” “꺄아아악! 사, 살려줘! 제발, 제발!” 중앙광장은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아니, 일방적인 도륙이 벌어지는 생지옥이라는 말이 맞을까? 사방에서 빛이 번쩍이고, 그럴 때마다 여지없이 지면이 터져 올랐다. 그리고 대지가 한 번씩 폭발할 때마다 비명소리와 함께 피 분수가 끈임 없이 솟아올랐다. 마음껏 공격을 퍼붓는 부랑자들은 수십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수백에 달하는 사용자들은 번번한 반항도 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도륙 당하는 중이었다. 확실히 인원수는 사용자들이 유리했다. 그러나 부랑자들은 그것을 덮고 남을 만큼의 실력과 일사 분란함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준 정예 급으로 생각하는 게 맞겠군.’ 목숨이 걸린 일인만큼 애당초 설렁설렁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곧바로 허리춤에 걸려있던 일월신검을 뽑아 들었다. 매끈한 검신이 달빛을 받아 시퍼렇게 빛나고, 이내 그것을 빗겨 들은 찰나였다. 씽! ‘좌측 45도. 건물 위.’ 세찬 화살 소리. 나는 즉시 마력을 일으키며, 화살이 쏘아져 들어오는 곳을 향해 재빠르게 왼손을 내밀었다. 파악! 제법 마력을 담았는지 묵직한 충격이 느껴졌지만 부담 없이 붙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붙잡은 걸로 끝내면 섭섭하다. 나는 곧장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의 원리를 이용해, 화살을 반대로 되돌려 건물을 향해 힘껏 던졌다. 퍽! “깍!” 이내 퍽, 소리와 함께 외마디 비명이 울려 퍼졌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여성 저격수인 모양이었다. 슬쩍 건물위로 시선을 주자 이마에 화살을 꽂은 채 건물아래로 곤두박질치는 한 명을 볼 수 있었다. 휘이익! 이윽고 중앙광장의 초입에 들어서자 가느다란 휘파람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러자, 눈앞에서 한창 난도질을 하던 두 명의 부랑자가 고개를 돌렸고, 각각 검과 창을 꼬나 쥐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둥글게 펼쳐놓은 마력 감지는 좌우로 짓쳐 들어오는 은밀한 기척을 알려주고 있었다. ‘우선은 앞에 두 놈.’ 나는 바로 앞으로 튀어나갔다. 오로쓰로스 부츠의 위력은 대단했다. 딱히 궁신탄영(弓身彈影)을 쓴 것도 아닌데, 그들과 나의 거리는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놈들도 이렇게 빠르게 거리가 좁힐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듯 살짝 당황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거리가 세 발짝 정도 남았을 즈음, 나는 오른발을 대지에 강하게 내디뎠다. 그리고 마력을 가득 머금은, 푸른빛이 넘실거리는 검을 횡으로 베었다. 확실히, 지금 뮬을 습격한 사용자들은 준 정예 급이었다. 내 검이 놈들과 충돌하기 직전. 이 찰나의 순간 왼쪽에 있던 놈은 재빠르게 창을 일자로 세워 방어했다. 오른쪽에 있는 놈은 조금 반응이 늦었지만, 검이 약간 앞으로 나오고 손목을 비스듬히 튼 것으로 보아 그대로 찔러 들어올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일월신검은. 스겅. 세워진 창을 가볍게 자르며 지나갔다. 일월신검은, 정확히는 ‘검술전문가의 권능’은 이 정도는 우습다는 듯 너무나도 간단히 창을 자르고 지나갔다. 창을 자르고 지나간 검은 그대로 갑옷을 쪼개어 들어갔고, 부드러운 살갗에 닿았다. 끄극, 끄그극! 마치 두부를 베는 것처럼 일월신검은 부랑자의 내부를 날카로이 베었다. 손잡이를 꾹 쥐고 있는 손바닥으로 내부를 사정없이 유린하는 섬뜩한 느낌이 여과 없이 전달되고 있었다. 이윽고 창병의 몸을 반으로 잘랐을 때는 마침 오른쪽의 부랑자가 나를 찌를 준비를 끝마쳤을 때였다. 놈은 한껏 당황한 얼굴로 주춤거렸고,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검을 보며 물러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내 검은 여지없이 남은 한 명의 목과 몸을 간단히 잘라주었다. 푸화학! 툭! 가슴이 베어져 나간 자리에서는 피가 콸콸 쏟아지고, 목이 떨어져나간 자리에서는 간헐적인 핏빛 분수가 뿜어졌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죽어라!” “끝~!” 좌우로 짓쳐 드는 놈들은 어느새 내게 근접해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고 있었다. 행동이 꽤나 민첩한 것으로 보아 둘 다 암살자가 분명했다. 목소리로 보아, 오른쪽에 있는 놈은 허공에 떠올라 양손에 단검을 쥔 채 내리꽂을 준비를 하고 있었고, 왼쪽에 있는 년은 한껏 몸을 굽혀 내 발목을 노리고 있었다. 시간차공격. 모르고 있었다면 당황했을지 몰라도, 이미 놈들의 공격해 들어오리란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나는 오른손을 틀어 놈이 하강하는 지점을 향해 검을 갖다 놓았고, 왼쪽 아래로 들어오는 놈은 얼굴을 향해, 96포인트의 근력 능력치를 믿고 있는 힘껏 왼발을 후려갈겨 줬다. 물론 이화접목의 원리를 담아 걷어차 준 것은 덤이었다. 푹! 퍽! 곧이어 검을 들고 있는 팔에 약간 묵직한 느낌이 전해졌다. 슬며시 고개를 돌리자 목에 검이 꽂힌 채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죽어라!”라고 말한 놈이 보였다. 그리고 왼쪽으로는, 얼굴이 움푹 패인 채 사정없이 바닥을 나뒹구는 “끝~.”이라 말한 년까지. 이로써 광장에 진입하며 총 다섯 명을 죽였다. 남은 놈들은 아직 수십 명.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방금 전 내가 들어옴으로써 인근에 도륙 당하던 사용자들이, 학살을 자행하는 부랑자들이, 그리고 저 멀리서 반원형으로 넓게 퍼진 채 양껏 마법을 퍼붓던 마법사들의 일부가 나를 돌아본 것이다. ‘저놈들 먼저 처리해야겠군.’ 이윽고 난 가볍게 검을 털어 검 끝에 꽂혀있던 부랑자를 바닥에 떨구었다. 그리고 날 뚫어져라 주시하기 시작하는 몇몇 마법사들을 향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일월신검을 겨누었다. 그렇게 그들과 시선을 마주친 순간,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대지를 박차 올랐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독자님들! 제 생각인데요, 아무래도 요즘 수현이 너무 착하게만 살아온 것 같아서요. 뭐 아군에게는 제법 너그러운 수현이지만 적군에게는 가차없잖아요? 특히 부랑자한테는 더더욱 말이죠. 그래서 조만간 본성을 드러낼 예정입니다. 솔직히 지금 구상하고 있는 내용이 불쾌할 수도 있어서 살짝 걱정이 들었는데, 앞으로 그냥 걱정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제가 어떤 내용을 써도 독자분들께서는 여유롭게 받아들여주실 것 믿어요. 후후. :D 『 리리플 』 1. LosingSight : 짜잔~. 1등 축하합니다. 하하. 1등 코멘트에서는 처음 뵙는 것 같아요. :) 2. 아톰 : 헉! 술을 드시다가 접속을 하셨다니, 대단하십니다. 저는 술을 정말 못 먹어서요.(심할 때는 맥주 한잔만 마셔도 취한적이 있다죠. 소곤소곤.) 3. Nodens : 그렇습니다. 저도 진작에 1등은 포기했습니다. 하하. 에헤라디야~. 1등을 포기하면 정말 편해요! 4. 이슬며르 : 감사합니다! 요즘 날씨 정말 더운데 이슬며르 님도 건강 조심하세요! 5. s25jin :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ㅋㅋㅋㅋ. 제법 괜찮은 영감님으로 설정해놨어요. :) 6. 라무데 : 본☆성☆출☆현! 많은 기대 부탁합니다! 7. 추락한날개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 유정이가 인기가 없을까요? 흑흑. ㅜ.ㅠ 저는 유정이 같은 스타일이 참 좋던데요. :) 8. 오어더주 : 썰어 넘기는 건 덤입니다. 앞으로 구상중인 내용이 독자님들께 어떻게 다가갈지 궁금하네요. 하하. 그래도 후기에 써놓았듯이 한 번 진행해볼 예정입니다. 9. 가입하기싫다 : 아마 많은 분들이 유현아를 불쌍히 여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ㅜ.ㅠ 10. 페어리쿠키 : 쿠폰 감사합니다! _(__)_ 이번 회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305 / 0933 ---------------------------------------------- 역관광이란 무엇인가? 팡! 공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김수현의 신형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단 한 번 땅을 박찼을 뿐인데, 그는 정반대 편에 있는 마법사들과의 거리를 삼분지 일 가까이 줄여버렸다. 실로 가공하리만치 무서운 도약력이요, 속도였다. 부랑자들은, 동료를 가볍게 해치우고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김수현의 기세를 어렴풋하게 느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 또한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지금 광장에 있는 부랑자들은 ‘진짜 부랑자’들이었다. 도시라는 안식처가 없이 항상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며 목숨의 위협을 받는 자들.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이를 상대한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에 따른 사선을 몇 번이나 헤쳐 넘어온 실력자들이었다. “집중사격! 집중사격 준비!” 정 중앙에 위치한 마법사가 지팡이를 높게 들어올리며 외치자, 한창 주문을 준비하던 마법사들이 일거에 고개를 돌린다. 이윽고 쏜 살 같은 속도로 짓쳐 들어오는 김수현을 발견했는지, 그들은 일제히 지팡이를 겨냥했다. 지팡이 끝에 박힌 보석에는 각각 형형색색의 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뒤늦게 주문을 준비하는 마법사들의 수까지 합친다면 물경 스물을 헤아리는 마법이 김수현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시시각각 거리를 줄여오는 김수현을 보고 있음에도, 부랑자 마법사들은 바로 마법을 발사하지 않았다. 아우성으로 가득한 광장이 신경이 거슬릴 법도 한데 그저 차분한 태도를 유지한 채 누군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중앙에는, 처음 집중사격을 외쳤던 마법사는 나직이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질속(疾速) 영창을 익힌 듯 그가 들고 있던 지팡이 끝자락에서 삽시간에 초록빛 구체가 생성되었고, 점점 둥글게 크기를 키워갔다. 이윽고 구체가 축구공 정도의 크기가 되었을 즈음, 마법사는 한층 우렁찬 목소리로 시동어를 외쳤다. “───. ───. ───. 인스네어(Ensnare)!” 이윽고 김수현을 겨누던 지팡이에서 초록빛 구체가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구체는 이내 물결처럼 넓게 퍼지며 김수현을 덮을 듯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마치 그 주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들도 일제히 마법을 발사했다. “워터 스피어(Water Spear)!” “아이스 캐논(Ice Canon)!” “체인 라이트닝(Chain Lighting)!” “썬더 볼트(Thunder Bolt)!” 수많은 빛이 번쩍였다. 무시무시한 마력을 흘리는 마법들이 경쟁적으로 김수현에게 쇄도한다. 흡사 빗줄기처럼 우수수 쏘아지는 마법의 연쇄는, 폭격을 연상케 할 정도로 완벽한 화망을 갖추고 있었다. 이윽고 폭격의 선두에 선 인스네어 마법이 김수현의 근거리에 닿았을 때였다. 바다 빛 도복을 묶고 있는 붉은 허리띠에서 일순 작열하듯 이글거리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지랑이에 점차 푸른빛이 맺히며 구체화하는가 싶더니, 초록색 그물이 김수현을 덮칠 즈음 푸르스름한 방어막을 형성했다. 치이익! 치이이익! 인스네어 주문을 외운 마법사의 눈이 크게 떠졌다. 물결처럼 밀려갔던 마법은 ‘하늘의 영광’과 ‘태양의 영광’의 상호작용으로 생성된 방어막에 허무하리만치 막히고 말았다. 인스네어는 물에 탄 물감처럼 확 번지더니, 고기 타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크기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종래에는 초록빛 물보라를 뿌리며, 완전히 소멸하고 말았다. 이어서 드러난 김수현의 모습은 한손 검이 아닌 양손에 검을 들고 있었다. 어느새 일월신검은 왼손으로 옮겨 잡은 상태였다. 오른손에는 검신이 보이지 않는 손잡이만 남은 검이 들려있었다. 김수현은 폭풍같이 달리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몰아쳐 들어오는 무수한 마법을 향해 거침없이 검을 베어 들었다. 첫 타자는, 뾰족한 창 모양을 한 워터 스피어였다. 서걱! 촤아악! 보이지 않는 검은 놀랍게도 워터 스피어를 깔끔하게 베었다. 강제로 마력이 끊긴 마법은 목표를 잃어버렸고 허공에 잔 물방울을 흩뿌리며 사라져 없어졌다. 하지만 뒤이어 날아드는 마법은 아직 수없이 남아있었다. 사방팔방, 전방위를 빼곡히 채운 집중사격은 아예 김수현이란 존재 자체를 산산이 파괴해버리려는 듯 살벌한 기세로 달려드는 중이었다. 그리고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2차 공격을 준비하는 마법까지 합치면, 그 파괴력은 가히 지면의 일부를 날려버리고도 남을 것이다. 서걱, 펑! 서걱, 쨍그랑! 이윽고 김수현에게 마법의 다발이 다다랐을 때였다. 워터 스피어를 잘랐을 때부터 마법사들의 눈동자에 어렸던 불신감이, 연발이 들어가는 순간 한층 심해졌다. 펑! 펑! 펑! 펑! 펑! 펑! 펑! 펑! 그것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오른손엔 보이지 않는 검. 왼손에는 일월신검. 김수현은 두 개의 검을 풍차처럼 휘두르며 연속해서 덮쳐 드는 마법을 하나하나 정확하게 쳐내고 있었다. 마치 솜씨 좋은 정원사가 재빠르게 나무의 곁가지를 치는 것처럼, 김수현에게는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차를 두고 들어오는 것도 거의 동시에 들어오는 것도 모두 예외는 없었다. 김수현의 사위로 수많은 검광이 번쩍였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섬뜩한 궤적을 남기는 칼날의 빛은, 차마 눈으로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빨라 흡사 정교한 검막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어지간하면 한 발 정도는 들어갈 법도 한데 김수현은 단 한 발의 접근도 허용치 않았다. 그 정도로 김수현이 흩뿌리는 검광은, 세밀하고 촘촘했다. 김수현의 검이 한 번 훑을 때마다, 마법은 여지없이 잘라져 날개가 찢긴 종이비행기처럼 목표를 잃고 허공을 선회한다. 그리고 이내 힘없이 허공 속으로 사그라졌다. 이윽고 집중사격이 끝난 후, 폭발로 인해 발생한 자욱한 연기를 헤치고 김수현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푸르스름한 방어막은 여전히 잔잔한 바다 빛을 띠고 있었고, 옷에는 그을음 하나조차 보이지 않는다. 두 발을 디딘 대지에 충격의 여파로 이리저리 쓸린 바닥만이 남아있을 뿐, 김수현은 자그마한 생채기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어느새 중앙광장은 조용해져 있었다. 살고 싶다는 생존을 갈망한 비명도, 이글이글 불타오르던 복수심을 반영한 광기도 모두 사라졌다. 광장을 가득 메우던 비명과 광기가 가라앉고, 경악과 불신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사용자와 부랑자 모두 본능적으로 거리를 벌린 채, 단 한 명의 남성에게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사용자들은, 그 중 특히 보통 검사들에게는 검으로 마법을 막는 것은 비상식에 해당하는 행동이다. 두터운 장갑을 갖추고 검에 마력을 잔뜩 머금었다손 치더라도, 마력과 마력이 맞부딪침으로써 일어나는 폭발을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마법사는 마력 능력치가 가장 높은 클래스에 속하기 때문에, 항마에 관련한 능력이 없다면 마법과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것은 검사들에게는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금기를 정면에서 깬 사용자가 출현했다. 그것도 한 발이 아닌, 수십여 발에 이르는 마법을 모조리 쳐내고, 파쇄했다. 비상식이라 여겼던 일을 현실로 실현한 것이다. 김수현이 모든 공격을 막아낸 후, 1초라는 짧은 시간이 흘렀다. 고개를 든 그의 눈동자가 한 번 번뜩이는가 싶더니 이내 전방의 허공으로 몸이 크게 튀어 올랐다. 궁신탄영과 오로쓰로스 부츠의 능력을 합쳤는지, 방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도약력과 속도였다. 눈 한 번 깜짝했을 뿐인데 김수현의 신형은 어느새 부랑자 마법사들이 모여있는 장소의 허공에 진입하고 있었다. 부랑자들은 멍하니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침 서서히 하강을 하려는지 김수현의 몸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제야 잠시 놓았던 정신을 붙잡았는지, 부랑자들은 여태껏 멈췄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쏴, 쏴라!” 슈슈슈슈슉! 궁수들의 화살이 쏘아졌다. “───. ───. ───. 거스트 오브 윈드(Gust Of Wind)!” “───. ───. ───. 파이어 랜스(Fire Rance)!” 2차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마법사들의 주문이 터져 나왔다. 다시 한 번 화살과 마법들이 허공을 향해 치솟았다. 김수현의 도약이 최고점에 닿고 막 내려오려는 순간을 노린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김수현의 얼굴에서는 어떠한 당황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입가에 미소까지 살짝 띤걸 보니 애당초 예상한 걸지도 모른다. 쐐액! 쐐액! 퍼벙! 퍼버벙! 화살과 마법은 여지없이 김수현을 꿰뚫었다. 전신에 숭숭 뚫린 구멍을 보며 부랑자들의 얼굴에 희열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희열 어린 표정은, 김수현을 맞추고도 여전히 허공을 가르는 화살들과 서로 부딪쳐 폭발을 일으키는 마법을 보는 순간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이윽고, 대기에 남아 이리저리 찢긴 김수현의 잔상이 천천히 허공 속으로 녹아 들었다. 이형환위(移形換位)였다. “뒤, 뒵니다!” 누군가 크게 소리쳤다. 멍하니 허공만 보고 있던 부랑자들은 허둥지둥 고개를 돌렸다. 아까 전 집중사격을 지휘하던 부랑자 마법사도 외침에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김수현은 이미 목표했던 부랑자의 후방을 점거한지 한참 전이었다. 급히 몸을 돌린 부랑자 마법사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보이지 않는 검을 크게 내리긋는 김수현의 모습과 허공을 수놓는 푸르른 궤적뿐이었다. * 팍! 무검은 정수리부터 세로로 쪼개어 들어가, 입 부분까지 완벽하게 반으로 갈라버렸다. 아까 나에게 인스네어 마법을 구사한 놈이었다. 실력도 제법 괜찮았지만 지휘관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첫 표적으로 잡은 것이다. 풀썩! 머리가 반으로 갈라진 마법사는 그대로 몸을 허물어뜨렸다. 쓰러진 목에서 피가 주룩주룩 흘러나와 광장의 바닥을 서서히 적셨다. 이로서 부랑자들의 한가운데 안착하는데 성공했다. 나는 신속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접 계열이 몇 명 보이긴 했지만 대다수가 원거리 계열들이었고, 그 중 80%를 마법사가 차지하고 있었다. 아무리 산전수전 겪은 부랑자들이라고 해도, 설마 이렇게 쉽게 뚫릴 줄은 몰랐는지 모두의 움직임이 정지한 상태. 기회였다. 나는 지체 없이 일월신검을 검집으로 돌리고 무검을 세게 쥐었다. 일월신검의 성능도 나쁘진 않지만, 이놈들을 최대한 쓸어버리려면 내 마력을 100% 소화할 수 있는 무검이 더 나았다. 우웅! 서서히 마력을 일으키자, 무검은 청명한 울음소리를 흘렸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눈에 장애가 없는 놈들이라면 확실히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몇몇 놈들이 몸을 움찔하는 것을 보며 나는 회로를 타고 도는 마력의 속도를 가일층 높였다. 이윽고 오른손을 통로로 삼은 마력이 짜르르 흘러 들어가자 무검의 주위로 심상치 않은 진동이 일기 시작했다. 96포인트에 해당하는 마력 능력치를 온전히 담아서 그런지, 대기를 떨쳐 울릴 정도의 강렬한 진동이었다. 이 정도면 되었다 싶을 즈음 나는 무검을 한 번 바라보았다. 푸르스름한 기운이 검을 타고 물결처럼 넘실대는 게 보였다. 사방에서 황급히 주문을 외우는 소리와 시위를 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바로 옆으로 뛰어들어가, 마법사들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곳을 향해 있는 힘껏 무검을 후려갈겼다. 뻥! 빈 허공을 치자 아무것도 없던 대기가 크게 꿀렁거렸다. 그리고 오른손에 묵직한 반발력이 느껴지는 순간, 검신 전체를 타고 있던 마력은 이내 하나의 파동이 되어 마법사들을 덮쳐 들었다. 콰콰콰콰! “씨, 씨발!” “막지 말고 피해!” 대기를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파동은, 놈들과의 거리가 줄어들수록 부채꼴 모양으로 범위를 넓혔다. 그 범위에 포함된 마법사들은 전면에서 밀려오는 파동의 기세를 느꼈는지, 급히 좌우로 갈라지며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피할 수 있었던 것은 호의 좌우 끝에 있던 운 좋은 놈들뿐이었다. “끄아악!” “꺄아아악!” 이윽고 거대한 파동이 마법사들이 모여있던 장소를 덮쳤다. 나 또한 파동을 뒤따라 달려가고 있었기에 놈들이 당하는 광경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쏘아 보낸 파동은 첫 번째 열에 있던 다섯 명의 신체를 거침없이 자르며 들어갔다. 그리고 두 번째 열에 있던 네 명의 몸 또한 잘라냈으며 세 번째 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절삭력이 무뎌진 듯, 남은 두 명을 허공으로 띄웠다. 물론 그렇다고 놈들이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파동에 담긴 충격파가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콰득! 콰드득! 파동은 남은 두 명의 몸을 자르지는 못했지만, 대신 철저하게 파괴했다. 광장의 중앙 게시판에 그들이 거세게 부딪치고, 그 여파로 우지직 소리를 내며 게시판이 무너졌다. 그리고 핏물이 왈칵 터져 나옴과 함께 사지가 폭발하듯 튀어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한 번의 일격으로 열한 명을 피 떡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에 도취될 시간은 없었다. 지금쯤이면 빠르게 정신을 차린 놈들이 주문을 완성했을 시간이었다. 일단 호를 벗어난 놈들을 먼저 처리하고, 나머지 놈들을 마무리 지을 필요가 있었다. 그때였다. “으아아아!” 분노에 찬 고함소리가 귓가를 세게 때렸다. 고개를 돌리자 한 놈이 비명을 지르며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 속도는 나를 살짝 놀라게 만들 만큼 신속하고 민첩했다. 어쩌면 민첩 능력치가 90을 넘을지도 모른다. 핑! 핑! 씽! 씽! 화살. 얼음 마법. 펼쳐놓은 마력 감지에 여러 기척들이 포착됐다. 우선은 바로 눈앞까지 다가온 부랑자부터 처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놈은 양손에 삐죽한 바늘이 달린 너클을 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얼굴을 향해 정확하게 쇄도하는 중이었다. 붕! 확실히 빠르고 위력적이기는 했지만, 눈에 훤히 보이는 공격이었다. 가볍게 머리를 틀자 귓가를 스치는 거센 바람이 느껴졌다. 흘끗 시선을 내리니 왼손을 역으로 쥔 게 바로 연타를 먹일 생각인 것 같았다. 그에 한 발 앞서, 나는 적당히 힘을 조절해 비어있는 왼손으로 놈의 복부를 후려쳤다. “컥!” 놈은 순식간에 등을 구부리며 앞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대로 검을 꽂으면 끝이었지만, 이놈은 할 일이 남아있었다. 나는 즉시 부랑자의 뒷덜미를 잡고 아까 느꼈던 기척들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들어올렸다. 퍽! 퍽! 퍽! 퍽! 머리에 화살 두 발, 복부에 얼음 송곳 두 발. 내구 능력치도 제법 높은지 다행히 화살이나 마법이 몸을 뚫고 나오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놈의 뒷덜미를 잡고 있는 손에서 놈이 몸을 부르르 떠는 느낌이 전해져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놈은 팔과 다리를 축 늘어뜨렸다. 나는 쓸모가 다한 놈의 시체를 바닥에 던졌다. 그러자, 나를 보며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 부랑자들을 볼 수 있었다. 이제 남은 놈들은 서른 명이 약간 안 되는 정도였다. 얼른 처리하고 워프 게이트로 갈 생각에 곧장 대지를 박차려는 찰나였다. 그 순간, 등 뒤로 수백 명이 내지르는 거대한 함성소리가 들렸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지금껏 압도적으로 당하고만 있었던 사용자들이 각자 무기를 쥐고 분연히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용자들의 눈동자는 지금껏 당한걸 되갚겠다는 듯 복수심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 “헉, 헉. 자네 정말 대단한 사용자였구먼.” “뛰는 중에는 말씀하지 않으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예끼. 비록 나이는 들었어도, 몸은 죽지 않았네.” “그렇군요. 아무튼 곧 있으면 워프 게이트에 도착합니다. 먼저 나가서 상황을 살펴보고 있을 테니 제 뒤를 따라와주십시오. 그럼 고연주, 부탁합니다.” 나는 고연주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후 바로 앞으로 달려나갔다. 결국 광장에 있던 부랑자들은 한 놈도 남김없이 처리했다. 사용자들을 학살하던 화력의 중추를 이루는 곳을 한바탕 크게 휘젓자, 그때까지만 해도 가만히 구경만하던 사용자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은 원호이기는 했지만, 어찌됐든 덕분에 더욱 빠르게 광장에 있던 놈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광장 전투가 끝나고 사용자들은 내게로 겹겹이 몰려들었다. 내가 출현한 이후로 전세가 뒤집어졌다, 살려줘서 감사하다, 당신이 우리의 희망이다 등등 수 없는 감사의 말이 쏟아졌지만, 그것에 일일이 대꾸해줄 여유가 없었다. 광장에 있던 놈들은 어디까지나 내부에서 호응한 인원에 불과하다. 지금 동, 서, 북문에서 달려오는 놈들이 진정한 정예 급일 것이다. 그놈들이 워프 게이트나 광장에 들이닥치기 직전 뮬을 탈출하는 게 내 계획이었다. 해서, 나는 얼른 클랜원들만 챙기고 광장을 빠져 나왔다. 내 뒤를 따르는 기척을 몇몇 느끼긴 했지만 솔직히 거기까지 신경 써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윽고 저기 앞에서 워프 게이트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달리는 속도에 더욱 박차를 가하며 안력에 한층 마력을 돋구었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점거 당했구나.’ 이제 워프 게이트와의 거리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상황은 광장과 비슷했다. 그리고 워프 게이트의 주위에 있는 수십 명의 부랑자와 그 주위를 둘러싼 수백의 사용자들. 다만 몇 가지 다른 점은 있었다. 그것은 부랑자들이 일방적으로 공격을 하는 게 아닌, 방어에 주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수백의 사용자들은 아우성을 치며 어떻게든 워프 게이트를 탈환하려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아무튼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광장보다 낫다고 할 순 있었지만, 삼 방향에서 시시각각 가까워져 오는 비명소리는 부랑자들 또한 이곳에 거의 다다랐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달리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급히 걸음을 멈추었다. ‘아껴놓은 게 다행이군. 일단 한 번 쓰자.’ 나는 다시 한 번 크게 마력을 일으켰다. 그리고 발에 힘을 주어 바닥을 크게 굴렀다. 그러자 대지에 일렁이는 파문이 일었고, 그와 함께 주위로 수십의 기운이 퍼져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내 파르스름한 빛을 띠며 ‘검’의 형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난, 곧장 심장에 잠들어있는 화정의 힘을 일깨웠다. 화륵! 화르륵! 화정이 깨어났다는 반증인 특유의 맑은 불소리. 그 순간, 지금껏 파르스름한 빛을 띠던 ‘검’에 붉은 기운이 섞여 들어갔고, 곧이어 화정이 발갛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워프 게이트가 망가지지 않도록.’ 나는 멈췄던 걸음을 다시 움직이며 오른손을 세차게 내뻗었다. 그와 동시에, 이글이글 타오르던 수십 발의 열화검이 워프 게이트를 향해 쏘아져 들어갔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아, 많은 분들이 오해하신 것 같네요. 전투를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하. 음 아무튼 뮬의 탈출은 2회 안으로 이루어질 예정이오니, 그 이후의 이야기를 기대해주시면 감사합니다.(귀환 챕터는 약 8회~12회 사이로 잡고 있습니다. 하하.) 날씨가 많이 덥네요! 독자분들 모두 건강 조심하시고, 편안한 밤 보내세요! :D 『 리리플 』 1. 미월야 : 미월야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하.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1등은 미월야 님이 하시는군요. :) 이번 회도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2. 사람인생 : 하하. 그래도 시도하는 것 자체가 참 값지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해요. :D 3. 플룻 : 김유현이 뮬에 나타나지는 않아요! ㅋㅋㅋㅋ. 4. EH연 : 흑흑. 한달 있다가 군대를 가시는군요. ;ㅇ; 저는 이제 2년 차~.(퍽퍽!) @_@ 몸 건강히 다녀오세요! 하하하. 5. superrobot : 생각해보니 여담이라는 말이 조금 안 어울려서 나름 문맥에 맞게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6. POWERED : 아마 당분간은 많거나 적거나 전투 내용이 조금 나올 것 같지 말입니다. :) 7. 독자분노하다 : 그렇죠? 저도 전투 내용은 정말 오랜만에 써보는 것 같습니다. ㅋㅋㅋㅋ. 8. 시룡 : 에이, 아무리 늦어도 귀환까지 12회 안으로 끝낼게요! 너무 걱정 마세요!(무, 물론 오차는 있을 수 있어요.) 9. shadowΞghost : 40, 50회라뇨! 으잌ㅋㅋㅋㅋ. 아닙니다. 그 정도까지 가지는 않아요! 10. 석양s : 그렇지요. 스스로 원해서 된 경우도 있고, 휩쓸려서 그렇게 된 경우도 있지요. 정답입니다. 11. 오피투럽19 : 하하, 코멘트는 언제나 읽고 있습니다! :D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306 / 0933 ---------------------------------------------- 역관광이란 무엇인가? 꺼지지 않는 불꽃, 영원히 타오르는 염화(炎火). 이 세상에 실재(實在)하는 모든 것을 불태울 수 있는 화정(火正). 마음 같아서는 워프 게이트를 포함해 전방위적으로 타격하고 싶었다. 그리고 충분히 그럴 능력도 있다. 화정은 신화계급의 권능이고, 내 의지에 따라 파괴할 수 있는 대상을 지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워프 게이트가 점거 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후, 계획이 틀어졌다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이미 훼손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즉 워프 게이트를 점령할 수는 있지만, 파손을 확인한 사용자들이 책임의 화살을 내게 돌리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해서 괜한 오해는 피하고 싶었기에, 나는 일부러 방어막을 찢는 것과 최대한 앞쪽에 나와있는 부랑자들을 목표로 삼았다. 현재 부랑자들이 방어에 일관함으로써 상황은 비등비등했지만, 사용자들이 공격하는 입장에 있는 만큼 이 정도만 해줘도 충분히 탈환할 수 있을 것이다. 열화검은 지체 없이 허공을 가르며 쏘아져 나갔다. 기세 좋게 타오르는 화정은 맑은 음색을 뿌리며 순식간에 사용자들의 머리 위를 지나쳤다. 그리고 부랑자들이 쳐놓은 대규모 방어막에 다다른 순간, 마치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급격이 강하를 시도했다. 똑같이 100개의 미사일을 발사한다고 가정했을 때, 폭격 범위가 좁을수록 더욱 많은 화력을 쏟아 부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차치하고서라도, 화정의 위력은 절대적이었다. 화륵! 화르륵! “이, 이건 또 뭐야! 실드, 실드!” “으, 으아아아악!” 거창한 폭발도 일어나지 않고, 화려한 효과를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화정은 그저 내 의지에 따라 충실히 움직여주었다. 수십 개의 열화검이 모조리 목표지점에 내리꽂혔다. 대규모로 쳐져 있던 반투명한 방어막이 종잇장처럼 찢겨나간다. 마법사들의 원호 아래서 사용자들의 접근을 저지하던 부랑자들이 순식간에 지면을 나뒹굴었다. 화정에 의해 일어난 불길로 워프 게이트 주변이 환히 밝아지고, 열화검을 몸에 꽂은 놈들의 비명이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누가 갑자기….” “기회다! 쳐라! 워프 게이트를 탈환하자!” 지금껏 든든히 버텨주던 보호막이 깨졌다. 사용자들의 진입을 방해하던 부랑자들이 무력화됐다. 방어막이 깨진 것 영향을 받았는지, 뒤에 있던 마법사들 중 몇 명이 비틀거리는 게 보인다. 철벽 같던 입구가 완전하게 개방된 것이다. 사용자들 중 일부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한 목소리를 뱉었지만, 목숨에 위협을 느낀 집념은 무서웠다. 소강에 빠진 것도 잠시. 그들은 곧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지르며 파도처럼 우르르 밀려들어가기 시작했다. 나 또한 후미에서 뒤따라 들어가며, 부랑자들의 상황을 면밀히 관찰했다. ‘남은 놈들은 사용자들에게 맡겨도 되겠지.’ 중앙광장에서처럼 일방적으로 학살을 당하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워프 게이트는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범위에 벗어나있던 놈들과 간신히 정신을 차린 놈들이 몇몇 보이긴 했다. 그러나 사용자들은 이미 봇물처럼 터져 들어가는 중이었다. 어떤 전술도 순서도 보이지 않는 마구잡이 식 돌격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것도 나름 괜찮은 방법이었다. “밀지마! 밀지 말라고 이 씨발새끼야!” “차례를 지키세요! 들어온 순서대로 가자고요, 좀!” “죽어라, 이 개 자식들아!” “크아아악!” 사방에서 수백의 사용자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서 그런지 워프 게이트 내부는 무척이나 혼잡했다. 실은 혼잡 정도가 아니었다. 곧장 워프 게이트로 달려가는 사용자들, 쓰러진 부랑자들에게 달려가는 사용자들, 그리고 필사적으로 저항하고는 있지만 사면초가에 빠진 부랑자들. 이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고함과 비명이 뒤섞여 워프 게이트를 왕왕 울리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오로쓰로스 부츠를 십분 활용하기로 했다. 앞을 보아하니 곧 있으면 사용자들로 꽉꽉 들어찰 낌새가 보이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워프 게이트의 상황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기에, 지체 않고 대지를 박차 올랐다. “악! 누가 내 머리 밟았어!” ‘미안.’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용자 한 명이 머리를 감싸 쥐며 주저앉는 게 보였다. 한 번의 도약으론 살짝 부족한 감이 있어 아무데나 발을 내질렀는데, 마침 얻어걸린 모양이었다. 속으로 간단히 사과한 후 나는 다시 전방을 쳐다보았다. 워프 게이트는 시시각각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몇 명의 사용자가 달라붙어 있음에도, 포탈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워프 게이트 부근으로 착지한 순간 들려온 하나의 울부짖음은, 내가 이전부터 느꼈던 불안감을 구체화 해주었다. “워, 워프 게이트가 작동이 안돼요!” ‘이런 제기랄.’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곤 워프 게이트로 달려갔다. 워프 게이트 자체는 멀쩡했다. 어디 한군데 파손된 곳도 보이지 않고 이음새도 제대로 연결되어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부랑자 놈들이 워프 게이트를 작동하는 마법 진을 건드렸을 것이다. “무슨 말이야? 왜 작동이 안 돼?!” “빨리 포탈 열지 않고 뭐하냐!” “모, 모르겠어요…. 왜…. 왜….” “비켜봐요! 제가 해볼게요.” 내부는 삽시간에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아직 워프 게이트가 작동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상대적으로 뒤편에 있는 사용자들의 아우성까지 겹치자 이건 혼란 정도가 아니었다. 그때였다. 혹시 복구가 가능하지 않을까 마법 진 부근으로 다가가려는 순간,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로 흘러 들었다. “크흐흐흐흐흐흐흐….” 소리의 진원지는 바닥이었다. 살짝 고개를 숙여 바닥을 훑어보자, 사용자들의 발에 밟혀있는 부랑자 한 명을 볼 수 있었다. 걸치고 있던 장비는 이미 넝마가 된지 오래였고, 피 웅덩이 위에 있는 것으로 보아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몰골이었다. “꼴 좋다 씨발 놈들…. 크흐흐…. 쿨럭! 쿨럭!” “너희들, 도대체 워프 게이트에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무슨 짓? 마법 진을 건드렸다, 이 멍청한 년아. 어디 여기 실컷 있어봐라. 곧 외부에서 달려오는 인원들에게 몽땅 죽을 테니까…!” “이 자식이…!” “차라리 살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도망치는 게 어때? 킬킬!” 퍽! 누군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무기를 내려쳤는지, 부랑자의 머리가 움푹 패이며 피 분수가 솟아올랐다. 그대로 눈을 까뒤집는 놈을 보다가, 나는 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완전한 파괴가 아닌 훼손 정도라면, 어쩌면 이른 시간 안에 복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손상 정도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기에, 나는 마법 진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포기하자.’ 그리고 허공에 표시되는 워프 게이트에 대한 정보와 손상률을 확인한 순간, 나는 바로 이곳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워프 게이트에 관한 전문가가 있었는지 정말 기가 막히게도 훼손해놓은 상태였다. 엄밀히 말하면 복구는 가능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불가능하다. 못해도 이틀은 수리에 달라붙어야 할 정도로 마법 진은 깔끔하게 파훼되어있었다. 삼 방향에서 들려오는 고함은 이제 지척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한시가 급했다. 워프 게이트를 이용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더 이상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다. 내부를 꽉 메우는 사용자들을 헤치며, 나는 다시 입구를 향해 도약했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 성문을 통해 나가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럼 어느 문으로 가느냐가 문제인데….’ “수현!” “오빠!” 빽빽한 사용자들을 뛰어넘어 입구에 다다르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직 워프 게이트에 들어오지 못했는지, 고연주를 비롯한 클랜원들이 모여있는걸 볼 수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 깊은 밤. 어둑한 하늘은 도시에 짙은 어둠을 드리우고 있었다. 하지만 도시는 어둡지 않다. 사방에서 치솟아 오르는 불길은 어둠을 몰아내고 도시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불빛이 비추는 도시의 거리는, 흡사 한 폭의 지옥도를 연상케 할 만큼 끔찍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산산이 부서진 건물의 잔해더미엔 싸늘히 식은 시체들이 이리저리 걸려있었다. 시체들에게서 흘러내린 피는 벽을 타고 내려와 웅덩이를 만들었고, 점차 시내로 줄기를 확장하는 중이었다. 곳곳에 널브러진 시체를 모으면 작은 언덕 하나는 만들 수 있음에도, 살육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한쪽은 닥치는 대로 학살을, 한쪽은 구슬피 울부짖으며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할 뿐. 간간이 저항을 시도하는 사용자들도 보였지만, 이내 부랑자들의 무자비한 공격에 속절없이 몸을 뉘였다. 학살이 횡행하는 도시. 비명과 광기와 시체와 핏물이 흘러 넘치는 거리. 그런 거리의 중앙로를,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색 타이츠를 입은 한 명의 여성이 여유롭게 가로지른다. 여성의 정체는 바로 백서연이었다. 마치 모델과 같은 걸음으로 거리를 걷던 백서연은,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차분히 숨을 내쉬면서 입가에 만족스러워 보이는 미소를 머금었다. 이내 다시 뜬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지금 이러한 상황이 그녀에겐 무척이나 즐거운 모양이었다. “와, 너도 진짜 미친년이다. 넌 지금 이 상황에 그 생각이 나냐?” “미친놈. 누가 누구보고 미친년이래? 그럼 네 손에 그건 뭔데?” 한동안 거리를 활보하던 백서연은 어느 지점에 이르러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거리가 떠나가라 지르는 고함소리에, 방금 전까지 즐거워 마지않던 얼굴이 살며시 찌푸려진다. 이윽고 한쪽 방향을 바라보는 백서연의 얼굴엔 자못 한심하다는 기색이 뚝뚝 묻어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얇은 한숨과 함께 허리춤에 걸려있던 단검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한 손에 단단히 쥐고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백서연의 걸음이 향하는 곳에는 두 명의 남녀가 한창 말다툼을 벌이는 중이었다. 이런 지옥과도 같은 상황에 태평히 말다툼을 벌이는 건 확실히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나 둘의 주변에 쓰러져있는 시체의 수와 각각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본다면 아주 이상하다고 볼 수만은 없었다. “야, 얘 지금 몇 살이나 되었을 것 같아? 아무리 많이 쳐줘도 초등학생이야. 아니, 애초에 사용자가 맞기는 해? 차라리 죽여라 죽여.” “그게 뭔 상관이야? 그리고 네 손에 쥐고 있는 그건 뭐냐고.” “이년은 딱 봐도 성인이잖아. 그리고 난 너처럼 그런 변태 같은 짓은 안 한다. 아무튼 잔말 말고 빨리 죽여.” “지랄. 이렇게 귀엽고 어린 남자애를 구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아니? 아무튼 얘는 내가 가질 거니까, 너나 잘하세요.” “얼씨구 얼씨구.” 둘의 대화가 기가 막혔는지 백서연은 아니꼬운 목소리를 내었다. 두 명은 깜짝 놀란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백서연을 보는 남성과 여성의 얼굴에 뿌연 절망감이 어렸다. 각각의 손아귀에는 척 봐도 어려 보이는 소년과 성숙한 미모를 뽐내는 여성이 머리채를 뽑힐 듯 쥐어 잡혀있었다. “어, 언니.” “누님 오셨습니까!” “개뿔이. 다른 놈들은 죽자고 임무수행을 하고 있는데, 간부라는 놈들이 잘들 하고 있다. 응?” “그, 그게 아니라….” 여성이 머뭇거리는 순간, 백서연의 신형이 쏜살같이 쏘아졌다. 그녀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곤 이내 오른손에 쥔 단검을 섬광같이 휘둘렀다. 뻥! 이내 강렬한 빛이 한 번 훑었다 싶은 순간, 빵빵한 풍선이 터지는 소리가 거리를 세게 울렸다. 소년의 머리는 잘게 으깬 수박처럼 터졌고, 분홍빛 뇌수가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소년의 머리를 쥐고 있던 여성은 멍하니 손을 들어올렸다. 어느새 여성의 손아귀에는 한줌 머리카락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잠깐 그것을 바라보던 여성은 이내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신경질을 부렸다. “아, 언니!” “시끄러.” “아 진짜…. 서른 명 중에서 겨우 한 놈 건졌는데….” 옆에서 연신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백서연은 전혀 아랑곳 않은 채, 이번엔 남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남성은 그녀의 시선을 받자마자 고개를 미친 듯이 휘저었다. “누, 누님! 안 돼요!” 하지만 백서연의 매끈한 다리는 주저 없이 허공을 갈랐고, 그녀의 발등은 잡혀있던 여성의 턱에 정확히 닿았다. 으드득! “깍!” 외마디 비명과 함께 성숙한 여성의 목이 기형적으로 뒤틀렸다. 이윽고 몸을 축 늘어뜨린 여성을 보며 남성은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아 진짜 누님. 정말 너무하십니다.” “너희들이야말로 너무하지. 지금 습격한지 얼마나 지났다고 약탈 질이야?” 백서연은 허공에서 발목을 한두 번 돌리고는 쭉 뻗은 다리를 다시 곱게 접었다. 남성은 잠시 그 각선미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앞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는지 바로 대답했다. “현이 형님이 마음껏 약탈해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건 습격이 끝나고 해도 된다는 소리였지.” “아 누님이 한 명당 스무 명만 죽이래 매요. 보세요. 저랑 해연이가 지금까지 백 명을 넘게 죽였는데….” 남성은 정말 억울하다는 말투로 한쪽 거리를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다른 거리는 비명이나 발자국소리로 가득한데, 유독 이곳만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백서연은 남성이 가리킨 방향으로 흘끗 시선을 돌렸다. 과연 그의 말대로, 거리는 널려있는 시체의 수는 확실히 100구를 넘어서고 있었다. “어휴. 아무튼 까불지 말고, 가인이는 어디 있어?” “가인이? 그러고 보니 어디 갔지? 아까까지만 해도 시체 앞에서 무릎 꿇고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던데.” 여성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대답하자, 백서연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째 내 아래 있는 애들은 다 이상한 애들밖에 없니. 시체를 들여다보질 않나, 습격한지 얼마나 지났다고 오입질을 생각하질 않나…. 후유.” “에이, 광장도 성공했다고 하고, 워프 게이트도 성공했다고 연락 받았잖아요. 상황을 봐도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는데…. 좀 봐주시죠 누님. 못 참겠어요.” 백서연은 촉새처럼 끼어드는 남성을 한껏 째려보다가, 조금은 누그러진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하여간 말은 청산유수야. 근데 얼마 전에 몇 명 던져주지 않았어? 맞아, 대표 클랜 애들 포획했었잖아? 그때 사제가 네 취향이라면서 득달같이 달려가놓곤.” “아아, 확실히 그랬어요. 근데 못했어요. 아니, 안 했지요.” “왜?” “차례를 기다렸는데, 내가 딱 이백 번째였거든요. 근데 딱 보니까 할 마음이 사라지더라고요. 구멍은 구멍대로 벌어져있고, 몸은 하얀색으로 범벅이 돼 있고…. 축 늘어진 게 꼭 실 끊긴 인형을 보는 것 같아서….” 딱따구리처럼 말을 잇던 남성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왜 그래?” “누님. 뒤요.” 남성이 가볍게 턱짓으로 가리키자, 백서연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뒤쪽으로는 언제 나타났는지 백치미가 감도는 얼굴을 하고 있는 여성이 걸어오고 있었다. 좋게 말하면 백치미였고,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정신이 나간 것 같은 얼굴이었다. 백서연은 여성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완전히 몸을 돌렸다. “가인아? 넌 또 어디 갔다 왔어?” “언니. 큰일.” “어디 갔다…. 응?” “광장. 워프 게이트. 연락. 안 돼.” 그 말을 들은 순간, 세 명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백서연은 미간을 약간 좁히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광장. 워프 게이트. 연락. 안 돼.” 백서연의 물음에, 백치미 여성은 수정구를 들어올리며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녀는 잠시 동안 여성을 바라보다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박동수. 이해연. 잡담은 그만하자. 그리고 조금 이르지만, 지금 바로 애들 모아. 모으는 즉시 광장이랑 워프 게이트로 달려간다.” “지금요? 아직 완전히 점령한 건 아닌데…. 이 구역 정리하고 들어가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차라리 좌우방향 약탈 조 애들은 남기는 게 어때요?” “그렇게 해.” 휘이익! 동수라고 불린 남성은 단번에 고개를 끄덕이곤 바로 신호를 불었다. 그러자, 이때까지만 해도 사방팔방에 흩어져있던 그림자들이 한쪽 방향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하하, 뮬의 탈출은 워프 게이트가 아닌 성문으로 이루어집니다. 어제 후기에 말씀 드렸듯이 다음 회에 성문성 나갈 것 같습니다. 과연 수현 일행은 어느 성문으로 탈출을 할까요? 눈치 빠르신 독자분들께서는 이미 알아채셨을지도 모르겠네요. 물론, 이대로 떠나기에는 조급 섭섭하겠지요? :D 아, 그리고 요즘 들어 너무 걱정하지 않으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습니다. 부랑자들 걱정 좀 해주세요. 부랑자들이 서운해하고 있습니다. ㅜ.ㅠ(?)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합니다. 하하. 1등이 참 쉬우시군요. 그 쉬운 것, 저도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ㅜ.ㅠ 2. 안솔 : No. 지금 체력 올 인하면 98포인트입니다. 남은 포인트는 6포인트에요. :) 3. 시즈프레어 : 그렇지요. 뭐 솔직히 '지금' 사용자들 중에서 1:1로 수현과 그나마 대적할 수 있는 사용자는 다섯명도 채 안되니까요. 그것도 화정을 사용하면 뭐…. 4. 훈제달팽이 : 어떡해요. ㅜ.ㅠ 수현이 이제 성문을 통해서 탈출할거예요. 그런데 이건 걱정을 좀 해주셔야해요. 수현이 말고 부랑자들을요.(?) 5. 메를리위 : 호오, 혹시 저번에 유리켄느 님의 지인이신 분이 아니십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6. 시드엘 : 조, 좋은 예지력이십니다. ㅎㄷㄷ. 하, 하지만 저에겐 아직 비장의 수가 몇 개 더 남아있지요! 7. 피네이로 : 네. 백한결은 확실히 강해질 예정입니다. 하지만 수현이 체력 101을 찍는다고 가정하면, 백한결이 아무리 최종병기로 각성한다고 쳐도 수현에게 개 박살 납니다. 물론 수현이 전력을 다한다는 가정이 있어야겠지요. 8. LOVE가을 : 수정 완료했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9. 輝雅 : 다음회를 기대해주세요. 수현의 은밀한(?) 돌파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후후. 10. 에르시리나 : 네! 여기 리리플 바치겠습니다! 로유X라는 말씀만 아니었다면 더욱 기쁜 마음으로 리리플을 바쳤을 겁니다. ( --) 11. Lea : 후후. 행운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능력입니다. 특히 행운 101로 업그레이드된 후 더욱 미묘해졌죠.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Lea 님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말씀해주신 것 중에는 1번이 일부 맞습니다.) 다만, 이것 하나만 기억해주시면 됩니다. 행운은 만능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하.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307 / 0933 ---------------------------------------------- 역관광이란 무엇인가? “네? 워프 게이트가 작동하지 않는다고요?” “예. 아무래도 부랑자들이 마법 진을 건드린 것 같습니다.” 확답하듯 말을 잇자 클랜원들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 이제 겨우 탈출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그 방법이 물거품처럼 사라졌으니 걱정이 될 만도 했다. 이윽고 나만을 쳐다보는 클랜원들을 보며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 성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럼 어디로 나가느냐가 문제인데….' 여기서부터는 신중히 선택할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워프 게이트는 거의 중앙에 있는 만큼 거리는 비슷비슷하다. 그렇다면 최대한 안전한 곳, 즉 부랑자들이 없을 만한 곳을 선정해야 한다. 나는 아까 전 보석상의 건물 위에서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부랑자는 동문, 서문, 북문 총 삼 방향에서 습격해왔다. 그렇다면 남문으로 탈출로를 잡는 게 가장 옳은 결정일 것이다. 하지만 선뜻 남문으로 달려가기엔 왠지 모르게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1회 차에서 시가전을 치를 적 겪었던 경험에서 기인한 일종의 직감이었다. 부랑자 말살계획이 이루어진 이후, 사용자들에 대한 놈들의 적개심은 엄청날 것이다. 대륙과 대륙을 횡단하며 복수를 차곡차곡 준비해온 것만 봐도 어느 정도인지 알만한 수준이다. 놈들이 남문을 틔운 의도는 알 것 같았지만 도망치는 사용자들을 순순히 보내주리라고는 생각기 어려웠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부랑자들이라면, 뭔가 수작을 부렸을 거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1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많은 것들을 고심했고, 정리했다. 그리고 막 클랜원들을 향해 입을 열려는 찰나 문득 안솔이 눈에 밟혔다. 그녀는 한껏 불안한 얼굴로 손가락만 쪽쪽 빨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보는 순간 나는 한가지 좋은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안솔.” “네, 네?” “잠깐만 이리 와봐.” 안솔은 한두 번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쪼르르 달려오기 시작했다. * 깜빡! 어둡던 거리가, 한 순간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진다. 저 멀리서 솟아오르는 불길은 도시 외진 곳까지는 비추지 못하는지, 시가는 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오직 불규칙하게 깜빡이는 라이트 스톤만이 간헐적으로나마 어두운 거리를 밝혀주고 있었다. 그런 거리를, 한 명의 여성이 힘겹게 기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기다가 도저히 안되겠는지, 포복자세 그대로 멈춰 벌렁 돌아누웠다. 여성의 상태는 척 봐도 정상적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었다. 하의는 갈기갈기 찢겨져 골반 아래를 훤히 노출하고 있었는데, 새하얀 허벅지에는 두 개의 구멍이 숭숭 뚫린 상태였다. 그리고 구멍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잠시 동안 숨을 고르던 여성은 주변에 사람의 흔적이 없다고 여겼는지, 끙 힘을 주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리고 양손을 바닥에 짚고 천천히 바닥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쓱, 쓱, 쓱, 쓱. 여성은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 몸을 기댄 후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머지않은 곳에서 난도질 당한 시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미 부랑자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듯, 너덜너덜이 찢긴 시체들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던 여성은 더는 견딜 수 없었는지 “흑.” 흐느끼는 소리를 내었다. 그때였다. “우리 귀여운 아기 고양이~. 어디로 갔나~.” 걸걸한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억지로 꾸며낸 억양이 거리를 나지막이 울렸다. 여성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흐느낌이 남아 턱과 어깨를 떨었지만 필사적으로 참는 모습이었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여성의 목 울대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가죽부츠가 거리를 스치는 소리가 잦아졌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눈을 감은 후, 입술을 질끈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일어서려고 한 순간이었다. “여기 있었네~. 오빠가 많이 찾았잖아~.” 찾았다는 소리와 함께, 둥글둥글한 공 하나가 어두운 허공을 휙 가로지른다. 툭! 데구루루…. 이윽고 바닥에 떨어진 공은 데굴데굴 굴러가 그녀가 있는 곳 앞에서 정확히 멈췄다. 여성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끔찍하게 뜯긴 목 아랫부분과,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진득한 핏물을 발견한 순간 크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꺄아아아아아아악!” “크하하하하하하하!” 쿵! 우직! 우지직! 어디서 떨어졌는지, 커다란 몸집의 남성이 거칠게 웃어 젖히며 머리를 으깨어 부쉈다. 그는 끈적거리는 발바닥을 서너 번 비비곤 이내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을 여성에게 내밀었다. “어쩌냐, 우리 아기 고양이. 네 동료들은 어떻게든 너를 살리고 싶었나 본데, 이렇게 되어버렸네…?” “아…. 아아….” 거한의 손이 여성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여성은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는지 목멘 탄식만 뱉으며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에는 이렇게 잡혀버렸네! 잡혀버렸어! 크히히히!” “싫어! 싫어어!” 거한은 급히 허리춤을 풀었다. 연방 헛손질을 하는 게 지금 이 상황이 꽤나 흥분되는 모양이었다. 곧 바지와 속옷이 스르륵 내려가고 빳빳이 고개를 치켜든 흉물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여성의 양 허벅지를 꽉 붙잡아 벌린 후 그대로 위로 들어올렸다. 그녀는 어떻게든 저항하려고 주먹을 휘저었지만 남성은 오히려 껄껄 웃으며 흉물을 조준했다. 이윽고 거한의 흉물과 여성의 소중한 곳이 어느 정도 가까워졌다 싶을 즈음, 그는 허벅지를 잡고 있는 손을 거세게 내리꽂았다. 푹직! “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접합부에서 미약한 피가 튀었다. 눈 한 번 깜박할 새에 거한과 여성의 신체가 겹쳐졌다. 그녀는 허리를 비틀며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가, 전신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끄아…. 역시 사용자 년들은 죽이는구먼…. 그런데 너 처녀였냐?” “끅…! 악…!” “큭큭. 그러니까 어차피 이렇게 될 거, 뭐하러 그렇게 도망갔어. 응?” “흑…. 읔….” 여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입을 열 정신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남성이 한 손으로 그녀의 등을 감싸 안자, 교접(交接)은 더욱 깊어졌고, 신체의 떨림은 더욱 심해졌다. 이윽고 허우적허우적 허공을 휘젓던 손이 거한의 어깨에 닿고, 여성은 반사적으로 손에 힘을 주었다. 거한은 남은 한 손으로 여성의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두드렸다. 그리고 자신의 품에 안긴 그녀를 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아이구 우리 고양이. 이제야 애교를 부리네. 옳지, 옳지.” “흑…. 흑….” 그때, 저기 멀리서 미약한 고함소리가 들렸다. 거한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씩 미소를 머금으며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흐흐. 이대로 나가는 것도 재밌겠군. 놈들에게 자랑해야지. 어때. 너도 좋지?” “엉…. 어엉…. 오빠…. 오빠 살려줘…. 어어엉….”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하복부에서 밀려오는 참을 수 없는 고통 때문인지 아니면 거한의 말에 극심한 수치심을 느꼈는지. 찌푸려져 있던 여성의 눈에서, 결국에는 서글픈 눈물 한 방울이 흘러 허공에 흩뿌려졌다. 그때였다. 휭!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거한과 여성을 스쳤다. 그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웃음이 만면했던 표정을 지우고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 순간, 거한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리고 재빠르게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가드 하려는 찰나였다. 썩둑! 그러나 손을 채 들어 올리기도 전, 거한이 생에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단 두 개였다. 그것은, 자신의 목을 바람처럼 훑고 지나간 섬뜩한 감촉과. “처리했습니다. 지나갑시다.” 소름 끼칠 만큼의 차가운 목소리였다. * 많은 고민 끝에 결정한 탈출로는 동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쪽 외곽구역을 우회해서 동문으로 빠져나간다는 계획이었다. 물론 괜히 동문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도박이라고 볼 수 있는 선택이었지만, 복덩이에게 확인을 받음으로써 승산이 높아졌다. 그렇게 우리는 우회에 성공에 동쪽 외곽인 거주민들의 주 거주구역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고, 그대로 탈출을 시작했다. 외곽구역에 진입함으로써 한가지 변한 것이 있다면 고연주가 나를 적극적으로 원호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예상대로 부랑자들은 생각보다 많은 숫자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최대한 은밀하게, 그리고 불가피하게 만나게 됐을 시에는 최대한 신속하게 처리한다는 명제아래 외곽구역을 돌파했다. 외곽구역에서 약탈을 자행하는 부랑자들은 가지각색으로 움직였다. 홀로 움직이는 놈이 있는가 하면 너덧이 뭉쳐 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놈들은 처리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다. 실제로 우리는 그런 놈들을 가볍게 처리하며 중반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탈출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외곽구역 중반을 넘어 거의 중 후반부에 다다를 즈음 우리는 17명이 뭉쳐 다니는 부랑자들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놈들은 외부에서 침입해온 부랑자들이었고, 내부에서 호응한 놈들보다 한층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었다. 다행히 고연주의 대규모 그림자 마법이 놈들을 전방위적으로 덮쳤고, 놈들이 당황한 틈을 타 너덧 명을 베고 시작했기에 크게 시간을 지체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다시 탈출을 재개했지만 부랑자들도 바보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면 부랑자들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중이었다. 부랑자들도 그들 나름의 연락체계는 갖고 있을 테고 아니면 점령 약탈 도중 동료들의 시체를 보았을 수도 있다. 가면 갈수록 점점 부랑자들과 부딪치는 일이 잦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껏 외곽 지역을 거의 돌파하면서 내가 도륙한 부랑자만 예순 명이 넘어가고 있었다. 사태가 이지경이 되었으니 그들 또한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을 터. 언제부터인가 끊이지 않고 들리던 거주민들의 비명 소리가 잦아들었다. 사방팔방으로 퍼져있던 기척이 일부는 뭉치기 시작하고 일부는 망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간단히 말해서 놈들은 점령 약탈을 중지하고 동료를 살해한 놈을 찾아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전방에서 느껴지는 수십의 기척에 잠시 숨을 죽이고 상황을 살피는 중이었다. “수현. 어떻게 할까요?”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고연주는 벽면에 바짝 몸을 붙인 채 덜덜 떨고 있는 안솔을 보듬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창백한 안색의 김한별과, 살짝 숨을 몰아 쉬고 있는 영감님도 보였다. “아무래도 전방에 부랑자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있는 쪽으로 서서히 들어오는 중입니다.” “저도 그렇게 느껴지고 있어요.” 나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방에 우뚝 선 거대한 성벽을 보건대, 이곳만 지나치면 성문은 금방이었다. 앞에서 느껴지는 수는 어림잡아 스물 남짓. 고연주의 원호만 이어진다면 순식간에 처리할 자신은 있다. 다만,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고연주. 전방 말고, 혹시 부근에 다른 부랑자들의 기척이 느껴지지는 않나요?” “있어요. 우리들이 지나온 곳으로 한 무리, 그리고 오른쪽 방향으로 한 무리 정도?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것으로 보아, 흔적을 찾으면서 오는 것 같아요.” “그럼 지금 그들과의 거리는 어느 정도 떨어져있죠?” “거리는 약간 있는 편이에요. 그런데….” 고연주는 뒤를 한 번 흘끗 돌아보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실은 방금 전부터 뒤쪽 방향에 있는 무리의 움직임이 멈췄어요. 그리고 오른쪽 방향에 있는 무리의 일부가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고요.” “설마….” 순간 샌드위치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고연주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제 생각에는 다른 사용자들을 우리로 착각하는 것 같아요.” “다른 사용자들 이라고요?” “네. 수현이 전방 전투에 집중하는 동안 저는 후방을 담당했잖아요? 많지는 않지만, 실은 광장이랑 워프 게이트부터 수현의 뒤를 따라온 사용자들이 몇몇 있어요. 지금 거의 기척이 겹치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그들을 발견했을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나는 고연주의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으로 오면서 사용자 몇 명이 나를 부르고 붙잡은 기억이 있었다.(물론 바로 뿌리쳤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보면 이것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방법은 두 가지였다. 다른 사용자들이 시선을 끌어주는 동안 눈앞의 놈들을 처리하느냐, 아니면 사선으로 방향을 트느냐. 나는 바로 고연주에게 물었다. “고연주. 혹시 사선으로 방향을 튼다면 빠져나갈 수 있을까요?” “글쎄요? 지금 아무래도 거의 몰이 식으로 망을 구성한 모양인데….” “…….” “성문은 바로 앞이잖아요? 쉬운 길이 있는데 굳이 어려운 길로 갈 필요가….” 나와 고연주의 생각이 일치했다. 나를 뒤쫓아온 사용자들이 얼마나 버텨줄지도 불투명했고, 최악의 경우에는 사방에서 부랑자를 맞을 수도 있다. 더구나 여기서 방향을 틀어버리면 시간을 지체하게 되고 다른 구역의 부랑자들이 추가로 들어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차라리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더라도 눈앞의 부랑자들을 처리하는 선택이 나아 보였다. '최대한 빠르게 놈들을 정리한 후 지체 없이 빠져나간다.' 그렇게 마음을 정한 후, 나는 클랜원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마 이번이 마지막 전투가 될 것 같습니다.” “…….” “긴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지금까지와 똑같을 테니까요. 제가 그들을 처리하는 즉시 이곳을 탈출합니다.” “오, 오빠.” “그럼 고연주. 아까와 같이 부탁합니다.” 한별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바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앞으로 크게 뛰어나가며 있는 힘껏 도약했다. 그와 동시에, 지면을 타고 흘러가는 수 갈래의 그림자들을 볼 수 있었다. * 삽시간에 건물 하나를 뛰어넘었다. 저기 앞쪽에서 부랑자들이 보인다. 그들은 뭔가 이상한 기척을 느꼈는지 천천히 걸어오던 도중 슬쩍 고개를 올렸다. 그리고 나와 시선을 마주친 순간, 고연주가 쏘아 보낸 수 갈래의 그림자들이 부랑자들을 덮쳐 들었다. “아악!” “꺄아악!” 그리고 그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착지한 순간, 수 명의 부랑자들이 허공에 떠오르며 비명을 질렀다. 문득 열화검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미 워프 게이트에서 한 번 사용하고 말았다. 얼마나 더 사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앞으로의 일정을 생각하면 최대한 체력을 아껴놓을 필요가 있었다. 해서, 나는 내려앉기가 무섭게 그들에게로 다가가 검을 찔러 들었다. 멋을 부리며 싸울 여유도, 그럴 생각도 없다. 오직 탈출을 위한 전투만이 내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고연주의 그림자들이 부랑자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사이에 최대한 수를 줄여놓을 필요가 있다. 나는 아무 생각도 않고 전투에 집중하기로 했다. 해서, 첫 시작으로 허공에 묶여 버둥거리는 세 명을 향해 검을 날렸다. 푹! 푹! 푹! 그렇게 순식간에 세 명의 목숨을 빼앗은 후, 나는 그들 사이로 그대로 뛰어들었다. 부랑자들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혼란에 휩싸였다가 이내 순식간에 회복하며 외쳤다. “찾았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젠장! 어둠을 다루는 놈이다! 만만히 보지마!” '놀고 있네.' 휘이익! 휘이익! 신호가 나오자, 주변에서 망을 구성하고 있던 부랑자들이 몰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재빠르게 몸을 돌리며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달렸다. 그러자 나에게 달려오던 부랑자들 중 몇몇이 움찔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마 내가 오히려 달려오며 거리를 줄여주니 제법 당황한 듯 싶었다. 파박! 파박! 방금 전까지 내가 있던 자리에 뭔가 꽂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정면에서 날아오는 마법을 가볍게 피한 후 부랑자 무리들에게 잽싸게 달려들었다. “미, 미친! 뭐가 이렇게 빨라!” “조심해!” 가장 앞에 있던 놈에게 검을 휘두르자, 놈은 자신만만하게 방패를 들었다. 콰드득! 무검은 여지없이 두꺼운 방패를 자르며 지나갔고, 부랑자는 자신만만한 표정 그대로 얼굴이 반으로 갈라졌다. 뭔가 더운 것이 나를 흠뻑 적시며,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주변에 있는 놈들이 다시금 당황한 기척이 느껴진다. 그 틈을 노려, 나는 주특기 중 하나인 마력 파동을 사방으로 뿌렸다. “───! ───! ───! 시, 실드!” 펑! 퍼벙! 몇몇 마법사들이 재빠르게 방어막을 펼쳤다. 하지만 푸르스름한 마력의 파동은 반투명한 막을 꾸깃꾸깃 접어 들어갔고, 이내 깨뜨려버렸다. 이윽고 마법사는 파동에 직격으로 부딪쳐 울컥 피를 쏟아내었다. “칵!” “뭐,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겨우 한 놈에게 이게 무슨 꼴이냐! 멍청한 놈들!” 콰앙! 그때 옆에서 분노 가득한 노호성이 들리더니, 뭔가 거친 굉음이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굉음이 들린 곳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손에 묵직한 충격과 함께 노란빛 광선이 잘라져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광선은 이내 나풀나풀 떨어지며 속절없이 사그라졌다. “이, 이럴 수가!” 거칠었던 노호성은 금세 경악으로 바뀌었다. 광선을 날린 쪽을 쳐다보자, 활을 들고 있는 놈이 주춤주춤 물러나는 게 보였다. 나는 곧장 그 놈에게로 뛰어들어 검을 찔러 넣었다. 미약한 비명소리가 들린 듯 싶지만, 가슴팍을 한 번 걷어차주고 바로 다음 상대를 찾는다. 부랑자들은 나를 보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황하면 할수록 좋고, 혼란스러워하면 할수록 좋다. 놈들이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폭풍처럼 몰아붙여 끝내야 한다. 나는 멈추지 않고 달려들었다. 단 1초도 검을 쉬지 않고, 조금의 틈도 주지 않으며 몰아붙였다. 한 놈을 베었다 싶으면 바로 다음 놈에게로 달려가 목숨을 끊었다. 그렇게 삽시간에 10명을 쓰러뜨렸을까. “모두 비켜! 이놈은 내가 상대하고 있을 테니 모두 집중사격 진을 구성해라!” 이번에는 중후한 목소리가 주변을 울렸고, 그와 동시에 왼쪽에서 매섭게 짓쳐 드는 참격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지금의 나는 최대한의 마력을 활성화했고 모든 능력치를 최고조로 뽑아 올리고 있었다. 흡사 형이 죽었을 때 피에 미쳐 날뛰었던 것처럼, 짐승과도 같은 야성이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는 왼발로 대지를 딛고, 아래서 위로 있는 힘껏 검을 쳐올렸다. 챙! 서걱! “어….” '응?' 나에게 들어오던 부랑자도, 그리고 나도 순간 놀라고 말았다. 놀란 것은 우리 둘뿐만이 아니었다. 집중사격 진을 구성하던 놈들도 급히 숨을 들이키는 게 들렸다. 부랑자는 반으로 갈라진 자신의 검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나는 1초도 안되긴 했지만 잘라지지 않고 버텼다는 것에 놀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조장! 일단 피하세…. 크아악!” “혀, 현철아! 뭐야! 분명 아무 기척도 없었는데…!” 빠드득! 빠드득! 그 순간 고연주의 원호가 또 한 번 적절히 이루어졌는지 사방에서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는, 나와 검을 맞대고 있던 부랑자를 향해 최고 속도로 가슴을 찔러 들었다. 푹! 꿍! 무검은 육중한 장갑을 뚫고 가슴 깊숙이 박혔다. 손잡이를 타고 들어오는 짜릿한 손맛. 그 상태 그대로 마력을 폭발시키자, 웅혼한 폭음과 함께 놈이 크게 몸을 떨었다. “우욱!” “…….” “너, 넌 도대체…. 누구…. 쿨럭!” 대답 대신 나는 검을 크게 비튼 후 거칠게 뽑아주었다. 가슴에서 나온 피가 검 끝과 이어져 가느다란 실선을 이루었다. 그래. 이것은 사냥, 사냥이다. 나는 바로 다음 먹잇감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내 주위로 나를 멍하니 보고 있는 5명의 부랑자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하나같이 공포감이 맺혀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을 목표해서 들어간 순간 나는 커다란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도…. 도망쳐!” “으아아아아아아악!”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후기 일부 삭제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분량 조절에 실패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ㅜ.ㅠ 원래 이 다음 내용이 부랑자들 도망치고, 성문 밖으로 나가는 것으로 마무리 지으려고 했는데…. 허허허. 유구무언입니다. 깊은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_(__)_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합니다. 하하. 백서연은 뮬을 침략한 부랑자들 중 다섯 손가락 이내에 꼽히는 실력자입니다. 동문의 침략을 이끄는 지휘관이기도 하고요. 1회 차에서는 수현이랑 악연이었습니다. 2. DarkOfSoul : 미월야 님은 강자입니다. 저도 못 이겨요. ㅜ.ㅠ 3. 냐~암 : 걱정 마세요. 저 악독한 것들은 자기들이 당했던 행동 그대로 돌려받게 될 것입니다. :) 4. 오피투럽19 : 일단 이번 회는 살짝 단서를 드렸고요(이 정도만 해도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요!), 다음 회에 진짜 이유가 나올 거예요. 하하. 5. QuistA.Gw*() : 저도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전부 실패했어요. T^T 6. 센서티브 : Yes. 정답입니다. 정답! 짝짝짝짝! 7. 天上天下唯我獨尊 : 아, 유현아요? 걔 아직 뮬에 있어요. 뭐 유현아는…. 조금 불쌍하네요. ㅜ.ㅠ 8. 피네이로 : 전 대륙적으로 보면 그 정도 나옵니다. 하하. 아, 어디까지나 수현이 화정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이지 이기지는 못해요. ㅎㅎ. 9. 시룡 : 아 시룡 님. ㅜ.ㅠ 제 마음이 다 뜨끔합니다. 죄송합니다. _(__)_ 10. 실비안 : 네! 그래서 이번에 안쓰고 학살했어요! :D 칭찬 좀….(퍽퍽!) @_@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308 / 0933 ---------------------------------------------- 역관광이란 무엇인가? 부랑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집중사격 진을 만들다가 말았는지, 남아있는 5명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몸을 돌려 도주했다. 잠시 동안 그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나는 기다란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투가 끝난 구역은 10명이 훌쩍 넘는 시체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비교적 깔끔했던 대지가, 부랑자들에게서 흘러나온 피로 여느 곳과 다름없이 변해간다. 그런 광경을 보며 나는 치솟아 오르는 살기를 억누르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추격해 모조리 도살하고 싶었지만, 고지를 앞두고 있는 만큼 일일이 쫓아갈 여유는 없다. “수현. 고생하셨어요.” 이윽고 부근에서 고연주의 나른한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그제야 살육에 도취되어있던 정신을 일깨울 수 있었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신속하게 빠져나가자고 했던 주제에, 정작 머뭇거리는 꼴이라니. 문득 내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난 바로 고개를 돌려 클랜원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곳에는 고연주를 위시한 다른 클랜원들이 얼굴만 빠끔히 내밀고 있었다. 그 중에 나는 그림자 여왕과 눈을 마주쳤다. 이번 외곽구역을 돌파하는 데는 그녀의 공도 혁혁했다. 방금 전만해도 그림자로 한 번 덮어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집중사격 진에 휘말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적절한 원호였습니다. 과연 그림자 여왕다웠습니다.” “별말씀을. 낯간지러워요. 호호.” 고연주는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시체들을 보며 대답했다. 나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거주민 거주지역을 돌파할 때는 최대한 좌 방향으로 돌파했다. 이제 정말로 지긋지긋했던 외곽구역을 빠져나가기 위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왼쪽 사선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내 뒤를 따라오는 클랜원들의 발소리 또한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5분 가량 달렸을까. 부서진 건물에 가려 난잡했던 주변 광경이, 일순 뻥 뚫리며 시야가 훤해졌다. 비릿했던 피 내음이 약해지고 매캐한 연기가 코로 흘러 들어온다. 그리고 눈앞 정면에서, 거대한 성벽아래 높이 15척은 되어 보이는 뻥 뚫린 공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외곽구역을 벗어난 것이다. 예상대로 성문은 텅 비어있었다. 난도질 당한 경비병의 시체 두 구가 보이긴 했지만, 그리고 멀리서 다시금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지만, 동문은 확실히 비어있었다. 일단 성문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생존 가능성은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설령 추적을 해온다고 해도 도시라는 제한된 공간이 아니기에 따돌리는데 훨씬 수월하다. 어찌됐든, 지금 중요한 것은 외부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 후 어느 방향으로 갈지는 도시를 탈출하고 나서 생각해볼 문제였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난 비로소 거리에 발을 걸칠 수 있었다. 그때였다. 씽!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파공음.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응시하자, 치밀어 오르는 불길과 피어오르는 연기를 뚫고, 뭔가 길쭉한 것이 어둠을 타고 짓쳐 드는 게 느껴졌다. 그것은 이미 지척까지 다가와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빙글 돌렸다. 그와 동시에, 살육에 도취된 마음을 진정하기 위해 일부러 꺼뜨렸던 감각을 다시 끝까지 끌어올렸다. 목덜미를 스치는 차가운 바람이 제법 매섭게 느껴졌다. 뭔가 이상한 공격이다 싶어 고개를 갸웃하고 있자, 극한까지 활성화된 청각에 고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준선 정렬(Fine Shot)…. 마탄, 격발(Demon Bullet, Flush)!” 그 순간 거대한 폭음과 함께 화끈한 기운이 뒤에서부터 덮쳐 들었다. 『마력 공격이 감지되었습니다. 하늘의 영광, 태양의 영광이 상호작용하여 대응합니다.』 『마력 공격이 감지되었습니다. 잠재 능력, 전장의 가호(Rank : EX)가 대응합니다.』 『하늘의 영광, 태양의 영광이 완벽히 방어합니다! 완전 방어로 판정되었습니다!』 무수한 파편이 보호막을 두들기는 게 느껴졌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아무튼 방금 전의 일격으로 위치와 거리는 파악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아직 건재하게 남아있는 3층 높이의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나를 조준하고 있는 어슴푸레한 인영을 확인한 후, 곧바로 몸을 튕겼다. 궁신탄영(弓身彈影)과 오로쓰로스 부츠의 능력을 발휘하자 건물은 순식간에 내게로 다가와, 옥상을 아래 두게 되었다. 궁수가 작게 침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럼에도 대처는 훌륭했다. 당황은 짧게 끝내고, 위로 뛰어올라온 나를 보자마자 곧장 시위를 당긴 것이다. 씽! 씽! 씽! 씽! 씽! 씽! 단 한 번 당겼을 뿐인데 6발의 화살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허공으로 쏘아진 어두운 화살은 이내 꿈틀꿈틀 춤추듯 방향을 틀어 삽시간에 육 방위를 점거했다. 마치 살아있는 화살을 보는 것 같았다. 이윽고 칠흑 색 화살들은,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차분히 무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리고 화살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크게 원을 그리듯 검을 휘둘렀다. 마력을 가득 담아서 그런지, 푸른빛 궤적이 허공에 남아 반원을 그린다. 그리고 화살과 반원이 맞부딪치는 순간 육중한 충격이 짜르르 손목을 타고 들어왔다. 스카카카카칵! 화살, 아니 마탄은 여지없이 잘려나가며 부채꼴모양으로 퉁겨나갔다. 이윽고 부서져 내리는 파편을 헤치고 달려들자 나에게 화살을 쏜 부랑자의 얼굴이 점점 더 크게 보인다. 코 아래를 흑 두건에 가려 자세히 볼 순 없었지만 긴 생머리나 가녀린 체형으로 보아 여성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크게 떠져있었다. 나는 하강하는 힘을 그대로 이용해 무검을 세게 내리그었다. 싹둑! '이것 봐라?' 무검은 방금 전까지 여성이 나를 조준했던 자리를 예리하게 갈랐다. 그러나 여성은 호락호락 당하지 않았다. 날의 대부분이 허공을 베어 가른 것이다. 하지만 확실히 검 끝에 걸리는 느낌은 있었다. 의아한 기분에 시선을 앞으로 두자, 상의의 중앙이 일자로 찢어진 채 뒤로 물러서는 부랑자를 볼 수 있었다. 살며시 모습을 드러낸 그녀의 살결은 미세한 혈흔과 함께 가느다란 핏줄기를 내뿜고 있었다. 궁수는 아주 간발의 차로 목숨을 건졌다. 내가 화살을 쳐내는 것을 보자마자 재빠르게 후퇴한 게 유효했다. 사용자 정보도, 빠른 상황판단 능력도 제법 마음에 들었다. 다만 부랑자인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나는 바로 자세를 잡고 궁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미 전투는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부랑자는 궁수로서의 솜씨는 훌륭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거리를 두었을 때의 이야기다. 이렇게나 거리를 좁힌 이상 궁수에게 승산은 없는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궁수는 아예 이곳을 이탈하려는지 재빠르게 발을 놀리며 뒷걸음질 쳤다. 어떻게든 거리를 벌리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내 민첩 능력치 98포인트. 거기에 오로쓰로스 부츠까지 신고 있으니, 제 아무리 실력 좋은 궁수래도 나와의 간격을 벌리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한껏 벌어지던 거리는, 단 2초 만에 무검에 사정거리가 닿을 만큼 줄어들었다. 흑 두건 위로 보이는 궁수의 눈동자에 절망감이 어리는 게 보였다. 나는 왼발로 땅을 강하게 밟음과 동시에, 무검을 신속하게 찔러 들었다. 푹! “악…!” 보이지 않는 검은 상의의 찢겨진 틈새를 정확히 파고들어가 궁수의 가슴팍에 꽂혔다. 부드러운 살덩이를 파고들어가는 느낌. 그리고 이쯤이면 충분히 들어갔다고 여길 즈음, 나는 있는 힘껏 마력을 폭발시켰다. 꿍! 꽝! 마치 몸 속에 폭탄을 심어놓고 터뜨린 것처럼 어마어마한 폭발이 내부에서 터져 나왔다. 궁수의 내구 능력치는 폭발의 압력을 견디지 못했는지, 이내 사지가 갈기갈기 찢기며 허공으로 비산했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신체의 잔해들. 그 순간, 폭발로 튀어나온 뜨끈한 핏물이 내 전신을 덮쳤다. “푸.” '오늘은 완전 피로 샤워를 하는군.' 실력자를 제거했다는 후련함도 잠시. 나는 입안까지 들어온 핏물을 퉤 뱉은 후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성문은 여전히 비어있었다. 아니, 비어있지 않았다. 고연주가 나를 보며 태연히 손을 흔들었다. 클랜원들은 바로 나가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클랜원들을 향해 돌아선 후, 성문을 향해 크게 뛰어올랐다. 드디어 대망의 탈출이었다. *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백서연은 주위가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살기가 메아리 치는 그녀의 고함에 곁에 있던 이들은 움찔 몸을 움츠렸다. 항상 촉새처럼 떠들던 동수도, 새침데기처럼 투덜거리던 해연도, 멍한 백치미 소녀 가인도 하나같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 그들은 알고 있다. 백서연은 아끼는 부하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럽지만, 한 번 눈이 회까닥 돌면 본래의 잔혹한 본성이 가차없이 드러난다는 것을. 실제로, 백서연은 지금 미쳐 돌아가기 일보직전이었다. 연락이 끊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해도 설마 설마 했다. 하지만 광장과 워프 게이트에 도착했을 때 그 설마 가 현실로 다가왔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자신의 부하들이 맡은 구역의 상황을 전해들은 순간 기어코 폭발한 것이다. 머리끝까지 솟구치는 분노를 풀기 위해 사용자들이 보이는 족족 잔혹하게 살해하기는 했지만, 분은 풀리지 않았다. 확실히 백서연은 '진짜 부랑자'치고는 비정상적이라 여길 정도로 흑백논리가 강한 부랑자였다. 오죽하면 실력은 둘째 치고서라도, 현이 그녀에게 지휘를 맡기는 것을 탐탁지 않아할 정도였다. 백서연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단검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다시 말해…. 지금 피해가 몇 명이라고…?” “…….” 백서연의 물음은 박동수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서슬 퍼런 기세에 눌려, 이리저리 눈치만 보며 침만 꿀꺽 삼켰다. 하지만 그녀가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자마자 황급히 입을 열었다. “과, 광장에 있던 65명, 워프 게이트에 있던 77명. 도합 142명이 전원 전멸했어요.” “씨…발….” “또 거주민 주 거주지역의 피해는….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총 129명이며…. 그…. 아직 수색 중이라고 해요….” “하…. 그럼 271명이 죽었다고? 그것도 현재까지 확인된 피해가?” 백서연은 기도 안 찬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동수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한 번 크게 괴성을 질렀다. “씨바아아아아아알!” 쨍그랑! 백서연은 평소 애용하던 단검을 내동댕이치고는,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사실상 이번에 뮬을 침략한 부랑자들의 숫자는 총 2800명에 달했다. 물론 뮬에 있던 사용자들보다는 적은 숫자였지만, 이들은 그냥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니었다. 수뇌부들과 그들 휘하의 부대 몇 개를 제외하면, 가히 최정예라 봐도 좋을 정도의 전력이었다. 부랑자 말살 계획에서 무사히 도망쳤으며, 대륙을 횡단하고 미개척 지역을 건너온 이들. 고르고 고른 알짜배기들 중에서도 핵심을 차지하는 이들. 즉 지금껏 끔찍이도 아껴온, 즉시 전력감을 넘어 최고급 전력으로 분류되는 부랑자들이었다. 그 2800명 중에서, 백서연이 지휘한 부랑자들은 총 800명이었다. 이중 300명은 자신이 직접 이끌었고, 나머지 500명은 각각 300명과 200명으로 나눠 좌우로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 200명이 맡은 구역이 바로 거주민 주 거주지역이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70%가 거주민에 해당하는지라 점령에 큰 무리가 없다는 판단에 100명을 적게 배정한 것이다. 물론 아무리 부랑자들의 수준이 높다고 해도, 도시를 습격한 이상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습격이 이제 시작이나 다름없는 마당에 벌써부터 병력의 10%를 잃었다. 그 중에서도 사망한 부랑자들의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백서연의 부하들이었다. 그리고, 가장 피해가 적으리라 예상한 외곽구역에서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이게 지금 바로 백서연이 눈이 뒤집힌 이유였다. 그때였다. 저기 멀리서, 외곽구역을 지원하러 간 인원 중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크, 큰일났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달려온 부랑자들에게로 모였다. 백서연을 제외한 모두는 눈을 감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다음에 나올 말을 익히 예상했으리라. “외곽 후미 지역에서 사망 인원을 추가로 발견했습니다!” “…몇 명인데.” “17명입니다! 그, 그런데 사망자 중에 정규강님과 이지현님이 포함되어있습니다!” “17명…. 뭐, 뭐라고?” 부랑자의 보고가 끝난 순간 사위로 웅성웅성 소란이 일었다. 정규강은 실력은 물론이고 부랑자들 중 연차가 높은 축에 속했고, 그만한 명성 또한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지현은 시크릿 클래스 '마탄의 사수(Freischütz)'를 가진, 귀중한 전력이다. 무엇보다, 둘은 백서연이 가장 크게 믿고 의지하는 이들 중 두 명이었다. 백서연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부랑자를 응시하더니, 이내 성큼성큼 다가서 멱살을 쥐어 올렸다. 그리고 아무 말도 않고 빤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거, 거짓말이 아닙니다! 시체까지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제대로 확인했어? 잘못 본 게 아니라?” “예, 예! 그때 간신히 도망친 인원이 있었는데, 놈이 증언해주었습니다! 트, 특히 정규강님은 한 놈한테 거의 일방적으로 당하셨다고…! 그리고 이지현님은 아직 확실치 않지만….” “…확실치 않아?” “그, 그게 신체가 완전히 찢어져 이곳 저곳에 흩어진 상태라…. 그래도 일단 얼굴이나 옷으로 보면…!” 툭. 백서연은 그대로 부랑자를 떨어뜨렸다. 동수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비단 동수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녀가 부하의 멱살을 잡았을 때부터, 백서연의 이성을 근근이 이어주던 줄이 뚝 끊겼다는 것을. 백서연은 차분히 몸을 돌려 아까 떨어뜨렸던 단검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해연.” “예!” “지금 당장, 도망쳤다는 놈 내 앞으로 끌고 와. 아니, 시체 옆에 대기하고 있어. 그리고 전해. 살고 싶으면, 그 놈의 특징이나 인상착의에 대해 최대한 자세하게 생각해놓고 있으라고.” “알겠습니다!” 이해연은 후다닥 뛰어나갔다. 백서연은 다음으로, 동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박동수.” “네, 네.” “너는 지금 당장 추적 준비해. 달리기 빠른 놈들로 최소 오십 명은 모아놔.” “누, 누님. 지금 한창 습격 중인데 추적이라뇨…. 윽!” 일순 백서연의 눈동자에서 붉은 안광이 폭사되듯 흘러나왔다. 박동수는 온 몸에 쭈뼛 소름이 돋았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는 양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상황이 이럴수록 누님이 냉정하게…. 큭!” “아직 남아있을 수도 있고, 설령 나갔다고 해도 금방 따라잡을 수 있어.” “아씨…! 그래도…. 보고는…. 해야 하잖아요! 누님!” “…….” “젠장, 알아요! 누님이 지현 누님이랑 규강 아저씨랑 얼마나 친하게 지냈는지 알고 있다고요. 누님 마음 이해하니까, 그럼 최소한 말이라도 하고 가요. 지금 광장이나 워프 게이트가 이렇게 되어버려서, 남문에 예상보다 빠르게 사용자들이 몰리고 있어요. 남문이요. 네?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누님? 가더라도 최소한 할거는 하고 가자고요! 누님이 똥싸는 건 좋은데! 적어도 치워줄 사람은 필요할거 아니에요!” 백서연은 박동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던 안광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박동수의 목 울대가 두어 번 움직인 순간, 백서연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일단 모아놔. 먼저 모아놓고 보고해. 알겠어?” “제길. 보고가 들어가기도 전에 나갈 생각…. 아, 알겠어요. 지금 모을게요. 모은다고요.” 박동수는 기다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허둥지둥 한 쪽 방향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백서연은 잠시 동안 박동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쏜살같이 앞쪽으로 튀어나갔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복수심이 한층 격렬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백서연은 모르고 있었다. 지금의 선택으로 인해 차후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그리고 대륙에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그녀는 복수심에 눈이 멀어 아주 조금도 짐작지 못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아, 조금 걱정이네요. 저번에 후기에 앞으로 웬만하면 경고 문구는 쓰지 않겠다고 말씀 드렸는데, 그래도 저와 같으신 분들이 계실까 봐서요. ㅜ.ㅠ 그런 분들에게는 미리 양해의 말씀을 구합니다. 귀환 파트에서 뭔가 이상한 게(?) 나올 낌새가 보인다 싶으시면, 마우스 스크롤을 확 내려버리세요! :D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합니다. :) 요즘 카네사다 님과 치열하게 첫 코를 하시는 것 같아요! 하하. 2. 훈제달팽이 : 이번 파트에, 부랑자들이 불쌍하다는 말이 나올까 걱정입니다. ㅜ.ㅠ 3. 라티인형 : 현대의 국가별로 나뉘어 있습니다! :) 4. 뇌전신룡 : 수정 완료했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5. hohokoya1 : 아하하. 여, 연참이요. 그, 그렇지요! hohokoya1 님! 오늘 날씨가 정말 좋아요!(퍽퍽!) @_@ 6. nji90okm + 아르망디카 : 응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이 고민하고, 노력하겠습니다! :) 7. J.F : 오호. 그렇군요. 제가 조만간 J.F 님을 위해서 좋은 선물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하하하. 8. 猫鈴 : 추, 출근! 그러고보니 직장인 분들께서는 방학이 없으셨죠. ;ㅅ; 9. 양준규 : 죄송합니다! 제가 초반부는 습작에다 쓰고 올려서 오타가 좀 많아요. 지금 1회 부터 수정하고 있습니다. ;ㅅ; 10. 시드엘 : 유현아요? 아. 아마 귀환 파트에 한두 번 등장할 예정입니다. 물론 시점은 바꿔서요.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309 / 0933 ---------------------------------------------- 사냥당하는 악마들, 사냥하는 악마 하늘은 어두웠다. 어두운 하늘에 떠있는 달은 세상에 시퍼런 달빛을 오롯이 뿌리고 있었다. 무성하게 우거진 나무와 풀은 달빛을 머금어 서슬 퍼런 빛깔로 물들어 있었다. 한밤의 숲 속은 도시보다 훨씬 캄캄하고 침침하다. 그러나 이런 어둠과 환경은 오히려 내게 반길만한 것이었다. 과거 요정의 숲에서 겪었던 경험은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에 큰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여 궁수를 처리하고 나서 나는 클랜원들과 함께 바로 뮬을 빠져 나왔다. 하지만 방심하지 않았다. 비록 도시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안전해졌다고 보기 어려웠다. 아니, 이제부터는 환경을 둘러싼 서바이벌의 시작이었다. 워프 게이트가 막혔으니 탈출에 성공한 사용자들은 다른 도시까지 걸어서 가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어찌됐든. 동문을 나선 이후 내가 클랜원들을 이끈 방향은 남쪽 방향이었다. 뮬은 북부 북동방향에 위치한 도시이다. 여기서 가까운 도시라고 하면 에덴(동부 동북방향 소도시) 아니면 파멜라(북부 일반도시)를 들 수 있었다. 그러니 우선은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어느 정도 내려갔다 싶으면 동쪽 또는 서쪽으로 방향을 틀면 될 것이다. 에덴이나 파멜라나 거리는 비슷비슷하지만, 문제는 뮬이었다. 뮬은 개척 도시로써 안정화가 덜된 곳이다. 그런 만큼 괴물들의 출현이 잦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식량이나 식수의 수급도 문제였다. 처음 출발할 때 넉넉히 챙겨왔다곤 하지만 끽해야 3일치였다. '일단은 삼림을 통과하면서, 강줄기를 찾는 게 좋겠군.'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나서, 나는 물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강물에 잇닿은 가장자리의 땅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꽉꽉 엉켜있는 덩굴을 헤치고 들어가자, 강기슭 너머로 시원한 바람과 함께 개운한 물 내음이 콧속을 찔러 들었다. 잔잔히 흐르는 강물은 달빛을 받아 이따금 은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강물을 옆에 낀 채 다시 남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풀썩! “학…! 학…!” 누군가 맥없이 주저앉는 소리와 함께 당장에라도 끊어질 듯한 호흡소리가 들렸다. 차분히 고개를 돌리자 양손을 대지에 짚은 채 무릎을 꿇고 있는 안솔이 보였다. 그녀는 눈물자국이 그득한 얼굴로 힘겹게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아이야, 잠시 숨을 멈췄다가, 호흡을 크게 잡아보거라.” 영감님이 얼른 허리를 숙이고 등을 다독이자, 안솔은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안솔의 눈망울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고 입술은 달싹달싹 떨리는 중이었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들간에 죽고 죽이는 대규모 전쟁도, 그리고 그에 걸맞은 잔인한 참상도 모두 처음 겪었을 터. 도시에서는 긴장감으로 어떻게든 억눌러왔겠지만, 도시를 나옴으로써 그게 한꺼번에 터져 나온 모양이었다. 고연주를 제외하고, 다른 클랜원들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김한별의 안색도 새하얗게 질려있었고, 안솔을 보듬는 영감님도 꽤나 지친 기색이었다. 아직 마음을 놓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는 잠깐 휴식을 취하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 도시까지 오랫동안 걸어가야 하는 만큼 적절한 체력관리도 필수적인 요소였다. “이곳에서, 잠시 숨 좀 고르고 가겠습니다.” 내 말을 들었는지, 안솔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가늘게 어깨를 떠는 것으로 보아 소리 죽여 우는 모양이었다. 영감님을 비롯한 클랜원들은 깜짝 놀라 다가가려 했지만 나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지금 상황에서 어설픈 위로보다는 그냥 실컷 울게 놔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모두가 자리에 앉은 후,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가끔씩 안솔이 흐느끼는 소리만 들릴 뿐 다들 아무런 말도 없다. 나는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멍하니 한쪽을 바라보았다. '왜 서쪽이 아니라 북쪽으로 먼저 온 걸까…. 하지만 수가 그렇게 많아 보이지는 않던데…. 응?' 도시에서부터 품어왔던 의문에 잠시 생각에 빠지려는 찰나, 김한별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뭘 하려고 했는지 기껏 붙였던 엉덩이를 다시 들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눈을 맞추고 잠깐 엉거주춤했다가, 뭔가 대단한 것을 결심한 얼굴로 일어서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김한별은, 내 옆에 얌전히 무릎을 꿇었다. “왜?” “오빠. 잠시만요.”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의아히 물어보자, 김한별은 조용히 대답하며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청색 로브의 소매가 앙증맞게 쥐어져 있었다. 이윽고 내 얼굴을 닦는 부드러운 천의 감촉이 느껴졌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세수를 해주듯이 조심조심 얼굴을 매만진다. 문득 달빛에 비친 김한별의 얼굴이 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밝은 청색이었던 소매는 어느덧 진한 빛을 띠고 있었다. 얼굴과 머리는 대충 닦은 것 같지만 피 냄새는 여전히 강렬했다. 이대로 있다간 괜히 괴물들이 꼬일 수도 있기에, 나는 여전히 얼굴을 어루만지는 가녀린 손을 붙잡았다. 미약이 떨리는 손을 내리고, 나는 곧장 허리띠를 풀러 하늘의 영광을 벗었다. “이 정도면 됐어. 고맙다.” “아니에요.” “잠시 옷에 배인 핏물 좀 빼고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제가 빨아올게요. 이리주세요.” 내가 뭐라고 하기도전에 김한별은 도복을 받아 들었다. 이윽고 강물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리고 김한별이 강물 앞에 쭈그려 앉는 것을 보는 순간 나긋한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 들었다. “체. 선수를 치다니. 그렇게 안 봤는데, 제법 요망하네.” “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느새 다가왔는지. 고연주도 강물이 있는 쪽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내 옆으로 엉덩이를 붙였다. “수현. 앞으로 어떻게 할 거예요? 도시로 돌아가실 건가요?” “그래야죠. 일단은 에덴, 아니면 파멜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법 거리가 될 텐데…. 걱정이네요.” “그래도 가야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행군만 할 수 있다면…. 3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과연 방해가 없을까요?” 고연주는 씁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 또한 그것은 확신할 수 없는 사항이기에 그저 입맛만 다실뿐이었다. 사실상 3주가 아니라 4주 가량 걸린다고 보는 게 옳았다. 찰박찰박, 옷을 물에 담그는 소리와 함께 다시금 어둠과 정적이 찾아 들었다. 그렇게 10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즈음, 물에 젖은 발소리가 사위를 나직이 울렸다. 고개를 돌리자 약간이나마 본래의 색깔을 되찾은 도복을 들고 있는 김한별을 볼 수 있었다. 핏물이 대부분 빠지고 물기도 떨어지지 않는 게, 정성 들여 빨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김한별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네고, 나는 몸을 일으켜 하늘의 영광을 걸쳤다. 물에 젖어 살짝 축축했지만 아까처럼 피 냄새가 진동하지는 않았다. 나는 태양의 영광을 단단히 동여맨 후 안솔을 응시했다. 그녀는 여전히 힘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아주 조금은 진정된듯한 얼굴이었다. “슬슬 출발하겠습니다.” 내 말에 고연주와 영감님은 바로 몸을 일으켰다. 안솔도 불안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더니, 이내 비척비척 일어서기 시작했다. 조금 힘들긴 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거리를 벌리고 싶다는 열망이 엿보였다. “비록 밤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벗어날 때까지는 부지런히 걷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럼, 바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였다. 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우리가 지나쳐왔던 방향에서 수많은 기척들이 느껴졌다. 그것은 다수의 인간이 움직이는 기척이었다. * “…그래서, 성문 밖으로 나갔다고? 습격 도중에?” “정규강님과 마탄의 사수가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백서연님은 시체를 확인하고 바로 전령을 보내셨고요. 아마 지금쯤 부하들을 데리고 확실히 나갔을 겁니다.” “부하까지? 몇 명이나 데리고?” “거의 50명 가까이 데리고 나갔다고….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다고 했답니다.” “크아아아악!” 보고를 하던 남성은 일순 말을 멈추었다. 현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고, 그에 따라 눈앞에 붙잡혔던 사용자의 목이 잘라졌기 때문이다.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남성은 방안을 나뒹구는 얼굴을 보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누굽니까? 지상낙원의 클랜 로드입니까?” “아니. 그냥 일개 클랜원인것 같아. 멍청하게도 이곳에 숨어있더군.” “그럼 클랜 로드는….” “일단은 기절시켜놨다. 습격이 끝나고 물어볼게 있어서. 그래도 명색이 대표 클랜이라길래 나름 기대했는데, 입맛만 버렸어.” 현은 사늘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차분히 몸을 돌렸다. 그와 눈길을 부딪치는 순간, 남성은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현은 시종일관 태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지만 남성은 알고 있었다. 보고를 들은 현이 분노했다는 것을. 현은 총 1200명을 지휘하고 북문을 침략했다. 그가 노리는 곳은 광장도, 워프 게이트도 아니었다. 현은 북문으로 침입하자마자 직속부대만 이끌고 바로 지상낙원의 클랜 하우스를 습격했다. 사용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대항하기 전에, 재빠르게 지휘통제실을 박살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막 성공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 찰나에 비보가 들어왔다. 동문 침략상황이 지지부진하고, 거기에 한술 더 떠 지휘관은 자리를 이탈하기까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숫자도 적은데 최정예 부랑자 50명까지 데려갔다고 한다. 일이 술술 풀려가던 상황에서 뜻하지 않은 제동이 하나 걸린 셈이다. “이래서 지휘관을 맡기는 게 아니었는데…. 내 잘못이 크다. 쯧.” “저는 오히려 걱정이 됩니다. 대충 들어보니 꽤나 실력 있는 사용자 같던데…. 이러다 혹시 백서연님도….” “글쎄. 백서연이 질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든데. 한 번 미친년 모드로 들어가면 나도 조금 무섭거든. 거기다 50명까지 데려갔다고 하니까…. 아무튼 상황은 알았다. 이미 나갔다면 할 수 없고. 대신, 돌아오는 대로 책임을 물을 거야. 일단 남은 인원은 최대한 뮬의 공략에 집중한다.” “예.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동문은 속도가 늦고, 남문에는 사용자들이 예상보다 일찍 몰리고 있습니다.” 남성의 말에, 현은 생각에 잠기려는지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뚝, 뚝. 리드미컬한 뼈 소리가 들렸다. 그는 잠시 남성의 꾹 쥐어진 손에 눈길을 주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쩔 수 없지. 계획을 조금 변경한다. 동문에는 내가 가겠다. 그리고 남문은 예정했던 것보다 조금 일찍 터뜨리자고.” “알겠습니다.” “북문의 지휘는 네가 맡고 있어라. 나는 동문을 정리하고 바로 남문으로 달려갈 거니까. 시기는 내가 조절할 테니, 연락이 가면 바로 터뜨리도록 해.” “조심하셔야 합니다. 시몬이 서 대륙의 1인자로 떠오르는 데는 그 트랩이 1등 공신이었다고 합니다. 저번에 한 번 봤는데, 폭발력이 가히 어마어마합니다.” 남성의 걱정 어린 말투에 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닥에 있는 시체를 가볍게 걷어찬 후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래. 그럼 이곳을 부탁한다.” “저도 같이 나가겠습니다.” 남성도 현을 따라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가 손에 쥐고 있던 '뭔가'가 미약한 비명을 질렀고, 동시에 바닥을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렸다. 현은 막 문을 나서기전 헛웃음을 뱉으며 물었다. “그런데 그건 뭐지.” “아, 죄송합니다. 실은 클랜 로드인줄 알고 잡았는데, 알고 보니 뮬의 전 대표 클랜의 로드였다고 합니다. 혹시나 몰라서….” “…….” “죄송합니다. 실은 이대로 죽이기엔 아깝잖아요. 가슴도 크고 뭔가 기품도 흐르는 게, 딱 제 취향입니다.” 남성이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자, 현은 나직한 콧소리를 흘렸다. “딱히 뭐라 할 생각은 없다. 그래도 때는 가리도록. 적당히 기절시켜두고 어디 한구석에 박아놔. 습격이 끝나면 질리도록 즐기게 해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남성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외치더니, 오른손에 쥐고 있던 뒷덜미를 들어올렸다. 그의 손에는, 한 명의 여성 사용자가 망연한 얼굴로 덜덜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잠시 자고 있어라. 끝나면 듬뿍 귀여워해줄 테니까 말이야.” “시, 싫어…. 사, 살려….” 퍽! “악!” 떠듬떠듬. 간신히 입을 열은 여성은, 남성이 복부를 강하게 후려갈기자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퍽! 퍽! 남성은 틈을 주지 않고 두 대, 세 대를 연타로 꽂아 넣었다. 그러자, 여성은 숨이 막히는지 부르르 몸을 떨더니 이내 고개를 툭 떨구었다. 이윽고 그녀의 풍만한 가슴에 연갈 빛 머리카락이 늘어지는 것을 보며, 남성은 히죽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 작품 후기 ============================ 이번 침략을 드러내는 방법의 하나로 살육 및 강x을 잡았습니다. 부랑자들이 지금껏 참아온 상황과 그들의 특성에 잘 어울릴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현아는 소설 속 인물일 뿐입니다. 그때처럼 다시 필요 이상으로 과열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_(__)_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합니다. 하하. 기대 감사합니다. 저는 웹툰 중에는 선천적 얼간이들이 제일 재미있더라고요. :) 2. 크래미 : 쿠폰 감사합니다. 항상 노력하겠습니다. _(__)_ 3. M.K : 에이, 그래도 발호는 가능합니다. 다만 백서연은 나름 위치가 있는 만큼, 커다란 일이 벌어지겠지요. 후후. :) 4. 시드엘 : 백서연은 주인공과 과거에 악연이었습니다. 벨페고르만큼은 아니지만, 악연은 악연이지요. 그냥 단순하게 죽이면 조금 섭섭하다는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뽑아먹을 것들이 나름 있거든요. 5. 輝雅 : 아이고. 제가 헷갈렸습니다.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6. 몽구헌터 : 추격과 전투는 2회 정도를 배당할 예정입니다. 김수현과 백서연이 악연인 만큼, 동료로 들어오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 7. 악마신전 : 아니에요. 저 그런 개그 좋아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8. spika : 하하, 아니요. 시크릿이나 레어 클래스는 일반적으로 중복이 불가합니다. 다만 예외는 있습니다. 수현의 특전 같은 경우나, 비비앙과 신상용을 예로 들 수 있겠지요. :) 제가 마탄의 사수로 혼란을 드렸네요. 죄송합니다! 9. 훈제달팽이 : 그렇지요. 본인들이 사용자들을 어떻게 죽였는지는 생각 안하고, 동료들이 죽은 것만 보고 있습니다. 이기적인 캐릭터입니다. :D 10. s하렘마니아s : 굉장히 많고, 다양합니다. 이유도 가지각색이지요. 물론 그것도 하나의 '기원'은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변질되어버렸죠. 그런 만큼 각각의 종류도 세분화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사용자와 부랑자가 아닌, 양쪽에 발을 걸친 자들 또한 존재합니다.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310 / 0933 ---------------------------------------------- 사냥당하는 악마들, 사냥하는 악마 발 빠르게 마력을 끌어올려 감각을 넓히자 기척은 더욱 상세히 느껴졌다. 기척은 10명 남짓, 정확히는 11명이 감지에 걸리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이상했다. 11명은 분명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부랑자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너무 어설픈 움직임이었다. 또한 수가 적기도 적거니와 무엇보다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조심조심 전진하는 게 마치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는 느낌이랄까? '혹시….' “수현. 전방으로 50미터에요.” “알고 있습니다.” 나를 부르는 고연주의 목소리.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그녀가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고개를 끄덕이고 차분히 숨을 고르고 있자 고연주의 말이 이어졌다. “피 냄새가 조금 나네요. 뮬에서 온 것은 확실해요. 전투 준비를 할까요?” “부랑자들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 대비를 합시다.” 클랜원들은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 이윽고 고연주가 티르빙을 쥔 것을 시작으로, 김한별, 안솔, 영감님도 각자 지팡이를 꺼내 들며 전방을 경계했다. 서서히 긴장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나는 감각을 활성화했다. 바스락! 풀을 밟고 헤치는 소리와 함께 무성이 우거져있는 덤불에서 미미한 흔들림이 일었다. 그리고, 흔들림은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기척은 이미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렇게 약 10초의 시간이 흘렀을까? 클랜원들의 지팡이가 천천히 전방을 향할 즈음, 어수선이 헝클어진 수풀이 좌우로 갈라지며 작은 틈이 생겼다. 그와 동시에 구멍 속에서 자그마한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끙. 차.” “…….” 그리고 찾아온, 잠시 동안의 고요함. 덤불 사이로 드러난 낯은 아직 한참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의 생김새였다. 이제 갓 고등학생, 아니 어쩌면 중학생일지도 모른다.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통통한 볼 살과 동글동글한 이목구비가 돋보이는 귀여운 인상이었다. 여자아이는 자신을 겨누고 있는 지팡이를 봤는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하지만 한두 번 눈을 깜빡이고는 곧 또렷한 눈동자로 우리를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마치 지팡이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클랜원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서로만 번갈아 보고 있을 무렵, 나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던 그녀의 얼굴이 우뚝 멈추며 나를 빤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나는 먼저 말문을 열기로 했다. “넌 누구지?” “…….” 낮은 음성으로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덧 열한 명의 인기척은 여자아이의 바로 뒤에서 멈춰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자, 마음속에 살짝 답답한 마음이 일려는 찰나였다. 그 순간 여자아이의 입술이 살며시 떼어졌다. “후유.” 아이는 짧은 한숨을 내뱉었고 이내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누군가에게 말하는듯한 말투의, 앳된 육성이 들렸다. “찾았어.” * 북 대륙 동부 일반 도시 프린시카. 김수현이 해밀 클랜에 방문한 후. 형과의 해후를 나누고 프린시카를 떠난 지 꼭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그 5일이라는 시간 동안, 북 대륙은 벌집을 쑤신 듯 가열차게 들끓는 중이었다. 김수현이 프린시카를 떠난 당일, 부랑자들은 어둠을 틈타 기습적으로 뮬을 침략했다. 결국 워프 게이트는 훼손되었고, 그에 따라 모든 도시와의 통행이 끊겼다. 사용자들은 처음에는 크게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다. 요즘 들어 통행이 끊기는 경우가 잦은 터라, 그저 불만스럽게 생각할 뿐 부랑자들이 습격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하루를 넘어 이틀이 이어지자 슬슬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용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높아지던 불만이 혼란으로 바뀌기 시작한 시점은, 중앙과 서부뿐만 아니라, 심지어 북부에 있는 두 도시마저 뮬과의 통행이 끊겼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였다. 비단 통행뿐만이 아니었다. 연락 자체가 되지 않았다. 솔직히 타 도시간에 아무리 못해도, 최소 한 명 정도는 연락을 취하는 사용자들이 있을 법도 했다. 수상하게 여긴 몇몇 사용자들은 수정구를 이용해 지인에게 통신을 시도해봤지만 뭔지 모를 강력한 마력 방해로 번번이 실패했다. 그제야 사용자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설마 하며 외면해왔던 의심이 퍼뜩 고개를 들은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후 이틀이라는 시간이 추가로 흘렀을 때, 이번에는 도로시(서북방향 소도시), 베스(서남방향 소도시)와의 통행이 끊겼다. 그것 또한,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늦은 대비를 하던 도로시와 베스에서 구원을 요청하는 통신이 들어온 것을 확인한 순간, 일각에서만 떠돌던 습격 소문이 비로소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갑작스러운, 사전예고도 없던 습격에 모든 도시는 일순 혼란에 빠졌다. 그것은 분쟁지역에서 떨어져있는 프린시카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헉! 헉!” 한 남성이 복도를 거침없이 질주한다. 남성의 정체는 예전 김수현이 방문했을 때 함께 자리했던 사용자들 중 한 명인 이준성이었다. 무에 그리 급한 일이 있는지, 평소의 쌀쌀맞은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화급해 보일 지경이었다. 이윽고 이준성이 4층에 다다랐을 때는, 마침 서가희가 방문을 열고 나오는 중이었다. 그는 그녀를 향해 크게 외쳤다. “헉, 문! 헉, 열어!” “준성이 오빠? 유현이 오빠는…!” “연락 듣고, 일단 다시, 끌고 오고!” 이준성은 숨이 차는지 짧게 끊어 대답했다. 그리고 “오고!”를 말했을 때는 이미 문 앞까지 달려온 상태였다. 그는 아직 매듭짓지 못한 말을 크게 외치며, 문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벌컥! 쾅! “있어! 헉! 헉!” “엄마야! 아씨! 야! 깜짝 놀랐잖아 이 멍청이야!” 방안에는 한 명의 여성이 침대에 몸을 기댄 채 일어나있었다. 그리고 이준성이 방문을 차고 들어온 순간 여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를 질렀다. 차가우면서 성숙함이 공존하는 외모와는 달리, 여성의 목소리는 아이처럼 날카롭고 뾰족했다. “학! 학! 효, 효을, 누, 누님! 학! 학! 크, 큰일…! 아, 아니 드디어 일어…! 학! 학!” “학, 학? 기, 기분 나빠! 숨이나 돌려 이 바보!” 이효을은 날카롭게 쏘아붙이곤 주변에 있던 물병을 집어 던졌다. 이준성은 그것을 가볍게 잡아챈 후,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녀는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차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제길. 일어나자마자 보는 남자가 너라니…. 짜증나.” “후유…. 누, 누님. 그게 그러니까…. 뭐, 뭐부터 말해야 할지…. 일단 일어나신 거 축하….” 이준성의 말에, 이효을은 코웃음을 치며 손을 휘저었다. “됐고, 큰일났다며. 더듬거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이준성은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가, 차분히 호흡을 고르며 이효을을 응시했다. 침대 위의 그녀는 다리를 꼰 채 거만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 북 대륙 도시들이 습격을 받고 있습니다. 부랑자 놈들이 서대륙 놈들과 손을 잡았다고요!” “염병.” “누님! 거짓말이 아니라!” “아, 알겠으니까. 조용히 좀 해봐.” 이준성은 깜짝 놀란 얼굴로 이효을을 응시했다. 이것은 중요 뉴스임이 분명했는데, 그녀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은 것이다. 이 소식을 처음 접한 사용자가 대부분 믿지 못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효을의 반응은 확실히 뜻밖이었다. “어휴. 로렌스 이 계집애가 결국엔 실패했냐…. 그래서, 어디가 습격 받고 있는데.” “뮬, 도로시, 베스입니다. 뮬에 먼저 쳐들어왔고, 도로시와 베스는 동시에 쳐들어왔어요.” “뮬이라….” 이효을은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머리를 긁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윽고 그녀는 입맛을 다시며 이준성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는 이효을의 뽀얗고 반질반질한 손바닥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떨떠름히 입을 열었다. “누님. 일어나자마자…. 몸도 안 좋으신데….” “…….” “아, 알겠어요. 드릴게요.” 이효을이 날카롭게 째려보자, 이준성은 냉큼 품을 뒤져 연초 한가치를 갖다 받쳤다. 그리고 그녀가 연초를 물자마자 바로 불을 붙여주는 서비스 정신도 발휘해주었다. 이효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이고는, 연기를 길게 내쉬며 말했다. “후~. 이제 좀 살겠네. 그래서, 그게 큰일이라는 거야?” “네? 그렇긴 한데…. 실은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마침 잘 일어나주셨어요.” “?” 이효을이 말해보라는듯 고개를 까닥이자, 이준성은 마치 일러바치는 듯한 억울함을 토로했다. “아 지금, 클랜 로드가 뮬에 가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다고요!” 이 말에는 자못 놀랐는지, 이효을은 연초를 열심히 빨던 도중 크게 기침했다. “콜록 콜록! 뭐, 뭐?” “지금 분위기 장난 아니에요. 뮬에 친동생이 있다고…!” “잠깐만. 친동생? 김유현의? 그건 또 뭔 헛소리야?!” “헛소리가 아니다. 이효을.” 그때였다. 이준성의 등 뒤로, 싸늘한 목소리가 방 내부에 벼락같이 내리 꽂혔다. * 탁, 탁! 야영지의 중앙에, 모닥불이 타오른다. 나는 마른 잎을 깔고 앉은 채 가만히 모닥불을 응시했다. 탁탁 불똥을 튀겨대는 불씨를 조용히 구경하고 있자, 뒤에서 누군가 터벅터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머셔너리 로드. 피곤하실 텐데 그만 교대하실까요?”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말쑥한 인상의 남성이 나를 향해 담박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조승우로 며칠 전 우리와 합류한 사용자들 중 한 명이었다. 나는 차분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아직 교대 시간은 남아있습니다.” “하하. 오늘따라 이상하게 잠이 안 와서요.” 조승우는 담담하게 웃으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약간 옆으로 비켜주었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오직 모닥불에서 튀어나오는 불똥만이 이따금 튀는 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흩날렸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조승우는 잠시 모닥불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희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딱히 도와드린 건 없는 것 같은데요. 그저 같이 움직이고 있을 뿐인데….” “아닙니다. 합류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광장에서 도와주신 것도, 활로를 틔워주신 것도, 부상자들이 있는 저희들을 받아주신 것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하. 한 번만 더 들으면 귀에 딱지가 앉겠네요. 정말 괜찮으니, 이제 그만 말씀하셔도 됩니다.” “역시 머셔너리 로드는 겸손하신 분이시군요.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거 되게 눈치 보네.' 뭔 말을 해도 좋게 해석해버리는 탓에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조승우는 광장에서부터 내 뒤를 따라온 수십의 사용자들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운 좋게 부랑자들을 피한 열한 명 중 한 명이기도 했다. 방금 전 조승우의 말은 아주 틀리다 고는 볼 수 없지만, 지금 내 심정으로는 우스워 죽을 지경이었다. 도시에서는 어디까지나 나와 클랜원들을 위해서 움직였을 뿐이지 다른 이들을 염두에 두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외곽구역을 통과하면서도 내 클랜원들만 챙겼지, 다른 사용자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조승우는, 뒤를 따라오면서 내가 그냥 지나쳐버린 사용자들을 모두 데리고 왔다. 그런 만큼 정작 칭찬을 받아야 하는 사용자는 조승우였다. 부상자들을 받아준 것도 오롯한 선의는 아니었다. 부상자들이 있었다곤 하지만 다리를 다친 것은 아니었다. 치료도 어느 정도 마쳤고, 어차피 우리도 마법사들이 셋 인만큼 행군속도에 커다란 지장은 없다. 또한 혹시나 모를 불상사가 일어났을 때 저들을 클랜원들의 방패막이로 사용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즉 현재 상황에서는,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같이 움직이는 게 이득이었다. 그래서 합류를 허락한 것이다. 물론 인원이 늘어난 이상 식량과 식수는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강을 끼고 걷는 중이었으니, 식량과 식수를 자체적으로 조달할 수 있었다. 정 안되면 식용으로 먹을 수 있는 숲 짐승을 잡으면 되는 일이었고. 아무튼 현재로써 조심할 것은 두 가지였다. 괴물과 추적대. 숲을 통과하면서 괴물과 몇 번 마주치기는 했다. 하지만 처리하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한가지인데, 추적대도 조금 아리송한 면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부랑자가 추적대를 꾸렸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었다. 그들 특유의 특성도 있긴 하지만, 정신 나간 지휘관이 아니고서야 이미 도망친 사용자를 잡으러 추적대를 보낼 리가 없다. 방심은 하지 않는다. 추적에 대한 나름의 대비는 하고 있었다. 우리들이 지나가는 길은 고연주를 시켜 최소한으로 지우고 있었고, 불침번도 철저하게 세우고 있었다. 솔직히 오지 않는 게 모두에게 좋은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진정한 속마음은 몇 십 명이라도 왔으면 하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뮬을 먼저 침공한 이유가 자못 궁금했기 때문에, 만일 추적대가 온다면 몇 명은 잡아서 정보를 캘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한참 생각에 빠져있던 도중 조승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무릎에 깍지를 끼어 올려둔 채 나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그냥 이런저런 생각 좀 했습니다.” “하하. 눈을 감고 계시길래 주무시는 줄 알았습니다. 이제 교대 시간도 됐는데, 들어가 주무세요.” 조승우의 권유에, 나는 차분히 고개를 주억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그제처럼 아무도 깨우지 않고 혼자서 불침번을 서시면, 앞으로 이틀간 불침번 제외입니다.” “이런. 앞으로의 이틀 밤을 위해 오늘 꼭 밤을 새야겠군요.” “방금 전 말은 취소하도록 하죠.” “하하. 농담입니다.” 조승우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눈 후, 나는 양손을 땅으로 짚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어 이대로 가기 전에 감지라도 한 번 돌릴 생각이었다. 오른손에는 여전히 가슬가슬한 마른 잎의 감촉이 느껴졌지만, 왼손에는 부드러운 흙이 느껴졌다. 나는 서서히 마력을 일으키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음? 안 들어가십니까?” “…….” “머셔너리 로드?” 흙을 짚고 있는 손의 마력에서 미약한 파장이 느껴졌다. 흙 바닥에 손을 깊숙이 대지 않았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의 흔들림이었다. 그리고 그 흔들림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거세어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독자님들. 우울한(?) 월요일은 잘 보내셨나요? 하하. 저는 오늘 기분이 참 좋아요. 그리고 참 미묘하기도 하네요. 혹시나 저번처럼 코멘트란이 심하게 과열될까 걱정했는데, 독자분들께서 적정선을 유지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D 그리고, 표지를 바꿨습니다. 이번 고연주 표지는 호불호가 조금 갈리네요? 하하. 정말 죄송합니다! 표지를 지금 바로 바꾸는 것은 조금 무리입니다. 대신 적당한 간격으로 세라프 표지와 번갈아 가면서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독자분들의 양해를 부탁합니다. :) PS. 아, 다음 회에는 빅토리아의 영광이 첫 선을 보일 예정입니다. 『 리리플 』 1. 카네사다 : 이야. 미월야 님도 빠르시지만 카네사다 님도 만만찮게 빠르신것 같습니다. 하하. 1등 축하합니다. 이번 회도 재미있게 감상해주세요! 2. 아톰 : 다음 회에 빅토리아의 영광이 진가를 드러낼 것입니다. 검에 잠재된 능력이 수현이랑 상성이 잘 맞아요~. 3. 유운[流雲] :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그 부분을 놓쳤네요. 어제 보자마자 바로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4. 현오 :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 동안 많이 바쁘셨군요. 하하.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D 5. 천냥보은 : 읔. 감사합니다. 혹시 오늘 제가 절단마공을 사용했나요?(ㅌㅌ!) 6. 레필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항상 레필 님께는 많이 배우는 것 같습니다. :) 아직 마지막 얻을 것들이 남아있습니다. 하하. 귀환 파트는 그것의 마무리를 위한 초석(?)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7. NinthSky : 새로운 대표 클랜의 호의로 합병했어요~.(실상은 합병이라고 보기도 어렵지만요.) 8. 고래생각 : 정 주행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응원 감사합니다. _(__)_ 9. 시룡 : 아 고연주는 검은색에 연한 잿빛이 감도는 머리카락입니다. 검은색이 조금 강렬히 표현되기는 했습니다. 하하. 10. J.F : 네! J.F 님의 고연주에 대한 애정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아 고연주를 표지로 올렸습니다!(?!) 아아. 수현이랑 대등한 사용자는 원거리 중에는 거의 없고, 근접 계열에는 조금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근력 101 사용자 또는 엄~청 좋은 장비들을 걸친, 능력치 90대 중후반 정도가 되겠네요.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311 / 0933 ---------------------------------------------- 사냥당하는 악마들, 사냥하는 악마 “어머. 얘들 좀 봐.” 대지에 가만히 손바닥을 대고 있던 고연주가 손을 탁탁 털며 일어서자, 모두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고연주는 쓴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얘네들 아주 뿔이 단단히 났는데요? 살기가 아주 찐득찐득한 게…. 추적대가 맞는 것 같아요. 아니, 확실해요.” 고연주가 확언하듯 말하자 모두는 깊은 침음을 내었다. 그녀 말대로 그리고 내가 느꼈던 대로, 부랑자들의 추적대가 출현했다.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종잡을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방금 전까지 모닥불을 보며 생각했던 속마음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다. “어, 어떡해요? 우리도 얼른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닐까요?” “맞아요! 부랑자 놈들이 덮치기 전에 빨리 도망가요! 네?” 이윽고 여기저기서 두려움에 찬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뮬에서 부랑자들의 학살극을 직접 겪어본 이들인 만큼 그들에 대한 공포가 뼛속 깊숙이까지 각인된 모양이다. 그러나 고연주는 사용자들의 외침에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도망가봤자 에요. 놈들은 지금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확신하고 있어요.” “하지만….” “죽어라 달려오는 중이죠. 지금 도망쳐봤자 결국에는 따라 잡힐 거예요.” 다른 누구도 아닌 그림자 여왕의 판단이었다. 처음 도망치자 말을 꺼냈던 여성 사용자는 암담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고연주의 말이 맞다. 부랑자들이 정상적인 추적대를 꾸렸다고 가정했을 때, 여기까지 잡히지 않고 도망친 게 용한 일이었다. 또한 지금 등을 돌리고 도망친다고 해도 달리기가 느린 사용자들은 따라 잡힐 가능성이 농후했다. 결국에는 시간 문제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도망칠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정보가 고팠던 찰나였다. 여기서 “저를 잡아 잡수세요.” 하고 덤벼들어 주는데 당연히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그럼 우리는…. 여기서 죽는 거예요…?” 어디선가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릴 정도로 처량한 목소리가 울렸다. 간신히 살아남았다 싶었는데 다시 죽음을 눈앞에 두었다고 생각하니 자괴감이 드는 모양이다. 그 목소리에 동조해 분위기가 한껏 침울해지려는 순간, 나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사용자 고연주. 추적대와의 거리나 숫자를 알 수 있겠습니까.” “처음 느꼈을 때는 800미터…. 아, 이제는 더 줄어들었네요. 숫자는 정확히 파악되지는 않지만, 약 마흔 명 정도인 것 같아요.” '마흔 명이라.' “마흔 명 정도면 광장에 있던 숫자보다 적군요. 생각보다 해볼 만하겠습니다.” “수…. 그래요. 오랜만에 부랑자들에게 그림자 여왕의 위명을 알려줄 수 있겠네요. 호호.” 고연주는 잠깐 뭔가를 말하려다가, 내 신호를 받고 바로 말을 바꾸었다. 그러자 우울함에 젖어있던 일부의 얼굴에 일순 희망이 감돌았다. 광장에서부터 나를 보아온 사용자들은 그때 수십의 부랑자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모습을 보인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더구나 10강 중 한 명인 그림자 여왕까지 있으니, '죽는다.' 에서 '어. 그러고 보니 그렇네. 그럼 해볼만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이 바뀌었을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노린 것도 바로 그런 생각의 변화였다. 소규모 전투든 대규모 전투이든 간에 사기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고연주가 하려던 말은, 듣지는 않았지만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부랑자들이 아무나 뽑아서 추적대를 꾸렸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당장 광장에서만 예순 명이 넘는 부랑자들을 격살했다. 그럼에도 마흔 명을 보냈다는 것은 추적대의 수준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니면 엄청난 실력자를 끼워 보냈을 가능성도 있다. “맞는 말씀입니다. 저는 부랑자 놈들에게 지금껏 함께한 소중한 동료들을 잃었습니다. 여기서 얌전히 죽어주기엔 너무 억울합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저는 발버둥이라도 쳐보렵니다.” “이를 말인가? 이 개 같은 놈들! 아주 오기만 해봐 그냥. 내 비록 왼팔을 잃었지만, 아직 오른팔은 남아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최소 한 놈이라도 길동무로 데려간다.” 조승우는 때맞춰 호응해주었다. 살짝 눈을 찡긋하는 것을 보니 사기를 진작하려는 내 의도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옆의 아저씨는 그냥 팔을 잃은 것에 대해 분노한 것처럼 보였지만, 아무튼 효과는 있었다. 나는 차분히 주변의 사용자들을 둘러보았다. 나를 포함한 머셔너리 클랜원에 새로 합류한 사용자들을 합치면 총 15명. 클래스 별 분류를 해보자면 근접계열이 6명, 궁수가 2명, 마법사는 5명 그리고 사제가 2명이었다. 전원이 전투 사용자라는 사실은 다행이었지만, 그럼에도 딱히 이거다 싶은 사용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보면. 나와 고연주를 제외한 전원은 뮬을 습격한 부랑자들에 비해 수준이 달리는 게 사실이었다. 그나마 전투에 도움이 될만한 이들은 예닐곱 명 정도로, 부상자들을 포함한 나머지는 있으나 마나였다. 하지만 난 그런 사실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설령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최소 고기방패 정도는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문득 얼굴이 따끔따끔하다는 것을 느꼈다. 어느덧 여기 있는 모두가 내게 뭔가를 기대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전력이 비슷해야 뭐라도 해볼 터인데 워낙 수준이 떨어지다 보니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의 폭이 굉장히 좁다. 오죽하면 그냥 고연주를 키퍼로 세우고 나 혼자 싸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대강 생각을 정리한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선 자리를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 냉랭한 목소리가 방안을 훑자 이준성은 깜짝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방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그곳에는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차가운 인상을 한 미남자가 서 있었다. “호. 김유현. 오랜만이야. 이준성? 나가있어.” “깨어난 것을 축하한다 이효을. 역시 내 동생은 대단하군. 나가있어라, 이준성.” 두 남녀의 축객령에 이준성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고개만 번갈아 돌렸다. 하지만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힘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김유현은 천천히 침대로 다가가 이효을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그와 잠시 눈을 마주쳤다가, “흥.”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첫마디가 그게 뭐야. 사경을 헤매다 일어난 사람한테 너무 하는 거 아니야? 내가 깨어났으면 조금 더 기뻐해보라고.” “다시 한 번 깨어난 것을 축하한다. 내 동생이 아니었으면 네가 일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 그러니 수현이에게 감사하도록.” 김유현의 담담한 말에 이효을은 일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곧바로 얼굴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너한테 뭘 기대하겠니. 그건 그렇다 치고, 동생은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리고 뮬은 또 뭐고?” “네가 정신을 잃고 있었을 때, 반시의 저주를 해주 한 사용자가 바로 내 친동생 김수현이다. 그리고 수현이는 너를 치료하고 바로 뮬로 떠났지. 그 후로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 명료한 대답. 이효을은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생각하려는지 잠시 눈을 서너 번 깜빡이더니 이내 가느다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부랑자들의 습격이 시작됐다. 그곳 중 하나가 뮬이다. 내 몸을 치료해준 사람은 네 친동생으로, 김수현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그리고 네 동생이 뮬로 떠났다. 그 후로 연락이 끊겼다. 틀린 것 있으면 말해봐.” “없다.” “진짜 친동생이었네…. 아무튼 Ok. 그리고 너는, 네 친동생을 구하기 위해 뮬로 떠나겠다 이 소리네. 연락이 끊겼다면 워프 게이트도 끊겼을 테고. 그럼 뭐 어쩌자고?” “에덴과의 워프 게이트는 살아있다. 우선 그곳으로 갈 생각이다.” “그래서. 에덴에서 걸어서 가시겠다.” 김유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반응을 확인한 이효을은 눈매를 사납게 치켜 올렸다. 그냥 아무런 방해 없이 보통속도로 걸어간다고 가정하면, 에덴과 뮬의 거리는 3주 가량 걸린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행동이었다. 이효을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다가 다시금 한숨을 폭 내쉬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미쳤냐고 욕을 한 바가지 퍼부었을 테지만 눈앞의 인물은 김유현이었다. 평소 그의 행동이나 성격을 알고 있고, 그냥 웃고 넘기기에는 김유현의 말투는 엄청난 진지함을 담고 있었다. “김유현. 내가 너니까 다른 말은 안 할게. 딱 두 마디만 할 테니까, 진정하고 들어봐.” “…….” “에덴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뮬까지는 아무리 빨라 봤자 3주 거리야. 그리고 습격은 끽해야 이틀이면 끝나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지?” “네 말은, 수현이가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네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야. 죽었을 수도 있고 살아서 도망쳤을 수도 있고. 확실히 네 동생 일은 안타깝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합리적으로 생각하자고. 응?” 이효을의 설득은 그야말로 타당했다. 하지만 그녀가 한가지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김유현이 심각한 동생 바보라는 사실이었다. 이미 김유현의 머릿속에는 눈망울을 바르르 떨며 애처로이 형을 부르짖는 김수현이 각인되어있었다. “확실히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흥. 알면 됐다고. 정말 깜짝 놀랐네. 상황을 보라고, 상황을. 아니 그전에, 너 정말 김유현이 맞기는 해?” “이효을.” “?” 김유현은 천천히 허리를 숙여 이효을과의 거리를 줄였다. 그리고 서로의 눈이 마주칠 즈음, 그녀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시선을 살며시 회피했다. 이윽고, 김유현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난 말이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정확히는 관심이 없다는 게 정답이겠지.” “어, 어?” “살아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좋아. 나에게는 수현이를 다시 되찾는 게 우선이다. 합리적인 생각도, 상황을 보는 것도. 그것은 그 이후에 생각할 일이라는 말이다.” “너…!” “잘 들어. 나는 내 동생을 구하러 간다. 살아있든, 죽었든, 붙잡혔든 내 결정은 변하지 않아. 설령 뇌신(雷神)의 힘을 이끌어내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동생을 찾을 생각이다. 몸조리 잘하고 있어라. 굳이 클랜원들을 데려갈 생각은 없다.” 그 말을 끝으로, 김유현은 숙였던 허리를 들었다. 이효을은 멍한 시선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너, 너 말이야! 지금 무슨 말을…! 이 동생 바보가!” “진명에도 그렇게 적혀있더군. 개인적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시끄러워! 도대체 너 혼자서 뭐 어쩌겠다는 건데! 그리고 뇌신? 뇌신의 힘을 사용한다고? 최악에는 너도 죽는다고…!” “아마 수현이가 죽었다면 나도 분명 죽을 만큼 괴롭겠지. 그 꼴을 당하느니 거기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너만 보고 따라온 클랜원들은 어쩌라고! 오지랖도 정도껏 하라고 이 멍청이야! 어? 가, 가지마! 야! 야!” 그때였다. 김유현이 이효을의 말을 무시하고 나가려는 찰나, 갑작스레 방문이 벌컥 열렸다. “저기….” 이윽고 열린 틈으로 자그마한 목소리와 함께, 서가희가 조심스레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는 어색한 얼굴로 방안을 살피고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머셔너리 클랜에서 찾아왔어요.” * 온 힘을 다해 달린다. 주변으로, 숲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다행히 나보다 속도가 높은 부랑자는 없는지 기습으로 외곽에 침투한 후,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30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였다. 등 뒤로 분노에 찬 고함과 함께 수많은 기척이 나를 뒤쫓는 게 느껴졌다. 사사삭! 사사사삭! “거기서라! 빌어먹을 자식!” “흥분하지마! 함정에 주의해!” '역시나 알고 있었나.'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미약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괜찮다. 애초에 이 정도는 파악할 수 있는 놈들이었다. 그리고 내 계획은 그것을 감안하고 세워진 계획이었다. 오래 끌 것도 없이, 초반에 큰 타격을 줄 예정이었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달리자, 눈 앞으로 거대한 어둠이 보였다. 언뜻 보면 숲 주위로 깔린 어둠이었지만, 나는 어둠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저것은 그림자들이 모여 만든 하나의 '막'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이윽고 놈들을 안으로 끌어들였다 싶을 즈음, 나는 급작스럽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검을 겨누자 나를 쫓아오던 부랑자들이 흠칫하는걸 볼 수 있었다. 지금 내 손에는, 은은한 빛을 내뿜는 '빅토리아의 영광'이 쥐어져 있었다. “정지! 모두 정지!” “검 빛을 조심해라!” 그때였다. 부랑자들이 급히 몸을 멈춰서는 것과 함께, 뭉쳐있던 그림자들이 일시에 풀렸다. 그와 동시에 그 안에 몸을 숨기고 있던 사용자들이 몸을 드러내었다. 절대 틈을 주지 말라는 내 말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그들은 막이 풀리자마자 지체 없이 준비하던 주문과 화살을 발사했다. 슈슉! 슈슈슉! 퍼벙! 퍼버벙! 마법과 화살 그리고 수많은 그림자들이 전방으로 쇄도한다. 하지만 부랑자들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선발대에 있던 놈들에게 둥근 막이 생성되는가 싶더니, 이내 반투명한 막이 삽시간에 겹겹이 세워졌다. 미리 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을 보며 나는 아까부터 준비하고 있던 '빅토리아의 영광'에 잠재된 능력, 검광(劍光)을 일으켰다. 그 순간, 눈앞으로 수많은 검광이 번쩍였다. ============================ 작품 후기 ============================ 아이고. 오늘은 10분 정도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T^T 오늘 조금 늦게 집필을 시작해서…. 열심히 쓴다고 썼는데 결국에는 늦었어요. 엉엉. 추론으로 대강 상황은 짐작하시겠지만, 궁금하신 게 몇 개 있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 중 빅토리아의 영광의 능력 '검광'은 아직 설명이 나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런 것들은 다음 회에 효과와 함께 설명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_@ PS. 김유현 대사…. 원래는 테이큰 대사처럼 하려고 했다가, 수현이 털끝 하나당 100명을 죽이겠다고 하려다가, 그냥 이렇게 바꿨습니다. 하하하.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합니다. 오. 그럼 오늘이 미월야 님의 마지막 1등이겠군요. 말 그대로 전설의 은퇴입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2. days0314 : 맛있는 담배 좀 추천해주세요. 주로 피는 건 팔리아멘트 라이트에요. 다른 것도 간간이 피워보긴 하는데 영 입맛에 안맞네요. ;ㅅ; 3. 판타지니아2 : 제 소원이 완결 전에 한 번 코멘트 1등 해보는 거예요. 정말이요. ㅜ.ㅠ 4. dbss : 본 게임보다는 본 학살이에요.(응?) 부랑자들 그간 실컷 날뛰었으니, 그에 대한 죗값을 치러야겠지요. :) 5. 피네이로 : 앞으로 나올 내용 등을 기대해주세요. 후후. 그리고 3회 차나 1000회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요? ;ㅅ; 6. J.F : 화정만 '제대로' 다룰 수 있다면 사용자 중에서는 김수현을 이길 수 있는 이가 없습니다. :) 7. 가을왕 : 아니에요. 항상 읽어주시는 것만해도 정말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 8. 순수혈통 : 다르게 바꿔보았습니다. 어떠신지요. 'ㅇ'? 9. NinthSky : 현재 김수현 일행에는 이렇다 할 통신수단을 갖고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예. 정답입니다. 10. 천겁혈신천무존 : 천겁혈신천무존 님. 백한결은 남자입니다. 정녕 BL을 원하시는 건가요!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312 / 0933 ---------------------------------------------- 사냥당하는 악마들, 사냥하는 악마 『빅토리아의 영광(Victoria's Glory) : 검광(劍光)』 (설명 : 빅토리아의 영광의 몸체에는 항상 은백색 기운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것의 정체는 고대 왕국 빅토리아의 수호신 다이애나(Diana)의 권능이 일부로써, 검광이라는 이명을 갖고 있습니다. 이 능력을 발동하게 되면 칼날에 흐르는 빛이 현실로 구현화되어 실제로 물리력 및 마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힘 자체도 예리하기 그지없지만, 착용자의 능력에 따라 숫자, 위력 등을 얼마든지 증폭할 수 있습니다.(사용자 정보에 권능이 등록되어 있으면, 해당 권능의 힘을 담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하루에 총 3번 사용할 수 있으며, 횟수는 하루가 넘어가는 것을 기점으로 초기화됩니다.) 처음에는 지형을 이용해 치고 빠지는 계획을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사용자들을 이끌고 게릴라전을 펼치기에는 경험, 속도, 능력 모두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냥 나 혼자 유격활동을 할까도 생각해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림자 여왕이 있다고 해도 여기서 내가 빠지는 순간 전력은 급격히 하락한다. 걱정거리를 남겨두느니, 차라리 내 주변에 두는 편이 훨씬 안심이 되었다. 해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요격이었다. 물론 정공법은 아니었다. 이왕 한 판 붙기로 했으니, 부랑자들이 도착하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것보다는 선공을 하는 게 백배 낫다. 그래서 난 사용자들과 함께 놈들을 상대하기 적합한 지형으로 이동했다. 이후 홀로 빠져 나와 추적해오는 부랑자들을 가볍게 휘저었고, 놈들의 이목을 끈 채 사용자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그리고 계획은 지금 막 결실을 거두기 직전이었다. * 김수현을 쫓아온 부랑자들은 노련함을 갖추고 있는 이들이었다. 비록 처음 기습 때 갑작스레 쏟아진 칼날 빛으로 인해 어이없게 동료들을 잃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상외의 공격이었다. 두 번 당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김수현을 뒤쫓을 때도 나름의 대비를 하고 있었고, 은은한 빛을 내뿜는 검이 겨누어지는 순간 바로 대응한 것이다. 수많은 빛의 번쩍임과, 어둠의 갈래와, 화살, 마법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린다. 그와 동시에 부랑자들의 앞으로도 반투명한 막이 겹겹이 쳐졌다. 그들은 여러 겹으로 세워진 보호막이 눈앞의 공격을 막아낼 것이라고, 아니 최소한 대부분 완화해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후 벌어질 즐거운 살육을 기대하며 그들은 한껏 마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칼날의 빛이 맨 처음 보호막에 다다랐을 때 순식간에 경악으로 바뀌었다. 채채채채채채채채챙! 쯔자작! 쯔자자작! 은은한 빛을 내뿜은 칼날의 빛은, 흡사 실체화된 칼처럼 청명한 탄성을 울리며 보호막을 찢어발겼다. 그리고 마법을 펼친 부랑자들이 무자비한 마력 충돌에 몸을 비틀거리는 사이, 찢어진 보호막의 틈으로 사용자들의 공격이 비집고 들어온다. 슈슉! 슈슈슉! 푹푹! 푹푹푹! 퍼벙! 퍼버벙! 쾅쾅! 쾅쾅쾅! “크아아아악!” “꺄아아아악!” 그것은, 마치 성난 파도처럼 전방에 있는 부랑자들을 깡그리 집어삼켰다. 보호막을 찢고도 아직 힘이 남았는지, 검광은 섬뜩한 빛을 뿌리며 부랑자들을 베었다. 어두운 그림자들이 덮쳐 들고, 화살과 마법이 사정없이 꽂히며 폭음과 비명을 이루어냈다. 이어진 공격 중 일부는, 그것도 모자라 거친 흙먼지를 휘날리며 쭈르륵 미끄러져 들어갔다. “젠장! 모두 비켜!” 가뜩이나 어둑한 밤이었는데, 자욱한 흙먼지가 일었다. 하지만 어지간한 경지에 오른 자라면 이런 종류의 시야의 방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뾰족한 목소리와 함께 흐릿한 먼지 사이를 헤치며 검은색 타이츠의 여성이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머리카락은 칠흑 빛을 바탕으로 두고 있었지만, 살며시 붉은색이 감도는 게 한 번 흔들릴 때마다 홍색의 점이 허공으로 휘날리듯 흩뿌려진다. 그에 영향을 받았는지, 그녀의 눈동자 또한 선명한 홍색을 띠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양손에 쥐고 있는 단검에 마력을 한껏 불어넣은 듯, 각각 적색의 마력을 이글이글 내뿜는 중이었다. “흐읏!” 검은색 타이츠의 여성, 백서연은 야릇한 기합성과 함께 전방을 향해 X자로 단검을 교차시켰다. 그러자 놀랍게도, 단검을 감싸는 것에 불과했던 마력이 일순 길이가 쭉 늘어나며 채찍처럼 낭창낭창 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가 세게 손을 튕기자 검기의 곡선은 더욱 깊어졌고, 밀고 들어오는 수많은 마력 덩어리를 횡 방향으로 휘감았다. 콰쾅! 콰콰쾅! “큭!” 거대한 굉음이 치솟아 오르며 사방을 휩쓸었다. 백서연은 짧은 신음을 내며 몸을 움찔했다. 한 번 거르고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충격이 그녀의 전신을 휩쓸고 있었다. 백서연은 바드득 이를 깨물며 버티다가, 의아한 얼굴로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리고 허공에서 폭죽 터지듯 흩어지는 그림자를 보는 순간, 번뜩이는 빛이 눈가를 스쳤다. “그렇군…. 이제야 이해가 되네. 그림자 여왕이…. 응?” 지금껏 삭혀온 게 많은지 백서연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다가, 끝말의 화음을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쐐액!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 그 소리에 담겨있는 사늘한 살기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백서연의 머리에 불타오르던 분노를 차갑게 식혀주었다. 다 잡았다고 생각했다. 이제 최대한 공포를 주고, 고통스럽게 사냥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오히려 일말의 틈도 주지 않고 폭풍처럼 몰아붙이는 김수현의 공격에, 백서연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유성같이 베어 들어오는 은빛의 궤적을 보며, 백서연은 단검을 꽉 쥐면서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붉은색 마력을 크게 일으켰다. 챙! 청명한 검음이 숲 속을 울린다. 붉은색과 은백색의 마력이 맞부딪치는 순간 휘황찬란한 빛이 폭발하듯 번쩍였다. 전초전은 사용자들의 우세로 끝났다. 그리고 마치 물감처럼 뒤섞여 둥글게 퍼져 나가는 마력의 물결은, 비로소 본격적인 접전에 들어가겠다는 하나의 신호였다. * 남은 부랑자들은 40명 남짓한 정도였다. 정확히는 41명. 고연주는 애당초 40명 정도라고 추정했었다. 그리고 내가 처음 놈들을 봤을 때 확인한 숫자는 50명이었다. 그녀의 예측이 틀리긴 했지만 그것은 나름 이유 있는 빗나감이었다. 50명중 10명에 이르는 인원이 마법사와 사제였는데, 그들은 다른 근접계열 부랑자들의 등에 업혀서 오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봤을 때는 조금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아무래도 좋았다. 첫 기습과 첫 격돌로 처음부터 9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내고 시작할 수 있다. 이것만해도 엄청난 성과였다. 이제 남은 것은, 본격적으로 휘젓는 것 뿐이었다. 챙! 서로의 마력으로 점철된 빅토리아의 영광과 단검이 맞부딪쳤다. 육중한 충격이 들어오는 순간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단검이 내 권능을 막아서가 아니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여성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은색으로 도배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단검마저도 붉은 마력이 일어나는 중이었다. 첫 기습 때는 급하게 나오느라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뭔지 모를 익숙한 감정을 선사해주고 있었다. 파각, 파가각…! 쨍! 그때 유리가 깨지는듯한 맑은 소리가 울렸다. 흘끗 시선을 돌리자 바르르 떨리는 흑색 타이츠 위로, 세로로 뚝 금 가있는 단검이 보였다. 제법 잘 버틴다 싶었지만, 결국에는 권능을 이기지 못하고 파열된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흑랑이…?” 그리고 경악에 찬 목소리를 들은 순간,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검을 짧게 휘저으며 찔러 들었다. “큭!” 챙그랑! 여성은 순간적으로 몸을 젖히며 뒷걸음질을 쳤다. 단검을 바로 놓은 것은 아주 좋은 판단이었다. 덕분에 머리를 노리던 검 끝이 아슬아슬하게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물론, 그 대신에 단검 하나는 완전히 산산조각 나며 파편으로 변했지만. 이윽고 여성은 공중제비를 돌며 재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나는 굳이 뒤쫓지 않았다. 확인해볼 것도 있었고, 여성이 물러난 곳에는 짧은 공방이 이루어지는 새 전열을 가다듬은 부랑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왼쪽 팔에서는 가느다란 선혈이 솟구치고 있었다. 꿰 뚫리는 것은 피했지만 칼날을 휘감고 있는 마력에 베어져 나간 모양이었다. 그녀는 부랑자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선 후, 인상은 와짝 일그러뜨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나는 곧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일단은 필요한 정보만 확인할 생각이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백서연(5년 차) 2. 클래스(Class) : 폭염의 학살자(Secret, Slayer Of Heatwave, Master) < 능력치 > 1. [근력 90(+2)] [내구 85] [민첩 96(+1)] [체력 89] [마력 94] [행운 67] “빌어먹을!” '백서연이다.' 사용자 정보와 함께 여성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방금 나와 공세를 교환한 부랑자가, 바로 백서연이라는 것을. 솔직히 그녀가 이곳에 나타난 것은 뜻밖이었다. 나는 어이없으면서도 한편으론 횡재했다는 마음이 들었다. 벨페고르를 봤을 때만큼 기쁜 건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설레는 기분이었다. 해서,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빅토리아의 영광을 겨누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백서연은 죽여버린다. 아니, 아니지. 죽이는 걸로는 부족하다. 죽이는 것은 정 여건이 안될 때 최후의 방법으로 두고, 기회만 된다면 불구로 만들어놓자. '근력 2, 민첩 1. 장비도 좋고…. 대박이다.' 그렇게 마음먹은 나는 가느다랗게 웃었다. 그런 내 표정을 읽었는지 백서연의 눈동자에서 일순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성난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빠르게 중얼거렸다. “앞, 뒤, 집진! 컷트, 그림자 여왕, 뒤! 15! 16! 10!” 백서연의 외침에, 이어진 부랑자들의 행동은 신속했다. 나는 잽싸게 상황을 분석했다. 놈들은 중앙에 15명을 남겨두고 순식간에 세 갈래로 갈라졌다. 16명은 좌우 양 갈래로 크게 갈라지며 나를 그대로 지나쳤다. 아마 뒤에 있는 사용자들을 노리는 것이리라. 그리고 뒤로 물러서는 부랑자들은 총 10명이었는데 대부분이 마법사, 사제 그리고 소수의 궁수로 이루어져있었다. 중앙의 15명은 근접 계열과 궁수들만 보이고 있었다. 나는 손잡이를 꽉 쥐고서 바로 중앙으로 짓쳐 들었다. 그러자, 중앙의 15명 중 일부는 내게 정면으로 달려들었고 또 일부는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궁수가 많다.' 나는 그것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면에서 달려오는 부랑자들 중 가장 선두에 있는 년은, 하나 남은 단검을 꼬나 쥐고 있는 백서연이었다. 그리고 서로의 사정범위에 들어온 순간, 우리 둘의 검이 다시 한 번 교차했다. 백서연은 전과는 사뭇 다른 비교적 얌전한 공세를 펼쳤다. 언제든지 발을 뺄 수 있게 방어에 중점을 둔 모습이었다. 아까처럼 단검을 허무하게 잃기는 싫었는지 나와 검을 부딪치려는 찰나 비스듬히 세우며 흘리려는 동작을 보였다. '이거 내 특기였는데.'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곤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을 이용해 반대로 가볍게 쓸어주었다. 팍! “아…?” 백서연의 눈이 크게 떠진다. 그 힘을 그대로 되돌려준 결과 그녀의 오른팔이 뒤로 크게 젖혀졌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그녀의 오른쪽 가슴이 훤히 비었다. 완벽한 기회였다. 솔직히 백서연이 이렇게 녹록한 상대는 절대로 아니었다. 그녀 역시도 홀 플레인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만큼 엄청난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쉽게 밀리는 것은, 내가 백서연보다 실력이 훨씬 윗줄에 있다는 것. 그리고 정보의 부재였다. 일찍이 상대해 본적 없는 상식을 파괴하는 전투에 적응을 못한 것이다. 물론 백서연도 첫 격돌로 나와의 차이를 인지하고 나름의 보험은 들어둔 것 같았다. 지금 나를 노리고 있는 부랑자 14명의 기척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녀의 팔이 뒤로 젖혀진 순간 수많은 화살 소리와 함께 전신을 노리는 매서운 기척이 느껴졌다. 찰나의 순간, 수많은 고민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다른 열네 명의 부랑자와, 백서연 한 명의 가치의 고민. 답은 명료했다. 둘 다 중요하다. 그렇게 마음을 정한 나는, 재빨리 뒤로 빠지는 백서연을 보며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있는 힘껏 마력을 일으켜, 혼신의 힘을 다해 대지를 밟았다. 꽝! 우직, 우지직! 발바닥으로 땅이 움푹 패이다 못해 쩍 갈라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마치 어퍼컷을 날리는 것처럼, 대지로부터 치솟아 오른 충격파는 나를 향해 들어오던 공세를 덮쳐 들었다. 그에 영향을 받은 것들은 일시적으로 궤도가 비틀렸지만 곧 다시 정상으로 돌아와 나를 노렸다. 하지만 내가 노린 것은 그 몇 초의 틈이었다. 나는 발을 땅에 찍었을 때부터 검광의 능력을 발동했다. 이윽고 빅토리아의 영광으로 짜르르 마력이 흘러 들어감과 동시에, 나는 검을 크게 베었다. 채채채채채채채채챙! 다시 한 번 사위로 10개의 검광이 번쩍이고, 동시다발적인 비명과 함께 시야에 그려지는 핏줄기가 튀었다. 그로 인해 대부분의 살기는 없어졌지만 아직 남아있는 것들도 있었다. 백서연은 이미 다시 젖혀졌던 팔을 내린 상태였다. 나는 곧바로 이형환위(移形換位)의 능력을 사용했다. 슉, 슈슉! 팍, 파박! 땅에 무언가 꽂히는 소리. 고개를 들자 대지에 널브러진 부랑자 서너 명과, 저 앞에서 서서히 흐릿해져 가는 또 다른 내가 보인다. 바로 앞으로는 전방에 시선을 둔 채 내게 뒤통수를 드러낸 백서연이 있었다. “뭐…?” 그것을 보자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백서연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그대로 검을 내리쳤다. ============================ 작품 후기 ============================ 아. 오늘 날이 정말 덥네요. 아무래도 여름이라서 그런지 속도가 영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ㅅ; 그러고 보니 조아라 사이트가 참 많이 바뀌었네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아직 익숙지 않아서 조금 어색하지만, 익숙해지면 편할 것 같아요. 하하하. 후유. 아, 전투 내용은 다음 회로 끝날 예정입니다. :) 『 리리플 』 1. 우사인볼트 : 1등 축하합니다. 1등 코멘트에서는 처음 뵙는것 같네요. 솔직히 처음 닉네임을 봤을때 살짝 움찔했습니다. 누구보다 빠르게…. 하하하. 이번회도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2. 리오Rio : 아 정말이요? 저번에 아이스 블래스트 폈다가 저랑은 조금 안 맞는 것 같아서요. 에쎄 한 번 도전해봐야겠네요. 후후. 3. Lea : 가장 가까운 정답은, 1번입니다. 하하. 4. 한해 : 신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들어가있고, 그것또한 규격외의 힘이 맞습니다. 그래도 굳이 우위를 판단한다면, 화정이 뇌신보다 윗줄에 있습니다. 5. 운수대통 : 도시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습니다. 에덴에서 뮬은 방해없이 걸어갔을때 3주정도 걸리고요, 괴물들을 처리한다고 가정하면 4주 이상은 걸려요. 대륙과 대륙간의 거리는 아무리 못해도, 최소 2달 이상은 걸리는 거리입니다.(그 이상도 가능합니다.) 홀 플레인에 '말'은 없습니다. 그러한 탈 동물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예외는 있습니다. 예를들면 유니콘을 길들이는 경우가 있겠네요. :) 6. ThePrestige : 첫 코멘트 축하합니다. 하하. 구상이나 플롯은 짜여져있습니다. 그런데 비축분은 현재 전부 떨어진 상태입니다. ㅜ.ㅠ 7. 파할파할 : 뇌신이 규격외의 힘은 맞습니다. 하지만 화정과는 궤를 달리하는 힘입니다. 굳이 힘을 비교하자면, 화정 >>>>>(5개!) 뇌신입니다. 8. hohokoya1 : 아마 2부에 들어가서 정말 초신속으로 전개를 하면 600회도 가능하다고 생각해요.(아주 어렵겠지만요.) 그것을 위해서 적절한 생략을 할 예정입니다. 하하. 9. 멜리스 : 수정 완료했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10. 유사쿠 : 네! 재밌게 읽고 가세요!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313 / 0933 ---------------------------------------------- Game 그때였다. 빅토리아의 영광이, 목표한 지점을 내리치기 직전의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사람의 형태를 한 안개가 뛰어들어 나와 백서연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나는 순간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안개화?' 내 기억이 맞는다면, 이것은 사용자의 몸을 일시적으로 안개로 변환하는 고유 능력일 것이다. 지속시간이 짧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꽤나 쓸만한 능력이었다. 이동속도가 비약적으로 높아지고, 물리력은 가뿐히 무시하며, 마력에 대해서도 높은 내성을 갖고 있다. 상성 마법을 제외한, 일반적인 수단으로 상대하기에는 제법 곤란한 능력이었다. 이윽고 안개는 희뿌연 한 빛을 발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물 흐르듯 흘러나와 내 검을 칭칭 동여매었다. '그러고 보니 얘도 꽤 유명해질 텐데.' 안개화 능력을 사용하는 부랑자를 한두 번 들어본 기억은 있다. 속으로 가볍게 애도를 표한 후, 나는 내리긋는 검에 더욱 속도를 붙였다. 썩둑, 썩둑! “캬악!” 손바닥을 타고 들어오는 느낌은 꽤나 다채로웠다. 부드러운 육질을 잘랐다가, 허공을 가르다가, 다시 살을 자르는 감촉이 번갈아 가면서 느껴졌다. 시선을 내리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흰빛을 띄고 있던 안개는 반으로 똑 잘라져 점점 붉은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는 게 보였다. 백서연의 몸은 왼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의 오른팔은, 어깨서부터 보이지 않고 있었다. 풀썩! 툭! 이윽고 안개화가 해제됐는지 대지에서 깔끔하게 반으로 잘라진 시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직도 단검을 꼭 쥐고 있는 매끈한 팔이 보였다. 둘은 나란히 바닥에 내려앉아 사이 좋게 피를 내뿜고 있었다. * 부랑자들의 얼굴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얼어붙어있었다. 말 그대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자신들의 리더이자 지휘관인 백서연이 허무하게 당하려는 찰나 한 명이 기지를 발휘했다. 고유 능력인 안개화를 사용해서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하지만 안도한 것도 잠시였다. 안개화를 사용한 부랑자는 분명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다. 단순히 가로막은 것에서 그친 게 아니라 모종의 능력을 발휘해 검의 진로를 방해했다. 그러나 빛나는 검은 안개를 거침없이 베어 가른 것도 모자라, 백서연의 오른팔을 절단시켰다. 판단 착오가 불러일으킨 결과였다. 안개화를 사용한 부랑자는 김수현이 수준 높은 커트 마법을 구사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에 따라 고유 능력으로 대응했다. 아마 시크릿 클래스 최상위 계열로 분류되는 '검술 전문가(Sword Specialist)'의 권능을 알았더라면 절대로 달려들지 않았으리라. 즉 방금 전 살해당한 부랑자는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갖다 받친 꼴이었다. 그러나 부랑자들은 아직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 단순한 사용자 정보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김수현이 일부러 백서연의 팔을 잘랐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무튼, 이어진 백서연의 행동은 신속했다. 자신의 팔이 잘린 것도, 무기를 모두 잃어버렸다는 것도, 안개화가 파훼되었다는 것도 모두 뒷전이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어떻게든 김수현과의 거리를 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 오른팔이 잘려나간 이후 균형감각이 약간 이상해졌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백서연은 안개 덕분에 자신이 목숨을 구했으리라 굳게 믿고 얼른 뒤로 물러나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뻥! 그러나 김수현이 그것을 보고만 있을 리가 없다. 백서연이 뒤로 빠지려는 낌새를 느끼자마자, 오른발을 들어 그녀의 복부를 후려갈긴 것이다. 그녀의 몸이 잠시 허공에 뜨는가 싶더니 이내 땅바닥에 처박혀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이쯤이면 이겼다고 여길 법도 한데 김수현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는 듯 김수현은 재빠른 속도로 백서연과의 거리를 줄였고,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 부랑자들의 한가운데에 있음에도 전혀 아랑곳 않은 태도였다. 이윽고 김수현의 왼팔이 뒤로 크게 젖혀지는가 싶더니, 쓰러져있는 백서연의 얼굴 위를 거세게 가격했다. 뻑! “아악!” 지금껏 어떤 상황에서도 비명을 내지 않은 백서연이었는데, 처음으로 여성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김수현의 근력 능력치는 96포인트. 그 힘은 단순 주먹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히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아마 백서연의 내구 능력치가 준수한 수준이 아니었다면 일격에 머리가 터지거나 얼굴이 함몰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백서연의 비명이 들린 순간, 그제야 얼어붙었던 몸이 해동되었는지 부랑자들은 몸을 움찔거렸다. 실상 5, 6초 정도 흘렀을 뿐인데, 상황은 바뀌어도 너무나도 바뀌어 있었다. 뻑! 뻑! 뻑! 뻑! 뻑! 뻑! 뻑! 뻑! “악! 아악! 그, 그만, 아아악! 아아아악!” 다시 한 번 들리는 높은 비명 소리. 부랑자들을 퍼뜩 정신을 차리고 김수현을 향해 발 빠르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김수현은 오연한 눈길로 주변을 쓱 둘러보고는, 피가 덕지덕지 묻은 왼손으로 대지를 짚었다. 그리고, 그 상태서 크게 위로 뛰어올랐다. 슈슉, 슈슈슉! 김수현의 몸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공중에서 회전한다. 그와 동시에, 7발의 노란 광선이 그를 노리고 사방에서 쏘아져 들어갔다. 궁수들의 사격은 정확했다. 김수현이 뛰어오르는 지점을 정밀하게 예측한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리 정확히 예측했다고 해도 맞추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마력을 품은 화살 광선은 그대로 김수현을 꿰뚫었고, 각자가 날아가던 방향으로 멀리멀리 사라져간다. 이윽고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사르르 사그라진 순간, 어디선가 또다시 비명이 튀어나왔다. 공중에서 이형환위(移形換位)를 사용했는지 김수현의 발은 어느새 한 명의 가슴을 짓밟고 서 있었다. 그는 발 아래에는 한 명의 사제가 바닥에 처박힌 상태였다. 백서연이 당한 것을 보고 치료하려고 나왔지만, 김수현이 애초에 차단한 것이다. 이번에 사용자들을 쫓아온 부랑자들의 추적대 중에서 마법사와 사제의 숫자는 50명 중에 단 10명이었다. 그마저도 초반 기습과 선공으로 인해 절반 가까이 잃어버리고 말았다. 사실상 지금 남은 사제는 단 한 명이었는데, 그마저도 김수현에게 잡혀버린 것이다. 김수현은 그 상태 그대로, 발을 지그시 눌렀다. 우두둑! “까아악!” 부랑자들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김수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음 먹잇감을 노리는지, 사위를 훑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모두…. 뒤로…. 빠져…!” 힘겹게 토해낸 듯한 목소리가 허공을 나직이 울려 떨었다. 놀랍게도, 몸을 일으킨 사람은 백서연이었다. 한쪽 팔이 없고 얼굴이 피투성이긴 했지만 다시 일어난 것이다. 그녀는 몸을 한 번 크게 비틀거렸다. 어떻게든 균형을 잡으려고 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백서연은 속절없이 왼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 순간, 김수현의 뒤로 매서운 마력의 파동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쏴!” 그리고 울음과도 같은 백서연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허공으로 수많은 마법과 화살이 솟구쳐 올랐다. 이윽고 그것들은 김수현을 넘어 어딘가로 쏜살같이 짓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방향은, 다른 사용자들이 있는 방향이었다. * '그렇군.' 내 위를 지나치는 마법들과 화살들을 보며, 백서연이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왜 10명이 빠지는가 했더니 앞에서 시간을 끌고 집중사격을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뒤에 있는 사용자들을 먼저 처리하고 나에게 집중해 전술을 구사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키이이이이이이잉! 순간 그쪽으로 달려갈까 싶었지만 이내 걸음을 멈추었다. 사용자들이 있는 곳에서, 티르빙의 섬뜩한 소리와 함께 가공할만한 마력이 뭉클뭉클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주변의 그림자들이 속속히 몰려들고 있다. 조금 걱정은 되었지만 나는 고연주와 사용자들을 믿기로 했다. 그렇다면 이제 내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나는 백서연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가, 집중사격을 한 부랑자들을 돌아보았다. 백서연이 일어난 것이 놀랍기는 했다. 팔과 복부는 차치하고서라도, 뇌를 뒤흔드는 충격을 받았을 터인데 악바리처럼 일어섰다. 그 정신력에 감탄하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녀는 이미 전투력을 상실했다. 애용하던 무기도 잃었고 한 팔도 잃었으니 예전과 같은 무위를 보이는 것이란 불가능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지금은 백서연과 주변의 부랑자들을 처리하는 것보다는, 집중사격 진을 파훼하는 게 우선이었다. 나는 곧바로 그곳을 향해 짓쳐 들었다. 내 첫 번째 목표는 마법사들이었다. 내 마법 저항력이 워낙 괴물 같아서 그렇지, 실력 있는 마법사들의 화력은 절대 얕볼만한 게 아니었다. 최대한 빠르게 놈들을 처리해서 이어지는 화력의 지원을 끊어줄 필요가 있었다. 내가 쏘아져 들어오는 것을 봤는지, 부랑자들은 바로 나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은 몇 발짝 뒤로 물러서며 주문을 외웠고, 궁수들은 나를 겨냥했다. 또한 후방에서 내 등을 노리고 달려오는 근접계열들의 기척도 느껴졌다. 내가 한 명이라는 것을 생각했는지 완벽한 포위 진형을 구축한 것이다. 이것도 나름대로의 집중사격 진이라 볼 수 있었다. 슈슈슉! 슈슈슈슉! 나는 정확한 타이밍을 노려 들어오는 화살을 쳐냈다. 전방에 있는 놈들은 전원이 궁수 아니면 마법사였다. 이 말인즉슨, 거리만 줄이면 모두 다 차려진 밥이라는 소리였다.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갈 생각이었기에, '빅토리아의 영광'에 마력을 담아 전방으로 크게 휘둘렀다. 콰콰콰콰! 일전에 광장에서 선보였던 부채꼴 모양의 파동이 부랑자들을 덮쳐 든다. 좌우 끝에 있거나 뒤로 빠진 소수는 황급히 몸을 물렸지만, 중앙에 있는 부랑자들은 그러지 못했다. 대신 놈들은 날렵하게 위로 뛰어오르며 파동의 범위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검을 위로 쳐올렸다. 그러자, 파동은 방향을 바꿔 순식간에 위로 솟아올랐다. 퍼펑! 퍼버벙! “크아아악!” “으아아아악!” 그 와중에도 마력을 일으켜 저항했는지 잠시 불꽃이 튀겼지만, 곧이어 뛰어오른 인원은 한 명도 예외 없이 신체의 일부가 잘렸다. 그들을 가볍게 제치고 나서야, 나는 집중사격 진의 중앙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부랑자에게 곧장 검을 휘둘렀다. 들어온 속도에 당황했는지, 어쩔 줄 몰라 하는 놈의 얼굴에 빛이 한 번 번뜩이더니, 이내 얼굴의 중앙으로 새빨간 금이 그어졌다. 이후 나는 사정거리에 닿은 두 명의 부랑자를 추가로 처치한 후 이번에는 마법사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사방으로 흩어진 터라 어딜 먼저 가나 고민하고 있자, 양 옆으로 화끈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사위를 살피자 나를 향해 들어오는 두 줄기의 화염을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나에게 닿기 직전의 마법을 향해 나는 잽을 날리듯 가볍게 좌우로 검을 연타했다. 쾅! 쾅! 굉음을 내며 잘라져 없어지는 마법들을 보며 누군가 급히 신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뒤에서 달려온 부랑자들이 나를 따라잡은 순간이었다. 마법을 쏘아 보낸 마법사들에게 각각 파동을 하나씩 보내준 후, 난 곧바로 몸을 돌렸다. 선두에는 뾰족한 철심이 삐죽삐죽 나있는 거대한 메이스를 들고 있는 부랑자가 보였다. 부랑자는 나에게 다다른 순간, 푸른색으로 물든 메이스를 양손으로 힘껏 내리쳤다. 나는 몸을 왼쪽으로 회전하는 것과 동시에 놈의 메이스를 검으로 슬쩍 쓸어주었다. 그러자 내려가던 부랑자의 팔꿈치가 반대로 접히더니, 이내 그대로 자신의 머리통을 깨부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난 왼발을 축으로 삼아, 회전하는 힘을 그대로 이용해 허공으로 발차기를 내질렀다. 퍽! “크악! 둔탁한 것이 발등에 느껴졌다. 시선에 보이지는 않지만 감각에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검을 휘두른다. 뭔가 부드러운 것을 베고 지나가는 느낌이 걸렸다. 그 상태로 반 바퀴 정도를 더 회전하고 나서야 나는 간신히 몸을 멈추고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후유.” 고개를 들자 집중사격 진은 완벽하게 파훼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잠시 전방으로 시선을 옮겼다. 백서연은 대지에 죽은 듯이 쓰러져있었고, 저기 멀리서는 갑작스럽게 크게 자라난 수풀들이 눈에 밟혔다.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기로 했다. 잠재 능력, 전장의 가호는 내게 클랜원들이 무사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총 41명 중 백서연을 포함해 26명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거진 서른 명에 가까운 인원이 달려들었지만 이제 남은 부랑자는 한자릿수를 보이고 있었다. 승기가 완벽하게 기운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서연이 정신을 잃었다는 것. 그렇다면 이제 남은 놈들은 잔챙이에 불과하다. 난 바로 마력 감지를 크게 돌려 부랑자들의 기척을 잡은 후, 가장 가까운 곳으로 신속하게 몸을 날렸다. 이제는 조금 남겨놓을 필요가 있었다. * “고연주. 몸은 좀 괜찮아요?” 나는 품속에서 연초 한대를 꺼내 들고, 바위에 걸터앉아있는 고연주를 향해 말했다. 그녀의 입술에는 은은한 핏자국이 번져있었다. 고연주는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연초를 까닥거리자, 그녀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럭저럭 견딜 만은 해요. 집중사격 진이란 거,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무섭네요. 수현은 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 주억였다. 그리고 고연주의 옆에 엉덩이를 붙인 후, 연초를 입에 물었다. 치익, 치이익. “후. 피해는 어떻게 되죠?” “세 명이요. 클랜원들은 무사해요.” “세 명이라. 선전했군요.” 추적대와의 전투는 끝났다. 부랑자들의 사망자는 39명. 부상 및 기절한 놈들은 11명. 사용자는 사망자만 3명. 이로서 부랑자와 사용자의 전투는 사용자의 완승으로 돌아갔다. “결과만 보면 그렇죠. 솔직히 집중사격에 한 번 크게 당할뻔했는데, 다행히 저 남자 덕분에 피해를 줄일 수 있었어요.” 고연주가 가리킨 사람은 조승우였다. 그는 한창 전장을 정리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봤던 무성한 수풀은, 조승우가 방어를 위해 일으킨 마법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수현.” “예.” “부랑자들 11명은 왜 살려둔 거예요?” “살려둘 가치가 있으니까요. 지금 우리에겐 정보가 부족해요.” “그렇긴 하지만….” 고연주는 대체로 공감하는 얼굴이었지만 미약이 걱정 어린 기색을 엿볼 수 있었다. 왠지 그 걱정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럼 시체는 버린다고 쳐도…. 기절한 부랑자들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한곳에 모아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옷을 싹 다 벗겨야겠죠.” “네? 아, 장비요?” “뭐 그것도 있지만….” “…만?” 물론 장비도 모두 가져갈 생각이었다. 전투 중 훼손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남은 것은 꽤나 기대해볼 만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정보나 장비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특히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대충 연초를 비벼 끄곤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기지개를 펴며 입을 열었다. “일단, 놈들의 마력 회로를 망가뜨릴 생각입니다.” ============================ 작품 후기 ============================ 독자분들. 죄송합니다. 오늘 하루 후기와 리리플을 쉴 예정입니다. 오늘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들어와서, 정신이 전혀 없네요.(머리가 쪼개질 듯이 아파요. ㅜ.ㅠ) 하하하. 오전에 조금 써두고 가지 않았으면 큰일 날뻔했습니다. 리리플은 다음 회에 합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독자분들의 깊은 양해를 구합니다. @_@ 0314 / 0933 ---------------------------------------------- Game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말하기 애매한 비등한 상황이었다. 김수현을 지나쳐 사용자들이 있는 곳으로 쳐들어온 부랑자들은, 무슨 까닭인지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견제에 가까운 움직임이라고 할까? 어찌됐든 전세는 대등했다. 부랑자들의 실력이 훨씬 윗줄에 있는 만큼 평균 전력은 사용자들을 상회한다. 그에 비해 사용자들이 부랑자들에 앞서는 것은 단 두 가지였다. 조합과 그림자 여왕. 이따금 사제와 마법사들의 적절한 원호와, 고연주가 그림자들을 일으켜 전장을 조율하지 않았다면 이미 한곳은 뚫려도 진작에 뚫렸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이 대등한 전세를 뒤집을만한 격렬한 열풍이 일어났다. 하늘에서 흘러내리는 뜨거운 열기가 얼굴을 적셨는지, 고연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허공에는 어둠을 밝히는 빛이 하늘을 가르며 둥글게 모여들고 있었다. 고연주는 티르빙을 꺼냈다. 아직 완벽하게 제어할 자신이 없어 지금껏 사용을 자제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얼굴에 느껴지는 열기가 점차 후끈해지고 있었다. 어느새 부랑자들은 조금씩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녀는 직감했다. 막지 못하면 무너질 것이라고. 더 이상 생각할 시간도 여유도 없다. 고연주는 더는 지체 않고 티르빙에 힘껏 마력을 불어넣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우리 빙빙이, 잘 버텨줄 거지?” 키히이이이이이이이잉! 그 말에 대답이라도 했는지 티르빙은 찢어질듯한 비명을 떨쳐 울렸고, 무시무시한 마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사용자들을 원호하던 그림자들이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원을 그리며 돌던 그림자들의 속도에 점점 가속이 붙더니 이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였다. 고연주는 재빠르게 일으킨 그림자들을 쪼개고, 길이를 늘리고, 이어 붙였다. 그러자 바닥에서부터 회오리처럼 돌던 그림자들은 어느새 완전한 하나의 어둠이 되어 아래서부터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어두운 장막이 사용자들의 주변을 감싸 안았을 즈음, 장막에 둘러친 막에 부랑자들의 집중사격이 맞부딪쳤다. 꽈르릉! 그 순간 고연주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뱉을뻔했지만 입술을 깨묾으로써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진로가 막힌 마법과 화살들이 장막을 두드릴 때마다, 그녀는 내부가 진탕하는 것을 느꼈다. 고연주의 마력 능력치는 93 포인트였다. 부랑자 중 한두 명은 그녀보다 더 높은 마력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한두 발이 아니라 화살까지 포함하면 다발수준이었다. 그러한 것들을 감안하면 확실히 티르빙의 위력은 대단했다. 비록 밀리는 중이라고는 해도 집중되는 화력을 어찌어찌 버텨주고는 있었으니까. 그때였다. 휘오오오오오오오! 파각! 장막의 일부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하얗게 작열하는 창이 삐죽 모습을 드러내었다. 창 끝이 두 갈래로 갈라져있고 사이로 이따금 노란빛 스파크가 튀는 것이, 금방이라도 뚫고 들어와 커다란 폭발을 일으킬 것만 같았다. 고연주는 찢어진 곳을 메우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구멍은 조금씩 더 커져만 갔다. 고연주는 손이, 팔이 점점 오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위기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림자 장막이 깨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주변에서 발 빠르게 주문을 외우는 소리들이 들렸지만, 그마저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으리라. 결국 최후에는 클랜원들이라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에 고연주가 입술을 질끈 깨문 순간이었다. “됐습니다! 조금만 더 버텨주십시오!” 조승우의 말에 고연주는 흘끗 시선을 돌렸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빙긋이 미소 짓고 있었다. 곧 조승우가 왼손을 가볍게 휘젓자, 사위로 반짝이는 빛이 흩뿌려지는가 싶더니 이내 점점이 흙으로 스며들었다. “───. ───. ───. 급속 성장(Rapid Growth)!” 그리고 담박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다시 한 번 변화가 시작되었다. 차갑던 흙 바닥에서 싹이 트기 시작했다. 그것은 순식간에 떡잎으로 자라더니 가지각색으로 자라기 시작했다. 어떤 것은 꽃으로도, 어떤 것은 풀로도, 또 어떤 것은 나무로도 변했다. 아주 짧은 시간에, 사용자들의 주변으로 새로운 숲이 하나 만들어지고 있었다. 사용자들도 부랑자들도 모두 놀란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약(Contract), 실행(Excute)!” 우우웅! 그렇게 조승우의 외침이 들렸을 때였다. 웅혼한 마력의 떨림이 사방을 울림과 동시에, 자라났던 수풀들이 파란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 “머셔너리 로드. 말씀하신 것들을 전부 완료했습니다. 일단 아직 숨이 붙어있는 부랑자들은 전부 벗겨서 일렬로 늘어놓았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하하.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머셔너리 로드와 그림자 여왕이 아니었으면 죽은 목숨이었을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조승우는 손사래를 치며 공손히 대답했다. 부랑자들과의 일전을 치르고 나자 사용자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변했다. 이전까지는 약간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런 태도가 많이 희석된 것이다. 나는 조승우와 함께 안으로 걸어가면서 아직도 꼿꼿이 세워져 있는 무성한 수풀들을 바라보았다. 이런 종류의 마법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일단 마법이 끝나고 마력이 끊겼으면 사라질 법도 한데,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게 조금 신기했다. 나는 제 3의 눈으로 그의 정보를 다시 확인하기로 마음먹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조승우(3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마법사(Normal, Mage, Expert)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가온누리(Clan Rank : C Plus) 5. 진명 · 국적 : 기회를 놓치지 않는 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5) 7. 신장 · 체중 : 185.1cm · 87.2kg 8. 성향 : 선 · 기회(Good · Chance) [근력 48] [내구 42] [민첩 51] [체력 46] [마력 89] [행운 78] (능력치 포인트가 0포인트 남은 상태입니다.)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을 다른 뜻으로 해석했는지, 조승우는 어색이 웃으며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손등에는 빛이 바랜 파란색 보석이 박혀있었다. 조승우는 잠시 아련한 눈길로 보석을 바라보더니, 이내 집게 손가락을 만들어 보석을 집었다. “이제 이것도 필요 없게 됐군요.” “예?”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조승우는 오른손에 박힌 보석을 뽑았다. 그러자 보석은 쑥 뽑혀 나왔고, 손등에는 자그마한 구멍과 함께 약간의 피가 흘러내렸다. “예전에 인연이 닿아 구할 수 있었던 보석입니다. 씨를 뿌리고 그것을 성장시켜 보호막을 만드는 마법이 걸려있습니다.” “일회용입니까?” “예. 뭐 괜찮습니다. 소비한 대신 제 자신의 목숨을 구했으니 적절히 사용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저 수풀은 아마 보석에 남아있는 마력이 떨어지면 저절로 사라질 겁니다.” 조금 아깝다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맞는 말이었다. 나는 차분히 고개를 주억였다. 어느덧 조승우의 발이 멈췄다. 이곳은 아직도 수풀에 둘러싸여 있는, 아까 사용자들과 부랑자들이 한창 격전을 벌이던 장소였다. 그 중앙으로 11명의 부랑자들이 반듯이 누워있었다. 모든 장비를 홀딱 벗겨내긴 했지만 그래도 예의상 중요한 부분을 가리는 속옷은 남겨둔 모양이었다. 아무튼,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은 부랑자들의 마력 회로를 망가뜨리는 일이었다. 사용자들의 누구나 내부에 마력 회로를 품고 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보면, 사용자의 신체 내부에는 혈(穴)이 존재하고 이 구멍을 통해 기운이 흐른다. 그리고 기운이 흐르는 길을 통틀어 혈도(穴道)라고 부른다. 회로(Circuit)는 심장에서부터 뻗어져 나오는 하나의 순환로라고 보면 좋을까. 천사들의 말에 따르면 기운은 심장을 통해 마력으로 공정되어, 회로에 흐를 때 비로소 본래의 힘을 발휘한다고 한다. 망가뜨리는 방법은 많지만 지금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세 가지였다. 심장, 혈도, 마력 회로. 그 중에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마력 회로를 건드리는 것이다. 다른 것도 건드릴 수야 있지만 심장이나 혈은 작업 도중 사망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마력 회로가 위험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지만, 개중에는 가장 안전하다고 볼 수 있었다. 거의 나신이나 다름없는 부랑자들의 몸이 달빛에 비쳐 매끈한 빛을 드러내었다. 남성 부랑자는 총 6명, 여성 부랑자는 총 5명이었다. 가장 왼쪽에 있던 남성 부랑자를 향해 다가가기 전에, 나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죽은 3명을 제외하고 살아남은 사용자들이 보였다. 그들은 살았다는 환희 어린 표정과 함께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부랑자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안솔을 비롯한 클랜원들도 끼어있었다. “사용자 조승우씨.” “아, 예.” “혹시 시체에 있는 장비들도 수거하셨나요?” “예? 아뇨. 그건 아직….” 일부러 들으라는 의미로 목소리를 높였기에 조승우 포함 모든 사용자들의 시선이 모였다. “혹시 힘들지 않으시다면 시체들이 장비하고 있는 것들도 모두 모아주시지 않겠습니까? 부탁합니다.” “물론입니다. 그런데 혹시 가져가실 생각이시라면…. 너무 많지 않을까요? 파손된 장비를 제외한다고 해도….” “그래서 여기 있는 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들고 가는 것을 도와주신다면 도시에 도착했을 때 소정의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아….” 내 말이 끝나는 순간 몇몇 사용자들의 눈동자에 아차 하는 감정이 떠올랐다. 사용자들은 이번 부랑자들의 습격으로 잃은 것들이 많을 것이다. 지금이야 같이 행동하고 있다곤 하지만 도시에 도착했을 때는 남이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소정의 보상이란 게 참 미묘한 말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잃은 것을 일부나마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셈이었다. 나는 말을 마치고 난 후 신속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나무에 몸을 기대고 있는 고연주를 볼 수 있었다. '고연주. 장비를 부탁해요.' '걱정 말아요. 저만 믿어요 수현.' 척하면 척. 내 눈빛만 봐도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고연주는 빙글빙글 웃고는 시체들이 모여있는 장소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무튼 구실을 주기는 했지만 이것은 내 축객령이나 다름없었다. 사용자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이내 한 명 두 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물론, 그럼에도 아직 남아있는 사용자들은 있었다. “안솔. 너도.” “오, 오라버니이….” “김한별. 영감님도요. 안솔 좀 데려가 주세요.” “알겠네.” 김한별은 군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고, 영감님은 나직이 대답했다. 이윽고 둘에게 질질 끌려 사라지는 안솔을 보며 나는 제 3의 눈으로 가볍게 부랑자들을 훑었다. 다들 장비들을 수거하러 갔는지, 공터는 나와 부랑자들을 제외하고 텅 비어있었다. 나는 가장자리에 있던 부랑자들 향해 다가가다가, 문득 뭔가를 발견하곤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래에는 근접 계열로 보이는 한 명의 남성이 누워있었다. 나는 양 무릎을 굽혀 그의 팔을 세게 누르고 훤히 노출된 가슴에 손을 대었다. 살갗에 닿은 손바닥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감촉이 전해져 왔다. “정신차린 거 다 알고 있어.” “!” 부랑자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가 딱딱히 경직됐다. 나는 지체 없이 부랑자의 내부로 마력을 침투시켰다. 원래 마력 회로를 손상시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다. 회로에 마력을 넣는 것이야 그렇다 쳐도 정확히 어느 정도를 넣을지를 판단하는 게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제 3의 눈이 있다. 가령 지금 눈앞의 부랑자가 85의 마력을 갖고 있는데, 이럴 경우는 85보다 조금 안 되는 선에서 마력을 끊으면 된다. 여기서 조금만 더 넣으면 목숨을 잃고, 그렇다고 너무 낮추면 자체적으로 회복할 가능성이 있다. “눈뜨지 마. 뜨는 순간 죽는다.” 자신의 내부에 들어오는 이질감을 느꼈는지, 부랑자의 눈꺼풀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부랑자의 양팔을 누르고 있는 무릎에 더욱 힘을 주며 내부를 관조했다. 그리고 이쯤이면 되었다 싶을 즈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투입한 마력을 바로 터뜨렸다. 시간을 끌 필요가 없는 일이기도 했고, 얼른 끝내고 쉬고 싶었기 때문이다. 뻥! 뻐벙! “크, 크아아악! 카아아아아아아악!” 푸화악! 폭발이 이루어지는 순간 부랑자의 몸이 한 번 크게 불룩거렸다. 입, 눈, 코, 귀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놈은 찢어질 듯한 비명과 함께 몸을 세차게 뒤틀었다가, 이내 눈을 까뒤집으며 혀를 내밀었다. 극심한 고통에 다시 기절한 것이다. “일단 한 놈.” 마력 회로의 손상 정도를 확인한 후, 나는 몸을 일으켰다. 가장 중요한 백서연을 포함해, 아직 열 명이나 남아있었다. * 햇빛이 비쳐 들어오는 책상 위로 하얀 것이 웅크려 누워있다. 그것의 정체는 김수현이 데려온 아기 유니콘이었다. 무에 그리 기운이 없는지, 아기 유니콘은 풀이 죽은 얼굴로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가끔 볼을 비비고, 냄새를 맡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게 누군가를 무척 그리워하는 모양이었다. 한동안 책상 위에서 떠날 생각을 않던 아기 유니콘은, 갑작스레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문밖에서 자박자박 걸음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벌컥! “뀨뀨야. 너 또 여기 있니?” 문이 활짝 열리고 소녀다운 고운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백한결이었다. 아기 유니콘은 김샜다는 얼굴을 하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백한결은 아직도 켜져 있는 라이트 스톤을 소등하고 나서 책상 위를 응시했다. 그리고 한숨을 폭 쉬고는 아기 유니콘과의 거리를 줄였다. “뀨뀨야. 너 계속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밥이라도 먹어야지. 응?” “뀨….” 백한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며 음식이 담긴 접시를 내려놓았지만, 아기 유니콘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대신에 미약한 울음소리를 내며 축 처져있던 꼬리를 힘없이 휘저었다. 먹기 싫다는 신호였다. “말했잖아. 형님은 널 버린 게 아니라니까? 잠시 사고에 휘말려서 연락이 끊어진 거야.” “뀨뀨….” “걱정하지마. 곧 다시 돌아오실 거야. 하연이 누나도, 상용이 형님도, 유정이 누나도, 안현 형님도, 비비앙 누나도 모두 찾으러 갔잖아? 분명히 돌아오실 거야. 그런데 형님이 돌아오셨을 때 네가 삐쩍 마른 꼴을 보면 과연 좋아하실까?” “…뀨.” 이 말은 조금 효과가 있었는지, 아기 유니콘은 비척비척 고개를 들었다. 백한결은 한결 안도한 표정을 짓더니, 억지가 다분히 묻어나는 미소를 지으며 품을 뒤적거렸다. 이윽고 그는 둥그런 수정구를 꺼내 아기 유니콘에게 보여주었다. “옳지, 착하다. 어서 먹어. 이 수정구 보이지? 하연이 누나가 이걸로 통신을 준다고 하셨어. 그러니까 우리 열심히 기다리고 있자. 응?” 아기 유니콘은 정말이냐는, 의문에 찬 시선을 보냈다. 백한결은 고개를 끄덕끄덕 주억였다. 이윽고 힘겹게 한 입 두 입 먹기 시작하는 아기 유니콘을 쓰다듬으며, 백한결은 약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시선을 내려 수정구를 응시했다. 아기 유니콘과 수정구를 번갈아 보는 게, 당장 내일이라도 김수현을 찾았다는 통신이 올지 모른다는 기대가 한껏 묻어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백한결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통신은 앞으로 2주가 흐르고 나서야 올 것이라는 것을. ============================ 작품 후기 ============================ 하하. 안녕하세요. 아, 어제 못하는 술을 마셔서 그런지 오후까지 숙취에 시달렸습니다. 제가 정말 술을 못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자제하는데, 어제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저랑 작년부터 제법 친하게 지낸 동생이 있는데 녀석이 드디어 군대를 간다고 하더라고요. 하하하. 전역자의 여유를 한껏 부려주고 왔습니다. 아. 이번 파트를 재회로 잡은 만큼, 다음 회에 부랑자들이랑 꽁냥꽁냥 하는 부분이 나오고, 다 다음 회에 재회를 할 예정입니다. :) 『 리리플(312회) 』 1. zjekfksqlc : 1등 축하합니다. 하하. 이번에는 절대로 건너뛰지 않았습니다. zjekfksqlc 님의 리리플을 보니 뜨끔해지더라고요. :) 1등 하신 것 다시 한 번 축하합니다! 2. Lea : 둘 다라고 보시면 됩니다. 변화도 생기고, 다른 사용자도 출현할 수 있습니다. :D 3. s하렘마니아s : 뱉을 건 뱉고 결말을 지어야겠죠. 그 결말이 비록 슬픈 결말이라고 해도 말이죠. :) 4. 하엔 : 아마 눈팅하시던 조아라 관계자 분께서 뜨끔하셨지 싶습니다. 하하하. 저도 아직은 조금 불편하네요. 차차 수정한다고 하시니 기대감을 갖고 기다려볼 생각입니다. 5. Astrain : 쿠폰 감사합니다. _(__)_ 앞으로도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 리리플(313회) 』 1. 삼권분립 : 오호. 1등 축하해요. 1등 코멘트에서는 처음 뵙는 분 같네요. :) 이번 회도 재밌게 잃어주세요! 2. 천냥보은 : 아하하. 부정할 수 없네요. 안 그래도 오류가 조금 보이더라고요. ㅜ.ㅠ 3. 기동대대 : 소원이지만, 만능은 아닙니다. 되는 것도 있고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천사들의 제한을 받는 항목입니다. 음. 예를 들면 죽은 사용자를 살릴 수 있습니다. 정도가 되겠네요. 4. 위태위태 : 고연주는 아쉽게도 장비 운이 많이 없는 편입니다. 대신 몸매가 섹시하죠. 아. 죄, 죄송합니다. 흠흠. 앞으로 수현이 많이 챙겨줄 예정입니다. 하하. 5. 플룻 : 신상용은 연금술과 결혼한 남자입니다. 하하하. 실은 이건 비밀인데 말이죠, 신상용은 마법사입니다.(과, 과연 이해하실 수 있을까요? 후후.)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315 / 0933 ---------------------------------------------- Game 길을 걷던 도중이었다. 문득 코끝을 살랑이는 사늘한 바람이 불었다.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키자 콧속으로 상쾌한 공기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답답했던 가슴을 뻥 뚫어주고 뼛속까지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차가운 산들바람이었다. 다시 눈을 뜨자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초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무릎 아래까지 닿을 정도로 길쭉하게 자란 풀들과 군데군데 불룩히 솟아오른 비탈진 언덕이 보인다. 사람의 손길을 탔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오고 간 흔적은 이곳 저곳에 남아있었다. “아무래도 절반은 온 것 같은데요?” “절반은 넘었습니다.” “그런가? 아무튼 오늘 아니면 내일 즈음에는 방향을 틀어야 할 것 같은데…. 애매하네요. 수현, 어떻게 하실 거예요?” 나는 걸음을 멈추고 반쯤 몸을 돌렸다. 고연주는 길을 찾고 있는 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가 내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아침햇살을 머금어서 그런지 그녀의 눈동자는 황금빛을 번들거리고 있었다. 살짝 오므려져 있는 입술을 쳐다보다가, 나는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잠시 방향을 점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 지금 있는 장소의 지리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분 계십니까?” “…….” “…10분 후에 다시 출발할 예정입니다. 부랑자들 감시 잘하시고, 잠깐 휴식을 취해두세요.”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아무도 없었다. 다들 멀뚱한 눈으로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나마 처음 우리를 발견했던 암살자 소녀에게 약간의 기대를 걸어봤는데, 그녀는 휴식 선언을 듣자마자 바로 안솔에게 달려들었다. “이얍, 이얍.” “으, 응? 하, 하지마아…. 왜 자꾸 괴롭히는 거야아….” 하기야 궁수들도 나서지 않았고 같은 암살자 계열인 고연주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애당초 뭘 바라는 것 자체가 요원한 일이리라. 잘 노는 둘을 보다가, 나는 전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고연주가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부랑자들과 격전을 벌였던 삼림은 이미 한참 전에 벗어났다. 그 다음으로 접한 지역이 초원이었고, 그곳이 바로 지금 우리가 지나고 있는 곳이었다. 특징이라고 해봤자 구름 초원이라고 불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딱히 별 볼 일 없는 초원이다. 이곳으로 들어서고 나서 괴물들과 벌였던 네 번의 전투만 빼면 굉장히 심심한 지역이었다. 삼림처럼 수풀이 어지럽게 헝클어진 곳은 아니지만, 문제는 넓어도 너무 넓다는데 있었다. 그리고 지형도 거의 비슷비슷해 어느 방향에서 틀어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다. “방향은…. 가는 방향 기준으로, 서쪽으로 틀 예정입니다.” “서쪽이라. 그럼 결국 에덴으로 가시겠다는 거네요?” “예. 그런데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틀어야 에덴이 나올지 감이 잘 안 잡힙니다.” “호호. 우리 클랜 로드께서도 모르는 게 있었네요?” 고연주는 짓궂은 목소리로 깐족거렸다. 나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홀 플레인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익혔던 게 바로 지도입니다. 그러나 지도로 봤을 때와 직접 걷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입니다.” “그렇구나~. 나는 또 언제나 혼자서 척척하길래 척척박사님인 줄 알았어요.” “저 0년 차입니다.” “어머? 10년 차가 아니라요? 까르르.” 자지러지게 웃는 것으로 보아 농담이 분명했지만 내 속이 뜨끔했던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간신히 태연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리고 고연주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가까이 오라는 신호였다. 그녀는 냉큼 고개를 들이밀고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좌우로 살짝살짝 움직이며 까불기 시작했다. 나는 고연주의 오뚝한 코에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아코. 아야야. 너무해.” “엄살부리지 말고, 그만 좀 까불어요.” “네네~. 수현이 너무 답답해하는 것 같아서 장난 좀 쳐봤어요. 너무 걱정 말아요. 꼭 맞춘 다음에 갈 필요는 없잖아요. 안 그래요?” “…….” 고연주의 말인즉슨 반대로 가면서 길을 맞추자는 소리였다. 이윽고 그대로 자리에 앉아 대지를 팡팡 두드리는 그녀를 보며 나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랑자들이 습격했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었다. 물론 최단 루트로 가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지금처럼 기억이 알쏭달쏭할 때는 혼자서 끙끙 앓아봤자 헛된 일이었다. 또 가면서 아는 지역이 나올지 모르는 일이니 고연주의 말대로 조금 더 느긋하게 생각하는 게 이로울 것 같았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오늘 밤도 유혹의 눈동자를….” 나는 못이긴 척 고연주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며 물었다. 얼마나 대지를 두드렸는지 꼿꼿이 일어난 풀이 완전히 짓뭉개져 있었다. “네. 괜찮아요. 오늘도 한 번 정도는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고연주는 나를 쳐다보지 않고 사용자들이 모인 곳을 보며 대답했다. 부랑자들과 전투를 치른 이후 우리는 총 11명을 포로로 잡을 수 있었다. 그 중 현재 남아있는 인원은 9명이었다. 1명은 새벽을 틈타 도주를 시도해 본보기로 죽였고, 1명은 자살했다. 그리고 고연주의 고유 능력 유혹의 눈동자를 이용해, 남은 9명을 대상으로 매일 밤마다 정보를 캐내고 있었다. 덕분에 대략적인 사정은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부에 불과했다. 내가 원하는 고급 정보는 아직 캐내지 못한 상태였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유혹의 눈동자에 걸린 제한 때문이었다. 고연주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능력에는 몇 가지 제한이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하루에 한 번밖에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 두 번째는 이성을 대상으로 사용했을 때 비교적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것.(동성에게도 사용할 수 있지만, 대상자가 레즈비언이 아닌 이상 거의 실패한다고 말해주었다.) 세 번째는 이성이라고 해도 무조건 성공하는 게 아니라, 대상자의 정신력이 강할수록 실패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대상자의 정신이 망가진 상태라면 동성과 이성을 가릴 것 없이 아주 높은 확률로 성공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조금 아쉬움이 남는 제한이었지만, 일전 고연주의 유혹의 눈동자에 저항했을 때를 떠올리자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만일 저런 제한이 없었다면 말 그대로 엄청나게 사기적인 능력이었을 것이다. 어찌됐든 내가 원하는 것은 고급 정보였다. 단순히 이리저리 퍼져있는 정보가 아니라, 수뇌부들만이 알고 있는 정보. 그리고 그러한 정보를 알고 있는 부랑자라면 단연 백서연 뿐이었다. '그렇다면 백서연을 어떻게든 망가뜨려야 한다는 말인데….' “수현. 저기 좀 보세요.” “예?”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순간, 갑작스레 팔을 잡아당기는 감촉에 고개를 들고 말았다. 고연주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뭔가를 구경하는지 여전히 사용자들이 모인 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부랑자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은 사용자들이 있는 곳이었다. 놈들은 찢은 가죽이나 천 옷 등 기상천외한 것들로 팔을 결박 당한 상태였다. 그나마 여성 부랑자인 경우는 사정이 조금 나았다. 그래도 천이나 후드 하나라도 걸쳐주었으니까. 꼭, 마치 노예를 보는 것 같았다. 부랑자들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무릎을 꿇은 채 사용자들이 주는 치욕을 감내하는 중이었다. 나는 곧장 안력과 청각에 마력을 돋웠다. “목마르다며. 그래서 물 줬잖아. 응? 그런데 왜 안 마셔?” “…….” “물이 부족해서 그래? 그럼 말을 하지 그랬냐. 자, 여기 더 줄게. 퉤!” “큭…!” 외팔이 사용자는 정확히 부랑자의 얼굴 아래로 침을 뱉었다. 그는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남성을 내려다보더니 이내 표정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왜 마시지 않아? 내 성의를 무시하는 거야? 빨아먹어 이 새끼야!” 이윽고 외팔이 사용자는 발을 들어 부랑자의 머리를 거세게 내려찍었다. 남성은 침이 뱉어진 대지에 속절없이 머리를 처박고 말았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용자들은 낄낄 웃으며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나름 이해는 가지만, 사람이라는 게 참 무섭네요.” 고연주는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어깨를 들먹이며 말했다. 나는 조금 더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나직이 대답했다. “…동감합니다.” 비단 외팔이 사용자만 그러는 게 아니었다. 백서연의 주위로도 세 명의 여성 사용자가 몰려들어 비슷한 짓거리를 저지르고 있었다. 두 명은 그녀의 얼굴과 몸을 강제로 잡고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욕설과 함께 쉴 새 없이 뺨을 후려갈기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랑자 이름만 들어도 덜덜 떨던 사용자들이었다. 그러나 놈들이 힘을 상실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후로, 또 직접 감시하면서 끌고 오는 과정에서 두려움을 털어버린 것 같았다. 지금껏 울분을 억누르던 두려움이 사라졌으니 자연스레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리라. “뭐 그래도 같은 여자 입장에서 보면 나름 이해는 가지만요. 저기 지금 신나게 손을 휘두르는 사제 보이시죠?” “예. 보입니다.” “누군가 했더니 그때 부랑자한테 강간당하고 있던 여자네요. 오, 방금 전에는 조금 세게 쳤다. 백서연 볼이 아주 빨갛네요?” “…….” 이제 그만 출발하자고 몸을 일으키려다가, 조금 더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한창 물이 오르고 있으니 못 본 척해줄 생각이었다. 대신에 풀로 만든 머리띠를 서로 씌워주는 안솔과 암살자 소녀를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어머! 턱까지 올려 붙여? 수현. 저거 저대로 보고 계실 거예요?” “그냥 놔두세요. 한두 번 이러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래도 오늘따라 정도가 심한 것 같은데…. 저러다 한 명 죽겠어요. 여자애들은 아직 캐낼게 많은 애들인데….” “하하. 설마 죽이겠나요. 그리고 강도는 차차 더 심해질 겁니다. 사용자들도 동료, 친구, 가족, 연인. 아니 어쩌면 자신의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인과응보라고 생각합시다.” “흐응?” 고연주는 눈을 가늘게 뜨며 비로소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빤한 시선. 나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고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산이 보이지 않았다. “흐~응?” 고연주는 코맹맹이 목소리를 내더니 이내 내 팔에 찰싹 달라붙었다. 고개를 돌리자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머리를 슬쩍슬쩍 비비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왜 이래요? 갑자기?” “갑자기는 무슨. 뭔데요. 말해줘요.” “예?” “모르는 척 하지 말아요. 내가 수현 이러는 한두 번 봤어요? 그러지 말고 빨리 말해봐요. 전투 때는 그렇게 신명 나게 날뛰었으면서, 마력 회로를 파괴한 이후로는 딱히 건드리지도 않고 있잖아요. 도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예요?” “딱히 꾸미는 건 없는데요….” 나는 일부러 시선을 피한 채 딴청을 피웠다. 이윽고 팔에서 뭔가 물컹한 것이 비비적대는 게 느껴졌지만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정말, 이러기에요?” “아직 때가 아닙니다.” “때라뇨?” “후후.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서요. 아직은 아니에요.” 나는 일부러 완곡히 말을 돌린 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부랑자들의 특성은 알고 있다. 백서연이 어떤 인물인지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내 최종 목표는 그녀, 백서연이었다. 어지간한 협박으로는 그녀를 정신을 굴복시킬 수 없으리라. 그렇다면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흔들어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주변의 부랑자들을 극한까지 몰아붙일 필요가 있었다. 나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고연주를 보며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볼에 바람 빼요. 조만간 아주 재미있는 게임을 하나 벌일 생각이니까.” “게임이요?” “네. 그때는 고연주도 꼭 초대할게요.” “……?” 고연주는 그저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만 갸웃거렸다. * “그래서. 아직 찾지도 못했고, 돌아오지도 않고 있다.” “예. 백서연님 휘하의 박동수가 열심히 수색하고는 있습니다만….” “후. 정말 돌아 미쳐버리겠군.” 현은 진심으로 머리가 아프다는 얼굴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의 앞에 서있던 남성은 잠시 현의 눈치를 살피다가 이내 조심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저…. 이미 2주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대장님. 이쯤 되면 아무래도 추적대가 당했다고 보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남성의 말에 현은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감싸 쥐고 있던 이마에서 손을 떼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가 안 돼. 백서연만 간 게 아니잖아. 안개 능력자 김다혜. 궁수 이해인. 그리고…. 마법사는 누구였더라. 항상 멍하게 있는….” “이가인양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레어 클래스. 그 정도의 능력자들을 포함한 추적대가 당했다고? 이게 말이 돼?” “…….” 이번에는 남성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둘은 알고 있었다. 지금 남성의 말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백서연이 배신한다는 것은 그만큼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고, 또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기도 했다. 현은 불편한 얼굴로 입맛만 다시다가 남성을 올려다보았다. “백서연이 죽었다면 그래도, 그나마 괜찮아. 하지만 붙잡혔다면….” “자살하기를 바래야죠.” “…일단 만약을 대비하자고. 워프 게이트 복구는 끝났지?” “예. 도로시와 베스와는 이미 뚫어 논 상태입니다. 아마 다음주에는 헤일로도 뚫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남성의 말에 현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거야 지켜볼 일이지. 아무튼 사용자들이랑 노닥거리는 건 그만하라고 전해. 오늘부터 주변의 경계, 수색을 철저히 강화할거니까.” “알겠습니다.” “너도 마찬가지야. 간부라고 예외는 없다. 일체 금지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직접 통제할거니까 알아서들 적당히 해야 할 거다.” “예?” 남성의 반문에, 현은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그 저번에, 네 취향이라는 사용자 있었잖아.” “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남성은 쓴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이윽고 현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자 남성은 몸을 돌려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남성의 걸음걸이는 묘하게 부자연스러웠다. ============================ 작품 후기 ============================ 독자님들. 원래는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래도 경고를 원하시는 분이 몇 분 계셔서 후기로 말씀 드릴게요.(대신 다음 회 상단에는 경고 문구가 없습니다.) 다음 회는 초반에서 중반부분까지 몇몇 마음이 여리신 독자님들이 눈살을 찌푸릴만한 내용이 나올 수 있습니다.(성적인 내용은 아닙니다.) 그러니 해당 내용이 거북하신 분은 그 부분을 생략하고 넘어가주시고, 마지막 재회하는 부분만 보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_(__)_ PS. 다음 회 재회 파트 분량 조절에 실패했습니다. 죄송합니다. 『 리리플 』 1. 카네사다 : 1등 축하합니다. :) 미월야 님이 은퇴 선언을 하셨으니 이제 카네사다 님께서 강자로 출현하시는 걸까요. 하하하. 2. 메를리위 : 하하. 지금이야 현자 수행 중이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짝을 찾지 않을까 싶습니다. :) 3. 무뇌 : 항상 코멘트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고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_(__)_ 4. podytop : 다음 회에는 회유와 게임이 주 내용입니다. :) 아마 수현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회가 아닐까 싶네요. 5. CemeteryGates : 재미있겠네요. 나중에 현실로 돌아가고 백한결은 락커로 성공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는 걸까요? :D 6. 플룻 : 고민 중입니다. 설령 그것을 쓴다고 해도 소프트 하면서 귀엽게 하지 않을까요.(?) 7. 몽구헌터 : 이미 뮬에서 홀딱 마신 상태입니다. :) 8. LOVE가을 : 소원은 알고 보면 말은 거창하지만, 참 쓸데없는 능력입니다. 제한이 많거든요. 하하. 9. 다크사이드 : 실은 사랑과 존경의 영약에서 사랑이 신상용이라는 소문이…. 농담입니다! 10. 거등이 : 저도 얼른 결말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독자님들의 반응이 기대 되요.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316 / 0933 ---------------------------------------------- Game 찌르르. 찌르르. 둥근 달이 하늘에 떠있고 야영지 인근에서는 풀벌레들이 우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온다. 알알이 박힌 별이 아름답게 빛나는 밤하늘 아래, 나는 넓적한 풀밭에 앉아 연초를 태우고 있었다. 사실상 지금은 내가 불침번에 들어갈 시간이었다. 하지만 교대할 때 나는 같이 번을 서는 사용자들에게 잠깐의 양해를 구하고 따로 빠져 나온 상태였다. 따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연초를 깊게 빨아들이며 한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눈앞에는 꼿꼿이 서 있는 고연주와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은 한 명의 남성이 있었다. 고연주를 올려다보는 그의 태도는 어딘가 힘이 없어 보였다. 얼굴을 초췌하기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고, 눈동자에는 연한 잿빛이 감도는 게 멍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러니까, 8명 중에 2명만 제외하고는 지금 전부 백서연을 원망하고 있다는 말이지?” “다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아서 원망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끔 보면 불만은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고요.” “그래 그래. 괜히 추적대에 꼈다가 약탈도 못하고 참 슬프겠다. 그렇지? 그럼 그 2명은 백서연이랑 어떤 사이니?” “예. 이해인, 이가인입니다. 이해인은 통과의례 때부터 함께 해온 사이로 알고 있고, 이가인은 백서연이 직접 부랑자로 만들었습니다. 상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둘은 백서연의 심복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평소 친밀한 관계를 보였습니다. 부랑자들 중에서는 조금 특이한 성격으로 불리지만 그만큼 따르는….” 고연주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슬며시 얼굴을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자 그녀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남성의 눈동자는 원래의 빛을 되찾았고 곧바로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거친 콧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게 어지간히 힘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수고했습니다. 그 놈은 여기 놔두고 먼저 가 있어요.” “수현은요?” “잠깐 챙길 것만 챙기고 따라가겠습니다.” 고연주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훌쩍 몸을 돌려 총총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남성은 아직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나는 그를 한 번 슬쩍 훑고 야영지로 걸음을 옮겼다. 어둠이 내려앉은 야영지는 조용했다. 야영지를 지키는 불침번이 힐끗 돌아보았지만 이내 나라는 것을 확인했는지 다시 모닥불로 시선을 돌렸다. 간간이 코고는 소리들이 들렸지만 나는 일행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필요한 것들을 챙겼다. 오늘 저녁 먹다 남은 짐승 고기 스튜 한 그릇, 깨끗한 생수 한 병, 치료 물약 한 병. 이윽고 필요한 것들을 모두 챙기고 불침번들이 모여있는 장소로 향하려는 순간이었다. “나도 갈래.” 앳된 목소리가 옷깃을 붙잡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안솔과 잘 놀아주는 암살자 소녀였다. 홀로 번을 서는 게 다소 심심했는지 모닥불에 비친 소녀의 얼굴에는 지루함이 떠올라 있었다. 나는 단박에 거절했다. “안 돼.” “왜.” “넌 아직 어려.” 부랑자들을 포로로 잡은 이후로 불침번은 4명씩 3교대로 바뀐 상태였다. 하지만 오늘 조금 특별한 일이 있을 예정이기에 부랑자들을 따로 떼어놓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불침번을 한쪽에만 몰아서 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야영지를 지키는데 최소 한 명은 필요했다. 그리고 그 한 명에 암살자 소녀가 당첨된 것이다. “곧 부랑자 감시하는 사람들 이쪽으로 보내줄 테니까, 그 사람들이랑 놀아.” “싫어. 그 사람들 재미없어. 나도 갈 거야.” “자꾸 떼쓰면 앞으로 안솔이랑 못 놀게 한다?” “치, 치사해.” 암살자 소녀는 비장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가 이 한마디에 다시 앉고 말았다. 이윽고 뾰로통한 얼굴로 나를 보는 게 제법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속으로 웃으며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구예지(1년 차) 2. 클래스(Class) : 암살자(Normal, Assassin, Runner) 3. 진명 · 국적 : 아직은 순수한 소녀 · 대한민국 4. 성별(Sex) : 여성(15) 5. 성향 : 중립 · 선(True · Good) [근력 52] [내구 65] [민첩 81] [체력 63] [마력 67] [행운 58] (능력치 포인트가 4포인트 남은 상태입니다.) '1년 차라…. 나름 괜찮네.' “씨이. 나만 따돌려. 오빠 미워.” 원망에 찬 소녀의 말을 들으며 나는 바로 몸을 돌려 쓰러진 부랑자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아직도 땅에 쓰러져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실상 2주를 훌쩍 넘는 기간 내내 사용자들에게 횡포를 당했으니 지칠 만도 했다. “일어나.” 나는 부랑자의 머리를 걷어차려다가, 생각을 바꿔 팔을 붙잡아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부랑자는 팔을 붙잡아준 게 의외였는지 눈을 서너 번 깜빡이다가 코를 벌름거리기 시작했다. 따뜻하게 데워온 고기 스튜의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나는 숟갈에 큼직한 고기를 담아 먹는 척을 하다가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한 입 먹을래?” 부랑자는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지금껏 당해온 게 있으니 저절로 거부반응이 일은 것이다. 하지만 목 울대가 꿀꺽 움직이는 것을 놓치지 않아, 숟갈을 그의 입 가까이에 가져다 주었다. “…….” 부랑자는 냉큼 미끼를 물지 않았다. 다만 갈등 어린 얼굴로 나와 숟갈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 상태로,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제 3의 눈으로 부랑자의 상태를 확인한 다음, 담담히 입을 열었다. “안 먹을 거야?” 그리고 내가 다시 손을 거두려는 순간이었다. 부랑자는 눈을 질끈 감더니 숟갈을 덥석 물었다. 이윽고 그의 얼굴에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표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 환희라고 해야 할까 감동이라고 해야 할까. 하기야 고연주의 음식 솜씨는 발군이고 그 동안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먹고 마실 것을 나눠줬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다 먹었으면 가자고. 다시 원래의 자리로.” “…고맙습니다.” 나는 부랑자의 대답에 픽 웃음을 터뜨린 후 불침번들이 있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고맙다 라. 과연 이게 고마워 해야 할 상황일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 * 약 5분 정도 걷자 저기 앞에서 공터와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공터에는 부랑자 여덟 명이 무릎을 꿇은 채 일렬로 늘어서 있는 상태였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며 사용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니 꽤나 서글프게 느껴질 만한 상황이었다. 상대가 부랑자라는 것만 빼면 말이다. 나는 마력 회로를 터뜨린 이후로 부랑자들에게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사용자들의 행동을 방관했다고 해야 할까. 백서연은 1회 차에서 유명세를 떨쳤던 부랑자 중 한 명이기도 하지만, 나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년이기도 했다. 그녀의 성격이나 특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그에 맞춰 계획을 잡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껏 사용자들의 행동을 묵인한 것이다. 내 계획과 부합되는 행동을 해주는데 굳이 막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아무튼 이제는 계획의 첫걸음을 시작할 단계였다. “수현. 오셨네요. 그런데 그건…. 스튜? 왜 가져왔어요?” 공터 안으로 들어서자 고연주가 아는 체를 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데려온 부랑자를 들여보냈다. 사용자들은 딱히 별다른 행동을 취하고 있지는 않았다. 아마 고연주가 있어서 그런지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일렬로 꿇어앉아있는 부랑자들이 앞에 그릇과 물을 내려놓자 단박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나는 잠시 몸을 돌려 사용자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내 행동에서 뭔가 이상한 기류를 느꼈는지,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이의는 받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미를 담아 차분히 입을 열었다. “오늘 부랑자들의 감시는 저와 고연주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야영지로 돌아가 불침번을 서주세요.” 현재 이곳에 있는 사용자는 총 4명. 그 중 나와 고연주를 제외하면 총 2명이었다. 외팔이 사용자, 강간당한 여성 사제. 둘은 오늘 부랑자를 제대로 괴롭히지 못했다는 사실이 자못 아쉬운지 다들 시무룩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그때, 나는 뭔가 생각이 들어 돌아가는 한 명을 붙잡았다. “거기 사제님 잠시만요.” “네, 네?” “사제님은 잠시 이곳에 남아주시겠어요?” “……?” 여성 사제는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이며 발길을 돌렸다. 이윽고 외팔이 사용자가 혼자서 쓸쓸하게 야영지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위는 고요했다. 특별 손님 및 도우미 고연주. 만약을 대비한 사제. 그리고 부랑자 9명. 무대는 마련됐다. 나는 남몰래 입술에 침을 적시고 부랑자들의 앞에 섰다. 그들은 하나같이 파리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막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같잖은 짓은 그만둬.” 차가운 목소리가 내 말문을 막았다. 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돌리자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는 백서연이 보였다. “같잖은 짓이라. 뭘 그만두라는 거지.” 백서연은 눈앞에 놓인 스튜와 물을 보고는 사늘히 말을 이었다. “네가 밤마다 한 명씩 데리고 가서 무슨 짓을 하는지는 알고 있어. 꼴랑 음식 가지고 우리를 회유할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절대로 네 말을 따르지는 않을 거니까. 이 악마 같은 자식아.” “그건 네 생각이고. 그리고 악마라니. 말이 좀 심하잖아. 난 딱히 너희를 건든 기억은 없는데.” “하. 동료를 죽이고, 마력 회로도 네가 파괴했지? 우리를 이 꼴로 만들어 논 장본인인 주제에, 뭐가 어쩌고 어째?”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품속에서 연초를 한 대 꺼내 물며 뜸을 들였다. “그거 참 웃기는군. 애초에 도시를 습격한 것도 너희들이고 쫓아온 것도 너희들이야. 그리고 너희들은 포로로 붙잡혔지. 내가 적을 죽이지 않고 이 상황에서 포로 압송을 위해 마력 회로를 파괴하지 말았어야 하는 이유를 말해봐.” “…….” 백서연은 아무런 대답도 않은 채 그저 죽일듯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렇다고 딱히 거북하지는 않았다. 인간이란 원래 자기합리화에 능한 동물이니까. “뭐 확실히 건드리지만 않았을 뿐이지 방관한 것은 있지. 그리고 밤마다 그림자 여왕을 시켜서 정보를 캐낸 것도 있고. 너희 부랑자란 놈들은 그런 일을 당해도 싸다고 생각하거든. 개인적으로 말이야.”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부랑자들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놈들 중 일부 몇 명에게서 뭔가 기대하는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부랑자들은 지금까지 모진 고초를 당했다. 근 3주에 가까운 기간 동안 잠도 자지 못하며 사용자들에게 횡포를 당했다. 식량과 식수는 최소한으로 배급했다. 밤마다 걸리는 유혹의 눈동자에 정신을 오염시켜 황폐화를 가속했다. 그리고 이제 도시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들은 시시각각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지금 이 자리에서 부랑자들의 처우를 결정할 수 있는 최고 권력자가 자리를 마련했다. 지금까지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던 내가 미묘한 뉘앙스를 풍긴 것이다. 즉 부랑자들은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혹시나.'하는 생각을 품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뭔가 다른 이야기를 들어서 말이지. 부랑자들 중에서도 사정이 있는 자들이 있다고 하더군. 예를 들면 납치를 당했거나, 모종의 사정으로 부랑자가 됐다거나….” “푸. 놀고 있네. 그래서, 그런 사정이 있는 놈들을 따로 살려주겠다?” “백서연. 아직 내 말 안 끝났다.” “아 그래? 미안. 그런데 딱 한마디만 더할게. 개소리 집어치워. 네 시커먼 속을 누가….” “입 다물어.” 그 순간이었다. 내 말이 떨어지자 백서연의 그림자가 훌쩍 일어나더니 이내 그녀의 입을 꽁꽁 봉했다. “지금부터 내 허락 없이 함부로 끼어들면 죽는다.” 이윽고 눈가에 살기를 가득히 담아 뿌리자 부랑자들이 움찔하는걸 볼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살기를 풀고 현재 백서연에게 불만을 갖고 있다는 부랑자들을 응시했다. 그들의 눈은 아까와는 다르게 한없이 가라앉아있었다. “잘 들어. 사정을 봐주겠다는 소리가 아니다. 너희들 사정에는 관심도 없고 그렇다고 죄가 없어지지는 않잖아. 나는 도시로 돌아가자마자 규칙대로 너희들을 모두 재판에 올릴 생각이다.” “…….” “하지만 개중에는 아주 조금이라도 억울한 사람도 있겠지. 아니면 다시 사용자로서의 신분을 획득하고 새 출발하고 싶은 부랑자도 있을 테고. 어쨌든 나는 기회를 주겠다는 말이야.”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아, 정확히는 침묵은 아니었다. 백서연이 어떻게든 말을 하려는지 용을 쓰는 소리가 들렸으니까. “그럼…. 살려주시겠다는 말입니까?” 그때였다. 피곤에 찌든, 조심스럽게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아까 전 스튜를 한 숟갈 먹은 남성이 보였다. 옆에서 백서연이 읍읍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어설픈 말로 구슬리기보다는 최대한의 사실을 말해주면 가능성을 열어주어야 한다. 모두의 시선이 나와 남성에게로 모인 가운데,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그건 장담할 수 없어. 아까 말했던 대로 나는 너희들을 모두 재판에 회부할 생각이야.” “으음….” “그전에 일단 내 소개부터 하지. 나는 머셔너리 클랜 로드 김수현이다. 그리고 저쪽은 그림자 여왕 고연주. 들어본 적 있어?” “예. 두 분 모두 들어본 적 있습니다.” 부랑자의 말투가 확실한 경어로 바뀌었다. 나는 속으로 확신을 가지며 태연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가 생각을 바꿨다면 길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지.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생각을 바꾼 부랑자들에 한해서 최대한 변호해줄 생각이다. 나와 그림자 여왕, 둘이서 말이야.” “그럼….” “그 뒤는 전적으로 너희들에게 달렸지. 만약에 억울한 사정이 있다면 밝혀질 것이고, 죄가 있다면 죄를 덮을 만큼의 공을 세워야 할 거다.” “공이라면…. 정보를 팔라는 말씀이십니까.” “잘 생각해. 이미 이번 전쟁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알아낸 상태니까. 하지만 우리라고 전부 알아냈다고는 생각지 않아. 저기 백서연이야 두말할 것도 없이 처형…. 아니, 처형만 당하면 다행이지. 아무튼 너희들이 저 정도는 아니잖아. 가서 실컷 고문당하고 정신조작으로 정보만 뱉다가 죽을 건지, 아니면 자의든 타의든 이왕 뱉어낸 거 확실하게 전향하고 구명 줄을 잡을 건지. 아, 서비스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앞으로 도시에 도착하기까지 비교적 정상적인 포로생활도 보장해주지. 그리고….” 나는 뜸을 들이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한마디 더 덧붙여주었다. “스스로들도 느끼겠지만, 마력 회로는 아직 살아있을 거다. 조금 시간은 걸리겠지만 신전의 힘을 빌면 충분히 회복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자, 잠시만….” “내가 해줄 말은 여기까지야. 더는 이런 얘기를 꺼낼 일도 없을 거고…. 아무튼 결정해. 이대로 자살을 하던가, 고생하면서 개죽음을 당하던가, 아니면….”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곤 이미 식어버린 스튜 그릇과 생수를 조금 더 앞으로 내밀었다. “내 말을 듣고, 먹던가.” 그때였다. 내게 처음 말을 건 남성이 바로 앞으로 튀어나오더니,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그릇에 머리를 처박았다. 이윽고 게걸스럽게 스튜를 먹기 시작하는 그를, 백서연은 믿을 수 없다는 눈동자로, 다른 부랑자들은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동자로 응시했다. 그리고 난 흡족한 기분을 느낌과 함께 그 광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더 없어?” “…….” “없으면 말고. 그럼….” “자, 잠시만요!” * 나는 신기한 마음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득 담았던 스튜와 물병은 따로 설거지를 할 필요도 없이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한결 안도한 얼굴로 연초를 피고 있는 남성과, 나중에 추가로 걸어 나온 여성 부랑자 한 명이 보인다. 여성은 입가에 스튜를 잔뜩 묻힌 채 고연주가 먹여주는 물을 삼키고 있었다. 결국 내 말에 넘어간 인원은 총 두 명이었다. 나머지 일곱 명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몇 명은 혹한 것처럼 보였지만 미친 듯이 읍읍소리를 내는 백서연의 눈치를 보는 건지 아직 나서지 않고 있었다. 아직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솔직히 말하면 말은 번지르르하게 했지만 나중에는 다 죽일 생각이었다. 저런 부랑자들 백 명보다 백서연에게서 나오는 정보가 더욱 값어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얼마나 독종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일반적인 방법으로 정신을 망가뜨리는 건 힘들다. 해서, 나는 두 번째 계획을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고연주. 잠시 백서연 입 좀 풀어보세요.” “야 이 멍청한 새끼들아! 그 뭐 같지도 않은 말에 홀랑 넘어가? 너희들이 어떻게…!” “다시 막아요.” “읍! 읍읍! 읍읍읍읍!”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 뒤로 물러나 충분한 여유공간을 마련하고 고연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고연주. 지금 식량이나 식수 상황이 어떻게 되죠?” “둘 다 부족해요. 식량이야 보급하면 된다고는 하지만 식수는 근시일 내로 확보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럼 먹는 입을 조금 줄일 필요가 있겠군요. 어차피 두 명이 넘어왔으니 다른 놈들은 굳이 필요할 것 같지도 않고….” 나는 일부러 흘리듯 말하며 부랑자들을 쓱 훑어보았다. “고연주. 힘 좀 빌려주셔야겠습니다.” “얼마든지 빌려드릴게요. 대신 이자까지 쳐서 갚아주셔야 해요.” “어떻게요?” “침대에서요.” 잊을만하면 나오는 고연주의 성적인 농담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는 까르르 웃고는 내게로 다가와 물었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간단한 게임을 하나 할 생각입니다.” “게임이요?” “보시면 알 겁니다. 일단 저기 저 두 명을 다리를 꽁꽁 묶고 앞에 공간으로 놓아주세요.” 고연주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내 명령에 착실히 따라주었다. 이윽고 두 명의 여성이 그림자에 들려 각기 다리가 묶인 채 나와 부랑자들 사이에 놓여졌다. 한 명은 백서연의 심복이라고 알려진 이가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내 말에 반응을 보인 여성이었다. “그 다음에는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게임이 끝날 때까지만 그 상태를 유지해주세요.” 나는 말을 마치고 곧바로 일월신검을 뽑았다. 그리고 두 여성 사이를 가로질러 꿇어앉아있는 부랑자들에게로 다가섰다. 달빛을 받은 일월신검이 사늘한 빛을 뿜으며 남은 다섯 명의 얼굴을 비췄다. 나는 그 중에 아무나 고른 남성의 어깨를 짚었다. “잘 들어. 너는 저기 왼쪽에 있는 여성 팀.” “무, 무슨…. 어, 어!” 푹! 가볍게 배를 찌르자 남성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는 신속하게 다음 타자인 이해인으로 걸음을 옮겼다. “너는 오른쪽에 있는 여성 팀.” “아…!” 푹! 이해인은 복부에 칼을 찔린 채 입을 벌렸다가 뻐끔뻐끔 거리며 핏줄기를 토해냈다. 나는 칼을 거둔 후 품속에서 미리 준비해온 치료 물약을 꺼내었다. 그리고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흔들어준 후 나직이 입을 열었다. “게임 내용은 배틀 로얄. 지금부터 둘이 싸워.” “무, 무슨.” “싸우라고. 네가 이기면 이 부랑자를 살려주고. 네가 이기면 이 부랑자를 살려준다.” 나는 남성과 이해인을 각각 가리킨 후 백서연을 쳐다보았다. “으으읍! 으으으으으으으읍! 읍읍읍!” 백서연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발광하고 있었다. 나는 물약을 다시 품속에 넣은 후, 천천히 말을 이었다. “참고로 둘 다 이 상태면 10분 안에 죽는다. 싸워서 이기면 한 명은 사는 거고, 아니면 둘 다 죽겠지.” 백서연은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내 다시 자리로 몸을 처박는 게 고연주가 솜씨를 부린 것 같았다. “으으읍! 으으으으으으으읍!” 그리고 이가인과 나머지 여성 부랑자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서로만 쳐다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아, 정말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1시까지 재회 파트까지 써서 올리려고 했는데, 또 분량 조절에 실패했네요. 플롯을 짠 걸 보면 가능할 것 같았는데 막상 집필을 시작하면 왜 이렇게 되는지…. 이번에도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일단 이번 파트 소제목은 바꾸겠습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독자 분들의 깊은 양해를 바랍니다. _(__)_ PS. 리리플은 하루 쉬고 다음 회에 합쳐서 하겠습니다. 오늘 어머니 생신이라서 외식을 하느라 집에 늦게 들어와서요. 정신 없이 집필하다 보니 머리가 빙빙 돌아요. ㅜ.ㅠ 0317 / 0933 ---------------------------------------------- 재회 & 귀환 공격으로 나온 이가인과 구원을 기다리는 부랑자 남성, 정현우. 공격으로 나온 다른 부랑자 여성, 신아영과 구원을 기다리는 이해인. 그리고 그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백서연. 게임은 시작됐다. 이가인이 이기면 정현우가 살 수 있고, 신아영이 이기면 이해인이 살 수 있다. 나는 흥미로운 마음으로 눈앞의 둘을 바라보다가 흘끗 백서연을 쳐다보았다. 입이 꽁꽁 막혔음에도 목이 터져라 소리를 내고 눈동자에는 핏발이 선 게 자못 살벌한 모습이었다. 괜히 대결을 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저렇게 팀을 짠 것에는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백서연은 조금 특이한 부랑자였다. 단순히 '부랑자'라는 말 한마디로 놈들을 일반화 시킬 수는 없겠지만, 놈들은 원래 끼리끼리 모이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기에 사용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情)이라는 감정이 적은 편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르다. 백서연은 적에게는 비정하리만치 잔혹한 면모를 보이지만, 자신을 따르고 의지하는 부랑자들은 끔찍이도 아끼는 부랑자였다. 어떻게 보면 나와 비슷한 면이 있다고 해야 할까. 내가 기억하는 그녀는, 그런 인간이었다. 나는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백서연은 독종이다. 이미 유혹의 눈동자도 실패했고 어떤 모진 고문을 가한다고 해도 자의로 정보를 뱉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신조작을 통해 정보를 알아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그녀의 정신력이 예상외로 막강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백서연이 자살을 강제적으로 막으면서 그녀의 정신을 망가뜨려야 한다. 다행히도 백서연이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였다. 이미 도시 습격에 성공한 상황에서 굳이 추적대까지 편성해서 쫓아온 것을 보면 대강 그림이 그려졌다. 그럼 어떻게 하면 그녀의 정신을 망가뜨릴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나는 우선적으로 백서연 주변의 부랑자들에게 초점을 맞췄다. 그녀의 성격과 부랑자들간의 관계를 잘 비틀어보면 길이 열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백서연을 잡은 것은 예상외의 수확이었다. 이 수확을 잘 이용할지 아니면 망칠지는 오롯이 내 손에 달려있었다. 급하게 갈 필요는 없다. 고연주의 말대로 천천히, 느긋하게 갈 생각이었다. 해서, 나는 제 3의 눈으로 아직도 서로를 멀거니 보고만 있는 둘을 응시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이가인(3년 차) 2. 클래스(Class) : 망상 마법사(Rare, Delusion Sorceress, Master) 3. 진명 · 국적 : 백치 미인(Beautiful Fool) · 대한민국 4. 성별(Sex) : 여성(22) 5. 성향 : 혼돈 · 우울(Chaos · Gloom) [근력 16(-22)] [내구 8(-18)] [민첩 10(-14)] [체력 14(-32)] [마력 30(-64)] [행운 80] (능력치 포인트가 0포인트 남은 상태입니다.) (사용자의 마력 회로가 70% 가까이 손상된 상태입니다. 근래 몸의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행운 능력치를 제외한 전 능력치가 하락했으며 이 상태가 지속될 경우 영구적인 능력치 손실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미 자체적인 회복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엘릭서 한 병 또는 최소 6개월 이상은 정양해야지만 완치할 수 있습니다.) 유혹의 눈동자를 통해 한가지 알아낸 사실은 이가인과 이해연은 백서연의 심복이라는 것. 이가인은 직접 부랑자로 만들었다고 했고, 이해연은 통과의례 시절부터 함께해온 사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부러 둘을 찢어놓은 것이다. 누가 이기든 누가 지든 결과는 똑같다. “3분 경과. 참고로 무승부 같은 건 없다. 저 둘이 죽으면 너네 둘도 똑같이 죽는 거야.” 나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극한까지 몰린 부랑자들이었다. 그런 내 말이 촉매가 되었는지 비로소 한 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움직인 부랑자는 신아영이었다. 양다리는 그림자로 인해 꽁꽁 묶인 상태에서 팔로 바닥을 기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가인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아직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신아영은 이가인의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온갖 마이너스한 감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신아영은 잠시 이가인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거세게 손을 휘둘렀다. 짝! 얼마나 세게 쳤는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이가인이 얼굴이 대번에 돌아갔다. 신아영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이가인의 고개는 마치 굳은 것처럼 돌아간 그대로를 유지했다. 이윽고 이가인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고 입이 서서히 벌어질 즈음 다시 한 번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퍽! 퍽! 처음은 어렵지만 그 이후부터는 쉽다. 신아영은 첫 번째 가격 이후 거침없이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비록 현재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곤 해도 전투 경험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신아영은 얼굴을 집요하게 노리며 양손을 휘둘렀고, 이가인은 그저 속절없이 당할 모양인지 때리는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고개만 늘어뜨리고 있었다. “읍! 으읍! 으으으읍! 으으으으으으으읍!” 한쪽은 때리고 한쪽은 맞는다. 이미 싸움이라고 보기에도 민망한 모양새였지만 그것은 점점 격렬함을 더해가고 있었다. 어느새 이가인의 볼은 벌겋게 부어 올랐고 입에서는 가느다란 핏줄기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백서연의 비명에 가까운 소음이 들렸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고연주에게 고개를 돌렸다. “고연주. 풀어주세요.” “네? 백서연을요?” “예. 다리는 여전히 구속해두시고 다른 건 모두 풀어주세요.” “수현도 정말. 어지간하다니까요. 알았어요~.” 고연주는 헛웃음에 가까운 웃음을 흘리고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러자 백서연을 감싸고 있는 그림자가 일부 떨어져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몸이 한 번 크게 들썩였다. 이윽고 백서연은 몸의 구속이 해제된 것을 알아차렸는지, 곧장 중앙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이 멍청한 자식아!” 백서연이 아무리 외쳐도 신아영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녀가 중앙에 도착하고 신아영을 거칠게 밀치고 나서야 게임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신아영! 너 미쳤어? 지금 저 새끼 말에 놀아나고 있는 거 몰라?” 백서연이 눈을 부라리자 신아영은 약간 고개를 떨궜다. 그러자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가 고개를 따라 늘어지며 신아양의 얼굴을 감싸 들었다. “정신 차려! 너….” 이윽고 백서연이 한차례 더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 사이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비켜.” “뭐, 뭐?” “비키라고 이 씨발년아!” “너 지금 뭐라고…?” “다 너 때문이야! 네가 추적하겠다고 억지만 부리지 않았어도…! 내, 내가 지금 왜 이 꼴을 당해야 하는데? 다 너 때문이라고 이 씨발아아아아!” 신아영은 이제 거진 우는 목소리로 절규하고는 백서연을 거세게 밀치며 다시 이가인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녀는 일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곧 신아영이 손이 다시 이가인에게 닿는 순간 백서연은 신아영의 머리채를 잡았고, 신아영의 얼굴은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하늘을 향했다. 그것이 바로 개싸움의 시작이었다. “놔! 안 놔? 노라고!” “너…. 그만해! 정신차려 이 미친년아!” “그, 그만. 그만. 그만. 그만.” 신아영은 머리를 바동거리다가 이내 몸을 뒤집으며 백서연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제압하려 애쓰는 것 같았지만 결국에는 똑같이 머리채를 붙잡히고 말았다. 서로의 머리를 쥐어뜯고, 뒹굴고, 얼굴을 치고, 볼을 할퀸다. 이가인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둘을 말려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말 그대로 진흙탕 개싸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킥.” 그 순간 어디선가 미약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옆을 보자 아까 내가 붙잡은 여성 사제가 보였다. 사제는 이 광경이 그리도 우스운지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가늘게 어깨를 떨고 있었다. “재밌어요?” 담담히 말을 건네자 사제는 웃음을 뚝 멈췄다. 그리고 손을 내리더니 이내 당돌하게 느껴지는 눈초리로 대답했다. “네. 너무 재밌어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너무 통쾌하고, 너무 후련하고, 너무 속 시원해요. 미칠 정도로 말이에요.” “그렇군요. 그나저나 곤란하네요. 저래서야 누가 이겼다고 보기엔 어려운데.” “그냥 다 죽으라고 놔두면 안 돼요?” “그건 안되죠. 이긴 사람은 살려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니까요.” “아이 아쉬워라…. 어머?” 사제는 뭔가 굉장한 것을 발견했는지 예쁜 목소리로 감탄했다. 다시 중앙으로 고개를 돌리자 뜻밖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 만!” 백서연과 신아영의 꼴은 제법 웃겼다. 머리가 산발이 되었음은 물론이요 코피는 터져 흐르고 입술을 찢어져 피범벅이었다. 그리고 둘의 사이로,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이가인은 중앙으로 파고든 상태였다. 서로가 씩씩 숨을 몰아 쉬는 가운데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우…. 우….” 단순히 우는 건지 아니면 흐느끼는 건지 미묘한 소리를 내던 이가인은 서서히 고개를 올려 나를 쳐다보았다. 이가인의 얼굴은 예의 멍청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이전과는 사뭇 다른 결연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서로 눈을 맞춘 채로, 이윽고 내가 중앙으로 한 발짝 내디딘 순간이었다. 이가인은 잠시 고개를 돌려 이해인이 쓰러져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를 다시 보는 눈동자가 번쩍 빛을 발하는가 싶더니, 이내 몸이 한 번 크게 경직되었다. 뭔가 이상함을 느낄 새도 없이 입이 서서히 벌어지고 그 안에서 진득한 액체가 왈칵 쏟아졌다. “가, 가인아?” “아….” “가인아! 가인아!” '설마….' 혹시나 해서 사제를 대기시켜두기는 했다. 미처 예상치 못한 상황에 살짝 놀라는 마음이 일었다. 그러나 얼른 마음을 가다듬곤 재빨리 아래로 내려가 이가인의 상태를 살폈다. 바르르 떨리는 입을 억지로 벌려 안을 만져보자, 뜨끈한 핏물과 함께 절반 정도 잘라진 혀가 느껴졌다. 결국 이 상황을 견디지 못했는지 혀를 깨문 것이다. 나는 혀를 쯧쯧 차고 숙였던 허리를 바로 세웠다. “혀를 깨물었네.” “가인아? 가인아! 가인아아아아!” “야, 시끄러워.” 퍽! “아악!” 백서연의 고함이 거슬려 세게 배를 걷어차자, 그녀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가인을 바라보았다. 몸을 간헐적으로 떠는 것을 보니 아직 살아있었다. 혀를 깨물어 잘랐을 경우에는 쇼크사, 과다출혈, 질식사로 죽을 수 있다. 지금 당장에는 죽지 않겠지만 이대로 놔두면 확실한 사망이다. 주변은 조용했다. 들리는 것은 오직 여럿이 내쉬는 숨소리뿐이었다. 나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가 백서연과 신아영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는 걷어차인 충격이 남아있는지 복부를 부여잡은 채 고통스러워하고 있었고, 신아영은 멍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자, 문득 하나의 생각이 번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쩌면 이것도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신속하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신아영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지. 게임은 여기서 끝내도록 한다. 결과는, 백서연의 난입으로 무효다.” “그럼….” “죽는 거지 뭐.” 신아영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서린다. 나는 유유히 몸을 돌려 고연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흥이 깨졌네요. 고연주. 저는 야영지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남은 네 명은 알아서 처리해주시고, 이곳 좀 정리해….” 그렇게 돌아가려는 뉘앙스를 풍기며 발길을 돌린 순간이었다. 예상대로 누군가 내 발목을 붙잡는 게 느껴졌다. 악착같이 기어왔는지 아직도 한 손으로 배를 잡고 있는 백서연이 보였다. 나는 가볍게 발을 털었다. “그러게 누가 난입하래.” “…….” 백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발을 이용해 그녀의 고개를 강제로 한쪽으로 꺾었다. 이해연은 서서히 한계가 다가오는지 이미 쓰러진 상태였다. 그리고 간신히 고개를 들고 있는 눈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쟤는 너 때문에 죽은 거야. 아니. 어쩌면 얘나, 얘나, 아니면 저기 남성이 살았을지도 모르지. 아무튼 네가 반칙만 하지 않았다면 못해도 두 명은 살았을 텐데. 안 그래?” “…살려줘.” 덜덜 떨리던 백서연의 입술에서 비로소 첫마디가 튀어나왔다. 아까까지만 해도 거칠던 목소리는 한풀 꺾인 상태였다. 문득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묘하게 차오르는 의식의 정체는 바로 1회 차의 기억이었다. 엎드려있는 백서연의 모습에 누군가의 모습이 겹쳐 들었다. 나는 천천히 발을 올려 그녀의 머리에 발을 올렸다. 백서연이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살려달라고 말하는 주제에 너무 건방진데?' “살려달라고 말하는 주제에 너무 건방진데.” '기회를 줄게. 어머나, 다시 한 번 말해봐. 텔 미~. 텔 미~. 꺄하하하!' “다시 말해봐.” “살려…. 주세요….” 나는 코웃음을 치곤 발길을 돌렸다. 그렇게 서너 발자국 정도 걸었을 즈음이었다. 곧 쿵, 하고 머리가 바닥을 찧는 소리가 들렸고 후들거리는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 들었다. “게임…. 도중…. 난입한 것은….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동료들을 치료해주세요….” “…….” “제발…. 부탁합니다.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신다면….” 이제는 애절함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에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은 백서연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음…. 하기야 너도 난입한 죄는 있지만, 그래도 재밌게 싸우긴 하더라.” “…….” “좋아. 옆에 사제님도 네 난입이 재밌었다고 하시니 특별히 인심 좀 쓰지. 그럼 누굴 살려줄까?” “뭐, 뭐라고…. 요?” 백서연은 떠듬거리며 말했다. 나는 더 이상은 아무 말도 않은 채 그녀와의 거리를 줄였다. 그리고 품을 뒤져 미리 준비해놓은 치료 물약을 한 병 쥐어주고,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입을 열었다. “한 병이기는 하지만, 질 좋은 거야. 한 명한테 사용하면 오늘 게임에서 입은 부상은 완치할 수 있을 거다.” “…….” “두 명한테 나눠 써도 일단 살릴 수는 있겠지만…. 그럼 그만큼 효과가 떨어질걸. 세 명은 말도 안되고.” “그, 그런….” “아무튼 살릴 사람은 네가 정하라고.” 나는 백서연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곤 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일말의 미련도 없이 등을 돌려 걸었다. 이윽고 걷던 도중이었다. 한순간 고연주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지금껏 조용히 구경만 하다가, 나를 보며 조용히 미소를 흘렸다. “고마워요. 덕분에 좋은 구경했네요.” “기대에 부응했다니 기쁘군요. 아무튼 저는 사제님과 함께 야영지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이곳을 부탁합니다.” “세상에 천하의 백서연이 저럴 줄이야…. 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요. 걱정 말아요. 두 명만 처리하면 되는 거죠?” “예. 백서연의 선택이 끝나면 해주시면 됩니다. 오늘 하루만 고생해주세요. 그럼 사제님, 가시죠.” 그림자를 다룰 수 있는 만큼 부랑자들의 감시는 고연주 혼자만으로도 충분하리라. 나는 더 이상의 여지를 보이지 않기 위해 일부러 사제의 팔을 잡아 끌었다. 사제는 부랑자들을 한 번 쓱 훑고는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 “생각해보니까 그 여성은 참 불쌍하네요.” “예?” 야영지로 돌아가던 도중이었다. 경쾌함이 느껴질 정도로 걷던 사제는 낭랑한 목소리로 입을 떼었다. “맨 처음 싸웠던 부랑자요. 제일 열심히 싸웠는데 이제 선택을 기다리는 처지잖아요.” “아아.” “일부로 그러신 거죠?” 사제의 물음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않았다. 확실히 나는 고연주에게 두 명을 처리하라고 했다. 신아영은 죽을 만큼의 부상은 입지 않았지만 만일 선택을 받지 못한다면 그녀에게 죽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한 명을 죽이고 다른 한 명을 살리는 것이라 볼 수 있었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면 불합리의 극치였지만, 아무런 마음도 들지 않았다. 상대는 부랑자였다. “아, 불쌍해라. 지금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있을까요? 깔깔.” '불쌍하다 라. 과연.' 사제의 불쌍하다는 말에 나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어쩌면 도시로 들어가기 전, 지금 이곳에서 죽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아니, 확실히 그럴 것이다. 말로는 살려준다고 했지만 실상은 그럴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으니까. 이후 우리는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야영지에 도착했고, 교대 시간까지 아무 이상 없이 불침번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예상대로, 부랑자들은 9명에서 7명으로 줄어들어있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는 이가인과 이해인을 확인한 후, 나는 에덴을 향한 출발을 알렸다. 이제 도시는 금방이었다. ============================ 작품 후기 ============================ 백서연은 정신력이 강하다는 설정입니다. 그런 만큼 일반적인 신체에 가하는 고문이나 성적인 고문으로는 굴하지 않는 여성이죠. 다만 누구나 그렇듯이 약점은 있고, 그 약점은 본문에 나온 백서연의 성격입니다. 다만 어느 분께서 그러셨듯이 백서연은 이미 포로로 잡힌 상태입니다. 약점을 세게 찔렀다고 해서 자의로 정보를 뱉지는 않겠죠. 그래서 천천히 정신을 흔들어나갈 예정입니다. 도시로 돌아가서도 그러한 과정은 이어지고, 방법 또한 많아질 겁니다. 그리고 오늘 아주 약간의 회상 내용을 넣었습니다. 내용 자체는 간단합니다. 요즘 시점 변환이 잦아 몰입도가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와 중간에 일부만 삽입했습니다. 추후 적절한 기회가 닿으면 해당 내용은 추가로 삽입하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개학이 다가오다 보니 제가 알게 모르게 마음이 많이 급해진 것 같습니다. 이번에 23학점을 신청했거든요. 아직도 그런 면이 없잖아 있지만, 쫓기듯이 쓰는 건 스스로 사양하고 싶습니다. 다시 예전의 차분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항상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 리리플(315회) 』 1. 라무데 : 1등 하셨군요! 하하. 축하합니다. :) 이번 회도 재밌게 읽어주세요~. 2. 킹슬레이 : 지적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요즘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완결을 앞당기려면 최대한 제 것을 지키면서 스스로도 조금 빨라질 필요성을 느꼈거든요. 느리게 쓰는 게 습관이 되다 보니 하루 만에 고쳐지지가 않네요. 다른 작가님들께 조언은 구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생략과 압축을 공부하는 중입니다.(쫓겨서 하는 건 아니고, 스스로 필요하다 여겨서 하는 겁니다. 하하.) 3. 서비스 : 최대한 이용하고, 필요한 것들만 빼먹고 죽여야겠죠. 그게 주인공의 성격에 알맞다고 생각합니다. 4. NinthSky : 음. 재미있는 생각이십니다. 저도 한 번 상상해봤는데, 잘 살고 있다가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나타나서 죽어라 이 원수야 하면. 음. 하하. 조금 그렇네요. 5. 애독자C : 이제 해탈했습니다. 하하. 로유미든 로유나든 로유라든 뭐든 좋습니다. 『 리리플(316회) 』 1. 오어더주 : 오, 1등 축하합니다. 뭔가 익숙한 분들이 보일 것 같았는데 아니라서 놀랐습니다. :D 2. 소비에 : 아마 제가 더욱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최대한 지루함을 덜 느끼시면서 추후에 일어날 일에 뜬금없다고 느끼지 않으실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요. 많이 어렵겠지만요. 하하. 3. 천연천연 : 그분들에게는 제가 부랑자의 잔인함에 대해서 묘사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_(__)_ 아. 추후 백서연의 입에서 나올 정보를 기대해주세요! :) 4. 라티인형 : 한가지 힌트를 드리면. 하하. 아, 뭐라고 말씀 드려야 할까요. 힌트가 너무 크네요. 이번 전쟁 파트에 출현할 예정입니다. 5. 일렌 :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저 자신만의 색깔을 유지하면서 독자분들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고 싶네요. 하하.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318 / 0933 ---------------------------------------------- 재회 & 귀환 나는 귀환 길에 오르며 간간이 부랑자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제 남아있는 일곱 명 사이에는, 냉랭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백서연에게 건네준 물약은 정확히 두 명을 살릴 수 있는 양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선택한 사용자는 심복 이가인과 이해인이었다. 과연 정현우와 신아영은 죽어가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남은 부랑자들은 그것을 어떤 마음으로 지켜봤을까. 정답은 나왔다. 결국 그날 밤 이후로, 백서연과 그녀가 살린 두 명을 제외하고 모조리 전향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백서연의 기세는 확실히 꺾였다. 아무리 독한 그녀라도 그날의 게임은 기억에 남는지 시종일관 어두운 표정을 보여주었다. 사용자들은 처음에는 부랑자들의 수가 줄어든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제가 말을 잘 해주었는지, 곧 내가 원하는 행동들을 해주었다. 이후로 한가지 변한 것이 있다면 사용자들의 괴롭힘이 백서연과 심복들에게로 집중됐다는 것이다. 나머지 네 명은 잘 대해줬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괴롭힘이 전보다 상당히 줄어들었고 식량과 식수도 정상적으로 배급해주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나름의 진을 유지한 채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삼림에 이어서 나온 초원은 사흘 전에 벗어날 수 있었다. 수풀이 가득 차 있던 풀밭 다음에 나온 지역은 황량한 벌판이었다. 초원과는 대조적으로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거칠고 쓸쓸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사방이 탁 트여있는 것은 초원과 별반 다를 바 없었지만, 나는 모래 벌판에 들어선 후 약간 안심할 수 있었다. 이곳부터는 확실하게 기억에 있는 곳이었기에, 예전처럼 익숙히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해서 난 중간중간 꼭 필요한 휴식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행군으로 밀어붙였고, 그 결과 예상보다 빠르게 벌판의 중간 지점으로 불리는 '왕의 무덤(King's Tomb)'에 다다를 수 있었다. “우와.” “와아. 와아.” 안솔과 암살자 소녀, 구예지는 발굴된 유적을 보며 연신 경탄을 터뜨리고 있었다. 왕의 무덤은 기본적으로 펜타그램(Pentagram : 오각형 별 모양의 형태로써 성스러움을 상징한다.)과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으며, 중앙에 우뚝 솟아있는 성소는 마치 피라미드와 같은 웅장함이 감돌고 있었다. 안솔은 구예지와 한참 뭔가를 쑥덕이더니 이내 내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그리고는 머리에 물음표를 동동 띄우며 내게 질문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이. 궁금한 게 있어요.” “응. 뭐가 궁금한데?” “여기가 아주버님이 발견하신 왕의 무덤이잖아요. 그런데요오. 이렇게나 커다란데 왜 지금까지 발견이 되지 않은 거예요?” “아. 그건 간단해. 너 혹시 예전에 비비앙의 던전을 발견했을 때 기억나니?” 역으로 질문을 던지자 안솔은 잠시 동안 눈을 끔뻑거렸다. 하지만 곧 물음표가 느낌표가 바뀌는 것으로 보아, 해답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그녀는 짝 소리가 나도록 손뼉을 치며 대답했다. “아! 진로 결계군요!” “그렇지. 역시 똑똑하구나. 그런데 왕의 무덤을 형이 발견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며 묻자, 안솔은 몸을 배배 꼬며 헤실 거리는 얼굴로 대답했다. “헤헤. 또, 똑똑하다뇨…. 그냥 예전에 오라버니 방에 몰래 들어갔다가 우연히 읽게 된 기록에서…. 헤헤헤.” “응? 뭐라고?”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내 집무실에 있던 물건들이 가끔씩 없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물건이라고 해봤자 다 마신 찻잔이나 없어지는 정도라서 고연주가 치웠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흘끗 시선을 돌리자 잔뜩 얼어붙어있는 안솔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나 당황했어요.”라고 똑똑히 적혀있었다. “어, 어버버버.” “안솔. 너 이 녀석….” 엄한 목소리로 말하자 안솔은 합죽이처럼 입술을 딱 다물었다. 묵비권을 행사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이는 행동이었다. 아무튼, 이번 기회에 단단히 혼쭐을 내서 버릇 좀 고쳐놓겠다는 생각에 한 걸음 다가서려는 순간이었다. “수현.” 그때였다. 나를 부르는 고연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걸음을 멈춘 채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자, 잠시만요.” 고연주는 평소답지 않게 진중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녀는 모두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더니, 긴장한 빛을 역력히 드러내며 한 쪽을 응시했다. 나는 곧장 마력을 돋워 감각을 끌어올렸고, 고연주가 보는 방향으로 감지와 점유(Occupy)를 동시에 발동했다. 찌릿! '응?' 그 순간, 최대한 넓게 퍼뜨린 범위 안으로 강대한 마력의 기척이 느껴졌다. 얼마나 폭발적으로 기세를 뿌리고 있는지, 약간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몸에 미약한 저릿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고연주. 방향과 거리를.” “방향은 약간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아요…. 아니, 거의 비슷해요. 아주 일치하지는 않지만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분명히 마주칠 거예요. 거리는 아직 정확히 가늠할 수 없지만, 이렇게나 강대한 마력이라면…. 아마 곧….” “…….” “어떻게 할까요? 이대로 그냥 편하게 생각하기에는 살기가 너무 짙어요.” 고연주의 말에 나는 상념에 잠겼다. 내가 이 길을 선택한 이유는 에덴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왕의 무덤은 이미 공략이 완료된 상태고 안정화도 어느 정도 진행된 곳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크게 위험하지는 않겠다고 추측했는데, 예상이 빗나가버리고 말았다. 물론 다른 사용자들이 이 길을 이용할 수도 있겠지만, 현재 시국이 어수선한 상황이고 그냥 그런가 하고 넘기기에는 느껴지는 살기가 너무 짙었다. '아니 잠깐만. 이 마력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전투 준비를 지시하려던 나는 익숙히 느껴지는 마력에 들었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속으로 제발 아니기를 빌면서 사용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단 마력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제가 앞장서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이 올 수도 있으니 다들 나름의 준비는 해주세요.” 그렇게 말한 다음, 나는 마력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언니. 고마워요오….” “으, 응?” 문득 등 뒤로 안솔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속보로 20분 가량 걸었을까. 피부에 느껴지는 마력이나 살기의 강도가 점차 강해진다고 느낄 즈음이었다. 누가 바람 마법을 이용해 뛰어오고 있는지, 저기 앞에서 거친 흙먼지가 휘몰아치는 게 육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흙먼지의 중심을 가만히 관망했다. 그러자, 역시나 누군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걸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못살아 정말.' 안력을 돋워 그 '누군가'의 정체를 확인한 후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토록 아니기를 빌었건만…. 이윽고 흙먼지를 일으킨 주인공이 부근까지 들어온 순간 나는 조용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는 나를 한 번 흘끗 보고는 그대로 바람을 휘날리며 지나쳤다. 그리고 속으로 정확히 3초를 센 순간, 뒤에서 마력과 대지가 마찰하는 소리가 주변을 왕왕 울렸다. “수, 수현아?” “…후유.” 그 순간, 방금 전까지만 해도 피부를 찌릿하게 찌르던 살기가, 한순간에 사그라졌다. “수현아? 수현아!” “…어.” 흙먼지의 주인공은 바로 내 형, 김유현이었다. 제발 아니기를 바랬건만, 형은 내 기대를 무참히 깨뜨려주었다. “수현아…!” “형, 잠깐만.” 당장에라도 달려와 안을 것처럼 보였기에 나는 미리 형을 제지했다. “내 몸은 괜찮아. 아무데도 다치지 않았어. 그러니 일단 벌린 팔부터 내려줘.” “어? 어, 어.” 보는 눈이 많았다. “김유현과 김수현은 브라더 콤플렉스래요.”라는 소문이 나는 건 미연에 방지하고 싶었다. 형은 잠시 멈칫한 몸짓을 보이더니 이내 순순히 왼팔을 내렸다. “오른팔도.” “…….” '또 내 머리 쓰다듬으려는 거 모를 줄 알고?' 냉랭한 반응에 머쓱한 마음이 들었는지 형은 천천히 오른팔을 내렸다. 그러나 진한 아쉬움이 느껴지는 눈길로 내 머리를 쳐다보는 게, 혹시 꿀이라도 발라져 있는 건가 의심이 들었다. 이윽고 모두가 보는 가운데, 나와 형은 천천히 거리를 줄였다. “수현아. 어디 다친 데는 없니? 응?” “응. 조금 피곤한 거 빼면 몸은 괜찮아.” “후유…. 다행이다. 그럼 뮬에서 오는 거야?” “맞아. 그런데 형은 여기 웬일이야?” 딱히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이미 짐작하는 바가 있었기에 나는 날카롭게 형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형은 내 말투에 가시가 돋쳤음을 느꼈는지, 얼른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수현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서운하다. 네가 뮬로 간다고 했잖아…. 그런데 일은 터졌고, 동생 걱정은 되고….” “하…. 그래서, 지금 이렇게 아무 대책도 없이 혼자 온 게 잘하셨다.” “아니. 그건 아니고….” “조용히 안 해?”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를 높이자, 형은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도대체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만약 고연주가 마력을 눈치채어주지 못했다면? 그리고 내가 돌아오는 사실을 모르고, 길이 엇갈려 형이 그대로 뮬에 들어갔다면? 생각만해도 끔찍했다. 어쩌면 2회 차로 돌아온 보람도 없이 형을 이대로 보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동안 형을 노려보다가,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세차게 뛰는 가슴을 심호흡으로 가다듬었다. 그냥 다 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다못해 원거리 통신용 수정구라도 하나 구비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거기 몇천 명이 있는 줄 알아? 그런데 혼자 와서 뭘 어쩌겠다고….” “하하…. 수현아. 나 혼자 온건 아니야.” 뭔 소리를 하는가 싶어 눈을 뜨자, 형이 한쪽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한 무리의 사용자들이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 “헉, 헉, 헉, 헉!” “학, 학, 학, 학!” 탈출에 성공한 사용자들은 바닥에 쓰러져 숨을 몰아 쉬는 사용자들을 어색한 눈길로 보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빠르게 달려왔는지 일부 사용자들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있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우리가 구조대로 보일 지경이었다. 나 또한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형의 혼자오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당장에 보이는 인원만해도 머셔너리 클랜원 대부분에, 해밀 클랜원에, 심지어 한(韓) 클랜의 클랜 로드 성현민도 보였다. “오, 오빠?” “헉, 헉! 소, 솔아! 혀, 형! 헉, 헉!” 안솔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달려가자, 안현은 간신히 응답만 해주고는 다시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도끼눈을 뜨고 형을 돌아봤지만, 형은 어느새 먼 산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다시금 한숨을 쉬고 바닥을 짚고 있는 클랜원들에게로 다가갔다. 여러 사용자들이 있었지만 형 다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클랜원들이었다. 나는 허리를 꺾어 얌전하게 침을 뱉고 있는, 머리카락에 연한 푸른빛이 감도는 여성에게로 다가갔다. 이윽고 내가 다가온 기척을 느꼈는지, 그녀는 재빠르게 입가를 정리하곤 고개를 들었다. 여성의 정체는 정하연이었다. “…괜찮습니까?” “학, 학! 괘, 괜찮아요. 학, 학!” “…….” “학! 그런데, 왜, 질문이, 뒤바뀌었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요? 학!” 다들 숨이 차는 와중에도 정하연의 말을 들었는지 이곳 저곳에서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조금 쑥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클랜원들을 돌아보았다. 백한결과 아기 유니콘을 제외한 전원의 얼굴이 보였다. 모두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도 있었지만, 나를 보며 마음을 놓았다는 표정도 드러나있었다. 특히 이유정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자꾸만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목이 메이는 듯 애꿎은 눈만 쓱쓱 닦으며 코맹맹이 소리를 잇달아 내는 중이었다. 솔직히 약간 이해가 가지 않는 면도 있었다. 형이야 나를 좋아하니 그렇다 치더라도, 이들까지 나를 구하러 달려온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무튼 이들이 지금 이렇게 지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 동안 눌러왔던 긴장이 일거에 풀린 탓도 있으리라. 도대체 클랜원들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나는 결국 담담히 한 마디 툭 던지고 말았다. “다들…. 왜 왔어요. 번거로웠을 텐데.” “수현.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우리 클랜 로드고, 우리 클랜원인데 걱정되니까 왔죠. 살아있다는 걸 확인한 이상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어요.” “…제가 살아있다는 걸 확인했다고요?” “네. 비비앙씨 덕분에 알 수 있었어요.” 정하연은 간신히 숨을 가다듬었는지 본연의 목소리를 되찾은 상태였다. 이윽고 비비앙을 쳐다보자,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주는 세포가 퇴화했는지, 바닥에 대(大)자로 누워있는 한 명의 여성 연금술사를 볼 수 있었다. 비비앙은 자신의 얘기가 나온 것을 들었는지 누워있는 상태서 고개만 살짝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나와 눈을 마주치곤 건방지게 고개를 한 번 까닥이더니, 이내 자신의 품속을 뒤져 A4용지만 한 크기의 기록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바로 나와 비비앙의 (종속 노예) 계약서였다. ============================ 작품 후기 ============================ 아이고. 오늘도 덥네요. 날이 도대체 언제쯤 시원해질지 궁금합니다. 실은 지금 와서 밝히는 건데, 제가 김수현이라는 캐릭터를 잡을 때 모티프로 잡은 캐릭터가 있습니다. 공공의 적 강철중이란 영화의 이원술이란 캐릭터죠. 그때 과수원에서 강철중과 이원술이 만났는데, 강철중이 한 말이 희미하게 기억나네요.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네 자식은 좋은 것만 보여주고 좋은 것만 하게 해주면서(?) 남의 자식은 그 따위로 취급하냐.” 대강 이런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하. 저는 나름 재밌게 봤으니, 혹시 아직 보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추천할게요! :D 『 리리플 』 1. 삼권분립 : 1등 축하합니다. 말씀대로 스피드 하게 1등을 차지하셨군요. 하하. :) 2. 블라미 : 아이고. 무려 5일 동안이나…. 어디서 지내셨길래…. 흑흑. 아. 예전에 리리플로 똑같은 질문을 하신 분께 간단한 답변을 드렸는데, 부랑자에 대한 모든 것은 여기 설명하려면 너무 길어질 것 같네요. 흠. 이유야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사용자와 부랑자로 구분 짓는 것이 아니라, 더욱 세분화할 수도 있습니다. 제대로 설명하려면 부랑자가 만들어진 '기원'과 현재 그 '기원'이…. 음. 이건 스포일러가 되므로 비밀로 하겠습니다. 하하. 차후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내용을 넣도록 하겠습니다. :) 3. 우사인볼트 : 쿠폰 감사합니다. _(__)_ 앞으로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4. 이터시온 : 예. 알겠습니다. 아마 다음 회 즈음에는 귀환에 완료한 수현 일행을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하하. 재미있는 것들이 많이 남아있네요. :) 5. 유운[流雲] : 수정 완료했습니다. 감사합니다. 6. 명박짱의양양합일 : 아니요. 저는 게이도, 여성도 아닙니다. 그저 건전한 이성관을 가진 남성입니다. 믿어주세요. 제발 요. ㅜ.ㅠ 7. 아키츠키 : 원래 인간은 자기합리화의 동물이라고 합니다. 저도 그런 적이 있거든요. 메모라이즈에서는 그러한 부분이 많이 반영되어있습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지요. 8. 초요 : 코멘트 감사합니다. 제 소설을 보시면서 항상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 지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9. zjekfksqlc : 제가 이번에 학점을 가득 채웠는데, 그렇게 힘든가요? 아직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감이 잘 안 와요. ㅜ.ㅠ 10. hohokoya1 : 감사합니다. 학점도, 소설도 모두 잡을 수 있도록 꼭 노력하겠습니다! :D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319 / 0933 ---------------------------------------------- 재회 & 귀환 클랜원들과 전혀 간단하지 않은 해후를 나눈 후(몇몇 클랜원들이 눈물을 글썽이는걸 달래느라 진땀을 빼야만 했다.), 나는 간신히 형에게 전후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형은 처음엔 해밀 클랜원들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홀로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내 행적을 쫓은 머셔너리 클랜원들이 때마침 방문했고, 비비앙의 계약서로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의기투합해 나를 되찾으려는 구조대를 조직했다고 한다. 아무튼 별일이 없었다고는 해도 구조대를 조직해준 것은 나름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눈앞에 보이는 사용자들은 하나뿐인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마당에 발 벗고 나서준 이들이었다. “살아있다는 걸 확인했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데….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려요.” 정하연은 양손을 가슴에 얹은 채, 애틋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킁. 나도. 정말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유, 유정양. 이제 그만 눈물 좀 닦으세요. 리더가 곤란하겠습니다. 하하.” 신상용이 넉살 좋은 웃음을 보이며 말하자, 이유정은 흠칫 주위를 둘러보고는 손등으로 눈가를 닦았다. 그런 정하연과 이유정을 보며, 안현은 음흉한 미소를 짓더니 내게로 살금살금 다가와 속삭였다. “흐흐. 형. 형은 좋겠어요?” “응? 뭐가?” “형이 실종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난리도 아니었다고요. 특히 하연 누나랑 유정이, 그리고 임한나씨 셋은 완전히 눈물 바다가 되어서는요…. 아우, 부러워라!” “……?” 안현의 말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정하연과 이유정은 그렇다 치더라도, 임한나까지 눈물을 보였다는 말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슬쩍 그녀를 돌아보자 양손을 그러모은 채 뒤에서 조용히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임한나는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살포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궁수라서 귀가 밝아 그런지 안현의 속삭임을 들은 모양이다. 문득 그녀의 속마음이 궁금해졌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따로 알아봐야겠군.' 나는 그렇게 마음먹곤 차분히 입을 열었다. “아무튼 다들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저 때문에 놀란 클랜원이 있다면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형. 저는 형이 돌아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어요. 그리고 습격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거예요. 몸 성히 돌아오셨으면 된 거죠 뭐. 안 그래요 울보 아가씨들? 악!” 안현은 기어코 정하연과 이유정에게 얻어맞고 말았다. 이윽고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녀석을 보다가, 나는 아차 한 기분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어색한 얼굴의 영감님과 김한별이 있었다. 고연주와 안솔은 진작에 달려와 클랜원들과 해후를 나눴지만, 김한별 가엾게도 시종일관 고개만 숙인 채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어쨌든 안현 말대로 저와 클랜원들은 무사히 돌아왔으니 걱정은 이만 거두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소개가 늦었네요. 이번에 뮬에서 새로 영입한 영감님…. 흠. 사용자 이만성입니다. 김한별. 영감님. 이쪽으로.” 드디어 꿔다 논 보릿자루 신세를 면했다는 생각인지, 영감님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이번에 새로 가입하게 된 이만성이라는 사람입니다.” “반가워요. 저는 정하연이라고 해요. 이만성님의 가입을 축하해요.” “허허, 감사합니다. 시작부터 본의 아니게 클랜 로드께 민폐를 끼쳤지만,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저희들이야말로 잘 부탁해요. 아, 그리고 연세가 조금 있으신 것 같은데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되요.” 클랜원들 중에서는 정하연이 대표로 인사를 받았다. 영감님은 그녀의 첫인상을 좋게 보았는지, 푸근히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이윽고 자연스레 소개의 시간으로 넘어가는 광경을 보며 나는 간신히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때였다. ““머셔너리 로드.”” 동시에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몸을 돌리자, 나는 뜻밖의 인물을 한 명 발견할 수 있었다. 내 뒤에는 언제 다가왔는지, 두 명의 남성이 겸연쩍은 미소와 함께 서 있었다. 한 명은 아까 전에 본 성현민이었다. 그리고 남은 한 명은 바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신재룡이었다. “한 로드…. 그리고 사용자 신재룡씨?” “기억해주시는군요. 살아서 만나 뵙게 되어 다행입니다.” “아, 네. 그런데 두 분은 여기 어쩐 일로…. 그리고 신재룡씨는 아까 안 보이시던데요.” “클랜원분들과 해후를 나누시는 게 우선이라 생각돼 살짝 빠져있었습니다. 하하. 그리고….” 성현민과 신재룡은 잠시 서로를 보더니, 이내 신재룡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실은 저는 우연한 기회에 구조대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우연한 기회요?” 내가 되묻자, 신재룡은 멋쩍은 표정과 함께 대답했다. “예. 그때 탐험에서 돌아오고 나서, 이것저것 정리할 일들이 있어서요. 한동안 정신 없이 뛰어다니다가 겨우 정리를 마쳤을 즈음 머셔너리 로드가 생각났습니다. 도와주신 것도 있고 해서 인사라도 드리려는 찰나…. 실종되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저를 구하려고 구조대에 참가하신 겁니까?” 신재룡의 말을 들은 순간,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미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제 목숨을 구해주셨으니까요. 마침 머셔너리 클랜에 사제가 없다는 말을 듣게 되어 일말의 도움이라도 되고자 참가했습니다.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은인이 곤경에 처한 것을 알고서도 모른척하는 것은 금수만도 못한 행동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군요.” 나는 조금씩 답답해지기 시작하는 가슴을 가다듬으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내가 너무 세상을 삭막하게만 보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하지만 이내 기다란 한숨과 함께 생각을 흘려버리고, 이번엔 성현민으로 시선을 돌렸다. 성현민은 조금 창피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보더니, 쑥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실은 저는 지인의 부탁을 받아서요.” “지인이요?” “예. 지인이라기보다는 은인에 가깝지만…. 아무튼, 저는 예전부터 해밀 로드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모를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 하하. 죄송합니다. 괜히 눈치가보이네요. 설마, 머셔너리 로드가 해밀 로드의 친동생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습니다. 죄송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감사하네요.” 성현민의 말인즉슨, 나의 구조가 주목적이 아니라 최악의 경우 김유현을 설득하기 위해 참가했다는 소리였다. 오히려 신재룡의 행동이 이상한 거지, 홀 플레인에서는 이런 반응이 당연하기에, 나는 아무런 거북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현민은 잠깐 내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이내 흘끗 한쪽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은 부랑자들이 잡혀있는 곳이었다. “머셔너리 로드. 지금 이 자리에서 여쭈기엔 외람될 수도 있습니다만. 혹시 한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저기 잡혀있는 부랑자들에 관한 것인가요?” 부랑자라는 말을 꺼낸 순간, 잠깐이지만 성현민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역시…. 부랑자들이었군요. 익숙한 모습이 몇 명 보이길래, 혹시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잡으신 겁니까?” “뮬에서 탈출하면서 조금 판을 벌렸더니, 추적대로 쫓아오더라고요. 그래서 역으로 요격해 대부분 죽이고, 일부는 붙잡았습니다.” 아주 간단하고 명료한 대답이었지만, 그 대답이 지니는 무게는 전혀 가볍지 않다. 성현민과 신재룡의 나지막한 탄성이 들리는 가운데, 나는 떨떠름히 있는 부랑자들 중 백서연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녀는 주위가 제법 소란스러움에도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백서연이라는 부랑자를 알고 계십니까?” “백서연…? 그 악녀가 지금 이곳에 있습니까?” 혹시나 해서 물었는데, 성현민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예의 사람 좋던 얼굴이 한순간에 싹 굳어지는 게, 내가 순간 사람을 착각했나 싶을 정도였다. '아니, 의외가 아닌가?' 악명이라곤 해도 부랑자 중에서는 제법 유명한 백서연이기에, 성현민 정도의 인물이라면 들어봤음이 틀림없었다. “백서연을 알고 계십니까?” “알다마다 요. 빌어먹을, 그 악녀 때문에…. 아,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오면서 보아하니 백서연이라는 부랑자는 제법 이름있는 것 같아 보이더군요.” “이름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나저나 정말 백서연인가요?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서….” 말하면서도 이를 바득바득 가는 게,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사무친 게 있는 듯싶었다. 아무튼 적의 적은 동지라고 하니 나에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성현민은 정말 백서연이 잡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지 주의 깊게 그곳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만약 정말 저 부랑자가 백서연이라면….” “…….” “머셔너리 로드께서는, 북 대륙에 지대한 공을 세우신 겁니다. 특히 지금 상황에서요.” “하하….” 진심이 깃들어있는 성현민의 말에 나는 가볍게 웃음을 흘림으로써 대답했다. 과연 공을 세우는 선에서 끝날지 아니면 북 대륙, 아니 미래까지 뒤바꿀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 그렇게 구조대와 극적으로 합류한 이후, 우리는 함께 에덴으로의 귀환 길에 올랐다. 그리고 도시로 돌아가는 도중 나는 현재의 사정을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우선적으로 물어본 것은 헤일로에 대한 지원 여부였다. 성현민은 이 부분에 관해선 말을 아꼈다. 아직 공식적인 지원 요청이 오지 않았고, 자신들도 논의 중에 있다며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는 않았다. 다만 “이전까지는 워프 게이트도 제한했으면서, 침공이 일어나자마자 워프 게이트를 활성화하는걸 보니 조금 웃기더라고요.”라는 말로 완곡히 돌려 말해주었다. 습격 받은 도시를 제외하곤 아직 워프 게이트를 닫지 않았다고 하지만, 조금 더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아마 정확히 사실이 판가름 나는 시점은 서부 일반 도시 헤일로가 점령당하고 난 이후일 것이다. 아무튼 1회 차와 비교해보면 바뀐 것은 딱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부랑자들이 뮬을 먼저 기습하고, 그 다음으로 서부 도시를 침공했다는 것이었다. 이미 도로시와 베스는 서 대륙의 손에 떨어진 지 오래였고 이제는 헤일로마저 위험한 상황이었다. 특히 현재 적의 전력이 명확히 파악되지 않은 것도 있지만, 황금 사자와 우호 클랜들은 강철 산맥 원정의 실패에서 입은 피해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지원군을 편성하는 과정도 난항에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고 한다. 오죽하면 헤일로를 포기하자는 말까지 나온 상태니 안 봐도 비디오인 셈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말이 있다. 상대를 정확히 파악해야 대책을 세울 수 있는데, 뮬은 침공과 동시에 연락이 끊겼고, 도로시, 베스에서는 침공 사실과 구원 요청만 들어왔을 뿐이지 상세한 정보는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도시를 습격한 부랑자들을 직접(?) 잡아온 것은 말 그대로 천금보다 더한 값어치가 있었다. 특히 백서연은 거의 수뇌부 급에 근접한 부랑자인 만큼, 그녀가 뱉어내는 핵심 정보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리라. 결국 관건은 백서연의 정신을 얼마나 빨리 망가뜨리냐에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귀환 내내 생각하고, 고민하던 문제였다. 이미 지인들과 동행을 시작한 이상 저번과 같은 게임은 대놓고 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한 번 써먹은 방법이 또 먹힐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들었고. '좌우간, 지금은 도시로 돌아가는 게 우선이겠지.' 지금과 같은 제한된 공간에서는 선택할 수 있는 방법도 제한되어있다. 도시로, 클랜 하우스로 돌아가면 분명히 틈을 벌릴 수 있는 방법들이 나올 것이다. “…….” 천천히 상념에서 깨고 하늘을 올려다보자 푸른 하늘이 보였다. 문득 생각으로 가득 차있던 머리가 깨끗이 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귀환 내내 형에게 시달려 머릿속이 복잡했는데, 잠시 생각할 것이 있다는 핑계로 살짝 옆으로 빠져 나와 걷는 중이었다. “김수현, 김수현!” 왠지 좋은 기분에 한동안 하늘을 보며 걷고 있자, 누군가 폴짝폴짝 뛰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비비앙의 목소리였다. 잠시 후 힐끗 시선을 내리자 뭔가 잔뜩 상기된 얼굴을 쑥 들이 밀은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왜?” “네 형이 곧 에덴에 도착할 것 같다고 전해달래서. 그런데 왜 그렇게 하늘만 보면서 걸어?” “잠시 생각할게 있어서.” “무슨 생각? 어제 그거?” 나는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그 동안 고민은 나 혼자 한 게 아니었다. 마침 어제 불침번을 같이 설 기회가 있어, 비비앙에게 내 생각을 일부 털어놓은 상태였다. 상대가 그녀라면 부담 없이 말할 수 있는 사실이었고, 무엇보다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해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사실 지루한 시간도 때울 겸 겸사겸사 말했던 것도 없잖아 있었다.) “후후. 그렇구나. 뭐 좋은 생각이라도 났어?” “그냥 한두 개? 너는?” “후후. 실은 말이야. 내가 고민을 조금 해봤는데 말이지. 후후.” “?” 뭔가 자꾸 자신감 가득한 웃음소리를 흘리기에 나는 의심 반 기대 반으로 비비앙을 응시했다. 그녀는 내 눈길에 씩 입 꼬리를 끌어올리더니, 품속을 뒤지며 말을 이었다. “내게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그것도 두 가지나.” “뭔데. 애태우지 말고 말해봐.” “후후. 조금만 기다려보라고. 형씨.” “너 그 말은 또 어디서 배운 거냐….” 비비앙은 자그마한 목소리로 “안현.”이라고 대답한 후, 이윽고 양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오른 손바닥 위에는 하얗게 빛나는 구체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고, 왼손에는 두꺼운 책이 쥐어져 있었다. 질서의 오르도와 마볼로의 조교 일지였다. '아니, 오르도는 그렇다 치고…. 책은 왜 가지고 다녀?' 매우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일단은 들어볼 요량으로 차분히 비비앙의 말을 기다렸다. 그녀는 어울리지 않게 살살 눈웃음을 치고는 낭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전에 있잖아. 이 질서의 오르도에 적혀있던 구즈 어프레이즐에 대한 정보 기억해?” “구즈 어프레이즐?” 몇 개는 기억이 나지만, 아주 상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무튼 지금 확인하면 되는 일이기에 하얀 구체를 향해 제 3의 눈을 활성화 하려는 순간이었다. “에덴이 보입니다!” 누군가 크게 외치는 목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방에는, 말 그대로 동부 소도시 에덴이 작게나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바로 비비앙을 향해 말했다. “얘기할게 많아?” “응. 조금 많이.” “그래. 그럼 도시로 돌아가서 다시 얘기하자.” “후후. 좋아, 그 정도는 기다려주지. 네가 나에게 질서의 오르도를 준 것을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주겠어. 기대해도 좋다고.” 도대체 뭔 말을 하려고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리도 자신하는걸 보면 뭔가 뾰족한 수가 있는 것처럼 보이긴 했다. 이윽고 콧방귀를 팩 뀌고 돌아서는 비비앙을 보며, 만약 마르가리타처럼 조교를 한다는 둥의 헛소리를 지껄인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 작품 후기 ============================ 하하. 계약서가 사용되리라 예상한 분들이 몇몇 계시군요. 예. 계약서의 유무로 김수현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계약서의 조건에 사망 후 타인에게 인계한다는 직접적인 조건이 딱히 붙어있지 않았으므로, 김수현이 사망했다면 계약은 저절로 파기가 됩니다. 신전에 문의하면 계약에 대한 지속성을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죠. 물론 사망 후 조건도 넣을 수 있지만, 그러면 계약서의 무게가 훨씬 높아집니다. :) 『 리리플 』 1. 우사인볼트 : 하하. 1등 축하합니다. 예. 비비앙은 거의 반 노예나 다름없는 상태입니다. :) 2. MT곰 : 아이고. 학점을 가득 채워 신청하니 많은 분들이 겁을 주시네요. 하하하. 그래도 최대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3. 손자맨 : 저는 로유진이니 안심해도 되겠군요. 대관절 로유미라는 분은 누구신가요? ?ㅇ? 4. hohokoya1 : 그 동안 많이 쪼였으니 당분간은 훈훈한 내용이 나올 예정입니다. 물론 예외는 있겠지요. 부랑자들이 나올 때는…. :D 5. irenairis : 하하, 설마 요. 안솔을 제거하면 아마 제가 몰매를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6. NinthSky : 어, 어떻게 아셨나요. 현대에서 그랬습니다. 베개에 사진도 붙여놓았다는 설정이…. 농담입니다. :) 7. 메를리위 : 아마 조만간 아주버님에 대한 단어를 금지할까도 생각 중입니다. 하하. 8. araoj : 아니요. 과거에 대한 기록은 없었습니다. 그 기록은 일전에 고연주에게 부탁한 형의 행보에 대한 정보입니다. 9. 아나스키 : 재미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힘든 일 부디 좋게 해결되시기를 기원합니다! 10. 랑이만세 : 응원 코멘트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_(__)_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320 / 0933 ---------------------------------------------- 재회 & 귀환 “도, 도시다! 진짜로 도시에 들어왔다!” “살았어! 우린 살았어! 살았다고…. 어엉…. 어어엉….” 에덴으로 입성하는 순간 사용자들은 도시가 떠나갈듯한 환호성을 질렀다. 개중에는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것은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 아닌, 생환의 기쁨이 엿보이는 눈물이었다. 처음에는 3, 4일 정도 걸릴 거라 예상했던 일정이 3, 4주가 걸려버렸다.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었고, 나 또한 정말 오랜만에 보는 도시라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는 아니고, 오자마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난 남몰래 고연주를 불러내었다. “고연주. 그건 어떻게 됐습니까?” “네? 그거요?” 고연주는 처음에는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내가 지그시 응시하자 이내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아. 장비요? 당연히 잘 챙겨뒀죠~.” “오면서 보니깐 일부는 사용자들이 걸치고 있는 것 같던데요.” “네. 장비들이 너무 많아서, 최대한 꽉꽉 담았는데도 여유 공간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제 눈썰미로 괜찮다 싶은 것들은 전부 챙겨놨고, 나머지 파손은 됐지만 그럭저럭 쓸만한 것들은 걸치고 가자고 했어요.” 고연주의 말에, 나는 제 3의 눈으로 서로 자축하고 있는 사용자들을 훑어보았다. 그녀의 눈썰미는 좋은 편이지만 그래도 혹시나 모르는 일이었다. 재빠르게 장비 정보를 확인한 후,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다행히도 특출 날 정도로 좋은 장비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사용자들에게 약속한 소정의 보상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 말대로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로 파손된 장비들이 대다수였는데, 수리만 할 수 있다면 그럭저럭 쓸만할 것 같기도 했다. '지금 와서 받기도 모양새가 그런데…. 그냥 걸치고 있는 것들은 줘버릴까…?' 그렇게 생각할 즈음, 고연주가 조심스레 내게 말을 걸었다. “수현. 혹시 보상 문제를 고민하시는 거라면 저에게 생각이 있는데….” “예? 아, 예. 말씀해보세요.” “차라리 지금 걸치고 있는 것들은 가져가라고 하는 게 어떨까요? 그럼 사람들이 굉장히 고마워하지 않을까요…?” 끝말과 함께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린 것으로 보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부랑자들을, 특히 백서연을 포로로 잡아온 것은 분명히 북 대륙 전부를 휩쓸만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내가 있으니 자연스레 머셔너리의 이름도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소문을 내주는 데는 구출한 사용자들도 일조를 해줄 터였다. 한마디로, 고연주의 말인즉슨 어차피 당장 쓸 데도 없는 장비를 보상으로 제공해 좋은 인식을 심어주자는 소리였다. 입을 타고 전해지는 소문의 파급 효과는 익히 알고 있기에, 나는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그렇게 하시고, 금화랑 보석도 나왔다고 했죠?” “네.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금화는 500골드도 채 안되고, 보석은 20알 정도?” “보석은 놔두시고, 금화는 나눠주세요. 말도 적당히 잘 해주시고요.” “호호. 그럴게요.” 고연주는 예쁘게 웃으며 대답했다. 곧 몸을 돌려 사용자들에게 달려가는 고연주를 보다가, 나는 클랜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확히는 클랜원들과 함께 있는 신재룡이 목적이었다. 물론 가는 도중 다시 한 번 그의 정보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신재룡(4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사제(Normal, Priest, Expert)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불굴의 노력, 굽힐 수 없는 의지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42) 7. 신장 · 체중 : 176.2cm · 73.8kg 8. 성향 : 선 · 열정(Good · Passion) [근력 78] [내구 82] [민첩 74] [체력 90] [마력 84] [행운 68] '클랜은 해체된 것 같고…. 이 정도면 괜찮지.'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사용자 정보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준수하다고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성향이 마음에 들었다. 더구나 현재 머셔너리 클랜에 사제가 부족한 만큼, 이번 기회를 틈타 영입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재룡씨.” “아, 머셔너리 로드.” 이리저리 달라붙는 클랜원들을 헤치고 말을 걸자, 신재룡은 중년 특유의 부드러운 웃음을 보이며 대답했다. “근래 많이 힘드셨을 텐데…. 구조대에 참가해주신 것,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하!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그저 제 신념대로 행동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빚진 것도 있었고요.” “그렇군요. 아무튼 이대로 그냥 헤어지기에는 마음이 조금 그렇네요. 혹시 뭐 다음 일정이라도 있으신지…?” “아, 딱히 잡혀있는 건 없습니다.” 아직 적당한 자리는 구하지 못한 듯, 신재룡은 차분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거리낄 것이 없기에 나는 사심을 다분히 담아 입을 열었다. “그럼 머셔너리의 클랜 하우스로 초대를 하고 싶은데요. 따로 긴히 드릴 말씀도 있고 말이죠.” “아….” 신재룡도 4년 동안 홀 플레인에서 활동한 사용자였다. 내 말에 담긴 의미를 단번에 알아차린 듯 그는 약간 멍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가, 어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쯤 찾아 뵈면 될까요?” “하하, 너무 부담 가지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이왕 말 나온 김에 오늘 하루 묵으셔도 괜찮습니다.” 신재룡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테고, 나도 다짜고짜 가입하라고 강요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제야 당황한 마음을 진정시켰는지, 그는 한결 편안해진 낯빛을 띠었다. “수현! 얘기 끝났어요.” 그때, 등 뒤로 고연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른 몸을 돌리자, 이야기가 잘되었는지 그녀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뭐라고 하던가요?” “다들 만족한 얼굴이에요. 아니, 사실 만족하는 정도가 아니죠. 금화까지 주니까 엎드려 절이라도 할 기세던데요?” “과장이 심하시군요.” “정말인데….” 절이라. 하기야 습격으로 거의 모든 걸 잃어버린 상황에서, 내가 주는 보상은 가뭄의 단비와 다름없게 느껴질 것이다. 시선을 돌려 사용자들을 바라보자 우물쭈물 서 있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내 깊게 허리를 숙이는 조승우를 보며, 고개를 까닥임으로써 화답해주었다. 이로서 장비 문제도 해결했고, 신재룡에 대한 영입도 일단락 지었다. 이제 남은 것은 클랜 하우스로의 귀환뿐이었다. 다만, 그전에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눌 사람이 있었다. “수현아.”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싱겁게 웃고 몸을 돌리자 우뚝 서 있는 형을 볼 수 있었다. 형은 나에게 다가와 머리에 손을 얹으려고 하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래. 이제 어떻게 할거야?” “클랜 하우스로 돌아가려고. 너무 오랫동안 비워뒀거든.” “음. 그래 잘 생각했다. 클랜 로드라는 지위를 가졌으니, 이것저것 신경 쓰이는 일이 많겠지.” “어…. 어? 그, 그렇지 뭐.” 나는 새삼스런 마음으로 형을 응시했다. 당장 해밀 클랜 하우스로 데려가 보호하겠다고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반응이었다. 왠지 모르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형은 빙긋 웃어주곤 어깨에서 손을 떼더니, 내 뒤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마음 같아서는 제 옆에 두고 싶지만…. 수현이도 저와 비슷한 입장에 있다고 하니 어쩔 수 없군요. 동생을 잘 부탁합니다.” “호호. 클랜 로드에게는 항상 도움을 얻고 있는걸요. 오히려 저희가 최선을 다해 보필할 테니 염려 놓으세요. 해밀 로드.” “하하. 해밀 로드라니, 너무 딱딱하게 말씀하시는군요. 아무튼 이번에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볼 일이 있을 것 같네요.” “저도 만나 봬서 영광이었어요. 앞으로 잘 부탁 드려요.” '뭐, 뭐지?' 서로 호의 가득한 말을 주고받는 형과 정하연. 이윽고 가볍게 한 손을 맞잡는 둘을 보며 어안이 벙벙해질 즈음, 악수를 끝낸 형이 나를 슬쩍 잡아 끌었다. “수현아. 잠시 얘기 좀 할까?” “응? 응.” 뭔가 둘이서만 얘기할게 있는지, 형은 열 발자국 정도 걸음을 옮긴 후 입을 열었다. “이번에 구조대를 조직하면서, 그리고 도시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참 많은 생각을 한 것 같다.” “무슨 생각?” “너도 이제 어른이라는 생각.” “그거야 당연….” “응. 하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뭐랄까, 조금 서운하면서도 신기하다고 해야 할까? 중학교 교복을 입고 내 앞에서 빙글 돌면서 자랑하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훌쩍 커서 너를 따르는 사람이, 너를 원하는 사람들이 생겼구나.” '형. 그때는 지구에 있을 때고, 여기는 홀 플레인이잖아.' 뭔가 핀트가 어긋나는 말에 살짝 정신에 혼동이 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뭔가 쓸데없이 진지한 말투였기에, 태클을 걸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형의 말은 내 정신을 더욱 세게 강타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저 정하연이라는 여성 말이다. 네가 목숨을 구해준 여성이라지?” “어. 그런데?” “오면서 얘기를 몇 번 나눠봤는데. 참 괜찮더라. 형은 정하연씨라면 찬성한다.” “뭐?” '뭘 찬성해?' 속으로 기함하며 눈을 크게 뜨자, 형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사람 마냥 내 어깨를 두드렸다. “생각도 건실한 사람 같고, 뭣보다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참으로 깊은 여성이었어. 아무튼 너도 이제 다 컸으니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겠지만, 형은 마음에 든다.” “…….” “특히 이효을을 상대로 한치도 밀리지 않던 말솜씨가 압권이었지. 그래, 저 정도는 되어야지.” 도대체가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는 말에 정하연을 돌아보는 순간, 나는 비로소 형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하연은 뭔가 기분이 굉장히 좋은 듯, 연신 생글생글 웃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주위로,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는 고연주와, 고사리 같은 손을 꾹 말아 쥐고 있는 안솔을 볼 수 있었다. “…이만 가볼게.” “응? 아, 그렇지. 그런데 점심이라도 같이….” “아니 됐어.” 나는 딱 잘라 거절한 후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형제인데, 어찌 이리도 눈치가 없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 귀환 길에 함께했던 사용자들과 간단히 이별을 나눈 후, 우리는 곧바로 워프 게이트를 이용했다. 부랑자들을 모조리 끌고 감에 따라 사용자들의 시선이 빼곡히 쏟아졌지만, 그저 빠른 귀환에 집중한 결과 30분 안에 클랜 하우스로 도착할 수 있었다. “아유, 드디어 도착했네.” “흑. 너무 그리웠어요오….” 정문을 앞에 두고 뒤에서 들려오는 고연주와 안솔의 소리를 듣다가, 나는 문득 생각이 들어 부랑자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구조대와 재회한 이후 한마디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말을 듣지 않아도 놈들의 심정은 짐작할 수 있었다. 백서연, 이가인, 이해인은 죽어있는 얼굴로 내면을 드러내고 있었고, 나머지 네 명은 한껏 긴장한 표정과 함께 뭔가 낯선 시선으로 도시를 둘러보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부랑자들을 응시하다가, 미미한 턱짓과 함께 입을 열었다. “시작하세요.” ““““───. ───. ───. 마비(Paralysis).”””” 그와 동시에 들리는 마법사들의 주문 소리. 마비는 일반적으로 그리 수준 높은 마법은 아니지만, 사용자의 마력 능력치에 따라 커다란 효과의 차이를 볼 수 있다. 더구나 현재 부랑자들은 마력 회로가 망가진 만큼 70%는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마비 주문에 맞은 부랑자들이 속절없이 몸을 허물어뜨렸다. 이윽고 한 명 두 명 들쳐 엎는 클랜원들을 바라보다가, 나는 고연주가 들던 백서연의 몸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고연주. 미안하지만 잠시 상점에 좀 다녀와야겠습니다. 억제구가 필요합니다.” “괜찮아요. 그런데 억제구라면….” “질 좋은 걸로, 일단 세 세트만 사와 주세요. 상점용이면 보석 20알이면 충분할겁니다.” “알겠어요. 그런데 혼자 들고 오기는 조금 무거울 것 같은데….” 고연주가 나른한 목소리로 흘리듯이 말하자, 나는 대번에 안현을 향해 말했다. “안현. 따라가.” “감사합니다 형!” 뭐가 감사하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안현은 들고 있던 부랑자를 이유정에게 내던지며 환호했다. 이유정은 씨근거리며 비어있는 손으로 내던져진 부랑자를 쥐려다가, 이내 몸을 멈칫했다. 신재룡이 대신해서 들어준 것이다. 고연주는 한동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길로 안현을 바라보더니, 입술을 삐죽 내밀며 몸을 돌렸다. 곧 번화가 너머로 사라지는 둘을 확인한 후, 나는 클랜 하우스의 정문에 다가섰다. 문 뒤로 두 명의 기척이 느껴졌다. 정하연이 백한결에게 통신을 보냈다고 했으니, 아마 녀석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나는 천천히 정문을 열었다. 그리고 내부로 한 발짝 들어간 순간이었다. “뀨!” 그 순간, 낯설지 않은 소리와 함께, 뭔가 은빛으로 빛나는 뾰족한 것이 내게 쏜살같이 파고들었다. ============================ 작품 후기 ============================ 음. 독자분들께 한가지 여쭈고 싶은 게 있습니다. 지금까지 실베스터 님께서 그려주신 표지가 세라프, 고연주가 있는데요. 혹시 위 둘을 제외하고 독자분들께서 보시고 싶은 캐릭터 표지가 있으신가요?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만약 있으시다면, 코멘트로 달아주시면 다음 표지는 가장 많이 나온 코멘트로 추진해볼까 생각 중입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조언 부탁합니다. _(__)_ 1. 우사인볼트 : 1등 축하합니다. 하하. 첫 코의 감을 잡으셨군요. 저에게도 좀 알려주세요. 제 소원 중 하나가 자정 업데이트 때 1등 한 번 해보는 거랍니다. :D 2. 삼권분립 : 하하. 카오스 미믹도 챙길 예정입니다. 전쟁 때 들고 가면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겁니다. 3. 데바란 : 감사합니다. 학점은 겁이 조금 나지만, 최대한 열심히 해볼 생각입니다. 4. 쿠로시온 : ☆. 5. 깨똥이 : 수정 완료했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6. 몽구헌터 : 침략 순서는 서부 소도시 -> 일반 도시 -> 바바라로 이어집니다. 지금은 일반 도시 공략 바로 전에 있는 상황입니다. 7. 피네이로 : 예. 그 대단했던 마볼로도 정신조작은 미숙하다는 설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비비앙이 상대방의 정신을 조종할 수 있다면 설정에 어긋나겠지요. 영혼 명령자라면 모르겠지만 말이죠. :) 8. 다힛 : 지금 1차 교정본의 일부를 받았습니다. 지금 19세를 붙일까도 생각 중입니다. 하하. 9. 도피칸 : 예. 조만간 방법을 구상하고, 본격적인 출격 전에는 그렇게 만들 생각입니다. :) 10. 닉네임중복 : 그럼요. 비비앙은 절대 착하지 않아요. 처음 했던 일들을 생각해보면…. 그리고 성향도 그렇고요.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321 / 0933 ---------------------------------------------- 無 애당초 문 뒤로 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재빠르게 손을 놀려 번쩍이는 뿔을 잡아챘다. 그리고 시선을 아래로 기울이자, 내 손에 뿔이 붙잡힌 채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아기 유니콘이 보였다. 녀석은 매달린 채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보이기 시작했다. “오랜만이다.” “뀨뀨뀨! 뀨뀨뀨뀨뀨!” 나는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뭐가 그렇게도 서러운지, 아기 유니콘은 빽빽거리는 울음소리로 대답하더니, 곧 네 다리를 허공에 마구 휘젓기 시작했다. 그 기세가 자못 대단해, 나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녀석을 바닥에 내려주었다. 하지만, 내려준 것을 곧바로 후회하고 말았다. “뀨뀨! 뀨뀨뀨! 뀨뀨뀨뀨뀨!” “야, 야.” “뀨뀨, 뀨뀨뀨뀨뀨? 뀨뀨, 뀨뀨뀨뀨뀨?!” “아, 알았어. 잠시만…. 야, 야!” 이어진 아기 유니콘의 행동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더니, 말 그대로 난동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자기가 강아지인줄 아는 건지, 아기 유니콘은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펄쩍펄쩍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뿔로 꼭꼭 찌르고 다리로 몸을 두들기더니, 종래에는 바닥에 발라당 나자빠져 몸부림을 치기까지. 꼭 어린아이가 생떼를 부리는 것 같은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얘 왜 이래?” “…반가워서 그럴 거예요.” 문득 앞에서 들려온 고운 음색에 고개를 들자, 수줍은 듯이 서 있는 백한결이 보인다. 그녀는, 아니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 약한 미소를 보내더니 산뜻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클랜 로드님이 안 계실 때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지냈거든요. 그랬다가 무사하신 모습을 보니 안심하기도 했고…. 아마 그래서 그런 게 아닐까요?” 백한결의 설명에 나는 새삼스런 눈길로 아기 유니콘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이제야 숨이 차는지 할딱할딱 숨을 몰아 쉬며 널브러져 있었다. 천천히 손을 내뻗어 아기 유니콘을 안아 올리자, 녀석은 비로소 얌전한 태도를 보이며 내 품에 얼굴을 비볐다. 나는 보드랍고 따뜻한 등을 약하게 토닥여주었다. “뀨…. 뀨….” “아…. 어떡해…. 쟤는 정말 오빠가 좋은가 봐~.” “아이 귀여워라~. 유니야아~. 나도 여기 있는데….” “크흠. 이만 들어갑시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흐뭇한 시선에 얼굴이 더워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차분히 클랜 하우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윽고 정원을 지나쳐 로비에 도착하기까지 훑어본 결과, 클랜 하우스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평소 관리에 소홀하지 않았다는 방증이었다. 흡족한 마음과 함께 바로 회의실로 가자고 말하려는 순간, 간절한 눈초리를 보내는 얼굴들이 문득 눈에 밟혔다. 하나같이 지친 기색이 역력한 게 얼른 쉬고 싶다는 티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현재 심정 같아서는 바로 대책 회의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나는 바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뮬에서 함께 탈출한 세 명은 지금 휴식이 필요한 상태였다. 또한 남아있던 클랜원들도 지금껏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고, 일주일 내내 강행군을 했다고 한다. 나조차도 약간 피곤함을 느낄 정도이니, 다른 사람들이 어떨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직면한 문제들만 해결하고, 오늘 하루는 휴식을 주는 게 낫겠다.' 그렇게 생각을 바꾼 나는, 클랜원들이 들고 온(?) 부랑자들을 쳐다보았다. “다들 힘들어 보이니 지시사항만 간단히 말씀 드리고 오늘 하루는 쉬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부랑자들은 모두 로비에 놓아두세요. 고연주가 돌아오면 제가 직접 조치한 후, 당분간 지하 연무장에 감금해둘 생각입니다.” 오늘 쉰다는 말에 안심했는지, 클랜원들은 살았다는 낯빛을 띠며 부랑자들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어차피 마력 회로를 손상 당했기에 일반인이나 다름없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기본적인 조치는 해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고연주가 돌아온 다음에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영감님과 신재룡을 신경 쓰는 일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영감님과 신재룡씨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간단한 식사나 아니면 클랜 하우스 구경이라도….” 내 말에 둘은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나 또한 의례적으로 물어본 말이었기에, 바로 이유정과 신상용을 시켜 임시 숙소로 안내하라 일러두었다. 얼른 할 일을 끝내고 쉬고 싶은지 클랜원들은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보다가, 나는 로비에 놓여진 의자에 천천히 몸을 뉘였다. 그러자, 갑작스럽게 피로가 몰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 다음날 아침. 하루 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나는 집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비비앙을 호출했다. 해야 할 일들은 산더미였고, 그 중에서도 우선순위의 경중을 따질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가장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은, 바로 부랑자들에 관한 일이었다. 귀환 길에서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비비앙이니 어떤 방법인지 한 번 들어볼 요량이었다. 1. 백서연 및 부랑자 처리(정보, 재판.) 2. 지하 연무장 감옥 건설(간이식으로. 불가능하다면 철거가 용이하게.) 3. 부랑자 장비 결산(결산 후 클랜원들에게 장비 분배.) 4. 영감님, 신재룡(영감님과 면담, 회의 후 신재룡 영입 제안.) 5. 정세 파악(지속적으로.) 나는 책상 위에 놓인 기록을 보며 오른손에 쥔 깃펜을 돌렸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항상 하는 버릇이었다. 일단 이것들을 일단락 지어둬야 다음 행보를 결정할 수 있기에, 비비앙과 면담 후 잡혀있는 회의 때 최대한 처리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때였다. 똑똑! “김수현. 들어가겠어.”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록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자, 비비앙이 우아하게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거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호출한지 30분이 지났다. 왜 이렇게 늦었어?” “아아. 진정하라고 김수현. 네가 나를 왜 불렀는지 알 것 같아서, 나름대로 준비할게 있었거든.” “무슨 준비?” “창고에 볼 일이 있어서. 그런데 나는 출입할 수 없잖아? 그래서 고연주에게 부탁하느라 조금 늦었지 뭐.” 그러고 보니 비비앙은 양손에 뭔가를 쥐고 들어온 상태였다. 아무튼 그녀에게 테이블 소파에 앉으라는 의미로 턱을 까닥이고, 나 또한 의자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비비앙과 마주보며 앉은 후,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저번에 네가 방법이 있다고 했었지? 자세히 말해봐.” “응? 아무튼, 잠깐만. 먼저 이것들 좀 봐봐.” 비비앙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주섬주섬 물건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이윽고 테이블에 하나씩 놓이는 물건들을 보며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마볼로의 조교 일지, 마볼로의 물약 세트, 썩어버린 위그드라실의 과실. 그녀가 가져온 물건들은 예전에 마법 도시 마지아의 원정에서 획득한 물품들이었다. 비비앙은 마지막으로 질서의 오르도를 소환한 후, 지팡이 끝으로 마볼로의 조교 일지를 톡 건드렸다. “모든 해답은 여기에 있어.” “그러니까 무슨 해답? 애태우지 말고 빨리 말해.” “후후. 급하기는. 일단 내가 책에 적어놓은 게 있으니 읽어보라고…. 아차, 너 우리 언어 해석이 가능하던가?” 비비앙은 묘한 웃음을 보이며 깐족거렸다. 아마 내 생각이건대, 그녀는 내게 이렇게 위세를 부릴 수 있다는 상황이 자못 즐거운 모양이었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비비앙은 주춤한 모습을 보이더니 내가 잡고 있는 반대편을 덥석 잡았다. “이, 읽을 수 있어? 읽을 수 있던가?” “아니. 다 못 읽어. 아무튼 일단 줘봐. 설령 못 읽더라도 뭘 해놨는지 보기라도 하자.” 정확히 말하자면 '다'가 아니라 '다는'이었지만 약간의 거짓말을 섞었다. 내가 이 책을 가져온 것을 보면 알 법도 한데, 비비앙은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손을 거두었다. 모든 해답이 여기에 있다고 한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살폈다. 비비앙이 접어놓은 부분은 많았지만, 유독 아예 절반을 접어놓은 곳이 눈에 띄었다. 곧장 그곳을 펼치자, 종이의 빈 면에 둥글둥글한 필체로 적혀있는 기록을 볼 수 있었다. 마볼로가 적은 기록과 차이가 나는 게 한눈에 그녀가 적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후후. 기대되는군.'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차분히 해석을 시작했다. 우선은 가장 위에 있는 것부터…. [김수현 ♡ 비비앙] '…….' 나는 바로 책을 덮었다. 더 읽을 엄두도 나지 않았거니와, 왠지 모르게 그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비비앙은 노심초사하는 눈초리로 손톱만 깨물고 있었다. 순간 책으로 머리를 내려찍어버릴까 싶었지만, 참을 인을 되뇌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비비앙. 뭐 하나만 물어보자.” “어, 어? 어…. 무, 무, 무, 무, 물어봐.” “너 말이야…. 혹시….” “으, 으, 으, 으, 응.” “설마 백서연을 조교하겠다는 생각은 아니겠지?” 그 순간, 비비앙의 얼굴에 수많은 표정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잠시 얼떨떨한 얼굴로 눈을 끔뻑이고는, 곧바로 표정을 고치며 대답했다. “후유. 아니야.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는 있겠지만, 어려운 방법이지.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거든.” '쉬운 길이라.' 비비앙의 말이 들린 순간 나는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언제나 제 몫 이상은 해주는 클랜원이었고, 내 기대를 배반한적이 없었다. 꺼져가던 설렘이 다시 불타오르는 것을 느끼며, 나는 가만히 비비앙을 응시했다. “그럼 이제 진짜 말해봐.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내 말투에 담긴 진심을 읽었는지 비비앙은 목 울대를 한 번 꿀꺽 움직이더니,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그래. 일단 결론부터 말할게. 먼저, 나는 그 백서연이라는 여성의 정신을 망가뜨릴 수 있는 물약을 제조할 수 있어.” “물약? 정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물약을 제조할 수 있다고?” “물론. 그런데 잠깐만. 미리 말해두는데, 인간의 정신력이란 그리 만만한 분야가 아니야. 물약 하나만으로 모든 상황이 해결되지는 않아. 그걸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좋겠어.” 애초에 그 정도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쉬운 길'라는 단어를 가벼이 흘려 들을 수는 없었기에, 나는 경청하는 태도를 취했다. 비비앙은 한두 번 헛기침을 하고는 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설명은 확실히 흥미로웠다. 가령 보통 인간이 가지는 평균 정신력은 100이라 가정했을 때, 사람마다 정신이 무너지는 한계점이 있다고 한다. 정신이 약한 사람은 10의 타격만 줘도 바로 무너지는 반면에, 강한 사람은 50의 타격을 줘도 버티는 사람이 있다. 한마디로 사람에 따라 가지는 정신력이 다르다고 정의할 수 있으며, 정신을 무너뜨리는 한계점 또한 천차만별이라는 것이다. “그렇군. 그럼 내가 저번에 부랑자들을 상대로 벌인 게임은 타격에 해당하는 건가?” “응. 내 설명에 따르면 그렇지. 그 외에도 타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은 많아. 예를 들면 네가 말한 조교도 하나의 방법이야. 혹시 내가 예전에 거미였을 시절 기억나?” “그래. 설마 정하연의 동생을 말하는 건가?” “응. 걔 같은 경우는 괴물들한테 돌릴 때만해도 근근이 버티긴 했는데, 거미의 알을 잉태하고 불러오는 배를 확인한 순간 이지를 상실해버리더라고.” 비비앙은 혹시나 정하연이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지만 인간의 정신은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아. 왜냐하면 내성이라는 게 존재하거든. 만약 네 말대로 백서연이 굉장히 강인한 여성이고, 어지간한 건 버틴다고 해보자고. 그럼 또 게임을 하든, 강제로 범하든, 육체적으로 고문을 주든. 처음에는 효과를 볼지 몰라도, 가면 갈수록 타격이 0에 수렴한단 말이야.” “잠깐만. 그럼 네 말대로라면 물약도 똑같은 거 아닌가?” “물론 그렇지. 그래서 내가 미리 연막을 쳐둔 거야.” “잘 이해가 안 되는데.” 비비앙은 잠시 말을 멈추곤 마볼로의 물약과 위그드라실의 과실을 가리켰다. 이미 예전에 정보는 확인한 상태였다. 간단히 말하면, 물약은 연금술에 촉매 역할을 해주는 효능이 있었고, 과실은 먹으면 정신을 어지럽히고 끝내 사망에 이르게 만드는 독약…. “아.” 그 순간, 나는 하나의 생각을 번뜩 떠올릴 수 있었다. 비비앙은, 물약을 제조한다고 했었다. 그 말인즉슨…. “이 두 개로 네가 말한 물약을 제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정확히 표현하자면 위그드라실의 과실이 핵심 재료지. 마볼로가 뭔 수작을 부렸는지는 몰라도, 현재 썩어버린 위그드라실의 과실은 본래의 효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야. 아무튼 제조법도 책에 있고, 직접 사용한 결과도 나와있어.” “어땠는데?” “마볼로는 총 12조각에서 4조각만, 그것도 조각당 절반으로 나눠서 8번 사용했어. 물론 이것뿐만 아니라 다른 방법도 병행했지. 하지만 수백 년간 고결함을 유지해온 요정 여왕의 정신을 망가뜨리는데 일조한 방법이야.” 나는 차분히 과실을 집어 들었다. 총 4조각을 사용했다고 했으니, 남은 조각은 8조각이었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이내 비비앙의 조용한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8조각을 반으로 나누면 총 16병의 물약을 만들 수 있다는 소리지. 김수현. 어떻게 생각해?” “…….” “이 16병을 백서연에게 한꺼번에 먹이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지 않아?”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오늘 투표 결산으로 리리플은 다음 회와 합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독자 분들의 양해 부탁합니다.) 아이고. 투표 결과 좀 합산하느라 늦었습니다. ㅜ.ㅠ 먼저, 빠른 투표 결과입니다. 안솔 : 55표(1등. 안솔~. 축하해!) 이유정 : 8표(하하. 그래도 이 정도면 평균은 되네요.) 유니콘 : 50표(2등. 설마 이만큼 인기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김수현 : 8표(주인공. 미안해.) 정하연 : 22표(4등. 역시 첫 여자의 힘인가요?) 한소영 : 5표(한소영. 하하하. 후유.) 비비앙 : 31표(3등. 인기 투표는 1위인데!) 김유현 : 4표(김유현도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김한별 : 1표(한별아 미안.) 단체 샷 : 4표(이건 조금 힘들어요. ㅜ.ㅠ) 안현 : 1표(!) 세라프 : 2표(이건 있어요!) 로유미 : 2표(……. 탕! 탕탕!) 고연주 : 1표(이것도 있어요!) 카오스 미믹 : 1표(헐.) 비비앙(거미) : 3표(헐?) 백한결 : 1표(여성화 백한결은 저도 조금 끌리는군요. 하하. 농담입니다.) 뿔에 그곳을 찔린 김수현 : 1표(…….) 처음에 두 명 이상 말씀하신 것은 제외하려고 하다가, 너무 많아서 그냥 나눠서 넣었습니다. 하하. 아래쪽에 이상한 것들이 보이신다면, 예. 착시입니다. 착시이고 말고요. :D 아무튼 일단 안솔로 말씀 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분이 지금 사정이 생기셔서, 아마 다음주 즈음에 말씀드릴 것 같네요. 진행 상황은 차후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0322 / 0933 ---------------------------------------------- 無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비비앙을 응시했다. 그녀는 기필코 성공해 보이겠다는 자신감을 한껏 드러내는 중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비비앙은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고질적인 체력 문제를 일부 해소해준 것도 그녀 덕분이 아니던가. 나는 위그드라실의 과실을 만지작거리다가, 기꺼운 마음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제법인데, 비비앙. 이제 구미가 당기는 말도 할 줄 알고.” “응? 뭘 당겨? 구미?” “관심이 생겼다는 소리야. 그런데 말이야…. 백서연 한 명에게 굳이 16병이나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요정 여왕도 8병으로 충분했다고 했잖아.” “아. 어떻게 보면 이 물약은 양날의 검이라고 볼 수 있거든. 정말 만에 하나의 경우지만. 백서연이 이 물약을 마시고도 저항한다면, 그때는 웬만한 방법으로는 타격이 어려워질 수도 있어. 아까 내성 얘기해줬지?” “그렇군. 그럼 질문 하나 더. 혹시 물약을 제외하고 정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전에 네가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잖아. 예를 들면 그때 마볼로처럼….” 곁눈으로 오르도를 슬쩍 흘겨보며 운을 띄우자, 비비앙은 밝은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뭘 생각하는지 알겠다. 김수현. 미안하지만 정신을 직접 조작하는 건 지금 내 실력으로는 불가능해. 아니, 그건 대 마법사라 불린 마볼로도 실패한 과정이라고.” “그래? 그건 좀 아쉽군.” “그래도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 이 지팡이에 잠들어있는 힘을 사용하면 여기에 나와있는 재미있는 것들을 몇 가지 흉내 낼 수 있을 것 같거든. 아무튼 방법은 많아. 나는 어디까지나 제안하는 입장이니까, 선택은 네 몫이야. 김수현.” 그래. 결국 선택은 내 몫이었다. 문득 비비앙에게 얘기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약서의 영향인지 원래 성격이 이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백서연의 정신을 철저히 망가뜨릴 생각인 것 같았다. 아무튼, 비비앙의 말은 아직 계획 단계에 불과했다. 실제로 행동에 들어가야 구체적인걸 정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마음을 정한 나는, 이만 면담을 끝내고 회의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좋아. 결정했다. 네 계획을 승인하도록 하겠어.” “좋아 좋아. 아주 좋은 선택이야.” “조만간 지하 연무장에 감옥을 하나 건설할 생각이다. 그곳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도록 허가해주마. 그리고 인력이든 재료든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아낌없이 지원해주겠어.” “후. 이제야 김수현이 내 진가를 조금 알아보는 것 같군.” 비비앙은 두 팔을 겨드랑이 밑으로 마주 끼고는 잘난체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레 솟구치는 가학성을 억누르며, 나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래 그래. 이 일에 대한 일체의 권한을 위임해줄 테니, 잘 해보라고.” “걱정 붙들어 매셔. 내가 언제 한 번이라도 실망시킨 적 있었어?” 없다. 내 생각에도 부랑자들에 대한 일은 비비앙이 가장 적합한 적임자였다. 나는 한두 번 고개를 끄덕인 후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자신감에 취해있던 비비앙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열었다. “가려고?” “응. 이제 회의에 들어 가야 할 것 같아서. 너는 들어오지 않아도 좋아. 당분간은 일절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 일에만 몰두하라고.” “아….” “왜?” 그 순간, 방금 전까지 거만했던 비비앙의 얼굴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그녀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이내 시무룩한 낯빛으로 마주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비비앙?” “알았어…. 그럴게….” 비비앙은 주섬주섬 물건을 담으며 맥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혹시 내가 말실수를 한 건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딱히 생각나는 건 없었다. 이윽고 회의실로 가기 위해 방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미약한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 들었다. “바보. 건드려도 좋은데….” '…….' 과연 비비앙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 “그럼 회의는 이것으로 끝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아까 적어놓은 기록을 정리하며 회의가 파했음을 알렸다. 회의라고 해봤자 별 내용은 없었다. 가장 중요한 부랑자들의 문제를 처리했으니, 나머지는 크게 어렵지 않은 일들이었다. “다들 아직 피로가 남아있겠지만, 주변 상황이 많이 어지럽습니다. 머셔너리 또한 이러한 상황에 발맞춰 단단히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3층 회의실에는 비비앙과 신재룡을 제외한 전원이 앉아있었다. 클랜원들이 하나 둘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다가, 나는 안현과 정하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둘은 제가 개인적으로 맡긴 일들이 있을 겁니다. 각자 그것들에 대해 고민해보시고, 오늘 안으로 세부적으로 조정할 사항들을 말씀해주세요.” “예 클랜 로드. 그런데 세부적으로 조정할 사항들이라면 어떤걸 말씀 드려야 해요?” “안현 네가 장비 결산이었지? 그걸 혼자 할 수는 없잖아. 구즈 어프레이즐도 필요하겠고, 도와줄 인원도 필요하겠지. 그런걸 나에게 말하라는 뜻이야.” “아하.” 그제야 이해가 됐는지 안현은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그리고 음흉한 눈빛으로 고연주를 쳐다봤지만, 이내 뭔가를 봤는지 흠칫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이만 해산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나가보시고, 영감님은 잠시….” “이곳에 남아주세요.”라고 말하려는 찰나,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테이블 맨 끝에서 앉아있는 백한결이 손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녀석이 공개적으로 발언권을 요청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기에, 나는 얼른 일어나라고 손짓해주었다. “사용자 백한결.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크, 클랜 로드님. 죄, 죄송합니다.” 백한결은 벌벌 떨면서 일어서고는 대뜸 사과부터 했다. 낯빛이 하얗게 질려있는 게 단순히 긴장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고 보니 회의 내내 좌불안석하는 태도를 보여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기는 했었다. “말해봐.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래?” “제가…. 어제 말씀 드렸어야 했는데…. 모르고 까먹고…. 형님을 만나니 너무 반가워서 그만….” “백한결. 진정하고,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혀.” “그, 그게….” 횡설수설. 백한결은 클랜원들의 시선이 쏟아지자 더욱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말에 나는 애꿎은 테이블만 두드리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렇게 열 번 정도 두드렸을 즈음, 비로소 다시금 녀석의 말문이 열렸다. “실은 형님을 찾으러 클랜원분들이 도시를 떠날 때…. 이스탄텔 로우에서 약간의 도움을 줬어요.” “음. 그래. 사용자 정하연이 요청을 했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클랜 하우스를 보호하는 인원을 보내줬다고 했지.” 이미 정하연에게 들은바 있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이 건에 대해서도 감사를 표해야 하기에, 조만간 이스탄텔 로우에 방문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예…. 그런데 돌아오시기 일주일전에, 하연이 누나한테 수정구로 연락을 받았거든요. 살아있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그래서.” “그래서 기쁜 마음에 그때 보호하러 온 분에게 말씀을 드렸어요. 마침 클랜 로드님과 잘 아는 사이라고 하셔서…. 그런데 그분이 다음날 오시더니…. 그게….” “백한결. 말 더듬지 말고. 빙빙 돌리지 말고. 그냥 뭐가 문제인지 본론만 말해.” 결국 나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이기지 못해 딱딱한 목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원래 이런 성격인건 알고는 있었다. 그래도 척하면 바로 알아듣는 비비앙과 대화하다가, 백한결의 말을 듣자니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백한결 또한 그런 낌새를 느꼈는지, 움찔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스탄텔 로우에서 클랜 로드님께 전해달라는 말이 있었어요. 돌아오시면 부랑자들을 데리고 바로 이스탄텔의 클랜 하우스로 오라고 했어요. 그걸 제가 어제 말씀 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깜빡 잊고…. 정말 죄송합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바로 궁금함이었다. 일주일전에 통신을 넣었다면 아직 귀환하던 도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스탄텔 로우에서 우리가 부랑자들을 붙잡은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럼 우리가 돌아오기 전에 네게 말했다는 건데. 이스탄텔 로우에서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었지?” “그건 아마 한결이가 얘기했을 거예요. 제가 클랜 로드와 만났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상황도 같이 설명해주었거든요.” “사용자 정하연이요?” “네. 한결이가 자세히 알고 싶다고 해서….” 대답은 정하연에게서 나왔다. 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백한결. 그럼 네가 그 사실을 알려주니 경호해주러 온 인원이 그렇게 말했어? 한치의 틀림도 없이?” “예…. 너희 클랜로드에게 부랑자들 데리고 우리 클랜 하우스로 오라고 전해줘.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아! 그리고 곧 소집령을 가질 계획이니 거기에도 참석하라고….” “소집령? 도대체 그렇게 말한 사람이 누군데?” “처형의 공주라고….” 나는 그제야 상황을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한소영은 실수할 사람도 아니었고, 그렇게 말할 사용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연혜림이라면, 그녀의 성격상 앞뒤 구분 못하고 툭 내뱉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정을 모르는 애들은 그저 멀뚱한 얼굴로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지만, 연차가 있는 클랜원들은 하나같이 심기가 불편한 표정이었다. 심지어 그 사람 좋은 신상용마저도 불쾌한 빛을 드러내고 있을 정도였다. 일단 자세한 사정을 알아봐야겠지만, 그래도 머셔너리는 지금껏 이스탄텔 로우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다. 연혜림의 의도치 않은 말실수로 클랜원들이 이스탄텔 로우에 반감을 갖는 건 좋지 않은 일이었다. 해서,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유하게 넘길 수 있을까 고민이 들던 찰나였다. 똑똑. “회의 중에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그때, 낯선 목소리가 들리더니 살며시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메이드 복과 가터벨트를 차고 있는 고용인이었다. 그녀는 회의실에 감도는 사늘한 분위기에 놀랐는지 몸을 움츠렸다가, 이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지금 클랜 하우스에 사용자 한 분이 방문하셨습니다. 의뢰가 있다고, 클랜 로드를 뵙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 “흐흥. 흐흥흐흥.” 이스탄텔 로우의 클랜 하우스. 박다연은 휴게실 테이블에 진득하니 앉은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뭔가를 열심히 적는 중이었다. 그녀는 이따금 몸을 이리저리 배배 꼬면서도 열심히 손을 놀리더니, 곧 탁 소리가 날 정도로 깃펜을 세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기록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려다보며 말했다. “좋았어. 이 정도면 완벽해. 후후.” “완벽하긴 뭐가 완벽해.” 팍! “어, 어?” 그때였다. 박다연의 등 뒤로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그녀가 들고 있던 기록을 누군가 순식간에 빼앗아 들었다. 박다연은 반사적으로 기록을 잡으려고 손을 휘저었지만, 상대 역시 하늘 높이 기록을 들고 있었다. 한없이 까치발을 들던 박다연은, 결국 손이 닿지 않은 것을 인정했는지 씩씩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리고, 어느새 눈앞에 서 있는 연혜림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뭐에요. 언제 온 거예요?” “방금. 그런데 뭐야, 별 내용도 없네. 하도 몸을 꼬길래 난 또 연애 편지인 줄 알았네. 친애하는 머셔너리 로드에게. 이거 보고 잔뜩 기대했는데.” “연애 편지는 무슨. 곧 개최할 소집령에 대한 초청장이에요. 이리 줘요.” “그런 거 같더라. 그런데 이거 보낼 필요 없어.” 연혜림은 기록을 휙 날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윽고 종이가 날아간 곳으로 걸음을 옮기던 박다연은 중간에 살짝 얼굴을 돌리며 되물었다. “왜요? 이거 소영이 언니가 직접 시킨 건데, 취소 지시 내려왔어요?” “내가 말 안 했던가? 머셔너리한테는 내가 예전에 말해놨는데.” 그제야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듯, 박다연은 의아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아. 저번에 유니콘도 볼 겸 머셔너리 클랜 하우스에 갔었잖아? 그때 그 신의 방패라는 꼬맹이가 머셔너리 로드의 소식을 말해주더라고. 그래서 그때 말했지. 김수현이 돌아오면, 부랑자들도 한 번 데려와 보고 소집령도 참가하라고. 그렇게 전해달라고 했어.” “뭐…. 뭐라고요…?” “그러니까 그렇게 구구절절 써놓은 기록은 보낼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 호호. 나 잘했지?” 연혜림은 입 꼬리를 씩 끌어올림과 함께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박다연의 눈썹이 세게 꿈틀거리더니, 이윽고 입술이 크게 떼어졌다. “야 이 멍청이야아아!” ============================ 작품 후기 ============================ 곧 개강입니다. 하하. 괜히 마음이 설레네요. 이번 방학 때 마음먹은 다이어트는 결국 실패했네요. 흑흑. 앞으로 학교 + 연재 + 이북 + 다이어트를 어떻게 병행할지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숨이 막혀옵니다. ;ㅇ; 『 리리플(320회) 』 1. 우사인볼트 : 1등 축하합니다. 하하. 원래 김유현과 김수현은 그런 관계였습니다. 수현이는 어렸을 때 참 순수한 아이였거든요. :) 2. 아톰 : 그 모습 좀 괜찮을 것 같습니다. 물음표와 느낌표. 킵 해두도록 하겠습니다. :) 3. 피빠는소녀 : 이번 전쟁 파트에 나올 예정입니다. 과연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후후. 4. Astrain : 구예지, 조승우. 모두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혹시 구예지가 마음에 드셨나요? :D 5. 작은꿈 : 쿠폰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_(__)_ 『 리리플(321회) 』 1. 마황강림 : 1등 축하합니다. 그리고 첫 코멘트 이시군요! 미월야 님이 은퇴 선언을 하신 이후 참 여러분을 뵙는것 같네요. 하하. 2. 엿같다 : 의도한 내용입니다. 그 정도의 혼동이 일정도로 애매한 캐릭터라고 보시면 됩니다. :) 3. 랜슬럿 듀 락 : 아마 1병만 마셔도 반응이 제법 괜찮을 겁니다. 이미 구상돼있어요. 후후. 4. 파뱐 : 그렇군요. 좋은 것 하나 배웠습니다. 수정 완료했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5. 카바이리 : 현재 모니카로 돌아온 상태입니다. 6. 감자띱 : 많이 느리다고 느껴지시는 모양이네요. 알겠습니다. 중간중간에 생략해도 될 과정은 한 번 생략해보도록 하겠습니다. 7. dydy0114 : dydy0114 님은 아기 유니콘의 이미지를 부수셨습니다. ㅜ.ㅠ 엉엉.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323 / 0933 ---------------------------------------------- 無 “깜짝이야!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너…. 너…. 진짜…. 미친 거니?” “어쭈? 너? 미친 거니? 이게 어디서 은근슬쩍 반말을 하는….” 박다연이 빽 소리를 지르자 연혜림은 순간적으로 귀를 막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폭언에 눈에 쌍심지를 돋우며 눈썹을 치켜 올렸지만, 이내 박다연의 얼굴을 보곤 말끝을 흐렸다. 현재 박다연의 얼굴은 복잡하고도 미묘한 빛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연혜림은 지금 상황이 무안한지 눈만 서너 번 깜빡이다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아니…. 진짜로 별말 안 했어. 그냥 예전에 아카데미에서 친하게 지냈던 것도 있고….” “…정확히 뭐라고 말했는데요. 정확하게 말해요, 정확하게.” “그냥 도시로 돌아오면 우리 클랜에 부랑자들 데려오고…. 소집령 곧 개최되니까 거기에 참석하라고….” 연혜림의 대답에 박다연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지금 이럴 시간이 없다는 듯, 곧 번쩍 고개를 들더니 재빠르게 계단을 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혼자 남은 연혜림은 머쓱한 얼굴로 박다연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뒤를 따라 올랐다. 박다연이 달려간 곳은 한소영의 집무실 이었다. 그녀는 노크도 않고 문을 벌컥 열었고, 들어가자마자 연혜림의 만행을 종알종알 고자질하기 시작했다. 한소영은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온 것에 기분이 상했는지, 처음에는 불편한 낯빛을 보였다. 하지만 고자질이 진행됨에 따라 조금씩 표정이 변하더니, 종래에는 '당황'이라는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었다. '철혈의 여왕'이라는 진명을 갖게 된 이후로 정말 드물게 드러내는 감정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후. 한소영은 가느다란 한숨과 함께 들고 있던 기록을 놓았다. 그리고 문밖에서 쭈뼛쭈뼛 들어오는 연혜림을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연혜림. 지금 다연이 말이 사실이니?” “…아니 그게.” “사실이야?” “…응.” 한소영은 양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렇게 잠시 동안 이마를 꾹꾹 누르다가 피로에 찌들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넌 정말…. 어쩜 이렇게 멍청하니…. 가뜩이나 할 일도 많은데 왜 자꾸 일을 만들어…. 응?” “나…. 정말 나쁜 의미는 없었는데….” 그제야 연혜림도 사태가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한소영의 책상에 쌓인 기록을 훑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엄밀히 말하면, 연혜림의 행동이 가지는 의미의 자체는 틀리지 않다. 원래 규칙 자체가 그렇다. 부랑자들에 대한 재판은 대표 클랜에서 주관하고 있고, 지금 상황을 보아도 머셔너리 클랜이 소집령에 참가하는 게 좋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말이란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다. 한마디로 방법의 문제였다. 서로간에 지켜야 할 최소한의 절차라는 게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머셔너리 클랜이 이스탄텔 로우의 산하 클랜이 아니라는 점과, 바로 자유 용병 클랜이라는 점이다. 아니, 산하 클랜도 이렇게 대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규칙과 상황이 있다곤 하지만, 부랑자들에 대한 1차적인 권리와 소집령의 참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머셔너리 클랜 고유의 권한이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연혜림의 행동은 아카데미에서 나눴던 알량한 친분을 믿고 필요한 절차를 깡그리 무시해버린 셈이다. 즉 머셔너리 입장에서는 굉장히 기분 나쁘게 여길 법한 행동이요, 엄청난 실례였다. “어떻게 할까요?” 박다연은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눈치만 보고 있던 연혜림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내가 잘못한 것은 알겠어. 그럼 그냥 미안하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속 좁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 “또 또. 그러다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하여간 전투에 돌아가는 머리의 절반만 평소에 사용했으면…. 아무튼 사과하는 건 당연한 건데, 그 따위로 사과하기만 해봐요.” 온당 당연한 말이었지만, 박다연은 빈정거리는 음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워낙 행동이나 말투가 톡톡 튀는 연혜림이기에, 이대로 맡기기에는 너무나 불안했다. 그렇게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한소영은 지끈거리던 머리가 조금은 괜찮아졌는지 이마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전전긍긍이 서 있는 둘을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처음 방문한 사용자가 있다는 말에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돌아오는 내내 머셔너리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사용자들이 있기에, 조승우나 구예지가 찾아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용인은 의뢰인이 찾아왔다고 말해주었다. 지금 서 대륙의 침략을 받은 상황에서, 의뢰는 솔직히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흥미도 돋았기에 나는 얼른 회의를 파하고 고용인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이윽고 고용인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자, 말끔한 로브를 차려 입은 여성 사용자 한 명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여성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는 순간, 나는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여성은 정체는 내가 익히 아는 사용자였다. 물론 2회 차가 아니라 1회 차에서. “혹시 머셔너리 로드 되시나요?” “예. 제가 머셔너리 로드 김수현입니다.” “아하~. 생각 외로 젊으시네? 아무튼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별빛 클랜의 로드 현승희라고 해요.” 활기차 보이는 웃음과 함께 현승희는 내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손을 마주잡기는 했지만 그녀가 왜 나를 찾아왔는지는 아직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자세히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별빛 클랜은 현재 남부에서 활동할 클랜은 아니었다. 삽시간에 속으로 많은 궁금증이 일었다. 아무튼 얘기를 들어보면 될 일이기에 나는 현승희에게 자리를 권하곤 마주 앉았다. “의뢰가 있으시다고 들었는데요.” “맞아요. 아, 혹시 제가 첫 의뢰인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에이, 아쉽다.” 현승희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느긋한 태도로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양손으로 깍지를 껴 훤히 드러난 허벅지 위에 올리곤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머셔너리 로드께서는 저에 대해서 알고 계시나요?” “예. 어느 정도는…. 유니콘을 길들인 유일한 사용자로 알고 있습니다.” “네. 하지만 이제 유일은 아니죠. 얼마 전에 유니콘을 길들인 사용자가 한 명 더 나왔으니까요.” 현승희가 말하는 사람은 내가 분명했다. 하기야 아기 유니콘을 데려온 지도 많은 시간이 지났으니 소문이 전역으로 퍼질 만도 했다. 어쨌든, 왠지 모르게 아기 유니콘이랑 관련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말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현승희는 고혹적인 미소를 보내며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별빛 클랜은 원래 서부 일반 도시 헤일로에서 활동하던 산하 클랜으로, 강철 산맥 원정에 참가한 수많은 클랜들 중 한 곳이었다. 하지만 원정의 실패로 커다란 피해를 입었거니와 현승희도 유니콘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목숨만 건져 탈출할 수 있었다. 이후 어떻게든 세를 회복하려 애쓰던 도중 서 대륙의 침공이 시작됐고, 베스와 도로시가 맥없이 함락당한 후 헤일로를 떠날 생각을 굳혔다고 한다. “그럼 SSUN의 산하 클랜에서 탈퇴하신 겁니까?” “그렇죠 뭐. 솔직히 원정 이후로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거든요. 저번에는 사용자 계발 계획이라고 신규 사용자를 대거 데려오더니 뒤치다꺼리를 하게 만들지를 않나. 베스와 도로시가 그렇게 구원 요청을 보냈는데 워프 게이트를 끊어버리질 않나. 그리고 이제는 직접 헤일로로 오고 있잖아요? 매일 대책 회의랍시고 불러 젖히는데 나아지는 게 없어요, 나아지는 게. 그래서 기반이고 뭐고 다 버려두고 모니카로 도망 왔죠. 거기 계속 있다가는 정말로 죽을 것 같았거든요.” 지금껏 쌓인 불만이 어마어마한지, 현승희는 매우 빠른 속도로 투덜거렸다. “아무튼 비겁하다고 욕하실 수 있겠지만 좋게 봐줘요. 지금 그런 사용자들 많아요. 오죽하면 그랬겠어요?”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명료히 대답하고 현승희를 쳐다보았다. 지금 심정 같아서는 서부 도시의 상황이나 이것저것을 묻고 싶었지만, 입맛을 다시는 걸 보니 더는 얘기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튼 이제 본격적인 의뢰 내용을 말씀 드릴게요. 실은 의뢰라고는 하기 뭐하지만, 머셔너리 클랜밖에 부탁할 곳이 없어요.” “아마 아기 유니콘에 관한 일일 것 같군요.” “난 눈치 빠른 사람이 좋더라. 맞아요. 아까 강철 산맥 원정에서 유니콘 덕분에 살아나올 수 있었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그때, 유니콘은 마지막에 큰 상처를 입으면서까지 저를 도와주었어요. 다행히 우리 둘은 살아 돌아왔고 유니콘의 상처도 치료할 수 있었죠. 하지만 그 이후로 애가 영 맥을 못 추네요.” 현승희는 유니콘을 진심으로 아끼고 생각하는지, 지금껏 미소가 번져있던 얼굴에 처음으로 어둠이 그늘지었다. “알고 계실지는 모르겠는데 유니콘은 감정에 민감한 동물이에요. 자신을 아껴주던 클랜원들이 죽는 것을 봐서 그런지, 아니면 단순히 그 광경을 잊지 못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육체의 상처는 치료할 수 있었지만 마음의 상처는 도저히 길이 안 보이네요. 그래서, 머셔너리에 있다는 유니콘과 만나게 해주고 싶어요.” “아기 유니콘과 만나게 해서 치료 방법을 찾아보시려고 하는 거군요.” “네. 유니콘은 동족애가 굉장히 강하잖아요? 혹시나 둘이 만나면 뭔가 새로운 반응이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었기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런 내 반응을 승낙이라고 여겼는지, 현승희는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심하지는 않지만, 그녀는 살을 약간 노출한 옷을 입고 있었다. 양손을 꼭 마주잡고 상체를 약간 숙여 가슴 골을 드러내더니, 간절한 표정으로 입을 열은 것이다. “그러니까. 서로 유니콘을 길들인 사용자로써 부탁 드리고 싶어요. 가여운 애 한 명 살리는 셈치고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시면 안될까요?” 어느덧 의뢰라는 말은 부탁으로 바뀐 상태였다. 확실히 현승희는 제법 예쁘장한 얼굴과 좋은 몸매를 갖고 있었다. 남자를 유혹하는 기술도 수준급이었고. 그러나 이미 나에게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끝판 대장이나 다름없는 고연주가 있었다. 해서 아주 여유로운 마음으로, 담담히 대답할 수 있었다. “저도 그 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직접 이곳까지 의뢰하러 오셨는데 거절할 생각도 없고요. 보상만 확실하다면, 의뢰는 흔쾌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순간, 현승희의 얼굴이 뾰로통하게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 요 근래 클랜 하우스는 굉장히 분주해져 있었다. 며칠 전 회의에서 빠르게 움직이자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클랜원들의 행동은 발 빠르다고 표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지시한 사항들은 하나씩 차곡차곡 진행되는 중이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클랜 하우스에는 거주민들의 출입이 잦아진 상태였다. 정하연은 하루 만에 견적서를 뽑아냈고, 그날로 클랜 하우스를 시공해준 거주민들을 찾아가 공사를 부탁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설계도와 공사에 필요한 비용을 내게 가져와 나는 바로 승인해주었다. 그 결과 어제 부로 공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정하연다운 깔끔한 일 처리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로비와 지하를 왔다갔다하는 거주민들을 차분히 응시하다가 문득 고개를 올려 옥상을 응시했다. 공사 도중에는 부랑자들을 가둬 놀 수 없어 임시로 옥상으로 옮겨둔 상태였기 때문이다. 마침 부랑자들을 감시하던 고연주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살랑살랑 손을 흔드는 그녀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화답한 후, 이번엔 클랜 하우스 내부로 들어가 3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3층의 창고에 들어서자, 복도에까지 놓여진 장비들과 각기 하나씩 달고 있는 구즈 어프레이즐 주문서를 볼 수 있었다. 안현을 비롯한 영감님, 신상용, 백한결은 내가 온 것도 모른 채 열심히 장비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한동안 흐뭇한 마음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나는 집무실로 걸음을 돌렸다. 요즘 따라 비비앙이 잘 보이지 않아 공방에 들를까도 생각해보았지만 괜히 찾아갔다가 방해만 하는 게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4층 집무실에 도착한 나는, 책상 의자에 앉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일들은 모두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마 조만간 모든 일들을 완료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이제 슬슬 다음 행보를 생각할 때였다. 일단 앞으로 일어날 미래를 간단히 정리해보자는 마음에, 기록과 깃펜을 꺼낸 순간이었다. 똑똑. “오빠! 안에 있어? 오빠!” 문을 두드림과 함께 이유정이 나를 애타게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들어오라고 말해주자 문은 벌컥 열리더니, 이내 왠지 모르게 다급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정이 보였다. 그녀는 빠르게 걸음을 놀리며 내 앞으로 다가오고는, 바로 입을 열었다. “오빠. 큰일났어.” 이유정은 요즘 한창 내 수행인원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가까이서 보기 위해 수행인원으로 뒀는데, 생각보다 유능해 제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옥에도 티가 있다고 딱 한가지 단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별거 아닌 일에도 꼭 큰일이 났다고 하는 것이었다. “응? 무슨 일인데?” 나는 막 꺼내던 기록을 책상 위에 놓은 후, 여유롭게 깃펜을 돌리며 되물었다. 그러자, 이유정은 목 울대를 한 번 꿀꺽 움직이더니 화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스탄텔 로우 클랜에서 찾아왔어. 그것도 클랜 로드가 직접.” ============================ 작품 후기 ============================ 8월 26일이네요. 드디어 개강입니다. 학점을 가득 채운 상태라 많은 분들이 걱정을 해주셨습니다. 괜히 가슴이 설레네요.(일주일 중 나흘이 오후 늦게까지 강의가 잡혀있습니다.) 직접 부딪쳐봐야 알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 리리플 』 1. Cheetos : 1등 축하합니다. 아. 혹시 클전이라면 서든 어택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 2. 붉은황야 : 전개 속도가 느리다는 건 자주 받아온 지적입니다. 빠른 전개를 원하시는 분들이나 빨리 보고 싶은 내용이 나오기를 원하는 분들은 아마 하나하나 짚고 가는 게 답답하실 겁니다. 그래서 질질 끈다, 필요 없는 내용인데 왜 썼냐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와 반대되는 분들도 계시겠죠. :) 3. retire : 저번에 한 번 말씀은 드렸는데, 알의 부화에는 제법 시간이 걸릴 예정입니다. :) 4. 명박짱의양양합일 : 살려주세요. 오늘 형이 저보고 그러더라고요. 너 꼭 죽어있는 사람 같다고요. ㅋㅋㅋㅋ. 5. 피네이로 : 장비나 백서연에 대한 처리를 빨리 보고 싶으신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그런 장면이 언제 나올지는 이미 구상이 완료된 상태입니다. 그 이전에 나오는 내용 중 추후 구상중인 내용과 연계되는 부분이 있기에 모조리 생략하기는 조금 어렵습니다.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6. 작은히어로 : 부럽네요. 저는 먹으면 찌고 빼면 빠지는 스타일입니다. ㅜ.ㅠ 7. 블라미 : 아마 중간에 생략한 부분이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이해가 되도록 잘 썼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ㅜ.ㅠ 8. 라티인형 : 하하. 신재룡은 아직 가입은 되지 않았고, 김수현의 호의로 머셔너리 클랜 하우스에 머무르는 중입니다. :) 9. 석양s : 감사합니다. 박다연은 개인적으로 애정을 갖고 있는 캐릭터라서, 좋아해주시니 고마운 감정이 드네요. ㅜ.ㅠ 10. 감자띱 : 이미 이번 전쟁 파트 끝부분에서 영입이 결정된 이들이 있습니다. 아마 남성들도 제법 들어오지 않을까 싶네요.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324 / 0933 ---------------------------------------------- 無 “죄송해요. 머셔너리 로드.” 나는 머셔너리에 방문한 이스탄텔 로우의 클랜원들을 귀빈실로 직접 안내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리를 권하고 나 또한 의자에 앉으려는 찰나, 대뜸 사과부터 건네는 연혜림의 말에 엉거주춤하고 말았다. 이윽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아 한소영을 쳐다보자, 그녀는 엄한 얼굴로 연혜림을 응시하고 있었다. “제가 저번에 클랜 하우스를 경호하러 왔을 때 클랜원분께 함부로 입을 놀린 적이 있어요. 구차하게 변명은 하지 않을게요. 제가 생각이 많이 짧았어요. 이미 실례를 해버렸지만, 부디 한 번만 너그러이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어느새 연혜림은 고개까지 숙인 상태였다. 더구나 그녀답지 않게 목소리도 굉장히 정중하기까지. 실상 얼마 전 이스탄텔 로우에서 연혜림의 말실수에 대해 사과하는 전령을 보냈기에, 머잖아 화해의 제스처를 취해오리란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도 연혜림이 이렇게 직접 사과하는 것은 설마 하는 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그 설마 가 현실로 일어난 것이다. 아무튼 이 정도면 충분히 제대로 된 사과라 볼 수 있고, 나 또한 이스탄텔 로우에 뻗댈 마음은 없었다. 해서, 이쯤에서 일을 매듭짓기로 마음먹었다.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처음 말을 들었을 때 불쾌했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가 알고 있는 처형의 공주라면, 비록 말투는 그랬을지언정 마음까지 똑같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일부러 연혜림과의 친분 관계를 완곡히 들먹였다. 그녀가 얼마나 성격이 드세고 자존심이 강한지 알기에 적당히 비빌 언덕을 마련해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살짝 고개를 든 연혜림의 낯빛이 약간이나마 밝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머셔러니 로드. 저 또한 클랜원을 확실히 관리하지 못한 점을 사과 드리고 싶어요.” 그 순간 지금껏 가만히 지켜보던 한소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듣기 좋은 말도 계속 들으면 질리는 법인데, 자꾸 사과를 들으니 민망한 기분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괜찮습니다. 클랜원들에게는 제가 잘 말해놓을 테니,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그럼 부탁할게요. 이해해주셔서 고마워요.” 일부러 딱 잘라 말한 것을 눈치챘는지 한소영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제야 연혜림은 완전히 고개를 들었고, 한소영의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사과를 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이후 방안을 감도는 어색한 분위기는 필연적인 상황이었다. 마침 한소영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이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말문을 여는걸 볼 수 있었다. “뮬에서 실종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많이 놀랐어요. 인사가 많이 늦었지만, 무사히 귀환하셔서 다행이에요.” “예. 설마 부랑자들이 습격해올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중간에 여러 사정이 있었지만…. 보시다시피 건강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클랜 하우스를 경호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감사는요. 오히려 구조대를 조직하지 못하고 그저 기다리고만 있었는걸요. 그게 자꾸 마음에 걸려서….” “하하. 아닙니다. 현명하신 선택이었습니다.” 서로 의례적인 말이라고는 해도, 어색했던 분위기는 덕담을 주고받음으로써 점차 호전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화제를 돌릴 차례였다. “아차. 그러고 보니 소집령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습니다. 혹시 곧 소집령을 개최하실 생각이신가요?” 내 질문에 한소영은 잠깐 입술을 열었다가 번뜩 고개를 돌려 연혜림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연혜림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내 살짝 고개를 숙이곤 몸을 돌렸다. 곧 문밖으로 나가는 연혜림을 보며 나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정말 중요한 얘기를 위해 나가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왠지 모르게 이것도 사과의 제스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동 그대로, 연혜림은 오직 사과를 위해서만 데려왔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 한소영은 차가운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눈초리로 나를 직시했다. 이전까지는 '여성'으로서의 한소영이었다면, 이제는 완전히 '철혈의 여왕'으로 돌아온 것이다. “실은 머셔너리 로드께 한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소집령 참가에 대한 부탁이라면, 참가할 생각이 있습니다.” “비슷하지만, 상황이 조금 복잡해요.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수도 있는데….” 한소영이 말끝을 흐림에, 나는 바로 대답했다. “경청하겠습니다.” 한소영은 잠시 빤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목을 한두 번 가다듬더니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단 조만간 모니카의 클랜들에게 소집령을 내릴 계획이에요. 준비도 거의 끝마친 상태고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소집령은 머셔너리 로드가 참여하실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예? 어째서죠?” “시간 낭비까지는 아니지만…. 참여하셔도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소집령은 아닐 거예요.” 문득 한소영의 말에서 뭔가 조화롭지 않은 어설픈 위화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바로 말을 이으려는 듯 보였기에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현재 이스탄텔 로우의 소집령은 총 두 번이 계획되어있어요. 그 중 하나는 저희의 주최로 여는 거지만, 다른 하나는 소집령을 받은 입장이죠.” “소집령을…. 받으셨다고요? 이스탄텔 로우 클랜이?” “네. 두 번째 소집령은 동부와 남부 전체를 아우르는 소집령이에요. 그리고 주최자는 동부에 있죠. 그분은 저랑도 인연이 깊은 분이시지만, 아마 머셔너리 로드와도 인연을 맺은 걸로 알고 있어요.” 비로소 나는 한소영이 말하는 주최자가 누군지 아렴풋하게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아직 자세한 사정까지는 몰라도, 대강의 밑그림은 그려지는 기분이었다. “원래는 모니카에서 이뤄지는 소집령에 초청할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어제 그분의 연락을 받고 생각을 바꿨어요. 바로 말씀 드리면, 그분은 머셔너리 로드와의 만남을 원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저보고 두 번째 소집령에 참가하라는 말씀이신가요?” 내 대답에 한소영은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러한 반응에 나는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주저하는듯한 태도를 보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니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다만 그분은 두 번째 소집령이 개최되기 전에 머셔너리 로드와 만나고 싶어해요. 단 둘이서요.” * 하늘은 맑고 날은 따뜻했다. 나는 본관 옥상에서 유니콘의 등에 기댄 채 간만에 맛보는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며칠 전 이스탄텔 로우에서 방문한 이후 크게 변한 것은 없다. 아니, 있다면 클랜 내부 사정이랄까. 건설 완료된 감옥에 부랑자들을 모두 처넣고, 장비 결산이 완료됐고, 비비앙의 연구가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점이 변화라면 유일한 변화였다. 후르르르…. “뀨….” 문득 귓가를 울리는 울음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있는 두 마리 유니콘이 보인다. 아기 유니콘은 내 품에 파고든 채 고롱고롱 콧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현승희의 유니콘은 나와 아기 유니콘의 베개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솔솔 잠이 오려는 순간 옥상으로 걸어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옥상 문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자 이윽고 팔랑팔랑 뛰어들어오는 현승희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곤히 잠든 유니콘들을 봤는지 이내 살금살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언제 잠들었나요?” “조금 됐습니다. 한 30분?” 현승희는 한결 안도한 낯빛을 내비치고는 조심스레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녀는 예뻐 죽겠다는 얼굴로 아기 유니콘을 바라보다가, 나와 시선을 마주치곤 입을 열었다. “아 참. 머셔너리 로드. 어제는 왜 안 오셨어요?” “어제라니요?” “소집령이요. 모니카에 거주하는 모든 클랜들이 모였잖아요. 그래서 인사라도 드리려고 찾았는데, 안보이시더라고요.” “아아. 머셔너리는 초청받지 못했습니다. 애당초 저희는 자유 용병 클랜이니 참가할 이유도 없죠.” 한소영이 그날의 부탁을 비밀에 부쳐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런 만큼 자세한 사항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뭐 어차피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내 말이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현승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별빛 클랜에도 소집령이 들어왔습니까? 모니카로 얼마 전에 들어온 것 아니었어요?” “네. 맞아요. 그런데 저희도 이제는 이스탄텔 로우의 산하 클랜이니까요. 소집령에 참가할 자격은 있죠?” 현승희의 대답에 나는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나 인재 욕심이 강한 한소영이라서 그런지, 벌써 산하 클랜으로 끌어들인 모양이었다. “하하. 이스탄텔의 신속함은 과연 명불허전이군요.” “네? 뭐가 명불허전이에요?” “들어 오신지 얼마 안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벌써 산하 클랜으로 끌어들이다니….” 현승희는 내 말에 살며시 미간을 좁히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소리에요. 들어오고 나서 산하 클랜이 된 게 아니라, 들어올 때부터 산하 클랜이었다고요.” “네…? 하지만 원래 SSUN의 산하에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거야 탈퇴했다고 말씀 드렸는데…. 아, 제가 다른 건 말씀 안 드렸나요? 저희가 SSUN에 마음이 떠나있던 건 맞는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건 이스탄텔 로우 때문이에요. 그쪽에서 때마침 저희를 산하 클랜으로 스카우트하고 싶어했거든요.” “…뭐라고요?” “그래서 비겁하다고 욕하지 말라고 한 건데. 저희와 같은 클랜 많다고. 아마 칸이랑 코란…. 아니면 동부 쪽으로도 꽤 갔을걸요? 저는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심장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현승희는 소집령이 어땠는지에 대해 종알종알 떠들기 시작했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약간이나마 개운해졌던 머리가 순식간에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어쩌면 내가 기억하는 미래가 성큼 앞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빛살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밤이 깊었다. 일반적인 사용자라면 잠자리에 들어 다음날을 대비할 시간이었지만, 나는 클랜원들 몰래 클랜 하우스를 빠져 나온 상태였다. 그리고 연락을 받은 장소인 이스탄텔 로우 클랜 하우스 정문에서 한소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밤중이라서 그런지 거리를 걸어 다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때였다. 끼익. “머셔너리 로드.” 아주 살짝,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평소보다 낮은 음색이지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들린 곳에서는, 두터운 로브로 몸과 얼굴을 가린 한소영이 있었다. “이쪽으로.” 한소영은 내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가볍게 손짓 후 몸을 돌렸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분이길래 이런 짓거리까지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속으로 대강 짐작 가는 바는 있었기에 잠자코 그녀의 뒤를 따라 클랜 하우스 안으로 진입했다. 한소영은 건물 내부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저 넓디넓은 부지 중 약간 으슥한 곳으로 걸어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소영을 뒤따르다 보니 어느새 머셔너리 클랜 하우스에 있는 정원과 비슷한 풍경이 펼쳐져 있는 장소를 볼 수 있었다. 우리 클랜 하우스도 제법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대표 클랜과 비교하면 넓이나 퀄리티나 손색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분은 저곳에 계세요.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셔야 할 것 같아요.” 이윽고 한소영은 걸음을 멈추더니 정원의 한구석에 세워진 높은 정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는 같이 안 가시는 겁니까?” “네.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고 계시다는 거 알고 있어요. 그래도 그분을 만나면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음…. 알겠습니다.” “네. 아, 그리고 오늘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나는 정자로 걸어가면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소영의 말에 따르면 분명 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인 감각에는 사람이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의아한 마음에 제 3의 눈을 발동하자, 그제야 나는 위화감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사위는 고요했다. 다만, 오직 한곳. 한소영이 가리킨 정자 주위로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결계가 쳐져 있었다. 하지만 딱히 해가 되는 결계가 아니라 기척을 차단하는 결계였기에, 나는 가만히 정자의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막 정자 안으로 한 발짝 걸친 순간이었다. “호오…. 내 은인께서 오셨네?” “…….” “그럼 요즘 위명이 자자한 분의 얼굴 좀 볼까? 뭐해? 안 들어오고?” 그때, 특유의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뭔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낯선 마력이 내 전신을 덮쳐 드는 것을 느꼈다. 『사용자 이효을의 고유 능력 탐색 - 안목(Discerning Eye, Rank : S)의 발동을 확인합니다.』 『고유 능력 제 3의 눈(Rank : S)이 대응합니다. 동 랭크 판정…. 제 3의 눈의 격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탐색 - 안목(Discerning Eye, Rank : S)을 완전하게 간파합니다!』 “뭐, 뭐? 간파? 알 수 없는 능력?” 방금 전 자신만만하던 말투는 어디로 갔는지. 이효을은 순식간에 새된 비명과도 같은 소리로 말을 더듬었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곤 정자 내부로 완전히 들어섰다. ============================ 작품 후기 ============================ 아이고. 오늘 개강했습니다. 오늘이 개강인데 교수님들께서 개강 첫날 수업을 하시는 패기를 보여주셨습니다. 하하하. 몸이 참 적응이 안되네요. 내일 또 7시 30분에 나가야 할 것 같네요. 아니, 생각해보니 월 화 수 목 금 모두…. ㅋㅋㅋㅋ. 힘내야겠어요. :) 『 리리플 』 1. 랜슬럿 듀 락 : 1등 축하합니다. 혹시 다른 자아(?)분 중에 얼마 전 한 분 군대에 가지 않으셨나요? :) 2. 빈강쇠 : 네. 최대한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3. 피네이로 : 분명히 이효을을 구한 것은 북 대륙 전체에 영향을 미칠만한 일입니다. 다만, 아쉽게도 사용자와 사용자 사이에서는 업적이 성립될 수 없다는 설정입니다. 그걸 지금 인정해버리면 너무 많은 것들이 꼬여버려요. :D 4. 감자띱 : 백한결이 제대로 각성하는 순간, 클랜원들 중에서 김수현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백한결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습니다. 5. s25jin : NO. 10강의 기준은 단순히 강함만이 아닙니다. 클래스, 연차, 명성, 업적 등 모든 부분에서 일정 기준을 넘어야지만 10강으로 평가됩니다. 6. 하얀까마귀 : 물품을 감정할 수 있는 주문서입니다. :) 7. 석양s : 데이즈가 어떤 뜻이에요? 메모라이즈 데이즈? 네이버에 쳐봤는데 아무것도 안 나와서…. 궁금해요! 8. 이루크 + 지랄병 : 쿠폰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_(__)_ 9. dkeogu2001 : 하하. 저야 읽어주시는 것만해도 감사합니다. 쿠폰은 dkeogu2001 님께서 가장 좋아하는 작가님께 드리세요! 10. 건전한소환사 : 부럽네요. 9월 2일 개강이라니. ㅜ.ㅠ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325 / 0933 ---------------------------------------------- 미래, 뒤틀리다. 마치 우유를 발라놓은 것처럼 뽀얗고 하얀 피부는 달에서 비치는 찬연한 빛을 받아 한층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정자(亭子) 안의 여성이 푸른 월광을 담은 눈동자로 나를 응시한다. 나 또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윽고 여성의 아름다운 눈꺼풀이 위아래로 서너 번 빠르게 움직였다. 그렇게 서로를 쳐다보며 찾아온 침묵을 삼킨 후, 나는 태연히 여성의 앞에 마주앉았다. 예상했던 대로 여성의 정체는 이효을이었다. 그녀는 냉정해 보이는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한껏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만히 얼굴을 살피고 있자 한순간 섬찟한 기운이 등골을 훑는다. 표정이 가식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갑게 얼어붙어있다. '재미있네. 그래도 나름대로 짬은 먹었다는 건가.' 하기야 북 대륙의 수호자라면 나름대로 산전수전을 겪은 사용자일 것이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이효을(8년 차) 2. 클래스(Class) ① 북 대륙의 수호자(Guardian of the Northern Continent) : 활성화 ② 일반 마법사(Normal, Mage, Master) : 비활성화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해밀(Clan Rank : B Plus) 5. 진명 · 국적 : 빛을 인도하는 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7) 7. 신장 · 체중 : 168.7cm · 49.3kg 8. 성향 : 중립 · 중용(True · Neutral) [근력 35(-12)] [내구 50(-13)] [민첩 58(-11)] [체력 28(-11)] [마력 92(-7)(+3)] [행운 99]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조금 회복했군.' 나는 이효을의 사용자 정보를 상기하며, 방심하지 않도록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었다. “마, 말도 안 돼. 너는 도대체….” 이효을은 여전히 당황한 빛을 지우지 않은 채 말을 더듬거렸다. 나는 천천히 품속에서 연초를 한 대 꺼내 입에 물었다. 점화석으로 불을 붙인 후 한 모금 깊숙이 빨아들인다. 그리고 연기를 길게 내쉬며, 차분한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들었는데…. 천사들의 따까리가 내게 무슨 볼일이지?” 입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는 기형적인 형태를 그리며 춤추듯 퍼져나갔다. 그리고 연기가 허공에 완전히 녹아들 즈음, 흐릿한 기체에 가려져있던 이효을의 낯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낯빛을 물들이던 당황이라는 감정은 어느새 눈 녹듯 사라져 있었다. 이윽고 이효을은 살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눈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휘어지고, 분홍빛 예쁜 입술은 가느다란 호선을 그렸다. “그게 무슨 말일까…?” 이효을은 톤이 높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보다 훨씬 정돈된 목소리로, 더 이상 말을 더듬지 않는다. 그녀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대강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서로 밀고 당기는 피곤한 짓거리는 사양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시작부터 돌 직구를 날린 것이다. “놀란 척, 모른 척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 따까리.” “호호. 누가 김유현 동생 아니랄까 봐 말 한 번 차갑게 하는구나? 그리고 아까부터 따까리 따까리 거리는 데 그렇게 부르지 말아줄래? 듣는 따까리 기분 나쁘거든.” 이효을의 재치 있는 대답에 나는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더니 이내 뒷머리를 소리가 날 정도로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왜 이렇게 머리가 복잡하니…. 어휴. 어쨌든, 우선 내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표해야겠지. 고마워. 물론 반말과 따까리라고 부른 것은 마음에 안 들지만, 은인이니까 그냥 넘어갈게.” “반말은 네가 먼저 했고, 따까리는 사실이지.” 엄밀히 말하면 이효을을 비롯한 모든 사용자들이 따까리라고 볼 수 있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하지만 이 사실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싶었다. 북 대륙의 수호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그녀의 접근 권한의 범위는 모르니까. “…너 되게 얄밉게 말한다.” “아무튼 쓸데없는 말들은 그만 집어치우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이효을은 잠시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어 날 흘겼지만,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말에는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시 물어볼게. 왜 나를 보자고 한 거야?” “그거야 간단해. 궁금해서 불렀어. 하도 요즘 네 말이 많이 들리길래 누군지 정~말 궁금했거든. 아니, 애당초 뮬의 홍보 기록을 봤을 때부터 이상하다 생각했다? 그래서 불러놓고 어떻게 좀 살펴보려고 했는데….” “…….” “너무 그렇게 보지마. 너는 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솔직히 내 입장에서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어? 달마다 유적을 발굴하지 않나. 클랜원은 시크릿과 레어로 도배를 하지 않나. 내가 북 대륙의 수호자라는 것을 알고 있지를 않나. 0년 차 사용자답지 않은 무위를 보이지 않나. 천사들에게 물어봐도 Tanay 어쩌고 거리면서 접근 권한이 없으니 알 수 없다고 하고, 오히려 친하게 지내고 최대한 도와주라고 하지를 않나. 이러한 상황인데 너라면 안 궁금하겠어?” 역시나 그냥 이 자리에 나온 건 아닌 듯싶었다. 사전에 자신만의 깜냥으로 나에 대해 조사한 게 분명하다. 물론 별로 건진 것은 없어 보이지만 말이다. 나는 전부 타버린 연초를 톡 튕기곤 어깨를 으쓱였다. “천사들도 알려주지 않은 건데, 내가 알려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방법은 여러모로 생각해뒀어. 일단 고유 능력으로 너에 대해서 파악하고 북 대륙의 수호자라는 사실을 드러내 뭔가 좀 있어 보이려는 척을 하려 했거든. 그리고 살살 꼬시려고 했는데…. 고유 능력은 네 알 수 없는 능력에 간파 당했고, 수호자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네? 그러고 보니 네 능력에 대한 정체가 뭐야? 어떻게 수호자 전용 능력을 막을 수 있었던 거지?” 참 솔직한 만큼 궁금한 것도 많은 아가씨였다. 물론 이효을이 내게 가지는 호기심은 사용자로써 온당 당연한 것들이었지만, 그거야 그녀 사정이었다. 해서 코웃음으로 대답해주자 이효을의 얼굴이 샐쭉하게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후유. 그럼 이것만 알려줘. 도대체 내가 어떻게 북 대륙의 수호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거지? 이건 굉장히 중요한 사항이니 꼭 대답해주면 좋겠어.” “글쎄.” “부탁해. 만약 네가 대답해주면, 나도 네가 원하는 것은 한 가지 대답해줄게.” 이건 조금 끌리는 제안이었다.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알고 있었어. 그리고 이미 네 담당 천사에게 다녀온 거 아닌가? 문제가 있었다면 천사들이 진작에 조치를 취했겠지. 보아하니 별문제 없이 넘어간 것 같은데, 그럼 된 거지.” “…가브리엘이 전해달래. 비밀은 꼭 지켜달라고. 그리고 기다리고 있다고. 그러고 보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제 내가 질문할 차례군.” “아오 진짜 미치겠네.” 이효을은 처음으로 얼굴을 와짝 일그러뜨리더니 입술을 꾹꾹 짓씹기 시작했다. 그에 아랑곳 않고 나는 차분히 질문을 던졌다. “넌 내 형과 무슨 관계지?” 한참 손해 봤다는 얼굴을 떨치지 못하던 이효을은 순간 나를 멀뚱히 쳐다보더니 이내 “킥.”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왜 웃는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일단은 살려놓기는 했지만 이효을이 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녀의 차후 처분을 결정할 수 있었다. 일단 살려둘지, 기회를 봐서 죽일지, 아니면 협력할지. “푸. 누가 형제 아니랄까봐. 아무튼 그 질문에 대답해보자면…. 난 올해로 수호자 7년 차야. 그리고 가장 최근에 이끌어주는 것으로 선택한 사용자가 바로 네 형이고. 물론 최근이라고 해봤자 2년 전이지만.” “……?” “원래 수호자가 2년 동안 한 곳에 머무르는 일은 드물어. 진짜 길어봤자 1년? 물론 김유현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 천사들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네. 아무튼 내 개인의 의지로 남은 게 가장 커. 나도 천상 한 명의 여성이잖아.” “그렇군.” '이제 그것도 끝이네.'라는 말이 조금 걸렸지만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뭐, 솔직히 지금 그만둘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은 심정이야. 그럴 수가 없어서 문제지. 후계자가 없어 후계자가…. 어휴, 망할 할망구.” 이효을은 팔짱을 끼고 한숨을 폭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더니, 갑작스레 묘한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저기 있잖아. 어쩌면 우리 형수 도련님 사이가 될지도 모르는데, 질문 하나만 더하면 안될까? 물론 너도 해도 좋아.” “앞에 말은 인정 못하겠는데, 뒤에 말은 그러도록 하지.” “좋아. 자세히 말하기 싫어하는 것 같으니, 예 아니오 로만 대답해줘. 너 혹시 새로운 수호자니?” “아니.” 즉답해주자, 이효을은 굉장히 실망한 얼굴로 입을 삐죽거렸다. 아무래도 이래저래 기대한 게 있는 모양이었다. “다시 내 차례. 너 조만간 제법 커다란 소집령을 개최할거라는 말을 들었는데.” “응? 응. 그런데 그렇게 크지는 않아. 나를 알고 있는 애들만 부를 거니까.” “그렇겠지. 그럼 물어보자. 도대체 너희들의 얘기는 어디까지 진행된 거지? 그리고 목적은 뭐지?” “?” 내 질문에 이효을은 고개를 갸웃했다. 너무 범위를 포괄적으로 잡은 것 같아 약간 축소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보였다. “얼마 전 별빛 클랜이 모니카로 들어왔다. 원래는 헤일로에서 활동하던 클랜인데, 이스탄텔 로우의 스카우트를 받았다고 하더군.” “아하. 웬일이니. 이건 소영씨가 실수했네…. 아니, 아니다. 하긴 곧 일은 터뜨릴 거니 별 상관은 없으려나?” 이효을은 그제야 감을 잡았는지 토끼 눈을 떴지만 금세 빙긋 웃으며 뜻 모를 소리를 지껄였다. 아니, 뜻 모를 소리가 아니었다. '실수'와 '터뜨릴 거니 별 상관은 없으려나.'라는 키워드가 나왔다. 아마 그녀는 내가 한 번에 두 개의 질문을 던졌다는 것을 눈치채곤 완곡히 돌려 대답해준 것 같았다. 그러면 두 개 모두 대답해주겠다는 말이었는데, 참 종잡을 수 없는 사용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목적이라…. 이건 조금 설명이 길어질 것 같은데…. 에이, 뭐 천사들 말도 있고 도련님이기까지 하니 대 출혈 서비스다. 너 혹시 할망구…. 어험. 너 대모님이 살해당한 것은 알고 있지?” “알고 있다.” “체. 딱딱하게 대답하기는. 아무튼 개인적으로 대모님의 사망에 석연찮은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래서 그것을 풀려고 행동에 나섰는데, 너도 알다시피 오히려 사경을 헤매는 꼴이 됐지. 네 덕분에 살아나기는 했지만, 깨어나보니까 일은 터져있더라고. 그래서 고민에 빠져있던 찰나에 네가 짠하고 부랑자들을 데리고 나타나 준거야. 소집령의 목적은 바로 네가 데려온 부랑자들이야.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오해는 하지 말아줘. 네 권한을 빼앗겠다는 게 아니라 엄연한 부탁이니까.” '석연찮은 점을 풀려고 행동에 나섰다고?' 형은 유적을 탐험하다가 당했다고 설명했었다. 하지만 이효을의 말은 달랐다. 그렇다면 두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거나. 나는 그러한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럼 네 말은 대모를 살해한 것이 부랑자라는 말인가?” “똑똑해서 좋네. 응. 뭔가 짚이는 게 있어서. 지금 상황과 결부시켜보면 냄새가 꽤 많이 나거든? 솔직히 부랑자 한 명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었는데, 무려 백서연까지 잡아왔으니까 내 입장에서는 정말 고맙지. 걔는 거의 수뇌부 급으로 볼 수 있는 애라서 이것저것 알고 있는 게 많을 것 같거든. 아마 내 생각이 맞는다면, 아예 걔가 대모 살해에 참가했을 수도 있고.” 오랫동안 말해서 입이 아픈지, 이효을은 잠시 입술을 매만지다가 이내 양손을 살며시 맞잡으며 말을 이었다. “아 참. 나 혼자 김칫국만 마시고 있었네. 두 번째 소집령에 참가해줄 거지? 참가자 중에는 당연히 김유현도 있어. 응?” 그게 도대체 뭔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담담히 이효을을 응시했다. 그녀의 생각과 내 생각은 비슷하다. 아니 기억과 비슷하다고 해야 맞으려나. 아무튼 아직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오늘의 대화로 한 가지 확신을 내릴 수는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를 치료해주길 잘했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잠시 동안 생각을 정리하다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일단은 살려둔다고. ============================ 작품 후기 ============================ 오늘은 5분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개강을 하고 나니 갑자기 생활리듬이 어그러져 영 맥을 못 추고 있습니다. 하하. 아, 그리고 조만간 공지에 걸려있는 고연주 사진은 교체할 생각입니다. 그려주신 분께 부탁해 가슴 부분을 조금 더 가린 그림으로 수정을 요청했습니다. :) 그리고…. 예리한 매의 눈을 가지신 분들은 오늘 회에서 뭔가 감을 잡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혹시나 알아차리셨더라도, 다른 분들을 위해 말을 잠시 담아주시면 굉장히 감사하겠습니다. _(__)_ 『 리리플 』 1. 앙마처리다 : 1등 축하합니다. 혹시 그분이 맞으신 가요? 하하하. :) 만약 맞는다면, 만나 뵈어서 즐거웠습니다! 2. TrueEyes : 네! 여기 리리플 바치겠습니다. 넙죽! _(__)_ 3. 월야수월 : 화정과 반시의 저주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능력이라고 다 같은 능력은 아니거든요. :) 4. 꿈속의활로 : 음. 둘의 사용처가 달라 비교하기 애매하지만, 만약 둘을 완전체로 가정한다면, 화정 > 제 3의 눈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5. 태양달그리고별 : 그렇죠. 이효을은 남부와 동부를 아우를 정도의 영향력이 있으니까요. 차후 소집령에서 차차 드러낼 생각입니다. 6. podytop : 이효을은 김수현의 기억에 없던 이입니다. 원래 1회차 때 이효을은 반시의 저주를 해결하지 못해 사망하고, 김수현이 형의 클랜에 들어간 것은 한참 후입니다. 혹시 대륙의 수호자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시몬과 부랑자 대장의 대화를 다시 읽어보시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 7. 유리켄느 : 효을 이름 참 예쁘죠? 하하. 수현의 현은 빛날 현이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네요. :) 8. 레필 : 단언컨대 제 3의 눈은 사기 능력입니다. 하하. 9. J.F : 수현의 경우엔 현재 검의 주인이죠. 그래서 모든 검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하하. 10. 석양s : 이거 초 중반까지는 훈훈하게 보다가 갑자기 남자 주인공처럼 보이는 애가 피를 흘리면서 누워있어 깜짝 놀랐네요. -_-a 그리고 마지막엔 언뜻 보다가 또 놀라서 껐는데, 목을 안고 있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ㅜ.ㅠ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0326 / 0933 ---------------------------------------------- 미래, 뒤틀리다. 이효을은 꼭 확답을 듣고 싶었는지 내게 연속적으로 참가를 권유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의사를 확실히 밝혀주었다. 이 정도까지 얘기를 들었는데 소집령의 진짜 목적을 눈치채지 못한다면 스스로를 바보로 인증하는 꼴이었다. 아무튼 오늘 이효을과의 만남은 제법 유익한 시간이었다. 서로의 속내를 완전히 드러낸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생각이 나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시간낭비가 아니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설령 일을 터뜨린다고 해도 주도와 수습을 도와줄 이가 필요했는데, 이효을이라면 그런 역할에 적격일 것이다. 이윽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이효을은 차분히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가게?” “응. 가기 전에 네 주최로 열리는 소집령의 일정을 알려줘야지.” “날짜는 3주 후. 작업이 막바지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마무리할 시간이 필요해서. 그리고 장소는 물색 중이야. 3일 안으로 전령을 보내줄게.” “그래 알겠다. 아, 그리고 너. 소집령 전에 우리 클랜에 한 번 방문해야 할 것 같은데.” 이효을은 처음에는 고개를 기울였지만 이내 눈을 살짝 치켜 올리며 말했다. “왜?” “그전에 한 가지 더. 네 주최로 모이는 사용자들은 모두 너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거지?” “그렇지. 다들 나랑 적게나마 함께한 전력이 있는 녀석들이니까.” “그럼 모두 믿을만한 사람들이라는 소린가?” 이 말을 꺼낸 순간, 이효을의 눈이 깊어졌다. 그녀가 먼저 이야기를 꺼낸 이상 내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달았을 것이다. 이왕 참가하는 거, 나는 이번 소집령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언제쯤 방문하면 되는데?” 이윽고 이효을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머셔너리 로드.” “아, 오셨군요. 아닙니다. 오히려 먼저 약속을 잡아주셔서 미안합니다. 그 동안 제가 이래저래 바쁜 일이 있어 짬을 못 냈습니다.” 나는 내 집무실로 들어온 신재룡을 보고 앞에 놓인 소파를 가리키며 자리를 권했다. 원래 하루만 머무르기로 했었지만 어느새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기간이 길어져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딱히 터치하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이미 내 의사는 확실히 전달한 상태였다. 그리고 어떤 사용자이든 간에, 아니 연차가 높은 사용자일수록 새로운 둥지를 찾는 것은 굉장히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런 신재룡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기에, 그 동안 머셔너리를 둘러볼 시간과 스스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충분히 준 것이다. 이윽고 내가 권해준 자리에 앉은 신재룡은 지나치리만큼 정중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요즘 상황이 이러니 당연히 바쁘실 겁니다. 오히려 저야말로 죄송하네요. 하루만 머무르겠다고 해놓고 염치없이 지금까지 신세를 졌습니다. 하하.” “신세라뇨. 그 동안 클랜원들이 신재룡씨에 대해 하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여러 가지 일도 도와주시고, 안솔에게 적절한 조언도 해주신다고요.” 신재룡에 대한 클랜원들의 평가는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사실상 구조대에 참가했을 때부터 그를 좋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터라, 차후 가입하게 되면 큰 무리 없이 녹아들 것이라 생각되었다. 신재룡은 쑥스러운 미소를 한 번 내비치고는 이내 진지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미리 선수를 쳐주기로 했다. “그럼 마음의 결정은 내리신 겁니까?” 신재룡은 잠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가, 침을 삼키는 듯 목 울대를 꿀꺽 움직였다. 하지만 바로 차분함을 되찾는걸 보니 내 말대로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보였다. “처음 암시를 주셨을 때는 조금 당황했었습니다. 말로는 모든 정리를 끝냈다고는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제 마음속에는 여울가녘의 클랜원들이 남아있었거든요. 하지만 지금 잘 생각해보니, 그때 그 말씀은 제 처지에 참으로 감사한 말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예. 어제 비로소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 동안 머셔너리 클랜에서 지내면서 참 좋은 사람들이 많다고 느꼈고, 이 기회를 놓치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아직 그 말씀이 유효하다면 이제는 감히 제가 먼저 요청하고 싶습니다. 워낙 대단하신 분들이 많아 제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가입을 받아주신다면 최대한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신재룡(4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사제(Normal, Priest, Expert) 3. 성향 : 선 · 열정(Good · Passion) [근력 78] [내구 82] [민첩 74] [체력 90] [마력 84] [행운 68]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농담하지마.' 나는 제 3의 눈으로 사용자 정보를 확인하며 신재룡을 쳐다보았다. 그는 일단 사제였고, 이 정도의 사용자 정보라면 무조건 도움은 된다. 더구나 사제로서는 드물게 체력의 능력치가 높아 더욱 높은 효율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성향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대규모 전쟁을 생각해보면, 지금 사제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머셔너리로서는 가뭄의 단비와 같은 영입이라고 볼 수 있었다. 나는 손을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그리고 최대한 넉살 좋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하. 그것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앞으로는 더욱 바빠질 예정이니 어떻게든 도움은 되실 겁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할 일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거든요. 앞으로 머셔너리를 위해 분골쇄신 노력하겠습니다.” 신재룡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후 내게로 다가와 손을 맞잡아주었다. 그러자 손에서 따뜻하면서 포근한 느낌이 전해져 들어왔다. 똑똑. 그때였다. 신재룡과 따뜻한 악수를 하고 서로 손을 거둘 즈음, 누군가 가볍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와 그가 동시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명의 여성이 모습을 보였다. 이유정이었다. “오빠…. 어, 이야기 중이셨네. 나 들어가도 돼?” “이미 문 열어놓고선. 들어와. 무슨 일인데.” 눈짓으로 신재룡에게 양해를 구한 후 고개를 끄덕이자, 이유정은 냉큼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윽고 책상 앞까지 다다른 그녀는 신재룡을 한 번 흘끗 쳐다보더니 이내 곱게 접힌 기록을 내게 내밀었다. “오빠 이거. 해밀 클랜에서 전령을 보냈어.” “해밀 클랜에서?” '이효을이 보냈나?' 나는 담담히 기록을 받아 겉면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살짝 멈칫하고 말았다. 발신인은 이효을이 아니라 내 형 김유현이었다. 여기서 바로 기록을 읽어볼까 하다가 문득 앞에서 멀뚱히 서 있는 신재룡의 시선이 느껴졌다. “사용자 신재룡. 다시 한 번 머셔너리로의 가입을 축하합니다. 앞으로 많은 활동 부탁합니다.” “아, 예!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기대하겠습니다. 조만간 아침 회의에서도 볼 수 있겠네요. 아무튼…. 우선 임시 숙소에서 개인 숙소로 옮길 필요가 있겠네요. 이유정?” “응? 아, 응!” 나와 신재룡의 대화를 들었음이 분명한데, 의외로 이유정은 그렇게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아마 이곳에 계속 머무르는 것을 보며 그의 가입을 염두에 둔 모양이었다. “오늘 부로 신재룡씨도 머셔너리 클랜원으로 가입하게 되었다. 네가 이것저것 신경 좀 써주렴.” “아하. 역시나. 알겠어요~. 가입 환영해요 아저씨! 앞으로 잘 부탁해요!” 이유정은 밝게 미소 짓더니 신재룡의 손을 잡아 휙휙 흔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신재룡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클랜원들 중 한 명이었다. 진심으로 환영한다는 기색이 훤히 드러나는 게, 예전에 김한별을 대할 때 보였던 태도와는 천지차이였다. '배신자라고 했던가?'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예. 이유정. 클랜원들에게 소개도 시켜드리고, 개인 숙소도 안내해드리고. 알고 있지?” 이유정은 대답 대신 눈을 곱게 흘기곤 입술을 뾰족이 내밀었다. 마치 “나도 이제 다 알고 있다고요.”라고 반항하는 딸을 보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문밖으로 걸어나가는 둘을 보다가, 나는 잠깐 내려놓았던 기록을 다시 집어 들었다. * 클랜원들과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나는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아까 읽었던 기록을 다시 천천히 훑어보았다. 처음에는 별 내용이 없었다. 제법 두툼하길래 뭔가 있겠다 싶었는데, 밥은 잘 먹었냐, 몸은 좀 괜찮으냐 등의 쓸데없는 안부 내용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숨을 내쉬며 기록을 치우려고 할 즈음, 비로소 기록을 보낸 본 내용이 나오기 시작했다. 구구절절 내용을 써놓기는 했지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 말이었다. 이효을을 당분간 머셔너리의 공동 클랜원으로 받아줄 수 없겠냐는 것. '물론 김유현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 천사들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네.' 문득 며칠 전 이효을과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녀가 형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형 또한 이효을의 정체를 알고 있는 만큼,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갚는다, 나를 키워준다는 등등 어떤 명목으로든 요청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형은 나를 위한다는 마음에 흔쾌히 수락했을 것이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아니 많은 고민이 들었다. 비록 정체를 아는 사용자는 소수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흔히들 착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북 대륙의 수호자가 착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수호'라는 말이 들어가서인지 빚을 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는 사람에 한해 수호자에 대한 인식을 정리하면 '자기 자신을 희생해 남을 도와주는 자.'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이끄는 자라고 해도 결국에는 천사들의 따까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천사들은 하나의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더욱 용이하게 달성하기 위해 수호자를 내세운 것이다. 지금 현재만 봐도 알 수 있다. 이효을은 수호자면서 왜 지금 침공 받는 도시들을 구하러 가자고 하지 않을까? 구원은커녕 오히려 중앙, 서부의 클랜들이 속속히 동부와 남부로 자리를 옮기는 중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직감이지만 그 배후에 이효을이 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농후했다. 즉 대륙의 수호자라는 존재는 천사들의 대리인이고, 그들은 목적 달성에 철저히 맞춘 행보를 보인다. 한마디로, 지금의 이효을은 황금 사자 및 우호 클랜들을 쳐내는 게 북 대륙을 위해 더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무튼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이효을이 머셔너리로 들어오는 것은 영 탐탁지 않다. 또한 처음 만났을 때 그녀를 죽이려는 마음을 먹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지금에서야 형의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는 있지만, 추후에는 지금의 황금 사자 꼴이 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물론 지금 당장은 죽이겠다는 마음은 접었다. 상황이야 어찌됐든 현재의 이효을은 내가 지향하는 행동과 상당히 비슷한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형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지금까지 형을 비롯한 여러 클랜들을 키워옴으로써 쌓아온 수호자 자체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정말 복잡하네.' 나는 한숨을 내쉬고 기록을 툭 내던졌다. 어째 산 넘어 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뜩이나 머릿속이 복잡했는데, 하나의 일이 해결되면 또 하나의 일이 튀어나왔다. 어쨌든 도대체 뭔 생각으로 내 클랜에 오겠다는 건지는 몰라도, 형 말대로 자세한 얘기는 직접 만나서 해야 할 듯싶었다. 그리고 그전에 세라프도 한 번 만나보고. 나는 의자를 빙글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정원에 완연한 어둠이 내려 앉은 게 밤이 찾아온 모양이다.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단은 내가 해야 할 일들에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하나의 일을 해결하면 다른 하나의 일이 튀어나온다. 이 순서에 따르면 이제는 또 다른 하나의 일을 해결할 차례였다. 오늘 식사에서 비비앙의 연구가 거의 완료됐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말인즉슨 물약의 제조를 마쳤다는 말이었고, 백서연에 대한 작업을 들어갈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녀는 새벽쯤에 완전히 마무리 지을 수 있다고 말했지만 미리 가서 설명을 듣고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마음먹은 나는 바로 집무실을 나서 3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고요한 어둠이 스며든 복도를 걸어 끝 쪽 방의 문 앞에 다다랐다. 비비앙의 공방은 굳게 닫혀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한 약초 냄새가 콧속을 찔러 들어오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오늘 후기와 리리플은 하루 쉬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제가 9시 강의가 있는 터라, 7시에 집에서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얼른 이북 수정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어야 하거든요. ㅜ.ㅠ 그리고 전개 속도에 관해서는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분 말씀대로 제가 지금껏 적어온 페이스가 있어서 당장의 변화는 조금 어려우리라 생각됩니다. 일전에 말씀 드린 데로 속도에 관해서는 차차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PS. 한 가지 질문에 답변을 드리자면 메모라이즈는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1부와 2부 사이에는 약 1년~2년 정도의 공백이 있을 예정이고, 이후는 최대한 빠르게 완결을 위해 달릴 생각입니다. 지금은 당연히 1부이고, 현재 연재 분은 기승전결로 가정하면 전으로 보시면 됩니다. 동, 남부 클랜들이 서 대륙 사용자 + 부랑자들과 전쟁을 벌이는 것이 결에 해당하는 파트입니다. 백서연과 소집령에 대한 파트는 최대한 빨리 끝마치고, 결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그리고 전쟁 후 마무리 작업으로 1부를 끝내고, 잠시간의 휴식 기간을 가질 생각이고요. 하하.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27 / 0933 ---------------------------------------------- 미래, 뒤틀리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온갖 약초가 뒤섞인 알알한 냄새가 코를 톡 쏘아 들어온다. 천장에서 뿌려지는 진한 호박 빛 아래 드러난 공방의 바닥은, 개판 오분 전이라 봐도 좋을 만큼 난장판이었다. 이곳 저곳에 널브러져있는 약초는 물론이요 이번에 필요하다고 해서 잔뜩 사다 준 재료들도 무질서하게 흩어져있다. 연단을 하는데 여전히 마법 진을 사용하는지 부글부글 거품을 일으키는 화로 아래 붉은색으로 빛나는 진이 보인다. 내가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비비앙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뭔가 굉장히 중요한 과정을 진행중인 듯 오른손에 쥐고 있는 질서의 오르도가 연신 번쩍이고, 허공에 십 수개의 마법 진이 나타났다가 사그라진다. 그러더니 보지도 않고 손을 뻗어 타브로시아의 뿌리를 3개 정도 쥐더니 이내 화로를 향해 휙 던졌다. 펑! 뿌리는 정확히 화로 속으로 녹아 들어갔고, 그러자 미약한 굉음과 함께 자줏빛 연기가 뭉게뭉게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비비앙은 화로를 흘끗 쳐다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다였다. 잘되어가고 있다는 제스처를 보여준 그녀는 다시금 손을 바쁘게 놀리기 시작했다. '도와줄까?'란 생각이 설핏 들었지만, 나는 이내 그 생각을 접고 대충 자리를 치워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비비앙은 연금술사로서의 자부심이 굉장히 강하다. 그런 면은 말에서도 드러나지만 행동에서 더욱 확실히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가 그녀를 나름 인정하는 이유였다. 뭐랄까, 직업 정신이 굉장히 투철하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열정을 갖고 행동에 임하는 비비앙의 모습은 참 아름다웠다. 땀에 절어 뺨에 착 달라붙은 머리카락도. 언제 갈아입었는지도 모르는, 약초와 재료의 흔적으로 범벅이 되어버린 로브도. 그리고 갑자기 살랑살랑 실룩이기 시작한 토실토실해 보이는 엉덩이도. 이 모든 모습이…. 응? '하하. 나도 참.' 나는 콧등을 주무르곤 싱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요새 몸이 피곤해 잘못 본 것이라 생각하며 다시 흐뭇한 마음으로 비비앙을 응시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제는 늦은 밤을 넘어서 완전한 새벽으로 접어들었을 즈음 비비앙의 마무리 작업도 서서히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까만 해도 넘칠 듯 부글거리던 화로의 액체는 어느새 양이 굉장히 줄어든 상태였다. 비비앙은 기다란 막대기로 화로를 정성스럽게 젓더니, 국자에 액체를 한 가득 퍼 담아 옆에 놓은 빈 병에 조심스럽게 따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것을 세 번 가량 반복했고 이내 양팔을 번쩍 올리며 외쳤다. “끝났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박수를 몇 번 쳐주었을 뿐. 비비앙은 손을 번쩍 치켜든 채로 나를 돌아보고는 뻐기는듯한 미소를 보냈다. 꽤나 자신감이 엿보이는 웃음이었다. “기다리느라 수고했어, 김수현.” “고생했다. 그럼 이제 완전히 끝난거야?” “응. 원래는 더 일찍 끝낼 수 있었는데, 중간에 계획을 세분화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네. 잠시만 기다려봐.” 비비앙은 얼른 성과를 자랑하고 싶었는지 물약이 들어있는 병들을 주섬주섬 모으기 시작했다. 그녀가 방금 전에 만든 자줏빛 물약은 총 4병이었다. 설마 이게 끝인가 싶었지만 역시나 아니었다. 비비앙은 자줏빛 물약을 제외하고도 총 3가지 색깔을 갖고 있는 물약을 선보였다. 한 색깔당 총 4병이었으니, 16병으로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짙은 남색, 흑색, 분홍색, 자주색. 왼쪽에서부터 가지런히 놓인 물약들을 보다가 나는 힐끔 비비앙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설명을 해달라는 시선을 느꼈는지 “에헴.” 한두 번 목을 가다듬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핵심 재료인 썩어버린 위그드라실의 과실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나는 차분히 고개를 주억였다. 원래의 과실이라면 복용자의 정신을 맑게 해주고 마력의 흐름을 도와준다. 그러나 썩어버린 과실은 이와 정반대의 효능을 지니고 있다. 쉽게 말하면 먹으면 죽는 독약이었다. 비비앙은 내 반응을 확인했는지 바로 말을 이었다. “일단 이 네 가지 물약의 공통점은 과실의 기본적인 효능이 똑같이 들어있다는 거야. 말 한대로 총 여덟 조각을 한 조각당 반으로 나눠서 총 열여섯 병으로 나눴어. 처음에는 효능이 너무 강력해서 네 조각으로 나눌까 했지만…. 시간을 생각하면 절반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렇군. 공통점이라…. 그럼 차이점도 있다는 소린가?” “그렇지. 마볼로의 책은 모든 조교의 총집합이라 봐도 좋을 정도로 내용이 많아. 그 중 요정 여왕에게 가장 타격이 심했던 것들을 내가 따로 엄선했지. 차이점은 바로 거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각 상황에 맞는 물약을 먹여 시너지 효과를 노릴 생각이야.” “상황이라면?” “간단히 말하자면, 이 남색 물약은 온 몸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어주지. 분홍 물약은 음약. 음약은 내 장기이니 효과는 기대해도 좋아. 그리고 흑색은 고통. 마지막으로 자주색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어주지. 이 네 병이 한 세트로 총 네 번을 사용할 수 있어.” 문득 비비앙이 굉장히 치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말인즉슨 물약으로만 해결을 보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물론 자세한 건 직접 먹여봐야 알겠지만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간다. 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기꺼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알겠다. 그럼 이제 작업에 들어가는 것만 남은 거네?”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걱정이 된단 말이야.” 비비앙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뿐히 팔짱을 끼고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슨 걱정?” “위그드라실의 과실은 정말로 얻기가 힘든 재료잖아. 그만큼 효과가 좋긴 좋은데, 문제는 효능이 강해도 너무 강하다는 거지. 특히 시너지 효과까지 생각하면…. 아우. 그냥 네 조각으로 나눌걸 그랬나?” “요정 여왕도 어지간하게 버텼다며. 아니면 절반만 먹이는 방법도 있잖아.” “인간의 정신력을 얕보는 건 아니지만, 요정 여왕과는 비교할 수 없지. 수백 년 동안 고결함을 지켜온 정신이랑, 꼴랑 20년 조금 넘게 지켜온 정신이랑 같다고 볼 수는 없잖아. 그리고 만들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만들어버린 이상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는 없어. 여기에 얼마나 많은 계산이 들어갔는지 알아?” 비비앙은 볼멘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몇 번 입맛을 다시고는 갑작스레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무튼 네가 말한 대로 백서연의 정신력이 최대한 강하기를 기대해야지. 이 물약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비비앙은 벌써부터 걱정 아닌 걱정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효능이 강하길래 이렇게까지 말하는지 궁금함이 일었지만, 아무튼 큰 상관은 없었다. 막말로 정보를 뱉어낼 때까지 죽지만 않으면 된다. 아니, 어쨌든 부랑자들의 최종 종착지는 죽음이었으니 이것도 큰 상관은 없으려나. 나는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비비앙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차피 필요한 것들만 뽑으면 다 죽일 놈들이야. 설령 네 말대로 불의의 사고가 난다고 해도 중간에 죽지만 않으면 돼.” “…응.” “가장 중요한 건 백서연이야. 백서연만 함락할 수 있다면 다른 놈들은 네가 어떤 용도로 사용하든지 일절 상관하지 않겠어. 비비앙. 난 네게 이 일에 대해서 전권을 위임했다. 알고 있지?” 비비앙은 잠시 동안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말 그대로 아주 잠시 동안이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스산한 빛이 스치는가 싶더니, 이내 입 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말했다. “그 말, 정말이지?” 나는 깊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비앙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정말 내가 어떤 짓을 해도 괜찮은 거지?” “난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해.” 비비앙은 그제야 마음을 놓은 듯 평소의 낭랑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체 없이 물약을 한 병 잡고는, 내 팔을 잡아 이끌었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병은 짙은 남색의 액체로 채워져 있었다. 기존의 효능과 더불어 온 몸의 감각을 예민하게 일깨워주는 부가 효과가 있는 물약이었다. “좋아 좋아. 그럼 바로 지하 감옥으로 가자고.” “지하 감옥? 지금 바로? 나는 괜찮은데, 넌 좀 쉬어야 되지 않아?” “본격적인 작업은 내일부터 들어갈 거야. 다 순서를 정해놨거든. 첫 번째 순서는 이것만 먹이면 되니까 금방 끝날 거야. 같이 가줄 거지?” 비비앙의 말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나란히 공방을 나선 우리는, 달빛에 휩싸여있는 복도를 걸어 지하 감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것이 추후 북 대륙을 강타할 폭풍을 만드는,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를 일으킬 첫 걸음이었다. * 다음날. 나는 비비앙의 요청에 따라 오후 일과를 끝마치고 지하로 내려갔다. 넓디넓은 면적을 자랑하던 연무장은 개축 공사로 인해 비교적 훌륭한 지하 감옥으로 변모한 상태였다. 물론 언제라도 철거가 가능하게 만든 만큼 구조는 굉장히 간단하다. 연무장을 하나의 거대한 직사각형으로 생각한다면 하나의 선마다 2개의 감옥이 배치되어있고, 총 8개의 감옥이 배치되어있다. 이중 7개의 방에는 부랑자를 가둬놓았고, 나머지 1개의 방은 비비앙이 특별히 요청한 다용도실이었다. 아주 약간의 라이트 스톤만 점등한 지하 감옥은 어둡고 침침했다. 내부는 뜻 모를 후끈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으며, 코를 쥐게 만들 정도의 악취가 곳곳에 흐르는 중이었다. 예전과는 다르게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지하를 가로지르자 이윽고 강철로 만들어진 문이 보였다. 이곳은 다용도실 바로 옆에 있는 감옥으로, 백서연이 갇혀있는 곳이었다. 안에서 미약한 신음과 함께 사람의 기척이 두 명 느껴지는 게, 아무래도 비비앙이 먼저 온 모양이다. 나는 바로 문을 밀어 들어갔다. 그러자, 미약하게만 들리던 신음이 더욱 확실히 귓가로 흘러 들고, 그와 동시에 악취가 더욱 심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아…. 파…. 아파…! 아….” “아, 김수현 왔어?” 들어가자마자 비비앙이 나를 반기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쭈그려 앉은 채, 바닥에 널브러져 흐느끼는 백서연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아마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나와 비비앙이 악이고, 백서연이 선이라는 생각하지 않을까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뭐 나도 내가 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말이다. 어찌됐든 그것보다도, 중요한 건 백서연의 상태였다. 비비앙은 어제 새벽 백서연에게 남색 물약을 먹었다. 효과는 확실했다. 과실의 기본 효과인 정신 오염과 마력을 어지럽히는 효능이 제대로 발휘됐는지 그녀는 감옥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나중에는 몸을 배배 꼬고 몸을 뒹구는 것도 모자라 자해를 시도해, 결국 벽면에 세워서 구속해뒀을 정도였다. 비비앙의 말에 따르면 온몸의 감각을 극대화했으니 더욱 고통스러울 거라나 뭐라나. 아무튼 비비앙이 오늘 다시 풀어줬는지는 몰라도, 백서연은 한 팔과 양다리에 억제구가 묶인 채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그녀는 하루 동안 물약에 상당히 시달렸는지 처참한 몰골을 보이고 있었다. 감옥에 갇힌 이후 제대로 씻지못해 몸에서는 냄새가 진동했고, 바닥의 일부에는 오물이 보인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그것이 소변과 대변임을 알 수 있다. 물약의 효과가 강하긴 강한 듯, 어제까지만 해도 표독스러운 눈빛이 살아있던 백서연의 눈동자는 한풀 기가 꺾여있었다. “그럼 김수현도 왔으니. 이제 두 번째 물약을 사용해 볼까나~?” 그때였다. 가만히 백서연을 관찰하던 비비앙은 품속에서 분홍빛이 감도는 물약을 꺼냈다. 음약 효과가 섞여있다는 물약이었다. 이윽고 비비앙은 물약의 마개를 따더니 백서연의 턱을 잡고 강제로 들이밀었다. 그 와중에도 정신을 살아있는지 그녀는 간신히 고개를 흔들며 저항했지만, 의미 없는 반항이었다. 어제처럼 목 울대를 가볍게 매만져주자 곧 “꿀꺽.” 액체를 들이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끄윽…. 큽…. 푸하! 하아…. 하아…. 하아아아악…! 아파…. 아파…! 아아아아아!” 이윽고 모든 액체를 삼킨 백서연은 거친 숨소리를 토하며 몸을 떨기 시작했다. 비비앙의 물약의 효능은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 온 몸으로 퍼지고 효과를 발휘하는데 약 1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비비앙은 침이 묻었는지 백서연의 옷에 손을 쓱쓱 닦고는 분연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내게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김수현. 어떻게 할래?” “응? 뭐가?” 내 반문에 비비앙은 손가락을 들어 백서연을 가리켰다. “어제는 맛보기였고 오늘부터 제대로 조교를 시작할 생각이거든. 보니까 얼굴도 제법 반반한데…. 어때. 생각 있어?” “싫어.” 나는 즉답했다. 확실히 백서연은 예쁘다. 비록 한 팔이 없기는 했지만 얼굴과 몸매는 고연주와 견줄 정도의 섹시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녀와 관계를 맺기에는 고연주와 정하연에게도 미안했고, 무엇보다 내 것에게도(?) 너무 미안하다. 그래도 너무 딱 잘라 거절했나 싶어 비비앙의 표정을 살펴보자, 뜻밖에도 왠지 모르게 기분 좋아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 그래?” 비비앙은 입가에 씰룩씰룩 미소를 짓고는, 낭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다른 감옥 문 좀 열어줘. 너한테 전향 신청했다는, 남성 부랑자들이 있는 감옥으로.” ============================ 작품 후기 ============================ 후기 적다가 깜빡 잠들었습니다. 오늘 아침 일찍 나가서 이래저래 잠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문제는 오늘도 어제와 똑같은 시간에 나간다는 것이네요. 그래도 개강 첫날보다는 몸이 점차 익숙해지는 것 같습니다. 아마 다음 주쯤이면 어느 정도 적응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조교 파트는 많은 부분이 생략될 예정입니다. 개인적으로 적기도 불편한 부분이고, 독자분들도 보기 불편하신 분들이 계시겠죠. 아마 이르면 다음 회에 종료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 그리고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 회도 늦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금요일이 최악의 시간표라서 아침 일찍 가서 집에 제일 늦게 돌아오는 날입니다. 아무리 빨라도 19시…. 자정에 기다리시는 분들은 기다려도 올라오지 않는다면, 한숨 푹 주무시고 아침에 일어나셔서 보시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 리리플(325회) 』 1. 우사인볼트 : 1등 축하합니다. 하하. 이효을의 경우는 김수현이 다른 이유로 죽일까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2. 데바란 : 전개가 느린 것도 죄송한데 피치 못할 사정이 없는 한 1일 1연재는 유지하는 게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 3. 광마(狂馬) : 이번 백서연 파트 끝내고, 소집령 끝내면 판은 만들어집니다. 그때부터는 전쟁만이 남아있죠. 전쟁의 시작의 1부의 (기승전)결의 시작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4. hohokoya1 : 항상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비 결산은 소집령 이후 결으로 들어가기 전, 잠시 쉬어가는 편으로 나올 예정입니다. 5. 석양s : 그냥 블로그에 리뷰 되어있는 글을 읽었는데도 멘탈이 붕괴할뻔했습니다. 무섭더라고요. 아, 축하드립니다는 한국어 맞춤법 검사기로 돌리는 틀렸다고 표시되었습니다. 저도 조금 놀랐습니다. 다른 분들에게도 여쭤봤는데, 의견이 분분합니다. 하하. 『 리리플(326회) 』 1. 외로운솔로 : 1등 축하합니다. 닉네임이 제 가슴에 비수를 꽂는군요. ㅜ.ㅠ 2. podytop : 현재 고민 중에 있습니다. 일단 최소 1부까지는 이어갈 생각입니다. 3. Cheetos : 현재 이북 수정 속도가 많이 더디네요. 그 부분은 확실히 삭제할 예정입니다. 4. 프리테즈 : 정답입니다. 2년간의 공백의 소설 내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고, 휴식은 어느 정도 잡아야 할지 생각 중입니다. 일주일은 너무 많을까요? 5. Lea :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하. 힘이 나네요.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28 / 0933 ---------------------------------------------- 미래, 뒤틀리다. 백서연에게 음약을 먹인 이후, 3단계에 해당하는 흑색 물약(고통의 물약)마저 먹인지도 꽤나 시일이 흘렀다. 지하 감옥은 여전히 어두웠다. 하지만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지는 풍경을 밟으며 나는 과거 연무장이었던 곳을 차분히 가로질렀다. 이윽고 내가 걸음을 멈춘 곳은 다용도실이었다. 이미 문은 열려있었기에 나는 스스럼없이 안을 살펴보았다. 다른 감옥과는 다르게 이곳만은 미약한 불빛이 감옥 내부를 비추고 있다. 그리고 안에서는 묘한 열풍이 휘몰아치는 중이었다. 밤꽃 냄새, 땀 냄새, 오물 냄새, 몸 냄새 등 온갖 구릿한 냄새가 뜨거운 바람을 타고 콧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냄새의 근원지는 내부서 뒤엉켜있는 한 명의 여성과 세 명의 남성이었다. 잠시 그들이 벌이는 일방적인 행각을 보다가 나는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문을 닫지는 않았다. 하지만 발소리가 들렸는지 한창 행위에 열중하던 이들 중 한 명이 급히 몸을 돌리는 게 보였다. “허, 헉!” “괜찮아. 계속해도 돼.” 손을 들어 괜찮다고 말해주었지만 백서연을 둘러싼 부랑자들은 엉거주춤히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옷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넝마를 급히 걸친 그들은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비비앙은 왔다 갔나?” “예, 예. 오늘 식사를 갖다 주시면서…. 잠시 살피고 가셨습니다.” “그래. 딱히 불편한 건 없고?” “예! 요즘 식사도 잘 나오고…. 그리고 뭐….” 나와 가장 가까이 서 있던 부랑자는 백서연을 흘끗 쳐다보고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거야 그걸 할 체력은 있어야 하니까.' 엄밀히 말하면 나는 부랑자들을 굶긴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상전 모시듯 실컷 먹인 것은 아니었지만, 백서연과 심복 두 명을 제외하곤 정상적인 포로로 대우해주고 있었다. 물론 그 세 명은 딱 죽지 않을 정도로 체내에 억지로 주입하고 있었지만. “저…. 머셔너리 로드. 외람되지 않으면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때 가만히 눈치만 살피고 있던 부랑자가 말을 걸었다. 말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주억이자, 그는 약간 거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혹시…. 저번에 말씀해주신 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아. 곧 소집령에 열릴 예정이다. 재판도 그때 같이 할 거야.” “그, 그렇군요. 대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최소한 증언에 관한 약속은 지킬 생각이니까, 그 부분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무튼 당분간 비비앙의 말에 잘 좀 따라달라고. 잊지 않을 테니까.” 부랑자는 여부가 있겠냐는 얼굴로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애당초 목숨에 관해서는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연막을 쳐두었다. 어쩌면 그들도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백서연에게 이렇게 짐승같이 덤벼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부랑자들은 이내 한 명 두 명 방을 나가기 시작했다. 아직 한창 즐기고 있었는지 아쉬움이 남는 모양새였지만 곧 한 명도 남김없이 각자의 감옥으로 돌아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나는 마력을 담아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러자 다용도실의 라이트 스톤이 일제히 빛을 밝혔고, 바닥에 죽은 듯 누워있는 백서연의 나신을 적나라하게 비춰주었다. 다리를 좌우로 벌린 채 발라당 드러누워있는 백서연의 모습은 꽤나 처참했다. 어지간히도 시달렸는지 어디 한 곳 성한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 봉긋한 가슴은 이리저리 빨린 자국과 이빨 자국으로 그득한 상태였다. 음부는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고, 약간 벌어진 분홍빛 틈새 사이론 하얀 액체가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머리부터 하부까지 묻어있는 하얀색과 붉은 자국을 본다면 그녀가 근 며칠 동안 얼마나 심하게 당했는지 새삼 짐작할 수 있었다. “아윽…. 아앙…. 흑…. 크윽…. 하앙…. 끅….” 우는 건지, 흥분한 건지, 아파하는 건지 구별할 수 없는 소리가 벌어진 입술에서 흘러나온다. 아니 셋 모두일 수도 있다. 비비앙의 말에 따르면 원래 위그드라실의 과실은 영구적인 효과를 지닌다고 한다. 그러나 효과가 반대로 뒤바뀌고 물약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영구성은 소실됐지만, 지속성은 남아있다. 그 말인즉슨 현재 백서연은 예민해진 감각에, 쾌락과 고통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는 소리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한동안 물끄러미 응시했다. 정신이 강인한 여성이라도 여럿에게 윤간을 당하면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진다. 아무리 음약을 먹였다고 해도 며칠 만에 마음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저 몸을 강제로 반응하게 만들 뿐 그것을 진정으로 즐기게 만드는 것은 소설 속에서나 나오는 일이었다. 더구나 백서연은 평소 아끼던 부하들에게 당한 상태였다. 그녀는 타고난 색녀도 아니고 요정 여왕처럼 오랜 기간 동안 조교 당한 것도 아니었다. 아마, 지금 죽고 싶을 만큼 괴롭지 않을까? “흑…. 흐엉…. 흐어엉…. 어어엉….” 그때였다. 다시금 백서연의 소리가 공허한 내부를 가득히 메운다. 이번에는 확실히 흐느끼는 목소리였다. 그녀는 어느새 손등으로 눈을 가린 채 입술을 열어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 고요한 침묵 아래 구슬프게 흐느끼는 소리만이 지하를 울렸다. 그것은 가뜩이나 무거운 분위기를 더욱 묵직하게, 더욱 처량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연신 눈물을 뚝뚝 떨구는 백서연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나는 조용히 발걸음을 돌려 다용도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불쌍하지 않다. 슬프지도 않다. 나는 담담한 속내를 느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남들은 어떻게 볼지 몰라도, 스스로를 선하다고 생각한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난 원래 그렇게 생각한다. 인간은 원래 자기 합리화에 능하고, 상황에 따라 태도가 달라지며, 일관성이 없는 지극히 이기적인 동물이라고. 나는 목적을 가지고 2회 차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런 만큼 고작 저런 상황에 취해 서글픈 감정을 느끼기에는, 1회 차의 기억이 선명히 머릿속에 남아있다. 내가 겪어야만 했고, 보고만 있어야 했으며, 당하고만 있었어야 했던 나날들을. 그때의 사무친 기억들은 아직 가슴 깊숙한 곳에 절절히 남아있었다. 그래. 단지 그뿐이었다. * “수현. 수현이 저 정말 오랜만에 불러주는 거 알아요?” 한밤중.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던 도중, 귓가로 흘러들어오는 뾰족한 음색에, 나는 고개를 우로 돌리며 심드렁히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오늘도 갑자기 찾아오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 얼마나 기뻐했는데요. 그런데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따라오라니…. 하연씨도 슬퍼하고 있다고요.” “요즘 좀 바빴습니다.” 고연주는 모처럼 투정을 부릴 모양이었지만 바빴다는 말에 바로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 내가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를 바로 곁에서 지켜본 그녀이기에 딱히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달콤한 말을 못들은 게 영 못마땅한지, 고연주는 입술을 삐쭉 내밀어 불만을 표시했다. 그녀가 어떤 말을 원하는지 알고는 있지만 지금은 말을 아끼고 싶었다. 왜냐하면 중요한 순간을 눈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로비에 다다른 우리는 옆으로 트인 복도를 걸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도착했다. 아무 말도 않고 계단을 내려가자, 내 기분을 읽었는지, 아까보다 한층 차분해진 고연주의 목소리가 들린다. “수현. 3일 후에 소집령이 비밀리에 개최되는 것, 알고 있나요?” “알고 있습니다.” “그럼 부랑자들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글쎄요. 오늘 봐야 알겠는데요.” 고연주는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긴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나른한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유혹의 눈동자를 준비해야겠군요.” 역시나 고연주는 대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곤 어느새 도착한 지하 감옥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바로 문을 열지는 않는다.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안에 있는 누군가가 들을 수 있도록 어느 정도 힘을 실어 문을 세 번 두드렸다. 쾅. 쾅. 쾅. “응? 안 들어가고 뭐 하는 거예요?” 우웅! 고연주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부에서 강하게 느껴지는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어차피 비비앙의 환상 마법 진이 완전히 구현되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미 눈치채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나는 몇 가지를 추가로 설명하기로 했다. “고연주. 오늘 백서연에게 결정타를 먹일 생각입니다.” “결정타…. 네.” “그에 걸맞은 쇼를 하나 준비했습니다. 물론 고연주는 대상에 들어가지 않겠지만, 혹시나 모르니 이곳에서 기다려주세요. 그리고 제가 백서연을 데려오는 순간 상황에 맞춰 유혹의 눈동자를 써주시면 됩니다.” “응…. 아직 감은 잘 안 잡히지만, 뭐 열어보면 알겠죠. 알겠어요.” 고연주의 시원스런 대답에 나는 마력을 일으켜 내부의 상황을 느껴보았다. 그리고 지체 없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자 이전과는 다르게, 모든 라이트 스톤을 점등한 눈부시도록 환한 내부가 보인다. 이어지는 지하 감옥의 내부는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꽤나 웃긴 상황이었다. 바닥에는 거대한 마법 진이 그려져 있었고, 연한 초록색 빛이 띄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마법진위로 군데군데 널브러져 꼼지락거리는 부랑자들이 보인다. 굳게 닫혀있던 감옥 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활짝 열려있었다. 나는 한 쪽에 서 있는 비비앙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녀는 발광하는 오르도를 바닥에 겨눈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이야기는 모두 끝낸 상태. 나는 한 발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몸 내부로 흘러들어오는 마력을 받아들이며 정면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목표는 백서연이 쓰러져있는 마법 진 중앙이었다. 이윽고 진의 중앙에 도착하자 죽은 듯이 쓰러져있는 백서연이 보였다. 나는 차분히 허리를 굽혀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으…? 흐…. 으, 흐으!” 백서연은 끓는 목소리와 함께 살짝 눈을 뜨는가 싶더니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간만에 보는 빛에 눈이 부신지 그녀는 계속해서 눈을 깜박거렸다. 나는 미리 준비해둔 로브로 나신을 감싼 후 차분히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그리고 강제로 고개를 올려 나를 똑바로 보게 만들었다. 나를 보는 백서연의 눈동자에는 절망과 상실이라는 감정이 강하게 깃들어있었다. 마치 죽은 사람의 눈동자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녀의 눈이 일순 크게 부릅떠지는가 싶더니 이내 입도 동시에 벌어지며 나를 멍하니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30초 정도 지났을까? 백서연의 목구멍에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현…?” “…….” “혀, 현? 너 맞지? 응? 현 맞지?!” 백서연의 눈은 여전히 몽롱했다. 하지만, 아주 미약하지만 서서히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아직까지 마이너스한 감정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한 줄기 새어 나오는 감정의 빛은 분명 희망을 말하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왜 네가….” “…….” “왜 아까부터 대답을 안 해? 현? 현….” 백서연은 힘없이 손을 들어올려 내 얼굴을 매만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말끝을 흐리며 내 가슴으로 시선을 내렸다. 나는 그녀의 표정을 계속해서 관찰하며 손으로 가슴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지금 백서연은, 마지막 단계인 판단력과 주의력을 급속히 떨어뜨리는 효과가 있는 자주색 물약을(몽롱함.)을 마셨을 것이다. 그리고 비비앙이 시동한 환상 마법에 걸린 상태였다. 아직 비비앙의 실력이 완전하지 못해 이 연극 같은 짓거리를 해야 했지만, 아무튼 마볼로가 가장 효과를 본 방법 중에 하나라고 하니 한 번 정도는 감수해줄 의향은 있었다. 백서연은 아직도 내 가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는 남은 한 팔로 간신히 내 손을 치우더니(물론 내가 의도적으로 손을 내려주었다.)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곤 덜덜 떨리는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왜 이렇게 많이 다친 거야…?” “…….” “설마…. 나 때문에 다친 거야? 나를 구하기 위해서….” 도대체 백서연은 지금 어떤 환상을 보고 있는 걸까. 굉장히 궁금했지만, 어쨌든 지금의 나는 상황에 맞춘 행동만 하면 되므로 한 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미,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고집을 부려서…. 네 말대로 지휘관을 맡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는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런데 왜 아까부터 아무 말도 안 해? 그리고 여기는 어떻게…. 분명 여기는….” '현이라. 부랑자들의 말이 사실이었나 보군.' 이것저것 시시콜콜히 알아둔걸 잘했다고 생각하며 나는 백서연을 이끌고 문밖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 환상이라는 것을 눈치채면 기껏 공들여 준비한 것이 도로아미타불로 되어버린다. 뭐, 그것도 제법 타격은 있겠지만. 백서연은 처음에는 주춤한 발걸음으로 비틀거렸지만 곧 내 옆에 기대어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열 걸음 정도 걸었을 즈음, 뭔가를 발견했는지 백서연이 조용히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흘끗 아래를 내려다보자, 그녀의 시선이 쓰러져있는 부랑자들을 향해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 멍청이들. 내가 그렇게 속아넘어가지 말라고 말했는데…. 결국 죽었구나. 빌어먹을 자식들…!” 과연 죽은 걸까? “아, 현! 자, 잠시만 기다려줘!” “?” “아마 이곳에 해인이랑 가인이가 붙잡혀있을 거야. 아, 알고 있지? 혹시 게네들은 못 봤어?” 이젠 애절함까지 느껴지는 말투였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도하지 않았다. 오직 백서연을 문까지 끌고 가는데 주력했다. 문과의 거리는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현? 현! 왜 둘은 보이지 않아? 죽은 거야? 제발 대답해! 해인이랑 가인이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백서연은 겨우겨우 내던 목소리를 멈추고는 멍하니 감옥을 응시했다. “죽은…. 거야…?” 이윽고, 문을 바로 앞에 두고 나는 걸음을 멈췄고, 몸을 돌려 다시 내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환히 빛나던 연록 빛 마법 진이 서서히 빛을 잃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비로소 본래의 목소리를 내었다. “안 죽었어.” “응? 안 죽었어? 그럼 왜…. 데리고 나오지 않는 거야?” 아직까지 약과 마법에 취한 듯 백서연은 혼란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마력을 담아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쳤을 뿐. 그러자, 환한 빛을 비추던 라이트 스톤이 순식간에 소등되더니, 빛과 어둠이 순식간에 교차했다. 단 한 번 손뼉을 쳤을 뿐인데 지하 감옥은 예전의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법 진에 쓰러져있던 부랑자들이 한 명 한 명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뭐, 뭐, 뭐야? 현? 현?! 왜 갑자기 죽어있던 놈들이…!” 백서연은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아직도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지 못한 듯 나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외쳤다. 이미 마법 진은 꺼졌다. 나는 이쯤에서 사실을 밝히기로 마음먹었다. “내 이름은 수현이다. 멋대로 외자로 부르지 말라고.” “아…?”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백서연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를 돌아본다. “현?” 그리고 내 얼굴을 쳐다본 순간, 계속해서 현을 찾던 희망찬 목소리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현…………?” ============================ 작품 후기 ============================ 주말입니다. 여러분들. 주말이에요! 하하하!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간만에 한강을 걸을 생각입니다. 저 산책을 되게 좋아하거든요. 운동도 되고, 차분히 생각도 정리하고 일석이조잖아요! :) 아. 그리고 오늘 전개 속도는 어떠세요? 본문에 소집령에 곧 다가왔다는 말이 나와있죠? 이게 소설 내 시간으로 따지면 약 2주 넘게 흐른 거거든요. 혹시 마음에 드시면 칭찬 좀 해주세요. :D 『 리리플 』 1. 데바란 : 1등 축하합니다. 하하. 남자 캐릭터 투표도 좋을 것 같네요. 한 번 염두에 두겠습니다! 2. 탄환 : 감사합니다! 부족한 소설에 과분한 관심을 주는 독자 분들께 항상 감사할 따름입니다. :) 아. 클리어 연차는 이미 구상해둔 상태입니다. 비슷하게는 맞추셨습니다. 껄껄! 그리고 쿠폰 감사합니다! _(__)_ 3. 아클레오 : 으잌ㅋㅋㅋㅋ. 1년, 2년은 소설상의 공백기를 말하는 거예요! 절대 그렇게 쉬지 않아요~. 4. repairSEKAI : 네! 리리플 여기 바치겠습니다! 1등은 저도 포기했어요. ㅜ.ㅠ 5. La_Emperor : 아. 어제 많이 힘들었는데 La_Emperor 님 코멘트 보고 엄청 웃었습니다. 감사합니다. ㅋㅋㅋㅋ. 6. s25jin : 일단 소집령까지 빠르게 끝내면, 결에 들어가기 전 두세 편 쉬는 회가 나올 겁니다. 후후. :) 7. 피네이로 : 지금껏 하나하나 설명하고 가야 다음 전개를 납득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요. 상황으로 이해시켜드리는 방법도 있고, 아니면 꼭꼭 아껴뒀다가 반전을 내보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 8. 호랑왕 : 하하. 저는 남자입니다. 여자가 아니에요. 남자입니다.(강조.) 9. 오피투럽19 : 코멘트 보고 나서 섬찟했습니다. 어찌 아셨는지요? ;ㅅ; 10. 로노에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부부 분들께서 왜 이러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요 유남쌩!(?)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29 / 0933 ---------------------------------------------- 뭐예요. 그럼 안 해요. 마법 진을 밝히던 빛은 이제 완전히 사그라졌다. 백서연의 눈길이 내 얼굴을 훑는다. 지금 그녀의 얼굴을 도대체 어떤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꼭 안고 있던 팔이 서서히 떨어져나간다. 백서연은 주춤거리며 한두 발짝 뒤로 물러났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직 그녀의 눈동자에서 희망의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라는…. 잠시간의 침묵 후, 백서연의 입술이 열렸다. “너, 너는 누구야?” “글쎄. 누구라고 생각해?” 나는 잠깐 어깨를 으쓱였다가 유들유들하게 대답했다. 백서연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져버렸다. 그녀는 내 얼굴을 보다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어제와 똑같은 풍경의 지하 감옥에 덩그러니 서 있는 부랑자들.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던 백서연의 발이 한순간 꼬인다. 이윽고 꼴사납게 넘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지하를 울렸다. 백서연은 그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일어서려고 했지만 내게 기대서도 겨우겨우 걷던 그녀였다. 아니, 당장에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도 힘들어 보인다. 뒤에서는 부랑자들이 시시각각 거리를 줄여오고 있었다. 백서연은 한 팔과 두 다리로 애꿎은 바닥만 짚다가 결국에는 절규하는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 오지마!”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진짜로 오지 않을 턱이 없다. 어느새 백서연에게로 다가온 부랑자들은 그녀를 일으켜 희롱을 시작했다. 떡 주무르듯 가슴을 주무르고 소중한 곳을 농락한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이제야 현실을 인지했는지 한순간 안도했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미미하게 피어오르던 한 줄기 희망은 어느덧 눈물로 바뀌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 아니야. 이럴 리 없어…. 현이 맞지?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거지?” “현? 내 이름은 수현이라고.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현을 부르던데, 도대체 누구야? 꽤나 애타게 찾는 것 같아서….” “뭐라….” 백서연의 목메는 목소리. 차라리 지금을 꿈이라고 생각하려는지, 그녀가 눈을 질끈 감는 게 보인다. 비비앙의 보여준 환상이 이만큼이나 효과가 있었던 건가. 나는 속으로 감탄하며 부랑자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주었다. 그러자 그 중 한 명이 백서연의 눈꺼풀을 강제로 들어올렸다. 이윽고 나와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내 눈에 보이는 백서연의 눈동자는 사정없이 흔들리는 중이었다. “현…. 학!” 백서연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지만, 이어지는 부랑자들의 손길에 야릇한 비음을 흘렸다. 아직 약효가 남아있어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려는지 기껏 입혀놨던 로브를 벗기고 그녀를 다시 바닥에 눕힌다. 그리고 그들은 백서연의 사방을 둘러싼 채 서로 동시에 몸을 굽혔다. “그, 그만해! 하지마!” 백서연은 그 와중에도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 몸 상태에서는 헛된 저항이다. 부랑자는 나를 향해 뻗은 그녀의 가녀린 팔을 잡아 자신의 흉물을 억지로 쥐었다. 나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가, 가지마! 도와줘, 현! 혀언! 혀어언!” 조용했던 지하 감옥에 백서연의 울부짖음이 허공에 메아리 친다.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듯한 외침이었다. 하지만 계단을 올라갈수록 건조했던 목소리에 서서히 물기가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계단을 모두 올라가기 전, 나는 고연주에게 신호를 줄 겸 슬쩍 아래를 응시했다. 어느 틈에 벌써 부랑자는 힘차게 허리를 놀리고 있었고, 그에 따라 백서연의 몸은 고장 난 인형처럼 덜그럭거리고 있었다. 약간의 희망으로 물들어있던 얼굴엔 어느새 전과 같은 절망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는, 흡사 죽은 사람마냥 흐릿한 빛을 띠고 있었다. 간신히 살려놨던 희망을 완전히 박살내버린 것이다. '이효을을 불러야겠군.' 탁한 빛을 뿌리는 눈동자를 보다가, 나는 시선을 거두어 다시 계단을 올랐다. 이효을을 소집령의 주최자였고, 개최하기 전 필수로 확인할 사항이 있었다. 나는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까닭 없는 한숨이었다. * “호외요! 호외! 다들 비켜요! 드디어 서 대륙과 부랑자 놈들이 헤일로의 침공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볼 일이 있어 신전에 들렀다가 사용자들이 너무 많아 그냥 돌아오던 도중이었다. 사람들이 복작이는 광장을 가로지르던 중, 누군가 큰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다급한 발걸음으로 순식간에 사용자 사이를 헤치더니 이내 광장 게시판에 커다란 기록을 걸어놓았다. 그리고 한 쪽에 기록 더미를 쿵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곤 다시금 바쁘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웅성웅성. 폭풍과도 같은 기자의 발걸음이 지나간 후 광장은 순식간에 소란으로 휩싸였다. 하지만 크게 혼란스럽지는 않다. 일찍이 그들의 진군을 포착했다는 소식은 여러 번 들었을 것이기에 다들 올게 왔구나 하는 반응들이었다. 그래도 제법 상세한 사정은 알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인지라 사용자들은 순식간에 게시판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리저리 비비면서 게시판의 기록을 읽을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더미에 있는 기록 한 장을 집은 후 재빨리 광장을 이탈했다. 누가 작성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록엔 작금의 전쟁 상황이 제법 따끈따끈했다. 일단, 헤일로를 침공했다는 말 자체는 거짓말이었다. 다만 놈들의 침공이 이제 거의 임박했고 늦어도 이틀 안에는 사정거리 안에 닿는다고 하니 거의 비슷한 말이나 다름없다. 그 외의 정보들도 살펴보면 굉장히 여러 가지가 있었다. 놈들의 숫자는 1만은 가볍게 상회할 것이다. 베스와 도로시를 침공할 때 나눠진 병력은 중간에 합쳐서 들어오고 있다. 북부 도시는 뮬의 탈환을 핑계로 지원군 편성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황금 사자는 SSUN에게 헤일로를 버리길 종용했고, 의용군을 모집하는 등 재정비 후 탈환을 노리고 있지만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등등. 어떻게 보면 상투적이지만 최대한 사실적으로 쓰려고 한 면을 엿볼 수 있었다. '헤일로를 포기하고, 재정비 후 탈환이라.' 기록의 최 하단을 보면, 헤일로에 거주하던 사용자들이 다른 도시로 피난을 가는 수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성현민은 황금 사자의 지원군 편성이 난항을 겪고 있다고 말해주었는데, 아무래도 사실인 모양이다. 하기야 강철 산맥 원정으로 알짜배기 사용자들을 모조리 잃어버렸는데, 지금 당장 억지로 편성한다고 쳐도 그 수준이 어떨지는 안 봐도 자명한 일이었다. 나는 들고 있던 기록을 바닥에 흘리고 클랜 하우스로 가는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백서연의 조교를 끝낸지도 이틀이 지났다. 소집령을 앞두고 이효을이 머셔너리에 한 번 오기로 했으니, 어쩌면 지금쯤 방문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클랜 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카운터를 보는 고용인에게 이효을이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때마침 방문한 모양이었다. 고연주가 직접 4층의 집무실로 안내했다는 말에 나는 지체 않고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차분히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테이블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재빠르게 책상으로 걸어갔다. 수정구에서 재생되는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제가 부랑자가 된 이유는…. 아마 1년 차가 조금 넘었을 때….) (이번 북 대륙을 침공한 서 대륙과 부랑자들의 수는 약….) (서 대륙의 총 지휘자는 시몬이라는 사용자입니다. 저랑은 직접적으로 대면한적은 없지만….) (만나본 이의 말을 들어보면 꼭 인간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내가 들어온 기척을 느꼈는지, 열심히 영상 기록 수정구를 보던 이효을은 문득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응? 왔어…?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이거 내 멋대로 건든 건 아니야.” “알아. 잠깐 나갔다 올 일이 있어서 고연주한테 미리 얘기해뒀어.” “흐응. 그렇구나. 그런데 어디 갔다 온 거야?” “신전. 천사들한테 볼 일이 있었거든.” 나는 고연주의 이름이 붙어있는 호출석에 마력을 주입한 후 이효을과 마주보며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신전에 들렀다는 말에 묘한 눈빛을 내게 보냈다. “그래? 네 담당 천사는 뭐라고 했는데?” “못 만났어.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렇구나. 그럼…. 저번에 전령 받았지? 네 생각은 어때? 나 되게 쓸모 있는데.” “그건 나중에 형이랑 같이 얘기하자.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으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수정구 봤지?” 지금 바로 결정할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완곡히 대답을 회피했다. 이효을은 “그럼 애초에 같이 오라고 하던가.”라고 입을 삐죽거렸다가, 바로 내 물음에 대답했다. “앞에 약간 보긴 봤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정보를 얻을 줄은 몰랐네.” “이게 가장 정확한 방법이니까. 거짓말일 염려도 없고 모두를 이해시킬 수 있잖아?” “하기야. 그건 그렇지.” 이효을은 동의한다는 듯 한두 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는 수정구는 바로 어제 백서연과의 대담을 기록한 수정구였다. 이틀 전, 우리는 드디어 그녀를 굴복시킬 수 있었다. 비비앙은 개인적으로 “실패.”라고 일축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성공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백서연의 정신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데는 실패했지만, 유혹의 눈동자가 성공할 정도로 정신력을 약화할 수는 있었던 것이다. “…….” “…….” 나와 이효을은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 흘끗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자 볼이 살짝 상기되어있는 게 보인다. 겉으로는 담담해 보이지만 아마 현재 마음속은 굉장히 설렐 것이다. 긴 말은 필요 없다. 이미 지난번의 대화로 서로의 생각은 확인한 상태였다. 물론 수정구로도 충분하겠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백서연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게 나을 것이다. 이후 약 5분의 시간이 흘렀을 즈음, 방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윽고 벌컥 문이 열리고 고연주가 백서연을 데리고 들어오는걸 볼 수 있었다. 미리 유혹의 눈동자를 걸고 들어온 듯, 그녀의 눈은 연한 잿빛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 풀썩! 유혹의 눈동자에 기력이 많이 상했는지, 백서연은 끝나자마자 바닥에 몸을 허물어뜨렸다. “후유. 그나마 다행이네.” 이렇게 폭풍 같던 질문의 시간은 끝났다. 그리고 이효을이 내뱉은 첫 마디는 바로 다행이라는 말이었다. 그녀의 뜻 모를 말에 나는 바로 질문을 던졌다. “뭐가 다행이라는 거지?” “아아. 부랑자들이 왜 대모를 죽였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봐. 만약에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배신자가 있었다면, 지금쯤 난 과연 어떻게 됐을까? 후후…. 네가 날 살리지 않았다면….” 이효을은 끝까지 대답을 잇지 못하고 끝말을 흐렸다. 그녀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지어져 있었다. 확실히 일리는 있는 말이었기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였다. 이윽고 이효을은 입맛을 짝짝 다시고는 분연히 몸을 일으켰다. “시몬이라…. 부랑자나 시몬이나 참 대단하네. 단순한 복수가 목적이 아니었어. 쯧. 아무래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겠다. 소집령을 앞당겨야겠어.” 이 말 또한 의외였다. 오늘 만남 이후 소집령을 미루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앞당긴다고 한다. 좋게 말하면 행동력 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나쁘게 말하면 그만큼 준비에 구멍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런 내 기색을 읽었는지, 이효을은 가벼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걱정 마. 그 정도 영향력은 있으니까. 그리고 헤일로의 침공이 생각보다 빨라서 애초에 조금 당길까 생각하고 있었어. 아무튼 나는 이만 일어날게. 지금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 같거든. 오늘 초대 고마웠어. 그리고….” 이효을은 뭔가 더 말을 하려고 하다가, 갑작스레 옆에 얌전히 앉아있는 고연주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오늘 도와주셔서 고마웠어요. 동서.” “별말씀을요. 다음에 또 뵈었으면 좋겠네요. 형님.” 고연주 또한 굉장히 우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참 잘들 놀고 있다는 생각에 어이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는 순간, 이효을은 아차 하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차. 머셔너리 로드. 나 좀 배웅해주지 않을래?” “내가 왜….” “둘이서만 할 말이 있거든. 네 형에 대해선데, 길지는 않을 거야.” “음. 워프 게이트까지만 가도록 하지.” 곧바로 거절하려고 했지만, 형의 얘기라 하니 마냥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애당초 이곳에 이효을과 함께 오려는 걸 극구 말렸기에 상당히 삐쳐있다는 말을 전해들은 상태였다. 나는 고연주에게 백서연의 처리를 부탁한 후 이효을과 함께 문을 나섰다. 그리고 복도를 돌아 계단을 내려가고, 막 1층 로비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오라버니이!” “뀨!” 한창 로비에서 놀고 있다가 내가 내려오는 것을 봤는지, 안솔이 유니콘을 꼭 끌어안은 채 반갑게 소리를 질렀다. 안솔과 유니콘은 각자 한 팔을 들어 내게 아는 척을 하고 있었다. “저건 유니콘…? 에이, 아직 애기네…. 아무튼 저 둘이 너에게 볼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먼저 나가있을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말아줘.” 이효을은 예전에 유니콘을 본적이 있는지, 덤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곤 안솔과 유니콘을 힐끗 확인하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안솔이 나에게 달려오고 이효을이 그 옆을 지나친다. 그렇게 서너 걸음 정도 서로 거리가 벌어졌을까. 그때였다. 물 흐르듯 걷던 이효을의 걸음이 일순 멈췄다. 그러더니 화들짝 고개를 돌려 내 품에 안기는 안솔을 바라본다. 백서연의 얘기를 들으면서 단 한 번도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던 이효을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얼굴은, 경악 그 자체로 표현해도 좋을 만큼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이었다. ============================ 작품 후기 ============================ 백서연과의 대화 내용은 의도적으로 생략했습니다. 내일 바로 소집령을 벌일 생각인데, 생각해보니 얘기가 중복이 되더군요. 그래서 다음 회에 하나하나 밝힐 생각으로 일부러 생략했으니, 독자분들의 많은 양해를 구합니다. 이제 전의 마지막 파트 소집령만 남았네요. 하하. 9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9월은 조금 시원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어요. :) 『 리리플 』 1. 데바란 : 1등 축하합니다. 하하. 글을 굉장히 정확하게 읽으시는 것 같습니다. :) 세세하게 기억하시는군요! 2. dbss : 하하. 감사합니다! 이번 주는 개강 크리에 많이 휘청거렸지만, 앞으로 차차 적응될 거라 생각합니다. :) 3. 유운처럼 : 오랜만에 뵙습니다! 쿠폰 감사합니다. :) 4. 오피투럽19 : 그렇죠. 백서연은 나쁘긴 하지만, 비교적 상황 서술이 적었고, 지금 상황만 따지면 충분히 불쌍한 상황입니다. 이로서 수현은 나쁜 놈이….(?) 5. 탄환 : 헉.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ㅜ.ㅠ 그런데 저는 끊어봤자 최대 24장이던데, 그 이상으로도 가능한가요? 혹시 결제가 중복으로도 가능한가요? 예를 들면 3개월을 두 번 결제하면 6개월을 볼 수 있다든지…. ?ㅇ? 6. J.F : 지금껏 쌓여온 것들이 한 번에 완전히 터진 겁니다. :D 그래서 일부러 물약 배치 순서를 그렇게 정했습니다. 어떤 분 말씀대로, 완전한 희망고문이죠. -_-a 7. Quill : 아마 소집령만 끝나면 슉슉 지나는 장면이 많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2부는 그렇게 나갈 생각이거든요. ㅋㅋㅋㅋ. 8. CemeteryGates : 개인적으로 저는 결말 부분에 대한 독자 분들의 반응이 참 궁금합니다. 얼른 그 부분을 쓰고 싶어요. 과연 그때 김수현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9. 에르시리나 : 네? 저는 로유진입니다. 뭐, 로유미로 부르셔도 괜찮습니다. 이미 하도 많이 들어서 타격은 제로에요. 하하하! 그럼 잠시 이불 뒤집어쓰고 울고 오겠습니다. 10. UrDREAM : UrDREAM 님의 코멘트를 보니까 왠지 모르게 노라조의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슈퍼맨? 이던가요? 달리고 달리고 달리고 달리고! 돌아라 지구 열두 바퀴!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30 / 0933 ---------------------------------------------- 뭐예요. 그럼 안 해요. 어느새 머셔너리의 클랜원도 열 명이 넘었지만 그럼에도 회의실은 넓었다. 아직 3층 소 회의실도 이 정도로 자리가 남는데, 과연 언제 4층의 대 회의실을 사용할 수 있을까. 갑자기 떠오른 시답잖은 생각에 빠져있다가, 나는 손에 있던 기록을 테이블 위로 놓았다. 그러자 의자에 착석해있던 클랜원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클랜 로드. 어디서 온 전령인가요?” “…소집령 초청장입니다. 동부와 남부 전체를 아우르는 소집인데 이번에 머셔너리도 와달라고 하더군요.” “어머…. 그럼 대표 클랜도 참여할 수 있다는 말인데. 그곳에 머셔너리도 포함됐다는 말씀이세요?” “포함이 아니라, 초청입니다.” 정하연의 질문에 나는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 말해주었다. 고연주의 경우엔 어쩔 수 없었더라도, 천사들이 비밀을 지켜달라고 했으니 웬만하면 말을 아낄 생각이었다. “네. 하지만 부랑자들을 아직 우리가 관리하고 있으니, 참가하는 게 여러모로 좋은 모양새일 거예요. 개최지는 어딘가요?” “동부 일반 도시, 프린시카의 대표 클랜. 고려의 클랜 하우스입니다.” “그렇군요. 아무튼 동남부를 아우를 정도라면 꽤 대규모 소집령으로 생각되는데…. 드디어 제대로 된 해결책을 논의하려나 봐요.” “글쎄요. 뭐 가보면 알지 않겠습니까.” '대규모라. 오히려 소규모가 아닐까 싶은데.' 겉으로는 고려 클랜의 개최로 알려져 있어도 실상은 이효을이 주최자였다. 어쨌든, 이미 돌아가는 속사정은 대충 알고 있었지만 아직 밝힐 수는 없는 노릇. 이미 각자 도시에서 이야기는 끝냈을 것이고 실제 행동에도 들어간 상태였다. 즉 해결책은 이미 나왔고, 이번 소집령은 내가 데리고 있는 부랑자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소리였다. “오빠. 혹시 수행인원도 있어?” 그때 이유정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다들 머셔너리가 초청됐다는 사실에 기분이 우쭐한 모양이었다. “응. 있어. 있기는 한데….” 나는 다시 기록을 집어 들었다. 초청장에는 저번에 황금 사자가 주최한 소집령처럼 참가 인원을 제한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름 확실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따로 불만은 가질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머셔너리 클랜에도 동행 가능 인원이 있다. 일단 고연주와 백서연은 이번 소집령에서 필수로 필요한 인원이었다. 그렇기에 둘의 동행은 당연시되는 일이었지만, 문제는 하단에 적힌 추신에 있었다. 그곳엔 안솔의 동행을 요청한다는 내용이 자필로 적혀있었다. 아마 이효을이 직접 적은 것이라 생각되었다. '아무래도 진명과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저번에 안솔을 봤을 때 이효을의 반응을 생각하자 뭔가 모르게 마음에 걸리는 기분이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나는 왼쪽 라인에 앉아있는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안솔은 세상만사를 가진 사람처럼 그저 방실방실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걱정이란 한 올도 찾을 수 없는 모습을 보고 있자, 문득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안솔은 도대체 1회 차에서 어떻게 광휘의 사제가 되었을까? 그리고 왜 북 대륙에 남지 않고, 오딘으로 넘어갔을까? 수많은 의문점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나는 이쯤에서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지금 해답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도 했거니와, 직접 행동하면서 돌파구를 찾아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소집령 당일. 나는 2회 차를 시작한 이후 두 번째로 프린시카에 방문했다. 저번에는 형을 만나기 위해서였다면 이번에는 소집령에 참가하기 위해서 방문한 것이다. 지금 시점만 놓고 본다면 1회 차와 2회 차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과거엔 이곳 저곳을 빌빌대는 별 볼 일 없는 사용자였다면, 현재는 북 대륙을 주도하는 사용자들의 모임에 참가하는 클랜 로드의 신분이었다. 1회 차와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에 아주 살짝 어색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고려의 클랜 하우스로 이동을 시작했다. 내 기억에 따르면 워프 게이트부터 클랜 하우스까지의 거리는 천천히 걸어서 약 15분 정도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우리는 목적지에 당도하기까지 장장 30분 가까이 걸리고 말았다. 백서연이 제대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어, 이동에 꽤나 지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아무튼 우리는 고려의 클랜 하우스에 당도할 수 있었다. 이윽고 정문에 도착하자마자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용자들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이내 정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高麗(고려)라는 문양이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신분을 밝혀주십시오.” “머셔너리 클랜 로드. 김수현입니다.” 신분을 밝히는 순간 사용자들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들은 나와 내 뒤에 있는 인원들을 면면히 살펴보고는 다시금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소집령 초청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가 직접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우리가 많이 늦었나요?” “다들 도착하신 상태지만 방금 전에 들어가신 분도 계십니다. 하지만 빨리 가는 게 좋겠지요. 그럼 이쪽으로.” 머셔너리 클랜 하우스보다 몇 배는 큰 위용에 놀랐는지, 나는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안솔을 잡아 끌었다. 그리고 정문을 개방한 안내원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현재는 엄연한 전시 상황이다. 그러나 프린시카나 모니카…. 아니, 당장 머셔너리 클랜 내부의 분위기를 보아도 도저히 전쟁 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강 건너 불구경. 이 말이 딱 맞는 표현이 아닐까? 아마 대모의 소집령 이후 클랜간 격화된 갈등이 도시에 거주하는 사용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나마 전쟁을 약간이라도 겪은 사용자들은 그러진 않겠지만, 침공 받은 다른 도시들의 실상을 알면 어떻게들 반응할지 자못 궁금했다. 우리는 넓은 부지를 지나 본관처럼 보이는 커다란 건물에 들어섰다. 따로 계단을 오르지는 않았다. 고려 클랜원은 1층에 들어서서 바로 오른쪽 복도로 방향을 꺾더니, 3미터는 넘어 보이는 문이 있는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문의 상단에는 '회의실'이라고 음각된 글자가 고운 빛깔을 뿌리고 있었다. “후아. 후아.” “…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안솔이 긴장해서 숨을 몰아 내쉬는 모습을 귀엽게 느낀 듯, 사용자는 잠깐 웃음을 참았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아무리 사소하다고 해도 외부의 평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에, 나는 안내해준 사용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하기로 했다. “예.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사용자는 점잖은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천천히 손잡이를 쥐었다. 이윽고 문의 틈새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고, 회의실 특유의 무거운 공기가 흘러나와 내 몸을 감싸 안았다. 나는 심호흡과 동시에 그 안으로 차분히 발걸음을 옮겼다. * 문안으로 들어서자 드넓은 회의실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부 구조는 마치 노천 극장이 떠오를 정도로, 그와 흡사한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머셔너리 클랜의 4층에 있는 대 회의실보다 배는 넓은 공간이었지만, 앉아있는 사람의 숫자는 서른 명 남짓으로 극히 적었다. 우선 정면의 상석에는 세 명이 앉아있다. 그 중 두 명은 이효을과 고려 클랜의 외교관 조성호로 나와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앉은 채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 명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고려의 클랜 로드가 아닐까 추측할 수 있었다. 중앙으로 걸어가며 천천히 좌우를 훑어보자, 제법 많은 클랜에서 이번 소집령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동부 일반 도시 프린시카의 대표 클랜, 고려. 그리고 산하 소 도시인 에덴과 다나의 대표 클랜 달밤과 한(韓). 남부 일반 도시 칸의 대표 클랜, 푸른 늑대. 그리고 산하 소 도시인 코란과 모니카의 대표 클랜 수(秀), 이스탄텔 로우. 그 외에도 대표 클랜은 아니지만, 해밀이나 리버스등 이름있는 클랜들은 대부분 참가한 게 눈에 보인다. 새삼 이효을의 동부와 남부에 미치는 영향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막간을 이용해 형과 한소영 등 알고 있는 사용자들과 눈인사를 나누었다. 이윽고 중앙에 서 걸음을 멈추자, 팔짱을 끼고 앉아있던 이효을이 미묘한 미소를 보내며 입을 열었다. “다들 주목. 그럼 오늘의 주인공인 머셔너리 로드가 도착했으니, 지금 바로 소집령을 개최하겠어요.” 특유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허공을 울린다. 회의실에 내 자리는 없다. 다만 중앙에 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 이미 앞서 얘기는 되어있기에, 나는 당황하지 않고 백서연을 의자로 끌었다. 그렇게 막 백서연을 의자에 앉히려는 순간 나는 잠깐 움직임을 멈추었다. 의자 위에는 기록이 하나 놓여있었다. 이건 또 뭔가 하는 생각에 그것을 집어 들자, 마침 이효을도 자리에서 일어서 내게로 걸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질문할 것들을 정리해둔 거예요. 질문할 수 있는 사용자는 그림자 여왕에게로 한정되니까, 그게 더 편하잖아요?” 이효을의 합리적인 말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기록을 고연주에게 넘겨준 후, 난 백서연을 의자에 앉혔다.(자꾸만 몸을 늘어뜨리려고 해서, 자세를 잡는데 약간 애를 먹어야 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자 내게로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들이 보인다. 그 시선에는 하나같이 지대한 관심이 담겨있었다. 비록 차이는 조금 난다곤 하지만 위축될 것은 없다. 나는 허리를 곧게 피고 그들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리고 당당히 발을 디딘 채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현재 모니카에 거주하고 있으며, 자유 용병 클랜인 머셔너리를 운영하고 있는 김수현입니다.” 간단한 인사가 끝나자 가벼운 박수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형의 얼굴이 눈에 밟혔다. 형은 뭔가 대단히 감동했다는 얼굴로 나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꼭 다 큰 자식을 보는 부모의 눈빛이랄까. 아무튼 제발 이번에는 조용히 있어주길 기도하며, 이효을에게 바통을 넘겼다. 그녀는 어느새 나와의 거리를 완전히 줄인 상태였다. “다들 저한테 대강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아무래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하는 분들이 많으시겠죠. 실제로, 그런 분들도 많으셨고요?” 끝말을 올린 이효을은 갑자기 내 팔을 잡고는 바로 말을 이었다. “여기 있는 이분은 저와 굉장히 인연이 깊은 사용자에요. 저기 있는 해밀 로드의 친동생이며, 제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지요.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어요. 소문은 다들 들으셨을 거예요. 머셔너리 로드는 부랑자들의 첫 습격이 이루어졌을 때, 당일 뮬에 있었고….” “그 부분에 관해서, 머셔너리 로드께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그때 누군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흘끗 고개를 돌리자 왼쪽 남부 라인에서 한 명의 남성이 손을 들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문양을 살펴보니 秀(수)가 그려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막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이효을이 한 발 앞으로 나서 제지했다. “나 지금 얘기하고 있는 거 안보이니?” “죄, 죄송합니다. 그런데 너무 궁금해서….” “넌 내가 낄 때 안 낄 때 구분하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쯧. 아무튼 지금 질문하는 건 허락할 수 없어. 나중에 시간을 줄 테니까 천천히 하렴.” “예! 알겠습니다.” 이효을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와 동시에 축 늘어져있던 백서연의 머리칼을 잡아 올려 모두에게 얼굴이 드러나 보이도록 만들었다. “죄송해요. 다시 말할게요. 지금 의자에 앉아있는 여성은 백서연이라는 부랑자로, 제법 악명이 자자한 사람이죠. 뭐, 모르는 분은 없으실 거라 믿어요. 머셔너리 로드? 지금 이곳에 계신 분들을 위해서, 이 부랑자를 어떻게 포획하게 됐는지 간단히 설명해주시지 않겠나요?” “예. 뮬을 벗어나고 도시로 돌아오던 중 부랑자들의 추적대가 뒤를 쫓아왔습니다. 저는 함께 있던 사용자들과 전투를 벌였고, 역으로 그들을 물리침과 함께 여러 명을 포로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상입니다.” 나는 이효을의 말대로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내용은 전혀 간단하지 않은지, 지금껏 조용하던 회의실에 미묘한 술렁거림이 올라오는걸 느낄 수 있었다. 하기야 내가 0년 차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이러한 반응이 나오는 것도 아주 이상한 건 아니었다. 나는 회의실을 맴도는 술렁임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았다. “뭐야. 그럼 소문이 사실이었던 거야? 과장이 아니라?” “말이 안 되는데…. 나도 과장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얼마전에 뮬에서 탈출한 사용자 한 명을 만났는데….” “저 빌어먹을 년. 드디어 잡혔군.” “꼴 좋다. 망할 부랑자년.” 그리고, 그 와중에도 백서연을 확인하고 분노를 표하는 사용자도 여럿 있었다. 아무래도 백서연은 나보다 더한 정도로 악연을 쌓은 모양이었다. 약 1분 정도 지났을까. 이효을은 손을 들어올려 소란을 진정시켰고, 백서연의 머리칼을 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사실 관계를 원하시는 분들이 많은 관계로, 바로 확인 절차에 들어가겠어요. 그림자 여왕님?” “네. 준비는 마쳤어요.” 고연주의 시원스런 대답에 이효을은 눈을 찡긋하곤, 살며시 고개를 까닥였다. “그렇군요. 그럼 바로 기록에 적혀있는 질문을 해주시겠어요? 1번에서 4번까지는 한 번에 해주셔도 되요.” “네. 그럼 잠시.” 이효을의 부탁에 고연주는 백서연의 앞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나는 약간 뒤로 물러서 불안한 얼굴로 서 있는 안솔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고연주는 백서연의 턱을 들어올리며 모두를 둘러보았다. “바로 시작할게요.” 그리고 질문이 적혀있는 기록을 왼손에 쥔 채 나른한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1번. 북 대륙을 침공한 서 대륙 사용자들과 부랑자들의 총 숫자는?” “자세히는 모르지만…. 15000명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맥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도 없는 쉰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그러자 그때까지 미묘하게 회의실을 울리던 소음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고연주는 다음 질문을 이어서 말했다. “2번. 그럼 서 대륙 사용자들을 총 지휘하는 사용자는 누구지?” “이름은 시몬입니다. 자세한 정보는 저도 모르지만, 무법지대인 서 대륙에서 가장 지배자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 청년입니다.” “3번. 너희 부랑자들이 이번에 북 대륙을 침공한 이유는, 부랑자 말살 계획에 대한 보복을 하기 위함인가?” “그건 아닙니다. 복수도 하나의 일환인 것은 맞지만, 최종 목적은 아닙니다.” 뜻밖의 말. 겨우 진정되는가 싶던 소요가 다시금 어수선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직 백서연의 대답은 끝난 게 아닌지, 연한 잿빛으로 물들은 눈을 번들거리는 중이었다. “그럼 부랑자들의 최종 목적은 뭔데?” “그것은….” 백서연은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이내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끝맺었다. “북 대륙의 서 대륙화입니다.” ============================ 작품 후기 ============================ 으아. 주말이 끝났습니다. 으아. 흑흑흑. 내일부터는 다시 학교에 나가야겠지요. 그리고 강의도…. ;ㅅ; 그래도 새롭게 시작한 9월이니 열심히 힘내보겠습니다! 직장인분들도, 학생분들도 모두 활기찬 월요일 맞이하세요! 아. 소집령은 아직 한 회 더 남아있습니다. 다음 회에 끝날 예정입니다. :)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되는 장면은 김수현을 둘러싼 한소영 Vs 김유현이네요. 킥킥. 『 리리플 』 1. 우사인볼트 : 1등 축하합니다. 소제목에 너무 많은걸 드러낸 것 같네요. ㅎㅎ. 2. 흥야홍야 : 제가 세어봤는데, 12등이십니다. 3. 오리콘 : 음? 아니에요. 후계자는 양도가 가능하답니다. 아마 소집령이 끝나고 조만간 그에 관해서 나올 거예요. :) 4. 까까뀨뀨 : 안솔의 진명은 빛을 인도하는 자입니다. 5. 류메쉬엘 : 네! 답답하신 분들은 몰아서 보시는 것을 권해드리고 있습니다! 6. 소시는걍쩌는듯 : ㅋㅋㅋㅋ. 그래서 수현이도 생각한 겁니다. 참 잘들 놀고 있다고요. ㅋㅋㅋㅋ. 7. 몽구헌터 : 소집령이 끝나고 세라프와의 만남이 계획되어있습니다. 그때 나올 거예요. :D 8. araoj : 미워하지 말긔. ㅜ.ㅠ 9. 감자띱 : 네. 해당 부분에 대해서는 이번 파트에 확실히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10. ROK1198 : 쿠폰 감사합니다.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_(__)_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31 / 0933 ---------------------------------------------- 뭐예요. 그럼 안 해요. 서 대륙은 타 대륙과는 판이하게 다른 구역이다. 동, 남, 북 대륙이 각자의 목적에 따라 제로 코드를 얻기 위해 착실히 준비하고 있다면, 서 대륙은 항상 내전이 끊이지 않고 살인, 강도, 강간 등 온갖 추악한 짓거리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이라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일명 '무법지대'라 불릴 정도로, 그곳은 막장의 끝을 보여주는 대륙이었다. 그렇기에 백서연의 꺼낸 “북 대륙의 서대륙화.”라는 말이 지니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예상대로, 백서연의 말이 끝난 순간 회의실 안은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소란은 물론이요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게, 어지간히도 당황한 듯싶었다. “그만! 이미 다 들었으면서 왜 이렇게 소란스럽나요?” 그리고 그 순간. 이효을의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내가 회의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예전에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기야 7년 동안 수호자 역할을 해왔다고 했다. 그간의 경험을 딱지치기로 얻은 게 아닌 이상, 이 정도의 장악력도 보여주지 않는다면 섭섭했다. “질문은 남아있고, 들려드릴 것들은 많아요. 아직 클라이맥스도 나오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놀라시면 곤란해요.” “하. 이게 클라이맥스가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클라이맥스지? 이효을?” 그때 지금껏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상석의 인물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나이는 40중 후반쯤 되어 보일까. 서글서글한 눈매와 굵은 이목구비가 돋보이는 호남형 남성이었다. 약간 고압적으로 느껴지는 말투에 이효을은 살짝 눈매를 치켜 올리며 대답했다. “기다려보시면 알아요. 고려 로드.” 그리곤 멀뚱히 서 있는 고연주를 향해 한 번 더 말을 이었다. “그림자 여왕님? 계속해주시겠어요?” 고연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백서연을 향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북 대륙의 서대륙화. 그 말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이야기해줄래?” 새로이 질문이 시작됐다. 삽시간에, 사위는 다시 고요해졌다. 여기 있는 모두가 신경을 바짝 세운 채 백서연의 입에 시선을 집중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을 받는 가운데, 그녀의 입술이 차분히 떼어졌다. “네. 북 대륙의 서 대륙화를 위한 첫 걸음은, 바로 북 대륙의 수호자를 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대모를 살해함으로써 이미 달성한 상태입니다.” “뭐라고? 부랑자 놈들이 대모를 살해했다?!” 계속해서 폭탄과도 같은 발언이 이어진다. 이미 이효을에게 일부 들었다고는 해도, 그냥 듣는 것과 직접 보고 듣는 것은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특히 거짓말일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원천 봉쇄해주는 '유혹의 눈동자' 앞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그럼 도영록이 저지른 일이 아니란 건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하, 참.” 소란스러워졌다가, 진정됐다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가, 다시 진정됐다가, 또다시 소란스러워진다. 이런 재미있는 상황이 반복되는 가운데, 이효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녀는 중앙선을 따라 느긋하게 걷기 시작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일부러 여유를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그래요. 범인은 황금 사자도 아니고, 우리도 아니에요. 하지만 진범인 부랑자는 드러나지 않은 채 우리들끼리만 싸우고 있었네요?” “그 말씀은….” “그러고 보니 아는 사람들도 있겠고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아마 다들 궁금하실 거예요. 왜 대모님을 수호자라고 부르는지. 그리고 부랑자들이 왜 대모님을 살해하려고 했는지.” 예전 이효을과 나눴던 대담으로 살짝 감을 잡기는 했지만 이건 나도 자세히 모르는 부분이었다. 한 번 들어둘 가치는 있다는 생각에 나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먼저 말하건대, 저는 확실한 북 대륙의 수호자에요. 이 역할을 무려 7년 동안 이어왔죠. 다들 아실 텐데요?” “그럼 방금 전 백서연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뭡니까?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겁니까?” “대모님은…. 뭐, 말해도 상관없겠죠. 정확히 말씀 드리면, 수호자 역할을 맡으신 적은 있어요. 하지만 결국 1년 만에 그만두셨고, 저를 후계자로 삼으신 거예요. 이게 진실이랍니다.” 이곳 저곳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 이효을은 회의실을 한 바퀴 돌고 나서 다시 내 옆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모두를 둘러보고는 전보다 높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말인즉슨. 거짓말이 아니라 애초에 부랑자들이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게 아닐까요? 아니. 함정에 걸렸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원래는 나를 죽일 생각이었겠지만 엉뚱한 곳을 짚은 거예요. 대모님은 제 대신 희생당하신 거죠.” 함정이라는 말이 나왔다. 문득 이 부분에 대해서 궁금증이 일었지만, 바로 화제를 돌린 것으로 보아 세세한 것까지 얘기해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이제 더는 놀랄 기력도 없는지 여기저기서 아까 삼켰던 숨소리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은 홀 플레인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들이었다. 놀라는 것도 잠시.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하나같이 심각한 표정을 비치기 시작했다. 지금 상황을 허황되다 여기지 않고, 똑바로 직시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다.” 그때, 아까 들었던 고려 로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양손에 깍지를 낀 채 중후함이 느껴지는 눈초리로 이효을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을 받은 그녀는 한두 번 고개를 주억였고, 고려 로드는 바로 말했다. “백서연은 북 대륙을 서 대륙으로 만들겠다고 했고, 그 첫 걸음으로 북 대륙의 수호자를 살해했다고 했었지.” “정확하네요.” “물론 놈들이 잘못 짚은 것은 맞지만 그대로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아마 저 청년이…. 크흠, 실례했군. 아마 머셔너리 로드가 때맞춰 나타나지 않았다면 결국 너도 사망했을 텐데? 아닌가?” 웅성웅성. 맞는 말이었다. 비록 부랑자들이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고는 해도, 이효을은 확실히 죽음 직전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내가 치료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분명 사망했을 것이다. 실제로 나 또한 이효을은 1회 차에 사망했을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네. 그런데 뭐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일단 말해두는데. 네 역할과 능력. 그리고 지금껏 쌓아온 공적은 인정해. 그걸 부정하지는 않는다.”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고려 로드는 허튼 말을 할 지위에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걸 알고 있는지, 이효을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고 계속 듣겠다는 시늉을 보였다. “네가 죽었다는 가정을 해보았다. 그럼 북 대륙은 수호자를 잃었을 거야. 뭐 후계자야 내 알 바는 아니지만…. 단순히 그것만 가지고 북 대륙이 서 대륙처럼 된다는 말은 납득하기 힘들어.” “…흐응.” “비록 황금 사자들이 뻘 짓을 했다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북 대륙의 전력이 최강이라고 생각한다. 서 대륙과 부랑자 15000명? 지금 당장 동부와 남부의 모든 전투 사용자만 모조리 끌어 모아도 그 두 배는 되는 전력이 모인다. 그렇다고 우리가 질적으로 모자라는 것도 아니고. 상황이 이러할진대, 겨우 수호자 한 명 죽였다고 북 대륙을 무법지대로 만들겠다고?” 냉정히 생각해보면, 고려 로드의 말은 맹점을 찌르고 있었다. 더구나 이곳에 모인 이들은 각자 홀 플레인에서 나름의 세력을 구축한 사람들이었다. 그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는지 대부분 동의하는 기색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모두의 시선이 이효을에게로 쏠렸다. 그리고 그녀는, 전에 없는 진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확실히, 고려 로드의 말은 맞아요. 틀리지 않아요. 하지만, 한가지 간과한 점이 하나 있네요.” “간과한 게 있다고?” “백서연은 수호자 살해를 첫 걸음이라고 말했어요. 그럼 두 번째, 세 번째 걸음도 있다는 말이 아닐까요?” “…….” 이 말에는 할 말이 없는지 고려 로드는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이효을이 고연주를 쳐다보자 그녀는 반사적으로 기록을 보고는, 백서연을 향해 바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 대모님을 살해한 이후의 계획은 어떻게 되니?” “네…. 먼저 바바라를 점령한 후. 그리고 적당히 상대해주는 척하다가 워프 게이트를 이용해 서부 도시로 후퇴하고, 북 대륙에서는 물러날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단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당분간은 서 대륙에 터를 잡고,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기다리는 기간 동안에는 각 클랜 내부에 잠입해있는 첩자, 간첩들이 동부와 남부의 갈등을 최대한 조장할 예정이었습니다. 우선은 비어있는 바바라의 권리를 놓고 문제를 일으키고, 차후 생겨난 갈등을 서부와 북부로 뻗어나가는 형식으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지, 백서연의 말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들은 사용자들에게선, 더 이상 웅성거리는 소음이 들리지 않는다. 그만큼 부랑자들의 계획과 클랜에 첩자, 간첩이 있다는 사실에 속이 뒤집어진 모양이었다. “간…첩?” “무, 무슨….” 고개를 들어 반응을 살펴보자 다들 너무도 놀라 할 말을 잊은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개중에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사람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백서연의 말은 사실이었다. 서 대륙 사용자들이 물러난 후. 바바라의 소유권 문제로 시작된 동부와 남부의 다툼은 추후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게 된다. 그리고 종래엔 북 대륙은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게 되는 게 1회 차의 흐름이었다. 서 대륙처럼 막장이 되지는 않지만, 비슷하게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백서연의 말을 들으면서 저는 참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한없이 떠들던 백서연의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이효을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듣는 사용자들은 대부분 침중한 빛을 띠고 있었다. 정작 일이 벌어졌을 때와, 일이 벌어지기 전 알고 있을 때의 상황은 판이하게 다르다. 막상 그러한 상황이 닥쳤을 때, 과연 평화로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이미 1회 차를 겪은 나로서는 자신 있게 아니오 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더구나 백서연이 말한 첩자, 간첩이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이 아니던가. “자부심을 가지는 것도, 자신이 최고라 생각하는 것도 좋아요. 하지만 고려 로드의 말대로,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나요? 말 그대로 마음만 먹으면 우린 15000명 정도는 확실히 이길 수 있어요. 적어도 지지는 않겠죠. 그럼 그들은 그걸 알면서도 왜 이곳에 왔을까요?” “그거야….” “결국. 누군가가 부랑자들에게 우리의 사정을 전해주었다는 말이겠죠. 간첩. 아니면 첩자.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 누군가 힘겨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지만 나를 보고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이미 그들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짐작하고 있었지만, 아직 나는 모른다고 보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 얘기는 일단 여기까지. 마지막 확인 절차가 남았어요.” “허허…. 더 남은 게 있다는 말입니까?” “물론. 백서연은 수뇌부 급이라 볼 수 있는 부랑자에요.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첩자나 간첩이 누군지 대강은 알고 있을 것 같은데요. 아니, 한 명만 있어도 되요. 그럼 줄줄이 엮을 수 있을 테니깐.” 그리고 이효을이 말을 끝맺은 순간, 모두의 얼굴에 번뜩이는 빛이 스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 그렇게 약간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다들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애꿎은 목 울대만 움직이고 있을 즈음이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약간 피로함이 감도는 고려 로드의 목소리가 나직이 회의실을 울렸다. “일단 그 말을 확인해보고, 사실이라면…. 진실의 수정을 준비해야겠군.” * “뭐라고? 김승현이 부랑자? 이 자식 예전에 황금 사자에서 받아준 놈 아니에요?” “맞습니다. 예전에 아카데미에서 탈퇴 선언할 때 같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소집령은 끝났다. 백서연이 자신이 알고 있는 부랑자들의 말을 실토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효을은 소집령의 종료를 선언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구 하나 회의실을 나서는 이가 없었다. 다들 고연주와 백서연에게 달라붙어, 그녀가 말하는 명단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중이었다. “머셔너리 로드.” 그때,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다가왔는지. 약간 뒤에서 한소영이 초연히 서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잠시 내 얼굴을 보는듯하더니 이내 어여쁜 입술을 떼었다. “고생 많으셨어요.” “고생은요. 제가 한 건 별로 없는데요.”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아마 머셔너리 로드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정말로 저 부랑자의 말대로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어쩌면 이라는 말을 들어보니, 한소영도 아직 긴가민가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사용자들의 눈을 피해 버젓이 클랜 내에서 활동하던 부랑자들이었다. 그 사실도 모르고 있었는데, 추후 놈들이 어떤 일을 벌일지 예상하는 건 아무리 한소영이라도 어불성설이었다. 나는 속으로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아까 들어보니, 이스탄텔 로우에는 부랑자들이 침투하지 못한 것 같던데요.” “네. 불행 중 다행이죠. 다른 클랜은 상황이 다른 것 같지만….” 한소영은 가슴 아래로 팔짱을 끼어 풍만함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고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리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머셔너리 로드.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잠깐 이야기를….” “수현아.” 그때였다. 등 뒤로, 이번엔 형의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 작품 후기 ============================ 소집령 파트가 끝났습니다. 조금 급하게 완결시킨 감이 있지만, 그래도 명단을 부르는 장면은 생략했습니다. 하하. 차후 언급될 내용인데 불필요하게 중복할 필요는 없겠지요. 요즘 너무 어두운 이야기가 많이 나온 것 같네요. 말씀 드린 대로, 이제 뒤처리와 함께 약간의 쉬어가는 타임을 가질 예정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외국인들에게 대한민국 게이머의 위엄을 알려줄…. 아차. 흠흠. 월요일이 지났습니다! 개강 처음에는 되게 힘들었는데, 서서히 적응이 되는지 요즘에는 힘이 나네요! 역시 사람은 바쁘게 살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아. 그리고 어느 한 분이 쪽지를 보내셨는데요. 작품에 대해서는 그냥 가감 없이 말씀해주세요. 물론 제가 구상한 내용은 있지만, 여러분들의 코멘트는 제가 좋은 방향으로 가는지 가늠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척도거든요. :) 『 리리플 』 1. 우사인볼트 : 1등 축하합니다. 오호. 우사인볼트 님이야말로 바로 닉네임 값을 하시는 분이로군요! 2. 데바란 : 실은 그거 제 말버릇이에요. ㅋㅋㅋㅋ. 제가 항상 말을 할 때 끝말을 올려서 하는 버릇이 있거든요. (__ )* 3. 파르키엘 : 첫 코멘트시군요!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종종 뵈어요! 4. 꿈을그리다 : 제게 만일 하루가 48시간이라면, 그 중 24시간은 메모라이즈 연참에 쏟겠나이다.(그런데 닉네임 진짜 예쁘세요. 탐날 정도에요.) _(__)_ 5. 탄환 : 아. 아니에요. 수호자는 절대로 강제할 수 없습니다. 진짜 대답해드리고 싶은데, 곧 나올 내용이라서 꾹 참을게요. ㅜ.ㅠ 6. 블라미 :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고 계신가요? :) 7. 에르시리나 :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후후. 8. 소설광pen : 저도 진짜 고민 많이 했어요. 클랜, 길드. 클랜, 길드. 결국에는 클랜으로 정했지만요. 후후. 9. 아카드 : 다음 회에 나옵니다. 내일을 기대해주세요! 10. 천냥보은 : 제가 지금 이럴진대, 직장인분들의 월요일 느낌은 어떨지 너무 궁금해요. 정말 우울하기 그지 없다는데요. ㅋㅋㅋㅋ.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32 / 0933 ---------------------------------------------- 뭐예요. 그럼 안 해요. 안솔은 현재 상황이 지극히 불만스러웠다. 언니인 이유정을 제치고 수행인원으로 선발된 것은 좋다. 하지만 소집령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꿔다 논 보릿자루 신세를 면치 못하는 중이었다. 회의실에 들어와 한 일이라곤 사용자들의 시선을 견디며 바닥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분명 뭔가 중요한 분위기였다는 건 느꼈지만, 어려운 이야기는 모른다. 그저 가슴속으로 뭔지 모를 서러운 감정만이 차오를 뿐. 그렇기에, 안솔은 뚱한 기분을 느끼며 아랫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오랜만에 생떼를 부리리라 단단히 마음먹고는 어딘가에 있을 김수현을 찾았다. 아니, 찾으려는 순간이었다. 쾅! “이 빌어먹을 자식!” “클랜 로드! 진정하세요!”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명색이 간부라는 자식이…!” “우선, 우선 확인을 해봐야지요. 그리고 저희만 그런 게 아니잖습니까. 일단은….” 바닥을 내려찍는 거친 소음과 함께 걸걸한 목소리가 사방을 울린다. 안솔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지만 새가슴은 이미 크게 놀란 상태였다. 안솔은 반사적으로 소음의 진원지를 쳐다봤다가 이내 울상을 지었다. 회의실의 중앙에는 사람들이 잔뜩 몰려있었는데, 하나같이 흉포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기 때문이다. “딸꾹!” 스멀스멀 불안감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안솔은 딸꾹질을 하는 입을 막으며 재빠르게 김수현을 찾기 시작했다. 마음속을 점령했던 불만 감은 이미 눈 녹듯 사라진 상태였다. 그저 1분이라도 빨리 김수현의 옷깃을 잡아, 불안한 마음을 달래고 싶은 게 현재 심정이었다. 잠시 후. 안솔은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지 않는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김수현을 찾을 수 있었다. 이윽고 '어디서 감히.'라는 표정으로 김수현에게 걸어가는 아주버님을 보며 잠시 고개를 갸웃하긴 했지만, 얼른 합류할 생각에 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그때였다. “얘.” 억지로 꾸민 것 같지는 않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설픔이 느껴지는 자상한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안솔은 막 떼려던 걸음을 멈칫했다. 그리고 찬찬히 몸을 돌아보자, 포근한 미소를 보내고 있는 이효을이 있었다. “저, 저요? 딸꾹!” “그래. 거기 너. 혹시 네가 머셔너리 클랜원 안솔이니?” 혹시 라는 말을 붙이긴 했지만 안솔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클랜명과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눈앞의 여성은 자신을 알고 찾아왔다는 사실을. 안솔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문득 안솔은 스스로가 참 많이 성장했다고 느꼈다. “얘는. 왜 그렇게 무서워하니? 나야 나. 이효을. 예전에 한 번 봤었지?” “네에….” 얼굴에는 “해치지 않아요~.”라는 표정이 드러나있었지만, 이효을의 눈동자는 기이한 열망으로 이글거리는 중이었다. 안솔은 침을 꿀꺽 삼키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이효을은 두 걸음 다가섰다. 그것도 아주 빠른 발 놀림으로. 안솔은 당황했다. 이윽고 코앞까지 다다른 이효을은 안솔의 가녀린 어깨를 쥐곤 농도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잠시 언니랑 얘기 좀 할까…?” “따, 딸꾹.” 이어진 이효을의 말투는, 뭔가를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 강렬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 “반갑습니다. 해밀 로드 김유현입니다.” “처음 뵙네요. 이스탄텔 로우 로드 한소영이에요. 반가워요.” 찌릿! 서로 간단히 인사를 건네고, 형과 한소영은 서로 손을 스쳤다. 악수를 한 게 아니라 그저 손끝만 가볍게 닿고 다시 거둔 것이다. 이윽고 서로를 냉랭한 눈으로 응시하는 둘을 보며 나는 굉장히 어색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오고 가는 말은 예의 바르지만, 각자의 눈동자는 차갑게 불타오르고 있다. 왠지 괜히 소개해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1회 차 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형과 한소영을 잇고, 추후 머셔너리, 해밀, 이스탄텔 로우 세 클랜의 공조를 구축하려는 나로서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솔직히 한소영이라면 형을 양보할 생각도 조금은 있었다. 굳이 따지고 보면 형의 태도에 문제가 있기는 했다. 오자마자 이건 왠 도둑년이냐는 시선으로 은근히 한소영을 쳐다봤으니까. 그러나 눈치 빠른 그녀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당연히 싸늘한 눈빛으로 형의 시선을 마주했고, 그에 따라 분위기가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자, 옆에서 형의 헛기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내 오른팔을 붙잡는 기척이 느껴졌다. “흐흠. 수현아. 지금 잠깐 시간 있어?” “응? 나 지금 바쁜데. 마침 이스탄텔 로우 로드랑 이야기를….” “이 녀석. 요새 따라 친형한테 연락도 없고 클랜 하우스에도 오지 못하게 하고. 이 친형은 정말 섭섭하구나.” “…….” 형은 '친형'이라는 말에 악센트를 주고 있었다. 마치 누가 들으라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전에, 이에 질세라 내 왼팔을 아주 살짝 붙잡는 기척 또한 느껴졌다. “머셔너리 로드. 아까 했던 얘기를 이어서 하고 싶어요. 단 둘이서요.” “이런. 조금 급한데.” 둘은 나에게 얘기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나를 통해 서로에게 말을 전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툭 까놓고 말해보자면, 한소영의 말은 “꺼져요.”였고, 형의 대답은 “싫은데.”였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아직 10초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마치 1분이 흐른 것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분위기는 더더욱 가라앉고 있었다. 카리스마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한소영이지만, 형도 만만찮다. 다들 얼굴은 태연해 보여도 이미 전투나 다름없는 분위기였다. 마치 얼음과 얼음이 맞부딪치는 착각을 느끼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그렇게 불편한 흐름이 이어지는 도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수현아. 너 얼마 전에 뮬에서 탈출했었잖아.”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다름아닌 형이었다. 뭔가 좋은 건수를 잡은 듯 입가에는 옅은 미소까지 걸려있었다. 형은 한소영을 슬쩍 흘겨보고는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때 구조대에 참가한 사람들 중에 몇 명이 여기 와있거든. 잠깐이면 되니까 같이 가지 않을래? 그 사람들이 너를 보고 싶어해서 말이지. 백서연을 포로로 잡은 과정에 대해서 듣고 싶어하더라.” '와…. 진짜 유치하다.' 형의 말을 듣자마자 맨 처음 떠오른 생각은 진짜 치사하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말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괜히 그런 말을 꺼냈을 리가 없었다. 쉽게 말하면 형은 구조대 참가를 명목으로 한소영을 떼어내겠다는 소리였다. 이스탄텔 로우가 대표 클랜이기는 해도, 따지고 보면 머셔너리는 자유 용병 클랜이니 구조대에 참가할 어떤 의무도 없었다. 물론 설마 왜 너는 참가하지 않았냐 이런 뜻으로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한소영을 주춤하게 만들기엔 충분한 사유가 될 수 있었다. 그녀 입장에선 굉장히 억울하겠지만. 한소영은 처음엔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이건 나도 조금 놀랐다.) 그러나 역시나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지, 내 팔을 잡고 있던 손이 서서히 떨어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바로 낯빛을 고치고는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형을 빤히 바라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그럼 다음에 얘기해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 이윽고 한소영이 몸을 돌려 천천히 걸어나갔다. 그리고 완전히 모습이 사라질 즈음 옆에서 형이 나직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수현아. 조심해라. 아까 멀리서 보니까 가관이더라.” 도대체 뭘 조심하라는 걸까. 어처구니없는 기분을 느끼며 시선을 돌리자, 제법 진중한 빛을 띠고 있는 형을 볼 수 있었다. “뭐가 그렇게 가관인데.” “못 봤어? 너랑 이야기할 때 갑자기 팔짱을 끼고 가슴을 일부러 드러내더라. 그리고 눈은 갑자기 왜 깔아? 딱 봐도 끈적거리고 색기가 넘치는 게 바로 답 나오지. 네가 이제 유명해지려고 하니까, 유혹하고 이용하려는 거야.” “무슨 헛소리야.” 아무리 형이라고 해도 방금 전 상황을 겪은 나로서는 고운 말투가 나갈 리가 없었다. “저 여자가 모니카의 대표 클랜 로드라고 했지? 안 되겠어. 수현아. 원래는 그냥 놔두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프린시카로 오는 게 나을 것 같다. 너무 느낌이 안 좋아.” 그러나 형은 오히려 적반하장 격으로 열변을 토했다. “쓸데없이 가슴만 커서는…. 속이 보인다. 보여.” 이윽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혀를 차는 형을 보며 나는 차분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군. 그럼 나는 클랜원들에게 “한소영의 가슴이 쓸데없이 크므로 모니카를 떠나겠습니다.”라고 말하면 되는 건가. 나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아주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아직도 내 팔을 붙잡고 있는 형의 손을 거세게 쳐내었다. “수, 수현아?” “나중에 나랑 얘기 좀 해.” “너 갑자기 왜….” “장난하는 거 아냐. 그럴 기분도 아니고.” 내 눈빛에 담긴 진심을 읽었는지 형은 애꿎은 눈만 끔뻑였다. 나는 형을 날카롭게 한 번 쏘아보고는, 한소영이 나간 방향으로 바삐 걸음을 놀렸다. * 이로써 소집령은 완전히 끝났다. 그리고 우리는 프린시카에서 모니카의 클랜 하우스로 다시 돌아온 상태였다. 이래저래 말 많고 탈 많은 소집령이었지만, 아무튼 원래 목적했던 바는 모두 전할 수 있었다.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이제 남은 건 그들 스스로 내부를 가다듬고 본래 계획했던 것들을 실행하기를 기다리면 된다. 그래. 단지 그뿐이었다. 하지만…. “홀짝! 흥흥.” 나는 내 눈앞에서 음료를 들이키는 이효을을 보며 이마를 짚어야 했다. 원래는 소집령에서 형에게 떼어놓고 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몰래 꼭 할 말이 있다고 애원했고, 이것만 들어주면 다시는 머셔너리에 가입하겠다고 조르지 않겠다는 파격적인(?) 조건까지 내걸며 기어이 따라왔다. 그러더니, 오자마자 하는 말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그러니까. 안솔이 북 대륙의 수호자로써 재능이 있다고?” “응응. 그렇지.” “그래서 어쩌라고.” 안 그래도 형의 일로 마음이 상해있었는데, 또 문제가 터지니 짜증이 안 날수가 없다. 하지만 이효을은 수호자를 떠넘기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 라는 양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아무튼 자세한 얘기는 다 해놨으니까. 얘한테 들으면 되겠네. 아니, 미래의 수호자님에게. 호호.” 이미 약간 짐작하곤 있었지만, 직접 얘기를 듣자 내심 입맛이 씁쓸했다. 원래는 세라프와 대화 후 천천히 생각해보려고 했는데 이효을이 먼저 선수를 쳐버린 모양이었다. 산 넘어 산이라는 생각에 이마를 꾹꾹 누르다가, 나는 옆에서 조신하게 앉아있는 안솔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은 예의 해맑은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전에 볼 수 없던 사명감에 젖은 비장한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이효을이 달콤한 말로 구워삶은 게 틀림없었다. 안솔은 나와 시선을 마주치더니, 그녀답지 않은 또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갑자기 이런 얘기 들으셔서 당황하신 거 알아요. 하지만 잠시 제 얘기를 들어주세요. 부탁해요. 네?” 그 말을 듣자 나는 바로 결단을 내렸다. 만일 이효을이 되도 않은 말로 안솔을 유혹한 거라면, 천사들과 일전을 벌이고서라도 그녀를 뺏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일단 안솔의 말을 들어보고 개인의 의사를 존중해줄 필요는 있었다. 그게 내가 그어놓은 마지노선이었다. “오라버니. 일단 둘이서만 얘기해요. 그게 더 나을 것 같아요.” 내 옷깃을 꾹꾹 잡아당기는 안솔의 손길에 나는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가 인도하는 데로 순순히 따라주었다. 많이 걷지는 않았다. 안솔은 이효을이 있던 집무실을 나가더니 복도에서 걸음을 멈췄고, 이내 열린 문을 꼭 닫았다. 그리곤 결연함이 엿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오라버니. 먼저 말씀 드릴게요. 저 북 대륙의 수호자 하고 싶어요. 저보고 무척 재능이 뛰어나데요.” “안솔. 수호자는 그렇게 만만한 역할이 아니야. 솔직히 갑자기 말해서 당황한 건 맞아. 그러니까 차분히 말해봐. 그것에 대해서 얼마나 들었고, 알고 있는 거지? 응?” “오라버니. 쉬잇! 다 들려요오!” 그때였다. 내가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는지, 안솔은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일자로 세우고는 집무실을 쳐다보았다. 문을 닫아봤자 마력으로 청각을 돋우면 다 들을 수 있기에 어차피 소용없는 신호였다. 하지만 그전에 뺏기지 않으리라 단단히 벼르고 있던 나로서는, 안솔의 반응이 조금 의외일 수 밖에 없었다. 안솔은 후유, 귀엽게 숨을 뱉고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알아요. 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오라버니. 일단은 제 장단에 맞춰주시면 안될까요? 저에게 좋은 생각이 있단 말이에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유 없이 맞출 순 없고, 난 네 클랜 로드야. 합당한 이유 없이 허락할 수 없어.” “오, 오라버니….” 안솔은 내 말에 잠깐 감동한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녀는 다 알고 있다는 마냥 손사래를 치더니 여전히 나지막한 음색으로 말했다. “후. 어쩔 수 없죠. 자자. 오라버니. 진정하세요. 그리고 들어보세요. 제가 다 말씀드릴 테니까요. 솔이가요. 자세히 얘기를 들어봤는데, 북 대륙의 수호자는 특수한 능력이 굉장히 많다고 하더라고요.” “…….” “어떤 것들이 있냐 하면….” 이윽고 안솔은 이효을에게 들은 특전의 내용에 대해서 상세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중 주된 내용은 고유, 특수, 잠재 능력에 관한 이야기였다. 안목, 탐사 등 여러 갈래로 나뉘어진 탐색 능력은 객관적으로 보면 확실히 쓸만했다. 하지만, 그녀는 가장 중요한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것은 북 대륙의 수호자가 되면 한 곳에 얽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정체를 최소한으로 숨기고 남을 도우며 활동해야 하는데, 안솔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도 생각되지 않았다. 삐아 삐아 거리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약 5분의 시간이 지나고 설명이 모두 끝났다. “어때요. 정말 대단하죠?” 안솔은 어떠냐는, 매우 의기양양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쉽지는 않단다. 무엇보다 네가 머셔너리를 떠나야 하잖아. 안현이 그걸 용납할까?” 나는 안현까지 들먹이며 안솔의 마음을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지 그녀는 환한 얼굴로 동문서답했다. “솔직히 그 동안 너무 민폐만 끼쳤다고 생각해서요. 그리고 저를 제외하고 오빠나 언니나 다들 특수한 클래스기도 하고….” “일반 클래스라서 수호자를 얻으려는 거야?” “물론 그것도 있지만 주된 이유는 아니에요. 생각해보세요! 제가 수호자가 되면요. 오라버니를 마음껏 도와드릴 수 있다고요. 탐색, 탐사 능력을 이용해 앞으로 남은 모든 유적을 모두 오라버니께 몰아드린다면? 과연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그러니까.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고. 네 맘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천사들이 그런 행동을 용납할 것 같아?” “후후. 왜요? 그거야 제 마음이죠.” 그때, 입 꼬리를 씩 끌어올리곤 자신만만하게 쳐다보는 안솔을 보며,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마 안솔은 지금 북 대륙의 수호자 역할을 뭔가 딱지치기와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내 반응에 아랑곳 않은 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일단은 수호자를 얻는 게 가장 중요해요. 제가 오라버니 옆에 꼭 붙어있겠다는데 지들이 뭐 어쩌겠어요. 안 그래요?” “아니. 그러니까 그게 네 말처럼 쉬운 게….” “후후후. 걱정마세요. 정 안 된다고 하면 때려 치면 그만이니까요. 아무튼 이제 오라버니와 저도. 아니, 이 머셔너리가 힘껏 비상할 일만 남았다고요.” 어느새 안솔은 내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이미 자신이 펼쳐놓은 장밋빛 미래에 빠져 신나게 허우적대는 중이었다. 즉 눈도, 귀도 막힌 상황. 망상에서의 개헤엄이라고 할까. '…….' 잠시 말을 멈춘 안솔은 오른손을 꾹 쥐었다. 그리곤 나를 향해 힘차게 정권 지르기를 하며 외쳤다. “오라버니는 힘!” 다음으로, 왼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팡 치며 말을 이었다. “저는 능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왼손을 꽉 말아 쥐더니, 힘을 주는 듯 부들부들 떨며 망상의 대미를 찍었다. “홀 플레인의 행운이 우리를 감싸고 있다고요오!” “푸우우우!” 그 순간, 집무실 안에서 누군가 액체를 세차게 내뿜는 소리가 들렸다. ============================ 작품 후기 ============================ 이제 슬슬 안솔 성격의 정체도 드러낼 때가 왔죠. PS. 와우. 반응이 폭발적입니다! 하하하. 간만에 이런 반응을 받으니 좋네요. 그 동안 코멘트 란이 너무 심심(?)했어요. 뭐 저도 입은 근질거리지만, 잠시 참도록 하겠습니다. :D PS2. 오늘 리리플은 쉽니다.(다음 회에 같이 할게요.) 이북 교정도 쉽니다.(편집자님 죄송해요.) 0333 / 0933 ---------------------------------------------- 안솔의 과거 & 폭풍전야 “야. 너 진짜 대단하다. 수호자가 그러는 게 어딨어?” “그쪽이 그렇게 해도 된다고 했잖아요.” “내가 언제? 머셔너리를 도와줘도 상관없긴 한데, 어디까지나 천사들과 협의를 거쳐야 한다고 했는데?” “뭐예요. 난 그런 거 몰라요. 아무튼 오라버니 옆에 계속 있을 수 없는 거면, 나 그거 못 해요. 아니 안 해요!” 이효을은 역시나 대화를 엿듣고 있었는지, 안솔의 계획을 듣자마자 바로 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지금, 안솔과 이효을은 한창 말다툼을 벌이는 중이었다. 천사들도 바보는 아니다. 북 대륙의 수호자는 인도하고 이끄는 자인만큼, 언제나 중립적인 시각에서 활동해야 한다. 그렇기에 안솔이 사리사욕으로 수호자의 권능을 휘두르는 것을 용납할 리 없었다. 정작 그녀는 한 번 해보고 정 안되면 때려 치면 그만이라는 아주 쉬운 생각만 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와. 이렇게 뒤통수를…. 소름이 돋네. 너 정말 못된 아이였구나?” “흥. 말 바꾸기 한 게 누군데요. 그쪽이야말로 정말 못된 사람이에요.” 한마디도 지지 않는 안솔의 말대꾸에 이효을은 게거품을 물었다. 그러나 딱히 할 말은 없는지 이내 눈동자를 빙글 돌리더니,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미 모든 사실은 밝혀진 상태. 다 된 밥에 재가 뿌려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안솔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볼을 퉁퉁 불린 채 짙은 실망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도대체….” “다들 그만해라.” 이윽고 2차전이 시작되려는 낌새가 보였기에, 나는 낮은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묵직하다고 느껴졌다. 이미 소집령 때부터 속이 제법 상해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보금자리라고 할 수 있는 클랜 하우스에 와서도 기분을 거스르는 일들이 일어나니, 짜증이 안 나고서야 배길 수가 없다. 그런 내 기색을 읽었는지, 씩씩 들리던 거친 숨소리들이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라는 속담이 있다. 지금 내 꼴이 딱 그 짝이었다. 물론 이것을 누구 한 명의 문제로 정의할 수는 없었다. 애한테 쓸데없는 헛바람을 불어넣은 이효을도. 앞뒤 안 따지고 덥석 물은 안솔도. 그리고 알고 있었음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어온 나도. 굳이 따지자면 세 명 모두에게 잘못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안솔의 어떤 마음으로 이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녀는 여태껏 머셔너리에 민폐를 끼쳐왔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고, 그것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똑같은 시작점에서 출발한 안현이나 이유정은 모두 레어 클래스를 받아 실력을 착실히 키우는데, 자기 자신만 정체되어있었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었을 것이고. 그러나 안솔의 심정을 알고 있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눈뜨고 그녀를 빼앗길 뻔하지 않았는가. 나는 한동안 속을 다스리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솔.” “네에….” 안솔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문득 예전 생각이 들었다. 안현이나 이유정은 뮬에서부터 주구장창 혼내왔지만, 그녀만큼은 금이야 옥이야, 오냐 오냐 키워온 나였다. 오죽하면 이유정이 항상 달고 다니던 말이 “오빠는 항상 안솔만 예뻐해.”였을까. 아무튼 더 이상 쓸데없는 일에 심력을 소모하고 싶지도 않았고, 난장판에 휘말리는 것도 사양이었다. “일단 방안으로 들어가. 그리고 내가 다시 부를 때까지 반성하고 있어.” “오, 오라버니.” “어서.” “…….” 안솔은 애처로운 음색으로 나를 불렀지만, 나는 눈동자에 힘을 주어 그녀를 직시했다. 그러자 안솔은 찔끔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힘없이 한두 번 끄덕였다. “죄송해요오….” 이윽고 모기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후 자박자박 복도를 걸어가는 안솔을 보다가, 나는 번뜩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지은 죄를 아는지 이효을이 떨떠름한 얼굴로 내 시선을 회피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넌 지금 나 좀 보자. 따라 들어와.”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한마디 툭 내뱉은 후 집무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등 뒤로 이효을이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앉으라는 소리도 하지 않고 바로 책상으로 직행했고,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기록과 깃펜을 꺼내 들어 형에게 보낼 전령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저기…. 머셔너리 로드.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 “이효을.” 이효을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말을 잘랐다. 그리곤 계속해서 깃펜을 놀렸다. 형에게 보낼 전령의 내용은 그녀의 공동 클랜원을 거절한다는 내용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소집령 때까지만 해도 제법 쓸만하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어차피 그까짓 수호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탐사? 당장 북 대륙만 해도 내가 알고 있는 곳만 스무 곳이 넘는다. 괜히 영입해서 불화를 일으키느니 깔끔하게 포기하는 게 백 배 이득이었다. “안솔은 머셔너리 클랜원이고, 나는 머셔너리의 클랜 로드지. 그리고 넌 내 허락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접근했고. 내가 이 상황에서 뭐라고 말을 해야 될까?” “미안해. 그건 사과할게. 그래도 굳이 변명을 해보자면….” “내가 정말 싫어하는 말이 있는데.” 구구절절 한 사연을 적은 게 아닌 용건만 간단히 적은 거라, 내용을 적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윽고 기록을 두세 번 접고 나서 나는 책상 끝으로 그것을 밀었다. 그리고 최대한 사무적인 어투로 입을 열었다. “이미 할 말 다해놓고, 일은 저질러놓은 사람이 물론, 하지만…. 등등. 이런 말들을 하는걸 정말 싫어해. 변명하지마. 구차해 보이니까.” “…….” “안솔이 어떤 마음으로 네 말을 들었을 것 같아? 아니, 그전에 그녀가 어떤 애인지 알고는 있어?” “…아니.” “아니면. 너는 대단한 북 대륙의 수호자고, 우리는 머셔너리 클랜이니 네 말을 따라야 한다 이건가? 그럼 우리를 우습게 봤다는 소린데.” 그때였다. 지금껏 묵묵히 듣고 있던 이효을이 순간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직시했다. 전체적인 얼굴 표정은 태연해 보여도, 눈동자는 강렬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한 말이 그녀 내부의 역린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효을은 곧 지그시 눈을 내리깔곤 책상으로 다가와 끝에 밀어져 있던 기록을 집어 들었다. “맞아. 내 생각이 짧았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 이미 벌여놓고 할 말은 아니지만, 너그러이 용서해줬으면 좋겠어.” “머셔너리는 스스로 여기까지 성장해온 클랜이다. 네 덕을 보지도 않았고, 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응. 가슴 깊이 새겨둘게. 이번 사건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원한다면 그 아이에게 개인적으로 사과할게.” 이효을은 확실히 인물은 인물이었다. 아까부터 자존심을 건드리는 독설을 내뱉고 있었지만, 방금 전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정말로 미안하다는 빛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잠시 동안 이효을을 응시하다가,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더는 분란을 일으키지 말고 한시라도 빨리 떠나라는 신호였다. “…이만 해밀로 돌아가. 그리고 형한테 고마워해. 형만 아니었으면 이대로 곱게 보내주지도 않았을 거다.” “그래. 지금 와서 말하기는 우습지만. 내 목숨 구해준 거랑, 그리고 소집령 때 도와준 거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럼 조만간 또 연락할게. 그때는 이런 사적인 일이 아니라, 공적인 일일 거야.” “멀리 나가지는 않겠어. 나가봐.” 이효을은 점잖게 고개를 숙이고는 이내 차분히 몸을 돌려 걸었다. 천천히 문 쪽으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은 유난히도 주눅들어 보였다. 이윽고 문이 닫히고 이효을의 모습이 사라지는 순간, 나는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뭔가 굉장히 복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효을이 떠난 지도 며칠의 시일이 흘렀다. 그 동안 머셔너리 클랜은 뭐랄까, 조용했다고 해야 할까? 평소와 다른 것은 없었다. 그저 다른 클랜이나 사용자들과 똑같이 자신이 할 일들을 하며 외부의 소식에 촉각은 곤두세우고 있었을 뿐. 그렇게 멍하니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깊은 상념에 잠기려는 순간이었다. “수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그때 뒤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양손에 찻잔을 든 채 맑은 미소를 보내는 정하연이 보인다. 그녀는 모락모락 김을 뿜는 찻잔을 살짝 들어올렸다. 마침 뜨거운 차 생각이 간절했기에, 나는 간만에 기꺼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색 물빛에 향긋한 냄새. 라몬차가 틀림없다. 나는 코끝으로 향을 음미하며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보고를 하려고 집무실에 들렀는데, 자리에 계시질 않아서요. 그래서 혹시나 하고 옥상에 올라와봤죠.” 거짓말. 그런 사람이 차까지 타올까? 하지만 잠깐의 티타임을 가지기 위해 온 사람에게 굳이 지적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슬며시 웃으며 정하연의 장단에 맞추어주기로 했다. 철두철미한 그녀의 성격이니 보고거리를 만들어서라도 왔을 것이다. “예. 어떤 보고인가요?” “부랑자들이요. 어제 회의에서 클랜 로드께서 지시한대로, 알아낸 기록과 함께 모조리 이스탄텔 로우에 넘겼어요. 곧 재판을 열거라고 하니 조만간 수현의 방문을 원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군요. 확실한 보고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일부러 찻잔을 들어올리며 대답했다. “…흠흠. 아. 그리고 이스탄텔 로우 로드가 전해달라고 했어요. 머셔너리의 호의에 감사한다고. 그리고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셨으면 좋겠대요.” 이윽고 찻물을 목으로 넘기며, 나는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무슨 말인지는 단박에 알아들었다. 그때 형과의 오해를 풀기 위해 진땀을 뺐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쓴웃음이 나온다. '그나마 한소영이 대인배라서 다행이지.' 나는 속으로 쓰게 웃으며 연신 찻물만 들이켰다. 이제 더는 보고할게 없는지 정하연은 살짝살짝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살며시 입을 열었다. “수현. 이런 상황에서 말하긴 조금 그렇지만, 요새 참 심심하네요. 예전 같으면 원정 준비한다고 부랴부랴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을 텐데….” “궁금한 게 있나 보군요.” 내 직구에 정하연은 잠시 눈에 이채를 띠더니, 양손으로 찻잔을 감싸 쥐며 말을 이었다. “네. 맞아요. 어제 회의에서 별말씀이 없으셨잖아요. 다들 소집령의 결과를 궁금해했거든요.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셔서…. 혹시 말할 수 없는 비밀인가요?” “예. 자세한 얘기는 아직 언급하기가 조금 그렇네요. 대외비라서요.” “그렇군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어쨌든 당분간은 그냥 기다리시면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될 것들입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헤일로에 대한 침공이 시작됐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오전에 모든 연락이 끊겼다. 뮬, 베스, 도로시와 똑같이 말이다. 마력 파장을 방해하는 수작을 대규모로 부린 것이라 짐작하곤 있었지만, 그걸 내색하지는 않았다. 아직 다른 사용자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인데 혼자 아는 건 이상하게 비춰질 수도 있으니까. '아니면 벌써 점령당했을 수도 있고.' “밖이 굉장히 시끄러워요. 말을 들어보니까, 황금 사자에서 지원병을 파병하려는 순간 거짓말처럼 워프 게이트가 끊겼다고 하던데요. 그럼 지금쯤 헤일로는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네요.” “거짓말처럼 이 아니라 거짓말입니다. 그렇게 우연찮게 끊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헤일로를 버리고 한 곳에 힘을 모아 재정비를 하겠다는 건 나름 탁월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애당초 도영록은 황금 사자를 이끌만한 그릇이 아니었다. 자신의 생각을 실제로 실행할만한 행동력이 없는 것이다. 이쯤 되면 동남부에 지원 요청을 보낼 법도 한데, 소집령 때까지 감감소식이라고 들었다. 과연 황금 사자가 언제까지 자존심을 지킬지 지켜보는 것도 하나의 흥미로운 구경거리였다. 아마 지원 요청을 보내는 순간이 발등의 불이 번지는 순간일 테지만 말이다. 이르면 헤일로가 함락되는 순간, 또는 아무리 늦어도 바바라가 점령당하는 순간, 동남부는 곧바로 행동에 들어갈 것이다. 어찌됐든 내 역할은 열쇠를 준 것으로 끝났다. 그 열쇠를 어떻게 활용할지는 온전히 그들의 손에 달려있다. 당분간은 괜히 앞장서서 나서기보다는, 이 흐름에서 한 발짝 물러나 가만히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의로 끼어들만한 성질의 것도 아니었고, 완급 조절이 필요한 때였으니까. 내 대답에서 뭔가를 알아내기란 요원한 일이라는걸 깨달았는지, 정하연은 가느다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후유. 뭐라도 좀 얻을 수 있을까 해서 찾아왔는데…. 아무튼 결론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대기군요.” “저도 입이 근질근질하군요. 미안합니다.” “호호. 아니에요. 아, 수현. 그럼 아무튼 바쁜 일은 대부분 끝나신 거죠?” “예? 예, 뭐. 그렇죠.” “그럼요. 조금 갑작스런 요청이지만, 조만간 파티를 여는 건 어떨까요?” 뜬금없는 파티를 열자는 말에, 나는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정하연은 내 얼굴을 봤는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요즘 다들 너무 얼굴을 비추지 않아서요. 그리고 새로 들어온 클랜원들도 있잖아요? 오랜만에 모두의 얼굴도 볼 겸, 그리고 환영회도 할 겸. 어때요? 너무 그런가요?” “음….” '아무리 그래도 지금 이 상황에 파티는….' 뭔가 핀트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한 번 생각해보겠다는 말로 보류의 의사를 밝히려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뭔가 번뜩이는 생각 하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좋네요. 그럽시다.” “어머. 정말이요?” “예.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얻은 부랑자들의 장비도 결산해야 하는데, 마침 잘됐어요. 그래도 클랜원들에게는 파티라기보다는, 단합을 위한 목적이라고 말해두세요.” 정하연은 어지간히 기쁜지 환한 미소를 보이며 기뻐했다. 흔쾌히 승낙해주니 자못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와. 다행이네요. 요즘 왠지 모르게 솔이가 기운이 없어 보여서 신경이 쓰였는데, 들으면 분명 기뻐할 거예요.” “안솔이요?” “네. 왜 그러냐고 물어도 고개만 도리도리 젓고…. 오늘은 이걸로 말 좀 붙여봐야겠어요.” “그렇군요.” 나는 속으로 픽 웃었다. 그리고 다 마신 찻잔을 정하연에게 넘기곤 옥상 문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자세한 사항은 고연주와 의논해주세요. 저는 잠시 다녀올 곳이 생겼네요.” “네. 그럴게요. 그런데 어디 가시는 거예요?” 정하연은 자신의 찻잔과 내 찻잔을 겹치며 물었다. 그리고 나는, 크게 기지개를 펴며 대답했다. “신전에 다녀올 생각입니다.” “아….” '음? 왜 저러지?' 단순히 신전에 간다고 밝혔을 뿐인데, 정하연은 낯빛을 붉히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나는 영문을 몰라 어깨를 으쓱였고, 그대로 문을 나서려는 찰나였다. “저기. 수현!” “?” “저…. 바쁜 일 다 끝나셨으면….” 갑작스런 외침에 다시 돌아보자, 정하연의 목 울대가 한 번 꿀꺽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녀는 발개진 얼굴로 나를 힐끔 살피더니 이내 모기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끔…. 밤에 찾아가도 될까요…?” ============================ 작품 후기 ============================ 음. 안녕하세요. 오늘은 제가 안 좋은 소식을 여러분들에게 전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이번 주말 9월 7일(토요일), 9월 8일(일요일)에 성묘 때문에 내려갈 수도 있습니다. 참가할지 참가하지 않을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기에, 늦어도 금요일까지는 결정을 내려 독자분들에게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평일의 절반이 지났습니다! 이제 목요일이네요. 하하. 아무래도 저는 비비앙인것 같습니다. 근래에 코멘트란이 뜨뜻해서 알게 모르게 힘이 빠졌는데, 어제 폭발한 것을 보곤 다시 힘이 생기더군요. 아무래도 제가 변태인가 봅니다.(?) 『 리리플(331회) 』 1. 외로운솔로 : 1등 축하합니다. 하하하. 닉네임…. 솔로 탈출하고 싶어요. ㅜ.ㅠ 2. 낭랑 : 수정 완료했습니다. 감사합니다! 3. 여신유리찬양 : 그거 이북 교정하면서 삭제할 예정입니다. 제 흑 역사에요. 흑흑. 4. 신판타지 : 뭐, 안죽으면 좋겠지만…. 현재 구상으로서는 완결 전에 절반 이상은 죽지 않을까 싶네요. :) 5. 진아이드 : 서 대륙 사용자가 시몬이었죠? ㅎㅎㅎㅎ. 기대해주세요. 메모라이즈? 아니죠. 역관광 라이즈! 맞습니다! 『 리리플(332회) 』 1. 한방모드 : 네! 1등에서는 오랜만에 뵙습니다! 재밌게 보고 가세요! 2. MT곰 : 저랑 똑같으시네요. 저도 무슨 말씀인지 못 알아듣겠습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우리 같이 힘내요! 파이팅~. 3. 천연천연 : 안솔 방출하면 후회하실 거예요. ㅋㅋㅋㅋ. 구상에 살짝 변화를 줬습니다. :) 4. sereson : 안솔이다! 안솔이 나타났다! 오랜만이에요! 5. 몽구헌터 : 정답입니다. 다른 대륙으로 넘어가서 그렇습니다. 하하. 테라에 관해서는 아직 말을 아껴두고 싶어요.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34 / 0933 ---------------------------------------------- 안솔의 과거 & 폭풍전야 신전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호출이나 탐험 보고 등 각자 볼 일이 있어서 온 것이겠지만, 입구까지 줄이 늘어서있는 것은 조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모니카는 이번 침공 사건으로 피난민을 대거 받아들인 상태였다. 전체적인 거주 인구가 크게 늘었으니, 하나밖에 없는 신전에 사용자들이 몰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너 오늘 아침 소식 들었어? 당일 새벽 부로 헤일로랑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고 하던데….” “들었어. 미치겠다 정말…. 아니 그런데. 당최 헤일로 상황을 하나도 모르니까….” “너 거기에 친한 친구 있다고 했잖아. 연락은 해봤어?” “응. 소식 듣자마자 바로 통신 넣어봤는데, 연결 자체가 안 돼. 노이즈 현상만 잔뜩 일어나고…. 후유….” 웅성웅성. 오늘의 뜨거운 감자는 역시나 헤일로였다. 워프 게이트와 통신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참으로 많은 바를 시사해준다. 통신을 방해하는 대규모 파장을 일으켰을 수도 있고, 혹은 한 명도 남김없이 죽었을 가능성도 있다. 최악의 경우에는 워프 게이트까지 점령당했을 경우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물론 난 이미 답은 알고 있지만 그것을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사용자들의 수군거리는 것을 반주 삼으며, 내가 입장할 차례만을 조용히 기다렸다. 약 한 시간 가량 지났을까? 일렬로 늘어서있던 줄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내가 입장할 차례가 되었다. 나는 정문에서 이름과 방문 목적을 간단히 밝혔다. 그리고 분주히 뛰어다니는 신관들 사이를 가로질러 들어갔다. 하도 바빠서 그런지 안내원은 없었지만, 이미 몇 번이나 와본 적 있는 곳이었다. 금세 방을 찾아 안으로 들어선 후, 나는 지체 않고 푸른빛으로 빛나는 포탈에 몸을 묻었다. “사용자 김수현. 오랜만입니다.” 그렇게 소환의 방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날 반갑게 맞이해주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흘끗 고개를 드니 언제나처럼 제단에 앉아 하얀 날개를 일렁이는 세라프가 보인다. 잠시 그녀의 고요한 시선과 마주하다가, 나는 약간의 거리를 남겨두고 세라프의 정면에 주저앉았다. “호출도 안 했는데 오늘은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맞춰봐.” “예?” 나는 품속에서 연초 한 대를 꺼내 물었다. 이상하게도 세라프만 마주하면 연초가 당기기 때문이다. 곧 연초 끝을 점화한 후, 나는 크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 “스읍. 후…. 너 그런 거 잘하잖아. 맨날 내가 오는 이유 먼저 맞추는 거.” 세라프는 아주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내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 입을 열었다. “혹시 북 대륙의 수호자에 관한 일입니까?” 역시 세라프도 알고 있었나. 나는 맞는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 서 대륙에 관한 말을 꺼냈다면 처음부터 설명하려고 했는데, 알고 있다면 이야기는 쉬워진다. 나는 돌려 말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세라프도 그게 더 편할 테니까. “얼마 전 아주 웃기지도 않는 일이 하나 일어나서 말이야. 세라프. 이효을이라고 알고 있지?” “예. 알고 있습니다.” “이효을이 북 대륙의 수호자를 미끼로 안솔에게 접근했다.” “…….” 세라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바로 말을 잇지는 않았다. 혹시 천사들이 안솔을 북 대륙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다면, 사이가 틀어질 각오를 하고서라도 지켜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안솔은 현재로서도 대단한 사용자 정보를 갖고 있지만, 차후 사제의 끝판대장이라고 불리는 시크릿 클래스, 광휘의 사제(Brilliance Priest)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용자였다. 북 대륙의 수호자와 광휘의 사제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 적은 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생각이 달라진 상태였다. 내 1회 차 기억에 따르면, 안솔은 몇 년의 시간이 지나서 남 대륙에서 발족한 오딘(Odin) 클랜에 가입하게 된다. 아무리 오딘이 사 대륙 사용자들이 모인 클랜이라고 해도, 본관은 남 대륙에 있는 클랜이었다. 물론 도중에 그만두고 넘어갔을 경우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가능성이 낮다고 여겼다. 아무튼, 추후 크게 될 가능성이 있는 아이를 눈뜨고 놓칠 수는 없다. 물론 단순히 가능성만 따지는 건 아니었다. 설령 광휘의 사제가 되지 못한다고 해도 좋다. 안솔은 스스로를 민폐라고 칭했지만 그녀는 지금도 나름대로의 도움을 주고 있었으니까. 해서, 나는 벼르고 벼르던 말을 꺼내기 위해 단호히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해두는데. 나는 안솔을 북 대륙의 수호자로 만들 생각은 없다.” “예…. 예?” “너희들이랑 이효을이 어떤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 하지만 안솔을 지금껏 데리고 키워온 사용자로써, 그녀를 넘길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천사들에게 전해. 포기하라고.” 내 말에 세라프는 의아한 얼굴로 더더욱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곤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지그시 눈을 감더니, 다시금 곧바로 눈을 뜨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 속으로 벼르고 벼르던 것에 비해, 뭔가 굉장히 간단한 대답이었다. 순간 기뻐해야 하나 이상하게 생각해야 하나 고민에 빠지려던 찰나, 세라프의 고요한 목소리가 소환의 방을 울렸다. “사용자 김수현.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원하신다면, 오해를 풀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해봐.” 나는 머쓱한 마음에 애꿎은 연초만 물었다. 이윽고 세라프의 말이 이어졌다. “일단 사용자 안솔을 새로운 북 대륙의 수호자로 선출하려는 시도가 있었음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초기 단계에 불과했습니다. 북 대륙의 수호자는 오랜 기간 동안, 굉장히 엄정한 심사를 걸쳐 이루어집니다. 백 번 양보해서 우리들이 그녀를 후계자로 낙점했다고 하더라도, 수호자로 선발하는 과정에는 손톱만큼의 강제성도 부여되지 않습니다.” “뭐야. 그럼 이효을의 행동은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그것은…. 응? 가브리엘님?” 나를 부른 소리는 아니었다. 아마 다른 천사와 대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럴 때는 항상 입만 오물거리고 육성을 들은 적은 드물었기에,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 미약한 호기심이 일었다. 대화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세라프는 “예.”, “예.”, “알겠습니다.”, “죄송하지만 그건 싫습니다.”라고 말하더니, 이내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갑작스러운 통신이 걸려서….” “괜찮아.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길래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튼 말씀하신 것에 답변을 해드리겠습니다. 사용자 이효을은 올해로 7년 동안 수호자 역할을 이어오는 중입니다.” 뭔가 급하게 화제를 전환시키려는 느낌을 받았지만, 아무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주었기에 큰 불만은 없었다. 나는 잠자코 세라프의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3년 전부터 수호자를 그만두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고, 그것은 2년 전…. 그러니까 해밀 클랜에 들어간 이후 더욱 강하게 요청하던 중이었습니다. 아마 제 생각으로는, 사용자 이효을은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을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일을 급하게 진행한 것 같습니다.” “…….” “물론 사용자 이효을의 잘못도 없다곤 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북 대륙의 수호자를 인계하는 과정은 둘이서 합의했다고 끝나는 건 절대 아닙니다. 혹시 그녀가 이 사실을 말해주지는 않았습니까?” '그렇군. 그럼 그때 그 말을 하려고 했던 건가.' 문득 이효을이 집무실에서 내게 말을 걸었을 때가 떠올랐다. 나는 당시 그녀의 말을 의도적으로 잘랐었다.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연초를 물려고 하자, 어느새 끝까지 타버린 연초를 볼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바닥에 버리고 나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그럼 앞으로 안솔은 건드리지 않겠다는 말이지?” “가브리엘님께서, 이번 사건에 대해 어느 정도의 정보는 공개해도 된다고 허락하셨습니다.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말씀을 드려보자면, 대답은 Yes입니다. 사용자 안솔의 수호자로서의 재능은 역대를 통틀어도 톱 클래스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납니다. 그렇기에 그녀의 재능에 반한 천사들은 사용자 안솔을 후계자로 내세우는데 찬성했습니다. 그 수는 전체의 약 절반에 다다릅니다.” 수호자로서의 재능이 톱 클래스? 그것도 역대를 통틀어서? 설마 그 정도일 줄은 당연히 몰랐기에,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사용자 안솔을 후계자로 내세우는데 반대한 인원도 절반에 다다릅니다. 그리고, 반대 인원에는 저도 포함됩니다.” “그래? 그럼 혹시 반대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 “개인적인 이유를 말씀 드려보면, 수호자로서의 재능은 확실히 인정합니다. 하지만 사용자 안솔은 수호자와는 너무도 맞지 않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아마 그녀가 이 상태에서 수호자가 된다면….” 세라프는 잠시 내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이내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히려 북 대륙이 혼란에 빠져들지도 모릅니다. 분명히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못 심각한 어조로 말한 것으로 보아 세라프는 진지한 모양이었지만, 나는 순간 터지려는 웃음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아무튼, 이 정도까지 말한 것으로 보아 안솔의 일은 이쯤에서 매듭지어도 될 듯 싶었다. 일단 목표했던 바는 이뤘다. 이만 돌아가자는 생각에 차분히 몸을 일으키자, 앞에서 세라프의 말이 이어졌다. “벌써…. 가시는 겁니까?” “응. 확답은 들었으니까.” 그렇게 대충 대답해주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떠오른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빛살처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태연히 바지를 툭툭 털며, 최대한 지나가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재능은 확실히 좋다며. 그럼 성격을 고치면 되는 거 아니야?” “No. 그 부분은 논외입니다. 그것은 현재로서는 극복하기 힘든…. 아.” 그리고 그 순간, 세라프는 아차 한 얼굴로 급작스럽게 말을 멈췄다. 그녀는 가녀린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갖다 대더니, 이윽고 빤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칠흑 같은 밤이 슬금슬금 스며들고 있었다. 정원에 까맣게 내려앉은 어둑한 땅거미를 보다가, 나는 연초를 깊게 빨아들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캄캄함 밤하늘 중앙에 희멀겋게 얼어붙은 달이 보인다. 연기를 내뱉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달을 응시한 채, 난 며칠 전 세라프와 나눴던 대화를 곱씹었다. '죄송합니다. 제게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사용자 안솔의 담당 천사가 맹렬히 반대하고 있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이 머셔너리 로드라는점과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의사를 피력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막무가내입니다.' '치료 방법이라….' '저희들은 단지 도우미 역할일 뿐입니다. 해당 부분에 대해서는 사사로이 개입할 수 없습니다.' '만일 설정에 의한 장애라면 확실히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홀 플레인에 들어오기 전부터 갖고 있던 것입니다.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의 정신을 건드리는 것은 굉장히 고 난이도의 마법에 속합니다. 현재로서는 아무래도….' '별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희들의 사정을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안솔의 정신 장애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까 싶어 툭 던져본 것인데, 예상대로 세라프는 쉽게 걸려들지 않았다. 일단 안솔을 지켜내는 것은 성공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대로가면 그녀는 광휘의 사제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묻힐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것은 홀 플레인의 적응과는 차원이 다른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도대체 1회 차 때 뭔 일이 있어 안솔의 심경을 변하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현재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이제는 변화가 필요할 때라는 것이다. “형! 형!” 그때였다. 한창 안솔의 정신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을 즈음, 나를 부르는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는 안현을 볼 수 있었다. “형. 여기서 혼자 뭐하세요? 파티 준비가 모두 끝났다고요! 다들 형만 기다리고 있어요! 연주 누님이 얼~른 모시고 오래요.” “너 왜 이렇게 들떴어.” “정말 오랜만에 파티잖아요! 파티파티! 거기다 장비 결산까지? 유후~! 빨리 가요 형!” “녀석하곤. 알겠다. 지금 가자꾸나. 그리고 파티가 아니라 단합 회.” 안현은 아무래도 좋다는 양 벙글벙글 웃으며 나를 잡아 끌었다. 이따금 콧노래도 흥얼거리는 게 정말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렇게 좋으냐?” “정원에서 하니까 뭔가 좀 기분이 색다른 것 같아서요. 그리고 오늘은 음주도 허락하신다고 해서….” “결국 술이 목적이었군.” “에이. 형. 진짜 오랜만이잖아요. 그리고 오랜만에 형이랑 술을 마신다고 하니 좋아서 그러죠. 형도 저랑 술 한잔 하실 거죠?” “음…. 그러고 보니 예전에 학술 정보 관에서 넷이서 마셨을 때가 떠오르네. 그래 좋다. 오랜만에 술 한잔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일부러 “둘이서.”라는 말은 생략했다. 내가 맞장구를 쳐주자 더욱 신이 나는지, 안현은 더더욱 흥얼거리며 발걸음을 바삐 놀렸다. 나는 걸음을 맞춰 녀석의 뒤를 따라가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안솔의 문제는 급하게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특히나 정신에 관련된 거라면 더더욱 말이다. 일단 긴 시간을 두고 천천히 방법을 찾아볼 요량이었다. 그렇다면 우선적으로 안솔이 왜 이렇게 됐는지 속사정을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당사자가 스스로 입을 열게 만드는 방법 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당사자에게 곧바로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이미 그것은 여러 번 실패했었으니까. 해서, 나는 안솔의 속사정을 알아내기 위한 첫 목표를 안현으로 잡은 상태였다. 남매 사이인 만큼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을 것이고, 그녀보다는 안현이 입을 열을 가능성을 더욱 많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저희 왔습니다!” 그때. 어느새 도착했는지, 안현이 거세게 손을 흔들며 큰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런 녀석의 뒤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자정 업데이트에 성공했네요. 하하. 기분이 참 좋습니다. 아. 성묘는 아마 가게 될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금요일에 제대로 말씀 드려볼 생각이지만, 오늘 아버지가 넌지시 말씀하시는 게 그런 뉘앙스셔서요. 그리고 형이 지금 졸업반이라서 취업 준비한다고 바쁘다고 해 불참 선언을 했습니다. 아무튼 내일 확실하게 결정이 날 것 같으니, 후기에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금요일입니다! 불타는 금요일! 내일은 학교에서 가장 늦게 돌아오는 시간이지만, 그래도 최대한 맞춰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직장인, 학생분들 파이팅!) PS. 확실히 어제 독자분들의 공격은 매서웠습니다. 하지만 결국 버텨냈지요. 그러나 아무리 로유미라고 놀리셔도, 제가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하하하! 『 리리플 』 1. 눈물강 : 1등 축하합니다. 저도 야호! :D 하하. 이번 회도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2. 九靈感 : 그저 감사할 따름이죠. 요즘 지하철로 학교에 통학하면서 틈틈이 작품을 읽는데, 재미있는 게 많더라고요. :D 3. NovaB : 하하. 감사합니다. 주인공의 캐릭터성은 제가 더 노력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김수현의 시점에서 사랑한다는 표현에 인색함을 받으셨다면, 제대로 보셨습니다. :) 4. 명박짱의양양합일 : 아이고. 오해십니다. 김유현, 김수현은 지극히 정상적인 이성관을 갖고 있습니다. 다만 김유현이 중증 동생 바보일 뿐이지요. 예를 들면, 김유현은 정하연을 상당히 좋게 평가했었습니다. 5. 우사인볼트 : 안솔 인기 좀 떨어트리려고요. 민폐 녀로 만드는 게 가장 좋지만 그건 조금 너무한 것 같고, 그래서 적당히 욕 좀 먹였습니다. 는 농담입니다. 하하. 나중에 안솔 짱짱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 6. 메를리위 : 하하. 김수현은 1회 차 때 찌질이 + 민폐 남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연애 관을 갖고 있다고요! 예전에 제가 잠깐 로유미로 멘붕했을때 BL을 쓰겠다고 협박(?)했었지만, 이제 제 멘탈은 튼튼합니다. 후후. 7. Juary : 다음 회에 본 내용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부디 독자 분들에게 내용이 잘 다가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요. :D 8. 박시온 : 쿠폰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루라도 글을 안 쓰면 불안해서요. 시험 때야 어쩔 수 없지만, 이 핑계 저 핑계로 계속 휴재하면 버릇이 될까 봐 두렵거든요. 9. 상승불사조 : 아. 입이 근질근질하네요. 이미 해당 인원에 대해서는 내용 구상이 끝마친 상태입니다. 그들의 희생은 김수현에게…. 아. 여기까지 할게요. 빨리 그 부분을 쓰고 싶네요. ㅎㅎ. 10. 순수혈통 : 하하. 안 그래도 근래에 느낀 건데, 저는 천상 나쁜 '남자'는 되기 어렵나 봅니다. 평생을 초식 남으로 살아야 하나 봐요…. ㅜ.ㅠ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35 / 0933 ---------------------------------------------- 안솔의 과거 & 폭풍전야 안현의 말처럼 파티, 아니 단합 회의 준비는 이미 모두 끝난 상태였고, 모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목이 길게 빼어져 있는 것을 보니 간만의 단합 회가 자못 기꺼운 모양이다. 이윽고 클랜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걸어가자 정하연이 살며시 와인 잔 하나를 내밀었다. 잔은 둥그런 반원이 눕혀진 형태였는데, 신비로운 물빛을 띠는 맑은 액체가 삼분의 일정도 채워진 상태였다. 나는 바로 그것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물빛 액체는 '인어의 눈물'이라는 이름으로, 혀 전체로 사르르 녹아 드는 감미로움과 은은한 청량감이 일품인 고급 음료였다. 또한 그 이명에는 '번영, 영광, 무궁한 발전'이라는 뜻이 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아까부터 뜨거운 시선으로 응시하는 클랜원들의 시선을 더는 외면할 수 없었기에, 나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원래는 시작 전에 조금 긴 얘기를 하려고 했지만, 여러분들의 시선을 더는 견딜 수가 없군요. 그러니 짧게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냥 농담으로 한 마디 던진 것뿐인데, 여기저기서 안도하는 클랜원들이 보인다. 그들의 얼굴에는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나는 떨떠름한 기분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비록 창설된 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은 클랜이지만, 그 동안 워낙 다사다난해 구구절절이 말하려면 끝이 없겠지요. 그리고 제가 요즘 외부 활동이 바빠 클랜 내부에 소홀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 이 자리는 사용자 정하연의 건의로 인해, 여러분들을 위해 마련한 특별한 축제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 지시할 것은 단 하나입니다. 이 순간만큼은 모든 복잡한 것들을 내려놓으세요. 오직 다들 마음껏 먹고, 마음껏 마시며, 이 단합 회를 즐겁게 즐기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상입니다.” 나는 격려사를 마친 후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리고 전보다 조금 더 강한 목소리로, 축제의 시작을 힘차게 외쳤다. “머셔너리를 위하여.” “위하여!” 클랜원들은 이 말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는지, 다들 이구동성으로 외치며 잔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리고 내가 잔을 입에 가져다 댄 순간 클랜원들도 동시에 '인어의 눈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응?' 그때, 잔을 쭉 들이키자, 입안에서 뭔가 톡 쏘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 '인어의 눈물'은 잔잔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음료인데, 오히려 달콤하고 산뜻한 식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곧 기분이 약간 들뜨고 좋아지는 것을 보니, 추가로 뭔가를 섞었음을 알 수 있었다. 단합 회를 적절히 즐기기 위한 정하연의 세심한 배려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크오! 맛있다!” “후와…! 언니 이거 대체 뭐예요…?” '인어의 눈물'을 마신 클랜원들의 얼굴은, 전보다 한층 상기되어있었다. 몇몇은 볼에 살짝 홍조가도는 게 벌써부터 약효가 퍼지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다들 들뜨는 기분에 벙글벙글 웃고만 있을 즈음, 누군가 가볍게 손뼉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짝짝. “자. 그럼 이제 슬슬 음식을 먹어야 하지 않겠어요? 제가 알기론 오늘을 위해서 하루 종일 굶은 사람도 있다고 하던데. 쿡쿡.” “누님! 그거 저에요 저! 고기! 고기!” 고연주의 목소리. 그녀의 말에 모두 식욕이 동한 얼굴이 되더니 이내 여기저기서 침을 삼키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정원의 중앙에는 식당에서 사용하던 테이블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를 차지하고 있는 엄청난 양의 음식들과 주류들이 보인다. 그녀가 제법 신경을 썼는지 마치 뷔페를 보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테이블로 이동한 우리는, 한쪽에 쌓인 접시를 하나씩 들고 각자 취향에 맞는 음식이 있는 테이블로 쏜살같이 흩어졌다. “연주 누님! 저는 이 고기가 먹고 싶습니다.” “그래? 그럼 잠깐만 기다리렴. 맛있게 구워줄 테니까. 아. 어떻게 구워줄까?” “겉만 살짝 익혀주세요. 후후.” “하여간 먹을 줄은 알아요.” 안현이 침을 질질 흘리며 큼직하고 두터운 고기를 가리키는 것을 보다가, 나 또한 음식을 담기 위해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고연주는 확실히 식도락에 일가견이 있는 여성이었다. 대강 테이블을 훑어보자, 어류, 육류부터 신선한 야채까지 온갖 종류가 구비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번 단합 회에 금화를 아끼지 말라고 했는데, 정말로 아끼지 않은 것 같았다. 아무튼 이왕 즐기는 것 확실히 즐기자는 생각에, 나는 적당량의 음식을 덜고 나서 빈 테이블에 앉았다. 클랜원들 또한 욕심껏 음식을 담았는지 하나같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한 명씩 테이블에 앉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먹고 싶다고 한 고기를 구웠는지 만족한 얼굴을 한 안현과 고연주가 뒤늦게 테이블에 합류했다. 그리고 내가 수저를 드는 것으로 즐거운 식사 시간의 출발을 알렸다. “고, 고연주씨의 음식은 정말 간만에 맛보네요. 기대됩니다.” “호호. 기대해도 좋아요. 신상용씨.” “잘 먹겠습니다!” “잔뜩 남아있으니까, 걱정 말고 많이 먹으렴.” 클랜원들 또한 서로 화사한 이야기 꽃을 피우며 음식을 식사를 시작했다. 나는 간단한 입가심을 위해 채소를 뒤적일 즈음, 문득 입 앞으로 고운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뭔가 하고 봤더니 살짝 말아 쥔 손 아래로 쌈이 보였다. 고기 약간과 여러 야채들을 넣었는지, 다채로운 빛깔을 내는 게 참으로 맛깔스러워 보이는 쌈이었다. 흘끗 고개를 들자, 고연주가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찡긋하는 게 보였다. 그녀는 바로 입을 열었다. “수현. 그 동안 정말 고생하셨어요. 정작 스스로는 소홀하셨다고 말씀하셨지만, 머셔너리를 위해서 그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이신 것 알고 있어요. 이건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한 제 작은 성의랍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냥 제가 먹겠습니다.” “아이. 계속 제 손 민망하게 하실 거예요?” 내가 손을 뻗어 집으려 하자, 고연주는 서운하다는 표정을 내비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곤 그녀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 아~.” 주변의 시선이 모조리 쏠리는 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극심한 거부감이 일었다. 하지만 고연주는 성의를 빙자한 나름의 연막을 쳐두었고, 그녀 말마따나 이것을 거절하기엔 조금 매몰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이 정도면 크게 이상하지는 않을 일이라 생각되었기에, 난 순순히 입을 벌려 쌈을 받아먹었다. “호호. 기뻐라. 수현! 맛있으세요?” “예. 맛있네요.” 입안에서 퍼지는 솔직한 느낌을 그대로 말해주자, 고연주의 얼굴에 화사한 웃음꽃이 핀다. “그럼 하나 더 싸드릴…?” 그때였다. 고연주의 말이 이어지려는 찰나 옆에서 똑같은 쌈이 불쑥 내밀어졌다. 설핏 고개를 돌리자 정하연이 눈매를 아주 살짝 치켜 올린 채 연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저도 클랜 로드를 위해서 에요. 부디 거절하지 말아주세요.” “하, 하하. 사용자 정하연.” “아.” “…이것 좀 먹고요.” 정하연의 눈가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뭔가 거절하면 크나큰 상처를 받을 것 같은 모양새였기에,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씹고 있던 것을 삼킨 후 그녀의 쌈을 받아먹자, 정하연은 의기양양이 고개를 돌려 고연주와 시선을 마주쳤다. 둘은 입 꼬리를 살며시 올린 채 허공에서 시선을 맞부딪치고 있었다. 나는 혹시나 클랜원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해서 주위를 훑었다. “이, 이야. 클랜 로드. 인기가 정말 하늘을 찌르는데요? 부럽습니다. 하하!” “홀홀. 뜨겁구나, 뜨거워. 암. 젊은 건 좋은 거지.” 하지만 내 걱정은 기우였는지 다들 크게 별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슬며시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있자 이곳 저곳에서 분주하게 손을 놀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유정과 김한별이 이에 질세라 쌈을 싸기 시작한 것이다. 한순간 다시 깊은 고민에 빠지려는 찰나였다. 그러나 다행히 눈치는 있는지, 여성 클랜원들의 손길은 내가 아닌 방금 전 부러워한 남성들에게 향했다. “나 참. 별걸 다 부러워하네. 내가 원래 이런 여자는 아닌데, 인심 한 번 썼다. 자, 상용이 오빠. 아.” “유, 유정양? 이, 이러시면….” “할아버지. 이거 한 번 드셔보세요. 제가 직접 싼 거예요.” “응…? 크흠, 크흐흠!” 신상용과 영감님은 한창 낄낄대다가, 막상 상황이 닥쳐오니까 부담스러운지 당황한 얼굴로 연신 헛기침을 했다. 그것을 보자 문득 고소한 마음이 들었다. 어찌됐든, 둘은 이내 조심스레 쌈을 받아먹었다. 각기 얼굴은 터질 듯 붉게 달아올라있었지만, 입술을 실룩거리는 게 좋긴 좋은 모양이다. 혹시나 어색한 상황이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이유정과 김한별 덕분에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었다. 애당초 단합 회의 목적이 클랜원들간의 친목을 다지고 관계를 돈독히 하는것에 있으니, 꽤나 흐뭇한 상황이라 볼 수 있었다. “오호. 이거 분위기가 묘한데요? 그럼 저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죠.” 그때였다. 안현도 이 상황이 기꺼웠는지 씩 미소 짓고는 손수 쌈을 싸기 시작했다. 이윽고 녀석은 자기 손바닥만한 약초 한 장을 짚고는, 큼지막한 고기를 통째로 올려놓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곤 아무렇게나 닥치는 대로 약초를 우겨 넣어 손바닥을 꽉 쥐어 쌈을 마는 것으로 만행의 대미를 장식했다. “어때요? 맛있겠죠? 먹을 사람, 손! 저도 원래 이런 남자는 아닌데, 특별 서비스로 제가 직접 먹여드립니다!” 꽉 쥔 손으로 고기 기름이 뚝뚝 떨어진다. 안현은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외쳤지만, 당연히 나서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다들 비위가 상했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회피하는 중이었다. 녀석 또한 그것을 느꼈는지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가, 결국 직접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연주 누님! 제가….” “꺼져.” “하, 하하. 역시 톡톡 튕기시네요. 그게 매력이죠. 아무튼…. 그, 그럼 하연 누님?” “치우렴.” “그, 그럼…. 비비앙!” “응? 야 이씨! 한창 맛있게 먹고 있는데! 치워! 밥맛 떨어지잖아!” 비비앙은 이 상황에 아랑곳 않고 한창 음식 삼매경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비위를 상하게 한 안현에 진심으로 분노한 듯, 눈에 쌍심지를 돋우며 녀석을 노려보았다. 안현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러다 곧 최후의 보루를 발견했는지 비장미가 감도는 눈길로 누군가를 쳐다봤다가, 이건 아니라는 얼굴로 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옆에서 왠지 모르게 이유정이 분노하는 소리가 들렸다. “헤헤. 다들 거절하시네요.” “…….” “그, 그럼 내가 먹으면 되지 뭐! 나도 실은 처음부터 줄 생각은 없었다고요. 하하하!” “…….” “이야, 맛있겠다. 정말 맛있겠네. 자 보세요. 먹습니다. 우적우적!” 그럴수록 더 비참해진다는 사실을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이윽고 한 입에 쌈을 삼킨 안현은 볼을 크게 부풀리며 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음~.”이라는, 이따금 정말 맛있다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듣는 사람들은 이미 그의 목이 메였다는 사실을 알아챈 상태였다. 아무튼 그것은 안현의 개인 사정이었고, 나는 다시 식사를 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문득 가여운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 안솔과 눈을 마주했다. 그녀는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런 안솔의 손에는, 앙증맞은 쌈이 쥐어져 있었다. 안솔은 한동안 주저하는 듯 싶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그리고 쌈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 조용히 오물거리는 것을 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크흑흑흑….” 문득, 어디선가 굉장히 처량맞은, 구슬픈 목멘 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 식사가 끝난 후 우리는 바로 장비 결산을 시작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그저 어떤 장비들이 있나 확인하는 차원에 불과했다. 워낙 수가 많기도 했지만, 지금 이 분위기에 분배를 시작하면 자칫 갈등이 일어날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해서, 지금은 이 무르익은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각자 갖고 싶은 장비를 생각해보라는 말로 보류한 상태였다. 식사도 즐겼고, 장비 결산도 끝냈다. 단합 회를 시작한지도 어느덧 꽤나 시간이 흐른 상태였다. 저녁이었던 시간은 어느덧 깊은 밤으로 바뀌었지만, 축제는 아직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중반을 넘어섰다는 듯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삼삼오오 모여 주류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이야기 꽃을 피우는 클랜원들을 응시하다가, 안현을 찾았다. “사나이~. 눈물~. 약하다 욕하지마~.” 이미 거나하게 취했는지 안현은 술병을 손에 든 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서는, 본의 아니게 장단을 맞춰주는 신재룡이 땀을 뻘뻘 흘리는 중이었다. “재룡 형님. 우리는 동지입니다. 동지.” “하하. 그, 그렇지.” “쌈 동지 크로스! 자 한잔 더!” “크, 크로스. 그런데 너. 너무 취한 것 같은데.” '이제 슬슬….' 실은, 나는 아까부터 안현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쯤 이야기를 꺼낼지 타이밍을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동안 고민하다가, 주류가 모여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마 안현도 이 정도면 제법 즐겼을 것이고, 클랜원들의 신경이 분산된 지금이 가장 적기라고 여겼다. 산처럼 쌓여있는 주류 더미를 헤쳐 손을 깊숙이 집어넣자, 후미쯤에 연록 빛 물이 찰랑이는 술 두 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은 내가 정하연에게 특별히 부탁한 것으로, 속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가다듬게 해주는 효과가 있는, 술보단 물약에 가까운 액체였다. 나는 몸을 최대한 굽혀 양손에 한 병씩 쥐었고, 다시 허리를 피며 고개를 돌려 안현을 보았다. 그러자, 뜻밖의 상황을 볼 수 있었다. “어쩌지? 내가 먹여드렸으니, 이제 동지가 아니네? 신재룡씨. 이 바보는 내버려두고 저희랑 같이 놀아요. 이 기회에 친해져야죠.” “아, 안 돼! 치사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형님 아우 하던 안현과 신재룡이었는데,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안현이 주저앉아있었다. 그리고 신재룡은, 이유정의 손길에 잡혀 얼 떨떨히 끌려가는 중이었다. 신재룡의 볼이 불룩하고 입에 쌈이 살짝 튀어나와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그녀가 쌈을 먹여 동지 관계를 파탄 낸 것이라 추측할 수 있었다. 굉장히 안쓰럽다고 여겼지만 개인적으론 나이스 타이밍이었다. 속으로 이유정에게 소소한 감사를 표하곤, 난 좌절하고 있는 안현에게 걸음을 옮겼다. 녀석은 내가 오는지도 모르는지 그대로 벌렁 드러눕더니,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윽고 드러난 안현의 얼굴은 예상외로 굉장히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행복해 보인다고 나 할까? 도대체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곧 녀석의 앞으로 다다를 수 있었다. 안현은 여전히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사나이…. 눈물…. 약하다 욕해….” “안현.” “뭐…. 어…. 혀, 형님? 아이고. 인기남께서 여기는 어쩐 일로….” 내 목소리임을 알았는지, 안현은 고개를 번쩍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들고 있던 술병을 들어올린 후, 차분히 입을 열었다. “형이랑 술 한잔 하자. 둘이서.” ============================ 작품 후기 ============================ 참 오늘은 생각할 것이 많은 하루였습니다. 원래 금요일은 제가 평일 중 가장 일찍 학교를 가고, 가장 늦게 집에 돌아오는 날입니다. 그런데 오늘따라 학교에 너무 실망해서 마음이 굉장히 착잡하네요. 세상에. 제가 학교에 다니면서 처음으로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지요. 아니다 다를까. 강의가 끝나고 애들 모두가 투덜거리더군요. 1학기 때 뵈었던 교수님들이 너무 열정적이셨던 걸까요? 단순히 강의의 질이 문제가 아니라 태도가 진짜…. 아무 말도 없이 40분 지각은 기본에. 자료? 필기? 없습니다. 책 한 번 읽고 20분 사색하고. 책 한 번 또 읽고 20분 나갔다 오고. 책 한 번 다시 읽고 20분 휴식하고. 전문 용어가 굉장히 많은, 처음 듣는 전공 과목인데, 이건 알지? 하면서 모조리 넘어가고. 뭐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더라고요. 딱 하나 마음에 든 것은, 40분 지각해서 40분 추가로 강의하셨다는 거네요. 불쾌한 마음에 집에 오자마자 형한테 투덜거렸는데, 형의 말 두 마디가 저를 넉 다운 시켰습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나도 그런 적은 있다. 그런데 결국 그건 네가 교수에게 맞춰야 하는 부분이다.” “한 번 시험 끝나고 봐라. 애들 점수가 어떤지. 거기서도 악착같이 따라가는 애들 있다. 불평할 생각 말고 네가 노력해라.” ^_ㅠ 예습해야겠습니다. PS. 성묘는 어찌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버지랑 통화 후 집에서 얘기하기로 했는데, 아직까지 오지 않으시네요. PS2. 과연 지금 뀨뀨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 리리플 』 1. 우사인볼트 : 하하 1등 축하합니다. 흠. 궁금해해 주세요. ㅜ.ㅠ 안솔도 진짜 불쌍한 애에요. 세라프 다음으로요. 2. Renea : 쿠폰 감사합니다! _(__)_ 3. 라이지나 : 트라우마 제거하면 광휘의 사제라.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하하하. 4. 오피투럽19 : 로유진 로유진 로유진 로유진 로유진 로유진 로유진 로유진 로유진 로유진. 5. 천냥보은 : 천냥보은 님! 그렇지 않습니다. 오해십니다. 오해를 거두어주세요. :) 6. 와룡선생a : 와룡선생a 선생님! 문제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보기에 답이 없어요! 7. CemeteryGates : 쿠폰 감사합니다. 정신 문제는 처음 안솔 설정을 잡을 때 제가 이것 저것 알아본 상태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전문 지식이 부족한 상태라 많이 걱정되네요. 하하. 조금 부족해도, 예쁘게 보아주세요.(?) 8. namdab : 하하하. 쿠폰 감사합니다. 잊어먹은 건 아니었어요. 다만 리리플이 랜덤일 뿐이에요. 징징. ㅜ.ㅠ 9. 천사의사정 : 한가지 키워드를 드리자면, 과연 제로 코드가 무엇이길래 그렇게 천사들과 악마가 대립하고 있는 걸까요? :D 10. hohokoya1 : 내일 연재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할 수 있게 된다면 최선을 다해 집필하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코멘트 달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36 / 0933 ---------------------------------------------- 안솔의 과거 & 폭풍전야 “오…! 형이 저를 구원해주시는군요. 후후.” 미리 술 한잔 하자고 말을 해두어서 그런지 안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나는 “하하하! 형은 나를 선택했어! 보고 있냐 이유정?”이라 지껄이는 녀석의 옆구리를 후려치고 나서, 축제 장소에서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최대한 으슥한 곳으로 이동하며 나는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안현과 안솔은 해당 일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굉장히 꺼려한다. 그럼 어떻게 하면 안현의 입을 열게 만들 수 있을지, 그게 바로 관건이었다. 약 2분 정도 걸었을까. 어느새 밤은 깊었고 등 뒤로는 여전히 안현이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대강 주위를 둘러보다가 정원 연못 주위서 걸음을 멈췄다. 달빛이 찬란하게 비쳐서 그런지, 빛은 흐린 어둠을 몰아내고 자그마한 연못의 수면에서 은백색으로 반짝반짝 튀어 오르는 중이었다. “오. 여기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왜 이곳까지….” 안현은 싱글싱글 웃으며 자리에 앉다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곤 잠시 흠칫하더니, 양팔로 자신을 감싸며 외쳤다. “형. 설마…?!” “?” “혀, 형.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아…. 아니다. 형이라면…. 어쩌면 괜찮을지도….” “한 마디만 더해봐. 강제로 술을 깨게 만들어주마.” 나는 으르렁거리듯 내뱉고 오른손에 들고 있던 병을 세게 던졌다. 안현은 낄낄 웃으면서 손을 젓더니, 제법 근거리였음에도 날아간 병을 정확히 잡아채었다. 속으로 약간 감탄한 후 나는 왼손에 있던 병의 마개를 열었다. “일단 건배.” “네! 그런데 병째로 마시는 거예요?”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병과 병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먼저 한 모금 들이켰다. 차가운 액체가 목으로 부드럽게 넘어가자, 아주 약간 들떴건 기분이 가라앉으며 속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잠시 입안에 남은 청량한 맛을 음미하다가, 나는 슬쩍 앞을 바라보았다. 정면에선 살짝 고개를 돌린 채 예의 바르게 병을 받쳐 마시고 있는 안현이 보였다. “카. 독하진 않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괜찮은데요? 목 넘김도 좋고 정신도 말똥말똥해지는 것 같고요.” “그럼 한잔 더할까?” 안현은 여부가 있냐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느 정도 약효가 돌기를 기다릴 예정이었다. 녀석은 이미 술에 취할 대로 취한 상태였다. 그러니 적어도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을 만큼 정신을 일깨울 필요가 있었다. 이후 나는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잠자코, 안현이 떠드는 것에 맞장구만 쳐주며 애꿎은 액체만 들이켰다. 그리고 반 병 정도를 비우자, 녀석의 흐릿해 보이던 눈동자에 총기가 돌아오고, 축축 늘어지던 발음도 서서히 또렷해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이쯤이면 슬슬 이야기를 꺼낼 타이밍이라는 생각에 나는 품속에서 연초를 한 대 꺼내 물었다. 내가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 어색하게 느꼈는지, 방금 전까지 주절주절 떠들던 안현의 목소리도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그렇게 점화석으로 연초에 불을 붙일 즈음이었다. “형. 혹시 저한테 뭐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아까부터 아무 말씀도 안 하시네요.” 안현의 음색은 아까보다 훨씬 가라앉아있었다. 어느 정도 약효가 퍼졌다는 생각에 나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불을 붙인 연초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후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네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다. 그래서 일부러 이 자리를 마련한 거야. 안솔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거든.” “아하. 그렇구나. 에이, 어떤 거라도 물어보세요 형. 형님이라면, 제가 솔이에 대한 모든 것들을….” “안현. 지금 농담 따먹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나는 안솔의 과거와 정신에 대해서 묻는 거거든.” 그러자, 안현은 거짓말처럼 입을 다물었다. 나는 흘끗 시선을 들어 녀석의 얼굴을 살폈다. 단합 회에서 보였던 즐거워하는 기색은 어디로 갔는지, 안현은 한껏 당황한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굳이 묻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목소리에 더욱 힘을 주었다. “물어볼 데가 너 밖에 없구나. 그러니 네가 속 시원히 좀 말해줬으면 좋겠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알고 있지?” “…….” 문득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한동안 안현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굳게 입을 닫고 멍한 눈초리로 애꿎은 땅만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고, 다문 입술이 살짝 씹혀 들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안현은 갑작스레 미소를 흘렸다. 하지만 그것은 억지로 만든 티가 다분히 묻어나는 웃음이었다. “하…. 하하. 형도 참. 에이, 말씀 드렸잖아요. 죄송해요. 아무리 형이라도 그건 좀 곤란해요. 개인 프라이버시란 말도 있잖아요. 존중해달라고요. 하하, 하.” “안현.” “…형. 차라리 나중에 말씀 드리면 안될까요? 왜 하필 지금…. 부탁해요. 저에게도 생각할 시간 좀 주세요. 마음의 정리도 하고 싶고, 이 좋은 분위기도 더 즐기고 싶어요.” 안현의 어조는 이제 거진 애원하는 음색을 띠고 있었다. 정말 어지간히도 말하기 싫은 듯 싶었지만, 나는 처음 마음먹은 그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눈앞의 녀석을 설득해야 한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차분히 마음을 다듬었다가, 다시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현아.” 그 순간, 안현은 다시금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뜨고는 이내 입을 살며시 벌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녀석의 눈동자에는 깜짝 놀랐다는 감정이 서려있었다. 나는 지금껏 웬만하면 애들을, 아니 심지어 클랜원들조차도 이름만 따로 부르지 않는다. 거의 성이랑 같이 붙여 불렀다. 그것은 나 나름대로의 벽을 만들고 거리를 두기 위함이었다. 아마 주위의 사람들도 그것을 어렴풋이 느끼곤 있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정하연이 이름만 불러달라고 요청했을 정도였을까. 하지만 이번에는 그 벽을 나 스스로 허물어뜨린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안현을 향해, 나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나는 오늘…. 아니.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구나.” “형…. 제발….” “도대체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거야? 이렇게 숨긴다고 만사가 해결되는 게 아니잖아.” “하지만, 형. 하지만요….” “현아. 혹시 내가 예전에 말했던 것들 기억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 두려움을 딛고 공포의 원인을 똑바로 직시하라고. 그래야만 이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적응할 수 있을 거라고.” 나로서는 드물게 간절히 말해서일까. 그것을 느꼈는지, 안현의 얼굴에 일순 갈등의 빛이 스쳤다. 녀석의 얼굴은 현재의 감출 수 없는 고민과 복잡한 심경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분명 내 저의는 전달됐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안현의 대답은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이었다. 이내 “죄송합니다.”라는 자그마한 말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역시나 이 정도로는 안현의 벽을 무너뜨릴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5분전까지만 해도 즐거웠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급변한 상태였다. 유쾌하고 흥겹던 공기는 삽시간에 사그라지고 불편과 침묵이라는 공기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렇게 아무 말도 없는 잠잠한 상태는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나는 입맛을 다시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안솔에게 굉장히 큰일이 일어날뻔했다. 알고 있니?” 안현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바로 좌우로 저었다. 아마 안솔의 반응으로 대강은 짐작하고 있는듯했지만, 자세한 속사정은 모르는 모양이다. 하기야 수호자에 관해서는 함부로 말을 꺼내기 어려우니 그녀도 상세한 말은 하지 않았으리라. “여기서 안솔을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정말로, 정말로 힘들어질 거야. 이건 단순히 적응을 말하는 게 아니란다. 앞으로 홀 플레인은 급변할거야. 그러면 이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과연 안솔이 그런 성격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엔 아니올시다 야. 내가 항상 말했었지? 홀 플레인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이번 사건이 딱 그 짝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안솔이 이용당할 수도, 최악으론 잘못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 다행히 이번에는 어떻게든 막았지만, 앞으로도 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는 보장할 수 없구나.” “설마 솔이가….” “예전 같았으면. 그래, 그렇구나. 괜찮아. 말하기 어려우면 하지 않아도 돼. 이렇게 말했겠지. 뭐, 솔직히 나도 그게 편하긴 해. 신경 안 쓰고 내 일에만 집중하면 되니까.” “……!” 수그러든 안현의 고개와 축 늘어진 어깨가 움찔한다. 하지만 이왕 내친 김이었고, 견고한 벽을 허물기 위해선 좀 더 강하게 말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은 먼저 안현에게 사태의 중요성을 인식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감성을 흔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구나. 예전에 말이다.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김한별이 물어온 적이 있어. 왜 황금 사자에 들어오지 않냐고. 왜 이 좋은 기회를 걷어차버리냐고. 내가 그때 뭐라고 대답했을까?” “…….” “나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야. 의심도 많고 사람을 잘 못 믿어. 하지만 말이다. 이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은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니잖아. 결국에는 같이 살아가고, 도와줄 동료가 있어야 해. 그래서 나는 대답했지. 나만의 클랜을 만들 거라고. 설령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만 구성된 가족 같은 클랜을 말이야.” “가족…. 이요…?” 가족이라는 단어를 꺼낸 순간 안현의 눈망울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나는 그러한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아직 술병에 남아있는 액체를 들이켜 목을 축인 후, 바로 준비해온 말을 이었다. “나도 황금 사자를 포기하긴 했지만 그건 너희도 똑같은 상황이었지. 중견 클랜들의 오퍼를 거절했으니까. 탁 까놓고 말해서, 내가 그때 쥐뿔이라도 있었니? 가진 건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받은 2골드 남짓한 금화뿐,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 0년 차 사용자였지. 그런데도 너희는 군말 않고 나를 따라와주었고, 광장에서는 금화를 탈탈 털어서 내게 건네주더라. 그때 내가 어떤 기분을 느꼈을 것 같아?” “형….” “현아. 생각해봐. 나와 너, 솔이, 유정이는 통과의례부터 여기까지 쭉 함께해온 사이야. 이제 더 이상 남남도, 타인도 아니잖아. 그래서 내가 더는 두고 보지 못하겠는 거야. 지금 이대로가면 언젠가는 안솔이 잘못될 것을 아니까. 그렇게 될 것을 아는데, 단순히 말하기 싫다고 해서 이대로 그냥 가만히 두어야 할까?” 안현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자의로 저었다기보다는 반사적으로 저었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제 마지막이다. 나는 안현의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현아. 더는 도망치지 말고, 우리 한 번 해보자. 형이 도와줄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응?” “아….” 내 말에 안현은 할 말을 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매가 떨리고 입술을 달싹이는 게 마치 곧 눈물이라도 쏟을 모양새였다. 나는 그런 녀석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윽고 바람이 완전히 잦아들고,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주변이 고요해졌다. 문득 오른손 손가락 사이서 화끈한 기운이 전해졌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자, 한 모금도 피우지 않은 연초가 모두 타 들어가 살갗에 닿았음을 볼 수 있었다. 얼른 그것을 떨굴 즈음, 앞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하…. 맞아요.” “?” 다시 돌아본 안현의 얼굴은,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될까. 눈동자는 멍하고 입은 벌어져있다. 힘이 없어 보인다. 언뜻 보면 홀가분한 것처럼 보였지만, 또 어떻게 보면 뭔가에 홀린 것처럼도 보였다. “형 말이 맞아요. 솔이가…. 나이에 비해 행동이 조금, 아니 많이 이상하긴 했죠.” 안현이 드디어 첫말을 꺼냈다. 굳게 닫혀있던 마음에 약간의 틈새를 내보인 것이다. 그 틈을 더욱 더 열기 위해 나는 바로 대답했다. “그래. 문제가 있다고 대강 짐작하고는 있었다. 그런데 그게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잖아?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다 최소 하나 이상의….” “아니요, 아니요. 형. 그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고요.” 그리고 그 순간, 안현의 눈이 한 번 번뜩였다. 이윽고 녀석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듯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 정도가 아니에요…. 솔이의 심각함은요. 그렇게 좋은 말로 포장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라고요. 예. 맞아요. 우리 솔이, 정신에 장애 있는 애에요.” '꼭 정신병자 같더라고요.' 문득 예전에 고연주가 했던 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솔이도 그것을 알고 있어?” “인지하고 있겠죠. 병원에도 몇 번 데려가 봤으니까. 그런데 아마 자신이 왜 이렇게 됐는지는 모를 거예요.”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씁쓸한 낯빛의 안현이 보인다. 녀석은 천천히 입술을 떼고 있었다. “몇 년 전에 기억을 한 번 상실한적이 있거든요. 전부는 아니고, 부분적으로요. 아마 안솔에게 물어보셨으면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을 거예요. 안 한 게 아니라요.” “뭐…?” '기억 상실…?' 끽해봤자 지적 장애라고 생각해왔던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런 내 반응에 아랑곳 않고, 안현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면 병원을 참 많이 간 것 같아요. 저도 정신에 대해선 자세히 아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많은 병원을 들렀고, 들른 병원마다 하는 얘기가 다르더라고요. 정신분열이다. 해리성 장애다. 기분 장애다. 망상 장애다. 트라우마다. 히스테리 신경증이다. 또는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이다. 하하…. 그런데 원래 그렇데요. 사람 정신의 세계가 원래 그렇게 심오하고, 안솔은 특히 복잡해서 현대의 정신 의학적으로는 최종 진단을 내리기 어렵다네요.” “…그렇군. 기억 상실은 무슨 말이야?” “아…. 형. 혹시 해리성 기억상실증이라고 아세요? 아. 심인성 건망증이라고 했던가.”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대강의 증상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중요한 과거 기억을 회상하지 못하는 장애 현상이며, 증세가 심할 경우 혼돈감, 우울증, 불안 증세, 연령 퇴행 현상, 자살 충동, 대인 관계의 장애 등의 증상과 함께 보이기도 한다. 나는 즉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이제부터가 중요하다는 생각에 얼른 표정을 관리했다. “안솔한테…. 그럼 걔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무슨 일이라…. 그렇죠….” “그럼 도대체 어떤 일을 겪었길래 안솔이 그런 정신 장애 현상을 보이게 된 거지?” 안현은 바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저 무거운 얼굴로 시선을 내려 땅만 내려다보고 있을 뿐.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뭔가를 떠올리려는 듯 녀석의 눈빛이 애잔해지는가 싶더니, 서서히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와 안현은 허공에서 시선을 마주쳤다. 이윽고, 안현의 입이 열렸다. ============================ 작품 후기 ============================ 개강 후 글들을 쭉 읽어봤습니다. 쪽지, 코멘트 등으로 지적을 많이 받았습니다. 갑자기 너무 급해진 감이 있다. 글이 왜 이렇게 꼬였냐. 또는 왜 갑자기 이 부분이 나오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등등.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아마 부족한 실력에 억지로 전개 속도를 높여보려다가 놓친 부분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자신을 원망해야죠. ㅜ.ㅠ 아무튼 그래서, 당분간 꼬인 것을 풀고 필력 회복을 위해 본래의 페이스로 연재할 예정입니다. 아무래도 제 욕심 때문에 메모라이즈를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하하. 당연히 일일 연재는 이어갈 예정입니다. 혹시라도 늦게 올라오는 날에는, 제가 조금 더 글을 다듬고 있다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많이 피곤하네요. 몸도 머리도 어지러우니 회복을 위해 리그 오브 레전드를(?) 하고 오겠습니다! 리리플은 다음 회에 합쳐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한 분만 빼고요. letzgo02 / 복귀를 축하합니다! 예. 시크릿 클래스는 중복이 안됩니다. 김수현 같은 경우는 특전 덕분에 모든 정보가 공개된 것이지, 일반적인 상황으로는 중복으로 가질 수 없습니다. 물론 예외는 있어요. 김수현이나 비비앙, 신상용 같은 경우지요. :) 그리고 시험 합격하신 것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경찰 시험이라니! 정말 대단하시고, 부럽습니다. :D 짝짝짝짝! 0337 / 0933 ---------------------------------------------- 마무리. 그리고 발발.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우리 솔이,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있던 애는 아니에요. 어렸을 때부터 정말 순수하고 무척 여리긴 했어도,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지요.” 드디어 안현과 안솔의 과거 이야기가 시작되는 건가. 예전부터 궁금했던 일이라 한순간 속에서 호기심이 치솟았지만, 나는 그것을 잠시 억누르기로 했다. 그냥 얘기만 듣고 끝낼 일이 아니다. 안현이 해주는 이야기를 토대로 안솔의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잡아야 한다. 그런 만큼 어느 부분에서 단서가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한 마디 한 마디 주의 깊게 들을 필요가 있었다. 나는 차분히 자세를 바로잡고 자세히 듣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형. 원래 저희 집은요.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 없는 가정이었어요. 번듯한 직장을 다니는 아버지, 온화한 성격의 어머니. 그리고 맨날 사고만치고 돌아다니는 저와 조금 많이 소심하지만 그래도 착한 동생 솔이. 말 그대로 평범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가족이었단 말이에요. 하지만, 딱 하나 문제가 있었죠.” 그렇다면 안솔의 정신 장애는 후천적으로, 어떤 요인(要因)에 의해 발생했다는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였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후, 이어지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 날이었어요. 실컷 놀다가 밤늦게 들어왔는데, 아버지랑 어머니가 굉장히 심하게 다투고 계시더라고요. 야 이 개 놈아. 왜 이 개년아. 이런 욕설까지 오고 갈 정도로요.” “그건 좀 심한데. 왜 그렇게까지 싸우신 거야? 원래 불화가 있었었나?” “아니요. 다 아버지 탓이에요. 겉으로 보기엔 정상적인 아버지였는데, 알고 보니 도박과 노름에 손을 대고 계시더라고요. 그 사실을 어머니가 알게 되었고, 결국에는 이혼까지 생각하셨어요.” 안현은 그때를 회상하는지 지그시 눈을 감은 상태였다. 물론 가정의 불화는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을 법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고서라도, 그의 목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담담했다.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럼 그때 이혼을 하신 거야? 그래서 안솔이 충격을 먹은 거고?” “하하하…. 아니요. 사정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아요. 아니, 차라리 그때 그랬다면 오죽 좋았을까요….” 안현은 잠시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젓더니 이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혼하지 않으셨어요. 이혼 직전까지 갔었는데, 마지막에 아버지가 잘못을 인정하고 싹싹 비셨거든요. 물론 다시는 도박과 노름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도 있었고요.” “다행이군.” “거기까지는 다행이었죠. 그런데 형. 개 버릇 남 주겠습니까?” “…다시 손을 대신 거야?” “예. 그런데 약속하신 대로 도박, 노름에는 손을 대지 않으셨어요. 그 대신에, 주식으로 손을 돌리셨더라고요.” '거의 중독 수준이었나 보구나.'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주식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지인의 말에 따르면 상위1%가 아닌 이상 거의 지는 게임이라고 들었다. 그리고 절대 하지 말라는 소리와 함께.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것도 말리지 그랬어.” “어머니는 모르셨던 건지….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때 제가 뭘 알았겠어요? 그냥 컴퓨터 앞에 앉으셔서 이상한 그래프만 주구장창 보시는데, 그냥 아 열심히 일하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했지요. 그런데….” 안현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그렇게 조금 잠잠해지는가 싶었는데, 어느 날 집에 도배된 빨간색 차압 딱지들을 보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했죠.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가 주식에 실패해서 큰 빚을 지셨더라고요. 저번에 도박, 노름 사건은 다행히 터지기 전에 커트했지만, 주식은 정말 빼도 박도 못할 상황이었어요. 혹시 아세요? 정상적인, 평범했던 가정이 풍비박산이 나는 건 정말 한순간이라는 거?” 이후, 안현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눈은 다시 뜬 상태였다. 뭔가를 떠올리는 듯 그의 눈이 아련한 빛을 띠고 있었다. 이윽고 안현의 시선이 떨어져 나에게 맞춰지더니, 곧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아직도, 선명히 기억나요.” “…….” “거리로 나앉은 그날….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어요. 그저 어머니, 저, 솔이를 데리고 하염없이 걷기만 하셨죠. 하지만 전 그때까지만 해도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못했어요. 그래도 아버지니까. 이대로 끝일 리가 없으니까. 설령 최악이라도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니까…. 그런데요, 아버지란 작자는 그 일말의 희망마저도…. 짓밟더라고요.” “왜?” “우리를 데리고 도착한 곳이 바로 한강이었어요, 한강. 그리고 터벅터벅 다리 위로 올라서더니, 그러더라고요. 죽자고. 그냥 여기서 다 같이 뛰어내리자고.”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깊은 침음을 흘렸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아버지로는 보이지 않는 행동이었다. 혹시 그 사람한테도 정신 장애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런 내 생각을 눈치챘는지, 안현은 쓴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형이 생각해도 우습죠? 그런데 사실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 “아마 거기서 뛰어내렸다면, 지금 여기 있을 수 없었겠죠. 이번에도 어머니가 날뛰셨어요. 미쳤냐. 어딜 데려가는가 했더니 고작 이따위 소리나 하려고 데려왔냐. 왜 나랑 새끼들까지 죽이려고 그러냐. 죽으려면 당신 혼자 죽어라. 우리는 악착같이 살아남을 거다….” 그나마 안현의 어머니란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었다. 하기야 아버지 어머니가 쌍으로 똑같은 짓거리를 저질렀다면, 남매는 정말로 여기서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때부터가 지옥의 시작이었어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일은 마치 드라마 같은 일이었잖아요?” “드라마라….” “예. 드라마. 그때만해도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현실의 벽은 냉엄하더군요. 정말 드라마라면 뭔가 극적 반전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반전은커녕 상황은 점점 힘들어져만 갔어요.”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어?” “있었죠.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자꾸만 손을 벌리니까 인간 관계가 모조리 어그러졌죠. 후유….” 메말랐던 안현의 목소리는 서서히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아버지 얘기를 할 때는 비교적 담담했지만, 어머니를 떠올리는 건 그러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는 손을 들어 눈가를 훔치기 시작했다.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는지 안 나오는 하품까지 하며 눈가를 꾹꾹 누르곤 있었지만, 그게 그것이 아님을 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말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말하게 하는 내 마음도 편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왕 일을 시작한 것 내가 둘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 절대 포기하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끝을 보리라는 것. 실상 이건 내 능력을 벗어난 일이라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되는 만큼 해볼 생각이었다. 이 남매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나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아…. 죄송해요 형. 얼른 솔이에 대해서 말씀 드려야 하는데, 제가 쓸데없는 가정사만 늘어놨네요.” “아니. 하나도 쓸데없지 않다.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밤은 길고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잖아.” 안현은 기다란 숨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눈동자에 괸 액체가 살며시 흘러내린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낮은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빚은 자꾸만 쌓여가고…. 친인척 관계는 단절되고…. 가정에서는 서로 서서히 말도 없어지고…. 그렇게 한 2년쯤 지났나? 결국 그때 일이 하나 터지고 말았어요.” “일이 터졌다고?” 이어지는 안현의 음색은 미약한 떨림을 담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과정도 충분히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겠지만, 불현듯 아마 이제부터가 진정한 본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어진 안현의 말은 나를 꽤나 놀라게 만들었다. “예. 어머니가 자살하셨어요.” “…….” 잠시간, 침묵이 감돌았다. 안현의 아버지라면 모를까 설마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거라는 예상은 전혀 못한 상태였다. “그때가 수요일이었는데….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니까, 평일에 웬일로 어머니가 집에 계셨어요. 그리고 갑자기 같이 외출하자고 하더라고요…? 예! 좋았죠. 저랑 동생은 좋다고 따라나갔고, 오랜만에 정말 재밌게 놀았어요. 솔이 좋아하는 동물원도 갔고요, 자장면도 사주셨고요…. 그런데요…. 그런데….” 안현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목소리의 떨림은 점점 심해져 이제 말을 하는 건지 우는 건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이윽고 목 울대를 꿀꺽 움직인 안현은 겨우겨우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볼 일이 있다고, 우리보고 먼저 들어가라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동생이랑 집에 돌아가는데…. 갑자기 솔이가 그러는 거예요. 너무 불안하다고. 엄마 찾으러 가자고.” “뭐? 갑자기 왜…. 아.” “처음에는 뭔 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문득 헤어지기 직전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떠올랐어요. 현아, 솔아. 엄마가 미안해. 그래도, 아무리 힘들어도, 어떤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둘이서 잘 살아야 한다…? 그 말을 떠올린 순간, 저는 바로 달렸어요. 하지만….” 하지만. 안현은 더는 말하기 싫은 듯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이라는 단어를 말한 것으로 보아 그 이후의 일은 익히 짐작할 수 있었기에, 나는 묵직히 고개만 주억였다. 약간의 고요함이 흐르고 안현은 겨우 속을 진정했는지 말문을 열었다. “참 웃긴 게, 어떻게 자살하셨는지 아세요? 한강에 뛰어내리셨어요. 2년 전 아버지가 죽자고 했던 그 자리에서요.” “…….” “그건 정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충격이었죠. 아버지나, 저나, 솔이 모두한테요. 얼마나 원망했는지 몰라요. 그리고 어쩌면…. 솔이의 정신 장애도 그때부터 시작된 것 같아요.” “음?” 슬쩍 눈매를 올리자, 안현은 침중한 낯빛을 비치며 대답했다. “어머니 장례식이 끝난 이후 애가 갑자기 혼잣말을 하기 시작하더라고요. 아무도 없는 빈방인데 혼자서 대화를 하지 않나…. 조용히 혼자서 중얼중얼거리지를 않나…. 어머니가 자살하신 이후로 집이 완전히 변했거든요. 그때까지만 해도 그래도 근근이 이어져 오던 가족이었는데, 완전히 깨져버린 거죠. 아마 그 상실감을 견디지 못한 것 같아요.” “하. 그럼 네 아버지란 사람은 도대체 뭘 한 거야?”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들으려고 했지만 스스로 느끼기에도 내 말투는 은은한 분노를 담고 있었다. 그것은 안현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눈살을 크게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몰라요 저도.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때부터는 막장이었다는 거예요. 툭하면 술을 먹고 잔뜩 취해서 들어오는 게 일상 다반사였죠. 하는 짓이라곤 신세한탄에 어머니 욕이 전부이고, 거기에 걸핏하면 주먹질과 폭언을….” “뭐? 주먹질에 폭언?” “예. 말씀 드렸잖아요. 변했다고. 나중에 아버지도 자살하시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인데, 아버지 또한 정신에 병이 있으시더라고요. 심각한 정신분열증이 있다고….” “자살?” 자꾸만 터져 나오는 안현의 굴곡진 인생사에 나는 이제 어이가 없는 경우를 넘어서 허탈할 지경이었다. '얘넨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거냐….' 안현은 씁쓸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는 완전히 비운 병을 톡톡 두드렸다. “저도 꽤 맞기는 했는데, 유독 동생을 많이 때리시더라고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솔이가 엄마를 많이 닮았거든요.” “나 참…. 뭐 그딴…. 그래도 아버지라고 해서 욕은 안 하려고 했는데, 완전히 미친놈이군. 그럼 넌 동생 맞는걸 가만히 보고만 있었어? 아니, 하다못해 신고라도 할 순 있었잖아.” “그렇죠. 그런데 그때는…. 그냥 저도 포기한 상태였어요. 아니, 집구석에 있는 것 자체가 싫었어요. 학교에서도 완전히 삐딱선을 타기 시작했고…. 불량한 놈들이랑 어울렸거든요. 그냥…. 그랬어요 그때는. 그러고 싶었어요. 집에 신경 자체를 쓰기가 싫었어요. 그래서 솔이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다고, 힘들다고 우는 것도 일부러 모른체했죠. 그때는 그냥 모든 게 다 귀찮았어요.” 안현은 무척 후회하는듯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한동안 입맛을 다셨다. 다른 말은 필요 없다. 안현의 말 그대로, 막장 그 자체였다. 난 품속에서 다시 연초를 한 대 꺼내며 나직이 되물었다. “아버지도 자살하셨다고?” “…예.” “똑같이 뛰어드신 거야?” “아니요. 스스로 못 견뎠는지, 길가에서 시체로 발견됐어요.” '스스로 못 견뎌?' 뭘 스스로 견디지 못했다는 걸까. 안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곤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각히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바닥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더니 이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날따라, 유독 집안이 조용했어요.” “……?” 방금 전부터 이어진 안현의 뜬금없는 말에, 갑자기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바짝 바른 입술을 침으로 적시고는 바로 말을 이었다. “형은 혹시 그런 적 없으세요? 갑자기 공부가 하고 싶다거나, 갑자기 정신이 맑아진다거나. 그런 날이요.” “아. 무슨 말인지 알겠다.” “예. 그거요. 그날 제가 그랬어요. 심할 때는 2주가 넘게 집에 들어가지 않은 적도 있는데, 그날따라 유독 느낌이 이상하더라고요.” “그래서 집에 간 거야?” “예. 집에 들어갔는데…. 너무 조용했어요. 이상할 정도로 말이에요.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방에 쓰러져있는 동생이 보이더라고요. 교복은 심하게 찢겨져 있고, 얼굴이랑 몸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에 피가 낭자하게 흐르고 있었죠.”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설마…? “설마 안솔이…?” “형.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형이 생각하는 그런 거는 안 당했으니까. 옷이 찢겨진 건 반항하다 그런 거고, 피는 많이 맞아서 그런 거예요.” 그런 내 분노를 알아차렸는지, 안현은 곧바로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나는 다급히 되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일단은 119를 불렀어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아버지를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솔이를 살리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그리고…. 다행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어요. 하지만 동생의 정신 장애는 거기서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어요.” “모습을 드러냈다고?” 내 물음에, 안현은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그리곤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며칠 후 정신을 차린 솔이는, 저를 알아보지 못했어요.” ============================ 작품 후기 ============================ 후기에 무슨 말을 쓸지 고민하다가, 어느덧 40분이나 지나버렸네요. 그 동안 최신 회 코멘트를 쭉 읽어봤는데 많이 늘어진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계셔요. 하하, 네. 이 파트는 다음 회 안에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갈 예정이오니 하루만 더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월요일이네요. 다들 힘내시고, 기운찬 월요일 맞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 리리플(335회) 』 1. 외로운솔로 : 1등 축하합니다. 간간이 1등 코멘트에서 뵙는 것 같네요. :) 2. 악에구렁텅이 : 감사합니다. 이번 회는 조금 무거우셨죠? 3. 하얀까마귀 : 그 부분에 대해서 정말 많이 고민했었습니다. 결국 결론은, 일정 이상의 지문을 할애할 수 밖에 없었지요. 바로 마음의 문을 열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요. 4. lovejin : 아니요. 완전한 랜덤입니다. 다만 대답하기 좋은 것에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더군요. :) 5. 바라건데 :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 리리플(336회) 』 1. 데바란 : 1등 축하합니다. 항상 자정에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2. 신야루야 : 살려주세요. 잘못했습니다. ㅜ.ㅠ 저도 더 쓰고는 싶었어요. 정말이요. 3. 오피투럽19 : 그렇게 자주는 안 해요. ㅋㅋㅋㅋ. 그리고 시간대 맞추시기도 어려울 거고요. 글을 쓸 때는 아예 안 하거든요. 해도 다 쓰고 나서 몇 판 정도?. :) 4. DSIID : 제, 제 손목을 자르시면 저는 앞으로 어떻게 글을 쓰죠? ;ㅅ; 5. 명박짱의양양합일 : 제가 너무 조급했나 봅니다. 앞으로 침착하게 생각하려고요. ㅎㅎ. 소중한 조언 감사합니다. _(__)_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38 / 0933 ---------------------------------------------- 마무리. 그리고 발발. “너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그럼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건가?” “아니요. 처음에 말씀 드렸잖아요. 완전한 기억상실이 아니라, 부분적 기억상실이었어요.” 안현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나는 양손에 깍지를 끼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안현의 입에서 과거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했고, 그런 만큼 안솔이 어떠한 일을 당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구체성이 상당히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하기야 그때 거의 집에 거의 없었다고 하니 딱히 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기억하고 있는 것도 있고, 못하는 것도 있다는 소리네.” “네. 의사 선생님 말에 따르면…. 본인의 괴로웠던 기억들 대부분을 잊어버렸을 거라고 했어요. 가능성은 여러 개가 있겠지만,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일종의 자기 방어를 위한 본능이 발현됐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 “그 말을 들은 순간 머리가 멍해지더라고요. 저를 잊어버렸다는 말은, 동생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오빠라는 존재를 원망했다는 말일 테니까요.” 나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안솔의 입장에서 듣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상황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패가망신한 가정과 그로부터 비롯된 가족간의 불화. 어머니의 자살. 오랫동안 이어진, 학대를 동반한 가정 폭력. 학교에서 당한 왕따.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자살. 더구나 아버지란 사람이 중증의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상황상으로 따져도 유전상으로 따져도, 정신 장애가 안 걸릴래야 도저히 안 걸릴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자기편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세상에서, 오히려 안솔의 성격에 자살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아니, 어쩌면 했을지도 모르지.' 안현도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아예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는 연초를 두어 번 툭툭 털고는 나직이 말했다. “그래서 안솔은 그 이후로 어떻게 됐어?” “…굉장히 혼란스럽고 불안해했어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엄청 꺼려했고, 심한 우울증에 걸핏하면 머리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죠. 설상가상으로 증세가 점점 심해지자 연령이 퇴행하는 현상까지 보이더라고요.” “그럼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온 거야?” “병원에서는…. 극심한 트라우마와 스트레스가 겹쳐서 일어난 거라고. 갑작스럽게 회복되는 경우가 많으니 한 번 천천히 경과를 지켜보자고 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딱히 회복될 기미는 못 느꼈어요.” 안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시선은 어느새 내 손가락 사이에 끼어있는 연초에 꽂혀있었다. 한 대 피고 싶어하는 것 같아 살짝 신호를 주자 설레설레 고개를 흔든다. 나는 품에 넣던 손을 원위치하곤 입맛을 다셨다. 안현은 양손으로 바닥을 디디곤 몸을 약간 눕히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어찌어찌 집에는 데려왔는데…. 처음에는 저도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보려고 했거든요? 이제 정말 저희 둘만 남았다는 생각이 들자 느껴지는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든 솔이만은 지키겠다는 생각에…. 사진도 보여주고, 병원도 꼬박꼬박 데려가고, 예전에 같이 놀았던 장소도 자주 데려갔지요.” “진작에 그렇게 좀 하지 그랬냐.” “하하…. 후회는 언제나 늦은 법이죠 뭐. 아무튼, 일하는 시간만 제외하면 거의 항상 붙어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 안현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느닷없이 나를 똑바로 직시하더니 이내 또렷한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어쩌면, 이대로 기억을 잊어버린 채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요.” “…음.” “그렇잖아요? 이대로 어떻게 잘만 다독이면…. 어쩌면 새 출발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어요.” “글쎄다….” 개인적으로 그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속마음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아마 안현이 원래의 생각을 고수했다면 내게 이러한 얘기도 꺼내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내가 그 상황을 겪어보지 못했기에 함부로 왈가왈부할 생각도 없었고. 이윽고, 안현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형. 운명적으로 안 될 놈은 안되나 봐요. 모처럼 마음잡고 새 출발을 하려고 했는데, 눈을 떠보니 동생이랑 홀 플레인에 들어왔더라고요. 형은 제 맘 아시죠?” “…알지.” “형도 하필이면 군대 전역하고 돌아오는 날 소환 당하다니. 따지고 보면 안 억울한 사람이 어디 없겠냐 만 말이죠…. 뭐, 아무튼 대충 이런 얘기에요. 하하.” 안현은 웃음인지 울음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말로 모든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맑은 달빛이 비치는 고요한 밤. 사위는 조용했다. 나와 안현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 입을 다물었다. 약간 길었던 정적이 흐르고, 나는 먼저 말문을 열기로 했다. “현아. 나는 어디까지나 듣는 입장이고, 그렇기 때문에 네가 살아오면서 느꼈을 고통은 감히 짐작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직접 겪어보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지.” “…예.”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조금 더 일찍 말해주었다면…. 그런 생각이 없잖아 있구나. 그럼 조금 더 일찍 방법을 강구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건….” 안현은 잠시 주저하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이왕 내친 김이라고 생각했는지 이내 자그마한 음색으로 대답했다. “버림받을까 봐 그랬어요….” “응?” 뭔 소리냐는 뜻으로 눈썹을 치켜 올리자, 안현은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다시금 말을 이었다. “솔직히 그렇잖아요. 현대에서도 정신에 장애가 있다고 하면 다들 눈에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게 현실인데…. 그리고 실제로 통과의례에 처음 들어왔을 때도 그랬고. 그때 기억나세요…?” “아. 그때는….” 확실히 그랬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안솔은 그때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한 증세를 보였고, 박동걸과 이신우는 얼른 버리고 가자는 말을 꺼냈었다. 아마 그걸 안현이 들은 모양이었다. '가만. 그러면 지금은 증세가 조금 호전됐다는 소린가?' 동시에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수많은 의문. 하지만 지금 고민해봤자 답은 나오지 않는다. 애당초 시간을 두고 해결하기로 결정을 내린 문제였다. 나는 잠시 머릿속을 정리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직도 주저앉아있는 안현에게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짚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알겠다. 괴로운 말을 하게해서 미안하구나.” “형….” “그리고 나를 믿어주고, 얘기해줘서 고맙다.” “아니에요. 저도 막상 말하고나니 홀가분한걸요. 형 말대로 진작에 말씀 드릴걸 그랬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인데….” 안현은 어설픈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런 그를 보다가, 나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안현은 멀뚱한 눈초리로 내 손을 쳐다보더니 그제야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내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손에 힘을 주어 일으키려는 순간, 멀리서 이유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안현! 둘 다 어딨어! 어디서 뭐하고 있는 거야!” 나와 안현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맞췄다. 나는 가느다란 숨을 내쉬고 안현을 끌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분위기는 많이 가라앉았지만, 이만 갈까?” “그래요 형. 축제는 아직 남았으니까요. 끙~차.” 이윽고 몸을 일으킨 안현은 손을 툭툭 털곤 힘차게 기지개를 폈다. 그리곤 고개를 정중히 숙이며 입을 열었다. “형님. 앞으로 우리 솔이 잘 부탁합니다. 저도 최대한 돕겠습니다. 무엇이든지 시켜만 주십쇼.” “그래. 물론 장담은 못하겠지만…. 이것 하나만은 약속할게.” 이미 해놓은 말이 있기 때문에 시원스레 대답할 수 있었다. “내 능력이 닿는 한에서, 최선을 다해보마.” 그 말을 끝으로 나는 클랜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반대로 내가 안현의 팔을 잡고서. * 정하연의 건의한 단합 회는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번 모임은 상당히 좋았다고 평가한다. 축제가 끝난 지 고작 며칠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클랜 내부의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진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간에 데면데면한 클랜원들이 제법 있었지만, 이번 기회로 겉도는 클랜원들을 모조리 안으로 끌어올 수 있었다. 물론 애들과 김한별의 고질적인 냉전은 아직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렇게 단합 회가 끝나고 나서, 나는 며칠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 이후 바로 안솔을 호출했다. 그리고 안솔은 지금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그때 화를 낸 이후로 주구장창 내 연락만 기다리고 있었는지, 호출석으로 부르자마자 한 걸음에 달려온 모양이었다. 고개만 푹 숙인 채 손장난만 하는 안솔을 보며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말하면, 확실한 자신은 없다. 지금 내가 가진 최고의 무기는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과 무력이었다. 차라리 힘을 이용하는 거라면 이렇게 고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애당초 정신이란 분야에 전문가도 아니었거니와 백서연처럼 무조건 물약에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망가뜨리는 건 쉽지만, 한 번 망가진 정신을 회복하는 건 어렵다. '하지만 이대로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도 없으니….' 지금 당장 방법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성과가 나올 때까지 시도한다. 이게 지금 내가 가진 생각이었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는 말도 있잖은가. 나는 이만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기로 마음먹었다. “솔아.” “네, 네?” 내가 이름을 부른 것에 깜짝 놀랐는지, 안솔은 고개를 화들짝 들며 대답했다. “내가 그 동안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솔이는, 현재 머셔너리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클랜원인것 같아.” “!” 그리고 내 말이 이어진 순간, 안솔의 머리 위로 느낌표가 반짝 떠올랐다. 그러더니 곧 눈망울이 그렁그렁해지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오, 오라버니이….” “이것 봐. 또 이래. 아직 내 말도 다 안 끝났는데, 왜 벌써부터 울려고 그래?” “죄송해요오….” “그럼. 죄송해야지. 아마 유정이라면 울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문제점에 대해서 물었겠지. 그리고 고치겠다고 했을 것이고. 유정이도 지금껏 나한테 엄청 혼난 거 알고 있지?” 안솔은 울음을 삼키는 듯 목 울대를 꿀꺽 움직이고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것을 보며 바로 말을 이었다. “물론 네가 남들과는 다른 능력이 있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말이다. 그 능력은 네가 스스로 사용할 줄 알고, 지킬 수 있을 때 비로소 가치를 발휘하는 법이야. 그게 안되면 이용당하기 딱 좋은 능력이지. 내 말이 틀렸니?” 도리도리. 안솔은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자꾸만 애처로운 눈초리를 보내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이미 마음을 단단히 먹은 상태였다. 해서, 나는 딱 잘라 말하듯 입을 열었다. “너는 지금 클랜원들 중에서 가장 발전이 더디고, 뒤떨어져있어. 능력을 말하는 게 아니야. 이 홀 플레인에 대한 전반적인 것을 말하는 거라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네. 네에….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오….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용서해주세요오….” 안솔을 이렇게 몰아붙이는 건 처음이었다. 그녀 또한 여태껏 오냐 오냐 해온 것에 익숙해져 있었는지, 내 이런 모습이 적응이 안 되는 듯 어지간히 충격을 먹은 얼굴이었다. 계속해서 싹싹 비는 안솔을 보다가, 나는 약간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후유. 너. 지금 수행인원 자리가 비어있는 것은 알고 있지?” 얼마 전 회의에서 나는 이유정을 수행인원에서 해제한다고 공식적으로 통보했다. 그녀가 못해서 자른 것이 아니다. '순결의 머리띠'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유정은 훌륭할 정도로 안정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또한 회의 전 이미 충분한 얘기를 나눈 상태였고, 약간의 사정을 덧붙여 이유정의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정작 본인은 상당히 아쉬워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이윽고 안솔이 급하게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바로 말을 이었다. “나는 후임자로 너를 임명할 생각이다.” “저, 저를요? 수, 수행인원에요?” “그래. 그런데 오해하지는 마. 넌 홀 플레인에 대해서 더 알아야 하고, 더 배워야 해. 거부권은 없어. 각오 단단히 하고 오는 게 좋을 거야.” “그, 그럼….”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던 안솔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끅끅 목을 몇 번 들썩이고는, 서너 번 눈을 깜빡였다. “저 안 버리시는 거예요? 내쫓지 않으시는 거예요…?” 그렇게, 안솔의 조심스런 목소리가 들린 순간이었다. 다다다다! 벌컥! “머셔너리 로드!” 누군가 기다란 생머리를 휘날리며 집무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한창 중요한 이야기 중이라 갑작스레 방해를 받은 것에 짜증이 일었지만, 이윽고 들어온 사용자를 보고 나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집무실의 방문을 열고 들어온 사용자의 정체는 다름아닌 임한나였다. 평소 임한나의 단정한 성품이나 기품 있는 몸가짐에 대해선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이상할 여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전에, 그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속보에요. 방금 전 번화가에 나갔다가, 소식을 들었어요.” “사용자 임한나. 진정하시고 차분히. 어떤 소식을 들으셨죠?” 임한나는 내 말에 따라 가슴에 한 손을 얹더니, 곧 숨을 고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5초가 지났을까. 그녀는 약간은 진정된 듯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헤일로, 헤일로의 함락을 확인했어요.” “음…. 통신이 끊겼다고 들었는데…. 아무튼, 예.” 이미 예정되어있던 일이었기에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하지만, 아직 임한나의 말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황금 사자의 지원 요청도 들어왔다고 해요. 이것 말고도 한두 개가 아니에요. 또한 서 대륙 사용자들이, 바바라로의 진군을 시작했다는 소문도….” 이윽고 임한나의 말이 이어진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테이블을 한 번 두드렸다. ============================ 작품 후기 ============================ 조금 더 하고 싶었던, 풀어내고 싶었던 이야기는 많았습니다. 그래도 지금 여기서 다 드러내는 것보다는 차후 안솔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하나씩 드러내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늘은 별로 안 늦어서 다행입니다. 하하. 이제 결의 시작이네요. 전쟁 전까지는 최대한 빠르게 끌어보도록 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 리리플 』 1. 우사인볼트 : 1등 축하합니다. 쿠, 쿨하십니다. 11! 2. 블라미 : 블라미 님! 언제 한 번 1등을 노려보세요! 제가 조만간 어떻게든 자정 연재에 맞춰보겠습니다! ㅜ.ㅠ 3. 아야사키 : 군인이신가 보군요. 나라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힘내세요! 4. [해적]조로 : 아니요. 전 TV 거의 안봅니다. ㅎㅎ. 예능도 한 달에 서너 번 볼까 말까 에요. :) 5. 석양s :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6. 피에로의 눈물 : 코멘트 보고 울컥했습니다. 그저 제 닉네임 제대로 불러주셨을 뿐인데, 갑자기 눈물이 흐르려고 하더군요. 감사합니다. 흑흑. 7. 에샬케이 : 솔직히 안솔이 너무 사기라서요. 백한결이랑 섞어서 사용하면 보조 계열에서는 최강 조합이 나오거든요. 쉽게 줄 수야 없죠. 후후. 8. guzzi : 이런. 그렇군요. 바로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9. 묵향사촌 : 정신 장애에 근친상간이 관련되어있는 경우는 많습니다. 거의 70%에 다다른다고 하네요. 그 말인즉슨, 30%는 아닌 경우도 있다는 말이죠. 급하게 돌리지는 않았습니다. :) 10. Lea : 예. 저도 주인공 말고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도 이따금 드러내고 싶습니다. 독자분들이 즐겁게 읽으실 수 있도록 최대한 재밌게 쓰는 것이 제 사명(?)이겠지요. 하하. 11. Quill : 저야말로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D 12. 레필 : 좋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결국에는 제 손에 달려있겠지요. 항상 고민하고 있습니다. 즐거운 고민이에요.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39 / 0933 ---------------------------------------------- 마무리. 그리고 발발. 헤일로의 함락. 임한나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우리처럼 헤일로에서 간신히 탈출한 사용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도시에서 일정 거리를 벗어난 후 다시 연결된 수정구를 이용해 구조 요청을 보냈다고 한다. 물론 탈출에 성공한 사용자들도 헤일로를 끝까지 지켜본 것은 아니겠지만, 떠도는 소식을 종합해보니 거진 함락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마지막까지 헤일로에 남아있던 사용자들은 고작 수천에 불과했다고 하니까. 그리고 또 다른 소문 중 하나인, 헤일로 함락 이후 침략군이 곧바로 바바라로 진군을 시작했다는 소식은 아직 뜬소문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것도 상당히 가능성이 높았다. 1회 차에서도 놈들은 서부 도시를 전부 점령하고 나서 쾌속하게 바바라로 진군했었기 때문이다. 상황은 다시금, 아주 서서히 어수선해지고 있었다. 아무리 강철 산맥 원정 이후로 크게 쇠락했다곤 하지만, SSUN 클랜은 한때 황금 사자 다음으로 북 대륙을 주름잡던 클랜이었다. 그런 그들이 관할하던 헤일로가 이리도 손쉽게 함락됐다는 사실은, 사정을 모르는 보통의 사용자들에게 불안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사안이었다. 나는 의자에 앉은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서부 도시나 바바라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솔직히 나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현재 내가 관심을 두는 사항은 앞으로 미래가 어떻게 바뀔 것이냐는 것이었다. 큰 줄기는 비슷하다곤 하지만 이미 2회 차는 1회 차와 어느 정도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로 내가 있다. '변했다, 변하지 않았다.' 이제부터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장 이효을을 살린 것도, 북 대륙에 숨어있었던 첩자들을 색출해낸 것도 모두 1회 차와는 크게 어긋나는 일들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앞으론 1회 차의 기억을 100% 맹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유적의 위치나 인재는 그대로 있겠지만 전반적인 흐름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나조차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다면 결국 해답은 하나였다. 이제부턴 예전의 기억은 참고하는 선에서 그치고, 뮬을 먼저 습격했던 사건처럼 뜬금없이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선 최대한 융통성 있게 대처해야 한다. 이 말인즉슨….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거지.' 결론은 힘이었다. 힘이 중요하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에게 이번 전쟁은 어떻게 보면 하나의 기회로 볼 수 있었다. 부랑자들을 포로로 잡아온 이후 머셔너리와 내 이름은 서서히 퍼지는 중이다. 물론 그만큼 표적이 될 가능성은 높아지겠지만, 애초에 목표했던 양지서 자리매김하는 계획은 더 이상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게 이룬 상태였다. 그러니 이 여세를 몰아, 설령 차후 어떤 일이 닥쳐온다고 하더라도 능히 감당해낼 수 있는 힘을 쌓아야 한다.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나는, 비로소 감았던 눈을 뜨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한낮이라서 그런지 등 뒤의 창을 통해 밝은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나는 분연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방안을 가득히 메우는 햇살을 가로질러 굳게 닫힌 문을 열어젖혔다. * 다음날 아침. 나는 단합 회가 끝난 이후 처음으로 회의를 열었다. 전처럼 서로 서먹한 분위기보다야 지금의 활발한 분위기가 좋지만, 언제까지고 이런 기분에 젖어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현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얼른 본래의 업무로 돌아갈 필요성도 있었다. 이미, 회의는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이스탄텔 로우 클랜에서 조만간 클랜 하우스로 방문하고 싶다고 전했어요. 부랑자들에 관한 처리 문제를 의논하고 싶다고 하네요.” “직접 방문한다고요?” “네.” 회의 중 보고를 하고 있던 정하연은, 내 물음에 작게 고개를 움직였다. “음…. 알겠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혹시 다른 보고 사항이 있나요?” “아니요. 이게 마지막이에요.” “그렇군요. 그럼 다른 분은?”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들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더는 얘기할 것들이 없는 모양이다. 평소보다 조금 짧기는 하지만, 얼른 본업으로 돌아가자고 생각한 주제에 클랜원들을 괜히 붙잡아둘 이유는 없다. 나는 이만 회의를 파할 생각으로 차분히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먼저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수많은 시선이 내게 쏠리는 게 느껴졌다. 흘끗 고개를 돌려보니 다들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게 눈에 밟힌다. '…….' 클랜원들이 궁금해하는 게, 그리고 원하는 게 뭔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 속 시원히 밝힐 수는 없었고, 최대한 말을 아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소집령에 참가한 인원들의 약속이었다. 마침 이번 기회에 확실히 말해두자는 생각에 나는 일으키려던 몸을 다시 앉혔다. 그리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지금 시국이 어수선한 건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계실 겁니다.” “…….” “다른 사용자들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하신 분도, 불안하신 분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부분에 관해서는 현재 자세히 말씀드릴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저…. 클랜 로드님. 그럼 혹시 저번 소집령에서 이번 침공에 대한 대책은 나왔나요? 그것만이라도….” 그때, 테이블 왼쪽 라인에서 누군가 조심스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김한별임이 분명했다. “음….” 나는 잠시 동안 고민하다가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 그 순간 회의실이 미세하게 술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나 쓸데없는 오해는 사양하고 싶었기에 나는 바로 말을 잇기로 했다. “그래 봤자 지금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 세가지만 제외하고요. 차분히 기다리는 것. 일이 터질 때를 대비해 열심히 실력을 올리는 것. 그리고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간에 선동 당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 것.” 상세한 결과는 알려주지 못해도 몇 가지 키워드는 던져줬다. 여기까지 말했으면 다들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몇몇 머리 회전이 빠른 클랜원들의 얼굴에 일순 긴장감이 감도는걸 볼 수 있었다. “지금 당장은 이 정도로만 알고 계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곧 발생할 것 같으니까요.” 잠시 클랜원들의 반응을 살핀 후, 나는 앞에 쌓인 기록 더미를 손에 집어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기록들은 각 클랜원들이 신청한 장비 신청서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위시 리스트라고나 할까? “이 기록은 제가 직접 검토 후 개인적으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들 이만 나가보세요. 아. 솔이 너는 가지 말고, 4층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어.” “네에…!” 축객령과 함께 안솔에게 지시사항을 내리자, 그녀는 약간 힘차게 느껴지는 음색으로 대답했다. 오늘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그녀를 새로운 수행인원으로 임명한 상태였다. 단단히 정신무장을 하라고 일러뒀는데 다행히 나름의 각오는 한 모양이다. '분명 뭔가 더 있겠지. 안현이 모를 수도 있는….' 그 부분에 관해서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라면 할 말이 없지만, 아무튼 현재로서는 뭐라도 해볼 생각이었다. “수현. 앞으로 또 많이 바빠지실 것 같네요.” 이윽고 클랜원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는 것과 함께 기척이 문밖으로 사라질 즈음, 아직 남아있었는지 맑은 목소리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잠깐 기록을 읽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자, 연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정하연이 보였다.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는 동시에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겠죠. 바로 바빠지지는 않겠지만, 아마 다음 주에는 클랜 하우스를 비울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미리 말씀 드릴게요.” “다음 주…. 그럼 이번 주는 그래도 괜찮으세요?” “글쎄요.”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던 도중이었다. '그래도 라고?' 그 순간 뭔가 이상한 위화감이 들었고,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정하연을 응시했다. 그러자, 그녀는 약간 서운한듯한 기색을 내비쳤다. “왜요?” “아, 아니에요. 후후.” 그러나 정하연은, 이윽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얼른 시선을 돌리며 조용히 웃었다. 문득 그녀의 볼에 발갛게 피어오른 홍조가 보인다.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불현듯 떠오른 하나의 의문에 곧바로 입을 열었다. “아. 사용자 정하연. 그러고 보니 요즘 따라 아기 유니콘이 보이지 않는데요. 혹시 요즘 뭐하고 있는지 아시나요?” “아기 유니콘이요?” 잘 생각해보면 단합 회에서 아기 유니콘을 본 기억이 없다. 그래서 물은 것이다. 하지만 정하연도 잘 모르는지, 내 물음에 의아한 표정을 짓고는 잘 모르겠다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으응…. 어제 분명…. 아?” 그때였다. 한순간 정하연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지는가 싶더니, 이내 나를 번뜩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어머. 단합 회.” * “귀한 발걸음을 해주셔서 감사해요. 머셔너리 로드.” “별말씀을. 오히려 초대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한소영의 정중한 인사에, 나 또한 마주 고개를 숙이며 화답해주었다. 현재 내가 있는 곳은 이스탄텔 로우의 클랜 하우스였다. 그리고 일전에 머셔너리에서는 이스탄텔 로우에 부랑자들을 인도했다. 홀 플레인의 규칙에 따르면 도시의 대표 클랜은 자체적으로 부랑자를 재판하고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여기서 처리란 말은 부랑자를 다시 사용자로 받아주던가, 아니면 공개 또는 비밀로 처형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규칙은 머셔너리에는 통용되지 않는 규칙이다. 우리는 누구의 산하 클랜도 아니었고, 신분도 자유 용병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내가 굳이 규칙을 따른 이유는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 번째는 한소영에 대한 내 순수한 호의였고, 두 번째는…. 조금 어감은 이상하겠지만, 떠넘기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는 당연히 제가 찾아 뵈었어야 했는데, 자꾸만 방문하게 만드시는 것 같아 죄송한 마음뿐이네요.” “그거야 제가 그렇게 하고 싶었으니까요. 너무 그러시면 오히려 불편합니다.” 한소영은 오늘따라 전과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를 흘리고 있었다. 우선은 옷이었다. 온 몸에 착 달라붙는 얇고 짧은 투피스 형태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어깨는 물론이요 쇄골 윗부분을 훤히 드러낸 노출이 짙은 상의였다. 더욱이 크고 탐스럽게 솟아오른 젖가슴이라서 그런지 살짝 몸을 젖히면 그대로 배꼽을 노출할 것 같은 모양새였다. 하의는 더욱 과감했다. 다르게 말할 것도 없이, 탁 트인 허벅지를 시작으로 탄력적인 살결을 자랑하는 각선미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한소영의 얼굴은 예의 차가움과 고요함을 두루 갖추고 있었지만, 옷차림이 색기를 강조해선지는 몰라도 신비스러움 속에서도 요염함을 엿볼 수 있었다. 솔직히 옷이야 어떻게 입든 본인의 자유라고는 해도, 한소영의 성격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고개가 조금 기울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나야 눈 호강해서 좋기는 하지만 말이다. 내 빤한 시선을 느꼈는지 한소영은 좌우로 꼬았던 다리를 슬쩍 풀고는 허벅지를 약하게 비볐다. 그 행동에서, 왠지 모르게 그녀가 창피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조만간 정식으로 부랑자들의 재판을 열 예정이에요. 이 부분에 관해서 머셔너리 로드의 의견을 여쭙고 싶어서요.” “음…. 규칙에 의거해서, 이스탄텔 로우에서는 이미 그에 따른 진행 계획을 잡아놓으신 게 아니셨나요?” “그렇기는 해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저희의 독단일 뿐. 이번 일에 대해서는 머셔너리 로드의 재가가 꼭 필요해서요.” “그렇군요. 그럼 혹시 계획을 볼 수 있을까요?” 한소영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해서 던진 말이었는데, 철두철미한 성격인 만큼 역시나 미리 준비해둔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녀가 건네준 기록을 훑으며 나는 차분히 고개를 주억였다. 이런저런 내용이 많았지만, 내용을 요약해보면 재판은 공개 진행이 아닌 자체적으로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추가로 재판을 통해 알아낸 사실 중 일부는 사용자들에게 일부 공개하고 싶다는 의견도 첨부된 상태였다. 크게 거슬릴 것은 없었기에,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자체적인 진행은 저도 찬성합니다. 그리고 정보 공개는…. 전부 공개하는 건 아직 시기상조가 아닐까요?” “물론 첩자나 수호자에 관한 내용 등 중요한 내용은 전부 제외할 생각이에요. 하지만 머셔너리 로드도 아시다시피, 헤일로가 함락된 이후 사용자들 사이로 불안한 분위기가 서서히 고조되고 있어요. 그래서 그런지 요즘 따라 정보를 공개하라는 문의가 빗발치게 들어오네요.” “하하. 사용자들의 원성이 자자한가 보군요.” “원성까지는 아니지만…. 이따금 과하다 싶을 정도의 사람도 있어서요. 산하 클랜들도 계속해서 눈치만 보내고 있고….” 한소영은 머리가 아픈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한껏 무르익은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식으로 뒤처리를 맡겨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부랑자들을 인도받았으니 감수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에 따른 이득도 확실히 있을 테니 말이다. 아무튼 기본적인 정보만 공개하는 건 아무 상관도 없었기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기본적인 정보를 공개하는 것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어련히 잘 알아서 하시겠지만…. 굳이 재판에서 알아낼 것 까지는 없을 것 같네요.” “네? 그 말씀은….” 한소영은 한숨 돌렸다는 얼굴로 안도했다가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나는 즉시 말을 이었다. “귀환 과정에서 저희가 앞서 알아낸 정보들이 있습니다. 제가 클랜 하우스로 돌아가서 그 부분만 따로 간추려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것을 공개하시는 건 어떨까요?” “아…. 그럼 저희야 좋아요.” “그러고 보니 진작 보내드릴걸 그랬네요.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머셔너리 로드께서 이렇게 호의를 보여주시는데,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에요.” 한소영은 드물게 살며시 미소를 흘리고는 다시금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자연스레 그녀의 상체도 숙여졌고, 가슴 한가운데 오목하고 길게 패여 있는 부분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담담히 시선을 돌렸다. 오늘 한소영의 옷을 누가 코디했는지는 모르지만, 만나기만 하면 맛있는 밥을 사주리라 단단히 마음먹었다. '만약 스스로 입은 거면 어떡하지?' 그렇게 속으로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실없는 웃음을 흘릴 즈음, 녹아 내릴듯한 미성이 귓가로 흘러들었다. “아차. 머셔너리 로드. 실은 한가지 더 부탁할 일이 있어요.” “부탁이요?” 내 반문에, 한소영은 “네.”라고 한 번 대답하곤 말을 이었다. “백서연에 관한 문제에요.” '백서연이라…. 이제 백서연이나 부랑자들은 거의 쓸모가 없을 텐데.' 애당초 전부 사형할 생각이었기에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한소영의 말인 만큼 들어볼 가치는 있다고 여겼다. 나는 한두 번 고개를 끄덕인 후,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일단 들어보도록 하죠.” ============================ 작품 후기 ============================ 이렇게 화요일도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수요일이네요. 얼른 주말이 왔으면 좋겠어요. 하하. 주말이 끝나면 바로 추석이잖아요. 하하하.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자정 업데이트를 지켰네요! 서서히 페이스가 회복되어가고 있는 게 느껴집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셔야겠네요.(?) 다들 주말을 위해서 힘내세요. :) PS. 아. 혹시나 해서 말씀 드리는데, 아기 유니콘은 현재 삐진 상태입니다. 왜 삐졌을까요? :D 『 리리플 』 1. 우사인볼트 : 1등 축하합니다. 이제 1등은 가볍게 하시는군요. :) 2. guzzi : 네, 네? -_-a 3. 탄환 : 하렘 좋아해요 저도. 그런데 문어발은 싫어요! 아무튼, 추후 다른 남자의 하렘도, 또는 여성의 역하렘도 등장할 예정입니다. 하하. 4. 치우우현 : 제가 독자이던 시절 존경하던 작가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항상 일일 연재를 하셔서요. 저도 그분을 닮고 싶네요. :) 5. -yS- : 하하. 아직 안솔의 모든 게 밝혀지지는 않았지요. 각성은 조금 당기되, 전말은 2부의 이야깃거리로 남겨놓을 예정입니다. 6. 순수혈통 : ?ㅇ? !ㅇ! 7. 홍가55 : 하하. 아닙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할 뿐이에요. :D 8. pen36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 다시 타이트하게 가야겠죠? 전쟁~. 전쟁~? 전쟁~! 9. 춤추는꼭두각시 : 오늘은 전개 속도를 조금 높여보았습니다. 한순간 팍 올리기에는 제가 공부가 부족하니, 조금 더 공부하면서 서서히 끌어올려볼게요. :) 10. 가입하기싫다 : 아. 피임할 수 있는 방법 있습니다. 홀 플레인 내 약초로 할 수도 있고, 마법도 있어요. :) 몰아서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40 / 0933 ---------------------------------------------- 마무리. 그리고 발발. 이스탄텔 로우의 클랜 하우스에 방문한지도 어느덧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그날 인도한 부랑자들의 처리 문제에 합의했고, 한소영은 예정대로 5일 후 재판을 진행했다. 그렇다고 해봤자 자체적으로 진행한 재판이었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아니었기에 크게 별다를 것은 없었다. 결론부터 말해보면 부랑자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처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나는 부랑자들의 앞에서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사형 언도는 온전히 이스탄텔 로우의 판단으로 이루어졌으며, 철두철미한 한소영의 성격상 부랑자를 순순히 살려줄 가능성은 만무했다. 선고를 받았을 때의 부랑자의 반응은…. 뭐랄까, 각양각색이었다고 해야 할까? 살려준다고 하지 않았냐고 악을 쓰는 놈도 있었고, 분명 앞으로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침착히 설득하는 놈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감성에 호소에 눈물을 흘리는 놈도 있었으며, 애당초 포기했는지 묵묵히 끌려가는 놈도 있었다. 하지만 백서연이 넘어옴으로써 다른 부랑자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상실한 상태였다. 한소영은 한 번 내린 판결을 다시 번복하지 않았고, 결국 부랑자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형장의 이슬로 화했다. 단 한 명. 백서연을 제외하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백서연도 사형 판결을 받은 건 맞다. 하지만 다른 부랑자들과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부랑자들처럼 곧바로 처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는데, 잠시 동안만 살려두는 게 어떻겠냐는 한소영의 부탁이 있었다. 그리고 한소영의 부탁이란, 다름 아닌…. “…내정 간부 장해윤 외 네 명을 확인했습니다.” 그때였다. 갑작스레 귓가에 들리는 묵직한 목소리에, 나는 상념에서 깨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현재 내가 있는 곳은 예전 소집령 때 방문했던 고려 클랜 하우스의 내부 회의실이었다. 그때도 사람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더욱 적었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대부분이 고려의 클랜원이었고 그 외라고 해봤자 오직 나만이 유일한 외부인이었다. 회의실을 감도는 분위기는 어둡고 무거웠다.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싸늘한 시선을 뿌리고 있었다. 그들의 눈초리가 내리 꽂히는 곳으로 따라가보자, 양팔이 결박된 채 중앙에 무릎 꿇고 앉아있는 너덧 명의 사용자를 볼 수 있었다. “확인했다. 그럼 지금 바로 시작하도록 하지.” 고려 로드의 점잖은 목소리가 사방을 웅웅 울린다. 목소리는 제법 차분하게 들렸지만 속에 담긴 마력은 숨길 수 없는 분노를 품고 있었다. 옆에 앉아있던 조성호(고려 클랜 외교 간부)도 그것을 느꼈는지 이윽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클랜 로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유도신문은 제가….” “아니 됐다. 어려울 것도 없으니 내가 직접 하도록 하마.” 고려 로드는 고개를 좌우로 젓고는 금세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아래 포박된 사용자 중 한 명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장해윤. 평소 머리가 똑똑했던 만큼, 네가 이곳에 끌려온 이유도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칭찬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생각하시는 것만큼 제 머리는 똑똑하지 않아서요. 제가 왜 갑자기 이곳에 끌려와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 정말로 궁금하군요.” “네놈….” “그러니 제가 이 상황에 대해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분명 빼도 박도 못할 상황임이 분명했지만 장해윤은 오히려 눈 한 번 깜박하지 않고 차분히 대답했다. 그는 고려 클랜에 숨어든 첩자 중 한 명으로써, 백서연의 입에서 가장 먼저 언급된 인물이었다. “음. 하지만 형님께서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일을 벌이셨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아무튼 오해가 있다면 푸는 게 인지상정이겠지요.” 천연덕스럽게 이어진 장해윤의 말에 고려 로드의 주먹이 꾹 쥐어지는 게 보였다. 그는 분을 삭히려는지 잠깐 동안 씨근거리는 듯 싶더니, 곧 나직이 입을 열었다. “네가 들어오면서 백서연을 한 번 흘끗 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이리도 당당하게 나오니 치가 떨리는구나.” “저야말로 잘 모르겠는데요. 머셔너리 로드가 백서연을 포획했다는 소문을 들었고,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신기해서 본거지 딱히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만.” “하. 이년의 주둥이에서 네 이름이 나왔는데도?” “예? 제 이름이 나왔다고요? 그건 또 왜….” 장해윤은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고려 로드가 다시 발끈하려는 순간, 조성호가 그의 어깨를 짚었다. “클랜 로드. 고정하십시오. 어차피 의미 없는 설전일 뿐입니다. 이대로 다람쥐 쳇바퀴를 도느니 그냥 일찍 끝내는 게 나을 듯 싶습니다.” “…….” 뭔가 수가 있는지 조성호는 장해윤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말했다. 그의 제지에 고려 로드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고 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조성호는 천천히 앞으로 나서며 말을 이었다. “고려 클랜 내정 간부 장해윤. 구구절절 자세한 말은 하지 않겠다.” “무슨 말을 해도 좋은데, 일단 상황 설명부터 해달라고요. 나 참.” “…얼마 전 머셔너리 로드는 백서연을 포로로 잡았고, 그녀를 심문한 결과 한 가지 충격적인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그건 바로 북 대륙 곳곳에 부랑자들의 첩자가 숨어들었다는 말이었지.” 장해윤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려는지 고개를 기울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잠시나마 감탄했다. 현대에서 연기자 생활을 하고 왔는지, 겉모양만 보면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장해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 말씀은, 제가 지금 첩자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하…. 솔직히 설마 설마 예상은 했는데, 직접 들으니까 심히 당황스럽네요.” “끝까지 뻔뻔하군. 가증스러울 정도야.” 조성호의 매서운 일갈에 장해윤은 잠시 그를 빤히 응시했다. 이윽고 장해윤의 얼굴에 어둠이 그늘지는가 싶더니 이내 침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억울합니다. 저는 첩자가 아닙니다.” “누구나 그렇게 말할 수는 있겠지.” “지금 두 분은 수년 동안 함께한 저보다, 고작 부랑자의 말을 믿으시겠다는 겁니까?”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그래서 준비한 게 있거든?” 고려 로드는 장해윤에 조금 말리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조성호는 확실히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감성에 호소하는 장해윤의 말을 단칼에 잘라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고, 곧 품속을 뒤적여 조막만 한 수정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나는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진실의 수정.' 아주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드물게 발견되는 장비 중 하나였다. 나는 그제야 조성호가 보이던 자신감의 원천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기야 이제 명실상부 최고의 클랜이나 다름없는 고려 클랜인데, '진실의 수정' 하나 정도는 보유하고 있을 법도 했다. 조성호는 지체 않고 '진실의 수정'을 장해윤의 앞으로 휙 던졌다. 이윽고 '진실의 수정'은 바닥을 굴러 정확히 장해윤의 앞에서 멈췄고,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내려 그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장해윤이 차마 시선을 들기도 전에, 조성호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게 뭔지는 너도 잘 알고 있겠지.” “이건…. 하. 형님!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네 말마따나, 그간의 정을 고려해 길게 말은 하지 않으마. 네가 정말로 결백하다면 이 진실의 수정이 증명해주겠지.” “…….” 게임은 끝났다. 다시 고개를 든 장해윤의 얼굴은 여전히 침착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내심 굉장히 당황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력을 주입하려면 억제구 하나는 풀어줘야겠지. 지금 내려갈 테니 허튼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장해윤.” 이윽고 중앙으로 내려가는 조성호를 보며 나는 남몰래 하품을 했다. * 고려 클랜에서의 볼 일은 끝났다. 일이 끝난 후 고려 로드와 조성호는 내 호의에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식사라도 함께 하자고 요청했지만 나는 형과 선약이 있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솔직히 웬만하면 먹을 생각은 있었는데, 고려 로드의 표정이 너무 좋지 않아 일부러 자리를 비켜준 것이다. 아마 장해윤이 부랑자라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한 게 어지간히도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해서, 나는 진짜로 형을 찾아갔다. 예전 소집령 때 한 번 크게 성을 낸 이후로 형에게서는 단 한 번의 연락도 없었다. 그것은 형이 삐쳤다기보다는, 내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행동으로 볼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화를 내면 형은 항상 어정어정 내 눈치를 살피곤 했으니까. 그러니 먼저 가서 풀어줄 생각이었다.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는지 형은 해밀 클랜에 방문한 나를 반색하며 맞이해주었다. 그리고 잠깐 나가서 식사라도 하자는 제안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옆에서 한창 같이 서류를 정리하던 준성이 형에게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오히려 형이 앞장서서 나를 잡아 끄는 통에 별다른 인사도 못해보고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이윽고 적당히 넓고 조용한 식당을 찾은 후, 우리는 구석진 곳 테이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서로 식사를 주문하고 나서야 간단한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그래. 그 동안 잘 지냈어?” “그럭저럭.” “여기는 어쩐 일로 온 거야?” “고려 클랜에 일이 있었거든. 그래서 일이 끝나고 겸사겸사.” 나는 웨이트리스가 가져다 준 물을 한 모금 들이키고 나서 고려 클랜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했다. 처음 백서연을 데리고 방문한 것부터, 마지막 진실의 수정이 나올 때까지. 형은 그 과정을 조금의 지루함도 보이지 않고 열심히 들어주었다. “음…. 그럼 고려 클랜에서 너한테 별다른 말은 안 했고?” “그냥 도와줘서 고맙다고 하더라. 그리고 식사를 하자고 했는데, 고려 로드의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보여서 거절했지. 엄청 쉬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보였거든.” “그렇구나. 하기야 상대가 장해윤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 형은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고개를 주억이며 숨을 내쉬었다. 뜻 모를 대답에 궁금하다는 의미를 담아 빤히 쳐다보자, 그런 내 기색을 눈치챘는지 형은 입맛을 다시곤 입을 열었다. “자세히 아는 건 아닌데, 장해윤이라면 고려 로드의 충실한 심복으로 알려져 있었거든. 그래서 그가 첩자라는 사실이 나왔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놀랐어.” 형은 잠깐 쓴웃음을 짓고는 바로 말을 이었다. “장해윤 그 사람. 나랑도 조금 안면은 있는 사이였거든? 인물도 제법 괜찮고, 인망도 꽤 높은 사람이었는데….” '그렇군. 그래서 한소영이 부탁한 거였던가.' 첩자를 색출하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차근차근히 진행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중간에 몇 가지 걸림돌이 있는 모양이었다. 예를 들면 장해윤 같은 경우는 형 말대로 명성이 제법 높은 터라 따르는 사용자들도 여럿이 있었다. 그런 그를 갑작스럽게 잡아들이면 아무래도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반발을 최소화하고 명분을 부여하기 위해서, 백서연이 필요한 것이고. '형이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어쩌면 장해윤에게 넘어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아무튼 찾아와줘서 고맙다. 안 그래도 조만간 한 번 찾아갈 생각이었거든.” “응? 머셔너리에?”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겨있을 즈음, 앞에서 형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고개를 들자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형이 보인다. “수현아. 형이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너도 들어줬으면 좋겠어.” “무슨 말인데.” “이번 전쟁에 대해서야.” “…….” “아, 물론 네가 지금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어. 하지만 일단 형 말을 먼저 들어주면 안될까?” 혹시라도 다짜고짜 전쟁에 참가하지 말라는 말을 했다면 또 성을 낼뻔했지만, 단순히 그렇다고 치부하기엔 형의 말투에서 진심이 엿보이고 있었다. 아무튼 듣기만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없기에, 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그럼 혹시 남부 클랜에서는 따로 이야기가 없었니?” “없었어. 왜?” “그런가….” 형은 잠시 말을 흘리는가 싶더니 이내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테이블 주위로 무형의 장막이 생성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형은 제대로 발동되었는지 확인하려는 듯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는, 이내 방금 보다 훨씬 낮은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조만간…. 동부에서는 이르면 다음 주 안으로 사용자들을 편성할 생각인 것 같다. 그것도 대규모로 말이야.” “다음 주? 그렇게 빠르게?” 내 반문에, 형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뭔가를 정리하려는 듯 검지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더니 이내 나직이 말을 이었다. “잘 들어. 지금부터 차분히 설명해줄 테니까. 이번 전쟁, 생각보다 스케일이 커질 것 같다. 네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 작품 후기 ============================ 지금 구상한 내용을 보면 다음 챕터 즈음에(345회) 본격적인 전쟁 파트에 돌입할 것 같습니다.(물론 오차는 있을 수 있습니다. 더 당겨질 수도 있고, 1, 2회 늦어질 수도 있겠네요.) 오늘 늦어서 죄송합니다. 개강 초 조별 과제 크리를 맞아 오늘 모이는 일이 있었거든요. 9월말에 내면 되기는 하는데, 중간에 추석이 끼어있고 10월 중순에 시험이라 미리미리 준비해둬야 할 듯 싶습니다. 『 리리플 』 1. 우사인볼트 : 네. 1등 축하합니다. :) 한소영에 살짝 변화를 줘보았습니다. 나 이런 여성이야~. 라는 느낌? 하하하. 2. Nodens : 축하해요. 포기하셨군요. 저도 일찍이 포기했습니다. 같은 동지군요! 3. AlDante : 수현이는 게이도 아니고, 고자도 아닙니다. 믿어주세요. 정말이에요. 4. 감자띱 : 고맙습니다! 오늘은 조금 위험했는데, 다행히 잘 세이브 할 수 있었습니다. 하하. 대신 이북 교정은 오늘 하루 쉬어야겠네요. ㅜ.ㅠ 5. 현오 : 현오 님 오랜만이에요~. ㅋㅋㅋㅋ. 역시나 눈에 확 들어오는 코멘트는 여전하십니다. :D 많이 바쁘신것 같네요. 힘내세요! 6. 털보아제 : 감사합니다. 단언컨대, 쓰담쓰담은 제 원동력 중 하나입니다. 7. Lea : 보석 감정사는 레어 클래스입니다!(호, 혹시 제가 실수했나요?) 굵직한 것들만 다루고 가다보니 소소한건 놓치기 일쑤더군요. ㅜ.ㅠ 8. 오피투럽19 : 오피투럽 님. 예리하시군요. 그래도 쉿! 쉿! 쉿! 흑흑. 매의 눈이십니다. 9. 데바란 : 호, 혹시 교수님 이신가요? ㄷㄷㄷㄷ. 10. 에슈리카 : 하나씩 천천히 고쳐나갈 예정입니다. 하하.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41 / 0933 ---------------------------------------------- Middle Or West '스케일이 커질 것이다 라고….' 사실상 미래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그냥 그렇게 치부해버리기에는 형은 꽤나 심각한 낯빛을 띠고 있었다. “휴…. 수현아. 솔직히 말해서 네게 이 말을 꺼낼까 말까 많은 고민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합리화라고 볼 수도 있고, 또 어떻게 보면 변명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거든….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내 상황이 그래.” 형은 성격답지 않게 완곡히 말을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이 말을 꺼내는 이유를, 심정을 어렴풋하게 알 것 같기도 했다. 문득 속에서 쓴 물리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미리 말을 해놓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설령 네가 나에게, 그리고 지금껏 만나온 사람들에게 실망하는 일이 있더라도….” “실망하지 않아.” 나는 낮은 음색으로 이어지던 형의 말을 단호히 잘라버렸다. 그러자, 내 대답이 의외였는지 형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는 게 보인다. 속에서 올라오는 메스꺼움을 간신히 삼킨 후, 나는 한 번 더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이 어떤지는…. 어떻게 돌아가는 세상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어.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말할게. 형이 어떤 말을 하든 간에 내가 실망할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적어도 형에게만큼은, 절대로.” “수현아.” 형은 내 이름을 불렀다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곤 지그시 응시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다. 문득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홀 플레인에 대한 실망? 그런 것에는 초월한지 오래였다. '사용자'라는 신분으로써 그런 감정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글러먹었다는 증거나 다름없다. 당장 나 하나 살아남고 소중한 사람들을 챙기는 것에도 벅찬데,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사치에 가깝게 느껴진다. 홀 플레인이 그렇게 아름답지 못한 곳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형보다도 훨씬 더. 한동안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형의 시선은 애매하고도 복잡했는데, 언뜻 보면 대견해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더불어 쓸쓸해하는 기색도 느껴졌다. 이윽고, 형이 기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언제…. 다 컸구나.” '이제.'가 아닌 '언제.'라고 한다. 왠지 모르게 그 한 마디의 차이가 내 가슴을 쿡 찔러 들었다. “그렇게 얘기해주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 것 같아.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하나도 미안할 것 없어.” “그래…. 그럼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네…. 혹시 얼마 전 황금 사자가 지원 요청을 해왔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 다시금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저 행동은 깊은 생각에 잠길 때 보이는 일종의 습관이었다. 말로는 편안해졌다고는 했지만, 지금 형의 얼굴에는 “도대체 어떻게 말해야 할까.”라는 빛이 뚜렷이 드러나 있었다. “응. 내용을 들어봤는데, 솔직히 조금 웃기더라.” “그랬겠지. 아마 조만간 동부와 남부 측에서도 공식적으로 입장 발표를 할 생각이야.” “공식 입장? 어떻게 발표할건데?” “이번 주 안으로 바바라와의 워프 게이트를 끊을 예정이다. 여기에는 남은 북부의 도시도 함께하기로 동의했어.” '북부까지?' 공식 입장에 대해서 정확히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이어진 답변으로 충분히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워프 게이트를 끊는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소식은 아니었다. 다만 북부가 동참했다는 소식은 확실히 예외였다. 형은 말을 마치고 난 후 잠시 내 반응을 살피는듯한 눈초리를 보냈다. 하지만 일전에 마음먹은 바가 있기에 나는 일부러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계속 말하라는 신호로 경청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통통. 그때였다. 형이 펼쳐놓은 블록 필드(Block Field)가 가볍게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주문한 음식을 가지고 왔는지 어색이 서 있는 웨이트리스가 보였다. “원래는 말이다. 남부에서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동부에서는 침략한 놈들을 그냥 놓아주자는 의견도 있었어. 순수히 복수를 위해서 온 것이라면 괜한 충돌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었지.” “…….” “하지만 네 덕분에 놈들의 진정한 속내를 알게 되었고, 그런 만큼 모두의 생각에 약간의 변화가 온 모양이다. 이대로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을 말이야. 그래서 얼마 전 우리는 원래의 계획을 파기하고, 새로운 작전을 하나 짜내었지.” '첩자들이 없어진 것도 한 몫 했겠지.' 나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직도 전전긍긍이 기다리고 있는 웨이트리스를 위해 형에게 슬쩍 눈짓을 보내주었다. “작전이라. 기대되는데.” “작전명은 신세계.” “신세계?” “그래. 이번 북 대륙을 침공한 서 대륙 놈들에게 신세계를 보여주겠다는 의미야.” 내 신호를 받은 형은 이내 흘끗 옆을 돌아보고는,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이번에 침략한 놈들을 단 한 명도 돌려보내지 않기로 했다. 모조리, 깡그리 쓸어버리기로 의견을 모았거든.” * '원래는 네가 참가하지 않아주었으면 했지만…. 아마 그럴 수는 없겠지?' '아무튼 잘 생각해봐. 너희들은 자유 용병이니 따로 얽매일 것은 없을 거야. 그리고 혹시 마음을 정하게 되면, 나한테 가장 먼저 얘기해주었으면 좋겠다.' “후유.” 머릿속을 꽉 채우는 생각에 나는 들고 있던 기록을 놓고 책상 의자에 몸을 묻었다. 복잡하다. 아까부터 클랜원들이 제출한 기록을 검토하고는 있었지만, 어제 형과 대화를 나눈 영향인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은 마음에 들게 흘러가는데…. 어떻게 보면 행복한 고민이라고 해야 하나. 킥.' “수현. 많이 답답하세요?” 시답잖은 생각에 실소를 터뜨린 후 지그시 눈을 감으려는 찰나, 앞에서 아리따운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나는 금방 꺼뜨리려던 고개를 들고 전방을 주시했다. 그러자, 테이블 소파에 얌전히 앉아있는 단아한 외모의 여성이 시야에 들었다. 푸른색 눈동자와 푸른색 머리카락. 정하연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수현이 안 좋을 때 들어왔나 봐요.” “그냥 조금 복잡해서 그렇습니다. 하연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에요.” “에이, 아쉽다. 이 기회에 둘만의 정기적인 티 타임이나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당분간은 보류해야겠네요.” “하하하. 아니요. 하연과의 티 타임은 충분히 휴식이 되고 있습니다.” 사심이 다분히 묻어나는 정하연의 말에 나는 어설픈 웃음을 흘렸다.(사실상 정하연이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물론 이 사실을 굳이 입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가져다 준 차를 한 모금 홀짝이려다가, 어느새 식어버린 것을 느끼곤 단번에 들이켰다. “후후. 다행이네요. 그런데…. 어떤 것 때문에 수현이 한숨까지 푹푹 쉴 정도로 고민하는 거예요? 장비 문제 때문이세요?” 이윽고 자박자박 내 옆으로 걸어온 정하연이 살며시 고개를 들이밀며 묻는다. 나는 대답 대신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녀는 책상 위에 펼쳐진 기록 더미를 보다가, 갑작스레 천천히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주저하는가 싶더니 이내 내 허벅지 위로 서서히 엉덩이를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싱겁게 웃고는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양다리를 약간 빼주었다. “으음.” “으응….” 서로 미묘한 신음을 흘릴 즈음, 허벅지에 아주 약한 압박감이 전해져 옴과 함께 연한 푸른빛이 감도는 머리카락이 목을 간질이는 게 느껴졌다. 정하연의 몸에서는 시원한 물처럼 신선하고 청량한 내음이 난다. 콧속을 은은히 찔러 들어오는 정하연의 향기를 흠뻑 들이마시며, 나는 그녀의 배를 조심이 쓸어 내렸다. “신청한 내역은 많아 보이는 것 같은데…. 응! 아, 아무도. 아니, 의외로 겹치는 게 별로 없네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불행 중 다행이죠.” 정하연은 잠시 몸을 움찔했지만 곧 태연한 목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중간에 말이 미묘하게 끊긴 것과 지금 몸이 살짝 떨리는 것으로 보아, 내심 그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만성 할아버님은 창고 내 보석들에 대한 감정을 신청했고…. 신재룡씨는 이번에 새로 얻은 리아트리스의 나무 지팡이를 신청했네요. 확실히 사제 능력이 뛰어나신 분이니 괜찮은 선택일 것 같아요.” “예. 그런데 하연이 신청한 것도 있더군요.”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이자, 꽤나 간지러웠는지 정하연은 킥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이번에 새로 얻은 네프로네피스의 거울을 신청했어요. 한 번 사용해보고 싶어서요…. 응?” 그때였다. 기록을 훑던 정하연의 시선이 어느 하나에서 딱 멈추고 말았다. 그녀의 눈길을 따라 흘끗 시선을 내리자 다른 사용자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빼곡히 적혀있는 장비 신청서를 볼 수 있었다. 『장비 신청서(클랜원 : 임한나)』 1. 찬란한 섬광(Brilliant Flash) : 라우라 필리스(Laura Phylis) 2. 위그드라실의 나뭇잎을 이어 만든 옷(Yggdrasil's Leaves Clothes) 3. 리자 부츠(Rhiza Boots) 4. 황혼의 무녀(Rare Class, Medium Of Twilight) 5. 오정색(五正色) - 흑(黑) : 북쪽의 겨울 타이츠(Winter Tights Of North) (특이 사항 : 오른팔 부분이 일부 잘려진 상태입니다. 해당 부분을 제외하고는 물리적 기능에는 이상 없습니다. 원래 근력 능력치를 상승시켜주는 효능이 있었지만(+2, 근력 90이하 제한), 귀속 기능도 있는 터라 따로 해제하기 전까지는 효과를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한나씨…. 역시 은근히 욕심쟁이라니까.” “하연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저요? 음~. 개인적으로 찬성하고 싶어요. 한나씨는 참 사람도 좋고, 실력도 있으니까요. 수현은요?” “글쎄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나뭇잎 옷이나 북쪽의 겨울 타이츠는 과연 입을 수나 있을지….” 나는 임한나의 사용자 정보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저 고연주를 능가하는 그녀의 커다란 가슴을 생각했을 뿐이지, 순수한 걱정에 흘리듯 뱉어낸 말이었다. 그러나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정하연이 나를 곱게 흘겨보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곧바로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얼른 화제를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진짜 문제는 황혼의 무녀입니다. 다른 장비는 빌려주는 것으로 돌릴 수 있지만, 레어 클래스는 그렇게 하기 어려워요.” “그렇죠. 한 번 습득하면 끝이니까요. 아무튼 수현이 좋은 판단을 내려주실 것이라 믿어요.” 아마 지금 내 허벅지에 앉아있는 여성이 고연주였다면 기회는 이때다 싶어 실컷 놀렸을 것이다. 하지만 정하연은 잔잔한 성격이라서 그런지 상냥한 미소를 보이곤 내 장단에 맞춰주었다. 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 내렸다. “예. 조금 더 고민해보고, 사용자 임한나랑은 따로 얘기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후 난 잠시 동안 정하연의 체취를 음미하다가, 그녀를 잡고 있는 손을 위로 슬쩍 들어올렸다. 이제 그만 일어나라는 신호였다. 정하연은 일순 서운하다는 기색을 내비쳤지만 다행히 순순히 내 말에 따라주었다. “좋았는데.” 그래도 일말의 아쉬움은 남는지, 미약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나 들으라는 의미가 담뿍 담긴 혼잣말이었다. “저도요. 하지만 이건 오늘 안으로 끝내야 돼서요. 더 이상 끌 수는 없는 노릇이라….” “분명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가슴으로 매정하다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정하연은 자신의 맘을 몰라주는 게 야속한지 연신 투정을 부렸지만, 사실 얼마 전부터 그녀의 애정 표현이 늘어난 것은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왜 그러는지 이유 또한 알고 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하면 되죠.” “그게 과연 언제가 될까요~. 앞으로 무척 바빠지실 텐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다시 기록을 들고 시선을 내리며, 흘리듯 말했다. “오늘 밤.” “…………네?” 잠시간의 정적. 정하연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여전히 기록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말씀 드렸잖아요. 오늘 밤을 새서라도 이걸 끝낼 생각이라고. 새벽에도 계속 집무실에 있을 생각입니다.” * 아기 유니콘은 요즘 따라 부쩍 쓸쓸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감정에 예민해서 그런지 반짝이던 눈동자는 시무룩하게 죽어있고, 상시 살랑살랑 흔들어대던 꼬리도 축 늘어져 있었다. 아기 유니콘은 서운했다. 예쁘다, 귀엽다면서 쭉쭉 빨 때는 언제고,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들이 자신을 갖고 놀아주지 않는다. 물론 인간들이 요즘 따라 바쁜 것은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모두가 모여 즐겁게 어울려 노는 일에 챙겨주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직은 어린 유니콘에게 너무나도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후로 아기 유니콘을 찾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어린 아이는 이미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은 상태였다. 그래서 자신을 찾지 못하도록 일부러 구석에 숨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물론 그 와중에도 만일 찾아주었다면 적당히 져줄 마음도 없잖아 있었지만 말이다. “뀨….” 아기 유니콘은 문득 서글픈 마음을 이기지 못해 처량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인간들은 나빠. 그렇게 생각한 아기 유니콘은, 이내 깊은 밤 아무도 없는 복도를 터벅터벅 가로질렀다. 현재 아기 유니콘이 향하는 곳은 태고(太古)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굳세지만 포근하고, 뜨겁지만 터럭의 타락도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정화의 기운. 오늘 밤 간만에 주인님 품에서 잠들 생각을 하자, 느릿하게 걷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기운이 느껴지는 곳 앞에 도착한 아기 유니콘은 잠시 걸음을 멈칫했다. 언제나 굳게 닫혀있던 문이라서 뿔로 콩콩 두드릴 각오를 하던 참이었는데, 오늘따라 어떤 일인지 아주 살짝 틈이 열려있다. 틈새 사이로 흘러나오는 미약한 불빛이 어두운 복도를 약간이나마 밝혀주고 있었다. 안에서는 분명히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다. 하지만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기 유니콘은 잠깐 동안 고민했지만 이내 결연한 눈빛으로 문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틈새 사이로 뿔을 슬쩍 들이밀고 나서, 조심스레 옆으로 열어젖혔다. 끽…. 문이 슬쩍 열리고 개방된 내부가 아기 유니콘의 눈에 들어온다. 안에는 예상대로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당연히 태고의 기운을 품은 주인님이었고, 다른 한 명은 물의 냄새가 물씬 느껴지는 인간 여자였다. 막 달려가서 응석을 부릴 준비를 하던 아기 유니콘은, 갑작스레 느껴지는 은은한 열풍에 다시금 발걸음을 멈칫했다. 주인님은 의자에 앉아있다. 그리고 물 냄새가 나는 인간 여자는 주인님 앞에 무릎을 꿇어 앉아있었다. 혼나는 건가? 아기 유니콘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리곤 내부의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물 냄새를 풍기는 인간 여자가 이상하다. 항상 거추장스럽게 걸치던 상의를 탈의한 채, 주인님 앞에 꿇어앉아 머리를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언뜻 보면 뭔가를 머금고 있는 것 같은데 머리카락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그때였다. 문득 인간 여자가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는가 싶더니, 입술을 오므리며 머금고 있던 것을 천천히 빨아내었다. 이윽고 여자가 곧바로 혀를 내미는 바람에 다시 가려졌지만, 찰나의 순간 머리카락에 가려져있던 것의 정체가 드러나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비록 한순간이었기는 해도, 아기 유니콘은 그것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어린 암컷 유니콘은 갑작스레 마음에 차오르는 부끄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오른쪽 앞다리를 들어 눈을 가려버렸다. “뀨!” 고요한 복도를 울리는, 짧은 비명과 함께. ============================ 작품 후기 ============================ 본격 어른이 되어가는 소녀 유니콘의 과정.txt 그렇습니다. 아기 유니콘은 암컷이었습니다. 이름은 유미로 지을까 생각 중이에요.(퍽퍽!) @_@ 금요일이 왔습니다. 오늘만 어떻게든 버티면, 다음 주 황금 같은 주말과 추석이 찾아옵니다. 하하.(교수님! 왜 하필 이때 과제를 내주신 거예요! 학생들이 추석을 쉬는 게 그렇게 보기 싫으셨나요!) 아. 방금 전에는 제 속마음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흠흠. 『 리리플 』 1. 데바란 : 1등 축하합니다. 교수님! 과제 좀 그만 내주세요! 부탁해요!(?!) ;ㅇ; 노, 농담입니다! _(__)_ 2. 이슬며르 + 트레이더 : 쿠폰 감사합니다. :) 더욱 열심히 집필하겠습니다. :) 3. asldkfjalskdfj : 아. 죄송합니다. 제가 헛것이 보였나 봐요. 수정했습니다! 4. 타나투스 : ㅎㅎㅎ. 기대해주세요. 1부의 마지막인 만큼 열심히 써서 올리겠습니다. :) 5. 상승불사조 : 조만간 지겹도록 나올 예정입니다. 일말의 마무리는 필요해서요. 하하. 6. 치우우현 : 일단 분량이 ㅎㄷㄷ 하게 많아서요. 레포트 제출이기는 하지만, A4용지 몇 장이 나올지 모르겠어요. 후후. 7. 오피투럽19 : 하하. 참고한다고 무조건 반영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이 부분이 맞다 싶은 것은 첨가하는 거예요. :) 8. Astrain : 동부 + 남부를 넘어서 수호자 기준으로 북 대륙에 최대한 유리하게 가져간다고 보시면 됩니다. 더불어 주인공 보정도 있으면 금상첨화겠지요.(?) 9. 훈제달팽이 : 과연 어떻게 될까요? 하하. 저도 많이 걱정되지만, 그래도 최대한 소신껏 연재할 생각입니다! 10. DaMam : 수행인원은 클랜 로드의 비서라고 보시면 됩니다.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42 / 0933 ---------------------------------------------- Middle Or West 고요한 밤이었다. 어두운 하늘에 떠오른 달은 창문을 통해 은백색 빛을 비추고, 은은한 달빛 사이로 정하연의 모습이 희끄무레하게 잡힌다. 츄릅…, 쯉…, 쪽…. 츄릅…, 쯉…, 쪽…. “우음…. 움…. 꼴깍….” “읏….” 정하연은 중간중간 침을 삼키는지 잠시 빨아들이는 것을 멈췄고, 목 울대를 꿀꺽 움직인다. 문득, 그 소리가 굉장히 야하게 들렸다. 이윽고 한 번 숨을 고른 정하연이 다시금 천천히 내 남근을 혀로 감싸 안는 게 느껴졌다. 다시금 시작된 구강 성교. 정하연 스스로의 제안으로 행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펠라티오가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런 기교도 보이지 않고 입과 혀의 놀림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저 단순히, 그리고 열심히 내 남근은 핥고 빨아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장에라도 사정할 것만 같은 굉장한 압박감을 느껴야만 했다. 정하연의 입 속은 따뜻했다. 남근에서 느껴지는 끈적끈적한 기운은 이내 내 등골을 타고 올라와 전신을 포근하게 만들어준다. 이것은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 분위기의 문제였다. 비록 행위 자체엔 서툴더라도 정하연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나를 생각한다는 의미가 강하게 담겨져 있었다. 소중하고, 정성스럽다. 혹여 이빨로 상처를 낼까 봐 조심조심 입을 오물거리는 것도, 나를 최대한 만족시켜주려고 쉬지 않고 혀를 놀리는 것도. 그런 정하연이 무척이나 사랑스럽다고 느끼며 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그녀의 정수리에 손을 얹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쓸어 내렸다. 츄릅, 쯉, 쪽. 츄릅, 쯉, 쪽. 그러자 처음에는 입에 넣는 것도 버거워하던 정하연의 고갯짓이 점차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까닥까닥 흔들리던 머리카락은 이내 사위로 휘날릴 정도로 속도가 높아졌고, 상의를 탈의해 드러난 새하얀 젖가슴도 덩달아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내 남근에 전해지는 자극 또한 더더욱 심해졌다. 애당초 고연주라면 모를까. 조신하고 단아한 이미지였던 정하연이 이런 행동을 보이자 더욱 더 강한 흥분이 터져 나온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것을 멈추고, 나도 모르게 살며시 그러쥐었다. 아랫도리에 절로 힘이 들어가고 남근은 더욱 부풀어 팽창할 것만 같았다. 오르가슴이 서서히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했지만, 이미 분위기에 취해버린 나로서는 불가능이나 다름없었다. 이윽고 나는 결국 나직한 신음을 흘림과 함께 힘껏 분출해버리고 말았다. “흡!” 그 순간 정하연은 눈을 크게 부릅뜨며 입을 움찔거렸고 동시에 고갯짓도 멈추었다. 강렬한 쾌감이 전신을 휘몰아칠 때마다, 요도 구멍에서 정이 솟구쳐 뿜어 나온다. 나는 반사적으로 정하연의 머리를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간신히 손을 뗄 수 있었다. 지금껏 하느라 충분히 힘들었을 텐데 개인적인 욕심으로 더는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어진 정하연의 행동은 내 눈을 휘둥그래 만들었다. “움…. 우움…. 꼴깍…. 꼴깍….” “하, 하연?” 당황한 목소리로 부르자, 정하연은 꿇어앉은 상태 그대로 나를 살짝 올려다보았다.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러운지 그녀는 귀 뒤로 부드럽게 쓸어 넘기더니 서서히 고개를 뒤로 젖힌다. 이윽고 타액에 젖어 번들거리는 남근이 완연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정하연이 내 것을 마셨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나는 온몸이 나른해지는 기분과 함께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그걸 왜 마셔요.” “수현 것이니까요.” “그래도 속이 안 좋을 텐데. 맛도 없고.” “후후. 왜요? 나름 괜찮은데요?” 쪽. 정하연은 아직도 꼿꼿이 서 있는 내 남근을 보곤 배시시 웃고는 이내 요도 구멍에 수줍게 입술을 맞추었다. 그녀의 볼에는 숨길 수 없는 홍조가 발갛게 피어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적극적인 정하연의 태도에, 그 동안 어지간히도 쌓였구나 라는 생각이 설핏 들었다. 그때였다. “뀨!” 갑작스레 들리는 익숙한 울음소리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주먹 하나 정도의 크기로 벌어져있는 문틈과, 그 사이서 앞다리로 눈을 가리고 있는 아기 유니콘이 보였다. “어, 어머?” 정하연도 마찬가지로 소리를 들었는지, 아래쪽에서 당황한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나 정하연이 어떻게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아기 유니콘은 잽싸게 자취를 감추었다. 이윽고 후다닥, 복도를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 “…….” 그렇게 나와 정하연은 한동안 멍하니 문틈을 응시했다. 고요한 밤이었다. * 머셔너리 클랜의 아침 식사 시간은 딱히 정해져 있지는 않다. 식당에는 항상 고용인들이 상주하며 배가 고프면 가서 식사를 하면 된다. 그래도, 대부분의 클랜원들은 아침에 식당에 모여 식사를 하는 일이 잦았고, 그런 만큼 시간도 대부분 비슷비슷한 편이었다. 좋은 기분으로 출발했던 정하연과의 관계는 결국 아기 유니콘이 출현한 이후로 흐지부지 끝나버리고 말았다. 나야 들켰다고는 해도 사실상 유니콘은 동물이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다. 그저 약간 흥이 깨진 정도랄까? 하지만 정하연은 전혀 그렇지 않았는지, 내게 양해를 구하곤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곧바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마 아기 유니콘을 찾으러 간 모양이었다. 그리고 간밤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나는 오늘 아침 식당에 들어선 후 아주 진기한 광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 “뀨.” “이, 이게 먹고 싶니?” “뀨뀨.” 테이블에는 정하연, 임한나, 백한결 세 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세 명과 한 마리가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아기 유니콘은 의자 하나를 차지한 채 꼿꼿이 서 있었는데, 입을 앙 벌린 상태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정하연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유니콘의 입가에 음식을 먹여주고 있었다. 언뜻 보면 귀엽게 볼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아기 유니콘의 태도는 거만하기 그지없었고, 순수했던 얼굴에는 심술이 뚝뚝 흐른다. “아. 형님 오셨어요.” “어머. 어서 오세요 클랜 로드. 식사 하려고 오신 거예요?” 천천히 안으로 들어서자 백한결과 임한나가 아는 체를 해왔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후 비어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정하연을 향해 의문의 시선을 보내자, 그녀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말아달라는 의미 같았다. “저기 아가야. 언니도 지금 밥을 먹어야 할 것 같은데….” “뀨?” 정하연의 애절한 어조에 아기 유니콘은 흘끗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픽 콧방귀를 뀌더니 이내 오른쪽에 앉아있는 임한나를 톡톡 건드리는걸 볼 수 있었다. “응? 나 부른 거니?” “뀨.” “왜?” 임한나가 상냥한 미소를 보이며 묻자, 아기 유니콘은 갑작스레 나를 척 가리켰다. “뀨.” “응? 클랜 로드님?” “뀨.” “이번엔…. 하연이 언니?” “뀨뀨.” 아기 유니콘은 이어서 정하연을 가리켰고 이내 머리를 끄덕끄덕 주억였다. 그리고 뭔가 다른 행동이 이어지려는 순간, 정하연은 재빨리 유니콘을 향해 숟갈을 내밀었다. '…….' 유니콘은 기본적으로 굉장히 영리하고 감정에 예민한 신수이다. 도대체 어제 둘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몰라도, 정하연이 뭔가 실수한 게 틀림없다. '그러게 그냥 의연히 대처할 것이지….' 땀을 뻘뻘 흘리는 정하연을 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당황한 태도로 미루어보아 건수를 잡혔을 가능성이 가장 높을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기 유니콘이 그녀의 태도를 확실히 인지했고, 이 기회에 자신의 서열을 높여보려는 움직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일수도 있고. 나는 일단 정하연에게 맡겨보기로 하고, 도가 지나치다 싶으면 개입하기로 했다. 솔직히 아기 유니콘이 이따금 나를 간간이 흘기는 게 아직까지는 허용범위 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클랜 로드. 오늘 아침 식사는 간단한 빵이랑 스프에요. 지금 다들 주방에 들어가 있어서, 제가 바로 다녀올게요.” “아. 괜찮습니다. 직접 다녀오도록 하지요.” 공교롭게도 식당 카운터는 비어있는 상태였다. 나는 얼른 몸을 일으키려는 임한나를 손짓으로 앉힌 후, 차분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클랜 로드님께서는 안 그러셔도 되는데….” “제가 먹을 건데 제가 가져와야지요. 주는 거 받아오기만 하면 되는데요 뭐.”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임한나와는 장비에 관해 할 이야기가 있었다. 이미 황혼의 무녀는 보류 쪽으로 가닥을 잡은 상태였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딱히 약속이 없다면 식사를 마치고 바로 해결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차. 임한나. 혹시 오늘 아침에 따로 일정이 잡혀있나요?” “네? 아니요.” “잘됐네요. 그럼….” “식사가 끝나고 집무실에서 이야기 좀 하죠.”라고 말을 이으려는 순간이었다. “클랜 로드! 클랜 로드!” 그때, 누군가 다급히 목소리를 내지르며 식당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의아히 고개를 돌리자, 온몸이 땀에 젖은 신상용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용자 신상용?” “헉, 헉! 크, 클랜 로드! 바, 밖이 이상합니다!” “예?” 나는 뜬금없는 말에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러자 신상용은 숨을 고를 생각도 못하고 다급히 말을 이었다. “오, 오늘 아침에 번화가에 잠시 일이 있어서 다녀왔는데….” “예 예. 진정하시고, 차분히 이야기해보세요.” “지, 지금…. 후유. 과, 광장부터 워프 게이트까지 걸쳐서, 이스탄텔 로우 클랜원 수백 명이 모여있습니다. 그것도 완전 무장한 상태로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내 마음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시작이다.' * 성현민은 잔뜩 초조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시선을 한곳에 두지 못하고 자꾸만 다리를 떠는 게, 평소 그의 침착한 성품을 생각해본다면 굉장한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모습이었다. “휴….” “가만히 좀 있어라. 응? 아까부터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왜 그래? 너답지 않게.” 결국 보다 못한 이효을이 톡 쏘는 목소리로 핀잔을 주자 성현민은 머쓱한 웃음을 흘렸다. “하, 하하. 죄송합니다. 조금 있다가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까 괜히 긴장돼서요.” “나 참.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때랑 지금이랑은 다르잖아요. 그때는 저 나름의 신념 아래서 행동했지만, 지금은….” 성현민은 말을 잇던 도중 서서히 말끝을 흐리더니 이내 조심스레 이효을을 살폈다. “그러면 지금부터 벌어질 우리의 행보는 네 신념에 위배된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성현민은 솔직히 대답했다. 이효을은 잠시 동안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내 느긋한 손길로 연초를 한 대 꺼내 물었다. 치익. 치이익. 불을 붙이는 소리가 방안을 나직이 울린다. 이윽고 이효을의 얇은 입술 틈새로 가느다란 잿빛 연기가 흘러나왔다. “후. 현민아. 내가 3년 전에 너와 함께 있을 때 기억나니?” “…예. 똑똑히 기억합니다.” “내가 그랬지. 네 그 어줍잖은 신념이 사용자로서의 성장을 방해할거라고. 조금만 사고를 전환하는 버릇을 들이면, 너는 더욱….” 그때였다. 성현민의 눈동자에 번뜩이는 빛이 스쳤다. “이효을. 개인적으로 당신을 존경합니다. 당신의 말은 언제나 합리적이었고, 그것에 따랐을 경우 절대로 손해를 보지 않았습니다. 당신이란 사람을 직접 겪은 사용자로써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만…. 분명, 오늘의 처사로 불만을 품는 사용자들이 나올 겁니다.” 이효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현민이 의도적으로 말을 자르며 끼어든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녀는 그다지 불쾌한 얼굴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만면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현민아. 뭔가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란다. 그건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 “애초에 너희들이 원한 일이었잖아? 물론 네 말마따나 합리적이라 생각해서 받아들인 건 맞지만 말이야.” “…저는 오히려 이 사건을 계기로 북 대륙이 혼란으로 빠져들지 않을지 걱정이 됩니다.” 결국 할 말이 없는지 성현민의 걱정 어린 말투로 대답을 돌리자, 이효을은 피식 웃어버렸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너무 신경 쓰지 말렴.” “사용자 이효을.”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걸 내가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니?” 이 한 마디에 성현민은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다~. 생각이 있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응? 과연 내 생각대로 흘러갈지, 네 생각대로 흘러갈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이윽고 담뱃재를 툭툭 떨군 그녀는 양손에 깍지를 끼고 위로 쭉 뻗어 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아직도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성현민을 향해 힘차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 시답잖은 생각은 치워버리고 이만 나가자고. 이제 시작할 시간이야. 작전명, 신세계의 첫 걸음을.” ============================ 작품 후기 ============================ 달콤한 일상을 원하시는 분들에게는 다음 회부터 미리 양해의 말씀을 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전쟁은 참혹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전쟁의 시작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느긋한 일상이 나오는 내용이 구상되어있지 않습니다. 사실상 이번 회가 수현에게 있어 1부의 마지막 휴식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앞으로는 최대한 몰아칠 예정입니다. :) (오늘 리리플은 하루 쉬겠습니다. 대신 다음 회 연재 분에 합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추석 때문에 오늘 보강한 강의가 있어서 하루에 4강의를 들었네요. 하하.) 0343 / 0933 ---------------------------------------------- Middle Or West 모니카의 광장은 빼곡히 모인 사용자들로 발 디딜 틈 없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압권이라 볼 수 있는 광경은, 광장에 가지런히 오와 열을 맞춘 채 서 있는 이스탄텔 로우의 클랜원들일 것이다. 그리고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세를 내뿜는 그들의 중앙으로 '전장의 지휘자'의 갑옷을 갖춰 입은 한소영이 보인다. 웅성웅성. 웅성웅성. 광장은 매우 요란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시끄럽고 떠들썩했다. 하지만 중앙에서 음성 증폭 마법의 활성화가 느껴지는 순간 소란은 금세 잦아들었다. 서 대륙과 부랑자의 침략이 시작이 시작된 이후, 동부와 남부는 아예 등을 돌렸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침략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도시의 대표 클랜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나섰다는 사실은 공식적으로 입장을 발표를 하겠다는 것과 진배없었다. 그런 만큼, 오늘 이 자리는 사용자들에게 있어 초유의 관심사였다. “이스탄텔 로우의 클랜 로드 한소영입니다. 이번 황금 사자의 지원 요청에 대해 모니카의 입장을 발표하겠습니다.” 한소영은 말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주변을 한 번 쓱 둘러보았다. 그러자 그때까지만 해도 구석구석 남아있던 어수선함이 한순간에 정리되었다. 그녀의 군중 장악력이 발휘된 것이다. “최근 화제였던 머셔너리 로드에 대한 이야기는 다들 한 번쯤은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순간 여러 명의 시선이 내게로 꽂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한소영의 말에 더더욱 귀를 기울였다. 아직 그녀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머셔너리 로드는 포로로 잡은 부랑자들을 이스탄텔 로우에 인도했고, 그와 더불어 침략자들에 대한 굉장히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주셨습니다. 그 중 일부는 여러분들에게도 공개가 되었을 겁니다.” 끄덕끄덕. 고갯짓이 보이고 조용한 숨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철혈의 여왕'의 발표가 이어진다. “얼마 전 이스탄텔 로우는 동부와 남부의 대표 클랜들이 모인 회합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회합에서는 황금 사자의 지원 요청에 응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모든 준비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모니카는 앞으로 침략 받을 예정인 모든 도시에 대해 워프 게이트의 연결을 끊을 예정입니다.” 이런저런 미사여구를 포함치 않은 한소영의 성격다운 직설적인 화법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은 광장에 모인 사용자들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면 이대로 바바라를 버리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어느 남성 사용자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그 음성에는 분노를 넘어선 어이없음이 담겨져 있었다. “버리겠다고 한적은 없습니다. 다만 정비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지금 모니카뿐만이 아니라, 다른 도시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발표가 이루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입장 발표가 끝난 이후로 10일 동안 워프 게이트를 열어둘 생각입니다.” “…….” 사람들의 입가에서 무거운 침음이 흘러나온다. 한소영은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곳에 모인 사용자들은 중간에 생략된 내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정비'가 필요하다고 말해두기는 했지만, 어찌됐든 도시를 버리고 오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10일은 마음의 선택을 내릴 시간을 준 것이리라. 이것으로 한소영의 공식 입장 발표가 끝났다. 물론 아직 해야 할 말들은 남아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내용을 우선적으로 발표했다. 사용자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람도, 그리고 고소하다는 듯 만면에 웃음을 띤 사람도 보였다. 어차피 예견된 일이었다. 동부와 남부는 이번 기회를 통해 황금 사자와 우호 클랜을 완전히 배제할 생각이었다. 1회 차와 똑같이 말이다. 또한 이미 갈등이 일어났을 때부터 사용자들도 자체적으로 도시에 따라 나뉘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번 행보가 정당화 될 수는 없다. 분명히 비난하는 사람들이 우수수 나올 것이고, 이번 2회 차에는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지가 자못 궁금했다. 결국에는 명분이 문제였다. 굳이 '진짜' 명분이 아닌, '만들어진' 명분이라고 해도 말이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한 명의 여성 사용자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께서 정비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을까요?” “현재 동부와 남부 내부에 아직은 밝힐 수 없는 복잡한 내부 사정이 있습니다. 그것을 해결하는 것과 동시에, 각 도시에 거주하는 사용자 분들을 모집할 생각입니다. 중, 고 연차 분들은 징병이 되겠지만 0, 1년 차 분들은 지원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지, 징병이요?” “북 대륙에 신분을 등록한 사용자로써 지금껏 권리를 누리셨다면, 응당 의무도 함께 짊어져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한소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사람의 가슴을 찌르는 섬뜩한 예기도 배어있었다. 어느새 광장에는 고요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물론 그 의무에는, 이스탄테로 로우를 비롯한 산하 클랜들이 앞장설 것임을 여기서 분명히 약속합니다.” 이윽고 이어진 한소영의 목소리는 광장에 넓게 울려 퍼졌다. * “머셔너리는 이번 전쟁에 참여할 생각입니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3층 회의실에 모인 클랜원들의 낯빛이 급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혹시 저희도 징병의 대상입니까?” “의뢰가 들어온 건가요?” 신상용과 정하연이 재빠르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차분히 고개를 저었고 명료히 대답해주었다. “머셔너리 소속 클랜원은 징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의뢰는…. 제 생각으로는 곧 접촉이 올 것 같군요.” “만약 오지 않는다면….” “만일 오지 않는다고 해도, 스스로 지원해서라도 나갈 예정입니다.” 딱 잘라 전쟁에 나간다는 말을 하자, 일부 클랜원들의 얼굴에 불안해하는 감정이 엿보인다. 물론 전쟁에 나가지 않는 방법도 있기는 있다. 소수겠지만 도시의 방위에 지원하거나, 아니면 그냥 쥐 죽은 듯 조용히 지내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지나치기에는 너무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클랜원들의 심정은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결정을 철회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자유 용병이라곤 하지만, 우리는 북 대륙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이번 전쟁은 북 대륙의 명운이 걸린 일이라 볼 수 있을 정도로, 사안이 굉장히 중대합니다.” “…….” “더구나 현재 머셔너리의 이름은 제법 알려져 있는 상태이고, 본의 아니게 전쟁에 한발 걸친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이번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차후 어떤 행보를 보이던 간에 그리 좋은 시선을 받지는 못할 겁니다.” 중간 과정이야 어찌됐든 이번 전쟁은 표면적으로는 북 대륙의 승리로 끝이 난다. 그리고 이번 진행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이루고 싶었던 일도 있고, 전쟁 자체가 머셔너리에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물론 모두를 데려가지는 못하겠지만.' 아직 전쟁에 참여하기에는 실력이 미숙한 클랜원들이 있고, 또는 참가에 회의적인 클랜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부분은 도시 방위 쪽으로 돌려둘 생각이기 때문에 큰 걱정이 되지는 않는다. “아무튼 일단 상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차후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접촉이 온 이후에 말이죠. 오지 않는다면…. 어쨌든 지금은 당면한 일에 집중해야 할 것 같군요. 사용자 고연주, 정하연.” “네.” 바로 부르자, 동시에 대답한다. 나는 모든 클랜원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창고를 완전히 개방하겠습니다. 모든 클랜원들을 이끌고 신청했던 장비를 지급하세요. 그리고 중복되는 장비는 의견을 조율해보시고, 안되면 저에게 말씀하시고요.” “알겠어요. 그럼 창고는 언제….” “지금 바로입니다.” 한 번 고개를 끄덕이자 정하연과 고연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들을 따라 하나 둘 일어서는 클랜원들을 보다가, 문득 한 명이 눈에 밟혔다.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나는 그 클랜원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사용자 임한나.” “네…?” 초조한 눈빛을 뿌리며 의자에서 일어서던 임한나는 의아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임한나씨는 잠시만 이곳에 남아주시겠습니까?” 임한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모든 클랜원들이 회의실을 나간 후 나는 가까운 자리에 앉은 임한나를 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 신청하신 장비 품목은 잘 봤습니다. 찬란한 섬광, 위그드라실의 나뭇잎 옷, 리자 부츠, 북쪽의 겨울 타이츠. 대부분이 궁수 전용 장비이고, 그런 만큼 해당 장비들은 충분히 대여 형식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감사해요. 그런데….” “?” “둘만 있을 때는 말 편하게 하겠다고 하셨으면서….” 임한나는 눈을 슬쩍 내리깔며 얼굴을 붉혔다. '갑자기 뭔 소리를 하는 거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문득 그녀가 손가락을 비비는 게 눈에 들었다. 언제나 여유 있고, 상냥함과 기품을 겸비한 임한나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확실히 느낌이 신선했다.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뭔가 모를 매력이 있다고 해야 할까? 나는 속으로 싱겁게 웃고는 임한나의 염원에 따라 입을 열었다. “그래. 앞서 말한 것은 문제가 없을 거야…. 하지만, 황혼의 무녀는 약간 문제가 될 소지가 있어.” “네.” 임한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그녀의 얼굴이 편안한 것으로 보아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윽고, 임한나의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 한소영의 말대로 비단 모니카만 입장을 발표 한 게 아니었다. 동부와 남부를 아우르는 모든 도시의 대표 클랜이 동시에 입장을 발표한 것이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접한 황금 사자는 기가 막히다 는 입장을 보였다. - 이번 동부와 남부의 입장 발표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을 넘어서 어떤 의도가 담겨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 지금껏 양 도시간에 갈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그것을 따질 겨를이 없는 상황이다. 순망치한이라고, 입술을 잃으면 이가 시릴 것은 자명한 수순. -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니 답답할 따름이다. 서로간의 안 좋은 감정은 잠시 접어두고 함께 북 대륙의 위기를 헤쳐나가야 할 것. 발 빠른 황금 사자의 대처가 이어졌지만 동부와 남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하나하나 조목조목 반박했을 터인데, 지금에 와서는 딱 필요한 말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 전쟁은 장난이 아니다. 갑작스레 터진 전쟁인 만큼 준비가 소홀했고, 내부 사정도 어지럽다. 확실한 승리를 위한 정비의 시간이 필요하다.” - 베스, 도로시 그리고 특히 헤일로의 경우를 경험으로 삼아야 할 것. 당시 황금 사자도 SSUN에 비슷한 제안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왜 이제 와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지는 의문이 들뿐. - 워프 게이트는 예고한 날짜에 폐쇄될 예정이다.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겠다. 황금 사자를 비롯한 바바라의 사용자들의 부디 좋은 선택을 내리기를 기대한다. 사용자들의 반응도 가지각색이었다. 이번 입장 발표를 도를 넘을 정도로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고, 개중에는 이번 전쟁을 통해 북 대륙의 패권을 잡으려 한다는 제법 날카로운 사람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황금 사자와 우호 클랜을 비판하는 사용자들도 부지기수였다. 이 상황은 그들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다. 아니면 애당초 지원 요청을 보내던가,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지원 요청을 하는 것도 웃긴다. 또한 먼저 워프 게이트를 제한한 게 어디였는데, 이제 와서 손바닥 뒤집듯이 말을 바꾸는 것 등등, 이전일까지 세세히 짚어내며 비판했다. 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이 각 클랜에서 풀어낸 선동 꾼임은 다들 암묵적으로나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시간이 지날수록 결과는 확실히 한 쪽으로 치우치기 시작했다. 황금 사자가 연일 필사적으로 호소력 짙은(?) 입장을 발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부와 남부의 도시의 워프 게이트는 거의 폭주 상태에 이를 정도였다. 헤일로까지만 해도 설마 설마 했던 사용자들이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드디어 바바라를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중앙이 시끌시끌하고 북부가 조용히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동부와 남부는 묵묵히 제 할 일을 했다. 공식 발표에서 나온 '내부 사정'이란 다름아닌 첩자를 색출하는 일이었다. 그 과정은 의외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는데, 가끔 출장을 나가는 고연주의 말에 따르면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듯했다.(먼저 굵직한 인물들을 우선적으로 잡아넣었으며, 그들을 토대로 여러 갈래로 나뉜 줄기를 때려잡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한다.) 그와 동시에 도시 내 거주하는 사용자를 모집하는 일도 꾸준히 추진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재정비는 차곡차곡 진행되는 중이었고, 준비가 되면 될수록 시일 또한 빠르게 흘러갔다. 워프 게이트의 연결을 끊는 열흘째가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하루 직전, 입장 발표 이후 아흐레째 되는 날이었다. 나는 충격적인 소식을 하나 접하고야 말았다. 그것은, 워프 게이트의 연결이 끊겼다는 소식이었다. 동부와 남부에서 끊은 게 아닌 황금 사자 스스로. 이것은 1회 차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었다. ============================ 작품 후기 ============================ 로유진의 속마음 (오늘 전개를 빠르게 썼는데…. 독자분들이 읽고 칭찬해주시겠지? 헤헤. 분명 그러실 거야.) 아. 위에 말은 제 혼잣말, 아니 속마음입니다. 네. 전혀 신경 쓰실 것 없어요. 그럼요. 후후. 오늘 자정 업데이트에 성공했습니다. 역시 주말은 위대합니다.(?) 하하하. 리그 오브 레전드는 2012년 7월? 그쯤에 시작했다가 올해 2월에 접었었죠. 그러다 올해 8월 말에 다시 손을 대고야 말았습니다. OTL 가끔 쪽지나 코멘트에 제 롤 아이디를 알려달라는 분이 계시는데요, 저 못해요. 브론즈입니다. 승급전만 5번 떨어지고 정신이 붕괴했지요. 하하하. 제가 못하기는 못하나 봅니다. :) 담배 한 대 피고 리리플 올릴게요! 『 리리플(341회) 』 1. 우사인볼트 : 1등이시네요. 왠지 모르게, 342회 리리플에도 우사인볼트 님이 1등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 2. 달을쫓는아이 : 한 자리를 넘어선 순위권 3등입니다. 축하합니다. :) 3. 메를리위 : 예, 예? 3단 합체요?! 헐! 헐! 흠흠. 아. 메를리위 영애님. 유리켄느 님께서는 요즘 평안하신지요.(?) 4. superrobot : 살려주십쇼. 아. 정말 로유미로 해서 밉상 유니콘으로 만들어버리면 어떨까요? 그럼 독자분들께서 모두 로유미 욕을…. 후후. 5. 엠버메인 : 아니요. 대한민국, 영국, 일본, 미국입니다. 『 리리플(342회) 』 1. yjung : 엇! 우사인볼트 님이 아니군요! 1등 축하합니다. :D 2. 현오 : 저는 오늘 라면을 먹었지요. 하하. 제 라면 끓이는 솜씨는 천하제일입니다. 저희집에서…. 라면 드시고 가실래요? ☞☜ 3. 붉은황야 : 오늘은요? 오늘은 어때요? 네? 네? :) 4. 오피투럽19 : 당하는 제 입장은 어떻겠습니까! 머리가 하얗게 불태우는 기분이었습니다. ㅜ.ㅠ 5. 샤니스 : 예! 아주 자~알 봤습니다! 바득바득 이를 가는 중이지요. -_-+ 6. 천냥보은 : 네! 천냥보은 님~! 조만간 또 괜히 생떼 한 번 부려도 되나요? ㅇㅅㅇ?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44 / 0933 ---------------------------------------------- Middle Or West 회상 “제 운명을 개척해보고 싶어요.” 뜬금없이 터져 나온, 운명을 개척해보고 싶다는 말. 의아한 기분에 고개를 들자 잠잠히 가라앉은 임한나의 눈동자가 보인다. “개인적인 소원이에요. 작게는 누군가를 지켜보고 싶고, 크게는 제 운명을 한 번 시험해보고 싶어서 그래요.” 이윽고 내가 의아해하는 기색을 느꼈는지, 임한나는 얌전히 말을 덧붙였다. “…흠.” 난 습관처럼 검지로 테이블을 톡톡 건드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원래 '황혼의 무녀'는 보류할 생각이기는 했어도, 최소한 임한나의 입장을 들어볼 요량은 있었다. 물론 간단히 넘어가줄 생각은 없었지만, 혹여 그녀에게 절박한 사정이 있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설명이 부족하다.' 임한나에게 어떤 사정이 있으리라고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냉정히 따져보면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더구나 지금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게 이제부터는 말을 아끼고 싶은 것 같았다. 조금 더 심사숙고 해보았지만, 나는 결국 '클랜 로드는 공적인 일에서는 공평해야 한다.'는 잣대 아래,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임한나. 황혼의 무녀는 일단 보류해두는 게 낫겠다.” “아….” 그 순간 임한나의 얼굴에 아쉬움의 빛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민망한 낯빛을 내비치는 것으로 보아, 본인도 지금 요청이 얼마나 무리였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다. “방금 전 회의에서도 말했듯이, 우리는 곧 전쟁에 나갈지도 몰라. 그런 만큼 지금 당장 황혼의 무녀를 습득하는 건 독이 될 수도 있어.” “그렇네요. 새로운 클래스에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제가 그 생각은 못했어요.” “맞아. 그리고 솔직히 클랜원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기도 하고. 그 동안 많은 클랜원들이 시크릿, 레어를 얻었지만 다들 그만한 고생은 한 사람들이거든. 무슨 말인지 알고 있지?” “네. 확실히 이해했어요. 죄송해요. 저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하신 것 같아서…. 너무 제 생각이랑 욕심만 앞섰네요.” 다행스럽게도 임한나는 얼굴값을 해주었다. 속 좁은 이였다면 불만부터 드러냈을 터인데, 그녀는 현실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적당한 욕심은 부리는 게 좋다고 생각해. 어쨌든 대신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일단 나머지 장비들에 대해서는 전부 승인해둘게.” “감사해요.” “그리고…. 나는 앞으로 장비 분배에 대해서는 철저히 공을 따질 생각이야.” 깊게 가슴을 숙이는 임한나를 보며 난…. 아니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아무튼,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시선은 의도적으로 올려 그녀의 얼굴에 맞춰둔 채로 말이다. “이번 전쟁에서 모두가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황혼의 무녀는 네 차지가 될 거야.” “후후. 전쟁은 무섭지만, 그래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임한나는 고상한 기품이 묻어나는 미소를 흘리며, 양팔을 감싸 안아 그득한 가슴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건가? '설마, 버릇이겠지.' 내가 생각에 잠길 때마다 테이블을 두드리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한 나는 한두 번 헛기침을 한 후 몸을 일으켰다. 일단은 창고에 가볼 생각이었다. * 황금 사자의 워프 게이트가 끊겼다. 그것도 동부와 남부가 끊은 게 아닌, 그들 스스로 끊은 것이다. 황금 사자의 처사에 대한 사용자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 미친 자식들! 지금 다른 도시로 사용자들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일부러 막은 건가? - 그렇다고 보기에는 조금 모호한데? 그럼 애초에 조금 더 일찍 끊었을 수도 있잖아. - 10일까지 버티다가 변화가 없을 것 같으면 이동하려는 사용자들도 꽤 되거든. 그들의 이동을 강제로 막으려 한 게 아닐까? 최소한의 방어 인력은 필요하니까. -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혹시 지금 바바라에 있는 지인이랑 연락되는 사람 있어? 아직 자세히 밝혀지지는 않은 상황에서 추측은 난무하고 있었다.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상념에서 깬 후, 말간 빛을 내뿜고 있는 통신용 수정구를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왠 한숨. 수현아. 내 말 듣고 있어?) “응. 듣고 있어.” (그래…. 아무튼 일단은 우리도 자세한 정황을 파악하는 중이니까. 혹시라도 알게 되면 바로 연락 줄게.) 수정구에는 형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저런다고 더 자세히 보이는 게 아닌데. 나는 다시 숨을 내쉬려던 걸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런데 형. 지금 동부의 정비 상황은 어때? 잘 진행되는 중이야?” (그럭저럭. 내부 정리도 완전히 끝났고, 사용자들의 편성도 순조로워. 이효을이 바쁘게 뛰어다녀서 그런지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중이야. 남부는 어떤데?) “모니카도 비슷해. 그런데 징병에 대해서 거부감을 보이는 사용자들이 몇몇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네. 하여튼 저번 주까지만 해도 전쟁이 별로 와 닿지 않았는데, 지금은 도시 내로 서서히 전운이 감도는 느낌이야.” (하기야 슬슬 체감할 때도 됐지. 그리고 징병이야 강제적인 문제가 섞여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 문제에 관해서는 각 도시의 대표 클랜에게 맡겨놨으니 너무 신경 쓰지마.) 걱정하지 마라. 신경 쓰지 마라. 형과 영상 통신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었다. 아직도 내 걱정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괜찮다고 말해주려는 찰나, 다시 형의 입술이 열리는 게 보였다. (그나저나…. 수현아.) “응?” (이제 이르면 다음 주에 출발할지도 모르는데…. 예전에 말해줬던 것 있잖아. 마음의 결정은 내렸니?) 이어진 형의 조용한 음색에 나는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 사실상 마음의 결정은 내린 상태였지만, 중요한 게 하나 남아있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형은 어설프게 웃고는 바로 입을 열었다. (내 옆에 있으면 좋겠지만…. 나는 웬만하면 네가 남부를 따랐으면 좋겠구나. 물론 그냥 남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말이다.) “…오늘 이스탄텔 로우에 방문하기로 했어.” (아. 그래?) “응. 아마 늦어도 내일 안으로는 결정이 나겠지. 내가 연락할게.” (꼭 이다.) 형은 내게 한 번 더 약속을 받아내더니 이내 지금 바로 나가봐야겠다는 말을 전했다. 동부도 어지간히 바쁜 모양이었다. 나는 그만 가보라고 대답한 후 수정구에 흘리던 마력을 끊어버렸다. '멍청한 놈들. 어쩌다가 이렇게….' 그리고 빛이 꺼져버린 수정구를 한 쪽으로 밀어두고는, 혀를 끌끌 차며 연초를 물었다. 황금 사자가 어떤 결정을 내렸든 간에 스스로 워프 게이트를 끊은 행동은 미련하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워프 게이트를 끊는다고 해서 이동을 못하는 것이 아니다. 조금 시일이 많이 걸릴 뿐이지, 내가 뮬에서 그랬던 것처럼 직접 걸어서 이동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과거 황금 사자는 최고라 불리던 북 대륙을 호령하던, 정점에 서 있던 클랜이었다. 부자는 망해도 3대가 간다 또는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는데, 아무래도 황금 사자에게는 그런 관용어가 적용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도영록이 그릇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소리겠지만.' 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의자에 몸을 묻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끝이 발갛게 피어오르는 연초를 잠시 굴리다가, 끝까지 태웠을 즈음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서서히 이스탄텔 로우에 방문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오랜만에 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스탄텔 로우의 클랜 하우스는 전에 방문했을 때와는 달리 매우 부산스러웠다. 출장을 나갔던 클랜원들도 모조리 복귀했는지 클랜 마크를 단 사용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대표 클랜에 볼 일이 있어 방문한 사용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이래서 내 호출이 늦었던 거구나.' 이 정도로 바빴다면 호출이 늦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마음속에 있던 병아리 눈물만큼의 서운함을 털어낸 후, 나는 고용인의 안내를 받아 방의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그때였다. “아 나가서 말 좀 들어보세요! 뭐? 권리를 받은 게 없어? 진짜 짜증나 죽겠다고요! 지금 밖에 자식들이 진짜…!” “알겠어. 알겠으니 제발 조용히 좀 하렴. 곧 네가 오매불망 기다리는 머셔너리 로드가 올지도 모른단다.” “누가 기다려요! 그리고 아직 안 왔잖아요!” 벌컥. 문을 열자마자, 방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터져 나왔다. 다행히(?) 한소영의 목소리는 아니었기에, 나는 천천히 내부를 둘러보았다. 피로한 얼굴로 책상에 앉아있는 한소영. 그리고 무에 그리 화가 나는지 숨을 씩씩 몰아 쉬는 박다연. 정황상 미루어보아 누가 소리를 질렀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시간이 잠잠히 지나가는 동안 박다연은 마치 카멜레온처럼 바삐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한껏 치켜 올라가있던 눈썹이 조금씩 가라앉고, 짝 다리를 짚은 채 서 있던 오른 다리는 서서히 곧게 변한다. 그 모든 변화의 과정을 마친 후, 비로소 박다연의 앙증맞은 입술이 조신하게 열리었다. “오셨군요. 머셔너리 로드.” “아…. 예.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뵈어서 반갑지만, 지금 일이 좀 바빠서요. 바로 나가봐야 될 것 같아요. 부디 양해를.” “…무, 물론입니다.” 방금 전 빽 소리를 지르던 여인은 어디 갔는지, 흡사 양갓집 규수처럼 얌전히 입을 연 박다연은, 곧 살며시 목례를 하며 단아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짧은 다리로(그녀의 키는 155cm이다.) 되지도 않는 모델 워킹을 선보이더니, 이내 단정히 문을 닫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윽고 문이 닫히는 순간 후다닥, 복도를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미쳤어 미쳤어!”와 “요새 뭐 되는 일이 없어, 되는 일이! 젠장!”란 소리는 덤이었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 아닌 소란을 겪고서야, 나는 간신히 한소영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요즘 많이 바쁘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러네요. 세상일이 제 마음대로 되지는 않으니까요.” 소수이기는 했지만, 오면서 고성방가를 하는 사용자들도 여럿 보았기 때문에 한소영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원래는 조금 더 일찍 연락을 드리려고 했어요. 하지만 상황이 복잡해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네요.” “현 상황은 알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그런데…. 하실 말씀이란 건, 혹시 편성에 관한 일입니까?” “음? 알고 계셨나요?” “작전명 신세계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형에게 들은 바가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일순 한소영의 눈가에 이채가 스쳤다. 신세계란 이번에 침공한 서 대륙 사용자들을 깡그리 정리하는데 목적을 둔 작전이다.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해보면, 현재 북 대륙은 뮬, 베스, 도로시, 헤일로가 점령당한 상태였고, 바바라의 함락도 초읽기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여기서 설령 바바라를 탈환한다고 쳐도 현재 서 대륙 사용자들의 퇴로는 확보된 상태였다. 만일 놈들이 워프 게이트를 통해 서부 도시로 넘어간 후 그대로 서 대륙으로 넘어간다면? 북 대륙 사용자들은 그야말로 닭 쫓던 개가 된 꼴이 될 것이다. 그런 만큼 바로 '타이밍'이 생명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아슬아슬한 '타이밍'을 위해 각 도시의 역할이 나뉘어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선 동부는 바바라를, 남부는 베스와 도로시를, 북부는 뮬을 탈환하는데 중점을 둔다. 순서를 따지자면 동부가 바바라에서 시간을 끄는 동안, 남부와 북부가 먼저 맡은 도시를 탈환해 서 대륙 사용자들의 퇴로를 차단한다. 그리고 남부와 북부는 도시를 탈환한 즉시 바바라의 공략을 지원한다. 그와 동시에, 오갈 데 없는 서 대륙 사용자들과 부랑자들을 모조리 정리한다. 이것이 바로 작전명 '신세계'의 요지였다. “그렇다면…. 얘기가 빨라지겠군요.” “원하던 바입니다.” 시원스러운 대답이 자못 마음에 들었는지, 한소영의 피로하던 얼굴에 미약한 미소가 흘렀다. “알겠어요. 그럼 실례가 될지도 모르지만, 여쭐게요. 머셔너리 로드는 이번 전쟁에 참여….” 한소영은 말을 하던 도중 내 표정을 봤는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질문이 잘못됐군요. 다시 말씀 드릴게요. 머셔너리 로드께서는 저희를 따라 서부 공략에 참여하실 건가요? 아니면 중앙을 생각하고 계시나요?” 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음색에,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저는….” * 다음날 아침. 나는 간단한 세안과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바로 3층 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어제 이스탄텔 로우에서 돌아온 후 클랜원들에게 미리 공지해둔 바가 있어서 그런지, 회의실로 들어가자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늘 여러분들을 모이게 한 것은 드디어 때가 다가왔음을 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상석에 앉자마자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회의실에는 차가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분위기도 자못 엄숙한 게, 마치 중대한 수술을 앞둔 수술실이라는 느낌이었다. 에둘러 말하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바보는 없으리라. “다들 아시겠지만, 어제 이스탄텔 로우에서 공식적으로 접촉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일전에 말씀 드린 대로 머셔너리를 이번에 무조건 참여할 생각이고요.” “…….” 대답은 없지만, 서서히 긴장감이 치솟아 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럼 이제 자세한 설명을 해드려야 하는데…. 그전에 앞서 말씀 드릴게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현재 가장 관심 있어 하는 것 말이죠.” 나는 잠시 말을 끊고, 품속을 뒤적여 기록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것은 이미 예전부터 생각해왔던, 그리고 어젯밤 비로소 완성할 수 있었던 내용이 적힌 기록이었다. 현재 머셔너리의 클랜원은 총 13명. 나는 좌우로 나뉘어 앉은 그들과 한 번씩 시선을 맞추고 나서, 차분히 입을 열었다. “상황 설명에 앞서, 지금부터 이번 전쟁에 참여할 인선을 발표하겠습니다.” ============================ 작품 후기 ============================ 소제목 'Middle Or West'. 이번 소제목은 김수현이 중앙과 서쪽 중 어느 곳을 선택할지에 관한 소제목이었습니다. 서쪽으로 가게 되면 여러분들이 궁금해하던 과거와 미래의 인연을 만날 수 있고, 중앙으로 가게 되면 생각해둔 바를 이룰 수 있겠죠. 물론 현재 소설 상황으로서는 먼저 나오냐, 안 나오냐의 차이입니다. 하하. 다만 비중에 대한 차이는 있을 것입니다. :) 요새 점차 페이스가 회복되는 게 느껴집니다. 조금 일찍 시작한 것도 있지만, 정말 오랜만에 23시 이전에 집필을 마쳐보네요. 주말은 다들 잘 보내셨는지요? 비록 월요일이라고는 하지만 이틀만 더 버티면 추석입니다! 다들 힘내세요! PS. 브론즈 승급전 또 떨어졌어요. ㅜ.ㅠ PS2. 노래하는인형 : 하하. 설마 그분께서 그러시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만. 만일 공개하신다면 저 또한 일반 연재란에 연재 중이신 달밤에xx 님의 롤 아이디를 공개하겠습니다. 『 리리플 』 1. 우사인볼트 : 아니에요. 사정이 없으면 자정 업데이트를 꼭 지키고 싶네요. :) 1등 축하합니다! 2. 데바란 : 하하. 2등도 정말 대단하신 겁니다. 그렇고 말고요. 그리고 황금 사자는 앞으로 더욱 찌질 해질 예정입니다. :D 3. 명박짱의양양합일 : 그, 그런 민망한 말씀을…. 그리고 저는 남자라고요. ㅜ.ㅠ 4. 로벨리얀 : 그렇군요. 왠지 모르게 가슴에 와 닿는 말씀입니다. ;ㅅ; 5. 멜리스 : 수정 완료했습니다. 감사합니다! 6. 현오 : 저는 딸기랑 치즈 케이크가 좋아요! 하지만 다이어트 중 이라죠. ㅜ.ㅠ 7. ka지매 : 에헴. 감사합니다. 에헤헴. 오늘은 어떠신지요. :) 8. 엠버메인 : 운이 좋다기 보다는, 아직 대륙간 통로가 뚫리지 않은 곳도 있고, 원래 자기 대륙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주인공이 지금껏 만나지 못한 것은 맞습니다. 9. 유온. : 헉. 저는 팔리아멘트 라이트를 사랑하는데, 뜨끔한 코멘트군요. 저도 끊고 싶지만 이게 없으면 도저히 글이 안 나오더군요. -_-a 10. hohokoya1 : 아이고. 흑흑. 저야 감사하지만, 걱정이 되네요. 제 글은 잠시 머리를 휴식하실 때 간간이 읽어주세요! 공부 열심히 하세요! 파이팅~!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45 / 0933 ---------------------------------------------- 선택은, 바바라 “사용자 신상용. 사용자 이만성. 사용자 백한결.” 세 명의 이름을 거론한 순간 몇몇이 흠칫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클랜원들의 사이로 예전 어느 때와도 비교할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홀 플레인에서 전쟁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절대로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이것은 단순한 탐험이나 원정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한순간의 실수가 목숨을 잃는 것과 직결되는, 사망 확률이 가장 높은 규모 있는 전투. 그런 만큼 클랜원들의 마음도 십분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오직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줄 수는 없다. 아무리 하기 싫은 일이 있더라도 해야 될 때가 있으니까. 여기서 전쟁 불참을 선언한다면 결국 머셔너리는 여기까지일 것이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아무튼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지금은 분명히 나서야 될 때라는 것이다. 나는 잠시간 뜸을 들였다가 단언하듯이 입을 열었다. “방금 전 호명한 세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 전쟁에 참가합니다. 이것으로 인선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예…?!” 아주 간단한 인선 발표. 그리고 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뜻밖에도 신상용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침착히 고개를 돌리자 왼쪽 맨 끝에 앉아있는 신상용을 볼 수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깜짝 놀란 것 같아 보여도, 자세히 살펴보면 미미한 찌푸림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그로서는 드문 감정 표현이었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 밖에 없었다. '왜 저러는 거지?' 다른 애들이라고 안 그러겠냐 만은, 백한결은 아직 전쟁에 참여하기엔 미숙하다고 판단했다. 영감님은 애당초 전투 인원으로 데려온 것이 아니었고. 그리고 신상용의 참가 여부에 대해서는 수많은 고민을 했지만 어젯밤 가까스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의 성향이 안전을 추구하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신상용은 비비앙과는 달리 아직 '소환'보다는 '연금술'의 색채가 더욱 강한 사용자였다. 그리고 '연금술'은 엄밀히 말해서 전투 계열이라고 보기 어려운 특성이었다. “혹시 이번 결정에 이의가 있다면 지금 발언권을 드리겠습니다.” “…….” “사용자 신상용?” “아, 아, 아닙니다.” 재차 묻자, 신상용은 허둥대는듯한 행동을 보이고는 이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약간 더 기다려보았지만 더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입을 굳게 다문 채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이번 전쟁에 대해서는, 머셔너리의 입장을 기준으로 설명하겠습니다.” 나는 가벼운 숨을 흘리고 모두를 돌아보았다. 어느덧 회의실은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을 만큼 고요하게 변해있었다. 다들 숨을 죽인 채 내 말에 집중하고 있다. 처음에는 조금 걱정이 됐지만, 문득 이것도 마냥 나쁘지마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태도는 어찌됐든 전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하나의 방증이었다. “머셔너리는 자유 용병으로써, 이번 전쟁을 의뢰의 형태로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 클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합니다.” 그때, 정하연이 조심스럽게 손을 드는 게 보였다. “그럼…. 머셔너리에 의뢰를 한 클랜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예.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도 두 곳이나 있지요.” 아마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이 있다면, 방금 전 말에서 이상한 위화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우선 결론부터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번 전쟁에서 머셔너리 클랜은, 동부의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에 따라 근시일 안으로 프린시카로 이동, 동부 연합의 지휘에 따라 바바라의 탈환에 일조할 생각입니다.” “네…? 이스탄텔 로우가 아니라요? 아니 잠시만. 동부의 의뢰라면…. 그럼 남부는…?” 역시나. 뭔가 정리되지 않은 느낌이 들었는지 정하연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비밀 단계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조만간 드러날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철저히 입 단속을 시켜두면 된다는 생각에, 나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이번에 북 대륙이 세운 작전명, 신세계에 대한 설명에 들어가겠습니다.” * (그럼 결국 우리 쪽으로 오기로 결정한 거야?) “그렇지. 서쪽 도시 공략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바바라의 탈환도 괜찮겠다 싶어서.” (후유…. 이스탄텔 로우가 잡지는 않았어?) “글쎄. 조금 아쉽다는 기색을 보인 것 같기는 했는데 그거야 내 생각이고. 그래도 존중은 해주더라고.” 문득 수정구에 비친 형의 얼굴이 자못 씁쓸해 보인다. 내가 동부로 가겠다는 게 어지간히도 마음에 안 드는지, 운을 띄웠을 때부터 시종일관 저런 표정이었다. 이윽고 형은 입맛을 다시더니 이내 쓰게 웃으며 말했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럼 언제쯤 넘어올 건데?) “언제쯤 출발하는데?” (곧. 남부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동부의 준비는 거의 끝났다고 봐도 좋을 정도야. 최근 갑자기 일이 터져서 조금 빠르게 일을 진행했거든…. 어쨌든 이왕 마음먹은 거, 최대한 빨리 오는 게 좋지 않을까? 이쪽 분위기에 적응도 할 겸 말이야.) 일이 터졌다 함은 바바라가 스스로 워프 게이트를 끊은 사건을 말하는 것이리라. 아마 그 사건 때문에 출발 일시를 억지로 당겼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었다. “알겠어. 이미 클랜원들한테 공지는 해둔 상태니 3, 4일 내로 넘어갈 수 있을 거야.” (그래. 내가 따로 말은 해둘 테니까 너는 마무리에만 집중해.) “그럴 수는 없지. 그래도 최소한의 절차라는 게 있잖아. 어차피 전령 한 통만 보내면 되니까 너무 신경 쓰지마.”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정작 나 자신은 절차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스스로 그것을 지키지 않는 것은 꼴불견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알겠다. 아무튼 편성이나 전쟁에 대해 이것저것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그것은 만나서 하자꾸나. 그게 더 나을 것 같다.) “응. 프린시카로 가게 되면 해밀 클랜에 먼저 방문할게. 그럼 이만 끊는다.” (아. 오기 전에 연락 한 번 주면 고맙겠는데.) 그거야 당연한 일이었기에, 나는 걱정 말라는 의미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나와 형은 간략히 작별 인사를 나누었고 바로 수정구에 흘리던 마력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빛이 꺼져버린 수정구를 한 쪽에 밀어 넣고 나서, 나는 집무실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동부 클랜에 보낼 전령을 끄적거리는 안솔이 있었다. 이따금 낑낑대는 신음을 내는 게 제법 머리를 쥐어짜내는 모양이다. “안솔? 중간 검토 좀 해보자. 지금 적고 있는 기록 가져와.” “히익! 오, 오라버니이.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시면 안될까요?” “아니 중간 검토를 하겠다고. 그리고 오늘 내로 전령을 보내야 해. 더 이상 시간을 줄 수는 없어.” 안솔은 울상을 지으며 울먹였다. 하지만 엄한 목소리로 다그치자, 곧 몸을 일으키더니 쭈뼛쭈뼛 다가와 기록을 건네었다. 나는 그것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머셔너리 클랜 로드 김수현입니다. 제가 이번에 전령을 보내게 된 이유는….』 나는 찬찬히 기록을 읽어내려 가다가, 오른손을 불쑥 내밀었다. “깃 펜 가져와.” 그 동안 여러 번 혼낸 게 효과가 있는지 깃 펜은 신속하게 손에 쥐어졌다. 나는 그것을 받자마자 바로 내용 수정에 들어갔다. 필요 없는 부분은 쭉쭉 긋고, 필요한 내용은 추가한다. “오라버니. 어때요…?” “나쁘지는 않아. 처음보다는 좋아졌어.” 흘끗 고개를 들어 대답하자, 오랜만에 칭찬을 들어서 그런지 안색이 밝아진 안솔을 볼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것도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정말로 처음과 비교하면 나아졌다. 첫 기록은 무슨 유치원생이 군인 아저씨한테 보내는 편지를 본 기분이었으니까. “그래도 아직도 부족한 점은 보이네. 고려의 클랜 로드가 나보다 명성이 높은 건 맞지만, 그래도 엄연히 같은 클랜 로드야. 이렇게까지 엄청나게 높여 쓸 필요는 없어. 또 미사여구도 너무 많고.” “죄, 죄송해요오.” “그리고 가장 큰 문제점은, 너무 느려. 정하연이나 이유정이었다면 10분 안에 뚝딱 가져왔을 거야.” “아, 앞으로 더 노력할게요!” 노력이라. 수행인원 첫날에 크게 혼냈을 때 울먹거렸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아무튼 오늘은 이 정도에서 만족하기로 하고, 나는 신속하게 전령의 내용을 완성했다. 그리고 수정 본을 안솔에게 건네주며 새하얀 기록 한 장도 추가로 건네주었다. “새 기록에 이대로 베껴 써. 그리고 완성하자마자 바로 전령으로 보내고. 어디로 보내는지는 알고 있지?” “그러니까아…. 프린시카의 고려 클랜이요.” “그래. 그리고 전령을 보내고 난 다음에 1층 로비 게시판에 공지하나 붙여둬. 이틀 후에 최종 점검에 들어갈 거니까 그때까지 장비들 잘 손질해두라고.” “네. 알겠습니다.” 안솔은 순순히 대답했다. 그녀의 확답을 듣고 나서 나는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그럼 믿고 맡길 테니까. 나는 잠시 어디 좀 다녀오마. 돌아오기 전까지 전부 완료해두기를 기대하고 있을게.” “아. 오라버니! 잠시만요!” 그때였다. 이윽고 막 책상을 벗어나려는 찰나 안솔의 가냘픈 목소리가 내 옷깃을 붙잡았다. “왜?” “따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실은 클랜원 중 한 명에 관한 일이라 함부로 말하기 어려웠는데, 그래도 아시는 게 낫겠다 싶어서….” 설마 안솔이 이런 말을 꺼낼 줄은 몰랐기에, 나는 감탄 반 기꺼움 반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클랜원에 관련된 일이라면 내가 알고 있어야지. 말해봐.” 그제야 안심한 듯, 안솔은 서서히 입술을 떼었다. “실은 어젯밤에요. 쉬야가 마려워서 일어…. 아, 아니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일어났는데요.” 내가 눈을 가늘게 만든 것을 눈치챘는지, 안솔은 말을 잇던 도중 황급히 단어를 바꾸었다. 솔직히 말투까지는 간섭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스무 살 여성이 사용하는 말투라고 보기엔 많은 문제가 있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갑자기 잠이 안 오고 마음도 싱숭생숭해져서요. 그래서 산책이라도 할까 싶어 정원에 나갔는데….” “나갔는데?” “상용이 오라버니가 연못 옆에 앉아있더라고요. 그것도 혼자서 말이에요.” '신상용씨가?' 언뜻 들으면 별거 아닌 일이었지만, 어제 회의에서 신상용의 반응은 뭔가 이상했다. 이대로 그냥 넘기기에는 뭔가 알 수 없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기분이었다. “혹시 뭐 이상한 낌새라고 느꼈어?” 내 물음에 안솔은 가만히 생각하는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안솔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 머셔너리의 클랜 하우스. 3층 비비앙의 공방. 호박 불빛이 비치는 공방의 안에는, 한 명의 여성과 한 명의 남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심각한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 네가 빠지고 싶다고 해서 빠진 것도 아니잖아. 김수현이 알아서 빼준 건데.” 여성의 정체는 바로 비비앙이었다. 그녀는 다리를 꼰 채로 앉아있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현재 심경이 복잡한지 항상 느긋하던 눈매는 약간 치켜 올라간 상태였다. 그리고 비비앙의 말에, 이윽고 남성의 대답이 들렸다. “무,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 하지만…. 충분히 고민하고 생각해 내린 결정입니다.” “그럼 다시 잘 생각해봐. 나는 100년 전에 몇 번 전쟁을 겪어 본적이 있거든? 물론 직접 참가한 게 아니라, 시민 입장에서 그냥 겪은 거지만 말이야. 아무튼 전쟁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야. 그리고 그딴 싸구려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잖아? 도시에 남는 게 너 혼자도 아니고.” “죄책감이 아닙니다! 그, 그리고 저는 그 사람들과 입장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아무튼 이번에 빠지는 것은 왠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비비앙은 어떻게든 설득을 해보려는지 간곡한 어조로 말을 이었지만, 돌아온 남성의 대답은 요지부동이었다. “후유…. 네 생각은 알겠는데…. 아니 잠깐만. 애초에 네 맘대로 할거면 왜 말하러 온 거야?” “하, 하하. 그래도 고민을 상담할 사람은 스승님뿐이라….” 비비앙은 어설프게 웃는 신상용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지, 입술을 뾰족이 내밀며 투덜거렸다. “네, 네. 마음대로 하세요. 그래도 스승으로써 충고하건대, 한 번 정도는 더 심사숙고 하는 게 좋을 거야. 너. 김수현 성격 알고 있지? 걔 한 번 작정하면 진짜 무서워지는 거 알고 있지? 응?” “무, 물론입니다.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습니다.” “쩝. 그러니…. 정 부담스러우면 내가 말해줄 수도 있고.”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 건은 제가 직접 말씀 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들리는 확고한 대답. 그에 비비앙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으쓱 어깨를 들먹이고는 책상 위에 사뿐히 엎어졌다. “아이고 아이고. 이래도 내가 한다 저래도 내가 한다. 이제 난 몰라. 김수현이 알아서 해주겠지 뭐.” 그리고 그런 비비앙을 보며, 신상용은 잔잔한 미소를 흘렸다. ============================ 작품 후기 ============================ 자! 이제 전쟁의 서막이 올랐습니다! 동부에서 중앙까지의 거리는 약 2주에서 3주! 가는 과정을 하나하나 세세히 묘사할 계획이니, 아마 최대 21편 다음에 바바라에 도착할 수 있겠군요! 김수현이 걸었다! 김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수현이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퍽! 퍽퍽! 퍽퍽퍽퍽! 퍽퍽퍽퍽퍽퍽퍽퍽! (독자분들의 응징이 이어진 후.) 흑흑흑흑…. 노, 농담입니다….(코피를 닦는다. 눈물을 훔친다.) 담배 한 대 피고 리리플 올릴게요! 'ㅇ'/ 『 리리플 』 1. 데바란 : 1등 축하합니다. 단언컨대, 임한나의 가슴은 언젠간 김수현의 것이 될 것입니다.(?) 농담입니다! 하하하. 2. 치우우현 : 앗 정말이요? 절단신공이 나쁜 거예요? 나쁜 건데 왜 신공이라 부를까요?!(깐족깐족!) ㅋㅋㅋㅋ. 3. katalina : 1부의 대미를 장식하는 전쟁입니다. 하하. 저도 기대되네요. 재밌게 봐주세요! 4. 밍긔 : 그만큼 크고 아름답습니다.(?) 5. 로벨리얀 : 후후. 저는 주 포가 서포터이었지요. 지금은 아니지만요. :) 6. 원중s : 몰아서 봐주시는 것만해도 감사해요. 분위기가 우중충하다면 잘 표현된 것 같아 다행이에요. 전쟁이 밝을 수는 없으니까요. :) 그리고 난잡한 것은 제가 조금 더 신경 써볼게요! 감사합니다! 7. QuistA.Gw*() : =ㅁ=. 지금 전국의 브론즈들을 무시하시는 겁니까! 8. 이런남자이니까 : 에이. 그래도 하루 펴봤자 한 갑? 조금 많을 때는 한 갑 반 정도인데요 뭐.(?) -_-a 9. 파르나르 : 네. 가능합니다. 다만 홀 플레인 특유의 피임 방법도 존재합니다. :D 10. 유온. : 트, 특이한 코멘트네요! 그런데 왠지 모르게 끌리는 말투에요. ㅋㅋㅋㅋ. 임한나도 괜찮은 여성이에요~.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46 / 0933 ---------------------------------------------- 선택은, 바바라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어 뜨겁게 달구어지던 정원의 수풀은, 어스름한 황혼이 깔릴 즈음에야 서서히 식어가기 시작했다. 1층 창을 통해 비치는 정원의 풍경을 보다가, 나는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늘은 모니카를 떠나기 하루 전날. 클랜원들은 다들 1층 로비 아니면 정원에 나가, 신체 조율 및 장비 손질 등 최종적인 점검을 진행하고 있었다. “한별아. 다시 한 번 설명해줄까?” “아니요. 이제 괜찮아요. 전부 기억했어요.”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들에 시선을 돌리자, 로비에 비치된 테이블에 앉은 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김한별과 영감님이 보인다. 테이블 위에는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가 너덧 개 놓여있었는데, 영감님은 걱정 그득한 얼굴로 주머니를 손수 갈무리해주는 중이었다. “그렇구나. 그럼 다행이다. 아무튼 내가 말해준 것들은 꼭 기억하고…. 그리고 이 주머니들은 부담 없이 썼으면 좋겠다. 알겠지?” “네. 할아버지 말씀대로 항상 몸조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이것들은 정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거예요. 고맙습니다.” “고맙기는. 여하튼 첫째도 조심, 둘째도 조심이란다. 부디 몸 성히 다시 봤으면 좋겠구나. 항상 기도하마.” 이윽고 김한별의 손을 꼭 잡은 채 재차 조심을 강조하는 영감님을 보고 있자, 마치 친손녀를 대하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한동안 눈앞의 광경을 흐뭇한 마음으로 보고 있을 무렵, 이번엔 누군가 반대쪽에서 내게 말을 걸었다. “참, 사람 감정이란 게 미묘한 것 같아요. 형.” 목소리의 정체는 안현. 그대로 몸을 돌아보자 가지런히 놓인 기공 창술사의 창, 위대한 태양, 용맹의 투구가 눈에 밟힌다. 안현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아련한 눈길로 그것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뒤에서 뭔가를 열심히 꼼지락거리고 있는 안솔을 바라보다가, 나직이 목소리를 내었다. “사람 감정이 미묘하다고?” “예. 솔직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몸이 엄청 근질근질했거든요. 이쯤이면 원래 다시 탐험을 나갈 즈음인데 전쟁 때문에 나가지 못했잖아요? 그래서 이왕 이렇게 된 거 최대한 빨리 터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바로 어제까지요.” “…….” “그런데 막상 이렇게 장비를 꺼내고, 직접 전쟁에 참가한다는 생각을 하니까…. 왜 이렇게 미묘한지 모르겠네요. 잘 모르겠어요. 그냥 말 그대로 미묘하네요.” 이윽고 길게 한숨을 내쉬는 안현을 보며 나는 슬며시 웃음지었다. 안현의 말은 한 마디로 체감의 문제였다. 지금까지 머셔너리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걸음 빗겨 서 있던 상태였다. 단순 우리뿐만 아니라 동부와 남부의 사용자들 모두가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걸음을 옮겨 스스로 폭풍의 눈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당연히 두려움을 느낄만한 상황이었다. 더구나 이번에 처음으로 전쟁을 겪는 애들인 만큼, 그러한 감정은 가면 갈수록 심해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아주 약간의 도움은 줄 수 있겠지만, 이것은 원체 스스로 극복해야 할 문제였다. “어휴. 왜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리냐. 다시 정원으로 나가서 몸 좀 가라앉혀야 하나?” “그것도 나쁘진 않지. 나도 종종 생각이 복잡할 때는 지칠 때까지 검을 휘두르거든. 그럼 생각도 정리되고, 머리도 개운해져.” “아. 그래요? 그래도 혼자서 창 춤 추기는 그런데…. 형. 오랜만에 한 판 하실래요?” 예전에 뮬에서 대련했던 기억을 떠올린 듯 안현은 번뜩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그 정도야 상관없겠다는 생각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그러면 지금 바로 간단히 창만 챙기고 나와.” “이야. 신난다. 오랜만에 형과의 대련이다.” 가볍게 허락해주자 안현은 만면에 미소를 띄운 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바닥에 놓였던 창을 들며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꽤 성장했으니, 이제 만만치는 않을 거예요 형. 이제는 창을 한 손으로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고요.” “퍽이나.” “어어? 지금 못 믿으시는 거예요? 안되겠다. 보세요 형. 지금 바로 보여드리죠. 후후.” “밖에 나가서 볼 테니까 여기서 휘두르지…. 야, 안현! 야!” 불현듯 안현의 뒤에 안솔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제지했다. 그러나 그는 내 제지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 그대로 창을 핑그르르 돌렸고, 이어진 흑색 궤적은 역시나 뒤에 있던 안솔을 정확히 겨냥해 들어가는걸 볼 수 있었다. 그때였다. 우웅! 카카캉! “삐아!” 하지만, 천만 다행히도 백색으로 빛나는 동그란 구체가 시기 적절히 창을 막아주었다. 아까 안솔이 꼼지락거리던 개량형 수호의 방패가 나서준 것이다. 나는 순간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허, 헉! 솔아!” “어버, 어버버….” 그리고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안현은 입을 쩍 벌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지간히도 놀랐는지. 한참 동안 입을 뻐끔거리던 안솔은 이내 자신의 무사함을 완전히 확인한 후에야 눈매를 무섭게 치켜 올렸다. “오빠…?” “미, 미안해! 정말 실수야!” “실~수~? 저번에도 한 번 이런 적 있으면서…? 이번에도 또?!” 안솔은 안현에게 뭔가 단단히 벼르고 있었는지, 이윽고 아기 새처럼 쫑알쫑알 잔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땀을 뻘뻘 흘리며 연신 사과를 거듭하는 그를 보다가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이놈은 항상 잘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니까.' 아무튼 안현과의 대련은 종쳤다는 생각에 나는 홀로 정원으로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정원에 있는 정비를 마친 클랜원들도 둘러볼 필요도 있었고, 마침 지급한 장비들을 착용한 끝낸 임한나도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장비들이 잘 맞는지도 궁금했지만, 예전부터 궁수로서의 실력 또한 궁금했기에 한 번 가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빠르게 입구를 나서려는 찰나였다. “크, 클랜 로드! 여기 계셨군요.” 또다시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또 누구지.' 오늘따라 나를 찾는 사람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의외의 인물이 나를 불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 옆에는 신상용이 서 있었다. “사용자 신상용? 여기는 어쩐 일로….” “클랜 로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윽고 내 물음에 대답한 신상용의 어조는 자못 장중한 음색을 품고 있었다. * “갑작스러운 말 인건 알고 있습니다. 우선 그건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음. 아무튼 일단 어떤 일인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예. 많이 늦었지만, 이번 전쟁에 저도 참가하고 싶습니다.” “?” 어떤 일인지 들어보자고 말은 꺼냈지만, 신상용이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꺼내든 탓에 나는 잠깐 어안이 벙벙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내 정신을 차리곤 의아한 기분과 함께 입을 열었다. “예? 내일이 바로 출발인데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미 회의 때부터 고민하고, 숙고해온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틈틈이 준비도 해두었고요. 출발에는 지장이 없게 할 테니, 참가 허락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신상용으로서는 드물게 강경한 어조였기에, 나는 입을 다물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신상용은 원래 안전을 추구하는 성향이 아니었나? 그런데 왜 갑자기….' 평소 신상용의 행동이나 성향을 알고 있는 만큼,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도 괜히 이런 말을 꺼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단 신상용의 말을 먼저 듣고 결정을 내리기로 마음먹었다. “사용자 신상용. 이미 인선은 발표됐고 그것을 하루 전날 바꾸기에는 모양새가 조금 그렇군요. 그 동안 뭔가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겁니까?” “예. 실은 회의에서 이만성 님과 한결군과 함께 제외된 이후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클랜 로드.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는 이번 전쟁에 참가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하하. 사용자 신상용.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으신데요. 제가 당신을 제외를 한 이유는….” “아니요, 아니요. 클랜 로드에게 섭섭한 것이 아닙니다. 굳이 문제를 따지자면 저에게 문제가 있었겠지요. 그리고 이번 결정은 저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것 같아 말을 꺼내려는 순간, 신상용은 손을 휘휘 저으며 끼어들었다. 그리곤 평소처럼 더듬거리는 말투가 아닌, 흐르는 물결처럼 말을 이었다. “왜 저를 제외하신 걸까. 먼저 그것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 동안 제가 보였던 행동이 머셔너리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결론이었습니다.” “효율성이요?” “예. 문득, 스스로 생각하기에, 저는 현재 머셔너리에 가장 비효율적인 클랜원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러시겠죠. 하지만 스스로 느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것을.” 그 순간 나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뭔가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지금 신상용이 하는 말은, 내가 예전에 안현에게 안솔에 대해서 말했던 내용과 굉장히 흡사했다. 문득 조금씩 그의 말이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저는 홀 플레인에 들어왔을 때, 그리고 클랜 로드를 만나기 전까지 정말 쓸모 없는 사용자였습니다. 마법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고 성취도가 낮은 연금 술사를 받아주는 곳도 없었지요.” 하지만 신상용의 말투가 워낙 심각했기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가만히 듣고만 있는 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저에게 커다란 선물이 들어왔지요. 레어 클래스. 그 선물은 쓸모 없던 저를 쓸모 있는 사용자로 만들어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어 매달렸고, 클랜 로드께서는 제 무리한 요청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제가 레어 클래스를 받으면서 했었던 맹세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견마지로를 마다하지 않겠다.” “사용자 신상용.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잠시 제 얘기를 들어보세요. 엄밀히 말하면 신상용씨도 전쟁에 참가합니다. 다만 도시에 남아서 방위를 도울 뿐이지요. 역할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렇게 비겁하게 회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확실히 마음 먹었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저 자신에게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기회요?” 언뜻 신상용의 눈가에 결연한 빛이 스치는 듯 싶더니 이내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클랜 로드. 저는 예전으로 돌아가기 싫습니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신상용씨를….”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신상용의 음색은 크게 고저가 없지만, 그만큼 자신의 생각에 확신이 깃들어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또다시 옛날과 똑같은 딜레마에 빠지게 될 것 같습니다.” “…….” “저는 말입니다. 저라는 존재가 어디엔가 꼭 쓰여지면 좋겠고, 꼭 필요한 데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을 위해 항상 준비하고 노력해왔습니다. 클랜 로드. 정말 저를 생각해주신다면, 이번 한 번만 기회를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윽고 모든 말을 쏟아냈는지, 신상용은 잠깐 숨을 몰아 쉬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리고 나는, 한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서 처음에는 객기나 죄책감을 덜기 위한 면죄부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상용의 진심을 듣고 난 지금은, 그가 이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얼마나 이를 악물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만히 신상용을 응시했다. 그의 말을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는 이해했다. 나도 저렇게 생각한적이 있었으니까. 저는 지금의 신상용도 충분히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굳이 무리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나는 애초에 준비하던 답변을 마음속 깊숙한 곳에 밀어 넣었다. 지금으로서는 어떤 말을 생각해도, 그 말이 신상용에게 얼마나 커다란 상처를 입힌다는 것 정도는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나는 아까부터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췄다. 그리고 그를 향해 불쑥 손을 내밀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 정도로 각오를 하셨다면 전쟁 참가를 허락하겠습니다.” “크, 클랜 로드!” “출발 일정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니 내일까지 확실히 준비해두도록 하세요.” 그러자 신상용은 내 손을 마주잡으며 환한 웃음을 선보였다. 비록 한순간이었지만, 마주잡은 손에서 뭔가 따뜻한 기운이 전해져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간밤의 어스름함은 일말의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산뜻하고 맑은 아침이었다. 오늘 하루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날씨만 보면 마치 머셔너리의 앞길을 축복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는 프린시카로 가서, 진정한 전쟁에 뛰어들 일만 남았다. 칼리고 아브락사스. 빅토리아의 영광. 하늘의 영광. 태양의 영광. 오로쓰로스 롱 부츠. 노블 미스릴 셔츠. 푸른 용기사의 외투. 행운의 네 잎 클로버. TOPG. 마지막으로 장비를 최종 점검한 후, 고개를 들어 정원을 응시한다. 정문 앞에서 가지런히 열을 맞추고 있는 10명의 클랜원들. 그 주변에 서 있는 나머지 클랜원들과 고용인들. 그리고 아기 유니콘 한 마리. 이제는 출발할 때였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이윽고 햇살이 비치는 입구를 천천히 가로질렀다. ============================ 작품 후기 ============================ 음. 지금은 구상을 바꿔서 말씀 드리건대, 원래 1차 구상에서는 이번 전쟁을 통해 클랜원의 삼분의 일 정도를 정리할 생각이었습니다.(지금은 아니지만요.) 아무튼 더는 미리 말하면 스포일러가 되니 말을 아껴두겠습니다. 추석이 다가오니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네요. 내일이 제사라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집에서 제사를 조금 많이 지내는 편이거든요. 하하. 이번 추석도 콩나물이나 도라지 등 나물은 제가 다듬어야겠지요. 추석에도 최대한 연재를 이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 리리플 』 1. 데바란 : 1등 축하합니다. 하하. 아슬아슬 하셨군요. 신상용…. 지켜봐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2. 치우우현 : 음. 페가수스의 알과 요정 여왕의 알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 등장할 예정입니다. 3. 로벨리얀 : 하하. 과연 그럴까요? 전쟁에서 신상용의 행보를 기대해주세요. :) 4. 명박짱의양양합일 : 심정은 십분 이해합니다. 그러나 아마 그랬다가는 많은 분들에게 질타를 받을 것 같습니다. 5. 상승불사조 : 음. 사고라. 어떻게 보면 사고가 맞을 수도 있겠네요. 하하. 6. 루아v : 아. 왜 그러냐 면, 필요 없는 내용이거나 중복되는 내용이어서 그래요. 작전명 신세계에 대한 내용은 바로 전편에 언급했었고(또 언급했다면 중복되는 내용으로 지면을 차지했을 겁니다.), 오늘 안솔의 말을 잇는 내용은 신상용은 그저 한숨만 쉬는 내용이 뒤를 이을 예정이었습니다. 이것은 굳이 묘사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져서 건너뛰었습니다.(신상용의 심정은 회의에서의 반응과 오늘 마지막 부분에 넣은 내용으로 독자분들의 이해를 도울 생각이었거든요.) 원래 코멘트에 달았는데, 혹시 못 보셨을까 봐 한 번 더 남깁니다. 7. 이디오 : 농담이었습니다. 하하. 개인적으로 필요하다 싶은 부분은 느리게 갈수도 있지만, 가는 과정은 그렇게 세세한 묘사까지는 가지 않을 것입니다. 8. 현오 : 이야. 생일 축하합니다! 하하하! 식도락에 취미가 있다는 것은 정말 부럽네요. 저도 그것을 좋아하지만, 다이어트 중이라 자제하고 있습니다. ㅜ.ㅠ(그나저나 묘사력은 여전히 대단하십니다.) 9. 폭풍의날개 : 신상용 또한 현대에서 아픈 기억이 있는 사용자입니다. 그것이 홀 플레인에서 이어져왔고요. 이번 전쟁에서 그것을 드러낼 생각입니다. 10. city : 네. 감사합니다. city 님도 좋은 추석 보내세요!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47 / 0933 ---------------------------------------------- 선택은, 바바라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에서,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요소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거기에는 수많은 요소와 변수가 있겠지만, 나는 '마법사'의 숫자가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홀 플레인에서 목숨은 단 하나. 그런 만큼 원거리에서 강력한 화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마법사들은 전쟁에서 1순위로 각광받는 클래스이다. 대규모 전투가 벌어질 때 얼마나 더 강한 화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그리고 쏟아져 들어오는 마법들을 얼마나 잘 방어할 수 있는가. 이 두 가지 상황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다면 그 전쟁은 거진 70%이상 이겼다고 봐도 좋은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역할이 바로 시크릿과 레어 클래스이고. 개인적인 경험으로 비추어봐도 여태껏 벌어진 전쟁의 양상은 거의 비슷비슷했다. 근접 계열들은 마법사들을 보호하고, 마법사들은 적의 진영을 향해 양껏 공격 마법을 퍼붓는다. 그렇다면 보호를 제외한 근접 계열들이 나서는 때는 언제가 있을까? 그것은 어느 정도 승리에 대한 확신이 들거나, 재빠른 추격이 필요할 때가 비로소 근접 계열들이 직접적으로 나서는 때이다…. * 저번에 단합 회 사건 이후로 아기 유니콘은 한동안 삐뚤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백한결의 품에 안겨있는 아기 유니콘의 모습은, 근래와는 사뭇 다른 불안한 모습이었다. 클랜원들 사이로 감도는 눅눅한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는지, 덩달아 불안해하는 눈빛을 뿌리는 중이었다. “뀨!” 이윽고 정문 앞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얌전히 백한결에게 들려있던 아기 유니콘은 버둥버둥 품에서 빠져 나와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에 나는 잠깐 걸음을 멈췄고 천천히 한 쪽 무릎을 굽혔다. 저번에 내가 말도 없이 사라졌을 때는 밥도 먹지 않았다고 하니, 이번엔 떠나기 전 확실히 말해둘 필요성을 느꼈다. “아가야. 이번에는 조금 오랫동안 헤어져 있어야 할 것 같구나.” “뀨….” “저번에 너를 빼먹었던 건 정말 미안하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깜빡 잊은 거였어. 정말로.” “뀨뀨…. 뀨우…. 뀨웅….” 슬슬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아기 유니콘은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고는 이내 슬며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를 보는 녀석의 눈망울이 벌써부터 그렁그렁한 게 한바탕 울음을 터뜨릴 모양이었다. '빨리 떠나야겠군.' 그렇게 생각한 나는, 마지막으로 아기 유니콘의 머리를 서너 번 더 보듬은 후 훌쩍 몸을 일으켰다. “아무튼 조금 늦을 수는 있어도 꼭 돌아올 테니까. 그 동안 밥 잘 먹고, 말 잘 듣고 있어야 한다. 알겠지?” “뀨? 뀨뀨?!” 덥석. 그리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 아기 유니콘이 내 발목을 왈칵 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앞으로 말 잘 들을게요. 가지 말아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가지 않는다고 할 수도, 그렇다고 녀석을 데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돌아오면, 네 이름을 지어주마.”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차분히 발을 떼고 등을 돌렸다. 그러자 결국 등 뒤로 미약한 울음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약간 찝찝한 마음과 함께 클랜원들의 앞으로 걸음을 옮긴 후, 나는 클랜원들의 얼굴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고연주처럼 비교적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이도 있었지만, 대다수 클랜원들은 묵직한 긴장감이 맴도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들 앞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까. 한순간 수많은 고민이 들었지만, 나는 길게 끌지 않기로 했다. 억지로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 되도 않은 미사여구를 붙일 생각은 없다. 불현듯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말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이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매우 짧게 끝날 수도 있겠지만, 또 어쩌면 생각 외로 오래 걸릴 수도 있겠지요.” “…….” 아무런 대답도 없다. 클랜원들은 그저 조용히 내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몇 달이 걸리든 간에, 지금 제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이 자리에 모였을 때.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건강한 모습으로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을 하던 도중 문득 신상용의 담담한 얼굴이 눈에 밟힌다. 이윽고 그는 갑작스레 고개를 돌려 건물을 바라보다가, 살짝 멍해 보이는 표정으로 다시 앞을 쳐다보았다. 신상용은 방금 전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더 이상 말을 길게 늘어놓지는 않겠습니다. 그저 마지막으로, 제 결정에 아무 이견 없이 따라준 여러분들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내 말이 클랜원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는 짐작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 마음속에 품은 진심을 전달했다는 것. 이번 전쟁에 참가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는 클랜원들이 몸 성히 돌아오는 것을 진정 바라고 있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이별은 진작에 끝냈고 하고 싶었던 말도 모두 끝냈다. 더 이상 질질 끌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나는 지체 않고 몸을 돌려 정문을 통과했다. 저벅저벅. 그러자, 등 뒤로 이어지는 10명의 발소리가 대지를 힘차게 울리기 시작했다. * 클랜 하우스의 정문을 나선 이후 우리는 워프 게이트를 통해 프린시카로 이동했다. 프린시카와 모니카는 전반적으로 비슷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당연히 전운의 냄새가 물씬 풍겨져 오고 있었다. 그러나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용자들이 내뿜는 기세는, 모니카의 사용자들과 확연한 차이점이 있었다. 오히려 긍정적인 기세가 너무 강해, 마치 '이번 전쟁에서 무조건 이길 것이다.'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한 분위기를 가로질러 나는 클랜원들을 이끌고 곧바로 해밀 클랜으로 직행했다. 미리 연락을 넣어둔 터라 형은 반갑게 나를 맞이했고, 그와 함께 때깔 좋은 장비들을 차려 입은 해밀 클랜원들을 볼 수 있었다. 형도 다른 도시로 출장을 보낸 클랜원들은 전부 복귀시켰는지, 전에 왔을 때보다 한층 사람이 많아 보였다. “수현아. 밥은?” “먹었어. 식사는 됐으니까, 빨리 편성에 대한 얘기나 해줘.” “녀석. 그럴 줄 알았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내 단호한 말투에 형은 쓰게 웃더니 이내 고용인을 시켜 머셔너리 클랜원들을 안내하라 일러두었다. 나는 클랜원들에게 얘기가 끝나고 바로 가겠다고 약속한 후 형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이윽고 형이 나를 데려간 곳은, 바로 3층에 있는 집무실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뜻밖의 인물을 볼 수 있었다. “오랜만~.” 방안에는 이효을이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 채 팔랑팔랑 손을 흔들고 있었다.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형을 쳐다보자, 형은 미미한 눈짓을 보냈다. 싫어도 잠시만 참아달라는 신호였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으, 응?” 속으로 투덜거리며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입을 열자, 이효을은 생글생글 웃던 낯빛을 지우고 떨떠름히 대답했다. “웬일이긴! 나도 아직은 해밀 클랜원이니까 여기 있지. 그리고 너한테 편성에 대해 설명해주려고….” “…….” “시, 싫으면 나갈까…?”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응.”이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옆에서 형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수현아. 이번 편성은 얘의 생각도 상당히 많이 들어갔거든. 그러니까 나보다 더욱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머셔너리의 편성에 관해서도 말해줄 것이고.” 그 말에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하기야 일단 전쟁에 참여한 이상 기본적인 통제를 따르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아무리 자유 용병이라고 해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더욱이 우리의 편성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고 하니, 나는 개인적인 감정은 잠시 접어두고 이효을의 말을 경청하기로 했다. “흠흠.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문제없지?” 그런 내 반응을 확인했는지 이효을은 약간 밝아진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이효을은 굉장히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결국에는 요약해보자면 이거였다. 이번에 동부에서 편성한 인원은 총 16000명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최대한 균등하게 4부대로 나뉘어, 동, 서, 남, 북을 동시에 공략할 계획이다. 만약 공략이 지지부진하게 되면 추후 맡은 도시의 워프 게이트를 확보한 남부, 북부와 힘을 합쳐 재차 공략에 나선다. 물론 중간중간 견제나, 퇴로 하나를 열어두고 기습을 한다는 등 세세한 전략이 나오기도 했지만, 아무튼 커다란 흐름은 '동시 공략'으로 볼 수 있었다. “여하튼 전략은 여러 가지를 세워놨지만, 일단 직접 부딪쳐봐야 알겠지. 어떤 상황이 올지 모르니 최대한 유동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거든.” 이효을은 오랫동안 말해서 입이 아픈지 턱을 이리저리 움직였다가, 이내 의자에 몸을 묻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여기까지 1차적인 설명은 끝. 혹시 뭔가 궁금한 점이라도 있어?” “몇 가지. 부대를 클랜을 기준으로 총 4개로 나눈다고 했는데, 그럼 각 부대의 지휘는 누가 맡게 되지?” “고려, 달밤, 한, 그린나래. 클랜이 없는 사용자들은 인원이 부족한 곳에 적당히 분배했고.” “Ok. 그럼 총 인원이 16000명이라고 했는데 각 클래스 별 인원은 어떻게 되고?” “근접 계열 8100명. 궁수 3900명. 마법사 2800명. 사제 1200명. 물론 정확한 수치는 아니고 대략 계산한 수치야.” 마치 내가 질문할 것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이효을은 물 흐르듯 막힘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의 대답을 들은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1회 차에서 동부는 자체적으로 구성한 병력으로 바바라 탈환에 나섰고, 서 대륙과 부랑자들에 의해 대패를 하게 된다. 물론 지금과 그때 상황이 판이하게 다르다고는 하지만, 일단 동부 혼자서 맞붙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설명만 들으면 질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마음속에 있는 미묘한 불안감이 자꾸만 무언가를 부추기고 있었다. “표정이 왜 그래? 되게 불안해 보이는데.” “그냥. 조금 이상해서.” “응? 뭐가 이상한데?” 이효을은 궁금해하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반사적으로 대답한 거라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이 들었지만, 일단은 완곡히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전쟁에 생각대로만 흘러간다는 보장은 없잖아. 그리고 오면서 대충 분위기를 봤는데, 벌써부터 이겼다는 사용자들도 있고. 너무 방심하는 거 아냐?” “아. 분위기? 그건 우리가 언론 플레이를 조금 해서 그럴 거야.” “언론 플레이?” “응. 그런데 없는 것을 지어낸 건 아니야. 그냥 지금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알려줬을 뿐이지. 예를 들면 기존에 동부에 있던 유명한 사용자들을 제외하고, 이번에 중앙과 서부에서 새로 들어온 사용자들 중 유명한 사람들이 되게 많거든? 검후, 닥터, 간호사, 타로 카드 마술사, 진혼의 암살자, 저주술사 등등. 아. 너랑 그림자 여왕도 있고. 그 사람들도 전부 참여한다고 했거든.” 이효을은 검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고는 이내 슬며시 팔짱을 꼈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확실히 네 말대로, 내 생각대로 흘러간다는 보장은 없겠지. 한 마디로 변수를 걱정하는 거지?” “변수라. 대충 비슷해. 우리도 유명한 사용자들이 있지만, 적들도 없으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아하. 그러고 보니 그것에 대해서도 말해줘야 하는데. 그전에…. 한 가지 정하고 가자. 머셔너리는 어떻게 할거야?” “응? 뭘 어떻게 해?” 내 반문에 이효을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이미 편성은 대부분 마친 상태라서, 머셔너리는 추가 편성에 들어가야 해. 원래는 내가 정하는 게 맞는 일이기는 한데, 그래도 의뢰 형식으로 참가한 거니까 선택권을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어서.” “선택권…?” “응. 선택권. 동, 서, 남, 북. 어느 부대에 편성되고 싶어? 참고로 네 곳 모두 너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나는 서쪽이야 수현아.” 문득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형이 끼어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시 동안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쪽 부대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은데.” ============================ 작품 후기 ============================ (오늘 하루 리리플을 쉬겠습니다. 다음 회와 합칠 예정이오니 독자분들의 양해를 부탁합니다.) 이효을이 말해주는 전략에 관해서 구구절절이 적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까 2천자를 차지하고 있더군요. 순간 내가 뭐 하고 있지 라는 생각에 과감히 날려버리고 7줄로 줄였습니다. 하하하. 독자분들 모두 즐거운 한가위 보내세요! 0348 / 0933 ---------------------------------------------- 선택은, 바바라 16000명의 사용자를 4개의 부대로 나누고, 나누는 기준은 '클랜'으로 잡았다. 이러한 부대 편성은 지휘 체계를 최대한 고려했음을 드러내 주는 사실이었다. 중구난방으로 이리저리 섞는 것보다는, 평소에 같이 생활하고 손발을 맞춰본 사용자들을 최대한 한군데 묶어놓은 것이다. 그리고, 머셔너리가 편성된 부대는 다름 아닌 서문 공략을 맡은 '본대'였다. 서문 공략을 '본대'라 부르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이번 전쟁에 사실상 총사령관이나 다름없는 고려 로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로는, 서문 부대에 편성된 사용자들의 수준과 인원이 다른 부대를 한층 웃돌기 때문이었다. 서문 부대를 다른 부대와 차별화시킨 이유는 간단했다. 이효을은 혹시나 적들이 성문을 뚫고 도주할 경우(타 도시 워프 게이트를 확보했다는 가정하에.), 서문으로 나올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고 있었다. 그런 만큼, 확실히 '본대'의 현황은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대단한 인선을 자랑하고 있었다. 일단 총인원은 4782명. 그 중 굵직굵직한 클랜과 명성 있는 사용자들을 골라내 보면, 우선 8개의 클랜과 11명의 사용자들을 추려낼 수 있었다. 고려 클랜 : 서진우(Normal, 10강) 리버스 클랜 : 김덕필(Normal, 부랑자 학살자), 허유리(Normal, 미친 불꽃의 어릿광대) 해밀 클랜 : 김유현(Secret, 뇌제) 하스피탈 클랜 : 손시혁(Rare, 닥터), 강예빈(Normal, 간호사) 천둔 클랜 : 남다은(Secret, 검후) 마법의 탑 클랜 : 선율(Secret, 타로 카드 마술사), 강태욱(Rare, 저주술사) 아사신 클랜 : 이찬희(Secret, 진혼의 암살자) 머셔너리 클랜 : 김수현(Secret, 검술전문가), 고연주(Secret, 그림자 여왕) 이름값만 따지자면 중앙, 서부, 동부에서 일단 첫손으로 꼽을 수 있는 자들을 모아놨다. 단순한 클래스나 실력을 떠나서, '명성'만을 따져 추렸음에도 이 정도였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닐 것이다. 당장 머셔너리 클랜만 봐도 정하연, 비비앙과 같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실력자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즉, 실력은 있지만 명성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애당초 실력을 숨기는 사용자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소리였다. 나는 이번 전쟁에서 이루고픈 목표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 목표만 보고 달려가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여력이 남는 한에서, 최대한 챙길 것은 챙기고 가면 좋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전쟁을 치르는 동안 '제 3의 눈'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이번 전쟁에 참가했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실력을 보장한다는 소리니 키우는 것에 대한 부담이 적을 것이란 계산도 있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이효을의 신속한 일 처리에 힘입어, 머셔너리는 프린시카에 온 날 바로 서문 부대에 편성될 수 있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부대를 4개로 나눈 건 어디까지나 크게 따진 것에 불과하다. 각각 부대 내에서도 당연히 세부적으로 들어가는 편성이 있었고, 머셔너리 클랜원들은 그에 발맞춰 빠르게 움직이고 녹아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우리가 동부에 적응해나가는 동안, 바바라로 출병할 일시는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 어느덧 프린시카에 온지도 약간의 시일이 흘렀고, 그에 따라 출병 일자도 코앞으로 다가온 상태였다. 그 동안 많이 바빴다고는 해도, 나는 현재 없는 짬을 내어 클래스로 나뉘어진 부대를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아무리 편성에 관한 권한이 없다곤 하지만, 그래도 클랜 로드로써 클랜원들에게 너무 무심한 감이 없잖아 있었기 때문이다. 출병하는 날 각 부대의 사용자들은 클랜원들끼리 오순도순 모여가는 게 아닌, 대규모 원정에 맞춘 철저한 진형을 유지한 채 행군을 시작한다. 그리고, 행군 진형은 정석적인 '클래스'별로 역할이 나뉘어진다. 물론 차후 아주 만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슬슬 전쟁 분위기를 체감하고 있을 것이고, 뿔뿔이 흩어진 이들도 있는 만큼 한 번쯤은 들러 보듬어줄 필요는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궁수 사용자 임한나와 따로 만남을 갖는 중이었다. 왜냐하면 머셔너리 클랜원 중 궁수 계열 사용자는 그녀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임한나는 어떤 클랜원과도 함께 편성되지 못했다. “혼자 따로 떨어져서 외롭지는 않아?”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죠? 그러게 궁수 한 명만 더 영입해주시지 그러셨어요.” “글쎄. 궁수는 영 기회가 닿지 않아서. 그리고 너도 고연주의 소개가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거고.” “이런. 농담이에요 농담. 어쩔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요. 그냥 괜히 투정 한 번 부려본 거예요. 후후.” 한껏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자, 임한나는 나긋이 고개를 젓고는 상냥한 눈웃음을 보였다. 그녀의 장난에 나 또한 싱겁게 웃어주었다. “투정? 갑자기 왜 그래. 네가 그러니까 조금 낯설다.” “어머. 왜요? 저도 엄연한 여자라고요. 힘들 때는 누구에게 하소연도 하고 싶고, 투정도 부리고 싶어진답니다.” “응? 힘들다고?” “아.” 나는 임한나가 흘린 말을 놓치지 않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한순간 실수했다는 얼굴을 보이더니 이내 가냘픈 손으로 고운 입술을 가렸다. “왜? 어떤 문제라도 있는 거야?” “음…. 그게….” 임한나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듯 보였지만, 지금 상황은 엄연한 전시 상황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작아 보이는 문제도 커다랗게 번질 소지가 있기 때문에 꼭 들을 생각이었다. “아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고요….” “한나야. 그러면 말해봐. 왜? 뭐가 힘든 거야?” 임한나는 어설프게 화제를 넘기려고 했지만, 나는 그것을 단칼에 잘라버렸다. 그녀는 한참 동안 내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방금 전 내 말투에서 무조건 듣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느꼈는지, 결국 서서히 입술이 열리는 게 보였다. “그게…. 아무래도 곧 출병인 만큼…. 부대별로 궁수 클래스들끼리 모이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그렇겠지. 그런데 왜?” 임한나는 내 재촉에 살며시 입술을 내밀고는 갑자기 푹 고개를 숙였다. 뭔가 굉장히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그러더니 이내 그녀답지 않은, 매우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한 번씩 모일 때마다…. 자꾸만 부담스러울 정도로 시선이 쏠려서요…. 특히 남자들한테…. 모임이 끝나면 치근덕대는 사람들도 많고….” “?” 뭔가 두서가 없는 말에, 나는 아주 잠시 동안 임한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의문에 살짝 고개를 기울인 순간, 그녀의 옷차림이 시야에 들었다. 임한나는 기본 상하의로 전신을 덮는 '북쪽의 겨울 타이츠'를 입고 있었는데, 타이츠인 만큼 몸에 착 달라붙어 여체의 굴곡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살짝 누르면 터질듯한 가슴의 볼륨. 그리고 아래로 이어지는 하의는 탱탱하고 탄력적으로 보이는 엉덩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더구나 예전에 백서연이 나에게 오른팔을 잘린 것으로 인해, 타이츠의 오른팔을 덮는 부분은 아예 없어진 상태였다. 그 결과 훤히 드러난 임한나의 살결은 아찔하리만치 새하얀 눈부심을 발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문득 임한나의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날씬한 백서연이 입었을 때도 조금 끼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녀가 입었으니 어떻겠는가. 다행 중 불행…. 아니 불행 중 다행은 타이츠가 새까만 검은색이고, 겉에 위그드라실의 나뭇잎 옷을 걸쳤다는 것이다. 만일 타이츠가 조금 더 밝고 드러나는 색이었다면…. 어쩌면 가슴에 돌출된 부분이나, 아니면 아래에(?) 세로로 금간 곳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고연주가 그렇게 입었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임한나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얼굴은 상냥한 미인상이었고, 풍기는 분위기는 고아한 기품을 뿌리는 여성이었다. 그런데 몸은 어딘지 모르게 야하다는 느낌을 준다. 분명히 언밸런스 한 미(美)였지만, 나는 그런 임한나에게서 자못 신선한 매력을 느꼈다. 해서,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그때였다. 다시금 시선이 임한나의 몸을 타고 올라가는 순간, 문득 나를 빤히 응시하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 한순간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이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재빠르게 계산하려는 순간이었다. “시, 싫어요.” “으, 응?” 이윽고 임한나는 잔뜩 부끄러운 얼굴을 하고는 양팔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듯 천천히 감싸 안는다. 그리고 수줍은 눈초리와 함께 시선을 바닥에 꽂더니 발개진 얼굴로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 그렇게 빤히 보시면…. 싫어요….” “흠, 흐흠.” 나는 반사적으로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얼른 시선을 돌린 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입을 열었다. “좀…. 가릴 수 있는 로브 하나 사는 게 낫겠다.” “…네.”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자, 조용한 대답이 이어진다. 하지만 나와 임한나의 사이를 감도는 공기는 여전히 부자연스럽고 어색했다. * “흐응~?” 고려의 클랜 하우스로 향하던 도중이었다. 문득 옆에서 익숙한 비음이 귓가를 타고 흘러 들어왔다. 아까부터 볼을 콕콕 찌르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결국 참지 못해 흘끗 곁눈질을 하자,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따라오는 고연주가 보였다. 나는 죄진 사람처럼 재빠르게 시선을 돌렸지만, 일순 그녀와 눈을 마주쳤던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흐~응~?” 그러자 더욱 깊이 있게 들리는 비음. “이상해. 너무 이상해.” “…….” “왜 내 여보 야랑 한나의 분위기가 그렇게 뜨끈~뜨끈~했던 걸까?” “사용자 고연주.” 계속해서 이어지는, 혼잣말을 빙자한 나 들으라는 소리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고연주의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사실상 나를 위기에서(?) 구해준 인물은 바로 고연주였다. 서로 시선을 피한 채 한창 어색했던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즈음, 어디선가 그녀가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고려 로드가 나를 호출했다는 말을 전해주었고, 나는 그것을 핑계 삼아 탈출할 수 있었다. 물론 눈치 백 단인 고연주가 그 상황을 보고 가볍게 넘어갈 리는, 천만의 말씀이요 만만의 콩떡이었다. 이윽고 간단한 인증을 거치고 본관 안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최대한 태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까 잠깐 듣기는 했는데, 고려 로드가 나를 호출했다고 들었는데요.” “네! 맞아요!” “고연주.” 대답하는 고연주의 음색에는 일부러 호들갑을 떠는 티가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한 번 더 나직이 부르며 얼른 돌아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녀는 배시시 웃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쯧. 아무튼 혹시 어떤 이유로 불렀는지 알 수 있을까요? 갑작스러운 호출이라 영 감이 안 잡히네요.” “응…. 글쎄요? 일단은 서문 부대 지휘권 자들의 전체 소집이라고 듣기는 했는데…. 뭔가 부탁할 것이 있다는 투로 얘기하는 것 같기는 했어요. 아마도 조만간 출병에 관련한 일이라 생각되는데요.” 나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머릿속을 맴돌던 가벼운 생각은 버리고 깊은 상념에 잠겼다. 완벽히 녹아 들었다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어찌됐든 머셔너리의 추가 편성도 거의 끝난 상태였다. 그리고 얼마 전 최종 준비가 끝났다는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막바지에 접어든 게 아니라, 완전히 끝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조만간 도시를 나가는 일밖에 없기 때문에, 고연주의 말은 확실히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러고 보니 출정식과 관련해서 이벤트 하나를 벌일 생각이라는데….” “출정식이요?” “네. 아. 다 왔네요. 잠시만요. 제가 문을 열어드리겠어요.” 언제 도착했는지, 어느새 나와 고연주의 앞에는 회의실이 문이 서 있었다. 상단 중앙 부분에 '지휘통제실'이라고 적혀있지만, 그냥 말만 그런 거지 회의실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출입 제한이 걸려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이윽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방 내부에 8명의 사용자가 이리저리 퍼져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들 또한 내가 들어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대다수가 문 쪽 방향을 돌아보았다. “오. 이제 오셨네요. 오랜만에 봅니다! 머셔너리 로드!” “여! 김수현!” 그때, 낯설지 않은 사용자 둘이 일어나 나를 반갑게 부른다. 언뜻 고개를 돌리니 '10강' 서진우(고려 클랜)와 '부랑자 학살자' 김덕필(리버스 클랜)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교관을 할 때 제법 친하게 지냈던 터라, 아는 체를 하는 게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이야. 너 진짜 오랜만이다. 너 사흘 전에 왔다면서?” “예.” “그런데 어떻게 얼굴 한 번 보는 게 힘드냐. 편성됐다는 소식만 달랑 보내고 말이야.” 김덕필은 호칭과는 어울리지 않는, 벙글벙글한 낯빛으로 내게 걸어오기 시작했다. 불현듯 혹시 이러다 또 연초를 털리는 게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 그때였다. 조용히 보고만 있던 나머지 6명의 사용자들 사이에서, 3명의 사용자가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서진우와 김덕필은 이미 2회 차에서 한 번씩 본 이들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6명은 이번에 처음 보는 사용자들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낯설지만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익숙했다. 기억에 있는 이들이었다. '내게는 부탁이고…. 지휘권 자 소집이라고 했겠다?' 이 말인즉슨. 지금 이곳에 있는 나머지 6명은 앞서 내가 서문 부대의 현황에 대해서 파악할 때 보았던, 명성 높은 사용자들 중 일부일 것이라는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문득 범상치 않은 기세를 내뿜는 두 명의 남성과 한 명의 여성이 차분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더니 이윽고 고연주의 앞에 선 3명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보고 싶었습니다. 그림자 여왕님.” “간만에 뵙습니다. 사용자 고연주.” “오랜만에 뵈어요. 연주 언니.” 각각 인사말은 달랐지만, 말투에는 하나같이 경외 또는 반가움이 깃들어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잠시 동안 그들을 바라보다가,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 작품 후기 ============================ * Normal 클래스 옆에 적힌 내용은 '칭호'를 뜻합니다. 오늘 추석이라서 외갓집에 다녀왔습니다. 간만에 친척들을 보니 많이 반가웠습니다.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얘기도 나누었지요. 집필하려고 가져간 울트라 북이 사촌 동생들 차지가 된 것은 조금 에러였지만 말이죠. 하하하. 음. 다음 회에 드디어 출정을 하게 되네요. 제가 항상 챕터를 나누는 4회 안으로 맞출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여러분들 많이 피곤하시죠? 오늘 뜨거운 물에 몸 좀 녹이시고 맥주 한 캔 하고 주무세요! 『 리리플(326회) 』 1. yjung : 1등 축하합니다. 하하. 이미 지났지만, 추석 잘 보내셨으리라 믿습니다! 2. 치우우현 : 아쉽지만, 서막은 다음 회 입니다. 하하. _(__)_ 앞으로 나올 중요한 인물들이 있어서요. 3. 輝雅 : 예. 신상용. 이번에 확실히 분발할 생각입니다. 많은 기대 부탁합니다! 4. 유온. :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모델이고 키도 크고 시원시원한 외모! 그분은 어디 사는 누군가요! 부럽네요. ㅜ.ㅠ 5. 능수버들 : 첫 구상은 1/3이었지만 지금은 확실히 바뀐 상태입니다. 하하하. 『 리리플(327회) 』 1. 데슈카르 : 1등 축하합니다. :) 저 전부터 궁금했는데요, 요시! 그란도시즌! 이게 무슨 뜻이에요? 2. 파뱐 : 브라콤 소재는 충분히 우려먹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슬슬 가라앉힐 필요가 있지요. ㅋㅋㅋㅋ. 3. 석양s : 감사합니다. 제가 정말 어지간하면 그대로 올리겠는데, 열 번 스무 번 여러 각도에서 아무리 읽어봐도 그냥 설정 집을 읽는 기분이더라고요. 그래서 차후 내용 묘사를 통해 드러내는 게 낫겠다는 판단에 과감히 날려버렸습니다. 앞으로의 내용을 통해 확실히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니면, 궁금하신 부분을 질문하시면 최대한 성실히 답변하도록 하겠습니다. _(__)_ 4. 임지수12 : 아니요. 군대도 다녀온 신체 건강한 남자입니다. 정말이에요. 5. 천냥보은 : 차 구매하신 거 축하합니다. 너무 부러워요. ㅜ.ㅠ 저도 얼른 차를 구매하고 싶지만, 장롱 면허랍니다. 하하.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49 / 0933 ---------------------------------------------- 전조 : 패, 승, 패, 승, 승 첫 타깃은, 고연주의 앞에 가장 먼저 달려 나오다시피 한 남성 사용자였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이찬희(3년 차) 2. 클래스(Class) : 진혼의 암살자(Secret, Assassin Of Requiem,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아사신(Assasin, Clan Rank : A Zero) 5. 진명 · 국적 : 죽은 사람들을 위한 기도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5) 7. 신장 · 체중 : 176.3cm · 63.7kg 8. 성향 : 중립 · 중용(True · Neutral) [근력 88] [내구 82] [민첩 96] [체력 84] [마력 94(+2)] [행운 80] (능력치 포인트가 0포인트 남은 상태입니다.) < 능력치 비교 > 1. 고연주 : 536 / 600 (능력치 포인트가 0포인트 남은 상태입니다.) [근력 89] [내구 90] [민첩 97] [체력 85] [마력 93] [행운 82] 2. 이찬희 : 524 / 600 (능력치 포인트가 0포인트 남은 상태입니다.) [근력 88] [내구 82] [민첩 96(+1)] [체력 84] [마력 94] [행운 80] '괜찮네.' 홀 플레인에서 '강하다.'라는 의미는 클래스, 능력치, 능력(고유, 특수, 잠재)의 조화로 이루어진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찬희의 클래스와 능력치는 합격선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어서 나머지 둘을 보려고 하는 순간, 나는 잠시 제 3의 눈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가까이 다가온 김덕필이 나를 향해 손을 불쑥 내밀었기 때문이다. “담배 좀.” “…….” 한순간 가운데 손가락을 살포시 얹어줄까도 생각해봤지만, 나는 곧바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얌전히 연초 한 대를 꺼내어 휙 던져주었다. 하지만 김덕필은 마치 돌고래와 같은 몸놀림을 보이더니 이내 허공에 뜬 연초를 입으로 잡아채는 묘기를 선보였다. “나이스 캐치!” 이윽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든 채 유유히 문을 향하는 김덕필을 보며, 나는 잠시 동안 할 말을 잊고 말았다. “하하. 예전에 아카데미에 있을 때부터 느낀 건데, 사용자 김덕필은 머셔너리 로드가 무척 마음에 든 모양입니다.” 그때 어느새 다가왔는지, 문득 등 뒤로 서진우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나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곤 심드렁히 입을 열었다. “아 예…. 그런데 고려 로드가 안 보이시는군요. 볼 일이 있다고 하시던데.” “아. 방금 전까지 계셨는데,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곧 돌아오신다고 하니 잠시만 기다리시는 건 어떨까요? 전부는 아니지만 마침 다른 분들도 계시니까, 이 기회에 안면도 익혀놓을 겸 말이죠.” 자리에 없다. 그래서 생각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였던 건가. 서진우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비어있는 자리에 대충 앉은 후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왕 기다리기로 한 거, 다른 사용자들의 정보를 살피는 알찬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해서, 나는 아까 보다 말았던 세 명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조용히 서 있는 남성은 아까 봤던 대로 '진혼의 암살자' 이찬희였다. 고연주를 뜨거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남성은 '닥터' 손시혁, 그리고 신나는 얼굴로 수다를 떠는 여성은 '간호사' 강예빈이었다. 고연주와 한창 해후를 나누는 것으로 보아 넷이 제법 친분이 있음을 추측할 수 있었다. '이찬희는…. 아, 적이었지. 나중에 고연주를 따라갔던 걸로 알고 있고…. 손시혁과 강예빈은 2인 1조 활동으로 유명해진 애들이었나? 얘넨 기억이 조금 흐릿한데….' 나는 손시혁과 강예빈의 사용자 정보를 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둘은 내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을 때는 거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던 이들이었다. 자세히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아마 사망했던 게 아닐까 생각이 되었다. 도대체 무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넷의 수다는 끊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잠깐 입맛을 다시고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타로 카드를 만지는 신비한 분위기의 여인과, 그 옆에 죽은 듯 고개를 수그린 음침한 남성을 살펴볼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응?' 문득 왼편에서 누군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눈길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긴 생머리를 늘어트린 한 명의 여인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와 시선을 마주쳤음에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계란형의 갸름한 얼굴에 꼭 다문 도톰한 입술이 돋보인다. 코는 높지만 끝은 둥그렇다. 거기에 가늘고 맵시 있는 허리와 길고 매끈하게 뻗은 다리를 보면, 분명히 날씬한 느낌을 주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단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바로 눈동자와 분위기였다. 여인의 눈은 세라프를 연상케 할 정도로 고요했지만, 눈매가 살짝 치켜 올라가 있어서 그런지 약간 화나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조화를 이루자, 왠지 모르게 거만하고 냉랭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흡사 차가운 북풍한설을 보는 느낌이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남다은(4년 차) 2. 클래스(Class) : 검후(Secret, Queen Of Sword,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천둔(天屯, Clan Rank : B Plus) 5. 진명 · 국적 : 검의 여왕, 남성 혐오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4) 7. 신장 · 체중 : 168.5cm · 48.5kg 8. 성향 : 냉정 · 상처(Cool · Scar) [근력 93] [내구 78] [민첩 95] [체력 91] [마력 94] [행운 93] (능력치 포인트가 0포인트 남은 상태입니다.) < 능력치 비교 > 1. 김수현 : 564/ 600 (능력치 포인트가 자유 능력치 6포인트 남은 상태입니다.) [근력 96(+2)] [내구 92] [민첩 98] [체력 92(+2)] [마력 96] [행운 90(+2)] 2. 남다은 : 543 / 600 (능력치 포인트가 0포인트 남은 상태입니다.) [근력 93] [내구 78] [민첩 95] [체력 91] [마력 94] [행운 92] 나는 침음을 흘릴뻔한 것을 간신히 삼킬 수 있었다. 1회 차서 위명은 익히 들었지만, 장비의 보조를 받지 않았음에도 이 정도의 능력치를 보인다는 것은 확실히 눈이 번쩍 뜨일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얘는 내구 능력치가 발목을 잡네.' 마치 체력 문제로 허덕일 때의 나를 보는 것 같은 느낌에 절로 쓴웃음이 지어진다. 아무튼 그것을 제외하면 나름대로 대단하고, 궁금한 것도 많은 여인이었다. 내 '검의 주인'이라는 진명과 비교해 '검의 여왕'이라는 진명도 궁금했고, 성향 중 '상처'가 표기된 것에도 호기심이 일었다. 남다은은 한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내가 허공을 쳐다보는 것을 시선을 피했다는 것으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실상은 사용자 정보를 본 것이지만 말이다. 벌컥. “이런. 약간 늦었군.”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보자 고려 로드가 도착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머셔너리 로드는 계시는가?” 이어진 물음에, 나는 얼른 제 3의 눈을 끄고 몸을 일으켰다. * 고려 로드는 들어오자마자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지휘자 소집의 해제를 선언했다. 지금 이곳에 모이기로 한 몇몇 클랜 로드들에게 개인적으로 사정이 생겼다는 게 이유였다. 다른 부대와 연계해서 편성에 문제가 있다는 등 뭐라고 얘기를 하기는 하는데, 뭔가 에둘러 말한다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동부에 대해 불만이 있다면 바로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마음이 급한 것은 알지만,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이 너무 허술하고 구멍이 많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당장 지휘자 소집을 해제하는 것만 봐도 아직 명령 체계가 명확히 잡혀있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내주고 있었다. '왜 첫 전투에서 동부가 대패를 당했는지 알 것 같군.' 물론 이 불만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비교에서 나오는 불만이었다. 1회 차 시절 한소영은 전쟁 하나는 정말 철저하게 준비했다. 과감할 때는 한없이 과감했지만, 일단 상황과 여건만 된다면 굉장히 정돈된 과정을 보여주는 게 바로 '철혈의 여왕'이었다. “정말 미안합니다. 머셔너리 로드.” 초췌하다 못해 눈 그늘이 진하게 배인 고려 로드를 보며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하기야 한소영이 한창 날아다니던 시절은, 이미 사용자들간에 '전쟁'이라는 개념이 확립되고 익숙해진 시절이었다. 지금의 사용자들은 아직 '원정'에 익숙해져 있는 만큼, 경험 부족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되었다. “막상 출정 일이 다가오니까 정신이 없어서 말입니다. 준비는 다 끝냈는데 왜 자꾸 문제가 터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애초에 철저하게 준비를 하던가. 나는 목구멍 끝까지 튀어나오려는 말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괜찮습니다. 항상 바쁘신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하하.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군요. 그래도 변명을 해보자면, 이효을이 건의를 제안해서 그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있던 중입니다.” “건의요? 준비는 거의 다 끝난 것 아니었습니까?” “아. 그렇기는 한데 갑자기 변수를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하더군요. 유능한 사용자들을 따로 뽑아서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고 해서…. 그런데 그러려면 지금 편성에 조금 손을 대야 해서 그렇지요. 함부로 사용자들을 차출하면 최대한 맞춘 균형이 어그러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윽고 고려 로드는 깊이 생각하는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이내 낮은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 둘이서만 있으니 하는 말인데. 솔직히 저도 이번 전쟁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효을이 말하는 바도 어렴풋이 알 것 같고요. 개인적으로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아니지만…. 이효을의 말을 들어서 지금껏 손해본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염두에 둘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약간 의외의 기분을 느끼며 고려 로드를 응시했다. 사실상 그는 이번 전쟁에서 죽을 운명이었다.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동부는 대패 후 적들에게 추격을 받게 되는데, 추격을 막는 역할에 고려 로드가 참가했다고 한다. 사후 세인의 고려 로드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괜찮았다. 조금 직선적이고 우직한 면은 있지만 그래도 클랜 로드로서의 그릇과 기량은 가지고 있었다고. 어떻게 보면 외부적으로 드러난 면은, 나와 약간 비슷하면서도 굉장히 다른 인물이었다. “일단 그 문제는 지금 당장 결정할 수가 없는 노릇이기에,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지금 당장은 출정이 급해서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를 호출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아. 하도 정신이 없다 보니 본론을 깜빡 잊고 있었군요. 실은 머셔너리 로드를 따로 남긴 이유는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부탁이요?” 내 반문에, 고려 로드는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부탁은 다름 아닌 백서연에 관해서입니다. 그녀를 잠시 양도해주신 것에 대해서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수많은 클랜들이 내부의 첩자를 처리할 수 있었으니까요.” “별말씀을. 아무튼 잘 처리됐다면 다행이네요.” “그렇지요. 그럼 원래대로라면 다시 돌려드려야 하는 것이 맞지만. 제가 알기론 백서연이 이스탄텔 로우의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살려둘 생각은 없고, 가능하다면 출정 전에 처형할 생각입니다.” 나는 평소 생각하던 대로 대답했다. 그랬을 뿐인데, 갑자기 고려 로드의 안색에 어려있던 피로가 약간이나마 가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윽고, 고려 로드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것 참 다행이군요. 그러면…. 혹시 이벤트 좋아하십니까?” '다행이라고?' 고려 로드의 뜬금없는 말에, 나는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다. 눈앞의 그는 미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 시간은 흘러, 어느덧 드디어 출정식을 가지는 날이 밝았다. 개인적으로 아직도 준비가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황금 사자의 뻘 짓으로(정확히는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랐기에.) 억지로 출병을 앞당긴 것이다. 웅성웅성. 웅성웅성. 웅성웅성. 출정식을 치르는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살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동부 도시 전체에서 모여든 사용자들의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급조한 티를 팍팍 풍기는 중앙 광장에 설치된 제단 주변으로는, 이번 전투에 참여하는 16000명의 사용자들은 소속된 부대에 따라 나름의 오와 열을 맞추고는 있었다. 하지만 다른 장소는 구름 인파가 몰린 탓에 발 디딜 틈도 없는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그때, 갑자기 엄청난 환호가 사방을 뒤흔들었다. 환호의 중심에는 바로 고려 로드와 그를 뒤따르는 수행인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한 명의 여성 사용자를 끌고 오는 중이었다. 이윽고 정 중앙에 도착한 고려 로드는 곧바로 제단에 올랐다. 나는 얼른 고개를 빼어 제단을 살폈다. 그러자 그곳에서 수행인원들이 끌 고온 백서연을 중앙에 꿇어앉히는 걸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약간의 준비에 시간을 소요한 후 고려 로드의 출정 연설이 시작되었다. - 친애하는 동부 사용자 여러분. 우리는 지금껏 많은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고려 로드의 말문이 열린 순간, 소란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 긴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다시 이어지는 환호. 음성 증폭 마법을 이용했는지, 고려 로드는 그 환호 속에서도 또렷한 발음으로 연설을 이어갔다. - 지금 상황은…. 조용히 연설을 듣고만 있자, 문득 오른편에서 서 있던 고연주가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수현. 왜 거절했어요?” “예?” “이벤트요. 제법 주목 받을 수 있었을 터인데.” “글쎄요. 이벤트 자체는 상관없지만, 주체가 되는 건 별로 내키지가 않았습니다.” 나는 간단히 대답하고는 중앙에 고개를 숙인 백서연을 응시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척 봐도 그녀의 상태는 엉망에 가까웠다. 이리저리 찢겨진 옷과 산발이 된 머리카락. 그것을 보자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여러 클랜에 양도되는 동안 수많은 사용자들의 손을 탔을 것이다. '성별'에만 초점을 맞추면 백서연은 확실히 매력 있는 여성이었으니까. - …때문입니다. 그러면 잠시 이곳을 봐주십시오. 지금 여기에 꿇어앉아 있는 부랑자가 누군지는 알고 계실 겁니다. 이 부랑자는 북 대륙을 혼란에 빠트리려 한 장본인 중 한 명인 백서연입니다. 우우우우우우우우! - 하하. 백서연이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는, 예. 다들 아시다시피…. 지금 한창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머셔너리 로드. 사용자 김수현이 사로잡아왔기 때문입니다. 잠시 이 자리를 빌어, 머셔너리 로드에게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그 순간 주변을 둘러싼 여럿의 시선이 잔뜩 꽂히는 게 느껴졌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열화와 같은 연호. 오오오오오오오오! 김수현! 김수현! 김수현! '뭐 어쩌라고.' 내 이름 부르지마. 김수현! 김수현! 김수현! 그만해. 제발. “오. 우리 여보 이름 부른다. 수현. 손이라도 흔들어줘요.” “싫습니다.” 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내가 살짝 불편한 기분을 느끼는 것에 반해서, 고연주의 음색에는 신난다는 기색이 잔뜩 어려있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내 이름을 연호하는 것도 조금씩 잦아들 즈음. 그제야 나는 간신히 제단에 집중할 수 있었다. 어느새 고려 로드는 백서연에게로 다가가 햇살을 받아 번쩍이는 검을 빼어 든 상태였다. - 우리는 이번 전쟁에 승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럼 출정에 앞서,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묻겠습니다. 백서연은 부랑자입니다. 이 부랑자를 우리는 어떻게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 맞습니다. 흔히 어디 클랜에서는 부랑자를 교화한다, 다시 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부랑자는 사용자들의 적이고, 무조건 말살해야 할 명백한 주 적입니다. 가까운 예를 들어보면, 부랑자 말살 계획에 대해서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말입니다…. 깨알 같은 황금 사자 클랜 디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 로드의 연설은 제법 설득력이 있었는지, 사용자들의 죽이라는 연호는 더욱 거세어지고 있었다. 그 연호에 발맞춰 그가 검을 서서히 올리는 것이 보인다. - 그럼 지금부터.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 동부 도시의, 바바라의 출정을 공식적으로 선언합니다! 우오오오오오오오! 그리고 이어진 출정 선언과 동시에, 사용자들의 열광이 최고조로 달한 순간. 고려 로드는 들었던 검을 단칼에 내리쳤다. 푸확! 깔끔한 일격이었다. 백서연의 머리가 잠시 허공을 나는가 싶더니 이내 바닥으로 데굴데굴 구른다. 그녀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 흩어진 가느다란 피 분수가 허공을 아름답게 휘날렸다. - 지금 바로 동문 부대부터 출발하겠습니다. 다들 위치로! 백서연은 처형당했다. 백서연의 공개 처형과 함께, 비로소 바바라로의 본격적인 출병의 시작을 알린 것이다. ============================ 작품 후기 ============================ 역시 의도적으로 전개 속도를 올리니 고질적인 문제가 드러나네요. 중간중간이 비어버린다는…. -_-a 그래도 생략에는 후회가 없어요. 앞으로 전쟁을 진행하면서 다시 언급할 수 있는 내용이니 그때 보충하면 될 것 같거든요. 아마 하나씩 세세하게 적어나갔다면…. 아직 편성에 멈춰있겠지요. ㅋㅋㅋㅋ. 이번 챕터는 바바라로의 여정을 보여주는 내용으로 구성할 생각입니다. 3주를 3회로 압축해야 하는 만큼 또 골머리를 싸매야겠네요. :D 『 리리플 』 1. 데바란 : 1등 축하합니다! 하하. 수고는요.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2. 털보아제 : 저도 1등은 무리에요. 저는 진작에 포기했습니다. 포기하면 편합니다! 암요! 3. 요수리 : 왜용. ㅋㅋㅋㅋ. 강예빈. 이름 예쁘잖아요. ㅋㅋㅋㅋ. 4. 유온. : 원래 검후 이름도 수현이었다요. 동명으로 하려고 했다가 중간에 바꿨다요. 하하하다요. 이 말투 참 마음에 든다요. 저도 쓰게 해주세요다요. 5. 겜뭰 : 후후후후후후후후. 이 코멘트를 기다렸습니다! 이미 구상을 끝냈거든요! 과연 언제 나올까요? 그것을 비~밀~!(퍽퍽퍽퍽!) @_@ 6. 엘네이드 : 엇. 저 여자 아니에요. 남자입니다. 네. 그렇고말고요. 그리고 메모라이즈는 저는 600회로 예상하는데, 독자분들은 최소 800회라고 하시더라고요. 흠. 7. 석양s : 이번 전쟁에서 뇌제의 본 모습을 드러낼 예정입니다. 이제 동생 바보는 적당히 우려먹을 생각이거든요. :) 8. 천겁혈신천무존 : 자, 잠시만요. 제가 다 이해합니다. 그런데요. 백한결은 남자입니다. 왜 수현이가 남자를…. -_-;;;; 9. hohokoya1 : 아하하. 언젠가 완결 전에는 꼭 연참으로 독자분들의 뒤통수를(?) 치겠습니다! 10. 치아바타 : 그럼요. 맞는 말씀이세요. 꼭 주인공만 하렘일 필요는 없죠. 다른 남자도 하렘이 있을 수 있고, 다른 여자도 역 하렘이 있을 수도 있지요. :) 아. 유정이는 안현에게 줄까 생각 중입니다. 그러면 전의 회상 내용을 삭제해야 해요. ㅎㅎㅎㅎ.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50 / 0933 ---------------------------------------------- 전조 : 패, 승, 패, 승, 승 바바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방법은 직선 코스를 이용하는 것이다. 실제로 동부의 이동 경로를 보면 거의 직선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도착까지의 예상 소요 시간은, 순수 이동에 걸리는 시간만 따져 약 3주 정도로 잡은 상태. 그리고 지금, 동부는 '비경(祕境)의 황야'를 지나고 있었다. '비경의 황야'는 프린시카를 나오면 가장 먼저 맞닿게 되는 지역으로, 한때 유적의 보고로 불렸던 곳이었다. 지금까지 이곳에서만 발굴된 유적만 총 6개가 넘을까?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사용자들이 몰림으로써 급속한 안정화가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관심도 점차 시들해졌지만…. 왜, 이런 말도 있잖은가. 등잔 밑이 어둡다고. '비경의 황야'는 매우 넓고, 또한 매우 방대하다. 이곳을 지나쳐 다음 지역으로 넘어가려면 평균 11일이 걸릴 정도이니 그 면적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넓은 곳이기도 했지만, 중요한 건 너비가 아니었다. 내 기억에 따르면 '비경의 황야'에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곳이 두 곳이나 남아있었다. '잃어버린 낙원, 그리고 발할라의 탑.' 처음에는 이곳에 자리를 잡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결국 '마법 도시 마지아'에 저울이 기울긴 했지만, '잃어버린 낙원'과 '발할라의 탑' 또한 꼭 선점해야 할 유적들이었다. “행군 정지!” 그때, 전방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상념에 빠져있던 머리를 깨우자, 이곳 저곳에서 거칠게 숨을 내쉬는 호흡들이 느껴진다. “중간 지점에 도착했습니다! 잠시 이곳에서 대 휴식을 취하겠습니다!” 다시금 외침이 터져 나오고, 그와 동시에 주변의 사용자들이 쿵, 소리가 날만큼 짐을 내려놓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꽤나 힘에 부치는 모양이군.' 현재 동부의 행군 속도는 강행군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빠르고 신속했다. 참가한 사용자들의 수준이 높기는 하지만, 고려 로드의 말에 따르면 '비경의 황야'를 7일만에 돌파하는 게 1차 목표라고 한다. 그러니 체력이 달리는 사용자들이 일부 나오는 것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튼 아직 초반인 만큼 어느 정도의 강행군은 용납할만한 상황이었다. 문득 애들을 찾아가볼까 생각했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잘 적응하고 있는가 살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자꾸 찾아가면 해당 부대에 소속된 사용자들이 이상한 시선을 보낼 여지가 있었다. 해서, 나는 적당한 자리를 찾을 생각에 바깥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을 바삐 돌아다니던 한 명의 사용자가 얼른 다가와 말을 걸었다. “머셔너리 로드. 지금 휴식 겸 식사도 같이 할 것 같은데요.” “저는 괜찮습니다. 속이 약간 안 좋아서요.” “아. 속이 안 좋으십니까? 많이 안 좋으시면 제 4부대에 다녀오겠습니다.” “굳이 사제까지 호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그냥 한적한 곳에서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너무 멀리 나가지는 말아주십시오.” 사용자의 말에 나는 걱정 말라는 의미로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다시 총총히 걸음을 옮기는 사용자를 보다가,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나는 곧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은 채 탁 트인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드넓은 들판인 만큼 인적이 드문 곳을 찾기도 어렵겠지만, 지금은 엄연한 전시 상황이었다. 휴식 때 눈치를 보면서 자리를 이탈한 필요는 없어도, 적당히 시선이 닿는 곳에서 멈추는 게 좋은 모양새였다. “후유. 이제 좀 살겠군.” 버려진 들판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바위에 엉덩이를 붙인 후 나는 크게 기지개를 폈다. 주변에 포진한 사용자들의 수가 워낙 많아서 그런지, 행군 도중 몇 번이나 답답함을 느끼곤 했다. 더구나 시도 때도 없이 제 3의 눈으로 사용자들을 살피다 보니 이제는 눈마저도 아플 지경이었다. 그나마 꼬박꼬박 주어지는 휴식 시간에 피우는 연초 한 대가 요즈음 유일한 낙일 정도였다. “오. 머셔너리 로드. 여기 있었군. 나 연초 한 대만.” “…….” 왜 갑자기 “다 좋은데, 자네만 없었으면 좋겠군.”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걸까? 막 연초 하나를 꺼내려 했지만, 나는 뚱하니 고개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언제 다가왔는지 벙글벙글 웃는 낯빛으로 손을 내밀고 있는 김덕필을 볼 수 있었다. “연초 없습니다.” “어? 진짜?” “예. 다 떨어졌네요. 누구 덕분에.” “아우. 나도 돛댄데. 쩝쩝…. 어쩔 수 없지 뭐. 그럼 이거 피워.” 김덕필은 무척 아쉬운 얼굴로 뒤통수를 벅벅 긁더니 이내 엄지 손가락만한 굵기의 연초를 내게 건네주었다. '돛대를 준건가?' 나는 약간 머쓱한 마음에 헛기침을 했다가, 품 안에서 손에 쥐었던 연초를 건네주었다. 김덕필이 건네준 것보다 굵기는 훨씬 얇았지만 길이는 훨씬 긴 연초였다. “…헐.” “실은 하나 있었어요.” 그렇게 잠시 동안 서로를 멍하니 응시한 우리는, 이윽고 사이 좋게 연초를 태우기 시작했다. “아차. 머셔너리 로드. 그 소식 들었어? 드디어 북부와 남부에서도 행동을 개시했다고 하던데.” “예. 어제 회의에서 들은 것 같습니다.” “아 맞다. 어제 회의했었지. 염병할. 뭔 놈의 회의를 한답시고 하루가 멀다 하고 불러 젖히는 건지. 그냥 서 대륙이고 부랑자고 깡그리 조지면 끝나는 일인데.” 연일 개최되는 회의에 어지간히도 불만을 품은 듯, 김덕필은 바닥에 침을 탁 뱉으며 투덜거렸다. 그러더니 동의를 구하려는지 나를 보며 눈썹을 올렸지만, 나는 어깨만 으쓱였다. 그저 과연 '부랑자 학살자'라는 칭호를 가진 사용자답다고 생각하곤, 속으로 싱겁게 웃었을 뿐. “쩝쩝…. 어? 그런데 쟤는 왜 여기 있냐.” 그때였다. 내 시원찮은 반응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입맛을 다시던 김덕필은 갑작스레 눈을 휘둥그래 뜨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나 또한 의외의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면에 보이는 들판에는 '검후' 남다은이 들판을 가로질러 걷고 있었다. 남다은 또한 기척을 느꼈는지 설핏 우리를 돌아봤다가 이내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버렸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김덕필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여간, 성격은 여전하네.” “성격이라니요?” “몰랐어? 검후, 남다은. 남성 혐오증으로 유명하잖아. 그리고 뒤도 약간 구릿하고.” 성격이야 애당초 알고 있었기에 천연덕스럽게 물었지만, 뒤가 구리다는 말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긴데요.” “응. 그런가? 하기야 너는 0년 차니까….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이긴 한데….” 김덕필은 약간 뜸을 들이는 듯싶더니 이내 천천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사용자로써 검후라는 명성을 쌓고 있지만, 남다은이 원래 부랑자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거든.” 이것은, 1회 차를 활동한 나에게도 금시초문인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이어지는 김덕필의 말에 더더욱 귀를 기울였다. “지금이야 성격도 냉랭하고 남자를 엄청 싫어한다고는 하는데, 원래부터 그러지는 않았다고 하더라? 처음 홀 플레인에 입장했을 때는 성격도 꽤나 명랑했고,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수석을 차지할 정도로 재능이 있었다고 하더군.” “그런데 왜….” “나도 그게 의문이야. 분명히 우리 리버스 클랜에서도 오퍼를 넣었었는데, 수료하는 날 모든 오퍼를 거절하고 한 남자를 따라갔어. 모두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남자요?” 내 반문에, 김덕필은 다 태운 연초를 탁 튕겼다. “응. 이강산이라고, 너도 들어 봤으려나?” '변절자 이강산.' 나는 김덕필이 지칭하는 부랑자가 누군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추후 살인여단(Murder Brigade)의 한 축을 담당하는, 굉장한 실력자 중 한 명이었다. “지금 부랑자 놈들 중에서도 꽤나 이름이 알려진 놈이지. 사용자에서 부랑자로 변절한 후 나랑 몇 번 싸워보기도 했고. 그때마다 내가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달아났지만 말이야.” “그럼 남다은은 왜 지금 여기에….” “그렇게 홀연히 사라지고 나서…. 1년 정도 됐나? 아무튼 부랑자 몇 놈 모가지와 함께 갑자기 바바라에 나타났더라. 그때는 영문도 모르고 따라간 거라 해명을 했고, 다시 사용자로 활동하고 싶다고 하더군.” “그럼 전향한 걸로 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지금 엄연히 활동하는 클랜도 있으니….” 내 의견은 일견 타당했지만, 김덕필은 자못 심각해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글쎄. 그렇게 좋게 좋게 보기에는 애매한 게 있으니까…. 그리고 천둔 클랜을 말하는 거라면, 어차피 이번 강철 산맥 원정으로 거의 망했잖아. 그리고 그 클랜의 성격이….” 그때, 김덕필은 갑작스레 말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인상을 와짝 일그러뜨리곤 분연히 몸을 일으켰다. “망할. 쉴 틈을 안 주는군.” 한순간 갑자기 왜 이러는가 싶었지만, 나는 이내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저 멀리 사용자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한 명의 여성이 우리 쪽을 향해 열심히 뛰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정체는 이미 출발 때부터 몇 번이나 봤었던, 회의 소집을 알리는 전령이었다. “검후가 저쪽으로 갔다고 알려줘야겠군.” 이윽고 김덕필이 힘없이 중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는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 오늘도 역시나 회의와 행군이 반복이었고, 시간은 흘러 깊은 밤이 찾아왔다. 밤에는 행군을 할 수 없으니 당연히 잠을 자야 한다. 그에 따라 주변엔 근 5천명에 이르는 사용자들의 야영지가 건설된 상태였다. 나는 불침번을 서던 중 조용히 야영지 전체를 둘러보았다. 한밤중 밝게 돋은 달이 비추는 은빛은 불침번들의 시야가 미처 닿지 못하는 곳을 훤히 밝혀주고 있었다. 원정을 다닐 때는 항상 침낭을 사용했는데, 드넓은 들판에 가지런히 배열된 천막들을 보자 제법 장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닥! 타닥, 타닥! 문득, 어디선가 불을 피웠는지 모닥불의 불똥이 튀는 소리가 흘러들었다. “졸리면 주무시지 말입니다.” 그와 동시에, 옆에서 같이 불침번을 서던 사용자가 아기자기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흘끗 고개를 돌리자 동글동글한 얼굴에 살짝 젖살이 올라있는 귀여운 인상의 여성 사용자가 보인다. 말투가 제법 특이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나직이 대꾸했다. “별로 안 졸립니다.” “에이, 눈가에 졸음이 가득하신 게 보이지 말입니다.” “…….” “시, 실은 제가 조금 불편해서 그러지 말입니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여성은 더듬거리는 음색으로 대답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스스로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뭐가 불편한데요?” “저…. 머셔너리 로드신 것 같지 말입니다.” “예.” “다른 클랜의 로드들은 대부분 불침번을 서지 않으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조금 놀랍지 말입니다.” '뻥 치네.' 말은 저렇게 해도, 나랑 함께 서면 빡빡하게 서야 하니까 그게 불만이라는 소리였다. 나는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그건 잘못된 정보군요. 예를 들면 고려 로드께서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불침번을 거른 적이 없습니다.” “그, 그건 그렇지만. 다른 클랜 로드들은 알게 모르게 빼는 경우가 있지 말입니다.” “그거야 다른 사용자들 사정이고요. 저는 그럴 생각 없습니다. 그러니 이만 불침번에 집중하세요.” “…눼에.” 이름이 노유미라고 했던가? 그녀는 시무룩이 대답하고 나서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나는 지그시 눈을 감은 후 요 근래 연일 벌어지는 회의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비경의 황야'를 통과하는 것도 이제 서서히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까지 오는 동안 수번의 회의를 열었지만 아직도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는 의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바스락. '응?' 그때였다. “머, 머셔너리 로드.” “…….” 잠잠해지는 기미가 보이는가 싶더니, 다시금 입을 조잘거린다. “머, 머셔너리 로드! 뒤, 뒤에 누가 있지 말입니다!” “예…?” 하지만 이어진 여인의 말은 나를 놀라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리자, 등 뒤로 누군가 조용히 서 있는 기척이 느껴졌다. 솔직히 다른 생각에 빠져있었고, 마력 감지도 활성화하지 않은 상태이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내 기본 육감이 인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상대가 엄청난 실력자라는 소리였다. 나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실력자의 정체가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긴 생머리. 계란형의 갸름한 얼굴. 도톰한 입술. 가늘고 맵시 있는 허리와 기다란 다리. 그리고 차갑고 고요한 눈동자가 나를 직시하는 게 느껴졌다. “머셔너리 로드.” 목소리를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윽고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검후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잠시 얘기 좀 해요.” 이어진 남다은의 목소리는, 고저가 없고 냉기가 뚝뚝 묻어 나오긴 했지만, 분명히 아름다운 음색이었다. ============================ 작품 후기 ============================ 하하. 어제 이유정을 안현에게 넘긴다고 리리플을 달았다가, 폭풍 같은 코멘트를 받았습니다. 음.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일단 예전 애프터에 관한 내용은 이북 수정 진도에 닿았을 시 삭제할 예정입니다. 이것을 삭제하는 이유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며, 그 외의 이유는 없습니다. 즉 내용은 변함없이 그대로 가도록 하겠습니다.(확정이 아니라 아직 '생각 중'이라고 했는데 엄청난 반응이 왔네요. 하하하.) 다만 개인적으로 김수현 말고 다른 사람들의 로맨스도 써보고 싶네요.(1:1도 적어보고 싶고, 다른 남성의 하렘도 적어보고 싶고(예를 들면 김유현과 해밀 클랜원들.), 다른 여성의 역 하렘도 적어보고 싶습니다.) 아무튼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는 구상 변경이 없을 것입니다. 땅땅. PS. 오늘 내용 중에 스파이를 심어놨습니다. 『 리리플 』 1. Nodens : 1등 축하합니다. 드디어 1등을 하셨군요. 다시 한 번 축하합니다. 부럽네요. 저는 못하는데…. ㅜ.ㅠ 2. tawt : 쿠폰 감사합니다. 하하하. 항상 연참을 못해서 죄송할 뿐이네요. ;ㅅ; 노력해보겠습니다. 3. 명박짱의양양합일 : 이미 망한 클랜입니다. 검후의 위명이나 쌓아온 명성은 살아있지만, 실제 전력은 약간 처지는 곳이지요. 4. 초요 : 고민을 많이 해보았는데요. 그냥 3주 동안 가는 과정은 지루할 것 같고, 중간에 사건을 중심으로 묘사하는 게 좋겠다 싶어서요. 사건이 끝나면 바바라에 도착! 어떠신지요. :D 5. 오뭬 : 알겠습니다. 이유정 김수현꺼 하겠습니다. -_-a 6. 감자띱 : 안현 불쌍하잖아요. 그렇죠? 주 내용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가끔 그런 아이들의(?) 달달 한 내용도 써보고는 싶어요. 하하. 아무튼 이 부분은 제가 잘 생각하고 적도록 하겠습니다. 7. 시드엘 : 좋네요. 안현 + 백한결. 그렇게 둘은 금단의 사랑에 눈을 뜨게 되고 마는데…. 아. 농담입니다. 농담이에요. 농담 농담! :) 8. 석양s : 옳은 말씀입니다. 저도 김수현 하렘을 지향하고, 이미 하렘이나 다름없지만, 수십 명의 여자를 거느리는 문어발을 절대 사양이라서요. 병풍이 없는, 제가 조절해낼 수 있는 선에서 각자의 매력을 살릴 수 있는 정도로 그치는 게 가장 좋겠지요. :) 9. hohokoya1 : 아이고.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ㅜ.ㅠ 다음부터는 그런 코멘트 보시면 그냥 그러려니 하시고 넘어가세요! 제가 다 죄송하네요. _(__)_ 10.갸루루루루 : 네. 네이버에 찾아보니까 뜻이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차용했습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51 / 0933 ---------------------------------------------- 전조 : 패, 승, 패, 승, 승 회상 “저는 이번 안건이 별로 내키지 않는군요.” 타로 카드 마술사, 선율의 발언에 임시 회의소에는 고요한 침묵이 찾아 들었다. 그녀는 신비로운 빛이 감도는 눈동자로 모두를 둘러보고는 이내 현숙한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특별한 힘을 지닌 자들을 따로 모아 하나의 조를 만들고, 혹시 모를 변수에 대비한다. 이거…. 그냥 5분 대기조 같은데요?” 5분 대기조라. 어떻게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어조에 미묘하게 비꼬는 기색이 담겨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흠. 사용자 선율. 일단 도착해봐야 알 것 같지만, 경우의 수는 총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있다, 없다.” 선율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까닥이자, 고려 로드는 살짝 불편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요. 후자의 경우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전자의 경우라면 만일을 대비해야 합니다. 바바라는 북 대륙의 안방과도 다름없는 곳입니다. 그리고 객관적인 전력은 우리가 훨씬 우세하지요. 그럼에도 아직 나가지 않았다는 건, 뭔가 수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철저한 대비를….” “고려 로드? 무슨 말인지는 알아요. 그리고 대비하는 것도 좋게 생각해요. 하지만, 제가 문제 삼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랍니다.” 고려 로드의 간곡한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선율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던 도중, 문득 그녀의 사용자 정보가 궁금해졌다. “하는 건 좋아요. 하지만 왜 지금 각 제대(梯隊)를 맡고 있는 사람들까지 차출하냐 이거에요. 제가 알기로는 출발 전부터 편성에 관해 말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닌가요?” “음….” “도시를 떠난 지도 많은 시일이 흘렀어요. 그리고 이제 곧 중간 지점을 지나게 되잖아요. 저를 예로 들어보면, 이제 겨우 제대의 지휘에 익숙해졌는데 갑자기 조에 참가하라니. 백 번 양보해 저는 둘째 치고서라도, 현재 지휘를 따르는 사용자들에게도 안 좋은 인상을 심어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해요. 아무튼 정 안건을 시행하고 싶으시면, 현재 편성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시행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고 싶은 말을 거의 끝냈는지, 선율은 잠시 말을 멈추곤 느긋이 다리를 꼬았다. 그러더니 이내 농염함이 한껏 묻어나는 음색으로 말했다. “이런 말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당장 주변 분들만 봐도 조 하나 꾸리기에는 충분할 것 같은데 말이죠. 호호.” “씨발, 말하는 꼬락서니하고는. 재수없는 암퇘지 같은 년.” 그 순간 속삭이듯 흘러들어오는 앳된 음성에, 나는 옆으로 흘끗 눈길을 돌렸다. 이제 갓 17살, 18살쯤 되어 보일까? 내 옆으로 팔짱을 낀 채 앉아있는 리버스 로드가 보인다. 그녀는 타로 카드 마술사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살을 한껏 찌푸린 상태였다. 거기다 다리를 달달 떨고 있는 게, 척 봐도 발랑 까져 보이는 태도였다. 나는 다시금 선율을 응시했다. 그녀는 현재 부대 내 최고로 중요한 전력으로 평가 받는, 마법사 클래스들이 모인 제 3제대를 이끄는 입장이었다. 즉 선율의 말인즉슨 괜히 엄한 사람 차출하지 말고, 하릴없이 놀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잡으라는 소리였다. 그러니 리버스 로드가 이렇게 격하게 반응하는 이유도 어느 정도 이해할 만은 했다. 그녀는 제법 거대한 클랜의 로드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지휘도 맡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제대를 맡은 게 대단한 권력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정작 중요한 건 전쟁에서의 활약인데. 나는 속으로 픽 웃고는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선율(6년 차) 2. 클래스(Class) : 타로 카드 마술사(Secret, Tarot Card Magician,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마법의 탑(Magic's Tower, Clan Rank : A Plus) 5. 진명 · 국적 : 정숙한 요희(妖姬)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8) 7. 신장 · 체중 : 170.8cm · 54.6kg 8. 성향 : 숙녀 · 음란(Lady · Obscene) [근력 42] [내구 48] [민첩 72(+2)] [체력 56] [마력 98(+4)] [행운 86]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 능력치 비교 > 1. 김유현 : 총합 537포인트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근력 70] [내구 87] [민첩 91(+3)] [체력 97] [마력 97(+2)] [행운 95(+1)] 2. 선율 : 총합 402포인트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근력 42] [내구 48] [민첩 72(+2)] [체력 56] [마력 98(+4)] [행운 86] '?' 선율의 사용자 정보를 본 순간, 매우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진명과 성향이 진정 압권이었다. 겉으로만 보면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도는 현숙한 여인상이었는데, 내면은 정반대였다. '나 참. 역시 겉만 봐서는 몰라. 이래서 제 3의 눈이 좋다니까.' 그때였다. 제 3의 눈에 대한 효용에 감탄하려는 찰나, 고려 로드의 목소리가 나의 상념을 일깨웠다. “후. 그 말씀도 확실히 일리는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말투가 진하게 드러나 있었지만, 고려 로드의 말대로 선율의 말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제법 말발이 좋아 보이는 이들도 이번만큼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조금 더 고민하고,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아무쪼록 최대한 영향을 주지 않는 선으로 생각해보지요. 그럼 오늘 회의는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회의가 파했음을 알리는 선언에 몇몇 사용자들이 만족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물론, 그것은 소수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아. 검후는 잠시만. 잠깐 이곳에 남아주시겠습니까?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윽고 고려 로드의 호출에 남다은이 다시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는, 나는 회의소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그때 무슨 말을 들었던 건가?' 있는 그대로 생각해서, 검후와 나의 사이에는 아무런 접점도 없는 게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 혐오증이 있는 그녀가 나를 따로 불러냈다는 사실은, 뭔가 용건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 가는 겁니까?” 남다은을 따라 야영지를 벗어난 지도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야영지도 보이지 않고, 어둠이 내려앉은 들판에는 황량한 적막만이 맴돌고 있었다. 그 순간 앞장서서 걷던 남다은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는 듯 싶더니 이내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머셔너리 로드. 당신은 검사 계열 시크릿 클래스, 소드 스페셜리스트로 알고 있어요. 맞으신 가요?” 갑작스러운 물음이었지만, 이미 밝혀진 사실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검술 전문가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맞습니다.” “연차는 아직 0년 차이시죠.” “예.” “그러면…. 폭염의 학살자, 백서연을 이번에 1:1로 포로로 잡으신 게 맞나요?”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입을 다물곤 물끄러미 남다은을 응시했다.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는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뮬에서 생환하신 이야기를 들었어요. 소문으로요.” 소문이라. 뜻 모를 의미심장함이 깃들어있는 한 마디였다. 좌우지간 더 이상의 취조는 싫었고 남성 혐오증에 걸린 여성과 함께 있고픈 생각도 없었기에, 나는 선수를 치기로 마음먹었다. “혹시 저번 회의에서 고려 로드에게 따로 들으신 거라도 있습니까?” “…….” 남다은은 한동안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윽고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보아, 내 예상이 맞은듯싶었다. “고려 로드의 부탁을 받았어요. 그는 변수가 일어날 것에 대해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혹시 모를 상황을 발 빠르게 대처할 실력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죠.” “흠.” “하지만 이미 알려진 실력자들은 지휘권을 잡은 상태이고, 대부분 고려 로드의 의견에 큰 호응을 보이지 않아요.” “그렇다면…. 아. 그래서 저를 찾아오신 거군요.” “네. 머셔너리 로드는 현재 지휘권자가 아니지만, 실력자일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현재 편성에 영향을 주지 않는 사용자들을 뽑는다. 이 말인즉슨 숨어있는 실력자들에게도 가능성을 열어두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있어서는 저절로 굴러 들어올리는 없으니, 직접적으로 돌아다니는 것일 테고. 가능성이라는 말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아무튼 남다은이 왜 나를 찾아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머셔너리의 클랜 로드이고, 정작 나를 비롯해 우리 클랜은 시크릿과 레어 클래스들이 철철 넘쳐났으니까. “확실히 이해했습니다.” 스릉. 대답은, 검을 뽑는 것으로 되돌아왔다. “그럼,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검을 한 번 나눌 수 있을까요?” “…그러죠.” 이어진 남다은의 행동은 신속했다. 아직 내가 준비를 마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내 폭발적인 마력의 흐름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윽고 남다은의 검이 나를 일직선으로 겨누었다. 외양이 얇고 아름답기는 했지만, 일견 특별해 보이지는 않는 검이었다. 우우웅! 하지만 검음이 들리는 순간 나는 평가를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검 전체에서 일순 신비한 빛이 어리는가 싶더니, 그것은 남다은에게로 옮겨가 전신에 은은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의 기운이었다. 딱히 뭐라고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흡사 '발할라의 탑'에서 출현했던 '전투 천사 발키리'처럼, 위엄 넘치면서도 기품 있는 기운이라고 할까. 그래, 꼭 검의 여왕을 눈앞에 둔 기분이었다. '실력을 보자는 건지, 목숨을 걸고 싸우자는 건지. 아니면…. 권능인가?' 나는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곤 조용히 귓가로 손을 가져갔다. 화악! 그러자 귀걸이는 말간 빛을 내뿜더니 곧 '빅토리아의 영광'의 아름다운 형체를 이루었다. 이런 광경은 처음 보는지 시종일관 잠잠하던 남다은의 눈동자에서 이채가 스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잠재 능력, 신검합일(Rank : Extra)을 발동합니다.』 『'빅토리아의 영광'에 잠재된 능력, '왕의 위엄'이 발동됩니다. 사용자 김수현의 마력 능력치 96. 행운 능력치 90. 합산 중…. S랭크로 판정합니다.』 나를 내리누르던 신묘한 기운은 '빅토리아의 영광'을 들자마자 씻은 듯 사라졌다. 전방위적인 압박을 펼치던 여왕의 기운이 한순간 주춤하는 것이 느껴졌다. 왕의 위엄으로 대항하는 것이 정답이었던 셈이다. '정확히는 정답 중 하나겠지만.' 아무튼 이미 전투는 시작되었다. 권능인지 마력인지 나를 압박했을 때부터 선공은 들어왔다고 볼 수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받은 만큼, 아니 이자까지 쳐서 돌려주는 게 예의였다. “그럼. 한 수 부탁합니다.” 최소한의 예의로 한 마디 내뱉은 후, 나는 남다은의 가슴 중앙을 겨냥한 채 대지를 세게 박찼다. 챙! 그러나 예상하고 있었는지, 남다은은 검을 비스듬히 세워 내 일격을 막아내었다. 나는 검신으로, 그녀는 검 날로. 어느덧 나와 남다은의 검에는 서로 푸른 마력이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나는 내려가는 방향 그대로, 크게 힘을 주었다. 키이잉…! “응아?” “푸.” 한순간 검후답지 않은 비명에 크게 웃을뻔했지만,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미약하게 터뜨린 바람 소리는 어쩔 수 없었는지, 남다은의 얼굴이 급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씨잉! 검후는 내 검을 흘려 내리고 재빠르게 물러나는가 싶더니 이내 쾌속한 속도로 한 점을 노리고 찔러 들어온다. 이윽고 유성 같은 일격이 내 가슴을 노리고 들어왔지만, 나는 들어오는 궤적을 쫓아 검신으로 다시금 세게 내리쳤다. 쾅! 검이 부러졌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커다란 굉음이 사방을 울렸다. 서로 마력을 가득 담아 부딪쳐서 그런지 터져 나오는 파장에 들판의 풀이 찢겨나갈 정도였다. 다행히도, 검후의 검은 무사했다. 그러나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검 끝이 미묘히 흔들리는 게, 손목에 반동 충격이 들어간 모양이다. 이로써 두 가지 사실은 확실히 드러났다. 하나는 내가 검후보다 근력이 높다는 것. 그리고 마력 또한 상회한다. 뭐, 그것이 아니라면 장비 효과로 생각할 수도 있고. 검후는 신속히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호흡을 가다듬는지 가슴을 들썩들썩 움직이기 시작했다. 분명히 얼굴 전체에 당황한 빛은 드러나 있어도 눈동자는 여전히 침착했다. 제법 어려운 경험을 겪어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상대라도 얕보지 않는 자세는 확실히 칭찬해줄 만하다. “머셔너리 로드. 아까부터 자꾸 검면으로만 치시는군요.” “검 날로 쳤다간 일 납니다.” 검후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일부러 의도한 것이었다. 검 날로 쳤다가 애꿎은 검을 자르게 되면 뭔 말을 들을지 모르기 때문에, 아까부터 자제한 것이다. 아무튼, 서로 죽고 죽이는 생사결이 아니라 실력을 보는 정도였다.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검을 거두려는 찰나, 검후가 다시 자세를 잡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한순간 고민이 들었지만, 나는 이내 응해주기로 결심했다. 기본적으로 투지가 높은 사용자는 어지간해서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지금 이 자리에서 확실히 꺾어놔야 다음에 귀찮게 굴지 않을 것이다. 해서, 나는 단판에 승부를 낼 마음에 검후의 자세를 자세히 살폈다. '또 찌르기?' 검후는 아까부터 계속해서 찌르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 나름의 장점은 있다. 막기도 애매하고 가속을 붙일 수도 있고. 그러나 변화가 없고 너무 단순하다. 상대의 속도를 능가하지 못한다면 카운터를 먹기 딱 좋은 게 바로 찌르기의 최대 단점이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기로 했으니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나는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뎌 체중을 이동시키곤, 상체와 무릎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리고 뒷발을 참과 함께 곧장 앞으로 짓쳐 들어갔다. 팡! 그와 동시에, 검후도 일 점 찌르기를 선보이며 정면으로 쳐들어온다. 그렇게 삽시간에 서로의 사정 거리에 맞닿기 직전, 검후가 팔을 쭉 내뻗는 게 보였다. 내 검은 아직 상단에 세운 상태. 내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먼저 목에 검을 겨누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나는 이 순간,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다. 실제 전투였다면 어떨지 몰라도,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 이상 기교의 차이가 승패를 가른다. 이윽고 목에 닿기 바로 직전에 나는 왼쪽으로 살며시 몸을 기울였다. 몸을 한껏 굽히고 들어갔기 때문에 왼손은 금방 땅에 닿았다. 그리고 이 찰나의 순간 바닥에 마력을 투사했다가, 다시 끌어당기듯 위로 훅 끌어올린다. 스륵. 그 결과, 아슬아슬하게 검후의 검이 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이 상태에서 더욱 몸을 굽힐 줄은 몰랐는지, 남다은의 눈동자가 크게 떠진다. 나는 그 상태에서 미끄러져 들어가는 대신, 왼손에 담긴 마력에 퉁기듯 힘을 주어 몸을 크게 회전시켰다. 그러자, 내 몸은 그 상태에서 순식간에 반으로 뒤집혔다. 하늘이 보인다. 그리고 약간 오른쪽으로 태깔 고운 검이 일직선을 그리며 지나가고, 검후의 가는 오른팔이 뒤따르는 것도 보였다. 그 순간, 나는 주저 없이 검신으로 남다은의 오른팔을 후렸다. 퍽! “꺄악!”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높은 소프라노의 비명이 들리고, 이후 검후가 쥐고 있던 검이 허공을 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오늘 하루 리리플 쉬겠습니다. 하…. 진짜 미치겠네요. 연휴가 끝나면 원래 이렇게 후유증이 큰가요? 오늘 길을 걷는데 사람들 표정이 다들 왜 이렇게 똑같던지…. ㅋㅋㅋㅋ. 진짜 월요일이 왔다는 사실에 급 우울해지네요. 학생인 제가 이 정도인데 다른 직장인분들은 어떨지 감히 상상도 안 갑니다. 어휴. 한숨만 푹푹 나옵니다. ㅋㅋ. 쩝쩝. 다들 힘내시고, 월요병 + 연휴병(?) 잘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리리플은 다음 회 합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_(__)_ 0352 / 0933 ---------------------------------------------- 전조 : 패, 승, 패, 승, 승 짙은 어둠이 내린 밤. 인적이 드문 황야에 고요한 침묵이 감돌았다. 문득 버려진 들판에 주저앉아 멍하니 손목을 부여잡은 남다은의 모습이, 너무나도 처량해 보이는 건 왜일까. 우우웅. 우우웅. 그때, 들판 어딘가에 떨어진 검이 맑은 검음을 토해내는 소리가 들렸 다. 그 검음에 정신을 차렸는지 남다은의 눈이 서너 번 끔뻑이더니, 이내 목 울대가 꼴깍 움직인다. “좋은 한 수였습니다. 대련으로 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잠시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나는 지금 이 상황에서 남다은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를 보냈다. 검을 한 번 섞어본 결과, 최선을 다하는 그녀의 태도가 제법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아…. 이게…. 아니…. 네…. 조, 좋은….” 남다은은 현재 심정이 무척이나 어지러운지,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남다은은 몇 번이나 입을 달싹였지만 결국엔 고개를 푹 숙이고 나지막한 음색을 들려주었다. “제가…. 제가 졌네요. 완벽히 졌어요. 소문이 사실이었어요.” “글쎄요. 실제 전투와 대련은 엄연히 다른 법이니까요.” “설령 그렇다고 해도 변명의 여지는 없어요. 위로는 괜찮아요.” '응? 꽤나 시원한데?' 이내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는 남다은을 보며 나는 약간의 호감이 이는 것을 느꼈다. 남다은이 만일 남자였다면, 아니 최소한 남성 혐오증에 걸리지 않았다면 제법 좋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우우웅. 우우웅. 내 일격에 남다은이 놓쳤던 검은, 여전히 들판에 놓인 채 청량한 검음을 토해내는 중이었다. 이윽고 약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간 그녀는 검을 주우려는지 살며시 허리를 굽혔다. 그때였다. 우우우우우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비교적 차분한 검음을 내던 검이었다. 그러나 남다은의 손이 닿은 순간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맹렬히 울어 젖히기 시작한 것이다. “서, 설아야? 갑자기 왜 그래?” 남다은은 한껏 당황한 음색으로 검에게 말을 걸었다. '이름이 설아인가? 설마 자아가 있다거나….' 갑작스레 일어난 이상 현상에 남다은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태도를 보였다. '설아'라는 검이 이런 현상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는지, 그녀의 얼굴에는 당황한 빛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아.' 아무튼 볼 일은 끝났기에 나는 먼저 돌아갈까 심각히 생각하고 있을 즈음,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아직 확신이 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빅토리아의 영광'을 얻었을 때를 생각해보면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이대로 모른척할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결국 남다은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내 예상이 맞는다면 어떻게 할까 마음속으로 고민하면서. *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동부는 '비경(祕境)의 황야'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내부를 살펴보면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행군' 하나만 보면 매우 순조로운 진행이었다. 그리고 '비경의 황야' 다음으로 들어선 지역은, 바로 '성단(星段)의 숲'으로 불리는 지역이었다. 성단의 숲은 북 대륙에 현존하는 4년 차 이상의 사용자들에게는 꽤나 뜻 깊은 곳이다. 왜냐하면 이 지역은 한때 아직 바바라를 공략하기 이전 시절, 지금의 '강철 산맥'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즉 성단의 숲은 바바라로 들어가기 위해서 필수로 거쳐야 하는 지역이었으며, 공략에 커다란 희생을 치렀던 곳이기도 했다. '물론 규모나 난이도 자체는 강철 산맥과 비교할 수 없지만.' 아무튼 감회가 새로운 것은 당시 공략에 참여했던 사용자들에 한한 일이었고, 이곳에서는 탐사할 유적이 없는 만큼 나에겐 큰 의미가 없는 곳이었다. 바바라는 안정화만 따지자면 북 대륙 전 도시 중에서 첫손으로 꼽을 수 있는 도시이다. 그런 만큼 '비경의 황야'를 무사히 통과한 이상 가면 갈수록 원만한 항해가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렇게 동부는 새로운 지역으로 순탄히 들어갈 수 있었고, 그와 동시에 나에게도 하나의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원래 프린시카에서 출발할 당시 나는 10강 서진우가 제대 장으로 있는 1제대에 편성된 상태였다. 그러나 남다은과 한 번 대련을 가진 이후 그녀가 나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는지, 변수를 대비하는 특별한 '조'에 선발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남다은과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매우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기는 했지만, 나는 그녀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제대에 있을 때보다 더욱 자유로운 행동을 보장받을 수 있었고, 수많은 사용자들의 틈에 끼어 지휘를 받는 것보다는 서로의 실력을 받칠 수 있는 소수와 날뛰는 게 훨씬 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남다은의 요청은 나를 참가시키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머셔너리는 시크릿과 레어 클래스 사용자들이 총 인원의 7할 가까이 차지하는 클랜이었다. 그런 만큼 실력자들이 숨어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나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검후' 남다은에 대한 평가를 상당히 수정한 상태였다. 처음에는 남성 혐오증에 걸린 특이한 여성이라고 생각했지만, 겸허히 패배를 받아들이는 자세나 이후 나를 대하는 태도는 굉장히 정중했다. 물론 어떻게 보면 거리감을 두려는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남성 사용자들과는 말도 섞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어쨌든, 나는 남다은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고심 끝에 세 명의 클랜원을 추천할 수 있었다. 일단 첫 번째는 무조건 고연주였다. 고연주는 암살자들이 모인 5제대에 편성되어있었는데, 조심스레 차출 명령을 내린 것에 반해서 5제대 장은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아니, 흔쾌한 정도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실력으로 보나 명성으로 보나 5제대의 장은 고연주가 맡아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동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편성이 끝난 상태였고, 그녀 역시 제대 장이라는 직함에 큰 욕심이 없었기에 그냥 저냥 물 흐르듯 지나간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제대 장이 그렇게 쌍수를 들고 환영한 이유는, 아래에 '그림자 여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부담스러웠던 것 같았다. 물론 고연주 본인의 의사도 확실히 물어보았고, 그녀는 내가 참가했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당장에 짐을 싸서 달려왔다. 그리고 마지막이자 두 번째로 추천한 클랜원은 바로 비비앙과 정하연이었다. 비비앙은 '질서의 오르도'를 얻은 이후로 '마수 군단'을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전쟁에서 이러한 능력이 얼마나 유용하게 쓰이는지는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하지만 정하연을 추천하는 것에는 정말로 많은 고민을 했는데, 일단은 이야기를 해보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어디까지나 강제성이 없는 만큼 우선 이야기를 해보고 그녀의 선택에 맡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과를 먼저 말해보자면, 비비앙과 정하연 모두 남다은의 제안에 응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연금술사로서의 자부심이 강한 비비앙은 '조'가 뭔가 특별한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정하연은 처음에는 잠깐 생각해보겠다고 했지만, 내가 있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바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남다은은 나의 전폭적인 도움으로, 빠른 시간 안에 나를 포함, 총 네 명의 인원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 어느덧 동부는 '성단의 숲'을 벗어나는 것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이 속도를 유지할 수 있다면 앞으로 하루, 이틀 안에 다음 지역으로 넘어갈 수 있으리라 예상되었다. 솔직히 다음 지역은 딱히 뭐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곳이었다. 왜냐하면 다음 지역으로 넘어가는 순간 바바라는 지척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에헴!” 문득, 비비앙은 잔뜩 힘을 준 목소리로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서너 번 추가로 기침을 연발한 그녀는 목을 빳빳이 세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가에는 거만한 빛이 가득한 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비비앙과 정하연을 데려오는 데는 한바탕 홍역을 치르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저번 회의에서 선율의 언행을 생각하면 그녀들을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내뱉었던 말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던지, 타로 카드 마술사는 둘의 차출 요청에 간단히 승인 허가를 내려주었다. 이로써 일단 '조'에 모인 인원은 총 5명이었다. 나, 고연주, 비비앙, 정하연 그리고 검후.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었다. 남다은 말고도 발굴에 활동하는 인원이 있다고 한다. 성단의 숲을 벗어나기 전에 활동을 마치고, 한 번 회합을 가진다고 하니 진득하니 기다리면 알게 될 일이었다. “수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그때, 옆에서 발맞추어 걷던 정하연이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흘끗 고개를 돌리곤 담담히 대꾸했다. “아. 타로 카드 마술사에 대해서 조금 했습니다.” “음. 확실히 수현이 좋아할만한 매력이 있는 분이죠. 가슴도 크고, 가슴도 크고.” “…….” “호호. 농담이에요, 농담.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정하연은 농담을 던졌지만 바로 내 반응을 봤는지 까르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나는 푹 한숨을 내쉬곤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그냥 이렇게 쉽게 차출을 허락할지 생각은 못했습니다. 저번 회의에서 조금 안 좋은 광경을 본적이 있어서…. 특권 의식이 너무 강하더라고요.” “어머. 그래요? 저는 그런 거 못 느끼겠던데.” “그래요? 제대에서는 어땠는데요?” 이것은 조금 의외의 대답이었기에, 나는 의아한 기분을 느끼며 되물었다. 그러자 정하연은 곰곰이 생각하는 듯싶더니 이내 하나 하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음. 꼭 친언니 같았어요. 시크릿 클래스라는걸 알고는 이것저것 조언도 많이 해주시고, 잘 챙겨주셨고요. 가끔 수다도 떨고, 갖고 계신 카드로 점도 쳐주시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죠. 그렇지요 비비앙?” 이윽고 말을 끝낸 정하연은 동의를 구하려는지 비비앙을 돌아보며 물었다. 하지만, 비비앙은 뭔가 켕기는 게 있는 듯 떨떠름한 얼굴을 보이더니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그, 글쎄. 나, 난 별로. 잘 모르겠는데.” 정하연은 비비앙을 보며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가, 갑자기 “아.”, 뭔가 떠올린 얼굴로 킥킥 웃었다. “아. 비비앙씨도 저번에 같이 점을 봤었거든요? 그런데 결과가 별로 안 좋았나 봐요.” “오호. 점이라. 그건 좀 관심이 가는데요. 정하연은 어떤 점을 쳤는데요?” “에이. 비밀로 할래요. 그리고 점은 그냥 재미로 보는 거예요.” “그래도 궁금한데…. 뭐 비밀이라면 어쩔 수 없죠. 그럼 비비앙. 너는 어떤 점을 쳤고, 무슨 결과가 나왔지?” 나와 정하연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지, 비비앙은 일순 억울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분연히 입을 열려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나는 먼저 선수를 쳐, 품속에 고이 모셔두었던 계약서를 꺼내었다. 이윽고 아무 말도 않고 그것을 살랑살랑 흔들자, 비비앙은 목멘 음색으로 말했다. “너…. 김수현…. 정말 나빠. 왜 나한테만….” “그래 그래. 알았으니 어서.” “으으….” 아까의 거만함은 어디 갔는지. 비비앙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소극적으로 반항했지만, 한층 더 재촉하자 겨우겨우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냥…. 그게…. 내가 지금 가장 원하는 게 이루어질 가능성에 대해서 점을 쳤는데….” “응. 원하는 거? 그게 뭔데?” “그, 그건…. 그…. 엉덩….” 휘이익! 그때였다. 비비앙이 주저하는 태도로 입을 열려는 순간 전방에서 갑작스레 날카로운 신호음이 울려 퍼졌다. “잠시 행군을 정지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들려온 외침에 우리는 하던 대화를 멈추고 걸음을 정지할 수 밖에 없었다. “응? 무슨 일이죠? 설마 괴물이라도.” “글쎄요. 일단 기다려봅시다.” 정하연이 앞으로 빠끔히 고개를 내밀었지만, 나는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그런다고 보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휴. 살았다.” 그 순간 문득 나와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일단은 넣어두고 전방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게 20분 가량이 흘렀을까. 이윽고 수정구를 통해 들려온 소식은, 가장 앞서 나가던 동문 부대에서 바바라에서 나온 듯 보이는 사용자들과 조우했다는 소식이었다. ============================ 작품 후기 ============================ 오늘 이북 수정에 들어가기 전에 저번 회 내용이랑 쪽지 답신에 열을 올려야겠네요. 하하. 그래도 간단히 말씀 드려보면, 능력치는 이미 +가 된 상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98(+4)면 장비를 해제했을 경우 94가 된다는 말이지요. :) PS. 칼 등, 칼등마루 부분은 검신으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 리리플(350회) 』 1. 레이암 : 1등 축하합니다. 1등 코멘트에서는 처음 뵙는것 같네요. :) 2. 난방랑자 : 음. 다른 사람들의 로맨스는 조미료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것도 어떻게 잘 조절하면 주인공을 드러낼 수도 있는 장치가 될 수 있지요. 하하. 3. 소수영서 : 네. 저도 문어발은 굉장히 싫어해서요. 제가 미치지 않은 이상 김수현이 수십 명의 여성을 거느리게 될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 4. 명박짱의양양합일 : 어! 그 소설 아시는군요! 저도 아는 작가님 추천으로 읽었는데, 진짜 완전 사랑합니다. 고다이바 짱짱걸! 진짜 재밌게 읽었어요. 같이 재밌게 읽으셨다니 기분 좋네요! 5. 레필 : 그렇습니다. 물론 다른 캐릭터들의 비중이 높아질 수도 있겠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김수현이 서 있을 것입니다. :)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최대한 거부감 없도록 조절하겠습니다. 『 리리플(351회) 』 1. 데슈카르 : 1등 축하합니다! 데슈카르 님! 요시! 그란도시즌! 이 뜻이 뭐예요? 너무 궁금해요! 2. dbss : 어우.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3. 산사나무 : 안현 짝이요? 2부에 나올 예정입니다. 이번에 확실히 정했어요. 후후후후. 4. 고장난선풍기 : 감사합니다! 오늘 간신히 버텼네요! :) 5. 바다숲을그리다 : 우와. 진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런 말 처음 들어요. ㅜ.ㅠ 맞아요. 제가 좀 야성적인 면이 강한데 독자분들이 그걸 몰라주시더라고요! ( --) 후후.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53 / 0933 ---------------------------------------------- 바바라 동, 서, 남, 북. 이 네 개의 문을 맡은 부대 중, 가장 선두에서 진군하는 부대는 바로 한(韓) 로드가 총대장으로 있는 동문 부대였다. 동문 부대는 '성단의 숲'을 횡단하던 도중 바바라에서 도망친 것으로 보이는 사용자들과 조우했고, 이에 급작스럽게 행군을 멈추었다. 그리고 부대간 원활한 소통을 위해 구비된 통신용 수정구를 통해, 사용자들의 처리나 행군의 속행 등 차후 진행 방향에 대한 지시를 기다린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통신을 받은 서문 부대는 “일단 사용자들을 이쪽으로 인도하기를 바란다. 행군은 이곳에서 잠시 멈추기로 하고, 따로 통신이 들어가기 전까지 주변의 경계를 늦추지 말 것.”이라고 답신했다. 이윽고, 인도를 위해 나온 동문 부대 소속 사용자들과 함께 바바라에서 도망친 사용자들이 도착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꼴랑 일곱 명?' 하나씩 인원수를 세어보자 뜻 모를 의심이 설핏 고개를 들었다. 하기야 인원수 자체는 크게 상관없을지 몰라도, 보면 볼수록 처음 봤을 때부터 차오르는 미묘한 위화감이 가시질 않는다. '안솔을 데려올까?' 문득 옆에 복덩이가 없다는 사실에 아쉬운 마음이 들려는 찰나, 고려 로드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바바라에서 도망쳐 나온 사용자라고 들었습니다. 보아하니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미안하지만 몇 가지 물어볼 것들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겐 중요한 것들이라서 말입니다.” “하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조금 힘들긴 하지만, 지금은 그저 같은 사용자 분들을 만나서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안 드는군요. 사정은 앞에 분들에게 대강이나마 들었습니다. 질문에는 성심 성의껏 대답하겠습니다.” 고려 로드의 질문에는 7명의 사용자들 중 정 중앙에 있던 남성이 대답했다. 행색은 초라하기 그지없고 얼굴에는 피로감이 가득해 보인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진정 다행이라는 듯 안도감이 서리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자세히 살폈다. 군데군데 찢어진 옷과 일부러 그랬나 싶을 정도로 더럽혀진 옷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이해해주셔서 고맙군요. 그럼 먼저 간단한 사용자 정보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혹시 클랜도 있다면, 같이 듣고 싶습니다.” “4년 차 사용자 백건웅입니다. 현재는 무소속 상태입니다. 원래 있던 클랜은 강철 산맥 원정 이후로 해산되었거든요.” 남성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고려 로드는 주변에 모인 사용자들을 둘러보았다. 눈빛을 보니 혹시라도 백건웅을 아는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곳에 모인 사용자들은 모두 어느 정도 지위가 있거나 명성을 쌓은 사용자들이었다. 그에 반해 백건웅은 그저 그런 사용자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교류를 나누었을 기회는 일반적으로 적다고 보는 게 옳다. 특별한 관계가 아니라면 말이다. 고려 로드는 하나같이 고개를 젓는 사용자들의 반응을 확인한 후,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그럼 지금 바바라의 상황을 간략하게나마 알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면 현재 전투가 흘러가는 양상이라던가….” “양상이요. 솔직히 말씀 드리면 일주일전에 도시를 떠난 지라 전투 상황에 대해서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상황을 모르다니요?” “말 그대롭니다. 저희가 도시를 떠난 것은 얼추 일주일전입니다. 그때는 아직 도시가 침략을 받기 전이라서요.” 이 말인즉슨 침략을 받기도 전에 바바라에서 나왔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옷이 저 꼴이야?' 바바라의 안정화는 북 대륙에서 제일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 더구나 일주일전에 나왔다면 도시 부근 지역을 거쳤음이 분명하다. 그런 만큼 저 정도로 옷이 훼손되는 경우는 드물다고, 아니 아예 없다고 봐도 좋았다. 처음 미약했던 의심이 더욱 증폭되는 게 느껴졌다. “일단 저희가 나오기 전까지의 상황이라도 말씀 드리자면….” 이어지는 백건웅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하?' 그리고 그의 사용자 정보를 확인한 순간, 눈동자에 엄청난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우선, 워프 게이트를 끊은 것은 황금 사자의 독단적인 소행이었습니다. 동부와 남부에서 태도를 바꿀 것 같지는 않고, 사용자들은 자꾸만 빠져나가는 와중이었죠. 아마 강제적으로 방어 인력을 확보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음. 그런데 워프 게이트뿐만 아니라 연락 자체가 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건 어떻게 된 일인가요?” “아. 그것은…. 예전에 침략을 받은 타 도시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바라는 침략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통신을 하려고 할 때마다 마력의 흐름이 굉장히 불안정해지더군요.” 백건웅의 그 부분은 전혀 모른다는 듯 고개를 차분히 좌우로 저었다. 그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황금 사자는 이후 사용자들을 어르고 달래는 등 어떻게든 도시 방어에 힘을 기울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최후의 보루로 믿고 있던 북부도 이미 등을 돌린 상태였고, 날이 갈수록 성문을 통해 빠져나가는 인원은 증가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건웅은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지만, 결국 지척까지 다다른 침략자들을 확인한 순간 주저 없이 도시에서 도망 나왔다는 것으로 말을 맺었다. “비겁한 행동이었다는 것은 시인합니다. 하지만 도저히 도시가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한때는 못해도 만 명 이상이 상주하던 도시였는데…. 제가 나올 때는 천명도 채 남지 않았을 겁니다.” “음…. 말은 잘 들었습니다. 그럼 그 외의 상황은 모르신다는 말이고요.” “예….” 백건웅은 짙은 후회가 서린 음색으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던 고려 로드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바바라의 상황은 동부가 남부가 주도한 것과 다름없었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던지 별달리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분들의 거취를 결정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일단은 이대로 도시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여기는 위험합니다.” “아. 잠시 그것에 관해 한 가지 부탁할게 있습니다.” “부탁이요?” “지금 바바라로 가시는 거라면, 혹시 저희도….” 그 순간 백건웅은 말을 멈췄다. 왜냐하면 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나는 고려 로드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응? 머셔너리 로드.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예. 고려 로드. 혹시 저번에 첩자들을 정리한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아. 그건 당연히 알고 있지요. 특히 그림자 여왕의 능력 덕분에 백서연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던 놈들도 모조리 발본색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갑자기 왜 꺼내시는지요?” “불현듯 하나의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이분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추가로 해도 괜찮겠습니까?” 나는 더 이상 병아리가 아니었다. 이번 전쟁을 준비하는 게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사용자이고, 지금 한창 주가를 올리는 머셔너리 클랜의 로드였다. 예전 같았으면 건방지다는 말을 들을만한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충분히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고려 로드는 일순 의아한 빛을 보였지만 이내 해보라는 듯 한두 번 고개를 주억였다. 나는 바로 질문을 시작했다. 언제나와 같이, 시작은 직구와 함께. “일단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당신들이 굉장히 의심스럽습니다.” “예?” “이곳에서 바바라까지의 거리는 빠르게 가면 닷새. 천천히 가면 이레 정도 걸리는 거리이지요. 말 자체에는 크게 문제가 없는데…. 그런데 말이죠. 너무 타이밍이 딱 맞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네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도시가 침략 당하기 직전에 나오셨다고 했는데, 그거야 모르는 일이잖습니까. 일주일보다 훨씬 전에 침략을 당했을 수도 있고. 아니 어쩌면 벌써 함락됐을 수도 있지요. 지금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웅성웅성. 내 말이 끝난 순간 주변 사용자들 사이로 작은 소란이 일었다. 갑작스런 발언에 놀랐는지, 갑자기 왠 헛소리냐고 말하는 소리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이러한 반응은 예상하고 있었고, 내게는 확신과 비장의 무기가 있기에 바로 터뜨린 일이었다. 질질 끌 것도 없이 속전속결로 끝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머. 머셔너리 로드?” 그때, 옆에서 정중하면서도 정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목소리의 정체는 선율이었다. 그녀는 살며시 팔짱을 끼고는 나직한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방금 전 말씀은, 지금 저들을 부랑자라고 의심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현재 첩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인 상태입니다. 첩자들과 연락이 되지 않으니 우리의 상황을 궁금하게 여기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눈앞의 사용자들을, 아니 부랑자들을 사용자로 위장해 정보를 빼낼 생각이었겠지요.” “흐응. 그것 참 대단하신 추측이세요. 물증은 없고 심증만 있는…. 억지랄까?” 선율은 가벼운 웃음을 흘리고는 비꼼이 가득한 기색으로 나를 힐난했다. 그러자 자신의 아군이 생겼다고 생각했는지 백건웅은 당황한 얼굴에서 금방 미소를 되찾으며 말했다. “하하. 괜찮습니다. 이해합니다. 상황이 이런 만큼 확실히 의심스러울 수도 있겠지요. 그 부분에 관해서는 제가 해명을….” “아니. 실은요. 억지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저도 머셔너리 로드와 비슷한 생각을 해서요. 그래서 그런 거랍니다.” 그때였다. 내 말에 이의를 제기했던 타로 카드 마술사, 선율은 순식간에 표정을 가라앉히더니 이내 바로 태도를 바꾸었다. “예, 예? 그, 그게 무슨….” “우리들은 바보가 아니에요. 당신 말은 언뜻 들어보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석연치 않은 구석이 너무도 많아요. 예를 들면 통신용 수정구. 도시 안에서는 그랬다고 치더라도, 도시를 나왔으면 수정구를 사용할 수도 있었겠죠. 저희는 방금 전에 아주 잘 사용했거든요. 혹시 사용해보셨어요?” 어. 이거 내가 말하려고 했는데. 일단 억지로 느껴지더라도 크게 터뜨리고, 부연 설명을 이어나가려고 했던 나로서는 조금 아쉬운 순간이었다. “아, 아니. 저희는 수정구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요.” “아하. 그러시구나. 그러면 간단한 몸수색을 해보죠. 아마 첩자라면 몰래 통신을 넣을 수정구를 가지고 왔다고 생각되는데. 안 그래요? 머셔너리 로드?” 아군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태도를 바꾸어 공격하자, 백건웅의 시종일관 침착했던 낯빛은 사그라지고 한껏 당황한 기색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흠. 제법 꿍 짝이 맞는데?' 이윽고 나를 향해 눈을 찡긋하는 선율을 보며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물론 종잡을 수 없는 여성이라는 생각은 여전했지만 말이다. “정말 너무 하시는군요!” 그때, 가만히 뒤에서 듣고만 있던 한 명의 여성이 앙칼진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우리들이 어떤 심정으로 도시를 나왔는지 알기나 해요? 여기까지 오면서 얼마나 불안에 떨었는데. 겨우 아군을 찾았다 싶었는데. 이렇게 되도 않은 부랑자 취급을….” 여성의 얼굴에는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빛이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제 3의 눈으로 확신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감정에 호소해 어떻게든 위기를 탈출하려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죠? 간신히 살았다 싶었는데…. 어떻게…. 흑…. 흑….” 어떻게 이러긴. '너희 모두의 사용자 정보를 봤으니까 알지.' “크흠. 머셔너리 로드의 말이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그냥 이렇다는 생각만으로 몰아붙이는 건 옳다고 생각되지는 않는군요. 타이밍이야 맞을 수도 있는 거고, 통신용 수정구야 생각을 못했을 수도 있지요. 아무튼 정말 억울한 사용자들일수도 있지 않습니까.” 잠깐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하기야 고려 로드의 말은 현재 상황에서는 가장 적합한 발언이었다. 고려 로드가 옹호해주자 약간의 힘을 얻었는지, 백건웅은 뭔가 번뜩 떠올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잠시만요! 현재 이곳에는 많은 분들이 계십니다. 이중에서 저희 일곱 명중 한 명이라도 알고 계시는 분들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 아니. 그럴 필요도 없이, 처음 마주했던 분들 중에 제가 아는 얼굴이 있었습니다! 그 분에게 가면 결백을 증명할 수 있을 겁니다.” “오. 그러고 보니 그런 방법도 있겠군요. 그래도 만약을 위해서 몸수색 및 수정구는 잠시 압수하는 것으로 하고….” 최후의 발악인가. 물론 이 방법이 확실한 방법일지는 몰라도, 여기에는 가장 큰 맹점이 있었다. 동부, 남부, 그리고 비밀리에 북부의 첩자들도 청소했다곤 하지만, 중앙의 첩자는 아직 남아있는 상태였으니까. 즉 백건웅과 뒤에 있는 사람들은 사용자의 탈을 쓴 부랑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니요.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증거가 있거든요.” “예? 증거라니….” 고려 로드가 의아히 반문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지체 않고 한 명의 이름을 불렀다. “사용자 고연주.” “네. 클랜 로드. 부르셨어요?” 그러자, 내가 나설 때부터 기다리고 있었는지 고연주가 얼른 나서며 대답했다. “아.” 그리고 그 순간, 옆에서 고려 로드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고연주는 자주 출장을 보내줬으니,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 지는 충분히 짐작하고 있으리라. “저는 눈앞의 일곱 명이 전부 당신의 능력에 저항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만.” “음~.” 나는 고연주를 돌아본 채 긴장한 얼굴로 서 있는 부랑자들을 가리켰다. 그녀는 느긋한 신음으로 잠시 말을 끌었다. “호호.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이윽고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한 고연주의 눈동자는, 어느덧 연한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 해는 저물어가 어느새 짙은 황혼이 평야를 드리우고 있었다. 하지만 군데군데 어둑한 빛이 스며든 것을 보니, 조금 있으면 저녁이 찾아올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차분히 주위를 둘러보자 이미 야영 준비를 마쳤는지 가지런히 설치되어있는 천막들이 보인다. 원래대로라면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최대한 행군을 했겠지만, '성단의 숲'을 벗어난 이후로 급속 행군은 일절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제 곧 바바라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남은 거리는 아무리 천천히 가도 이틀이면 충분히 갈 수 있을 만큼의 거리였다. 그런 만큼 이제는 전쟁을 위한 체력도 비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천막에서 나와 심각한 얼굴로 얘기를 나누는 사용자들을 보다가, 나는 한 번 더 고개를 돌렸다. 내가 고개를 돌린 곳은 야영지의 중앙이었는데, 그곳에는 일곱 명의 사람이 나무 기둥에 매달려있었다. 이곳 저곳에서 핏자국이 보이고 미동도 하지 않는 게, 이미 사망한 상태인 모양이다. 매달려있는 일곱 명의 정체는 바로 사흘 전 사용자로 위장하고 찾아온 부랑자들이었다. 나는 고연주의 고유 능력 '유혹의 눈동자'를 이용해 그들의 정체를 손쉽게 밝혀내었고, 그들은 곧바로 포로로 잡혀 역으로 알고 있는 정보를 대부분 밝혔다. 물론 잔챙이들이라서 그런지 딱히 건질만한 것은 없었다. 그나마 쓸만한 것은 두 가지 정도? 하나는 바바라가 이미 점령당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우웅…. 그때였다. 문득 들려오는 검의 공명에 나는 몸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등 뒤로 검후, 남다은이 다소곳이 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머셔너리 로드께서 이번에도 공을 세우셨군요.” 차갑고 냉랭한 목소리. 음색만 들으면 나를 싫어하는 건가 착각할 정도였지만, 이제는 그녀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담담히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의심스러웠을 뿐입니다. 공이라고 추켜세울 정도는 아니에요.” “겸손하시네요.” 우우웅.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클랜원들을 추천할 때 도와준 것은 있지만, 그 이후로 서로 마주치면 간단히 고갯짓만 하고 피하기 일쑤였다. 그렇기에 갑작스레 내게 말을 붙이는 검후가 조금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얘 갑자기 왜 이래. 부담스럽게.' 여기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고심하는 찰나, 남다은의 입술이 한 번 더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늘 저녁에 회합이 있어요. 물론 조원끼리요.” “그렇군요.” 명료한 용건과 간단한 대답. 그리고 다시금 이어지는 불편한 침묵. 그러한 분위기가 이어질수록, 왠지 모르게 자꾸만 내가 뭔가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나는 뜻 모를 죄책감을 벗어나고자, 조금 더 성실히 답변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우웅! “회합에는 꼭 참가하도록 하겠습니다.” “…….” 내 확답에 남다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나와 그녀는 서로를 쳐다보며 시선을 교환했다. 그렇게 의미 없이 서로 눈을 맞춘 채 10초 정도 흘렀을까. 남다은은 내게 아직 볼 일이 남아있는지 입술을 오물오물 거리는 게 보였다. 그러더니 이내 눈을 슬쩍 내리깐 그녀는, 자그마한 목소리와 함께 두 손을 수줍게 내밀었다. “머, 머셔너리 로드. 이것 좀….” “…네?” “부탁…. 해요…. 제발….” “…또 그럽니까?” 내게 이런 말을 꺼내는 게 무척이나 부끄러웠는지, 남다은은 애꿎은 바닥만 내려다보며 고개만 끄덕끄덕 흔들었다. 그런 그녀의 가녀린 양손에는, 아까부터 거슬릴 정도로 공명을 내뿜던 검이 쥐어져 있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건가.'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레 검을 받아 들었다. 우잉 우잉. 갑자기, 검은 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라 검을 놓치고 말았다. 우에에엥. 그러자, 이번에는 서러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 작품 후기 ============================ 남다은 : 설아야. 너 자꾸 왜 이래. 응? 가만히 좀 있으렴. 설아(검) : 싫어 싫어. 아빠한테 갈래. 아빠 보고 싶단 말이야. 으아아앙. 남다은 : 아, 아빠? 왜 갑자기 아빠가? 설아(검) : 훌쩍. 아빠는 검의 주인이고, 엄마는 검의 여왕이니까. 그런데 왜 둘이 결혼 안 해? 남다은 : …겨, 결혼? 얘가 큰일날 소리를…! 설아(검) : 징징! 나 동생 갖고 싶어! 둘이 결혼해서 동생 만들어줘! 징징징! PS. 그냥 콩트입니다. 『 리리플 』 1. 쿠로시온 : 1등 축하합니다. 하하. 롤드컵 보시는군요! 저는 꼬박꼬박 챙겨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결과는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 2. 츄파츕스틱 : 101 이상은 찍을 수 있습니다! 가능해요! 3. 천연천연 : 검의 주인은, 모든 검에게 사랑을 받고 복종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진지.) 4. 타나투스 : 푸하하하! 아, 상상해보고 빵 터졌습니다. 그럴 일은 없어요! ㅋㅋㅋㅋ. 아 정말 대단하세요. 오늘 기분 약간 우울했는데, 타나투스 님 코멘트 보고 확 풀렸네요. :D 5. 태일이 : 군대 가시는군요! 몸 건강히 다녀오세요! 저는 연재 분 잔뜩 쌓아놓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6. 석양s : 내일 잠시 특별 조 인원들이 나올 예정입니다. 남자들도 있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로맨스는 주가 아닌, 양념으로 사용할 예정입니다. 후후. 재미있는 것들이 잔뜩 떠올랐거든요! 7. 붉은고양이 : 아. 그렇군요. 이게 진도를 팍 끌어내기 위해서 생략이 들어가서 그래요. 솔직히 생략 안하고 쓰면 저도 좋긴 해요. 쓰고 싶은 것 맘껏 쓸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랬다가는 진짜 1000회 완결날것 같아서요. ㅜ.ㅠ 아무튼 제가 조금 더 신경 써보겠습니다! 8. [暗黑]魔劍流 : 저는 승급전 11번 떨어졌어요. 브론즈에서요. ㅋㅋㅋㅋ. 9. Lea : 고연주, 임한나, 정하연이요! 저는 연상이 좋아요! 마구 응석부리고 싶거든요. 헤헤. 10. 천성녀 : 허헉! 수백 명이면 수현이 복상사하지 않을까요?! ㅋㅋㅋㅋ.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54 / 0933 ---------------------------------------------- 공지 : 하루 휴재합니다. . ============================ 작품 후기 ============================ 오늘 하루 휴재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번에 2학기에 들어서 학점을 가득 채워 신청한 여파인지, 체력적으로 많이 지친 상태입니다. 레드불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어, 부득이하게 오늘 하루 쉬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딱 하루만 쉬겠습니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이번 주말 중, 하루 2회를 올려 9월 26일 목요일 연재 분을 벌충하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기다려주시는 분들께는 그저 죄송한 마음뿐이네요. 그럼, 9월 27일 금요일 자정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독자분들의 하해와 같은 양해를 구합니다. _(__)_ 0355 / 0933 ---------------------------------------------- 바바라 우에엥. 우에에엥. 세상에, 검이 운다. 한순간 오만 가지 생각이 내 머릿속을 교차했다. 그러나, 나는 일단 재빨리 떨어뜨린 검을 집어 들었다. 다른 사람의 검을 떨군 것이 실례에 해당되는 행동이기도 했지만,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에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기도 했다. 이윽고 나는 왼손에 남다은의 검 '설아'를 들었고, 오른손으로 검신을 슬슬 보듬었다. 마치 예전에 안솔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던 것처럼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쓸어 내린다. 우웅…. 웅…. 그렇게 한 열 번 가량 쓰다듬었을까? 아까부터 구슬프게 울리던 검음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더욱 부드럽게 검신을 쓸어 내렸다. “…….” “…….” 우웅! 문득, '설아'가 방긋 미소 짓는듯한 착각이 든 것은 왜일까? '설마 내 손길을 느끼고 있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설아'의 직접적인 표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까는 처량한 울음소리를 내었다면,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검신을 부르르 떠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여러 잡다한 것을 제외하고, '설아'는 주인이 확실하게 있는 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나로서는 의도치 않은 상황이라 난감할 수 밖에 없다. 어찌됐든, 나는 계속해서 검을 쓸어 내리던 도중 멍하니 고개를 들어 남다은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시선을 바닥에 내리꽂은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본인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아니…. 진짜 나보고 뭐 어떻게 하라고….'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우웅~. '설아'는 오직 청명한 검음을 흘릴 뿐이었다. * 남다은의 말대로 저녁에는 '조'에 참가한 인원들의 회합이 있었다. 나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해프닝을 끌어안은 채, 그녀와 함께 회합에 참가했다. 그렇게 특별한 사용자들의 회합이 시작되었지만, 내용에 딱히 특별한 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 '조'를 대표하는 인물로 선발된 남다은의 간략한 인사와, 참가한 인원이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 것이 전부였다. 비록 인원은 소수일지라도 하나하나 개성이 강한 사용자들의 모임이었다. 아니, 자부심이라고 해야 맞을까? 남다은은 그러한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는지, 회합 내내 권위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전쟁 동안 잘 부탁한다.”라는, 지극히 형식적인 말투로 모두에게 말했을 뿐. 이 다음은 알아서 하라는 태도를 보였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회합은 상당히 자유로운 분위기로 흘러갔다. 물론 대화는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그 중 처음에는 바바라에 관한 말들이 가장 많았지만 이내 이야깃거리가 떨어졌는지, 지금은 부랑자들에게로 화제가 옮겨간 상태였다. “어휴. 언니. 저는요, 밖에 매달아 논 부랑자들이 진짜 마음에 안 들어요. 저게 지금 뭐 하는 짓거리인지도 모르겠고….”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눈살을 잔뜩 찌푸린 '간호사' 강예빈이 보였다. 그녀는 고연주의 옆에 착 달라붙은 채 한창 불만을 토로하는 중이었다. “알아낼 정보 다 알아냈으면 그냥 깔끔하게 처리하면 좋잖아요. 뭐 좋은 게 있다고 저렇게 중앙에 덩그러니 매달아 놓았는지…. 볼 때마다 밥맛이 뚝뚝 떨어지는 게, 영 별로네요.” “글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 음침한 목소리가 갑작스레 강예빈의 말에 끼어들었다. 목소리 톤이 굵직한 걸로 보아 고연주에게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대답의 주인공은, '저주술사' 강태욱이었다. 강예빈은 잠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상대를 확인했는지 아니꼬워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하? 아~. 그래요. 네 취향에는 저런 게 딱~. 맞으시겠지요.” “말이 조금 심하군.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분위기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분위기? 그건 또 무슨 헛소리세요?” “…흥. 널 이해시킬 자신이 없어서. 관두자. 기껏 이야기해봤자 못 알아들을 것 같으니….” “뭐라고요?” 강태욱의 눈에 일순 한심하다는 빛이 어리는가 싶더니 이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려버린다. '분위기라.' 하지만 나는, 강태욱의 말에 담긴 뜻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요컨대, 말 그대로 분위기의 차이였다. 도시에서부터 분명히 전운은 감돌았다. 그러나 이효을이 말했던 '광고'가 너무 과대한 효과를 내버린 탓인지, 사용자들이 승리에 대한 기대치는 필요 이상으로 높아진 상태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부랑자들의 잠입을 사전에 차단한 것은 동부 사용자들에게 이로운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아주 약간이라고 해도 상대에 대한 경각심을 확실히 일깨워주었을 테니. 도를 넘어선 긴장은 좋지 않다. 그러나 목숨이 오고 가는 전쟁에서 적에 대한 철저한 경계심은 필수로 갖춰야 할 사항이었다.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다가, 가만히 앉아있는 강태욱을 흘끗 살펴보았다. 1회 차에서 나와 강태욱은 어느 정도의 안면이 있던 사이였다. 물론 아주 친하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한때 '부랑자 사냥꾼'으로 같이 활동한 전력이 있었다. 당시 포획한 부랑자들을 상대로 인체 실험이나 이종 교배 등, 굉장히 잔혹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기억이 제법 강하게 남아있다. 우우웅…. “그래 그래.” 너무 깊게 빠져있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손을 멈췄던 모양이다. 아래서 자그맣게 들려오는 검음에, 나는 다시금 손을 놀려 검신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 그러자 한쪽 구석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남다은이 미안한 시선을 보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였다. “김수현. 김수현.” “응?” 방정맞지만, 낭랑한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누군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비비앙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혹시 요즘 신상용 못 봤어?” “신상용? 근래에는 못 봤는데. 왜?” “아. 내일 아니면 모레에 바바라에 도착한다잖아. 그래도 스승 된 도리로써 한 번 찾아 가는 게 좋겠다 싶어서.” “찾아가면 되잖아.” “하지만 갈 때마다 보이지 않는걸. 일부러 피하는 건가 생각도 들고….” 비비앙은 약간은 풀이 죽은듯한 목소리로 끝말을 흐렸다. 그리고 그녀의 반응에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자리를 피한다고?' “그럼 내가 한 번 찾아가볼까?” “어? 그래도 상관없긴 한데…. 못 만나면 어떡하려고. 그리고 시간도 애매하잖아.” 내 제안에 비비앙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미 회합은 거의 끝난 상태였고, 사정상 자리를 비운 사용자들도 한두 명은 있었다. “없으면…. 글쎄. 아무튼 밤이라고 딱히 못 만나는 것도 아니니까 내가 한 번 가볼게.” “후유. 응. 그래 주면 고맙고. 하기야 신상용도 설마 너를 피하지는 않겠지.” 비비앙의 한숨에 나는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이곤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아차. 김수현 잠깐만! 한 가지만 더.” “?” “이건 개인적인 호기심인데, 아까부터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응? 내가 뭘.” 비비앙은 대답 대신 시선을 내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눈길은 왼손에 쥐어진 '설아'와, 검신을 쓰다듬는 손길에 꽂혀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오늘 날씨 좋네. 하늘도 창창하고. 그렇지 않아?”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리고 지금은 밤이라고.” 넘어가지 않는다. 나는 곧바로 검을 놓고 몸을 일으켰다. 아까부터 보고 있는 것 같으니, 알아서 찾아가겠지. “네 말을 들으니까 신상용씨가 조금 걱정이 되네. 지금 바로 가봐야겠다. 너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 “으, 응. 고마워. 그런데…. 김수현? 김수현!” 등 뒤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빠른 걸음으로 막사를 벗어났다. '젠장. 이게 무슨 창피야.' 나는 속으로 강하게 투덜거리며, 막사를 나오자마자 바로 제 3제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신상용은 레어 클래스 '키메라 연금술사'이기는 해도, 일단은 마법사 클래스로 편성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결과부터 말하자면, 나는 신상용을 만날 수 없었다. 보초에게 물어 막사를 찾을 수는 있었지만 그는 자리에 없었다. 심지어 같은 막사를 사용하는 사용자들까지도 신상용이 어디 갔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들은 말이라고 해봤자 요즘 들어 근심이 많아 보였다는 것과, 밤늦게 홀로 막사로 돌아온다는 것뿐이었다. 이곳 저곳 이 잡듯 뒤지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나는 일단은 보류해두기로 했다. 막사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내일 따로 만나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대로 돌아가는 건 아쉬운 마음이 없잖아 있어, 꿩 대신 닭이라는 마음으로(?) 김한별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물어 물어 김한별의 막사를 찾아간 결과, 나는 뜻밖의 인물과 조우하고 말았다. “어머? 머셔너리 로드?” “어. 당신은….” “여기는 웬일이세요?” 김한별의 천막 앞에는, 타로 카드 마술사이자 제 3제대장인 선율이 서 있었다. * 제 3 제대 장, 타로 카드 마술사의 개인용 막사. 나는 선율의 안내에 따라 중앙에 비치된 테이블 의자에 앉았고, 그녀와 마주보게 되었다. 막사는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그러나 주변에 놓인 라이트 스톤들이 미약한 빛을 발하고 있었고, 희미한 불빛 사이로 선율의 모습이 어렴풋이 시야에 잡혔다. 이윽고, 선율의 입술이 살며시 열렸다. “그렇군요. 클랜원들이 걱정돼서 찾아오셨다 라…. 후후. 성실하시네요. 마침 저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거든요.” “설마 거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습니다.” “괜찮아요. 전혀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오히려 호감이 가는데요?” 나를 보는 선율의 입가에 가느다란 호선이 그려진다. 나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선율의 복장은 누가 봐도 현대의 마술사를 연상케 할 정도로, 특유의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복장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나 여성이라서 그런지 상하의로 어느 정도 노출이 드러난 상태였다. 소담스러운 어깨와 아름다운 쇄골을 드러내는 검은색 란제리 의상. 안이 제법 비쳐서 그런지 가슴 사이의 골짜기도 은근히 드러내는듯한 느낌이 든다. 거기다 아래는 가터벨트 차림을 선보이기까지. 육감적인 매력이 무척이나 도드라진 게, 꼭 팜므파탈의 결정체를 보는 것 같았다. “음…. 신상용씨라면….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시는 겁니까?” “그럼요. 그래도 일단은 제 제대 원인데요. 그리고 머셔너리 분들에게는 모두 관심이 있어서…. 아마 곧 바바라에 도착한다는 생각을 하니까 많이 떨리는 모양이에요. 생각이 복잡한지 이곳 저곳을 걸어 다니는 것 같은데, 그냥 놔두고 있어요. 그게 더 나을 것 같아서.” 내일 직접 만나봐야 알겠지만, 선율의 말대로라면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도 참 모르겠군.' 처음에는 단순히 허세만 가득한 사용자인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의 주변을 관리하는 수완이나 맡고 있는 역할에 대한 책임감등이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 아무래도 이 사람에 대한 평가도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그분이 돌아오시면 머셔너리 로드께서 찾아오셨다고 말씀해둘게요….” “감사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잠시 동안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왠지 모르게 이 침묵이 불편하게 느껴져, 나는 먼저 말문을 열기로 했다. “마탑 로드. 저한테 궁금한 게 있다고 하셨죠.” 그랬다. 나는 김한별 막사 부근에서 제대 원들을 돌고 있던 선율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왕 오신 김에 잠깐 이야기라도 하고 가지 않겠냐는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여 개인 천막에 들어온 상태였다. “편하게 부르셔도 되요. 그리고 네. 아까도 말했듯이, 머셔너리 클랜원들에게는 깊은 관심이 있어서요.” 선율은 잠깐 생각할게 있는지 입술을 닫았다가 이내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궁금하게 있다고 쳐도…. 솔직히 그렇게 대단한 것들은 아니에요.” “어떤 것들이 궁금하신지요.” “그냥 사람 자체가 궁금했을 뿐이에요. 이것저것 호기심이 일었다고 할까? 어떤 사람일까. 해밀 로드의 친동생이라고 하던데 진짜일까?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유적을 발굴할 수 있었을까? 0연차임에도 불구하고 백서연을 포로로 잡을 정도의 실력은 또 뭘까?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던 고연주를 어떻게 잡은 걸까? 정말 소문대로 절륜한 걸까? 등등 말이에요. 바꾸어 생각해보면, 머셔너리 로드는 저에 대해서 궁금한 것들이 없으신가요?” '뭐?' 잘 나가다가 갑자기 뭔가 삼천포에 빠진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태클을 걸기에는 선율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담담히 입을 열었다. “음…. 중간에 뭔가 이상한 말이 들린 것 같지만, 대강은 알 것 같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궁금한 게 있거든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입니다만.” “어머. 그건 그것 나름대로 호기심이 생기는데. 후후. 저에 대해 어떤 것들이 궁금한지 먼저 들어도 될까요? 살짝 야해도 이해할게요.” “그냥…. 사람이 조금 종잡을 수 없다고 느껴져서요.” “왜요? 왜 그렇게 느끼셨어요?”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 선율은 빤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회의 때나, 클랜원들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나, 아니면 저번에 부랑자들과 대화했을 때나.” “머셔너리 클랜원들이요? 뭐라고 말했는데요? 모두 다 말씀해주시면 안될까요? 궁금해요.” '궁금한 것도 많은 여성이군…. 하기야, 마법사니까.' 아까부터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속으로 약간 쓴웃음이 지어졌다. 하지만 먼저 단초를 제공한 것이 나이기에, 나는 최대한 아는 선에서 대답해주었다. “많이 챙겨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저것 조언도 많이 해주고, 점도 쳐주고, 수다도 나누고…. 꼭 친언니 같다고 하더군요. 아무튼 챙겨주신 것은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아. 하연씨랑 비비앙씨 말씀하시는 거구나. 딱히 감사하실 필요는 없어요. 둘이 마음에 들어서 친분을 쌓은 것뿐이니까…. 그래서 점도 봐준 거고…. 아.” 그제야 대강의 상황을 이해했는지 선율은 이해가 간다는 눈빛을 보여주었다. 그때였다. 한두 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잇던 그녀은, 갑작스레 뭔가를 떠올린듯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약 1분의 시간이 흐르고, 선율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머셔너리 로드.” “예.” “이런 말씀 드리기 조금 그런데…. 그래도 한 가지만 여쭤볼게요. 비비앙씨는 거주민이잖아요? 혹시 그녀와 계약 관계에 있나요?” 왜 갑자기 이런 것을 물어보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있는 사실대로 대답해주기로 했다. 선율의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이 아까부터 대화에 쓸데없는 무게 감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음. 일단은 다행이군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계약서를 한 번 잘 살펴보세요. 그리고…. 또다시 찾아온 침묵. 시원하게 이어지던 아까의 질문에 비해 답답하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속으로 참을 인을 되뇌었다. 다행히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잠시 주저하는듯한 태도를 보이는 선율이 이내 마음을 정한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머셔너리 로드. 조금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말씀 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비비앙씨를 조심하세요.”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저번에 비비앙씨의 점을 친 적이 있는데, 결과가 썩 좋지 못했거든요.” “혹시 점의 내용을 들려줄 수 있습니까?” 조금 외람된 요청일지도 모르지만, 선율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얘기를 꺼냈으니 끝까지 하는 게 맞겠죠. 대신 비비앙씨한테는 비밀로 해주셔야 해요.” “물론입니다.” 이윽고, 내 확답과 함께 선율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실은 카드 점이라는 게 재미로 보는 것도 있지만 상당히 애매해서요. 그런데, 이게 이따금 아주 기가 막힐 정도의 적중률을 보일 때가 있어요.” “애매하다는 것은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거군요.” “맞아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 해석 나름이죠. 애당초 재미로 보는 것도 있고요. 그런데 저번에 비비앙씨는….” 그때의 점괘를 떠올리려는 듯 지그시 눈을 감은 선율은, 그 상태 그대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뭔가 원하는 게 하나 있어요. 소원이라고 표현하면 적당할까요? 그리고, 그 소원은 다른 사람과 아주 강하게 연결되어있고요.” “소원이라면….” “그거야 저도 모르죠. 하지만 그 소원은 이루어질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요. 그리고 비비앙씨의 소원이 이루어졌을 시에는….” 그러고 보니 예전에 비비앙에게 말을 듣기 직전에, 뜻하지 않은 사고로 멈춘 적이 있었다. 해서, 나는 더욱더 선율의 말에 주의를 집중했다. “솔직히 여기서부터는 저도 잘 몰라요. 그러니 카드 해석에 따라 그대로 말씀 드릴게요.” “예.” “둘 다, 자신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예?” 예 와 예? 두 말은 같지만 어감에 따라 뜻이 완전히 달라져버린다. 선율도 그것을 느꼈는지 다시 눈을 뜨고는 입맛을 다셨다. “아까 해석은 나름이라고 말씀 드렸죠? 대충 자신을 잃어버린다, 이 정도로 해석할 수도 있지요. 물론 해석은 자유지만, 그렇게 좋은 의미 같지는 않아요.” '자, 자신이 아니게 되어버려?' 불현듯 어렴풋하지만 낯설지 않은 뭔가가 다가오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간단히 말해서 감이 잡힐 듯 말듯 하다는 소리였다. “머셔너리 로드.” 그때, 앞에서 선율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품속에서 카드 한 뭉치를 꺼내 들고는, 그것을 살짝 들어올렸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머셔너리 로드의 점도 한 번 봐드릴까요?” 촤르르. 촤르르, 촤르르. 그리고 수준급이면서도, 솜씨 있는 카드 셔플링이 이어진다. 이윽고 간단한 셔플을 마친 선율은 고개를 살며시 기울이곤 입을 열었다. “혹시, 궁금하신 거라도?” ============================ 작품 후기 ============================ (오늘 리리플은 하루 쉬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회에 합쳐서 할 생각이오니 독자분들의 양해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독자분들의 배려 덕분에 하루 푹 쉴 수 있었습니다. 일단 카페인 음료는 끊기로 했고, 담배도 조금씩 줄여나가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원래는 다이어트 때문에 저녁도 거의 안 먹었는데, 앞으로 그냥 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으려고요. 하하. 아무래도 1부의 끝을 장식할 전쟁이 다가오다 보니 그전에 이것저것 넣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들이 거의 끝난 상태입니다. 다음 회에는 바바라에 도착할 예정이오니, 조금 늦은 진행이더라도 양해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실은 오늘도 하마터면 글을 올리지 못할뻔했습니다. 지금 집에 냉장고가 고장이 난 상태입니다. 그런데 글을 쓰던 도중, 갑자기 집에 정전되더라고요. 확인해보니까 누전 차단기가 내려가 있었습니다. 그대로 쓰던 게 날아가 정신이 붕괴할뻔했는데, 다행히 워드가 자동 저장인가? 복구를 해주었습니다. 정말 십 년 감수했습니다. 하하하. 아. 내일, 금요일은 제가 학교에서 가장 늦게 돌아오는 날입니다. 혹시라도 자정 업데이트에 늦을 수도 있겠지만, 연재는 꼭 이어나가겠습니다. 요즘 들어 자꾸만 독자분들의 양해를 구하는 일이 생기네요. 얼른 정신 차리고 페이스 회복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0356 / 0933 ---------------------------------------------- 바바라 ‘점을 봐준다고?’ 선율의 호의 어린 제안에 나는 한순간 흥미가 동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니 딱히 궁금한 게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한동안 고개를 갸웃 기울이다가, 결국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딱히 궁금한 건 없어서…. 괜찮습니다.” “어머. 지금 거절하시는 거?” “거절이라기보다는…. 별로 궁금한 게 없어서요. 아무튼 호의는 감사합니다.” “그러지 말고 한 번 보세요. 다음 기회는 없을지도 모르니까. 저, 남자들한테는 웬만해선 이런 얘기 안 꺼내거든요.” 선율의 목소리에 아주 살짝 가시가 돋쳤다고 느낀 것은 내 착각일까? 아니. 착각이 아니다. 선율은 내가 거절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는지 샐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좀 전의 현숙했던 태도는 점차 사그라져가는 게, 은근히 자존심이 상한 듯 보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또 거절하면 실례일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한 번 보도록 하죠.” “그래요. 잘 생각하셨어요. 그냥 하나의 소소한 재미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으니까….” 그제야 원래의 표정을 회복하는 것을 보니, 말을 바꾸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유. 남자를 상대로 보는 건 되게 오랜만인데….” 이윽고 선율은 한숨과 함께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사뭇 진중한 얼굴로 카드를 섞기 시작했다. 탁, 탁, 탁, 탁. 탁, 탁, 탁, 탁. 꽤나 규칙적인 소리를 내는 카드 셔플링. 아까까지만 해도 소소한 재미로 생각하라 말한 주제에, 카드를 섞는 손놀림은 신중하기 그지없다. 점을 준비하는 과정을 가만히 구경하고 있자, 문득 하나의 의문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마탑 로드. 그런데 왜 남자를 상대로는 점을 봐주지 않는 겁니까?” “아. 그거요?” 꽤나 집중하는 모습이라 말을 걸어도 될까 고민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다행히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아주 예전에 남녀 구별 없이 본적도 있어요. 그런데 안 좋은 사건을 한 번 겪은 이후로 남자를 상대로 보는 건 꺼려지더라고요.” “안 좋은 사건이요?” “네. 제가 아직 시크릿 클래스를 얻기 전 저 연차 시절의 일이었죠. 돈이 없어서 대충 만든 카드로 점을 쳐주는걸 부업 삼아 근근이 살아가던 시절이에요…. 아직도 기억나요. 그 놈은 저를 보자마자. 네가 그렇게 젖치기를 잘한다며? 이렇게 말하더니….” '젖? 아니 점치기?' 설마 점치기겠지. 분명 틀린 말은 아닌데 어딘가 모르게 어감이 이상하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탁, 탁, 탁, 탁! 그리고 그 순간 선율이 카드를 섞는 소리가 더욱 거세어지는 것을 느꼈다. 눈매가 살짝 치켜 올라간 게 그때를 회상하자 속이 끓는 모양이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카드 셔플링은 다시금 원래의 리듬을 되찾았다. 그와 동시에, 선율의 입술이 떼어졌다. “갑자기 바지를 벗어 성기를 꺼내더라고요.” “?”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말에 나는 의아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분명 점이 아닌 젖이라고 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차분했고 카드를 섞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디 하나 장난하는 구석을 찾을 수가 없다. '진담으로 말하는 건가?' 머리에 미약한 혼란이 찾아올 즈음, 선율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알고 보니 점치기가 아니라 젖 치기를 얘기하는 거였어요. 젖 치기 모르세요? 전문 용어로는…. 우리 말로는 유방 성교. 일본 말로는 파이즈리.” “미, 미친놈이군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어떻게 하긴요? 저 연차 사용자가 무슨 힘이 있나요. 그냥 해달라는 대로 얌전히 쳐줬죠.” “…예?” 어떻게 이런 얘기를 이리도 담담하게 할 수 있을까. 나는 멍한 기분을 느끼며 선율을 응시했다. 그녀는 어느새 카드를 전부 섞었는지 현란했던 손놀림을 멈춘 상태였다. “…….” “…….”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사이 테이블 위로 착! 소리가 날 정도로 카드를 내려놓은 선율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농담이에요, 농담. 그러니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짓지 말아요. 그냥 잘랐으니까.” “뭐….” 차르르르르르르륵! 텅!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 카드 위에 손을 얹은 선율의 팔이 커다란 반원을 그린다. 이윽고 그녀는 부채꼴로 펼쳐진 카드 옆으로 자그마한 모래 시계 하나를 꺼내놓더니, 이내 예의 침착한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후. 그럼 시작해볼까요? 궁금하신 게 없다고 하셨으니, 점은 제가 임의대로 볼게요.” “마법의 탑 로드.” “아. 이 시계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점을 도와주는 도구에요.” “…….” '진짜로 종잡을 수 없는 여성이다.' 갑작스레 긴장이 한꺼번에 풀린 탓인지 입술 사이로 노곤한 한숨이 흘러나온다. 나는 어이없는 기분으로 선율을 응시했다.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녀가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머금었다고 느꼈다. “그럼 지금부터 방법에 대해 설명할게요. 아주 간단해요.” “예 예. 마음대로 하시지요.” 문득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선율이 왠지 모르게 무척 얄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대답하는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불퉁함이 듬뿍 담겨있었다. “쿡. 여기 펼쳐진 카드들이 보이시죠? 이걸 한 장씩 골라내시면 되요.” “…그게 끝입니까?” “네. 거의 대부분이 열두 장에서 끝나지만, 다른 경우도 드물게 있으니까요. 다만 지금부터 말하는 세 가지는 꼭 지켜주세요. 한 번에 한 장씩. 그리고 제가 그만두라고 말했을 때는 뽑는 것을 멈춰주셔야 해요. 마지막으로, 고른 카드는 왼쪽부터 순서대로 놓아주세요.” “아. 예….” 그 말을 들은 순간 약간 김이 새고 말았다. 물론 애당초 재미로 보는 거라고 듣기도 했고, 스스로도 크게 의미를 둔 것은 아니었다. 그랬던 주제에 알게 모르게 기대한 게 있었던 모양이다. 해서, 나는 마음을 편하게 먹고 눈에 보이는 카드로 손을 옮겼다. 그리고 막 한 장을 집으려는 순간, 불현듯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것에 관한 점입니까?” “그냥 총체적인 거라고 보시면 되요.” 선율은 명료히 대답했다.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재미라는 말을 끝없이 되뇌며 가볍게 한 장을 골라내었다. 그리고 그녀를 응시하자, 선율의 시선이 모래시계로 향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선율은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확인은 모든 카드를 골라낸 후에 할거예요. 뽑은 카드는 뒤집은 채 왼쪽부터 두시면 되요. 계속 골라내세요.” 선율의 확언에 나는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장씩 빠르게 카드를 골라내기 시작했다.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나는 신속하게 카드를 골라내었고, 이윽고 12장을 넘어 13번째 카드를 골라내려는 순간이었다. 문득 앞에서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잠시 뽑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자, 아까부터 계속해서 카드와 모래시계를 번갈아 보는 선율이 보인다. 아까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현재 선율의 눈동자에 미묘히 당황한 빛이 보인다는 것.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리자 아까보다 제법 줄어든 모래시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과 비교해보면 5분의 4정도 줄어들었을까. 나는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왼쪽부터 가지런히 진열된 카드가 15장에 이르렀을 무렵, 비로소 선율이 나를 제지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이, 이, 이제 그만하세요!” 선율의 목소리는 이제 언뜻 들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한 떨림을 담고 있었다. 모래시계에 채워져 있던 가루는 이제 완전히 아래로 내려간 상태. 선율은 마음을 추스르려는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가, 약간이나마 떨림이 잦아든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여, 열다섯 장이라니. 이 정도로 나온 건 저도 처음인데요. 아무튼…. 정말 궁금하네요. 그럼 일단 왼쪽 네 장부터 열어주시겠어요?” 원래 대부분 12장에서 끝난다고 했던가? 어쨌든 예외가 있다고 했으니, 나는 순순히 왼쪽부터 4장을 뒤집었다. 이윽고 테이블에는 커다란 피 웅덩이와 그 속에서 절규하는 남자. 거꾸로 돌아간 시계. 시꺼먼 것을 불태우는 맑을 불꽃. 그리고 가슴에 검을 꽂은 채 풍경화 속에 홀로 서 있는 남자 한 명이 그려져 있는 카드가 순서대로 펼쳐졌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4장의 카드 아랫면에 깨알 같은 글씨가 적혀있었다는 것이다. 선율은 굉장히 집중하는 얼굴로 하나씩 카드를 살피더니 침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으음. 어렵네요. 그래도 하나씩 차분히 해석해볼게요. 피 웅덩이. 당신은 원래 굉장히 험난한 운명을 타고났어요. 거꾸로 돌아간 시계. 하지만 그 운명에 뭔가 알 수 없는 존재가 개입했네요. 맑은 불꽃. 그것의 정체는 이 카드인데…. 태고, 세상?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어요. 마지막으로 세상 속에서 가슴에 검을 꽂은 남자. 처음의 카드가 두 번째와 세 번째를 거치며 마지막 카드로 변했네요.” “마지막 카드는 뭘 의미하는 겁니까?” 내 물음에 선율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앞의 세 장과 연관 지어 해석해보면…. 당신의 총 두 가지 요인이 개입했고, 그 결과 당신의 운명이 완전히 뒤바뀌었어요. 여기서 맑은 불꽃은 태고 또는 세상을 의미하며, 당신은 세상의 총애를 받고 있어요.” “총애요?” “네. 하지만 조심하세요. 이건 무조건적인 총애가 아니에요. 남자의 가슴에 검이 꽂혀있는 것 보이시죠? 이것은 양날의 검을 의미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까닥 잘못하면….” 선율이 말끝을 흐리자, 문득 가슴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잠시 동안 눈을 깜빡였다가 한두 번 목을 가다듬었다. “흠. 재미있네요. 그럼 다음에도 네 장을 뒤집을까요?” “네.” 앞선 4장에 대해서는 얼른 넘어가고 싶었기에, 나는 재빠르게 4장의 카드를 뒤집었다. 그리고 이번에 열린 카드는 매우 복잡한 형태를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각각의 카드에, 굉장히 복잡한 그림이 여러 개씩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먼저 첫 번째 카드로 시선을 돌렸다. 첫 카드는 정확히 네모난 사등분이 된 카드로써, 각 칸에 아름다운 여성이 한 명씩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여성의 주위로는 분위기를 나타내주는 배경들이 보인다. '피와 강철. 아름답지만 상처가 많은 검. 그림자. 그리고…. 마지막은 뭐지? 빛인가?' 그 중, 오른쪽 하단에 그려진 여성은 유독 특이했다. 배경을 보면 성스러운 분위기를 띠고 있었는데, 다른 여성들과 다르게 혼자서만 피눈물을 흘리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빛이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밝은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처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림이었다. 이어진 두 번째 카드는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림 자체가 작아 알아보기도 어려웠거니와 인간, 동물, 검, 날아다니는 용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카드는 비교적 그림이 적었지만 더욱 미묘하다. 카드의 중앙에 한 명의 아기가 그려져 있었는데, 아기의 주위를 맑은 불꽃과 시뻘건 불꽃이 정신 없을 정도로 휘감고 있었다. 둘 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불꽃으로 느껴졌는데, 시뻘건 불꽃을 보자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졌다. 그리고 다행히도(?), 마지막 네 번째 카드는 앞선 카드들과 비교하면 굉장히 간단했다. 다른 복잡한 카드들에 비해 왕관을 쓰고 있는 남성 한 명이 그려져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선율을 쳐다보았다. 해석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율의 얼굴을 보는 순간 뜻을 물어보려던 입은 절로 다물어졌다. 카드를 들여다보는 그녀의 표정이 가히 압권이었기 때문이다. 항상 차분하고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던 것과는 다르게, 지금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입을 쩍 벌리고 있다. 벌어진 입 사이로 당황, 황당, 혼란 등의 감정이 봇물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니, 그런 느낌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선율은 더듬더듬 입을 열기 시작했다. “머, 머셔너리 로드.” “예.” “여, 여자 관계가 왜 이렇게 복잡하세요? 왜, 왜 이래요 이거? 도대체 뭐죠?” “예?” 순간 “그걸 왜 나한테 물으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왜냐하면 선율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래 왕이니까. 네 명의 여왕은 그렇다 쳐도…. 아. 세 명인가? 한 명은 스스로 밀어냈네. 어머 불쌍해라….” “…….” “마법사. 궁수. 사제. 마녀 등등. 그래. 백 번 양보해서 여기까지는 이해할만해…. 인간이잖아. 그런데…. 검? 고양이? 거미? 용? 아니 신수인가? 아…. 모르겠어…. 아니 어떻게 검이 인간을 사랑해…?” “…….” “세 번째는…. 하나는 정화의 불꽃. 하나는 파괴의 불꽃. 정화와 파괴는 상반 속성인 게 당연한 이치. 그런데 왜 갑자기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표현된 거야….” 듣는 내가 괴로울 정도로 선율의 정신이 서서히 붕괴되어가는 게 느껴졌다. 갑작스레 안쓰러운 느낌에, 나는 결국 손을 휘젓고 말았다. “마탑 로드. 그만합시다.” “머, 머셔너리 로드.” “힘들면 그만해도 됩니다. 어차피 해석 나름이고, 재미잖아요.” “…….” 선율을 일순 갈등하는 빛을 띠었지만,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얼굴에 발간 홍조가 피어오른 게 어지간히 창피한 모양이었다. “저, 정말 미안해요. 제 카드가 일종의 마법 카드라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나오는데, 이런 카드가 나온 적이 처음이라…. 해석이 전혀 되지 않아요. 그, 그럼 나머지 네 장, 아니 일곱 장이라도….” “일단 진정하세요. 나머지 카드들은 뭘 의미하는데요?” 한번 더 손사래를 치자 그제야 자신의 추태를 깨달았는지 선율은 가볍게 숨을 몰아 쉬었다. “후, 후유. 그러니까 나머지는…. 다음 네 장은 머셔너리 로드가 원하는 것. 즉 일종의 미래라고 보시면 되요. 그리고 나머지 세 장은…. 일단은 분기점 또는 추가 해석으로 볼 수 있는데, 열어봐야 알 것 같아요.” “그렇군요…. 그럼 됐습니다.” “네?” 약간 실례가 될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만 몸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다른 거라면 혹시 들을 마음도 있었겠지만, 미래에 관한 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솔직히 말해서 궁금하다. 하지만 미래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한 가지 맹세한 게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카드를 보아버리면, 겨우 다잡은 마음이 또다시 흔들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제 운명. 두 번째는 제 연애 운. 여기까지는 뭐 괜찮습니다. 하지만 미래는 보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요.” “…….” “괜히 봐서 앞으로의 행보에 영향을 받느니, 그냥 처음 생각대로 쭉 밀고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거야…. 그렇죠. 미래는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니까요. 물론 원하는 것이랑 조금 다른 의미이기는 하지만. 알았어요. 머셔너리 로드의 뜻이 그렇다면 점은 여기서 그만둘게요.” 아직 조금 당황한 빛은 남아있었지만 다행히 선율은 내 의견에 동의해주었다. 나는 서너 번 고개를 끄덕이곤 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마탑 로드.” “후유. 저는 미안한 마음뿐이네요. 그렇게 자신 있는 모습을 보였는데…. 부끄러워요.” “당신의 프라이드를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는 정말 괜찮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마셨으면 합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 시선 아래 잠시 아직 열리지 않은 일곱 장의 카드를 응시했다. '…….' “그럼.” 하지만, 이내 미련을 털어버리곤 곧바로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 다음날. 간밤에 여러 일을 겪기는 했지만, 나는 언제나와 같은 아침을 맞이했다. 그리고 의례적인 간단한 정비를 마친 이후, 드디어 동부의 바바라를 향한 마지막 행군에 참가했다. 이미 웬만한 지역은 거쳤다. 더 이상 버려진 들판도, 거친 숲도 보이지 않는다. 잘 닦여진 길들과 정돈된 초원이 사용자들의 주변에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나는 가는 도중 제 3제대를 한 번 더 찾아간 것을 제외하고는 행군 진형의 자리를 지켰다. 아침에 제 3제대를 찾아갔을 때 신상용이 돌아온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말을 걸기에는 너무도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고, 행군마저도 혼자서 멀찍이 걸어오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걸음을 돌린 것은, 신상용이 내가 온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 번 눈도 마주쳤다. 하지만 정중히 허리를 숙이고 시선을 피하는 것을 보아 머릿속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해서, 나는 억지로 말을 걸기보다는 스스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참가 전 신상용이 마지막에 보였던 의지를 믿어보고 싶었다. 내가 자리로 돌아온 이후 행군은 계속되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자, 어느덧 해는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석양은 황혼 빛을 뿜어 초원을 진한 붉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고, 우리는 초원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붉은빛을 가로질렀다. 잠시 후, 길은 바바라의 부근 지역으로 연결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원래 지금 시간대라면 이 길은 탐험 또는 사냥에 나섰던 사용자들이 서로 웃거나, 또는 울거나 하면서 도시로 돌아와야 정상이다. 하지만 아주 조금씩, 천천히 어둑한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한 길은, 끝없이 싸늘하고 고요한 전운만이 맴돌고 있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시간이 흐르고, 세상을 붉게 물들이던 황혼 빛도 서서히 사라져갈 무렵. “바바라 도착 5분전입니다! 모두 준비하십시오!” 눈 앞에 보이는 너른 평야에, 거대한 도시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게 서서히 잡히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점이 많이 어렵네요. 원래 점에 대해서는 원래 나머지 일곱 장에 중점을 두려고 했습니다. 다만 그렇게 되면 바바라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아 일부러 잘랐습니다. 하하하. 다음에 회상 때 드러낼 생각이에요. 물론 그때 김수현은 없겠지요. 그리고 이번 점에 대해서 궁금하신 게 있다면 저에게 쪽지를 보내주세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최대한 성실히 답변하겠습니다. 쪽지가 많이 쌓였네요. 제가 평일에는 워낙 바빠 확인할 시간이 없고, 주말에 몰아서 답신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내일 오후 즈음에는 모든 쪽지에 답신이 들어가있을 거예요. :) 『 리리플 』 1. ROK1198 : 1등 축하합니다. ROK하니까 갑자기 예전에 서든 어택 칼 클랜이 생각나네요. 하하.(마, 맞나요?) 2. 갸갸겨겨 + 오리콘 : 쿠폰 감사합니다. _(__)_ 앞으로 더욱 열심히 적겠습니다! 3. Nodens : 히, 힘내세요. 토닥토닥. 저는 1등을 포기하니까 너무 마음이 편해요. :) 4. katalina : 이해가 되지 않으시거나, 궁금하신 부분 있으시면 쪽지 주셔도 됩니다! 5. SHarPº : 네. 맞습니다. 이번 회의 점도 비슷하게 해석하시면 됩니다. 어디까지나 해석하기 나름이니까요. :D 6. hohokoya1 : 하하. 이번에 워낙 신청한 학점이 많다 보니 시험 때는 조금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7. 이런남자이니까 : 헉~. 그러면 너무 많아져요! ㅋㅋㅋㅋ. 일단 선율은 계획에 들어있지 않아요! 8. 하얀불 : 김유현. 신상용. 이번 행군에 이 둘의 비중을 의도적으로 줄였습니다. 후후. 왜 그랬을까요? 9. chlghsk : 그 반대로 생각해주시면 됩니다. 저는 강하고 포근하고 자상하고 부드러운 연상 누나가 좋아요. 길들여지고 싶어요. 하아 하아. 10. 참수리358 : 아, 스파이는 그, 농담이었습니다. 우리 중에 스파이가있어, 이것을 패러디 한 후기였습니다. 그 정체는 노유미의 깜짝 출연이었지요. ㅜ.ㅠ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57 / 0933 ---------------------------------------------- 바바라 회상 어느덧 깊었던 밤은 시간에 흘러가버리고, 희뿌연 한 새벽 안개가 막사를 뒤덮었다. 새하얀 안개가 찾아 든 막사의 안에는, 한 명의 여인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었다. 자욱한 안개 속 보이는 얼굴에는 약한 피로감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아직 떠져있는 눈과, 고뇌에 가득 찬 눈동자로 보아 잠들지 않고 깨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후유.” 문득, 여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타로 카드 마술사, 선율이었다. 그녀는 간밤에 김수현이 자리를 떠난 이후 지금껏 쭉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태였다. 밤을 지새워 눈이 피곤한지 선율은 눈두덩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그러더니, 다시금 시선을 테이블 위로 내리꽂았다. 새벽 동안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테이블에는 일부는 열린, 그러나 일부는 아직 뒤집힌 15장의 카드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 아무 말도 않은 채, 조용히 카드만 쳐다본 지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그래. 보자.” 밤새 동안 수없이 고민한 마음에서 발로한 말이라서 그런 걸까. 그러나 선율의 눈가에 스산한 빛이 스치는가 싶더니, 마치 가슴에 걸린 것을 토해내는 것처럼 말을 내뱉는다. 그녀는 한참 동안 죄 없는 카드를 노려보다가 이내 천천히 손을 내뻗었다. 이윽고 목적지에 닿은 손은 거침없이 카드를 뒤집기 시작했다. 한 장, 두 장, 세 장, 네 장…. 이로써 총 열두 장의 카드가 뒤집혔다. 이어서 열세 장째 카드를 뒤집으려던 손길이 잠시간 멈칫한다. 카드의 끝을 잡고 있던 손이 덜덜 떨리는 것으로 보아 꽤나 고민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내 손을 떼는 것을 보니 아직은 완전한 결단을 내리지는 못한 듯 보였다. 새로 카드를 펼치자, 선율의 목 울대가 꿀꺽 움직인다. 이윽고 그녀는 일단 처음 네 장의 카드를 살펴보려는지, 시선이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 그러나 이번에도 시원하게 해석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선율은 곧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첫 번째 카드에는 빛나는 검을 들고 있는 왕이 그려져 있었다. 두 번째 카드에는 추악한 악마가 그려져 있었다. 세 번째 카드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을 지닌 타락한 여왕이 그려져 있었다. 네 번째 카드에는 갈림길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문제는 바로 두 번째와 세 번째 카드에 있었다. 두 번째 카드에 그려진 추악한 악마는 원래 대상자에게 위험 또는 위기가 닥쳐오는 것을 뜻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지금 테이블에 놓인 카드의 악마는 꽤나 비참한 모습이었다. 온몸은 상처투성이에 전신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납작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는 모양새였다. 세 번째 카드에 그려진 여왕은 더욱 가관이었다. 온몸은 벌거벗은 것도 모자라, 양다리를 활짝 벌려 음부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바닥에 누워 멍하니 침을 흘리는 그림은 앞서 보았던 위엄 있는 여왕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첫 번째 카드에 그려진 왕은 바로 그들을 바라보며 싸늘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손에 들린 빛나는 검이 오른쪽 방향을 겨냥하고 있는 것은 과연 우연일까? “악마와 인간에게…. 뭔지 모를 위험이 닥쳐오고 있다? 가해자는 왕이고…? 이건 또 무슨….” 차라리 왕과 악마의 카드 위치가 뒤바뀌었더라면 선율은 이해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카드들이 가지는 통상적인 의미는 크게 변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자꾸만 상식을 벗어나는 카드들이 나오는 탓에 그녀의 머리는 계속해서 혼돈으로 빠져들어 갔다. 선율은 한동안 두 카드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다시금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이내 머리를 절레절레 젓는 게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을 포기한 모양이었다. 결국 조금이나마 의미를 이해한 것은 마지막 네 번째 카드뿐인지, 선율은 쓴맛이 감도는 입안을 다셨다. “갈림길….” 네 번째 카드에 그려진 갈림길은 어떤 상황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의미를 갖고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결국 이 카드도 해석하지 못한 것과 다름없었다. 네 장을 완전히 이해하고 그것을 서로 연결지음으로써 하나의 의미가 완성되는데, 선율은 한 장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것도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선율의 시선이 아직 닫혀있는 카드 세 장을 향한다. 그녀는 일순 한 번 더 고민하는 빛을 지었지만 결국에는 한 장씩 천천히 뒤집기 시작했다. 열세 번째 카드를 넘겼다. 이번 카드는 온몸이 포박된 채 꿇어앉아 있는 남자가 그려져 있다. 이어서 열네 번째 카드를 넘긴다. 다시 한 번 갈림길이 그려진 카드가 나왔다. “…….” 이제는 마지막이었다. 선율은 미미하게 떨리는 손으로, 끄트머리에 있던 카드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것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넘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카드가 절반가량 뒤집힌 순간이었다. “!” 카드에 드러난 그림의 일부를 확인한 순간, 시종일관 가늘었던 선율의 눈매는 일순 화등잔만 하게 커지고 말았다. * 오후에서 저녁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시간대라서 그런지, 바바라의 평야는 전체적으로 미약한 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고작 어스레함으로 인해 시야를 방해 받기에는, 사용자들에게는 마력이라는 아주 효율적인 수단이 있었다. '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걸까.' 하지만 마력으로 안력을 돋운 내 육안에는 지금 아무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나는 한번 더 바바라의 성벽을 살폈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전 들었던 도착 5분 전이라는 소리는, 바바라의 성문이 아닌 부근 지형까지의 거리를 계산한 말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동부는 이미 바바라에 도착했다고 볼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해보자면, 동부는 도시와 약 사오백 미터 가량의 거리를 남겨둔 채 행군을 정지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바바라의 부근에서 이상 징후를 포착했기 때문이다. 원래는 도착하자마자 각 부대가 지정된 성문의 부근에 터를 잡고 전진 기지를 설치하는 게 1차 계획이었다. 그러나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이상 징후로 인해, 일단은 무조건 대기 상태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한동안 진형의 중앙에 멀거니 서 있다가, 이내 서서히 앞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전방에는 궁수 사용자들로 이루어진 제 2제대와 마법사 사용자들로 이루어진 제 3제대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지나쳐 더 앞에 있는 최전방으로 가자, 고려 로드를 위시한 제대 장들이 보인다. 얼굴들이 제법 심각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상 징후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틀림없었다. 그 이상 징후란, 바로…. “마법 진 해석 진행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지?” “일단 시야 능력치가 있는 궁수 사용자들이 뛰어다니고는 있습니다만…. 약간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도시의 주위에 그려진 거대한 하나의 마법 진이었다. 아직 아무런 마력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지만, 도시 전체를 둘렀을 정도로 크기가 방대해 해석에 시간이 걸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대 마법 진 : 수호용 대규모 마력 차단 진』 물론 나야 이미 제 3의 눈으로 확인한 상태였다. 보자마자 그냥 알려줄까라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나는 바로 그 생각을 털어버렸다. 제 3의 눈은 내 최후의 보루 중 하나로써 알려져 봤자 하나도 좋을 것이 없는 능력이었다. “어, 어? 뭐지?” “왜? 뭔가 보여?” “어, 어. 이제 올라오는 것 같은데?” 웅성웅성. 웅성웅성. 그때, 특별 조원임을 이용해 개인적으로 전장을 살피고 있을 즈음, 주변 사용자들의 기척이 한층 부산스러워지는 게 느껴졌다. 왜 그런가 하고 고개를 돌리자 다들 한 명 두 명 고개를 들어 성벽을 바라보는걸 볼 수 있었다. 한순간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나는 얼른 마력을 돋워 다시 성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분히 왼쪽부터 훑자, 벽면 위로 속속히 모습을 드러내는 일단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드디어 서 대륙과 부랑자들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어서 올라온 사용자들의 수는 동부 정도는 안되지만, 그래도 바바라의 성벽을 어느 정도 채울 만큼 제법 많은 인원을 보이고 있었다. “각 부대에게 전해라. 지금 당장 작업을 중지하고 경계태세에 들어가라고!” 서 대륙과 부랑자들이 대놓고 모습을 보인 상황에 이어진 고려 로드의 대응도 신속했다. 이미 서로 마음만 먹으면 타격을 줄 수 있는 사정거리 안에는 들어선 상태였다. 여기서 따로 들어간 사용자들은, 혹시라도 선제 사격으로 이어진 화살이나 마법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게 약 10분 정도 흘렀을까. 우우웅…! 문득, 앞에서 커다란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마력의 흐름이 포착되었습니다!” “방어! 방어 마법을 준비해라!” “───. ───. ───.” “그리고 2제대는 3, 4제대의 방어 후 곧바로 사격할 수 있도록!” 그러자 3, 4제대의 사용자들 사이로 일제히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수천 명의 사용자들이 한꺼번에 주문을 외우는 소리는, 과연 장관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웅장했다. 그때였다. 우우웅…. 화악! (아아. 아아. 음성 증폭 시험. 번역 시험. 북 대륙 사용자분들. 잘 들리십니까?) 커다랗게 일어났던 마력의 흐름은 한순간 널따랗게 퍼지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맑은 음성이 평야에 울려 퍼졌다. (아하. 옆에서 확실히 들린다고 해주는군요. 하하. 저는 서 대륙의 사용자 시몬 그라임스라고 합니다. 북 대륙 분들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성벽에서 들리는 음성에 동시다발적으로 주문을 외우던 소리들이 일제히 끊겼다. “조성호. 음성 증폭 마법의 근원지는?” “중앙입니다. 하지만 틈에 섞여있는지 모습이 명확히 보이지는….” “모습까지는 됐어. 각 제대 장에게 분위기 가라앉히고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해. 그리고 우리도 지금 바로 음성 증폭 마법과 번역 마법을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갑작스레 대화를 걸어 약간 당황스러운 분위기가 퍼져 나가는 듯싶었지만, 고려 로드 역시 만만찮은 인물임은 분명했다. 내 기준에서는 아주 만족스러운 정도는 아니었지만(내가 지휘관이었다면 대화는 일단 미루어두고 화살과 마법 세례부터 날렸을 것이다.), 현존하는 북 대륙 최고 클랜 로드의 이름값 정도는 해내고 있었다. (음. 대답들이 없으신데…. 그래도 아무나 대답이라도 해주시면 안될까요? 공식적으로 한 가지 제안할 것이 있습니다.) (들어보도록 하지.) 이윽고 바로 마법을 활성화했는지, 고려 로드의 중후한 목소리가 시몬의 말을 맞받아쳤다. (오. 확실히 들렸습니다. 그런데 잠시만요. 얘기를 꺼내기 전에 지금 저와 대화를 나누시는 분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알 것 없다. 그냥 얼른 제안이나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역시 한국인들은 성미가 급하군요. 여유가 없어요, 여유가. 후후.) 그리고 이어서 들려오는 미미한 웃음소리. 하지만 크게 거슬리지 않는다.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맑고 순하게 들리는 웃음소리였다. (그럼 원하시는 데로 바로 제안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 별거는 아니고요. 일단 북 대륙 분들이 지금 막 도착하셨는데, 오늘 하루는 그냥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먼 길을 달려오시느라 정말 수고하셨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차피 오늘은 날도 늦었으니…. 어때요?) (개소리군.) 고려 로드는 시몬의 제안을 간단하게 일축했다. 하지만 이러한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곧바로 여유로운 음성이 대답했다. (하하. 너무하시네요. 그래도 나름 호의를 보인 건데. 진정으로 말해서, 저희야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낸 상태이고, 애초 바바라에도 무, 혈, 입, 성…. 후유. 을 했으니까요.) 무혈입성(無血入城). 이 말의 뜻이 의미하는 바는 컸다. 그리고 문득 시몬이 바로 지금을 노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독 그 부분만 익숙하지도 않은 언어를 꺼낸 이유가, 바로 사기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가 아닐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몬이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다면, 동부가 미리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얼마 전 사용자로 위장해 들어오려고 한 부랑자들에 의해서 말이다. '서 대륙 사용자와 부랑자의 공조가 이루어지지 않는 건가?' 물론 여기에도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만일 부랑자들이 독단으로 행한 일이라면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이윽고 고려 로드의 음성이 귓가로 흘러들었다. (항복한 사람들은 어떻게 됐지?) (아? 네, 네. 뭐. 잘 있습니다. 남자분들이나 여자분들이나. 여러분들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를 지루하지 않게 해주셨지요.) (흐음. 그런가.) (응…?) 말끝을 미묘히 올리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동부의 담담한 태도에 시몬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려 로드는 일부러 보라는 듯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예의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알겠다. 아무튼 네 제안은 잘 들었다.) (오. 그럼 받아들이시는 겁니까?) (좋다. 고맙게 받아들이도록 하지. 그럼 서로 오늘밤은 푹 쉬고, 내일 아침에 보자고.) 고려 로드는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마법을 펼친 사용자에게 입을 열었다. “지금 바로 음성 증폭 마법을 꺼라.”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로드. 정말로 저 시몬이란 자의 제안을 받아들이실 생각입니까?” “그럴 리가. 서 대륙 놈들이 미친놈들이라는 소리는 들었는데, 진짜 미친놈들이야. 일단 해석 작업을 재개하고, 하면서 2, 3, 4제대에 일러. 오늘밤 기습 공격을 준비하도록.” '좋아. 그래야 고려 로드답지.' (아. 잠시만요. 여기 있는 떠돌이 분께서 따로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는데요. 일단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 그때 아직 음성 증폭 마법을 꺼두고 있지는 않았는지, 다시 우리를 붙잡는 시몬의 음성이 들렸다. 그 소리에 나는 더욱 마력을 돋워 시선을 집중했다. 혹시라도 성벽에서 중요 인물들이 이동하는 낌새를 포착할 수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서로 환담을 나눌 사이도 아니니, 간단히 한 가지 묻겠다. 사용자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곧바로 낮고 거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까처럼 약간 부조화가 느껴지는 번역 투가 아니라 익숙하게 들리는 언어였다. 그렇게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지고, 이윽고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이곳에, 머셔너리 로드인 사용자가 있는가.)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많이 늦었습니다. 오늘 예상치 못한 습격을 받아, 집필이 많이 늦어졌습니다. 조카들에게 컴퓨터를 점거 당했거든요. ㅜ.ㅠ 원래 후기와 리리플에 이것저것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오늘 하도 복잡하게 지내서 그런지 일단은 전부 내려놓고 쉬고 싶네요. 일단 지금 날이 많이 늦었으니 바로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쪽지는 정말 죄송합니다. 일요일 오후 안으로 필히 답신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좋은 밤 보내세요. 0358 / 0933 ---------------------------------------------- 함정(1) 설마 나를 찾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에, 잠시 동안 어리둥절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그것은 주변의 사용자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약한 소란과 함께 몇몇이 나를 돌아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머셔너리 로드…? 갑자기 그는 왜….” “여기 있습니다.” 이미 나 또한 최전방으로 나온 상태였다. 가까운 곳에서 고려 로드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바로 손을 들어 대답했다. “흠. 마침 이곳에 계셨군. 떠돌이라 함은 아마 부랑자를 말하는 것 같은데…. 원치 않는다면 응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응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그래도 너무 깊게 이야기는 나누지 마시오. 위험한 놈들이니….” 고려 로드의 조언에 나는 한두 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는 옆에 서 있던 마법사를 향해 눈짓을 보내었다. 그러자 짧은 주문과 함께 다시금 음성 증폭 마법이 활성화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네가 머셔너리 로드인가.) 성벽에서는 우리가 훤히 보이는 모양이다. 내가 앞으로 나오자마자 예의 낮은 음성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뮬에서는 꽤나 분탕질을 쳐놓고 갔더군. 제법 인상 깊었다.) (분탕질에 대한 정의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 같군. 떠돌이.) (…큭.) '뮬에서의 일을 알고 있다면…. 소문을 들은 건가? 아니면 워프 게이트로 넘어온 건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말이었지만, 일단 생각은 미루어두기로 했다. (좋아. 그럼 한 가지만 물어보지. 그때 너를 추적한 내 부하들이 있었을 텐데…. 그들은 지금 어떻게 됐지?) (죽었어.)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되물어오는 음성은 여전히 낮고 침착했지만, 미묘하게 느껴지는 분노를 품고 있었다. 놈들이 그 사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포로로 잡았다느니 공개 처형을 했다느니 세세한 정보를 말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 모두 죽었다.) (그….) “그”라는 말을 끝으로 부랑자의 음성이 멈추었다. 뒷말을 약간 흐린 것으로 보아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 음성은 최소 3만 명이 듣고 있는 음성이었다. 개인적인 사항을 묻기에는 주변의 눈치가 보이리라.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백서연에 관해서 묻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렇군. 알겠다. 서로 적임에도 불구하고 질문에 대답해준 점은 고맙게 생각한다.) (용건은 끝났나?) (그래. 끝났다. 그리고 알려준 것에 대한 답례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좋은걸 주도록 하지.) '좋은 거?' 이미 안력은 물론이고 다른 감각 또한 한껏 돋운 상태였다. 다시 한 번 성벽을 자세히 살피자 이내 성벽 사이로 길쭉한 막대기 하나가 세워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거기에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막대기 끝에 둥글고 뭉툭한 것이 꽂혀있었다는 점이다. “조심하시오. 머셔너리 로드. 마법사! 이제 그만 음성 증폭 마법을….” 옆에서 고려 로드가 무어라 말하는 것 같긴 한데, 귀에 자세히 들어오지는 않는다. 아까부터 내 신경은 온통 막대기에 쏠려있었다. 처음 수직으로 세워져 있던 그것은 서서히 기울어져 수평을 맞추더니 이내 더더욱 아래쪽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그 끝은 종래에는 정확히 나를 겨냥했다. 이윽고 내던질 준비를 하는지 한껏 뒤로 젖혀진 막대기는. (머셔너리 로드. 그때 분탕질에 선물이다. 너희들도 보면 좋아할 거야. 흣!) 이윽고 낮은 기합성과 함께 힘껏 쏘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쐐애애애애애애액! 감각을 활성화해서 그런 걸까. 나를 향해 직선으로 내리 꽂히는 막대기의 파공음이 유난히도 살벌하다. 그러나 이미 행동을 눈 여겨 보고 있었던 만큼, 나는 반사적으로 '칼리고 아브락사스(Caligo Abraxas)'를 쥐었다. 끝에 뭐가 달려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처음 떨어져있던 거리는 대략 사오백 미터. 그러나 막대기는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거리를 순식간에 줄여 들어오고 있었다. 눈 한 번 깜빡이자 지척까지 다가왔을 정도로. 이 찰나의 순간, 나는 대강의 거리를 가늠하고 무릎을 살짝 굽혔다. 막대기가 사정거리에 들어오자마자 발검술로 베어버릴 요량이었다. 그때였다. 번쩍! 한순간, 빛이 번쩍였다. '응?' 말 그대로 한순간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현상이었다. 웅성웅성. 그리고 이어지는 미약한 어수선함. 아마 육안 그대로 보았다면 어렴풋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력을 활성화해서 그런지, 내 시야에는 확실하게 잡혔다. 강렬한 빛을 내뿜는 하나의 빛 줄기가 쏜살같이 달려들어 막대기의 끝을 정확히 맞췄다는 것. 그래. 그것은 마치 하나의 섬광(閃光)과도 같았다. 푸확! 그 증거로 신속으로 날아오던 막대기는 공중에서 그대로 폭사했고, 갈가리 찢겨진 파편과 함께 검붉은 액체가 허공에 비산했다. 아무래도 막대기 끝에 달려있던 것은 사람 신체의 일부였던 모양이다. 그 중에서도 머리일 가능성이 높았다. '누구의 머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머리에 대한 생각은 털어버리고, 나는 화살의 주인공으로 생각을 전환했다. 대강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확인 차 고개를 돌린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하지만 낯설게 느껴지는 한 여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항상 보여주던 온화한 얼굴과 상냥한 미소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임한나는 눈매를 잔뜩 치켜 올린 채 성벽을 매섭게 노려보는 중이었다. 그런 그녀의 왼손에는 '찬란한 섬광(Brilliant Flash), 라우라 필리스(Laura Phyllis)'가 들려있었다. 우웅! 화아악! 시위도, 살도 없는 활이었다. 하지만 이내 화려한 빛을 내뿜는 화살이 한발 더 생성되었고, 다시금 무시무시한 기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임한나가 어지간히도 분노한 모양인지, 화살의 끝에서는 대지를 쪼갤듯한 기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사용자 임한나. 그만두세….” 꾸릉, 꾸르릉. 일단 지금은 한발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에 그만두라고 지시할 참이었다. 그때, 갑작스레 구름이 부딪쳐 우레가 울리는듯한 소음이 사방을 울린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성벽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반대로 성벽에서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보였다. '이건 또….' 그리고, 내가 주문의 정체를 확인하고 그만두라고 말하기도 전에. 짜작! 짜자작! 어두워진 하늘에서, 한 줄기 거대한 벼락이 지그재그를 그리며 내려 꽂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찌지직! 쾅! “Shit!” 귀를 왕왕 울리는 거대한 폭음이 일어나고, 시몬은 깜짝 놀라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이윽고 찌릿한 여파를 담은 매캐한 연기를 맡았는지 그는 코를 벌름거리며 힐끔 옆을 쳐다보았다. “Oh My God….” 찰나의 순간이기는 했지만 벼락이 내리 꽂히기 직전 분명히 방어막은 생성되었다. 그러나 방어막은 한순간에 찢겨나갔고 벼락은 여지없이 성벽을 강타했다. 그 결과, 그곳에는 시커먼 연기와 함께 신음을 흘리는 몇 명의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대도시인만큼 성벽의 크기나 두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두껍고, 단단하다. 그러나 벼락이 내려친 성벽엔 구멍이 깊게 패여 있었고, 아직도 시커먼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몬은 얼떨떨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가, 더 이상 추가 공격이 없자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미안하다. 독단적인 행동을 한 것에 대해서는 정중히 사과하지. 시몬 그라임스.” 그때 옆에 있던 현이 시몬에게 말을 걸었다. 그 또한 벼락의 여파를 피할 수 없었는지, 얼굴에는 시커먼 그을음을 묻히고 있었다. “상관없습니다, 떠돌이. 어차피 성벽 밖의 사람들이 순순히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곤 생각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군.” “북 대륙에서 마법사 클래스로 인정을 받으려면 질속 영창과 마법 회로 응용이 필수라고 하던데…. 어휴, 진짜였나.” “…….” “아무튼 그건 그렇고…. 떠돌이. 혹시 저한테 무슨 할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할 말?” 현이 의아한 얼굴로 되묻자, 시몬은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지금 상황이 약간 이상하게 느껴져서 말입니다.” “어떤 것들이 이상하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었으면 좋겠다.” “여러 가지로요. 의외로 끌고 온 인원도 많지는 않은 것 같고…. 무, 혈, 입, 성을 했다고 말했는데도 별로 당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래저래 이야기는 했지만, 마치 이쪽 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것 같아 보여요.” “…….” “원래 상황은 정반대가 아니었나요? 오히려 당신들이 저들의 안에 첩자를 심어놨던 걸로 알고 있는데. 아. 필드 효과는 이유가 되지 않아요. 지금은 확실히 해제한 상태니까.” 번역 마법이 완벽하지는 않은지 중간중간 어색한 문맥은 있었지만, 듣고 이해하는 데는 충분할 정도였다. 그러나 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묵비권만 행사하고 있을 뿐. “흠. 당신은 얼마 전 뮬에서 넘어와서 모르려나…. 아무튼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음부터 독단적인 행동은 고치도록 해주세요.” “…알겠다.” 현은 침음과 함께 대답하고는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문득 고개를 돌려 성벽 밖을 쳐다보자, 동부 사용자들이 천천히 이동을 시작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부는 그대로 남아있었지만, 일부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진을 이동하고 있었다. 그 광경에 발맞춰 천천히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현의 등 뒤로 사늘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당신뿐만 아니라, 부랑자 전체를 말하는 겁니다.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모든 계획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즉시 워프 게이트를 통해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 순간, 현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 어느새 평야에는 완연한 밤이 찾아 들었다. 동부는 바바라에 도착하자마자 서 대륙 그리고 부랑자들과 첫 격돌을 치렀다. 실은 격돌이라고 표현하기 민망할 정도로 사소한 전투였지만, 어찌됐든 첫 전투의 끝은 동부의 우세라고 점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동부는 피해가 전무한 것에 반해서 형의 '낙뢰'는 부랑자에 확실히 피해를 주었으니까. 사기는 동부가 더 높았다. 서로 평야에서 만났다면 한 번 총 공격을 내려봄직도 했을 테지만, 이후 동부의 결정은 일단의 후퇴였다. 남부와 북부가 도시를 탈환할 때까지 시간을 끌 필요도 있었거니와, 무작정 공격하기에는 아직 전진 기지도 건설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물론 도시 주변에 그려져 있는 거대한 마법 진도 하나의 이유라면 이유였다. 그리고 현재, 동부는 침공을 위한 준비를 하나씩 차곡차곡 진행해나가는 중이었다. 4개의 부대는 각각 맡기로 했던 성문이 있는 곳으로 이동을 시작했고, 그에 따라 내가 소속한 부대 또한 서문 방향으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부대는 자리를 옮기고 나서 바로 전진 기지 건설에 들어갔고, 도시 주위의 마법 진을 해석하는 작업도 재개했다. 그사이 수뇌부들도 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우리의 가장 큰 약점은 부대가 넷으로 분산되어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각 부대의 관점에서 보면 그만큼 공격력이나 방어력이 약해진다는 것을 뜻하니까요. 특히 방어력의 약화는 굉장히 위험합니다. 놈들이 미친척하고 한 쪽 부대에 집중적으로 타격을 한다면….” “분명히 한 쪽이 부담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쪽은 그만큼 마음껏 화력을 퍼부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요.” “그럼 해당 부대는 방어 마법에만 치중하고, 정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사정거리 밖으로 물러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리고 조금 잠잠해진다 싶으면, 다시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가는 쪽으로….” 제일 먼저 세워진 지휘 통제실에는, 현재 한창 열띤 논의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예전에는 조금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몇 명이 있었는데, 오늘따라 그런 이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새벽 마법사들을 통한 첫 공격이 있어서 그런지 다들 자못 심각한 얼굴들이었다. 하기야 마법사들의 화력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열쇠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새벽, 제대로 된 첫 전투를 치르는 만큼 흥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때였다. 계속해서 시간이 흘러도 열기가 식을 줄 모르던 지휘 통제실에, 하나의 전령이 날아들었다.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지금 막 한 명의 마법사가 도시 주변에 그려진 마법 진을 해독했다고 합니다!” “응? 그렇게 커다란 마법 진을 이렇게 빨리? 어느 부대 소속인가?” “서문 부대입니다! 그리고 지금 통제실 밖에서 대기하고 계십니다.” “그럼 우리 부대인데? 허…. 일단 이곳으로 모셔오도록.” 고려 로드가 기꺼운 음성으로 말하자, 전령은 순식간에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윽고 한 명의 여인이 통제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순간 나는 약하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단아하면서 영리해 보이는 인상. 연한 푸른빛이 감도는 눈동자와 머리카락. 여인의 정체는 바로 정하연이었다. 정하연은 나와 잠깐 눈을 맞추더니 이내 살포시 미소 지었다. 그리곤 모두를 향해 정중히 목례하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머셔너리 클랜원 정하연입니다.” “오호. 머셔너리 클랜원 정하연이라면…. 이름은 다소나마 들어본 것 같은데. 혹시 클래스가…?” “시크릿 클래스. 푸른 달의 마도사에요. 고대 마법과 관련된 클래스라 생각보다 마법 진의 정체를 빠르게 알아볼 수 있었어요.” “아. 푸른 달의 마도사. 분명히 변수 대비 조원 중 한 명이었지요. 확실히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나저나…. 고대 마법에 능통하다니…. 이것 참 일이 술술 풀리는 것 같습니다. 하하.” 아까처럼 소란이 동반된 열기는 없었지만, 회의실 내부는 뜨거웠다. 특히 몇몇 남성 사용자들은 정하연을 향해 남몰래 뜨거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확실히 시크릿 클래스를 얻은 이후로 그녀의 미모는 한층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윽고 고려 로드가 입을 열었다. “흠. 사용자 정하연. 그러면 일단 저 마법 진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바로 말씀 드릴게요. 지금 바바라의 주위에 그려진 마법 진은, 수호용 마력 차단 진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어요.” “수호용 마력 차단 진?” '정답.' 나야 미리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용자들은 처음 듣는지 하나같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수호용 마력 차단 진…. 그런 진은 처음 들어보는데. 혹시 해당 진에 대한 자세한 효과도 알고 계십니까?” 철저하고 꼼꼼한 정하연의 성격에, 그것도 모르면 이곳에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이에요. 간단히 말씀 드리면…. 진이 발동됐을 경우, 진 외부에서 행사하는 마력은 진의 내부에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어요. 즉 일종의 대규모 항마 진이라고 보시면 되요.” “대규모 항마 진이요? 아니 무슨 그런 사기적인….” “사기가 아니에요. 분명 그 효과만 놓고 보면 강력하지만, 저 마법 진은 고대 홀 플레인에서도 널리 쓰이지는 못했어요. 오히려 곧 사장되고 말았죠. 왜냐하면 수호용 마력 차단 진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거든요.” “치명적인 단점이라면….” 누군가의 물음에, 정하연은 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진이 외부의 마력을 차단한다면, 내부의 마력은 모조리 동결시킨다는 거예요.”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이번 주말 독자분들에게 벌충용으로 연참을 하겠다는 약속은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작정하고 16시 즈음에 자리에 앉았는데, 결국 18K가 한계였네요. 아무래도 1부의 끝이 보이다 보니 계속해서 힘이 떨어지네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_(__)_ 연참력이 언제 다시 살아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일단 페이스 회복과 유지에 중점을 두도록 하겠습니다. 참 이상하네요. 이미 구상도 다 잡혀있고, 쓰기만 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시간이 걸리는지. -_-a PS. 터져버린 사용자의 머리는 황금 사자 클랜원입니다. 그것도 제법 이름있는 사용자이지요. 1. 도영록 2. 성유빈 3. 강철 산맥 이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전 황금 사자 클랜 로드 4. 박현우 과연 누구일까요? :) 『 리리플(356회) 』 1. 레이암 : 1등 축하합니다. 하하. 저도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다 읽고 다음 회를 눌렀는데, 바로 나온 적이 있지요. :) 2. 時人 : 신상용은 배신자가 아닙니다. 다만 그의 성향이 '안전'인만큼 현재 상황에 극도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차후 내용에서 자세히 묘사하도록 하겠습니다. 3. 센서티브 : 처음에는 넣을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개그 분위기가 되어버려 삭제했습니다. 하하. 4. 의기2010 : 날카로우십니다. 거의 다 맞추셨네요. 다만, 마지막 안솔에 대해서는 저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틀린 게 아닙니다. 의견이 다른 것이지요. 독자분들의 해석은 정말, 매우 즐겁게 보았습니다. :D 5. 가연을이 : 여러 여성과 관계를 맺을 수는 있지만, 히로인의 수는 철저히 제한할 생각입니다. 제가 조절해낼 수 있는 선에서요. 병풍, 수집은 제가 정말 싫어해서요. ㅜ.ㅠ 『 리리플(357회) 』 1. 바다속괴수 : 1등 축하합니다. 제가 너무 많이 늦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ㅜ.ㅠ 2. 블라미 : 이제 전쟁 돌입입니다. 전쟁 중에는 개그가 없고, 후에는 잘 모르겠군요. :) 하하. 더욱 열심히 쓰겠습니다! 3. 아일릴리아 : 오랜만에 뵙습니다. 수정 완료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여행 중 많은 조언 부탁합니다. :) 4. deblan : 나체의 여왕 카드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아직 등장하지 않은 캐릭터입니다. 후후. 5. 123오라 : 죄송합니다. 저를 매우 치세요. ㅜ.ㅠ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59 / 0933 ---------------------------------------------- 함정(1) 이어진 정하연의 설명은 모두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통제실에는 근접 계열 등 마법에 대한 지식이 얕은 사용자들이 더러 있었다. 그런 그들을 배려해서 그런지 그녀의 해석은 마법사 특유의 난해함이 없었다. 오히려 전문 용어가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단순하고 간략한 설명이었다. 그러면서도 정확한 사실과 핵심만 짚어주니, 이윽고 설명이 끝났을 때, 통제실의 모두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이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어찌됐든. 정하연의 말에 따르면 수호용 마력 차단 진의 특성은 총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체내 회로를 따르는 게 아닌, 마법 진에 그려진 독자적인 공정을 따라 마력이 발현, 유지된다. 2. 진이 유지되는 동안에 외부에서 생성된 마력은 내부에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다. 3. 진이 유지되는 동안에 내부의 마력은 동결된다. 4. 진의 크기나 규모는 주문을 외운 자의 의지에 따라 임의로 조절이 가능하다. 물론 이런 조건들은 어디까지나 마법 진 고유의 특성만을 나열한 것으로, 마력이 갖는 상대성은 벗어나지 못한다. 예를 들면 내가 화정의 힘을 사용할 경우, 외부에서 생성된 힘일지언정 내부에 확실한 영향을 줄 자신이 있었다. 어느새 통제실을 가득 채웠던 열기는 서서히 잦아들고, 다들 골똘히 생각에 잠긴듯한 표정을 내비쳤다. 해석은 끝났다. 이제는 '왜 해당 마법 진을 설치했는가.'에 대해서 밝혀낼 시간이었다. “푸른 달의 마도사.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그때, 익숙한 음색이 통제실을 나직이 울리는걸 들을 수 있었다. 설핏 시선을 돌리자 타로 카드 마술사, 선율이 손을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진이 유지되는 동안에 내부의 마력은 동결된다. 혹시 이 부분에 대해서 추가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요?” “저도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알고 있는 선에서는 대답해드릴 수 있어요. 어느 부분이 궁금하신데요?” “외부에서 행사하는 마력을 완벽하게 차단한다. 그리고 내부의 마력은 동결된다…. 이 두 조건의 정확한 차이점이 궁금해요.” “그러고 보니 나도 그게 궁금했어. 왜 우리뿐만 아니라 자기들도 제한을 받을 수 있는 진을 설치했을까?” 선율의 질문에 몇몇 사용자들은 일견 타당하다는 듯 수긍하는 빛을 띠었다. “그건…. 일단 보존의 차이라고 보시면 되겠네요. 내부에서는, 이미 발현된 마력에 한해서는 보존이 가능해요.” 이 질문에 대해서는 쉽게 대답할 수 없는지, 정하연은 약간 고민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자 선율의 눈매가 대번에 가늘게 변했다. “그 말씀은…. 설마! 차단 진이 생성되기 전 발현된 마법은, 진이 유지되는 동안 보존이 가능하단 말씀이신가요? 그래서 동결이란 표현을…?” “맞아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진 안의 범위에서 일뿐, 마력의 상대성을 벗어나지는 못해요. 수호용 마력 차단 진은 독자적인 해석이 8할 이상 들어간 고대의 마법 진이에요. 현대의 마법과는 많은 부분이 다르죠. 즉 진의 파장과 맞지 않는 마법의 발현은, 보존의 효과를 받을 수 없어요.” “후유. 그나마 다행이군요. 그래도 여지가 있는 만큼 불안하기는 한데….” “현대의 마법 진이라면 몰라도, 고대의 마법 진은 그리 흔한 게 아니잖아요. 더구나 정식 명칭에서도 나와있듯이 마력 차단 진은 어디까지나 보조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마법 진이에요. 그와 반대되는 성향을 지는 진은, 설령 고대 마법 진이라도 해도 파장이 맞을 가능성은 극히 적지 않을까요?” 마지막에 정하연은 의문문으로 말을 끝내었다. 이 말인즉슨 방금 언급한 내용에 대해서는 자신도 확신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여기서 그것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정도까지 해석해준 것만으로도 사실 엄청나다고 볼 수 있었다. “워프 게이트.” 그때였다. 지금껏 가만히 듣고만 있던 조성호(고려 클랜 외교 간부)는, 갑작스레 뭔가 생각났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바바라 안에 있는 보조용 고대 마법 진이라면, 워프 게이트가 있지 않습니까?” 그 순간, 머리 회전이 빠른 사용자들은(정확히는 마법에 대한 지식이 해박한 이들은.) 작은 탄성을 터뜨렸다. 조성호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만일 둘의 파장이 맞는다는 가정하에, 워프 게이트를 활성화한 채 마력 차단 진을 발현하면 기능이 보존될 가능성이 있다. 즉 진이 외부의 공격을 차단하는 동안 최대한 안전하게 워프 게이트를 이용하겠다는 말이었다. “다른 도시에 조금 남겨두고 왔다고 해도, 지금 바바라에 못해도 일만 명 이상은 있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한꺼번에 워프 게이트를 이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름의 방법을 강구한 것이겠지요.” “오호. 그렇다면 적들은 신세계 작전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말이 되는군요!” 물론 조성호의 말도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정하연과 선율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보아 이 가설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잠잠했던 통제실에 다시금 활기를 띤 소란이 찾아 들기 시작했다. 적들이 전투에 앞서 도주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니, 긴장감으로 살짝 결여되었던 자신감이 다시 제자리를 찾은 모양이다. 이윽고 고려 로드는 기다란 한숨을 내쉬고는 분연히 몸을 일으켰다. “북부와 남부의 진행 상황은 어떻지?” “현재 전 도시 동시 탈환을 목표로 신속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도착하는 즉시 작전에 들어간다고 하니 나흘, 아니 사흘 안으로 경과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나흘, 아니면 사흘이라….” 고려 로드는 중앙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주변을 한 번 쭉 훑어보더니 이내 나직한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워프 게이트가 끊겼을 때, 놈들의 반응이 궁금하군.” * 바바라 평야의 새벽은, 차갑고 고요하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오직 들리는 소리라고는 풀을 지르밟으며 앞으로 진군하는 수천 명의 발소리뿐. 이윽고 바바라는 점차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서로 오늘밤은 푹 쉬자고 했던 주제에, 성벽에서는 제법 많은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오늘 새벽은, 바로 동부와 서 대륙 그리고 부랑자들간의 제대로 된 첫 격돌이 이루어지는 날이다. 일단 동부는 급할 필요가 없는 만큼 고려 로드는 서로의 화력을 교환하는 선에서 그치겠다고 전했다. 하지만 홀 플레인의 전쟁이 대부분 마법에 의해서 판가름 난다는 것을 감안하면, 오늘 전투야말로 차후 승패를 가를 척도가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정지.” 고려 로드의 나직한 한 마디. 그러나 주변이 고요하고 음성 증폭 마법이 걸려있어서 그런지, 사용자들의 걸음은 일제히 멈추었다. “진지 구축.” 1, 2, 3, 4제대가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1제대, 근접 계열 사용자들은 최전방에서 화살을 방어한다. 2제대, 궁수들은 저격을 위한 화살을 준비한다. 3제대, 마법사들은 화력을 퍼붓기 위한 공격 마법을 준비한다. 4제대, 사제들은 대규모 방어 신성 주문을 준비한다. 5제대, 암살자들은 대기. 바바라를 이백오십 미터 즈음 남겨두고 진형은 순식간에 구축되었다. 그리고 각 제대 장에 의해, 제대 별로 준비가 시작되었다. “───. ───. ───.” “───. ───. ───.” “───. ───. ───.” “───. ───. ───.” 그 중 가장 압권은, 바로 마법사들과 사제들이 있는 제 3, 4제대였다. 서문 부대의 인원은 약 5천명. 각각 주문은 다르겠지만. 약 1천명에 달하는 사용자들이 동시에 주문을 외우는 소리는 가히 엄숙하다고 봐도 좋을 만큼 웅장했고 또한 장엄했다. 이윽고 성벽과 평야가 이어지는 사이로, 서로간 엄청난 마력의 흐름이 교차한다. 우우웅! 우우우우우우우웅! 더 이상 평야는 어둡지 않다. 각자의 손 또는 지팡이에는 각기 오색찬란한 불빛이 휘감아 들어 주변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질속(疾速) 영창을 익힌 사용자들이 많아서 그런지, 1차 공격을 위한 주문이 완료되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본인 또한 일단의 주문을 마쳤는지, 제 2제대를 맡고 있는 선율이 하늘 높이 팔을 들어올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한 장의 작열하는 카드가 쥐어져 있었다. 이제, 시작이었다. 이윽고 선율은 들고 있던 카드를 주문을 외치는 것과 함께 훌쩍 놓아버렸다. “증폭(Amplification)!” 화아악! 그러자, 허공을 나풀거리듯 선회하던 카드에 잠시 입체감이 생성되는가 싶더니 이내 네모난 각을 따라 연한 초록빛 장막이 허공에 펼쳐졌다. “발사!” 그리고 “발사.”라는 소리가 들린 순간. “!” 거대한 굉음과 함께 사용자들이 무기에 담고 있던 마법이 터져나간다. 수백 발의 마법이 일제히 하늘을 날자, 순간적으로 고막이 크게 울렸다. 그 여파가 어찌나 강렬한지 온몸의 살을 짜릿하게 찔러 들어온다. 문득, 입술이 가볍게 떨리고 있음이 느껴졌다. 아직 전투의 도입부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피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가느다란 곡선을 그리는 마법들은, 선율이 펼쳐놓은 장막에 집중적으로 몰려들었다. 그때였다. “가속(Acceleration)!” 다시 한 번 이어지는 선율의 외침. 쐐애애액! 그러자 장막 전까지만 해도 완만한 곡선을 그리던 마법들이, 장막을 통과하자마자 궤도를 달리한다. 잠시 장막에 머물렀던 마법들은 한순간 액셀레이터를 밟은 듯 재빠르게 성벽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완벽한 직각이었다. 수백 발의 마법은 깔끔한 직선 궤도를 그리며 성벽아래로 세차게 몰려들고 있었다. 마치 하나의 폭우처럼 또는 세차게 쏟아져 내리는 소나기처럼. 무수한 마법의 빗방울들이, 유성과 같이 성벽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물론 놈들도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마력의 흐름이 일순 뚝 멈추었다. 과연 사 방향에서 쏟아지는 수천 발의 마법을 어떻게 대응할지. 나는 더욱 안력을 돋워 성벽을 응시했다. 펑! 퍼벙! 퍼버버벙! 그리고 그 순간, 놈들의 대응도 시작되었다. 내가 보고 있는 서문의 성벽에서도 가히 수백에 이르는 마법이 화려한 폭발과 함께 쏘아진 것이다. 그리고 그 마법의 목표는, 우리가 아닌 바로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화력의 차이를 인정하고 시작하는 건가?' 분명 저쪽에도 사제가 있을게 분명한데, 우리가 아닌 발사된 마법들을 겨냥했다. 이 말인즉슨 보유한 사제로는 막을 자신이 없으니 마법으로라도 화력을 감소시키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서로의 마법이 맞붙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내 텅 비어버린 허공에서, 두 세력의 마법이 맞붙었다. 비로소 본격적인 화력 겨루기의 시작이었다. 번쩍! 다시 한 번, 화려한 불꽃과 거대한 폭음이 화음을 이뤘다. 마치 성대한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눈앞에 보이는 허공에는 폭발의 여파로 인한 빛 줄기들이 사정없이 새어 나오기 시작하고, 목표를 잃은 불똥들이 분수처럼 튀어 올랐다가 내려온다. 그리고, 첫 화력전의 결과는 바로 알 수 있었다. 후우우우…. 허공에 그려진 커다란 버섯송이 모양의 연기. 그리고 연기가 사방에 자욱이 퍼질 즈음, 그 사이를 뚫고 아까보다 확연히 줄어든 마법의 다발이 시야에 잡혔다. 그리고, 아직 힘을 잃지 않은 마법들은 그대로 성벽에 내리 꽂혔다. 꽝! 꽝꽝! 꾸릉, 꾸르릉! 짜작! 짜자작! 그때였다. 성벽 위 대규모로 펼쳐진 방어 마법이 난타당하는 소리와 함께, 갑작스레 출현한 열 줄기의 벼락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내리 꽂힌다. '저것은…. 벼락?' 구름을 이용할 수 있는 형의 마법 특성상, 화망이 걷히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놈들 또한 설마 이렇게 시간차를 두고 들어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뒤이어 들어간 벼락은 확실히 먼저 들어간 마법에 힘을 보태주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자욱했던 연기도 옅어졌다. 그리고 일단 보이는 대로 말하자면, 놈들이 펼친 방어막은 처음 발사된 마법을 전부 방어한 듯 보였다. 그러나, 형이 노린 것은 방어막이 아니었다. 형의 가장 큰 장점은 무지막지한 능력치도 능력치지만, 무엇보다 정교한 마력 조절이 가능하다는 것. 우직! 우지직! 어느 한 군데 성벽에 금이 가는 소리와 함께, 시커먼 연기가 이곳 저곳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성벽은 그렇게 잠시 동안 버티는 듯 싶었지만, 이내 오른쪽 한편에서 성벽의 일부가 거친 소음과 함께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쿵! 이 찰나의 순간, 형은 방어막의 영향이 닿지 않는 곳을 탐색하고 그곳에 정확히 벼락을 내려친 것이다. “…….” 휘오오오. 휘오오오. 본격적인 공성전의 시작. 그리고 첫 날의 화력 겨루기는, 동부 사용자들의 우세로 시작되었다. ============================ 작품 후기 ============================ 아이고. 오늘 너무 늦었네요. 그래도 일일 연재를 지켰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습니다. 하하. 아. 전쟁 파트는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을 겁니다. 아마도요. 견제에 대한 내용은 생략에 들어갈 예정이고, 곧바로 단판 승부를 터뜨릴 생각입니다. :) 『 리리플 』 1. 데슈카르 : 1등 축하합니다. 하하. 예. 맞습니다. 1등은 데슈카르 님 것입니다.(?) 2. Dark설 : 헉. 그럴 리가 없잖아요. 시, 신상용 머리라니요. ㅜ.ㅠ 3. dbss : 아니요. 현은 부랑자 대장이 아닙니다. 수뇌부 중 한 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 4. 천연천연 : 크크크크. 기대해주세요. 재미있으실 겁니다. 일방적인 흐름은 되지는 않을 겁니다. 발상의 전환이지요. 후후. 5. 아미슈 : 암 쏘 쏘리 벗 알러뷰 다 거짓말. ㅜ.ㅠ 죄송합니다! 6. 가입하기싫다 : 예. 유니콘은 신수입니다. 춤이라고 해봤자 그냥 발을 마구 휘젓는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하하! 7. 멜리스 : 수정 완료했습니다. 감사합니다! 8. 신참만세 : 네. 내용에 나와있지요. 지금 필드 효과는 해제한 상태라고요. :D 9. 갸루루루루 : 사망 플래그까지는 아닙니다. 그러한 의도는 들어있지 않았어요. :) 10. 센서티브 : ! 허, 헐. 그런 이유라니요. 대단하세요.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60 / 0933 ---------------------------------------------- 함정(1) 과거 광활한 대지와 아늑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바바라의 평야는, 지금 너무도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정돈돼있었던 대지는 황폐하기 이를 데 없고, 이곳저곳에 흩어진 묵 빛 그을음 사이로 거대한 불길이 피어오른다. 그리고 불길에서부터 솟아오른 연기는 붉게 물든 하늘 저편으로 넘실거리듯 사라져갔다. 핏빛 같은 짙은 황혼이 드리운 평야 아래. 이윽고, 제 2제대의 사용자들이 일제히 시위를 잡아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제대 장의 어떠한 신호도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궁수들은 당겼던 시위를 거의 동시에 놓았다. 전쟁의 사흘 차에 돌입한 지금, 사용자들은 첫날에 비해 훨씬 일사불란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쾅! 슈슈슉! 슈슈슈슉! 외마디 폭음과 함께 물경 1천 발을 헤아리는 화살이 눈앞의 하늘을 빽빽이 덮는다. 허공으로 날아오른 무수한 화살은 가느다란 곡선을 그리었고, 마력의 잔상이 남긴 궤도는 이내 성벽 너머로 사라졌다. 엄밀히 말해서, '파괴'쪽에 초점을 맞춘다면 화살은 마법에 비해 현저히 위력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약점을 덮을 만큼의 장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재빠른 연사 능력이었다. 신속히 이어지는 두 번째 사격은 다시금 성벽의 적들을 견제한다. 그리고 궁수들의 최선을 다해서 주의를 끄는 동안, 제 3제대의 사용자들은 비장의 일격을 꽂을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증폭(Amplification)!” 이제는 익숙할 정도로 느껴지는 주문이 대기를 울리고, 그와 동시에 허공으로 던져진 한 장의 카드가 찬란한 빛을 발한다. 이윽고 바바라 성문 정면을 향하는 방향으로 카드는 예의 네모나게 각진 연록 빛 장막을 생성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하지만 사흘 동안 이어진 전투에서 적들이 가장 치를 떨 사용자 둘을 꼽자면, 뇌제인 내 형과 타로 카드 마술사 선율을 들 수 있었다. 정교한 마력 조절을 바탕으로 군데군데 비어있는 곳을 내려치는 '낙뢰'. 그리고 수백 발의 마법에 한꺼번에 특수 효과를 부여해주는 능력은, 내가 만일 적이었다 생각해보면 욕이 나올 만큼 까다롭고 무지막지했기 때문이다. “가속(Acceleration)!” 속도를 더해주는 특수 효과. 그러자 장막을 통과한 수백 발 마법의 궤도가 일제히 달라지고, 본 속도에 한층 가속이 붙은 채 성문을 향해 물밀듯 달려든다. 이어서 눈 한 번 깜짝인 순간, 수백으로 이루어진 마법 덩어리는 두꺼운 성문에 몸을 부딪쳤다. 그러나 성문을 날려버리려는 우리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는지 그곳엔 이미 엄청난 수의 보호막이 겹겹이 둘러쳐진 상태였다. 쿠지직! 쿠지지직! 성문과의 거리는 불과 이백 미터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찌나 거대한 격돌이었는지, 둘의 부딪침에서 퍼져 나오는 시퍼런 불똥은 마치 분수대의 물처럼 사방으로 튀어 오르더니, 이내 물보라가 되어 허공에 흩뿌려진다. 어떻게든 뚫으려는 쪽과 어떻게든 막으려는 쪽. 거대한 힘들의 겨루기 양상은 곧이어 한 쪽이 우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꽈지직! 꽝! 기어이 보호막을 깨고 들어간 마법은 바바라의 서문을 곧바로 쳐버렸고, 성문에서 터져 나온 격렬한 철성(鐵聲)은 도처를 울렸다. 이후, 찰나의 시간이 흘렀다. 격돌에서 피어난 연기는 서서히 걷히었다. 그에 이어서 드러난 성문의 모양은, 비록 한 번에 뚫지는 못했지만 분명한 성과를 보여주었다. 오목하게 패인 구멍은 전방위적으로 새겨져 있어 마치 종잇장처럼 구겨진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뚫지는 못했지만, 방금 전과 비슷한 규모의 공격이 한 번만 더 들어간다면 확실히 뚫을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비스름한 생각을 한 사람들이 많은지, 성문을 보는 사용자들 사이로 자그마한 환호가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쾅! 갑작스럽게 폭발한, 흡사 허공을 거세게 후려갈기는듯한 폭음에 나는 반사적으로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실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이미 사흘 동안 질리도록 주고받았던, 대규모 주문을 일거에 터뜨린 소리였다. '그런데…. 소리가 평소보다 큰 것 같은데?'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슈슈슉! 슈슈슈슉! 씨잉! 씨잉! 씨잉! 씨잉! 사흘 동안 이어진 전투에서 시종일관 우위를 점한 동부는, 오늘 확실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사정거리 안쪽에 제법 진입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마법은 물론이거니와 엄청난 수의 화살과 투창은 성벽에서 마치 빗발치듯 분출된 것이다. 동부는 현재 사 방향에서 공격을 퍼붓고 있었고, 적들도 그에 따라 각 성벽에 병력을 나뉘어 방어에 전념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약간이나마 시일이 흐른 만큼 이제 어느 정도 규모의 공격이 올 것인지는 대강 짐작이 가능했는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규모는 예상을 크게 벗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발악이었다. 공성전에서 성문이 가지는 의미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그런데 그 중요한 방어 수단을 단 한 번의 마법 공격에 잃게 되었으니,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 예상을 벗어나는 규모의 공격은 아마 다른 성벽에서 방어하던 인원을 추가로 끌어들인 것이 분명했다. “───. ───. ───. 보호(Protect)!” “───. ───. ───. 리플렉트 쉴드(Reflect Shield)!” 4제대의 사제들은 발 빠르게 대응했다. 아니 사제들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용자들도 이번 공격은 심상치 않다 느꼈는지, 금방 마법을 마친 3제대의 마법사들 또한 방어 마법을 펼치는데 동참했다. 그리고 삽시간에 동부의 진형 전체를 감싸는 여러 겹의 반투명한 막이 생성되었다. 잠시 후. 매우 세찬 바람을 흩날리는 마법, 화살, 투창의 폭풍은 지체 없이 동부의 진형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더니. 이윽고, 단단히 둘러싼 보호막을 사정없이 두들겨대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쿠쿠쿠쿵! 우직! 우지직! “끄으으으!” “꺄아아악!” 다급해 마구잡이로 마법을 쏘아 보낸 탓인지, 보호막 밖으론 각양각색의 마법이 보이고 있었다. 폭발한 불덩이는 크게 번져 보호막 전체로 번져갔고, 뾰족한 얼음의 창은 외겹의 막을 뾰족이 찔러 들어오고 있었다. 폭풍은 흡사 소낙비처럼 보호막을 잇따라 세게 치었고, 그에 부담을 느꼈는지 이곳저곳에서 고통에 젖은 비명들이 흘러나온다. 적들이 회심의 반격으로 채택한 집중 사격은 확실히 매서웠다. 물론 우리에게 주의가 집중된 만큼 다른 부대에 여유가 생기겠지만 그거야 그들 사정이었다. 도대체 얼마만큼의 인원을 동원했는지는 몰라도, 이번에 집중된 화력은 네 갈래로 나뉘어진 사용자들이 견디기에는 견딜 수 없는 부담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폭풍처럼 느껴졌던 기세는 점차 미풍으로 바뀌어져 갔지만, 굳건하게 느껴졌던 보호막 또한 그와 비례해서 깨어져나가는 중이었다. 사용자들 또한 그것을 느꼈는지, 최전방에 서 있던 근접 계열들은 하나 둘 방패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사제들은 시간이 걸리는 보호막 대신 사용자들의 방패에 소규모 마법 저항 주문을 걸어주기 시작했다. 질속(疾速) 영창을 익힌 마법사들이 제법 있으니, 추가 보호막을 위해 잠시간의 시간이라도 벌어둘 셈인 것이다. 그와 동시에, 고려 로드의 증폭된 음성이 우렁차게 울리었다. “전원 뒤로 후퇴한다!” 진형을 물려 피해를 최소화할 셈인지 가까스로 후퇴 명령이 내려졌다. 거의 부숴놓은 성문이 아깝긴 하지만, 그래도 여기서 커다란 피해를 입느니 다음 기회를 노리리라 결정한 모양이다. 이윽고 동부의 사용자들은 진형을 유지한 채 한 걸음 두 걸음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쿠쿠쿠쿠쿠쿠쿠쿠…. 한껏 끌어올려 예민해진 감각에, 갑작스레 거대한 마력의 흐름이 출현한 게 느껴졌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공방전에서 나눴던 흐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마력이었다. 그 순간, 평야에 물들었던 황혼 빛이 갑자기 짙어지기 시작했다. 까닭 없이 목이 뜨거워지고, 몸이 체감하는 더위가 한층 심해진 느낌이 전신을 엄습했다. '이건…?' 머릿속으로 위험을 알리는 경종이 울린다. 나는 반사적으로 귀에 손을 가져갔고, 변환된 '빅토리아의 영광'을 세게 쥐었다. 그리고 그때. 크롸롸롸롸롸롸롸! 이글거림을 동반한 거대한 갑작스러운 포효가 마치 회오리처럼 평야를 휩쓸었다. 어찌나 소리가 컸는지, 대기를 떠도는 공기와 디디고 있는 대지가 우르르 울릴 정도였다. 느닷없이 고막을 울리는 울부짖음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있자, 이윽고 주변 사용자들의 경악 어린 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으, 으아아악! 요, 용이다!” '용이라고?' 지금 이 시점에서 아직 용이 나올 리가 없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나였기에 머릿속으로 바로 부정을 했지만, 시선은 반사적으로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자 성벽을 넘어선 한참 위에서 서쪽 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태양을 볼 수 있었다. 아니, 그것은 태양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눈부신 빛으로 인해 일어난 잠시간의 착시 현상. 두어 번 눈을 깜빡이고 다시 올려다보자 말 그대로 하나의 '용'을 볼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용의 형상을 이룬 하나의 불꽃 덩어리였다. 기다란 목 끝에 만들어진 두 개의 뿔이 있는 용의 머리. 거대한 몸체와 등에서 뻗어 나온 염화(炎火)의 날개 두 장. 그리고 커다란 구렁이의 모양새를 띤 S자를 그리는 꼬리까지. 사위로 끊임없는 불꽃을 토해내는 그것은, 분명한 용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펄럭! 펄럭! 용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하늘을 선회했다. 그리고 서너 번 하늘을 빙글빙글 돌던 용은 이내 불타오르는 날개를 좌우로 크게 펼치었다. 얼른 방향을 가늠해보자, 정면이 아닌 서쪽 방향으로 이동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다시 한 번 살 떨리는 포효를 내뱉은 용은, 활짝 펼친 날개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에서 아래로 날갯짓을 할 때마다 동부의 진형과 용과의 거리는 자꾸만 줄어들어갔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염화의 용은, 지금 전신을 덮쳐 서문 부대 전체를 휩쓸어버릴 생각인 것이다. '아니. 중간을 가르려는 건가? 아니면 퇴로 차단?' 마법사들과 사제는 방어 마법의 유지에 집중하느라 후퇴의 속도는 현저히 느렸다. 그렇다고 방어를 포기하고 후퇴하자니, 그것 또한 만만치 않은 피해가 예상되었다. 오늘 확실한 우위를 점하겠다고 깊게 들어간 호기가 한순간 서문 부대를 진퇴양난에 빠트린 것이다. 크롸롸롸롸롸롸롸! 조금 더 상황을 파악하고 싶었지만 염화의 용은 더 이상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미처 대응할 시간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날갯짓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것은 부드럽게 내려와 평야와 수평을 이루었고, 이내 동부 진형의 옆구리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후르르르르르르륵! 전신에서 뚝뚝 떨어져 나오는 불똥은 하나의 거대한 불길을 만들고 있었다. 거기에 오는 동안 계속해서 가속이 붙는 건지, 시야에 잡히는 불길은 눈 깜빡 할 사이에 크기를 키워가는 중이었다. 그러한 폭발적으로 짓쳐 들어오는 불길의 앞에서, 나는 아까부터 부서져라 쥐고 있던 검을 고쳐 잡았다. 사흘의 공방이 이루어지는 동안 나는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나름의 역할이 있기도 했거니와, 방패를 드는 입장도 아니라 그저 뒤에서 상황을 보고만 있을 적이 많았다. 하지만 애당초 변수를 대비한 조에 포함된 만큼 이제는 밥값을 할 시간이 온 모양이다. 마법을 자르는 것이라면, 바로 내가 전문이었다. “머, 머셔너리 로드!” 검후의 음성이 나를 붙잡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곧바로 땅을 박차 올라 자리를 이탈했다. 전력을 다해 뛰어서 그런지 나는 금방 서쪽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이윽고 거대한 불길이 오는 것을 정면에서 마주보자, 무시무시한 기세가 전신을 압박하는 게 느껴졌다. '이건 조금 위험할 수도 있겠는데….' 나는 마력으로만 대응하겠다는 생각을 곧바로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폭발적인 기세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나는 즉시 속을 가다듬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 쏘아져 들어오는 불길에 대항해, 심장에 잠재된 힘을 일깨운다. 그리고 빅토리아의 영광을 일자로 세워, 정확히 용의 정 중앙을 찌르며 들어가는 것을 선택했다. 서로 반대 방향에서 거리를 줄여서 그런지 거리는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가면 갈수록 아까부터 느껴졌던 열기는 점차 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그렇게, 빅토리아의 영광이 용이 만들어낸 불길과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화륵! 화르륵! - 건들지마. 그 순간, 심장에 잠들어있는 무언가가. - 저급한 용염(龍炎) 주제에. 마치 으르렁거리듯이, 폭발적인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사흘간의 공성전 내용은 의도적으로 생략했습니다. 별다른 사건 없이 서로간에 화력만 교환하는 내용은 지루하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과 끝 내용만 적는 걸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제 슬슬 마법사들의 마력 고갈을 느낄만한 시점이고, 그래야 주인공이 활약하는 내용이 나올 수 있을 테니까요. 이번 전쟁은 그렇게 오래 끌 생각은 없습니다.(처음에는 약 50회 정도로 구상했어요.) 일부러 상황도 그렇게 만들었고, 어느 입장에서는 이후 상황을 알게 되면 최대한 빠르게 승부를 봐야 하는 상황이 올 테니까요. 아무튼, 자세한 내용은 차차 드러내도록 하겠습니다. :) PS. 쪽지는 주말에 일괄적으로 답신을 드릴 예정입니다. 이 부분 양해 부탁합니다! 『 리리플 』 1. pen36 : 허, 헉. 1등 축하합니다. 저,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_(__)_ 2. 달을쫓는아이 : Oh, Oh, Oh, Oh! 오빠를, 사랑해! 퍽퍽! 죄, 죄송합니다! 3. 가연을이 : 아. 어느 캐릭터를 그렇게 매력적으로 느끼셨어요? ㅎㅎ. :) 4. 우리천사 : 저야말로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5. Nodens : 최대한 빨리 올리고 싶었습니다. 요즘 자꾸 자정 업데이트를 못 지키고 있네요. 반성하겠습니다. ㅜ.ㅠ 6. 유온. : 헉! 몸은 괜찮으세요? 설마 아버지께서 굴리기야 하시겠어요?! 유온. 님의 건강이 더욱 중요하죠! 7. 까망콩하얀콩 : 코멘트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8. 탄환 : 아쉽지만, 유니콘 인간화는 예정에 없습니다! ㅜ.ㅠ 9. brisingr : 정말 죄송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유구무언이네요. ^_ㅠ 10. 천겁혈신천무존 + Lea : 네! 여기서 천겁혈신천무존 님과 Lea 님이 공식 커플이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여러분! 모두 축하해주세요! 와! 짝짝짝짝!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61 / 0933 ---------------------------------------------- 함정(1) 홀 플레인, 소환(召喚)의 방. 회색 빛으로 둘러싸인 아치형 천장(Vault) 아래로, 방의 중앙엔 직사각형 모양의 제단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중앙에 놓인 잿빛 제단에는, 한 명의 아름다운 천사 세라프가 미동도 않은 채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었다. 딱 하나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이따금 미약하게 일렁이는 새하얀 날개뿐.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수심에 젖은 얼굴은 마치 정적 속에 묻혀버린 듯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 어째서….” 그때였다. 가만히 감겨있던 눈이 한순간 번쩍 뜨이는가 싶더니, 이내 눈꺼풀 안으로 숨겨져 있던 옥 빛 눈동자가 한 번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떠한 사실에 심히 당황했는지, 드러난 세라프의 눈동자는 미미한 떨림을 담고 있었다. “왜 하필 지금…. 화정의 각성이….” 어지간히도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세라프는 말을 끝까지 잇지도 못해 중간중간 흐리었다. 어느덧 미약했던 날갯짓은 사정없이 살랑거렸고, 뱉어낸 음성에는 수심에서 비롯된 숨길 수 없는 걱정이 묻어있었다. “안 돼…. 아직은 시기상조….” 하지만 이내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깨달았는지, 천사의 얼굴에 처연한 감정이 스쳤다. “수현….” 이윽고 고운 입술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새어 나온다.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들을 수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음성에는 간절하리만치 느껴지는 애달픔이 담겨있었다. 세라프는 다시금 눈을 감았다. 그리곤 양손을 꼭 맞잡아 올린 채, 예의 고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시길….” *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 '빅토리아의 영광'과 용이 맞닿기 직전 이 찰나의 순간. 모든 것이 멈추고 말았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도 크게 울린다. '방금 전에 들린 목소리는…. 분명….' 격돌 직전, 심장에 잠재된 힘이 크게 폭발한 건 느꼈다. 하지만 그 이후 벌어진 상황은 내 의지를 확실히 벗어나 있었다. 시간이 멈춘 세상. 내부를 울리는, 익숙하진 않지만 낯설지도 않은 목소리. 그리고 아까부터 거세게 요동치는 심장의 고동. 갑작스레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상황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차분히 숨을 들이켰다가, 다시 내쉰다. 심호흡을 반복해 들뜬 마음을 가라앉힌다. 그렇게 어느 정도 속을 가다듬은 후에야 나는 다시 눈을 뜰 수 있었고, 그제야 상황을 약간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아….” 세상은 멈췄던 게 아니었다. 그렇게 착각했을 뿐이다. 내부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멈춘 것은 단 하나. 그것은, 바로 거대한 불길을 일으키며 날아온 용염(龍炎)이었다. - 멍하니 있지마. 흥. 이 바보 멍청이. 띠링! 그때, 다시 한 번 내부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리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답할 겨를도 없이, 이어서 눈앞 허공으로 메시지 창 하나가 떠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화정(火正)의 각성 1단계, 영역 선포(Area Declared) - “태고(太古)의 격으로 명할지 어니.”가 시작됩니다.』 '화정? 각성?' 그리고 메시지를 끝까지 읽은 순간,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화정의 각성이라고는 하지만, 어떠한 전조도 징조도 보이지 않은 갑작스레 이루어진 각성이었다. 그렇게 영문도 모르는 상황에 가만히 입술에 침만 적시고 있을 즈음이었다. - 왜 이렇게 멍하니 있어. 나랑 처음 얘기하는 것도 아니면서. 응. 이번이 세 번째인가? 이것은…. 화정의 목소리? - 저번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엄청 늦게 알아맞히네. 이 바보 멍청이. 지금 이 상황은 어떻게 된 거지? 아니 왜 네가 갑자기 지금 나온 거야? 화정이 말을 걸어왔다는 사실이 신기했지만, 나는 호기심을 꾹 밀어 넣었다. 지금으로서는 단순히 벌어진 일만 파악했을 뿐이다. '왜.' 이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 한다. 하지만 화정의 생각은 다른지, 돌아온 말은 내 기대와는 한참 어긋난 대답이었다. - 상황은 나중에. 지금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고? - 일단 내 임의대로 선포하긴 했지만…. 어찌됐든 지금 일대는 '영역 선포'에 들어간 상태야. 지금 네 수준으로는 오랜 시간 동안 유지하는 건 불가능해. …어떻게 하면 되지? 화정의 말에 나는 곧바로 생각을 고쳤다. 하기야 지금 한가로이 대화를 나눌 상황이 아니기도 했거니와, 시간이 없다는데 자꾸 물고 늘어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내 신속한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문득 화정의 기운이 몸 안을 한 바퀴 빙글 도는 게 느껴졌다. - 응!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하고 싶은 대로? - 그래. 아까 이미 영역은 선포된 상태라고 말했잖아! 이 바보야! 아까부터 자꾸 바보 멍청이라고 말하는 게 무척이나 거슬렸지만, 나는 침착히 시선을 들어 전방을 응시했다. 그러자 여전히 불똥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용의 형상을 이룬 불꽃들이 보인다. '하고 싶은 대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단숨에 잘라낼 생각으로 달려들었던 터라, 오른손에는 여전히 무시무시한 마력을 뿜어내는 '빅토리아의 영광'이 쥐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윽고 나는 그것을 천천히 늘어뜨렸다. 그리고 그 대신, 비어있는 왼손을 활짝 피어 용염의 앞으로 가져다 대었다. 더 이상 뜨거운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이대로 사라지라고 말하면, 사라지는 건가? - 사라져. 흩어지라고 말하면? - 흩어져. 단문단답(短文短答)이었지만, 나는 이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지만, 지금 이 일대에 있는 염화(炎火)의 기운은 모두 내 지배하에 있다는 것을. 그렇군. 그래서 '영역선포'라는 이름이 붙은 거구나. - 맞아. 비록 영역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넓은 범위라고 볼 수는 없지만, 누구를 탓하겠어? 아무튼 시간 없으니까 빨리 끝내. 슬슬 몸에 부담이 느껴질 테니까. 몸에 부담이 느껴진다. 그 말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순간적인 마력 폭발로 인해 극도로 활성화됐던 회로는 이내 조금씩 기세가 잦아들고 있었다. 그와 함께, 예전에 한창 체력이 낮았을 때 느꼈던 익숙한 감각이 온몸을 서서히 잠식해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멸? 되돌림? 방향 선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 만큼 선택지의 폭이 굉장히 너무도 넓어서, 순간적으로 어떤 명령을 내려야 할지 많은 고민이 들었다. 이후 약 10초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결국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왼손은 이미 용염에 대어둔 상태. 이윽고 하나의 염원을 담아 그것을 서서히 허공으로 끌어올리자, 그에 따라 천천히 하늘로 올라가는 광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거칠 것은 없다. 몸에 걸리는 부담이 점차 거세어지는 것을 느끼는 만큼, 나는 지체 없이 팔을 왼편으로 뻗었다. “가라.” 단 한 마디였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크롸롸롸롸롸롸롸! 말 한마디와 한 번의 팔짓을 했을 뿐인데, 동부의 사용자들을 쪼갤 듯 달려들었던 용염은 내 말에 반응하듯 커다란 포효를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신속히 방향을 바꾸어 바바라의 성벽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의 끝을 채 보기도 전에, 주변으로 뭔가 '탁.'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 기분은….' 해방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해제라고 해야 할까?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이윽고 전신을 휘돌던 이글거림이 한순간 사그라지는가 싶더니, 머릿속으로 어둠이 차츰 찾아 들기 시작했다. 한순간 휘청거리는 와중에서도 나는 간신히 성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용염이 내가 지시한 성벽을 거세게 덮치는 것을 확인했을 즈음. - 잘자. 우리…. 다음에 또 봐. 아쉽게 느껴지는 화정의 목소리와 함께, 의식의 끈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 따뜻한 빛 무리가 온몸을 휘감는다. 그러자 몽롱한 머리에 차차 정신이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형! 형!” “깨어나셨어요! 깨어나셨다고요!” '시끄러워.'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자, 익숙한 얼굴들과 시선을 마주쳤다. 가슴속에 차오른 숨을 뱉고 고개를 들자 천장에 상아색 천막이 보인다. 아무래도 정신을 잃은 직후 개인 막사로 옮겨진 듯싶었다. “제가…. 얼마 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나요?” 끙 힘을 주어 상반신을 일으키자, 내 양쪽 어깨로 누군가의 손길이 살며시 닿은 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나를 따라 몸을 일으킨 정하연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잃지는 않으셨어요. 수현 덕분에 부대는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진지로 후퇴할 수 있었고요. 그러니, 일단은 푹 주무세요.” 이윽고 어깨에는 가해지는 미약한 힘이 상반신을 다시 침대로 이끌었지만,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젓고 손을 떼어내었다. 그리고 속으로 바로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화정. - …….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예전처럼 멋대로 나타나 말을 걸었다가, 또 멋대로 사라진 모양이다. 혹시 몰라 한참 동안 말을 걸어봤지만 결국 응답 없는 메아리에 불과했다. 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고 몸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혹여 또 엉망이 되지는 않았을까 많은 걱정이 되었는데, 다행히 무척 양호한 상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머리도 어지럽지 않고 마력 회로도 일절 손상된 곳 없이 평소처럼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물론 마디마디에 미약한 결림이 느껴졌지만, 곧 회복할 수 있을 정도였다. “클랜 로드. 몸 상태는 어떠세요?” “괜찮습니다. 딱히 이상한 데는 없어요.” “다행이네요. 아주버님과 검후께서 좋은 약초를 주셨어요. 엘릭서 정도는 아니었지만….” “형이랑 검후가요?” 내 물음에 정하연은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이곤 말을 덧붙였다. “두분 다 방금 전까지 이곳에 있다가 가셨어요. 회의가 있다고 하셔서….” 형은 그렇다 치더라도, 검후라….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가, 이제야 막사에 한 가득 모여있는 사용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바로 머셔너리 클랜원들이었다. 하나같이 걱정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내가 정신을 잃었다는 소식에 다들 한 걸음에 달려온 모양이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도 있어 설핏 반가운 마음이 일었지만, 모두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고 있는 터라 왠지 모르게 부담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해서, 나는 한두 번 헛기침을 하고 얼른 화제를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흐흠. 알겠습니다. 그럼….” 마지막에 나는 달려들던 용염을 다시 도시로 되돌렸다.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무척 궁금했기에 현 상황에 대한 입을 열려는 순간, 갑작스레 이상한 위화감이 엄습했다. 그리고 나는 엄습한 위화감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모두 온 줄 알았던 머셔너리 클랜원들 이었는데,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신상용씨는?” “아….” 그냥 아무 의미 없이 한 마디 툭 던진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는, 순간 클랜원들에 얼굴에 미묘한 빛이 스치는걸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뭔가 말하기 싫어한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자, 불현듯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이번 전투에서 사망한 겁니까?” “아, 아니에요 형. 죽은 건 아니에요.” 대답은 안현에게서 나왔다. 하지만 한 번 신경이 쓰이니 더듬거리는 말투조차 의심스럽게 느껴졌다. “그럼?” “그게….” 안현은 난처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내 쩝쩝 입맛을 다시곤 말을 이었다. “지금 상용이 형 상황이 별로 안 좋아서요.” “어떻게 안 좋은데?” “에…. 혹시 소문 못 들으셨어요?” “소문?” 신상용에 대한 모종의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로 금시초문이었기에 나는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들을 필요성을 느꼈다. 그런 내 기색을 눈치챘는지, 안현이 다시 입을 여는 게 보였다. 그때였다. “현이 너. 쓸데없는 말 하지마. 조용히 해.” 정하연이 일순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내자 안현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서서히 눈길을 거둔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분사분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냥 아직 전쟁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래도 나름 노력하고 있는 것 같으니, 너무 심려 마세요. 클랜 로드. 일단은 휴식을….” “사용자 정하연.” “네, 네?” 나는 정하연의 말을 끊고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몇몇 클랜원들이 반사적으로 나를 따라 몸을 일으켰지만, 이내 지그시 내려다보자 엉거주춤 엉덩이를 붙였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사용자 신상용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 작품 후기 ============================ 화정의 각성에 대해서 적고 싶은 이야기는 많습니다. 그래도 한 회에 모두 담아내는 것보다는, 차차 풀어가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즈음 그런 기법을 자주 쓰고 있어서요. 예를 들면 저번에 나오다 말았던 마지막 카드에 그려져 있던 그림도, 다음 회에 나올 예정이에요. :) 『 리리플 』 1. 데바란 : 1등 축하합니다. 이제는 1등에서 자주 보는 느낌이에요. ㅎㅎ. 2. 자베트 : 바보. 멍청이. 앞으로 봐서, 비밀을 확! 터뜨릴지 아니면 계속 비밀로 할지 생각해보겠습니다. 3. 어설픈후니 : 화정과의 재미있는 대화는 다음 기회로 미루었습니다. :) 4. 의기2010 : 격으로만 따지자면, 용염은 화정한테 말도 못 붙입니다. 화정이 어머니라면, 용염은 손주의 손주의 손주의 손주의 손주의 손주의 손주보다 더 아래에 있다고 보시면 되요.(?) 5. 눈물강 : 화정에 대해 구상할 때 애초에 그렇게 구상했습니다. 물론, 같은 화염 계열이라고 해도 분명히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은 있습니다. 6. 뇌전신룡 : 주먹이나 발을 쓰는 자들도 있습니다. 다만,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D 7. 타나투스 : 헉. 바로 맞추셨네요. 체력이 101이 되지 않는 이상, 화정은 여전히 김수현의 발목을 붙잡을 겁니다. 설령 100을 찍는다고 하더라도요. 8. KireiAutumn : 김수현을 건들지 말라는 소리였습니다. 9. 훈제달팽이 : 전쟁이 끝나고 화정의 비밀을 일부 밝힐 예정입니다. 그때 어느 정도 정체를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 10. 건전한소환사 : 흠. 새로운 설문이라. 무척이나 댕기는데요? :) 한 번 고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62 / 0933 ---------------------------------------------- 단판 승부 사실상 물어볼 것도 없었다. 이미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한 이상 돌출 행동은 크게 제한을 받는다. 그런 만큼 이곳 바바라 부근 구축된 진영의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클랜원들은 다들 불안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번 눈을 마주치려 하면 황급히 시선을 피하였다. 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걸음을 내디뎠다. “클랜 로드로써 이렇게 못난 모습을 보여 창피한 마음뿐입니다. 그래도…. 다들 한창 바쁜 와중에 이곳까지 와주신 건 정말 감사히 생각합니다.” “수, 수현.” “지금 몸 상태는 매우 양호합니다. 형과 검후에게는 제가 나중에 따로 찾아 뵙도록 하지요. 그럼 이제 다시 원래의 자리들로 되돌아가시는 게 나을 것 같군요.” “그, 그럼. 가실 거면 같이….” 정하연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나를 붙잡았지만, 나는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여전히 엉거주춤한 태도를 보이는 클랜원들을 뒤로한 채 막사를 나섰다. 딱히 클랜원들을 탓하고픈 생각은 없다. 아니. 어떻게 보면 결국에는 최종 인선을 바꾼 내 잘못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신상용은 내 울타리 안에 있는 사용자였다. 하다못해 중간에 어떤 조치라도 취해주었다면…. 믿는다는 생각으로 놔둔 게 어쩌면 방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엄습했다. 그래. 일단 만나자. 만나서 이야기라도 들어보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빠른 걸음으로 제 3제대의 막사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설령 저번과 같이 신상용 쪽에서 피한다고 해도, 이번만큼은 어떻게든 만나리라 단단히 벼르며 막사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제 3제대의 막사만 해도 2, 300개는 족히 넘어갔지만, 나는 돌아다니는 사용자들에게 물어 간신히 신상용의 막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사용자들이 가르쳐준 막사로 들어선 순간, 한 쪽 구석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오늘은 막사에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누가 들어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미동도 않은 채 누워있던 신상용의 고개가 일순 어렵사리 나를 돌아보았다. “신상용씨.” “으…?” 아직 깨어있다는 생각에 한 번 이름을 부르자, 이윽고 신상용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떠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크, 클랜 로드?” “누워있으셔도 괜찮습니다.” 이윽고 비로소 내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확인했는지, 신상용은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곧바로 팔을 미끄러뜨리는 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얼른 가까이 다가가 그의 몸을 부축했다. 그 순간 갑작스레 코를 찔러오는 시큼한 냄새에, 방금 전 신상용이 구토를 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정말 어지간히 힘든 모양이군.' 가까이서 본 신상용의 얼굴은 더없이 심각해 보일 정도로 고통스러워 보인다. 예전의 어수룩한 눈매는 퀭하기 그지없을 정도로 황폐화된 상태였다. 잔잔함과 따뜻함이 머물던 눈동자는 이미 생기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오직 수척해진 얼굴과 나락까지 떨어져 내린 공허한 눈만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와 신상용은,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를 응시했다. “사용자 신상용. 몸은 좀 괜찮습니까.” “…….” “많이 힘들다고 들었습니다.” “…큭.” 그 순간, 내 말이 내면의 무언가를 건드렸는지 신상용은 갑작스레 고개를 숙이었다. 어떻게든 자신의 초췌한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결국 꾹 깨문 입술로 몇 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는 그것을 닦을 생각도 못한 채 한동안 소리 죽여 흐느꼈다. 차마 말을 걸 수 없을 정도의 어둠이 그늘지어있는 신상용을 보며, 나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3시간 같던 3분이 흘렀을 즈음, 그의 어깨에 일던 떨림이 서서히 가늘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숙인 고개 사이로 잔뜩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로드께서 저에게 해주신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말이었는지요.” “스스로 한계를 느꼈을 때. 그 벽을 넘어가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야 한다. 물론 넘어가는 과정은 많이 힘들겠지만…. 스스로 벽을 넘었을 경우, 그것은 자신의 발 아래를 받쳐주는 탄탄한 지지대가 되어줄 것이다.” 기억한다. 그것은 내가 아직 뮬에 있던 시절, 정하연과 신상용을 처음 가입 받을 때 해주었던 말이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로드를 만나기 이전 항상 목숨을 우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도시를 나가는 일도 무척 드물었고, 최대한 안전을 추구하면서 생활했지요…. 하지만 로드를 만난 이후. 그리고 여러 동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저는 서서히, 아주 서서히 한 번 바뀌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하게 된 것 같습니다.” 하게 되었다가, 하게 된 것 같다 라. 뜻 모를 의미심장함이 느껴지는 말에, 나는 속으로 숨을 삼켰다. “이번 전쟁에 참가한 것도 그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클랜 로드께 호기를 부렸고, 따라오게 되었지요. 하지만 지금에서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호기가 아닌 객기였다는 것을요.” “…….” “어떻게 서든 입증하고 싶었는데…. 저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하하. 안될 놈은 안되나 봅니다.” “사용자 신상용.” 내 부름에 신상용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에 미약한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그것은 자기를 비웃는, 자조(自嘲) 짙은 웃음이었다. “쓰러지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가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달려가 안부를 묻고 싶었지만….” 신상용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얼굴을 보였다. 그의 입가에는 서글픈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이윽고 멈췄던 입이 다시 열리었다. “클랜 로드에게만큼은, 이런 모습을 보이기 싫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에,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 하늘에 희미한 달이 떠 있다. 어둑한 먹물을 머금은 검은 구름과 동그란 띠 형태를 보이는 달무리는, 내일의 비를 예고하고 있었다. 나는 막사에 들어가기 전, 담담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싸늘한 밤바람이 온몸을 휘감아오는 게 느껴졌다. 고요한 기운이 감도는 동부의 진영.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우중충한 공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아마 그 이유는 어제 치른 전투의 여파가 남아있어서 그럴 것이리라. 동부는 전투를 시작한 이래로 어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일단 확인된 사망자수는 22명. 결국에는 최전방에 폭발적으로 퍼부어진 적들의 공격을 일부 견디지 못한 모양이었다. 물론 적들 또한 많은 피해를 입었겠지만, 현재로서는 자세히 확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사실상 22명의 사망으로 이런 우중충한 분위기가 내려앉은 건 꽤나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결국 요지는 사기였다. 지금껏 시종일관 우세한 전투로 일관했던 만큼, 이번에 대패를 당할뻔했다는 사실이 자못 충격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나마 내가 용염을 되돌림으로써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고 하니, 사기가 반전되는 일까지는 일어나지 않은듯했다. '내일이 문제로군…. 유지나, 반전이냐. 그런데 또 그런 공격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머셔너리 로드.” 그때였다. 상념은 그만두고 내일을 위해 이만 잠자리에 들자고 마음먹었을 즈음, 한껏 농염함을 품은 음성이 들리었다. “아직 주무시고 계시지 않았군요. 다행이에요.” “마법의 탑 로드?” 나를 부른 여인은 바로 타로 카드 마술사, 선율이었다. 그녀는 한 번 어깨를 으쓱이고 나서는 한두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부르기 힘들지 않아요? 그냥 선율로 불러주면 참 고마울 텐데.” “밤이 깊었는데, 이곳까지는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이런.” 바로 용건을 묻자 선율은 입가에 쓴웃음을 띄웠다. 그러더니, 내 기대에 부응하려는지 무척 빠른 속도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래요. 머셔너리 로드에게는 총 세 가지 공적, 개인적 볼 일이 있어서 왔어요. 첫 번째는 머셔너리 로드께서 요청한 사용자 차출 요청. 두 번째는 개인적으로 사과할 것이 있기 때문이고. 세 번째는 전할 소식이 있어서예요.” “차출 요청이라면…. 지금 제대에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네. 원래 소식을 전하는 건 다른 분이 하실 예정이었는데, 마침 제가 볼 일이 있다고 해서 겸사겸사 맡게 되었어요.” 물 흐르듯 말을 꺼내는 선율을, 나는 새삼스런 기분으로 응시했다. “그리고 일거리 남겨두고 자는 성격은 아니라서. 실례일까요?” 이윽고 선율이 눈매를 살며시 치켜 올리자, 나는 한숨과 함께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말해서, 실례가 아니라 오히려 환영이었다. 왜냐하면 나도 비슷한 성격이었으니까. “후유. 차출 요청은…. 그렇게 되었습니다. 마법의 탑 로드의 양해를 부탁합니다.” “사용자 신상용이라면,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 동안 관심 깊게 지켜봤으니까요. 아무튼…. 뭐, 차출은 허락할게요.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머셔너리 로드.” “어떤 것을….” “혹시 신상용씨를 둘러싼 소문을 들으셨다면, 헛소문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그건 제가 보증할게요.” 신상용을 둘러싼 이상한 소문이란, 바로 행군을 하면서 자주 자리를 이탈한 행동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이 전투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은, 아니 '못한' 태도와 이어져 현재 불미스러운 소문이 퍼진 상황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신상용씨는 지금껏 벌어진 공방전에 빠짐없이 참여했거든요. 그는 자신이 견딜 수 있는 한, 정말로, 있는 힘껏 싸웠어요.” 하지만 소문이 사실이 아니란 것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알고 있기에, 나는 대답으로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그런 내 반응을 봤는지, 선율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럼 차출 문제는 됐고…. 이제 개인적인 사과를 해야겠군요.” “혹여 저한테 잘못하신 거라도?” “네. 혹시 저번에 저에게 점을 보신 것을 기억하시나요?” “기억합니다.” “그때 떠나신 이후로, 제 멋대로 나머지 카드를 펼쳐보았어요. 물론 해석은 못했지만…. 죄송해요.” '난 또 뭐라고.' 고작 카드를 봤다는 사실로 사과를 하러 왔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직업 특성상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해석도 하지 못했다고 하니 그렇게 신경 쓸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재미로 본 겁니다. 딱히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후후.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고맙고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선율은 미묘한 웃음소리를 흘리었고, 이내 나와의 거리를 줄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두 걸음 앞까지 다가온 그녀는 갑작스레 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런 선율의 손에는 네모난 카드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이건 선물이에요. 드릴게요.” “이건…. 마법의 탑 로드의 전용 마법 카드가 아닙니까?” “이것은 그때 펼치셨던 열다섯 장의 카드 중 가장 마지막 카드에요. 열두 장 까지는 제가 항시 사용하는 카드이지만, 열세 장부터 열다섯 장까지는 아니에요. 그때 보여드렸던 시계처럼, 점을 도와주는 도구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그래도….” “중요한 건. 저에게는 쓸모 없는 카드지만, 머셔너리 로드에게는 필요할 수도 있어요.” 갑작스레 뜬구름을 잡는 말이었지만, 나는 거절하려던 말을 다시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잠시 동안 시간을 끌다가 이내 카드를 향해 차분히 손을 내뻗었다. 어떠한 마력 반응도 느껴지지 않고, 제 3의 눈으로 봐도 특이한 정보는 표시되지 않는다. 이런 카드가 도대체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건지는 몰라도, 일단 받아두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건네 받은 카드는 뒷면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을 손에 쥔 채 살짝 흔들자, 선율은 마음대로 하라는 양 다시금 어깨를 으쓱였다. 한순간 볼까 말까 고민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왕 받은 거 그림만 보는 건 큰 상관이 없겠다 싶었다. 연결되는 다른 카드를 본 것도 아니고, 내가 카드를 해석할 가능성은 무척이나 낮았으니까. 해서, 나는 곧바로 카드를 뒤집었다. 카드에는 총 두 명의 남녀가 그려져 있었다. 그림은 특히 여성이 무척 두드러져 있었는데, 날개가 달린 걸로 보아 천사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천사는 언뜻 보면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자세히 보면 한 줄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천사의 품에는 한 명의 남성이 안겨져 있다. 이 중 한가지 특이한 점을 꼽자면, 천사의 날개가 검은색으로 물들여져 있었다는 것이다. “아차. 머셔너리 로드. 그러고 보니 전할 소식이 있다고 했죠?” 너무 집중해서 본 걸까. 꿈결처럼 들리는 선율의 목소리에 마지막으로 천사를 보고 고개를 드려는 찰나였다. 그리고 얼굴에 시선이 꽂힌 순간,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 “아직 사용자들에게 밝히지는 않았는데…. 후후. 희소식이에요. 드디어 북부와 남부에서 소식이 들어왔어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천사의 눈동자를 본 순간, 불현듯 하나의 익숙한 누군가가 머릿속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건…. '세라프?' ============================ 작품 후기 ============================ 우헤헤. 오늘 휴일이 지나갔네요. 저는 또 우울 모드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저랑 비슷하신 분들이 많으시겠죠? ^_ㅠ 오늘 후기와 리리플은 하루 쉬도록 하겠습니다. 독자분들의 양해 부탁합니다.(리리플은 내일 합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 0363 / 0933 ---------------------------------------------- 단판 승부 북 대륙 북부 소 도시. 뮬. “꼭 물오리 떼처럼 몰려오는군.” 성벽에 서 사방을 둘러보던 김갑수는, 해일처럼 밀려오는 인원을 보더니 이내 짤막한 감상평을 내뱉었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동의를 구하려는 듯 고개를 돌리자, 오른쪽 옆으로 가죽 갑옷을 입은 남성이 대답했다. “물오리 떼라…. 재미있는 표현이군요.” “그렇지? 그런데 얼굴이 왜 그렇게 굳어있어? 재미있으면 웃으라고.” “그야 그럴 수밖에요. 계속 이곳에 머물렀다가는…. 자칫 잘못하면 물오리들한테 뜯어 먹힐 수도 있으니까요.” 담담하지만, 남성의 뼈있는 회답에 김갑수는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물오리에 비유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남성의 말은 현 상황을 매우 정확히 표현해주고 있었다. 확실한 열세의 상황. 아니 열세 정도가 아니다. 도시에 남아있는 인원이 200명을 채 넘지 못하는 것에 비해, 달려오는 ‘물오리’들의 숫자는 물경 수천을 헤아리고 있었다. “흐흐…. 그래. 현재 대피 상황은 어떻지?” “바바라로의 이동은 거의 완료된 상태입니다…. 아.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하네요. 지금 내려가면 딱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런가…. 그럼 얼른 내려가야겠군. 네 말마따나, 이대로 가만히 뜯어 먹힐 수는 없으니 말이야.” “현명하신 선택입니다. 성문은 굳게 봉해두었으니, 너무 늑장만 부리지 않으면 워프 게이트를 이용할 시간은 충분할 겁니다.” “알았어. 알았다고. 지금 내려가면 되잖아. 거참, 보채기는….” 김갑수가 손사래를 치자, 남성은 머쓱한 기분을 느꼈는지 더는 내려가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윽고 그를 위시한 일단의 무리는 천천히 성벽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성벽 너머로 시시각각 함성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걸음걸이는 무척이나 여유롭다. “놈들이 닭 쫓던 개꼴이 될 생각을 하니 기분이 다 통쾌하군…. 아! 그러고 보니 그년은 어떻게 했지?” “예? 그년이라니요?” “그 있잖아. 내 거시기 물었던 년.” “아~. 그 갈색 머리 한 젖소 말씀이십니까?” '그년'을 지칭하는 남성의 말이 자못 웃겼는지, 김갑수는 다시 한 번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킥킥. 그래. 그 젖소는 잘 데리고 갔나?” “아 예. 바바라로 잘 모셨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혹시라도 이강산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라. 그년이 딱 그놈 취향이라서, 혹시라도 놈이 발견하면 바로 빼앗길 거야.” “최대한 조심은 하겠지만…. 아무리 저라도 권한을 벗어나는 일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이미….” 꽝! 그때였다. 김갑수와 부랑자 무리들이 막 성벽에서 내려왔을 즈음, 천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굳게 닫혀있던 성문이 크게 들썩였다. 어찌나 소리가 컸는지 말을 잇던 남성이 한순간 귀를 막을 정도였다. 그런 그의 얼굴은, 소음이 주는 고통에 와짝 일그러져 있었다. “미, 미친 씨발! 간 떨어질 뻔했잖아!” “이, 이렇게 빨리? 부, 분명 거리는 어느 정도 남아있었을 텐데….” 혹시 마법이라도 사용한 건가? 한창 '젖소'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남성은 의문 어린 얼굴로 성문을 돌아보았다. 콰콰콰콰…! 그때, 이번에는 공기를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선명한 파공음이 들리더니, 이내 성문을 울린 거센 쇳소리가 다시금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꽈앙! 꽈앙! 꽈앙! “큭! 미…. 친…! 뭐, 뭐야. 부서지려고 해? 저 성문 보강한 거 맞아?” “마, 맞습니다. 현님의 지시로 확실히 보강 작업을…. 아, 아무튼 이럴 때가 아닙니다! 일단 어서 대피를…!” 쿵. 쿵. 쿵. 쿵. 하지만 이번엔 지축이 쿵쿵 떨쳐 울리는 소리에, 남성의 낯빛은 마치 사형을 언도 받은 죄인처럼 창백하게 변하였다. 아까부터 들려오던 심상치 않은 소음은, 흡사 함부로 입을 여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양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윽고 잠시 동안 멍하니 있던 부랑자들이 퍼뜩 정신을 차렸을 무렵, 대지의 떨림도 잦아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했다. 쿠지직! 쿠지지직! 한순간 성문의 중앙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전보다 더욱 보강한 성문임에도 불구하고, 두터운 강철로 이루어진 성문은 흡사 종잇장처럼 이리저리 비틀려나가고 있었다. “서, 성문이 찌그러지고 있어…?” 눈앞에서 보고도 믿을 수가 없는지 누군가 망연함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성문은 여전히 “꾸직!”, “꽈드득!” 소리를 내며 비틀려가고 있었다. 마치 있는 힘껏 빨래를 쥐어짜는 것처럼, 성문은 일각일각 우글쭈글한 고철 덩어리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꽈직! 꽈지지지직! 그러더니, 이윽고 아예 철이 통째로 뜯겨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성문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었다. 그리고 구멍 사이로 붉으락푸르락한 거한의 팔이 불쑥 들어온 순간이었다. 후욱…. 후욱…. 짜부라진 구멍 사이로, 뜨거운 자줏빛 바람이 세게 몰아친다. 뭉클뭉클한 마력이 담긴 자줏빛 바람은, 순식간에 성문의 주변을 잠식했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으, 으아아악!” “괴, 괴물이다! 도망쳐!”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부랑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 북 대륙 중앙 대 도시. 바바라. 우글우글. 바바라의 워프 게이트는 무척이나 복잡했다. 방금 전까지 쉴 새 없이 반짝이던 빛은 사그라졌지만, 워프 게이트를 통해 나온 사용자들은 수백을 훌쩍 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던 한 명의 여인이, 옆에 있던 한 남성에게 말을 걸었다. “보이시죠? 뮬에서 들어오는 떠돌이들이에요.” “으흠! 그렇군요.” “으흠? 따로 하실 말씀은요?” “으음. 글쎄요. 이것 참. 난감하네요.” 바바라의 워프 게이트에서 떼지어 들어오는 떠돌이들을 보며, 시몬은 진정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하하. 우리 대륙에서는 아직 낌새만 잡았다고 하던데. 이대로 돌아가면 참 난감해질 텐데 말이죠. 안 그래요? 유리나?” “저는 지금이 더 난감하다고 생각해요. 시몬 그라임스.” 이어지는 시몬의 너스레에, 유리나라 불린 여인은 또박또박한 음색으로 맞받아쳤다. 그러자 그는 머쓱한 얼굴로 뒷머리만 벅벅 긁더니 이내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아~. 확실히, 난감하죠.” “…….” “뮬은 그렇다 치더라도…. 설마 베스와 도로시, 그리고 헤일로까지 동시에 공략을 탈환을 시도할 줄은…. 왠지 끌고 온 인원이 적다 싶었는데, 그런 꼼수를 부렸나 보네요. 하하! 정작 저는, 떠돌이들한테서 아무런 얘기도 듣지 못했는데 말이에요. 어쩐지 갑자기 움직임에 대한 정보가….”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탓하는 건 나중 일이에요. 지금 우리는 당장 마력 차단 진을 활성화하고, 헤일로를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유리나의 말인즉슨 서 대륙에 가장 가까운 도시로 이동하고, 그곳에서 탈출을 도모하자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의견은 일견 타당한 듯 보였다. 비록 다른 도시는 전부 떨어졌지만, 인원을 약간 남겨놓은 헤일로는 북 대륙의 탈환에 맞서 거세게 저항하는 중이었으니까. 하지만 시몬은 절대 안 된다는 얼굴로 헤헤 웃으며, 오히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그러다 진짜 죽어요?” “그게 무슨 말이죠? 왜 헤일로로 이동하는 게 죽는다는 건가요?” “유리나의 말은 말이죠. 여기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동하는 동안, 저~기 성밖의 괴물들이 가만히 있어주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에요. 즉 우리는 질서를 지켜 한 명 한 명 이동할 테니, 그 동안 흐뭇하게 구경만 해주십사 하고 부탁해야 하는 거죠.” “우리는 마력 차단 진이….” “유리나. 저 괴물들을 상대로, 그게 얼마나 버텨 줄거라 생각해요?” 시몬이 딱 잘라 대답하자, 유리나는 대답이 궁해진 듯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나 여전히 속 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시몬이 자못 답답했는지, 눈매를 가늘게 만들어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내었다. “시몬.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숨통을 죄어오는걸 기다리고 있어요?” “하하. 너무 열 내지 말아요. 지금 북 대륙의 선전에 다들 재미있어하는 분위기인데…. 왜 유리나만 그렇게 화를 내고 있나요?” “하? 지금 이 상황이 재미있어요?” “에…. 실은 재미있다기보다는, 예상한 상황이라서.” 그때였다. 시몬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유리나는 할 말을 잃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아. 물론 모두 다 예상한 건 아니에요. 드래곤 브레스가 되돌아온 건 확실히 예상외였거든요. 어휴. 그건 진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시….” 뭔가 말을 하려는지, 유리나는 한 번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결국에는 다시금 입술을 꾹 깨문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시몬의 눈은 여전히 벙글벙글 웃고 있었고 표정은 한없이 편안해 보인다. 마치 동네에 마실 나온 순수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비교적 오랫동안 시몬에게 '복종'해온 유리나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시몬 특유의 성격이라고 봐도 좋았다. 그는 어떤 상황에 오든 간에 절대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서 대륙 제패에 가장 가까웠던 '재키'를 상대할 때도 무수한 위기를 넘겼지만, 단 한 번도 평정을 잃은 적이 없다. 오히려 항상 누구도 생각지 못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위기를 넘기곤 했다. 시몬은, 그런 남자였다. 아무튼 시몬은 분명 예상한 상황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에 대해서, 그에게 모종의 수가 있다는 소리였다. 평소 절대로 허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만큼, 유리나는 일단 이야기를 듣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좋아요. 이제 조금 진정한 것 같네요. 하하. 아. 유리나가 말한 헤일로의 이동은, 간단해요. 각개격파의 그림이 그려지거든요. 정말 살고 싶다면 절대로 행하지 말아야 할 악수나 다름없죠.” “…….” “어차피 조금 당해줄까도 생각했어요. 그게 진짜 당하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궁극적으로는 변한 게 없으니, 지금 상황을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여요. 살고 싶다면. 그리고 다시 서 대륙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스스로 숨통을 틔우면 되는 일이에요.” “방법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예상했다는 말은 진짜였는지, 유리나의 물음에 시몬은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일단은 마력 차단 진을 활성화해야겠죠. 기껏 그려놓고 안 쓰는 건 아까우니까.” “…그리고요?” “으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몇 가지 조건에 대해서는 운에 맡겨야 해요. 북 대륙에서 진을 해석해주었다면 참 좋을 텐데…. 헤일로도 잘 버텨주어야 하고…. 아무튼 운에 맡긴다고 해도, 가능성은 높일 수는 있겠죠? 지금 당장 헤일로로 지원 인원을 몇 명 보내기로 해요. 물론, 가장 쓸모 없는 애들로.” 시몬의 말에 유리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생각이 있는지 하나하나 지시 사항을 말하고는 있는데, 전혀 공감이 가지 않은 탓이다. 그에 따라 그녀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아직 그의 말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아. 그리고 또 뭐가 필요하더라…. 그렇지. 유리나? 마탄을 사용할 거예요. 가지고 온 전량을 준비해두세요.” “네? 마탄을? 그것도 전량을요?” “예! 조금 아깝긴 한데, 계산해보니까 전량이 아니면 살아나갈 수 없을 것 같거든요. 그리고 보자…. 아하. 날씨 좋네. 그럼 마지막으로 정령술사도 불러주시겠어요? 그러면 완전히 준비 끝인데.” 시몬은 설핏 고개를 돌리곤 검지를 까닥까닥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유리나의 표정을 확인했는지, 히죽 웃어 보였다. “왜 그런 얼굴이에요?” “…아까부터 도대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모르면 시키는대로. 이건 타이밍과, 속전속결이 생명이거든요. 하하하!” 그러더니, 시몬은 갑작스레 고개를 들어 구름 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양팔을 활짝 펼치며,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봐요. 날씨도 우리를 도와주고 있잖아요?” * 하늘엔 어두운 그림자들이 잔뜩 끼어 평야로 흐릿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리고 흘러들어오는 짙은 안개 사이에 서, 나는 한 명의 사용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는 사용자의 정체는 바로 신상용이었다. 분명히 짐을 정리하고 오늘 아침에 내 막사에서 보자고 했을 터인데, 지금껏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있다. 물론 아직 아침이 완전히 지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평소 약속은 제법 잘 지키는 만큼, 아침 해가 모습을 보였는데도 보이지 않는 건 고개가 기울어질만한 일이었다. '왜 아직도 오지 않는 거지?' 문득, 오늘 새벽 내가 너무 말을 심하게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에게 했었던 말은, 바로 인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하려다가 말았던 이야기였다. 물론 신상용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눈곱만치도 없었다. 오히려 아끼는 마음에 꺼낸 이야기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입장에 따라서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들이었다. '아무튼…. 오면 다시 이야기를 해봐야겠군.' 어찌됐든. 잠시 찾아온 소강 상태를 이용해 나는 막사에 비치된 간이 침대에 누웠다. 갑작스런 화정의 각성. 북부와 남부의 소식. 신상용. 카드. 여러 생각들이 이리저리 뒤얽혀 머릿속이 무척 복잡했다. 나는 잠시 동안 수많은 상념에 잠겼다가, 나도 모르게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윽고 한 장의 카드가 손에 잡혔다. 그리고 그것을 눈앞으로 들어올리자,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는 천사가 눈에 들었다. '세라프….' 왜 카드의 천사를 보면 자꾸만 세라프가 생각나는 걸까? 땡땡땡땡땡땡! 그때였다. 세라프의 생각에 빠지려는 찰나, 갑작스럽게 진영을 울리는 신호성이 들렸다. 나는 곧장 생각을 멈추고 튀어올라, 발 빠르게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웅성웅성. 신호에 반응한 건 나뿐만이 아닌지, 이윽고 주변에 위치한 막사에서 한 명 두 명 사용자들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들 하나같이 멍한 기색이 가득한 게 상황 파악을 한 사용자는 없는 듯싶었다. 이윽고 나는 신속히 진영의 가장 앞으로 달려나갔다. 온 힘을 다해 달린 탓인지 순식간에 전위에 다다를 수 있었지만, 농밀한 안개가 시야를 방해한다. 도시가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나는 곧장 마력을 돋워 안력을 강화했다. 그러자, 부옇게만 보이던 풍경이 조금씩 자세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성벽에는 시꺼먼 그을음이 잔뜩 묻어져 있었다. 내가 용염을 되돌림으로써 만들어낸 작품이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정작 이상징후를 보이는 것은, 바로 바바라를 둘러싼 바닥에 있었다. 도시 주변에 그려져 있던 '수호용 마력 차단 진'이, 말간 파란빛을 내뿜는 중이었다. 이것은, 마법 진의 발동을 예고하는 하나의 전조였다. ============================ 작품 후기 ============================ 2부를 위해 뿌릴 것은 다 뿌렸네요. 그 동안의 무수한 떡밥을 견디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제 더 이상의 떡밥은 없고, 1부의 마지막을 매듭지을 전쟁만이 남았습니다. 다행히 1부 완결이 400회까지는 가지 않겠네요. 하하하. :) 아무튼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PS. 쪽지는 주말 안으로 답신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리리플(361회) 』 1. 데바란 : 1등 축하합니다. 하하. 조금 있으면 시험이라서 괜히 긴장이 되네요. 시험 문제 쉽게 출제해주세요! :D 2. hohokoya1 : 예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신상용은 배신자가 아닙니다. 하하. 3. 라티인형 : 흠흠. 남자다운이라. 그 말씀이 제 심금을 울리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 4. 자베트 : 자베트 님은 바보입니다. 다들 자베트 님 바보라고 외쳐주세요! EE!(?!) 5. 천냥보은 : 죄송해요. 흑흑. ㅜ.ㅠ 어느새 질 나쁜 작가가 되어버렸습니다! 저를 매우 치세요! 『 리리플(362회) 』 1. 데바란 : 와. 또 1등 하셨습니다. 한 회에 리리플을 두 개 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네요. 다시 한 번 축하합니다! 2. 훈제달팽이 : 하하. 상상은 독자분들의 자유입니다. 그저 제가 구상한 내용이, 나중에 독자분들께 재미를 드렸으면 좋겠어요. 3. 우리천사 : 미안합니다. 앞으로는 절단 대신, 시원시원한 내용으로 찾아 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4. 놈아저씨 : 저야말로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_)_ 5. 천겁혈신천무존 : 천겁혈신천무존 님. 딱 한 마디 말씀만 올리겠습니다. 살려주세요. ㅜ.ㅠ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64 / 0933 ---------------------------------------------- 단판 승부 어제까지만 해도 우중충했던 제 3제대의 분위기는, 하루가 지나자 조금씩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원인은 바로 오늘 아침에 발표된, 남부와 북부에서 들어온 따끈따끈한 희소식 때문이었다. 남부와 북부는 총 4개의 도시를 대상으로 동시 공략을 실시했고, 현재 3개의 소도시를 되찾는데 성공했다. 비록 헤일로(서부 일반 도시)는 적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쳐 교전 중에 있다곤 해도, 시종일관 우세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함락도 시간문제였다. 그에 따라, 현재 주변 사용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바로 동부의 다음 행보에 있었다. 이대로 남부와 북부의 지원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용자들이 있는가 하면, 이 기세를 몰아 신속히 바바라를 탈환해야 한다는 사용자들도 더러 있었다. “…….” 그러나. 그런 것에는 일절 관심이 없는지 대화에 끼지 않는 한 남성이 있었다. 아니,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다른 것에 신경이 쏠려있는 모습이랄까. 얼굴은 멍하고 짐을 챙기는 손길은 느릿한 게, 다른 생각에 빠져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남성의 정체는 바로 신상용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지금 최근 김수현과 나눴던 대화를 곱씹는 중이었다. '한계를 돌파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굳이 자신의 성향을 바꿀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습니다. 사용자 신상용은…. 전투 사용자보다는 비 전투 사용자로서의 역할이 더욱 걸맞다고 생각합니다.' '레어 클래스?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쪽에서 충분한 재능을 보여주셨으니까요.' '사용자 이만성도 그러한 취지에서 데려온 것입니다. 너무 부끄럽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성향이라.” 한 마디 툭 내뱉은 신상용은 이내 자조 어린 미소를 내비쳤다. 자신의 성향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혹시라도 정보를 본 게 아닐까? 수많은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이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후후. 하기야 할 말도 없지.” “응? 뭐가 할 말도 없어?” 그때, 등뒤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불쑥 날아들었다. 신상용은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그러자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한 명의 남성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같은 막사를 사용하는 사용자였다. “어, 언제….” “아까부터 이상한 혼잣말만 중얼거리고…. 그런데 신상용씨. 지금 뭐 하는 거야?” “아. 이, 이건….” “이건?” 여기서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모양인지 신상용은 슬며시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짐을 정리하는걸 보곤 대충 눈치를 챘는지, 남성은 일순 아니꼬운 낯빛을 보였다. “차출?” “…예, 예.” “어디로 가는데?” “벼, 변수를 대비하는 조가 있다고 해서….” 사실상 지금까지의 전투는 원거리에서 화력만 교환하는 양상을 띤 터라, 변수를 대비해 창설한 '조'는 특별한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딱 한 명. '머셔너리 로드'만 제외하고 말이다. 저번에 부랑자들의 첩자를 밝혀낸 일부터 이번에 용염을 막은 것까지. 지금껏 '조'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사용자는 김수현뿐이었다. 그렇기에, 남성은 신상용이 짐을 챙기는 의미를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이야. 신상용씨는 좋겠네. 능력 있는 클랜 로드가 이렇게 신경도 써주고.” “…예.” “부럽다 부러워. 아무튼 축하해. 그럼 짐 정리에 방해될 수도 있으니, 나는 이만 나가볼게. 그럼 거기서도 잘 해보라고.” “…….” “활약상 기대하고 있을 테니까. 나 참.” 기어이 한 마디 더 던지고 나간 남성은 이내 거친 발소리를 내며 막사를 나섰다. 그리고 그가 나간 입구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신상용은 이내 아무 말도 않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짐을 정리하는 손길은 여전히 느렸고, 또한 서서히 느리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손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을 때, 신상용은 고개를 푹 숙이었다. “후….” 이윽고, 신상용의 얇은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 '수호용 마력 차단 진'의 발동과 함께 동부로 새로운 소식이 하나 날아들었다. 그것은 바로 점차 소극적으로 변하던 헤일로의 저항이 다시금 거세어졌다는 것이다. 갑작스레 성벽을 지키는 인원이 늘어나, 성문 함락 직전까지 갔다가 간신히 병력을 물렸다고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바바라에서 헤일로로 지원군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옅은 파란빛을 띠기 시작한 마법 진은 하나의 사실을 추가로 시사해주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결국에는 도망치는 것으로 결정을 내린 모양이군.” “아마 지금쯤 전 도시의 소식을 접했을 겁니다. 그들로서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겠죠.” 고려 로드의 말에, 조성호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려 로드는 한두 번 고개를 끄덕였다가, 조성호를 돌아보았다. “헤일로 공략을 맡은 클랜이 푸른 늑대라고 했던가? 그쪽에서 추가로 들어온 소식은 없나?” “있습니다. 동부에서 조속히 바바라의 공략을 재개하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후후. 걱정되는 모양이군.” “그럴 겁니다. 지금껏 계속해서 전투를 치렀다고 했지만, 아직 양쪽 합해서 사상자가 천 명도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요. 지금 바바라에 몰려있는 인원이 전부 헤일로로 옮겨간다면 푸른 늑대에서는 꽤나 곤란한 상황에 직면할 겁니다.” 확실히 조성호의 말은 정설이었다. 마력 차단 진이 활성화되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발동의 조짐은 확실히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 바바라를 공격하기에는 자꾸만 찜찜한 마음이 이는 것은 왜일까? '이상해…. 이렇게 쉽게?' “그렇다면 응해주어야겠지.” 하지만 고려 로드의 생각은 다른지, 그는 분연히 몸을 일으켰다. 아마 적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지원군을 파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고려 로드는 회의에 참가한 통제실 내부의 인원을 전체적으로 훑어보고는 비장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마력 차단 진이 완전히 발동하면 그만큼 시간이 끌릴 겁니다. 그러면 시간이 지날수록 헤일로를 공략하는 아군들의 부담도 커지겠지요. 그러니 지금 바로 각 부대에 상황을 전파하고, 제대 장들은 정비에 들어가주시오. 총 공격에 들어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다른 부대에 전파하도록 하겠습니다.” “좋군. 회의는 여기까지. 다들 빠른 준비에 들어가 주시고, 저는 먼저 나가보겠소.” 그 말을 마지막으로, 고려 로드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통제실을 나서기 전, 내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런가 하고 고개를 들자,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진다. “몸은 좀 괜찮습니까. 머셔너리 로드.” “아, 예. 몸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형…. 아니 해밀 로드와 검후께서 좋은 약을 보내주셨거든요.” “예? 검후가요?” 내 말이 꽤나 의외로 들렸는지, 고려 로드는 눈을 휘둥그래 뜨며 고개를 돌아보았다. 워낙 조용한 회의실이라 내 목소리가 모두에게 들렸던 모양이다. 그가 돌아본 곳에는 목을 빳빳이 세우고 있는 형과,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는 검후가 보였다. '형은…. 그렇다 치고. 검후는 왜 저렇게 좌불안석이지?' “허허허. 하기야…. 이제 좋은 남자 만날 때도 됐지.” “예?”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튼 몸이 괜찮아지셨다고 하니, 이번에도 잘 부탁합니다. 허허허!” “?” 이윽고 고려 로드는 뜻 모를 웃음만 남긴 채 회의를 파했고 바로 통제실을 떠났다. 그리고, 조용한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내 하나 둘 몸을 일으키며 자리를 비켜주기…. 아니. 왜 갑자기 이런 느낌이 들었지? 아무튼 남은 인원들도 한 명 두 명 통제실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미묘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갑자기 왜이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차가운 공기가 흐르던 회의실이었는데, 갑자기 뭔가 확 달라진 기분이 들었다. 뭔가 훈훈하고, 분홍빛이 떠도는 느낌이랄까? 그 순간 문득 선율이 손가락으로 만든 브이(V)자 신호를 보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마치 뭔가를 깨달았다는 표정이었다. 선율은 이내 쿡쿡 웃으며 내 앞을 지나쳤다. '…….' 이어서 맨 마지막으로 나온 검후는 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래도 예의상 먼저 말을 걸기로 했다. “보내주신 약은 잘 받았습니다.” “네…. 몸은….” “이제 괜찮아요.” “그렇군요….” 검후, 남다은은 추가로 할 말이 있는 양 잠시 주저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더니, 설아를 꼭 품에 안은 채 후다닥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그냥 감사를 표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나는 남다은이 달려나간 입구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한껏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등뒤로 내 어깨를 짚는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수현아. 너 진짜 눈치 없구나.” 이것은 형의 목소리. 나는 어이없는 기분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누가 누구보고 눈치가 없다고?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었다. * 비록 회의 때 사소한 해프닝은 있었지만, 이내 본격적인 정비에 들어가자 나는 다시 원래의 생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까부터 자꾸 가시처럼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지만, 그것은 현재로서는 모르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알고 있는 미래와의 차이, 즉 '동부는 첫 번째 전투에서 대패한다.'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일단 대세를 따르자는 결정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미래와 현재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 중에서는 이번 전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도 적지 않았으니, 미래가 충분히 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그런 건 제쳐놓고서라도, 적들이 이대로 헤일로로 넘어가는걸 두고 볼 수 없는 것도 하나의 사실이었다. '그래도 커다란 흐름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는데…. 일단은 나를 믿어보자.' 이윽고 각 제대 장들이 정비를 마쳤다는 외침을 들으며, 나는 확실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출발.) 짧지만 나직한 음성이 허공을 왕왕 울린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동부의 질서정연한 진군이 시작되었다. 고요하다. 전투에 돌입한 이상,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을 지킨 채 짙은 안개를 가르며 나아간다. 하도 안개가 끼어 육안에 보이는 도시는 부유스름했지만, 마력이 있는 이상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2, 3, 4제대는 준비에 들어가도록.) 이윽고 부대는 공성전을 재개할 수 있는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누구 한 명이 죽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기에, 주위로 한층 신중한 기운이 느껴졌다. 서문 부대는 저번의 일을 교훈 삼았는지, 혹시 모를 일격을 주의하며 계속 전진해나갔다. 그리고 아까보다 훨씬 진한 빛을 띠는 마법 진이 보이는 순간, 부대는 바로 진군을 정지했다. 그때였다. 슈슈슉! 슈슈슈슉! 서문 부대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사정거리 안에 들어온 순간 수많은 화살 소리가 대기를 갈랐다. 그러나 이미 대기를 하고 있던 4제대의 사제들은 재빠르게 방어 마법을 펼쳤고, 기세 좋게 쏘아진 화살들은 수십 겹의 보호막에 속절없이 튕겨나갔다. 비록 선공을 받았다고는 해도 2제대의 궁수들 역시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선공을 완벽히 방어하자마자 바로 대응 사격을 날린 것이다. 그러나 적들 또한 똑같은 방어 마법을 펼쳤기에, 서문 부대에서 사격한 화살들 또한 커다란 피해를 주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괜찮다. 방금 전 화살을 교환한 것은 전투 직전 간을 보는 맛보기에 불과하다. “───. ───. ───.” “───. ───. ───.” “───. ───. ───.” “───. ───. ───.” 내 생각이 옳다는 듯이, 이윽고 수백 명이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사방에 들어선 침묵을 깨뜨리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상황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였다. 2제대는 적들의 견제와 엄호에 집중해 바쁘게 화살을 쏘아댔고, 4제대는 쏟아지는 공격에 대비해 필사적으로 방어 마법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로, 3제대의 마법사들은 화려한 일격을 위해 주문에 집중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한데?' 비교적 안전한 후방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곤 해도, 한껏 예민해진 감각에는 자꾸만 이상한 것들이 걸리고 있었다. 그것은 성벽의 돌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들이었다. 최근 전투에서 연신 화력을 쏟아 부어서 그런지(아니면 저번에 용염 탓인지는 몰라도.), 바바라의 성벽은 척 봐도 헐거워 보였다. 그러나 평소라면 보강 작업을 해놓거나, 아니면 최소한 보호막이라도 걸어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의문을 느낄 새도 없이, 한순간 얼굴에 화끈거리는 기운이 느껴졌다. 마법사들은 하나 둘 서서히 주문을 완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비 시간 때 오고 간 이야기가 있는지, 3제대가 있는 허공에는 하나같이 시뻘건 불길을 토하는 불덩이들이 생성되고 있었다. 마치 끓어오르는 용암처럼, 불덩이들은 맹렬한 염화(炎火)를 토해내고 있었다. 휘날리는 바람에 불똥들이 떨어져 바닥을 때린다. 이윽고, 각양각색의 불꽃들은 서서히, 그리고 동시에 위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선율이 증폭 마법을 걸어주면, 저 수많은 불의 파도가 성벽에 거칠게 범람할 것이다. 그때였다. 우우웅! 짙은 빛이 돌던 마법 진 에서 일순 웅혼한 소리와 함께 시퍼런 마력의 빛이 크게 일어났다. “차단 진의 발현이 확인되었습니다!” (내부의 마력은 동결된다! 완전히 발동되기 전에, 지금 바로 총공격을 가하도록!)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역관광라이즈 1화. 마볼로 : (화정 너프 일인시위를 벌이고 있다가, 마침 메모라이즈 스튜디오에 가는 시몬을 발견한다.)어서 오게. 친구여. 시몬 : 네? 제가 왜 당신이 친구입니까? 마볼로 : 혹시, 자네 뭔가 무척 있어 보이는 등장을 한 적이 있는가? 시몬 : 그, 글쎄요. 그건 갑자기 왜…. 마볼로 : (어깨에 손을 짚으며.) 역시…. 우린 친구로군. 이놈의 작가는 변태거든. 시몬 :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다.) 저 이만 전쟁하러 가봐야 해서요. 많이 바빠서…. 그럼 이만.(저 멀리 사라져간다.) 마볼로 : (혀를 차며 하염없이 바라본다.) 쯧쯧…. 『 리리플 』 1. 데바란 : 1등 축하합니다. 4연속 1등이란, 정말 대단하십니다. 미월야 님 이래로 두 번째 5연속 1등이 나오는 걸까요? 하하하. 2. ㅇㅡㅅㅜ : No. 리리플은 최대한 올리고 있습니다. :) 3. hohokoya1 : 흑흑. 저도 연참하고 싶어요. 제가 스스로 제 손가락을 매우 치겠습니다! 찰싹찰싹! 4. 타락악마 : 어? 제가 이럴 때 자주 쓰는 말이 있죠. 예지력 상승! 5. araoj : 예. 유현아. 정답입니다. 최대한 부랑자들이 사용하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6. 감자띱 : 오. 다 맞추셨지만, 전자를 맞추시는 게 놀랍습니다. 허허허. 어떻게 아셨나요? 7. Lea : 외전은 1부가 끝나고 제법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내용으로다가요. 하하. 물론 휴식기는 가져야겠지요. 한 2주정도 생각하고 있는데 Lea 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8. 고룡의반란 : 뀨? 뀨뀨! 아 빨리 아기 유니콘에 알 품는 내용도 적어보고 싶네요. :) 9. 푸른산호숲 : 후후. 요점은 타이밍, 그리고 속도입니다. 이 부분은 제법 머리를 썼어요. 그리고 '정령'이 처음 홀 플레인에 등장하게 됩니다. 물론, 기본적인 정령의 개념과는 차별화되는 개념을 갖고 있지요. :) 10. 현오 : 헉. 현오 님은 자동차이셨나요? 새, 새로운 사실이군요!(퍽퍽!) @_@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365 / 0933 ---------------------------------------------- 단판 승부 한순간 눈부신 빛의 명멸(明滅)이 시야를 가득히 채웠다.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강렬한 빛 무리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는다. 이윽고 눈동자를 아릿하게 만드는 감각과 함께 눈을 뜨자, 눈앞에는 믿지 못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수호용 마력 차단 진'은 어느덧 발현을 멈춘 상태였다. 당장에라도 도시를 감쌀 듯 몸을 일으키던 남청 색 장막은, 마치 만들다 만 울타리처럼 발동 도중 성장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하여, 구멍 난 성벽의 틈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수십…. 아니. 어쩌면 수백에 이를지도 모르는 빛의 줄기가 허공을 그득히 메우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도처를 비추는 빛의 조명이 서서히 강도를 더해가기 시작한다. 단지 눈 한 번 감았다가 떴을 뿐인데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윽고 도처에 뿌려지는 빛의 조명이 점차 거세어지는걸 느꼈을 즈음, 성장을 멈춘 장막이 다시금 서서히 몸을 일으키려는 낌새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처 대응할 틈도 없는 창졸간,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꽈앙! 일순간, 고막을 뒤흔들 정도의 거대한 폭음이 솟아올랐다. 아주 잠시나마 귀가 멍해질 정도로 커다란 충격음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지금껏 굳건히 버텼던 바바라의 성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걸 볼 수 있었다. “피, 피해라!” 누군가 다급히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성벽이 일거에 무너지며 터져 나온 화려한 빛의 폭발에 고함은 곧바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이윽고 내가 마지막으로 본 상황은 이내 도시를 둥글게 감싸 올라가는 남청 색 장막과, 폭렬(爆裂)한 빛의 파도가 동부의 진영을 사정없이 휩쓸어오는 광경이었다. 번쩍! 와장창! 잠시 후. 보호막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였다. ……. …………. ……………………. 한순간 꺼졌던 시야가 부옇게나마 보이기 시작했을 때, 등에서 차가운 대지의 감각이 느껴졌다. 정신을 잃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너무나 거대했던 충격에 나도 모르게 쓰러졌던 모양이다. 뒷골을 잡아당기는 감각은 이대로 몸을 누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양손으로 땅을 짚고 애써 몸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차분한 심호흡으로 속을 가라앉히자 주변 상황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용자들 또한 쓰러져 끓는듯한 신음을 내고 있었다. 어느새 도처를 점령했던 빛 무리는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그러나 뭔가가 이상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몸에서 미미한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반사적으로 몸의 이곳 저곳을 만져보자, 거동엔 이상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설핏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노란빛을 띠는 마력이 신체의 일부에 붙어있는걸 볼 수 있었다. 마치 방전할 때 일어나는 현상처럼, 불빛을 튀기는 마력에선 굉장히 불안정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이건….' 우우웅! 그때였다. 아까 들은 기억이 있는 웅혼한 마력의 음파가 귓가를 웅웅 울리었다. 퍼뜩 고개를 들자 도시를 빈틈없이 감싸고 있는 거대한 보호막이 보였다. 그곳에도 노란색 전류가 흐르고 있었는데, 불안정한 마력의 흐름에 영향을 받았는지 장막의 빛이 점차 옅어져 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바닥에 그려진 마법 진을 응시한 순간, 나는 그러한 생각이 완전한 착각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수호용 마력 차단 진'은 더 이상 마력을 띤 상태가 아니었다. 처음 바바라에 왔을 때처럼 빛이 바래어져 있었다. 이 말인즉슨 발동된 마법 진을 유지하는 장치를 의도적으로 파훼(破毁)했다는 소리였다. 기껏 발동한 마법 진을 왜 다시 꺼트리려는 걸까? 어떠한 목적이 있는지는 몰라도, 아직 숨겨진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느 틈에 반투명하게 변한 장막은 흡사 허공으로 녹아 드는 것처럼 슬슬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비로소 드러난 내부의 광경이 모습을 보였다. 서문의 성벽은 완전히 무너져 내린 상태였고, 훤히 보이는 대지로는 부서진 벽돌의 잔해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그러나 부서진 성벽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적은 동부에게 일말의 틈도 줄 생각이 없는지, 곧바로 다음 수를 꺼내었다. 문득 흐릿하게 끼어 부근을 감돌던 안개가 어딘가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는 착각이 느껴졌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콰아아아! 잠시 후. 뭔가 솟구쳐 오르는 굉음과 함께, 눈앞에 보이는 도시 내부의 전경의 중앙에서 사나운 물결이 세로로 치솟았다. 그것은 가히 수십 미터에 이를 정도로 높은 크기를 가지고 있어, 마치 폭포를 눈앞에 둔 기분이었다. 이윽고 삽시간에, 폭포는 하나의 맹렬한 파도가 되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 다가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주변은 물론이고, 파도는 의도치 않은 바리케이드 역할을 한 벽돌 더미도 깡그리 해치우며 거칠게 달려온다. 그러더니 한 지점에서 우뚝 멈춘 파도는 이내 순식간에 하강하여, 동부 사용자들이 모여있는 지점을 세차게 강타했다. 꽝! 이게 과연 물과 대지가 부딪치는 소리일까? 그러나 의문을 채 곱씹을 새도 없이, 나는 몸이 급격히 뒤로 쏠리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그렇게 빛의 파도에 이은 물의 파도는, 다시금 매몰차게 동부의 진영을 휘몰아 쓸었다. * 한순간 전신을 강타당한 탓인지 이번엔 고막에서 윙윙대는 소리가 울렸다. 눈은 일부러 뜨고 있었지만 시야에는 너울대는 하늘만 보일 뿐이다. 그저 감각으로 파도에 휩쓸려 압력에 뒤로 밀렸구나 인지할 뿐이었다. 이후 거칠었던 한 번의 웨이브가 지나가고 나는 폐 속에 담은 산소를 폭발하듯 내뿜었다. “푸.” 내뱉는 소리와 함께 튀어 오른 물방울들이 얼굴에 다시 떨어진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거슬려 나는 거세게 머리를 털었다. 문득 비릿한 물 냄새가 물씬 코를 찔러 들었다. 빛의 파도를 맞았을 때부터 파괴된 동부의 진형은, 이제는 진을 구축했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물이 흘러 질척해진 대지로 사방팔방 널브러진 사용자들이 보인다. 개중에는 바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극히 소수였다. 대부분 연이은 파도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한 것도 오랜만인데.' 그러나 심안의 영향인지 내 정신은 혼란스럽다기보다는, 지극히 차갑고 또한 고요했다. 파도의 영향으로 성벽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진 상태였다. 비록 불의의 일격을 두어 번 맞았다고는 하지만 혼란에 빠지기보다는 상황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일단 몸은 멀쩡했다. 그리고 이것은 나로서도 의문이었다. 빛의 파도의 정체는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마탄'이었다. 수백 개가 일거에 터져 파도라는 착시 현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물의 파도는 제대로 직격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이상 효과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아까부터 느껴지던 마력의 불안정한 흐름이 점차 안정되어가는 게 느껴졌다. 이어지는 의문에 곧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하자, 나는 방금 전 덮친 파도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정령 마법(Elemental Magic) : 정화의 해일(The Tsunami Of Purification)』 '정화의 해일…?' 그 순간 빛살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하나의 생각에 나는 번쩍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복잡하게 퍼져있던 머릿속의 퍼즐이 이내 차분히 정리되기 시작한다. 이윽고 재빠르게 주변을 훑자 이내 내 추측이 맞는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어느덧 신체에 붙어있던 '마탄'의 흔적은 깔끔히 사라진 상태였다. “하하….” 문득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이런 생각을 해낸 상대에 속으로 감탄이 일었다. '마탄'이란 간단히 말해서 마력의 흐름에 영향을 끼치는 일종의 마법 도구이다. 마력의 흐름이 극히 불안정해져, 원거리 통신 등 원(元) 흐름의 영향을 많이 받는 마법이 제한되는 특성이 있다. 그러나 수백 발을 한꺼번에 터뜨렸을 경우, 얘기는 달라진다. 중첩되고 중첩되어, 사용자들이 직접적으로 유도하는 마력의 흐름에도 간섭할 수 있을 정도로 필드 효과가 강력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번에 적들이 보인 작전은 타이밍과 연계기의 결정체였다. 이정도 규모로 '마탄'을 터뜨렸다면, 필드 효과는 양날의 검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적은 자신들 쪽으로 겨누어진 날을, '수호용 마력 차단 진'으로 방어했다. 한 마디로 '마탄'의 효과가 일어나기 직전의 시점에 정확히 맞추어, 마법 진을 완벽하게 일으킨 것이다. 이건 나보고 해보라고 해도 자신할 수 없는, 소름 끼칠 정도의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정화의 해일은 아마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첫 번째는 동부의 진영을 완전히 흩트려놓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현재 주변에 일어난 필드 효과를 스스로 정화하는 것. 이미 동부의 사용자들은 마법을 발현하기 직전 '마탄'에 맞았고 그에 따라 내부가 크게 헝클어졌을 것이다. 비록 지금 정화의 해일에 맞았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필드 효과를 없애줄 뿐이다. 물론 개인차야 있겠지만, 이미 간섭된 마력은 당장 회복되는 게 아니라 천천히 시간을 두고 회복된다. 즉 현재 서문 부대의 진형은 산산조각이 났고, 마법사와 사제들은 마력의 사용을 제한 받는다. 한 마디로 전투에 돌입한 이후 가장 약해진 시점이었다. 그리고 적들이 노린 것은, 바로 이순간일 것이다. 놈들이 일말의 틈도 주지 않고 쉴 새 없이 몰아친 이유는, 바로 지금의 '때'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와아아아아아아아! 그런 내 생각에 화답이라도 해주듯이, 이윽고 전방에서 커다란 함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수한 사용자들이 일거에 뛰쳐나오는지 대지에 고인 물은 미약한 파문이 인다. 크아아아아아아앙! 스스스스스스스스…. 그러나 적들의 함성에 이어지는, 평야를 으르렁 울리는 괴성과, 땅을 적시는 물들이 다시 빠르게 휘돌기 시작한 광경은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성벽 부근으로 10미터에 다다르는 신장을 보이는 괴물이 출현한 게 보였다. 손에는 거대한 몽둥이를 쥐고 있고, 몸에는 황금빛이 감도는 인간의 형상을 한 거인이었다. 『거인들의 (전대)제왕 : 쿠샨 토르(현재 길들여진 상태입니다.)』 '반신?' 거인들의 제왕. 다른 말로는 자이언트 로드. 이제는 헛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이윽고 거인을 선두로 한 적들이 떼지어 밀려오기 시작했다. 고인 물이 하나씩 하나씩 형상을 갖추기 시작한다. 적들의 수장은 어설프게 워프 게이트와 차단 진을 연계해 각개격파를 당하느니, 한 곳으로 힘을 모아 스스로 활로를 개척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런 만큼 이번 전투에 사활을 걸을 셈인지, 자신들의 역량과 비장의 수를 총동원한 모양이다. 그에 비해 서문 부대의 사용자들은 비척비척 간신히 몸을 일으키곤 있었지만, 여전히 혼란에 빠진듯한 상황이었다. 잠시 동안 전방을 응시하다가 나는 거인에게 눈을 맞췄다. 계속 주시하며 화정을 한 번 돌리자, 몸 속에 남아있던 불안정한 잔재가 말끔히 불타 사그라졌다. 곧이어 몸에 활력이 샘솟는 것을 느끼며 나는 차분히 허리춤에 걸린 검을 쥐었다. 그와 동시에, 있는 힘껏 마력을 밀어 넣는다. 키아아아아아아아!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마검 칼리고 아브락사스(Caligo Abraxas)의 봉인이 풀렸습니다. 변화가 시작됩니다.』 이윽고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가공할 어둠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거인은 어느덧 거리를 절반이나 줄인 상태였다. 아마 지금쯤 다른 도시에 있던 인원들도 전부 바바라로 복귀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서는 수적 우위는 없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우리도 크게 불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서문 부대의 사용자들이 얼른 정신을 차려 시간을 끄는 동안, 다른 부대의 지원이 오기를 기다리면 된다. 그러니, 결국 필요한 건 시간이었다. 문득 나는 앞으로 나가려던 걸음을 잠깐 멈추었다. 쿠샨 토르. 내가 알고 있는 거인들의 제왕과는 다르지만, 엄연한 반신과의 대결이었다. 한순간 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지만, 곧 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나는 곧바로 땅을 박차 올랐다. ============================ 작품 후기 ============================ (오늘 리리플은 쉽니다. 다음 회에 합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해요.) 음. 독자분들. 오늘은 죄송한 말씀을 하나 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10월 7일(월요일)부터 10월 18일(금요일) 동안 연재 주기에 변화를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유인즉슨 바로 과제와 중간고사 때문입니다. 제가 1학기 때 신청한 학점이 지금만큼은 아니어서, 그때는 그래도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2학기에 들어서 학점을 가득 신청하고, 더불어 강의 난이도도 많이 올라간 편이라 이번에는 조금 위기감이 느껴지네요. 더불어 쏟아지는 과제도 처리해야 할 것 같고요. 몇몇 분들은 아시다시피, 부모님께서 제가 조아라 노블레스에 연재를 하는걸 알고 계십니다. 생활패턴이 항상 '학교 - 글'이라 걱정도 꽤 하시는 편이고요. 1학기 때는 다행히 학점이 괜찮게 나와서 잘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번 2학기에도 성과를 보여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시험은 10월 14일(월요일)에 시작해 10월 18일(금요일)에 끝납니다. 그리고 준비는 10월 7일(월요일)부터 할 생각이고요. 그래서 당분간 일일 연재가 아닌 격일 연재로 들어갈 생각입니다. 일단 이번 주는 10월 7일(월요일 : 이건 오늘 올렸지요.), 10월 9일(수요일), 10월 11일(금요일) 자정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10월 13일(일요일)은 시험 전날이니 공부에 집중하고, 시험 시작인 10월 14일(월요일)부터는 제가 한 번 상황을 보고, 시험이 끝나는 10월 18일(금요일)까지 어떻게 연재할지 다시 공지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독자분들의 양해 부탁합니다. _(__)_ 0366 / 0933 ---------------------------------------------- 미안해. 형. 적들은 물에 젖은 벌판을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그들이 한꺼번에 달려 나오는 기세는, 꼭 한순간 터져 나오는 물살과도 같았다. 적들의 수는 약 15.000명. 엄청난 인원이 일제히 대지를 내달려서 그런지, 지축을 박찰 때마다 몸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벌판을 울리는 거센 함성은 청각을 멍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런 적들의 선두에는 거인들의 제왕 '쿠샨 토르(Kushan Thor)'가 있었다. 오른손에 거대한 몽둥이를 쥔 채 성큼성큼 달려온다. 키가 10미터에 이르는 탓에, 놈이 한 번 발을 내디딜 때마다 남은 거리는 뭉텅뭉텅 좁혀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거인과 적들의 거리도 그만큼 큰 차이로 벌어지고 있었다. 아마 소환수인 거인을 앞세워, 동부가 정신을 차리기 전 한바탕 크게 어지럽힐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서로 마주보며 동시에 거리를 줄였기에, 어느덧 나와 '쿠샨 토르'의 거리는 지척만 남게 되었다. 가까워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비로소 거인은 나를 인지한듯했다. 놈이 한 차례 커다란 괴성을 지르더니 이내 몽둥이를 번쩍 치켜들었기 때문이다. 키야아아아아아아! 나는 울부짖는 칼리고 아브락사스(Caligo Abraxas)를 들어 양손으로 으스러져라 거머쥐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대지를 박차 거인의 정면으로 돌진했다. 이윽고, 나와 놈이 서로의 사정거리에 진입한 순간이었다. 쿵! 아주 짧은 순간. 거인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는가 싶더니, 내디딘 오른발이 질척한 대지를 크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때, 머리카락이 나부낄 정도로 세찬 바람이 덮쳐 들었다. 이내 정수리를 쿡쿡 쑤셔 드는 압박에 얼른 고개를 들자, 대지를 쪼갤 듯이 내려 찍히는 커다란 몽둥이를 볼 수 있었다. '온다.' 여러 생각을 할 겨를은 없다. 그저 하강하는 몽둥이에 대응해, 나 또한 있는 힘을 다해 검을 쳐올린다. 그러자 뭉클뭉클한 기운을 내뿜는 어두운 잔상이 가느다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고, 기세 좋게 낙하한 몽둥이가 머리를 때리기 직전이었다. 번쩍! 폭발하듯 터져 나온 빛과 함께, 칼리고 아브락사스와 거인의 몽둥이가 격돌했다. 꽝! 귓가를 후려갈길 정도의 엄청난 폭발음. 그리고 이 찰나의 순간, 눈앞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 다행히 시력은 곧장 회복되었지만, 이어서 찾아 든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에 나도 모르게 미약한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그리고 이 순간, 들판에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까부터 들리던 지축을 울리던 발소리도, 흉흉한 살의를 담은 함성도 거짓말처럼 뚝 끊겨버렸다. 이윽고 손목을 저릿하게 울리던 떨림이 사라졌을 때, 나는 비로소 결과를 볼 수 있었다. 검과 몽둥이는 여전히 격돌한 상태 그대로 붙어있었다. 하지만 충돌 지점인 몽둥이의 상단 부에 커다란 구멍이 파여있었다. 그리고 새로 생겨난 둥그런 구멍을, 반으로 자르고 들어간 칼리고 아브락사스가 보인다. 끄으으으…. 문득 바로 앞에서 목이 끓는 소리가 들리었다. 별안간 몽둥이가 수직 방향으로 힘없이 떨구어진다. 흘끗 앞을 쳐다보자 입을 헤 벌린 채 한 걸음 두 걸음 뒷걸음질을 치는 거인이 보였다. 쿵! 그러더니, 이내 왼쪽 무릎을 꿇는 것과 함께 한 차례 미약한 울림이 일었다. 근력. 마력. 그리고 칼리고 아브락사스. 나는 이 세 개의 힘과 더불어, 내게 가해진 타격도 합쳐서 되돌려주었다. 물론 모두 되돌린 것은 아니었다.(정확히는 못했다.) 그러나 나에게 들어온 충격은 이미 상당부분 감쇄된 상태라 그럭저럭 견딜만한 수준이었다. 아무튼 되돌아온 충격을 이기지 못했는지, 거인은 순간적으로 정신 줄을 놓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기회다!' 눈을 희번덕거리는 거인을 보자마자 나는 지체 않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호락호락 당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는지, 놈은 얼른 몽둥이를 곧추세우곤 횡 방향으로 크게 쓸어 내렸다. 하지만 오로쓰로스 부츠를 신은 이상, 나는 민첩과 도약력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용자였다. 나는 힘차게 발을 구르곤, 젖 먹던 힘을 다하여 높게 몸을 날렸다. 그러자 발 아래로 칼날 같은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제 3의 눈은 '쿠샨 토르'를 전대 제왕이라고 말해주었다. 거기에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나는 이제 눈앞의 거인이 '반신(Demi - God)'이 아니란 걸 확신한다. 왜냐하면 반신의 고유 권능인 '신력'과 '완전한 마법 저항'의 흔적을 손톱만큼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쿠샨 토르'는 단순히 힘센 괴물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놈은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보다도 훨씬 아랫선에 있는 놈이었다. 그렇게 이제 끝이라는 생각과 함께, 공중으로 떠오른 몸이 배 부분을 지나칠 즈음이었다. 그때 거인의 금색 몸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더니 일순 마력 방전 현상이 일어났다. 그것은 곧 줄기찬 네 개의 가닥이 되어 나를 거세게 강타했다. 마력의 줄기는 꽤 커다란 뇌성을 내었지만, 안타깝게도 내 마법 저항을 뚫을 수준은 아니었다. 파츳! 파츠츳! '쿠샨 토르'는 나름 회심의 일격이라고 생각했었는지, 짜르르 녹아 내리는 마력을 멍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놈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순간, 나는 공중에 뜬 상태에서 그대로 칼리고 아브락사스를 내리그었다. 푸슉! 그러자 여지없이 두꺼운 가죽을 자르는 손맛이 느껴졌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내부에 꽂힌 검을 통하여 다시 한 번 폭발적인 마력을 투사했다. 꿍! 꿍! 꾸어어엉! 이윽고 너른 배에 울룩불룩한 고저가 생기는 것과 동시에 거인은 고통에 찬 비명이 들린다. 놈은 몸을 크게 휘청거리면서도 몽둥이를 서너 번 휘둘렀다. 그러나 첫 일격에서 느꼈던 예기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마구잡이로 내두르는 공격이었다. 나는 이형환위(移形換位)로 궤도에서 벗어나 순식간에 사각을 점거했다. 그리고 바로 허공을 차올라 추가타를 먹이려는 순간이었다. 슈슈슉! 슈슈슈슉! 그때, 갑작스레 허공을 찢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급히 고개를 돌리자 수십 발의 화살이 나를 노리고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확실한 일격을 먹이려는 생각에 옆으로 돌아갔는데, 그 탓에 적들의 시야에 잡힌 모양이다. “큭!” 나는 비어있는 공간으로 재빠르게 공중제비를 돌아 아슬아슬하게 화살 세례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격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대로 지상에 착지하고 말았다. 그리고 내려오자마자 재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방금 전의 화살 세례는, 잠깐 멈췄던 적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시간이 별로 없다. 침착히 고개를 들자 어느덧 거인의 몸으로 짙푸른 막이 형성된 것을 볼 수 있었다. 푸른 막은 놈의 상처를 집중적으로 감싼 형태였는데, 물처럼 스며들어 반짝거리는 빛을 내고 있었다. 그러더니 거인의 상처가 점차 아물기 시작한다. 이윽고 똑바로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엔 흉포한 기운이 되돌아와 있었다. 한순간 화정을 사용할까도 생각해보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번처럼 통제할 수 없는 각성과 비슷한 현상이라도 일어난다면, 그 이후의 일은 생각만해도 끔찍했기 때문이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사용하겠지만, '쿠샨 토르'는 화정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끝장낼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도 너무나 아까웠다. 찰나의 순간 수많은 고민이 들었지만, 나는 무리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기회를 살리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나서 바로 돌격하려는 찰나였다. 꾸르릉! 우레가 울리어는 소리가, 대지를 냅다 차려는 내 발길을 붙잡았다. '이건…?' 그러나 미처 생각이 이어지기도 전. 짜작! 짜자작!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열 줄기 뇌전이 거인의 가슴을 강타한다.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려친 지점은 정확히 내가 상처를 낸 부분이었고, 그 결과 아물어가던 가슴은 도로 크게 찢어지는걸 볼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상처를 치료해주던 물은, 뇌전이 닿자마자 감전을 더욱 용이하게 만들어주는 촉매로 돌변한 상태였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내부는 만신창이가 됐을 터. 갈라진 틈 사이로 진한 갈색의 물이 후드득 흘러내리고, 피가 고인 바닥에는 정체 모를 찌꺼기도 섞여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뇌전의 정체를 맞추는 것보다는, 오직 반사적으로 몸이 튀어나가 버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무리해야 만들 수 있었던 기회가, 다시 더 없는 확실한 기회로 변해 내 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꾸어어어어어어엉! '쿠샨 토르'는 그 와중에도 내가 달려드는걸 확인하고는 기어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그리고 몸을 기우뚱 앞으로 기울면서도. 그러면서도 무기만큼은 끝끝내 놓치지 않는 것을 보니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지에 거무스름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몽둥이와 함께 몸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보아, 제 딴에는 최후의 발악을 해보려는 것 같았지만, '쿠샨 토르'는 이제 상처 입은 짐승에 불과하다. 나는 몽둥이가 떨어지는 궤적을 쫓아 일부러 그쪽으로 이동했다. 목표 지점에 이동하고 나서는 양손으로 검을 쥐어 마력을 힘껏 불어넣었다. 칼리고 아브락사스는 내 마력에 반응해 한층 더 크게 울부짖었다. 그리고 난, 홈런을 날리는 타자처럼 하강하는 몽둥이를 있는 힘껏 후려쳤다. 뻥! 거대한 충격음과 동시에 손에 묵직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쳐올린 힘의 흐름에 그대로 몸을 맡기었고, 이내 한 번 더 회전하여 재차 검을 후려갈겼다. 싹둑. 그 순간 뭔가가 잘려나가는 느낌이 확실히 전해져 들어온다. 절반 정도는 산산이 부서진,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깔끔하게 잘린 몽둥이가 허공을 날고 있었다. 이제 '쿠샨 토르'는 완전한 무방비 상태가 된 것이다. 나는 설핏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몽둥이를 놓친 탓인지, 정면에서 서서히 무너지던 거인의 몸은 이제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어져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나는 재빠르게 거리를 계산했다. 이형환위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생각보다 길지 않다. 그렇기에 놈이 더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약 2미터 정도 남았다 싶을 즈음, 나는 땅을 박참과 동시에 능력을 발동했다. 그러자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삽시간에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지축을 떨치는 소음에 흘끗 아래를 내려다보자, 대지에 몸을 처박은 거인이 보였다. 놈은 지금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끝이다.' 그대로 떨어지듯 머리에 착지한 후, 나는 뒤통수 깊숙이 검을 박아 넣었다. 낙하하는 힘을 더해서 그런지 부담 없이 쑥 박혀 들어간다. 그리고 난, 지체 않고 마력 폭발을 일으켰다. 그러자 거대한 폭음이 솟아오르고, 이내 디딘 거인의 몸에서 크게 경련하는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이윽고 '쿠샨 토르'의 몸에 감돌던 금색의 빛이 바래어진 순간, 나는 지체 않고 있는 힘껏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비록 생각보다 짧았던 몇 분간의 공방이었다고 해도, 이제는 적들이 서서히 몰려올 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젠 거인도 쓰러졌으니, 나는 적들의 시야에 훤히 노출된 상태였다. 계속해서 후방으로 몸을 날린다. 그러다 잠시 방향이라도 가늠할 생각에, 공중에서 가벼운 선회를 거쳐 바닥에 착지한 순간이었다. “수현아.” 문득. “수현아!” 형의 목소리와 함께, 내 양 어깨를 맞잡는 따뜻한 손길이 느껴진다.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놀라진 않았다. 실은 아까 거인의 가슴을 내려친 뇌전을 봤을 때부터, 형이 이곳으로 오고 있으리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담담히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물에 젖은 모습을 한 형이 보였다. 푹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어있었지만, 틈새로 보이는 눈은 지긋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형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수현아…. 너 지금 도대체…?” 부글부글! 부글부글! 그러나 일순간, 주변에서 심상찮은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형은 곧바로 입을 다물더니 주위로 날카로운 시선을 뿌리었다. 심상찮은 기운의 정체는 바로 '물'이었다. 피부로부터 싸늘한 기운이 스쳐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무심코 고개를 숙이자, 나는 뜻밖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온몸에 묻어있던 물이, 마치 흡착기에 빨리는 것처럼 엄청난 속도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형도 마찬가지였고, 평원에 괴어있던 물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은 멀리 가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곳으로' 속속히 모여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모인 물들은, 사방에서 융합해 부피를 불리는 중이었다. 후르르르르르르르! 이윽고 아무것도 없던 들판에, 수십…. 아니. 어쩌면 수백에 이를지도 모르는, 액체로 이루어진 푸른색 형상이 일어나 넘실넘실 물결치기 시작한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파도가 굽이쳐 움직이는듯한 광경은, 가히 압권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웅장했고, 아름다웠다. 라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라…. “이건…. 아니, 아니다. 일단 얘기는 나중에 하고, 지금은 얼른 빠져나가는 게 좋겠다.” 이윽고 '정화의 군단(The Legion Of Purification)'이 부르는 찬란한 노랫가락이 들리는 순간, 형이 다급히 내 팔을 잡아 끌었다. 물론 그 의견에는 십분 동의한다. 그러나 이미 소환의 막바지에 이른 정령들은 우리의 전후좌우를 점거한 상태였다. 그와 더불어, 전방에서 달려오는 적들의 함성도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그때였다. 일단 어떻게든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스아아아아아아아…. 저기 멀리서부터 천천히 모든 것을 삼켜가는 듯한, 뭉클뭉클 기분 나쁜 공기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어서, 익숙한 울음소리가 미약하게나마 귓가를 파고들었다. 정령들의 찬란한 미성(美聲)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느껴지는, 어스름한 악성이었다. 그래. 이 소리는 꼭…. 끼아아아아아…. 끼아아아아아…. 끼아아아아아…. 지하 깊숙한 곳 구렁텅이에서. 끼에에에에에에에! 심연의 마수들이 부르짖는, 어두운 절규처럼 들렸다. ============================ 작품 후기 ============================ 수요일 자정 업데이트 완료했습니다. :) 역시 공부를 하니까 좋네요. 저번 주는 까닭 없이 마음이 불안했는데, 공부를 시작하니까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집니다. 하하. 음…. 그래도 매일 올리던 글을 올리지 않으니까, 이상하게 허전한 마음도 들더라고요. 하루 지났는데 괜히 독자분들이 보고 싶고요. ㅜ.ㅠ 저만 이런가요? :D 하하하. 아무튼 좋은 말씀들 많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결과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럼 금요일 자정에 뵈어요! PS. 리리플은 시험 끝날 때까지 봉인하도록 하겠습니다. 양해 부탁해요! 0367 / 0933 ---------------------------------------------- 미안해. 형. 근처로 흉포한 기운을 품은 아지랑이가 밀물처럼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에 또렷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뭉글뭉글하면서도 불쾌한 기분이 느껴지고 있었다. “김수혀어어어어언!” 그때, 내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음성이 들리었다. 그리고 나와 형을 에워싼 진형의 일부가 와해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달려온 방향 쪽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마치 모세의 기적이 재림한 것처럼, 빈틈없이 흐르던 물결이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수현아!” 그리고 나와 형은, 갈라진 틈 사이를 지체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빠르게 달리면서도 난 주변을 살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덧 소환이 완료됐는지, 물의 정령들은 완전한 형상을 갖춘 상태였다. 키는 약 1미터 50센티미터 정도가 될까. 온몸에 물이 흐르는 정령들은 전부 삼지창을 쥔 여인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물빛 머리카락 사이로 뾰족한 귀가 솟은 게, 상반신은 여지없는 요정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아래 하반신은 물고기 꼬리가 달려있었는데, 전신으로 신비로운 빛이 흘러 인어와 비슷한 자태를 보였다. 그렇게 얼마 있다가, 정령들은 하나같이 엄숙한 낯빛으로 몸을 돌렸고 이내 한 쪽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눈가에는 은은한 분노까지 어려있는 게, 굉장히 화가 난듯한 모습으로 느껴졌다. 그때였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정신 없이 달리고 있는 동안, 이윽고 눈앞으로 정령들을 분노케 한 것들의 정체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넉넉히 수백에 이르는 것으로 보이는 그것들은, 섬뜩한 빛을 번들거리는 핼버트(Halbert)를 든 채 서서히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들을…. 도대체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몸과 팔은 인간의 그것이었지만, 얼굴과 하반신은 염소의 형상을 한 반신반수(半人半獸)의 모습이었다. 탁한 빛을 띤 2개의 뿔이 머리에 우뚝 솟아 있었고, 검붉은 색이 감도는 중 갑옷을 전신에 착용한 상태였다. 진한 붉은색 안광을 흘리며 다가오는 모습은 가히 '마수'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지금 구해줄게!” 그리고 오와 열을 맞춘 채 걸어오는 그들 사이로,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가 왕왕 울리었다. 비비앙이 때맞춰 나와 형을 구원하러 온 것이다. “모습을 보여라! 사티로스(Satyr, Satyrus)!” 그 순간이었다. 한순간 주변으로 시커먼 안개가 서리는가 싶더니, 이내 6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반신반수가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마수들보다 몸집이 3배는 커 보이는 게, 아마 이놈이 눈앞 군단을 이끄는 군단장인 듯싶었다. “쓸어버려!” 끼에에에에에에에! 비비앙이 가혹한 명령이 떨어졌다. 염소 마수들은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일순 그들의 눈가에 시뻘건 빛이 폭사되듯 뿜어져 나오더니, 마치 살의에 차오른 짐승처럼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라라라라라라…. 그러자, 물의 정령들도 지지 않고 노래를 합창하며 물빛이 번쩍이는 삼지창을 치켜든다. 이윽고 물과 어둠이 뒤엉키는 것을 시작으로, 정령과 마수의 전투가 개시되었다. 그렇게 정령들이 마수들을 상대하는 사이, 나와 형은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간신히 비비앙이 있는 곳으로 도착하자, 물에 흠뻑 젖은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늦지는 않았네?” 비비앙 또한 나를 확인했는지 한 손을 흔들며 상큼한 미소를 보내었다. 전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내 눈에는 까닭 없이 아름답게 비쳐 보인다. “이 마수들은…. 군단을 소환한 건가?” “응. 제 9군단. 처형의 사티로스. 여자들만 보면 환장하는 놈들이니 좋은 상대가 되어줄 거야.”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까지 나와 형이 있던 장소는, 이제 더 없는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내가 시선을 돌린 곳에는, 한 마리 마수가 커다란 괴성을 지르며 핼버트를 휘두르는 중이었다. 이윽고 핼버트는 정령의 목을 거세게 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정령은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분리됐던 목에서 액체가 쭈르륵 흘러나오고, 약간 떨어졌던 상체와 다시 이어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마수는 얼른 다시 핼버트를 꼬나 쥐었지만, 이번에는 정령의 움직임이 한 발 더 빨랐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일순 길게 늘어나는가 싶더니 이내 마수의 양손을 칭칭 휘감은 것이다. 그러더니 옴짝달싹 못하게 된 마수의 가슴에, 물빛 삼지창이 깊숙이 꽂힌다. 마수는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자 소리를 들은 주변 동료들이 얼른 다가왔고, 들고 있던 핼버트로 일제 공격을 퍼부었다. 여럿이 후려갈기는 데는 도리가 없는지 물의 정령은 삽시간에 잔 물방울로 으깨어졌다. 그러나, 정령들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이윽고 앞에서부터 쏘아져 들어온, 열 줄기는 족히 넘는 물빛 광선이 모여든 마수들을 곧바로 치었다. 워터 커터(Water Cutter)처럼 날카로운 면을 가지고 있는지, 광선에 닿은 마수들은 삽시간에 신체가 갈기갈기 찢겨 검은 연기로 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방금 교전에 돌입했을 터인데, 전투는 시작부터 격렬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의 전황은, 거의 백중세에 가까웠다. 아니 놀랍게도 조금씩이나마 마수 군단이 우세를 점해가는 중이었다. 냉정히 말해서. 개인의 능력은 마수보단 정령이 우위를 보이고 있었다. 힘만 앞세워 무모하게 돌격하는 마수들에 비해, 정령들은 근거리 원거리를 가리지 않았고, 훨씬 다양한 능력을 선보이며 전투에 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투를 우세하게 이끌어가는 것은, 바로 마수 군단에 '사티로스'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꽝! 몸집의 배는 될법한 핼버트가 땅에 내리 꽂힐 때마다, 수 명의 정령들이 물보라로 화해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사티로스'는 말 그대로 미쳐 날뛰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것에 힘입어, 마수들 또한 한치의 물러섬 없이 정령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물론 저쪽에서도 '정령 왕'이 출현하면 전황은 반전될 것이다. 그러나 앞서 보였던 수에서 여력을 다했는지, 정령 왕이 출현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비비앙씨. 지금 이 군단을 남겨놓고 뒤로 물러날 수 있습니까?” “응? 야. 당연…. 아, 아니. 네! 가능해요. 원래 범위를 벗어날수록 통제가 힘들어지지만, 이것을 얻은 이후론 사정거리가 크게 늘어났거든. 요.” 문들 들리는 대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비비앙이 질서의 오르도를 번쩍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형은 불행 중 다행이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통제…? 사정거리…?' “아.” 그것은, 정말로 한순간이었다. 비비앙의 말을 들은 순간, 거인부터 이어진 여러 생각들이 머리를 빛살처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머릿속을 떠돌던 여러 조각들은 순식간에 퍼즐을 맞추었고, 이내 하나의 계획을 수립했다. “군단은 괜찮아요. 지금 마력은 조금밖에 남지 않았지만, 오르도를 이용하면 한 번 완전히 재충전할 수 있거든? 요?” “다행이군요. 적들의 함성 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일단 군단은 이곳에 남겨두고, 우리는 얼른 뒤로 빠지도록 하죠. 수현아?” “…….” “수현아? 수현아!” 와아아아아아아아! 한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지금껏 계속해서 뒤로 달려 거리를 벌려왔다. 그러나 형의 말대로, 적들의 함성 소리는 점점 크기를 키워가고 있었다. 이곳에서 약간 지체한 바람에, 적들이 다시금 지척까지 다가온 것이다. “형.” 그리고 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 나는 반사적으로 형을 불렀다. 이윽고 나는 느릿하게 둘을 돌아보았다. 형의 숨소리는 한껏 거칠어져 있었고, 비비앙은 전장과 나를 번갈아 보며 다급한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형이랑 비비앙 먼저 돌아가.” “…뭐?” “해야 할 일이 있어.” “너 지금 뭐라고….” “둘이 먼저 돌아가라고!” 팍! 그 순간, 나는 상체가 크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먼저 돌아가라는 말을 내뱉자마자, 형이 오른손을 뻗어 내 어깨를 거칠게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너…. 지금 뭐라고 말했어…?” 형의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설명이 필요할 듯싶었다. 나는 신속히 말을 이었다. * 상황에 쫓겨 최대한 간략히 설명하기도 했거니와, 사실상 그렇게 복잡한 계획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말은 금방 끝낼 수 있었다. “수현아? 지금…. 뭐라고? 뭐라고 했어? 정령술사를 암살하겠다고?” “말한 대로야.” “…너 지금 미쳤어?” 그러자, 형은 처음으로 나에게 “미쳤냐.”는 욕설을 꺼내었다. 나는 잠깐 입술을 짓씹었다가, 이내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미치지 않았어.” “무…. 너…. 지금….” 어지간히도 어이가 없는지. 아니 그것을 넘어서 분노를 느끼는지. 부들부들 떨리는 형의 음색은, 묘한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애초에 전달 내용을 굉장히 요약했고, 최대한 빠르게 말하느라 두서가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런 반응이 나온다는 것은, 내 계획을 확실히 알아들었다는 방증이었다. 나는 이번엔 비비앙을 응시했다. “비비앙. 너도 명심해. 아까 내가 한 말 꼭 기억….” “웃기지마!” 혹시 몰라 비비앙에게도 재차 다짐을 받아두려는 찰나였다. 형으로서는 드물게 내게 고함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잡힌 왼쪽 어깨에서 아주 미약한 아픔이 밀려왔다. “지금 장난해? 기껏 데리러 왔더니…. 뭐? 앞으로 또 들어가겠다고?” “말했잖아. 형….” “뭔 말인지는 알아! 그래도…! 설령 그렇다고 해도!” 형이 외치는 소리를 듣자, 한순간 마음이 아릿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가슴을 바늘로 쿡 찔린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난 아무런 내색도 비치치 않았다. 그저, 잠자코 형을 응시했다. “지금 여기가 네 놀이터로 보여? 네가 무슨 영웅이야? 그걸 왜 해? 왜 들어가? 아니. 왜 네가 해야 되는 건데? 지금 변수 대비 조원이라고 이러는 거야?” “그게 아니야 형. 지금 상황에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어.” “하. 아 그래? 그랬구나. 그래. 꼭, 필요한 일이니까. 그러니까 나보고, 지금 사지로 스스로 걸어가려는 동생을 그냥 두고 나 혼자 빠지라고? 나보고 이대로 가만히 구경만 하라고?” 꽈악! 이제 형의 목소리는, 평소의 낮은 음색이 아닌 흡사 짐승이 으르렁대는듯한 음성이었다. 으스러뜨리려는 듯이 내 어깨를 쥐고 있다. 그것은, 마치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느낌이었다. 두두두두두두두두! 이제는 함성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발걸음 소리들이 생생히 들리었다. 그리고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이젠 가까워진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까지 다가왔을 거라고. 난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뒤따라오면 큰일이기에, 한 번 더 설득할 필요성을 느꼈다. “형. 잘 들어. 지금 이 전쟁터는 패배가 기정사실로 됐어. 적들은 발 빠르게 다가오고 있고, 우리는 아직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있다고. 지원부대? 통신이 끊겼잖아. 상황 파악하고, 정비 마치고 온다고 해도…. 아무리 빨라야 20분. 아니, 더 걸리는 게 사실이겠지. 지금 당장은 이기기는커녕 살아남는 게 중요하잖아. 안 그래?” “그래. 살아남는 게 중요하지. 그걸 알고 있는 놈이 지금 이래?” “내 말뜻이 그게 아니란 건 알잖아.” “그러다 네가 죽는단 말이다 이 바보 같은 놈아!” 더 이상 형이 내지르는 고함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결국 눈을 꼭 감고 말았다. 하지만 말은 멈추지 않는다. 나는 전보다 더욱 높은 목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 “그래서 형한테 부탁한 거야. 퇴로를 만들어달라고. 아까와 같은 상황이 만들어지면, 그리고 형의 능력이 합쳐지면 길은 생겨. 그리고 길이 생기면, 난 자력으로 빠져나올 수 있어.” “적들을 눈 뜬 장님으로 생각하는 거니? 응? 우리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내가 여기서 빠지면 도대체 어떻게 네가 빠져나올 퇴로를 만들라는 거야?” “…….” “네가 뭘 위해서, 누굴 위해서 이러려는지 형은 정말로 모르겠다. 수현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그러니까 지금 바로 빠지자. 빠지고 나서, 나중에 기회를 한 번 보자고. 그게 더 낫지 않겠어?” 나는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너무 늦는다. “수현아…. 제발….” 내 결심이 확고한 것을 느꼈는지, 형의 목소리가 일순 애처로이 변하였다. 그 애절한 음성에 일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지만, 나는 곧바로 마음을 다잡았다. 뭘 위해서냐고 묻는다면 나를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누굴 위해서냐고 묻는다면 형과 내가 아는 모두를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형이라면 할 수 있을 거야. 믿을게.” “김수현!” “혀엉!” 비로소 마주 지른 고함에, 몸을 흠칫한 형을 볼 수 있었다. 한순간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변하였다. 불현듯 이대로가면 끝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결국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을 꺼내야 했다. 아니. 아직 꺼내기 어려운 말이라는 표현이 정확할까. '이런 데서 말하기는 싫었는데….' 찰나의 순간 수많은 고민이 스쳤다. 그러나, 이내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이제는 말을 해야 할 때라고. 다시 눈을 떴다. 그러자 가슴을 애틋하게 만드는 형의 얼굴이 눈에 들었다. 나는 그런 형을 보며, 결국 토해내듯 말을 내뱉고 말았다. “이번 한 번만, 뇌신의 힘을 사용해줘.”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뭘 말하려고 했는지 열렸던 형의 입술이, 일순 꼭 맞대어졌다. 그러더니 이내 날카롭던 눈매가 화등잔만 하게 커진다. 표정은 마치 망치로 세게 얻어맞은듯한 얼굴이었다. 이왕 말한 거, 나는 내친김에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뇌신의 힘을 사용해줘. 형 특유의 마력 조절과 뇌신의 힘이 합쳐지면, 분명히 할 수 있을 거야.” “너…. 그걸 어떻게…. 그건…. 나와 이효을만 알고 있는…. 비밀인데….” 어연간히 놀랐는지, 더듬더듬 대는 형의 목소리를 들린다. 그러나 나는 말을 마치고 나서, 아직까지 내 어깨를 쥐고 있는 형의 손등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차갑지만, 포근한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져 들어왔다. 이윽고, 나는 형의 손을 살며시 감싸 안았다. “수현아!” 그러자 내가 이대로 떼어버릴 것을 알았는지, 형은 다급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 눈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한 채,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미안해.” “수현아.” “정말, 정말 미안해. 형.” “네가….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감싸 안은 손 사이로, 미약한 떨림이 일었다. 그것을 느낀 순간, 갑작스레 속으로 뭔가가 왈칵 솟아오르고 목이 메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미안해. 형.” 기껏 데리러 와줬는데, 그런 걱정을 정면에서 걷어찬 것만 미안한 게 아니었다. 그냥 모든 게 다 미안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하고 싶은 말도 많았는데.” 형을 처음 보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정말,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도 많았는데.”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도 많았다. 그러나 결국 그러지 못했다. 지금도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다. 얘기를 하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없었으니까. “무슨…. 아, 아니다. 그래. 차라리, 차라리 내가 가도록 하마. 일단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를….” “그건 절대 안 돼!” 어느덧 남은 거리는 100미터 남짓이었다. 나는 흘끗 옆을 돌아보았다. 적들은 새까만 개미떼들처럼 시야를 가득 메우며 들어오고 있었다. “형의 진심을 알고,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도 알아. 난 그런 형의 마음을 단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어. 그런데, 이젠 정말로 시간이 없어. 정말로.” “…….” “돌아오면…. 나중에 다 말해줄게. 그러니까, 날 한 번만 믿어줘. 내게 한 번만 기회를 줘.” 번쩍! 문득 거대한 폭음이 솟아오르고, 섬광이 번쩍였다. 무언가 거칠게 날아오는 소리도 들렸다. 정령들의 노랫소리도 더욱 선명히 들리고 있었다. 그와 함께 사티로스가, 그리고 마수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도 들렸다.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침을 삼켰다. 다시 시선을 들어 지그시 형을 응시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이제 내가 형을 보호할 테니까.' 이윽고 마치 10년처럼 느껴지는 10초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더니 내 어깨를 잡고 있는 손이 아주, 아주 미약해진 게 느껴졌다. 내 진심을 들어서였을까? 충격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형의 손은 여전히 내 어깨를 움켜쥐고 있었지만, 미세하게나마 손길이 풀린 것을 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난, 주저 않고 형의 손을 쓸어 내렸다. 그러자. “…….” 손이 스르르 떨어지고, 이내 팔이 반원을 그리며 힘없이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갈게.” “…….” 옆에서 쏘아지듯 들어오는 비비앙의 시선도 느껴졌지만, 이제는 정말로 마지노선이었다. 나는 바로 귀에 손을 가져가 비어있는 왼손에 '빅토리아의 영광'을 쥐었다. “믿을 테니까, 믿어줘.”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곧바로 몸을 돌려 적을 응시했다. 이제부터는, 능력이고 장비고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동원해야 한다. 『고유 능력 제 3의 눈(Rank : S Zero)이 발동합니다.』 『특수 능력 신검합일(Rank : Extra)이 발동합니다.』 『잠재 능력 백병전(Rank : A Plus)이 발동합니다.』 『잠재 능력 쓰러질 수 없는(Rank : A Plus)이 발동합니다.』 『잠재 능력 심안(정)(Rank : A Plus)이 발동합니다.』 『잠재 능력 전장의 가호(Rank : Extra)이 발동합니다.』 『'빅토리아의 영광'에 잠재된 능력, '왕의 위엄'이 발동합니다.』 “수현아…!” 문득, 등뒤로 형이 다시 손을 내뻗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해서 나는 다시 어깨를 잡히기 전에, 얼른 땅을 박차 올랐다. 그리고 최대한의 마력을 끌어올려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원래 사실을 밝히는 것은 구상에 없었습니다. 오히려 안 밝힐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런데 내용을 전개하면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아무래도 혼자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궁극적인 목적은, 2부의 내용에 속도와 탄력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김유현 성격상 브라더 콤플레스가 더욱 심해질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수현이 잘 알아서 하겠지요. 하하. :) 이제 다음 주 연재를 말씀 드려야겠네요. 원래는 저번 후기에 말씀 드린 대로 이번 주 일요일에 연재를 쉴 예정이었습니다.(시험 전날이거든요.) 그리고 상황을 봐서 말씀 드린다고 했는데, 원래는 다음 주는 3일에 한 번씩 연재할 생각이었습니다. 즉 수요일에 올리고, 토요일부터 다시 일일 연재를 시작할 생각이었죠. 그런데 그러는 것보다는, 수요일 연재 분을 당겨 이번 주 일요일(10월 13일)에 올리고, 다음주 월화수목금은 연재를 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금요일 오후에 시험이 끝나니, 토요일에는(10월 19일) 다시 일일 연재를 재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험 때마다 이게 뭔 난리인지 모르겠네요. 독자분들에게는 정말 죄송합니다. 그저 깊은 양해를 구할 뿐입니다. _(__)_ 정리해보면 이번 주 일요일에 올리고, 다음주 월화수목금은 휴재입니다. 그리고 토요일부터 일일 연재를 재개합니다. PS. 혹시 모르니 본 내용은 공지, 후기에 같이 넣어두겠습니다. 0368 / 0933 ---------------------------------------------- 미안해. 형. '느껴진다.' 제 3의 눈과 마력 감지를 동원해 '물의 기운에'에 집중하자, 앞에서 그와 관련된 기운이 물씬 풍겨오는 게 느껴진다. 무언가 굉장히 집중적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사정거리'라는 말을 들은 순간 어쩌면 정령술사도 가까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생각보다 제법 나와있는 상태였다. 나를 잡으러 나온 건지 아니면 거인을 백업하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확실한 건 암살에 대한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는 것이다. 방향은 거의 정면. 거리는 대강 100미터…. 아니. 그보다는 조금 더 되는 것 같지만, 기척을 잡은 이상 남은 건 최대한 빠르게 다다르는 것뿐이었다. '평소라면 금방 돌파할 수 있을 거린데….' 하지만 그렇게 맘 놓고 달리기에는 눈앞에 보이는 적의 숫자가 너무나 많다. 서서히 심장이 달구어지기 시작한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곤 달리는 힘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있는 힘껏 달리는 와중, 문득 형에게 들었던 말들이 가슴을 날카롭게 찌르는 게 느껴졌다. '지금 여기가 네 놀이터로 보여?' '네가 무슨 영웅이야?' '아니. 왜 네가 해야 되는 건데?' “…….” 알고 있다. 이러한 행동이 비정상적으로 보여질 것이라는 것 정도는. 그럼에도 내가 나서는 것을 자처한 이유는 까닭 없이 나서고 싶어서도 아니었고, 영웅이 되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형.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나'를 위해서라고 할 수 있었다. 아마 1회 차에서 망가질 대로 망가졌던 나였다면, 정신을 차리자마자 줄행랑을 쳤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전쟁에 참가하지를 않았을 테지. 그리고 그러한 성격을 2회 차에 다다른 지금까지 유지했다면, 형을 강제로 끌고서라도 도주한다는(물론 형이 동의할 리는 없겠지만.)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까? 지금의 나와 형은 혈혈단신(孑孑單身)이 아니다. 머셔너리와 해밀이라는 클랜의 로드이고, 각 울타리 안에 있는 사용자들을 이끄는 입장이었다. 1회 차에서 나 때문에 목숨을 버렸던 해밀 클랜원들이나, 2회 차에서 나를 믿고 따라온 머셔너리 클랜원들은 나와 더 이상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홀 플레인의 대명제(大命題).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다. 이러한 명제 아래, 나는 여럿을 생각했고 그에 따라 결정할 수 있었다. 즉 '형'이라는 단수에서 '그들'이라는 복수로 의미를 확장한 것이다. 그러나 말할 것도 없이, 그들 모두를 살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나였지만, 난 그 모든 것을 고려하고서라도 최대한 많이 살릴 수 있는 길을 선택했다. …그래서, 더욱 미안한 건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한 길을 선택함으로써 발생한 부담은, 형과 비비앙에게 고스란히 돌아가 버리고 말았으니까. '나도 만만치는 않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웃겼기에, 나는 킥 웃어버리곤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 장소를 벗어나자마자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있는 놈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훤히 트인 들판을 가득 메운 적들은 나와 마주보는 방향으로 재빠르게 달려오는 중이었다. 마치 지금껏 벌였던 공성전에서 당했던 것을 일거에 되갚겠다는 양, 무기를 꼬나 쥔 놈들의 기세가 흉흉하기 그지없다. 이윽고 놈들 또한 나를 발견한듯했다. 꼭 흥분한 도사견처럼 흉포한 살의를 띄우던 눈가에, 일순 당혹이라는 감정이 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명백한 비웃음으로 바뀌었다. “Khahahahahahahaha!” 처음 눈에 들었던 도끼 전사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신나게 웃는다. 아마 내가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으로 비춰지는 모양이다. 그러한 적들을 보자, 2회 차를 시작하기 훨씬 전…. 그러니까 전투에 미쳐 살았을 적. 옛날에 느꼈던 감정들이 갑작스레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얽혀있었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것은 살의로 가장한 맹목적인 광기였다. 지금부터 나는 눈앞의 무수한 적들을 뚫고 들어가, '정령술사'를 암살해야 한다. 나는 차분히 속을 가다듬었다. 머릿속을 떠돌던 형의 말을 깨끗이 비우고, 그 자리를 전투에 대한 계산으로 대체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손에 들린 검을 꾹 쥐어 마력을 폭발적으로 불어넣는다. 해야 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후.” 해낼 자신이 없었다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을 것이다. 웅웅웅웅웅웅웅웅! 키야아아아아아아! 마력을 가득 먹은 '빅토리아의 영광'과 '칼리고 아브락사스'는, 빛과 어둠이라는 서로 상반된 색깔을 뿌리며 미친 듯이 울어 젖혔다. 피피피피피피피핑! 그때, 시위를 놓는 소리와 함께 무수한 화살들이 쏟아져 내렸다. 선공으로 검기를 갈기려 했었기에, 나는 아쉬움의 입맛을 다시곤 급히 몸을 피했다. 그렇게 궤도에서 벗어나자 날 선 바람 소리에 이어 화살촉이 애꿎은 땅을 치는 소리가 들리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한 차례 기합을 내지르곤 대지를 크게 차 올랐다. 펄럭! 얼굴을 스치는 바람결에 머리카락이 나부낀다. 적들과의 거리는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아니, 줄어든 정도가 아니라 이미 선두 안으로 들어온 상황이었다. 설핏 시선을 내리자, 나를 따라 고개를 들어올리는 적들이 보인다. 설마 이 정도 도약력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대다수가 놀란 눈초리를 보이고 있었다. 나는 비어있는 공간을 확인한 후, 그 상태 그대로 몸을 하강했다. 그렇게 사뿐히 땅에 착지하자, 사방을 둘러싼 서 대륙 사용자들과 그 속에 간간이 섞여있는 부랑자들이 보였다. 그리고 바로 내 옆으로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멍한 눈초리를 보내는 한 명의 남성 미국인이 서 있다. “Hi.” 그런 그의 눈짓에, 나는 간단한 인사와 목에 검을 꽂는 것으로 화답해주었다. 그리고 놈의 가슴을 발로 세게 밀어 차버렸다. 이어지는, 그리고 이제부터의 움직임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보일 수 없다. 민첩 능력치 98. 이형환위(移形換位). 궁신탄영(弓身彈影). 오로쓰로스 부츠 등등. 내 사용자 정보는 속도에 가장 최적화되어있다. 어지간한 사용자의 동체 시력으로는 쫓아올 수 없는 수준. 그런 만큼 적들에게 약간의 종적이라도 잡을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해서, 나는 반걸음 정도 확보된 공간으로 옮겼다. 그리고 아까 막혔던 능력을 펼치기 위해, 양손에 들린 검을 교차하듯 내려그어 횡으로 길게 휘두른다. 한순간 검에 어렸던 기운은 움직임을 멈춘듯했다. 그러나 곧 폭발적으로 용솟음쳐 오르더니, 칼끝으로 성스러운 빛과 어두운 기운이 한 줄기 흘러나온다. 기운은 휘둘러진 궤도를 따라, 허공에 기다란 곡선을 그리는 잔상을 남기었다. 이윽고 1초의 시간도 지나지 않아 대기에 그려진 상(像)은 각기 다른 기운을 품은 너울거리는 파동으로 변하였다. 그 상태로 발출하자, 이제 막 달려드려는 적들을 향해 거침없이 쏘아져 나갔다. 촤촤촤촤! “Whoops!” “Noooooooo!” 두 파동의 돌진은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깡그리 집어삼켰다. 흰 파(波)는 깔끔하게 잘라나가고, 어두운 파는 게걸스럽게 찢어발긴다. 마력의 파도에 치인 사용자들은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나감과 함께 둔탁한 비명을 질렀다. 공기 중에 뿌려진 붉은 핏물은 아직 남은 잔상에 닿자마자 부서진 낙엽처럼 산산이 흩어진다. 파동의 벌이는 피의 축제를 계속해서 보고 싶었지만, 그럴 겨를은 없다. 나는 바로 궁신탄영의 능력을 발동해 파동이 만들어준 공간으로 튀어 올랐다. 퉁, 배꼽이 쏠리는 느낌과 함께 이번엔 금빛 머리칼을 갖고 있는 미국인 여성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은 제법 가련해 보였지만, 나는 지체 않고 상단으로 검을 찔러 들었다. 푹! 칼리고 아브락사스는 목젖에 부드럽게 꼽혔다. 미처 반응할 생각도 못했는지 여인의 눈이 일순 동그래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세게 비틀어 뽑아내려는 순간, 등뒤로 정신 없는 소란에 묻힌 미약한 고함소리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검을 마저 뽑는 것과 동시에, 보지도 않고 '빅토리아의 영광'을 휘둘렀다. “Catherine…! Keuak!” 꽈드득! 검날에서 뭔가를 거칠게 찢는 감촉이 전해졌다. 흘끗 뒤를 돌아보자 꽤나 두터운 장갑을 걸친 한 사내가 보인다. 그런 사내의 흉갑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거칠게 찢어 뜯겨진 상태였다. 이 찰나의 순간, 나는 방금 전 베어 넘긴 사내와 눈을 마주쳤다. 눈동자에는 강한 불신이 서려 있고, 입은 벙긋거리고 있었다. 방금 전 죽은 여인과 특별한 사이라도 되는지. 복수를 하려고 뒤를 노리려 했던 모양이다. 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겨우 한 호흡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나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첫 일격으로 만들었던 혼란도 잠깐. 곧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살기의 바늘에 피부가 따끔거린다. 이형환위를 사용하려면 사정거리 내 빈 공간을 찾는 게 필수였기에, 나는 물샐틈없는 전장의 한복판을 신속하게 훑었다. 약간의 틈이라도 있으면 된다. 물론 이 전장 내에 한정하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면, 내가 목표로 하는 정령술사와 최대한 동선을 겹치게 할 것. 적들을 일일이 상대할 수는 없다. 목적은 어디까지나 암살이었고(사실상 이제 와서 암살이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최대한 신속하게 죽이고 빠져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빠져나가기 힘들어질 테니까.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다행히 비어있는 공간을 찾은 순간, 나는 주저 않고 마력을 일으켰다. 팟! 팟! 팟! 능력을 세 번 연달아 발동했다. 그 동안 눈을 세 번 깜빡였는데 한 번 깜빡일 때마다 눈앞의 풍경이 변하였다. 이윽고 다시 능력을 발동하려 공간을 찾는 순간, 나는 다급히 머리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섬뜩한 소리를 동반한 한 자루 단창이, 코앞을 살짝 스치어 지나간다. 피피피피피핑! 그와 동시에 들리는 여러 발의 화살소리. '미친놈들.'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재빠르게 창을 쳐내었고, 이번엔 반대로 몸을 굽혔다. 물론 노블 미스릴 셔츠나 내구를 따지면 설령 몇 발 맞아도 어느 정도 견딜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설마 이러한 난전 상황에서 화살을 쏠 줄은 몰랐기에, 어디 한 번 아군의 화살에 당해보라는 심보가 생겨버렸다. 물론 화살이 길을 만들어주리라는 일말의 기대도 겸사겸사 섞여 있었다. 이윽고 화살비가 곧바로 등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간 이후, 나는 곧바로 몸을 피었다. 그리고 기대가 어긋났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나간 화살은 아군을 꿰뚫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엉거주춤 멈칫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내 한 바퀴 빙글 돌아 다시 나를 겨냥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궁수 전용 유도(Homing) 능력이 깃들어있는 모양이다. “쯧.” 나는 가볍게 혀를 차곤 오른손에 들고 있던 칼리고 아브락사스를 하늘 높이 던지었다. 그리고 오른팔을 길게 뻗어, 방금 나를 창으로 공격한 사내의 목을 움켜잡았다. 이윽고 수발의 화살이 나를 곧바로 치려는 순간, 나는 지체 않고 그를 끌어와 방패로 삼았다. 푸슉, 푸슉! 푸슉, 푸슉, 푸슉! 한 발 한 발 꽂힐 때마다, 대신 맞아준 사내의 몸이 크게 떨어 울린다. 그래도 절명하지는 않았는지 미약한 떨림이 지속적으로 느껴졌지만, 여기서 너무 시간을 지체한 상태였다. 적들은 계속해서 빽빽이 모여들고 있었다. 해서 나는 바로 손을 우그러뜨려 목을 박살내고는, 그를 앞으로 세게 던졌다. 그리고 바로 손을 옮겨 손바닥에 착 떨어져 내린 칼리고 아브락사스의 손잡이를 느끼었다. 여전히 빈 공간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다시 허공으로 뛰어 이형환위로 착지하는 방법이 있지만, 적들이 정신을 차린 이상 위험도가 상당히 높아졌다. 허공에 오른 이상 원거리 공격은 더욱 집중될 것이고, 만에 하나 허공에서도 발을 디딜만한 공간을 찾지 못할 경우 상황은 굉장히 난감해진다. '할 수 없지.' 아주 짧은 동안, 나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아직 여력은 남아있다. 남아있다 못해 충만한 상태였다. 그러니 벌써부터 도박을 감행하기보다는, 한 번 할 수 있는 데까지 활로를 만들어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정령술사에 도착하기 전까지 최대한 아껴두려 했지만…. 나는 결국 빅토리아의 영광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리고 맹렬히 돌진하여 검에 잠재된 능력 '검 빛'을 발동했다. 우웅! 그러자 일순 빅토리아의 영광이 찬연한 빛을 내뿜는가 싶더니. 챙챙챙챙챙챙챙챙챙! 이내 검의 형상을 띤 9줄기의 빛이 청명한 검음을 내었다. 이윽고 검 빛은 앞을 가로막는 사용자 9명의 목에 정확히, 그리고 깊숙하게 스며들었다. ============================ 작품 후기 ============================ 저번 후기에 말씀 드렸던 대로, 다음 주 수요일 업데이트를 일요일 자정으로 당겼습니다. 약속을 지킬 수 있어 다행이네요. 하하. 그럼 다음 주 월, 화, 수, 목, 금요일은 중간고사의 영향으로 휴재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10월 19일(토요일)부터 일일 연재를 재개하도록 할게요. :) 독자분들 모두 행복한 한 주 보내세요! 토요일에 다시 만나요! |ㅇ3ㅇ/ 0369 / 0933 ---------------------------------------------- 미안해. 형. 하얀 빛이 스며든 목 울대서, 이내 몇 줄기 가느다란 피 분수가 뿜어져 나온다. “Ah…?” 남성 사용자는 일순 멍한 음성을 뱉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이내 피를 왈칵 쏟아내더니, 목이 싹둑 잘려 땅으로 떨어진다. 툭! 데구루루…. 이윽고 9명의 머리가 바닥을 뒹구는 것과 함께,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 속속히 빈 공간이 생기었다. “Watch out!” “Is a Monster! Monster!” 한순간 적들 사이로 다시금 미약한 혼란이 이는 게 느껴졌다. 9명의 목이 동시에 날아간 게 꽤나 놀라운 모양이다. 그러나 상대를 배려해주는, 일말의 망설임도 있을 수는 없다. 난 놈들이 쓰러진 즉시 달려가 앞이 막힐 때마다 사납게 검을 찌르고 휘두르기 시작했다. 푸욱! 스칵! 검 끝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심장을 후볐고, 검날은 사정없이 목을 그어버린다. 나는 두 번 공격할 필요가 없도록 일격에 죽일 수 있는 급소만을 노렸다. 무의미한 추가타를 줄일 때마다 그만큼 한 걸음 더 전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혼란에 빠진 틈을 잘 찔렀는지, 검이 닿을 때마다 적들의 목과 가슴에 숭숭 구멍을 뚫을 수 있었다. 그렇게 길을 꾸역꾸역 만들곤 있었지만, 반대로 마음은 점차 급해지고 있었다. 이쯤 됐으면 정령술사도 뭔가 이상한걸 느꼈을 터. 혹시라도 위험을 감지하고 후방으로 빠져버린다면, 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최대한 빨리 이동하지 않으면….' 이러한 마음이 반영되었는지, 두 검을 잡고 있던 손의 놀림이 약간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방어에 할애하는 부분을 일부 줄이고 공격에 더욱 치중하는 것이다. 비록 정교함이 약간 떨어질지라도 파괴력을 높이는 선택이었다. 훙훙훙훙훙훙훙훙! 이윽고 물 흐르듯 유연하게 이어지던 검로(劍路)는, 거친 바람 소리를 담은 비틀린 궤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상태 그대로 뛰어들어 왼쪽 발을 디딤과 동시에 반 바퀴 크게 회전했다. 그리고 오른발이 앞으로 나간 순간, 양팔에 힘을 주어 거세게 떨쳐 올렸다. 스르륵! 뭔가가 날카롭게 베이는 소리와 함께 복잡한 형태를 그리던 궤도에 남은 잔상은, 하나하나 매서운 검기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나마 눈치 빠른 놈들은 몸을 피하거나 방패를 들어 방어하려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검기가 닿은 순간 사방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피 분수가 시야를 가득히 가렸다. 다시 확보된 피가 낭자한 공간으로 파고들며, 나는 쉬지 않고 양손에 쥔 검을 있는 힘껏 교차시켰다. 타깃이 된 적은 얼떨결에 검을 들어올렸지만, 곧 쪼개진 무기와 함께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Back off! Back off!” “Stay away from Monster!” 그렇게 어찌어찌 성공적으로 돌파를 이어갈 즈음, 사방에서 소란과 섞여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들이 유난히 크게 흘러들었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움직임에 하나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 부근에서 일어난 변화였다. 적들이 나와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기 시작한 것이다. 사방팔방으로 꽉 막혀있던 둘레였는데, 내가 가는 곳마다 뒷걸음질을 하며 오히려 길을 터주고 있었다. '응?' 한순간 적들의 뜻 모를 속셈에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오묘한 살기가 목덜미를 깊숙이 찌르는 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패앵! 등 뒤로부터 들려오는 섬뜩한 파공음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꺾었다. 휘리릭! '호?' 목을 살짝 스치고 지나간 그것의 정체는, 바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조그만 손도끼였다. 애당초 후방으로 들어오는 공격에 대해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기에, 피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도끼에 담긴 위력 하나만큼은 제법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나는 약간 소름이 돋는걸 느끼며 바삐 상황을 살폈다. 이 와중에도 적들은 부단히 나와의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어느덧 내가 서 있는 주위로 둥그런 공간이 만들어지는 중이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생각을 지워버렸다. 온몸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어 만일에 대비하고, 다시 검을 세워 돌격해 들어갔다. 아까부터 화살이나 마법 공격이 생각보다 뜸해진 게 의심스러웠지만 이미 적진 한복판으로 들어온 이상 목적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멈출 수 없다. 나는 곧바로 두 개의 검을 곧추세우고, 다시 달려듦과 동시에 마력의 파동을 쏘아 보냈다. 카캉! 카카캉! 그러나 이번엔 대비하고 있었는지, 기세 좋게 들어가던 파동은 순식간에 겹겹이 세워진 방어막에 진로가 막혔다. 그 광경에 살짝 눈살을 찌푸릴 즈음, 갑작스레 전후좌우로 접근해오는 8개의 기척을 감지할 수 있었다. 8명이 들어오는 경로는 나를 완벽히 에워싼 형태였다. 더구나 들어오는 움직임을 보면 꽤나 매끄럽고 신속해, 실력이 범상치 않은 자들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놈들과 가까워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윽고 우왕좌왕 물러나는 적들의 앞으로 정확히 8명이 속속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3명, 3명, 2명. 절반은 근접 계열 사용자로 보였고, 나머지 절반은 암살자 같았다. 나도 모르게 숨을 한 번 들이키자, 은은한 살기를 품은 공기에 코끝이 저릿해지는걸 느꼈다. '무시하기는 힘들겠네.' 간신히 일으켰던 혼란이었지만 그럼에도 모든 시선이 내게 쏠려있다. 이미 도처는 적들로 꽉꽉 들어찬 상태였다. 공간 조건상 이동을 위한 이형환위의 발동은 상당히 제한되어버렸다. 그래서 그것을 억척스럽게 뚫어가는 도중이었는데 난데없이 8명이 등장했다. 그 의도는 명백히 알 수 있었다. 아마 내가 무차별적으로 날뛰는 것을 잠시나마 묶어보려는 심산이리라. '전열을 가다듬으려는 건가?' “You shall die….” 찰나 동안 이어졌던 대치는, 나직한 목소리가 울린 순간 깨어졌다. 정면에 서 있던 남성이 입을 엶과 동시에 8명이 한꺼번에 나에게 덮쳐든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느껴지는 살기에 나는 침착히 이형환위를 발동하였다. 휙! 그리고 흘끗 뒤를 돌아보자, 방금 전까지 내가있던 자리에 거의 동시에 달려든 놈들을 볼 수 있었다. 지독히도 놀라운 합격 능력이었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칼리고 아브락사스'를 횡으로 쳤고, '빅토리아의 영광'을 조절해 이제 2번 남은 능력 '검 빛'을 날렸다. 챙챙챙챙챙챙챙챙챙! 잠시 후, 내게 등을 보였던 자들의 등에 기다란 일자의 검상이 생기고, 마주보는 방향에 있던 자들의 목에 하얀 빛이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나를 죽이겠다고 선언한 남자를 비롯해, 3, 4명의 사용자는 미약한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무너뜨렸다. 이제 남은 인원은 3명. 그리고 나는 잠시간 속으로 혀를 찼다. '검 빛'이 사기인 이유는 본래의 힘에 더해 나 자신의 사용자 정보를 담을 수 있다는 점이다. 방금 전에는 '검술전문가'로서의 권능을 담았고, 때에 따라서는 '화정'의 힘도 담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런 만큼, 지금으로써는 그저 급한 마음에 바삐 능력을 발동했던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남은 한 번의 능력은 아껴야 한다.' 정령술사와 자웅을 겨루는 게 아니라, 죽이고 빼앗고 나오는 게 목적이었다. 물론 아직 비장의 수는 남아있지만, 혹시 모르니 이제 한 번 남은 검 빛은 아껴두는 게 나을 것이다. 그렇게 정리하고서, 나는 다시 내게 공격해 들어오는 3명의 적을 맞이했다. “Kyaah!” 꽤나 독특한 기합성과 함께 3명은 전방위로 퍼져 달려들었다. 공교롭게도 앞선 전투에서 암살자가 모두 죽었는지, 달려오는 놈들은 전부 대검을 들고 있는 근접 계열이었다. 나는 들어오는 궤도를 계산해, 침착히 검을 들어 그것을 방어했다. 그리고 각각의 검이 맞부딪친 순간 손목이 묵직해지는걸 느꼈으나, 이내 들어온 힘을 되돌리자마자 도로 튕겨나가는 놈들을 볼 수 있었다. 이화접목(移花接木)의 진가가 발휘된 것이다. 끝끝내 무기를 놓치지 않은 건 칭찬해줄 만했지만 3명은 하나같이 팔이 크게 들려 가슴을 훤히 드러낸 상태였다. 나는 바로 처리할 생각에 검을 들어올려 앞으로 눕혔다. 그때였다. 찰랑! 한순간 볼에 차가운 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린 게 느껴졌다. 일순 눈이 크게 떠졌지만 일단 할 일은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잽을 날리듯 검을 재빠르게 연타했다. 그리고 막 밀려나가던 놈들의 목에서 핏줄기가 터져 나오는 것을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곧바로 얼굴을 쓸었다. 손목에 묻어있는 것은, 확실한 물이었다. 물이 등장했다는 사실에 잠시나마 속으로 놀라움이 일었다. 하지만 이내 속을 가라앉히곤 검을 들어, 주변 상황을 냉정히 살피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했다. 비록 8명과의 전투가 순식간에 끝났다고 하더라도, 그 순간 적들이 잠잠히 있었다는 건 뭔가 납득하기 어렵다. 더구나 사방을 막고는 있지만 스스로 물러서며 내게 공간을 만들어주기까지.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나를 주시하는 적들의 분위기도 미묘하다. 마치 누군가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듯한 태도처럼 보인다. 아까까지는 어느 정도의 혼란이 동반된 상태였다면, 지금은 묘한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영창이 끝난, 발사 대기만을 기다리는 수많은 마법들이 느껴졌다. 또한 나를 겨냥하고 있는 무수한 활과 석궁들도 보였고, 그들 앞에서 단단히 버티고 있는 근접 계열들도 밟힌다.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수백 명의 사용자들은, 조금 전에 비해 굉장히 정돈된 전열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치 '집중 사격'진과 마주한 느낌이었다. '설마….' 번뜩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나는 발 빠르게 마력 감지에 집중했고, 이내 물 냄새가 코를 물씬 찔러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물의 정령술사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이상하군. 아직 닿을 정도는 아니…. 아.' 아니. 그럴 수 있다. 따져보면 내가 잘못 생각한 게 분명하다. 물의 정령술사는 도망을 선택하지 않았다. 내가 뛰어든 것을 인지하고, 오히려 나를 처리하기 위해 스스로 다가온 것이다. 즉 서로 거리를 줄여왔다는 소리. 하기야 입장 바꿔 생각해봐도, 혼자 뛰어든 적이 무서워 도망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Fire!” 퍼버버버버버버벙! 그리고, 이러한 의아함을 채 삼킬 새도 없이, 이어지는 외침과 함께 준비된 수많은 마법이 발출되는 소리가 들렸다. 쏘아진 마법들은 잠시 하늘로 올라갔다가 이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어 나에게로 하강했다. 나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놈들은 간교하게도 자신들 부근에 방어막을 치고, 내 일대로 동시다발적으로 마법을 쏟아 붓고 있었다. 어찌됐든 일단은 해보자는 생각에, 나는 양 검을 쥐어 쏘아져 들어오는 얼음의 창과 바람의 칼날을 쳐내기 시작했다. 펑펑펑펑! 펑펑펑펑! 검의 궤도에 닿은 마법은 여지없이 잘라졌지만, 들어오는 양은 모조리 쳐내기 버거울 정도였다. 그리고 간간히 몸에 미약한 흔들림도 느껴지고 있었다. 놓치는 마법들은 지금이야 고유 마법 저항력으로 버틴다고는 해도, 계속해서 누적되면 어찌될지 장담할 수 없다. “Fire!” 슈슈슉! 슈슈슈슉! 진퇴양난의 상황에 우선 방어에 집중하고 있을 때, 다음에는 무수한 화살비가 허공을 갈라 사선으로 내리 꽂혔다. 이것은 쳐낼 엄두도 내지 못한다. 나는 이를 꾹 깨물곤 이형환위를 발동했다. 사방이 막혀있으니 결국 피할 곳은 하나. 내키지는 않지만, 허공이었다. 허공으로 이동한 후 유도 마법에 대비해 슬쩍 고개를 내리자, 순간 의외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벗어나자마자 초토화된 대지에는 가히 백은 넘어 보이는 화살들이 고슴도치처럼 꽂혀있다. 그것들은 내게 다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찰랑! 마치 기다렸다는 듯, 때맞춰 들어온 물의 공격. 허공을 매섭게 가르는 하나의 물줄기. 한 줄기 물빛 채찍이 허공을 직선으로 갈라, 내 정수리로 치고 들어왔다. 나는 담담히 검을 들어 그것을 쳐내었다. 그리고 미묘한 느낌에 주위를 둘러본 순간이었다. 그 순간, 나는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찰랑! 찰랑! 찰랑! 찰랑! 어느새 허공에 떠오른 내 부근으로, 수십 개의 물줄기가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이형환휘를 사용할 것을…. 알고 있었군.'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처음 쳐내었던 물보라처럼 흩어진 물줄기는, 다시 여러 갈래로 합치어 각각이 하나의 줄기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겨냥하더니 그대로 나를 향해 채찍처럼 휘감아 들었다. 쐐액! 이 찰나의 순간. 나는 침착히 고개를 숙이었다. 그리고 내가 본 것은, 물줄기들이 이어지는 곳에 몰려있는 사용자들과, 그들의 중앙에 서 있는 한 푸른 머리칼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나를 향해 싸늘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킥.” 그리고 그것을 보며, 나 또한 여인을 향해 마주 미소 지어주었다. 그리고 오른손에 들린 '칼리고 아브락사스'를 으스러져라 쥐었다. 이윽고, 허공에 하나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칼리고 아브락사스의 잠재 능력. 부서진 파편(Broken Fragments)을 발동합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네. 오늘 돌아왔습니다. 시험이 오후에 끝나서, 자정 업데이트가 조금 늦었습니다.(양해 부탁해요!) 독자분들의 응원과 흔쾌히 기다려주신 덕분에 시험은 잘 보았습니다. 물론 결과야 나와봐야 알겠지만, 그래도 부모님께 부끄럽지 않게 준비했다고 생각합니다. :D 오늘 쭉 코멘트를 읽었는데요. 매우 날카로운 분들이 계시더군요. 무엇보다 가장 마음이 끌렸던 건 1인친 주인공 시점인데도 묘사가 너무 많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확실히 묘사가 구구절절 하더라고요. 그 탓에 긴박감이 없어지고, 급박한 상황답지 않게 너무 여유로운 느낌이었달까요. 하하. 그래서 미사여구를 간결하게 하는 방향으로 나가볼 예정입니다. 원체 묘사하는걸 좋아하는 터라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네요. 5일만에 글을 잡아서 약간 갸우뚱하기도 하고요. 혹시라도 어색한 점이 보이신다면 독자분들의 아낌없는 지적 부탁합니다. 아…. 아무튼 시험이 끝나니 후련해요. 시험 과목이 많아서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동생들이랑 학교 도서관에서 밤새면서 공부하고, 야식도 먹고 나름 재밌게 한 것 같습니다. 기분도 괜찮으니 뭐든 게 다 아름답게 느껴져요. 하하하. 다시 한 번 기다려주신 독자분들께 감사 드리며, 오늘부터 일일 연재를 재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0370 / 0933 ---------------------------------------------- 신상용 그 순간 '칼리고 아브락사스'에서 일어나던 기운이 반전했다. 마치 모든 것을 찢어발길 것처럼 게걸스레 타오르던 기세는, 검안으로 뭉클뭉클 모여들어 하나의 정돈된 형태를 보여주었다. 찰랑! 찰랑! 사방에서 들리는 맑은 물소리들. 일단 눈앞에 보이는 것들만 얼추 걷어낸 후, 나는 마력을 담은 발길질로 허공을 박차 올랐다. 비록 대지에서 차는 것처럼 거센 돌진은 일으킬 수 없어도, 몸을 떠오르게 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이내 다시 따라 올라오는 물줄기들이 느껴졌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자세를 잡았다. 고개를 숙이자 나를 향해 왼팔을 뻗고 있는 정령술사가 보였다. 그런 그녀의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이겼다는, 스스로 승리를 확신하는 오만한 웃음으로 느껴졌다. 문득 검 내부를 가득 채운 기운이 꿀렁꿀렁 흔들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제 그 거만한 미소를 깨주겠다는 생각에, 나는 '칼리고 아브락사스'를 역으로 돌려 잡고 오른팔을 크게 뒤로 젖혔다. 그러면서 대충 가늠해보았고, 이내 가능하겠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공중에 떠오른 것은 분명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목표했던 정령술사를 포착한 이상 이야기는 달라진다. 애당초 빠르게 살해하고 빠져 나오는 게 목적이었고, 굳이 달라붙지 않아도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있다. 나에게도 하나의 방법이 존재하기에 마주 미소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중력에 의해 몸에 하강하려는 낌새가 찾아들 즈음. 나와 정령술사의 공세 교환은, 찰나간에 이루어졌다. 여인이 내뻗은 손을 꽉 움켜쥐는 것과 동시에, 나 또한 역으로 들어 젖힌 '칼리고 아브락사스'를 있는 힘껏 투척했다. 찰랑! 찰랑! 던지자마자 수십의 물줄기들이 나를 칭칭 둘러 감았지만, 이내 물에 탄 물감처럼 허공으로 넓게 젖어 퍼지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피해는 누적되겠지만, 마력 능력치 100의 마볼로도 인정한 마법 저항력을 단번에 뚫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됐다.' 이번에는 반대로, 내가 승리를 확신했다. 힘껏 던진 검은 불길한 기운을 퍼뜨리며 직선으로 곤두박질쳤다. 그 끝에는 정령술사가 있었다. 자신의 능력이 허무하게 사그라지는 것을 봤는지, 미끈했던 여인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키아아아아아아아! 이윽고 달려나간 '칼리고 아브락사스'는 곧은금을 그리었고 이내 정령술사를 꿰뚫기 직전이었다. 갑작스레 여인이 손을 가볍게 휘젓더니 입술을 오물거린다. 그러자 허공에서 유령처럼 일어나는 물 덩이에, 나는 곧바로 시동어를 외웠다. “부서진 파편(Broken Fragments).” 와장창! 그 순간 '칼리고 아브락사스'는 거친 폭발을 일으켰다. 마치 수류탄을 터뜨린 것처럼, 잘게 나뉜 칠흑 빛 파편은 넓게 퍼져 정령술사를 삼켜 들었다. 그와 동시에 일순 몸이 뚝 떨어지는 게 느껴졌고, 이어서 거대한 폭음이 귓가에 흘러들었다. 하강하는 도중 다시 시선을 돌리자, 검은색과 물색이 뒤섞인 뜨거운 바람이 솟아오르는걸 볼 수 있었다. 후르르르! 후르르르! 찰랑! 춤이라도 추는지 이리저리 흔들거리는 바람은 이윽고 기지개를 펴듯이 크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바람에 뒤섞였던 칠흑 빛은 만발한 꽃잎처럼 부근으로 활짝 흩뿌려졌다. 내가 대지에 착지한 것과 결과에 의문을 느낀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나는 급히 고개를 들어 아까 파악한 위치로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여전히 두 발을 디딘 채 서 있는, 그러나 온몸이 그을린 정령술사를 볼 수 있었다. 여인은 아직 살아있었다. “…어.” 이윽고 정령술사의 앞에 서 있는 거대한 존재를 보자마자 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까 보았던 것은 바람이 아니었다. 솟아올랐던 것은 하나의 존재가 형상을 이루는 과정을 착시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직경 8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물의 거인은 바로 정령왕이 출현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사티로스가 홀연히 출현했던 것처럼 물의 정령왕도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혹시나 했는데…. 미리 준비해둔 게 다행이었네. 이 괴물. 그러나 그 위용을 자세히 살펴볼 틈도 없이, 몽실몽실 밀려들며 주변을 잠식해오는 물안개서, 고요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국어가 아니라 완전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정령술사가 나를 보며 미소 짓는 것을 보니 그다지 좋은 기분은 들지 않는다. 나는 한숨을 쉬고 속을 가다듬었다. 언뜻 보이는 정령술사의 안색은 파리하다. 아무래도 아껴두었던 정령왕을 드러냄으로써 여력을 다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결국 방금 전 일격으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 그나마 '부서진 파편'은 초기 어느 정도 피해를 준 것 같았지만, 여인의 전신에는 물빛이 쉴 새 없이 흘러 부상을 치료하고 있었다. 이어지는 걱정은, 주변을 둘러봄으로써 현실로 다가왔다. 어느덧 다시 장전을 마친 마법사와 궁수들이 하나같이 나를 겨냥하고 있었다. 나는 지그시 입술을 짓씹었다. - 죽여버리겠어. 그때였다. 단정한 외모와 고요한 목소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살기 어린 음성이 주변을 왕왕 울리었다. 그리고 그것은, '집중 사격'의 재개를 알리는 하나의 신호탄이 되었다. 퍼버벙! 퍼버벙! 무수한 마법이 하늘로 솟아올랐다가, 내게로 낙하한다. 그것을 보자 무검을 두고 온 게 무척이나 후회되었다. 그러나 이내 곤두박질치는 무수한 마법의 창과 칼날에, 나는 '칼리고 아브락사스'는 회수할 생각도 못한 채 하나 남은 검을 들어올렸다. 힘들 것이라는 건 알면서도, 동시다발적으로 들어오는 것들을 겨냥해 검을 돌리기 시작했다. 펑, 펑, 쿵! 펑, 펑, 쿵! 그리고 격돌이 시작한 순간 몸에 미약한 흔들림이 일었다. 닥치는 대로 휘둘러 막아내고는 있었지만, 아까 2개를 이용해서도 완전히 막지 못했던 마법이었다. 한 번 베어낼 때마다 서너 개씩 떨굴 적도 있어도 고작 검 하나로 수십 개를 한꺼번에 막을 재주는 없다. 가능한 보이는 것은 최대한 잘라내곤 있었지만 알게 모르게 놓치는, 시야에 닿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그 증거로 시간이 흐를수록 전신에 일어나는 파문은 점점 강도를 더해가는 중이었다. 슈슈슉! 슈슈슈슉! 그러나 약간의 틈도 허용하지 않을 요량인지, 대기를 찢는 헤아릴 수 없는 화살 소리가 이어서 흘러들었다. 보지 않아도 다음 타자가 화살 세례임은 알 수 있다. 나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고 울며 겨자 먹기로 이형환위를 발동했다. 한순간 눈앞 풍경이 달라지는 것과 동시에, 역시나 이동한 곳으로 곧바로 치고 들어오는 수십 개의 물빛 광선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일찍이 본 적이 있는, 비비앙의 마수 군단을 상대로 물의 정령들이 사용했던 광선이었다. 하지만 굵기나 기세는 그와 비할 수 없어, 나는 '빅토리아의 영광'을 머리 앞으로 세운 채 전신을 '푸른 용기사의 외투'로 크게 둘렀다. 풍! 이윽고 한 광선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둥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에 내려진 광선의 비는 사정없이 내리 꽂혔다. 풍! 풍! 풍! 풍! 이윽고 반사적으로 일어나는 마법 저항과, 내려오는 빗줄기가 마치 거침없이 쏟아지는 빗줄기가 격돌했다. 전방위적으로 수많은 파문이 일어나고, 흩뿌려진 물이 몸을 적신다. 이것은…. 풍! 풍! 풍! 풍! 마치 소나기의 한복판에 서 있는 느낌이랄까. 어깨, 허벅지, 발에서 연신 둔중한 충격이 느껴지고 있었다. 심지어 등에서는 뭔가 북 찢어지는 느낌까지 들자, 이내 등으로 시원한 물이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빗물이 모두 흘러내려 땅을 질척하게 만들 즈음, 주변에서 커다란 환호가 울렸다. 환호를 받으며(물론 나에게 한 건 아니겠지만.)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인위적으로 생겨난 물안개가 살며시 걷히었고, 그와 동시에 환호는 뚝 끊기었다. 왠지 모르게 등이 휑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차분히 머리를 털어냈다. 전장의 가호, 하늘의 그리고 태양의 영광, 푸른 용기사의 외투. 이 삼박자가 만들어낸 마법 저항이 정령왕의 일격을 막아낸 것이다. 나는 한 번 더 고개를 흔들어 남은 물기를 털어내고, 다시금 마력을 일으켰다. “푸.” 현 상황은 분명히 위기라 볼 수 있었다. 지금이야 마법 저항이 빵빵하니 어찌어찌 버틴다 쳐도, 이러한 연계가 계속해서 이어지면 언제 깨어질지는 장담할 수 없다. 아마 지금껏 누적된 피해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일 것이다. 활로를 위한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거리는 대략 60미터….' “───. ───. ───.” '개새끼들.' 그러나 이어서 들려오는 주문의 영창과 화살을 시위에 거는 소리에, 나는 즉각 생각을 중단했다. 그리고 일으킨 마력을, '빅토리아의 영광'에 한껏 불어넣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이제는 사실상 생각할 것도 없다. '칼리고 아브락사스'를 이용한 저격은 실패했다. 그렇다면 지금 남은 활로는 바로 돌진뿐이었다. 일단 적들의 한복판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아까와 같은 '집중 사격'에서는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래로 검을 늘어뜨렸고,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오직 하나의 생각만을 제외하고 머리를 깨끗이 비우기 시작했다. '남은 거리는 60미터…. 남은 거리는 60미터….' 인위적으로 집중력을 끌어올린다. 호흡이 길어지는 게 느껴진다. 그와 동시에, 마력을 머금은 '빅토리아의 영광'이 신비한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신을 넘어서는 기운이 넘실거리듯 퍼져 나오기 시작할 때, 나는 지체 않고 대지를 박차 돌진해 들어갔다. 이제부터는 속도를 이용해 최대한 움직여야 한다. 정돈된 전열에 돌진을 시작한 이상, 잠시라도 멈추는 순간 폭격을 맞을 것이다. 걸음을 멈추는 순간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전에 없는 긴장한 마음으로 검을 들었다. 적들과의 거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한 박자 늦게 방패를 드는 사내의 옆을 스치듯 지나가, 목에 신속하게 검을 찔러 넣는다. 그리고 관통한 검 끝으로 파동을 발출하자, 이내 새하얀 검기가 적의 전열을 덮쳐 들었다. 이어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적들을 밟으며, 나는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워낙 빽빽이 서 있다 보니 그냥 휘두르는 대로 적들이 걸려들었다. 스칵! 스칵! 가득 찬 풀 위에 제초기를 돌리는 것처럼, 순식간에 수 명의 목이 허공에 떠오르고, 검 끝에 늘어지는 핏물 어린 실 가락들이 허공을 수놓는다. 설마 내가 이런 무모한 돌격을 할지는 몰랐는지, 눈앞에 보이는 궁수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생겨난 빈틈에 착실히 검을 찔러 넣자, 갑작스레 양 옆으로 돌격해 들어오는 근접 계열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검을 한 번 비틀어 뽑고 나서, 가벼운 파동을 두어 번 날려준 후 곧바로 몸을 날렸다.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할 시간도 없다. 말 그대로 아비규환(阿鼻叫喚)의 현장이었다. 그저 닥치는 대로 죽이고 죽이는 전투.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사방으로 피와 살점들이 끊임없이 흩뿌려졌다. 퍽! 그때였다. 검을 뽑고 다시 휘두르려는 순간 등 뒤를 후려갈기는 기척이 들렸다. 고통이 크지는 않지만, 굉장히 거슬린다. 그래도 할 수 없다. 주변을 가늠하고 그에 맞춰 하나하나 대응하는 것은 사치였다. 장비를 걸치지 못한 곳 중 급소만을 최소한으로 방어한다. 그리고 사각의 공격은 오직 감각에 맡긴 채, 나는 정령술사가 있는 방향으로 돌진하고, 돌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걸음을 멈추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은 바로 시크릿 클래스의 권능이었다. '모든 것을 잘라낼 수 있다.', '검에 관련한 모든 행동에 긍정적인 효과를 준다.'라는 권능은 실로 대단했다. 아무리 단단한 것이라도 마치 종잇장처럼 잘라내었다. 거기에 애초 절삭력이 뛰어난 '빅토리아의 영광'과, 96 마력 능력치의 조화는 권능을 더욱 증폭해주고 있었다. 비록 무모한 돌격이기는 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좁혀질 것 같지 않던 정령술사와의 거리가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언뜻언뜻 보이던 모습이, 이제는 서서히 전신으로 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방어를 도외시한 돌진은,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한 번 정돈된 전열은 다시 혼란을 일으키기 어렵다. 그것이 나 혼자라면 더더욱 말이다. 비록 마법과 화살의 세례에는 벗어날 수 있었지만, 우수수 쏟아지는 병장기들의 공격은 무시할 수 없었다. 팡! 뒤를 찔러오는 일격에 다급히 왼팔을 들자, 옆구리 사이로 들어온 창은 정면의 적을 꿰뚫었다. 고마운 마음에 놈의 가슴을 발로 차버리고 뛰어넘으려는 찰나였다. - 크악! 누군가 마주 차버렸는지, 한순간 사내의 허리가 활처럼 휘어들어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그에 이어서, 시체의 귀를 스쳐 하나의 검이 튀어나왔다. “큭!” 재빠르게 머리를 비틀어 피할 수는 있었지만, 시야를 가린 불의의 일격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잠시 걸음을 멈춘 대가는, 우려했던 현실로 톡톡히 돌아왔다. 슈슈슉! 슈슈슈슉! 지금껏 애꿎은 허공만 쳤던 것을 복수라고 하려는지, 일순간 무수한 병장기들이 여지없이 나를 노리고 들어온 것이다. 즉시 몸을 비틀고 나서 공중제비로 허공을 넘었지만, 놈들의 공격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목을 스치고 지나간 창은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배, 허벅지에서 미약한 충격이 느껴졌고 등에서는 따끔한 고통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 다쳤는지, 이내 시큰거리기 시작하는 왼손에 절로 눈살을 찌푸려졌다. 뭔가 따뜻한 게 몇 방울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이를 바드득 깨물곤 다시금 힘차게 대치를 박찼다. 다행히 여러 장비들이 치명타를 막아주곤 있었지만, 장비에 전적으로 의지한 물리 방어는 한계가 있다. 그나마 내구 능력치가 92에 이르지 않았다면 이미 어느 한 군데는 뚫려도 진작에 뚫렸을 것이다. 나는 크게 한숨을 뱉곤 신속히 거리를 가늠했다. 처음 60미터의 거리는 어느덧 절반으로 줄어들어 30미터 남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적들의 전열은 견고했고, 무엇보다 정령술사의 앞에는 정령왕이 버티고 있다. 여기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남은 거리는 30미터…. 남은 거리는 30미터….' “…….” '…승부다.' 이제는 승부수를 던져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바로 부츠의 힘을 빌어 있는 힘껏 대지를 박차 올랐다. 지금부터 내가 펼칠 3단 비행의 첫 번째를 알리는, 오로쓰로스 부츠를 이용한 도약이었다. ============================ 작품 후기 ============================ 3단 비행은 자르반에게서 모티브를 얻었지요. E + Q - 점멸 - 데마씨아! 하하. 오늘 많이 늦었습니다. 정말 죄송해요. 원래는 이번 회에 정령술사를 끝낼 생각이었는데, 진도가 맘대로 조정이 안되네요. 솔직히 말씀 드리면 뒤의 내용이 정확히 3,977자 추가로 있습니다.(아직 초고이긴 하지만요.) …(스포일러)을 자르고 나온 광경에, 그리고 포격을 뚫고 나온 광경에…. 마침내 정령술사가 한 손에 잡힐 듯 보이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희망에서, 나는…(스포일러). 이렇게요. 그런데 이것까지 퇴고해서 올리려니 눈앞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하하하. 아무튼 최대한 빠르게, 본래 페이스를 되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요. _(__)_ 0371 / 0933 ---------------------------------------------- 신상용 3단 비행. 물론 세 번만 사용한다고 해서 3단 비행이라는 뜻은 아니다. 내가 보유한 이동 능력을 세 개로 나누고, 도약할 때마다 들어가는 마력을 컨트롤하여 임의대로 비거리를 조절하는 능력이었다. 각도가 나온 순간,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곧바로 대지를 박차 올라, 오로쓰로스 롱 부츠(Orthros Long Boots)의 속도를 이용한 첫 번째 도약을 실행했다. - 죽여! 그리고 몸이 공중으로 떠오른 순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양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살기들이 매섭게 쇄도해 들어온다. 하지만 그것은 나 역시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렇기에 공중에 오르자마자 급격히 몸을 꺼트렸고, 이내 위쪽 빈 허공을 스치는 무수한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일단 피하기는 했지만 이대로 착지할 생각은 없다. 나는 완전히 바닥에 닿기 전 급히 발을 내저었고, 이내 발바닥이 누군지 모를 이의 어깨에 닿은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상태서, 나는 다시 한 번 부츠를 이용한 도약을 감행했다. 슈슈슉! 이번엔 화살이 다시금 나를 노리고 들어왔지만, 방금 전에 비해 확연히 줄어든 살기를 느끼었다. 화살이 최대한 들어오는 방향으로 '빅토리아의 영광'을 거세게 훑는다. 베어진 것들은 툭툭 반으로 잘라져 모조리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러나 미처 막지 못한, 사각으로 들어온 화살 몇 개가 몸을 치는 것을 느꼈다. 살며시 입술을 깨물고 아래를 쳐다보자, 약간의 공간은커녕 발 디딜 틈 없는 촘촘한 전열이 눈에 들었다. 적들은 하나같이 눈을 치켜 뜬 채 길쭉한 병장기들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만일 이대로 아래로 하강하면 몸의 균형은 틀림없이 무너져 내린다. 3단 비행의 핵심은 1, 2, 3단을 나누는 부분에서 물 흐르듯 이어지는 행동을 보여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해답은 하나. 아까처럼 공간을 만들어내면 된다. 이윽고 몸의 추락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검에 마력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낙하지점을 향해 쉴 새 없이 검기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빅토리아의 영광'이 짧은 검음을 토해내고, 그럴 때마다 30cm에 다다르는 파동을 적들의 한복판에 쏟아 붓는다. 펑! 펑! 펑! 펑! 충격으로 일어난 자욱한 먼지 사이로 분주한 움직임과 어지러운 비명이 흘러나온다. 무차별적으로 내려친 파동은, 이윽고 빛의 세례가 되어 적들의 전열에 자그마한 구멍을 만들어주었다. 잠시 후. 나는 거센 바람에 머리카락이 좌우로 나부끼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땅에 착지했다. 그리고 1차 비행을 마치고 대지에 발을 디딘 순간, 번쩍거리는 빛이 내 전신을 뒤덮는 게 느껴졌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동시에 번들번들거리는 수십 개의 날이 사방에서 짓쳐 든 것이다. 완벽히 이어지는 연계에 혀를 차는 것도 잠시. 나는 재빠르게 고개를 들어 전방을 응시했다. 쏟아져 들어오는 병장기들 사이로, 어그러진 전열이 눈에 밟힌다. 그리고 그 어그러짐 사이로, 나는 두 번째 비행인 이형환위를 발동해 그것을 뛰어넘었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뜨자, 눈앞 광경이 달라지는 것과 동시에 등 뒤로 미약한 환호성이 울렸다. 그러나 이내 뚝 끊긴 것으로 보아 잔상이 사그라지는 것을 확인한 모양이다. 하지만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나는 곧바로 달리기를 재개했다. '남은 거리는 절반.' 삽시간에 절반을 줄였다. 그렇다면 15미터. 평소라면 한달음에 줄일만한 거리였다. 그러나 눈앞에 버티고 있는 정령왕을 확인하자 갑작스레 까닭 없는 답답함이 가슴을 엄습한다. 어찌 보면 정령술사에 도달하기 전 마지막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만큼 쉽지 않은 상대였다. 그러나 이제 와서 어떡하겠는가. 결국 관건은 누가 더 치밀한 계산을 했는가에 달렸다. 한 번 침을 삼켰다. 이대로 다시 공중에 떠오르면 다시 표적이 될 것은 알지만, 지금 나에게 트인 공간은 허공뿐이었다. 과연 나를 노리고 들어오는 것들을 회피하면서 정령왕을 넘을 수 있을까? '운에 맡길 수는 없다.' 목숨을 행운에 맡기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적들은 현재 내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 점을 노려야 한다. 아마 지금쯤이면 다시 장전을 마쳤을 것이다. 장전된 주문과 화살을 한 번 더 소비하게 만들어야, 내가 정령왕을 뚫고 나갈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나는 들어오는 공격을 느껴 반사적으로 행동을 개시했다. 우선 대지를 냅다 차오르기 전, 이형환위의 능력을 끌어올린다. 이어서 허공으로 솟구치는 것과 동시에, 준비한 이형환위의 능력을 한 박자 늦게 발동했다. 발은, 아직 대지에 붙어있었다. 이윽고 몸이 바람을 세차게 가르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몸에 찾아 든 부유감은 잠시였다. 그것은 한순간 반전해 아래로 쏠리었고. 쿵! 이내 나는 떠오른 순간 다시 대지에 착지할 수 있었다. 퍼버벙! 퍼버벙! 슈슈슉! 슈슈슉! 뒤늦게 허공을 후려갈기는 무수한 마법과 화살들. 적들은 허공에 떠오른 나를 곧바로 노렸지만, 나는 허공에 오르자마자 발동된 이형환위의 능력으로 바로 대지로 착지했다. 그 사이의 틈은 약 1초. 허공으로 솟구치기 전 준비한 이형환위로 인해, 뛰어오른 것과 능력을 발동한 게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판정을 이끌어낸 것이다. 이로서 한 번의 기회가 생겼다. 아직 정령왕이라는 관문이 버티고 있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간신히 만들어낸 시간이 가기 전에, 나는 바삐 행동을 개시했다. 앞에서 멍하니 눈만 끔뻑이는 사내의 멱살을 붙잡고, 힘차게 아래로 끌어내린다. 지금의 도약이 승부를 가릴 것이라는 생각에, 순순히 몸을 허물어뜨리는 그의 어깨를 밟고서 이번에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뽑아내어 단숨에 뛰어올랐다. 정령왕과의 거리는 약 5미터. 이 정도 도약력이라면 충분히 닿고도 남을만한 거리였다. 힘껏 뛰어서 그런지 곡선을 그리며 날아간 몸은 물의 거인과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이내 정령왕도 나를 인식한 듯싶었다. 놈의 고개가 슬며시 내려오더니 나를 지그시 응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더니, 이윽고 전신에서 수십 줄기의 물빛 광선이 뿜어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놈의 오른팔이 변화를 일으켰다. 그리고 나서, 맹렬한 기세로 들어오는 물빛 광선들은 마주 올라가는 나를 정확하게 노리고서 낙하한다. 풍풍풍풍풍풍풍풍! 거의 집중 사격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잠시 숨을 삼키었지만, 나는 검을 앞으로 쭉 뻗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와 동시에 힘껏 마력을 불어넣어 정령왕을 베어낼 파동을 준비한다. 풍! 풍! 풍! 풍! 믿는 구석은 있었다. 몸에 닿은 물빛 광선은 아까처럼 거센 물보라를 일으키며 허공에 번져 퍼지었다. 아까부터 연신 두들겨 맞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내 마법 저항력을 살아있어 수십 줄기의 물빛 광선을 가까스로 방어한 것이다. 오오오오오오오오! 그 순간 엄청난 분노성과 함께, 아까보다 거대해진 오른팔이 나에게 뻗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휘둘러 들어오는 일격이 행사하는 물리력은 무시할 수 없다. 내가 온 힘을 다해 뛰어든 것처럼, 혼신을 다해 휘두른 물의 주먹은 당장에라도 나를 처박으려는 듯 힘차게 쏘아지고 있었다. 그것이 닿기 직전, 나는 양손으로 검을 쥐어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이윽고 주먹과 검이 서로 맞닿으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검을 사선으로 비스듬히 돌리는 것과 함께, 오른쪽으로 반 바퀴 몸을 기울였다. 검후와 일대일 전투를 벌였던 경험이 지금 순간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스치는 왼쪽 팔꿈치가 아릿해지는 느낌이었지만, 뻗어져 나간 물의 주먹은 이내 하나의 거대한 줄기를 이루어, 내 옆을 확실히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그 옆을 타는 듯 들어가 몸체를 향해 스미듯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정령왕의 몸체로 그대로 돌진해 들어갔다. 한순간 눈앞에 파란 바다가 보이는 착각이 있었다. 직경 8미터에 이르는 몸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물의 장벽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대로 바다에 묻히려는 찰나, 나는 바로 정면에서 진로를 가로막은 그것을 향해, 준비해둔 파동으로 크게 그어 내렸다. 촤아악! 그러자 일순간 거짓말처럼 바다가 좌우로 열리었고, 그 뒤에 있는 텅 빈 허공이 눈에 보인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정령왕에게 확실한 타격을 줄 기회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내 생각을 접었다. 비록 왕이라고는 하지만 정령왕도 엄연한 소환수였다. 소환의 주체를 죽이면 자연스레 소멸할 것이다. 목표는 단 하나. 정령술사. 그것을 되새김질하자, 일순 좌우로 갈라진 바다에서 부글거리듯 물이 끓어올라 상처를 수복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나는 틈새를 직선 궤도를 그리며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해냈다…!' 그렇게 빠져 나오고 나서, 생각한 순간이었다. 꿍! “허억.” 정령왕을 가르고 나오자마자, 등을 가격하는 거센 충격에 나도 모르게 헛바람 들이켰다. 안 그래도 검면으로 물을 타고 들어오면서 속력이 무척 감소된 상태였는데, 방금 전 일격으로 몸의 균형이 흐트러졌다. 이윽고 몸이 더더욱 기울어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이대로 몸을 떨군다면 지금까지의 개 고생은 물거품이 돼버리는 것과 다름없어진다. “큭!” 다행히 극한으로 끌어올린 집중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게 만들었다. 등쪽으로 들어온 힘에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일전에 통과의례에서 안솔을 구해냈을 때처럼, 받아들인 충격을 조절하여 오히려 앞으로 가속하는 힘으로 바꾸어내자, 이윽고 멈췄던 몸이 한순간 퉁기듯 튀어나간다. 살랑!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과 탁 트인 허공. 그것을 보자 드디어 팔부능선을 넘었다는 환희가 전신을 감돌았다. 남은 거리는 10미터. 몸은 여전히 허공에 떠 있는 상태. 두 번의 비행을 마치고 아래를 보자, 이제는 손에 잡힐만한 거리에 있는 정령술사가 보였다. 마침내. 드디어 정령술사가 간격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아까의 거만한 미소는 어디 갔는지. 입을 멍하니 벌린 모습을 보자 목적을 달성하기 직전이라는 것을 느꼈다. 잡힐 듯 말듯 애매했던 생각이 이제 눈앞으로 확신으로 변해 다가왔다. 나는 온몸을 감도는 회로에 마력을 가득히 일으켰다. 아래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사용자들이 나를 보고 있다. 과거 제로 코드를 쥐었을 때의, 그때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할 수 있다.' 그렇게 정령왕이 보태어준 힘 덕에, 나는 일부 속도를 되찾아 하강을 시작했다. 힘을 다한 도약과 마력은, 이번에야 말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미끄럼틀처럼 대기를 가른다. 나를 보는 정령술사는 분한 얼굴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일순 표독스런 표정을 지어 보인다. 나는 그대로 여인의 품으로 직선으로 파고들며 온몸의 회로에 흐르는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것은 한 발자국이었다. 주르륵! 그때였다. 승리를 한 발짝 앞에 두고서, 이어진 정령술사의 행동에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그것은 내가 막 하강을 시작할 즈음이었다. 이대로 내가 들어올 것을 깨달았는지 정령술사는 입을 크게 벌려 소리쳤고, 이내 손을 횡 방향으로 기다랗게 내저은 것이다. 쭈르르르르륵! 그때, 내가 들어가는 지점의 왼쪽에서 거대한 물의 길과 함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마치 파란 카펫을 밀어 까는 것처럼 쭉 밀고 들어오는 그것은, 내가 통과하려는 지점을 가로막으려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었다. 또한 오른쪽에선, 뭔지 모를 거친 기세가 물의 질주와 맞춰 세차게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속으로 감탄이 일었다. 그것들은 내가 들어오는 속력까지 계산한 정확한 공격이었다. 만일 이 속도를 유지한 채 날아간다면, 양방향에서 들어오는 살기는 내가 지점에 다다른 순간 손뼉 치듯 나를 터뜨릴 것이다. '그럴 수는 없지.' 아직, 도약은 끝나지 않았다. 그에 따라 나는 한껏 몸을 웅크렸다. 아까 채워둔 마력은 여전히 몸 안 회로를 따라 거침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윽고 통과 지점을 바로 앞에던 직전의 순간. 쾅! 나는 지체 않고 몸을 활짝 피는 것과 함께, 온몸의 휘도는 마력을 일거에 폭발시켰다. 그러자 가는 곡선을 그리며 허공을 낙하하던 몸은, 한순간 고무줄 튀기듯 퉁 튀어나가며 직선에 가까운 곡선으로 변했다. 마지막 도약, 궁신탄영(弓身彈影)의 발동이었다. 하강하는 속도에 한층 가속이 붙는다. 그 상태로, 나는 통과 지점을 말 그대로 '통과'했다. 철썩! 아무것도 들리지는 않는다. 그저 마법이 들어오는 지점을 통과하고 나서, 뒤늦게 하늘로 치솟는 빛과 물보라만을 느꼈을 뿐. 비로소 다가온 희망에서, 나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빅토리아의 영광'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아래 정령술사와 여인을 단단히 감싸는 사용자들을 겨누었다. 챙챙챙챙챙챙챙챙!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아끼고 아껴온 능력. 마침내 새하얀 검이 청명한 검음을 내질렀다. 검 빛이 쏘아지고, 이어서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수 명의 사용자들이 몸을 허물어뜨린다. 그 사람들 중에는 정령술사도 포함되어있었다. 그러나 아직 죽지는 않았는지, 한순간 휘청거렸다가 오른쪽 팔을 부여잡으며 간신히 자세를 잡는다. 이윽고 겨우 몸을 일으킨 정령술사는, 지척까지 다가온 나를 노려보았다. 언제 주웠는지 정령술사의 오른손에는 변화가 풀린 '칼리고 아브락사스'가 들려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비로소 짜릿한 환희가 온몸에 감돌았다. 지금껏 참고 참고 참아온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다. 수많은 위기를 헤치고 간신히 만들어낸 확실한 기회. 나는 정말 끝이라는 생각에 오른팔을 크게 뒤로 젖혔다. 웅웅웅웅웅웅! 마치 나의 승리를 확신하듯이, '빅토리아의 영광'은 전에 없는 청명한 검음을 울리었다. - 아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려는지, 정령술사는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힘겹게나마 '칼리고 아브락사스'를 들어 보였다. 그것으로, 나와 정령술사의 거리는 '0'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하얀색과 검은색이 교차했다. 싹둑! 쾅! 이윽고 뭔가를 자르고 지나간 것과 함께, 나는 그대로 대지로 추락했다. 어찌나 혼신의 힘을 담았는지, 지축은 거대한 굉음과 함께 흙먼지들이 일어나 주변을 자욱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전신에 느껴지는 것은 딱딱한 대지가 아니었다. 뭔가 말캉하고 부드러운 인간의 육체가 느껴졌다. 충격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자 간헐적으로 뿜어지는 피 분수와, 전신이 으깨어져 피가 튀어나온 목 없는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 고생한 것에 비해, 결과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그래도 드디어 죽였다는 생각에 숨을 몰아 쉬었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나는 시체를 들어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사위는 고요했다. 일어났던 먼지는 어느새 가라앉아, 나와 정령술사만을 멍하니 보는 적들만이 보였다. 이윽고 왼손에는 시체를, 오른손에는 '빅토리아의 영광'을 든 채,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하늘은 어둑한 구름을 품고 있었다. 찰랑! 그에 이어서, 정령왕을 이루었던 거대한 물들이 한순간 점점이 흩어지며 이곳 저곳 흩뿌려진다. 소환자가 죽었으니 더 이상 이곳에는 존재할 수 없다는 법칙을 따르는 것이다. 후드득! 후드득! 일대를 적시는 빗방울에 적들은 이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이내 흉흉한 살의가 일대를 뒤덮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쯤이면 그쪽에도 신호가 갔을 터. 꾸릉! 그리고 구름 사이로 비치는 한 줄기 뇌광(雷光)을 보자,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나는 다시금 마력을 일거에 터뜨리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혀어어엉!” 그리고 그 순간. 꾸르르르르르르릉! 세상이, 샛노란 빛으로 변하였다. ============================ 작품 후기 ============================ 아마 내일은 조금 긴 후기가 될 듯싶네요. :) 0372 / 0933 ---------------------------------------------- 신상용 바바라의 들판은, 아직 오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흐릿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해는 여전히 하늘 한가운데 떠올라 있었지만, 어느새 몰려든 먹구름들이 햇빛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마치 비가 쏟아져 내리기 직전의 모습 같았다. 문득, 들판에 한 줄기 사늘한 바람이 불어 어딘가로 닿았다. 그리고 들판에 분 바람이, 한 무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때였다. 라라라라라라…. 라라라…. 라…. 찰랑! 찬란한 승리를 노래하던 물의 정령이 불어온 바람에 휘감겨 일거에 사그라진다. 그것을 시작으로, 형체를 이루던 액체는 점점이 흩어져 허공에 반짝이는 물보라를 수놓았다. 그런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 후에, 비로소 김유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멍하니 서 있는 그의 눈길이 얼굴이 어딘가를 망연히 응시한다. 하지만 한 번 짧게 숨을 들이키고는, 오른손을 들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잠시 후. 꾹 말아 쥔 손등에 한 문양이 나타남과 함께 황금빛 기운을 발하였다. 금색의 마력은 순식간에 전신으로 번져 방전 현상을 일으켰고, 이내 크게 솟구쳐올라 하늘 전체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흑운(黑雲)이 황운(黃雲)으로 변하는 과정은 가히 장관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어느덧 김유현의 전신은 황금빛으로 뒤덮여있었고, 새어 나온 마력의 전류는 허공을 찢어발길 듯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상태로 물끄러미 전방을 바라보는 태도는 담담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살짝 숙인 고개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입술은, 어깨는 미미한 떨림을 담고 있었다. 갑작스레, 김유현은 질끈 눈을 감았다. 이윽고 그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걱정, 고뇌, 구슬픔, 서글픔, 눈물…. 총체적으로 '슬픔'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이 그의 표정에 묻어 나오고 있었다. “…….”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김유현은 말아 쥐었던 손을 활짝 피었다. 그리고 조용히 입술을 떼었다. “극(極).” 번쩍! 한순간 뇌성을 동반한 빛이 세상을 환히 밝혔다. 그리고 비로소, 김유현은 약간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어느새 뜬 눈에서 진한 노란색 안광이 실 가락처럼 흘러나온다. 이윽고, 김유현은 마치 목멘 사람처럼 목 울대를 움직였다. 그러다가 이내 뭔가를 토해내는 사람처럼 힘겹게 말을 잇는다. “뇌(雷)…!” 꾸릉, 꾸르릉! 그리고, 세상은 샛노란 빛으로 물들었다. 이어서 김유현의 로브 자락이 크게 펄럭여 올라간 순간. 꽈과광! 꽈과과광! 노랗게 물든 하늘에서, 들판을 뒤덮는 수백의 빛 줄기가 물 젖은 대지로 내리 꽂혔다. * 구름 사이로 비친 뇌광이 부근을 환히 밝혔다. 이제야 뭔가 이상한걸 느꼈는지,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던 적들이 일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곧바로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이미 때는 한참 늦었다. 뇌신(雷神)은 이미 힘을 발동한 상태였다. 꽈과광! 폭음에 가까운 뇌성이 들린 순간,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과 동시에 눈앞 시야가 하얗게 변하였다. 한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바로 마력을 일으켜 안력을 돋우었다. 그러자 하늘에 떠 있던 황금의 구름이 녹아내려 대지로 쏟아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벼락의 폭우였다. 쿵, 쾅! 쿵, 쾅! 쿵, 쾅! 쿵, 쾅! 짜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피부를 찌르는 따끔한 살기. 직선으로 추락한 벼락은 이내 흙 바닥을 거세게 내리쳤고 크게 파인 구멍을 만들었다. 그리고 적들이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대지를 흐르는 물을 타고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마치 전기로 이루어진 강줄기를 보는듯한 느낌이었다. - 으, 으아악! 으아아악! - 끄아아아아아아악! 이윽고 내려치는 뇌성에 이어, 찢어지는 비명의 합창이 도처를 울린다. 사방은 곧바로 아우성으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 흐악! 흐아아아아아아악! - 끄게레레레레레렉! 전기와 물이 이루어내는 시너지 효과는 실로 대단했다. 감전된 적들은 몸을 부르르 떠는 것도 모자라, 온몸이 시꺼멓게 타오를 정도였다. 하릴없이 스러져가는 숫자는 얼추 세어도 헤아릴 수 없다. 내 이동을 제한하려 빽빽이 서 있던 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나마 감전된 적들의 상황은 나을지도 모른다. 벼락에 직격당한 불운한 놈들은 아예 형체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그저 일부 남아있는 육신의 파편이 끔찍한 결과를 알려주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꼿꼿이 선 채 지그시 주변을 응시했다. 지금 이 공간에 나도 서 있었고, 그렇기에 벼락을 피할 수 없다. 그에 따라 이미 수십의 사용자를 삼킨 황금빛 물길은 꺾어지듯 달려와,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나에게 흘러 들고 있었다. 파츠츳! 파츠츠츳! 이윽고 근접한 벼락의 물줄기는 거센 방전 현상을 일으키어 파도처럼 덮쳐 들었다. 파지직! 파지지직! 일순 짜릿한 마법 저항과 부딪쳐 짜릿한 파문이 일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비끼듯 스쳐 지나가 유유히 흘러나간다. 형의 마력 조절 능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나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마법 저항 능력만 믿을 수는 없다. 해서 언제든 화정의 힘을 뽑아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형의 고유 능력. 뇌신. 뇌신의 능력은 시야에 대한 증가와 마력 조절 능력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백미는 '증폭'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뇌신의 힘을 빌어 자신의 능력에 대한 범위와 파괴력을 큰 폭으로 넓히는 것. 이것은 단순한 증폭과는 비교할 수 없다. 이름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신'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이상 내가 지닌 화정(火正)과 비슷한 반열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 푸하! 놀고 있네. 이까짓 게 나랑 비슷하다고? '응?' 그때였다. 내면에서 들린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한순간 하늘에서 다시 벼락이 내리쳤고, 또다시 내리친다. 벽력(霹靂)과 대지가 마찰하는 소름 끼치는 소음에 나는 곧장 의문을 접고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꽈꽝! 꽈꽈광! 꽈꽈꽈광! “…….” 벼락은 끊이지 않고 내리쳤다. 꼭 누구 맘대로 감히 내 동생을 몰아붙였느냐고 화를 내는 것처럼, 형은 일말의 틈도 주지 않고 연거푸 벼락을 쏟아 부었다. 마력을 돋운 안력임에도 희뿌옇게 보이는 시야에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제는 비명도 들리지 않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감은 채 기척에 집중하고 있을 즈음, 이내 주변을 울리던 진동이 서서히 잦아드는 게 느껴졌다. 그 상태서 한동안 더 눈을 감고 있다가 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고오오오오오오오…. 줄곧 내리치던 벼락은 어느새 뚝 멈춘 상태였다. 주변은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연기가 잔뜩 끼어 흐릿했다. 충격으로 일어난 흙먼지들이 부근을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차차 가라앉을 즈음, 비로소 내가 주변의 광경이 완연히 눈에 보였다. 문득, 바삭바삭 타오르는 냄새가 코를 찔러 들었다. 그을린 흙. 용암이라도 흐른 것처럼 쩍쩍 갈라진 대지. 군데군데 널브러진, 시꺼멓게 타버린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시체. 그랬다. 최소 반경 100미터 안으로 나 말고 서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죽일 듯 노려보던 적들이, 마치 거짓말처럼 한꺼번에 사그라진 것이다. 말 그대로 잿더미….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렇게 불러도 오히려 부족할 만큼의 참상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놀라는 것도 잠시. 나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었다. 어차피 1회 차에 몇 번 보았던 광경이라 넋을 잃을 정도로 놀란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이대로 주저앉을 여유는 없다. 지금 이 상황은 형이 자신의 몸에 부담이 걸리는 것을 감수하고서 만들어준 소중한 기회였다. 믿어달라고 말한 주제에, 정작 얼빠진 모습을 보이면 그것이야말로 형의 믿음을 배반하는 것이리라. 그렇기에 이어지는 행동은 신속했다. 우선 재빠르게 '칼리고 아브락사스'와 '빅토리아의 영광'을 챙기었고, 바로 시선을 내려 아까 들었던 시체를 살폈다. 정령술사의 시체는 간신히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것뿐이었다. 내게 보였던 거만한 미소는 이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그러져 있었다. 나는 얼른 제 3의 눈으로 탐색을 실시한 후 복부를 향해 손을 밀어 넣었다. 이윽고 손바닥에 뭔가 딱딱하면서 차가운 기운이 전해지는, 동그란 구슬이 잡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바로 꺼내었다. 『물의 결정』 “역시 있었군.” 약간 그을리긴 했지만, '물의 결정'은 다행히 원형을 보존한 상태였다. 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구슬을 소중히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시간을 벌었다. 변수도 제거했다. 추가로 적들의 돌진을 죽이고 커다란 피해를 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적의 총 병력 1만 5천 명 전원에 해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범위에 닿지 않는 적들은 아마 잠깐 멈추고 우왕좌왕했다가, 그대로 달려나갔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도 지금쯤이면 비비앙이 어느 정도 방어진을 구축해두었을 터…. 그러나 나는 그쪽으로 가지 않는다. 아니. 가서는 안 된다.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최대한 버텨야 한다.' 현재 동부의 진영은 '정화의 해일'을 맞아 크게 흩어진 상태였다. 한곳에 몰려있는 게 아니었기에, 바쁘게 뛰어다녀야 한다. 이제 남은일은 내가 아는 사람들만을 구해내 최대한 빨리 방어진 안으로 데리고 가는 것. 차후 악마와 마족의 군세를 상대할 수단을 얻었다는 환희도 접어두고서, 나는 신속히 들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허공으로 하나의 잠재 능력을 띄웠다. 『전장의 가호(Rank : Extra)』 (설명 : …. 오직 전장 한정으로 발동하는, 한 명의 병사로서 누릴 수 있는 여신의 축복. 가호를 받은 사용자는 전장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넓은 시야를 얻으며, 위기에 몰린 아군의 위치를 곧바로 파악할 수 있다. 또한….) * 고막을 왕왕 울리는 소란을 느꼈는지, 신상용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이윽고 그의 눈이 서서히 떠졌다. 그리고 눈이 잘 보이지 않는지 한두 번 깜빡이다가, 습관적으로 주변을 더듬는다. 아마 머리맡에 부서진 안경을 찾는 듯 보였다. 마력으로 안력을 돋울 생각도 못한 채 한동안 안경을 찾던 신상용은, 이내 갑작스레 움직임을 멈췄다. 이윽고 짧게 열렸던 실눈이, 일순 화등잔만 하게 커지었다. 신상용은 아직 바닥에 널브러진 상태였다. '정화의 해일'에 휩쓸린 이후 줄곧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어…. 어….” 여전히 생각을 못하고 있는지, 간신히 고개를 든 신상용의 시선은 굽혀 든 오른손에 꽂혔다. 그리고 손바닥에 묻은 진득한 핏물을 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상체를 세웠다. “으, 으아아악!” 그러나 신상용은 몸을 일으키려는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자신의 몸을 덮고 있는 누군지 모를 시체를 보자마자 커다란 비명을 질렀고, 이내 다시 몸을 눕혔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다리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도 함께 밀려와, 그의 정신을 세차게 헤집었다. 그렇게, 갑작스레 맞닥뜨린 상황에 팔만 허우적거리고 있을 즈음이었다. “거기 누구 살아있지 말입니다?” 아직 앳된 여인의 음성과 함께, 신상용을 덮고 있던 시체가 데구루루 굴러 치워졌다. “괜찮지 말입니다?” “아…. 어…. 아…. 어….” 신음만 내뱉는 신상용이 답답한 모양이다. 여인은 바로 몸을 굽히곤 그의 어깨를 잡으며 외쳤다. 신상용은 거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참! 가만히 있지 말입니다! 아직 이곳까진 닿진 않았지만, 그래도 빨리 도망쳐야 하지 말입니다!” “사, 살려….” 여전히 신음만 내뱉는 신상용이 이상했는지, 다급히 훑어보던 여인의 눈빛이 일순간 번뜩였다. “이런…! 심하게 다치셨지 말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지 말입니다.” 여인의 힘이 제법 센지, 이윽고 신상용의 몸은 부축을 받아 번쩍 일으켜졌다. 그리고 그제야 그는 약간이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간신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도와준 여인을 돌아보자, 이내 젖살이 통통히 오른 귀여운 인상의 여인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얼굴 가득 흙을 묻히고선 뭔가에 쫓기는 듯 연신 뒤를 돌아보는 중이었다. “가, 감사….” “아아. 그건 나중에 받겠지 말입니다. 일단은….” 그때였다. 핑! 팍! “아악!” 어디선가 날아온 한 대의 화살이, 신상용을 부축하던 여인의 얼굴을 가열차게 꿰뚫었다. 그녀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몸을 허물어뜨렸고, 그에 따라 신상용 또한 겨우 일으킨 몸을 다시금 대지에 던질 수밖에 없었다. 두두두두두두두두! 그와 동시에, 신상용의 감각에 비로소 주변의 상황이 하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하하. 정령술사를 잡는 파트가 논란이 많았네요. 이번 후기는 가장 많이 들어왔던 의문을 답변하는 시간으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1. 왜 혼자서 개 고생을 하는가. 현재 동부, 특히 서문 부대의 상황은 굉장히 어지럽습니다. 마력의 사용에 일부 제한을 받는 '마탄'에 맞았고, '정화의 해일'에 맞아 서서히 회복하고는 있지만, 그것에 크게 휩쓸린 탓에 전열이 굉장히 어그러진 상태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적들 1만 5천 명은 일거에 서문 부대 쪽으로 달려 나왔고, 그에 반해 서문 부대는 5천 명은 사방팔방 흩어진 상태이지요. 전투력 또한 급감한 상황이고요. 그럼 잠시. 368회에 이런 내용이 나오죠.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까? 지금의 나와 형은 혈혈단신(孑孑單身)이 아니다. 머셔너리와 해밀이라는 클랜의 로드이고, 각 울타리 안에 있는 사용자들을 이끄는 입장이었다. 1회 차에서 나 때문에 목숨을 버렸던 해밀 클랜원들이나, 2회 차에서 나를 믿고 따라온 머셔너리 클랜원들은 나와 더 이상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홀 플레인의 대명제(大命題).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다. 이러한 명제 아래, 나는 여럿을 생각했고 그에 따라 결정할 수 있었다. 즉 '형'이라는 단수에서 '그들'이라는 복수로 의미를 확장한 것이다. 그러나 말할 것도 없이, 그들 모두를 살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나였지만, 난 그 모든 것을 고려하고서라도 최대한 많이 살릴 수 있는 길을 선택했다.' 김수현은 혼자서 도망치거나 형과 둘이 도망치는 게 아닌, '자신이 아는 사람들(해밀, 머셔너리 클랜원들.)을 살리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고요. 시간은, 바로 동, 남, 북문에 있던 지원 부대가 도착하기까지 버틸 시간이요. 현재 적들은 탈주를 위해 성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나온 상황입니다. 북 대륙을 모조리 휩쓰는 게 주된 목적이 아니라, 서 대륙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그것에 대응한 김수현의 계획은 이렇습니다. 1. 김수현이 거인, 물의 정령술사를 제거해 시간을 벌고, 가능하면 최대한 피해를 입힌다. 2. 그 사이 비비앙이 2개의 군단을 소환하고, 주변 사용자들은 최대한 끌어들여 버티기를 위한 방어진을 구축한다. 3. 김수현이 돌아와 '전장의 가호'를 최대한 이용해, 흩어진 아는 사람들을 찾아 방어진으로 데려간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김수현은 방어진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전장을 돌아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적들이 북 대륙의 몰살이 아닌 도주가 목적이라면, 김수현은 방어진이 세워진 곳보다는 세워지지 않은 곳으로 몰릴 것이라 계산했습니다. 그래서 거인과 정령술사를 필히 죽여야 했던 겁니다. 방어진을 더욱 용이하게 만들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고, 혹시라도 방어진을 위협할만한 최대 변수를 제거하기 위해서요.(마수들보다 강한 정령의 군단이 방어진을 덮친다면 그때는 제법 난감한 상황에 빠질 테니까요.) '물의 결정'은 덤, 또는 부차적인 이유에 불과합니다. 물론 굳이 들어가지 않고 바로 방어진을 세우고 아는 사람들을 찾는 방법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신속히 들어온 적들을 맞이했을 것이고, 어느 정도의 시간을 방어진 안에서 보냈어야 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때는 구하지 못한 '아는 사람'들에 대해선 이미 늦었을 가능성이 농후했을 겁니다. 지금도 늦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만, 김수현이 고생해서 번 시간으로 그 차이를 어느 정도 줄였습니다. 상황은 아직도 불리합니다. 다만 김수현의 입장에서, 효율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길을 선택한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PS. 후반부에 화살에 맞은 여인은 일전에 김수현과 불침번을 섰던 여인입니다. 이름은 노유미라고 내용에 언급되었죠. :D 0373 / 0933 ---------------------------------------------- 신상용 “시몬. 갑자기 왜 그래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시몬을 부르는 유리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러나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청년을 보는 눈길은, 약간이지만 숨길 수 없는 초조함이 섞여 있다. 그것은 비단 유리나뿐만이 아니었다. 들판을 한창 달리던 도중 시몬이 갑작스레 걸음을 멈춤으로써, 일대의 사용자들 또한 달리는 것을 정지한 것이다. 그들의 시선 또한 하나같이 한 청년, 시몬에게 쏠려있었다. “시….” “쿠샨 토르가 죽었네요?” 그때였다. 보다못한 유리나가 한 번 더 입을 연 순간, 비로소 시몬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리었다. “그리고 정령들도 사라졌어요.” 이윽고 천천히 몸을 돌린 시몬이 살며시 얼굴을 드러내었다. 유리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살짝 뜬 실눈 틈으로 보이는, 마치 악마와 같은 새빨간 눈동자. 그리고 히죽 끌어올린 입 꼬리. 언제나처럼 싱글벙글한 얼굴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아슬아슬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비교적 오랫동안 최 측근으로 활동해온 만큼, 유리나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시몬 그라임스의 심기가 매우 거슬린 상태라는 것을. “씨발, 짜증나네요.” 이어서 툭 던진 한 마디. 평소 그의 언행을 비추어볼 때, 방금 전 욕설은 시몬으로써 굉장히 이례적인 언사였다. “왜 우리가 고작 한 놈한테 쳐 발려야 하는 거죠?” “시, 시몬….” “왜 내가 짠 판이 그 한 놈한테 좌지우지되는 거야?” “…….” 유리나는 간신히 꺼내려 했던 말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더 입을 열지 않기로 결심했다. 시몬이 이성을 포기하는 순간 원래 모습과는 180도 달라진 태도가 드러난다. 그 모습을 한두 번 본 기억이 있어, 그녀는 더는 그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게 상책이라 여겼다. 이후,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것은 비록 몇 분에 불과했지만, 누군가 에게는 생명 줄이 될 수도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또 누군가 에게는 이대로 흘려 보내기 아까운 천금 같은 시간이었다. 그 동안 잇따라 숨을 가쁘게 내쉬던 시몬은, 이내 살얼음 같은 미소를 띠운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시몬의 걸음이 향한 곳은 부랑자, 그 중에서도 수뇌부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 탁 트인 들판을 질주한다. 시꺼멓게 탄 시체들을 밟아 가로질러, 정령과 마수가 전투하던 지역마저 단숨에 지나친다. 그에 따라 나 또한 덩달아 가슴이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까 전 별 고생을 다하고 나서 겨우겨우 한 걸음 내디뎠던 게,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기세를 몰아 나는 더욱 거침없이 질주했고 이내 전장의 초입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전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한 번 재빠르게 훑어본 결과, 상황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원래 이곳을 채웠어야 할 놈들이 전부 나자빠져서 그런지, 적들이 그다지 많이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내 시선이 닿는 곳에 한한 말이었지만…. 아무튼 상황은 생각보다는 좋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다. 도착한 곳이 아직 초입에 불과하기도 했거니와, 이 정도로 적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곳으로 몰려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한숨을 쉬고 나서 고개를 들었고 저 멀리까지 샅샅이 훑었다. '있다.' 그리고, 이윽고 한 지점에서 언뜻 비비앙이 구축한 방어진을 발견했다. 비록 점으로 보이기는 했지만, 거대한 사티로스가 날뛰고 있는걸 보니 내 명령을 제대로 수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문득 방어진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마음과는 다르게 내 몸은 이미 다른 방향을 향해 달리는 중이었다. '단 한 걸음이라도 낭비하면 안 된다.' 아까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다. 지금의 나에겐 쉴 틈 따위는 없다. 내가 조금이라도 지체하는 순간,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살리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전쟁터란 그런 곳이었다. 그렇게 간간히 보이는 사람들을 지나쳐, 10분을 달리기만 했을까. 전장의 초입에서 내부로 들어가면서 나는 '전장의 가호'가 전해주는 정보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한 번에 수천에 해당하는 위치 정보가 흘러 들었고, 그에 따라 머리에 현기증이 도는 것을 느꼈다. '설마…. 여기 있는 전원을 아군으로 판정한 건가?' 부단히 달리면서,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이내 내가 원하는 사용자들을 하나씩 떠올리자, 들어온 정보는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가까운 곳에 위치가 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은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천만다행이었다. 이제부터 그들의 위치를 하나하나 되새기고 이동할 경로를 계산해야 한다. 중구난방 식으로 가는 것보다는, 최소한의 경로로 최대한의 효과를 거두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한 자리에 머물러있을 것이란 보장이 없었기에,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난감함이 앞섰다. 퍼벙! 퍼벙! 잠시 후. 미약한 폭음이 들리는 것과 함께 대지에서 미미한 떨림이 이는 게 느껴졌다. 나는 바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눈앞으로 보이는 사용자들의 수가 점차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드디어 적들이 몰려든 곳으로 진입을 시작한 것이다. 그 증거로, 약하게 들리던 비명이 이제는 더욱 확실히 귀에 들어오고 있었다. - 죽어라! 이 개 자식들! “으, 으아아악!” 그때였다. 한쪽에서 세게 터져 나오는 비명에 고개를 돌리니, 족히 수십 명은 되어 보이는 적들이 살기등등한 얼굴로 휘젓는 광경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비로소 전쟁터다운 광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 그것은, 어느 한 곳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이래서야 처음 초입 때 봤던 방어진 부근이 어린애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검에 베여 고통에 신음하는 자. 날아오는 마법에 바닥을 뒹구는 자. 쏘아진 화살에 그대로 몸을 허물어트리는 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사제를 부르짖는 자. 상황은 초입과는 다르게 진정으로 엉망이었다. 사방팔방 중구난방 격으로, 이곳저곳에서 난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쪽은 미친 듯이 몰아붙이고, 다른 한쪽은 미친 듯이 반항한다. 말 그대로 미친놈들이 벌이는 피의 축제였다. 심지어 아군 적군의 식별은커녕 그 무엇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한 와중에, 나는 안구에 마력을 가득 돋운 채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내가 아는 사람은…. '없다.' 육안으로나 '전장의 가호'로나 내가 아는 사람은 주변에 없었다. 그렇다면 여기는 그냥 통과. 나는 적들에 휩쓸리는 사용자들을 철저히 외면한 채 바로 그곳을 지나쳤다. 핑! 피핑! 그러나 지나치는 순간 어디선가 눈먼 화살이 등을 노리고 들어왔고, 나는 고개를 가볍게 돌림으로써 그것을 피해내었다. 그에 이어 마침 앞을 가로막은 적을 일수에 처리하고 달리자, 이번에는 거의 기백 명 몰려있는 적들이 눈에 밟힌다. 나는 지체 않고 있는 힘껏 대지를 박차 올랐다. 퉁! 배꼽이 쏠리는 느낌과 동시에, 몸은 포물선을 그리듯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몰려있던 적들을 간단히 뛰어넘어 곧바로 대지로 하강한다. 그렇게 발이 땅에 닿으려는 찰나, 나는 바로 착지하지 않고 약간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대로, 마치 슬라이딩 태클을 하는 것처럼 미끄러지듯 몸을 던졌다. 쭈르르르르르르륵! 파파팍! 파파파팍! 관성의 힘을 빌어 대지를 밀고 나가자, 뒤에서 뭔가가 거세게 박혀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내 속도가 더 빨랐는지 쏘아진 화살은 터럭만큼도 나를 건들지 못했다. 전장은 넓다. 그런 만큼 적 또한 넓게 분포되어있다. 더구나 나 홀로 타깃이 아니라, 널리고 널린 동부의 사용자들도 같이 타깃에 포함된 상태였다. 수천의 적들을 돌파하고 집중 사격도 버텨낸 나였다. 그렇기에 이렇게 주의가 분산된 전장을 돌파하는 것은, 적어도 그보다는 훨씬 쉬운 일이었다. 이윽고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렸다 싶을 즈음, 나는 스프링처럼 몸을 일으켰고 다시 바로 달렸다. 아니. 달리려고 한 순간이었다. 『사용자 임한나에 대한 위치 정보를 갱신합니다.』 '어?' 한순간 '전장의 가호'가 전해주던 정보가 갱신되었다. 방향은 북동쪽으로 45도. 거리는 90미터 남짓. 일순 '전장의 가호'의 자체 판정에 대한 의문이 들었지만, 나는 비로소 첫 번째 구출을 시작할 지점을 정할 수 있었다. 우선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임한나를 구출하고, 그곳을 시작으로 최대한 겹치는 동선을 고른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곧바로 방향을 틀어 달리기 시작했다. 있는 힘을 다해 달려서 그런지 90미터의 거리는 순식간에 줄어들기 시작했다. 가는 방향으로 임한나의 기운이 점차 가까워지는 게 느껴진다. 그러더니 곧 한껏 상승한 시력에 임한나와 일단의 무리들이 잡히었다. '호.' 그곳에는 족히 스무 명은 넘어 보이는, 제법 많은 수의 사용자들이 모여있었다. 내가 벌어준 시간을 잘 활용한 모양이다. 그들은 천천히 이동하며 사용자들을 모으면서도, 자신들에 돌진하는 적들에게 거세게 반항하고 있었다. 번쩍! 번쩍! 번쩍! 번쩍! 그 중에서도 압권은 단연 임한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가 한 번 손을 놓을 때마다 섬광이 번쩍이고, 그에 따라 한 명의 적이 여지없이 몸을 무너뜨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따금 쏘는 커다란 빛 줄기는 후방에서 지원 중인 원거리 계열들을 착실히 저격하는 중이었다. 비록 '찬란한 섬광, 라우라 필리스'의 힘을 빌렸다곤 해도, 임한나는 거진 세 배에 이르는 적들에 맞서 균형을 맞추는 존재감을 보이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아무 탈없이 구출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나는 더욱 빠르게 발을 놀렸다. 그러나, 그때였다. 퍼벙! 퍼버벙! 슈슉! 슈슈슉! 한순간 반대 방향에서 날아온 마법과 화살이 그대로 임한나와 사용자들을 휩쓸었다. 아무래도 다른 방향에 있던 적들의 지원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쾅! 쾅쾅! “꺄악!” “으아아악!” 어찌어찌 버티던 무리는 일거에 흐트러졌다. 마법이 휩쓸고 간 자리엔 쓰러져 신음하는 사용자들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앞쪽 적들을 상대하기도 버거운 상황이었는데, 기습적으로 들어온 지원에 한순간 틈을 내준 것이다. 간신히 유지하던 전열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달려든 적들은 괴성을 터뜨리며 점령을 시작한다. 그것은 임한나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미모에 혹했는지 아니면 당한 게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녀의 주위로 특히 적들이 몰려드는 게 보였다. 그러더니 한 놈이 비열한 웃음을 내비쳤고, 이내 휘파람과 함께 발을 들어 임한나의 가슴을 꾹 짓밟는다. 그녀는 분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감은 눈에 한 줄기 눈물이 흐르는 순간, 나는 간신히 임한나를 사정거리 안에 포착할 수 있었다. “임한나!” 혹시 모를 자살을 막기 위해 한 번 크게 소리친 후. 나는 바로 몸을 웅크렸다가, 궁신탄영으로 튀어나갔다. 내가 소리친 것을 들었는지 적들은 일순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었다. 그러나 나와 시선을 마주친 순간, 나는 바로 '빅토리아의 영광'을 내리그었다. 첫 타깃은 임한나를 짓밟은 놈이었다. 푹적! 검은 정수리를 쪼개어, 헤 벌린 입까지 깔끔하게 파고들었다. 그대로 놈이 몸을 허물어트리는 것과 함께, 나는 힘껏 마력을 일으켜 빈 허공을 후려갈겼다. 뻥! 꿀렁! 순간적으로 허공이 크게 일렁였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일렁인 허공은 마력의 파동으로 변해 주변에 있던 부랑자들을 무차별적으로 덮쳐 들었다. 콰콰콰콰! 내 공격 또한 기습의 일종이어서 그런지, 파동은 여러 명의 신체를 거침없이 자르며 들어갔다. 적들을 한 바퀴 돌고도 힘이 남아, 포착한 범위 밖까지 멈추지 않고 흘러나간다. 곧이어 여기저기서 핏물이 왈칵 터져 나옴과 동시에 때늦은 비명이 튀어나왔다. 나는 운 좋게 살아남은 두 명을 재빠르게 처치한 후, 멍하니 올려다보는 임한나를 일으켰다. “사용자 임한나. 괜찮습니까?” “수, 수현씨!” 임한나는 짓밟힌 부분이 아픈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이내 한 손을 가슴에 대곤 애틋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 어떻게…. 수현씨…. 아, 아니. 머셔너리 로드!” 임한나는 무척 고마우면서도 반가운 얼굴이었다. 나 또한 반가웠지만 상황이 급했다. 나는 해후를 나눌 새도 없이 바로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설명은 나중에. 지금 상황은 알고 계시죠?” 그러나 내 다급함을 느꼈는지, 곧바로 얼굴을 가다듬곤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사용자 임한나. 지금 이쪽 정면에는 적이 몰려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왼쪽 사선으로 빠지시고, 어느 정도 적이 보이지 않게 되면 다시 오른쪽 방향으로 달려가세요. 그곳에 방어진이 있습니다. 그쪽으로 가서 합류하시면 됩니다.” “네? 방어진이요?” “비비앙과 제 형이 구축한 방어진입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주변 사용자들도 제법 모아놨을 겁니다. 지금은 거기가 제일 안전해요.” “네. 알았어요. 그럼 그쪽으로 가면 되는 거죠?” 확실히 상황을 이해하는 거나, 판단이 빠르니 마음에 들었다. 아마 눈앞 여인이 임한나가 아닌 안솔이었다면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안솔.' “예. 그럼 먼저 가있도록 하세요.” “네, 네? 잠시만요! 같이 가시는 게 아니라요?” “미안합니다. 하지만 다른 클랜원들도 찾아봐야 합니다.” “!” 아마 정하연, 신상용, 안현, 안솔, 이유정 등이었다면 내가 데려다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임한나는 궁수 사용자인만큼, 방향만 가르쳐줘도 혼자서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사용자였다. “그럼.” “머셔너리 로드!” 임한나가 나를 붙잡는 게 들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애들의 걱정에, 나는 눈인사를 건네곤 바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나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다음 타깃은….' 탁탁탁탁! 그러나. 나는 잠시 달리는걸 멈출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등 뒤로 나를 따라오는 임한나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어이없는 기분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사용자 임한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나도 갈래요. 같이 가요.” “…네?” “나도 머셔너리 로드…. 수현씨랑 같이 가겠다고요!” 임한나의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크게 눈살을 찌푸렸다. “헛소리하지 말고…!” “싫어! 나보고 또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으라고?” “……?” “이대로 또 잃느니, 또 지켜만 보느니…. 따라갈 거야. 이번만큼은 무조건 따라갈 거야!” 소리치는 임한나의 얼굴에는 사뭇 아련함이 감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평소에 보이던 상냥함과는 전혀 다른 그녀의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문득 예전 임한나가 한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말 편하게 해주세요. 아. 저는 존댓말을 써도 될까요?' '제 운명을 개척해보고 싶어서요.' “…….” “…….” 이윽고 아주 잠시 동안, 나는 임한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꼭 깨물린 입술 위로 보이는 임한나의 눈동자는, 눈에 보일 정도로 확연한 떨림을 보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원래는 김수현에 이어 신상용의 시점을 넣으려고 했는데, 다음 회 내용과 일부 바꿨습니다. 후기에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과제가 있습니다. 난 혼자죠. 비 내리는 오늘. 김태우의 하고 싶은 말 노래가 참 좋더라고요. 히히힣. 히히히힣! 0374 / 0933 ----------------------------------------------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 눈을 마주친 채로, 약 5초의 시간이 흘렀다. “좋습니다.” 그리고 난 바로 마음을 바꾸어, 같이 가겠다는 요청을 허락해주었다. “아…!” 그러자 미약한 탄성과 함께 추어 올라간 눈썹이 둥그렇게 휘어진다. 잠시 후, 꾹 맞물리었던 임한나의 입술에 이내 환한 미소가 서리었다. “수현씨! 저, 정말이죠? 정말이에요?” 임한나는 한층 밝아진 얼굴로 안도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고개를 들어 한쪽 허공을 응시했다. 바라본 공간에는, 조금 전 들어온 '전장의 가호'가 알려주는 새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사용자 정하연의 정보를 갱신합니다.』 정하연의 정보가 갱신되었다. 나는 신속히 거리 및 방향을 가늠했다. 그러자 임한나 때와 거의 비슷한 정보가 갱신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두 번 생각 않고 정하연을 다음 구출 타깃으로 결정했다. 그렇게 마음을 결정한 후, 비로소 나는 임한나를 쳐다보았다. 결정을 내렸으니 이제는 행동으로 옮길 차례였다. “예.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네? 조건이요?” “동행하는 동안 무조건 제 말에 따라야 한다는 것. 이것을 지킬 자신이 없다면, 절대로 동행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그럼요. 꼭 지킬게요.” 내 으름장에 임한나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보였던 반항은 벌써 잊은 모양이다. “약속해요. 같이 가게만 해주신다면….” “…….” 솔직히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은 태도는 매우 미덥지 못하였다. 그러나 지금 임한나가 해줄 일이 하나 생겼기에,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미동도 않은 채 나를 올려다보는 여인의 몸에 손을 대어, 공주님 안기로 번쩍 들어 안았다. 임한나는 약한 비명을 내질렀다. “어, 어머!” “그것이 설령….” “머, 머셔너리 로드…?” “동행 도중 돌아가라는 말이라고 해도. 따르셔야 할 겁니다.” 임한나는 애꿎은 눈만 깜빡였다. 하지만 이내 눈꺼풀을 슬며시 내리었고, 천천히 두 팔을 내뻗어 내 목을 감싸 안는다. 이윽고 목 부근으로 매끈한 손길이 느껴질 즈음, 나는 지체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저…. 저도 충분히 잘 달릴 자신 있는데….” 느지막하게 이어진 불만은, 내가 제 속도를 내는 순간 곧바로 사그라졌다. 임한나의 민첩 능력치는 92포인트. 나와 6포인트만큼의 차이를 갖고 있다. 물론 92도 굉장히 빠른 속도를 낼 수 있겠지만, 여러 장비들의 보조를 받는 나와는 속도에 큰 차가 있는 게 사실이었다. 더구나 적들을 일일이 상대하는 게 아니라 최대한 지나치면서 가고 있으니, 지금으로서는 그녀를 안고 가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챙, 챙챙! 퍼벙, 퍼버벙! 전장을 안쪽으로 가로지르면 가로지를수록, 처참함의 정도는 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흡사 폭격이 쏟아지는 것처럼 화살과 마법이 퍼부어지고, 군데군데 솟아오른 짙은 연기는 수십 미터나 피어오르고 있었다. “도망치지 말고 모여! 모이라고!” “자, 잠시만! 가지마! 살려줘! 살려달라…. 끄, 끄아악!” 전투를 치르며 적들의 학살에 최대한 반항하는 소리. 어딘가에 쓰러져 구조를 요청하는 소리. “머, 머셔너리 로드….” “…….” 폭음부터 이어지는 여러 소리들이 동시에 아른거리듯 흘러들었다. 하지만 나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것을 모조리 지나쳤다. 폭격은 피하고, 적이 보이면 뛰어넘는다. 지금 내 신경은 오롯이 구출에만 집중되어있었다. 다른 사용자들이야 어떻게 되든, 뭘 하고 있든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아는 사람들을 챙기는 것만해도 지금의 나에게 벅찬 일이었다. 그렇게 있는 힘껏 달리던 도중, 문득 볼을 아주 살짝 쓸어 내리는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문득 고개를 내리자 나를 멍한 눈초리로 올려다보는 임한나 눈동자가 보인다. 하지만 시선이 마주친 것도 잠시였다. 내가 다시 고개를 드는 것과 동시에, 그녀도 시선을 돌리고 손을 내리었다. “피가…. 묻어있어서….” “…….” 이내 아래서 들려오는 미미한 목소리에 약간이지만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그녀는 기껏 따라오겠다고 해주었지만, 나는 오히려 곧 돌려보낼 예정이었다. 다음 구출 타깃으로 정하연을 선택한 만큼, 그녀가 방어진까지 잘 도착할 수 있도록 동행을 부탁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왔다 갔다 할 필요 없이 바로 다음 타깃으로 이동할 수 있을 테니까. '이해해주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생각하여, 나는 눈앞에 솟아오르는 재 섞인 연기로 거세게 뛰어들었다. 정하연과 떨어져있던 거리는 임한나와 만났던 지점을 기준으로 110미터. 이곳만 지나친다면, 바로 2차 구출 지점이 나올 것이다. 어느덧 다다른 목표 지점에 나는 한 번 숨을 삼켰다. 이윽고 얼굴에 달라붙는 잿가루들과 함께 시야가 검게 변했다. 하지만 연기를 뚫고 나오자마자 다시 회복되었고, 그 순간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여전히, 비명은 들려온다. 나는 조용히 임한나를 내려놓곤 부근을 둘러보았다. 이미 한바탕 크게 휩쓸고 갔는지 커다랗게 몰려있는 적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 만큼 부근에 서 있는 사용자 또한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보이는 거라곤 대지를 흐르는 핏물과 그 위를 장식하는 수많은 시체뿐이었다. 그리고 정하연의 정보는 바로 이 시쳇더미에서 확인되고 있었다. 한순간 마음이 덜컹했지만 나는 재빠르게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그에 이어 정하연이 느껴지는 곳으로, 무수한 시체의 더미를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사용자 김주연(사망)』 『User Kaisa Matthew(사망)』 『사용자 신현태(사망)』 『User Brian James(사망)』 『사용자 김아영(사망)』 『사용자 정하연(치명상)』 『…….』 『User Kate Bellamy(사망)』 『사용자 김지훈(사망)』 『사용자 한효진(치명상)』 『…….』 '찾았다.' 이윽고 정하연을 발견한 것과 동시에 그녀의 상태를 확인한 순간,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바로 달려나가려는 찰나였다. 옆에서 갑작스레 잡힌 마력의 흐름에, 잽싸게 '빅토리아의 영광'을 뽑아 검면으로 쳐올렸다. 텅! “아!” “쓸데없는 주의 끌지 마세요.” 임한나는 어딘가를 향해 '찬란한 섬광, 라우라 필리스'를 겨냥한 상태였다. 그러다 놓칠뻔했는지 황급히 붙잡고는, 이내 얼떨떨해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임한나에게 경계하고 있으라는 지시를 재차 내린 후, 나는 곧바로 시쳇더미로 달려들었다. 이미 어디 있는지는 파악한 상태였다. 거슬리는 시체들은 전부 발로 차고 넘기자, 이윽고 대지에 몸을 누운 채 창백한 얼굴을 한 정하연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결 좋던 푸른 머리카락은 피에 절여져 어지러이 흩어져있었다. 이어서 아래로 시선을 내리자, 그녀의 복부에 꽂혀있는 두 대의 화살이 보인다. 아마 지금 시냇물처럼 흐르는 피에는 그녀의 피도 일부 섞여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하연을 부여잡고 꼴사납게 우는 것보다는, 나는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다. 그녀의 몸을 넌지시 들어 화살촉과 깃대를 꺾어 부러뜨렸고, 몸만 남은 화살대를 쑥 뽑아 들었다. “으응…!” 한순간이었지만, 정하연의 몸이 미미하게 떨어 울렸다. 그러더니 감겨있던 눈이 살며시 열리었고, 간신히 드러난 푸른빛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아주 미약한 혼란의 빛이 스치는 게 나를 보고 있는지 확신이 안 서는 모양이다. 해서, 나는 먼저 말문을 열어주었다. “정하연. 고생했습니다. 이제는 안전해요.” 이윽고 정하연의 입술이 힘겹게 떼어졌다. “수….” 하지만 곧 힘이 부치는지 정하연은 끝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눈은 다시 감겼고 고개는 힘없이 떨어진다. 색…. 색…. 하지만 가늘게나마 이어가는 한 줄기 숨을 위안 삼으며 나머지 한 대도 마저 제거하였다. 그에 이어 나는 곧장 마력을 일으켰고, 배에 분포된 혈 몇 군데를 물 흐르듯 훑어 눌렀다. 잠시 후 흘러나오는 핏줄기가 순식간에 줄어들기 시작했고, 이내 멎었다. 그것을 확인한 후에야 나는 비로소 정하연을 안아 들어 몸을 돌렸다. “하, 하연이 언니?” 경계를 서고 있던 임한나도 정하연을 보았는지 크게 놀란 얼굴을 보였다. “어, 언니…. 어떡해…. 설마…?” “아직 안 죽었습니다.” 이윽고 고개를 번쩍 치켜드는 임한나를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천천히 팔을 내밀었다. 임한나는 잠시 갸웃했지만 그래도 얼른 활을 정리하고 정하연을 받아 들었다. 나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임한나. 조금 이르지만 동행은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네?” 임한나의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지만, 나는 그것이 이미 기정사실이라는 양 말을 이었다. “아까 말씀 드린 방어진의 위치는 기억하고 계시겠죠?” “그렇긴 한데….” “일단은 처음 만났던 지점으로 달려가세요. 적을 보게 되면 무조건 피하고, 화살과 마법에 조심하세요. 그리고 급하다고 절대로 전장을 가로지르려 하지 마십시오. 아까 말씀 드렸던 대로, 지점에 도착하면 바로 바깥쪽으로 빠지시면 됩니다. 일단 빠지는데 성공하면 적은 거의 보이지 않을 겁니다.” “…….” “그럼 정하연을 부탁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바로 몸을 돌렸다. 나라고 정하연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아직도 구해야 할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그렇기에 나는 복받쳐 오르는 뜻 모를 감정을 억누르고 다시 달릴 수밖에 없었다. 전장으로 돌입하기 전에 마음먹었던 것처럼, 지금의 나에게는 단 한 걸음도 낭비할 여유가 없었으니까. “자, 잠시만요!” 그때였다. 마지막으로 일러두고 바로 달려나가려는 찰나, 임한나의 다급한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그 행동에 부아가 솟구쳤지만, 나는 재차 몸을 돌리었다. 그러자 보이는 임한나의 태도는 가관이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가, 이내 정하연으로 시선을 번갈아 옮기는 중이었다. 임한나는 아마 여전히 나를 따라오고 싶은 듯 보였다. 그래도 아까처럼 대책 없이 억지를 부리지 않는 것은,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듯 보이는 정하연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마음의 결정을 내렸는지, 임한나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머셔너리 로드.” “?” “그냥…. 방어진에 같이 가시면 안될까요…?”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지금껏 참아왔던 감정이 크게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든 삼키려고 했지만 결국 몇 줄기 새어 나온 분노를 담아 나직이 입을 열었다. “사용자 임한나.” 화륵! 화르륵! “지금…. 제 말이 말 같지가 않습니까?” 그 순간, 임한나는 흠칫한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공포의 빛이 서리어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나도 모르게 분노를 필요 이상으로 분출했다는 실수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바로 새어 나온 기운을 몸에 갈무리하곤 지그시 임한나를 응시했다. 잠시 후. 임한나는 서글픈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가 이내 눈을 내리깔며 몸을 돌렸다. 이윽고 그녀는 정하연을 소중히 안은 채 그대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저 속도면…. 웬만해서는 잡히지 않겠군.' 삽시간에 거리를 떨어트리는 임한나를 보며,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그리고 마주 등을 돌리어 다음 타깃으로의 이동을 시작했다. * 해일에 맞고 눈을 뜨자 전장은 판이하게 뒤바뀌어 있었다. 퍼벙, 퍼버벙! “사, 살려줘!” 마법 소리. 이어지는 살려달라는 소리. 슈슉, 슈슈슉! “꺄아아아악!” 화살 소리. 또 이어지는 비명 소리. 안경을 끼지 않아 시야가 흐릿했지만, 귀에 들어오는 여러 소리들은 주변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휘몰아치는 복잡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신상용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아직도 자세한 건 모른다. 아니, 자세히 알아볼 겨를이 없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까. 뇌리로 아까 전 다시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들렸던, 여인의 찢어지는 비명이 계속해서 왕왕 울리었다. 그 순간 뭔가 모를 것에 닿으면 큰일난다는 생각에, 허벅지에서 밀려오는 심한 고통도 참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렸다. 신상용은, 오직 달리고 또 달렸다. “헉, 헉, 헉, 헉!” 그렇게 도대체 얼마나 달린 걸까. 어떻게 되어버린 걸까. 심장이 쿵쾅쿵쾅 요란하게 울리었고, 갑작스레 머리에 약한 현기증이 감돌았다. 정말 오래 달린 것 같은데, 전장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신상용은 절망했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진동에 전신이 마구 떨리는 게 느껴졌다. 볼에 눈물이 줄줄 흐르는걸 보니 자신도 모르게 흐느낀 모양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허벅지는 난로 앞에 있는 것처럼 뜨끈하고, 땀 비슷한 것이 주르륵 흐른다. 하지만 그것은 땀이라고 보기에는 온도가 높고, 미약한 점성이 있는 것이었다. 계속 달리던 도중, 신상용은 결국 치솟아 오르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피로 범벅 되어있는 오른 허벅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헉!” 그 순간 달리던 발에 뭔가 물컹한 게 부딪혔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치지지지지직! 내동댕이쳐진 몸은 이내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갔고, 그에 따라 대지에 얼굴을 세게 긁히었다. 일순 신상용의 안면에 따가운 기운이 느껴졌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 ───!” 갑작스레 들려오는 그리고 점점 거리를 줄여오는 고함 소리에, 신상용은 거짓말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허벅지가 아팠지만, 그저 도망쳐야 한다는 일념 하나가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 하지만 너무 늦은 걸까. 막 달리려는 순간, 신상용은 어깨를 짚는 거친 손길 하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찾아 든 죽음에 대한 공포와 함께,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헉, 형! 상용이 형! 헉, 헉!” 눈앞에 있는 안현을 볼 수 있었다. 그런 그의 뒤에는, 붉은빛이 감도는 기다란 머리카락이 허공에 휘날리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개인적으로 정말 쓰고 싶었던 신상용을 위한 챕터입니다. 전쟁은 곧 끝이 납니다. 원래는 이후 김수현이 한 번 더 구출하는 장면과 함께, 주인공을 제외한 다른 사용자들이 활약하는 장면을 담을 예정이었습니다.(그래야 구출에만 집중하고 있는 김수현의 시점에 해당 장면을 담을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빠른 전개를 위해서 그 부분은 생략하고, 신상용의 파트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김수현과 재회를 담을 예정입니다. 즉 구출하는 내용이 자세히 나오는 것은 정하연이 마지막이고, 이후는 간략히 언급되겠지요. 그 부분은 제가 최대한 조절해보겠습니다. 이번 챕터의 소제목은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 입니다. 그 중 마지막 1회는 신상용의 시점으로 찰나의 순간을 담은, 영화에서 '롱 테이크'와 비슷한 구성을 적용할 예정입니다. 이 챕터가 끝나면, 아마 다음 챕터에서 전쟁은 마무리 짓게 될 것 같습니다. 독자분들의 궁금함에 답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요즘 항상 늦어서 죄송합니다. 금요일은 제가 학교에서 가장 늦게 돌아오는 날입니다. 자정은 장담할 순 없지만, 조금 늦게 올리더라도 연재는 절대로 펑크내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0375 / 0933 ----------------------------------------------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 어느덧 주위에 들리던 비명이 점차 사그라져가기 시작했다. 떨리는 마음에 어깨를 잡은 이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그 순간 거센 몸부림을 치려던 신상용은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형!” 다시 한 번 울린 목소리는 매우 낯익게 들리는 음색이었다. 그러한 익숙함은, 헝클어졌던 신상용의 머릿속을 약간이나마 바로잡아 주었다. 그는 한두 번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조금은 진정된 시야 사이로, 자신의 어깨를 짚은 안현이 가장 먼저 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스산한 눈빛을 뿌리는 이유정이 서 있었다. “아, 안현군…. 유정양…. 다들 살아있었군요….” “예 형! 형도 살아있으셨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다행이에요….” 간신히 입을 뗀 신상용의 목소리엔 미약한 울음이 섞여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몸 안 가득했던 긴장감이 둘을 보자마자 썰물처럼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이어서 빈자리에는 안심이라는 감정이 대신 찾아 들었다. 당장이라도 다리가 풀어져 내릴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그는 가느다란 숨을 내쉬었다. “형! 마침 잘됐어요. 지금 큰일이 벌어졌어요. 형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요.” “그, 그렇지요. 큰일이지요. 아. 지금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일단 한시라도 빨리….”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던 신상용은 이내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그의 어깨를 부여잡은 안현이 고개를 빠르게 젓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요 형. 그게 아니에요.” “으, 응? 그, 그게 아니라면….” 안현의 다급한 부정에 신상용은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솔이, 솔이를 잃어버렸어요. 동생을 찾아야 해요.” 그리고 안현이 즉답하자마자, 막 신상용의 몸을 맴돌려던 안도감은 순식간에 반전했다. “예? 아, 안솔양을 찾는다니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 에요. 간신히 구출했었는데, 적들의 습격에 이리저리 휩쓸리면서 한순간 솔이를 놓쳤어요. 조금 전부터 계속 찾고는 있는데…. 어디 있는지 보이지가 않아요.” 비록 두서 없는 말이기는 했어도, 신상용은 안현의 말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순간 그의 속내에 절로 극심한 거부감이 일었다. 그에 이어 뜻 모를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과 동시에, 겨우 진정되었던 심장이 다시금 쿵쾅쿵쾅 요동치기 시작한다. 사실상 '정화의 해일'을 맞은 이후. 안현, 이유정, 안솔은 꽤나 극적으로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안현과 이유정은 정신을 차린 사용자들이 무리를 이루는 과정에서 운 좋게 만나게 되었다. 이윽고 일단의 무리는 중간중간 보이는 아군을 끌어들이며 이동하였고, 그 과정에서 안솔 또한 구출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분명 거기까지만 해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배를 넘는 적과 맞닥뜨리면서 무리는 와해되었고, 정신 없이 도망치던 와중 안솔의 행방이 묘연해지고 말았다. 이후 습격에서 가까스로 도망쳐 나온 인원에게 안현은 동생을 함께 찾아줄 것을 부탁하였고, 그들이 거절함으로써 둘만 빠져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모르는 신상용의 입장에서는 안현의 말이 무리라고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설령 알았다고 해도 생각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신상용은 지금껏 오직 살기 위해서 도망쳤다. 그런데 안현은 힘을 합쳐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전장의 안쪽을 돌아다니자고 한다. 그것은 범의 아가리에 스스로 머리를 들이미는 꼴이었기에, 그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탁이었다. 하지만…. “형! 도와주세요. 도와주실 거죠? 네?” 안현의 머리에 쓰인, '용맹의 투구' 사이로 새어 나오는 눈길이 신상용의 입을 막고 있었다. 시선에는 틀림없이 도와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신뢰가 담겨져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분명 무리라고 자신은 할 수 없다고 말을 해야 할 터인데, 눈빛을 마주하자 왠지 모르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문득 신상용의 머릿속으로 예전 클랜 하우스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헤헤. 상용이 형. 저 좀 도와주시면 안될까요?' '예, 예? 도와달라고요?' '예! 수현이 형이 저한테 시킨 일이 있거든요. 그런데 잘 모르겠어 서…. 도와주실 거죠?' '하하. 그, 그렇군요. 물론입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이어서 안현의 얼굴 위로, 아무 까닭 없이 그때의 일이 겹치었다. 신상용은 순간적으로 어찌할 줄 몰라 이유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아까부터 아무 말도 없이 빤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 태도는 평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항시 하고 다니던 머리띠는 온데간데없고, 눈동자는 전에 없는 진한 핏빛을 띠고 있다. 살기 충만한 이유정의 모습에 신상용은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형? 왜 그래요? 어디 다치셨어요?” 급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안현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마저도 신상용에게는 얼른 대답을 하라는 독촉으로 들리었다. 그때였다. “다쳤네.” 비로소 이유정이 첫말을 열었다. 그 말에 안현은 깜짝 놀라 손을 떨어트렸고, 이내 그녀가 가리킨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내렸다. “허, 헉. 허벅지가…!” “이래서야…. 조금 힘들 것 같은데.” 이유정의 조금 힘들 것 같다는 한 마디. 그 말은 수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그것을 느꼈는지 안현의 낯빛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그와는 반대로 뭔가 길이 보인다는 생각에, 신상용은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형…. 이런 상처로 지금까지…. 아프지 않으세요?” “그, 그냥 조금….” “하…. 어떡하냐….” “…….” 안현은 기다란 한숨과 함께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런 그를 보며, 신상용은 침을 꿀꺽 삼켰다. 신상용은 생각했다. 이제는 확실한 핑계가 생겼다. 이 정도의 상처라면 애들도 분명 이해해줄 거다. 아니. 오히려 이걸 빌미로 애들과 같이 탈출하자. 이대로 가면 둘은 틀림없이 죽을 테니까. 그러니 일단 자리를 피한다는 명분으로 이동하고, 나중에 안솔을 찾는다…. 이것은 둘을 위하는 길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나름대로의 합리화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신상용은 입을 열었다. “이, 일단은….” “안 되겠다. 아무래도 혼자서라도 안솔을 찾아야겠어요.” 그러나 막 말을 이으려는 찰나, 안현이 뭔가 단단히 결심한 얼굴로 신상용의 말을 끊었다. “지금 상용이 오빠 상태로는…. 잠깐. 뭐라고?” “알아. 그러니까 이유정. 네가 잠깐 형 좀 보살피고 있어줘. 안솔은 내가 어떻게든 찾아볼 테니까.” “미쳤어? 오버하지마.” “그렇다고 계속 이대로 있을 수도 없잖아. 언제 발견될지도 모르는 상황이고…. 그리고 돌아다니다 보면 사제를 발견할 수도….” 이윽고 옥신각신하는 둘을 신상용은 멍한 얼굴로 응시했다. 그와 동시에 부끄러운 마음이 한 가득 차 올랐다. 안현은 자기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자신은 그 진심을 배반했다는 생각에 묘한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그 순간이었다. 도저히 결론이 나지 않는 사면초가의 상황에 애꿎은 시간만 흘러갈 때. “오, 오빠아!” 갑작스레 들려온 안솔의 목소리에, 셋은 경악하며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들린 방향에서는, 총 네 명의 사용자들이 있었다. 그곳에는, 마치 거짓말처럼 서 있는 안솔과 한 여인이 서서히 거리를 줄여오고 있었다. * 푹! 한순간 맑은 빛을 뿜는 아름다운 검이 번개같이 허공을 갈랐다. 검 끝은 이내 사내의 목에 부드럽게 꽂히었다. 어찌나 빠른 속도였는지 그의 얼굴에는 아차 한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이윽고 사내의 시선이 서서히 아래를 향하였다. “!” 그리고 목에 꽂힌 검을 보는 순간 그 시선 그대로 몸을 고꾸라뜨렸다. 그와 함께 여인의 검이 거두어졌고, 긴 머리가 한 번 찰랑여 허공을 나부꼈다. 풀썩! 그렇게 마지막 적을 처치한 후, 고요한 적막이 주변을 감돌았다. 마지막에 쓰러진 사내를 포함해 바닥에는 총 열한 구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이내 그들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하나의 줄기를 이루어 흐를 즈음, 여인의 입술이 살며시 열리었다. “여기서 잠시 대기하도록 해요.” 여인의 말이 떨어지자, 그녀와 안솔을 제외한 5명은 순식간에 몸을 낮추었다. 그리고 각기 한 쪽 방향으로 등을 돌려 경계를 시작한다. 여인은 그 중앙에 서서 사방으로 날카로운 눈빛을 뿌리었다. “저….” “집중하세요. 그리고 앞만 보세요.” 안현은 잠시 등을 돌려 여인에게 말을 걸었지만, 되돌아온 반응은 냉랭하기 그지없다. 거기다 암암리에 느껴지는 상대하기 싫다는 기운에, 그는 소득 없이 고개를 돌리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그리고 어떻게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올 수 있었는지 궁금증이 일었지만, 여인은 일체의 질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게 맞을지도 모른다. 상황 설명은 나중에라도 들을 수 있었고, 지금 당장은 어떻게든 살아나가는 게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친 오빠라는 입장에서는 그럴 수만은 없어, 안현은 슬며시 안솔을 응시했다. 그녀는 중앙에서 멍한 얼굴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중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안현은 제법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야 한다는 의무감. 그리고 부상당한 신상용을 놔둘 수 없다는 진퇴양난의 기로에서, 행운은 다시 한 번 그를 도왔다. 그러나 재회의 기쁨도 잠시였다. 자신들을 보자마자 펑펑 울음을 터뜨린 안솔은 이후 계속해서 덜덜 떠는 모습만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뭔가에 굉장히 심한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안현은 생각했다. 정신 줄을 놓은 것 같지는 않다. 그나마 “저 언니가 구해줬다.”라는 대답과 신상용에게 간단한 치료 주문을 외우기는 했으니까. 하지만 정상이라고 생각하기도 어려운 모습이라 근심 어린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안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인의 말대로 일단은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 함께 이동을 시작한 이후 여인이 보인 능력은 굉장했다. 자신들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데 어디어디에 적이 있다고 미리 말해 피하거나,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릴 경우 홀로 수십의 적들을 처리하는 능력을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김수현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안현은 창을 다잡았다. 신상용을 만난 이후 거짓말처럼 조용해진 주변이었기에 뭉클뭉클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잠시 후. 중앙에 서 있던 여인에게서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매우 미약한 호흡이었지만 모두에게 똑똑히 들리었다. 그와 동시에 전원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윽고 여인의 입술이 열리었다. “혹시…. 이곳으로 오면서 적과 직접적으로 조우하지 않은 분 계신가요?” 그 말에 다들 서로 멀뚱멀뚱 쳐다본다. 여기 있는 대부분이 최소 한 번 이상의 위기를 겪었기에, 그런 사람은 없으리라 여긴 탓이다. 그러나 그때 한 사람이 슬며시 손을 들었다. 그 사람은 바로 신상용이었다. “저…. 직접적으로 조우하지는 못했습니다.” “…어느 쪽 방향에서 오셨죠?” “자,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눈앞에 적이 나올 것 같을 때마다 급하게 몸을 틀어서….” 신상용의 말을 끝으로 여인은 다시 침묵을 지켰다. 어느덧 고요했던 얼굴엔 한 줄기 숨길 수 없는 수심이 서리어 있었다. 그러더니 혹시나 하는 얼굴로 안솔을 응시했다. “거기 사제 분. 혹시 아까처럼 길을 알려줄 수는 없을까요?” 안현에게 말할 때보다는 훨씬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그러나 안솔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고, 여인은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결국 참다 못한 한 사용자가 입을 열었다. “거, 검후. 다시 이동은 하지 않는 건가요?” 그 말에 검후는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동할 수 없으니까요. 사방이 적이에요.” 검후의 대답에 질문한 사용자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 적이 보이지 않는데…. 그냥 지나친 게 아닐까요?” “글쎄요. 그냥 운이 좋은 거예요. 아니 좋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중간의 틈에 끼인 것 같네요.” “?”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기색을 느꼈는지, 남다은은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지나친 건 맞아요. 하지만 왜 그냥 지나쳤는지. 그 의미를 잘 모르겠군요.” 검후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왼쪽을 응시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이쪽에서는 훨씬 위험한 살기가 느껴져요. 적이 다가오고 있는 건 확실해요.” “…….” “아무튼 저라고 완전히 다 아는 건 아니에요. 그냥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폭풍의 눈에 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네요.” 그 말에 머리 회전이 빠른 사용자들 몇 명은 아 하는 탄성을 내질렀다. 폭풍의 눈이라는 말에 비로소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깨달은 것이다. 첫 습격에서 운 좋게 살아남기는 했지만, 사실상 살아남은 게 아니었다. “그, 그럼. 지금 우리는 포위된 건가요?” “의도적인 포위는 아니지만요.” “그럼 만약 계속 이 상태가 유지된다면….” “죽는 거죠.” 검후는 명료히 대답했다. 그 순간 안솔은 조용히 울음을 터뜨렸다. “어엉….” “…….” “오라버니이…. 수현 오라버니이…. 어어엉….” 서글픈 흐느낌이 이어졌지만 아무도 말릴 생각을 못했다. 겨우 살아남았다 싶었는데 다시 위기에 봉착해 일순 힘이 빠졌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머셔너리 클랜원들의 마음 또한 무척이나 착잡해졌다. 지금 그들의 머릿속에는 동시에 한 사용자가 떠오르고 있었다. 만약 클랜 로드가 있었다면…. “수현?” 그때 안솔의 흐느낌 사이로 들리는 한 이름에, 남다은이 퍼뜩 고개를 돌렸다. “아. 예.” 옆에서 신상용이 대답했다. 그러나 남다은은 그를 보지도 않은 채, 여전히 안솔에게 시선을 고정한 상태였다. “사용자 김수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머셔너리 로드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맞습니다. 우리들의 클랜 로드입니다.” 그제야 남다은이 눈이 동그랗게 변하였고, 신상용을 돌아보았다. 그때였다. “!” 남다은은 서서히 자신들 쪽으로 이동해오는 무리를 느꼈는지, 황급히 고개를 돌리었다. 잠시 동안 정면을 응시한 그녀는 이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적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어요.” 그 말에 안솔은 울음을 그쳤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아무래도 피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네요.” ============================ 작품 후기 ============================ 독자분들의 상황 이해를 위해 잠시 후기를 빌리겠습니다.(내용에 넣어보기는 했는데, 그러면 설명이 너무 많아져 일부러 삭제했습니다.) 현재 안현, 안솔, 신상용, 이유정이 있는 위치는 전장에서 가장 위험한 위치입니다. 방어진과는 가장 멀리 떨어져있고, 적들이 가장 많이 몰린 곳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적의 수뇌부들이 지나가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 탓에 전위 부대가 먼저 돌격하여 후위 부대에 있는 적의 수뇌부들을 위해 안전하게 길을 뚫어놓은 것이지요. 즉 가는 방향으로 오른쪽에는 전위 부대가 지나쳤고, 왼쪽에는 후위 부대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앞뒤로는 적들이 분포되어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분포되어있는 이유는,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것에 대응해 적들 또한 여러 무리로 나뉘어 제압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7명은 운 좋게 사각지대에 잠시 머무를 수 있었던 것이고요. 휴. 다음 회를 완성하기 전까지는 조아라에 들어오지 않겠습니다. 0376 / 0933 ----------------------------------------------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 뿌우우…. 뿌우우…. 미약한 뿔 피리 소리가 일대의 대기를 타고 흘러들었다. “이런. 또 신호가 왔네. 그럼 얼른 가보겠수다.” 그러자 한 사내가 꾸벅 머리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는, 앞쪽으로 몸을 돌려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그러자 스물 남짓한 부랑자들도 그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삽시간에 점으로 변한 그들을 보며 시몬 그라임스는 살며시 고개를 갸웃했다. “흠.” “왜 그래요? 시몬?” “아. 뭔가 조금 석연치 않아서요.” “응? 뭐가 석연치 않은데요?” 유리나의 질문에 시몬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뻘겋게 물들은 안구로 주변을 쓱 훑어봤을 뿐. “신호는 확실히 들렸는데…. 혹시 저놈들이 거짓말이라도 했나요?” “신호는 저도 들었어요. 거짓말을 한 것 같지는 않고요. 그런데….” 시몬은 다시금 말을 끊었다. 그런 그의 눈에 일순 붉은 자위가 한 번 희번덕거렸다. 혹시라도 또 이성이 흔들릴까 봐 걱정됐는지 유리나는 얼른 다가가 시몬의 등을 상냥히 쓸어 내리었다. “너무 괘념치 말아요. 지금은 우리들 도망치는 것만 신경 쓰자 고요. 그리고….” 유리나는 설핏 고개를 들어 오른쪽을 응시했다. 그러자 아까 사내를 따라가지 않은, 아직 남아있는 부랑자 몇 명이 은근히 시선을 피하였다. “설마 도망이라도 쳤겠어요? 아직 이곳저곳에 남아있을 텐데.” “쳤을 수도 있죠. 당장 이곳만해도 중요한 인물들은 다 빠졌잖아요. 그리고 의리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놈들이라.” “시몬….” “걱정 말아요. 약간은 예상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할 말은 없네요.” 자신의 잘못이라는 시몬의 말에 유리나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슬쩍 고개를 들이밀어 말했다. “그럼 제가 한 번 가볼까요?” “응? 유리나가요?” 시몬의 반문에, 유리나는 뭔가를 생각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중요한 떠돌이가…. 강산이라고 했었던가요? 그자를 데려와 볼게요. 수뇌부 중 한 명이라고 했으니 뭔가를 알고 있을 거예요.” “흠. 데려와 봤자 크게 변하는 건 없을 것 같은데…. 기다리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 같기도 하고.” 시몬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팔짱을 끼곤 미약한 고갯짓과 함께 말을 이었다. “아무튼 상관없기는 하지만…. 기다리는 것보다는 미리 알아두는 게 좋겠죠. 유리나? 가고 있을 테니까, 대충 상황만 살피고 돌아오세요.” 시몬의 말에 유리나는 살포시 웃고 몸을 돌렸다. * 15분 후. “이거 이거. 왜 신호를 보냈나 했는데…. 보낸 이유가 있으셨구먼.” 한 사내의 으스대는 목소리가 주변의 공간을 떨어 울리었다. 그와 동시에 일견 스물은 되어 보이는 인원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가 시작한다. 거대한 대검을 들고 있는 사내를 필두로, 그들은 하나같이 심상찮은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확인한 검후의 낯빛이 일순 흙빛으로 변하였다. “설마 우리 다은이와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로군. 으하하하!” 이어서 들려오는 너털거리는 웃음소리에 검후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새로 들어오는 적들에 대응해, 검후는 사각지대에서 대응하는 것을 선택했다. 어차피 피할 곳이 없기도 했거니와, 그 수가 생각보다 많지 않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어서 교전이 시작된 이후, 검후의 예상은 초반에는 어느 정도 들어맞는 듯했다. 그녀는 압도적인 능력을 선보여 대다수의 적을 쓰러뜨렸고, 안현을 비롯한 일행들의 지원으로 가볍게 승기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검후가 미처 예상치 못한 게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적들 중 뿔 피리를 가진 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뿔 피리란 부랑자들이 가지고 다니는 연락 수단 중 하나였다. 부는 횟수에 따라 신호 체계를 정해놓음으로써, 위급 상황 시 도움을 요청하거나 지시를 전달하는 일종의 도구였다. 사내는 한 걸음 앞으로 나와 검후와 그 일행들을, 그리고 부근을 응시했다. “흠. 우리가 가장 먼저 도착한 건가? 아무튼 다행이네. 겨우 빠져 나올 수 있어서.” “정말 좋을 때 불어줬지 말입니다. 그럼 이제 동맹은 완전히 결렬된 겁니까?” “거의. 총대장도 아까 누구 하나 정리한다는 핑계로 먼저 빠졌잖아. 지금쯤 아예 전장을 벗어났을걸. 우리도 알아서 빠져 나와야지.” “예? 아…. 아까 그 기생오라비가 우리한테 성질 부렸을 때 말입니까? 현 님은 진짜 잡으러 가시는 것 같던데.” “그놈은 백서연 잡혔을 때부터 이상해졌어.” 사내는 잠깐 잠깐 대꾸하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어느 한곳에서 시선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눈을 부릅뜬 채 바닥에 널브러진 부랑자가 있었다. 피가 흘러나오는 입가에는, 뿔 피리가 꼭 물려있다. “도대체 몇 명이 죽은 거냐…. 참 잘도 해주었네. 우리 다은이.” 사내는 기가 찬 목소리로 입을 열고는 방금 대화를 주고받은 부랑자를 툭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어이. 너. 저 뿔 피리 주워서 지금 바로 상황 종료 신호 보내.” “예? 상황 종료 신호를 보내라고요?” 지시를 받은 부랑자가 반문하자, 사내는 귀찮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다른 놈들이 오고 있을 수도 있잖아.” “그래도 상대는 검후인데…. 그리고 다른 놈들한테도 알려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왜 네가 신경 써? 알아서 빠져 나오라 그래. 그리고 혹시라도 서 대륙 놈들이 끼어있으면 귀찮아질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부랑자는 조금 망설였지만, 사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이내 얌전히 뿔 피리를 주워들었다. 뿌우우…. 뿌우우…. 뿌우우…. 이윽고 세번의 뿔피리 소리가 대기를 울리었다. 상황이 종료됐다는 신호였다. 이윽고 서서히 이곳으로 모여들던 여러 기척이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금 서서히 방향을 돌려 돌아가기 시작한다. “명령에 따르긴 했지만…. 검후에게 죽으셔도 전 모릅니다.” “큭. 걱정 마라. 설마 우리가 지친 암캐 한 마리 상대 못할까.” 아까부터 자신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부랑자들의 태도에, 검후는 한껏 긴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암캐란 말이 신경을 긁었는지 한순간 그녀의 기세가 일변했다. 그것을 느낀 사내는 히죽 미소 지었다. “자자. 그 기생오라비가 눈치채기 전에, 얼른 처리하고 빠지자고.” “헤. 그냥 지금 빠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저쪽도 그리 상황은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그래도 눈앞에 배신자가 있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잖아. 그리고 그 동안 찾아 다닌 것도….” “누가 배신자야!” 그때였다. 검후의 날카로운 외침이 순식간에 사내에게 쏟아졌다. 아까부터 은근히 보내던 도발이 드디어 걸려들자, 그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검후를 쳐다보았다. “오랜만이야. 우리 다은이. 나 기억하지?” “닥쳐! 나를, 나를 그딴 식으로 부르지 마!” 분노로 떨리는 검후의 외침에 사내는 흐흐 웃어 보였다. 사내의 정체는 바로 '배신자' 이강산이었다. 일전 아카데미에서 최고의 수재라 불리던 검후를 데려가고, 그와 동시에 부랑자로 전향한 사용자. “아이고 우리 다은이. 많이 날카로워지셨네. 배신자 주제에 너무 기세 등등한 거 아니야? 그 동안 검후라고 주변에서 제법 떠받들어줬나 봐?” “배신자는 너겠지…!” “허허. 키워주고, 입혀주고, 먹여주고, 시크릿 클래스도 얻어주고, 또 매일매일 몸으로 위로도….” “입 닥쳐! 죽여버리겠어!” 이강산의 능글능글한 말이 이어지려는 순간, 검후는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질렀다. 그러나 그에 아랑곳 않고, 그는 여전히 유들유들한 태도로 되받아 쳤다. “누가 누굴 죽여? 꼴에 피해자인척하기는. 가증스러운 년.” “너 때문에…. 너만 아니었으면…!” “그냥 인정하지 그래. 나중 가서는 너도 즐겼잖아?” “……!” “그러다가 내가 거하게 뒤통수를 맞았지. 결국 체념하고 순종하는 척을 하더니, 틈을 봐서 도망을 가? 이 배신자!” 우우웅! 더는 참지 못했는지, 검후의 검, '설아'에서 청명한 검음이 웅웅 떨쳐 나오기 시작했다. “너…. 마침 잘됐어…. 기필코 죽인다….” 검후의 고요한 눈동자에는 스산한 살기가 폭사되듯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마치 현재 그녀의 심정을 대변이라도 해주는 양, 소리 만들어도 주변을 씹어먹을 기세가 휘몰아쳤다. 이 정도면 도발은 충분히 먹혀 들었다 판단한 이강산은, 사뭇 진중한 얼굴로 대검을 앞으로 꺼내 들었다. 그 또한 엄청난 실력자임은 분명했지만, 아무래도 검후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었다. 그나마 믿고 있는 구석은 한때 그녀를 가르쳤다는 사실과, 지금 힘이 많이 빠진 상태라는 것. 그리고 수적 우위였다. 그렇게 전투에 돌입하기 직전, 이강산은 보지도 않고서 살짝 고갯짓을 했다. “거기 오른쪽 네 명. 뒤에 병아리들은 알아서 처리해라. 그리고 나머지는 검후를 합격한다. 죽이지 않고 잡을 거니까, 최소 절반을 죽을 각오하고 들어가. 적당한 상처는 용서하마.” “하. 나를 잡겠다고?” 검후는 코웃음 쳤다. 그러나 부랑자들은 이강산의 명에 충실히 따라, 가장 오른쪽에 서 있던 네 명이 마치 유령처럼 스르르 빠졌다. “죽여버릴 거야!” 그와 동시에 일생일대의 원수를 눈앞에 두고서, 이성을 잃은 검후가 16명을 향해 섬광처럼 돌진했다. 그리고'설아'에서 열 줄기의 검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그럼 우리는 이쪽을 처리해볼 까나.” 빠져 나온 부랑자들은 남은 일행들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 명은 남성이었고, 한 명은 여성이었다. “푸. 떨고 있는 것 좀 봐. 진짜 병아리들이군.” “아직 주문도 안 외워놨어. 혼자서도 가능하겠다 야. 저기 예쁘장한 붉은 머리카락은 내 것. 딱 내 취향이야.” “그럼 저기 맨 뒤에 사제 년은 내 것. 진짜 귀엽고 예쁘게 생겼다. 아니. 청순인가? 몰라. 히히.” “미친놈들. 정리하고 바로 뜰 거야. 죽일 생각이나 해.” 여성 부랑자의 핀잔이 이어졌지만 말 그대로 병아리들이라 생각하는지, 세 명의 남성 부랑자는 한껏 여유로운 얼굴로 시시덕거렸다. 도발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상대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숫자는 4:6. 인원으로 따지면 사용자들이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안현을 비롯한 누구도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아니, 사실상 부랑자들이 출현했을 때부터 그들은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대꾸할 가치를 못 느껴서가 아니라 온몸에 긴장이 돈 탓이었다. 적어도 안현의 감각에는 눈앞 부랑자들이, 지금껏 상대해왔던 여느 적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몸소 체감하고 있었다. '도망칠 수는 없다.' 안현은 창을 꾹 쥐고는 자세를 잡았다. 챙! 끼릭! 그에 따라 이유정도, 그리고 검후가 데려온 두 명의 사용자도 비척비척 무기를 들어 보였다.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대로 순순히 쓰러질 수는 없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행동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네 명은 고개를 돌려 격렬한 전투를 치르는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저쪽이 조금 밀리네.” “와. 대 간부님이랑 중간 간부 열여섯 명이 밀린다고? 단 한 명한테?” “그렇게 크게는 아니지만…. 조금? 검후잖아. 시크릿 클래스. 아무튼 빨리 처리해서 상황을 보자고. 불리하면 바로 합류해야지.” “어휴. 각자 알아서들 하라고. 아니. 그냥 내가 다 처리할까?” 드디어 남은 네 명도 무기를 마주잡는다. 창, 도끼, 검, 검. 원거리 계열은 하나도 없는 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일까. 안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슬쩍 곁눈질로 검후가 전투를 벌이는 곳을 살폈다. 도와주러 올 때까지 버티는 게 가장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보아하니 이곳에 달려온 부랑자들은 한 명 한 명이 자신보다 뛰어난 실력자로 느껴졌고, 이윽고 창을 든 부랑자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시 눈을 돌리자 마치 장난이라도 하듯이, 창 끝으로 일행을 겨누곤 살랑살랑 흔드는 게 안현의 눈에 보였다. 하지만 안현은 방심하지 않았다. '카운터를 노리는 수밖에 없다.' 안현은 부랑자의 공격이 들어오는 순간 바로 파고들기로 마음먹고 이를 깨물었다. 설령 크게 다치더라도 한 놈이라도 확실히 보내버릴 생각이었다. '상대의 선공을 받아 칠 때는, 발을 주시해라.' 김수현의 가르침에 따라 안현은 가장 선두로 나온 남성의 걸음을 주시했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더 이상 걸음이 이어지지 않을 때, 안현의 귓가로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안현은 온 힘을 다해, 고개를 젖히는 것과 함께 마주 창을 찔러 들었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둥그런 옅은 빛이 생성되었다. 스팟! 서로의 창이 아슬아슬하게 교차한다.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찌르기였다. 그러나 속도는 부랑자의 창이 더 빨랐고, 이내 목표한 안현의 머리를…. 파각!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몸을 감싸고 있던 옅은 빛을 깨졌지만, 머리는 무사했다. 안현의 잠재 능력, 호신강기가 창의 진로를 약간이나마 틀어준 것이다. 그에 따라, 안현은 창이 지체 않고 부랑자의 가슴을 향하였다. 그 찰나의 순간, 부랑자의 가슴에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일었다. 그저 병아리라고만 생각했는데, 들어온 불의의 일격에 이마로 땀이 쭉 솟았다. 그때였다. 뻑! 막 창 끝이 가슴에 닿으려는 순간, 안현의 눈앞이 번쩍하더니 이내 몸이 여지없이 왼쪽으로 붕 휘날렸다. 한순간 스치고 지나간 창이 그대로 머리를 후려갈긴 것이다. 분명히, 완숙한 실력자를 상대를 아직은 어설픈 기교로 상대하지 않는다는 선택은 괜찮았다. 하지만 안현이 아무리 레어 클래스라고 해도, 아직 능력치 개발도 끝나지 않은 0년 차였다. 그리고 상대는 바로 부랑자. 그것도 산전수전을 겪은, 중간 간부로 인정받을 정도로 노련한 부랑자. 한순간 위기를 느끼긴 했지만, 그는 곧바로 침착하게 대응했다. 이미 창이 닿은 순간 부랑자의 승리는 예정되어있었던 것이다. “악….” 들어온 충격에 안현은 입을 벌렸다. 머리에 가해진 타격이 컸는지, 균형을 잃은 그는 그대로 몸을 허물어뜨렸다. 머리는 빙글빙글 돌고 귀에서는 미약한 소음이 끊이질 않는다. 그러한 와중에, 안현은 창을 꾹 잡고 다시 한 쪽 방향을 가리켰다. “창신…. 사격…!” 창, 차차창! 이내 떨어져나가는 안현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부랑자는, 다시금 급히 숨을 삼켜 들었다. 푹, 푸푹! “컥!” 갑작스레 떨어져 나온 네 줄기의 창에 그대로 가슴을 직격당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핫!” 채 창을 거두기도 전에, 안현의 뒤에 있던 이유정이 곧바로 달려 들어왔다. 남성은 재빨리 몸을 틀려고 했지만, 이유정 또한 교묘하게 몸을 틀어 양손의 단검을 휘둘렀다. 마치 한 놈이라도 완전히 끝내겠다는 듯 그녀는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어, 어?” 이윽고 X자로 교차하는 단검이 그대로 가슴을 그어 내리려는 찰나였다. “병신 새끼.” 푹! 뻥!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옆에서 들어온 여성 부랑자가, 있는 힘껏 이유정의 옆구리를 찔러 차버렸다. 그리고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것과 함께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허억.” 그제야 창을 든 남성은 삼켰던 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가슴에는, 구겨진 갑옷과 기다랗게 파인 여러 줄기의 상흔이 보였다. “너. 나한테 하나 빚졌다.” “하, 하하하. 하, 씨발.” “와. 너 지금 병아리들한테 당할뻔한 거냐?” “이야. 정한이도 많이 죽었네. 자기가 다 처리하겠다고 거들먹거릴 때는 언제고 병아리한테 죽을뻔하냐.”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양쪽에서 부랑자들의 조롱하는 소리들이 들리었다. 정한이라 불린 부랑자는 발끈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언제 처리했는지 조롱한자들의 손에는 검후와 안솔과 동행한 사용자들의 목이 들려있었다.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에이 썅!” 정한은 거칠게 욕설을 뱉곤 나란히 바닥에 누운 안현과 이유정의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복부를 지그시 밟아 내리자, 그녀의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졌다. 그는 그대로 창을 올려 들었다. “이 개새끼들이….” “야. 잠깐 죽이지 말아봐.” “뭐라고?” 그러나 이어지는 여성의 제지에,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반문했다. “쟤 마지막에 이상한 기술을 쓰더라. 무슨 사격? 보니까 장비도 좋은 것 같은데…. 혹시 알아? 클래스에 관한 정보라도 나올지.” “그걸 지금 이 상황에서 챙기자고?” “지금 아니면 언제 챙겨. 그리고 저기 봐. 별로 합류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염병. 언제는 빨리 합류하자고 한 년이.” “목숨, 목숨.” 그 말에 입을 다문 남성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후는 지금 대 간부, 그리고 중간 간부 열여섯 명을 맞아 한창 불리한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그녀가 우세한 듯 보였지만, 부랑자들은 최대한 격돌을 회피하며 철저한 차륜전을 펼쳤다. 그 결과, 지금은 제법 상황이 반전된 상태였다. 아직까지 쓰러진 부랑자들이 한 번도 없다는 게 그 증거였다. “야. 발 치워.” 일단 발을 치우라는 말에 부랑자는 가슴을 한 번 쓱 훑고는 왼쪽 발을 들어 비켜주었다. 그리고 허리를 숙이는 여성을 보다가, 이내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래서는 앙칼진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이유정이 있었다. “뭘 봐. 씨발년아. 너도 내가 우스우냐?” “큭!” 그 눈초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정한은 왼쪽 발로 이유정의 가슴을 세게 짓눌렀다. 제법 봉긋한 가슴이라서 그런지, 발바닥으로 뭉클한 감촉이 전해져 들어왔다. 그는 발을 연신 비틀며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눈깔 보소. 아주 사람 하나 죽이겠네, 죽이겠어.” “흑! 흐으윽!” 이어서 마력을 일으킨 창이 이유정의 배를 시작으로 위로 쭉 훑는다. 그에 따라 찌직 옷이 반으로 찢어지고, 살결에 새겨지는 얕은 상처가 길게 이어진다. 뾰족한 창 끝은 그녀의 목에서 멈추었다. “드세 보여서는…. 생긴 것도 마음에 안 들어.” “어어? 야! 하지마! 내 것이라고 했잖아!” 옆에서 다가오던 부랑자가 소리쳤지만, 정한이 그대로 목에 창에 힘을 주려는 순간이었다. “거스트 오브 윈드(Gust Of Wind)!” 후루룩! 거센 돌풍이, 부랑자를 덮쳐 들었다. * 후루룩! 간신히 외운 주문이, 신상용의 손끝에서 발출되었다. 이윽고 날아간 돌풍은 그대로 부랑자 무리를 덮치었고, 그에 따라 이유정의 위에 서 있던 놈은 몸을 허물어뜨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마탄의 영향으로 주문 영창이 평소보다 늦어지기는 했지만, 늦어도 너무 늦었다. 더구나 위력도 평소보다 한껏 반감된 터라 그저 넘어뜨리는 선에서 그치었다. 한 마디로 그것은, 부랑자의 화를 돋구는 역할밖에 해주지 못한 것이다. 놀란 것도 잠시. 넘어진 부랑자는 이어지는 조롱에 새빨개진 일어났고, 이내 가슴에 피를 뚝뚝 흘리며 득달같이 달려왔다. 신상용은 절망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되리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눈앞에 다가오자 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한 와중에, 신상용은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안솔을 보며 간신히 소리쳤다. “아, 안솔양! 도, 도망치십시오!” “어딜?” 퍽! 그 순간 얼굴에서 느껴지는 둔중한 충격에, 신상용은 억 소리와 함께 한두 바퀴 몸을 굴리었다. “병신 새끼면 병신 새끼답게 가만히 있던가. 아니면 도망이라도 치던가. 전투 중에는 가만히 있다가 지금 와서 하는 건 뭔데?” 그리고 신상용이 채 몸을 가누기도 전에, 정한의 발길질이 이어졌다. 퍽, 퍽퍽! 정한은 화를 풀려는지 사정없이 신상용을 짓밟았다. 그는 최대한 몸을 웅크려 몸을 보호했지만, 결국 부상당한 허벅지에 발길이 닿은 순간 울음 섞인 비명을 토해내었다. 한순간 발길질이 멈췄다. 하지만 부랑자는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결국에는 창을 들어 사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화 봤어? 라이언 일병 구하기. 업햄이라고 혹시 알아?” “큭, 크윽….” “난 너 같은 놈들이 제일 싫어. 이도 저도 아닌 그냥 병신 같은 놈. 야. 넌 그냥 죽어라. 너라도 죽여야겠다.” “안 돼애!” 캉! 그 순간, 안솔이 뛰어드는 것과 동시에 불꽃이 튀었다. 그녀가 재빠르게 뛰어들어 신상용을 끌어안은 것이다. 그런 안솔의 주위에는 새하얀 구슬이 떠올라 있었다. '개량형 수호의 방패'였다. 정한은 일순 창을 거두었다. “하. 진짜 가지가지 하는군. 씨발, 그래 한 번 해보자.” 그러나 이내 어이없는 웃음을 내뱉고는 이내 신명 나게 보호막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캉! 캉캉! 웅! 우웅! “어엉! 어어엉!” 이윽고 이리저리 튀는 불꽃에 안솔은 커다란 목소리로 울었다. 어떤 것을 할 생각도 못한 채 그저 눈물만 흘리었다. 신상용은 멍한 상태로 있다가, 고통이 약간 가시자 퍼뜩 정신을 차리곤 고개를 들었다. 캉! 캉캉! 캉캉캉캉! 그러자 당장이라도 깨질 것 같은 보호막 밖으로, 여러 광경들이 눈에 들었다. '헤헤. 형. 저 좀 도와주시면 안돼요?' 하나하나 장비를 해체당하는 안현.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닌데, 이번 한 번은 인심 썼다. 자. 상용이 오빠. 아~. 해봐.' 자신의 이곳 저곳을 쿡쿡 찌르는 부랑자를 죽일 듯 노려보는 이유정. '꾸, 꿀꺽? 영약을 저한테 주시면 어떡해요오! 으아아앙!' 자신을 끌어안고 울부짖는 안솔. 캉! 캉! 캉! 캉! 보호막의 진동이 점차 거세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신상용은 미안했다. 그저 미안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보호만 받는 처지에 절망했다. 그저 살 궁리만 했던 자신이 미치도록 증오스러웠다. 캉, 파각! 캉캉, 파가각! “오라버니이! 수현 오라버니이!” 안솔의 울음이 더욱 거세어졌다. 신상용을 껴안은 손길이 더욱 거세어졌다. 그럴수록 신상용의 머리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여기서 자신이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니면…. 이대로 죽어야 하는 건가? 그때였다. 문득 하나의 여러 가지 복잡한 기억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도망이라도 치던가.' '넌 병신이야, 병신. 그냥 죽어라.' 그 말들을 떠올린 순간, 캄캄한 절망 속에서 신상용은 처음으로 무언가 들끓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피가 흐르는 입술을 떼었다. “─, ──. ─, ──. ─, ──.” 그것은, 반사적으로 나온 주문이었다. 비록 지금껏 단 한 번도 성공한적이 없고 상황도 최악이었지만, 현재의 신상용으로서 남은 유일한 방법. '마법사가 전장의 꽃이라면 시크릿, 레어 클래스는 전장을 판가름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심지어 불리한 전쟁을 단번에 뒤집을 수도 있지요.' “───. ───. ───.”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는 신상용의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들이 동시에 흘러들었다. '네가 왜 항상 실패하는 줄 알아?' '마수 소환이란 건 말이지 엄연한 독자적인 주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계약이라고, 계약.' '마수들은 능력이 강력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자존심도 세.' '그런데 애당초 마수를 무서워하고, 그렇다고 간절하지도 않고. 아니! 그전에 계약에 대한 의지가 없는데 나오겠니? 앙?' 그 순간, 생각이 멈춘 것과 동시에 영창도 끝났다. “오라!” 신상용은 번쩍 눈을 떠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 그러나 변하는 건 없었다. 그저 눈앞에는, 마치 금 간 달걀 껍질처럼 거의 깨지기 직전의 보호막이 보일 뿐이었다. 파창! 푸스스스! 아니. 이제 깨지기 직전이 아니라, 깨져버렸다. “끝이다. 잘 가라 병신.” 이윽고 남성의 창이 크게 들렸다. “오라! 오라!” “뭘 와?” 내려꽂히기 직전, 들어 올린 창이 허공에 우뚝 멈췄다. 이 찰나의 순간 신상용의 전신에 만감이 교차한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그는 자신의 모든 마력을 한꺼번에 쥐어짜 냈다. 그리고 진심으로 간절한 마음을 담아, 전에 없던 커다란 음성으로, 목놓아 크게 외쳤다. “오라! 제발 오라아아! 임프리소오온!” 파자작! 파자자작! 그때였다. 비록 일그러지기는 했지만, 허공에 하나의 마법 진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와 동시에. “제 49군단을 지배하는 강철의 구속자여어어!” 차르르르르르르릉! 일그러진 마법 진 에서, 비로소 응답한 수십의 묵 빛 쇠사슬이 도처로 뻗어나갔다. ============================ 작품 후기 ============================ ㅇ<-< 0377 / 0933 ----------------------------------------------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 차르르르르르르릉! 사슬이 부딪치는 요란한 소리가 도처를 울렸다. 마법 진에서 튀어나온 사슬은 순식간에 허공을 뒤덮었고, 흉흉한 기세로 짓쳐 들어 부랑자에게 파고들었다. “어, 어?” 갑작스레, 그것도 코앞에서 출현한 능력에 정한은 당황했다. 그것은 전에는 겪지 못했던 능력이었다. 감각이 알려주는 경종에 얼른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잠깐 흠칫했던 순간 사슬은 이미 그의 전신을 감아 들고 있었다. 이내 마치 누에고치처럼 물샐틈없이 칭칭 감긴 사슬은, 부랑자를 서서히 공중으로 끌어올렸다. 허공에 들려진 부랑자를 보며 신상용은 멍하니 상반신을 일으켰다. 다른 생각은 없었다. 드디어 마수를 소환했다는 기쁨도, 죽음을 마주했다는 공포도 지금 이순간만큼은 모두 잊어버렸다. 단 하나. 오직 애들을 구해야겠다는 회광반조(回光返照)의 일념으로 점철되어있었다. 그러한 일념에 따라, 신상용은 있는 힘껏 외쳤다. “임프리손!” 키에에에! 신상용의 내면이 투영되어서 그런지 임프리손의 반응도 거세었다. 감긴 사슬이 일순 꽉 조이는가 싶더니, 곧 물 흐르듯이 흐르며 부랑자의 전신을 비틀어 훑었다. 차르르르르르르릉! “크아아아아아아악!” 사슬 고치 안으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마력이 담긴 묵 빛 철쇄는 부랑자의 몸을 단숨에 찢어발겼고, 이내 완전히 풀어져 내부의 광경을 드러내었다. 풀썩! 이윽고 전신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걸레 짝처럼 변한 하나의 고깃덩이가 바닥으로 떨구어졌다. “정한아!” “뭐, 뭐야?!” 그제야 이상 징후를 확인했는지 부랑자들은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신상용은 번뜩 고개를 들었다. 쓰러진 채 미동도 안 하는 안현과, 이제는 아예 깔린 채 희롱 당하는 이유정이 눈에 밟혔다. 그 순간 항상 잔잔하고 평온했던 그의 눈동자가, 일순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신상용은 한 번 사납게 손을 떨쳤다. 차르르릉! 차르르릉! 그러자 수십…. 아니 거의 기백에 이를 정도의 무수한 사슬들이, 각기 세 방향으로 나뉘어 세차게 쇄도한다. 그리고 세 명의 부랑자는 어지러이 몰려드는 사슬의 비를 보며 크게 기함했다. 안현의 위에 앉아있던 여인은 재빠르게 몸을 돌려 피하려 했지만, 회피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사슬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녀의 행동에 맞춰 궤도를 변화했고, 이내 둥글게 퍼지듯 들어가 여인의 몸을 감아들었다. 전방위적으로 펼쳐 들어 아예 도망칠 여지를 주지 않은 것이다. “크읍!” 이윽고 그 상태서 힘껏 죄자 사슬이 팽팽해지는 것과 함께, 그녀의 얼굴에 붉은색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옆에서 장비를 구경하던 남성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서 있는 상태라 정면에서 들어오는 사슬은 반사적으로 쳐내었지만, 상하좌우로 흔들리며 들이닥친 사슬에 결국 옆구리를 내주고 말았다. 양 갈빗대를 직격당한 순간 그는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느꼈고, 곧바로 정신 줄을 놓았다. “이, 이건 도대체 뭐야?!” 캉, 카캉! 이유정을 깔아뭉갰던 남성이 도끼를 풍차처럼 휘두르며 소리를 질렀다. 제법 실력은 있는지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지만, 사슬을 쳐내는 손길을 점점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그 순간 신상용은 활짝 핀 손바닥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일방행적으로 몰아치던 사슬이 부분부분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일부는 동시다발적으로 도끼에 달려들어 동여매었고, 나머지 사슬들은 십자 모양으로 교차해 하나의 망을 형성한 것이다. 이윽고 만들어진 사슬의 그물은 그대로 남성에게 밀려들었다. “제기랄!” 버텨봤자 답이 없다는 걸 깨달은 남성은 욕설과 함께 도끼를 놓았다. 그리고 바로 몸을 빼려고 했지만, 그 순간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그는 경악하여 아래를 쳐다보았다. 바닥에는 한 팔을 내뻗은 이유정이 독기 어린 눈초리를 빛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손은 남성의 발목을 힘껏 붙잡고 있었다. 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지었다. “이 미친…!” 채 말이 끝나기도 전 이유정은 발목을 세게 잡아당겼고, 이어서 사슬의 그물이 남성을 강타했다. 퍽! “아악!” 상황은, 한순간 반전됐다. 남성이 미끄러지는 것과 함께 이유정은 부근에 치워져 있던 단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마치 고양이와 같은 유연한 몸놀림을 선보여 곧바로 그의 배에 올라타는 묘기를 보였다. 이윽고 단검이 들린 손이 뒤로 크게 젖혀졌다. “씨발 새끼!” “사, 살려…. 끄르륵!” 남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유정은 지체 않고 단검을 내려찍었다. 그의 입가에서 피 거품이 솟아오른다. 그러나 한 번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껏 당한걸 고스란히 되돌려주려는지, 손에 쥔 '스쿠렙프'를 연거푸 내려찍기 시작했다. 팍! 팍! 팍! 팍! 팍! 팍! 팍! 팍! “끄륵, 끄르륵!” 붉은 섬광이 번쩍일 때마다 남성의 몸도 움찔움찔 떨리었다. 그렇게 십 수번을 내려 찔렀을까. 꼿꼿이 세워져 있던 발이 축 늘어졌음에도 단검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남성의 얼굴이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뭉그러졌을 때, 이유정은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옆에서 사슬 소리와 함께 구슬픈 비명이 들렸다. 차르르릉, 차르르릉!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검후와 전투를 벌이던 부랑자들의 시선이 옆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하나같이 깊은 침음을 내었다. 기세 좋게 달려들었던 네 명의 부랑자는, 어느덧 어느 한 군데 성한 곳 없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윽고 동료의 죽음을 확인한 부랑자들의 시선이 모조리 신상용에게 쏠렸다. 그로서는 어떤 의미에서 처음 받아보는 주목이었다. 사실상 능력치만 보면 신상용은 결코 약하다고 평가할 수 없다. 마법사의 수준을 가르는 척도는 바로 마력 능력치였다. 처음 김수현과 만났을 때는 85포인트였고, 이후 약간의 성장을 거둬 이제는 중 후반의 포인트를 보이고 있었다. 거기에 레어 클래스를 계승함으로써 새로운 능력의 생성과 진화를 이루었다. 비록 기습의 효과를 봤을지라도, 마수를 완벽히 소환해 부랑자 네 명을 처리한 지금. 신상용은 확실한 '강자'였다. 김수현처럼 전장 전체를 아우르고 뒤집을 정도는 되지 못하지만, 적어도 이런 소규모 전투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정도는 되고도 남는 것이다. “헉…. 헉….” 신상용은 연신 거친 숨을 몰아 쉬면서도 생소한 감정을 느꼈다. 두근. 두근.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전신이 떨렸지만, 뭔가 모르게 개운한 기분이었다. 마치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이랄까? 단순히 마수를 하나 소환한 것에 불과하지만, 신상용의 내면에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감정이 약간이나마 샘솟아 오르고 있었다. 이윽고 내뻗었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린다. 그러자 사슬들은 신상용의 명령에 복종하듯이 돌아와, 우거진 정글처럼 사슬을 늘어뜨려 감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공에 우뚝 솟아오른 마수는, 언제라도 사슬을 내뻗겠다는 양 움직임을 멈춘 부랑자들을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건…. 또 뭐야?” 이강산은 저도 모르게 한두 걸음 물러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야말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지경이었다. 거의 다 잡았다고는 말 못해도 그래도 전투의 흐름이 차차 유리해지고 있던 찰나였다. 왼쪽의 병아리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한 병아리가 무시 못할 존재로 성장한 것이다. 물론 아주 절망적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강산은 검후를 흘끔 쳐다보았다. 지쳐 헐떡이고는 있어도, 새어 나오는 기운은 아직도 예기를 잃지 않았다. 만일 저 둘이 힘을 합친다면 상황이 난감해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차르르르르르르릉! 신상용도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이내 요란한 철성이 다시 사방을 울리었다. 부랑자들은 급히 물러서 경계했지만, 뻗어 나온 사슬은 그들을 지나쳐 검후, 안현, 이유정에게로 동시다발적으로 달려들었다. 이윽고 그들의 몸이 사슬에 감긴 순간, 셋의 몸이 동시에 떠올라 허공을 치솟아 오른다. 이강산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막아!” “───. ───. ───. 아이스 랜스(Ice Lance)!” 그 순간, 부랑자 중 한 명이 발출한 얼음의 창이 허공에 떠오른 검후를 노렸다. 그때였다. “───. ───. ───. 홀드(Hold)!” 얼음의 창이 검후를 꿰뚫기 직전, 하얀 빛이 날아와 창을 뒤덮었다. 이윽고 창은 거짓말처럼 공중에 정지했고, 이내 대지로 힘없이 추락했다. 그리고 세 명은 그대로 허공을 갈라 둥근 곡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마, 말도 안 돼!” 마법을 발동한 부랑자는 눈앞에 벌어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뾰족한 고함을 내질렀다. 사용자는 개인마다 고유한 마력의 파장이 존재하고, 서로의 마력이 섞일 수 없다는 게 기본 원칙이다. 그런 만큼 각기 마력이 충돌했을 때는 폭발하는 게 정석적인 상황이었다. 방금 전도 원래는 얼음의 창이 홀드를 뚫고 들어갔어야 정상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홀드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해야 하는 게 사실이랄까. 하지만 신상용이 펼친 홀드 마법은 영향력을 상실하지 않았다. 이유는 바로 그의 특수 능력, '조화의 마방진' 때문이었다. 능력을 발동한 신상용은 상대의 마법 파장에 자신의 마법 파장을 조화시켰고, 그 결과 홀드의 영향력을 유지했다는 판정을 이끌어냈다. “후.” 신상용은 들어올린 지팡이를 내리며 숨을 삼키었다. '마탄'의 영향으로 조금 늦을까 걱정도 들었지만,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게 정답이었다. 이윽고 사슬 안으로 안착하는 검후를 보며 이강산은 이를 갈았다. “저 새끼 먼저 조져!” 일단은 유리한 기세를 몰아보겠다는 생각에, 이강산은 곧바로 명령을 내리곤 바람처럼 달려나갔다. 사실 질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기보다는,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검후를 눈앞에서 놓친 것에서 발로한 명령이었다. 이윽고 흉흉한 기세로 달려오는 부랑자들을 보며 신상용은 잠재 능력을 발동했다. “마법 진지 구축!” 우우웅! 그러자 신상용을 기준으로 정사각형 모양의 빛이 그려지고, 꼭지점에 각기 네 개의 마법 진이 떠올라 환한 빛을 밝히기 시작한다. 그것을 시작으로, 사용자와 부랑자들의 2차전이 시작되었다. 차르릉, 차르르릉! 신상용이 다시금 손을 떨치자, 절반의 사슬은 주변을 엄호하고 다른 절반의 사슬들은 덮쳐오는 부랑자들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이번엔 부랑자들 또한 간단히 당하지는 않았다. 철저히 대비하고 있던 만큼, 각기 몰려드는 사슬들을 끊어내고 걷어내며 사방으로 흩어 퍼졌다. 하지만 신상용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까는 기습으로 효과를 거두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부랑자들이 잠시 멈춘 틈을 타 일부러 검후를 끌어들인 것이다. 자신이 틈과 공간을 만들어준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활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신상용은 이번엔 검후를 엄호하는 지원 전투를 펼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전투는, 이강산의 우려를 그리고 신상용의 계산을 그대로 현실로 나타냈다. 신상용은 '마법 진지 구축'가 전해주는 정보를 바탕으로, 사슬을 사방팔방으로 휘두르며 접근하는 적들을 최대한 방해했다. 정면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뒤를 노려 진로를 방해하고, 발목을 감아 중심을 균형을 무너뜨리며, 멀리서 들어오는 마법은 사슬로 받아 친다. 그러다 어쩌다 확실한 기회를 잡게 되면 사슬을 여지없이 부랑자의 목을 휘감았다. 신상용은 말 그대로 무아지경의 상태로 임프리손을 운용하고 있었다. 정말로 젖 먹던 힘까지 뽑아내고 있는 것이다. 한 번 둑을 터뜨린 이상, '마탄'은 더 이상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한계까지 뽑아낸 마력은 거침없이 회로를 돌고 있었고, 그것을 견디는 마력 회로는 뜨겁게 달구어진 상태였다. 그러한 와중, 사실상 가장 신난 사람은 바로 검후였다. 처음에는 분노에 떨어 달려들긴 했지만, 차후 수세에 몰렸을 때 이성을 잃었던걸 후회했다. 그런데 레어 클래스의 보조를 받게 되자 숨통이 확 트이더니, 비로소 본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반대로 부랑자들은 죽을 맛이었다. 사슬 하나하나는 별 위협이 되지 못했지만, 수 개의 사슬이 악착같이 달려드니 여간 신경이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그것을 간신히 뚫고 들어가면, 이번엔 수십 개의 사슬이 감도는 광경 사이로 눈을 번쩍이는 검후가 서 있었다. 차륜전에서 약간의 우위를 점했다고는 하지만, 홀로 있을 때도 쉽사리 제압하지 못한 검후였다. 온 신경을 쏟아 부으며 상대해도 될락말락 에, 지금은 신경을 쏟기는커녕 차륜전을 펼칠 상황도 못되었다. 거기다 둘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신상용의 주위를 호위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이유정도 알게 모르게 부랑자들의 신경을 긁고 있었다. “크아아악!” 결국 어디선가 모를 첫 번째 비명이 들렸을 즈음 이강산은 깨달았다. 이렇게 방어 일관으로 나오는 이상, 전투를 이기려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겠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이강산의 내면으로 뒤늦은 후회가 찾아 들었다. 이렇게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게 아니라 확실한 조합을 갖추었다면….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소모적인 전투라는 게 명백해진 이상, 그는 일단 바로 고함을 질렀다. “젠장! 일단 물러나라!” 부랑자들 또한 갑자기 전투가 어려워진 것을 느낀 찰나였다. 해서 즉시 사슬 안에서 맴돌던 것을 멈추고 순식간에 걸음을 물렸다.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끙….”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후. 살짝 숨을 몰아 쉬는 부랑자의 말에 이강산은 침음으로 대답했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하등 좋을 것이 없었다. 슬슬 자신들을 방패막이로 쓰려는 시몬의 행동에 서 대륙과 사이는 잠정적으로 틀어졌고, 그게 아니더라도 이제 곧 동부의 지원 부대가 도착할 시간이었다. 그 동안 찾아 다닌 검후를 놓치는 게 너무나 안타까웠지만, 이대로 시간을 끌다가는 덜미를 잡힐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이강산이었지만, 그래도 미련이 남는 눈길로 검후를 응시했다. 그녀는 사슬 사이로 여전히 꼿꼿이 선 채 부랑자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부랑자가 한 번 더 채근했다. “마음은 알지만 상황이 조금 급하지 말입니다.” “…….” 이강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침묵은 무언의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그 순간 이강산은 갑작스레 고개를 돌려 한 쪽 방향을 응시했다. 그리고 와짝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씨발! 눈치챘나? 모두 빠져! 이대로 바로 전장을 빠져나간다!” 이윽고 부랑자들이 후퇴를 시작했다. 이내 천천히 한두 걸음 물러섰다가, 등을 돌려 달아나는 그들을 보며 신상용은 안도했다. 그리고 검후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 작품 후기 ============================ 바로 다음 회 갑니다. 0378 / 0933 ----------------------------------------------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 잠시 후. 부랑자들이 멀리 사라진 순간, 신상용은 곧바로 몸을 무너뜨렸다. 그와 동시에 아찔한 후유증이 그의 전신을 덮쳤다. “허억, 허억!” 눈앞이 한순간 핑글 돌아버렸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심장이 쿵쿵 뛰는 게 꼭 가슴이 방망이질하는 것 같다. 이윽고 찾아 드는 현기증에, 신상용은 바로 마력 회로를 가라앉혀 소환을 해제하였다. “크흑…. 크흑….” 간신히 내부를 추스르자, 이번에는 한껏 가열된 마력 회로가 몸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한다. “후…. 후….” 신상용은 차분히 호흡을 조절했다. 내부는 텅 비어 무척이나 공허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괜찮았다. 이윽고 간신히 숨을 고른 신상용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안현은 머리에 피를 흘린 채 기절한 상태였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아직 살아있었다. 이유정은 가슴과 옆구리에 손을 얹은 채 고통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살아있다. 안솔은 여전이 오들오들 떨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이내 모두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신상용의 가슴이 조금은 진정되었다. “아, 안솔양.” “네, 네에?” “괜찮으십니까?” “아니요오…. 아까부터 자꾸만 심장이랑…. 몸이 떨려요…. 죄송해요….” “하, 하하. 괜찮습니다. 이, 이제 적은 물러갔습니다. 그러니 얼른 치료를….” 신상용은 계속 말을 잇기가 힘들어 안현을 응시했다. 뜻을 알아들은 안솔은 이내 한두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엉금엉금 기어 안현의 주변으로 다가갔다. 신상용은 대지에 몸을 눕혔다. 이곳이 전장 한복판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지금은 그저 쉬고 싶었다. 몸에 한 톨의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윽고 막 머리를 눕히려는 신상용의 목으로, 뭔가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는 이유정이 보였다. “오빠.” “이, 이유정양?” “고마워.” “…….” 고맙다는 말에 신상용은 일순 할 말을 잃었다. 그냥 얼굴이 화끈해지고, 속이 더워지는 기분이었다. “오빠 그런 모습 처음 봤어. 멋있더라. 진작에 좀 보여주지.” “하, 하하.” 이유정의 핀잔 아닌 핀잔에, 신상용은 머쓱하게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남아서 다행입니다.” 그 말에 이유정은 재회 이후 처음으로 미소를 보였다. 그때였다. “일어나세요.” 갑작스레 들린 고요한 음색에 신상용은 저도 모르게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러자 어느새 앞에 다가온, 피곤에 찌든 얼굴을 한 검후를 볼 수 있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겨우 적을 물러가게 했을 뿐.” “아…. 그, 그렇지요. 그래도 지금 상황도 이렇고 적도 보이지 않으니 약간이라도 휴식을….” “안 돼요.” 신상용의 말도 일견 일리는 있었다. 그러나 검후는 딱 잘라 거절했다. “방금 전…. 놈들이 작정하고 끝까지 몰아쳤으면 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도 이강산은 물러나는걸 택했죠. 느낌이 좋지 않아요. 일단 얼른 저 남자를 깨우고 간단히 치료하고 나서, 바로 떠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아, 알겠습니다.” 검후의 말은 냉정했지만 현실이었다. 신상용은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이면서 약간이지만 생소한 감정을 느꼈다. 아까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는데, 지금은 확실히 자신을 내려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이윽고 신상용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것을 확인한 검후가 몸을 돌려 주변을 보려는 찰나, 일순 그녀의 다리가 크게 비틀렸다. “읔!” “괘, 괜찮으십니까?” 신상용이 놀라 부축하려고 했지만, 검후는 고개를 저어 손길을 거부했다. “…안 괜찮아요.” “그, 그럼 얼른 치료를.” “치료로 회복될게 아니에요. 고유 능력을 남용한 부작용이니까.” “고유 능력이요? 아, 아무튼 그래도 안 받는 것보단.” “능력을 증강하고 온몸의 감각을 극도로 끌어올려주는 능력이죠. 잠깐 사용하는 거면 상관없는데, 오랜 시간 동안 발동해서 몸에 무리가 찾아왔어요.” 그것은 예전에 김수현과 대결할 때 잠깐 선보였던 능력이었다. 검후는 귀찮다는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비교적 상세한 설명을 해주고는 신상용을 힐끔 쳐다보았다. “지금 제 상태가 그래요. 당신도 비슷한 상태 아닌가요?” 그제야 이해가 됐는지 신상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홀가분했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방금 전 전투서 거의 모든 힘을 쏟아 부은 터라, 그에게는 남은 힘이 거의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간신히 옮기는 게 고작일 정도였다. 그런데 검후도 비슷한 상태라면…. “아, 앞으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포위망은 어떻게.” “…몰라요.” “예, 예?” 그 순간 신상용의 뇌리로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 “설마 저희와 만나기 전부터 능력을 발동하고 있었던 겁니까?” “당분간은 능력을 발동할 수 없어요. 아니 마력의 사용도 조심해야 하죠.” 약간 동문서답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인정한 것과 다름없었다. 신상용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동안 검후가 보인 괴물 같은 감지 능력을 이해하면서도 깊은 걱정이 일었다. 간신히 산 하나를 넘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커다란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이 머리를 맴돌자 신상용은 바로 머리를 털었다. 그리고 한창 치료 주문을 외우는 안솔을 응시했다. 안현과 이유정을 치료한다. 일단은 그게 우선이었다. 아무튼 검후의 말대로 팔자 좋게 누워있을 틈은 없어, 신상용은 곧바로 명상의 자세를 잡으며 검후를 응시했다. 등을 보이고는 있었지만, 대지를 디딘 다리에서 미약한 떨림이 보였다. “으으.” 그때, 미약한 신음이 신상용의 귓가에 들렸다. 그는 반색하여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눈살을 가득 찌푸린 채 서서히 눈을 뜨는 안현이 보였다. 안솔이 한결 다행이라는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걸로 보아, 깨어나는데 지장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윽고 눈을 뜬 안현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바로 입을 열었다. “뭐, 뭐야…. 이게 어떻게…. 어…? 내 장비는?” “야. 네 장비 저기 있다. 알아서 챙겨오고 그만 좀 비켜. 이제 나 치료받게.” “장비…. 형이 준 장비….” “하하. 제, 제가 가지고 오겠습니다.” 깨자마자 장비부터 찾는 안현의 행동에 신상용은 피식 웃곤 몸을 일으켰다. 이어서 앞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목이 잘려 널브러진 시체 옆으로 가지런히 나열된 투구, 창, 갑옷 등이 보였다. 일단은 하나씩 옮길 생각에 허리를 숙여 투구를 집으려는 찰나, 마주보는 방향에서 양손으로 갑옷을 집는 가녀린 손길을 확인했다. 신상용은 설핏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흘끗 마주 보는 검후가 보였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창을 집었고, 바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타박. 타박. - 흐응. 여기는 왜 이렇게 사람이 없나 싶었는데…. 그 순간, 막 몸을 일으키려던 신상용과 검후의 몸이 딱 멈췄다. - 이건 아까 떠돌이들의 시체들…? 이건 예상치 못한 상황인데? 이어서 등 뒤로 들려오는 말에 급히 허리를 피려는 찰나. - 보아하니…. 아군으로 보이지는 않네. 휘리릭! 뭔가가 바람을 거칠게 찢으며 달려들었다. 팍! “악!” “컥!” 그리고 둘은 동시에 비명을 내질렀다. 신상용의 몸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떨리기 시작한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이윽고 완전히 시선을 내리자, 자신의 복부를 뚫고 나온 가시 돋친 굵은 채찍을 볼 수 있었다. 그 순간, 보이는 시선에서 한순간 땅이 멀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금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온다. 퍽! “꺽!” 바닥에 한 번 몸이 부딪치는 순간, 신상용의 목이 크게 꺾였다. 그러나 그것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퍽! 두 번. 퍽! 쿠당탕! 그리고 세 번에 이르러서야 몸에 꽂힌 채찍이 쑥 비틀려 빠지더니, 이내 관성의 힘으로 전방으로 쭉 나동그라진다. “혀, 형?” “오빠!” 숨이 턱 막히고, 복부에서, 전신에서 아릿한 고통이 밀려들어 온다. 이것은,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뒤늦게 애들이 달려오는 기척이 들렸지만, 이미 신상용은 육체는, 정신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엄습하는 고통에 그는 숨을 쉴 생각도 못한 채 꺽꺽거렸다. 그러한 상황에서 신상용은 초인적인 인내로 간신히 눈을 떴다. 그리고 힘겹게 고개를 들자,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애들이 보였다. 그는 반사적으로 반대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애들을 조준하는 한 여인이 보였다. 그녀의 손에는 자신의 복부를 꿰뚫은 게 분명한, 피와 살점이 묻어있는 채찍이 들려있었다. 휘리릭! 단 일말의 자비도 없이, 채찍이 휘둘러졌다. 그리고 그 순간, 신상용의 눈에 크게 떠졌다. 분명히 힘은 없었지만 그는 양손으로 대지를 짚고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양손을 크게 벌리며 신상용의 눈이 정면을 응시한다. 안현과, 안솔과, 이유정이 보였다. 그리고. 철썩! - 어머? 채찍이 가열차게 등을 후려치는 것과 동시에, 점점이 터져 나온 피가 허공을 수놓는다. 그와 동시에, 신상용의 눈앞이 캄캄하게 변했다. “────!” “────!” 애들이 고함쳤지만 들리지 않는다. 이미 귀에서는 찡한 소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 잠시 후. 다시 밝아진 신상용의 눈에 천천히 하늘이 넘어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셀 수 있을 만큼, 굉장히 느린 속도였다. 마치 정지라도 한 듯이 시간이 완만하게 흐른다. 그렇게 천천히 넘어가는 하늘이 점차 밝아지기 시작해, 이윽고 신상용의 시야를 하얗게 물들였다. 완전히 정신을 놓기 전, 신상용은 생각했다. 혹시 이게 죽기 직전에 본다는, 인생의 주마등이 아닐까 하고. 곧바로 파노라마처럼 흘러 드는 기억에, 신상용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 그 해의 겨울은 추웠다. 정말 유난히도 추운 겨울이었다. 삐뽀. 삐뽀. 삐뽀. 삐뽀. 환한 불길이 솟아오른다. 화염이 치솟고 혈흔이 낭자한 공간. 불길의 원인은 도로의 중앙에 뒤집힌 자동차였다. 차체가 찌그러진 자동차는, 불길에 둘러싸인 채 밤의 도로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차체의 안에는, 두 명의 어른이 웅크려 한 아이를 보호하고 있었다. 아이는 떨리는 눈으로 자신을 감싸는 어른을 쳐다보았다. 어른과 아이의 시선이 마주쳤다. 문득 한 어른이 피 젖은 손으로 아이를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 상용아. 살아남아라. 너만큼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아이는 떨리는 눈망울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아이의 주변이 바뀌었다. - 얼레리꼴레리. 얼레리꼴레리. 말더듬이래요. 말더듬이래요. 여러 명의 아이들이 한 아이를 둘러싼 채 놀리고 있었다. 애들의 중앙에 있는 아이는 그저 멍한 얼굴로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런 아이를 묵묵히 보던 할아버지가 하신 한 마디. - 침묵을 지켜라. 아이는 그 말을 지켰다. 스스로도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아무리 노력해도 버릇이 잘 고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의 정체는 바로 신상용이었다. 정체를 깨달은 것을 시작으로, 신상용의 뇌리에 기억이 하나씩 하나씩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신상용은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애초 소심한 성격과 맞물린 침묵은, 그의 주변을 외롭게 만들었다. 항상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왔고, 그 결과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심할 때는 왕따를 당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렇게 사는 게 익숙하기도 했고, 자신만 그렇게 사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자신은….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신상용도 하나 참지 못하는 게 있었다. 그것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이따금 찾아오는 외로움이었다. 어디 하나 의지할 데 없는 그의 주변은 언제나 어둡고, 차가웠다. 마치 겨울처럼. 지구의 계절은 항상 변했다. 그러나 그 해 멈춰버린 신상용 개인의 계절은 언제나 겨울이었다. 발버둥을 쳐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이가 들고,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가면서 조금 나아지기는 했다. 소기의 성과는 있었지만, 결국 원래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어릴 때만큼 심하게는 아니더라도 말은 여전히 더듬었고, 그걸로 인해 무시당하는 경우도 잦았다. 소심한 성격으로 손해 보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지만 괜찮다고 생각했다. 애당초 그렇게 혼자서 살아왔으니까. 그리고 홀 플레인으로 입장한 후. 통과의례를 통과하고 나서, 신상용은 근 일주일을 앓았다. 처음에는 왜 이곳에 소환됐는지,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다. 이후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처음 든 생각…. 그것은 바로, 홀 플레인은 혼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라는 것. 유달리 삶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신상용에게, 살아남으려면 세상에 적응해야 했다. 그리고 적응하려면, 자신의 모든걸 바꾸는 게 우선 과제였다. 그러나 신상용의 인생은 홀 플레인에 들어와서도 변하지 않았다. 악착같이 잡일을 해보기도, 무서움을 떨치고 탐험에 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았다. - 저 사람 너무한 거 아니야? 아무리 마법사라고 하지만 너무 뺀다. 아니 그럴 거면 캐러밴에 왜 끼었어요? - 말을 더듬어도 주문은 똑바로 외우셔야죠. 죽을뻔했잖아요. - 연금술을 익힌 마법사는 받지 않습니다. - 고어 해석? 별로 내키지는 않네요. 고대 유적을 발굴하면 연락 드려보겠습니다. 1년이 지났다. 어느덧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신상용의 주변에는 그 누구도 서 있지 않았다. 그는 나름대로 노력했다고 생각했다. 참고 기다려보면, 봄이 올 거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돌아온 결과는 현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결국 현대에서도, 홀 플레인에서도 신상용은 여전히 혼자였다. 신상용의 계절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은 봄이 오는 것을 가만히 기다렸던 게 아니었을까? 어렸을 때부터 익숙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자신이 겨울을 나가는 것을 방해했던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들. 하지만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은 상태였다. 이미 자신은 홀 플레인에서 비주류였고 혼자였다. '사용자 정보'가 우선되는 세상에, 환영 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그리고 신상용은 크게 마음을 먹었다. 마지막으로, 이제 마지막으로 세상 밖으로 걸어나가 보자고. 그리고 자칫 목숨을 잃을뻔했던 탐험에서, 비로소 한 명의 사용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사용자는 자신과는 사뭇 다른 인간이요, 사용자였다. 언제나 주도적으로 행동하였고, 주변 사람들의 한없는 신뢰를 받았다. 그래. 그 사내는 마치 태양과도 같았다. 신상용은 생각했다. 어쩌면 태양 옆에 있다면 자신의 겨울을 녹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신상용은 모든 것을 무릅쓰고, 처음으로 매달렸다. 항상 순응하고 물러났던 그에게는 처음으로 해보는 매달림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 좋습니다. - 예, 예? - 사용자 신상용씨의 가입을 환영합니다. 현실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언제 끝나나 기다렸던 겨울의 얼음이 서서히 녹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꽁꽁 얼어붙었던 신상용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찾아 들었다. 변화는, 바로 주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 사용자 신상용. 너무 무리하시면 안 좋습니다. - 하, 하하. 리, 리더께서 할 말은 아니신 것 같은데요. - 하하하! 그렇군요. 여태껏 아무도 오려 하지 않았던 자신의 주변으로. - 요호호호. 이봐 이봐! 신상용! 이 스승님께서 말이지. 드디어 중임을 맡았다고. - 예, 예? 중임이라니요? - 그래. 중임 말이야 중임. 김수현이 부탁했어. 그것도 직접! 도와줄 거지? 한 명씩. - 형! 저번에 도와주신 거 고마웠어요! 저희 나름 잘 맞는데요? - 어휴. 오빠가 다했으면서 생색은. - 그러게나 말이에요오. 한 명씩.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신상용은 드디어 자신이 있을 곳을, 아니 있어도 된다는 곳을 찾았다는 생각에 기뻐했다. 그래서, 더욱 상심했던 건지도 모른다. - 이번 인선에서 사용자 신상용은 제외하도록 하겠습니다. - 비 전투 사용자가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마법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클랜원이 있었다. 연금술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설마 이대로 쓸모 없어지는 게 아닐까…. 어쩌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래서 신상용은 전쟁에 참가했다. 자신의 존재감을 입증하겠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그 결과…. “───! ───!” “───! ───!” “───! ───!” 응? 갑작스레 들려오는 소리에 신상용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을 비볐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공간이었는데, 어느덧 머셔너리 클랜원들이 서 있었다. 반사적으로 걸어가려던 신상용은, 일순 걸음을 멈췄다. 과연 내가 들어갈 자리가 있을까…? 그 순간, 다시금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흘러 든다. 함께 식사를 할 때. 함께 불침번을 설 때. 함께 유적 탐험했을 때. 함께 목숨을 걸고 전투했을 때. 함께 클랜 하우스에 들어갔을 때. 함께 정원에서 즐겁게 축제를 벌일 때. 신상용은 멍하니 기억의 장면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때, 한 명이 천천히 등을 돌리었다. 사내는 가볍게 웃고는 슬쩍 발을 비켜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그와 동시에 모든 클랜원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어서 오라는 듯한 태도에, 신상용은 이끌리듯이 걸어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비로소 안으로 들어간 순간. - 사용자 신상용씨의 가입을 환영합니다…. “───! ───!” “───! ───!” “───! ───!” 시야가, 다시 하얗게 변하였다. “…….” 몸에 감각이 없었다. 지금 보는 게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이윽고 시야가 천천히 흔들렸다. 그러한 흔들림 사이로, 익숙한 세 명의 얼굴이 보였다. “혀엉! 혀어엉!” “오빠! 오빠! 대답해! 대답하라고!” “───. ───. ───. 치료!” 소리치는 안현. 몸을 미친 듯이 흔드는 이유정. 정신 없이 주문을 외우는 안솔. “형. 살 수 있어요. 살 수 있데요!” “조금만 참아! 지금 바로 치료 중이니까! 응?” 살 수 있다고? 어렴풋이 들리는 말. 신상용은 서서히 입술을 떼었다. “다행….” “어, 어? 다행? 그렇지! 다행이지! 응?” 외침에, 신상용은 희미하게 웃었다. 아직 할게 많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애들한테 사과도 하고 싶었다. 스승님에게 이제는 마수를 소환할 수 있다고 자랑도 하고 싶었다. 이제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뭐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과는 반대로, 몸은 서서히 식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한 상반된 감정 속에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신상용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세 명을 보았다. “미안….” 미안합니다. “정말…. 고마….” 정말 고마웠습니다. 이윽고, 신상용은 웃었다. 그리고 울었다. 웃으면서 울었다. 갑작스레 머릿속으로 어둠이 찾아 든다. 실은 아까부터 자꾸만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해서, 신상용은 잠깐 눈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오빠. 왜 그래? 왜 갑자기 눈을 감아? 응?” 왠지 모르게 홀가분한 기분에, 신상용은 나직이 읊조렸다. “겨울 지나면…. 봄 온다….” 그 순간 간신히 이어오던 뭔가가, 갑자기 뚝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형…. 형…? 형…!” 신상용은 그대로 눈을 감기 전 생각했다. 그래도. 혹시라도 다시 눈을 뜰 수 있다면…. “오빠…?” 이제는, 따뜻한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다고. * 신상용의 눈이 완전히 감기는 것과 함께, 괴어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안현과 이유정이 울부짖는 와중에도, 안솔은 여전히 치료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심장 부근에 손을 대었다. 하지만 이미 멎어버린 심장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싸늘하게 식어가는 온기만 느껴질 뿐…. 안솔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뻥 뚫린 복부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어느새 그녀의 로브를 적시고 있었다. 그러나 신상용의 얼굴은 편안하기 그지없다. 비록 피가 흘러나오고는 있어도, 입술은 분명히 미소 짓고 있었다. 이윽고 안솔은 조용히 입술을 떼었다. “오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안솔이 한 번 더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오….” 툭. 채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신상용의 고개가 힘없이 떨구어졌다. 두근! 그 순간. 두근두근! 안솔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오전 04:41분 완료했습니다. 그래도 3시간은 잘 수 있겠네요. 하하. 신상용 파트 끝났습니다. 다음 회부터 김수현 등장합니다. 이제 전쟁은 팔부능선은 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남은 거야 뭐…. 역관광라이즈밖에 더 있겠나요.(퍽퍽!) 흠. 28K, 17K, 23K. 총합 68K. 이번 주말에 거의 5회 분량에 가까운 내용을 연재했네요. 그래서 10월 29일(화요일)은 쉴 생각입니다. 이번엔 주말을 반납하고 진짜 하얗게 불태웠거든요. 양해해주시리라 믿어요.(해주실거죠?) 머리가 멍하네요. 일단 자야겠어요. 10월 30일(수요일)에 뵈어요! 0379 / 0933 ---------------------------------------------- 늦어버린 한 걸음 후웅! 철썩! “흑!” 낭창낭창 휘어들어오는 채찍을 간신히 걷어내며, 검후는 깊은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제는 정말 한계라고. - 와. 대단하네. 그 상처를 입고서. 혹시 시크릿 클래스? 채찍을 든 여인이 이채를 띠었지만, 검후는 이제 대꾸할 힘도 없었다. 부랑자들과의 전투 후 체력은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그 상태서, 불의의 일격에 복부가 꿰 뚫리고 바닥에 두세 번 내동댕이쳐졌다. 정신력으로 겨우 일어나기는 했어도 이미 내구는 심각히 저하된 상태였다. 어쩌면 지금껏 홀로 맞상대한 게 기적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그만큼 검후의 상태는 심각했다. 자꾸만 아득해지는 정신을 악착같이 붙잡으며 검후는 곁눈질을 했다. 아까와 같은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어쩌면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쓰러진 남자와 그를 둘러싼 채 울부짖는 세 명만이 보일 뿐이었다.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걸 확인하자 검후의 눈에 암담함이 스쳤다. 그때였다. - 전투중에 한 눈을 팔면 어떡해. 푹! “아악!” 그것은 정말로 아차 한 순간이었다. 검후가 낙담한 사이를 노린 여인이 그녀를 정확히 찔러온 것이다. 검후는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었지만, 결국 채찍이 오른쪽 어깨를 후려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설아'를 놓쳤고 이내 몸을 허물어뜨렸다. 휘리릭! 착! 이윽고 채찍을 회수한 여인, 유리나는 손을 털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체 다섯 구가 보였지만 아까 달려나간 떠돌이들은 못해도 네 배는 되는 인원이었다. 눈앞의 사용자들에게 몰려 도망쳤다고 생각하기는 힘들고, 누군가에 쫓겨 급히 달아난 모양이었다. - 시몬이 주변만 살피고 오라고 했었지? 그래도 확실히 해야겠다고 생각해, 유리나는 남은 세 명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하나같이 슬픔에 젖은 얼굴로 한 남자를 끌어안고 흐느끼는 중이었다. 그녀는 잠깐 고개를 갸웃하곤 어느 정도 거리를 남긴 채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왼손을 무릎에 짚고 살짝 허리를 숙이며 말을 걸었다. - 저기 있잖아. 하나 물어볼게 있는데…. 혹시 여기로 약간 뚱뚱한 남자가 오지 않았니? 약간 뚱뚱한 남자란 유리나의 시선에서 본 이강산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말을 알아들을 수 없기도 했거니와, 비로소 정신을 차린 안현이 분노 가득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이다. 유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안현이 창을 집고 일어나려는 순간 지체 않고 채찍을 휘갈겼다. 푹. 채찍은 무방비 상태의 가슴에 손쉽게 꽂혔다. 울컥 터져 나오는 핏물과 함께 높은 비명이 사방을 울렸다. 담담한 얼굴로 채찍을 회수하자 끈에 달린 가시에 피와 살점들이 딸려 나왔다. 창을 쥔 자세 그대로 안현의 몸이 무너졌다. “아, 안현?! 이 씨발년이…!” 그 상태 그대로, 유리나는 다시 한 번 채찍을 휘둘렀다. 푹.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던 이유정의 움직임이 일순 뚝 멈췄다. 한순간 믿을 수 없다는 빛이 얼굴을 스쳤다. 이윽고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옆구리를 응시했다. 이미 벌어져 있던 상처였는데, 그 틈을 뚫고 들어온 게 있었다. 이유정은 떨리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안, 솔…. 도망….” 풀썩! 이어서 몸을 허물어뜨리는 이유정을 보자 안솔은 순간적으로 호흡을 멈췄다. 잠시 후 한순간 정신이 나간 것처럼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저 갑작스레 온몸에 힘이 빠져 다리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언제나 반짝반짝 했던 눈동자가 서서히 빛을 잃어 잿빛으로 변하였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텅 비어버린 내면에서, 오직 아까부터 박동하는 심장만이 안솔을 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 아랑곳 않고 다가온 유리나는, 다시금 상냥히 물었다. - 그 남자 못 봤어? 여기 온 게 맞아? “아….” - 떠돌이들의 시체는 너희들이 처리한 거야? 혹시 어디로 갔는지 기억하니? “안….” 의미 없이 돌아오는 대답에 유리나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만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오른손을 한 번 살짝 흔들었다. 채찍은 S자를 그리며 짝! 소리가 날 정도로 대지를 내리쳤고, 이내 끝이 튀어올라 뱀처럼 쇄도했다. 그때였다. 그러나 그때, 금간 구슬 하나가 채찍의 진로로 불쑥 끼어들었다. 우웅! 쨍그랑! - 응? 유리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분명히 목을 노렸음에도 불구하고 채찍은 안솔에 닿지 못했다. 구슬의 정체는 바로 '개량형 수호의 방패'였다. 부랑자 때 보호막이 깨져 타격을 입긴 했지만 구슬 자체가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주인인 안솔의 위험을 감지한 순간 불완전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뛰어든 것이다. 푸스스…. 푸스스스…. 방금 전 보호막이 마지막 힘이었는지, 극히 일부만 남은 구슬이 대지에 떨어져 굴렀다. 산산이 부서진 파편은 서글프게 허공을 흩날렸다. “안 돼….” 바람을 타고 흩어지는 파편 속에서 안솔은 읊조렸다. - 뭐지? 유리나는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 그러나 조각난 구슬을 보고는 채찍을 고쳐 잡았다. 그에 따라 끈이 곡선으로 길게 늘어지고, 땅에 닿았다. 이윽고 그녀는 채찍을 잡은 손에 약간 힘을 주었다. 안솔은 다시 입을 열었다. “안 돼…!” 그때. 한없이 치솟아 오르던 안솔의 박동이, 진동이 최고조에 오르려는 순간. 거짓말처럼 모든 게 정지했다. 쿵쾅쿵쾅 뛰던 심장이 멎고, 몸에 흐르던 떨림도 사그라졌다. 마치 속 빈 인형처럼 그녀는 자신의 몸을 통제하지 못했고, 어떤 것도 느끼지 못했다. - 잘 가. 휘리릭! 이윽고 안솔의 고개가 힘없이 떨구어지는 것과 동시에 채찍이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그리고 여지없이 그녀의 복부를 부드럽게 관통한다. 복부를 뚫은 감촉은 아픔으로 바뀌었다. 이어서 전신으로 퍼지는 고통에 비명이 나오려는 순간, 시간이 완만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그 찰나의 순간. 안솔의 시선에 주변에 벌어진 모든 광경이 눈에 들었다. 멀리서 죽은 듯 쓰러져있는 검후가 보였다. 둥그런 피 웅덩이에 몸을 누인 안현이, 이유정이 보였다. 그리고 어느새 싸늘하게 식은 채,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신상용이 보였다. 모두가 쓰러져 있었다. 아무도 자신을 도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모든 광경이 느릿하게 흘러갔다. 그리고 그것은, 끝이 났다. 곧바로 정상으로 돌아온 것과 함께 몸이 밀린 안솔의 고개가 번쩍 치켜 들렸다. 이윽고 정지했던 박동이. 두근! 멈췄던 진동이. 두근! “안 돼애애애애애!” 비로소 안솔의 입술이 떼어진 바로 그 순간,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각성의 조건을 만족합니다. 당신의 간절한 기원에 응답하여, 각성 시크릿 클래스 '광휘의 사제(Priest Of Brilliance)'의 계승을 실행합니다.』 우우우우우웅! 그와 동시에, 안솔의 전신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 “수현. 잠시만요.” 한창 들판을 질주하던 도중 고연주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달리는 그대로 고개를 돌리자, 날카로운 눈빛을 사방에 뿌리는 그녀가 보였다.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사용자들이나, 적들이나. 갑자기 수가 줄었어요. 아니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요.” “흠.” 고연주의 말에, 나는 마력 감지로 주변의 기척을 잡아보았다. 확실히 그랬다. 정하연에 이어 신재룡, 그리고 김한별과 해밀 클랜원들을 구할 때까지만 해도 제법 많은 수의 적을 상대하고 피했었다. 그러나 고연주를 만난 이후부터, 갑작스레 적들의 출현이 잦아들었다.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적들의 목적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사각지대일지도 모릅니다.” “사각지대요?” “전위 부대가 앞서서 길을 뚫고 그 뒤를 수뇌부들이 따라가는 방식이죠.” “그렇다면….” 머리 회전이 빠른 고연주는 단박에 내 말을 알아들었다. 그러나 바로 얼굴이 핼쑥하게 변하는 게 약간의 망설임이 이는 모양이다. “두려우면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헛소리 말아요.” 고연주는 일견 나를 째려보았다. 사실상 무조건 돕겠다고 따라온 그녀였기에, 나를 혼자 놔두고 갈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림자 여왕' 정도라면 적잖은 도움을 기대할 수 있기에 나 또한 흔쾌히 허락한 상태였고. 아무튼 나로서는 반길만한 상황이었다. 남은 인원을 구해낸 다음 운만 따라준다면, 원래 목표한 수뇌부 몇 명은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애들의 운반은 고연주에게 맡길 예정이었다. 이제 남은 인원은 안현, 안솔, 이유정, 신상용이었다. 그리고 네 명은 공교롭게도 함께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거의 비슷한 위치에 몰려있었다. 대충 가늠해보아 이 최고 속도를 유지한다면 곧 도착할 수 있다. 아무튼 나와 가장 오랫동안 함께한 애들이었고, 무엇보다 안솔을 잃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해서 얼른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박차를 가한 찰나였다. 『사용자 신상용의 정보를 갱신합니다.』 갑작스레 떠오른 메시지에 나는 정보를 확인했다. '응?' 그러나 정보가 떠오르지 않는다. '전장의 가호'가 전해주는 정보는 위기에 몰린 아군의 위치를 전해주는 것. 애들의 정보는 여전히 그대로였고, 신상용의 정보는 사라졌다. 불현듯 불안한 생각 하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 멀리서, 거대한 빛의 기둥 하나가 하늘을 뚫을 듯 치솟아 올랐다. 그것은 곧 하늘에 둥그런 타원을 그렸고, 구멍 사이로 거대하면서도 아름다운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눈을 꼭 감은 채 하얀 빛으로 이루어진 형상은 꼭 천사라는 느낌을 주었다. 고오오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갑작스레 하늘에 투영된 천사. 눈앞 광경은 분명히 1회 차 때 단 한 번 본 기억이 있었다. 그래. 이것은 바로…. 『각성 시크릿 클래스. 광휘의 사제가 출현했습니다!』 『기적(Miracle)의 발동을 확인합니다!』 '기적이다!' 그때, 감겨있던 천사의 눈이 서서히 떠지었다. 화아아악! 그리고 천사의 눈이 완전히 떠진 순간, 천사의 전신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일대를 뒤덮을 정도로 내리쬐는 강렬한 빛에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살며시 눈을 뜨자 내려온 빛이 내게 스며드는 광경을 볼 수 있었고, 허공에 새로운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모든 체력이 회복됩니다!』 『모든 마력이 회복됩니다!』 『모든 상태 이상이 회복됩니다!』 한순간 몸 상태가 전부 회복됐다. 전장을 휘젓느라 알게 모르게 지쳐있었는데, 단숨에 원상태로 돌아온 것이다. 아니, 원상태도 아니다. 화정을 얻은 이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활력이 전신을 맴돌고 있었다. 이 정도로 몸이 최고조에 오른 것은 정말 간만이라 느껴질 정도였다. “어머?” 고연주도 새된 음성을 내질렀다. 약간 당황한 얼굴을 하면서도 팔을 움직이는 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광휘의 사제의 고유 능력. 기적. 이것이 발동됐다는 소리는…. “수현!” 그 순간, 나는 지체 않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주변 풍경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간다. 분명 안솔의 '광휘의 사제' 전직은 기뻐할 일이었다. 내가 생각해둔 계획들을 적어도 두 배, 아니 세 배는 빠르게 앞당길 수 있으니까. 그러나 까닭 없는 불안감이 마음을 엄습하는 건 도대체 왜일까? 해답은 바로 알 수 있었다. 한껏 예민해진 감각에 드디어 애들의 기척이 감지된 것이다. 그리고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거리가 줄어들었을 즈음, 나는 깊은 신음을 흘렸다. 먼저 보이는 건, 검후가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문제가 아니었다. 부근에는 안현도, 이유정도, 신상용도 하나같이 피 웅덩이 속에 몸을 누인 상황이었다. 한순간 머리가 멍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범인으로 보이는 여인이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는걸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가시 달린 채찍이 쥐어져 있었다. - 하. 어리어리해 보여서는. 무서운 힘을 숨기고 있었네. 중얼거리는 여인의 앞에는, 등에 하얀 날개를 일렁이는 안솔이 눈을 꾹 감은 채 앉아있었다. 이윽고 여인이 채찍을 하늘 높이 들었다. 거리는 아직 남아 있었다. 나는 지체 않고 '빅토리아의 영광'을 들어, 있는 힘껏 여인을 향해 던졌다. 쐐액! - 응? 그 순간,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바로 제 3단 비행을 펼쳤다. 퉁! 팟! 쿵! 도약, 이형환위, 궁신탄영 후 눈을 뜨자, 뒤늦게 들어온 검이 여인에게 짓쳐 드는걸 확인할 수 있었다. 챙! - 꺄악! “오, 오라버니?” 옆으로 검이 튀어오르는 소리와 함께 높은 비명이 들린 순간, 미약한 목소리가 나를 일깨웠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눈을뜬 안솔이 나를 올려다보는게 보였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왜…. 왜 이렇게 늦게…. 다…. 다….” 자신이 한 일을 모르는걸까? 안솔의 목멘 어조가 귓가로 흘러든다. 나는 어떤일보다 먼저, 제 3의 눈으로 주변을 확인했다. 어느덧 품에 둔 엘릭서 한 병을 꽉 쥔채로. 『사용자 남다은(정상).』 『사용자 안현(정상).』 『사용자 이유정(정상).』 그러나 제 3의 눈으로 확인한 세 명은 살아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몸은 쓰러져 있었지만, 그들 또한 기적의 효과를 받은 게 틀림없었다. 나는 다급한 와중 가슴을 쓸어 내리며, 남은 한 명을 응시했다. 『사용자 신상용(사망).』 '…….' 그러나 신상용이, 사망했다. 그 순간 나는 홀린 듯 다가가, 신상용의 앞에서 한 쪽 무릎을 꿇었다. 몸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다. 아무래도 채찍을 든 여인의 소행인듯하다. 무척 아팠을 터인데, 얼굴은 고통이 아닌 편안하고 잔잔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그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나는 조용히 신상용을 응시했다. '…….' 아무렇지도 않다. 어차피 한두 명은 죽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게 고연주나 안솔이었다면 아까웠겠지만, '키메라 연금술사'는 비비앙이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다. 그냥 담담한 기분이었다. 사람을 잃어본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익숙한 상황이었다. 분명히 신상용의 죽음을 확인했음에도,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 아니. 아무런 기분도 느끼지 못했다. * 안솔의 눈에 보이는 허공에는 여러 메시지들이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에 보이는 건 단 하나, 김수현뿐이었다. “오라버니….” 안솔은 김수현의 등을 응시했다.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눈에 띄는 상처는 보이지 않지만 그의 등은 처참했다. 갈기갈기 찢어진 '푸른 용기사의 외투'부터 내부에 덕지덕지 묻은 핏자국까지. 그 동안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여과 없이 알려주는 외관에, 문득 안솔은 부끄러움이란 감정을 느꼈다. 이윽고 그녀가 조심스레 손을 뻗으려는 찰나였다. “하….” 나직한 한숨과 함께 김수현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순간, 주변의 모든 공기가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한순간 턱 막혀오는 숨에 안솔은 절로 손을 떨어뜨렸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 몸이 먼저 반응했던 걸까.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다. 화륵! 화르륵! 순간 얼굴을 치켜든 김수현의 눈에서 한 줄기 맑은 불꽃이 흘러나온다. 그와 동시에 강둑을 범람하는 홍수처럼, 모든 것을 깡그리 집어삼킬듯한 가공(可恐)할 기운이 세차게 뿜어졌다. 기운은 순식간에 일대를 점령했다. 흐르는 기운 속에서 그 누구도 함부로 움직일 생각을 못했다. 그것은 명명백백한 살기를 품고 있었다. 터벅터벅. 김수현은 담담한 얼굴로 걸어 바닥에 떨어진 '빅토리아의 영광'을 주워들었다. 유리나는 괴어있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한 행동은 처음부터 분명 허점을 보이고 있음에도, 그녀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으니까. 여기서 한 걸음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바로 죽는다는 것을. ============================ 작품 후기 ============================ 많은 분들의 관심 감사합니다. 광휘의 사제가 출현했습니다. 그리고 클래스의 고유 능력 기적은, 광휘의 사제를 끝판 대장으로 불리게 한 능력이지요. 물론 굉장히 사기적인 능력이지만, 그만한 페널티도 존재합니다. 신상용은 죽었습니다. 다른 애들은 심한 상처를 입었지만 아주 약간이라도 숨이 붙어있는 반면, 신상용은 아예 목숨이 끊어진 상태였으니까요. 그래서 기적의 효과를 받지 못한 겁니다. 만약 기적에 부활의 권능이 주어진다면, 그거야말로 설정 충돌이 되겠지요. 균형도 제법 어그러지고요. 신상용을 살리라는 코멘트가 압도적이었지만, 원래 구상 그대로 가는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 근래 연재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솔직히 원래 12시 이전에 분량은 채운 상태였습니다. 자정 연재를 지킬 수 있는 상황이었지요. 그럼에도 늦은 이유는, 분량을 추가하고 글을 가다듬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만약 초고나 다름없는 상태 그대로 올린다면, 현재 여러분들이 느껴주시는 재미에 반의 반도 느끼지 못하실 겁니다. 적어도 최소한의 것은 다듬고 올리겠다는 생각이오니 독자 분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PS. 코멘트란 에 러브 지수라는 게 새로 생겼네요. 혹시 어떤 건지 아시는 분 계시나요? 0380 / 0933 ---------------------------------------------- 늦어버린 한 걸음 문득, 목이 바짝 타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아무 의미 없이 머리카락을 세게 쓸어 넘겼다. 그리고 아직 미동도 않은 채 서 있는 적에게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노엘 유리나.” 이름을 부르자, 유리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 나…? 나를 알고 있어? 알고 있고말고. 적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스친다. 나는 대답 대신 검을 상단으로 들었다. 그리고 손목을 살짝 비틀어 '빅토리아의 영광'을 세로로 돌렸다. 회의 때도 몇 번 거론됐었고 제 3의 정보로도 확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1회 차 때 '악녀'로 불리며 시몬의 최 측근으로 활동했던 여인…. 아니 적. 그러나 내가 유리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 알고 있든 알고 있지 않든, 죽여야 할 수많은 적들 중 하나 일뿐. 결국 '죽인다.'라는 결론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생각과 동시에 몸을 활처럼 휘었다. - 너는 누구지?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대답해! 그리고 일거에 마력을 터뜨림과 동시에, 궁신탄영(弓身彈影)으로 튕기듯 앞으로 짓쳐 들었다. 순간 유리나의 얼굴에 낭패한 빛이 떠올랐다. 문답무용. 찰나의 순간 거리는 지척으로 줄어들었고, 유리나는 침착히 손을 움직여 채찍을 들어올렸다. 우우우우웅! 휘리릭! '빅토리아의 영광'이 검음을 울리는 아슬아슬한 순간, 내뻗어진 채찍은 정확히 검 끝에 닿았다. 그러더니 뱀이 기어오듯 구불구불한 궤도를 그리며 재빠르게 파고든다. 삽시간에 절반이 넘게 감겼을 즈음, 그녀의 얼굴에서 일말의 희망이 피어올랐다. 그때, 나는 주저 않고 검을 놓았다. - 뭐? 검에 고정돼있던 시선은 곧바로 경악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시선을 돌리기 전 나는 그대로 안으로 파고들었고, 머리와 몸통을 잇는 잘록한 부분으로 왼손을 내뻗었다. - 아! 그리고 손바닥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 순간, 나는 손에 잡힌걸 지체 않고 아래로 끌어당겼다. 휙! 강제적으로 구부러지는 유리나의 상반신. 그리고 머리가 굽혀지는 궤적에 따라, 나는 있는 힘껏 왼발을 박차 안면이 떨어지는 곳으로 무릎을 들어올렸다. 뻑! 무릎에 둔중한 충격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여전히 쥐고 있던 손을 꽉 움켜잡았다. 찌직! 뿌드득! - 껙…! 살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손안 가득히 잡힌 살점과 뼈가 느껴졌다. 반대로 튕겨나가는 적의 얼굴은 중앙이 깨져 움푹 들어간 상태였고, 거칠게 찢어진 목구멍에는 피가 콸콸 흘러나오고 있었다. 쿵! 이윽고 적은 완전히 몸을 쓰러뜨렸다. 아직 살아있는지 한두 번 몸을 움찔했지만, 이내 축 늘어지고야 말았다.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로서 내가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구해내었다. 그러나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부족했다. 곧바로 원수를 갚았음에도 불구하고, 목을 어지럽히는 갈증이 가시질 않는다. 나는 무심히 시체를 보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사용자 고연주.” “…….” 대답은 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한 번 고연주를 돌아보자, 멍한 얼굴로 바닥을 응시하는 그녀가 보인다. “클랜 로드로서 명합니다. 지금 바로, 여기 있는 인원을 데리고 전장을 이탈합니다.” “아.” 그러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연주는 황급히 시선을 돌려 고개를 끄덕였다. “크, 클랜 로드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한 번 고개를 끄덕인 후. 나는 다시 한 번 시체를 보았다. 시체의 정체는 '악녀' 노엘 유리나. 서 대륙의 수장 시몬의 최 측근. 그녀가 여기 있었다는 소리는…. 나는 잠시 왼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몬은 이미 지나쳤을까.' 그리고 오른쪽을 본다. '아니면 아직 오고 있는 걸까.' 그때였다. “오라버니….” 바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애절한 목소리로 내 옷깃을 꾹 잡는 기척을 느꼈다. 차분히 고개를 돌리자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는 안솔이 보인다. 어깨는 가늘게 들썩여 흐느끼고 입술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가, 가실 거예요?” “놔….” 지금 이 상황에 어리광을 피울 거냐 란 생각에, 바로 뿌리치려는 찰나였다. 안솔이 천천히 왼팔을 들었다. 이어지는 그녀의 행동에 나는 일순 입을 다물었다. “여기….” 이윽고 안솔의 팔 끝으로 시선을 옮기니, 검지가 한 쪽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가려는 방향이랑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이쪽이에요…!” “너…?” “혼내…. 혼내주세요.” 나는 그제야 안솔의 상태를 정확히 살필 수 있었다. 음색은 목소리 반 울음 반이었지만, 눈빛만은 형형하기 그지없다. 멍하니 안솔을 응시하다가, 나는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이윽고 그녀의 팔이 저절로 툭 떨어졌다. 나 또한 머리에서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탁탁탁탁! 안솔이 가르쳐준 방향에서 비릿한 바람이 불어온다. 앞에 어떤 일이 있을지, 누가 있을지는 모른다. 그저 피 내음이 감도는 들판을 하염없이 달릴 뿐이었다. '신상용.' 문득 신상용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첫만남부터 전쟁의 기억까지. 신상용은 있는 듯 없는 듯 언제나 조용했다. 비록 존재감은 옅었지만 매사에 묵묵히 제 할 일을 다하는 사람. '폐허의 연구소' 탐험 중 보물을 발견했을 때, 신상용은 스스로 자청해서 경계 역할을 맡았다. '절규의 동굴'에서 강행군을 펼쳤을 때, 신상용은 스스로 자청해서 불침번 역할을 맡았다. 보상으로 마력 영약을 주었을 때, 결국에는 갖지 않고 안솔에게 먹였다. 그래. 첫 만남부터 신상용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유난히도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었다. 행동 하나하나에 어떻게든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기색이 엿보였다. 그것을 보며 1회 차의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조금만 더 빨리 왔다면….' 나는 신상용의 죽음을 보지 못했다. 과연 그는 죽어가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원망했을까? 후회했을까?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의 복잡한 생각이 순식간에 떠올랐다가,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그 와중에, 나는 계속 안솔이 가르쳐준 방향으로 일직선으로 달렸다. 아직도 바람은 불고 있었다. 다만 미약했던 피 내음이 가면 갈수록 더욱 짙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어디 한 군데 선을 기점으로, 다시금 여러 기척들이 우수수 잡히기 시작했다. 이미 한 번 휩쓸고 지나간 걸까? 붉게 물든 들판을 밟고 달리는 발에서, 끈적끈적한 점성 있는 액체가 흐른다. “마력 제한이 풀렸다!” - 가,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왜 갑자기 쌩쌩해진 건데? 이윽고 앞쪽에서 여러 명이 고함치는 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흘러들었다. 나는 설핏 고개를 들었다. '역시.' 멀리서 서서히 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역시나 이곳으로 가장 많이 몰린 모양. 시야를 가득 채울 정도로 빽빽한 숫자가 잡히는 게, 이곳저곳에서 격전이 벌어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광휘의 사제의' 고유 능력 '기적'은 나뿐만 아니라 아군 전원에 영향을 미친 게 틀림없었다. 아까 전과 같은 일방적은 학살이 아닌, 동부 사용자들은 밀리면서도 치열하게 전투하고 있었다. 서로의 병장기가 시끄럽게 부딪치고, 비명이 도처를 날아다닌다. 화살이 사방으로 뿌려진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폭음은 아마 마법의 잔재이리라. 조금 전 신상용의 생각으로 약간 가라앉았지만, 막상 전장을 보자마자 격한 감정이 일었다. 잠시 잊었던 갈증이 되살아나는 게 느껴졌다. 우우웅! 우우우웅! 한 폭의 지옥도로 들어가기 직전, 나는 '빅토리아의 영광'을 한 번 크게 휘둘렀다. 마력을 가득 먹은 검은 이내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피로 물든 전장을 환하게 밝혔다. - 기습이다! 그 순간 가장 후미에 있던 적들이 등을 돌려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살짝 몸을 틀어 옆으로 파고든 창을 피하고 좌우로 검을 흐르듯 베었다. 푸확! 곧이어 튀어나온 시뻘건 핏줄기가 내 앞을 X자로 교차하고, 눈을 물들였다. 후웅! - 크아아악! 그때, 정면에서 도약한 한 사내가 괴성을 지르며 양팔을 높게 들어올렸다. 햇빛에 반사된 날이 한 번 번쩍인 순간, 나는 허공에 잽을 날리듯 한 번 가볍게 검을 쳤다. 뻥! 파각! 허공으로 날아간 파동은 막 내려치려던 사내의 머리를 곧바로 쳤다. 허공에 떠 있던 몸 위로, 사방으로 파편이 비산한다. 그러자 다른 방향에서 나를 돌아보던 적들이 일순 움직임을 멈칫했다. '걸리적거리는 건 무조건 벤다.' 이미 직진하기로 마음먹은 상황이었다. 그게 바로 신상용을 위한, 적에게 내가 내민 최소한의 타협점. 그때였다. “드디어 찾았군. 머셔너리 로드.”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와 함께, 마력 감지에 누군가 재빠르게 옆으로 파고드는 기척이 잡혔다.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한 호흡 돌리고 고개를 돌리기 전, 기척은 이미 범위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물론, 그것은 내 사정거리 안에도 들어와 있음을 의미했다. 순간 '빅토리아의 영광'을 고쳐 잡은 나는, 재빠르게 비스듬히 세워 오른쪽 가슴 위로 올려 쳤다. 깡! 붉은 불똥이 튀겼다. 들어온 무기의 정체는 창이었다. 검 끝은 정확히 창 끝을 가격했고, 이내 창은 여지없이 위로 솟구쳤다. 그럼에도 적은 나에게로의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 이윽고 내 어깨를 짚는 감촉과 함께 귓가로 낮은 음성이 재차 흘러들었다. “과연. 대단한데. 백서연이 당할만하군.” '부랑자인가?' 동시에 창의 움직임이 기형적인 변화를 보였다. 마치 막을 것을 예상했다는 듯 허공에서 휙 돌더니, 이내 핑그르르 회전하여 턴을 그리며 짓쳐 들었다.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검은 돌풍을 일으키는 창은 정확히 내 사각을 노리고 있었다. “일단 구멍 하나 뚫고 잠시 이야기 좀 하도록 하지.” 예전이었다면. 마음속으로나마 주의가 분산된 틈을 노려 연타를 날린 점을 칭찬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방해다.' 그저 방해라는 생각에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심장에 잠재된 힘을 한껏 폭발시켰다. 화륵, 화르륵! 가슴팍에서 화정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맑은 불꽃은 지체 않고 창을 집어삼켰고, 내 의지에 따라 깡그리 불태웠다. 이윽고 드러난 공간에는 언제 창이 있었냐는 듯 허공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어깨를 잡은 손에서, 미약하지만 움찔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손 치워. 꺼져.”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나는 '빅토리아의 영광'을 그대로 쭉 밀어 올렸다. “컥!” 외마디 비명과 함께 뭔가가 작렬한 느낌이 전해져 들어왔다. 나는 손을 털듯 앞 방향으로 세게 검을 털었다. 그러자 혀를 빼문 채 바닥에 나자빠지는 한 사내를 볼 수 있었다. 현이라고 했던가? 전투 전 성벽에서 나와 이야기를 나눴던 놈이었다. 어떻게 방어했는지는 모르지만, 놈은 아직 죽지 않았다. 뒹구는 사이 손을 내뻗어 바닥을 짚는 게 그 증거였다. 나는 바로 놈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칼을 내려찍어 바닥을 짚은 손을 쑤시고, 마력을 가득 담은 발로 배를 걷어차 버렸다. 뿌지직! “아아악!” 다시금 대지를 구르는 놈은 구슬픈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그대로 또 달려가, 이번엔 공을 차듯 얼굴을 걷어 찼다. 수박처럼 터지는 머리를 확인한 후에야 놈의 비명이 비로소 멎었다. 이내 몸을 축 늘어뜨리는 놈을 보다가, 나는 한 호흡을 돌리며 고개를 들었다. - ……. - ……. 적들이 공격해오지 않는다. 사방에 널린 게 적들인데, 나를 보고 있는 놈들도 제법 있는데. 호전적인 성향의 서 대륙 사용자들이 지천임에도, 다들 나와 주변을 번갈아 보며 주춤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상태서, 나는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자 적들이 한 걸음 물러났다. 문득 머리카락과 볼에 흐르는 따뜻한 액체가 느껴졌다. 그것을 인지하자 왠지 모르게 심한 갈증이 일었다. 아까부터 일어난 목의 메마름이 더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면 후련해질 것 같았다. 방금 전도 부랑자를 죽일 때 잠깐이지만 타오르던 목이 시원했다. 그래. 오지 않으면 내가 간다. 피핑! 피피핑! 그렇게 생각하고 몸을 휜 찰나, 몇 발의 화살이 나에게 날아들었다. 나는 그대로 몸을 앞으로 튕기면서 쏘아진 화살에서 벗어났다. 등 뒤로 애꿎은 바닥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 젠장! 낮게 허공을 날았던 발이 바닥에 닿은 순간, 눈치만 보던 수 명이 횡 열로 동시에 달려들었다. 나는 검을 비스듬히 세워 첫 번째로 들어오는 공격을 걷어내고, 그와 동시에 몸을 숙여 날아온 힘 그대로 몸을 미끄러뜨렸다. 후웅! 후웅! 허공만을 가르는 당황한 무기의 궤적들 사이를 빠져나가며 나는 주워담듯 검을 크게 한 번 쓸었다. 그러자 뭔가 싹둑싹둑 걸리는 느낌이 나는가 싶더니, 이내 전부 빠져 나왔을 때. - 아아악! 아아아악! 동시에 몸을 허물어뜨리는 놈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멍하니 서 있던 한 놈이 나를 보며 입을 쩍 벌리는 게 보였다. 그대로 옆을 지나치면서 나는 단숨에 허리를 갈랐다. 중 갑옷을 입고 있음에도 검은 부담 없이 강철을 베어 허리를 잘랐다. 그리고 놈의 비명과 함께 허리를 굽히는 순간, 나는 머리를 손으로 짚어 뛰어올랐다. 그리고 그대로 등을 박차고 재차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대지가 순식간에 멀어지며 아래로 격렬한 전장이 한 눈에 잡힐 듯 보였다. 여기저기서 전투를 벌이는 놈들도. 발목이 잘라진 채 신음하는 놈들도. 방금 전 찌른 놈이 그대로 고꾸라지는 것도. 그리고 일부 나를 잡기 위해 모여드는 적들도. 이윽고 몸은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날았다. 착지 점에는, 한창 전투를 벌이는 사용자들과 적들이 엉겨있었다.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막 하강하기 직전, 누군가 익숙한 얼굴을 한 사내가 눈에 들었다. 그 또한 허공으로 고개를 올린 상태였다. 그리고 눈을 마주친 순간 사내는 한껏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더니 착지 점을 향해 손을 내뻗어 있는 힘껏 뭐라고 소리질렀다. 뻥! 그러자, 마치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폭음과 함께 검붉은 대지가 한 번 크게 풀썩거렸다. 시커먼 연기가 대지에 둥그렇게 솟아오르며 적들을 덮친다. 연기에 맞은 적들은 순식간에 몸이 부풀더니 이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녹아 내렸다. 하강을 시작한 순간 연기는 순식간에 걷히었다. 이어서 드러난 공간에는, 녹아 내린 적들과 확보된 공간이 있었다. 잠깐 고개를 갸웃했지만, 어쨌든 좋았다. 나는 '빅토리아의 영광'에 마력을 보내며 하늘 높이 들었다. 그리고 빙글빙글 돌리며 떨어졌다. 검에서 흘러나온 궤적은 돌리는 그대로 잔상을 남기었고, 이내 확보된 공간으로 안전하게 떨어져 내린 순간에는, 회오리와 비슷한 형태가 만들어져 있었다. 쿵! 이윽고 대지에 착지한 순간, 나는 검을 비틀어 이어지던 궤적을 끊어냈다. 그리고 비어있는 왼손으로 허공을 후려갈겼다. 뻥! 그러자 궤적의 잔상에 남아있던 마력은, 한순간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사방으로 넓게 퍼졌다. 스칵, 스칵, 스칵, 스칵! 스칵, 스칵, 스칵, 스칵! 마치 넓게 퍼지는 회오리처럼, 칼날의 폭풍이 주변의 적들을 가차없이 찢어발긴다. 구슬픈 비명과 함께 사방으로 신체의 파편이 거세게 휘날렸다. 그와 동시에 후드득, 뜨거운 피가 비처럼 쏟아져 몸을 적신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잠깐 정리된 전장으로 나를 보는 수많은 사용자들이 보였다. 그 중에는 아까 내 공간을 확보했던 '저주술사' 강태욱도 보였다. '그렇군. 그래서 제법 버티고 있었던 건가.' 아마 내가 뒤를 치는 것을 보고는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한 모양이다. 나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직 한 놈이 잔해 속에 묻혀 내가 걸어가려는 틈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막 검을 늘어뜨리려는 때였다. “위험!” - 죽어! 칵! 잔해 속에 묻혀 있던 한 명이 시체 사이서 솟아오르려는 순간, 목이 크게 꺾이며 몸을 허물어뜨렸다. 설핏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익숙한 얼굴이 한 명 보인다. “머, 머셔너리 로드!” 진혼의 암살자. 이찬희라고 했던가? 그는 투척한 단검을 회수하고는 곧장 내 앞으로 달려왔다. 그때였다. 『악마의 눈, 마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제 3의 눈으로 대응합니다. 간파했습니다! 마안의 사용자 시몬 그라임스를 확인합니다. 위치는….』 그 순간, 나는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혹시 그림자 여왕님이 어디 계신지 아십니까?” 나는 대충 한 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를 밀어젖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머, 머셔너리 로드! 어디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무시하고 달렸다. 이제야 안솔이 이쪽 방향으로 가라고 했던 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시몬 그라임스. 나는 놈을 죽이기 위해 이 전쟁에 참가했다. 안솔은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짚어준 것이다. * “비비앙? 이제 적들이 보이지 않아요. 슬슬 이동해도 되지 않을까요? 클랜 로드가 걱정 되요.” “…….” “비비앙?” 임한나의 물음에, 비비앙은 멍한 얼굴을 고치곤 눈을 깜빡였다. 그리곤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응. 그렇네.” “어디 아파요? 혹시 탈진….” 이어지는 임한나의 말에, 비비앙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냐. 몸은 거뜬해. 아까 빛을 맞은 이후로 갑자기 마력이 충전돼서. 하나 더 소환할 수 있을 정도야. 그런데….” “희소식이네요…! 그런데…?” 비비앙은 잠깐 고개를 갸웃하곤 한 쪽 방향을 응시했다. 그리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냥. 아까부터 조금 이상해서. 왜 갑자기 이렇게 슬퍼지는 걸까?” ============================ 작품 후기 ============================ 전쟁은 거의 끝났다고 보셔도 좋습니다. 다음 회는 지원 부대가 도착하고, 전투는 반전된 상황의 묘사와 함께 전반적인 흐름이 설명문으로 들어갈 겁니다. 남은 건 현재 수현의 목표인 시몬 그라임스를 비롯한 서 대륙의 수뇌부들을 추격해 잡는 것뿐입니다. 물론 써봐야 알겠지만, 지금 구상을 보면 다음 회 혹은 다 다음 회 안으로 대부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부 완결이 눈앞으로 다가왔네요. 아마 전쟁 부분까지 합쳐서 남은 회는 10회 전후가 될 예정입니다. 11월의 시작입니다. 11월의 목표는 1부 완결 전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일일 연재를 하는 것으로 잡았습니다. 1부 완결 후에는 차후 어떤 식으로 연재를 할지 잘 생각해보고, 그때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0381 / 0933 ---------------------------------------------- 마족 네르갈 챙! 무기와 무기가 맞부딪치는 철성(鐵聲)이 사방을 흔들었다. 그것은 비단 한 곳에서만 발생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도처에서 터져 나오는 세찬 진동은 곳곳을 울리며 전투의 격렬함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소리는, 정말로 제각각 이었다. 포효하는 괴성도, 고통에 젖은 비명도, 욕설 섞인 고함도, 발악하는 외침도. 사방에서 치솟는 폭음과 불길에 물기 어린 흙 모래가 흩날렸고, 그 사이로 어김없이 살점이 떨어지고 핏줄기가 튀어 올랐다. 그야말로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난전이었다. 이제는 적과 아군의 식별이 힘들 정도로, 동부와 서부는 서로 뒤엉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 새끼들아! 진형을 지켜! 도망치지 말고 자리를 지키라고!” 철퍽! - 아악! 어디 푸줏간에서나 쓸법한 도가 허공을 가르자, 구슬픈 비명과 함께 한 명의 부랑자가 몸을 허물었다. 이윽고 목과 몸이 분리된 시체가 바닥에 쓰러지는 것과 함께 사내는 일부러 거친 웃음을 터뜨렸다. “와하하하! 덤벼라 덤벼! 부랑자 학살자 김덕필님이 상대해주마!” 도의 주인공은 '부랑자 학살자' 김덕필이었다. 그의 앞으로는 하나같이 목이 달아난 시체 수십이 쌓여 있었다. 이내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도를 든 채 눈을 번뜩이자 몇몇 적들은 흠칫 몸을 떨었다. - 오오오오오오! 그러나 뒤에서 들려오는 아군의 함성에 힘을 얻었는지, 다시금 슬금슬금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한다. 현재 전장은 여전히 서대륙과 부랑자 연합군에게 유리하다고 볼 수 있었다. 사실상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기세나 숫자 등 여러 요소들에서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동부 사용자들이 지금까지 버티고 저항하는 게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실제로 기적이 이루어졌다. 초반 김수현이 최대한의 시간을 벌어줌으로써 동부는 아주 최소한의 정비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안솔의 고유 능력 '기적'은 전장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아군의 모든 상태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것도 모자라, 남아있던 '마탄'의 잔재를 깡그리 지워버렸다. 지금 비록 우세를 점하고 있다곤 해도 연합군 입장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속이 탈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거의 다 뚫려나가던 마당에 마지막에 이르러 동부의 저항이 거세어졌다. 그것도 정말로 뜬금없고, 갑작스럽게. 결국 이러나저러나, 단숨에 서문 부대를 관통하려던 연합군의 계획은 지금에 이르러 실패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이대로 지원 부대가 도착하는 순간 전황이 반전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 뚫어라! 어떻게든 뚫어라! 안되면 그냥 지나쳐! “니미럴.” 다시 해일같이 몰려오는 적들을 보자마자, 김덕필은 나직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잠시 고개를 들어 적들이 몰려오는 저 너머를 응시했다. 그런 그의 눈빛에는 광기가 대부분이었지만, 구원을 바라는 간절한 눈빛도 약간이나마 섞여 있었다. 이윽고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도를 다잡으며 김덕필은 기합 찬 목소리로 외쳤다. “뭉쳐라! 그리고 버텨라! 조금만 더 버티면 지원 부대가 온다!” 비록 얼마나 더 버텨야 하는지는 몰라도, 동부 사용자들에게 남아있는 희망은 그것뿐이었다. 이윽고 동부 사용자들이 마주 소리를 지르는 것을 시작으로, 서로의 함성과 함성이 맞부딪쳤다. 그리고 그 사이에, 전쟁에 새로운 양상을 가져다 줄 변화는 어느덧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 척척척척. 척척척척. 치열한 전장에서는 어느 정도 비껴난 곳으로, 헤아릴 수 없는 발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지나친다. 그러자 적들이 거칠게 밟고 지나간 물 젖은 대지에, 다시금 수천의 발자국이 아로새겨진다. (더 빠르게.) 이윽고 증폭된 음성이 울려 퍼지자, 발소리 주기가 점차 짧아지기 시작했다. 행군 속도가 한층 상승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척척척척! 이어서 보이는, 발맞추어 진군하는 사용자들의 숫자는 거의 6천에 다다를 정도였다. 그랬다. 오와 열을 맞춘 채 질서 정연히 진군하는 사용자들의 정체는 바로 남문과 북문을 맡았던 사용자들이었다. 상황을 파악하고 정비를 마친 지원 부대가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후유. 상황이 장난 아닌데요. 완전히 엉망이에요.” “으음.” 한 사용자의 말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멀리서 어렴풋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전황은 아슬아슬했다. 사내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살아계시면 좋으련만….” “클랜 로드님. 동문 부대에서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데…. 많이들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클랜 로드가 아니라, 지휘관이다.” 한 마디 툭 내뱉은 사내는 이내 다시 음성을 증폭했다. (돌격전에…. 우리가 왔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니, 최대한 크게 소리를 지르도록.) 뜬금없는 명령에 사용자들은 서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내 사내가 앞서서 달리기 시작하자, 그에 발맞춰 더욱 속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이윽고 반듯한 직사각형의 형태를 보이던 전열이, 조금씩 중앙이 앞으로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사내를 비롯한 제대 장들이 가장 앞으로 나서고, 근접, 원거리 클래스 순으로 뒤따른다. 척척, 쿵쿵! 척척, 쿵쿵! 서서히, 6000명 사용자들의 진군이 빠른 걸음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거리가 줄어들수록 모두의 얼굴에 긴장이 서리고, 심장은 쿵쿵 뛰었다. 쿵쿵, 쿵쿵! 쿵쿵, 쿵쿵! 이제, 완전히 뛰는 걸음으로 바뀌었다. 더불어 이쯤이면 되었다고 여겼는지 사내는 검을 번쩍 뽑아 소리쳤다. (지금부터 서문 부대의 구원을 시작한다. 모두 전투 준비!) 음성에 맞춰 이곳저곳에서 무기를 치켜드는 것과 함께, 주문을 영창 하는 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울렸다. 그리고 전장이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다가왔을 즈음. 사내는 그대로 검을 내려치며, 전에 없는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공격!) 와아아아아아아아! 쿵쿵쿵쿵쿵쿵쿵쿵! 그와 동시에 남문, 북문 부대는 일제히 함성을 내지르며 들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시체 사이를 달려나간 6천명의 사용자들이 연합군의 후미에 파도처럼 들이닥쳤다. 한편, 같은 시각. 와아아아아아아아! 거대한 함성이 들판의 전체를 뒤흔든다. 소리가 들린 순간 성현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앞으로 나서자 그의 옆으로 얼른 한 명이 따라붙었다. “한 로드. 아무래도 시작된 것 같은데요?” “네. 연락을 보내고 나서 바로 움직인 모양입니다. 빨라서 좋네요. 하하.” 넉살 좋게 웃는 성현민을 보며 여인은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후회라뇨?”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반문에 여인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성현민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신념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리고 작전에 따랐을 뿐인걸요. “…그래도.” “그러니까 대답은…. 네. 후회하지 않습니다.” 말을 마친 후. 성현민은 느긋한 눈초리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현재 동문 부대의 인원은 약 3500명. 현재 그들은 어느 한 지점에 모여 직사각형 밀집 대형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사실상, 성현민은 이변이 발생했을 때부터 바로 이상한 점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성벽이 허물어지고 적들이 서문으로 모두 달려나간 것을 확인했을 때는 눈치가 확신으로 변했다. 그러나 성현민은, 3500명으로 바로 구원에 나서는 것보다는 조금 다른 길을 선택했다. 바로 남문과 북문 부대에 전령을 보내 상황을 알리고, 자신들은 전장을 우회해 적들의 예상 퇴로에 새롭게 진을 친 것이다. 물론 작전을 따지면 크게 어긋나지는 않은 행동이었지만, 논란이 있을만한 여지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고서 성현민은 자신의 의도대로 행동했다. 어떤 의도가 숨어있는지는 본인만이 알뿐이었다. 이윽고 지축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자, 한동안 전방을 응시하던 성현민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드디어 오는가 보네요.” “이길 수 있을까요? 그래도 우리보다 많을 것 같은데.” “지금의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말을 하는 성현민의 눈빛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있었다. 뜻 모를 자신감에 여인은 한숨을 내쉬었고, 이내 조용히 음성 증폭 마법을 시전했다. 주변에 대기하고 있는 사용자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제각각 이었다. 어떤 사용자들은 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또 어떤 사용자들은 고개를 갸웃한다. 아직까지 적들과 난전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서문 부대가 힘겨운 전투를 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성현민은 그들을 빠르게 훑고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적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말에, 한없이 가라앉았던 분위기에 비로소 긴장이 샘솟기 시작한다. (긴장하실 거 없습니다. 준비는 완벽하니까요. 다들 탐험 한 번씩은 해보셨죠? 언제나 하던 것처럼 똑같이 해주시면 됩니다.) 성현민이 농담 비슷한 어조를 던졌지만 누구 하나 웃는 사용자는 없었다. 그 사이 지축의 떨림이 점차 강도를 더해가고 있었고, 멀리서 뭔가 움직이는 기색이 포착됐기 때문이다. 드디어 전장을 뚫은 연합군의 선두 부대가 조금씩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성현민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선택은 두 가지였다. 적들이 이대로 좌우로 선회해서 도망가거나, 아니면 그대로 짓쳐 들거나. 사실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다. 동문 부대의 입장에서 급한 건 어디까지나 연합군이었다. 자신들은 완벽히 정비를 마쳤다. 더 이상 마구잡이 식 난전이 아닌, 정돈된 전투를 할 수 있다. 북 대륙이 자랑하는 사용자들의 실력을 이제 고스란히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그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지만. 잠깐 생각한 성현민은, 차갑게 미소 지었다. (자. 기다리던 복수의 시간이 도래했네요. 다들 많이들 참으셨습니다. 모두 준비하세요.) 이윽고 적들의 선두가 서서히 확인되기 시작함에, 성현민은 지체 않고 음성을 퍼뜨렸다. 끼릭, 끼리릭! “───. ───. ───.” 그러자 궁수들이 화살을 재는 소리와,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장엄히 울리기 시작한다. 성질 급한 사용자들은 위협 사격을 날리려고도 해보았다. (아직 대기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제지한 성현민은 날카롭게 전방을 주시했다. 연합군은 퇴로에 진을 친 동문 부대를 인지한듯했다. 그에 따라 잠시 움직임을 멈췄지만,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곧바로 정면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런 적들을 보며 성현민은 멍청하다고 생각했지만, 방심하지는 않았다. 그대로 돌격한다는 소리는, 아직 보이지 않는 곳에 돌파를 성공한 적들이 제법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대기, 대기합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역시나 성현민의 예상이 맞았는지, 선두의 뒤로 제법 많은 수의 연합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얼핏 헤아려도 동문 부대의 1.5배는 되는 숫자였다. 비록 마구잡이로 달려오기는 했지만, 그 모습은 확실히 위협적이었다. 그에 따라 일부 사용자들이 눈에 띄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시위를 잡은 손이 떨리고, 주문을 외우는 목소리에 잡음이 섞여 들어갔다.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이번 전쟁에서 영웅이 되는 겁니다!) 이윽고, 적들의 선두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 우오오오오오오오! 그리고 범위에 들어온 순간, 성현민은 지체 않고 외쳤다. (들어오는 놈들은 한 놈도 놓치지 않습니다! 모두 공격!) 슈슈슉! 슈슈슈슉! 그와 동시에, 먼저 장전된 화살이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쏘아진 화살은 포물선을 그리더니, 달려오는 적들에게로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 '뭐지?' 한창 달리던 도중, 나는 갑작스럽게 늘어난 시체에 의문을 느꼈다. 사방에는 화살과 마법이 휩쓸어 대지가 파헤쳐져 있었고, 그 위를 장식한 시체는 거의 연합군이었다. 사실상 시몬을 추격하는데 있어서, 나는 지금 달리는 곳을 돌파하는걸 가장 난관으로 여겼다. 직선으로 돌파한 만큼 빠르게 가로지를 수는 있었지만, 앞으로 나아갈수록 앞서 전장을 지나친 적들이 더욱 많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군은 더더욱 줄어들 테고. 하지만 적들 또한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 소리는…. '아.' 해답은, 시체더미를 돌파한 순간 알 수 있었다. 저기 멀리서 어지러이 전투를 벌이는 광경에 눈에 잡혔기 때문이다. 사용자들과 연합군이 한 바탕 어우러진 광경은 지원 부대가 도착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기야 도착할 때도 됐지만….' 그렇다면 전방으로 보이는 부대는 구원이 아니라 부랑자들의 퇴로를 차단했다는 소리. 뭔가 석연치 않은 의문이 남았지만,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가까워지자 나는 곧바로 고개를 털었다. 아무래도 좋다. 아니, 서문 부대의 사용자들은 야속하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에게는 더없이 나이스를 외칠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는 시몬에, 적들이 곳곳에서 가로막는 와중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적들의 신경을 돌릴 곳이 생긴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그대로 돌파할 수 있는 것이다. 한순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나는 전장을 그대로 돌파하기로 결정했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간파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몬의 마안은 꾸준히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자신을 죽일 거라는걸 알고 있는 것 같은 태도였다. 하지만 내 기억에 따르면, 시몬은 근접 계열이 아니다. 굳이 따지면 마법사 클래스에 가깝다고나 할까?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적들의 방해가 없다면 10분 안에 따라잡을 자신이 있었다. 눈앞으로 거친 흙먼지가 일어났다. 밟고 달리는 대지에서 이제는 더 이상 물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윽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흙먼지 속으로, 나는 지체 없이 뛰어들었다. 2년의 시간을 벌기 위해서. ============================ 작품 후기 ============================ 시몬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걔 아니더라도 나올 애들은 많으니까요.(?) 아 진짜 다음 회 쓰고 싶어 죽겠는데, 결국에는 잡기 직전에 끊었습니다. 더 내용을 추가했다가는 진짜로 늦을 것 같아서요.(절대로 절단은 아닙니다. 믿어주세요.) 지금 생각하건데 10월이 저에게 슬럼프였던 것 같아요. 이래저래 힘든 일들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오늘 글을 쓰면서 느꼈는데, 서서히 벗어날 기미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아마 독자분들이 한결같은 응원과 따끔한 지적 덕분인 것 같습니다. 하하하.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독자분들에게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에요. 아이. 갑자기 이런 말 하려니 부끄럽네요. 갑자기 왜 이럴까요. ㅋㅋㅋㅋ. 아무튼 감사, 그리고 또 감사합니다. 1부 완결까지 더욱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PS. 다음 회는 제법 잔인할 수 있습니다. 얘 또 한 번 광기 터뜨리거든요.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은 감안하고 보아주세요. 0382 / 0933 ---------------------------------------------- 마족 네르갈 자욱한 흙먼지를 뚫고 나오자마자 어지러운 난전의 광경이 나를 맞이했다. 난전이라 함은 주로 근접 계열 클래스들이 활약하는 전장이다. 이곳저곳에서 금속음이 울렸고, 눈을 아프게 만들 정도의 불똥이 난무했다. 언뜻 보긴 했지만 전황은 엇비슷했다. 연합군은 지금껏 이어온 기세와 수적 우위를 앞세워 어떻게든 밀어붙이려는 중이었다. 그러나 방금 전 들판을 지나쳤던 것처럼 쉽사리 돌파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연합군에 반해, 동부의 사용자들은 매우 안정적이고 정돈된 대응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지금 전황이 수평으로 보이는 것도 단순한 인원 차이일터. 지나쳐온 곳에서 보았던 연합군의 시체를 생각해보면 동부의 손을 들어주어도 무방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생각은 여기까지. 나는 늘어뜨렸던 검을 곧추세우고 눈앞에 시선을 집중했다. 어느새 적들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멀리서 점으로 보였던 놈들의 모습이 거리가 줄어들수록 커져만 갔다. 그 중에서 적들 중 한 명이 나를 발견했는지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 떠돌이들은 다 어디로 간 건가! 스칵! 그대로 지나치며 목을 베자 머리가 그대로 허공을 날았다. 찰나의 순간 당황한 빛이 스친 게 나를 부랑자로 오해한 모양이다. 그때였다. - 캬오오오오오오오! 마치 괴물이 부르짖는듯한 괴성이 전장을 떠르르 울렸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빽빽한 밀집 대형을 이루던 동부의 대형에 변화가 생겼다. 그리고 변화의 중심에는 진짜 '괴물'이 서 있었다. 키는 5미터 정도 될까? 전신에 비늘이 덮인 그것은 흡사 도마뱀과 비슷한 형상을 한 채 거세게 날뛰고 있었다. 길쭉한 손톱을 이용해 무차별적으로 전방을 후비자, 꽉 막혀있던 대형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적들은 괴물 도마뱀을 앞세워 틈이 생긴 곳으로 저돌적으로 파고드는 중이었다. 괴물은 자신이 다치든 말든 미친 멧돼지처럼 날뛰었고, 그 결과 동부의 진형이 서서히 반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주변으로 거친 폭음과 고함 소리가 뒤섞여 들었다. 날카로운 바람에 머리카락이 나부낀다. 그 순간, 나는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방향을 돌렸다. 그리고 전력으로 내달렸다. “사제! 사제는 어디 있나!” “집중 사격! 괴물에게 집중 사격을 하라고!” 괴물 도마뱀과의 거리는 40미터. 놈이 날뛰는 주변으로 나는 낯익은 사내 한 명을 볼 수 있었다. 복부를 감싸 쥔 채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틀림없는 성현민이었다. 슈슉, 슈슈슉! - 캬오오오! 캬오오오! 사방에서 날아든 화살이 괴물 도마뱀의 비늘을 파고든다. 하지만 화살로는 놈을 저지할 수 없었다. 약간의 타격은 있을지언정, 괴물 도마뱀은 더욱 괴성을 지르며 발을 굴렀다. 쿵! 일순 들판의 흙들이 높게 솟구쳤다. 미약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지축이 흔들린다. 그에 따라 부근의 사용자들은 균형을 잃어 무너졌고, 괴물 도마뱀은 잽싸게 손을 내뻗었다. “엄마아아!” 앳된 비명이 허공을 왕왕 울렸다. 결국 잡혀버린 한 여인이 하늘 높이 들린 것이다. 이윽고 그녀는 보는 내가 아찔할 정도로 순식간에 대지에 내리 꽂혔다. 꿍! 푸칵! 뭔가 완전히 부서지는 소리가 나고, 시뻘건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이어서 드러난 광경은 처참했다. 산산이 부서져 흩어진 머리에 으스러진 뇌수가 사방팔방에 늘어져 있었다. 이윽고 괴물 도마뱀의 눈이 다른 먹잇감을 찾기 시작할 즈음. 내가 도착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이쪽이다.' 나는 괴물 도마뱀 너머로 보이는 쭉 갈라진 곳을 응시했다. 그리고 '빅토리아의 영광'을 양손으로 잡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이어서 마력을 가득 불어넣는 것과 동시에, 힘차게 발을 굴러 대지를 박차 뛰어올랐다. 훙! 몸이 솟아오른다. 슬쩍 고개를 내리자 괴물 도마뱀의 모습이 더욱 확실이 눈에 들어왔다. 이내 도약의 최고점에 닿고 번들거리는 머리 비늘이 고개를 드는 순간, 나는 손을 최대한 뒤로 젖혔다. 그리고 그대로 하강을 시작하여 있는 힘껏 검을 내리쳤다. 쑤아아악! 찬란한 빛을 뿌리는 검기는 내려치는 궤적을 따라 새하얀 상(像)을 그리었다. - 크아아아아아아아! 순간 괴물 도마뱀의 눈에서 고민의 빛이 보였다. 그러나 곧 마음을 정했는지 곧바로 몸을 움직여 피하려는 낌새를 보였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확실히 도마뱀 종은 빠르다. 그리고 민첩하다. 그러나 '민첩'이라는 두 글자는 내 앞에서 논해선 안 되는 성질의 것이었다. 팟! 다시 눈을 뜬다. 이형환위(移形換位)를 발동하자 순식간에 비늘 덮인 머리가 눈앞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이미 내려쳐진 '빅토리아의 영광'은 놈의 정수리를 깔끔하게 쪼개어 들어가는 중이었다. 뿌뜨뜨뜨뜨뜨뜨뜩! 쇳덩이를 자르는 감촉. 엘리베이터를 탄 것처럼 그대로 아래로 내려간다. 시선이 주르륵 내려갈 때마다 좌우로 갈라져 붉은 속살을 드러내는 광경이 보였다. 이윽고 대지에 발을 안착했을 때, 깨끗하게 반으로 나뉜 괴물 도마뱀의 신체가 각각 나누어 떨어지는걸 볼 수 있었다. 풀썩, 풀썩! 촤아아아아아아악! 온몸을 적시는 비처럼 내려오는 뜨끈한 액체는 덤이었다. 한두 번 눈을 깜빡인다. 이윽고 한 줄기 불어온 바람에 괴물 도마뱀의 시체는 재가 되어 흩날렸다.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던 신체는 온데간데없고, 반으로 잘라진 사람의 시체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수인을 결합한 사용자였나…. 들어본 기억이….' “그만! 공격하지 마라! 아군이다!” 그때였다.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나를 둘러싼 채 무기를 겨누고 있는 사용자들을 볼 수 있었다. 약간 어이없는 기분이 드려는 찰나, 한 사내가 내 앞으로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성현민이었다. “머셔너리 로드! 머셔너리 로드가 아니십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남성치고는 부드러운 손길이 내 얼굴을 쓸었다. 붉디붉던 시야가 조금이나마 정상으로 돌아왔다. “마, 맞는군요. 후유. 정말 대단합니다! 그리도 애먹었던 괴물을 단번에….” “한 로드. 혹시 시몬이 이쪽으로 빠져나갔습니까.” “예?” 성현민은 일순 의아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시몬. 서 대륙 총 대장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마 놓친 것 같습니다. 저도 익히 주시하고 있었는데, 미처 예상치 못한 변수가….” “시몬이 이쪽으로 빠져나갔습니까.” 말을 끊고 다시 묻자, 성현민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지그시 나를 응시하고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몬인지 확신하지는 못하겠습니다. 다만 막 사로잡기 직전 적 중 한 명이 방금 괴물로 변신했고, 그 틈을 타 한 무리의 호위를 받는 사용자가 빠져나갔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혹시 추격하실 생각이라면 지원군을…. 머, 머셔너리 로드!” “필요 없습니다.” 아직 난전이 한창이었고, 성현민은 부상을 입고 있었다. 나는 다가오는 사제를 향해 그를 약하게 밀쳤다. 그리고 갈라졌다가, 이제 서서히 닫히기 시작한 길로 지체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빠져나간 것을 확인했다. 그럼 이 길만 빠져나간다면, 이제 남은 것은 아무런 방해 없는 추격뿐이었다. 등 뒤서 들리는 성현민의 목소리가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 탁탁탁탁! 탁탁탁탁! 한 무리의 사용자들이 숲을 달리고 있었다. 수는 약 백 명 가량 될까. 온몸에 덕지덕지 피를 묻힌 채 달리는 그들은 하나같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방을 경계하며 달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속도는 그렇게 빠르지 못하다. 이유는 바로 중앙에서 호위를 받으며 달리는 한 청년 때문이었다. - 헉, 헉! 잠, 잠시만요! 청년이 입을 열자 나머지가 일사분란이 움직임을 멈췄다. - 헉! 더는, 헉, 헉! 더는 못 달리겠어요.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죠. - 기다린다고요? 한 사내의 반문에 청년은 헉헉대는 와중에도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 아. 네. 혹시 뚫고 나온 친구들이 더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겸사겸사 체력도 회복할 겸 말이죠. 사내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마법사 클래스는 체력 부족의 대명사였고, 뒤따라오는 동료들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전력을 상승시킬 수 있다. - 다들 편하게 쉬세요. 아직 탈주는 끝난 게 아니니까요. 하하. 청년의 온화한 목소리가 들리자, 한 명 한 명 눈치를 보며 바닥에 앉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거친 숨을 몰아 쉬는 그들의 얼굴은 고뇌 어린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조금 전의 사내가 몸을 일으켜 청년에게 다가섰다. - 시몬.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랬다. 청년의 정체는 바로 성현민이 이룬 회심의 포위망을 간신히 뚫고 빠져 나온 시몬 그라임스였다. - 글쎄요. 저도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거든요. 이 난리에 퇴로를 차단할 생각을 하다니…. 시몬은 입맛을 다시며 말끝을 흐렸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분명 처음 성을 깨고 나왔을 때만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전황이 조금씩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지원 부대가 도착한 순간 순식간에 뒤집혔다. 사실상 자기들이 지나쳐온 곳을 통해서 들어올 줄 알았지, 퇴로를 차단당했을 줄을 꿈에도 몰랐던 연합군이었다. 비록 어찌어찌 뚫고 나왔다곤 해도 피해가 너무 크다. 처음 일만 오천 명에 이른 연합군은 어느덧 백 명으로 줄어 있었다. 물론 백 명만 살아남은 건 아닐 테고, 난전 중 각자 살길을 찾아 흩어졌으리라. 그러나 과연 서 대륙까지 무사히 돌아갈 사람은 얼마나 될까? 스스로들 생각해도 부정적으로 느꼈는지, 서 대륙 사용자들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 자. 그럼 슬슬 일어날까요? 그때 별안간 느긋한 목소리가 주변을 흘렀다. 음성은 너무도 여유로워, 마치 아직 숨겨둔 수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투로 들렸다. - 다시 달릴 수 있겠습니까? 그에 힘입은 사내가 번쩍 몸을 일으키자, 시몬은 미미하게 웃었다. - 아. 기다리던 손님이 왔거든요. 솔직히 조금 더 쉬고는 싶은데, 곧 도착할 것 같아요. 어디 보자…. 한순간 시몬의 안구가 빨갛게 변하였다. 뭔가를 주시하는지 검은색 동공이 세로로 삐죽해졌다. 파직! - 윽. 그러나 시몬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고, 눈을 살살 문지르며 울상을 지었다. 어느덧 안구는 다시 본래의 색깔을 되찾은 상태였다. - 기다리던 손님이라니요? 설마 동료들이…. - 아니요. 괴물. 돌아온 대답에 사내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였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규칙적인 발소리가 고요한 숲을 울린다. 모두 소리를 들었는지 잠깐 풀어졌던 얼굴에 경계가 잔뜩 차 올랐다. - 경계! 이윽고 백 명 전원이 몸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검은 머리의 남성이 서서히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를 확인한 사용자들의 입가에서 나직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남성은 말 그대로 혈인이었다. 피가 덕지덕지 묻은 정도가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마치 피의 바다에서 헤엄치다가 잠깐 나온듯한 모습이었다. 꾸준히 이어지던 남성의 걸음이, 백 명을 앞에 두고 우뚝 멈췄다. 척 봐도 아군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기운에, 서 대륙 사용자들은 한층 긴장한 얼굴로 무기를 빼어 들었다. 그리고 총 대장의 명령을 기다리려는 찰나, 갑자기 시몬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 다들 그만. - 시몬 그라임스? - 눈앞의 남자는 괴물이에요. 당신들은 상대할 수 없습니다. 이대로 덤벼봤자 개죽음이죠. 평소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했겠지만, 사내는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눈앞의 남성은 외형도 외형이었거니와, 풍기는 기운도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고양이를 앞에 둔 생쥐의 심정이랄까. - 그, 그럼 어떻게…. - 어쩌긴요. 그래도 명색이 총 대장인데 제가 상대해야겠지요. 저 괴물의 목적도 저인듯하니. - 시몬? 설마 혼자서 상대하겠다는 말씀은 아니겠죠? - 물론이에요. 당연히 당신들의 도움도 받을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한순간 시몬의 말이 멈췄다. 그리고 왼손을 들더니, 이내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 죽어주세요. - 예? 그게 무슨…. - 걱정 말아요. 불나방 같은 개죽음이 아니라, 조금 더 가치 있는 죽음이 되는 겁니다. 뜬금없이 터져 나온 말에 사내는 의아히 반문했다. 우웅! 그러나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 시몬이 왼손에서 검붉은 빛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삽시간에 남성을 비롯한 주변 사용자들을 덮쳤다. 빛은 사용자들의 몸을 칭칭 휘감았고, 형형한 색채를 내뿜었다. - 어? 어, 어? 그리고, 변화가 시작되었다. 우우웅! 우우우웅! 그것은 정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빛에 휘감긴 사용자들의 몸이 흐물흐물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물 흐르듯 전신이 녹아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 흐아악! 흐아아악! 고요했던 숲에 때아닌 비명이 울렸다. 이윽고 녹아 내린 살은 피에 섞여 검붉은 빛에 흡수되었고, 백여 명에 다다르던 사용자들은 흔적도 없이 사그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사방으로 퍼졌던 빛이 다시금 시몬에게 되돌아와 하나의 형체를 이루어내었다. 그의 왼손에 피와 살로 이루어진 한 권의 책이 떨어져 내렸다. 이제 남은 사람은 단 두 명. 시몬과 남성이었다. - 이야. 역시나 곱게 죽어주지는 않네요. 설마 저항할지는 몰랐는데 말이에요. “…….” - 하하. 그거 알아요? 당신 정말 짜증나는 거? 기껏 세운 제 계획을 망치질 않나, 죽어라 고 쫓아오지를 않나. 그리고 제가 아끼는 부하들도…. “…….” 남성은 묵묵부답이었다. 다만 눈길이 조금 묘한 게 마치 서커스 한 번 잘 봤다는 눈초리였다. - 뭡니까? 그 눈초리는? 그때 남성의 눈동자가 한 번 깜빡였다. 시몬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어떠한 해도 없었지만, 순간적으로 무척 더러운 기분을 느낀 것이다.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속속히 들춰내는 것 같은…. 남성의 정체는 바로 김수현이었다. 사실상 성현민의 포위망을 벗어난 이후, 시몬이나 김수현이나 피차 전장에서는 벗어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은 김수현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이상 마법사 클래스를 따라잡는 건 일도 아니었으니. “예상대로군.” 저벅저벅. 저벅저벅. 한 마디 뱉은 남성이 다시 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몬의 얼굴은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아까 지쳐있던 기색은 어디 갔는지, 백여 명에 이르는 사용자들을 흡수한 뒤로 전신에서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이제 10미터 안으로 들어온 김수현을 보며 시몬은 핏빛으로 물든 안광을 번뜩였다. 촤라라라라라라락! 손을 대지 않았음에도, 소환된 책이 저절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흉흉한 기운을 내뿜는 책을 보면 잠깐 걸음이라도 멈출 법도 한데, 그래도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 담담한 얼굴에 시몬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넘어가던 페이지가 저절로 멈췄다. 우웅! 그 순간 시몬의 주위로 성인 남성의 주먹만한 구체가 우수수 떠올랐다. 족히 수십이 넘는 그것들은, 하나같이 진한 피 색을 띠고 있었다. - 블러드 벌컨(Blood Vulcan). 그리고 시몬의 입술이 떨어진 순간, 핏빛 구체는 일제히 남성을 향해 쇄도했다. 씨잉! 씨잉! 씨잉! 씨잉! 포탄처럼 달려간 구체는 남성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그 찰나의 순간, 곧 이어질 폭음의 향연을 기대하며 시몬은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그러나 시몬이 기대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휘리릭! 구체는, 순식간에 허공에 휘날렸다. 그것도 마치 물에 탄 피처럼 가느다랗게 번져서. - 뭐? 시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그리고 김수현은 티끌 하나 다치지 않은 채 여전히 담담히 걸어오고 있었다. - 브, 블러드 랜스(Blood Lance)! 시몬은 발악적으로 외쳤다. 그러자 이번엔 길쭉길쭉한 핏빛 창이 서른 개가 생성되더니, 다시금 김수현을 향해 세차게 쇄도한다. 끼기긱! 끼기기긱! 이번에는 조금 전과 달랐다. 하릴없이 스러진 구체와는 다르게, 쏘아진 창은 고슴도치처럼 주변을 빽빽이 둘러쌌다. 어떻게든 마법 저항을 뚫고 들어가려는지, 끝이 부르르 떨리며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우직, 우지직! 그러더니, 이윽고 어느 한 점에서 미약한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어느덧 멈춰버린 김수현의 걸음은 본 시몬은 비틀린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였다. “흠.” 잠깐 콧숨을 내쉰 김수현은 오른손에 쥔 '빅토리아의 영광'을 휘둘렀다. 위로 한 번. 싹둑! 오른쪽으로 한 번. 싹둑! 왼쪽으로 한 번. 싹둑! 그에 따라 싹둑싹둑 잘라진 창들은, 이내 먼젓번 들어온 구체를 따라 조용히 허공에 퍼지었다. 김수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걸었고, 상식을 벗어난 현상에 시몬은 경악했다. 믿고 있던 수가 이해할 수 없는 수단에 막히자, 비로소 그의 차분하던 얼굴에 감정이 찾아 들었다. - 마, 말도 안 돼! 아, 아무리 마법 저항력이 높아도! 배, 백 명을 제물로 삼았단 말이야! 시몬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김수현의 걸음이 더욱 빨랐다. “후유. 너도 참 애먹인다.” 어느덧 시몬의 앞에 다가선 김수현은 천천히 왼손을 내뻗었다. 그리고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책을 잡았다. 시몬은 반사적으로 책을 맞잡았다. 그러나 이내 항거할 수 없는 힘에 그대로 책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윽고 책을 빼앗은 김수현은 흥미로운 눈길로 이모저모 살펴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의 눈이 깜빡인다 싶더니, 이내 꾹 닫혔던 입술이 열렸다. “시크릿 클래스라. 예상치 못한 수확인데.” 이윽고 책을 소중히 품 안으로 집어넣는 것을 보며 시몬은 어안이 벙벙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눈앞의 남성은 마치 처음부터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너는 애당초 내 상대가 아니다라는 눈빛? 그것을 생각하자 머리 끝까지 차가운 분노가 치솟았다. 그렇게 왼손을 들어올려 책을 다시 소환하려는 찰나였다. 순간 김수현의 손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우지직! 화륵, 화르륵! - 끄아아악! 갑작스레 왼손이 우그러지는 느낌에, 시몬은 새된 비명을 질렀다. - 내, 내 손! 내 손! 어느덧 시몬의 왼손은 김수현의 손에 잡혀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그가 손을 놓아주자, 손목 위로 허공만이 보였다. 왼손은 형체도 없이 불태워졌다. 왼손에서 떠난 김수현의 손은 이윽고 시몬의 머리에 얹혔다. 그걸 그대로 잡고 끌어올리자, 시몬의 몸도 덩달아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대로 걸음을 옮긴 김수현은, 이내 숲에 널린 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몸통에 시몬을 댄 후에 복부로 거침없이 칼을 꽂아 넣었다. - 크엑! 쿨럭! 무력해진 시몬의 입에서 한 움큼 피가 토해졌다. 김수현은 그에 아랑곳 않고 양손을 탁탁 털었고,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확인은 했는데…. 어떻게 끄집어내야 하지?” - 쿨럭, 쿨럭! “말도 안 통하고. 영어 좀 배워둘걸 그랬나.” - 이, 이…! 그 와중 간신히 정신을 차린 시몬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의 눈길은 흰자위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시뻘건…. 마치 악마와도 같은 눈동자였다. 김수현은 뚱하니 그 시선을 받아넘겼다. “그런 눈으로 보지마.” - 책 내놔!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라고! “난 마족의 눈만 보면 몸서리가 쳐지거든.” 김수현은 말을 마치고 나서 곧바로 양손을 내뻗었다. 뻗어나가는 그의 손에는 각기 엄지가 치켜세워진 상태였다. 이윽고 엄지는 시몬의 양 눈을 그대로 파고들었다. - 으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악! 눈동자가 거칠게 짓눌리는 감각에, 시몬은 다시금 격한 비명을 내질렀다. 김수현이 손가락을 빼자 한 줄기 핏줄기가 따라 튀어나왔다. 뭉개진 눈구멍 사이로 눈물 섞인 피가 흘러내렸다. 시몬의 고개가 축 늘어졌다. “이대로 죽이기엔 불안한데…. 일단 하나씩 뜯어야 나오려나?” 잠시 동안 고개를 갸웃한 김수현은 이번엔 시몬의 두 팔을 잡았다. 그러자 시몬은 흠칫 몸을 떨었다. 비록 두 눈이 보이지는 않아도, 팔을 잡은 감촉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어렴풋이 직감했다. - 하, 하지마! 하지마! 시몬이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김수현은 끙 힘을 주어, 잡은 팔을 좌우로 세게 잡아당겼다. 찌이이익! - 으, 으아아아! 그러자 잠시 늘어나던 팔에서, 점차 살이 찢어져 늘어지는가 싶더니. 뿌지지지지지지직! 이내 그대로 뼈와 함께 속살을 드러내며 몸에서 뜯어졌다. -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시몬의 비명이 다시금 숲을 울렸다. ============================ 작품 후기 ============================ 후유. 겨우 1시 이전에 맞췄습니다. 분량이 많으니 용서해주시어요. (__ )* 0383 / 0933 ---------------------------------------------- 마족 네르갈 짓눌린 눈동자. 찢어 뜯겨진 팔. 뚫린 복부. 시몬은 세 부분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언제나 침착했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있다. 항상 미소가 흐르던 입가는 하얀 거품투성이였다. 어찌나 비명을 질렀는지 간간이 나오는 비명은 잔뜩 쉰 상태였다. - 끄어어…. 시몬은 후회했다. 상대가 괴물인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자신 있었다. 자신도 괴물이라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이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다. 가히 상식을 뛰어넘는, 아니 파괴할 정도의 무력. 이건 그야말로 '격'이 다르다. 그것을 인정했을 때 시몬의 내면에 하나 둘 복합적인 감정이 찾아 들었다. 절대 이길 수 없다. 무섭다. 수치스럽다. 살고 싶다. 좌절. 두려움. 굴욕. 욕망. 어떻게…. 어떻게 이 자리에 올라왔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 킬킬킬킬킬킬킬킬…. 아랫배를 울리는 아릿한 감각. - 아무래도…. 다시 거래의 시간이 도래한 것 같군. 그리고 이어진 나직한 음성에, 한순간 시몬의 생각이 멈췄다. 시몬은 반문했다. - 거래의…. 시간? - 킬킬! 그래. 하나만 물어보지. 시몬 그라임스. 하나만 물어본다는 말에 시몬은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잠깐 뜸을 들인 목소리는 이내 낮디 낮지만, 달콤한 음색으로 그의 내면을 울렸다. - 힘을 원하는가? - 힘…. 이라고? - 이 곤란한 상황을 뒤바꿀 힘을 말이야! 시몬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 방금 전의 당당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고개를 축 늘어뜨린 시몬을 보다가, 나는 잠시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쟁을 시작한 직후 '제 3의 눈'은 계속 활성화해 둔 상태였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Simon Grimes(6년 차) 2. 클래스(Class) : 피의 군주(Secret, Monarch Of Blood,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네뷸라(Nebula) 4. 소속 단체(Clan) : Tyrant 5. 진명 • 국적 : 피에 미친 폭군, 악마의 씨앗을 받은 자 • 미국 6. 성별(Sex) : 남성(22) 7. 신장 • 체중 : 174.4cm • 62.3kg 8. 성향 : 악 • 혼돈(Evil • Chaos) [근력 31] [내구 32] [민첩 64] [체력 43] [마력 94] [행운 77] (남은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파괴의 악마 베엘제붑(Beelzebub)의 첫 번째 피조물, 마족 네르갈의 씨앗을 받은 상태입니다.) '악마의 씨앗을 받은 자.' 내가 이번 전쟁에 참여한 목적은, 추후 서 대륙을 장악할 사용자 시몬 그라임스를 처단하기 위해서였다. 이유는 바로 놈의 진명 '악마의 씨앗을 받은 자.'에 있다. 1회 차 시절. 동부와 벌인 두 번째 전투에서 패배한 시몬은 무사히 서 대륙으로 돌아간다. 그 이후 놈은 모종의 이유로 '첩자의 마족 네르갈(Nergal)'로 각성을 하게 된다.(물론 이러한 사실 자체는 굉장히 뒤늦게 밝혀졌다.) 그리고 각성한 네르갈은 차후 조용히 지내다가, 어느 순간 서 대륙을 기점으로 전 대륙에 혼란을 일으키는 주범 역할을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벨페고르가 소환된 것은 우연의 산물이라 생각한다. 고대 거주민들의 욕심이 불러일으킨 의도치 않은 재앙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네르갈은 벨페고르와 결단코 같은 경우로 볼 수 없다. 증거는 명백하다. 진명 악마의 씨앗을 받은 자. 우연히 마족이 소환된 것과 씨앗이 발아해 몸을 점령당하는 건….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분명히 있었으니까. '죽이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렇게 해버리면, 숙주가 죽는 순간 씨앗은 본 기능을 상실해버린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결 고리의 역할을 할 뿐이지, 씨앗이 마족의 본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발아를 거쳐 숙주의 몸이 점령당하는 순간 비로소 본체가 세상에 드러났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우…. 우…. 귓가에 들려오는 신음에 나는 설핏 시선을 돌렸다. 시몬은 당장에라도 넘어갈 듯 숨을 껄떡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약간이지만 걱정이 일려는 순간이었다. - 크르르르…. 그때, 갑작스레 시몬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그리고 놈과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이상 징후가 발생한걸 깨달을 수 있었다. 분명 내가 눈동자를 짓뭉갰을 터인데, 구멍 안으로 검붉은 빛이 번쩍인걸 보았기 때문이다. '설마…. 시작된 건가?' 떠오른 생각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때맞춰 시몬의 몸에 변화가 찾아 들었다. 하얀 피부에 검붉은 반점이 우후죽순으로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점은 이내 전신을 뒤덮어 까맣게 물들였고, 그와 동시에 살갗이 불룩히 치솟아 오른다. - 크아아앙! 한순간, 갑작스레 커다란 괴성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더는 시몬의 목소리라 볼 수 없을 만큼 흉악하고, 또한 포악했다. 투둑! 투둑, 투둑! 어느덧 불룩 솟아오른 몸이 마치 풍선처럼 끝없이 팽창하기 시작한다. 그에 따라 살가죽이 찢어지고 갈라지는 게, 보통 사람이라면 차마 보기 힘들 정도의 끔찍한 광경이었다. 찌직! 찌지직! 이윽고 한 군데 찢어진 틈으로, 검붉은 연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온다. 절로 불쾌해지는 기분에 나는 바로 '빅토리아의 영광'을 빼어 고쳐 잡았다. 그때였다. 털썩! 푸확! 바닥에 떨어진 전신이 쩍쩍 갈라지는 것을 확인한 순간, 드디어 시몬의 몸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신체는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터져 나왔고 시꺼먼 연기가 삽시간에 주변을 뒤덮는다. 이내 뭉클뭉클 덮쳐오는 연기에 파묻히며, 나는 똑바로 눈을 떠 나무를 직시했다. “…….”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전방을 물들였던 연기가 걷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부 확보된 시야 속에서 검붉은 안광이 번쩍이는 것을 확인했을 때, 나는 지체 않고 '빅토리아의 영광'을 휘둘렀다. 후웅! 검에서 일어난 풍압에 남아있던 연기가 일거에 흩어진다. 그러나 검 끝에 걸리는 느낌이 없다. 잠시 고개를 갸웃할 때, 허공에서 비열하게 들릴 만치 짜증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끼끼끼! 끼끼끼끼! 드디어 세상으로 나왔다! 끼끼끼끼끼!” 나는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허공까지 올라간 검은 연기가 어딘가로 급속히 빨려 들어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서서히 옅어진 연기 사이로, 비로소 시몬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아니. 시몬이 아니었다. 키는 얼추 2미터는 될까.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몸집에 색은 칠흑처럼 검었다. 등에는 박쥐 날개와 비슷한 모양의 날개가 달려있었고, 머리 윗부분으로 두 개의 뿔이 돋아나 있었다. 그래. 저것은…. “그런데 세상에 나오자마자 칼질을 당하다니…. 끼끼끼. 간덩이가 부은 인간이로구나! 끼끼끼끼!” 마족, 네르갈이었다. “끼끼끼…. 원래대로라면 죄를 물어 갈기갈기 찢었겠지만, 너는 한 번 특별히 용서해주도록 하지. 이 긍지 높은 몸을 나오게 해준….” “오랜만이야. 네르갈.” “뭐, 뭣?” 이름을 부르자, 네르갈의 눈을 물들이던 검붉은 빛이 한순간 흔들렸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인간?” “어떻게 알고 있긴.” 나는 한 마디 툭 대답하곤 슬쩍 무릎을 굽혔다. “대답해라! 이 하찮은 벌레야!” “하찮은 마족을 죽이려고 알고 있…. 지!” 그리고 “지!”라고 말한 것과 동시에, 있는 힘껏 대지를 박차 올랐다. “무슨…!” 말을 하면서도 네르갈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찰나의 순간 놈이 손을 두어 번 주먹 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아직도 주변을 떠돌고 있던 연기가 삽시간에 나에게로 쇄도한다. 그야말로 기습을 기습으로 받아 친 격이지만, 나는 내 마법 저항력을 믿었다. 사실 깨어져도 상관없다. 본체가 드러난 것을 확인한 이상, '그나마' 힘을 완전히 회복하기 전에 최대한 빠르게 죽이는 게 이득이다. 그런 만큼 약간의 타격을 감수할 용의는 있었다. 사사삭! 사사사삭! 이윽고 검은 연기가 나를 칭칭 휘감으려는 듯 달려들었다. 우웅! 휘류루루루루! 그러나 지척에 도달한 순간 잠시 멈칫하더니, 일부는 그대로 흩어지고 또 일부는 주변을 빙빙 휘돌기 시작했다. 마법 저항이 연기의 접근을 막아낸 것이다. 그와 동시에, 내 눈은 순식간에 네르갈을 앞에 두게 되었다. 나는 그대로 마력을 끌어올려 '빅토리아의 영광'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검붉은 안광과 마주한 순간, 놈의 정수리를 향해 세로로 검을 내리쳤다. 스칵! 뭔가 베어진 느낌과 동시에, 네르갈의 오른팔이 공중에 흩날렸다. '쯧.' 나는 혀를 찼다. 검은 목적한 지점을 정확히 베었지만, 주변의 검은 안개가 한순간 진로를 방해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남은 안개의 일부로 스스로의 발을 잡아당겨 순간적으로 회피했다. 그러한 두 상황이 맞물린 결과, '빅토리아의 영광'은 정수리가 아닌 팔을 쪼개었고. 쿵! “끼이이이!” 이윽고 네르갈은 대지에 착지한 것과 함께 거센 비명을 울렸다. 이어서 나 또한 바닥에 발을 닿자, 보이는 놈의 얼굴은 가관이었다. 팔이 잘렸다는 고통보다도 오히려 부르르 떨리는 분노 감이 가득했다. 그것은 아마 종족 특유의 오만함과 자존심에서 비롯된 감정이리라. “내, 내 팔이…! 이놈! 무슨 잔재주를 부린 거냐!” 길길이 날뛰는 네르갈을 보며 나는 다시 검을 겨냥했다. 세상에 나온 마족은 제한상 본체의 7할에 해당하는 힘을 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오자마자 7할의 힘을 내는 게 아닌, 개인차에 따라 약 2할에서 3할부터, 서서히 힘을 회복하는 성질이었다. 즉 마족은 출현한 순간 가장 약한 상태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가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이번 전쟁에 참여한 이유였다. 추후 벨페고르와 함께 마족의 대대적인 출현에 혁혁한 공을 세울 네르갈을, 가장 쉽게 처치할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하찮은 인간 따위가! 감히, 감히…!” 네르갈은 여전히 분노에 찬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혹시나 '첩자의 마족'이 전심전력으로 도망쳐버리면, 나로서도 꽤나 성가신 일이 될 테니까. “시끄럽다.” “뭐라고!” “긍지 높은 마족 님께서는 입으로만 싸우는 모양이군.” “끼끼끼! 하! 지금 나를 도발하려는 것이냐! 하찮은 인간 놈 주제에?! 끼끼끼끼!” 역시나 교활한 녀석이었다. 내 의도를 파악했는지, 네르갈은 곧바로 태도를 바꿔 오히려 나를 도발했다. 그러나 나는 빙긋 웃어주었다. 피조물에 불과한 마족을 도발하는데 가장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었으니까. “놀고 있네. 역시나 벨제부브의 피조물다워.” “!” “머릿속에 든 게 파괴밖에 없어서 그런가? 하여간 멍청한 건 주인을 빼다 박았네. 하하하!” “인간이 어떻게 주군의 존함을…. 아, 아니. 뭐라고…?” “네가 멍청해 보이니 네 주인도 멍청해 보인다고. 이 벌레 같은 새끼야.” 그 순간, 네르갈의 주변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 나를 응시하는 놈의 안광이 제법 사늘하게 느껴진다. 일전에 벨페고르때도 그랬던 것처럼, 피조물은 조물주에 대해 목숨을 걸 정도로 맹목적인 충성심을 가진다. 그렇게 15초의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크아아앙!” 한 번 거센 포효를 내지른 네르갈은, 한층 진해진 안광으로 입을 열었다. “…좋다.” “뭐가 좋아?” “이죽대지 마라. 비록 네가 한 가락 실력이 있고, 뭘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네르갈은 잠깐 말을 멈췄다. 그러더니 주변에서 검은 연기가 빠르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돌풍은 놈의 전신을 가릴 만큼 크게 일어났고, 그것은 이내 검붉은 빛으로 바뀌었다. 네르갈의 말이 이어졌다. “조금 전 지껄인 것을 기필코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끼끼끼!” 쿠쿠쿠쿠쿠쿠쿠쿠! 잠시 후. 돌풍의 사이사이로 검붉은 불 줄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자세히 보니 네르갈의 몸에서 뭉클뭉클한 염화(炎火)가 용솟음치고 있었다. 그것은 휘도는 돌풍에 따라 핑그르르 도는 원을 그리어,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마치 하나의 불의 폭풍을 보는 것만 같았다. 안면에서 뜨거운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흘러들어오는 기류에는 역겹고 비릿한 피 내음이 섞여 있었다. 항상 맑은 화정(火正)만 보아오다가, 간만에 거지 같은 기운을 보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런 내 반응에 착각했는지 네르갈은 사늘한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끼끼끼! 왜 그러지? 왜 그런 얼굴이야?” “이건…. 불?” “그렇지. 벨제부브님의 권능, 크림슨 템페스트! 이제 좀 후회가 드는 건가? 끼끼끼끼!” 크림슨 템페스트? “아.” 그 말을 들은 순간, 불현듯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한 번의 심호흡으로 몸을 점검했다. 그리고 안솔의 '기적'에 감사하며, 심장의 힘을 한껏 폭발시켰다. '태고의 격으로 명할지 어니.' 화륵! 화르륵! 내 말에 따라 전신에서 맑은 불꽃의 기류가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냐!” 이어진 네르갈의 외침에, 나는 왼손을 들어 올려 대답했다. “영역 선포(Area Declared).” ============================ 작품 후기 ============================ 로유진 부! 활! 정말 오랜만에 정시에 업데이트했습니다! 하하하하하! |ㅇㅇ/ * …그러나 메모라이즈가 다시 자정에 업데이트되는 일은 없었다. 주말 집필에 모든 힘을 쏟아낸 로유진은, 이어지는 화요일에 거짓말처럼 늦어버리고 말았다. - Fin. - 0384 / 0933 ---------------------------------------------- 전쟁의 끝 화르르르르르르륵! '영역 선포(Area declared)'를 외친 순간, 눈부실 정도의 맑은 불꽃이 하늘을 물들였다. 마력으로 안력을 끌어올렸음에도 불구하고, 한순간 시야가 멀었다 여겨질 정도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그러다 빛이 약간이나마 잦아들었을 즈음, 간신히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오오오…. 하늘 아래 보이는 허공은 어느덧 붉은 황혼으로 물들여져 있었다. 그것은 이따금 물결이 부드럽게 굽이쳐 움직이는 것처럼, 잔잔한 리듬이 느껴진다. 눈앞 광경은, 보이는 대로 오롯한 화정(火正)의 흐름이었다. “이놈!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게냐!” 스스로도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는지, 네르갈의 비명이 들린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화정은 곧바로 다음 행동을 개시했다. 허공을 넘실대던 찬란한 발광(發光)이, 이내 둥글게 퍼지면서 내려와 하나의 막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꼭 붉은 하늘이 떨어져 내리는듯한 광경에, 네르갈은 다급한 목소리로 고함쳤다. “크림슨 템페스트(Crimson Tempest)!” 쿠르르르르르르르! 네르갈의 몸을 휘돌던 불의 폭풍이 한층 거세어진다. 공기의 진동이 한층 심해지고 회전 속도도 빨라지는 게, 금방이라도 발출될 듯한 기세였다. 그때였다. 투쾅! 맑은 불빛이 물결처럼 미끄러지듯 내려와, 그대로 대지에 내리 꽂혔다. 나와 네르갈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보았다. 비로소 완성된 '영역 선포'는, 마치 연한 붉은빛이 감도는 유리그릇을 거꾸로 덮은 것과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뭐, 뭐냐?!” 네르갈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설핏 얼굴을 보니 얼굴은 황당 그 자체였다. 어느덧 불의 폭풍은 행동을 완전히 멈춘 상태였다. “크림슨 템페스트!” “…….” “크림슨 템페스트! 크림슨 템페스트!” “…….” “크, 크림슨 템페스트으으으으!” 손을 마구 휘젓는 모습이, 이제는 우스꽝스러운걸 넘어서 안쓰럽기까지 하다. 웬만하면 조금 더 보고픈 마음이 있었지만, 나는 곧바로 왼손을 들어올렸다. '영역 선포'는 몸에 엄청난 부담이 걸리는 능력이다. 아무리 '기적(Miracle)'을 맞았다곤 해도, 추후 닥쳐올 부담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나에게는 하등 유리할게 없으니까. '내 의지에 따른다고 했었지….' “이, 이 비겁한 인간 같으니라고! 당장 이것을 풀지 못할까!” “미친놈.” 간단히 대답한 후, 들어올린 왼손으로 네르갈을 겨냥한다. 그리고 나직이 말을 이었다. “물들어라.” 화륵! 화르륵! 그러자 네르갈을 감싸던 검붉은 불꽃은,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단번에 색채가 변화했다. 변화된 색깔은 맑은 빛을 띠고 있는 화정의 색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했을 때, 나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터져라.” 그 순간이었다. 꽈앙! 제자리에 멈춰있던 불의 폭풍이, 거세게 폭발했다. 그것은 시야를 가득 메울 만큼 거대한 폭발이었다. 귀가 멀어버릴 듯한 폭음에 절로 눈살을 찌푸렸지만, 나는 이번에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광경에,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고작 두 마디를 내뱉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청명한 불길은, 20미터는 족히 넘을 정도로 크게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네르갈의 서 있던 대지에는, 폭발의 여파로 움푹 파인 커다란 구덩이가 보였다. 그에 따라 흙먼지가 공중으로 피어올랐고, 이내 사방을 점령한 불길에 흔적도 없이 녹는다. 화르륵! 화르르륵! 네르갈? 놈은 보이지도 않는다. 비명은커녕, 핏줄기도 보이지 않는다. 폭발이 어찌나 강렬했는지, 화정은 폭발 후에도 여전히 허공에 남아있었다. 마치 복잡하게 얽힌 전깃줄처럼, 어른거리는 아지랑이를 피우며 여전히 존재감을 과시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5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안 그래도 붉게 물든 하늘에 진한 황혼 빛이 드리웠을 즈음, 이내 미약하게 솟아오르는 한 줄기 검은 연기가 보였다. 그것을 보고 나서야 나는 약하게 숨을 내쉬었고, 곧바로 '영역 선포'를 해제했다. 그러자 반투명한 막이 곧바로 걷히었고, 전방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던 화정도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 어느덧 네르갈이 서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진득하게 녹아 내린 대지와 서서히 사그라지는 흙먼지만이, 조금 전의 폭발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말 그대로, 놈은 “끽.” 소리도 못한 채 1초 만에 터져나간 것이다. 물론 네르갈이 가장 약한 타이밍을 노리기는 했다. 그래도 이것은 나로서도 놀라운 결과였다. '체력을 101까지 올리면 화정을 다룰 수 있다고 했던가?' 돌아가면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 전투는 끝난 게 아니었으니까. 벨페고르와의 전투에서 그랬던 것처럼, 마족은 기본적으로 두 개의 목숨을 갖고 있다. 1회 차 때는 이 사실을 몰라 한 번 죽인 마족을 그대로 놓친 경우도 심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네르갈은 한 번 더 소생해야 정답이었다. 그러나 제 3의 눈으로 네르갈의 사망 여부를 확인한 결과, 아무 정보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 말인즉슨 조금 전 화정의 폭발로 놈을 확실히 사살했다는 방증이었다. 마족을 확실하게 죽이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목숨이 두 개인만큼 따로따로 두 번을 죽이는 번거로운 방법. 두 번째는 첫 번째로 목숨을 빼앗을 때, 두 번째 목숨까지 한 번에 날려보낼 정도로 강력한 공격을 구사하는 것이다. 나는 두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그렇기에 바로 “터져라.”가 아닌 “물들여라.”라는 과정을 거쳤다.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려는 내 염원이, 화정의 특수성과 결합하여 네르갈을 순식간에 터뜨렸다. 그 결과 놈의 두 번째 목숨까지 단번에 앗아간 판정이 나온 것이다. 어쨌든 네르갈은 죽었다. 제 3의 눈으로 확인한 이상,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만큼 더 없는 확실한 사실이었다. 그때, 문득 한 생각이 들었다. '벨제부브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떨까.' 시몬이 지금껏 어떤 행보를 거쳐왔는지는 모른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또는 어떻게 '악마의 씨앗'을 받게 되었는지. 그러나 그 또한 통과의례를 거쳤을 시절이 있을 테고, 처음부터 이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연히 소환된 벨페고르와는 다르게 네르갈은 놈들이 철저히 계획한 하나의 과정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얼만큼 시간이 걸렸을지는 몰라도 그것을 이번 전쟁을 통해 저지했으니, 이 사실을 알게 된 군주 급 악마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자못 호기심이 일었다. “후유….” 기다랗게 숨을 내쉬고 고개를 든다. 조금 전까지 붉게 물들었던 하늘은, 어느덧 다시 푸르른 색채를 띠고 있었다. 그렇게 멍한 기분으로 둥실둥실 떠다니는 구름을 보고 있자, 한순간 머리에 띵한 현기증이 찾아 들었다. 나는 어지러운 와중에도 쓰게 웃었다. 최고조에 이른 몸이었다고 해도, 역시나 '영역 선포'를 감당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팍! '빅토리아의 영광'을 대지에 꽂아, 무너지려는 몸을 지탱한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쓰러져 자고 싶었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쓰러지려는 몸을 붙잡았다. 그리고 담담히 보이려 애쓰며 호흡을 골랐다. 그나마 미리 대비를 해두어서 그런지, 전처럼 속절없이 기절했던 때에 비하면 힘들게나마 버틸 수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 아직 전투는 끝난 게 아니었으니까. 부스럭! 그렇게 잠깐 숨을 골라 여력을 만드는 와중, 뭔가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지만, 일단 선수를 치겠다는 생각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와라.” - ……. “…Out.” 부스럭, 부스럭 부스럭! 한순간 맞는 표현일까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마른 잎을 밟는 소리가 들리는 게, 다행히 알아들은(어쩌면 알아들어 준) 모양이다. 이윽고 내 앞으로 한 여인이 성큼성큼 다가와 모습을 보였다. 나는 여력을 끌어올려 검을 겨누었다. 그러나 여인은, 곧바로 양손을 하늘 높이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 잠깐만. 항복하겠다. 지금 나에게 당신과 싸울 의사는 없다. 이어지는 유창한 국어에 나는 잠시 침을 삼켰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보아하니 마법사로 보이는데, 아무래도 번역 마법을 걸은 모양이다. “항복이라고?” - 그렇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여인을, 나는 잠시 동안 지그시 응시했다. 항복이라고 말하는 것치곤 여인의 태도는 썩 당당했다. 그와 동시에 꽤나 미인이었다. 흡사 황금을 녹여 뽑아낸 듯한 매력적인 가는 웨이브 머리에, 서구 특유의 하얀 피부가 돋보인다. 눈동자는 태양을 담았는지 밝은 주황빛이 반짝였고, 입술 또한 잘 익은 앵두처럼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비록 이곳저곳에 피가 묻어있긴 했지만…. 그것은 전혀 아름다움을 퇴색시키지 못할 만큼, 그 정도로 여인의 미모는 빼어났다. 나는 잠깐 동안 여인의 얼굴을 보며 시간을 끌었다. 최소 한 번이라도, 제대로 검을 휘두를 힘을 비축해야 했기에. “언제부터 숨어있었던 거지?” 사실상 내가 깨달았을 때는 바로 '영역 선포'를 이루었을 때였다. 내 물음에 여인은 한두 번 눈을 깜빡이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 간신히 포위망을 뚫었을 때는 이미 총대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름대로 추적해온 결과, 그는 나무에 꽂혀있더군. “그럼 그때부터 봤던 건가?” - 그렇다. “웃기는군. 네 주인이 당하는데 지켜보다니. 그리고 다 끝난 지금 와서 항복이라.” 내 이죽거림에, 여인은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 아니. 나서려고는 했었다. 하지만 막 나가려는 찰나, 갑자기 총대장이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출현한 괴물에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건 도대체 뭐지? 신화에서만 나오는 악마인가? “그렇다면…?” 여인의 말에 바로 말을 이으려는 순간, 나는 곧장 도로 집어넣었다. '하기야 숨겼을 수도 있으니까.' - 그리고…. 그러자 여인은 내 눈치를 한 번 보더니, 이내 차분히 입을 열었다. - 혹시. 당신…. 그때 그 괴물이 아닌가? “괴물?” - 공성전 당시…. 내가 발동한 스피릿 브레스를 막은 자가 있었지. 조금 전 본 광경으로 미루어보아, 그때 그 괴물이 아닐까 생각한다만. “내가 발동한? 스피릿 브레스?” 뜻 모를 말에, 나는 한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이어서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재빠르게 제 3의 눈으로 여인의 사용자 정보를 띄웠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Marcia Yesica(4년 차) 2. 클래스(Class) : 불의 정령술사(Secret, Elemental Shaman Of Fire,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네뷸라(Nebula) 4. 소속 단체(Clan) : Tyrant 5. 진명 • 국적 : 용의 축복을 받은 자 • 미국 6. 성별(Sex) : 여성(25) 7. 신장 • 체중 : 171.2cm • 54.7kg 8. 성향 : 중용 • 신념(Neutral • Belief) [근력 26] [내구 38] [민첩 42] [체력 37] [마력 92(+2)] [행운 87] (남은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현재 과도한 마력의 사용으로 탈진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이 이상 무리한다면 능력치가 하강하는 후유증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충분한 회복을 요합니다.) '아.' 나는 속으로 탄성을 터뜨렸다. 그리고 사용자 정보를 보자마자 핑그르르 머리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왜 그때 용염(龍炎)을 보고 떠올리지 못했던 걸까? 아마 갑작스런 화정의 각성에 잠깐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곤 해도…. 갑자기 항복이라니. 내 입장에서는 조금 곤란한데.” - 이해한다. 그러나 내가 빠져 나왔을 때 동료들은 이미 거의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믿지 못할 광경을 보기도 했고…. 지금 내 머리는 무척이나 혼란스럽고, 나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이대로 정신 없이 추적에 쫓기느니 차라리 항복하고 포로가 되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뿐. “…….” - 먼저 침략한 입장에서 뻔뻔하다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부디 승자의 아량으로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그에 따른 처벌은 어떤 것이라도 감내하겠다. 번역 마법이 완벽하지는 않은지 중간중간 어색한 번역 투가 들렸지만, 이해하는 게 크게 지장이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잠시 후. 계산을 마치고 나서, 나는 다시 여인을 응시했다. 그녀는 여전히 두 손을 높이 든 채 아름다운 황금색 눈동자로 나를 마주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사용자의 체력이 30%이하입니다. TOPG의 잠재 능력, 분노가 활성화됩니다.』 『근력, 체력, 내구, 민첩이 잠시 동안 소폭 상향합니다!』 타이밍 좋게 발동한 능력에, 순간적으로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해서, 나는 겨누었던 검을 천천히 늘어뜨렸다. 그리고 서서히 칼집에 집어넣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주변에 너와 비슷한 동료들이 있나? 항복할 의사가 있는 사람들 말이야.” 그런 내 반응을 긍정적이라 생각했는지 여인의 얼굴에 일순간 밝은 빛이 스쳤다. 그러는 와중 나는 계속해서 제 3의 눈으로 그녀의 몸을 탐색하며, 천천히 다가섰다. - 아니. 없다. 같이 탈출한 동료들은 몇몇 있었지만, 도중에 뿔뿔이 흩어지거나, 괴물을 보자마자 도망쳤다. “그렇군. 알겠다. 그럼 이만 손 내려도 돼.” 내 말에 여인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들었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지척까지 다가온 나를 보며, 옅은 미소와 함께 가녀린 손을 내밀었다. - 고맙다. 내 이름은 마샤 예시카. 비록 상황은 이렇지만, 만나서 반갑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항복을 받아주어서 고맙다. 나는 마주 손을 내밀며, 마력을 일으켰다. 동시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화답했다. “김수현이다.” - 그렇군. 솔직히 그날부터 내 능력을 막은 자가 누군지 무척이나…! 그리고 내뻗은 손은, 마샤 예시카의 손을 그대로 스쳐 지나가 오른쪽 가슴을 파고들었다. 푹! 이윽고 손끝으로, 부드러운 살갗을 파고드는 감촉이 느껴졌다. - 아…? 의아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마샤 예시카. 나는 손을 한 번 휘젓곤 그녀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항복? 내가 미쳤냐?” 그리고 손에 잡힌 구슬을, 단숨에 뜯어 꺼냈다. 찌지직! - 아아악! 비명과 함께 튀어나온 가느다란 핏줄기. 이어서 믿을 수 없는 눈초리가 나를 향하는 찰나의 순간. 나는 마샤의 머리를 향해, 지체 않고, 있는 힘껏 왼손을 휘둘렀다. 뻥! 전력을 다해서 그런지, 마샤의 머리는 여지없이 크게 터져나갔다. 그에 따라 봇물처럼 터지는 핏물과 함께, 피와 뇌수가 뒤섞인 분비물이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윽고 남은 것은 얼굴이 절반이나 넘게 날아간 시체뿐. 나는 아직 뜨거운 온기가 남은 시체를 그대로 바닥에 던졌다. 털썩! 남은 절반에서 마샤의 눈동자는 여전히 크게 떠져 있었다.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시선을 돌렸다. 『불의 결정』 손에 쥔 구슬에서 진득한 핏물이 뚝뚝 떨어진다. 나는 물끄러미 결정을 응시하다가, 느릿하게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이번 전쟁으로 얻은 부수입은, 시크릿 클래스 3개. 어떻게 보면, 전쟁은 좋다. 이렇게나 얻을게 많으니까. 또한 슬프기도 하다. 그만큼 잃는 것도 있으니까. '…….' 이로서 모든 상황이 끝났다. 물론 전쟁의 종결 자체는 전장으로 돌아가봐야 알겠지만, 나로서는 이루고 싶은 것은 모두 이룬 상태였다. …이 말인즉슨, 인정하기 싫은 현실과 다시 마주해야 한다는 소리. '그만…. 돌아가자….' 이윽고 나는 달려 온 길을 따라, 비틀거리면서도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핏물이 낭자한 숲길 사이로 어울리지 않는 환한 실루엣이 비쳐 들었다. ============================ 작품 후기 ============================ 늦었어요! 죄송해요! 우헤헤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요! 우헤헤헤헤!(퍽퍽!) 아이고. @_@ 죄송합니다. 잠시 정신 줄을 놓았네요. 흠흠. 자! 전쟁이 끝났습니다! 하지만 아직 죽일 사람들이 남았다는 게 함정! 과연 누구일까요? 우훗훗. :D PS. 오늘 묘하게 하이 텐션입니다. _(__)_ 0385 / 0933 ---------------------------------------------- 전쟁의 끝 <회상> 철퍽! 순간, 칠흑 빛 머리카락이 대지에 흐트러졌다. 눅진히 얽힌 머리카락 아래로 선홍색 핏물이 퍼져 나온다. “하아…. 하아….”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남성은 간헐적으로 호흡했다. 한 번 숨을 토할 때마다 입가에서 핏방울이 튀어 오른다. 이윽고 창백한 입술이 간신히 떼어졌다. “수현아…. 예전에 형이 했던 말 기억하지…? 나를…. 살리지 말라는 거….” “형…?” “그래도 너는…. 살아남아라.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끝을 봐라….” “혀….” 청년이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 안고 있던 손에서 떨림이 사라졌다. 몸에서 일어나던 노란빛 전류가 서서히 사그라진다. 흔들리던 눈동자는 삽시간에 빛을 잃었다. 툭! 마지막으로, 고개와 손이 힘없이 동시에 대지에 떨구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쿠오오오오오오오! “아아아아아아아아!” 토해진 분노와 슬픔의 부르짖음이, 허공을 미친 듯이 떨어 울렸다. * 모든 게 끝났다. 조금 전까지 머리를 가득 메우던 뭔가가, 한순간 빠져나간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까닭 없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는 이제야 중천에 떠올랐다. 시원한 비라도 내리면 좋으련만 정오의 하늘은 너무도 맑고 청명하다. 그렇게 멍하니 하늘만 보고 걷던 도중, 돌연히 허공으로 몇 개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사용자 김수현은 '첩자의 마족 네르갈'을 처치했습니다!』 『'첩자의 마족' 네르갈은 악마 군주 벨제부브가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온 계획의 일부입니다. 아마 시몬 그라임스가 이대로 돌아갔다면, 홀 플레인의 대륙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혼란에 빠져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용자 김수현은 '악마의 씨앗'을 받은 예비 각성 자를 살해함으로써, 악마의 계획을 저지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점을 판단하여, 사용자 김수현에게 500.000 골드 포인트(Gold Point)를 지급합니다!』 “…….” '50만 포인트라….'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메시지들을 보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50만 골드 포인트. 꼴랑 마족 한 마리 잡은 것치고는 상당히 후하게 준 편이다. 이 말인즉슨 결국 내 예상이 맞았다는 소리였다. 벨페고르가 우연히 소환된 산물이었다면, 네르갈은 확실히 계획적인 요소가 섞여 있었다는 것. 아마 그러한 점을 참고해 제법 높게 준 모양이다. 솔직히 별다른 감흥은 없다. 한때 셀 수 없을 만큼의 GP를 만져 본적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적지 않은 골드 포인트임에도 불구하고, 50만 GP가 그렇게 크게 와 닿지는 않는다. 어느덧 들판의 숲은 벗어났다. 이어서 걸음이 향하는 전방으로, 분주한 인기척들이 서서히 느껴지기 시작한다. 나는 감았던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허공에 머무르는 메시지들을 꺼버렸다. 그러자 사라진 전언들 사이로, 멀리서 내가 거쳐왔던 전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이제 더는 전장이라 부르기는 어려울까. 분명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보이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 전 지나쳤을 때 느꼈던 격렬함이, 이제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 해서 나는, 계속해서 걸었다. 걷고 걷고 걸어,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을 그대로 지나쳤다. 화창한 하늘에 떠오른 해는 찬연한 햇살을 뿌리고 있어, 들판을 선명하게 밝혀주는 중이었다. 들에 흩어진 시체와 흐르는 핏물의 풍경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날씨였다. 문득 강하게 내리쬔 햇살에 뒷목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들판의 한복판을 걷고 있었다. 이윽고 사람들을 지나치면서, 주변의 장면이 하나하나 귓가로 흘러들었다. “수연아! 수연아! 대답해! 수연아!” “누가 좀 도와주세요! 사제 분들 좀 이쪽으로 와주세요!”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도움을 바라는 사람들.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다행이라고…. 우리는 살았다고!” “허엉…. 허어엉….” 살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기뻐하는 사람들. “형! 형! 눈을 감으면 어떡해! 눈 좀 떠봐! 응? 형…? 혀엉!” 죽어가는 사용자 앞에서 절규를 부르짖는 사람들. “놔! 노라고! 저 새끼들 죽여버릴 거야!” “참으세요! 참으라고요! 항복한 포로들이에요! 이제 다 끝났잖아요!” “누구 멋대로 포로야! 아직 전쟁 안 끝났어! 이 씨발 새끼들아!” 죽음을 확인하고 분노를 터뜨리는 사람들. “형님! 형님! 아니죠? 거짓말이죠? 젠장! 형님!” 그리고 지인의 죽음을 확인하고 슬퍼하는 사람들…. '응?' 순간 귓가로 흘러 드는 목소리가 꽤나 익숙히 느껴져,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 상태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이내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몰려있는 어느 지점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대부분 고려 클랜을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제기랄! 끝까지, 끝까지 같이 살기로 약속했었잖습니까! 아,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거기 사제들 뭐하냐! 빨리 치료 주문 안 외우고!” “사용자 조성호! 고려 로드는 사망했습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그러나 일단 진정을….”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약간이나마 정신이 일깨워지는 것을 느꼈다. '고려 로드가 사망해?' 그렇다면 1회 차 때처럼 그대로 사망했다는 건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원래 사후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처럼 허무하게 죽지는 않았으리라.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느다란 한숨과 함께 울부짖는 사람들을 지나쳤다. 가면 갈수록 주변을 메우던 소리가 점차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내가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바로 애들을 구출할 때 만났던 곳이었다. 안솔이 각성이 이루어지고 신상용의 죽음을 확인한 곳. 그곳에 서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몇 구의 시체와 함께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아마 고연주가 내 말을 잘 따라준 듯싶었다. “…….” 자꾸 눈에 밟히는 낭자한 핏자국들 중에는, 틀림없이 신상용의 것도 섞여 있으리라. 나는 그곳을 한동안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잠깐 조용해졌던 전장이, 걸을수록 다시금 소란스럽게 변하였다. 철퍽철퍽, 철퍽철퍽. 아래로 보이는 걸음걸이는 느릿하기 그지없다. 불과 아까 전장을 미친 듯이 질주했던 게 꿈처럼 여겨질 정도로 내 걸음은 한없이 느렸다. 그냥 마음 가는 데로 정처 없이 걸어서 그런 걸까? 그렇게 얼마나 들판을 가로질렀을까. 멀리서 보이기 시작한, 한 곳에 모여있는 사용자들이 시야에 잡힌 순간,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보이는 사용자들은 바로 머셔너리 클랜원들이었다. 처음에는 걸음이 느린 이유를 나도 잘 몰랐다. 하지만 클랜원들을 보자마자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나는 직감적으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아주 예전에, 아직 머셔너리 클랜 초창기 시절. 탐험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한 사용자 무리를 본 기억이 있다. 그들 또한 탐험을 마치고 돌아오는 무리들이었는데,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신나서 돌아오는 우리와는 달리 굉장히 우울한 분위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이유야 뻔하다. 탐험에 실패했고, 동료를 잃었을 것이다. 그때 애들은 떠들던 것을 뚝 멈추고 지그시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애들이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게 궁금하면서도, 나는 당시 다짐했었다. 저런 광경이 찾아오지 않도록 절대로 실패하지 않겠다고. 그러한 분위기가 머셔너리에 보이지 않도록 하겠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개인적으로 보면 전쟁을 통해 목표했던 바를 이루긴 했다. 그러나 클랜 전체로 보면…. 모든 클랜원들을 위험에 빠트렸으며, 무엇보다 한 명을 잃기까지 했다. 물론 신상용은 처음 인선에서 제외했고, 개인의 부탁으로 바꾸기는 했다. 하지만 그 결정 또한 내가 한 것이고, 결국 전쟁의 참가는 변명할 여지없는 그릇된 선택이었다. '차라리 혼자 간다고 할걸.' 떠오른 생각과 함께, 나는 걸음을 멈춘 채로 클랜원들을 응시했다. '기적'의 효과인지 신상용을 제외하고 다들 무사한 모습이다. 그런 모습에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걱정이 앞섰다. 굳이 다가가지 않아도 암암리에 흘러들어오는 기분은 파악할 수 있었다. 가야 한다는 생각에 한 걸음 떼었지만, 이내 다시 바닥에 붙이고 말았다. 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에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을 때였다. “수현아!” '?' “수현아! 수현아!”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 그에 따라 고개를 돌리자, 한 쪽에서 득달같이 달려오는 인영이 보인다. 이어서 인영의 정체를 확인한 나는 약한 침음을 흘렸다. 형이 달려오고 있었다. “수현아! 너…! 어…?” 그리고 지척까지 다가온 형이, 나와 시선을 마주친 순간 약간 멈칫했다. “너…. 괜찮아?” “괜찮으냐니?” 나는 반문했다. 뜻 모를 말이기는 했지만, 굳이 따지자면 괜찮지 않다. '분노'가 다시 비활성화됨에 따라 몸에 다시 가득한 피로감이 찾아 들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을 인지하자마자, 한순간 시야가 흔들렸다. “어….” “수현아!” 턱! 의도치 않게 가까워지던 대지가, 중간에서 멈췄다. 설핏 고개를 들자 형이 보인다. 내가 쓰러지는걸 보고 달려와 받아준 모양이다. “너 지금….” 이윽고 형의 입술이 떼어졌다. 그러나 내 얼굴을 보더니 바로 다시 다물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걸까? 그때였다. “수현!” “머셔너리 로드!” 형의 목소리가 꽤나 컸는지, 등을 보이던 클랜원들이 한 명씩 서서히 돌아보기 시작한다.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힘을 다해 바로 섰다. 갑작스레 괜한 오기가 솟았다. 이제 정신을 잃는 거라면 지긋지긋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 의외로 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알게 모르게 나를 부축했을 뿐, 조용히 입을 닫은 채 걷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윽고 클랜원들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나에게 달려오려는 인원이 몇 명 보였지만, 곧바로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였다. 거리가 줄어들수록 우울한 기운의 농도는 짙어지고, 클랜원 여덟 명의 얼굴이 확연히 보인다. 남은 클랜원들의 수는 총 여덟 명. 네 명은 신상용을 둘러싼 채 바닥에 주저앉거나 엎드려있고, 나머지 네 명은 일어선 채로 침중한 빛을 띠고 있었다. “크허엉…. 크흐어엉…. 형…. 나 때문이에요…. 나 때문에…. 상용이 형이….” 그 중에서도 특히 심한 건 안현이었다. 녀석은 특이하게도 자신의 장비를 모두 내팽개친 채, 바닥에 엎드려 흐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안솔과 이유정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힘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둘 다 볼에 눈물 자국이 가득한 게, 이미 한바탕 눈물을 쏟은 모양이다. 이윽고, 마지막으로 힘없이 앉은 비비앙이 보였다. 그녀는 내가 왔음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있었다. 그저 조용히 신상용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수, 수현?” 왠지 모르게 의문문으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리고 신상용을 자세히 보려 안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그러자 비로소 비비앙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 그녀의 두 눈에선 각기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김수현.” “…….” “신상용이 죽었어.” “…….”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신상용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보았던 대로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잔잔하고, 편안해 보이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내 첫 제자였는데…. 이렇게 이별할지는 꿈에도 몰랐는데….” “…….” “나…. 이런 거 너무 싫어….” 훌쩍이면서 이어진 비비앙의 마지막 한 마디는, 내 가슴을 깊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도대체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떤 말을 해야 할까? “…….”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때였다. “다시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어요.” 일순 고요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번쩍 들어 한 쪽을 쳐다보았다. 클랜원들이 시선이 모인 곳에는, 김한별이 있었다. “사용자 상점에 소원이라는 항목이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엄청난 GP가 들기는 하지만, 그런 만큼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는 얘기를….” “김한…!” “뭐, 뭐라고?” “그게 진짜야?” 득달같이 달려드는 안현과 이유정에, 김한별은 “들은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아마 맞을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러나 김한별의 대답으로는 충분치 않은지, 안현은 곧장 나에게 달려들었다. “형! 형! 정말이에요? 소원이란 게 있어요?” “…….”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갑자기 떠오른 기억에 한순간 속이 복잡해졌지만, 간신히 대답할 수 있었다. “일단 그만하자.” “형! 만약에 GP를 모으면 다시 상용이 형 살릴 수 있는 거예요? 네?” 그만하자고 말했음에도, 안현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나는 떨리는 목구멍을 다잡으며 입을 열었다. “현아.” 이름을 부르자, 안현의 매달림이 한순간 멈칫했다. “제발…. 제발 그만하자….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자꾸나.” “형! 어…. 형…?” 나는 더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때 나를 보는 안현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지었다. 그것은 비단 안현뿐만이 아니었다. 형을 만났던 것부터 시작으로, 클랜원들의 경악과 걱정 어린 시선이 나에게 꽂혀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피로 칠갑돼있는 스스로를 살필 수 있었다. 어디 한 군데 살색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 전신은 빨갛게 물들여져 있다. 나는 담담히 외투를 벗어 들었다. 그러나 외투도 성하지 않다. 언제 이렇게 됐는지, 등 부분이 갈기갈기 찢어진 게 걸레 꼴이 되어있었다. 나는 그것으로 얼굴을 세게 닦았다. 한 번으로는 모자라 두 번 세 번 닦았다. 그제야 비로소 눈앞이 약간이 맑아진 기분이 들었다. '정신차려라. 김수현!' 잠깐 속을 가다듬은 나는, 이내 억지로 쥐어짜 낸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사용자 고연주.” “네, 네!” “지금 바로 사용자 신상용의 시체를 수습하십시오. 그리고 바로 전장 정리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형을 돌아보았다. 형은 여전히 묵묵히 나를 보고 있었다. 형을 보고 있자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신상용? 소원? 살릴 수는 있다. 그러나 과연 살리는 게 옳은 선택일까? 먼 훗날. 어쩌면…. 아니. 어쩌면 이 아니다. 내가 돌아온 이유는 홀 플레인에서 잘 먹고 잘 살자 가 아니었다. 형과 한소영을 데리고, 궁극적으로는 지구로 '무사히'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고 계획한, 필연적으로 맞이할 미래였다. 그러나. 그때가 다가왔을 때, 과연 신상용을 살린 게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확답을 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한 번 사망한 사용자를 다시 되살려도, 끝에는 지구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 작품 후기 ============================ 일일 연재 세이브 성공! 일전에 말씀 드렸던 것처럼, 1부 완결 전까지는 일일 연재가 펑크 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_(__)_ 0386 / 0933 ---------------------------------------------- 전쟁의 끝 <회상> “사용자 김수현.” 한동안 닫혀있던 세라프의 입술이 드디어 열렸다. 나는 일말의 불안감을 억누르면서도, 이제 끝이라는 생각에 조용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뜸을 들이던 세라프는, 이내 예의 고저 없는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어떤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설명하겠습니다. 홀 플레인에 소환된 사용자는 영혼을 구별하는 고유한 정수를 지닌 존재…. 즉 원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윽고 이어진 세라프의 대답은 내가 바라왔던 것과는 한참이나 어긋나 있었다. 순간 이전부터 느껴왔던 어렴풋한 불안감이 서서히 구체화하는 것을 느꼈지만, 그녀는 여전히 말을 잇는 중이었다. “영혼의 정수란 고유한 개체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망한 사용자를 되살리는 건…. 정수의 복원 또는 재구성이 아닌, 새로운 생성으로 이루어집니다.” “세라프.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도 모르게 살짝 숨이 거칠어진 모양인지, 언성이 높아졌다. 세라프는 잠깐 입술을 꼭 물었다. 그러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결론을 말했다. “사망 전 사용자의 정수는 지구인으로서의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홀 플레인에서 사망 후 부활한 사용자의 정수는, 더는 지구인이 아닌 거주민으로 인식됩니다. 즉 둘은 서로 동화할 수 없는 성질이라는 말입니다.” “…….” “완전히 다릅니다. 다르기에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이 언급한 사용자들은 하나같이 홀 플레인에서 사망한 사용자들…. 다시 말하여, 그들을 포함한 귀환 요청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임을 알려드립니다.” 이어지는 결론을 들은 순간, 나는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지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복잡했던 머리가 망치에 세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아스타로트에게 직접 들었을 때도 설마 설마 했던 것들이, 이제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뭐라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내면에서 무언가가 떨리기 시작한다. 그러한 와중에도, 나는 현실을 부정했다. 아니 세라프의 말을 부정했다. 아닐 것이다. 아니. 설령 맞는다고 해도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상반된 감정 속에서, 나는 점차 얕아지는 희망의 끈을 더욱 부여잡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거지?” “미리 말씀 드리지만….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겁니다.” “아니. 다, 다시 한 번 말해봐. 아니지? 내가 잘못들은 거지?” “사용자 김수현….” 그러자 세라프는 감았던 눈을 찬찬히 뜨더니 이내 나에게로 초점을 맞췄다. 나를 응시하는 그녀의 연록 빛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고요하고 잠잠했다. 그러나 조금씩 비틀리기 시작한 속내는, 그러한 시선을 “네 사정은 알 바가 아니다.”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폭발해 터질 것 같은 속을 꾹꾹 눌러 담으며,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는 찰나였다. “사용자 김수현은 제 말을 이해했습니다.” “너….” “일단은 진정하는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현재 사용자 김수현의 정신 상태는 극도로 불안한 상태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이해는 했으되,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추측….” “내가 잘못들은 거지?!” 세라프의 말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해서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세라프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레 목구멍이 메말라가는 게 느껴진다. 나는 한두 번 숨을 가다듬은 후, 손에 쥔 구슬인 제로 코드를 내밀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GP를 이용하려는 게 아니야. 소원을 말하는 게 아니라고. 내 말을 제로 코드를 말하는 거였어. 만능의 힘이 담긴 제로 코드.” “…….” “세라프? 응?” 평소라면 절대 보이지 않았을 애원 조까지 담아가며, 나는 세라프에 간청했다. 아무래도 좋다. 지금은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었다. 이제야 끝에 왔다. 드디어 오매불망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그러한데, 한 발짝 남겨두고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멈추고 말았다. 나는 절박한 마음으로 세라프를 응시했다. 그러나. “…….” “세라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라프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까처럼 고요히 나를 응시하고만 있을 뿐…. '인정할 수 없어.' 그래. 세라프의 말대로 이해는 했을지 몰라도,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녀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인 순간…. 지금껏 실낱같은 줄기로 간신히 지켜온 무언가가, 산산이 부서질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최대한 침착 하려 애쓰며,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또 뭘 해야 내 요청이 정상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걸까? 이제 퍼스트 코드라도 찾아야 하나?” “사용자 김수현.” “좋아. 말해. 경청하겠어.” “…하….” 일순, 세라프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아까 언급한 김유현, 한소영…. 이 두 사용자는 이미 사망한 상태입니다. 물론 어떤 방법으로든 부활은 가능합니다. 제로 코드를 사용해도 좋고, 보유한 GP로 소원을 이용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이 아니잖아?” “…어떻게 보면 제로 코드는 소원의 상위 호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결국, 결과는 똑같습니다. 아까 말씀 드렸듯이 한 번 사망한 사용자는, 다시 살렸을 경우 거주민으로 재설정됩니다. 제로 코드든 소원이든 근본적인 문제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혹시나 하고 가만히 들어보았지만 아까와 똑같은 이야기였다. 결국에는 변하지 않은 세라프의 확답은 나에게 있어서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기껏 내밀었던 팔이 힘없이 떨어져 내린다. 그런 내 반응을 보았는지, 세라프는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사용자 김수현은 한 번도 사망하지 않았습니다. 지구로의 귀환에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그럼…. 이대로 나 혼자 가라고…?” “…홀 플레인에서의 기억은 없을 테지만, 사용자들은 여전히 지구에 존재하고 생활합니다. 비록 그들이 사본이라고 할지언정….” 그때였다. 그 순간, 나는 여태껏 간신히 가라앉혔던 내면이 한순간 와장창 깨어지는 것을 느꼈다. 스르릉! “사용자 김수현?” 나직이 흘러들어오는 세라프의 의아한 목소리. 문득 정신을 차리자, 눈앞으로 세라프를 겨냥한 검이 보인다. 나도 인지하지 못한 새에 반사적으로 뽑아 겨눈 모양이다. 이내 검 끝이 미미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며, 나는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불현듯, 애써 외면해왔던, 그러나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 머리를 스쳤다. '결국에는 이렇게 돼버렸나…. 휴. 어쩔 수 없지. 아무튼 지금이라도 마음껏 좋아해라. 축하한다. 사용자 김수현. 그리고 애도하마.' '갑자기 뭔 개소리냐?' '곧 알게 될 거다…. 결국, 너도 이용당했다는 것을. 그리고 천사들도 우리와 똑같은 존재라는 것을 말이야.' '미친놈. 죽기 직전이 되니 별 헛소리를 다하는군.' “사용자 김수현. 어떤 생각으로 이러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행동은 굉장히 적절치 못합니다. 설령 저를 죽인다고 해도 결론은 불변입니다.” “…세라프. 다 필요 없으니까, 하나만 대답해줘.” 나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흘러나온 목소리는, 스스로 들어도 놀랄 만큼 착 가라앉아있었다. 마치 터지기 일보 직전의 무언가처럼. 세라프는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고,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럴까? 후후.' '너랑 농담 따먹기 할 시간은 없어. 아스타로트.' '글쎄? 이봐, 김수현. 궁금하지 않아? 제로 코드가 뭔지? 그리고 왜 너희가 홀 플레인으로 끌려와, 제로 코드를 놓고 우리와 싸우는지…?' '그게 무슨….' “나. 제로 코드 얻었잖아. 사용자로서 홀 플레인의 끝을 이룬 거잖아.” “Yes.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정확한 사실입니다.” 곧바로 이어진 즉답에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하지만 이내 왼손을 활짝 피어 보이며, 쥐고 있던 파란 구슬을 드러내 보였다. “그럼…. 대체 이게 뭐지?” “예…?” “왜 내가…. 아니. 우리가 너희를 대신해서 제로 코드를 얻어야 했던 거지? 이 물건이 너희에게 어떤 의미가 있기에?” “!” 그 순간 세라프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한 빛이 스쳤다. * 워프 게이트의 차례를 기다리던 도중. 나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중천에 올랐던 해는 시간이 흐를수록 서쪽으로 떨어져, 도시에 붉은 황혼을 드리우고 있었다. 잠깐 동안 입맛을 다셨다가, 나는 남은 줄을 세어보았다. 그리고 머셔너리의 차례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확인하곤, 여태껏 옆에 있던 형을 돌아보았다. “형. 이제 그만 가볼게.” “응? 아아. 그러네. 우리는 아마 거의 끝에 가게 될 것 같다.” “그래도 이만 가봐. 클랜 로드가 계속 자리 비우는 것도 안 좋아.” “흠. 그건 그렇지.” 형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곤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갑자기 내 어깨를 잡더니, 이내 자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수현아.” “응?” “고맙다.” “?” 뭐가 고맙다는 걸까? 내가 의아해하는 기색을 읽었는지, 형은 빙긋 웃었다. “애들한테 얘기 들었어. 전부 네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이야. 해밀 클랜은 덕분에 기적적으로 인원 손실은 없다. 다들 너에게 무척이나 감사하고 있어.” “…잘됐네.” 애들이라 함은 해밀 클랜원들을 말하는 거였나. “그래. 다른 말은 몰라도, 이 말만은 꼭 전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 “연락 기다리고 있으마. 마음이 정리되면 먼저 연락을 줘. 얼마든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응.” 연락을 기다린다는 말은 아마도 '그일'을 말하는 것인가. 나는 단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말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별로 거리낄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은 내 반응을 확인한 후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그리고 “힘내라.”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차분히 몸을 돌렸다. 나는 서서히 멀어져 가는 형의 뒷모습을 본다. 형은 아까부터 별로 말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내 옆을 지키고 있었을 뿐. 아마 형 나름대로 나를 배려하는 방식이리라. 이윽고 나는 기다란 한숨과 함께 상념에 잠겼다. 새벽에 시작된 전쟁은, 점심 즈음에 이르러 끝이 났다. 이후 시간이 흘러 지금 시간대는 오후와 밤의 경계선에 놓여 있었다. 비록 서 대륙의 예기치 못한 승부수로 많은 피해를 입은 상태였지만, 일단 전쟁이 끝났으면 가장 우선시되는 일은 전장 정리 및 전후 처리였다. 그에 따라 슬픔에 젖어있던 사용자들은 조금씩, 그러나 부지런히 움직였다. 먼저 남부와 북부에 연락해 현재 상황을 전달했으며, 최대한 빠른 지원을 요청했다. 두 곳은 탈환한 도시를 추스르고, 바로 지원을 오겠다고 답신했다. 아마 이르면 오늘밤, 늦으면 내일 아침에 도착할 것이다. 사실 지원 요청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바바라의 도시 상태가 말이 아니었고, 핏물이 흐르고 시체가 쌓인 들판은 말한 것도 없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포로로 잡힌 서 대륙 사용자들도 처리해야 했으며, 피해 상황도 집계해야 했고, 바바라 내부에 살아있을 사용자들을 관리하는 일도 있었다. 한 마디로 할 일이 산더미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동, 남, 북문 부대를 제외하고, 서문 부대는 며칠간 추스를 수 있는 대기 및 정비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왜냐하면 쏟아져 나온 서 대륙 사용자들을 맞아 가장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비록 '기적'으로 상태가 최악까지 치닫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나름의 배려라면 배려라고 볼 수 있는 조치였다. 어찌됐든 거기에는 당연히 머셔너리 클랜도 포함되어 있었고, 현재 워프 게이트를 이용할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혼잡한 바바라에 억지로 남아 있을 이유는 없으니까. 추스르는 시간은 오늘을 포함해 총 3일이 주어졌다. 3일 동안 정리를 일단락 지은 후, 아마 다시 회의가 열릴 것이다. “다음 차례 준비하세요.” 어느덧 줄이 바로 앞에까지 왔다. 나는 한 번 뒤를 돌아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클랜원들이 대부분 침묵을 지키고 있기도 했고, 여기서 말할 기분도 아니었다. 더구나 아직 남은 줄이 긴 만큼 최대한 빨리빨리 이동해야 한다.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그래. 일단은 클랜 하우스로 돌아가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이내 파란빛이 일렁이는 워프 게이트로 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휴. 집필 완료했습니다. 하하하. 오늘도 일일 연재를 세이브해서 무척이나 기분 좋습니다.(기다려주신 독자분들께는 죄송합니다.) 슬럼프 꺼져! 네가 찾아온다고 내가 글을 안 쓸 것 같니? 오기로라도 써주마. 아. 위에 말은 혼잣말입니다. 하하하. 하. 이제 클랜 하우스로 돌아갑니다. 이제 진짜로 1부 완결까지 몇 회 안 남았네요. 한두 번 죽고, 자그마한 복선 하나 풀면 끝이에요. :) PS. 수험생분들 모두 수능 잘 보세요! 파이팅! 0387 / 0933 ---------------------------------------------- 변했다. 변하지 않았다. 형과 잠깐의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나서, 나는 클랜원들과 함께 바로 워프 게이트로 들어갔다. 그리고 드디어, 남부 도시 모니카로 이동할 수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모니카의 광경이었지만 딱히 달라진 건 없다. 그러나 클랜원들은 하나같이 어색한 기색을 내비쳤다. 다들 오랜만에 보는 도시의 전경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기분을 느꼈으리라. 이윽고 나는 잠깐 주변을 둘러본 후, 머셔너리 하우스로 곧장 직행했다. 클랜원들은 돌아가는 내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한 불편한 침묵 속에서, 왠지 모르게 내 눈치를 보는 느낌도 없잖아 있었다. 이따금 등에 쏟아지는 시선을 견디며, 나는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아마 신상용이 살아서 같이 돌아왔더라면….' 과연 어땠을까? 그래도 전쟁을 거쳤으니 “하하.”나 “호호.”까지는 아니었겠지만, 최소한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렇게 불편한 침묵이 감돌던 때였다. 순간 누군가 슬며시 내 옆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확인하자, 절반 정도 팔을 내뻗은 정하연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잠깐 멈칫했고, 이내 손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수현. 머셔너리 하우스에 미리 연락을 해두었어요.” “그렇군요.” “…네. 지금쯤이면, 아마 다들 나와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 정하연의 목소리는 여전히 맑았지만, 한껏 잠겨있었다. 약간 어색하게 느끼면서도 나는 그녀가 이을 말을 기다렸다. “이야기는 제가 간략히 해뒀어요.” 이야기라. 이러한 와중에도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쓴 정하연이 놀라웠지만, 나는 짐짓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고개를 꾸벅 숙였고, 이내 걸음을 늦추어 물러났다. 큰일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걱정 하나는 던 셈이다. 갑작스레, 요 근래 잊고 살던 연초를 간절히 생각하며, 나는 바쁘게 걸음을 놀렸다. 걷는 데만 집중해서 그런지, 머셔너리 하우스까지 도착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곧 육안에 확실히 잡힐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을 무렵, 정하연의 말대로 정문이 활짝 열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안에는, 익숙한 사용자들이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정문의 좌우 방향으로, 일렬로 서 있는 고용인들. 그리고 이번 참가 인선에서 제외한 영감님과 백한결. 물론, 아기 유니콘도 있었다. “뀨!” 아기 유니콘은 나를 보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꼬리를 쉴 새 없이 살랑이는 게, 어지간히도 신나는 모양이다. 그런 녀석을 받으려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뻗은 찰나, 나는 순간 내뻗는걸 멈추었다. 아래로 보이는 손은 여전히 피투성이였다. 바바라에서처럼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대부분 말라붙어 굳어져 있었다. 나는 잠시 동안 고민했고, 결국 내뻗은 손을 다시 거두어들였다. 그와 동시에 다리를 슬쩍 물리며 입을 열었다. “안 돼.” “뀨, 뀨뀨?!” 피가 묻든 말든 아랑곳 않고 달려들던 아기 유니콘은, 내 제지에 갑작스레 달리는걸 멈추었다. 이윽고 녀석은 황급히 나를 올려다보았고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초리에 나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오지마. 피 묻어….” “뀨…?”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때였다. “뀨우….” 뚫어져라 쳐다보던 눈망울이 일순 그렁그렁해지기 시작한다. 동시에 꼬리가 축 늘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짧게 숨을 뱉었다. 그리고 그대로, 아기 유니콘을 지나쳤다.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괜히 피를 묻힐 필요는 없잖은가. 그렇게, 나는 드디어 머셔너리 하우스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다녀오셨어요.” “어, 어서 오세요.” “히, 히익!” “조, 조용히 해!” 이윽고 정문 안으로 들어서자, 고용인들은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러나 천성이 비 전투 사용자라서 그런지, 내 모습을 보고 약한 비명을 지르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살짝 고개를 까닥여 화답하고 나서, 내게로 다가오는 두 명과 시선을 맞췄다. “혀, 형님. 아…. 크, 클랜 로드님. 어서…. 오세요.” “생환을 축하합니다. 클랜 로드.” 백한결의 반응은 고용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말을 하면서도 연신 힐끔힐끔 쳐다보는 게, 이런 내 모습이 꽤나 낯설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그에 반해서, 영감님은 비교적 차분한 태도로 나를 맞아주었다. “허허. 실로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격조했습니다.” “그렇지요. 음…. 이야기는 정하연양에게 대충 들었습니다. 사용자 신상용이….” “…예. 불행히도 그렇게 됐습니다.” “클랜 로드….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늙은이가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합니다.” 이내 혀를 끌끌 차는 영감님을 보며, 나는 한두 번 고개를 끄덕였다가 바로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요. 영감님이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복수는 했으니까요.” “쯧. 이곳에 있으면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더군요. 아. 소식은 간략히 들었습니다만…. 이제 전쟁은 완전히 끝난 겁니까?” “예. 서 대륙과 부랑자 연합군은 동부에 패배했습니다. 비록 일부는 목숨을 건져 도망갔지만 곧 포위망이 구성될 겁니다. 어쨌든 북 대륙의 승리라고 보셔도 좋습니다.” “허허. 그래도 결과는 희소식이군요. 그나마 다행입니다.” “승리.”라는 말을 꺼내자 주변인들의 얼굴이 밝아진다. 그것을 보자 괜히 속이 씁쓸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사용자는, 참가한 사용자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승리했는지 모를 테니까. 그러다 문득 든 하나의 생각에, 나는 설핏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어두운 얼굴을 한 채 한 명 한 명 들어오는 클랜원들이 보인다. 그 순간. 출발 전 지금 이 자리에서, 클랜원들을 앞에 두고 했었던 말들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전쟁이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매우 짧게 끝날 수도 있겠지만, 또 어쩌면 생각 외로 오래 걸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몇 달이 걸리든 간에, 지금 제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이 자리에 모였을 때.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건강한 모습으로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돌아본 그대로 약한 침음을 흘렸다. “…하.” 그것은 분명 아주 미약한 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클랜원들은 한순간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삽시간에 쏟아지는 시선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 그야말로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 “그리고 우리는…. 무사히 클랜 하우스로 돌아왔고요.” “…….” 클랜원들은 침묵으로 대답했다. 나 또한 반사적으로 꺼낸 말이었기에, 딱히 이렇다 할 말을 찾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잠시 고민했지만, 일단 말을 꺼냈으니 어떻게든 마무리 짓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비록 한 명은 돌아오지 못했지만….” “흑…!” 그때였다. 갑작스레,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잠깐 말을 멈췄다가, 나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무사히 돌아와준 분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크윽!” “흐어엉….” “어어엉….” 그와 동시에 안현, 이유정, 안솔이 동시에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주저앉은 그들을 나는 지그시 응시했다. 약간 당황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 켠으로는 나름 이해가 가기도 했다. 애들은 아직 0년 차였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들을 겪었다고는 해도,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으로 비추어보면 아직 새하얀 백지나 다름없는 상태. 그러한 아이들인데, 이번 전쟁에 참가한 것으로 너무나 많은 일들을 한꺼번에 겪었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살인이 난무하는 전쟁. 같은 자리에서, 눈 뜨고 지인을 잃어야 했던 아픔. 마지막으로 드디어 전쟁이 끝났다는 말에 한순간 풀려버린 긴장감 등등. 그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애들의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을 것이다. “아, 안현군. 클랜 로드께서 말씀하시는 중입니다. 일어나세요.” “유정아. 일어나. 응? 너 자꾸 이럴래?” “솔양. 일어나세요. 이러면 클랜 로드께서도 속상해하신답니다.” 이윽고 애들을 조심스럽게 달래 일으키는 클랜원들을 보다가, 나는 갑자기 든 생각에 고연주를 쳐다보았다. 생각해보니 그녀는 지금껏 신상용의 시신을 들고 있는 상태였다. “사용자 고연주.” “알겠어요.” 그리고 부르자마자, 고연주는 즉각 대답했다. 신상용의 시신을 수습하라는 지시를 내렸을 때 이미 예측했던 걸까. 왠지 그럴 것 같다는 느낌에, 나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그녀를 응시했다. “그럼…. 다녀올게요. 늦지는 않을 거예요.” “부탁합니다.” 고연주는 괜찮다는 얼굴로 미미한 미소를 보이고는, 조심스레 신상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바로 몸을 돌려 정문 밖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달려가는 방향은 정확히 상점가를 향하고 있었다. “혀, 형님. 아, 아니. 클랜 로드님.” 그때, 갑작스레 들려오는 음성에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백한결이 우물쭈물한 얼굴로 눈을 끔뻑이는걸 볼 수 있었다. “마, 많이 힘드셨죠? 식사를 준비했는데…. 아, 아니. 일단 씻으시는 것부터….” “식사는…. 나는 괜찮다.” “…그래도.” “지금 다들 정신적으로 힘든 상태일거다. 오늘만큼은 너무 강제하지는 않는 게 좋겠구나. 그러니 원하는 클랜원들에 한해서 식사를 하고, 나머지는 그냥 욕실이든 숙소든 들어가는 게 낫겠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었는지, 백한결은 한결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이윽고 나는 아직 끝내지 못한 말을 매듭짓기 위해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길게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이상입니다. 여기서 이만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는…. 푹 쉬는 것을 권합니다. 그럼 해산.” 정식으로 해산 명령을 내리고 나서야, 나는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자리를 떠나는 클랜원들은 드물었다. 몇 명은 제자리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몇 명은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으며, 또 몇 명은 신상용의 시신 주변에서 눈물을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는 홀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걸었다. 귓가로 흘러들어오는 여러 소리들이 점차 멀어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본관으로 걸음을 옮기고 나서, 나는 계단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4층에 이르러 숙소의 방문을 밀어젖힌 순간, 눈에 보이는 하얀 침대에 던지듯 몸을 드러누웠다. * “젠장.” 나직한 욕설과 함께 눈을 뜨자, 어두운 땅거미가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습관처럼 주변을 둘러본 후, 가느다란 한숨을 흘렸다. 오후 늦게 클랜 하우스로 돌아왔는데, 어느덧 새벽이 다가온 모양이다. '자야 한다.' 일단 자야 한다는 일념에 나는 어둠 속에서 억지로 눈을 감았다. 그에 이어 간신히 수마(睡魔)가 찾아오려는 찰나였다. 미약한 현기증이 또 한 번 머리를 울렸다.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제기랄.” 나는 결국 다시 눈을 뜨고 말았다. 실은 방에 들어와 누웠을 때부터 계속 똑같은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다. 깊은 잠에 들려고 하면 어김없이 미약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에 따라 잠을 깨어버리고, 간신히 선잠이 들려고 하다가, 또다시 깨버린다. 참 더러운 기분이었다. 몸은 수면을 요구하는데 정작 잠을 들지 못하고 있으니. '이러다 옛날로 돌아가는 게 아닐까….' 나는 쓴웃음을 흘렸다. 지금 내 몸은 마치 내 몸이 아닌 것 같았다. 단순한 피로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들로 인해 머릿속은 복잡한데, 그에 비해서 아무것도 생각지 않으려는 마음은 가슴 속을 공허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한 상반된 감정들 속에서, 마치 갈 곳 잃은 어린양처럼 배회를 거듭하는 중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문득, 눈앞으로 신상용이 허공에 떠올랐다가, 이내 스르르 사라진다. '…….' 결국, 나는 스스로 자문자답을 해보았다. 신상용이 죽음 때문에 지금 내가 이 궁상을 떨고 있는 걸까? '아니.' 분명히 신상용의 죽음이 안타깝기는 하다. 하지만 아는 사람의 죽음은 1회 차 때 충분히 겪어 보았다. 그런 만큼 죽음이라는 단어는 내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단어였다. 그러면 클랜 로드로서 잘못된 결정을 내린 죄책감? '아니.' 어찌됐든 나는 클랜원들을 구해냈고, 목적한 바를 이루었으며, 그에 따른 이득도 확실히 챙겨놓았다. 그럼? 아니면? '…….' 스스로에 물었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렇게 돌아오지 않는 자답(自答)에, 오직 자문(自問)만이 내면에 메아리 칠뿐이었다. ============================ 작품 후기 ============================ 꽤나 애매하게 끊었는데, 지금 바로 나갈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오늘 9시 수업이라…. 늦어서 죄송합니다. _(__)_ PS. 수능 보신 분들 모두 정말로 수고하셨습니다. :) 0388 / 0933 ---------------------------------------------- 변했다. 변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갑작스레 서늘한 한기가 온몸을 엄습해 들어온다. 그대로 숨을 한 번 크게 들이키자, 뼛속까지 얼얼하게 만드는 차가운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외롭다….' 이윽고 스스로 외롭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눈에 힘이 들어갈 정도로 소스라치게 놀라버렸다. 외로움, 고독감, 그리고 쓸쓸함…. 예전의 나는 이러한 감정들을 내내 달고 살았었고, 그런 만큼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야 정상이었다. 헌데, 조금 전 느낀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지금의 나에게 무척이나 생소한 감정으로 다가왔다. 그와 동시에 형, 한소영, 고연주, 정하연의 얼굴이 차례대로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나는 지금, 실로 오랜만에 '누군가 옆에 있어주었으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여전히 몸은 피로했고, 계속해서 수면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누워있다가는 한없이 감성적으로 변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젠장.” 결국 더는 참지 못하여,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잘그락! 허리춤에서 들려온 미약한 금속성이, 내려앉은 침묵을 자그맣게 흔들었다. 습관적으로 허리를 더듬자 한기를 받아 차디찬 '빅토리아의 영광'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창문으로 비추는 달빛에 드러난 피 묻은 침대 시트가 보인다. “하.” 얼룩진 시트를 확인한 순간,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검을 차고 잔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몸을 씻지도 않은 채 침대에 몸을 누운 것이다. 이렇게 보니 이러나저러나 나 또한 정신 줄을 놓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나는 곧바로 '태양의 영광'을 끌러 검을 내려놓았다. 원래는 지하 연무장으로 내려가 한껏 땀을 뺄 예정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일단 전신에 묻은 핏자국을 지우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 찝찝한 느낌이 제법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잠이 올지도 모르고. '대 목욕탕이…. 별관 지하에 있던가?' 나는 지체 않고 방을 나서 계단을 밟았다. 어차피 지금 시간대도 새벽이니, 아무런 방해 없이 느긋한 목욕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은 별관 지하 1층에 다다르자마자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다. 밤하늘에 별이 총총히 떠 있는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목욕탕에는 환한 불이 켜져 있었다. 목욕탕을 바로 앞에 두고 잠시 머리를 긁적였지만, 이내 천천히 탈의를 시작했다. 어차피 욕실은 공공시설로 건축하였고, 남성 전용과 여성 전용이 나뉜 만큼 큰 상관은 없겠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몸에 빼곡히 새겨진 상처를 보이는 데는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지만…. '그것도 이미 한 번 보였으니.' 여관 '조신한 숙녀'에 있었던 시절, 애들이 다 보는 데서 강제로 탈의 당했던 사건이 있었다. 범인은 고연주였고. 그때 그녀가 했던 말이 “남자의 옷은 이렇게 벗기는 거란다.”였었나? 문득 떠오른 생각에 쓴웃음을 지으며, 나는 비치된 천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김이 끼어있는 문을 약하게 밀어젖혔다. 그렇게 목욕탕 안으로 들어가자, 희뿌연 색 수증기로 가득 찬 내부와 드넓은 공간에 비치된 여러 목욕 시설이 보였다. 한 쪽에는 마법진을 이용한 샤워 시설이 가지런히 나열되어있었고, 중앙부터 다른 쪽까지는 탕과 사우나 등을 구현해놨다. 처음 머셔너리 하우스를 건설할 때 최대한 현대와 유사하게 만들었다고 했는데,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만큼 정말로 비슷했다. 쏴아아아! 쏴아아아! 샤워 시설은 이미 누가 사용하고 있는지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소리가 들렸다. 탕에 들어가기 전 몸을 씻어야 했고, 겸사겸사 누구인지도 확인해볼 겸, 난 뜨끈뜨끈한 증기를 맞으며 걸음을 옮겼다. 찰박찰박! 찰박찰박! 목욕탕은 물로 흠뻑 적셔져 있어, 발로 밟을 때마다 얕은 물을 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연한 호박 불빛이 아른거리는 사이로,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응? 긴 생머리?' 그 순간, 나는 이상한 느낌에 곧바로 걸음을 멈췄다. 언뜻 보긴 했어도, 긴 생머리는 눈앞 인영이 여인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동시에 확신할 수 있었다. 여인의 정체는 절대로 고연주와 정하연이 아니라는걸. 일단 내가 목욕탕을 착각했나 혼란이 일었지만, 바로 고개를 저었다. 분명히 남성 전용임을 확인하고 들어온 터였다. 한순간 다시 돌아나가야 하나 고민이 들었다. 그러나 눈은 이미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선은 전방을 자세히 주시하고 있었다. 아른아른 몽환적으로 피어오르는 수증기는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도 모르게 안력까지 끌어올리고 말았으니까. 그러자 보이는 약간 옆으로 돌아서 있는 모습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흰 눈처럼 새하얀 나신이었다. 미끈한 어깨 아래로 보이는 가슴의 자태는, 정말이지 무척이나 탐스럽다. 그득하게 솟아오른 젖가슴은 커다란 크기로 인해 살짝 늘어진 물방울 형태를 갖고 있었다. 그 언덕의 첨단에는, 케이크에 놓인 딸기처럼 도드라진 분홍빛 젖꼭지가 수줍게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 아래 잘록한 허리로부터 이어지는 S자 곡선은,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 엉덩이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이따금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마치 하얀 달덩이를 보는듯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꿀을 발라놓은 듯한 탄력적인 허벅지와 매끈한 종아리로 이어지는 각선미는, 싱그러우면서도 관능적인, 한껏 무르익은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여인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그러다 물 젖은 머리카락이 세차게 찰랑인 후 다시 움직였지만, 이어진 움직임은 조금 전과는 다르게 어딘지 부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알아차린 건가?' “랄랄라. 랄랄라.” 한순간 걸렸나 싶었는데, 이내 여인에게서 콧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잘못 본건가?' 그렇게 한동안 시선을 빼앗겨있었지만, 이내 물이 꺼지는 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보는 여인의 얼굴을 보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임한나임을 확인한 순간, 나는 속으로 자책했다. 나도 아직 멀었다고. 정신수양이 덜된 놈이라고. '고연주, 정하연. 미안합니다.' “어머?” 깜짝 놀랐다고 말해주는 감탄이 들린다. 나는 여전히 눈을 감았다가 이내 잽싸게 천으로 하부를 둘렀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내 성기가 대책 없이 불끈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 “어머머. 머셔너리 로드.” “미안합니다. 사용자 임한나.” 이어진 임한나의 목소리는, 깜짝 놀란 감탄사를 내뱉은 것 치고는 꽤나 상냥하고 차분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을 이었다. “남성 전용 탕인데…. 사용자 임한나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사실 이미 볼 건 거의 다 봤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변명은 해야겠단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는 바로 몸을 돌렸다. 뜨끈한 욕탕과 사우나를 이용하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이대로 혼욕을 할 수는 없는 일이잖은가. 그렇게 빠르게 한 걸음 내디딘 찰나였다. “자, 잠시만요. 머셔너리 로드. 설마 아직까지 안 씻으신 거예요?” 순간 재빨리 내 손을 잡아채는 나긋한 손길이 느껴졌다. 이어진 말을 들어보니, 몸에 묻은 무수한 핏자국을 보고서 말하는 모양이다. “씻으러 온 거 아니셨어요? 아니. 씻으셔야 할 것 같은데요. 너무 심하게 말라붙었어요.” “그렇기는 한데…. 개인 욕실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이왕 오셨는데…. 그냥 여기서 하세요. 저 때문에 나가시는 거라면 저는 괜찮으니까요.” “예?” 사락, 사라락. “아. 이제 눈뜨셔도 되요. 이렇게 하면 되죠. 후후.” 그 말에 나는 냉큼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어느새 전신에 천을 두른 채 상냥히 웃고 있는 임한나를 볼 수 있었다. '혹시…. 내가 들어올 때부터 알고 있던 건가?' 에이. 아니겠지. 약간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긴 했지만, 원래 성격이 그러려니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폐가되지 않을지 모르겠네요. 저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폐라니요. 오히려 저야말로 폐인걸요. 허락도 없이 멋대로 들어와서 죄송해요.” “그러고 보니 왜….” “아. 지금 여성 전용은 비비앙씨가 사용하고 있거든요.”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에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내 기색을 느꼈는지, 임한나는 옆으로 눈초리를 보내며 말을 덧붙였다. “혼자 있고 싶다고 하셔서요.” 그리고 이어진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예?” “나가라고 눈치도 주시는 것 같고…. 그리고 저도 같이하는 게 부담스러웠거든요. 너무 심하게 우울해하셔서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나 참. 이 녀석을 그냥.” “아, 아니에요! 비비앙씨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저도 혼자 하는 게 좋아서 온 거니 너무 화내지 마세요. 솔직히 전에도 새벽에 몰래 사용한적이 몇 번 있기도 해서….” 살짝 혀를 내미는 임한나를 보며 나는 황당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버릇이에요. 혼자 하는 게 좋아서요. 그리고 여성 전용은 새벽에도 경쟁이 약간 있는 편이거든요. 그에 비해 남성 전용은….”라고 말을 흐리곤 배시시 웃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것 참…. 어쨌든 비비앙에게는 나중에 제가 말을 해두겠습니다. 그러나 사용자 임한나 또한 다음 번에는 이런 일을 지양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이번처럼 불의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으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리고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고, 비비앙을 생각했다. 일단 이번 한 번은 주의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신상용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이었고, 정식적인 첫 제자였던 만큼 애착도 굉장했으니까. 이윽고 난 살며시 임한나를 응시했다. 혹시나 나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저 미안한 기색만 내비치는걸 보니 자리를 비켜줄 의향은 없는 듯 보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 핏자국은 그냥 지우기 어려우실 거예요. 일단 간단히 씻으시고, 뜨거운 탕에서 몸을 좀 불리시는 게 나을 거예요.” “그렇긴 하지만…. 그런데 혹시 목욕 중이셨습니까?” “아. 네. 이제 막 시작하려고 했는데….” “…그럼 그냥 최대한 빠르게 씻고 비켜드리겠습니다.” “아, 아니.” 나는 드디어 임한나를 지나쳐 비어있는 샤워 부스로 안착할 수 있었다. 조금 전 그녀가 사용했던 곳이라 그런지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찌른다. 나는 하부를 가린 천을 단단히 동여맨 후, 살짝 마법 진을 눌렀다. 그리고 쏟아지기 시작한 물세례로 몸을 닦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쏴아아아! '완전히 없애려면 탕을 이용하는 게 좋은데….' 나는 힐끗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임한나는 나를 빤히 응시하는 중이었다. '…….' 그러한 시선이 무척 신경이 쓰였지만, 지은 죄가 있기에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조금 전 안력까지 끌어올린 마당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해서, 그냥 대충 물로 세게 비비어, 얼른 나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후유….” 그때였다. 거의 마무리에 다다랐을 무렵, 옆으로 가벼운 한숨이 들렸다. “진짜 갑갑한 사람이야….” 그리고 이어진 혼잣말에, 나는 괜스레 속이 뜨끔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였다. 찰박찰박. 찰박찰박. 한껏 예민해진 감각에 물 바닥을 밟는 소리가 들린다. 혹시 나가는 건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오히려 내게로 가까이 다가오는 임한나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말문을 열기도 전 그녀는 살며시 팔을 내뻗었고, 이내 등에 닿는 부드러운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이쪽도 남아있네요.” 이윽고 등을 훑어 내리는 나긋나긋한 감촉을 느낀 순간, 나는 뒤늦게 입술을 떼었다. “사용자 임한나.” “머셔너리 로드.” “지금 뭐하시는….” “수현아.” 그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떠 임한나를 응시했다. 동시에 말한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그녀가 갑자기 나에게 말을 놓은 것이다. 일순 당황했지만, 이내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그래서 친구 하나 있었으면 했거든요.' '그럼 저랑 친구할까요? 공식석상에서는 힘들겠지만, 사석에서는 말도 놓고요.' '아, 아니에요! 제가 어찌 감히 클랜 로드께…. 그런 뜻으로 말씀 드린 건 절대로 아니었어요.' '난 괜찮은데.' '저…. 그럼 저는 당분간 말을 높일 테니까, 클랜 로드께서는 저한테 말을 놓아주시면 안될까요?' '그래. 그럼 앞으로 사석에서는 말 편하게 해보도록 할게.' '감사해요. 저는 나중에 익숙해지면 그때 편하게 말할게요.' 순식간에 여러 기억들이 주르륵 스치고 지나간다. 확실히 그랬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임한나는 이후로 내게 말을 꼬박꼬박 높였고, 나도 어느새 그녀를 다시 존댓말로 대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렇다고는 해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설마 임한나가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도 못했으니까. 그러나 임한나는, 그에 아랑곳 않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 작품 후기 ============================ 1) 이번 회, 다음 회는 임한나의 복선을 푸는 과정 및 수현의 내면을 가다듬는 과정입니다.(임한나에서 베드 신은 구상되어있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꾸벅. _(__)_) 2) 완결까지는 4회~5회 정도 남았습니다. 1부 완결 후 연재 방향도 거의 결정한 상태입니다. 그에 따라, 완결의 구상에 약간의 변화를 주었기도 하고요. 확실한 마음의 결단을 내리게 되면 후기로 공지하겠습니다. 3) 요즘 글이 안 써진다기보다는, 많이 피곤해서 그렇습니다. 걱정 감사합니다. 그래도 1부 완결 전까지는 펑크 없이 달려보겠습니다. 0389 / 0933 ---------------------------------------------- 변했다. 변하지 않았다. 찰방! “으음.” 열탕에 몸을 담그자 절로 만족에 찬 신음이 새어 나온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물의 열기는 온몸의 구석구석으로 퍼져 내부를 덥혀주고 있었다. 뜨끈뜨끈한 열이 뼈다귀를 어루만지는 기분은, 흡사 몸에 축적된 피로를 살살 녹이는 느낌이었다. 이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생각에 슬그머니 눈을 감으려는 때였다. “아뜨뜨.”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가슴부터 허벅지까지 하얀 천을 감은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임한나였다. 임한나는 살짝 입을 벌린 채 발을 살짝 들고 있었다. 어여쁜 발가락 끝에서 물방울 몇 개가 똑똑 떨어지는 것으로 보아, 아마 생각보다 높은 물의 온도에 놀란 모양이다. 그런 꽤나 신선한 광경에, 난 한순간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임한나는 곧바로 반응했다. “왜 웃어….” “기분 나빴다면 미안합니다.” 나 또한 곧바로 사과했지만, 임한나의 낯빛은 더더욱 이상해졌다. 어색해 죽겠다는…. 그러니까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랄까? 내 말에 임한나는 발부터 조심스레 담그며 조용히 입술을 삐죽였다. “나 드디어 말 놓았는데…. 진짜 용기 낸 건데….” “드디어는 아니지 않나요? 저번에 말 한 번 놓았잖아요.” “으, 응?” “뭐라고 했더라…. 나보고 또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으라고? 이랬던가? 아무튼 그때 잘 놓던데.” 찰방! 임한나는 완전히 몸을 담그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러나 전쟁 중 자신의 언행을 떠올린 듯, 이내 안색이 급변했다. “…너무해.” 보글보글. 이어지는 장난을 견디지 못했는지 임한나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곤 잠수했다. 아무튼 시답잖은 장난은 이쯤에서 관둬야겠다는 생각에, 난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그리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다고 했는데.”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물살을 헤치는 소리와, 잔잔했던 탕의 수면에 미약한 파문이 이는 게 보였다. “그냥….” 이윽고 차분한 목소리가 다시 들리고 동시에 조심조심 등을 매만지는 연한 손길이 느껴졌다. 핏자국이 그렇게나 신경 쓰이는 걸까…. 얘도 은근히 집요하다는 생각이 들은 순간, 임한나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 그 말에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깐 생각했다. 주관적인 생각이긴 해도 힘들지는 않다. 육체적으로는 당연히 피곤했지만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건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정상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아니…. 평소와 같지는 않다고 해야 할까? '겉으로 내색은 안 했다고 생각했는데….' 임한나는 이런 내 상태를 어떻게 눈치챈 걸까?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음…. 혹시 아기 유니콘 봤어?” 이후 방에서 아예 나오지를 않았기에,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자 이번엔 어깨를 조곤조곤 주무르는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물이 묻어 촉촉하면서도 은근히 끈적한 감촉이 느껴져, 난 숨을 가늘게 내쉬었다. “어땠는데? 울었어?” “으으응. 울지는 않았어. 그런데 엄청 우울해하더라. 축 늘어져서는 반응도 안보이고. 힘이 없어 보인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그거 알아?” “?” “유니콘은 감정에 무척 예민한 동물이잖아?” “그렇지.” “그 중에서도 특히 주인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하더라.” 그렇다는 말은 아기 유니콘을 보고 내 상태를 추측했다는 말인가? 약간 석연찮은 기분이 들었지만, 아무튼 일단 말을 들어볼 요량으로 난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으응. 그러니까…. 전쟁이 끝나고 돌아오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거든. 그때 내 욕심에 너를 붙잡지 않았다면? 그럼 어쩌면….” 뭔 소리를 하나 했더니. “헛소리.” 나는 임한나의 말을 가볍게 일축했다. 그리고 그 순간, 느릿하던 그녀의 손길이 뚝 멈춘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탓하지 마. 그렇게 따지면 애초 전쟁 참가를 결정한 내 잘못이겠지.” “정말? 진짜 그렇게 생각해? 스스로를 원망하는 게 아니라?” “신상용씨의 죽음은 분명히 안타까운 일이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전쟁 중이었으니까.” 이어서 난 딱 잘라 선을 그었다. 목소리를 약간 높인 것은, 더는 허튼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도 포함돼있었다. “…….” 임한나는 확실히 내 말을 알아들은 듯했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다가, 이내 다시금 천천히 손을 놀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서로 침묵을 지킨 채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상처가 되게 많다…. 안쓰러워….” “…….” 굳은 피 얼룩을 지우는지 아주 약간 힘을 주어 비비는걸 느끼며,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일부러 눈앞에 피어오르는 희뿌연 색 수증기에 집중했다. 탕에 들어왔을 때부터 등에서 전해져 오는 감촉은, 마치 임한나의 성격을 대변한 것처럼 무척이나 상냥했고, 또한 부드러웠다. '이것도 고문 아닌 고문이군.' 그때였다. “다행이다….” “?” “있잖아. 역시 너는 오빠랑 다른 사람이었어. 이제 좀 마음이 놓인다. 후후.” 뜻 모를 소리에 몸을 돌리려고 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등을 어루만지는 양손의 사이로 임한나가 살포시 얼굴을 묻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면을 간질이는 그녀의 숨결에 난 나직이 입을 열었다. “오빠라면…. 러브 하우스의 예전 건물주를 말하는 거야?” “어? 기억해?” “예전에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되게 잘나갔던 사용자로 기억하는데.” 러브 하우스의 건물주. 한때 제법 잘나가는 캐러밴의 리더로 활동했지만, 한 탐험에서 크게 실패하고 캐러밴은 거의 와해 수준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남은 캐러밴 원들을 모아 어느 클랜에 합병되는 과정을 거치는 도중, 임한나는 충격을 이기지 못해 홀로 빠져 나왔다. 아무튼 내가 들은 이야기는, 그 사용자가 임한나에게 있어 은인이었다는 것. 그리고 망상의 고원으로 원정을 떠난 클랜에서 소식이 끊기자, 1차 구조대에 참가했다가 사망했다는 데까지였다. 사실 약간 찍은 것도 있긴 했지만, 처음 임한나를 받을 때 들었던 이야기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 나름대로 어떤 사연이 있겠다고 생각했고,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한 번 물어보리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임한나가 말했다. “잘나가기야 했지. 그리고 한 번의 실수로, 그 모든 게 사그라졌고.” “…….” “그 오빠. 겉으로는 엄청 담담한척했는데…. 그때 친했던 동료들이랑 애인을 잃었거든? 그 이후로 내내 죄책감에 시달렸어.” “죄책감에 시달렸다 라…. 그럴 수도 있지.” “응. 행동만 봐도 알 수 있었거든. 애인이었던 언니가 원래 밤의 꽃이었잖아. 갑자기 모아놓은 금화로 밤의 꽃들을 위한 건물을 지어주질 않나…. 나보고 항상 잘 대해주라고 하지를 않나….” 임한나는 말을 하면 할수록 끝을 흐리고 있었다. 그러다 잠깐 입을 다물더니, 이내 자조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 쓸데없는 관심이었지….” 문득 머릿속으로 임한나가 오빠라 부르는 사용자를 좋아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그것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차츰차츰 젖어 들고 있었으니. “그 사용자가 구조대에 참가한 것도 죄책감 때문이었나?” “약간? 예전에 함께 활동하던 동료가 있었거든.” “그럼 말려보지 그랬어. 아님 이야기라도 해보던가.” “그랬지. 그런데 언제나처럼 그러더라. 그냥 아무 걱정 말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그래서 가만히 기다렸지. 후후. 생각해보면 그 오빠는 항상 그랬어. 맨날 기다려라. 나만 믿어라. 걱정하지 마라…. 그런데 나는, 할 말이 없더라.” 그 순간, 하나의 생각이 번뜩 머리를 스쳤다. '싫어! 나보고 또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으라고?' “그래서 그때 그렇게 말한 거야? 이번에는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지 않겠다는 소리가.” “…응. 그냥 하라는 대로, 들은 대로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었잖아. 그러다 오빠가 죽었다는 걸 확인했을 때…. 내 행동에 엄청 후회했거든. 아니라고는 했지만…. 어떻게 보면 오빠의 죄책감의 원인은 나였으니까.” '원인?' 임한나의 대답에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약간이지만 연민의 감정이 일었다. 나 또한 그녀와 비슷한 경험을 겪었으니까. '형.' 차이가 있다면 나는 복수심에 미쳐 무차별적으로 날뛰었고, 임한나는 충격에 스스로 뭔가를 하는 게 두려웠을 거라는 것. “그 사용자가 너를 소중하게 생각했었나 봐.”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자 임한나가 어깨를 가늘게 떠는 것과 동시에, 킥킥 숨죽여 웃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금 무거운 침묵이 찾아 들었다. 이번에는 약간 긴 침묵이었다. “…….” “…….” 혹시 말 실수라도 한 건가 갸웃하고 있자, 등에서 서서히 머리를 드는 기척이 느껴졌다. “수현아…. 나 하나 고백할게 있어. 내가 말하지 않은 거.” “뭔데.” “그때 캐러밴이 그렇게 된 거…. 실은 내 탓이었어. 내가 어그로를 잘못 끌어서 괴물들한테 대규모 습격을 받은 거야.” “…그게 네 탓이다?” 내 물음에 임한나는 미미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모두를, 특히 오빠를 볼 낯이 없었어. 그냥 죄인이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합병 제의도 거절하고 바로 탈퇴한 거야. 더는 폐를 끼칠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사정이 있었던가.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난 네 탓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데.” “응? 왜? 그걸 어떻게 알아?” “추측이지. 그런데 냉정하게 생각해봐. 이번이랑 비슷한 경우 아니야? 예를 들어 내가 무엇 무엇을 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이런 거. 네가 100% 잘못한 거라면 그 사용자가 왜 죄책감을 가졌겠어? 너라는 좋은 핑계가 있는데.” “!” 일순 임한나가 움찔하는 기척을 느꼈다. 내 말이 정곡을 찌른 모양이다. 할 말이 없는지 임한나에게서 더는 말이 들려오지 않는다. 해서 나는 먼저 말문을 열기로 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응? 응.” “전에 나한테 그랬잖아. 네 운명을 개척해보고 싶다고. 그건 무슨 말이었어?” “아….” 내 말에 임한나는 미약한 탄성을 터뜨렸다. 찰방, 찰방. 잠시 후, 임한나가 천천히 머리를 떼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더니 금방 내 앞으로 돌아와 나를 정면에서 마주했다. 물이 송골송골 맺힌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눈망울은, 미약한 떨림을 보이고 있었다. “처음 너를 봤을 때 많이 놀랐어. 하는 행동이나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나 오빠랑 정말 똑같았거든. 나 너 처음에 엄청 쳐다봤었는데…. 몰랐어?” “몰랐어. 그런데 말을 들어보니 별로 똑같다는 생각은….” “비슷해. 뭐든지 혼자서 다하려고 하잖아.” 이 말에는 할 말이 없었기에, 나는 약한 침음을 흘렸다. 그러자 임한나는 “후후.” 웃고는 한 번 심호흡을 했다. 그리곤 낮은 음색으로 매우 길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연주 언니한테 클랜 가입 권유를 받았을 때 무척 고민했어. 가고는 싶은데, 가도 되는 걸까?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또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밤마다 끙끙 앓으면서 고민했고, 또 고민했다?” “너도 참….” “수많은 의문은 있었지만, 그래도 너에게 마음이 끌리는 건 막을 수 없더라. 그래서 한 번 해보자는 생각에 가입을 결심했지.” 그렇다면 그게 진짜 이유였고, 밤의 꽃들은 부차적인 이유였다는 말이었다. 개인적으로 추측하자면, 아마 당시 임한나 스스로도 혼란을 느꼈을 것이고, 도피의 일종으로 밤의 꽃에 대한 문제를 내세웠을 것이다. “그런데 진짜 웃기는 게 뭔지 알아? 내가 가입하고 나서 얼마 안 있어 네가 뮬로 간 거야. 그리고 부랑자들의 습격으로 연락이 끊겼지.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아?” “설마 그것도 네 탓이라고 생각한 아니겠지.” “…나를 둘러싼 주변 상황이 그랬으니까. 동료들이 죽었고, 오빠가 죽었고, 너도 죽었다고 생각했지. 그 정도 되니까 그냥 운명이라고 생각되더라. 아. 나는 마녀구나. 그때 이후로 내 운명에 살이 끼었구나.” “말도 안 돼.” 나는 어이없는 기분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임한나가 지금껏 무슨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또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를. 시종일관 상냥하고 차분해서 몰랐는데, 알게 모르게 속은 제법 복잡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를 걱정한 거야? 이번 사건으로 내가 그 오빠랑 똑같이 죄책감을 가지고, 흔들릴지?” 임한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촉촉한 눈망울로 끄덕끄덕 두어 번 고개를 주억였다. 그 모습을 보자, 순간 왠지 모르게 임한나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난 다시금 싱겁게 웃었다. “왜 웃어….” “별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고 생각해서.” “…치.” “글쎄. 아무튼 그 오빠라는 사용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는 잠깐 말을 끊은 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야기가 생각보다 길어졌다. 이제 어느 정도 불렸다는 생각에, 씻고 나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빤히 나를 올려다보는 임한나의 시선과 마주하여, 난 양손을 내밀었다. “내 대답은 아까 들었지?” 순간, 임한나의 눈망울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러더니 이내 꼭 깨문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다. 그녀가 웃었다. “응. 들었어.” 임한나는 내 손을 마주잡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드러나는 그녀의 몸매에 나는 담담히 시선을 돌렸다. 물에 젖은 천이 임한나의 속살을 여과 없이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 기색을 느꼈는지, 임한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말을 이었다. 내 손은 여전히 그녀에게 잡힌 상태였다. “후후. 왜?” “이만 나가자고.” “잠깐만.” “?” 이윽고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린 순간, 임한나가 서서히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 밤하늘에는 여전히 별이 떠 있었다. 목욕탕에서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새벽인 모양이다. 임한나의 도움 덕분에 나는 몸에 묻은 피 얼룩을 깨끗이 지울 수 있었다. 오기 전과는 다르게 몸에 감도는 상쾌함을 느끼며 난 본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터벅터벅. 터벅터벅. 이윽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 어두운 계단을 밟는 도중, 난 임한나에 대해 생각했다.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비록 그 사연이 별거 아니라 생각될지라도, 솔직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외롭다고 느낀 나였기에, 임한나의 걱정은 내 외로움을 달래주는 기분 좋은 관심이었다. 마지막 전신에서 느꼈던 그녀의 포근한 감촉을 생각하며 나는 살짝 입술을 매만졌다. 동시에 걱정 또한 앞섰다. 고연주, 정하연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나…. 그렇게 4층 숙소에 이르러 방문을 열은 순간, 난 약간의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상한 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피 묻은 침대 시트가 어느새 깨끗이 갈려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시트의 중앙이 불룩 솟아올라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어이없는 기분에 다가가 잘 정돈된 시트를 들추었다. “뀨.” 그러자 갑작스레 찬 공기가 엄습했는지, 온몸을 웅크린 채 고개를 파묻는 아기 유니콘이 보였다. 잠깐 눈을 깜빡였다가, 곧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나는 아기 유니콘이 깨지 않게 조심조심 침대로 올라 천천히 몸을 눕혔다. 그리고 오들오들 떠는 녀석을 살며시 끌어안았다. “뀨?” “괜찮아. 괜찮아.” 그에 아기 유니콘은 곧바로 고개를 들어 반응했지만, 몇 번 쓰다듬어 달래자 다시 꾸벅꾸벅 고개를 꺼트렸다. 이내 내 안으로 꾸물꾸물 파고들어 오는 녀석을 느끼며, 나 또한 비로소 졸음이 밀려오는걸 느꼈다. 다시 고른 숨소리를 내는 아기 유니콘을 느릿하게 보듬으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방안에는 여전히 한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복부에서 느껴지는 따뜻함과, 깨끗한 시트와, 입술에 남아있는 감촉에 나는 생각했다. 이제는 별로 외롭지 않다고. ============================ 작품 후기 ============================ I'm so sorry but I love you 다 거짓말. ㅇ<-< 0390 / 0933 ---------------------------------------------- Epilogue 1/4 : “기다려줄 시간은 없으니까요.” “으음.” 얼굴에 부딪혀오는 아침 햇살에 난 약한 신음을 내뱉었다. '…아침인가?' 어느덧 날이 밝았다는 생각이 들자,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 천천히 눈을 뜬다. 부스스한 눈으로 고개를 올리니 역시나 중천에 떠오른 해를 볼 수 있었다.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비쳐오는 햇살은 제법 찬란하면서도, 강렬했다. 마음 한 켠으로 이대로 눈을 감아 다시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습관이라는 건 그리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언제나처럼 몸 내부를 점검하는 일이었다. '응?' 그렇게 회로를 따라 유영하는 마력의 흐름을 체크하던 도중, 난 고개를 갸웃했다. 복부에서 뭔가 묵직한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설핏 시선을 내리자 뭔가 하얀색 덩어리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규우…. 규우….” “…너.” 이윽고 살랑이는 꼬리를 보았을 때, 나는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상 징후의 정체는 한창 달게 자고 있는 아기 유니콘이었다.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헤.” 벌린 입에서 침이 졸졸 새어 나오고 있다. 나는 한동안 녀석을 응시했다. '얘도 이런 얼굴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생각해보면 아기 유니콘에게는 조금 미안한 게 있었다. 기껏 동료 무리를 버리고(?) 우리를 따라왔는데, 정작 난 바쁘다는 이유로 알게 모르게 소홀했었으니까. 더구나 녀석은 아직 유아기에 있는 아기 유니콘. 즉 더더욱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러고 보니 돌아오면 이름을 지어주겠다고 했던가?' 앞으로는 이전보다 더 관심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난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뀨?” 내가 일어나는 기척을 느꼈는지 아기 유니콘은 비척비척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나를 찾더니, 이내 한결 안도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파묻었다. 내가 또 혼자 훌쩍 사라진 건가 걱정한 모양이다. 나는 그런 아기 유니콘을 살며시 보듬어 안아 들고는 침대에서 걸어 나왔다. “일어나. 아침이다.” “뀨웅…. 뀨우…?” “옳지 옳지. 졸려도 아침은 먹고 자려무나.” 아기 유니콘은 그럼에도 여전히 내 품에서 고개만 비볐지만, 난 그런 녀석을 보며 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느덧 녀석의 귀는 쫑긋이 솟아있었고 꼬리는 살랑살랑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임한나의 말이 맞았던 모양이다. 잠시 후. 나는 아기 유니콘과 즐거운 세안 시간을 가진 후, 곧장 방을 나와 계단을 밟았다. 층을 내려갈수록 여러 명이 움직이는 기척이 잡히는 게, 아무래도 내가 가장 늦게 일어난 모양이다. 이윽고 1층에 도착하자 열심히 카운터를 보고 있는 고용인들이 황급히 인사를 해왔다. 그러면서도 슬쩍 눈치를 살피는 게, 어제 보였던 모습이 자못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이, 일어나셨어요.” “예. 좋은 아침입니다. 클랜원들은 어디 있나요?” “깨, 깨어나신 분들은 식당에 계세요.” 말을 하면서도 자꾸만 힐끔힐끔 쳐다보아 대충 고개를 끄덕였고, 얼른 걸음을 돌려 식당으로 통하는 복도를 걸었다.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으로 여러 클랜원들이 한 쪽 테이블을 잡고 앉아있었다. '영감님, 고연주, 정하연, 신재룡, 임한나, 안솔, 백한결…. 애들이 없군.' “어머. 일어나셨군요. 클랜 로드.” 나와 마주보는 방향에 있던 임한나는 금세 아는 체를 해왔다. 그러면서도 상냥한 눈웃음을 보이는 게, 아무래도 어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수현?” “편안한 밤 보내셨어요?” 이내 따라 돌아보는 고연주와 정하연을 보며 난 침을 꿀꺽 삼켰다. 임한나. 솔직히 껴안기만 했으면 나름 할 말이라도 있겠는데, 입술까지 맞춰버렸으니 빼도 박도 못할 상황이었다.(아무리 자의가 아니었다고 해도 말이다.)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려는 클랜원들을 손짓으로 앉힌 후, 난 남은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면서 슬쩍 어깨를 보자 언제 다시 잠들었는지 고롱고롱 숨소리를 내는 아기 유니콘이 보였다. “뀨우…. 뀨우우….” 어떻게든 떨어지지 않으려 애쓰는 아기 유니콘을 테이블에 놓으며, 나는 모두를 돌아보았다. “잠들은 좀 주무셨는지요.” “네? 아, 네. 오래간만에 푹 잘 수 있었어요. 역시 집이 최고죠. 수현은요?” “저도 집만 한 곳이 없더군요. 아. 오늘 식사는 조신한 숙녀의 세트 메뉴 A인가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지금 바로 가져올게요.” 괜찮다고 말할 새도 없이 고연주는 수저를 놓고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이내 재빠르게 주방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보며 나는 짧은 한숨을 뱉었다. “허허. 그렇게 씻으니 신수가 훤하니 정말 보기 좋습니다. 이제야 좀 클랜 로드답구려.” 식사를 거의 마쳤는지 영감님은 따뜻한 김이 피어나는 찻잔을 들며 미소 지었다. 나는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곤 조용히 음식만 퍼먹고 있는 안솔을 응시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자세히 볼 수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아직 충격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클랜원들은 어디 있습니까? 안현이나 이유정은 식사를 이미 마쳤나요?” 내 말에 정하연은 잠시 입을 오물거리곤, 목울대를 꿀꺽 움직였다. “으음. 잘 모르겠어요. 어제 숙소로 들어간 이후부터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그때였다. “제가 가봤어요.” 뾰족한 목소리로 대답한 사람은 다름 아닌 고연주였다. 벌써 주방에 다녀온 듯 양팔에 커다란 쟁반을 들고 있는 채였다. 이윽고 내 앞에 조심스레 쟁반을 내려놓으며, 그녀는 살짝 가시 돋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직 방에 콕 틀어박혀 있어요. 나오기는커녕, 불러도 대답도 안 해요.” “그렇군요. 그럼 비비앙은?” “비비앙은 숙소에 없던데요?” '숙소에 없다?' “흐음. 숙소에 없으면 어디를 간 거지.” 나는 쟁반에 담긴 여러 음식들을 보며 아기 유니콘을 톡톡 건드렸다. 그러자 녀석은 앞다리를 들어 얼굴을 비비고는 끔뻑끔뻑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일단 수프 먼저 먹일 생각에 막 숟가락을 쥐었을 때였다. “저기…. 형님.” 여린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자, 백한결이 전전긍긍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왜. 알고 있어?” “혹시…. 그…. 연구실에 계신 게 아닐까요?” “연구실? 걔가 지금 거긴 왜가?” “그…. 예전에 항상 상용이 형이랑 연구실에서 밤을 새우실 적이 많아서요….” 그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용조용 식사를 하고 있던 클랜원들이, 일제히 백한결을 응시했다. 그리고 녀석은 흠칫한 얼굴로 입을 막았고. “?” 그러더니 다들 하나같이 한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난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시선을 따라가 보았고, 이내 숟가락 질을 멈춘 안솔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어깨는 아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다들 갑자기 왜….” 의아한 기분에 내가 입을 열은 순간이었다. “…으윽.” 짧디 짧은 신음과 함께 갑작스레 안솔의 고개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서 드러난 얼굴을 본 순간, 난 그녀가 왜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벌써 한바탕 울었는지 안솔의 눈은 미약하게 붉어져 있었고, 젖살 어린 볼에는 눈부터 타고 흐른 눈물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었다. “안솔? 너 왜 그래?” 이유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지만, 난 그래도 안솔을 불렀다. 그러자 그녀는 순간 입술을 꼭 깨물었다. “끅…. 흐끅….” 그러한 모습은 어떻게든 울지 않으려 애쓰는 것 같아 보여도, 눈망울이나 어깨서 보이는 떨림은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그러더니. “부뎨에에~.”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크게 벌린 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음식을 가득 퍼 넣던 중이었는지 울음소리 한 번 요상했다. “어휴….” “죄, 죄송….” 동시에 여기저기서 가벼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도 몇 명은 이리저리 내 눈치를 살피는 게, 아무래도 내 반응이 꽤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솔아. 뚝. 울면 안 돼. 오라버니 계시잖아. 응?” 이윽고 정하연이 달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곤 아예 신경을 끊어버렸다. “흐어엉…. 흐어어엉….” “아, 안되겠다. 수현! 잠시만….” 뭔가 허락을 구하는듯한 말에 나는 마음대로 하라는 양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정하연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태도로 나와 안솔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그녀를 데리고 식당 밖으로 나섰다. 이윽고 울음소리가 서서히 멀어져 갔다. 그리고 다시 찾아 든 침묵에, 고연주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아직 충격이 큰가 봐요. 하기야 뮬에서 캐러밴부터 함께 활동했으니….” “그런가 봅니다.” “그래도 애들도 참…. 눈치 없게….” “눈치라…. 안현이랑 이유정도 저랬습니까?”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그러자 고연주는 살짝 머리를 긁적이고는, 이내 한 번 더 말을 걸었다. “그냥…. 지금 다 데려올까요?” 난 대답 대신 수프를 한 숟갈 퍼 아기 유니콘에게 내밀었다. 녀석은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지 고개만 빙빙 돌리다가, 이내 내가 내민 수프를 날름 받아먹었다. 이윽고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먹기 시작한 아기 유니콘을 보며, 나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냥 놔두세요.” “네?” “그냥 놔두시라고요. 지금 이러는 게 본인들 문제이지, 다른 클랜원들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니 억지로 끌어내지 말고, 스스로 나올 때까지 내버려두세요. 지금 할 일 많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테이블에 어색한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굳이 둘러보지 않아도 다들 어색해하는 것쯤은 느낌상 알 수 있었다. “수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사용자 고연주.” “네, 네?” 내 말투가 심상찮음 을 느꼈는지, 고연주조차도 약간 당황한 음색이었다. 그러나 난 일부러 그녀의 말을 끊었다. 이미 오늘 새벽 이후로 마음을 정리한 나였기에 굳이 애들을 데려와 어르고 달랠 생각은 없었다. 애초 그럴 생각이 없기도 했고. “잠시만…. 이것도 먹어보렴.” “뀨.” 나는 약간 뜸을 들일 요량으로, 따뜻한 빵을 찢어 아기 유니콘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녀석은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오히려 그것을 내게로 밀었다. 그 모습이 꼭 나도 먹으라고, 같이 먹자고 말하는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아주 약한 미소를 짓고는 빵을 씹었다. 그리고 그것을 삼키고 나서야 다시 고연주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상용씨의 시신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 제가 잘 처리했어요. 그가 원래 사용하던 방에 보관하고 있는데….”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식사를 마치고, 그거 정원으로 가지고 나오세요.” “…알겠어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보였지만, 고연주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난 다시 아기 유니콘과의 식사에 집중했고, 클랜원들도 한 명 한 명 어색한 얼굴을 풀고 남은 식사를 시작했다. *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나서 난 바로 식당을 홀로 빠져 나왔다. 그리고 고용인을 시켜 삽 하나를 챙긴 후, 곧장 정원으로 나섰다. 따뜻한 햇살이 감도는 정원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주변을 자세히 둘러보아 적당한 자리를 물색한 후, 이내 선정한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그랬다. 나는 신상용을 화장하는 게 아니라 머셔너리 하우스 안에 매장할 생각이었다.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바로 작업에 들어가기 전, 나는 그동안 정말 피고 싶었던 연초 한 대를 꺼내 들어 입에 물었다. 그렇다고 주저앉지는 않았다. 점화석으로 불을 붙여 주머니에 집어넣었고, 이내 연초를 입에 물은 채 삽을 들어 신상용을 매장할 땅을 파기 시작했다. 팍, 팍, 팍, 팍, 팍, 팍, 팍, 팍! 굳이 마력을 일으킬 것도 없이 근력의 힘만으로도 땅은 부드럽게 파졌다. 삽질을 불과 서른 번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평평했던 정원의 대지는 어느덧 조금씩 구덩이로 변하고 있었다. 이윽고 열 번 정도 더 파고 잠깐 땅을 고르려는 순간, 정문 입구에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오는 기척을 느꼈다. 해서 삽질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자, 양손에 길고 넓은 관을 든 채 다가오는 고연주가 보였다. 나는 잠시 물고 있던 연초를 뺐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와 관을 내려놓는 고연주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리 잘하셨네요. 고생하셨습니다.” “네. 저…. 수현.” “?” “다른 클랜원들은 잠시 나오지 말라고 했어요. 할 말이 있어서요.” “별 상관은 없습니다만.” 나는 대충 대꾸하곤 고연주가 들고 온 관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일반적인 관이 아닌 반투명한 푸른 수정으로 되어있었다. 그 안을 들여다보자,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신상용이 보인다. 그의 시신은 상처 하나 없이 완전히 복구되어있었다. 잠시 동안 신상용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문득 옆에 있던 고연주가 말을 걸었다. “아까 속 많이 상하셨죠. 애들이 수현 마음도 모르고 자꾸만….” “예? 아. 아닙니다. 별로 안 상했어요.” “…아까 놔두라고 하신 말. 진심이세요?” 나는 삽을 들었다. 그리고 다시 연초를 입에 물고 땅을 고르기 시작했다. 물론, 대답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끄덕끄덕. “그렇군요. 하지만…. 물론 수현 뜻이야 알겠지만….” “…….” “아직 0년 차 애들이에요. 전쟁도 처음이고, 지인의 죽음도 이번이 처음이라….” 어느덧 연초는 필터 끝까지 타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연초를 크게 빨아들였다. 그리고 연기를 내뿜는 것과 함께 퉤 뱉었고, 한층 힘차게 삽질을 시작했다. 팍, 팍, 팍, 팍!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해하니까 이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변하는 건 없습니다.” “수현과 애들은 달라요. 저는 수현이 애들과 한 번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말에 고연주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음에, 난 결국 삽질을 멈췄다.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문득 고개를 돌리자, 저기 멀리서 이쪽을 쳐다보는 클랜원들이 몇 명 보였다. 그들과 잠깐 시선을 마주쳤다가, 난 차분히 말을 이었다. “사용자 고연주. 전쟁은 끝났습니다.” “네.” “다시 말하겠습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일상으로 되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말이죠…. 이제부터 무척, 정말로 바빠질 것 같습니다. 그것도 눈코 뜰 새 없이요. 그럼 왜 바빠지는지 아십니까?” “그건….” 갑작스런 물음에 당황했는지, 고연주는 조용히 말끝을 흐렸다. 나는 잠시 동안 생각을 정리했다가, 이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저는 이번 전쟁의 발발을 단순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게 왜 발발했는지, 또는 차후 어떠한 영향을 미치든지…. 아무튼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제부터 작게는 북 대륙, 그리고 크게는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이 조만간 크게 변하기 시작할거라는 것입니다.” 고연주는 아직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악마와 관련된 미래를 알고 있는 것과, 알고 있지 않은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으니까. 설명을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한두 번 목을 가다듬었다. “우리는 그런 변화에 발맞추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사용자 고연주. 혹시 예전에 제가 뮬에서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 “저는 이곳에서 하나의 확실한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전 말입니다. 홀 플레인에서 잘 먹고 잘살려고 이 머셔너리라는 클랜을 만든 게 아닙니다.” 고연주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아무런 대답도 않는 게, 일단 내 말을 듣고 판단할 생각인 모양이다. 나는 잠깐 동안 삽을 매만졌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집에 돌아가고 싶습니다.” “…네.” “그동안 한두 번 생각한 게 아닙니다. 언제고 이 홀 플레인이라는 빌어먹을 세상의 끝을 봐서 지구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가 원래 누려야 했던 삶을 누리고 싶어요…. 다만, 그렇다고 혼자서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려면 애초에 제로 코드를 얻었을 때 홀로 지구로 귀환했을 테니까. “그럼….” “형과, 클랜원들과, 또는 제가 아는 사람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게 지금 그리고 현재 이 홀 플레인에 존재하는 사용자, 김수현의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나는 말을 일단락지음과 함께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파여진 곳의 거친 부분을 다듬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용자 신상용씨의 죽음은 분명히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다. 저 또한 지금 애들이 느끼는 기분을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 “슬퍼해도 됩니다. 울어도 되고요. 다만, 그것에 발목을 잡혀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윽고 대충 고른 나는, 관의 크기에 맞추어 다시금 구덩이를 넓히기 시작했다. 팍, 팍, 팍, 팍! “이제는 애들이, 이 세상에 어떤지 확실히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느끼게들 되겠죠. 따라올지 아니면 도태될지. 결국 선택은 온전히 애들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러니까…. 수현은 버리시는 게 아니라 스스로 극복하길 원하셨던 거군요.” 들려온 고연주의 목소리는, 전보다는 한층 밝아져 있었다. 나는 삽을 한 쪽에 치우곤 잠깐 허리를 들었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예.” 중천에 떠오른 해는 여전히 짱짱한 햇살을 비추고 있었다. 난 지그시 눈을 감아 햇살을 느끼다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이제는…. 정말로 기다려줄 시간은 없으니까요.” ============================ 작품 후기 ============================ <이후.> “호호. 제가 괜한 걱정을 했나 보네요.” “걱정은 감사합니다. 그리고 어제 시트도 감사했습니다.” “뭘요. 아. 그런데 시트 하니까 궁금한 게 생겼어요.” “?” “어제 목욕탕에 다녀오셨죠? 오늘 아침에 한나와 시선 교환이 미묘하던데.” “예, 예? 아. 오, 오늘 날씨가 좋네요.” “수현?” “아차. 오늘 내일 바바라로 다시 떠날 생각이니, 미리 준비해두는 게 좋겠습니다.” “흐흥~?” 0391 / 0933 ---------------------------------------------- Epilogue 2/4 : 다시 만난 붉은 송곳니 워프 게이트를 나오자마자, 낯익은 도시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바바라에 도착했네요.” 곧바로 따라 나온 고연주의 말에, 나는 한 번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후였다. 그것도 늦은 오후. 점심 후 잠깐 오침을 하고 나서 출발해서 그런지, 어느 틈에 해는 서편으로 넘어가고 어둑한 땅거미가 차츰차츰 내려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수현. 그냥 지금이라도 돌아갈까요? 어차피 회의도 또 지연됐는데, 내일 오전에 다시 오면 되잖아요.” “으음.” 일리 있는 말에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전투가 끝나고 어느덧 사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번 전투에서 가장 타격을 심하게 받은 서문 부대는 전장 정리에서 빠지게 됐고, 정비를 명목으로 사흘간의 휴식 시간을 받았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 바바라에 모여 회의를 하기로 했고. 오늘이 바로 나흘째였다. 그러나 원래 오늘 아침 열렸어야 하는 회의는, 전장 정리 사정으로 오후로 밀리고 말았다. 그래서 시간에 맞춰 다시 출발을 했는데, 막 워프 게이트에 다다랐을 즈음 또 다시 내일 오전으로 회의가 밀렸다는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전장 정리라는 구변은 좋은 핑계가 있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아직 준비가 덜됐다는 소리였다. 어찌됐든 그에 따라 적어도 오늘까지 쉴 순 있었지만, 나는 발걸음을 돌리지 않고 바바라로 오는 것을 선택했다. 클랜 인원수가 적어 정비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고, 휴식도 충분히 취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궁금했다. 거듭 말하지만 전쟁이 끝났다고 다가 아니다. 전후 처리 과정이 궁금했고, 황금 사자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고, 이번 전쟁에서 사망한 명성 높은 사용자가 있는지 궁금했고, 전투의 피해 정도도 궁금했다. 뭐 딱히 할 일이 없다는 것도 이유였지만. 아무튼 내일 회의에서 대부분 알게 될 사실들이지만, 그래도 한 발 앞서 아는 게 나쁘지는 않은 일이잖은가. “수현? 어떻게 하시겠어요?” 나는 워프 게이트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고 결국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이대로 뜻 없이 시간을 죽이느니, 이왕 나온 거 대충이라도 살펴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연주는 돌아가도 좋습니다.” “…….” “저는 오늘 바바라에서 지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회의를 마치고 다시 돌아가도록 하죠.” “…후유. 못 말려 정말.” 과연 저 한숨의 의미는 무엇일까? 해답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워프 게이트를 나서자, 내 뒤를 종종 쫓아오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진짜 돌아가도 상관없는데….' 사실상 다른 클랜원들의 동행도 전부 거절한 나였기에, 나 홀로 바바라에 있어도 상관없었다. 지금 와서 전장 정리에 끼어들기도 그렇고, 회의에 참가하는 것도 나만 있으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연주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수현~. 같이 가요~.” 이내 조심스레 팔짱을 끼어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약간 어색한 기분을 느꼈다. 우리는 거리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사이 좋게 거리를 거닐었고, 나는 걸으면서 찬찬히 주변 거리를 살폈다. 중간중간 듣기로는 원래 서부 도시에 거주하던 사용자들도 바바라로 끌어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제 곧 밤임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거리는 소란스럽고 사람이 넘쳤다. 그렇게 하염없이 거리를 걷던 도중, 문득 고연주가 말을 걸었다. “수현. 일단 통제실에 가보는 건 어때요? 거기라면 어느 정도 통계가 나왔을 텐데.”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요. 일단 도시를 돌아보다가…. 밤이 오기 전에 한 번 가볼 생각입니다.” 한두 번 고개를 끄덕이자 고연주는 슬그머니 팔짱을 풀어버렸다. “그래요. 그럼 다녀오시고, 나중에 중앙 광장에서 뵈어요.” “예? 고연주는요?” “오늘 바바라에서 지내신다고 하셨잖아요. 밖에서 잘 수는 없으니 오늘 하루 지낼 방이라도 알아봐야죠.” 나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그냥 아무 의미 없이 던진 말인데 고연주는 꽤 진지하게 받아들인 모양이다. 하지만 이왕 도시에 도착한 거,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오전에 혼잡할 워프 게이트를 생각하느니, 정말로 이곳에서 하루 지내고 바로 참가하는 것도 괜찮으리라. “그래요. 저는 주변을 둘러보고 있겠습니다. 나중에 중앙 광장에서 만나도록 하죠.” “네. 그런데요. 방이 없으면 어떡해요?” “너무 부담 가지지는 마세요. 그냥 해본 말이었으니까. 방이 없으면 모니카로 돌아가면 되죠.” “호호. 농담이에요, 농담. 저를 뭐로 보는 거예요? 제 명함 정도면 여관 방 하나쯤이야 우습다고요. 아무튼 빠르게 다녀올게요.” 고연주는 앙큼하게 대답하고는 금세 자리를 떠났다. 이내 서서히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일단 한 번 전체적으로 둘러보고 나서, 고연주의 말을 따라 통제실로 가는 게 낫겠지. '그렇다면 광장을 거쳐야겠군.' 아마 황금 사자의 클랜 하우스가 통제실일 가능성이 높다 생각하여, 나는 광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렇게 홀로 남고서야 비로소 도시의 전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때 북 대륙의 대 도시로서 엄청난 번영을 누렸던 바바라는, 이제는 그 모습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황폐화된 상태였다. 그러나 무혈입성으로 점령당했다는 걸 가정했을 때, 생각보다는 상태가 괜찮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생각보다'였지만, 완전히 무너진 서쪽 성벽을 제외하고는 나름 도시의 구색을 갖추고는 있었다. ‘하기야 자기들도 지낼 공간이 필요했을 테니까.’ 이윽고 보이는 광경에, 나는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광장에 들어섰다. 넓은 빈터에는, 조용한 분위기와 함께 서른 남짓한 사용자들이 이곳 저곳에 앉아있었다. “…….” “…….” 거진 스무 명이 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다들 힘이 없어 보인다고 해야 할까? 사실상 비단 광장만 이런 게 아니었다. 지금껏 거쳐왔던 모든 곳이 이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물론 간간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제들이 있어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눈앞 사용자들처럼 의욕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렇게 봐서는…. 누가 패배했는지 분간하지를 못하겠군.' 나는 잠깐 입맛을 다셨지만, 이내 1회 차 시절을 생각하곤 고개를 주억였다. 그때는 정말로 패배나 다름없는 전투였고 상황도 지금보다 배는 심각했다. 당시 난 0년 차라서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분위기도 지금보다 훨씬 심각했던 걸로 기억한다. 아무튼 그때보다는 훨씬 낫다. 언제나와 같이 시간이 약이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더는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기도 했으니…. 해서, 나는 그대로 광장을 지나칠 생각에 바삐 걸음을 놀렸다. 터벅터벅. 터벅터벅. 조용한 광장을 울리는 발소리가 거슬린 모양이다. 부서진 분수대 주변으로 앉아있던 사용자들 중, 몇 명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나 또한 그들을 흘끗 보았다가 그대로 지나치려는 순간이었다. “어.” “어.” 한 사내와 눈을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것은, 그 사내 또한 마찬가지였다. 멍하니 죽어있던 눈동자에 한순간 이채가 스쳤다. 생기 없는 낯빛이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그러면서도 알게 모르게 낯익은 얼굴에 나는 사내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얼굴은 갸름했지만 생김새는 분명 남성이었다. 길게 기른 머리는 허리까지 닿아있고, 몸은 호리호리한 편이었다. 그 순간 머리를 스치는 하나의 생각. “우….” “김수현?” 순간적으로 이름을 내뱉을뻔했지만,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아. 상관없나?' 하지만 이내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됐든 같은 사용자 아카데미를 나왔으니까. 그랬다. 눈앞의 사내는 나와 통과의례에서 한 번 마주쳤으며, 1회 차 '붉은 송곳니' 클랜의 클랜 로드였던 우정민이었다. 설마 여기서 만날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사용자 우정민.” 이름을 부르자 사내는 확실히 반응했다. 나는 광장을 지나치려던 발걸음을 돌려 우정민에게로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자 내가 다가오는걸 보고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렸는지, 우정민 또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우리는 의례적으로 가벼운 악수를 나누었다. “오랜만이다. 사용자 김수현.” “오랜만이군요.” 간만에 듣는 우정민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쉬어있었다. 그는 내 얼굴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가 내 전신을 훑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좋아 보이는군.” “서문 부대에 참가했었습니다. 모니카에서 정비 후 지금 들어온 길입니다.” “서문 부대?” 우정민은 한 번 고개를 갸웃했다가, “아.” 머리를 끄덕였다. “맞아. 그렇지. 머셔너리 클랜…. 소문은 들었어. 서문 부대라면 힘들었겠군.” “이제 좀 괜찮아졌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나…?” 순간 우정민의 시선이 아래를 향하고 얼굴에 한 줄기 수심이 어렸다. 그것을 보자, 우정민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얼굴도 그렇고, 아직 마주 잡고 있는 손에서 미미한 떨림이 일어나는걸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쪽도 이번 전쟁에 참여한 겁니까?” 우정민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0년 차는 강제 참가가 아니었을 텐데. 자원하셨나 보군요.” 그러자 우정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비로소 꾹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글쎄. 참가했다고 해야 하나…. 뭐, 하긴 했지. 나는 헤일로에 거주하고 있었거든.” 그 순간 나는 약간이나마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정민은 동부에 참가한 게 아니라, 서부에 있다가 습격을 받은 것이다. 마주잡은 손이 떨어졌다. 시야를 가리는지, 우정민은 앞머리를 걷어내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눈이 멀은 거지. 젠장. 빨리 도망쳤어야 하는 건데.” “도망? 아. 설마….” “흐흐.” 나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우정민은 멍하니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나는 이틀 전 바바라에 들어왔다. 헤일로가 함락 당한 이후, 그 동안 쭉 포로로 잡혀있었어. 그놈들한테.” 우정민의 말은 조용한 광장을 왕왕 울렸다. 중간중간 몸을 웅크리는 사람이 몇몇 보이는 게, 아마도 몇 명은 비슷한 처지인 듯 보였다.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힘들어? 힘든 정도가 아니었어. 지옥 그 자체였다.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놈들은 악마야, 악마.” “…….” “가축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지. 살아 생전 그런 대접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함께 해왔던 동료들도 하나 둘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지. 어떻게 됐는지 알아? 결국 혜수는 미쳤고, 승현이는 자살했다.” 우정민은 이제 마치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공허한 눈빛으로 말을 하는 모양새는 흡사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문득, 나는 같이 있던 한 명에 대해 의문이 일었다. 추후 10강 중 1인이 되는 사용자. 이름이…. “둘 말고 다른 동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한 명 더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루하루가 정말로 지옥이었다. 절대로 끝나지 않을…. 누구?” “…선유운씨?” “아. 유운이….” 우정민은 여전히 혼잣말을 하듯 이름을 되뇌었다. 그러나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는걸 보면, 머릿속으로 고민하는 게 있는 모양이다. 이후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혹시 죽은 건가 까지 생각이 미쳤을 즈음,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서서히 떼어졌다. 그러더니, 우정민은 한순간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김수현.” “?” “잠깐 시간 좀 있어?” 나는 잠깐 쳐다봤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우정민이 안내한 곳은 하얀색으로 된 널찍한 건물이었다. 문 앞에서 사제들이 돌아다니고, 이곳 저곳에서 신음이 나오는걸 보니 구호소의 일종인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나는 예상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내부는 제법 넓었는데, 급조한 티가 물씬 풍기는 자리들이 부지기수로 보였다. 바닥에는 간이 침대나 천 등이 곳곳에 배치돼있었고, 그 위로 여러 사용자들이 누워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 중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눈에 띌 정도의 심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정신 없는 분위기이긴 했지만.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바로 앞에는 몸에 하얀 천을 걸친 정신을 잃은 듯 보이는 여인과, 그녀를 돌보는 사내가 있었다. 그의 가슴에 새겨진 문양은 전쟁에 참가한 사용자라는걸 알려주고 있었다. 여인을 앞 에두고 주문을 외우던 마법사는, 이내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제에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분도 임신한 것 같은데요.” “쯧. 저쪽으로 보내세요.” “알겠습니다.” 이어서 축 늘어진 여인을 부축한 채 한 쪽으로 걸어가는 사내를 보며, 나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이쪽이야.” 이윽고 난 우정민이 잡아 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혹여 밟지 않도록 약 서른 명 정도를 거치며 조심조심 걸었을까. 이내 그가 걸음을 멈춘 곳에는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고른 숨을 내쉰 채 잠들어 있었다. 선유운이었다. “몸은 괜찮은 겁니까?” “유운이는 그나마 괜찮아. 워낙 정신력이 강한 놈이다 보니…. 그런 일을 당해도 어찌어찌 버티더군.” “그런 일이라니요?” 물음에 우정민은 일순 고민하는듯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이내 자조어린 웃음을 짓고는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랑자 놈들은 그렇다 쳐도…. 서 대륙 놈들 중 남색을 즐기는 놈들이 꽤 있더군.” “그런….” “아무튼 살아서 다행이지. 바드득!” “…….” “가자고. 조금 전 겨우 잠들었으니.” 확연히 들릴 정도로 이를 간 우정민은, 곧 다시 내 손을 이끌었다.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역시나 온몸에 천 하나를 걸친 여인이 있었다. 역시나 얼굴이 낯설지 않은 것은 아마 그녀가 원혜수일 것이리라. “헤헤. 헤헤헤.” 여인은 깨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자세히 응시했다. 눈동자는 한없이 풀려있고 입은 헤 벌어져 침이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거기다 이따금 터져 나오는 실없는 웃음소리는,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통과의례였었나?’ - 시끄러! 혜연이는! 거, 거짓말! 거짓말 하지마! 죽었을 리 없어! 거짓말이지? 그렇지? 응? - 그래. 나 미쳤어. 차라리 미치고라도 싶어. 그러니까 이거 놔. 노라고 그만! “히히. 히히히.” '미치고 싶다더니…. 진짜 미쳤네.' 속으로 혀를 차고 있을 즈음, 우정민은 침착히 허리를 숙여 원혜수의 입을 닦아주었다. 다시 바로 몸을 일으키고서, 그는 음울히 입을 열었다. “임신했다더군.” “…….” “본인에게 물어볼 수 없으니, 나보고 낙태할지 놔둘 건지 결정해달래. 큭. 여기서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난감하겠군요.” 나는 명료히 대답하면서도 제 3의 눈으로 둘의 상태를 살폈다. ‘선유운은 확실히 정신력이 강해. 그런데 원혜수 이 사람은….’ 그나마 선유운의 경우에는 회생의 가능성이 있었지만, 원혜수는 말 그대로 미쳐있는 상태였다. 성향만 봐도 답이 나온다. 지금 당장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그녀의 상태는 심각했다. “나아질 수 있을까?” “…….” “나아지겠지?” “글쎄요….” 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괜한 희망을 주는 것보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게 더 나을 테니까. 이것은 육체의 상처가 아닌 정신의 상처였다. 더구나 이지를 상실했을 정도로 거대한 상처인 만큼, 치료에 대한 방법은 요원하다고 볼 수 있었다. 문득 우정민에 대해 안쓰러운 마음이 일었다. 솔직히 그들이 초반에 어떻게 성장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나중에 '붉은 송곳니' 클랜으로 유명세를 떨치는걸 보면, 지금이 또 하나의 통과의례가 아니었을까 추측할 뿐이었다. “히이. 히이히. 흐후으. 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한동안 원혜수를 내려다보던 우정민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넌 여기 어쩐 일이지? 클랜 하나 만들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내일 회의가 있어서요.” “회의?” “예.” “거기에 네가 참가한다고?”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만들었다는 소문까지만 들었나 보군.’ 잠시 후, 옆에서 가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흐으. 같은 사용자 아카데미를 나왔는데. 내 신세가 비참하군.” “…운이 좋았을 뿐이죠. 그나저나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모르겠어….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마침내 원혜수에서 시선을 떼어 우정민을 쳐다보았다. 그녀를 아련히 응시하는 그의 눈길은, 1회차의 날카로움은 온데간데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메말라 있었다.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반사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모니카에 제 클랜 하우스가 있습니다.” 그 말을 꺼낸 순간 우정민의 웃음이 뚝 멈췄다. 그 상태로 잠시 바닥만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했다. “동정하는 건가?” “그거야 당신 선택에 달렸습니다. 사용자 우정민.” “?” “동정을 받을지, 다시 마음을 먹을지, 아니면 무시할지. 선택은 오롯이 당신에게 있습니다.” 딱히 할 말이 없는지, 우정민은 일순 말문이 막힌듯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곧 말에 담긴 의미를 이해했는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나에게 달렸다 라….” 이건 나로서도 전혀 생각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일종의 모험이나 다름없었다. 성공하면 대박인 도박. 우정민과 선유운이라면 확실히 쓸만한 카드들일 테니. “나에게 달렸다….” 이후 우정민은 한동안 혼잣말을 되뇌다가, 한순간 번쩍 눈을 떴다. 그러더니 낮은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만약에…. 그러니까 만약에 가게 되면….” “예.” “…혜수를 데려가도 되나?” “환영합니다.” 나는 바로 즉답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가능성은 생겼다는 생각에 속으로 웃었다. '그럼 이제 슬슬 떠나야겠군.' 너무 오래있는 것도 부담일 테니, 나는 이만 자리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여기 계속 있어봤자 자존심 강한 우정민이 불편하게 생각할 것이며, 스스로 생각할 시간도 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쯤 고연주가 광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고. 해서, 나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치곤 눈짓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가려고?” “예. 이제 슬슬 가봐야 해서요. 아무튼 힘내십시오.” “가려고?”라고 말했으면서, 우정민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에 따라 나는 바로 몸을 돌렸고, 건물 입구 쪽을 응시했다. 그렇게 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찌릿! '응?' 그것은, 제법 강렬한 시선이었다. 꽤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 기척을 잡아 고개를 돌리자, 입구 방향으로 세 명 건너서, 천 위에 앉아있는 한 여인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커다란 눈망울. 청순하면서 선한 인상. 연한 연갈 빛이 감도는 하늘하늘한 머리카락…. 아니, 이제 더는 하늘하늘하지 않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깨를 넘던 머리카락은 목 부근 단발로 잘려있다. ‘여기에 있다는 것은….’ 여인의 눈은 썩은 동태처럼 한껏 죽어있었다. 그러나 내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한 순간, 텅 빈 눈동자가 이내 서서히 연갈 빛을 되찾는걸 볼 수 있었다. 나는 허공에 떠오르는 사용자 정보를 확인하여,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전보다 더 높은 목소리로, 여인에게 들릴 수 있도록. “사용자 우정민. 한 가지 알려드릴게 있습니다.” “아직 안 갔…. 응?” “지금쯤 제 클랜원 한 명이 바바라에서 잠자리를 잡았을 겁니다. 오늘밤은 그곳에서 지낼 생각이니,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주변 여관에서 저를 찾으십시오. 성심 성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맙다.” 이윽고 미묘하게 흔들리기 시작한 눈망울을 확인한 후, 나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설령…. 한밤중일지라도요.”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오늘 새벽에 초고는 완성했었는데, 퇴고를 못하고 잠들었습니다. 일단 울트라 북을 갖고와서 공강 시간에 급히 퇴고하고 올립니다. 2시 강의라서 바로 들어가야할것 같습니다. 독자분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 0392 / 0933 ---------------------------------------------- Epilogue 3/4 : '부디 편히 잠들길.' 고즈넉한 바바라의 밤. 어느덧 간간히 맴돌던 붉은 석양빛이 사라지고, 잿빛 땅거미들이 황혼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석음(夕陰)은 시간이 흐를수록 도시 깊숙이 파고들어 어스레한 빛을 뿌렸다. 그리고 도처에 어둠이 내려앉을 때마다 그윽하게 변하였다.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올려 창문을 응시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에 밝게 빛나는 달이 떠 있다. 마치 은으로 만든 쟁반처럼, 둥그런 달은 어두운 방안을 밝혀주는 은백색 월광을 비추고 있었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 느껴졌던 소란은 달이 뜬 것을 기점으로 점차 사그라졌다. 그에 따라 벌집 같던 여관도 밤을 맞이하여, 어수선함이 사라지고 어둠과 적막으로 빠져들었다. “흐흥…. 흐흐흥…. 흐흥…. 흐흐흥….” 고요한 정적 속에서 흘러 드는 미약한 콧노래. 창에 두고 있던 시선을 천천히 내리자, 살며시 눈 감은 채 엄마 미소를 짓고 있는 고연주가 보인다. 무에 그리 기분이 좋은지, 그녀는 나를 꼭 품에 안은 채 기분 좋은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윽고 내 머리를 보듬는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나는 온순히 눈을 감았다. 우정민과 헤어진 후, 나는 광장에서 고연주를 만나 바로 통제실로 직행했다. 그리고 일을 마친 후 그녀가 마련한 여관으로 향했는데, 고연주 왈 공교롭게도 방이 딱 하나 비어있었다고 한다. 솔직히 고연주 개인의 사심이 듬뿍 묻은 의도가 엿보였지만…. 사실상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그녀와 같은 침대를 쓰는 게 별로 어색하지는 않았으니까. 나는 풀어헤쳐 진 옷깃 사이를 파고들어, 달빛이 머무는 젖 무덤에 고개를 묻었다. 그 순간 내내 머리를 보듬던 손길이 멈췄다. 그러더니 가느다란 숨결이 정수리를 간질이고, 내 머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는 고연주. “후후…. 귀여워라….” 비록 얼굴을 거세게 압박해 들어오는 젖가슴에 숨이 막혔지만, 그래도 좋았다. 안면에서 느껴지는 말랑말랑하면서 따뜻한 감촉은…. 지금 이순간만큼은 모든걸 잊게 해줄 정도로 아늑하고, 포근했다. 이내 머릿속을 차츰차츰 점령하는 안온한 기분에, 나는 자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졸음이 밀려오는걸 막을 수 없었다. 아니. 막지 않았다고 해야 정답일까. 그렇게 깜빡 잠이 들려는 찰나였다. 터벅터벅…. 터벅터벅…. 정적을 깨뜨리는 발소리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재빠르게 마력 감지를 활성화하자 한 인영이 마침 나와 고연주의 방문 앞에서 멈춘 기척을 잡을 수 있었다. 나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똑똑. “실례합니다. 혹시 이 방에 사용자 김수현씨 계십니까?” 뜻밖에도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걸걸한 남성의 음색이었다. “어머?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글쎄요.” “흥…. 당최 무슨 일이람.” 한창 좋을 때 방해 받아서 불만인지, 고연주는 가시 돋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바삐 옷 매무새를 가다듬는걸 보며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나가기 직전, 나는 벽에 기대어두었던 '무검'을 쥐었다. 그때였다. “수현? 검은 왜….” “…자고 있어요. 곧 돌아올 테니까.”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완곡히 말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방문을 열자, 한 사내가 졸음 가득한 눈으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오늘 본적 있는 사내였다. 입구에서 임시 관리 겸 보초를 서고 있던 사용자로 기억한다. “제가 김수현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아. 밤중에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밖에 한 분이 찾아오셔서요.” “?” “원혜수라고 전해달라던데….” 순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 난 입술을 꼭 물어야만 했다. '내가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네. 그럼.” 사내는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시선을 방안으로 돌렸다. 그리고 부러움이 듬뿍 담긴 눈빛을 빛내었고, 이내 한숨과 함께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나가기 전, 나는 잠깐 몸을 돌렸다. 침대에는 살짝 흐트러진 옷을 입은 고연주가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조용히 방문을 닫았을 뿐. 이윽고 복도를 걸어 계단을 내려가자, 홀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여관의 문을 열고 나섰다. 이윽고 눈앞에 어두운 거리가 드러난 순간,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어두운 거리를 비추는 달빛 아래, 한 여인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녀는 내가 잘 알고 있는 사용자였다. '성스러운 여왕', 유현아. 1회 차 시절 매우 유명했던 사용자 중 한 명이며, 2회 차에서는 뮬에서 나와 악연을 맺은 여인. 나는 잠시 동안 유현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낯빛은 많이 상해있었지만, 예의 청순하고 포근한 미모는 어디 가지 않았다. 다만 예전과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웨이브 진 연갈 빛 머리카락이 단발로 깎여있다는 것. 물론 그 모습도 꽤 잘 어울리기는 했지만, 절단면을 보면 억지로 잘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약간의 거리를 남겨두고서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먼저 말문을 열었다. “진짜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역시.” “?” “역시, 당신이었군요.” 예전 상냥했던 목소리는 온데간데 찾을 수 없다. 그동안 모진 고초를 겪어서 그런지, 유현아의 음색은 잔뜩 쉰 상태였다. 나는 한 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할 말이 있다고 들었다. 사용자 유현아.” 말을 하면서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고, 동시에 유현아는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에 언뜻 걸음을 멈추자 그녀가 손을 꾹 말아 쥐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정적이 흐르고, 유현아는 주춤하던 걸음을 멈췄다. “…잠깐 얘기 좀 해요.” “지금 하면 되지 않나?” “자리를 옮기고 싶어요.” 그 말에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록 여관 앞이기는 했지만, 거리에 보이는 사용자는 적었다. “그러지.” 이내 그 의도를 알 것 같아, 나는 마음대로 하라는 양 어깨를 으쓱였다. 아까 한 걸음 내디뎠을 때, 그녀의 눈에 두려워하는 빛이 스쳤다. 아마 '조신한 숙녀'에서 있었던 일이 트라우마로 남은 모양이다. 이윽고 유현아는 몸을 돌려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나는 그녀의 등을 보며 발걸음을 맞췄다. 어느새 내 손은 '무검'의 손잡이를 매만지고 있었다. 사실상 이곳은 엄연한 도시 내부였고,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사용자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유현아가 명백한 적이 아닌 이상 나에게 명분은 없다. 지금 이곳에서 그녀를 죽이는 건 솔직히 많은 무리수가 뒤따르는 일이었다.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애써 무리할 필요는 없다. 그때처럼 명분이 나오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도 있고…. 정 안되겠다 싶으면 추후 기회를 보아 몰래 암살하는 방법도 있었으니까. 비록 명분이 없다 뿐이지, 나와 유현아의 관계는 이미 앙숙을 넘어선 적이나 다름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덧 유현아가 걸음을 멈춤에 따라 나 또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이동한 곳은 워프 게이트 부근이었다. 시간대가 시간대인만큼 이곳도 많은 사용자가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용자들이 주기적으로 오고 가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나름 머리는 굴렸다고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유현아가 몸을 돌렸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력 감지를 일으켰고, 가만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 “…….” 하지만 이후 5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말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렇게 지루함을 넘어서 약간의 초조함이 느껴질 즈음, 비로소 유현아는 입을 열었다. “그날 이후로….” “…….” “저는요. 그날의 일을 단 하루도 잊어 본적이 없어요.” 들려온 목소리는, 잔뜩 쉬긴 했지만 차분했다. “당신…. 알고 있나요? 그 후로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일을 당했는지….” 그리고 이어지는 말들에 나는 의아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유현아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말하지 않아도 비디오였다.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도…. 아니. 실제로 형과 한소영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벨페고르를 만났을 때, 나는 어떻게 행동했는가? “알고 있냐고요. 네?” 그러나 생각이 채 이어지기도 전 재차 묻는 음성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 모르지만…. 지금 모습을 보아하니 대충은 알 것도 같은데….” “…….” “여전히 뮬에 있었나? 그럼 부랑자들에게 제법 험한 꼴을 당했겠군.” “…그래요. 맞아요. 험한 일을 당했어요. 여자로서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들 정도의 수치스러운 일들이요.” 유현아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더니 살며시 고개를 들어 내 시선과 마주했다. 비로소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젖어있었다. “그렇군.” “…그게 다예요?” “그럼? 애도라도 해줘야 하나? 너와 나 사이에?” “당신…. 때문이잖아요!” 유현아는 잠깐 말을 끊더니 이내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모르는 거예요?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하는 거예요? 당신 탓이에요. 제가 그런 일은 당한 건 당신 탓이라고요.” “그게 왜 내 탓이지?” “…뭐라고요?” “부랑자들이 습격한 게 내 탓인가?”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 번 더 말을 이었다. “부랑자들이 습격했고, 너는 험한 일을 당했어. 그런데 그게 왜 내 탓이야?” “그, 그건….” 내 말에, 유현아는 일순 말문이 막힌 얼굴이 되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정곡을 찔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여전하네. 그 떠넘기는 성격은.” 그러자 유현아가 입술을 꼭 깨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무척이나 분하다는 감정이 절절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그저 분하다는 반응만 보일 뿐이지, 발악적인 행동을 찾을 수 없다. 유현아가 나를 찾아왔을 때 혹시나 상황을 기대한 나로서는, 김빠지는 전개가 아닐 수 없었다. 이윽고 크게 심호흡한 유현아는 조금은 가다듬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요. 좋아요. 그럼 그때 왜 그러셨어요?” “왜 그랬느냐니? 당시 상황을 말하는 거라면…. 결과는 통보 받았을 텐데?” 통보란 황금 사자에서 실시한 조사를 뜻하는 말이었다. 당시 나는 정당방위가 인정되어 무죄로 판결 받았고, 그러한 결과는 유현아에게도 전송이 갔으리라. “저는 그 종잇조각을 묻는 게 아니에요.” “내가 할 대답은 그것뿐이다.” “하.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렇다면?” 곧바로 받아 치자, 유현아는 허탈한 얼굴 표정을 지었다. “당신에게 도의적인 면이란 눈곱만치도 없는 건가요? 다른 모든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면 그렇게, 똑같이 말할 거라 생각하세요?” “지금 협박하는 건가?” “협박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의 생각을, 진심을 묻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들리지는 않는데. 아무튼 해봐. 하고 싶으면.” “당신 정말!” 그렇게, 유현아의 목소리가 높아진 순간이었다. “별로 지금과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은데….” 툭 내뱉은 한 마디에, 유현아는 입을 연 그대로 말을 멈췄다. 그러면서 기껏 가다듬은 호흡이 거칠어지는 게 숨이 턱 막힌 모양이다. 하지만 내 말은 사실이었다. 홀 플레인은 '사용자 정보'가 우선되는 세상이다. 즉 기본적으로 '힘'이 있어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말. 그러한 점에서 보면, 현재 나와 유현아는 하늘과 땅만큼의 격차를 가지고 있었다. 즉 지금의 유현아는 나를 상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나마 나를 찾아왔을 때 혹시나 하는 기대는 있었지만, 머리가 아주 미쳐 돌아버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뭔 말을 하나 했더니…. 아무튼 고작 신세 한탄을 하려고 온 거면 사양하겠어.” “고작…?” 유현아는 혼잣말로 내 말을 되뇌고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때였다. “알고 있어요. 지금 와서 이런다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거.” 조용히 서 있던 유현아에게서, 바로 말이 들려왔다. 그러더니 내가 미처 말하기도전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럼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 “꼭 죽였어야 했나요?” 드디어 나온 질문. 그와 동시에, 나는 눈을 살짝 치켜 떴다. 다시 머리를 든 유현아는 비록 비척거리기는 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유현아는 다시 한 번 내게 물었다. “승현이 오빠. 다희. 알고 보면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둘을 꼭 죽였어야 했나요?” “글쎄.” 그리고 나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사실상 “글쎄.”가 바로 내 진심이었다. 아마 처음 2회 차를 시작했을 때의 나라면, 두말 않고 “응.”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때는 괜히 쫓기는 기분에 사로잡혀, 어떻게든 죽여야 한다는 의식에 사로잡혀있었으니까. 더구나 1회 차를 떨쳐 울렸던 '성스러운 여왕'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클랜원들이 생기고, 한소영을 만나고, 형을 만나고, 클랜원을 잃으면서. 그러면서 내 생각도 차츰 생각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건 최근에 들어와서 인지한 변화였다. 물론 아직도 부랑자나 악마 등 명백한 '적'에 대한 관념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사용자들. 그러니까…. 고연주가 좋은 예였다. 원래 그녀는 내 적이었지만, 지금은 그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이요 조력자였다. 문득 선율과 점을 쳤을 때 나눴던 대화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그래 왕이니까. 네 명의 여왕은 그렇다 쳐도….' '아. 세 명인가? 한 명은 스스로 밀어냈네. 어머 불쌍해라….' 그때 보았던 카드는 성스러운 빛이 그려진 배경에, 한 명의 여인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담담한 기분으로 유현아의 사용자 정보를 떠올렸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유현아(3년 차) 2. 진명 • 국적 : 가시밭길을 걷다(Tread a Thorny Path) • 대한민국 3. 성향 : 상처 • 순수(Scar • Pure) '아직도 순수라.' 나는 새삼스런 마음으로 유현아를 응시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는 꾸준히 나와의 거리를 줄여오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예요? 처음에는…. 당신이라는 사람과 잘 지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한 걸음. “저는요. 신세한탄을 하러 온 게 아니에요. 아니. 안 할게요. 안 할 테니까 대답해주세요.” 두 걸음. “그때 왜 그래야 했는지.” 세 걸음. “정말 그랬어야만 했는지.” 네 걸음. “절대 용서할 수 없지만….” 어느덧, 유현아는 내 코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그리고 잠시 후. 떨리던 입술이 힘겹게 떼어졌다. “그래도 미안하다는, 사과 한 마디라도 듣고 싶었어요.” 마침내 말이 이어진 순간, 그녀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와 동시에, 유현아는 바로 내 앞에서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유현아를 내려다보았다. 아까 느낀 새삼스런 마음은, 이제 새로운 감정으로 바뀌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의 정체는, 지금껏 위선자로 생각했던 유현아에 대한 새로운 놀라움이었다. 나는 한때 미친 적이 있다. 그 결과 살육에 빠진 적이 있다. 원혜수는 지금 미쳤다. 그 결과 정신을 놓아버렸다. 그러나 유현아의 현재 상태는, 그 어느 것도 해당되지 않는다. 비록 성향 하나가 상처로 바뀌었지만, 하나는 그대로였다. 이 말인즉슨 유현아는 아직도 내면의 순수함을 잃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과연 성스러운 여왕인가….' 누가 뭐라 해도 유현아는 홀 플레인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거물급 사용자였다. 그때는 왜 그렇게 그녀에게 인재가 붙는지 몰랐는데, 나는 지금에 이르러서야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기도 했다. “…….” “…….” 어느새 주변에 남아있던 모든 기척이 사라졌다. 언제 다시 잡힐지는 모르지만, 적기라면 지금이 적기였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상식에서 이해할 수 없는, 서로 정반대에 위치한 사람이라는걸.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도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 사과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유현아에 대한 내 생각도 변함은 없다. 그녀는 나를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건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더구나 지금에서야 약간 이해가 간다고는 해도…. 이미 벌어진 사실을 뒤집기에는, 우리는 너무 멀리 왔다. 또한 만일 내가 사과한다고 해도 변하는 게 있을까? 그런다고 유현아의 내면에 변화가 생길까? 내 대답은 “아니올시다.”였다. 지금 유현아는 벼랑 끝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려다보고, 유현아는 올려다본다. 어느덧 그렁그렁한 눈망울에서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은, 애처로운 빛을 가득 띠고 있었다. “너는 나에게 뭘 원하는 거지?” “나에게 사과할 수 있어요?” “사과를 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건데?” “…저도 잘 모르겠어요.” 역시나 유현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나도 그녀를 따라 고개를 저었다. “너무 멀리오기는 했지.” 그것을 내 대답으로 알아들었는지, 유현아는 일순 고개를 푹 숙이었다. “대답은 잘 들었어요.” “…….” “역시…. 당신은 이해할 수 없어요.”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인정했다. 유현아는 위선자가 아니었다. 착하고, 순수하다. 이윽고 바닥에 점점이 찍히는 눈물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이제는 그냥 죽고 싶네요.” “…….” “죽여줄 수 있나요? 당신이 그때 그랬던 것처럼.” “…원한다면.” 나는 마침내 무검을 뽑아 들었고, 아래로 겨누었다. 검신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에는, 여전히 울고 있는 여왕만 보일 뿐이었다. 이내 무검을 천천히 치켜들며, 나는 생각했다. 나를 둘러싼 상황이 이러지만 않았다면. 아니, 나와 조금만 더 늦게 만났더라면. '어쩌면….' 유현아와 잘 지냈을지도 모른다고. 서로 힘을 합쳐,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성스러운 여왕, 유현아. '부디 편히 잠들길.'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나는 있는 힘껏 검을 내리그었다. ============================ 작품 후기 ============================ “수현. 오셨어요?” “아직 안자고 있었나요?” “네.” “…….” “…어디 다쳤어요?” “왜요?” “피 냄새가 나서….”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요. 다행이에요.” 0393 / 0933 ---------------------------------------------- Epilogue 4/4 : “모두 다 같이요.” * 오늘 후기는 꼭 읽어주세요. “그럼 이것으로 1차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5일째 되는 날. 오전에 시작된 바바라의 회의는 개최 2시간 만에 파(罷)함을 선언했다. 2시간이라는 시간은 마냥 짧다고는 볼 수 없는 시간이다. 그러나 회의에 참가한 사용자들이 한 클랜의 로드임을 감안하면, 그렇게 알찬 회의였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처럼, 내 입장에서는 별 소득 없는 회의였으니까. 그래도 객관적으로 봤을 때, 회의의 결과는 나름 합리적이었다. 가장 급한 일부터 하나씩 해결하는 방향도 아주 나쁘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 도주 중인 연합군 잔당들이 남아있었고, 침략으로 황폐화된 도시는 무려 5개에 이르고 있었다. 그에 따라 동, 남, 북부는 잔당의 추적과 침략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하는걸 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기타 사용자들의 구호 활동과 포로 관리 등 기타 전후 처리는, 차후 2차, 3차 회의를 거치면서 차차 해결하는 걸로 입을 모았다. 역할 배분 또한 나름 합리적이었다. 예를 들면 이번 전투에서 기존 전력을 온전히 유지한 해밀 클랜은 잔당의 추적에 참가한다. 아마 회의가 끝나자마자 바로 편성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에 비해 피해가 큰 고려 클랜의 경우는 도시에 남아 구호 활동을 돕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어찌됐든. 어차피 머셔너리 클랜은 자유 용병 클랜. 전쟁이 끝난 것을 기점으로 용병의 임무는 끝났다. 이후 머셔너리 클랜의 행보를 결정하는 것은 오롯한 나의 권한이지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 난, 어느새 반의 반도 남지 않은 회의실의 인원을 확인하고 바로 몸을 일으켰다. 회의가 끝난 이상 더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으니. 회의실 밖 황금 사자 클랜 하우스의 입구는, 막 회의를 마치고 나온 인원들로 가득했다. 어떤 사람은 바로 도시로 돌아가려는지 걸음을 바삐 놀리고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모여 짐짓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웅성웅성. 웅성웅성. 그렇게 가득한 인파를 가로질러 걷는 도중, 문득 이상한 기분이 느껴졌다. 가는 길마다 모여있는 사람들이 나를 힐끔힐끔 곁눈질을 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아예 대놓고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기에, 고개가 절로 기울어지는 상황이었다. 아무튼 일단 밖으로 나가겠다는 마음에 걸음 속도를 한층 높이려는 순간이었다. “머셔너리 로드.” “머, 머….”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손길과 낯익은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흘끗 시선을 돌린 순간, 나는 한두 번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언제 다가왔는지 옆으로 두 명의 여인이 다가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 명은 이스탄텔 로우 로드, 철혈의 여왕 한소영. 다른 한 명은 검후, 검의 여왕 남다은. 두 여왕이 함께 있는 자리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같으면서도 생소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나요?” “머, 머셔너리 로드….” 이어진 한소영의 인사에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일순 왜 둘이 같이 있는지 궁금증이 일었지만, 인사를 받았으니 멍하니 있는 것은 실례였다. “오랜만입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검후.” 한소영은 한두 번 고개를 끄덕이곤 내 앞으로 두어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은은한 향기가 코를 물씬 찔러들 정도의 거리였다. 이윽고 한소영은 고요한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오늘 머셔너리 로드에 대한 말을 많이 들었어요. 고생하셨어요.” “네? 말이라뇨?” “이번에 활약이 대단하셨다는 소문이요.” 이어지는 말에 나는 눈이 동그래지는 것을 느꼈다. 활약했다는 말이 틀려서가 아니었다. 분명 활약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제대로 언급되지 않았을 터. 더구나 서부에 있던 한소영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의문은 삽시간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지만 한소영의 말을 곱씹은 순간 곧바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아까 느꼈던 이상한 시선들도 이해가 가는 기분이었다. '그렇군. 소문이라.' 하기야 그 정도로 난리를 쳐댔는데 본 사람이 없으면 이상한 일이겠지.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쓰게 웃었다. “글쎄요. 저로서는 개인의 활약보다는…. 전쟁 중 지키지 못한 클랜원이 더 기억에 남는군요. 적어도 지금은요.” “그래요. 나 활약 대단했어요.”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나름대로 겸양의 의미를 담은 대답이었다. “…미안해요.” “아….” 그러나 두 여왕이 받아들인 의미는 달랐는지, 그녀들은 동시에 안타까운 기색을 내비쳤다. 나는 괜한 말을 꺼냈다는 생각에 속으로 반성했다. 그리고 까닭 없는 한숨을 쉬었을 때였다. “머셔너리 로드.” 문득 손등에서 느껴지는, 서늘하면서도 한없이 보드라운 감촉. 깜짝 놀라 시선을 내리자, 어느새 양손으로 내 손을 감싸 쥔 한소영의 고운 손길을 볼 수 있었다. 이어서 고요하면서도 일말의 위로가 담긴 음색이 흘러들었다. “그 심정 이해해요. 이번이 처음이라면 아마 많이 힘드실 거예요.” “아…. 네.” “지금 느끼시는 심정에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힘내셨으면 좋겠어요.” “가, 감사합니다.” 나는 태연한 척 애쓰며 고개를 숙였고, 다급히 손을 빼었다. 순간 손에서 약간 잡는듯한 느낌이 전해졌지만, 이내 순순히 놓아주는걸 느낄 수 있었다. '손.' 갑작스레 얼굴이 화끈해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곧바로 속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화제를 돌릴 겸 시선을 돌리자 이내 검후가 눈에 밟힌다. 그녀는 두 손을 들었다 놨다 하며 무척 고민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가, 나와 시선을 마주치자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혹시 전쟁 중 머리를 다친 게 아닌가 걱정하면서도, 나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두 분은 왜….” “아. 잠시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재빠르게 대답하는 한소영. 한두 번 고개를 주억이자, 이내 그녀의 입술이 다시금 열렸다. “앞으로 이스탄텔 로우는 서부 도시를 기점으로 포위망을 구축할 예정이에요. 그래서…. 혹시나 검후께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싶기도 했고….” 한소영은 순간 검후를 설핏 쳐다보고는,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현재 소속되신 클랜에 큰 미련이 없다고 하셔서요. 겸사겸사 권유 중이었어요.” 이내 시원하게 인정하는 한소영을 보며, 나는 단박에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겸사겸사라.' 구변 좋은 이유를 들고는 있지만 결국에는 검후 영입에 생각이 있다는 소리였다. 하기야 검후 정도면 누구나 탐낼만한 인재이고, 김덕필에게 듣기론 현 소속 클랜과 큰 접점도 없다 하니 제법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더구나 인재 욕심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한소영인만큼, 홀로 다니는 검후를 가만히 놔둘 수는 없었으리라. 아무튼 한소영에게 가는 거면 큰 상관은 없기에, 나는 기분 좋은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그럼…. 어쩌면 앞으로 모니카에서 종종 뵙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하하.” 그때였다. “아, 아니요.” 남다은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한소영의 빤한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오로지 나만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냥…. 아직 확정된 건 아니고, 생각 중이에요.” “음….” 나는 미묘하게 부정하는 검후를 보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현 소속 클랜은 거의 망했고…. 남성 혐오증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극에 이를 정도의 혐오증은 아닌듯했다. 실제로 전쟁 전 특별 조장의 임무를 맡기도 했으니, 그냥 어느 정도 거부감이 생기는 정도로 생각되었다. '아니면…. 설아가 나는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주어서 그런 걸지도.' 혹은 내가 착각하는 거일 수도 있고. 머리를 스치는 시답잖은 생각에 픽 웃고는, 나는 상념을 깨었다. 그리고 아주 살짝 입술을 내민 채 무표정한 얼굴의 한소영을 보며, 약간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이대로 둘의 밀고 당기기를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지만…. 검후가 이스탄텔 로우로 가는 것은 길게 보면 나에게도 이득이었다. “사용자 남다은. 말씀대로 현 클랜에 묶인 몸이 아니라면, 모니카에 한 번 와보시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머셔너리도 모니카에 자리를 잡을 때 이스탄텔 로우의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요.” “머셔너리요? 모니카에요?” 귀엽게 따라 대답하는 검후를 보며, 나는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 그러고 보니 전쟁 중 제 클랜원들이 신세를 지지 않았나요?” “신세랄 것까지는….” “아니요. 무척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덕분에 제가 도착하기 전까지 수많은 위기를 넘겼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저도 도움을 받은걸요.” 괜찮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는지, 검후는 홰홰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쌤쌤인가?' 일순 고개를 갸울였지만, 어쨌든 검후가 아니었다면 내가 도달하기 전 애들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혹시라도 이스탄텔 로우 로드를 따라 모니카로 오시게 되면, 머셔너리에 꼭 한 번 들러주세요.” “그, 그래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생명의 은인인데요. 검후라면 당연히 환영하겠습니다.” “…정말이요?” 드디어 보이는 반응에 나는 한 번 크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떻게 들으면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었지만, 모니카를 언급한 것은 이스탄텔 로우를 겨냥한 말이었다. 혹시나 해서 한소영을 살피자, 내밀었던 입술을 들이밀고 약한 헛기침을 하는 그녀가 보였다. 나는 속으로 실컷 웃었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서로 할 일이 있으니 해후는 적당히 나누고 갈 길을 가는 게 좋았다. 또한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오지랖은 적당히 부리는 게 예의였으며, 이 정도 해주었으면 한소영이 충분히 요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점차 쏠리는 시선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도 이유 아닌 이유였다.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한소영은 서너 걸음 나에게서 물러났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몸조심하십시오.” 나는 이번에는 먼저 인사했다. “네. 그럼 살펴가세요. 나중에 모든 일이 끝나면 한 번 뵈었으면 좋겠어요.” “네. 전 곧 뵙도록 할게요.” '?' 뜻 모를 남다은의 말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이내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건넨 후, 나는 곧바로 몸을 돌려 입구를 나섰다. 이제 나에게는 머셔너리 클랜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을 뿐이다. * 워프 게이트에 도착한 후 나는 머셔너리 하우스로 향해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수정구로 곧 도착한다고 연락을 넣을까도 생각해봤지만, 그냥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오늘 아침 일찍 고연주를 보냈으니 어련히 알아서 잘들 하고 있으리라. 다만 내가 도착했을 때 한 가지 바라는 모습이 있다면, 신상용의 죽음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태도를 보여주었으면 하는 것. 중간중간 뛰어서 그런지 머셔너리 하우스에 다다르는 것은 금방이었다. 내부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고요 그 자체였다. 왠지 모르게 절로 긴장감이 샘솟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살짝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나는 뜻밖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 클랜원들이 보였다. 정원 한 구석에 놓인 신상용의 무덤 앞에, 모든 클랜원들이 모여있었다. 나는 열어젖힌 문을 이내 조심스레 닫았다. 일견 느끼기에도 클랜원들 사이론 애처로우면서도 엄숙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누구도 말을 않고,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따금 무덤을 응시하는 클랜원들 중 일부가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나는 입구에 선 채 잠시 동안 클랜원들을 관찰했다. 그리고 모든 클랜원들이 나와있다는 것에서 미묘한 느낌을 받았다. 흘러오는 건 분명히 슬픈 기운이었지만…. 그러면서도 예전처럼 마냥 힘없는 분위기가 아닌, 뭔가를 결심한듯한 정숙한 얼굴들. 그렇게 한동안 클랜원들을 응시하다가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수….” “클랜….” 들어온 기척을 느꼈는지 몇몇 클랜원들이 돌아보았지만, 나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리고 발소리를 죽인 채 거리를 천천히 줄여, 유령처럼 그들 사이로 녹아 들었다. 이윽고 보이는 무덤 앞 광경에, 나는 약한 신음을 삼키었다. 무덤의 앞에는 안현이 꿇어앉아 있었다. 지그시 눈을 감은 모습이 자못 비장하기까지 하다. 안현은 그대로 허리를 숙여 두 번 절을 하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녀석은 눈을 떴다. 그리고 침착히 몸을 돌려 정확히 나를 돌아보았다. 아마 내가 온걸 진작에 알고 있던 모양이다. “형님. 100만 골드 포인트를 모이면 사용자 상점에서 소원을 사용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 “형님. 상용이 형을 살리고 싶습니다. 아니, 꼭 살려 보이겠습니다.” 오랜만에 얼굴을 맞댄 것치고는 조금은 뜬금없는 말. 그러나 안현이 말을 꺼냄과 동시에 모든 클랜원들의 시선이 내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갑작스레, 어깨가 묵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불현듯 5일전의 내가 떠올랐다. '일단 그만하자.' '제발…. 제발 그만하자….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자꾸나.' '길게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이상입니다. 여기서 이만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는…. 푹 쉬는 것을 권합니다. 그럼 해산.' 문득 그때 그렇게 말했던 게 후회가 되었다. 그렇게 말했으면 안됐는데. 회피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래. 적어도, 신상용에 관한 문제는 확실히 매듭지었어야 했다. 나는 침착히 고개를 돌려 클랜원들 한 명 한 명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임한나나 고연주나, 왜 그렇게 나를 걱정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신상용의 문제를 앞두고, 다가오는 미래와 마주할 수 없는 자신에 도망쳤다. 나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다시 안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녀석의 눈동자는 쉴 새 없는 일렁임을 보이고 있었다. 이윽고, 나는 마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원래는 살릴 생각이 없었어. 그게 바르다고 생각했거든.” “…….” “…쉽지는 않을 거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예.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안현은 즉답했다. 정말 확고히 결심했다고 느끼자, 나는 그동안 외면했던 문제를 단칼에 결정했다. “좋아. 네가 살리는 건 말리지는 않으마.” 일순 안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지만, 나는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다만 한 가지는 약속해다오.” “약속…. 이요?” “추후 신상용을 살렸을 때.” 신상용이 지구로 돌아갈 수 없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너에게 어떤 상황이 찾아오든…. 무조건 감내하겠다고.” 역시나 지금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안현은 순간 아리송한 얼굴을 보였다. 그러나 일단 살리겠다는 열망이 강한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현의 약속을 확인한 후,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갑시다.” “수현. 우선 식사는….” “아니요. 1차 회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러니 바로 3층 회의실로….”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말았다. 이윽고 다시 말을 잇기 직전, 설핏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오전에 끼었던 짙은 안개가 걷히고 하늘에는 하얀 구름들이 떠다니고 있다. 그런 창공을 가로질러 높이 솟은 해는, 정원에 환한 햇살을 비추어주고 있었다. “…그냥 식사 먼저 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다 같이요.” 이내 길게 드리워진 햇살을 따라, 나는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1. 아직 1부가 완결난건 아닙니다. 세라프의 시점에서 추가로 들어가야 할 내용이 있으며(386회 회상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해당 내용은 내일 바로 연재될 예정입니다. 즉 다음 회가 진정한 1부 완결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2. 에필로그에서 “왜 이 부분이 나오지 않았나.”라는 의문을 가진 분들이 계실 겁니다.(예를 들면 수현이 형에게 사실을 고백하는 내용.) 그러한 부분은 내일 1부 완결 후 외전 형식으로 이어질 예정이며, 3번에서 자세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3. 원래 휴재는 한 달 정도 생각하고 있었으나, 아는 작가 분이 너무 길다고 말씀하셔서 2주로 줄였습니다. 그런데 시기가 조금 애매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내일 연재 후 2주를 휴재하면, 12월 초부터 2부 연재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 기말고사가 12월 14일에 계획되어있습니다. 즉 그때는 또 시험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해서, 일단 11월 15일(금요일)에 1부를 완결한 후 16일(토요일), 17일(일요일)은 쉴 예정입니다. 그리고 오는 18일부터 30일까지 외전이 연재될 예정입니다. 1부와 2부 사이에 약 2년 정도의 시간 공백이 있는 만큼, 그 사이사이의 에피소드를 다룰 예정이며, 각 에피소드는 파트마다 독립적으로 구성할 예정입니다. 4. 다음 회가 1부 완결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동안 죄송했던 게, 10월에 제 앞가림이 힘들었던 지라 쪽지나 코멘트에 달린 질문에 답변을 못 드렸습니다. 393회는 모든 코멘트에 대해 리리플이 들어갈 예정입니다. 질문해주시면 스포일러가 아닌 이상 무조건 답변합니다.(다만 로*미가 들어간 코멘트는 제외하겠습니다.) 0394 / 0933 ---------------------------------------------- 1부 완결(完結) : 나는 한동안 소리 없이 웃었다. 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을지라도, 나는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세라프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동요의 빛을. “그, 그건 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천사와 악마에게 있어서 제로 코드란 열쇠를 의미한다. 천사로서는 어떻게든 지켜야 할 천계의 수호 장치이며, 악마로서는 무조건 획득해야 할 천계로 통하는 열쇠.” “…하. 도대체 어디서, 누구에게 들으셨는지는 몰라도…. 악마에게 들은 거군요. 사용자 김수현.” 나는 아스타로트에 들은 그대로 읊었다. 사실상 이것 말고도 수많은 말을 들었지만, 진위를 가리는 데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이제 이어질 응답을 기다렸다. “…….” “…….” 하지만, 이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기다려도 세라프의 입술은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내려앉은 무거운 침묵에, 나는 피가 나올 만큼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세라프의 반응을 확인했을 때부터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고요하고 차분했던 세라프. 그러나 지금은 갑작스레 말을 더듬고 동요를 감추려 애쓰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리고 평소라면 벌써 나왔을 대답이 5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들려오지 않는 대답을 대신해서 말해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대답해.” “…….” 하지만 침묵은 변하지 않았다. 이제는 불 보듯 뻔해진 사실. 그와 동시에, 세라프를 겨냥한 검 끝이 미약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떠한 기교도 의미도 아니었다. 그저 검을 붙잡은 손이 순수하게 떨리고 있었다. 천사들은 항상 스스로를 합리적인 종족이라 일컫는다. 나는 지금 이 순간만큼, 그 말을 뼈에 사무칠 정도로 처절히 느낄 수 있었다. 이미 내면의 뭔가가 부서진지는 오래였다. 그럼에도 아직 이러고 있는 것은, 10년의 세월 동안 쫓아온 희망이 아직 한 줄기 살아있기 때문이리라. 이윽고, 나는 최후라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너네 졌다며.” “지…. 다니요?” “악마와의 전쟁에서 패배했다며. 그래서 악마와 맞상대하는 게, 아니 더는 나서는 게 무서워서 인간들을 마구잡이로 소환해 대리자로 내세우는 거라며.” “무섭다고요? 고작 악마들이 무서워서 나서지 않았다고요? 사용자 김수현. 엄청난 오해입니다. 적어도 그것만큼은 확실히 아니라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럼 왜?” “그, 그건…. 말할 수 없는 사항입니다. 사용자에게는 개방될 수 없는 정보입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그 말을 해준 존재는 악마라는 사실을.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시는 겁니까?” 비로소 돌아온 세라프의 대답에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동시에 전신으로 서글픈 감정이 엄습했다. “하하…. 난 그 말이 더 무섭다.” “사, 사용자 김수현?” “적어도 그것만큼은? 그럼 나머지는 사실이라는 거잖아….” “!” 그러자 간곡히 이어지던 음색이, 일순 뚝 끊기었다. 그와 동시에, 지금껏 간신히 붙잡고 있던 10년의 희망 줄 또한 끊겨버렸다. 나는 한껏 짓눌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하지만 숨이 턱 막혀옴에 순간 말을 멈추고 말았고, 동시에 공기의 흐름 또한 멈춘듯했다. 나는 서서히, 검 끝에 고정했던 시선을 들어 세라프를 응시했다. 쉴 새 없이 일렁이는 날개. 세라프는 애처로운 얼굴로 나를 보다가, 이내 눈을 질끈 감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난 벌컥 고함지르며, 일생일대의 힘을 다해 달려들었다. “씨발 년들아아아아아아!” 거리는 순식간에 줄어들었고, 검은 매섭게 번뜩이며 세라프의 심장을 찔러 들었다. 그러나 순간 나는 몸이 뒤로 쏠리는 감각을 맛봐야 했고, 가까워졌던 세라프의 얼굴이 멀찍이 밀려나는걸 볼 수 있었다. 뭔가 강력한 힘이 나를 뒤로 밀어낸 것이다. 이내 부드럽게 땅을 구르는 감각이 느껴졌을 때, 나는 표범처럼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곧바로 땅을 박차 다시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는 찰나였다. “허억…. 허억….” 어느덧 내 몸은 공중으로 떠올라 있었다. 알 수 없는 힘이 온몸을 감아 털끝만치도 행동을 제한하고 있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움직이지 않는 몸에, 나는 그저 눈이 찢어져라 세라프를 노려보았다. 아까 입술을 너무 세게 깨물었는지, 입에서 뜨끈한 피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몸은 다시 바닥에 내려앉았다. 움직임을 제한하던 힘도 풀렸다. 그리고 나는 다시 기계적으로 검을 들었다. 설령 빈약한 능력치일지라도, 나는 있는 힘껏 마력을 일으켜 검에 집중시켰다. 이내 찬연히 피어오르는 짙푸른 색 검기를, 나는 그대로 쏘아 보냈다. - 텅! 여전히 세라프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도 뭔가가 쏘아 보낸 파동을 막았다. 그것이 정체를 확인할 새도 없이,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뽑아내어 다시 마력을 뽑아냈고, 크게 울부짖는 것과 함께 거세게 내리그었다. “으아아! 으아아악!” - 텅! 그러나 세차게 허공을 가르던 파동은, 역시나 힘에 부딪혀 그대로 사그라졌을 뿐이다. 그나마 약간의 불똥을 튀긴걸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하아…. 하아….”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는 생각에, 허탈한 웃음만 배어 나온다. 처음으로 찾아온 감정은, 전신을 휩싸는 격정적인 감정이었다. 이어서 찾아온 감정은 전신을 떨리게 만들 정도의 분노였다. 그리고 지금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 찾아 든 감정은…. 바로 참을 수 없는 허탈함이었다. 전신을 엄습하는 탈력감을 느끼며, 나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문득 머리에 강한 현기증이 돌았다. 분명 눈을 감고 있음에도, 검은색 일색인 광경에 누군가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형. 한소영. 그리고 모두들. 하나하나 지나가는 얼굴들을 보며 나는 얼굴을 와짝 일그러뜨렸다. 이제야 겨우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겨우 빚을 갚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겨우 함께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는 지금껏…. 무엇을 위해서….'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은, 나를 다시 한 번 좌절하게 만들었다. 이윽고 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래…. 좋다 이거야.” “사용자….” “천사와 악마. 너희들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나와 상관이 없지. 그런데. 왜 미리 알려주지 않은 거지?” 말을 내뱉고 나서 나는 번쩍 고개를 들어 제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흡사 짐승이 울부짖는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한 번 죽은 사용자는 되돌아갈 수 없다! 그걸 왜 미리 말해주지 않은 거야?!” 하지만 세라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직 슬픈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허공에서 맞부딪치는 시선이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에, 나는 들고 있던 검을 후려갈기듯이 내던졌다. 깡! 까강, 깡, 깡…. “왜! 왜 알려주지 않은 거야! 왜 거짓말을 한 거야!” “거, 거짓말은 하지는 않았습니다!” “뭐, 뭐? 이 악마 같은, 아니 악마보다 더한 새끼들아!” 나는 미친 듯이 고함질렀다.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아, 나는 주먹 쥔 두 손으로 한 번, 두 번, 세 번 바닥을 내리쳤다. 쾅! 쾅! 쾅! “수, 수현!” “뭐? 거짓말을 하지 않아? 내가 형과 한소영을 살려 같이 돌아가려는 사실을 지금 몰랐다고 말하는 거야?” “어느 정도 오해가 있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씨발! 입 닥쳐! 아스타로트의 말이 맞았어! 악마가 너희랑 뭐가 달라!” 나는 반사적으로 왼손을 피어, 지금껏 꾹 잡고 있던 제로 코드를 들었다.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푸른 구슬은, 잔잔한 바다 빛을 내뿜고 있었다. 나는 그것은 세라프를 향해 전력으로 던졌다. 퍽!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간 구슬은, 그대로 세라프의 얼굴을 강타했다. 그녀의 고개가 홱 돌아가고 떨어진 구슬은 이내 “쨍.”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데구루루 굴러, 나와 세라프의 중앙에서 정지했다. 나는 순간 멈칫했다. 어느덧 숨은 한껏 거칠어져 있었고, 턱이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세라프가 서서히 고개를 돌려 정면으로 나를 응시한다. “수현.” “똑같아. 똑같다고.” 흔들리는 눈망울이 보였지만, 머리에 차오른 분노는 그런 것을 깡그리 무시하게 만들어주었다. “너희들이나 악마나 우리를 이용했어. 사용자라는 웃기지도 않는 설정을 집어넣고 이용했다고! 왜 우리가 너네 개싸움에 말려들어야 하는데?! 대답해! 대답 못해? 그럼 다른 년이 나와서 대답해봐! 이 좆같은 년들아!” 고함친 소리가 어두운 소환의 방을 왕왕 울린다. 하지만 역시나 응답은 없다. 오직 제단에 앉아있는 세라프만이 미동도 않은 채 내 말을 받아넘기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피하는 것처럼 느껴져, 아니 그냥 아무렇지 않게 보는 것처럼 느껴져 눈앞이 핑그르르 도는 기분이었다. “악마를 깡그리 죽인 게 이토록 후회될 줄이야. 하다못해 한 놈이라도 남아있다면…. 제로 코드를….” “사용자 김수현! 말이라도…!” “왜? 심해? 너희들이 우리한테 한 짓거리는 심하지 않고 이건 심하게 느껴져?” 나는 몸을 박차 일어나는 것과 함께 세라프의 말을 끊었다. 일순 다시 검을 들어 달려들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왠지 모르게 힘이 빠져 지금은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다못해 속이지라도 말던가.” 어느새, 목소리는 잔뜩 쉬어있었다. “뭐? 거짓말은 하지 않아? 그래. 그런데 너도 말해준 건 아니잖아? 내가 어떤걸 원하는지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니잖아? 알고 있었잖아?” “…….” “해달라는 대로 해줬잖아. 응? 그런데, 너희들은 원래 이러냐? 이렇게 이용했으면, 그렇게 실컷 이용해 먹었으면! 나 같으면 미안해서라도 마지막에는 이러지 않아!” “수현!” 아까부터 주구장창 내 이름만 부르는 세라프.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치켜들자 그녀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오직 서글픈 눈빛으로, 이제는 나를 멀거니 올려다볼 뿐. 나는 세라프와 마주한 채 비틀린 웃음을 내었다. 그래. 할 말이 없겠지. 문득 온몸에 당장에라도 쓰러질듯한 피로감이 찾아 들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세라프의 야료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겨우겨우 참아내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 너희들은 이제 아무래도 좋겠지. 악마들이 사라졌고, 제로 코드는 내가 쥐었으니까. 그러니 내 심정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거겠지. 안 그래?” 세라프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입술을 꾹 깨문 행동은 일견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괴로워 보였지만, 저것도 분명히 가장한 표정일 것이다. “그런 얼굴 하지마. 이제 더는 안 속으니까. 아니. 이제 속일 필요도 없잖아?” “…….” “진짜 대단하다. 그래도. 그래도 한때는 믿었거든? 세라프. 내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너는 유일하게 내 의지가 되어주는 존재였지. 네 판단은 언제나 합리적이었고 나를 옳은 방향으로 이끌었어. 그래서 너한테 고마웠어. 비록 도우미라는 존재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나를 위해주는구나. 이렇게 생각했단 말이야….” 심지어 아스타로트한테 모든 사실을 들었을 때도, 나는 세라프의 말을 믿었었다. 악마는 믿지 못할 존재라고 생각했으니까. 죽음을 앞에 두고서 부리는 마지막 발악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너희들도 만만치 않은 자식들이었어. 결국에는 그 제로 코드인가 뭔가 때문에 나를 도운 거였다고!” “사용자 김수현. 어느 정도의 사실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만은 아닙니다.” “그놈의 그것뿐만은 그것뿐만은! 한 번이라도, 왜 단 한 번이라도 그게 아니라고 말을 못해?” 세라프의 입술 사이로 기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윽고 그녀는 양손을 제단 앞으로 모아 짚고 그대로 고개를, 몸을 숙였다. 그에 따라 늘어진 머리카락이 세라프의 얼굴을 일부 가리었다. 이윽고 제단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만일 그때 모든 사실을 말했다면…. 당신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익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때의 수현은 죄책감에 몸서리쳤으니까요. 단 하루도 제외하지 않고….” “아하. 정말? 에이. 그게 아니지 세라프. 너는 나를 생각한 게 아니라, 너희 천사들을 생각한 거지. 널리고 널린 사용자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구슬려 제로 코드를 지키는데 이용하려는 계획을….” “계획이 아닙니다! 그저, 그저!” 순간 세라프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수현이 죽는걸 원치 않았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걸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세라프는 가까스로 말을 끝마쳤다. 그리고 난 어이없는 기분에 곧바로 대답했다. “참 핑계 한 번 좋다. 나를 위해서였다. 좋네. 도우미 입장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끼워 맞출 수 있는 최고의 핑계인데?” “…….” 눈앞에 보이는 세라프의 얼굴은 더없이 창백했다. 그녀의 뒤를 비춰주던 날개는 어느덧 축 늘어진 상태였다. 너무도 힘들어하는 세라프를 향해 나는 억지로 웃음지었다. “스스로 말해놓고도 안 부끄러워? 정말 너만큼이나 구역질 나는 년은 처음 본다.” 그리고 세라프는 아무런 말도 않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추악한 년.” “…….” 그렇게 약간의 침묵이 흐르고, 나는 천천히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걸음은 중간에서 멈추었다. 바닥을 내려다보자 예의 잔잔한 빛을 내뿜는 제로 코드가 보였다. 이윽고 나는 허리를 굽히고 손을 뻗으면서, 비참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동시에 이것을 얻기 위해 고생하며 견뎠던 나날이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이게 도대체 뭐라고….' 시간이 흐를수록 온몸을 가득 채우고 있던 감정이 더더욱 휘몰아치는 게 느껴진다. 그렇게 한동안 구슬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문득 전방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세라프는 어느새 다시금 고요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동자를 보자 일순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쳤지만, 이내 억눌렀다. 그리고 아무 의미 없이, 이미 예정된 결과를 한 번 더 물었다. “형이랑 한소영을 돌려보내줄 수 없다는 것도 거짓말은 아니겠지.” 세라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역시 지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구나.” 그러자 더는 견딜 수 없어,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동시에 갑작스레 몸의 균형 감각이 어그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몸을 맡겼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눈앞에 짓눌린 머리카락 사이로 잿빛 돌 바닥이 보였다. 그리고 그사이로 반반씩 보이는 파란 구슬 하나. 구슬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빠져나가는 감정을 하나하나 느껴보았다. 지독한 절망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허탈감…. 이용당했다는 배신감…. 죽고 싶다는 비관 감…. 그리고 서서히 찾아 드는 체념 감…. 10년간 걸었던 치열한 인생이 마지막에 이르러 허무해졌다. 뭐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다. 눈물도 나오지 않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잠시 후. 나는 아무 까닭 없이, 그저 무의미하게 중얼거렸다. “흐흐…. 뭐가 만능의 힘이고, 뭐가 무한한 힘이냐…. 원하는 것 하나 이루지 못하는데….”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 '만능'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순간 하나의 생각이 번뜩이듯 솟구쳤다. 그것은 그야말로 아무 전조 없이 떠오른 생각이었다. 한 번 죽은 사용자는 다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죽었다는 사실 자체를 무효로 만들어버리면?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 순간 나는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돌려줘…. 그래.” 이내 일말이나마 되살아난 희망 줄에, 나는 천천히 팔을 움직여 제로 코드를 덮었다. 그리고 그대로 구부려, 구슬을 세게 움켜잡았다. “그래. 그러면 되잖아? 다시 되돌아가면 돼.” “네?” “세라프.” 순간 온몸에 힘이 되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대로 오른손을 뻗어 마력을 일으키자, 어딘가에 놓여져 있던 검이 바닥을 거칠게 쓰는 소리를 내며 손에 잡혀 온다. 그것을 지팡이 삼아,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제로 코드를 사용하겠다. 시간을, 시간을 다시 되돌려줘. 내가 처음 이곳에 들어왔던 때로.” “사, 사용자 김수현?” 그 순간 세라프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지었다. 하지만 난 아무 대답도 않고 묵묵히 검을 허리춤에 꽂았다.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쉰 후 머릿속을 깨끗이 비웠다. 그리고 오직 죽음 앞에서 간신히 떠올라 붙잡은 하나의 희망만을 되뇌었다. 이윽고, 나는 잔뜩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로 코드의 제 1계승자로서.” “수….” “시간 역행을 요청한다.” *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저 멍한 기분으로 왼손에 쥐고 있는 작은 구슬을 굴려본다. “사용자 김수현.” 10년. 그 기나긴 시간 동안 그토록 열망하고 꿈꾸었던 것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내 안을 가득 채우는 상실감과 시리도록 아픈 마음은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사용자 김수현. 다시 한 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나직하지만 아름다운 미성이 내 귓가를 두드린다. 그 소리에 끌려 나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수록 잿빛 벽돌로 이루어진 바닥이 눈에 밟혔다. 그러다가 이내 서른 평에 달하는 공간을 시야에 담았을 즈음, 조금씩 올라가던 시선이 멈췄다. 모든 것의 시작을 알리고, 모든 것을 마무리 짓는 ‘소환의 방’. 그리고 방의 중앙에 놓인 직사각형 제단 위에는, 하얀 빛을 뿌리는 날개가 희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공허한 기분을 느끼며 제단에 앉아있는 ‘천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사용자 김수현의 요청을 재확인 하겠습니다. 당신은 진심으로 홀 플레인의 시간을 되돌리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까?” “그래.” “도저히 납득 할 수 없습니다. 저를 비롯한 모든 천사들은 당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니, 틀렸어. 나는 너희들의 이해를 바라는 게 아니야. 세라프.” 귀에 들리는 내 목소리가, 너무나 사늘하다. 천사, 세라프의 음성은 평소와는 다르게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한 말이 그만큼 충격적이라는 소리일까. 잠깐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세라프는 곧바로 무표정한 인상을 회복했다. 그리고 예의 나직한 목소리로 나를 차분히 타이르기 시작했다. “사용자 김수현, 당신은 홀 플레인의 모든 임무를 달성했고 정상을 거머쥔 첫 번째 사용자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가 아닙니다. 그토록 소망했던 제로 코드를 얻었습니다. 당신은 ‘자격’이 있습니다. ‘자격’이 허락하는 안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세라프. 얘기는 이미 끝났어.” 도저히 멈추지 않을 것 같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오른손을 허리춤에 짚었다. 손아귀에 들어오는 검의 손잡이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후유, 그런 감언이설에 넘어간 건 10년으로 충분해. 이제는 지친다. 세라프? 더는 말하지 않을게. 너희들이 어떤 말로 나를 꾄다고 해도, 내가 제로 코드의 사용을 재고하는 일은 없을 거야.” 손잡이를 바스라 지도록 쥐고 회로를 따라 마력을 일으킨다. 내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기운을 읽었는지 세라프는 일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곧 나를 보는 그녀의 얼굴에 안쓰러워하는 감정이 물들었다. 아직 설득을 포기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제로 코드의 소유권은 오롯이 사용자 김수현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건드릴 권한이 없습니다.” “…….” “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겁니다…. 그 대단한 힘을 간직한 물건을 단순히 시간을 되돌리는데 사용하겠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 “마지막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은 정말로, 그 10년의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반복하고 싶다는 겁니까?” 말을 마친 세라프의 말투는 이젠 거의 애원 조에 가까워져 있었다. 문득, 내부서부터 까닭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건 말 그대로 아무 이유 없는 웃음이었다. 나는 한동안 소리 없이 웃었다. ============================ 작품 후기 ============================ 2012년 12월 12일 연재 시작. 2013년 11월 15일 공지 포함 총 394회로 1부 완결. 하하. 처음 시작할 때 선호작 3000만 찍자고 연재를 시작했던 작품이, 어느새 독자 분들의 과분한 사랑을 받아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먼저 그동안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신 독자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을 드립니다.(감사, 또 감사합니다!) 소설을 적는 건 아마 중학생 때부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네이버나 다음 카페를 전전했던 저에게, 어느 날 유조아라는 사이트를 알게 되었죠. 소설을 적는 것만큼이나 읽은걸 좋아했던 저로서는 그야말로 보물이나 다름없는 사이트였습니다. 이후로 조아라로 바뀌고 노블레스가 생기면서 더더욱 읽을거리는 늘어났고요.(예. 저도 고등학생 때 어머니 아이디로 노블레스 봤습니다. 후후(?).) 처음 메모라이즈를 연재했던 게 아마 2012년 3월 7일이었을 겁니다. 다만 그때는 제가 나름 하고 있던 게 있어, 20회 정도 연재하고 습작으로 돌렸었지요. 이후 여유가 생기고 노블레스에 연재한 작품은 메모라이즈가 아닌 '현대 마법사'였습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분명 떠오른 소재는 좋았지만, 치밀한 구상이 아닌 즉흥적으로 들어간 작품이라 연재에 금방 한계가 느껴지더군요. 해서 다음으로 연재한 작품은 나름 자신 있었던 AOS장르 게임 소설 '아포칼립스 크로니클'이었고요. 이건 한때 제가 연재했었던 2개의 게임 소설의 설정을 참고해 만들어낸 나름 자신 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현대 마법사보다 큰 호응은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유를 잘 생각해보니, 이런 소설은 저만 재미있게 보는 소설이지 독자 분들의 대중적인 취향은 반영하지 못한 작품이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독자 분들이 어떤 작품을 재미있게 읽을까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잡은 소설이 메모라이즈였습니다. 당시 메모라이즈는 첫 시작부터 결말까지 구상돼있던 상태였고, 거기다 앞선 두 작품에 넣었던 소재, 설정 중 괜찮은 것들을 골라내 리 빌딩을 했지요. 그리고 연재를 시작하면서 생각했습니다. 이번만큼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50회까지는 연재해보자. 그리고 언젠가는 완결을 보자. 제 기억으로는 아마 20회까지 선호작이 400개였을 겁니다. 그러다 한 번 선호작 버프를 받고 베스트에 노출되며 천 단위를 넘었고, 70회를 넘으면서 갑작스레 독자 분들의 과분한 사랑이…. (__ )* 처음 연재할 때 주변에서 무척이나 걱정이 많았습니다. 과연 완결까지 낼 수 있을까? 온당한 걱정이었습니다. 워낙 세계관이 방대하고 설정도 많이 들어간 작품이었거든요. 더구나 곧 학교를 다니면서 병행한다는 사실은 저를 더더욱 고민에 빠트렸지요. 하지만 그래도 끊임없는 독자 분들의 관심과 저 스스로 글 쓰는 게 즐겁다고 여기는 마음이 지금까지 연재를 성공적으로 이어지게 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 이런. 코멘트 리리플 해야 하는데 너무 말이 길어졌네요. 더욱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일단 여기서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공지했던 대로 16일, 17일은 쉬고 18일부터 외전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외전은 부분부분 진지한 이야기도 있지만, 대부분 탐험, 인재, 소소한 일상 등을 다루는 가벼운 이야기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일 연재가 아닌 자유 연재라는 점이지요.(혹시 올리기 힘든 날은 코멘트에 공지해둘게요.) :) 그리고 지금껏 따로 말씀은 드리지 않았지만.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러브 지수(성장 아이템? 맞나요?)을 주신 분들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복사 및 붙여 넣기 한 거는 양해해주세요! 너무 많아요!) 빨간달팽이 2013-11-14 07:35 ㅇㅅㅇ → 러브지수 감사합니다. :) 그런데 빨간달팽이 님. 요즈음 거의 대부분 ㅇㅅㅇ로 코멘트를 다시는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고 싶어요. :) 현오 2013-11-14 04:12 우헤헤헤 성장아이템 빛을 받아라!!!! 그리고 빛이 되어라!!!!! 愛로유진 만세! → 러브지수 감사합니다. :) 그리고 메모라이즈 문학 정말 잘 보았습니다.(저보다 잘 쓰신 것 같아요. ㄷㄷㄷㄷ.) 에로 유진이요? 네. 외전에 베드신 나옵니다. 고연주, 임한나, xxx(비밀!)중에서 고민 중입니다. 아니면 그냥 세 명 다 적어버릴까요?! 탄환 2013-11-15 01:00 이 질문의 산에서 질문하나 추가로 얹어두도록 하겠습니다 :D /제로코드로 빌 수 있는 소원은 단 한 개인가요?? 천사들이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말입니다.. → NO. 여러 개입니다. 다만 제로 코드는 이미 작품에 나온 것처럼 만능, 무한한 힘이 아닌 명백한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즉 제한되는 사항들에 대해서는 '정도'가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dddfaaaf 2013-11-15 00:58 질문양과 내용을 보니, 작가님이 안쓰럽다는 생각과 문뜩, 유명 연애인들 인터뷰 할 때 꼭 필요없는 질문을 하는 기자들 보는 기분. 왜 콕 찍어서 몇명한테만 질문받는지 알겠네 → 그래도 코멘트는 많은 게 좋더라고요. ㅎㅎㅎㅎ. 제일 힘들었을 때가 반응이 없을 때였어요. ㅜ.ㅠ TheDaybreak 2013-11-15 00:05 재미있게 보고 갑니다. ㅋ → 매일 똑같은 코멘트를 달아주셔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 저야말로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달빛조각4 2013-11-15 00:04 tmc님 글을 제대로 읽고 질문을 해야지 거의다 재대로 보기만해도 알수있는건데 → 괜찮아요 괜찮아요! 저는 괜찮아요~! 물빛앙금 2013-11-14 23:58 퍼스트 코드가 뭐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은.. 이걸 정말 질문이라고 하는건지 진짜 문맥상 이해를 못하는 난독증이라고 해야할지.... 이런걸 설명해야하는 작가님이 안쓰러울정도네요 → 아하하. 수현의 애절함을 드러내는 문장이었어요. 다만 제로 코드가 있는 만큼, 정말로 퍼스트 코드라는 게 있는지 궁금하셨을 거예요. :) 호기심은 좋은 거랍니다. 전체 코멘트 보기 | 393편 관리 | 수정 | 삭제 로유진(작가) 2013-11-14 23:58 오늘은 00:30분 이전에 올리겠습니다. 후후. :) → 야. 너 다음부터는 자정에 연재 좀 해라. 맨날 징징대지만 말고. 응. 알았어. 미안. Silversteel_Archer 2013-11-14 23:43 질문: 화정은 아이템처럼 사용되는데 다른 아이템들은 그럴 수 없나요? 예를 들어서 전에 빼버린 용클래스 정수를 화정에 먹인다던지 등등 → 그러면 화정이 싫어할 겁니다. 격 떨어진다고요. 지금의 화정은 격에 대해서는 완전 체라고 보시면 됩니다. Silversteel_Archer 2013-11-14 23:41 질문: 혹시 업적이나 칭호시스템 사라졌나요? 소설 초반에 도시 개척등등 한 사람들이 스탯포인트를 받았다고 했는데 주인공은 그것보다 훨씬 큰 업적아닌가요? 마법도시 반신살해나 악마2마리에 도시탈환 시크릿클래스 학살 등등 → 업적은 굉장히 까다로운 시스템입니다. 10년 동안 살아왔던 수현도 겨우 20개를 넘겼을 정도이지요. 그것도 대부분 아틀란타 이후로 얻은 업적이고요. 우연적 산물이 아닌, 홀 플레인의 흐름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일에 대해서만 업적이 성립됩니다. 그리고 그게 계획적으로 발생되었다면, 업적으로 평가될 가능성은 더더욱 높아지고요. 물론 예외는 있습니다. 초반 통과의례처럼 이벤트 성이 짙은 업적도 아주 없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TMC 2013-11-14 22:53 13. 제로코드라면 홀플레인의 시스템을 짜고 지구의 존재들을 홀플레인으로 이동시킨 천사들조차 죽일 수 있는 것 같은 암시가 나오는데 그 제로코드조차도 거주민을 지구로 이동 못 시키나요? → 1회를 보면 제로 코드의 사용 권한은 오롯이 김수현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발동은 천사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14. 마족들은 제로코드의 위치를 모르는건가요? 마족들에게 무한히 공급되는 사용자들과 전쟁을 벌여야할 이유라도 있는건가요? → 이 코멘트는 스포일러 가능성이 높으므로 말을 아끼도록 하겠습니다. :) me:ll 2013-11-14 22:47 ♡ → ♡ TMC 2013-11-14 22:41 11. 소원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요? 능력치를 올리거나 하는 것도 가능한가요? → 아니요. 불가능합니다. 초반에 김수현이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소원은 살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것이라고요. 범위가 넓다고는 볼 수 있지만, 밸런스상 제한이 심합니다. 12. 세라프의 타락과도 같은 암시가 있었습니다. 세라프는 신이고 신의 타락이라면 설마 마족들처럼 신위(?) 비스무리한걸 포기하게되나요? → 스포일러~. 스포일러~. TMC 2013-11-14 22:39 8. 왜 홀플레인의 거주민들은 지구에 갈 수 없는지 궁금합니다. 비록 사용자라는 존재가 되었다지만 지구의 존재들은 홀플레인에 오게 되었는데 거주민들은 제로코드까지도 쓰면서까지 지구로 갈 수 없는지 궁금합니다. → 간단합니다. 지구와 홀 플레인은, 근본적으로 다른 세상이니까요. 홀 플레인의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양방향의 성질이 아닌, 일방행적인 성질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어떻게 다르냐고요? 결말 때 나옵니다. :) 9. 소원을 사용하면 지구로 돌아갈 수 있나요? → 아니요. 돌아갈 수 없습니다. 10. 퍼스트코드는 뭔가요? 제로코드를 얻는다고해도 사용자들의 존재가치는 끝이 난게 아니고 퍼스트코드를 찾게되나요? → 하하. 아니요. 당시 수현의 애절함을 드러내기 위한 문장이었습니다. TMC 2013-11-14 22:34 6. 세라프의 반응이 심상치 않습니다. 설마 특전이 주어지면서 세라프에게 1회차때의 수현에 대한 감정까지도 계승된건가요? → 첫 외전을 보시면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 세라프에 관한 복선이 풀리거든요. 다음 주를 기대해주세요. :) 7. 천사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홀플레인에 있는 사용자들에게 직접적인 조치를 가할 수 없나요? 신위(?) 비스무리한 것을 포기한 마족들은 직접 홀플레인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된건가요? → 네. 자기 방어의 형태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스스로의 의지로는 행할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도우미들입니다. 뒤에 질문은 스포일러입니다. TMC 2013-11-14 22:29 3. 1회차 당시 수현이 거의 모든 마족들을 처리한 것 같은데 다른 사용자의 도움을 받았다고는해도 당시의 수현이 그렇게 강했나요? 만약 그렇다면 현재 수현의 전투력은 최고위 마족들과 비교해서 어떤가요? → 마족들과의 수현 혼자 싸운 게 아니라, 다른 사용자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수현도 당시 '강자'의 반열에는 들었었고요. 4. 현재의 수현도 1회차의 수현처럼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상태인가요? → 실제로는 경험상 그보다 약간 더 높은 경지입니다. 5. 몸의 상처가 1회차때 입은 상처인 듯한데 세라프가 준 특전으로 스테이터스를 계승할 때 1회차 때의 신체를 그대로 계승한건가요? 그럼 현재 신체 나이는 30대? → 그대로 로드 한 것은 맞습니다. 신체 나이는 사용자 정보에 따라 가장 최적화된 나이대로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TMC 2013-11-14 22:22 1. 2차 신의 방패가 통과의례에서 각성한 것 같은데 아무리 수현에 의한 나비효과라고는 해도 너무 많이 바뀐듯한데 설마 수현에 때문에 천사들의 행동에 무언가 변화가 생긴건가요? → 나비 효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변했다, 변하지 않았다. 이 소제목은 무척이나 의미가 깊은 소제목 이지요. 후후. 2. 타로카드 마술사가 점을 봐줄 때 시크릿 클래스의 권능을 사용한건가요? 그렇다면 그것은 운명이나 확정된 미래인가요? 아니면 가능성이 가장 높은 미래같은건가요? → 아. 이건 대답하기 애매하네요. 다른 것들은 확정된 미래이고, 분기점(갈래길 그림)이 나온 것들은 수현의 선택에 따라 바뀌어지는 것들입니다. :) 가입하기싫다 2013-11-14 22:03 그럼 질문입니다. 유니콘은 말과 같은 골격구조를 갖고 있나요? 유니콘이라 하면, 일단 말의 형태를 지닌 일각수가 떠오르는데 얘가 춤을 추지를 않나. 안기지를 않나. 어깨위에 얹지를 않나. 망아지의 외양을 갖고 있다면 뭔가 납득이 안 가는 것들이 있어 궁금합니다. 설마 그.. 포니? → 하하하! 포니라는 코멘트를 보고 한참 웃었습니다. 아직 유아기에 불과한 녀석입니다. 크기는 아직 성인 고양이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춤은 아마 셔플 댄스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그냥 완벽하게 췄다기보다는 비슷하게 따라 했다고 생각해주세요. :) 엄연한 신체 구조상 한계는 있습니다. 가입하기싫다 2013-11-14 22:00 덕분에 저는 진지하게 작가님의 본명은 로~(-_-)~미가 아닌가 고민중이지 말입니다. 아니! 설령 겉은 로유진이라 한들, 알맹이는 사실.. 로~(-_-)~미가 아닐까.. → 아닙니다. 로유진입니다. 로유진이에요! 가입하기싫다 2013-11-14 21:58 기묘한 형제애에서 오는 은근한 거부감만 빼면 참 좋았습니다. 네.. 근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김수현이 ...응 하고 대답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니, 형이지. 알았다. 알았어. 그래. 어. 이렇게나 많은데.. ...응.. 흠.. → 에이. 왜요. 형제끼리 우애 좋은 게 보기도 좋잖아요. :) 가입하기싫다 2013-11-14 21:54 아오.. 제길.. 다 봤다아.. → 고생하셨습니다! 묘지위에핀꽃 2013-11-14 21:02 잘보고 갑니다 → 재미있게 보고가세요! Gori506 2013-11-14 21:00 으아아아아앙 완결나면 가장 아쉬운 작품 중 하나가 벌써 1부완..! 작가님 좋은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ㅠㅠ 항상 너무나도 재밌게 읽고 있어요. 이 작품. 완결 내지 마시죠? → 네, 네? 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완결 안내면 어떡해요? ㅜ.ㅠ 아! 이런 방법이 있어요! 수현이 숨을 쉬었다. 그리고 오른발을 들었다! 다시 내디뎠다! 또 숨을 쉬었다! 바람이 불었다! 머리카락을 스쳤다! 휘날렸다! 다시 내려앉았다! 어때요? 좋죠?!(퍽퍽퍽퍽! @_@) 노트님 2013-11-14 20:50 그나저나 리리플 다시는데 무척 오래걸릴듯 하네요ㅋㅋㅋ → 지금 미소 듬뿍 머금은 채 달고 있습니다. 하하하. 아. 롤하고 싶다. 노트님 2013-11-14 20:49 이렇게 리리플을 달아주신다니 뭐라고 써야할지 으으 재밌게 잘 보고있어요. 음 현재의 수현에게 유현이나 한소영 정도의 비중을 가진 머셔나맄 클랜원이 있나요? 엘릭서 몇 병 없는데 몇회전에 그 엘릭서 쥐고 광휘의 사제 출현 때 안현 외 몇명 사용자 정보 확인하던게 생각나서요. → 수현의 입장에서 형이나 한소영만큼의 비중 있는 인물은 없습니다. 적어도 '지금'은요. :) 천성녀 2013-11-14 20:29 쥔공은 늘 뜸을 드리네여~확실히 이야기 해야지 왜 미루나여~? → 나름 이유가 있답니다. 이 부분은, 조금 이야기하기 꺼려지는 성질이에요. 후후. 삥뜯긴외계인 2013-11-14 20:07 아니, 사람이 아닌가? → 금발은 남 대륙 사용자가 맞습니다! 삥뜯긴외계인 2013-11-14 20:06 카드에서 수현의 적인 여왕. 남대륙. 금발. 오딘클랜 로드쯤? 되는 사람 or 사람들의 정보를 원합니다. → 금발 여왕은 남 대륙의 최고 사용자로 보시면 됩니다. 후후. 타락악마 2013-11-14 19:26 일러스트는 더 안나오나요? → 아. 이거 좋은 질문이에요. 그분도 학생이고 또 하시는 일이 계셔서 저나 그분이나 무척이나 바쁜 상태였거든요. 일단 방학 후에 다시 말씀 드려볼 생각입니다. 그래도 안되면, 다른 분을 찾을 생각이고요. :) 플라스마 2013-11-14 19:11 로.유.미 ㅋㅋㅋ → =ㅁ= LOVE가을 2013-11-14 18:06 능력치 102이상은 결국 안나오는건가요? 101 사욘자도 인나온거 같은데 → 헤헤헤. 아마 나온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인물은 수현이겠죠? :) hohokoya1 2013-11-14 17:26 질문3~~~ 현재 주인공이전쟁중 혼자서 거인및 불물 정령사부랑자 총대장및 서대륙 1인자를 혼자서 죽인것도알려 졌나여 ??? 정말궁금 합니다 답변 꼭좀 부탁드립니다 → 네. 전부는 아니더라도, 하나하나 서서히 알려질 생각입니다. 그와 동시에 머셔너리의 비상도 시작되겠지요. :) hohokoya1 2013-11-14 17:25 질문2 ~~~ 총연재편수를 여러번 600화정도로 종료 하신다고 이야기하셨는데 초반이 400화면 너무 급하게종료 되는것아닌가생각되네여 예상편수 계획도 답변부탁여 개인적인생각은 천편은가야 되지않나 생각하는데 작가분판단 꼭듣고 싶습니다 연재는느려도 상관없습니다!! → 600회 완결은 제 소원이고요. 스스로 생각해도 힘들지는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1000회는 조금 무리이고, 아무튼 잘 조절해보도록 하겠습니다! hohokoya1 2013-11-14 17:21 질문1 ~~ 조아라랑계약은e북만된건가여??? 아님조아라도 종이책출간하던데 종이책도계약된건가여 ??? 책나오면살려고대기중입니다 ㅎ ㅎ → 죄송합니다. 그리고 강xx 편집자 님 죄송합니다. 원고 독촉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려요. ㅜ.ㅠ 밤12시는축복 2013-11-14 16:58 1) 안솔이 '광휘의사제' get 한거 클랜원들이 알고 있나요? 2) 안솔의 사용자 정보 알고 싶어요. 고유능력(=기적), 특수능력, 잠재능력 등등? 3) 외전=>자유연재라 하셨는데 대충 언제쯤 나온다는 정도는 미리 알려주시면 감사. 4) 외전에 주요 인물(클랜원+등등)들 사용자 정보 한눈에 볼수 있게 한편 써주심 좋겠어요. 5) 유현아 죽였다면 '사용자 살해' 아닌가요? 잡음없이 처리 될 수 있었는지... → 1) 바로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2) 외전 때 올려드릴게요. :) 3) 11월 18일(월요일)부터 자유 연재로 연재될 예정입니다. 4) 하하. 한 명씩 차분히 적어 보이겠습니다. 5) 주인공에게는 화정이 있지요. 시체는 말끔히 태운 상태입니다.(당시 주변 기척은 모두 끊긴 상황이었고요.) 프랑코 2013-11-14 16:46 근데 성직자 아저씨 한분 영입하지 않았나요? 계속 언급이 없길래 궁금하네요 → 존재감이 없지요? ㅜ.ㅠ 네. 그렇습니다. IPrin 2013-11-14 16:41 초토화된 5개의 도시는 서부의 도로시, 베스, 헤일로, 대도시 바바라와 북부의 뮬로 알고 있지 말입니다. 부랑자들이 굳이 뮬을 점령할 이유가 없어보이는데 과거 1회차와 달리 부랑자가 어떤 전술점이점도 없어보이는 뮬을 점령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시선을 끌기 위해서였습니다. 부랑자로 뮬로 먼저 시선을 돌리고, 그 다음 서부의 소도시 두 개를 급습한다는 계획이었지요. 감자띱 2013-11-14 16:30 4. 이번 서대륙 사용자 대화, 능력치창 이름을 영어로 작성 하셨는데 앞으로 동대륙 즉 일본 사용자들을 일본어로 대화, 능력치창 이름을 쓰실건지 궁굼 하내요 사실 서대륙 사용자 말 할때 영어로 쓰셔서 걱정 했습니다. 이런 논리면 동대륙 사용자의 일본어로 쓰셔야 되는데 쩝 사실 서대륙 애들이 영어로 말 할때 글 읽다 집중이 안되서 아쉬웠습니다. → 그렇군요. ㅜ.ㅠ 중간에 한글로 바꾸기를 참 잘한 것 같네요. 하하. 까르 2013-11-14 16:25 갠적으로 상용이형 살리는건 그다지 반대는 아닌데 비비앙을 상용이형한테 주는건 절대 용납할수가 없습니다.. 비비앙은 수현이꺼라고!!!!! → 네, 네! 알겠습니다. 둘은 영원히 스승과 제자 관계에요! 그러니 신상용은 연금술과 결혼하는 걸로!(응?) 제르미스 2013-11-14 16:17 로*미? → ? 예니카 2013-11-14 16:07 알면서 안가르쳐주는건 너 한번 엿되봐라 같은데ㅎㅎ 굳이 안가르쳐주는 이유가 있나모르겠음 → 수현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 그렇겠지요? :) 미닛슈 2013-11-14 15:47 이 엄청난 스케일과 대단한 소설... 난 이런 것을 원했노라 핰핰핰 언제나 봐도 재밌다. 폰을 잃어버리고 잠자기 전에 귀찮지만 컴퓨터를 켜서 꼭 보고 잔다 후후훗... 사랑합돠 → 감사, 또 감사해요. 저도 사, 사, 사, 사탕 드실래요? (__ )* 감자띱 2013-11-14 15:44 1. 추후 들어 올 신규 사용자 상당수 1회차와 변경 되나요? 예로 작가님이 언급 하셨던 101마력 사용자, 진수현 등 2. 2부 시작은 혹시 강철산맥 진군과 함께 시작인지 아니면 강철산맥 공략 후부터 인지 궁금합니다.물론 후자면 외전에서 나올지. 3. 2부에서 주요적으로 지옥놈들과 악마들이라고 하셨는데 이런 괴물들과 북대륙만 싸우나요? 아니면 전대륙 사용자와 같이 싸우나요? 스포일러 라고 생각 하시면 답변 안하셔도 됩니다. → 1. 거의 비슷하게 진행되면서, 중요한 것 몇 개는 변경됩니다. 2. 강철 산맥 공략 직전부터 시작합니다! 3. 후후. 그 이상을 보시게 될 겁니다. :) 피씽 2013-11-14 15:43 부랑자 총사령관이 누군가여? 현은 창이고... 시몬만난 부랑자는 낫이던데... !?! → 만세! 만세! 네! 잘 보셨어요! 총 사령관은 바로 그 낫을 든 부랑자입니다! 전투 중 일찌감치 도망쳤지요! 나나단 2013-11-14 15:35 음? 방금 석달 결제하고 왔는데.. → ?ㅇ? 비켜봐 2013-11-14 15:13 쥔공이 10강에 오르지않을까요? 활약도가 장난없었는데 몇몇은 직접도 봤겠다...ㅋㅋ → 후후. 지금 북 대륙은 실의에 빠져있습니다. 그것을 채우려면 영웅의 출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널위한결제 2013-11-14 15:13 글고보니 진수현은 김수현보다 일년 늦게 왔다는데 2회차는 예상 못한 대량 신입 발생으로 안 오겠군요 → 그래도 진수현은 나와야겠지요. 피씽 2013-11-14 14:48 2부에서는 클랜간 갈등 악마들과 부비부비?등 쓰실거 같으신데..스케일이 커지겠네요~클랜원도 꽤 많이 늘겠고..그럼 요기서 궁금한점!!뿌려놓으신 떡밥이나 각 케릭터 특성 살리시는걸 좋아하시는 작가님 2부가 꽤 길어질거 같아서요'악명높은?북부대륙?용병왕 유정양.안솔 정신관련?세라프 대형떡밥..정령술사 관련.검후.진수현! 던전공략등!'신산용만 봐도 분량이1~2편으로 끝나지 않을거같은데요.. 외전형식으로 풀어 나가시나요..?아니면 본편으로..?완결 짧게 잡으셨던거 같은데..두리뭉실 하게 흘러가려나요..ㅠㅠ → 중요한 것들은 확실히 풀을 예정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라디에르[ 2013-11-14 14:36 앞쪽에 보니 연차 실력 명성 모두 일정 기준을 넘어야 10강에 들어갈 수 있다고 답변하신적이 있네요... 유현은 충분한 자격이 된다 하셨으니 2년차는 가능하고, 수현이 새로운 예외가 될지, 아니면 수현을 위해 한자리를 비워둘지, 아니면 일단 다른 사람이 되고 2부 시작때 10강에 들어갈지 궁금하네요ㅋ → 10강 자체가 사용자 정보는 물론이고 명성 등 여러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얽힌 칭호입니다. 수현이 정도면 솔직히 10강도 아까운 수준이지 않을까요. 하하. 피네이로 2013-11-14 14:04 그리고 이제 차기 10강이 정해질텐데 10강 한번 알려주세요. 김수현 김유현 고연주 연혜림 서진우 정도는 들어갈 것 같고 나머지 5명이 궁금해요. → 근력 101 사용자, 남다은, 선율, xxx, xxx입니다. 피네이로 2013-11-14 14:02 그리고 제 생각에 회귀로 얻을 이점은 이미 글에서 다 소진한 것 같네요. 1인칭이 글에서 한계로 느껴집니다. 여지껏이야 회귀물이라는 특징을 살리는데 1인칭이 좋았을 지 몰라도 이미 머셔너리가 상위권 클랜으로 자리잡은 이상 전지적으로 돌려서 거시적인 관점으로 서술해야할 것 같네요. 글이 후반에 오면서 단순해지는 느낌이라서 스케일이 커지는데 한계로 작용하는 것 같아요 → 그래서 2년이라는 시간을 스킵한겁니다. 아무리 재미있는 내용도 자꾸 나오면 질리기 마련이지요. :) gotobooki 2013-11-14 14:01 아기유니콘...결국 이름은 뭔가요? 성별은?ㅋㅋ → 이름은 유美. 성별은 암컷입니다. :) 피네이로 2013-11-14 13:57 안현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밝혀야죠. 어떻게 알았냐고 하면 자기도 어디서 들었다 아니면 책에서 봤다 정 안되면 세라프가 가르쳐줬다.라고 하면 됩니다. 알면서 안 가르쳐줄 이유는 없는데... 검후야 들어올꺼라고 믿습니다. 근접유저가 부족한데 김수현 혼자만 하는 것도 아니고 클랜에 적격이죠 멍청하게 다 꼬여놓고 놓치지는 않겠죠. → 해당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게 간단하게 밝힐 성질은 아닙니다. 남다은이야 이미 암시를 많이 던져둔 상태입니다. NeoGGM 2013-11-14 13:50 미리 다는 뎃글. 1부 수고하셨습니다. 2부 기대할께요 → 감사합니다. :) NeoGGM 2013-11-14 13:49 덧.Aㅏ... 결재하니 쉬시는 작가님 ㅠㅠ → 하하하. 저도 휴식이 필요하답니다! NeoGGM 2013-11-14 13:48 항상 궁금하던게 왜 작가님 별명이 로*미.인가요? 어쩌다 *유*가 됬는지 궁금해요ㅎㅎ → 네? 그게 누구에요? 저는 처음 듣는 이름인데. 이름 예쁘네요. ㅎㅎㅎㅎ. ㅎㅎㅎㅎㅎㅎㅎㅎ.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데바란 2013-11-14 13:48 늘 기쁜 마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 잘 정리하면서 건필 하시길~ → 감사합니다! 교수님! 저 요즘 과제가 너무 많아요. 엉엉. ㅜ.ㅠ 카이혼 2013-11-14 13:48 그냥 한달푹 쉬고 10연참으로 시작을?! → 사, 살려주세요. 쉬, 쉬는 것만 하는 건 안될까요? >< 하이요 2013-11-14 13:28 이글에 대한 개인적인의견인데 등장인물이 너무 많고 개인의 생각까지 나옵니다 그래서 글을 보다보면 모든인물의 생각을 알고있으니 인물들의 행동보다 답답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들자면 이런겁니다 우리나라선수가나오는 스포츠중계를 하는데 자꾸 다른외국 선수들끼리 하는 경기를 보여주면 짜증이 나겠죠 물론 경기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할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중계를보는 분은 우리나라선수경기를 보고싶겠죠 결론:주인공분량좀 늘리고 주변인 분량좀줄여주면... → 오호라. 그렇군요. 2부 연재 때 참고할게요~!(그런데 지금 구상된 거로는 처음 1~3회는 다른 사람들 시점이 나오는데요. ㅜ.ㅠ) chalgaro 2013-11-14 13:05 아..물어볼꺼 진짜 많았는데 정작 물어보라니까 기억이 안나요 ㅠㅠ → 자! 여기 물으세요! 팔을 물으셔도 됩니다! 아니면 허벅지?(농담입니다!) 천겁혈신천무존 2013-11-14 13:04 으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헣 로*미만 아니면 리리플 해주시죠? 그럼 사진 주세요!! 주소 알려 주세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가 유일 것 같으므로 무효입니다! 하하하하! zorney 2013-11-14 13:01 뀨뀨이름은 뭔가요? → 유美입니다! 마도의서 2013-11-14 12:38 흠 지구로 귀환 못한다고 하면 기분이 어떨지 생각하면 어느정도 공감이 가내요 → 그토록 같이 가고 싶어했으니까요. 후후. Cheetos 2013-11-14 12:20 노유미를 왜 죽였음!! ㅠㅠ → 죄, 죄송합니다. _(__)_ 능수버들 2013-11-14 12:13 그냥 사실대로 100만 gp로 부활시켜도 그순간 홀플레인으로 귀속되어 지구 귀환을 할수없다는 사실을 밝히면 안되나요? 그게 왜 숨겨야할 비밀인지 모르겠네요.. → 음. 외전에서 한 번 밝힐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면 후기도 괜찮을 것 같고요. :) 고룡의반란 2013-11-14 11:52 오메 ㅠㅠ 돌아왔더니 휴재라니 뀨뀨! → 뀨뀨! 뀨뀨뀨뀨! 뀨뀨뀨뀨뀨뀨뀨뀨! 락시아 2013-11-14 11:35 엉엉 → 우, 울지 말아요. ㅜ.ㅠ 수라 2013-11-14 11:11 셰라프에게 들었다고하고 상용이살렫ᆢ 못데려간다고 말하면 안되는건가요 ? → 아.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시네요. 설명을 위해 외전에 넣는데 긍정적으로 생각해볼게요. :) 휘네아 2013-11-14 11:08 검후는 머셔너리에 오려는 필인데 ㅋㅋ 수현아 왜 니눈치는 여자상대론 안나오니 ㅎㅎ 아아 그리고 1부완결 축하드려요! → 수현이 눈치 좋습니다. 다만 이상한 데만 좋은 편이죠.(?) 감사합니다! Lizad 2013-11-14 10:49 2주도 길엉!엉엉엉 ㅠㅠㅠ → 그럼 아쌀하게 2달은 어떠세요! 콜?! 열정을 2013-11-14 10:49 근데 회귀하면 이전 세상과는 다른 평행세계인건가요? 아니면 그런거없이 모두 다 처음으로 돌아가는건가요? → 현재 구상으로 답변 드리면, 손해 보는 사용자가 나옵니다. 이 부분은 아직도 고민이 많아 조율 중에 있어요. ViaLatea 2013-11-14 10:32 수현은 언제쯤 체력101찍나요?? 그리고 작가님 러브합니다!!! → 후후후. 언제 찍을지는 이미 구상해뒀습니다. 저도 사, 사, 사, 사과 드실래요?! 하얀백곰 2013-11-14 10:14 귀환할시 포멧됨.. 외전재미나겠다 → 외전재미 : 네! 저 여기 있어요! 부르셨어요?!(죄송합니다. 퍽퍽! @_@) 커피? 2013-11-14 09:46 잘보고갑니다. 고생하셨어요 →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 Mr.child 2013-11-14 09:44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단 한번도 코멘을 받아본적이 없어 코멘 받고 싶어서 달게되네요 작가님 파이팅 → 아하. 죄, 죄송합니다. 리리플리 랜덤으로 뽑다 보니. ㅜ.ㅠ 응원 감사해요! elekdl66 2013-11-14 09:44 질질 끌지마 → 쳇. 알겠어요. 노력해볼게요. '3' 금빛천사 2013-11-14 09:44 배고파요 밥주세요 → 네, 네? 어떤 밥 좋아하세요? 저 라면 잘 끓이는데. >< dkapqk 2013-11-14 09:43 작가님1부 잘봤어요 진짜 수고하셨습니다 보는동안 정말 재미있었어요 푹쉬고 2부에서 뵈요 화이팅입니다 → 감사합니다. 충전 많이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런데 시험 기간이라서. ㅜ.ㅠ hohokoya1 2013-11-14 09:37 고생하셨 습니다 2부 기대합니다ㅎ → 항상 응원 코멘트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2부는 저도 걱정 반 설렘 반이네요. 후훗. Giㅡ 2013-11-14 09:06 ㅎㅎ수고많으셨습니다~2부도잘부탁드립니다~ → 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메를리위 2013-11-14 09:00 1부 수고하셨습니다!! 기말 끝나고 오셔도 돼요, 몇번이고 정주행 할게요... 그리고 신상용 살았으면 합니다.. 홀플레인이라도 더 행복할거 같아요.. → 저, 정주행. ㄷㄷㄷㄷ. 신상용은 아마 금방 나오지는 않을 거예요. ㅜ.ㅠ 그런데 요즘 유리켄느 님께서는 평안하신가요? 빗방울소리 2013-11-14 08:42 Aㅏ.....결제했는데 휴재라니요...ㅋㅋㅋㅋㅋㅋㅋ → 암 쏘 쏘리 벗 알러뷰 다 거짓말! 활의강 2013-11-14 08:23 아... 신상용을 비비앙한테 줄려고 비비앙이 대쉬해도 주인공이 안받아주는건가 그럼안되는데 찰진엉덩이가 ㅜㅠ → 아마 외전에 귀인이 한 명 나올 예정입니다. 재미있으실 거예요. 루나시인 2013-11-14 08:14 현 수현은 힘을 역이용하는 검술(이화접목) 덕분에 힘 101사용자는 극복가능. 마술사 계열상대론 검술 전문가의 권능으로 인해 우세인데 처음에 민첩101을 올리고 싶어했던 이유가 이형환위 등 경신술과 보법위주의 빠른 전투를 선호하는 수현의 입장에서는 자신보다 빠른속도를 극복하기 힘들어서 인가요..?(100과101의 차이는 엄청나다고 하셧으니..) 만약 수현이 양패구상의 마음으로 전력을 다한다면 타 사용자들과 격이 다른정도인가요?(1회차때 10강들과 비교했을시) → 수현의 가장 큰 무기는 상식을 파괴하는 무력에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검과 검이 맞대면 불꽃이 튀어야 정상인데, 수현의 경우는 아예 자르고 들어가버리니까요. 그리고 몸 곳곳에 심어진 비장의 무기들과, 풍부한 어빌리티는 그러한 전투 능력을 더욱 효율적으로 증폭해주지요. 간단히 말씀 드리면. 화정을 제대로 사용했을 경우 10강 전원이 다 덤벼도 수현이 이깁니다. 정근 2013-11-14 08:09 문득 든 생각인대 신상용 부활하면 지구에 있는 신상용이 오는것 아닌가 설마 아니겠죠 → 에이. 그건 아니에요. ㅋㅋㅋㅋ. 플룻 2013-11-14 08:01 비엔//마지막으로... 다들 로유미에 대해서 많이 기억을 못하는데.. 왜 ..로유미(로유진)양은.... 또 잊을만하면.. 오히려 불을 만드시는지.... 은근히 츤데레같다는.. ㅋㅋㅋㅋㅋㅋ.....확실히 괜히 즐기는듯.. 느낌이 드는 ㅎㅎㅎ →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언제나 그 이름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인간이지요. 플룻 2013-11-14 07:59 그리고 마지막에 언급되는게... 다죽고 혼자서만..... 살아 남는것으로 언급되어있는데 과연 지구에와서 제정신으로 살수가 없을듯하네요.... 흔히 말하는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만 가지고 있는것이 아닌 현실(기억못하면서살아있는동료) 과 과거( 형을 포함해서 싹죽어버린 동료)의 괴리로 정신분열로....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저상태로 1회차때 혼자 지구로 온다면 정신병원행일듯하네요...김수현도 그사실을 감지하고 있으니 다같이..살려서 지구로 온다는 목적으로 다시 과거로 회귀한듯하네요...최소한 형과(가족) 사랑하는사람(애인)이 기억을 같이 공유하고 지구로 온다면 그 처절한기억과 아픔을 서로 나누어서 자기가 지구에서 살수 있을것 같기 때문일듯...아마 김수현이 그것을 느꼈을듯하네요..지구에 와봤자 기억못하는형과 한소영을 본다면 결국 자신이 미쳐버릴듯한것을 안듯... → 이 코멘트 보고 뜨끔하네요. 플룻 님은 정말 날카로우세요. 비엔 2013-11-14 07:56 신상용씨는 살아나서 지구귀환불가능하다는걸 알아도 잘 이겨낼꺼같아요. 정신적으로도 안정을 맞이하고 죽었고... 홀플레인엔 스승님인 비비앙도 있으니까요...빨리살리진 못하겠죠? 조화의 마방진이 좀 아까운데..그런데 로유미가 뭔가요? 작가님 후기보고 궁금해졌어요. ㅋ → 아쉽지만 빨리 살리지는 못해요. ㅜ.ㅠ 로유미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 다른 분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ㅇ? 플룻 2013-11-14 07:54 이자젤// 님같으면 10년동안 용병 짓하다가 동료들 다죽고 한국에 왔는데 그 용병의 클론(복제인간)들이 한국에 버젓히 살아있고 자기는 그 험한 기억을 가지고 한국에 혼자 자기는 기억하는데 뻔히 얼굴 똑같은 형과 같은 클론이 있고 그 형은 클론이라서 그기억을 하나도 못하고... 혼자만 험한 기억을 가진다면.... 아마 미쳐버리지 않을까요????이해가 되는데요?? 차라리... 한국에 클론이 없다면.. 아.. 추억속에 .. 그대들이겠지만... 아마.. 얼굴 뻔히 죽은사람이 보이면서 그기억을 못하는 ....그런상황이라면 미쳐버릴듯..... 현실 적응을 못해서.... → 많이 슬프겠죠. 저라도 견디지 못할 것 같아요. ㅜ.ㅠ 하루지온s 2013-11-14 07:51 씨..씬좀... 고자설이 맴돌아; → 외전 때 나옵니다. ㅋㅋ. 알리 2013-11-14 07:49 항상 재밌게 잘보고 있어요~~ 감사해요~~ → 재미있게 보아주셔서 감사해요~. :D 플룻 2013-11-14 07:48 분명히 모니카 와서 이스탄텔 로우 클랜가서.. 난... 머셔너리 갈래요 할듯 ... 그리고 외전으로....... 검후 겟.. 아마 검후........ 김수현이한테 뿅간듯. ㅋㅋㅋ →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플룻 님 ㅋㅋㅋㅋ. 아 정말 ㅋㅋㅋㅋ. 이러시면 아니 되요. 플룻 2013-11-14 07:47 sky// 1회차때 김수현은 .. 죽을 고비를 어마어마하게 넘긴것으로...그리고 별로 능력이 없었는데... 어케어케 하다가 살아남다가.. 보니..... 살아남은 자가 위너지만...그것을 반영한것으로........ 생각되네요 ^^ ... 다딸리니 어거지로 움직이니 민첩이 올라가고 줘터지다보니 내구가 올라가고 ^^ 대충.. 중간중간 회상신보면.... 예상되는듯.. 하네요 ^^ → 한때 메모라이즈를 완결하면 1회 차를 차기 작품으로 생각한적도 있었죠. 지금은 아니지만요. ㅎㅎ. 플룻 2013-11-14 07:44 아..... 마지막이 압권 .... 로x미....언급한 리플은 무플하겠삼~~~~~!!!!!!!!!!!!!!!! ..... 은근히..... 유미틱함...... 뒤끝 작살..... 애교 만점. ^^ → 헐. 저는 진지합니다. 궁서체에요. 빨간달팽이 2013-11-14 07:35 ㅇㅅㅇ → ㅇㅅㅇ? 센서티브 2013-11-14 07:31 공교롭게도 연재가 멈춘 순간 제 3개월 이용권도 끝이 나네요. 15일까지 거든요. 헤헤. 푹~~ 쉬시고 상쾌한 마음으로 돌아오셔요~ → 네! 시험이 끝나면 제 마음도 상쾌하겠죠? 하늘에서뚝딱 2013-11-14 07:29 만약에 올리플 리리플하신다면 이거만 적으시는데 몇일 걸리실듯..ㅋㅋ 우선 힘들게 달려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애초에 기본 시놉은 정해져있눈걸로 아니..우선 궁금한건 내일 에피소드 보고 ㅎㅎ → 지금 딱 절반 적었습니다. 1시간 정도 걸렸네요. ㅋㅋㅋㅋ. 어떡하죠. skylab 2013-11-14 07:24 음 1회차때 수현을 보고 개인적으로 생각한건데 민첩을 제외하면 내구 능력치가 비정상적으로 높죠. 그리고 능력를 개화할때도 쓰러질 수 없는 과 백병전이 나왓는데 백병전은 말이 백병전이지 난전이란 소리거든요. 각설하고 저 두 능력과 비정상적인 내구수치는 수현이 1회차때 얼마나 굴렀는지를 반영한건가요? → 수현이는 구른 정도가 아닙니다. 아주 관계가 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2년 차에 대부분 개화되는걸 생각하면 스스로 길을 잘 걸어갔다고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 야베스 2013-11-14 07:21 중간에 두번정도 10등 안에 들었는데 리리플 안달아 주셨는데 리리플기준이 뭐였던가요? → 암 쏘 쏘리합니다. 무조건, 랜덤입니다. ㅜ.ㅠ eigba 2013-11-14 07:21 작가님 제가 아는 작가님이그러시는데 2주도길데요 그러니깐 1주후에 본편도같이..ㅋ...ㅎㅎㅎㅎ → 에헤헤. 에헤헤헤. 살려주세요. OTL 오피투럽19 2013-11-14 07:13 ㅋㅋㅋㅋㅋㅋㅋ 코멘트에 로유x 로x미 x유미가 들어가면 안되는건가요?ㅋㅋㅋㅋㅋ 흐음---, 저 근데 작가님, 지금 소문이 난게, 혹시 누군가가 이전화의 장면을 목격한건 아니겠죠?(?) 유현아를 죽인 장면을 목격하고 소문으로...(?) → 에이. 수현이잖아요. 시체는 화정으로 말끔하게 처리했습니다. :) 파카사리 2013-11-14 07:12 적어도 1부 마지막에는 김수현이 2회차라고 클랜원들한테 말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네요... → 클랜원들한테 말하기는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ㅎㅎ. -yS- 2013-11-14 06:46 최초로 3회 정주행할정도로 애착있는 소설입니다 작가님을 응원합니다 ㅠ 아직 대학생인데 어찌 이리 글을 이리 잘쓰시나요 20대 후반인 제가봐도 그리 깊이가 모자라지 않습니다 중고딩들 양산 판타지가 난무하는 점점 퇴행하는 조아라에 한줄기 빛이 되어주세요 미궁의 들개, 메모라이즈 화이팅!! → 가, 감사합니다. 과분한 칭찬이세요. (__ )* 천냥보은 2013-11-14 06:36 로유미가 들어간 코멘트는 제외하겠다니;;;;;!? → 험험. 그, 그래도 지금은 모두 달고 있답니다. :) 보리볕 2013-11-14 06:31 비비앙과의 그일?은일어나지않는건가요?? 변화시킬그일... → 후후. 언젠가는 일어나겠지요?! namdab 2013-11-14 06:14 생각나는게 내용밖에 궁금하지 않아서 그냥 대천사와 대악마 이름이나 말씀좀... → 천사는 가브리엘, 미카엘, 라파엘 등등. 악마는 사탄, 리리스, 벨베부브 등등. 많이 들어본 이름이시지요? 플레이어드 2013-11-14 06:06 그럼 12월 중반부터 2부인가요? → 네! 정답입니다! Stacato 2013-11-14 05:40 화정급의 다른건 없나요? 뇌정이라던가.. 있어도 스탯이 안되면 다루기가 힘들겠지만 → 후후. 첫 외전에 해당 내용에 관해서 나올 예정입니다. 이비앙 2013-11-14 05:38 신상용을 살려도 지구로 같이 돌아갈 수 없는데 신상용에게 홀 플레인에 혼자 남는 고통을 안겨줄 자격이 너에게 있냐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 아무래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한 설명이 들어가야 할 것 같군요. 하하. 간지남이돌아왔다 2013-11-14 05:16 그리고 머셔너리 클랜의 최대인원은 몇명정도끼지 생각하시는지도 좀... 궁금하네요 → 100명입니다. :) 간지남이돌아왔다 2013-11-14 05:15 남다은도 머셔너리에 가입시키는게 옳지 않을까요. 소수정예라는 특성상 저 이상 가는 동료도 찾기 힘들텐데. →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열정을 2013-11-14 05:09 유현아는 결국 죽었나요? 직접적으로 죽었다는 언급이 없어서 안죽였을 것같기도 한데. 유현아를 죽이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김수현에게 갈림길이라 생각했거든요. 유현아가 죽지않았다면 그건 김수현이 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김수현 성격을 보아하건데 가차없이 죽였을 것같기도하고 → 예! 죽었습니다! ㅜ.ㅠ hohokoya1 2013-11-14 05:08 쉴때는 푹쉬시고 학교공부도잡으시기를 ^^ 화이팅 → 감사해요! 열심히 할게요~! hohokoya1 2013-11-14 05:06 최고다라고밖에말못하겠네여 ^^ → 언제나 응원 코멘트 달아주시는 것 감사히 보고 있습니다. :) hohokoya1 2013-11-14 05:05 고생하셨습니다 → 완결짓고 나니 많이 뿌듯합니다. :D 빙뢰(氷雷) 2013-11-14 04:54 통과의례때 남자한명 여자한명을 데리고 통과한 범죄자녀석의 얘기가 잠깐 나온다더니 까맣게 잊고있었네요.. 그녀석은 어떻게 통과의례를 버텨냈을까요 → 박동걸, 이보림, 이신우. 셋 다 외전에 나옵니다. 어떻게 나올까요? 흡냐 2013-11-14 04:49 화정보다 더 높은 격을 지닌 불이 있나요 → No. 화정의 태초의 불입니다. 다만, 동급의 불은 있습니다. 흡냐 2013-11-14 04:48 노유미 살려내요 ㅠㅠ → 엉엉. 노유미가 죽었어요. 엉엉. 우헤헤헤(?). 닥스베이더 2013-11-14 04:47 수현의 원래 직업의 주인은 2부에 나오나요? → 네. 진수현. 나오지요! 흑월인혼 2013-11-14 04:19 아는작가 짱짱맨 → 짱짱맨! 현오 2013-11-14 04:12 우헤헤헤 성장아이템 빛을 받아라!!!! 그리고 빛이 되어라!!!!! 愛로유진 만세! → 현오 작가님! 메모라이즈 문학 잘 보았습니다. 러브 지수 감사해요!(지금 리리플을 올렸다가 너무 길어서 중간에 끊겼어요. 그래서 지금 줄 조정 및 공간 확보고 메모라이즈 문학 내용을 어느 정도 삭제했습니다. 양해 부탁해요. ㅜ.ㅠ) 현오 2013-11-14 04:10 팬픽입니다! 메모라이즈 문학 - IF 신상용이 3월의 라이온을 봤다면- 눈을 감자 주위가 성대한 파티장의 조명과 같이 환하게 빛난다. 수많은 빛나는 조각들이 주위를 맴돈다. 눈이 부셔서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다. 그래서 눈부신 곳에서 방향을 틀어 조금은 빛바랜 곳을 마주한다. 흐릿해진 조각들, 그 조각들이 궁금하다. 더 다가가서 살펴본다. 그 조각들은 붉고 새하얀 흐름의 연속, 매캐한 향,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정도로 구겨진 자동차, 그 주위를 둘러싼 검은 아스팔트. 자동차였다는 것을 상상하기 조차 힘들정도의 물체사이로 붉은 액체가 웅덩이를 만들고 있고, 웅덩이 위에는 두개의 인형, 그 두 인형사이에 작은 아이하나가 있었다. 아이는 자신을 감싸고 있는 존재가 차가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아직은 따뜻한 숨이 느껴진다 생각한다. 파르르 떨리는 눈을 들자 한 존재와 눈이 마주친다. 주위에 비해 너무도 차가워진 붉게 물든 손이 아이의 머리를 훑는다. 검붉은 얼룩이 더럽힌 입이 열렸다. '상용아. 살아남아라.너만큼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각들이 깨져나간다. 새카만 어둠이 보여 다급한 마음에 다른 방향을 향한다. 보랏빛 조각들이 빛나고 있다. '얼레리 꼴레리. 얼레리 꼴레리. 말더듬이래요. 말더듬이래요...' 사라진 조각들과는 다르게 여러사람들이 보이고 있다. 하하핳/ 愛로유진님 드디어 1부가 끝났네요, 참 수고하셨습니다. 언제나 고마웠어요! 이제 외전과 2부에서 봐요!!! → 모두 좋았지만, 특히 첫 도입부가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이걸로 교체하고 싶을 정도에요! 하류아 2013-11-14 04:09 비비앙과는 1부에선 이렇게 끝인가요ㅠㅠ 개인적으로 제일 기대했는데 → 헤헤. 곧 귀인이 나올 예정입니다. 수현을 일깨워줄 귀인이지요.(?) 비켜봐 2013-11-14 04:08 이정도 분량에 이정도 스토리에 이정도 재미란......대단하네요... → 감사합니다. (__ )* BloodArk 2013-11-14 03:52 음 그럼 1부 완결후 임시 휴재라는게 되겠군요. → 네. 지금 제가 해야 할 것들이 조금 쌓여있어서요. 주말에 쉬면서 싹 다 처리하게요. 소그 2013-11-14 03:38 잘봤습니다 ㅜ 신상용이 죽은게 참 아쉽군요. 그리고 로x미 들어간 코멘은 답변안하신다고 하셨는데 ㅎ 일단 물어는 볼게요. 처음에 다른 작가님의 말때문에 생긴 별명인데요. 사실 진심으로 작가님이 여자라고 생각하는 독자는 없을거고 다들 장난스럽게 부르는것 같은데 로유진님은 진짜 진심으로 그렇게 부르는게 싫으신건가요? → 처음에는 장난이라고 생각해서 받아넘겼는데, 그게 종종 도를 지나친 감은 있더라고요. 다만 관심의 일부라 생각해 그냥 감사히 웃고 넘겼습니다. :) 우주땅하늘땅별땅 2013-11-14 03:37 주인공이 기척을 못느끼다니 암습당하면 바로 죽겠네 왜케 물러졌져 → 에이. 전장은 아니잖아요. 생각에 빠져있었고요. 하하하. 천사의사정 2013-11-14 03:36 비밀이긴하지만 지금까지처럼 어떻게든 알았다고 해서 소원으로 살릴시 현실로는 못간다는 걸 알리는게 낮지않을까 하는데.. 아니면 형에게 말할때 클랜원들도 같이 말하면 되지않을까요?? 괜히 희망고문하는게 맘에들지 않아서 끄적에 봤어요 예전 스포가 있어서 현실로 안가고 남을꺼같지만.. → 음. 저는 클랜원들에게 아주 돌아왔다는 사실을 밝히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삥뜯긴외계인 2013-11-14 03:20 클랜 랭크가 높을 수록 얻을 수 있는 혜택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 어느 클랜의 전력을 가늠할 때, 인원, 10강의 유무, 업적, 실적 등 수많은 요소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 중 클랜 랭크(Clan Rank)란 바로 업적 그리고 실적을 통해 이루어지는 '설정상'의 판단 기준으로 보시면 됩니다. 즉 클랜 랭크가 높을수록 그만큼 홀 플레인의 흐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겠지요. 아무튼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고 딱히 특별한 이득은 없습니다. 다만 아주 당연하게도 클랜 랭크가 낮은 클랜보다는 높은 클랜이 활동(신규 인원 모집 등.)에 여러모로 유리하겠지요. (45회 수정했습니다.) dkeogu2001 2013-11-14 03:19 잘 봤습니다. 작가님 건필 하시고 쉬는 기간동안 푹 쉬시고 오세요 ㅎㅎ 쿠폰 투척하고 갑니다. → 쿠폰 감사합니다. 시험 끝나고 상쾌한 마음으로 돌아오겠습니다! dgfdgzvc 2013-11-14 03:17 1부에선 처음 부분만 보면 앞으로gp와 업적을 얻는 부분이 꾸준히 나올것으로 예상됬는데 거의 끝판가서 딱 한번 나오는군요 2부에서는 많이 나오려나요...? → 아틀란타 부터는 어느 정도 나올 겁니다. :) 아톰 2013-11-14 03:15 하아 ㅠ.ㅠ 아쉽네요~ 벌써 끝으로 가는게 ㅠㅠ 2부 기대하겠습니다 → 헤헤. 얼른 완결 내고 싶어요! 무뇌 2013-11-14 02:51 잘 읽고 갑니다. →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다는 코멘트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 콜록ㄱㄱㄱ 2013-11-14 02:48 완결은 대충 몇화정도를 예상하시는지???? → 소원은 600회 이고요. 아~무리 늦어도 800회 이하로 하고 싶어요. Ornella 2013-11-14 02:44 그동안 말없이 추천만 꼬박꼬박 눌렀는데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 묵묵히 보아주시는 독자 분이셨군요. 추천 감사합니다. 앞으로 좋은 내용으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_(__)_ 청섬백 2013-11-14 02:44 항상 재밌게 보고있습니다. 건필하세요. 아된 의견처럼 출판이나 개인소장본판매가 된다면 꼭 소장하고싶네요. → 감사합니다. 이북을 출판하면 바로 공지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자띱 2013-11-14 02:41 잘보고 갑니다. → 감사합니다. 임한나의 이름을 지어주셔서 감사해요. 후후. 이자젤 2013-11-14 02:40 그리고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하나 있네요. Q.수현은 왜 이렇게 현실에 집착하는가? 살리는 코맨드가 있다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현실로 못돌아가는 것 때문에 처음부터 플레이를 다시 하는 위험을 감수하다니, 일반적으로 홀플레인에서 몇 년 살았으면 적응하고 계속 사는게 정상 같은데... 이건 뭔가 스포일러 내용이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죽을때마다 살릴 수 있는 곳에서 무엇하러 무리해서 시간역행한 것인지가 이해가 안되더라구요.(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라는 개연성 부족한 이유는 제발 아니길...ㅠㅠ) → 그래요. 분명히 적응하고 사는 경우도 있겠지요. 다만 수현이 그대로 적응하고 살게 되면, 그 이유는 스포일러가 되는 거죠. 아주 스포일러는 아닌데 추론이 가능한 글이라 조금 걱정되네요. 눈물강 2013-11-14 02:37 회상에서 부활한 사용자는 돌아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세라프와 1화에서 세라프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말리고 원하는 바를 잘 안다며 GP로 소원구입 후 부활시키라는 투의 말을 꺼낸 부분이 충돌하지 않나 싶네요. → 마지막 권유였습니다. 즉 말은 그렇게 하면서, 수현마저 홀 플레인에 남기려는 일부 섞인 의도였지요. 라고 보실 수도 있는데, 세라프 입장에서는 하나의 확인 절차였습니다. 이자젤 2013-11-14 02:35 마지막 전쟁에서 작가님은 전체 흐름을 알고 전쟁의 흐름을 진행했고, 독자는 수현의 입장에서 1인층으로 전쟁을 경험하니 우리편이 이기는 것 같은데 자꾸 전쟁에서 지는 기묘한 상황이 계속되더라구요. 더군다나 전쟁신이 짧은 것도 아니고, 몇 일에 걸쳐서 연재가 되는건데 보는것이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이런 많은 정보가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신은 앞으로 2부에서도 계속 수현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하실 계획인가요? → 네. 1인칭 위주로 가지만, 중간중간 다른 시점도 섞을 예정입니다. 다음 번에는 조금 더 보기 편하시게 적어볼게요! preemuler 2013-11-14 02:35 음 선작하고 몇일만에 끝까지 달렸더니 ㅋ 잘보았어요 → 고생하셨어요. 감사합니다! 메카스타 2013-11-14 02:34 잘보고ㄱㅏㅂ니다 → 앗. 궁금한 게 있어요! 홍. 이라는 코멘트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형여늬v 2013-11-14 02:33 신상용 살리면 나중에 비비앙이랑 같이 살면 될듯.. → 신상용은 연금술과 결혼하는 건 어떨까요? 블랙커던트 2013-11-14 02:32 코멘트를안읽어서그런데 로유미라는애칭이붙은이유가먼지? → 다른 작가 분들의 장난에 의해 붙은 호칭입니다. 계속 모르는 척 하려고 했는데, 중간에 이미 밝히신 분이 있으시더라고요. ㅜ.ㅠ Toranoanal 2013-11-14 02:29 3. 작가분 본인은 전업작가로의 진로에 대해 고민중이신지? → 오랜만에 뵙습니다. _(__)_ 아니요. 진지하게 생각은 해봤는데, 출판 작가 분들께서 뜯어 말리셨습니다. 워프위너 2013-11-14 02:29 출판계획이 있으시다면 말해주세요 ㅎㅎ 꼭 소지하고픈 소설이라서요 오늘도 잘보고갑니다 → 감사합니다. 이북 출판하면 바로 공지할게요! Toranoanal 2013-11-14 02:28 2. 극의 흐름을 깨는 유일한 인물이 비비앙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 아마 처음 비비앙에 대해 처우를 바꿀 때 저와 유일하게 생각이 같으셨을 겁니다. 다만 예상 외의 인기를 얻으면서 차후 제 생각이 약간 변화된 것은 있습니다. 지금은 미우나 고우나 소설의 일부를 담당하는 만큼, 제 자식이나 다름없으니 아껴주고 싶습니다. ]라디에르[ 2013-11-14 02:27 자유 연재라면 하루에 여러편도 가능한거죠?b → 어, 어. 으음. 그, 그렇기도 하겠네요. 그, 그렇죠. 으음. Toranoanal 2013-11-14 02:25 1. 이북이 아닌 출판계획이 있으신지? 혹은 개인지로 일정량 판매가 가능한지? → 이북 계약을 맺은 상태입니다. 1권은 원고를 넘겼고요, 2권은 지지부진한 상황이에요. ㅜ.ㅠ 타지아 2013-11-14 02:25 홀플레인을 유지하는 천사들(세라프같은) 그들의 진짜역할은무엇인가요 사용자에게 간단한정보전달등제외하고 그들이할수있는 진짜역할이요. → 지금은 그냥 도우미라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천사들이 그저 도우미로만 나와 있는 건 아니겠지만, 할 수 있는 역할은 도우미에 가깝습니다. 전체 코멘트 보기 | 393편 관리 | 수정 | 삭제 로유진(작가) 2013-11-14 02:25 아. 여러분. 외전은 일일 연재가 아닌 자유 연재입니다. :D → 아. 그렇구나. 헤헤. 이건 마음에 드는 코멘트네. 그렇지 로유진아? 응! 그렇네? 헤헤헤. 전체 코멘트 보기 | 393편 관리 | 수정 | 삭제 로유진(작가) 2013-11-14 02:24 와! 이제 진짜 한 회만 남았어요! 덩실덩실! → 1부 완결했어! 같이 춤추자! 얼쑤절쑤! 파뱐 2013-11-14 02:23 4여왕 중 그림자여왕 품었고, 이스탄텔 로우 로드는 아직 간보는 중, 검후는 대충 넘어왔고, 성스러운 여왕은 저번 화에 피눈물을 흘리는 카드대로 밀어내져서 리타이어...인거군요. 여왕 말고도 득시글거리는 히로인들은 어쩔까요. ㅠㅠ. 특히 사춘기소녀...응응한 상황 훔쳐보다 눈을 가리고 도망간 뀨뀨는... → 아마 아기 유니콘은 외전 중 한 번 크게 혼날 겁니다. 정하연한테 말이죠. :) rhkdel2 2013-11-14 02:22 2주간 머하지ㅜㅡ → 요즘 재미있는 소설 많더라고요. 하하하. 어둠의지배자 2013-11-14 02:22 낼난데요. 남은 11월은 외전 연재후 12월 말 부터 2부인듯. → 예. 정답입니다. 세하a 2013-11-14 02:21 1부 끝나도 안 쉬실 거죠? 그럼 된거에요^_^ → 예, 예? 아. 조금은 쉬면 안될까요? ㅜ.ㅠ 물빛앙금 2013-11-14 02:21 1부 완결났나요?; 완결났으면 지금 1일 결제해서 보려는데..-_;; → 네. 지금 완결 났습니다! ]라디에르[ 2013-11-14 02:18 남다은은 딱 봐도 결굽 머셔너리 올듯... 그나저나 마법계열 시크릿만 3개를 얻었는데 올지도 모르는 조승우 외엔 마법사도 없고... 2부에선 우정민 선유운 남다은 조승우 구예지에다가 추가로 마법사 2명 더 구할테니(해밀 줄지도) 클랜원도 꽤 불어나겠네요ㅋ → 남성 클랜원들이 많이 들어오겠지요. 아주 득실득실하게 만들어버리게요. 흥! 머셔너리 클랜이 여성향 클랜이라는 오명을 벗겠어요. mororo 2013-11-14 02:16 결국 살리시는건가요 현실가면 홀플레인의 기억은 사라진다고하지 않앟나요? 잘못본건가 → No. 경우에 따라 다릅니다. 이 코멘트는 조금 뜨끔했네요. 후후. ]라디에르[ 2013-11-14 02:15 수현, 유현, 소영이 10강에 들어가나요 이제? 아 이건 스포일러가 되나 ㅠ → 한소영은 들어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들여보내지 않을~?(퍽퍽!) bella donna 2013-11-14 02:14 안현은 100%후회할테고.... 어느덧 1부의 끝이네요ㅋ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 감사합니다! 안현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 J.F 2013-11-14 02:14 그래서 결국 남다은은 어디에 가입 시키실겁니까?딱봐도 수현한테 완전 반해서 헤롱헤롱상태인데.. 근데 지금 수현의 여자관계가 유지되고 현실로 귀환한다고하면 진짜수라장 → 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그렇겠네요. 그냥 집 하나 짓고 다 같이 살까요? enthusiasm1 2013-11-14 02:12 제가 2등입니다ㅋㅋ올라와서 굿이라고 한거예요ㅋㅋㅋ → 2등 축하합니다! 기다리고 계셨다면 죄송해요. ;ㅇ; 無有 2013-11-14 02:11 비비앙한데 신상용 넘기면 되죠. ㅎㅎ → 그럼 아마 많은 독자 분들의 질타를 받을 것 같아요. ㅜ.ㅠ J.F 2013-11-14 02:11 그래서 2부 연재는 언제부터인가요? → 12월 중순부터 입니다. 자세한 날짜는 그때 따로 공지 할게요! IPrin 2013-11-14 02:10 수고하셨습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D she민 2013-11-14 02:09 끝인가..... 수고하셧습니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네요 → 걱정 반 설렘 반이지만, 열심히 적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디에르[ 2013-11-14 02:09 수고하셨습니다 → 감사합니다. :) iyrou 2013-11-14 02:09 안현은 과연 후회할까요.?! → 지금 수현의 생각대로라면 후회하겠지요. 그것은 온전히 신상용에게 달려있습니다. 神之影 2013-11-14 02:08 1부 완료네요. ㅅㄱ하셨고 2부도 기대만빵입니다. → 감사합니다. 2부도 열심히 생각해서 돌아오겠습니다. 휘넬리온 2013-11-14 02:03 ㄷㄷㄷ 굿? → 굿! 어허이야! 얼쑤 절쑤~! 굿을 합시다!(퍽퍽!) 123오라 2013-11-14 02:03 어모징?? → 네? 뭐가요? 픽시브 2013-11-14 02:03 3등!!! → 3등 축하합니다! 픽시브라. 저도 조금 알지요. 좋은 그림들이 많더라고요.(?) 청홍의불꽃 2013-11-14 02:03 안타까운 2등? ㅋㅋ → 하하하. 1분 차이로 3등이세요. 그래도 2등도 대단한 거랍니다. :) 축하합니다! enthusiasm1 2013-11-14 02:02 굿 → 2등 이시네요! 축하해요. :) 그런데 굿은 굿판의 굿인가요 아니면 Good인가요?(농담입니다.) 黑夜猫 2013-11-14 02:02 1등 어라 마지막이 아니군요?! → 1등, 정말로 축하합니다. 하하하. 이번에 복사 붙여 넣기로 가장 아래에 계시지만, 제 마음에는 1등이세요. :) 0395 / 0933 ---------------------------------------------- 1. 천사들의 걱정(1/1) 이른 아침. 탁한 빛으로 물들었던 하늘은, 말간 태양이 떠오르는걸 기점으로 동쪽 하늘부터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이내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서늘한걸 보니 아직 새벽의 흔적은 남아있는 모양이다. 바람이 담은 신선한 공기는 머릿속을 상쾌하게 만들었고, 나는 천천히 자리에 앉으며 오른손을 내뻗었다. 손에 뜨거운 찻잔이 만져졌다. 오늘 아침 식사 후 입맞춤 한 번을 대가로 지불한 고연주표 허브 차. 앞으로 차를 마시고 싶으면 꼬박꼬박 대가를 지불하라고 으름장을 놓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자, 입가에 절로 미소가 배어져 나온다. 한동안 향긋한 차 향기를 음미하다가 일순 가볍게 한 모금 들이켰다. 이내 잔잔한 목 넘김과 함께 몸 안으로 퍼져나가는 기분 좋은 뜨거움을 느끼며, 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문밖에 서 있는 누군가에게 들릴 수 있을 정도로. “들어와.” 확실히 들렸는지 문밖에서 흠칫하는 기척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에 이어 주춤주춤 망설이는 기척을 보이고는, 이내 빠르게 복도를 달려나가는 소리가 이어서 흘러들었다. 이제는 내가 흠칫할 차례였다. “……?” 잠깐 쫓아나가 볼까 생각해봤지만, 그냥 놔두자는 생각에 반쯤 일으켰던 몸을 도로 앉혔다. 기척의 정체는 대충이나마 추측할 수 있다. 식사 시간 때 나를 연신 흘끔흘끔 쳐다보던 안현, 비비앙 중 한 명일 터. 아마 신상용을 소원으로 되살리겠다는 말을 들은 이후,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볼 일이 생겼을 것이다. 한순간 그 문제를 떠올리자, 나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한 번 죽은 사용자는 다시는 지구로 돌아갈 수 없다.' 이 사실은 나도 시간을 역행하기 직전에서야 알 수 있었던 사실로, 애들에게 말을 꺼내기 조심스러운 면이 없잖아 있었다. 들어보니 안현은 신상용의 죽음에 깊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데, 지금은 소원을 사용하겠다는 목표로 다시 일어선 상태였다. 헌데 그 사실을 알게 됐을 경우 어쩌면 평생 동안 죄책감을 안고 살아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제로 코드와 밀접하게 연관이 있는 만큼, 천사들이 순순히 얘기해줄지도 의문이었다. 천사들이 1회 차에서 왜 그 사실을 내게 말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나도 정확히 모르는 상태이다. 나는 당연히 돌아갈 수 있겠지 라는 생각에 묻지 않았고, 천사들은 어떠한 생각으로 말해주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돌아갈 수 없다.”라고 얘기하면 애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여태껏 홀 플레인에서 0년 차 답지 않게 굴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변명은 할 수 있었다. 한때 자주 도서관에 들락날락했던 모습을 보였던 만큼, 대부분의 정보는 '기록'에 적혀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원으로 되살아난 사용자가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은 그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다. 사실상 '귀환'에 대한 직접적인 키워드는 '테라'를 공략할 때 밝혀지기 때문에, 만일 애들이 사실에 대한 출처를 물어온다면 지금 내 입장은 꽤나 곤란해질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난 신상용을 되살릴 생각은 없다. 그게 바르다고 생각했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안현이 소원을 사용하겠다는 것도 허락만 했을 뿐, 나는 어디까지나 도와주는 입장에서 지켜볼 예정이었다. 아무튼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미리 말할 수 있다면 말해주는 게 좋다고 생각하고는 있다. 안현이 신상용을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내가 겪었던 아픔을 똑같이 겪게 해주고 싶지는 않으니까. '결국 해답은 세라프한테 있는 건가.' 1회 차에서, 나는 당연히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묻지 않았다. 그리고 세라프는, 나를 위해서 말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세라프의 말을 온전히 믿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조만간 신전을 한 번 방문할 필요성은 느꼈다. 그녀의 대답에 따라 애들에게 말해줄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 판가름할 수 있으니까. '그냥 지금 바로 가볼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나는 까닭 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생각을 너무 깊게 했던 걸까? 시간이 제법 흘렀는지, 부옇던 하늘은 어느새 선명한 색을 띠고 있었다. 이내 약간 식은 찻물을 한 입에 들이킨 후,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한 번 사망한 사용자는 더는 사용자로 살아날 수 없습니다. 그런 만큼, 아예 새로운 거주민으로 생성된다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그럼 질문 하나 더. 거주민이 지구로 가는 경우는 있는 건가?” “없습니다. 지구와 홀 플레인은 양방향이 아닌 일방행적인 관계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지구인은 한 번 들어온 통로가 있으니 다시 돌아가는 게 가능하지만, 거주민은 애당초 이동이 불가능합니다.” 홀 플레인, 소환의 방. 미약한 어둠이 내려앉은 공간에 제단에는 하얀 날개를 일렁이는 천사가, 그리고 바로 그 앞에는 한 남성이 주저앉아 있다. 바로 세라프와 김수현이었다. “그렇다면….” 한 차례 대화가 끝난 후. 이윽고 김수현은 살짝 말끝을 흐리며 쳐다보자, 세라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원으로 되살린 사용자는 거주민입니다. 다르지 않습니다.” 세라프의 대답에 일순 김수현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그런가.” 곧 담담히 대답한 김수현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고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큰 충격은 받은 얼굴은 아니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꽤나 복잡한 기색이 어려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럼 그 사실은…. 왜….” 이윽고 김수현은 잠깐 입을 열었다가, 뭔가를 고민하는지 다시 한 번 말끝을 흐렸다. “…….” 그렇게 김수현이 고민하는 동안, 세라프는 그의 눈동자를 응시했고, 또한 생각했다. 자신을 대하는 말투나 태도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적어도 살기는 보이지 않는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살얼음 같던 눈빛이 약간은 다감해진 것 같다고. 그것이 설령 자신을 향한 시선은 아닐지라도, 그녀는 안도감과 함께 뜻 모를 만족감을 느꼈다. “쯧. 아니다. 아무튼 말해준 사실에 대해서는 지키도록 하지.”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직 뭔가 묻고 싶은 게 남은듯했지만, 이내 훌쩍 몸을 돌린 김수현은 파란 포탈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지체 않고 몸을 묻는 그를 보며 세라프는 나직이 콧숨을 쉬었다. “…후.” 이윽고 다시 홀로 남아버린 공간에서 세라프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제 조금은 안정됐는지, 어느덧 날개의 일렁임 또한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때였다. 번쩍! 한순간 제단의 옆으로 밝은 빛이 터지더니, 이내 허공을 물들일듯한 휘황찬란한 빛 무리 사이로 한 천사가 걸어 나왔다. “!” 어떠한 전조도 없는 일이었기에, 깜짝 놀란 세라프는 감았던 눈을 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소환된 천사를 확인한 순간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우리엘 님.” “내가 온 게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모양이군. 세라프.” “…….” “상급 천사 주제에 꽤나 건방지다고 생각하지 않아?” 약간 웨이브 진 단발을 한 천사의 노골적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세라프는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그런 그녀를 한껏 노려보던 우리엘은, 가느다란 숨과 함께 칠흑 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뭐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조금 전 그 사용자가 왔었지?” “제가 담당하는 사용자 김수현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맞습니다.” “숨기지는 않네…. 좋아. 그럼 왜 그 사실을 말해준 거지? 홀 플레인에 관한 사실은 웬만하면 함구하는 게 좋을 텐데. 만일 그 사실이 북 대륙에 떠돌게 되면 천사들에 대한 사용자들의 신뢰도는 바닥을 칠 거야. 설마 모르는 건가?” “저는 공개할 수 있는 정보만 공개했을 뿐, 결론 도출은 사용자가 스스로 이루었습니다. 물론, 우리엘 님의 말씀에도 일부 동의는 합니다. 그래서 사용자에게는 해당 사항에 대해서는 함부로 퍼뜨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서약은?” “…서약까지는 받지 않았습니다.” 세라프는 한 치도 주눅들지 않고 꼬박꼬박 대답했고, 그에 따라 일견 누그러졌던 우리엘의 얼굴이 다시금 미약하게 일그러졌다. “세라프. 내가 분명 네 사용자가 들어왔을 때부터 누누이 말해왔을 거다. 그 인간은 수상하고, 위험하다고.” “…그래서 저번에 저에게 Tanay급 특전에 대한 철회를 요청하신 겁니까?” “그래. 그 특전은 우리가 건드릴 수 없지만, 검토 후 부당함을 밝혀 위쪽으로 철회 요청을 해볼 생각이었어. 물론 확실하지 않은 아닌 단순한 요청에 불과하겠지만…. 그래도, 그나마 그거라도 해보려면 어쩔 수 없잖아? 그리고 그걸 발의할 수 있는 자격은 담당 천사인 너밖에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가 동의할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세라프가 고요히 대답했을 때, 우리엘도 더는 참지 않았다. “아무래도 말로 해서는 들어먹지 않을 모양이군.” 나직이 한 마디 뱉어낸 우리엘은, 이내 가볍게 손을 한 번 휘저었다. 이후 벌어진 일은 어떠한 소리도, 흐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제단에 앉아있던 세라프의 몸이 순간 강제로 일으켜지더니, 이내 공중으로 떠올라 매달린듯한 모습이 되었다. 목 부근에서 뭔가 알 수 없는 힘이 압박하는 듯, 그녀는 거센 기침을 내뱉었다. “큭! 콜록, 콜록!” “세라프. 난 네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어.” “무, 무슨! 콜록!” “왜 그렇게 그 사용자를 보호하려는지, 집착하는 모르겠다고. 응? 애당초 화정을 준 것부터 시작해서. 담당을 바꾸겠다는 말도 거부하고, 체력을 올리지 못하게 유도하라 했음에도 오히려 반대로 얘기하고. 그리고 이제는 쓸데없는 정보까지? 지금껏 내 말을 뭐로 들은 거지?” 점점 죄어드는 압박에 세라프는 어떤 대답도 못한 채 속절없는 기침만 내뱉었다. 하지만 그렇게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그녀는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치켜 떠 우리엘을 노려보았고,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은 절대로 말에 따를 생각이 없다는 하나의 의지 표현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러한 태도에 한층 화가 나는지, 우리엘이 한 번 더 손을 내저으려는 찰나였다. 번쩍! 번쩍! 번쩍! 그 순간 연이어 세 번의 빛 무리가 터져 소환의 방을 하얗게 물들였고, 이내 세 명의 천사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막 손을 내저으려던 우리엘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더니, 똑같이 걸어 나오는 천사들을 보자마자 아연한 얼굴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가브리엘 님…? 미카엘, 라파엘.” “우후후. 지금 뭐 하는 거야? 우리엘.” 빛이 채 사그라지기 직전 한껏 여유로운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이내 기다란 머리카락이 먼저 닿는 것에 이어, 한 점 티끌 없는 새하얀 발이 바닥에 닿았다. 또한 등에 달린 날개가 무려 12쌍에 이르는 것으로 보아, 가장 먼저 내려온 천사가 가브리엘인 듯했다. “여긴 어쩐 일로….” “지금 뭐하고 있냐고.” “이, 이건.” 우리엘은 궁색한 얼굴로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곧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그러자 허공에 매달려있던 세라프가 다시 제단에 떨어졌고, 그녀는 약한 기침을 하며 지친 얼굴로 목을 쓰다듬었다. “세라프. 괜챃니?” “네. 괜찮습니다. 약간의 사소한 다툼이 있었을 뿐입니다.” 말을 하면서도 세라프와 우리엘의 얼굴은 자못 어색함 그 자체였다. 가브리엘은 그런 둘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는 킥킥 웃으며 말했다. “사소한 다툼이라. 거짓말하지 마. 그동안 우리엘이 보였던 행동을 생각하면 사소한 다툼은 아니지.”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시원해서 좋네. 그럼 약간의 처벌과 함께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는 서약도 해야겠지?” 가브리엘은 여전히 생글생글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갸울였다. “처벌은 감내하겠습니다. 하지만 서약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뚝뚝히 대답하는 우리엘. 어떻게 보면 대 천사장인 가브리엘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입가에 지어졌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을 뿐. “잘못된 행동을 해놓고도 따르지 않겠다는 건가?”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어째서?” “이미 누누이 말해오지 않았습니까. 김수현이라는 사용자는 너무도 위험하고 수상합니다. 그러니 그에게 주어진 필요 이상의 힘은 거두어들이고, 최대한의 정보를 제한해야 합니다.” 여전히 뜻을 꺾지 않는 우직한 태도에, 가브리엘은 세라프가 앉아있는 제단에 차분히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자 바로 몸을 일으키려는 세라프의 날개를 붙잡으며, 고운 입술을 열었다. “우리엘아, 우리엘아. 나야말로 네가 그렇게 걱정하는 이유를 모르겠구나.” “…시작부터 부여된 Tanay급 특전. 화정의 보유. 그리고 마치 뭔가를 알고 있다는 홀 플레인에서의 활동. 이래도 감이 잡히지 않으십니까?” “궁금하기는 해. 그런데 현재 결과적으로 나쁜 건 없잖아? 그는 예전에 벨페고르를 없앴고, 이번에도 네르갈을 처치했어. 아니. 전체적으로 보면 악마들의 계획을 보기 좋게 저지했지. 도대체 이게 어디가 나쁘다는 거야?” “확실히 현재로 보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가브리엘 님.” 우리엘은 간곡한 어조로 한 번 더 입을 열려 했지만, 그녀는 순간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느새 들이밀었는지, 가는 목 부근으로 뜨거운 열을 내뿜는 창이 겨누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더는 입을 열지 않는 걸 권한다. 우리엘.” 우리엘은 묵묵히 자신을 바라보는 미카엘과, 한 쪽에 쭈그려 앉은 채 벙글벙글 웃고 있는 라파엘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분한 듯 이를 갈았다. “말하는 도중이었다. 미카엘.” “그래 그래. 말하는 중이었지. 미카엘? 창을 거두렴.” 가브리엘이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젓자, 미카엘은 담담히 우리엘을 응시하고는 이내 한 걸음 물러섰다. 이윽고 우리엘은 목을 한 번 쓰다듬더니 일순 세라프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러자 가브리엘은 느긋이 세라프를 감싸곤 태연한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엘. 얼마 전 담당하던 사용자가 죽었던가?” “예비 여왕 각성 자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얼마 전 김수현에게 살해당했습니다.” “굳이 김수현이라는 이름을 강조하지 않아도 좋아. 아무튼 이 일은 내 재량으로 묻어둘 테니, 새로운 사용자가 들어올 때까지 근신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드리고 싶습니다.” “똑같은 말이라면 허락하지 않겠어.” 가브리엘은 딱 잘라 대답했다. 지금이 마지노선이라는, 여기까지만 참겠다는 의지를 느꼈는지, 우리엘의 목울대가 한 번 크게 움직였다. 그러나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우리엘은 기어이 입을 열고 말았다. “화정은 무서운 힘입니다.” 그 순간, 등장한 세 명의 천사는 동시에 숨을 멈추었다. 가브리엘 또한 이 말은 의외였는지, 살며시 눈을 치켜 떴다. 그에 용기를 얻은 우리엘은 조금은 차분해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얼마 전 화정의 1차 각성을 이루었죠.” “우리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이대로라면 그가 제로 코드를 쥐게 될 확률은 상당히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여 그가 제로 코드를 얻게 되는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이런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게 무슨…? 아니 잠깐. 미연의 불상사라고?” 언뜻 들으면, 천사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바로 화를 내지는 않았다. 말을 곱씹으며 곰곰이 생각하는 낯빛을 비치더니, 이내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그가 악마랑 손을 잡을 가능성이 있다는 건가?”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요. 놈들은 제로 코드를 사용해야 하는 입장이고, 사용자도 제로 코드를 사용해야 하는 입장이니까요. 그러므로 제로 코드는 하나에 불과하니, 둘의 목적이 상충하는 만큼 손을 잡을 가능성은 적다고 보입니다.” “그렇지.” “하지만.” 곧바로 대답한 우리엘은 약간 뜸을 들인 후, 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가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을 둘러싼…. 그러니까 우리와 악마. 그리고 지구의 비밀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비밀, 그리고 반응이라.” 그제야 우리엘의 내심을 알아차렸는지, 가브리엘은 한두 번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다 갑작스레 고개를 좌우로 저어, 전보다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로 코드의 발동은 무조건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져. 그러니 그가 멍청한 결정을 할 것 같지는 않아. 즉 한 마디로 네 걱정은 시기상조고, 기우에 불과해.” “글쎄요. 물론 기우일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는 천사들을 적대하고 있습니다. 한때 담당 도우미 교체 문제로 거론됐던 만큼, 그의 태도가 어떠한지는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으음.” “다들 너무 편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욱 깊게 생각해보십시오. 체력을 100까지 올리면 화정의 2차 각성이 시작되고, 101까지 올리면 마지막 3차 각성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 이상을 올릴 경우. 화정은 자체적으로 설정을 벗어나, 본인의 의지에 따라 본래의 힘을 되찾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마침내 하고 싶은 말을 전부 꺼냈는지 우리엘은 천천히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더니, 공간 내부에 있는 천사들을 한 번씩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이 '세상'을 편집할 수 있는 힘.” 이윽고 그녀의 전신이 서서히 밝은 빛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만일 그가 모든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부디 화정을 담은 칼끝이 우리를 향하지 않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파앗! 잠시 후. 찬란한 빛 무리와 함께 사라진 우리엘이 남긴 말은, 이내 점점이 떨어지는 빛 가루와 함께 여운처럼 감돌았다. ============================ 작품 후기 ============================ 오늘 내용을 보시고 의문이 생기신분은, 121회 'After' 부분을 보시면 약간이나마 감을 잡으실 수 있을 겁니다. 결국 회귀 직전 세라프는 김수현에게 또 한 번의 거짓말을 한 셈이지요. :D 0396 / 0933 ---------------------------------------------- 2. 고백(2/2) 북 대륙, 그리고 연합군의 전쟁이 끝난 지도 어느덧 2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내외적으로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변화는 전반적인 전후 처리가 슬슬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그 중 가장 핵심으로 대두되었던…. 그러니까 도주한 적들을 추격 및 포위하는 계획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딱 절반의 성공만을 의미했다. 서 대륙 사용자는 대다수 사로잡는데(혹은 살해하는데.) 성공했지만, 부랑자들은 총대장과 수뇌부를 포함해 대다수를 놓치고만 것이다. 사실상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서 대륙 사용자들은 북 대륙의 지형에 익숙하지 못했고, 부랑자들은 도망과 유격(遊擊)에 관해서는 도가 튼 놈들이었다. 그렇게 1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이후 추가로 1개월의 시간이 흘렀을 때. 그제야 북 대륙은 포위망 유지를 무의미하다 여겼고, 한 번의 회의를 거쳐 규모를 대폭 축소하는 것으로 결정했다.(놈들을 쫓는 것을 아예 중단한 건 아니었다.) 이제는 무너진 도시의 복구와 포로에 대한 처우 등등…. 여태껏 2차, 3차로 미뤄두었던 북 대륙 내부를 추스르는데 힘을 쏟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후 바바라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회의가 개최됐고, 여러 클랜의 로드 또는 간부들이 항시 드나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수많은 회의가 열릴 때마다, 나의 참석을 요청하는 서신도 꼬박꼬박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까놓고 말해서. 이런 쓸데없는 회의에는 참가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그러나 일방적인 통보가 아닌 정중히 서신으로 요청한 만큼, 일단 참가는 해주고 있었다. 신분이 자유 용병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도 좋게 보이지는 않을 테니까. 특히 오늘 개최하는 회의는 실질적으로 북 대륙의 방향을 결정하는 자들이 모이는 회의였으니, 어느 정도 구색을 맞춰줄 필요는 있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제 우리는 북 대륙 내부를 정비하고 가다듬는데 주력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이후부터는 당연히 바바라를 중심으로 많은 논의가 오고 가겠지요.” 이제 슬슬 마무리를 지으려고 하는 걸까? 단상에 선 이효을은 양손을 꼿꼿이 집은 채 전에 없던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정체는 북 대륙의 수호자로 일반 사용자들에게는 베일에 감싸인 존재였다. 이 말인즉슨, 지금 이곳에 모인 클랜 로드 및 간부들은 모두 수호자와 인연이 있는 사용자라는 소리였다. “끝내기 전에. 여러분들에게 마지막으로 딱 한 마디만 당부하겠어요.” 뭔가 대단히 중요한 말을 발표하려는지, 잠깐 말을 멈춘 이효을은 강한 눈빛으로 모두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와 시선을 마주쳤을 때, 그녀는 비로소 말을 이었다. “모두 예전에 각 클랜에 숨어들었던 부랑자…. 그러니까 첩자들을 색출했던 사건을 기억하고 계실 거예요.” 그 말이 나온 순간, 제법 많은 시선이 나에게 쏠리는걸 볼 수 있었다. 첩자 색출이란, 포로로 잡아온 백서연의 정신을 망가뜨려 부랑자 내부의 기밀을 토해내게 만든 사건을 일컫는 말이리라. 당시 각 클랜에 숨어든 첩자의 숫자는 그야말로 방대했고, 그만큼이나 조직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한 번 쏠린 시선은 쉽사리 거두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난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앞쪽을 주시했다. “그때 한 부랑자가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네요. 전쟁 후 각 클랜을 이간질해 북 대륙을 분열시킨다. 그리고 종래에는 서 대륙과 똑같이 무법지대로 만들 계획이었다.” “…….” “어떤 분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손사래를 치겠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그것은 분명히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 여기서 확실하게 말하겠어요.” 고요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이효을은 천천히 단상에서 내려와 형형한 눈빛으로 전원을 응시했다. 천사에게 어떤 말을 단단히 들었는지, 그녀의 눈은 어떠한 의지로 강렬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 여기서 제 2의 황금 사자를 꿈꾸는 분이 있다면, 일찌감치 꿈을 깨시는 게 좋을 거예요. 만에 하나 조금이라도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클랜이 있다면…. 북 대륙을 수호하는 입장으로써 제 모든걸 걸고 최선을 다해 저지할 테니까.” 그리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 이효을은, 이내 살짝 얼굴을 누그러뜨리는 것과 함께 말을 매듭지었다. “이점 유념해주시고, 오늘 회의는 일단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어요.” 이효을의 의미심장한 말을 마지막으로 길었던 회의는 막을 내렸다. '오늘은 시간 낭비까지는 아니었군.' 물론 앞으로 많은 것을 논의해야 하는 만큼 지속적인 자리를 가질 테지만, 아무튼 오늘만큼은 난 일찍 끝나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오늘은 나에게 매우 중요한 약속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회의가 끝나고 약간 기다리다가, 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먼저 일어서서 문을 나가는 사용자들의 후미에 끼어, 얼른 약속 장소로 향하려는 순간이었다. “머셔너리 로드.” '형은…. 안보이네. 먼저 나가서 기다리고 있는 건가?' 형에게는 오늘 회의가 끝나고 잠깐 만나자고 미리 언질 해둔 터였다. 서로 가장 멀리 떨어진 반대편에 앉아있었던 만큼, 혼잡한 실내보단 밖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머셔너리 로드!” 그때였다. 막 문을 나서려는 순간, 신비로운 목소리가 내 옷깃을 붙잡았다. 의아히 고개를 돌리자 내 옆으로 낯익은 한 명이 서 있는 게 보였다. 한 손에 카드를 든채 몽환적인 분위기를 지닌 여인. 마법의 탑 클랜 로드이며 시크릿 클래스 타로 카드 마술사. 그녀의 정체는 바로 선율이었다. “마법의 탑 로드.” “…그냥 마탑 로드라고 불러주시면 안될까요? 마법의 탑 로드라고 하면 왠지 듣기 불편한 어감이라.” “그러죠. 마탑 로드.” “음. 훨씬 낫네요. 선율이라고 불러주시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말이죠.” 선율은 한결 만족한 얼굴로 다시 요청했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러한 내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그녀는 마주 어깨를 으쓱이며 천연덕스레 입을 열었다. “무슨 바쁜 일이라도 있어요? 몇 번 불러도 들은 척도 안 하시던데.” “아. 오늘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요. 그 약속에 대해서 잠깐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응? 약속이요?” 약속이 있다는 말에 선율은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이게 그렇게 이상한일인가 고민하고 있자, 순간 그녀가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런. 선약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예?” “아. 얼마 전에 저에게 부탁하나 하셨잖아요. 그걸 빌미로 오늘 밥이나 한끼 사달라고 하려고 했거든요.” “부탁…? 아.” 일순 부탁이란 단어가 생소하게 느껴졌지만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얼마 전 문득 한 물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수소문한 게 있는데, 워낙 희소 가치가 높은 물품이라 쉽게 구할 수 없었다. 그러다 고연주를 통하여 한 클랜에서 해당 물품을 보유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교섭 후 간신히 물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물품을 보유하고 있던 클랜이 바로 선율이 클랜 로드로 있는 마법의 탑이었다. “그거 우리도 별로 없는 건데…. 시세보다 싸게 드린 건데….” “하하하.” 연신 구시렁거리는 소리에 멋쩍은 웃음만 짓자, 선율은 못마땅한 얼굴로 “체.” 혀를 찼다. “이것저것 듣고 싶은 얘기가 많았는데…. 뭐, 선약이 있으시다니 어쩔 수 없네요.” “미안합니다. 정말 중요한 약속인지라…. 다음에 제가 먼저 초대하도록 하죠.” 약간, 아주 약간 미안한 마음에 먼저 초대하겠다는 말을 꺼내자, 선율은 바로 얼굴빛을 바꾸었다. “아, 그래요?” “…예.” “먼저 초대라. 음. 음, 음. 좋아요. 그것도 좋겠네요. 남아일언중천금이라 했으니, 기대할게요.”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여인이로군.' 상대하기 피곤하다는 생각에 속으로 고개를 젓고 있자, 이내 다시금 농염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럼 이만. 그래도 숙녀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아주세요.”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겉으로는 정중히 인사를 건넸지만, 속으로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숙녀라. 선율의 진명이 정숙한 요희(妖姬)였던가? 스스로 사용자 정보를 살펴볼 수 있는 만큼, 나라면 창피해서라도 저렇게 말하지는 않을 텐데. * 선율과 헤어진 후. 건물 밖으로 나서 입구에 다다르자, 나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드는 형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약한 미소로 화답한 후 천천히 형과의 거리를 줄였다. 사실상 형, 아니 해밀 클랜은 일주일 전 본거지로 귀환할 수 있었다.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전력 이탈이 심하지 않아(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약간의 정비 후 포위망 구성 부대에 참가한 것이다. 그에 따라 전투 중 했던 약속은 뜻하지 않게 미루게 되었고, 이후 형이 돌아오고 나서 나는 약속대로 전령을 보냈다. 물론 용건은 간단히 “밥이나 먹자.”고 했을 뿐이지만, 형은 분명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연락 기다리고 있으마. 마음이 정리되면 먼저 연락을 줘. 얼마든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워프 게이트에서 헤어지기 전 분명히 그렇게 말했으니까. “금방 나올 줄 알았는데. 조금 늦었네?” “예상치 못한 사람에게 발길을 잡혔거든.” “응? 누구?” “있어. 그런 사람.” 내 이성 관계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형이었기에, 나는 쓰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이윽고 나와 형은 입구를 나서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밥을 먹자고는 했지만 딱히 어디로 갈지는 정해놓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와 형은 계속해서 걸었고, 방향은 일치하고 있었다. 이것은 지금 형이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워프 게이트를 향해 걷다가,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사실상 지금부터 내가 말할 이야기는 극비에 해당하는 정보였다. 물론 나는 형을 믿고, 형도 나를 믿기에 이야기하는 것은 거리낌이 없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이야기할게 너무 많다는 것. 살아온 인생이 워낙 굴곡이 크다 보니 도대체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 “…….” 그렇게 워프 게이트로 도착할 때까지 형과 나는 한 차례도 말을 나누지 않았다. 분명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형의 입장도 나름 이해는 되었다. 예전에 말했던 것처럼, 형은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갑작스레 긴장되는 마음에 지그시 입술만 깨물고 있을 즈음, 문득 형이 나를 돌아보았다. “모니카로 갈까? 아니면 프린시카?” “…프린시카로.” “프린시카로? 나 너네 클랜 하우스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머셔너리 하우스는 나중에…. 프린시카에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거든.” “흐음. 그렇다면야.” 형은 한두 번 고개를 주억이고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른한 점심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보이지는 않았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사용자들이라 해봤자 서너 명이 전부였다. “다음 차례 들어오세요.” 이내 우리 차례가 다가오자, 나와 형은 조용히 포탈로 걸었다. 그리고 다시금 찾아온 침묵. 불편하거나 어색하지는 않지만 어딘가 모르게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한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가슴에 손을 대었다. 지금 내 품에는 일전 '마법의 탑' 클랜에서 구한 '진실의 수정'이 들어있었다. 물론 꼭 필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일종의 보험으로 준비한 물품이었다. 나는 가슴에 손을 댄 채, 옷 위로 만져지는 동글동글한 구슬의 감촉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미 결단은 내렸다고. 그때 '뇌신'의 발동을 요청했을 때, 이미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었다고. 그래. 이제는 말해야 할 때였다. 아니. 오히려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이윽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서 포탈 앞으로 다다랐을 때, 나는 한 번의 호흡과 함께 나직이 입을 열었다. “형.” “프린시카로 두 명…. 응? 왜?” “나…. 형한테 할 말 있어.” “…….” 역시나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형은 담담히 나를 돌아보고는,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형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침착히 대답했다. “그래.” ============================ 작품 후기 ============================ 요즘 들어 쪽지로 많이 물어보시는 것들이 있는데, 다시 한 번 말씀 드릴게요. :) 1. 지금 연재하는 부분은 2부가 아니라, 외전입니다. 1부 완결 후 원래 2주 동안 휴재 기간을 가지려고 했는데, 그랬다가는 제가 12월 달 시험과 겹쳐 또 2주간 휴재를 해야 합니다. 그럼 너무 기간이 길어지니, 그동안 외전을 올리는 것으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2부의 시작에 2년 가량의 공백이 있는 만큼, 외전의 성격은 1부에서 2부 사이에 존재하는 공백을 약간이나마 설명해주는 파트가 될 것입니다. 2. 외전은 쭉 이어지는 내용이 아니라, 여러 파트로 나눌 생각입니다. 즉 한 파트마다 독립적인 에피소드가 연재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예를 들면 고백, 모여드는 인재들, 얼어붙은 숲(탐험), 김수현과 101등등 1부 때 다루지 못한 것들이나, 소소한 일상들이 주가 될 것입니다. 2. 외전은 자유 연재입니다. 다만 자유 연재가 일일 연재가 아니라는 말이지, 연재 중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3. 2부 연재는 제가 시험이 끝나고 방학이 시작되면 시작할 예정입니다. 4. 세라프에 관한 코멘트는 모두 잘 읽었습니다. 아쉽게도 '나머지'에 해당하는 부분은 결말에 드러날 예정이오니, 지금 곧이곧대로 밝히기 어려운 점 양해 부탁합니다. 음…. 그런데 지금껏 복선을 몇 개 알려드린 만큼, (121회, 카드.) 비슷하게 맞추신 분들은 몇 분 보이시네요. :) 0397 / 0933 ---------------------------------------------- 2. 고백(2/2) 창문 사이로 희미한 빛 줄기가 느껴졌다. 성큼 솟아오른 술기운 때문일까. 아직 해는 중천에 떠 있었지만 벌써부터 눈이 가물가물하다. 어른거리는 시계(視界)를 붙잡으려 한두 번 눈을 깜빡이자, 아주 약간 선명해진 시야 속으로 어질러진 방안의 풍경이 눈에 밟혔다. 자리잡은 곳 주변으로 텅 빈 병들이 나뒹굴고 있고, 그릇에 담겨있던 안주거리는 사방팔방 볼썽사납게 흐트러져있다. 바닥에 깔린 천은 병 입구에서 흘러나온 술에 젖어 끈적하게 엉켜있었다. 말 그대로 엉망 그 자체. 형이나 나나 평소 유난히도 깔끔을 떠는 성격이라 평소라면 절대로 좌시하지 않을 풍경이었다. ‘진하 누나가 보면 기절하겠군.’ 안줏거리를 가져다줄 때만 해도 형 몰래 “도련님, 도련님.”하며 상냥히 눈웃음치던 진하 누나였는데, 과연 이런 방안을 보고서도 그런 말이 나올까? 아. 그래도 잘 보이려고 여전히 눈웃음치려나? 하하하. 돌연 떠오른 실없는 생각에 잠깐 숨죽여 웃다가, 나는 기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멍하니 입을 벌리자, 뱉어낸 숨결이 벌어진 입 속으로 스며들어 달콤한 내음이 퍼지는 게 느껴졌다. “피곤해?” 하품을 하는 걸로 착각한 걸까. 한두 번 입맛을 다시고 옆을 돌아보자 여전히 쌩쌩한 얼굴을 한 형이 보인다. 형은 나를 정면으로 향한 채 침대에 편하게 앉아 있었고, 한 손에는 거의 다 비운 술병을 들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아마 형이 나보다 훨씬 술이 셌던 걸로 기억한다. 현대에서나 홀 플레인에서나 말이지. “피곤하면 한숨 자도 돼. 어차피 여기 빈방이니까.” 형은 무척이나 자상한 목소리로 한 번 더 말했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취하지 않았어.” “알아. 그래서 취한걸 물어본 게 아니라 피곤한지 물어본 거잖아.” “이런.” 형은 조용히 웃었다. 그 모습을 보자 뭔가 말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나는 다시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한 쪽으로 팔을 내뻗어 아직 마개도 따지 않은 새 술병을 집어 들었다. 뽕! 이어서 느릿한 손길로 마개를 잡아떼자, 문득 휑했던 등을 맞대어오는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엇차. 그런데 여기는 왜 오자고 한 거야? 술은 그렇다 쳐도…. 오고 싶다는 데가 고작 이곳이었어?” “그냥. 옛날 생각이 많이 나는 곳이라.” “옛날 생각?” “…혹시 현대에 있을 때 기억나?” 나는 까닭 없이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영민한 형은 곧바로 내 의도를 알아들었다. “현대? 어떤 기억?” “예전에 형이랑 나랑 한창 미국 드라마에 빠진 적이 있었잖아. 그때 드라마 보겠다고 방을 영화관 비슷하게 꾸몄던 게 기억나서.” “아. 기억난다. 빅뱅 이론이었던가? 하하. 그땐 정말 난리도 아니었는데.” “난 재미있었어. 팝콘 용기 하나 구해서 과자를 채워 넣었던 거나, 누워서 보려고 모니터 앞으로 끌어와서 최대한 기울였던 거나….” “그러다가 모니터가 떨어져 금이 가기도 했지.” 서로 등을 맞댄 상태라 얼굴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어깨 부근에서 미약한 떨림이 전해져 오는 것으로 보아 형이 웃는 중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하여 나도 가벼운 웃음을 흘린 후 술병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입을 닦고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시즌 4까지 봤던가? 지금은 몇까지 나왔으려나….” “더 나왔겠지. 만약 돌아가게 되면 실컷 볼 수 있을 정도로…. 그나저나. 그 이유 때문이야?” “응? 뭐가?” “오고 싶다고 한 장소로 굳이 이 방을 선택한 거. 현대에서 겪었던 향수를 느껴보고 싶어서?” 형은 방을 둘러보는 듯 잠깐 말을 멈추더니, 이내 낮은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별로 비슷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때였다. “…아니. 그건 아니야.” 돌연히, 정말 갑작스럽게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졌다. 그리고 물끄러미 벽을 바라보며 뭔가에 홀린듯한 기분으로 말을 이었다. “여기는….” “응.” “예전에 내가 해밀 클랜원이었을 때 사용했던 숙소였거든.” “…응?” “지금이 거의 1년 차니까…. 내가 해밀 클랜에 가입했던 게 벌써 9년 전일이네.” “수현아?” 뒷목이 따끔따끔하다. 이제야 형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모양이다. “그게 무슨….” “형.” 하지만 나는 형의 말을 곧바로 끊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자, 역시나 의아한 눈으로 나를 직시하는 형이 보였다. 눈동자에 서로의 얼굴이 비쳐 보일 정도로, 거리는 아주 가까웠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거 알고 있어. 그래도 중간에 끊지 말고, 잠깐만 내 말을 들어줘.” “너….” “부탁할게. 제발.” “…….” 형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차마 그 시선과 더 마주할 자신이 없어, 다시 고개를 돌려 전방의 벽을 응시했다. “…….” “…….” 그리고 이어지는 불편한 침묵. 그러한 침묵을 조용히 음미하고 있자, 불현듯 한 생각이 들었다.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어쩌면 난 지금까지도 망설이고 있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그럼 시작할게.” 그래. 여기서 굳이 형의 대답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그렇게 마음먹은 즉시 나는 조용히, 그러나 침착하게 말문을 열었다. “한 청년이 있었어. 그 청년은 막 전역 신고를 마친 청년이었고, 기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깜빡 잠이 들었지.”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내가 홀 플레인에 들어오기 직전의 이야기. “잠에서 깨어 눈을 뜨자 청년은 자신이 이상한 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그리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틈도 없이 통과의례라는 시험을 치러야 했고, 그곳에서 등장한 난생 처음 보는 괴물들에게서 필사적으로 도망쳐야만 했어. 그렇게 7일을 간신히 보낸 후, 일종의 자격을 얻은 청년은 홀 플레인이라는 곳에 입장하게 돼.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게 말이야.” 아까 잠깐 떼어졌던 등은 어느새 다시 맞닿아있는 상태였다. 이면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에 나는 뜻 모를 안온함을 느끼며, 나는 결심했다. 지금 바로 결론을 말하자고. 혹시라도 내가 중간에 견디지 못해, “실은 농담이었어.” 이 한 마디로 돌아갈 수 없도록 미리 선을 그어놓자고. “그리고 이후 10년의 세월이 흐르고, 청년…. 아니 남자는 헤아릴 수 없는 우여곡절 끝에 홀 플레인의 정상에 오를 수 있었지. 남자는 결국 끝에 다다라 마침내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었어.” “…….” “하지만 남자는 지구로 돌아가지 않았어. 아니. 지구로 돌아가기는커녕, 오히려 시간을 되돌려 홀 플레인에 처음 들어왔던 때로 돌아오는걸 선택했다? 왜냐고? …남자에게는 하나의 목적이 있었으니까.” “…….” “그 남자가 바로 나야.” 혹여 마음이 변할까 나는 쉴 틈 없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결론의 마침표를 찍고 나서야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내 난 무릎을 모아 천천히 양팔로 감싸 안았다. 그와 동시에 등을 통하여 몸을 흠칫 움츠리는, 갑작스레 놀라는 기척 또한 전해졌다. 이윽고 난 차분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형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저 지그시 나를 바라보는 게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시선을 마주치고 있자, 마주하던 눈동자가 미세하게 일렁이는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형의 입술 또한 천천히 떼어졌다. “수현아.” “형은…. 네 말이 무슨 말인지 당최 이해가 가지를 않는구나.” 그 말이 들린 순간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물론 스스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내용이라고 생각하지만…. 왜 이렇게 허탈한 기분이 드는 걸까? 그때였다. “그러니까….” 형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말았다. “조금 더. 아니, 조금 전 말보다 훨씬 자세한 얘기를 해주었으면 좋겠다.” 늘그막이 이어진 말에 나는 한두 번 눈을 깜빡였다. 그래.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형은 뭔 헛소리냐는 반응이 아니라, 일단 한 번 말을 들어보겠다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내 말을 가벼이 여기지는 않는다는 방증이었다. 당연히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러한 태도만으로도 내게는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가 약간씩 떨려오는 입술을 잘끈 씹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 “…그래서 난 결정했어. 이대로 홀로 지구로 되돌아가느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과거를 바꿔서, 그 모두를 살려서, 모두와 함께 귀환하겠다고.” 마지막으로 말을 끝맺고 난 후에야, 나는 내내 땅만 쳐다보던 시선을 들어 창문을 응시했다.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맑은 빛을 비추고 있었는데, 어느덧 해가 기운 모양이다. 바닥에 드리운 옅은 황혼 빛 노을을 보며 나는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단 한 마디였다. 정말 한 마디에 불과했다. 자세히 말해달라는 한 마디에 나는 일말의 용기를 얻을 수 있었고, 하여 그동안 겪었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풀어놓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걸 말한 것은 아니었다. 살인, 강도, 강간 등 내 입장에서 말하기 부끄러운 부분은 철저히 삭제했으며 오직 굵직굵직한 흐름을 위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것만으로도 이야기할 것은 차고 넘쳤고, 형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데는 충분했다. 아니 오히려 너무 요약해서 말하느라 설명이 충분치 못한 곳이 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0년이라는 굴곡진 세월을, 하루도 안 되는 시간에 온전히 담아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은 내 말을 잘 들어주었다. 물론 중간중간 끊긴 적은 몇 번 있었지만, 그것은 대부분 내가 상처를 입은 내용에 관해서였다. 예를 들어 벨페고르에 당해 복부에 칼이 찔려 기절했다는 얘기를 했던 순간, 형은 “뭐라고?” 심히 분노하여 말을 끊은 정도였다. 어찌됐든. 그래도 나로서는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이야기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형은 처음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군. 그런 이야기구나.” 이윽고 형은 한 손으로 검지를 피어 톡톡 바닥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형이나 나나, 서로 머리가 복잡할 때 하는 버릇 같은 행동이었다. 그런 형의 얼굴은 생각보다는 담담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굳어있는 게, 마치 태연한 척 애쓰는 모습이랄까? 아무래도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에는, 중간중간 내가 알아맞힌 여러 사실들이 내면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을 테지. 한동안 형을 보다가, 나는 한 마디 툭 내뱉었다. “괜찮으니까 어떤 말이라도 해봐.” “…잘 모르겠어.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하면…. 그것도 바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커다란 말이라 잘 와 닿지가 않아.” 형은 솔직히 대답했다. “하….”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순간 검지의 움직임을 멈췄다. “수현아. 네 말을 그냥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믿기지가 않아. 하지만 네가 들어오기 전의…. 그러니까 너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여러 사실들을 알고 있는 거나, 네가 들어오고 난 이후의 행보를 생각해보면…. 정황상 맞는 말 같기는 해.” “정황상이라….” “못 믿겠다는 말이 아니야.” 형은 딱 잘라 대답했다. “단…. 지….” 그러나 뭔가 망설이는 게 있는지 곧바로 말을 잇지는 않았다. 문득 목이 바짝 타는 기분에, 난 황혼 빛으로 타오르는 술병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입안으로 침범한 액체는 메마른 목구멍을 적셔주었지만, 갈증이 가시질 않는다. 오히려 가뭄이 든 논밭처럼 쩍쩍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이내 텅 비어버린 술병을 보며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단지?” 형은 그 특유의 고독한 눈빛으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석양에 물들은 얼굴이 무척이나 벌겋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형의 입술이 열렸다. “모르겠다. 그냥 네가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시종일관 불안하던 가슴이 먹먹해졌어.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어. 왜 갑자기 이리도 답답해지는 걸까?” 형의 말을 들으며 나는 한두 번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적으로 형은 지금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정황상 인정은 해야겠는데, 한순간 체감하고 받아들이기에는 많이 힘든 상태였다. 그리고 난 형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봐도, 만일 안솔이 갑자기 “저는 미래에서 시간을 되돌렸어요!”라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무리 맞는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긴가민가한 감이 없잖아 있을 것이다. 잠시 후.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품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진실의 수정'을 꺼내어 형이 볼 수 있도록 꺼내놓았다. 솔직히 웬만하면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형. 이게 뭔지는 알고 있지?” “그건…. 진실의 수정이잖아.” “맞아.” 그리고 수정에 손을 얹은 난 그대로 마력을 불어 넣었다. 이내 수정구 안으로 자그마한 연한 불꽃 하나가 피어오르는 것으로, '진실의 수정' 간단히 발동 완료되었다. 고요히 흔들리는 푸른 불꽃을 보다가, 나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한 말은 사실이야.” “…너.” 형은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가, 바로 시선을 내려 수정구를 확인했다. 이내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지는 걸로 보아, 색깔이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한 모양이다. 나는 한 차례 더 확인을 위해 입을 열었다. “한 번 더 할게. 내가 이 방에 들어오고 나서 형에게 한 말들은 전부 사실이야. 나는 홀 플레인의 끝을 본 사용자고, 과거를 바꿀 목적으로 시간을 돌려 지금 이 자리로 다시 되돌아왔어.” 여전히 똑같이 타오르는 푸른 불꽃.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형의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형의 태도는 처음부터 한결 같았다. 건물 밖에서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도 똑같았고 행동도 똑같았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낯빛이 확실하게 변했다. 뭔가 굉장히 차갑게 굳어있으면서도, 맥이 풀린듯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후….” 이윽고 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살짝 벌려진 손 틈 사이로 숨의 마찰하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그렇게 얼굴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형은 처음으로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진짜였구나.” “응.” “응? 하. 하하…. 진짜, 진짜였어. 너. 이 세상을 이미 클리어했었구나.” “맞아.” 곧 있으면 '진실의 수정'의 지속 시간이 끝날 시간이었다. “그리고 뭐 같지도 않은 이유 때문에,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차버렸고.” “응…. 응?” 그때 형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양손을 아래로 내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강렬한 눈빛과 마주하자, 왠지 모르게 형이 뭔가를 정리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왜 불안했는지 이제 알겠다. 김수현. 설령 네가 그랬다고 해서. 다시 되돌아왔다고 해서 내가 기뻐할 거라고….” 뭘 말하려던 형은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다. 후. 그래. 이왕 '진실의 수정'을 발동한 거 하나만 더 물어보자. 손은 그대로 얹고 있어.” “…….” 조금 전 형이 하다만 말을 곱씹고 있어서 그랬을까. 잠시 후에야 형이 내 말을 기다리는 중이라는 것을 깨닫고선 나는 황급히 말했다. “뭔데?” “네가 그랬었잖아. 내가 너를 구하려다가 죽었다고. 그 부분을 다시, 자세하게 말해줘.” “어, 어떤걸.” 말을 하면서도 나는 속이 따끔해지는걸 느껴야만 했다. 왜냐하면 이 부분은 내가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의도적으로 제외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은 여지를 남겨두지 않겠다는 듯이 가차없이 다음 말을 이었다. “수현아. 혹시 내가 죽을 때 너에게 살려달라고 빌었니? 아니면 어떻게든 나를 살려서 같이 돌아갈 방법을 찾아달라고 했어?” “…….” “대답해.” “아니. 그러지 않았어.” 담담하게 대답하긴 했지만 속은 철렁했다. 다시 목이 말라오는 기분에 술병을 찾아봤지만, 이미 이야기를 하면서 대부분 결딴낸 상황이었다. “그럼.” “살리지 말라고 했어. 그리고 나보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끝을 보라고 했어.” 화륵! 화르륵! 그 순간, 형의 질문을 마지막으로 '진실의 수정'의 지속 시간이 끝나버렸다. 나는 이제 정말 끝났다는 생각에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손을 떼었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들자 어느새 형이 꼿꼿이 선 채 나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가 형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려는 찰나였다. 쨍그랑! “!” “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얼 떨떨히 고개를 내리자 조각조각 부서져 파편으로 나뉜 '진실의 수정'이 보인다. 순간 상황 파악이 안되어 격한 혼란이 일었지만, 비로소 형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형도 마찬가지였다. 형은 막 뭔가를 말하려던 얼굴이었는데, 내 얼굴을 보자마자 억지로 입을 다문듯했다. 그 표정은 그야말로 복잡해 보였고 뭐라 형용키 어려운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때 형이 말했다. “왜, 왜….” “왜…. 그래?” 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과연 지금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도대체 어떤 얼굴이길래 형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이익…!” 형은 자꾸만 뭔가를 말하려다가, 그것을 꾹꾹 눌러 담는지 힘겨운 신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갑작스레 그대로 주저앉아 나와 비슷하게 시선을 맞추었다. “이…. 멍청한 놈아…!” 간신히 쥐어짜낸 듯한 목소리. 덜덜 떨리는 음색에서 나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형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그 모든 것을 조금 전 한 마디에 담았다는 것을. 그러더니 이내 정수리에 부드러이 얹히는 형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나는 얼른 이를 악물었다. 그와 동시에 갑작스레 형의 모습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하여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떤 기분인지는 자세히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지금껏 10년 동안 겪었던, 겪어야 했던 온갖 고통이 형의 단 한 마디에 한꺼번에 보상받는듯한 기분이었다. 비로소 형의 조금 전 기분이 약간이나마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아주 똑같은 기분을 느끼지는 않았겠지만. 아니. 오히려 정반대의 기분을 느꼈겠지만. 나는 형처럼 모든 하고 싶은 말들을 눌러 참고, 간신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아니. 괜찮아.” 이윽고 머릿결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는 감촉이 느껴진다. 나는 살짝 눈을 떴다가, 여전히 살아있는 일렁임에 다시 눈을 감았다. 한동안 곳곳을 훑는 형의 시선을 느끼며, 나는 이 순간이 얼른 지나가기를 바랬고, 동시에 조금 더 이어지기를 바랬다. 그렇게 상반된 감정 속에서,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고백하는 게 아주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고.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잠깐 자고 일어났을 때는 몸이 가뿐했는데, 집필하면서 다시 상태가 안 좋아져서요. 눕다가 글 쓰다 눕다가 글 쓰다 하다가 까무룩 잠들었습니다.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아 업데이트가 늦어진 점 양해 부탁합니다. _(__)_ PS. 등록을 누르니까 갑자기 접속자가 많아 접속이 원활하지 않다고 뜨더니, 한 네 번 클릭하니까 되더군요. 그리고 보니까 네 편이 한꺼번에 올라와 있어서, 세 편은 얼른 삭제했습니다. 0398 / 0933 ---------------------------------------------- 3. 두 번째 의뢰 - 구출 : 얼어붙은 숲(5/5) 오후였다. 중천에 떠오른 해는 마침 지나가는 구름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서늘했던 공기는 조금씩 따뜻해져 가고 있었고, 도시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왠지 모르게 활기찬 느낌이었다. 전쟁이 끝난 지도 어느덧 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전란에서 한 걸음 비켜서 있던 모니카는 보다 빠르게 원래 모습을 되찾았고, 이스탄텔 로우의 노력이 합쳐져 전보다 더욱 번성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확실히 한소영은 대단한 사용자였다. 이번 혼란을 잘 매만져 오히려 도시 발전의 기회로 삼았으니. 팡! 그때 매서운 파공음이 문득 귓가로 흘러들었다. 하여 소리의 근원지인 정원으로 고개를 떨구자, 웃통을 훌렁 벗은 채 열심히 창을 휘두르는 안현이 보였다. 팡! 팡, 팡! 공기를 치는 소리가 제법 경쾌하다. 자세도 그다지 나쁘지 않고. 아무래도 그날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연습한 게 조금씩 성과를 보이는 모양이다. 현은 한동안 열심히 움직이다 잠시 몸을 멈추더니 자세를 유지한 그대로 고개를 갸웃했다. 체술에 많은 영향을 받는 '기공창술사'인만큼 뭔가 잘 이어지지 않는 부분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다 내 시선을 느낀 걸까. 일순 녀석이 갑작스레 고개를 돌리더니 정확히 내가 서 있는 테라스를 올려다보았다. 오호라. 이제 감각도 꽤 예민해진 건가? 순간 절로 흐뭇한 마음이 들어, 난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현은 처음에는 깜짝 놀란 듯 멍한 얼굴을 보였다. 하지만 이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곧 수줍은 표정으로 땀이 흐르는 상체를 가렸다. '……?'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가만히 생각하다가, 나는 반사적으로 검을 잡았다. 그러자 녀석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짤짤 흔들었고, 이내 헤헤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렇게 한바탕 뜻 모를 의미(?)가 오고 간 후, 다시 진중한 얼굴로 자세를 잡는 안현을 보며 난 짧게 고개를 까닥였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했던가? 신상용의 죽음 이후 애들의 태도는 서서히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각 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변화를 보인 클랜원은 바로 현이었다. 예전에는 약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종종 가벼운 태도가 보였는데, 근래에 들어서는 가끔 장난을 치더라도, 자신의 본분은 잊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윽고 다시 열심히 창을 휘두르는 녀석을 보다가, 나는 차분히 걸음을 돌려 집무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방문을 열어 복도로 나선 후,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아 3층 창고로 향했다. 조만간 창고 정리를 실시할 생각이었고, 겸사겸사 새로 들어온 장비들이 잘 있는지도 확인해볼 요량이었다. 잠시 후. 3층 창고에 도착하자, 나는 먼저 온 선객에 잠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굳게 닫혀있어야 하는 문은 약간 열린 상태였고, 벌어진 문틈으로 누군가의 기척이 흘러나오고 있다. 하여 조심스레 문을 열어 창고 내부로 들어서자, 두터운 상자에 둘러싸인 채 쭈그려 앉은 한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여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에 쌀쌀맞게 다 물린 입술. 이내 새침한 빛이 감도는 눈동자와 마주하자, 여인이 한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어깨를 흠칫하더니 곧 살며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오빠? 안녕하세요.” “응. 안녕.” “저…. 이건….” “알고 있어. 어제 영감님한테 들었거든…. 요즘 보석에 대해서 배우고 있다며?” 어제 영감님에게 창고 좀 개방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기억이 있어, 한별이 창고에 있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러자 대답을 들은 한별은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고, 곧 새치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한별(1년 차) 2. 클래스(Class) : 보석 마법사(Secret, Jewel Mage, Runn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평가 중입니다.) 5. 진명 • 국적 : 별에서 비롯된 자 • 아름다운 빛과 광택을 다루는 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2) 7. 신장 • 체중 : 170.5cm • 51.3kg 8. 성향 : 냉정 • 노력(Cool • Effort) (변경 전) [근력 51] [내구 59] [민첩 70] [체력 53] [마력 88] [행운 68] (변경 후) [근력 51] [내구 59] [민첩 71] [체력 54] [마력 89] [행운 68]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4포인트입니다.) '상처가 없어졌네? 마력도 1포인트 상승했고.' “네. 제가 모르는 부분까지 세세하게 알려주셔서, 매일매일 찾아가고 있어요.” 예전과는 다른 똑 부러지는 대답. 왠지 모르게 낯설다고 느껴졌지만, 어떻게 보면 지금이 한별이의 본 모습일 것이다. 더구나 성향이나 능력치를 보면 그동안 그녀가 여실히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무튼 이러한 변화는 내 입장에서도 환영할만한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슥슥. “고생하네. 열심히 하는구나.” “오, 오빠?” 슥슥. “응? 요즘 주변에서 그러더라. 처음 들어왔을 때랑 많이 달라졌다고. 아무튼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야.” “네, 네? 감사…. 아, 아니. 자, 잠시만….” 기분이 나빴던 걸까? 한별은 이리저리 몸을 배배 꼬며 손길을 피하려 노력했다. 빠르게 눈을 깜빡이는 게 무척이나 당황한 얼굴이었다. 하여 얼른 손을 떼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살짝 거칠어진 숨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그녀는 발개진 얼굴로 목을 가다듬고는 오른손으로 왼손 약지를 매만졌다. 예전에 내가 주었던 안티 매직 링(Anti Magic Ring)을 아직도 갖고 있는 모양이다. “아. 내가 실수했나?” 나는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다. 한별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입을 꼭 다문 채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러더니 또 눈을 내리깔았다. 얘는 왜 이렇게 나랑 눈을 마주치는걸 싫어하는 걸까. 이윽고 숙인 고개 사이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도…. 요즘 조금 변하신 것 같아요.” “응? 어디가.” “예전에는 되게 차갑고 무서웠는데…. 요즘에는 가끔 웃어주시고…. 가끔 이름도 불러주시고…. 가끔 보이는 눈빛도 다정해지신 것 같고….” '가끔?' 중간중간 말끝을 흐려서 그런지, 한별의 대답은 불분명했다. 해서 고개를 갸웃하고 있자 이내 다시 고개를 드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냥…. 예전보다는 여유가 생기신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좋아요.” 그리고는 까닭 없이 비장한 어조로 말을 매듭지었다. 나는 잠깐 머리를 긁적였다가, 아무튼 칭찬이라는 생각에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내가 웃은 순간, 무표정했던 한별의 얼굴에 미약한 홍조가 어리는가 싶더니 곧 입가에 어렴풋한 미소가 그려지는걸 볼 수 있었다. 웃음이 드문 아이라 생소하기는 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옅은 미소가 무척이나 어울린다는 것. '아름답네.' 그렇게 아무 말도 않은 채 서로 미소만 짓고 있을 즈음이었다. 우당탕! 다다다다! 갑작스레 복도 계단 쪽에서 뭔가 굉장한 소리가 나더니. “오빠아아아아! 큰일났어어어!” 이내 찢어지는 소리가 복도를 타고 들어와 창고를 왕왕 울렸다. 우리는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유정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말한 큰일이란 바로 식당에서 치고 때리는 싸움이 났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머셔너리 하우스 내부에서.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속으로 기함했고, 바로 식당으로 달렸다. 지금껏 내부 불화가 아주 없었다고는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주먹다짐까지 연결된 경우는 없었다.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은 현대와 다르다. 각 사용자들은 '능력치'라는 설정이 있기 때문에 단순한 싸움이 한순간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다. 물론 정말 격한 경우가 아니라면 마지노선은 지키겠지만….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것은 자칫 잘못하면 클랜 내부의 불화로 번질 소지가 매우 크기 때문에, 이유를 불문하고서라도 최대한 빠르게 진화해야 한다. 단숨에 1층에 다다라 식당으로 향하는 통로를 달리자, 앞쪽에서 격한 소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흘러나왔다. 나는 급한 마음에 달리는 속도를 높였고 식당 문을 세게 밀어젖혔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확인한 순간, 나는 바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식당 안에는 여러 클랜원들이 있었는데 가장 먼저 보인 사람은 바로 무척이나 화난 얼굴을 하고 있는 정하연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쪽 테이블의 위로, 꼬리를 일자로 빳빳이 세운 채 으르렁거리는 아기 유니콘이 보였다. '…….' 순간 혼미해져 오는 정신을 붙잡으며, 나는 일단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둘은 현재 한창 말다툼을 벌이는 중이었다. “너. 진짜 자꾸 이렇게 나올 거니?” “뀨!” “오냐 오냐 봐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동안 너 때문에 얼마나 속상했는지 알아?” “뀨뀨!” …하지만 상황이 파악되지 않는다. 그저 정하연이 무척 화가 나 있다는 사실과, 그녀의 말에 오히려 눈을 똑바로 뜨고 대응하는 아기 유니콘이 보일 뿐.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뭘 추론할 수 있다는 말인가? 멍하니 시선을 돌리자, 한 쪽 구석에서 끅끅 소리를 내는 고연주가 보였다. 그녀는 웃겨 죽겠다는 얼굴을 한 채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오죽하면 눈물까지 흘려댈 정도였다. 그 순간, 한층 높아진 정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어디서 눈 똑바로 뜨고 대들어! 얼른 잘못했다고 해!” “뀨뀨! 뀨뀨뀨뀨뀨!” “이 녀석이 정말!” 결국 정하연은 참지 못했는지, 한 걸음 성큼 다가서 아기 유니콘을 번쩍 치켜들었다. “뀨, 뀨뀨?” 아기 유니콘은 깜짝 놀란 얼굴로 다리를 마구 휘저었지만 정하연은 꿋꿋이 녀석을 왼쪽 옆구리에 끼었다. 그렇게 엉덩이를 드러내게 만들더니 이내 오른손을 한껏 치켜들었다. “이 녀석!” 찰싹! 그리고 손이 바람을 가르는 것과 동시에, 아기 유니콘의 엉덩이에서 차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 녀석! 이 녀석! 이 못된 녀석!” 찰싹! 찰싹, 찰싹! “뀨! 뀨뀨! 뀨뀨뀨!”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누가 그렇게 협박하랬어. 어? 협박이 나쁜 거 알아 몰라?” 정하연은 아기 유니콘의 볼기를 쉴 새 없이 볼기를 두드렸다. 그야말로 인정 사정없는 손길이었다. 찰싹! 찰싹, 찰싹! “뀨, 뀨뀨! 뀨뀨뀨뀨!” 그럴 때마다 아기 유니콘은 온 힘을 다해 버둥거렸지만 그녀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녀석은 아직 유아기에 불과한 힘 약한 동물이었으니까.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그만!” 아직 내가 온 것을 몰랐는지, 대다수의 클랜원들이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내 나는 부러운 얼굴로 아기 유니콘을 쳐다보는 비비앙을 지나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용자 정하연.” “수, 수현?”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아…. 이, 이게요….” 정하연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더니 곧 아기 유니콘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뀨우…. 뀨우웅….” 그러자 아기 유니콘은 앙앙 울며 나에게 달려왔고, 난 녀석을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하얗던 엉덩이가 발갛게 변했을 정도였다. 이윽고 약하게 입술을 깨문 정하연을 보며 나는 한 번 더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던 겁니까?” “죄송해요. 클랜 로드.” “…아직 유아기에 불과한 녀석입니다. 어떤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소란까지 피울 필요는 없었을 텐데요.” “그냥…. 속상해서요.” 속상하다 라. 나는 지그시 정하연을 응시했다. 평소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는 만큼, 분명 아무 이유 없이 이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여 추후에 자세한 연유를 듣기로 하고, 일단은 상황을 정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어쨌든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뀨우웅…. 뀨우우웅….” 무에 그리 서러운지. 슬쩍 고개를 내리자 훌쩍훌쩍 울며 내게로 고개를 파묻는 아기 유니콘이 보였다. 하기야 소리가 차진걸 넘어서 짝짝 달라붙었을 정도니, 매우 아팠을 것이다. 나는 탱탱 부은 엉덩이를 부드러이 보듬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휴. 알겠습니다. 아무튼 이 녀석은 제가 잠시 데리고 있을 테니, 하연은 잠시 머리라도 식히는 게 좋겠네요.” “네. 죄송해요. 부르실 때까지 자숙하고 있을게요.” 이내 차분히 숨을 고른 후 대답하는 하연을 보며, 나는 반대로 고개를 돌렸다. 이유정이 보이지 않는다. 과연 큰일이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추궁할 필요는 있을듯했다. 그때였다. “오라버니이이!” 순간 등 뒤로 식당을 박차고 들어오는 소리가 귓가를 강하게 때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안솔의 목소리. “큰일났어요!” 그 말에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여기서도 큰일, 저기서도 큰일. 아까 현이랑 한별이를 봤을 때만 해도 기분이 잔잔했는데, 식당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모든 게 변하였다. '…큰일 아니기만 해봐라.' 하지만 안솔의 공식적인 역할이 수행 인원인 만큼 마냥 무시하기는 힘들었다. 해서 나는 속으로 단단히 마음먹으며,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안솔의 말이 이어졌다. “이, 이스탄텔 로우 로드랑…. 에…. 아무튼 손님 한 분이랑 방문하셨어요!” 그 순간,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손님이라고?' ============================ 작품 후기 ============================ 1. 이번 파트는 탐험을 다룬 에피소드로, 총 4회로 예정되어있습니다. 다만 제 생각에 1회 추가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2. 몸은 거의 나았습니다. :) 3. 11월 23일(토요일)에 약속이 있어 휴재합니다. 저번 주부터 잡은 약속이라 필히 참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0399 / 0933 ---------------------------------------------- 3. 두 번째 의뢰 - 구출 : 얼어붙은 숲(5/5) “뀨웅…. 뀨우웅….” …엉덩이를 맞은 충격이 너무 컸던 걸까? 아기 유니콘은 한사코 내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고, 나는 금방 곤란한 입장에 놓여버렸다. 우는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조금이라도 떼어 놀라치면 네 다리를 방방 휘저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결국 난 아기 유니콘과 함께 들어가는 것으로 결정을 보았다. 아직 어린 녀석이라 그렇게 큰 부담도 없었으며, 한소영을 계속 기다리게 하는 건 확실한 실례였기 때문이다. “절대로 멋대로 굴면 안 된다. 알겠지?” “뀨.” 그래도 혹시 몰라 한 차례 단단히 다짐을 받고 난 후에야 난 재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이윽고 문을 밀어젖히고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찻잔을 기울이는 한소영과, 처음 보는 남성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그가 안솔이 말한 손님인 모양이다. 찻잔을 물은 색기 넘치는 입술에 잠깐 시선을 빼앗겼다가, 이내 정신을 차려 입을 열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한소영은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금은 찻물을 넘기는지 목울대가 살짝 움직인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불쑥 찾아와…. 어.” 그리고 바로 인사를 건네는듯싶더니, 갑작스레 말을 멈췄다. '음?' 왜 그러는가 싶어 자세히 살펴보자, 그녀의 시선이 내 가슴 부근에 꽂힌걸 볼 수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뀨?” 그때, 한없이 고개를 파묻던 아기 유니콘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원체 호기심이 왕성한 녀석이라, 새로운 사람들을 보자 관심이 일은 모양이다. 나는 머리를 갸웃하는 녀석의 머리를 부드러이 쓰다듬은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 인사하렴.” “뀨?” “좋은 분이란다.” “뀨뀨.” 그러자 뀨뀨거리며 고개를 꾸벅 숙이는 아기 유니콘. 그와 동시에 찻잔을 내려놓던 그녀의 나긋한 손길이, 중간에서 우뚝 멈추었다. 그 광경을 흐뭇한 마음으로 쳐다보고 있자, 일순 그녀의 눈망울이 눈에 보일 정도로 거세게 흔들린다. 난 고개를 갸울이며 남은 소파에 마주앉았고 그제야 한소영의 시선이 나를 향하였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진득이 떼어졌다. “유니콘…. 인가요?” “예. 아직 유아기에 불과한 녀석이지만요…. 아. 혹시 처음이신가요?” “듣기는 많이 들었어요. 하지만 보는 건 처음이네요.” 테이블에는 허브 차와 함께 간단한 다과가 차려져 있었다. 한바탕 울고 나니 배가 고픈지, 아기 유니콘이 꾸물꾸물 움직이며 코를 킁킁거린다. 하지만 난 가만히 있으라는 뜻으로 살짝 꼬집고 나서 옆의 남성을 흘끗 쳐다보았다. 언뜻 느끼기로, 그의 행동은 꽤나 특이했다. 왜 그런가 하면 내가 들어온 이후로 시종일관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방금 눈동자를 스친 감정은…. 공포인가? 아주 잠깐 그를 바라보다가, 나는 바로 말문을 열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찾아오셨는지요.” “네. 다름이 아니라…. 아. 그전에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 여쭈어도 될까요?” 허락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순간 그녀의 낯빛이 미약한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진명인 '철혈의 여왕'처럼 항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그녀였기에, 조금 전 그리고 지금의 반응은 꽤나 의외라 볼 수 있었다. “오면서 보니까 입구에 해밀 클랜 깃발이 걸려있던데….” '아하.' 그 순간, 난 한소영의 반응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깃발이 걸려있는 이유야 간단하다. 형에게 내 비밀을 고백한 이후로, 얼마 전 머셔너리와 해밀 클랜은 동맹을 맺었다. 동맹의 수준은 '공방 동맹'으로(공격과 방어를 함께한다는 뜻.), 합병을 제외한 최고 수준의 동맹이라 볼 수 있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입구에 해밀 클랜을 상징하는 문양을 자그맣게 걸어놓았는데, 아마 거기서 오해가 생긴 듯싶었다. 아직 머셔너리의 문양은 정하지조차 않은 상태였으니 관심 있는 사람이 본다면 확실히 이상하다 여기리라. “얼마 전 해밀 클랜과 공방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머셔너리를 상징하는 문양을 정하지 못해 깃발을 걸어놓지 못했고요. 단지 그뿐입니다.” “그뿐이라면….” “합병도 아니고, 종속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머셔너리가 모니카를 떠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단언하듯 입을 열었고, 한소영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렇군요. 다행이에요. 그리고 괜한걸 여쭈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저희 쪽 실수도 있는걸요. 아무튼 오해가 풀렸으니 다행입니다.” 이러나저러나 한소영은 우리를 놓치기 싫었던 모양인가 보다. 그리고 나 또한 당분간 모니카를 떠날 생각이 없었기에, 미리 말해주는데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아무튼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생각에, 나는 꿔다 논 보릿자루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옆의 분은 누구신가요?” 그러자 그녀는 알고 있다는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고, 곧 고개를 돌려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소개를 안 드렸네요. 송승규씨?” “…….” “사용자 송승규?” “…아! 네, 네.” 역시나 이상한 반응. 그래서 제 3의 눈으로 사용자 정보를 확인한 순간,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걸 느낄 수 있었다. 하여 반사적으로 허리춤을 더듬었다가, 검을 두고 왔다는 사실에 깊이 신음했다. '…아니지. 일단은 두고 보는 게 낫겠군.' 이윽고 송승규라 불린 남자는 날 유심히 한 번 살펴보더니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소…. 송승규라 합니다. 얼마 전까지 작은 캐러밴 하나를 이끌던 사용자입니다.” 얼마 전까지라 함은 이제는 아니라는 소리. 뭔가 의뢰의 냄새가 솔솔 풍기는 게 느껴져 일단 말에 집중하기로 했다. 물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반갑습니다. 머셔너리 클랜 로드 김수현입니다.” “머셔너리 로드라 하면…. 혹시.” “?” “이전 전쟁에서 활약하신…. 그분이십니까?” 그분이라. 굉장히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어쨌든 난 맞는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한결 안도한 얼굴로 한소영을 돌아보았다. 한소영은 바로 입을 열었다. “머셔너리 로드. 오늘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 뵌 이유는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예요.” “부탁이요?” “네. 아. 의뢰라고 말을 해야 할까요. 혹시 얼어붙은 숲이라고 들어보셨나요?” 매우. 그리고 당연히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한소영은 다시 송승규를 쳐다보았고, 그는 뭔가를 회상하려는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러니까…. 아마 두 달 전이었을 겁니다. 연합군과의 전쟁에 참가한 저와 캐러밴의 동료들은 이후 벌어진 포위 작전에도 참가하게 되었고, 해체 명령이 떨어지기 몇 일전 얼어붙은 숲 외곽을 정찰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지요.” “예.” “그래서….” * …그렇게 공식적인 해체 명령이 떨어지고 나서, 우리들은 바로 도시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며칠간 정비를 마친 후 바로 탐험을 떠났지요. 포위망이 해체되기 전까지 혹여 누가 발견하는 게 아닐까 전전긍긍하고 있었기에, 하루라도 빨리 도착하고 싶은 마음이었거든요. 네. 2주 후 저희들은 미리 봐두었던 '얼어붙은 숲' 중앙의 얼음 탑으로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온전히 얼음으로 이루어진 탑은 아니고, 고대의 헐은 탑이 얼음으로 뒤덮여 그렇게 보인 것이지요.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가까이서 보니 얼음 안 벽은 헐어있고, 군데군데 녹이 슨 게 그야말로 흉흉한 곳이었지요. 하지만 크기는 엄청났습니다. 넓이도 엄청 넓었지만 높이도 엄청났지요. 거의 15층 아파트 높이 정도됐을까요? 아무튼 별로 다가가고 싶은 형상은 아니었지만…. 아시잖습니까. 사용자들에게 유적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우리는 이곳을 탐험하고 얻을 것들에 한창 들떠있는 상태였고 하여 곧바로 안으로 진입했습니다. 1층에는 별다른 건 없었습니다. 아니.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눈에 뜨이는 특이한 건 없었지요. 보물은커녕 괴물 한 마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와 동료들은 무척 실망했습니다. 그래도 아직 남은 층이 있었기에 저는 동료들을 다독였습니다. 조금만 더 올라가보자고. 아직 남은 곳이 있으니까 한 번 끝까지 가보자고 말이죠. …그때는 그게 화근이 될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몇 층인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문을 열고 층을 올라갔을 때 한 가지 느낀 점은, 그때까지 거쳐왔던 층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점이었습니다. 뭐랄까…. 미로? 그래 미로였습니다. 사방에는 얼음이 서려있고, 길은 무척이나 복잡한 얼음으로 이루어진 미로요. 우리는 일단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으려 미로로 들어갔고, 갖은 고생 끝에 간신히 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알고야 말았죠. 동료 중 한 명이 없어졌다는 걸 말입니다. 처음에는 길을 잃었나 싶어 다시 길을 되돌아갔는데, 동료의 흔적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흔적은커녕 우리는 미로에서 길을 잃고 말았죠. 정말로 미치고 환장하는 건, 그렇게 길을 잃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또다시 두 명이 없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네. 처음 용병을 포함해 11명으로 시작했던 캐러밴은 어느덧 8명으로 줄어들었고, 1시간 정도 추가로 헤맨 결과 5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저는 그제야 일이 잘못됐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동료의 일단 물러서자는 의견에 바로 후퇴를 결정했지만,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이미 그놈들…. 우리는 미로에 먹혀버린 상황이었으니까요. 아무리 찾아도 나가는 출구는 보이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저희는 심한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러던 중 결국 다시 문 앞으로 오게 되었고, 그것은 아까 발견했던 위층으로 올라가는 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문을 보는 순간 저희는 모두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왜냐고요? 문에는 아까 전에는 없었던 글이 적혀있었거든요. 남은 동료 중에 고어 해석 전문가가 있어 그가 해석해 말해주었습니다. 나가는 길을 찾고 있구나. 그럼 이 문을 열어. 저는 한순간 고민했고 결국 문을 열기로 결정했습니다. 남은 동료 중 몇 명은 만류했지만 이대로 계속 헤매느니 한 번 부딪치는 게 낫겠다고 여겼지요. 그래서 일말의 준비를 한 후 곧바로 문을 열었습니다. …방안은 어두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또 한 번 광경이 달라져 있었지요. 그냥 어둡고 넓은 방? 그냥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요? 우리는 막힌 벽 앞에서 또다시 걸음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벽에는 또 하나의 긴 글이 적혀있었습니다. 진짜 문을 열어줬네? 고마워. 그 말을 들은 순간 저는 일이 잘못됐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때 동료 중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문 쪽으로 도망간 터라 한층 마음이 복잡해졌죠. 그 찰나의 순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해석을 해준 동료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절대로 뒤돌아보지마. 처음엔 뭔 소린가 했지만, 그 순간 궁수인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희들이 들어온 문밖으로 뭔가가 재빠르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요. 그리고 동료의 뒤돌아보지 말라는 말은, 벽에 적혀있던 글을 읽은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때였습니다. 문밖으로 먼저 도망친 동료의 것으로 추정되는 비명이 들리고, 동시에 굳게 닫았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 “…그래서 어떻게 되셨지요?” 내 물음에 송승규는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고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윽고 손 틈으로 잔뜩 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모르겠습니다. 문이 열린 것을 확인한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했으니까요. 그냥 뭔지도 모를 것을 피해 방안을 미친 듯이 돌아다니다가, 어떻게 문을 나간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요?” “그리고…. 모르겠습니다. 정신 없이 뛰던 것은 간간이 기억나는데…. 어떻게 도망친 건지는 모르겠어요.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저는 탑 밖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여전히 얼굴을 보이지 않는 그를 보다가, 나는 차분히 다리를 꼬았다. 이윽고 손을 내려 얼굴을 보인 그는, 눈을 형형히 빛내며 말을 이었다. “부탁합니다. 살아있을 가능성은 거의 생각지 않지만…. 그래도 몇 년 동안 함께해온 동료들입니다. 적어도 생사라도 확인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확…. 구출 의뢰를 하겠다는 말씀이시군요.” 난 확인 의뢰라고 말하려다, 마음을 바꿔 구출로 정정했다. 순간 참으로 얄궂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어붙은 숲'은 분명 기억에 있는 유적이었지만 탐험 예정에 들어있는 곳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차후 이스탄텔 로우에서 밝혀낼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괜히 건드리기보다는 그냥 알아서 밝히도록 놔둘 예정이었다. 한소영은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요히 입을 열었다. “원래는 응당 저희 쪽에서 처리해야 하는 일이지만…. 현재 이스탄텔 로우는 도시 정비에 온 힘을 쏟고 있어요. 현재 여력이 부족한 게 사실이라 머셔너리의 도움을 구하고 싶은 거예요.” 구변은 좋았지만 한소영의 말을 온전히 믿을 것은 못되었다. 바쁜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의 아래에는 수많은 산하 클랜이 있다. 그들 중에서 적당히 맡겨도 되는 일인데, 그럼에도 굳이 나를 찾아왔다는 이유는…. '깃발을 보고 안게 아니라 훨씬 전에 이미 정보를 입수했던 것이로군. 그래서 사실 확인 후 아니라면 신경을 써주려는 것일 테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절로 쓴웃음이 일었다. 그래도 호의를 보인다고 보였는데, 아직까지 완전한 신뢰 관계는 구축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뭐 어쩌면 이게 정상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와삭와삭. 와삭와삭. 문득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내리자, 테이블에 비치된 다과를 맛있게 먹고 있는 아기 유니콘이 보였다.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쉰 후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 의뢰, 머셔너리 클랜에서 맡도록 하겠습니다.” 송승규는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이더니 큰 목소리로 외쳤다. “감사합니다!” 소리가 제법 컸는지, 한창 신나게 다과를 탐하던 아기 유니콘은 일순 번쩍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뀨, 뀨!” 그러더니 입가에 가루를 잔뜩 묻힌 채 나에게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뭔가에 깜짝 놀랐는지 온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다. '…….' 이내 테이블에 비친, 섬뜩하게 드러난 하얀 이를 보며 나는 마주 웃어주었다. “뭘요. 의뢰인데요.” 거기도 얼마나 얻을게 많은데. ============================ 작품 후기 ============================ “머셔너리 로드. 그런데 혹시 검후 못 보셨나요?” “예? 아니요. 못 봤는데요.” “흠. 그렇군요.” (매의 눈빛을 뿌리는 한소영.) “왜, 왜 그렇게 보시는지.” “흠.” “?” “알았어요. 혹시 보시면 저에게 연락 한 번 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같이 있는 거 아니었나?)” PS. 4회~5회로 구성이 끝마쳐있는 상태라, 이후 진행은 많은 부분이 생략될 예정입니다. 다음 회는 도입 부분을 제외하곤 바로 얼어붙은 숲에 도착해있을 예정입니다. 0400 / 0933 ---------------------------------------------- 3. 두 번째 의뢰 - 구출 : 얼어붙은 숲(5/5) 깊은 밤, 숲은 어두웠다. 시잉…. 시이잉…. 그리고 매우 추웠다. “흠.” 살이 에일 정도의 찬바람이 불어, 난 약간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곧장 엉덩이를 끌어 홀로 타오르는 모닥불 쪽으로 바짝 다가섰다. 문득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자, 무수히 수 놓인 반짝이는 별들이 보인다. 아직 남은 밤은 긴 모양이다. “쿨…. 쿨….” 하여 저녁에 먹다 남은 스튜라도 한 그릇 할까 하며 몸에 두른 담요를 끌어올리자, 돌연히 미약한 코고는 소리가 들려온다. 누구인지는 안 봐도 비디오. 나는 싱겁게 웃곤 한숨과 함께 주변을 둘러보았다. 빽빽하게 자라난 나무와 무성하게 우거진 수풀들. 이 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숲이겠지만, 주변 풍경은 일반적인 숲과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그것은 내 눈에 밟히는 나무들에 서리가 끼어있다는 것. 아니. 비단 나무뿐만이 아니었다. 서리는 숲 전체에 뒤덮인 상태라, 마치 남극 한복판에 있다는 느낌마저 주었다. 어찌됐든. 난 불침번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주변을 날카롭게 훑었고,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탁탁! 타닥, 타닥! 문득 불똥이 튀는 소리에 나는 슬쩍 시선을 올렸다. 그러자 허공에 점점이 흩어지는 불꽃이 보이고, 그 너머로 고개를 꾸벅꾸벅 꺼트리는 누군가가 보였다. 안현이다. “음, 음…. 연주 누님…. 이러면 안돼요….” 얼씨구. 불침번 때 조는 것도 모자라 발칙한 상상까지? 원래는 한 15분 정도 지나고 깨울 생각이었지만, 안현의 잠꼬대는 내 마음을 바꾸게 만들었다. 솔직히 유정이나 한결이었다면 어느 정도 용납할 생각이었으나, 고연주는 예외였다. 하여 녀석의 입가에 지어진 음흉한 미소를 보자마자 나는 지체 않고 입을 열었다. “야. 안현.” “흐허헙!” 기특하게도, 안현은 곧장 반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행동 또한 놀랍도록 민첩했다. 순간적으로 고개를 똑바로 세우더니 눈을 부릅떠 주변을 홰홰 둘러보는 것이다. “흐흠. 커흐흠. 음…. 형! 이상한 점은 없는 것 같아요. 스읍.” “…그래?” “콜록, 콜록! 스읍.” “…….” 그렇게 잠시 동안 시치미를 떼긴 했지만, 이내 입가에 흐르는 침 자국을 느낀 모양이다. 눈을 가늘게 만들어 빤히 바라보자, 현은 곧 어색한 눈길로 나를 응시했다. “…죄송합니다.” 나는 옆에 쌓인 장작을 뒤적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 오전 중으로 도착한다니까 졸리면 이만 들어가서 자라. 정작 중요할 때 실수하지 말고.” “아, 아니요! 형님께서 불침번을 서시는데 어찌 제가 감히…. 섭섭합니다. 형님.” “눈가에 졸음이나 지우고 말해. 아니면 미리 말이라도 하고 눈을 붙이던가. 예전에 뮬에서 말했었지?” 내 말인즉슨 졸리면 미리 양해를 구하고 졸라는 말이었다. 깜빡깜빡한 상태로 어설프게 경계하는 것보다는, 15분 정도 푹 자고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불침번을 서는 게 백배 나았으니까.(물론 불침번이 최소 두 명이라는 전제는 있어야 한다.) “헤헤.” 안현은 자신이 백 번 잘못했다는 양 멋쩍은 웃음만 흘렸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짧은 한숨을 흘렸고, 몰아붙이는걸 그만두었다. 어쨌든 지금이 불침번을 서는데 가장 힘든 시간이기도 했고, 나도 저 때 꽤나 졸았으니까. 안현은 한동안 입을 쩍쩍 벌리다가, 결국 수마를 이기지 못했는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형님. 아직 불침번 많이 남았죠?” “응. 교대하려면 멀었어.” “그럼 정말 죄송한데, 딱 1분만 자면 안될까요? 너무 졸려서요.” “…5분 뒤에 깨워줄게. 네 구역은 내가 보고 있으마.”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안현은 바로 고개를 숙이더니 10초 만에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제야 난 아까 잡았던 장작을 모닥불로 던져 넣었고, 이리저리 흩날리는 불꽃을 응시했다. 잠시 후. 한참 동안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자, 내 머리는 절로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이스탄텔 로우의 의뢰를 받은 지 어느덧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의뢰를 받은 이상. 그리고 의뢰 내용에 시급을 다투는 생사가 걸려있는 이상. 난 그날 의뢰 공지 및 인선을 발표했고, 다음날 바로 '얼어붙은 숲'으로 출발했다. 이번 조사단에 참가한 클랜원은 6명으로 많은 인원은 아니었다. 일단 나와 안현. 그리고 비비앙, 신재룡, 임한나, 정하연이 전부였다. 그리고 인도 자로 합류한 송승규까지 합친다면 인원은 총 7명이 될 것이다. 생각보다 적은 인원이라 생각할 수 있음에도, 의뢰인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한시라도 빨리 가고 싶은지 출발을 재촉하는 말만 했을 뿐. '얼어붙은 숲'은 탐험 예정에 들어있는 유적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내 기억 속에 있는 곳이었다. 사실 내 기준으로 따지면 그렇게 난이도가 높은 곳은 아니었기 때문에, 필요한 포지션을 제외하곤 과감히 제외한 것이다.(효율로 따지면 고연주를 넣는 게 좋긴 했지만, 현재 머셔너리에는 클랜 로드 대리가 필요했기에 남겨두었다.) 이후 서부로 이동한 조사단은 곧바로 목적지로 행군했고, 바로 사흘 전 '얼어붙은 숲'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최종 목적지인 '얼음 탑'에 도착하기 하루 직전에 있었다. 객관적으로 평가해서 여기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괴물들도 별로 보이지 않았고(포위망 구성으로 이미 한바탕 난리를 친 상태였기 때문이다.), 굉장히 추운 것만 제외하면 다친 클랜원은 없다. 다만 변수가 하나 있다면 바로 의뢰인…. '응?' - 사아아아아아아아…. - 히아아아아아아아…. 그때였다. 불현듯 주변에서 감지된 이상 징후에, 난 바로 상념에서 깨어나 감각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머리는 고정한 상태로 시선만 좌우로 돌리자, 나무들 사이에서 희뿌연 한 것들이 하나 둘 나타나는 게 보인다. 조용히 수를 세어보니 수는 대략 기백 정도 돼 보일까. 언뜻 보면 허연 김이나 아지랑이처럼 보이지만…. '이런 수상한 기체가…. 이렇게 한꺼번에 나타날 리는 없지.' 아무래도 형체가 없는 놈들인지라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 히이이이이이이이…. - 흐어어어어어어어…. 절대 인간의 육성으로는 들을 수 없는, 소름 돋는 귀곡성. 난 담요 안에 넣어둔 '무검'을 꽉 잡았다가, 우선 안현을 깨우려는 생각에 전방을 바라보았다. “안….” “형.” 그러나 놀랍게도 안현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아직 졸음이 남았는지 서너 번 눈을 깜빡였지만, 눈동자는 한없이 가라앉아 있다. 그런 녀석의 손은 어느새 슬그머니 '칠흑의 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안현이 낮은 음색으로 물었다. “형…. 이것들은 뭐예요?” “…망령.” “망령이요?” 안현은 창을 잡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도, 쉴 새 없이 좌우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막 천막으로 달리려는 녀석에게 난 잠깐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냈고, 이내 주변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상세히 파악하기 시작했다. - 사아아아아아아아…. - 히아아아아아아아…. '적의가 느껴지지 않아?' - …가라…. - …쳐라…. 아니 잠깐만. '이건….' 뭔가를 말하려고 하고 있다. 난 여전히 검을 잡은 손을 놓지 않으면서도, 아지랑이들이 내는 귀곡성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 ……! 여…서 …가! - 살………요. 저…를 구해……요. 그래. 확실하다. 처음에 바람 소리로 들렸던 소음은, 이제는 뭔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비단 나만 들은 것은 아닌지, 안현은 잔뜩 굳은 얼굴로 눈알을 굴렸다. “혀, 형…. 무슨…. 이상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요. 정확히는 못 알아 들겠지만….” 웅얼거린다 라. 하기야 감각을 한껏 끌어올린 나에게도 완벽하게 들리지는 않는데, 안현에게는 희미하게 들릴 것이다. 난 알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후 검지를 피어 입술에 대었고, 안현은 곧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 도망…! 도망치라고! 숲의 안쪽에는 훨 … ……운…! - 너희… 속고 있…. …금 천막 안… …는 …은…. 과연. 그런 건가. 마지막에 들린 말로 미루어 난 망령들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고, 동시에 꾹 잡았던 검을 슬며시 놓았다. “…….” 그리고 한 번 천막을 뒤돌아보았다가, 다시 서서히 고개를 돌려 망령들과 스치듯 눈을 마주쳤다. 이윽고 종착역으로 안현과 눈을 마주쳤을 때, 나직이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마. 이만 쉬어.” “네? 쉬라고요?”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곁눈질을 하자, 동요의 감정이 흘러들었다. - 걱정 말……? - 모… 조…히! 그나마 눈치 빠른 놈은 있는지 망령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나는 놈들의 고요를 확인한 후 한 번 더 말을 이었다. 물론, 여전히 시선은 안현에게 고정한 채로. “알고 있어. 이놈들은 갈 곳을 잃은 망령들이다.” “네?” “추워도 참아. 곧 물러나면…. 조만간 편안해질 거야. 그러니 섣불리 대응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기다려.” “?” 약간 핀트가 어긋난 대답을 해서 그런지, 안현은 시종일관 고개를 갸울였다. 그러나 망령들은 단박에 내 말을 알아들은 듯 이내 말한 대로 행동해주었다. - …래. 그…다…. - 고맙습…다. 아지랑이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처음 발견했을 때처럼 순식간에 출현했다가, 삽시간에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금 고요한 침묵이 찾아 들었다. “형. 조금 전 저한테 말씀하신 거예요?” “너한테 말한 것도 맞아.” “아니. 그게 무슨….” “엇차.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라고.” 한 마디 툭 내뱉은 후 몸을 일으켜 모닥불을 살폈다. 장작더미 주변에는 오늘 저녁 먹다 남은 고기 스튜가 담긴 냄비가 있었다. 난 가벼운 손길로 냄비를 들어 흘끗 안현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여전히 멍한 얼굴로 목울대를 꿀꺽 움직이는 녀석이 보인다. “한 그릇?” 얼떨떨한 와중에도 배는 고픈지, 안현은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나는 바로 남은 그릇 하나를 찾아 건네며, 문득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남은 밤은 길다. '내일이 기대되는군.' * 아침이 밝았다. '얼어붙은 숲'의 아침은 새벽과 별반 다를 바 없다. 하늘에는 쨍쨍한 해가 떠올라 있었지만, 내리쬐는 햇살은 숲의 얼음에 막혀 대지를 비추지 못하는 상태였다. 더구나 중앙으로 들어갈수록 추위는 점점 더 심해져, 우리는 연신 옷을 비비며 행군을 해야만 했다. 나는 이번 행군에서 선두에 서지 않았다. 선두에는 인도자인 송승규와 궁수인 임한나가 있었으며, 난 안현과 함께 나머지 원거리 클래스를 보호하는 중단에 선 상태였다. 바스락, 바스슥! 바스락, 까드득! 꽁꽁 얼은 대지를 밟을 때마다, 얼어붙은 수풀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어후. 추워 죽겠네 진짜.” 그렇게 한창 숲 속을 지나치던 도중, 비비앙이 온몸을 끌어안으며 투덜거렸다. 방한 마법이 걸린 로브를 두 겹이나 입었음에도 '얼어붙은 숲'의 추위는 막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게요. 저도 어제 너무 추워서 한숨도 못 잤어요. 차라리 모닥불 앞이 따뜻하던데.” “으으. 그렇지?” 하연 또한 맞잡은 손 사이로 “호.” 입김을 불어넣고는 비비앙의 투정에 동의했다. 그러더니 옆에서 조용히 따라오는 신재룡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재룡씨는 그렇게 입고 안 추우세요? 어제 보니까 사제 복 하나만 입으신 것 같던데.” 자신에게 말을 걸어준 사실이 놀라운 모양인지. 신재룡은 잠깐 눈을 휘둥그래 떴다가, 이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꽤 춥군요.” “그럼 왜 그렇게….” “탐험 때는 이렇게 입어야 집중이 되거든요. 특히 전투 때 말이죠. 솔직히 지금껏 별일이 일어나지 않아 후회되지만…. 아무튼 얼어붙은 숲의 이름값은 단단히 체감하고 있습니다.” “저도요. 차라리 괴물이라도 나오면 몸이라도 움직이지. 이러다 관절까지 얼어붙는 기분이에요.” 안현 또한 배부른 투정을 하며 연거푸 투덜거렸다. 하기야 자기 딴에는 오랜만에 탐험을 나간다는 말에 잔뜩 신이 나 있다가, 생각보다 평탄한 탐험이 지속되니 꽤나 심심한 모양이다. “저렇게 해가 떠올라 있는데…. 여긴 녹지도 않나.” 그 순간, 안현은 뭔가 번뜩 떠오른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형. 그런데 갑자기 궁금해졌는데요. 여기는 왜 이름이 얼어붙은 숲이에요? 그리고 왜 얼음이 녹지 않는 거예요?” “…나라고 모든걸 아는 건 아니란다.” “아…. 형은 항상 탐험 전에 꼬박꼬박 도서관에 들르셨잖아요. 그래서 혹시 알고 계실까 해서….” “이번엔 조사 시간이 부족했다고….” 말은 저렇게 했지만 난 안현이 원하는 바를 알아챌 수 있었다. 예전에 연구소, 그리고 마법 도시 마지아에 갔을 때 관련 설화 몇 개를 설명해준 적이 있는데, 아마 이번에도 호기심이 일은 모양이다. 문득 지금껏 다들 심심했는지, 기대에 찬 클랜원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심지어 앞서서 걷던 임한나마저 잠깐 돌아보더니 살짝 웃어 보일 정도였다. '관련 설화에 관해서는…. 정말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아.' 난 한두 번 목을 가다듬었다가 잠깐 송승규의 등을 응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튼 잘은 모르지만…. 어제 망령들은 봤지?” “네? 네.” “그럼 들어봐. 무덤이나 흉가에 가면 까닭 없이 으스스한 느낌이 들곤 하잖아? 그러니까 그걸 뭐라고 하냐면…. 그래. 음기라고 하지. 그러한 느낌을 음기라는 기운으로 정의한다면, 숲에 있는 얼음은 단순한 얼음이 아니라, 망령. 즉 원혼들의 한이 이루어낸 하나의 결정체라 볼 수 있지.” “결정체요? 그럼 이런 얼음들은 다 원혼들이 내뿜는 음기로 이루어진 거예요?” 단박에 알아듣는 안현에,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이 숲은 '얼어붙은 숲'이라 불릴 만큼 전체가 얼어있어.” “그렇다면….” 안현의 되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 중 하나지. 숲 전체를 뒤덮을 만큼 강한 음기를 지닌 원혼이 있거나, 아니면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원혼들이 있거나.” 아니면 둘 다 일수도 있고. 나는 굳이 마지막 말을 꺼내지 않고 말을 매듭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반응들을 살펴보자, 여성 클랜원들. 특히 정하연이 살짝 어깨를 떨고 있는걸 볼 수 있었다. 그때였다. 바스락, 바사삭! 툭! 바닥에서 큰 소리가 나는 것과 함께 행군이 멈추었다. 앞에서 선도하던 송승규가 갑작스레 걸음을 멈춘 것이다. 송승규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그 말에 바로 다가가자 송승규는 느릿하게 손가락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그러자 아직 약간의 거리가 남아있었지만, 나무 위로 슬쩍 모습을 보이는 우뚝 솟은 탑 하나가 슬며시 눈에 들었다. “저곳이 바로 최종 목적지입니다.” “확실히 보이네요. 확인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쉬었다가, 아니면 바로?” “바로 들어가죠.” 나는 즉답했고 클랜원들은 한층 긴장한 얼굴로 진형을 정돈했다. 이윽고 임한나가 송승규를 슬쩍 쳐다보는 것을 시작으로, 우리는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바스락, 바스락! 바스락, 바스락!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아무런 방해 없이 탑 앞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와. 김수현. 여기 되게 높다.” 비비앙이 낭랑한 탄성을 터뜨리며 탑을 올려다보았다. 경치는 감도는 분위기를 제외한 외관만 보면, 그럭저럭 아름답다 할만했다. 탑은 꽝꽝 얼은 호수의 정 중앙에 있었다. 밑바닥 주변으로 얼음이 두껍게 얼어붙어 있어, 마치 아래서부터 위로 솟아오르는 모양새였다. 또한 비비앙의 말대로 탑의 크기는 제법 거대했다. 넓이도 넓이지만 높이는 일견 50미터에 다다를 정도였다. 재질은 그냥 벽돌로 보였는데, 외곽에 얼음이 더덕더덕 붙어있어 어느 정도 형태는 유지하고 있는 듯 보였다. 잠시 구경의 시간을 갖다가,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으로 진입 준비를 하겠습니다.” 잠시 후. 우리는 천천히 탑과의 거리를 줄이기 시작했다. 가면 갈수록 외관이 자세히 보였는데, 군데군데 보이는 균열과 얼룩은 알게 모르게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작스레 선두에 서 있던 임한나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고, 일순 멍하니 고개를 늘어뜨렸다. “임한나?” 그리고 그 순간, 송승규가 재빠르게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위험해요. 망령입니다.” 나는 바로 외쳤다. “무슨 일입니까.” 그제야 번뜩 정신을 차렸는지, 임한나는 떨리는 손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내렸는데…. 이 아래에 뭔가 휙 지나갔어요.” 임한나는 목소리는 살짝 겁에 질려있었다. 나는 제 3의 눈으로 곧장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고개를 갸웃했다. 탑으로 가는 길에는 꽁꽁 언 호수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곧 송승규의 말이 들려왔다. “…아래는 웬만하면 쳐다보지 마십시오.” “네, 네?” “아까 머셔너리 로드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곳은 수많은 원혼들이 있습니다. 최소한 눈은 마주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놈들은 어떻게든 사람을 홀리려 하거든요.” “후…. 그렇군요. 조심할게요.” 임한나는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려는지, 가슴에 살며시 손을 대어 심호흡했다. “머셔너리 로드. 아무래도 얼른 탑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나는 아주 잠깐 송승규를 물끄러미 보다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그럼 지금 바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단단히 준비하시고…. 송승규씨. 선도를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송승규는 단숨에 대답하곤 성큼성큼 걸어가 뻥 뚫린 입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와 일행들은 한 번 시선을 맞췄다가, 조심스레 그의 뒤를 따랐다. 이윽고 탑 안으로 들어서자, 순간적으로 심한 한기가 온몸을 엄습했다. 그리고 언제 저기까지 걸어갔는지. 싸늘한 얼음 빛을 내뿜는 벽돌로 둘러싸인, 텅 빈 공동의 중앙에 홀로 서 있는 송승규가 보였다. 여전히 앞쪽만 바라보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이내 그 상태로, 그는 조용히 위를 가리켰다. “아마 8층까지는 바로 갈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치 쇠를 긁는듯한 목소리는…. “가시죠. 히히히히…!” 밖에서 들었던 것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소름 끼치는 음색이었다. ============================ 작품 후기 ============================ 원래 이번 챕터는 소름 끼치는 공포물로 가려고 했다가, 그냥 일반 탐험으로 방향을 선회했습니다. 왜냐하면 다음 회 이어질 머리채를 이용한 쥐불놀이가 나오면…. 매치가 되지 않을 것 같아서요. 하하. -_-a 어제 쉬어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월요병인지는 모르겠는데, 괜스레 마음이 찹찹하고, 감성도 심하게 터지더군요. 계속 외롭다는 생각이 들어서…. ㅜ.ㅠ 아무튼 앞으로도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400회 축하 감사합니다. :) 0401 / 0933 ---------------------------------------------- 3. 두 번째 의뢰 - 구출 : 얼어붙은 숲(5/5) …그리하여 마법사는 일생일대의 소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심한 절망감에 빠지게 되었지요. 마침내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공주와 탑에 단둘이 남게 되었지만…. 그녀는 결국 싸늘한 시체로 되돌아왔으니까요. 한때 전 대륙을 설레게 만들었던 아름다운 꽃도 이제는 차갑게 식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마법사는, 어느 날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릅니다. 네. 그건 바로 '부활'이었습니다. 그는 고명한 마법사이면서 동시에 뛰어난 연금술사이기도 했거든요. 하여 자신의 능력을 총동원해 공주를 부활시키자는 결심을 하게 되고, 결국 금단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그 이후로 어떻게 되었냐고요?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날 이후 마법사는 숲에 '영원의 마법'을 걸어놓았고, 그에 따라 자연스레 소식도 끊기게 되었거든요. 즉, 여기까지가 설화에 기록돼있는 전부입니다. 다만 이따금 숲에서 들려오는…. - 북 대륙 대도시 바바라(Babara) 중앙 도서관, ‘얼음 숲의 귀곡성’에서 발췌. * 송승규의 말대로였다. 명색이 유적임에도 불구하고, 탑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보이는 거라고는 서늘한 빛을 내뿜는 얼음들과 을씨년스러운 광경뿐. 아무튼 나쁜 일은 아니었고, 우리는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순조로이 계단을 오를 수 있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탑의 내부가 점차 어두워지는 게 느껴졌다. 시야에 별문제는 없다. 그러나 1층부터 계단을 올라오면서 보았건대 나는 단 하나의 창문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 결과 햇살이 비쳐 들지 못해, 훤한 낮임에도 불구하고 알게 모르게 어둡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어두운 탑을 오른 걸까? 후웅…. 후우웅…. 돌연히, 계단 위쪽에서 싸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탑 안으로 들어왔다고 해서 냉기가 어디 가시는 건 아니었다. 내부에도 당연히 얼음이 서려있었고,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은 오히려 더욱 추위를 부추기는 듯했다. 자꾸만 찔러 드는 한기에 온몸을 움츠렸을 때였다. “이제 곧 8층에 도착합니다.” 문득, 소름 끼치는 쇳소리가 스치는 바람결을 타고 흘러들었다. 얼음 서린 계단은 소라 껍데기처럼 나선형으로 비틀려, 까닥 잘못하면 발을 헛디딜 만큼 미끄럽다. 하여 조심조심 균형을 잡고 나서, 나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앞쪽을 응시했다. “저 문만 넘으면 바로 얼음 미로가 나올 겁니다. 캐러밴에 이상이 생긴 것도 저곳부터였으니, 이제부터는 한층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송승규. 여전히 듣기 불편한 음색이었지만 말투 자체는 꽤나 느긋하다. 아마 여기까지 별 의심 않고 따라 올라온 만큼, 이미 다 잡은 고기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럼 미로를 넘으면 문제의 어두운 방이 나오는군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미로가 관건인데…. 혹시 가는 길은 기억하고 계신가요?” 딱히 의도가 있다기보다는 한 번 찔러보는 질문이었다. 송승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하다가, 가볍게 끄덕이는 것과 함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터벅터벅, 터벅터벅. 저벅저벅, 저벅저벅. 고요한 탑 안을 울리는 발소리. 송승규는 탑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거침없이 행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리고 클랜원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유심히 지켜보며 조용히 뒤를 따르고 있었다. 잠시 후 8층으로 통하는 문 앞에 도착한 우리는, 송승규가 하는 행동을 가만히 관찰했다. 그는 바로 옆쪽으로 다가서 벽을 더듬더니 곧 손잡이 비슷한 것을 찾아내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아래로 쭉 내리자, 끄르릉! 뭔가가 긁히는 소리와 함께 얼음 문이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까지 드러낼 생각은 없는 건가….' 이윽고 4/5정도 올라간 얼음 문은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한기와 함께 어두운 내부를 드러내 보였다. “길은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럼 들어오시죠.” 이윽고 송승규는 나직이 한 마디 내뱉고서 입구 안으로 홀연히 몸을 감추었다. * 8층으로 올라와 미로에 들어선지도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송승규의 말대로 8층은 어지럽게 갈래가 져, 언뜻 봐서는 굉장히 복잡한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헤맨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미로가 미로 같지 않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왜냐하면. “여기서 왼쪽이었을 겁니다.” 이 정도로 복잡한 길이면 최소 한두 번은 주저할 법도 한데, 송승규는 11번째로 맞이한 갈림길에서도 단 한 번의 망설임 없이 길을 골랐다. 그러더니 곧 거침없이 성큼성큼 걸어가는 게, 고작 두 번째로 오는 사람 치고는 굉장히 익숙한 모양새였다. 이내 저 멀리 앞으로 나아가는 송승규를 봤는지, 하연이 슬금슬금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수현.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저는 아직도 헷갈려요.” “의심할 여지는 없습니다.” “그럼….” “우선은 따라가죠. 어차피 둘 중 하나겠지요. 이대로 호랑이 굴로 들어가든, 아니면 들어가기 전에 뭔가 행동을 취해오든.” 얘기에 따르면 이상 징후는 미로에서부터 발생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방심할 수는 없지만, 난 왠지 모르게 우리를 9층으로 데려가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일단은 갑시다.” 터벅터벅, 터벅터벅. 저벅저벅, 저벅저벅. 그렇게 갈림길을 지나고 나서, 또 얼마의 시간이 흐른 걸까? 송승규도 미로에 들어오기 전 경고했지만, 미로에서도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고요한 행군이 자못 지루했던 걸까. “김수현! 여기 아까 지났던 길 같은데? 우리 지금 빙빙 도는 거 아니야?” 문득 비비앙이 내게로 걸어와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대답을 구하려는 듯 눈을 반짝였지만, 나는 고개를 젓곤 묵묵히 걸었다. 그녀는 구시렁거리긴 했지만 더는 보채지 않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클랜원들에게는 이미 출발 전부터 송승규에 대해서 말을 해둔 상태였다. 그래서 그런지 다들 긴장의 빛을 늦추지 않고 있었는데, 오직 비비앙만은 “아. 그렇구나.”하는 태도였다. 하기야 이따금 덜렁거리는 것만 제외하면 나와 아주 약간은 비슷한 성격을 지닌 그녀였기에, 내심 지루해하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지났던 길은 확실히 아니지만…. 돌고 있다는 사실은 한 번 재고해봐야겠군.' 밖에서 탑의 규모를 확인했을 때보다 지금 체감하는 넓이가 훨씬 넓게 느껴진다. 물론 중간중간 몇 번 길을 돌은 것도 있지만, 미로에 들어선지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문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때였다. 이윽고 기다란 얼음 벽을 돌아 새로운 길로 들어서자, 좌우를 가로막는 거대한 벽이 눈에 밟혔다. 언뜻 보면 그냥 단순한 얼음 벽이었지만, 그냥 넘기기에는 뭔가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다. 하여 안력을 끌어올려 살펴보자 곧바로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벽면에 흐릿하게 묻어있는 핏자국이었다. 자국 자체는 희미하긴 했지만…. 색을 보면 분명 최근에 뿌려진 피였다. 나는 걸음을 멈춘 채 입을 열었다. “피가 묻어 있군요.” 나직이 말을 건네자, 순간 모두의 걸음이 멈추었다. 이윽고 하나하나 쏠리는 시선에 난 차분히 오른쪽 벽면을 가리켰다.(동시에 클랜원들에게 눈치를 주어, 함부로 행동하지 않도록 사전에 신호를 주었다.) 송승규는 잠시 고개를 갸울이더니 벽면으로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뭔가 희미한 게 보이는군요.” “예. 색깔을 보면 최근에 뿌려진 피 같습니다. 혹시 짚이시는 거라도…?” 눈에 보이는 뒤통수가 부자연스럽게 흔들린다. “아니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별로 중요해 보이지는 않고요.” “동료의 것 일수도 있습니다만.” “그렇겠죠. 하지만 지금 완벽히 판별할 수는 없으니, 일단 미로를 벗어나는 게 우선인 듯싶습니다.”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닌데. 이윽고 송승규는 벽면에서 두어 걸음 물러서고는, 앞쪽으로 트인 길을 가리켰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이 길을 걸어가면 오른쪽으로 꺾은 방향으로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옵니다. 계단만 올라가면 문이 나올 겁니다. 그곳이 저와 동료들이 당했던 9층입니다.” 나는 그가 가리킨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 마디 툭 내뱉었다. “굉장히 상세하게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송승규는 다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길이 난 쪽으로 걸음을 돌려 다시 걸어가려는 모양새를 취했을 때였다. 비비앙은 어지간히 추운 듯 손을 싹싹 비비더니 불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휴. 드디어 도착이라네. 다행이다. 안에 원혼이든 뭐든 얼른 때려잡고 돌아갔으면 좋겠어.” 바로 그 순간이었다. 탁! 막 걸음을 옮기려던 송승규는 순간적으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여전히 등을 보이고 있는 채였고, 그 상태서 말했다. “…뭐라고요?” “으, 응?”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나는 지그시 비비앙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처음에는 눈만 끔뻑이다가, 금세 상황을 파악했는지 아차 한 얼굴을 보였다.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냥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제 9층도 금방이었고, 사실상 이제 와서 별 문제는 없었다. 어차피 저놈은 기생 체에 불과했고, 죽여봤자 큰 의미는 없다. 솔직히 탑에 들어왔을 때부터 처리해도 상관은 없었지만, 일단은 어디까지 데려가는지 한 번 지켜볼 요량이었던 것이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올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내가 잘 알고 있다 라….” 이윽고 음산하면서도 약간 높은 톤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키킥, 내가 누군 줄 알고?” “글쎄. 그래도 최소한 네가 몸의 주인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 “언제부터 알았어? 그놈들이 알려준 건가?” 그놈들이란 망령들을 말하는 거겠지. 나는 느릿하게 검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네가 깃든 육체가 사망했다는 사실이라는걸 알 수 있었거든.” 정확히는 제 3의 눈으로 알 수 있었지만. 그때 보인 메시지는 '사망' 그리고 '빙의'라는 정보가 떠올라 있었다. 이윽고 송승규, 아니 원혼이 말을 이었다. “…어떻게 안 거야?” “물론 그것뿐만은 아니었지. 네 말대로 망령들이 알려주기도 했고.” “어떻게 안 거야?” “또 탑에 들어와서 알 수 있었어. 이상하게 네 행동이 미묘하게 부자연스러웠거든. 그러다가 계단을 오를 때 발이 닿지 않는 것을 보고 확신했지.” 그러자 송승규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자신의 발을 쳐다보려는 건가? 아니, 아니다. 비단 고개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몸 전체가 마치 실이 끊긴 인형처럼 힘없이 축 늘어진 것이다. 툭, 데구루루. 그러더니 뭔가 하얗고 동그란 게 떨어져 바닥을 구른다. 그러나 채 정체를 확인할 틈도 없이, 지금껏 주구장창 앞만 보던 머리가 삐걱삐걱 돌아보기 시작한다. “어떻게 안 거야?” “…….” 그나마 완전히 돌리지도 못했다. 이내 정확히 반쪽만 드러난 그의 얼굴은 꽤나 그로테스크했다. 검게 죽어있는, 퀭한 눈. 그리고 귀까지 쭉 찢어져있는 흉물스러운 입술. 간신히 절반 정도 돌려진 고개는 눈에 보일 정도로 푸들푸들 떨리며, 어떻게든 돌아가려고 애쓰는 듯 보였다. “어…. 떻…. 게…. 안…. 거…. 야…?”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뿌드득! 한순간 송승규의 목이 왼쪽으로 크게 꺾이었다. 꺾인 각도가 90도를 훨씬 넘어서, 누가 봐도 기형적이라 여길 정도였다. 뒤에서 누군가 깊이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그것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뿌드득! 이번엔 반대로 고개가 꺾이더니, 이내 덜렁덜렁 흔들려 자유롭게 움직인다. 그 상태로, 3초의 시간이 흘렀다. 1초가 1분처럼 느껴지는 시간. 그때, 덜렁거리던 목이 갑작스레 핑그르르 목을 꼬아 우리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시퍼렇게 죽은 얼굴이 완전히 눈에 들었다. 그와 동시에 아까 땅으로 떨어졌던 하얀 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퀭한 눈 사이로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눈알이 떨어졌던 모양이다. 이윽고. 입술이 귀밑까지 찢어져 드러난 이빨이 호두 까기 인형처럼 딱딱 부딪쳤다.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어?” 그러더니, 곧 온몸을 덜그럭거리며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런 그의 머리카락은 위쪽 방향으로 쭉 잡혀 올라가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 물려있는 것처럼.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역시 초반에 예상했던 대로 1회가 더 필요하네요. 그러므로 즐거운 쥐불놀이는 다음 회에…. 헤헤. 후유. 아침 10시에 개인 발표 있는데 아직 절반밖에 못했네요. 졸려 죽겠는데…. 큰일났어요. T^T 0402 / 0933 ---------------------------------------------- 3. 두 번째 의뢰 - 구출 : 얼어붙은 숲(5/5) 송승규는 사지를 늘어뜨린 채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좌우로 몇 번 흔들리는가 싶더니 얼음 벽을 훌쩍 넘어 자취를 감췄다. '도망인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재빠르게 클랜원들의 반응을 살폈다. “기, 김수현!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고개 숙여 사죄하는 비비앙. “하아…. 하아….” 살짝 숨을 몰아 쉬는 한나. 일견 보기에 대부분 침착해 보였지만 한나는 약간 놀란 듯싶었다. 이미 사전에 공지를 했음에도 저러는걸 보면, 아마 조금 전과 같은 상황에 본능적인 공포심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한나는 애써 아닌 척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순간 살짝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시선을 느낀 걸까. 그녀는 나와 시선을 맞추더니 미약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죄송해요. 갑자기 목이 돌아가는데 깜짝 놀라서…. 이제 괜찮아졌어요.” “괜찮아졌다면 다행입니다.” 나는 명료히 대꾸한 후 클랜원들을 둘러보았다. 모두의 시선 또한 나에게 쏠려있었다. '바로 가는 게 좋겠지.' 이윽고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용자 송승규의 의뢰, 동료들의 생사 확인 및 구출은 불가피한 사정으로 파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현시간부로 클랜 로드의 직권 아래 조사단을 해체합니다.” 나는 잠시 말을 끊었고, 중단에서 선두 쪽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그러자 한나는 한결 안도한 기색을 내비치더니 슬그머니 내 옆으로 다가섰다. “그럼 지금부터 얼어붙은 숲의 중앙, 얼음 탑의 탐험을 시작하겠습니다.” 내 말이 떨어진 순간 클랜원들은 곧바로 진형을 변경했다. 선두에는 나와 한나가, 중단에는 하연과 신재룡이, 그리고 후미에는 현과 비비앙이 맡는다. 인원이 적은 만큼 진형은 순식간에 갖추어졌고, 우리는 곧바로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탑의 원혼은 우리를 9층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리고 난 지금 9층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물론 어떤 함정이 있을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나 미로에서 이리저리 헤매며 습격 받는 것보다는, 호랑이 굴로 직접 들어가 때려잡는 게 훨씬 편한 길이었다. 원혼이 말대로 길의 끝나는 부분에는 오른쪽으로 새롭게 통하는 계단이 있었다. 이어서 단숨에 계단을 오르자 7층에서 보았던 공허한 입구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여기도 철문은 존재했다. 다만 7층처럼 굳게 닫혀있는 게 아닌, 활짝 열려져 있는 상태였다. '있다.' 그리고 난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문이 9층으로 통하는 통로이며, 원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등 뒤로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입구의 안쪽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둡고 컴컴했다. 나 또한 감각으로만 느꼈을 뿐, 마력으로 끌어올린 안력에도 희미한 실루엣만 보이고 있었다. 내부의 어떤 기운이 안력에 의한 투사를 방해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바로 들어가기 전,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이곳은 현대가 아닌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입니다. 원혼은 한낱 괴물에 불과하며, 우리 사용자들은 괴물을 잡을 능력이 있습니다.” “…혀, 형 말이 맞아요. 저깟 괴물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안현이 곧바로 동의하고 나섰다. 그리고 난 녀석을 지그시 응시했다. 맞장구 쳐주는 건 고마운데 입술 좀 그만 떨지 그래. “현이 말이 맞습니다. 그저 외관이 약간 끔찍한 괴물일 뿐, 우리들이면 충분히 잡을 수 있는 수준이라 생각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마볼로도 잡아낸 전력이 있다는 것을요.” 사실 내가 혼자 잡은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사기만 진작할 수 있다면 뭔 말을 못하랴. 나는 말을 마치는 것과 함께 귀걸이를 떼어내었고, 이내 찬란한 빛을 내뿜는 '빅토리아의 영광'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검에서 뿌려지는 은은한 빛은 입구 안으로 흘러 들어 약간이나마 시야를 밝혀주었다. “그럼 안으로 진입하겠습니다.” 이윽고 어둠이 사방에 깔린 방안으로 나와 클랜원들은 동시에 진입했다. 그렇게 우리는 드디어 9층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안쪽으로 완연히 발을 디딘 순간, 뭔가 기묘한 위화감이 전신을 스치고 지나갔다. 보풀이 잔뜩 일어난 헝겊처럼, 뭔가 가슬가슬한 감촉이 느껴진 것이다. 그때였다. 오도독. 오도독, 오도독. 무거운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허공에서 뭔가 단단한 물건을 깨무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돌리자, 허공에서 뭔가 길쭉한 게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보였다. 하여 제 3의 눈으로 자세한 정보를 확인하는 찰나, 뒤에서 묵직히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렸다. “───. ───. ───.” 일단 시야를 확보할 생각인지 신재룡이 사제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 것이다. 서서히 생성된 구체는 곧 환한 빛을 뿜으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오도독! 오도독, 오도독! 오도독, 오도독, 오도독, 오도독! 그러는 와중에도 불편한 소음은 도를 더해갔고, 이내 약간이나마 잦아졌을 때 신재룡의 주문이 발동했다. “홀리 라이트(Holy Light)!” 화악! 주문을 영창하자 떠오른 구체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와 방안을 물들인다. 빛 무리는 9층 전체를 밝힐 정도는 못되었지만, 그래도 주변 시야를 확보하는 데는 차고 넘쳤다. 이윽고 구체를 중심으로 일부가 훤히 드러난 9층의 광경. “허, 허억!” “으, 으아악! 저, 저게 뭐야!” 그와 동시에, 지금껏 어찌어찌 견뎌오던 클랜원들이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9층의 바닥은 공동(空洞)이 연상될 만큼 아무것도 없는 방이었다. 그러나 바닥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잠시 후 나와 클랜원들은 허공에 떠 있는 어떤 것에 시선을 고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바라본 공중에는 커다란 '머리'가 떠 있었다. 어느 정도의 크기냐고 하면 잘 익은 수박 두 통을 합친 정도일까. 드러난 얼굴 또한 가히 그로테스크했다. 얼굴은 이리저리 균열이 일어나 있었는데, 갈라져 터진 곳에서 검붉은 액체가 흘러나와 시뻘겋다는 느낌이 강하다. 또한 눈은 얼굴의 1/3 이상을 차지할 만큼 과도하게 컸고, 눈동자 중앙 절반을 차지한 검은 자위는 흡사 블랙홀을 보는 듯했으며, 입술은 귀밑까지 크게 찢어져 있었다.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구체가 빛을 밝힌 순간, 아까 제 3의 눈으로 보았던 정보들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오도독, 오도독! 좌우로 흔들리던 길쭉한 것은, 의뢰인 송승규였다. 원혼의 이빨에 물린 채 머리부터 차근차근 먹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신을 스쳤던 가슬가슬한 감촉은, 바로 머리칼이었다. 머리에서부터 뻗어져 나온 머리카락은 방안을 가득 메울 정도로 길고, 수북했다. 오도독! 꿀꺽! - 히키킥! 히키키킥! 이내 송승규를 모두 삼켰는지, 원혼은 눈꼬리를 둥글게 휘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꽝! 일순 강렬한 금속음이 귓가를 강타했다. 설핏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굳게 닫힌 철문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활짝 열려있던 문이 원혼이 웃자마자 저절로 닫힌 것이다. '퇴로를 차단하려고 한 건가?' 어디서 본건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의도대로 호락호락 당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나는 문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회로의 마력을 일으킨다. 그리고 오른쪽 무릎을 가슴에 닿을 정도로 끌어당겼다가, 일직선 방향으로 있는 힘껏 발을 내질렀다. 꽈장창! 그러자 발바닥에 뭔가가 와짝 일그러지는 감각이 느껴졌고, 동시에 육중한 철문은 산산조각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완전히 부서져 내렸다. 얼음이 서려있던 지라 충격이 전체로 전달된 모양이다. 이윽고 다시 뻥 뚫린 입구와 부서진 파편을 확인한 후, 나는 다시 몸을 돌려 원혼을 응시했다. - 히킥? 원혼의 반응은 꽤나 미묘했다.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부릅떠 핏발이 보이는 게, 조금 전 여유로 이 식사를 즐기던 모습과 대비하면 확연한 차이가 보였다. 스스슥…! 스스스슥…! 그렇게 핏발이 서서히 굵어져갈 즈음, 하나의 변화가 감지되었다. 나풀나풀 움직이던 머리카락들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동일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뭔가 심상치 않은 전조를 느꼈고, 하여 곧바로 외쳤다. “모두 전투 준비!” 일순 상세한 오더를 내릴까 했지만, 이내 생각을 거두었다. '처리하는 거야 어렵지는 않지만….' 원혼은 내가 긴장할 정도로 강한 괴물이 아니다. 물론 한 유적의 보스인 만큼 일반 괴물들과는 차별화되는 무력은 갖추었지만, 그뿐이었다. 화정을 사용하면 3초안에 결딴낼 자신이 있고, 굳이 화정을 이용하지 않더라도 혼자서 압도적으로 박살낼 자신이 있었다. 대강 가늠해보건대 원혼은 마볼로는커녕, 재생 능력을 제외한 파멸의 기사 '호렌스'와 비슷하거나 혹은 아랫선에 있는 놈이었으니. 그러나 원맨쇼로 해결을 보는 것보다는, 이번 기회로 비슷한 상황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을 마쳤을 때, 보인 것은 쩍 벌려진 원혼의 입이었다. 그리고 사방팔방으로 삐죽하게 솟구친 무수한 머리카락들. 가만히 모습을 보고 있자 꼭 미친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원혼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 끼이이이이이이이! 벌려진 입에서 귀를 괴롭게 만드는 커다란 음파가 퍼져 나온다. 발음체의 파동은 공기를 타고 들어와 곧바로 우리가 있는 곳을 강타했다. 『한이 맺힌 음파 공격입니다! 온전한 마법 행사로 볼 수 없는 공격입니다! 마법 저항 행사에 제한을 받습니다!』 『마력 능력치 96! 행운 능력치 90! 일부 방어로 판정합니다!』 순간 아주 미약한 어지러움이 머리를 스쳤다가, 이내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큭!” “꺄악!” 하지만 몇몇 클랜원들은 피해를 고스란히 받은 듯 나직한 신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우리의 진형이 흐트러진 틈을 타, 삐죽하게 솟아오른 머리카락들이 일거에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클랜원들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보호(Protect)!” “쉴드 오브 리펠링(Shield Of Repelling)!” 미리 준비하고 있었는지 하연과 신재룡의 방어 주문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푸른 달의 언약(Covenant Of Blue Moon) 아래…. 나는 소원한다.” “월령, 3일의 초승달(Crescent Moon).” 그리고 연이어 들려온 주문은 한 사람, 분명 하연의 음색이었다. 한순간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예전에 건네준 '영광의 목걸이'를 사용한 것이다. 우웅! 전방으로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눈썹 모양의 커다란 달이 생성된다. 이내 삽시간에 구체화를 완료한 하연은 짓쳐 들어오는 머리카락을 향해 매섭게 외쳤다. “분열!” 그 순간 초승달은 순식간에 수십 조각으로 분열되었고, 이내 연속으로 회전하여 사방으로 발출됐다. 그녀의 장기인 마법 연쇄가 시크릿 클래스 '푸른 달의 마도사'와 합쳐져 첫 선을 보인 것이다. 썩둑! 썩둑! 썩둑! 썩둑! 이윽고 핑그르르 돌며 날아간 초승달은 가시 모양의 머리카락은 단숨에 잘라내었다. 푸르스름한 빛은 자신의 예기를 뽐내듯이 거침없이 자르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분명 하연의 마법은 효과적이었지만, 들어오는 머리칼의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일부 잘라져 떨어진 머리카락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치고 들어왔고, 두 겹으로 생성된 방어막을 거세게 찔러 들었다. 쨍! 파캉! “수, 숫자가 너무 많아요!” “이대로라면 보호막이 무너지는 건 시간 문제입니다!” 하연과 신재룡의 다급한 목소리. 흘끗 뒤를 돌아보자 애꿎은 창만 쥔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안현과, 쉴 새 없이 섬광을 터뜨리는 임한나가 보인다. 그리고 나와 마찬가지로 가만히 서 있는 비비앙. 음파 공격이 어지간히도 심기를 거슬리게 했는지, 그녀의 표정이 꽤나 일그러져 있다. 이윽고 비비앙은 씨근대는 말투로 외쳤다. “조금만 더 버텨! 약간만, 약간의 시간만 있으면 되니까!” 마수를 소환하려는지. 이내 바로 영창에 들어가는 그녀를 보며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전투에서는 알게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서려고 했지만…. '그래도 시간을 벌어주는 정도라면 괜찮겠지.' 나는 바로 마음을 굳히곤 스스로 보호막 밖으로 걸어나갔다. “수, 수현! 뭐 하는 거예요!” “클랜 로드!” 붙잡는 목소리들은 개의치 않고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번뜩 떠오른 생각에, 왼손에 마력을 일으켰다. 그리고 원혼이 나를 바라본 것도 바로 그때였다. - 키힛? 놈은 나를 보자마자 몇 번 눈을 끔뻑이더니 입을 크게 벌리며 웃어 젖혔다. - 키히히히히히히히! 하지만 나는 전혀 아랑곳 않고, 왼손에 '허공섭물'의 묘리를 응용해 마력을 일으켰다. 대상 지정은 바로 '머리카락.' 수수숙! 수수수숙! 널린 게 머리카락이라 지정한 대상은 삽시간에 한 줌 가득히 쥐어 들었다. 동시에 원혼 또한 음산한 귀곡성을 내며 달려들었지만 이미 한참이나 늦었다. 나는 머리카락을 쥔 그대로 있는 힘을 다해 팔을 위로 쳐올렸다. 쿵! - 끽! 머리카락이 너무 길었던 걸까. 삽시간에 솟구친 머리는 천장에 보기 좋게 부딪쳤다. 이내 또다시 힘껏 팔을 내려치자. 쾅! - 껙! 빛의 속도로 내려와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원혼을 볼 수 있었다. 아무튼 시간 벌이에는 이만한 것도 없다는 생각에, 나는 신명 나게 팔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쿵! 쾅! 쿵! 쾅! 쿵! 쾅! 쿵! 쾅! - 끽! 껙! 끽! 껙! 끽! 껙! 끽! 껙! 천장과 바닥에 부딪칠 때마다 원혼이 외마디 비명으로 추임새를 넣는다. '…의외로 재미있는데?' 하여 나는 약간 변화를 주기로 결심해 이번엔 둥글게 원을 그려보았다. 쿵! 찌지직! 쿵! 찌지지직! - 끄겍! 끄게레레레렉! 공간이 제한돼있는 만큼 중간중간 걸리는 게 있어 부드러운 원을 그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도중에 걸릴 때마다 난 근력으로 억지로 밀어붙였고, 그리하여 원혼의 얼굴은 걸리는 지면을 그대로 쓸어 지나가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던 도중, 문득 뒤가 조용해졌음에 나는 차분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어느새 얌전히 가라앉은 머리카락과, 그 사이로 멍하니 나를 쳐다보는 몇몇 클랜원들이 보인다. 나는 머쓱한 마음에 입을 열었다. “아니. 시간을 벌어달라고 해서….” 그때, 안현이 다급히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혀, 형! 뒤요!” “?” 하여 얼른 뒤를 돌아보자, 갑작스레 손아귀에서 묵직한 끌어당김이 느껴졌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원혼이 내 손길에서 벗어나려 움직인 것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끌어당겼고, 그 결과 찌지직! 머리칼을 한 움큼 뽑는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나는 가만히 머리칼을 쳐다보다가 이내 탁탁 손을 털며 전방을 응시했다. - 키하아아아아아아! 조금 전 당한 일에 꽤나 화가 난 모양이다. 별로 티가 나지 않음에도 원혼은 분노에 찬 비명을 힘차게 질렀다. 그러더니 다시 음파 공격을 하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그때였다. 번쩍! 한 줄기 섬광이 번쩍이는 것과 동시에, 원혼의 입 속에서 가는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번쩍! 번쩍! 섬광은 두 번 세 번 이어졌고, 결국 악착같이 날아드는 화살을 이기지 못해 원혼은 다시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오라! 피에르! 제 4군단을 지배하는 미친 불꽃의 어릿광대여!” 마침내 발동한 비비앙의 마수 소환진. 4군단이라면 66군단 중 6군단 안에 드는, 평소 비비앙이 자랑해 마지않는 최상위 군단이었다. 오늘 참 눈 한 번 호강한다는 생각에 나는 깊은 관심을 갖고 떠오르는 마법 진을 지켜보았다. 파츳! 파츠츳! - 히히히…. 히히히히…. 히히히히히! 이윽고 마법 진 위로 어두운 심연 속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방안을 소슬히 메운다. 그러더니 거진 2미터는 되어 보이는 건장한 남성이 비죽 솟아오르는걸 볼 수 있었다. 나는 자세히 모습을 살펴보았다. 십자가 모양의 눈, 루돌프 같은 빨간 코, 그리고 길게 칠해진 새빨간 입술. 그리고 오른손에 들고 있는 장난감 같은 알록달록한 막대기. 이 모습은…. 그래. 꼭 현대의 피에로와 정말 흡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눈을 떠라! 피에르! 눈앞에 있는 머리 괴물에게 너의 위엄을 보여줘! 아주 꼼짝도 못하게 눌러버려!” 이윽고 비비앙이 명령이 떨어지고, 감겨있던 피에르의 눈이 번쩍 떠지었다. 장난기 가득한 피에르의 시선은 곧장 원혼을 향하였고, 이내 빨갛게 칠해진 입을 한껏 벌려 방안이 떠나가라 웃어 젖혔다. - 후헤헤헤헤헤헤헤! 그때 불현듯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 나는 얼른 원혼을 응시했다. 피에르가 출현한 순간, 어느덧 원혼은 끽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아까 뭔가 있어 보이던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완전히 기에 눌려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 이제 슬슬 끝낼 생각에 나는 다시 허공섭물을 일으켜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푸른 달의 언약(Covenant Of Blue Moon) 아래…. 나는 소원한다.” “월령, 3일의 초승달(Crescent Moon).” 동시에 하연의 주문 소리가 연이어 들리고, 원혼의 주위로 시퍼런 초승달이 생성되었다. 잡힌 머리카락. 방이 떠나가라 웃는 피에르. 주변을 감싸는 예기 넘치는 초승달. - ……. 그러한 상황에서 원혼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한 눈길로 주변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지그시 눈을 감았을 뿐. 이제 끝이라는 생각에, 나는 가볍게 팔을 쳐올렸다. 아무 저항 없이 허공으로 올라간 원혼은, 이어서 둥그런 곡선을 그리며 소환된 마수에게로 떨어졌다. 그리고 피에르는 부드러이 떨어지는 머리를 보며 입을 함지박만 하게 크게 벌렸…. 응? '설마 먹으려고?' 콰직! ============================ 작품 후기 ============================ 1. 퇴고 문제로 10분 가량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_(__)_ 2. 탐험 성과는 생략했습니다. 다만 완전한 생략은 아닙니다. 이어지는 파트 '모여드는 인재들'에서 이 부분과 약간 연관되는 부분이 있으며, 그때 회상 및 본 내용으로 추가하겠습니다. 3. 얼어붙은 숲 파트는 호러물 아니에요…. 믿어주세요. 0403 / 0933 ---------------------------------------------- 4. 모여드는 인재들(4/4) 탑의 10층은 9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보이는 광경은 무척이나 달랐지만, 중간에 막힌 곳 없이 넓게 트여있다는 점은 비슷했다. “언니. 여기는 유난히 추운 것 같아요.” 갑작스레 심해진 한기에 한나는 자신의 풍만한 가슴을 꼭 감싸 안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한나를 돌아보았고, 양팔에 살짝 뭉그러진 가슴에 시선을 빼앗겼다. 양팔을 둘렀음에도 채 가려지지 않는 그녀의 젖가슴은 온화한 풍요로움을 과시하고 있었다. '저 가슴에 얼굴을 묻으면 무척 따뜻할 거야.' 그렇게 시답잖은 상상에 빠져있을 때, 문득 누군가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본능에 따라 시선을 돌렸고 한두 번 헛기침을 했다. “…….” 약간의 침묵이 흐르고 나서, 하연의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얘는. 살도 많으면서 엄살은….” “별로 좋을 건 없어요. 어깨만 아프고…. 후후. 언니는 편해서 좋겠어요.” “한나야? 언니가 농담 좀 해봤어. 그리고 나 정도면 작은 건 아니란다?” “언니. 저도 농담이었어요. 그리고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호호호호.” “후후후후.” 두 여인은 서로를 쳐다보며 화사한 웃음소리를 내었지만, 주변에 휘몰아치는 기운은 전혀 화사하지 않았다. “혀, 형. 이상하게 자꾸만 추워지는 것 같아요.” 옆에 서 있던 안현은 뭔가 굉장히 억울하다는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고, 그저 조용히 전방을 응시했다. 얼음의 탑은 9층이 끝이 아니었다. 9층에서 원혼을 처리한 후, 난 제 3의 눈으로 10층으로 향하는 비밀 통로를 찾을 수 있었다. 하여 하연에게 탐색(Scan) 마법을 부탁했고, 이렇게 통로를 찾아 10층으로 올라온 것이다. 10층은 9층처럼 굉장히 넓게 트인 곳이었지만 휑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저쪽 끝에서 보이는 몇 가지 시설들과 방안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커다란 얼음 덩어리들. 그러한 것들이 못해도 기백 개는 되어 보인다. 더구나 방의 중앙에 놓인 얼음덩이는 다른 덩이들보다 최소 3, 4배에 달하는 크기를 갖고 있었다. 아마 10층이 유난히도 추운 이유는 바로 이 얼음 덩어리들이 내뿜는 한기의 영향일 것이다. '아마 이곳이 본거지였던 모양이군.' 제 3의 눈으로 혹시나 모를 위험을 대비한 후, 나는 중앙에 놓인 얼음덩이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주변에 놓인 것들을 살펴보자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무수히 놓인 얼음 덩어리 안에는, 바로 '사람'이 들어있었다. 아니. 비단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어떤 얼음덩이들에서는 요정, 수인 등 인간과 비슷한 모양의 여러 종족들도 발견되었다. “오호라. 이건 꽤나 흥미로운 연구처럼 보이는데.” 역시나 연금술사의 호기심이 발동됐는지 비비앙은 연거푸 감탄을 터뜨렸다. “네가 보기에는 어때. 여기가 어떤 연구를 하던 곳일 것 같아?” 내 물음에 비비앙은 “흐음.” 신음을 흘리며 주변을 둘러보았고, 짐짓 새초롬한 얼굴로 대답했다. “글쎄. 차후 자세히 봐야 알겠지만, 일단 연구 자체는 매우 깊이 있게 느껴져.” “그렇군.” “하지만….” 주변에 놓인 얼음덩이 하나를, 비비앙은 찌푸린 눈길로 응시했다. 나 또한 그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안쪽에 갇힌 한 수인 남성을 볼 수 있었다. 무에 그리 억울했는지 얼음 속에서 눈을 부릅뜬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이윽고 완전히 지나친 순간 비비앙의 씁쓰름한 음색이 이어졌다. “이곳의 책임자는 아무래도 금단의 영역에 발을 들인 것 같네.” 금단의 영역이라. 순간 호기심이 일어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다시 삼켜야만 했다. 어느덧 중앙에 놓인 거대한 얼음 덩어리에 도착한 것이다. 하여 나는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거주민(A Native), 이아노르 라 에라헬(사망).』 “와. 엄청 예쁘다.” 안현의 말대로, 가장 거대한 얼음 안에는 가히 경국지색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만큼의 여인이 갇혀있었다. 눈처럼 흰 볼에 흘러내린 하늘빛 머리카락. 가늘고 긴 속눈썹에 도톰히 돋아난 연한 분홍빛 입술. 눈을 감은 상태라 눈동자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정도의 미모였다. “공주님이네.” 그때 가만히 보고 있던 비비앙이 한 마디 툭 내뱉었다. 무슨 뜻이냐는 기분으로 돌아보자, 그녀는 건방지게 고갯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입고 있는 옷이 신관용 복장이야. 그것도 아주 특별한 사람한테만 허락되는 복장이랄까?” “그럼 공주님이 아닐 수도 있잖아. 여왕일수도 있고, 귀족일수도 있고.” 내 반론에 비비앙은 차분히 고개를 흔들었다. “차고 있는 목걸이에 왕가의 표식이 붙어있어. 그리고 지금 입고 있는 하얀색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순결한 여성을 뜻해. 그러니 공주님일 가능성이 가장 높지. 뭐, 아니면 말고.” 비비앙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매듭지었고, 나는 다시 얼음을 응시했다. 공주님이라. '별 상관은 없겠지.' 어차피 이미 죽은 존재들이다. 나신으로 있다면 모를까, 생전에 사용하던 것들을 그대로 장비한 채 갇혀있다. 더구나 공주 정도의 존재면 분명 뭔가 괜찮은 물품을 갖고 있을 터. 주변에 널려있는, 가능성 높은 복권의 현장을 보며 나는 이 얼음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고민에 빠졌다. '하나씩 깨부숴야 하나….' 그때였다. 찬찬히 얼음을 뜯어보던 도중, 문득 묘한 것이 내 시선에 잡혔다. 묘한 것의 정체는 바로 수정처럼 보이는 보석이었는데, 얼음의 아랫부분에 박혀있었다. 중앙 부근을 중점으로 살펴보느라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얼음과 색이 비슷하기도 했고. 나는 한 걸음 더 다가가 허리를 굽혔고 감각을 한껏 끌어올렸다. '…흠.' 매우 차가운 공기가 흐르고 있어, 쭈그려 앉아 더욱 자세히 느껴보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난 한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수정 보석은 손톱만한 크기였는데, 주변에 감도는 한기의 흐름과 이어져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은 얼음덩이 전체를 감싸고 있다. 나는 지체 않고 보석으로 손을 뻗었고, 이내 집게 손가락 끝으로 뭔가 단단하면서 차가운 게 집혔다. 사아…. 사아아…. 역시나. 이대로 순순히 뽑힐 생각은 없는지 한순간 싸한 감각이 손끝을 물들였다. 하여 나는 곧장 화정의 힘을 일으켰고, 금세 감각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 상태서 약간 힘을 주자 수정은 절반 정도 뽑혀 나왔다. 워낙 오랜 세월 동안 박혀있어서 그런지 단번에 뽑히지가 않는다. 그때였다. 쩡! 다시 힘을 주려는 순간 귓가를 때려오는 날카로운 소음. 흘끗 고개를 들어보자 세로로 크게 금이 간 얼음덩이가 보였다. 아마 이 보석이 주변의 얼음들을 유지하던 매개체인 모양이다. “조심하세요.” 나는 뒤에서 기다리는 클랜원들에게 나직이 경고한 후, 다시 힘을 주어 손을 잡아당겼다. 바직! 바지직! 여전히 저항감은 느껴졌다. 하여 나는 한층 더 힘을 주었고, 이내 보석이 완전히 뽑혀 나오는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쩌정! 쩌저정! 수정 보석을 꾹 쥔 채 허리를 피자 이제는 사방팔방으로 금이 간, 금방이라도 깨질듯한 얼음덩이가 보였다. 퍽! 파사사…! 파사사사…! 그러더니 일순 퍽! 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지는 얼음 덩어리들. 나는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백 개에 이르는 얼음들이 일거에 부서지는 광경은 장관이라 부를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윽고 사르르 흩어지는 얼음 가루들과 온전히 드러난 시신들을 보며 나는 클랜원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한 시라도 빨리 탑을 나가고 싶을 텐데요…. 그러니까 얼른, 후딱 끝냅시다.” “네…?” “예, 예?” 비교적 최근에 들어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듯, 한나와 신재룡은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러나 하연은 이미 가방을 내려놓고 있었다. 비비앙 또한 굉장히 무서운 기세로 책장으로 달려가고 있었고. 그리고 안현은 건장한 수인 남성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가, 옆의 아름다운 요정을 보며 목울대를 꿀꺽 움직이고…. 아니 저 자식이? 나는 쯧쯧 혀를 차며 시선을 내렸고 얌전히 누워있는 공주를 응시했다. 보석이 알알이 박힌 머리띠, 특별한 사람들만 입는다는 신관 복장, 하얀 면사 장갑, 왼쪽 약지의 반지, 그리고 목에 걸린 목걸이. '좋아. 일단 다섯 개.' 그래도 예의상 속옷은 남겨두기로 하고, 나는 하연이 내미는 아기 카오스 미믹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입을 열라는 의미로 톡톡 두드리자, 오히려 입구를 꼭 다무는 녀석이 느껴졌다. 나는 한숨과 함께 양 주둥이를 붙잡은 다음, 단숨에 쫙 찢으며 말을 이었다. “삐엑!” “벗깁시다.” 아기 카오스 미믹의 고성에 묻힌 듯, 두 명은 연신 고개를 갸웃했다. “삐이…. 삐에에….” 나는 입구 안으로 수정 보석을 흘려 넣으며 하연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그녀는 어느새 둘을 향해 마법 배낭을 내밀고 있었다. 나는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주변에 장비들이 널렸잖아요. 그러니까 벗기고, 챙기시면 됩니다.” 그런 내 말에, 하연은 쓰게 웃어 보였다. * “그래서 그렇게 장비들을 챙기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조금 말을 길게 해서 그런지 목이 제법 건조해졌다. 해서 테이블에 놓인 물컵을 들어 목을 축이자, 문득 반짝반짝 시선을 빛내는 두 명의 시선이 느껴졌다. 한 명은 '부랑자 학살자' 김덕필, 다른 한 명은 '타로 카드 마술사' 선율. “와. 좋겠다. 그럼 고대 장비들 되게 많이 얻었겠네?” “머셔너리 로드. 혹시 마법의 탑에서 관심을 가질만한 물건이 있을까요? 잘 쳐드릴게요.” 김덕필과 선율이 애절한 눈빛으로 응시했지만, 현재 난 제법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해서 엿이나 먹으라는 심정으로 콧방귀를 낀 후, 대번에 고개를 돌렸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중앙 도시 바바라, 그리고 황금 사자의 클랜 하우스였다. 왜냐하면 '얼어붙은 숲'에서 돌아온 후. 이후 며칠의 시일이 흐르고 나서, 참으로 공교롭게도 이효을이 주재하는 회의가 잡혔기 때문이다. 약간 길어지는 회의인 탓에 중간에 쉬는 시간이 부여됐고, 조용히 연초나 태우려 했던 난 두 명의 방해꾼에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돌아오자마자 신전에 보고했던 게 화근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우리가 새로운 유적을 발굴했다는 사실은 널리 퍼지게 되었고, 꿀맛 같은 쉬는 시간에 저 두 명이 탐험 얘기를 해달라고 졸라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선율이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안주 삼아 심심한 입을 달래고 있을 무렵, 김덕필이 호들갑을 떠는 목소리가 들렸다. “머셔너리 로드, 머셔너리 로드. 그런데 말이야. 네가 그랬잖아. 원래는 의뢰를 받아서 간 건데, 그 의뢰인이 뒤통수 때렸다고.” “그렇죠. 그런데요?” “그럼 이스탄텔 로우에서 뭔가 성의를 보여야 하는 거 아니야? 아무리 몰랐다고는 해도…. 이러나저러나 도의적인 책임은 있는 거지.” “성의까지야…. 의뢰를 수락한 건 전데요.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나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사실 신전에 보고를 한 이상 이미 한소영의 귀에 들어갔을 가능성은 100%였다. 하지만 그녀는 오늘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괜히 참석하지 않았을 리는 없으니, 요즘 들어 굉장히 바쁘다는 방증이었다. 아무튼 그거야 불가항력인 일이라 생각하고, 설령 성의를 보인다고 해도 받을 생각은 없었다. 딱히 손해 본 것도 없고 반대로 이득만 잔뜩 얻어서 돌아왔으니. “아니 잘 생각해봐. 어쩌면….” “그럼 휴식은 이만 마치고, 다시 회의를 시작할게요. 괜찮겠죠? 사용자 김덕필?” 마침 이효을이 돌아왔는지, 그녀는 단상에 선 채 내 쪽을 응시했다. 부산스럽게 떠들던 김덕필은 바로 입을 다물었고, 나는 처음으로 고마움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이효을은 나를 향해 한 번 싱긋 웃어 보이고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앞서 말씀드린 데로, 여러분들 덕분에 북 대륙이 차차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먼저 그 점 깊이 감사하는 바에요…. 물론 입으로만 감사하려는 속셈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아요.” 오늘은 뭔가 기분이 좋은지, 이효을은 생글생글 웃으며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원래는 알려드리면 안되지만…. 이번에 한해서 특별히 한 가지 희소식을 전해드릴게요.” 희소식이라는 말에 나는 살짝 눈을 떠 이효을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앞으로 3주 후에 새로운 사용자들이 들어올 예정이에요. 그것도 최근 몇 년과 대비해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로 말이죠.” 아무런 전조도 없는 직설적인 알림. 웅성웅성. 회의실은 삽시간에 소란으로 휩싸였다. 새로운 사용자들이 들어온다는 게 놀라운 건 아니다. 이쯤이면 슬슬 들어올 때라고 다들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대규모로 들어온다는 말은 확실히 기존 사용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말이었다. 특히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번에 피해를 많이 입은 클랜이나, 두드러진 공적을 세운 클랜에 기회를 드리고 싶은데….” 잠시 뜸을 들이려는지 말을 흐린 이효을은 나와 한 번 시선을 맞췄다. 그러더니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일단 여러분들의 생각도 들어볼까요?” * 회의가 파하고 머셔너리 하우스로 돌아가는 길. 모니카로 이동한 후, 나는 천천히 번화가를 걸으며 상념에 잠겼다. '물론 우선 순위에 있는 클랜들의 피해가 어느 정도 복구되면, 기회는 공평하게 돌아갈 거예요.' 'FA처럼 교관 참가 클랜에 우선 협상권을 주고, 그러한 권한을 사고 팔게 하자? 그것도 괜찮은데요?' '아직 3주라는 시간이 남았잖아요? 지금 바로 결정하는 것 보다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 보도록 해요.' 사용자 아카데미. 그리고 신규 사용자. 이것은 현재 머셔너리의 상태에 많은 화두를 던지는 말들이었다. 즉 이것저것 거두절미하고 말해보면, 지금 우리에게는 '인재'가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그것은 요 근래, 특히 '얼어붙은 숲'에서 돌아온 후 절실히 느끼던 문제들이었다. 지금껏 머셔너리는 많은 유적들을 발굴했고, 또한 전쟁에서도 한몫 단단히 잡은 상태였다. 오죽하면 창고에 장비를 둘 공간이 없을 정도이니 무슨 말을 할까?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나는 모으는데 취미는 없다는 것. 아무리 시크릿, 레어 클래스나 좋은 장비들을 모아도 그저 쌓아두기만 하면 뭐하겠는가. 직접 사용해야 진가가 발휘되는 것들인데. 그러나. '장비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시크릿, 레어 클래스에 관해서는 신중해야 한다. 해당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회수하기가 어려운 부분이라,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사용자들에게 분배하는 게 정석이었다. '복잡하네.' 문득 고개를 들어 가볍게 기지개를 피자, 저기 앞에서 머셔너리 하우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여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수많은 생각들을 대강 정리했고 발걸음을 바삐 놀렸다. 좌우간 클래스 계승에 관해서는 조심스럽더라도, 일단 인재를 모아 클랜의 전력을 상승시키는 데는 다들 이견이 없으리라. '신규 사용자에게만 의존할 수는 없어.' 이미 활동하는 사용자들 중에서도 가능성 있는 자들이 있을 터. 그들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직접 뛰어야 한다. 방법은 많다. 홍보를 하는 방법도 있고, 스스로 돌아다니며 발굴하는 방법도 있으며, 아니면 한소영처럼 권유하는 방법도 있다. 아무튼 조만간 클랜원 확충에 대해 공식적으로 발표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난 어느덧 불쑥 다가온 정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막 손을 내밀어 문을 밀어젖히려는 찰나, 달칵 소리와 함께 오른쪽 문이 열리는걸 볼 수 있었다. 이윽고 문을 열고 모습을 보인 사람은, 다름 아닌 한별이었다. 나는 곧바로 그녀를 불렀다. “한별아.” 한별은 예의 쌀쌀맞은 눈동자로 돌아보더니 이내 화들짝 놀란 토끼 눈으로 말했다. “어. 오빠. 지금 돌아오세요?” “응. 회의가 끝났거든. 그런데 너는?” “신전에서 호출이 들어와서요. 잠깐 다녀올게요…. 아차. 오빠.” 별일 아니라는 생각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대로 지나치려는 순간, 한별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왜?” “그러고 보니 30분전에 어떤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찾아왔다고? 누군데?” 한별은 잠깐 생각하는듯한 얼굴을 보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대답했다. “누군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오빠 소개로 찾아왔다고 하던데요?”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원래 간략히 적으려고 했는데, 적다 보니까 너무 재미있어서…. >///< 아. 그리고 저 때문에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으신 분들께도 죄송해요. 원래 공포물 기획이 아니었는데, 정말로 본의 아니게 그렇게 보인 것 같습니다. ㅜ.ㅠ 밤에 잠을 못 주무신다는 코멘트를 보고 마음이 많이 찔렸습니다. 저 그리고 독자분들. 오늘 금요일인데요. 토요일 업데이트 하루만 쉴게요…. 헤헤. ☞☜ PS. 코멘트 모두 읽었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성장 지수(아이템) 주시는 분들께는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_(__)_ 0404 / 0933 ---------------------------------------------- 4. 모여드는 인재들(4/4) 손님이 찾아왔다는 말에 한 달음에 응접실로 달려가자, 안에서 조용히 앉아있는 세 명의 사용자를 볼 수 있었다. 남성 2명, 여성 2명. 바로 우정민과 일행들이었다. “김…. 머셔너리 로드.” “앉아있어도 됩니다.” 우정민은 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나는 손짓으로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이어서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며 마주앉자, 한 쪽에서 조용히 시립해있는 여성을 볼 수 있었다. “사용자 고연주.” 고연주였다. 아마 내가 초청한 손님이라는 말에 직접 안내한 모양이다. 이름을 부르자 고연주는 사뿐히 다가와 귀에 속삭였다. “클랜 로드의 초대를 받았다는 말에 일단 안내했어요. 언제 돌아오실지 몰라서….” “많이 기다렸습니까?” “아니요. 한 10분 정도 기다렸어요.” 나는 알겠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였고,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차라도 드렸어야 했는데….” “아니요. 괜찮습니다.” 우정민은 약간 쉰 목소리를 내더니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다고 하네요. 이만 나가보셔도 됩니다.” “네. 그럼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필요하시면 호출해주세요.” 이윽고 고연주는 신속하게 걸음을 물렸다. 달칵. 그리고 방문이 얌전히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나는 찾아온 세 명과 시선을 마주했다. 어딘지 모르게 지쳐 보이는 우정민, 그리고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선유운. 그리고 그 옆으로…. “에헤헤, 에헤헤헤.” 입가에 침을 묻힌 채 멀거니 나를 바라보는 원혜수가 보인다. “…차도는 좀 있습니까?” “전혀.” 우정민은 천천히 손을 들어 원혜수의 입을 닦았고, 나직이 말을 이었다. “후, 최악이야. 정신이 되돌아올 기미도 보이지 않고…. 그나마 처음보다는 온순해졌다는게 유일한 위안이랄까. ” “그렇군요.” “그리고….” 우정민은 잠깐 주저하는 듯싶더니, 조용히 눈을 감으며 말을 이었다. “결국 낙태도 하지 못했다.” “예? 아니 왜….” “하려고 할 때마다 병적으로 싫어하더군. 울고불고 소리를 지르고…. 심지어 어쩔 때는 혀까지 깨물었지. 아마 옷을 벗고 몇 명에게 둘러싸이는 상황이 트라우마로 남은 모양이다.” “홀 플레인에서는 낙태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수면 마법을 거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요.” “그렇지. 그런데 스스로 몸 안에 뭔가 있는걸 알고 있나 봐. 자신의 배를 감싸고 나를 애절히 쳐다보는데…. 순간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들더군.” “…어쨌든 절반은 혜수의 것이니까.”라는 말을 덧붙인 우정민은, 이내 쓴웃음과 함께 한숨만 흘렸다. “…….” 개인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처사였지만 난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깊이 간섭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었거니와, 가라앉은 얼굴을 보니 얼른 화제를 돌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잘 찾아왔네요.” “찾는데 별로 힘들건 없었어. 그리고 여기 오니까 익숙한 얼굴들이 몇몇 보이더군.” “그러고 보니…. 하하. 애들은 기억하던가요?” “아니. 처음 보는 사람 취급하던데…. 아. 그 붉은 눈동자를 가진 여자는 기억하는 거 같았어.” 붉은 눈동자라면 유정이를 말하는 건가. 나는 바로 말을 이었다. “그때 바바라에서 만나고 제법 시일이 흘렀잖아요. 계속 도시에 있었던 겁니까?” 우정민은 잠시 생각하는 듯싶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계속 구호소에 있을 수는 없어 정리되는 데로 바로 나왔지. 너에게 얘기를 듣긴 했지만 그래도 다시 시작해보고 싶었거든. 그래서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생각에 서부로 향했다.” “…….” “그런데…. 뭐랄까. 참 막막하더군.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그래. 처음 홀 플레인에 나왔을 때. 딱 그 짝이었지. 더구나 전쟁 직후라 캐러밴을 찾는 것도 어려웠고, 혜수는 한 시라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고.” 적나라하게 밝히기에는 그 특유의 자존심이 상하는지, 우정민의 목소리가 서서히 줄어든다. “여러 방면으로 노력해봤지만…. 결국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도 벅찬 게 현실이었다. 일이 없는 날은 비 전투 사용자들처럼 아르바이트도 해봤고, 정말 견디다 못해 갖고 있던 장비들도 팔았지. 하지만 그것도 곧 한계가 찾아오더군.” 그 말을 들은 순간 문득 새삼스런 기분이 들었다. 전투 사용자로서 장비를 팔았다는 것은 최후의 마지노선까지 갔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나를 향해 아기처럼 손을 뻗어오는 원혜수를 보자, 순간 이해할 수 있었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그녀 혼자 둘 수도 없는 상황. 아마 둘의 입장에서는 원혜수가 엄청난 걸림돌이었으리라. 하여 한두 번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선유운과 시선을 맞추었다. '신궁' 선유운. 추후 10강 중 1인이 될 사용자. 원래 과묵한 성격이어서 그런지, 그는 내가 들어오고 나서 지금껏 단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선유운(1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궁수(Normal, Archer, Expert)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백발백중(百發百中)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6) 7. 신장 • 체중 : 180.9cm • 73.1kg 8. 성향 : 중립 • 중용(True • Neutral) (변경 전) [근력 45] [내구 48] [민첩 62] [체력 54] [마력 50] [행운 50] (변경 후) [근력 67] [내구 63] [민첩 84] [체력 71] [마력 74] [행운 61] (잔여 능력치 포인트가 4포인트 남은 상태 입니다.) 괜찮다. 정말 괜찮다. 물론 현 사용자 정보는 보잘것없다. 그러나 이들도 이제 막 1년 차에 돌입했을 것이다. 그러한 점을 감안하면, 지금 이정도 능력치를 보여준다는 것은 역시나 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붉은 송곳니 클랜이라…. 마침 인재가 필요하다 생각한 참이었는데.' 붉은 송곳니 클랜의 핵심 인물 두 명이 내 품으로 들어왔다. 물론 아직 완전히 들어왔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눈뜨고 놓칠 생각은 없다. 이들이 계속 머무를지 아니면 다시 나갈지는 나에게 달렸으리라. “아무튼 그 지경에 이르러서야 네가 해준 말이 생각나더군.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았어….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찾아왔다. 미안하다.” “아니요. 오히려 진작에 왔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그 순간 꼬르륵, 배 속이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웅….” 고개를 돌리자 원혜수가 살살 배를 쓰다듬는 게 보인다. 배가 고픈 모양. 나머지 둘은 내색하진 않았지만, 몰골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나는 고연주가 놓고 간 호출석을 누르며 부드러이 입을 열었다. “조금 더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우선 세분은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일단 배부터 채우시고, 푹 주무신 다음에 만나도록 하죠.” “…그래도 될까?” 그동안 정말 힘들었던 모양인지, 우정민은 한 번의 사양 없이 눈을 끔뻑였다. 우정민은 자존심이 강하지만 은원도 확실히 기억하는 편이다. 오죽하면 클랜원 한 명 죽었다고 '살인 여단'을 때려잡았을 정도이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최대한 빚을 지워두는 게 좋다. “임산부도 있는 만큼 안정이 중요하니까요. 두 분도 예외는 아닙니다. 먼저 지친 심신부터 달래는 게 좋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때였다. 지금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선유운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우정민은 입을 다물었지만, 꽤나 감동한 것처럼 보였다. 달칵. “클랜 로드. 부르셨어요?” 그때 고연주가 문을 열어 들어왔고, 나는 약한 눈짓과 함께 입을 열었다. “고연주. 아직 방이 많이 남아있던가요?” “그럼요.” 노련한 고연주는 단박에 대답했다. 그것은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질문에 숨겨진 다른 의미를 이해했을 것이다. 나는 세 명을 가리켰다. “중요한 손님들입니다. 먼저 식당으로 안내해주시고, 다음으로 숙소를 배정해주세요. 임산부가 있으니 특별히 신경 써주셔야 할 겁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아. 그리고….” 고연주는 아직 뭔가 남았냐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난, 나직이 말을 이었다. “내일 아침, 회의를 열겠습니다.” * 다음날 아침. 정말로 오랜만에 개최된 회의는 제법 긴 시간 동안 이어졌다. 내부의 일을 맡기고 있는 만큼 보고받을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전후 처리가 공식적으로 마무리됨으로써 나 또한 알려줄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이제 남은 건 단 두 가지입니다. 바로 전쟁 포로에 대한 처리와, 남은 황금 사자 클랜원의 처우만이 남았을 뿐이죠.” “나, 남아있는 클랜원이 있나요?” 한때 몸을 담은 적이 있어서 그런지, 한별이 무척 놀란 음색으로 되물었다. 나는 한두 번 고개를 끄덕인 후 대답했다. “클랜원들을 약간 살아남은 모양이지만…. 수뇌부들은 거의 몰살이야. 10강이었던 클랜 로드는 목이 잘린 채로 발견되었고, 도영록은 반대로 목만 남은 채로 발견되었지.” “…….” “수뇌부에서 남은 인원은. 박현우, 그리고 성유빈 정도일걸.” 황금 사자 클랜 로드란, 강철 산맥에서 심한 상처를 입고 돌아온 사용자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후 쭉 의식 불명으로 지냈는데 들이닥친 연합군에 목숨을 잃고만 것이다. 여기저기서 흘러 드는 깊은 신음을 들으며, 나는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포로 처우에 대해서는 회로를 부숴 노예화한다는 말은 있는데 아직 확정된 건 아닙니다.” “예? 회로를 부순다고요?” “수도 1000명 가량 되고, 그냥 놔두기에는 위험한 놈들이 꽤 있다고 합니다.” “허허. 북 대륙에서 강수를 두었군요.” 신재룡을 비롯한 몇 명은 끔찍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여 실은 원래 포로가 1500명 정도 되었고, 모종의 일로 500명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넣어두기로 했다. “아무튼. 이외에도 몇 가지 더 있기는 하지만, 아직 논의 중이니 공식적으로 결정이 나면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럼 사용자 정하연.” “네.” “이제 보고를 받아보죠. 일전 얼어붙은 숲에서 가져온 장비들은 결산이 끝났나요?” “죄송해요. 워낙 수량이 많기도 하고, 창고 정리와 병행하고 있는지라 아직 완전히 끝내지는 못했어요. 아마 모레쯤이면 모두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연은 할 말이 없다는 얼굴이었지만,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장비 하나하나가 고대 물품인 만큼 일일이 확인 절차도 거쳐야 했고, 수량이 굉장히 많으니 금방 끝낼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이번엔 고연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외에 따로 특기할만한 상황은요?” “음. 어제 온 세 명에 대해서는 말씀 드렸고. 아. 아직 관심 정도에 불과하지만…. 하나 있어요.” 고연주는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이내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요새 알게 모르게 하우스 앞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기웃거린다고요?” “네. 제 산하 밤의 꽃들에게 들었는데, 요새 머셔너리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것 같아요.” “산하 밤의 꽃이라면.” “예전에 고용인으로 들어오지 못한 애들이죠. 지금은 잘 지내고 있답니다.” 눈을 찡긋하며 대답하는 고연주. 나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였다가 조용히 상념에 잠겼다. '홍보가 필요한 때로군.' 탐험, 가입 문의, 용병 클랜에 대한 성격 등 관심이 높아진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마침 어제 우정민 일행들도 들어왔겠다. 이번 기회를 잘 살리겠다는 생각에, 클랜원을 확충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려는 때였다. “들으신 분도 있겠지만. 어제….” 똑똑. 그러한 찰나, 소심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그러자 조심스레 문이 열리더니 메이드 복을 입은 여인이 모습을 보였다. 고용인이었다. 그녀는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자그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지금 급한 일이 생겨서요.” “급한 일이요? 어떤?” “네. 사용자 한 분이 찾아오셨어요. 지금 클랜 로드님을 찾고 계세요.” 또 찾아왔다. 고연주의 말마따나 요즘 부쩍 관심이 높아지긴 한 모양이다. 그때 문득 뭔가가 생각났는지, 고용인은 아차 한 얼굴로 한 마디 말을 덧붙였다. “초대를 받았다고….” '응? 초대라고?' 초대라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소영은 아니다. 그녀가 왔다면 나를 찾는 게 아닌, 방문했다고 말할 테니까. 아무튼 우정민 일행을 제외하면 초대한 사용자는 없기에, 누가 와서 그런 말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혹시 누가 왔는지 알 수 있나요?” “네.” 고용인은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이고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검후, 남다은이라고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 작품 후기 ============================ 12월의 시작입니다! 올해의 마지막 달이네요! 새삼 감회가 새롭습니다. :) 또한 시험으로 인한 잠정 연재 중지의 날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어요. ㅜ.ㅠ 으허헝. 슬퍼라. 아. 여러분. 다음 회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검후에 대한 엄청난 반전을 보여드리죠. 후후후후후.(?) 아마 비비앙과 좋은 짝을 이룰 겁니다.(?) 0405 / 0933 ---------------------------------------------- 4. 모여드는 인재들(4/4) 아름다운 문양이 그려져 있는 높은 천장과 화려한 장식물로 치장된 실내 장식. 그리고 방의 중앙에 놓인 원형 탁자와 사위로 배치된 세 개의 소파.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감도는 이곳은 바로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귀빈실이었다. '검후(劍后)' 남다은이 머셔너리 클랜을 방문했다. 나는 고용인에 검후를 4층으로 안내하라 일러둔 후, 급히 회의를 파했다. 그리고 얼른 귀빈실로 들어서자 소파에 얌전히 앉아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차 한 잔 드리겠습니다.” “와. 감사합니다~.” 어딘지 모르게 신나 보이는 음색을 들으며 나는 뜨겁게 가열된 주전자를 기울였다. 쪼르륵! 따르르…. 가는 물줄기가 빠르게 흘러내리고, 한 줄기 하얀 김이 피어오른다. 이내 적당히 채워진 찻잔을 건네자 그녀는 예의 바르게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아직 비어있는 한 잔에 가득히 따르며, 난 조심스레 차를 홀짝이는 검후를 훔쳐보았다. 작고 하얀 얼굴을 감싸는 긴 생머리. 매끈히 빛나는 콧날과 찻잔을 머금은 자그마한 복숭아 빛 입술. 그리고 살짝 치켜 올라가있는 가늘고 날카로운 눈썹. “응?” 찬찬히 살펴보던 도중 문득 검후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차가 꽤나 마음에 드는 듯, 잔을 입에 꼭 문 채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그러한 눈동자와 마주하자 어딘가 달라진 점이 느껴졌다. '…눈동자인가?' 전쟁 통에서 보았던 검후의 눈동자는 슬퍼 보였다. 아련한 슬픔과 뜻 모를 공허함이 보였다고나 할까? 그러나 지금 보이는 눈동자는 전혀 그렇지 않다. 여전히 차갑고 냉랭한 느낌은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착 가라앉아 있다. 예전이 북풍한설이라면 지금은 고결(高潔)하다 보일 정도로 완화된 느낌이었다. “맛있어요.” 순간 “그랬어요?”라 우쭈쭈하고 싶었지만, 검후의 명성을 생각해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찻잔에서 올라오는 향기를 음미한 후,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입맛에 맞으실 겁니다. 고연주의 차 타는 솜씨는 예사롭지 않거든요.” “고연주라면…. 그림자 여왕님이요?” “예.” “그렇구나….” 다시 차를 홀짝이는 남다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 먼저 말을 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게 참 행복해 보이는 느낌이랄까. 이렇게 눈이 번쩍 뜨이는 미인과 즐기는 티 타임은 나로서도 환영이었지만, 아쉽게도 주변을 둘러싼 상황이 그렇게 넉넉하지는 못하다. 하여 나는 먼저 말문을 열기로 결심했다. “전쟁이 끝나고 뵙지 못했으니…. 거진 4개월만인가요?” 남다은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아, 네. 아마 그 정도 될 거예요. 제가 너무 늦게 왔죠? 죄송해요.” “…예?” “그때 곧 뵙겠다고 해놓고…. 이스탄텔 로우 로드의 요청이 너무 간절해 어쩔 수가 없었어요. 혹시 기다리셨다면, 양해 부탁해요.” 뭔가 핀트가 어긋난 응답. 검후는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머셔너리 클랜원들의 목숨을 살려준 전력이 있다. 그리고 난 그에 따른 감사의 의미로 그녀를 클랜 하우스로 초대했고. '뭐지. 그렇게 감사 인사를 받고 싶었던 건가.' 이내 멋대로 이해해버린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전쟁 후 부랑자들을 쫓는 추적대에 참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활약도 제일로 대단하셨다고요.” “아, 네. 부랑자는 사용자의 가장 큰 적이니까요. 그래서 눈에 불을 키고 부랑자들을 찾아 다녔어요. 추적대에 참가했던 기간은 저에게도 뜻 깊은 시간이었어요.” “훌륭하십니다. 그런데 뜻 깊다는 말씀은…?” “알고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제 과거를 둘러싼 안 좋은 소문들이 있었거든요.” 잠깐 말을 끊은 검후의 얼굴에 일견 어두운 빛이 스친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표정을 바로 하고는 옥구슬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출발하고 싶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제 과거를 둘러싼 소문을 청산할 필요를 느꼈고요. 그래서 더욱 열심히 찾아 돌아다녔는지도 몰라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돌연히 김덕필의 말이 뇌리에 떠올랐다. '몰랐어? 남다은이 원래 부랑자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거든. 그리고 뒤도 약간 구릿하고.' 나는 차를 한 모금 넘긴 후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성과는 있으셨는지요.” 검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네. 정말 찾아 죽이고 싶은 부랑자는 못 찾았지만…. 그래도 주변 시선이 달라진걸 느껴요. 이제야 당당히 한 명의 사용자로 인정받은 느낌이에요.” 찾아 죽인다 라. 일견 듣기에는 꽤나 살벌한 소리였지만, 남다은의 과거가 어느 정도 사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될법한 소리였다. 이윽고 다시 눈을 뜬 검후는, 나를 쳐다보며 예쁘게 웃었다. “제가 이렇게 새로 출발할 용기를 얻을 수 있었던 건, 모두 머셔너리 로드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예. 그렇…. 예? 아니 왜 제가….” “아이 참. 그때요. 바바라에서 만났을 때…. 실은 제법 곤란했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정말 기뻤어요.” “?” 그때?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밑도 끝도 없는 응답에 잠시 혼란에 빠져드려는 찰나였다. 탁. 검후는 여태껏 쥐고 있던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약간 고개를 숙여 시선을 내리더니, 양손 검지를 맞대어 살며시 비비기 시작했다. “실은…. 그래서 바로 머셔너리 로드를 따라가지 않고 추적대에 참가한 거였어요. 그때 그 상태로 갔으면 알게 모르게 폐를 끼칠 것 같아서….” “??” “그런데 자꾸 이스탄텔에서 가입 권유를 하는 거 있죠. 아하하. 그때마다 회피하느라 정말 힘들었네요.” “???” 점점 더 혼미해지는 정신 속에서, 나는 애써 태연한 태도를 유지한 채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검후는 내가 어떤 말을 해서 기뻤고, 새 출발할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추적대에 참가한 이유는 차후 머셔너리 클랜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스탄텔 로우 클랜의 가입 권유를 회피하느라 힘들었다. 이어서, 나는 한소영 그리고 남다은과 대면했을 때를 떠올렸다. '현 클랜에 묶인 몸이 아니라면, 모니카에 한 번 와보시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혹시라도 이스탄텔 로우 로드를 따라 모니카로 오시게 되면, 머셔너리에 꼭 한 번 들러주세요.' '물론입니다. 생명의 은인인데요. 검후라면 당연히 환영하겠습니다.' '…헐.'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나는 등에 흐르는 한 줄기 식은땀을 느껴야만 했다. 즉 남다은은 내가 했던 말을 가입 권유로 알아들었고, 지금껏 머셔너리로 오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해왔다는 소리였다. 물론 이것은 엄청난 오해였다. 나는 당시 한소영의 가입 권유를 도와주기 위한 일환으로 말을 꺼낸 것이었을 뿐, 그녀를 머셔너리로 데려오겠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큰일이다.' 그리고 이제야 왜 한소영이 검후를 보면 알려달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살짝 입술을 물었다. 이러한 상황은, 어떻게 보면 한소영 입장에서는 꽤나 서운하게 생각할만한 상황이었다. 사실상 먼저 침을 발라놓았는데 어찌어찌 내가 가로채간 셈이 되는 것이다. “하….” 여전히 손장난을 하는 남다은을 보며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어지러운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정신차려라. 김수현!' 이미 일은 벌어졌고, 남다은은 머셔너리 클랜에 왔다. 지금 가만히 앉아 전전긍긍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원만히 일을 처리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그, 그러시군요.” “네…. 괜히 부끄럽네요. 아하하.” “하, 하하. 그러고 보니….” 그렇게 생각한 난, 일단 상황을 가라앉히고 시간을 벌 속셈으로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오늘은 이상하게 조용하네요?” “네? 조용하다뇨?” “검 말입니다. 이름이….” “아~. 설아요?” 단박에 알아들은 남다은은 배시시 웃으며 '설아'를 꺼내 들었다. “지금 오랜만에 만나서 무척 부끄러워하고 있거든요.” 하하. 검이 부끄러워하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우웅…. 우웅우웅~. '…….' …잊고 있었다. 저런 검이었다는 걸. 검후는 이내 수줍은 검음을 흘리는 '설아'를 내밀었고, 난 얼떨떨한 기분으로 받아 들었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정말로 신기한 검인 것 같습니다.” “저는 설아를 제 아이라 생각해요. 힘들었을 때 항상 함께해준 반신이나 다름없죠.” “그렇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잠시?” 나는 잠깐 봐도 되겠냐는 의미로 물었고, 검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한 바퀴 빙글 돌려보자 부드러이 바람을 가르는 감촉이 느껴졌다. 이어서 손바닥을 피고 검면을 부딪치자, '설아'가 착착 달라붙는 게 느껴진다. 내가 사용하기에는 가벼운 감이 없잖아 있지만, 절삭력은 아주 괜찮을 듯했다. 찰싹. 찰싹, 찰싹. 우웅~. 설아는 기분 좋은 검음을 흘리며 더 해달라는 듯 애교를 부렸고, 나는 가볍게 검면을 부딪치며 상념에 잠겼다. 검후 남다은의 가입 요청. 아니 오해.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건 엄청난 기회였다. '검후'라 불리는 남다은의 능력은 두말하면 입 아플 정도였다. 단순한 '사용자 정보'로만 따지면 내가 2회 차 홀 플레인을 시작했을 때와 엇비슷한 상황. 그리고 추적대 참가로 어느 정도 과거를 청산했다면, 그녀는 차후 공석이 된 10강의 일 좌를 차지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만일 이러한 상황에서 남다은이 내 품으로 오게 된다면? 머셔너리를 10강만 두 명을 보유한 클랜이 되는 것이다. '그냥 이대로 모른척하고 받아들일까?' 물론 한소영에게 미안한 감은 있지만…. 내가 이스탄텔 로우와 적대할 것은 아니니까. 더구나 검후는 머셔너리를 위해 스스로 과거를 청산하려는 노력까지 보였다. 이러한 점들을 모두 무시하기엔, 그녀에게도 미안한 감정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아….” 순간 들려온 신음에 고개를 들자, 너무 깊게 상념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찰싹. 찰싹, 찰싹. 은연중에 계속 검을 부딪히고 있었는지 어느새 손바닥이 발갛게 물들어있다. 하여 천천히 고개를 들자 볼에 미약한 홍조가 피어오른 채, 뜨거운 시선으로 손을 응시하는 검후가 보인다. “이런. 너무 많이 보고 있었군요.” “아, 아니요. 괜찮은데….” 왜인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드는 검후를 보며 나는 '설아' 돌려주었다. '일단 정보를 한 번 볼까?' 아까 스스로 노력했다고 말했으니, 일단 보고 판단할 요량이었다. 나는 약간 식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었다. 그리고 제 3의 눈을 활성화해, 나를 빤히 응시하는 검후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허공으로 여러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을 때였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남다은(4년 차) 2. 클래스(Class) : 검후(Secret, Queen Of Sword, Master) 3. 진명 • 국적 : 검의 여왕, 즐길 줄 아는 여자 • 대한민국 4. 성향 : 냉정 • 음란(Cool • Obscene) [근력 93] [내구 78] [민첩 95] [체력 91] [마력 94] [행운 93] (능력치 포인트가 0포인트 남은 상태입니다.) “푸.” 그와 동시에, 나는 머금었던 찻물을 거세게 내뿜고 말았다. “콜록! 콜록, 콜록!” “머, 머셔너리 로드!” 나는 혼란한 와중에도 다시 간신히 허공을 응시했고, 순간 머릿속이 깨끗이 비워졌다. '????????' “괘, 괜찮으세요?” “콜록, 아. 콜록콜록, 네. 괘, 괜찮습니다. 미안합니다.” 나는 멍하니 검후를 쳐다보았다. '즐길 줄 아는 여자? 음란?' 분명 남성 혐오, 상처로 적혀있던 진명과 성향이 이상하게 바뀌었다. 아니.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이건 도대체 뭐지. 간신히 가라앉혔던 머리가 다시금 복잡하게 휘몰아친다. 이내 걱정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는 검후를 보며, 나는 입가에 묻은 찻물을 훔쳤다. 그리고 아직 정리되지 않은 말들을 두서없이 꺼내놓았다. “거, 검후. 머셔너리 클랜을 그렇게 생각해주신 건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이스탄텔 로우에서 먼저 관심을 보인 것 같아서요. 그곳도 굉장히 좋은 클랜입니다.” “물론 그렇기는 해요. 좋은 클랜이죠. 하지만…. 그곳에서 새 출발을 하기엔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져서요. 그리고 저는 머셔너리 로드가 있는 이곳이 더 마음에 들고요.” “아, 아니.” “아. 혹시 눈치를 보시는 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추적대가 해산하기 전에 제가 확실하게 거절하고 왔으니까요.” 한소영이 그런다고 포기할 여인은 아닌데요. 아니, 그것보다…. “…….” 조금 전 사용자 정보에서 느꼈던 충격이 너무 강한 터라, 나는 멀거니 남다은을 응시했다. 그런 내 시선을 느낀 걸까. 검후는 일순 시무룩한 기색을 내비치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제가 오는 게 마음에 안 드세요? 예를 들면 제 과거 때문이라거나….” “아니요. 그건 절대로 아닙니다.” 나는 곧바로 응답했다. “와. 다행이에요. 속으로 걱정 많이 했었는데…. 환영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러자 안색이 밝아진 검후는 한결 다행이라는 얼굴로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약간의 침묵이 이어진 후.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기대 가득한 눈빛을 뿌리며 말을 이었다. “저…. 그럼 클랜 하우스를 구경할 수 있을까요? 아까 보니까 정원이 무척이나 예쁘던데. 다른 클랜원분들도 한 번 뵙고 싶고요.” “…그래요. 가시죠.” …이제 나도 모르겠다. 그, 그래. 취향은 존중하라는 말도 있잖은가.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몸을 일으켰고, 남다은과 함께 귀빈실을 나섰다. 이내 복도를 걸어간 우리는 층계에 도달했고, 계단을 밟으며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3층에 도착했을 때였다. “야! 너 거기 안 서!” “뀨뀨!” 문득 들려온 소란스러운 소리에 시선을 내리자, 재빠르게 계단을 오르는 아기 유니콘이 보인다. 그리고 그런 녀석을 다급히 뒤쫓는 비비앙. “뭐하니.” “뀨?” 하여 계단을 올라 내 쪽으로 달려오는 아기 유니콘을 가볍게 낚아채자, 녀석은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때였다. “김수현! 잘 잡았어! 얼른 그 녀석! 어….” 마침 뒤쫓아 올라온 비비앙이 나를 가리킬 즈음. 그제야 내 옆에 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그녀의 시선이 옆으로 향한다. 그에 따라 나 또한 고개를 돌리자, 똑같이 비비앙을 내려다보는 남다은이 보였다. 서로를 빤히 쳐다보는 둘을 보며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인사해. 여기는 검후, 남다은이라고…. 응?”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호오….” “와….” 꼴깍, 침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두 여인의 목울대가 동시에 움직였다. ============================ 작품 후기 ============================ 고수와 유망주의 만남. 오늘 중요한 후기입니다. 12월 2일(월요일)부로 메모라이즈가 휴재에 들어갑니다. 이유는 예전에 말씀드렸듯이, 기말고사 시험 때문입니다. ㅜ.ㅠ 혹시나 해서 다시 말씀 드려보면, 원래 1부 완결 후 2주간 쉬는 기간을 가질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12월 시험 기간을 생각해보면 또 휴재를 해야 되고, 그러면 휴재 기간이 너무 길어지기에 외전을 연재하는 것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외전은 적는 동안 너무 즐겁게 적은 만큼, 개인적으로 아쉬운 게 너무 많습니다. 더 적고 싶은 내용이 많거든요. 인재, 화정과 꽁냥꽁냥, 탐험으로 얻은 장비들, 101능력치 사용자와의 대결, 선율과 안솔, 머셔너리의 발전, 고연주 임한나와 응응, 비비앙과의 찰싹찰싹, 박환희, 차유나 그리고 백한결, 박동걸과 이보림의 근황 등등 소재거리는 넘쳤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걸 적기에는 제가 중간에 너무 많이 쉬었고, 시간도 조금 부족했지요. 이점 백배 사죄합니다. ㅜ.ㅠ 아무튼. 이번 기말이 올해의 마지막인 만큼, 제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온 힘을 다 쏟아낼 예정입니다. 기말고사 기간은 12월 9일(월요일)부터 일주일간 진행됩니다. 그리고 다시 메모라이즈를 올리는 건 아마 12월 16일(월요일)이 될 것 같습니다.(즉 12월 3일(화요일)부터 12월 15일(일요일)까지 총 13일 휴재합니다.) 솔직히 지금도 이번 주는 격일 연재라도 해볼까 생각하고 있지만, 지금 해야 할게 너무 많아 애초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시험이 끝나면 바로 방학입니다. 그때는 여유가 생기니 미뤄왔던 이북 작업이나(부장님, 편집자님 죄송해요.), 연재에 더욱 많은 신경을 쓰겠습니다. 그럼 불초 로유진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12월 16일(월요일)에 뵙도록 해요! 모두 행복한 12월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총총. + 2013년 12월 2일 오후 20시 15분 추가 내용. 애초 예정했던 휴재 기간을 줄이겠습니다. 이번 기말고사는 2학기 중간고사 때 연재했던 방향과 똑같이 가도록 하겠습니다. 1. 변경 전 2013년 12월 2일(월요일) ~ 2013년 12월 15일(일요일) 휴재 2. 변경 후 - 2013년 12월 2일(월요일) ~ 2013년 12월 8일(일요일) : 격일 연재(12월 2일(월요일), 12월 4일(수요일), 12월 6일(금요일), 12월 8일 연재(일요일)) - 2013년 12월 9일(월요일) ~ 2013년 12월 13일(금요일) : 중간고사 기간으로 인한 휴재. 3. 2013년 12월 14일(토요일) 연재 재개. 조금 더 타이트하게 생활하면 이 정도는 가능할 것 같네요. 0406 / 0933 ---------------------------------------------- 4. 모여드는 인재들(4/4) “미안. 아무래도 조금 힘들 것 같아.” 한동안 원혜수를 유심히 보던 비비앙은, 결국 고개를 가로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죄송해요. 저도 장담할 수는 없어요.” 이어지는 안솔의 말 또한 부정적인 의견이었다. 그렇게 두 여인의 동시에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자, 두 남성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레어, 시크릿 클래스의 능력에 일말의 희망을 걸었던 모양이다.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번에 백서연의 정신을 억지로 망가뜨렸던 것처럼…. 반대의 경우는 힘든 건가?” “위그드라실의 과실이 남아있다면 모를 일이지. 하지만 그때 여분을 만든다고 전부 써버렸는걸.” 비비앙은 단호한 목소리로, 딱 잘라 대답했다. “…그럼 기적은?” “아직 재사용 대기 시간이 2개월 정도 남았어요. 그때 가서 한 번 해봐야 알겠지만….” 안솔은 잠시 말끝을 흐렸다가, 무척 가엾다는 얼굴로 침대를 응시했다. 원혜수는 두 손으로 배를 감싼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설정에 의한 정신 오염이라면 어떤 것이든 100% 치료할 자신이 있어요. 하지만 이분은 커다란 충격으로 인한 정신병의 발병이라….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기적은 만능이 아니니까요.” 그렇군. 시크릿 클래스 '광휘의 사제'의 '기적'으로도 힘든 건가. 나는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옆을 돌아보자, 씁쓸한 얼굴을 한 두 명을 볼 수 있었다. 우정민과 선유운이었다. 사실 망가진 정신을 치료하기 힘들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이유는 안솔이 말한 대로였다. 그나마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은 어느 날 정신이 갑자기 돌아오거나, 아니면 서서히 나아지는 자연적인 회복 정도일까. 아무튼.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번거로이 둘을 부른 이유는…. “괜찮다. 어차피 다른 데서도 들었던 말이야. 머셔너리 로드.” 바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우정민과 선유운을 머셔너리에 끌어들이기로 결정한 이상, 여러 방면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일단 둘이 꽤나 소중히 생각하는 원혜수를 신경 써주는 게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물론 빚을 지우려는 의도도 없잖아 있었고. “혜수를 살펴주어서 고맙습니다…. 그래도 여기가 가장 희망적으로 말해주는군요.” 우정민과 선유운. 둘은 비비앙과 안솔에 깍듯이 고개를 숙이곤 고소(苦笑)를 지었다. 잠시 후. 어색이 인사를 받는 둘을 내보낸 후, 나는 우정민과 선유운과 자리했다. 원혜수는 여전히 달게 자는 중이었다. 나는 세 명을 번갈아 보았다가 미안해하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괜한 기대를 가지게 만든 건 아닌가 모르겠군. 미안하다.” “무슨! 나로서는 고마울 따름이지. 그렇게 말하면 오히려 내가 미안하잖아.”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신경 써주신 것, 정말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둘은 동시에 대답했다. 그래. 나도 알아. 그냥 겸양 한 번 떨어본 거야. 우정민은 한두 번 헛기침을 하더니, 짐짓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야말로 인사가 늦었어. 덕분에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 고맙다.” “…지내는데 불편한 점은 없어?” “전혀. 그림자 여왕님께서 이것저것 신경 써주시더군. 혜수도 괜찮아진 느낌이고. …요즘에 아주 가끔 웃기도 하거든.” 여인과 꽤나 각별한 사이였는지 우정민은 아련한 눈길로 원혜수를 응시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그녀를 쳐다보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머셔너리 로드. 할 말이 있다.” 나는 해보라는 의미로 고개를 까닥였다. “우리가 이곳에 온지도 며칠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지?” “어떻게 해야 하냐니?” 나는 눈을 살짝 떠 천연덕스레 응답했다. 사실 기다리던 질문이었지만, 곧바로 말을 꺼내기에는 조금 속보이잖은가. “혜수는 이곳이 마음에 든 것 같다. 물론 우리도 그렇고. 하지만….”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대로 지내기에는 눈치가 보이기도 해. 뭐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야.” “으음. 뭐라도 하고 싶다 라.” 깊이 생각하는 척으로 한 번 더 시간을 끌다가,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조만간 세 명 모두 머셔너리 클랜원으로 등록하는 건 어때?” “…네 클랜에 가입하라는 소린가?” 역시나 하는 우정민을 보며 나는 곧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지. 가입이 아니라, 그냥 등록만 하라고.” “가입이 아니라 등록? 당최 그게 무슨 말이지?” “간단히 말해서, 같이 일을 하자는 소리야.”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우정민과 선유운은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하여 나는 머셔너리 클랜에 대한 성향. 즉 '용병'의 개념에 대해서 추가로 덧붙였고, 둘은 그제야 이해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다면…. 네 말은 우리도 용병으로 활동하라는 말인가?” “그렇지. 현재 머셔너리의 최대 단점은 적은 인원이야. 예를 들어 의뢰가 몰리는 상황인데 인원이 부족하다면? 그 의뢰에 대해서는 포기하거나 시일이 걸릴 수밖에 없지. 그런 것들은 이제 막 발돋움하려는 우리 클랜에 타격이 될 테고.” “그러면 인원을 늘리면 되지 않나?” “말했잖아. 소수 정예를 지향한다고. 그렇게 어중이떠중이 등 아무나 받을 생각은 없어.” 바꾸어 말하면, 너희들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뭔가 좋은 얘기 같기는 한데.”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해.” “그럼 혹시 나중에….” “머셔너리에 등록하는 순간 신분은 자유 용병으로 바뀌게 되지.” 나는 일부러 자유라는 말을 강조했다. 우정민은 굉장히 야망이 큰 인물이다. 그런 만큼 단순히 “내가 너를 도와줬으니 우리 클랜에 들어와라.”고 하면 반감을 가질 가능성이 높았다. 해서 나는 우정민의 성격을 눈여겨보았다. 그는 자존심이 높지만, 은원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오죽하면 이제 곧 어디선가 창단될 부랑자들의 모임, '살인 여단'을 깡그리 쓸어버리지 않았는가. 고작 클랜원 한 명 죽었다는 이유로. 그런 우정민이 1회 차 시절 입버릇처럼 내뱉었던 말이 바로 “은혜는 바다같이 갚고, 복수는 칼날같이 갚는다.”였던가. 이윽고 둘은 내 말을 충분히 알아먹은 듯 보였다. 우정민은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멋쩍어 보이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가…. 그래도 될까?” 머리가 있으면, 내가 지금 말한 조건들이 얼마나 사정을 봐주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어찌됐든 사실상 반승낙이나 다름없는 대답에 나는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그럼 승낙한 걸로 알고 서류를 준비해둘게. 조만간 등록소로 가자고.” 그리고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말을 이었다. “아. 원혜수는…. 의사 표현이 걸리네. 아무튼 등록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상태를 감안하면 대리인 신청이 이루어질 수도 있어. 그러니까 그녀도 외출을 준비해줘.” 그 말에 우정민과 선유운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혜, 혜수도 받아주는 건가?” “그럼?” “하지만 지금의 혜수는…. 알다시피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움은 너네 둘로 충분해. 아마 등록하게 되면 조금 더 신경 써줄 수 있을 거야. 일단은 같은 클랜원이라는 명분이 생기니까.” 그 순간, 나는 우정민의 눈동자가 서너 번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때였다. “머셔너리 로드.” 제법 묵직한 목소리가 얼른 자리를 비켜주려는 내 발목을 붙잡았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물어도 되겠습니까.” 흘끗 고개를 돌리자, 우묵해 보이는 얼굴의 선유운이 보인다. 내게 질문을 던지는 그의 눈동자는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이윽고 선유운의 입이 열렸다. “저희에게…. 왜 이렇게 잘해주시는 겁니까?” “?” “물론 말씀해주신 것들은 저희에게 한없이 감사한 제안입니다. 하지만 혜수와는 예전에 안 좋은 기억도 있고…. 솔직히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안 좋은 기억이라 함은 동생이 죽었다고 꼬장을 피운 일을 말하는 건가?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깐 상념에 잠겼다. 사실 우정민과 선유운은, 엄밀히 말해서 내 '적'이었다. '붉은 송곳니 클랜'은 차후 연합군의 한 축을 담당할 만큼 크게 성장하고, 그만큼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런 만큼 사실상 기회를 봐서 처리하는 게 옳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는 게 정확한 생각이랄까. '어쩌다 이렇게 된 거예요? 처음에는…. 당신이라는 사람과 잘 지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그날 들었던 유현아의 말은, 내 가슴에 제법 깊숙이 박힌 상태였다. 이미 미래는 변해도 한참 변했다. 하여, 난 이후로 생각을 바꾸었다. 앞으로는 유현아와 같은 사례보다는 고연주와 같은 사례를 만들어보자고.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나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그냥….” 그리고 어깨를 한 번 으쓱인 후 차분히 말을 이었다. “옛날 생각이 나서?” *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예고한대로 우정민 일행과 등록소에 다녀왔고, 원혜수까지 무사히 신분 변경을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클랜 하우스로 되돌아오자, 예상했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클랜 로드 님이 자리를 비우신 사이에, 이스탄텔 로우 로드께서 방문하셨어요.” 고용인의 말에 나는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한소영의 방문은 예상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직접 전령을 보내 검후의 출현을 알렸기 때문이다. 하여 고용인에게 조만간 방문할 수 있음을 공지했고, 혹시 내가 없을 때 오면 검후와 자리를 마련해주라 일러둔 상태였다. 사실 그냥 은근슬쩍 넘어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렇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일을 처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검후를 둘러싼 관계에 약간의 오해가 있었고, 그것을 확실하게 풀고 싶었으니까. 여태껏 기껏 관계를 잘 유지해왔는데, 그것을 어그러뜨릴 불씨는 시작부터 진화하는 게 좋았다. “그렇군요. 지금 어디 계시죠?” “네. 말씀하신 데로 4층에 검후 님과 자리를…. 아! 마침 저기….” 놀란 음성에 뒤를 돌아보자, 공교롭게도 마침 계단을 내려오는 여인이 보였다. 성적 매력이 충만한 몸동작과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농염한 몸매. 그러면서도 퇴폐적이지 않은, 오히려 세련된 자태를 뽐내는 여인의 정체는 바로 한소영이었다. '남다은을 포기한 모양이군.' 언뜻 보기에는 무표정해 보이지만, 눈가에 알게 모르게 아쉬움이 배어져 있다. 이윽고 한소영 또한 나를 확인했는지 보자마자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자리를 만들어주셔서 고마워요. 머셔너리 로드. 실례했어요.” “검후 또한 허락한 일이니 실례랄 것 까지는 없습니다. 아무튼, 얘기는 잘 나누셨는지요.” “네. 검후의 뜻을 확실하게 받았어요. 머셔너리 클랜에 경사가 생겼군요.” 사실상의 포기 선언. 그래도 경사라 말하는걸 보니 어지간히 부러운 모양이다. “혹시 속이 상하셨다면 미안합니다. 의도치 않게….” “아니요. 괜찮아요. 속이 상하지는 않았어요. 그저 아쉬울 뿐…. 애초 검후는 머셔너리 클랜에 뜻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 “…제가 너무 부담을 준 모양이에요.” 우리는 서로 말끝을 흐렸고, 그 사이로 고요한 침묵이 감돌았다. 왠지 모르게 불편하게 느껴지는 침묵이었다. 다시 말문을 연 사람은 한소영이었다. “지금 클랜으로 되돌아갈 생각인데. 잠시 같이 걸을 수 있을까요?” “배웅해드리겠습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걸까. 이윽고 우리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입구를 나설 때까지만 해도 한소영은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예전에 '얼어붙은 숲'을 주선했던 일에 대한 사과와, 최근 근황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였다. 그러다 본론을 꺼내든 것은, 정원의 중앙. 즉 주변 인기척이 확연히 줄어들었을 때였다. “머셔너리 로드. 현재의 검후는 굉장히 가치가 높은 사용자에요. 단순히 능력뿐만이 아니라, 명성을 통한 상징성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죠. 차후 10강 중 1인이 될 수 있을 만큼….” “그렇군요.” “네. 그럼 혹시 10강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뜬금없이 튀어나온 10강에 대한 이야기. 그러나 아무 이유 없이 꺼낼 말은 아니었기에, 나는 조용히 말을 경청했다. “현재 10강의 10자리 중 7자리가 비어있어요. 아마 조만간 일부 자리가 채워질 예정이에요.” “10강은 누가 정하는 게 아니라 사용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정확해요. 다만, 그 상황을 누가 의도적으로 조장할 수는 있죠. 언급된 사람이 10강에 합리적으로 부합되는 사용자라면.” 이어서 터져 나온 말은 가벼이 흘려 들을게 아니었다. 하여 걸음을 멈추고 한소영을 쳐다보자, 그녀는 물끄러미 나를 응시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수호자는 아직 북 대륙이 완전히 정상이라도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여러 가지 일을 계획하는 중이고요.”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한 계획이라.” 그 순간, 번뜩 스치고 지나가는 하나의 생각.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설마 그 일환 중 하나가…. 이효을은 10강의 자리를 의도적으로 채울 생각인 겁니까?” “맞아요. 이미 남은 7자리 중, 6자리는 내정된 상태에요.” “그 6명이 도대체 누구인가요?” “…미안해요.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 에요.” “…….” “배웅 감사해요.” 할 말을 다했다는 듯, 한소영은 한숨과 함께 살짝 고개를 숙이곤 몸을 돌렸다. 이윽고 멍하니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 일순 그녀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는걸 볼 수 있었다. “머셔너리 로드. 북 대륙의 수호자는 당신을 주목하고 있어요.”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요.” “아직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남은 한 자리는 아마 1년 차 사용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는군요.” 내가 그 말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한소영은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부디, 머셔너리 클랜이 이 기회를 잘 활용하기를 바래요.” 은은한 색기가 어린 한소영 특유의 목소리는, 이내 그녀가 떠나간 자리를 여운처럼 감돌았다. * 남다은은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서너 번 눈을 깜빡이고는, 양팔을 하늘위로 들어올렸다. “만세.” 마침내 한소영에게서 벗어나 축하하고 싶었던 걸까. 홀로 경축을 터뜨린 남다은은 조용히 방에서 걸어 나왔다. 그리고4층 계단을 내려가며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남다은의 머릿속은 복수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 홀 플레인에 들어왔을 때, 자신을 속인 이강산과 부랑자들에 대한 증오가 깊숙이 뿌리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남다은은 여전히, 그리고 아직도 부랑자를 증오한다. 순수했던 0년 차 시절. 그네들에게 당한 일을 잊기에는 그녀의 가슴은 너무나 많은 상처로 뒤덮여 있었다. 다만. 그러한 감정은 전쟁과 추적대에 참가하는 과정을 거치며 상당 부분 희석되었다. 한치의 자비도 없는 부랑자 살해로 세간의 평가가 수정된 지금, 이제는 어느 정도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긴 것이다. 이윽고 3층에 다다른 남다은은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복도를 거닐었다. 얼마 전 그녀는 클랜원들 앞에서 정식으로 소개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되돌아온 반응에 슬퍼했다. 대부분 축하는 해주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려워하는 기색을 느낀 탓이다. 하지만 남다은은 실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원래 명랑한 성격이었고 대인 관계도 원만한 여성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본성을 되찾아가는 지금. 남다은은 생각했다. 이왕 새 출발을 하기로 했으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다가가 보자고. 이윽고 3층 끝에 다다른 그녀는 문이 살짝 열려있는 방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문틈을 들여다보자, 뭔가를 열심히 읽고 있는 한 여인을 볼 수 있었다. 남다은은 한두 번 심호흡을 한 후 차분히 문을 두드렸다. 똑똑. “누구야?” “저기…. 저예요.” “저가 누구…. 어.” “안녕하세요.” 대답한 사람은 바로 비비앙이었다. 사실 남다은이 비비앙을 찾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처음 만날 때부터 왠지 낯설지 않다고 느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고 있으니 뭔가 모를 동질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단순한 착각일수도 있지만, 아무튼 현재 그녀로서는 김수현을 제외하고 가장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상대였다. “당신은…. 검후라고 했나? 여긴 어쩐 일로?” “그냥 이야기도 나누고 싶고…. 친해지고 싶어서요.” 남다은의 직설적인 화법에 비비앙은 볼을 발그레하게 붉혔다. 이윽고 그녀는 고개를 약하게 끄덕였다. “드, 들어오던가.” 가볍게 떨어진 허락에 남다은은 기뻐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이내 비비앙이 내준 자리에 앉은 그녀는 적극적인 태도로 입을 열었다. “아하하. 계단에서 마주친 이후로 뵙지 못한 것 같아요.” “많이 바쁘니까. 나는 연금술사거든. 그리고 연구도 해야 하고….” “와. 연금술사. 그러고 보니 클랜 로드에게 무척 뛰어나신 연금술사라 들었는데.” 비비앙은 자신이 연금술사라는 사실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진 여인. 그런 만큼, 남다은이 의례적으로 띄워주자 금세 코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래? 김수현이 정말 그랬어? 요호호호. 내 입으로 하긴 그렇지만, 사실 맞는 말이야.” “역시. 같은 클랜에 뛰어난 연금술사가 있으니 마음이 든든하네요.”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는 비비앙과, 그에 맞추기에 여념이 없는 남다은. 연신 이어지는 칭찬에 비비앙은 몸을 뒤로 젖혀 거만하게 다리를 꼬더니, 약한 콧숨과 함께 자랑을 시작했다. “휴. 사실 좀 피곤한 정도로 부탁이 많이 들어오기도 해.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뭐. 내가 없으면 김수현은 항상 곤란해하는걸.” 김수현이 들으면 코웃음을 넘어 한 대 맞기까지 할 말이었지만, 비비앙은 서슴없이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문제는 남다은이 곧이곧대로 믿고 있다는 것. “정말이요? 그분이 곤란해하기도 해요?” “그럼~. 얼마 전에도 내게 새로운 부탁을 해왔는걸. 그래서 열심히 이 책을 탐독하고 있었지.” 남다은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책이 뭔데요?” 비비앙은 자신의 입지를 확실하게 각인하려는지, 거대한 책을 톡톡 두드려 보였다. “연금술에 관한 책. 고대 마법사 한 명이 자신의 일지를 적어놓은 책으로, 예전 탐험에서 얻은 거야.” “와. 그럼 다 고어로 되어있을 텐데.” “상관없지. 난 당신들 말마따나 거주민이니까. 해석엔 문제없어.” 잠시 숨을 고른 비비앙은 곧 뻐기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직 자랑은 끝나지 않았다. “아 참. 혹시 백서연이라는 부랑자 알아?” “네.” “그럼 이건 알려나 모르겠네. 그때 포로로 잡은 백서연의 정신을 망가뜨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책 덕분이었어. 김수현이 말하기를, 내 덕에 사용자들 틈에 섞여있던 부랑자 첩자들을 색출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고.” “아하. 그 사건도 알고 있어요.” 그 사건은 무척 관심 깊게 지켜봤던 사건이었기에, 남다은은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적의 적은 동지라고 했던가? 그녀는 비비앙에 대한 호감이 부쩍 높아지는 것을 느꼈다. “저는 클랜 로드가 한 줄 알았는데, 숨은 공로자도 있었군요.” “흥. 뭐 상관없어. 진정한 연금술사는 명예에 연연하지 않는 법이야.” “그렇구나.” “그런 거지.” 이내 둘은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이어서 비비앙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려는 찰나, 돌연히 남다은이 입을 열었다. “비비앙씨. 저 그 책 내용이 정말 궁금한데, 한 번 봐도 될까요?” “어? 어. 그래.” 남다은이 두터운 책을 가리키며 묻자, 비비앙은 순간 얼떨떨한 얼굴로 긍정했다. 그러나 그녀가 사용자라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서슴없이 책을 건넸다. “그런데 읽을 수 있어? 전부 우리 언어로 되어있는데.” 팔랑. 이윽고 책을 무릎에 놓고 펼친 남다은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저 아카데미 다닐 때 고어도 배운 적이 있거든요.” “…어?” “물론 약간이긴 하지…. 어, 어머?” 그리고. 같은 시각. “에취!” 막 입구를 들어오던 김수현은 거센 기침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양손으로 팔을 감싸 안고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 작품 후기 ============================ “자, 잠깐만!” “흠. 제법 흥미롭기는 하지만, 이게 다라면 아직 부족하군요. 비비앙씨.” “어, 어?” “명심하세요. 아무리 이론이 좋아도 실전은 다른 법이에요.” ………. ………. ………. “사부로 모시겠습니다.” 그날 둘은 의기투합했다는 소문이…. 농담입니다. :) 0407 / 0933 ---------------------------------------------- 5. 비상(飛上)(2/2) 딱 한 번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눈앞이 가물가물하다. 창문을 통해 비쳐온 햇살이 너무 포근했던 탓일까. 집무실 책상에 앉은 채 그대로 졸아버린 모양이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돌려 창문을 응시했다. 반들반들한 윤이 흐르는 창틀에 찬란한 햇살의 물결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 너머로 에메랄드를 뿌려 놓은듯한 옥빛 정원이 펼쳐졌다. 이윽고 시선이 정문에 다다랐을 때, 나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부디, 머셔너리 클랜이 이 기회를 잘 활용하기를 바래요.' 떠나기 전, 한소영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 그 한 마디는 현재 머셔너리의 상황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효을은 조만간 10강의 공석을 채울 예정이다. 억지로 상황을 조장한다는 점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의도 자체는 나쁘지 않다. 핵심은 남은 7자리 중 1자리에 1년 차가 오를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 말인즉슨 나를 10강의 자리에 올려놓을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10강이 되는 게 나쁜 일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러나저러나 차후의 일을 생각해보면 실보다는 득이 많다고 예상되니 말이다. 문제는, 그 하나의 실(失)이 자못 말썽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이미 머셔너리는 순풍에 돛단배처럼 잘 나가고 있다. 그러나 난 여기서 한 번 적당히 제동을 걸 필요성을 느꼈다. 잘나가는 건 선망의 대상이 될 수도 있지만, 도가 지나치면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더구나 전쟁이 끝난 지금, 머셔너리에 대한 사용자들의 관심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가는 상황. 여기서 내가 덜컥 10강이 돼버린다면? 결과야 뻔하다. 내가 지금껏 어떤 실적을 쌓았든 태클을 거는 자들이 분명히 나올 것이다. 이건 100% 장담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헐뜯을 거리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으니까. 하지만 마냥 안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기에는, 한소영의 말을 한 번 생각해볼 여지는 있다. '남은 일곱 자리 중, 여섯 자리는 내정된 상태에요.' 정리해보자. 남은 한 자리는 아직 내정하지 않은 상태이다. 하지만 나를 10강으로 올릴 생각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당분간 자리를 비워놓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내 해석이 맞는다면…. '어느 정도는 기다려주겠다는 건가?' 나는 비로소 복잡했던 생각이 차차 트여감을 느꼈다. 동시에 추가로 든 생각은, 지금의 고민은 비단 나 하나에 국한된 게 아닐 거라는 것. '내정'이라는 말에 너무 한 쪽으로 생각을 해버렸다. 그래. 이효을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중대한 문제를 성급히 진행할 리는 없을 터. 그렇다면…. 10강으로 오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차차 연차를 쌓아가며 착실히 실적, 평판을 쌓아가는 것. 그리하여 누가 봐도 10강으로 인정할 만큼의 명성을 구축하는 방법. 다른 하나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엄청난 활약을 하여 사용자들에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 다만 이 방법은 실제로 실현된 적이 드물다고나 할까. 이 두 개의 방법 중 현재 내가 택해야 할 방법은 바로 둘 모두였다. 즉 둘 사이를 적당히 저울질해 이루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경우, 내가 행해야 할 행동 또한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한 번 생각이 트이니 거침없이 계획이 수립된다. 난 복잡했던 머릿속을 순식간에 정리할 수 있었고, 곧바로 손을 뻗어 통신용 수정구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서서히 마력을 흘려 보내자 곧 말간 빛을 내뿜기 시작한다. 잠시 후. 파츳, 파츠츳! 상대 쪽에서 연결을 확인했는지 약간의 노이즈가 생성되었다. 그와 동시에, 누가 봐도 가슴이 설렐 정도의 매력적인 얼굴이 수정구에 비쳤다. 한순간 가슴을 턱 막히게 만드는 냉랭한 시선이 나를 쏘아본다. “형. 나야.” 그 순간 싸늘했던 인상이 봄 만난 겨울처럼 사르르 녹는걸 볼 수 있었다. 이내 한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남성은…. - 그래 수현아. 오랜만이야. 바로 내 형, 김유현이었다.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어서 연락했어.” - …섭섭하다. 보자마자 안부는커녕 용건부터 꺼내니. “형. 그동안 잘 지냈어? 할 말이 있어서 연락했어.” - 원, 녀석도. 형은 정말로 서운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 그래. 할 말이 뭔데? “형의 도움이 필요해.” - 무슨 도움? “저번에 말했던 거야. 기억하지?” - 저번에 말했던 거라면…. 아. 형은 바로 말을 알아들었는지 짐짓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긴 얘기야? “조금?” - 으음. 긴 얘기면 수정구보다는 직접 만나서 듣는 게 좋겠구나. “아니. 그렇게 길지는 않을….” - 겸사겸사 얼굴도 보자는 얘기야. 그날 이후로 한 번도 보지 못했잖니. 차분하게 타이르는 형의 목소리. '…….' 이리도 낯부끄러운 말을 너무도 당당하게 말하는 태도에 순간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이내 형은 한두 번 헛기침을 하더니, 뭔가 번뜩 떠오른 듯 아차 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 어차피 조만간 만나게 될 것 같은데…. 차라리 그때 얘기하는 건 어때? “조만간 만나다니? 왜?” - 곧 사용자 아카데미가 활성화되는 건 알고 있지? 효을이가 일차적인 의견을 종합했나 봐. 머잖아 회의를 개최할 예정이야. 또 회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용자 아카데미가 연관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확실히 일리 있다는 생각에 머리를 느릿하게 끄덕였을 때였다. - 아. 그러고 보니 너희 클랜 이번에 좋겠더라. “응? 뭐가?” - 이건 효을이가 살짝 흘려준 얘긴데…. “?” 나는 의아히 반문했다. 설마 벌써 남다은이 가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건가? 그러나 이어지는 형의 말은,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 이번 사용자 아카데미는 교관으로 참가할 수 있는 클랜들이 제한돼있잖아. “그렇지. 피해를 많이 입은 곳을 우선으로 선발하겠다고 했던가.” - 거기에 두드러진 공적을 세운 곳도 포함되지. 아무튼…. 형은 내 말을 곧바로 받고는 깍지를 껴 턱을 괴었다. - 이번에 머셔너리 클랜에도 참가 우선권이 보장될 것 같다. 그 순간, 나는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 형과의 연락을 마치고 3층으로 내려가자, 활짝 열린 창고와 부산스레 움직이는 클랜원들이 보였다. 얼마 전 장비 결산 후 대대적인 창고 정리를 지시했는데 임무를 맡은 이가 바로 하연이었다. “사용자 정하연. 이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로브네요. 방어구들을 모아 논 곳으로 갖다 놓되, 클래스 별 분류를 확실히 해주세요.” “그럼 왼쪽 진열대에 두겠습니다.” “정확해요.” 이내 빠릿빠릿하게 돌아서는 선유운. 그리고 한 쪽에서는 열심히 무구를 나르는 우정민이 보였다. 딱히 도우라는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나온걸 보면, 저들도 서서히 적응할 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하연은 크게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돌연히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현아! 너 그거 뭐야?” “예? 그, 금화 상자요.” “금화 상자? 그걸 왜 거기다 둬? 앞쪽 벽에 붙여놓으라고 했잖아.” 안현은 미처 생각지 못한 듯 눈을 끔뻑이더니 뜨악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우. 이거 엄청 무거운데…. 누님. 그냥 여기 두면 안 돼요? 어차피 아무것도 없잖아요.” “거기 공간 없어. 갑옷들 둘 거란 말이야. 내가 도와줄 테니까 같이 하자.” “아이고. 누님도 참 융통성 없어요.” “그래. 나 융통성 없는 여자야. 이제 알았니?” 힘겨움 가득한 투덜거림에 하연은 어깨를 으쓱하곤 팔을 걷어붙였다. 곧 서서히 다가가는 그녀를 보며, 안현은 건들건들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형한텐 따사로운 인간적인 여자.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아는 융통성 있는 여자. 그러나 우리 앞에서는 없어지는 신비로운 여자. 그런 반전 있는 여자~.” 막 상자를 잡으려던 하연은 일순 멍한 표정으로 안현을 쳐다보았다. “킥!” “쿡쿡.” 이어서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미약한 웃음소리. 간만에 안현의 농담이 먹혔다. 오죽하면 한 쪽에서 조용히 보석을 정리하던 한별이조차 손으로 입을 막고 있을 정도였다. 하연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무척 화가 났는지 거세게 손을 떨쳐 내린 것이다. 그리고 새빨개진 얼굴로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너, 너? 이 자식이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흠, 흐흠.” 그때 나는 가벼운 헛기침과 함께 창고 안으로 들어섰고, 순간 몇 명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동시에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하연의 어깨가 움찔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현아. 다같이 열심히 일하고 있잖니. 그렇게 누나를 놀리면 못써요. 다음부터 그러면 안 돼. 알겠지?” 약간의 틈을 두고 이어진 하연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부드럽고 상냥했다. 나는 속으로 잠깐 웃고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섰다. “하연. 고생하는군요.” “어머. 클랜 로드 오셨어요?” 하연은 이제야 깜짝 놀란 척 나를 돌아보았다. “…예. 현이가 또 놀렸습니까?” “그냥 농담이었어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군요. 그래도 가끔 보면 하연은 너무 무른 데가 있습니다. 그래도 엄연히 임무 수행 중인데…. 조금 더 매섭게 몰아붙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만.” “호호. 이왕 하는 거 즐겁게 일하는 게 좋잖아요?” 동시에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들. 그 눈길에는 왠지 모르게 억울하다는 낌새가 느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한별을 곁눈질했고, 멍하니 입을 벌린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아마 내가 오기 전까지 꽤나 시달렸던 모양이다. 결국 누군가 참지 못했는지, 억지로 변조한 티가 나는 음성이 한 쪽 구석에서 들려왔다. “무, 무슨! 장비 하나 놓는데 각까지 잡게 했…!” “그래도 클랜 로드의 말씀은 가슴 깊숙이, 뼛속까지 새기겠어요.” 그러나 빠르게 말을 끊은 하연의 대응 또한 민첩했다. 이어서 싸늘한 빛을 뿌리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그녀는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아니. 뼛속까지 새길 필요는 없어요. 이윽고 하연의 입가에 지어진 진한 미소를 보며, 나는 속으로 애도했다. 아무튼. 나는 팔을 뻗어 안현이 들고 있던 상자를 아래쪽에서 들어올렸다. 이 거대한 상자에 금화가 가득 차서 그런지 약간 묵직한 느낌이다. 그리고 엉거주춤한 안현에게 비키라는 신호를 보낸 후, 아까 하연이 말한 방향으로 가볍게 상자를 던졌다. 쿵! 그리고 허공에서 좌우로 빙글 돌은 상자는, 구석 모서리로 정확히 안착했다. 일순 토끼 눈으로 변한 클랜원들을 돌아보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창고 정리를 끝마치는 순간 바로 장비 분배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열심히 한 사람에게는 그만한 보답이 돌아가겠지요. 이 부분은 제가 하연에게 필히 보고받도록 하겠습니다.” 클랜원들은 순간 멍한 얼굴로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곧 내 말을 이해한 듯했다. 삽시간에, 다들 바삐 몸을 놀리기 시작한 것이다. “영차, 이영차.” 그 중 안솔이 가장 가관이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화살 하나를 곧장 내려놓고는 무거운 갑옷을 들어올린 것이다. 그것도 일부러 끙끙대며 내 앞을 지나가기까지. 문득 들려오는 짧은 한숨 소리에, 나는 하연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왜 저럽니까?” “괜찮은 사제 장비가 하나 나왔거든요.” “…….” “저번에 얼음 벽 안에 갇혀있던 공주 기억하시죠? 그거에요.” 하연은 명료한 대답에 나는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여 픽 웃음을 터뜨렸다가, 천천히 창고를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시선이 잡힌 곳은 바로 레어, 시크릿 클래스들을 모아둔 진열대였다. 두 개의 구슬, 두 권의 책, 하나의 보자기. '저 보자기는….' 레어 클래스 황혼의 무녀. 그 순간 불현듯 스치고 지나간 하나의 생각. 하여 난 얼른 보자기의 주인공을 찾았고, 마침 숙였던 허리를 일으키는 한나를 볼 수 있었다. “응?” 역시 감이 예민해서 그런지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모양이다. 이마에 흐르던 땀을 훔치던 한나는, 문득 나를 돌아보더니 머리를 갸웃했다. 나는 까닭 없이 머리를 끄덕였고 얼른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손뼉을 두어 번 쳐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짝짝. “보아하니 창고는 오늘 중으로 정리가 완료될 것 같네요. 그럼,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릴 한 가지 공지할 사항이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사안이라 내일 아침 회의를 열 예정이니, 단 한 명의 제외 없이 참가해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사안이요? 어떤 일인지 미리 알 수 있을까요…?” “음. 자세한 건 내일 아침에 말씀 드리겠지만….” 하연의 물음에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어차피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같이 하려고 했으니까.' 하여 입술에 간단히 침을 적신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해밀 클랜에서 협조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 작품 후기 ============================ 많이 늦었네요. 독자분들의 양해 부탁합니다. _(__)_ 0408 / 0933 ---------------------------------------------- 5. 비상(飛上)(2/2) 깊은 밤, 그러나 새벽이라 부르기는 조금 이른 시간. 밤하늘은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고, 그 아래로 아름다운 별빛이 드리운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현아. 에덴이 보인다.” “응.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지.” 나는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이곤 있는 힘껏 기지개를 폈다. 팔을 쭉 뻗어 올린 채 부르르 몸을 떨자, 나란히 걷던 형이 옅은 미소를 머금는다. “피곤한가 봐?” “그다지? 별로 어려운 탐험도 아니었고.” “피곤하면 자고 가도 되는데. 우리 클랜이 여기서 가깝잖아.” “그게 무슨….” 뭔가 이상한 기분에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웃고 있는 형이 보인다. 나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한숨을 쉬고 걷는데 집중했다. 어차피 형이나 나나 워프 게이트를 이용할 텐데 거리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잠시 후. 길을 걸어 성문에 도착하는 데까지는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어둠이 드리운 바닥이 달빛을 받아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다. 이내 고요한 적막이 흐르는 거리에 진입한 우리는 곧바로 워프 게이트로 향했다. 그렇게 워프 게이트도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퍼뜩 떠오른 생각에 어깨를 한 번 크게 들썩였다. - 쪼롱? “일어나. 다 왔다.” - 쪼롱…. 쪼로롱…. 앙탈을 부리는 듯한 새소리에 어깨를 내려다보자, 손톱만한 부리를 벌려 하품하는 아기 새가 보인다. 그 안으로 소지(所持)를 쏙 집어넣자 녀석은 냉큼 부리를 닫아 손가락을 물었다. 그대로 살짝 손을 들어올리자 약지를 꼭 문 채 대롱대롱 떠오르는 아기 새. 아직 크기는 주먹만 하지만 전신에서 발하는 은은한 황금빛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자. 가져가.” “하하. 걔는 네가 더 마음에 든 모양인데?” 얼른 가져가라는 의미로 팔을 내밀자 형은 멋쩍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주인은 형이야.” 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하곤 아기 새를 형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 쪼롱, 쪼로롱! 아기 새는 나를 한 번 흘끗 쳐다보더니 얌전히 소지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형의 어깨에 얼굴을 묻어 비비는 게 그쪽도 자못 마음에 든 모양이다. 형은 연신 울어대는 아기 새를 몇 번 보듬은 후 미안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수현아. 이 새 정말 내가 가져도 되는지 모르겠다.” “형. 이 장비들 정말 내가 가져도 되는지 모르겠어.” 나는 곧장 등 뒤를 돌아보았다. 머셔너리 클랜원들이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따라오고 있었다. 그 중 몇 명의 등에는 배낭이 메여있었는데, 내가 말하는 장비란 배낭 안에 있는 것들이었다. 즉 형의 어깨에 얹은 아기 새와 여러 장비들. 그것은 이번에 발굴한 유적 '발할라의 탑'을 공략함으로써 얻은 성과였다. “그래도 네가 발견한 유적인데…. 미안해서 그렇지.” “내가 발견한 게 아니라 같이 발견한 유적이지. 그리고 공략에 해밀의 힘도 적잖이 빌렸고.” “너는 내 마음 모를 거다. 형이 되어서 챙겨주지는 못할망정 빼앗는 기분이야…. 그러니까 수현아. 아무래도….” “형. 잘 키우겠다며. 그리고 이미 끝난 얘기야. 더는 말 않기로 약속했잖아.” 약속이라 함은 처음 성과 분배가 끝나고 다시는 얘기를 꺼내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한두 번을 제외하면 잘 지키는가 싶었는데, 워프 게이트가 가까워오자 도로 마음이 약해진 모양이다. 그래도 입을 열려는 낌새가 보여 나는 날카롭게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약속을 깨면 실망할거야.” 그제야 형은 흠칫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유치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가만히 놔두었다면 헤어지기 전까지 서로 끝없는 평행선을 달려야 했을 것이다. 서로 피곤한 일은 하지 말자는, 내 굳은 의지(?)를 느낀 걸까. 형은 한참 동안 나를 응시하더니 속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 녀석도. 알았다, 알았어.” “진작에 그럴 것이지.” “…잘 키울게. 뇌 속성을 띠고 있으니 나랑은 잘 맞을 거야.” “아무렴. 척 봐도 영물인데. 잘 키우면 제법 볼 만할걸?” 끄덕끄덕. 이러나저러나 형도 아기 새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아직 아기라서 잠이 필요한지, 자꾸만 고개를 꺼트리는 녀석을 부드러이 쓰다듬는다. 그 모습을 보자 절로 흐뭇한 마음이 일었다. '그러고 보니…. 1회 차 때 형이 저 새를 엄청 갖고 싶어했었지.' 자기랑 잘 맞을 것 같다고 했었나? 아무튼, 물론 난 아기 새의 정체를 알고 있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녀석을 형에게 줄 때 “스스로 알아가고 싶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씩 알아가면서 친해지고 싶다나. 아무튼, 지금은 그저 차후 형과 '썬더스톰(Thunderstorm)'이 이루어낼 합작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할 뿐. 이윽고 나는 서서히 걸음을 늦추었다.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제 워프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 각자 도시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하~. 드디어 도착했다.” “그렇네. 바로 가려고?” 뭔가 아쉽다는 형의 목소리. 탐험 직후 축배라도 함께 나누고픈 마음은 이해하지만, 지금이 대낮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늦어버린 이상 빨리 돌아가는 게 피차 나은 일이었다. “늦었잖아. 클랜원들도 피곤해하는 것 같고.” “그런가…. 알았다. 그럼 내일 연락할게.” 나는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등을 돌아보자 무척 피로해 보이지만, 기분 좋아 보이는 클랜원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하여 해밀 클랜원들과 간단한 작별을 나눈 후, 바로 워프 게이트로 들어섰다. “남부 소도시 모니카. 여덟 명입니다.” “16골드 24실버입니다.” 이번 탐험에서 얻은 장비들을 결산하고 싶지만, 일단 돌아가 푹 자는 게 나을 테지. 그렇게 생각한 난 어느새 활성화된 포탈에 지체 않고 몸을 묻었다. 준비하는데 7일, 탐험 왕복에 4주. 장장 한 달하고도 5일만의 귀환이었다. * 똑똑. 어슴푸레 들려온 문소리에 눈을 뜨자 서늘한 새벽 공기가 느껴졌다. 한 번 크게 들이마시자 조금은 정신이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달칵! 순간 돌연히 들려온 문 열리는 소리. 얼른 고개를 들어 문을 쳐다보자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아주 조금 열린 틈 사이로 검은색의 뭔가가 휙 사라지는걸 볼 수 있었다. “…….” 나는 한두 번 눈을 깜빡였다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침대에서 나와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1층으로 내려가자 로비 카운터에 앉아 있는 고용인이 나를 돌아보았다. 꼭두새벽에 출근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매우 기특했지만, 졸음 가득한 눈과 입가에 묻은 침이 보이자 고소(苦笑)를 짓고 말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머셔너리 로드님.” “고생하시는군요.” 잔뜩 쉰 음색이 막 자다 깬 목소리가 분명하다. 스스로 일어났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 깨워줬을 가능성도 있다. “아차. 그러고 보니….” “어디에 있습니까?” “네, 네?” “누가 오지 않았습니까?”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자 고용인은 멍한 낯빛을 내비쳤다. 그러더니 느릿하게 팔을 들어 한 쪽 방향을 가리켰다. “식당으로…. 가셨어요.” “감사합니다.” 나는 까닥 고개를 숙이고 나서 곧바로 방향을 틀었다. 잠시 후. 식당 문을 가볍게 밀어젖히자, 중앙 테이블을 차지해 앉아 뭔가 열심히 보고 있는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옅은 잿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그녀는, 바로 고연주였다. 후룩. 내가 올 것이란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고연주는 일견 머리를 들더니 진한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잔 머금는다. 아직 몽롱한 정신에 한두 번 머리를 긁적인 후 그녀가 앉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수현~! 정말 오랜만….” “예. 언제 온 겁니까?” “…방금? 오 일 전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외출증을 요청했죠. 마침 주말이라서 나올 수 있었어요.” “바바라에도 소문이 퍼졌습니까?” “이미 파다해요.” 얼마나 널리 퍼졌길래 저리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우선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전 보고도 돌아온 다음날 끝마친 상태였고 어차피 예상한 일이기도 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고연주는 턱을 괴더니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수현. 탐험은 어땠어요? 타 클랜과 협력해서 간 건 이번이 처음인데….” “괜찮았습니다.” 간단히 대꾸하고 고개를 털자 정신이 약간 맑아지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뭘 그리 열심히 읽고 있었습니까?” “…이거 좀 보세요.” 고연주는 약간 서운해 보이는 얼굴을 들고는 검지로 테이블을 가리켰다. “…이건.” 뭐냐는 의미로 쳐다보자 그녀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어제 오늘 뿌려진 기록들이에요.” 어여쁜 손톱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보자 가지런히 놓인 여러 기록들이 보였다. 나는 조용히 기록에 집중했다. - 해밀, 머셔너리 클랜. 동부 고대 유적 '발할라의 탑' 발굴. - 머셔너리 클랜. 도대체 어떤 클랜인가? 얼마 전 '얼어붙은 숲'에 이어 이번에는 '발할라의 탑' 발견…. - 지금까지 발견한 던전은? '고대 연금술사 던전', '폐허의 연구소', '절규의 동굴',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 '얼어붙은 숲', '발할라의 탑'. 이것 모두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루어낸 성과로…. 과연 진실은? - [단독] '고대 연금술사 던전', '폐허의 연구소', '절규의 동굴' : 미개척 도시 뮬에서 얻은 알짜배기들.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 '얼어붙은 숲' : 이스탄테 로우의 의뢰로 발견한 사실을 확인…. '발할라의 탑'은 해밀 클랜과 함께 밝혀낸 것으로 알려져…. - [단독] 머셔너리 클랜 로드 김수현. 해밀 클랜 로드 김유현의 친동생이라는 사실 밝혀져…. 클랜도 '동맹' 관계. “머셔너리 클랜. 해밀, 이스탄텔 로우와 도대체 어떤 관계인가…. 고작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여섯 곳의 유적을 발굴…. 어쩌면 어떠한 목적을 지닌, 일종의 키워주기로 생각할 수도….” “재미있죠?” 한참을 읽고 있던 찰나 다시금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동시에 불쑥 찻잔이 내밀어져 눈앞의 기록 일부를 가렸다. 잔잔한 파문이 물결치는 칠흑 빛 물이 일렁일 때마다 허연 김이 조금씩 피어오른다. “몇몇 거슬리는 기록이 보이긴 하지만…. 대체로 괜찮군요.” 마침 뜨거운 차 한 잔 생각이 간절했기에 나는 군말 않고 받아들였다. 바로 찻잔을 물자 촉촉한 감촉이 느껴졌다. 마시던걸 준건가? 이어서, 고연주의 질문이 이어졌다. “이런 기사들이 나올 줄 알고 해밀 클랜과 함께 가신 건가요?” “나올 줄 알았다기보다는…. 그냥 겸사겸사?” 이윽고 온몸으로 퍼지는 따뜻한 기운을 음미한 후, 난 비로소 기록에게서 눈을 떼었다. “그곳 반응은 어떻습니까?”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자세히. 그러니까 어떤 관심이요?” “…대부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지만, 종종 호의적으로 볼 수 없는 반응도 있어요.” 역시나 하는 생각에 나는 싱겁게 웃었다. 현재 머셔너리는 1년 동안 6곳의 유적을 발굴했다. 누가 봐도 놀랄 정도로 전무후무한 기록이지만, 사용자들이 과연 놀라기만 할까? 아니. 그렇지 않다. 유적은 사용자들의 이득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된 '설정'이다. 그런 만큼 '어떻게 이토록 짧은 시간에 그 많은 유적을 발굴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혹이 제기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군요.” “아직 대놓고 드러내는 건 아니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스탄텔 로우와 해밀을 끼고 있는 한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을 거예요.” “당분간은 그렇겠죠. 아마 명확한 관계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꽤나 신중하게 움직일 거라 생각돼요.” “그동안 해밀과 이스탄텔 로우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거예요. 물론 고연주의 힘도 필요할 겁니다.” 북 대륙의 정보라 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그림자 여왕'이었으니,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윽고 고연주는 잠깐 생각하는 듯싶더니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대륙 언론을 상대로 싸우는 건 힘들어요.” “이길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그럼요?” “아니다 싶은 기록에 대해서만 적당히 받아 쳐주면 됩니다.” 우리도 말할 거리는 있다. '고대 연금술사 던전', '폐허의 연구소', '절규의 동굴'은 미개척 도시 뮬에서 발견했다.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와 '얼어붙은 숲'은 이스탄테 로우의 의뢰를 받아 발견한 유적들이다. '발할라의 탑'은 여차하면 해밀 클랜에서 밝혀낸 것으로 돌릴 수 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완전한 해명은 되지 못한다. 그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바로 '뭔가 있는, 이상한 클랜.'에서 '매우 운 좋은 클랜'정도로의 완화 작용이었다. '여차하면 키워주기도 괜찮고.' 고연주는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 “수현은 노이즈 마케팅 효과를 노리고 있군요.” “글쎄요. 본격적으로 발돋움하기 전의 통과의례라고 생각하렵니다.” 나는 고연주의 해석을 부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단시간에 10강에 오르기로 결심한 이상 겸사겸사 실적도 쌓을 생각이었고. 따로 할 말이 없는지 고연주는 조용히 입맛만 다셨다. 그러더니 이내 폭 한숨 쉬며 허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교관 일도 힘든데 앞으로 더욱 바빠지겠네요.” 그때였다. 교관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 불현듯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여 남은 차를 모두 들이키곤 한층 맑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고연주. 제가 부탁한 일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형의 말대로 머셔너리는 이번 차수 사용자 아카데미에 참가할 수 있는 권한을 얻을 수 있었다. 아마 지금쯤 500명이 넘는 신규 사용자들이 들어왔을 터. 하지만 그들이 들어올 때까지 계속 기다릴 수는 없는 터라, 부득이하게 고연주에게 교관 역할을 맡긴 상태였다. 그리고 해밀 클랜과 도시를 떠나기 전에, 나는 고연주에게 두 가지 지시를 추가로 내렸다. 그 중 하나는…. “흥. 여기 있어요.” 고연주는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며 두툼한 기록 뭉치를 꺼내었다. “이게 그겁니까?” “네네~. 이번에 들어온 병아리들 명단이에요.” 아까 생글생글 웃던 얼굴은 어디 갔는지, 지금은 왠지 모르게 불만 가득한 투덜거리는 음색이다. 나는 멀뚱히 그녀를 응시했다가 멋쩍어 입을 열었다. “지금도 바쁠 텐데…. 고연주에게 기대하는 게 많아 미안하군요.” 그리고 그 순간, 고연주는 뾰족한 음성으로 날카롭게 외쳤다. “뭐예요? 지금 내가 그것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요?” “…그럼?” 눈을 끔뻑이며 묻자 기가 막히다 는 얼굴의 고연주. 입술을 꼭 깨물고 볼도 살짝 부풀어오른 게 평소 '그림자 여왕'답지 않은 모습이다. 하여 아무 말도 않고 있자, 그녀가 손에 든 기록을 힘없이 내려놓았다. “…수현. 우리 얼마나 오랜만에 만나는 지는 알고 있어요?” “?”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분위기는 진지했다. 새벽이 되니 여성 특유의 감수성이라도 터진 건가? 고연주는 곧 시무룩한 기색을 내비치곤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나갈 수 있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는데…. 오자마자 수현만 몰래 깨웠는데….” “…….” “잘 지냈냐, 보고 싶었다는 말 한 마디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요. 그런데 보자마자 일의 경과부터 물어보시니까…. 너무 서운해요. 나만 생각하고, 나만 기다렸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리고 이어진 고요한 적막감. “…….” “…….” 나는 잠깐 동안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고연주는 여전히, 무척이나 섭섭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녀의 발그레한 볼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쪽. “어머?” 기함하는 고연주. “가, 갑자기 무슨? 아니! 이런다고 제가 풀릴 것 같나요?” 입술에 보드라운 살결이 맞닿은 순간 고연주는 깜짝 놀라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천연덕스레 말을 이었다. “고연주. 차 한 잔이 더 마시고 싶습니다.” “네?” 쪽. 그리고 한 번 더 입을 맞추자, 그녀가 멍한 얼굴로 볼에 손을 올려놓는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뭐하긴요. 고연주가 저번에 그랬잖아요. 앞으로 차 마시고 싶으면 대가를 지불하라고…. 그래서 선불한 겁니다만.” “…….” “설마 떼어먹지는 않겠죠?” 이제야 떠올린 걸까. 고연주는 일순 멍한 얼굴을 보이더니, 이내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나를 곱게 흘기며 몸을 일으킨다. “정말. 내가 못살아. 그래요. 반한 사람이 잘못이죠.” “라몬 차로 부탁합니다.” “킥. 다음부터는 가격을 올릴 테니 그리 아세요. 아마 볼이 아닌 입술에 해야 할 거예요.” “부디.” 마음대로 하라는 양 대꾸하자, 고연주는 태연히 말을 바꿨다. “생각해보니 섹스 한 번이 낫겠네요.” “…그건 좀.” “까르르.” 고연주의 차는 몇 안 되는 소소한 즐거움인데, 그렇게 되면 내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 “흐흥, 흐흐흥. 흐흥, 흐흐흥.” 이내 콧노래를 부르며 주방으로 가는 고연주를 보다가, 나는 얼른 기록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설레는 마음을 다듬으며 차분히 한 장을 넘겼을 때였다. “!” '이 여인은….' 첫 페이지부터 눈에 밟힌 이름에, 나는 반사적으로 기록을 꽉 쥐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조금 늦게 집필을 시작한 터라 부득이하게 늦고 말았습니다. _(__)_ 이번 주는 격일로 연재했습니다. 나름 최선을 다해 시간을 쪼개어 적은 터라, 혹시 서운하셨던 분이 계시다면 양해 부탁합니다. 다음 주는 정말로 휴재합니다. 직접적으로 시험을 치는 기간이라 정말로 연재가 힘들 것 같습니다. 시험이 끝나고 방학을 하면 연재에 조금 더 신경 써보겠습니다. 다시 한 번 독자 분들의 양해를 부탁하며,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럼 여러분 모두 좋은 밤 보내세요. _(__)_ 0409 / 0933 ---------------------------------------------- 6. 101(4/4) 이튿날. 고연주가 건네준 명단을 확인한 후, 난 모든 일을 제쳐두고 바바라로 이동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사용자 아카데미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관계자 분이시라면 성함, 소속 클랜을 밝혀주세요.” 바로 사용자 아카데미에 방문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머셔너리 클랜 로드 김수현입니다.” “머셔너리 클랜…. 이번 회 참가 클랜임을 확인했습니다. 방문 목적은 홍보입니까?” “아직 대대적인 홍보 계획은 없습니다. 스카우트할만한 신규 사용자가 있는지 살피러 왔습니다.” “스카웃겸 시찰. 알겠습니다. 옆에 총 교관님이 계시니 유의 사항은 따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총 교관?' 뭔 말인가 싶어 옆을 돌아보자 눈을 찡긋하는 고연주. 총 교관은 처음 들어보는 보직인데 새로 만들어진 직책인 듯싶었다. 이윽고 꾸벅 고개를 숙이는 사용자를 지나쳐 나는 아카데미 안으로 진입했다. '…성하얀.' 명단 첫 페이지에 있던 하얀이라는 이름은 내 뇌리 속에 꽤나 강렬하게 남아있는 이름이다. 물론 기억하는 사용자와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직접 확인하는 길을 선택했다. 성이라는 성(姓)은 흔한 편이지만 하얀이라는 이름은 흔하지 않을 테니까. '한 번 보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까닭 없이 방망이질하는 가슴을 추스르며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주변으로 익숙한 건물들이 눈에 밟혔다. 아직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만 아카데미도 곧 개축에 들어간다고 했던가? 그렇게 예전 생각을 하며 걷고 있을 즈음, 고연주가 슬그머니 말을 걸어왔다. “아차…. 수현. 그러고 보니 깜빡 잊고 말을 안 한 게 있네요.” “?” “지금 이곳에 이효을이 와있어요. 아니. 아카데미가 열린 후 계속 이곳에서 지내며 일하고 있죠.” '이효을?' 이효을이라면 북 대륙의 수호자. 직업상 최대한 모습을 숨겨야 할 사용자였다. 그러한 존재가 왜 이렇게 드러난 곳에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난 일순 고개를 갸웃했다. 이윽고 고연주의 말이 이어졌다. “그녀는 수현과의 만남을 원하고 있어요.” “저를요?” “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뭐, 개인적으로 볼 일이 있나 봐요. 아무튼 수현도 볼 일을 마치고 나면 한 번 찾아보는 게 어떨까요? 이러나저러나 그녀에게 빚을 지었으니까요.” 빚이라. 순간 나는 고연주에게 했던 두 번째 부탁을 떠올렸다. '하기야 아주 틀린 말도 아니지.' 하여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어쨌든 가장 우선적인 일은 성하얀의 사용자 정보를 확인하는 것. 다른 신규 사용자들을 살피거나 이효을을 찾는 일은 그 이후의 차례였다. “그럼 어디 먼저 가시겠어요?” “일단 근접 클래스. 그 중에서 검사가 소속된 반을 보고 싶군요.” 나는 곧장 대답했다. 명단을 보았을 때 성하얀이 소속된 반은 1반. 검을 사용했던 여인으로 기억하니 아마 근접 계열로 분류됐을 터였다. 고연주는 두세 번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검사? 근접 계열을 영입할 계획이세요?” “그냥…. 겸사겸사?” 석연찮은 낯빛은 여전했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움직였다. “흐응. 안내할게요.” 이내 총총히 걸어가는 고연주를, 나는 조용히 뒤따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고연주가 날 안내한 곳은 놀랍게도 숙소가 아닌 아카데미 강당이었다. 주말이라서 교육이 없는 줄 알았지만 예상외로 교육생(신규 사용자)들로 빼곡히 찬 상태였다. 물론 모종의 사정으로 주말에 교육을 하는 경우는 있다. 그러나 현재 아카데미가 활성화된 초기임을 감안한다면 비교적 생소하게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아무튼.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할 준비를 하며 지그시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런. 오늘은 합동 수업인가 봐요.” 강당 안에는 족히 삼백은 넘어 보이는 인원이 모여있었다. 고연주의 말대로 근접 계열 클래스 전부를 모아놓은 듯했다. 간간이 조는 교육생이 보이는 걸로 보아 아마 역사 또는 정신 교육 시간인 모양. 그때였다. 막 왼쪽 열부터 한 명 한 명 확인하려는 찰나, 한창 가르치고 있던 교관이 나와 고연주를 돌아보았다. 하기야 대놓고 안을 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여길 법도 했다. 교관은 일순 눈을 크게 만들고는 곧바로 강의를 중지했다. 이윽고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밖으로 나온 교관을 볼 수 있었다. “초, 총 교관님. 여기는 어쩐 일로….” “아. 그냥 계속하세요. 클랜 로드님과 함께 잠시 참관하러 왔답니다.” “클랜 로드님이라면…. 아. 혹시 머셔너리 로드님이십니까?” 나는 맞는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신성 클랜 소속 김현우라고 합니다.” “머셔너리 클랜 로드 김수현입니다.” 들어본 적 없는 클랜, 그리고 들어본 적 없는 이름. 나는 의례적으로 인사를 받았다. 한동안 날 멍하니 쳐다보던 교관은 이내 아차 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참관이라 하면 홍보를 목적으로 오신 겁니까?” “홍보는 아닙니다. 오늘은 적당한 탐색 정도랄까요.” “아하. 그럼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자리를 마련해드리겠습니다.” 안으로? 그래도 되겠냐는 뜻으로 고연주를 돌아보자 마음대로 하라는 양 어깨를 으쓱인다. 하여 난 안으로 들어가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하하. 괜찮습니다.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닌데요.” “그냥 조용히 구경하다 나갈 테니 강의는 계속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잠시 후. 나와 고연주는 김현우를 따라 강당 안으로 들어섰고, 동시에 수많은 교육생들의 시선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휘익~! 휘이익~!” “와~! 연주 누님!” 남성 교육생들의 열띤 환호가 터져 나왔다. 순간 어찌된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고연주를 보자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고연주는 손에 입을 맞추더니 환호하는 교육생들을 향해 후 불어주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었다. 더불어 한 쪽 눈을 깜빡이는 눈짓까지. “수현. 머셔너리의 인지도는 제가 착실히 쌓아놨답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하기야 좋고 그르고를 떠나서 이것 또한 하나의 방법은 될 수 있다. 나 때도 생활 교관으로 선남선녀를 배치하는 경우가 있었으니까. ‘남성에 한해서 인지도를 쌓았겠지만.’ 나는 쓰게 웃었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용자 고연주. 교육 중입니다. 강의를 방해하는 행동은 지양하도록 하세요.”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대부분 졸고 있었는데요. 잠이라도 깨면 다행이지요.” 김현우는 하하 웃으며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고, 고연주 또한 팔짱을 끼어 은근슬쩍 애교를 부렸다. “호호. 알았어요. 조용히 있을게요.” 아무튼 교관이 괜찮다는데 더 몰아붙일 수는 없어 나는 강당의 교육생들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단상으로 걸어간 교관은 책상을 탕탕 쳐 주목하게 하더니 높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두 조용. 강의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그래도 미약한 환호가 흘러나오자 그는 한 번 더 말을 이었다. “지금 이곳에 중요한 관계자 두 분이 참관하러 오셨습니다. 한 분은 다들 알고 있듯이 총 교관님이고, 다른 한 분은 총 교관님을 클랜원으로 두고 있는 머셔너리 클랜 로드 김수현 님이십니다.” 그 순간 소란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비로소 조용해진 좌중을 둘러보며 만족한 듯 웃음지었다. “지금껏 누누이 말씀드렸을 겁니다. 교육생들은 졸업 후 조금 더 좋은 출발을 하고 싶다면….” 상투적인 이야기가 이어지고 교육생들이 날 새삼스레 쳐다보는 눈길들이 느껴졌다. 생각하는 거야 뻔하다. 아무튼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해 강당을 둘러보았다. 『서윤희』 『박태준』 『구본경』 『안보람』 …………. 『성하얀』 ‘찾았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나는 원하던 이름을 찾아낼 수 있었다. 찾아내는 거야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내 시선이 저절로 중앙으로 빨려 들어갔다고 해야 할까? 나는 사용자들이 몰려있는 중앙에 파묻힌 한 여인을 정확히 응시했다. 공교롭게도 여인 또한 나를 쳐다보고 있어 시선이 마주치게 되었다. 티 한 점 보이지 않는 말간 눈동자. 볼에 흘러내린 칠흑 빛 머리카락이 도드라져 보일 만큼 살결이 흰 눈을 연상케 할 정도로 새하얗다. 가늘고 긴 목덜미와 소담한 어깨는 한 번 건드리면 물결칠 것처럼 고요해 보인다. 눈길 또한 미묘했다. 일견 나를 보는 것 같지만, 또한 나를 보지 않는다고 느껴질 정도로 불가사의한 시선이었다. 거기까지 봤을 때 나는 돌연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보고 있는 성하얀이 내가 기억하는 성하얀과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성하얀(0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검사(Normal, Sword User, Beginner) 3. 소속 국가(Nation) : -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눈꽃(Snow On The Branches)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0) 7. 신장 • 체중 : 165.5cm • 42.5kg 8. 성향 : 절개 • 지조(Integrity • Fidelity) [근력 36] [내구 42] [민첩 55] [체력 31] [마력 47] [행운 58]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지조 있는 여자네.' 성향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나는 다시 한 번 사용자 정보를 면밀히 살폈다. '…….' 하지만 이상한 점이 보이지 않는다. 끽해야 진명 '눈의 꽃(Snow On The Branches)이 눈에 밟혔지만, 그뿐이었다. 능력치는 그냥 저냥 괜찮은 편에 속했고. 두루두루 주의해 자세히 보았지만 더는 특이한 점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한숨과 함께 제 3의 눈을 비활성화로 돌렸다. 그리고 1회 차 시절, '그'가 남긴 말을 떠올렸다. '오직 그녀만이 나를 받아줄 수 있는 여인이다.' 성하얀. 1회 차 시절 '그'가 자신의 목숨보다 아꼈던 여인이며 연인이기도 한 사용자. 단순한 연인이라고 보기에는 둘의 관계는 무척 깊던 걸로 알고 있다. 오죽하면 '그'의 사후 밝혀진 둘의 사랑 이야기가 북 대륙 전역으로 퍼졌을 만큼 말이다. 그렇다면. 솔직한 심정으로는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놈이 하도 아끼고 보호하길래 뭔가 특별한 게 있는 여인인줄 알았는데, 딱히 별다른 점은 없는 사용자였으니까. '성하얀은…. 일단 보류.' 한두 번 입맛을 다시고 나서 나는 고연주에게 나가자는 눈짓을 보냈다. 미래가 변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성하얀에 대해서는 일단 보류해둘 생각이었다. 어차피 수료 전까지는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지금 당장 취할 수 있는 이득인 두 번째 부탁을 해결하는 게 낫다. 강당을 나온 후 고연주는 내게 어땠냐는 시선을 보냈지만, 고개를 가로저음으로써 대답해주었다. 한 명 한 명 제 3의 눈으로 확인해야 알 수 있겠지만, 성하얀을 제외하고서라도 딱히 느낌 있는 교육생은 없었다. “수현. 그럼 다음에는 어디를 갈까요? 마법사? 사제?” 이내 다시 물어오는 고연주를 향해 나는 다시금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요. 교육생들은 둘러보는 건 이쯤 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여기서 그만두신다고요?” “예.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있으니까요.” “흐응. 별일이네요.” 고개를 갸웃하는 고연주. 그녀의 심정도 나름 이해는 간다. 눈치가 좋은 여인인 만큼 분명 내가 노리고 있는 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터. 그것을 시원하게 말이라도 해주면 모르겠는데 이렇게 의미 없이 겉도는걸 보면 이상하게 여길 법도 했다. 하지만 사실을 모두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나는 그저 씁쓸히 웃어줄 뿐이었다. '괜찮아…. 어차피 공찬호는 영입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성하얀을 찾은 이유는, 그만큼 101능력치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어서일까? 공찬호. 근력 101능력치 사용자의 이름을 떠올리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고연주. 박현우에 대한 부탁은 어떻게 됐습니까?” “말씀드린 대로에요. 이미 얘기는 끝마쳤고, 이효을의 허락도 받아두었어요. 다만 그가 클랜 로드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네요.” “그렇군요. 현재 포로 수용소에 함께 있다고 했나요?” “네. 하지만 그전에 이효을을 한 번 찾는 게 어떨까요?” 나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이윽고 나는 고연주의 안내를 받아 천천히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하하. 죄송합니다. 오전 9시에 올린다는 게 이리도 늦어버렸네요. 5일만에 다시 키보드를 잡아서 그런지 집필이 약간 생소하게 느껴집니다. 하여 늦게 업데이트한 점 깊이 사죄 드리며, 최대한 빠르게 페이스를 찾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늘부터 다시 연재에 들어갑니다. 이번 외전 파트는, '101'입니다. 외전은 전부 연재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몇 가지는 추가로 연재한 후 바로 2부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그리고…. 기다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_(__)_ 0410 / 0933 ---------------------------------------------- 6. 101(4/4) 사용자 아카데미로 와서 처음 느꼈던 점은 예전에 느꼈던 분위기와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황금 사자 관할 하에 있던 아카데미는 군대가 연상될 정도로 굉장히 딱딱했다. 수료식이 다가올수록 느슨하게 풀어주는 경향은 있었지만, 중 후반까지는 꽤 강압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은 확실하게 다르다. 아까 고연주를 부르던 교육생들의 태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즉 전에 비해 매우 개방적으로 변한 느낌이랄까. 개인적으로 이러한 변화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아직 변화 초기에 불과하니 속단할 수는 없는 노릇. 지금은 그저 앞으로 지속될 변화를 지켜볼 생각이었다. “수현. 거의 다 왔어요. 이 복도를 돌면 바로 왼쪽에 문이 하나 나오거든요? 그곳이 이효을이 지내는 방이에요.” 어느새 도착한 모양이다. 귓가로 흘러오는 나른한 음성에 난 상념에서 깨어나 주변을 살폈다. “생각보다 소박한 곳이네요.” “최대한 일반인 행세를 해야 하니까요. 아무튼 저는 여기서 기다릴게요.” 여기서 기다리겠다는 말에 나는 천천히 고연주를 돌아보았다. “같이 들어가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평소라면 그랬겠지만, 수호자의 초대는 가벼이 여길 수 없으니까요. 저는 초대받지 못한 사용자에요.” 고연주는 딱 잘라 답했다. 그녀는 나와는 다르게 수호자라는 존재를 꽤 중요하게 여기는 듯했다. 아무튼 일리 있는 말이라 생각해 난 금방 나오겠다고 답하고 바로 복도를 돌았다. 북 대륙의 수호자 이효을. 그녀를 생각하자 새침해 보이면서도 이지적인 외모가 떠오른다. '안솔에게 떠넘기려 하지만 않았다면.' 엄밀히 말해서, 나와 이효을은 좋다고 볼 수는 없는 관계였다. 아니.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거슬린다고 생각하는 게 맞을까. 하지만 이러한 감정만 넣어두면 이효을을 살린 건 나름 좋은 선택이었다고 판단한다. 북 대륙에 대한 입장이나 그동안 보여준 일 처리는 그래도 제법이라고 생각하니까. 하여 나는 그녀에 대한 감정을 조금은 누그러뜨리기로 마음먹었다. 이효을은 아직까지는 쓸만한 사용자였고, 그 사건이 있은 이후로 내게 끈임 없이 화해의 손길을 보냈다. 이번 박현우에 대한 부탁만 봐도 그렇다. 그러니 한순간의 감정을 계속 밀고 나가기보다는 적당히 경계하면서 도움을 받는 게 훨씬 나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난 어느덧 눈앞에 보이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약간의 심호흡 후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똑똑.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들어오시어요.” “?” 뭔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말투에 순간 멈칫. 그러나 난 곧바로 문을 밀어젖혔다. 그리고 침착히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클클클클클….” “어헉.” 그리고 막 이효을과 대면한 순간, 나도 모르게 침음을 내뱉고 말았다. 퀭한 눈과 거무죽죽한 눈가. 동시에 들려오는 가래 끓는 음침한 웃음소리. 예전 말끔하고 이지적인 자태는 어디서 엿 바꿔 먹었는지, 지금은 당장 쓰러지기 일보직전의 환자만 눈에 보일 뿐이었다. 하여 나도 모르게 안부를 묻고 말았다. “괜찮으냐?” 그러자 그녀는 손에 쥔 기록을 꼬깃꼬깃 구기더니 한껏 낮음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오호호호…. 어서 오시어요, 머셔너리 로드. 이리 오랜만에 뵈니 소녀는 무척이나 반갑답니다?” “…미쳤냐?” “어머. 지금 친히 소녀를 걱정해주시는 건가요? 오호호. 소녀, 너무 기뻐 몸 둘 바를….” “완전히 미쳤군.” 그 말을 끝으로 이효을은 주변에 수북이 쌓인…. 아니 쌓이다 못해 층을 이루는 기록 더미에 풀썩 얼굴을 묻었다. 그러더니 힘없이 손을 들어 검지를 핀다. 아마 아무데나 앉으라는 뜻 같았다. 그렇게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이효을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입술을 달싹였다. “기, 김수현…. 너였구나…. 그래. 와줘서 고마워. 헤헤….” “기록 정리 도와주러 온 건 아니니까 고마워할 필요는 없는데.” “…빈말로라도 도와주겠다고 말하면 안 될까? 꼭 거절할게. 그러니 말이라도 해줘. 제발.” 말하는 목소리가 하도 처량해 나는 한 번쯤은 말해주기로 했다. “…도와줄게.” “고마워! 그럼 이것부터…!” 그러자 고개를 번쩍 든 그녀는 반색하며 구겼던 기록을 내밀었고. “꺼져.” 곧바로 이어진 거절에 쿵 소리가 날만큼 다시 고개를 처박았다. 아무래도 안 좋은 때에 온 모양이다. '이 엄청난 양의 기록이 멀쩡한 사람 하나 망가뜨렸군.' 하기야 기록 정리가 얼마나 고되고 짜증나고 지루하고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지는 매우 잘 알고 있기에, 난 그녀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힘들어 보이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는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이는 이효을. 이윽고 그 상태로 기다란 한숨을 내쉬더니 힘없는 음색이 흘러들었다. “미안. 잠깐 정신 줄을 놓고 말았어.”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넌 수호자 아닌가?” 책상에 쌓인 기록은 여전히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아마 저 기록 하나하나에 사용자 아카데미의 변화를 알리는 내용이 들어있을 터. 아무튼 기록은 많은데 사람은 한 명이다. 말인즉슨, 네가 지금 왜 여기 있냐는 소리였다. “필요해. 그리고 내가 맡는 게 가장 나으니까. 하~움. 다, 다으 오으으 오 이어~.(다른 놈들은 못 믿어~).” 그리고 하품을 하며 말을 잇더니 짝 소리가 날 정도로 뺨을 세게 쳤다. 이어서 천천히 손을 내리자 이제 정신을 차렸는지, 볼에 새겨진 발간 자국 위로 조금은 초롱해진 눈동자가 보인다. “흠냐…. 아무튼 잘 왔어. 차라도 한 잔 줄까?” “아니.” “그럼 할 말만 빨리 해주는 게 좋겠군. 소문은 들었어. 이번에 해밀 클랜이랑 발할라의 탑이란 유적을 발굴했다며?” “왜. 어떻게 그렇게 유적을 잘 발굴하는지 천사들이 알아내라고 지시했나?” “아니. 이제 그런 건 별로 상관없으니까 그렇게 삐딱하게 말하지 말아줘.” '그런 건 상관없다고?' 문득 새삼스런 기분이 들어 나는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다. 상관이 없다는 소리는…. 설마 후계자를 찾았다는 말인가? 치익, 치이익. “후우.” 상상의 나래에 빠져있는 동안, 이효을은 연초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 가볍게 한 모금 내뱉더니 한결 좋아진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소영씨한테 얘기는 들었을 테고…. 그 후 탐험 성공으로 북 대륙이 떠들썩하게 변했지. 그럼 승낙의 의미로 봐도 되지?” “?” “10강.” 나는 바로 알아들었다. 그리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조금 천천히.” “콜. 어차피 한꺼번에 발표할게 아니라 몇 명씩 기간을 두고 올릴 생각이었어.” 이효을은 짐 하나 덜었다는 듯 한결 후련한 얼굴로 OK사인을 보냈다. 그 순간 돌연히 떠오른 생각에, 나는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나를 선택한 거지? 찾아보면 없는 것도 아닐 텐데.” “없는 게 아니라, 없어. 진짜로.” “…….” “그리고 너라면 어차피 언젠가 10강에 오르겠다고 생각했거든. 그 시기를 조금 당길 뿐이지. 뭐, 말은 이렇게 해도 나도 노리는 게 있지만…. 어쨌든 10강이 되는 게 나쁘지는 않을 거야. 특히 막 발돋움하는 클랜이라면 말이지. 으다다다~!”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뭉쳐있던 기록 몇 장이 흩날렸다. 이윽고 한껏 기지개를 편 이효을은 아차 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현우를 데려가고 싶다고 했었지? 걔 머셔너리로 가겠데?” “이미 고연주가 얘기를 끝내놨더군. 그전에 한 번은 만나야겠지만.” “그렇군…. 좋아.” 이효을은 고개를 서너 번 끄덕이더니 곧 한 쪽 구석에 놓인 수정구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현우는 지금 포로들과 함께 지하 감옥에 있어.” “지하 감옥?” “예전에 새로 개축한 감옥이지. 장소는 전 황금 사자 클랜의 지하층. 지금 연락을 넣어둘 테니 바로 가면 될 거야.” “알겠다.” 재지 않고 시원하게 얘기를 이끌어나가는 게 마음에 들어, 난 기꺼운 마음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몸을 돌려 나가려는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옷깃을 붙잡았다. “아, 잠깐만! 김수현!” “?” “이왕 감옥에 가는 김에 혹시 다른 거 필요한 건 없어?” “다른 거라니?” “예를 들면 성유빈이라던가. 아니면 서 대륙 포로들 등등.” '포로?' 성유빈은 생각할 것도 없어,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유빈은 볼 일없고, 포로는 쓸만한 사용자가 있나?” “쓸만하다 함은 사용자 정보를 말하는 거겠지?” “그럼?” “앞서 찾아온 구매자들은 튼실하거나 어여쁜 포로를 원했거든. 뭐라더라. 백마?” 순간 난 암암리에 떠돌던 하나의 소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 대륙 포로 중 일부는 돈을 받고 노예로 판다는 말을 들었는데, 아무래도 사실인 듯했다. 노예라 함은 아마 마력 회로를 파괴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리라. “아무튼 관심 없어? 혹시 구매 의사가 있다면 싸게 쳐줄게.” “…그냥 박현우만 데려가도록 하지.” 이효을은 역시나 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흐응. Ok. 좋은 선택이야. 그럼….” “그럼?” 그러더니 약간 밝아진 안색으로 말을 이었다. “잠시,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겠어?” * 이효을과 헤어진 후 난 고연주와 함께 그녀의 숙소로 이동했다. 앞서 말했던 두 번째 부탁이란, 살아남은 박현우를 회유해 머셔너리로 끌어들이라는 것이었다. 원래는 지하 감옥으로 직접 찾아가려고 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노예를 구매할 생각이 없으니 직접 가서 고를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현재 지하에 구금돼있는 박현우를 불러오는 게 더욱 편하고 효율적이다. '박현우.' 똑똑. 그때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고연주가 사용하던 침대에 누워있자 문득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현. 데려왔어요. 들어갈게요.” “들어오세요.” 나는 바로 몸을 일으켰고 동시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고연주와 함께 그녀의 뒤에 서 있는 한 사내를 볼 수 있었다. 정말 간만에 보는 사용자. 황금 사자 클랜의 전 간부 박현우였다.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박현우(5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검사(Normal, Sword,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검에 잔영을 남기는 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7) 7. 신장 • 체중 : 179.2cm • 67.8kg 8. 성향 : 중립 • 중용(True • Neutral) [근력 90] [내구 81] [민첩 73] [체력 87] [마력 89] [행운 60] < 능력치 비교 > 1. 김수현 : 564 / 600~ [근력 96(+2)] [내구 92] [민첩 98] [체력 92(+2)] [마력 96] [행운 90(+2)] 2. 박현우 : 480 / 600~ [근력 90] [내구 81] [민첩 73] [체력 87] [마력 89] [행운 60] '어느 정도 진보는 했군.' 능력치는 변동이 없지만 검사 숙련도는 Master로 상승했다. 사실 박현우의 사용자 정보는 필히 영입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정도면 '소수정예'를 지향하는 머셔너리와 어느 정도 부합하기에 나는 그를 영입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남다은, 우정민, 선유운에 이어서 박현우까지 추가된다면 머셔너리의 스쿼드도 한층 볼만해질 것이다. 얘기는 거의 끝났다고 들었고 이제 마지막 면담만 남았다. 여기서 초를 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나는 최대한 부드러이 입을 열었다. “사용자 박현우.” “오랜만입니다. 머셔너리 로드.” 예전의 말끔한 인상은 어디 갔는지, 초췌한 얼굴과 거뭇한 턱수염이 눈에 밟혔다, 언뜻 나를 보는 박현우의 입가에 이내 나직한 고소(苦笑)가 아로새겨진다. 난 그것을 눈치챘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아마 과거의 입장과 지금의 입장을 비교해보자 쓴 물이 올라오는 모양이다. 이윽고 박현우와 자리에 앉은 후,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예…. 그래도 최근에는 괜찮아졌습니다. 그림자 여왕님이 여러모로 편의를 봐주셨거든요.” 순간 손가락으로 V자를 짓는 고연주. 현재 살아남은 황금 사자 클랜원들. 그 중에서도 특히 간부들은 거의 포로 수준으로 취급 당한다고 들었다. 명분이야 연합군에게 항복했다는 사실을 들고 있지만, 내심은 안 봐도 뻔했다. 내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불거지던 감정 싸움이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사용자 박현우는…. 처음 아카데미에 교관으로 들어왔을 때 많은 것을 도와주셨죠. 이렇게라도 도와드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박현우는 일순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 이내 한별이를 떠올렸는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당신이 일을 주도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예전 일을 따지자는 것도 아니고요.” 나는 어깨에 손을 얹고 살며시 밀었다. 그러자 숙였던 고개가 조금씩 들어지더니 피로한 눈빛이 나를 마주한다. 길게 끌 것도 없이, 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고연주에게 얘기는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다만…. 그전에 저를 만나고 싶다고 들었는데?” “아. 그건….” 박현우는 잠시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한참 동안 생각하는 듯싶더니 차분히 목을 가다듬었다. “솔직히 감옥 생활은 무척 힘들었습니다. 나름대로 억울한 것도 있었고, 포로 취급을 받는 게 분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죄가 명백한 이상 남아있는 자들은 감당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연합군에게 잡혔을 때나, 또한 같은 대륙의 사용자들에게 잡혔을 때나 정말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습니다.” “…….” “희망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대로 감옥에서 평생 고통 받거나, 아니면 재판에 회부되어 죽을 것이라 여겼거든요. 그렇게 좌절하던 중에, 그림자 여왕님이 전해주신 머셔너리 로드의 전언은 무척이나 감사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금 제 입장에서는 기필코 잡아야 할 동아줄이지만…. 콜록! 콜록, 콜록!” 말을 길게 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목이 메마르다 못해 갈라진 걸까. 박현우는 중간중간 심한 기침을 했고, 나는 얼른 고연주에게 눈짓해 음료를 가져다 주었다. 한 차례 목을 축인 후(제법 양이 많은 음료였는데 한 번에 비우는 건 조금 신기했다), 박현우의 말이 이어졌다. “후우. 감사합니다. 아무튼…. 동아줄이었지만, 그렇다고 줄을 덜컥 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왜죠?” 내 반문에 박현우는 쓰게 웃으며 답했다. “여기서 나간다고 해서 제 입장이 변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게 되면 단순히 저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머셔너리 클랜 자체도 표적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그제야 박현우의 내심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말했다. “죄는 명백하다.”라고. 박현우는 황금 사자 클랜의 잘못을 인정했고, 감옥을 나간 이후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박현우는 잠시 내 눈치를 보더니 한층 조심스런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조금 뻔뻔하다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머셔너리 로드께 묻고 싶었습니다.” “머셔너리 클랜이, 당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힘이 있냐고 말이지요?” 박현우는 잠깐 멍한 얼굴을 보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여 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생각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사실 박현우가 말하는 문제는 나도 생각해본 적은 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머셔너리는 북 대륙에 거주하되 매인 클랜은 아니며, 공식적으로 중립을 표방한다. 더구나 남쪽에서는 이스탄텔 로우와, 그리고 동쪽에서는 해밀 클랜과 긴말한 관계를 맺고 있다. 동시에 동부 클랜들과는 여러모로 친분을 쌓은 상태였고. 차후 관리만 잘한다면, 최소한 동부 그리고 남부 모니카에서는 적당히 눈을 감아줄 것이다. 이윽고 생각을 정리한 난 목소리에 더욱 힘을 주어 입을 열었다. “그 의문에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예. 머셔너리 클랜에는 사용자 박현우를 보호할 힘이 있습니다.” “…….” “보호뿐만 아니라 다시 당당히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드릴 자신도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겠지만요.” 현 머셔너리의 사정은 고연주에게 이미 충분히 들었을 것이다. 여기서 자랑 식으로 또 구구절절이 늘어놓기보다는 자신감 넘치는 한 마디가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흐르는 시간 동안 박현우는 나를 빤히 응시했다. “사용자 김수현…. 아니 머셔너리 로드.” 그리고 서서히 몸을 일으키더니 일순 정중히 허리를 숙인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바로 “감사합니다.”였다. “지금부터 클랜 로드로 모시겠습니다. 앞으로 머셔너리의 용병이 되어, 견마지로를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그 순간 떠오른, 뮬에서 들었던 누군가의 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수현씨 일행의 목표 달성을 위해 견마지로를 마다하지 않고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뭔가에 홀린 듯이 일어나 느릿하게 손을 내밀었다. “머셔너리 클랜의 가입을 환영합니다. 사용자 신…. 박현우.”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클랜 로드.” 그렇게 서로 막 악수를 하려는 순간이었다. 펑! 꽈꽝! “끄아아악!” 일순 외부에서 들려온 거대한 폭음이 방안을 뒤흔들고, 찢어지는 비명이 2차로 흘러들었다. 잠시 후. 나, 고연주, 박현우. 우리는 갑작스레 동작을 멈춘 채 멍하니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그때였다. “사, 사람이 죽었습니다!” “아, 아니야! 내가 아니야!” 다급히 들리는 비명이 열린 문틈으로 흘러들었다. ============================ 작품 후기 ============================ 우정민, 선유운, 박현우…. 훈훈한 아이들이 머셔너리에 들어오네요. 하하하. 아. 오늘은 엄청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생각보다 페이스가 빠르게 돌아오는 느낌입니다. 방심하지 않고,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언젠가 이루어질 자정 업데이트를 위하여! 0411 / 0933 ---------------------------------------------- 6. 101(4/4) 뭔가 펑 터지는 소리는 컸지만, 비명은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이 말인즉슨 현장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떨어져 있다는 소리였다. “이, 이건 무슨…!” 멍하니 있던 것도 잠깐이었다. 금방 나를 돌아본 고연주의 낯빛은 전보다 확연히 가라앉아 있었다. “수현. 뭔가 터진 것 같아요.” “나가봅시다. 아. 사용자 박현우는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고 계십시오.” 박현우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와 고연주는 재빠르게 문밖으로 나섰다. “어디서 들렸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까?” “지금 추적 중이에요…. 그렇게 멀지는 않아요.” 고연주의 걸음 속도가 점차 빨라지기 시작한다. 하여 나 또한 속도를 높여 그녀와 걸음을 맞췄고, 우리는 순식간에 복도를 통과했다. 그렇게 약 2분 정도를 빠르게 걸었을까. 현장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고 걷는 데 집중했고, 제 2 별관(교관 전용 숙소) 1층에 이르러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지?” “초, 총 교관님! 큰일 났습니다!” 누군가 고연주를 알아봤는지 호들갑을 떨며 외쳤다. 곧 안으로 헤쳐 들어가는 고연주를 쫓으며 나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딱히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주변에 모인 사용자들의 크게 놀란 얼굴만이 눈에 밟힐 뿐. 사실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에서 사람이 죽는 일은 그렇게 야단스러운 일은 아니다. 단순히 시비가 붙어서 죽을 수도 있고, 탐험을 나가서 죽을 수도 있고, 전쟁 중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러한 세상, 이러한 상황에서 특수성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곳이 '사용자 아카데미'라는 것. 기본적으로 사용자 또는 교육생의 사망이 발생할 일이 없기 때문에, 현 상황은 확실히 의외라 할 수 있었다. 이윽고 사용자들을 헤쳐 안으로 들어가자 정확한 현장을 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은 건, 바로 까맣게 불타다 못해 이곳 저곳이 터져 나간 그로테스크한 시체였다. 그리고 그러한 시신의 주위로 세 명의 사용자가 한바탕 어우러져 있었다. “이 개 자식!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제, 제가 죽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죽인 게 아니라고요!” “입 닥쳐! 네가! 네가 성훈이한테 수작을 부린 거잖아!” “억울합니다! 수작이라니요! 그러길래 애초에 누누이 주의를 드리지 않았습니까!” “거짓말하지마! 그럼, 그럼 왜 저 여자는…!” 얼굴에 눈물 자욱이 가득한 채 사내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여인과,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내. 그리고 둘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말리려 애쓰는 듯 보이는 또 한 명의 여인. 그때였다. “모두 그만!” 마력이 한 가득 담긴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1층을 크게 흔들었다. 어찌나 강력한 음파가 발생됐는지 가까이 있던 사용자들이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정체는 당연히 고연주였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훑더니 한 덩어리가 돼 있는 사용자들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거기 세 명, 떨어져.” 멱살을 잡고 있던 여인도 고연주를 알아본 듯 떨리는 고개로 옆을 돌아보았다. 볼에는 눈물 자욱이 선명하고 눈은 아직도 그렁그렁하다. 그 정도로, 무척이나 원통한지 여인은 얼굴을 와짝 일그러뜨려 보였다. “초, 총 교관님! 하지만…!” “떨어지라고 했는데. 안 들리니?” 어지간히 짜증이 솟구쳤는지 고연주의 목소리가 일변했다. 표정은 여전히 없었지만 음색은 짜증이 가득하다. 여인도 그것을 느꼈는지 일순 흠칫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더니 마지못해 사내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기 시작한다. 이내 둘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몇 걸음 물러섰지만, 여인은 여전히 사내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후.” 고연주는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수현. 잠시 상황을 파악해야 할 것 같아요.” “이곳의 총 교관은 고연주입니다. 저는 손님에 불과하고요. 권한은 오롯이 고연주에게 있습니다.” 다음부터는 일일이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고연주는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이고는 침착히 현장으로 다가섰다. 이윽고 시체 앞에서 허리를 숙이는 그녀를 보며 난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약간의 도움이라도 줄 생각이었다. 하여 우선 숨을 거칠게 몰아 쉬는 세 명을 응시했을 때였다. 『사용자(User) 공찬호.』 『사용자(User) 성하얀.』 『사용자(User) 김민희.』 '응?' 뭔가 눈에 익숙한 이름. 차오르는 의문 감에 옆으로 고개를 빼자, 사내 뒤에 가려져있던 성하얀…. 아니 잠시만. 뭐라고? “공찬호?” “예, 예?” 이름을 부르자 멍하니 목을 쓰다듬던 사내가 나를 돌아본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심장이 멎는 기분을 느꼈다. 송충이를 연상케 하는 짙은 눈썹 아래 우수에 찬 눈동자. 하지만 그렇다고 멍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볼에 새겨진 흉터를 보면, 오히려 날카롭고 호전적인 인상이었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하고 허공으로 여러 메시지들이 주르륵 떠오른다. 나는 턱이 떨리는걸 느끼며 허공을 응시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공찬호(3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창술사(Normal, Lancer,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수라마창(壽拏魔槍)의 주인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34) 7. 신장 • 체중 : 191.3cm • 94.7kg 8. 성향 : 안전 • 신념(Safe • Belief) [근력 101(+6)] [내구 85] [민첩 87] [체력 91(+2)] [마력 78] [행운 72] < 능력치 비교 > 1. 김수현 : 564 / 600~ [근력 96(+2)] [내구 92] [민첩 98] [체력 92(+2)] [마력 96] [행운 90(+2)] 2. 공찬호 : 514 / 600~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근력 101(+6)] [내구 85] [민첩 87] [체력 91(+2)] [마력 78] [행운 72] '…공찬호!' 이름도, 진명도, 능력치도 알려주고 있다. 그래.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사용자 정보 창은 근력 101 능력치 사용자, 공찬호의 등장을 알리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이윽고 나를 멀거니 보는 공찬호를, 난 아무 생각 않고 멍하니 응시했다. 그것도 한참 동안. * 황금 사자가 몰락한 이상, 현 사용자 아카데미에는 여러 클랜들의 '교관'과 '교육생'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만일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교관'이 책임을 져야 한다. 다만 이러한 상황에서의 책임이란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문제 자체에 대한 책임은 어디까지나 가해자와 피해자가 해결할 문제이며, 교관은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발표할 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고연주는 운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직함은 '총 교관.' 이 말인즉슨, 고연주가 현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발표할 의무가 있다는 소리였다. “후유….” 현장에 도착한지 30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제야 상황 파악을 마쳤는지 고연주는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숨을 내쉬었다. 난 한동안 공찬호와, 옆에서 괜찮다고 다독이는 성하얀을 보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어떻습니까?” “글쎄요…. 살인으로 보기에는 애매하네요. 아마 부주의로 인한 사망 판단이 나올 것 같아요.” 사건은 이랬다. 자세한 상황을 빼고 간단히 요약해보면…. 공찬호는 이번 전쟁에서 뮬을 탈환한 공적을 인정받아 사용자 아카데미에 교관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교육생인 성하얀을 호출해 면담을 했다는 것. 그렇게 면담을 끝내고 돌아가던 도중 아카데미에서 친분을 쌓은 두 교관을 만났다고 한다. 그 두 명이 바로 사망자 강성훈과 피해자 김민희였다. 여기서 바로 문제가 터졌다. 강성훈은 평소 공찬호가 들고 다니는 무기를 궁금해했다. 보통 때는 검붉은빛이 감도는 기다란 막대기에 불과하지만, 마력을 넣는 순간 모습이 크게 변화하는데 깊은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 강성훈이 한 번 봐도 되냐고 여러 번했던 부탁을, 공찬호는 주인이 아닌 사람이 만지면 다칠 수도 있다는 말로 계속 거절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강성훈은 공찬호가 성하얀을 바래다주던 도중, 그녀가 “우와. 이거 되게 무거워요.”라 말하며 그의 무기 '수라마창'을 들고 있는걸 발견했다. 하여 성하얀을 보자마자 공찬호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 자리서 공찬호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수라마창'을 억지로 만졌고, 그 결과 엄청난 반발 효과가 일어나 온몸이 터져 죽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옆에서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들었기에, 고연주의 의견에는 나 또한 동의하는 바였다. 그러나 피해자는 그렇지 않은지 단박에 눈을 치켜 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총 교관님! 그게 아니라고요! 지금 저 자식의 말을 믿으시는 거예요?” “진실이 밝혀졌다고는 말하지 않았어.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지.” 완곡히 돌려 대답하는 말에 여인은 일순 입을 뻐끔거렸다. 고연주는 한두 번 이마를 꾹꾹 누르고 나직이 말을 이었다. “아직 애매해. 김민희라고 했던가? 너, 클랜은 어디니?” “네, 네! 거인들의 모임이에요.” “거인들의 모임? 아무튼 지금 나랑 가서 내용 기록 작성하고 바로 클랜에 연락해. 그리고 혹시 진실의 수정을 사용할 의향이 있다면….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 사실 이미 고연주는 의견을 밝혔다. 이대로가면 '부주의로 인한 사망' 판단이 나올 가능성이 높으니, 조금 더 확실히 하고 싶다면 '진실의 수정'을 가져오라는 얘기였다. 여인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떨떠름히 머리를 끄덕였다. 아마 '진실의 수정'이 없거나 그것을 구할 만큼의 여력은 없는 모양. 그러나 거기까지는 알 바가 아니었기에 고연주는 어느새 구름처럼 몰린 구경꾼들에 해산 명령을 내렸다. “더 구경할 거 없으니 다들 자리로 돌아가세요. 그리고 교관들은 최대한 현장을 보존하고, 추가 지시가 나올 때까지 대기하도록. 그리고….” 이윽고 공찬호와 성하얀을 돌아본 고연주는 약간 고민하는 기색을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재빠르게 그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내 신호를 받은 걸까. 고연주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내 쪽으로 다가와 은밀히 속삭였다. “수현. 왜요?” “도와드리겠습니다.” “네? 그럴 필요는….”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잠깐 자리만 마련해주시면 됩니다.” 고연주는 날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머뭇머뭇 서 있는 둘을 쳐다보며 말했다. “너희 둘. 사용자 김민희와 증인의 내용 진술이 끝나면 둘의 차례야. 끝나고 바로 갈 테니 잠시 이분과 함께 있으렴.” “왜요? 도망치면 어떡하려고요!” 김민희의 지적은 온당 당연했지만 고연주는 여유로이 대꾸했다. “너랑 같이 있으니까 저 사람이 말을 못하잖니. 그리고 도망은 걱정 마. 저분이 잘 지켜보고 계실 거야.” “도대체 저분이 누군데요?” “내 클랜 로드님.” “…네?” “머셔너리 로드님이라고.” 고연주가 내 정체를 밝힌 순간 여기저기서 미약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마 전쟁 이후 내 명성도 어느 정도 퍼진 듯싶었다. 나는 공찬호와 성하얀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새삼스런 눈길을 보내는 김민희와 마주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잘 감시하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겠어요. 하지만 당신, 두고 봐. 이대로 끝나지는 않을 테니까.” 김민희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듯 보였지만 이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원한에 찬 시선을 쏘아 보내 공찬호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사망자 강성훈과는 각별한 사이였던 모양이다. “그럼 모두 해산.” 이윽고 고연주의 지시가 떨어지자 구경꾼들이 산산이 흩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난 둘의 앞에 다가가 여전히 얼굴이 굳은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사용자 공찬호. 잠시 얘기 좀 하실까요?” “아…. 예…. 알겠습니다.” 공찬호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소심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이 모습은 내가 기억하는 '천하무쌍' 공찬호의 모습과 엄청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왜 네가 지금 여기 있고…. 어떻게 성하얀과 벌써 만난 거지? 설마 벌써 둘이 만난 건가?' 처음 봤을 때만해도 성하얀은 보류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공찬호의 등장으로 머릿속이 한순간 복잡해졌다. 아무튼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 나는 일단 한적한 곳으로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입구로 걸음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제 3의 눈으로 수라마창을 응시했다. ============================ 작품 후기 ============================ 오랜만에 자정에 업데이트 해보네요. 하하. 오늘은 후기로 몇 가지 의문 사항에 대해서 답변하겠습니다. 1. 홀 플레인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Sol) 사용자 + 사용자 = 사용자. 사용자 + 거주민 = 사용자(50%) 또는 거주민(50%). 거주민 + 거주민 = 거주민. 2. 캐릭터들의 사용자 정보가 궁금합니다. Sol) 2부의 시작과 동시에 작품 설정에 올려두겠습니다. '지금'의 상태가 아닌 '2년 후' 상태로요. 사실 2년 후 사용자 정보는 아직 초기 구상에서 멈춘 상태라, 조금 더 손을 봐야 할 것 같기는 합니다. 3. 클랜원이 늘어날수록 일부 캐릭터가 공기화가 진행되는 것 같다. Sol) 이 부분은 저도 근래에 들어 느끼고 있습니다. 너무 김수현에 대한 비중이 높다고나 할까요. 차후 현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최대한 노력해 공기화를 해소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0412 / 0933 ---------------------------------------------- 6. 101(4/4) 『수라마창(壽拏魔槍)』 (일반 설명 : 천 년의 전설을 이어 내려온 신창 수라(壽拏). 고대 홀 플레인에서 천마대전의 신화에 기록된 하나의 신성(神聖) 무장(武裝)입니다. 그러나. 일천 년의 시간을 전해져 내려오는 동안 수라(壽拏)는 가히 헤아릴 수 없는 어둠의 혈통(血統)을 머금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차곡차곡 쌓인 피에 취한 수라(壽拏)는, 어느 순간 마성(魔性)에 물들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수라(壽拏)는 더는 신창이 아닙니다. 착용자에게 끈임 없이 피를 갈구하고 파괴를 부르짖는 하나의 마창(魔槍). 즉 수라마창(壽拏魔槍)입니다.) (주의 : 수라(壽拏)에 잠재된 불길(不吉)은 착용자에게 지속적인 고난과 시련을 부여합니다. 조심하십시오. 마성(魔性)을 극복했다고 생각한 순간, 마창(魔槍)이 그대를 가차없이 삼킬 겁니다.) (상세 설명 : 1. 착용자의 근력을 '무조건(unconditional)' 6만큼 상승시켜줍니다. 2. 착용자….) * 공찬호, 성하얀과 한적한 곳으로 이동한 후.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주변에 비치된 자리에 앉자마자 공찬호의 하소연이 들려왔다. 안색에 전전긍긍한 빛이 가득한걸 보니 “두고 보자.”라는 말이 자못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일단 그림자 여왕의 판단을 기다려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하, 하지만! 그렇지만….” 그럼에도 한없이 불안한 듯 공찬호는 나와 성하얀을 번갈아 보며 입술을 떨었다. 이내 절망하는 그의 등판을 성하얀이 걱정스런 낯빛으로 토닥토닥 다독인다. '이건…. 전혀 대화할 태도가 아닌데.' 아니 그전에. 이 공찬호가, 정말로 그 천하무쌍이 맞는 건가? 낯설게 다가오는 '천하무쌍'의 모습에 나는 짧게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차분히 사망 사건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려면 먼저 현 상황을 정확히 주지시키는 게 나을 듯싶었다. “관건은 바로 저 여인이 창을 만졌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말을 꺼낸 순간 공찬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간절히 빛나는 눈빛이 흡사 동아줄이라도 보는듯한 눈동자였다. “사용자 김민희의 주장은 간단합니다. 이 여인이 만졌을 때는 아무 반응도 없었는데, 사용자 강성훈이 만진 순간 죽음에 이르게 만들 정도의 커다란 반발 효과가 발생했습니다. 그러니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다면, 사용자 공찬호의 무죄는 입증될 겁니다.” 공찬호는 어느 정도 알아들은 듯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시무룩해 보이는 게 아무래도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는데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그게 말입니다…. 실은 왜 그런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흠.” “후유. 머셔너리 로드님. 제 말을 좀 들어주십시오. 일단…. 지금 제 옆에 있는 여인은 아직 사용자가 아닌 교육생 성하얀이라고 합니다.” 갑작스런 소개였지만 나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성하얀은 날 물끄러미 보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성하얀이에요.” “…머셔너리 클랜 로드. 김수현입니다.” 한치의 티도 느껴지지 않는 청아한 목소리. 흰 눈이 떠오를 만큼 맑고 고운 음성이었다. 아무튼. 얘가 어쨌냐는 의미로 눈썹을 슬쩍 올리자, 공찬호가 쑥스러워하며 말을 잇는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별것 없는 이야기였다. 공찬호는 근접 계열을 가르치는 교관이었다. 그러나 처음 해보는 교관 업무라 초기에는 실수도 잦고 많이 허둥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공찬호는 야외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수라마창을 깜박해 놓고 왔다. 하여 다시 찾으려 급히 돌아왔을 때 마침 수라마창을 들고 있는 성하얀을 보았다고.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합니다. 혹시 반발 효과가 일어났다면…. 아. 물론 왜 안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하하.” 잠시 말을 멈춘 공찬호는 성하얀을 바라보며 쑥스러이 웃었다. 그녀 또한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마주 미소 짓는다. 그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난 둘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그 사건을 계기로 급속히 친해졌을 것이다. 순간 까닭 없는 짜증이 치솟아 한층 날카로이 입을 열었다. “…그게 말이 됩니까?” 공찬호는 금세 웃음을 지우더니 다시 심각한 기색을 비쳤다. “역시…. 부족하겠지요?” “…으음.” 나는 잠시 이마를 매만지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결국 진실의 수정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저는 진실의 수정을 구할 여력이….” “그걸 사용자 공찬호가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확실한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다면 상대 쪽에서 스스로 구해올 겁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유죄로 입증된다면….” 차오르는 불안감을 해소할 데가 없는지 공찬호는 자꾸만 가정(假定)을 말했다. 하여 나는 이제 그만 좀 하라는 뜻으로 목에 힘을 주었다. “현 상황에서 유리한 건 사용자 공찬호입니다. 왜냐하면 무기를 만지지 못하게 했음에도 사용자 강성훈이 억지로 만졌으니까요. 그 부분을 참작하면 아마 부주의로 인한 사망 판단이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총 교관, 고연주는 머셔너리 클랜원입니다. 아까 잠시 얘기를 나눠봤는데 제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공찬호는 불쌍히 눈을 끔뻑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정말…. 낯설다….' 솔직히 말해서. 공찬호와의 첫 대면은, 엄청난 실망이었다. 공찬호가 누구인가. 바로 북 대륙 전역을 떨쳐 울렸던 최강의 풍운아, '천하무쌍'이 아니었던가? 너무나도 뛰어나, 너무나도 강력해 모든 클랜들의 견제를 받았던 '천하무쌍' 공찬호. '무신' 차승현과 '미친년' 반다희의 합격을 물리치고, 일인 군단이라 불리었던 그 위명을 난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이 정도는 되야 상대할 맛이 나지 않겠나. 하하하!' 또한 함정에 빠졌을 때. 자신을 둘러싼 수천의 사용자들을 향해, 나직이 웃으며 오연히 '수라마창'을 뽑던 모습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깊숙이 각인돼있다. 그런데. 그러할진대. “하하…. 부디 잘 부탁합니다. 머셔너리 로드님!” 지금 이 비굴한 모습은 대체 무어라 말인가? 한동안 쓴맛이 감도는 입을 다시다가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간신히 안심한 걸까. 공찬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나에게 꾸벅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덧붙이기까지. 이내 덩달아 머리를 숙이는 성하얀을 보며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시 후,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고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난 한참 동안 테이블을 두드리다가 고요히 감도는 적막을 깨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전쟁에서 활약이 대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예, 예?” “공적을 인정받아 교관으로 들어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아하…. 아이고. 그저 자그마한 공일뿐입니다. 머셔너리 로드에 비할 수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나를 관찰하듯 슬쩍 쳐다보는 공찬호. 그렇다면 나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는 소리. 나는 살짝 고개를 갸울였다가 한 번 더 말을 이었다. “아직 소속한 클랜은 없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홀로 활동하시는 겁니까?” “아, 그건 아닙니다. 짧게는 몇 달에서 길게는 몇 년까지 같이 활동하는 동료들이 있습니다.” “그럼…. 아직 캐러밴이란 말씀이시군요.” “얘. 그래도 클랜을 곧 창설할 계획은 있습니다. 이번 전쟁으로 실적 평가에서 밀리지는 않을 것 같거든요. 하하.” 역시 그랬던가. 실은 이럴 것이라 예상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공찬호의 사용자 정보는 엄청나다. 근력 능력치가 101이라는 것만으로도 10강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 그렇다면, 이렇게 엄청난 사용자가 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을까? 사실 생각할 것도 없다. 그에 대한 정답은 단 하나뿐이었으니. 그건 바로, 공찬호가 지금껏 자신의 능력을 일부러 숨겼다는 것이다. 아마 홀 플레인 초반의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으리라 생각된다. 즉 자신의 기반이 확실히 잡힐 때까지 조용히 살겠다는 것. 아니면 성향상 그럴 수도 있고. 물론 수라마창을 언제 얻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공찬호 혼자서 이렇게 잘 숨겼다고 보기는 어렵고, 주변에 뛰어난 동료들이 도와줬을 가능성이 높다. '신효찬…. 아냐. 홍주희일 가능성이 높겠군. 가장 오랫동안 공찬호를 보좌했으니.' 불현듯 스친 생각에 나는 성하얀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미 교류를 나눈 것 같기는 하지만, 혹시 아직 스카우트된 게 아니라면….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을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용자 성하얀. 보아하니 아카데미에서 꽤나 준수한 성적을 올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 아, 아니에요.” “혹시 스카우트를 제의한 클랜이 있나요?” “아, 그게….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러나 성하얀은 조심스레 말끝을 흐렸다. 모습을 보자 대충 돌아가는 상황은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미 미래는 변했고 공찬호는 더는 내 적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불과하다. 101이라는 위력을 체감해본 나에겐, '천하무쌍'이라는 변수를 이대로 가벼이 넘기기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추후 저 수라마창이 나와 내 동료들을 겨눌지 겨누지 않을지 그 누가 알겠는가? “아…. 하하. 머셔너리 로드. 실은 제가 이미 스카우트한 상태거든요. 아카데미 수료 후 저를 따라가기로 했습니다.” 내 침묵이 불안했던 걸까? 조심스레 이어진 공찬호의 설명은 마지막 지푸라기마저 깔끔히 잘라냈다. 동시에 나를 향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는 미래의 천하무쌍.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다. 뭔가 조사하는듯한 뉘앙스의 질문을 연이어 했고, 이미 깊은 관계처럼 보이는 성하얀에게 추파(?)를 던졌으니. 이쯤에서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아쉬운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한동안 생각을 정리하다가 일단은 한 걸음 물러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당장은 방법이 없다.' 하여 일단 화제를 돌리려는 순간 공찬호의 허리에 걸린 수라마창이 눈에 띄었다. '수라마창을 대비할 수만 있다면….' 수라마창은 공찬호 사후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진 장비였다. 사용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이 잡듯 뒤졌지만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 만큼 가장 베일에 싸인 장비이기도 했다. 그 순간, 나는 결심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수라마창을 파악해두기로. 그럼 입술에 침을 먼저 바르고…. “후유. 알겠습니다. 이미 스카우트하셨다면 어쩔 수가 없군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그럼 다시 얘기로 돌아가볼까요?” “예? 얘기라뇨?” “그 창처럼 생긴 막대기 말입니다.” 고갯짓으로 수라마창을 가리키자 공찬호는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솔직히 믿기지 않는 것도 있고, 저도 호기심이 일어서…. 사용자 공찬호. 제가 그 무기를 한 번 볼 수 있겠습니까? 잘하면 조금 더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예, 예? 아. 물론입니다.” 공찬호는 일순 당황했지만 얼른 수라마창을 들어 내 앞으로 내밀었다. 너무 쉽게 주는 듯싶어 나 또한 당황활 뻔했는데, 이내 창 양쪽을 꾹 쥐는걸 보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절대로 눈으로만 보십시오. 혹시나 가까이서도 위험할 수 있으니, 어느 정도 거리를 두시는 게 좋습니다.” 나는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 '수라마창, 수라마창. 그놈의 수라마창.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잠재된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내야 한다.' 이미 제 3의 눈으로 능력치는 낱낱이 살핀 상태였다. 다만 실제로 쥐고 휘두르는 것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기에, 한 번 직접 만져 반발 효과를 느껴볼 생각이었다. 하여 나는 지그시 바라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무기를 직접 만져봐도 되겠습니까?” “예…? 아! 저, 절대로 안됩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마법 저항력이 높은 편이거든요. 한 번 살짝 만져보고 아니다 싶으면 바로 떼겠습니다.” “안됩니다! 아무리 머셔너리 로드님이라고 하셔도, 이것만큼은 절대로 안됩니다! 그, 그냥 눈으로만 보십시오. 제발…!” 적당히 구슬려보았지만 공찬호는 격렬히 반대하며 외쳤다. 어느새 다시 창을 거둘 기미를 보이는 팔을 보며 나는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니. 걱정 마십시오. 이게 대체 뭐라고….” 이미 창과의 거리는 지척에 있었다. 나는 별거 있냐는 태도를 연기하며 신속히 팔을 움직였다. 공찬호는 재빨리 물리려 했지만 내 민첩 능력치는 98포인트였다. 하여 완전히 거두어지기 전에 성공적으로 수라마창에 손을 얹을 수 있었다. “아, 안 돼…!” 파츠츳! 파츠츠츳! 『수라마창의 마기가 반발 효과를 발생합니다!』 『하늘의 영광, 태양의 영광이 대응하여 발동합니다! '일부 방어'로 판정합니다!』 『전장의 가호(Rank : EX)가 대응하여 발동합니다! '일부 방어' 판정이 '완전 방어' 판정으로 상향됩니다!』 “크헉!” 엄청나게 뿜어져 나오는 방전 현상에 놀란 걸까. 손아귀의 힘이 일순 느슨해지는 게 느껴져 부드럽게 창을 빼내자 사내와 여인이 날 멍하니 올려다본다. 혹시 몰라 화정을 사용할 준비를 했지만 그럴 필요까지도 없었다. 약간 마찰하는 감각은 느껴지지만 그뿐이다. 나는 검붉은 전류를 내뿜는 창을 한 바퀴 가볍게 돌렸다. 그리고 나를 멀거니 보는 이들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봐요. 괜찮지요?” “어, 어떻게…?” 여전히 믿겨지지 않는 듯 떠듬떠듬 말을 내뱉는 공천호. 그러나 나는 방심하지 않았다. 단순히 쥐는 것은 가능했지만 아직 실제 힘을 이끌어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 조용히 가슴을 추스르고 나서, 서서히 마력을 일으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파지직! 파지지직! “꺅!!!!” “머, 머셔너리 로드! 지금 당장 놓으십시오!” 『수라마창의 마기가 폭주합니다!』 우웅! 우우웅! 『빅토리아의 영광이 마기에 대응하여 사용자의 몸을 보호합니다!』 '큭!' 한순간 놓칠뻔했지만, 나는 '빅토리아의 영광'덕에 간신히 신음을 삼킬 수 있었다. 철저히 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순간적으로 역류한 마기는 가히 무시무시했다. 과연 천 년 동안 내려온 신장 무기라서 이런 걸까? 오른손에 일거에 집중된 천 년의 힘은 정말로 무시 못할 수준이었다. 오죽하면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보다 지금이 훨씬 버겁게 느껴질 정도. 파지지지지지지직! 우웅! 우우웅! 우우우웅! 손에 묵직하다 못해 수백 개의 바늘로 찌르는듯한 격통이 밀려온다. 간신히 시선을 내리자, 당장에라도 놓으라는 듯 마기를 삐죽이 솟구치는 수라마창. 그리고 그에 있는 힘을 다해 저항하는,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은은한 빛의 기운. 하지만 은은한 기운이 빠르게 사라지는 게 보인다. 여기서 기본 저항력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현재 수라마창에 연결된 마력은 바로 내 마력이었다. 여기서 마력을 일으켰다간 수라마창의 힘 또한 덩달아 증폭되리라. 파직! 파지직! 파지지직! “크읏, 크으읏!” 난동을 부리는 수라마창을 간신히 붙잡으며 나는 이를 바드득 깨물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결국…. 화정을 사용해야 하는 건가?' 현재는 '빅토리아의 영광'으로 겨우 버티고는 있지만, 이 기운이 사그라지는 순간 부담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파직, 펑! 퍼벙! 퍼버벙! 이제는 폭발까지. '염병. 어지간히도 싫은가 보군. 검들은 이러지 않았는데.' 더는 생각할 여유가 없어 나는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심장에 잠든 힘을 일깨우려는 찰나였다. 그때였다. 화륵! 화르륵! - 어머? 파지지직! 파지직…! 파직…?! - 어머, 어머 어머. 얘. 너 수라 아니니? 채 일깨우기도 전에, 내 심장이 말했다. ============================ 작품 후기 ============================ 하하. 죄송합니다. 원래는 이번에 다음 파트로 넘어갈 생각이었는데, 분량 조절에 실패했습니다. OTL. 실은 이번 파트는 101 사용자와의 인연을 만드는 동시에, 수현에게 102에 대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 기획했습니다. 즉 외전 1화(395회.) 천사들의 걱정과 연계된 부분이었지요. 아마 다음 회 잠시 '어떤 일'을 겪고, 수현은 자신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겁니다. 다음 회에는 정말로 다음 파트로 넘어갑니다.(안 넘어가면 앞으로 한 달 동안 꼬박꼬박 2연참 하겠습니다.) 다음 파트의 제목은 '유현아의 그림자'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합니다! 0413 / 0933 ---------------------------------------------- 7. 유현아의 그림자(2/2). 내 심장, 아니 화정이 입을 열은 순간이었다. 파지지직! 파지직! 파츳?! 정말 신기하게도, 조금 전까지 미친 듯이 폭주하던 마기가 일순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화정의 말이 이어졌다. - 어머 수라야~. 정말 오랜만이야. 그런데 너 왜 여기 있는 거니? 파츠츳! 파츠츠츳! - 아이고…. 인석 좀 봐. 얘 왜 이래…. 나야 나, 화정. 해치지 않아요. 응? 가만히 좀 있어보렴. 파츳…? 파츠츳…. - 옳지. 그래 그래. 착하다…. 나 원. 천 년 전 처음 봤을 때는 그렇게 순수하던 녀석이었는데, 어찌 이리되었을꼬. 순간 멍한 기분이 들었다. 수라마창의 기운은, 조금 전 흉포했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화정이 말을 걸 때마다 흠칫 흠칫 물러나고 있었다. 하기야 서로의 기운이 상성이니 물러나는 건 이해한다. 그러나 화정이 이렇게 친근하게 말을 거는 건 당최…. “머셔너리 로드! 머셔너리 로드!” “!” 그때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우렁찬 목소리가 귓가를 강타했다. 하여 멍하니 고개를 들자 콧김을 씩씩 내뿜고 있는 공찬호가 보였다. “머셔너리 로드! 괘, 괜찮으신 겁니까!” “아…. 예, 예. 괘, 괜찮은 것 같습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이게 어찌된 건지 나도 아직 모르는 상황이라 순간 말을 더듬고 말았다.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린 후 난 다시 한 번 공찬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어느새, 그는 경악한 표정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린 상태였다. 하여 나 또한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리자 무척 기묘한 광경이 눈에 밟혔다. 화륵! 화르륵! 파츠츳! 파츠츠츳! 가시 돋친 듯 오른팔을 덮고 있던 검붉은 마기는, 어느덧 화정의 맑은 기운에 의해 감싸져 있었다. 그러한 광경은…. 마치 화정이 수라를 보듬는 모양새랄까. 그때였다. - 이봐. 동반자. 그러고 보니 수라마창의 폭주가 멈췄다고 느꼈을 즈음, 화정이 말을 걸었다. 순간 난 재빠르게 공천호와 성하얀을 살폈다. 둘 모두 경황이 없어 보이긴 하지만, 여기서 말로 대답했다간 수상하게 생각할게 뻔하다. '화정이 마음을 읽을 수 있던가?' 그렇다면…. 화정? - 너 왜 우리 수라 괴롭혀?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얘를 왜 괴롭혀. - 얘 지금 엄청 화나있는데? 싫다는데 네가 자꾸 만졌다고. 거기다 억지로 점령까지 하려고 했다는데? 점령? 창 주제에 표현이 꽤나 마니아 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뭔가 할 말이 없어졌다. 수라마창이 '점령'을 어떤 의미로 말했는지는 모른다. 그래도 힘을 한 번 알아볼 생각에 억지를 가미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 흐응…. 힘을 알고 싶다 라…. 그렇군. 좋아. 그럼 잠시 기다려봐. 역시나 내 마음을 읽은 걸까. 화정은 잠시 기다려보라고 하고는 물결처럼 살며시 요동쳤다. - 얘, 얘. 수라야. 있잖아…. “머, 머셔너리 로드. 이건…. 정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으세요?” 언뜻 고개를 치켜들자 공찬호와 성하얀이 지척까지 다가와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어느새 걱정의 빛은 줄어들고 신기하다는 기색으로 내 팔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잠시 속을 추슬렀다가 창을 한 바퀴 빙글 돌려보았다. “예. 괜찮습니다. 한순간 큰일나는가 싶었는데 다행히 마법 저항력이 버텨주었네요….” “그렇군요. 그럼….” 공찬호의 표정이 미묘해진다. 내가 이 반발 효과를 버틴 게 자신에게 득이 될지 해가 될지 감이 잡히지 않는 모양.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말을 덧붙였다. “예. 반발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는 확실히 확인했습니다. 만일 공식 재판까지 가게 되면 이 부분에 대해서 증언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요. 당연히 해야 될 일인걸요…. 아. 그나저나 이 창, 그냥 보통의 창으로는 보이지가 않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 창 좀 더 봐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하하하.” 이제야 완전히 마음이 놓이는지 공찬호는 크게 웃어 보였다.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창을 잡은 손을 하늘 높이 올려 들었다. 그나저나, 정말로 무시무시하다. 제 3의 눈으로 읽었을 때도 엄청난 능력치라 여겼었다. 그러나 직접 들어보자 말 그대로 장난이 아니었다. 형태는 단순히 막대기에 불과했지만, 사위로 흐르는 검붉은 마기는 소름 끼칠 정도로 파괴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 솔직히, 그리고 객관적으로 평가해서. 내가 가진 네 개의 검들 중 어느 것 하나 수라마창보다 뛰어난 게 없다. 그 정도로 수라마창은 최강 혹은 최악의 무기라 볼 수 있었다. - 동반자. 준비해. 그때, 갑작스레 화정이 다시 말을 걸었다. 뭘 준비해? - 힘을 알고 싶다며? 내가 부탁했어. 그러니 아주 잠시 동안이지만 수라마창이 너를 주인으로 받아들일 거야. 그러니까 준비하라고. 수라마창의 주인…? - 그래. 아. 지금 시작하려나 보다. 너한테서 얼른 벗어나고 싶나 봐. 아무튼 내가 조금 도와주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거야. 잠깐만. 주인이라면…. 설마! 크게 놀란 마음에 나는 곧바로 사용자 정보창을 띄웠다. 그 순간이었다. - 시작한다. 화정의 한 마디와 함께, 쿠두둑! 쿠두두둑! 변화가 시작되었다. “크윽!” 돌연히 손아귀가 찢어지는 감각에, 나는 격한 신음을 내뱉었다. 아무런 전조도 없었다. 그것은 흡사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커다란 해일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쿠두두두, 쿠두두두! 잠잠해졌다 생각한 마기가 다시금 거칠게 요동친다. 왼쪽에서는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 기운이 막대기 전체를 휘감고, 오른쪽에서는 가시처럼 솟구친 기운이 줄기줄기 세차게 솟아오른다. 그러더니 점차 굵어져 하나의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고오오…! 고오오오…! 해일처럼 몰아친 마기의 폭풍은 이내 막대기를 감싸다 못해 주변을 휩쓸었다. 그에 따라 엄청난 압력이 순식간에 몰아치고 시야가 흔들렸다. 흡사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동시에 심한 소음이 발생해 누가 외치는 소리 또한 묻히는 기분이었다. “큭…! 크읍…!” 나는 격하게 흔들리는 오른손을 붙잡으며 눈을 감았다. 동시에 혀를 세게 깨물었다. 조금은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다. 아까 수라마창의 마기를 '저항'으로 정의한다면, 지금 수라마창의 마기는 미묘했다. 마치 '받아낼 수 있으면 받아봐.'라고 말하는 것처럼, 자신의 힘을 양껏 뿜어내고 있다고 해야 할까. 화륵! 화르륵! 아마 중간중간 화정이 도움이 없었다면 놓쳐도 진작에 놓쳤을 터.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몰아치는 압력을 견디며, 나는 서서히 눈을 떴다. 키햐아아아아아아! 수라마창은 이게 자신의 본 모습이라는 듯 사방이 떠나가도록 흉포한 괴성을 질렀다. 길쭉한 막대기였던 모습은 어느새 완전히 변화한 상태였다. 총 길이는 약 2미터 가량 될까. 왼쪽 끝에는 미친 듯이 마기가 피어오르고, 뾰족한 송곳 같은 것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오른쪽 끝에는 부드럽게 휘어지는 낫이 섬뜩한 빛을 번뜩이고 있다. 송곳은 어린 아이 팔만한 길이였고, 낫은 거대한 나무 하나를 가히 감싸 안을만했다. 이것이 바로 수라마창(壽拏魔槍)의 본 모습이던가. 이어서 허공에 메시지가 떠오른다. 『수라마창(壽拏魔槍)이 사용자 김수현을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합니다!』 『근력이 6포인트 상승합니다!』 그와 동시에 전신으로 차오르는 충족감. 나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허공을 응시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수현(1년 차) 2. 클래스(Class) : 검술 전문가(Sword Specialist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실적 평가 중입니다.) 5. 진명 • 국적 : 검(劍)의 주인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5) 7. 신장 • 체중 : 181.5cm • 75.5kg 8. 성향 : 질서 • 혼돈(Lawful • Chaos) [근력 102(+8)] [내구 92] [민첩 98] [체력 92(+2)] [마력 96] [행운 90(+2)] 근력 능력치가, 102가 되었다! “하아!” 이 형용할 수 없는걸 주체할 수 없어, 나는 절로 탄성을 터뜨렸다. 도대체 이 감정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쾌락? 포만감? 해방감? 마치 온몸을 꽁꽁 옭아매던 사슬이 일거에 풀린듯한 느낌은 무척이나 시원함 그 자체였다. 전신이 상쾌하다. 더는 어떤 압력도 느껴지지 않는다. 내 안의 무언가가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회로를 휘도는 마력이 전에 없이 경쾌하고,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 엄청난 힘을 보내주는 기분이었다. 지금 눈앞을 가로막는 모든걸 박살낼 수 있을 것 같은 이 기분! 그때였다. - 야! 오래 끌지마. 끌면 끌수록 후 폭풍의 부담이 커질 테니까. 무슨 말인지는 알고 있지? 이어진 화정의 경고에 나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하아…! 하아…!” 여전히 가슴은 쿵쾅쿵쾅 뛰고 설렜지만 나는 억지로 진정했다. 그리고 제 3의 눈이 경고한 바를 떠올렸다. 극복했다고 생각한 순간, 수라마창이 나를 집어삼킬 것이다. “후우…. 후우…. 후웁.” 지금 이렇게 버티는 것도 화정의 아니었다면 힘들었을 터. 그 말대로 오래 끌어 좋을 것은 없다. 하여 나는 몇 번의 심호흡 후 창을 비스듬히 세웠다. 섬찟한 빛을 뿌리는 검은 낫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겨냥한다. 그 상태로 잠시 동안 푸른 창공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흣!” 외마디 기합성과 함께 하늘을 향해 팔을 있는 힘껏 내리그었다. 궤적을 따라 흐른 기운은 이내 짙은 색으로 변하여 힘차게 솟구쳤다. 콰콰콰콰콰콰콰콰! 예전에도 느껴본 적 없던 가공할만한 마기가 아우성을 치며 부상한다. 허공을 훑고 지나간 그것은 삽시간에 하늘로 솟구쳐 길게 늘어졌다. 흡사 하늘에 기다란 줄이라도 그어진듯한 모습이었다. 쯔거억. 그 순간, 분명히 허공을 지나쳤을 뿐인데 뭔가가 섬찟하게 베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뭔가 싶어 안력을 크게 돋구었을 때, 나는 그 상태로 입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쩌저적, 쩌저저적! 마기는 가차 없이 하늘을 갈랐다. 그리고 갈라진 하늘에 이어서 드러난 광경은, 어두컴컴하면서 아무것도 없는…. …그래. 마치 우주를 보는 듯했다. * 7. 유현아의 그림자. 밤이 깊었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해보았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까닭 없이 허탈한 기분에 나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아카데미에서 돌아온 지도 며칠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아카데미에 있었을 때와 돌아온 후의 시간을 비교해보면…. 뭐랄까. 적응이 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단 하루도 있지 않았는데, 아카데미에서 수많은 일을 겪은 것 같다. '공찬호를 만나고…. 박현우를 데려오고…. 그리고 수라마창도 쥐어보고….' 고연주는 결국 공찬호를 무죄로 잠정 판단했다. 다만 김민희쪽 클랜에서 보류를 요청한 터라 공식 발표만 미루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마 '진실의 수정'을 구해올 요량이겠지만 과연 쉽게 구할 수 있을까. 잠시 후, 의미 없이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하던 도중 문득 머리맡을 더듬었다. 이내 잡히는 가슬가슬한 기록의 감촉에 난 종이를 들어 내 앞으로 펼쳤다. - [단독] 아카데미의 혼란. 교관 사망 사건에 이어 하늘도 갈라졌다? 알 수 없는 현상에 근래 사용자들의 신전 방문이 폭주…. 근래 사용자들의 신전 방문이 폭주 중이라. 하기야 나에게도 호출이 한 세 번쯤 왔던가. 아마 지금쯤 세라프의 속은 타 들어가겠지. 조만간 신전을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싱겁게 웃었다. '…….' 그리고 이어진, 다시 찾아온 허탈감. 사실 이러한 허탈감의 원인은 알고 있다. 이유는 바로 얼마 전 잠시나마 근력 능력치가 102포인트로 올랐다는데 있다. 그때 느꼈던 그 무한한 힘을, 엄청난 해방감을 당최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다시 원 상태로 돌아오자 지금 내 몸이 적응을 못하는 것 같다. 즉 '맛'을 알아버렸다고 해야 하나. '그냥 돌려주지 말걸 그랬나.' 사실 그럴 수는 없다. 사망 사건으로 공찬호의 무기는 이미 널리 알려진 상태였고, 수라마창 또한 나를 싫어한다. 아마 화정이 아니었다면 하늘을 가르기는커녕 못 버텨 던져버렸을 것이다. 나는 다시금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멍하니 말을 걸었다. 대상은 바로 내 심장이었다. 화정. - 응? 왜?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는 화정. 신속한 대답에 일순 놀라버렸지만 바로 진정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화정은 항상 갑작스레 등장하지 않았던가. - 불렀으면 말을 해. 놀라지 말고. 화정의 핀잔에 나는 차분히 속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대화를 시작했다. 그래. 예전에 네가 그랬잖아. 너를 제대로 사용하고 싶다면 체력을 101로 올리라고. - 그랬지. 그럼…. 만약에 말인데. 체력을 102로, 아니 그 이상으로 올리면 어떻게 돼? - 흐응…. 너도 그 수라마창처럼 달라지는 건가? - 글쎄? 그걸 말해야 할 의무는 없는 것 같은데. 아직 말해서는 안되기도 하고. 아무튼 대답하기 곤란해. 화정의 직접적인 거절에 나는 입맛을 다셨다. 하기야 나와 화정은 동반자 관계. 나는 힘을 빌리는 입장이지, 일방적인 관계는 아니다. - 흥. 그렇지. 주제는 잘 아네. 어쨌든 뭐 다른 궁금한 건 없어? 궁금한 거라.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이내 한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수라마창을 들었을 때 네가 나왔잖아? 저번에 용염을 앞에 두고도 스스로 나왔고. - 응. 생각해보면 불과 관련됐을 때 네가 자주 나오곤 했지. 혹시 그게 네 출현과 약간이라도 관계가 있는 건가? - 전혀. 용염은 네가 조금 위험하다 싶어서 나온 거고, 그리고 조금 건방지다고 생각했거든. 그리고 수라는 예전에 내가 보살핀 아이였어. 단지 그뿐? - 그래. 그뿐이야. 네가 불을 마주했을 때 내가 항상 나온 건 아니잖아? 예를 들면 예전에 숲에서 어떤 여자를 상대했을 때나, 또는 전쟁 중에서나. 시원시원한 화정의 대답에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 같이 어울리는 것도 어느 정도 격이 있어야 놀아주지. 격이라. 그런데, 아까 숲에서 상대했다면 백서연을 말하는 건가? 그녀 정도라면 네가 말한 격이 어느 정도 있을 텐데. - 개뿔이. 폭염이라면 인간이 다룰 수 있는 불 중에서 최고로 볼 수 있는…. - 웃기는군. 내가 고작 인간 중 최고 불을 상대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봐. 자부심 넘치는 화정의 목소리. 문득 화정이 만약 얼굴이 있다면, 지금쯤 코웃음을 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러고 보니 너. 이번 기회에 말하는데, 툭하면 내게 의지하려는 버릇 좀 고치라고. 응? 얼마나 귀찮고 한심한지 알아? 이 바보야. 그리고…. 화정은 때는 이때다 싶었는지 기관총처럼 쉬지 않고 쏘아붙였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 예전에는 몇 마디 하지도 않고 들어가는 게 끝이었는데, 오늘은 다르다. 따따따따따따따따. 102에 대해서 물어보려다가 이게 뭔 꼴인지. 그렇게 화정의 잔소리에 한동안 쓰디쓴 입맛만 다시고 있을 무렵. 그러다 불현듯 스치고 지나간 하나의 생각. - 아. 물론, 절~대로 네 몸이 걱정돼서 이런 말하는 건 아니니까…. 그럼 너는 왜 고작 인간에 불과한 내 몸에 있는 건데? 그때였다. 쉴 새 없이 조잘거리던 화정의 목소리가 일순 뚝 끊겼다. 하여 또 예전처럼 멋대로 나와서 멋대로 들어간 건가 추측했을 때, 돌연히 몸 안을 휘도는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화륵! 화르륵! 심장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삽시간에 마력 회로를 점령한다. 그러더니 이내 내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미친 듯이 흘러 움직인다. “어헉. 자, 잠깐만.” 백기를 들자 화정의 움직임이 멈췄다. - 씩…. 씩…. 하여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을 꺼내자, 화정이 뭔가 굉장히 화가 난듯한 게 느껴졌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 너 잘 들어. 화륵! 화르륵! 그리고 새어 나온 한 줄기 염화는 이내 내 코에 닿아 꾹 누르기 시작했다. - 내가 너에게 힘을 빌려주는 이유는, 그때 네 간절한 의지에 반했을 뿐이야. 앙? 절대로 너 따위한테 반한 게 아니라고. 알아들어? “아니. 누가 뭐라고 했어?” - 이 멍청이. 흥! 곧 밖에 나갈 준비나 해! 화륵! 어이없어 반문하자 화정은 크게 불꽃을 뿌리고는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이내 점점이 흩어지는 불똥을 보며 나는 거세게 머리를 털었다. 불로 세수하는 게 이런 기분이로군. 아무튼. “모르겠다.” 나는 크게 기지개를 피며 하품했다. 뜻하지 않게 몸이 따뜻해져 지금은 그냥 노곤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잠이 오지 않았는데, 지금 눈을 감으면 왠지 모르게 잠들 것 같은 기분. 나는 기록을 던지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머릿속에 찾아들 어둠을 기다리며 화정과의 대화를 곱씹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에 했던 말이…. 나갈 준비를 하라고? 그게 무슨 말이지?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우웅우웅우웅우웅우웅우웅우웅우웅! 머셔너리 하우스가 떠나가라 울리는 마력의 알림에,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건…. 3층 창고에 설치한 보안 마법의 작동이었다. 나는 귀걸이에 손을 가져다 대며 재빠르게 몸을 날렸다. ============================ 작품 후기 ============================ 아이고. 제가 오늘 내용 적으면서 얼마나 떨었는지 독자분들은 모르실 겁니다. 설마 오늘도 파트 못 넘어가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다행히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흑흑. ㅜ.ㅠ 예. 우리 수현이가 또 하나의 기연을 얻었네요. 드러나지 않은 기연입니다. 살짝 힌트를 드리자면, 예전보다 화정의 말이 많아졌다는 걸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하하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차차 드러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0414 / 0933 ---------------------------------------------- 7. 유현아의 그림자(2/2). 깊은 밤 통로는 어두웠다. 하지만 난 이것저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달리는데 집중했다. 3층에 설치한 보안 마법이 울렸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그동안 탐험으로 얻은 성과를 넣어둔 창고에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것. 물론 출입 허락을 받지 못한 내부 클랜원의 소행일수도 있지만, 창고에 있는 여러 물품들을 떠올리면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할 수는 없다. 하여 난 캄캄한 복도를 신속히 가로질러 나는 듯 계단을 내려갔다. 그렇게 막 3층으로 내려왔을 때였다. “감히 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더냐!!!!” 푸확! 철썩! “꺄아아악!” 액체가 '뻥' 터지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비명이 복도를 울린다.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자 뭔가가 공중으로 튀어올라 허공을 나는 것이 잡혔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내 쪽으로 날아오는 그것은, 바로 비비앙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양팔을 내밀었다. 풀썩! 최대한 충돌을 줄이며 부드러이 받아내자, 비비앙의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크윽! 아, 아프잖아!” “비비앙! 무슨 일이냐?” “젠장! 저 빌어먹을 자식이…! 제기랄! 이거 놔! ───! ───! ───!” 그러나 비비앙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무척 화가 난 듯 거칠게 몸을 일으키더니 바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 것이다. 일단 상황을 알아볼 생각에 나는 곧장 안력을 돋웠다. 그리고 창고가 있는 방향을 응시하자 곧 침입자의 실체가 서서히 눈에 잡히기 시작했다. '저건….' 키는 일반 성인 남성과 비슷할까. 하얗다 못해 창백히 질린 피부와 어둠에 동화된 다크 블론드 색 머리칼. 어딘가 모르게 고귀한 기운을 뽐내는 서구 외모는 척 봐도 북 대륙 사용자로 보이지는 않는다. “후…. 조용히 나가고 싶었건만, 또 한 명의 버러지의 등장인가.” 이윽고 조금 높긴 하지만 확실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어깨까지 늘어진 머리칼을 차분히 쓸어 올린다. 이내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싸늘한 번뜩임이 나와 비비앙을 노려보듯 주시한다. 그리고 빛나는 시선과 마주한 순간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침입자는 인간처럼 보이되 인간은 아니다. 저건 바로…. '뱀파이어다.' 순간 왜 저놈이 이곳에 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나는 일단 '빅토리아의 영광'을 겨누었다. 지금 중요한 건 호기심이 아니었다. 침입자가 '뱀파이어'라 불리는 괴물인 이상, 그리고 손에 황금빛 액체를 찰랑이는 '엘릭서' 한 병이 쥐어져 있는 이상. 놈은 확실한 내 적이다. “인간이여. 이 몸이 친히 경고하마. 지금 나를 곱게 보내준다면, 불필요한 유혈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 그리고 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나는 있는 힘껏 복도를 박찼다. 휙! 칠흑 같은 어둠이 살갗을 스치고 뱀파이어와의 거리가 순식간에 줄어든다. 그러나 놈은 당황하지 않았다. 흡사 내가 달려들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담담한 표정. 놈이 팔을 천천히 들어올린다. “인간은 언제나 한결같구나. 어찌도 이리 어리석은가.” 순간 비릿한 냄새가 물씬 흘러들었다. 들어올린 팔에는 뭔가 뭉클뭉클한 핏빛 액체가 어깨와 손목 사이를 감싸듯 돌고 있다. 아까 뭔가 이질감이 느껴진다 싶더니 놈의 '피'가 정체였던 모양이다. 잠시 후, 손끝이 나를 겨냥했다. “경고는 한 번으로 충분하겠지. 굳이 벌주를 마시겠다는 걸 말릴 생각은 없다.” 그 순간 휘돌던 액체가 손끝으로 쭈르륵 집중됐다. “각오해라! 내 피가 너를 먹어 치울 것이다!” 푸확! 그러더니 우산처럼 널찍하게 펴지며 나를 삼킬 듯 짓쳐 들어온다. 아마 비비앙도 비슷한 수법에 당한 듯싶었다. 한순간 지척까지 다가온 피로 이루어진 주둥이를 보며 나는 다급히 마력을 일으켰다. '최대한 빠르게 없애야겠다.' 뭐랄까. 사실 이런저런 경험을 겪은 만큼 그리 위급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왜인지는 몰라도 이상하게 귀가 괴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팟! 하여 곧바로 이형환위(移形換位)를 발동하자,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어 뱀파이어의 후방을 점거할 수 있었다. 뱀파이어의 피는 어느새 내가 있던 자리를 게걸스레 집어삼키고 있었다. 비스듬히 보이는 놈의 얼굴에 거만한 빛이 가득하다. 부디 그 오만한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기를 기대하며, 나는 힘껏 검을 내리그었다. 부웅! “더헛!” 순간적으로 위험을 느꼈을까? 정수리를 노렸던 검날은 흔들린 머리를 스치듯 타고 흘러 어깨부터 베어 들어갔다. 그에 이어 손을 타고 전해지는 뭔가를 자르는 감촉. 싹둑! 찰박! 그 순간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살가죽을 자르는듯한 감촉에 어느 순간 끈적끈적한 불쾌감이 섞여 든 것이다. 사실 이대로 끝까지 베어내도 상관없겠지만, 나는 곧장 마력을 일으켰다. 그리고 중간에 검을 멈춰 힘차게 마력을 투사했다. 내 장기인 마력 폭발이었다. 펑! 퍼펑! “크하아아악!” 이윽고 뱀파이어의 신체에 울룩불룩한 폭발이 터지고, 고통에 젖은 비명이 복도를 떠르르 울린다. 그와 동시에 공중으로 치솟아 오르는 엘릭서를 보며 나는 눈을 번뜩였고, 신속히 손을 뻗었다. “아, 안 돼!” '허. 아직 살아있었던가?' 분명히 몸을 절반 이상 가르고 마력 폭발도 실컷 먹여주었다. 내 사용자 정보를 생각해보면 아무리 생명력 높은 뱀파이어라도 빈사 상태에 이를 정도의 충격일터. 그럼에도 미약하게나마 들려오는 외침에 매우 놀라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여벌의 목숨이나 다름없는 엘릭서가 훨씬 중요했기에, 우선 허공을 선회하는 병을 가볍게 낚아챘다. 찰랑. “이, 이럴 수가아아아아!” 엘릭서를 놓친 게 그리 분한 걸까? 뱀파이어는 복도가 떠나가라 절규했다. 그러더니 도망이라도 치려는 듯 몸의 일부에서 터져나간 액체가 소용돌이처럼 돌기 시작한다. '어딜.' 하여 허공에 뜬 상태서 그대로 왼발을 날리자 철퍽, 발등이 끈적한 액체를 후려치는 게 느껴졌다. 후루룩! 후루루룩! 분수처럼 솟구친 혈액은 허공에 점점이 흩뿌려지더니 이내 완전히 사그라졌다. 그리고는 아무도 없는 복도의 끝 쪽에서 다시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윽고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던 놈이 당황한 음색을 내뱉었다. “헉! 허억! 어떻게 된 거냐…. 어째서, 어째서 재생이 되지 않는 거냐! 고작 인간의 검에 당했을 뿐인데!” 그건 내 권능 때문이야. 나는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아무튼 헐떡이는 숨소리로 보아하니 큰 타격을 입은 것 같기는 했다. 이 와중에 한 가지 놀라운 점은 도망치지 않고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점. '도망치려는 게 아닌가?' 그때였다. “오라! 아라냐! 제 32군단을 지배하는 죽음의 거미줄이여!” 비비앙의 낭랑한 목소리가 날카로이 터져 나왔다. 꽤나 씩씩거리더니 마수 소환을 준비했던 모양이다. “김수현! 이제 됐어! 내가 처리할 테니 비켜!” 쉬리릭! 쉬리리릭! 동시에 섬뜩한 은빛이 흐르는 여러 줄기들이 복도를 쇄도한다. 살아있는 뱀이 춤을 추듯, 날 부드러이 지나친 거미줄은 복도 끝으로 이동한 뱀파이어를 삽시간에 뒤덮었다. “잡았다! 요놈!” 수십의 거미줄에 묶였음에도 뱀파이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서 있기만 할 뿐. 그런 놈의 모습은 매우 처참했다. 폭발이 일어난 부분이 군데군데 뚫려있는 게 마치 커다란 펀치로 여러 번 몸을 뚫은듯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비비앙이 복도를 걸어온다. 놈을 서늘히 쳐다보던 그녀는 나를 보지도 않은 채 걸음을 멈추었고, 곧 턱으로 한 쪽 방향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비키라는 의미 같았다. “김수현. 미안하지만 이 싸움은 양보할 수 없을 것 같아.” “응? 아니 무슨 양보. 보니까 이미 거의….” “아니야. 김수현. 저놈은 내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혔어. 너무 분해. 그러니 이 수치심을 회복할 기회를 주겠어? 부탁해.” 내가 다 잡아놨는데 뭔 헛소리를 하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쏘아붙이기에는 비비앙의 얼굴이 굉장히 진지했다. 아니 진지하다 못해 눈망울이 그렁그렁해 보일 정도였다. “…마음 대로해라.” “후. 좋아. 똑같이 날려주겠어. 내 눈앞에서.” 하여 짧은 숨을 뱉고서 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한 쪽으로 비켜서자 비비앙은 득달같이 달려가 뱀파이어의 앞에 섰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 간신히 숨이 붙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뱀파이어 중에 유난히 생명력이 질긴 놈들이 있었는데. 생명력을 저장하는 놈들이랬나?' 고개를 갸웃하던 도중 비비앙이 가녀린 검지를 피어 뱀파이어의 턱을 들어올린다. “어이 너. 아깐 잘도 내 엉덩이를 쳤겠다.” “크윽….” “호호호. 꼴 좋네. 어떻게 죽여줄까? 앙? 갈기갈기? 아니면 발기발기?”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죽여라! 더는 내게 모욕을 주지 마라. 거미 냄새를 풍기는 인간이여.” '오호라.' 뱀파이어의 말에 일순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괴물은 괴물을 알아보는 건가? 비비앙은 낭랑히 웃었다. “호호호, 호호호호! 보아하니 너도 인간은 아닌 것 같아 보이는데?” “…….” “대답이 없군. 그럼 이건 어때?” 딱! 비비앙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거미줄이 스르르 움직인다. 이윽고 놈의 왼팔을 세게 잡아당기는 것과 함께 뿌드득, 뭔가 세차게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끄아아아아아아악!” 한밤에 일어난 뱀파이어의 고문. 나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비비앙. 바로 죽이지는 마. 배후를 캐내야 하니까.” “걱정 마. 고문하면 나야. 백서연 사건을 잊었어?” 비비앙은 딱 잘라 대답했다. 일리 있는 말이라 생각돼 나는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놈이 연신 부르짖는 처절한 비명을 반주 삼아 차가운 벽에 기대어 섰다. 그리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왜 엘릭서만 가져가려고 했을까?' 솔직히 이번 침입 사건을 따져보면 이상한 점이 몇 가지가 있었다. 창고 안에는 여러 가지 물품이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엘릭서 한 병만 가져가려고 했을까? 그리고 인간이 아닌 괴물이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두두두두! 두두두두! 문득 느껴지는 진동에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자 여러 발소리들이 들려온다. 아마 뒤늦게 달려오는 클랜원들인 듯싶었다. '쯧. 모르겠다.' 다시 탈환한 엘릭서를 느릿하게 매만지며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사정이야 어찌됐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 알아낼 것만 알아내고 죽일 생각이니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 거주민 정보(Native Status) > 1. 이름(Name) : 사샤 펠릭스(Sasha Felix) 2. 클래스(Class) : 뱀파이어(Monster, Vampire,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펠릭스(Felix, 현재는 멸망한 뱀파이어의 왕국입니다.)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피의 군주의 후계자• 홀 플레인 6. 성별(Sex) : 남성(127) 7. 신장 • 체중 : 183.3cm • 65.4kg 8. 성향 : 혼돈 • 푼수(Chaos • Idiot) [근력 53] [내구 67] [민첩 78] [체력 84] [마력 93] [행운 51] * 1. 로드 오브 뱀파이어(Lord Of Vampire)가 될 가능성이 있는 뱀파이어의 정통 후계자, 즉 진조입니다. * 2. 현재 사용자와 일시적인 계약서를 체결한 상태입니다. 계약을 맺은 사용자는 이 뱀파이어에 대해 '주인'의 자격을 갖고 있습니다. '피의 군주…? 푼수…?' 그때였다. 하나씩 읽어 내려가던 도중 '사용자와 계약'을 했다는 내용이 눈에 밟혔다. 그리고 그 순간 머릿속 떠오른 의문이 일부 해소되는 게 느껴졌다. '아…? 아!' 그와 동시에, 갑작스레 머리에 떠오른 기억에 나는 다급히 비비앙을 불렀다. “비비앙! 잠깐만!” “알아들어? 네까짓 게 건드릴 수 없는…. 응? 왜?” 얼른 뱀파이어를 쳐다보자, 그새 일을 벌였는지 몸통과 다리 한 짝만 남은 몰골이 눈에 들었다. 하지만 다행히 아직 숨은 붙어있었다. 나는 '빅토리아의 영광'으로 팔을 얇게 베어내며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저 뱀파이어는 추후 '성스러운 여왕'의 '그림자'로 불릴 놈이 분명하다. '맞아. 비교적 일찍 죽어 기억하지 못했어.' 그리고 '그림자'가 여기 있다는 말은…. '그녀도 여기 있다는 말이겠지.' ============================ 작품 후기 ============================ 흠. 외전은…. 1, 2, 1, 2, 1. 현재 구상 예정으로 따지면 이르면 이번 주, 늦으면 25일 안에 끝날 것 같네요. 예전에 말씀드린걸 전부 연재하지는 못하고, 최대한 이거다 싶은 것들만 뽑아놨습니다. -_-a 아. 독자님들. 혹시 제가 예전에 투표했던 표지 기억하시나요? 그때 안솔이 선정됐었지요. 현재 여유가 생겨 일러스트레이터 분과 접촉 중입니다. 몇 일안으로 결정이 날 듯싶으니 확정되면 따로 말씀드릴게요. :) 0415 / 0933 ---------------------------------------------- 8. 가장 갖고 싶었던 사용자(3/3). 홀 플레인의 뱀파이어는 생명력이 질기기로 유명한 종족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침입자 '사샤 펠릭스'는 종족 특성의 면모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다 죽어가던 놈이 팔을 그어 피를 먹이자 곧바로 되살아난 것이다. 물론 완전히 부활한 건 아니고 적당히 숨이 붙어있을 만큼만. “지금부터 두 가지 질문을 던질 것이다. 뱀파이어.” 그윽한 적막이 흐르는 3층의 회의실. 중앙 바닥에는 꿇어앉힌 뱀파이어와, 양 옆으로 놈을 지켜보고 있는 박현우 그리고 남다은이 있다. 목에 겨누어진 무기가 서늘할 법도 한데 놈은 고개만 숙인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나는 고요히 입을 열었다. “첫째, 왜 엘릭서를 훔치려고 했는지. 둘째, 어떻게 엘릭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이 두 가지 질문에 정확한 답변을 한다면 일말의 자비를 고려해보마.” “자비를 고려하겠다.”라는 말은 사실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자비는커녕 심문 후 살해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떠올린 기억이 맞는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뱀파이어와 그 주인은, 차후 '성스러운 여왕' 유현아의 휘하서 활약할 이들이다. 현재 이들이 왜 모니카에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한 가지 추측할 수 있다면 바로 유현아의 사망으로 미래가 변했다는 것. 그렇다면 원래 그녀 밑으로 들어가야 할 사용자들이 2회 차에서 공중으로 떠버렸다는 소리였다. 안 그래도 인재가 고픈 참이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잘 매만지면 꽤나 좋은 인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윽고 뱀파이어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서너 번 코를 벌름거리더니 나를 힐끔 올려다본다. “엘릭서가 있는 걸 알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이 장소에 엘릭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들어온 게 아니라, 들어오고 나서 알았다는 말이다.” 나는 살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이해는 했지만 납득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기색을 느꼈는지 뱀파이어는 숨을 기다랗게 내쉬었다. “후유. 어쩔 수 없지. 선택의 여지가 없군…. 자비를 고려하겠다는 말을 믿겠다. 인간.” 그러더니 어두운 낯빛으로 시무룩이 입을 떼었다. “일단은 이 몸의 정체를 밝히도록 하지. 짐은….” 그리고 이어진 말은 의외로 사연 깊은 이야기였다. 제 3의 눈으로 보았던 대로 뱀파이어는 일종의 계약에 묶인 몸이었다. 말인즉슨 신전에서 사용자와 거주민간의 계약서를 작성했다는 소리. 관계는 나와 비비앙처럼 주인과 노예라고 한다.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뱀파이어의 주인은 현재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 처해있다고 한다. 이유는 바로 리치(Lich) 때문이었다. 둘은 한동안 북부 도시 뮬을 기점으로 활동했다. 그러다 푸른 산맥에 있는 유적 '절규의 동굴'이 공개된 사실을 알게 됐고, 언제 시간이 날 때 '청소부' 역할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고.(청소부는 첫 발견자와 조사단 이후 세 번째로 유적에 들어가는 사용자들을 일컫는다. 앞선 이들이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보물을 찾으러 가는 게 목적이며, 이따금이긴 하지만 실제로 성과를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당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 일은 순식간에 벌어지고 말았지.” 뱀파이어는 미간을 찡그리며 이를 갈았다. 그때를 회상하자 자못 분기가 끓어오르는 모양이다. 둘이 참가한 캐러밴은 푸른 산맥을 배회하는 리치 군단과 맞닥뜨려 전투를 벌였다. 전력 자체는 대등해 서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어떻게 간신히 승기를 쥘 수 있었다. 그러나 마무리가 어설펐다. 최후에 홀로 남은 리치는 주인에게 달라붙었고 자폭을 했다고 한다. “주인도 어느 정도 실력은 있는 편이라, 급박했던 상황치고는 민첩하게 대처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거대한 폭발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겠지. 그런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폭발 후….” “신체의 어느 부분이 마비됐군.” “오른팔이…. 어, 어?”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기능을 잃어버리는 부위가 늘어났겠지. 서서히.” “어,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거지?” 뱀파이어는 경악한 얼굴로 외쳤다. 나는 대답 대신 품으로 손을 넣어 연초 한 대를 꺼냈다. 일단 엘릭서가 필요한 이유는 알겠다. 하지만 아직 의문이 하나 남아있었다. 그때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하연이 고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리치는 육신은 홀 플레인에 있지만 영혼은 우리가 모르는 세계에 있는 괴물이죠. 자폭 공격을 했다면…. 아마 다른 세계에 있는 영혼의 소멸을 각오했을 거예요.” “그, 그게 무슨 소리지?” “즉 지금 당신 주인의 상처는 육신이 아닌 영혼의 상처에요. 목숨이 위험하다는 말이 이제 이해가 가는군요.” 어느 집 딸인지 참 똑 소리 나는군. 나는 맞는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였고 여전히 혼란해하는 뱀파이어를 응시했다. “그래서 엘릭서를 필요로 했다…. 모든 상태 이상을 회복 가능한 엘릭서면 확실히 치유가 가능하지. 영혼의 상처라고는 하지만 설정에 불과하니까.” “잠깐! 그건 또 무슨 말이지? 설정이라니?” “우리는 사용자다. 거주민인 네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니야.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러니까….” 꺼낸 연초에 불을 붙이며 나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후. 어떻게 이 장소에 올 생각을 했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답을 못 들었는데.” “말하지 않았는가. 알고 들어온 게 아니라, 들어오고 나서 알았다고.” “정확히 말해.” “…원하는 대로 정확히 말해보면 이번이 여덟 번째다. 아, 아홉 번째인가.” “여덟 아홉 번째?” “엘릭서라는게 그리 간단히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더군.” 뱀파이어는 담담히 대답했다. 둘은 푸른 산맥에서 돌아온 이후 신체를 치료하러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눈에 띌만한 성과는 없었다. 아무리 돈을 쏟아 부어도 일시적으로 감각을 되찾거나 진행 속도를 늦추는 게 고작이었다고. 하여 이리저리 방법을 찾아 헤맨 끝에, 엘릭서만이 리치가 남긴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렇게 귀한 물건인지 몰랐지. 상점에 엘릭서가 있냐고 물어보니 미친놈 취급을 받았고, 어느 커다란 건물에 사정을 해보니 또 미친놈 취급을 받았다.” 그거야 당연하지. 엘릭서는 홀 플레인에서 여벌의 목숨이라 불리는 보물 중의 보물이다. 억만 금으로도 살 수 없고 있어도 숨겨야 하는 물건. 그걸 누가 선심 쓰듯 건네주겠는가? “그제야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더군.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엘릭서는 분명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러나 남에게 줄 수는 없는 아주 귀한 것이다.” “그렇지. 똑똑하네.” “하하. 고맙다. 아, 아니. 아무튼 시간이 흐를수록 주인은 점점 힘들어했고 난 엘릭서를 더욱 갈구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모종의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구할 수는 없을 것 같으니 훔치겠다. 엘릭서가 있는 장소를 발견할 때까지.” 드디어 결론이 나왔다. 뱀파이어는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머리를 끄덕였다. 비로소 이유를 듣자 분노보다는 감탄의 감정이 절로 일었다. 그렇다면 뱀파이어는 지금껏 여러 건물에 잠입해왔다는 소리였다. 도대체 어떤 능력이 있길래 그렇게 제집 드나들듯 다닐 수 있었을까? '어쩌면 고유 능력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나중에 한 번 자세히 봐야겠다.' 무척이나 탐나는 능력이라 생각하며 나는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좋아. 이야기는 잘 들었다. 뱀파이어.” “야, 약속은 지키겠지?” “그럼.” 뱀파이어가 몸을 흠칫하며 물었다. 이제 처분을 내린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난 놈과의 거리를 천천히 줄였다. “대신 네 주인이라는 사람을 한 번 만나야겠다.” “뭐, 뭐라고?” “왜 그렇게 놀라지?” “이건 약속이 다르잖은가! 나는 거짓없이 모든 이야기를 했다! 그럼 분명 자비를 고려하겠다고…. 크악!” 뱀파이어의 고함이 뚝 끊겼다. 남다은이 일순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더니 놈의 머리칼을 쥐어 아래로 거세게 처박았기 때문이다. “네가 오해하는 게 있구나.” 꾹 말아 쥔 손등에 가벼이 손을 얹자 그녀의 얼굴에 발간 홍조가 피어오른다. 이내 내 손을 스르르 훑으며 떨어지는 여인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아래로 부들부들 떨리는 뒤통수가 보였다. 나는 품속에 넣어둔 엘릭서를 꺼내 들어 몇 번 흔들었다. 황금빛 액체가 눈부신 빛을 발하며 일렁인다. 찰랑찰랑. “네 사정이 어떻든 이 엘릭서는 머셔너리의 것이다. 주인을 살리겠다는 네 마음을 갸륵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보물을 빼앗길뻔한 침입자에 불과하다는 소리지. 그리고 넌 지금 바로 즉결 처분해도 할 말 없는 입장이고. 내 말이 틀렸나?” “크으…!” “하지만, 그럼에도 네 주인을 부르겠다는 이유는 최대한 평화적인 해결 방법을 모색하겠다는 소리야. 이 정도면 충분한 자비요, 배려라고 생각하는데….” “해결 방법이 없다면 그녀에게도 책임을 물을 생각이겠지…!” '오호. 예리한데?' 나는 씩 웃었다. 뱀파이어의 말은 내 속마음을 정확히 찌르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솔직히 성향이 푼수라 쉽게 구슬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까 대화를 하면서 그러한 마음을 버렸다. 놈은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정작 숨겨야 할 부분, 즉 내가 알고 싶은 부분은 쏙 빼놓고 있었다. 그녀라 말한 순간에서 거의 확신하긴 했지만. “그거야 당연하지. 원래 노예의 잘못은 주인도 일정 부분 책임지게 돼 있다고. 아무튼. 그래서 말 할 마음이 없다?” “내가 말할 것 같은가? 차라리 죽여라!” “어쩔 수 없지.” 새벽이 깊었다. 더는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아 나는 숙여진 머리를 향해 있는 힘껏 후려갈겼다. “컥!” 그리고 완전히 고꾸라지기 전 발차기로 복부를 세게 강타했다. 곧 눈을 까뒤집은 뱀파이어를 보며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회의실에는 고연주를 제외한 클랜원 전원이 모여있었다. “비비앙. 끌고 가서 어느 정도 죽여놔. 도망치지 못하게.” “응? 아, 알았어.” 뱀파이어를 툭 치며 입을 열자 비비앙은 떨떠름히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다음으로 하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침이 되면 이스탄텔 로우에 전령을 보내세요. 오늘 하루 광장 좀 빌리겠다고 해주시면 됩니다.” 하연은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알겠다는 듯 주억였다.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남은 클랜원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남다은, 이유정, 임한나, 안현, 선유운, 백한결….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나는 방금 생각한 6명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내일 아침 이놈을 광장에 매달아 놀 생각입니다. 그러니 제가 방금 지목한 여섯 명은 지금 바로 두 명씩 짝을 지어 조를 이루십시오. 그럼 총 3조가 만들어질 테니 적당한 시간을 간격으로 교대하시면 됩니다. 혹여 물어오는 사용자가 있다면 적당히 대처해주시고요.” 6명은 멍하니 서로를 돌아보더니 나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어떤 일을 벌일지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은 모양이다. '고연주가 그립군.' 고연주였다면 지금쯤 “수현!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라며 호호 웃어 보일 텐데. 싱겁게 웃으며 난 마지막으로 사제 둘을 돌아보았다. “사용자 신재룡, 안솔. 두 분은 이스탄텔 로우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신전으로 가주세요. 그리고 사정을 얘기하고 광장의 게시판을 이용하겠다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아. 알겠습니다.” 이제야 겨우 알아차렸는지 신재룡을 비롯한 몇몇 클랜원들의 안색이 밝아진다. “밤이 깊었네요.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이만 해산하도록 하지요.” 동시에 시작하라는 의미로 고갯짓을 하자 비비앙이 사뿐사뿐 다가와 소리쳤다. “지하로 옮기는 거 도와줄 사람?!” 이내 부산스레 움직이는 클랜원들을 보며 나는 고소를 지었다. '그녀를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 참 모를 일이야.' 어찌 보면 사용자 한 명 만나려고 부산을 떤다고 볼 수 있지만, 내일 나타날 주인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용자였다. 물론 나올지는 미지수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녀의 성격이라면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나는 크게 기지개를 피고 조용히 회의실을 나섰다. 갑작스레 설레는 마음에 오늘밤은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 아무튼 이제 이 뱀파이어의 주인인 '섬광(閃光)'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 아침이 밝았다. 간밤에 큰 사건을 하나 치렀지만 찾아온 오전은 언제나처럼 고요하기 그지없다. 조식을 먹고 클랜 하우스 전체를 돌아보자 평소보다 훨씬 조용하다. 아마 내가 어제 지시한 일들을 처리하러 대다수의 클랜원들이 외출한 모양이다. 숙소까지 한 바퀴 돌아본 후 나는 한참을 3층 창고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곧바로 집무실로 향했다. 클랜원들이 열심히 일하는데 클랜 로드가 놀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지금 직시해야할 문제는 바로 창고의 보안 문제였다. 침입자가 '뱀파이어'라는 특이성은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변명할 여지는 없다. 나름 신경을 쓴다고 썼는데도 결과적으로는 보안이 뚫렸다는 게 사실이요, 현실이었다. '불침번을 두게 된다면 클랜원들의 부담이 커질 수도 있는데…. 차라리 내 숙소를 3층으로 옮길까? 어차피 본관이잖아.' 보강 계획이 적힌 기록을 눈앞에 둔 채 나는 손에 쥔 깃펜을 의미 없이 돌렸다. 무조건 돈만 쏟아 붓는다고 보안이 강화되지는 않는다. 일단은 어떤 방법으로 창고의 물건을 지킬지 방향에 대한 가닥을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 방향에 맞춰 최대한 효율적으로 연계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하는 게 정답일 것이다. '숙소를 3층으로 옮기는 건 보류. 창고 출입에 대한 보안 강화야 당연하고…. 알림은 이미 설치돼있지. 함정이랑 방해 마법도 복합적으로 설치해볼까? 아. 비비앙의 질서의 오르도의 도움을 얻을 수 있으려나?' 웅성웅성.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외출했던 클랜원들이 한 명 두 명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백지로 시작했던 기록도 어느덧 글씨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슬쩍 창문을 쳐다보니 해가 중천에 서서히 가까워지는 게 보였다. 이제 곧 정오인 모양이다. 일단 점심이라도 먹을 생각에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똑똑. “클랜 로드. 선유운입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예. 들어오세요.” 반쯤 일으켰던 몸을 다시 앉히자 문이 달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열려진 문틈으로 드러낸 인물은 머리를 말끔하게 빗어 넘긴 선유운이었다. 옷이 날개라고 하던가? 한 번 창고에 데려가 궁수용 장비를 고르라고 한 적이 있는데, 바바라에서 봤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에 깜짝 놀란 기억이 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인 선유운은 무뚝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침입자의 주인이 나타났습니다.” “…예?” “침입자의 주인이 나타났습니다.” 앵무새처럼 말을 반복하는 선유운. 난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가 가볍게 웃었다. '이건 너무 시원한데.' 항상 주절주절 떠들던 애들이나 찐득찐득한(?) 고연주를 상대하던 나였다. 그런데 선유운의 보고를 받자 왠지 모르게 낯설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하하. 그래요. 주인은 지금 어디 있나요?” “정문까지는 데리고 왔습니다. 현재 클랜 로드를 만나 뵙기를 원하는 중입니다.” 내가 웃는 이유를 모르겠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잇는 선유운.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허락했다. “알겠습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 작품 후기 ============================ 안솔 일러스트레이터를 그려주실 분을 찾았습니다. 저번에 세라프, 고연주를 작업해주신 일러스트레이터 분이세요. 하하하. :) 음…. 저번 회 코멘트를 보니 의외로 유현아가 살았으면 하는 분들이 계시더군요. 약간 의외라고 생각했습니다. -_-a 독자 분들이 '성스러운 여왕'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고 계셨는지 새삼 궁금해지더군요. :D 0416 / 0933 ---------------------------------------------- 8. 가장 갖고 싶었던 사용자(3/3). 마침내 뱀파이어의 주인이 나타났다. 사용자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광장에 공개적으로 매달아놓은 게 효과를 본 것이다. 드디어 '그녀'를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나는 설레는 가슴을 추슬렀다. '이 아가씨는 성격이 어떻더라…. 어떻게 해야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문득 고민이 들었다. 뱀파이어를 인질로 잡고 있고 명분도 우리측에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꿇릴게 없을 뿐이지, 상대방 입장을 생각해보면 함부로 건드리기 민감한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향이 '물질적인 보상'이 아닌 '등용'에 있으니까. '상황을 이용해야 하는 건 맞지만, 물고 늘어지면 안 된다.' 그러니 다짜고짜 쏘아붙이기보다는 어느 정도 격식과 예를 차려 대하는 게 나을 터. 그러나 남다은처럼 미처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 '아냐. 설마 그녀가 그럴 리는 없겠지.' 아무튼 일단은 사용자 정보를 보고 판단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녀'에 대한 생각을 떠올렸다. 사실 유현아의 휘하에는 정말로 인재가 많았다. 오죽하면 전성기 시절 10강 중 네 명이 유현아 아래에 있을 정도로 최고의 스쿼드를 자랑했다. 그 중에서 내가 진심으로 높게 평가하는 사용자가 단 한 명 있었다. '무신' 차승현도, '미친년' 반다희도, 마력 능력치 101포인트를 보유한 사용자도 아니다. 바로 '섬광(閃光)'의 차소림이었다. 한결같은 충심으로 유현아를 보필했으며 귀신 같은 창 솜씨가 일품이던 사용자. 실력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공식적인 전투에서 '무패'라는 기록을 쌓은 전무후무한 사용자였다. 차소림의 최후는 '철혈의 여왕'에 의한 처형으로 나름대로 깔끔했다. 유현아의 판단 착오로 허무하게 붙잡히기는 했지만, 그녀의 뜻을 존중한 한소영은 차소림의 최후를 더럽히지 않았다. '한소영도 처형할 때 굉장히 아쉬워했지.' 한소영의 특수 능력 칵 키드 피스톨(Cocked Pistol). 여왕의 군대(Queen’s Army)에 둘러싸여 죽었던가? 그때 문득 들려오는 복도를 걷는 발소리. 하여 차소림의 최후를 회상하던 나는 돌연히 생각을 멈췄다. 생각보다 기다리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이윽고 가벼운 노크 소리에 이어 문이 달칵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 “데려왔습니다. 클랜 로드.” 예의 무뚝뚝한 음색이 들리고 선유운이 먼저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는 살짝 웃으며 자그맣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의 몸에 가려 완전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누가 서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뒤에 있는 분이 뱀파이어의 주인 되시는 분인가요?” “예.” “그렇군요….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둘이서만 대화하고 싶으니 자리를 비켜주시겠어요?” 선유운은 알겠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더니 이내 조용히 몇 걸음 물러섰다. 이내 다시 방문이 닫히고 집무실에는 나와 '그녀'만이 남게 되었다. 나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앞쪽 테이블을 가리켰다. “머셔너리 로드 김수현입니다.” “…3년 차 사용자 차소림입니다. 방문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윽고 가까이 다가선 그녀의 이름을 듣는 순간 절로 '섬광(閃光)'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잠시 후, 차소림이 앉고 나서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들어보니 뱀파이어가 이번 사건은 뱀파이어의 단독 행동으로 보여지더군요.” “예. 따로 지시하지는 않았습니다.” 딱딱한 말투. '다.'로 끝나는 말투를 보자 문득 한 여인이 생각난다. 노유미라고 했던가? 꽤나 재미있는 여인이었는데. 시답잖은 생각은 곧바로 흘리고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찾아오신 이유는…. 문제 해결을 위한 의사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차소림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당당하되 거만하지 않고, 그렇다고 비굴하지도 않다. 오히려 원숙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품성에 나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차소림의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은 건 살결은 잡티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얗고 투명한 살빛이었다. 약간 짙은 눈썹 아래 고요히 가라앉은 칠흑 빛 눈동자는, 단아한 이목구비에 영리해 보이는 인상을 추가해준다. 그 아래로 보기 좋게 솟은 콧마루와 도톰히 돋은 연분홍 빛 입술 또한 무척이나 돋보인다. 갸름한 얼굴을 덮고 있는 머리카락은 결 좋아 보이는 긴 생머리였다. 청순가련의 상징이라 볼 수 있는 흔한 머리였지만, 곧게 선 차소림의 태도와 대비하면 나약한 인상은 아니었다. 동정심을 유발하는 애틋한 모습이 아닌, 오히려 깨끗하고 강인해 보이는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었다. 차소림의 단정한 외관을 보고 있자 절로 흐뭇한 마음이 일었다. 혹여 '천하무쌍'을 봤을 때처럼 실망하면 어쩌나 했는데, 기억 속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래서야…. 아프다고 보이기가 어려울 정도야.' 말인즉슨 차소림의 자기 관리가 뛰어나다는 방증이었다. 또한 '척'을 하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아프다는 점을 일부러 드러냈다면 크게 실망할뻔했는데, 눈에 보이는 곧은 태도는 본연의 강직함과 침착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동안 말이 없자 어색함을 느꼈던 걸까. 연한 쌍꺼풀이 진 눈을 깜빡이더니 잔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머셔너리 로드. 동료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사죄해야 할지요.” “동료? 주인과 노예 관계로 들었는데…. 아무튼 이 사건에 대해서 사용자 차소림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따로 생각할게 있겠습니까. 관리하지 못한 명백한 불찰입니다. 그저 유구무언의 마음뿐이지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습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힘겹게 머리를 숙였다. 몸이 불편하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 듯 간단한 행동에도 묻어나는 부자연스러움이 간간이 눈에 밟힌다. “처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래도 염치없는 바람이 있다면, 부디 목숨만은 보전해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처분을 기다리겠다는 말투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 슬슬 작업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에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차소림(3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창술사(Normal, Lancer,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조용한 사냥꾼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4) 7. 신장 • 체중 : 170.7cm • 49.8kg 8. 성향 : 질서 • 신념(Lawful • Belief) [근력 89] [내구 83] [민첩 95] [체력 88] [마력 91] [행운 77] (잔여 능력치는 2포인트입니다.) (리치의 정신 계열 공격으로 영혼에 심대한 타격을 입은 상태입니다. 현재 상당 부분이 진행된 상태로 더욱 시간이 흐를 경우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잔여 능력치가 2포인트?' 차소림의 사용자 정보를 보며 나는 짧게 숨을 삼켰다. 수준은 둘째 치고서라도 아직 잔여 능력치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아마 그녀가 사용자 정보를 가벼이 여기지 않고 깊게 연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좋게 생각해서 그런 걸까. 차소림이 점점 더 마음에 드는 게 느껴졌다. “사용자 차소림. 처벌을 받으신다고 하셨지만 상황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네.” “뱀파이어가 침입해 가져가려고 한 물건은, 우리 쪽에서 극비를 요하는 물건입니다. 즉 세상에 알려져서 하등 좋을 게 없는 물건이지요. 그게 어떤 건지 아시겠습니까?” “정확히 듣지는 못했지만…. 대충 짐작은 갑니다.” 차소림은 솔직히 대답했다. 하기야 그동안 엘릭서를 목을 매고 찾아 다녔다고 하니 모를 리는 없을 터. “중요한 건 뱀파이어가 창고 침입에 성공했고, 엘릭서를 들고나오기까지 했습니다. 제가 우려하는 바는 바로 이 부분에 있습니다.” “그는 거주민이니 계약서의 영향을 받습니다. 제가 바로 계약서를 갱신할 테니….” “그럼 신전에서 알게 되겠지요.” “…그렇군요.” “또한 사용자 차소림도 이제 알고 있는 상황이라고 봐야 합니다. 사용자 차소림? 이 사건을 단순히 절도 문제로 국한하기에는, 현재 우리 입장이 굉장히 난처한 상황입니다.” 장황하게 늘어놓기는 했지만, 말인즉슨 머셔너리의 비밀을 알게 된 너희를 곱게 처리할 수는 없다는 소리였다. 차소림은 가면 갈수록 말이 없어졌다. 스스로 생각에도 할 말이 없는 모양. 이건 단순한 보상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아마 내가 그녀의 입장이었다면 상황이 더럽게 꼬였다고 욕하고 있을지도.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저로서는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비밀 유지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처형이겠지요. 제가, 그리고 우리 클랜원들이 과연 두 분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즉답했다. 그 순간 차소림의 안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 '죄는 건 이만해야겠군.' 아무리 맞는 말이라고는 하지만 계속해서 몰아붙였다간 반감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 이제는 슬그머니 살길을 열어줄 타이밍이었다. “물론 사용자 차소림의 입장도 이해는 합니다. 본인이 지시하지 않은 일인데, 매우 억울할 겁니다.” “아니요. 가슴이 답답하긴 하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도피할 생각은 없습니다.” “…흠. 그 뱀파이어를 굉장히 아끼시나 보군요. 고작 괴물에 불과할진대….” 사실 뱀파이어는 바로 처분해도 상관없지만 차소림은 조금 복잡한 경우였다. 그녀가 책임을 지겠다고 하니 망정이지, 자기가 지시한 일이 아니라 뻗대었다면 나도 꽤나 난감했을 것이다. 하여 슬쩍 떠보려는 의미로 말하자 차소림은 쓰게 웃었다. “처음에는 저를 무작정 쫓아다니는 게 부담스러웠고 이해도 되지 않았지요.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저를 정말 좋아하고 따르는 동료입니다. 그리고 제가 힘들 때 옆을 지켜준 유일한 이고요. 계약서를 쓰기는 했지만 그를 노예가 아닌 친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충심의 아이콘이라 그런지 답변 또한 예상대로였다. 차소림이 말을 이었다. “머셔너리 로드. 부탁하겠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단 한 가지 부탁이 있다면 목숨만은 보전해달라는 겁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어떤 처벌이라도 감내하겠습니다.” “음….” 다시 한 번 꾸벅하는 차소림. 나는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잠긴 척을 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도 극단적인 방법을 쓰기는 싫습니다.” 뭔가 길이 열리려는 것을 느꼈는지 차소림의 고개가 서서히 올라왔다. “처음에는 처형도 생각했지만…. 사용자 차소림의 자세를 보니 마음이 흔들립니다. 조금이라도 책임을 전가하거나 뻗대려는 모습이 보이면 몰랐을 텐데, 당신은 진지하게 문제를 생각하고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였거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당신에게 호감이 있습니다. 아니, 조금 전에 생겼습니다.” “네? 아…. 가, 감사합니다.” 처음으로 차소림의 얼굴에 변화가 생겼다. 왠지 모르게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아마 호감이 있다는, 직접적인 화법에 자못 당황한 모양이다. 그래도 약간이나마 안색이 밝아진걸 보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듯싶다. “그래요. 생각해보면 굳이 살인멸구를 하지 않더라도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겠지요. 물론 거기에는 사용자 차소림의 동의가 있어야겠지만요.” “그게 어떤 방법입니까?” 반색하며 되묻는 차소림을 향해 나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 조용히 손가락을 들어 그녀를 가리켰다. “당신입니다.” “네?” “사용자 차소림. 저는 당신을 원합니다.” 나름 회심의 말이라 생각해 꺼낸 말이었다. 그러나 일순 차소림의 태도가 딱딱히 경직됐다. 그러더니 잔잔했던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실망감이 차오른다. '왜 저러는 거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차소림의 성격상 이리저리 재기보다는 솔직한 속마음을 밝히고 신뢰를 얻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러 호감이 있다는 말도 했는데 그녀의 반응은 내가 생각한 게 아니었다. “싫으신 겁니까?” 차소림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 가만히 생각에 잠긴 얼굴. 그러더니 갑자기 주먹을 꾹 쥐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머셔너리 로드. 정녕…. 그것을 원하시는 겁니까?” “살인멸구를 제외한다면 떠오르는 방법이 하나밖에는 없습니다.” 그건 바로 같은 가족이 되는 것. 내 확답에 차소림이 질끈 눈을 감는다. 그리고 부르르 몸을 떨기까지. 뭔가 굉장히 수치심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나쁜 클랜인가?' 그래도 좋게 봐주었는데. 약간 서운한 마음이 들어 입술을 깨물 즈음, 차소림이 깊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후유. 머셔너리 로드의 뜻은 알겠습니다.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실로 부족한 몸이라 생각하지만, 잘 부탁합니다.” 그러더니 번쩍 눈을 떠 처연한 눈길로 날 응시한다. “저 그러면…. 얼마나…. 그, 그걸…. 해야 합니까?” 마침내 허락이 떨어졌다. 뭘 해야 한다는 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일단 절반은 잡았다는 생각에 나는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흠칫 몸을 떠는 차소림.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본인의 동의는 얻었다. 하지만 차소림의 가입은 앞선 이들처럼 단순한 발표로 끝날 문제는 아니었다. 그냥 이대로 가입시키는 방법도 있겠지만, 이렇게 문제가 끼었을 경우 미리미리 해소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래야 차후 발생할 불화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을테니. 그러니 앞선 사건에 대한 문제를 정확히 짚고 클랜원들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혹여 반대하는 의견이 나오면 설득하는 절차를 필수로 거쳐야 한다. 나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글쎄요. 이번에는 저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니라서요. 클랜원들의 의견도 들어봐야 합니다.” “…네?” “회의가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응접실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에…. 에?” “…왜 그러시죠?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아…. 아! 아, 아, 아, 아닙니다!” 차소림은 멍한 얼굴로 날 멀거니 쳐다보았다. 그 얼이 빠진 얼굴이 자못 낯설게 느껴졌지만 나는 담담히 호출석을 꺼냈다. 일단은 회의를 열 생각이었다. ============================ 작품 후기 ============================ 많이 늦었네요. 그래도 최대한 빠르게 집필하려 노력했습니다. 죄송합니다. _(__)_ 음. 아쉽지만 외전에 모든 내용이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제 솔직한 심정은 얼른 외전을 마무리 짓고 2부로 들어가고 싶거든요. 주구장창 외전만 연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ㅜ.ㅠ 일단 남은 내용은 정해졌는데…. 혹시 꼭 보고 싶은 외전이라도 있으신가요? 다는 장담 못하지만 그래도 몇 가지는 최대한 곁들이는 방향으로 가보겠습니다. 0417 / 0933 ---------------------------------------------- 8. 가장 갖고 싶었던 사용자(3/3). “…그럼 이 사건에 대해서 클랜원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나는 조용히 말을 마치고 나서 전방을 응시했다. 머셔너리 하우스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개방한 4층 회의실에는 고요한 적막감이 흐르고 있었다. 상황 설명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한다. 요지도 간단하다. 차소림에게 죄를 덮을 기회를 주자고 했을 뿐이다. 그러나 뱀파이어의 침입으로 선입관이 생긴 걸까? 눈에 보이는 클랜원들의 얼굴빛이 하나같이 미묘하기 그지없다. 그때였다. 탁. “말도 안 돼. 오빠! 나는 절대로 반대야!” 테이블을 가볍게 치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유정의 성난 음색이 회의실을 울렸다. 아미(蛾眉)를 있는 대로 치켜 올린걸 보니 차소림을 클랜원으로 받아들이는 게 영 마땅찮은 듯 보였다. “생각해봐. 오빠는….” “유정아.” 그리고 다시 말문을 열려는 찰나 하연이 유정의 말을 가로막는다. 그리고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자 유정은 순간 흠칫했다. 이내 어색이 목을 가다듬는걸 보니 이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모양이다. “죄, 죄송해요…. 그래도 클랜 로드님. 차소림과 뱀파이어에 대한 영입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어요.” “다시 생각해보라…. 흠. 그럼 사용자 이유정이 반대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그, 그건….” 처음 기세와는 다르게 유정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오히려 궁색이 더듬는 걸 보아하니 명확한 이유는 없는 게 분명하다. 회의 전 “걸어오는 꼬락서니 봤어? 도둑년 주제에 당당한 게 마음에 안 들어!”라 외치는 소리를 들었는데, 아마 엘릭서가 도난 당할뻔했다는 사실에 선입관이 단단히 박힌듯했다. “그…. 뱀파이어는 괴물이고…. 괴물을 받아들이면 불안하기도 하고…. 주변에서 어떻게 볼지도 걱정되고…. 그, 그래요. 클랜 로드님도 그러셨잖아요. 요즘 주시하는 사용자들이 많으니 행동거지를 조심하라고….” 스스로 생각해도 궁색하다고 느꼈는지 유정은 조심스레 말끝을 흐렸다. 사실 유정의 주장은 아주 잘못 짚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기우(杞憂)에 불과하다. 이제부터 설득을 시작해야 한다. 하여 잠시 동안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용자 이유정의 말대로 뱀파이어는 괴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뿐입니다. 분명히 드문 사례이기는 하지만, 홀 플레인에는 괴물이나 거주민이 사용자의 동료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 주변 시선에 대해서는 딱히 걱정할건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떻느냐는 의미로 응시하자 유정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이해는 했으되 납득한 얼굴은 아니었다. '정말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 다른 클랜원들로 시선을 돌렸다.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로 가부를 가늠하려 했다면 회의 자체를 열지 않았을 터. 현재 회의실에 자리한 클랜원은 교관으로 파견된 고연주를 제외한 전원이 모여있었다. 그러니 다른 클랜원들의 생각 또한 들어보고 싶었다. “아무튼 내 생각은 이래….” “하지만 언니. 그건 아직 잘 모르는 거잖아요. 그리고….” 한 쪽에서는 하연과 한나가 소리를 죽인 채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영감님은 눈을 지그시 감은 게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었고, 안솔은 아까부터 뭔가 말하고 싶은지 입술을 달싹이며 고민하고 있다. 그에 반해 근래 들어온 클랜원은 비교적 조용했다. 이런저런 생각은 하는 듯 보였지만 아직은 눈치를 보는 느낌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각자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비로소 하연과 한나의 얼굴이 떨어졌다. 서로 머리를 끄덕이는 걸로 보아 이제야 의견을 종합한 모양이다. 하여 그쪽에 시선을 두고 있자 이내 하연이 머리를 돌려 나를 마주한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을 무렵, 하늘색이 감도는 머리칼 사이로 분홍빛 입술이 자그맣게 떼어졌다. “클랜 로드. 사용자 차소림과 뱀파이어를 받아들이는 건 약간 불안하지 않을까요?” 누구처럼 대놓고 반대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반대를 완곡히 돌려 말한 것일 뿐, 뜻은 똑같다. 나는 바로 되물었다. “어떤 부분이 불안하신가요?” “우스갯소리이기는 하지만, 야한 동영상에 대해서 이런 말이 있어요. 한 번도 보지 않은 사람은 있지만,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는 말이요.” 순간 좌우로 미약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런 자리에서 꺼낼 말은 아니었지만, 회의실에 가득 찼던 긴장감이 약간은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나 또한 싱겁게 웃음을 터뜨리고 하연을 쳐다보았다. 정작 말을 꺼낸 그녀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이었다. 하기야 하연의 성격에 괜한 말을 꺼낼 리는 없다. 나는 잠깐 동안 테이블을 두드렸다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사용자 정하연은…. 재범의 발생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군요.” “이미 창고는 한 번 뚫렸으니까요. 또한 뱀파이어가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높으니, 언제라도 똑같은 일을 저지를 수 있다고 봐요.” “그리고요?” “이것뿐만이 아니에요. 사용자 차소림은 현재….” 하연의 말을 들으며 나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때였다. 내 미소에서 뭔가 느꼈는지, 자신 있게 말을 잇던 하연이 일순 아차 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하연의 말은 간단하지만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그건 바로 불안감이었다. 한 번 전례가 있는 만큼 재범의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머셔너리 하우스 안으로 받아들일 경우 그러한 가능성은 더더욱 높아질 것이다. 따져보면 사실상 그녀의 말은 정론이었다. 그러나 하연이 간과한 게 몇 가지 있었다. “사용자 정하연. 확실히 뱀파이어는 창고에 침입했고 보안을 뚫었습니다. 그리고 엘릭서를 훔쳤지요.” “…네.” “그게 잘했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이 부분에서 관점을 달리하고 싶습니다.” 이윽고 나는 차분히 설득을 시작했다. 요점은 바로 뱀파이어가 엘릭서'만' 훔쳤다는 점이다. 실제로 엘릭서 한 병을 제외하면 창고 안의 물건은 모두 그대로 놓여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주인인 차소림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머셔너리 쪽에서 차소림을 치료하면 뱀파이어는 더는 창고를 털고 다닐 이유가 없다. 그녀의 상처가 '설정'인 이상, 화정이나 기적으로 충분히 치료가 가능할 것이다. “하, 하지만 굳이 엘릭서가 아니더라도….” “뱀파이어는 거주민입니다. 정 불안하면 그 부분에 대해서 사용자 차소림에게 계약서 갱신을 부탁하면 됩니다.” 하연은 한 번 더 입을 열었지만 나는 바로 받아 쳤다. 그녀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멋쩍게 미소 지었다. 보아하니 어느 정도 납득한 듯싶었다. 솔직히 더는 할 말이 없기도 할 테고. 이로서 조금 전 설명은 모든 클랜원들이 들었을 것이다. 시선을 들자 내 말을 일리 있다고 생각했는지, 몇 명이 머리를 끄덕끄덕 주억이는 게 보인다. 그러더니 한 쪽에서 누군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영감님이었다. “클랜 로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 늙은이도 한 마디 거들고 싶습니다.” “허락합니다.” 머리를 끄덕이자 영감님은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허허…. 다른 분들의 심정은 익히 짐작합니다. 소중한 물건이 도난 당할뻔한 것에 깜짝 놀랐을 테고 또한 화도 나겠지요. 그 마음은 십분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 늙은이는 그래도 클랜 로드의 의견에 공감합니다.” 영감님의 목소리는 손주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처럼 잔잔하고 부드러웠다. 뭔가 연륜이 느껴지는 목소리랄까. 나는 더욱 집중했다. “사용자 차소림은 엘릭서를 훔치라 지시하지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뱀파이어의 독단이었지요. 아마 그녀가 느끼기에도 억울한 감이 없잖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찾아왔고, 깊이 사죄했으며, 여러분들의 용서를 구하고 있지요.”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었다. 나는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속으로 파이팅을 외쳤다. “부디 그러한 점을 판단해 한 번은 기회를 주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히려 끌어안는 게 더 좋은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살인멸구보다는 말이지요.” 침착히 말을 매듭지은 영감님은 이내 느릿하게 자리에 앉았다. 영감님이 마지막에 남긴 말은 꽤나 의미심장했다. 살인멸구보다 끌어안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 영감님 또한 사용자 차소림을 둘러싼 상황이 애매하다는 걸 느낀 모양이다. 아무튼. 처음으로 찬성표가 나왔다. 영감님의 의견을 실로 좋은 타이밍에 나왔다고 볼 수 있었다. 유정, 하연의 반대를 설득하며 조금씩 넘어오던 분위기가 영감님의 찬성으로 확실히 힘이 실린 것이다. “혹시 다른 의견이 있는 클랜원 있습니까?” 하여 이 기세를 몰아볼 생각에 바로 입을 열었고, 다른 의견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아직 탐탁잖아 보이는 이가 한둘은 있었지만 결국에는 입을 다물었다. 이쯤이면 되었다는 생각에 나는 안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사용자 안현. 가서 두 명을 회의실로 데리고 오도록.” “예? 아, 알겠습니다.” 그동안 조용히 앉아있던 안현은 순간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이놈 회의는 안 듣고 다른 생각에 빠져있었군. 이내 안현이 재빠르게 회의실을 나서는 걸 보며 난 입술에 침을 적셨다. *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차소림과 뱀파이어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둘을 중앙으로 인도한 안현이 도로 자리에 앉은 후, 나는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다. 처분을 기다리는 동안 꽤나 노심초사했는지 차소림은 한껏 긴장한 기색이었다. 이윽고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용자 차소림.” “네.” “당신의 실력을 보고 싶습니다.” “네, 네?” 차소림은 매우 당황한 음색으로 대답했다. “클랜원들과 회의한 결과 사용자 차소림과 뱀파이어에게 한 번 기회를 줘보자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붙어있습니다.” “그 조건이….” “바로 사용자 차소림의 실력입니다.” 실력을 보아야 한다는 말은 바로 한별의 의견에서 나온 말이었다. 일단 받아들이기로 결정은 났으나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테스트가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왜 저러는 거지?’ 차소림은 한동안 멍한 얼굴이었다. 그러면서 흘끔흘끔 주변을 둘러보는 게 마치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 같기도 했다. 이윽고 차소림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 하지만…. 저는 아직 처음이고…. 경험도 없으며…. 하물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자신이 없는 건가?’ 순간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차소림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몸이 불편한 상황이다. 이러할진대 자신이 전력을 내보일 수 있을지 궁금했으리라. 아무튼 그 정도로 잔인하지는 않기에 나는 걱정 말라는 뜻으로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용자 차소림의 몸 상태를 감안하여, 지금 바로 하는 게 아니라 우선 몸을 치료한 후 테스트할 예정입니다.” 그때였다. ‘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차소림은 눈을 번쩍 떠 머리를 들었다. “제, 제 몸을 치료해주신다는 말입니까?” “예.” “그럼…. 설마!” “엘릭서는 아닙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엘릭서가 아니더라도 머셔너리에는 사용자 차소림을 치료할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도 두 가지나요.” “그게 정말인가!” 뱀파이어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만일 이 두 방법이 먹히지 않는다면, 엘릭서를 사용해서라도 사용자 차소림의 몸을 치료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아.” 회의실에는 나 말고도 머셔너리 클랜원 전원이 착석한 상태였다. 그런 만큼 방금 발언은 그냥 해본 말이 아닌 실제로 유효한 공신력을 갖고 있다. 차소림은 멀거니 나를 응시했다. 눈을 쉴 새 없이 깜빡이는 게 뭔가 매우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자 약간이지만 가슴이 따끔해지는걸 느꼈다. 사실 화정이나 기적으로 치료할 자신이 있기에 꺼낸 말이었지, 엘릭서를 사용한다는 말은 일종의 생색이었다. 차소림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답했다. “그, 그 편이 좋으시다면…. 아, 아무튼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들어보니 창 솜씨가 일품이라고 하던데. 기대하겠습니다.” 이윽고 머리를 꾸벅하는 차소림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네?” 한순간 차소림의 움직임이 멈췄다. 시선을 들어보니 마치 흐르는 시간 속에서 홀로 정지한 것처럼 보였다. “창 솜씨…? 아, 아!” 그렇게 10초의 시간이 흘렀을까? 시종일관 어색하던 차소림의 얼굴에서 마침내 또렷한 표정이 생겨났다. 이내 안면이 붉게 달아오르고 내 시선을 회피하는 게 무척 창피해하는 모습이었다. 흡사 몰라 몰라를 외치는 소녀처럼 보였다고나 할까? “사용자 차소림. 무슨 문제라도?” “아, 아닙니다!” 큰소리로 대답한 차소림은 이내 숨을 색색 몰아 쉬었다. 그러더니 뭔가 확인해보겠다는 듯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저, 저. 그럼 테스트에 합격하면 저는 앞으로 이곳에서 지내게 되는 겁니까?” “아마 그렇겠지요?” “후. 그렇군요…. 그랬구나…. 머셔너리….” 잠시 후, 차소림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서서히 얼굴이 안정되고 본연의 침착한 모습으로 돌아오는걸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의외로 당황하는 것 같아 불안했는데 저 모습을 보자 적잖이 안심할 수 있었다. 이윽고 차소림은 형형히 빛나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뜻이었다면…. 알겠습니다. 어차피 쓸모 없어진 몸뚱어리. 다시 살아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는 언제나처럼 똑같은 멘트로 답했다. “머셔너리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 작품 후기 ============================ 정오에 겨우 세이프했네요. ㅜ.ㅠ 아. 저번회 코멘트를 읽어보니 재미있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몇몇 분들은 실망하실지 모르겠지만, 차소림은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랍니다. 저번에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안현과 꽁냥꽁냥 하겠다고 말씀드렸지요? 차소림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하하하. :) 0418 / 0933 ---------------------------------------------- 9. 머셔너리의 소소한 일상(2/2). “기적(Miracle)!” 안솔의 전신에서 찬란한 빛이 솟구쳤다. 천장에 닿은 새하얀 빛살은 둥그런 타원을 그렸고, 중앙으로 하얀 날개를 펄럭이는 고결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고요히 눈을 감은 그녀는 영락없는 천사의 모습이었다. “와….” 이내 방 내부가 빛으로 가득 물들자 침대에 누워있던 차소림이 미약한 탄성을 터뜨렸다. 하기야 광휘의 사제(Brilliance Priest) 고유 능력 '기적'은 실제 효능이 좋은 만큼 시각 효과도 매우 화려하고 아름답다. 이윽고 천천히 눈을 뜬 천사는 소원을 말하라는 듯 안솔을 내려다보았다. 안솔은 차소림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천사 님, 천사 님. 이분이 리치에 당한 상처를 치료해주세요.” 어려울 건 없다는 듯 천사는 자애로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 천사를 보며 안솔을 고개를 갸웃했다. 이윽고 천사의 손이 차소림을 향하려는 찰나, 안솔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아! 차라리 몸 상태 전부를 회복해주시면 어떨까요? 이왕 치료해주시는 거 서비스 좀 팍팍 넣어주세요.” 천사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면 눈이 착각을 일으킨 걸까? 이내 떨떠름히 머리를 끄덕이는 천사를 보며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천사를 상대로 서비스를 논하다니. 얘도 참 어지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안솔을 얕보고 있었다. “으~응. 잠시만요. 천사 님, 천사 님. 생각해보니 우리 지금 보고 한동안 못 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수현이 오라버니도 치료해주세요. 요새 무척 피곤해하시는 것 같아서 너무 안쓰러워요. 해주실 거죠? 네?” 순간 천사가 나를 쏘아본다. 아니 왜 날 노려봐. 난 잘못 없어 이 사람아. 아니 이 천사야. “아, 아니다. 그러면 다른 분들이 섭섭해하실 수도 있으니까…. 에이, 그냥 머셔너리 하우스에 있는 전원을 회복해주세요. 그 있잖아요? 전쟁에서 해주셨던 거. 그 정도면 충분할거 같아요. 헤헤.” 안솔은 혼자서 끄덕끄덕하며 해맑게 미소 지었다. 나는 감탄했다. 세상에. “그 있잖아요? 전쟁에서 해주셨던 거.”란다. 신성 주문 중에서 가히 최고 수준이라 부를 수 있는 게 바로 기적인데, 흡사 뉘 집 개 이름 부르듯 불러대는 안솔의 작태는 실로 대단함 그 자체였다. 천사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어이없다는 눈길로 안솔을 내려다보니, 이번에는 착시가 아니라는걸 알 수 있었다. 안솔도 천사의 눈길을 느꼈는지 금세 미소를 지웠다. 그리고 시무룩이 어깨를 늘어뜨리더니 입을 삐죽거렸다. “그냥 하고 싶은 데로 해주세요….” 천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꼭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꽉 쥔 손을 피더니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그 모습 하나하나가 성스러워 보였지만 왜 갑자기 하기 싫은 티가 팍팍 나는 걸까? 번쩍! 『모든 체력이 회복됩니다!』 『모든 마력이 회복됩니다!』 『모든 상태 이상이 회복됩니다!』 이윽고 눈이 멀 정도의 큰 빛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전에 한 번 보았던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 동시에 전신에 활력이 가득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영역 선포(Area Declared)'를 사용한 이후 이따금 몸이 찌뿌둥할 때가 있었는데, 그러한 거북함이 눈 녹듯 사라진 기분이었다. 비단 나만 그런 게 아닌 듯 옆쪽에 서 있던 안현과 유정이 쌍으로 호들갑을 떠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적의 천사. 이러나저러나 일단 안솔이 해달라는 대로 해준 모양이다. 어쩌면 안솔이 상재에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심각히 고려하며 나는 침대를 응시했다. 어느덧 모두의 몸에 스며든 빛도 서서히 사그라지는 중이었다. “끝난…. 겁니까?” “네. 끝났어요. 한 번 움직여보시겠어요?” 차소림은 반신반의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안솔의 말대로 조심스레 팔을 움직이더니 일순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어, 어?!” 몇 번이고 팔을 움직인 차소림은 얼른 몸을 반듯이 세웠다. 그리고 하나하나 점검하려는 듯 느릿하게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녀의 움직임에서 전에 보였던 부자연스러움이 더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주인이여! 정말로 상처가 회복된 건가?” “그, 그래.” “정말로? 참말로?” “그렇다니까.” 이제야 치료가 됐다고 확신한 걸까. 차소림은 득달같이 달려드는 뱀파이어를 밀어내며 떨리는 눈망울로 날 응시했다. 그러나 난 조용히 머리를 가로젓고 안솔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차소림은 놀란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이내 침대에서 내려와 안솔의 손을 꼭 쥐었다. “사, 사용자 안솔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안솔은 싱글벙글. 그러고 보니 전쟁 후 가끔씩 신전에 자원 봉사를 하러 나간다고 들었다. 평소 약간 엉뚱한 면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도왔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큰 기쁨으로 다가오는가 보다. “몸이…. 완전히 회복됐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좋아진 느낌입니다. 정말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뭘요. 회복되셨다니 다행이에요.” “우호호호!” 안솔은 우쭐한 얼굴로 겸양을 떨자 뱀파이어는 즉시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양팔을 넓게 펼치더니 과장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안솔! 이름이 안솔이시군요! 이게 바로 기적입니까? 당신이 홀 플레인의 성녀인 겁니까?” “네…? 에, 에이. 성녀라뇨. 그냥 평범한 사제일 뿐인걸요. 헤헤.” 한 마디로 오버였다. 안솔은 자상한 얼굴로 뱀파이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한없이 자애로운 얼굴로 조용히 그를 일으켰다. “자, 일어나세요. 자꾸 이러시면 제가 너무 곤란하잖아요.” “하, 하지만…! 그렇지만…!” “저는 성녀가 아니에요. 기적은 노력하는 자에게 우연이라는 다리를 놓아주는 법. 오늘의 기적은 그대의 노력이 보답을 받은 날이에요. 그러니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겨주세요.” “서, 성녀님!” '얼씨구.' 둘이서 북치고 장구치고 노래도 한다. 뱀파이어는 발광했다. 그리고 차소림은 어색한 얼굴로 간신히 웃음짓고 있었다. 더는 못 보겠어 고개를 돌리자, 마찬가지로 서로를 꼭 붙들고 있는 안현과 이유정이 보였다. 오, 보기 좋은데. “으으…. 쟤…. 내 동생 맞아? 그동안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미친 거 아냐? 요즘 신전에 자원 봉사 다녀오더니만 착각 한 번 잘하네. 어휴, 소름 돋아.” “야. 이유정. 그래도 내 동생이라고. 말조심 좀 해라.” “꼴에 동생이라고…. 응?” 이제야 이상한 기분을 느꼈는지 유정은 미간을 좁히며 안현을 응시했다. 안현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유정을 더욱 끌어안고 있었다. “야, 야! 안현?” “아 가만히 좀 있어봐. 안 그래도 오그라드는데.” 안현의 무덤덤한 말에 유정의 얼굴이 와짝 일그러졌다. 그렇게 3초의 시간이 흘렀다. 퍽! “미친 변태 새끼!” “크헉!” 유정은 걸쭉한 욕설을 내뱉으며 복부를 강타했고, 쓰러진 안현에게 거센 발길질을 선사했다. 한동안 성난 고양이처럼 갸르릉거리던 유정은 씩씩 숨을 몰아 쉬며 나를 돌아보았다. “하여간 방심할 수가 없어요. 앙?!” “누, 누가 네 몸을….” 퍽! “닥쳐! 오빠! 쟤가 나한테 변태 짓 했어!” 그리고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게 착 달라붙어 몸을 껴안았다. 제법 무르익은 육체라 그런지 여인 특유의 향기가 코를 푹 찔러 들었다. 나는 어이없는 마음에 물었다. “…그럼 너는 뭐 하는 건데?” “으응. 정화. 안현에게 더럽혀진 몸을 정화하는 거니까…. 신경 쓰지마…. 으으응, 이거 좋은데….” “아니. 안현이 바퀴벌레는 아니잖아.” “아니야 오빠. 안현은 바퀴벌레야.” 유정은 단언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은 후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음을 흘리는 유정과 신음을 흘리는 안현. 뱀파이어는 여전히 찬양에 여념이 없고, 안솔은…. 말도 하기 싫다. 그 중에서 오직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차소림만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에 벌겋게 달아오른 게, 아마 어떻게든 안솔과 뱀파이어에 적응하려다가 결국 포기한 모양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왜 동질감이 느껴지는 걸까…?' 까닭 없이 느껴지는 익숙한 기분. 차소림은 이해한다는 눈길로 나를 마주했다. 이윽고 나와 차소림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 차소림이 머셔너리 클랜에 들어온 지도 며칠의 시일이 흘렀다. 어느덧 완전히 몸을 회복한 그녀는 예전에 약속한 테스트를 보고 싶다고 요청했다. 솔직히 차소림에게 테스트는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녀의 실력은 익히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제 3의 눈이 없는 클랜원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기에, 나는 차소림의 요청을 받아들여 정원에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클랜원들이 모여있는 정원은 고요한 적막과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바로 안현과 차소림이 서 있었다. 두 명은 각자 창을 든 채 서로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테스트의 방식은 바로 '대련'. 사실 차소림의 상대가 안현인 건 약간 어폐가 있는 말이었다. 나 또한 원래는 남다은을 상대로 붙일 예정이었고. 그러나 테스트를 공지했을 당시, 안현은 차소림의 상대를 자신으로 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그동안 열심히 연습한 것도 있고 같은 창술사다 보니 호승심이 이는 모양이다. 그 간절한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나는 결국 허락하고 말았다. 기실(其實) 차소림 입장에서는 안현이 상대로 나온 게 더욱 부담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만일 상대가 남다은이었다면 약간만 선전해도 클랜원들은 납득했을 것이다. 그녀는 검후라는 명성이 있으니까. 그러나 안현은 차소림보다 저년 차 사용자였다. 즉 누구도 불만을 제기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으로 이겨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하지만 나는 만일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았다. 안현이 레어 클래스고 동년 차에 비해 수준이 높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갓 1년 차에 오른 애송이에 불과하다. 진심을 다한 차소림을 이긴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슬슬 시작하겠군.' 테스트가 시작하고 서로를 응시한 채 2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은 건 안현의 흑색 창이었다. 허공을 살랑살랑 부드러이 유영하는 안현의 창 끝은 상대의 시야를 어지럽히며 한순간 공격할 수 있는 포인트를 찾고 있었다. 그에 반해 차소림의 자세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굉장히 편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 창 끝을 비스듬히 아래로 늘어뜨리고 정면도 텅 비워놓은 상태였다. 마치 틈을 줄 테니 공격하려면 공격해보라 도발하는 자세였다. 다만 살짝 치켜 뜬 눈동자는 끈임 없이 안현의 전신을 주시하고 있다. 이윽고 안현의 왼손이 움직였다. 오른손은 여전히 창을 흔들고 있었지만 왼손으로 창의 반대 부분에 슬쩍 손을 얹은 것이다. 동시에 자세도 조금씩 조금씩 구부러지는 게, 순간적으로 치고 나갈 것이라 예상되었다. 이윽고, 안현의 발에 힘이 들어갔다 생각됐을 때였다. 휙! “헉!” 차소림이 가볍게 창을 휘둘렀다. 사실상 아무런 의미 없는 휘두름이었지만 안현은 깜짝 놀라 허리를 크게 젖혔다. '쯧.' 멍청한 회피 동작. 기껏 예리하게 잡았던 자세가 엉망으로 흐트러져버렸다. 고수를 앞에 두고 일으킨 긴장이 과도하게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젖혀진 안현의 허리가 다시 돌아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욱 크게 기울어진다. 그러더니 허리를 크게 퉁기는 것과 함께 온몸을 던지듯 세차게 달려들었다. 기공창술사의 장점은 유연한 체술에 있다. 상대의 사각을 노리고 자신의 사각은 없앤다. 그들은 어떤 기형적인 자세에서라도 정확히 창을 내지르고 회피할 수 있다. 안현의 노림수도 바로 그것이었다. 자세가 흐트러진 것은 맞지만 그 순간을 역이용했다. 즉 '이 상태에서 공격할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라 여기고 들어간 것. 슈웅! 흑색 창이 허공을 가르며 앞으로 쭉 뻗어나간다. 그동안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는지 속도도 신속하고, 찔러 들어가는 궤적 또한 꽤나 깔끔하다. 거리는 순식간에 줄어들어 안현의 창이 차소림이 있던 자리를 꿰뚫으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의 발이 왼쪽으로 한 걸음 움직였다. '승부가 났군.' 나는 직감했다. 허를 찌른다는 의도는 좋았지만 안현은 교전이 아닌 일격필살을 선택했다. 즉 두 번의 여지는 없다는 것. 차소림은 애초부터 안현의 전신을 보고 있었다. 말인즉슨 창과 상체만이 아니라 하체 또한 주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안현의 허리에 비해 하체가 필요 이상으로 힘을 주고 버텼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터. 들어올 거라 알고 있는 이상 막는 것은 쉽다. 사실 차소림이 창을 휘둘렀을 때부터 승패는 갈라졌다. 곧 한 걸음 옆으로 피한 차소림은 안현의 창을 그대로 흘려 보냈다. 동시에 쥐고 있던 창을 그대로 쳐올려 안현의 복부를 후려쳤다. 퍽! “커헉!” 이윽고 안현이 바닥에 나뒹구는 것과 동시에 승부는 완벽하게 갈렸다. 차소림은 세 가지 동작만으로 안현을 제압한 것이다. 누구도 불만을 제기할 수 없는 테스트였다. 짝짝짝짝. 잠시 후, 이어지는 박수에 차소림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고 안현은 힘없이 떨구었다. 나 또한 가볍게 박수를 쳤다. 승자에게는 축하를, 패자에게는 위로를. 차소림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절대로 거만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좋은 승부였습니다.” “예, 예. 가, 감사합니다.” “몸은 좀 괜찮으신지요.” “괜찮은 것 같아요. 하, 하하.” 차소림은 한 번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기더니, 멍하니 앉아있는 안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안현은 미약한 탄성을 뱉었다. 그리고 차소림의 얼굴과 내밀어진 손을 번갈아 응시하더니 조심스레 맞잡았다. “그럼.” “자, 잠시만!” 이윽고 안현을 일으켜준 차소림은 나에게 다가와 섰다. 어땠느냐는 눈길에 나는 흡족히 입을 열었다. “테스트 합격을 축하합니다. 깨끗한 회피와 깔끔한 동작이 돋보였습니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니 다행입니다.” “앞으로 정식 클랜원으로 대우하겠습니다. 그럼, 다시 한 번 머셔너리에 오신걸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차소림은 슬쩍 눈을 내리깔더니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왠지 모르게 내 시선을 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잠시 머리를 갸웃했다가 아직 중앙에 남아있는 안현을 응시했다. 패배의 충격이 컸던 걸까. 안현은 자리에 가만히 선 채 자신의 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마 좌절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한참 동안 안현을 보다가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가시죠. 일단 식사를 마친 후 정식적인 클랜원의 절차를 밟도록 하겠습니다.” “절차라면…?” 차소림의 물음에 나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부로는 장비를 점검하거나 숙소를 배정하고, 외부로는 신분을 변경하는 게 있겠네요.” 차소림은 다시 한 번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는 여전히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 “이 방도 싫다.” “꺄아아아악!” 머셔너리 하우스 별관. 평소 클랜원들이 숙소로 사용하는 3층에 때아닌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러니 다른 방을 보여다오. 연금술사여.” “야! 적당히 하라고 적당히! 이게 벌써 몇 번째 방이야!” 비비앙은 절규했다. 원인은 바로 뱀파이어 '사샤 펠릭스' 때문이었다. 김수현은 차소림을 머셔너리 클랜원으로 등록하면서, 노예 관계인 뱀파이어도 함께 등록했다. 하여 등록소에서 절차를 마치고 난 후, 김수현은 비비앙에게 한 가지 특명을 내렸다. 그것은 바로 머셔너리 하우스를 안내하면서 숙소 등 여러 가지를 챙겨주라는 것. 거기에는 이제 서로 한솥밥을 먹게 됐으니, 예전의 기억은 잊고 한 번 친해져 보라는 깊은 뜻이 있었다. 그러나 역시나 문제는 터졌다. 기껏 밥 잘 먹고 구경 잘한 뱀파이어가 숙소를 고르는 과정에서 갑작스레 까다로워진 탓이다. 적당히 안내해주고 남다은에게 달려갈 생각이었던 비비앙은, 뱀파이어가 방을 고르는 과정을 보고는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뱀파이어가 방을 고르는 방법은 특이했지만, 과정 자체는 간단했다. 코를 킁킁거려 냄새를 맡고는 곧바로 방을 평가한다. 하지만 이유가 웃기다. 예를 들면 “춥다.”라던가, “냄새가 이상하다.”라던가,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다.”라던가 등등. 아무튼. 사정이야 어찌됐든, 단순한 냄새로 가부를 결정하는 모습에 비비앙은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너 말이야. 내가 사지 좀 잡아뜯고 고문 좀 했다고 이러는 거 아니야. 응? 유치해 진짜.” 당장에라도 얼굴을 할퀴려는 듯, 비비앙은 눈에 불을 키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나 뱀파이어는 의연했다. 대차게 콧방귀를 뀌더니 한심한 눈길을 보낸 것이다. “흥. 역시나 저급한 거미답군. 고작 방을 안내해주는 게 그리 어려운가.” “아니. 그러니까 이게 몇 번째냐고요. 너 지금 일부러 나 엿 먹이려고 그러는 거지?” “엿? 뱀파이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차라리 말을 하지 않을지언정.” 뱀파이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스스로 다른 방의 문을 열어 냄새를 맡았다. 그렇게 한동안 킁킁대더니 역시나 하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여기도 별로. 너무 척박하다.” “하…. 마음대로 해. 나 안 해. 아니. 못해!” 결국 비비앙은 참다못해 포기를 선언했다. “흠. 난 길을 잘 모르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또다시 혀를 쯧쯧 찬 뱀파이어는 느릿하게 걸어 또 하나의 문 앞에 섰다. “저게 진짜.” 안 하겠다고 했지만 비비앙의 시선은 뱀파이어를 쫓고 있었다. 그리고 가만히 지켜보던 그녀가 순간 다급히 외쳤다. “야, 잠깐! 거긴 주인 있는 방이야!” 그러나 뱀파이어는 이미 문을 벌컥 연 상태였다. 드러난 방은 가지런히 정리된 침대와 새하얀 사제 복들이 걸려있었다. 또한 벽에 걸린 예쁜 선반과 널빤지에 가득히 쌓인 찻잔이 아기자기한 느낌을 주는 방이었다. “킁킁. 킁킁킁.” 이내 얼굴만 슬쩍 들이밀어 냄새를 맡는 뱀파이어를 보며 비비앙은 욕지기를 내뱉었다. “야! 주인 있다고 했잖아!” “킁킁킁. 킁킁. 킁…?” “안 들려? 그 방은 안솔 방이라고!” 자신을 무시하는 행태에 열이 받았는지 비비앙이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더니 엉덩이라도 걷어찰 기세로 씩씩거리며 다가섰다. “너 지금…!”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우웨에에에엑!” “꺄아악! 꺄아아악!” 갑작스레 토악질을 하는 사샤 펠릭스. 비비앙은 기함해 후다닥 물러났고, 걸쭉한 욕지기를 내뱉었다. “미, 미친! 너 진짜 미쳤어?” “우욱! 으웨에엑!” 그러나 연거푸 헛구역질을 하는 모습이 거짓말 같지는 않다. 하여 비비앙은 눈을 동그랗게 떠 살피다가 조심스레 다가섰다. “야. 야?” “우욱…. 웁…!” “너 갑자기 왜 그래?” “허억…, 허억…. 제기랄! 도대체 이 방은 누구 방인가!” 쾅! “안솔 방이라고 했잖아.”라고 대답하려던 비비앙은 거세게 닫히는 문소리에 찔끔했다. 그리고 뱀파이어는 연신 입을 닦으며 경멸 어린 눈초리로 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젠장! 냄새를 맡는 게 아니었어…!” “왜, 왜 그러는데?” “침 냄새! 여인의 애액 냄새! 무슨 놈의 이런 변태적인 냄새가 진동을 하는가! 정말이지 지금껏 봐왔던 방 중 최악의 방이다!” 뭔가 단단히 한이 맺힌 듯, 가열차게 내뱉은 뱀파이어는 이내 몸을 휙 돌려 복도를 걸었다. “침? 애액?” 고개를 갸웃하던 비비앙.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가는 뱀파이어를 보다가 곧바로 뒤쫓기 시작했다. “또 어디 가는데?” “됐다. 혼자 보겠다.” “거기부터는 주인들이 있는 방이라고!” 조금 전 방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었던 걸까. 가장 복도 끝까지 걸어간 뱀파이어는 곧 어느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은 채 비비앙을 돌아보았다. “여기도 주인이 있는가?” “어? 거, 거긴….” “주인이 있는가?” “지금은…. 없는데.” “후유. 그럼 상관없겠지.” 뱀파이어는 곧바로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이내 방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이번 방에도 누군가 사용한 흔적은 있었다. 침대는 뽀얀 먼지가 살짝 쌓여있고 그 위로 빛 바랜 로브가 벽면에 걸려있었다. 책상에는 두꺼운 책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있고, 한 쪽에는 연금술에 사용되는 간단한 기구들이 놓여있었다. “잠시만!” 뒤늦게 들어온 비비앙은 문틀에서 잠시 멈칫했다. 이윽고 안을 들여다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잠깐이지만 아련하게 젖어 들었다. “킁킁, 킁킁킁.” 이내 코를 벌름거리는 뱀파이어를 보며 비비앙은 급히 팔을 잡아 끌었다. “자자. 여, 여기도 별로 지? 다른 방 보여줄 테니까, 4층으로 가보자.” “아니, 잠시만.” 그때였다. 비비앙의 팔을 뿌리진 사샤 펠릭스는 이내 살며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비앙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여태껏 밖에서 냄새만 맡던 뱀파이어가 처음으로 안쪽으로 발을 들인 것이다. “흐음, 흐으음.” 뭔가 마음에 드는 듯 비음을 뱉으며 방을 둘러보는 뱀파이어. 비비앙은 가만히 지켜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기는 어떤데?” “한심하다.” 뱀파이어는 즉답했다. 그와 동시에 비비앙의 눈살이 크게 찌푸려졌다. “뭐라고?” “기막히고, 딱하고, 한심스럽군. 깊이 고뇌하고 발버둥친 흔적이 이곳저곳에 아로새겨져 있어. 너무나 번거롭고 갑갑해 내 가슴이 답답해질 지경이야.” “하. 그래서 여기도 마음에 안 드신다?” “하지만.” 그때, 뱀파이어는 둘러보던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슬쩍 뒤를 돌아보더니 만족한 미소를 내비쳤다. “따뜻하다.” “…뭐?” “이상하군. 유독 이 방만이 온기가 있어. 음음. 아주 마음에 들어.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라고 했나? 주인이 없다면 나는 이 방으로 하겠다. 괜찮을까?” 그리고 고개를 끄덕끄덕 주억이는 뱀파이어를 보며 비비앙은 눈을 끔뻑였다. “…정말?” “그래.” “진짜로 이 방이 마음에 들어? 왜?” “흠…. 이 방만큼은 딱히 까닭은 없다. 그냥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뱀파이어는 침음을 흘릴 뿐 명확히 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사샤 펠릭스는 한참 동안 방안을 꼼꼼히 둘러보더니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이런 말이 있지. 계절도, 삶도 지독한 추위가 지나야 봄이 오는 법이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비비앙이 의아해하며 되묻자, 뱀파이어는 조용히 대답했다. “겨울이 가야 봄이 온다는 소리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아 팔을 벌려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기막히지만, 성실하다…. 딱하지만, 끈기가 느껴진다…. 한심하지만, 열정적이다…. 그래. 이 방은 마치….” 이윽고 뱀파이어는 잠깐 말을 멈췄다. 그러더니, 슬며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갓 겨울이 지난, 따뜻한 봄과 같지 않은가.” ============================ 작품 후기 ============================ 하하. 죄송합니다. 용량을 꾸역꾸역 집어넣다 보니 예상외로 집필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_(__)_ 저번 회 코멘트는 잘 보았습니다. 저 여러분. 한 가지 알려드릴게…. 뱀파이어는 남성체입니다. 여성체가 아니에요.(순간 제가 혹시 여성체로 서술했나 몇 번이고 다시 살폈습니다.) 그런데 안현이랑 뱀파이어를 이으면…. 탁 까놓고 말할게요. BL이잖아요. -_-a BL 싫어하시면서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ㅜ.ㅠ 아. 외전은 거의 끝났습니다. 지금 순번이 9잖아요? 외전은 순번 10에서 끝날 예정입니다. :D 0419 / 0933 ---------------------------------------------- 9. 머셔너리의 소소한 일상(2/2). 전쟁 전 머셔너리 클랜의 인원은 열세 명이었다. '신상용.' 그러나 전쟁을 거치면서 한 명이 사망했다. '남다은, 우정민, 선유운, 원혜수, 박현우, 차소림, 사샤 펠릭스.' 그리고 전쟁 후 일곱 명을 새로 받아들였다. 단시간에 기존 인원의 7할에 가까운 인원이 불어났다. 즉 현 머셔너리 클랜의 총인원은 열아홉 명으로 볼 수 있었다.(아기 유니콘은 일부러 제외했다.) 물론 수백을 상회하는 대형 클랜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 그러나 나는 인원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머셔너리는 양보다는 질을 추구하는 클랜이니까. 잘 키운 사용자 하나 열 사용자 안 부럽다라는 말이 있다. 어중이떠중이들로 부족한 인원을 채우는 것보다는, 싹이 보이는 사용자를 받아들여 집중적으로 밀어주는 게 훨씬 낫다는 소리다. 아니면 이미 싹을 틔워 꽃을 피운 사용자를 받아들이거나. 그러한 의미에서, 머셔너리 클랜은 수는 적지만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이들의 모임이었다. 이미 10강에 오른 사용자며, 시크릿, 레어 클래스며, 추후 10강에 될 가능성이 있는 사용자까지. 현재 머셔너리의 스쿼드는 누가 봐도 입을 벌릴 정도로 호화롭고 찬란하다. 나 또한 현재의 스쿼드에 큰불만은 없다. 그러나 큰불만이 없다는 말은 작은 불만은 있다는 소리였다. 불만이란 바로 클랜원들의 수준에 대한 불만이 아닌 태도에 대한 불만이었다. '클랜원이 클랜원 같지가 않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건 얼마 전 차소림의 처리 여부를 결정하는 회의서부터였다. 기존의 클랜원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했지만 최근 가입한 클랜원들은 우물쭈물한 모습을 보였다. 흡사 눈치를 보는듯한 태도였다고 할까? 왜 그러는지, 이유는 알고 있다. 새로 가입한 이들은 대부분 내게 신세를 진 입장이었다. 즉 머셔너리에서 편의 또는 사정을 봐주고 있는 만큼 눈치를 아예 안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상황이 계속 유지되면 그것 또한 곤란하다. 클랜 내의 구도가 여러모로 이상해져 버릴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그들도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클랜원으로서 원활히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기실 갑작스레 걱정을 하는 이유는, 이러한 문제는 내가 직접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성질이기 때문이다. 사람과의 관계는 스스로 노력해야 이루어지는 것이지 누가 시킨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후룩. 쓰디쓴 입을 차 한 모금으로 달래며 나는 있는 힘껏 기지개를 폈다.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창문에 비치는 햇살이 방안의 한기를 약간이나마 식혀주고 있었다. 현재 머셔너리에 필요한 건 단합이다. 기존 클랜원과 새로 들어온 클랜원들이 느끼는 거리감을 줄이는 게 선무(先務)였다. 직접 간섭하는 건 힘들겠지만 간접적으로 도와줄 수는 있다. 말인즉슨 능력을 뽐낼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거나 친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 '당장 떠오르는 건 탐험이나 축제밖에 없는데. 아니면 동반 임무를 맡기거나.'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당장 생각나는 건 많지 않다. 나는 쓰게 웃었다. “이런 건 고연주가 도가 텄는데…. 이따가 통신이라도 넣어볼까.” “고연주? 그게 누구지?” “후룩. 머셔너리 클랜원. 지금은 일 때문에 잠깐 없지만.” 나는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텅 빈 허공을 향해 담담히 대꾸했다.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였지만 사실 진작부터 인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군…. 그나저나 역시 대단해. 눈치채고 있던 건가?” 인기척의 정체는 역시나 사샤 펠릭스였다. 이내 허공에서 홀연히 나타나는 뱀파이어를 보며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전에 할 말이 있을 텐데.” “미안하다.” 사샤는 순순히 머리를 숙였다. 나는 머리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집무실은 엄연한 개인 용도로 사용하는 방이야. 다음부터 볼 일이 있다면 제대로 노크하고 들어오도록.” “명심하겠다. 아직 인간 세계에 익숙지 않으니 이해해다오. 아. 혹시 다른 주의 사항은 없는가? 예를 들면 말투라던가. 요.” 나는 속으로 웃었다. 어색이 요 자를 붙이는 게 꽤나 웃겼기 때문이다. “말투는…. 굳이 고칠 필요는 없어. 사석과 공석만 구분하면 돼. 그 정도는 가능하겠지?” 사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코를 벌름벌름 거리는 게 꼭 강아지처럼 냄새를 맡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아무튼. 여기까지 무슨 볼 일이지?” “아아. 인사를 하러 왔다.” “인사?” “고맙다는 인사 말이다. 겸사겸사 사과할 것도 있고.” “…뜬금없는 말이군. 응?” 살짝 손을 들어보자 손가락에 걸린 찻잔이 가벼워진 게 느껴졌다. 이내 한 쪽에 놓아둔 후 나는 바로 말을 이었다. “혹시 도난 사건을 말하는 거라면 사과하지 않아도 돼.” “그, 그런가? 하하. 제법 시원시원하군 그래.” “그리고 감사는 네 주인이 충분히 했으니 역시 필요 없고.” “어, 어. 음. 으음.” 사샤는 말을 더듬었다.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딱히 할 말이 없는 모양. 그러나 아직까지 우물쭈물하는걸 보면 다른 용무가 있는 게 분명하다. 한동안 눈치를 보던 사샤는 결국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시, 실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결국 그게 목적이었냐. 아무튼 좋아. 말해봐.” “알겠다. 하지만 말하기 전, 일단 나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밝히도록 하지. 단언컨대 너는 이 몸의 정체를 들을 자격이 있다.” “그거 참 고맙네. 눈물이 날 지경이야.” “하하. 눈물까지야. 아무튼 나는 과거 찬란한 영광을 이룩했던 펠릭스의 적통 후계자로, 이름하여….” 꼬르륵. 그 순간 사샤의 배에서 끓는 소리가 울렸다. 뱀파이어는 다급히 시선을 내리더니 어버버하며 나를 응시했다. 돌연한 시장기의 습격에 한껏 당황한 모습이었다. “킥. 꼬르륵이라. 꽤나 별난 이름이군. 아주 특이해.” “아, 아니다! 내 이름은 꼬르륵이 아니다!” 꼬르륵! 분연히 외쳤지만 사샤의 배는 다시 한 번 주인을 배반했다. 그것도 더욱 큰소리로. “좋다. 꼬르륵. 계속 말해봐라.” “이익!” 분한 기색을 내비치는 사샤 펠릭스. 나는 킥킥 웃으며 몸을 일으켰고 곧장 방문으로 이동했다. 뱀파이어는 여전히 선 채로, 고개만 돌려 나를 보았다. “어디 가는가? 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가자.” “으, 응?” “식당으로 가자고. 나도 배가 고프거든. 식사하면서 말하면 될 거 아냐.” 사샤 펠릭스는 멍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그러더니 떨떠름히 머리를 끄덕여 몸을 돌렸다. 이내 천천히 문을 나서자 등 뒤로 헛기침을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샤 펠릭스는 생각보다 수다를 좋아하는 뱀파이어였다. 식당으로 향하는 와중 끊임없이 조잘거리는데, 기실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자랑하는 말이었다. 하여 간단한 요약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만한 게 대부분이었다. 왜냐하면 사샤의 정체는 예전 제 3의 눈으로 확인한적이 있기 때문. 나는 적당히 대꾸해주며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1층에 다다르자 쉴 새 없이 이어지던 수다가 뚝 끊겼다. 이어서 호흡을 고르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약간은 지친 모양이다. 이윽고 로비로 들어선 순간 아는 얼굴들이 보여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둥글게 비치된 소파에는 비비앙과 남다은이 사이 좋게 앉아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따금 서로를 쳐다보며 진한 미소를 짓기까지. “클랜 로드. 뭐 하는가? 나는 배가 고프다.” “잠깐만.” 칭얼대는 뱀파이어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후 나는 둘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때 갑자기 남다은이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를 보니 진정으로 즐거워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아까의 걱정을 단번에 날려보낼 정도로, 둘의 모습은 정말이지 보기 좋았다. 문득 남다은이 가입했을 때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머셔너리에서 새 출발을 해보고 싶어요.' 그때를 회상하자 흐뭇하면서도 고마운 감정이 일었다. 거듭 말하지만 사람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면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 남다은은 스스로 새 출발을 하고 싶다고 했고 노력하겠다고 했지만, 사실 알게 모르게 걱정하던 나였다. 왜냐하면 전쟁 전까지만 해도 부랑자와의 기억에 심히 상처받고 아파하던 그녀였으니까. 그러나 몇 달 만에 저렇게 환히 웃을 수 있다는 건 정말로 노력했다는 방증이 아닐까? 남들이 씌워준 가면을 벗고 스스로 걸어 나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기에, 지금 보이는 모습에 찬사라도 보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휴, 말도 마. 걔 은근히 이런 거 좋아해. 진짜로.” “네? 그분이요? 에~이. 설마 요.” “정말이라니까? 나 원. 야. 이건 비밀인데. 걔, 예전에 남몰래 내 엉덩이도 만졌어. 아. 쳤다고 해야 하나?” “어머. 어머 어머. 정말이에요 언니?” 하여 흐뭇한 기분으로 가까이 다가갔을 때였다. 발소리를 들었는지 둘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비비앙. 사용자 남다은.” “어, 어? 기, 김수현?” “클랜 로드?!” 끝말이 묘하게 올라간 걸로 보아 꽤나 놀란 듯싶다. 그리고 한 번 서로를 쳐다보더니 재빠르게 나를 응시했다. 꼴깍! 왜인지 두 여인의 목울대가 동시에 움직였다. 뭘 했길래 침을 꼴깍꼴깍 삼키는 거지? 비비앙은 삽시간에 뭔가를 뒤로 숨기더니 어설프게 웃었다. “호, 호호. 그나저나 여기는 어쩐 일이야? 맨날 집무실에만 있으면서.” “밥. 사샤 펠릭스랑 점심이라도 같이 하려고. 아. 둘은?” 혹시 아직 안 했다면 같이 하려는 생각에 물어보자 둘은 홰홰 머리를 저었다. “아냐. 우린 괜찮아. 이미 먹었거든.” “아하하. 오늘 점심 정말 맛있었어요. 클랜 로드님도 맛있게 드세요.” 일순 절로 눈이 가늘어지는 게 느껴졌다. 뭔가 수상하다는 느낌이 팍팍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뭐하고 있었어? 꽤나 즐거워 보이던데.” “어, 어? 그나저나 김수현!” 하여 고개를 살짝 옆으로 빼며 말을 이은 순간, 비비앙이 벌떡 일어나 시야를 가렸다. 그러더니 내 품에 몸을 묻어 팔을 끌어안는다. 얘 갑자기 왜이래? “김수현 김수현! 생각해보니까 요즘 클랜원들이 되게 많이 들어왔잖아? 그렇지?” “그렇지. 근데 그게 왜.” “실은 근래 들어온 클랜원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거든. 우리 이 참에 오늘 밤 축제라도 하는 게 어떨까? 축하 겸 또 친해질 겸. 응? 좋은 생각이지?” “축제라.” 뜻밖의 말에 순간적으로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축제가 의외라는 게 아니라 비비앙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뜻밖이었다. '얘가 축제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나?' 아니다. 비비앙이 축제에 관심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음식에 한해서였다. 즉 절대로 먼저 말을 꺼낼 성격은 아니었다. “와. 축제. 재미있겠다. 저도 참가해보고 싶어요.” 어느새 자리를 바꿔 앉은 남다은이 추임새를 넣는다. 나는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좋은 생각이기는 한데. 오늘 밤은 무리.” “왜?” “고연주가 없으니까. 혼자 다른 도시에 나가서 일하고 있잖아. 그런데 우리끼리 축제를 열면 어떻게 생각하겠어?” “아~. 그러네. 미안. 그 생각을 못했어. 요호호호. 그, 그럼…. 뭐 다른 일정이라도 있나?” 비비앙은 어줍게 웃었다. 그녀를 보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까부터 왠지 모르게 대화가 겉도는 기분을 느낀 탓이다. 억지로 화제를 돌리려는 걸 보니 내가 낀 게 달갑지는 않은 모양이다. '관두자.' 하여 이쯤에서 빠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있어봤자 추근대는 것처럼 보일뿐더러 둘의 사이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사샤 펠릭스를 계속 세워둘 수도 없는 노릇이기도 했고. “일정은…. 아마 곧 생길 거야. 때 되면 공지해줄 테니까 항상 준비하면서 기다리고 있어.” “오호. 그거 정말 기대되는데.” “아무튼 이만 식당으로 가볼 테니까. 그만 좀 놔줄래?” 비비앙은 냉큼 떨어지더니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미약한 한숨을 내쉬는 게 매우 안도한 얼굴이었다. “그럼 이만.” 이윽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나는 다시 몸을 돌렸다. “아. 그러고 보니…. 검후에게도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자 서로의 어깨를 치고 있던 두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응시했다. 나는 한동안 남다은을 주시하다가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남다은? 비비앙과 이러고 있는 모습, 정말 보기 좋았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보았으면 좋겠네요.” 조금 낯간지럽기는 했지만 나름 격려의 의미를 담아 던진 말이었다. “네?” 그 순간 남다은이 의아한 음색으로 반문했다. 이어서 살짝 눈망울이 떨리는 게 약간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하여 왜 그러냐는 의미로 눈을 치켜 뜬 순간이었다. “죄, 죄송해요.” 갑작스레 고개를 푹 숙이는 남다은. 그러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이번엔 내가 의아할 차례였다. “예? 뭐가 죄송합니까?” “아, 아하하. 아니에요. 어떤 말씀인지는 잘 알겠습니다. 앞으로 절대 이런 모습 보이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겠습니다.” 뭔가 굉장히 상처받은 얼굴로 대답한 검후는 이내 바람처럼 달려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하여 멍하니 눈만 깜빡이고 있자 비비앙이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니 조금 전과는 달리 뾰로통 볼을 부풀린 그녀가 보였다. 나는 얼른 입을 열었다. “비비앙? 남다은 갑자기 왜 저래?” 비비앙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랫입술을 삐쭉 내밀며 날 힘껏 흘겨보았고, 곧 시무룩이 입을 열었다. “김수현. 너무해.” “어, 어? 아니 뭐가….” “됐어! 물론 고연주가 열심히 하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렇게 비꼴 것까지는 없잖아? 우리도 나름 열심히 하는데…. 흑!” “아, 아니…. 비, 비비앙?” 몸을 팩 돌린 비비앙은 남다은이 사라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내 저 멀리 사라지는 그녀를 보며 난 비로소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고연주를 언급한 게 실수였다. 나는 진심으로 꺼낸 말이었는데, 둘은 “고연주는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둘은 한가로이 놀고 있네요. 적당히 하세요.”로 받아들인 것이다. '젠장. 이래서 평소 안 하던 말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또한 평소 항상 클랜원들을 바짝 죄던 행동도 한 몫 했으리라. 뒤늦은 후회가 찾아 들어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오호. 겉으로는 칭찬이지만 달리 생각하면 비꼬는 것처럼 받아들일 수도 있군. 좋은걸 배웠다. 클랜 로드.”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샤 펠릭스가 마구 고개를 끄덕인다. 의도치 않은 확인 사살을 들으며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남다은이 웃는 모습을 떠올리자 왠지 모르게 어깨가 축 늘어진다. '나는…. 그냥….' 보기 좋았다고…. 웃는 게 예쁘니, 종종 보여달라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 작품 후기 ============================ 1. 12월 26일(목요일) ~ 12월 27일(금요일)에 스키장에 갑니다. 하여 27일(금요일), 28일(토요일) 휴재합니다. _(__)_ 2. 9번은 머셔너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김수현의 일상 파트였습니다. 다음 회부터는 김수현과 클랜원들이 주를 이루는, 외전의 마지막 순번인 10번이 시작됩니다. 모든 외전을 쓸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겹치는 방향으로 골랐습니다. 3. 10번에서는 이번 회 김수현의 걱정이 어느 정도 풀어지는 방향으로 연재할 예정입니다. 즉 클랜원들의 시선에서 서술되는 파트가 약간 나옵니다. 또한 한 명과의 응응(?)이 예정되어있으며, 다른 한 명과는 깃발 회수(?)가 예정되어있습니다. 응응 파트는 적나라한 표현이 들어갑니다. 따라서 몇몇 분께서 보시기에 불쾌하실 수 있으니, 연재 시 따로 경고 문구를 삽입하겠습니다. :) 0420 / 0933 ---------------------------------------------- 10. 마지막 이야기(9/9). (까르르! 까르르르!) “고연주.” (미, 미안해요 수현. 그, 그런데 너무 웃겨…. 깔깔!) “……휴.” 한껏 자지러지는 고연주를 보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온다. 순간 통신을 끊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지만 간신히 억누르며 애꿎은 수정구를 힘주어 눌렀다. '그냥 용건만 말하고 끊을걸….' 처음에는 클랜원들의 단합에 대해 좋은 의견이 있는지 들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삼천포로 빠진 얘기는, 어느 순간 클랜원들의 근황까지 번지게 되었다. 하여 억울함을 호소할 생각으로 비비앙, 남다은과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는데…. 그래 누구 잘못이랴. 괜한 말을 꺼낸 내 잘못이지. “아 그만 좀 웃으시고, 좋은 의견이나 얘기해보세요.” (킥킥. 아 간만에 실컷 웃었네. 그나저나 좋은 의견이요? 음~.) 고연주는 눈가를 쓱쓱 훔치더니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괴었다. (글쎄요? 이것저것 떠오르는 건 많은데 생각 좀 정리해야 할 것 같아요. 사안이 가볍지는 않으니까요.) “정리라. 응?” 똑똑. 그때였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큰일났어요.” 괜찮으니 일단 말해보라 하려는 찰나 문밖으로 안솔의 앙증맞은 목소리가 들렸다. “큰일이라니?” “손님이 찾아왔어요. 클랜 로드님을 뵙고 싶데요.” (쟤는 여전하네. 아니 손님이 찾아온 게 무슨 큰일이에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고연주의 날카로운 핀잔. 나는 조용히 속삭여 동의한 후 목소리를 높였다. “손님이 누군데?” “그게…. 아! 마법의 탑에서 오셨다고 하던데요?” “마법의 탑? 거기서 왜…? 아무튼 알겠어. 곧 나갈 테니까 4층 귀빈실로 모시고 와. 그리고 차도 타오고.” “네~.” 이윽고 안솔의 기척이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천천히 수정구를 들어올리자 여전히 턱을 괸 고연주가 나를 내려다본다. “손님이 오셨다네요.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머 그래요? 그런데 어째요? 저는 수현을 보낼 생각이 없는데~?) “마력 공급자는 저입니다. 즉 통신의 연결 유무가 바로 제게 달려있죠.” (쳇.) 어쩔 거냐는 투로 대꾸하자 나를 흘겨보는 고연주. 하지만 못마땅하여 노려보는 게 아닌 고운 눈 흘김이었다. (알았어요. 생각 많이 해둘 테니 나중에 잊지 말고 연락이나 해요.) “알겠습니다. 나중에 보도록 하죠. 그럼 끊겠습니다.” (잠깐. 어딜 그냥 가려고 그래요?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자, 여기 뽀뽀~.) “그럼 이만.” 고연주는 살짝 오므린 입술을 수정구에 내밀었지만 나는 바로 마력을 끊어버렸다. 아까 실컷 웃은 것에 대한 소소한 복수였다. 나는 살짝 기지개를 핀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법의 탑에서 손님이 왔다고 한다. 이름은 듣지 못했지만 누군지는 대강 짐작이 간다. '타로 카드 마술사.' 선율이 아니면 누가 나를 찾아오겠는가. 물론 왜 찾아왔는지는 궁금했지만 일단 옷 매무새를 다듬고 귀빈실로 이동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자 먼저 도착해있는 선율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기함했다. “어….” 놀란 건 선율 또한 마찬가지였다. 막 자리에 앉으려다 엉거주춤하는 게 나보다 한 발 앞서 도착한 모양이다. “마법의 탑 로드. 언제 오셨습니까?” “또 또. 마탑 로드라 불러달라니까…. 쯧, 아무튼 방금 요.” “그럼 안솔은….” “안솔? 해맑게 웃던 꼬맹이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저한테 대충 위치를 가르쳐주고 바로 달려가던데요?” “…예?” “차를 타온다고 했었나~. 후훗, 귀엽기도 하지.” '이 바보가.' 선율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지만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걸 느꼈다. 세상에. 안내자도 없이 손님을 혼자 올려 보내다니. 그것도 시크릿 클래스며 한 클랜의 로드인 사용자인데. “아무튼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입니다.” 잠시 후, 우리는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자리에 마주앉자 선율은 노출된 어깨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녀의 복장은 사뭇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뿌리는 약간 야한 란제리였다. 이윽고 슬쩍 다리를 꼬자 육감적인 허벅지를 가로지르는 가터벨트가 보인다. 더불어 쭉 뻗은 종아리를 덮는 망사 스타킹까지. 그 순간 앞쪽서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선율이 은근한 눈길로 나를 보고 있다. “머셔너리 로드. 혹시 전에 저랑 한 약속 기억해요?” “약속이라니요.” “…요즘 많이 바쁘셨나 봐요?” “글쎄요. 아니요? 근래는 제법 한가했습니다만. 그런데 왜 그러시는지….” 선율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오히려 입술을 꾹 물고 아까처럼 나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혹시 미친 건가 걱정이 들 무렵, 돌연 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한 번 만나기로 했었던가?' 그래. 생각해보니 몇 달 전, 바바라에서 회의를 마치고 나오며 약속한 것 같기도 하다. 아니 분명히 그랬다. 일순 아차 싶어 나는 까닭 없이 미간을 문질렀다. 그러나 내가 떠올렸다는 사실을 알아챘는지 선율의 입 꼬리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다. 하여 괜스레 불편함 감정이 일어날 때 뜻밖의 구원자가 등장했다. 똑똑. “오라버니. 아니 클랜 로드님. 차 가지고 왔어요. 들어갈게요?” “아, 들어와.” 마침 잘됐다 싶어 나는 재빠르게 말했다. 그리고 천연덕스레 입을 열었다. “하하. 차가 왔네요. 날도 추운데 일단 속부터 덥히시죠. 차가 제법 따뜻할 겁니다.” “어머, 화제도 잘 돌리셔라. 저도 모르게 깜빡 넘어갈 뻔했어요. 아주 연기하셔도 되겠어.” 그러나 선율은 넘어가지 않았다. 쓰디쓴 입맛만 다시고 있을 무렵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그리고 양손에 쟁반을 받친 안솔이 들어왔다. “그림자 여왕님이 두고 가신 라몬 차에요. 부디 입맛에 맞으셨으면 좋겠어요.” “어쩜…. 아까도 그렇고 정말 너무 상냥하세요. 차 잘 마실게요.” “헤헤. 에이, 뭘요. 그쯤이야 아무것도 아닌걸요.” “…천연인가? 이건 예상 못했는데.” 선율의 마지막 말은 아마 나만 들었을 것이다. 어쨌든 선율이 장단을 맞추어주자 안솔은 고요히 웃었다. 아니 그러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이어서 모델처럼 우아한 걸음걸이를 선보이는 게, 아직도 성녀 놀이에 빠져있는 모양이다. “으흠. 으흠, 으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푸훕.”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제 3자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서 엄청 창피했다. 연거푸 찾아오는 낯깎이는 상황. 차마 더는 볼 수 없어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어? 어, 어?” 갑작스레 안솔이 당황한 소리가 들렸다. 얼른 다시 고개를 돌리자 몸을 바로 가누지 못하고 이리저리 비틀거리는 그녀가 보였다. 아마 익숙지 않은 걸음걸이에 순간 스텝이 꼬인 모양이다. “아, 안 돼!” 결국 안솔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쟁반을 놓쳤다. 나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요즘 잠잠하다 싶었지. 아무튼 일단 잡아줄 생각에 놓친 쟁반을 쫓았다. '…어?' 그리고 그 순간,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찰나의 순간 찻잔이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쏟아져 나온 칠흑 색 찻물이 바지에 쏟아진다. “으앙! 오라버니 죄송해요!” 안솔은 넘어진 상태 그대로 기어와 허벅지에 헛손질을 날렸다. 그녀의 손길과 바지를 양껏 적셔오는 뜨거운 액체가 느껴졌지만 나는 아래를 쳐다볼 생각도 못했다. '내가…. 가만히 있었어?' 조금 전 안솔의 움직임은 엄청난 수준이었다. 나는 그녀가 넘어질 거란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대응하지 못했다. 넘어진 거리, 쏟아진 방향, 찻물이 들어오는 각도. 흡사 자로 재기라도 한 듯 그 모든 게 완벽했다. 만일 방금 상황에서 찻물이 아닌 검이 날아왔다면 나는 여지없이 치명상을 입었으리라. “안솔?”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다듬고 고개를 내리자 어쩔 줄 몰라 하는 안솔이 보인다. “오라버니…. 죄송해요…. 어엉….” 안솔은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올려다보더니 훌쩍훌쩍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모양새가 쫌 미묘하다. 정확히 표현해보면 내 다리를 약간 벌린 채 그 사이로 무릎을 꿇어앉아 얼굴을 들이민 그녀. 잠깐. 이건 꼭 AV에 나오는….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이어서 엎어진 찻잔을 테이블에 올려놓은 후, 안솔을 일으켜 세워 괜찮다고 다독였다. 조금 전 그녀의 움직임을 보면 설마 고의로 이러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연의 일치겠지.' 이내 힘없이 밖으로 나가는 안솔을 보며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찻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로 보아 속옷은 물론이고 안쪽까지 푹 젖은 모양이다. 으, 찝찝해. “후.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오히려 신선하고 좋은데요?”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집무실이 바로 앞이니 잠깐이면 될 겁니다.” “아니요.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뭔 소린가 싶어 머리를 들자 어느새 초록빛으로 빛나는 카드가 그녀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었다. 이윽고 선율의 입술이 떼어졌다. “드로우 아웃(Draw Out).” 그때였다. 카드를 둘러싼 초록빛이 일순 강렬해지는가 싶더니 주변에 뿌려진 물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젖은 바지도 마찬가지였다. 큰사폭에 스며든 찻물이 쭉 배어져 나와 여러 갈래 물줄기를 만든 것이다. “얍.” 따르륵, 따르르르. 마치 물결처럼 부드러이 유영하던 물줄기는 이내 선율의 손가락을 따라 찻잔 속으로 안착했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어느덧 바지에는 약간의 물기만 느껴졌고 찻잔에는 식은 찻물이 채워져 있었다. 이윽고 맵시 있게 찻잔을 쥔 선율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어, 저거…. 생각해보니 조금 엄한데도 젖은 물인데. “음. 맛있네요.” “…대단하네요.” “명색의 시크릿 클래슨데 이 정도는 해야죠. 그나저나 라몬 차라고 했나요? 머셔너리 로드도 한 번 들어보세요. 차 맛이 찐~한 게 아주 좋아요.” “하, 하하….” 어쩌면 선율이 알면서 저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차 생각이 싹 사라졌기에(내 몸에 묻은 물이기는 하지만.), 나는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다. 선율은 연갈 빛 목덜미를 훤히 드러낸 채, 찻잔을 끝까지 기울이고 있었다. “후. 그럼 장난은 이쯤하고 슬슬 얘기를 시작해볼까요?” 이내 꼴깍 찻물을 삼긴 선율은 우아한 자태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제 슬슬 본론이 나오겠다는 생각에 나는 자리에 앉아 자세를 고쳐 잡았다. “경청하겠습니다.” “좋아요. 일단 오늘 제가 머셔너리 클랜을 방문한 이유는…. 거두절미하면,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 때문이에요.” “마지아…? 그곳인 이미 공략이 끝난 곳입니다만.” “그래요. 이스탄텔 로우에서 조사도 마쳤고 이후 사용자들에게 공개됐죠. 그리고 우리 마탑에서는 마지아에 청소부를 파견했어요. 두 달 전부터 지금까지 쭉 말이죠.” 두 달 전부터라. 마지아에 그 정도 가치가 있던가? 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청소부란 이미 공략된 유적에 혹시나 주워먹을게 있는지 들어가는 세 번째 사용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머셔너리가 마지아를 공략했을 때 기실 장비는 물론이고 쓸만한 고대 마법 책까지 모조리 쓸어왔다. 즉 성과는 이미 모두 뽑아낸 상태였으니 남은 건 폐허가 된 건물밖에 없을 터. “글쎄요. 머셔너리는 물론이고 이스탄텔 로우에서도 조사를 마쳤습니다. 굳이 두 달이나 소비하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머셔너리 로드? 마법의 탑은 말 그대로 마법사들의 모임이에요. 우리가 원하는 건 혹시나 파묻혀있을 유물이 아니랍니다…. 마지아는 말이죠. 고대 홀 플레인의 역사상 마법이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할 때 세워진 최고의 마법 도시에요. 현재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수한 고대의 마법들이 총체적으로 집약된 도시. 즉 그 당시 도시의 생활상이 어떠했는지, 도시가 어떤 식으로 건설되었는지 등등. 우리가 원하는 건 바로 그런 것들이에요.” 선율은 평소답지 않은 살짝 흥분된 음색으로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내 목이 마른 지 내 앞에 놓인 찻잔마저 냉큼 가져가기까지. 다시 차를 들이키는 그녀를 나는 가만히 기다렸다. 어차피 마시려고 하지도 않았으니까. “후…. 계속 얘기할게요. 아무튼 우리는 두 달에 걸쳐 마지아를 낱낱이 조사했고, 얼마 전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어요.” 갑작스레 귀가 번쩍 뜨이는 기분이 들었다. 선율은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머셔너리 로드가 생각하는 물질적인 성과는 아니에요. 마법의 탑 입장에서의 성과라 볼 수 있죠. 솔직히 성과라 하기도 뭐하고. 하나의 결과? 아니 앞선 의문들에 대한 추측이라고 할까요?” “추측이라. 그렇군요. 그럼 어떤?” “일단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마지아는 다른 도시들과 달리 마법이 주가 된 생활을 했다고 생각해요. 즉 일반적인 삶과는 차별화된 삶을 살았던 거죠. 간단히 예를 들어볼게요. 지구에서 계단과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할때 느끼는 차이를 생각하면 이해하실 수 있으려나 요?” “일반 도시의 거주민들이 계단을 오를 때 마법 도시 마지아의 마법사들은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했다. 이 말씀이시군요.” 선율은 만족한 얼굴로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해요.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해준 건 바로 도시 곳곳에 잠들어있는 엄청난 수의 마법 진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다시 한 번 장문의 설명을 마친 선율은 약하게 숨을 몰아 쉬었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지금 선율이 꺼낸 말은 1회 차에는 나오지 않은 이야기였다. 마지아도 공략 후 쭉 방치되었고. 아무튼 내가 알고 있는 게 아닌 처음 듣는 이야기에 흥미가 동했지만, 동시에 의문도 들었다. “마법의 탑 로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그걸 왜 머셔너리에 말씀하시는 거죠?” “음.” 선율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이어서 약간 고민하는 듯했지만 이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첫 결론을 내렸을 때는 한 달 전. 그리고 우리의 추측이 맞는다는 가정하에, 마탑은 클랜의 힘을 총동원해 나머지 한 달을 새로운 방향으로 조사에 착수했어요. 이 도시가 과연 어떤 목적으로 지어졌을까? 그리고 과연 재건할 수 있을까?” '재건?' 생각지도 못한 말들이 연이어 터져 나온다. 점점 스케일이 커져가는걸 느끼며 나는 더더욱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한 달 후. 그러니까 얼마 전, 우리는 결론을…. 아니 추측을 내릴 수 있었어요.” “결론이라고 하셔도 됩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뭐죠?” 선율은 순간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나를 지그시 응시하더니 가느다란 콧숨을 내쉬며 입맛을 다셨다. 마치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렇게 약 3분 정도 흘렀을까? 고요한 적막이 어색하게 느껴질 즈음 선율의 입술이 천천히 떼어졌다. “도시의 목적은 바로 방어였어요. 즉 도시 자체가 방어를 위해 지어진 하나의 전략 병기나 마찬가지였죠. 그리고 재건도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고어 해석을 할 수 있는 클랜원 한 명이 아주 흥미로운 기록을 발견했거든요.” “흥미로운 기록이요?” 선율은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그리고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대로 말씀 드려보면…. 마지아에는 단 한 명의 주인이 존재한다. 주인은 마지아의 모든 것을 총괄할 수 있다. 주인은 도시 그 자체나 다름없다. 그런 마지아의 주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도시의 모든 마법 진을 통제할 수 있는 하나의 열쇠가 필요하다. 그 열쇠의 이름은….” 그 순간 저번에 제 3의 눈으로 읽었던 장비의 정보가 아련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자세한 정보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목이 바짝 타는 기분이었다. 선율의 말이 이어졌다. “질서의 오르도. 도시를 재건하고 통제할 수 있는 열쇠의 이름이에요.” 역시나. 나는 입술에 침을 적시며 질끈 눈을 감았다. 갑작스레 머릿속이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의 이름이 강하게 떠올랐다. 잠시 후, 나는 눈을 떠 선율을 응시했다. 그녀는 흥분된 기색으로 달뜬 음색으로 신나게 떠드는 중이었다. “머셔너리 로드. 흥분되지 않아요? 열쇠를 가진 자는 도시의 주인이 될 수 있어요. 혹은 걸어 다니는 마법 도시 그 자체로도 볼 수 있다고요.” “비슷합니다.” “아니야. 어쩌면 도시 내에서는 신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 네?” “마법의 탑 로드. 잠시만요.” 또렷이 부르자 선율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삽시간에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건조한 목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결론이 아닌, 과정까지 말이지요.” 선율은 아주 잠시 동안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볼멘 목소리로 갑작스레 말을 내뱉었다. “나 배고파요.” * 예쁜 방이었다. 한 쪽 벽에는 사제용 로브가 걸려있고, 다른 쪽 벽에는 찻잔이 가지런히 놓인 아담한 선반이 달려있다. 하얀 벽면에 하얀 침대. 누가 봐도 흰 눈 같다 생각할 이 새하얀 방은 바로 안솔의 개인 숙소였다. “흑. 너무 경솔했어. 딴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이 멍청이!” 침대에 누워있던 안솔은 발을 동동 구르며 주먹으로 침대를 쳤다. 아까 전 차를 들고 가다가 발이 꼬여 넘어진 게 너무나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실은 그것은 온전한 안솔의 잘못이었다. 차를 들고 가면서 되도 않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상의 나래란, 간만에 어리광이 폭발해 김수현의 품에 얼굴을 묻었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발이 꼬여 의도치 않게 쟁반을 놓쳐버렸고. “오라버니가 믿고 맡겨주신 건데…. 이제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혹시 그만두라 하시는 건 아닐까?” 안솔은 여전히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힘없이 축 늘어졌다. 사실 안솔은 김수현의 수행 인원에 무척이나 만족하고 있었다. 김수현을 볼 때마다 행복해지는 안솔이었기에 수행 인원이란 감투는 그녀에게 최고의 자리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많이 불러주니 많이 볼 수 있고 그에 따라 옆에 있는 시간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또한 김수현이 지시하는 일을 처리하다 보면 어쩌다 부인이라도 된듯한 기분을 느낄 때도 있었다. “치, 치, 치, 치.” 한동안 이불을 차던 안솔은 갑자기 번쩍 고개를 들었다. 괜찮다고 말해주는 따뜻한 눈빛과 다독이던 손길이 아른거린다. 이내 주먹을 불끈 쥔 안솔은 분연히 몸을 일으켰다. “그, 그래. 오라버니도 괜찮다고 했으니까! 다음부터 잘하면 돼. 그렇지?” 안솔은 스스로를 격려하며 힘차게 파이팅을 외쳤다. 그리고 선반으로 다가가 가장 최근에 훔쳐온 찻잔을 쥐었다. 그러더니 이내 깃펜으로 예쁘게 표시해 논 위치를 꼭 물어 쪽 소리가 나도록 빨아들였다. 똑똑. 찻잔을 핥고 빨수록 안솔은 기분이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시무룩했던 감정이 사그라지고 다시 오늘 아침의 기분으로 되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사실 오늘 아침 안솔은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일어나자마자 머리와 몸이 굉장히 상쾌하고 가뿐했던 것이다. 전신이 무척이나 상쾌한 느낌이랄까? 이렇게 기분이 좋은 적이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안솔은 오늘 하루는 되는 날이라는, 원하는 건 뭐든지 이룰 수 있겠다는 기분마저 느끼고 있었다. “음. 으음.” 쪽. 쪼옥. 똑똑. 한참 동안 찻잔을 빨던 안솔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까 전 김수현의 다리 사이로 들어갔을 때를 회상했다. 그때는 경황이 없느라 느끼지 못했지만 한 냄새만큼은 분명히 맡을 수 있었다. 흠뻑 젖은 바지의 큰사폭 사이로 물씬 풍겨져 오던 남성의 냄새. 그때를 떠올리자 안솔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휴. 좋았어.” 돌연 안솔은 찻잔을 빠는걸 멈췄다. 그리고 다시 선반에 올려놓고는 이내 하나씩 하나씩 옷을 벗기 시작했다. 양말을 벗고 로브를 벗고 셔츠를 벗는다. 삽시간에 속옷 차림이 되어버린 안솔은 가슴 가리개마저 벗어버렸다. 이내 하나 남은 팬티에 손을 대며, 본격적인 행위 전 전조를 위한 엉큼한 상상을 시작했다. '헤헤. 이러다 오라버니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주시지 않으시려나. 그럼 난…. 꺅! 몰라 몰라!' 안솔은 실실 웃으며 남은 속옷마저 끌어내렸다. 그때였다. 벌컥! “안솔. 자니?” 갑작스레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안솔을 깜짝 놀라 속옷을 내리던채 그대로 몸이 굳었다. 이어서 천천히 고개를 들자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김수현을 볼 수 있었다. “오, 오라버니?” “어…. 미, 미안하다. 호출해도 오지 않고, 노크를 했는데도 대답이 없어서.” 김수현 또한 무척 당황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바로 얼굴을 고치더니 급히 몸을 돌렸다. 안솔은 당황한 와중에도 반사적으로 물었다. “조, 죄송해요. 그,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아 그게…. 지금 잠깐 외출할 거거든? 마법의 탑 로드와 식사를 할 건데 조금 오래 걸릴지도 몰라. 그리고 내일 오전에 회의를 열거니까 네가 클랜원들에게 미리 공지해줬으면 좋겠다.” “네, 네. 알겠어요.” “그럼 부탁한다…. 그리고 미안하다. 고의는 아니었어.” “괜찮아요.” “…그래.” 탕. 방문이 닫혔다. 이윽고 점차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안솔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털썩! “후아, 후아.”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다 곧 가슴을 추스른 안솔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이내 머리 위로 물음표 하나가 동동 떠올랐다. 뭔가 이상한 위화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분명 문을 열고 들어와주었으면 했는데….” 그런데 진짜 들어왔다. “아까도 안겨서 킁카킁카를 하고 싶다고 했는데….” 확실히 안긴 건 아니지만, 냄새는 맡았다. 그 순간 안솔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안솔의 눈동자는 전에 없을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어, 어쩌면…!” 오늘은 뭔가 되는 날이 아닐까? 일말의 근거도 없는 결론이었지만 안솔은 전신에서 뭔지 모를 자신감을 느꼈다. 동시에 내면에서 뭔가가 크게 폭발하는 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요즘 예전처럼 어리광을 부리기가 어려워졌는데 그동안 꾹꾹 쌓아오던 욕구가 한순간에 폭발한 것이다. 빛나던 눈이 한순간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안솔은 형형히 눈을 빛내며 그녀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뽀뽀! 포옹! 아니, 어쩌면 그것까지도! 평소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까지 상상하자 안솔은 몸을 배배 꼬았다. 갑작스레 아랫도리가 욱신거리기 시작한 탓이다. 이내 나는 듯 일어난 안솔은 나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양팔을 쫙 벌리더니 주먹을 꽉 쥐며 생각했다. 정말로, 오늘은 뭔가 되는 날일지도 모른다고. 안솔의 눈에 보이는 하얀 천장이 오늘따라 까닭 없이 눈부셔 보였다. ============================ 작품 후기 ============================ 후일담. (선율, 카드를 주르륵 펼치며.) 선율 : 흠. 머셔너리 로드. 점을 보니까. 오늘따라 운세가 굉장히 위험한데요? 김수현 : 네? 위험하다니요? (선율, 진지한 얼굴로 카드를 응시한다.) 선율 : 오늘은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군요. 엄청난 위험이 머셔너리 로드의 주변을 감싸고 있어요. 조심하세요. 이미 그것은 잠깐 당신을 스치고 지나갔으니까. 방심하는 순간 가해자는 자신의 원하는걸 단번에 이뤄버릴 거예요. (김수현, 코웃음을 친다.) 김수현 : 헛소리 말고 식사나 하세요. (선율, 안타까운 눈길로 김수현을 응시한다.) 그리고 안솔은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는 이야기가…. Fin. 마지막 외전 순번 시작! 1. 여러분 죄송합니다. 용량을 꾹꾹 넣다 보니 조금 늦었습니다. ㅜ.ㅠ 2. 아. 제가 어제 휴재 기간을 잘못 알려드렸습니다. 26일(목요일)~27일(금요일)에 스키장을 가는 건 맞는데 27일(금요일) 오후에 돌아옵니다. 즉 돌아오면 집필을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제가 25일 오전 오후에 약속이 있습니다. 그래서 27(금요일), 28일(토요일) 휴재가 아니라 26일(목요일), 27일(금요일) 휴재입니다. 착오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3. 어느 분이 문의를 주셨는데. 이 부분은 지금 확실히 말씀 드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후기를 빌리게 되었습니다. 예. 차소림은 안현과 이어줄 생각입니다. 변경 예정은 없습니다. 유정이 사건 때는 제가 단순이 잘 어울리겠다, 이러면 재미있겠다 생각해 함부로 말을 꺼냈습니다. 그래서 독자 분들께 많은 심려를 끼쳐드렸지요. 그때는 제가 정말로 경솔했고, 아직도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로 독자 분들의 조언에 따라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겠다고 말씀 드렸는데, 그 캐릭터가 바로 차소림입니다. 원래는 2부에 등장할 생각이었지만 전에 등장하는 게 더 모양새가 좋을 것 같아 외전에 넣게 되었습니다. 이미 만들 때부터 안현과 어떻게 이어질지 생각해둔 터라 지금 와서 변경하기는 아주 많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차소림은 현숙한 여인입니다. 한 남자를 오랫동안 흠모하고 사랑하는 어떤 캐릭터를 보고 영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직 차소림과 안현은 별 관계가 아닙니다. 안현이 일방적으로, 벌써 반한 게 아니라 조금 신경 쓰이는 정도라고 하는 게 맞겠지요. 일단은 여기까지만 언급하겠습니다. 차후 김수현, 차소림, 안현이 어떻게 될지 미리 말씀 드리면 재미없겠지요. :) 0421 / 0933 ---------------------------------------------- 10. 마지막 이야기(9/9). 차가운 공기가 내려앉은 어두운 새벽이었다. 문득 잠에서 깬 한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 저녁 짠 음식을 먹어서인지 무척 목이 말랐다. “지금 시간이….” 한결은 창문을 흘깃 보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몽롱한 정신이 약간이지만 맑아졌다. 잠시 후,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난 한결은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온몸을 엄습하는 한기에 입술을 떨며 불평했다. 이런 날씨에 고작 물 한 잔 마시기 위해 정원을 걸어야 하는 건 너무 불공평하다고. “으으…. 추워, 추워, 추워.” 예상대로 정원은 굉장히 추웠다. 사정없이 불어대는 찬바람에 한결은 잔뜩 움츠린 채 정원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간신히 본관에 도착하자마자 참았던 숨을 크게 토해냈다. 속에 가득 찼던 냉기가 조금은 새어나가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시간이라 그런지 1층은 역시나 휑뎅그렁했다. 오직 을씨년스러운 어둠만이 남아 텅 빈 카운터와 로비를 맴돌고 있었다. 한결은 한참 동안 1층을 둘러보더니 쓸쓸한 눈빛으로 걸음을 틀어 적막한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열어 식당 안으로 한 걸음 내디뎠을 때였다. 탕. 뭔가 세게 부딪치는 소리가 주변에 흐르던 고요를 깨뜨렸다. 막 안으로 들어가려던 한결은 일순 놀란 토끼 눈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동시에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한 식당에 한 인영이 테이블에 덩그러니 앉아있었던 것이다. 탕. 다시 한 번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한결은 마력으로 안력을 높여 등을 보이는 인영을 주시했다. 그리고 곧바로 인영과 소리의 실체를 알 수 있었다. 인영의 정체는 바로 안현이었다. 안현은 홀로 테이블에 앉아 손에 쥔 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한결은 살며시 눈살을 찌푸리며 코를 감싸 쥐었다. 곳곳에 진동하는 술내가 콧속을 물씬 찔러 들고 있었다. 안현은 아직 한결이 들어온걸 모르는 듯했다. 이내 한 쪽으로 병을 던지더니 금세 새로운 병을 집어 입에 가져간다. 뭔지 모를 말을 웅얼거리고 이따금 속 깊은 한숨을 푹푹 내쉬기까지. 한결은 본능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자리에 서 안현을 가만히 응시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테이블 한 쪽에 쌓이는 병의 개수가 점차 늘어날 즈음, 또한 한결이 물을 마시겠다는 목적을 까맣게 잊어갈 즈음. 술과 한숨을 반복하던 안현의 행동이 처음으로 변화를 보였다. 별안간 옆자리 고이 놓아둔 창을 들더니 빤히 쳐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진한 칠흑 빛을 띤 창은 일견 어둠에 파묻힌 듯 보였다. 그러나 창 끝에 흐르는 섬뜩한 빛은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 어둠과의 동화를 거부하고 있었다. 문득 한결은 침을 삼켰다. 지긋이 창을 응시하는 안현. 그 모습은 한결이 평소 보아오던 안현과 비교해 뭔가 다른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때 창의 끝에서 갑작스레 시퍼런 기운이 솟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안현이 지그시 눈을 감아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한결은 숨을 짧게 들이키며 생각했다. 이 야심한 새벽에, 그것도 식당에서 홀로 뭘 하려는 걸까. ‘그냥’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보이는 얼굴이 너무나 진지하다. 이윽고 안현은 아무도 없는 허공으로 창을 비스듬히 겨누어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도중에 조금씩 비틀거리긴 했지만 분명한 건 어떤 자세를 잡았다는 것. 그리고 그 자세를 보는 순간 한결은 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방금 안현이 잡은 자세는 얼마 전 차소림과 테스트를 치를 때…. 그러니까 안현의 자세가 무너지기 전 처음 잡았던 자세였다. 한결은 고민했다. 테스트 후 안현은 한동안 멍한 상태를 보였다. 오죽 심했으면 유정이도 다가가 위로를 건넬 정도였다. 이후 곧 정신을 차려 괜찮다고 웃었지만 왠지 모르게 억지 웃음이라 느꼈던 한결이었다. 창 끝에 서린 시퍼런 빛이 점차 선명해지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한결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과연 말릴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고 또한 안현을 감싼 분위기가 워낙 진지했던 탓이다. 말려야 할까 말아야 할까. 이대로 보고 있어야 할까 나가야 할까. 아니면 수현 형님한테 말을 해야 할까? 한결이 어떤 것도 가늠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을 무렵. 안현의 눈이 번쩍 떠지며 시퍼런 불길을 토해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쾅! 일순 창과 안현의 전신에서 화려한 빛이 번쩍이더니 거친 폭음이 허공을 떨어 울렸다. “크헉!” 동시에 들려온 외마디 비명. 매우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라 한결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뭔가 일이 잘못됐다는 것을. 하여 여태껏 꾹 눌려져 있던 한결의 말문이 반사적으로 터져 나왔다. “형!”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내 폭발한 빛이 사그라지고 솟구친 연기도 옅어질 즈음, 비로소 상황이 조금씩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 눈에 들은 건 폭발의 여파로 산산조각 난 테이블이었다. 그 옆에는 한껏 달구어진 흑색 창이 허연 아지랑이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한결은 반사적으로 안현을 찾았다. 테이블 주변에는 보이지 않아 얼른 고개를 들어 식당 전체를 살폈다. “으…. 으….” 잠시 후,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미약한 신음에 한결은 재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주방 카운터에 부딪쳐 쓰러진 안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형! 괜찮아요? 괜찮은 거예요?” 큰 목소리로 불러봤지만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 순간 목마름도 여러 복잡했던 생각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형!” 한결은 더는 생각 않고 신속히 앞으로 달려나갔다. * 아침이 밝았다. 간밤에 많은 생각을 해서 그런지 머리가 약간 띵한 기분이었다. 본격적으로 하루를 시작하기 전 가벼운 기분 전환이라도 할 생각에 창문을 열었다. 이윽고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정원을 응시한다. 여기서 고연주가 만들어준 뜨거운 차 한 잔이 있으면 금상첨화일 텐데. 그것 하나만 빼면 괜찮은 아침이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있는 힘껏 기지개를 폈다. 문득 며칠 전 선율과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 아직 자세한 사항은 확인 못해봤지만 그녀의 생각에 꽤나 구미가 당기는 건 사실이었다. 마지아를 재건한다. 그 말은 북 대륙에 도시가 하나 늘어난다는 단순한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다. 외적으로는 현재 정체된 북 대륙 마법의 수준을 몇 단계나 끌어올릴 수 있고, 내적으로는 방어가 목적인 전략 병기 하나를 가질 수 있다. 생각해보면 선율의 말은 제법 아귀가 맞았다. 마볼로의 기록을 살펴보면 해답이 나와있다. 용사 로이드와 요정 여왕 마르가리타를 감금한 후, 둘을 되찾으러 온 성녀 그라치아의 군대를 단신으로 토벌했다. 또한 나를 상대할 때 도시 내에 떠오르던 무수한 마법 진들. 그때 양 옆으로 나를 덮쳤던 마법 진은 각각 만년설과 지옥 불 초열에 해당하는 기운을 뿜어냈다. 물론 어디까지나 흉내 낸 것에 불과하지만 그 정도만해도 엄청난 수준이었다. '어떤 마법 진들이 묻혀있을지 궁금해지는데.' 일이 선율의 말대로만 풀린다면 앞으로의 계획에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 활용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홀 플레인 최고의 방어 도시를 갖게 되는 거니까. 어쩌면 비비앙의 신분 상승을 노려볼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아직 어디까지나 생각에 불과하다. 벌써부터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는 건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키는 일이었다. 도시를 재건한다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니까. 단순히 '질서의 오르도'를 꼽고 “재건 끝.”이라 외칠 수 있다면 아예 고민도 안 했을 터. '길도 뚫어야 하고…. 폐허가 된 건물도 되살려야 하고…. 사용자들의 호응도 있어야 한다.' 그때였다. 생각 도중 나는 슬쩍 고개를 틀어 문을 응시했다. 밖에서 서성대는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누구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만했다. 잠시 기다리다가, 다시 멀어지는 기척에 나는 다시 상념에 빠졌다. 재건에는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어갈 것이고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아직 스무 명도 안 되는 머셔너리 클랜만으로는 감당키 벅찬 계획이었다. 선율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역사를 보면 어느 클랜도 혼자서 도시를 개척한적은 없어요. 모든 클랜이, 모든 사용자들이 합동해서 도시를 확장했고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갔지요.' 선율이 말을 마치며 내건 조건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도시를 재건하게 되면 사용자들의 입주를 허락해줄 것. 두 번째는 도시 지분을 배분할 때 마법의 탑을 머셔너리 다음으로 해달라는 것. 물론 그만한 협력을 약속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녀가 내건 조건은 조건이라고 보기에도 민망한 당연한 일이었다. 도시를 활성화할수록 다양한 경제 효과를 창출할 수 있고 발생한 이익은 고스란히 머셔너리의 것이 된다. 배분 또한 큰 문제는 없다. 우리가 50.1% 이상을 가져가면 되거니와, 기실 '질서의 오르도'가 핵심 열쇠인 이상 배분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었다.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 고대 홀 플레인에서 마법의 최고 황금기를 구가했을 때 건설된 최고의 마법 도시. 군침 도는 계획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보이는 떡이 큰 만큼 조심해야 한다. 잘못해서 '나가리'가 되는 순간 돈도, 시간도, 노력도 낭비한 셈이 되는 거니까. '벌써부터 설레발하지는 말자. 조용히 다음 보고를 기다리고 확인하면 되는 거야.' 나는 한숨을 뱉으며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느긋이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한다 해도 짧은 시간에 이룰 수는 없는 계획이었다. 선율도 이 부분에는 동의했고 몇 달간 더욱 상세한 조사를 거치며 진행 경과를 알려주기로 했다. 이윽고 자리에 앉은 후 나는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문 앞에 선 기척에 나직이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언제 들어올래.” 기척이 움찔한 게 느껴졌다. “그만 기다리게 하고 이제 적당히 들어오려무나. 사용자 안현.” 그렇게 5초가 흘렀을까. 이내 조심스레 문이 열리고 어색한 얼굴을 한 안현이 슬그머니 발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헤헤.” 웃기까지. “와서 앉아.” 고갯짓으로 앞쪽 소파를 가리키자 안현은 냉큼 달려와 앉았다. 그러면서도 노심초사 눈치를 살피는 게 아마 불호령이 떨어질까 불안해하는 듯 보였다. “그래. 몸은 좀 괜찮고?” “아, 예. 이제 괜찮습니다. 형님이 바로 달려와서 치료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큰일날뻔했지. 회로는 꼬여있고 마력은 폭주하고 있었으니까. 나 말고 바로 알려준 한결이한테 고마워해.” “예 형님. 그리고 죄송합니다. 이건 무조건 제 잘못입니다.” 그럼 네 잘못이지. 그 말이 맞기는 한데 벌써부터 머리를 숙이는 안현을 보며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튼 몸은 괜찮다니 다행이고. 그럼 이제 얘기를 해볼까? 한결이가 비교적 상세한 상황을 알려주더군. 술 잘 마시고 있다가 갑자기 창을 들어 자세를 잡았다고. 이미지 트레이닝 중이었나?” “그게….” “왜 그랬어?” “하하. 그냥…. 그게 실은 술주정이었습니다. 제가 주사가 조금 심한 편이라서요. 아마 아무 생각 없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안현은 다시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어설프게 웃는 걸로 보아 진실된 대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예 형님. 사실대로 말씀 드리려니 정말 창피하네요. 하하하.” 나는 안현을 빤히 응시했다. 그리고 몇 번 더 테이블을 두드렸다가 이내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그럼 다음부터 조심하도록 하고. 이만 나가봐.” “예…. 예?” 안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는다. 생각보다 가볍게 넘어가자 자못 놀란 모양이다. 나는 품속에서 연초를 한 대 꺼내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아 참. 오늘 아침 회의 있는 건 알고 있지? 늦지 않게 참석하도록.” “…알겠습니다.” 안현은 멍하니 나를 보다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한 번 허리를 굽히고 몸을 일으켰다. 나는 가만히 안현을 주시했다. 나를 보는 안현의 눈동자가 왠지 모르게 홀가분해 보이면서도 쓸쓸해 보였다. 꺼낸 연초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점화석을 들어 조용히 불을 붙였다. 일전에 화정으로 불을 붙인 적이 있는데 질색을 하는 바람에…. - 마침 생각 잘했네. 아주 한 번만 더 그래 봐? 그때는 진짜로 가만히 안 있을 거니까. …자제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몸을 돌린 안현은 느릿한 걸음으로 문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막 문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나는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췄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현아.” 안현의 걸음이 멈췄다. 이어서 고개를 돌리기 전 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리 분하더냐.” 돌아가던 고개가 중간에서 멈췄다. “…예?” “그리 분하냐고 물었다.” 답하는 안현의 목소리는 떨리는 음색이었다. 연기를 한 번 뱉어낸 후 나는 부드러이 입을 열었다. “검술이 최고 경지에 이르면 사람이 검이 되고 검이 사람이 되는 경지가 있다. 그 경지를 바로 신검합일이라 부르지. 물론 창에도 예외는 없다. 창술사들의 사용자 정보에는 아마 신창합일로 표현될 거다.” “그, 그렇군요….” “사용자들이 합일에 이르는 때는 평균 4년 차.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균에 불과하다. 보다 빠르게 다다른 사용자도, 아예 다다르지 못하는 사용자들도 있겠지…. 아무튼 어제 네가 보인 행동은 아마 신창합일을 이루려는 기초 단계였을 거다.” “자, 잠시만요 형님. 사용자들이 합일에 이른다는 말씀은…. 아, 아니. 그게 사용자 정보에 표현된다고요?” “그래. 신창합일은 어빌리티가 아니라 특수 능력 또는 잠재 능력이라는 말이다.” “!” 마침내 꺼낸 진실에 안현은 비로소 몸을 돌려 나를 응시했다. 잠잠했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는 게 아마 여러 의미로 놀란 듯싶었다. 사실 안현이 왜 그랬는지는 알고 있었다. 아마 차소림과의 대련 후 스스로 많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안현은 단시간에 강해지기를 원했고 결국 어빌리티를 익히는 방법을 선택했다. 하지만 익힌다는 게 어빌리티가 아닌 '능력'이라는 점에서 에러였지만. “알고…. 있으셨어요?” “어느 정도는.” 그럼. 알고 있지. 왜냐하면 네가 하는 행동이 내가 저년 차였을 때와 완전 똑같거든. 1회 차를 회상하며 나는 슬며시 웃었다. “그럼 왜 아무 말씀도….” “행동은 잘못됐지만 의도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어느새 연초는 끝까지 타 들어가 있었다. 필터를 재떨이에 비비며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안현. 조금 있으면 한 번 더 탐험에 나가는 사실은 알고 있지?” “예….” “인선은 이미 정해놨다. 기존 인원 3, 새로 들어온 인원 7. 그 중에 너와 차소림을 발표할 생각이며 선두에 기용할 생각이야.” “…선두요?” 그랬다. 선율과의 만남 후 개최한 회의에서 나는 마음을 바꿔 탐험 준비를 공지했다.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이르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내 많은 말은 하지 않으마.” 그리고 침착히 입을 열었다. “사용자 안현은 아직 1년 차에 불과하지. 그래. 여태껏 누누이 말해왔지만 지금은 사용자 정보에 주력할 때다. 어빌리티는 네게 아직 일러.” “하지만….” “그러니까…. 이번 탐험에서 한 번 보고 느껴봐. 그리고 직접 배워봐. 그게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이야.” “해야 할 일….” 이내 눈만 끔뻑이는 안현을 보며 나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네 심정은 이해한다. 목적이 멀면 멀수록 빠르게 목적지까지 가고 싶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분해하는 건 알지만 성급해하지 마라. 그리고 망설이지 말고 포기하지 마라.” “성급히 굴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안현은 앵무새처럼 내 말을 따라 했다. 꼭 뭔가에 홀린듯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서서히 고개를 드는 안현을 보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너는 강해질 수 있다. 그러니 네가 목적한 곳에 다다를 때까지, 차분히 밀고 나가면 되는 거야.” ============================ 작품 후기 ============================ 후유. 스키장은 잘 다녀왔습니다…. 아니요. 솔직히 잘 다녀오지는 못했어요. ㅜ.ㅠ 분명 재미있게 보내기는 했지만, 나름 상처를 받은 여행이었습니다. 실은 스키장에 관해 안 좋은 추억이 있습니다. 고등학생 때 스키를 타러 간 적이 있는데, 그때 최상급 코스에서 내려오다가 한 번 구른 적이 있거든요. 약간 탈줄 안다고 만용을 부린 제 잘못이었지요. 그때 왼쪽 팔꿈치를 다쳐 이후 2년 동안 치료를 해야 했습니다. 이번에 간 스키장이 바로 그때 그 스키장이었습니다. 시간도 많이 흘렀고 이제는 괜찮겠다 싶었지요. 그리고 애당초 초급에서만 놀 생각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생각이란 게 참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가 봅니다. 처음 타는 애들이 있어 몇 번 가르쳐줬는데 이놈들이 몇 번 타더니 더 재미있는 곳으로 가자고 하더군요. 그리고 리프트를 탔는데 공교롭게도 제가 다쳤던 코스 앞에 서게 됐습니다. 막상 경사를 보니까 애들이 무서운지 뜸을 들여 저는 극구 만류했습니다. 아래로 내려가는 코스가 최상급, 중 상급, 초급으로 세 개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겨우 초급으로 끌고 가서 한숨 돌렸습니다.(파xxx 코스라면 아시는 분 계실까요?) 그래서 타기 시작했는데…. 초급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경사는 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약간 긴장을 풀고 간만에 해방감을 느낄 겸 조금씩 가속을 시작했지요. 그렇게 중간중간 S자로 휘면서 적절히 속도를 조절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코스 중 가장 경사가 있는 곳에서 휙 내려가고 있는데…. 그러니까 방향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하는 중이었을 겁니다. 사선으로 쭉 내려가는 찰나 갑작스레 보드를 탄 분이 제가 가는 방향 앞으로 세차게 들어오더군요. 앞뒤로 떨어진 거리는 1미터? 그 정도도 안됐을 겁니다. 제가 가속하던 상황이라 그대로 내려갔으면 아마 그대로 부딪쳤을 겁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가장 경사진 곳이라 굴렀을 가능성도 높고요. 그래서 순간적으로 방향으로 틀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의 일은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순간 눈앞이 번쩍했고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까 저는 엎어진 채로 아래쪽으로 쭈르륵 내려가고 있었고, 겨우 고개를 드니 오른발이 휑하더군요. 장착했던 스키가 날라가 버린 겁니다. -_-a 그리고 오른 팔꿈치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 그 사람도 크게 놀란 듯 멈춰서더니 “괜찮아요?” 하셨습니다. 저는 대답 대신 스키를 찾았고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위쪽에 있어 올라가기 어려우니 대신 가져다 달라는 의미였는데…. 잠깐 주춤하시더니 그대로 내려가시더군요. 하. 한 1분 정도 끙끙대고 있으니 다행히 다른 한 분이 오셔서 스키를 주워주셨습니다. 감사를 표하고 스키를 다시 장착하려는데 아이고. 경사진 곳이라 몸이 자꾸 내려가 다시 스키를 장착하는데 엄청난 애로사항이…. 그 순간 갑자기 무서워져서 일단 자리를 옮겼습니다. 가장 오른쪽 구석으로…. 그 주황색 기둥이랑 망이 쳐진 곳이 있거든요. 그곳까지 기듯이 몸을 옮겨가 일단 앉았지요. 그리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여기서 스키를 다시 장착해야 되나, 아니면 내려가서 비교적 평평한 곳까지 가야 할까. 아무튼 일단 아픈 몸이라도 추스를 생각에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쉬이이이이익. “어어어어어어어어.”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까, 이번에 또 어떤 분이 보드를 타고 양팔을 허우적대며 직선으로 하강. 방향은 정확히 제 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몸을 일으킬 틈도 없이 그대로 내려와 제 아래쪽 허리를 직격하더군요. 그대로 엉켜서 한 세 바퀴 굴렀을 겁니다. 커플로 왔는지 뒤에 어떤 남자가 허둥지둥 내려오더군요. 또 “괜찮아? 괜찮으세요?” 물어보길래 일순 짜증이 솟구쳤습니다. 그래서 “아 조심이 좀 타세요.”라고 말했는데, 뭐라고 우물쭈물하더니 여자를 데리고 슝 내려갑니다. 저는 그저 헛웃음만. 결국 어찌어찌 내려오는 데는 성공했는데 더는 못 탈것 같아 바로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그날 밤 숙소에서 자는데 왼쪽 허리가 아파서 왼쪽으로 눕지를 못하겠더군요. 그렇다고 오른쪽으로 누우려니 팔꿈치가 아프고….(동생아 맨소래담 사다 줘서 고마워. ㅜ.ㅠ) 참 파란만장한 스키 여행이었습니다. 다음 번에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가게 되면 절대로 그곳은 가지 않으렵니다. 뭔가 저한테 마가 낀 것 같아요. 0422 / 0933 ---------------------------------------------- 10. 마지막 이야기(9/9). 하늘은 연한 붉은빛이었다. 해도 슬슬 계절을 타는지 얼른 서쪽으로 넘어가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문득 고개를 들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노을에 물든 황혼 빛 구름이 드문드문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다. 붉게 타오르는 불꽃에 미약한 어스름이 섞여 든 것 같았다. “하늘을 보고 계십니까? 머셔너리 로드.” 가만히 하늘을 보며 상념에 잠길 즈음, 걸쭉한 남성의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흘끗 곁눈질을 하자 한 인상 좋은 사내가 털레털레 걸어오는 걸 볼 수 있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내리고는 마주 미소 지었다. 이름은 이종학. 이스탄텔 로우의 핵심 클랜원으로 1회 차 때 나와 깊은 인연을 맺었던 사용자였다. 또한, 어찌 보면 내 스승이나 다름없는 이라 할 수 있었다. 현재 내가 유용하게 쓰고 있는 이형환위(移形換位)를 가르쳐준 사용자가 바로 이 사람이었으니. “예.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서요.” “아하. 그렇군요. 혹시 제가 방해라도 한 건 아닐지….” “아니요. 괜찮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젓자 이종학이 머쓱히 웃는다. 그리고 살살 눈치를 살피는 게 아무래도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분도 연초를 참 좋아하셨지.' 돌연히 떠오른 생각에 연초 두 대를 꺼내자 이종학은 반색하며 받아 들었다. 이윽고 우리는 사이 좋게 연초를 피우며 느린 걸음으로 언덕을 내려갔다. “이번에 보여주신 실력에 정말로 놀랐습니다. 솔직히 전쟁 후 돌아다닌 소문이 어느 정도 과장됐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눈앞에서 보니까 감탄밖에 나오지 않더군요.” “과찬입니다. 아무튼 좋게 보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과찬은요. 정말 장난이 아니던데요. 저 말고도 모든 이스탈텔 로우 클랜원들도 크게 놀랐습니다. 특히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졌다가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 기술은…. 혹시 어빌리티입니까?” “아. 이형환위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고유, 특수, 잠재 능력이 아닌 직접 개발한 어빌리티가 맞습니다.” 맞는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이자 이종학이 크게 탄성을 터뜨린다. 그러면서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게 어지간히 배우고 싶은 모양이다. 마음이 급한 걸까. 이내 연초를 쭉쭉 빨아들인 이종학은 진중한 낯빛으로 날 응시했다. 형형한 눈동자를 보아하니 날 찾아온 이유가 대강은 짐작되었다. “머셔너리 로드. 실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돌려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방금 이형환위라 말씀하신 어빌리티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저도 예전에 비슷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 2년 동안 개발 중에 있었습니다. 하여 어느 정도 성과는 거뒀지만, 치명적인 오류가 있어 잠시 묻어둔 상태였습니다. 즉 실제로 상용화시키지는 못했다고 할까요?” “그렇군요.” “한때 너무 답답해 이곳저곳에 자문을 구한 적도 있었지요. 하지만 오늘 머셔너리 로드를 보니, 제가 개발한 어빌리티의 치명적인 단점을 극복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 혹시 제가 막히는 부분에 대해서 도움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도움을 원하는 이종학의 시선에 나는 잠시 1회 차를 회상했다. '수현아. 내가 지금 이 어빌리티를 너에게 전수해주는 이유는…. 그녀의 부탁도 있지만 네가 죽지 않기를 바래서 이기도 해.' 이종학의 이형환위를 전수해준 덕에 도대체 몇 번이나 목숨을 건졌던가. 긴장한 얼굴로 목울대를 움직이는 이종학을 보며 나는 미미하게 웃었다. “좋습니다.” “그렇군요. 하하. 괜찮습니다! 솔직히 제가 너무 실례…. 예?” “어느 부분이 막히시는지요? 제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정말이십니까?” 나는 그렇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였고, 이종학은 잠시 동안 나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입 꼬리가 한껏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뛸 듯이 기뻐 보이는 게 당장에라도 껴안을듯한 기세…. 아니. 정말로 양팔을 벌렸다. “우, 우와! 감사합니다! 정말로….” 그때였다. “사용자 이종학.” 은은한 색기 어린 여성스러운 음색. 그러면서도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위엄 서린 목소리가 한 줄기 흘러들었다. 그 순간 이종학은 갑작스레 움직임을 멈추더니 떨리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흡사 뱀 만난 개구리 같은 모습이었다. “크, 클랜 로드.” 이종학은 하필 지금이냐는 어투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얼른 시선을 돌리자, 보는 이를 빨아들일듯한 기이한 마력이 서린 두 쌍의 흑 수정, 아니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무표정하지만 서릿발 같은 눈길로 이종학을 보는 여인은 다름 아닌 한소영이었다. 이종학은 머쓱히 머리를 긁적이더니 어색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 언제부터 계셨던 겁니까?” “두 분이 연초를 피울 때부터요.” “…그럼 혹시 들으셨습니까?” “그렇다면요?” 고저 없는 음색이었지만 그래서 더 무서웠다. 뭔가 모르게 상대를 압박하고 몰아치는 느낌이랄까? 상황은 금세 정리됐다. 이종학이 몇 번 머리를 꾸벅하더니 신속히 줄행랑을 놓은 것이다. 곧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가는 그를 보며 나는 가볍게 웃었다. 그러나 한소영은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이종학을 응시했다. 그녀가 무섭기는 어지간히 무서운가 보다. 잠시 후, 한소영은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에게 걸어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머셔너리 로드. 클랜원의 철없는 부탁에 곤란을….” “아, 잠시만요.” 그 순간 나는 더욱 가까이 다가서 한소영의 가녀린 팔을 잡았다. 이어서 녹아 내릴 것 같은 부드러운 감촉이 손에 잡히는 순간 막 떨어지려던 그녀의 고개가 멈췄다. 사실 앞으로 몇 년 후 이종학은 결국 단점을 극복하고, 원하던 어빌리티를 개발하게 된다. 그러니 어차피 알게 될 거, 약간이라도 도움을 주어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속셈도 있었는데 일이 이상하게 틀어져버렸다. “여러 클랜원들이 보고 있습니다. 사과는 괜찮으니 이만 넣어두시지요.” “…어빌리티는 가족이라도, 같은 클랜원이라도 가르쳐주지 않는 게 관행이에요. 하물며 머셔너리 로드와 사용자 이종학은.” “그렇다면 제가 좋게 거절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허락한 것도 저고요. 이스탄텔 로우 로드께서 고개를 숙이실 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해요. 그런데…. 아파요.” 한소영은 눈을 한두 번 깜빡이더니 갑작스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시선은 내가 잡은 왼팔에 향해있었다. 나는 아차 싶어 얼른 팔을 놓았다. 안 그래도 농염한 여인의 향기가 난다 싶었는데 너무 거리를 줄인 모양이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내 몇 걸음 물러서자 한소영은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어느덧 클랜원들은 언덕을 거의 내려간 상태였다. 천천히 내려가던 도중, 한소영은 내가 잡았던 부위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그리고 부드러이 주무르며 조용히 입을 떼었다. “감사해요. 머셔너리 로드는 참 친절하세요.” “…예?” 그것은 매우 갑작스럽고 또한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한소영은 그렇지 않은 듯 날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간 게 뭔가 묻고 싶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나는 얼른 속을 가다듬었다. “생각해보니까…. 조금 전도 그렇고, 이번에 이스탄텔 로우에서 유적을 탐험할 수 있었던 건 머셔너리 로드 덕분이었죠. 배려에는 무척 감사하고 있어요.” “하하. 우리에게도 필요한 상황이었는데요.” 한소영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내 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었다. 몇 달 전 클랜원들에게 다시 탐험을 개시하겠다 공지한 후, 나는 한 가지 말을 덧붙였다. 그것은 바로 이번에도 타 클랜과 협력하겠다는 것이었다. 탐험할 유적은 '잃어버린 낙원', 그리고 협력 대상은 해밀이 아닌 이스탄텔 로우였다. 클랜원들과의 회의를 끝낸 후 나는 곧바로 이스탄텔 로우를 방문했다. 그리고 한소영에 사정을 설명하고 나서 도움을 요청했다. 이번에도 추측성 기사를 담은 기록들이 머셔너리를 겨냥할 경우, 여차하면 이스탄텔 로우에서 발견했다는 걸로 해달라는 것. 한소영은 또 유적을 발견했다는 말에 크게 놀랐지만 예상대로 자세히 캐묻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 제안을 흔쾌히 승낙해주었다. 사실 대부분의 성과는 우리가 가져갔지만 떨어지는 떡고물을 사양할 여인은 아니었다. 더구나 떡 공장이 유적이라면 더더욱. '잃어버린 낙원'의 탐험은 '발할라의 탑'처럼 순조로웠다. 난이도도 그리 높지 않은 곳이었으며 양클랜에서 참가한 인선도 호화롭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해서 우리는 단숨에 낙원 내부의 괴물을 처리한 후 성과를 챙겨 룰루랄라 돌아오는 중이었다. 아무튼. 한소영은 자꾸만 고개를 갸웃했다. 설명은 들었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건 알고 있지만…. 솔직히 이렇게 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배분도 2할이면 만족하는데 굳이 3할까지 늘려주셨고, 핵심 장비도 하나 건네주셨어요.” “처음 모니카에 자리를 잡을 때 이스탄텔 로우에서 많은 편의를 봐주었으니까요. …혹시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라도 있으신지요.” 주면 조용히 받아먹어라 라는 의미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의심이 있는가 싶어 물어본 말이었다. 한소영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다만 궁금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므린 손을 코앞에 갖다 대더니 살짝 입김을 불었다. 허연 김이 발개진 그녀의 손을 덮는다. 문득 찰찰 한 머리카락 사이로 비죽 솟아나온, 마찬가지로 발갛게 변한 귀가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소영이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그냥 유적 건도 그렇고…. 아까 사용자 이종학에게도 그렇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래요. 그러니까 머셔너리 로드는요.” “?” “왜 이렇게 저에게, 이스탄텔 로우에게 잘해주세요?” “예…?”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한소영의 말에 정곡을 찔린 탓이다. 이윽고 한소영도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심유(深幽)한 눈동자로 날 빤히 주시하는 게 꼭 대답을 듣고 싶은 모양이다. 솔직히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볼 줄은 몰랐기에 나는 한순간 공황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사실 이렇게 챙겨주는 이유는 명백했다. 작게는 1회 차 때 받았던 호의를 갚고, 크게는 전력을 상승시켜 추후 지구로의 귀환에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뭐, 뭐라고 해야 되지?' “그 이유는 내가 알고 있지.” 그 순간이었다. 조용히 침만 삼키고 있던 찰나 연혜림이 사이로 슬쩍 끼어들었다. 나와 한소영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 갑자기 등장한 '처형의 공주'는 “냐하하하.” 웃으며 한소영의 볼을 쿡 찔렀다. “그건 바로 우리 클랜 로드 때문 아니야? 머셔너리 로드?” “연혜림.” 순간 뜨끔했지만 한소영은 헛소리로 치부한 듯했다. 그러나 그녀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연혜림의 손가락이 거침없이 그녀의 몸을 질주한다. 얼굴에서 가슴을, 가슴에서 잘록한 허리를. 그러더니 종래에는 전신을 순식간에 훑는다. 가히 10강다운 손놀림이었다. “봐봐. 이렇게 얼굴도 예쁘지, 가슴도 크지, 몸매도 죽이지, 분위기도 도도하지. 즉 남자라면 한 번쯤은 정복해 보고 싶은 욕망이….” “사용자 연혜림! 당장 안 물러나?” 결국 한소영이 소리를 질렀다. 항상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던 얼굴인데, 드물게도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로 찌푸려졌다. “이크. 우리 클랜 로드 화났네~.” 그제야 장난이 너무 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연혜림은 다급히 물러섰다. 이어서 손을 살랑살랑 흔들고는 유려히 발을 놀려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뜻하지 않은 도움. 어물쩍 넘어가는 상황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소영 몰래 엄지 손가락을 세웠다. 연혜림은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어 화답했고 이내 이종학처럼 신속히 도망쳤다. “후….” 그러나 한소영은 그렇지 않은 듯, 그대로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미안해요. 머셔너리 로드. 우리 클랜원들은 왜 이렇게 철이 없을까요. 머셔너리 클랜원들은 하나같이 조용하고 묵직하던데….” '아니요. 우리도 그런 애들 많습니다.' 다만 데려오지 않았을 뿐.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계속해서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위로 차 입을 열었다. “우리 분위기가 너무 심각했나 봅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너무 괘념치마세요.” “아니요. 괘념해야겠어요. 가끔 보면 연혜림은 너무 막 나가는 경향이 있어요. 아무리 머셔너리 로드와 친분이 있다고 해도…. 제 말은 들어먹지를 않으니 언제 한 번 따끔히 일러주시면 안될까요? 이건 부탁이에요.” “하하. 글쎄요. 아무래도 어렵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사용자 연혜림의 말도 틀리지는 않는데요. 기분이 상한 건 아니니, 너무 나무라지는 마세요.” “…틀린 말이 아니라고요?”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자고로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니까. 한숨은 멈췄지만, 한소영은 여전히 얼굴을 감싸 쥔 상태였다. 이내 약간 벌어진 손가락 틈새로 그녀의 눈이 나를 곁눈질하는 게 보였다. 이윽고 한소영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머셔너리 로드가 생각하시기에도, 제 가슴이 크고 몸매가 죽이나요?” “…잠시만요.” “한 번 정복해보고 싶은….” “오해입니다. 그냥 여성으로서 아름답다는 말이었습니다.” 한소영은 “푸.” 소리를 내고는 세차게 손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활짝 핀 손바닥으로 몇 번 부채질을 하더니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다.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나는 그녀의 정신을 붕괴해준 연혜림에게 감사했다. 한소영의 이런 모습은 5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했으니. 한소영은 한참 동안 머리를 털더니 다시 본연의 고요함을 되찾았다. 왠지 모르게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왜냐하면 2회 차에 들어서 그녀와 처음으로 일 얘기가 아닌 사담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클랜원들에게 가볼게요. 오늘은 너무 추태를 보였네요. 부디 잊어주세요.” “추태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러겠습니다.” 머리를 끄덕이자 한소영은 급히 발을 놀려 앞쪽으로 걸었다. 나는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다가, 남은 언덕을 천천히 내려갔다. 그렇게 앞서가던 클랜원들을 따라잡고 슬쩍 오른쪽을 쳐다보자, 먼저 도착한 한소영이 이스탄텔 로우 클랜원들 사이로 여전히 부채질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때였다. “수현아. 무슨 둘이서 무슨 얘기 했어? 저분 완전 급하게 뛰어오시던데.” 들려온 목소리에 이번에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2열 종대로 행군하는 머셔너리 클랜원들과, 옆으로 은근슬쩍 팔을 감아오는 한나를 볼 수 있었다. 이내 왼팔에 살짝 닿는 크고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나는 조용히 머리를 흔들었다. “별 얘기 안 했어.” “으응. 그렇구나. 아. 이제 곧 도시에 도착한대. 클랜에 연락 넣었어.” “잘했네. 고연주는 돌아왔대?” “연주 언니? 그 소식은 못 들었는데…. 왜?” “돌아가면 총 결산과 함께 축제를 열 생각이거든. 그래서 귀환 시기를 고연주가 돌아오는 날에 맞춘 거야.” “축제라…. 와, 기대된다. 후후.” 배시시 웃는 한나를 보며 나는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너는 더욱 기대해도 좋아.” “뭘 기대해도 좋아?” “이번 결산 때 섭섭지 않게 챙겨줄 거거든. 이제 슬슬 클래스를 계승할 때도 됐으니까.” “얘는. 내가 언제 섭섭해했다고. 누가 보면 꼭 조른 줄 알겠어.” 한나는 나를 곱게 흘겼다. 그리고 난 약하게 헛기침을 했다. “그때 장비 요청서에 당당히 적은 게 누구였더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왠지 엄청 삐칠 것 같아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아무튼 연신 웃음을 흘리는 게 지금은 기분은 좋아 보이니까. 그렇게 한참을 걷고 있을 즈음. 무에 그리 좋은지 상냥히 웃던 임한나에게서 미약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있잖아…. 수현아. 이번 축제 때….” “도시가 보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앞쪽에서 누군가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전방을 응시했다. 하늘이 내려앉은 곳에서 구름을 찌를 듯 솟아오른 까마득한 건물이 잡혔다. 그리고 조금 더 걷자 하늘과 함께 황혼 빛으로 물들은 도시가 아스라이 보였다. 드디어 도시로 돌아온 것이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의 코멘트를 보니 힘이 납니다. 의외로 저와 비슷한 상황을 겪으신 분들이 많네요. ㅜ.ㅠ 저도 나쁜 기억은 훌훌 털고 얼른 본 페이스를 찾도록 하겠습니다. :) Q1. 여태껏 탐험한 유적들에서 얻은 장비들이 궁금합니다. Sol) 다음 회에 몇 가지 핵심 장비들이 나올 예정입니다. :) Q2. 도대체 깃발 회수는 언제 합니까? Sol) 다음 회에 나올 예정입니다. 대상은 남다은입니다. Q3. 그럼 응응은요? Sol) 다 다음 회에 나옵니다. 대상은 임한나입니다. Q4. 외전은 언제 끝나나요? 그리고 2부는 언제 시작합니까? Sol) 이제 2편 남았습니다. 끝나면 바로 2부로 돌입합니다. Q5. 비비앙. Sol) …죄송합니다. 이번 외전에는 과감히 빼버렸습니다. 제가 아직 그 부분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상태라 잘 쓸 자신도 없었고요. 그러니 언제 한 번 날을 잡고 과감히 끝내버리겠습니다. 그때는 2부 연재 중 외전 형식으로 연재가 되겠지요. 그런데…. 이거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힙니다. 동영상이라도 봐야 하나요? -_-a 0423 / 0933 ---------------------------------------------- 10. 마지막 이야기(9/9). 머셔너리 하우스, 본관 1층의 풍경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입구로 들어오면 정면에 카운터가 보이고 좌우로 기다란 복도가 트여있다. 그리고 정 중앙에는 테이블과 게시판 등을 배치해 논 매우 넓고 둥근 공간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다 목적용 로비였다. 평소 로비는 한산한 편이다. 클랜원 대부분이 개인 연구소 및 숙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모든 클랜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긴장된 낯빛을 비치고 있었다. 다들 입을 딱 다물고 있는 게 정말로 고요한 분위기였다. 문득 이들이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아 나는 살며시 웃음지었다. 이유는 단 하나. 바로 눈앞에 놓인 수많은 장비들 때문일 터. “흠, 흐흠.” 한두 번 헛기침을 하자 무수한 시선이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더는 시간을 끌면 안되겠다 싶어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축제에 들어가기 전, 장비 결산을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로비의 중앙으로 이동했다. 이번 결산은 '얼음의 탑', '발할라의 탑', '잃어버린 낙원'에서 얻은 성과를 토대로 한 결산이다. 다만 모든 장비가 아닌 핵심 장비들만을 대상으로 잡았다. 축제 전 분위기를 띄우는 데는 이 정도가 딱 적당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실 그래도 많은 편이긴 했지만. 나는 재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1층 바닥에는 은은한 빛을 뿌리는 각양각색의 장비들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이미 모든 장비에 구즈 어프레이즐(Goods Appraisal : 물품 감정서)이 붙여져 있었지만, 제 3의 눈이 훨씬 효과가 좋다. '일단 한나부터 챙겨주는 게 낫겠지.' 첫 시작을 한나로 끊을 생각에 나는 곧장 보자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짙은 남빛을 띠는 조막만 한 보석을 꺼내 들었다. 레어 클래스 '황혼의 무녀(Medium Of Twilight)'를 계승할 수 있는 장비였다. 시선을 마주치자 한나는 낯부끄러운 미소를 흘렸다. 그러나 이미 그녀가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옆에 앉은 비비앙과 안솔은 벌써부터 부산을 떠는 중이었다. 나는 보석을 높이 들었다. 결산의 시작이다. “이것부터 바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주인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비로소 주게 되네요. 레어 클래스 황혼의 무녀는 사용자 임한나에게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여'가 아닌 '완전 지급'을 선언했다. 곧바로 다가가 보석을 내밀자 한나는 머리를 꾸벅하며 양손으로 받았다. 가벼운 박수가 이어졌고 그녀는 활짝 미소 지었다. “드디어 레어 클래스네. 나와 같은 반열에 올라선 걸 축하할게. 요호호호.” “언니 축하해요. 드디어 오매불망 기다리던 레어 클래스를 받으셨네요.” “내, 내가 언제 오매불망 기다렸니….” 한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입가에 배인 미소로 보아 꽤나 기쁜 듯싶었다. 조금 더 축하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지만, 나는 바로 다음 장비를 향해 걸음을 틀었다. 왜냐하면 결산을 최대한 일찍 끝내달라는 여성 클랜원들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축제를 주관한 사용자는 바로 머셔너리의 여성 클랜원들이었다. 사실 이번 축제가 어떻게 될지는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여성 클랜원들이 당일 깜짝 놀라게 해주겠다고 자기들끼리 쉬쉬해버렸기 때문이다. 아무튼, 도대체 뭘 준비했길래 이러는지는 모르지만 바람대로 빨리 끝내주는 게 나으리라. 다음 타깃은 바로 '얼음의 탑'에서 얻은 로브와 뮬에 있을 적 발견한 활이었다. 『이아노르 라 에라헬의 루나리스 로브(Lunaris Robe).』 (일반 설명 : 고대 홀 플레인, 이아노르 왕국의 공주인 에라헬이 입었던 루나리스 로브입니다. 이아노르 왕국은 달을 숭배하는 신전을 국교로 삼았는데, 왕가의 혈족을 신전에 보내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루나리스 로브는 신전이 당시 이아노르 왕국의 꽃이며 성녀가 될 예정이었던 에라헬에게 바쳤던 물품입니다. 로브의 겉면에 달빛으로 음각된 보호 주문이 걸려있습니다. 달이 뜨면 미약한 빛을 발합니다.) (상세 설명 : 1. 착용자의 능력에 재사용 대기 시간이 존재할 경우, 그 시간을 절반으로 줄여줍니다. 2. 로브에 보호 주문이 각인돼 있습니다. 착용자는 마력 능력치 50이하에 대해서 완전 방어 판정을, 60이하에 대해서 일부 방어 판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단, 달빛을 받을 경우 마력 능력치 10포인트 만큼 저항력이 상승합니다. 3. 루나리스 로브에 잠재된 능력 '달빛의 축복(Blessings Of Moonlight)'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파사(破邪)의 활』 (일반 설명 : 파사(破邪) - 첫 번째의 날개. 나쁘고 그릇된 기운을 깨뜨리는 권능이 담겨 있습니다.) (상세 설명 : 1. 마(魔)와 관련된 기운에 대해서는 압도적인 공격력을 보이는 파사의 활입니다. 다만, 파사의 능력은 어디까지나 사용자의 마력 능력치를 기반합니다.) “이 두 장비도 역시 주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로브와 활을 들어 안솔과 선유운을 번갈아 보았다. 안솔은 역시나 하는 얼굴로 방실방실 웃었지만, 선유운은 눈만 끔뻑이는 게 꽤나 놀란 모양이다. 머셔너리에 사제는 두 명이다. 그러나 가슴 중앙 부분이 마름모꼴로 노출돼있고 다리 옆 선도 훤히 트여있는 게, 루나리스 로브는 완전한 여성용 로브였다. 궁수도 마찬가지로 두 명이지만, 한나는 이미 더 좋은 활을 갖고 있으니 파사의 활을 원하지 않으리라. 그 순간 갑작스레 장난기가 일어 나는 차분히 신재룡을 돌아보았다. “사용자 신재룡. 혹시 루나리스 로브를 받을 생각이 있습니까?” 갑작스런 지목에 놀랐는지 신재룡은 한순간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곧 푸근한 미소를 보이더니 껄껄 웃었다. “으음, 좋습니다. 머셔너리 로드께서 친히 주시는 물품인데…. 그럼 여기서 한 번 입어볼까요?” 이제는 내가 당황할 차례였다. “에~? 에에~?” 이윽고 안솔의 앙탈의 이어졌을 때 신재룡은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내저었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사제가 되어 동료들의 안구를 치료하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괴롭게 만들 수는 없겠지요. 그러니 말씀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거, 한 방 먹었네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자 클랜원들이 일제히 왁자한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까지 고요했던 1층 로비가 순식간에 웃음이 흐른다. 그 와중 흘끗 시선을 돌리니 “정말 주는 거야?” 전전긍긍하는 안솔과 “내가 받아도 될까?” 고민하는 선유운이 보였다. “루나리스 로브는 사용자 안솔에게 대급하겠습니다. 또한 파사의 활은, 발할라의 탑과 잃어버린 낙원에서 많은 활약을 보여준 사용자 선유운에게 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이의 있으신 분 계십니까?” 클랜원들은 하나같이 머리를 저었다. 하기야 있을 턱이 없다.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는 장비도 아니었거니와, 이대로 묵혀두기에는 아까운 것들이었다. “와아! 와아!” 안솔은 냉큼 달려 나오더니 누가 채갈세라 루나리스 로브를 힘껏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나는 잠깐 잡고 있다가 한순간 놓아주었다. 결국 자기 힘에 못 이겨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그녀는 넘어진 상태서도 헤헤 웃으며 로브를 꼭 끌어안았다. 어지간히도 갖고 싶었던 모양이다. “제가…. 이걸 받아도 되겠습니까? 활이라면 저번에 주신 장비로도 충분합니다만.” 선유운은 뒤늦게 나와 쭈뼛쭈뼛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대답 대신 박수를 보내는 클랜원들과 로브를 들고 빙글빙글 도는 안솔을 가리켰다. 선유운은 머쓱히 웃더니 조심스레 파사의 활을 받았다. 여기까지 처리한 후 나는 잠시 숨을 돌렸다. 이제 남은 성과는 장비 세트 하나와 물품 하나 그리고 장비 하나였다. 사실 이번 결산은 어디까지나 축제 전 흥을 돋구는 과정에 불과했다. 하여 클랜원들이 배분에 납득할 수 있도록, 결산 때 보일 장비를 선택할 때 최대한 겹치지 않는 선에서 고른 것이다. 지금까지는 확실히 괜찮았다. 그러나 남은 장비들을 생각하면 과연 클랜원들이 납득할지 걱정이 이는 게 사실이었다. 『아르쿠스 발키리, 소환 세트(Arcus Valkyrie, Set)』 (일반 설명 : 무지개의 여신 플라비우스를 수호하던 친위대, 아르쿠스 발키리들이 착용하던 장비들입니다. 아르쿠스 발키리는 생전에는 영웅으로 전장에서 명성을 떨쳐 울린 여인들이며, 사후에는 플라비우스의 부름을 받아 전투 처녀로 거듭난 이들입니다. 평소에는 목걸이 형태로 봉인돼있지만 착용자가 해제할 경우 무기, 투구, 갑옷, 장갑, 부츠가 소환돼 신체에 자동적으로 장착됩니다.) (상세 설명(이 모든 능력은 봉인을 해제했을 시 적용됩니다.) : 1. 아르쿠스 발키리들의 장비는 여인들만 사용할 수 있는 소환 세트며, 그 중 처녀만이 본래의 힘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2. 아르쿠스 발키리의 권능, 무지개 오오라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3. 봉인을 해제했을 경우 착용자의 마력 능력치에 따라 유지 시간이 조정됩니다. 유지 시간 동안 근력, 체력, 내구 능력치가 1포인트 만큼, 민첩, 마력, 행운 능력치가 2포인트 만큼 상승합니다.) 『이브의 혈통(Eve's Blood)』 (일반 설명 : 낙원은 폐쇄성이 짙은 지역이었지만, 한때는 지상 낙원이라 불릴 정도로 풍요로운 성세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낙원을 시기한 주변 국가들이 어둠 속의 마물들을 움직여, 낙원은 침공을 받게 됩니다. 낙원의 주민들은 용감히 저항했지만 끝없이 밀고 들어오는 마물을 막을 수는 없었고, 결국 멸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브의 혈통은 낙원 최후의 생존자며 여왕이었던 이브의 피를 담은 병입니다. 반신이라 불린 아담의 아내였던 만큼 이브의 피에는 특별한 능력이 깃들어있습니다.) (상세 설명 : 1. 이브의 혈통은 바로 효과가 일어나는 게 아닌, 복용자가 원할 때 효과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2. 효과는 두 개의 '경우'로 나뉘며 또한 한 가지 '선택지'가 존재합니다. 3. 첫 번째 경우입니다. 민첩 능력치 80포인트 이하, 행운 능력치 80포인트 이하인 경우 : 각각 2포인트 만큼 상승합니다. 4. 두 번째 경우입니다. 민첩 능력이 90포인트 이하, 행운 능력치 90포인트 이하인 경우 : 각각 1포인트 만큼 상승합니다. 5. 마지막 선택지입니다. 사용자의 여섯 능력치 중 하나가 무작위로 선정돼 2포인트 만큼 하락합니다. 그리고 차감된 포인트에 2를 곱해 4포인트 만큼 되돌아옵니다. 되돌아온 능력치 포인트는 자유롭게 올릴 수 있지만, 해당 능력치가 하락한 능력치의 십의 자리(일의 자리는 0으로 계산합니다.)에 해당하는 수치를 초과할 경우 아무런 효과를 볼 수 없습니다.) 『피 묻은 스카프(Bloody Scarf)』 (일반 설명 : 낙원의 왕이었던 아담이 여왕 이브에게 선물한 스카프입니다. 아담은 밀려오는 마물의 군대에 맞서 용감히 저항했지만, 끝없이 몰려드는 군세를 전부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아담이 최후를 맞았을 때, 이브는 왕의 옆으로 다가가 스카프로 흐르는 피를 닦았습니다. 낙원의 왕이며 반신이었던 아담의 피가 묻어, 스카프에 특별한 능력이 깃들었습니다.) (상세 설명 : 1. 스카프를 두를 경우 착용자의 이동 속도가 한층 상승합니다. 2. 아담의 권능 중 하나인 '동화(Assimilate)'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3. 아담의 권능 중 하나인 '흡수(Absorb)'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피 묻은 스카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 이 자리에는 없는 고연주에게 대급할 예정이었다. 효과도 잘 어울리고 그녀가 머셔너리에 공헌한 일이 많으니 다들 납득할 것이다. 다만 '아르쿠스 발키리 소환 세트'의 경우, 상황이 조금 복잡했다. 우선 가장 적합한 대급은 차소림이며 차선책으로는 유정이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유정의 클래스는 레어 클래스 묘족 용병을 기반으로 한 '여명의 검투사'였다. 즉 두터운 장갑과는 맞지 않는 사용자였다. '차소림이 진짜 어울리는데.' 차소림에게 주는 게 최선이라는 선택은 몇 번을 생각해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냉큼 주는 것도 문제였다. 결산할 장비가 좋아도 너무 좋다. 하지만 그녀는 가장 최근에 머셔너리에 들어왔으며 활동이라고 해봤자 '잃어버린 낙원'에 참가한 것밖에 없다. 사용자 정보는 인정하지만 공헌도를 따지면 주기 이래저래 눈치가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갑자기 말을 하지 않아서일까. 한껏 좋았던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남은 장비들을 두고 고민하는걸 알아챈 모양이다. 하여 빠르게 생각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 아르쿠스 발키리 소환 세트는 차소림에게 지급하자. 그리고 이브의 혈통으로 유정이를 달래는 거야.' 결국 짧게 숨을 뱉고서 나는 침착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클랜 로드가 이런 모습을 오래 보이는 건 좋지 않다. 그러니 불화의 여지가 있더라도 소신껏 가는 게 좋을 것이다. 나는 은은한 빛을 내뿜는 목걸이 앞에 섰다. 그리고 클랜원들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예전에 여러분께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을 겁니다. 우리는 장비를 수집하려고 탐험하는 게 아니라 사용하러 탐험을 한다고요. 물론 무분별한 배분은 저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클래스에 관해서는 철저히 관리를 하고 있고, 장비도 완전 지급과 대급 방식으로 구분한 겁니다.” 이윽고 목걸이를 들어올리자 클랜원들이 시선이 따라 올라오는 게 보인다. “이미 다들 보셨으니 알겠지만, 이 목걸이는 발키리 세트를 소환하는 아주 좋은 장비입니다. 어느 정도 제한은 있지만, 권능을 사용할 수 있고 능력치도 올려줍니다. 그래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예. 일단 거두절미하고 말하겠습니다. 이 장비는 사용자 차소림에게 대급할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가장 잘 다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여러 클랜원들이 유정을 쳐다봤다. 다들 그녀의 뾰족한 성격을 아는 만큼 혹시 모를 일을 걱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유정의 얼굴은 매우 담담했다. 아니, 마치 목걸이에 관심도 없었다는 것처럼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이기까지. 유정을 보며 나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여명의 검투사는 묘족 용병을 기반으로 한 레어 클래스입니다. 즉 신속한 상황 판단과 재빠른 몸놀림이 요구되는 만큼, 몸을 무겁게 만드는 아르쿠스 발키리 소환 세트는 맞지 않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니 이 목걸이 보다는, 민첩과 행운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이브의 혈통을 지급하겠습니다.” 그 순간 유정은 설핏 시선을 들어 나를 응시했다. 일견 담담해 보이지만, 눈동자에는 아쉬움 한 줄기가 스치듯 지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3초 정도 지났을까? 유정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그러더니 어슴푸레 웃으며 조용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짝짝짝짝…. 클랜원들은 잠깐 조용했지만 곧 유정을 따라 박수를 쳐주었다. 이내 분연히 몸을 일으켜 다가오는 그녀를 보며 나는 간신히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혹시 생떼를 쓰면 어쩌나 싶었는데 어느 정도 납득한 듯싶었다. 이윽고 유정에게 '이브의 혈통'을 건넨 후 나는 차소림에게로 이동했다. 어색한 얼굴로 자꾸 양 옆만 번갈아 보는 게 이러다 계속 기다리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용자 차소림. 축하합니다.” “머, 머셔너리 로드. 이건…. 저에게 너무 과분합니다.” “하지만 차소림 말고는 어울리는 사용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대급인데요.” “하, 하지만….” 여전히 우물쭈물하는 차소림. 나는 동기 부여도 잊지 않았다. “그만큼 열심히 활동하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창고에는 시크릿 클래스 아르쿠스 발키리도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 열심히 활동하면 그것 또한 얻을 수 있겠지요.” “아, 아앗…!” 나는 차소림에게 직접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그녀는 양손을 목으로 감쌌지만 이미 한 발 늦은 상태였다. 이윽고 환히 웃고 있는 클랜원들을 향해 몸을 돌리…. 아니. 왜 여성 클랜원들은 노려보고 있는 거지…? 아, 아닌가? 처음 돌았을 때는 분명 노려보는 것 같았는데 눈 한 번 깜빡이자 다들 웃는 얼굴로 변했다. 아무튼 박수가 잦아들어,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 남은 피 묻은 스카프는 사용자 고연주에게 대급할 예정입니다. 이의 있으신 분 계십니까?” 클랜원들은 전원 “아니요.”로 합창했다. 클랜원들에 대한 고연주의 영향력을 엿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한 번 머리를 끄덕인 후 결산을 마치기로 했다. “그럼 이것으로 결산을 마치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피 묻은 스카프'를 마지막으로 모든 결산이 끝났다. “언니. 축하해요.” “축하해요. 사용자 차소림.” 축하는 건네는 이들과 감사를 표하는 이들. 클랜원들의 얼굴은 다행히 밝고 활기차 보였다. 솔직히 약간 걱정한 감도 없잖아 있었는데 이 정도면 나름 잘 넘어간 것이라 생각됐다. 나는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일단 핵심 장비들은 결산을 끝냈지만 남은 장비들은 더욱 많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앞으로 클랜원들에 한해 창고를 전면 개방할 예정입니다. 혹시 원하는 장비나 클래스가 있다면 기탄없이 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검토한 후, 지급 또는 대급 여부에 대해 결정하겠습니다.” 남은 장비는 많다. 기존에 보류한 장비들부터, 이번에 새로 얻은 특수 보석, 낙원의 심장, 여러 장신구들, 요정 여 왕과 페가수스의 알 등등. 그것들 또한 매우 좋은 장비였지만 장착이 아닌 특수한 상황에서 사용할 것들이라 결산에서 제외한 것이다. “오빠. 빨리빨리.” “오라버니~.” 가만히 상념에 잠겨있을 때, 일순 유정과 안솔이 발을 동동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전 결산을 최대한 빨리 끝내달라고 했는데, 한시라도 빨리 준비한 걸 보이고 싶은 모양이다. 하여 알겠다고 대답한 후 박수를 쳐 이목을 집중시켰다. “다들 주목. 결산이 끝났습니다. 지급 받은 장비는 나중에 보도록 하시고, 일단은 축제를 시작하는 게 낫겠지요?” 그와 동시에 여성 클랜원들 전원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흡시 이 말을 기다렸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잠시 동안 멍하니 보다가 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우리 여성 클랜원들이 준비한 축제를 즐길 시간이네요.” * 머셔너리 하우스 1층. 식당 앞 복도. “아 배고파. 배고파 죽겠는데 왜 이렇게 문을 안 열어…. 도대체 뭘 준비했길래….” “헤헤. 형님. 그래도 기대되지 않아요?” “기대는 무슨…. 야, 한결아. 이쪽으로 와봐. 뭔가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어…. 정말 그러네요? 와. 저 어제부터 굶었는데.” 안현이 배를 슬슬 문지르더니 식당 문에 딱 붙어 코를 벌름거린다. 녀석을 따라 코를 벌름거리는 한결을 보며 나는 쓰게 웃었다. 결산이 끝난 후 축제가 시작됐다. 아니. 정확히는 시작 바로 전이라고 할까. 현재 머셔너리의 남성 클랜원들은 밖에서 추위에 떨며 기다리는 중이었다. 왜냐하면 여성들이 식당에 들어가기 전 이구동성으로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금방 준비하겠다고는 했는데 기다리는 게 벌써 2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결국 더는 기다리지 못하겠는지 안현이 목을 좌우로 꺾으며 말했다. “형. 그냥 확 밀고 들어가버릴까요? 영화에도 자주 나오잖아요. 형이 모두 조져! 이렇게 외치면 다들 우루루 몰려들어가서….” “…네가 한 번 해봐.” 안현이 정말 하겠다는 얼굴로 문고리를 잡자, 한결은 죽겠다는 듯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얘도 참 웃음이 헤퍼서 큰일이야. 이윽고 안현은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뭔가 생각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차 형. 그러고 보니 연주 누님이요. 오늘 못 오시잖아요?” “그렇다고 하더군. 결산 한 시간 전에 연락이 왔어. 내부 사정으로 아카데미 기간이 연장됐다고 하던데.” 그랬다. 고연주는 원래 당일 수료식을 마치고 바로 돌아올 예정이었는데, 모종의 사정으로 귀환이 연기된 상태였다. 그때는 이미 축제 준비를 거의 끝낸 상태라 다시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축제 불참을 선언했다. “아하…. 그래도 엄청 아쉬워하실 것 같은데. 제가 통신용 수정구라도 가져올까요? 축제 구경이라도 하시라고요.” “맞아. 안 그래도 구경하고 싶다고 하길래 이미 가져왔단다.” 품속에서 수정구를 꺼내자 안현은 킥킥 웃으며 팔짱을 꼈다. 그때였다. “준비 다 끝났어요! 이제 들어오세요!” 안쪽에서 유정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여 안현이 반색하며 문을 열려는 순간 영감님이 한 발 앞서 제지했다. “도대체 뭘 준비했는지는 모르지만 다들 고생했을 걸세. 그러니 설령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좋아해주고 기뻐해주는 게 어떤가?” 일리 있는 말이었다. 안현은 머쓱히 머리를 끄덕였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이윽고 문이 활짝 열리며 식당의 광경이 드러났다. 그리고 바로 안쪽에는 두 여인이 양손을 모은 채 얌전히 시립해 있었다. 그러더니 배꼽에 손을 모아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세요. 머셔너리 축제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헤헤. 환영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를 비롯한 모든 남성 클랜원들이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두 여인의 정체는 바로 유정과 안솔이었다. 안솔은 고용인들이 입는 메이드 복장이었는데, 그럭저럭 봐줄만한 정도였다. 그러나 유정의 복장은 가히 파격이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왜들 가만히 있어요? 어서 안 들어오고? 랄랄라.” 유정이가 한 바퀴 빙그르르 돌자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복장은 바로 바니 걸 복장이었다. 다만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머리, 엉덩이에 고양이 귀와 꼬리를 달았다는 것 정도? 또한 노출이 굉장히 심했다. 안현이 입을 쩍 벌리더니 삿대질을 하며 물었다. “너, 너! 그, 그 복장은 도대체 뭐야?” “응? 이게 어때서? 히히. 조금 야한가?” “아이고. 잘하는 짓이다. 가슴은 절반도 넘게 드러내고, 허벅지에는 망사 스타킹? 얼씨구. 등은 아주 작정하고 노출을 했네.” “왜. 귀엽잖아. 그리고 한 번 입어보고 싶기도 했고. 아무튼 너 보라고 입은 건 아니니 신경 끄시지?” “아니. 신경 쓰인다고. 안 쓰일 수가 없잖아.” “킥킥. 왜. 꼴리냐? 야~옹~.” 유정은 양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요염한 표정을 짓더니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며 애교를 부렸다. “아악! 내 눈! 내 누우우운! 재룡이 형! 솔아! 얼른 치료를!” 안현은 곧바로 바닥에 쓰러졌고, 꿈틀꿈틀 발광을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도 호응해주지 않는다. 결국 금세 벌떡 일어난 안현은 투덜거리며 몸을 돌렸다. “아. 난 그냥 갈래. 너 보니까 갑자기 입맛이 확 떨어졌어. 속도 이상하고.” “그거 좋네. 나가. 나가서 너 혼자 밥 먹어. 아주 식당에 들어오기만 해봐. 죽여버릴 거야.” 어디서 났는지, 유정은 스쿠렙프를 빙글빙글 돌리며 상큼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진짜 나가는 건 싫었는지 안현은 슬그머니 발길을 돌렸다. “에이. 이 좋은 날 그만 싸우세요. 문도 열었는데 얼른 시작하자고요. 꼬르륵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요. 자자. 모두 들어오세요.” 이윽고 둘 사이로 제법 근엄한 얼굴을 한 안솔이 사이로 끼어들었다. 걸음걸이가 여전히 모델 워킹과 비슷한 게, 아직도 성녀 놀이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비로소 눈에 잡히는 식당의 광경에 미약한 탄성을 질렀다. 식당의 구조가 변했다. 흡사 뷔페를 보는 느낌이었다. 홀 중앙에는 이곳 저곳 테이블이 보기 좋게 배치돼 있었고, 주방 쪽 외곽에는 수많은 음식과 음료들이 보기 좋게 쌓여져 있다. 그 중 가장 압권은 바로 여성 클랜원들이었다. 그녀들은 각자 앞치마를 입은 채 각자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의 탄성을 들었는지 유정은 뻐기는 미소를 흘리며 앞으로 나섰다. “일단 축제에 필요한 음식들은 대부분 만들거나 구매했어요. 종류별로 나눠놨으니 알아서 가져가 드시면 되는데,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저기 우리 언니들 요리하는 거 보이시죠? 언니들이 음식들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마음에 드는 곳으로 가서 접시를 내미세요. 그럼 즉석에서 직접 요리한 음식이 나온답니다? 어때요?” “우우…. 나도 말하고 싶었는데…. 언니가 다 말해버리면 어떡해요….” '대단하군.' 나는 연신 속으로 감탄했다. 분위기 있게 식당을 개조한 거나 음식 준비도 좋았지만, 직접 요리한 음식이라는 말에 갑작스레 설레는 마음이 일었다. 비단 나만 그런 게 아닌 듯 다른 남성들도 한층 들뜬 얼굴이었다. 잠시 후, 유정과 솔은 한 쪽에 쌓인 접시를 집었다. 그리고 한 명 한 명에게 나누어주며 가보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참고로 요리에 자신 없는 나와 솔이는 서빙 담당이에요.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아. 경고하건대, 눈으로 보는 건 자유지만 만지는 순간 각오들 하세요. 히히.” “지랄. 만지라고 해도 안 만진다.” 안현은 불퉁한 얼굴로 투덜대더니 낚아채듯 접시를 받아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안현을 시작으로 남성 클랜원들도 한 명 두 명 접시를 받아 이동을 시작했다. “아. 오빠는 마음대로 만져도 돼. 클랜 로드 특별 서비스야.” “그런 서비스는 필요 없단다.” 유정이 어여삐 윙크하며 접시를 내밀었다. 그리고 나는 담담히 대꾸하고 접시를 받았다. 이윽고 주방 쪽을 향해 걸으려는 찰나, 앞에서 어색이 서 있는 우정민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원혜수의 손을 꼭 잡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하여 천천히 다가가 등을 찌르자 이내 깜짝 놀라 돌아보는 우정민을 볼 수 있었다. “아. 클랜 로드.” “사석입니다. 말 편하게 해도 됩니다.” “그, 그런가. 하하하…. 후.” “왜 가만히 있습니까. 축제는 이미 시작했는데.” 우정민은 알고 있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지. 근데 혜수가 잠깐 구경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아~. 우~.” 그 말이 맞는다는 듯 원혜수가 옹알이를 한다. 설핏 시선을 돌리자 아기 유니콘을 꼭 끌어안은 채 이곳 저곳을 둘러보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눈동자에 호기심이 가득한 게 뭔가 무척 신기한 모양이다. 그러다 문득 원혜수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꽤나 시간이 흐른 지금 그녀의 배는 볼록 솟아오른 상태였다. 우정민이 입을 열었다. “…어색하군.” “아직도 이곳이 어색합니까?” “응. 모든 게 어색해. 하지만 나쁜 의미는 아니야. 방금했던 결산도, 또 이런 축제도….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행복이 찾아온 느낌이야.” “뭐, 기분은 좋아 보이는데요.” 우정민은 원혜수의 배를 몇 번 쓰다듬더니 낮게 웃었다. “그래 맞아. 기분 좋아.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행복감이라 그런지, 어색해 죽을 지경이라고. 흐흐.” “우…. 우….” 그때 원혜수가 우정민의 팔을 잡아당겼다. 이제 배가 고픈지 애처로운 얼굴로 배를 쓱쓱 쓰다듬는다. “아무튼 고맙다. 클랜 로드. 너는 내 은인이다.” 우정민은 어깨를 한 번 툭 치더니 이내 원혜수를 데리고 한 쪽으로 향했다. '은인이라.' 은인. 좋은 말이지. 잠시 동안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도 슬슬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다른 음식들도 많았지만 일단 여성 클랜원들이 즉석에서 만들어주는 음식부터 먹을 생각이었다. '그럼 어디부터 갈까?'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분량 조절에 실패했습니다. 밤새 쓴다고 썼는데 여기까지가 한계였네요. ;ㅅ; 실은 뒤에 내용으로 4천자 가량이 더 있기는 한데, 손을 더 봐야 합니다. 즉 퇴고를 더 해야 하는데…. 지금 더는 글을 보는 게 힘들 지경입니다. -_-a 자꾸만 졸음이 와요. 휴. 원래는 내일 외전이 끝나는 날이지요? 피치 못하게 외전이 1회 더 늘어났지만, 끝나는 날은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1회 추가로 올리고, 내일 마지막 회 올리면 예정했던 외전 종결 날짜는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분량 조절 실패에 다시 한 번 사죄 오늘 연참으로 예정했던 분량을 끝내겠습니다. _(__)_ 0424 / 0933 ---------------------------------------------- 10. 마지막 이야기(9/9). 즉석 음식 부스는 총 여섯 곳이 아닌 네 곳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중간중간 부스 안으로 두 명이 보이는 게 서로 힘을 합쳐서 요리하는 곳도 있는 모양이다. 뭐 아무려면 어떠랴. 직접 음식을 만들어 준다는데. 발걸음이 처음 다다른 곳은 바로 하연과 한나가 있는 부스였다. 고소한 냄새가 물씬 흘러 들었고, 한나의 실력이야 '러브 하우스'때 이미 맛본 적이 있었다. 즉 검증된 실력이라고 할까. “고기! 고기!” “고기~! 고기~!” 먼저 도착한 선객이 있었다. 안현이 접시를 탕탕 두드리며 고기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한결이 따라 하는 게 자못 마음이 걸렸지만, 즐거워하는 얼굴로 보아 이번 한 번은 넘어가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어머, 수현. 우리 쪽에 먼저 오신 거예요?” 가까이 다가가 인사하자 설핏 고개를 든 하연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예. 냄새가 좋아서 절로 이끌리게 되더군요.” “호호. 좋은 선택이에요. 우리가 이겼다 한나야. 그렇지?” “그럼요. 역시 우리 클랜 로드가 보는 눈이 있다니까요. 후후. 아, 언니. 다 구웠어요.” “좋았어. 수현! 접시 이리 주세요. 담아드릴게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곳에 먼저 온 게 그렇게 중요한가? 어차피 모두 가볼 생각인데. 아무튼 얼른 접시를 내밀자 하연이 하나씩 하나씩 고기를 덜기 시작했다. “어! 하연 누님! 우리가 먼저 왔잖아요!” 그러자 선객인 안현이 강력한 불만을 제기했지만. “얘는. 찬물도 위아래가 있잖니. 아니면 다른데 가서 먼저 먹고 오던가.” “기다리렴. 곧 새로 구워줄게. 후후.” 하연과 한나의 답변에 눈물을 터뜨렸다. 아니. 왜 우는 걸까. 괜히 미안해지게. 예상대로 고기는 상당히 맛있었다. 적당히 퍼지는 고소한 향기와 부드러이 씹히는 육질이, 정말 요리사라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였다. 나는 의외의 기분을 느끼며 하연을 쳐다보았다. “하연. 원래 이렇게 음식을 잘했나요?” “절 어떻게 보신 거예요? 저도 요리할 줄 아는 여자….” 그 순간 한나가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연은 일순 눈치를 보더니 곧 어색한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호호. 실은 못해요.” “하지만 이건 맛있는데….” “축제 계획을 짜자마자 바로 한나를 붙잡았죠. 요리를 못하는 사람은 잘하는 사람 옆에 붙어서 도와주기만 하면 되거든요.” “아하.”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나는 마주 웃었다. 한나는 예의 상냥한 미소를 보인 채 어깨만 으쓱였다. 나는 남은 고기를 안현에게 넘겼다. 마저 먹고 싶기는 했지만 녀석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차마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다음 부스로 이동하자 이번에는 영감님과 신재룡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느긋이 야채를 먹고 있는 게 이번 부스 요리는 야채 종류라는걸 알 수 있었다. “여기들 계셨습니까.” “허허, 이거 클랜 로드가 오셨군요.” “어서 오십시오, 클랜 로드. 마침 잘 오셨습니다. 갓 볶은 야채가 아주 맛있습니다. 한별이 솜씨가 아주 좋아요.” '한별이라고?' 신재룡의 말에 얼른 부스 안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에이프런 차림의 한별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여기서 불을 줄이고…. 반 숟갈 양념을 넣어서….” 내가 온 사실도 모르는 모양이다. 예의 쌀쌀맞은 눈동자는 어디 갔는지, 한별은 코에 양념을 묻힌 채 열심히 야채를 볶고 있었다. 꽤나 신선한 풍경이었다. 나는 살짝 웃으며 말을 걸었다. “한별아.” 한별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나는 몇 걸음 가까이 다가가 천천히 손을 내뻗었다. “오셨어…. 오, 오빠?” “가만히.” 한별은 반사적으로 몸을 빼려 했지만, 요리 중이라 그런지 상체만 살짝 휘었을 뿐이었다. 이내 그녀의 매끈한 콧마루를 가볍게 훔쳐주었다. “여기 양념이 묻었거든.” 엄지에 묻은 양념을 보여주고 나서 나는 살짝 혀로 핥았다. 약간 짜긴 했지만 맛은 나름 괜찮았다. 한별이 기함했다. “오, 오빠! 그, 그걸 드시면 어떡해요…!” “응? 왜? 나름 맛있는데?” “…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양념 맛은 나쁘지 않았어. 아무튼 부스 평가가 좋던데, 나도 한 접시 줄래?” 천연덕스레 접시를 내밀자 한별은 발갛게 물든 얼굴을 들어 나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연신 힐끔힐끔 쳐다보며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에 그리 창피할까. 한별은 시시각각 얼굴을 붉히면서도 용케 야채 볶음을 올려주었다. 이내 한 젓가락 들어 입안으로 가져가자, 톡 쏘는 향과 함께 상큼한 내음이 물씬 흘러들었다. 솔직히 어르신들 말처럼 아주 맛있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이었다. 한창 야채를 우물거리고 있자 한별이 조심스레 물었다. “…어때요 오빠?” “생각보다 괜찮네. 먹을만해.” “정말이요?” “응.” 다행이라 생각했는지 한별은 한결 안도한 얼굴로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영감님과 신재룡은 동의 못하겠다는 듯 뚜벅뚜벅 걸어와 재차 접시를 내밀었다. “허허. 클랜 로드. 생각보다 괜찮다니요. 이 정도면 매우 맛있는 거지요. 안 그런가 신재룡?” “맞습니다 영감님. 양념이 톡 쏘고 야채 향기도 아주 좋은 게, 아무래도 한별양이 요리에 재능이 있나 봅니다.” 영감님과 신재룡이 주거니 받거니 하자 한별의 몸이 살짝살짝 비틀린다. 과한 칭찬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아, 아니에요. 그러지 마세요.” 한별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영감님은 편애는 멈추지 않았다. “으음, 아니기는. 당장 시집 보내도 되겠는데. 안 그렇습니까? 클랜 로드?” “그렇습니다. 한별양의 미래의 남편은 분명 무척 행복할겁니다. 클랜 로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 물론 나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한창 맛있게 야채 볶음을 먹고 있는데 갑작스레 이상한 질문이 들어왔으니. “할아버지…. 재룡 아저씨…. 우리 오빠한테 왜 그러세요…. 제발, 그만 좀….” 한별의 몸이 비틀리다 못해 배배 꼬인다. 그 모습이 자못 신선했는지 두 어르신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허. 신재룡, 들었나?” “하하하하. 들었습니다. 우리 오빠 라네요. 이거 정말 의미심장합니다.” “아 진짜 왜들 그러세요…!” 음색이 울먹울먹하는 게 이제 거의 애원 조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나마저 웃으면 정말 울릴 것 같아, 조용히 자리를 피해주는 길을 선택했다. 어차피 거의 다 먹어서 이제 슬슬 이동해야 할 때였다. 다음 부스의 요리사는 바로 차소림이었다. “오. 클랜 로드 왔는가. 후루룩.” 가자마자 사샤 펠릭스가 아는 체를 해왔다. 동시에 가는 면을 후루룩 빨아들이는 게 이번에는 국수 종류인 듯싶었다. 국수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요리라 한껏 기대감이 감돌았다. 이윽고 부스 앞에 서자 얌전히 재료를 다듬고 있는 차소림을 볼 수 있었다. “사용자 차소림.” “어서 오세요. 클랜 로드.” “사샤가 맛있다고 하더군요. 국수 한 그릇 가능할까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차소림은 간단히 대답하고는 손을 빠르게 놀리기 시작했다. 탁탁탁탁. 탁탁탁탁. 조용하면서도 정확한 칼 소리가 귀를 즐겁게 만든다. 나는 조용히 차소림을 응시했다. 희고 고운 목에 걸린 목걸이가 눈에 밟혔다. 차소림 또한 에이프런을 단정히 차려 입었는데 아주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차분한 이목구비와 곱게 틀어 올린 머리가 꼭 남편을 맞이하는 새색시 같다고나 할까. “크크. 기대해도 좋다. 우리 주인의 음식 솜씨는 정말로 좋으니까.” 멀거니 차소림을 보고 있자 옆에서 사샤의 우쭐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연주도 만만찮다 는 투로 응수했고, 사샤는 언제 한 번 먹어보고 싶다는 말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이런저런 사담을 나누고 있자, 부스서 “완성했습니다. 접시를 주십시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차소림은 정성스레 국수를 담더니 이내 접시를 잡은 팔을 쭉 내밀었다. “입맛에 맞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말은 예쁘게 하는데 여전히 나를 쳐다보지는 않는다. 고개는 옆쪽으로 틀었고, 눈은 반쯤 감아 시선을 내리깐 상태였다. “잘 먹겠습니다.” 나는 의례적으로 대꾸한 후 젓가락을 들었다. 후루룩. '어?' 이윽고 국수를 빨아들인 순간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면발은 살살 녹아 혀로 부드럽게 녹아 들고, 면에 섞인 야채는 아삭아삭 씹혀 식감도 뛰어났다. 그리고 온몸에 퍼지는 따뜻한 국물까지. 객관적으로 평가해서 정말로 고연주와 견줄 수 있을 정도였다. 눈을 크게 떠 쳐다보자, 어느덧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얌전히 손장난만 하는 차소림이 보였다. “어떠세요?” 이내 평가를 물어와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아주 대단합니다. 정말 맛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차소림은 조신이 머리를 숙이고는 다시 재료를 다듬기 시작했다. 탁탁탁탁. 탁탁탁탁. 리드미컬한 칼 소리를 반주 삼아 국수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한 접시 더 먹을까도 생각했지만, 아직 부스 한 곳이 남아 그곳에 먼저 들르기로 했다. 하여 다시 오겠다고 말한 후 다음 장소로 걸음을 틀었다. 이제 남은 인원은 비비앙과 남다은이었다. '다들 음식 솜씨가 좋네.' 잘은 모르지만, 비비앙과 남다은의 음식 또한 맛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기대가 들었다. 그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부스 앞에 서려는 찰나. 철퍽! “크, 클랜 로드!” 누군가 갑작스레 튀어나오더니 내 허리를 강하게 부여잡았다. “?” 의아히 시선을 내리자 한껏 일그러진 얼굴로 몸을 비틀거리는 박현우를 볼 수 있었다. 다리는 덜덜 떨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는 게 금방이라도 쓰러질듯한 모습이었다. “사용자 박현우?” “가, 가시면 안됩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이 앞쪽 부스로 가시려는 거 아니었습니까?”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남은 장소가 그곳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저, 절대로 가시면 안됩니다! 클랜 로드를 이렇게 잃을 수는 없습니다!” 박현우는 나를 더욱 세게 부여잡았다. 마치 이 앞으로 절대로 보낼 수는 없다는 듯이. 그때였다. “어! 김수현 왔네?” “어머. 우리 클랜 로드가 오셨어요?” 두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박현우는 “히익!” 혼비백산해 도망쳤다. 하여 당최 왜 이러나 싶어 고개를 돌린 순간, 나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꺽꺽…. 그, 그만…! 보글보글….”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선유운이 바닥에 쓰러져 몸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그것도 입에 게거품을 문채로. 비비앙은 옆에 쭈그려 앉아, 검은 덩어리를 그의 입안으로 꾹꾹 밀어 넣는 중이었다. 퍽! 퍽! 퍽! 퍽! 그리고 검후는 에이프런은 두른 채 설아를 힘차게 휘두르고 있었다. 한 번 도마를 내려칠 때마다 재료가 사위로 크게 튀어 오른다. “클랜 로드. 기다렸어요. 열심히 만들었다고요. 그러니, 부디 맛을 한 번 보아주시겠어요? 아하하!” 나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김수현! 빨리 안 오고 뭐해? 여기는 말이야, 직접 먹여주는 서비스도 해준다고. 요호호호.” 그러나 비비앙은 재빠르게 몸을 일으켜 나를 끌어당겼다. 여지없이 끌려가면서, 나는 본능적으로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정체불명의 음식.』 (일반 설명 : 여러 재료가 복합적으로 들어간 음식인건 알겠습니다. 그러나 요리사가 어떤 의도로 만들었는지는 전혀 짐작할 수 없습니다.) (상세 설명 : 어쩌면 이 세상의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냥 먹지 않는 것을 권합니다.) 먹지 않는 것을 권한다 라. 나는 멍하니 정보를 응시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병신 같은 음식을 만들 수 있는 거지?' 나는 거세게 머리를 흔들었다. “야, 잠시만. 나 갑자기 배불러.” “에이. 그러지 말고 한 입만 먹어봐. 정말 맛있다니까? 봐봐! 얘도 한 입 먹고 실신했다고.” “실신할 정도로 맛있나 봐요. 아하하.” 선유운의 고개가 툭 떨구어졌다. '…….' 이건 만행이다. “김수현! 아~.” “수현씨! 자, 아 하세요.” 그러나, 어느새 정체불명의 검은 덩어리는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양쪽에서 내밀어진 덩어리를 보며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어쩌면 오늘이 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고. * 천국과 지옥을 오가던 식사 시간이 지나고, 축제는 다음 장으로 돌입했다. 사실 다음 장이라고 해봤자 별거는 없다. 비치된 음료를 마시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바로 그게 필요한 거지만.' 지끈거리는 머리를 흔들자 목을 받치는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흘끗 시선을 올리니 사분사분한 미소를 내려 보내는 한나가 보인다. “일어났어? 속은 좀 괜찮아?” “아직도…. 죽을 것 같아.” 아까 강제로 음식을 흡입한 탓에 기절할 만큼 속이 뒤집혔지만, 조금 쉬니까 약간 나아진 것 같다. “후후. 조금 더 쉬어.” 보들보들한 허벅지에 한껏 머리를 비비다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얘는 왜 축제는 안 즐기고 이러고 있는 걸까. 허벅지 아프겠다는 생각에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식당 벽에 기대어 축제의 현장을 응시했다. 가장 처음 눈에 보인 건 바로 안현이었다. 녀석은 꽤나 긴장한 얼굴로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걸음을 힘차게 내디디며 차소림 앞에 섰다. 걸음걸이가 꼭 군대 제식 훈련을 보는 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사용자 차소림! 저는 안현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깐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네?” 차소림은 일순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지만, 이내 머리를 끄덕였다. 반색하는 안현을 보며 나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원혜수는 여전히 아기 유니콘과 즐겁게 노는 중이다. 우정민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연초를 피우며 흐뭇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유정은 사샤 펠릭스와 술 내기 시합을 하고 있었고, 심판은 하연이었다. 안솔은 비틀비틀 걷다가 픽 쓰러졌으며, 먼저 쓰러져있던 한결은 그녀의 침대가 되었다. 영감님과 신재룡은 서로 술잔을 부딪치며 껄껄 웃고 있었다. 비비앙은 아까 만든 음식을 담은 접시로 이곳 저곳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 누군가가 걸렸다. 공교롭게 앞을 지나가던 선유운이었다. “이봐! 너…!” “으아아악!” 선유운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쫓아가는 비비앙을 보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떠들썩한 소란이 사방에서 들려온다. 다행스럽게도 모두가 즐거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수현아. 있잖아….” 그렇게 한참 동안 축제를 지켜보다가 나는 기합을 내지르며 힘차게 몸을 일으켰다. “엇차!” “어? 어디가?” “후, 힘들어서. 잠깐 쉬고 올게.” “으, 응? 그럼 축제는?” “글쎄. 숙소에서 조금 쉬다가 괜찮아지면 내려오마. 어차피 밤샐 것 같은데.” “…마실 거라도 좀 챙겨서 가져다 줄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이내 십자가 형태로 쓰러진 안솔과 한결을 넘어 신속히 식당 밖으로 나섰다. 이어서 복도를 지나쳐 계단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설핏 얼굴을 들이밀자 가만히 서 있는 여인과 고개 숙인 사내를 볼 수 있었다. 한별이와 박현우였다. “미안하다. 한별아. 용서해다오.” “…왜 지금 와서 이러시는 거예요?” “머셔너리에 왔으니까. 그리고 이곳이 마음에 들어서…. 한 번 제대로 활동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전에 네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이 우선이라 생각했다.” “…머리 드세요.” 그러나 박현우는 머리를 들지 않았다. 한별은 기다랗게 숨을 내쉬더니 차분히 그의 손을 잡았다. “황금 사자에서 현우 오빠가 저한테 얼마나 잘해줬는지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게 오빠 뜻이 아니었다는 것도요.” “한별아….” “우리는, 잠깐 길이 갈라졌을 뿐이에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렇죠?” “…고맙다.” 나는 조용히 지켜보다가 발걸음을 떼었다. 사실상 거의 끝나가는 상황이었고 더 보는 건 예의가 아닐 터. '잠깐만. 이러면 숙소에 못 가는데.' 잠시 동안 고민하다가 나는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속은 여전히 안 좋았지만 축제는 더 즐기고 싶었다. 찬바람을 쐬어 속을 진정시키고 겸사겸사 정신도 차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대로 정원은 무척이나 시원했다. 세찬 바람을 들이키자 가슴까지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복잡했던 속이 가라앉고 헝클어졌던 머릿속이 정리된다. 한동안 바람을 맞던 난 연못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친김에 간단한 세안이라도 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정원을 가로질러 막 연못에 도착했을 때였다. “응?” 연못에는 선객이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나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클랜 로드?” 먼저 와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남다은이었다. 그녀는 한 손에 술병을 든 채 달빛으로 반짝이는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잠시 동안이긴 했지만, 찬란한 빛에 휩싸인 그녀가 무척이나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는 어떻게….” “왜 이곳에….” 우리는 동시에 말했다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남다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잠깐 생각할 것도 있고. 바람 좀 쐬고 싶어서요.” “이하 동문입니다.” 그러자 남다은은 잘됐다는 얼굴로 한 손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와. 그럼 같이 바람이라도 쐴래요?” “좋습니다.” 잠시 후, 나는 남다은의 옆에 앉게 되었다. 조용한 밤. 달빛이 비치는 연못. 그리고 어색함이 흐르는 침묵. 이 까닭 없는 적막함이 불편했는지 남다은이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아까는 죄송했어요. 실은 몸에 좋은 것만 잔뜩 넣었거든요. 그래서 그런 음식인지도 모르고….” “하하. 괜찮습니다.” 사실 속으로 “정말 알고는 있니?”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간신히 가라앉힌 속이었고, 생각만해도 구토가 쏠리는 음식이었다. 하여 얼른 화제를 돌릴 생각으로 나는 말문을 열었다. “아. 혹시 저번에 로비에서 있었던 일 기억하십니까?” “로비라면…. 아하하. 그때 저한테 쓴 소리 하셨던 거죠? 괜찮아요. 이미 잊었는걸요.” “아니요. 그게 아닙니다. 검후가 생각하는 그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습니다.” “음? 그래요? 그럼…. 어떤 뜻으로 말씀하신 건데요?” 남다은의 반문에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날을 회상하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때의 그녀는 웃는 모습이 정말로 예뻤다. 나는 솔직히 입을 열었다. “그때…. 남다은이 비비앙이랑 웃는 모습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거든요.” “…네.” “그뿐입니다. 그냥 자주 그 모습을 보았으면 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얘기한 거지,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남다은은 잠깐 생각하는 듯싶더니 손바닥을 짝 치며 입을 열었다. “아하. 그러니까 제가 웃는 모습이 예뻤고, 자주 그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시죠?” “예.” “진짜요?” “예.” 왠지 모르게 들뜬 음색에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검후는 미약한 비음을 내더니 갑작스레 까르르 웃으며 고개를 주억인다. 입가에 진한 미소가 배인 게 매우 만족한 얼굴이었다. 이윽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검후의 시선을 느껴, 나는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해해주시니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축제는 어떻습니까? 제법 즐거워 보이던데.” “그럼요. 즐겁고말고요. 홀 플렌인에 들어와서 처음 경험하는 축제인걸요.” “아. 축제가 처음입니까?” “클랜내에서 하는 축제는 처음이에요. 후후. 비단 축제뿐만이 아니라 여기는 매일매일이 즐거운 곳이에요…. 그래요. 지금 생각해보면, 머셔너리에 들어오는 게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고 느껴요.” 남다은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얘기 후, 나를 보며 자꾸 웃어주는 모습에 절로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군요. 저도 검후를 받아들인 건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 그때는 저도 조금 놀랐어요. 저를 둘러싼 소문 때문에 안 좋게 보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흔쾌히 허락해주셨거든요.” “솔직히 약간 고민하기는 했습니다. 다만 소문 때문에 고민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럼요?” 남다은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스탄텔 로우의 요청을 뿌리치고, 굳이 머셔너리로 온 게 조금 궁금했습니다.” “음…. 제가 왜 머셔너리로 왔는지 그게 궁금하셨다고요?” “예.” “흠.” 사실이었다. 지금이야 꽤나 잘나가는 클랜일지몰라도, 그때 당시 이스탄텔 로우와 머셔너리를 엄연한 격차가 있었다. 그리고 그 격차는 지금도 존재한다. 검후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아니 뭔가를 생각하는지 살짝살짝 입술을 깨물고 있다. 휘이잉, 휘이이잉. 문득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우리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남다은은 살짝 나부끼는 머리에 손을 대어 가지런히 아래로 내렸다. 그 상태서, 그녀는 연못 중앙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클랜 로드. 조금 전 말을 들으니 저도 한 가지 궁금한 게 생겼어요.” “경청하겠습니다.” 진지한 검후의 목소리. 나는 침착히 속을 가다듬으며 그녀를 곁눈질했다. 아까처럼 들뜬 기색이 아닌, 한껏 가라앉은 눈동자가 눈에 들었다. 이윽고 남다은은 고요히 입술을 떼었다. “질문하신걸 되물을게요. 클랜 로드. 제가 왜 머셔너리로 왔는지. 그 이유를 모르시나요?” 뜻밖의 말에 나는 의아히 고개를 돌렸다. 검후는 여전히 연못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만 살짝 엉덩이를 들어 내 옆으로 바싹 다가왔을 뿐. 갑자기 목이 바짝 타는 기분이 들었다. “제가 왜 머셔너리에 왔을까요? 정말로 그 이유를 모르시는 건가요?” “하하. 검후….” “클랜 로드. 아니 수현씨….” 아련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비로소 남다은이 고개가 돌아 나를 정면에서 응시한다. 서로의 어깨가 맞닿고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문득 땅으로 내린 손등을 덮는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다시 한 번 여쭐게요. 정말로, 정말로 제가 왜 이곳에 왔는지. 아주 조금이라도 짐작하지 못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검후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맑게 빛나고 있었다. * “여기도 없네.” 한나는 4층 숙소 방문을 닫으며 아미를 좁혔다. 분명 숙소에 올라가 쉬고 있겠다고 들었다. 그러나 김수현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한나는 한동안 계단을 쳐다보다가 치, 혀를 차고는 걸음을 옮겼다. 방향은 계단이 아닌 반대쪽 집무실이었다. 똑똑. “수현아. 혹시 집무실에 있니?” 예의상 문을 두드렸으나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자고 있어? 일단 들어갈게.” 달칵. 한나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갖고 문을 열었다. 그러나 집무실 또한 텅 비어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진한 아쉬움이 흘러나왔다. “쉰다면서….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한숨을 푹푹 내쉬는 한나. 그녀는 이대로 몸을 돌릴까 하다가, 갑작스레 걸음을 멈췄다. 집무실 책상 너머로 달빛이 들어찬 창문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 앞쪽에는 훤히 트인 테라스가 있었다. “정원으로 나갔나?” 일리 있다는 생각에 한나는 슬며시 안쪽으로 들어섰다. 무단 침입인건 알지만, 창문을 통해 슬쩍 정원만 볼 생각이었다. 만일 김수현의 모습을 찾으면 정원으로 내려가고 없으면 다시 식당으로 복귀하리라. 한나는 금세 창문에 도착해 테라스로 통하는 문을 힘껏 밀어젖혔다. 열린 틈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흘러들었다. 가져온 음료가 깨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품에 안으며, 그녀는 밖으로 나섰다. 하늘에 떠오른 달은 찬연한 빛을 뿌려 정원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었다. 한나는 마력을 일으켜 안력을 돋웠다. 그리고 차분히 정원을 훑기 시작했다. 문득 음료 하나 갖다 주려고 별일을 다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싱겁게 웃었다. 그때였다. 갑작스레, 한나의 눈길이 어느 한 쪽에서 멈췄다. 그곳은 유난히 빛이 반사되는 곳으로 바로 연못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연못에는 한 쌍의 남녀가 서로 사이 좋게 어깨를 기대어 앉아있었다. 꼴깍. 한나는 침을 삼켰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안력을 크게 돋웠다. 그러자 손톱만하게 보였던 인영이 크게 다가오고, 흐릿했던 시야가 정확해진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어…!” 그것은,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연못에 앉아있던 남성과 여성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맞닿은 것이다. 한나는 숨을 멈췄다. 쨍그랑! 그와 동시에,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적막한 테라스를 울렸다. ============================ 작품 후기 ============================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일단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1. 다음 회 자정 업데이트가 힘들 것 같습니다. 아마 오늘과 비슷한 시간에 올라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마지막 회에도 들어갈 내용이 많거든요. 아무튼 최대한 빠르게 적겠습니다. 2. 암 쏘 쏘리 벗 알러뷰 다 거짓말. 3. ㅇ<-< 0425 / 0933 ---------------------------------------------- 10. 마지막 이야기(9/9). 도대체 언제부터 잘못된 걸까. 어디서부터 어긋난 걸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처음부터 이러지는 않았다는 것.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은, 사용자 정보라는 것으로 인간의 가치를 척도하고 가늠한다. 그 중에서 나는 높은 잠재성을 인정받아 괜찮은 수준의 사용자 정보를 가질 수 있었다. - 저 사용자가 이번 사용자 아카데미 수석이라며? 이름이 남다은? - 응. 이미 여러 클랜에서도 눈독들이고 있다고 하더라. 좋겠다~. 그래. 홀 플레인에 처음 들어왔을 때, 나는 분명히 주목 받는 사용자였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이 사그라졌다. 그걸 도대체 누구를 탓해야 할까? 나? 아니면 가해자? 정답은 나였다. 사람을 함부로 믿은 나의 잘못이고 그릇된 선택을 한 나의 잘못이다. 그 한 번의 그릇된 선택으로 인해, 내가 사는 세상은 사용자 쪽에서 부랑자 쪽으로 강제로 변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 ‘변절자’ 이강산. 처음 봤을 때만 해도, 그 누구보다 포근하게 웃어주던 그였다. 사용자 아카데미에 있을 때만 해도, 초기에는 많이 힘들 거라며 귀찮을 정도로 챙겨줬던 그였다. - 이번 사용자 아카데미가 끝나면 나는 새로운 클랜을 창설할 생각이야. - 다은아. 나와 함께 하지 않을래? 네가 나와 함께 해준다면 정말로 기쁠 거야.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때의 그는, 나에게 있어 이 척박한 세상에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사용자 아카데미 수료식이 끝나고 나서, 내 기대는 철저히 빗나갔다. 앞으로 같이 활동할 동료들이 ‘부랑자’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안식처는 순식간에 지옥으로 돌변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회유와 협박. - 밖에서 나보고 뭐라고 하는지 알아? 배신자라고 하더군. - 너 또한 마찬가지야. 이제 그만 순순히 포기하고 네 운명을 받아들이지 그래? 부랑자 남다은. 크하하하! 부랑자들에게는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온갖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하루가 지날수록 몸도 마음도 피폐해지는 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현실을 부정했다. 다음에는 풀어달라고 애원했다. 그 다음에는 아니라고 발악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굴복하고 받아들였다. 사용자를 포기하고 부랑자의 운명에 순응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하지만 아주 포기한 건 아니었다. 언젠가 똑같이 뒤통수를 쳐주겠다고, 내가 받은 모든 수모를 되갚아주겠다고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그러려면, 일단 힘을 길러야 했다. 이후로 나는 철저히 부랑자 남다은이 되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연기에 불과했다. 겉으로는 순종하고 따르는척했지만 가슴속으로는 항상 서늘한 칼을 갈았다. 1년이 지나고, 시간이 흘렀다. 내가 포기했다 생각한 걸까? 어느 순간부터 나에 대한 부랑자들의 의심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부랑자 교육을 실시했다. 실력자들이 나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실전 경험도 풍부하게 쌓았다. 정말 이를 악물고 실력을 높이자, 주변 생활이 개선되고 대우도 점차 나아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적을 통해 발굴한 시크릿 클래스 ‘검후’도 받았으며, ‘설아’라는 검도 받을 수 있었다. 대 간부 육성 계획에 희생된 사용자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아마 그 즈음일 것이다. 나는 그때에 이르러서야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첫 번째는 부랑자들 사이에 심한 알력이 있다는 것. 두 번째는 이강산이 나를 부랑자의 대 간부로 만들려고 했다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나를 대 간부로 만들어 ‘어떤 일’에 이용하려고 했다는 것.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나는 비로소 기다리던 기회가 왔음을 느꼈다. 오랫동안 이어지던 감시가 풀리고, 동시에 이강산에게 한 가지 ‘지령’이 떨어진 것이다. - 극비를 요하는 임무다. 최대한 소수로 움직여야 하니 너도 따라오도록.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이강산을 비롯한 다섯 명은 임무에 나섰다. 그리고 남은 부랑자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렸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비로소 가슴속 몇 년간 갈아왔던 칼을 꺼내 들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때 이강산을 죽이지 못했다는 것. 그래도 괜찮았다. 비록 이강산은 죽이지 못했지만 사용자들의 도시가 눈앞에 있었다. 도시에 있을 때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던 나였기에, 이제야 다시 처음 시절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살해한 부랑자들의 목을 베어 도시로 들어갈 때까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오산이었다. 일단 부랑자들의 목을 베어온 점은 인정받아 도시로는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 저 사용자 누구였더라? 상당히 낯이 익은데. - 아아, 남다은. 시크릿 클래스 검후라고 하던데? - 아~. 그 배신자? - 배신자라니? - 몰라? 쟤 사용자 아카데미 수료하고 배신자 이강산이랑 사라졌잖아. 아, 그러고 보니 배신자의 첩이라고 해야 하나? - 진짜? 그럼 백 퍼센트 부랑자랑 붙어먹었다는 소린데…. 도대체 왜 돌아온 거야? 도시는 내 생각만큼 따뜻한 곳이 아니었다. 도시에서 이강산은 ‘변절자’로 불리고 있었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나를 보는 ‘사용자’들의 시선은 이강산을 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 이 꼬리표도 벗을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래서 부랑자로 다시 돌아오라는 전령도 무시했고, 전령을 전달한 첩자도 살해했다. 절대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무언의 의지였다. 그러나 ‘변절자’라는 꼬리표를 벗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 소문 들었어? 저 사람…. 아무래도 불안하지 않아? - 왜 혼자서 행동하는 거지?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니야?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내가 부랑자의 첩자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 것이다. 위장으로 전향을 했다는 말이 알게 모르게 퍼졌고, 사용자고 클랜이고 모두가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부랑자가 나에 대한 정보를 흘렸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사용자들이 나를 불신하게 만들고, 동시에 내가 설 자리를 없애려는 수작이었다. 물론 ‘검후’라는 시크릿 클래스를 가지고 있는 이상, 이따금 나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곳도 있었다. 그날 클랜 가입 문제로 만났던 사내는 아직도 내 기억에 선명히 남는다. - 사용자 정보는 인정하지만…. 솔직히 검후를 둘러싼 소문이 좋지 않은 게 사실이지요. 내부에서 반대가 심합니다. 글쎄요…. 이걸 어떡해야 하나…. - 정 그러시다면,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어떻습니까, 검후. 저를 한 번 믿어보시겠습니까? 말은 빙빙 돌리고 있었지만 사내의 눈동자는 추악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이강산이 본색을 드러낸 후 나에게 드러냈던 눈동자와 흡사했다. 그 순간 예전 비참했던 기억이 되살아나, 눈앞의 남자가 한없이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도시로 들어오며 간신히 묻어둔, 아니 묻어두려 했던 감정이 일거에 폭발한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랑자에서 몸은 멀어졌지만, 나는 여전히 부랑자라는 생각이. 부랑자들에 의해 영향을 받고, 부랑자였을 때 기억을 잊지 못하고, 사용자들마저 나를 부랑자로 본다. 결과적으로 어찌어찌 한 클랜에는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어딘가에서 나를 감시하기 위해 급조한 클랜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그저 헛웃음이 나왔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에서나 저쪽에서나 변한 게 없다. 간신히 사용자로 되돌아왔는데, 나는 이쪽에서도 감시 받는 처지였다. 그제야 뒤늦은 후회가 찾아 들었다. 너무 성급했다. 조금 더 기다렸다가 나왔어야 했다. 간부가 되면 부랑자에 대한 중요한 정보들을 더 많이 알 수 있었을 터. 최소 사용자들 틈에 섞인 첩자 리스트만 알았더라도, 이렇게까지 몸이 꽁꽁 묶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랑자들은 집요하고 끈질겼다. 첩자들은 나에 대한 소문을 퍼뜨려 활동을 제한시켰고, 감시의 시선도 늦추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기회라 생각한 ‘부랑자 말살 계획’의 참가 요청을 거절당한 후, 나는 결심했다. ‘은둔’하기로. 사실 따로 대안이 없기도 했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그렇다고 돌아가는 건 죽기보다 싫었으니까. 그래도…. 이대로 계속 살 수는 없으니 조용히 지내면서 다시 한 번 기회를 노려보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부랑자들의 감시를 최대한 피하며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 기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어느 날, 북 대륙이 전쟁 소식으로 한창 떠들썩할 무렵. 부랑자 대 간부 중 한 명인 백서연이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나에게도 새로운 요청이 들어왔다. 서 대륙, 부랑자 연합군과의 전쟁을 앞두고 동부 진영으로 참가해달라는 전령을 받을 수 있었다. 도시로 들어온 후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기회가 온 것이다. 이윽고 동부 진영으로 이동했을 때, 나는 비로소 돌아가는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백서연의 자백으로 사용자들 틈에 섞여있던 ‘첩자’들이 낱낱이 밝혀졌다. 그러면서 나에 대한 지령을 받은 ‘첩자’들이 곁다리로 일부를 실토한 모양이다. 물론 그렇다고 결백이 완벽하게 밝혀진 건 아니었다.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는 사용자들이 태반이었다. 이해는 간다. 아무튼 그곳에 있을 때는 놈들 또한 나를 완벽한 부랑자로 알고 있었을 테니. 하지만 ‘첩자’가 깡그리 색출됨으로써 전보다 모든 게 좋아졌다. 더는 감시를 받지 않고, 더는 행동에 제한도 받지 않는다. 선입관은 여전했지만 최소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길은 열린 셈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만족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하루 아침에 일어나보니 나를 둘러싼 상황이 완벽하게 풀려있었으니까. 그와 동시에 호기심도 일었다. 누구일까?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루지 못한 일을, 누가 이렇게 간단히 해낸 걸까? 도대체 누가, 나를 이 지옥에서 꺼내준 걸까?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머셔너리 클랜 로드, 김수현이라는 사용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 “솔직히 처음 봤을 때, 정말 이상했어요. 예전에 남자들을 볼 때마다 일었던 혐오감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제가 어땠길래요?” “그게…. 어땠느냐면….” 싸늘한 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간다. 우수수, 정원이 풀들이 서로의 몸을 비비는 소리가 듣기 좋은지 남다은의 눈꼬리가 빙그레 휘었다. “동질감을 느꼈어요.” “동질감?” “그래요 동질감. 깊은 상처를, 깊은 슬픔을 담은 눈동자. 저를 보는 시선이 딱 그랬거든요. 분명 처음 보는데, 왠지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시선이었어요.” '그러니까, 나도 남다은과 비슷한 상처와 슬픔이 있는 사용자라는 건가?' 남다은은 설핏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한없이 진지한 눈동자를 들어 고요히 입을 열었다. “아마 수현씨는 이상하게 생각하셨을 거예요. 그때 프린시카에서 보았을 때, 처음 보는 여자가 계속 빤히 쳐다보니 말이에요.” 첫만남이라면 고려 클랜의 통제실을 말하는 건가. 확실히 그때 나를 빤히 쳐다보기는 했다. “실은 한 마디 감사의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말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그러면서 한 가지 궁금함도 일었어요. 저 사람은 과연 어떤 일을 겪었길래 저런 눈동자를 하고 있는 걸까?” “그리 생각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저는 또 저한테 관심이 있는 줄 알았거든요. 하하.” 한없이 심각해지는 분위기를 막고자 던진 농담에 불과했다. 그러나 남다은은 내 말이 맞는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손으로 턱을 괴어 부드럽게 웃었다. “네. 맞아요.” “…아 그런가요?” “궁금하고, 또 궁금했어요. 사용자 김수현을, 머셔너리 로드라는 사람을 한 번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몰래 조사도 해봤고요. 아마 관심이 없었다면 그러지는 않았겠지요.” 나는 입을 매만졌다. 언제나 이 입이 문제였다. 왜 가끔씩 내가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상황이 흘러가는 걸까? 자꾸 이러느니 그냥 흘러가는 데로 놔두는 게 낫겠다 싶었다. “수현씨한테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바로 사용자 아카데미 때였어요. 수석을 차지하고 수많은 클랜들의 오퍼를 받았음에도, 통과의례 때 만난 애들을 데리고 세상으로 나섰죠.” “그건….” “수현씨 생각이 어떻던 간에, 제 입장에서는 정말로 멋있어 보였어요. 제가 만일 그 애들 중 한 명이었다면, 아마 굉장히 행복했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건 제가 처음 홀 플레인에 들어왔을 때 바랬던 꿈이었으니까.” 남다은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아까 웃는 게 예뻐 보인다 말을 했을 때부터 여태껏 시종일관 웃고 있다. 자신의 과거를 얘기해줄 때도, 그리고 지금도. “전쟁 때, 특별 조원을 들어 수현씨를 테스트한 것도 같은 이유였어요. 한 번 말을 걸어보고 싶었는데 마침 좋은 핑계가 생긴 거예요.” “그때의 대련은 저도 기억합니다.” “저도요. 어이가 없었죠. 0년 차 사용자가 첫 교환 때 힘으로 저를 압도하는데, 설아를 놓칠뻔했다고요.” “하하….” “그리고 설마 설마 했는데 패배하기까지.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갑자기 설아가 수현씨를 보고 난리를 치지 않나. 제가 그때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아요?” “관심 있던 남자가 한순간 이상한 남자로 변해버렸군요.” 남다은은 어떻게 그리 잘 아냐는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 순간 나와 그녀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하하하!” 한바탕 웃음이 지나가고, 어깨에 머리가 살며시 닿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까처럼 긴장되지는 않는다. 남다은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이제는 그저 편안한 기분만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굉장히 혼란스러웠어요. 왜 자꾸 이 남자에게 시선이 가는 걸까. 단순한 관심으로 시작된 감정이, 나중 가서는 스스로 물어봐도 모를 정도로 복잡해졌거든요.” “그래서 도중에 시선을 피하기 시작한 겁니까?” “네. 안 그래도 복잡해죽겠는데, 앞에만 서면 설아가 자꾸 진동을 보냈으니까요.” “그럼 지금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복잡하고, 잘 모르겠습니까?” 보통 때라면 내뱉지 못할 대담한 말.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마음이 잔잔하니 말도 술술 나오는 기분이다. 어느새 처음의 불편한 기운은 사라지고, 묘한 기류가 나와 남다은의 사이를 감돌았다. 남다은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지금은 아니에요. 그때 느꼈던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알아낼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거든요.” “계기라면….” “바바라, 바바라에서였어요.” 이윽고 어깨에 기대었던 머리가 천천히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려는 듯, 남다은은 힘껏 숨을 들이켰다. “후. 회의가 끝나고 수현씨와 만났잖아요?” “그랬지요.” “그때, 이스탄텔 로우 로드가 수현씨 앞에서 저를 영입하겠다고 밝혔을 때. 이상하게 싫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래 보였습니다.” “그리고 수현씨가 머셔너리에 오면 환영하겠다고 말해주었을 때. 그때는 반대로 행복한 기분이 들었어요.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기분이 좋았답니다. 그렇게 상반된 기분을 느끼면서 겨우….” 그 순간, 남다은이 말을 멈췄다. 그리고 비로소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눈동자에 흐르는 은은한 눈빛이 꼭 어떤 중요한 말을 하기 직전의 모습처럼 보였다. 나는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느릿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말을 해보라는, 해도 된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이후 포위에 참가하면서 저는 그날의 감정을 계속해서 곱씹었지요. 그리고 확신했어요.” “…단순한 호의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남다은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고요한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호의를 넘어선 건 확실해요. 왜냐하면 한 가지가 더 있거든요.” 한 가지가 더 있다고 한다. 이윽고 남다은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 순간, 갑작스레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달빛이 희미하게 비쳐 내리는 정원. 어느새 땅거미가 진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물결을 따라 흐르는 반사광은 연못 주변을 반짝반짝 밝히고 있었다. 어두운 정원, 환히 밝혀진 공간 속에서. “그러니까….” 마침내, 남다은이 입을 열었다. “두근두근해요.” 그리고 나는, 멍하니 물었다. “두근두근…. 이요?” 남다은은 크게 머리를 끄덕이더니 차분히 내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으로 이끌었다.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팔에 힘을 빼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이끌렸다. 이윽고 손가락에 닿은 보드라운 젖가슴의 감촉이 느껴졌다. 두근. 그와 동시에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미약한 진동. “머셔너리에 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거든요.” 두근두근, 두근두근. 그랬다. 두근거리는 이 느낌은 확실히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였다. “그 이후로 수현씨를 볼 때마다, 수현씨 말을 들을 때마다, 수현씨 옆에 있을 때마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 심장이 두근두근, 세차게 뛰어요.” “사용자…. 남다은.” “왜 머셔너리를 선택했느냐고 물으셨죠? 이게 제 대답이에요. 클랜 로드, 그리고 수현씨.” 남다은의 절절한 고백이 이어지자, 순간적으로 머릿속으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홀 플레인 1, 2회 차를 통틀어 처음 겪는 상황에 그저 하얀 백지가 된 기분이었다. 하연과도, 고연주와 있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이 생소한 감정. 그래. 지금의 나는 분명히 설레고 있었다. 나는 멀거니 남다은을 응시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활짝 웃어 보였다. “수현씨는 어때요? 수현씨도 저를 보면 두근두근, 하나요?” 나는 남은 팔 하나를 들었고, 왼쪽 가슴에 손을 얹어 느껴보았다. 두근. 그러자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지만. 두근두근, 두근두근! 심장의 고동 소리가 서서히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왼손에서 느껴지는 고동이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고동과 속도가 비슷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까 전에는 이러지 않았습니다만.” 침을 삼키고, 말을 잇는다. “조금 전부터 두근거리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도 자꾸만 속도가 빨라지네요.”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요.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인걸요.” “…그런가요?” “그렇고 말고요. 또한, 저를 기쁘게 하는 현상이기도 해요.” 남다은은 다시 내게 바짝 다가오더니 오른 어깨에 얼굴을 걸쳤다. 빨아들일듯한 시선에 절로 눈길을 빼앗겼다. “고마워요. 수현씨.” “고맙…. 긴요.” 나는 반사적으로 가슴에 닿은 손을 빼었고 대신 그녀의 턱을 들어올렸다. 아주, 살짝. 이내 갸름한 고개를 드는 것과 동시에 남다은이 지그시 눈을 감는다. 가늘고 기다란 속눈썹과, 어여쁜 콧마루와, 꼭 다물어 오므린 도톰한 입술이 눈에 밟혔다. 들어올린 턱을 엄지와 검지로 약하게 고정한다. 그리고 흡사 홀린듯한 기분으로, 나는 천천히 얼굴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입술을 다물어 마주 눈을 감는다. 이윽고 서로의 숨결이 섞이는 것과 함께, 입술에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부드럽고, 달콤함 접문(接吻). 이내 온몸으로 퍼져 흐르는 미칠듯한 감미로움에 입술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그녀의 입술도 떨리고 있다. 그때였다. 쨍그랑…! 한 쪽에서 미약한 소음이 울렸다. 곧바로 눈을 뜨자 똑같이 토끼 눈을 뜬 남다은을 볼 수 있었다. 이내 단숨에 떨어진 우리는 동시에 소음이 들린 곳, 본관 4층을 응시했다. “아하하. 들…. 켰나?” 남다은의 어색한 음색이 흘러들었다. * 탕. 임한나는 재빠르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 바로 몸을 뒤돌아서, 그대로 벽에 몸을 기울였다. “하아, 하아.” 숨이 차다. 온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손은 까닭 없이 축축했다. 그리고 찾아 드는 뜻 모를 서글픔. 임한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나…. 왜 이래….” 자조 어린 목소리가 고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다. 이윽고 창문에 기댄 여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몇 달 전, 임한나는 김수현에게 마음을 고백하고 입까지 맞췄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 이후로 관계는 조금도 진전되지 않았다. 임한나는 이해하려 노력했다. 항상 바쁜 사람이니 나중에 시간이 나면 한 번쯤은 찾아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을 누르고 기다렸지만, 찾아오기는커녕 얘기를 꺼낼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기다리다 지쳐,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축제가 열리니 이번 기회를 노리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이번 축제 때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또는 “잠깐 얘기 좀 할래?”.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하려 할 때마다 번번히 무산됐다. 단 몇 마디에 불과한 말인데 어찌 이리도 꺼내기 어려운 걸까. 그러다 축제 중 겨우, 간신히 기회를 잡았다 싶었는데 기껏 올라와 보게 된 광경은…. 다른 여인과 입을 맞추는 김수현이었다. 그것도 누구처럼 여인 쪽에서 일방적으로 한 입맞춤이 아니라, 김수현이 적극적인 호응이 있었다. 임한나가 목욕탕에서 입을 맞추려고 했을 때, 떨떠름히 받았던 것과는 극명히 대비되는 장면이었다. 다시 광경을 떠올리자 임한나는 씁쓸히 미소 지었다. '혹시 일부러 피하는 건가?' 그리고, 슬프게 웃었다. 사실 임한나도 알고 있었다. 차라리 정하연이나 고연주라면 모를까. 방금 본 상황은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광경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아직 김수현과 어떠한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하긴, 나도 나쁜 년이지.' 또한 임한나도 좋은 입장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김수현의 옆에는 이미 정하연과 고연주가 있었다. 그리고 임한나는 그 사이로 파고들어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 둘의 입장에서 보면 임한나도 크게 할 말은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도 서운하고 서글픈 기분이 드는 이유는 대체 무얼까. “후유.” 임한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설핏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응시했다. 어느덧 연못 주위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사내와 여인은 이미 그곳에서 떠난 상태였다. “치워야겠지….” 임한나는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테라스에는 깨진 병 조각과 흘러나온 액체가 바닥에 한껏 번진 상태였다. 무단침입도 확실한 실례인데, 깔끔한걸 좋아하는 김수현이 보면 분명히 싫어하리라. 그렇게 생각한 한나는 힘없이 웃옷을 벗었다. 1층으로 천을 가지러 내려갈 힘이 없었다. 달칵. 휘이이잉, 휘이이이잉. 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서자 살을 에일듯한 추위가 강하게 들이닥쳤다. 이내 조용히 꿇어앉은 임한나는 곱게 접은 옷으로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쓱…, 쓱…. 조각을 모으고 손을 쓸자, 깨끗했던 옷에 삽시간에 자줏빛으로 젖어 들었다. 중간중간 작은 조각들이 피부를 찌르는 게 느껴졌지만 아프지 않았다. 임한나는 아무 생각 없이 닦고 치우는데 집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었다. 툭. “어….” 아직 액체가 묻지 않은 옷 윗면에, 일순 자그마한 물방울이 떨어져 얼룩을 만들었다. 툭, 툭툭. “어…?” 얼룩은 자꾸 늘어났다. 하나에서 두 개로, 두 개에서 세 개로, 세 개에서 네 개로. 그리고 계속해서. 임한나는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 하하…. 하하하…. 흑….” 다시 한 번 찬바람이 불어와 임한나의 전신을 덮쳤다. 그녀는 한껏 떨면서도 옷을 반대로 뒤집었다. 그리고 액체와 조각이 묻은 면에 손을 얹었다. “흑…. 흑…. 흑….” 혹여 들킬세라 소리 죽여 울며, 다시 조심스레 걸레질을 시작했다. 그때였다. 달칵! 테라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일단 여러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한없이 죄송합니다. 또 분량 조절에 실패했습니다. ㅜ.ㅠ 어떻게든 오늘 안으로 끝낸다고 마음먹었는데, 생각대로 되지가 않네요. 굳이 변명하자면, 남다은 때문이었습니다. 코멘트를 보던 도중 남다은에 대해 부족함을 느끼는 분들이 여럿 계셨고, 하여 과정을 집어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이렇게 길어질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솔직히 그냥 대충 마무리 짓고 빨리 끝낼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기보다는,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제대로 유종의 미를 마무리하고 싶었습니다. 나름대로 의미도 부여하고 싶었고요. 그래서, 결론은 이제 언제 끝나겠다고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분명히 외전이 거의 끝에 다다른 건 맞지만, 또 약속을 지키지 못하느니 안 하느니만 못하겠지요.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는데 마음만 급하니, 글이 제대로 나오지 않더군요. 저번 회는 몇몇 분은 내용이 산만하다 느끼셨을 겁니다.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글을 쓰고 싶습니다. 자꾸 외전을 끝내겠다고 했는데, 끝내지 못해 죄송합니다. 2부를 기다리시는 분들께는 다시 한 번 깊은 사죄를 드립니다. 다만 저 또한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 지으려 미친 듯이 발버둥을 치고 있으니, 이점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바로 다음 회 적으로 가겠습니다. 회가 식기 전에 돌아오겠습니다. PS. 1. 앞으로 본문에 따로 경고 내용은 삽입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원하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그냥 적당히 읽으시다가 넘어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 조아라 쪽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성실 연재상을 받게 됐습니다. 독자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을 드립니다. _(__)_ 3. 쪽지는 제가 지금 답장을 못 드립니다. 외전이 끝나면 일괄적으로 답신하겠습니다. 0426 / 0933 ---------------------------------------------- 10. 마지막 이야기(9/9). 남다은과 1층 로비에서 헤어졌다. 그대로 헤어지기 아쉬운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이상 급할 건 없다. 그녀가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쭉 볼 사이니까. 하여 따라오려는 남다은을 식당으로 보낸 후, 나는 신속히 4층으로 올랐다. 예상대로 집무실 문은 자그맣게 열려있었다. 나는 빠르게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대로 테라스 문을 밀어 발코니로 나서자,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한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닥은 조각난 병에서 흘러나온 액체로 흥건했고, 웃옷으로 바닥을 닦는 중이었다. 나는 오도카니 한나를 응시했다. “!” 한나 또한 멍한 눈길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일순 급히 얼굴을 돌리더니 손등으로 얼굴을 훔쳤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발간 눈동자와 볼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확인한 뒤였다. '봤구나.' 그리 직감하자 괜스레 속이 불편해진다. 왠지 모르게 한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도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잠시 동안 고민해봤지만, 우선 침착히 겉옷을 벗어 한나를 감싸주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꿇어앉아 그녀가 쥐고 있는 옷을 잡아당겼다. 그러고 보니 이 옷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던데. “내, 내가 치울게.” 목멘 음색이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기어코 옷을 빼앗아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잠시 후, 목을 가다듬으려 애쓰는 소리가 들렸다. “미, 미안해. 나 멋대로 들어와버리고…. 방도 어지럽히고….” “괜찮아. 치우면 그만인걸…. 오히려 내가 미안하다. 숙소로 간다고 해놓고 정원으로 나갔잖아. 혹시 많이 찾아 다녔어?” “으응, 조금…?” 한나는 미소했다. 그러나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슬픔을 감추려 억지로 짓는 미소였다. 나는 속으로 한숨지었다. “이리 줘….” 한나는 계속해서 옷을 가져가려고 했지만 나는 가볍게 그녀의 움직임을 제압했다. 쭉, 주르륵. 흠뻑 젖은 옷을 한 번 쭉 짜내고 나서, 나는 다시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괜찮다고 했잖아. 내가 마저 치울 테니까 먼저 내려가있어.” “아니야. 그냥 내가 치울 테니까, 차라리 네가….” “정말로 괜찮다니까? 너 오늘 축제도 별로 즐기지 못했잖아.” “축제….” 옥신각신. 그러다 결국 포기한 모양인지, 한나는 허탈한 음색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 게, 여전히 그 자리서 나를 보고 있는 모양이다. 이후, 한참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왜 이렇게 어색한지는 알고 있다. 뭔가 해야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은데 그저 겉만 빙빙 도는 기분이었으니.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자줏빛으로 물들었던 바닥은 어느덧 본연의 색깔을 거의 되찾은 상태였다. 액체에 잔뜩 젖은 옷을 한 쪽에 밀어 넣은 후, 가지런히 모아둔 조각 더미에 손을 뻗었을 때였다. 가녀린 목소리가 한 줄기 흘러 들었다. “생각해보니 그렇네. 나도 이번 축제 정말 기대했는데…. 기대한 만큼은 즐기지는 못한 것 같아.” “지금 내려가도 늦지 않을걸. 아까 보니까 밤샐 기세더라.” “다들 술에 취해있을 텐데 뭐…. 생각해보니까, 아까 그냥 바로 이야기할걸 그랬어.” “왜. 누구랑 하고 싶은 얘기라도 있었어?” 되물으며, 나는 조각 더미를 단번에 움켜잡았다. 손바닥 곳곳을 찌르는 감촉이 느껴졌지만 아프지는 않다. 고작 병 조각에 아파할 정도로 나의 내구 능력치는 낮은 수준이 아니었다. 이대로 가루를 만들어버릴 생각에 살며시 마력을 일으키려는 찰나였다. “…응. 수현이 너랑 대화하고 싶었어. 너와 꼭 얘기하고 싶었던 게 있거든.” 가벼운 마력 폭발을 일으키려던 찰나, 나도 모르게 회로를 도는 마력을 멈추고 말았다. 조용히 옆을 돌아보자 아련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흐릿한 미소를 머금은 한나가 보인다. 애처로운 눈빛을 빛내는 게 흡사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어떤 게 미안한 걸까? “…어떤 얘기?” “너한테 고백하고 싶은 게 있거든.” 나는 숨을 삼켰다. 고백. 참 많은 뜻을 의미하는 단어. 갑작스레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한나가 어떤 의미로 고백을 말했는지, 대충은 눈치채고 있는 상태였으니.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고백이라. 무단 침입과 방을 어지럽힌 거라면 이미 들키지 않았어?” 순간 한나의 눈망울의 거세게 흔들렸다. 나는 무심히 그녀를 응시했다. 농담이라면 농담이지만, 웃자고 한 농담은 아니었다. 최후 통첩, 아니 선택권을 넘겼다고나 할까. 농담으로 받아들이면 어떻게든 웃고 넘어가면 된다. 그러면 그만이다. 그러나,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아마 한나는 상처를 받을지도 모른다. 결정은 예상외로 신속했다. 잠시 후, 한나의 입술이 열린 것이다. “그것도 있지만…. 실은…. 아까 봤어. 너랑 다은씨랑 서로 연못에서….” 그리고, 그녀는 후자를 선택했다. 나는 살짝 입술을 물었다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우연히 만난 거야.” “그렇구나. 그, 그럼 둘이서 무슨 얘기했어?” “어디서부터 봤는데?” “시, 실은 전부…. 인 것 같아.” “다 보았다고….” “…아까 다은씨가 고백한 거야? 너한테?” 그렇지 않았다면 입맞춤도 하지 않았겠지. 나는 대답 대신 머리를 끄덕였다. 사실 보았을 거라 예상하기는 했다. 아직 볼에 남아있는 선명한 눈물 자국을 보자, 왠지 모르게 미안해졌다. 왜냐하면 마음속으로는 한나가 웃고 넘어가기를 바래었고, 이쯤에서 그만두기를 원하고 있었으니. 그러나, 한 번 말문이 터진 한나는 재차 입을 열었다. “너는 받아들였어? 그래서 입맞춤을 한 거고?” “한나야.” 지긋이 부르자 한나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지나쳤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다. “나와 남다은의 문제잖아.” 다시, 침묵이 흘렀다. 찬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치는 테라스는 굉장히 추웠다. 그러나 추운 이유가 단순히 바람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문득 연초 한 대의 생각이 간절해졌다. “후후. 그러네. 내가 너무 꼬치꼬치 물었나 봐.” 약간의 뜸을 들였다가, 한나는 고요히 수긍했다. 그리고 또다시 어설프게 웃음 짓는다. 그러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떨리는 게, 자꾸만 입을 달싹이는 게…. “그냥…. 걱정돼서….” 꼭, 바로 눈물을 쏟을듯한 모양새였다. 그러한 모습을 보자 순간 마음이 약해졌다. “…뭐가 그렇게 걱정되는데?” “이미 네 옆에 두 여인이 있잖아…? 하연이 언니랑, 연주 언니…. 그런데 다은씨까지 이러면…. 후, 후후…. 인기 많은 남자는 정말 힘들겠네….” 얘가 울먹이면서 정곡을 찔러오네. 나는 입맛을 다셨다. “맞는 말이기는 한데, 그것 또한 내 문제야.” “그, 그래. 그런데. 아, 아니. 그리고 있잖아. 후….” 그때였다. 횡설수설하던 한나는 한순간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러면서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이내 날 정면에서 응시하는 게, 뭔가 단단히 결심한 얼굴이다. 이윽고, 한나가 크게 숨을 내뱉었을 때였다. “나도…. 이제 고백할 거거든?” 불시에 들려온 고백에,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럼…. 어떡하지? 그러면 어떡할 거야?” 파스슥! 그대로 손아귀에 힘을 주자 조각이 바스러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주먹이 터져라 더더욱 세게 쥐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제는 말해야 한다. 상처를 주기 싫었는데, 주어야 한다. 사실 한나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목욕탕 사건 때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 느꼈고, 마지막에 스스로 입을 맞춰오는걸 보며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실상 나는 한나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 아니,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분명 좋게 생각하는 건 맞지만, 그녀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사랑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수현씨도, 저를 보면 가슴이 두근두근 하나요?' 가슴에 손을 대보았다. 고백을 들었음에도 한나의 앞에서는 가슴이 뛰지 않는다. 이게 바로 현실이었다. 그래도 최대한 완곡히 말하려 애썼다. “한나야. 너는 좋은 여자라고 생각해. 정말로.” “왜? 너는 내가 마음에 안 들어?” “…그건 아니야. 넌 누가 봐도 반할만큼 예쁘고 상냥해.” “하지만 다은씨의 마음은 받았잖아. 하연이 언니도, 연주 언니도 있는데 받아준 거잖아. 나도 그러면 안 돼?” 가슴이 뜨끔해졌다. 단순히 “좋은 여자.”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어질 말들을 예상했는지, 그녀가 내놓은 답은 이미 몇 수를 뛰어넘고 있었다. 갑작스레 말문이 막혔지만 나는 얼른 속을 가다듬었다. 아니. 가다듬을 것도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진실만을 말해주면 되는 일이니. 설령 그게 잔인한 말이라 할지라도.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난간으로 다가가 주먹 쥔 손을 활짝 폈다. 잘게 쪼개진 조각들이 바람에 흩날려 어디론가 사라진다. “너는 그럴 수 없어.” 그리고 한두 번 손을 털며 말을 잇는다. “하연은…. 하연과는 보호를 요청으로 시작한 관계였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변했어. 지금은 우리가 단순한 보호 관계가 아닌 조금 더 깊은 관계라고 생각해. 나는 그녀를 볼 때마다 내 첫 여자라고 생각하거든.” “응.” “고연주와의 시작? 사실 단순한 호기심이었을 거야. 나도, 그녀도. 하지만 이후 고연주는 내게 놀랍도록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고, 그 모습에 지금 내 마음이 변한 것 같아.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이따금 그녀를 보면 사랑스럽다고 느껴.” “…응.” “그리고 남다은은…. 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 솔직히 두 여인이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아까 그녀의 고백을 받으니까 심장이 뛰고 가슴이 설레더라. 왜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응.” 이야기를 진행할수록 한나의 답이 반 박자씩 늦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조용히 심호흡했다. 그리고 차분히 몸을 돌아 그녀를 응시했다. 뭔가에 홀린듯한 눈길이 멍하니 나를 마주한다. “네 말대로 내 옆에는 두 명, 아니 어쩌면 앞으로 세 명이 될지도 모르는 여인들이 있어.” “…….” “이런 상황에서, 보호를 명목으로 너를 안을 수는 없어. 상황도 맞지 않고,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해. 그렇다고 호기심으로 너를 안을까? 싫어. 단순히 남녀라는 이유로 그러고 싶지 않아. 그리고….” 순간적으로 이 말을 할까 말까 고민했지만, 그냥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끊는다면 모든 게 애매해진다. 나는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한나야. 아까 고백을 들으면서 설레는 감정이 들지 않았어. 미안해.” 그 말을 꺼낸 순간이었다. “!” 한나의 눈이 일순 크게 떠지는가 싶더니 바로 눈을 감는다. 이어서 목울대에 한 번 고저가 생기고 입술을 잘끈 문다. “그래…. 그렇구나…. 내가…. 한 발 늦은 거네.” 글쎄 라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한나가 남다은보다 먼저 말했다고 해도 받아들였을지는 미지수였다. 시간이 흐른다. 이윽고 한나는 서서히,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나는 테라스 문 앞에 서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그래. 사실대로 말해줘서 고마워.” 충격을 받은 건지, 추운 건지. 한나는 천천히 양팔을 끌어안았다. 이제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로 덜덜 떠는 모습에 나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고맙긴. 미안하지.”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냥 이대로 두고 갈까 생각했지만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한나에게 다가가 팔을 잡았고 힘주어 끌었다. “얘기 끝났으면 일단 들어가자. 춥다.” “자, 잠시만.” 한나는 저항했다. 담담 하려 혹은 태연 하려 애쓰는 듯 보였지만, 빛 잃은 눈을 보니 아무래도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수현아. 그냥…. 너 먼저 가면 안될까?” “한나야. 이러지 말자.” “아, 아니…. 다른 게 아니라…. 나 잠깐 여기 있고 싶어서 그래.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나 한나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흑.” 이내 가늘게 어깨를 떠는 게 결국 참지 못해 눈물이 나오는 모양이다. 이러할진대, 내가 어찌 그냥 놔두고 가겠는가. “…일단 들어가자. 여기 있지 말고.” 나는 한나의 팔을 강제로 잡아 끌었다. 그녀는 약간 저항했지만 곧 무너지듯 내게로 끌려왔다. 탁. 집무실로 들어오고 나서 나는 바로 테라스 문을 닫았다. 찬바람이 사그라지고 따뜻한 방안의 온기가 우리를 맞이했다. 그리고 한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속이 착잡해졌다. 한나는 분명히 매력적인 여인이다. 얼굴, 몸매, 성품, 사용자 정보. 어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여인. 그런 만큼 오만 감정이 들었다. 이런 여인이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준 게 고마웠고, 정말로 미안했다. 그래도, 결국에는 이게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나는 한나를 받을 자신이 없다. 다시 말해서, 나는 차후 한나를 하연이나 고연주처럼 대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잡았던 팔을 살며시 놓았다. 그리고 최대한 부드러이 말하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같이 내려가자. 식당으로 내려가서 기분 전환이나 하자고. 너 오늘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잖아.” “…미안. 지금 그냥 혼자 있고 싶어….” 그러나 한나는 힘겹게 고개를 저었고, 나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럼 더 하고 싶은 말은 없어?” 다시 들려오지 않는 대답. 나는 더는 말을 않기로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녀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 터. 애당초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기도 하고. 계속 옆에 있느니 얼른 몸을 비켜주는 게 낫겠지.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 진정되면 내려와.” 잠시 후,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문 쪽으로 다가가 방문을 열었다. 달칵. 이윽고 어두컴컴한 복도가 눈앞에 드러났다. 그곳을 향해 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가지마….” 그 순간 미약하게 들려온 울음 섞인 목소리. 한없이 서글프고 애처로운 음색이 떠나려는 내 발길을 붙잡는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에 나는 다시 몸을 돌리고 말았다. “가지마…. 제발….” 어느새 한나는 양손을 내린 상태였다. 가슴이 북받쳐 오르는지 자꾸만 목울대를 움직이면서도,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가지 말라는 듯, 양손을 내밀어 내 팔을 잡았다. 나는 손을 들어 한나의 눈을 닦았다. “울지마.” “왜, 왜에…. 도대체 왜 나는 안 되는 건데.” 울면서도 한나는 서러운 눈빛을 들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시작부터 꼭 시작부터 설렐 필요는 없잖아. 처음부터 가슴이 두근두근할 필요도 없잖아. 응? 여기는 홀 플레인이잖아…. 하연이 언니처럼, 연주 언니처럼…. 나도 언니들과 똑같이 시작하면 안 돼?” “한나야. 아까도 말했잖아. 나는….” “알아. 무슨 말인지 알아. 그러면 나눠달라고 하지 않을게. 정 부담스러우면 나, 네 안으로 들이지 않아도 돼. 그러니까 수현아. 나한테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안될까? 응?”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러 불이 갑작스레 타올랐다. 한나의 감정이 점차 격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정말로 모든걸 버리고, 매달리고 있었다. “임한나.” 하여 진정시킬 목적으로 이름을 불렀지만, 한나는 세차게 도리질을 쳤다. “그냥, 그냥 옆에 있기만 해도 좋아. 옆에 있어도 된다고 허락만 해줘. 네 안으로 들어가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응?” 이제 여기까지 왔다면, 나라고 계속 가만히 있기도 그런 상황이었다. “왜? 도대체 네가 나한테 이렇게 집착하는 이유가 뭐야?” “화내지마….” “화내는 게 아니라 모르겠어 서 그래. 정말로 모르겠어. 임한나 너, 혹시 아직도 스스로를 마녀라고 생각해? 아니면 아직도 나를 그 사람과….” “아니야!” 그때였다. 한나가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와 동시에 나와 그녀는 서로 아차 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나 또한 말을 지나치게 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아니야. 분명히 그런 적은 있지만…. 지금은 아니란 말이야….” 애처롭다 못해, 이제는 애틋하게 보이는 눈초리. 머릿속이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설마 한나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도저히 해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나는 한숨만 푹푹 뱉었다. “수현아….” 저렇게 나를 보는데,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여기서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차라리 여자가 없었다면…. 아니, 아예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그러면 이렇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터. 하지만 한나는 아는 사람이며 내 울타리 안에 있는 사용자였다. 또한 앞으로 계속 함께할 사용자이기도 하다. ‘머리 아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나는 지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잠깐, 잠깐만. 어지러워. 그러니까 생각 좀….” 하지만 한나는 그럴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녀는 여전히 내 팔을 잡은 상태였고, 더더욱 세게 잡았다. 그러더니, 갑작스레 형형히 눈을 빛내어 말을 이었다. “알아. 알고 있어. 내가 지금 이러는 게 엄청 구질구질하다는 것도, 또한 무척 이기적이라는 것도. 그리고 네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도. 그런데 나, 너를 정말 놓치고 싶지 않아. 아니. 네 말을 들으니까 더 놓치기 싫어졌어.” “…거듭 말하지만 너는 좋은 여자고, 너만을 사랑해줄 좋은 남자 또한 많아. 그런데 왜 그렇게 나한테 스스로 묶이려는 거야?” 그때였다. 쉴 새 없이 열리던 한나의 입이 멈췄다. 그리고 나를 빤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또 불안해지고 싶지 않으니까.” 이윽고, 팔을 잡은 손이 약간이지만 느슨해지는 게 느껴졌다. 한나의 말이 이어졌다. “러브 하우스에 있을 때부터 너를 봐왔으니까. 이제 그만 다른 건 잊고, 한 곳에 정착하고 싶으니까.” “거봐. 너….” “그리고, 너를 좋아하니까.” “…납득이 안 돼.”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한나는 예의 서글픈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너는 꼭 그렇게 이유가 필요해?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꼭 백 퍼센트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어야 해?” “그게 아니라…. 후, 아니야. 아니다.” 지쳤다. 정말로 지쳤다. 전투를 하지도 않았는데 온몸이 녹초가 된 느낌이다. 내가 힘들어하는걸 느꼈는지, 한나는 시무룩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더욱 가까이 다가와, 조심스레 내 품에 자신을 묻었다. 가녀린 줄이 등을 죄고, 따뜻한 숨결이 가슴을 간질인다. “미안해. 힘들게 해서. 하지만 내 마음은 진심이야.” 돌연히 여인 특유의 향기가 코를 물씬 찔러 들었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나를 둘러싼 주변 상황이 그랬으니까. 동료들이 죽었고, 오빠가 죽었고, 너도 죽었다고 생각했지. 그 정도 되니까 그냥 운명이라고 생각되더라. 아. 나는 마녀구나. 그때 이후로 내 운명에 살이 끼었구나.’ ‘또 불안해하고 싶지 않으니까.’ 한나는 과거에 의한 트라우마가 있다. 통과의례에서 한 번 모든 동료를 잃었고, 홀 플레인에 들어와 비슷한 일을 겪었다. 그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생각하고 또한 운명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그녀는 한때 자신을 동료를 잡아먹을 마녀라고 생각했다. 머녀서리에 들어와서도 트라우마는 여전했는데, 그렇게 생각할만한 상황이 터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한나의 과거 동료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어떤 일을 겪어도 보란 듯이 살아남았고, 클랜원들을 구출했다. 한나는 아마 그때부터 나를 특별히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어떠한 감정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시작부터 꼭 시작부터 설렐 필요는 없잖아.' '처음부터 가슴이 두근두근할 필요도 없잖아.' '여기는 홀 플레인이잖아…. 하연이 언니처럼, 연주 언니처럼…. 나도 언니들과 똑같이 시작하면 안 돼?' '그냥, 그냥 옆에 있기만 해도 좋아. 옆에 있어도 된다고 허락만 해줘.' 설핏 시선을 내리자, 여전히 얼굴을 묻은 채 덜덜 떠는 한나가 보인다. 예의 상냥하고 기품 넘치는 자태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마치 살짝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녀를 품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모르겠다.' 아까 그냥 가버렸으면 모를까. 아니, 아예 오지 않았다면 모를까.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몸을 돌린 이상 이대로 놔둘 수는 없다는 것. 이제는 정말로 모르겠다. 나는 이마를 매만지던 손을 느릿하게 떨어뜨렸다. 그리고 한나의 정수리에 닿기 직전 허공에서 정지했다. 뭔가를 느낀 걸까. 그녀의 몸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한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수현아…?” 그런 한나의 눈동자는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여기서 거절하면 더는 돌이킬 수 없을 테지.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아직도 확신은 없지만, 나는 힘주어 한나의 머릿결을 쓸어 내렸다. 그리고 눈을 감아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한나야.” “응?” “진심이야? 정말로, 괜찮겠어?” 비로소 한나는 울음을 그쳤다. 그녀는 그렁그렁한 눈을 들어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응. 진심이야.” “…힘들 수도 있어. 후회할 수도 있고.” “힘들면 참을게. 후회해도 티 내지 않을게. 지금은 그냥…. 내 감정에 충실해지고 싶어.” 한나는 힘들지 않다는, 후회하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제야 비로소, 그녀가 조금 전 뱉은 말들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끄덕끄덕. 대답은 없었지만 가슴이 간지러웠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허공에서 멈췄던 손을 움직여 한나의 정수리에 살며시 얹었다. 이내 부드러이 쓸어 넘기자 그녀는 곧장 얼굴을 묻어 기다란 숨을 토해냈다. 왠지 안도의 한숨처럼 느껴지는 숨결이었다. “하아….” 가슴이 뜨거워졌다. “다행이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붙잡았는데…. 정말 그냥 가버리면 어쩌나 했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계속해서 한나의 머릿결을 보듬고, 쓸어 내렸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 즈음, 까치발을 들은 듯 한나의 얼굴이 살짝 올라오는 게 보였다. 이윽고. “…….” 은근한 목소리가, 귓가로 속삭이듯 흘러들었다. * 방안으로 스며든 달빛이 유난히 밝은, 어느 날 밤과 새벽의 사이. 탁, 달칵! 살며시 문이 닫히는 소리, 그리고 문이 잠기는 소리. “정말, 괜찮겠어?” 여전히 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조용히 몸을 돌자 눈물 젖은 눈으로 숫접게 머리를 끄덕이는 한나가 보인다. 여기서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한나의 어깨에 부드러이 손을 얹는다. 그대로 살짝 끌어당기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서로 몸을 꼭 붙인 채, 우리는 책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씩 가던 도중, 아래서 자꾸만 나를 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하여 설핏 시선을 내리자, 조마조마한 얼굴의 한나가 보였다. 그녀의 눈동자는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돌연 한나가 내 머리를 읽은 것 같아 가슴이 따끔했다. 나는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은 상태였다. 마지막 매달림에 허락하긴 했지만, 아직도 고민하는 중이었다. 문득 여러 여인들이 뇌리를 스쳤다. 정하연, 고연주, 그리고 남다은…. '그만두자.' 나는 그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한나의 고백을 받은 건 이미 번복할 수 없는 일. '앞으로 어떡하지' 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겠다.'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은 한나에게 집중하는 게 나을 터. 어느새 책상에 도착했다. 침대가 없는 게 아쉽긴 하지만 책상도 나쁘지는 않다.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좋다. 더는 망설이지 않는다. 살그머니 허리를 들어올리자, 그녀는 조용히 책상에 걸터앉았다. 한나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저 날 계속 쳐다보며 하라는 대로 따르고 있었다. “마음의 준비라도 할래?” 혹여 오해하지 않도록 고르고 고른 말이었다. 다행히 의미는 잘 전달된 모양이다. 한나는 사뿐 웃음 짓고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으응.” “꼭 해야 할 필요는 없어.” “아니. 이왕 밀어붙인 거 오늘 아예 마침표를 찍고 싶어.” 그러더니, 민망해하는 낯빛으로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나…. 오늘 되게 지저분했지? 막 억지도 부리고…. 이기적으로 굴고….” “괜찮아. 네가 생떼 쓰는 게 처음도 아닌데.” “새, 생떼?” “전쟁에서 따라오겠다고 난리 친 거. 설마 기억 안나?” 기억이 안 날 턱이 있나. 그때 속 터져 죽는 줄 알았는데. 한나는 볼을 발그레하게 붉혔다. 이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게, 창피한 줄은 아는 모양이다. 아무튼. 놀리는 건 이쯤하고, 이제 그만 슬슬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한나는 이번이 처음이다. 첫 관계이니만큼 어느 정도의 리드와 배려가 필요할 듯싶었다. “그럼 시작할게? 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 “아, 안 했거든. 그리고 그냥 말하지 말고 해…. 부끄러우니까….” 허락이 떨어진 순간 나는 가볍게 한나를 감싸 안았다. 색색 숨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안 했다고는 했지만, 나름대로 긴장한 모양이다. 나는 속으로 웃으며 재빠르게 손을 놀렸다. 테라스에서 걸쳐준 외투는 바로 끌러 내렸다. 손가락 끝으로 마력을 일으켜, 한 겹 남은 얇은 셔츠를 세로로 베어 내렸다. 이내 마지막 남은 속옷은 부드러이 풀어 내렸다. 이윽고 상의를 완전히 해체했을 때였다. “참 좋다….” 한나는 눈을 감은 채 잔잔한 음색으로 말했다. 보아하니 삽시간에 상의가 해체된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다. 곧 터져 나올 그녀의 비명을 기대하며, 나는 천천히 몸을 떼었다. 온기가 떨어져나가는걸 느꼈는지, 한나는 아쉬운 눈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사르르, 사르륵. 외투를 벗기자 등이 잘린 셔츠가 스르륵 떨어진다. 이어서 가슴을 가린 천마저 나풀나풀 허벅지에 안착했다. 이윽고 한나의 아름다운 젖가슴이 눈앞에 드러났다. 중간에 길게 그어진 가슴골의 좌우로, 예쁘게 모인 물방울 형태의 가슴이 자신의 크기를 한껏 과시하고 있었다. 흰 무덤의 정점에는, 이미 부풀어 오를 대로 부풀어 오른 연분홍색 젖꼭지가 꼿꼿이 돌출된 상태였다. 그녀의 가슴을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음에도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다. “응?” 내 시선을 느낀 걸까, 아니면 뭔가 휑하다고 느꼈을까. 한나는 의아한 눈동자로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이내 얼굴을 떨궈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미처 예상치 못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끄앙!” “푸.” 한나가 펄쩍 뛰어오르는 것과 동시에, 나는 순간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비명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뜬금없고 웃겼기 때문이다. “도, 도대체 언제 벗긴 거야?” “으하, 으하하!” “그, 그만 웃어!” “하하, 하하하!” 한나는 고운 아미를 한껏 치켜 올리며 불만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최대한 웃음을 참으려 애쓰며, 가슴을 가린 그녀의 양팔을 부여잡았다. “정말 예상치 못한 비명이었어. 끄앙.” “씨, 너 진짜. 놀리지마. 정말 깜짝 놀랐단 말이야. 그냥 안으려고 한 건 줄 알았는데, 언제 옷이….” 이번에는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팔을 풀어내자, 크고 아름다운 가슴이 다시 한 번 모습을 보였다. “자, 잠깐만.” “안 들려.” 나는 간단히 대꾸한 후 세로로 그어진 가슴골을 향해 차분히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내 코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살이 닿은 순간 나는 가는 콧숨을 내쉬었다. 후. “항!” 가벼운 자극에도 불구하고 이리저리 몸을 뒤트는걸 보니, 역시나 처음이 확실한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고 끝까지 얼굴을 돌진했다. 이윽고 양 볼을 부드러이 압박하는 포근한 감촉과, 코끝이 어딘가에 막혀 더 나아가지 않을 때. 나는 한나를 꽉 끌어안아 천천히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한없이 아늑하고 포근한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한나의 젖가슴은 어머니의 품을 연상케 할 정도로 한갓지고 편안했다. 도중에 약간 숨이 막혀, 나는 있는 힘껏 숨을 들이켰다. 여성 특유의 육향(肉香)이 콧속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으응. 으으응. 수, 수현아?” “잠깐만…. 잠깐만 이러고 있자.”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한나는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곧 나긋한 손길이 머리를 보드랍게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나는 한동안 살 내음에, 그녀의 손길에 취했다. 그러다 아까의 비명이 생각나서 다시 한 번 킥. “아 진짜~. 그만 좀 웃으라니까~.” 어지간히 부끄러운 듯 한나는 내 머리를 콩콩 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해도 웃긴지, 그녀의 음색은 전보다 훨씬 밝아져 있었다. 나는 비로소 고개를 들어 한나와 마주했다. 예상대로 그녀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배어져 있었다. “그래. 이제 좀 너답다.” “응?” 나는 찬찬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 손으로 한나의 머리를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어깨를 잡았다. 그 상태서 슬슬 몸을 기울이자 그녀의 몸도 자동적으로 기울어진다. “아.” 이윽고 나는 한나를 완전히 책상에 눕힐 수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자 창문을 통해 흘러 들어온 빛이, 흩뿌려진 머리칼에 스며들어 유유히 흐르기 시작했다. “봐. 그렇게 웃으니까 보기 좋잖아.” “그, 그런가?” “한나야.” “으, 응?” 살짝 놀란 듯, 한나는 떨떠름히 대답했다. 눈을 동그랗게 만든 채 아래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나는 스르르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이윽고 한 점 티끌도 보이지 않은 고운 이마가 눈에 들어왔을 때.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쪽. 그리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 ============================ 작품 후기 ============================ ㅇ<-< 0427 / 0933 ---------------------------------------------- 10. 마지막 이야기(9/9). 나는 입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 눈앞에 놓인 거대한 두 언덕 중 하나를 약하게 베어 물었다. “합.” “으응.” 한나가 움찔했다. 그러나 곧 입술을 꼭 무는 게 어떻게든 참으려 애쓰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녀의 등을 간드러지게 쓰다듬으며 나는 젖을 머금은 입을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커도 너무 큰 터라 한 입에 다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입을 움직였다. “으응, 으흐응.” 꾹 닫힌 입술 틈으로 참을 수 없는 비음이 새어 나온다. 나는 남은 손을 들어 남은 가슴 하나를 움켰다. 그리고 혀로 젖꼭지를 핥으며, 젖을 입 속 깊숙이 빨아들였다. “아, 안 돼…. 아, 아아아아앙!” 한순간 아래로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좌우로 거세게 찰랑인다. 동시에 머리를 밖으로 밀어내려는 미약한 저항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끈질기게 달라붙어 집요하게 가슴을 희롱했다. 엄지와 검지로 젖꼭지를 잡아 늘리고 혀는 둥글게 굴려 무덤 전체를 핥아 올린다. 물론 중간중간 적절히 흡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흐으으으응!” 힘의 방향은 순식간에 반대가 되었다. 어떻게든 밀어내려던 한나의 손이, 이번에는 반대로 머리를 짓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덜덜 떨면서도 이따금 정수리를 토닥이는 게 조금만 살살 해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푸하.” 이내 젖에서 입을 떼어 고개를 들자 숨을 헐떡이는 한나가 눈에 들었다. 그녀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침 범벅 된 가슴을 쓰다듬고 있었다. 새하얗던 언덕에 붉은 자국이 들어선 게, 생각보다 심하게 한 모양이다.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많이 아프니?” “역시…. 언니들 말이…. 맞네….” “응? 말이라니?” “너…. 가슴…. 엄청 좋아한다고…. 후후….” 한나는 숨을 가다듬으면서도 묘하게 눈꼬리를 휘었다. 나는 한두 번 헛기침을 한 후 아직 젖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떼었다. 그녀가 킥킥 웃는다. “왜? 더해도 되는데…. 너 정말 귀여웠어. 이런 모습 처음 봐.” “…칭찬으로 들리지는 않는데.” 약간 머쓱한 기분이 들었지만, 딱히 할 말도 없다. 잘 생각해보면 그녀들과 관계를 맺을 때마다 항상 가슴부터 찾아댔으니. 어쩌랴. 자업자득인걸. 아무튼, 가슴으로만 전희를 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 또한 한나는 아직 한 번도 관계를 맺은 적이 없는 처녀였다. 나중에 삽입할 시 어느 정도 고통을 줄여주려면 미리 고루고루 애무해두는 게 나을 것이다. “또 키스해주라….” 마침 때맞춰 요청이 들어와 나는 금세 한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책상이 춥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지만, 곧 덥혀주면 된다는 생각으로 그대로 상체를 앞으로 쓰러트렸다. 가슴을 짓누르는 기분 좋은 압박감을 느끼며 한나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음…. 으음….” 이제 조금은 익숙해진 건지 한나의 입술이 달싹달싹 움직인다. 보다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움직임에 나는 조금 더 대담해지기로 마음먹었다. 하여 부드러이 입술을 비비다가, 벌려진 틈으로 천천히 혀를 집어넣었다. 가늘었던 그녀의 눈이 크게 떠진다. 한나의 입안으로 침입한 후, 나는 곧바로 그녀의 혀를 찾아 움직였다. 한나는 이리저리 비틀어 피하려고 했지만, 이미 안으로 들어온 이상 끝난 일이나 다름없었다. 이내 매끈하면서 부드러운 살의 감촉을 맛보았을 때, 나는 재빠르게 혀를 감싸 얽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쉴 틈을 주지 않고 그대로 흡입. “응, 쩝…. 쩝…. 꿀꺽! 으응, 쩝…. 쩝…. 꿀꺽!” 나는 한나의 목을 받쳐 고정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주며 그녀를 강하게 빨아들였다. 방금 보였던 호응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한나는 다시 수동적으로 변하였다. 혀는 빨아들이는 대로 이끌리고 타액은 주는 대로 받아 마신다. 이윽고 한나를 다시 책상에 걸터앉혔을 때, 나는 비로소 맞붙였던 입술을 떨어뜨렸다. “푸하! 하, 하, 하….” 한나는 고개를 껄떡이며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눈동자가 몽롱하게 젖어 들고 숨결은 더웠다. 아무래도 딥 키스가 굉장히 인상에 남은 모양이다. 하지만 부족하다. 이 정도로 충분히 전희를 즐겼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바로 삽입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다. 하여 조금 더 한나의 몸을 덥히기 위해 나는 옆에 앉아 그녀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허벅지 위로 가볍게 안착시켰다. 서로의 몸을 겹치듯, 내 위로 그녀가 앉은 것이다. “또 뭘 하려는 거야?” 젖가슴과 딥 키스의 충격이 컸는지 한나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듯하다. 나는 천연덕스레 입을 열었다. “네 하의를 벗길 거야.” “하, 하의는 왜?!” “알면서.” “몰…! 꺅!” 혹시라도 앙탈을 부릴까 재빨리 하의를 벗기자 한나는 펄쩍 뛰어올랐다. 이제야 좀 정상적인 비명이 나온다고 생각하며 나 또한 차분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동시에 눈앞에 놓인 그녀의 뒤태를 감상했다. 한나 몸매의 큰 장점은 단연코 커다란 젖가슴이지만, 아래로 이어지는 라인 또한 아름답다. 나올 데는 나오고 들어갈 데는 들어간 원숙한 S자 곡선. 특히 복숭아를 연상케 하는 하얗고 둥그런 엉덩이와 보기 좋게 살이 붙은 탐스러운 허벅지는, 그야말로 한껏 무르익은 여성의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나는 한나의 양 옆구리에 지체 않고 손을 대었다. 그러자 그녀가 이리저리 허리를 비틀더니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삐죽였다. “깜짝 놀랐잖아. 할 때 미리 말 좀 해주고 하면 안 돼?” “아깐 말하지 말고 하라며.” “그, 그랬었나?” 한나는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대답하곤 다시 앞을 쳐다보았다. 한동안 그녀의 희멀건 한 목덜미를 바라보다가, 희고 고운 어깨에 턱을 올렸다. 그리고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아무 걱정도 하지마.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알겠지?” 일순 간지러운지 머리를 떨었지만, 한나는 끄덕끄덕 머리를 주억여 보였다. 나는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레, 옆구리를 잡은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옆구리에서 복부로, 복부에서 배꼽으로, 배꼽에서 더욱 아래로. 조금 전 보았던 부분들을 하나하나 쓸어 내려간다. 이윽고 더욱 깊은 곳으로 내려가려는 순간, 뭔가 꾹 닫힌 저항감이 느껴졌다. 자신의 소중한 곳을 방어하려는 본능인지, 한나가 허벅지를 오므린 것이다. “한나야.” “하, 하지만.” “괜찮으니까…. 응?” 그럼에도 허벅지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힘은 살짝 풀었는지 더는 거센 저항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대번에 허벅지를 비집고 들어가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 순간, 손끝으로 가슬가슬한 음모의 감촉이 느껴졌다. 손에 가해지는 압박감이 다시금 강해지기 시작한다. 말캉말캉하면서도 따뜻한 감도가 전해져 나는 빙그레 웃었다. 잠시 동안 그 촉감을 즐기다가, 다시 천천히 출발. 더욱더 아래로, 여성의 가장 소중한 곳으로. 그러자 비로소 중지 끄트머리에 계곡의 균열이 시작되는 부분에 도착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부분을 한 번 살짝 긁어보았다. 한나의 몸이 연거푸 움츠러들고 허벅지는 더욱더 죄어든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이미 안쪽으로 파고든 이상, 제한은 있을지언정 가지 못할 곳은 없다. 이내 쭉 아래로 내려가자, 균열에서 이어진 세로로 갈라져 내려가는 틈이 느껴진다. 그 틈을 따라, 나는 단번에 그리고 갈라진 틈 끝까지 손을 훑었다. “흐엉!” 그때였다. 마침내 한나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코에서 흘러나오는 비음이 아닌, 내부서부터 끓어오른 달뜬 음색이었다. 나는 왼팔로 한나의 허리를 감았다. 그러고 그녀의 어깨에 괸 얼굴을 들어 조용히 물었다. “아까는 끄앙. 지금은 흐엉. 너 되게 독특하다.” “흐, 흐으, 흐으. 노, 놀리지마?” “하하. 기분은 어때?” “하아…. 남자가 만져주니까…. 기분이 되게 생소해…. 확실히 차이가 있네?” “…남자가 만져주니까?” “얘는. 나는 살면서 수음 한 번 해본 적도 없는 줄 아니.” 뜻밖의 고백에 잠시 멍하였지만, 이내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기야 평소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과 내면의 본 모습은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까. 나만해도 그렇지 않은가. 아니면 안솔을 예로 들 수도 있을 테고(순간 안솔의 해맑은 얼굴이 떠올라, 나는 거세게 머리를 흔들었다). 어느새 손을 죄는 압박이 서서히 약해지고 있었다. 그토록 굳게 닫혀있던 허벅지가 스스로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한나는 여전히 앞만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 모습이 꼭 시치미를 떼는 것 같아 나는 속으로 웃었다. 아무튼. 이제 어느 정도 대담해질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중지를 고리 형태로 구부렸다. 그리고 단단히 닫힌 살 틈으로 밀어 넣어 들어갈 구멍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틈은 단단하게 다물려 있어, 중지의 입성을 거부하고 있었다. 자그맣게 힘을 주었음에도 끝 마디만 약간 들어갈 정도로 뻐덕뻐덕했다. '아까 그대로 넣었다면 엄청 아파했겠지?' 내심 안도하며 나는 허리를 감은 왼손도 아래로 떨어트렸다. 허벅지는 계속 벌어지는 중이라, 들어갈 공간은 충분했다. 나는 왼손으로 옥문(玉門)을 좌우로 벌렸다. 한나의 엉덩이가 비틀렸다. “으?! 벼, 변태.” “어차피 보이지도 않는걸.” 나는 천연덕스레 대꾸하며 드디어 노출된 속살을 조심스레, 정성 들여 매만졌다. 그러다 다시 구멍 안으로 느릿하게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이윽고 보들보들한 살 주름과 탄력적인 살결에 중지가 파묻히는 게 느껴졌다. 마치 어쩔 수 없이 허락하겠다는 듯, 그녀의 내부가 밀어 넣은 손가락을 옥여 바싹 죄어온다. 손가락을 들이미는 건 한 마디에서 끝냈다. 마음 같아서는 여성의 최고 성감대라는 지 스팟을 공략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처녀막 뒤에 있는 장소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한 마디만 걸친 상태서 부드러이 중지를 휘젓기 시작했다. '따뜻하다….' 그러나 뜻밖에도 한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하여 슬그머니 얼굴을 살피자 아미를 한껏 모은 채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이따금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고 손은 꾹 말아 쥔 상태였다. 내 몸에 기댄 등에서 잔잔한 파문이 이는 게, 흘러나오려는 꼭 신음을 있는 힘을 다해 참고 있는 모습이다. 설마 아까 놀려서 이러는 건가? 어떻게든 신음이 나오려는 걸 막으려고? '그렇다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나는 조용히 얼굴을 들었다. 옆을 보자 어여삐 솟아나온 한나의 귀가 보인다. 길게 흘러내린 머릿결 틈으로 비죽 새어 나온 게 참 탐스러운 모양새였다. 결국 참지 못해, 나는 그녀의 귀를 덥석 물었다. “으읍!” 성공할뻔했지만, 실패했다. 아쉬운 마음을 누르며 나는 넌지시 귀 둘레를 우물거렸다. 그리고 살금살금 타고 내려가 부드러운 귓불에 입을 맞췄다. “으으…. 흐으으…. 으흐으응….” 조금씩이지만 비음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언뜻 들으면 흐느끼는 음색이었지만, 파르르 떨리는 귓불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나는 왼손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입구를 벌리던걸 멈추고 신속히 틈을 더듬었다. 이내 처음 만졌던 균열에서, 아까는 느끼지 못했던 좁쌀만한 돌기가 도드라진 게 느껴졌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어느 순간 엄지와 검지를 모아 돌출된 부분을 세게 쥐었다. “으아앙!” 순간 한나의 허벅지가 크게 들썩였다. 동시에 자세가 흐트러져, 나를 쓰러트릴 기세로 기대어오기까지. 다시금 터져 나온 신음에 나는 이제 슬슬 시작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어느덧 꾸준히 휘젓던 오른 손가락에서 매끈매끈한 액체의 감촉을 느꼈기 때문이다. 샘솟아 흘러나온 진득한 애액은 바듯했던 질을 부드럽게 풀어주고 있었다. 나는 안을 젓는걸 멈추고 침착히 중지를 빼었다. 소중한 곳을 애무하던 손을 들어올려, 한나가 볼 수 있도록 눈앞에 갖다 대었다. 손끝에는 번들번들한 액이 묻어있었는데, 엄지를 한 번 대었다가 떼자 애액이 실을 끌고 눅진히 이어진다. “어때?” 한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부끄러운 얼굴로 고개만 수그리더니 이내 조심스레 입을 벌려 마디 끝을 머금는다. 곧 살며시 중지에 묻은 애액을 빨아들이는 게, 어디서 본건 있는 모양이다. “이제 슬슬 시작할까?” “…응.” 과연 '시작'의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걱정이 들었지만, 한나는 조용히 허락해주었다. 이미 서로 옷은 전부 벗은 상태였다. 그리고 내 음경 또한 기지개를 편지 오래였다. 기둥에 진한 붉은색이 비치는 게 피가 몰릴 데로 몰린 모양이다. 나는 한나의 엉덩이를 들어 내 쪽으로 딱 붙도록 끌어당겼다. 곧 내 복부와 일어난 기둥 사이의 공간에 그녀를 걸쳐놓은 순간 약한 비명이 들렸다. “이게 뭐야?”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그, 그렇기는 한데.” “생물학적 의미를 묻는 게 아니라면, 곧 네 안으로 들어갈 거야.” 친절히 덧붙여주고 나서, 나는 찬찬히 책상에 몸을 눕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한나의 몸도 따라 내려오고, 이내 어둠이 스며든 천장에 눈에 보였다. 그러한 와중에도, 이따금 거북이 부분을 살짝살짝 만지거나 콕콕 찌르는 감촉이 느껴졌다. 처음 보는 음경이 어지간히 신기한 모양이다. 아무튼 천천히 해야겠다 생각하면서도, 나는 은근히 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새 손이 뿌리를 잡아 조준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 몸을 겹쳐 누운 채 천장을 쳐다보고 있는 터라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간의 경험을 살려 나는 침착히 국부를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몸 전체서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 한나의 몸이 떨고 있었다. 그녀도 이제 시작한다고 느꼈는지 다시 긴장이 치솟은 모양이다. 나를 생각해서 말을 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몸은 정직하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런데 사용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여태껏 물고 있던 귀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적당히 긴장을 풀어줄 요량이었다. “천장에 무늬 보이지? 눈을 감고 하나씩 세고 있어. 눈 꼭 감고 하나씩 세고 있으면 끝날 거야.” “…정말?” “그럼.” 한나는 내 말대로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고요히 입술을 떼었다. “하, 하나…. 둘…. 셋….” …진짜로 세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아니 그전에, 눈을 감고 있는데 어떻게 무늬를 세는 걸까? 나는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남성의 끄트머리가 어딘가에 걸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한나를 양손으로 잡아 천천히 밀어 내린다. 그와 동시에, 페니스는 반대로 느릿하게 밀어 올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삽입의 시작이었다. “열하나…. 열두우우…? 울윽!” “으음.” 한나는 소중한 곳이 강제로 돌파되는 감각에 비명을 지르고, 나는 머리 부분을 조이는 뜨끈한 압박에 감탄을 질렀다. 순간 이대로 한 번에 뚫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지만, 가까스로 다스릴 수 있었다. 대신 돌입한 부분을 조심스럽게 좌우로 움직였다. 아까 흘려낸 애액을 묻혀 최대한 부드럽게 하려는 셈이었다. 한나를 앞으로 어떻게 대할지 자신은 없다. 그러나 일단은 스스로 안기고 싶다고 다가온, 울타리 안에 있는 사용자요 여인이었다. 그러니 적어도 함께하는 동안만이라도 최대한 잘해주고 좋은 추억을 쌓고 싶었다. 그것은 첫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후유…. 여, 열셋…. 열넷…. 열다섯….” 하여 조용히 기다리고 있자 한나의 커다란 숨소리가 들린다. 이어서 다시 숫자를 세는 소리와 동시에, 나는 다시금 남성을 찔러 넣었다.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한나의 내부는 상당히 좁아 들어가는 압박이나 조임이 상당히 심했다. 그러나 페니스는 꾸준히 진입했다. 내 것에 꿀이라도 발라놨는지, 미친 듯이 달라붙고 흡입하는 주름을 가르며 착실히 전진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었다. 약 사 분의 일 정도 들어갔다 싶을 즈음, 갑자기 미묘한 저항감이 생겼다. 살짝살짝 눌러보았으나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지 않는다. 약한 탄성과 신축성을 가진 끈끈한 점막이 내 침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게 뭔지 알 것만 같아, 나는 조용히 한나의 이름을 불렀다. “한나야.” 한나는 더는 숫자를 세지 않았다. 청초하고 상냥했던 얼굴은 밀려오는 고통에 일그러진 상태였다. 여전히 눈은 감고 있었지만, 숫제 입술까지 세게 깨문 게 피가 흐르지는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이제 들어갈게. 조금 아프겠지만,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알겠지?” 입을 열기도 힘겨운 듯 한나는 고개만 겨우 끄덕여 보였다. 이윽고 나는 침착히 페니스를 움직였다. 한없이 조심스레 밀어 넣었지만 이내 페니스와 처녀막이 맞닿을수록, 점막이 오목하게 늘어날수록 내부의 죄임이 더욱 심해진다. 반대로 내 페니스는 팽창할 만큼 팽창해, 이러다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나는 생각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팔부능선은 넘었다고 볼 수 있다. 원래는 끝까지 느린 리듬을 타려고 했지만, 이리도 힘들어하니 빨리 끝내주는 게 더 나을 듯싶었다. 한순간 고통이 있겠지만 차라리 단번에 삽입 후 움직임을 멈추어, 적응할 시간을 주는 게 나을 것이다. 기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한나의 탄탄한 엉덩이에 손을 대어 한두 번 고쳐 잡았다. 또한 내 엉덩이도 살짝 들어 강제 돌파의 준비를 모두 마쳤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을까. 일순 한나의 고개가 돌아 나를 응시한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지체 않고 그녀의 엉덩이를 잡아 내리는 것과 동시에, 페니스 또한 있는 힘껏 쳐올렸다. “아악!” 잠시 숨이 끊어진 듯, 단말마와 같은 비명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끝까지 저항하던 얇은 점막이 단번에 찢어지는 게 느껴졌다. 페니스는 점막을 찢고 들어가, 내 의도대로 단숨에 뿌리까지 파고 들었다. 드디어 끝까지 삽입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한나의 거친 몸부림이 느껴져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한나야. 끝까지 들어갔어.” “아윽…! 아으윽…!” 우리는 마침내 한 몸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한나의 머리는 거센 도리질을 치고 있었다. 몸을 바싹 꼬며 허리를 이리저리 비틀고 있었다. 그럴수록 더욱 고통은 가중되기에 나는 그녀의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껴안았다. 그리고 두 다리를 들어 한나의 다리를 감싸고 페니스를 깊게 묻었다. 그러한 상태서, 나는 한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가리듯 기대었다. 잠시 후, 한나의 발버둥이 잦아들었다. 그러나 고통은 여전한지, 아니 상상 이상인지. 그녀의 흰 볼에는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렇게 가만히 있다 보니 급격했던 숨소리가 사라지고, 대신 희미한 흐느낌이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허여멀건 한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많이 아파?” “…으응. 갑자기 몸이 둘로 쪼개지는 기분이 드는 게…. 흑. 너, 너는…?” “나는…. 무척 기분이 좋아.” 그냥 사실대로 대답했다. 왜냐하면 한나의 안이 정말로 기분이 좋았으니까. 꿈틀꿈틀 하면서도 페니스를 완벽하게, 안락하게 감싸 안는다. 어찌나 예민한지 뜨겁고, 조이고, 바르르 떨리는 느낌까지 생생히 전해지고 있었다. 어쩌면 이 뜨거움에 녹아 없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다시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몸을 감았던 팔과 다리는 풀었지만, 계속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러자 조금은 적응이 됐는지 한나가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 “이, 이해가 안 돼…. 이게 도대체 어떤 게 좋은 건지…. 나는 아파 죽겠는데.” “처음이라서 그래. 그리고 사람마다 고통을 느끼는 강도도 다르고. 익숙해지면 다른 게 느껴질 거야.” “그렇구나…. 아, 아무튼 이제 끝이야?” “끝이긴. 이제 시작인데.” 나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한나는 일순 멍한 얼굴을 지어 보였지만, 이내 나를 따라 환히 웃어 보였다. “그래도…. 이러니까 되게 좋다. 후후.” “…벌써 좋을 리는 없을 텐데? 혹시 색녀?” “바보! …그게 아니라, 너한테 안긴 게 좋다는 거야.” 숨이 차는 듯, 한나는 잠깐 숨을 토해내곤 바로 말을 이었다. “네가 그렇게 부드럽게 웃어주는 것도, 상냥하게 말해주는 것도…. 나한테는 처음이라는 거 알아?” “예전에는 아니었나?” “…테라스에서만 해도 거리감이 있었어. 어떻게든 줄이려고 했는데 줄여지지 않은 거리감. 그런데 이제 조금씩 줄어드는 느낌이야. 응응. 꼭 특별해진 느낌이랄까…. 아, 물론 이따금 날 음흉한 눈으로 보기도 했어. 특히 가슴을 볼 때마다…. 으윽!” 잘나가다 갑자기 헛소리를 해, 나는 페니스를 아주 살짝 움직였다. 한나의 반응은 격했다. 일순간 몸을 푸들푸들 떨더니 공중으로 몇 번이나 헛발질을 시작한 것이다. 이내 잔물결이 이는 그녀의 복부를 매만지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말을 정정할 기회를 줄게.” “너, 너. 정말 두고 봐. 나중에 익숙해지기만 하면 복상사 당할 각오…. 으응! 아, 아파! 미안해!” 다시 한 번 움직이자 한나는 내 허리를 몇 번이고 치며 백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서로 웃었지만 사실 마음 한 켠으로 두려움이 들었다. 예전에 한 번, 고연주와 가졌던 관계에서 그녀를 울리고 실금까지 하게 만든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인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던가. 이후 우리는 한 번 더 관계를 가졌는데, 그날 각성한 고연주에게 정말로 복상사를 당할뻔한 적이 있다. 하여, 나는 투덜투덜대는 한나를 정성스레 껴안았다. “어때. 이제 좀 움직여도 괜찮겠지?” “…아까보다는 괜찮아. 여전히 아프지만, 조금은 적응한 느낌?” “그럼 천천히 시작해보자.” “으응.” 한나는 소극적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왕복 운동을 시작했다. 끝까지 뺐다가 넣는 게 아니라, 조금씩 넣었다 빼기 시작했다. 삐걱…. 아직 1년도 되지 않은 책상이다. 그리고 최대한 느리게 움직였음에도, 이음새가 갈리는 소리가 울렸다. “응…. 윽…. 으응…. 흐윽….” 비음과 고통 젖은 신음이 번갈아 흐르기 시작했다. 단 한 가지 분명한 건 한나는 어떻게든 나를 받아들이려 애를 쓰고 있다는 것. 처음 해보는 섹스라 그런지 그녀는 어색하게나마 허리를 놀렸지만, 몇 번 엉덩이를 쳐주자 이내 가만히 모든 걸 내게 맡겼다. 아직은 빡빡한 한나의 안. 슬쩍 빼면 꽉 조였던 질이 서서히 풀리지만, 다시 밀어 넣자 대번에 수축한다. 풀었다 조이는 게 반복될 때마다 극에 달한 쾌감이 페니스를 타고 전신으로 퍼진다. 삐걱…. “아….” 삐걱…! “아…!” 마치 추임새를 넣는 것처럼, 책상 소리가 날 때마다 한나의 신음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조금도 추잡하게 들리지 않는 목소리다. 오히려 괜찮으냐고, 아프지는 않냐고, 이제 그만할까고 물어 보고픈 애틋한 음색이었다. “하~아.” 한나의 침 흐르는 입가에서, 뜨거운 숨결이 새어 나온다. 나는 곧장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벌려진 틈으로 따끈하면서도 달콤한 내음이 물씬 흘러들었다. 한나 또한 하복부에서 느껴지는 아픔을 잊으려는 듯 적극적으로 입맞춤에 호응했다. 삐걱…. 삐걱…. 이내 책상 소리와 야릇하게 빨려 들어가는 침 소리가, 적막했던 방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자정에 바로 다음 회 연재합니다. 0428 / 0933 ---------------------------------------------- 10. 마지막 이야기(9/9). 눈을 뜨자 환한 햇살이 시야를 가렸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으려 했지만, 그냥 시선을 내리는 걸로 대신했다. 몸에서 정체 모를 온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나가 빙긋 웃고 있었다. 내 목에 팔은 두른 채 새근새근 잠들어있다. 무에 그리 좋은 꿈을 꾸는지, 입가에 배인 미소가 참 기분 좋아 보인다. 어젯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우리는 처음으로 관계를 맺었다. 한나가 첫 경험이라 조심스러운 게 없잖아 있었는데, 그래도 무사히 마쳤다는데 안도감이 들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바로 한나를 절정에 이르게 만들지는 못했다는 것. 그래도 마지막에 연신 야릇한 신음을 흘렸던 걸 생각해보면 나름 성공적인 첫 관계가 아니겠는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몸을 일으키자, 한나의 훤한 나신이 눈에 들었다. 최대한 살살했다고 생각했는데 흔적은 생각보다 확실하게 남아있었다. 젖가슴 곳곳에 새겨진 입술 자국과, 하복부에 묻어있는 핏빛 섞인 하얀 덩어리. 그것은 한나의 소중한 곳 안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연초를 한 대 꺼냈다가, 문득 한나가 눈에 밟혔다. 나는 다시 연초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연초를 피려던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부드러이 쓰다듬었다. “으으응…. 색…. 색….” 한나는 잠깐 뒤척였지만, 다시 고른 숨을 내쉬더니 양손을 기도하는 듯 모아 얼굴을 받쳤다. 나는 한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곧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옷가지 몇 개를 옆에 가져다 논 후, 소리 나지 않게 숙소를 빠져 나왔다. 복도에는 네모난 빛과 그림자가 그려져 있었다. 사늘한 한기와 밝은 햇살이 동시에 섞인 게 이제 막 아침이 오른 모양이다. 나는 한껏 기지개를 피었다가 아까 넣어둔 연초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일단 식당으로 내려가볼 생각에 천천히 계단을 밟아 내렸다. 잔잔하고 조용한 게 편안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연초를 거의 모두 피웠을 즈음. “어헉.” 식당 문을 밀어젖힌 나는 기함할 수 밖에 없었다. '진짜 난장판이다…. 그런데 쟤들은 뭐야?' 식당이 난장판이 됐으리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쪽 테이블에서 한별과 유정이 서로 노려보고 있는 건 예상외였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둘의 사이가 어떤지는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없이 나는 다급히 외쳤다. “둘이서 지금…?!” 그 순간 한별과 유정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둘 모두 새빨개진 얼굴이 어지간히 취한 듯싶었다. 그때였다. “오빠….” 한별이 팔을 살며시 내밀더니 아련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멍하니 입을 열었다. “…왜?” “몰라…. 이 바보….” “?” 쿵! 한별은 이내 쿵 소리가 날 정도로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았다. 뜻 모를 상황에 가만히 눈만 끔뻑이고 있자, 유정이 벌떡 일어나 환호했다. “이히히히! 이겼다! 내가 이겼어! 이로서 머셔너리의 최고 주당은 바로 나, 이유정이다! 다들 나를 경배하라! 짝짝짝짝!” 순간 치솟은 긴장감이 맥없이 풀려버렸다. 그러고 보니 테이블 주변으로 여러 클랜원들이 엎어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단체로 술내기를 벌인 모양이다. 그것도 밤새도록. 한동안 자축하던 유정은 이내 비틀거리듯 내게로 다가왔다. 여전히 한 쪽 손에는 술병을 꼭 쥔 상태였다. “어흐…. 오빠~. 나 갑자기 열나는 것 같아…. 더워 죽겠어. 아, 오빠는 도대체 어제 언제 가버린 거야?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져놓곤.” 유정은 여전히 바니 걸, 아니 캣 걸(?) 차림이었다. 그 상태서 한 손으로 옷을 쭉 빼더니 고개를 내려 안으로 숨을 후 불어넣는다. 봉긋한 가슴이 슬쩍슬쩍 보이는 게, 외간 남자 앞에서 참 잘하는 짓이라 생각되는 행동이었다. “오빠오빠. 나 머셔너리 배 술 내기에서 우승했다? 잘했지? 이히히!” “…축하해.” “아 참. 우승자에게는 오빠를 하루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 이용권이 주어져.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이나, 어떤 일이든.” “뻥 치지마.” 나는 단호히 대답했다. 유정은 “단 호박이네.”라 중얼거리더니 이내 병을 찰랑찰랑 흔들며 눈을 찡긋했다. “그러고 보니 오빠가 남아있었네.” “아침부터 술 마실 생각은 없단다. 오늘은 푹 쉬게 해줄 테니, 너도 인제 그만 들어가 자려무나.” “아잉~. 이번 축제 때 오빠랑 술 한 잔도 못했잖아. 딱 한 잔만. 응?” 그러나 연거푸 조르는 탓에 결국 한숨과 함께 허락했다. 물론 딱 한 잔이라는 조건을 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히히. 기다려. 내가 잔에 예쁘게 따라올 테니까.” 이내 유정이 비척비척 멀어지고 나는 천천히 식당을 둘러보았다. 몇몇 클랜원들이 중구난방으로 엎어져 있었지만 하연, 우정민, 원혜수, 영감님 등 보이지 않는 이들도 몇 명 있었다. 아마 그들 또한 적당히 빠져나갔을 거라 생각됐다. 이윽고 아직도 크로스로 엎어진 안솔과 한결을 보고 있을 즈음, 문득 유정의 뒷모습이 눈에 밟혔다. 고개를 휘휘 돌리며 이곳 저곳을 둘러보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의 가슴으로 뭔가를 집어넣는다. 혹시 술잔을 가슴에 끼워오는 게 아닌가 하는 망상이 들었다. 옷차림이 그랬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몸을 돌은 유정을 보자 안심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한 손에는 병을, 다른 한 손에는 잔을 든 상태였다. 유정이 잔을 든 손을 내밀었다. “짜잔~! 자, 오빠. 우리 같이 건배! 원 샷으로 안 넘기면 아까 말한 자유 이용권 사용할거야!” “그럴 일은 없으니 걱정 마라. 그럼 건배.” 나는 가볍게 코웃음 쳤다. 이내 서로 잔과 병을 들어올리고, 날카롭게 유리가 부딪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아. 오빠. 실은 나 할 말 있어. 내가 어제 축제 내내 생각해봤는데….” '응?' 이제 할 말이 있다는 얘기만 들으면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든다. 나는 일단 잔을 들어 단번에 목으로 넘겼다. 그리고 꿀꺽 삼켰을 때였다. 『'이브의 혈통'을 복용했습니다! '이브의 혈통'은 세 가지 조건에 따라 사용자의 능력치를 상승시켜주는 물품입니다. 바로 효과가 일어나는 게 아니라, 사용자가 원할 때 효과를 일으킬 수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앞을 쳐다보았으나 유정이 보이지 않는다. “할 말이 뭐냐면! 아무래도 그건 오빠가 마시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거! 이히히히~!” 그때 상큼한 목소리가 뒤에서 흘러들었다. 하여 급히 몸을 돌리자, 손에 든 술병을 쉴 새 없이 흔드는 유정이 보인다. 히히 웃어젖히는 게 무척 신이 난 모양이다. 내가 할 말을 잊어 멍하니 서 있을 즈음, 갑작스레 유정은 뚝 웃음을 멈췄다. 이어서 눈을 부릅떠 주먹 쥔 손을 얼굴에 붙였다. 그러더니, 얌전하게 무릎을 굽히며 나직한 소리로 울었다. “야~옹.” '…….' “꺄하하하! 성공했다! 성공했어! 오빠를 속였다고! 꺄하하하하!” 이내 발랄하게 식당 밖으로 도망치는 유정을 보며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게 진짜…. 내 능력치도 모르면서….' 물론 이해는 간다. 아직 연차가 연차인 만큼, 유정은 설마 내 모든 능력치가 90을 넘어간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 능력치는 모두 90포인트를 넘는다. 그리고 '이브의 혈통'의 효과는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갖고 있었다. 따져보면 첫 번째 조건은 나에게 해당되지 않고, 두 번째 조건은 일부만 해당된다. 그리고 세 번째 조건은 나름 여러 길이 생기지만 리스크가 너무 크다. 탁 까놓고 말해서, 지금 상태로 효과를 일으키면 행운이 1포인트 오르는 게 끝이었다. 물론,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1. 김수현 : 564/ 600~ (잔여 능력치는 자유 능력치 포인트로, 총 6포인트 남은 상태입니다.) [근력 96(+2)] [내구 92] [민첩 98] [체력 92(+2)] [마력 96] [행운 90(+2)] '마지막 선택지입니다. 사용자의 여섯 능력치 중 하나가 무작위로 선정돼 2포인트 만큼 하락합니다. 그리고 차감된 포인트에 2를 곱해 4포인트 만큼 되돌아옵니다. 되돌아온 능력치 포인트는 자유롭게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당 능력치는, 하락한 능력치의 원래 능력치 포인트의 십의 자리에 해당하는 능력치를 초과할 경우 아무런 효과를 볼 수 없습니다(기준 값은 하락하기 전 능력치를 대상으로 잡습니다. 또한 십의 자리는 하락한 능력치를 따르되, 일의 자리는 0으로 계산합니다).)' 내 능력치와 이브의 혈통의 세 번째 선택지. 선택지 중 마지막을 잘 살펴야 한다. 이 말인즉슨, 조건이 하락한 능력치의 일의 자리는 0으로 계산하고 십의 자리는 그대로 가져온다. 즉 저 조건을 나에게 적용하면 기준은 '90을 초과하는 능력치는 올릴 수 없다.'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91이상의 능력치 포인트는 올릴 수 없다는 말이다.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절반의 가능성이다. 근력, 민첩, 마력이 하락하면 아무 의미 없이 능력치가 깎이는 셈이 된다. 행운이야 나에게 필요한 능력치가 아니니, 되돌아온 4포인트가 쓸 데가 없어지는 셈이다. 그러나 내구, 체력, 행운이 하락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각각 90, 90, 88 능력치로 하락한다. 즉 되돌아온 4포인트를 사용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가장 좋은 경우는 체력이 하락하는 경우다. 현재 남겨놓은 포인트는 총 6포인트. 여기서 되돌아온 4포인트를 합치면 10포인트. 그러면 최소 체력 능력치 포인트를 100까지 확보할 수 있다. 더해서 추후 업적을 얻었을 때 얻는 포인트까지 합하면? 어쩌면 체력 능력치를 정말로 101이상으로 이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장 잘 풀렸을 얘기였다. 성공 가능성이 절반이란 건 실패 가능성도 절반이라는 소리였다. 앞으로 상대할 악마들이나 강철 산맥을 생각하면 단 1포인트도 허투루 여길 수 없다. 나는 곧 상념에서 깨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고 나서 바삐 식당을 나섰다. 보아하니 엄청 술에 취한 것 같은데,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다가 다칠까 염려됐기 때문이다. 유정의 흔적은 복도를 지나 입구 밖까지 이어져 있었다. 일단 잡히면 볼기짝을 때려주겠다는 생각에 나는 얼른 문을 밀어젖혔다. 추운 바람이 불어와 몸을 시원하게 식혀준다. 이어서 얘가 어디 있나 하고 정문 방향을 쳐다본 순간,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그곳에는, 고연주가 서 있었다. “고, 고연주? 언제 온….” “조금 전에요. 그리고 수현? 잠시만요.” 고연주는 잠시 손을 들더니 흘끗 옆을 응시했다. 그녀의 어깨에는 바로 유정이 걸쳐져 있었다. 이윽고 고연주는 주먹을 들고는 있는 힘껏 유정의 복부를 후려갈겼다. 퍽! “끄엑!”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발버둥치던 유정의 몸이 축 늘어진다. 고연주는 쯧쯧 혀를 차며 유정을 내던지더니, 살랑살랑 나에게 다가왔다. “수현. 쟤가 어제 나 놀렸어요.” “놀렸다니요?” “어제 갑자기 저한테 통신을 걸더니, 축제 현장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요. 그것까지는 좋아요. 그런데 갑자기 메롱 메롱 놀리면서…. 흑.” “…맞을 짓을 했군요.” “그렇죠? 안 그래도 복장이 터지는데, 아주 속을 뒤집어 놓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꼴은 또 왜 저래? 아주 난리를 쳤나 보네.” 떨떠름히 머리를 끄덕이자 고연주는 반색하며 외쳤다. 물론 기절까지 시킨 건 심하다고 생각하지만 그저 속으로 묻어두었다. “아무튼, 수현. 정말 보고 싶었어요!” 이윽고 고연주는 팔을 활짝 벌려 내 품에 안겼다. 나도 마주 그녀를 안은 후 가볍게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예.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말도 마요. 나 다시는 사용자 아카데미로 안 갈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흥.” “하하. 축제는 다음에 또 개최할 테니, 그때는 꼭 참석하도록 합시다. 아. 아침 식사는 했나요?” “아니요. 안 먹고 바로 왔어요.” “식당에 남은 음식이 있을 겁니다. 시장하겠습니다. 저도 식전이니 일단 식사부터 함께 하도록 하지요.” 나는 고연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고개를 들이밀더니 킁킁 냄새를 맡는 기척이 느껴졌다. “고연주?”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일단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얼굴을 비비던 고연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를 보는 그녀의 얼굴은 활짝 웃고 있었다. 눈꼬리는 초승달을 그리고 입 꼬리는 잔뜩 올라간 게…. 돌연히 까닭 없는, 아니 까닭 있는 불안감이 들었다. 고연주의 입술이 열렸다. “수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예, 예? 뭐가 말입니까?” “내 남자에게서, 익숙한 여인의 향기가 나는데요?” “…원래는 낯선 여인에게서, 내 남자의 향기가 난다 가 아닙니까?” “맞아요. 그런데, 솔이나 한나가 낯선 여인은 아니잖아요.” 순간 귀신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 경직을 눈치챘는지 고연주는 더욱 진하게 웃었다. 그리고 이를 바드득 갈기 시작했다. 얼굴은 웃고 있는데 이가는 소리가 들리니, 여간 공포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래요.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겠나요? 호호, 고것들이…. 안 그래도 불안했는데, 내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기어코 일을 벌여?” “고연주. 그게 아니라….” “네~? 그게 아니라 뭐요~?” 고연주는 얼굴을 쭉 들이밀며 한껏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고연주는 크게 웃더니 눈을 부릅떠 고개를 들었다. “오호호호! 호호호호! 날씨가 좋아요? 저는 추워 죽겠는데요? 봐요. 하늘도 우중충한데, 어디서 은근슬쩍 화제를 돌리려….” 그때였다. 나도, 고연주도 동시에 말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든 채 시선을 하늘에 고정했다. 툭, 뭔가 차가운 게 얼굴에 닿더니 금방 녹아 흘러내린다. “눈?” 하늘에서 하얀 눈송이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네. 눈이네요.” 고연주는 전보다 훨씬 안정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잠시 동안 눈이 내리는걸 보다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들었다. 하여 차분히 걸음을 옮겨, 유정 옆에 떨어져있는 병을 집어 들었다. 살짝 흔들어보자 찰랑거리는 소리가 나는 게 아직 남은 양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어느 한 곳을 향해서. “수현? 어디가요?” “고연주. 오자마자 시켜서 미안한데, 식당에서 음식 몇 가지 좀 가져와주지 않겠습니까?” “흠~. 하기야 눈 내리는걸 보며 식사하는 것도 나름 무드는 있겠지요. 그런데 저는 지금 식사할 기분이 아닌데요?” 이윽고 목적지에 다다른 나는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 눈앞에는 무덤이 있었다. 나는 바로 몸을 돌려 고연주를 응시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진짜로 노려보는 게 아닌 곱게 흘기는 눈길이, 진짜 화난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일종의 고연주식 앙탈이랄까? “그게 아니라, 고연주 말고 한 명 더 잊은 사람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네?” 고연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나는 술병을 기울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신상용씨요.” 주르륵, 병에서 흘러내려온 액체가 무덤 위 풀을 적신다. 고연주는 일견 멍하니 무덤을 응시하더니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치, 치사해! 이, 이러면 왠지 모르게 할 말이 없어지잖아요!” “어차피 숨길 생각도 없었습니다. 자세한 말은 나중에 하연이 깨면 하도록 합시다.” “하…. 그래요. 좋아요. 알았어요. 일단 밥부터 먹고 생각하자는 말이죠?” 고연주는 힘차게 투덜대고는 정원에 쓰러져있던 유정을 들쳐 엎었다. 그리고 일부러 바닥을 세게 밟으며 입구 안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일견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배인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나는 무덤 곳곳에 골고루 술을 뿌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이제 막 내리기 시작했는지,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한다. 나는 술병을 입가에 가져가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천천히 주저앉아 무덤에 등을 기대었다. 눈 때문인지 흘러내린 술 때문인지, 등에 축축한 액체가 느껴졌다. 한참 동안 하늘은 보던 나는, 다시 한 번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허공으로 조용히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눈 한 송이가 떨어져내려 순식간에 녹아 흐른다. 문득,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하하하!” 웃는 와중에도, 나는 차분히 고개를 돌려 머셔너리 하우스를 응시했다. 사방에서 내리는 눈이 건물 전체를 덮으려 폼을 잡는 게, 제법 괜찮은 광경이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 갑자기 모든 걱정이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덕분에 일단은 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휘이잉…. 문득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괜찮다고 해주는, 신상용이 잔잔히 웃는 것처럼 느껴지는 바람이었다. 나는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사용자 신상용. 만약에 2회 차를 끝내게 되면…. 돌아가기 직전, 다시 살려드리겠습니다. 만약 제로 코드가 안 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요. 아마 비비앙과 있는 것도 즐거울 겁니다. 아, 새로운 클랜원인 사샤 펠릭스도 들어왔으니, 그와 친해져 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요.” 바람이 다시 불어온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느끼며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냥, 괜찮은 기분이었다. ============================ 작품 후기 ============================ 외전이 끝났습니다. 외전이 끝났으니, 기념으로 어느 분께 사사 받은 노노츄 댄스를 추고 오겠습니다.(…….) …네. 오늘 늦게 올려 죄송합니다. 집필이 끝난 시간은 1월 2일(목요일) 23시 43분 이었습니다. 원래는 한 편으로 전부 올릴 생각이었는데, 그래도 베드 신을 싫어하는 분들을 배려해 내용을 따로 나눴습니다. 하하. 그리고…. 전전 회 코멘트가 많이 어지러웠는데, 글쎄요. 일단 코멘트는 전혀 연재에 지장을 주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400회를 넘게 연재했는데, 비난도 아닌 정당한 비평을 들었다고 힘들다 징징대는 건 조금 많이 어불성설이겠지요. 연재 중지는 말도 안되고요. 또한 제 기준으로는 딱히 악플러라 부를만한 분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들 의견에 스스로도 일부 공감했기 때문이지요. 솔직히 말씀 드리면 남다은 얘기를 마치면서 고민은 많이 했습니다. 왜냐하면 남다은의 두근두근 파트를 마치고 바로 이번 회를 썼다면, 나름 마무리가 깔끔하겠다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저는 임한나를 넣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독자 분들과 약속한 게 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제가 적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황을 그려보고 일어날 수 있는 갈등을 한 번 다뤄보고 싶었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갈등부터 베드 신까지, 임한나 파트는 호불호가 매우 심하게 갈리더군요. 따지고 보면 제 잘못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열심히 구상하고 집필한걸 떠나서, 결국 제가 구상한 내용이 독자 분들께 잘 와 닿지 않았다는 소리니까요. 남다은 파트에 달린 코멘트와 비교해보면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독자 분들께 깊이 사죄합니다. 다음부터는 조금 더 납득하실 수 있도록, 제가 조금 더 노력하고 조금 더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흥분은 가라앉혀주셨으면 굉장히 감사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노블레스 성인란에 무조건 베드 신이 들어가야 한다는 규정은 없지만, 메모라이즈는 베드 신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 작품입니다. 물론 베드 신이 난무하는 건 저도 사양이고,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베드 신이 스토리의 중심이 되는 게 아닌, 감초 역할로 집어넣을 계획입니다. 이 부분 일부 독자 분들께 양해를 구하며, 긴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그동안 정신 없이 적느라 새해가 간 것도 몰랐네요. 늦었지만, 독자 분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가내 두루 행복 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_(__)_ PS. 쪽지가 많이 쌓였네요. 1월 5일(일요일)안으로 전부 답신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D 0429 / 0933 ---------------------------------------------- 2부 프롤로그(Prologue) : 악마들의 회담. 악마(The Devil), 그리고 마족(Asmodians). 악마란 악을 대표하는 존재로 신에 반(反)하여 인간을 타락시키려는 존재를 일컫는다. 마족이란 악마들의 피조물로써 악마의 명을 받들고 의지를 수행하는 존재를 일컫는다. 악마들의 계급 구조는 거미줄과도 같이 복잡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힘'이라 볼 수 있다. 약육강식(弱肉强食), 적자생존(適者生存), 우승열패(優勝劣敗).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먹히고 환경에 적응하는 자들만이 살아남는 살벌한 생존 경쟁. 나은자는 이기고 못한 자는 패한다. 패배자에게 선택권은 없다. 죽음이든 멸망이든 봉사든, 패배자의 권한은 일체 승리자에게 돌아간다. 그게 바로 마계를 지배하는 법칙들이다. '힘'을 척도로 계급을 나누자면, 마족은 하급, 중급, 상급, 최상급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러한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존재는 당연히 악마들인데, 마족을 다스리는 악마는 총 14명이며 그들을 '악마 14 군주'라고 칭한다. 또한 '악마 14 군주'를 통제하는 대군주급 악마들도 존재한다. 마계를 7분할로 나눠 다스리는 그들은 각각 '7대 악마'라 불리며, 각각의 이름과 칭호는 이렇다. '모든 악마의 왕', '적대자' 사탄(Satan). '잔혹한 파괴자', '동쪽의 왕' 바알(Baal). '음욕' 아스모데우스(Asmodeus). '타락 천사' 루시퍼(Lucifer). '분노의 악마' 아스타로트(Astaroth). '밤의 여왕', '대 탕녀' 리리스(Lilith). '폭식', '탐욕의 왕' 벨제부브(Beelzebub). 마족은 악마의 피조물인 만큼 창조주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을 지닌다. 눈앞에서 “죽어라.” 명하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정도. 마족을 만들어내는 역할은 원래 '악마 14 군주'들의 역할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악마 14 군주'는 '7대 악마'의 영향하에 있는데, 각 세력의 성세에 따라 '악마 14군주'를 두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가장 세력이 약한 '밤의 여왕', '대 탕녀' 리리스는 아래 단 한 명도 군주급 악마가 없어, 스스로 마족을 만들어낸다. 반대로 가장 세력이 강한 '모든 악마의 왕', '적대자' 사탄은 아래 4명의 군주급 악마를 두고 있다. 마계(魔界). 변화 없는 약육강식의 법칙 아래 이루어지는 정글과도 같은 자연의 세계. 생기, 활기는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칙칙하고 불길한 기운만이 감도는 세상. 하늘은 검푸른 보랏빛으로 물들어있고 쩍쩍 갈라진 대지는 황폐화된 황야와 같다. 물론 모든 지역이 이와 같은 건 아니지만, 어느 곳이든 적어도 하나의 공통점은 존재한다. 그건 바로 '빛'이 없다는 것이다. 나무나 풀은 시퍼런 빛을 띠고 있었으며, 강에 흐르는 물 또한 새까맣기 그지없었다. 이따금 보이는, 척박한 대지에 세워진 건물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황무지라 부를만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사방에 우거진 잡초와 어디가 어딘지 구분도 되지 않는 복잡함이 어우러진 장소. 간신히 눈에 띄는 건 붕괴 직전으로 보이는 오래된 고성밖에 없다. 개중에서 딱 하나 볼게 있다면, 바로 고성의 규모였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세워진 고성의 키는 멀리서 보아도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여기는 언제 봐도 정이 안 간다는 말이야.” 성의 어두운 통로를 걷던 청년이 빙긋 웃었다. 아니, 외양으로 보면 온전한 청년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까? 얼굴부터 발끝까지는 여느 청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지만, 딱 한 가지가 다르다. 청년의 정수리에는 검붉은 빛이 감도는 뿔이 뾰족하게 돋아나 있었다. 청년이 아닌, 청년의 모습을 한 악마였다. 악마는 한가로이 통로를 지나치고는 앞쪽 활짝 열린 문을 향해 걸었다. 개방된 문이었지만 내부는 암흑으로 가득 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악마가 문에 다다른 순간 좌우를 지키던 두 명의 마족이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외양이나 풍기는 기도는 그들이 최상급 마족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아스타로트 님.” “그래. 벌써 다들 도착했나?” “밤의 여왕님을 제외하고는 전부 안에 계십니다.” “밤의 여왕님은 무슨. 그냥 창녀라 불러, 창녀. 마계 공식 창녀인데 여왕님의 호칭은 너무 과분하잖아? 대 탕녀라면 모를까.” 아스타로트의 거침없는 발언에 두 마족은 가만히 서서 입만 벙긋거렸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악마와 마족은 엄연히 다른 존재였다. 더구나 그 대상이 정점에 선 '7대 악마'중 하나라면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여간 루시퍼의 권속들은 따분하다니까. 아스모데우스나 벨제부브의 권속들같이 받아넘기는 맛이 없어요.” “…죄송합니다.” 다시 정중히 머리를 숙이는 마족을 보며 아스타로트는 쯧쯧 혀를 찼다. “죄송할 필요까지야. 아무튼 들어간다.” “분노하는 악마에게 타락의 영광을.” 아스타로트는 으스스 몸을 떨었다. 루시퍼는 원래는 천사였지만 스스로 타락해 악마가 된 존재이다. 과거에 천사였다고 해서 딱히 배척하는 건 아니지만, 딱 하나 참지 못하는 게 있었다. 그건 바로 루시퍼가 천사였을 때 들였던 습관이었다. 항상 누구를 부를 때마다 “타락의 영광.”이라는 말을 붙이는데, 아무리 넉살 좋은 아스타로트라도 이런 격식은 견디기 힘들었다. “영광은 개뿔.” 아스타로트는 조용히 뇌까리며 문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육안으로는 꿰뚫어볼 수 없는 캄캄한 암흑이 자리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빛이 없는 공간인데, 이곳은 특히 심하다고 볼 수 있을까? 칠흑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색도 찾을 수 없는 게, 마치 어둠만이 존재하는 공간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스타로트는 여유만만이었다. 여러 번 와본 적이 있는지, 아까 통로를 지나칠 때처럼 한가로이 걸었다. 그렇게 5분간 하염없이 걷고 있을 때, 문득 고요한 목소리가 어둠을 울렸다. “늦었군. 아스타로트.” “이 목소리는…. 루시퍼?” 아스타로트는 걸음을 정지했다. 그리고 전방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무래도 거리가 있어서 말이야. 또 불시에 소집된 회의잖아? 그러니까, 고작 몇 분 늦은 것 가지고….” “회의는 6일전 통보가 갔을 터. 연락을 받지 못한 건가?” “아, 거참 짜증나게 구네. 너 정말…!” “목소리를 줄여라, 아스타로트. 그대는 분노의 악마지만, 이 공간의 주인은 바로 나. 오직 나만이 소리를 높일 자격이 있다. 그러니 분노를 터뜨리는 건 때와 장소를….” “미안.” 아스타로트는 바로 사과했다. 그리고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저 융통성 없는 외곬의 결정체와 말을 나누느니 깔끔하게 사과하는 게 좋겠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과를 받아들이지. 대군주급임에도 불구하고 깔끔히 잘못을 인정하는 그대에게 경의를 표한다.” 아스타로트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발 좀 닥쳐.”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지만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이내 '분노의 악마'는 한껏 움츠러든 몸으로 자리에 앉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이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다. 어느새 아스타로트의 뒤에는 보이지 않는 의자가 있었다. 아스타로트는 한숨을 돌리고 사방에서 흘러들어오는 기운을 느꼈다. 적대, 파괴, 타락, 음욕, 탐욕. 총 5개의 이질 된 기운이 보내는 흥미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무튼 자신까지 포함하면 6명. 아스타로트는 의자에 한껏 몸을 묻으며 다리를 꼬았다. “자. 그럼 어떤 일로 회의를 개최했는지, 천천히 얘기를 들어볼까?” “아직. 한 명. 리리스.” 그때 아직 앳된 어린 여성의, 그러나 차가우면서도 고저 없는 음색이 아스타로트의 말을 받아 쳤다. 연초를 꺼내던 '분노의 악마'는 힐끔 왼쪽을 주시했다. 그리고 서서히 마기를 일으켰다. 이윽고 커다란 의자에 앉은 채, 곰인형을 꼭 안고 있는 작은 체구의 여자 아이가 눈에 들었다. 그녀의 큼직한 눈 또한 아스타로트를 주시하고 있었다. 백금 색 머리칼은 단발로 짧게 쳐 머리띠로 가지런히 정리했다. 작고 동글동글한 얼굴과 젖살이 통통히 오른 볼. 착 가라앉은 푸른색 눈동자가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외양만 본다면 번쩍 안아 들어 어깨에 올리고픈 자그마한 체구였다. 아스타로트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연초에 불을 붙이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바알.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귀여워졌네.” “농담. 재미.” “하하. 농담이 아니라 진심인걸?” “진심. 날려.” 일순 여자 아이, 아니 '동쪽의 왕' 바알에게서 파괴적인 마기가 치솟았다. 아스타로트는 혼비백산한 얼굴로 두 손을 들었다. “실은 농담이었어. 재미있었지?” 파괴적으로 치솟던 마기가 삽시간에 가라앉는다. 아스타로트는 연초를 우물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유. 아무튼 늦은 주제에 할 말은 아니지만, 대충 시작하자고.” “그럴 수는 없다. 더구나 리리스라면 어둠의 숙녀. 몸단장하는 숙녀를 기다리는 건 응당 신사가 해야 할 노릇이지.” 다시 한 번 고요한 목소리가 흘러들었지만, 아스타로트는 코웃음으로 응대했다. “숙녀는 개뿔. 설마 공식 창녀가 몸단장이라도 하고 올까? 분명 회의는 잊고, 어디선가 신나게 박고 있겠지. 꼴사납게 마기를 구걸하면서 말이야. 아스타로트 님~. 죄송해요~. 부디 이 천한 창녀를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나 그때 아주 웃겨 죽는 줄 알았다니까.” 아스타로트는 한껏 가는 음색을 내어 누군가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거기다 몸까지 비비 꼬자, 여태껏 가만히 있던 두 악마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켈켈켈켈!” “크륵크륵! 크륵크륵!” 추악한 음욕과 지저분한 탐욕이 묻어나는 웃음소리였다. 그때였다. - 쾅! 어디서 났는지 모를 폭음과 함께 추악한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분명한 거대한 폭발이었지만 정작 악마들은 태연했다. 아스타로트가 연초를 힘껏 빨아들이자, 연초는 삽시간에 재로 변해 부스스 흘러내린다. 이윽고 '분노의 악마'는 짐짓 태연자약한 얼굴로 천연덕스레 입을 열었다. “아이고. 우리 대 탕녀께서 행차하셨군요. 이번에는 어인 일로 이렇게 늦으셨는지요.” 볼 것도 없이 '밤의 여왕' 리리스의 등장이었다. 이내 또각또각 걷는 소리가 공간을 울리고 6명의 악마가 모인 장소로 가까워졌다. 아스타로트는 비로소 연기를 코로 흘려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마침 잘 왔어. 네가 나와의 전쟁에서 패배했을 적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지. 직접 경험한 이로서, 네가 스스로 얘기를 들려주는 건 어떨까?” “켈켈, 켈켈켈켈! 듣고 싶다! 듣고 싶다!” 음욕 어린 목소리가 추임새를 넣는다. 리리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어느 한 곳으로 이동해 자신의 자리에 얌전히 몸을 앉혔다. 아스타로트는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는 검은 실루엣을 응시했다. 그리고 다시 비열하게 웃어 젖혔다. “이야. 정말 몸단장이라도 하느라 늦었나 보네. 꼴이 그게 뭐야? 어울리지 않게. 이제 공식 창녀라는 직함을 버릴 생각인가?” “아스타로트. 쓸데없는 소리하지마. 네 시비 받아주러 온 거 아니니까.” 비로소 리리스가 입을 열었다. 야릇하면서도 색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억양의 높낮이가 일정한 게 시큰둥한 말투이기도 했다. 아스타로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 이제 성깔 좀 부린다 이건가? 어디서 좋은 악마라도 잡았나 봐? 누구냐? 리리스의 치마폭에 쌓인 7대 악마가?” 아스타로트가 두 손을 들어 과장하며 손을 흔들자 그쳤던 웃음이 다시 이어졌다. 리리스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웃음이 그치기만을 기다리더니 이내 키득 웃으며 말했다. “한심한 꼬락서니들하고는. 지금 이럴 때가 아닐 텐데?” “오호. 그게 무슨 말이지?” “나는 소식 들었지. 애당초 이 회의가 개최된 것도 다 너희들 때문이 아니야?” “…무어?” 한순간 리리스의 시선이 세 악마를 재빠르게 훑었다. 조금 전까지 신나게 웃던 악마들은 조용히 입을 닫았다. “한 놈은 모두가 공들였던 서 대륙을 한 번에 말아먹었고.” '탐욕의 왕', 벨제부브가 몸을 흠칫했다. “또 한 놈은 되지도 않는 북 대륙에 힘을 쏟다가 씨앗만 잔뜩 잃었지. 아! 얼마 전에는 악마 14 군주 중 한 명을 잃었다며? 그것도 북 대륙 사용자한테. 어떡해. 마몬만 불쌍하게 됐지.” '음욕' 아스모데우스가 머리를 수그렸다. “그리고 마지막 한 놈은, 조금 지난 일이기는 하지만…. 한때 지옥의 제후랍시고 기세 좋게 홀 플레인의 지옥으로 들어갔다가, 와장창 깨지고 돌아왔지. 그뿐이니? 마찬가지로 악마 14군주인 메피스토펠레스까지 헌납했잖아?” '분노의 악마' 아스타로트가 주먹을 쥐었다. “호호호호.” 리리스는 여전히 시큰둥한 목소리로 비웃더니 갑자기 정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멍청한 새끼들.” “이…!” 그에 분노한 아스타로트가 벌떡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였다. 그 순간, 예리한 기운들이 의자 주변으로 동시에 내려 꽂혔다. “…인간들의 말 중에.” 어둠 너머, 그러니까 아스타로트의 정 반대편 쪽. “시간은 금이라는 말이 있지.” 깊디 깊은 심연 속에서, 나지막이 기어올라온 듯한 음성이 칠흑의 공간을 웅웅 울렸다. 아스타로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반대편에는 열손가락을 서로 엇갈리게 맞추어, 이마에 기댄 채 앉은 남성이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평범 그 자체였지만, 주변의 기도나 목소리에는 함부로 할 수 없는 어둠이 깃들어 있었다. “법칙에 충실한 모양새는 보기 좋지만…. 마냥 좋다고 생각하기에는,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서. 다들 어떻게 생각하는지.” “미, 미안하다. 사탄.” “오늘따라 유난히 사과를 많이 하는군. 아스타로트.” “…으음.” 아스타로트는 침음을 흘렸다. 한 쪽에서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분노의 악마'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은 가만히 있어야 할 때라고. “그럼 다들 모였으니 슬슬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루시퍼?” “괜찮습니다 사탄. 공간의 주인은 저이지만, 당신은 충분히 이야기를 이끌어나갈 자격이 있는 존재에요.” 아스타로트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예의 바른 목소리가 화답했다. 칙, 치익. 어둠에서 아주 잠깐 불이 켜졌다가 사라졌다. 이윽고 어딘가에서 흘러나온 희뿌연 색 연기가 공간 속으로 녹아 들었다. “후. 서 대륙이든, 북 대륙이든, 그리고…. 아무튼 상황 설명은 리리스가 대충 해주었으니 생략하도록 하지.” “…….” “이번에 회의를 소집한 이유는…. 다들 알고 있다시피, 얼마 전 아스모데우스 휘하 14 악마 군주…. 마몬의 소멸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켈, 켈, 켈, 켈….” 아스모데우스는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자 더더욱 얼굴을 숙였다.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덜덜 떠는 게, '7대 악마'라고 보이지는 않는 태도였다. “그러한 결과에 이르기까지, 과정이나 잘못을 가리기 전에.” 딱! 사탄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가벼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텅 비어있던 바닥에서, 일순 짙푸른 마법 진이 그려져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일단,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나을 것 같다.” 이어서 사탄이 말을 매듭지은 순간, 마법 진이 크게 일어나며 하나의 영상을 비추기 시작했다. - 끄아아아아아아악! 마법 진이 발하던 빛이 사그라졌다. 대신 한 광경을 비추는 영상과, 끔찍한 비명만이 사라진 빛을 대신하고 있었다. 불타는 마을이었다. 깊은 산속 불타는 마을에서, 오직 거세게 일어나는 불길과 새카만 연기만이 광경을 가득 비췄다. - 흐어, 흐어어, 흐어어어! “마, 마몬!” 익숙한 목소리였는지, 아스모데우스가 손을 뻗는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 시끄러. - 아아아아아아아악! 차가운 일갈과 함께 다시 한 번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윽고 불길과 연기가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광경에는, 비대한 몸집의 악마가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사늘한 눈길로 악마를 오연히 내려다보는 한 사용자. 그는 손잡이만 보이는 검과, 주변에 맑은 불꽃을 두르고 있는 건장한 남성이었다. - 화륵! 화르륵! 이내 불꽃이 맑게 타올랐을 때, 악마들은 동시에 침을 꿀꺽 삼켰다. ============================ 작품 후기 ============================ 2부의 시작입니다. 1부가 탐험을 하고 힘을 쌓고 사용자와의 관계를 맺는데 집중했다면, 2부는 조금 다른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요약하면, 집으로 돌아가려는 스토리라고 할까요? 하하. 아. 이브의 혈통은 제가 설명을 어렵게 적어놨나 봅니다. 자세한 이해를 위해, 잠시 후기를 빌리겠습니다. 1. 장비로 올라간 능력치는, 장비를 해제해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상승된 능력치에 한해서는 귀속이라고 보셔도 좋습니다. 2. 이상, 이하는 경계 값이 포함되며, 초과, 미만은 경계 값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현재 김수현의 능력치는 이렇습니다. [근력 96(+2)] [내구 92] [민첩 98] [체력 92(+2)] [마력 96] [행운 90(+2)] 이브의 혈통 세 번째 선택지를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사용자의 여섯 능력치 중 하나가 무작위로 선정돼 2포인트 만큼 하락합니다. → 이해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차감된 포인트에 2를 곱해 4포인트 만큼 되돌아옵니다. → 이해하셨을 겁니다. 되돌아온 능력치 포인트는 자유롭게 올릴 수 있습니다. → 이해하셨을 겁니다. 그러나 해당 능력치가 하락한 능력치의 십의 자리에 해당하는 능력치를 초과할 경우 아무런 효과를 볼 수 없습니다. → 해당 능력치는 사용자가 올리려는 능력치를 지칭합니다. 하락한 능력치, 이 조건에 조금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래 조건에 적어놨지만, 정확히는 하락하기 전 원래 능력치 포인트를 지칭합니다. 하여 현재 수정한 상태입니다. 다만, 기준 값은 하락하기 전 능력치를 대상으로 잡습니다. 또한 십의 자리는 하락한 능력치를 따르되, 일의 자리는 0으로 계산합니다. → 바로 이 조건이죠. ab란 숫자가 있을 때, a는 십의 자리라 가정하고 b는 일의 자리라 가정하겠습니다. 여기서 조건을 따르면, a는 그대로 가져오고 b는 무조건 0으로 계산합니다. 즉 이브의 혈통 복용 조건으로 나오는 기준 값이 a0으로 계산되는 겁니다. 이것을 김수현의 능력치 전부에 적용해보겠습니다. 기준 값은 '하락하기 전 능력치'를 대상으로 잡습니다. 즉 하락하기 전 능력치를 기준으로 효과를 볼 수 있는 기준 값은, 90, 90, 90, 90, 90, 90이므로 90을 초과하면 효과를 볼 수 없습니다. 상승시키려는 능력치가 91이상이면 올릴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김수현이 근력, 민첩, 마력이 떨어지면 기준 값이 90으로 적용됩니다. 올릴게 행운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구, 체력, 행운이 떨어지면 똑같은 기준 값이라 하더라도, 각각 90, 90, 88포인트로 하락합니다. 즉 91을 초과하지 않으니 4포인트를 사용할 여지가 생긴다는 말이지요. 충분한 답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PS. 사용자 정보는 다음 회부터 등장 인물마다 후기로 올리겠습니다. 여러모로 생각해봤는데, 아마 그 방법이 독자 분들께서 가장 보기 편하시리라 생각됩니다. 0430 / 0933 ---------------------------------------------- 응어리진 마음. 한껏 치솟은 불길이 줄어들고 자욱한 연기도 사그라졌다. 이내 비교적 확연해진 영상에 비치는 풍경은,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마몬과 그런 악마를 움켜 올리는 한 남성이었다. 이윽고 영상은 풍경 전체를 비추었다. 쓰러진 악마는 한 명이 아니었고, 사용자 또한 남성 한 명이 아니었다. 마몬을 중심으로 거의 열에 달하는 마족들이 중구난방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쓰러진 마족들 앞으로 최소 한 명, 최대 서너 명의 사용자들이 달라붙어 각기 개별적인 행동을 하는 중이었다. - 이 벌레 같은 인간 놈들이, 어딜 감히…! 아, 아악! 아아악! - 으하, 으하하! 마족이라고 했나? 이 암컷, 맛이 꽤나 각별한데? - 아, 아파! 아파아아! - 크으…. 죽이는 구만. 좋다 좋아. 바닥에 깔려 울부짖는 여 마족과, 그녀를 암컷이라 부르며 범하는 사용자들. 그들은 차례차례 돌아가면서 실컷 즐기더니, 종래에는 여 마족의 목에 검을 쑤셔 박아 세로로 힘껏 그었다. 여 마족의 몸이 한 번 움찔했다. 그리고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 그, 그만! 큭, 크으으윽! - 언니언니! 이것 좀 봐요. 이 괴물, 뿔이랑 날개가 달려있다니까? 꽤 쓸만할 것 같지 않아? 어디…. 한 번 뜯어볼까? - 끄아아아아아아악! - 됐고, 일단 심장이나 꺼내봐. 클랜 로드가 그랬잖아. 복용하면 능력치를 상승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다른 한 쪽에서는 마족 해체에 삼매경이다. 서로 깔깔 웃으며 목을 자르고, 뿔을 뽑고, 날개를 뜯고, 심장을 꺼낸다. 결국 마족은 견디지 못해 눈을 까뒤집으며 혀를 빼물었다. 비참한 최후였다. 영상은, 다시 마몬과 남성을 비추었다. 남성 또한 정상적인 상태로 보이지는 않았다. 몸의 여러 군데가 그을리고 왼팔에서는 상당한 출혈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악마보다는 낫다. 마몬은 이미 사지가 잘린 채 목과 몸만 붙어있는 상태였으니. - 흠…. 좋네. 주변을 둘러보는 남성의 입 꼬리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이윽고 다시 마몬을 쳐다본 그는 지체 않고 가슴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거칠게 살을 찢어 안쪽으로 파고들더니 3초 후 다시 세차게 뽑혀 나왔다. 손에 검은 피를 뚝뚝 흘리는 무언가를 쥔 채로. 이윽고 마몬의 전신에 맑은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남성은 더는 관심 없다는 얼굴로 불타오르는 악마를 휙 던졌다. 그리고 마치 장난이라도 치듯이, 손에 쥔 심장을 던졌다 받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화륵, 화르륵! 영상에는 다시 불길과 연기가 차 올랐다. “여기까지다.” 이어서 사탄의 목소리가 울린 순간, 영상이 사라지고 마법 진의 빛도 꺼졌다. 공간에는 다시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고요한 적막이 흐르기 시작했다. 방금 본 영상에 '7대 악마' 모두가 할 말을 잃은 것이다. 그렇게 서로가 입을 다물고 있을 즈음. 아스타로트가 말문을 열어 흐르는 침묵을 깨었다. “와…. 악마 같은 새끼. 이거 순 나쁜 놈이네.” “악마. 우리.” 바알이 곰 인형을 꼭 안으며 되받아 쳤다. 아스타로트는 가볍게 머리를 긁적였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아스모데우스? 어쩌다 일이 저렇게 된 거야? 다른 마족들은 그렇다 치고서라도…. 마몬은 도대체 왜 보낸 거지?” “마몬을 필두로 한 마족들을 보내는 건 아스모데우스의 원래 계획이었습니다. 다만….” 대답은 루시퍼에게서 나왔다. '타락 천사'는 잠시 동안 뜸을 들이더니 짧은 한숨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순서가 뒤바뀌었지요. 마몬의 등장은 서 대륙에서 벌였던 일이 성공하고, 북 대륙에 충분히 씨앗을 뿌린 후 등장할 계획이었습니다.” “아니. 애당초 서 대륙은 실패로 끝난 일이잖아.” 아스타로트가 어이없다는 식으로 입을 열자 아스모데우스는 더더욱 머리를 수그렸다. 이제는 아예 머리칼을 쥐어뜯는 중이었다. “켈…. 성급했다는 건 알고 있다. 하, 하지만! 마몬의 등장은 완벽했다. 오랜 시간 동안 공을 들인 만큼 흠잡을 곳이 없었단 말이다! 나는, 나는 이 답답한 상황을 역전할 회심의 한 수로….” “하지만 완벽하게 차단당했지. 그것도 소환 의식이 끝나는 순간 바로 들이닥쳤다며? 아~. 그래서 그렇게 어이없게 당했구나~.” 아스모데우스는 어떻게든 항변하려고 했지만 리리스가 비꼬는 투로 지적하자 “켈.”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순간 음욕에 찬 눈빛을 번뜩여 리리스를 노려보았다. '밤의 여왕'은 그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그때였다. “확실히 문제는 없었다. 비록 서두른 감은 없잖아 있었지만, 그리고 계획에 찬성한 건 아니었지만…. 최소한 소환이 들킬 염려는 없었어. 분명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사탄이 입을 열자 자연스레 '적대자'에게로 모든 시선이 쏠렸다. 사탄은 가볍게 팔걸이를 두드리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리리스의 말대로, 놈들은 마몬의 소환 의식이 끝나자마자 들이닥쳤다. 마치 우리가 가장 약할 때를 노렸다는 듯이 말이야.” “비밀. 유출.” “내부의 배신자라.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바알. 어떻게 보면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어.” “다르게. 어떻게.” 바알이 머리를 갸우뚱 기울였다. 사탄은 지그시 웃고는 이마에 대었던 손을 떼었다. 그리고 비로소 머리를 들어 모두를 훑었다. “어쩌면 그놈이 미리 소환 장소를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 “천사들이 알려줬다는 건가?”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마몬은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과율에도 딱히 변동은 찾을 수 없었고.” “그럼….” 아스타로트는 아리송한 기분으로 반문했다. 아직 사탄이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탓이다. “글쎄…. 아무튼 일단 회의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 그 순간, 사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키는 180을 간신히 넘을까 말까. 체구만보면 별다를 바 없는 보통의 남성에 불과하다. “버, 벌써? 아니 어디 가는 거지?” 아스타로트가 외쳤다. 뚜벅. 그러나 이내 '모든 악마의 왕'이 한 걸음을 내디뎠을 때, 고요하던 공간이 일순 크게 울렁였다. 사탄은 오른발을 내디뎠다가 다시 느긋이 왼발을 내디뎠다. “오늘은 영상을 보여준 걸로 목적 달성이 끝났어.” “아니 그렇다고 해도.” “아직 부족해. 그리고…. 우리는 필요에 의한 협동은 할 수 있지만, 원래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던가?” “…그냥 모르면 모른다고 해. 아니면 이제 한 번 알아본다고 하던가. 그렇게 뚝 끊어서, 어렵게 빙빙 돌려서 말할 필요가 있나….” 아스타로트는 나직이 투덜거렸다. 사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내 사탄이 공간에서 홀연히 사라지자, 남은 6명의 악마들도 한 명씩 몸을 일으켰다. * 탁! 한 청년이 나는 새처럼 가볍게 날아 나무를 오른다. 그리고 굵직한 가지에 손을 대는 순간, 다시 발을 차 반동으로 공중을 오르려는 찰나였다. 우지끈! 그러나, 너무 힘을 준 걸까? 일순간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청년의 몸이 좌우로 흔들렸다. 어떻게든 중심을 잡으려 황급히 손을 저어봤지만, 결국 청년은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쿵! 청년은 그대로 대지에 고꾸라졌다. 반사적으로 일어서려는지 이내 손을 짚었지만, 그는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형님!” 누군가 다급히 외치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형님이라 부른 걸로 보아 분명 남성의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여성스러운 어조가 묻어나는 음색이었다. “형님! 현이 형님! 괜찮아요?” “…끄응. 나 안 죽었다.” 청년, 아니 안현은 간신히 몸을 뒤집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그의 눈앞으로 자그마한 머리가 불쑥 찔러 들어 걱정스런 눈빛을 뿌렸다. 안현은 쓰게 웃었다. “비켜 임마. 안 그래도 어지러운데…. 머리 아프다.” “괘, 괜찮으세요?” “몰라. 돈다 돌아. 하늘이 빙글빙글. 달도 빙글빙글. 별도 빙글빙글.” “혀, 형님….” 한결이 시무룩이 고개를 숙이자 안현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기다랗게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재빠르게 살폈다. 숲이 보였다. 그뿐이었다. 아름드리 돋아난 나무와 우거진 수풀 등등. 한밤중 숲 한복판에서 맞이한 밤은 주변에 소름 끼치는 적막과 침묵을 동반하고 있었다. 그런 숲을 살피는 안현의 눈동자는 무척이나 피로한 빛을 띠고 있었다. 눈도 퀭하고 입도 바싹 말라있다. 복장도 거의 거지와 비슷한 행색을 하고 있는 게, 아까 바로 일어나지 못했던 건 단순히 낙하 충격에 의한 것만은 아닌 듯싶었다. “형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무런 말도 않자 불안감이 치솟은 걸까. 한결은 결국 조심스레 안현을 불렀다. 그러나 안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더니 잠시 후,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좋아. 아무도 없네. 일단은 안심이다.” “그, 그럼 조금 쉬고 가는 건 어때요? 형님 많이 지치셨잖아요. 거기서 나온 이후로 계속….” “아니. 그건 안 돼.” “아 형님….” 한결이 애절한 목소리로 간청했지만 안현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조금 머리가 회복됐는지, 안현은 흑색 창을 들어 사방을 경계했다. “우린 아직 나온 게 아니야. 가장 심한 곳에서 간신히 빠져나왔을 뿐이지. 이 산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쉬는 게 쉬는 게 아니라고. 이 산 전체가 적이나 다름없어. 알아들어?” “하지만. 벌써 며칠 동안 산만 헤매고 있잖아요. 이대로 계속 무리하느니….” 하지만 안현은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이내 다시 창을 내려 한결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야 임마. 형이 우리를 데리고 다닐 때는 이 정도는 장난에 불과했어. 벌써부터 앓는 소리를 하면 어떡해.” “그, 그건 그렇지만요.” 한결 또한 더는 보채기 싫었는지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잠시 뿐에 불과했다. 잠시 후, 두 청년은 다시 냉엄한 현실을 직시해야만 했다. “한결아. 일단 움직이자. 우선은 무조건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거야. 어떤 방향이든 산을 내려가는걸 중점으로 두자.” 안현이 입을 열었다. 한결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내 비척비척 걸어가는 안현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사박사박. 사박사박.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날은 계속 어두워지고 길은 보이지 않는다. 안현과 한결은 꾸준히 걸었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는 것 같다. 가면 갈수록 그냥 괜히 스산한 기운이 엄습하는 기분이 들었다. 오직 걷는 소리만이 적만한 숲 속에서 나는 유일한 소리였다. 한결은 요리조리 시선을 돌리고는 힘 빠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냥. 클랜 로드님 말을 들을걸 그랬어요. 이곳에 오는 게 아닌데….” “나도 후회 중이야. 하연 누님이 말렸을 때 들었어야 했어.” 안현이 수긍하자 한결이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크, 클랜 로드님이 돌아오시면 많이 화내시겠죠?” “수현이 형? 그렇겠지. 멋대로 의뢰를 받아 나갔는데 의뢰는 대 실패했지. 의뢰인들은 남겨두고 우리만 도망쳤지. 지금껏 100%를 이룩한 의뢰 달성률에 흠집 냈지. 거기다 애초에 이곳에 관해서는 관심도, 의뢰도 받지 말라고 하셨는데…. 아마 그냥 화내시는 정도가 아닐 거다.” 안현이 조목조목 말하자 한결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동안 머셔너리에 지내면서 클랜 로드가 몇 번 화를 내는걸 보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때리면 모를까. 수현이 화를 잘 내는 성격은 아니지만, 한 번 걸렸다 하면 얼마나 매섭게 몰아붙이는지 한결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한결이 침울해하는 기색을 느꼈는지 안현은 쓰게 웃었다. “걱정 마. 넌 잘못 없으니까. 내가 억지로 끌고 온건 데…. 아무튼, 일단 내려가는 길을 찾자고. 혼나든 안 나든 죽는 것보다는 나을 거 아냐.” “…….” “안 그래?” “…….” 안현은 걸음을 멈췄다. 갑자기 대답도 따라오던 발걸음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여 급히 몸을 돌리자, 한 쪽에서 멍하니 서 있는 한결을 볼 수 있다. 안현은 재빠르게 다가갔다. “너 뭐해?” “…형님. 잠시만요.” 한결은 멍하니 머리를 들더니 손에 쥔 뭔가를 내밀었다. 안현이 시선을 내리자 부러진 나뭇가지가 쥐어진걸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이게 뭐 어쨌다고….” 그 순간 안현의 머리에 한 사실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이어서 번쩍 머리를 들더니 마구 고개를 휘저어 숲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안현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그의 눈길은 정확히 한 나무를 직시하고 있었다. 중간 즈음의 부러진 나무의 가지와, 지금 한결이 들고 있는 나뭇가지. 그 나무는 아까 안현이 잠깐 올랐다가 발을 잘못 디뎌 추락한 나무였다. 둘은 아까부터 똑같은 장소를 돌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모든 게 똑같은 건 아니었다. 끼릭…. 끼릭…. 뭔가가 천천히 흔들리고 나무가 갈리는 소리가 흘러들었다. “이런 씨….” 안현은 반사적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간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은 탓이다. 그러더니 이내 나무의 밑동부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처음 눈에 보인 건, 검푸른 빛을 띠는 나무 밑동이었다. 다음으로 눈에 보인 건, 바람결에 살며시 일렁이는 검은색 비닐 같았다. 그 다음으로 눈에 보인 건 까닥까닥 좌우로 느릿하게 흔들리는, 새하얗다 못해 시퍼렇게 질린 시체의 발처럼 보였다. 위에서 뭔가 줄에 매달려 있는지 진자 운동을 하는 것처럼 왔다갔다하는 중이었다. 끼릭…. 우직…. 끼릭…. 우직…. 문득 안현은 생각했다. 이상하게 주변이 어두워졌다고. 아까까지만 해도 은은하게나마 비치던 달빛이 한순간 사라져버렸다고. 끼릭…. 히히…. 끼릭…. 히히…. 안현은 침을 삼켰다. 그럼에도 목은 바짝바짝 말라와 타는듯한 갈증을 일으켰다. 이내 안현은 완전히 시선을 들어 나무를 응시했다. 그리고 땅에 닿을 정도로 기다랗게 내려온 머리칼과 핏빛 도는 하얀 옷을 확인했을 때. 우지직! 뭔가가 와짝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매달려있던 것이 바람처럼 아래로 덮쳐 들었다. 이윽고 섬뜩한 웃음과 동시에 떠나가라 지르는 비명이 컴컴한 숲 속에 울려 퍼졌다. ============================ 작품 후기 ============================ 수현이는 다음 회 마지막 부분에 등장할 예정입니다. 다음 회부터 차분히 하나씩 풀어나가겠습니다. :)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안현(3년 차) 2. 클래스(Class) : 기공창술사(Rare, Energy SpearMan, Expert)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AA - Double A) 5. 진명 • 국적 : 잊혀진 고대 창술의 진전을 잇는 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5) 7. 신장 • 체중 : 178.8cm • 65.3kg 8. 성향 : 우호 • 온건(Amity • Moderation) [근력 88(+2)] [내구 85] [민첩 93] [체력 89] [마력 75] [행운 67] < 업적(0) > < 특수 능력(1/1) > 1. 창술의 달인(Rank : A Plus Plus Plus) < 잠재 능력(3/4) > 1. 호신강기(Rank : A Zero) 2. 창술사격(Rank : A Zero) 3. 기공술(Rank : B Plus) 4. - < 최근 능력치 비교 > 전 : [근력 61] [내구 58] [민첩 74] [체력 63] [마력 58] [행운 61] 후 : [근력 88(+2)] [내구 85] [민첩 93] [체력 89] [마력 75] [행운 67]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백한결(2년 차) 2. 클래스(Class) : 신의 방패(Arousal Secret, Aegis, Expert)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AA - Double A) 5. 진명 • 국적 : 천의 재능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0) 7. 신장 • 체중 : 173.7cm • 62.1kg 8. 성향 : 질서 • 강단(Lawful • Determined) [근력 68] [내구 74] [민첩 56] [체력 65] [마력 94(+2)] [행운 86] < 업적(0) > < 고유 능력(1/1) > 1. 되비침(Rank : D Zero) < 특수 능력(1/1) > 1. 이지스 시스템(Aegis System)(Rank : A Plus) < 잠재 능력(2/3) > 1. 디펜시브 매트릭스(Rank : B Plus) 2. 즈믄 가락(Rank : B Zero) 3. - < 최근 능력치 비교 > 전 : [근력 38] [내구 54] [민첩 36] [체력 48] [마력 62] [행운 74] 후 : [근력 68] [내구 74] [민첩 56] [체력 65] [마력 94(+2)] [행운 86] 0431 / 0933 ---------------------------------------------- 응어리진 마음. <2년 전.> 북 대륙 바바라, 구 황금 사자 클랜 하우스. “지금껏 북 대륙은 부랑자들에 대해 매우 관대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미사여구로 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을 다시 사용자로 또는 도시로 돌아오게 하는데 초점을 두었죠.” 여기서 잠시 말을 끊은 후 나는 차분히 좌우를 둘러보았다. 회의가 거의 끝나기 직전 새로 발언을 했지만 다행히 따가운 눈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다들 호기심 어린 시선들로 나를 보고 있다. '나를 벙어리고 알고 있던 건가?' 하기야 여태껏 수호자의 소집령에 쭉 참여는 해도, 회의를 시작하면 내내 침묵을 지켰던 나였다. 그러다 갑작스레 건의가 있다고 하니, 이들에게는 그러한 사실이 생소하게 다가오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 관대한 정책의 결과가 어떻게 돌아왔는지, 이곳에 계신 분들은 너무나 잘 아실 겁니다. 가령 예를 하나 들어보면…. 각 클랜에 숨어있던 첩자들만 봐도 알 수 있겠지요. 서 대륙을 끌어들여 전쟁을 일으킨 건 말할 것도 없고요.” 순간 여기저기서 무거운 침음들이 흘러나온다. 그 일은 지금은 공공연한 일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엄청난 사건이었다. 적어도 알고 있는 사용자들에 한해서. 하기야 몇 년을 동고동락한 동료가 부랑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면, 나라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저는 여기서, 과거 황금 사자 클랜이 강철 산맥 원정 직전 계획했던 계획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강철 산맥 원정 직전이라면…. 부랑자 말살 계획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가벼운 사안이 아님을 깨달았는지, 선율이 꽤나 진중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나는 맞는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였다. “예. 비록 끝은 흐지부지했지만…. 그때 황금 사자 내부에 첩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부랑자 말살 계획을 얼마나 강력하게 밀어붙였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저는 다른 건 몰라도, 황금 사자가 그 계획만큼은 제대로 세웠다고 생각합니다” 어느덧 회의실에 잠잠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날카로운 눈길들로 변했다. 나는 한두 번 목을 가다듬은 후 침착히 말을 이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모든 부랑자들이 사라진 건 아닙니다. 오히려 수뇌부들은 발 빠르게 탈출했고, 지금 어딘가에 숨어 재기를 꾀하고 있겠지요.” “그러니까 머셔너리 로드의 말씀은…. 부랑자들을 상대로 다시 전쟁을 일으키자는 말입니까?” 한창 말을 잇던 도중, 가슴에 수(秀)가 그려져 있는 사용자가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형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게, 마치 내가 하려는 말을 알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나는, 한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병신인가?' 방금 말은 그저 예를 든 것에 불과했고, 지금 북 대륙은 전쟁의 상처를 수습하고 겨우 안정화로 돌입하는 시기였다. 그런데 전쟁은 무슨 놈의 전쟁? 도대체 어떻게 이 자리에 있는지 의심이 들었지만, 나는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쟁을 일으키자는 말이 아닙니다. 현재 전쟁을 일으키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으며, 부랑자도 전력의 태반을 잃었으니 회피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 그, 그렇습니까?” “다만 이대로 부랑자들을 놔둘 수는 없으니, 이번 기회를 살려 아주 뿌리를 뽑자는 말입니다.” 더듬거리는 사용자에게 상세한 부연 설명을 해주고 나서, 나는 한 번 더 말을 덧붙였다. “즉 부랑자를 상대로 했던 관대한 정책을 철회하고, 우리도 강력히 대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똑같이 라고 해야 할까요?” “똑같이 라. 머셔너리 로드께서 좋은 생각이 있으시나 보군요.” 발언을 허락했을 때부터 이효을은 시종일관 진지한 얼굴이었다. 이제는 빙긋 웃으며 나를 보는 게, 궁금하니 뜸들이지 말고 빨리 본론을 말하라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로 했다. “부랑자들은 이제껏 사용자들을 상대로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악랄한 행동을 저질렀습니다. 살인, 강도, 강간은 물론이고, 심지어 시체를 잔인하게 훼손하여 보란 듯이 걸어놓은 적도 있지요. 또는 성 노예로 데리고 다니다 싫증나면 죽이는 경우도 다반사고요. 그 결과, 사용자들 사이에서는 부랑자가 공포의 대명사로 자리잡았습니다.” “으응…. 그럼 우리도 부랑자들 상대로 똑같은 짓을 저지르자는 건가요?” “부랑자들은 사용자를 먹이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전쟁으로 그러한 존재감이 많이 옅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회는 지금입니다. 그들은 이미 사용자이기를 포기한 이들입니다. 그러할진대, 똑같은 사용자 취급을 해줄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제는 반대로 부랑자들이 먹이가 될 차례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러니까…. 부랑자를 하나의 성과로 만들어 사용자들에게 동기부여를 하자는 의미군요.” 역시나.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효을은 단번에 핵심 의미를 짚어냈다. 홀 플레인에서 사용자들은 사냥, 탐험, 유적 발굴 등으로 성과를 얻는다. 그리고 이효을은 부랑자들을 하나의 성과로 만든다고 했다. 이 말인즉슨, 사용자들이 부랑자를 어떻게 다루든 일절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부랑자들의 장비를 노리거나, 회로를 파괴해 노예로 만들어 사고 팔거나, 인체 실험을 하거나, 아니면 그냥 죽여버리는 것 등등. 이효을은 탐탁잖은 얼굴로 고민에 빠져있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망설이고 있다. 왜 그런지는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건의한 계획을 실행하는 건, 전쟁이 끝난 지금이 가장 적기라는 사실을. '조금 더 설득할 필요가 있겠군.' 계속 망설이는 이효을을 향해, 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아니, 그러려는 찰나였다. 짝, 짝, 짝, 짝. 끊어 치는 박수 소리가 조용한 회의실을 울렸다. 박수를 친 사용자는 다름 아닌 고려의 새로운 클랜 로드, 조성호였다. 의아한 기분으로 쳐다보자 그는 가만히 입을 열었다. “그거 참,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아주, 아주 좋은 생각이에요. 머셔너리 로드.”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러나 조성호의 눈동자는 차가운 복수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전 고려 로드가…. 연합군과의 전쟁 중 사망했었지.' 또한 조성호는 고려 로드와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그가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찬성하는지, 이유가 대강 짐작되었다. “확실히 흥미를 돋구는 제안이야. 부랑자들을 하나의 성과로 만든다…. 그리고 성과는, 얻은 사용자의 개인 소유물이지. 재미있어. 흐흐.” '저주술사' 강태욱도 우호적인 의견이었다. 어차피 저놈이야 내 의견에 찬성할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아무튼 벌써부터 두 명의 찬성표가 나와, 나는 어떠냐는 뜻으로 이효을을 응시했다. 북 대륙의 수호자도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했는지 상념에서 깨어난 상태였다. 아까부터 계속 입맛을 다시는 게 여전히 아리송한 듯 보였지만. “머셔너리 로드의 의견은…. 아무래도….” 이윽고 이효을은 입술에 살짝 침을 적셨다. * 한 여인이 테이블에 앉아, 아니 엎어져 있었다. 나이는 이제 스물 중반쯤 될까? 의자에 붙은 허리와 엉덩이는 비스듬히 비틀었고, 상체의 가슴은 테이블을 엎누르고 있다. 한 쪽 팔로 머리를 받쳐 눈앞에 펼쳐진 찢어진 기록들을 보고 있었지만, 멍한 눈을 보아하니 그냥 정신을 놓은 듯 보였다. “오! 오늘은 사람이 별로 없네.” “운 좋~다!” 그렇게 여인이 한없이 허공만 멀거니 쳐다볼 무렵, 한 무리 사내들이 주점에 들어와 한 쪽 탁자를 차지했다. 서로 자축하며 시끄러운 목소리로 떠드는 게, 오늘 사냥에서 괜찮은 수확을 올린 모양이다. 이내 한껏 떠들다 배를 쓱쓱 문지른 사내 중 한 명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상하네. 종업원들이 안 보이는데?” “그럼 주인을 불러보자고. 임 마담님! 임 마담님!” 거한의 사내가 큰 목소리로 재차 불렀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러자 거한에 비해 왜소한 몸집을 가진 사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오늘은 안 계시는 건가?” “이런…. 그럼 이곳에 들어온 의미가 없는데. 모니카의 꽃을 보러 왔는데, 꽃이 없으면….” “그냥 조용히 음식이나 먹지. 이 주점 음식도 꽤나 괜찮으니까.” “메마른 놈. 너야 어떤 음식이든 배만 채우면 상관없겠지만, 나는 아니라고. 자고로 시각적인 즐거움은 음식의 맛을 한층 돋구어주는 법이지.” 거한은 몸집답지 않은 섬세한 말을 내뱉곤 아쉬운 눈으로 주점을 훑었다. 그리고 메마르다 평가 당한 남성은 콧방귀를 뀌었다. “글쎄. 그렇다고 해도 어차피 네 목적은 몸이 아닌가. 설마 임 마담이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테고, 너에게 관심을 줄 것 같지는 않은데.” “신경 꺼.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했어. 그리고 오늘 같은 날은.” 시큰둥하게 대꾸하던 거한은 일순 말을 멈췄다. 그의 시선은 어느 순간 테이블에 엎어져있는 여인에게로 꽂혀있었다. “…혀와 눈뿐만이 아니라, 아랫도리도 즐거워야 하는 날이지. 안 그래? 친구들?” 거한의 시선에 부쩍 호기심이 일었는지, 왜소한 사내와 메마른 사내는 옆쪽 테이블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동시에 부정했다. “반반하네. 그런데 무슨 여자가 저렇게 사나워 보이냐? 꼭 신경질 부리기 직전의 고양이 같잖아. 뭐, 그래도 몸매는….” “아서라. 보니까 전투 사용자 같은데, 그냥 조용히 밥이나 먹자고.” 봉긋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탱탱한 엉덩이. 확실히 여인은 여성으로써 활짝 개화한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었다. 눈썹이 한껏 치켜 올라가 앙칼져 보이는 인상이 흠이었지만, 그것 또한 하나의 매력이었다. “이 친구들이 뭘 모르는군. 난 말이야, 저런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가 좋아. 저런 여자일수록 정복하는 맛이 있거든? 침대에서 내지르는 신음 또한 더욱 각별하다고.” 거한은 쯧쯧 혀를 차며 손을 까닥까닥 하고는 거드름을 피웠다. “얼씨구. 그냥 여자가 좋은 거겠지.” 그때였다. 왜소한 사내가 핀잔을 주는 순간, 여인이 눈이 날카롭게 사내들을 훑었다. 메마른 남성은 그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하여 재빨리 말리려는 찰나 거한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이, 이제 그만하고….” “잘 봐라. 이 형님의 실력을 보여주마.” 들은 척도 않은 거한은 여인이 있는 테이블로 척척 다가갔다. 왜소한 남성은 흥미로운 얼굴로, 메마른 남성은 뭔가 꺼림칙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이윽고 여인에 엎드린 테이블에 거한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거기 아가씨….” “꺼져.” 하지만 여인은 거한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즉답했다. 그저 멍하니 허공만 응시하는 게 관심도 없다는 말투였다. 거한은 순간적으로 주춤했다. 그러나 몇 번 눈을 끔뻑이더니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이야, 역시 얼굴값은 한다 이건가?” “꺼지라고 했어. 지금 기분 별로니까 건들지마.” “아이쿠. 우리 아기 고양이께서 기분이 별로셨군요. 하하하. 너무 그러지 말고….” “야.” 비로소 여인은 거한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고개를 삐딱하게 틀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새끼가 귓구멍에 좆을 처박았나…. 밥 처먹으러 왔으면 조용히 밥만 처먹고 가지?” “아이구 우리 고양이, 화내는 것도 예쁘네~.” “… 아까 멋대로 품평회한 건 그냥 넘어가줄 테니까, 제발 조용히 꺼지렴. 응?” “…그냥 안 넘어가면 어쩔 건데?” 거한은 여전히 능글능글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팔을 들어 여인의 어깨에 얹고는 주물주물 매만지기 시작했다. 여인은 일순 고개를 똑바로 하더니 어이없다는 얼굴로 코웃음 쳤다. “하, 이게 진짜 미쳤나. 진짜 돌겠네…. 오빠가 한 번만 더 사고 치면 두고 보자고 했는데.” “오빠? 아가씨 오빠랑 사고 쳤어? 그럼 됐네. 끝났네. 응? 나랑도 사고 치면 되잖아. 크허허허!” 자신이 한 농담이 꽤나 웃겼는지 거한은 우렁차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여인은 눈을 감으며 한숨을 폭 쉬었다.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그것을 모종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거한의 손이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가려는 때였다. 휙! “그만 튕기고, 돈이라면 넉넉히 줄…. 크헉!” 한순간 바람이 흐르는 소리와 함께 거한의 눈앞에 있던 여인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거한은 급히 숨을 들이켰다. 일순 아래턱에서 찌를 듯 솟구친 날카로운 기운에 절로 입을 다문 것이다. “정말, 가만히 있으려니까 별 거지같은 새끼들이…. 오빠, 죽고 싶어?” 이어서 귓가에 흘러드는 나지막한 속삭임. 거한은 문득 턱이 미미하게 떨린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리고 등에 닿은 부드러운 감촉까지도.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자 턱을 톡, 톡, 건드리는 붉은빛을 띤 단검이 잡혔다. 여인은 눈 깜짝할 새에 이동해 거한의 뒤를 점거한 상태였다. 거한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근찬아?” “아가씨. 그만하지.” 한 박자 늦게, 두 사내가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그들 또한 거한이 지나쳤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료가 당하는걸 볼 수만은 없어 급히 나선 것이다. 하지만 그들 또한 여인의 움직임을 읽지 못한 듯, 눈동자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번쩍! 빛이 힘차게 터지는 소리와 함께 사내들이 앉아 있던 테이블에 섬광이 꽂혔다. 섬광은 화려하게 터지며 파편을 일으켰고, 막 다가가려던 두 사내는 엉거주춤 걸음을 멈췄다. “헉!” “뭐, 뭐야?” 그리고 한 쪽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경악을 내뱉었다. 카운터에는 어느새 시위 없는 활을 든 여인이 여인과 사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메마른 사내가 더듬더듬 말했다. “이, 임 마담님?” “네, 손님. 오랜만이네요. 후후.” 임한나의 등장이었다. 그녀는 상냥히 웃어 보이더니 다시 번쩍거리는 섬광을 일으켰다. 사내들은 당황했다. “자, 잠시만요. 오해입니다.” “네, 네. 아무튼 일단 다시 자리에 앉아주시겠어요?” “그, 그게 저 여자가….” “죄송하지만 이 주점에서 소란은 엄격히 금지하고 있어서요. 자리에 앉아주세요.” 한나의 단호한 대답에 사내는 할 말을 잃었다. 이윽고 도로 앉는 사내들을 보며, 한나는 여전히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유정에게 말했다. “유정아. 너도 일단 단검부터 내리렴.” “언니! 이 새끼들이 먼저…!” “새끼들이라니. 그런 말하면 못써. 너, 벌써 클랜 로드님 말씀을 잊은 거야?” “…젠장.” 한 번만 더 사고 쳤다간 알아서 해라. 수현의 엄포를 떠올린 유정은 마지못해 단검을 내렸다. 이내 그녀가 한 걸음 물러서자 거한은 한 번에 숨을 토해내며 목을 쓰다듬었다. 왜소한 사내는 어색이 눈치만 살피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분이랑…. 아시는 사이십니까?” “저분이라면, 유정이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 그렇습니다.” “그럼요. 저와 같은 클랜원인데 모를 리가 없죠.” 임한나는 흐르는 바다와 같이 대답했고, 메마른 사내는 침음을 흘렸다. 같은 클랜원이라면 머셔너리 클랜원이라는 소리. 그 사실을 깨달은 거한의 동료는 그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는지 후회하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하하, 하하하. 이상하게 오늘따라 종업원들이 보이지 않아서요. 그래서 임 마담님을 찾았는데….” “어머. 사랑 주점은 앞으로 일주일간 문을 닫아요. 곧 개축 공사를 하거든요. 밖에 안내문을 붙여놨는데?” 친절한 설명이 이어지자 사내들은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곧 어깨를 으쓱하는 게 보지 못한 모양이다. 그나마 메마른 사내가 눈치가 좀 있는지, 급히 거한을 잡아 끌며 머리를 숙였다. “시, 실례했습니다. 저희가 소란을 피운 거 같은데, 이만 나가봐도 될까요?” “그럼요. 제 생각에도 이만 나가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그럼.” 한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사내 무리는 곧바로 짐을 챙겨 밖으로 달아났다. 이윽고 문이 쾅 닫힌 순간, 한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정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주저앉더니 볼멘 소리를 냈다. “짜증나…. 언니 도대체 어디 갔었어.” “미안미안. 본 지부에서 급한 통신이 왔거든. 연락을 받느라 잠시 자리를 비워야 했어.” 한나가 손을 저으며 사과하자, 유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급한 연락? 무슨 연락?” “그게…. 한결이가 돌아왔대.” 한나가 입을 열자 유정의 얼굴에 남아있던 불만이 싹 사라졌다. “한결이? 진짜?” “응. 그런데….” “어휴. 하여간 엄~청 늦게 돌아오네. 아, 안현은? 그리고 의뢰인들도 무사히 돌아왔대?” 다급히 묻는 유정에 한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유정이 답답해죽겠다는 듯 발을 동동 구르자 눈을 감으며 말문을 열었다. “아니.” “응?” “다른 사용자는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어. 돌아온 사람은 한결이 뿐이야.” “…뭐라고?” 유정은 의자에 붙였던 엉덩이를 도로 일으켰다. 아미를 잔뜩 찌푸린 게 방금 말을 납득할 수 없는 모습이다. “언니. 그게 무슨 말이야? 돌아오지 않아?” “나도 자세히는 몰라. 그냥 연락만 받은 거니까…. 아무튼 하연이 언니가 지금 바로 모이라고 하니까, 가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야.” “…알았어. 그럼 나 먼저 간다.” “그, 그리고!” 그러나 유정은 더는 듣지 않고 신속히 몸을 날렸다. 막 “한결이 상태도 이상하다고….”라고 말하려던 한나는 쓰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가면 알게 될 일이었다. “후유. 얼른 정리하고 나도 가봐야겠네.” 한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유정이 쓰러트린 의자를 주웠다. 이내 허리를 피어 의자를 집어넣으려는 순간, 한나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그리고 빤한 시선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테이블에 놓인, 갈기갈기 찢긴 여러 기록들에 멈춰있었다. 한나는 차분히 찢긴 조각을 맞춰보았다. - 클랜…. 기공창술사, 신의 방패는 실종 1주일째…. 머셔너리 클랜의 첫 번째 의뢰 실패? - 머셔너리 로드 김수현. 지금 어디서 무엇을…. - 용병 클랜의 한계…. - 머셔너리 클랜…. 머셔너리 클랜에 대하여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기사들. “용병 클랜의 한계? 아주 놀고 있어, 정말.” 이내 한 마디 툭 내뱉은 한나는 테이블을 가지런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른 가야겠다는 말과 달리 느릿하게 움직이는 손길은, 어딘가 모르게 근심하는 기색이 묻어있었다. * 서부, 어디 깊은 산속의 계곡. 아직 아침 해도 채 떠오르지 않은 꼭두새벽이었지만 계곡 주변은 분주했다. 아니, 분주해지기 시작해야 한다고 나 할까. 탁, 탁, 탁, 탁! 끝 쪽에서부터 찾아오는 분주함에 거센 바람이 휘날렸다. 계곡 곳곳에 꽃인 횃불을 흘러오는 바람결에 이리저리 일렁였다. 바람을 일으키는 정체는 바로 한 사내였다. 그는 한 걸음마다 크게 뛰어오르며 죽자고 달리고 있었다. 무에 그리 급한지,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지고 호흡은 급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는 달리는걸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가속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이윽고 사내의 눈에 물이 흐르는 계곡을 중심으로, 부근에 여러 천막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밖에서 꾸벅꾸벅 머리를 꺼트리는 사내도. 사람을 보자마자 사내는 달리는 도중 크게 외쳤다. “크, 큰일났습니다!” “허흡?! 아, 아후…. 깜짝이야!” 천막 밖에서 모닥불을 쬐고 있던 사내는 화들짝 머리를 들었다. 그 탓에 긴 머리가 한순간 좌우로 휘날렸다. 깜짝 놀라 눈은 크게 뜬 상태였지만 입가에 침이 흐르는 게 불의 따뜻함에 잠시 졸고 있던 모양이다. 긴 머리 사내는 쓱 입을 훔치더니 벼락같은 목소리로 다그쳤다. “깜짝 놀랐잖아 임마! 지금 다들 자고 있는 거 안보여?” “추, 추적대가 왔습니다!” 그러나 호통에도 아랑곳 않고, 남성은 본론부터 곧장 꺼내 들었다. “추적대?” 긴 머리 사내는 잠깐 머리를 갸웃했다. 그러나 곧 의미를 알아들어 북북 머리를 긁었다. 귀찮다는 기색이 가득한 행동이었다. “하…. 또 추적대라…. 미치겠네.” “저, 정찰 조에서 연락이….” “아, 알았어 알았어.” 긴 머리 사내는 알겠다는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계속해서 머리만 긁다가 설핏 고개를 들어 헐떡이는 사내를 응시했다. 순간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너…. 그런데 왜 이렇게 호들갑이냐. 우리가 추적 한두 번 받아보는 것도 아니고.” “하, 하지만….” “진정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추적대가 오든 말든 여유롭던 놈이…. 오늘따라 왜 이래?” “그, 그게!” 사내는 여전히 초조한 빛을 지우지 못하며 주변을 훑었다. 그때였다. “…끙. 무슨 일이야.” 천막을 헤치고 새로운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에 털이 덮여 있고 배는 불룩 나온 게 과히 보기 좋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달려온 남성의 얼굴에는 화색이 감돌았다. “이, 이강산 님! 큰일났습니다! 추적대를 발견했습니다.” “추적대? 하~암.” 이강산은 몇 번 입을 두드리고는 시큰둥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이제 슬슬 올 거라 생각했는데…. 그래. 정찰 조 보고는 어때?” “그게…. 끊겼습니다.” 그 순간 이강산은 하품을 멈췄다. “…끊겼다고?” “예. 현재 통신 두절 상태입니다.” 남성은 꿀꺽 침을 삼키며 바로 말을 이었다. “정확히, 10분전 통신을 마지막으로 통신이 끊겼습니다. 아무래도 추적대에 당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마지막 보고는 들어왔어?” “들어왔습니다. 추적대 인원은 열 명 남짓. 가슴에 달린 문양은 진한 붉은색 바탕에 검과 방패가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뭐라고? 인원이 겨우 열 명…. 아니 잠깐만. 붉은색 바탕에, 검과 방패?” 그 순간 이강산과 긴 머리 사내의 고개가 동시에 돌았다. 남성은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려가는 둘에게, 호흡을 고를 생각도 못한 채 말을 이었다. “머, 머셔너리! 머셔너리 클랜의 척살 조가 온 게 분명합니다!” 거의 절규에 가까운 음색. “이런…. 미…. 친….” 그와 동시에, 이강산의 안색이 급변하고 긴 머리 사내가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 작품 후기 ============================ 현재 2부에서 나열된 주요 사건 시간대는 이렇습니다. 1. 김수현 마몬 처치(몇 달 전.). 2. 안현, 백한결 의뢰 수령 후 출발(1달하고 2주 전). 3. 안현, 백한결 실종 신고(2주 전). 4. 백한결 홀로 모니카로 귀환(현재). 5. 머셔너리 클랜 척살조 부랑자 덮침(현재). 2년이 지난 후인데, 자세한 설명 없이 사건부터 들어가고 있으니 상황 파악이 약간 힘드실 거예요. 2부의 첫 시작은 사슬 구조로 잡았습니다. 여러 사건들이 터지고, 그걸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하나로 종합됩니다. 다만 이대로 얼렁뚱땅 넘어가는 게 아니라, 중간중간 간간이 왜 이 사건이 일어났는지 설명할 생각입니다. 처음부터 차분히 설명하려면 전개가 더욱 느려지겠다고 생각했거든요. :)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이유정(3년 차) 2. 클래스(Class) : 여명의 검투사(Rare, Gladiator Of the Dawn, Expert)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AA - Double A) 5. 진명 • 국적 : 사랑에 빠진 미친 여자(狂女)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5) 7. 신장 • 체중 : 166.3cm • 54.7kg 8. 성향 : 첨예 • 순정(Sharp • Pure Love) [근력 83] [내구 79] [민첩 92(+2)] [체력 84] [마력 90] [행운 88] < 업적(0) > < 특수 능력(1/1) > 1. 피에 젖은 마음(Rank : A Zero) < 잠재 능력(3/4) > 1. 양손 단검술(Rank : B Plus) 2. 묘(猫)족 체술(Rank : B Zero) 3. 백병전(Rank : C Plus) 4. - < 최근 능력치 비교 > 전 : [근력 67] [내구 69] [민첩 78] [체력 65] [마력72] [행운53] 후 : [근력 83] [내구 79] [민첩 92(+2)] [체력 84] [마력 90] [행운 88]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임한나(5년 차) 2. 클래스(Class) : 황혼의 무녀(Rare, Medium Of Twilight,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AA - Double A) 5. 진명 • 국적 : 스스로 꺾이기를 원한 청초한 꽃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7) 7. 신장 • 체중 : 168.7cm • 55.6kg 8. 성향 : 질서 • 신념(Lawful • Belief) [근력 72] [내구 84] [민첩 93] [체력 71] [마력 89] [행운 90] < 특수 능력(1/1) > 1. 축문(Rank : S Plus) < 잠재 능력(4/4) > 1. 중도의 활(Rank : A Zero) 2. 통찰(洞察)(Rank : A Plus) 3. 연사(Rank : B Plus) 4. 천리안(Rank : B Zero) < 최근 능력치 비교 > 전 : [근력 72] [내구 84] [민첩 92] [체력 68] [마력 88] [행운 90] 후 : [근력 72] [내구 84] [민첩 93] [체력 71] [마력 89] [행운 90] 0432 / 0933 ---------------------------------------------- 응어리진 마음. 쾅! “이건 말도 안 돼요!” 한 여인이 책상을 거칠게 내려치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제 막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여인은 상당히 활발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턱 선은 살짝 예리해 보였지만, 다부진 눈매와 오뚝한 코는 씩씩하고 기운찬 느낌이다. 그러나 현재 여인의 얼굴은 한껏 찌푸려져 있었다. 무에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눈망울도 살살 떨리는 게 꼭 한바탕 눈물이라도 쏟을 기세였다. “진정하세요.” 그리고 그런 여인을 달래는 또 한 명의 여인이 있었다. 성숙하면서도 영리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여인은 바로 하연이었다. 하연은 푸른색이 감도는 눈동자를 들어 이제 막 울려고 하는 여인을 손수 도로 앉혔다. “사용자 김수정. 현재 심정이 많이 불안하실 거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하연이 하얀 천 조각을 건넸지만 김수정이라 불린 여인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옅은 흉터 자국이 새겨진 손등으로 눈을 훔치며, 간신히 참는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함께 파견해주신 용병 중 한 명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이게 어떻게 된 거죠?” 하연은 짧은 한숨과 함께 내밀었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말 그대로 에요. 사용자 김수정의 캐러밴과 우리 쪽에서 파견한 두 명의 용병 중, 현재 한 명만이 돌아온 상태죠.” “그렇다는 말은…. 결국 그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그렇게 서둘러 판단하기에는 일러요. 아직 아무것도 확인된 게 없으니까요.” “그럼 어서 확인을 해주세요! 아니. 최소한 돌아온 용병만이라도 만나게 해달라는데, 도대체 왜 안 된다는 건가요?” 수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하연은 눈도 깜짝 않으며 태연히 대답했다. “말씀 드렸잖아요. 설마 이렇게 될지 저도 미처 예상치 못했어요. 물론 확인 및 구조를 위한 조사단을 파견할 계획이지만, 지금 바로는 불가능하고요. 그리고 돌아온 용병은…. 아까 말씀드렸듯이, 현재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치료에 전념하는 중이에요.” “하….”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하나씩 차근히 설명하는 하연. 하지만 수정은 전혀 납득하지 못한 듯, 어이없다는 얼굴로 눈을 감았다. 하기야 하연이 그렇다고 “아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죠.”라고 받아들이기에는, 지금 수정이 처한 상황이 너무나 절박했다. 수정은 초조한 낯빛으로 입술을 질끈질끈 깨물었다. 호흡도 서서히 급해질 무렵, 갑자기 뭔가가 생각났는지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상황이 그렇다면 서로 얘기가 통하지 않겠네요. 길게 말할 필요 없이, 머셔너리 로드님을 만나게 해주세요.” “…네?” “머셔너리 로드님의 용병으로서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어요. 여태껏 들어왔던 소문들이 사실이라면, 그분은 뭔가 다르시겠죠. 그러니 제가 직접 뵙고 사정을 말씀 드리겠어요. 왜요. 설마 이것도 안되나요?” “그러고 싶지만, 그것도 현재는 불가능해요. 왜냐하면 클랜 로드는 지금 자리에 계시지 않으니까요.” 설마 그럴 줄은 몰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수정의 얼굴에 어두운 절망감이 스쳤다. 하연도 이제는 더는 할 말이 없는 입장이었다. 최선을 다해 설명했으나 어느 것 하나 들어줄 수 없는 상황. 하연 또한 이러한 상황이 갑갑했지만, 현재 일이 돌아가는 형편으로는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처지였다. 잠시 후, 수정은 서글픈 눈빛으로 힘없이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렇군요. 푸른 달의 마도사께서는 같은 클랜원의 목숨이 촌각을 다툴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정말 침착하세요. 그 침착함이 정말 부럽네요.” 칭찬이 아니란 것쯤은 하연도 알고 있었다. 하여 분연히 입을 열려는 찰나, 수정의 한풀 꺾인 모습이 눈에 밟혔다. 하연은 입맛을 다셨다. 한때 친동생을 잃은 경험이 있는 하연인 만큼, 현재 수정의 심정이 어떨지 나름 이해가 갔다. 수정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어요. 제 캐러밴의 동료들은…. 현대에서는 남남이었을지 몰라도, 홀 플레인에서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이들이라고요.” “이해해요.” “이해하신다면…!” “사용자 김수정.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여기서 더 대화해봤자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에 불과하다. 그렇게 생각한 하연은 단칼에 수정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수정을 똑바로 직시한 후, 전보다 확연히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기공창술사 안현. 신의 방패 백한결. 둘이 어떤 사용자인지를 떠나서, 그 두 명은 제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아이들이에요. 클랜 로드 또한 무척이나 아끼시는 애들이고요. 저라고 이대로 가만히 있고 싶은 건 아니에요.” “그럼 왜 계속 기다리라고만 하시나요?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이들인데, 클랜 로드는 왜 이 중요한 때에 자리를 비우신 거예요?” “…클랜 로드는 지금 굉장히 바쁘세요. 얼마 전 돌아오시자마자 또 바로 나가셨죠. 목적지가 죽음의 계곡이라면…. 대충 이해가 가시나요?” “죽음의 계곡이라면…. 아.” 수정은 잠깐 생각에 빠졌다가, 한순간 미약한 탄성을 터뜨렸다. 북 대륙이 부랑자에 대한 새로운 정책을 발표한 이후, 여러 클랜이나 사용자들 사이에서 무수한 척살 조가 탄생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척살 조를 꼽자면 단연 머셔너리 클랜을 첫손으로 꼽을 수 있었다. 부랑자 수뇌부들도 벌벌 떨게 만든다는 머셔너리 척살 조는, 엄청난 전력과 무자비한 잔혹함으로 가장 많은 성과를 올린 클랜이었다. 그리고 죽음의 계곡은 최근 부랑자들이 자주 출몰한다고 알려진 굉장히 위험한 지역이다. 그렇다면, 머셔너리 로드가 그곳으로 갔다면 결국 답은 하나였다. 바로 부랑자를 척살하기 위해서 간 것이리라. 그 사실을 깨달은 수정은 시무룩한 기분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기 때문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머셔너리 로드의 일이 대사(大事)면, 자신의 일은 소사(小事)에 불과하다. 억지를 부린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기에 수정은 낙담한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때였다. “하지만 이대로 손을 놓고 있겠다는 말도 아니랍니다.” 하연의 말이 수정을 일깨웠다. 수정은 천천히 얼굴을 들어 멍하니 하연을 응시했다. “약속할게요. 현재 머셔너리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어떤 방법이라도 강구하겠어요. 그러니 우리에게 조금 더 알아보고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시면 좋겠어요.” “…후유.” 하연의 말에서 진심을 느꼈던 걸까. 한참 동안 하연을 바라본 수정은 이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뱉으며 비틀거리듯 몸을 돌렸다. 이윽고 수정은 문을 나가기 직전,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상황이 머셔너리 클랜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의뢰 계약서에는 제 동료들의 안전한 귀환을 책임지는 조항도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해요.” “명심하겠어요.” “…미안해요. 하지만 지금 제가 비빌 언덕이 머셔너리 클랜밖에 없네요.” 탁. 뚜벅뚜벅…. 그 말을 마지막으로 수정은 문을 닫고 나섰다. 이윽고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희미해졌을 때, 하연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됐니.” 자조 어린 목소리였다. 이윽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하연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호언장담을 했지만 여전히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하연도 지금 당장 의뢰지로 구조대를 파견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버리면, 안 그래도 최악인 상황을 더는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다. 현재로서 유일한 방법은 한결이 입을 여는 건데, 그는 돌아온 후 죽은 듯이 잠만 자는 상황이었다. 가슴을 찌르는 자책감과 상황의 복잡함에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기분을 느꼈을 즈음. 문득 하연의 눈을 덮은 손 틈 사이로 싸늘한 빛을 내뿜는 통신용 수정구가 보였다. 이내 수정구에 누군가의 얼굴이 오버랩 되는 순간, 하연의 눈동자에 갈등의 빛이 서렸다. “수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해요?”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연 또한 혼잣말에 불과했기에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다. 그저 고요히,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하연은 얼굴을 감쌌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결연한 눈동자로 통신용 수정구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팔을 내뻗었다. *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스친다. 눈을 쓸며 지나가는 온 세상이 비틀려 보인다. 마치 맞지 않는 퍼즐 조각은 억지로 맞춘 듯, 눈에 보이는 숲의 풍경은 심하게 어그러져 있었다. 왜 이렇게 보이는지는 알고 있다. 원인은 바로 결계(結界). 진로, 환영, 망상, 방해 결계 등 온갖 종류의 결계들이 숲 속을 뒤덮은 상태였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결계들을 하나하나 돌파하며 목적지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부랑자들의 본거지가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죽음의 계곡으로. '그나저나 결계 한 번 덕지덕지 발라놨군…. 그놈의 짓인가?' 죽음의 계곡으로 다가갈수록 결계가 더욱 심해졌지만, 그렇다고 걱정은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최고의 결계 파괴자가 있으니까. 나는 빙그레 웃으며 전방을 응시했다. 후르르르…. 후르르르…. 파츳, 파츠츳! 파지지지지지지직! 신비한 울음소리가 들리고 시퍼런 빛이 번쩍일 때마다, 비틀린 세상에 깨진 계란 껍질처럼 커다란 균열이 생겼다. 한 번 생긴 균열은 멈추지 않는다. 균열이 일어나는 범위를 사방으로 넓혀 종래에는 완전히 산산조각 나게 만들고 있었다. 겹겹이 쌓인 결계가 단번에 깨져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시원하게 결계를 파괴하는 주인공은 바로 유니콘이었다. 척살 조의 가장 앞쪽에는, 이제는 망아지만한 몸집을 지닌 유니콘이 용맹하게 달리는 중이었다. 머리에 비쭉 돋은 뿔이 은은한 빛을 내뿜는 게, 결계가 닿은 순간 거침없이 찢어발긴다. 속으로 데려오기 잘했다고 생각하며 나는 유미(안솔이 지은 유니콘의 이름이다. 유니콘의 유에, 아름다울 미자를 써서 유미라고 이름을 붙였다.)와의 거리를 줄였다. 이제 슬슬 죽음의 계곡에 도착할 터이니 단번에 습격할 준비를 해야 한다. 이윽고 다시 한 번 푸른 방전이 일어나고, 뻥 뚫린 결계 너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곧 도착하겠다 생각되어 나는 무검을 뽑으며 크게 외쳤다. “선유운!” 휙! 그 순간 옆쪽에서 한 인영이 크게 솟구쳐 올랐다. 선유운이었다. 그는 세 번의 발 놀림으로 커다란 나무를 타더니 굵직한 가지로 날렵히 안착했다. “연사, 조준선 정렬(Fine Shot). 크흐으으읍!” 화살을 잇따라 쏘는 능력과 표적을 지정하는 능력. 이내 힘주어 시위를 당기는 소리가 들려, 나는 있는 힘껏 마력을 모았다. 저 계곡으로 화살비가 쏟아져 들어가는 순간 바로 연이어 파동을 쏘아 보낼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클랜 로드! 뭔가 이상합니다!” “모두 정지.” 선유운의 보고가 들려오자 나는 바로 정지를 명했다. 착! 그러자 유미를 뒤따르던, 나를 비롯한 아홉 명의 척살 조는 동시에 달리는걸 멈췄다. 이어서 선유운이 오른 나무를 올려다보자, 여전히 시위를 조준한 채 고개를 갸웃하는 궁수가 보였다. “뭐가 이상하지?” “계곡과 주변에 설치된 천막은 확인했습니다. 다만 부랑자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인기척은?”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이 한 곳에 모여있고 그 외는 전무합니다.” 그새 계곡에 마력 감지를 돌렸는지 선유운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나는 알겠다고 머리를 끄덕인 후 곧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그의 말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실전이었다. 더구나 유격전의 달인인 부랑자인 만큼,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 모르는 일이다. '…이상하네.' 하지만 제 3의 눈이 보여주는 정보도 선유운의 보고와 다를 바 없다. 일순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선유운에게 내려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후르르르…? “너도 돌아와.” 고개만 돌려 빼꼼 쳐다보고 있는 유미에게도 말하고 나서, 나는 빠르게 지시 사항을 내렸다. “계곡 내 부랑자의 본거지로 보이는 장소는 확인했습니다. 또한 중앙에 커다란 천막에서 다섯 명의 인기척을 느꼈습니다. 지금부터 계곡 안으로 천천히 진입을 시도합니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한껏 퍼져서 달리던 척살 조원들이 조용히 대지를 밟는 소리만이 들렸다. 이내 방진을 형성한걸 확인한 후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안으로 들어서자 물 흐르는 소리가 확연히 들려왔다. 그리고 조금 더 들어간 순간 나는 눈이 가늘어지는걸 느꼈다. 안쪽에는 약간 넓은 공터를 따라 둥글게 쳐진 울타리가 보였는데, 뾰족한 울타리 끝으로 수많은 시체들이 꽂혀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들어온 시체는 한 남성의 시체였다. 하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오직 허리 위 상체 만이 울타리에 깊숙이 박힌 상태였다. 나는 장기가 주렁주렁 흘러내리는 시체를 자세히 살폈다. '저건…. 달밤 클랜의 문양인데.' 오른쪽 가슴에 달밤 클랜의 문양이 있는 걸로 보아, 타 클랜 척살조로 활동한 사용자인 듯싶었다. 부랑자를 습격하다 역으로 잡힌 모양인데, 무에 그리 원통한지 눈이나 얼굴이 크게 일그러진 상태였다. 나는 조금 더 전진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샤 펠릭스. 인기척이 모여있는 장소는 중앙 천막이다.” ============================ 작품 후기 ============================ 음. 일단 초반의 사슬 구조는 유지할 예정입니다. 다만 이번 회처럼, 현재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설명이 들어갈 예정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한 회에 전부 설명을 집어넣고 싶지만, 그렇게 적다 보면 소설이 아닌 설명문 또는 설정을 그대로 복사 붙여 넣기 하는 것밖에 안되겠지요. 하하하.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독자 분들이 현재 품고 계신 의문이 전부 해소되실 겁니다. 가령 예를 들어, 다음 회는 수정의 캐러밴과 안현, 백한결이 간 의뢰 지에 대한 설명이 나올 겁니다. 왜 구조대를 파견할 수 없는지, 또 그곳이 어떤 곳인지 등등 말이지요. :)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정하연(5년 차) 2. 클래스(Class) : 푸른 달의 마도사(Secret, Magician Of the Blue Moon,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AA - Double A) 5. 진명 • 국적 : 푸른 달의 물방울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9) 7. 신장 • 체중 : 166.5cm • 54.7kg 8. 성향 : 질서 • 선(Lawful • Good) [근력 36] [내구 40] [민첩 42] [체력 35] [마력 93(+1)] [행운 81] < 업적(0) > < 특수 능력(1/1) > 1. 푸른 달의 가호(Rank : S Zero) < 잠재 능력(4/4) > 1. 고대 마법(Rank : A Plus Plus Plus) 2. 마법 회로 응용(Rank : S Plus) 3. 질속 영창(Rank : A Plus) 4. 항마력(Rank : A zero) <최근 능력치 비교> (변경 전) [근력 36] [내구 40] [민첩 41] [체력 34] [마력 91] [행운 81] (변경 후) [근력 36] [내구 40] [민첩 42] [체력 35] [마력 93(+1)] [행운 81] * 푸른 달의 마도사는 고유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 시크릿 클래스입니다. * 푸른 달의 마도사의 권능은『강화 메모라이즈』입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선유운(3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궁수(Normal, Archer,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AA - Double A) 5. 진명 • 국적 : 파사(破邪) - 제 1번째의 날개를 받은 자, 백발백중(百發百中)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9) 7. 신장 • 체중 : 180.9cm • 78.6kg 8. 성향 : 중립 • 신념(True • Belief) [근력 85] [내구 78] [민첩 95(+1)] [체력 86] [마력 89] [행운 73] < 업적(2) > < 고유 능력(1/1) > 1. 파사(破邪)의 화살(Rank : A Plus Plus) < 특수 능력(1/1) > 1. 조준선 정렬(Rank : B Plus) < 잠재 능력(3/3) > 1. 연사(Rank : B Zero) 2. 추적술(Rank : A Plus) 3. 천리안(Rank : A Zero) <최근 능력치 비교> (변경 전) [근력 67] [내구 63] [민첩 84] [체력 71] [마력 74] [행운 61] (변경 후) [근력 85] [내구 78] [민첩 95(+1)] [체력 86] [마력 89] [행운 73] * 선유운은 추후 10강이 되는 사용자이며, 잠재성은 아직 약간 남은 상태입니다. 0433 / 0933 ---------------------------------------------- 응어리진 마음. 그 순간 눈앞 허공으로 희뿌연 색 바람 한 줄기가 흘렀다. 흡사 아지랑이처럼 보이는 그것은, 금방 공기 중으로 섞여 캠프 안으로 흘러들었다. 사샤 펠릭스의 능력 중 하나인 안개화였다. 안개는 신속한 속도로 캠프 전체를 훑었고, 곧 내가 말한 중앙 천막에서 동선을 멈췄다. 잠시 후, 사샤 펠릭스는 천막 위쪽에서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래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제외하면, 어떤 이상한 점도 찾을 수 없다. 클랜 로드.” “…진입합니다.” 나는 곧바로 진입 명령을 내렸다.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도 의심이 남아있었지만, 얼핏 다른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부랑자들이 그냥 도망친 게 아닐까 하는. '본거지가 이 장소 하나만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백 명은 살았을 법한 곳인데.' 속으로 캠프 전체의 규모를 가늠하며 나는 천천히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세 번의 확인 절차로도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으니, 일단 인기척이 느껴지는 중앙 천막부터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어느새 천막 안에는 희미한 신음이 새어 나오는 중이었다. “걷을까?” 중앙 천막으로 도착하자 사샤 펠릭스가 천을 힘주어 잡으며 물어온다. 그러자 척살 조원들 또한 앞서 꺼내든 무기를 일제히 겨냥하였다. 이내 나직이 흘러드는 주문 영창을 들으며 나는 한 번 머리를 끄덕였다. “걷어.” 펄럭! 거친 바람 소리와 흐르고 단숨에 천막이 걷힌다. 그와 동시에 한 번에 터져 나온 진한 피 내음이 물씬 코를 찔러 들었다. “끕…. 끄읍….” “흐으…. 흐으으….” '포로네.' 천막 내부에는 천장을 받치는 기둥에 몸을 결박 당한 네 명의 사용자가 있었다. 그들은 온몸이 발가벗겨진 상태로, 전신을 꽁꽁 묶인 채 미약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얼른 제 3의 눈으로 확인해본 결과, 예상대로 달밤 클랜원들 이었다. 순간 맥이 탁 풀리는걸 느꼈다. 예상이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우정민은 포로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클랜 로드. 이들은….” “포로입니다. 부랑자들은 아무래도 도망친 것 같네요.” “예? 도망쳤다고요?” “데려가거나 죽이지 않고 적당히 상처만 입혀놨습니다. 우리가 이 포로를 구하고 치료하는 동안, 도망칠 시간을 약간이라도 더 벌겠다는 거지요. 흔한 수법입니다.” 우정민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그러나 황당하기는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작 9명에 불과한 인원을 보면 얼씨구나 하고 덤벼들 줄 알았는데, 설마 도망이라는 선택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냥 이대로 추격할까고 도망친 흔적을 훑었지만,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발자국이 보이자 포기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쓰디쓴 입안을 달래고 나서, 나는 뽑은 무검을 도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척살 조원 중 유일한 사제에게 말했다. “일단은 풀어줍시다. 그리고 포로들이 많이 다친 것 같으니, 사용자 박다솜은 치료 주문을 외워주세요.” “네, 클랜 로드님. 지금 바로 외울게요.” 온순히 대답한 박다솜은 이내 다소곳한 태도로 포로들에게로 다가섰다. 곧 포로를 풀어주는 조원들과 치료 주문을 외우는 박다솜을 확인한 후, 나는 계곡 부근의 커다란 바위로 향했다. 부랑자들을 박살 낸다는 계획을 공쳤으니 우선은 몸을 쉬게할 생각이었다. “수현. 도망친 흔적을 살펴보니 사방으로 흩어진 발자국을 찾았어요. 혹시 역으로 포위망을 짜겠다는 함정이 아닐까요?” 이윽고 바위에 걸터앉아 연초를 꺼낸 순간 나른한 음성이 흘러들었다. 설핏 고개를 들자 팔짱을 낀 채 주변을 예리하게 훑는 고연주가 보였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품속에 넣어둔 연초 한 대를 꺼내었다. “이미 계곡을 중심으로 최대 한도로 마력 감지를 돌렸습니다. 하지만 부랑자들의 기척이 느껴지지는 않는데요.” “저도 그래요. 하지만 멀리 갔다가 되돌아오거나 아니면 은신한 상태일 수도 있어요. 제가 우정민과 선유운을 데리고 주변을 둘러보고 올게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나는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고연주의 요청을 허락했고, 그녀는 곧 두 사내를 데리고 숲 속으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후….” 이윽고 조용히 연초를 태우며 나는 부랑자들이 도망친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일단 초반에 정찰대와 조우한 게 가장 크다. 물론 정찰대는 모조리 살해했지만, 전투가 벌어지는 사이 본거지에 통신을 넣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우리가 머셔너리 척살 조라는걸 파악한 부랑자는 도망을 선택했을 것이고. '아무래도…. 그때 그 전투의 영향이 아직까지 남아있나 보군.' 사실 부랑자들이 도망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세 번째라고 볼 수 있을까. 예전에 나는 9명의 척살 조원들과 함께, 수뇌부 한 명 포함 87명에 다다르는 부랑자를 압살한 적이 있다. 그때 그 소문이 북 대륙 전역에 쫙 퍼진 이후로 부랑자는 우리 클랜과의 충돌을 최대한 피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중이었다. '자꾸 이러면 곤란한데….' 나는 전부 태운 연초를 튕기며 캠프를 돌아다니는 척살 조원들을 응시했다. 머셔너리의 척살 조는 클랜원 중에서도 가리고 가려 뽑은 인원들이다. 하지만 그것이 머셔너리의 정예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척살 조원을 선발할 때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고, 그 조건에 부합한 자들만을 선발했다. 첫 번째는 당연히 실력. 이기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놈들인 만큼, 부랑자와의 전투는 긴장의 연속이다. 그런 만큼 실력이 없는 사용자는 짐 덩어리나 다름없으니 1차적으로 선발에서 제외했다. 두 번째는 거리낌이 없을 것. 이 조건은 상당히 포괄적이라 볼 수 있는데, 작게는 살인을 할 때 망설임이 없어야 하고 크게는 부랑자에 대한 성과를(생포한 부랑자에게 어떤 짓을 하든.) 보장해준다는 말이다. 아무튼 상대가 부랑자라는 점에 한해서,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세 번째는 부랑자에게 깊은 원한이 있을 것. 이 조건은 앞선 필수 조건들과는 달리 충분 조건이다. 부랑자에게 깊은 원한을 가진 사용자일수록 모임의 의미에 부합한다고 판단해 내건 조건이었다. “어머. 정민씨?” “어…. 혜수야.” 그때였다. 한참 생각에 빠져있던 도중 앞쪽에서 두 남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념에서 깨어 고개를 들자 원혜수와 우정민이 서로를 보며 주춤하는걸 볼 수 있었다. 아마 나에게 오려고 하다가 동시에 만난 모양이다. “먼저 말해.” “…실례할게요.” 둘은 잠시 동안 서로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곧 우정민이 한 걸음 물러서자, 원혜수는 까닥 머리를 숙이며 내 앞으로 다가섰다. “클랜 로드. 포로들의 신원 파악이 끝났어요. 남자 세 명에 여자 한 명. 동부 도시, 에덴의 대표 클랜 달밤의 척살 조로 활동하던 사용자들인 것 같아요.” “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전원 목숨에 지장은 없지만, 마력 회로는 파괴된 상태에요. 그리고 여자는…. 정신적인 충격이 심한 듯 보이고요.” “…그렇군요. 일단 목숨에 지장은 없다니 도시로 데려가는 걸로 하겠습니다.” 말하는 내내 원혜수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러나 마지막에서, 나는 그녀가 주먹을 꾹 쥐는걸 놓치지 않았다. 이윽고 원혜수는 주먹 쥔 손을 내게로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자, 손바닥 위로 얼음 빛이 감도는 통신용 수정구가 툭 떨어졌다. “그리고 본 지부에서 연락이 왔어요. 사용자 정하연이 클랜 로드에게 급히 보고할게 있다고 하네요.” “알겠습니다.” 원혜수는 그 말을 끝으로 포로들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이내 천천히 걸어가는 그녀를 보다가, 나는 우정민을 응시했다. 그는 조용한 눈길로 원혜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수정구를 만지고 있자, 우정민은 곧 시선을 떼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회합니까?” “예, 예?” “그녀가 척살 조원으로 활동하는걸 후회하냐는 뜻이었습니다.” “아…. 그건 아닙니다. 저는 혜수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설령 조금 문제가 있더라도….” 우정민은 잠깐 쓰게 웃고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척살 조원으로 활동한 이후 혼자서 괴로워하는 게 많이 줄어들었으니까요. 아마 이렇게 계속 복수를 하다 보면, 언젠가 혜수의 응어리진 마음도 풀리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응어리진 마음이 풀린다? 나는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요. 사용자 우정민.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겁니다. 아까 정찰 조와 만났을 때도 보았듯이, 그녀는 살해한 부랑자를 조각조각 해체하며 기뻐했습니다. 이대로라면 응어리진 마음이 풀리는 게 아니라, 더욱 안 좋은 방향으로 나갈 수도 있습니다.” “…한 번 지켜보겠습니다.” “사용자 우정민만 원한다면, 이번을 마지막으로 그녀를 조원에서 제외하겠습니다.” 우정민은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다. 괜찮다는 투로 말하기는 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가 그늘지어 있었다. 1년 전, 원혜수는 극적으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어떤 점이 계기를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느 순간 문득 정신이 돌아온 것이다. 우정민 입장에서는 응당 기뻐해야 할 일이었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모든 기억이 돌아온 원혜수는 거의 몇 달 동안이나 괴로워했다. 그렇게 예뻐하던 아이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하루하루 울부짖는걸 멈추지 않았다. 그런 원혜수가 정신을 차린 건, 우정민이 척살 조원으로 활동한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아차렸을 때였다. 원혜수는 복수심으로 불타는 눈으로 나를 찾아와 자신도 척살 조원으로 활동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처음에는 실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나, 여인의 복수심은 얕볼게 아니었다. 원혜수는 그 후로 눈에 불을 키고 수련을 시작했고, 단시간에 사용자 정보를 급상승시킨 것이다. 하여 원혜수가 우정민과 동반해 다시 한 번 참가를 부탁함으로써, 그녀는 척살 조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뭐…. 나야 상관없지만.' 사실 척살 조원으로서 원혜수의 행동은 딱히 흠잡을 거리가 없었기에, 나는 더는 간섭 않고 둘의 문제로 남겨두기로 했다. 우정민은 씁쓸한 기색으로 입맛만 다시다가, 뭔가 생각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클랜 로드. 그림자 여왕님의 전언입니다. 클랜 로드 말씀대로 부랑자의 기척이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다른 지역도 돌아보고 5분 후에 돌아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통신을 받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지금 받으려고 했습니다.” 일단은 보고가 우선이니까. 나는 가볍게 웃어넘긴 후 원혜수가 전해준 통신용 수정구를 들었다. 사늘한 빛이 감도는 수정에 하연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하연? 급히 보고할게 있다고 들었는데요.” (수현…. 큰일났어요.) 다짜고짜 큰일이 났다는 말에 순간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하연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평소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는 만큼, 절대로 가벼운 일은 아니리라.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말씀해보세요.” (실은….) 하연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상황 설명을 들은 순간,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현이랑 한결이가 용이 잠든 산맥으로 들어갔다고요? 그리고, 현이가 실종됐다고요?” (캐러밴의 의뢰를 받아서….) “그게 지금 말이나 됩니까? 제가 분명 용이 잠든 산맥은 탐험할 생각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관심도 두지 말고, 관련 의뢰도 받지 말라고 했는데…!” (…미안해요. 제가 더 강하게 말리지 못했어요.) 이내 눈을 꼭 감는 하연을 보며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우정민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걸 알아차렸는지, 순식간에 뛰어가기 시작했다. 아마 고연주와 선유운을 부르러 가는 것 같았다. 나는 한동안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재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지금은 왜 갔느냐 소리를 지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한 시라도 빨리 상세한 상황을 파악하고 두 명을 구조하는 게 급선무였다. 나는 자꾸만 높아지려는 목소리를 억지로 억눌렀다. “한결이는요.” (돌아오긴 했는데…. 상태가 많이 이상해요.) “혹시 하루의 절반을 잠으로 보내고, 깨있는 시간은 멍하지 않습니까?” (…네? 마, 맞아요.) “몸이 차갑고, 시간이 지날수록 심장 고동 소리가 약해지지는 않습니까?” (어, 어떻게….) '염병할.' 나는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그리고 벌떡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조용해진 척살 조원들은 하나같이 놀란 눈길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용자 정하연. 이 일에 대한 건 나중에 묻겠습니다. 설마 벌써 다른 클랜원들로 구조대를 보내지는 않았겠지요?” (네. 지금 출장 나간 클랜원들을 제외하고 전원 대기 중이에요.) “불행 중 다행이군요. 그러면 제가 지금 바로 본 지부로 귀환하겠습니다. 그리고 출장 나간 인원들도 모조리 불러들이세요. 특히 비비앙과 안솔은 무조건 불러야 할겁니다.” (오시기 전까지 모든 준비를 끝내놓겠어요.) 하연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나는 바로 통신을 끊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남다은이 조심스런 얼굴로 다가와 팔을 잡았다. “오빠…. 무슨 일이에요?” “…안현과 한결이 목숨이 위험해.” “네?” “설명은 나중에. 지금 바로 귀환해야 할 것 같다. 최대한 빠르게 돌아갈 거니까, 모두 단단히 준비하도록.” 남다은 역시 크게 놀란 듯 보였지만, 이내 신속히 척살 조원들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 또한 얼른 떠날 준비를 하며 용이 잠든 산맥에 대하여 생각했다. 용이 잠든 산맥. 1회 차 시절 공략을 위해 도전한 무수한 클랜들을, 무수한 사용자들의 무덤이 된 산맥. '그 장소는….' 결국 안정화에는 성공했지만, 정작 공략에는 실패한 곳이었다. ============================ 작품 후기 ============================ 부랑자 척살 조원 : 김수현, 우정민, 선유운, 김동석, 사샤 펠릭스, 고연주, 남다은, 원혜수, 박다솜, 비비앙(현재 출장 중). 김동석과 박다솜은 신입입니다. 둘 다 뮬에서 김수현과 인연을 맺은 이들입니다. 김동석은 외팔이 사용자며, 박다솜은 부랑자에게 당하는걸 김수현이 구해준 내용이 있습니다(물론 김수현은 그대로 버리고 갔지만요.).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고연주(8년 차) 2. 클래스(Class) : 그림자 여왕(Secret, Queen Of Silhouette,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AA - Double A) 5. 진명 • 국적 : 한 밤 칠흑 색 실루엣을 남기는 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9) 7. 신장 • 체중 : 169.4cm • 56.7kg 8. 성향 : 중용 • 혼돈(True • Chaos) [근력 90(+1)] [내구 90] [민첩 97] [체력 90(+3)] [마력 93] [행운 82] < 업적(7) > * 고연주의 업적은 원래 5개였습니다. 그 후 2개가 추가되어 7개입니다. < 고유 능력(1/1) > 1. 유혹의 눈동자(Lure Eyed)(Rank : S Plus) < 특수 능력(1/1) > 1. 심연의 무리(Abyss Crowd)(Rank : S Plus) < 잠재 능력(3/3) > 1. 그림자 단검술(Rank : EX) 2. 기척 차단(Rank : S Zero) 3. 검은 그늘(Rank : S Plus) <최근 능력치 비교> (변경 전) [근력 89] [내구 90] [민첩 97] [체력 87] [마력 93] [행운 82] (변경 후) [근력 90(+1)] [내구 90] [민첩 97] [체력 90(+3)] [마력 93] [행운 82] 『권능 : 어둠 그림자』 *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남다은(7년 차) 2. 클래스(Class) : 검후(Secret, Queen Of Sword,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AA - Double A) 5. 진명 • 국적 : 검의 여왕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7) 7. 신장 • 체중 : 168.5cm • 48.5kg 8. 성향 : 냉정 • 순정(Cool • Pure Love) [근력 93] [내구 80(+2)] [민첩 95] [체력 91] [마력 94] [행운 93] < 업적(2) > < 고유 능력(1/1) > 1. 여왕은 절대로 손에서 검을 놓지 않는다.(Rank : EX) < 특수 능력(1/1) > 1. 직절(直切)(Rank : A Plus Plus Plus) < 잠재 능력(3/3) > 1. 여왕의 긍지(Rank : S Zero) 2. 신검합일(Rank : A Plus Plus) 3. 검의 가호(Rank : A Minus) <최근 능력치 비교> (변경 전) [근력 93] [내구 78] [민첩 95] [체력 91] [마력 94] [행운 93] (변경 후) [근력 93] [내구 80(+2)] [민첩 95] [체력 91] [마력 94] [행운 93] 『권능 : 여왕의 위엄』 * < 거주민 정보(Native Status) > 1. 이름(Name) :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2. 클래스(Class) : 키메라 연금술사(Rare : Chimera Alchemist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AA - Double A) 5. 진명 • 국적 :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의 주인 • 홀 플레인 6. 성별(Sex) : 여성(27 • 128[?]) 7. 신장 • 체중 : 165.5cm • 48.8kg 8. 성향 : 중용 • 피 가학적 변태(Neutral • A Masochist) [근력 51] [내구 52] [민첩 58] [체력 47] [마력 94] [행운 74] < 업적(3) > < 특수 능력(1/1) > 1. 66 마수 군단의 지배자(Rank : S Plus) < 잠재 능력(4/4) > 1. 연금 마법(Rank : S Plus) 2. 정통 마법(Rank : A Zero) 3. 마법 진지 구축(Rank : A Plus Plus Plus) 4. 물약 제작(Rank : A Minus) <최근 능력치 비교> (변경 전) [근력 48] [내구 50] [민첩 56] [체력 45] [마력 92] [행운 74] (변경 후) [근력 51] [내구 52] [민첩 58] [체력 47] [마력 94] [행운 74] 검수하다 보니 너무 길어졌네요. 사샤 펠릭스, 원혜수, 김동석, 박다솜은 내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0434 / 0933 ---------------------------------------------- 분노. 시작은 사소했다. 서부 도시에 자리한 어느 클랜에서 서쪽 미개척 지역으로 탐험을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괴물과 전투를 벌이다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고, 부랑자에게 습격을 당했을 수도 있고, 함정에 빠졌을 수도 있으니까. 아무튼 사소하다. 개개인에게는 목숨이 달린 커다란 일일지 몰라도,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에서는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사소했던 사건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크기를 키워가기 시작했다. 실종을 확신한 피해 클랜에서는 도시의 대표 클랜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인 대표 클랜은 1차 구조대를 결성해 미개척 지역으로 파견했다. 하지만 그들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대표 클랜은 더욱 규모를 늘려 2차 구조대를 결성했고 다시 파견을 보내었다. 그러나 그들 또한 산맥에 진입한 후,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그들 또한 돌아오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대표 클랜에서는 비로소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사용자들도 한 명 두 명 이 사소한 사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아니. 이제 더는 사소한 사건이 아니었다. 일반 캐러밴도 아니고, 정규 클랜에서 결성한 구조대가 모조리 연락이 끊겼으니. 결국 대표 클랜에서는 자력으로 이 사건을 해결하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해당 사건을 북 대륙 전역에 공개하기에 이른다. 사용자들의 관심을 끌어 자발적인 도움을 유도한 것이다. 사용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근 2년 동안 유적은커녕 유적의 코빼기도 구경 못한 북 대륙의 사용자들이었다. 왜냐하면 남부 도시 모니카에 자리한 어느 한 클랜에서, 남은 유적이란 유적은 싹 발굴해 쓸어갔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오랜만에 대두된 뭔가 수상한 기운이 감도는 미개척 지역은, 사용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 이후로 북 대륙에 간만에 유적 열풍이 불었다. 고어를 익힌 사용자들이 갑작스레 우대받기 시작했다. 물론 한때에 불과한 주목이었지만,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사건이 일어난 지역에 대한 자료를 찾고 조사했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해당 지역에 얽힌 신화가 적혀있는 기록이 밝혀졌다. 그 기록은 고대 홀 플레인에서도 아득한 옛 시대의 전설을 적어놓은, 말 그대로 신화에 대한 기록이었다. 대 전쟁. 한때 전 대륙을 지배한 용들과 그들을 추앙하고 받은 거주민들. 그리고 용들의 지배에 반발해 독립 전쟁을 일으킨 거주민들. 해당 지역은 용과 거주민들이 마지막 전투를 벌인 영역으로,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가 최후를 맞이한 장소였다. 추후 세상의 주도권을 찾은 거주민들은 그곳을 '용이 잠든 산맥'으로 불렀다. 그럴듯한 신화가 담긴 기록이 나오자 사용자들은 더욱 흥분했다. 기록에 적힌 내용으로 비추어, '뭔가 수상한 지역'에서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 따라 모든 사용자들이 '용이 잠든 산맥'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목숨이 아까운 사용자들은 침묵했지만,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용자들은 재빠르게 원정대 및 캐러밴을 조직했다. 누가 먼저 유적을 발굴할세라 성급히 탐험을 떠났다. 보다 차분한 사용자들은 돌아가는 사태를 주시했다. 조용히 해당 지역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고 모으며 힘을 비축했다. 그리고 이제 가능하겠다는 확신이 들은 순간, 탐험을 떠났다.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처참한 현실이 다가왔다. 생환율 10.2%. '용이 잠든 산맥'에 도전해 살아서 돌아온 사용자들의 통계를 나타낸 수치였다. 바꾸어 말하면, 탐험을 떠난 사용자들 중 89.8%에 달하는 사용자들이 돌아오지 못했다는 소리였다. 그나마 생환한 10.2%도 유적 탐험이 아닌, 산맥 초입에 대한 정보를 모으러 떠난 사용자들이 돌아온 수치였다. 즉 내부 깊숙이 들어간 사용자들의 생환율은 0%였다. 이러한 극악의 생환율이 발표됐음에도 불구하고, '용이 잠든 산맥'에 대한 사용자들의 관심은 식을 생각을 안 했다. 비록 처음처럼 멋모르고 탐험을 떠나는 일은 없어졌지만, 일확천금의 꿈을 버리지 못한 사용자들로 인해 산맥으로 떠나는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열풍이 시작된 지 몇 달이 흐른 지금. '용이 잠든 산맥'은, 여전히 미 공략된 상태로 남아있었다. * “설마 머셔너리에서도 실패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용이 잠든 산맥이 확실히 어렵기는 한가 봐.” “글쎄. 아직 머셔너리에서 실패했다고 단정짓기는 이르지 않을까? 듣기론 어떤 어중이떠중이 캐러밴의 의뢰를 받아서 간 거라는데? 탐험을 하려고 간 게 아니라, 보호 명목으로.” 막 계단을 내려오던 수정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설핏 아래층을 내려다보자, 창가 테이블에 앉은 두 남녀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수정은 조용히 청력을 높였다. “그런가? 요즘 나오는 기록들 보면 거의 절반이 머셔너리 클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더라고. 의뢰 실패나 기공창술사의 실종 등등. 태반이 부정적인 기록이야.” “그거야 잘나가는 클랜이니까 그렇지. 솔직히 머셔너리가 유적을 싹 쓸어갔을 때부터 곱게 보지 않은 사용자들이 많았잖아? 배알이 꼴린 거야. 그러다 이번에 건수 하나 잡은 거고.” “헤헤. 나도 실은 그런데. 좋은 건 나눠 먹어야 하는데, 자기들이나 동맹 클랜들끼리만 나누는 꼴을 보니까 배 아프더라.” “거봐. 그럴 줄 알았어. 그리고 좋은 걸 왜 나눠 먹어야 해? 엄연히 본인들 능력인데 뭐라고 할 건더기가 없지. 하여간 우리나라 사람들, 남 잘되는 꼴은 못 본다니까.” 여인이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핀잔을 주자, 사내는 헤헤 웃으며 머쓱히 머리를 긁었다. 이어서 한동안 얘기를 나누던 두 남녀는 곧 다정한 연인처럼 팔짱을 끼어 문으로 향했다. 딸랑. 이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얼어붙었던 수정의 머리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연인이 앉아있던 창가의 테이블은 어느새 휑뎅그렁이 비어진 상태였다. “하….” 문득, 수정은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억지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때였다. 딸랑, 딸랑! “어. 언니? 수정이 언니!” 다시 요란스레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수정의 귓가를 때렸다. 수정은 의아한 기분으로 문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시선을 확인한 순간, 망연했던 눈동자에 미약한 활기가 일었다. “희선아…?” “언니!” 수정이 나직이 이름을 부르자 희선이라 불린 여인은 금세 다가왔다. 그리고 수정을 와락 끌어안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언니…. 미안해요…. 소식 들었어요…. 미안해요….” “왜 네가 미안해…. 다 내 잘못이지….” “하지만 제가 괜한 부탁을 해서…. 언니 동료들이 전부….” “괜찮아. 괜찮으니까 우리 일단 앉자. 울지 말고. 응?” 그래도 눈물은 그치지 않아, 수정은 희선을 부드러이 달래며 창가 테이블로 끌어 앉혔다. 이윽고 수정은 남은 자리에 마주앉은 후 아직도 훌쩍이는 희선을 응시했다. 송희선. 올해 2년 차 사용자로, 현대에서 배우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사용자였다. 또한 수정과는 통과의례를 함께 끝마친 동료였는데, 서로 마음이 잘 맞아 언니 동생으로 지내는 사이이기도 했다. 둘은 홀 플레인에 입장해서도 함께하기로 약속했지만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길이 엇갈리고 말았다. 엄밀히 말해서 수정과 희선의 아카데미 성적은 평균에 못 미치는 정도였다. 비 전투 사용자까지는 아니지만 클랜에서 군침을 흘릴 만큼 뛰어난 사용자 정보를 갖추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사용자 아카데미 수료 후, 수정이 어떤 클래에서도 오퍼를 받지 못한 것에 비해 희선은 '남부 자유 연합(여러 중견 클랜들이 모여 창설한 하나의 대규모 연합)'이라는 내로라하는 대형 클랜에서 오퍼를 받게 되었다. 일견 듣기로는 연합 쪽에도 배우 출신 사용자가 있는데 인맥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렇게 둘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지만 연락은 꾸준히 유지했다. 수정은 희선을 거의 은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처음 홀 플레인에 나왔을 때는 앞이 막막했는데, 희선의 헌신적인 희생으로 적잖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돈이 없을 때는 있는 돈을 털어 보내주었고, 기초적인 무기나 방어구도 마련해주었다. 이따금 간단한 사냥 정보도 슬쩍슬쩍 흘려주어, 수정과 동료들이 소정의 성과를 얻도록 유도해주기도 했다. “초입에 살짝 들어갔다 나오는 건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혹시 몰라서 머셔너리 클랜에 의뢰해 호위대로 붙인 건데…. 다 제 잘못이에요…. 흑….” “아니라니까. 그동안 네가 얼마나 우리를 도와줬니? 나도, 그리고 동료들도 절대 너를 원망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통과의례 때, 다들 저한테 잘해주셨던 걸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파요….” “희선아….” 결국 다시 눈물을 터뜨리는 희선을 보며 수정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사실 이번에 수정이 캐러밴을 잃은 시발점은 부탁 때문이었다. 두 달 전, 수정은 희선을 만나 캐러밴 활동 자금이 부족하다고 어렵사리 부탁한적이 있었다. 희선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갑작스러운 이야기를 꺼냈다. '언니. 자금을 드리는 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언제까지 캐러밴으로 활동하실 거예요?' '으, 응? 글쎄. 나도 클랜에는 들고 싶지만.' '차라리 이번 기회에 캐러밴 생활을 청산하고 우리 클랜에 들어오는 건 어때요? 솔직히 캐러밴 생활, 많이 위험하잖아요.' '너희 클랜에? 어, 어떻게?' 수정이 지대한 관심을 보이자, 희선은 자신이 속한 남부 자유 연합이 곧 '용이 잠든 산맥'을 탐험할 예정이라 털어놓았다. 하여 지금 산맥에 대한 여러 자료나 정보가 필요한데, 수정의 캐러밴에 직접 산맥을 조사해달라고 부탁해온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이번 성과를 빌미로 클랜 로드에게 부탁해보겠다고. 항상 클랜 생활을 꿈꾸었던 수정으로서는 거절하기 어려운 부탁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희선이 헌신적으로 도와준 점도 있거니와, 산맥 초입만 살짝 들어가 대강 정보를 구해다 주는 정도도 괜찮다고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클랜 로드가 희선과 현대에서 아는 사이였다고 하니 가입에 대한 가능성 또한 높다고 여겼다. 물론 '용이 잠든 산맥'의 위험성이 알려진 만큼, 캐러밴 내부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희선이 엄청난 금화를 꺼내며 '그럼 머셔너리 클랜에 의뢰해 호위를 붙이는 건 어떨까요?'라고 대안을 내놓자, 반대의 목소리는 곧바로 사그라졌다. 머셔너리 클랜. 여태껏 맡았던 의뢰에서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클랜인 만큼, 그들의 명성은 북 대륙 사용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실제로 '기공창술사'와 '신의 방패'의 참가가 확정되자 반대하던 동료들도 하나 둘 찬성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수정은 쓰게 웃었다. 그리고 앞을 쳐다보자 눈을 쓱쓱 닦고 있는 희선이 보였다. “언니…. 머셔너리 클랜에서는 연락이 없어요?” “응. 지난번에 찾아가고 일주일이 흘렀는데, 아직 연락이 없네.” “그래요? 이상하네…. 그쪽에서는 왜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거야. 언니. 귀환까지 안전하게 책임지겠다는 조항은 확실히 넣었죠?” “아…. 응. 준비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나 봐. 나하고 약속했으니까, 곧 소식이 오겠지.” “아니요. 안 되겠어요. 이대로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제가 한 번 가서 얘기해볼게요.” “그러지마. 네 위치를 생각해야지. 나야 그냥 일반 사용자지만 너는 아니잖아. 그냥 내가 오늘 다시 한 번 가볼게.” 수정은 분연히 몸을 일으키는 희선을 뜯어말렸다. 혹시라도 희선의 과한 태도에 문제가 터져 양 클랜간 불화가 생기면 어쩌나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왕 벌어진 일, 더는 희선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결국 기어이 가겠다는 걸 몇 차례를 더 말리고 나서야, 수정은 희선을 간신히 돌려보낼 수 있었다. 잠시 후, 수정은 희선이 워프 게이트로 들어가는걸 확인하고 나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어쩌면 스스로 생각해도 반은 포기하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더 가보자.' 수정은 심란한 마음을 다듬으며 억지로 힘을 주어 발길을 돌렸다. 목적지는 머셔너리 클랜 하우스였다. * 수정은 금세 머셔너리 하우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주변에 워낙 지부가 많아 본부를 찾는데 애를 먹었는데, 몇 번 와본 만큼 이제는 길이 익숙한 편이었다. “저기….” 수정은 조심스레 정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선 순간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조용하다. 항상 보이던 보초도 없으며 올 때마다 활기가 넘쳤던 정원도 오늘따라 적막하기 그지없다. 최근에 왔을 때는 건물이나 정원의 규모에 감탄하면서도, 같은 클랜원이 실종됐는데 이렇게 활발해도 되는지 이해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다르다. 머셔너리 하우스 전체에 고요한 침묵과 긴장감이 한껏 감돌고 있었다. 수정은 까닭 없이 주눅이 들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 문고리를 살짝 잡으며 침을 삼켰다. 갑작스레 목이 바짝 타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수정은 조용히 입을 열며 문을 열었다. “실례합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선 순간, 수정은 다시 한 번 흠칫하고 말았다. 한 걸음 내디디자마자 수십에 다다르는 시선이 일제히 쏟아졌기 때문이다. “…저 사용자는 누구야?” “아씨. 지금 온 줄 알고 깜짝 놀랐네.” 1층의 로비에는 가히 수십에 다다르는 사용자들이 오와 열을 가지런히 맞춘 채 서 있었다. 하나같이 번쩍거리는 장비와 심상찮은 기도를 풍기는 게,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듯한 모습이었다. “그, 그게. 저는….” 수정은 한껏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다가, 반사적으로 카운터를 쳐다보았다. 일단 볼 일을 해결하려면 카운터에 말을 하는 게 첫 순서였다. 이내 카운터에 앉은 고용인과 시선을 마주쳤을 때, 수정은 그녀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는걸 볼 수 있었다. 마치 “또 왔어.”라고 말하는 듯한, 귀찮은 티가 팍팍 풍기는 한숨이었다. 순간 속에서 분연히 오기가 솟아 수정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속으로 자신은 어디까지나 의뢰인이라는 사실을 새긴 후, 좌우로 시립해있는 사용자들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쾅! 문을 거칠게 밀어젖히는 소리와 함께 로비에 있던 모든 사용자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용인의 시선 또한 더는 수정을 향하지 않았다. 무시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깜짝 놀란 얼굴로 벌떡 몸을 일으킨 것이다. 하여 수정도 얼른 뒤를 돌아보자, 곧 입구로 척척 걸어 들어오는 열 명 남짓한 사용자들을 볼 수 있었다. 호흡이 과하게 거칠고 복장에는 먼지가 잔뜩 묻어있는 게, 뭔가 급하게 달려온 모양새였다. 이윽고, 가장 선두에 있던 사내가 주변을 쭉 훑으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모두 모였군요.” 낮고, 차가운 음색이었다. 신속히 주변을 훑던 사내의 시선은 이내 멀거니 서 있는 수정에 이르러 멈추었다. 수정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다시 조심스레 떠 사내를 응시했다. “이 사용자는….” 그리고 착 가라앉은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문득 온몸으로 까닭 없는 소름이 끼쳤다. ============================ 작품 후기 ============================ 프롤로그가 끝났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사슬 구조의 시작입니다. 솔직히 조금 걱정이 됩니다. 여러 터뜨린 사건을 나중에 하나로 종합해야 하는데, 제가 과연 잘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하하. 그래도 최대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독자 분들께 감히 한 가지 부탁이 있다면, 이제부터 등장하는 인물들을 조금만 주의 깊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면 이번 회의 경우는 '송희선'이 되겠지요. 이번 파트는 단순히 안현, 한결을 구하고 공략이 끝이 아니라, 그 후의 사건과도 연계되는 파트입니다. 아무튼, 좋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D PS. 1월 11일(토요일), 1월 12일(일요일)에 큰집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설에 가는 일정을 앞당겼습니다. 일단 아버지께 안 가면 안되냐고 말씀은 드려봤는데, 절대로 안 된다고 하시네요. 작년 추석 때는 학업과 소설 때문에 이해했지만, 지금은 안 갈 이유가 없다고 하시니 할 말이 없더군요. 아무튼 오늘 하루 더 얘기하고, 다음 회에 자세한 내용을 공지하겠습니다. < 거주민 정보(Native Status) > 1. 이름(Name) : 사샤 펠릭스(Sasha Felix) 2. 클래스(Class) : 피의 군주(Secret, Blood Monarch,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AA - Double A) 5. 진명 • 국적 : 피의 군주 • 펠릭스 6. 성별(Sex) : 남성(129) 7. 신장 • 체중 : 183.3cm • 65.4kg 8. 성향 : 혼돈 • 푼수(Chaos • Idiot) [근력 53] [내구 67] [민첩 78] [체력 84] [마력 95] [행운 51] < 업적(2) > < 고유 능력(1/1) > 1. 펠릭스의 이름으로(Rank : S Zero) < 특수 능력(1/1) > 1. 뱀파이어의 유혹(Rank : A Minus) < 잠재 능력(3/3) > 1. 피의 계약 마법(Rank : A Plus Plus Plus) 2. 안개화(Rank : S Zero) 3. 흡혈(Rank : B Plus) <최근 능력치 비교> (변경 전) [근력 53] [내구 67] [민첩 78] [체력 84] [마력 93] [행운 51] (변경 후) [근력 53] [내구 67] [민첩 78] [체력 84] [마력 95] [행운 51] 『권능 : 혈인』 *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원혜수(3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마법사(Normal, Magician, Expert)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AA - Double A) 5. 진명 • 국적 : 복수에 미친 여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8) 7. 신장 • 체중 : 165.6cm • 53.9kg 8. 성향 : 혼돈 • 광기(Chaos • Lunatic) [근력 44] [내구 38] [민첩 47] [체력 43] [마력 91] [행운 56] < 업적(2) > < 특수 능력(1/1) > 1. 피에 젖은 마음(2)(Rank : S Plus) < 잠재 능력(3/4) > 1. 정통 마법(Rank : A Minus) 2. 마법 진지 구축(Rank : A Minus) 3. 마법 회로 응용(Rank : B Plus) 4. - *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동석(5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전사(Normal, Warrior,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AA - Double A) 5. 진명 • 국적 : 배고픈 오뚝이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43) 7. 신장 • 체중 : 175.6cm • 87.3kg 8. 성향 : 쾌활 • 잔혹(Cheerful • Cruelty) [근력 91] [내구 94] [민첩 73] [체력 83] [마력 71] [행운 47] < 업적(2) > < 특수 능력(1/1) > 1. 황소(Rank : A Plus Plus) < 잠재 능력(4/4) > 1. 일격필살(Rank : A Zero) 2. 대지 파괴(Rank : B Minus) 3. 난무(Rank : S Zero) 4. 흘려내기(Rank : C Plus) * 뮬에서 김수현과 함께 했던 외팔이 사용자입니다. 부랑자들의 습격으로 한 팔을 잃었지만, 부랑자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이후 더욱 수련에 정진하여 높은 수준의 사용자 정보를 이루어냈습니다. *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박다솜(4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사제(Normal, Priest,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AA - Double A) 5. 진명 • 국적 : 구밀복검(口蜜腹劒)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5) 7. 신장 • 체중 : 161.4cm • 54.2kg 8. 성향 : 차분 • 복합적 비정상(Douceness • Crazy) * 상반 속성입니다. [근력 26] [내구 43] [민첩 35] [체력 51] [마력 90] [행운 83] < 업적(2) > < 특수 능력(1/1) > 1. 구원의 기도(Rank : B Zero) < 잠재 능력(4/4) > 1. 신성 치료 주문(Rank : A Plus Plus Plus) 2. 성스러운 축복(Rank : A Zero) 3. 피드백(Rank : C Plus) 4. 광화(Rank : A Minus) * 뮬에서 부랑자에게 당하는걸 김수현이 구해준 사용자입니다. 0435 / 0933 ---------------------------------------------- 분노. 수정이 다시 정신을 차린 건, 천장에 드리운 글라스 샹들리에의 은은한 빛과 마주했을 때였다. 멍하니 있던 수정은 이내 '앗.'하는 심정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의뢰인? 그럼 회의에 참가해도 상관없겠지. 들여보내.”라는 말을 언뜻 들은 것 같은데, 어느새 회의실 한 쪽 구석 자리를 차지한 상태였다. 회의실은 매우 넓었다. 대충 세어보니 약 일백 명은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돼 있었다. 비록 채워진 자리는 절반을 넘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자리에 앉은 사용자들의 기도가 수백 명과 맞먹어 오히려 수정의 가슴이 턱턱 막혀올 정도였다. 문득 수정은 오래 전 동료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머셔너리? 꿈도 꾸지마. 거기서 가장 약한 사용자가 다른 클랜에서는 즉시 전력 감이라는데, 설마 우리 같은 사용자를 받아주겠어? 듣기로는 입단 테스트도 장난이 아니라고….' 그때는 설마 그 정도는 아닐 거라며 웃고 넘겼다. 하지만 이렇게 실제로 머셔너리 클랜원들과 마주하자, 수정은 그 말이 진실이었다는 사실을 체감하는 중이었다. 회의실 내부는 옆에 앉은 사용자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한동안 테이블 모서리에 덮인 금장식을 만지던 수정은, 이내 슬그머니 눈을 들어 건너편에 앉은 사용자들을 둘러보았다. 어떤 사용자는 조용히 입을 다문 채, 어떤 사용자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을 한 채, 또 어떤 사용자는 한껏 긴장한 얼굴로 침묵하고 있었다. 다들 각양각색이었지만, 그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누군가를 향하고 있었다. 수정은 천천히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그러자 테이블 끝 가장 상석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한 사내를 볼 수 있었다. '머셔너리 클랜 로드.' 수정은 속으로 사내의 호칭을 되뇌었다. 10강, 검술 전문가, 소드 스페셜리스트 등 사내를 부르는 호칭은 굉장히 많았다. 그러나 가장 많이 쓰이는 호칭은 바로 '머셔너리 클랜 로드' 혹은 '머셔너리 로드'였다. 어떻게 보면 특색 있는 호칭은 아니었지만, 사실 사내에게는 딱히 별다른 호칭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어떤 좋은 칭호보다도, 머셔너리 클랜의 정점에 서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걸 설명할 수 있으니까. 수정은 한참 동안 사내를 응시하다가 갑작스레 눈이 부셔 미간을 찌푸렸다. 사내의 뒤에는 하얀 벽이 없었다. 오직 널찍한 유리만이 있어, 중천에 떠오른 햇살이 한 가득히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이윽고 한없이 감겨있던 사내의 눈이 서서히 떠지기 시작했다. 수정은 본능적으로 테이블 모서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 1층 로비서 시선을 마주쳤을 때처럼, 혹시 다시 소름이 돋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예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수정의 귓가로 차분히 흘러들었다. *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사실 처음 얘기를 들었을 때는 '용이 잠든 산맥'으로 바로 갈까도 생각했지만, 생각을 바꿔 일단 머셔너리 하우스로 오는 길을 선택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으니 일단은 최소한의 상황 파악은 하고 갈 셈이었다. 무엇보다 한결이도 데려가야 하는 만큼 결국 불가피한 선택이나 다름없었다. “어떤 것부터 말씀 드려야 될지 모르겠지만….” 이윽고 회의실 왼쪽에 앉아 있던 하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두 손으로 잡아 내게 내밀었다. 반으로 좁힌 기록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계약서인 듯싶었다. “일단 의뢰 계약서부터 보시는 게 나으실 거예요.” 역시나. 나는 직접 계약서를 받아 들어 접힌 부분을 펼쳤다. 그리고 바로 아래 부분을 확인하자 하단에 선명히 찍힌 검과 방패가 엇갈려있는 문양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머셔너리 클랜을 대표하는 문양으로서 클랜 로드의 권위를 상징하는 문양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결국 하연의 재가가 들어갔다는 소리였다. 나는 나직이 숨을 흘리며 하연을 응시했다. “사용자 정하연. 계약서에 머셔너리의 문양이 찍혀 있군요.” “…네.” 그 말이 끝이었다. 하연은 얌전히 대답하고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나는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통신으로는 분명 허락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요.” “네. 저는 의뢰를 받아들이는걸 반대했어요.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결재를 해주었고, 오히려 사용자 백한결을 추가로 넣었죠. 물론 사용자 안현의 동행 요청도 있었지만…. 이번 사건은 완전한 제 잘못이에요.” 서글픈 어조였다. 분명 하연도 억울한 부분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인데, 그녀는 스스로 잘못을 시인했다. 어떤 처벌이라도 받아들이겠다는 모습이었다. 나는 지긋이 입술을 물었다. 어느새 눈을 뜬 하연은 투명한 눈동자로 나를 보고 있었다. 구구절절 변명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좋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녀가 허락해줄 수밖에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그만큼 하연을 믿고 있었으니까. 가슴속에 연신 갑갑함이 차올라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나는 다시 계약서를 내려다보았다. 일단은 계약 내용부터 정확히 알아볼 생각이었다. '응?' 차분히 기록을 읽어내려 가던 도중 2번 조항에서 눈길이 멈췄다. 2번에는 의뢰의 주 목적이 적혀있었는데, '용이 잠든 산맥'의 완전 공략이 아닌 초입에 관련된 정보를 모은다는 조항이 적혀있었다. '초입이라면….'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일순간 그저 갑갑하기만 했던 가슴속에서 어슴푸레한 의문이 조금씩 일어나는 게 느껴졌다. 1회 차 시절을 경험했던 만큼, '용이 잠든 산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편이다. 그리고 나 또한 산맥의 내부 탐험에 참가한 적도 있었고. '용이 잠든 산맥' 자체가 어렵기는 하지만, 정확히 말해보면 안으로 들어갈수록 난이도가 높아지는 구조를 갖고 있다. 여기서 내가 겪은 경험으로 비추어보면, 안현과 한결이 당했다는 건 약간 고개가 기울어지는 사실이었다. 안현은 근 2년 동안 머셔너리에서 가장 많은 성장을 이룬 사용자고, 한결은 방어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능력을 지닌 사용자였다. 하연은 끝에 가서 허락을 했고, 안현의 동행 요청에 한결을 추가로 넣었다고 했다. 그것도 허락해준 것은, 아마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안현의 생환율을 높이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할진대, '기공창술사'와 '신의 방패'가 고작 초입에서 당했다? 아니다. 장담컨대 둘의 사용자 정보나 경험을 생각하면 초입에서 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초입'에 한정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둘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니, 나는 일단 다음 의문으로 생각을 옮겼다. 또 하나의 의문은 바로 의뢰 비용. 1층 로비에서 김수정의 사용자 정보를 보았을 때도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2년 차라고는 하지만, '용이 잠든 산맥'의 공략에 도전할 만큼의 사용자 정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단 방금 읽은 2번 조항으로 인해 의문이 일부 해소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의문은 남아있었다. 머셔너리 클랜의 의뢰 비용은 굉장히 비싼 편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캐러밴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데, 당장 김수정의 허름한 장비나 복장만 봐도 돈이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차라리 자기들끼리 갔으면 일확천금에 눈이 멀었다고 이해라도 했을까? 하지만 그들은 완전 공략도 아닌 겨우 초입을 탐험하면서 이 값비싼 의뢰 비용을 지불했다. '도대체 무얼 위해서?' 모르겠다. 뭔가 감이 잡히기는 했는데, 확실한 그림이 그려지는 게 아닌 희미하게 보이는 기분이었다. 조금 더 생각하고 싶었지만, 나는 바로 상념에서 깨어났다. 지금으로서는 이것저것 따질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을 지체할수록 안현과 한결의 생존 가능성이 낮아진다. 일단 전후 상황 파악은 끝냈으니 이제는 눈앞에 직면한 불을 끄러 가야 할 때였다. 내부 정리는 그 다음의 일이었다. 머셔너리 클랜의 총 소집령. 오직 나에게로만 쏟아지는 클랜원들의 무수한 눈길들. 그 시선들을 받으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상황이 급하니 긴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하연을 응시했다. “사용자 정하연. 출발 준비는 끝내놨으리라 믿습니다. 지금 밖으로 나가서 한결이를 데려오세요. 바로 구조대에 참가할 인선을 발표를 할 생각입니다.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곧 나가겠습니다.” 하연은 차분히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빠르게 발걸음을 놀려 회의실을 나섰다. 아마 머리가 영리한 하연이라면 방금 내 말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이번 인선에서 제외했다는 사실과 회의실을 나간 사실. 그리고 내가 일말의 배려를 해주었다는 것도. 그럼에도 조금도 변명을 하지 않는 건, 이미 자신도 마음의 정리를 했다는 뜻이리라. 다음으로 나는 예고한 인선 발표를 시작했다. 이미 오면서 참가할 인원을 생각해둔 터라, 딱히 고민할건 없었다. “방진을 기준으로 말하겠습니다. 선두는 저와 사용자 차소림, 남다은, 허준영. 궁수는 사용자 선유운, 임한나. 마법사는 사용자 김한별, 비비앙. 사제는 사용자 안솔, 신재룡. 그리고 지원 전투로 사용자 고연주, 우정민입니다. 지금 호명한 열한 명은 바로 회의실을 나가서 개인 정비를 마치세요. 최대한 빠르게 끝내고 정문 앞으로 집결해주시면 됩니다.” 자신들도 급한 상황을 인식했는지, 말이 끝나자마자 11명의 클랜원들이 동시에 일어나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잠시만요! 클랜 로드님!” 바로 회의를 파하려는 찰나, 뾰족한 목소리가 입을 막았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유정이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저도…. 저도 참가하고 싶어요.” “…너도?” “안현이랑은 통과의례 때부터 함께한 사이에요. 한결이도 오랜 시간 동안 같이 지내왔고요. 이대로 가만히 기다리는 건 싫어요.” “글쎄. 그러려면 너를 지원 전투로 분류해야 하는데, 이미 자리는 찼고. 그렇다고 선두로 넣을 수도 없고. 그냥 가만히 기다리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제발 요. 하라는 대로 할게요. 짐이 되지 않을게요. 저도 구하는데 힘을 보태고 싶고…. 그리고 생각하기는 싫지만…. 만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최소한 둘의 마지막이라도 보고 싶어요.” “…마지막이라.” 나는 조용히 유정의 말을 되뇌었다. 그녀의 얼굴은 매우 절박한 빛을 띠고 있었다. 아마 그동안 남매처럼 지내온 안현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꽤 전전긍긍한 모양이다. 그 순간 나는 문득 의뢰인과 눈을 마주쳤다. 이름이 김수정이라고 했던가? 그녀는 뭔가 멍한 얼굴이면서도 나와 눈을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순간 하나의 방법이 머리를 빛살처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확신'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살짝 고갯짓을 했다. 한나는 금세 내 신호를 알아듣고는 의뢰인을 데리고 회의실을 나섰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유정을 돌아보며 말했다. “좋아. 너도 준비하도록.” 선뜻 허락해주자 유정의 얼굴에 일순 화색이 감돌았다. 그녀는 허리를 꾸벅 굽히고는 나는 듯 달려가 회의실을 나섰다. 잠시 후, 유정이 마지막으로 나가는 걸 확인하고 나서 나도 곧장 몸을 일으켰다. 목적지가 '용이 잠든 산맥'인 만큼 나름의 준비는 할 생각이었다. 이윽고 좌우로 길게 늘어진 테이블 사이로 트인 중앙 통로를 걸으며, 나는 아직 앉아 있는 클랜원 중 한 명에게 입을 열었다. “사용자 조승우.” “예. 클랜 로드.” “인수인계를 준비하세요.” “예…?” 화들짝 놀라는 조승우를 보며 나는 바로 말을 덧붙였다. “이번 구조는 아마 최소 한 달, 최대 두 달은 걸릴 겁니다. 그러니 제가 허락했다고 말을 하고, 사용자 정하연에게 인수인계를 요청하세요. 제가 돌아왔을 때 정식적인 절차를 거치고 바로 업무에 들어갈 수 있도록요.” “제가…. 말입니까?” 놀라지 않는다. 오히려 눈을 형형히 빛내며 되묻는 조승우에게 나는 맞는다는 의미로 머리를 주억였다. '하연은…. 너무 여려. 필요할 때 모질지를 못하니, 이런 일에는 맞지 않아.' 하연의 능력은 인정한다. 선천적으로 영리하고 머리 회전도 빠르며 상황 판단도 뛰어나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해도 하연은 근 2년 동안 머셔너리의 내정을 담당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나 고치지 못하는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분명 시키는 일은 잘 해내지만, 정작 중요할 때 한 번씩 실수가 나온다. 더구나 문제를 알고 있으면서도 막지 못하는 건 결국 부족한 능력이 있다는 소리였다. 말인즉슨, 클랜 로드를 대신하는 자리는 단순히 머리가 좋다고 맡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외부의 상황에 대응하여 내부를 철저히 통제하는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면, 주변 상황을 조율해 자신이 원하는 상황으로 이끌어 나가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하연은 둘 다 이루지 못했다. 즉 그녀는 사용자로서는 일류지만, 클랜 로드로서는 이류에 불과하다. 나는 다시 한 번 조승우를 응시했다. '어떻게 보면…. 성현민 같은 인물이지.' 그런 점에서, 사용자 조승우는 후자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현대에서 제법 커다란 사업을 벌이던 사람이라 그런지, 가입 후 보여준 수완은 꽤나 인상 깊게 남아있었다. 또한 그의 사용자 정보에 나오는 '기회'라는 성향은 생각보다 희소한 성향이었다. 아무튼 즉흥적으로 생각한 인수인계는 아니었다. 다만 적절한 시기를 재고 있었을 뿐. 아무튼 지금껏 할 만큼 했으니 하연도 이제는 조금 쉬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게 좋으리라. 이윽고 문 앞에 다다른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반들반들한 문을 쳐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껏 누누이 말씀 드렸을 겁니다. 행동들을 조심하라고요. 흠 잡힐 행동을 하지 말라고요. 제가 몇 번을 더 말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입이 아프려고 하네요.”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힘을 주어 밀어젖혔다. “오늘 총 소집령을 내리고 이 회의를 개최한 이유는, 클랜원들이 현재 상황을 다시 한 번 주지하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은 상황이 급박해 이렇게 넘어갑니다만….” 이내 문틈이 활짝 열려 나는 복도로 한 걸음 나섰다. 그리고 말했다. “여러분들께 마지막으로 경고하겠습니다. 앞으로 이와 같은 사건이 또 한 번 벌어진다면, 설령 그게 누구든지 간에 책임을 피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리고 몸이 완전히 나서기 전. “또한.” 나는 설핏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말을 매듭지었다. “방금 드린 말씀은, 이번 사건에도 예외가 없을 것입니다.” ============================ 작품 후기 ============================ 많이 늦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곧 군대에 입대하는 동생이 있어, 오늘 약속이 있던 터라 밤 늦게 돌아왔습니다. _(__)_ 아…. 그리고 또 하나의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그러니까 1시간 후인 6시에 큰집으로 내려갑니다. 설날에 내려가는걸 당겨서 내려가는데, 이유를 여쭤보니 아버지 사촌 결혼식이 있다고 하네요. 그래서 결혼식에 참가하고 겸사겸사 큰집에 들를 것 같습니다. 11일 새벽 6시에 내려와서, 12일 밤늦게 돌아온다고 합니다. 하여 12일은 연재가 힘들 것 같고, 13일은 연재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자정 업데이트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13일에는 연재를 하겠습니다. 정리하면, 12일 하루 휴재이며 13일부터 연재 재개합니다. 독자분들의 양해를 부탁합니다. _(__)_ 0436 / 0933 ---------------------------------------------- 용이 잠든 산맥. <회상(Reminiscence)> 한 차례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그 바람에 수많은 사용자들의 머리칼이 너울거리듯 나부꼈다. 한 여인의 칠흑 색 머리칼이 허공에 사르르 흩뿌려지더니 살랑살랑 흔들리며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철혈의 여왕(Queen Of Blood And Iron)' 한소영. 칭호에서 알 수 있듯이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여인이었지만, 지금 여인의 눈동자에는 뜻 모를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인의 시선이 닿은 장소는 해발 고도가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한 평지였다. 그러나 잘 보이지 않는다. 희뿌연 안개로 뒤덮인 분지는 오직 음울하고 음산한 기운만이 흘러나와,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용자들의 발걸음을 붙잡아놓고 있었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이번 바람 역시 서늘했지만 뭔가 느낌이 다르다. 불쾌하고 끈적끈적한 것이 묻어있는 게, 일종의 경고처럼 느껴지는 바람이었다. 마치 “더 이상 다가오면 죽는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잠시 후, 한 사내가 여인의 옆으로 다가섰다. 약간은 빛이 바랜 체인 메일을 걸친 사내는 양손으로 커다란 도끼를 힘껏 움켜잡고 있었다. 그러나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한두 방울 땀이 배어져 나오는 게, 사내 역시 무척이나 긴장한 듯싶었다. 이윽고 사내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클랜 로드. 소환하신 여왕의 군대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알아. 5분전에 소멸을 확인했으니까.” 여인은 가볍게 수긍했다. 그러나 설마 소멸이라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사내는 눈을 크게 부릅떠 자신의 감정을 내비쳤다. 여인은 부드럽지만, 짧은 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뒤로 정연히 서 있는 클랜원들을 응시했다. 클랜 이스탄텔 로우. 북 대륙에 퍼진 명성만큼이나 강력한 실력을 지닌 그들이었지만, 지금 보이는 얼굴은 여인이나 사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아니. 오히려 간간이 공포심마저 보이는 게, 눈앞 분지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에 짓눌린 모습이었다. “…그냥 돌아가야 하는 걸까?” 일말의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였다. 여인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안타까운 눈빛으로 분지를 응시했다. 고생에 고생을 거듭해 이곳까지 왔는데 그냥 몸을 돌리기에는 아깝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지, 사내는 침착히 머리를 저으며 여인을 달랬다. “클랜 로드. 사용자 정창민의 마지막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숨을 거두면서까지 안으로 들어가는걸 말렸습니다. 비록 여기까지 어찌어찌 오기는 했지만, 유적을 공략하려면 더욱 커다란 희생을 치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사용자 정창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이스탄텔 로우의 클랜원이었으며, 결계를 다루는 능력으로 유명한 사용자였다. 또한 한 번의 실수로 '용이 잠든 산맥'에 먹힌 비운의 사용자이기도 했다. '악랄, 절규, 절망, 살의, 증오 등…. 아무튼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무언가 무척 기분 나쁜 기운이 느껴집니다. 클랜 로드. 실은, 저는 정말로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여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냥 버릇처럼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입술을 짓씹다가 이내 침묵을 깨고 한 마디 입을 열었다. “돌아가자.” 결국 여인의 포기 선언이 떨어졌다. 그리고 완전히 몸을 돌리자 지켜보던 클랜원들은 하나같이 안도한 표정들을 지었다. 그와 동시에, 가장 뒤쪽에 서 있던 한 청년의 입술에서 기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주 늦은 시간이었다. 클랜원들은 오늘 강행군에 지쳐 저녁 식사를 끝내자마자 침낭 속으로 들어갔고, 오직 나와 허준영만이 남아 불침번을 서는 중이었다. 탁, 탁탁! 쪼개놓은 장작을 던져 넣으려는 찰나, 나는 설핏 눈을 돌려 허준영을 응시했다. 잠깐 딴 생각을 하느라 반응이 늦고 말았다. 이내 이글이글 타오르는 모닥불에 장작을 던져 넣자 탁탁, 또다시 불똥이 튀어 오른다. 다시 살아나는 불씨를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입을 열었다. “뭐가. 안현과 한결이를 구하러 가는 게?” “그냥 모두 다. 안현을 구하러 가는 것도, 이런 일에 내가 참가해야 하는 것도.” 이런 일에 참가해야 하는 것도 라. 나는 차분히 허준영을 응시했다. 사내인 주제에 허리까지 기른 기다란 머리칼에는 어두운 보라 빛이 흐르고 있었다. 입고 있는 복장은 검은색 코트 형 메일이었는데, 알 수 없는 문양이 곳곳에 새겨져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다. 허준영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자신의 검을 꺼내 다리에 얹어놓은 상태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를 감도는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어둡다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칼집 채 얹힌 검이 사람보다 따뜻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윽고 내 시선을 느꼈는지, 허준영은 비로소 눈을 열어 나를 마주 쳐다보았다. 머리 색과 마찬가지로 진한 보랏빛을 띤 눈동자였다. “1년 전. 그러니까 내가 막 머셔너리에 가입했을 때,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지.” “1년 전?” 의아히 되물으며, 나는 1년 전 일을 회상했다. 허준영과의 첫 인연은 부랑자 척살 조로 활동했을 때였다. 마침 부랑자들이 은신해있는 장소의 정보가 들어와 척살에 나섰는데, 그곳에 다다랐을 무렵 한 발 앞서 도착해있는 사용자를 볼 수 있었다. 그 사용자가 바로 허준영이었다. 그는 수뇌부 포함 거의 백 명에 가까운 부랑자들과 홀로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그때의 허준영은…. 글쎄. 나름대로 선전하고는 있었지만, 부랑자들의 조직적인 대응에 꽤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여 나와 척살 조는 곧바로 그를 지원했고 동시에 부랑자들을 깡그리 쓸어버렸다. 물론 허준영이 거기서 바로 가입한 건 아니었다. 이후 그는 간단한 감사 표시와 “언젠가 은혜를 갚겠다.”는 말을 남기고 훌쩍 떠났고, 나는 사용자 정보만 기억한 채 발길을 돌렸다. 공교롭게도, 나와 허준영의 재회는 북 대륙의 수호자 이효을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알고 보니 허준영의 정체는 이효을의 손과 발이 되어 음지에서 돕는 역할이었던 것. 그때 부랑자를 처리하러 갔던 것도 이효을의 부탁을 받아 간 것이라고. 당시 이효을은 후계자를 찾아낸 상태였다. 인수인계가 끝나면 바로 수호자를 그만두는 터라, 마찬가지로 허준영과의 계약도 슬슬 끝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여 이효을은 어차피 둘 다 그만두는 거, 머셔너리에서 미리 허준영을 데려가는 게 어떻겠느냐 제안했다. 이후로 나와 허준영은 약간의 이야기를 나누었고, 정식 절차를 밟아 가입하게 되었다. 나야 남다은과 비견될 정도의 사용자 한 명을 얻으니 좋은 일이었고, 허준영도 은혜를 갚을 일이 있으니 보답하겠다는 의미로 가입하게 된 것이다. 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내가 떠올리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허준영은 살짝 답답한 어조로 말했다. “안현 말이다. 1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않은가. 그리고 수습하는데 꽤 곤란을 겪었고.” “아, 그거. 그래도…. 그때랑 지금은 비교도 안 되지.” 싱겁게 웃으며 대꾸하자 허준영은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국에는 비슷한 맥락 아닌가? 그 일이 있은 후로 조금 잠잠해지나 싶더니, 그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또 문제를 일으켰다. 그때도 지금도 네 통제를 따르지 않았다는 말이지.” “그건 그래.” “…그러니까 그냥 이대로 놔두는 게 어떤가? 솔직히 나는 이번 사건으로 놈에게 오만 정이 다 떨어진 상태다. 운이 좋다면 살아 돌아올 것이고, 운이 나쁘다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우리가 굳이….” “그건 안 돼.” 나는 딱 잘라 대답했다. 그리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둘을 구하기로 결정했고, 구조대는 벌써 이만큼이나 왔어.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나는 마음을 바꿀 생각도 발길을 돌릴 생각도 없어. 돌아가려면 너 혼자 돌아가.” 탁탁! 탁탁! 돌연히 거세어진 불길에서 세찬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불똥에 맞았는지, 허준영은 살짝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건 싫다.” “용이 잠든 산맥은 위험한 지역이야. 서로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벌써부터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곤란해.” “그냥 생각일 뿐이었어. 생각해보니 한결이도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들어가야겠군.” “불가피한 일이지.” 나는 쓰게 웃었다. 조금 전 말은 허준영의 본심이라기보다는 습관이었다. 이놈은 결국에는 힘을 빌려줄 거면서도, 그전까지는 투덜투덜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가끔 보면 꼭 새침한 고양이를 보는 느낌이랄까? 뭐, 사내가 고양이라니 조금 안 어울리기는 하지만. 그때였다. “응?” “흠.” 다시 천천히 사그라지는 불길에 장작을 집으려는 찰나, 나와 허준영은 동시에 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레 대지에서 전해지는 미약한 진동들을 느꼈기 때문이다. 땅굴을 파는듯한 진동은 지금도 꾸준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자칼로드인가…. 수는 서른 정도.' 자칼로드. 간단히 말해서 땅속 괴물이다. 몸 자체가 땅을 파거나 지하에서 생활하는데 최적화된 괴물인데, 사용자들이 잠든 틈을 타 습격하는 악랄한 놈들이었다. 스으윽, 스르릉! “그러고 보니 슬슬 불침번을 교체할 시간이던가…. 다녀오지. 먼저 자고 있어라.” 허준영은 바로 몸을 일으키더니 멋들어진 솜씨로 검을 빼어 들었다. 검신의 폭은 굉장히 얇지만 길이는 매우 길어 거의 자신의 키와 비슷할 정도였다. 이내 천천히 어깨에 검을 걸치는 허준영을 보며 나는 멀뚱히 입을 열었다. “같이 가도 되는데.” “별로. 보아하니 따라오는 놈들은 아닌 것 같고…. 땅꾼들 정도면 몇 십 마리가 몰려와도 상관없어.” '따라오는 놈들이라.' 허준영은 흘리듯이 대답했다. 나는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방금 말을 꺼낸 따라오는 놈들이란, 모니카를 나올 때부터 알게 모르게 우리를 따라오는 사용자 혹은 부랑자들을 말하는 것이리라. 워낙 거리 조절이 섬세해 나도 그냥 누군가 따라온다는 사실만 느끼고 있었는데, 하여튼 감은 무지 좋은 놈이었다. “아무튼 대충 처리하고 올 테니, 걱정 말고 먼저 잠자리에 들도록.” 허준영의 확언에 나는 머리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하기야 그 정도의 실력이면 속칭 '땅꾼'들 정도야 100마리도 우스울 것이다. “불침번이라도 깨워놓을까?” “아니 됐어. 다녀오고 나서 깨울 테니까, 연초나 있으면 하나 줘.” 연초나 빌려달라는 요청에 꺼내어 던져주자, 그는 얇은 손가락으로 정확히 잡아챘다. 동시에 대지를 가볍게 뛰어오른 순간, 마치 궁신탄영이라도 사용한 것처럼 허준영의 몸이 홀연히 사라졌다. 그는 나와 같이 민첩 능력치가 높은 시크릿 클래스였다. 나는 대충 불길을 확인한 후 침낭으로 몸을 묻었다. 이윽고 한 쪽에서 어둠이 크게 솟구치는 것과, 대지를 가르는 소리와, 자칼로드의 것으로 추정되는 비명이 미약하게 흘러들었다. 그러한 소리들을 반주 삼으며 나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 약간 안개가 꼈지만, 하늘이 맑고 푸른 아침이었다. 우리는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아침 일찍 출발했다. 출발하면서 안솔과 유정이 푹 잤다는 소리가 들렸는데 아마도 자칼로드에게 습격 당할뻔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반사적으로 허준영을 쳐다보자, 그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음으로써 대답했다. 원래 자랑하는 성격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그냥 조용히 넘어가고 싶은 모양이다. 용이 잠든 산맥은 서부 소도시 도로시로부터 서북 방향으로 3주 정도 가면 나오는 지역이다. 3주면 그래도 사용자들의 발길이 몇 번 닿았을 법도 한데, 산맥은 흔히 말하는 미개척 지역으로 분류되는 곳이었다. 왜냐하면 가는 길이 워낙 험난하기도 하거니와 상대하기 까다로운 괴물들이 떼지어 출현하는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당장 우리만해도 이미 붉은 사막과 자석의 황야를 거쳐, 질척거리는 늪지대를 통과한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 걷고 있는 안개의 평야만 지나치면, 그때부터 굽이굽이 산맥을 이루는 험한 산지대가 나온다. 그곳부터가 바로 미개척 지역의 시작이었다. 나는 차분히 상념에 잠겼다. 1회 차 시절, 북 대륙은 강철 산맥 공략 전 모든 지역을 안정화하고 공략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바로 용이 잠든 산맥이었다. 마지막으로 도전한 클랜은 내가 몸을 담고 있던 이스탄텔 로우 클랜. 비록 한 명 사망자가 나오기는 했지만, 어떻게 유적 코앞까지 가는 데는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소영은 결국 유적을 눈앞에 두고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당시 이스탄텔 로우의 사망자는 정창민이라는 이름으로, 결계를 다루는 능력에 일가견이 있는 사용자였다. 그는 한순간의 실수로 목숨을 잃게 되었는데, 숨을 거두기 직전 내게 유언을 남겼다. '수현아…. 혹시라도 클랜 로드님이…. 클랜원들이 말려도 기어이 가시겠다고 하면…. 네가 꼭 말려주라….' '널 많이 예뻐하시잖아. 하하…. 아마 다들 말리면 고집은 부리시지 않으시겠지만…. 그래도 부탁해. 뭔가, 불안해. 그리고….' 결국 한소영은 클랜원들의 만류에 고집을 꺾었다. 그리고 이후, 정창민의 유언에 따라 유적 부근에 대규모 봉인 결계를 치고, 오직 산맥 내부만 깨끗이 청소하는 걸로 공략을 마무리 지었다. 돌아오고 나서 대외적으로 안정화라고 발표하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해서 완전한 공략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유적 내부까지 탐험한 게 아닌, 안에 있는 것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봉인을 한 것에 불과했으니까. 그리고.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이 있다면, 바로 산맥 내에서 실종된 사용자들의 존재였다. 1회 차든 2회 차든, 산맥 내에서 실종된 사용자들의 종적은 홀연히 사라졌다. 하다못해 시체라도 있어야 정상인데 시체조차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아마 유적 내에 있는 게 아닐까 많은 사용자들이 예상했지만, 결국 유적 자체를 봉인하는 것으로 예상은 추측으로 끝나고 말았다. 어쩌면 유적을 탐험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나는 산맥에 얽힌 역사로 생각을 돌렸다. 고대 홀 플레인에서도 옛 시대의 기록을 적어놓은 신화 속의 대 전쟁. 대륙을 지배했던 용과 그들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인간들의 전투. 기록에서 일컫기를 최후의 승리자는 분명히 인간이었다. 신화 속 거주민들은 최후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는 죽기 직전 자신의 영혼을 담보로 최후의 장소에 저주를 내렸다. 그러나, 그 이후의 기록은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다. 이후 결과에 대한 짤막한 한 줄이라도 언급돼있어야 정상인데, 전투에서 승리하고 용이 저주를 내렸다는 게 기록의 끝이었다. 아무튼 수십 년간을 이어왔던 전투의 종지부를 찍은 장소가, 바로 우리가 향하는 곳이었다. “와아. 그러면요?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됐는데요?” 차분히 행군을 하던 도중, 안솔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가면서 간단히 고대 신화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꽤 흥미가 동한 모양이다. 무지무지 궁금하다는 얼굴로 내 팔을 꾹꾹 잡아당기는 안솔을 향해,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이후는 몰라. 기록에도 나와있지 않으니까. 궁금하면 돌아가서 직접 찾아보렴.” “으응….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 궁금하다….” 안솔은 내 팔을 꼭 잡고 있으면서도 연신 고개를 갸웃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는 별로 걱정이 안되나 봐?” “우웅? 걱정이요?” “안현. 네 친 오빠.” “아~. 네. 별로 걱정 안 되요. 우리 오빠야 생명력은 바퀴벌레 급이고~. 그리고 오라버니가 직접 구하러 가는 중이시잖아요. 헤헤.” 안솔은 해맑게 웃어 보였다. 정말로 괜찮은지 이제는 잡은 팔을 휙휙 휘두르기까지. '아직 살아는 있는 건가?' 이 반응을 위안으로 삼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들 즈음이었다. 갑작스레 남다은이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빙긋 웃으며 안솔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솔이. 클랜 로드님을 정말 좋아하는가 보구나.” “네! 저는요. 우리 오라버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어, 어? 어, 언니. 왜 갑자기 절 은근슬쩍 잡아 끄시는 거예요?” “아. 우리 솔이가 너무 귀여워서 그래.” “어, 어…?” 양팔을 활짝 벌렸던 안솔은, 그대로 남다은에게 잡혀 질질 끌려가기 시작했다. 이내 허공에 방방 손을 휘젓는 안솔을 보며 훨씬 편해진 팔을 한 바퀴 돌린 찰나였다. “으윽…! 으으윽…!” 순간 진의 후방에서 미약한 신음이 흘러들었다. 한결의 목소리였다. 나는 바로 행군을 멈추고 신재룡에게 달려갔다. 현재 한결은 신재룡이 업은 채 가는 중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한 걸음에 달려가자, 신재룡이 한결이를 반듯이 눕힌 채 걱정스런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가벼운 한숨을 흘리고는 입맛을 다셨다. “한결군이 갑자기….” “상태가 어떤데요?” “어젯밤까지만 해도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안개의 평야 끝자락에서부터 갑작스럽게 고통스러워하더군요. 아니. 힘들어하다가,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짓다가, 이제는 고통스러워하네요. 치료 주문도 듣지 않으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쯧.” 나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치료 주문이 듣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한결이는 빈 껍데기, 혹은 반쪽자리에 불과했으니까. 일단 가슴에 손을 대보자 다행히 심장은 뛰고 있었다. 다만 출발했을 때보다 훨씬 미약해진 게, 곧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래도 다시 강행군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용자 신재룡. 부탁합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사제치고는 힘이 좋으니까요.” 신재룡은 설레설레 고개를 젓고는 다시 한결이를 번쩍 들어 안았다. 이윽고 다시 강행군 준비를 하는 클랜원들을 보며 나는 입술을 물었다. 솔직히 여태껏 쉬지 않고 달려온 만큼, 산맥을 앞두고서 조금이라도 체력을 정비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해서 최대한 강행군을 자제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가 않다. 강행군 준비는 삽시간에 마쳤다. 이내 다시 출발하기 직전, 나는 잠깐 걸음을 멈춰 후방을 응시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느낀 몰래 몰래 따라오는 기척들이, 오늘 아침 부로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허준영을 쳐다보자, 그는 마찬가지로 뒤를 쳐다보더니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나는 클랜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3분만 휴식하겠습니다. 휴식 후 한결이를 찾을 때까지는 거의 쉬지 못할 테니, 마지막 휴식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빠르게 말을 마치고 나서, 나는 신속히 한 쪽으로 이동해 클랜원들과 거리를 벌렸다. 그와 동시에 고연주에게 눈짓을 주자, 금세 알아들은 그녀가 살그머니 나를 따라왔다. “수현. 무슨 일이에요?” “어제까지 우리를 따라오던 기척들이 사라졌습니다. 알고 있습니까?” 거두절미하고 묻자 고연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이내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이는걸 보니, 그녀도 역시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네. 정확히는 아침 식사 후, 평야의 끝에 다다르자 물러난 것 같아요. 아마 우리가 산맥으로 들어가는지 들어가지 않는지 궁금해서 그러는 것 같던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바로 그겁니다.” “네?” 고개를 갸웃하는 고연주. 나는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폈다가,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잡았다. 고연주는 잠깐 움찔하더니 의아한 눈길로 나를 응시했다. “사용자 고연주. 지금부터 제 말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중요한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중요한 부탁이요? 혹시…. 돌아가라는 말은 아니죠?” “미안하지만, 맞습니다.” “…헐.” 고연주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나 곧 우는 소리와 함께 내 품에 무너지듯 몸을 허물어뜨렸다. “허헝~. 너무해요~.” “미안합니다. 하지만, 고연주밖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나 또한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라는 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즉흥적인 생각이 아닌 회의실에서 김수정을 봤을 때부터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리고 우리를 따라오는 무리를 느꼈을 때 거의 확신에 이르렀고. 애당초 유정이를 데려온 이유는, 고연주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저밖에 할 수 없는 일이요?” “예. 지금부터 고연주는 아무도 모르게 도시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마 우리를 몰래 따라온 무리는, 고연주의 말처럼 구조대가 산맥으로 들어가는지 또는 들어가지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 따라왔을 것이다. 더욱 정확히 말해보면, '그림자 여왕'의 참가와 그녀의 중간 이탈 여부를 확인하려고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보와 추적에 한해서 고연주만큼 부담스러운 상대가 없으니까. '물론 이 모든 게 아직 추측에 불과하지만….' 나는 1회 차 시절 10년 동안 음지에서 활동한 내 감을 믿고 있었다. 이번 사건은 뭔가 굉장히 찜찜하고 구릿한 냄새가 풀풀 풍기고 있었다. “중요한 건, 아무도 모르게 돌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재차 힘주어 말하자, 고연주의 우는 소리가 뚝 끊겼다. 이윽고 품에 묻은 고개가 슬쩍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수현. 무슨 일 때문이에요?” 나른한 음성이 귓가를 간질였다. 흘끗 아래를 내려다보자, 입가에 진한 미소를 배어 물고 있는 고연주를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나는 속삭이듯이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다행히 아주 늦지는 않았네요. 덕분에 큰집은 잘 다녀왔습니다. 산소도 들러서 인사도 하고 왔고요. :) 아. 결혼식을 볼 때는 뭔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고, 너무 빨리 마치는데 의아한 기분도 들더라고요. 허준영, 안솔, 신재룡. 사용자 정보는 오늘 아침에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서울에서 창원까지 차로 왔다갔다 하니 지금 약간 정신도 없고, 많이 지치네요. 하하. * 이준영의 이름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허준영으로 변경했습니다. 독자 분들의 양해를 부탁합니다. * 구조대에 참가한 클랜원은 백승훈이 아니라 신재룡이었습니다. 백승훈은 새로 추가한 사제 클랜원 중 한 명인데, 전 회에 신재룡과 혼동했습니다.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 _(__)_ 0437 / 0933 ---------------------------------------------- 용이 잠든 산맥. 나는 고연주에게 내가 생각한 것들을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녀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고, 곧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일리 있네요. 하기야 저도 조금 이상하다 싶었어요.” “고연주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고연주는 두 팔을 마주 끼더니 살며시 미간을 좁혔다. “네. 도시에 있을 때는 그냥 까닭 없이 찜찜했는데, 누군가 따라온다는 사실은 확실히 석연치가 않지요. 그리고 몇 가지 짚이는 것들도 있고….” “짚이는 것들이요?” 그리고 슬그머니 입술을 무는 고연주. 의아한 기분으로 되묻자, 그녀는 나를 빤히 응시했다. “수현.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다만 그 김수정이라는 사용자가 이끌던 캐러밴과 머셔너리와의 계약. 그리고 우리를 따라오던 누군지 모르는 사용자들. 지금 주어진 조각은 두 개뿐이죠.” “정보가 더 필요하다는 소리군요.” “그래요…. 흐음. 아마 이번에는 조금 어려울지도 모르겠네요. 상대가 바보이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고. 또 수현의 말대로 외부와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면서 활동해야 하니까요.” “사용자 고연주. 정 부담스러우면 돌아가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면 일단은 구조에 전념하시고, 차후에 제가 직접 해결을 보도록 하지요.” 고연주의 은근히 자신 없어하는 모습에 나는 차선이라 생각한 선택지를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일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호호. 아니에요. 그냥 우는 소리 한 번 해본 건데,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어떡해요?” “생각보다 만만한 일은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만에 하나 저와 고연주의 생각이 맞는다면, 상대는 양지가 아닌 음지에서 우리를 공격했다는 소립니다. 만일 진상이 밝혀진다면, 이건 머셔너리에 선전포고를 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어쩌면 클랜과 클랜과의 전투로 비화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수현이 이런 일에 직접 뛴다는 건 말도 안 돼요. 홀 플레인의 음지는 수현의 상상보다 훨씬 더럽고, 추악한 곳이랍니다.” “아니, 저도.” “수현. 쉿….” “저도 음지에서 잘 놀 줄 압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고연주가 어여쁜 엄지를 들어 내 입술에 갖다 댔기 때문이다. 이내 입술을 부드러이 훑는 연한 살의 감촉을 느끼며 나는 그녀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고연주는 살며시 미소 짓더니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저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 수현은 아무 걱정 말고 몸 건강히 만 돌아와주세요.” “…괜찮겠습니까?” “그럼요. 수현과 저도 근 2년 동안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죠…. 알겠습니다.” 나는 차분히 머리를 끄덕였다. 고연주의 말처럼 우리도 그동안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어떻게든 머셔너리를 비방하고 깎아 내리려는 세력을 그냥 놔두기에는, 나도 그녀도 그리 마음이 넓지는 않으니까. 이미 암중으로 준비한 계획이 몇 가지 있으니, 이번 기회를 통해 철저히 아작 내는 것도 괜찮으리라. “이런. 벌써 3분이 지났네요? 그럼 저는 지금 바로 가볼게요. 쪽.” 고연주는 한 쪽 눈을 찡긋 감고는 내 입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혀로 입술 전체를 핥더니 배시시 웃어 보였다. 나는 머쓱한 마음에 머리를 긁적였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고연주. 거듭 말하지만, 절대로 상대에게 들키지 말아야 합니다.” “괜찮아요. 나 그림자 여왕이라는 여자예요. 호호.” “…몸조심하세요.” “수현도요. 아직 서른도 안된 나이에 과부가 되기는 싫어요.” 고연주다운 인사였다. 그녀는 나와 작별을 마치고 몇 걸음 물러서더니 홀연히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이내 서서히 멀어져 가는 고연주의 기척을 느끼며, 나는 몸을 돌려 클랜원들이 기다리는 장소로 향했다. “…흠.” 그렇게 가는 도중, 문득 까닭 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과연…. 어디일지 기대되는데.' 이미 고연주와의 대화를 통해, 누군가 수작을 부렸다는 사실은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어디일까? 과연 어느 간 큰놈이 머셔너리에 음지 전쟁을 걸어온 걸까?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현대에 있었을 적 가끔 재미있게 하던 게임이 있었다. 이름은 '전설의 전쟁'. 총 10명의 플레이어가 5명씩 두 팀으로 나뉘어 각기 고른 영웅으로 전쟁을 치르는 게임인데, 내가 주로 고르는 영웅은 아군을 키우고 도와주는데 특화된 서포터 형 영웅이었다. 서포터의 초반 역할은 게임 초반에는 약하지만, 중 후반에는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아군 영웅을 보호하고 키우는 데 중점을 둔다. 초반에 아군 영웅과 함께 라인에 서서 성장을 하다 보면, 적 팀의 로밍(Roaming) 형 영웅이 라인 부근에 대기하는 경우가 있다. 맞은편 라인에 선 적 팀 영웅과 서로 호응해 아군 영웅의 성장을 방해하려는 게 목적이다. 그리고 서포터는 그러한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로밍 형 영웅이 숨어있을 법한 라인 부근에 시야를 확보하는 게 필수였다. '전설의 전쟁'을 하다 보면 나는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었다. 이따금 적 팀 로밍 형 영웅이 내가 시야를 확보해둔 곳에 숨어있으면, 아군 영웅이 전체 채팅으로 숨어있는 거 다 아니까 얼른 가버리라고 하는 것. 나는 이게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적 팀의 로밍 형 영웅이 대기하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팀 전체의 이득이 커진다. 적 팀의 경험치가 낭비되고, 동선도 낭비되며, 아군의 활동 반경은 훨씬 풀린다. 그런데 왜 그 이득을 포기하면서 숨은 사실을 알려주는 걸까? 그냥 단순히 모르는 척만 하면 되는 건데. 아무튼. 고연주에게 절대 들키지 말아야 한다 요구한 것도, 바로 이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알면 대비를 한다. 그러나 모르면 대비를 하지 않거나, 상대적으로 대비가 약해진다. 아까 고연주에게 했던 직접 나서겠다는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는 모를 수밖에 없겠지만, 1회 차 때 내내 음지에서 활동했던 만큼 음지 전쟁은 내가 가장 자신 있어하는 전투였다. 2회 차는 양지에서 활동하느라 크게 능력을 발휘할 일이 없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윽고 희뿌연 한 안개 속으로 클랜원들이 보이기 시작해, 나는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속으로 단단히 마음먹었다. 일단은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용이 잠든 산맥으로 들어가주겠다고. 그러나 볼 일을 마치고 도시로 돌아가는 순간, 상대에게 진짜 음지 전쟁이 뭔지 보여주겠다고. * 고연주와 헤어진 후, 나는 선두로 이동해 클랜원들을 이끌었다. 원래는 궁수들이 앞에서 선도하는 게 맞는 일이지만, 강행을 해야 하는 입장으로써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주변의 지리는 꽤 숙달한 상태니 중간에 길을 찾으려 멈추는 일도 없을 테고. 아침에 희미했던 안개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짙어졌다. 이제는 육안으로 20미터 앞을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나는 안력을 돋워 주변 지형을 면밀히 살폈고, 머릿속의 기억을 더듬어 1회 차에 진입했던 길을 찾으려 애썼다. 웬만하면 그냥 들어가겠지만, 용이 잠든 산맥은 나로서도 마냥 자신할 수는 없는 지역이었다. 그러던 중 갑작스레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복이 작고 지표면이 너른 대지를 걷고 있었다면, 어느 순간엔가 울퉁불퉁하고 거친 대지의 감촉이 느껴진 것이다. 나는 몇 걸음 더 걷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 정지 신호를 보냈다. 조용히 이어지던 발소리가 일시에 멈췄다. “클랜 로드. 무슨 일입니까?” 신재룡이 나직한 물음에,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용이 잠든 산맥으로 들어온 것 같습니다.” “예? 하지만 어떤 산도 보이지 않았는데….” “발 아래를 한 번 보세요.” “발 아래라면…. 아!” 몇 명은 금세 차이점을 느꼈는지 가벼운 탄성을 터뜨렸다. 대지에는 아름다운 들판이 아닌, 무성하게 우거진 수풀이 드문드문 보이고 있었다. “산맥으로 완전히 진입한 건 아닙니다. 아마 초입…. 아니, 초입 직전이라고 봐도 좋겠지요. 아무튼 안개의 평야는 완전히 벗어났으니, 이제부터는 미개척 지역이라 보는 게 옳겠습니다.” “오라버니. 기적을 사용할까요? 오라버니와 백한결의 위치를 찾아달라고….” 안솔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기적은 확실히 매력적인 해법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최대한 아껴놔야 할 능력이었다. 안현과 한결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됐어. 기적은 둘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껴놔야지. 그리고 위치를 찾는 방법이라면, 따로 있거든.” “네? 방법이 따로 있다고요?” 안솔의 물음에 나는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신재룡에게로 다가가 죽은 듯 잠들어있는 한결을 응시했다. “사용자 신재룡. 이제부터 한결이는 제가 맡겠습니다.” “예? 하지만 클랜 로드는 선두에 계시는데….” “괜찮습니다. 앞에서 데리고 다닐 생각이거든요.” “…데리고 다닌다고요?” 신재룡은 전혀 이해되지 않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나 일단 넘기라는 의미로 손을 내밀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한결이를 건네주었다. “한결아. 일어나. 한결아?” 한결이를 받아 들은 후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동시에 토닥토닥 등을 보듬자, 곧 서서히 눈을 뜨는 한결을 볼 수 있었다. 한결은 흐릿한 눈동자로 나를 보더니 곧 산맥의 한 쪽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한결을 내려주었다. “어?” “뭐, 뭐지?” 그 순간 클랜원들은 또다시 탄성을 흘렸다. 여태껏 걷기는커녕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껌뻑껌뻑 했었는데, 용이 잠든 산맥에 들어오자마자 스스로 일어선 것이다. 또한 약간 비틀거리고는 있었지만 조금씩이나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산맥의 어느 한 쪽 방향을 향해서. 이유는 대강은 알고 있었다. 처음 한결이를 봤을 때 나는 제 3의 눈으로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현재 한결의 상태가 빈 껍데기 혹은 반쪽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한 마디로 몸에 영혼이 없는 상태였다고나 할까? 아마 내 예상이 맞는다면, 한결이는 용이 잠든 산맥에 특수한 필드 효과를 받아 망인(亡者)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나도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한결이 아직 완벽히 망인이 된 건 아닐 거라는 것. 아마 한결이 산맥에 먹혀 완벽히 망인이 되는 순간, 한 줄기 간신히 이어온 육체와 영혼의 연결이 끊겼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한결의 죽음을 의미한다. “아직 심장은 뛰고 있으니….” 나는 한결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결은 여전히 초점 없는 눈동자로 어딘가를 향해 꾸준히 걸어가는 중이었다. 영혼이 있는 용이 잠든 산맥에 들어온 이후, 자신을 되찾으려는 육체의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이대로 따라가면 일단 한결이는 찾을 수 있겠지.' 여기서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한결이를 찾으면서 동시에 안현도 구조하는 것. 그러나 내 직감은 그렇게 일이 쉽게 풀리지는 않을 거라 경고하고 있었다. 만일 안현이 한결이처럼 망인이 아닌 실종된 거라면…. '그때는 정말 유적 안으로 들어가야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아직도 멀뚱히 서 있는 클랜원들에게, 고갯짓으로 한결을 가리켰다. “일단 한결이를 따라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곧 산으로 들어갈 예정이니 다들 주변을 최대한 경계하시기를 바랍니다.” 곧바로 정신을 차린 클랜원들은 긴장한 낯빛으로 주변을 주의 깊게 둘러보았다. 얼굴에는 아직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가득했지만, 일단은 현 상황을 받아들이고 구조에 집중하겠다는 태도였다. 잠시 후, 나는 조용히 출발을 알렸다. “한결이의 보호는 제가 맡을 테니, 다른 분들은 각자 맡은 방향을 감시하세요.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오라버니. 오늘 밤이에요.” 막 한결을 뒤따라가려는 찰나, 고요한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순간 의아한 마음에 바로 몸을 돌리자, 나를 빤히 주시하고 있는 안솔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한 번 흘끗 한결을 쳐다보더니 형형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아마, 오늘 밤까지 찾아야 할 거예요.”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사용자 정보는 아침에 업데이트 하려고 했는데, 잠에서 깨어나니 오후 2시였습니다. ^_ㅠ 그래서 대강 준비하고 볼 일을 보고오니 오후 6시. 일단 글부터 쓰자는 생각에 적다 보니 어느새 자정이 되더군요. 부디 이 불민한 로유진을 용서하세요. 하하. 아. 아마 그동안 하연과 안현의 행동으로 답답하신 분들이 많으셨을 겁니다. 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제 탐험도 하고~. 돌아가서~. 후후후후후.(?) PS. 김수현의 사용자 정보를 업데이트 하지 않는 이유는, 이번 용이 잠든 산맥 공략 후 새로 업데이트 되기 때문입니다. 헤헤. 부디 공략이 완료될 때까지만 기다려주세요! :D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허준영(7년 차) 2. 클래스(Class) : 침묵의 집행자(Secret, Executor Of Silence,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AA - Double A) 5. 진명 • 국적 : 세상에 침묵하는 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7) 7. 신장 • 체중 : 177.7cm • 67.8kg 8. 성향 : 냉정 • 차분(Cool • Douceness) [근력 91(+2)] [내구 88] [민첩 97] [체력 85] [마력 92] [행운 74] < 업적(4) > < 고유 능력(1/1) > 1. 전능 결계 : 아포칼립스(Rank : A Plus) < 특수 능력(1/1) > 1. 심판의 날(Rank : S Zero) < 잠재 능력(3/3) > 1. 신검합일(Rank : A Plus Plus Plus) 2. 유성검(流星劍)(Rank : A Zero) 3. 검폭(劍爆)(Rank : A Plus) 『권능 : 이단 심판』 *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신재룡(7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사제(Normal, Priest,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AA - Double A) 5. 진명 • 국적 : 불굴의 노력, 굽힐 수 없는 의지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45) 7. 신장 • 체중 : 176.2cm • 78.3kg 8. 성향 : 선 • 열정(Good • Passion) [근력 78] [내구 82] [민첩 74] [체력 90] [마력 86(+2)] [행운 68] < 업적(0) > < 특수 능력(1/1) > 1. 신념의 오러(Rank : B Plus) < 잠재 능력(4/4) > 1. 신성 치료 주문(Rank : A Plus Plus) 2. 사제 전투술(Rank : C Minus) 3. 신성 마력 회로 응용(Rank : A Plus Plus Plus) 4. 항마력(Rank : A Minus) <최근 능력치 비교> (변경 전) [근력 78] [내구 82] [민첩 74] [체력 90] [마력 84] [행운 68] (변경 후) [근력 78] [내구 82] [민첩 74] [체력 90] [마력 86(+2)] [행운 68] *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안솔(3년 차) 2. 클래스(Class) : 광휘의 사제(Arousal Secret, Priest Of Brilliance, Expert)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AA - Double A) 5. 진명 • 국적 : 빛을 인도하는 자, Olfactophilia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3) 7. 신장 • 체중 : 160.1cm • 45.3kg 8. 성향 : 순수 • 변태 성욕자(Pure • Pervert) [근력 31] [내구 37] [민첩 35] [체력 41] [마력 99(+1)] [행운 102] < 업적(0) > < 고유 능력(1/1) > 1. 기적(Miracle)(Rank : D Plus) < 특수 능력(1/1) > 1. 성녀의 예언(Rank : F Zero) < 잠재 능력(3/3) > 1. 안젤루스 대 신성 주문(Rank : EX) 2. 광휘의 축복(Rank : S Plus) 3. 속성 변환(Rank : B Minus) <최근 능력치 비교> (변경 전) [근력 25] [내구 28] [민첩 27] [체력 35] [마력 88(+1)] [행운 101] (변경 후) [근력 31] [내구 37] [민첩 35] [체력 41] [마력 99(+1)] [행운 102] 『권능 : 천벌』 0438 / 0933 ---------------------------------------------- 용이 잠든 산맥. 퍽! 쨍그랑! 아스모데우스가 힘껏 던진 잔이 거무죽죽한 벽에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그 탓에 벽에 걸려있던 횃불이 떨어져 바닥에 자그마한 불길을 만들었다. 화르륵, 화르르륵! 불길은 삽시간에 번져 어둡기만 했던 방을 환하게 밝혔다. 주변에 서 있던 마족이 황급히 엎드려 불길을 끄려고 했지만, 아스모데우스가 괴성을 지르자 곧바로 머리를 처박으며 용서를 빌었다. 부들부들 떠는 마족을 보며 아스모데우스는 잘근잘근 입술을 짓씹었다. 사실 눈앞의 마족은 아무런 죄가 없었다.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된 게 어찌 저 마족의 잘못이겠는가. 모두 무리하게 일을 진행한 아스모데우스의 욕심에서 비롯된 잘못이지. “비, 빌어먹을 리리스년! 감히, 감히! 켈!” 집어 던지고 괴성을 질렀지만 아스모데우스의 분노는 여전히 식을 줄을 몰랐다. 오히려 생각할수록 화만 치솟는지 이제는 머리를 세차게 쥐어뜯기까지. 사실 '음욕의 악마' 아스모데우스가 이렇게 분노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바로 '밤의 여왕', '대 탕녀' 리리스 때문이었다. 마계는 엄연한 강자지존(强者至尊)의 법칙을 따른다. 오직 강한 자만이 주인이요, 약자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대 법칙. 이러한 관점에서, 비록 같은 7대 악마라고는 하지만 아스모데우스와 리리스는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당장 7대 악마들이 보유한 '악마 14군주'의 현황만 봐도 그렇다. 아스모데우스가 불과 1년 전만 해도 예하에 2명의 군주급 악마를 거느렸던 반면(얼마 전 불의의 사고로 1명을 잃기는 했지만.), 리리스는 예나 지금이나 단 한 명의 군주급 악마도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할진대, 요즘 리리스가 아스모데우스를 대하는 태도는 예전과 비교해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흡사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물론이고, 회의가 있을 때마다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는 일도 허다했다. 그럴 때마다 아스모데우스는 가만히 있었다.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발끈하기에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가 너무나 컸고, 어쨌든 리리스가 늘어놓는 말들 또한 사실이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음욕의 악마'가 진심으로 반성을 하는 건 아니었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야 어쩔 수 없이 참는 거지만, 이렇게 홀로 있을 때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리리스에 대한 분노를 불태우는 중이었다. “망할 년, 빌어먹을 년…! 하는 것도 없는 년이…! 할 줄 아는 거라곤 가랑이 벌리는 것밖에 모르는 년이…! 켈켈켈켈!” 또다시 솟구치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는지, 아스모데우스는 고개를 회회 돌려 주변에 있던 잔을 잡아들었다. 그리고 아직도 살아있는 불길을 향해 있는 힘껏 집어 던지려는 찰나였다. 후르륵, 후르르륵! 차차 사그라지던 불길이 한순간 크게 불타올랐다. 마치 회오리가 치는 것처럼 빙글빙글 올라오더니 세찬 바람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흩날렸다. 이내 허공에 점점이 흩뿌려지는 자그마한 불똥들을 마지막으로 방안에는 처음의 적막한 어둠이 찾아 들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악마도 함께. “재미있게 노는 중이군. 아스모데우스.” 조용히 내려앉은 방안의 적막을 깨는 목소리에 불길이 사라진 공간을 쳐다본 아스모데우스는, 어느새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는 악마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왜냐하면 그 악마는…. “사, 사탄?” '모든 악마의 왕', '적대자' 사탄이었다. “어, 언제 온 거지…. 그리고 여기는 왜….” 아스모데우스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모든 악마의 왕'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지만, 사탄은 다른 악마들에 거의 간섭을 하지 않는다. 서로 싸우건 전쟁을 벌이건 자신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어떻게 보면 그냥 무시한다고 봐도 좋았다. 하지만 요새에 이르러서는 많이 다르다. 아니, 달라졌다. 다른 악마들이 하는 일에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간섭까지 이른 적은 없지만 7대 악마들은 하나 둘 긴장하기 시작했다. 항상 관조하던 사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건 어떤 '목적'이 생겼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한 번 움직인 사탄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설령 같은 악마라도 주저 않고 희생양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다른 악마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사탄은 아직도 엎드려있는 마족의 등에 사뿐히 몸을 앉혔다. “아아. 요새 꽤 재미있는 소문이 돌아서.” “재, 재미있는 소문?” “그래 아스모데우스…. 너 곧 다시 한 번 북 대륙에 씨앗을 뿌릴 계획이라며?” “케, 켈! 켁, 켁, 켁, 켁!” 사탄이 말을 꺼낸 순간 아스모데우스는 격한 기침을 내뱉었다. 이어서 극구 부인하려 머리를 번쩍 치켜들었지만, 조용히 양 손을 들고 있는 사탄을 보며 일순 말을 멈추었다. “잠깐, 잠깐. 보아하니 나한테 숨기고 싶었던 모양인데, 미리 말해두지. 네가 어떤 짓을 꾸미고 있든 나는 일절 상관 않는다. 어차피 우리는 독립된 객체가 아닌가.” “으음…. 그, 그건 그렇지. 그러면 왜 여기서 그 이야기를….” 사탄은 바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저 지긋한 눈길로 아스모데우스를 응시하고는 이내 하얀 이를 씩 드러내 보였다. “그냥…. 그래도 지금은 한솥밥을 먹고 있으니, 내가 약간의 도움은 줄 수 있다고는 할까?” “너, 너는 원래 누구에게든 관심이 없었지 않은가. 간섭이든, 도움이든…. 그, 그런데 왜 갑자기….” “오…. 그건 그래, 아스모데우스. 하지만 말이야…. 너, 요새 상황이 그렇게 좋지는 못하잖아?” “…켈.” 정곡을 찔러오는 사탄의 말에 아스모데우스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그런 '음욕의 악마'를 사탄은 딱하다는 눈빛으로 들어보더니 품속에서 연초 한 대를 꺼내었다. 이윽고 연초에 불을 붙이는 사탄을 보며 아스모데우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탄이 다른 이를 돕는다니. 누가 들으면 헛소리인줄 알겠어. 켈, 켈켈!” “후…. 도움이라고는 했지만, 어떻게든 생각해도 좋아. 기회라 생각해도 좋고 그냥 조언이라 생각해도 좋지. 왜냐하면 선택은 오롯이 네가 하는 거니까.” “기회…? 조언…?” “핵심은 선택이야…. 바로 말하도록 하지. 나는 네게 한 가지 정보를 줄 예정이다. 네 입장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내 입장에서는 투자라고 봐야겠지. 아무튼, 그것을 받아들이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따라서 말이 달라질 거야.” “사탄의 투자라. 으음….” “물론, 네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다른 이를 찾아볼 수밖에 없겠지. 예를 들면 리리스라거나….” 사탄이 투자라고 밝혔을 때부터 마음이 약간 움직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 말이 결정적이었다. 그때까지 긴가민가하던 아스모데우스는 순간 눈을 번쩍 떠 사탄을 똑바로 응시했다. 물론 속내서 일말의 의심을 거둔 건 아니었지만. “케, 켈켈. 사탄이 서운한 소리를 다 하는군. 이야기를 듣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 “그럼. 다만 이 정보를 다른 데로 흘리거나, 거부해놓고서 네 멋대로 한다면…. 그때는 알아서 해야 할거야.” “그럴 일은 없으니 걱정 마라. 켈!” “좋아. 그러면….” 잠시 말을 멈춘 사탄은 의자 대용으로 쓰고 있는 마족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렸다. 엎드린 마족은 무려 최상급에 다다르는 힘을 지니고 있었지만 감히 고개를 들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을 이렇게 대해주는데 엄청난 감명이라도 받은 듯, 행여 사탄을 떨어뜨릴까 조심하며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아스모데우스와 사탄은 조금 전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바로 얘기로 들어가기 전에, 네가 다시 도전하려는 북 대륙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지.” “재미있는 이야기?” “신화라고나 할까? 가끔 이런 것도 찾아보면 발상의 전환을 할 수 있더라고.” “?” 아스모데우스는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사탄은 한두 번 나직이 웃더니 입에 물고 있던 연초를 뱉어내었다. 그리고 몸을 약간 기울이며 열 손가락을 서로 엇갈리게 바짝 맞추었다. “신화의 이름은 대 전쟁…. 아주 옛날에, 홀 플레인을 지배하던 용과 인간의 전투를 그린 이야기다.” 그리고 이어진 사탄의 목소리는 전처럼 오싹한 소름이 돋는 음색이 아니었다. 여전히 낮고 조용하지만, 한없이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였다. 아스모데우스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 우거진 나무 틈으로 드문드문 보이던 해도 이제 서서히 서편으로 기울어 시야를 벗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부근에 차분히 깔린 붉은 노을 빛 색채가 점차 진해지는 게, 아마 산이라서 저녁이 빠르게 찾아오는 듯싶었다. 해가 떨어지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초입에 들어서기 직전 안솔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리에 맴돌고 있었다. '오라버니. 오늘 밤이에요. 아마, 오늘 밤까지 찾아야 할 거예요.' 안솔은 오늘 밤까지는 찾아야 한다고 했다. 말인즉슨, 오늘 밤이 지나면 여태껏 실낱같이 이어온 한결이 목숨이 끊어질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마음이 급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나는 최대한 차분해지려 애썼다. 용이 잠든 산맥은 굉장히 넓고 방대하다. 마음이 급하다고 이곳 저곳을 중구난방으로 헤집어버리면 그만한 최악의 수도 없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오늘이 지나기 전에 한결이 있는 곳까지 무사히 가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정 안되면…. 기적을 사용해야겠지만.' 가는 숨을 내쉰 후, 나는 비틀비틀 걸어가는 한결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산세가 꽤 험하고 안개가 깔려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결은 자신의 영혼이 있는 곳으로 묵묵히 걸어가는 중이었다. 어느덧 우리는 초입을 통과해 산맥 내부로 완전히 들어온 상태였다. 비죽이 솟아 우거진 무성한 수풀들과 거친 대지 도처에 박혀있는 아름드리 나무들. 이것만 보면 여느 산지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지만, 아름답다고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오랜 시간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아서 그런지, 또한 아직도 각처에 자욱이 깔려있는 안개 때문에 그런지. 그리고…. - 흑…. 흑흑…. 죽일 거야…. 죽여버릴 거라고…! - 억울해…. 억울해애애애…! 이따금 어렴풋하게 흘러드는 괴성들은 산맥에 스산하고 을씨년스러운 기류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러한 괴성을 들을수록 이상하게 불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만 그런 게 아닐 테니까. “얘, 얘. 보석아…. 있잖아, 아무래도 이 안개가 이상한 것 같아.” “보, 보…. 뭐라고요?” “방금 이상한 괴성 들었지? 안개가 특히 자욱한 지역으로 들어가면 그런 게 들리더라고. 그리고 왠지 기분도 나빠지는 것 같고. 보석이는 어떻게 생각해?” “…몰라요. 그냥 감각이 둔해지는 건 느꼈는데…. 한 번 생각해볼 테니, 다음부터 보석이라고 부르지 말아주세요.” 문득 등 뒤로 비비앙과 한별이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흘러들었다. 한별을 보석이라 지칭하는 말에 약간 웃을뻔했지만, 비비앙의 말은 가벼이 흘릴게 아니었다. 한때 비슷한 산속에서 거미 괴물로 살았었던 만큼 비비앙의 감각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클랜 로드. 실은 저도 안개를 통과할 때 이상한 말을 들었습니다. 우는 소리나, 억울하다는 소리나….” 하여 한층 경계를 높일 무렵, 역시나 이야기를 들었는지 옆에서 걷고 있던 선유운이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로 대꾸했다. “저도 들었습니다. 아마 필드 효과의 일종이라고 생각됩니다.” “필드 효과라. 제가 초입 때부터 소리가 들린 주기를 세어봤는데, 점점 빈번해지고 있습니다. 소리의 정체가 궁금하군요.” “글쎄요. 얼어붙은 숲을 탐험했을 때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아주 옛날 이 산맥에서 대 전쟁이 일어났다고는 하는데, 그때 사망한 거주민들의 원혼일수도 있겠지요.” “원혼이라…. 원혼이 나올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아까 안솔에게 얘기해주신 것에 따르면 인간들이 승리했다고 하셨는데…. 용의 원혼이라면 모르겠지만 말이죠.” 나는 모르겠다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였다. 귀찮은 게 아니라 정말로 모른다. 내가 아는 건 용이 저주를 내렸다는 기록에서 끝나버렸으니까. '어쩌면 용의 저주와 연관이 있거나….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지.' 선유운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나는 비비앙과 한별에게 괜한 주의를 끌 수도 있으니 너무 떠들지 말라 주의를 준 후, 다시 한결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몇 시간을 더 걷자 해는 완전히 서쪽으로 넘어가 버렸다. 붉게 빛나던 노을은 어느새 희미해져 버렸고, 어둑한 땅거미들이 자리를 대신해서 내려왔다. 그에 따라 산도 갈수록 깊어졌다. 대지에 흐르던 안개는 이제 훌쩍 몸을 일으켜 산 전체로 번진 상태였다. 앞서 가던 한결의 모습도 희미하게 보일 정도라, 약간의 거리를 두고 따라오던 일부 클랜원들은 간격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이동하던 도중, 갑작스레 전방에서 안개가 심하게 깔린 장소가 눈에 밟혔다. 여태껏 거쳐왔던 곳보다 훨씬 흐릿하게 보이는 게 아무리 안력을 높여도 선명하게 보이지가 않는다. 다만 주변에 수풀이나 나무가 둥글게 둘러싼 풍경을 보면 공터라 추측될 뿐이었다. 그때였다. 시이이이이이이이…. 한 줄기 미약한 바람이 얼굴을 사늘하게 스쳤다. 나는 걸음을 옮기려다가 바로 손을 들어 정지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한결은 걸음을 멈추지 않아, 그대로 공터 쪽으로 들어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백한결을….” “잠시만요.” 나는 얼른 나서려는 선유운의 팔을 잡아 고개를 가로저었다. “확실치는 않은데. 안쪽에서 뭔가 이상한 게 느껴집니다.” 선유운은 감각을 높이려는 듯 바로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곧 눈을 떠 머리를 설레설레 흔드는 게, 어떤 기척도 감지되지 않는 모양이다. 시이이이이이이이…. 그때, 이번에는 바람이 아니라 공터의 안개가 흘러나와 우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 부러워, 억울해, 부러워, 억울해…. -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싸웠는데….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안개와 동시에 다시금 어렴풋이 들려오는 괴성들. 주변에서 다급히 숨을 들이키는 소리들로 보아, 나만 들은 건 아닌 듯싶었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려 전방을 응시했다. 어느새 공터의 안개는 전보다 훨씬 옅어진 상태였다. - 그러니까, 거기 가만히 있어…. - 죽일 거야…. 죽일 거야…. 모조리 죽일 거야아아아아! 그리고 어둠이 내려앉은 공터에는, 새빨간 빛을 뿌리는 수십의 눈동자들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용이 잠든 산맥의 파트는 총 4회로 예정된 상태입니다. 주 내용은 오늘 보셨듯이 악마들의 개입과, 수현 일행이 용의 잠든 산맥의 이상함에 대하여 자그마한 단서를 잡는 부분이라고 보셔도 좋습니다. 그럼, 오늘 하루도 편안한 밤 보내세요. PS. 오늘은 사용자 정보의 업데이트가 없습니다. 다음 회 전투 내용이 나올 예정이오니, 내일 추가 사용자 정보를 업데이트 하도록 하겠습니다. 0439 / 0933 ---------------------------------------------- 용이 잠든 산맥. 그때였다. “───. ───. ───.” “───. ───. ───.” 공터에 서 있는 망인들 사이로 웅얼거리는 소리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거의 태반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주문 영창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우우우우웅! 생각은, 곧 현실이 되었다. 웅혼한 진동음과 함께, 공터를 아우르는 2개의 입체 마법 진이 둥글게 퍼져 나온 것이다. 그것들은 삽시간에 허공으로 떠올라 각기 붉고 푸른빛을 비추었고, 이내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처럼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얼른 공터를 주시하자 아직도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망인들이 보였다. 그러나 안개 속에서 번뜩이는 시뻘건 눈동자가 히쭉 휘어지는 순간, 나는 지체 않고 외쳤다. “사제!” “안젤루스여, 우리를 보호하소서!”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걸까? 기특하게도 안솔이 바로 내 외침에 화답해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쐐액! 한순간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가 흘러 들었다. 그와 동시에 발 아래서 반구형의 막이 일어나 우리를 둥그스름히 감싸 안았다. 우우웅! 쾅, 콰앙! 이내 눈 깜짝할 새 짓쳐 든 바람 소리는 희뿌연 한 막에 부딪쳐 사그라졌고, 파문을 남기며 서서히 사라졌다. 말 그대로 간발의 차이였다. “안솔! 나이스 타이밍!” 유정이 달뜬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나는 아직이라는 의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확실히 재빠른 대응이기는 했지만, 아직 축배를 들기에는 일렀기 때문이다. 마법진을 소환한 건 이러한 단발성에 의의를 두지 않는다. 보통은 마법의 위력을 증강하고, 더 나아가 연사에 필요한 주문 영창 시간을 줄이려는 게 주 목적이라 볼 수 있다. 나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이, 시야를 가득히 메워오는 수많은 마법들을 볼 수 있었다. 하나하나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담은 마법들은, 마치 콸콸 쏟아지는 폭포수처럼 사납게도 보호막을 덮쳐 들고 있었다. 안솔 또한 입술을 꾹 씹은 채, 질 수 없다는 얼굴로 날아오는 마법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 후, 다발의 마법과 안젤루스 보호막의 격돌이 시작됐다. 쾅, 쾅쾅, 쾅쾅쾅, 쾅쾅쾅쾅! 뚫으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 안솔이 생성한 안젤루스 보호막은 확실히 대단했다. 서로 부딪칠 때마다 보호막에는 미미한 파문이 일었지만, 마법은 결국 파문을 뚫지 못해 닿는 족족 중화되는 중이었다. 불벼락과 얼음덩어리들이 세차게 쳐 내리고 있는 속에서, 안솔은 단신으로 그 모든 공격을 완벽히 막아내고 있었다. “끄으응…!” 그러나 언제까지고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안솔은 살며시 인상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지팡이를 쥔 손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고, 보호막의 빛도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물론 우리라고 가만히 있는 건 아니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보석 마법사' 한별이었다. “대상 지정, 안젤루스 신성 주문. 사용 보석, 애주라이트 화이트.” 곧 자그마한 보석 하나가 한별의 손에서 떠오르더니 환한 빛을 뿌리며 보호막으로 섞여 들었다. “보석 증폭!”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외침은, 바로 한별의 고유 능력인 ‘보석 증폭’이었다. 사르르! 사르르! 증폭의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보석이 가루로 변해 보호막 겉면에 흐르듯 녹아 내리는 순간, 서서히 빛을 잃어가던 보호막이 원래의 빛깔을 되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조금씩 범위를 넓혀가며 본래 이상의 힘을 내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손에 하얀 빛을 쥐고 있던 한별은, 예의 쌀쌀맞은 그러나 조금은 다급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솔아! 보호막 유지는 나한테 맡기고…!” “어, 언니. 그럼 부탁해요.” 바로 마력의 흐름을 넘겼는지, 안솔은 한 걸음 물러서 “후우우.”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살겠다는 얼굴…. “하~압!” 이 아니었다. 오히려 다시 볼이 빵빵 해질 정도로 있는 힘껏 숨을 들이키더니, 양손으로 지팡이를 꼬옥 잡아 공터를 겨누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으며 참았던 숨을 한 번에 토해내듯, 빽! 소리를 내질렀다. “천벌을 내리소서!” 번쩍! 짜작! 짜자작! 그 말과 함께, 공터로 매서운 번개가 서너 줄기 내리쳤다. 번개는 보호막과 같은 하얀 빛을 띠고 있었다. 안솔의 시크릿 클래스 '광휘의 사제'의 고유 능력, '천벌'의 발동이었다. 쾅! 동시에, 방금 부딪친 푸른 구체를 마지막으로 막에 쉴 새 없이 일던 파문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거기서 조금 기다리자 더는 마법이 날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 안솔의 권능 ‘천벌’이 마법진을 소환한 망인을 운 좋게 친 모양이다. “휴….”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게 힘겨웠는지, 한별은 허공의 마법진이 사라진걸 확인한 후 안젤루스의 보호막을 해제했다. 그렇게 ‘천벌’을 기점으로 전투는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하악…. 하악….” 안솔은 고개를 떨군 채 거친 호흡을 내뱉고 있었다. 누가 보면 전쟁 중 정신 없이 뛰어다니는 사제라고 오해할만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까 호흡을 잘못 조절한 것에 불과해, 나는 시선을 돌려 전방의 공터를 응시했다. 그러나 안력을 돋웠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안개와 '천벌'로 일어난 여파가 섞여 더욱 보이지 않는다. “후. 힘들었어.” 잠시 후, 호흡을 가다듬은 안솔은 이마를 쓱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오라버니. 어때요?” 그리고 살그머니 내 옆으로 다가와 목과 허리를 빳빳이 세우며 물은 찰나였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아주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공터에서 망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끔찍한 비명이 떠르르 울렸다. 흘끗 옆을 쳐다보자, 멍한 얼굴로 공터를 주시하는 안솔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살아있다는데?” “어, 어떻게…. 분명 제대로 맞췄을 텐데….” 큰 충격을 받았는지 말을 더듬거린다. 그러나 안솔의 ‘천벌’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지금 들리는 망인들의 합창은 처음 공터에서 확인했던 수보다 적다고 생각되는 괴성이었다. 끄아아악! 끄아아악! 다시 들려오는 괴성에, 허준영은 안솔의 어깨를 톡 치고는 내 옆으로 섰다. “아마 빗맞은 놈들이 있겠지…. 김수현.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아까보다 소리가 가까워졌다.” “나도 들었어. 전부 전투 준비!” 허준영이 내가 할 말을 대신 해주어, 나는 바로 몸을 돌려 클랜원들을 응시했다. 조금 전 마법 공격이 무서웠던 걸까, 아니면 악명 높은 용이 잠든 산맥에 들어와 치르는 첫 전투라서 그런 걸까? 다들 침착한 태도로 무기를 겨냥하고 있었지만, 알게 모르게 긴장한 낯빛이 역력했다. “히히! 망인들의 피는 차가울까? 뜨거울까? 검을까? 붉을까? 히히히!” …한 명만 빼고. 유정이 정신 줄을 놓은 모습에 잠시 혀를 찼지만, 이제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이내 들고 있던 무검을 일월신검으로 교체한 후, 나는 곧장 상세한 지시를 내렸다. “방진에서 층진으로 변경하겠습니다. 남다은, 차소림, 허준영은 나와 함께 앞으로. 사제와 마법사는 제일 후방에서, 궁수는 적당히 물러나며 지원 사격을 해주세요. 우정민은 키퍼로, 유정이는 알아서 지원 전투를 하도록.” 앞서 호명한 세 명은 바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나는 들어오는 방향을 계산해 일월신검을 비스듬히 들었다. 달빛을 머금은 일월신검은 섬뜩할 만큼 푸르스름한 반사광을 내뿜고 있었다. 쓱, 쓰윽! 끄어어, 끄어어억! 괴성은 생각보다는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예상대로 ‘천벌’을 빗맞은 놈들이 꽤나 있는지, 이따금 과하게 발을 끄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쓰윽, 쓰윽, 쓰윽, 쓰윽! 쿵! 쾅! 쿵! 쾅! '남은 거리는 2미터쯤 되려나….' “바로 앞입니다. 한 놈이 아닌 것 같습니다.” 차소림이 말했다. 그리고 그 즉시, 녹이 잔뜩 슨 대검이 자욱한 안개를 가르며 비죽 모습을 보였다. 이윽고 무기가, 거무스름한 다리가, 붉게 빛나는 안광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내었다. 피부는 갈라터지다 못해 붉은 속살을 간간이 비추고 있었고, 얼굴은 절반은 썩어 문드러진 살이 절반은 해골이 드러나 있었다. 확실히 인간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모습이었다. “동시 돌진인가…. 그렇다면.” 허준영은 조용히 중얼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하늘을 찌를 만치 길쭉이 솟은 검으로 뭔가 거리를 재는 것처럼 주춤거린다. 그러나 허준영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저 머리를 끄덕끄덕 주억이며 두세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후려갈기듯 팔을 내려쳐 검을 대지에 충돌시켰다. 쿵! 대지가 쪼개지는 소리가 주변을 크게 울렸다. 그와 동시에, 차소림의 말처럼 대여섯은 되어 보이는 망인들이 일제히 안개를 헤치며 튀어나왔다. 이윽고 놈들이 우리를 보며 막 뛰어오르려는 순간이었다. 투쾅! 차차차차차창! 순간 쪼개진 대지에서 수십 자루의 마력 검들이 중구난방으로 솟구쳤다. 그것들은 이제 막 뛰어오른 망인들은 정확히 노리며 들어가고 있었다. 허준영의 능력 중 하나였지만 자세한 명칭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기막힌 타이밍으로 망인들의 돌진을 상쇄한 것이다. 서걱, 서걱서걱! 끄어억! 끄어어억! 망인들의 몸에 삽시간에 수십의 검상이 생겼다. 생겨난 구멍에는 검붉은 피가 왈칵 쏟아져 나온다. 놈들은 들어오기는커녕 바닥을 구르며 우왕좌왕하며 괴성을 질렀다. 그러나 아까 전과는 다른 고통이 담긴 구슬픈 비명이었다. 쉬익! 그때, 차소림은 들고 있던 창을 앞으로 쭉 뻗어 들었다. 이어서 한 차례 짧은 기합이 들리는가 싶더니 눈앞 허공으로 은빛 기운이 기다란 잔상을 남겼다. 차소림이 갈팡질팡하는 망인들을 향해 직선으로 돌진해 들어간 것이다. 아르쿠스 발키리 세트로 무장한 차소림은 아름다우면서도 용맹했다. 어찌나 강력히 들어갔는지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낄 정도였다. 푸욱! 살을 찢고 들어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흘러들었다. 차소림은 가장 선두에 있던 망인에게 곧바로 창을 찔러 넣어 그대로 밀고 나갔다. 망인은 반사적으로 녹슨 대검을 들어 올렸지만, 차소림은 최대한 거리를 유지한 채 오히려 창을 뒤흔들었다. 그러면서도 달리는 걸 멈추지 않아, 망인은 곧 팔을 허우적거리며 속절없이 뒤로 밀려났다. 허준영이 돌진을 죽이고 진을 흩뜨려놓았다면, 차소림은 아예 진을 붕괴시킨 것이다. 결국 망인이 손에서 녹슨 대검을 놓치는 것과 함께, 차소림은 망인을 꼽은 채 그대로 창을 가로로 크게 휘둘렀다. 부웅! 쿠당탕탕! 그 탓에 망인은 창 끝에서 빠지며 허공을 날아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리고 간신히 몸을 일으키던 망인들은, 창이 지나간 자리에 맞아 다시금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쓰러뜨렸다. 크아아아아아아앙! 그러나 그때, 허준영과 차소림이 휘젓는 공간 바로 앞으로 새로운 망인들이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망인은 여섯 마리가 전부가 아니었다. 조금 전 망인들은 선봉에 불과했고, 저놈들은 뒤이어 들어오는 놈들인 듯싶었다. 그렇게 지원 온 망인들이 차소림을 에워싸려 좌우로 퍼지려는 순간. 씨잉! 씨이잉! 퍽, 퍽! 화살 두 발이 귀신같이 날아와, 차소림과 가장 가까이 있던 망인들에게 각각 꽂혀 들었다. 한 발은 번쩍이는 섬광으로 가슴을 직격했고, 다른 한 발은 망인의 얼굴에 깨끗하게 꿰뚫었다. “숙여!” 궁수들이 벌어다 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허준영은 날카롭게 외치며 앞으로 달렸다. 차소림은 방어 자세를 잡으려고 하다가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남은 망인들은 한 박자 늦기는 했지만, 에워싸기는 글렀다 싶었는지 무기를 힘껏 뒤로 젖히고 있었다. 이윽고 허준영은 쿵 소리가 날 정도로 대지를 힘차게 내디뎠다. 그리고 상체를 크게 기울여 새로 출현한 망인들을 향해 오른팔을 쭉 뻗어내었다. 달빛을 반사하는 검은 찬연한 반사광을 뿌리며 반원을 그렸다. 거리는 약간 남은 상태였지만 허준영 검의 길이는 굉장히 길다. 거기다 팔 길이를 합치고 상체마저 기울이자, 닿을 간격은 충분히 되고도 남았다. 이내 길쭉한 검은 차소림의 등을 스치고 지나가, 망인들을 사정없이 찢으며 지나쳤다. 여지없이 검붉은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때였다. 쓰윽, 쓰윽, 쓰윽, 쓰윽! 쿵! 쾅! 쿵! 쾅! 또다시 들리는 망인들이 다가오는 소리. 이번에는 정면이 아닌 좌우 방향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 작품 후기 ============================ 바로 다음 회 가겠습니다. 0440 / 0933 ---------------------------------------------- 한결의 구출. 그러나…. 나와 남다은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우 방향을 경계하고 있자, 이윽고 전신의 살갗이 갈라진 채 검붉은 안광을 흘리는 놈들이 우수수 튀어나왔다. “또?” 아직 내 옆에 남아있던 남다은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떠 재빨리 좌우로 들어오는 놈들을 살폈다. '총 12마리.' 정확히 반으로 나뉘어 좌에서 6마리, 우에서 6마리가 출현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 그것은 여러 방향에서 들어오는 망인들이 들어오는 수가 6마리로 딱딱 정해져 있다는 것. 전투도 마냥 멧돼지처럼 달려드는 게 아니라, 일말의 반응은 보이고 있었다. 마치 정식 훈련을 거친 군인을 보는 느낌이었다. 물론 놈들의 이러한 반응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다만 1회 차에서는 별 생각이 없었던 것에 비해, 2회 차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은근히 생소하게 느껴졌다. 남다은은 '설아'를 빙글 돌리더니 금방이라도 달려가려는 자세를 잡았다. “클랜 로드. 앞쪽은 준영씨와 소림이에게 맡겼으니, 이제 우리가 나설 차례인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사용자 남다은은 좌 방향을 맡아주세요. 저는 우 방향을 맡도록 하지요.” 우리 둘은 서로 한 번 눈을 맞추고는 각자 지정한 방향으로 뛰었다. 이내 홀로 들어오는 나를 발견했는지, 망인들 또한 각자 창, 도끼 등을 치켜들며 나를 맞이해주었다. '한 번 확인해봐야겠다.' 이윽고 선두와 맞부딪치기 직전, 나는 일부러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조절해 검을 크게 내리그었다. 망인은 역시나 머리 위로 방패를 들어올리며 방어하는 모습을 보였고, 내려친 검은 방패를 스치듯 그어 내렸다. 그리고 검이 끝까지 아래로 내려갔을 때, 나는 조금 더 밀어 넣은 후 위로 세게 올려 쳤다. 푸걱! 푸거거걱! 썩은 통나무를 베어 올리는듯한 느낌. 자세히 보니 살갗 속에 빛 바랜 쇳조각들이 드문드문 보이고 있었다. 단순히 살만 갈라터진 게 아니라, 생전에 착용했던 갑옷이 살결에 늘러 붙은 것 같았다. 잠시 후, 망인은 도끼를 치켜든 자세 그대로 낭심부터 머리 끝까지 두 조각이 난 채 갈라졌다. 그러나 검을 거둘 틈도 없이 나는 신속히 몸을 돌렸다. 갈라진 틈으로 울긋불긋한 창이 매섭게 짓쳐 들어온 것이다. 쉭! 그 와중에 머리를 노렸는지 창 끝이 귓불을 스치는 게 느껴졌다. 회피는 고개만 틀면 가능한 일이었지만, 나는 일부러 몸을 크게 회전시켰다. 그리고 일월신검을 왼손으로 옮긴 후, 허리를 살짝 낮추며 창이 질러온 방향으로 검을 마주 찔렀다. 푸욱! 검이 어딘가에 깊숙이 박힌 느낌이 들었다. 어디든 좋다. 이어서 주저 않고 마력 폭발을 사용하자, 찢어지는 폭음과 함께 검붉은 액체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비록 일부가 나에게 튀었지만, 나는 전혀 아랑곳 않고 검을 비스듬히 당겼다. 그러자 목 위가 끔찍하게 터져나간 망인이 스르르 몸을 허물어뜨렸다. 문득 볼에 묻어 흐르는 액체가 차갑게 느껴졌다. 이로서 순식간에 두 명을 처치했다. 이제 남은 망인은 네 명. 그러나 곧바로 다시 네 자루의 무기들이 날아들어, 나는 차분히 몸을 빼며 발악하는 망인들을 주시했다. 확실히 이상했다. 망인이라 함은 원래 의식 없이 집념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러나 아까 수준급 마법을 사용한 것도 그렇고, 지금도 연계가 가히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몇 걸음을 더 물려 할퀴듯 지나간 공격을 피해낸 후, 나는 도로 대지를 박차 놈들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한꺼번에 베어버리려 검에 회전을 가하려는 찰나, 갑자기 앞뒤로 강하게 충돌하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였지만 눈앞에 검게 변하고, 검에 미묘한 압박이 가해지는 걸 느꼈다. '이놈들 봐라?'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목덜미로 뭔가 싸늘한 것이 흘러들었다. 흘끗 쳐다보자 두 놈이 내 앞뒤로 육탄 공격을 했고, 다른 한 놈이 온몸으로 내 검을 붙잡고 있는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망인은 도끼를 크게 치켜든 채 나를 쪼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빠!” 시끄러워. 누군가의 외침에 속으로 대답한 후, 나는 최대한 마력을 끌어올렸다. 일단은 검의 자유를 찾는 게 우선이었다. 하여 다시금 마력 폭발을 일으키는 것과 함께, 빠르게 발을 놀려 도끼를 든 망인의 다리를 걸었다. 끄억?! 망인은 일순간 비틀비틀했으나, 곧바로 자세를 잡으려는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검을 봉쇄하던 놈은 이미 온몸이 터져나간 상태였다. 하여 도끼를 든 놈이 완전히 몸을 일으키기 전에, 나는 자유로워진 일월신검을 들어 망인의 머리를 신속히 내리쳤다. 서걱! 크어어억! 끄어어억!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망인의 목이 툭 떨어졌다. 그리고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분명 처리한 건 한 놈인데 두 놈에게서 비명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앞뒤로 들이친 망인들의 압박이 느슨해진 게 느껴졌다. 거기다 앞쪽에 있는 놈은 주춤주춤 몸을 물리기까지. 그뿐만이 아니라 부근에서 시커먼 연기들이 줄줄이 올라오고 있었다. 망인의 몸에서 나는 연기였다. 뭔가 싶어 시선을 내린 순간, 내 몸에 흐르는 은은한 빛과 그 사이사이 녹아 내리는 반짝거리는 가루들이 보였다. 이 빛은 사제의 능력이고, 가루는 아까 본 한별의 증폭 마법이었다. 그렇다면…. 화아악! 이윽고 가루가 완전히 녹아 내렸을 때, 은은했던 빛이 찬란히 터지며 사방으로 둥글게 퍼져나갔다. 빛은 주변에 서 있던 망인을 완전히 덮쳐 들었고, 이어서 전신이 녹아 흘러내리는 망인들을 볼 수 있었다. 아마 사제 한 명과 한별이가 합작해 나를 지원한 모양이다. 그러나 내 뒤를 잡은 망인은 아직도 내 목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 바로 등 뒤로 검을 찔러보았으나 애꿎은 허공만 가르는 게 느껴졌다. 흘끗 아래를 내려다보니 중간이 끊어 떨어진 망인의 하체가 보였다. 목에 뜨거운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게, 아마 내 목을 감은 상태로 빛에 맞은 모양이다. 이내 몸을 크게 한 번 털자, 망인은 힘없이 툭 떨어져 내렸다. 이로서 우 방향으로 들어오는 망인은 전부 처리했다. 그러나 전방이나 좌 방향에서는 아직 한창 전투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나는 목에 흐르는 액체를 쓱 닦은 후 지체 않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 전투가 끝났다. 첫 전투를 무사히 마치고 승리를 거둬서일까. 재정비에 들어간 클랜원들은 하나같이 밝은 얼굴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상처 없는 승리는 아니었다. 이번 전투의 부상자는 총 2명. 가장 선두에서 싸운 차소림과 좌 방향을 맡은 남다은이었다. 다행히 둘 다 그리 심하지는 않은 부상으로 차소림의 경우 동귀어진으로 들어온 방패 치기에 손목에 충격을 받았고, 남다은은 왼팔에 길지만 얕은 자상을 입었다. 본인은 실수였다고 했지만, 내구 능력치가 낮은 남다은으로서는 있을 수 있는 상처였다. 우정민, 선유운, 허준영은 망인들을 살펴보다가 나에게 조심스레 다가왔다. 그러더니 허준영이 내 귓가로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출현하는 망인들의 근력 능력치를 계산해보면, 대강 80은 넘는 것 같다. 만만한 수치는 아니야.” “남다은이 말해주던가?” “아니. 정확한 수치는 말해주지 않았다. 대강 알려줬어.” “…그런가.” 허준영의 부연 설명에 나는 싱겁게 웃었다. 사용자 정보는 극비에 해당하는 정보였지만, 같은 클랜이라는 하에 이 정도의 교류는 가끔 이루어지는 편이다. 적을 정확히 알아야 다음에 더욱 확실한 방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뭐, 나한테는 크게 의미 없는 말이었지만.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상대들은 해보니 어떻습니까?” “별로 어렵지는 않았다. 워낙 악명이 높길래 속으로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쉬운 전투였어.” 허준영은 즉시 대답했다. 그러나 우정민 선유운은 그렇지는 않은 듯, 머리를 갸울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확실히 생각보다는 쉬운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공터에서 안솔의 능력에 당한 열 구의 사체를 발견했고, 그 중에는 마법사로 보이는 망인도 끼어있었습니다. 아마 안솔양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네 분께서 앞에서 그렇게 잘 버텨주지 못했다면 꽤 힘든 전투가 되었을 겁니다.” “이하 동문입니다.” 우정민의 장황한 설명에 선유운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나는 느릿하게 말을 흘렸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확실히 망인들은 여타의 괴물보다는 차원이 다른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 개개인의 무력도 괜찮은 수준이지만, 서로 연계하여 체계적으로 전투하는 방식에서 우러나오는 강함이었다. 그러나 이번 첫 전투를 솔직히 평가해보면 나는 우정민과 똑같이 말할 것이다. 생각보다는 쉬웠다고. 나는 천천히 머셔너리 클랜원들을 둘러보았다. 망인들은 여전히 강했지만, 우리는 더 강하다. 몇 명만 제외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클랜원들은 거의 최고 정예 급 사용자들이었다. 또한 아까 안솔의 재빠른 대응과, 허준영과 차소림의 훌륭한 연계는 인상 깊게 남아있었다. '그리고…. 나도 많이 강해졌으니까.' 1회 차에 워낙 고생고생하며 탐험하던 기억만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산맥에 들어가기 앞서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방금 전투로 내 생각은 완전히 뒤바뀐 상태였다. 나는 이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나를 포함 현재 여기 서 있는 머셔너리 클랜원들의 수준은 그때 이스탄텔 로우의 수준을 상회하고 있다고. 그렇다면, 어쩌면 이번에 용이 잠든 산맥을 완전히 공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분히 상념에서 깨어난 후, 나는 아직도 쳐다보고 있는 세 명의 사내를 향해 말했다. “다음 전투에서도 난전이 벌어지면, 근접 계열들은 각자의 무기에 사제의 축복을….” 그러나 도중에 나는 갑작스레 말을 멈췄다. 한 쪽에서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차분히 고개를 돌리자 양손으로 얼굴을 받친 채 쭈그려 앉아있는 유정을 볼 수 있었다. 유정은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머리를 끄덕였다. 계속 말하라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왜?” “아니. 그냥 보기 좋아서.” “보기 좋다고?” “잘생긴 남자들이 한 곳에 모여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잖아. 계속해줘. 보기 좋다.” 아까 망인의 피가 궁금하다고 외친 여인은 어디로 갔는지, 유정은 예쁘게도 웃었다. 허준영은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우정민은 피식 웃었으며, 선유운은 쑥스럽게 웃었다. 아무튼 보거나 말거나 계속 말을 이으려는 찰나, 이번에는 누군가 다급히 뛰어와 내 팔을 부여잡았다. 또 뭔가 하고 미간을 좁히자 매우 급한 얼굴을 한 한별이 보였다. “오, 오빠. 큰일났어요.” “큰일?” “하, 한결이가 아까부터 보이지 않아요.” “어? 아, 맞다! 백한결!” 유정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쳤다. 모두 그 소리를 들었는지, 한순간 사위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다들 눈만 부릅뜬 걸 보니 전투에 정신이 팔려 사라진 한결을 생각지 못한 모양이다. “…깜빡 잊고 있었군.” “지, 지금이라도 빨리 찾으러 가야 하지 않을까요? 아까 공터 안으로 사라지던데….” “하우. 산 넘어 산이네요오.” “어, 어떡해! 어떡해! 우리 한결이!” 나는 호들갑을 떨며 매달려오는 유정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가만히 손가락을 들어 한 쪽 방향을 가리켰다. 클랜원들은 전부다 내 손가락이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방향은 우리가 지금껏 걸어온 길이었다. 이윽고 10초 정도를 기다리고 있자, 누군가 안개 사이로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내 멍한 눈길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인영의 정체는 다름 아닌 한결이었다. 클랜원들은 동시에 탄성을 터뜨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저 안쪽으로 사라졌을 텐데.” “예. 저도 분명히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허준영이 인상을 슬그머니 찌푸리자, 선유운이 얼른 받아 말을 확인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한결은 예의 흐릿한 눈으로 우리 사이를 지나치는 중이었다. “일단은 따라가보는 게 낫겠지. 정비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모두 출발 준비를.”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는 중앙으로 걸어가 막 지나가는 한결의 옆에 섰다. 클랜원들은 금세 몸을 일으켜 처음의 진형대로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모두 자신의 자리를 잡은걸 확인한 후, 나는 나직이 출발을 알렸다. 이내 다시 한결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하자, 비비앙이 살금살금 다가와 말을 건넸다. “김수현. 내 생각인데 아무래도 결계 안으로 들어온 게 아닐까? 어쩌면 우리도 모르게 산맥의 같은 곳을 배회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흐음. 결계라….” 일리 있는 말이었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제 3의 눈으로 전방을 응시하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글쎄. 아무튼 따라가 보면 알겠지.” * 한결이 눈을 떴다고 느꼈을 때, 세상은 아주 약한 회색 빛이었다. 완전한 밤이 아닌 해가 뜨기 직전의 회색 빛. 여기는 도대체 어딜까? 한결은 한두 번 눈을 끔뻑인 후 살짝 머리를 들었다. 아니 들으려고 했다. 그러나 갑작스레 한결의 눈동자에 당황의 빛이 스쳤다. 머리가 꼼짝도 않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머리뿐만이 아니었다. 눈을 뜬 자세 그대로 온몸이 움직이지를 않는다. 오직 눈꺼풀만 움직여질 뿐이었다. 어떻게든 머리를 옆으로 돌리려고 했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한결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유일하게 움직이는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최대한 살폈다. 하지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어떤 정보도 보지 못했다.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마치 모든 것이 멈춘 듯 잿빛으로 물든 세상과, 자신이 어딘가에 기대어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때였다. 사아아아아…. 분명 멈춰있었다고 느꼈는데 순간적으로 스산한 바람이 한결의 귓가를 스쳤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 중얼중얼 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한결은 최대한 귀를 기울여보았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말이 너무 빠르기도 했거니와, 애당초 모르는 말이기도 했다. 스윽, 스윽.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땅을 긁는 소리가 미약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결은 속으로 까닭 없이 공포감이 차오르는걸 느꼈다. 자신은 움직일 수도 없을 터인데, 뒤에서 들리는 소리는 명백히 자신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결은 어딘가에 기대어 앉은 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발악했다. 마력도 일으켜보고, 능력도 발동해보고, 하다못해 사용자 정보 창이라도 띄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되지 않았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과 똑같이…. 스윽, 스윽, 스윽, 스윽! 아니. 하나 있기는 했다. 그건 바로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미미하게 들렸던 소리가 이제는 귀에 확실하게 들릴 정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몸을 떨고 싶지만, 떨리지 않는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지만 입이 열리지 않는다. 그저 이 상태로 하염없이 기다리는 게 현재의 한결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한결은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이 모든 게 꿈이기를. 그리고 눈을 뜨면 모든 게 사라져 있기를. 그러나.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때, 문득 아래쪽에서 싸한 느낌이 올라와 다리를 살랑살랑 간질이기 시작했다. 한결은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속으로는 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시선은 느낌을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이윽고 한결의 시선이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간 순간이었다. 콱! 갑작스레 뭔가 하얀 게 빠르게 치고 들어와, 한결의 옆을 거세게 찍어 내렸다. 그것은 손이었다. 일반 사람의 손이 아닌, 촉수처럼 길고 흐느적거리는 창백한 손이었다. 바닥을 찍은 손톱은 이어서 미친 듯이 대지를 긁어 내리기 시작했다. 한결이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아마 할 수만 있다면, 있는 대로 비명을 질렀으리라.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숨이 막힌다고 느낄 무렵. 한동안 바닥을 긁던 손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한결에게 나긋나긋이 손짓을 하고 있는 게, 뭔가 아쉬운 감이 잔뜩 묻어있었다. 그리고 손이 올라가는 것과 반대로, 이번엔 뭔가 기다란 검은색 물체가 조금씩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한결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뒤에서부터 오고 있다 느꼈는데, 갑자기 위로 올라간다? 한결은 서서히 눈동자를 들었다. 머리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최대한 위를 올려다보려 애썼다. 처음 눈에 보인 건 이리저리 흔들리는 지저분한 머리카락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똑. 피 한 방울이 한결의 눈으로 흘러들었다. 한결은 본능적으로 시선을 올리던걸 멈췄다. 여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왠지 보면 안 된다는, 보면 모든 게 끝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다시 시선을 내리려는 찰나였다. 콱! 하얀 손이 순식간에 내려와 한결의 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억지로 턱을 들어 강제로 위를 쳐다보게 하였다. 이윽고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쳐다본 한결은, 이내 곧바로 정신 줄을 놓아버렸다. ============================ 작품 후기 ============================ 어제 연재를 못해서 죄송했습니다. 그나마 적어놓은 모든 내용을 지우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원인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용이 잠든 산맥에 대해 적어놓은 설정과, 사용자 캐릭터에 대한 설정을 비교해보니 답이 나오더군요. 이번에는 용이 잠든 산맥이 어렵다고 정평이 난 만큼, 그만한 고난을 주고 싶었습니다. 물론 그만큼 엄청난 보상도 준비했었지요.(사용자 김수현의 정보를 공략 후 업데이트하겠다고 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었습니다.) 그런데 김수현 하나만으로도 워낙 수준 차이가 나는데, 엄청난 동료들까지 가세하니 답이 없었던 거지요. 결국에는 잘 풀릴 일이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커다란 고난을 주고 싶었는데 그게 애당초 오류였습니다. 말이 안 되는 내용을 적으려니 당연히 전투 내용에서 막힐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그래서 아예 구상을 바꿨습니다. 일단 한결의 구출까지는 그대로 진행되며, 그 후로는 조금 더 빠르고 신속하게 공략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중간중간 예정했던 고난에 대한 내용은 삭제하거나 다른 내용으로 변경했으며, 결론은 공략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으로 파트가 짧아졌다고 보시면 됩니다.(예를 들면 4회로 예정돼있던 이번 파트도, 2회로 줄어들었습니다.) 앞으로 조금 더 정신차리고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아. 안솔의 캐릭터 일러스트를 업데이트했습니다. :) 일러스트레이터 SILVESTER 님이 그려주신 일러스트입니다. 저번에 세라프, 고연주에 이어 안솔까지 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PS. 공지사항, 뜰, 작품 설정에 올려놨습니다. 작품 설정으로 보시면 커다란 원본으로 보실 수 있어요!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한별(3년 차) 2. 클래스(Class) : 보석 마법사(Secret, Jewel Mage,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AA - Double A) 5. 진명 • 국적 : 별에서 비롯된 자, 아름다운 빛과 광택을 다루는 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5) 7. 신장 • 체중 : 170.5cm • 47.3kg 8. 성향 : 합리 • 배려(Rationality • Consideration) [근력 71] [내구 67] [민첩 73] [체력 64] [마력 95(+1)] [행운 83] < 업적(0) > < 고유 능력(1/1) > 1. 보석 증폭(Rank : A Plus Plus Plus) < 특수 능력(1/1) > 1. 별의 부름(Rank : A Zero) < 잠재 능력(3/3) > 1. 보석 마법(Rank : A Plus) 2. 결정 폭발(Rank : A Minus) 3. 광(光) 검(Rank : B Plus) 『권능 : 보옥』 <최근 능력치 비교> (변경 전) [근력 51] [내구 59] [민첩 70] [체력 53] [마력 88] [행운 68] (변경 후) [근력 71] [내구 67] [민첩 73] [체력 64] [마력 95(+1)] [행운 83] 0441 / 0933 ---------------------------------------------- 한결의 구출. 그러나…. 휙! 바람이 짧게 갈라지는 소리. 앞쪽에서 덤벼들던 망인을 해치우고 시선을 돌리자, 때마침 유정이 세 명의 망인을 상대하는 상황을 볼 수 있었다. 하여 바로 지원을 나가려는 찰나,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전후좌우가 둘러싸인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초조한 기색도 찾을 수 없다. 유정은, 오히려 한층 달아오른 얼굴로 현란이 발을 놀리는 중이었다. 이내 각 방향에서 머리, 가슴, 다리를 노리고 공격해 들어왔지만, 유정은 삽시간에 사각으로 빠지며 왼쪽으로 몸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 무방비가 된 망인의 뒤로 물 흐르듯이 돌아가 목에 비스듬히 단검을 꼽는다. 이윽고 그 상태로 손을 살짝 돌리니 망인의 목이 깨끗하게 떨어졌다. 푸슉! 잘라낸 면에서 검붉은 피 분수가 일었다. 유정의 입 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그러나 미소는 잠시였다. 곧 왼쪽 방향에서 한 자루 창이 날아가자 이번에는 지그재그로 이동해 공격을 회피한다. 창은 하릴없이 허공을 갈랐다. 그러나 창을 내지른 망인의 뒤로 아직 기다리고 있던 한 놈이 있었다. 망인은 유정의 발 놀림이 꽤 짜증났는지, 묵직한 메이스로 종아리를 내려쳤다. “합!” 하지만 유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도리어 눈을 번쩍 뜨며 고음의 기합성을 내질렀고, 재빠르게 상체를 기울여 땅을 짚어 텀블링을 했다. 그리고 몸이 반 바퀴 회전한 순간 발을 힘껏 뻗어 망인의 가슴을 걷어찼다. 크억! 유정의 근력 능력치는 83포인트. 전력을 다한 발길질은 무시 못할 수준이다. 가슴이 움푹 패인 망인이 허우적거리며 나가떨어지자, 유정은 가슴을 찬 반동력을 이용하여 반대로 회전해 착지했다. 동시에 질풍처럼 몸을 돌려 힘차게 팔꿈치를 폈다. 푹! 막 유정의 뒤를 찌르려던 망인의 볼에 핏빛으로 물든 단검이 박혔다. 망인은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창을 툭 떨구며 몸을 허물어트렸다. 이내 바람결에 휘날렸던 유정의 붉은 머리칼이 다시 제자리를 찾은 순간이었다. “아악!” 갑작스레 유정이 눈을 크게 찡그리며 비명을 질렀다. 아까 나가떨어진 망인이 넘어진 상태로 기어와 유정의 발목을 물은 것이다. 나는 재빠르게 검을 던졌다. 일월신검은 핑그르르 날아가 망인의 목을 정확히 절단했고, 더 나아가 흙 바닥 깊숙이 틀어박혔다. 그러나 머리만 남은 망인은 여전히 유정의 발목을 물고 있었다. 한순간 몸이 휘청휘청했으나 유정은 곧바로 균형을 잡았다. 조금 전 예쁘장한 인상은 어디로 갔는지 표독스러운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본다. 곧 눈동자에서 불똥이 튀는가 싶더니 유정은 오른발을 번쩍 들어올려 망인의 머리를 거칠게 짓밟았다. 나는 혀를 찼다. 하여간 저 성질머리 하고는. 찌직! “꺄아악!” 살이 찢어지는 소리. 유정은 얼굴을 와짝 일그러뜨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새된 비명을 들었는지 신재룡이 금세 달려와 유정의 상태를 살폈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전투는 거의 정리된 상태였다. “이 개새끼가!” “유정양. 여성이 그렇게 입이 험하면 어쩝니까.” “에이 쌍! 아 짜증나!” “…지금 치료해드릴 테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신재룡은 조곤조곤 타이르고는 곧바로 주문을 외워 유정의 발목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나는 신재룡의 옆으로 다가가 한 쪽 무릎을 꿇어 유정의 상처를 살폈다. 망인이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살이 거진 한 움큼은 떨어져나간 상태였다.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지장은 없겠습니까.” “예. 제 신성 주문 수준으로 충분히 치료가 가능한 상태입니다. 혹시 몰라 물약도 넉넉히 챙겨왔으니, 제대로 치료만 한다면 차후 활동에 전혀 지장이 없을 겁니다.” 신재룡의 장담에 마음이 놓였는지 유정은 안도한 얼굴로 한숨을 토해내었다. 그러더니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우우…. 아파….” “하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아 빨리 좀 치료해요! 아파 죽겠는데.” “뭐? 이게 지금 어디서 신경질이야?”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올리자 유정은 한껏 고개를 움츠렸다. 그러나 신재룡이 허허 웃으며 괜찮다고 하는 바람에 손을 도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유정은 살살 눈웃음치며 시선을 피하더니, 땅에 박힌 일월신검을 뽑아 얌전히 내밀었다. 나는 검을 받은 후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전투가 끝나고 바로 재정비에 들어갔는지 안솔이 부산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신재룡. 이번에 부상자는 몇 명입니까?” “두 명…. 아 유정양까지 있으니까 세 명이군요. 한나와 한별이가 다쳤습니다. 그리 심각한 상처는 아닙니다.” 신재룡은 유정이를 치료하느라 대수롭잖게 말했지만, 나로서는 가벼이 흘려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전위가 뚫린 겁니까?” “예. 클랜 로드가 맡으신 전방에서는 한 놈도 오지 않았지만, 왼쪽에서는 세 놈이 오른쪽에서는 다섯 놈이 오더군요…. 엇차.” 이제 치료를 마쳤는지, 신재룡은 유정의 발목을 몇 번 매만진 후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나와 한별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어느 샌가 둘은 안솔에게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세 놈은 키퍼였던 정민이가 묶었지만, 남은 두 놈이 한나와 한별이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다행히 잘 처리하기는 했습니다만…. 그 과정에서 약간 다치는 건 어쩔 수 없었지요. 아. 한별이 검술 솜씨가 예상외로 뛰어나더군요? 갑자기 빛나는 검을 소환해 망인을 상대하는데, 정말로 깜짝 놀랐습니다.” “으흠! 으흠, 으흠!” “하하하. 물론 유정양도 왼쪽에서 들어오던 세 놈을 막아내 주었지요. 정말 대단했습니다.” “나 서운할뻔했어요. 재룡이 아저씨. 히히.” 유정이 히히 웃자 신재룡도 빙그레 미소 지었다. 참 이 아저씨도 오냐오냐 하는 게 탈이라 생각하며,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큰 부상자 없이 전투를 끝낸 건 좋았다. 그러나 진이 뚫렸다는 건 자못 씁쓸하게 다가오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문제를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일단 이번 전투에 출현한 망인들의 숫자는 총 73명. 용이 잠든 산맥에 들어온 후 네 번째로 치르는 전투였다. 클랜원들은 확실히 전투를 치를수록 성장하고 있었다. 망인들의 공격 패턴이나 대응 등을 기억해 보다 수월히 상대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산맥도 마찬가지였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난도가 높아지는 추세라, 결국에는 서로 끝없는 평행선을 달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래서 한결이가 필요한 건데….' 각성 시크릿 클래스 '신의 방패'. 한결의 방어 능력은, 안젤루스 신성 주문을 익힌 안솔도 몇 수는 접고 들어갈 정도로 사기적이다. 아마 지금 한결을 후방에 배치했다면 진이 뚫려도 일말의 걱정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 후, 부상자 치료와 재정비를 마쳤다는 보고를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진의 선두로 걸음을 옮겼고, 다시 나타날 한결이를 기다렸다. 이후 조금 기다리고 있자, 또다시 한 쪽에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한결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한결이 우리를 지나치기를 기다렸다가 곧 차분히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어느덧 안개는 약간이지만 옅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 완연한 밤이 찾아들고, 아름드리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져있어서 그런지 어둡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내가 선두에 선 이상 길을 잃을 염려는 없어, 나는 쉬지 않고 클랜원들을 이끌었다. 그렇게 약 20분을 아무 말도 없이 행군했을 때, 누군가 살금살금 거리를 줄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언뜻 눈길을 돌리니 비비앙이 비장한 얼굴로 다가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왜? 아까 또 그 얘기?” 아까 도 그 얘기라 함은, 지금 우리가 결계 속에 들어와 같은 장소를 헤매고 있다는 비비앙의 주장이었다. 먼저 말을 던지자 비비앙은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곧 무겁게 머리를 끄덕이며 내 옆으로 바싹 다가왔다. “맞아…. 김수현. 내가 아까부터 주변을 주의 깊게 살폈는데, 아무리 따져봐도 내 생각이 맞는 것 같아.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그게 아니라면 왜 백한결이 아까부터 계~속 빙빙 돌고 있겠어?” “흠…. 아니라니까.” “이익! 쫌! 그냥 아니다 아니다 이렇게만 말하지 말라고! 나한테는 증거도 있단 말이야!” “증거?” 비비앙은 억울해하는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 탓에 클랜원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자신의 실수를 인지했는지 바로 흥분을 가라앉혔다. 물론 입술은 여전히 튀어나와 있었지만. 비비앙은 한동안 씩씩대더니 과도한 몸동작으로 한 쪽을 가리켰다. 곧게 핀 손가락은 왼쪽 흙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이쪽을 잘 보고 있어봐.” “왜?” “아~까 전에 내가 왼쪽 대지에서 부러진 나뭇가지를 발견했어. 그리고 걸으면서 똑같이 부러진 나뭇가지를 또 하나 발견했고, 다시 걸으면서 또 하나를 발견했어. 떨어져있던 위치나 모양새가 전부 비슷한 걸로 보아, 이건 확실히…. 어, 어?! 저, 저기! 저기 저기!” “?” “또”를 말할 때마다 삿대질하던 비비앙은, 갑작스레 불침 맞은 멧돼지처럼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나는 아닐 거라는 걸 알면서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전방 30미터 앞에서, 비비앙의 말대로 성인 팔만한 나뭇가지가 떨어져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젓자 비비앙은 발끈하며 후다닥 앞으로 달려나갔다. 아마 직접 나뭇가지를 보여주려는 모양이다. 어차피 한결이 가는 방향이었기 때문에, 나는 차분히 나뭇가지가 있는 쪽으로 이동했다. 사실 내가 아니라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제 3의 눈으로 어떠한 결계도 감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비비앙이 말한 나뭇가지들은…. 나도 여기까지 오면서 몇 번이나 보았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아마 비비앙의 말대로였다면 진작에 행군을 멈췄을 것이다. 하기야, 설명도 안 해주고 그냥 아니라고만 하니, 비비앙의 답답한 심정도 약간은 이해가 되었다. “아까 본 나뭇가지랑 위치, 모양새가 똑같아! 어때. 이제 내 말을 믿겠어?” 이윽고 비비앙은 나뭇가지를 던지듯 건네더니 양손을 허리에 척 얹어 의기양양이 외쳤다. 나는 나뭇가지의 제 3의 눈으로 나뭇가지의 절단면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아니.” “이이익!” “비비앙. 다시 말하는데, 우리는 결계 속에 있는 게 아니야. 정상적으로 한결이를 따라가고 있고, 한결이가 주변을 배회하는 건…. 아마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왜! 어째서! 어떻게! 무슨 까달으로!” “까달이 아니라 까닭. 그리고 왜냐하면, 네가 말한 나뭇가지들은 나도 오면서 보았던 것들이거든.” “뭐, 뭐라고?” 비비앙의 되물음에 나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나뭇가지를 들었다. 클랜원들은 어느새 전부 다 흥미로운 얼굴로 나와 비비앙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나는 나뭇가지의 절단면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떨어진 위치는 볼 것도 없이, 절단면만 봐도 답이 나오지. 첫 번째 나뭇가지는 거의 수평이지만 미묘하게 사선으로 잘려있었어. 두 번째 나뭇가지는 아예 오른쪽으로 크게 기울여 잘려있었고, 그리고 세 번째 나뭇가지는 두 번째와 비슷하게 잘려있지만 각도가 조금 더 완만했지. 어때. 무슨 소리인지 알겠어?” 나는 이 모든 설명을 아주 빠르게 마쳤다. 비비앙은 한두 번 눈을 끔뻑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네가 본 떨어져 있던 나뭇가지들은 각각 다른 것들이라고.” 비비앙은 멍청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영리하고 똑똑하다. 곧장 내 말을 이해했는지, 황급히 머리를 흔들었다. “하, 하지만…. 어째서? 그렇다면, 이 모든 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상하잖아?!” “글쎄. 우연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아마 어떤 의도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 “의도라면…. 그럼 범인이 있다는 소리잖아! 말도 안 돼!” “왜 안 돼? 망인이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 산맥이 스스로 그랬을 수도 있고. 또 아니면 필드 효과의 일종일 수도 있고. 이제나저제나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미개척 지역이고, 우리는 침입자나 다름없지.” 사용자도 아닌 거주민이 말도 안 된다는 소리를 하는 게 신기했지만, 미개척 지역이니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비비앙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조심스레 나뭇가지를 가져가더니, 심유한 눈동자로 절단면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나는 확인 사살을 해줄 요량으로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참고로 그 나뭇가지는 절단된 게 아니라 부러진 거야. 면이 한결같지 않고 삐죽삐죽 하….” '어.'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한 생각이 번쩍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앞선 나뭇가지들의 절단면은 한결같이 예리하게 베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발견한 나뭇가지는 베어진 게 아니라 부러진 나뭇가지다. 말인즉슨 누군가의 무게를 버티지 못했거나 또는 억지로 부러뜨렸다는 소리였다. 나는 비비앙에서 나뭇가지를 빼앗듯이 가져와, 전체적으로 주의 깊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흔적은 곧바로 찾을 수 있었다. '발자국.' 거의 지워지기는 했지만, 중앙 부분에 희미한 발자국이 남아있다. 나는 반사적으로 한결이를 찾았다. 그러나 그새 우리를 지나쳤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한결이는?” “앞에 있어요!” 한별의 외침에 나는 바로 전방을 쳐다보았다. 있었다. 한결은, 어느새 우리를 약간 지나친 곳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이리저리 고개를 둘러보는 게 길을, 아니 '자신'을 찾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한결이 여태껏 왜 산맥을 배회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군…. 한결이는 마지막에 정신을 잃었던 거야.' 안현과 한결을 습격한 망인은 무척이나 교활한 놈이었다. 한결의 반쪽이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다시 찾지 못하도록 수작을 부려놓았다. 그래서 한결이 여태껏 비슷한 장소에서 자신을 찾아 헤매었던 것이다. 끼릭…. 끼릭…. 그때, 머리 위쪽으로 돌연히 삐걱대는 소리가 흘러들었다. 아니. 이건 갈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굉장히 미약하기는 했지만, 뭔가가 나무에 매달려 흔들거리는 소리였다. 소리의 진원지는, 나뭇가지가 떨어져 있던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나무. 즉 부러진 나뭇가지가 있을 거라 추측되는 나무였다. 나는 나뭇가지를 툭 떨구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머리 위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Cause You're My Girl~♪ <다음 회 예고.> (김수현의 출현.) 한결을 괴롭히던 망인 : (빙긋 웃으며.) 그래도 좋은 혼생(魂生)이었어!(?) * 하하.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오늘 많이 늦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요…. 잘하면 오늘도 늦을지도 모르겠습니다. ㅜ.ㅠ 실은 오늘 제가 생일이라, 약속이 이것저것 많이 잡혀있습니다. 특히 오후에서 저녁에 걸쳐 약속이 두 개가 있어 언제 글이 완성될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절대로 펑크는 내지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하하. 아. 그리고 어제 표지를 교체했습니다. 이번 표지의 주인공은 안솔으로, 작년에 여러분들의 투표를 받아 약속했던 표지입니다. 일러스트레이터 분께서 정말 정성 들여서 그려주셨는데, 제 마음에 쏙 드는 그림이 나왔네요. 안솔이 정말 상큼하게 묘사된 것 같습니다. 하하하. 아. 배경 한 쪽에 걸려있는 선반과 찻잔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후후.(?) :) 독자 분들이 보시기에는, 이번 안솔의 표지가 어떠세요? PS. 조만간 새로운 투표를 하겠습니다. 2차 인기 투표로 생각하고 있는데, 후기를 통해 예선을 거칠 생각입니다. 하하하. PS2. 사용자 정보가 궁금한 캐릭터가 있다면, 코멘트로 말씀해주세요. 머셔너리 클랜원이 아니더라고 괜찮습니다. 단, 스포일러 가능성이 있는 캐릭터나 어차피 올릴 예정인 김수현은 제외합니다. 0442 / 0933 ---------------------------------------------- 증오, 그리고 갈등. 다시 눈을 떴을 때, 가물가물한 시야로 어슴푸레한 회색빛 세상이 보였다. 이 장소가 어디인지. 나는 왜 여기 있는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지만, 이제 더는 궁금하지 않다. 오직 마음속으로 어두운 절망이 자리 잡는걸 느꼈다. 사삭! 사사삭! 왜냐하면 이미 수십, 아니 수백 번은 보아온 풍경이니까. 아까부터 지금까지, 이러한 상황을 무수히 반복하고 있었으니까. '싫어.' 마음속으로 간절히 외쳐보았지만…. 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싫다고 해봤자, 지금 이 상황을 조작한 놈이 그만둘 리 없다는 것을. 사삭! 사사삭! 역시나.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이, 잠시 후 목을 칭칭 동여매는 가슬가슬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어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공중으로 몸이 천천히 떠오른다. 이내 서서히 목이 조여오는 느낌과 함께 호흡이 막혀오기 시작. 이제 이 상태로 한참 동안 고통 받다가, 나는 다시 기절하겠지. 그리고 다시 눈을 뜨게 되면 회색빛 세상을 마주할 테고. 덜컥! 그때였다. 이제 곧 다가올 고통에 아무 생각 없이 눈을 감으려는 찰나, 천천히 올라가던 풍경이 갑자기 멈춘다. 그 탓에 이리저리 흔들려 목의 압박이 느슨해져, 나도 모르게 설핏 눈을 뜨고 말았다. '벌써 멈출 리가 없을 텐데?' 이윽고 시선을 한 바퀴 빙글 돌렸을 때, 나는 소스라칠 정도로 놀라버렸다. 누군가 내가 매달린 장소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나는 꾹 눈을 감았다.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고통만 받다가 죽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껏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가슴에서 심장 고동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혹시 꿈은 아닐까? 약간이 시간이 흐르고, 나는 살그머니 눈을 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어느새 아래쪽에 서 있는 형님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형님!' 형님이었다! 얼굴이 자세히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언뜻 보이는 모습은 확실한 형님이었다. 아니. 비단 형님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동료들도 서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마음속으로 말 못할 기쁨이 차 올랐다. 이제 곧 구출 받을 수 있다. 몇 십, 몇 백 번을 반복한 이러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 문득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고통과 절망만 남은 속내에서, 사라졌다 생각한 희망이 조금씩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컥!' 그때, 잠시 느슨해졌던 목의 압박이 느닷없이 크게 조여 들었다. 숨이 턱턱 막혀오는 고통 속에서 나는 다시 형님을 쳐다보려 애썼다. 그리고 간신히 시선이 닿은 순간, 돌연 이상한 위화감이 내려앉았다. '형님…?' 까닭 없이 속이 착 가라앉는다. 얼른 구해줬으면 좋겠는데. 한시라도 빨리 이 반복되는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은데. 그런데, 형님은 왜 아까부터 가만히 있는 걸까? 아니 그전에. 아예 나를 쳐다보지조차 않는다. 그러고 보니 형님의 얼굴도 확인하지 못했다. 모습은 분명 형님의 모양새였지만, 나를 마주하는 게 아니라 조용히 전방만 응시하고 있다. '설마….' 순간적으로 어떤 생각이 떠올랐지만 나는 곧바로 아닐 거라 부정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씩 기지개를 펴던 희망이 일순 고개가 꺾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마침내 형님이 서서히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일순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교차했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따로 선택지가 없었다. 자꾸 목이 조여오는 와중에도 나는 있는 힘껏 눈길을 내려 형님의 시선과 마주치려 발버둥쳤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보게 되었다. 무덤덤한 형님의 얼굴을. '저건…. 형님이 아니야….' 한순간 형님의 눈이 튀어나올 듯 부릅떠졌다. 피부가 흉측하게 일그러지더니 썩어 문드러져 버렸다. 입은 귓불까지 쭉 찢어져 검붉은 피를 흘러내렸다. 그래. 나를 올려다보는 건 형님이 아니었다. 저것은 지금껏 나를 괴롭히던 망인이었다. 말인즉슨, 지금 이러한 상황도 망인이 조작했다는 소리였다. '…하.'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한참 동안 나를 비웃던 망인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떠나가기 시작했다. 이내 한 쪽으로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양은 영락없는 동료들의 모습이었다. 속으로 연신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분명 아닐 거라고, 망인이 조작한 상황이라고 파악했음에도. 그럼에도 저들이 떠나가는 모습에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는 건 왜 일까? '하…. 하하하…. 하하하….' 이윽고 완전히 모습이 사라졌을 때, 볼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동시에 지금껏 간신히 이어오던 뭔가가 툭 끊어지는 게 느껴졌다. 간신히 살아났던 희망이 철저히 짓밟히자, 미칠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 이제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모든걸 내려놓고 죽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 뿐이었다. - 정말로? 그러한 찰나, 모든 것을 포기한 순간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온 한 줄기 속삭임. 그와 동시에 눈앞으로 하나의 형상이 나타났다. 무척이나 끔찍한 형상이었지만, 이제는 무섭다고도, 놀랍다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나는 멍하니 형상을 응시했다. 뭐든 좋으니 이제는 그만 단념하고 편해지고 싶었다. '그래. 이제 그만 죽여줘. 제발.' - 히히! 히히히! 히히히히! 됐다, 됐어! 그 순간 망인의 찢어진 입이 쩍 벌려지더니, 나를 삼키려는 듯 다가오기 시작한다. 됐다고? 도대체 무엇이 됐다는 걸까? 잠시간 의문이 들었지만 나는 곧 생각하는걸 관둬버렸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한 번만 참으면 된다. 이제 곧 망인에게 잡아 먹히면, 그리고 다시 눈을 뜨게 되면. 다시는 이런 상황을 반복하지 않아도 되겠지. '이제…. 다 끝났다….' 끝났다는 생각에 나는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렸다. '…….' 그러나 생각했던 고통이 찾아오지 않는다. 고통스러울 거라 생각했는데, 어떤 감촉도 느껴지지 않는다. 설마 벌써 끝난 걸까? 나는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혹시 눈을 뜨면 또 반복되지 않을까? 여러 복합적인 생각이 떠올라 머릿속을 휘몰아쳤다. 하지만 그냥 고개를 저었다. 다시 눈을 떴을 경우 또 똑같은 상황의 반복이라면, 그때는 정말로 버틸 자신이 없었기 때문…? “어?” 목의 압박이 느껴지지 않는다. 목소리도 나온다. 조금 전 고개도 가로저었다. 구속돼있던 몸이 다시 자유를 되찾았다. 그리고, 그 순간. - 끼아악! 끼아아악! “휴, 한 발 늦을뻔했군. 다행이다.” 낮고 사늘한 음색.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목소리가, 확실히 귓가로 흘러들었다. - 억울해! 거의 다됐는데! 바로 직전이었는데! 억울해애애애! “시끄러워, 임마.” 빠득! 빠드득! 이윽고 뭔가를 갈기갈기 우그러뜨리는 소리와 함께 망인의 비명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넘기는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이 감촉은…. “안솔! 신재룡!” 나는 곧바로 눈을 떴다. 그러자 더는 회색이 아닌, 찬연히 비쳐오는 세상을 볼 수 있었다. 거기에는, 또 다른 내가 있었다. * “와….” “오….” 안솔과 비비앙이 미약한 탄성을 터뜨렸다.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자못 신기한 모양. 사실 신기할 것도 별로 없다. 한결이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뿐이었으니까. 즉 둘이서 하나로 합쳐지는 과정이랄까. '그나저나…. 상태가 가히 좋지는 않아 보이는데.' “으음….” 한결의 입에서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일말의 걱정을 뒤로한 채 바닥에 눕힌 한결을 응시했다. 눈앞이 가물가물한지 실눈 틈으로 보이는 눈동자가 미미하게 일렁인다. “한결아. 정신이 드니?” “흐어헉!” 막 가까이 다가서려는 찰나, 한결이 눈을 번쩍 떴다. 그러더니 기겁하며 비명을 내지른다. 고개를 반대쪽으로 비튼 것으로 보아 자기도 모르게 나에게서 떨어지려 했던 모양이다. 유정은 옆을 기웃기웃 거리더니 한결의 뺨을 찰싹찰싹 두들겼다. “얘는 또 왜 이래? 야! 백한결!” “시, 싫어! 오지마! 오지마아아아!” “어머 얘 좀 봐. 기껏 구하러 와줬더니만…. 대답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리고 안현은 어딨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계속 이딴 짓 할거면…. 차라리 죽여! 죽이라고!” 계속되는 뜻 모를 반응에 유정의 아미가 찌푸려졌다. 다른 클랜원들도 이상하게 느꼈는지, 조금 더 다가와 한결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나 한결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더니, 결국 눈을 꼭 감은 채 몸을 웅크렸다. 자신을 방어하려는 모습이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신재룡은 약하게 숨을 내뱉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뭔가에 커다란 충격을 받아 혼란에 빠진 것 같은데…. 난감하군요. 일단은 치료를 해보겠습니다.” “…신성 주문으로 치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요.” “외부의 자극에 의해 내부서 발생한 거라면 그렇겠지요. 생각하기는 싫지만…. 정신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건 외부 자극을 제거하는 것과 체력을 회복하는 것. 그리고 절대적인 심신의 안정입니다. 차후 한결군의 홀 플레인에서의 활동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지금 굉장히 위험한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클랜 로드. 사용자 원혜수를 기억하십시오.” “흠.” 신재룡의 어조는 자못 진중했다.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라, 나 또한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걸 느꼈다. 하여, 나는 조용히 한결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싫어. 오지마. 계속 이딴 짓 할거면. 차라리 죽여. '어색하지 않아. 하나로 이어지는군.' 그렇다면, 하나씩 되짚어보자. 계속 이딴 짓 할거면, 차라리 죽여. 이 말은 망인에게 어떠한 짓을 당했고, 결국 참지 못해 죽이라고 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리고 싫어, 오지마. 방금 추측과 연결해보면, 망인에게 한 말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를 망인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진짜 난감한데…. 그렇다고 여기서 안정을 취할 수도 없고. 안현도 찾아야 하고.' 솔직히 건강하게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한결의 상태는 예상한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아직 초기에 불과하다는 걸까? 아무튼 신재룡의 말대로, 지금 한결을 어떻게 안정시키냐에 따라서 차후 활동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일단의 생각이 정리됐다. 나는 안솔과 신재룡에게 치료 주문을 준비하고 있으라 일러둔 후, 차분히 한결에게 다가섰다. “흐윽…. 흐으윽….” 여전히 덜덜 떨고 있는 한결은 이제는 눈물까지 흘리는 중이었다. 나는 잠시 동안 한결을 내려다보다가 조심스레 한 쪽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미세하게 떨리는 머리에 부드러이 손을 얹었다. “한결아.” “제발…. 제발….” “한결아. 형이야. 형. 구하러 왔으니까, 눈 떠.” “거짓말하지 마…. 아니야…. 더는 안 속아….” 연신 말을 걸어보았지만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는다. 정신이 엄청나게 피폐해졌다는 방증이었다. 도대체 망인이 어떤 짓거리를 했는지는 몰라도, 한결은 홀로 있는 동안 상상도 못할 만큼 고통을 받은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우선은 최대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 나는 한결의 머리를 슬쩍 받쳤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강제로 눈을 뜨게 만들었다. “잘 봐.” 나와 한결이 바라보는 곳에는 얼굴이 반으로 갈라진 망인이 있었다. “흐어억! 흐어어억!” “한결아. 똑바로 봐. 너를 괴롭히던 망인은 죽었고, 너는 구조받았어. 꿈이 아니라, 현실이야.” “거짓말이야…. 안 속아….” “왜 거짓말이라 생각해? 뭘 속는다는 거야?” 계속 달래며 고갯짓으로 신호를 주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안솔과 신재룡이 다가와 한결의 몸에 손을 대었다. “안젤루스여, 방황하는 자에게 빛을 인도하소서….” “───. ───. ───. 대상 지정 사용자 백한결. 앱노멀 스테이트, 리커버리!” 안솔은 안젤루스 주문을, 신재룡은 상태 이상 회복 주문을 걸었다. 이내 각각 하얗고 노란빛이 흘러 들어가는걸 확인한 후, 나는 머리에 얹은 손을 통해 화정의 힘을 일으켰다. 마력의 흐름을 원활하게 만들고 내부를 다듬어줄 생각이었다. “으윽…. 으으윽….” 조금은 효과가 있던 걸까? 한결의 흐느낌이 서서히 잦아드는 게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한결은 촉촉히 젖은 눈을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동자에는 아직도 불신이 가득했지만, 아까처럼 현실 부정은 하지 않는다. 세 명의 치료를 동시에 받자 조금이지만 정신을 차린 듯싶었다. 한결은 힘겨운 얼굴로 입술을 떼었다. “…형님?” “그래. 이제 정신이 좀 드니?” “형님…. 형님…! 죄, 죄송해요…. 제가, 제가….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거는 없다.” 나는 괜찮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솔직히 처음 하연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굉장히 화가 났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다그칠 마음은 들지 않는다. 또한 한결은 하연과 안현에게 휘둘렸을 뿐이라 실제로 거의 죄가 없기도 했고. 무엇보다 여기서 잘잘못을 따지는 건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거기다 구조는 아직 절반만 이뤘을 뿐이다. 어떻게 한결은 구조할 수 있었지만, 주변에 안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렁그렁한 한결과 시선을 맞춘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결아.” “혀, 형님. 이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아니, 아니야. 상황은 이미 알고 있어. 아까도 말했지만 망인은 처치했고, 너는 구출 받았어. 이제는 마음 놓아도 좋아.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않을 테니까…. 응?” “…끅.” “좋아. 다만, 한 가지만 말해주렴. 안현이 너와 함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주변에서 보이지가 않아. 혹시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니? 아니면, 안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줄 수 있니?” 한결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저 멍한 눈길로 입만 뻐끔거렸다. “아 진짜 답답해 죽겠네! 야….” 그러자 자꾸만 어물쩍거리는 한결이 답답했는지, 유정이 빽 소리를 지르며 나섰다. 그러나 바로 바라보자 조용히 말을 흐렸다. “사용자 이유정.” “아니 그게…. 안현이 보이지 않는데.” “조용히 해. 그러니까 지금 찾으려고 하고 있잖아. 네가 회의실에서 한 말을 기억해.” “죄송해요….” 나는 짧게 숨을 뱉었다. 물론 나 또한 갑갑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현재 한결의 상태는 무척이나 불안정하다. 이대로 놔두면 정신적인 후유증이 생길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니 최대한 안정하도록 만들어주며, 스스로 입을 열도록 하는 게 현재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나는 가만히 있으라 신호를 보내고 나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으니까, 천천히 떠올려봐.” 그렇게 10초의 시간이 흘렀을 때, 한결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한결은 몸을 벌떡 일으키려다가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혀, 현이 형님!” “기억났어?” “어, 어디 있어요? 설마 없어요?” “없어. 여기서 발견한 건 너뿐이야.” 나는 빠르게 대답했다. 어느덧 안솔과 신재룡의 치료 주문은 끝난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화정의 힘을 유지하며 한결을 보듬었다. 그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결은 더는 혼란 상태를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하지만, 상황을 이해하고 내 말을 받아들이려 애쓰는듯한 모습이다. “한결아 말해봐. 안현은 어떻게 됐지?” “죄, 죄송해요…. 같이 도망쳤다가…. 길을 잃어서….” “괜찮아. 그러면 어디 있는지는 너도 모른다는 거지?” “네….” 한결은 시무룩이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여기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생각나는 대로 말해줄 수 있어?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까.” 약간 움찔했지만 한결은 이내 끄덕끄덕 머리를 주억였다. 그러더니, 잠시 후 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용의 잠든 산맥에 들어오고….” “들어오고?” “들어가고…. 계속 들어가서…. 아! 가, 갈림길에서…!” “잠깐만. 갈림길?” 상당히 띄엄띄엄 말을 잇고 있었지만, 일단은 좋다. 나는 바로 말을 멈추게 했다. 한결은 미간을 약간 일그러뜨리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네, 네. 갈림길…. 뭔가 특별해 보이는 길이었어요.” '갈림길이라…. 쯧.' 나는 잠시 클랜원들을 돌아보았다가, 한결의 귀에 바짝 얼굴을 붙였다. 그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혹시 다른 나무보다 커다랗고, 바짝 말라 비틀어진 나무가 있는 장소를 말하는 거야?” “어…. 마, 맞아요…!” “…젠장. 왼쪽으로 갔어, 오른쪽으로 갔어.” “오, 오른쪽이요. 맞아요. 분명히 오른쪽이에요.” 오른쪽으로 갔다 함은, 결국에는 들어갔다는 소리였다. 순간 욕이 목구멍 끝까지 치솟았지만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한때 용이 잠든 산맥을 연구했던 나는, 지금 한결이 말한 갈림길이 어떤 장소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친놈들…. 도대체 어떻게…. 아니 어쩌자고….'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도대체 거기까지는 어떻게 갈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었지만, 갈림길 안으로 들어갔다면 더더욱 문제였다. 이로서 안현의 실종이 확정됐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갈림길은…. “일단 다시 출발하는 게 좋겠습니다. 한 장소에 오래 있는 것도 안 좋으니까요. …후방 인원들은 한결이를 부탁합니다.” 바로 유적이 있는 장소로 들어가기 직전의, '분기 지역'으로 들어가는 갈림길이었으니까. ============================ 작품 후기 ============================ 하하. 예상보다 많이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지금 상태가 많이 안 좋아요. 술은 술대로 마셨는데, 케이크는 두 개나 꾸역꾸역 넣어서 토만 두 번을 했습니다. 아직도 속이 느글느글하네요. 아…. 진짜 무식한 녀석들…. ㅋㅋㅋㅋ. 2차를 친구 집에서 중국집을 시켰는데요, 제가 삼선 자장면을 시켰거든요. 그런데 포장도 뜯지 않고 자장면 소스를 부어서 놀림만 실컷 받았습니다. 헤헤. 망할냔. 이로서 한결의 구출 파트가 끝났습니다. 그러나…. 라는 말은, 한결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었지요. 후기를 쓰는 지금이 오전 7시 29분 이네요. 아침 해가 떠오릅니다. 그래도 오늘 펑크를 내지 않아 많이 뿌듯합니다. 하하하. 아, 죄송합니다. 지금 한결이처럼 저도 제정신이 아니네요. 말이 두서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일단 한 숨 자고, 다음 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회 소제목은 '증오'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소제목입니다. '갈등'을 두고 고민하다가, '증오'가 더 어울리는 것 같아 고르게 되었네요. 분기 지역을 주목해주세요! 여러분 알러뷰 쏘 머취! 저 지금 기분 좋아요. 그럼 뾰오오오옹. 0443 / 0933 ---------------------------------------------- 증오, 그리고 갈등. 용이 잠든 산맥의 면적을 정의해보면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광대무변(廣大無邊). 매우 너르고 커서 끝이 보이지 않아, 1회 차 시절에도 모든 지역을 청소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산맥의 끝이 아닌 유적이 있는 장소를 목적지로 설정한다면, 현재 우리가 어느 정도 거리가 남았는지는 가늠할 수 있다. 아무튼, 이제나저제나 공략의 핵심은 유적이니까. 어쨌든 그렇게 생각해보면, 현재 한결을 구출한지 이틀하고 사흘째에 가까워지는 지금, 우리는 약 삼 분의 일 정도는 지나쳤다고 볼 수 있었다. 즉 첫 번째 관문인 초입과 두 번째 관문인 '방황의 대지'는 무사히 통과한 셈이다. 그리고 내일쯤 도착할 예정인 갈림길에 다다르게 되면, 비로소 세 번째 관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용이 잠든 산맥의 세 번째 관문은 특이하게도 두 개의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다시 말하면, 갈림길은 일종의 분기점(分岐點) 역할을 한다고 나 할까. 오른쪽으로 가게 되면 '증오의 대지'라 부르는 지역이 나오고, 왼쪽으로 가게 되면….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 조용히 생각을 이어가던 찰나, 비비앙 특유의 맑고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나를 일깨웠다. 설핏 시선을 들자 자그맣게 타오르는 모닥불을 둘러싼 세 여인이 보인다. 김한별, 차소림, 비비앙. 이 세 명은 나와 함께 불침번을 서는 중이었다. 말인즉슨 다른 아홉 명의 클랜원들은 침낭에 들어가 있다는 소리였다. 지금 휴식을 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일단 한결의 구출은 성공했으나, 안현의 구출은 장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클랜원들은 여태껏 강행과 전투로 알게 모르게 지쳐있는 상태였다. 남은 여정을 생각하더라도, 이제는 아주 조금씩이라도 체력을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김수현. 나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니까? 응?” 비비앙이 재차 말을 걸었다. 말투에는 제발 대꾸 좀 해달라는, 혹은 자신 좀 돌아봐 달라는 무언의 애원이 담겨있었다. '나뭇가지 하나 잘못 짚은 게 어지간히 마음에 걸리나 보군.' 나는 슬그머니 웃었다. 차소림과 김한별이 워낙 조용한 성격이라 불침번이 심심한 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다행히 비비앙이 말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는 일환으로, 차분히 모닥불을 쑤시며 입을 열었다. “뭐가.” “왜 백한결이 장소를 배회했는지. 그러니까 더 나아가, 이 산맥이 어떤 장소인지 알 것 같아.” 비비앙의 목소리는 자못 의기양양해, 일순 “그냥 하지마.”라고 말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그러면 정말 오랜만에 울먹울먹하며,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는 비비앙을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뭐, 솔직히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들일 가능성도 컸고. 하지만 눈을 초롱초롱이 빛내는 김한별, 차소림이 보여 나는 곧바로 생각을 고쳤다. 하기야 한 번쯤 들어두어 나쁜 이야기는 아닐 테고, 상황도 한가로이 장난칠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모닥불을 쑤시는걸 멈추고 차분히 비비앙을 응시했다. “좋아…. 말해봐.” “뭐야. 그 거드름 피우는 눈빛은. 아니꼽게시리.” “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 네, 네가 예전에 필드 효과라는 말을 꺼낸 적이 있잖아? 그래서 그걸 기준으로 생각을 다르게 해본 거야!” 뭔가 굉장히 불경한 말을 들은 느낌이지만, 황급히 화제를 돌리려는 노력이 가상해 넘어가주기로 했다. 하여 계속 이야기하라는 뜻으로 고갯짓을 하자, 비비앙은 한결 안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흐흠. 그러니까…. 망인은 원래 생명이 끊어진 인간을 의미하잖아?” “그렇지.” “그래. 그러면 그러한 관점에서, 생명이 끊어진 인간은 모든 게 정지하지. 심장도, 몸의 움직임도, 그리고 사고도. 하지만 산맥에 들어온 이후로, 내가 보아온 망인은 왠지 망인 같지가 않았어. 가끔이지만 말도 들리고, 주문도 외우고, 전투 방식도 살아있는 인간과 거의 비슷해 보였다고나 할까? 그럼 여기서 문제. 분명 생명이 끊어진 인간인데, 여기서 출현하는 망인들은 어떻게 인간처럼 행동할 수 있는 걸까?” “원혼, 집념, 한, 저주 등등…. 글쎄. 얼어붙은 숲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으니, 아무튼 네가 말한 것들을 가능케 하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 나는 조용히 대답하고 나서 비비앙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는 의미인지, 비비앙은 머리를 크게 끄덕이더니 신나게 말을 이었다. “좋아 좋아. 그러면 다시 얘기를 돌려서, 필드 효과로 돌아가 보자고. 생각해봐. 도대체, 이 필드 효과라는 게 왜 일어났을까?” “…일어나는 경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지. 누군가 인위적으로 발생시켰거나, 아니면 어떤 조건들이 맞아떨어져 자연적으로 발생했거나.” “맞아. 그 중에서, 나는 자연 발생에 초점을 맞췄어. 왜냐하면 네가 지금껏 해준 이야기들을 종합해본 결과, 한 가지 가설이 생겨났거든.” “가설?” 비비앙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코를 매만지더니, 약간 피곤한 모양인지 힘껏 기지개를 폈다. “으다다다. 응. 신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가 인간들에게 저주를 내렸다는 부분. 그리고 네가 조금 전 이야기한 원혼, 집념, 한, 이런 것들?” “그런 것들이라…. 자연 발생이라 함은, 마그나카르타의 저주와 인간의 원혼, 집념, 한 등등이 섞여 하나의 필드 효과를 만들어냈다는 말인가?” “바로 그거야!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김수현. 왜 도대체 이 장소에 인간들이 한이 맺힌 걸까? 과연 용이 저주를 내려서일까?” “…….” 나는 잠자코 비비앙의 말을 기다렸다. 어느새 김한별과 차소림도 비비앙에게 시선을 집중한 상태였다. 비비앙은 우리 셋을 쓱 훑어보더니 짙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지배권을 되찾으려 수십 년간 전쟁을 벌였는데, 최후의 장소인 산맥으로 들어서며 나름의 각오는 했겠지. 그런데 전투가 거의 끝나가는 마당에, 용이 고작 저주를 내렸다고 한이 맺혀? 내 생각에는 아니올시다 야. 물론 어느 정도의 연관이야 있겠지만…. 인간들의 한이 맺힌 데는 조금 더 다른, 직접적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 가령 역사에는 전해지지 못한, 어떤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이곳에서 발생했다고.” 비비앙은 비로소 긴 이야기를 끝냈다. 마지막에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말을 이어서 그런지 살짝 호흡이 거칠어진 모습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비비앙을 새삼스런 마음으로 응시했다. “어때? 내 이야기가?” '거의 정답이네.' 1회 차에서 사용자들은 용이 잠든 산맥에 대한 여러 가지 가설을 쏟아내었다. 그 중 가장 지지를 받았던 가설이 바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건이 있다.'였는데, 비비앙의 말은 그 가설과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설에 불과하다. 즉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소리. 해답은 유적에 잠들어 있겠지만, 결국 이스탄텔 로우에서 봉인함으로써 진실은 영원히 묻히게 되었다. 아무튼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라 생각하지만, 왠지 모르게 순순히 인정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까닭은 없다. 그냥 비비앙이 “에헴.”하는 모습이 보기 싫다고나 할까. 결국 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반응이 별로 마음에 차지 않는지 비비앙은 잠깐 입맛을 다셨다. 그러더니 휙 고개를 돌려 조용히 모닥불을 쬐고 있는 김한별을 쳐다보았다. “보석아. 너는 어때?” “닥…. 시끄러워요. 제가 왜 보석이에요?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요.” 김한별은 눈썹을 한껏 치켜 올렸다가, 나를 한 번 보고는 누그러뜨렸다. 아마 조심스레 추측해보건대, 방금 “닥쳐요.”라 말하려 하지 않았을까? “뭐 어때서. 보석을 사용하는 마법사니까 보석이지.” “하지 말라고요. 제가 듣기 싫다는데 왜 자꾸 그러는 거예요? 자꾸 그러면 저도 연금이라고 부르겠어요.” 김한별은 맹렬히 반대했다. 비비앙은 입술을 삐쭉 내밀어 투덜거리더니 이번에는 가만히 있는 차소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창창이는 어때? 내 이야기 들었어?”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불침번 때 과한 이야기를 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부디, 조심하시길.” 창창이라. 창을 사용하니까 창창이인 건가? 아무튼 차소림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손은 아르쿠스 발키리 창을 살살 쓰다듬고 있었다. 꽤 재미있는 명명이라 생각되는데, 막상 이름을 불리는 당사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마지막 말인 “부디, 조심하시길.”의 어조는, 나조차도 진심이라 느껴질 정도로 살기가 충만했다. 속으로 키득키득 웃고 있자 비비앙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게 보였다. 안색이 시무룩해 보이는 게, 기껏 그럴듯한 가설을 세웠는데 반응이 미적지근하니 실망한 얼굴이다. 역시 비비앙은 저 얼굴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나는 차분히 감상에 들어갔다. 그때였다. 한동안 구시렁거리던 비비앙은 갑자기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얼굴에 분연한 기색이 가득한걸 보니, 괜히 분한 마음이 이는 모양이다. 이내 나를 향해 입을 열려는 낌새가 보여, 나는 바로 선수를 쳤다. “닥쳐.” “그럼 검검이는…. 왜! 뭐!” “그렇게 부르지마.” “싫어! 내 마음이거든! 이게 뭐 어때서!” “계약서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부디 그 방정맞은 입을 영원히….”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방구를 뀌고도 성을 내던 비비앙은, 곧바로 넙죽 엎드렸다. 아주 간단한 진압이었다. 그렇게 밤은 깊어만 갔다. * 다음날. 4명 3교대로 2시간씩 휴식을 취한 후, 나는 곧바로 안현의 구조를 위한 출발을 알렸다. 사실 클랜원들은 아직 자세한 내막을 모르겠지만, 안현의 실종을 확인한 이상 나는 이미 유적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왜냐하면 실종된 사용자들은 그곳에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으니까. 물론 이것 또한 1회 차의 가설에 불과하다. 용이 잠든 산맥은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게 없는 미개척으로 남은 지역이었다. 아침에 출발했다고는 하지만, 워낙 산세가 험하고 나무가 빽빽해 지금이 아침인지 오후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우리는 총 세 번의 전투를 거쳐, 출발한지 두 시간 만에 한결이 말한 갈림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갈림길. 산지인 이상 어느 곳이든 갈리는 길이 있겠지만, 이 갈림길은 조금 특별하다. 누가 봐도 확연히 갈림목이라 알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나무를 기준으로 길이 양 갈래로 나뉜 상태였다. “여기가…. 갈림길?” 20분 전 전투의 여파가 아직 남아있는지, 남다은은 헐떡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남다은의 시선은 눈앞의 커다랗고 말라비틀어진, 툭 치면 바스러질 것 같은 나무에 고정돼있었다. 나는 왼쪽 길과 오른쪽 길에 한 번씩 눈길을 주었다가, 옆에서 불안한 얼굴을 한 한결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오른쪽 길로 들어갔다는 말이지?” “네, 네. 확실해요.” “얼마나 깊숙이 들어갔지?” “그렇게 많이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한 십 분…? 그리고….” 한결은 다시 말을 이으려다가 갑작스레 얼굴을 찡그리며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처음 구출했을 때와 같이 무작정 불안해하는 모습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아직 머릿속에 충격이 남아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일단 마지막까지 들어간 장소를 보면 말해주렴.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네. 죄송해요.” 한결을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후방으로 몸을 돌렸다. 이내 힘없이 걸어가는 한결을 보며 나는 바로 신재룡을 호출했다. 현재 한결을 전반적으로 담당하는 사용자가 바로 신재룡이었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 한결의 상태가 많이 안 좋습니까?” “안 좋다면 안 좋은 상태이지요. 어느 정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조금 무리를 한다면, 현재 구조대에 정상적으로 참가할 수 있는지가 궁금하군요.” “절대로 안 됩니다.” 신재룡은 일말의 여지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 정도입니까?” “예. 마음 같아서는 지금 바로 돌아가 한결군을 쉬게 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휴.” “물론 안현의 구출 때문에 지금 이러는 건 알고 있지만…. 초반부터 관리를 잘해야 후유증을 최대한 없앨 수 있습니다. 어떤 생각으로 말씀하신 건지는 모르겠으나, 클랜 로드. 부디 한결군의 참가는 재고해주십시오. 어쩌면 계속 이 장소에 있는 것 자체가, 지금의 한결군에게는 부담이 될지도 모릅니다.” 재차 이어진 간곡한 어조에, 나는 알겠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앞 갈림길을 보며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머릿속으로 어제 비비앙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일단 유적으로 가는 길은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큰 상관은 없다. 다만 안현이 들어간 오른쪽 길은, 바로 '증오의 대지'라 불리는 무시무시한 필드 효과를 갖고 있는 길이었다. 그렇기에 필드 효과에서 보호를 받으려면 한결의 방어 능력이 꼭 필요한데, 지금 상태에서 억지로 시켰다가는…. '차라리 정심단을 먹을까?' 출발 직전 준비해온 정심단이 있기에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나는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창고에 있던 수량을 싹 쓸어왔지만 애당초 보유하고 있던 재고가 부족했다. 클랜원들에게 간신히 하나씩 돌아갈 수량이었다. 더구나 급하게 출발하느라, 이 산맥에서 먹힐만한 효과를 지닌 정심단을 제조할 여유가 없기도 했고. 또한 앞으로 남은 지역의 필드 효과를 생각해보면, 정심단은 세 번째 관문인 '증오의 대지'보다 네 번째 관문에서 사용하는 게 더욱 효과적이었다. '일단은 들어가자.' 일단 지금 남은 길은 한결이 기억하는 장소에 가는 방법뿐이다. 결국 일단은 부딪쳐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나는 곧바로 속을 정리하고 걸음을 옮겼다. 나는 잠깐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가, 곧바로 오른쪽 길로 걸음을 틀었다. 그리고 설핏 고개를 돌려 클랜원들을 바라보았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 작품 후기 ============================ 1차에서 가장 적은 득표를 기록한 이유정, 김한별은 2차 투표에도 들어갈 예정입니다. 그리고, 2차 투표는 독자 분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싶은데요. 일단 총 인원은 여덟 명으로 제한하고 싶습니다. 이유정, 김한별이 두 자리를 차지했으니 남은 자리는 여섯 명이네요. 그냥 괜히 투표하는 건 아니고, 투표 결과 득표가 높은 캐릭터는 차후 작품 내 등장 비율이나 일러스트 제작에 선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1차 투표에 참가한 캐릭터들과, 김수현을 제외하고(주인공에게 표가 몰리는걸 방지하기 위해서 입니다.) 혹시 추천하고픈 캐릭터가 있다면 코멘트로 남겨주세요. 제가 각각 하나씩 세어보아 1등에서 6등까지 커트해, 2차 투표로 올리겠습니다. 만일 투표를 실시하게 되면 후기에 남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0444 / 0933 ---------------------------------------------- 증오, 그리고 갈등. 이로써 우리는 용이 잠든 산맥의 세 번째 관문, '증오의 대지'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 지역과 다음 지역만 넘으면 유적이 있는 장소가 나오니, 일단 절반은 넘게 왔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유적 내부 탐험은 논외로 쳐야겠지만. “으음….” “흠, 흐흠!” 오른쪽 갈림길로 들어온 지 이제 막 5분이 지났을까? 그런데 벌써 클랜원들의 입에서 불편해하는 음색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이유는 알고 있다. 이 지역의 필드 효과 '증오' 때문이었다. 비비앙의 말에 따르면, 용이 잠든 산맥의 필드 효과는 조금 특별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수많은 고대 거주민들의 증오와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의 저주가 합쳐져 탄생한 무시무시한 원념. 이것은 가히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흐르며 더욱 깊어졌을 테고, 결과적으로 이처럼 광대한 지역을 아우르는 효과를 발생시켰을 것이다. 확실히 수천 년을 내려온 증오는 얕볼만한 게 아니었다. 사용자 정보부터 착용한 장비까지 마법 저항력을 몇 겹이나 두르고 있는 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신으로 스며드는 사무칠 정도의 원념에 가슴속으로 미미한 증오의 씨앗이 자리 잡는걸 느꼈다. 대응책이 없는 건 아니다. 지금이라도 정심단을 복용하거나 한결의 방어 능력을 이용하면 된다. 하지만 정심단은 네 번째 관문을 대비해 남겨두어야 했으며, 한결은 현재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말인즉슨, 지금으로서는 이 지역을 재빠르게 지나치는 게 제일 나은 선택이었다. 아무튼 나조차도 이 정도인데, 과연 다른 클랜원들의 상태는 어떨까? 안 봐도 비디오였다. 항마력이 있다면 그나마 낫겠지만…. 아마 지금쯤 마음속에서 까닭 없이 솟구치는 증오에, 자기 자신을 다스리느라 여념이 없을 것이다. 망인뿐만 아니라 클랜원들의 상태에도 주의를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차분히 산길을 걸었다. “클랜 로드! 잠시만!” 그렇게 5분이 추가로 흘렀을 때, 신재룡의 외침이 들렸다. 나는 바로 손을 들어 정지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바로 뒤를 돌아보자 느릿하게 다가오는 한결을 볼 수 있었다. 미심쩍은 눈길로 주변을 살피면서도 매우 불안해하는 얼굴이었다. “한결아. 왜?” “형님…. 아무래도 이 부근인 것 같아요.” “이 부근?” “네. 자세히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이 길은 확실히 지나쳤던 것 같아요. 그리고….” 한결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급히 고개를 돌려 좌우를 번갈아 보았다. 아마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려 애쓰는 모양이다. '깊숙이 들어가지 않고…. 10분 정도 들어갔다고 했던가?' 나는 서너 걸음 앞으로 나서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증오의 대지'로 들어선 후 이제 막 1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약간의 오차가 있음을 감안한다면…. 스스로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한결은 생각보다 상세히 기억하고 있다. 시선이 닿는 한에서, 나는 앞쪽부터 쭉 훑어 내렸다. 그리고 곧바로 한결이 기억이 정확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장소를 중심으로, 희미한 자취들이 이곳저곳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 한다.' 마침 바로 앞에도 하나가 보여, 나는 무릎을 꿇어 흔적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산맥에 돋은 수풀은 모두 앞쪽으로 부드러이 휘어진 상태이다. 그런데 유독 내가 보고 있는 지점은 그와 반대 방향으로 휘어졌거나, 군데군데 밟혀 찢어져있다. 그리고 내려오는 방향으로, 흔적이 끝나는 지점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대지가 우묵하게 패여 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누군가 발을 끌며 뒷걸음질을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는 소리였다. 나는 다른 흔적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올렸다. 이번에는 길게 그어진 자국이다. 마치 가속한 자동차의 타이어가 쓸고 지나간 것 같은데, 자국 난 대지의 흙이 검붉은 색이었다. 마치 피를 머금은 것처럼. '아마 망인이 출현했겠지. 그리고 전투를…. 아니 전투가 아니야. 전투는커녕 저항도 못하고 도망치기 바빴군.' “으윽!” 어쨌든 조금 더 살펴보려는 찰나 누군가의 외마디 신음이 터져 나왔다. 바로 뒤를 돌아보니 한결이 땅에 쓰러져 으스러질 듯 머리를 쥐고 있었다. 급히 모여든 클랜원들을 헤치고 다가가자, 한결은 간신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크게 찌푸린 얼굴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혀, 형님. 마, 맞아요. 기억났어요.” 나는 얼른 말해보라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한결은 목울대만 꼴깍 움직이더니 계속 입술만 달싹거렸다. 뭔가 말을 하고는 싶은데 정리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비로소 한결의 말문이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갈림길로 들어오고…. 들어와서…. 갑자기 서로 다투기 시작하더니….” '갈림길로 들어왔다. 이 장소에 도착했다. 의뢰인들이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아마 의뢰인들이 서로 다툰 이유는 필드 효과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까닭 없이 치솟은 증오가 그들의 신경을 과민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한결은 상당히 띄엄띄엄 말을 잇고 있었지만, 나는 상세한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렇게만 들어도 대강의 상황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펑….” “?” “펑…. 맞아요. 어디선가 펑 소리가 났어요. 그리고 잠깐이기는 했지만, 눈앞이 하얗게 밝아졌어요.” “펑…. 소리가 나고, 눈앞이 하얗게 밝아졌다?” 하지만 이 말은 이해가 가지 않아, 나도 모르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용이 잠든 산맥은 원체 매우 적막한 지역이다. 아무 말도 없이 걸으면 풀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만이 날뿐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폭음이 솟았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망인과 격렬한 전투를 치렀을 경우 어떤 사용자가 마법을 외웠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아까 확인한 흔적 중에서 격렬한 전투는커녕 주춤주춤 도망치다 당한 흔적만 발견했을 뿐이다. “혹시 망인들이랑 전투를 한 거야?” “아, 아니요. 그때까지만 해도 망인은 보이지 않았어요.” “…그럼?” “그냥….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모든 게 조용했어요. 아무것도 변한 건 없었지만, 꼭 지금처럼…. 어…?” 그러나 망인들과 전투를 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순간, 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용이 잠든 산맥은 총 네 관문으로 이루어져있고 각 관문에 모두 망인이 출현한다. 다만 사용자들이 각각 지역을 나누고 관문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바로 각 지역에서 망인들이 출현하는 '방식'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즉 '증오의 대지'에 출현하는 망인은 초입이나 '방황의 대지'에 출현하는 망인들과는 다르다. 앞서 경험한 것처럼 객체로 우르르 몰려다니는 게 아니라, 수십, 수백 놈이 한 놈으로 뭉친 덩어리로 나타난다. 즉 가장 망인에 가까운 망인이랄까. 아무튼 한 마디로 정의하면, '증오의 대지'에 출현하는 망인은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안현과 한결이는 아니고, 의뢰인도 아니고, 망인도 아니다. 그러면 폭음의 정체는 과연 누굴까? 점점 불어나는 의문에 나는 일단 생각을 멈추고 한결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아….” 한결은, 어느새 말을 멈춘 상태였다. 아니. 입을 다물지는 않았다. 입술을 약간 뗀 채 오직 멍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말을 흐릴 때 끝말이 미묘하게 올라간 것 같았는데…. 아무튼 속내는 알 수 없지만, 갑자기 무언가 알아차린듯한 모습이었다. “한결아. 왜 그래?” “맞아…. 꼭 지금처럼….” 꼭 지금처럼? 뜻 모를 말. “폭풍전야처럼…. 모든 게 조용해졌고….” 그러나 한결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돌연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다시 천천히 내려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나는 한결의 눈에 서려있는, 뭔가에 대한 공포심을 읽을 수 있었다. 이윽고 한결은 떨리는 그러나 숨을 토해내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 갑자기 놈들이 나타났어요…!”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으어어어어어어엉…. 으어어어어어어엉…. 으어어어어어어엉…. 쿠쿵, 쿠쿠쿵, 쿠쿵, 쿠쿠쿵. 쿠쿵, 쿠쿠쿵, 쿠쿵, 쿠쿠쿵. 쿠쿵, 쿠쿠쿵, 쿠쿵, 쿠쿠쿵. 한결이 말을 마친 순간, 어디선가 길게 늘어지는 소리와 함께 지축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증오의 대지'에 출현하는 망인임을 알아차렸다. 허준영은 일순 날카롭게 전방을 훑어보더니 칼자루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북서쪽, 북쪽, 북동쪽. 세 방향에서 오고 있다. 거리는 45미터…. 아니. 조금 전에 40미터 돌파. 수는 잘 모르겠군. 그냥 무수히 많은 정도다.” “세 놈이야. 모두 전투 준비!” 세 놈이라 일축하자 허준영의 의문에 찬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일이 설명할 시간이 없다. 단 몇 초 만에 5미터를 줄여오는 놈들이니, 이곳에 다다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클랜 로드! 세 놈이라면, 이번에도 층진으로…?” 이내 황급히 전투 준비를 하는 클랜원들 사이로 우정민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나는 일월신검을 꺼내 들며 생각에 잠겼다. '증오의 대지'에 출현하는 망인은 한 마디로 '원념 덩어리'로 표현할 수 있다. 수가 적은 건 좋지만 마냥 안심할 수는 없다. 뭉쳐진 원념이 모두 소멸하기 전에는 놈들은 끈임 없이 움직이니까. '그렇다면….' “이번에는 층진으로 상대하지 않습니다. 총 세조로 나누어 각 조가 한 놈씩 맡되, 저와 남다은 둘이서 한 놈을 맡겠습니다.” 남다은 정도라면 나를 충분히 백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나온 계산이었다. 이어서, 나는 곧바로 각개 전투를 펼칠 조를 편성했다. “차소림을 조장으로, 선유운, 김한별, 안솔, 우정민이 북서쪽에서 들어오는 놈을. 그리고 허준영을 조장으로, 임한나, 비비앙, 신재룡, 이유정이 한 조로 북동쪽에서 들어오는 놈을 맡습니다. 그리고 한결이는….” 스스로도 현재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겼는지, 한결은 벌떡 몸을 일으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클랜원들은 곧바로 내가 지정한대로 조를 편성해 각자가 맡은 위치로 이동했다. 이내 옆으로 다가온 남다은을 향해, 나는 조용히 지시를 내렸다. “남다은. 절대 무리하지 말고 주변에서 대기하며 틈을 노리세요. 제가 어떻게든 상황을 만들어드릴 테니, 기회가 왔다 싶으면 세로로 크게 베어주십시오.” “세로로요?” “예. 지축이 크게 울리는 걸로 보아, 몸집이 꽤 거대한 놈인 것 같습니다. 찌르기보다는 한 번에 내려긋는 게 더 나을 겁니다.” “음~. 알겠어요. 맡겨두세요.” 남다은은 설아를 톡 튕기더니 한 쪽 눈을 찡긋하며 대답했다. “안솔양! 제 무기에 홀리 스트라이킹을 부탁합니다!” “───. ───. ───.” “남은 거리 15미터! 임한나! 보이자마자 한 방 먹여!” “후후. 이럴 때 은근슬쩍 반말하지 마.” 이윽고 각 조의 조장들과 조원들이 외치는 소리들을 들으며, 나는 잊지 않도록 한결의 말을 되새겼다. '펑 소리가 나고, 눈앞이 하얗게 변하고, 갑자기 조용해지고, 망인들이 나타났다.'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처음 용이 산맥에 들어올 때 느꼈던 의혹이 삽시간에 증폭되는 기분이었다. 쿠쿵! 쿠쿵! 쿠쿵! 하지만 나는 일단 생각을 접어두었다. 바로 결론을 도출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정보가 있었고, 무엇보다 지축의 떨림이 확연히 강해진 걸 느꼈기 때문이다. 으어어어어어어엉…! 으어어어어어어엉…! 으어어어어어어엉…! 그리고 예상대로, 곧 세 방향에서 세 망인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용자 남다은. 부탁합니다.” 이윽고, 나는 마력을 한껏 일으키며 바람처럼 내달렸다. * “크하하하하하하하!” 광호한 웃음소리가 어두운 방안을 떠나가라 울렸다. 머리에 삐죽 돋은 뿔과 비대한 몸집을 가진 인영의 정체는, 바로 '음욕의 악마'이며 7대 악마 중 하나인 아스모데우스였다. “사탄의 말이 정말이었군, 정말이었어!” 도대체 무에 그리 기쁜지, 아스모데우스는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의자를 탕탕 후려쳤다. 마치 사탕을 받은 어린 아이처럼, 무척이나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었다. 그러한 모습에 조금은 용기를 얻은 걸까? 아스모데우스의 앞에 엎드려있던 마족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자신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주, 주군. 그럼….” “응? 왜 그러지? 나의 사랑스러운 피조물이여!” “사탄 님의 제안을 수락하실 겁니까?” “그럼! 해야지! 사탄이 말한 것들이 사실로 밝혀진 이상, 안 할 이유가 없잖은가?” “하지만….” “하지만?” 아스모데우스가 몸을 일으키자, 마족은 곧장 고개를 수그렸다. 감히 주군의 말에 토를 달려 하다니. 악마의 피조물에 불과한 마족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스모데우스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내려와, 오히려 수그린 마족을 톡톡 두드렸다. “알아, 알아. 너도 사탄의 소문을 들었다면 일말의 걱정은 들겠지. 놈이라면 분명 뭔가 목적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말이야, 이건 투자라고. 투자. 놈도 미리 나에게 밝히기도 했고.” “그…. 렇습니까?” “그래. 다음 번 회의에서 사탄의 편만 들어주면 되는 일이야. 그리고 지금 이런 상황에서 동맹을 맺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음. 좋아. 아주 좋아. 사탄에게도 좋고, 나도 일석이조지.” “추, 축하합니다.” 하도 웃어 숨이 찬지, 아스모데우스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차 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 이럴 때가 아니야. 아무래도 지금 바로 작업에 들어가야겠어. 사탄의 말대로 이건 획기적인 시도가 될 거라고. 성공 가능성이 100%인 시도 말이야.” “일러주시면, 준비해놓겠습니다.” “큭큭! 괜찮아. 이번만큼은 내가 해야 해. 이번에는 인간이 대상이 아니라고.” “예?” 마족의 되물음에, 아스모데우스는 문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씩 웃어 보이고는 낮지만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대상은…. 바로 죽은 용이니까!” ============================ 작품 후기 ============================ 일단 증오, 그리고 갈등 편은 다음 회에 끝납니다. 그리고 정심단을 남겨놓은 만큼 네 번째 관문은 최대한 1회로 압축할 생각이고, 그러면 유적만 남네요. 유적 탐험은…. 어디선가 착한 누군가가 도와주고 있으니, 생각보다 많이 잡아먹지는 않을 겁니다. 하하하. 무슨 뜻인지는 보시면 알게 되실 거예요. :D 추가 사용자 정보는 여러 사용자가 나왔지만 일단 한소영, 김유현, 차소림, 선율을 선별한 상태입니다. 사용자에 한해서 다른 궁금한 캐릭터도 있으신지요? 아. 그리고 투표는 계속 받습니다. 2차 투표 개시는 용이 잠든 산맥 공략이 끝나고 할 예정이며(개인적으로 밀어주고 싶은 캐릭터가 있거든요. 험험.), 443회에 달린 코멘트만 계산해 상위 6명을 선발하겠습니다. 그럼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 :) 0445 / 0933 ---------------------------------------------- 증오, 그리고 갈등. 생각해보면, '증오의 대지'에 출현하는 망인들은 굉장히 강하고 까다로웠던 걸로 기억한다. 정상급 수준을 자랑하던 이스탄텔 로우의 사용자들조차 약간은 애를 먹지 않았던가. 물론 실수였다고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사망자 한 명이 발생하기도 했고. 당시 내가 맡았던 역할을 바로 키퍼(Keeper)였다. 물론 말뿐인 키퍼였고, 실제로는 후방으로 물러나 동료들의 전투를 지켜보는 입장이었다. 왜냐하면 그때의 나는, 망인과 맞상대는커녕 지원 전투를 해주기에도 부족한 실력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그때와 비교해보면, 가히 하늘과 땅 차이라 부를 수 있는 사용자 정보를 보유하고 있다. 이 정보로 악마 14군주 중 한 명인 마몬도 잡아내지 않았는가. 그런 만큼 나는 자신감을 갖고 땅을 힘차게 박차 올랐다. 그리고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왼손으로 무검도 꺼내 들었다. 오른손에 일월신검을 쥐고는 있었지만, 이번에는 두 개의 검을 아울러 사용할 생각이었다. 끄어어어어엉! 이윽고 아래로 시커먼 머리가 보이는 순간, 느닷없이 괴성을 지른 망인이 번뜩 얼굴(로 보이는)을 들어 나를 주시했다. 이어서 족히 수십은 넘어 보이는 검붉은 시선과 마주했을 때, 땅에 닿을 정도로 늘어진 망인의 팔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일월신검을 들어올렸다. 후웅! 역시나. 일월신검을 상단으로 들어 방어한 것과 동시에, 육중한 팔 덩어리가 바람을 가르며 짓쳐 들었다. 창졸간에 일어난 공격이었다. 그러나 미리 예감해 방어하고 있던 터라, 망인의 팔은 모세를 만난 바다처럼 태양 빛으로 이글거리는 칼날에 여지없이 갈라져 나갔다. 대번에 몸을 후려치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일월신검의 능력과 검술전문가의 권능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첫 공격은 가볍게 막아낼 수 있었지만 나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내 몸이 하강함과 동시에 망인의 남은 팔이 또다시 한 차례 구부러지듯 비틀어졌기 때문이다. 이내 재차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려는 찰나, 나는 망인의 후방을 목표로 이형환위(移形換位)를 발동했다. 츠팟! 잠시 후, 눈앞 시야가 일변했다. 조금 전까지 허공에 떠 있던 나는, 한순간 망인의 뒷골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방금 내가 있던 허공에는 수십 놈이 어지럽게 얽혀있는 망인의 팔이 후려친 사슬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잠시 동안이지만 이로써 두 팔을 모두 묶었다. 몸은 여전히 하강하고 있었다. 나는 무검과 일월신검을 일자로 세워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근력과 마력과 추가로 낙하하는 힘을 이용해, 있는 힘껏 팔을 휘둘러 망인의 머리를 찍어 내렸다. 내려친 두 검은 망인의 정수리를 깔끔하게 쪼개며 들어갔다. 뿌저저저저저저적! 처음 느낀 감촉은 단단히 굳은 살덩어리를 깎아 내리는 감촉이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걸림도 없다. 오히려 좌우로 갈라지는 망인의 몸에서 시커먼 것들이 분수처럼 솟구친다. 마치 막바지에 다다른 후룸라이드처럼, 두 검은 힘차게 망인을 갈라내려 가다가 발이 땅에 닿아서야 덜컹하며 멈췄다. 너무 강하게 힘을 준 탓인지 발이 흙 바닥 깊숙이 박혔지만, 나는 신속히 발을 빼어 몸을 물렸다. 물론 이대로 가면 섭섭하니 마력 폭발을 먹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꽈꽝! 폭음과 망인의 겉면이 울룩불룩하게 변하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서너 바퀴 공중제비를 돌아 후방으로 착지했다. 선 방어 후 이형환위로 후방을 점거, 이어서 정수리부터 베어 가르며 마력 폭발로 마무리. 이렇게 항상 애용하는 연속 공격은 완벽하게 들어갔다. 사용자건 괴물이건 웬만한 놈은 골로 보낼 위력을 지닌 공격이었지만, 상대는 수십 수백의 망인이 혼재된 증오 덩어리였다. 아까 까다롭다고 생각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망인의 끝없는 재생력 때문이다. 이 망인은 체내에 섞인 모든 망인이 소멸하기 전까지 오직 맹목적인 증오를 불태우며 달려드는 괴물이었다. 얼마나 더 공격을 퍼부어야 하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무튼 시작은 좋다. 괜히 서두르지 않고 차차 깎아나갈 생각으로 나는 차분히 검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다시 망인을 바라본 순간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끄어어어어엉…. '왜…. 저러지?' 예상대로, 어느덧 망인은 좌우로 갈라진 몸을 붙인 상태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복구 중이라고 해야 할까? 자세히 보면 갈라진 면에서 망인들이 흘러나와 물결처럼 넘실거리고 있다. 어떻게 떨어진 면은 연결한 듯싶었지만, 완벽히 이어지지는 않는 모양이다. 한 마디로 영 맥을 못 추는듯한 모습이었다. '혹시….' 나는 양손에 든 검을 내려다 보았다. 전 차원의 존재를 타격할 수 있는 무검. 마를 물리치는 일월신검. 그리고 모든 것을 잘라낼 수 있는 검술전문가의 권능. 혹시 이 삼박자가 어우러져 망인의 재생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준 게 아닐까? 일순간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곧바로 생각을 접었다. 예상이 맞든 틀리든 지금은 아무래도 좋다. 어쨌든 망인을 조금 더 수월하게 상대할 수 있다는 희소식이었으니까. 잠시 후, 어떻게 몸은 맞췄는지 망인이 비틀비틀 몸을 돌렸다. 역시 완벽히 재생은 못했는지, 서투른 바느질 솜씨로 억지로 기운듯한 단면이 눈에 밟혔다. 하지만 증오는 여전했다. 어느새 망인은 나를 향해 완전히 돌아선 상태였다.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검붉은 안광은 전보다 한층 가열된 적의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바로 양손을 마주 잡아 크게, 서서히 들어올렸다. 아마 내가 했던 대로 똑같이 내려찍을 모양이다. 하여, 나는 차분히 허리를 낮추어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지체 않고 안쪽으로 치고 들어갔다. 바야흐로 망인이 맞잡은 팔을 쭉 뻗어 추켜올린 찰나, 나와 같이 보조를 맞추는 한 날랜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살짝 눈을 돌려 기척이 감지된 곳을 응시했다. 그리고 1초 후, 망인이 차마 반응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힘껏 솟구치는 한 여인을 볼 수 있었다. 남다은이었다. 이내 망인의 양팔이 부르르 떨린, 극히 짧은 시간에. 남다은은 어떤 소리도 없이 고요히 10미터를 날아오르더니, 삽시간에 궤도를 비틀어 한 줄기 빛살처럼 내리 꽂혔다. 그리고 '설아'가 망인의 오른쪽 어깨를 세차게 베어 내리는 동시에 한 차례 비명이 터져 나오며 몸이 크게 기울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스치듯 지나가며,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다리를 힘차게 베었다. 쿵! 꽝! 첫 번째 소리는 망인이 주저앉는 소리. 두 번째 소리는…. 풀썩! 우수수! 머리칼에 흙먼지가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걸로 보아, 땅을 내려친 소리인 듯싶었다. 쓰러지면서도 어떻게든 땅은 내려친 모양이다. 어쨌든 이렇게 헛된 수고가 되었지만. 나는 다시 동작이 굼떠진 망인을 응시했다. 이제 더는 무섭지 않다. 이후의 처리는 누워서 떡을 먹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쉬운 일이었다. 망인은 무너진 상태에서도 양팔을 무차별적으로 휘둘렀지만, 나와 남다은은 치고 빠지는 방식으로 번갈아 망인을 공격했다. 나는 망인의 팔과 다리를 끊어내는데 주력해 추가적인 움직임을 봉쇄했다. 그리고 망인이 재생에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남다은은 이리 뛰어오르고 저리 뛰어오르며 상단을 집요하게 공략했다. 특히, 유독 목 부분만 집중적으로 찌르는 탓에 까닭 없이 간담이 서늘하기도 하였다. 결국 망인의 공격 주기가 차차 늦어지더니 종래에는 사지가 없어진 채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바람 빠진 비명만 흘리는 게, 입에서 뭔가를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다. 끄어어엉…. 끄어어엉…. 마침내 간신히 붙어있던 목마저 잘린 순간, 망인의 입에서 미약한 괴성이 흘러나왔다. 그러더니, 이내 모든 움직임이 완전히 멈추어 버렸다. “우리 제법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요?” 제 3의 눈으로 망인의 죽음을 확인했을 무렵, 남다은이 생글생글 웃으며 이마를 닦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잘 어울리는 게 아니라, 잘 맞는 게 아닐까요.” “그거나 그거나. 이렇게 손발도 잘 맞고, 또 속 궁합도 좋으니까….” “그러고 보니 출현한 놈이 총 세 놈이었지요. 다른 클랜원들이 잘 싸우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킥. 다들 잘하고 있는 것 같은…?” 뒷말은 약간 낯부끄러운 말이라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남다은을 외면한 채 현재 전투를 벌이고 있는 클랜원들을 살폈다. 그리고 그 순간, 남다은이 말을 흐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건 도대체…. 뭐야?' 쿵! 생각과 동시에 한 망인이 몸을 허물어트렸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클랜원들의 전투가 이상했다. 분명히 조를 나눠 각각 한 놈씩 처리하라고 했는데, 지금 눈에 보이는 건 여덟 명이 한 번에 두 놈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즉 방금 한 놈을 처리했다는 소리였다. “남다은.” “바로 지원할게요.” 순간 지금 뭐하고 있는 건가 생각했지만, 나는 일단 남다은과 함께 달렸다. 클랜원들이 전투 중인 주변 땅에는 칠흑 색 장막이 널찍하게 깔려있었다. 허준영이 시크릿 클래스 '침묵의 집행자'의 고유 능력인 '아포칼립스'를 사용한 듯싶었다. 아마 '전능 결계'의 권한으로 망인의 재생력을 억제한 것 같은데, 일단은 괜찮은 선택이었다. 이미 한 놈이 남았을 때부터 승기는 클랜원들에게 기울어 있었다. 거기다 나와 남다은이 동시에 후방을 후려치자, 간단히 남은 놈을 처리할 수 있었다. 똑같이 쿵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망인을 확인한 후 나는 클랜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후.” “쯧….” 그리고 이내, 서로를 감도는 기류가 묘하게 이상하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입을 꾹 문 채 씩씩대는 게 어떻게든 삭히려는 모양이지만, 한 명만은 아예 대놓고 상대 쪽을 흘겨보는 중이었다. 유정의 붉게 물든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입맛을 다셨다. '뭔가 심상찮은 데?' 아무튼 우선 상황을 진정시키려는 찰나, 갑작스레 유정이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참나.” 유정은 열 받은 얼굴로 머리를 크게 쓸어 올리더니 쥐고 있던 단검을 세게 내던졌다. 퍽 소리와 함께 단검은 땅속 깊숙이 박혔다. “아, 짜증나…. 진짜 못해먹겠네.” “…뭐라고요?” 대답한 사람은 다름 아닌 한별이었다. 한별 또한 무에 그리 화가 나는지, 평소 잘 참아왔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마치 처음 통과의례 때 보였던 모습처럼 싸늘한 눈빛으로 유정을 쳐다보고 있었다. “너 지금 나한테 말한 거니?” “네. 그런데요?” 한별이 도발적으로 대꾸하자 유정은 한 차례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돌연히 땅속에 박힌 단검을 휙 걷어차 버렸다. 단검은 데구루루 굴러 한별의 발끝에서 멈췄다. 한별은 잠깐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마찬가지로 어이없다는 투의 헛웃음을 흘렸다. 차가운 웃음이었다. “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하? 하? 미치겠네…. 야, 지금 몰라서 묻냐?” “그렇다면요?” “아…. 그냥 관두자. 오빠 있는데 싸우기도 싫고, 아무튼 다음부터 어그로 관리 좀 똑바로 해. 아까 전에 그쪽 때문에 다 뒤질뻔했으니까. 응?” “지금….” “됐으니까, 단검이나 내놔. 더 말하기도 짜증나.” 한별은 굉장히 억울한 얼굴이었다. 유정이 말을 자르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곧 나를 한 번 보고는 침착히 눈을 감았다. 한두 번 목울대가 움직이는 게 어떻게든 속을 가라앉히려는 것 같았다. 이윽고 눈을 뜬 한별의 눈동자는 여전히 싸늘했지만, 간신히 참는다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언니.” “됐고, 단검이나 주우라고. 그리고 갑자기 왠 언니. 소름 돋네.” 한별은 입술을 꾹 짓씹었다. 그리고 미미하게 떨리는 손으로 발치에 떨어진 단검을 주우려는 찰나. 누군가 조용히 한별을 제지하더니 유정이 걷어찬 단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잠깐 유정을 쳐다보고는 알아서 받으라는 듯 공중으로 높이 던졌다.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 단검은 이내 유정을 지나쳐 똑같이 발 부근으로 꽂혔다. 우정민이었다. “사용자 이유정. 말이 조금 심한 것 같은데.” 유정은 아래를 흘끗 내려다보더니 나직이 말을 이었다. “뭐가 심한데?” “말은 똑바로 하지. 우리가 어그로 관리를 못한 게 아니라, 그쪽에서 필요 이상으로 우리 쪽으로 다가오지 않았던가? 아주 대놓고 말이야.” “필요 이상? 아닌데? 응? 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닌 거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설령 서로간에 사소한 실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힘을 합쳐 처리하지 않았나. 우리는 동료가….” “그래. 누가 뭐래? 아무튼 결국 그쪽에서 관리 못했다는 건 맞네.” “…자꾸 그렇게 비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제 화가 나려고 하는군.” 유정이 어깨를 으쓱이며 비웃자 우정민이 매서운 목소리로 대응했다. 전후 사정은 모르지만 말하는 꼬락서니들을 보니 대충 짐작은 간다. 참 잘들 놀고 있다고 생각한 순간, 어색한 얼굴을 한 신재룡이 양쪽 사이를 가로막았다. “자, 자. 다들 왜 이러십니까. 전투도 끝났고 지금 클랜 로드도 보고 계십니다. 다들 그만하고 재정비나 합시다.” 그럼에도 누구 한 명도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보면 갑작스러운 갈등이었지만, 나름 이해는 되었다. 아마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서 있는 지역의 필드 효과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또한 한 달이 넘은 여정과 연이어 치러온 전투. 다들 이곳까지 오면서 알게 모르게 지쳐있고 스트레스가 쌓인 상태였다. 어떻게 지금껏 내색 않고 잘 참는가 싶었는데, 결국 '증오의 대지'로 들어오면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으로 변했다. 그러던 것이, 조금 전 전투에서 사소한 실수로 불거진 것이다. 다들 어떻게 참으려고 노력들은 한 모양이지만, 결국 한 명이 참지 못해 터뜨렸다. 그에 덩달아 다른 사용자들도 터져 나왔을 것이고. “후유.” 짧게 한숨을 내쉬자 클랜원들이 시선이 쏠리는 걸 볼 수 있었다. 나는 연이어 입맛을 다시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대강 짐작이 갑니다. 아무래도 제 잘못이 가장 큰 것 같네요. 다들 미안합니다.” “아, 아닙니다. 클랜 로드.” 신재룡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말했지만, 나는 더 말하지 말라는 의미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때 안솔이 입을 오물거리며 유정에게 무언의 신호를 보내었고, 유정은 수 차례 눈을 깜빡이더니 허겁지겁 허리를 굽혔다.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그만.” 그러자 막 단검을 주우려던 유정의 손이 우뚝 멈췄다. “급하다고 준비를 철저히 하지 못한 내 잘못이고.” 나는 허공섭물(虛空攝物)의 묘리를 일으켰다. 단검은 저절로 뽑혀 나오더니 핑그르르 돌아 내 손으로 들어왔다. 유정이 서서히 허리를 피어 올려 나를 조심스레 쳐다본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너를 데려온 내 잘못이고.” “오, 오빠. 그게 아니라….” 유정은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지만,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주변 클랜원들도 다들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는데, 나도 지금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며 손에 쥔 단검을 내려다보았다. 스쿠렙프. 마족 벨페고르가 사용하던 단검으로, 잘못 사용하면 착용자의 정신을 미치게 만드는 일종의 마검이나 다름없다. 나는 잠시 동안 이것을 쳐다보다가, 붉은빛을 요요히 내뿜는 검신을 양손으로 지그시 부여잡았다. “애초에 네게 이걸 준 것도 내 잘못이지.” 그리 말하는 것과 동시에, 있는 힘껏 힘을 주어 단검을 비틀었다. 콰득, 콰드득! 철이 강제로 비틀리는 소리와 함께 스쿠렙프가 반으로 뚝 끊어졌다. 그 상태로 몇 번 더 우그러트리자, 꽈배기처럼 비틀린 감촉이 이내 수 갈래로 찢어져 조각으로 변하는 게 느껴졌다. 잠시 후, 나는 가볍게 손을 털어 고철로 변한 스쿠렙프를 내던졌다. 툭! “어….” 그리고 아래를 보고 있던 유정은,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 작품 후기 ============================ 아 죄송합니다. 오늘 조아라에 다녀왔는데, 한 분이랑 조금 늦게까지 이야기를 하느라 약간 늦었네요. 하하. 원래 오늘 사용자 정보를 한 명씩 올리려고 했는데, 시간이 상당히 늦었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꿀맛 같은 휴식을 허락해주시기를 바라며, 독자 분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하하하.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 0446 / 0933 ---------------------------------------------- 최후의 요새.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주변에 흐르는 적막함처럼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그냥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오직 천천히, 거의 무너지듯이 무릎을 꿇는 유정이만이 보이고 있었다. 잠시 후, 유정은 무릎을 꿇은 상태로 조각난 고철을 하나하나 모으기 시작했다. 천천히 팔을 뻗어 사방으로 뿌려진 조각을 주워담는다. 그런 유정의 손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확연히 떨리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발을 들었다. 그리고 고철로 변한 조각 하나를 가볍게 걷어찼다. 유정이 한별이한테 그랬던 것처럼. 땡그랑! 조각난 쇠붙이는 데구루루 굴러가 다른 조각과 부딪쳤다. “아…?”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탄식에 가까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한순간 유정은 흠칫 몸을 움츠렸다. 막 조각을 잡으려던 손이 차마 잡지 못하고 지나쳐 그대로 땅을 짚었다. 그 상태로 굳어버린 것처럼 유정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 ───. ───.” 누군가 조용히 웅얼거리는 소리가 주변에 흐르는 침묵을 깨었다. 그 순간 번뜩 정신이 들어 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되비침!” 한결이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아니. 이제 모두 외워 막 발현에 들어가는 중이었다. 이윽고 한결의 몸에서 찬란한 빛이 터져 나와 우리 전부를 부드럽게 휘감아 들었다. 마력이 흐르는 웅혼한 소리가 귓가를 웅웅 울렸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뜨자, 주변으로 반들반들한 광택이 흐르는 반구형의 보호막이 세워져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딱 세 번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뭔가 달라진 세상이 눈에 밟혔다. 문득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깨어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텅 비어있던 머릿속으로 하나 둘 생각이 떠오르고, 차갑게 일어난 가슴이 착 가라앉는다. '설마….' 나는 차분히 얼굴을 매만져보았다. 그리고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클랜원들 또한 하나같이 아차 한 얼굴이 되더니 어색한 표정으로 서로 번갈아 보는 중이었다. 나는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유정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어깨를 가늘게 떨고 있었다. 모아놓은 양손에는 아직도 고철 조각들이 올려져 있다. 그렁그렁한 눈동자가 서글프게 빛나는 게,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듯한 모습이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누군가 내가 오랫동안 애용해온 무기를 부러뜨렸다면 과연 어떤 기분일까? 그렇게 생각하자 너무 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화가 나기는 했지만 이 정도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아마도…. 설마 설마 했지만, 나에게도 필드 효과가 적용된 듯싶었다. “사용자 이유정. 일어나세요.”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차소림은 나를 한 번 보고는 유정에게 다가가 차분히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는 가만히 서 있다가 기다란 한숨과 함께 클랜원들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이곳은 빠르게 지나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들 재정비에 들어가세요.” 지시를 내리자 클랜원들이 하나 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떤 클랜원은 무기를 점검하고 어떤 클랜원은 사제에게 부상을 치료받는다. 신재룡은 치료 주문을 외우면서도 한결이가 걱정되는지 연신 흘끗흘끗 곁눈질을 하고 있었다. 내가 가보겠다는 의미로 신재룡의 어깨를 짚은 뒤, 계속 주문을 유지하고 있는 한결에게로 다가갔다. 한결의 얼굴은 파리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뜻 모를 비장함이 감도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몸은 좀 괜찮니?” “네. 괜찮아요.” “무리할 필요는 없단다.” “아니요. 이제 다 기억났으니까…. 정말로 괜찮아요.” 단호한 목소리였다. 솔직히 전혀 괜찮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절대 해제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의지가 느껴졌다. 나는 한두 번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한결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래.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능력을 사용할 생각을 한 거야?” “…그때와 똑같았으니까요.” “똑같아?” “네. 그때도 갑자기 서로한테 험악하게 굴었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또 이러니까…. 아, 여기 뭔가 나쁜 효과가 있구나. 이렇게 생각했어요.” 험악하다 라. 나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잘했다는 뜻으로 한결의 보드라운 머리칼을 쓱쓱 쓰다듬었다. 한결은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히더니 조심스레 눈을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형님…. 현이 형님은 잘 계시겠죠? 구할 수 있겠죠?” “클랜 로드. 재정비를 마쳤습니다.” 질문과 동시에 선유운에게서 정비를 마쳤다는 보고가 들려왔다.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어떤 대답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안현의 생사에 대해서는 나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나는 한 가지 부탁을 했다. “한결아. 몸에 부담은 가겠지만…. 견딜 수 있다면, 오늘 하루 이 보호막을 몇 번만 더 사용할 수 있을까?” “아니요. 몇 번이 아니라 계속 지속할 수도 있어요.” “하루 동안 지속하는 건 불가능해. 일단은 해제하렴. 내가 나중에 필요할 때 따로 부탁하마.” “네 형님. 저 이제 정말 괜찮아요.” 한결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딱 부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차분히 몸을 돌렸다. 어느새 정비를 마친 클랜원들이 한 곳에 모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 어깨가 축 늘어진 유정이 유난히 눈에 밟혔다. 나는 빠르게 걸음을 놀려 선두로 이동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는 강행군을 할 예정이니, 다들 낙오 없이 잘 따라와주시길.” '일단은 빠르게 지나치는데 중점을 두자.' 어서 이 지역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곧바로 행군을 시작했다. * 사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고작 사흘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한 달처럼 느껴지는 사흘이었다고나 할까. 한결에게 말했던 대로 우리는 하루 만에 '증오의 대지'를 통과할 수 있었다. 원래는 못해도 이틀은 걸리는 거리였으나, 최대한 강행군을 한 결과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통과 도중 위험한 적도 몇 번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한결의 능력을 사용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패착이나 다름없다. 아무리 상황이 급했고 한결의 상태를 예상치 못했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준비를 소홀히 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어찌어찌 '증오의 대지'를 벗어난 우리는 곧바로 네 번째 관문인 '공포와 환영의 대지'로 들어서게 되었다. 공포와 환영의 대지. 사실상 유적이 있는 장소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관문인 만큼 악명도 매우 높은 지역인데, 정확히는 사용자의 감정에 혼란을 일으키고 마음속에 내재된 공포를 읽어, 그것을 환영으로 구체화하는 무시무시한 필드 효과를 지닌 지역이었다. 가볍게 예를 들어보면, 안솔이 용의 존재를 알고 있고 그것을 두려워한다고 가정해보자. 만일 안솔이 이 지역의 필드 효과에 먹혔다면 아마 우리는 갑자기 출현한 용을 상대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기야 실체는 망인들로 이루어진 환영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 힘은 절대로 무시할게 못되었다. 하여, 그러한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나는 마지막 지역으로 들어서며 지금껏 아끼고 아껴온 정심단을 사용했다. 꽤 질이 좋은 것들이라 한 알만 복용해도 웬만한 혼란은 방어할 수 있고, 지속 시간도 긴 편이다. 물론 자주 복용하면 전혀 좋을 게 없는 각성제의 일종이었지만, 수월하게 통과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우우우우우우…. 생각 도중 멀리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얼핏 시선을 들자 칠흑 색으로 칠해진 숲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고요한 밤. 야영지 주변은 조용하다. 이따금 어디선가 우는 소리가 들리기는 하지만, 그 소리는 미약한 정도라 오히려 밤의 정적이 두드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무 의미는 없었다. 그냥 복잡한 머릿속을 차분히 정리해보고 싶었다. “오빠. 불침번 교대 시간이에요.” 그때, 사분사분한 목소리가 내게 말을 걸었다. 흘끗 시선을 돌리자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한별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멍하니 머리를 끄덕였다. “…음.” “오빠?” “아. 너희 먼저 들어가.” “네?” 일순간 이대로 잘까 고민했지만, 조금 더 생각하고 싶은 게 있었다. 나는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먼저들 들어가라고. 조금 생각할게 있으니까….” “그럼…. 계속 불침번을 서시려고요?” “응. 다음 불침번들도 깨우지 말고 그냥 자게 나둬. 혼자 서도 충분하니까.” “이미 깨웠는데….” 한별은 조심스럽게 말을 흐렸지만, 나는 더 말을 걸지 말라는 의미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잠시 후, 한별을 비롯한 다른 불침번들이 조심조심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마력 감지를 점검한 후 재차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 이후, '공포와 환영의 대지'로 들어온 지도 이틀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아마 내일 오전쯤 우리는 이 마지막 지역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로소 유적이 있는 장소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문득 참 징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탐험 같으면 벌써 유적에 도착해 공략을 끝내고 룰루랄라 돌아가고 있을 것 같은데, 여기는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지역인지 공략은커녕 아직 유적에도 도착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니. 도착하고 나서도 문제다. 통과의례에 불과한 지역이 이렇게나 까다로운데, 안에는 또 어떤 것들이 있을지 자못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이 들기도 하였다. 물론 내가 이런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한 명 때문이었다. '하여간 안현…. 이 자식….' 바스락. 조용히 안현을 씹고 있을 무렵 나는 반사적으로 상념에서 깨었다. 등 뒤로 마른 잎을 밟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차분히 감지에 집중하자 뒤에서 누군가 우물쭈물하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 “…….” 눈에 보이는 인영은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인의 형상이었다. 내가 돌아본 것을 알았는지 여인은 잠깐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한동안 가만히 서 있던 여인은 곧 서서히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앞쪽 모닥불로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천천히 걸어오던 기척이 다시 멈췄다. “저…. 오빠….” 낮은 음성이었지만, 어딘가 남아있는 뾰족한 음색은 유정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증오의 대지'에서 일이 있은 후로, 나와 유정은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유정은 꽤 큰 충격을 받은듯했고 나도 별로 말하고 싶은 입장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왜 말을 거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대답하지 않았다. “크, 클랜 로드님….” 순간 웃을뻔했지만,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타닥, 타닥타닥! 불똥이 튀겼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은 발간 빛을 비추어 주변을 밝게 조명하고 있었다. 유정은 계속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마음을 정한 듯, 나와 마주보는 방향으로 걸어가 조심스레 엉덩이를 붙였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을 보아하니 약간은 안됐다는 생각은 들었다. 이제나저제나 나와 가장 오랫동안 함께한 사용자고, 통과의례를 같이한 사용자고, 나를 친 오빠처럼 정말 좋아해주는 사용자고, 또한 내 말을 가장 잘 따르는 사용자였다. 유정이 어떤 사용자인지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스쿠렙프를 부러뜨린 건 후회하지 않는다. 상황상 과했다는 점은 있지만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유정이를 처음 봤을 때처럼 생각했으면, 어떻게 변하든 간에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욱 상태가 이상해지도록 부추겼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편이 전투에는 더 도움이 되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생각이 변했다. 유정이는 더는 내 목적을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은…. 나중에 지구로 같이 돌아가고 싶은 소중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기세 좋게 타오르던 불길이 약간은 죽은듯한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손을 더듬자 쌓아놓은 나뭇가지가 몇 개가 잡혔다. 그것을 모닥불 안으로 던져 넣자, 사그라지던 불길이 다시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화르륵! 불길에 비치는 유정의 모습은, 무릎을 꼭 안은 상태로 물끄러미 모닥불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쪽 무릎에 살며시 얼굴을 기대더니 살그머니 나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유정의 마른 입술이 천천히 떼어졌다. ============================ 작품 후기 ============================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내 그대로 묘사하는 게 습관이 된 터라, 아직 빠르게 적는 진행이 익숙하지는 않네요. 적으면서 몇몇 부분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계속 적다 보면 익숙해질 거라 생각이 듭니다 :) 유정에게 있어 스쿠렙프는 매우 중요한 물건이에요. 단순히 성능을 떠나서, 수현이 자신에게 신경 써주며 준 첫 물건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이전 회에 이 부분을 말씀해주신분이 딱 한 분 계셨는데, 솔직히 매우 기뻤습니다. 그 부분을 그렇게 상세히 기억해주신다는 게 놀랍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굉장히 감사하기도 했어요. 헤헤. (__ )* 아마 내일이면 요새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이제 고생은 거의 끝났다고 보셔도 됩니다. 솔직히 중간중간 구상해 논 고난은 거의 수정하거나 삭제하기는 했지만, 보상은 그대로 놔두었으니 약간 날로 먹는 감도 없잖아 있네요. 하하하. PS. 요즘 축전을 그려주시는 분들이 많아요! 파슈파티 님, 고장난선풍기 님 감사합니다! :D 두 분의 축전은 제 뜰에 오시면 볼 수 있습니다! *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차소림(6년 차) 2. 클래스(Class) : 아르쿠스 발키리(Secret, Arcus Valkyrie,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AA - Double A) 5. 진명 • 국적 : 섬광(閃光), 전투 처녀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7) 7. 신장 • 체중 : 170.7cm • 53.7kg 8. 성향 : 질서 • 신념(Lawful • Belief) [근력 91] [내구 85] [민첩 97] [체력 89] [마력 92] [행운 84] < 업적(0) > < 고유 능력(1/1) > 1. 채홍 • 홍예(彩虹 • 虹霓)(Rank : EX) < 특수 능력(1/1) > 1. 아르쿠스의 보살핌(Rank : B Plus) < 잠재 능력(3/3) > 1. 아르쿠스 발키리 창술(Rank : S Zero) 2. 천광(天光)(Rank : A Plus) 3. 발할라의 가호(Rank : A Plus Plus Plus) <최근 능력치 비교> (변경 전) [근력 89] [내구 83] [민첩 95] [체력 88] [마력 91] [행운 77] (변경 후) [근력 91] [내구 85] [민첩 97] [체력 89] [마력 92] [행운 84] 『아르쿠스 발키리 세트 권능 : 무지개 오오라』 0447 / 0933 ---------------------------------------------- 최후의 요새. “이렇게 둘이 있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유정은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는 가만히 유정을 바라보았다. 불빛이 스며들어 발갛게 익은 눈동자. 그 안으로 불길 하나가 옮았는지 동공이 쉴 새 없이 일렁이고 있었다. 문득, 유정이 살그머니 미소 짓는다. “오빠…. 기억나? 예전에 나 독 승냥이한테 허벅지 물렸던 적 있잖아.” “…….” “완전히 치료된 것도 아니었는데, 미련하게 속으로만 끙끙 앓으면서 걸었지. 그런데 어떻게 오빠만 딱 알아채더라? 갑자기 불침번 때 바지를 벗으라고 하는데…. 나 그때 엄청 놀랐고, 또 엄청 창피했다고. 히히.” “…그래.” 담담한 대답. 스스로 들어도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유정도 그것을 느꼈는지 간신히 내비친 미소가 삽시간에 사그라졌다. 순간 일말의 후회가 찾아 들어 나도 모르게 시선을 모닥불로 옮겼다. 이렇게 말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조금 더 좋게 말할 수 있었는데. 왜 자꾸 마음에도 없는 말이 나오는 걸까? 무릎을 비스듬히 대고 있던 얼굴이 천천히 떨어졌다. 고개를 똑바로 한 유정은 또다시 배시시 미소 지어 보였다. 하지만 속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이 아닌, 억지가 다분히 묻어나는 미약한 웃음. 어떻게든 말을 붙이려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헤. 아…. 나 요즘 되게 어색하더라. 항상 양손 단검만 사용하다가 갑자기 한 손 단검만 사용하려니까, 자꾸 실수가 나와.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가 봐.” “그렇겠네. 그럼 전투할 때는 괜히 억지로 싸우려 하지 말고, 한결이랑 같이 물러나있어. 잘못하다 다칠 수도 있으니까.” “…으, 응. 그나저나 조금 아쉽다. 나 스쿠렙프 진짜 소중하게 사용했는데.” “다음에 더 좋은 걸로 구해줄게. 일단은 섬백으로 사용하고 있어.” …또 미소가 사라졌다. 유정은 한동안 멍한 눈길로 나를 응시하더니 한껏 까라진 태도로 눈을 내리깔았다. 얼굴에 섭섭한 기색이 가득한 게 매우 서러워하는 모습이다. 당혹스럽다. 나로서는 최대한 위로와 격려를 담아 한 말이었다. 어색한 상태로 전투를 치르면 다칠 가능성이 높으니 물러나 있으라 한 거고, 실제로 더 좋은 무기 하나를 구해줄 생각이었다. “…오빠 미워.” 그러나 울먹거리며 툭 내뱉은 유정은 꼭 안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 모습을 보자 왠지 말을 잘못한 것 같은, 아니 초점을 잘못 짚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잠시 후, 푹 숙인 고개에서 흐느끼는듯한 말이 새어 나왔다. “그거…. 흑…. 오빠가 직접 나한테 준건데…. 나한테는 진짜 뜻깊은 물건인데….” “…….” “그래. 기억도 안나지…? 이 바보…. 멍청이…. 똥개…. 해삼…. 말미잘…. 멍게….” “…….” '참 별말이 다 나오는군.' 헛웃음이 나왔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나는 가만히 말들을 받아넘겼다. 유정은 이후로도 한참을 종알종알하더니 결국 제풀에 지쳐 입을 다물었다. 조금 더 기다리다, 이제 끝났다 싶자 나는 나뭇가지를 하나 더 집어 들었다. 그리고 모닥불을 쑤시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래. 실컷 욕하니 마음은 좀 풀리냐.” “욕한 거 아니거든. 이 바보 축구 오빠야.” “하긴.” “씨이….” 하기야 방금 말은 욕설 축에도 끼지 못한다. 평소 유정의 입담을 떠올리자 절로 머리가 끄덕여졌다. 얼핏 이 와중에 한 가지 다행이라 느낀 건, 아까보다는 목소리가 부드럽게 풀렸다는 것. 유정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이리와.” 유정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이어서 무릎을 더욱 세게 끌어안는 게, 절대로 오지 않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나는 싱겁게 웃었다. “엇차.”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유정의 몸이 한 차례 움찔했다. 고개가 살짝 들렸다가 다시 파묻는 것도 확인했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유정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 아담한 어깨를 살며시 안아, 차분히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싫어…. 하지마….” 그러나 유정은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버텼다. 미미한 저항이었지만 나는 바로 끌어당기는 걸 멈췄다. 생각해보면 유정도 엄연한 여성이다. 그냥 동생같이 여겨 별생각 없이 안은 건데 생각해보면 충분히 불쾌감을 느낄만한 행동이었다. 하여 손을 떼어 거두려는 찰나, 별안간 유정이 물 흐르듯이 흘러 들어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이내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던 유정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불만 가득해 보이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갑자기 왜 이래…. 싫다니까….” “아니, 네가….” 본능에 따라 나는 그 뒷말을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아직 얼떨떨한 마음이 가신 건 아니었지만, 나는 거두려던 손을 되돌려 유정의 정수리에 얹었다. 그리고 결 좋은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태껏 못 부린 어리광을 지금 다 부리려는지 유정은 이곳저곳에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다. “으응…. 그래서?” “응?” “오빠가 아까 말하려던 거…. 네가? 라고 했잖아…. 으으응….” “…걱정된다고. 네가, 걱정된다고.” 이 정도면 훌륭한 애드리브가 아니겠는가. 이제 실컷 비빈 모양이다. 나를 넘어뜨릴 기세로 얼굴을 문지르더니, 곧 가슴에서 매우 만족한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응…. 정말? 정말로 그렇게 걱정돼?” “…왜 좋아하는 건데.” “그냥. 오빠가 걱정해주니까 좋아서.” “그건 도대체 무슨 심보냐.” 얄미울 만큼 맹랑한 말에 나는 어루만지던 머리칼을 꽉 움켰다. 유정이는 “갸르릉.” 머리를 번쩍 들었다. 바로 살살 달래어 가라앉히자, 다시 사근사근 머리를 품에 묻는다. 잠깐이기는 했지만 혹시 정말 고양이로 변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나는 쓰게 웃었다. “참…. 너나 안현이나, 똑같아. 내가 걱정하는 게 그렇게도 좋을까?” “응? 나랑 안현이랑 똑같다고?” “그래 인마.” “헐….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힘주어 말하자 유정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문득 머릿속으로 세라프가 떠올랐다. '그래서 더 나쁩니다. 사용자 김수현은, 그리도 제가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싶으신 겁니까?' 그래. 어떻게 보면 나도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없네. 나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아니긴. 조금 다를 뿐이지. 한 명은 다른 건 원만한데 말을 지지리도 안 듣지. 또 한 명은 말은 잘 듣는데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지.” “내, 내가 뭘….” “정말 몰라서 물어? 너 그럼 사용자 정보 한 번 까봐. 어떨지 궁금하네.” “시, 싫어. 그건 내 프라이버시야.” 유정은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나 확실히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곧장 시무룩한 기색을 내비쳤다. 나는 잠시 동안 유정을 응시했다. 그리고 여태껏 마음에 담아두었던 생각을 실천하기로 결심했다. '사과해야겠지.' 그렇게 마음먹은 나는, 천천히 두 팔을 벌려 유정을 품에 안았다. “오, 오빠?” 당황한 목소리가 목울대를 간질였다. 그러나 나는 유정이 말이 이어지기 직전, 곧바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 그 순간, 유정의 숨이 멎은 게 느껴졌다. “스쿠렙프를 그렇게 만든 것도 미안하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렇게 한 것도 미안해.” “아…. 아니야 오빠! 사, 사과하지 마! 응? 오, 오빠가 사과하는 건 싫고…. 내, 내 잘못도 있는데…!” 유정은 두서없이 말을 꺼냈지만,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잠시 등을 토닥이다가 잔잔히 말을 이었다. “유정아. 하지만 이건 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나는 너를 정말로 걱정하고 있단다.” “아, 아우….” 나는 유정을 천천히 품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느릿하게 머리를 들이밀어 유정과 눈을 맞췄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어쩔 줄 몰라 하더니, 눈꺼풀을 내려 시선을 아래로 회피한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항상 선머슴 같던 아이가 이런 모습을 보이자 색다른 매력이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정아. 잘 생각해봐. 홀 플레인은 영영 사는 세상이 아니야. 우리는 언젠가 지구로 돌아갈 거고, 그때까지는 잠시 거쳐 가는 곳에 불과해. 그렇지?” “으, 으응….” “그러면, 지구로 돌아갔다고 생각해보자. 너.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 과연 예전과 같이 현대의 평범한 생활에 적응할 수 있겠어?” “평범한 생활…? 적응…?” 중요한 화두를 꺼내자 유정은 비로소 시선을 들어 조심스레 나와 시선을 맞췄다. 코가 맞닿을만한 거리에서, 나는 차분히 머리를 끄덕였다. 사실, 방금 말은 비단 유정이한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었다.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늦었다. 다시 되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길을 와버렸다. 그럼에도 이렇게 다시 돌아오기를 결정한 건, 애초에 모두 각오한 상태였으니까. 그리고…. '유정이는 아직 늦지 않았다.' 유정은 아직 3년 차. 나와 비교해보면 아직 되돌아갈 가능성은 충분하다. 조금은 진심이 전해졌을까? 유정은 한동안 우물쭈물 입을 달싹이더니, 곧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빠….” “응.” “우리…. 정말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럼.” 일말의 불안감이 담긴 목소리였지만 나는 흔쾌히 머리를 끄덕였다. 유정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정말로?” “그래. 정말 되돌아갈 수 있어. 그러니까 그건 조금도 걱정하지 말고, 오빠만 믿으렴. 하지만 그때를 대비해서 이제 너 스스로도 신경을 써야겠지?” 연이어 되묻는 말에, 나는 확신을 담아 되받아 쳐주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 나는 실제로 홀 플레인의 끝을 본 사용자였으니까. 물론 유정은 이 사실을 알고 있지 못하지만, 이내 안색이 환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응…. 아니 응!” “킥. 하여간 대답은 잘해요.” “아니야. 정말이라니까? 나 오빠 말 확실히 알아들었어.” “정말이지?” 눈을 가늘게 떠 바라보자, 유정은 한 쪽 눈을 예쁘게 찡긋했다. “응. 앞으로 절대로 조심할게. 히히.” “하하하.” 나와 유정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간만에 기분 좋게 터뜨리는 웃음이었다. “히히…. 히…. …으응.” “하하…. 하…. …흐흠.” 그러나 잠시 후, 느닷없이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얼굴이 서로 코가 닿을 만큼 얼굴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속말을 이야기한다고 눈을 맞춘 건데, 이렇게 얘기를 마무리 지어서야 굉장히 어색한 상황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음. 그럼….” “오빠.” 이내 서로 서서히 숨이 잦아드는 찰나, 유정의 입술에서 자그맣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정말로 오빠만 믿으면 되는 거지? 지금처럼, 그리고 앞으로도 쭉….” “…그래. 믿어도 좋아.” “좋아…. 그럼….” “……?” 그리고 유정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동시에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나도 모르게 크게 눈이 떠졌다. 형이랑은 달리 눈치가 빠른 나였기에, 지금 유정의 행동이 어떤걸 의미하는지 눈치챘기 때문이다. 갑작스레 목이 바짝 타는 느낌이 들어 나는 침을 꿀꺽 삼켜야만 했다. 그와 동시에 여러 여인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하연, 고연주, 임한나, 남다은…. 이걸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면 미안한데. 하지만 안 하면 상처받지 않을까? 그렇게 머릿속이 삽시간에 복잡해지려는 찰나. “꺅! 꺄하…. 꺄하하!” 돌연히 얼굴을 화들짝 뺀 유정은 숨이 넘어갈 듯이 웃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몰라 몰라.”를 외쳤다. 나는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으로 멍하니 응시했다. 이윽고 유정은 양손을 볼에 대며 꺅꺅 숨을 몰아 쉬었다. “아, 대박. 대~박 미치겠다. 이거 완전 민망하네?” “어, 어?” “아 왜~. 영화나 소설에서 보면 항상 그렇잖아. 이렇게 무드 좋을 때 여주인공이 눈을 꼭 감으면, 남주인공이 키스해주는 거. 그래서 한 번 해보려고 했는데, 이거 엄청 부끄러워. 진짜로 창피해서 죽을뻔했어. 꺄하하하!” “…허허.” 갑작스레 허탈한 기분이 찾아 들어, 나는 허허 웃고 말았다. '이제 감히 오빠를 놀려?' 하지만 손사래를 치며 웃는 유정을 보고 있자니, 곧 그런 마음은 사그라졌다. '그러고 보니…. 얘도 이제 스물다섯 이던가?' 25살이면 더는 어린애가 아니다. 오히려 여성으로서는 한창 꽃을 피울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나이. 조용히 가슴에 손을 대어보았다. 그리고 느껴지는, 손을 타고 들어오는 심장의 고동은 확실히 두근두근…. '…하지는 않네.' 나는 잔잔히 웃으며 유정을 바라보았다. 무에 그리 즐거운지 아직도 깔깔대며 웃고 있다. 그 모습을 보자 절로 흐뭇한 마음이 일었다. 확실히 여성으로써 성숙하기는 했지만…. 같이 지내온 시간이 있어서 그런지, 아직은 철부지 여동생으로 보일 뿐이다. 하여 조금 전 장난을 되갚아주겠다는 마음에, 나는 침착히 왼팔을 뻗었다. 왼손으로 유정의 머릿결을 쓸어내리다, 살그머니 뒷머리를 받쳤다. 그리고 살짝 몸을 일으켰다. “까르르…. 응?” 유정은 반짝 눈을 떠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이번에는 오른팔을 내밀어, 살며시 유정의 눈에 손을 얹어 가렸다. 유정의 웃음이 뚝 끊어졌다. 이제야 뭔가 심상찮다 느낀 모양이다. “오빠…? 갑자기 왜 그래?” “쉿. 조용히.”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유정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였다. 자꾸 깜빡이는지 손바닥을 쉴 새 없이 간질이는 눈꺼풀이 느껴졌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얼굴을 천천히 가져다 대었다. 이윽고 손가락을 움직여 앞머리를 걷어내자, 가늘고 기다란 눈썹과 희고 고운 이마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고요한 밤. 적막한 숲. 그리고 무수한 별빛이 쏟아지는 산맥의 한복판에서. “앞으로….” “어…. 어…?” 나는, 훤히 드러난 유정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미끈한 살결의 감촉이 느껴졌다. 잠시 그 감촉을 음미하고 천천히 얼굴을 떼자, 가려진 눈을 제외하고 꽁꽁 얼어버린 유정의 얼굴이 보였다. “…잘해보자.” 나는 살짝 웃으며 못다한 말을 마무리 지었다. 해동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꾹 닫혀있던 유정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활짝 벌어진 입술에서. “흐…. 엉…?” 한 줄기 새된 목소리가, 멍하니 흘러나왔다. ============================ 작품 후기 ============================ 하하. 죄송합니다. 오늘 많이 늦었네요. 아무래도 집필 속도가 느려진 감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오후 6시에 시작하면 12시에는 한 편 이상을 완성했는데, 요즘에는 그것도 안 되나 봐요. :) 아. 남은 구상을 보면 용이 잠든 산맥도 이제 한 자리수가 남았네요. 이번 회는 해소 + 플래그 편이라 보시면 됩니다. 분위기가 우중충한 채 유적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요. 하하. 또한 수현의 입장이 어떤지는 내용에 나와있지만, 받아들이는 캐릭터의 입장은 다를 수가 있지요. 특히 유정이라면 더더욱 이요. 하하하. 이로써 확실히 찜은 해놨으니, 더는 “유정이 수현이한테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런데 왜 안현이랑 이어주시려고 하는 거죠?”라는 코멘트는 안 나오겠죠? :D 0448 / 0933 ---------------------------------------------- 최후의 요새. 아침이 밝았다. “안녕! 다들 힘세고 좋은 아침!” 잠에서 깬 클랜원들은 밝고 힘차게 인사를 건네는 유정을 보며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 근래 시무룩한 얼굴로 시종일관 우중충한 기운을 자아내던 인물이, 하루 만에 태도가 180도 변했기 때문이다. “이야, 재룡이 아저씨. 오늘따라 정말 멋져 보이네.” “…예, 예? 가, 감사합니다.” “히히. 그럼 저는 어때요. 저, 오늘 좀 예쁜가요?” “아…. 유, 유정양이야 항상 아름다우시죠. 허허허.” 신재룡은 잘도 거짓말을 했다. 그러다 문득, 싱글벙글한 유정을 미간을 죄어 응시하더니 걱정이 듬뿍 묻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유정양? 혹시 몸은 괜찮으십니까? 평소보다 눈이 퀭하고 얼굴이 붉어 보이는 게….” “응? 아~. 괜찮아요~. 오늘 새벽에 잠을 못 자서 그런 거니까.” 유정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지만, 신재룡은 눈을 크게 뜨며 기함했다. “예? 잠을 못 주무셨다고요?” “응. 한숨도 못 잤는데요?” “아니 어째서….” “어머. 그럼 어떻게 자요. 설레어 죽는 줄 알았는데.” “예…?” “자자. 시시콜콜한 건 접어두고, 주변을 한 번 둘러보세요. 봐요! 세상이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유정은 음침한 기운이 감도는 숲을 한 번 가리키고는, 이내 양팔을 활짝 벌리며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신재룡은 입을 쩍 벌렸다. 매우 혼란스러운 얼굴로 멍하니 서 있다가, 후닥닥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했다. 나는 재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가만 보면 저 양반, 은근히 눈치가 빠르다는 말이지. 그러나 나는,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린 걸 곧바로 후회하고 말았다. 시선이 돌린 곳에는 다은이와 한나가 꼭 부여잡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시선을 마주친 순간, 서로의 팔을 마구마구 두드리기 시작했다. “했네~.” “했어~.” “와~! 어떡해 어떡해~.” “우~! 어떡하긴요~. 어떡해요~.” '?' 한순간,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을 끔뻑였다. 그러나 갑작스레 까닭 없이 분연한 마음이 치솟아 발끈 입을 열었다. “두, 둘이서 뭘 그렇게 쑥덕대고 있는 겁니까?” 둘은 돌연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한 손을 입에 대어 아줌마들이 수다 떠는 모양새를 잡고는, 고개를 끄덕끄덕 주억이며 말했다. “쑥떡쑥떡?” “나는 콩떡콩떡.” “그럼 찰떡찰떡.” “후후. 시루떡시루떡.” '…….' 뭐, 뭐라고?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온다. 오죽하면 눈앞으로 어이가 짐을 싼 채 가출하는 환영이 보일 정도였다. 내 상태를 보았는지 둘은 또다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시침 뚝 뗀 얼굴로, 천연덕스레 속닥이기 시작했다. “아. 나 떡 얘기하니까 갑자기 떡 먹고 싶어. 그지 한나야?” “응. 그러고 보니 나도 떡이 먹고 싶네.” 다은이 말을 꺼내자, 한나가 추임새를 넣는다. 다은은 나를 한 번 보더니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그럼 우리 돌아가면 떡이나 먹을까?” “응? 어떻게? 여기에는 떡이 없잖아.” “없으면 쳐서 만들면 되지.” “쳐서 만들어?” “그럼~. 원래 떡은 절구에 찧고 치면서 만드는 거라고. 우리 돌아가면, 서로 돌아가면서 떡이나 치자.” “떡 치다…?” 한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듯했다. 하지만 곧 눈을 크게 뜨는 게 떡에 대한 의미를 파악한 모양이다. 한나는 짝 소리가 날 정도로 손뼉을 마주치고는 상냥히 웃으며 말했다. “후후. 좋아. 대신 내가 먼저. 안 그래도 요즘 고팠는데, 돌아가면 배부르게 먹을 테야.” “아하하. 그 정도는 양보해주지. 나는 인내심 있는 여성이니까. 그래도 조심해. 까딱 잘못 쳐서 먹었다가는, 1년 내내 배부를 수도 있거든.” …나는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둘이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입 꼬리는 호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눈은 부릅뜬 채 형형하게 빛나고 있다. 마치 떡, 아니 먹이를 보는듯한 눈빛이었다. “…클랜 로드. 출발 준비를 끝냈습니다.” 그때, 옆에서 나를 구원해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다급히 옆을 쳐다보자 흠칫하며 반대로 한 걸음 물러나는 선유운이 보였다. 아니 도대체 왜 물러서는 건데. 나는 차분히 심호흡했다. 그리고 벌렁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힌 후, 어느새 나를 사방으로 둘러싼 클랜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모두 제자리로! 바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오빠~. 지금 바로 갈게요~.” 이 목소리는 확실히 유정의 음색이다. 그러나 예의 높고 뾰족한 목소리가 아니라,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상큼하면서도 어딘가 수줍음 가득한 음색이었다. 주변의 시선이 한층 강렬해지고 웅성거림이 심해지는 걸 느꼈다. 나는 조용히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만해. 제발. * 아침에 사소한 해프닝 사건이 있었지만 우리는…. 아니 나는 무사히 출발할 수 있었다. 행군 도중 문득 느낀 점은, 클랜원들 사이를 감도는 기운이 어제와는 판이하게 달라졌다는 것. 애초에 시작부터 잔뜩 긴장한, 즉 잘못된 출발이기는 했다. 거기다 음침한 산지와 연이어 치러온 전투. 그리고 증오의 대지를 거치면서 거의 폭발 직전까지 갔었는데(사실 조금 터져 나오기는 했지만.), 이 모든 게 하룻밤 새에 사그라졌다. 더는 어둡거나 짜증 어린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하나같이 흐뭇하고 훈훈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게…. 젠장, 그만두자. 아무튼 어제에 비해서는 굉장히 안정돼있었다. 언덕의 정상에 오른 나는 차분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주변으로 지금껏 지나쳐온 산지와는 약간 다른, 그리 낯설지는 않은 지형이 보였다. 특유의 거무죽죽한 경치나 우거진 수풀은 여전했지만, 땅이 몹시 가파르게 기울어져 있다. 당장 보이는 언덕만해도 십 수개는 넘는다. 한 마디로 언덕과 언덕이 모인 구릉 지형이었다. 언덕을 마저 내려가고, 또다시 나타난 다른 언덕을 오른다. '거의 다 왔네.' 1회 차의 기억을 더듬어 나는 유적이 있는 장소에 거의 다다랐음을 직감했다. 그때도 이런 언덕을 넘고 넘으며, 마지막 언덕을 오르고 나서야 유적을 발견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다. “한결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괜찮습니다. 조금 무리하는 것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오늘따라 얼굴은 밝거든요…. 다만….” “다만?”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첫마디가, 이거 꿈은 아니죠? 이렇게 말을 하더군요. 아직 완전히 그때의 기억을 떨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신재룡은 안쓰러워하는 얼굴로 혀를 끌끌 찼다. 그나저나 꿈은 아니죠 라. 신재룡의 말대로 한결의 안색은 밝아 보였으나 그것이 완전한 치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망인에게 몸을 빼앗기기 직전까지 몰렸으니 그 충격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만큼, 클랜 하우스로 돌아간 후 심신의 안정과 높은 수준의 정신 치료에 들어가야 하리라. 그렇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언덕을 오르고 있을 때, 자욱한 안개를 헤치고 내 옆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얼핏 시선을 돌리자 언제나 무미건조한 얼굴을 하고 있는 허준영을 볼 수 있었다. “김수현. 할 말이 있다.” 할 말이 있다는 말에, 신재룡은 나와 허준영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머리를 꾸벅 숙이며 걸음을 물렸다. 자리를 피해줄 겸, 또 원래 자리로 돌아갈 겸 스스로 물러난 것 같았다. 이내 선두에 둘만 남게 되자, 나는 허준영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서 말해보라는 의미였다. 허준영은 답지 않게 한두 번 헛기침을 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어?” 말 그대로, 뜬금없는 사과였다. 당최 뭘 사과하는지 알 수 없어 의아히 바라보자 허준영은 나직이 말을 이었다. “너를 멋대로 조금 오해하고 있었다. 사흘 전 일 때문에….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계속 마음에 걸리더군.” “아.” 사흘 전 일이라면 유정이에게 함부로 대했던 사건을 말하는 것이리라. 허준영을 한 인간으로써 괜찮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각 말을 하든 추후 기회를 보아 말을 하든, 본인이 조금 아니다 싶다고 생각하는 건 가감 없이 말을 한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였다. 허준영은 가만히 나를 보고 있다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사용자라면 이해했겠지만, 클랜 로드로서는 조금 실망했었지. 하지만 오늘 내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흠. 굳이 사과할 필요까지는 없는데. 그거라면 내 잘못이 맞으니까.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실수였어.” “아니. 생각해보니까 너도 사용자나 클랜 로드이기 이전에, 한 명의 남성이지 않은가. 그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자꾸 뜬구름만 잡는 말이 이어지는 탓에, 허준영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그런 내 기색을 느꼈는지 허준영은 고개를 반쯤 돌려 한 쪽을 곁눈질했다. 한 번 보라는 의미 같아 시선을 돌리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뚱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한별을 볼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는 유정이 눈에 밟혔다. 아마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내가 뒤를 돌아보자 깜짝 놀란 모양이다. '…….' 그리고 이어지는 유정의 행동은 무척이나 깜찍했다. 나를 흘끗 봤다가, 시선을 피한다. 또 흘끗 봤다가, 또 시선을 피한다. 그러더니 이제는 무에 그리 좋은지, 홀로 먼 산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기까지. 그리고 나는, 이제야 허준영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천천히 시선을 돌리자 살짝 올라가 있는 입 꼬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었다. 나는 기다란 한숨을 흘려내었다. “뭘 보라는 건지 전혀 모르겠는데?” “그런가? 내 눈에는 허공을 가득 채울 정도로 흐르는 분홍색 기류가 보이는데.” “…야.” “설마 그렇게 여성의 마음을 잡을 줄은…. 농담이다, 농담. 나도 한 번 해보고 싶어 이런 거니까 그렇게 쳐다보는 건 그만두도록.” 게슴츠레 바라보자 허준영은 조용히 웃으며 부정했다. 순간 너도 농담을 할 줄 아는 인간이었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그냥 머리를 설레설레 젓는 걸로 대신했다. “적당히 좀 해라, 적당히 좀. 이제 슬슬 짜증나려고 하니까.” “흐흠. 미안. 아무튼, 실은 진짜 묻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이번에도 허튼 소리를 지껄이면 가만두지 않겠어.” “음…. 안현과 지금 우리가 가는 목적지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어서.” 어느덧 대부분의 언덕은 넘은 상태였다. 나는 게슴츠레 뜬 눈을 곧바로 바로 했다. 안현과 목적지. 생각해보니 그냥 간단하게 설명했을 뿐이지, 지금 우리가 가는 길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해준 적이 없다. 아마 지금 몇몇은 그냥 막연히 구출을 한다고 알고 있을 것이다. 말해보라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이자, 허준영은 고개를 들어 지금 올라가는 가파른 언덕을 쳐다보았다. “안현이 살아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그러니까 지금 이 산맥에 있는 거겠지. 물론 확신하는 건 아니야.” “질문을 바꿔보지. 너는 정말로, 지금 우리가 찾고 있는 유적에 안현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아마도.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가능성이라.” “그래. 가능성.” 허준영은 추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용이 잠든 산맥이 알려진 지도 벌써 몇 개월이 흘렀지. 그리고 사용자들에게 수많은 의문만 남긴 채 아직 미 공략인 상태로 남아있고.” “그건 그렇지.” “그렇다면 지금 현재 가장 대두하는 의문 중 하나가, 바로 사용자들의 실종 사건에 있어. 탐험 중 사망했다면 어딘가에는 시체가 보여야 할 텐데, 그냥 아무것도 남김없이 홀연히 사라진 거야. 그래서 지금 나온 가설이 바로 두 개. 사용자들이 망인에 흡수됐거나, 아니면 어딘가로 끌려갔거나.” “나는 전자가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사용자 백한결의 상황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언뜻 들으면 일리 있는 말이었지만, 나는 단호히 머리를 흔들었다. “달라. 확실히 다르지. 한결의 사례는 분명 특이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전자의 가설이 틀린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어. 한결이는 분명히 망인화되고 있었지만, 흡수가 아니라 몸을 빼앗길뻔한 거야. 그러한 관점으로 따지면 비록 영혼은 망인일지라도 육체는 남아있어야 해. 하지만 아니잖아?” “흠. 꽤 복잡한데. 그러면 너는 후자의 가설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거군?” “그래. 정확히는 최선이면서 남은 방법이 이것밖에 없다고 해야 옳겠지. 안현을 찾으려 이 모든 산맥을 배회할 수는 없으니까.” “하긴…. 일단 주된 목적은 안현의 구출이지만, 겸사겸사 유적을 탐험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기적이….” “또한, 우리는 추가로 의뢰 문제도 해결해야 해. 그리고 만일에 발견했을 시 상태도 염두에 두어야 하고. …유적 공략은 지금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많은 부분이 걸쳐진 부분이라 생각하면 될 거다.” “유적이 교집합 역할을 한다는 말인가. 아무튼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다. 그럼….” 허준영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나를 슬그머니 쳐다보더니 약간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까 바꾸기 전 질문인데…. 너는, 안현의 생사 가능성을 어떻게 보고 있지.” “…대답은 아까 했지.” 나는 아까와 같이 일부러 명확히 답하지 않았다. 허준영도 더는 캐물을 생각은 없는지 딱히 독촉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그럼, 우선은 네 말대로 유적을 찾는 게 가장 급한 일이겠군.” 그때였다. 휭. 한 차례,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그 바람에 허준영의 보랏빛 머리칼이 가벼이 나부꼈다. 그리고 허공에 사르르 흩뿌려지더니 살랑살랑 흔들리며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문득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일종의 데자뷔 현상이라고 해야 할까? 허준영은 이곳에 오는 게 처음일 텐데, 조금 전 흩날리던 머리칼에 누군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와 동시에 나는 발이 갑작스레 평평해졌음을 느꼈다. 얼른 아래를 내려다보자 어느새 언덕을 모두 올라와 정상에 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익숙하다. 기시감은 여전히 나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차분히 언덕 아래를 응시했다. 시선이 닿은 장소는, 해발 고도가 높은 산을 등져 둘러싸인 한 평지였다. 그러나 잘 보이지 않는다. 희뿌연 안개로 뒤덮인 분지는 오직 음울하고 음산한 기운만이 흘러나와, 아래를 내려다보는 나의 발걸음을 붙잡아놓고 있었다. “클랜 로드?” 등 뒤로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나는 재빨리 걸음을 옮겨 클랜원들이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이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장소는, 그때 한소영이 서서 유적을 내려다보던 장소라는 사실을. “클랜 로드. 왜 갑자기 걸음을 멈추신 겁니까?” 연이어 들려오는 물음에 나는 검지를 피어 언덕 아래를 가리켰다. 잠시 후. 휘잉. 재차 불어온 한 줄기 바람에 안개가 흩어져, 잠깐이지만 요새로 보이는 거대한 방어 시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저건….” 그래. 우리는 드디어, 용이 잠든 산맥의 유적 '최후의 요새'에 도착한 것이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유적에 도착했네요. 용에 대해서는 너무 기대하지 말아주세요. ㅜ.ㅠ 정말 불쌍한 아이랍니다. 엉엉. 아시잖아요. 언제나 등장은 뭔가 있어 보이지만…. 응?! 헤헤. 얼른 다음 회를 적고 싶네요. :D *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한소영(7년 차) 2. 클래스(Class) : 전장의 지휘자(Secret, Maestro Of BattleField Master,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이스탄텔 로우(Clan Rank : AA - Double A) 5. 진명 • 국적 : 철혈(Blood And Iron)의 여왕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30) 7. 신장 • 체중 : 174.8cm • 55.8kg 8. 성향 : 신념 • 철혈(Belief • Blood And Iron) [근력 80(+2)] [내구 85] [민첩 94(+2)] [체력 87] [마력 98(+2)] [행운 90(+2)] < 업적(3) > < 고유 능력(1/1) > 1. 카리스마(Rank : A Plus) < 특수 능력(1/1) > 1. 칵키드 피스톨(Cocked Pistol) : 여왕의 군대(Queen’s Army)(Rank : S Plus) < 잠재 능력(4/4) > 1. 초감각(Rank : EX) 2. 전장 지휘(Rank : EX) 3. 대(大) 마법(Rank : S Zero) 4. 항마력(Rank : A Plus Plus Plus) <최근 능력치 비교> (변경 전) [근력 78] [내구 84] [민첩 94(+2)] [체력 86] [마력 98(+2)] [행운 88] (변경 후) [근력 80(+2)] [내구 85] [민첩 94(+2)] [체력 87] [마력 98(+2)] [행운 90(+2)] 『권능 : 파괴 돌격』 * 한소영의 고유 능력은 선천적 고유 능력으로, 총 능력은 6개입니다. 0449 / 0933 ---------------------------------------------- 최후의 요새. 인간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용도 알고 있었다. 대 전쟁. 각자 다른 신념 아래, 대륙의 주도권을 놓고 무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이 전쟁은, 서로에게 커다란 상처와 극심한 피해만을 남겼다. 지켜낼 것이냐, 아니면 되찾을 것이냐. 그렇기 때문에, 더욱 물러설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길고 길었던 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인간과 용이 총력을 기울인 한 산맥에서의 최후의 전투. 언덕을 내려온 후, 나는 눈앞에 놓인 요새를 보며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 요새는 인간들이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지어놓은, 말 그대로 최후의 요새였다. 도대체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위에서 볼 때는 안개가 잔뜩 낀 탓에 자세히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언덕에서 내려와 직접 눈앞에서 보니 새삼 달라진 위용을 체감할 수 있었다.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요새의 규모는 정말이지 엄청난 수준이었다. 중세의 어떤 군대가 몰려와도 뚫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난공불락(難攻不落)이라는 고사성어가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보다. “설마 말을 꺼내자마자 찾게 될 줄은 몰랐는데.” “거의 일주일은 걸려서 찾아냈네요.” 차분히 몸을 돌아보니 허준영과 차소림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게 보였다. 다른 클랜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요새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멀거니 쳐다만 보는 중이었다. 나는 두어 번 박수를 쳐 이목을 집중시켰다. “자…. 이렇게 유적을 발견했으니 이제는 발굴을 하러 갈 차례겠지요.” “헤. 지금 바로 들어가려고?” 사실 주목적은 발굴이 아닌 안현의 구출이다. 그래서 안현을 발굴한다는 의미로 가벼운 농담을 던져봤는데,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다. 약간이지만 서운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긍정했다. “응. 굳이 시간을 끌 필요는 없으니까. 일단은 도개교를 찾아봐야겠지.” “도개교?” 비비앙은 고개를 갸웃했다. 선유운이 대충 부연 설명을 해주는 모습을 보다가, 나는 시선을 돌려 요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요새를 향해 조용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좋은 요새란, 원래 넓은 시야와 함께 주변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건설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최후의 요새라 명명된 시설은 다르다. 오히려 반대로 아래쪽으로 장소를 잡았고 후방에는 거대한 산을 등지고 서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 이렇게 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배수의 진을 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이 산맥은 정말로 징~하네. 여태껏 고생 고생해서 왔는데, 이제 또 유적을 탐험해야 한다니…. 어휴, 정말.” “후후. 힘내렴. 우리는 현이를 구출하러 온 거잖니. 그리고 혹시 아니? 여기서 성능 빵빵 한 단검이 하나 나올지.” 유정의 질렸다는 투의 어조와 한나의 위로하는 목소리가 연이어 들린 찰나, 별안간 발이 푹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응?” 차분히 아래를 내려다보자, 거의 10미터가 넘을 정도로 깊숙하게 파놓은 구덩이가 보였다. 성벽을 따르는 방향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걸 보니, 아마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해자인 듯싶었다. 해자의 바로 앞쪽으로는 15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요새의 성벽이 있었다. 또한 성벽의 끝에는 원형으로 이루어진 탑이 있었는데, 탑 후면에 또 성벽이 있는 걸로 보아 내외가 분리되는 이중 구조를 이루는듯했다. 성벽의 높이나 구조도 엄청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이렇게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못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문득 욕심이 들었다. 혹시 이 요새의 건축 설계를 알 수 있다면, 올해 안으로 개방할 마지아의 방어력을 한층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 어차피 마법으로 운영되는 도시니 이런 건 크게 상관없으려나? “이거 참, 안개가 너무 심한데요? 이거 원 속 시원히 보이지를 않으니….” “그러게나 말입니다.” 불현듯 들려오는 목소리. 이 굵직한 목소리로 투덜대는 클랜원은 신재룡일 테고, 짧고 낮은 목소리로 답한 클랜원은 선유운이 확실했다. “원래 안개가 자욱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유난히 기분도 조금 이상한 것 같고요. 클랜 로드. 아무래도 조심…. 안솔양?” 서너 번 혀를 차며 조언을 하던 신재룡은, 도중에 홀연히 말을 멈추었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몸을 돌아보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얗게 질려있는 안솔이 보였다. “안솔양? 안솔양!” “…응? 네, 네!” “혹시 어디가 안 좋습니까? 얼굴이 새하얗게….” “아, 아니요. 괜찮아요. 이상 없어요. 그냥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져서….” 나는 지체 않고 걸음을 옮겼다. 안솔의 사용자 정보나 그간 보여주었던 능력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저런 반응이 나올 때마다 꼭 짚고 가는 편이었다. “왜 그래. 기분이 어떤데.” 가까이 가서 물어보자 클랜원들의 시선이 쏠리는 걸 느꼈다. 안솔은 도리도리 고개를 가로젓고는 살그머니 웃어 보였다. 억지 웃음이었다. “아, 아니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괜찮으니까 말해봐.” “그냥…. 가슴이 아프고 갑자기 서글픈 기분이 들어서…. 딱히 이상한 건 아니에요. 괜한 심려 끼쳐서 죄송해요.” “…흠. 알겠다.” 더 묻지 말아 달라는 무언의 메시지. 안솔의 얼굴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보였다. 여기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봤자 말할 것 같지도 않아, 나는 머리를 끄덕인 후 선두로 이동했다. 그리고 진정하기를 기다렸다가, 성벽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따라서 걷다 보면 도개교가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으리라. 도개교를 찾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침 처음 걸었던 방향이 정면이었는지, 우리는 약 10분이 지나고 나서 해저에 힘겹게 걸쳐져 있는 낡은 도개교를 발견할 수 있었다. 혹시 무너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들었지만, 그래도 밟아보니 삐걱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럼,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도개교를 건너기 직전, 어느새 몇 명의 클랜원은 스스로 자리를 이동한 상태였다. 여태까지는 방진으로 오다가 전투시 층진으로 바꾸는 경우가 많았는데, 일단 나를 비롯한 근접 클래스 세 명은 그대로 선두에 서고 사제, 마법사들이 더욱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유적 내부에 어떤 것들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돌발 상황에 최대한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 선유운, 한나가 좌우로 이동한 상태였다. 클래스가 궁수인 만큼 감이 좋기 때문이다. 도개교를 건너자 우리를 맞아들인 것은 어둡고 컴컴한 성의 입구였다.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서자 흡사 끝없는 터널처럼 빛이 보이지 않는 통로가 보였다. 마력 감지를 돌려 이상 징후가 없다는 걸 확인한 후 바로 신호를 보내자, 한별과 신재룡이 조심스레 라이트 주문을 외웠다. 이내 주변 시야가 약간이나마 확보되자 나는 재차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끝없는 침묵을 느꼈다. …조용하다.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다. '…이건 너무 이상한데?' 어두운 통로를 걸으며 나는 까닭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예전 이스탄텔 로우와 언덕에 섰을 때 이 유적이 정말로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다. 즉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고나 할까? 한소영도 비슷한 감각을 느껴 여왕의 군대를 소환해 먼저 보내지 않았던가. 그리고, 소환한 군대는 소리도 소문도 없이 소멸했고. 그때 느꼈던 감각이 너무도 강렬해, 내려온 이후 계속해서 최대 한도로 마력 감지를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까지는 딱히 감지에 걸리는 게 없다. 흡사 요새 부근이나 내부가 텅 비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안으로 들어가면 또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방심 않고 계속 경계하며 나아갔다. 느릿한 걸음으로 5분여를 걷자, 비로소 우리는 꾹 닫힌 문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이래서 아마 입구로 들어올 때 빛이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고작 입구안쪽에 문이 있다는 사실이 약간 의아하기도 했지만, 제 3의 눈으로 꼼꼼히 확인해보자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근에 열린 흔적이 있다.' 엄밀히 말해서, 지금 눈앞의 철문은 닫힌 상태가 아니었다. 워낙 두께가 두터운 터라 거의 닫힌 상태로 보였지만, 문의 옆면과 문틀의 테두리가 미묘하게 어긋나있다. 그리고 문틀에 새겨진 긁힌 흔적은 분명히 최근에 한 번 이상 닫혔다가 열렸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침이 목으로 넘어간다. 정말 오랜만에 긴장이라는 감정을 느껴보는 것 같다. 실력의 부족에서 나오는 긴장이 아니었다. 1회 차와 2회 차를 통틀어 아무도 공략하지 못했으며, 어떤 것도 알지 못하는 장소라는 사실에서 느끼는 긴장이었다. 나는 침착히 마음을 가라앉히며 차가운 냉기가 흐르는 철문에 손을 대었다. 문고리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대로 밀면 열릴 것 같다. 이대로 밀기 전 한 번 뒤를 돌아보자, 긴장한 낯빛으로 나를 주시하는 클랜원들이 보였다. 눈으로 조심하라는 신호를 보낸 후 나는 손에 천천히 힘을 주었다. 끄긍, 끄그긍…! 철문은 불쾌한 소음을 내며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벌어지는 틈으로 한 줄기 빛살이 흘러들었다. 그대로 힘을 꾹 주어 밀어버리자, 부서질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그와 함께 얼어버릴 것 같은 차가운 공기가 덮쳐와 온몸을 스치듯 휘감아 들었다. 끼리릭! 동시에 누군가 시위를 당기는 소리가 통로를 울렸지만, 눈앞에는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텅 비어있을 뿐이다. 그나마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안개가 바깥보다 더욱 심하게 깔려있다는 것. 허준영은 한 발 앞으로 나서 요새 안을 살펴보더니 살그머니 인상을 찌푸렸다. “예상외로 안개가 굉장히 짙다. 안력을 돋웠는데 10미터 앞도 안 보일 정도니…. 이제는 이게 안개가 맞는 건지 의심이 들 정도야.” 아까 신재룡이 기분이 이상하다고 말한 것 같은데 나 또한 동감하는 바였다. 허준영의 말대로, 안력을 한껏 돋웠음에도 불구하고 시야가 흐릿하다. 요새 내부 광경은커녕 바닥도 잘 보이지 않는 정도였다. 오죽하면 우리가 구름 지대에 들어선 건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무튼 이로써 철문이 열렸다. 나는 가만히 안쪽을 들여다보다가 조심스레 한 걸음 내디뎠다. 덜그럭! 그때였다. 발끝으로 느닷없이 기묘한 감촉이 느껴졌다. 뭔가 싶어 시선을 내리자 자옥이 흐르는 안개 사이로 포개지듯이 쌓여있는 허여멀건 한 것들이 보였다. 잠깐 허리를 굽혀 팔을 내리자 이내 빛 바랜 하얀 막대기가 손에 잡혔다. 아니. 막대기가 아니었다. 이건 바로…. “뼈군.” 허준영의 말대로 사람의 뼈가 분명했다. 나는 곧바로 들고 있던 걸 내던지고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그리고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아래쪽에서 계속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이 말인즉슨, 지금 우리가 서 있는 땅은 무수한 뼈로 덮여있다는 소리였다. 클랜원들도 뒤따라오면서 느꼈는지 하나같이 낮은 신음을 흘려내었다. 나는 또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고민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챘는지, 나와 같이 선두에 있던 클랜원 중 다은과 허준영이 다가왔다. “이렇게 시야가 제한된 상태에서는 대처가 힘들지도 모르는데…. 김수현. 어떻게 할 생각이지?” “생각 중이야.” 나는 제 3의 눈과 마력 감지로 주변을 꼼꼼히 훑으며 대답했다. 허준영은 나와 같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확실히 이상한 지역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들어올 때 까닭 없이 소름이 섬찟 돋는 게…. 또 조용해도 너무 조용해요. 마치 뭔가가 잔뜩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동의. 아직까지 뼈가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나, 도저히 안개로는 생각되지 않는 운무 등등.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지. 이렇게나 불길한 지역은 처음이다.” “차라리 바로 올라가는 것보다는 어디 높은 데로 올라가서 지형을 먼저 익히는 게 어떨까요?” '생각 중이라니까.' 순간 나도 모르게 입 좀 닥쳐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내 바로 눈을 감아 가슴을 진정했다. 필요 이상으로 신경이 예민해져 버렸다. 오랜만에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는, 습관이자 버릇이 발동된 셈이다. 어떻게 보면 답답할 노릇이기도 했지만, 지금 내가 서 있는 장소는 그 누구도 모르는 지역이었다. 아차 하면 목숨이 날아가버리는 홀 플레인의 특성상,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건 생존율을 높이는데 필수적인 선택이었다. “높은 곳으로 먼저 올라가 보자고….” “그것보다는…. 그냥 안으로 들어가는 게 어때?” 조용히 다은의 말을 되뇌던 찰나, 어느새 다가왔는지 비비앙이 슬쩍 끼어들었다. 눈을 떠 시선을 들자 비비앙은 혀로 입술을 살짝 적시며 말을 이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점에는 나도 동의해. 하지만 지금 여기서도 잘 보이지 않는데, 올라가봤자 별수 있겠어?” “그럼 이대로 안으로 들어가자는 소리야?” “그러니까 지금 딱히 뾰족한 수가 있냐고. 어차피 들어갈 거 아니었어? 아니면 내 마수 군단이라도 소환해서 난리라도 한 번 쳐볼까?” “기각.” 나는 곧바로 비비앙의 말을 기각했다. 유적을 탐험할 때 법칙 중 하나가 바로 기도비닉(企圖秘匿)을 유지하는 것이다. 최대한 주의를 끌지 않으며 중심부로 접근하는 게 정석인데, 어디 벌집을 들쑤셔놓을 일이 있는가. 물론 비비앙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 방법은 이미 1회 차 때 별 효력이 없다고 입증된 상태였다. 이윽고 주변 탐색을 끝마친 나는 반사적으로 안솔을 응시했다. 갑자기 말이 없어진 안솔은 여전히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 공포는 보이지 않는다. 정말 너무나도 슬퍼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만 엿보일 뿐이었다. “흠흠. 이러한 장소는 대다수가 중심부에 원인이 있는 경우가 있지. 예를 들면 광장이라거나, 아니면 뭔가 특이해 보이는 건물이라거나. 즉 원인을 찾아보고, 그것을 제거하자는 의미야.” 헛기침을 하며 이어진 비비앙의 말에 나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 '안쪽에 뭔가가 분명히 있어. 확실해.' 지금의 나는 마치 어떠한 일이 일어나기 직전의, 폭풍전야와도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클랜원들도 이 장소에서 뜻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제 3의 눈으로도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으니 정말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비비앙의 말대로 어차피 들어가야 하는 일. '이러면…. 알면서도 들어가는 건가….'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결국 비비앙의 의견을 따르기로 결정한 나는, 내부 진입을 지시하며 전방을 응시했다. 10미터 앞에는 약 20층 정도로 이루어진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아마 여기가 유적의 초입이라면, 저 계단을 올라서는 순간 본격적인 내부라고 봐도 좋으리라. 나는 단단히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온몸의 감각을 예민하게 일깨워, 눈앞 계단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나는….” 얼핏 등 뒤로, 안솔의 자그마한 혼잣말이. “…영웅을 증오한다.” 한껏 예민해진 귓가로 속삭이듯 흘러들었다. ============================ 작품 후기 ============================ 아.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집필을 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보니 12시가 넘었더군요. 순간 기겁해 바로 일어났습니다. ㅜ.ㅠ 흐어. 이거 생활이 거의 낮과 밤이 뒤바뀐 것 같네요. 얼른 학교 다녔을 때의 생활을 되찾아야 할 텐데요. 일단은 얼른 쿨쿨을 하겠습니다. :D 0450 / 0933 ---------------------------------------------- 대 전쟁, 그날의 재현. 어느새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우우…. 그냥 이대로 아무것도 안 나왔으면 좋겠어….” 유정의 나직한 한 마디는 계단을 오른 후 계속 이어져 온 침묵을 깨트렸다. 어떻게 보면 우는 소리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약간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냥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건 바라지 않고, 우리가 찾는 것만 나왔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이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나는 연신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욱한 안개로 인해 멀리까지 보이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껏 지나친 풍경을 보아온 결과, 이 요새가 도시와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본질 자체는 요새로, 군사적 방어 시설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당장 왼쪽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5층 건물도 옥상에 감시 탑으로 보이는 구조물이 건설돼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대로가 정연하고 간간이 엄폐물도 보이는 게, 확실히 하늘을 날 수 있는 용을 대비해 건물을 지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정말 보면 볼수록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군.'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불현듯 걱정이 들었다. 이러한 건물들은 당연히 침입자를 대비해 세워 놓은 것들일 터. 엄밀히 말해서, 우리도 침입자나 다름없는 입장이었다. 지금껏 겪어온 망인들은 전투 때 나름 체계적인 전술을 보여주었다. 만에 하나, 망인들이 출현해 이러한 구조물들을 이용한다면…. 덜그럭, 덜그럭! 톡! 파직! 덜그럭, 덜그럭! 그때였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던 찰나, 무언가 툭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북이 쌓인 뼈를 헤치고 걸어가는 소리는 줄곧 일정했다. 그렇기에 중간에 끼어든 소음은 실제로는 미세했지만, 확실히 귀에 들어왔다. “클랜 로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와 동시에, 차분한 음색으로 말하는 정지 요청이 들어왔다. 차소림의 목소리였다. 나는 바로 손을 들어 정지 신호를 보냈고, 천천히 몸을 돌아보았다. 차소림은 바른 자세로 선 채 아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방금 뭔가를 발로 찬 것 같은데…. 이상한 걸 발견했습니다.” “이상한 거요?” “예. 뼈 사이로 음침한 빛을 내는 작은 물건이….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차소림은 조용히 머리를 끄덕이더니 다소곳이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도중, 갑자기 한 생각이 번뜩 머리를 스쳤다. 나는 재빠르게 허리를 굽혀 마주 팔을 내뻗었다. 다행히 땅에 있는 물건을 줍기 직전, 차소림의 손을 잡아챌 수 있었다. 채뜨린 손이 움찔 떨리는 게 느껴졌다. “크, 클랜 로드? 여, 여기서…. 가, 갑자기 이러시면….” '?' 한껏 당황했는지 차소림은 서너 차례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침착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사용자 차소림의 아르쿠스 목걸이에는 항마력이 깃들어 있지요?” “네? 네, 네. 그래요. 아니 그렇습니다.” “그럼 다행이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손으로 쥐지는 마시길. 그냥 어디 있는 지만 저에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네? 그게 무슨…. 아!” 잠깐 고개를 갸웃하던 차소림. 그러나 역시나 경험이 풍부해서 그런지 단박에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은 모양이다. 이런대서 발견한 물품은 위험한 저주가 걸려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내 차소림이 살며시 눈을 내리깐 곳으로 시선을 내리자, 아까 들었던 말대로 음침한 빛을 띠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제 3의 눈은 이미 활성화한 상태였다. 『저주받은 계약의 증표.』 '계약의 증표?' 나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뼈 사이를 뒤적이자 곧 한 손에 쏙 들어오는 계약의 증표를 잡을 수 있었다. 일순 멍한 눈길들이 쏟아졌지만, 손으로 화정의 힘을 일으키자 금방 사그라졌다. 나야 굉장히 높은 마법 저항력을 갖추고 있고, 또한 화정의 능력으로 저주를 정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화륵, 화르륵! 자그맣게 일어난 화정의 불은 서서히 계약의 증표로 옮겨 붙었다. 역시나 격이 떨어지는지, 음침한 빛은 곧바로 사그라지고 원래의 말끔한 빛깔을 되찾았다. 형태는 둥그렇고 중앙에는 알아볼 수 없는 문양들이 그려져 있다. 나는 다시 제 3의 눈으로 응시해보았다. 『정화된 계약의 증표.』 “저…. 클랜 로드. 이 손 좀….” “응? 아, 미안합니다.” 한참 계약의 증표를 보던 도중, 차소림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맞잡은 손이 너무 따뜻해, 나도 모르게 아까부터 잡고 있던 모양이다. 나는 간단한 사과와 함께 바로 손을 놓아주었고, 이모저모 살피던 계약의 증표를 품속에 넣었다. 어떻게 보면 성과라 할 수 있는 물품이지만, 우리는 아직 요새의 한복판에서 탐험을 하는 중이었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별거는 아닙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가면서 이런 물건을 발견하게 되면…. 아니, 그렇게 필사적으로 찾을 필요는 없어.” “저에게 말씀해주세요.”라고 말하려 했지만, 시선을 올린 순간 정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남몰래 주변을 탐지하는 한별과 열심히 발로 뼈를 걷어내는 유정이 보였기 때문이다. 유적에 들어온 이상 성과에 욕심이 이는 건 당연했으나, 지금 상황으로서는 성과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차소림이 킥 웃으며 몇 걸음 물러섰다.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양 시침 뚝 떼는 한별과 아쉬운 얼굴로 돌아온 유정을 확인한 후, 나는 다시 선두로 이동했다. “그럼, 다시 출발하도록 하지요.” 이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동시에 뼈를 헤쳐 밟는 소음도 다시금 시작됐다. 이상하게 전보다 유난히 크게 들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하나씩 확인하며 가느라 느린 속도이기는 했지만, 차츰차츰 주변 풍경이 명확해지는걸 느꼈다. 이제 눈이 적응한 건가 생각이 들었지만, 아니었다. 10미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었던 안개가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여태껏 계속해서 뼈를 헤쳐왔던 발이 미약하지만 허공을 헛발질을 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약간 속도를 늦추면서도 재빠르게 바닥을 확인했다. 약간은 고저가 있던 대로는 사라지고, 어느새 깔끔한 대리석 바닥이 보였다.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기는 했지만, 나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지대에는 뼈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안개도 굉장히 옅었다. 앞쪽을 주시하자 홀 플레인에서는 처음 보는듯한 건축물이 눈에 밟혔다. 아니, 건축물이 아니라 일종의 벽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비석?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바닥과 마찬가지로, 하얀색 벽으로 보이는 것이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동상으로 보이는 것들이 사방으로 둘러싼 상태였다. “오호라. 아마 여기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보이는데.” “…이상한 점은 느껴지지 않아. 일단은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비비앙의 말에 답을 하고 나서, 나는 요새의 중앙 혹은 광장이라 생각되는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확실히 이곳만큼은 안개가 옅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시야가 정상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동상을 지나쳐 벽 앞에서 걸음을 멈춘 후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생각이 맞는지, 이곳에 서자 그나마 부근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폭이 약 200미터 정도 돼 보이는 광장은 중앙의 벽과 동상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동상은…. 아무래도 신화 속 거주민들을 의인화한 것 같은데 말입니다.” 선유운은 날카로운 눈썰미로 동상을 쳐다보며 말했다.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비록 오랜 시간이 지나 부분부분 낡은 흔적은 있지만, 동상은 대략의 원형은 유지하고 있었다. 벽을 중심으로 세워진 네 개의 동상은 각각 창과 방패, 지팡이, 기도하는 모습, 활을 들고 있었다. 아마 신화 속 유명한 거주민들의 모습을 동상으로 세운 듯싶었다. 나는 다음으로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윗부분이 둥글게 깎인 걸로 보아 비석이라는 느낌이 강했지만, 2미터에 달할 정도로 크기가 컸다. 이것 역시 세월의 힘을 이기지 못해 많이 낡아있어, 나는 가만히 손을 들어 벽을 조심조심 문질러보았다. 그리고, 바로 손을 멈추었다. 쓸어 내린 부분에서 뭔가 미묘한 감촉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볍게 바람을 불어 들여다보자, 어떤 글자들이 빼곡히 각인돼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고어는 꽤 알고 있는 편이라, 나는 지체 않고 해석을 시작했다. '…….' 그러나, 알 수 없었다. 분명히 해석할 수 있는 글자는 있었지만, 그것은 중간중간의 조사나 끝부분의 종결 어미에 해당하는 것들뿐이었다. 이 말인즉슨, 이 벽에 적혀있는 글자는 고어가 아니었다. 홀 플레인에서도 계속 글자가 발전해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은 아마 신화 시절에 사용하던 글자일 가능성이 크다. 혹시 비비앙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곧장 몸을 돌아보았다. 클랜원들은 나와 함께 벽을 보고 있거나 동상 주변에 서 있었다. 주변 경계를 늦추지 말라 지시를 내린 후, 나는 바로 비비앙을 향해 입을 열었다. “비비앙. 잠깐 이쪽으로.” “응? 무슨 일인데?” “여기로 와서 이 벽 좀 봐봐.” “왜. 뭐라도 적혀있어?” 비비앙은 한달음에 달려와 내가 가리킨 부분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3초 정도 보는가 싶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어, 이거 신화 시대에 사용하던 언어잖아?” “그럼 읽을 수 있는 거야?”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안고 물어봤지만, 비비앙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불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신화 시대부터 내려온 것을 발전시킨 거지만, 엄연히 시대는 구분한다고. 이건 고대 시절에서도 고대, 즉 먼 옛날이라 부를 때 사용하던 언어야. 지금에 이르러서는 실전된 것도 많고, 애초에 익힌 사람도 드물어.” “…그런가.” “쩝…. 일단 기다려봐. 언어 자체가 마법 주문과 함께 발달된 게 많으니, 어쩌면 내가 읽을 수 있는 게 있을지도 몰라.” “그래, 그럼 부탁…. 야 인마.” 아쉬운 마음에 머리를 끄덕이던 와중 나는 한순간 기함하고 말았다. 비비앙이 양손을 번쩍 들어 벽을 벅벅 문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혹시나 와르르 부서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들었지만, 다행히 벽은 무사했다. “후. 그럼 시작해볼까. 그래도 너무 기대는 하지 말라고.” 비비앙은 거무스름하게 변한 손을 탁탁 털었다. 전혀 아랑곳 않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진중한 얼굴로 변해, 침착히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더니 바로 검지를 피어 벽의 글자가 시작되는 부분에 살며시 댄다. 이내 손가락이 각인된 글자를 훑는 것을 시작으로 비비앙의 해석이 시작됐다. “으음…. 으으음….” 하지만 역시나 해석이 여의치 않은 걸까. 이미 몇 줄은 내려갔음에도 불구하고 비비앙은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처음에는 느릿하게 움직이던 손길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한다. 따지고 보면 비비앙 역시 100년 전 거주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화 때 글자를 읽는 것은 무리였던 모양이다. 그렇게 반쯤 포기했을 때, 돌연히 비비앙의 손가락이 멈췄다. 어느새 검지는 벽의 절반을 넘어서는 중이었고, 비비앙 또한 허리를 반쯤 굽힌 상태였다. 그리고 잠시 후, 비로소 비비앙의 입에서 첫 말문이 열렸다. “신뢰할 수 없었다…. 아니 믿을 수 없다…? 아니야 과거 형. 없었다.” “뭐라고?” “설마…. 그때의…? 그런 사건을…? 일을…? 벌일 것이라고는….” “…….” 지금 내 말은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비비앙은 한창 해석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그나마 조금이나마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 나왔는지, 비비앙은 한동안 멈춘 부분을 응시했다. 그러나 이내 다시 내려가는 걸 보니 다시 해석이 막힌 모양. 검지는 신속한 속도로 각인된 글자를 훑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다시 비비앙의 입술이 열렸다. “마그나카르타의 저주…. 그것은…. 누구에게….” 말은 다시 끊겼다. 그래도 문득, 혹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 점점 많아지는 건가 일말의 기대가 들었다. 그러나. 이후로 비비앙의 검지는 물 흐르듯이 내려가 거의 마지막 부분까지 내려가고 말았다. 그에 따라 쭈그려 앉은 비비앙을 보며 나는 아쉬움이 감도는 입맛을 다셨다. 혹시 이 안개를 걷을 수 있는 방법이 적혀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예상이 빗나가 버렸다. 아무튼 중앙 광장에는 별로 특이할 게 없다는 사실이 확인됐으니, 이제는 특이해 보이는 건물을 찾을 차례였다. 그렇게 생각해 비비앙의 어깨를 짚으려는 찰나, 문득 또다시 비비앙의 입술이 떼어졌다. 검지는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멈춘 상태였다. “나는….” 비비앙은 인상을 크게 찌푸렸다. 그리고 더욱 얼굴을 들이밀어 몇 번이고 확인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아니 우리는…. 영웅을…. 증오한다…?” 뜻밖의 말에 나는 비비앙의 말을 되뇌어보았다. 나는, 아니 우리는 영웅을 증오한다. '…어.' 그리고 그때, 한 생각이 머리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첫 계단을 오르기 전, 안솔이 입에서 나왔던 말. '나는 영웅을 증오한다.' 나와 우리라는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나는 곧장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안솔을 찾은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느덧 안솔은 쥐도 새도 모르게 옆으로 다가와, 한껏 긴장한 얼굴로 벽과 비비앙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서르제…. 이메르시오…?” 그리고 다시 들려오는 해석에, 나는 반사적으로 벽을 내려다보았다. 벽을 훑던 검지는, 이제 완전히 끝을 향해 느릿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인 테네브라스….” 그때였다. 우웅…. 순간적으로 느껴진 미약한 마력의 흐름. 말 그대로 한순간이기는 했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주변에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 불길한 마력의 흐름을. “모….” 마력의 각인도, 마법진도. 아니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작스레 마력의 흐름이 일어나자 무척 당혹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말하게 해서는 안 돼!' “비비앙!” 하여, 지체 않고 손을 뻗어 그만두게 하려는 찰나였다. 탁! 막 비비앙의 어깨를 잡으려는 손이, 중간에서 멈췄다. 누군가 내 팔을 잡은 것이다. 어이없는 마음에 시선을 돌리자 눈을 형형히 빛내는 안솔이 보였다. “안솔? 너 지금….” “하게 두세요. 오라버니.” “뭐,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하지 않으면…. 다 죽는단 말이에요!” 의미심장한 안솔의 목소리.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이윽고 나는 끝났다고 생각한 비비앙의 해석이 이어지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르투스. 모르투스였구나. 어휴, 힘들어…. 이제 끝났네. 어이 김수현! 나 불렀어?” 비비앙의 말에 대답할 생각도 않고, 나는 그저 안솔만 바라보았다. 안솔은 예의 서글픈 얼굴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안도하는 기색이 엿보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떼어 벽을 응시했다. 우웅!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둥글게 둥글게~. 짝! 둥글게 둥글게~. 짝! 키보드를 두드리며 글을 씁시다~. 담배를 피면서~. 짝! 콧노래 부르며~. 짝! 랄라랄라 즐겁게 글 쓰자~. 절단절단절~단! 절단절단절~단! 절단절단절~단! 절단절단절~단! 죄, 죄송합니다. 그냥 오랜만에 독자 분들께 한 번 까불어보고 싶었어요. 하하. 죄, 죄송해요. 어허! 손에 든 돌들은 어서 내려놓으세요. 제발요. 제가 정말, 진심으로 잘못했습니다…. 퍼퍼퍼퍼퍼퍼퍼퍽! ㅜ.ㅠ 아이고. @_@ 하하하. 다음 회 후기는 오프 더 레코드로 할 생각입니다. 이제 본격적인 마무리 파트 시작이네요. 모두 다음 회를 기대해주세요! 그리고 수현아. 안솔 말 좀 들어라 인마. 그 하게 놔두라면 하게 놔둘것이지 어딜 행운 102한테 개기니….(?) *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우정민(3년 차) 2. 클래스(Class) : 암살자(Normal, Assassin, Expert)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AA - Double A) 5. 진명 • 국적 : 붉은 송곳니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9) 7. 신장 • 체중 : 178.1cm • 71.8kg 8. 성향 : 의리 • 첨예(Loyalty • Sharp) [근력 87] [내구 83] [민첩 93(+1)] [체력 76] [마력 90] [행운 67] < 업적(2) > < 특수 능력(1/1) > 1. 즉사(Rank : C Plus) < 잠재 능력(4/4) > 1. 한 손 단검술(Rank : A Plus) 2. 은신 • 암살(Rank : B Plus) 3. 앞니와 어금니의 사이(Rank : A Plus Plus Plus) 4. 그림자 밟기(Rank : S Zero) <최근 능력치 비교> (변경 전) [근력 51] [내구 43] [민첩 59] [체력 48] [마력 55] [행운 36] (변경 후) [근력 87] [내구 83] [민첩 93(+1)] [체력 76] [마력 90] [행운 67] 0451 / 0933 ---------------------------------------------- 대 전쟁, 그날의 재현.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한순간, 중앙 광장의 바닥으로 거대한 마력이 미친 듯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오직 하얀색 일색이던 벽면이 삽시간에 파랗게 물들기 시작한다. 아니. 자세히 보니 벽이 파랗게 물든 게 아니라, 벽에 각인돼있던 글자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윽고 벽의 빛은 마치 넓적하게 벌어지듯 둥글게 퍼져나가, 약간 어두운 느낌이 들던 중앙 광장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 빛은 우리를 비추고 있지 않았다. 정확히는 부근에 서 있던 네 개의 동상을 중점으로 비추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누군가의 멍한 중얼거림. 웅웅웅웅! 그러다 어느 순간, 눈이 부실 정도의 빛을 발하던 벽의 빛깔이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곧 지문을 뜨는 것처럼 벽면의 모든 글자가 허공으로 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눈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마구잡이로 뒤섞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글자는 곧장 재배열을 맞추어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어서 마력의 흐름이 다시 한 번 요동치더니, 배열을 마친 글자들이 갑자기 네 방향으로 나뉘어 쇄도한다. 방향은 정확히 동상들이 서 있는 곳을 향하고 있었다. 여전히 파란빛을 띠는 글자는 마치 물이 솜을 만난 것처럼 동상에 닿자마자 스며들었고, 글자를 흡수한 동상에서 똑같은 파란색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웅! 이내 이 광범위한 지면을 아우르는 엄청난 양의 마력이 서서히 솟아오른다. 나는 이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일단 아무 생각 없이 검을 뽑으려고 했으나, 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안솔이 내 팔을 꼭 쥐었기 때문이다. “안솔?” 이름을 불렀으나,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안솔.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복잡한 생각이 들 무렵, 문득 눈앞으로 진한 보랏빛이 감도는 머리칼이 나부꼈다. “흐읍!” 짧은 기합성을 내지르며 달려간 사용자는 다름 아닌 허준영이었다. 스르릉, 허준영은 길쭉한 검을 뽑더니 가장 가까이 있던 동상을 향해 있는 힘껏 휘둘렀다. 아마 나와 마찬가지로 심상치 않음을 느껴 동상을 쪼개어 멈출 생각인 모양이다. 텅! 그러나 기세 좋게 들어간 일격은 동상에 닿은 순간 허무한 철성(鐵聲)만을 남겼다. 나는 믿을 수 없는 기분으로 동상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당장에라도 쓰러질듯한 낡은 동상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은은한 빛이 흐르는 형상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때, 그러니까 동상의 얼굴이라 추정되는 부분에서 두 개의 푸른 눈이 번뜩였을 때였다. - Drrrr…. Ea - Yaal! 허공에서 강렬하며 웅혼한 함성이 울려 퍼지는 것과 함께, 동상의 파란빛이 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듯이 지면으로 이동했다. 그 수가 너무 많아 차마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내 지면으로 떨어진 빛의 줄기는, 중앙 광장을 가득 물들이며 사방팔방으로 세차게 뻗어나갔다. 파츠츳! 파츠츠츳! 파츠츳! 파츠츠츳! - Drrrr…. Ea - Yaal! - Drrrr…. Ea - Yaal! - Drrrr…. Ea - Yaal! - Drrrr…. Ea - Yaal! 그리고 재차 이어진, 고막을 뒤흔들 정도의 장엄한 음성. 목소리는 허공을 떠르르 울릴 만큼 웅장했으나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덜그럭덜그럭! 덜그럭덜그럭! 덜그럭덜그럭! 덜그럭덜그럭! 덜그럭덜그럭! 덜그럭덜그럭! “크으윽!” “꺄아악!” 그때, 마치 단단한 물건들이 부딪쳐 흔들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일제히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새된 신음과 함께 찌푸린 얼굴로 귀를 틀어막는 클랜원들이 보였다. 조금이라면 모를까. 흡사 수백, 아니 수천은 돼 보이는 소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흘러 들자 귀가 괴로울 정도였다. 지금 이 요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나는 벽과 동상에서 눈길을 떼어 우리가 들어온 방향을 응시했다. 그리고 쳐다본 순간, 나도 모르게 시선을 고정하고 말았다. 뼈가, 일어나고 있었다. 말 그대로였다. 지금껏 우리가 헤치며 지나온 뼈들이 우수수 허공으로 떠올라, 무언가를 맞추듯 덜그럭덜그럭 움직이고 있었다. 동시에 지면을 물들이던 파란빛이 솟구쳐, 공중으로 떠오른 뼈들을 천천히 감싸기 시작했다. 곧이어 뼈들이 파란빛에 완벽히 뒤덮였을 즈음. 잔잔한 물결이 부드러이 굽이쳐 움직이듯이, 넘실거리는 파란빛무리가 시야를 가득히 메워버렸다. - Drrrr…. Ea - Yaal! 그리고, 바야흐로 다시 동상의 음성이 울리는 찰나. 쿠오오오오오오오! 온몸이 떨릴 만큼 강력한 진동과 함께, 동상을 휘감고 있던 빛이 하나의 기둥이 되어 하늘을 뚫을 듯 세차게 솟구쳤다. 하얀색과 파란색이 어우러진 빛의 기둥이 무시무시한 마력의 흐름을 줄기차게 내뿜는다. 그 기세가 어찌나 강렬한지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착용하던 장비가 벗겨나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내 눈이 멀어버릴 것같이 시야가 하얗게 변해와, 나는 안솔을 꼭 품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고오오오오오오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허공을 울리던 장엄한 목소리도, 고막을 뒤흔들던 요란한 소리도 서서히 잦아들 즈음. 마력의 흐름이 약해진 걸 느껴, 나는 살그머니 눈을 떴다. 그리고 동상 주위로 조용히 빛을 흩뿌리는 파란빛의 기둥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허공에 강렬한 여운을 남기더니 잔상처럼 사르르 사라졌다. “맙소사…. 저건 도대체…. 뭐야…?” 그때였다. 어느새 바닥에 넘어져 있는 비비앙에게서, 멍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비비앙의 시선은 정확히 정면을 쳐다보고 있다. 하여 그 눈길을 쫓아 정면을 바라본 순간, 나는 온몸이 딱딱히 굳어버린 걸 느꼈다. 그곳에는 해골, 아니 망인들이 서 있었다. 그것도 한 무리가 아닌, 가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수의 망인들이. 나는 침착하려 애쓰며 주변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 후. 좌. 우. 빼곡하다. 그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어느덧 중앙 광장의 주변으로는 해골 망인들이 각자 무기를 든 채 우리를 겹겹이 둘러싼 상태였다. 당장 마력 감지에 걸리는 것들만 세어도 족히 수백은 넘는다. 갑자기 한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가 여태껏 밟아온 뼈들의 주인이 바로 지금 저 해골 망인들 것일수도 있다는 걸. 죽은 지 무수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하나가 내뿜는 기세가 만만치 않다. 그것이 사방으로 동시에 압박하며 조여 들자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직감했다. 지금 여기에 서 있는 해골 망인들은, 신화 속 용과 전투를 치른 거주민들이라는 것을. 나는 거세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잠깐이나마 맑아진 기분으로 눈앞을 응시했다. 해골 망인들은 눈가에 푸른빛을 번뜩인 채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 호의적으로 보이지는 않는 눈빛이다. 주변의 클랜원들은 멍하니 서 있었다. 모두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들어오며 혹시나 생각했던 것이, 이렇게 현실로 이루어지자 할 말을 잃은 셈이다. '어쩌면…. 아까 막았다면….' 나는 이를 바드득 깨물었다. 뭐라도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강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이내 해골 망인들 사이로 일말의 움직임이 느껴져, 나는 지체 않고 외쳤다. “모두 전투 준비!” 클랜원들은 하나 둘 정신을 차렸지만 곧 엉거주춤 나를 돌아보았다. 하나같이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 가득한 게 지금 상황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아 보였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비비앙! 할 수 있는 한에서, 최고의 마수 군단을 소환해라. 하나는 보호할 수 있는 군단으로, 또 하나는 돌파력이 강한 군단으로!” “아, 알았어. ───. ───. ───.” 방금 지시는 마수 군단을 방패 삼아 이곳을 뚫겠다는 의미였다. 곧바로 주문 영창에 들어간 비비앙을 확인한 후, 나는 남은 클랜원들에게 추가 지시를 내렸다. “선두는 제가 맡습니다.허준영, 남다은, 차소림은 각각 좌우 방향과 후방으로 이동. 이유정, 우정민은 혹시 뚫리는 방향이 있다면 바로 지원을 가도록 하며, 나머지는 무조건 중앙으로 모입니다. 공격할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무조건 방어 주문을…!” - Drrrr…. Ea - Yaal! 하지만 나는, 도중에 말을 멈추고 말았다. 해골 망인들 사이에서도 철이 갈리는듯한 음성이 튀어나와 나도 모르게 말을 멈춘 것이다. 잠시 후. 해골 망인들의 눈을 감도는 파란빛이 잠깐 번쩍이더니 느릿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과 방패를 앞으로 들고, 창과 화살이 우리를 겨냥하며, 지팡이는 하늘 높이 들었다. 그러더니, 치켜든 지팡이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과 함께 오색찬란한 빛깔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여전히 귀에는, 무기를 들거나 뼈가 갈리는 소음이나, 주문을 웅얼거리는 낮은 음성들이 흘러 들고 있었다. 마치 죽음을 합창하는 것처럼 불길한 소음들이다. 그 와중,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나는 바삐 안솔을 살펴보았다. 안솔은, 울고 있었다.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을 똑 떨어뜨리며 숨죽여 울고 있었다. 그러나 그냥 서글퍼서 우는 건지, 아니면 죽음을 앞두고 공포를 느껴 우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이게 네 선택이냐…? 안솔?' 벌컥 소리라도 치고 싶었으나 나는 겨우겨우 마음을 가다듬었다. 탐험 중, 아니 전투를 앞두고 싸워봤자 뭐하겠는가. 어쩌다 일이 이 지경이 됐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빠져나가는 게 중요하다. “───. ───. ───. 후.” 마침, 비비앙의 주문 영창이 끝났다. 비비앙이 질서의 오르도를 꼭 쥔 채 나를 돌아보자, 나는 때가 왔음을 느껴 마음을 다잡았다. 해골 망인들 또한 각자 무기를 우리에게 겨냥한 채 지그시 서 있었다. '소환이 이루어지면 바로 앞으로 치고 나간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 신호를 시작으로 비비앙이 질서의 오르도를 하늘 높이 추켜올리며 입술을 떼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쿠르르르르르르릉! “오라! 피에르…. 꺅!” 막 소환 주문을 외우려는 찰나, 요새가 요동칠 정도의 파문이 바닥에 크게 물결쳤다. 그 바람에 나와 비비앙을 비롯한 모두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오죽하면 꼿꼿이 서 있던 동상에 땅으로 떨어지고, 디디고 있던 지면이 들썩거릴 정도였다. 쿵! 쾅! 쿵! 쾅! 쿵! 쾅! 빠직! 빠지직! 아니. 들썩거리는 게 아니라 깨져버렸다. 아래서 뭔가 쿵쿵 울리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더니, 지면에 균열이 일어나다 못해 파편이 튀어 오르기 시작한다. 흡사 이곳이 지진의 근원지가 아닐까 싶을 만큼 엄청난 진동이었다. 몇몇 클랜원들은 견디다 못해 넘어졌지만, 나는 간신히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꽈꽝! 별안간 지금까지와는 비할 수 없는 폭음이 온몸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형의 뇌신을 이용한 벼락이 주변에 쳤을 때보다, 가히 몇 배는 될 만한 소리였다. 소음은 기하급수적으로 크기를 늘렸고, 종래에는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이명이 계속해서 내 귓가에 메아리쳤다. 이건 또 무슨 일일까. 지금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걸까. 이 요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머릿속으로 복잡함이 휘몰아쳤다. 그러한 와중에, 나는 간신히 검을 뽑아 땅에 강하게 꼽았다. 그것을 지지대 삼아 간신히 버티자, 다시 서서히 진동이 잦아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곧바로, 이번에는 먼 곳에서 인간이 아닌듯한 목소리가 커다란 포효를 내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롸롸롸롸롸롸롸롸롸롸롸! 울부짖는듯한 포효 소리. 이곳이 아닌, 어디선가 들려온 거대한 폭음. 그리고 피부를 강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강렬한 바람. 펄럭! 후웅! 펄럭! 후웅!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것은 분명 거대한 날갯짓 소리였다. '정신차려라, 김수현!' 그래. 이것보다 더한 일도 겪지 않았던가. 하여 일단 클랜원들을 살펴볼 생각에 나는 주변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보고야 말았다. 지면을 서서히 덮어오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거대한 그림자를. '…….'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머리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완전히 고개를 들어올렸을 때, 나는 드디어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 마주친 건 뻥 뚫린 눈구멍과 안쪽에서 붉은빛을 흘리는 안광이었다. 두개골에 삐쭉 돋은 두 개의 뿔과 마치 요새 전체를 덮을 만큼의 덩치와 뼈로 이루어진 거대한 날개…. 아니. 온몸이, 길쭉한 꼬리까지도 뼈로 이루어져있다. 펄럭! 후웅! 펄럭! 후웅! 지금 뼈 날개를 펄럭이며 요새 위 허공을 선회하는 그것은, 마치 전설 상에나 나오는 본 드래곤과 같은 모습이었다. '잠깐만. 뿔?' 순간적으로 뭔가 낯이 익은, 익숙한 형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Mageuna…. - kareuta…. - Mageunakareuta…. - Mageunakareuta…. 하지만 곧바로, 사방에서 알 수 없는 말들이 웅얼웅얼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망인들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망인들이 시선은 더는 우리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모두가 안광을 희번덕 빛내며 하늘을 올려다본 채, 하나하나 입을 모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중이었다. - Occidite Eos! 그리고 아까 우리를 향해 외쳤던 음성이 다시 한 번 들린 순간. 슈슈슉! 슈슈슈슉! 퍼버벙! 퍼버버벙! 웅대한 폭음. 동시에 수백 수천에 달하는 마법과 화살들이, 화려한 빛깔을 휘날리며 일제히 하늘을 날아올랐다. ============================ 작품 후기 ============================ 『Off The Record.』 (세 남자가 머리에 하얀 띠를 질끈 동여맨 채 우렁차게 외치고 있다.)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 화정을 너프하라! 너프하라! 시몬 : 너프하라! 너프하라! 네르갈 : 너프하라! 너프하라! (그때 한 거대한 그림자가 세 남자에게로 다가섰다.) 거대한 그림자 : 저기…. 안녕하세여….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잠시 시위를 멈추며.)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 응? 자네는 누구…. 헉! 요, 용이잖아? 거대한 그림자: 아 너무 놀라지 마시고여…. 그 종말의 용이라 불린 마그나카르타라고 해여.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 그, 그런 대단한 용이 여기에는 무슨 일로…. 마그나카르타 : 아 다른 건 아니고…. 그 메모라이즈 시위 현장 맞나요? (시몬, 머리를 크게 끄덕인다.) 시몬 : 네. 맞습니다. 들은 척도 안 해주지만…. 여기에는 무슨 일이죠? 이 시위는 화정 너프를 원하는 모임인데…. 혹시 그쪽도 화정에? 마그나카르타 : 아…. 그건 아직 스포일러라 안되고여…. 시몬 : 흠. 그럼 무슨 일로 오셨죠. (마그나카르타, 갑자기 울먹인다.) 마그나카르타 : 그게…. 등장하자마자 다구리를 맞아서여…. (시위하던 세 남자, 동시에 탄식을 터뜨린다.)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우는 용의 어깨를 짚는다.)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 혹시 자네도 뭔가 좀 있어보기에 등장하지 않았는가? 마그나카르타 : 네, 네! 맞아여. 그래서 엄청 기대 많이 했는데…. 어흐흑. 삐이이-.(스포일러 방지.)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 그런가…. 그런 일을 당했으니, 당연히 슬프겠구먼. 하지만 너무 슬퍼하지 말게. 자, 저기를 보라고. (마그나카르타,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흑색 창을 쥔 남자가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있다.) 마그나카르타 : 저 남자는 왜 저러고 있대여…?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 1부까지만 해도 그냥 저냥 괜찮았는데, 2부가 시작되자 작가의 농간으로 아주 천하의 몹쓸 놈이 되어버렸다네. 요즘 욕도 엄청 많이 먹고 있지. 자네는 그래도 동정표라도 있지 않은가. (네르갈, 촉새처럼 끼어든다.) 네르갈 : 그뿐만이 아니에요. 겨우 애인이 생기는가 싶었는데, 그 애인이 처녀를 유지해야 하는 설정이 있다네 요. 그래서 쟤 영원히 고자임. (마그나카르타, 불쌍한 눈길로 홀로 떨어진 남성을 응시한다.) - Fin - 오프 더 레코드 2회를 기대해주세요! 0452 / 0933 ---------------------------------------------- 잊혀진 영웅들. 그롸롸롸롸롸롸롸! 사나운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대기를 쩌렁쩌렁 울렸다. 하늘에는 날개를 활짝 젖힌 채 하늘 높이 솟구치는 본 드래곤이 있었다. 어느새 망인들의 시선은 더는 우리를 보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마치 안중에도 없다는 양, 모조리 하늘로 시선을 올린 채 무시무시한 적의를 뿜어내는 중이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어, 나는 다급히 클랜원 돌아보았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몸을 피할 기회입니다. 일단은 이 장소에서 거리를 최대한 벌리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치고서, 나는 신속히 안솔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곧바로 이동하려는 찰나 마주 잡은 손에서 미약한 저항감을 느꼈다. 경황이 없어 몇 차례 더 잡아당겨 봤으나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저항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안솔?” “으응…!” “안솔!” “으으응…!” 안솔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쪽으로 손을 끌어당기며 소극적으로 거부 의사를 표시하고 있었다.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그러나 크게 부릅뜬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게,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너.”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나는 문득 말을 멈추었다. 이제는 화도 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분노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요새에 갑자기 나타난 용. 그리고 그런 용을 상대하는 해골 망인들. '혹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일순 섬찟한 소름이 돋았다. 안솔은 아까 망인들의 소환 의식이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납득할 수 있었다. 만약 망인들이 소환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꼼짝없이 이 요새에 출현한 용을 상대했을 터. '지금 이 상황을…. 전부 예견한 건가? 그러면?' 그때였다. 안개가 끼어 흐릿했던 하늘이 한순간 일변했다. 마치 해가 넘어가기 직전 황혼이 깔린 것처럼 붉게 물든 것이다. 동시에 쏟아지는 화살과 마법을 피해 비행하던 본 드래곤의 움직임이 별안간 느릿해지기 시작한다. 이윽고 날개를 활짝 펼쳐 꼿꼿이 아래를 한 번 내려다보고는, 눈가의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커다랗게 소리질렀다. 그 순간, 돌연히 하늘이 열리는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니 하늘이 열린 게 아니었다. 하늘 가득히 떠다니던 구름이 좌우로 열리더니, 벌어진 틈으로 활활 타오르는 빗방울들이 벼락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슈슈슈슈슈슈슈슝! 폭우처럼 쏟아지는 타오르는 빗방울들은 내려갈수록 기다랗게 늘어졌다. 그리고 지면에 닿기 직전에는 불 줄기로 변하여, 망인들이 모여있는 장소로 정확하게 떨어져 내렸다. 콰콰콰콰콰콰콰쾅! 고막이 얼얼할 정도의 굉음과 함께 사방에서 거대한 폭발이 솟구쳤다. 마치 하늘에서 융단 폭격을 가하는 것 같다. 오른쪽에서 시작된 폭격은 사선 방향으로 가로지르더니, 건물마저 터뜨리며 쫙 퍼졌다. 다행히 중앙 광장은 빗겨가 직접적인 영향은 피했으나, 그 여파는 피할 수 없었다. 삽시간에 불길이 치솟고 터져나간 조각이 튀어 오른다. 이내 굉음은 서서히 잦아들었지만, 어느덧 이글이글 불타는 소리가 사방을 채우고 있었다. 화륵! 화르륵! 요새가 불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허억!” 털썩, 누군가 땅에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폭격을 이기지 못해 다리가 풀린 모양이다. 다른 클랜원은 조용히 서 있는 듯 보였지만 아마 속내는 똑같지 않을까.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전투도 탐험도 아니었다. 하나의 전쟁이었다. “다들….” 말을 잇기 전 나는 안솔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다시 클랜원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저와 안솔은 이 자리에 남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분들은 어서 이 자리에서 피하십시오.” 급박한 와중에도, 모든 클랜원은 황당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름 심사숙고 후 내린 결정이었다.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이 자리에 남거나, 아니면 피하거나. 사실 피하는 방법이 가장 좋기는 했다. 안솔이 지금 저러고는 있지만 억지로 들고 가면 그만이었으니까. 사용자 정보는 물론, 지금껏 그리고 조금 전에도 확인한 안솔의 능력은 가벼이 넘길만한 성질이 아니었다. 안솔이 어떻게든 여기에 남아있으려는 데는 분명히 어떠한 이유가 있으리라. 그러니까, 나는 안솔의 선택을 믿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싫다.” “싫어!” “싫어요!” “싫은데?” “싫거든요?” “싫습니다!” 클랜원의 입을 모은 대답은 한결같이 내 기대를 배신했다. 나는 감히 클랜 로드의 명령에 거부하겠느냐는 뜻을 담아 근엄히 얼굴을 들었다. 그러나 곧바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고 있냐는 시선이 우수수 꽂혀 들었기 때문이다. 입술이 바짝 말라온다. 클랜원의 대답은 고맙고 뜻은 장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클랜원은 거의 머셔너리의 정예 급에 해당하는 사용자들이다. 이런대서 허무하게 잃을 전력이 아니었다. 그런 만큼 일단 용과 망인들이 전투를 벌이는 틈을 타 대부분의 클랜원을 대피시키고, 나는 추후 상황을 보아 움직일 계획이었다. 그리고 방금 공세를 보아하니 망인들이 이길 것 같지가 않다. 용도 무시무시하기는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단일 개체라는 것. 적어도 겹겹이 포위될 가능성은 없다는 소리다. 나는 생각을 밀어붙이기로 했다. 일단은 안솔과 이대로 계속 상황을 지켜본다. 그리고 만일 최악의 상황이 온다고 가정했을 때, 남은 클랜원이 안솔 하나라면 어떻게든 몸을 뺄 수는 있을 것 같았으니까. “괜찮아요.” 그때, 자그마한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안솔을 그렁그렁한 눈을 쓱 닦고는 물기 묻은 손으로 한 쪽 방향을 가리켰다.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하늘을 겨냥하는 망인들이 보였다. 수천에 이르는 망인들이, 각자의 무기를 든 팔을 나란히 뒤로 당긴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 Occidite Eos! 이어서 알 수 없는 외침이 들리는 순간 검이, 창이, 화살이, 마법이 동시에 하늘로 솟아올랐다. 하늘을 빼곡히 메울 정도로 엄청난 수량이었지만, 나는 순간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떠오른 것들은, 떠올랐다. 말 그대로였다. 그러니까 용을 향해 집중 사격을 가한 게 아니라, 그냥 중구난방으로 허공에 치솟은 것이다. 즉 그냥 하늘 높이 던진 것에 불과하다고나 할까. 그리고 본 드래곤은 아래를 흘끗 내려다보더니 힘차게 날갯짓을 해 하늘로 솟아올랐다. 이해가 되지 않는 공격. 도대체 뭣들하고 있는 건가 생각이 드려는 찰나. - Drrrr…. Ea - Yaal! 다시 한 번 웅장한 외침이 들리고, 허공으로 보라색 둥그런 장막이 생성됐다. 마치 밤하늘에 별이 박힌 듯 간간이 빛을 반짝이는 장막은, 일순 모터를 돌리는듯한 커다란 소음을 울렸다. 슈슈슉! 슈슈슈슉! 슈슈슈슈슈슈슈슉! 하늘로 떠오른 각양각색의 공격들이, 한순간 장막의 중앙으로 쏘아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흡사 하수구에 물이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찔러 들어가더니, 장막을 통과하자마자 하나의 점이 되었다. 이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광대한 힘을 품은 점이, 장막을 뻥 뚫어 앞으로 뻗어나간다. 장관이었다. 수백 수천의 힘이 집약된 점은, 기다란 꼬리를 남기며 유성처럼 달려들었다. 다급히 날아오르는 용을 순식간에 뒤쫓아 그대로 몸통에 작렬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점의 폭발은 본 드래곤의 전신을 깡그리 집어삼킬 듯이 물들였다. 꽈꽈꽈꽝! 그롸롸롸롸롸롸롸! 그리고 그 순간. “───. ───. ───.” 나직이 웅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솔이 지팡이를 상단으로 들어올렸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감히 말을 붙일 생각을 못했다. 왜냐하면…. “───. ───. ───.” 눈을 꼭 감은 채 조용히 주문을 외우는 안솔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거룩하고 성스러워 보였으니까. 마치 구원자를 보는듯한 기분이었다. * 슬펐다. 그저 슬펐다. 유적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안솔은 사방에서 밀려오는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지면에 새겨진 애통함. 건물에 스며든 구슬픔. 한낱 뼛조각이 간직한 서러움. 아니, 요새 곳곳에 새겨진 서글픔. 이 모든 것들이 하나같이, 안솔에게 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억울하다! 너무나도 분하고, 원통하다! 그에 한없이 애처롭게 느끼면서도, 안솔은 생각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나 짙은 원념이 한이 되어 남은 걸까. 해답은 벽에서 볼 수 있었다. 모두가 벽에 적힌 글자를 해석하고 있을 때, 안솔만이 다른걸 보았다. 길고 길었던 대 전쟁. 그리고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던, 최후의 전투. 1, 2년에 끝난 전쟁이 아니었다. 무려 수십 년간 이어진 전쟁이었다. 수십 년. 그것은 한 아이가 태어나 성년을 넘어서 중년에 이르기까지의 시간. 전쟁의 참상을 겪으며 자라난 아이는, 모든 것을 잃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갓 태어난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잃어야만 했다. 뜻하지 않은 습격으로 어머니를 잃어야만 했다. 전쟁 통에 형도, 누나도 잃어야 했다. 그때는, 그런 시대였다. 그러한 참혹한 시대였다. 셀 수 없을 만큼 비참하고 끔찍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이 시대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최후의 전투가 다가왔다. 인간 중에서도 특별히 선별된 인간들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산맥으로 들어가는 걸 자청했다.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이 산맥으로 들어가는 이상 태반이 죽을 거라는걸. 다시 살아 돌아오기 어렵다는 걸. 그럼에도 자청해서 들어간 것은 피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모두가 원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시대를 끝내자는 것을. 비록 자신들은 죽더라도 형제, 자매, 자식 그리고 후손들에게는 이 시대를 물려주지 말자는 것을. 다시 예전의 평화로운 시절을 되찾겠다. 그러한 하나의 신념 아래 인간, 아니. '영웅'들은 산맥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시작된 최후의 전투. 용의 공세는 거세었고, 용의 편에 선 인간들은 간교했다. 예상대로 수많은 피해를 입어야 했지만, 결국 용은 인간의 신념을 꺾을 수 없었다. 전쟁의 끝은 무수한 피가 흘러 웅덩이가 고여 들었으나 그 위로 떠오른 승리는 인간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전쟁의 끝은 모든 것의 끝을 고하지 않았다.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가 내린 두 개의 저주. 하나는 말 그대로 완전한 저주였으며, 다른 하나는 예언에 가까운 저주였다. 전자의 저주는 인간은 물론이고 산맥을 뒤덮었다. 남은 하나, 후자의 예언의 저주는 영웅들을 지휘한 대 영웅에게만 전달됐다. 그리고 그 결과. 대 영웅은, 저주를 받아들였다. 대 전쟁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승리의 기쁨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절망을 맛봐야만 했다. 길었던 전쟁이 끝난 후,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허무한 죽음뿐이었다. 사후에도 그들은 자유롭지 못했다. 응당 각자가 믿었던 곳으로 승천함이 옳았으나, 마그나카르타의 저주와 그것을 받아들인 대 영웅으로 인해 그들은 산맥을 떠나지 못하였다. 생전에 걸린 저주가 사후에도 영향을 미쳐, 산맥을 배회하는 망령이 돼버린 것이다. 꽈꽈꽈꽝! 그롸롸롸롸롸롸롸! 천지가 개벽하는 소리에, 안솔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허공에는 비틀거리고는 있었지만 다시금 날갯짓을 하는 본 드래곤과, 그것을 의연하게 바라보는 해골 망인들이 서 있었다. 마치 이 정도 공격에 끝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는 듯 그들은 초연히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안솔은 더욱 슬펐다. 살아 생전 모든 것을 바쳐 싸운 이들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믿었던 지휘관에게 뒤통수를 맞은 이들이다. 사후에 수천 년 동안 산맥을 외로이 떠돈 이들이다. 응당 누려야 할 것을 누리지 못하고, 세상에서 까맣게 잊혀진 이들이다. 그러할진대. 그들이 현실로 소환된 지금, 종말의 용 또한 함께 부활했다. 그리고 그들은 주저 없이, 다시 한 번 싸우는 걸 선택했다. 그 누구도 알아주지 못하지만, 승천도 못한 채 수천 년 동안 억울함을 품어왔지만, 승리 앞에서 배신을 당해버렸지만. 처음 산맥에 들어왔을 때 품었던 신념은 아직도 살아있었다. 오직 하나의 신념, 다시 예전의 평화로운 시절을 되찾겠다. 부활한 용이 세상에 나가는걸 걱정한 그들은, 영원한 소멸을 각오하고 다시 한 번 칼을 빼어 든 것이다. 몸을 추스른 마그나카르타와 다시 공격 준비를 마친 인간 영웅들. 그들을 보며 안솔은 천천히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어느덧 지팡이에서 흐르는 은은한 빛은 안솔의 온몸으로 흘러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안솔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기적…!” 안솔의 전신에서 찬연한 빛이 솟구쳤다. 새하얀 빛의 기둥이 허공으로 솟구쳐 둥그런 타원을 그린다. 그러더니, 눈이 부실 정도의 환한 빛 무리와 함께 타원의 중앙으로 하얀 날개를 펄럭이는 천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안솔이 말했다. “천사 님, 천사 님….” 고요히 눈을 뜬 천사는 소원을 말하라는 듯 내려다본다. “부디….” 어느새 전투는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든 상태였다. 서로 막 공격을 가하려는 찰나, 갑작스레 출현한 거대한 천사에 용도, 망인도 모두 놀란 탓이다. 안솔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한 마음으로 발동한 기적은, 이 요새 전체를 아우르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안솔은 절박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곳에 묻혀 있는 분들을 구원해주세요…!” 절절한 외침. 천사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곧 사방에 모인 망인들을 확인한 순간, 입가에 자애로운 미소가 지어졌다. 잠시 후, 모든 상황을 파악했는지 천사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시종일관 서글펐던 안솔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 Salvation…. 이내 짧게 읊조리는 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진 순간이었다. 천사가 망인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고는 살며시 양팔을 벌렸다. 이어서 마치 어머니와 같은 따뜻한 미소를 보냈을 때, 천사의 전신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화아아악! 하늘에서 일대를 뒤덮을 정도의 강렬한 빛이 지면에 사르르 내려앉았다. 수천 년간 어둠이 자리잡았던 땅에, 비로소 따뜻한 빛의 기적이 실현된 것이다. ============================ 작품 후기 ============================ 오늘 안솔의 시점으로 시작하는 내용은 http://bgmstore.net/view/0O1HB 이 BGM과 들으시면 아주 좋습니다. 제가 집필하면서 들었던 노래에요. :D 0453 / 0933 ---------------------------------------------- 잊혀진 영웅들. 화아아악! 한순간 빛이 온 세상을 물들이는 착시가 일었다. 망인들은 처음에는 약간 거부 반응을 보이는듯했으나, 몸을 따뜻하게 감싸오는 빛을 서서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커먼 기운이 감돌던 망인들의 몸에 하얀 빛이 천천히 스며들어 퍼지는 게 보였다. 문득 사방에서 중앙 광장으로 거친 바람이 흘러들었다. 거세게 나부끼는 머리칼을 걷어내며 나는 조용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망인들의 몸을 물들였던 빛은 어느새 외부에서 내부로 흘러 들어가는 중이었다. 아니. 빨려 들어가야 한다고 해야 맞을까?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듯이, 망인들이 정신 없이 빛을 빨아들여 갈증을 해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변화가 시작되었다. 해골 망인들에 흐르던 음침한 기운은 진작에 사라졌다. 빛을 받아들일수록 해골의 모습도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뼈만 남았던 부분에 새로운 살이 생기고, 그 위로 낡고 녹이 슬었던 장비가 원래의 말끔한 모습을 되찾는다. 심지어 두개골도 생전의 모습을 되찾아, 얼굴은 물론이고 머리칼까지 생겨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해골에 불과했던 망인들이 감쪽같이 인간으로 변한 것이다. 흡사 시간을 되돌리는 것처럼. 잠시 후, 천사와 빛이 동시에 사그라졌다. 빛이 가라앉은 주변에는 어느새 온몸으로 은은한 빛의 여운을 흘리는 망인, 아니 인간들이 서 있었다. 물론 저 인간들이 정말로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저것은 분명히 영혼이다. 그러나 아까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거룩한 기운이 느껴지는 게, 아마 저주에 물들어 어두웠던 영혼을 완벽하게 정화한 듯싶었다. “저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허준영이 멍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그러나 그 누구도 대답할 수 없었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지금 사방에 있는 영혼들도 멍해 보였으니까. 서로와 자신을 번갈아 보는 게, 그들 또한 작금의 상황에 무척 놀란 모양이다. 나는 차분히 안솔을 돌아보았다. 고유 능력을 발동해 기적을 실현한 만큼, 안솔이 전후 사정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그때였다. “오라버니! 도와주세요!” 그롸롸롸롸롸롸롸! 안솔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허공에서 살 떨리는 울부짖음이 들리었다. 반사적으로 하늘을 쳐다보자 어느새 완전히 몸을 추스른 본 드래곤이 보였다. '저놈은 아직 끝나지 않은 건가?' 일순 의문이 들었지만, 곧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솔의 기적은 어디까지나 망인들을 대상으로 발동했다. 그리고 본 드래곤의 두개골에 달려있는 뿔. 저것은, 내 눈이 틀리지 않다면 마족의 뿔이 분명하다. 왜 저놈의 머리에 마족의 뿔이 달려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설령 안솔의 기적이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저 뿔은 이곳과 연관이 없으니 발동 대상에서 제외됐을 가능성도 있다.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게 없지만….' 어느덧 하늘이 서서히 검어지는 게 보였다. 그와 동시에 뜻 모를 불안함이 온몸을 엄습했다. 무언가 흉포하고 심상치 않은 기운이 뭉클뭉클 모여들고 있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아 이 기운을 느꼈다. 한없이 불길하고 흉흉하다. 그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러나 낯설면서도 왠지 모르게 익숙하게 다가오는 이 기운은…. 그래. 마치 저주와 비슷한 느낌이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놈은 이러한 상황이 매우 마음에 안 드는지 또 다른 종류의 공격을 준비하는 듯 보였다. 나는 조용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안솔을 보며 침착히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될까?” 말을 꺼냄과 동시에, 경황없던 안솔의 얼굴에 한 줄기 생소함이 스쳤다. 비단 안솔뿐만이 아니라 주변 클랜원이 헛바람을 흘리는 소리도 들렸다. 지금껏 지적된 머셔너리 클랜의 비방 중에서 내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것은, 바로 중앙 집권 형 클랜의 한계를 지적한 기사였다. 그 말인즉슨, 모든 권한과 모든 권력이 오롯이 나에게 집중돼있다. 클랜 자체가 무조건 나를 통해 돌아가니, 내가 자리를 비우면 무너지는 사상누각 클랜이라는 것이다. 겉으로는 부정하고 있었으나 이번에 비슷한 사건이 터졌으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권한을 돌렸다. 단순히 조언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선택권을 부여하고 안솔의 말에 따르겠다는 소리였다. 안솔은 이 상황에 잠시 부담을 느낀 듯 보였지만, 이내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눈을 형형히 빛내며 하늘을 가리켰다. “저걸…. 저걸 막아주세요! 저분들은 대 영웅의 염원으로, 저 저주를 막을 수 없어요!” 어느새 모여든 뭉클뭉클한 검은 기운은, 하늘을 덮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간간이 잔물결이 일렁이는 게 꼭 몰아치기 직전의 파도를 보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것은 이따금 불똥을 튀기고 있었다. 꼭 물결치는 염화의 파도를 보는 것 같다. 그나저나 대 영웅의 염원이라. 그러고 보니 확실히 영혼들의 반응이 이상하다. 생전의 모습을 되찾은 이후 얼굴에는 표정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조금 전까지는 죽을 듯이 용과 싸우더니 지금은 전전긍긍한 기색들을 내비치고 있었다. 역시나 안솔은 내가 모르는 일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바로 생각을 접었다. 여러 가지 물어보기에는 상황이 너무나 급박해 보였으니. 하여,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네?” “저것을 막아내고. 그리고?” “마, 막아내실 수 있는 거예요?” 한껏 놀란 목소리. 저 기운에 불이 섞여 있다면 가능하다. 차분히 머리를 끄덕이자 안솔의 목울대가 살그머니 움직인다. “저, 저분들을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서로 힘을 합쳐서 저 나쁜 용을 물리쳐주세요.” “알겠다.” 곧바로 대답한 후, 나는 얼른 클랜원을 돌아보았다. “모두 안솔의 말을 들었을 겁니다. 제가 저 공격 아니 저주를 막아내면, 이곳에 있는 영혼들과 힘을 합쳐 용을 공격하시면 됩니다.” “클랜 로드. 혹시 막아내신다는 방법이….” 감을 잡은 걸까. 일견 신재룡이 걱정하는 어조로 물어와 나는 흘끗 시선을 던졌다.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우리가 가져온 엘릭서가 총 몇 병이지요?” “두 병입니다.” 그러면 됐다. 한결은 이미 구했다. 그러니 만일의 상황에서 내가 한 병을 사용한다 해도, 안현에게 사용할 한 병이 남는다. 꾸르르릉! 그때, 하늘에서 흡사 뇌성이 울리는듯한 거대한 굉음이 주변을 왕왕 울렸다. 나는 재빠르게 화정에게 말을 걸었다. 할 수 있겠냐고. - 할 수는 있는데…. 조금 힘들지도. 화정은 즉각 대답했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애매한 말이었다. 저 용의 힘은 너도 막아내기 힘든 건가? - 아니야 이 멍청이야! 이 부근을 전부 물들일 정도로 거대한 저주인데, 이걸 모두 감싸 안았다가는 네 몸이 버틸 수 없을지 모른다고! 그렇다면, 아무튼 할 수 있다는 소리. 나는 차분히 검을 집어넣었다. 양팔을 움직여 하늘을 향해 손을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자. 그롸롸롸롸롸롸롸! 용의 포효와 함께 하늘에서 떨어지듯 내려오는 거대한 장막을 볼 수 있었다. 화정이 경고한 대로였다. 흡사 위쪽에서 커튼을 쳐 떨어뜨리는 것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장막이 하늘을 덮으며 주르륵 흘러내린다. 영혼들 사이로 한층 심한 동요가 흘러들 즈음, 나는 침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태고의 격으로 명할지 어니.' 그렇게 마음을 착 가라앉힌 후, 나는 지체 않고 심장에 내재된 힘을 일거에 터뜨렸다. “영역 선포!” 화륵! 화르륵! 영역을 선포함과 동시에, 허공에서 둥글게 퍼져 내리는 반구형의 막이 일대에 떨어져 내렸다. 범위는 나와 클랜원을 포함한 모든 영혼들. 투쾅! 이내 유리그릇을 거꾸로 덮은 것 같은 맑은 불꽃이 흐르는 막은, 바닥을 깔끔하게 쪼개어 들어와 완전하게 자리잡았다. 동시에, 하늘에서 흘러내리는 장막은 그대로 화정의 영역을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통과했다. “오, 오라버니!” “클랜 로드!” 탄식 섞인 비명이 귓가를 강하게 때렸다. 공격이 영역을 그대로 통과했으니 내가 막지 못한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마음 같아서는 약간의 설명이라도 해주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다. 솔직히 나 또한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저건 일반적인 마법으로는 정의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상대를 해치려는 것뿐만이 아니라 일대에 영향을 미쳐 옭아매려는 목적, 즉 하나의 재앙이나 다름없다. '크으읍, 크으으읍!' 온몸을 찍어 누르는 압박감에 나는 속으로 거센 비명을 질렀다. 여태껏 이 정도의 대규모 영역을 선포한적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통과해 들어오는 힘이나 양 이 모든 게 장난이 아니었다. 무너져 내리는 고층 건물을 손으로 받아내는 기분이다.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기운이었다. 물론, 격은 화정이 더 높다. 화정은 착실히 내려오는 장막을 잠식해 들어가는 중이었지만, 그것 이상으로 밀려드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이대로라면…!' 처음보다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기는 했지만, 계속 이 상태를 유지했다가는 모든 기운을 잠식하기도 전에, 저주의 기운이 영혼들에게 닿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에는 상황이 되돌아간다. 영혼은 다시 저주로 물들어 이 산맥을 배회할 것이고, 안솔의 기적은 무위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는 못해!'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어?' 느닷없이, 선포했던 영역의 범위가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를 즈음, 속으로 화정의 말소리가 들렸다. - 내가 줄였어. 지금 저 영혼들이 네가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사실을 깨닫고, 네가 있는 쪽으로 속속히 모여드는 중이야. 그만큼 보호 범위가 줄어드니, 일말의 여유가 생기겠지. 그런가. 그랬던가. 확실히 주변으로 누군가 들이 서서히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간신히 시선을 내려 주변을 내려보았다. 기척은, 화정의 말대로 바로 영혼들이었다. 그제야 도처에서 수백, 수천의 시선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눈길에서는, 하나같이 간절함이 담겨져 있었다. 모든 방향에서 범위가 줄어들자 약간이지만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어느덧 검은 기운은 머리 바로 위까지 내려와 있었다. 이내 목 부근으로 뜨끈한 기운이 내려앉은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화정의 힘을 폭발시켰다. 쿵! 그리고 그 순간, 기적적으로 기운이 멈추었다. 거의 끝에 다다르기 직전이었지만, 비로소 멈추는데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아직 멈추기만 했을 뿐이다. 안솔은 막아달라고 했지만, 나는 최대한 이 기회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잠시나마 숨을 골랐다가, 남아있는 모든 잠력을 터뜨리며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끄아아아아아아악!” 화르르르르르르륵! 나는 마치 카펫 끝자락을 쥐어 힘껏 펼치는 느낌으로 나는 힘차게 화정의 힘을 터뜨렸다. 그러자 붉은 융단이 쫙 깔리는 것처럼, 화정이 단숨에 치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본 드래곤이 하늘에서 땅으로 장막을 떨어뜨렸다면, 이번에는 내가 화정의 힘으로 기운을 잠식해 땅에서 하늘로 기운을 되돌린 것이다. 눈부실 정도의 맑은 불꽃이 하늘을 물들였다. 끝없이 떨어지던 하늘이 다시 올라간다. 눈을 한 번 깜빡이자, 검은색으로 일변했던 하늘에 어느새 맑은 불꽃이 넘실대는 게 보였다. 사방에서 퍼지는 파문에서 왠지 모르게 잔잔한 리듬이 느껴진다. 이로써, 영역 내로 들어온 기운은 완전히 내 통제하에 들어왔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저 멀리 떠 있는 본 드래곤을 향해 속으로 외쳤다. '되돌아가, 뒤덮어라!' 공중에 멈춰있던 불의 휘장은, 주저 않고 본 드래곤을 향해 세차게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화르르르르르르륵! 목 언저리로 스며들었던 뜨끈한 기운이 차차 멀어져 간다. 온탕에 몸을 담갔다가, 밖으로 나왔을 때의 시원함이 대신 머물렀다. 그리고 이내 하늘로 급히 솟구치는 본 드래곤과, 그 뒤를 돌풍처럼 뒤쫓는 불길이 보였다. 그때였다. “아….” 성공했다고 생각한 찰나, 나도 모르게 몸이 서서히 허물어지는걸 느꼈다. 하늘이 갑자기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뒤쪽으로 차분히 넘어 간다. “───!” 그 순간, 누군가 내 뒷목을 받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크롸롸롸롸롸롸롹! 가물가물해지는 시야로, 치솟은 불길이 본 드래곤을 잡아먹는 광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어두운 방. 한 악마가 눈앞에 사슬에 휘감긴 마족을 보며 광소한다.) 아스모데우스 : 크하하하하하하하! 됐어! 됐다고! 드디어 용을 부활시켰어! 마침내 성공했단 말이다! (한동안 광소하던 악마는 뻐기는 눈길로 씨앗화한 마족을 쳐다본다.) 아스모데우스 : 크후! 크후후! 크헤헤헤헤헤헤헤! 이제,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그때.) 펑! (폭음과 함께 마족의 몸이 터져나간다.) 아스모데우스 : 어…. 0454 / 0933 ---------------------------------------------- 잊혀진 영웅들. 잠시 후. 쿵! 무언가 추락해 지면을 강하게 때리는 소리가 울렸으나, 돌아볼 겨를은 없었다. '아….' 시야가 가물가물하다. 예고했던 현기증이 온몸을 잠식해 들어오고 있었다. 꼭 정신이 나락으로 떨어지는듯한 기분에, 나는 안간힘을 쓰며 정신 줄을 붙잡으려 애썼다. 아직 용의 최후도 확인하지 못했거니와, 추후 영혼들이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은 이미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차차 기울어지고 있었다. 눈꺼풀에는 무거운 추라도 달렸는지 자꾸만 감기려고 한다. 그때였다. 이내 머릿속으로 어둠이 찾아들고 시야가 완전히 하얗게 일변했을 즈음. - Tempus Auxilium…. 결국 또 정신을 잃는 건가라고 생각한 순간, 귓가로 자그마한 속삭임이 흘러들었다. 그와 동시에 눈앞으로 나타난 이리저리 움직이는 노란빛 광채 하나. 일순간 엘릭서를 먹이려는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은은한 빛이 흐르는 노란빛 광채는 오직 눈앞에서 연신 살랑살랑 흔들리는 중이었다. 이윽고 왼쪽 가슴에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감촉은 가슴을 쓰다듬는 느낌으로 오른쪽으로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배꼽 부근을 확 당기는듯한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그리고 이어서 찾아든 감각은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감각이었다. 이걸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 몸을 강제로 한 쪽으로 끌어당기는 기분? 시계 태엽을 억지로 되감는 기분? 아니. 낯설기는 하지만, 나는 분명 이와 비슷한 감각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래. 시간 역행. 이건 꼭 1회 차 마지막에 이르러, 제로 코드를 발동했을 때와 흡사한 감각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불현듯 내부에서 화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 그래 맞아. Tempus Auxilium. 지금 네 몸에는 시간 역행 마법이 걸려있어. '템…. 뭐라고?' - Tempus Auxilium. 시, 간, 역, 행. 네 몸에 한정에서, 억지로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이야. 즉 지금 상황을 보면, 몸을 화정을 사용하기 직전의 상황으로 돌리는 거지. 아직도 이해 못하겠어?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바로 기함하고 말았다. 화정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무척 느린 속도이기는 했지만, 어느새 현기증이 가라앉고 시야도 차차 회복되고 있었다. 몸 상태가 확연히 나아지고 있다. 다만 회복이라는 느낌이 아니라, 화정의 말대로 힘을 사용하기 직전의 몸 상태로 되돌아가는 듯했다. '그게…. 가능한 마법인가?' - 비록 신화 시절 때 소실돼 전승되지는 않았지만, 이론상으로는 가능한 마법이야. 하지만 신화 시절 때도 사용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지. 엄청난 고난도 수준의 마법으로 실제로 사용하는 마법사도 드물었거니와…. 발동한 마법사는 피 대상자의 상태를 되돌리는 대신, 그와 동등한 대가를 치러야 하거든. 뭐, 지금은 영혼 상태라 그리 의미는 없겠지만. 화정의 말은 매우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아니 화정이 고난도 마법이라고 말한 것 자체가 이미 어느 정도인지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야 노란빛 광채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마 구원받은 영혼 중 한 명이, 내가 쓰러진 걸 보고서 신화 시절의 마법을 걸어준 듯싶었다. 이대로 꼼짝없이 기절할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몸이 회복된다. 또한 영혼이 이런 마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적어도 우리를 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방증이었다. 나는 간신히 안도할 수 있었다. '다행이군.' - 다행이긴 뭐가 다행이야! '…왜 화를 내는 거지?' - 너…. 지금 속 편하게 있을 때가 아니라고. 조금 전에 너, 확실히 죽을뻔했어. 그 사실은 알고나 있는 거야? …죽을뻔했다 라. 솔직히 죽는다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약간은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막연히 막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으나, 처음 부딪쳤을 때 그 무시무시한 힘에 압도당할 뻔했으니까. - 압도당했을 뿐만 아니라, 너란 그릇 자체가 깨지기 일보직전이었다고. 어? '그릇?' - 그래 이 멍청한 자식아! 원래 네 체력으로는 선포한 영역을 간신히 유지하는 수준이었어!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힘을 잠식해서 되돌려? 미쳤어? 그건 네 한계를 확실히 넘어서는 일이었다는 말이야! 예전에 그릇을 억지로나마 넓히지 않았다면 어쩔뻔했는데? '그릇을…. 억지로 넓혀놔?' 연신 이어지는 화정의 뜻 모를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 후…. 이봐 너. 지금부터 잘 들어. 큰소리를 친 게 약간은 미안했는지, 화정은 곧 약간은 꺾인듯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자꾸 너라고 하는 게 약간 거슬리기는 했지만, 나는 경청하겠다는 의미로 눈을 감았다. - …후유. 그래, 주인아. 예전에 네 부탁으로 수라의 힘을 받아들였을 때를 기억할거야. 그때의 일로 말미암아 체력 92에 맞춰져 있던 그릇이 101까지 넓혀지기는 했어.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넓혀지기만 했을 뿐이야. 그릇의 강도 자체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나는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릇이란, 한 마디로 한계를 비유한 말이었다. 현재 내게 허락된 화정의 힘은 딱 체력 90정도에 해당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에 한계를 초과할 정도로 힘을 사용한 것이다. 다행히 예전에 수라의 힘을 받아들인 일로 어느 정도 버틸 수는 있었지만, 그릇 자체는 거의 깨지기 일보직전이었다는 소리. '…그런가. 정말로 죽을뻔했던 건가.' 어쩌면, 아까 조금만 잘못됐다면. 아마 그대로 먹혀버렸거나 다시는 눈을 뜰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한 번 깨진 그릇을 다시 복구하는 건 요원한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온몸으로 소름이 돋았다. -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건 이해해. 그리고 네 말대로 지금 Tempus Auxilium를 사용할 수 있는 영혼이 있는 건 천운이나 다름없어. 하지만 이제부터는 다시는 이런 기적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지마. 그 기적인지 뭔지 웃기지도 않는 능력이나 엘릭서 등등. 아무리 철저하게 대비를 해놨다고 해도, 다음에 똑같은 상황이 발생해 네가 힘을 끌어다 쓰려고 한다면…. 나는 절대로 힘을 빌려주지 않겠어. 이건 네 목숨을 담보로 한 일이니까. 마지막으로 길게 말을 마친 화정은, 자신이 할 말은 다했다는 양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하여 내 쪽에서 몇 번이나 말을 걸어보았으나, 역시나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나는 조용히 손을 들어 차분히 얼굴을 쓰다듬었다. 화정의 말이 맞다. 목숨을 담보로 한 일.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저 화정의 힘을 이용해 조금 더 용이한 전투를 이어나갈 생각이었는데, 시작부터 잘못된 계획이었다. “클랜 로드!” “오라버니! 오라버니!” 문득 들려온 나를 부르는 목소리들. 어느새 몸 상태가 꽤 안정된 걸 느껴, 나는 차분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바로 눈앞에서 나를 보고 있는 한 영혼을 볼 수 있었다. 온몸에 은은한 빛이 흐르는 영혼은 온화한 인상을 주는 여인이었다. 머리카락은 샛노란 황금빛을 띠고 있었는데, 아까 흔들리던 노란빛 광채가 아마 이 머리칼인 듯싶었다. 여인은 나를 보며 상냥히 웃어 보이고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훌쩍 멀어지는 여인을 보며, 그제야 내가 바닥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주변은 고요했다. 클랜원이 귀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는 것만 제외하면, 대기를 떠르르 울리던 용의 포효도, 이글이글 타오르던 불길의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는다. 오직 요새를 비추는 따뜻한 햇살이 얼굴을 가득히 물들여오고 있었다. 나는 차분히 손을 더듬어 땅을 짚었다. “용은…?” 조용히 입을 열며 상체를 일으키자, 나를 부축해오는 여러 손길들을 느낄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용은 죽었어.” 허준영의 담담한 목소리. 나는 손을 들어 설레설레 흔들었다. 부축해줄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다. 몸 상태는 확실히 괜찮았으니까. “괜찮으니까…. 조용히 좀 해봐. 머리 울린다.” 이내 힘껏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자,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클랜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었다. 그 와중, 나는 엘릭서를 들고 있는 신재룡을 보며 안도했다. 혹시 사용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마개가 덮여진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도…. 나도 참 어지간하구나.' 이런 상황에서도 엘릭서를 생각하는 나를 보니 절로 쓴 물이 올라온다. 나는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죽었다고…? 어떻게 된 거지?” “네 공격이 결정적이었다. 온몸이 불타오른 용은 허공에서 몇 번 비틀비틀하다가, 결국 아래로 추락했지. 그리고 우리와 저 영혼들이 힘을 합쳐, 추락한 용을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사실상 일방적인 공격이었어. 네가 해치운 거와 다름없는 거야.” 나는 허준영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온몸에서 허연 김을 뿜어내는, 하늘을 활보하던 본 드래곤을 볼 수 있었다. 크기도 크기였지만 외양에는 아직도 그 특유의 흉포함이 남아있다. 그러나 제 3의 눈은 본 드래곤의 확실한 사망을 말해주고 있었다. 얼핏, 두개골에 돋은 뿔이 유난히 눈에 밟혔다. “오라버니…. 정말로 괜찮으신 거예요?” 문득 안솔이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들며 흐느꼈다. 목소리도 울먹울먹 거리는 게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을듯한 기세였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안솔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이윽고 다시 한 번 용의 사망을 확인한 후, 이번엔 사방으로 느릿하게 시선을 돌려보았다. 그러자 나와 안솔, 클랜원이 서 있는 중앙 광장 사위로, 모든 영혼들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영혼들은 더는 혐오스러운 해골의 모습이 아니었다. 생전의 모습을 되찾은 말끔한 모습으로, 외양에 흐르는 어슴푸레하며 흐릿한 빛은 거룩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그들이 우리에게 보내는 시선은, 하나같이 경외와 호의가 담긴 눈길이었다. 나는 한동안 안솔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솔.” “흑, 네.” “이제는 설명을 들어야겠구나.” “서, 설명이요?” “그래. 이들이 누구인지.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저들이 왜 지금 여기에 서 있는지. 그리고 네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네가 아는걸 얘기해주려무나.” “아…. 그, 그러니까….” 그때였다. 한 번에 너무 많은 걸 물어봐서 그런지, 안솔은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거렸다. 그렇게 어벙한 얼굴로 눈만 깜빡이는 찰나, 갑자기 영혼들 사이로 작은 어수선함이 일었다. 하여 소란이 이는 곳을 바라본 순간, 나는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걸 느꼈다. 빽빽이 모여있던 영혼들이 좌우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갈라진 틈으로 한 영혼이 차분히 걸어오고 있었다. 잠시 후, 이내 내 앞에서 걸음을 멈춘 영혼은 연갈 빛 머리칼을 가지런히 정리한 선한 이목구비를 가진 사내였다. 멀뚱히 쳐다보고 있자, 사내는 점잖게 머리를 숙였다. - Lorem ipsum dolor…. Nos Salvator…. “?” - Lorem ipsum dolor…. Nos Salvator…. “…흠. 당최 무슨 말인지.” 똑같은 말이 연이어 들려왔으나,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 혹시 비비앙이 알아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시선을 돌렸지만, 비비앙 또한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다는 뜻의 제스처를 취하자, 사내는 지그시 웃으며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이윽고 사내는 침착히 몸을 돌려 영혼들을 응시했다. 그러더니, 갑작스레 한 손을 번쩍 치켜들어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 Drrrr…. Ea - Yaal! 어느덧 요새를 가득 채우던 안개는 한 줌도 남김없이 걷힌 상태였다. 사내의 음성은 더는 처음의 낮고 불쾌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인상처럼 맑고 깨끗한 목소리가 허공으로 울려 퍼져, 바닥에 길게 드리워진 햇살을 따라 여운처럼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조금 전까지 우리를 주시하던 수천의 영혼들이. - Lorem ipsum dolor…. Nos Salvator…. 하나같이 웅장한 합창을 이루며,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 작품 후기 ============================ 쿵짝짝 쿵짝짝.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보 to the 상의 시간이 왔습니다! 아 미치겠네요. 얻을게 너무 많다 보니까, 정리하는 것도 일입니다. ㅋㅋㅋㅋ. 아마 제가 장담컨대, 독자 분들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아니, 아니요. 그냥 장담 안 할래요. 하도 매의 눈을 가진 분들이 많으셔서…. 그냥 몇몇 분들은 놀라실 수도 있습니다. -_-a 그리고 설날도 왔지요! 몇몇 남성분들은 고생 엄청 하시겠어요. 교통은 교통대로 정체되고, 운전은 운전대로 힘드시고. ㅜ.ㅠ 저는 저번에 후기에 말씀드렸듯이, 사촌 결혼식 가는 겸 다녀와 큰집에는 이미 다녀온 상태입니다. 그래서 내일 외갓집만 다녀오면 되요. ㅇㅅㅇ 그래서 계속해서 연재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D 독자 분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설날이니까 맛난 것도 많이 드시고요! PS. 아. 조만간 김수현, 김유현 형제의 사용자 정보를 업데이트 할 예정인데, 그 후 한 번 모든 캐릭터를 정리해서 설정에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D PS. 고장난선풍기 님! 팬 아트 고맙습니다! 김수현도 정말 대단했지만, 고연주가…. 진짜…. 아, 정말 이러시면 너무 감사합니다.(?) 제 뜰에 고장난선풍기 님께서 직접 올려놓으니 한 번 구경 오세요! 0455 / 0933 ---------------------------------------------- 잊혀진 영웅들. 나는 사방을 둘러보며 어색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수천의 영혼이 일제히 무릎을 꿇은 광경은 무릇 장관이었으나, 까닭 없는 부담감을 주고 있었다. 나와 비슷한 감정이 들었는지, 안솔이 내 손을 꼭 잡는 게 느껴졌다. 다행히 어색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나와 마주 보는 방향에 있는 사내가 스르르 몸을 일으키자 다른 영혼들도 동시에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다시금 호의 어린 미소를 짓는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볼 무렵. 돌연히 한 마법사가 다가오고는, 조용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영창 시간은 무척 짧았다. 그냥 두세 마디를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사분히 웃으며 나를 쳐다본다. 아까 내 몸을 치료해준 황금빛 머리칼을 가진 여인이었다. - 이제 들리십니까? 우리의 구원자시여. 그때였다. 잠깐 여인에게 시선을 빼앗긴 찰나, 아까와는 달리 확실히 들을 수 있는 유창한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크게 놀랐으나 나는 바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방금 여인이 외운 주문이 일종의 번역 마법이라는 사실을. 차분히 머리를 끄덕이자 사내는 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 감사합니다. 구원자시여. 우리는….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구원자라는 존재가 아닙니다.” 일부러 말을 끊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내에게서는 일말의 불쾌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더욱 활짝 웃어 보이더니 머리를 좌우로 젓는다. - 아니요, 맞습니다. 어둠에 물들었던 우리를 정화하고, 수천 년 동안 목적 없이 방황하던 영혼을 해방하셨습니다. 버림받았던 우리를 빛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분은 확실한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저 말이 무척이나 부끄러웠는지 안솔을 슬그머니 내 등 뒤로 숨었다. 나는 사내의 말을 떠올리며 새삼스런 기분으로 안솔을 내려다보았다. 안솔의 진명이 바로 빛을 인도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이윽고 한없이 따뜻한 눈길을 보내던 사내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 도대체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나는 멀거니 영혼들이 착용한 장비를 응시했다. 말끔한 모습을 되찾은 게 하나같이 범상치 않아 보이는 장비들이다. 생각 같아서는 이왕 승천들 하실 거, 입고 있는 장비 좀 두고 가시면 안되겠냐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등 뒤로 “갚으실 필요 없어요….”라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와, 그냥 입맛만 다시고 말았다.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혹시 대답해주실 수 있으실는지요.” - 물론입니다. 어떤 것을 하문하셔도, 최선을 다해 말씀드릴 것을 신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아니. 고마워하는 건 알겠는데, 제발 그만 좀 해. 저렇게 말하면 꼭 뭔가 대단하고, 있어 보이는 질문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잖아. 사실 별것 아닌 질문을 던질 예정이라, 나는 속으로 강하게 투덜거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이 산맥에 들어온 이유는 바로 사람을 찾으려 들어왔습니다. 최근 이 산맥에서 이유 없이 실종을 당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그 중에 우리와 아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흘러 흘러 이 요새까지 오게 되었는데….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혹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말을 꺼낸 순간 호의 서린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이내 심각한 기색을 내비친 사내는 점잖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아, 그 일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아마 요새 밖으로 벗어난 옛 동료들이 벌인 일이라 생각됩니다. “옛 동료들이요…?” - 우리가 이 요새에 갇힌 지도 어느새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생전에 아무리 고결한 인격을 지녔다 할지라도, 흐르는 세월 앞에서 영원히 버틸 수는 없는 법이지요.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그저 방관했습니다. 어떻게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잠시 쓴웃음을 보인 사내는, 곧 예의 깔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일단 지금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그들이 이 요새 지하에 잠들어있다는 사실과 일부는 살아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들을 살려낼 방법까지도요. 일부라는 말이 약간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일단 안현의 생존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안현이 실종된 후 우리가 바로 산맥으로 들어왔으니, 안현은 비교적 최근에 요새로 들어왔을 것이다.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요새 지하로 가는 방법과, 살려낼 방법을 말씀해주실 수 있겠지요?” - 물론입니다. 다만, 그전에…. 문득 사내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나를 쳐다보는가 싶더니, 이내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잠시 저의…. 아니,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 이어지는 사내의 말은 하나의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어떻게 보면 해명으로도 볼 수 있었다. 물론 나로서는 마그나카르타가 쓰러진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했던 터라, 썩 흥미로운 기분으로 들을 수 있었다. 마그나카르타의 저주. 그것은 하나의 저주를 말하는 게 아니라, 두 개의 저주였다. 하나의 저주는 예상했던 대로 산맥 일대에 내린 저주였다. 간단히 말해서. 저주에 물들은 영혼은 이 산맥을 벗어날 수 없는 일종의 금제가 걸렸다고 하는데, 아마 그것이 영혼의 원념과 섞여 필드 효과를 이루어낸 듯싶었다. 그리고 나머지 저주는 예상외로 예언의 저주였다.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는 숨을 거두기 직전 하나의 예언을 대 영웅에게 남겼다고 한다. '지금은 이렇게 패해 사라지지만, 나는 그리고 이 예언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여기에 있는 인간 중 아무도, 심지어 자신도 모르게 내 힘을 내 바람을 남기도록 하겠다. 그래. 당분간은 너희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언젠가는, 너희 후손 중에서라도 내 힘과 바람을 잇는 자가 나타나는 순간. 종말의 씨앗이 싹을 틔우는 그 순간! 그때 세상은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어디 한 번 마음껏 발버둥을 쳐보도록. 크하하하하하하하!'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그러나 언젠가는 꼭 이루어질 예언에 가까운 저주. 간신히 전투를 끝낸 인간들은 새로운 국면과 직면해야만 했다. 전투가 끝났음에도 산맥이 저주로 물들어 꼼짝없이 발이 묶인 것이다. 그래도. 비록 끝이 어그러지기는 했으나 인간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한 그들은 요새에 남아 저주를 해제할 방법에 골몰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산맥의 전투를 이끌었던 대 영웅이 하나의 전언을 알렸다. 드디어 저주를 해제할 방법을 찾은 거라 생각한 인간들은, 모두 한 장소에 모여 대 영웅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대 영웅이 모습을 보였다. 이제 곧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인간들은 한껏 기대에 차올라 자신들의 지휘관을 응시했다. 그러나 대 영웅이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바로 사과였다. - 여러분. 미안해요. 갑작스러운 사과에 인간들은 매우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황한 인간들을 향해 대 영웅은 그동안의 전모를 소상히 밝혔다. 요지는 마지막에 마그나카르타가 남긴 예언의 대한 내용과, 그 저주를 막아낼 방법을 찾았다는 것. 대 영웅의 말인즉슨, 우리는 어느 인간이 마그나카르타의 힘과 바람을 이어받았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이대로 산맥을 벗어나게 된다면 차후 세상의 혼란을 초래하는 원인이 될 수 있으니, 우리는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소리였다. 즉 저주를 막아낼 방법이라는 게, 바로 산맥 전투에 참가한 그리고 살아남은 인간들의 무조건적인 희생을 말하는 것이었다. - 그녀가 모든 말을 마쳤을 때는, 이미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습니다. 말을 마치고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사과를 건넨 후, 일말의 여유도 주지 않고 바로 그 방법을 발동했지요. 그 방법이란 바로 우리의 죽음과 영원한 속박을 의미했습니다. “그 방법이라는 게….” - 대 영웅의 염원. 바로 염원의 비석을 사용한 방법이었습니다. “염원의 비석이라고요?” - 예. 염원의 비석. 신의 파편이 담긴 일곱 개의 비석으로 마법 진을 구성해, 언어와 지혜의 여신이신 가네샤의 힘을 빌리는 방법입니다. 만일 그 소원이 합당하다고 여겨질 경우, 발동한 인간은 그 어떤 염원이라도 이룰 수 있습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럴 거면, 차라리 그 힘으로 저주를 없애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요. 아니면 예언이 깃든 사람을 알려달라는 식으로 처리할 수도….” 이제야 약간씩 이해가 가는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머리가 기울어졌다. 대 영웅은 마그나카르타의 저주를 막으려고 했다. 그런데 고작 생각한 방법이라는 게, 용의 힘과 바람이 깃든 인간이 누구인지 알 수 없으니 모두의 목숨을 빼앗는다? 그리고 혹시라도 예언이 스며든 영혼이 흘러나갈 것을 우려해, 용의 저주를 받아들여 영혼들이 이 산맥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염원의 비석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대단한 힘을 가지고 그 정도 생각밖에 못했다는 게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무튼 이 말에 따르면, 인간들은 마그나카르타의 농간에 놀아났다는 소리였다. 인간이 어떤 방법을 택해도 고통 받도록 만들었다. 다만 그 대상이, 산맥 전투에 참가해 살아남은 인간들이냐 혹은 차후 그들의 후손들이냐 만이 다를 뿐. 결국 마그나카르타는 어떤 식으로든 인간에게 복수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한 내 기색을 알아챘는지 사내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 그렇습니다. 그게 바른 생각이지요.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염원이 이루어지기까지 몇 가지 조건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그 생각을 못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고요. 그 생각을 실천하지 못한 것은, 아마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녀를 이해하는 건 아닙니다. 비록 산맥에 들어오면서 죽음을 각오하기는 했으나, 적어도 죽어서는 각자가 품고 있는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어떤 이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고, 또 어떤 이는 자신의 모시던 신의 곁으로 가고 싶어 했지요. 결코 죽어서까지 구차한 망령이 되어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사내는 비로소 길었던 말을 마쳤다. 그리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사내의 얼굴이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공허함과 서글픔이 묻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 수천 년.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정말로 끔찍했지요. 우리는 죽어서도 어떻게든 저주를 해제하려 발버둥을 쳐보았지만, 결국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할 수 있는 거라고 해봐야 마음에 품은 하소연을 적거나, 혹시 이곳에 올지도 모를 다른 사람의 힘에 기대는 것뿐이었지요. 그런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더군요. 하하하. 하기야 저주가 뿌려졌으니 들어올 수가 없었겠지. 나는 영혼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에서. 아니 희망을 맛보기 직전 절망을 맛본 상황에서 저들처럼 되었다면, 나라도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하리라. 이윽고 다시 시선을 내린 사내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 덩그러니 서 있는 벽면에 흘끗 시선을 던졌다. 하얗던 벽면은 어느새 약간은 불에 그을린 상태였다. - 미안합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 말씀 드렸는데, 생각보다는 길어졌네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말을 들어보니 당신들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개인적으로…. 존경을 표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사내는 잠깐이지만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이내 쑥스럽게 웃으며 말하였다. - 하하. 다른 사람에게서는 처음 듣는 말인데…. 기분이 미묘하네요. 뭔가 보상을 받는 기분이랄까요.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아닙니다. 그래도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네요. 아, 이제 아까 말씀하셨던 것에 대한 답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말씀하신 사람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이 요새 지하에 잠들어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대 영웅과 마지막으로 대면했던 장소에 있지요. “그때의 일이 어지간히 억울했나 보군요.” 가볍게 말을 던지자, 사내는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 아무래도…. 그때는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으니까요. 우리처럼 포기하고 조용히 묻힌 동료들도 있는 반면, 이제는 버릇처럼 산맥을 배회하는 동료도 있었을 겁니다. 그래도, 그나마 불행 중 다행입니다. 간혹 심하게 타락한 동료의 영혼이 살아있는 인간의 몸을 빼앗으려는 시도도 있었다고 알고 있는데, 여기는 그런 분은 없어 보이니까요. 문득 한결이 미약하게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수면 밖으로 떠올릴 문제는 아니라 여겨, 나는 다음 화제로 말을 돌렸다. “그렇군요. 그럼 지하로 가는 방법과, 되살릴 방법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 으음. 원래 산 인간이 가기에는 적당치 않은 곳이나 마침 좋은 방법이 생겼습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마그나카르타가 부활해 지면을 뚫고 나왔으니까요. 장소는 바로 이 요새의 지하 1층에 있습니다. 마그나카르타를 지하 2층에 봉인해뒀으니, 뚫고 나온 구멍으로 들어가시면 제법 수월하게 들어가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사내는 옆에 있던 황금빛 머리칼을 가진 여인을 끌어와 나에게 보였다. - 되돌리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살아만 있다면, 이 친구의 능력으로 모두 살릴 수 있습니다. 여인은 아까 나에게 시간 역행 마법을 걸어준 장본인이었다. 어떤 식으로 살린다는 지 단박에 이해가 돼, 나는 바로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우리 쪽에서 원하는 이야기는 전부 들었습니다. 이제 더 신경 써주지 않으셔도 괜찮으니, 다른 분은 이만 짐을 내려놓으시는 게 어떠실는지요.” 말인즉슨, 이제 그만 승천하라는 소리였다. 말을 듣자마자 사내는 환하게 웃었다. 그때였다. -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 잠깐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결국 이렇게 다 끝났다는 생각을 하려는 찰나, 사내의 뒤로 두 영혼이 새로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두 영혼은 모두 아름다운 여인의 형상을 갖고 있었는데, 한 명은 은색으로 빛나는 발키리 갑옷을 입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말끔한 무녀 복장을 갖춘 영혼이었다. 문득, 둘의 모습이 낯설지만은 않게 다가왔다. -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저분과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 저도 저분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사내는 한 차례 둘을 번갈아 보았다가 얼른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나 또한 일순간 갸웃했으나, 반사적으로 머리를 끄덕여 허락했다. 딱히 해를 입힐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내 반가운 얼굴로 나를 지나치는 두 여인을 보고 있자, 곧 조용히 서 있는 차소림과 한나에게서 각각 멈춰서는 걸 볼 수 있었다. - 그럼 여쭈겠습니다. 당신은 플라비우스 님을 모시는 아르쿠스의 자매가 아니십니까? - 혹시, 무녀의 진전을 이은 후인이신가요? 그리고 둘의 말을 들은 순간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차소림의 클래스는 아르쿠스 발키리였고, 한나의 클래스는 황혼의 무녀였다. 이내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두 클랜원을 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땡잡았네.' - 아하…. 그렇군요. 설마 여기서 동료들의 후인을 만날 줄이야…. 그렇네요. 이대로 승천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건 우리를 구원하신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지요. 하하하. 그때, 다시 맑아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 시선을 돌리자 나와 안솔에게로 서서히 가까워져 오는 영혼을 볼 수 있었다. 사내는 나를 향해 꾸벅 머리를 숙이더니 안솔의 앞으로 다가가 차분히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그,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저는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까…. 그냥…. 이제 쉬세요….” 안솔이 모기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으나, 사내는 머리를 도리도리 저음으로써 대답했다. - 그럴 수 없습니다. 확실히 구원자 님 덕분에 우리를 옭아매던 모든 저주가 풀렸지만, 결국에는 이 또한 빚을 지게 된 셈이니까요. 안솔은 또다시 웅얼거렸다. “괜찮다니까요오….” - 하하. 아니요. 이것은 우리를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산맥에 있는 동안 무척이나 많은 생각과 후회를 했습니다. 한때는 대 영웅을 비롯한 모든 인간을 증오하던 때도 있었지요. 만일 이대로 승천해 구원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게 된다면, 결국 우리도 그와 다를 바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념도 다시 되찾고 싶습니다. 더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여긴 걸까. 안솔이 살며시 고개를 들어 도움을 요청하는 눈길을 보내었다. 하지만 나는 그저 어깨만 으쓱였다. 네 마음대로 하라는 의미였다. 스르릉, 챙! 이윽고 청명한 검음과 함께 사내의 손에 검이 들렸다. 마치 기사 서임을 받는 모습처럼 정중히 검을 쥐어, 안솔의 앞으로 천천히 올렸다. 그리고 잠시 후, 사내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 그러니까, 당신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처럼…. “아, 아니….” 안솔은 한껏 당황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그에 아랑곳 않고, 사내는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 부디 우리에게도, 당신과 당신의 소중한 사람을 구원할 한 번의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 작품 후기 ============================ 독자 분들 설은 모두 잘 쇠셨나요? 일단 여기서, 운전하느라 고생하신 아버지 분들께 박수를! 설 음식 만드시느라 고생하신 어머니 분들께 박수를(어머니 분이 과연 계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저는 나름 재미있게 잘 지냈습니다. 사촌 큰누나께서 새벽에 예정일대로 순산하셨다는 좋은 소식도 받았고, 그리고 외가에 가서 간만에 친척들도 만났어요. 맛있는 음식도 잔뜩 먹고 잠도 실컷 잔 것 같습니다. :D 이제 설도 지났고, 2월의 시작이네요. 개인적으로 올 한해는 중요한 계획은 세운 터라, 벌써 두근두근한 기분입니다. 후후. 아. 독자 분들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혹시 독자 분들께서 소설 내 머셔너리의 클랜원 중 한 명이 된다면 말이지요. 만일 눈앞에 염원의 비석이 있다면, 과연 어떤 염원을 말씀하시겠어요? 재미있는 의견이 나오면 좋겠어요. :D PS. 보상은, 개수로 따지면 아직 절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0456 / 0933 ---------------------------------------------- 안현을 구출하다. “네…?” 숨을 살짝 들이켠 안솔은 미약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하지만 사내는 재차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안솔을 지그시 올려다보며 무언의 허락을 구하는 중이었다. “아…. 하, 하지만….” 그 눈길이 자못 부담스러웠는지, 안솔은 이리저리 고개만 돌리며 사내를 회피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가득한 게 마치 “오라버니. 어떻게 해야 돼요?”라 묻는 것 같았다. '부디 우리에게도, 당신과 당신의 소중한 사람을 구원할 한 번의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나로서는 거절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대충 말을 들어보니 보상의 냄새가 솔솔 풍겼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놓고 받으라 하기에는 약간 눈치가 보이는 게 사실이라, 살며시 미소 짓는 걸로 대신했다. 안솔은 한두 번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느슨히 말아 쥔 손을 들어 자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목울대가 꼴깍 움직이는 게 머릿속이 꽤 복잡한 모양이다. 잠시 후. “정말 괜찮으세요…?” 무척 다행스럽게도, 안솔은 차려진 밥상을 뒤엎는 만행은 저지르지 않았다. 얼굴에는 여전히 “이래도 될까?”하는 기색이 가득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끄덕 주억이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마침내 안솔의 허락이 떨어졌다. 은혜를 갚겠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사내는 얼굴에 환한 기색이 번졌다. -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원자시여. 그럼 이제 간단한 의식을 치를 테니, 너무 놀라지 말아주십시오. 다시금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는 안솔. 문득 지금 안솔이 느끼는 기분을 대강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항상 나만 쫄랑쫄랑 쫓아다니다가, 이렇게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상황에 직면하니 어색하지 않고는 못 배기리라. 사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손에 쥔 검을 하늘 높이 들어올리고는 지그시 눈을 감아 입을 열었다. - 이스탄텔의 이름으로, 저 하늘에 떠오른 태양을 향해 맹세한다. '…뭐라고? 이스탄텔의 이름으로?' 익숙한 단어가 나와 나는 재빠르게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말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사내가 매우 빠른 속도로 주문을 외우기도 했거니와, 손에 쥐었던 검이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우리에게 기적의 빛을 인도한 구원자를 지킬 것을, 다시 한 번 약속한다. 사내는 약 1분 동안 빠른 속도로 주문을 영창 했다. 어느새 하늘 높이 떠오른 검은 태양 빛을 받아 이글이글 타오르는 중이었다. 검이 뿌리는 빛이 밝아질수록 영혼들에 흐르던 빛도 점차 환한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 …이스탄텔의 법에 의거해 영혼의 서약을 마칩니다. 마쳤다는 소리가 나온 걸 보니, 사내가 말한 간단한 의식이 끝난 듯싶었다. 나는 마지막 말에 주목했다. 이스탄텔의 법이란, 바꾸어 말하면 이스탄텔 로우(Law). 일순간 어떤 의미로 말했는지 궁금증이 증폭했으나 분위기상 여전히 말을 붙일 계제는 아니었다. 그냥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소영에게 물어보기로 생각하며, 나는 사내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화아아악! 우우우우우우우웅! 하늘에 떠오른 검에서 사방을 비추는 찬란한 빛이 뿜어졌다. 동시에 영혼들의 몸에 흐르던 빛 또한 발광해 검이 내뿜는 빛에 공명하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시종일관 시무룩해 있는 안솔이 마음에 걸렸는지, 사내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그런 표정 짓지 마십시오. 구원자시여. “하지만….” - 우리는 지금 그 누구보다 기쁘고, 자랑스러우며, 행복합니다. 우리는 비로소 수천 년간 바라 마지않던 해방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구원자를 위해 마지막으로 힘을 사용할 수 있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우리의 작은 성의를 거절하지 말아주십시오. 사내의 간곡한 말에 약간의 위로를 받은 걸까. 기운 없던 안솔의 얼굴이 약간이나마 밝아졌다. 어느덧 사내의 몸에 흐르는 빛이 강해지는가 싶더니, 반대로 영혼은 점차 희미해져 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련한 눈길로 요새를 천천히 둘러보던 사내는, 조금은 허무해 보이는 눈동자로 나를 돌아보았다. -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나는 말해보라는 의미로 머리를 까닥였다. - 우리는 지금 바로 맹세를 따를 것이나, 이 아이는 잠시 남겨둘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를 따라가시게 되면 아마 지하 1층에는 어렵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내가 말한 이 아이란, 아까 내 몸을 치료해준 황금빛 머리칼의 여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여인은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다소곳이 웃어주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인가. 사내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내 결단을 내렸는지 차분히 말을 이었다. - 지하 1층에서 볼 일을 마치시면, 지하 2층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지하 2층이요?” - 예. 지하 2층은 마그나카르타를 봉인한 장소이며, 대 영웅이 마지막에 스스로 걸어 들어간 곳입니다. 아마 제 예상이라면, 대 영웅은 아직도 그곳에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군요.” 나는 지그시 사내를 응시했다. 왠지 다음에 나올 말이 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 그러니 볼 일을 마치시면, 2층으로 가셔서 대 영웅과 한 번만 만나주실 수 있겠습니까? “대 영웅이란 자도 구원해달라는 말입니까?” - 아니요, 아닙니다. 우리가 뜻하지 않게 구원받았듯이, 그 부분에 관해서는 온전히 맡기겠습니다. 그저…. 한 번 만나서 이야기만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추후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그녀가 왜 그랬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 정도면 큰 부담 없는 부탁이라 나는 알겠다고 말해주었다. 사내는 한결 안도한 얼굴로 미소 짓더니 차분히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덧 주변의 영혼은 하나의 빛으로 변해, 하나하나 검으로 흘러 들어가는 중이었다. 문득 사내는 옆에 있던 여인을 쿡 찔렀다. 여인이 깜짝 놀라 돌아보자 사내가 귓가에 속닥거린다. 이내 흘끔 나를 쳐다본 여인은 호호 웃으며 사내의 옆구리를 거세게 가격했다. 사내는 격한 신음을 내뱉었으나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꼭 살아있는 사람을 보는 기분이었다. - 그럼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며…. 다들 안녕히…. 이윽고 사내는 끝 인사와 함께 한 줄기 빛으로 화해 검으로 스르르 스며들었다. 마지막으로 강렬한 빛을 번쩍인 검은 하늘에서 하릴없이 떨어져, 안솔이 허둥지둥 받아내었다.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해 떨어진 검을 바라보았다. 『맹세의 검.』 (설명 : 고대를 넘어서는 아득한 신화 시절. 용과 인간은 대륙의 주도권을 놓은 대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렇게 신화의 영웅들은, 광휘의 사제가 이뤄낸 기적으로 수천 년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이 맹세의 검은 빛을 인도해준 구원자에 대한 일종의 서약입니다. 단 한 번, 사용자가 원할 때 최후의 전투에 참가한 신화 속 영웅들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비로소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간 이들이나, 사용자가 부를 경우 언제 어느 때나 주저 없이 달려올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힘을 지녔는지는 가히 측정할 수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신화 속 영웅으로 이루어진 군단을 소환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나로서는 매우 소중한 성과를 얻은 셈이다. 비록 1회성이라는 조건이 붙어있기는 했지만, 그들의 힘은 이미 절절히 체감한 상태였다. '정말로, 꼭 필요할 때만 써야겠구나.' “오라버니….” 그렇게 생각할 무렵, 양손으로 맹세의 검을 쥔 안솔이 다가와 조심스레 팔을 내밀었다. 나는 상념에서 깨어나 이리저리 일렁이는 눈망울을 응시했다. 어떻게 보면 이 성과는 거의 안솔 혼자서 이루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차분히 머리를 흔들었다. “네가 가지고 있으려무나.” “네…? 아, 아니요.” “네가 구원한 이들이야. 그러니 소중히 갖고 있다가, 나중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내게 말하렴.” “…으응. 정말이요?” 안솔은 잠시 머리를 갸우뚱 기울였지만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들어 검을 꼭 품에 안았다. 그리고 애틋한 눈빛으로 검을 내려다보는 게, 절로 흐뭇한 마음이 일었다. 아무튼 이제야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안솔의 얼굴에 겨우 환한 웃음꽃이 피었다. 나는 마주 웃어주며 안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이제 웃는구나. 우리 복덩이.” “…저는 복덩이에요?” “그럼. 그렇고말고. 정말 잘했다. 나도 깜짝 놀랄 정도로 말이야.” “와아…! 칭찬받았다아.” 안솔은 양팔을 활짝 벌렸다. 그러면서 종종 걸음으로 다가오는 게 꼭 내 품에 안기려는 듯한 모양새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안솔의 벌린 양팔은 각각 누군가에게 잡혀버리고 말았다. “히히. 우리 복덩이 정말 기특하네. 자자, 오빠한테만 가지 말고, 언니에게 오렴. 이 못된 것아. 어디서 은근슬쩍….” “어, 어…? 유, 유정이 언니? 갑자기 왜 이러세요? 왜 내 팔을 잡아요?” “아이고. 우리 솔이 이리 와봐. 도대체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뻐요? 이러는 거 보니까 정말 여우 같네~.” “이익…! 그게 무슨 소리에요! 아, 아니 다은이 언니는 왜 또 내 팔을 잡는 거예요. 놔줘요. 놔달란 말이에요. 이이익…!” 그렇게 유정과 다은에게 질질 끌려가는 안솔을 확인한 후, 나는 조용히 시선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늘은 맑고 푸르다. 내리쬐는 햇살이 요새를 비춘다. 어느새 주변을 빽빽이 메웠던 영혼들은 온데간데없고, 부서진 동상과 그을린 벽면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리고 홀로 우뚝 남아있는 뼈만 남은 용의 사체 하나. 어떻게 보면 저것 또한 하나의 성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일순 고민에 빠져들었다. '저 용은 어떻게 처리하나…. 그리고 왜 마족의 뿔이 있는지도 밝혀내야 하는데.' 그러한 찰나, 누군가 돌연히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걸 느꼈다. 차분히 몸을 돌아보자 홀로 남은 영혼이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여인은 나와 눈을 마주하자 자신의 가슴을 지그시 눌러 보였다. 그러자 봉긋한…. 아니, 아니. '따라오라는 소린가?' 그 순간 나는 아차 한 심정으로 외쳤다. 그러고 보니 아직 남은 일이 있었다. “다들 주목! 지금껏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있으니, 공략의 기쁨은 모든 일을 끝마친 후에 나누도록 하지요. 얼른 정렬하십시오.” “김수현! 저 용! 저 용은 어떻게 할 거야?” 역시나 비비앙이 탐욕스러운 눈길로 용의 사체를 가리키는걸 보며, 나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지금 가져갈 수는 없으니까 일단은 여기 두자고. 아무튼 가면서 얘기하자, 가면서.” “히잉.” 비비앙은 입술을 삐쭉 내밀었으나 결국에는 아쉬운 탄성을 흘리며 걸음을 옮겼다. 클랜원 또한 지하에 있을 안현을 떠올렸는지 삽시간에 모여 정렬했다. 정렬을 마치자, 이윽고 여인의 영혼이 어딘가를 향해 차분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바삐 걸음을 놀려 여인의 뒤를 뒤쫓았다. 이제 용이 잠든 산맥의 공략도 서서히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 지하로 가는 길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요새의 중앙 광장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내의 말대로 커다란 구멍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용이 출현했을 때 거대한 지진이 나는가 싶었는데, 아마 지하 2층에서 억지로 뚫고 올라오느라 생긴 진동인 듯싶었다. 생각보다 구멍의 깊이가 그렇게 깊지 않아, 우리는 매우 간단히 지하 1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단은 근접 계열들이 먼저 들어가 착지했으며, 차후 마법사와 사제의 낙하를 받아내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내려오는 사용자가 로프를 설치함으로써, 차후 다시 올라갈 수 있는 길을 확보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윽고 모두가 지하로 내려온 이후 우리는 일자로 만들어진 통로를 걸어야 했다. 지하라고 해서 딱히 특별한 게 있는 건 아니었다. 좌우 벽면을 따라 반듯한 통로를 걸을 뿐이라, 그냥 일반 동굴을 탐험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물론 우리는 마그나카르타 덕분에 쉽게 들어온 편이니 정상적으로 들어오려면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통로의 경사는 거의 평평했으나, 걷는 느낌으로 보아 약간이지만 아래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바지런히 여인의 뒤를 쫓으며 담담히 생각에 잠겼다. 혹시나 또 전투를 치러야 할까 경계했는데, 지하에는 어떤 괴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걸어가는 걸 보니 유적의 숨겨진 지역으로 보는 게 옳은 듯싶었다. 물론 끝까지 주의해야겠지만, 일종의 보너스 스테이지라고 해야 할까. '예. 지하 2층은 마그나카르타를 봉인한 장소이며, 대 영웅이 마지막에 스스로 걸어 들어간 곳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보상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 현재까지 우리가 얻은 보상은 총 네 개 정도로 볼 수 있다. 맹세의 검, 용의 사체 그리고 한나와 차소림. 한나와 차소림은 꽤 특이한 케이스였다. 이곳으로 오면서 아까 영혼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물어봤는데, 예상대로 한 명은 아르쿠스 발키리였고 다른 한 명은 황혼의 무녀였다고 한다. 즉 영혼들 입장에서는 이 두 명이 후배나 다름없는 입장이었다. 잠시 대화를 나눈 후 두 영혼은 각각의 후배에게 소정의 선물을 주었다고 하는데, 그 선물이라는 게 바로 힘. 즉 능력이었다. 한나는 고대 무녀가 사용했던 세 가지 힘 중 하나인 음각 문신의 능력을 부여 받았으며, 차소림은 잠재 능력 중 하나인 발할라의 가호가 아스테라의 축복이라는 능력으로 진화했다고 한다. 속된 말로 두 사람 모두 땡잡았다고 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맹세의 검 하나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보상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하지 않은가. 그리고 안현의 구출이 거의 확실시 되는 지금. 구출 후 들어갈 지하 2층에 어떤 보상이 있을지 기대하며, 나는 차분히 상념에서 깨어났다.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던 여인의 영혼이 차차 느려지는걸 느꼈기 때문이다. 앞을 보자, 지금껏 완만했던 경사가 비교적 급격하게 굽어 올라가는 지점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굴곡인줄 알았으나, 자세히 보니 조금이지만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아마 예전에는 계단 역할을 했던 장소일 것이다. 굴곡진 지점 앞에서 여인의 영혼이 잠시 멈추었다. 위로 올라가는 경사의 끝에는 거대한 어둠이 자리잡은 상태였다. 이곳을 올라 들어가면 어떤 장소가 나올 것 같은데, 깊은 어둠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잠시 멈춰 섰던 여인의 영혼은, 이윽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인을 따라 조심조심 경사를 올라서자 공허한 어둠이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검은색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게, 마치 칠흑 색으로 칠한 도화지를 보는 것 같았다. 허준영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경사의 끝에 서서 담담히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군.” 그 말은 들은 걸까. 마찬가지로 가장 선두에 있던 여인의 영혼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여인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일순 벙어리인가 생각이 들었으나, 생각해보면 벙어리는 아니었다. 사내에게 번역 마법을 걸어준 것도 이 여인이었고, 나를 치료할 때 주문을 외우는 소리도 확실히 들었다. 그때였다. 돌연히 호기심이 일어 제 3의 눈으로 여인의 정보를 확인하려는 찰나, 여인이 들어올린 손을 가볍게 저었다. 그와 동시에. 파파파파파파파팟! 마치 수십 개의 형광등을 동시에 켜는 것처럼, 위쪽으로 어둠 일색이었던 공간을 조명하는 밝은 빛이 켜졌다. 나는 바로 팔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어찌나 휘황찬란했는지, 한순간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한 빛이 내리쬐었다. 조금 기다리고 있자, 이제는 쳐다볼 수 있을 정도로 빛이 살그머니 사그라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회복된 시야로, 어둠을 걷어낸 공간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 작품 후기 ============================ 어디 보자~. 안현의 구출 파트는 다음 회에서 끝날 예정입니다. 그리고 다음 파트는 대 영웅과의 대면과 남은 보상 회수 파트가 되겠지요. 그것도 끝내면 비로소 이번 유적 공략 파트도 거의 마무리 짓게 될 것 같습니다. 아. 어제 코멘트는 잘 보았습니다. 아쉽게도 제가 설정한 제한에 걸리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의견이 참 많이 나왔더라고 요.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신 분도 적지 않아 깜짝 놀랐습니다. 하하하. 그리고 연참은…. 음. 어제 코멘트를 보며 조금 충격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가둬놓고 군 만두만 먹이신다니 요. 아니 저보고 여성으로 변하시라니 요.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ㅋㅋㅋㅋ. 진짜, 그 예전에 어떤 코멘트였죠? 차소림 설정 중에 처녀 유지 설정이 있어 안현의 고자설이 대두됐는데, 그때도 달린 코멘트들을 보고 엄청 웃었지요. '하하, 바보 같기는. 앞이 불가능하다면 입 또는 뒤로 하면 되잖아?'(적나라한 표현을 쓰기에는 너무 민망해 최대한 순화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를 떠오르게 하는 코멘트였습니다. ㅋㅋㅋㅋ. 0457 / 0933 ---------------------------------------------- 안현을 구출하다. 처음 눈에 보인 건 적막한 공기가 흐르는 허공이었다. 거기서 살그머니 시선을 내리자, 약 30미터쯤 아래로 둥그런 둘레를 그리는 공터가 보였다. 그렇다면 저 장소가 바로 신화 속 영웅들이 최후를 맞이한 장소란 말인가. 나는 조용히 공터를 응시했다. 공터는 확실히 수천 명은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고등학교 운동장 서너 개는 합친 크기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다. 어딘가 모르게 거칠고 쓸쓸한 기운이 감도는 게, 황량한 사막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공터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다. 중앙 부분으로 보이는 곳에 유독 검은색 진흙 같은 물질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있다. 꼭 황토색 도화지에 검은색 물감을 흩뿌린듯한 풍경으로, 아마 중앙이 움푹 패여 있었으면 늪지대라 해도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진흙 위로 둥글고 허여멀건 한 것들이 둥둥 떠올라 있었다. 안력을 돋워 두루두루 자세히 들여다보자, 곧 저 허여멀건 한 것들이 사람 얼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몸은 진흙 같은 물질에 파묻힌 채 얼굴이나 발만 떠오른 상태인 것이다. - ……. 여인은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공터를 내려다보는 눈이 약간 가늘어져 있는 게, 눈동자에는 처연한 빛이 서려 있다. 한동안 여인을 응시하다가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여인은 화들짝 어깨를 들먹이더니 조심스레 나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동그래진 눈과 살짝 오므린 불그스름한 입술이 왠지 귀엽게 보인다. “실종된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는 알겠습니다. 저기 보이는 진흙에서 끌어내야 할 것 같은데, 혹시 내려가는 길에 설치된 함정이라던가 주의해야 할 마법 진이라도 있습니까?” 여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말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아마 진흙이라는 단어를 알아듣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곧 차분히 고개를 가로젓는 걸 보니, 어쨌든 전체적인 의미는 제대로 전달된 모양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면까지의 거리는 얼추 30미터. 이 정도면 내 능력으로 충분히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다. 하여 일단 먼저 내려가고, 남은 사람들은 천천히 내려오라고 말하려는 찰나. '응?' 갑작스레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걸 느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클랜원도 지면에서 발이 살짝 떼어진 상태였다. 범인은 여인이었다. 은은한 빛을 뿌리는 구체가 여인의 가냘픈 손을 감싸고 있는데, 일종의 공중 부양 마법을 사용한 듯싶었다. “꺄아악! 김수현 나 떨어진다! 나 떨어진다고! 꺄아아악!” “오, 오빠. 나 죽기 전에 오빠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 …킥! '…….' 비비앙과 유정의 호들갑을 들었는지 여인이 한순간 킥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조용히 얼굴을 감싸 쥐었다. 살며시 벌린 손 틈으로 보자 한 손으로 입을 꼭 막은 모습과, 소담한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이후 아래로 내려가면서도 여인이 숨죽여 웃는 소리가 계속 들려와, 나는 벌겋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식히려 애써야만 했다. 아무튼 약간 어수선한 소란이 일기는 했으나, 이내 지면에 안정적으로 착지한 순간 곧바로 사그라졌다. 여인은 아래로 내려왔음에도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내게서 등을 돌린 것으로 보아 아직도 웃는 중이라 생각됐다. 가벼운 한숨을 내쉰 후, 나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몇몇 분들도 이미 보셨겠지만, 아마도 저 늪지대 같은 장소에 사용자들이 잠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은 안현을 중심으로 찾되, 살아있는 사용자가 보이면 바로 끌고 나와 주세요…. 아. 사제는 예외입니다.” 막 아랫단을 걷어 올리던 신재룡과 안솔은 이내 머리를 끄덕이며 몇 걸음 물러섰다. 나는 침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중앙 일부분이라고는 해도 공터의 크기가 워낙 큰 탓에 당장 눈에 보이는 얼굴만 기백 개는 족히 넘어가고 있었다. 어차피 모두 다 살피기는 해야 했으나,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 일단은 안현의 구출이 우선이었다. “그럼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죠.” 제 3의 눈을 활성화하는 것과 동시에 나는 늪지대처럼 보이는 곳에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자 액체라고 보기는 어려운, 물에 불린 흐물흐물한 젤리 같은 감촉이 발목 아래까지 잠겼다. 그 순간 약간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으나, 아주 미약한 정도였다. 계속 잠겨있다면 모를까. 몇 시간 정도는 크게 상관없을 것 같아 나는 늪지대를 헤치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용자 김현(사망).』 『사용자 신지석(사망).』 『사용자 백혜연(사망).』 『사용자 한윤상(사망).』 한 번 크게 주변을 둘러보자 여러 사용자의 이름과 상태가 우수수 허공으로 떠올랐다. 대부분 사용자의 상태는 사망을 알리고 있었다. 아마 이 장소에 들어온 후로 쭉 잠들어있다가, 이 정체 모를 늪지대에 생명력이 빨려 사망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러던 중 문득 눈에 익은 이름이 눈에 밟혔다.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가 이름이 떠올라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형체를 알 수 없는 시신 한 구가 놓여있었다. 마치 미라를 보는 것 같다. 얼굴은 핼쑥한 걸 넘어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건조돼있었다. 발을 들어 이리저리 몸을 굴려보자, 가슴이나 허리의 모양으로 확실히 여인의 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용자 성유빈(사망).』 성유빈. 구 황금 사자 클랜의 간부였던 사용자. 한때는 잘나가는 사용자였지만 황금 사자의 몰락과 함께 나락으로 떨어진 여인이었다. 전쟁 포로들을 처리하며 구금에서는 풀려날 수 있었으나, 황금 사자를 둘러싼 소문이 매우 좋지 못했던 터라 이후의 생활은 꽤 힘들었을 것이다. 성유빈이 왜 이 장소에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힘들게 살다가, 역전의 발판으로 용이 잠든 산맥에 들어온 게 아닐까 추측한다. 비록 이렇게 돼버린 게 약간 불쌍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홀 플레인은 원래 이런 세상이었으니까. 문득 한 클랜원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차분히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숨이 붙어있는 사용자를 찾았는지 두 발을 잡아 질질 끌고 나가는 한별을 볼 수 있었다. 말할까, 말까. 잠깐 고민이 들었다. 하지만 괜히 말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에 나는 들었던 발을 빼고 몸을 돌렸다. 잠시 후, 나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가 바로 생각을 돌려 외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안현은 이 장소에 가장 최근에 들어왔을 것이다. 망인들이 중구난방으로 던져놓지만 않았다면, 안쪽보다는 바깥쪽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계산이었다. 이내 둘레를 따라, 나는 무수히 떠오르는 사용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확인하며 걸었다. 그리고 공터를 절반 정도 걸었을 즈음, 비로소 목표했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용자 안현(중상).』 나는 곧바로 외쳤다. “안현을 찾았습니다! 사용자 안솔! 사용자 신재룡! 이쪽으로!” 나는 듯 달려가 확인하자, 얼굴만 둥둥 떠오른 채 편안히 눈을 감고 있는 안현을 볼 수 있었다. 클랜원이 이곳에 다다르기 전, 나는 안현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그리고 바로 늪지대에서 끌어올려 바깥쪽으로 데리고 나갔다. 안현은 성유빈과 같이 미라처럼 보이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전의 건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살가죽에 뼈가 보일 정도로 피골이 맞닿아 있었다. 방금 때린 걸 약간 후회하며 안현을 바닥에 조심조심 눕혔다. 그리고 코에 손을 대보자 가늘면서도 미약한 숨결이 느껴졌다. 그제야 나는 안도할 수 있었다. 제 3의 눈으로도 확인한 만큼, 일단은 살아있다. 허리를 들자 안쪽으로 들어갔던 클랜원이 하나같이 나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나는 바로 손을 들어 늪지대를 가리켰다. 안현은 나중에 보고 지금은 다른 사용자들의 구출에 집중하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조금 기다리고 있자 신재룡, 안솔, 여인이 영혼이 차례대로 도착했다. 그들이 안현을 보는 반응은 꽤 다양했다. 신재룡은 격한 신음을 흘렸으며, 안솔은 눈썹을 한껏 추켜올렸다. 깜짝 놀랐는지 화가 났는지 종잡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살아…. 있는 겁니까?” 신재룡이 더듬거리며 묻자, 여인이 조용히 한 손을 들어올리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리고 여인은, 나에게 했던 것처럼 안현의 가슴에 손을 대어 시간을 역행하는 마법을 외웠다. - Tempus Auxilium…. 이윽고 쏙 들어갔던 안현의 볼에 조금씩 조금씩 살이 오르기 시작했다. 헐렁헐렁하던 장비가 솟은 살과 근육으로 꽉 차고 있었다. 저게 바로 내 몸을 되돌린 마법의 실체인가. 나는 흥미로운 기분으로 안현을 응시했다. 잠시 후.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어느덧 안현의 안쓰러웠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혈색이 좋고 호흡도 고르다. 제 3의 눈도 더는 중상이 아닌 양호 판정을 내리고 있었다. 여전히 눈을 감아 잠자고 있기는 했지만, 다시 예전의 건강한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이내 치료를 끝낸 여인의 영혼이 나를 돌아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살짝 머리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 안현을 우선적으로 구출한 후, 우리는 다시 생존한 사용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는 이대로 놔둬도 큰 상관은 없으나, 최소한 안현, 한결과 동행한 사용자들은 찾아내야 했다. 모든 구출 작업을 끝내는 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 정체 모를 지대에 잠긴 사용자들은 가히 수백 명에 가까웠으나, 사망자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사용자는 총 17명. 정말 일부에 불과한 숫자였다. 어쨌든 의뢰인들을 찾았다는 사실을 위안 삼으며, 나는 생존한 사용자 전원의 치료를 부탁했다. 여인의 영혼은 조금도 힘든 기색 없이, 시간 역행 마법으로 사용자들을 모조리 치료해주었다. 화정의 말에 따르면 원래 저런 마법은 등가 교환의 원리에 따라 발동자가 똑같은 대가를 치러야 하나, 여인이 영혼의 상태라 그렇게 큰 부담은 없다고 한다. 말 그대로, 그냥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잠자코 안현을 보고 있던 찰나, 문득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침착히 시선을 돌리자 나를 보며 머리를 갸웃 기울이는 여인을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시간 역행의 영향이 아주 없지는 않은지, 모든 치료를 마친 여인의 영혼은 처음보다 상당히 희미해져 있었다. 아직 형체는 알아볼 수 있었으나, 혹시 이러다 영영 소멸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돌아가고 싶었을 텐데…. 이렇게 오랫동안 붙잡아둬서 미안합니다.” 여인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나는 천천히 공터 주변을 둘러보았다. 구조 작업을 끝낸 클랜원은 모두 한곳에 모여 여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들은 안쓰러움과 호의가 섞여 있다. 아마 마지막을 지켜보려는 모양이다.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로써 살아있는 사람은 모두 구출한 것 같으니, 그만 돌아가셔도 될 것 같네요. 이제 당신이 가야 할 곳으로, 그리고 부디 원하는 곳으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때였다. 화악! 그 순간 영혼이 환한 빛을 발하는 것과 함께, 여인이 살짝 미소 짓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여인의 영혼은 바로 승천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더니, 내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시선을 내린 순간이었다. 여인의 키는 약간 작은 편이었다. 하지만 깨금발을 들었는지, 느닷없이 여인이 얼굴이 비스듬히 기울어지며 올라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불그스름한 입술에 부드러운 호선이 그려지는 걸 확인한 순간. 쪽. 입술에 서늘한 감촉이 느껴지는 것과 함께,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뭐지…? 지금, 나한테 입을 맞춘 건가? “기, 김수현? 야! 야! 야아아아!” “뭐, 뭐…? 지금 뭐…? 아, 아니…. 뭐…?” 소리를 빽 지르는 비비앙과 어벙한 얼굴을 한 안솔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이내 눈에 쌍심지를 돋운 채 다급히 단검을 꺼내는 유정의 기척을 느낀 걸까. 여인은 나를 향해 배시시 웃어 보이더니, 양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발그레한 입술을 떼었다. - 안녕…. 우리, 다음에 또 만나요. 흡사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고운 목소리. 이윽고 내가 어떤 대답도 못하고 있는 사이, 여인은 금세 한 줄기 빛으로 화해 안솔의 허리춤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어, 나는 멍하니 입술을 매만졌다. ============================ 작품 후기 ============================ 이로써 안현의 구출 파트도 마무리 지었네요. 하지만 다음 파트에 아직 풀어야 할 약간 복잡한 이야기가 남아있어, 아직 끝났다! 라고 외치기에는 이른 것 같습니다. 하하하. 이전 회에 사내와 여인이 영혼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내용이 있었지요? 사내가 뭐라고 속닥거리고, 여인이 호호 웃으며 사내의 옆구리를 가격한 내용이요. 네. 그렇습니다. 사내는 바로 눈치를 채고 있었던 거죠. 후후. 독자 분들도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는, 대충 짐작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아. 마리 앙트와네트의 말은 제가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이더군요. 어느 독자 분 말씀대로 엔하위키를 참조했는데, 마리 앙트와네트를 미워하던 사람들이 악의적으로 퍼뜨린 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중학교 때 학교 선생님 중 한 분이 똑똑한 여인이었다고,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다고 하신 기억이 떠올랐는데, 그 말씀이 진짜였나 봅니다. :D PS. 아인현석 님! 쪽지는 잘 보았습니다. 답신을 눌렀는데, 현재 수신 거부 상태라 나오고 있어요! 일단 질문해주신 내용은, 131회 초반 부분에 있습니다. 현재는 그냥 있지만 차후 이북 수정 진도가 다다르면 삭제할 예정이에요. :) 0458 / 0933 ---------------------------------------------- 선택. 대 영웅? 아니면 마그나카르타? “이이이익! 저, 절대로 안 쓸 거야! 맹세의 검? 웃기지 말라 그래! 이거 절대로 쓰지 않을 테니까! 아니, 아니지. 두고 봐. 응? 기적이 돌아오면 싹 다 처음으로 돌려버릴 거니까, 어디 한 번 두고 봐!” “차, 참아라. 안솔. 그래도 명색이 구원자이지 않은가. 이런 모습은….” “구원자고 나발이고! 아 놔봐요, 좀 놔보라고요. 왜 아까부터 다들 내 팔을 잡지 못해서 안달들이에요? 네?” “어, 어헉.” 안솔의 반항은 매우 거칠었다. 말투나 행동이 어찌나 험하고 거세었는지, 어지간한 허준영조차도 몇 걸음 물러서게 만들 정도였다. 이윽고 양팔을 거세게 털고 나온 안솔은 씩씩거리며 다급히 허리춤을 더듬기 시작했다.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안솔을 보며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정작 당황한 건 나인데 왜 저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안솔의 말을 들은 순간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오, 오라버니의 키스인데! 그것도 무려 첫 키스인데! 내가 괜히 행운을 올린 줄 알아? 어?! 먼저 뺏으려고 수백 가지 계획을 세워놨단 말이야!” 뭐? 첫 키스? 아, 아니. 수백 가지 계획?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곧바로 연례 행사를 떠올렸다. 일년 중 단 하루. 안솔과 내가 매우, 그리고 유난스러울 정도로 자주 부딪치는 날. 사실 이루어지는 상황이 아주 절묘해 지금껏 별다른 말은 못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그 모든 게 의도된 계획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안솔의 행운 능력치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하지만 극심한 분노에 사로잡혀 자신이 무슨 말을 꺼냈는지도 모르는지, 안솔은 소중히 간직하겠다던 맹세의 검을 우악스럽게 꺼내 들었다. 그러더니 이제는 앙증맞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마구 때리기 시작한다. 콩콩콩콩! “나빠! 나빠!” 그래도 그렁그렁한 눈동자와 울먹울먹한 목소리를 보고 듣자니, 정말로 분하기는 한 모양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이미 나와 수 차례 입을 맞춘 전적이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다은이와 한나. 두 여인은 매우 뜨끔한 얼굴로 안솔을 쳐다보더니 사이 좋게 등을 돌려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별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둘을 쏘아본다. 상황은 삽시간에 일변했다. 주변을 가득 채우는 소란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와, 일단 생각을 정리할 요량으로 연초 한 대를 꺼내 들었다. 그때였다. 막 불을 붙이려는 찰나, 쓴웃음을 흘리는 신재룡이 터벅터벅 걸어왔다. “역시 안솔양은 안솔양인가 봅니다. 처음 요새에 들어왔을 때는 정말 걱정했는데, 이제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요.” “그렇군요. 그런데 왜 그렇게 씁쓸한 얼굴이시죠.” “그러는 클랜 로드님의 얼굴도 만만치는 않으십니다. 하하하.” “…아마 우리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방증이겠지요.” 그래. 저래야 안솔답지. 입안을 감도는 향이 무척이나 쓰디써 나는 얼른 연기를 뱉어내었다. 이내 한 대 피우겠냐는 뜻으로 눈짓을 보내자 신재룡이 차분히 머리를 가로젓는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 클랜 로드. 먼저 축하하겠습니다. 이로써 현과 의뢰인들도 구출했고, 더불어 용이 잠든 산맥도 공략했으니까요. 아마 돌아가면 북 대륙이 깜짝 놀랄 겁니다.”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개인적으로는 아직 약간 이르다고 생각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클랜원은 거의 끝났다고 알고 있을 것이다. “으음. 구출한 사용자들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깨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던데요.” “오랫동안 정신을 잃은 상태라 그렇습니다. 차후 어떻게 될지는 지켜봐야 알겠지만, 일단 현재 몸 상태는 매우 양호합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저 정체 모를 물질을 조금 담아두었습니다. 깨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나오면 이 물질을 연구해 치료제를 만들 생각입니다.” “역시 철저하시네요. 잘하셨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하하….” 멋쩍게 웃는 신재룡을 보며 나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 당연한 일을 왜 쟤는 못하는 걸까요? 진지하게 묻고 싶었지만 간신히 속으로 삼킬 수 있었다. 이윽고 한두 번 목을 가다듬은 신재룡은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나저나…. 클랜 로드. 이제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 말에 나는 공터를 감싸는 황토 빛 벽면을 면밀히 둘러보았다. 동시에 나는 사내의 말을 떠올렸다. '지하 1층에서 볼 일을 마치시면, 지하 2층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사내는 어디에 있다는 말을 자세히 하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이 장소에 지하 2층으로 향하는 통로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 그렇게 주변을 쭉 둘러보다가 나는 하나씩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지하 2층은 용을 봉인한 장소다. 용은 지하 2층에서 지면을 뚫고 나왔다. 그렇다면 우리가 들어온 구멍의 더욱 아래쪽에 그 장소가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위쪽으로 시선을 올렸다. 우리가 공중 부양으로 내려오기 직전 서 있던 장소. 그곳에서 아래쪽 방향으로 쭉 시선을 내려보자, 확실히 볼 수 있었다. 나는 절반쯤 태운 연초를 튕겼다. “클랜 로드?” “사용자 신재룡. 클랜원을 모아주세요.” 의아한 물음에 가볍게 대꾸해준 후, 나는 지체 않고 걸음을 옮겼다. 벽에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확실히 멀리서 봤을 때보다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손을 누르듯이 대고 문질러보자, 역시나. 벽면에서 약간이기는 했으나 네모난 모양으로 볼록하게 두드러진 감촉이 느껴졌다. 아마 만들었을 때는 미닫이 식으로 문을 만든 모양인데, 세월이 흐르며 그대로 굳어버린 모양이다. 간신히 찾은 틈 안으로 나는 억지로 손가락을 우겨 넣었다. 틈은 손끝도 채 안 들어갈 정도로 굳은 상태였으나, 어떻게든 걸칠 수는 있었다. 이내 그대로 힘을 주어 옆으로 밀자 빠드득, 균열이 생기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단단하다. 하기야 수천 년이 흘렀으니 어지간힌 근력 정도로는 열기 힘들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바로 마력을 일으켜 오른팔로 흘려 보냈다. 그리고 한층 상승한 근력으로 있는 힘껏 문을 밀어젖혔다. 빠드득! 빠드드득! 끼이이이이이이익! 그러자 틀을 따라 벽면이 갈라져 터지기 시작하더니, 곧 거친 소음을 울리며 벽이 오른쪽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세를 따라 완전히 문을 밀어버리자 캄캄한 공간과 안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어느새 공터에 일었던 소란은 사그라져있었다. 신재룡이 내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는지 등 뒤로 클랜원들이 색색 내뱉는 숨소리가 들렸다. 잠시 구출한 사용자들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으나 어차피 모두 자고 있는 상황이었다. 얼른 다녀오면 되겠다고 생각해,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직 남은 장소가 있는 것 같네요. 구출한 사용자들은 잠시 이 장소에 놔두기로 하고,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후, 나는 먼저 한 걸음 내디뎠다. *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길은 생각보다 깊었다. 처음 계단을 밟은 지 약 30분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우리는 계단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물론 함정이나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천천히 내려가는 점은 감안해야겠지만. 그러나 그것도 이제 슬슬 끝이 보이려는 걸까. 어느 순간, 앞에 둥둥 떠 있던 라이트 구체가 어딘가에 가로막힌 듯 더는 나아가지 않는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안력을 돋워 불빛이 비추는 곳을 응시하자, 어둠이 스며든 칠흑 빛 색이 보였다. 앞으로 바짝 다가가 살펴보자, 녹이 심하게 슬어있는 온갖 기하학적 문양이 그려진 커다란 철문을 볼 수 있었다. 혹시 함정 마법 진인가 해서 제 3의 눈으로 들여다봐도 떠오른 정보에는 아무 이상도 없다. 나는 조용히 손을 들어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을 앞으로 굽혔다. 문을 열어 안으로 진입할 테니,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각자 준비하고 있으라는 신호였다. 이번에 철문은 다행히 둥그런 고리가 달려있었다. 나는 속으로 숫자를 세며 쇳기가 묻은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셋을 센 순간, 두어 걸음 물러서 단번에 문을 잡아당겼다. 끄그긍! 끄그그긍! 꽤 저항감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결국 육중한 철성과 함께 문은 삐거덕삐거덕 열리었다. 그와 동시에 비로소 지하 2층의 내부, 마그나카르타가 봉인된 장소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내부는 생각보다 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시선을 들어보자 뻥 뚫려있는 거대한 구멍과 푸른 하늘이 보였다. 예상대로 이곳에서 마그나카르타가 뚫고 올라간 모양이다. 다시 시선을 내려보자, 거의 공터와 비슷할 정도의 크기를 지닌 내부가 눈에 들었다. 마그나카르타가 꽤 난리를 쳤는지 천장이 완전히 부서지기는 했지만, 주변 벽면이 회색 벽돌로 이루어진걸 보니 마치 커다란 회관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바닥에 그려진 마법 진은 엄청난 크기를 보이고 있었다. 일곱 개의 원이 올림픽 마크처럼 겹쳐져 홀 전체를 가득히 메우고 있을 정도였다. 그 안으로 셀 수 없을 만큼의 무수한 문양도 각인돼있었으나, 당연히 내가 모르는 문양이었다. 다은은 살짝 가늘어진 눈으로 내부를 훑더니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꼭…. 소환의 방을 보는 느낌이네요.” 그 말도 맞다. 홀에 둥글게 퍼져있는 일곱 개의 비석. 그리고 비석들을 중심으로 그려진 웅대한 마법 진은 달랐으나, 중앙에 높게 솟은 단은 흡사 천사가 앉은 제단을 보는듯했다. 또 한 가지 신기한 사실은, 제단 위쪽에 각각 검은빛과 하얀빛을 내뿜는 두 개의 구체가 고요히 떠 있다는 것. 나는 잠시 동안 홀을 지켜보다가, 제단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김수현. 조심해라.” “괜찮으니까 대기하고 있어.” 허준영의 경고에 나는 기다리고 있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머셔너리라는 클랜에서 내가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위험한 일이 나올 때마다 도맡아 나서는데 있었다. 실상은 제 3의 눈으로 하나하나 확인하고 움직이는 거지만, 아무튼 사정을 모르는 클랜원들이 보면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이윽고 목표했던 지점에 도착한 순간 나는 머리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물씬 풍겨오는 한기는 둘째 치고서라도, 거의 가슴팍까지 올라올 정도로 제단의 길이가 높았기 때문이다. 아니. 제단이 아닌가? 마주보는 면을 자세히 보니 예리한 칼로 그어낸 듯 긴 선이 그어져있다. 마치 뚜껑을 덮은듯한 형상이라, 이대로 들어내면 안쪽에 무언가가 들어있을 것만 같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단의 윗면 또한 이상했다. 두 구체가 떠 있는 위치에는 자그마한 홈이 패여 있었으며, 중앙 윗면으로 가지런히 나열된 일곱 개의 구슬이 있었다. 조막만 한 크기의 구슬이 연한 초록빛을 띠고 있는 게, 심상찮은 기운을 뿌리는 중이었다. 아마 어설프게 만졌다가는 좋은 꼴은 못 보리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앙 아랫면으로 오목하게 들어간 두 개의 부분이 있었다. 형체는 사람의 손 모양과 비슷했는데,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찍힌 부채꼴과 비슷한 형상을 띠고 있다. 각각 방향이 향하는 곳은 바로 검은 구체와 하얀 구체가 떠 있는 지점이었다. 나는 제단에 찍혀있는 손바닥 모양의 형상을 조용히 응시했다. 그러다가, 차분히 손을 올려 안으로 들어가도록 손을 맞추어 대었다. 그리고 일어날 반응을 기다렸다. '…….' 하지만 생각했던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곧 크게 마력을 일으켰다. 그리고 몸 안 회로를 따라 양팔로 흘려 보낸 후, 마찬가지로 안으로 투사하듯이 벽면으로 흘려 보내었다. 그렇게, 약 10초 정도 마력을 꾸준히 흘려 보냈을 즈음. 비로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화아아악! 한순간 손바닥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지더니, 손을 대고 있던 형상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와 시야를 하얗게 물들인다. 반사적으로 손을 떼려고 했지만, 나는 곧바로 생각을 고쳐 침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계속해서 눈을 두드리던 빛이 서서히 사그라졌다 싶을 즈음, 나는 살그머니 눈을 떠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볼 수 있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일변했다는 것을. ============================ 작품 후기 ============================ 요즘 들어 참 애매하게 자정에 못 맞추네요. 오늘은 볼 일이 있어 약간 늦게 시작하기는 했는데, 그래도 조금 아깝기는 합니다. 하하. 아. 제 뜰에 고장난선풍기 님이 올려주신 고연주 팬 아트가 있는데, 자꾸만 눈이 가네요. 뭔가 제가 생각했던 고연주는 물론이고, 평소 제 이상형(?)인 여인을 그려주신 것 같습니다. 실은 제가 연상의 누나를 좋아하거든요. (__ )* 그리고 보상은…. 아마 지금까지와는, 꽤 특이한 보상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D PS.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을 주신 분들께는 항상,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넙죽. _(__)_ 0459 / 0933 ---------------------------------------------- 선택. 대 영웅? 아니면 마그나카르타? 하얗다. 말 그대로 하얀색 일색이었다. 허공에는 하얀 빛이 넘실거리고 바닥에는 하얀 안개가 잔잔히 흐르고 있다. 눈앞에는 작은 빛이 잇따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게, 몽환적인 기운이 흐르는 세상이었다. - 그대는…. 누구신가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무렵, 허공에서 한 줄기 고요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나는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틀림없이 가까이서 들린 목소리였으나, 어디를 봐도 그저 하얀 허공뿐이었다. 그때였다. - 호. 한낱 인간이 이곳에 들어올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아니 잠깐. 이번에는 왼쪽에서 들린 목소리였다. 오른쪽의 목소리가 흔들림 없는 고요한 여인의 목소리였다면, 왼쪽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심원하면서도 낮고 굵직한 사내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목소리 자체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마치 물을 한 모금 머금고 말하는 것 같아 약간 알아듣기 어려웠다. 나는 사방을 둘러보는 걸 그만두었다. 보아하니 상대 쪽에서 나를 인지한 것 같으나 형체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계속 찾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왼쪽에서, 재차 목소리가 이어졌다. - 미처 알아보지 못한 무례를 용서하시길.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가 삼가 인사를 올립니다. 태고의 불을 품은 존재시여, 도대체 어인 일로 이곳에 방문하셨나이까. 응?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 태고의 불을 품은 존재? 갑작스러운 경칭에 당황하기는 했으나, 아마 화정과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말을 걸었다. 화정? - 흥. 하지만 되돌아온 건 새침한 콧소리였다.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심장을 쓰다듬었다. 아무튼 조금 전 말로 알아낸 정보는 두 가지. 하나는 왼쪽의 목소리가 화정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이고, 그 대상이 바로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라는 소리였다. 이 말인즉슨, 오른쪽의 목소리가 바로 사내가 말한 대 영웅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어느 정도 상황을 정리할 수 있어, 나는 오른쪽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이 장소에 온 이유는 한 사내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네가 대 영웅이라 불린 자인가?” - 흠…. 용의 경배를 받는 인간이라. 이상하군요. 아무튼 그 사내가 부른 대 영웅을 찾는 거라면 아마 저일 거예요. 그나저나 사내의 부탁? 어떤 부탁을 받았길래 저를 찾으시는 건가요? 미성의 목소리가 허공을 잔잔하게 울렸다. 그리고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사내의 부탁을 말하기에 앞서, 일단은 마그나카르타의 부활이나 영혼의 승천 등 현재 상황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이야기할수록 대 영웅의 반응은 시시각각 변했다. 처음 용의 부활을 얘기할 때는 걱정을, 동료였던 영혼들이 깨어나 용과 전투를 벌였을 때는 탄성을, 용을 쓰러뜨린 후 영혼이 승천했다고 했을 때는 경악을 터뜨렸다. 마지막으로 맹세의 검에 관한 이야기와 마그나카르타의 저주를 완전히 해제했다고 덧붙이자, 그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 후유. 그렇군요. 마그나카르타의 저주는 해제됐고, 동료들은 원래 가야 할 곳으로….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대 영웅이 반응은 온당 당연한 것이었으나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정이 어떻든 간에, 대 영웅이 동료들에게 벌인 짓은 나도 고개를 저을 정도였다. 문득 머릿속으로 사내의 말이 떠올랐다. '수천 년.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정말로 끔찍했지요.' '산맥에 들어오면서 죽음을 각오하기는 했으나, 적어도 죽어서 만큼은 각자가 품은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결코 죽어서까지 구차한 망령이 되어 살아가고 싶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사내의 입장에서 말을 들은 나로서는, 저렇게 약간이나마 죄책감을 벗은듯한 목소리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당초 왜 대 영웅이 이 장소에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기도 했고. 그래도 이미 끝난 일이었다. 제 3자가 왈가왈부할 것도 아니었고, 얼른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승천하기 전에, 사내가 한 가지 부탁을 하더군. 그때 왜 그래야만 했는지, 꼭 그렇게 했어야만 했는지 물어봐 달라고 했다.” 대 영웅은 바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비록 형체가 보이지 않아 어떤 기색도 읽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지금 흐르는 침묵이 대 영웅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후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대 영웅은 비로소 목소리를 울렸다. - 그건…. 동료들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첫마디는 절로 코웃음이 나올 정도로 구차하다 생각되는 변명이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럼 그렇게 얘기해주면 되는 건가?” - 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시는 것 같군요. 하지만 말 그대로,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언어와 지혜의 신 가네샤 님의 힘을 빈 염원의 비석은 확실히 강력한 신의 권능을 행사하지만, 그만한 제한도 있으니까요. “제한?” - 네. 거기에는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의 제한이 있지요. 하나는 오직 한 번의 염원을 말할 기회를 부여하며, 다른 하나는 염원이 무조건 발동하는 게 아니라는 제한이죠. 인간의 염원에 개인의 욕심이 최우선으로 앞서있다면, 가네샤 님은 이유를 불문하고 염원을 들어주지 않으세요. “개인의 욕심이 앞서있다면…. 염원을 들어주지 않는다?” - 그래요. 저는 대 영웅이라 불린 여인이었으나, 보통의 인간 여인이기도 했어요. 저라고 그대로 산맥을 나가서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살고 싶지 않았을까요? 아니요. 그러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럴 수 없었지요. 염원을 빌 기회는 단 한 번 뿐이었으며, 제가 진정으로 바라는 염원은 제 욕심이 가장 앞서있을 가능성이 높았으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저로서는 모험을 할 수가 없었어요. 이제 이해하시겠나요? 제가 왜 그런 선택을 해야 했는지? 그런가. 그랬던가. 저 말이 사실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설마 이런 제한이 있을 줄은 몰랐기에, 나는 살며시 팔짱을 끼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도 원래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사내나 여인의 영혼이 보여준 능력은 지금 내가봐도 놀랄 만큼 엄청난 수준이었다. “그래도 성급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드는군. 확실히 인간을 위한 선택이기는 하지만, 아마 내가 너였다면 조금 더 동료들을 믿었을 거다. 사실을 밝히고 서로 힘을 합쳐 저주를 해제하거나, 아니면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았을 거야. 너는 이미 일을 벌인 후에 동료들에게 얘기했고, 그 결과 네 동료들은 사후에도 수천 년 동안 끔찍한 절망을 맛봐야만 했다.” - 알아요. 제 결정은 부인할 여지가 없는 명백한 독단이었다는 걸. 하지만 그대는 그때 그 시절이 어땠는지 조금도 모르겠죠. 마그나카르타라는 공통된 적이 없어진 이상, 인간들의 고결한 신념이 언제까지 이어졌을까요? 저는 그 후의 상황을 걱정한 거예요. 인간은 항상 변화하는 존재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해왔기 때문에 대 영웅의 말에 일부는 공감할 수 있었다. 물론 완전히 이해한 건 아니었지만. 어찌됐든 이 정도면 사내의 부탁은 완수했다고 볼 수 있었다. 추후 맹세의 검으로 소환했을 때 얘기해주면 될 터. 더는 여기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해 이만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 어머니시여. 지금 대 영웅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진동은 심하지만, 헤아릴 수 없는 깊은 목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지금껏 묵묵히 듣고만 있던 마그나카르타가 입을 열은 것이다. 순간 나는 너 같은 자식 둔 기억 없다.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나는 차분히 왼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머니라는 말이 나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 말 그대로입니다. 비록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으나, 대 영웅의 속내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 입 다물어요. 마그나카르타. 비록 무수한 시간이 흐르기는 했지만, 악랄했던 계획은 끝까지 가지 못했고 오늘로써 분쇄됐어요. 당신은 패배했어요. 대 영웅은 재빠르게 패배자가 짖는 소리라고 매도했으나, 마그나카르타는 그에 아랑곳 않으며 말을 이었다. - 비록 당신께서 제 일말의 복수를 깨트렸으나, 그것은 어머니의 의지로 행한 일. 제가 감히 불만을 표시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저는 이 산맥에 들어온 모든 인간이 고통 받거나 아니면 그 후손들이 고통 받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대 영웅은 전자를 선택했음에도 자신만은 이 장소로 홀로 쏙 들어오더군요. 제가 봉인된 장소로 말입니다. “확실히 대 영웅의 영혼은 동료들과 섞여 있지 않았지. 왜 혼자 여기에 있는지는 나도 궁금했어.” - 겉으로는 인간을 위한다는 구변 좋은 말을 대고 있지만, 저는 저 대 영웅이라 불리는 자의 속내를 알 것도 같습니다. 관에 오르시면서 주변에 세워진 일곱 개의 비석을 보셨을 겁니다. “일곱 개의 비석이라면…. 설마 염원의 비석을 말하는 건가? 아니 잠깐만. 관이라고? 제단이 아니라?” - 그렇습니다. 이곳에는 아직도 염원의 비석을 발동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 있으며, 보신 것은 제단이 아닌 저 대 영웅의 신체가 동결돼있는 일종의 관입니다. 대 영웅은 제가 남긴 저주를 걱정한다는 이유로 모든 동료를 제물로 바쳤음에도, 정작 자신은 이 장소에 남아 저와 함께 영원히 봉인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이제 저 간악한 속내를 아시겠나이까? 대 영웅은 추후 이 장소로 찾아올 연자를 대비하여 종래에는 부활의 길을 남겨놓은 것입니다. 나는 또다시 코웃음을 쳤다. 확실히 그렇게 생각할 여지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마그나카르타의 말이 실제일 가능성은 매우 낮으며, 또한 하는 말이 종말의 용이라는 이름치고는 너무 옹졸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웃기지도 않는 소리군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날 모든 일이 끝나고 그대로 혼자서 나갔겠지요! 대 영웅 또한 그렇게 느꼈는지, 곧 발끈한듯한 목소리가 서 있는 바닥을 떠르르 울렸다. 그러나 마그나카르타는 예의 흔들리는 목소리로 대 영웅을 비웃었다. - 크큭. 아니지, 아니야. 홀로 살아서 나가는 게 두려웠겠지. 동료의 가족들을, 지인들을 볼 자신이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처음 나와 대면했을 때가 기억나는데. 네가 나에게 집요하게 저주를 내린 동료가 누구냐고 물었었지? 답을 해주자 한결 안도하던 게 기억나는군. - 역시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본성은 변하지 않네요. 그대여. 설마 저 패배자의 헛소리를 믿는 건 아니겠죠? 우리는 후손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어요. 제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마그나카르타의 혹시 모를 수작을 감시하기 위해서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그러니 저 정신 나간 패배자의…. 그 순간, 나는 차분히 손을 들었다. 이것은 클랜 회의 시 가끔 보이는 신호로, 필요 이상으로 소란스러워졌을 때 이제 그만 조용히 하라는 뜻이었다. 즉 일종의 버릇과도 같은 습관이랄까. 그러나 신기하게도, 점차 격해지던 두 존재의 대화가 뚝 멈추었다. 나는 잠깐 잠자코 있었으나, 이내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내가 이 장소에 온 이유는 아까도 말했듯이 사내의 부탁 때문이었다. 사내가 우리에게 보인 호의에 답하기 위해서지, 누가 옳고 그르고를 따지려는 게 아니다. 또한 나는 사용자다. 홀 플레인의 사용자. 수지가 있다면 모를까. 목적을 달성한 이상, 더는 이 장소에 있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몸을 돌아보니 정면 방향으로 2미터 높이 정도의 입구가 서 있었다. 아마 저기로 나가면 원래의 공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 터. 그렇게 생각해 한 걸음 떼려는 찰나였다. - 어머니시여. 이제 돌아가시려는 겁니까. 마그나카르타의 간절한 목소리가 이만 떠나려는 발길을 붙잡았다. 일순 무시하고 가려고 했으나, 나는 생각을 바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런데.” - 외람되지만, 가시기 전 감히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부탁?” - 그렇습니다. 이미 복수는 종결됐으니…. 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나와 상관이 있는 이야기라면 모를까. 아까부터 흰소리들을 하는 걸 참고 있었는데, 이제 조금씩 짜증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구구절절 말할 거면 그냥 치우고. 요점만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일순 옆에서 대 영웅이 목소리가 허공을 울렸으나, 나는 가볍게 흘리며 왼쪽을 응시했다. 잠시 후 마그나카르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 개인적으로는 이제 그만 영면에 들고 싶으며, 대 영웅에게 복수를 잇고 싶습니다. 그리고 보고 싶습니다. 영면, 복수, 그리고 보고 싶다. 이 세 개의 바람을 동시에 이룰 수는 있는 걸까? 아니 그전에, 보고 싶다는 건 또 무슨 말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탓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자, 마그나카르타는 바로 말을 이었다. - 인간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전쟁을 하면서 내내 궁금했던 한 가지 의문은, 도대체 왜 인간이 그토록 우리를 배척하려고 했냐는 겁니다. 우리 용들은 인간과의 공존하고 있었고 또 그것을 원하였으나, 거부한 건 인간들 쪽이었습니다. 과연 인간들이 우리를 배척하고 이뤄낸 결과가 어떤지 한 번 보고 싶습니다. - 하. 마그나카르타. 공존이라고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종족 위에 군림하고, 제물을 바치고…! 또 싸움이 일어날 것 같아 나는 다시금 손을 들었다. 그리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해방을 원하는 것 같은데. 웃기는군. 인간들이 기를 쓰고 너를 봉인했는데, 내가 왜 위험을 자초하면서까지 너를 해방해야 되는지 이유를 말해봐.” - 방금 하신 말씀은, 저야말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위험이라니요? 세상에 대한 복수는 불가능하며 이미 접었습니다. 제가 말한 복수란 저 대 영웅에 대한 복수를 말하는 겁니다. 또한 이미 제 본체는 다시 살릴 수 없을 만큼 사그라졌고, 파손됐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는 어머니가 계시지 않습니까? 어째서 저를 두려워하시는 겁니까? 어머니는 세상을 창조한 불이시며 모든 존재를 아우르고 굽어보는 존재. 저 또한 종말의 이름을 받기는 했으나, 근원은 태고의 불에서 비롯된 염화의 용입니다. 지혜에 빛에 오른 염화는 모두가 어머니를 공경하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 불완전한 상태로 보이시나, 어머니께 덤비는 자식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 지랄하네. 그 때, 마침내 화정이 입을 열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릴뻔했으나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 내가 저 사고뭉치를 키웠을 때만 생각하면…. 뭐? 어머니께 덤비는 자식이 어디 있어? 아주 지랄을 해요 지랄을. 화정은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나는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태연히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확실히 네가 어머니라 칭하는 존재는 내 품에 있지만, 나는 네가 말하는 어머니가 아니야. 인간이다, 인간. 그러니 그걸 감안해서 이야기하고, 어머니라 부르는 것도 관뒀으면 좋겠는데. 나는 엄연한 남성이거든.” 마그나카르타는 불완전한 상태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미 화정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에 스스로 밝힌 것이다. 그리고 설령 마그나카르타가 덤벼든다고 해도, 이미 한 번 거의 단신으로 쓰러트린 상대였다. 엘릭서도 있겠다. 동료들과 힘을 합쳐 약간의 무리를 감수하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 몽환적인 공간에 고요한 침묵이 흘러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마그나카르타의 침묵을 대신해, 다른 목소리가 곧바로 침묵을 깨트려버렸다. - 그대여. 설마 지금, 저 용의 말을 들으려는 건가요? 그건 아니겠지요? 나는 대 영웅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마그나카르타가 있을 거라 생각되는 공간만 바라보았다. 아마 머리가 돌아가는 용이라면, 그리고 인간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면. 내 말에 담긴 의미를 이해했을 것이다. -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한낱 인간이라도, 어머니를 품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윽고, 들려온 마그나카르타의 목소리는 여전히 경칭이었다. 새삼 화정의 격이 어느 정도인지를 느끼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 인간임을 감안하라. 무슨 말인지는 알겠나이다. 그럼 이건 어떠실는지요. 그 순간이었다. 한 줄기 강한 바람이 나를 스치는가 싶더니, 이내 허공으로 서너 개의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가 사용자 김수현을 인정합니다!』 『사용자 김수현에게 다섯 가지의 용의 권능이 부여됩니다.』 『역사상 최강으로, 최악으로 평가 받은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 그런 용의 인정을 받은 만큼 권능 또한 매우 강력합니다. 하지만 현재 사용자 김수현의 사용자 정보로서는 이 모든 것을 온전히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의 수나, 능력이 제한됩니다.』 『그러므로 현재 사용할 수 있는 용의 권능은 총 두 가지뿐이며….』 - 어떠십니까. 마그나카르타는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짚어주었다. - 흐응. 뭐 나쁘지는 않네. 그나저나 용의 권능이라. 자세히 봐야 알겠지만, 화정도 인정한 만큼 확실히 나쁘지는 않아 보인다. 나는 속으로 조용히 말을 걸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 뭘? 마그나카르타를 해방하는 것. - 그거야 네 마음대로지. 뭐 굳이 의견을 말하라고 하면…. 말마따나, 저 녀석도 어찌 보면 내 자식이라고 할 수 있거든. 이렇게 있는 걸 보면 과히 마음이 좋지는 않아. 마음대로 하라 말하기는 했지만, 화정도 은근히 마그나카르타의 해방을 원하는 눈치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더 들어봐야 결정하겠지만, 나는 한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걸 느꼈다. 곧 더 없느냐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이자, 마그나카르타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 지금으로서는 이게 한계입니다. 하지만 제 말을 들어 저를 해방해주신다면, 드릴 수 있는 선물이 하나 더 있지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곳에는 염원의 비석을 가동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돼있습니다. “그러면 그걸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말인가?” - 바로 그렇습니다. “오호라.” 대 영웅은 염원의 비석은 단 한 번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는 나 말고도 열두 명의 클랜원이 있다. 이 말인즉슨, 된다 안 된다를 떠나서 총 열세 번의 염원을 빌 수 있다는 소리. 그렇게 생각하자 이 제안이 무척 구미가 당기는 걸 느꼈다. 그때였다. - 지금 뭐 하시는 건가요?! 한껏 당황한듯한 목소리가 귓가를 세차게 때렸다. 대 영웅의 목소리였다. - 우리는, 우리는! 그대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어요. 지금 그대가 하려는 행동은 그 숭고했던 희생을 백지로 되돌리는…. “개인적인 복수나 세상을 보고 싶다는 건 내 알 바가 아니고. 어쨌든 최종적으로는 영면에 들고 싶다잖아. 그리고 나는 애당초 이 세상과는 상관없는 사람이야. 다른 세상에서 넘어온 사람이라고. 즉 네가 말하는 숭고한 희생은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소리지.” - 뭐, 뭐라고요? “후. 차라리 그때 멸망하는 게 나았을 것을…. 그럼 이 거지같은 세상에 올 필요도 없었을 텐데 말이지. 아무튼 수지만 맞는다면 못해줄 이유도 없으니까, 헛소리는 이만 집어치우렴.” 방금 말은 진심이었다. 그때 세상이 아예 멸망해버렸으면 이곳에 올 이유도 없지 않았을까? 아무튼 대 영웅을 원망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동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사내 또한 대 영웅의 처분을 나에게 맡겼다.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나는 거주민이 아닌 사용자였다. 기가 막히는지 아니면 할 말이 없는지. 대 영웅에게서는 더는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마그나카르타가 있을 거라 생각되는, 왼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덤덤히 입을 열었다. “세상을 보고 싶고, 복수를 하고 싶고, 영면에 들고 싶다. 그럼 어디 그 세 가지 부탁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들어보고 싶은데. 아. 미리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듣고 판단할 생각이야.” 말을 꺼낸 순간이었다. 보이지는 않았으나, 왠지 모르게 마그나카르타가 반색하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 그거야 당연합니다. 물론이지요. 하지만 그 전에…. 서로간에 조금 더 확실한 믿음을 위해, 지금 품속에 있는 물건을 잠시 꺼내주시겠습니까? 품속의 물건? 반사적으로 품을 더듬자 이내 뭔가 자그맣고 둥글둥글한 물체가 잡히는 걸 느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마그나카르타가 뭘 하려는지 대충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 화악! 환한 빛 무리가 눈앞을 가득 메웠다가, 곧 정상으로 되돌아온다. 정신을 차려보자 옅은 빛이 스며든 잿빛 홀이 보였다. 손은 여전히 제단, 아니 관에 얹은 상태였다. 그때, 돌연히 아래쪽에서 무수한 시선이 느껴졌다. 머리만 돌려 시선을 내리자,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는 클랜원들을 볼 수 있었다. 이야기를 듣느라 많은 시간이 지체돼 걱정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걱정하는 눈길들이 아니었다. 처음 이 장소에 들어왔을 때처럼 호기심 어린 눈동자만 보일 뿐이다. 그 순간 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아까 그 공간에서 흐르는 시간은 현실과 다른 배율로 흐르는 모양이다. 그 공간에서 아무리 오랜 시간을 보내도, 현실에서는 몇 초에 불과하다. 봉인 공간이라 생각하면 이해될 법한 일이었다. “클랜 로드! 괜찮으십니까?” 멍하나 바라보고만 있자 신재룡이 손을 크게 흔들며 외친다. 나는 한두 번 머리를 끄덕인 후 안솔을 응시했다. 안솔 또한 나를 쳐다보고 있어, 우리는 금방 시선을 마주칠 수 있었다. 이윽고 나는 침착히 손을 들어 관을 가리켰다. 그렇게 서로 눈을 마주친지 약 5초 정도 흘렀을까. 머리 위로 물음표를 동동 띄우던 안솔이 순간 “아차.”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입도 커다랗게 벌리며 머리를 마구마구 끄덕이기 시작했다. 목을 덮는 단발 머리가 세차게 휘날릴 정도였다. '?' 어떤 의미인지 일순 혼란이 왔으나, 저렇게 미친 듯이 끄덕이는 걸 보면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닐 터. 이로써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했던 안솔의 반응도 확인했다. 마음속에 남아있던 일말의 고민이 사라지는 걸 느끼며,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관 위를 응시했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연한 초록빛을 띤 일곱 개의 구슬이 가지런히 나열돼있었다. 그 구슬들을 보며 나는 침착히 머릿속을 더듬었다. '관 위를 보시면 아마 일곱 개의 구슬이 놓여있을 겁니다. 조작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일단 첫 번째로….' 이윽고 완전히 떠올린 순간. '제일 왼쪽에 있는 구슬을 한 번 눌러주십시오.' 나는 주저 않고 손가락을 움직여 가장 왼쪽에 있는 구슬을 꾹 눌렀다. ============================ 작품 후기 ============================ 죄, 죄송합니다. 오늘 어떻게든 자정에 맞추려고 했는데, 아버지한테 의도치 않게 30분간 붙잡혔습니다. 제 잘못 때문이에요. ㅜ.ㅠ 실은 오늘 아침에 출근 하시길래, 현관문으로 따라나가 인사를 드렸거든요. 그런데 문이 닫히기 직전에, 그 영화에서 조폭들이 인사하는 것처럼 다시 인사를 드렸거든요. 그~. 어깨 쭉 넓히고 머리 꾸벅 숙이면서 “다녀오십시오 형님!”. 이렇게요. 그리고 바로 도망쳤습니다. 일단 출근이 바쁘셔서 그대로 나가시기는 했는데, 오늘 약속이 있으셨는지 늦게 돌아오시더군요. 그것도 술에 잔뜩 취하신 채로요. -_- 그리고 그 와중에 오늘 아침 인사를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하하하. 머리랑 등이랑 어깨가 아직도 얼얼합니다. 이 야밤에 “아버님!”이란 단어를 몇 번이나 복창해야 했는지…. 허허허. 아. 오늘 용량이 조금 많지요? 원래 두 편 분량이기는 한데, 사실 내용으로 따지면 한 편 분량입니다. 즉 이번 회 보여드릴 내용이 딱 여기까지였다는 것이지요. 괜히 늘렸다가 원래 기획했던 회수를 초과할 것 같아(실은 이미 초과했는지도 몰라요. 퍽퍽!), 그냥 한 편으로 묶었습니다. 아무튼, 재미있게 보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D 0460 / 0933 ---------------------------------------------- 선택. 대 영웅? 아니면 마그나카르타? 마그나카르타의 부탁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우선은 걸려있는 봉인을 되돌린다. 그리고 봉인을 되돌리는 과정에서 길을 틀어 영혼이 몸 안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한 마디로 나머지는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관에 동결돼있는 대 영웅의 육체를 해동한 후, 자신과 대 영웅의 영혼을 차례대로 넣어달라는 소리였다. 그 영혼이란, 지금 눈앞에 동동 떠 있는 조막만 한 구체였다. 검은빛과 하얀빛을 띠고 있던 두 개의 구체. 이게 바로 마그나카르타와 대 영웅의 영혼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마그나카르타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인간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 대 영웅의 몸을 차지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두 번째, 대 영웅에게 복수를 하겠다. 마그나카르타는 대 영웅의 육체에 자신의 영혼을 먼저 넣어준 후, 대 영웅의 영혼을 추가로 넣어줄 것을 요청했다. 이 말인즉슨 사실상 육체의 주인은 대 영웅이었으나, 마그나카르타가 먼저 들어감으로써 육체의 지배권을 획득한다. 그러면 두 번째로 들어간 대 영웅은 어떻게 될까? 바로 집을 빼앗긴 세입자 신세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영면에 들고 싶다. 생각해보면, 일련의 과정은 인간의 육체에 용의 영혼이 들어간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은 서로의 파장이 맞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또한 한결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육체와 영혼은 서로의 파장이 맞는 방향으로 이끌리는 경향이 있다. 즉 졸지에 세입자 신세가 됐으나, 대 영웅의 영혼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을 것이다. 어떻게든 육체의 지배권을 되찾아오려 안간힘을 쓸 터.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그나카르타도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하다. 이러한 과정. 즉 파장이 맞지 않는 영혼이 지속적으로 머무르고 서로 주도권을 찾으려 싸우는 동안, 대 영웅의 육체는 견디지 못해 균열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균열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면 결국에 남은 길은 하나. 바로 사망이다. 육체가 사망하면 영혼이 승천하게 되니, 결국 이게 바로 마그나카르타가 말한 영면이었다. 어떻게 보면 대 전쟁의 연장선이라 볼 수 있는 주도권 싸움이라고나 할까. “하나, 하나, 둘, 셋, 다섯….” 나는 마그나카르타가 말해준 대로 왼쪽부터 차례대로 구슬을 누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총 일곱 개의 구슬 중 다섯 번째 구슬을 다섯 번 누르고 나서야 손을 멈추었다. 아직 누르지 않은 두 개의 구슬이 있기는 했지만, 마그나카르타가 절대 손대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한 터라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서 나는 천천히 양손을 들었다. 이제 남은 일은 관의 손바닥 형상에 손을 대고 마력을 주입하는 것. 곧 차가운 벽돌의 감촉을 느끼며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자, 우뚝 세워져 있는 비석의 모습과 홀을 가득 메우고 있는 마법 진이 보인다. 사실 구슬을 누르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세히는 모른다. 하지만 이미 대 영웅이 모든 조건이나 준비를 해놓은 상태라고 하니, 나로서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는 일. 지금쯤 부르르 떨고 있을 대 영웅에게 일말의 감사를 표하며, 나는 힘껏 마력을 일으켜 관으로 흘려 넣었다. 그러자 칙칙한 빛을 띠던 마법 진에 곧바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마 구슬을 눌렀을 때부터 모종의 장치가 작동해서 그런지, 마력을 부여하자마자 삽시간에 반응이 일어난 것이다. 후르르르르르르륵! 반응은 예상보다 거칠었다. 내가 서 있던 관을 중심으로, 초록빛을 띤 일곱 갈래의 불길이 일어나 각자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한다. 한없이 뻗어나가던 초록빛 불길이 멈춘 것은, 마법 진의 끝 방향에 세워진 비석에 다다랐을 때였다. 불길을 받은 일곱 개의 비석이 순식간에 초록빛으로 물들여진다. 웅웅웅웅웅웅웅웅! 이어서 비석은 거센 진동음을 토해내며 찬연한 옥빛을 내뿜었고, 곧 한 차례 커다란 방전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꽈꽝! 귀를 크게 울릴 정도의 폭음을 터뜨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귀를 막았다. 천장이 뚫려있기에 망정이지, 홀이 밀폐된 공간이었다면 후 폭풍이 장난 아니었을 것이다. 이윽고 폭음 후에 볼 수 있었던 광경은, 한층 크기를 키운 초록색 불길이 비석에서 되돌아오는 현상이었다. 파지직! 파지지직! 금세 중심에 도착한 불길은 삼키듯이 관을 휘감아 버렸다. 그러자 한순간 초록색 스파크가 크게 튀어 오르더니, 이내 빛이 둥글게 퍼져나가며 바닥에 그려진 각인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마치 거푸집에 쇳물을 붓는 것처럼, 내가 서 있는 장소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범위를 넓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관도 이러한 현상에 동조하듯이, 덜그럭덜그럭 소리를 내며 부르르 진동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마법 진 전체가 초록색으로 밝혀졌을 때였다. “헉.” 일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말았다. 관에 대고 있던 손바닥에서 느닷없이 화끈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 비단 손뿐만이 아니었다. 관 전체가 가열된 듯, 내가 서 있는 주변에도 뜻 모를 후끈후끈한 기운이 올라오는 중이었다. 하여 자세히 관을 들여다보자 곧 한 가지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관의 뚜껑이라 생각되는 부분의 바로 아래에 길게 그어진 틈이 있었는데, 그 틈에서 물이 줄줄 새어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대 영웅의 육체가 동결상태였다고 했던가? 그 생각을 떠올리자 바로 저 물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마 대 영웅의 육체를 감싸던 얼음이, 마법 진에서 일어난 불길에 녹아 흘러나오는 물일 것이다. 덜컹덜컹! 덜컹덜컹! 그러자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 한순간 관이 거세게 흔들림과 함께 형상에 접착돼있던 두 손이 툭 떼어지는 걸 느꼈다. 여기까지는 마그나카르타가 말한 대로였다. 나는 빠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그때였다. 여전히 앞쪽을 주시하고 있던 찰나, 이리저리 흔들리던 관 뚜껑이 갑자기 활짝 열리는 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찰랑, 찰랑! 물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관의 안쪽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흡사 무언가에 잡혀 끌려 올려진 것처럼 축 늘어진 육체가 허공으로 둥실둥실 떠오른다. 드디어 나왔다. 나는 마침내 대 영웅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생전에 사용한 무구를 그대로 착용한 상태라, 몸은 갑옷을 비롯한 장비들로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사내가 그녀라 밝혔듯이 보이는 대 영웅의 얼굴은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었다. 눈은 감은 상태였지만, 가늘고 긴 눈썹을 보니 눈동자도 아름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백한 코밑으로는 얼음 빛을 띠는 입술이 보였고, 그 아래로 보이는 턱은 갸름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인상은 전체적으로 무표정해 보였으나, 폭포수 같은 은빛 머리칼과 부분부분 드러난 물기 젖은 피부가 새하얗다. 거기다 몸에 걸친 반 갑옷마저 옅은 은빛을 내뿜고 있어, 함부로 다가가기 어려울 정도의 성스럽고 거룩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아무튼 꽤 아름다운 미모를 지니고는 있었지만, 감상은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거의 막바지에 이른 상태이기도 했거니와 이제 내가 다시 움직일 때였기 때문이다. 한 번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은 후. 나는 여전히 허공에 떠 있는 두 개의 구체를 응시했다. 검은 구체와 하얀 구체. 그 중에서,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떠오른 육체를 향해 검은 구체를 밀어 넣었다. 그러자 검은 구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대 영웅의 육체 안으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파지지지지지직! 한순간 눈앞으로 눈부실 정도의 커다란 방전이 일어나더니, 비석의 소음 또한 더욱 커져 주변을 가득히 메웠다. 그와 동시에 대 영웅의 육체가 심하게 요동치며 환한 빛이 휩싸였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이어서 쉴 틈도 없이 또 다른 변화가 시작되었다. 은은한 빛이 흐르던 은빛 머리칼이, 점차 연한 붉은빛을 띤 짙은 칠흑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윽고 머리카락이 완연히 칠흑 색으로 물들었을 즈음. 파직, 파지직! 거센 불꽃을 튀기던 스파크가 약간이나마 잦아들었다. 그러더니, 고운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조금 기다리고 있자, 이내 두 눈이 번쩍 뜨이는 것과 함께 심유한 빛을 뿌리는 검은색 눈동자 드러났다. 그리고 그 눈동자가 나를 향하는 순간 나는 마그나카르타의 성공을 예감할 수 있었다. 가장 난관이라 여겼던 영혼의 정착에 성공했으니, 이제 적어도 팔부능선은 넘은 셈이다. 그윽한 눈동자와 마주하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할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여인은, 아니 마그나카르타는 두 눈을 한 번 깜빡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살짝 미소 지었다. 그리고 일말의 주저도 없이 남은 구체 하나를 마저 육체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나서 바로 몸을 돌려 클랜원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두 영혼이 맞부딪쳐 거대한 마력 폭풍이 일어날 예정이기에, 가까이 있는 것보다는 최대한 거리를 떨어트리는 게 나으리라. 그 와중에도 어떻게 피할 생각은 했는지, 클랜원은 다들 마법 진에서 최대한 물러나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얼굴들이 모두 똑같다. 멍하니 입을 헤 벌리고 있는 게, 내가 다가가자 하나같이 의문에 찬 시선을 쏟아내었다. “기, 김수현. 지금 이게 무슨 일이야…?” 역시나 호기심의 여왕인 비비앙이 첫 말문을 떼었으나, 나는 차분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지금 일어나는 현상을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미 마그나카르타와 입을 맞춰 논 터라 함부로 말할 수도 없었다. “아씨! 알려줘! 궁금해 죽겠단 말이야!” 그래도 여전히 칭얼거리는 소리가 튀어나와 나는 앞을 가리켰다. 꽈꽝! 그러자 그 순간, 공교롭게도 다시금 고막이 얼얼할 정도의 굉음이 홀을 울렸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가 다시 쳐다보자, 마침 막바지에 다다른 해방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둥글게, 빙그르르 돌며 허공으로 떠오르는 대 영웅의 육체. 그 육체의 주변으로 수많은 포물선을 그리며 다투고 있는 검고 하얀 빛 줄기들. 두 영혼은 처음에는 격렬하게 싸우는 듯 보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하얀 빛 줄기가 서서히 사그라져 잔상만을 남기고, 검은 빛 줄기가 차차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더니 종래에는 대 영웅의 육체가 검은 빛 무리에 완전히 먹혀 들었다. 대 영웅이 원래의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미리 신체를 차지한 마그나카르타가 승리했다. 한 마디로, 이제 끝났다는 소리였다. 화아아악! 그렇게 생각한 찰나, 눈부신 빛의 명멸이 시야를 가득히 메웠다. 홀을 빽빽이 메울 정도의 엄청난 빛의 발광에 나는 살그머니 눈을 감았다. 문득 이번 탐험에서는 유난히 눈을 감는 일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이번 일이 끝나고 머셔너리 하우스로 돌아가게 되면, 고연주에게 눈이 좋아지는 허브 차를 타달라 할 것이라 필히 다짐했다. 그 이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많은 시간이 지나지는 않은 것 같다. 눈동자를 아릿하게 만드는 감각을 느끼며 눈을 뜨자, 가물가물한 시야로 한 검은빛 덩어리가 바닥으로 서서히 내려앉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내 완전히 시야가 회복돼 나는 눈을 크게 치켜 떴다. 어느새 바닥으로 내려온 빛 덩이는, 묶인 실을 풀듯이 가장 위쪽을 시작으로 줄기줄기 빛을 풀어 내리는 중이었다. 곧이어 빛이 모두 흘러내렸을 때. 조금 사그라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환한 빛을 내뿜는 중앙 사이로, 비로소 한 여인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흰 갑옷으로 흘러내리는 칠흑 색 머리칼. 그리고 나를 주시하는 칠흑 색 눈동자. 마침내, 마그나카르타가 대 영웅의 육체를 빌어 부활에 성공한 것이다. 마그나카르타는 살그머니 눈을 감았다. 수천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해방된 기쁨을 음미하려는지, 고개를 살며시 젖히며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일순 어수선하게 변한 클랜원들이 뭐라 말하는 게 들렸으나, 나는 아무 말도 않고 마그나카르타를 응시했다. 이윽고 빛과 소음이 점차 확연히 가라앉았을 즈음. 차분히 눈을 뜬 마그나카르타가 한 걸음 한 걸음 나와의 거리를 줄여오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비척거리며 힘겹게 걷고 있었으나, 오랜 시간 동결돼있던 점을 감안하면 생각보다 자연스러운 걸음이었다. 아까 몸을 감쌌던 녹색 불길이 육체를 정상으로 되돌리는 역할을 한 듯싶었다. 마그나카르타는 나와 약 2미터 정도의 거리를 남겨두고 우뚝 걸음을 멈췄다. 어디선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들이 들렸다. “김수현. 지금 이게 어찌된 상황인지, 이제 설명을 부탁할 수 있을까.” 앞서 일어난 현상이나, 눈앞 여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아서일까. 항상 침착하던 허준영도 이번만큼은 긴장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안될 것은 없다. 나는 머리를 한 번 끄덕인 후 마그나카르타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내 신호를 받은 마그나카르타가 부드러이 웃어 보인다. 그때였다. 스르릉, 챙! 휙! 한순간 청명한 검음이 울리더니 마그나카르타의 신형이 내게로 달려들었다. 손에는 성검으로 보이는 무구가 쥐어져 있었다. 아직 몸 상태가 불완전해서 그런지 그렇게 위력적인 공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다면 내 목이 꿰 뚫릴 것은 두 말할 여지도 없을 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마그나카르타의 공세에는 살기가 섞여 있지 않았다. 또한 내 가슴속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하얀 빛이 새어 나오는 중이었고, 사실 굳이 움직일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푹! 2초 후, 살을 부드럽게 파고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내 몸에서 난 소리가 아닌, 마그나카르타의 몸에서 난 소리였다. 흘끗 시선을 내려다보니, 종이 한 장이 들어갈 틈만을 남긴 채 멈춰선 흑색 검이 보였다. 어떻게든 내 목을 뚫으려 힘을 주는지 검 끝이 부르르 떨리고 있다. 하지만 무언가에 막힌 듯 더는 전진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나는 차분히 가슴을 쓰다듬었다. 이로써 마그나카르타의 서약을 담은 계약의 증표가 제대로 발동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시 시선을 올리자, 어느덧 바로 앞에서 우뚝 멈춘 마그나카르타가 보였다. 그리고 그런 마그나카르타의 몸 주변으로 너덧 개의 병장기들이 싸늘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목에는 허준영 특유의 길쭉한 검이 비스듬히 닿아있고, 남다은의 설아와 차소림의 아르쿠스 창은 양다리를 겨누고 있었다. 내 목에도 서늘한 감각이 느껴지는 게 선유운이 어깨 위로 화살을 걸친 듯싶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언제 옆으로 돌아갔는지, 유정이 붉은색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마그나카르타의 옆구리를 깊숙이 찌르고 있었다. “콜록!” 곧 거센 기침을 토해내는 마그나카르타. 가슴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점차 사그라지는 걸 확인한 후,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왜. 굳이 이렇게 확인할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콜록! 보, 보다…. 후우…. 보다 확실한 믿음을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나저나…. 좋은 부하들을 두셨습니다? 설마 정말 찌를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요. 콜록, 콜록!” 차분한 대화가 오고 가자 클랜원들의 의문에 찬 눈길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내 겨누고 있던 무기를 하나하나 걷어내 주자 마그나카르타는 옆구리를 쓱 문지르며 몇 걸음 물러섰다. 잠시 후, 숨을 고른 마그나카르타가 고운 미성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로써 제 말이 진실임은 입증했습니다. 그럼 이제, 동료 분들에게 오해를 풀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얼마든지.” 이쯤 되면 머리 회전이 빠른 클랜원은 어떤 상황인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섭게 쏘아 보내는 시선은 여전했다. 이제야 진실을 입증하는 방법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는지, 마그나카르타는 어깨를 으쓱이며 검을 집어넣었다. “제 이름은 헬레나 루 에이옌스.” 그리고는 양손을 느릿하게 내리더니 살며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알카트라츠 최후의 별이었으며, 대 영웅이라 불리었던 여인입니다.” * 알카트라츠 최후의 별, 대 영웅 헬레나 루 에이옌스. 사실대로 정체를 밝히지 않은 것은, 마그나카르타의 특별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대 영웅 행세를 하고 싶다고 하는데, 큰 상관은 없기에 허락해주었다. 차후 클랜 생활에 적응하려면 적어도 마그나카르타보다는 대 영웅이 나을 테니까(하여 나 또한 앞으로 대 영웅의 이름으로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약간의 도움을 주기 위해, 나는 대 영웅의 부활을 내가 선택한 것으로 돌려주었다. 자신의 죄를 알고 참회하려는 대 영웅을 내가 살살 구슬려 부활시켰다고 각색한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자, 클랜원들은 그제야 약간 누그러진 시선으로 헬레나 루 에이옌스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탐탁지 않아 하는 클랜원은 있었으나 클랜 로드의 결정에 극렬히 반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솔직히 따지고 보면, 비비앙이나 사샤도 처음부터 우리와 좋은 인연을 맺었던 건 아니었다. 더구나 계약의 증표로 서약을 맺었으니 무슨 걱정이 있을까? 아까 나를 공격한 것은 단순한 계약의 확인 절차에 불과했다고 해명하자, 클랜원들은 대체로 수긍한 낯빛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역시나, 클랜원들 또한 홀 플레인의 사용자였다. 마지막으로 염원의 비석으로 이야기를 마친 순간, 다들 기대 어린 눈빛으로 서로를 번갈아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 이제 네가 약속을 지켜야 할 차례군.” “물론입니다. 혹시 아까 여섯 번째 구슬과 일곱 번째 구슬을 건드셨는지요?” “전혀.” “그러면 됐습니다. 발동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니, 그동안 동료 분들에게 간단한 설명이라도 해주시길.” 이제 몸 상태가 상당 부분 돌아왔는지, 말을 마친 헬레나는 휙 몸을 돌려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클랜원들이 삽시간에 나를 에워싸 반짝반짝 빛나는 시선을 보내었다. 그것은 얼른 말해달라는 무언의 압박…. “저기…. 오빠.” 그때.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 시선을 돌리자, 고개를 갸웃하는 한별이 보였다. “왜?” “약속이라니…. 무슨 말이에요?” 순간 아차 싶었다. 내가 멋대로 부활시킨 것으로 이야기를 끌고 갔는데, 약속이라고 함은 꼭 서로 거래를 했다는 뉘앙스를 풍겼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으려 애쓰며, 태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설득했거든. 솔직히 영혼들의 반응에 대해서 조금 거짓말을 했어. 처음에는 워낙 죄책감이 심해서…. 아무튼 나중에 맹세의 검으로 한 번 만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직접 사과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했거든? 그러니까 구미가 당긴 모양이더라. 그래서 도와주는 대가로 염원의 비석을 발동하게 해달라고 한 거야.” 스스로 말하면서도 구멍이 많은 거짓말이라고 느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밝혀질 거 그냥 말할까도 생각해봤지만, 일단은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무튼 마그나카르타, 아니 헬레나와 약속한 것도 있으니까. 그러나 한별은 여전히 납득 못했는지 살며시 아미를 찡그렸다. “…그래요? 하지만 저는 왠지 모르게 이상해요. 행동이나 태도가, 전혀 죄책감을 가진 사람으로 안 보여요.” “김한별. 그만하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때 허준영이 앞으로 나서 한별의 말을 제지했다. 나는 쓰게 웃었다. 요즘 들어 연기력이 한참 떨어진 모양이다. 아무래도 허준영이 가장 먼저 눈치챈 것 같았다. 한별은 쌀쌀맞은 눈빛으로 허준영을 쳐다봤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앞으로 입 조심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그나카르타…. 젠장. 헬레나. 루. 에이옌스. 에게 들은 대로 염원의 비석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한 사용자당 오직 한 번의 기회만 부여된다는 것. 그리고 개인의 욕심이 최우선으로 앞서있을 경우 염원이 발동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이건 좀 애매한데요….” “개인의 욕심이라니. 그런걸 알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러자 설명을 들은 클랜원들은 모두 난색을 표했다. 사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딱히 더 해줄 말은 없었다. 소원 자체가 개인의 욕심으로 비롯되는 게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욕심을 제한해버린다면, 과연 빌 수 있는 소원이 있기나 할까? 그때였다. 꾸르릉, 꾸르르릉! 모두가 염원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찰나,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얼른 중앙으로 몸을 돌아보자, 어느새 마법 진의 중앙으로 이동해있는 한 비석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비석을 중심으로, 남은 여섯 개의 비석이 육망성을 이루고 있었다. 이어서 헬레나가 팔을 움직인 순간, 마력이 흐르는 웅혼한 소리와 함께 가운데 비석의 정 중앙으로 초록빛이 둥글게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 비석 전면을 물들인 초록빛은, 흡사 물에 파문이 이는 것처럼 고요하게 일렁이는 풍경을 보였다. 마치 소환의 방으로 들어가는 포탈을 보는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염원의 비석이 발동했다. ============================ 작품 후기 ============================ 아이고. 드디어 염원의 비석까지 왔네요. 저야말로 팔부능선을 넘었습니다. 하하하. 솔직히 인원수가 적다면 모를까. 저 모든 인원이 하나하나 어떤 염원을 비는지 적는 건 무리일 것 같고요, 한 서너 명 정도면 조명할 계획입니다. 남은 클랜원은 그냥 간단히 염원의 결과만 적을 예정이고요. 그럼 여기서 예상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작성해볼까요? 1. 또 여성이냐?! Sol ) 하지만 정신은 남성입니다. 2. 아무튼 육체는 여성이잖아. 얘도 공략 대상이지? 김수현 주변에 여성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Sol ) 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용은 그냥 부려먹으려고 데려왔지, 전혀 공략의 대상이 아니에요. 이미 수명도 정해져 있는걸요. 3. 뭐야. 그러면 왜 살려낸 거지? Sol ) 여러 군데 쓸모가 있거든요. 강철 산맥을 앞두고 머셔너리 마법사들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도 있고, 마법 도시 마지아와 관련해서 여러 문제들도 해결해줄 수 있고요. 물론 전력 증강에도 도움이 되겠지요. 4. 그럼 용에 대한 베드신의 계획은? Sol ) 절대로, 네버 없을 겁니다. 농담조로 성적인 내용이 나올 수는 있어도, 실제로 쓸 가능성은 0%에 수렴합니다. 그런 내용을 쓴다고 상상해보면, 아무래도 정신체가 남성이다 보니 저도 극렬한 거부감이 일 것 같아요. 5. 잠깐만. 타로 카드에 용이 있지 않았나? Sol ) Yes. 그렇습니다. 다만 그 용은 이 용이 아닙니다. 후후후. :D 0461 / 0933 ---------------------------------------------- 선택. 대 영웅? 아니면 마그나카르타? 염원의 비석을 활성화한 후. “이로써 가동은 완료했나이다…. 응? 왜 그런 얼굴들을 하고 있으신지요.” 헬레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와 가동 완료를 보고했다. 하지만 곧 우리의 얼굴을 봤는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다들 기뻐하기는커녕 울상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매해서 그래, 애매해서. 사실 염원이라고 해봤자, 개인의 욕심이 없을 수가 없잖아.” “아하.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바라는 염원에 욕심이 아예 없을 필요는 없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욕심이 최우선일 경우에나 제한되지, 차선으로 젖혀두면 문제가 되지 않을 텐데요.” 헬레나의 조언은 매우 당연한 말이었으나, 나는 싱겁게 웃었다.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사람의 감정이란 참으로 미묘해 자신도 정확한 잣대를 내리기 어려운 경우가 부지기수다. 애당초 그러할진대, 스스로 감정을 조절해 욕심을 차선으로 젖혀라? 어불성설이었다. 내 웃음의 의미를 깨달았는지, 헬레나는 어깨를 한 번 들먹이며 말을 이었다. “정 그러면 아주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 말을 꺼낸 순간 나를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꽂혔다. 헬레나는 요염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혀를 살짝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그러더니 이내 살며시 눈웃음을 치는 게, 꼭 색기 넘치는 요부 같아 보였다. 물론 머리칼과 눈동자 색이 변하기는 했으나, 처음 보았던 대 영웅의 모습과 비교하면 상당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기본 원칙을 완전히 뒤엎을 수는 없으나, 가능성을 약간이라도 높일 수는 있지요. 아니. 사람에 따라서는 비약적으로 높일 수도 있습니다.” “오호라. 어떤 방법이지?” “무릇 사람의 감정이란 야릇하기 그지없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변화할 수 있는…. 즉 함부로 측정할 수 없는 내면의 세계지요.” “뜬구름 잡는 소리군.” 어떤 뜻인지는 이해했으나, 현 상황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헬레나는 검지를 좌우로 까닥이더니 어여쁜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한 마디로 입을 잘 놀리면 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결국 판단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지금 신을 상대로 입을 털라는 말인가? 그것도 언어와 지혜의 신이라는 가네샤를 상대로? 여전히 가능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푹 한숨을 내쉬었다. 클랜원들 또한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서로 이리저리 눈치만 살피고 있는 게, 아무래도 선뜻 나서기 어려운 모양이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염원의 비석이라는 거대한 보상이 눈앞에 있지만, 조금만 삐끗해도 나가리가 될 터이니. 이러한 상황에서 누가 먼저 앞으로 나서고 싶겠는가. 한 번 입맛을 다신 후,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나부터 시작하도록 할까. 어떻게 하면 되지?” “오빠. 자신 있어?” 유정이 냉큼 물었으나 나는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이렇다 할 수가 생각나지 않으니, 남은 방법은 직접 맞부딪치는 것밖에 없다. 또한 이대로 계속 죽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인 만큼, 우선은 내가 시작을 끊는 게 나으리라. “모두가 지금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는 알겠습니다. 그것은 저 또한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상황이 이런데, 어쩔 도리가 있겠습니까? 되면 좋지만, 안되면 그만이지요. 이 보상에 대해서는 모두 여러분의 선택으로 돌리겠습니다. 어떤 염원을 빌었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 터이니, 다들 너무 부담은 가지지 마시고 좋은 방향으로 생각합시다.”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그나마 이 말의 효과는 있었는지, 클랜원들의 얼굴이 약간이나마 밝아지는 걸 볼 수 있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이미 포탈은 활성화된 상태로, 중앙 비석 부근은 이미 다른 차원의 공간이나 다름없습니다. 저 비석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귀를 기울이면, 신의 목소리가 들려올 겁니다.” 이내 헬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예상보다 간단하다고 생각하며 중앙 비석을 향해 이동했다. 이윽고 마법 진의 중앙으로 들어간 찰나, 나는 주변의 흐름이 미묘하게 달라진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클랜원들의 기척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나 홀로 존재하는 기분이랄까. 눈앞에는 초록빛 물결이 일렁이는 염원의 비석이 있었다. 나는 잠깐 비석을 매만졌다가, 들은 대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곧 무릎이 땅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우웅! “응?” 순간 비석에서 맑은 빛이 뿜어져 나와 온몸을 휘감았다. 그러더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강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의 구부린 무릎이 저절로 세워지고, 이어서 엉덩이에 무게가 실려 바닥에 앉는다. 거기다 양쪽 다리를 오그려주어 편하게 앉도록 해주기까지. 그때였다.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 무렵, 귓가로 미성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아련히 울려 퍼졌다. - 태고의 불이시여. 부디 편히 앉으세요. 이 미천한 가네샤가 모든 불의 어머니에게 인사를 올립니다. 비록 인간의 몸에 불완전한 상태로 존재하시나, 이렇게라도 뵙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3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곧바로 가슴으로 시선을 내렸다. 또 화정이었다. - 흐응. 가네샤네. 반갑다고 전해줘. 그때 속에서 화정의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얼른 말을 걸었다. 아는 사이야? - 음~. 나랑은 분야가 달라서. 그렇게 엄청나게 잘 아는 사이는 아니야. 그래도 수완은 꽤 좋은지, 아랫것들이 몇 번 이야기하는 건 들은 기억이 나네. 아랫것이라. 아, 그럼 잘됐네. 화정 너…. - 싫어. 아무리 까마득한 후배라지만, 가네샤도 엄연한 신이야. 그것도 상급의 신이라고. 그리고 내 관할 하에 있는 아이도 아니라고 했잖아? 분명 좋은 기회인 거는 인정하지만, 여기에는 내가 관여할 어떤 타당한 명분도 없어. 야. 그깟…. - 그깟? 그깟? 푸. 그래. 하기야 너는 잘 모르겠지. 인간이니까. 하지만 방금 네가 하려던 부탁은, 나한테나 가네샤한테나 무척이나 실례되는 말이었다고. 알아들어? 화정은 이미 내가 하려던 말을 짐작했는지, 딱 잘라 끊어내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화정이 이 정도로 단호하게 나오는 걸 보아하니, 더 조르는 건 무의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쉬움의 입맛을 다시며 비석을 올려다보았다. 비석에는 여전히 신비한 색을 띤 초록빛이 흐르고 있었다. 잠시 후, 가네샤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 어떤 대화를 나누셨나요? 태고의 불께서는, 저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던가요? “으음. 만나서 무척 반갑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지금 자신이 거주 중인 인간은 아주 특별히 아끼는 인간이니, 굳이 제한을 두지 않고 염원을 들어주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입술에 살짝 침을 바른 후, 나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어진 후 폭풍은 무척이나 거세었다. - 야! 너 죽을래 진짜! - 호호! 반갑다고 하시니 기뻐요. 하지만 거짓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언어와 지혜의 신, 가네샤.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답니다. 호호호! 젠장. 그럼 애초에 알고 있었다는 소리잖아. 내부를 미친 듯이 휘도는 화정에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나는 속으로 강하게 투덜거렸다. 물론 전적으로 내 잘못이 크니 겉으로 내색한 건 아니었다. - 후우. 이렇게 유쾌하게 웃어본 게 얼마만인지. 튀케가 관심을 가졌을 때는 이유를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확실히 재미있는 인간이네요. 감히 태고의 불 님과 농담을 하다니. 우리 세상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에요. “튀…. 누구 말입니까?” - 튀케요. 행운의 여신. 당신이 이 세상에 들어올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모르셨나요?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2회 차를 시작할 때, 능력치 상승 메시지에서 비슷한 말을 본 것 같기는 하다. 아무튼. 이러나 저러나 더는 내 알 바가 아니었기에, 나는 다시 염원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무튼 좋습니다. 그럼 염원을 빌기 전에, 몇 가지 질문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 아니요? 괜찮지 않아요. 보아하니 시간을 끌면서 밖의 인간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제한에 관한 질문으로 최대한 정보를 얻으려는 것 같군요. 그러니 허락하지 않겠어요. “…그러면 안됩니까?” - 그러면, 당연히 제 기분이 좋지 않겠죠? 이 공간은 염원을 비는 공간이지, 저를 이리저리 재보는 공간이 아니랍니다? 순간 나는 현기증이 도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참으로 까다로운 여신이로다. 아니, 설마 신과의 대화는 전부 이런 건가? 그런 나를 딱하게 여겼는지, 잠시 후 가네샤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 그래도 그분의 낯이 있으니 그대의 질문에 어느 정도 대답을 해주겠어요. 이 염원의 비석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무수한 인간들이 다녀갔어요. 그런 만큼 제가 들은 염원 또한 다양했지요. 누구를 죽여달라, 누구를 살려달라. 혹은 최강으로 만들어달라, 집으로 돌아가게 해달라. 아니면 누군가의 사랑을 받게 해달라 등등. 참고로 이런 종류의 염원은 사랑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이루어진 바가 없어요. 이 정도면 충분한 대답이 되었나요? 나는 두 손과 두 발을 다 들기로 했다. 마치 내가 할 말을 모두 알고 있다는 듯 말을 하는데, 숨이 턱턱 막혀올 지경이었다. 이런 가네샤를 상대로 입을 잘 놀려보라니.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렇게 계속 있어봤자 결국 크게 나아질 것은 없을 터. 솔직히 말해서, 나 자신부터 시작해서 주변 사람들까지. 빌고 싶은 염원은 무척이나 많았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말해봤자 100% 실패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렇게 좋은 기회를 날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최대한 성공 가능성을 높이며 가장 도움이 되는 염원을 빌어야 한다. 바로 마음을 정할 수 있어, 나는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헬레나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무릇 사람의 감정이란 야릇하기 그지없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변화할 수 있는….' “그만두겠습니다. 그냥 조용히 염원이나 말하지요.” - 현명한 선택이에요. 그럼 염원을 말씀해주세요. “그전에 잠시만 기다려주시길. 마음 좀 가다듬겠습니다.” - 흐응. 어디 한 번 해보라는 콧소리가 들려와, 나는 침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인드 트레이닝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용자 정보, 신상용, 유현아, 형, 한소영….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으나, 나는 그것을 모두 깨끗하게 지워버렸다. 그리고 1회 차에서 가장 비참했던 기억을 하나씩 떠올리며, 악마와 마족에 대한 생각을 가득히 채워가기 시작했다. 다연이가 놈들에게 죽었을 때. 형이 놈들에게 죽었을 때. 한소영이 놈들에게 죽었을 때. 여러 기억을 떠올리자, 순간 내면에서 무언가 들끓어 오르는 걸 느꼈다. 진득진득하면서도 맹렬한 불꽃과도 같은 그것은, 명명백백한 살기요 증오였다. 이윽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악마를, 마족을 죽이고 싶다. 였다. - 호! 대단하네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인간은 정말 오랜만인데. 특히나 이렇게나 진한 살기와 증오는…. 인위적으로 만든 게 아닌,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실한 감정이에요. 정말 놀라운데요? 가네샤의 목소리는 일견 칭찬으로 들렸으나, 어조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내가 실패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 제한의 적용은 오롯이 염원을 말할 때만 적용되죠. 과연 그대의 이 증오와 살기가, 욕심을 앞설 수 있을까…. 저도 궁금하네요. 자, 이제 그대의 염원을 말씀해보세요. 가네샤의 말이 맞다. 이 증오와 살기는 오직 악마와 마족을 대상으로 한 것. 물론 앞선 소원들과도 아주 연관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순수한 증오와 살기로 일으킨 이 감정에 다른 불순물이 첨가되는 순간, 제한이 어떻게 적용될지는 나도 자신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그렇다면 결국 방법은 하나였다. 다른 불순물이 섞일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하고, 최대한 이 감정을 유지해야 한다. 속에서 뭉클뭉클 올라오는 기운을 토해낸 후,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생각이 길어질수록 마인드 트레이닝으로 만들어진 감정이 사그라질 수 있다. 하여, 나는 지체 않고 염원을 말했다. “악마와 마족을, 지워버리고 싶다.” * 팟! 작은 빛 무리와 함께 정신을 차려보자, 어느새 내가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한두 번 눈을 깜빡였다가 차분히 안쪽을 응시했다. 화악! 비석은 아주 잠시 노란빛으로 물드는가 싶더니, 이내 초록빛으로 되돌아와 처음처럼 잔잔히 일렁이기 시작했다.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이윽고 클랜원들이 있는 장소로 되돌아가자 묘한 웃음을 띤 헬레나가 입을 열었다. “축하합니다. 완전한 성공은 아니지만, 실패는 하지 않으셨군요.” “…어떻게 알았지?” “비석이 노란빛을 내뿜었으니까요. 비석은 염원이 발동되면 파란빛을, 발동되지 않으면 빨간빛을 터뜨립니다. 그러나 이도 저도 아닌 경우는 노란빛을 발하지요. 적어도 빨간빛보다는 낫습니다.” “그런가.” 헬레나의 말대로 내 염원의 발동은 이도 저도 아닌 경우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만족하는 편이었다. 비록 염원이 발동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원하는 정보는 얻었다. 한 마디로 염원의 성사 여부가 내 손에 달렸다는 소리였다. 즉 절반의 성공이라고나 할까. 나는 대충 머리를 주억이며 기지개를 폈다. 그러나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여러 클랜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어떻게 됐어요? 어떤 염원을 빌었어요? 네?” 안솔뿐만 아니라 클랜원들 또한 궁금해하는 듯했으나, 나로서는 절대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또한 누구에게도 염원을 묻지 않겠다고 못박아 논 것도 있어, 나는 가볍게 안솔을 떼어내며 말했다. “비밀이야. 서로 묻지 않기로 했잖아?” “우웅…. 그래도….” “그래도 는 무슨 그래도. 굳이 조언을 주자면, 네가 빌려는 염원에 최대한 진심을 담는 게 좋을 것 같다.” “진심이요?” 그렇다고 대답한 후, 나는 두어 번 박수 치며 입을 열었다. “자자. 이제 한 명씩 들어갑시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다음에는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그러자 다행히, 누군가 차분히 화답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차소림이었다. 차소림은 아르쿠스 창을 다소곳이 내려놓고는 총총거리는 발걸음으로 중앙 비석으로 향했다. 이내 비석 앞에서 천천히 무릎을 꿇는 차소림을, 나는 흥미로운 기분으로 응시했다. 과연 어떤 염원을 빌까? 성공할 수 있을까? 그렇게 차소림이 들어간지, 약 3분의 시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 이윽고 차소림의 몸이 마법 진 밖으로 스르르 나올 무렵, 나는 두 눈을 크게 치켜 뜨고 말았다. 염원의 비석이 파란빛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말인즉슨, 염원의 발동에 성공한 것이다. “와아!” “오오오오!” 차소림이 돌아오자 클랜원들은 하나같이 환호를 터뜨렸다. 그러나 차소림의 얼굴에서는 조금도 기뻐하는 빛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부끄러운 낯빛이 가득한 게,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다가 고개를 팩 돌려버렸다. 무슨 염원을 빌었는지 궁금하기는 했으나, 이미 묻지 않기로 한 일. 나는 깨끗이 생각을 접고 다른 클랜원의 참여를 독려했다.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차소림의 성공이 신호탄이 됐는지, 클랜원들이 앞다투어 신청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은이부터 시작해서 선유운까지 일곱 명이 거의 동시에 하겠다고 나설 정도라, 나는 한 명씩 차례대로 순번을 정해주었다. 그리고 클랜원들은 정해진 순번에 따라 하나 둘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행운은 나와 차소림까지만이었을까. 이후의 성적은 전멸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처참했다. 개인당 걸리는 시간은 아무리 길어봤자 5분을 넘기지 못했다. 그나마 5분을 채운 것도 우정민과 신재룡뿐이었다. 그런데 무려 20분도 안 되는 사이, 비석은 총 여섯 번의 빨간빛을 비췄다. 다은, 우정민, 한나, 신재룡, 유정, 한결. 앞서 신청했던 일곱 명 중에서 여섯 명이 연달아 실패한 것이다. “후….” “휴….” 실패한 클랜원들의 시무룩한 한숨을 들으며 나는 비석 안에 있는 선유운을 응시했다. 이제 막 2분을 넘긴 선유운은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더니, 문득 활과 화살을 꺼내 시위를 걸기 시작했다. 저건 또 무슨 염원일까. 돌연히 호기심이 일어 나는 일말의 기대와 함께 중앙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기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선유운이 활을 한 번 튕기는가 싶더니 곧 미끄러지듯이 밖으로 밀려나왔고, 비석은 여지없이 빨간빛을 비췄다. 이내 터벅터벅 걸어오는 선유운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진한 한숨을 흘렸다. 위로의 뜻을 담은 눈길을 건네자, 선유운은 쩝쩝 입맛을 다시며 활을 어깨에 걸었다. “후유. 저 가네샤라는 여신, 참으로 까다롭더군요.” “하하. 그래서 활을 쏜 겁니까? 신한테?” 물론 농담이었다. 선유운은 힘 빠진 얼굴을 하더니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 그건 아닙니다. 그냥 활을 쏘는 자세를 보여드릴 테니 문제점을 지적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 “아무래도 일반적인 염원은 안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문제점을 지적해주면, 그것을 빌미 삼아서 어떻게든 사용자 정보의 상승을 노려보려고 했거든요. 그리고 활을 튕겼는데….” “튕겼는데?” 되묻자, 선유운은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잘 보았으니, 이만 나가라고 하더군요.” “푸!” 마침 가까이 있어 들을 수 있었는지, 다은이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유, 유운씨! 아하하하! 도대체 무슨 염원이 그래요? 완전 꼼수 대박이다~.” “…그러는 검후께서는, 도대체 어떤 염원을 비셨길래 그리 웃으시는 겁니까.” “어머. 이건 숙녀의 비밀인데요? 나는 절대로 말 안 할 거예요. 그렇죠 클랜 로드?” “끄응…. 아무튼, 어차피 실패한 건 매한가지 아닙니까.” 다은과 선유운의 가벼운 말다툼을 들으며 나는 다른 클랜원을 응시했다. 이제 남은 인원은 네 명. 안솔, 비비앙, 허준영, 김한별이었다. 그중에서 나는 안솔과 비비앙을 특히 주목하는 중이었다. 안솔과 비비앙은,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클랜원들이 돌아올 때마다 한 명씩 붙잡으며 이것저것을 캐묻는 열의가 참으로 볼만했다. 뭐 어찌됐든 좋기는 하지만, 그래도 평소에도 저렇게 열심히 하면 좋으련만. 기어코 선유운을 붙잡아 여러 질문을 던진 둘은 침을 꼴깍 삼키며 나에게 다가왔다. 얼굴에 긴장한 빛이 역력한걸 보니 이제 충분히 정보를 모은 모양이다. “김수현. 이제 내가 들어갈게.” “오라버니. 저도 한 번 들어가볼게요.” 안솔과 비비앙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리고 동시에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그렇게 서로 눈이 번쩍 마주쳤을 즈음. “내가 먼저다!” 선수를 취한 건 비비앙이었다. 서로 정보를 모으는 동안 라이벌 의식이라도 느꼈는지, 순번을 정할 틈도 없이 후다닥 몸을 돌린 것이다. “어, 언니!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 깜짝 놀란 안솔이 애처로이 소리를 질렀으나, 비비앙은 이미 절반을 넘게 달려나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안솔이라고 가만히 있는 건 아니었다. 한순간 숨을 씩씩 몰아쉰 안솔은 비비앙의 뒤를 재빠르게 쫓아 달렸다. 그러더니 달리는 와중 지팡이를 꺼내 들어, 점점 멀어져 가는 비비앙의 등을 겨누었다. “안젤루스여! 신성한 권능으로, 저 간악한 자의 발걸음을 묶어주소서!” 안젤루스용 홀드 주문. 지팡이에서 쏘아진 하얀 빛은, 단 한치의 자비도 보이지 않고 비비앙의 등을 직격했다. 아주 깔끔한 클린 히트였다. 불시에 홀드 주문을 맞은 비비앙은 우뚝 몸을 멈추었다. 아니 멈추는 것도 모자라, 관성의 힘을 이기지 못해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마치 굴렁쇠를 보는 기분이었다. “후부러버우부버버!” 괴상망측한 비명을 지르는 비비앙과, 그 옆을 쌩 지나치는 안솔. 아니, 도대체 왜 저렇게들 용을 쓰는 거지? 먼저 들어간다고 성공률이 높아지는 게 아닌데? “야! 안솔! 너 이러기야! 야, 야!” 결국 간신히 몸을 추스른 비비앙이 빽 소리를 질렀으나, 이미 안솔은 중앙 공간으로 쏙 들어간 뒤였다. 비비앙은 이를 북북 갈며 온갖 저주의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순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으나, 나는 참을 인을 되뇌며 비석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안솔은 경건히 무릎을 꿇은 상태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일단은 결과를 볼 생각이었다. “흠….” 처음 30초 정도는 꽤 잘 흘러가는 듯싶었다. 안솔의 얼굴에서 기분 좋아 보이는 웃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어서 추가로 30초의 시간이 흐르자, 안솔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생각보다 빠르다. 아무래도 이제 염원을 말하려는 것 같아 절로 침이 넘어가려는 찰나. 안솔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머리를 한 번 끄덕였다. 그때였다. 펑! 미약한 폭음이 홀을 울리고. “으에에엑?!” 그와 동시에, 양팔을 방방 휘두르는 안솔이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곧바로 바닥에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렀다. 쿠당탕탕! 정확히 비비앙의 옆에서 멈춘 안솔은 황급히 고개를 들어 앞을 응시했다. 나 또한 시선을 따라 중앙을 바라보자, 쉴 새 없이 깜빡깜빡 빨간빛을 비추고 있는 비석을 볼 수 있었다. 혹시 일이 잘못된 건가 싶어, 나는 바로 외쳤다. “헬레나! 이건 무슨 현상이지?” “그,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실패한 것 같기는 한데, 이런 반응은 저도 처음이라….” 헬레나도 잘 모르는지 더듬거리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나, 정작 범인이라 추정되는 안솔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일어날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나는 정말 진심을 말했는데?” “흥! 꼴 좋~다! 그러니까 마음을 곱게 써야지, 마음을.” “뭐, 뭐라고요? 그럼 언니는 뭐, 잘될 줄 알아요?” “에베베베? 안 들려~. 안 들려~.” 안솔에게 당했던 게 어지간히 분했던 걸까. 비비앙은 양쪽 귀를 꼭 막더니 깐족거림의 진수를 보여주며 안솔을 약 올렸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살랑살랑 안쪽으로 들어가버리자, 안솔은 입술을 꾹 깨물며 바닥을 세게 쳤다. 이윽고 비비앙은 가벼운 표정을 지우고, 근엄한 얼굴로 비석을 쳐다보았다. 이내 비장하게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며 나는 조용히 얼굴을 감싸 쥐었다. 문득 누군가 내 등을 토닥이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였다. 일단 일이 끝나면 두고 보자 마음먹으며,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고 있을 무렵. 펑! “꺄아아악!” 다시 한 번 폭음과 비명이 들려, 나는 다급히 시선을 들었다. 뭐지? 아직 30초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곧 안솔의 옆으로 처박히는 비비앙을 확인한 후, 나는 중앙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염원의 비석을 찾은 순간, 볼 수 있었다. 미친 듯이 빨간빛을 깜빡깜빡 비추는 염원의 비석을. 마치 그 모습이 화를 내는 것 같아 보여,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너희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 이년드으으으으을! 부르르 떨리는 음성이 주변을 웅웅 울리며 퍼져나갔다. 말투나 어조가 다르기는 했지만, 이건 분명히 가네샤의 음성이었다. 안솔과 비비앙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뜨끔한 얼굴로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나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가네샤의 분노한 음성이 다시금 홀을 쩌렁쩌렁 울렸다. - 보자 보자 하니까 자꾸 뭣 같은 것만 말하고 있고오오! 내가 그리도 우습게 보이더냐아아! ============================ 작품 후기 ============================ ㅇ<-<. 0462 / 0933 ---------------------------------------------- 이미 시작된 또 다른 전쟁. 가네샤의 분노 어린 음성이 홀에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안 그래도 복잡했던 머릿속이 한층 더 헝클어진 기분이다. 나는 지끈지끈한 이마를 꾹 눌렀다. 그리고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안솔, 비비앙. 지금 당장 무슨 염원을 빌었는지 말하도록.”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둘 다 살그머니 시선을 회피하고 있다. 저 모습들을 보자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가네샤가 분노한 원인이 저 둘에게 있다는 걸. 계속 기다려도 입을 열 기미가 보이지 않아, 나는 다그치는 투로 입을 열었다. “말 안 해?” 안솔과 비비앙은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다 쭈뼛쭈뼛 나를 쳐다보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 김수현 너무해. 왜 우리한테만 그래? 우리가 아닐 수도 있잖아….” “그, 그래요오. 그리고 설령 우리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각자의 염원은 비밀로 하기로 하셨잖아요오….” 아까 투닥투닥 싸우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안솔과 비비앙은 서로 쿵 짝을 맞추며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나는 이마를 매만지던 손을 오므려 머리칼을 꽉 움켰다. 하여간 저럴 때만 머리가 팽팽 돌아가지. “나는 별로 상관없는데?” 그때 유정이 붉은 머리를 사르르 흔들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목울대만 꼴깍꼴깍 움직이는 바보 콤비를 쳐다보더니, 문득 길게 늘어트린 머리칼을 양손으로 살며시 모아 올렸다. 오. 포니테일도 잘 어울리네. “그리고 아무리 비밀로 하기로 했다지만,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말을 해야지. 설마, 오빠 말을 안들을 셈이야?” 어느새 섬백을 꺼내든 유정은 중지에 끼어 빙글빙글 돌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밝히기 싫었는지, 안솔과 비비앙은 거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시, 싫어! 이건 엄연한 프라이버시라고! 그러는 너희도 안 밝혔잖아!” “마, 맞아요! 자꾸 이렇게 몰아붙이면 거짓말을 하겠어요!” 유정은 두 눈을 슬쩍 추켜올렸다. “그래? 그럼 말하면 되지 뭐. 나는 상용이 오빠 살려달라고 했어. 이제 됐어?” 그리고 코웃음을 침과 함께 시원스럽게 밝히자, 안솔과 비비앙은 멀거니 유정을 응시했다. 마치 이런 게 어디 있느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두 바보가 거듭 입을 열기도 전에, 한결과 신재룡이 동시에 목소리를 내었다. “어, 유정이 누나. 저도요. 저도 상용이 형을 살려달라고 빌었는데….” “허. 유정양. 저와 같은 염원을 비셨습니다?” 그렇다면 저 세 명은 똑같은 염원을 말했다는 건가? 그리고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잠시 후, 클랜원들은 한 명 한 명 자신이 빌었던 염원을 말하기 시작했다. 선유운은 이미 알고 있었고, 우정민은 원혜수의 정신을 되돌려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한나는 하나 남은 고대 무녀의 힘이 잠들어있는 장소를 물었다고 하고. 이윽고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전전긍긍해 보이는 차소림의 차례가 다가왔을 때였다. “시, 실은!” 이대로 가면 꼼짝없이 말해야 된다고 생각했는지, 두 바보 중 한 바보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도…. 나도 비슷한 염원을 빌었어…. 그…. 신상용을 살려달라고….” “저, 저도요. 실은 저도 그랬어요.” 비비앙이 말에 안솔이 재빠르게 추임새를 넣는다. 말끝을 흐린 걸로 보아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아주 경우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비비앙이야 신상용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클랜원이고, 안솔도 오랜 시간 동안 같이 지냈으니까. “그러면 다섯 명이 똑같은 소원을 말했다는 건데…. 계속 같은 소원을 빌어서 짜증을 부리는 건가?” “마, 맞아. 가네샤가 자꾸 뭣 같은 소원이라고 했잖아? 자꾸, 자꾸. 응? 그러니까, 결국에는 속 좁은 여신이라는 소리지. 가네샤가 잘못했네.” 뭔가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비비앙이 말하니까 묘하게 말이 되는 것 같다. 나는 머리를 갸웃하며 중앙의 비석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잠시나마 잠잠했던 비석이 재차 새빨간 불빛을 비추었고, 이내 가네샤의 분노한 음성이 허공을 떠르르 울렸다. - 뭐라? 누구를 살려달라 했다? 속 좁은 여신? 닥치거라 이년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느냐? 응? - 정말 뻔뻔스럽기 그지없구나! 네 년들은 분명! 이, 이, 이, 입에 담기도 망측한, 파렴치한 짓을…! “꺄아아악! 오라 피에르! 오라 퀘리타투스! 꺄아아아악!” “오라버니! 들으시면 안 돼요오옷! 으에에엑! 으에에에엑!” 순간 비비앙은 꽥꽥 소리를 지르며 이리저리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고, 안솔 역시 빽 소리를 지르더니 삽시간에 달려와 내 귀를 틀어막았다. 분명 망측한 이라는 말까지 들은 것 같은데, 나는 어안이 벙벙한 기분으로 안솔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한바탕 폭풍 같은 소동이 지나간 이후, 우리는 겨우겨우 염원을 비는 작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속 좁은 여신이라는 말이 걸렸을지도 모르겠으나, 가네샤는 분노했다고 해서 포탈을 닫는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아직 염원을 빌지 않은 클랜원은 두 명으로 한별과 허준영이 남은 상태였다. 그리고 둘 중에서, 먼저 들어가겠다고 한 클랜원은 바로 허준영이었다. 가네샤가 극심이 분노한 상태라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허준영은 애당초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중앙 공간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동안 무릎 꿇은 허준영을 보고 있다가, 나는 시선을 돌려 한별을 바라보았다. 어떤 염원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얼굴이 멍해 보인다. 그러다 문득 내 시선을 느꼈는지, 한별은 천천히 몸을 돌아 나와 마주했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별아. 부탁한다.” “…네?” 한별이는 눈을 살짝 떴다. 나는 구석에 쭈그러진 채 사이 좋게 고개를 파묻고 있는 두 바보를 가리켰다. “너는 저러지 말아다오.” “아…. 네.” 한별은 어설프게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하기야 한별이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해, 나는 입맛을 다시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때였다. 번쩍! 허준영의 몸이 스르르 미끄러지듯이 나오고, 동시에 비석이 환한 빛을 비추어 주변을 조명했다. 중앙 공간을 물들인 빛깔은 바로 노란색이었다. 성공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실패도 하지 않은 것이다. “오빠. 이제 제가 가볼게요.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응? 어어. 알겠다. 성공하길 바랄게.” 한별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허준영은 차분히 몸을 돌려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런 허준영의 양손에는, 가슴을 전부 가릴만한 크기의 불그스름한 상자 하나가 들려있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상자라 당연히 의문이 갈 수밖에 없었다. “후. 생각보다 무겁군.” “헤에…. 꽁꽁아. 이건 뭐야?” 이내 쿵 소리가 날 정도로 상자를 세게 내려놓자, 살금살금 다가온 비비앙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무래도 호기심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꽁꽁이라. 얼음을 표현한 단어인가? 그렇다면 확실히 어울리는데. 하지만 허준영의 반응은 냉담했다. “관심 꺼라. 파렴치녀.” “뭐, 뭐라고! 내가 왜! 아니라니까!” “음. 그럼 줄여서 치녀.” “아니라니까! 그리고 왜 봐준다는 듯이 말하는데!” 또다시 소란이 일어날 징조가 보여, 나는 아예 관심을 끄기로 작정했다. 조용히 시키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왜, 조금이라도 조용히 있지 않으면 혀에 가시가 돋나? 어느새 중앙 공간으로 들어간 한별은 천천히 무릎을 꿇는 중이었다. 이제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허공으로 사용자 정보 창을 띄웠다. 돌아가기 앞서, 우선 용의 권능부터 확인할 생각이었다. * - 염원을 말하라. 잔잔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딱딱히 굳어있는 음성이 공간을 웅웅 울렸다. 한별은 무릎을 꿇은 채 살며시 눈을 떠보았다. 하지만 신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예의 초록빛이 흐르는 비석만이 눈앞에 있을 뿐이었다. - 어서 말하지 않고 무엇을 하느냐. 염원을 빌기 싫은 것이더냐? “아니요. 지금 말씀 드릴게요. 그전에,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한별은 평소에도 눈치가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아직 가네샤의 분노가 완전히 풀리지 않은 듯 보이니, 시간을 끌수록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하여 한별은, 최대한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쓰며 지체 않고 입을 열었다. “가네샤 님. 염원이란 게,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도 말씀드릴 수 있는 거겠죠?” - 그거야 당연한 말. 그럼 너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염원을 말하겠다는 것이더냐? “네. 혹시 수현이 오빠…. 아니. 저희들 중에서, 이 비석에 처음 들어왔던 사내를 기억하세요?” - …뭐라? 설마 또? 한별은 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생각보다 가네샤의 반응이 이상해, 혹시 자신이 말을 잘못 꺼낸 건가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별의 말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가네샤의 반응이 곱지 않던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사실 처음만 해도, 가네샤는 굉장히 즐거운 기분을 느꼈다. 까마득할 정도의 신을 뵌 것도 그렇고, 첫 번째로 들어온 사내가 보여주는 재주도 매우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두 번째로 들어온 여인의 수줍으면서도 사심 없는 고백은, 가네샤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게 하였다. 그 후로 들어온 인간들의 염원은 딱히 재미있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적당한 염원들이었다. 지금껏 이곳에 들어온 인간들의 염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최소한 도리에는 벗어나지 않았다고나 할까. 그렇게 한 명씩 한 명씩 보냈을 무렵, 한 여인이 가네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지금은 멸망한 안젤루스 교단의 사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가네샤는 약간 사그라졌던 기대감이 다시 부푸는걸 느꼈다. 안젤루스 교단이 사제를 선발하는 방식은 매우 엄격하다. 천성이 선하고 욕심 없는 자들을 선발하고, 이후로도 극한에 가까운 기도와 수련을 통해 내면을 다스린다. 그렇게 혹독한 수련을 거치고 세상에 나선 사제들은, 거의 대부분이 성자나 성녀로 추앙을 받을 만큼 명성을 떨쳤다. 물론 사제치고는 아직 어린 듯 보였으나, 안솔이 '신님, 신님. 혹시 여기서 말한 염원이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는 건 아니겠지요?'라고 말할 때는, 자신도 모르게 엄마 미소를 지었던 가네샤였다. '여기 맨 처음 들어왔던 오라버니를 기억하실 거예요.' '호호. 그렇고말고. 당연히 기억하고 있단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이어진 안솔의 염원은 가네샤의 기대는 물론이요, 신의 정신까지 풍비박산을 내버렸다. '그럼요. 제가 원하는 건 간단해요. 저에게 말이에요. 오라버니와 언제 어디서라도, 한 침대에서 알몸으로 부둥켜안은 채 잘 수 있는 능력을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 능력을 평생 사용하고 싶어요.' '뭐, 뭐라고?' '네? 다시 말씀 드릴까요?' '아니, 아니. 지금 네 말인즉슨…. 설마 남녀의 육체적 관계를 말하는 것이더냐?' '네 맞아요! 섹스요 섹스!' '뭐, 뭐라? 이녀어어어언! 그 안젤루스의 사제라는 여인이 부끄러운지도 모르고오오오!' 가네샤는 극심한 분노를 터뜨리며 일말의 고민 없이 안솔을 날려버렸다. 이어서 가네샤가 차마 정신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다른 여인이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내 이름은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에스피니온 최고의 미녀 연금술사로써, 언어와 지혜의 신 가네샤에게 일생일대의 염원을 말하겠어.' 최고의 미녀는 차치하고서라도. 반말이 걸리기는 했으나, 가네샤는 애써 웃으며 비비앙을 맞이해주었다. 얼굴 표정이나 주변에 흐르는 기운이 사뭇 비장한 게, 뭔가 굉장히 중요한 염원을 말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비앙 또한 맨 처음 들어온 사내를 기억하느냐는 말을 꺼내자, 가네샤는 간신히 가라앉힌 불안감이 살아나는 걸 느꼈다. 바로 전의 안젤루스 사제와 똑같은 레퍼토리였기 때문이다. '그 사내는 나와 매우 중요한 약속을 했어. 하지만 아직 지키고 있지 않은 상태야.' '호. 약속이라. 다행이군.' '응?' '아니, 아니다. 그럼 그 약속이란 걸, 사내가 이행하기를 바라는 건가?' '그러면 좋겠지만, 아니. 약속은 내 스스로 받아내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오호라. 그래? 그럼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지? 어서 말해보거라.' 여기까지만 했어도 가네샤는 비비앙을 기특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어진 비비앙의 염원은 가네샤의 정신을 확인 사살함은 물론, 여태껏 억눌렀던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다. '내 엉덩이를 탐스럽게 만들어줘.' '…뭐?' '엉덩이 말이야, 엉덩이. 아까 말한 사내 있지? 그 사내가 내 엉덩이를 볼 때마다, 한 번쯤은 치지 않고 못 배길 정도로 탐스럽게 만들어 달라는 말이야. 찰싹찰싹! 이거 몰라?' '이, 이년들이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아아아!' 가네샤가 알아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비비앙은 시범을 보이려 엉덩이를 삐쭉 내민 채 손으로 착착 두드렸다. 그리고 가네샤는, 비로소 참았던 분노를 터뜨리며 비비앙마저 날려버리고 말았다. - 후. 조금 전을 떠올리자 다시금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으나, 가네샤는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바로 전의 사내와 생각보다 재미있는 거래를 해 약간 마음이 풀어진 것도 있었고, 눈앞의 여인은 아직 아무런 죄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아직이기는 했지만. - 좋다. 염원을 말하거라. 하지만 그 염원이 가당찮은 것이라 생각될 경우,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다. “…네?” 한별은 침을 꼴깍 삼켰다. 마지막 순번인 만큼 염원은 이미 생각해두었으나, 가네샤의 반응이 생각보다 까칠했던 탓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가당찮은 염원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한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아까 말씀 드렸던 사내…. 그러니까, 그분이 그냥 잘됐으면 좋겠어요.” - 흐응. 그냥 잘됐으면 좋겠다 라. 그 말은, 네가 말한 사내의 행운을 말하는 것이더냐. 가네샤의 해석에, 한별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그런 뜻은 아니에요.” - 그런 뜻이 아니다? 그럼 네가 말한 염원은 매우 광범위하다. 조금 더 구체화해서 말하도록. “구체화…. 알겠어요. 이따금 그분이 많이 힘들어하실 때가 있어요. 아무래도 체력적인 문제 같은데,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으니 저도 문제를 잘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좋으니 그분의 체력을 올려주실 수 없을까요?” - 그래? 그게 네 염원이라면, 불가하다. 그럼…. “왜요?” - ? 막 한별을 내보내려던 가네샤는 순간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흥미로운 기분으로 무릎 꿇은 한별을 내려다보았다. - 왜요 라. 염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제한은 이미 알고 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복을 못하겠다는 건가? “승복을 못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제한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납득할 수 없어요.” 어떻게 보면 한낱 인간치고는 매우 맹랑한 말이었다. 하지만 가네샤는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잔잔히 가라앉고 있었다. 한별의 소원이 가당찮은 게 아니었고, 무엇보다 눈빛이 도전적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언어와 지혜의 신인 자신을 상대로 담론이라도 해보자는 태도처럼 보였다. 그렇게 생각한 가네샤는 산산이 사그라졌던 흥미가 부쩍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 호호! 좋아. 그럼 납득을 시켜주지. 먼저 네게 묻겠다. 네가 그 사내가 잘되기를 바라는 이유는 무엇이냐? 아. 노파심에 말하건대,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할 생각을 말았으면 좋겠구나. 가네샤의 물음에 한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10초 후, 조용히 눈을 뜨며 말했다. “…그냥요.” - 그냥이라. 아니지, 아니야. 네가 말을 못하는 것 같으니 내가 맞춰보마. 너는 그 사내의 이야기를 할 때 태도나 감정이 무척이나 조심스럽단다. 또한 쌀쌀맞아 보이는 눈동자가 일순 애틋하게 변하기도 하더구나. 아마 사내에게 은혜를 입었거나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을 테지. 즉 좋아하거나, 사랑이라는 감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는 소리야. 그건 확실히 어여쁜 감정이 분명하나, 그렇기에 네 염원이 욕심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왜냐하면, 지금 네가 품은 감정은 일방행적일 테니까 말이다. “…….” - 호호. 말이 없구나. 이제 납득이 되었느냐? “아니요.” 그때였다. 곧바로 부정한 한별은 담담한 눈으로 비석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입술을 떼어 고요한 목소리로 반론을 시작했다. “그래요. 은혜를 입은 것도 맞고, 그분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도 부인하지 않겠어요.” - 그걸 인정하면 그 후의 말도 자연스레 인정하는…. “아니요. 거기까지만 인정하겠어요. 하지만 좋아하거나 사랑한다는 말씀은….” - 아니라고? 한별과 가네샤는 서로 한 번씩 말을 끊어내었다. 말을 하는 한별의 눈동자는 차가웠고, 비석의 초록빛 물결은 고고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 한치도 밀리지 않으며 말을 주고받던 찰나, 이어진 한별의 말에 가네샤는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아니요. 모르겠어요.” - …모른다? 약간은 멍하게 들리는 음성에, 한별은 침착히 머리를 끄덕였다. “네. 몰라요. 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누구를 사랑하기는커녕, 단 한 명도 좋아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저는 말씀하신 두 감정이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모르겠어요.” - …계속해보거라. “그리고 말씀하신 일방행적인 감정. 이건 맞아요. 제가 그분을 특별하게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분은 저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아니. 않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이 염원을 빌어서 그분과의 관계를 진전시키고 싶은 건 아니에요. 지금 제 말을 거짓말이라고 느끼고 계신가요?” - ……. 한별의 물음에 가네샤는 아무런 말도 못했다. 그것은 한별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방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별의 말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느낀 순간, 가네샤는 자신의 논지가 하나하나 논파되는 것을 느꼈다. “그분과 특별한 관계가 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이 염원을 빌어서 그분이 저를 돌아봐주는 것도 원하지 않고요. 그분이 힘들어할 때면 저도 심란하고, 혹시라도 쓰러질 때면 가슴이 아프고, 간혹 제 이름을 불러주고 웃어주실 때는 마음이 편안해요. 하지만 제가 그분이 잘되기를 바란 건, 그냥. 말 그대로 그냥. 그냥 잘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에요.” - …그냥이라. “네. 그냥이요. 사실 저도 제 감정을 모르겠어요. 어떻게 보면 비겁하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가네샤 님께서 말씀해주세요. 지금 제가 느끼는 감정이 좋아하거나 사랑한다는 감정이라면, 이대로 납득하고 물러나겠어요.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제 염원을 들어주세요.” -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확실히 너는 지금 네 감정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어…. 신기하구나. 타인의 행복을 바라면서, 자신과 연관 짓지 않는다니. 이건 아이가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도 보이기 힘든 감정이거늘. 아니. 오히려 완전한 타인이기에 가능한 일이던가. 가네샤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사실 지금 한별의 말은 헬레나의 말을 정확히 실천하고 있었다. 인간의 감정이란 야릇하고도 복잡하며 또한 미묘하다. 그리고 가네샤의 판단은 주관적이다. 한별은 이 판단 자체를 가네샤에게 넘겨 또 다른 해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한 번에 두 개의 염원을 말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가네샤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곧 어떤 것도 명확히 답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인간의 감정이란 하나의 정답으로 말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어떠한 상황에서 어떻게 변할지도 모른다. 특히나 어떠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고 있는 감정이라면, 끝에 이르러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에 신조차도 함부로 잣대를 내릴 수가 없었다. - 확실히 네가 말하는 염원은, 나조차도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 함부로 판단하기 어렵구나. 이건 확실히 욕심으로 연결된다고 보기는 어려워. 아니, 있다고 해도 최우선은 아니야. “네.” 한별이 수긍하자 가네샤는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 호호호. 아이야. 사실 나는 아직도 내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단다. 이렇게 말해줄 수는 있지. 지금 네가 느끼는 감정이, 앞서 말한 좋아하거나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걸 말이야. “그건 그래요.” - 허나, 그렇다고 네 말도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단다. 너는 그 사내를 위해 염원을 빌었으면서, 정말로 그 어떤 것도 바라고 있지 않으니까 말이다. 내게 네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을 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지. 결국 현재와 미래의 차이랄까…. 정말로, 참으로 애매하구나.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거냐는 말투에, 가네샤는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다 문득 바로 전의 사내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라, 곧바로 결정할 수 있었다. 이렇게 애매한 경우에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 아이야. 그럼 어디 나와 한 번, 거래를 해보지 않겠느냐? “거래요…?” 한별이 의아히 되물었다. 그러자 잠시 후, 한별이 서 있던 공간을 중심으로 약간이지만 장난기 어린 음성이 아련히 울려 퍼졌다. - 그래. 거래. 아니 선물이라고 해야 할까. 일단 네가 말한 염원은 적당한 선에서 들어주도록 하지. 그리고 네가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네가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일을 처리하마. 호호호. 어떻느냐? “…네?” 한별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편, 같은 시각. “아 정말 궁금하다고!” “꺼져라. 치녀.” “좀 알려주면 어때서!” “싫다.” 허준영이 가져온 상자를 둘러싼 소란 속에서, 김수현은 차분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무척 만족한 신음을 흘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으음. 지금 사용할 수 있는 게…. 폴리모프와 용족화라. 제한이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이거 정말 괜찮은데.” 이윽고 사용자 정보 창을 닫은 김수현은, 허준영이 가져온 불그스름한 상자를 응시했다. 김수현도 정확한 정체는 모르나, 상자를 감도는 기운이 종잡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불길한 상자처럼 보였고, 또 어떻게 보면 행운의 상자처럼 보였다. 김수현이 말했다. “허준영. 그게 뭔데 그래. 웬만하면 말해주지 그래.” “아아. 별거 아니야. 판도라의 상자라고 하더라고.” “판도라의 상자?” “그래. 원래는 카오스 미믹을 달라고 했었어. 너희들 말을 듣고 평소에 호기심이 있었거든. 그런데 가네샤가 애매하다고 하더니, 거래를 하자고 하더군. 그래서 받아온 게 이거야.” 꽤 상세히 설명하는 허준영을 보며 비비앙은 어이가 가출한듯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렇게 알려달라고 할 때는 안 알려주더니, 김수현이 물어보자 단박에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흠. 판도라의 상자라.” 약간 호기심이 생긴 김수현은 제 3의 눈을 활성화해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때였다. 번쩍! 비석에서 뿜어져 나온 노란빛이 홀을 물들였다. 김수현은 막 상자를 확인하려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려 중앙 공간을 응시했다. 중앙에는 이내 서서히 사그라지는 노란빛과, 스르르 미끄러지듯 나오는 한별이 있었다. 그런 한별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당황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이윽고 김수현과 한별이 서로 시선을 마주친 순간이었다. 『사용자 김수현을 위해, 사용자 김한별이 염원을 빌었습니다!』 『이브의 혈통에 대한 사용 조건이 갱신됩니다!』 김수현이 보는 허공으로 두 개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 작품 후기 ============================ ㅇ<-<. 0463 / 0933 ---------------------------------------------- 이미 시작된 또 다른 전쟁. 『이브의 혈통.』 4. 사용자 김한별의 염원에 따라, 가네샤의 힘으로 새로운 조건이 개방됐습니다. 새로운 조건이란, 바로 하락할 능력치의 지정입니다. 그러나 사용자 김수현에게 하락시킬 능력치를 지정할 선택권은 없으며, 가네샤의 뜻으로 이미 지정된 상태입니다. 네 번째 조건을 선택할 시, 사용자 김수현의 체력 능력치가 2포인트 감소하며 4포인트로 되돌아옵니다.(이 부분을 제외한 다른 조건은 모두 원래대로 적용됩니다.) 사용자 김한별의 Amor Nuntios : 이것은 사용자 김한별, 사용자 김수현만을 오롯이 생각해 말한 염원의 효과입니다. 지하 2층에서 나온 후, 나는 허공에 떠오른 메시지를 멍하니 응시했다. 이브의 혈통이 조건을 갱신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추가라고 해야 할까? 총 세 개만 있던 선택지가 네 개로 늘어난 것이다. 확실한 이득이다. 네 번째 조건을 발동하면 일단 체력 능력치가 90포인트로 하락한다. 하지만 하락한 2포인트는 곧바로 4포인트로 되돌아오며, 두 배로 변환된 포인트는 조건에 의해 91포인트 미만의 능력치를 올릴 수 있다. 이 말인즉슨, 조건에 걸리지 않는 체력 능력치를 다시 올릴 수 있다는 소리였다. 결국에는 94포인트까지 올릴 수 있으니 2포인트를 추가로 올리는 셈이었다. 그러나 이것뿐만이 아니다. 현재 남은 자유 능력치 포인트인 6포인트가 있다. 이 포인트를 추가로 올리면 결국 체력 능력치를 100포인트까지 올릴 수 있다. 즉 화정을 완전히 다룰 수 있는 101포인트까지는 아니더라도, 2차 각성을 이룰 수 있는 100포인트까지는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 아으으…. 야! 어디서 2포인트, 아니 1포인트라도 추가로 얻을 데 없어? 화정도 지금 이 상황이 못내 아쉬운지 아까부터 앓는 소리를 하는 중이었다. 2포인트 혹은 1포인트라.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곧바로 눈을 뜰 수 있었다. 추가 포인트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삽시간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강철 산맥. 강철 산맥을 공략하고 아틀란타에 들어간 사용자 전원에게는 1포인트만큼의 자유 능력치 포인트가 부여된다. 우선 이 방법만 하더라도 체력을 최소 101포인트 까지는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화정을 온전히 사용하는 게 이제 꿈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갑작스레 두근대는 가슴에 나는 하염없이 사용자 정보 창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그러면 우선 100포인트까지만이라도 올려볼까? - 아니. 지금 바로 올리지 마. 응? - 나중에 올려.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을, 조용한 장소에서. 아무튼 지금은 됐고, 일단은 얼른 그 강철 산맥이라는 곳으로 가자고. 어서! 아니. 왜 그래야 하는지 대충이라도 설명은 해줘야지. “오빠? 오빠?” “응?” 됐으니까, 얼른 강철 산맥이나 가라는 화정의 성화를 달래고 있는 찰나. 연이어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들자, 한창 사망한 사용자의 장비를 벗기고 있는 유정이 보였다.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어.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 혹시, 내 머리가 예쁘다는 생각? 히히히.” 유정은 말총 머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까불었다. 그래도 확실히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가벼이 머리를 끄덕였다. “응. 예쁘긴 하네. 그런데 진짜 왜 불렀어?” “…으응. 다른 건 아니고. 우리 이래도 되는가 싶어서.” “이래도 되느냐니?” “상관없다.” 되물은 순간, 바로 옆쪽에서 거의 동시에 대답이 날아들었다. 흘끗 시선을 돌려보자 품에 한 가득 장비를 안고 있는 우정민을 볼 수 있었다. 그 아래 늪지대에는 거의 나체와 다름없는 한 사용자가 누워있었는데, 역시나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우리가 이 유적을 공략했으니 당연히 이럴 권한도 있는 거야. 홀 플레인의 암묵적인 관행이나 다름없지. 안 그렇습니까 클랜 로드?” “아아…. 그렇지요. 이것 또한 하나의 성과로 볼 수 있으니까요.” 동의를 구하는듯한 우정민의 말에 나는 바로 수긍해주었다. 지하 2층을 마지막으로 용이 잠든 산맥의 공략은 거의 끝났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처리하거나 챙겨야 할 것들이 남아있는 관계로, 나는 이후 클랜원들을 세 조로 나누었다. 일단 나를 비롯한 첫 번째 조는 지하 1층에 남았다. 우리는 지하 2층에서 올라온 후 바로 지상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몇몇 깨어난 사용자들에게 상황 설명도 해주어야 했으며, 늪지대에 있는 사용자들의 장비도 온전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즉 사용자들이 생전에 착용했던 장비들을 벗겨 하나하나 챙기는 중이었다. 이것 또한 주요한 수입이 될 수 있고, 이따금 대박이 터지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리고 두 번째 조는 비비앙과 헬레나, 두 명으로 이루어진 조였다. 두 명은 지하 2층에 남겨두고 왔다. 왜냐하면 염원의 비석 때문이었다. 그것은 수천 년이 흘렀음에도 정상적으로 발동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니 이후에도 써먹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 나는 헬레나에 하나의 특명을 내렸다. 지하 2층을 엄중히 봉인하고, 혹시 모르니 발동에 필요한 중요한 장치가 있으면 하나만 가져오라고. 또한 조건만 맞으면 염원의 비석을 옮길 생각이라, 나는 비비앙에게도 하나의 지시를 내렸다. 비비앙은 이미 잠재적으로 마법 도시 마지아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만일 옮길 수만 있다면, 마법 도시 마지아만큼 잘 어울리는 장소는 없으리라. 마지막으로 세 번째 조는 모두 근력이 좋은 사용자들로, 안현을 비롯한 아직 깨어나지 못한 사용자들과 함께 지상으로 올려 보냈다. 또한 지상에는 아직 마그나카르타의 사체가 남아있어, 그것 또한 챙겨야 할 하나의 중요한 성과였다. 아까 잠들어있는 사용자를 업고 낑낑거리며 올라가는걸 확인했으니, 아마 지금쯤 한창 용의 사체를 해체 중일 것이다. 지하에 남은 클랜원들이 작업을 마치고 올라갈 즈음에는 해체 작업도 거의 마무리될 터. 그러면 바로 귀환 길에 오를 수 있다. “엇차.” 그래도 비교적 최근에 들어왔는지. 그나마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한 사내의 장비를 벗긴 후, 나는 굽혔던 허리를 들었다. 그리고 주변을 쭉 둘러보자 예닐곱 명의 클랜원이 열심히 사망한 사용자들을 벗기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눈에 보이는 사망자들 대부분이 거의 알몸과 다름없는 상태였다. 아마 한두 번만 왔다갔다하면 이 작업도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밀히 말해서, 이런 작업은 썩 유쾌하다고는 볼 수 없는 과정이었다. 사실 조금이나마 불쾌할 법도 한데, 하지만 어느 클랜원에게서도 그런 기색은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간간이 콧노래까지 들리는 게, 이제 곧 돌아간다는 생각에 들뜬 모양이다. 한 아름들은 장비를 추스르고 나서, 나는 바로 바깥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망한 사용자들이 거의 백 단위를 넘는 만큼 나오는 장비도 많았으나, 우리에게는 카오스 미믹이 있었다. 아빠, 엄마, 아기 카오스 미믹 등 가족 전부를 데려왔으니(?) 장비는 물론이요 용의 사체도 충분히 챙길 수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걷고 있자, 서서히 외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외곽에는 잠에서 깨어난 일부 사용자들이 멀거니 앉아있었고, 안솔 홀로 그들을 다독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약간 울룩불룩해진 아빠 카오스 미믹이 씩씩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이제 슬슬 엄마 카오스 미믹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며 걷는 찰나, 문득 한 클랜원이 눈에 밟혔다. “…….” 한별이었다. 마침 카오스 미믹에 다녀왔는지 손이 비어있다. 한동안 지그시 응시하다가, 나는 방향을 틀어 한별이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고맙다는 인사를 할 생각도 있거니와, 겸사겸사 어떻게 된 일인지 간단히 라도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별아?” 막 이름을 부른 찰나, 한별이 번쩍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나, 나…. …에요.” “응?” 그렇게 약 3초 정도 시선을 맞추고 있자, 한별이 별안간 휙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속삭이는 목소리로 뭐라 중얼거리더니, 이내 한쪽 방향으로 총총히 달아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삽시간에 멀어지는 한별을 보며 나는 어안이 벙벙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아니 왜 도망가? 무거운 갑옷을 포함한 장비를 가득 들고 있기는 했지만, 내 민첩 능력치는 98포인트. 한별도 민첩이 나쁜 수준은 아니었으나 나와 비교하면 아래를 한참 웃도는 수준이었다. 감히 어딜 도망가냐는 생각이 들어, 나는 지체 않고 빠르게 한별을 쫓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가 쫓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한별이 기함했다. “응…? 어? 오, 오빠?!” “응? 왜?” “가, 갑자기 왜 이러세요?!” “아니. 너야말로 왜 이래. 일단 거기 서봐.” 하지만 한별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속도를 높여, 이제는 거의 뛰는 걸음 수준이었다. 하여 그에 맞춰 나 또한 속도를 배로 높일 무렵. 슬슬 거리가 줄어든다 싶을 즈음, 나는 돌연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철퍼덕! “꺅!” 외마디 비명과 함께 한별이 시신에 걸려 넘어졌기 때문이다. 계속 달리느라 아래를 보지 못했는지, 한별은 미약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늪지대에 대자로 뻗고 말았다. “…헐.” 잠깐이지만, 침묵이 흘렀다. 한별은 쥐 죽은 듯 엎어져 있다가, 양손을 바닥에 짚어 차분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이윽고 나를 돌아보는 한별의 눈동자는 무척이나 그렁그렁했다. 입술을 꾹 깨문 채 원망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는 게,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뭔가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흑.” “…미안.” 나는 바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처음 목표했던 아빠 카오스 미믹이 있는 곳으로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아니 울기는 왜 울어.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 그로부터 약 1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우리는 사망한 사용자들의 장비를 전부 벗겨낼 수 있었다. 그리고 지하 2층을 담당한 헬레나에 작업 경과를 보고받은 후, 나는 곧바로 지상으로 올라갈 것을 지시했다. 이윽고 지상에 도착해 이동하자, 예상대로 거의 막바지에 이른 해체 작업을 볼 수 있었다. 참가한 클랜원들이 제법 신경을 쓴 모양이다. 두개골, 몸통, 날개는 하나하나 해체해 부위별로 예쁘게 쌓아놓은 상태였고, 하나 남은 꼬리도 끝자락만 남은 상태였다. 옆에서 한결이 건네주는 가방을 건네 받으며, 나는 살그머니 시선을 돌려보았다. 그러자 흐뭇한 얼굴로 해체 작업을 쳐다보는 헬레나 루 에이옌스를 볼 수 있었다. 한 번 슬쩍 주변을 둘러본 후,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사체를 보는 기분은 어때? 불쾌한가?” 헬레나는 언뜻 나를 돌아보더니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참 뼈도 잘생겼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오호. 별로 불쾌하지는 않은가 봐?” “별로? 어차피 대 영웅으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으니까요. 딱히 그런 마음은 들지 않으니, 부디 유용하게 사용해주시길.” “…그렇다면야.” 어깨를 으쓱이는 헬레나. 시원시원한 성격이라 다행이라 생각하며, 나는 가방 안을 뒤적거렸다. 아빠 카오스 미믹은 가득 찼으니 어쩔 수 없고, 남은 카오스 미믹을 꺼내야 한다. 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아 안쪽을 들여다보자, 한구석에 꼭 숨어있는 아기 카오스 미믹과 그런 새끼를 덮고 있는 어미가 보였다. 나는 별 고민 않고 아기 카오스 미믹을 꺼내 들었다. 아직 덜 여문 녀석이라 상자 입구를 찢는 맛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아기 카오스 미믹을 들어올리자, 새끼를 꼭 문 채 따라 올라오는 어미를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이 아이만큼은 안 된다고 애걸하는 것 같았으나, 나는 우악스럽게 어미를 떼어냈다. 이어서 아래로 시선을 내려보자, 오들오들 떨면서도 주둥이를 꼭 오므린 아기 카오스 미믹이 보였다. 나는 카오스 미믹의 양 주둥이 부분을 잡은 다음, 힘껏 힘을 주어 쫙 찢어버렸다. “삐엑!” 갑작스레 울린 비명에 놀랐는지, 클랜원들은 다들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곧 카오스 미믹을 확인한 듯 다들 머리를 끄덕끄덕하며 다시 작업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삐익…. 삐이익….” “시끄럽다 인마.” 퍽. “삐빅!” 서럽게 울어 젖히는 새끼에게 주먹을 먹인 후, 나는 용 뼈가 쌓인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수북이 쌓인 뼈 중 하나를 잡아, 주둥이 안으로 꾹 눌러 담으며 외쳤다. “자자. 이것만 챙기면 드디어 떠날 수 있습니다. 해체에 참가하지 않은 클랜원들은 저를 좀 도와주세요.” 그러자 클랜원들은 한 달음에 달려오더니 우루루 뼈를 집어 카오스 미믹 안으로 넣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얼른 떠나고 싶은 클랜원들도 있었는지, 급하게 욱여 넣는 손들도 간간이 볼 수 있었다. “삐엑엑…. 삐엑엑엑….” 그렇게 구슬프게 들려오는 흐느낌 속에서, 우리는 마지막 성과를 차분히 챙겨 넣을 수 있었다. 이제는 정말로 떠날 일만 남은 것이다. ============================ 작품 후기 ============================ 『443회 코멘트 결산(총 101표.).』 『캐릭터(이름) / 득표 / 순위 / 비고』 1. 한소영 / 16표 / 1위 / 2차 본선 진출. 2. 남다은 / 14표 / 2위 / 2차 본선 진출. 3. 비비앙 / 9표 / 3위 / 2차 본선 진출. 4. 차소림 / 9표 / 3위 / 2차 본선 진출. 5. 임한나 / 6표 / 5위 / 2차 본선 진출. 6. 김수현 / 5표 / 6위 / 2차 본선 진출 불가(사유 : 주인공에게 표가 쏠릴 수도 있습니다. 본 투표는 주인공을 제외한 캐릭터 중 어느 캐릭터가 가장 인기 있느냐를 알아보려는 목적을 갖고 있으며, 또한 주인공 일러스트는 어차피 완결 전에 한 번 의뢰할 계획입니다.). 7. 로유미 / 5표 / 6위 / 2차 본선 진출 불가(사유 : -_-). 8. 김유현 / 4표 / 8위 / 2차 본선 진출. 9. 세라프 / 4표 / 8위 / 2차 본선 진출 불가(사유 : 이미 일러스트가 존재합니다.). 10. 유미(유니콘) / 4표 / 8위 / 2차 본선 진출 불가(사유 : 이미 일러스트가 존재합니다.). * 11. 유현아 / 3표 / 12. 고연주 / 2표 / 13. 김한별 / 2표 / • / 2차 본선 자동 진출(사유 : 1차 투표 중 최하 득표 두 명 중 한 명.). 14. 로유진 / 2표 / • / 아 쫌. 15. 백한결 / 2표 / 16. 안현 / 2표 / 17. 연혜림 / 2표 / 18. 박다연 / 1표 / 19. 선유운 / 1표 / 20. 선율 / 1표 / 21. 신상용 / 1표 / 22. 신재룡 / 1표 / 23. 우정민 / 1표 / 24. 이만성 / 1표 / 25. 이유정 / 1표 / • / 2차 본선 자동 진출(사유 : 1차 투표 중 최하 득표 두 명 중 한 명.). 26. 정하연 / 1표 / 27. 허준영 / 1표 / * 『2차 캐릭터 투표 본선 진출 캐릭터.』 1. 김유현. 2. 김한별. 3. 남다은. 4. 비비앙. 5. 이유정. 6. 임한나. 7. 차소림. 8. 한소영. 투표는 아마 내일쯤 시작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혹시 각 캐릭터 옆에 캐릭터의 특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단어나 문장이 있다면, 추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단 대부분 생각해두었으나, 더 좋은 게 나오면 교체할 생각이거든요. 예를 들면 김유현 같은 경우는 동생 바보로 할 수 있겠지요. 하하하. 아. 메모라이즈 내에 나온 대사도 가능하고, 아니면 직접 창작하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다만 너무 길면 곤란해요. :D 0464 / 0933 ---------------------------------------------- 이미 시작된 또 다른 전쟁. 삐걱, 삐걱! “아앙….” 침대가 큰 물결을 이루며 출렁이자 한 여인의 달뜬 신음 또한 같이 흔들렸다. 거의 내동댕이친 것과 다름없는 수준이었으나 여인의 얼굴에서는 일말의 불쾌함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스스로 가슴 가리개를 벗어 살빛이 흐르는 젖가슴을 드러내고, 느릿하게 문지르며 누군가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여인의 눈빛은 한없이 끈적끈적해져, 흡사 사내의 그것을 갈구하는 창녀의 눈빛과도 같았다. “헉…. 헉….” 이내 거친 숨을 내뱉는 사내가 내부를 가리는 커튼을 찢듯이 헤집으며 침대에 올라섰다. 여인을 내려다보는 사내의 눈빛도 만만치는 않다. 발갛게 충혈된 눈이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어, 마치 발정기의 짐승과도 같은 눈동자였다. 잠시 후, 여인의 붉은 혀가 입술을 살짝 적시는 순간 실낱같이 이어지던 사내의 이성이 툭 끊어졌다. 사내의 몸이 허물어지듯 무너져 여인의 몸을 덮어버리고, 동시에 여인의 손이 부드러이 사내의 등을 휘감는다. 이윽고 여인의 손이 탄탄한 등을 스치듯 쓸어 내린 찰나, 희고 고운 목을 빨아들이던 사내의 입에서 한 줄기 불길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을 기점으로, 불은 삽시간에 타올라 침대를 뜨겁고 격렬하게 달구기 시작했다. 뜨거운 불에 녹아 내린 사내와 여인은 서로 엉겨 붙어 정신 없이 서로를 탐했다. 약을 마신 걸까, 술에 취한 걸까, 아니면 열정에 빠진 걸까. 사내가 조금도 배려 않고 저돌적으로 들이 받고 있었으나, 여인은 얼굴에는 환희 어린 기색이 서려있었다. 오히려 사내의 몸을 미친 듯이 끌어안으며 깔깔 웃음을 터뜨리자, 사내는 짐승이 우는 소리를 내어 화답했다. 여인의 웃음이 간드러진 교성으로 변한 건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또다시 시간이 흘러 교성은 흐느끼는듯한 신음으로 변화했다. 이윽고 사내와 여인이 함께 울부짖으며 합창을 노래할 즈음. 어느 순간 사내의 몸이 우뚝 멈추더니 부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그러자 여인의 숨 넘어가는 소리가 새어나오며, 폭풍처럼 이어지던 정사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침대를 두르는 하얀 망사 커튼 너머로, 헐떡거리는 사내와 몸을 움찔거리면서 가쁘게 숨을 몰아 쉬는 여인이 비쳤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해가 하늘 한가운데에 떠 있었는데, 어느새 창틀에는 옅은 노을이 내려앉은 상태였다. 사내가 멍한 눈으로 창밖을 쳐다보자 여인은 배시시 웃으며 사내의 입가에 무언가를 꽂아주었다. 연초였다. 이내 손수 불까지 붙여주는 탓에 사내는 피식 웃으며 연초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후…. 희선아. 아무래도 이것만 피고 가봐야겠다. 생각보다 너무 오래있었어.” 사내의 무심한 말에 생글생글한 여인, 아니 희선의 얼굴에 일견 서운한 기색이 감돌았다. “벌써 가게요?” “벌써라니. 시간이 얼마나 많이 지났는데…. 서로 오래 자리 비워봤자 좋을 거 없잖아.” “나는 언니한테 오늘 못 들어온다고 말하고 나왔는데….” “너야 조금 예쁨 받는 클랜원에 불과하고. 나는 아니거든. 당장 돌아가서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야, 산더미.” 사내의 말은 언뜻 깔보는 어조가 깔려있었으나, 애초 그런 말투인지 희선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는지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번 일만 끝나면 여유 생긴다고 했으면서….” “흐흐. 여유가 생겼으니까 이 짓거리도 하는 거 아니겠냐.” 사내는 유들유들하게 대꾸한 후 연초를 가볍게 튕기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다가, 문득 말끔한 이마를 문지르며 희선을 돌아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머셔너리 놈들이 산맥으로 들어간 지 며칠이나 지났지?” “음~. 한 달하고도 이 주? 삼 주? 그 정도 지났을 거예요. 조금 있으면 두 달이 되니까, 거의 실종이나 다름없죠? 여태껏 아무 연락도 없으니까요.” “두 달이 다 돼간다 라…. 모니카 쪽에서 따로 행동은 없고?” “조용해요. 무슨 명령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요새는 거의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중이에요.” 희선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일순간 사내의 입가에 비웃음이 지어졌다. 이내 목 부분을 차분히 다듬는 사내를 보며 희선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혁이 오빠. 우리…. 정말로 괜찮을까요?” “응? 괜찮으냐니? 그게 무슨 소리지?” “그렇잖아요. 머셔너리 쪽이 그렇게 만만한 클랜도 아니고. 특히 그림자 여왕의 정보 수집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고 들었어요.” “아하, 그림자 여왕이라. 확실히 무서운 사용자지. 나는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5, 6년 전만 해도 살문에서 밥 먹듯이 사람 죽이던 년인데, 그렇게 변했다는 게 정말로 놀랍거든. 뭐,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지만 말이야. 하하하.” 혁이라 불린 사내는 한껏 여유롭게 웃어 젖혔다. 그러나 희선은 혁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전보다 약간 높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빠. 나 지금 웃자고 하는 소리 아니에요. 이러다가 그들이 혹시라도 산맥에서 돌아오면 어떡하실 거예요?” “아 왜 그래. 머셔너리고 그림자 여왕이고, 아직 산맥에 있잖아.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확인했고. 그리고 설령 돌아와도. 놈들이 뭐, 어찌할 건데? 증거는 모두 없앴고 꼬리 자를 준비도 해놨잖아?” “그래요. 그렇긴 하죠. 하지만 불안해서 그래요, 불안해서. 이것뿐만이 아니잖아요. 지금 수 클랜 쪽에서도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요. 지금 내부 투쟁만해도 버거운데….” “누가 버겁다 그래?” 한순간 혁의 날 선 반문에 희선은 움찔 몸을 움츠렸다. 눈동자는 부르르 떨리고 이불을 꽉 쥐고 있는 게 겁에 질린듯한 태도였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희선을 지그시 노려보던 혁의 시선이 서서히 누그러졌다. 그러더니 침착히 다가가 희선의 머리를 천천히 쓸어 내렸다. “희선아. 이왕 벌어진 일이다. 응? 다음 주 선발 회의가 끝나면, 한달 후에는 현재 서부에 임시로 있는 대표 클랜들이 물러나. 무슨 말인지 알겠어? 지금은 걱정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가 더 중요하다고.” “…….” “그리고 너는 아무 걱정 안 해도 돼. 아니 하지 마. 생각해봐. 산맥까지 왔다 갔다 하는 데만 두 달이야. 그리고 내부 회의 및 투표는 다음 주고. 그런데, 기껏해야 일이 주잖아. 설마 별일이라도 일어나겠어?” “…그래도.” “그래도 는 무슨 그래도. 아니면 너. 설마 죄책감이라도 느끼고 있는 거냐?” “그건 아니에요.” 희선을 고개를 저으며 곧바로 대답했다. 이제야 조금 괜찮아졌는지 혁은 조용히 웃으며 손을 떼었다. 희선을 슬쩍 혁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혁이 말했다. “원래 이런 세상이야…. 그리고 명심해. 먼저 싸움을 걸어온 쪽은 우리가 아니라, 머셔너리 클랜이야. 하지만 증거가 없어서 우리는 아무 말도 못 했고. 이번 사건은 서부 도시 때문이기도 하지만, 겸사겸사 똑같이 되받아 쳐주는 거라고. 알아들어?” “네. 알겠어요…. 그나저나, 그놈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그놈? 아아. 이미 내 손아귀에 있지. 아마 지금쯤 수 클랜 쪽에서 잘 지내고 있을 거다. 뭐 일단은 나한테도 도움이 되니까 모른 척을 한 거지…. 그런데 너 오늘따라 정말 이상하다. 벌써 1년이 지난 일인데, 왜 갑자기 지금 꺼내?” “불안…. 그냥 조심하라고요. 베.” 희선은 진중히 말을 잇다가 갑자기 활짝 미소 지으며 혀를 쏙 내밀었다. 혁은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려 보이더니 휙 몸을 돌려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문을 열려는 찰나, 별안간 희선을 돌아본 혁은 왼손을 살며시 들어올려 꾹 쥐어 보였다. “걱정 붙들어 매라고. 네가 그렇게 걱정하는 머셔너리 클랜이나 수 클랜이나. 지금은 다 내 손안에 있어. 그러니까, 너는 네 클랜 일이나 잘 처리해. 그년한테 잘 좀 말해달라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혁은 지체 않고 문을 열고 나섰다. 탕. 이내 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와 함께, 아직 정사의 열풍과 연초의 향기가 흐릿하게나마 남아있는 방에 희선 홀로 남게 되었다. 이윽고 희선이 얼굴에 지어져 있던 미소가 천천히 사그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희선의 얼굴에 처음 말을 꺼낼 때처럼 자못 걱정하는 낯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여인의 직감이라고나 할까? 혁의 호언장담을 들었음에도, 뭔가 굉장히 불안해하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문을 응시하던 희선은, 곧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 하늘이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다. 중천에 올랐던 해는 이제 서서히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고, 밝은 햇살을 머금던 잎에는 저녁 노을의 어스름함이 살금살금 스며들고 있었다. 걸음을 약간 늦추며 주변을 둘러보자 여전히 우거진 수풀과 무성한 나무들이 보였다. 하지만 들어올 때처럼 음침한 풍경은 아니었다. 자욱한 안개가 사라졌고 망인들의 낌새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한 줄기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 황혼이 내려앉은 수풀이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다. 나갈 때의 용이 잠든 산맥의 풍경은 가히 환상적이라 봐도 좋을 만큼 아름다웠다. “젠장. 이 빌어먹을 천둥벌거숭이 자식.” 문득 들려온 투덜거림에 시선을 돌리자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허준영이 보였다. 허준영의 등에는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잠들어있는 안현이 업혀있었다. 허준영은 요새를 나올 때부터 지금까지 쭉 안현을 업고 온 상태였다. 아마 조금 전 웅얼거림은 몸이 힘들다기보다 애당초 안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 데서 비롯된 투덜거림이리라. “어이, 김수현.” “왜.” “유적을 나온 후에, 우리가 구출한 사용자들이 꽤 많이 깨어났다고 들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안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지.” “그래. 그렇지. 그러면 궁금하지 않나? 지금 이놈이 깨어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못하는 건지 말이야. 가장 최근에 들어왔다는 놈이 가장 늦게 깨어나는 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군.” “…그러니까, 자는 척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허준영의 말에 나는 싱겁게 웃었다. 그럴 가능성이 없었던 탓이다. 안현이 정말로 잠든 척을 하고 있다면 나는 물론이고 허준영에게도 진작에 걸렸을 터. 아직까지 깨어나지 못하는 게 약간 걱정스럽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안현을 제외한 다른 사용자들이 모두 깨어난 것도 아니었다. 또한 제 3의 눈으로 확인했을 때 큰 이상이 없었으니, 어느 정도는 마음을 놓고 있었다. 어느덧 주변에 빽빽했던 수풀이 조금이나마 사그라지고 드문드문 너른 공터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 곧 있으면 완전히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들 것이다. 마침 장소도 좋겠다, 이제 슬슬 야영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살며시 몸을 돌아보았다. 나를 따라오는 클랜원들과 그리고 클랜원들을 따라오는 깨어난 사용자들. 물론 아직 깨어나지 못한 사용자는 일부 클랜원들에게 업혀있는 상태였다. 비비앙과 헬레나는 무얼 그리 열심히 얘기하는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고, 다은과 한나는 서로 속닥이며 킥킥 웃는 중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주저 않고 불호령을 내렸겠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유적을 나온 이후 며칠이 흘렀음에도 망인이 단 한 번도 출현하지 않아 이미 청소됐다 잠정 결론을 내렸으며, 서로 떠드는 와중에도 간간이 주변을 훑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내 시선을 느낀 걸까. 문득 나를 돌아본 다은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리고 눈을 빠르게 깜빡이더니 백옥 같은 검지를 고운 입술에 대어 살살 문지르기 시작한다. 이내 입안으로 검지를 쏙 집어넣은 다은은 목울대를 꼴깍 움직이며 매혹적인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쓰게 웃었다. 다은의 저 행동은 일종의 신호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이 지금 무척이나 고픈(?) 상태니 오늘 밤 같이 놀자는 소리랄까. 연신 간절한 눈초리를 보내는 다은을 나는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주변 장소를 한 번 더 둘러보고 나서, 바로 걸음을 멈춘 후 높여 외쳤다. “모두 정지! 행군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 야영은 이 장소에서 할 생각이오니 다들 바로 준비해주세요.” 클랜원들 또한 슬슬 야영할 때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지시를 내리자마자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내 한 명씩 업고 있던 클랜원들은 조금은 지친듯한 얼굴로 사용자들을 한쪽에 내려놓았다. 풀썩! “이 빌어먹을 천둥벌거숭이.” 허준영은 안현을 거칠게 내려놓고는 분이 오른 얼굴로 발길질을 했다. 세게 찬 거는 아니고, 툭 건드린 정도였다. 그리고 몸을 빙글 돌리더니 나와 눈을 마주치곤 움찔했다. 나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차는 건 좋은데, 안 걸리게 차라.” “…새겨듣도록 하지.” 그렇게, 허준영이 떨떠름해하는 얼굴이 꽤 재미있어 조용히 웃고 있을 즈음이었다. “클랜 로드!” 문득 등 뒤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신재룡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클랜 로드. 지금 야영석을 깔고 식사 준비를 하는 중입니다. 하는 김에 겸사겸사 공지를 하려고 하는데, 오늘 불침번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제와 똑같이 하실 겁니까?” 나는 머리를 끄덕이려다가, 돌연 한별이 생각이 떠올라 바로 가로저었다. “아니요. 이 지역은 이제 괴물이 출현하지 않는 것 같으니 조금은 풀어도 괜찮을 것 같네요. 4인 1조에서 2인 1조로 바꾸도록 하지요. 조원이나 순번은 식사 후에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본 신재룡은 한 걸음 더 다가와 속삭이듯이 말을 이었다. “의뢰인들에게는 제가 따로 말을 해놨습니다.” “음? 말이라뇨?” “안현군과 한결이와 같이 갔던 의뢰인들 말입니다…. 이제 슬슬 사정 파악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정 파악이라….” 사정 파악. 나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상념에 잠겼다. 사실 이미 어느 정도 사정은 파악한 상태였다. 물론 의뢰인들이 깨어나기는 했으나, 김수정이나 한결이보다 더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결에게 전후 사정을 들은 결과, 이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는 생각을 굳혔기 때문이다. 하기야 언제까지 공략을 완료했다는 사실에 기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크게 보면 결국 유적 하나 얻은 사실에 불과하니까. 그러니 이제는 슬슬 시선을 돌릴 때도 됐다. 물론 결과적으로 용이 잠든 산맥은 완전히 공략하기는 했다. 보상도 엄청나고, 사용자들도 구출했으며, 고질적으로 시달리던 체력 문제의 해결에 엄청난 진전을 가져왔다. 즉 모든 게 좋아졌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넘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사실 도대체 어느 개 자식이, 무슨 이유로 우리 클랜에 이딴 짓거리를 벌이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도시로 돌아가 하나하나 꼬리를 잡고, 끝에 걸리는 그 순간…. 음지 전쟁. 문득 떠오른 순간 절로 웃음이 나왔다. 분명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인데, 그냥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벌써 상대를 조여 들어갈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웃고 만 모양이다. 아니면, 1회 차 때 음지에서 살았던 나 자신을 떠올렸거나. “크, 클랜 로드? 괘, 괜찮으십니까?” 말을 더듬는 소리에 눈을 뜨자, 왜인지 주춤 물러나는 신재룡이 보였다. 입이 살짝 벌어져 있고 목울대는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다. 나는 재빠르게 얼굴을 매만졌다. “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깐 생각하느라…. 아무튼 잘 알겠습니다. 그 사용자들과는 제가 따로 이야기를 나눠볼 테니, 사용자 신재룡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 “그럼 이만 가보십시오. 아…. 한별이한테는 오늘 저와 함께 초번을 설 준비를 하라고 일러주시고요.” “…알겠습니다.” 머리를 꾸벅 숙인 신재룡은 이내 침착히 몸을 돌려 자신이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마 머리가 꽤 돌아가는 사용자인 만큼 방금 내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을 것이다. 앞으로 시작될 무대에, 신재룡은 어울리지 않는 사용자였다. 천천히 걸어가는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나는 품속에서 연초 한 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이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진한 붉은빛이 흐르는 석양 속으로, 한 줄기 흐릿한 연기가 서서히 피어올랐다. ============================ 작품 후기 ============================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이네요. 이 파트를 완료하고 약간 안정하면, 이제 강철 산맥으로 들어가야겠지요. 그리고 악마들이 출현하고, 투닥투닥하고, 강철 산맥을 완료하면…. 그때부터는 서서히 완결이 눈에 보일 것 같네요. 하하하. 이번 파트도 초반부에는 아리송한 부분이 있으실 겁니다. 이게 누구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이렇게 느끼실 수 있습니다. 용이 잠든 산맥도 초반에 비슷한 반응이 나왔지요. 그리고 후반부로 가면서 하나하나 해답으로 풀어냈고요. 음지 전쟁 편도 비슷합니다. 지금 아리송한 부분은 이 파트에서 활용되는 복선으로 보시면 되며, 추후 몇 번 언급되며 모두 설명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생각보다 스케일은 큽니다. 단순히 범인 몇 명만 때려서 잡는 건 금방 끝나고, 재미도 없을 것 같아서요. 하하하. PS. 캐릭터 투표 때 사용할 대사 짜는 것 좀 도와주세요. 한소영, 한나가 막히네요. ㅜ.ㅠ 0465 / 0933 ---------------------------------------------- 이미 시작된 또 다른 전쟁. 밤이 깊었다. 하늘은 어두컴컴한 색으로 칠해져 있었으나, 아스라이 떠 있는 보름달이 야영지 주변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찌르르. 찌르르. 타닥! 타닥타닥! 나지막이 들려오는 풀벌레 우는 소리, 모닥불 불똥 튀기는 소리. 가만히 그 소리들을 듣고 있다, 나는 물고 있던 연초를 빼어 모닥불 쪽으로 튕겼다. 무언가 불에 사그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여전히 하늘을 보고 있었다. 딱히 사막에 흐르는 고즈넉함을 타려는 건 아니었다. 밤하늘을 수놓은 무수한 별들이 무척 아름답게 보이기도 했거니와, 이렇게 계속 보고 있으면 머릿속이 잔잔해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동안 하늘을 보고 있다가 나는 천천히 옆을 더듬었다. 가칠가칠한 기록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것을 눈앞으로 집어 들자, 한쪽 면이 모닥불 빛으로 발갛게 익은 그림이 그려진 기록이 보였다. 지도였다. 나는 재빠르게 지도를 훑었다. 용이 잠든 산맥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우리는 붉은 사막, 자석의 황야, 질척거리는 늪지대를 거쳐 산맥으로 들어가는 길을 선택했다. 돌아오는 길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 우리가 야영하는 장소는 붉은 사막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일주일을 거쳐 용이 잠든 산맥을 나올 수 있었고, 이후 삼 주라는 시간이 지나 이 붉은 사막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말인즉슨, 이제 도시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오빠? 안 주무세요?” 그때였다. 사막 지대에 누워 지도를 보고 있던 도중 별안간 한별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마침 남은 거리를 가늠하는 것도 마쳤던 터라, 나는 차분히 지도를 접어 품에 넣었다. 그러자 눈앞으로 하늘을 일부 가리는 한별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 자야지.” 나는 곧바로 상반신을 일으켰다. 이어서 완전히 일어서려는 찰나 순간 스쳐 지나간 생각에 얼굴을 찌푸렸다. 이윽고 시선을 돌려 바라보자 움찔하며 몇 걸음 물러서는 한별이 보였다. “그런데 너는 안자니? 오늘 초번은 비비앙과 차소림일 텐데.” “…소림이 언니랑 바꾸기로 했어요.” “또? 너 오늘 나랑 말번으로 서기로 했잖아. 그런데 왜 또 바꾼 거야?” “그냥…. 요….” 한별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렇게까지 얘기하니 찔리는 건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계속 따질 마음은 들지 않아, 나는 그저 한숨만 내뱉으며 마저 몸을 일으켰다. 사실 한별이가 잘못한 건 아니었다. 한별이는 자신의 소중한 기회를 사용해 내 체력 문제를 일부 해소해주었다. 나로서는 한없이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그래서 둘이서 대화를 해보고 싶었다. 정말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고, 또 왜 그런 염원을 빌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래. 단지 그러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한별이는 그러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평소에는 나를 똑같이 대했으나 염원 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어김없이 피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혹시 다른 클랜원이 엿들을까 봐 그러나 싶어, 불침번을 2인 1조로 바꾸고 나와 같은 조로 배정해,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마련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한별은 불침번을 몰래 바꿈으로써 나와의 자리를 회피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산맥부터 지금까지 쭉. 물론 그렇다고 아주 이야기를 못 나눈 것도 아니었다. 참다 참다못해 억지로 끌고 가서 염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도 있으니까. 그러나 그 한 번의 대화도 별로 소득 없는 상태로 끝나고 말았다. 일단 하고 싶었던 말은 모두 한 것 같다. 덕분에 이브의 혈통에 새로운 선택지가 생겼다. 그 선택지는 여타 불확실한 선택지들보다 훨씬 안전하고 효율적이다. 그러므로 사용자 정보의 체력이 상승할 여지가 생겼고, 그래서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 등등. 허나 한별의 반응은 실로 애매했다. 고맙다는 말은 그냥 저냥 알아들은 것 같은데, 가네샤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튼 상황이 이쯤 되자 나도 어느 정도는 포기한 상태였다. 한별이 자꾸만 묵비권을 행사하니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다. 거기다 애당초 염원을 묻지 않겠다고 말해 놓은 게 있는 터라, 억지로 다그쳐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럼에도 오늘 자리를 마련하려 한 것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이제 곧 도시로 들어가게 되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다. 구구절절이 나열할 것도 없이 내 손이 필요한 굵직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 만큼 마지막으로 한별의 진심을 확인해보고 싶었는데, 아직 나와 마음을 터놓을 정도로 관계가 발전한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돌연히 몸이 찌뿌듯한 걸 느껴 있는 힘껏 기지개를 켰다. 그러다 문득 쓰게 웃고 말았다. 스스로 여성에 대한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했으나, 이럴 때 여성의 마음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한껏 올린 두 팔을 내린 후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참…. 너랑 얘기 한 번 하는 거 힘들다.” “오, 오빠. 그런 게 아니라….” “괜찮아. 그냥 말 못할 사정이 있다고 생각할게. 아무튼 이만 가볼 테니까…. 나중에 생각이 정리되면, 그때 이야기하자.” “…네.” 한별의 자그마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몸을 돌려 차분히 걸었다. 그렇게 서서히 야영지를 벗어날 무렵. 마침 초번을 설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하품을 하며 걸어 나오는 비비앙이 보였다. 비비앙은 입을 펑펑 두드리다가 나와 마주치자마자 눈을 크게 떠 보였다. “어? 기우여? 어오…. 음냐음냐. 너도 오늘 초번이야?” “…아니. 나는 말번이다. 이제 그만 자려고.” “아하…. 그런데 왜 이쪽으로 와? 침낭은 저쪽에 있는데.” “자기 전에 볼 일 좀 보려고.” 오른쪽 방향을 가리키던 비비앙은 이내 커다랗게 하품하며 머리를 끄덕끄덕 주억였다. 볼 일을 보러 간다는 말을 아마 생리 현상을 해결한다는 말로 이해한 듯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생리 현상을 해결하러 가는 게 아니라, 정말로 볼 일을 보러 간다는 소리였다. 절대 졸면 안 된다는 엄중한 주의를 준 후에, 나는 호언장담하는 비비앙을 두고 야영지 밖으로 벗어났다. 용이 잠든 산맥에서 붉은 사막으로 오기까지, 할 수 있는 선에서 사정 파악은 모두 한 것 같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지금 할 수 있는 선으로써, 한결이와 깨어난 의뢰인들을 삼자대면 시킨 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내가 처음 했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아주 진전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한 가지 새로 알아낸 사실이 있는데, 바로 김수정에게 의뢰 비용을 지불한 사용자의 정체였다. 이름은 송희선. 현대에서는 연기자 출신으로 2년 전 홀 플레인으로 넘어온 사용자. 외모는 반반하나 능력치는 크게 보잘것없다. 하지만 송희선은 사용자 아카데미 수료 후 남부 자유 연합에 소속한 클랜에 오퍼를 받았다. 해당 클랜의 클랜 로드가 송희선과 아는 사이인데, 현대에서 똑같은 연기자를 했다고 한다. “이쯤이면 된 것 같은데.” 어느덧 야영지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떨어뜨린 상태였다. 저기 멀리서 발간 불빛을 비추는 장소를 보다가, 나는 품으로 손을 넣었다. 이내 조막만 한 크기의 동글동글한 게 만져져, 나는 이만 생각을 정리하고 잡힌 구슬을 꺼내 들었다. 꺼낸 구슬의 정체는 통신용 수정구였다. 그러나 반들반들한 빛이 흐르는 여타 수정구와는 달리, 눈앞의 수정구는 거무칙칙한 빛을 띠고 있었다. 수정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늦은 밤이기는 했지만 이제 통신을 받을 자들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는 자들이다. 즉 홀 플레인의 음지에서 활동하는 자들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용이 잠든 산맥에 들어가기 전 고연주에게 지시를 내리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연주에게만 전적으로 의지할 수는 없다. 이제 곧 도시로 들어가게 되면 나 또한 나름대로 행동할 계획이라, 이건 그 나름의 행동을 위한 첫 번째 걸음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주저 않고 수정구에 마력을 밀어 넣었다. 츠츳! 츠츠츳! 수정구가 밝게 달아오르며 거슬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노이즈가 차차 잦아들며 누군가 불쑥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수정구는 여전히 검은색 일색이다. 말인즉슨 지금 나타난 사용자 또한 온몸에 검은색을 두르고 있다는 소리였다. “오랜만이네.” (…설마 머셔너리 로드께서 연락을 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낮게 깔린 목소리였으나 음색은 무척이나 거칠었다. 흡사 쇠를 긁는듯한 음성이었다. 아무튼 확실히 통신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 나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왜? 나라고 연락하지 말라는 법이 있나?” (그런 뜻이 아니라, 서로 더는 연락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였습니다. 머셔너리 로드와 우리의 관계는, 우리 쪽에서 그림자 여왕을 놓아준 것으로 정리된 게 아니었습니까.) 그림자 여왕을 놓아준 것으로 정리됐다 라. 나는 1년 전에 있었던 사건을 떠올렸다. 그리고 피식 웃으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지, 아니야. 고연주는 이미 3년 전에 제 발로 걸어 나온 상태야. 아닌가? 그리고…. 너희들 나한테 목숨 빚도 있지 않나?” (목숨 빚이요?) “그래 목숨 빚. 내 기억에는…. 그때 고연주의 부탁으로, 너희를 깡그리 몰살시키지 않고 일부 살려준 걸로 기억하는데. 그래서 이렇게 통신망도 개통했잖아. 너도 아직 가지고 있는 걸 보면….” (하. 그 학살을 빚이라고…? 그리고 머셔너리 로드가 말하는 빚은 이미 갚았다고 생각하니 더는 할 말이 없군요. 이 수정구는 오늘 부로 폐기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사내가 말을 끊고 들어오자 갑자기 한없이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이내 사내가 통신을 끊기 직전,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끊으면….” (……?) “…죽는다.” (…….) 그러자 수정구에 비친 검은 사내는 행동을 멈춤과 동시에 일순간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사내는 말을 잇지는 않았으나, 수정구가 약간 일그러진 걸로 보아 입을 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사내를 지그시 노려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희가 아무리 꽁꽁 숨어있다고 해도, 내가 못 찾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끊어도 되고.” 그리고. (…용건이 뭡니까.) 마침내 들려온 사내의 말에, 나는 비로소 살며시 웃음 지을 수 있었다. * 깊은 밤, 야영지 부근. “보석아. 그러니까 내 말 좀 들어봐. 내 생각에는 말이야….” “…….” “아차. 그나저나 안현은 정말로 걱정이네.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그런데 곧 있으면 도시에 도착하잖아? 그러면 김수현도 엄청 오랜만에 공식 석상으로 돌아오는 건데…. 보석이는 어떻게 생각해? 과연 앞으로 어떻게 될까?” “…….” 쉴 틈 없이, 다양한 화제로 말을 잇는 비비앙을 보며 한별은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을 느꼈다. 가뜩이나 머릿속이 복잡해 죽겠는데, 쉬지 않고 나불나불 떠들자 이제는 터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요호호호! 그지?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후유.” 한별은 가느다란 한숨을 흘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예쁜 입술을 꽉 막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으나, 그래도 멈추지 않을 것만 같다. 그러니 그냥 속 편히 귀를 막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내 제멋대로 떠드는 비비앙을 최대한 무시하려 애쓰며, 한별은 천천히 상념에 잠겼다. 그것은 요 근래 자신의 머리와 속내를 어지럽히는 장본인에 대한 생각이었다. 김수현. 머셔너리 로드. 오빠. '참…. 너랑 얘기 한 번 하는 거 힘들다.' '그냥 말 못할 사정이 있다고 생각할게.' 문득 김수현이 넌지시 건넨 말이 떠올라, 한별은 시무룩이 고개를 묻었다. 알고 있다. 한별은 지금 김수현이 왜 저러는지도, 그리고 스스로의 행동이 옳지 않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면 왜 이렇게 계속 피하려는 걸까. 그것은 한별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었고 오는 내내 계속 숙고했던 생각이었다. 또한 아직 자신도 해답을 찾지 못한 하나의 난제이기도 했다. 사실 한별이 이렇게 김수현을 피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첫 번째는 염원의 정확한 내용을 들키기 싫다는 뜻 모를 심리였고, 두 번째는 아직 한별도 김수현을 향하는 감정을 정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별은 가네샤에게 두 개의 염원을 빌었다. 첫 번째 염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대비해, 두 번째 염원으로 가네샤가 자신의 감정을 알려주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 염원은 어디까지나 본인만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얘기한 염원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묘하게 틀어졌다. 첫 번째 염원도, 두 번째 염원도 모두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완전히 받아들여진 게 아니라, 정확히 절반에 불과했다. 가네샤는 수현에게 한별이 수현을 위해 염원을 빌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한별의 감정을 정의할 수는 없었지만, 한별 스스로 해답을 찾을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준 것이다. 그래서 지금 한별은 복잡해하고 있었다. 자신의 진심을 들키기 싫으면서도, 이 뜻 모를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해답을 구하고 싶었다. 아무튼, 이렇게나 모순된 상황인데. 설상가상 김수현도 어떤 염원을 빌었는지 자꾸만 캐물으니, 복잡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거기다,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과연 말을 하게 되면 김수현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궁금했거니와, 한별은 눈치가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이미 머셔너리 클랜 내 여인들이 김수현을 어떻게 보는지,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느 정도는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다. 물론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은 사용자 정보가 우대받는 세상이다. 능력 좋은 사내가 여러 여인을 거느리거나, 마찬가지로 여인이 여러 사내를 거느리는 일이 없는 게 아니다. 어찌 보면 이 세상에 맞지 않는 관념이라 볼 수 있으나, 한별 또한 현대에서 살다 온 한 명의 여인이었다. 그러할진대,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여인에게도 향하는 김수현을 이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아니 그전에 김수현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도 미지수였고, 자신이 다른 여인들 사이로 끼어들어 갈 자격이 있는지도 미지수였다. 선발 주자라면 모를까, 후발 주자인 만큼 눈치가 안보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 모든 게 다 미지수였다. “하아…. 몰라, 몰라, 몰라, 몰라! 몰! 라! 이 바보! 이 멍청이!” 결국 끝없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소리 지른 한별은 손을 뻗어 옆에 놓인 물병을 쥐었다.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어떻게든 식히지 않으면 새카맣게 타버릴 것만 같았다. 한별은 고개를 한껏 젖혀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내리는 순간, 어느새 잠잠해진 비비앙과 눈을 마주쳤다. 비비앙은 수 차례 눈을 깜빡이며 조용히 손가락만 빨고 있었는데, 아마 한별의 심기를 거스른 게 아닐까 불안해하는 얼굴이었다. 한별은 아차 한 기분을 느껴, 입가에 묻은 물을 닦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비비앙보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헤에…. 그래? 다행이다. 상처받을뻔했는데.” “…물 마실래요?” “좋지. 마침 너무 떠들어서 목이 마른 참이었어.” 한별이 물병을 건네주자 비비앙은 반색하며 마개를 돌렸다. 이내 좋다고 물을 마시는 비비앙을 보며 한별은 갑자기 부러운 기분을 느꼈다. 항상 해맑게 웃는 얼굴을 보면 세상에 근심 걱정이란 모르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물끄러미 보고 있던 도중, 문득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한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비비앙….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꿀꺽…. 꿀꺽….” 비비앙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여전히 물을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은 확실히 들었는지, 한별을 흘끗 곁눈질하더니 고개를 까닥여 말해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잠시 후, 한별은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를 되뇌며 바닥에 글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보는 방향으로 적었다가, 바로 지워 반대 방향으로 적었다. 그래야 비비앙이 더 편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A, m, o, r. 그리고 N, u, n, t, i, o, s….” “푸하. 시원하다. 뭔데? 뭐가 궁금한데?” 비비앙이 다시 물병을 내밀며 물었다. 목소리가 약간 상기된 게 한별이 질문을 했다는 사실에 들뜬 모양이다. “이거에요.” 마침 글자를 모두 적은 한별은 물병을 건네 받으며 바닥을 가리켰다. Amor Nuntios. 한별의 염원으로 김수현의 체내에 흐르던 이브의 혈통 조건이 갱신됐다. 이것은 갱신된 조건 중 가장 아랫부분에 쓰여있던 것으로, 김수현이 상세한 내용을 말해주며 나왔던 단어였다. 그때는 둘 다 모르는 단어라 서로 고개만 저었는데, 약간 이상한 기분을 느껴 기억해두고 있었다. 하지만 비비앙이라면 알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 갑자기 묻게 된 것이다. “으음…. 잘 안 보이는데. 잠시만.” 주변이 어두웠던 탓일까. 머리를 갸웃한 비비앙은 몸을 최대한 기울이며 지면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모래에 그려진 글자를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한별은 잠자코 기다리며 손에 쥔 물병을 가볍게 흔들었다. 바닥 부분에서 찰랑거림이 느껴지는 게 물이 조금은 남은 듯싶었다. 아직 가슴의 갈증이 해소되지 않기도 했고, 남은 물을 깨끗이 비울 겸 한별은 입가로 물병을 기울였다. 남은 물은 딱 한 모금 정도였다. 그렇게 입안 가득 물을 머금었을 무렵, 끝부분까지 시선을 돌린 비비앙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하. Amor Nuntios. 이거 그거네. 음음. 그거야. 나름 유래는 있는 단어인데….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잠시 뜸을 들인 비비앙은 이내 의기양양이 웃어 보였다. 한별은 물을 넘길 생각도 못 한 채 머리를 갸웃했다. “?” “사랑 메시지. 혹은 사랑 전달자라 보면….” 그리고 그 순간, 한별의 입에서 물이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푸!” “돼…? 꺄아악!” “콜록! 미, 미안해요…! 콜록, 콜록!” “야!” 비비앙은 빽 소리를 질렀다. 글자를 본다고 한껏 얼굴을 들이밀었다가, 졸지에 정면에서 물을 맞았기 때문이다. 물병에서 뿌려지는 물을 맞아도 기분이 나쁜데, 남의 입에서 분사되는 물을 맞으니 더더욱 기분이 더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콜록! 혹시…. 콜록! 이거…. 콜록! 오빠한테…. 콜록, 콜록!” “뭐! 뭐! 이거 오빠한테 뭐! 아오 진짜!” 그때였다. 한별이 사레 걸린 와중에도 혹시 김수현이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걱정하고, 물에 흠뻑 젖은 비비앙이 벌컥 화를 내고 있을 때. “으….” 야영지 한쪽에서 누군가의 목멘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는 지금껏 깨어나지 못했던 사용자에게서 나오는 신음이었다. ============================ 작품 후기 ============================ Reader : 네 소원이 무엇이냐. 로유진 : 제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다음 회 정시 업데이트를 하는 것이옵니다. Reader : 그럼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로유진 :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다음 회 후기에 김수현, 김유현 사용자 정보를 업데이트 하는 것이옵니다. Reader : 그럼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로유진 :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다음 회에 캐릭터 대사를 완성해 투표를 하는 것이옵니다. 0466 / 0933 ---------------------------------------------- 左遷. “용건이라니…. 이봐. 서로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자고. 죽인다는 건 농담이었으니까. 응? 설마 고연주가 있는데 죽이기까지야 하겠어? 하하하.” 눈에 주고 있던 힘을 부드러이 풀고 나서, 조곤조곤 한 목소리로 달래듯이 말한다. 아무튼 부탁을 하는 입장인 만큼, 한 번 바짝 조였으면 이제는 살살 풀어줄 때였다. 또한 이러나저러나, 상대는 홀 플레인의 음지에서 먹이 사슬의 정점에 군림하는 살문이었다. “그래. 용건이 아니라 의뢰, 의뢰라고 하자. 우리 머셔너리도 용병 클랜이야. 이번 일만 잘 처리해주면 섭섭지 않게 챙겨주도록 하지.” (으음. 의뢰라…. 혹시 이번에 용이 잠든 산맥으로 떠나신 것과 연관이 있습니까?) “그래. 안현이랑 백한결 사건은…. 너희도 대충은 들어서 알고 있겠지? 어느 듣도 보도 못한 캐러밴이 우리 쪽에 의뢰를 했는데, 아무래도 의뢰 과정이 석연치가 않아.” (흠…. 석연치가 않다 라….) 수정구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잠잠해진 음색이었다. 살문이 머셔너리와 똑같은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만큼, 의뢰라고 말을 바꾸자 마음이 조금 풀린 모양이다.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 후, 사내의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진짜 의뢰인은 김수정이 아니라, 송희선이라는 사용자일 겁니다. 그녀는 현재 2년 차 사용자며, 남부 자유 연합의 일원 중 한 명입니다. 소속 클랜은 백화 클랜. 민백화라는 사용자가 클랜 로드로 있는 상단 클랜입니다. 그쪽 재정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만큼 어느 정도 대형 클랜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내의 말을 들으며 나는 약간이지만 감탄하고 말았다. 아직 본론은 꺼내지도 않았는데, 마치 어떤 걸 물을지 알고 있다는 듯 정보가 술술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여기까지는 나 또한 알고 있던 정보이기는 했으나, 아직 살문의 정보력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셈이었다. “그래. 거기까지는 나도 알고 있어. 그럼 남부 자유 연합 쪽에서 수작을 부렸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인데…. 솔직히 백화 클랜에서 그랬다고 보기는 어렵거든.” (그렇습니다. 사용자 민백화는 선행을 베푸는 사용자로 명성 높지만, 사실 선한 것보다는 이런 짓을 벌일만한 사용자가 못됩니다. 자기 것만, 자기 클랜만 챙길 줄 아는 여인이니까요. 그런 만큼 단독으로 행동했을 가능성은 적습니다. 공범이거나 방관했거나 모르거나. 셋 중 하나일 겁니다.) “아마 다른 클랜이 끼었을 가능성이 높겠지…. 그런데 그쪽에서 우리를 공격할 이유가 없을 텐데? 서로 부딪친 기억은 없단 말이야.” (그거야 한쪽 입장이고요. 머셔너리 로드. 이유 없는 공격은 없습니다. 상대가 이런 짓을 벌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원한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희생양으로 삼았을 수도 있고요. 특히 머셔너리 같이 중립 클랜인 경우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아, 나는 머리를 끄덕끄덕 주억였다. “그런가…. 하기야 지금 와서 따지는 건 무의미하지. 아무튼 알겠다. 뭐 다른 정보는 없고?” (뭐, 지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표면적인 것들뿐입니다. 자세한 건 저희도 이제 알아봐야지요. 그래서, 어느 것부터 알아봐드리면 되겠습니까?) 요구 사항을 구체화해달라는 말에,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입을 열었다. “이미 고연주가 2주에서 3주전부터 활동하고 있을 거야. 내가 따로 말을 해놓을 테니까, 너희는 그냥 고연주를 도와주면 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예? 그림자 여왕이 말입니까? 그녀는 분명 용이 잠든 산맥으로….) 사내는 깜짝 놀란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살문이 모르고 있다는 말은, 고연주가 내가 내린 지시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아아. 용이 잠든 산맥에 도착하자마자 몰래 돌려보냈거든.” (허 참…. 왜 저희한테 의뢰를 하시나 했더니….) 사내는 허탈하면서도 언짢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그럼….” (그렇다면, 이번 의뢰는 맡지 않겠습니다.) 막 잘 부탁한다고 말하려는 찰나, 사내가 거절의 의사를 표시했다. 내가 잘못들은 건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순간 절로 얼굴이 찌푸려져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 장난하냐.” (장난하자는 게 아닙니다. 이미 그림자 여왕이 활동하고 있다면, 저희가 끼어들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롭니다. 머셔너리 로드. 머셔너리 로드께서는 그림자 여왕을 너무 과소 평가하시는 게 아닙니까?) 그건 아니었다. 고연주의 능력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살문에 연락을 넣은 것은 고연주에게만 전적으로 의지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좋은 게 좋은 거잖아. 조금 더 확실히 하자는 거지.” (이거 참….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머셔너리 로드. 여담이지만, 원래 우리 살문의 인원이 몇 명이었는지 아십니까?) 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고 있냐고 반문하고 싶었으나, 목구멍에서 꿀꺽 삼켰다. 지금 수정구에 비치는 사내가 함부로 흰소리를 하지 않는 성격이란 건 잘 알고 있었다. (최고 전성기를 이룰 때는 24명이었습니다. 그 중 그림자 여왕이 나가면서 19명으로 줄어들었고, 아 본인 포함 18명이네요. 그리고 1년 전 누구 덕분에 지금은 7명만 남아있는 상태지요.) “…굳이 누구라고 돌려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거두절미하고 말씀 드리면, 저희가 최고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그림자 여왕을 제외한 23명이 전부 달려들어 정보를 모은다고 해도, 그림자 여왕 혼자서 모으는 것과 비슷하거나 못 미칩니다. 그림자 여왕은, 그런 존재입니다.) “…….” 나는 한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니까, 지금 고연주가 활동하고 있으니 자신들은 필요가 없다는 소린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그림자 여왕은 이쪽 방면에서는 자부심이 매우 높은 사용자입니다. 우리가 개입했다는 사실은 그녀의 심기를 거스를 테지요.) “그건 내가 잘….” (아. 물론 머셔너리 로드 앞에서는 호호 웃겠지요. 솔직히 그것도 믿기 어려운 사실입니다만…. 아무튼, 하지만 저희는 아닙니다. 어떤 식으로든 분명히 불이익이 돌아올 겁니다.) “아니 그걸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제가 키운 사용자입니다. 그런데 제가 모르겠습니까. 저희는 당신도 무섭지만 그림자 여왕도 무섭습니다.) “…쩝.” 나는 힘없이 수정구를 내렸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딱히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시야가 바뀐 걸 알았는지, 아래쪽에서 한두 번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흠흠. 우선 그림자 여왕의 보고를 받으시고, 부족하다 싶으시면 그때 다시 의뢰를 주십시오. 하지만 그녀가 알아내기 어려운 정보를 저희라고 알아낼 수는 없으며, 그녀가 알아내지 못하는 정보는 저희 쪽에서 포기하겠습니다. 이점 유념해주시고 연락 주시길.) “연락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아무튼 알겠어. 나중에 다시 한 번 연락하지.” 꼬박꼬박 의뢰를 강조하는 걸 보니 그래도 일말의 자존심은 세우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리 생각하며 나는 가차 없이 마력을 끊어버렸다. 수정구는 작은 소음을 내고는 이내 서서히 거무칙칙한 색으로 돌아왔다. 나는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가 품속으로 수정구를 넣었다. 조금 당혹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살문이 이렇게까지 굽히고 나올 줄 몰랐기 때문이다. 사실 고연주야 자존심은커녕 항상 나긋나긋한 모습만 보아왔기 때문에 잘 모른다 하더라도, 살문이 얼마나 악독한 놈들인지는 알고 있다. 살문. 잔인하고, 포악하며 그만큼 자존심도 센 집단. 실제로 부딪친 적은 없으나, 오죽하면 살인여단도 살문 만큼은 피한다는 소문이 나돌았을까. 그러할진대, 고연주가 있으니까 자기들은 필요 없다? 아직 감이 오는 건 아니었으나, 살문 입장은 들었고 연락은 결국 끊어졌다. 그러니 일단은 돌아가 고연주가 모아온 정보를 들어보고, 차후 살문의 활용 여부를 결정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하여, 나는 차분히 몸을 돌려 야영지가 있는 장소로 걸었다. 어느새 주변 사막에는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걷고 있던 도중, 돌연히 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고연주는 과연 홀 플레인 초반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떤 삶을 살았길래 지금껏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일언반구도 안 하는 걸까? 궁금하다. 너무나 궁금하다. 한 번 물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렸다. 호기심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것을 함부로 물을 자격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도 과거에 대해서는 숨기고 있었으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시선을 들었다. 어느새 멀리서 야영지의 불빛이 다시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 안현이 처음 눈을 떴을 때, 눈에 보인 건 흐릿하면서도 가물가물한 세상이었다. 자세히 보이는 건 아니었다. 그저 작고 약한 불빛이 사라질 듯 말듯 자꾸 움직였고, 주변에서 뭔지 모를 소음이 난다는 것. 단지 그것뿐이었다. “으….” 문득 강렬한 현기증이 찾아와 안현은 바로 눈을 감았다. 어떻게든 움직여보려고 했으나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으나 메마른 소리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머리는 살짝 깨어났지만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이윽고 이마를 찢을듯한 현기증이 약간이나마 가라앉았을 때, 안현은 살며시 눈을 떠보았다. 아까보다는 낫다. 하지만 여전히 정상은 아니었다. 사물을 구별할 정도는 됐으나 온 세상이 일렁이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마치 물속에서 보는 느낌이랄까. 처음 눈에 보였던 건 어두운 밤하늘과 두 명의 여인이었다. 김한별, 그리고 비비앙. 김한별은 놀란 눈길로 안현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비비앙은 어딘가로 고개를 돌린 채 힘껏 입을 열고 있었다. 이윽고 한쪽에서 우루루 몰려오는 느낌을 받으며 안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정신은 조금 더 깨있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육체가 심한 피로를 호소하고 있었다. 결국 차차 찾아 드는 어둠을 이기지 못해 안현은 고꾸라지듯 눈을 감고 말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른 걸까. 몇 번 필름이 끊기기는 했으나, 한 번 깨어난 안현의 머리는 줄곧 정신 줄을 붙잡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안현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아니 기묘한 감각이라고 해야 할까. 미약하게 느껴지지는 감각이었지만, 간간이 몸이 들썩들썩 들리는 기분이었다. 안현은 이내 살며시 눈을 떴고, 그리고 곧바로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바로 조금 전에 밤하늘은 본 것 같은데, 지금 눈에 보이는 건 어두운 밤이 아니었다. 반대로 환한 빛이 비추는 아침 세상이었으며 주변의 풍경이 한쪽 방향을 따라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안현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누군가의 등에 업혀있다는 사실을. “음?” 이내 의아한 소리가 들려오고, 그 순간을 기점으로 안현이 보는 세상이 또다시 천천히 바뀌기 시작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늘이 보이더니 등에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졌다. “아….” 안현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오는 소리는 여전히 메마른 신음이었다. 갑자기 목이 입안이 건조한 걸 느껴, 안현은 애타게 물을 찾았다. 그러자 그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이 입안에 무언가 동그란 게 밀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사이로 차가운 액체가 살그머니 흘러들었다. 액체가 흡사 생명수라도 되는 듯이, 안현은 그것을 정신 없이 받아 마셨다. 그러자 마른 입안이 촉촉히 적셔지고 타는듯한 갈증이 서서히 사그라졌다. 이내 가슴을 가르는 한 줄기 시원한 기운을 느낀 순간, 내부에 잠들어있던 이성이 깨어나 안현의 머릿속을 스멀스멀 잠식해 들었다. 돌아온 이성이 안현의 머리가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해주어, 주변 상황이 하나씩 보이고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야, 야! 안현! 괜찮아? 나 보여?” “안현군! 정신이 듭니까? 안현군!” “이놈 봐. 도시 정문에 도착하자마자 깨어났어. 이 빌어먹을 천둥벌거숭이.” “아 쫌. 우리 오빠한테 자꾸 왜 그래요!” 안현은 멍하니 시선을 올렸다. 환한 세상을 가리는 붉은 머리칼과,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언뜻 보면 사납게 추켜 뜬 상태였으나, 부르르 떨리는 눈동자는 걱정 어린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안현의 시야로 여러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보였다. 이유정, 신재룡, 허준영, 안솔…. “형님! 형님! 이제 괜찮으세요? 깨어나신 거죠? 대답 좀 해보세요 형님!” 이어서 백한결의 얼굴이 보였을 때, 마침내 안현은 번쩍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한두 번 눈을 깜빡인 안현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한…………결?” “네. 맞아요! 형, 저예요.” “어, 어떻게….” “이제 아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수현이 형님이 우리를 구해주셨어요!” 수현이 형님? 구했다? 형님이 우리를 구했다? 간신히 생각을 정리한 안현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곧바로 도로 드러눕고 말았다. 이성은 돌아왔지만, 감각은 방금 회복된 터라 아직 완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워있어라. 천둥벌거숭이.” “클랜 로드! 안현이 완전한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그때, 클랜 로드라는 말을 들은 순간 안현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절로 감기려는 눈꺼풀을 필사적으로 올렸다. “끅……!” 그렇게 겨우겨우 고개를 들자, 앞쪽에서 자신을 지그시 내려다보는 한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그토록 보고 싶었고 그토록 그리운 얼굴이었다. 일견 무표정하고 차가운 인상이지만, 그래도 이따금 따뜻한 눈빛을 보이는…. “형….” 안현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때였다. “뭐, 다행이군요.” 느릿하게 올라가던 안현의 손길이 우뚝 멈추었다. “아무튼 도시에 도착했으니까, 일단 머셔너리 하우스로 돌아가죠. 다들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뭐, 다행이군요.' '아무튼 도시에 도착했으니까….' 언제나처럼 조용한 어조였으나 왜인지 안현의 귓가에 똑똑히 들리고 있었다. 아니 그전에, 김수현의 시선이 가슴을 쿡 찌르고 들어왔다. 그 눈초리는 무척이나 차가웠다. 예의, 조금이라도 따뜻함을 담고 있던 눈동자가 아니라 흡사 '남'을 보는듯한 눈빛이었다. 물론 안현은 깨어났다고 해서 축하 파티까지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럴 마음은 추호도 없었고,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일차적으로 김수현의 관심을 받아오던 안현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저런 반응을 보게 되자 안현의 가슴으로 생소한 감정을 넘어서는, 서러운 기분이 물밀듯 밀고 들어왔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김수현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수정구로 연락은 넣었습니까? 다들 놀랄 것 같은데.” “네, 네? 아…. 방금 사용자 정하연한테 넣었어요.” 이윽고 김수현이 무심히 고개를 돌려 누군가와 도란도란 말을 나누는 순간. 툭! 살짝 떨리던 안현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2차 투표를 시작합니다! 대사는 언제든지 교체가 가능하니, 더 좋은 말이 떠오르시면 코멘트로 남겨주세요. :) *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수현(3년 차) 2. 클래스(Class) : 검술 전문가(Secret, Sword Specialist,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AA - Double A) 5. 진명 • 국적 : 마성(魔性) • 검(劍)의 주인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7) 7. 신장 • 체중 : 181.5cm • 75.5kg 8. 성향 : 중용 • 혼돈(Moderation • Chaos) [근력 96(+2)] [내구 94(+2)] [민첩 98] [체력 92(+2)] [마력 96] [행운 90(+2)]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6(Free)포인트 입니다.) * 심장에 화정(火正)을 품은 상태입니다. * 체내에 한치의 노폐물을 찾을 수 없습니다. 마력의 흐름이 두 배로 상승합니다. * 심장에 고대 무녀의 각인이 새겨진 상태입니다. * 이브의 혈통(Eve's Blood)을 복용한 상태입니다. < 업적(6) > < 고유 능력(1/1) > 1. 제 3의 눈(Rank : S Zero) < 특수 능력(1/1) > 1. 신검합일(Rank : EX) < 잠재 능력(4/4) > 1. 백병전(Rank : EX) 2. 쓰러질 수 없는(Rank : A Plus Plus) 3. 심안(정)(Rank : EX) 4. 전장의 가호(Rank : EX) (잔여 능력 포인트는 1(Special, Latent)포인트 입니다.) 『권능 : 결(검술 전문가는 어떤 것이라도 베거나 자를 수 있습니다.)』 <최근 능력치 비교> (변경 전) [근력 96(+2)] [내구 92] [민첩 98] [체력 92(+2)] [마력 96] [행운 90(+2)] (변경 후) [근력 96(+2)] [내구 94(+2)] [민첩 98] [체력 92(+2)] [마력 96] [행운 90(+2)] 0467 / 0933 ---------------------------------------------- 左遷. 홀 플레인. 북 대륙 내 남부 소 도시 코란. 남부 자유 연합. 자고로 연합이란 두 가지 이상의 사물이 서로 합동하여 하나의 조직체를 이루는 말을 일컫는다. 하나의 연합이 만들어지는 원인은 실로 매우 다양하다고 볼 수 있다. 약소국이 강대국에 대항하여 하나로 뭉치거나, 아니면 각자의 이해득실을 계산해 서로 힘을 합치는 것 등등. 이러한 관점에서 헤아려보면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에서도 연합이 생기는 까닭이 엇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가령 예를 들어보면, 남부 소 도시 코란에 자리 잡은 남부 자유 연합을 가장 좋은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홀 플레인에는 이런 말이 있다. 사용자가 모여 클랜을 만들고, 클랜이 모여 도시를 이룬다. 코란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클랜이 모여'가 아니라 '클랜들이 모여'라는 점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코란은 총 8개의 클랜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연합 도시로써, 각 클랜은 수(秀), 아르테미스(Artemis), 남벌, 세렌게티(Serengeti), 백화, 상인 조합, 가리사니, 이끼 클랜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처음 연합을 이룰 때는 단일 세력으로는 강하다고 보기 어려운 중견 클랜들의 모임에 불과했다. 그러나 코란을 접수한 이후 차차 세를 불려나가더니, 현재에 이르러서는 클랜 하나하나가 무시할 수 없는 대형 클랜의 연합으로 성장한 클랜들이다. 세간에서는 남부 자유 연합이 이렇게 세력을 커다랗게 키울 수 있었던 배경으로, 구성 클랜들의 적당한 역할 나눔과 서로를 향한 적절한 견제를 근거로 들고 있다. 이 중 적당한 역할 나눔이란, 즉 분업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수, 아르테미스, 남벌, 세렌게티 클랜은 순수 전투 클랜이고, 백화, 상인 조합 클랜은 순수 상단 클랜이며, 가리사니, 이끼 클랜은 순수 정보 클랜의 역할을 맡고 있다. 한 마디로 무력, 자금, 정보 이 삼박자를 고루 갖춤으로써 상호 공존하는 구조를 만들어, 대형 클랜으로 발돋움할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남부 자유 연합의 역사는 여러 중견 클랜들이 서로 힘을 합치면서, 선의의 경쟁을 통해 대형 클랜으로 성장했다는, 하나의 좋은 본보기가 될 만한 이야기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 북 대륙에 알게 모르게 떠도는 소문으로는, 연합은 겉만 멀쩡해 보이지 내부로는 선의의 경쟁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의 극심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 일례로 2년 전, 한때 연합을 선두에서 이끌며 기반을 다진 김용만의 실종 사건을 예로 들 수 있다. 공식적으로는 탐험 중 실종이라 발표됐으나, 기실(其實) 연합 내 새로운 물결을 바라는 이들에 의해 몰래 제거됐다는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다. 연합에서는 극구 부인하는 중이나, 김용만과 주변 측근 전원이 동시에 실종됐다는 사실을 보면 그냥 소문이라 치부하기에는 꺼림칙한 면이 없잖아 있지 않을까. 물론 진실은 본인들만 알겠지만 말이다. * 남부 소 도시 코란의 어느 건물, 아니 연합 회의실에는 엄숙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회의실은 자못 어두웠다. 그러나 아주 캄캄하지는 않다. 테이블 둘레를 따라 아름다운 장식품이 둥글게 이어져 있었고, 중간중간 구멍 뚫린 공간에는 조막만 한 수정이 박혀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아무튼 회의실에 있는 사람은 총 16명. 그 중 8명은 띄엄띄엄 거리를 둔 채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은 상태였고, 남은 8명은 의자 옆에 미동도 않으며 기립해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를 무렵. “음…. 보아하니 다 모인 것 같은데, 이제 슬슬 시작하는 게 어때?” 한 사내가 말끝을 살짝 올리며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러자 연초를 태우고 있던 사내도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여인도. 테이블에 앉은 모든 사람이 말을 꺼낸 사내를 주시했다. 사내는 언뜻 보면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얼굴이었다. 전반적으로 푸근한 인상에 거뭇거뭇한 턱수염. 그리고 살짝 나온 뱃살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아저씨라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의 정체를 알고 있다면, 마냥 인상 좋은 아저씨로 생각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사내의 이름은 서지환. 연합 내 상인 조합 클랜의 클랜 로드이며 코란에 흐르는 자금을 한 손에 쥔 거물 사용자였다. 또한 김용만 시절부터 연합을 이끌어왔으며, 지금껏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몇 안 되는 공신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이윽고 씩 웃어 보인 서지환은 머리를 끄덕끄덕 주억이며 바로 앞에 놓인 기록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어디 보자…. 바바라, 그러니까 중앙 관리 기구 쪽에서 연락이 왔어. 이번 달 안으로 현재 헤일로, 도로시, 베스를 맡고 있는 임시 클랜들이 물러나고, 직접적으로 도시를 대표할 클랜을 선발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염병, 길기도 하네.” 일순간 기록을 쭉 읽어 내려가던 서지환의 이마에 주름살이 생겼다. 이내 테이블로 툭 내던진 서지환은 쩝쩝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훑었다. “어차피 저번 1차 회의 때 얘기한 내용도 있고, 다들 사정은 알고 있을 거 아니냐. 그러니까 그냥 자질구레한 거는 생략하고, 바로 투표에 들어가는 게 어때. 응?” “흠. 아저씨께서 말씀하시니 그러도록 하죠.” 서지환의 말을 받은 사내는 바로 박태진이었다. 박태진. 연합의 중추 클랜이라 할 수 있는 수 클랜의 클랜 로드로, 김용만의 자리를 이어받은 사용자. 태양의 검투사라는 시크릿 클래스를 갖고 있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머셔너리 클랜과 아주 약간 연관이 있는 사용자였다. 연관이라 함은, 한때 모니카의 꽃이라는 임한나를 두고 영입 경쟁이 붙은 적이 있는데, 러브 하우스에서 고백하였다가 차인 전력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아는 사람만 안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회의실 안에서는 공공연한 이야기였다. 그런 우스갯소리는 있었지만, 사실 박태진의 입지는 연합 내부에서도 거의 1, 2위를 다툴 만큼 강력했다. 원래는 김용만과 측근에 가려 큰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실종을 기점으로 무섭게 치고 올라와 수 클랜을 장악한 사용자였다. 그러나 추후 관리에 지속적으로 신경을 쓰고, 호방하면서도 기품 있는 성격은 수많은 사용자들이 박태진을 지지하게 만들었다. 박태진은 태우던 연초를 옆에 기립한 사내에게 넘긴 후, 바로 맞은편으로 시선을 올려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래. 신혁. 너는 어떻게 생각해? 바로 시작해도 상관없겠어?” 박태진의 입에서 신혁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그러자 태연한 얼굴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사내, 아니 신혁이 까딱 고개를 들어 박태진을 마주 응시했다. 그러다 문득 신혁의 입가에 부드러운 호선이 그려졌다. 신혁 또한 연합을 구성하는 클랜 중 하나인, 남벌 클랜의 클랜 로드였다. 박태진과는 잠재적인 경쟁 관계로써 마찬가지로 연합 내 탄탄한 입지를 갖추고 있었다. 성격이 음험하고 호색해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수완이나 일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매우 뛰어나, 주변에서 나름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이윽고 신혁이 말했다. “응? 아아. 나야 상관없지. 아니 오히려 내가 너한테 질문해야 하는 거 아닌가? 박태진. 너야말로 지금 해도 괜찮겠나?” “…무슨 소리지?” 박태진은 한쪽 눈을 슬쩍 추켜올리며 되물었다. 신혁은 여전히 손가락으로 테이블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소리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박태진의 얼굴도 서서히 굳어져갔다. 타다닥, 타다닥, 탁! 그리고 손이 멈추었을 때, 신혁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아니. 그냥 궁금해서. 이렇게 자신 있어 하는걸 보니까…. 흐흐. 좋은 거라도 먹여서 표 좀 확보했나 봐? 응?” “뭐라고? 혁이 형! 말씀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니요!” 신혁의 말이 끝난 순간, 박태진의 옆자리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박태진이 곧바로 손을 들어 진정시키자 씨근거리며 콧김을 내뿜었다. 사내의 이름은 백두산으로, 평소 박태진과 두터운 친분을 나누는 사용자였다. 또한 세렌게티라는 클랜의 클랜 로드를 맡고 있는 명성 높은 전투 사용자이기도 했다. “두산이는 진정하고…. 신혁. 조금 전은 무슨 말이지?” “아 그렇잖아. 우리 더는 의뭉스럽게 굴지 말고, 그냥 까놓고 말하자고. 사실 다들 알고 있잖아? 지금 상황이 어떤지.” “…머셔너리 사건을 들먹이려는 건가.” “그래. 머셔너리. 도로시야 서부 자체에서 해결할거고, 베스는 욕심 많은 동부 새끼들이 처먹겠지. 그래도 그쪽에서 바바라를 먹었으니, 일말의 양심은 있으니까 헤일로는 건드리지 않을 거잖아. 그런데 푸른 늑대에서는 관심 없다 하고 이스탄텔 로우는 여력이 안 돼지. 그럼 남은 데는 어디겠어? 우리 남부 자유 연합, 아니면 머셔너리 클랜이잖아?” 넉살스럽게도 말하는 신혁을 박태진은 지긋한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침착히 목을 가다듬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네가 경쟁 상대인 머셔너리를 젖혔으니까 헤일로를 차지하는 게 타당하다는 말인가?” “그렇지. 아주 똑똑해. 그리고 역시나 다들 알고 있었네? 그래 맞아. 머셔너리 사건은 내가 주도했어. 그런데 너희도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 아무 말도 안 했다는 건 똑같이 눈감았다는 소리 아니야? 응? 아니야?” “내 생각은 조금 다른데. 고작 이걸로 머셔너리를 젖혔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고작 이 사건으로 젖혔다고 생각해? 아무래도 조금 더 기다려봐야 하지 않을까?” “언제까지? 이대로 주구장창? 머셔너리가 산맥에 들어간 지 벌써 두 달하고도 일 주, 아니 이 주 가까이 지났다고. 그런데 생환은커녕 돌아오고 있다는 연락도 없잖아.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안 그래요 다들?” 신혁이 동의를 구하려는 듯 주변을 돌아보자, 일부는 머리를 끄덕여 공감했고 일부는 시선을 회피했다. 이내 신혁의 눈이 서지환에게 닿았을 무렵, 서지환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 사실 혁이 말이 아주 틀렸다고는 볼 수 없지. 사실 내 생각에도 헤일로는 머셔너리가 가져갈 가능성이 높았어. 복구 지원이야 우리가 조금 더했다고는 해도, 전쟁이나 북 대륙 안정화 기록들을 보면 우리가 현저하게 밀리니까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이번 사건은 확실히 우리에게 도움이 됐어. 이대로 실종되면 말 그대로 굿이겠지만…. 아무튼 의뢰로 먹고 살던 클랜이 의뢰를 실패했으니 평판이 떨어질 것은 당연한 이치. 그동안 잘나가던 머셔너리에 꽤 커다란 흠집을 냈고, 머셔너리를 비방하던 기사 일부에 힘이 실릴만한 여지를 주었으니까…. 뭐 사실 머셔너리야 의뢰를 실패한 것뿐이지만, 그동안 그들의 행보에 배 아팠던 사람이 한둘은 아니지 않나. 그러니까 이렇게 이슈가 된 거지.” “저….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그때였다. 앉아있는 사용자들 중에서만 대화가 오고 갈 무렵, 서 있던 사용자들 중에서 누군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말을 꺼낸 사용자는 깔끔하면서도 준수한 이목구비를 가진, 바른 자세로 서 있던 청년이었다. 미미하게 웃는 눈과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져 있는 게 누가 봐도 첫눈에 호감을 가질만한 인상이었다. 어차피 길었던 이야기도 막 끝마친 터였다. 서지환이 말해보라는 듯 턱을 들어올리자, 청년은 예의 바르게 머리를 숙이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알기로는 머셔너리 클랜은 헤일로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마법의 탑 클랜과 협동해 마법 도시 마지아를 활성화한다고 해서….” “큭!” “후….” “쯧.” 그러나 청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말을 꺼내는 도중 비웃는 소리, 한숨을 뱉는 소리, 혀를 차는 소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흘러 들었기 때문이다. 청년은 잠깐 어리둥절한 듯 머리를 갸웃했으나 이내 박태진마저 눈치를 주자 꾸벅 머리를 숙이며 물러섰다. “어이, 박태진. 저놈이 요즘 네가 데리고 다닌다는 그 청년인가? 참 착하네. 세상을 선하게 볼 줄 알아. 돌아가는 사정도 모르고 말이지. 흐흐흐.” “으음…. 모를 수도 있지. 아무튼 환희야. 조용히.” 박태진은 조용히 주의를 주고선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와 반대로, 신혁은 한껏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신혁은 연초를 한 대 꺼내 불을 붙였다. 이내 우뚝한 코에서 가느다란 연기 두 줄기가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그럼 아저씨 말대로 자질구레한 건 싹 치우고, 이만 재투표를 시작하자고. 다들 알아들은 것 같으니 말이야.” “…….” “아니 왜 갑자기 벙어리가 되셨나. 꿀이라도 한 단지 잡쉈나? 아니면 정말 저 바른 청년처럼 생각하고 있던 건가?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면 설마 그 머셔너리에 가슴 큰 년이라도 생각…. 아 농담이야, 농담. 너무 그렇게 보지 말라고. 가족끼리 농담도 할 수 있는 거지. 하하하…. 아저씨? 진행 안 해요? 내가 할까?” “으음…. 잠깐만. 그런데 말이야. 태진이 말도 아주 일리가 없는 건 아니야. 이대로 낙관하는 건, 솔직히 그동안의 머셔너리를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되거든. 그리고 사실 나는 오늘 대충이라도 협의가 될 거로 생각해서 왔는데, 이래서는 저번 투표랑 다를 게 뭐가 있겠나. 수 클랜에 2표, 남벌 클랜에 2표, 그리고 기권 4표. 저번이랑 또 똑같은 결과가 나오겠지. 아무튼 지금 아주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넉넉히 갖고….” 신혁의 독촉하자 서지환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조곤조곤 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으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혁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아 그놈의 생각, 생각! 적당히 좀 합시다! 1차 투표도 미루고 미루다 한 건데, 2차 투표도 또 미룰 셈이요?” “아, 알았어! 알았다 이놈아! 그럼 하자고, 해! 어차피 태진이도 아까 하자고 했으니까…!” 그때였다. 쿵! 서지환이 손사래를 치며 머리를 끄덕이는 순간,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한 사내가 불쑥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러자 모두가 문 쪽을 돌아보았음에도 사내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다급한 발걸음으로 신혁에게 다가가 귓가에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닥였다. 그리고 사내의 속삭임을 들은 순간, 신혁의 얼굴이 하얗게 일변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느긋하기 그지없던 낯빛이 꼭 일순간 정신이 나간 것처럼 멍하게 변한 것이다. 잠시 후, 신혁은 허공에서 이끌리듯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침을 한 번 삼키고, 차분해지려 애쓰는듯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입술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자, 잠시. 크흠! 바쁜 일이 생겨서. 이, 이만 가봐야 할 것 같군. 투, 투표는 다음으로 미뤄도 상관없어.” 이내 말을 마친 신혁은 바람처럼 달려나가 회의실을 나섰다. 그리고 회의실 안에 있던 모두는, 그런 신혁을 의아한 눈초리로 쫓았다. 아니. 모두는 아니었다. 오직 단 한 명. 박태진의 옆에 서 있던 청년은 문을 흘끗 쳐다봤다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청년의 시선이 꽂혀있는 장소는 바로 테이블 장식품에 박혀있는 수정구였다. 수정구들은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어두운 회의실을 밝혀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유독 2개의 수정구가 다른 수정구보다 약간이지만 더욱 밝은 빛을 흘리는 중이었다. 문득, 땀이 흥건한 듯 청년은 살그머니 손을 비비며 수정구들을 응시했다. 반들반들한 겉면에는 주변 회의실이 풍경이 그대로 비치고 있었다. 한편, 같은 시각. 남부 소 도시 모니카. 머셔너리 클랜 하우스. 마찬가지로 고요한 기운이 흐르는 로비로, 한 여인이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왔다. 푸른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를 가진 여인은 바로 정하연이었다. 그리고 로비에는 무수한 사용자들이 이리저리 앉아, 천천히 내려오는 정하연을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사용자들의 얼굴에는 뜻 모를 비장함이 감돌고 있었다. 이윽고 정하연은 계단의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고 나서 오른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가녀린 오른손에는 얼음 빛을 흘리는 통신용 수정구가 들려있었다. 돌연히, 정하연의 입술이 열렸다. “클랜원 분들에게 알려드릴게 있어요.” “…….” “조금 전 검후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용이 잠든 산맥으로 떠난 머셔너리 클랜원의 전원 생존을 확인했으며, 또한 산맥 공략 및 안현과 백한결의 구출은 물론. 살아남은 생존자까지 모두 구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용이 잠든 산맥 공략. 안현과 백한결의 구출. 의뢰인을 포함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구조. 이 사실을 들은 순간, 머셔너리의 로비에서 환희에 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것도 모자라 모여있던 클랜원들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약간의 시간이 흘러 로비는 함성과 박수 소리로 가득히 메워졌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역시 클랜 로드!” “해냈다! 해냈어! 클랜 로드가 해냈어!” “김수현! 김수현! 김수현! 김수현!” 거의 광신도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뻐하는 클랜원들을 보며 정하연은 쓴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그동안 김수현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던 만큼 머셔너리는 알게 모르게 행동을 조심해야 했고, 때마침 안 좋은 사건도 터진 터라 연합 내 분위기도 한동안 우중충했었다. 결국 그 사건으로 김수현이 복귀하고 용이 잠든 산맥으로 떠나기는 했지만, 회의적인 시선으로 보는 클랜원도 적잖이 있었다. 그냥 믿고 기다리기에는 여태껏 쌓아온 용이 잠든 산맥의 악명이 너무나 높았던 탓이다. 어찌 보면 용이 잠든 산맥은 김수현의 공식적인 복귀와, 현재 머셔너리가 직면한 상황과 맞물려있다고 볼 수 있었다. 말인즉슨 해결 여부에 따라 이 분위기를 반전시킬지 아니면 더욱 가라앉힐지 가늠할 수 있었는데, 그런 것치고는 용이 잠든 산맥은 해결하기에 꽤 가혹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수현은 멋지게 해냈다. 의뢰인의 문제를 해결한 것뿐만이 아니라, 공략과 동시에 다른 사용자들도 구조하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였다. 지금 클랜원들이 이렇게나 환호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복귀에 맞물린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했으니 그에 따라 신뢰감이 깊어지는 건 물론, 다시 클랜의 중심을 잡아줄 사용자가 돌아오는 걸 진심으로 환영하는 것이다. 사실 그동안 어지간히 기뻐할 일이 없기도 했지만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놔두고 싶었으나, 정하연은 천천히 손을 올려 클랜원들을 진정시켰다. 아직 한 가지 더 말할게 남아있었다. 환호는 바로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정하연의 신호를 본 몇 명이 소란을 진정시켰고, 그 결과 환호는 천천히 그리고 서서히 사그라졌다. 곧 완전히 가라앉은 주변을 훑으며 정하연은 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더 말씀 드릴게 있어요. 현재 클랜 로드는 모니카….” 그러나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쾅! 일순간 문을 거칠게 밀어젖히는 소리가 통로를 타고 흘러와 로비 전체를 떠르르 울렸다. 그에 이어, 이내 십 수명이 내는 발소리가 복도를 정연히 울리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음. 오늘 나온 등장 인물들이나 관계를 기억해주시면, 앞으로 나올 이야기를 이해하시는데 많은 도움이 되실 겁니다. 특히 이 중 몇 명은 이 파트가 끝난 후에도 몇 번 더 등장하오니, 더욱 좋으실 겁니다. 하하하. :D PS. 2차 투표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의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해주세요! 0468 / 0933 ---------------------------------------------- 左遷. 드디어 머셔너리 클랜 하우스로 돌아왔다. 클랜원들은 예상외로 우리를 성대하게 환영해주었다. 물론 환영해줄 거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상당히 지나쳐 오히려 당혹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처음 환호나 박수 세례까지는 괜찮았으나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간신히 가라앉히자 이제는 하나같이 히죽히죽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다. 그 모습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혹시 단체로 미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 걱정이 들었으나, 아무튼 이대로 가만히 있기도 민망하다. 하여 우선 함께 다녀온 클랜원들에게 고생했다는 말을 건네고 나서, 나는 바로 하연을 향해 직행했다. 그나마 하연이 가장 정상적인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따로 별일은 없었습니까?” “네. 그냥 잠잠히 지냈어요…. 아.” 그때였다. 하연은 살며시 웃어 보이더니 문득 내 어깨 쪽으로 시선을 맞추었다. 이내 하연이 몇 걸음 물러나자 나는 얼른 몸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한 선유운과 안솔이 보였다. 선유운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클랜 로드. 이번에 구출해온 사용자들 중 몇 명이 클랜 로드를 한 번 뵙고 싶다고 합니다.” “응? 왜요? 그 사람들 장비는 다 챙겨주지 않았습니까?” “장비 얘기가 아니라,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은혜를 갚고 싶다고 하는군요. 아무래도 클랜 가입 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만.” “헛소리들 말고 그냥 돌아가라고 하세요. 아. 의뢰인들은 조만간 사용자 김수정을 데리고 한 번 방문하라고 전해주시고요. 이로써 의뢰를 완료했으니, 잔금을 받아야 하니까요.”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딱 잘라 거절했다. 겉으로는 은혜를 갚는다고는 하지만 속내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스카우트할만한 사용자가 있으면 또 모를까, 오면서 한 명 한 명 살펴본 결과 다들 고만고만한 수준이었다. 이윽고 머리를 꾸벅 숙이고 몸을 돌리는 선유운을 보며, 나는 안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를 보는 안솔의 눈동자는 무언가 모를 간절함을 품고 있었다. “왜?” “오라버니. 저…. 오늘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리고, 이어지는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안솔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 탐험은 장장 두 달이 넘게 걸린 대장정이었다. 그러니 몸이 피곤한 건 둘째치고서 라도 따뜻한 밥과 푹신한 침대가 그리울 것이다. “아니. 그동안 힘들었으니까 오늘 하루는 피로를 푸는 게 낫겠지. 오늘은 푹 쉬렴. 가서 그렇게 전해주려무나.” “정말이요?” 어차피 안현과 한결도 요양에 들어가야 하는 터라, 천천히 머리를 끄덕여주었다. 이내 나는 듯 달려가는 안솔을 보며 나는 쓰게 웃었다. 그동안 어지간히도 몰아붙였던 모양이다. 잠시 후, 나는 다시 하연을 돌아보았다. “오늘은 저도 조금 피곤하군요.” “고생하셨어요. 클랜 로드. 나오면서 식사 준비나 방 청소를 하라고 일러두었으니까, 바로 들어가셔도 될 거예요.” 하연의 말에 나는 차분히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옆에서 하연이 조심조심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던 도중,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자 중천에 떠 있는 해가 보인다. 아직은 밝은 빛을 비추고 있었지만 이제 곧 떨어질 것 같다. 도로 시선을 내리자, 갑자기 허전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유미가 안 보인다. 유미는 특별한 능력이 하나 있는데, 내가 어딘가 나가기라도 하면 돌아올 때를 귀신같이 알아맞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정문에서 볼 때가 부지기수였는데, 오늘은 왜 보이지 않는 걸까? “그런데 유미는 어디 있습니까?” “아, 유미요? 지금 무척 바쁠 거예요?” “예? 바쁘다니요?” “호호…. 보시면 조금 놀라실지도 몰라요.” 응? 보면 놀라다니? 하연의 말에 머리를 갸웃했지만, 아무튼 잘 있다는 말 같아 더는 묻지 않았다. 그리고 살며시 문을 열어 우선 식당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사실 따뜻하고 맛 좋은 식사가 고픈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밖에서 먹는 밥보다는 이 장소의 밥이 나으니까. 식사는 확실히 괜찮았다. 아니. 밤의 꽃들이 해준 요리가 아닌 실력 있는 요리사가 만들어준 음식인 만큼, 아주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식당에서 나와 1층 로비에 있는 의자에 몸을 앉혔다. 앞의 벽난로에는 발간 빛을 띠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온몸으로 쬐어 드는 뜨끈한 불빛을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아 상념에 잠겼다. 지난 2년 동안 머셔너리는 무수한 의뢰를 받아 처리했고 수많은 유적을 발굴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성과가 따라오기 마련인데, 그동안 그것들을 단순히 창고에 쟁여놓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주 수입원인 유적이 한정돼있는 만큼, 언제까지고 탐험에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외적으로는 상점, 여관, 주점 등을 매입하거나 아니면 타 도시에 지부를 건설했고, 내적으로는 머셔너리 아카데미, 건물 개축, 대장간 등등 클랜원들의 복지를 높이는데 자금을 운용했다. 특히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이 바로 식당이었다. 식사는 의식주에 해당하는 만큼 생활에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있거니와, 사실 밤의 꽃들의 요리 솜씨가 굉장히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오죽하면. 하루의 시작을 상쾌하게 해야 하는데, 밤의 꽃들이 요리한 식사를 먹으면 몸이 축 늘어지는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결국 밤의 꽃들을 하우스 관리로 돌리고 나서, 식당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현재 식당을 관리하고 있는 사용자는, 현대에서도 식당을 운용한 경력이 있는 나름 실력 있는 부부였다. 이 부부를 만나게 된 건…. 글쎄, 우연이랄까. 언젠가 에덴에 갈 일이 있어, 볼 일을 마친 후 한 아담한 식당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 거기서 부부를 만나게 됐는데, 한 가지 특이했던 점이 부부가 비 전투 사용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한때 꽤 명성을 날린 실력 있는 전투 사용자. 처음에는 왜 비 전투 사용자처럼 생활하는지 궁금했지만, 사정을 들어보니 나름 이해할 수 있었다. 한창 활동하다가 아내가 임신을 해버려, 남편이 더는 아내가 격렬한 전투를 치르는 걸 반대했기 때문이다. 결국 둘은 아이를 출산함과 동시에 모든 활동을 중지했고, 모아놓은 돈으로 식당을 열었다. 아무튼 음식 솜씨가 매우 훌륭해, 약간의 이야기를 나눈 후 나는 그 자리에서 식당을 인수함과 함께 부부를 스카우트했다. 부부는 괜찮은 조건과 더욱 안전한 환경에서 아이를 키울 수 있으니 좋고, 우리 또한 식사 때마다 질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으니 상부상조였다. “으으응. 오라버니이.” 오랜만에 맛 좋은 음식을 먹어서일까. 나른한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바로 옆 의자에 몸을 앉히는 안솔이 보였다. 얼굴에는 포만감이 가득하고 왼손은 배를 살살 쓰다듬고 있다. 퍽 만족한 얼굴이었다. “왜.” “저요…. 지금 무지무지 배불러요오….” “그래. 이제 좀 살 것 같으냐.” “네에. 이렇게 따뜻한 벽난로 앞에서 음료를 마실 수 있다는 게…. 참 행복해요오….” 안솔은 빙그레 웃어 보이고서는 오른손에 든 커다란 컵을 한껏 들이켰다. 이내 음료를 쉬지 않고 뱃속으로 부어 넣는 안솔을, 나는 한동안 신기한 기분으로 응시했다. 저 희고 가냘픈 목에 어찌 저렇게 들어갈 수 있을까. 컵도 거의 일자로 기울였는데. “크햐아아! 콜록, 콜록!” 이윽고 안솔은 컵을 탁 내려놓고는 약한 기침을 뱉었다. 그러자 그 순간, 갑자기 불길에서 떨어져 나오는 기분과 함께 조용했던 주변이 시끌시끌해진 걸 느꼈다. 살그머니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덧 식당에서 나온 클랜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게 보인다. 잔뜩 흥분한 얼굴로 이것저것 캐묻는 소리가 들리는 게, 탐험이 궁금한 이들에게 붙잡힌 모양이다. 그렇게 한동안 주변 얘기들을 듣고 있다가, 나는 다시 안솔을 돌아보았다. 배가 부르니 잠이 오는지 어느새 꾸벅꾸벅 고개를 꺼트리는 안솔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안솔의 어깨를 흔들었다. “안솔. 들어가서 자야지.” “으응…. 응?” 안솔은 잠시 어깨를 비틀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번쩍 들어 졸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벽난로 앞이라 그런지 얼굴은 발개져 있었고, 눈동자에는 미약한 불빛이 일렁이고 있다. 그러다 문득 안솔의 입술이 열렸다. “오라버니….” “응?” “우리 오빠 있잖아요….” “응.”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지 안솔의 입술이 오물거린다. 나는 차분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결국에는 포기했는지, 안솔은 미약한 웃음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니?” 나는 연초를 한 대 꺼내며 비틀비틀 걸어가는 안솔을 응시했다. 우리 오빠란, 바로 안현. 과연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궁금했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안현에 대한 처분은 이미 결정한 상태였으며 더는 고려할 여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나는 이것만 태우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연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눈을 감아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내일부터는 무척이나 바빠질 것이다. * 다음날 아침, 머셔너리 클랜의 오전은 무척 부산스러웠다.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치고 슬슬 성과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즈음, 느닷없는 소집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냥 소집령이 아닌 총 소집령. 산맥에 참가한 클랜원이나 참가하지 않은 클랜원이나 성과에 대한 호기심은 강했으나, 다들 일언반구도 없이 한 명 한 명 회의실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클랜 로드인 김수현이 소집령을 내린 이유를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말하자면, 머셔너리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모든 권한이 김수현에게 집중돼있다. 물론 각 부문을 대표하는 클랜원들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대행에 지나지 않는 정도였다. 즉 머셔너리는 대 간부 혹은 간부라는 자리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클랜원'에 한해서다. 머셔너리는 클랜 로드를 제외하면 모든 클랜원을 동등하게 대우하며, 연차나 실력에 상관없이 비슷한 발언권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소수 정예인 머셔너리의 구조에 나름 잘 맞는 편이었다. 그런 만큼 2인자라는 말 또한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나, 그래도 클랜원들 사이로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사용자들은 있었다. 그 중 김수현이 가장 총애하는 3명의 사용자를 꼽아보자면, 그림자 여왕 고연주, 푸른 달의 마도사 정하연 그리고 기공창술사 안현이었다. 클랜 세력이 불어나며 김수현도 캐러밴 시절처럼 한 명씩 돌봐주기는 어려워졌지만, 안현은 예외였다. 김수현은 시간이 날 때마다 안현을 지도했고, 어디를 갈 때마다 꼬박꼬박 데리고 다녔다. 그뿐일까? 또한 유적 발굴 후 성과를 배분할 때마다 안현은 언제나 대상에 오르곤 했다. 그 결과 안현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사용자 정보를 보유할 수 있었고, 클랜 내 나름대로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면 나름 콧대가 높아질 법도 한데, 사실 안현의 클랜 내 평판은 꽤 좋은 편이다. 이유정과 달리 삐딱한 태도도 없었고 성격도 무던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새로 들어온 클랜원들에게 텃세는커녕, 앞으로 잘 지내보자는 마인드로 직접 챙겨주는 모습까지 보이니, 약간의 편애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심하게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클랜원은 없었다. 그런 안현이었기에, 이번에 터뜨린 사건에 대해서도 클랜 내 반응은 극명하게 갈리고 있었다. '예외 없는 처벌.'과 '그래도 안현.'이라는 반응. 그런 만큼 평소 안현을 예뻐한 김수현이 이번에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서는, 머셔너리 클랜원 전원이 주시할 정도로 초유의 관심사였다. “이야, 왠지 어제 가만히 넘어간다 싶었는데 역시 아니었네. 안현은 과연 어떻게 되려나.” “아까 회의실로 들어가는 건 봤는데…. 그나저나 클랜 로드도 조금 너무하네요. 이제 막 돌아온 클랜원인데 말이죠.” “아니. 뭐가 너무해? 나는 좋기만 하구만. 아무리 안현이라고는 하지만, 잘못한 건 잘못한 거지. 오히려 질질 끌고 그냥 흐지부지 넘어갔다면 클랜 로드에게 정말 실망했을 거야.” “누가 잘못하지 않았대요? 하지만 현이 얘기도 좀 들어보고….” 총 소집령이 열리는 장소는 4층 대 회의실. 소집령을 받은 머셔너리 클랜원들은 4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안현에 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아니 무슨 얘기는 얘기? 오면서 이미 다 들었겠지!” “쿨럭, 쿨럭쿨럭!” 그때였다. 동석이 험한 목소리로 벌컥 화를 내는 찰나, 계단 아래쪽에서 거센 기침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돌아보자 계단을 힘겹게 올라오는 한 늙수그레한 사용자가 있었다. 동석은 바로 말을 멈추고 후다닥 달려갔다. “아이고, 만성 어르신! 몸도 안 좋으신데 여기는 어쩐 일로….” “어쩐 일이긴. 소집령이 내렸다 길래 왔지…. 그런데 다들 여기서 뭐 하는 겐가? 가뜩이나 힘들어 죽겠는데, 올라가는 길도 막아놓고 말이야. 쿨럭!” 이만성은 다시 한 번 거친 기침을 뱉은 후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계단에 서 있던 클랜원들은 하나같이 시선을 회피했다. 이만성은 혀를 끌끌 차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차피 결정은 클랜 로드가 내릴 테고, 지금 와서 이리저리 떠들어봐야 무엇 하겠는가. 그러니 다들 잡소리는 집어치우고 어서 올라가기나 하세. 보아하니 우리가 제일 늦은 것 같은데….” 동석은 군말 않고 이만성을 부축했다. 그렇게 클랜원들은 조용히 입을 다문 채 4층 회의실로 걸음을 들였다. 이만성의 말대로 대 회의실에는 이미 거의 모든 사용자들이 모인 상태였다. 회의실 중앙에는 안현, 정하연, 백한결이 마치 죄인처럼 서 있었고, 좌우 테이블에는 가히 오십이 넘는 사용자들이 가지런히 착석해있었다. 잠시 후, 김수현은 천천히 자리에 앉는 이만성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모든 클랜원, 아니 고연주를 제외한 전부가 모였음을 확인하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 모인 것 같군요.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회의실에는 엄숙하고 무거운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클랜원들은 하나같이 어색한 눈초리로 중앙의 3명을 바라보았다. 안현, 정하연, 백한결. 저 세 명은 능력은 둘째치고서 라도, 김수현과 함께 가장 오랫동안 활동한 머셔너리의 원년 멤버들이나 다름없었다. 김수현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다들 사정은 알고 있을 터이니, 따로 설명 없이 바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용자 안현?” “예…. 예!” 이름을 부른 순간, 안현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사용자 안현이라는 말이 그토록 거리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새도 없이, 김수현의 말이 이어졌다.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다. 변론을 해보도록.” 그리고 말을 꺼낸 순간 자그마한 소란이 일었다. 구구절절 없이 변론을 말하라 함은, 이미 안현의 죄를 확정했다는 소리였다. 클랜원들은 긴장하면서도, 두 달 전 김수현이 회의실을 나가며 남긴 말을 떠올렸다. '여러분들께 마지막으로 경고하겠습니다. 앞으로 이와 같은 사건이 또 한 번 벌어진다면, 설령 그게 누구든지 간에 책임을 피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방금 드린 말씀은, 이번 사건에도 예외가 없을 것입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안현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일단 혀, 형님. 저를 구해주신 것은 정말….” “사용자 안현?” “…죄송합니다. 클랜 로드님.” “예. 사용자 안현. 저는 당신에게 감사 인사를 하라 한 기억은 없습니다. 왜 그랬는지,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이 사태에 대해서 해명을 하고, 저를 납득시키란 말이었지요. 지금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습니까?” “…….” 눈앞에서 자신을 지그시, 그러나 차가운 눈초리를 보내는 사내가 자못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안현은 꿀꺽 침을 삼켰다가 살그머니 하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하연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한순간 실수였다는 말은 변명이겠지요. 정말 죄송합니다. 이 사태에 대해서는 어떤 해명을 해도 부족하다 생각하며, 모두 제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처벌을 내리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다만….” “흐음. 그런가요. 변명할 생각은 없고, 처벌을 달게 받겠다. 그럼 예정했던 대로 근신 처분을 내려도 할 말이 없겠군요.” 김수현은 한 쪽 눈을 슬쩍 추켜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안현은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중간에 말을 끊어서가 아니었다. 처벌이 근신이라 함은 예상보다 훨씬 경미한 처벌이었기 때문이다. “예, 예!” “알겠습니다. 그럼 사용자 안현은 이 사태를 책임지고 근신 처분을 내리는 걸로 하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이의도 받지 않겠습니다.” 김수현의 말이 떨어지자, 아까보다 훨씬 커다란 어수선함이 회의실에 내려앉았다. 그때였다. “다만. 이 근신은 일반적인 근신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세 가지 제한이 있는 조건부 근신, 즉 사용자 안현에게 적용되는 세 가지 제한이 있습니다.” 그러자 술렁이던 회의실에 다시 엄숙함과 고요함이 찾아 들었다. 안현은 살짝 놓았던 긴장을 다시 잡았다. 근신이라 함은 말이나 행동을 삼가고 조심하라는 뜻. 어떤 처벌이 나올지는 모르나, 근신이라는 범주라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김수현은 앞에 놓인 기록을 들었다가, 도로 눈을 들어 안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첫 번째. 안현의 클랜원 직위를 해제합니다. 지금 이 시간 부로, 안현을 더는 머셔너리 클랜원으로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김수현 특유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조용한 회의실을 울렸다. ============================ 작품 후기 ============================ 아. 미치겠네요. 투표 결과 한소영이 너무 앞서고 있습니다. 이거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한소영에게 몰표가 나올 가능성이 높으니, 표를 떨어트려야겠어요. 어차피 조만간 한소영도 한 번 출현할 터. 최대한 밉상스럽게 그려내서 투표의 하락을 이끌어내겠습니다. 하하하.(노, 농담일지도 모릅니다.) 아직 두 개의 제한이 남았고, 안현에 대해서는 처벌이 과도하다 여기실지 모릅니다. 다만 나름 차후 생각은 있으니, 조금 더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시고,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좋겠네요. PS. 투표해주신 여러분 모두 감사합니다. 투표는 계속 진행할 생각이니, 독자 분 모두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해주세요! 0469 / 0933 ---------------------------------------------- 左遷. 툭! 투둑! 비가 되어 떨어지는 물방울이 지면을 점점이 적셨다. 아침에 떠오른 해는 아직도 중천에 떠있건만, 한바탕 비가 내리려고 그러는지, 하늘에서는 작고 둥글게 맺힌 액체가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먼지가 약간 쌓여있던 지면이 어느 정도 젖었을 무렵. 안현은 미약한 파문이 일어나는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의실에서 이끌리듯이 끌려 나온 후, 발길이 닿은 곳이 바로 이 연못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연못을 보고 있는 걸까? 눈동자가 흐릿하다. 연못을 보고 있되 보지 않는다. 입은 살짝 벌어져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아니 그전에. 지금 왜 이곳에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다. 오로지 머리에 내려앉은 빗방울만이 주르륵 떨어져, 눈을 지나치는 하나의 줄기로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그랬다. 지금 연못을 보고 있는 안현의 마음은 탁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오직 한 생각만큼은 텅 비어있는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계속해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첫 번째. 지금 이 시간 부로, 안현을 머셔너리 클랜원으로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두 번째. 클랜원으로써 대급했던 장비를 일체 회수합니다. 그래도 지금껏 나름의 공을 세운 건 인정해, 레어 클래스 기공창술사의 소유권은 인정하겠습니다.' '세 번째. 고용인 안현을 모니카 본 지부에 두지 않고, 프린시카로의 전출을 명하겠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결정에 대해서는 어떤 이의도 받지 않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이상입니다.'를 끝으로 맺어진 네 가지 선언. 그 선언 하나하나가, 김수현이 안현에게 내리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근신이되 근신이 아니다. 이제 더는 머셔너리 클랜원이 아니고 장비도 몰수당했으며 모니카에 있을 수도 없다. 사실상 퇴출이나 똑같은 말이었다. 머셔너리에서의 퇴출. 과연 그 누가, 안현의 퇴출을 예상이나 했을까? 안현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선언이었다. 통과의례에 들어왔을 때부터 시작된 인연이다. 사용자 아카데미 때부터 따라갔다. 캐러밴 시절을 지나, 머셔너리 클랜을 창설할 때도 자리에 있었다. 그 누구보다 가장 오랫동안, 그 누구보다 가장 긴 시간 동안 김수현의 옆에서 함께 해왔다. 그러할진대. 아니 그래서, 더더욱 믿을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자신이 가장 믿고 따르던 사람에게 버려졌다는 사실을. 이제는 따뜻한 눈빛은커녕 차가운 눈빛도 마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문득 회의실에서의 시선을 떠올린 안현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때였다. “어디 있나 했더니….” “……?” 언뜻 들려오는 낮고 침착한 목소리. 혹시라도 김수현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안현은 얼른 몸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휙! 작은 주머니가 안현의 앞으로 날았다. 탁, 엉겁결에 받아 들자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안현은 잠시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다가 멍하니 시선을 들었다. “여기서 홀로 청승을 떨고 있었군. 천둥벌거숭이.” 그러니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안현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김수현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이목구비와 가지런히 정리한 보랏빛 장발 머리. 허준영이었다. 막 입을 열은 안현은 문득 자신의 목이 메어있음을 깨달았다. 한두 번 티 나지 않게 가다듬고 나서, 안현은 흐릿하게나마 말문을 열었다. “형님…. 이건….” “골드랑 보석 조금. 무일푼으로 쫓겨난다는 말을 들어서, 클랜원들이 클랜 로드 몰래 모은 거야.” “아, 아닙니다. 이런 건….” “그럼 네가 도로 갖다 주던가. 아무튼 나는 확실히 전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허준영은 칼같이 몸을 돌렸다. 그러나 막 한 걸음 디디기 직전, 반쯤 고개를 돌려 약간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면 그냥 품에 넣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그리 많이 넣지도 않았으니까.” “…감사합니다.” “흠. 그럼…. 아차, 하나 잊고 있었다. 상남 형님과 노노 누님이 너를 찾고 있더군. 대충 청승 떨었으면 한 번 가보도록.” “예?” 상남 형님과 노노 누님이라면, 머셔너리의 식당을 관리하는 부부 사용자였다. 음식 솜씨가 무척 좋은 탓에 안현은 식사 때가 아니더라도 자주 애용했고, 그만큼 친분을 쌓은 상태였다. 안현이 반문했으나 허준영은 이미 바람처럼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삽시간에 거리가 멀어진다. 안현은 한참 동안이나 멀어지는 등을 보았다. 그러다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즈음, 손에 쥔 주머니를 품속으로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하, 아직도 믿기지가 않네…. 고용인, 장비 몰수, 프린시카로 전출? 거기는 지부도 없잖아? 끽해야 주점이나 여관밖에 없지 않아?” “그렇죠. 사실 현이가 그저 그런 사용자도, 이런 대접받을 사용자도 아니잖아요. 이건 그냥 머셔너리에서 나가라는 소리나 다름없죠.” 이윽고 문을 열어 로비로 들어온 순간, 여러 목소리가 안현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멀거니 고개를 들었다. 로비 게시판에는 오늘 회의 결과가 적힌 기록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그 앞으로 두어 명의 클랜원이 서성거리며 말을 나누고 있다. “거기다 하연이도 전출이고…. 그나마 한결이만 근신이구먼. 클랜 로드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아무리 입장이 있다고는 하지만….” “나 참. 동석이 오빠도 되게 웃기네요. 아침만해도 흐지부지 넘어가면 실망할거라 했으면서.” “아 누가 이렇게 심하게 할 줄이나 알았나. 사실 이번 사건 때문에 짜증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인간적으로 현이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어. 오히려 좋아하던 놈이었다고.” “그건 그래요. 막상 이렇게 되니까, 정말 불쌍해 죽겠어요. 저도 현이는…. 어? 오빠, 오빠!” 그러다 비로소 안현이 있음을 알아챘는지, 한창 말을 잇던 여인은 급히 말을 끊었다. 안현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방향을 틀어 빠른 걸음으로 오른쪽 통로로 들어갔다. 등 뒤로 이름을 부르거나 헛기침을 하는 등 미약한 소리들이 들렸으나, 안현은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 식당으로 들어섰다. 식당 테이블은 텅 비어있었다. 식사 때가 아니긴 해도 간간이 한두 명 앉아 있을 법도 한데,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한 쌍의 남녀만이 주방 부근에 서서 안현에게 이쪽으로 오라 손짓하고 있다. 그러자 손짓에 이끌려 홀린듯한 기분으로 다가간다. 이내 상에 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보자 안현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안현은 어떻게든 침착해지려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서글서글한 눈매와 시원한 이목구비를 가진 사내는, 그리고 일견 새침해 보이면서도 이지적인 외모의 여인은 따뜻이 웃으며 안현을 응시했다. 사내의 이름은 상남, 여인은 노노라고 불렸다. 물론 이름이 정말로 노노는 아니었고, 스스로 그렇게 불리는 걸 원해 모두가 노노라 부르고 있었다. 노노는 장미 문양이 새겨진 식칼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소식은 들었어. 이번에 나가게 됐다며?” “어허. 여보.” 상남은 허허 웃으며 점잖은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으나, 노노는 오히려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자기가 무슨 말을 잘못했냐는 태도였다. 이내 상남이 지그시 쳐다보자 노노는 입맛을 다시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준영이 놈이 잘 말해준 모양이네? 가기 전에 밥이나 실컷 먹으라고 불렀어. 비비앙 다음으로 우리 식당을 애용해준 고객이니, 이 정도 서비스는 해주려고. 후후.” 넉살 좋은 말에 안현은 희미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예린이는요…?” “지금 곤히 자고 있어. 그나저나 얼굴 좀 펴라 인마. 말에 매가리도 없어서는….” “하하….” “어휴. 그런데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너….” 노노는 한껏 궁금해하는 얼굴로 물었으나, 곧바로 말을 멈추고 말았다. 상남이 재차 노노의 팔을 잡았기 때문이다. 이내 지그시 고개를 가로저은 상남은 묵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평소 네가 좋아하는 걸로 만들었다. 먹고 기운 좀 차렸으면 좋겠구나.” “…….” “이따금 생각나면 주저하지 말고 연락 넣거라. 직접 가거나, 아니면 클랜 로드가 없는 시간을 알려줄 테니까. 허허….” “…….” 한없이 따뜻한 말에 안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이윽고 상남이 노노를 끌며 조용히 물러나자, 식당은 완전히 텅 비어버렸다. 이 거대한 식당에 안현 홀로 남은 것이다. 상다리가 부러지지 않을까 싶을 만큼 한 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보며, 안현은 무너지듯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망연히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멈춰있던 안현의 손이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예전에 자주 먹었던 음식들을 향해 느릿하게 손을 움직였다. 조금씩 조금씩 음식을 퍼먹으며 안현은 차차 현실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오늘이 지나면 내일 프린시카로 가야 한다. 이제는 클랜원도 아니고, 장비도 없고, 자신을 돌아봐주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공허하고 뭔가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 숟갈, 두 숟갈, 세 숟갈, 네 숟갈. 기계적으로 숟갈을 놀리고는 있었으나,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 평소 먹던 음식이고 맛도 그대로였다. 그러나 한 입 한 입 음미하면서 먹기에는, 현재 안현이 느끼는 심정이 너무나 복잡했다. 서서히 다가오는 부담감이 온몸의 감각마저 꾹 짓눌러버린 것이다. 그렇게 꾸역꾸역 음식을 집어넣던 안현은 돌연 음식이 더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입안이 가득 차고 목이 메어왔다. 그래도 억지로 숟갈을 쑤셔 넣은 순간 목이 턱 막혀옴과 함께, 돌연히 눈동자가 아려오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동안 참고 참았던 것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것은 빗방울이 아니었다. 안현은 손을 내저어 컵을 잡아 한껏 들이켰다. 목울대가 서너 번 움직인 후 안현은 거친 숨을 토하며 몸을 묻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볼에 흐르는 줄기는 늘어나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지금 나오는 눈물이 서글퍼 우는 걸까, 아니면 목이 쓰라려 우는 걸까. 스스로 물어본 안현은 멍하니 시선을 올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은은한 빛을 흘리는 불빛이 흐릿하게 일렁이고 있다. 가만히 눈을 감자 여러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마음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시작된 회의. 김수현의 시선. 무정하리만치 이어진 선언. 클랜원들의 시선. 자신을 둘러싼 여러 이야기들. 이 모든 게 안현의 머릿속으로 우수수 떠올랐다가 가라앉는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거기다 하연이도 전출이고…. 그나마 한결이만 근신이구먼. 클랜 로드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아무리 입장이 있다고는 하지만….' 로비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을 때, 감겼던 안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하연 누님이 전출…?” 회의실 중앙에는 안현 혼자 서 있던 게 아니었다. 하연, 한결과 같이 서 있었다. 그러나 처음 선언을 들었을 때부터 머리가 하얗게 변했던 터라, 회의실에서 어떻게 나왔는지도 차마 깨닫지 못했던 터라. 안현은 미처 두 사람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은 길었으나, 행동은 재빨랐다. 안현은 급하게 몸을 일으키더니 일말의 지체 없이 식당 문을 열고 나섰다. 하연이 주로 가는 장소는 3층 개인 연구실 아니면 숙소. 그 중 안현이 선택한 장소는 본관 3층 연구실이었다. “헉! 헉!” 숨이 차도록 뛰고 정신 없이 계단을 올랐다. 이내 순식간에 3층에 다다라 하연 개인 연구실의 문을 여는 순간, 안현은 거짓말처럼 걸음을 정지하고 말았다. 하연 또한 개인 연구실에 홀로 있었다. 언제나처럼 침착한 얼굴이다. 그러나 가냘픈 양손에는 꽤 큼직한 가방이 들려있다. 딱딱 꽂혀있던 마법 책도, 가지런히 나열돼있던 연구 기기도. 항상 깔끔하게 정리돼있던 연구실은 어느새 휑뎅그렁이 비어진 상태였다. “어머. 현이 왔니?” 이윽고 하연이 몸을 돌아 빙그레 웃자 안현은 숨이 멎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설마 설마 했던 예상이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왜인지 뜻 모를 죄책감과 자기 혐오가 파도처럼 몰아쳤다. 그렇게 한동안 보고만 있다가, 안현은 비틀비틀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님, 누님은 왜….” “응? 아아. 나도 전출 명령을 받았거든. 그래서 짐을 싸고 있던 중이었지. 호호. 그나저나 많기도 하네. 혹시 도와주러….” “누님은…. 누님은 아니잖아요…!” “…….” 하연은 천연덕스레 말을 이었다. 그러나 안현의 절규 어린 외침이 이어지자, 일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맑은 눈동자를 들어 안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안현이 말했다. 아니, 외쳤다. “제가, 제가 잘못한 거잖아요. 무조건 제 잘못이잖아요! 그런데 왜 누님이…!” “아니야. 내 잘못도 있어.” “누님!” “현아.” 하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러나 안현의 말을 가벼이 잘라내었다. 그리고 미미한 웃음을 띠며 말을 이었다. “어리광은 이제 그만 부리렴. 나는 수현씨 자리를 대신했고, 네 요청을 허락해주었어. 의뢰서에 직인이 찍힌 순간, 사정이 어찌됐든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란다.” “하지만….” “다 끝난 마당에 무슨…. 됐어. 내 걱정 말고 네 걱정이나 해. 나는 그래도 클랜원 상태는 그대로고, 장비도 그대로 있으니까. 적어도 너보단 낫단다? 호호.” “하….” 하연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투로 말하고는 도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안현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를 꽉 깨물었다. 그러다 불현듯 남은 한 명에게도 생각이 미쳐 망망한 기분으로 물었다. “한결이. 한결이는요?!” “한결이? 걔는 근신. 그런데 너랑은 달리 그냥 근신. 그런데 말만 근신이고, 요양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 지금 정신 상태가 무척 안 좋은가 봐. 후유증이 심하면 정신병이 발병할 수도 있다는데….” “…뭐, 뭐라고요? 후, 후유증? 정신병이요?” “응. 대충 들어보니까 영혼이 한 번 뽑혔다가 어떻게 다시 들어갔나 봐. 아무튼 걱정이지. 잘못되면 꽤 오랫동안 요양해야 하니까…. 그런데 너 모르고 있었어?” 정확한 사정은 모르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도시였고, 돌아오자마자 거의 바로 퇴출 명령을 받았으니까. 하연은 꼼꼼히 가방을 챙긴 후 책상에 가볍게 올려놓았다. 이어서 안현의 말이 더는 들려오지 않자, 고개를 갸웃하며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안현을 바라본 하연은 약간 놀란 얼굴로 천천히 손을 내뻗었다. “현이 너…. 울었니? 아니 울어?” 그랬다. 안현은 울고 있었다. 입은 꾹 닫혀있었으나,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동자에 고여 찔끔찔끔 새어 나오던 눈물이, 조금 전 들은 말로 거대한 충격을 받아 둑 터지듯 왈칵 쏟아진 것이다. 안솔을 동생으로 두고 있는 만큼, 안현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안현의 내면에서 하나의 생각이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다는 현실 부정도 아니었다. 김수현에 대한 원망도 아니었다. 앞날에 대한 하찮은 걱정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왜….” 내가 왜 그랬을까. “무슨 짓을….”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안현의 내면에서 비로소 문제에 대한 본질이 고개를 일으켰다. 이제 더는 개인에 국한해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그리고 그 행동이 어떤 결과로 돌아왔는지. 안현은,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http://bgmstore.net/view/CWWk7. 이번에 집필하면서 들었던 음악입니다. 정말 좋은 음악이니, 생각이 있으신 독자 분들께서는 함께 들으시면서 이번 회를 감상하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0470 / 0933 ----------------------------------------------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투둑! 투둑투둑! 비 내리는 어두운 밤. 나는 불도 켜지 않고 침대에 누운 채 창문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스며든 창틀은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고, 이따금 떨어지는 빗방울은 창문을 툭툭 때리며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먹구름이 잔뜩 낀 탓에 달은 절반 정도 가려져 있었지만, 오히려 보기 좋은 풍경이었다. 나는 비 내리는 날을 좋아한다. “수현….” 조용히 들려오는 고요하면서도 아련한 목소리.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한 쌍의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침대에 흐트러져있는 푸른 머리칼도, 정연한 코도, 아름다운 입술도 보였다. 현숙해 보이는 이목구비를 보며 나는 살짝 숨을 들이켰다. 약간은 냉랭한 새벽 공기가 흘러들었다. “예?” “오늘 있잖아요….” “예….” “…너무 좋았어요.” 말을 마친 하연은 첫날밤을 치른 새색시처럼 수줍게 웃어 보였다. 오늘이라고 해서 조금 마음이 켕겼는데 아무래도 괜히 긴장했던 모양이다. 나 또한 부드럽게 웃어주고는 하연을 천천히 끌어안았다. 하연은 순순히 안기지 않았다. 돌연히 내 팔을 잡아 진로를 방해했다. 그러더니 슬금슬금 침대를 타고 올라와 오히려 나를 품으로 끌어안았다. 그러자 일순간 까닭없는 짜증이 일어 이리저리 머리를 비틀어버렸다. 그러나 하연은 나를 부드러이 달래며, 자신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꼭 끌어안을 뿐이었다. “으응….” 이내 매우 만족한듯한 신음이 들려와 시선을 올려보자, 고요히 눈을 감고 있는 하연이 보였다. 나도 따라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하연이 이끄는 대로, 말랑말랑한 젖가슴에 코를 묻었다. 한없이 포근한 젖무덤은 달콤한 살 내음을 흘려, 꼭 자장가를 속삭이는듯했다. 그때였다. “수현. 할 말이 있어요.” 솔솔 잠이 오려는 찰나. 더는 나른한 어조가 아닌 또박또박한 하연의 어조에 눈이 번쩍 뜨였다. 잠은 삽시간에 달아났다. 나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느릿하게 손을 내밀어 하연의 배를 더듬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하연의 몸이 이리저리 비틀렸다. “자, 잠시만요. 수현!” “싫습니다.” “거, 거긴 만지지 말아요. 거기는 싫다고 했는데 왜 자꾸…. 아, 아! 아이참. 정말….” “…후.” 나는 가볍게 한숨을 흘렸다. 배꼽 바로 아랫부분을 문지르자 반들반들한, 그러나 살결은 아닌 감촉이 느껴졌다. 아주 오래 전 하연 스스로 각인한 아주 작은 보석이었다. 하연은 이 부분을 만질 때마다 매우 심하게 민망해했다. 사실 이렇게 느닷없이 만진 이유는, 그냥 말하지 않았으면 하는 뜻을 돌려 말한 거였다. 하지만 이렇게 만질 수 있게 가만히 놔두었다는 소리는, 결국 어떻게든 말을 하고 싶다는 뜻. 자그마한 보석을 매만지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현에 관한 말입니까?” “…네.” “그냥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그냥 하연이 이제 더는 안현을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하지만이라는 말에, 나는 하연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너무도 가늘고, 너무도 가냘프다. 이런 몸으로 그 힘든 자리를 대신하느라, 그동안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을까? 갑작스레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일어 나는 조곤조곤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연. 이런 세상에서. 자기 스스로를 챙기기에도 버거운 세상에서. 하연이 지금껏 누구보다 고생해온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고생이라뇨.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면 수현은…. 저보다 훨씬 더 힘들었을 거잖아요.” “저야 스스로 원한 자리이지만, 하연은 아니니까요. 오늘 그런 결정을 내려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하연이 조금이라도 쉬기를 바랬습니다. 이제는 모든 짐을 내려놓기를 바랬습니다.” “…….”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를 챙기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잠시라도 모든 걸 잊고, 푹 쉬었으면 좋겠습니다.” “수현.” “아. 하연의 복직은 걱정 마시고요. 우선은 머리를 충분히 식히고 나면, 제가 어떻게든….” “수현! 오늘 제 앞에서, 현이가 울었어요. 그 아이가 눈물을 흘렸다고요. 수현의 마음은 충분히 알겠어요. 하지만 제발 제 말 좀 들어주세요. 네?” 이렇게까지 말을 하였는데도, 결국에는 안현 말을 꺼낼 모양인가 보다. 나는 한두 번 혀를 차고는 하연의 품에서 벗어나 상반신을 일으켰다. 가슴이 갑갑해졌다. 오늘 밤이 지나면 당분간은 하연을 만날 수 없다. 그런 만큼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골 아픈 말은 않고 좋은 말만 나누고 싶었다. 이윽고 벽에 몸을 기대자 돌연 입맛이 씁쓸해졌다. 그래서 그런지, 이어지는 말 또한 부드러운 어조가 아닌 딱딱한 어조일 수밖에 없었다. “안현의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저도 나름의 생각은 있으니까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런 결정을 내린 게 아닙니다.” “수현. 알고 있어요. 수현의 결정이 그르다는 것도 아니고, 안현을 봐달라는 말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미안해요. 화 풀어요.” 하연은 나를 따라 상반신을 일으켜 살며시 몸을 기대었다. 화를 낸 것은 아니었다. 아니 내려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현은 말입니다.” “네.” “기본적으로 성실합니다. 그리고 무난하지요. 지금도 한 사용자 몫은 충분히 해주고 있습니다. 거의 하라는 대로 하기는 해도, 이따금 제가 놀랄 만큼의 통찰력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 녀석은 조금만 더 생각하고 행동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잘해낼 수 있는 타입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이번 용이 잠든 산맥의 사건으로 느꼈습니다. 안현은 지금 확실하게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요.” “잘못된 방향이요?” 하연의 되물음에 나는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사실 이번 사건을 다른 시각에서 보면 안현의 생각을 알 것도 같았다. 나는 항상 안현을 데리고 다니며 능동적으로 행동할 것을 누누이 주문했다. 물론 안현이 단독으로 움직인 데는 따로 원인이 있겠으나, 대충은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아마 들어간 지역이 용이 잠든 산맥만 아니었다면? 칭찬까지는 모르더라도, 적어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안현이 내가 내린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용이 잠든 산맥의 의뢰를 받았다는 것. 나는 이번 사건과 안현의 모습에서, 1회 차의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였다. 나를 떠올렸다. 1회 차에서, 나는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형을 비롯한 무수한 동료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그랬다. 그 비참했던 상황을 경험해야 했던 만큼, 나는 안현을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이런 극약 처방을 내린 것이다. 나는 안현이 자신을 조금 더 알기를 바랐다. “예. 1년 전 사건도 그렇고, 이번 사건도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기회를 주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조금도 나아지는 게 없었지요.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언젠가 한 번, 커다란 사고를 칠지도 모릅니다. 모두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만한, 그런 사건이요.” 조금은 진심이 전해졌을까? 하연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않았다. 그러다 창문을 때리는 빗방울이 차차 거세어질 즈음, 낮지만 예의 투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수현은…. 아주버님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주버님이라 함은 형을 일컫는 말. 느닷없이 왜 형을 들먹이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연의 성격을 아는 만큼 나는 잠잠히 입을 열었다. “좋아합니다. 항상 믿고 신뢰하며, 또한 의지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요. 그런데 그건요. 현이도 마찬가지에요.” “…….” “현이는 수현과 통과의례를 함께 거쳤고 사용자 아카데미 시절부터 따라왔어요. 그런 만큼 현이 또한 수현을 좋아하고, 믿고, 신뢰하고, 의지하죠. 현이에게 수현은 그런 존재에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요. 그리고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 “역지사지로 생각해보세요. 수현이 아주버님에게 그런 말을 들었으면 과연 어떨 것 같나요?”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생각해보았다. 물론 형의 뜻은 알겠지만 아주 상처가 없다면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나는 코웃음을 쳤다. “여기는 홀 플레인입니다. 고작 이런 걸로 엇나간다면, 결국 그것밖에 안 되는 사용자입니다.” “그런 말이 아니에요. 수현은 현이에게 바라는 게 있고, 현이가 수현의 기대에 부응한다면 서로 웃으며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앞으로 영영 안볼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이미 한 번 내린 명은 되돌릴 수 없겠죠. 하지만 조금이라도 좋으니 지켜보고 숨통을 틔워줄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현이가 스스로 느끼도록, 그리고 스스로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그런 상황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지켜보고 숨통을 틔워준다? 그런 상황을 만들어준다? 이윽고 하연은 내 손을 살포시 포개 잡아 나직이 입을 열었다. “제가 해볼게요. 안현을 위로하겠다는 것도, 돌보겠다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저에게도 마지막 한 번의 기회를 주세요.” 비로소 시선을 돌려 하연을 바라보았다. 하연의 얼굴에는 아직은 뜻 모를 간절함이 서려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하연을 보고 있다가, 나는 나지막이 한숨을 흘렸다. 여전히 어두운 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유난히 세차게 들려왔다. * 다음날. 비는 새벽에 미친 듯이 내리는가 싶더니, 아침 해가 떠오르자 언제 그랬냐는 듯 뚝 그쳤다. 하늘이 푸르다. 주변 공기는 약간 습했으나, 아래 보이는 정원은 밤사이 내린 빗방울을 머금어 반짝이는 물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테라스에 서서 머셔너리 클랜 하우스 정문을 내려다보았다. “하연이 언니! 자주 놀러 갈게요!” “안현! 너무 상심하지 마라! 너만 잘하면 우리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막 정문을 나서려는 하연과 안현은 들려오는 응원에 차분히 몸을 돌아보았다. 하연은 여전히 침착한 얼굴이었고 안현은 수척했다. 하연의 말대로 마음 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적어도 지금만큼은, 둘 모두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클랜원들이 일어나 떠나가는 둘을 배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침잠 많은 비비앙까지도 말이다. 사실 너무 빠르게(?) 쫓아내는 게 아닌가 하는 말들도 있었으나, 이왕 벌어진 일이었고 또한 나름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아마 머셔너리 클랜원이라면 이번에 내가 내린 결정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나누는 광경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연과 어젯밤에 나누었던 말. 그 결과, 나는 하연과 안현을 같은 지역으로 전출하라는 명을 내렸다. 원래는 서로 다른 지역으로 전출할 생각이었으나, 결국 어젯밤 하연의 말을 일부는 수용한 탓이다. 과연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지켜볼 생각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작별을 마쳤는지 하연과 안현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서서히 정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두 사용자는 몸을 돌려 차분한 걸음걸이로 정문을 향했다. 입구를 나서는 둘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차가운 바람이 흐르는 테라스에서, 나는 떠나가는 둘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때였다. “…음?” 정문을 나선 안현은 갑자기 몸을 돌려 고개를 들었다. 문득 미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거리가 떨어져있기는 했으나 안현은 분명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피하지 않고 안현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별안간, 안현은 느릿하게 허리를 숙였다. 이윽고 완전히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나는 확실히 볼 수 있었다. 나를 향해 90도로 허리 숙여 인사하는 안현을. “…….” 나는 연초를 한 대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여 태우며, 한참 동안이나 문 닫힌 정문을 응시했다. 잠시 후. 연초를 모두 태우고 클랜원들도 하나하나 들어갈 즈음, 나는 담담히 집무실로 들어섰다. 이윽고 도로 몸을 돌려 테라스로 통하는 창문을 닫으려는 순간이었다. 탕. 탁! 막 창문을 닫은 찰나, 나는 가슴이 철렁함을 느꼈다. 창문을 닫은 소리를 이어 무언가 미묘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어떤 소리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절대 창문 소리는 아니라는 것. 명백한 소음이었다. 절로 목에 침이 넘어갔다. 아무리 넋을 놓고 있거나 마력 감지를 펼치지 않았다고는 해도, 육감이라는 게 있다. 10년을 넘게 갈고 닦아온 육감이다. 그러할진대, 그런 내 육감을 피해서 몸을 숨겨 들어왔다? 믿기지 않는 마음을 뒤로한 채, 나는 황급히 몸을 돌아 문 쪽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수~현~!” 이내 벌컥 들려오는 색스러운 목소리. 그와 동시에 누군가 나에게 와락 안겨 들었다. 눈앞에는 잿빛 머리칼이 휘날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끌어안으면서도 나는 안도의 한숨을 뱉을 수 있었다. 누군가 했더니 고연주였다. 고연주는 나이는 생각도 못하는지, 내 품에 꼭 안긴 채 정신 없이 볼을 비비기 시작했다. “수~현~. 수~현~. 정말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저도요. 그런데 왜 기척을 내지 않은 겁니까.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으응~. 으으응~. 미안해요~. 근래 두 달 동안 예전처럼 생활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버릇이 나와버려서~.” “자, 잠시만요. 알겠으니까 잠시만요. 그만 좀 비비세요. 아직 세안도 안 했다는 말입니다.” “그, 그래요?! 그럼 흐~읍! 흐~읍!” “…….” 자신이 강아지, 아니 안솔인 줄 아는 걸까. 아니 그런 이미지는 아닌데? 아무튼 당혹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때맞춘 고연주의 귀환이 반갑기도 했다. 그러다 돌연, 처음 들려온 소음에 생각이 미쳤다. 문은 열린 기색도 없고 여전히 닫혀있다. 그런데 과연 무슨 소음이었을까? 나는 반사적으로 책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책상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두 개의 구슬을 볼 수 있었다. 수정구였다. 미세하기는 했으나 보통의 수정구와는 약간 다른 빛을 흘리는 수정구. 그러다 문득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어,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영상 녹화용 수정구였다. ============================ 작품 후기 ============================ 로유진 : Reader? (Knocks) Do you wanna write a Yeoncham? Reader : Go away, 로유진! 로유진 : Okay, Bye…. Q1. 안현은 음지 전쟁에 사용할 생각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안현의 정신적인 숙성을 거치는 내용은 맞으나, 음지 전쟁에까지 사용할 계획은 없습니다. 안현은 양지에서 자라온 아이인 만큼 잘 해낼지도 의문이 들었으며, 또한 어울리지 않기도 하지요. 안현의 성숙해지는 과정은 조금 더 통상적인 부분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에 따른 스토리도 이미 잡혀있는 상태입니다. 제가 한별이 다음으로 좋아하는 캐릭터라 나름 신경 쓸 생각도 있고요. 지금부터 전개할 내용은 수현이 사건을 해결하고 범인을 처벌하는데 초점을 맞춘 게 아닙니다. 조금 더 빠른 진행을 위해서이기도 하며, 또한 눈치가 빠르신 분들이라면 이미 사건은 거의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고 계시겠지요. 지금으로서는 많은 것을 알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번 파트는, 수현이 현재의 사건을 자신의 입맛에 맞추는 과정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Q2. 강철 산맥은 도대체 언제 나옵니까? 2부를 시작하기 전에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2부는 1부 완결 후 2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야기를 다루며, 시점은 강철 산맥 직전이 될 것이라고요. 여기서 직전이라는 말은 실제 내용상의 직전이 아닌, 현재 잡혀있는 구상의 직전을 말합니다. 2년이 지난 만큼 많은 것이 변화했습니다. 용이 잠든 산맥과 그와 연관된 음지 파트를 끼어 넣은 이유는, 이 파트를 연재하며 2년 동안 어떤 것들이 변화했는지 천천히 알려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정리해서 답변을 드리자면. 용이 잠든 산맥, 음지 파트가 끝나면 잠시 쉬어가는 파트가 나오며(성과 개방이나 마법 도시 마지아 등등.), 그 후로 강철 산맥 공략에 대한 준비가 시작됩니다. 충분한 답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0471 / 0933 ----------------------------------------------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어느 도시에도 밤은 찾아온다. 그리고 어느 도시에도 밤의 거리는 존재한다. 밤의 거리. 사실 홍등가나 노예 시장 등 여러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지만,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도시 내 밤이 되면 열리는 시장을 밤의 거리라고 부른다. 밤의 거리는 어느 것 하나 딱 집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하나, 그래도 공통적인 특성만 짚어낸다면 한 단어로 요약할 수는 있다. 바로 욕망. 앞서 말했듯이 처음에는 사창가나 도박장이, 그리고 조금 더 들어가면 암거래나 청부 살인이, 거기서 또 들어가면 아레나나 노예 시장 등등. 즉 낮에는 드러날 수 없는 사용자들의 어두운 욕망이, 밤에는 실제로 구현화돼 서로 오가는 거리인 것이다. 기실 어느 도시도 밤의 거리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래도 정도의 차이는 있다. 허용과 비 허용의 차이라고나 할까. 밤의 거리를 허용하는 도시도 있는 반면 허용하지 않는 도시도 있다. 하지만 사용자 입장에서는 큰 상관없는 제재에 불과하다. 각 도시를 거미줄처럼 잇는 워프 게이트가 있는 만큼, 하나라도 허용되는 도시가 있다면 이동하면 그만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재 북 대륙 내 밤의 거리가 가장 성황을 이루는 도시는 바로 코란, 남부 소 도시 코란이다. 가령 모니카가 철저히 밤의 거리를 배척하는 도시라면, 코란은 처음으로 용인한 도시였다. 이따금 들어오는 비 허용 도시의 비난에도 오히려 '우리 도시 일이니 이러쿵저러쿵 말라.'는 말로 대응한 코란은, 현재 북 대륙 내 가장 활성화된 밤의 거리를 갖고 있다. 남부 소 도시 코란. 붉은빛이 흘러 야릇한 기운이 감도는 거리에 여러 건물이 경쟁하듯이 자신을 과시하고 있었다. 외관의 화려함으로 사용자들을 끌어당기기도 하고, 또는 직접 나서 음란한 자세나 동작으로 유혹한다. 물론 스스로 들어가는 사용자도 적지 않다. “이 아이 좀 괜찮은데? 나이도 어려 보이고, 피부도 매끈매끈하고. 마음에 들어. 얼마야?” “예? 하지만 이놈은 아직 교육이 덜된 놈이라….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나온 지 3달도 채 안된 놈입니다.” “아 삼촌! 왜 이래. 나랑 한두 번 장사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이런 애가 좋아. 봐봐. 막 창피해하는 거. 아직 풋풋한 현대의 향기가 물씬~. 호호호.” “에이…. 쯧! 그럼 금화 100개, 아니 200개! 그 이하로는 절대로 안됩니다.” 한 뚱뚱한 사내가 혀를 차더니 손으로 V자를 그리며 말했다. 금화 200개 이하로는 절대로 안 된다는 무언의 단호함이 깃들어 있다. 하지만 사내는 곧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면 흥정을 포기할 줄 알았는데, “응? 좀 비싼데?”라 중얼거린 여인이 선뜻 백금화 2개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이내 강제로 손에 쥐어지는 금화와 여인 쪽으로 끌려가는 앳된 사내를 보며, 뚱뚱한 사내는 멍한 기색을 비쳤다. “헤~. 가까이서 보니까 정말 사랑스럽네. 오늘 하루 재미있게 놀고 곱게 보내줄 테니까, 너무 걱정은 말고. 그럼 간다? 호호, 호호호!” 여인이 가는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잡아 끌었다. 앳된 사내는 싫어하는듯하면서도 은근히 기대하는 얼굴로 끌려갔다. 자신을 처음 산 여인의 미모가 상당했던 탓이다. 그러나 멀어지는 둘을 보는 뚱뚱한 사내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다. 왜냐하면 방금 앳된 사내를 사간 여인은 단골이었고, 그런 만큼 어떤 취미가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인은 남색을 즐기는 매우 이상한 성벽이 있었다. 말인즉슨, 조금 전 앳된 사내는 일종의 수비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였다. “염병할. 정작 하지도 않을 년이 곱게 보내기는 개뿔! 아오, 재수도 없으려니….” 아마 가는 길에 어디 한 군데 더 들러, 공격 역할을 할 우락부락한 사내 한 놈 더 구하겠지. 집으로 돌아가면 강제로 남색을 시키고 자신은 말 그대로 재미있게 구경할 테고. 아마 내일 아침 그놈은 어기적어기적 기어올 거다. 그렇게 생각한 뚱뚱한 사내는 침을 탁 뱉고는 몸을 돌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가는 도중 입구에서 수줍게 호객하는 여인의 뺨을 세게 후려친 것으로 보아, 화풀이를 한 듯싶었다. 그리고 잠시 후. 한쪽에서 조금 전 풍경을 조용히 구경하던 또 다른 사내는, 뚱뚱한 사내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지체 않고 걸음을 옮겼다. 빛 바랜 로브를 깊숙이 덮은 상태라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키는 훤칠하리만치 커 보였다. 어느 사용자나 이상하다고 생각할 옷차림이었으나 밤의 거리에서는 예외였다. 아니. 사실 이런 홍등가에서는 이런 옷차림의 사용자 또한 그리 환영 받지는 못한다. 차라리 암거래나 청부 살인이라면 모를까. 누가 봐도 '나 수상한 사람이요.'라는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어, 성매매를 주업으로 삼는 거리에서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상한 옷차림을 한 사용자에게는 웬만하면 호객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 또한 하나의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스스로 들어가는 경우였다. 그럴 때는 성매매 업소도 어지간하지 않고서야 거절하지 않는다. 정체를 숨기고 싶어하는 사용자도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이윽고 뚱뚱한 사내가 들어간 건물 안으로 따라 들어가자, 어딘가 야릇한 음악과 시끌벅적한 소음이 입구를 웅웅 울렸다. 사내는 잠깐 주변을 살피다가, 옆으로 통하는 문을 살그머니 열어보았다. 쿵, 쿵, 쿵, 쿵! “잘한다~!” “어이~! 엉덩이 좀 더 흔들어봐!” 안쪽에는 커다란 공간이 있었다. 연한 붉은빛을 조명한 중앙에는 무대가 서 있었는데, 거의 알몸과도 다름없는 서너 명의 여인이 천박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으로는 무수한 사용자가 이리저리 환호하며 무언가를 던지는 중이었다. 잠시 고소를 지은 사내는 바로 문을 닫았다. 그리고 주저 않고 몸을 돌려 정면의 카운터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역시나 카운터에도 야한 복장을 입은 여인이 있어, 카운터로 걸어오는 사내를 보며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영업용 미소였다. “어서 오세요 오빠! 우리 이브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브에는 처음이신가요?” “…처음입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말은 듣고 왔으니, 설명은 괜찮아요.” “그러시구나~. 알았어요 오빠. 그럼 무대 입장을 원하세요? 아니면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룸을 원하세요?” “룸으로 하지.” 사내가 간단히 대답하자, 여인은 머리를 크게 끄덕였다. “Ok. 룸으로 하시고…. 룸의 기본 가격은 금화 50골드이며, 조건이 붙을 때마다 추가 금액 있어요~. 아. 혹시 원하시는 스타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으음. 얼굴은 섹시하면 좋겠고, 몸은 약간 마르면서도 가슴이 큰 스타일이면 좋겠는데.” “…그런 스타일이 너무 많은데~.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는 게 초이스에도 좋아요!” “음~. 그럼 한 번 보면, 다시는 잊을 수 없을 정도의 끈적끈적한 여인으로 골라주겠어? 밤에 생각나서 자기 위로를 할 정도로 말이야.” “…….” 언뜻 들어보면 사내의 말은 꽤 마니악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사내를 보며 싱글벙글 웃던 여인의 눈동자에, 한순간 이채가 스쳤다.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재빠르게 사내를 살펴본 것이다.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음에도 사내 또한 여인이 자신을 주시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삽시간에 원래의 얼굴을 회복한 여인은 품속에서 작은 수정 하나를 꺼내주었다. 사내는 군말 않고 수정을 받아 들었다. 잠시 후, 여인이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2층. 왼쪽 끝에서 세 번째 방이에요. 기다리고 계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아, 그쪽 예쁘네요.” 여인이 코웃음을 치는걸 확인한 후 사내는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방음이 괜찮으니 올라가는 계단은 조용했으나, 올라선 복도에는 뜻 모를 뜨거운 바람이 맴도는 중이었다. 사내는 조용이 좌우를 둘러본 후 여인이 가르쳐준 장소로 이동했다. 그리고 왼쪽에서 세 번째 방 앞에 서서, 심호흡과 동시에 수정구를 문고리에 붙였다. 이윽고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이었다. “으읍!”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길이 사내의 입을 틀어막고, 가슴을 끌어당겼다. 사내는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간신히 옆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내가 시선을 돌린 곳에는, 시커먼 그림자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 “박환희를 만났습니까?” “네. 그 편이 일이 더 쉬우니까요. 흥.” 조용히 입을 열자 고연주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가 곧바로 흘러들었다. 다만 말끝에 끼어있는 콧소리가 제법 아니꼬운 게, 보자마자 일의 경과를 물은 게 굉장히 열이 받는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미안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나는 고연주의 서운한 눈초리를 애써 무시한 채 책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지. 아주 똑똑해. 그리고 역시나 다들 알고 있었네? 그래 맞아. 머셔너리 사건은 내가 주도했어. 그런데 너희도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 아무 말도 안 했다는 건 똑같이 눈감았다는….) 책상에는 두 개의 수정구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둘 다 말간 빛을 흘리며 어떠한 영상을 재생하는 중이었다. 어떠한 영상이라 함은, 바로 남부 자유 연합의 회의 내용이었다. 아까 고연주가 알아낸 것들을 들으며 한 번 돌렸고, 이번이 두 번째로 돌리는 것이었다. 물론 돌릴 때마다 내 심기를 거스르는 말들이 족족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미친놈들이군요.” 결국 이어지는 말들을 참지 못해 뇌까리자, 몇 번 입맛을 다신 고연주가 말을 이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김수정과 송희선의 관계를 알아내자, 절로 남부 자유 연합에 의심이 가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마침 수현이 박아놓은 그놈도 있겠다. 얼씨구나 연락을 넣었지요.” “…그놈이 군말 없이 도와줍디까?” “줍디까? 뭐예요, 그 마흔 살은 넘은 것 같은 말투는. 아무튼 이래저래 말이 많기는 했는데, 결국에는 하라는 대로 했어요. 그런데 지가 뭐 어쩌겠어요? 수현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빌빌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을 텐데. 안 그래요?” “으음.” “그나저나 수현은 정말 대단하네요. 사실 처음에 그놈을 밀어줄 때만 해도 왜 도와주는지 이해를 못 했는데,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지 알고 미리 대비를 해놓은 건가요?” “…글쎄요.” 나는 일부러 애매하게 답했다. 고연주의 질문은 1회 차와 관련된 것이기도 했거니와, 사실 보험의 일환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기실 남부 자유 연합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는 익히 알고 있다. 실제로 춘추 전국 시대가 오게 된 것도 그놈들이 크게 일조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마침 내 눈에 띈 사용자가 박환희였다. 박환희는 연합군과의 전쟁 이후 동료도 기반도 모두 잃어버린, 소위 쫄딱 망한 상태였다.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보였던 태도나 성향을 떠올린 나는, 장고를 거친 후 박환희를 밀어주기로 결심했다. 물론 우리 클랜이 아니라 남부 자유 연합을 통해서. 확실히 고연주의 말대로, 1회 차를 대비해 들어둔 박환희라는 보험은 빛을 발했다. 지금 이 수정구만해도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뭔가 부족한 기분을 지울 수 없어 나는 머리를 갸웃하고 말았다. 지금 눈앞에 해답이 있는데, 해답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 기분이랄까? '모든 공격에는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살문의 말을 떠올린 나는, 책상을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머셔너리와 남부 자유 연합은 그동안 크게 친하게 지낸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나쁜 관계도 아니었다. 애당초 도시가 다른 만큼 서로의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나 해야 할까? 더구나 우리의 행보를 싫어하는 사용자들은 많아도, 연합의 세력을 생각하면 사실 크게 아쉬울 것도 없을 터. “…….”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그나마 접점이라고 해봤자, 조금 전 수정구에서 확인한 이제 곧 서부 도시에서 일어날 대표 클랜 선발에 관련한 일이 있을 뿐.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상하다. 왜냐하면 마법 도시 마지아에 신경을 쏟을 예정이라, 헤일로에 큰 관심이 없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놈들이 귀머거리가 아니라면…. “아.” “왜요? 뭔가 짚이는 거라도 있어요?” 그때였다. 스치듯 지나가는 한 생각에, 나는 책상을 두드리던 걸 멈추었다. 그리고 고연주의 의아한 목소리를 흘려 들으며 입을 꾹 깨물었다. 설마 이놈들….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건가? 생각이 미친 순간, 문득 까닭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하하하하!” 나는 실로 오랜만에, 신나게 웃을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근래에 꽤 중요한 결정을 한 터라, 요새 마음이 그리 편하지만은 않네요. 제가 제 길을 잘 걸어가고 있는지 스스로 결심이 안 선달 까요? 아무래도 마음을 추스르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하하하. 0472 / 0933 ----------------------------------------------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수현. 무에 그렇게 웃겨요?” 이내 고연주의 말소리가 들려와 나는 흘끗 시선을 돌렸다. 고연주는 여전히 의아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나를 보는 눈동자에는 뜻 모를 확신이 깃들어 있다. 역시 눈치가 빠르다. 아마 내가 왜 웃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약간은 감을 잡은 모양이다. 나는 자꾸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아직도 흘러나오는 영상을 꺼버렸다. “그럼 웃기지 안 웃깁니까. 명색이 한 클랜의 로드이며, 그 거대한 연합을 이끄는 사용자라는 놈들이….” “왜요. 하는 짓이 옹졸하다고요?” “아니요. 어떤 짓을 하던 간에, 자기 자신한테 이득만 되면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멍청해서 그렇습니다, 멍청해서. 특히 신혁이라는 놈은 병신 중에서도 최고의 병신이고요. 하하하.” “흐응….” 그래도 상대가 상대인 만큼 뭔가 좀 있을 거라는 직감에 복잡하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냥 있는 그대로 생각하면 된다. 나는 다른 모든 생각을 한쪽에 밀어둔 채, 오직 연합의 입장에서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그러니까, 이번 사건은 남벌 클랜의 클랜 로드인 신혁이라는 놈이 계획하고 주도했다. 그리고 실제 행동에 옮긴 사용자는 백화 클랜의 클랜원 송희선. 이 둘이 어떤 관계가 있는 건 확실하다. 신혁이 이번 사건을 계획한 원인은 아마 3가지 정도로 생각된다. 나름의 복수(물론 어디까지나 연합 입장에서.), 머셔너리의 명성 하락, 그리고 이번 사건을 이용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 했다는 것. 말인즉슨 조금 있으면 서부 도시들의 임시 대표 클랜이 물러나는데, 그 중 일반 도시 헤일로 선발에 힘을 실으려 그런 것 같았다. 그래.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이 요약하면 딱 이것뿐이다. 그렇다면…. 그때였다.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나가려던 도중, 나는 문득 정신을 차려 시선을 올렸다. 고연주가 흥미로운 눈초리로 나를 보고 있다. 무언가 관찰하는듯한 눈빛이다. 그 순간 아차 한 생각이 들어,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으음. 사용자 고연주. 이 수정구 말고, 혹시 남부 자유 연합에 대한 정보가 더 있습니까?” 고연주는 아무런 말도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머리를 톡 건드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영상은 잘 보았습니다. 그런데 영상을 보면서 몇 가지 의문이 들었는데요.” “어떤 의문이요?” “제가 알기로는, 코란의 연합은 거의 가족 같다고 들었습니다. 연합 내 각 클랜의 역할이 정해져 있으며, 서로 선의의 경쟁을 통해 상호 발전을 추구하는, 그런 연합 말입니다. 하지만 영상에 나오는 몇몇 사용자는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더군요.” “아. 그거야 간단하죠. 한때 연합을 다스리던 김용만이 사망한 이후, 수현이 말하는 그런 가족 같은 연합은 없어졌어요.” 고연주의 말에 나는 한쪽 눈을 살그머니 추켜올렸다. “꼭 김용만이 사망이 아니라, 살해당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김용만의 사망은 탐험 중 사고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니요? 그거 고의 살인 맞는데요?” 고연주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목구멍에 절로 침이 넘어가는 걸 느꼈다. 조금 전 말은 나 또한 1회 차에서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러면. 현재 연합 내부 사정이 그리 좋지는 않겠군요.” “네. 그리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개판이에요.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표면적으로는 도시 관리도 한 달씩 돌아가면서 하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서로 편을 갈라 경쟁적으로 나누어 먹고 있을 정도죠.” “편을 가르고, 경쟁이라.” “도시에서 나오는 수익은 고스란히 대표 클랜에 돌아가니까요. 아무튼, 수현이 조금 전에 본 영상 중에서 특히 기억해야 할 사용자는 두 명이에요. 박태진, 그리고 신혁. 둘의 공통점은 김용만과 측근의 사후에 무섭게 치고 올라와, 연합의 주요 자리를 꿰찼다는데 있죠. 현재 공식적으로 김용만의 자리를 이어받은 사용자는 박태진으로, 연합 내 명실상부한 1인자로 불리고 있어요. 그리고 신혁은 박태진을 위협하는 2인자로 평가 받고 있고요.” “박태진과 신혁…. 알겠습니다. 그러면 다른 클랜의 현황은 어떻습니까?” “박태진을 지지하는 클랜은 세렌게티의 백두산. 신혁을 지지하는 클랜은 아르테미스의 우설희. 이들을 제외한 다른 네 클랜은 현재 상인 조합의 서지환을 중심으로 조용히 중립을 지키는 중이에요.” 하나하나 물을 때마다, 고연주는 한 번도 막힘 없이 정보를 술술 흘려내었다. 더는 흥미로운 눈초리가 보이지 않는다. 말투나 태도가 꼭 제자를 가르치는 과외 선생님 같아, 나는 속으로 웃는 것과 동시에 안도할 수 있었다. 지금껏 들은 고연주의 정보는 내가 모르는 것도 있었으나, 알고 있는 것도 있었다. 1회 차와 비교하면 대강은 상황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하나씩 상세하게 캐물은 것은, 고연주의 눈치가 빠르기 때문이다. 현재 남부 자유 연합은 대외적으로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며, 이 정보들은 아직 대륙에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다. 그런 만큼 1회 차를 더듬으며 말실수라도 했다면 고연주의 의심을 피할 수 없었으리라. 사실 걸려도 딱히 문제는 없을 것 같으나, 일단은 할 수 있는 한에서 최대한 조심하는 중이었다. 아무튼, 이로써 필요한 정보는 모두 들었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책상에 놓인 수정구 중 하나를 움켰다. 그러자 나른하던 고연주의 시선이 일순 나를 향한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음? 어떻게 하다니요?” “의뭉스럽기는. 정말 몰라서 물어요?” “하하하.” 나는 천연덕스레 웃고 나서 손에 든 수정구를 휙 던졌다. 수정구는 머리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하강해 손에 안착했다. 그렇게 던지고 받기를 서너 번 반복한 후,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긴요. 이제 일해야죠.” “네?” 고연주는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약간 찌푸려진 아미를 보며, 나는 약간 놀리는 투를 담아 말을 반복했다. “일합시다. 일. 아, 이번 일은 정말 고생했습니다. 사용자 고연주.” “…네?” 잠시 후, 고연주의 얼굴이 멍하게 변했다. *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안현과 정하연이 머셔너리 하우스를 떠난 지도 어느새 3일이라는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동안 김수현은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야만 했다. 연합이라는 거대한 사건과 직면하기는 했으나, 사실 그것만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건을 아주 간단하게 해결하는 길은 있다. 방법은 단순하다. 고연주가 가져온 두 개의 수정구를 외부에 공개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관련자는 엄벌을 피할 수 없고, 남부 자유 연합의 이미지도 바닥까지 추락할 것이다. 하지만 김수현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김수현의 성격이 이대로 넘어가는 걸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평소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라는 속담을 지론으로 생각하는 만큼, 김수현은 이 사건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다룰 계획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가만히 앉아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하여 우선 다른 일로 시선을 돌리고는 있었으나, 이제는 김수현이 일일이 신경 쓸 것까지는 없었다. 현재 머셔너리 클랜원이 50명이 넘는 만큼, 능력 좋은 사용자도 여럿 있었다. 3일째, 아침 해가 하늘에 떠올랐을 즈음. 조승우는 마침내 김수현의 호출을 받았다. 머셔너리의 전반적인 내정을 담당하던 정하연이 떠난 이후, 그 자리를 이어받은 건 바로 조승우였다. 조승우는 김수현의 첫 호출을 받으며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김수현이 용이 잠든 산맥으로 떠난 동안 인수인계를 받을 수 있었는데, 들어본바 요구하는 업무량이 가히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안현과, 그 정하연이 모니카를 떠났다. 한 명은 가장 총애하던 클랜원이었고, 한 명은 고연주와 함께 가장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클랜원이었다. 그러할진대, 단 한 번 실수했다고 단번에 내쳐버렸다. 물론 매우 커다란 실수이기는 했지만, 이번 결정은 김수현의 성격을 드러냄과 동시에 클랜원들의 경각심을 확실히 일깨우는 결정이었다. 그런 만큼 조승우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설레는 기분을 느꼈다. 머셔너리의 클랜원은 한 명 한 명이 만만치가 않다. 어지간한 사용자 정보가 아니고서야 자신을 뽐낼 수 없다. 조승우도 머셔너리 기준으로 크게 두각을 드러낼 만한 사용자는 아니었다. 그런데 정하연이 물러난 이후, 조승우에게 뜻밖의 기회가 다가왔다. 그래. 이것은 기회였다. 그것도 커다란 기회. 그냥 클랜원 생활을 열심히 하고, 시키는 일을 성실히 한다고 해서는 두각을 드러낼 수 없다. 그건 누구나 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머셔너리의 내정을 담당하는 자리가 왔다는 건, 김수현이 무언가 바라는 게 있다는 소리일 터. 그렇게 생각한 조승우는 무슨 일이든 해내겠다 다짐했다. 그리고 침을 꿀꺽 삼키며 앞에 앉아있는 김수현을 응시했다. “성과 보고는 오늘 떠날 거라고 했고…. 출장 도중 돌아온 인원들도 오늘 다시 파견할 계획이고…. 좋군요. 이제야 슬슬 다시 자리가 잡히는 것 같네요. 아, 의뢰인 건은 어떻게 됐습니까?” “용이 잠든 산맥의 공략 이후, 우리 클랜을 비방하던 기사는 모두 사라졌습니다. 이번 공략에 대한 북 대륙의 반응은 놀라움 절반과 어떻게 공략했는지 궁금해하는 반응이 절반입니다. 또한 의뢰인 김수정은 군말 없이 잔금을 지불했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의미로 언젠가 한 번 찾아 뵙고 싶다고….” “그렇군요. 잔금을 냈으면 더는 볼 일이 없지요. 정중히 거절한다고 전해주시고, 요즘 클랜 내부는 어떤가요?” “클랜 로드가 돌아오신 이후로 확실한 중심이 잡혔습니다. 모두 현재 부여된 일에 열중하고 있으며, 이번 사건 이후 차후 행동에 특히 조심하자는 말들이 나오기도 하고요. 아. 그리고 성과는 언제 개방하냐는 의견도 일부 있습니다.” 조승우의 말은 사실이었다. 당장 조승우조차도 집무실에 앉은 김수현을 보며 마음 한 켠으로 든든함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머셔너리에서 김수현은 그런 존재였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잘못된 결정을 내리지 않고, 하는 일마다 성공을 일구어온 사용자. 자신은 어디까지나 대행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되새긴 조승우는, 머리를 터는 김수현을 바라보았다. “성과 개방이라…. 그것도 좋지요. 하지만 사용자 조승우. 그것보다는 말입니다. 지금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말이지요.” “중요한 일이요?” 김수현은 잠시 동안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조용히 손을 들어 손짓했다. 가까이 오라는 신호였다. 이윽고 조승우가 몇 걸음 다가가자 김수현은 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자세히 보니 수정구였다. 그냥 수정구가 아니라, 영상 녹화용 수정구. 김수현이 말했다. “이게 무엇으로 보이십니까?” “영상 녹화용 수정구로 보입니다.” “정답입니다. 하지만 시중에서 판매하는 보통 수정구는 아닙니다.” “그러면….” “예전에 마법 도시 마지아를 공략했을 때 말입니다. 마볼로의 보존용 마력 구슬이란 성과를 얻은 적이 있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이 수정구는 보존용 마력 구슬의 조각이 일부 들어간 특별한 수정구입니다. 비비앙이 만들어낸 하나의 새로운 물품으로써, 내부의 마력 흐름을 임의로 조절하고 영구히 유지할 수 있는 기능이 있지요.” “…그게 가능합니까?” 조승우 역시 마법사다. 김수현의 말을 단박에 알아들은 만큼, 놀라운 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눈앞의 수정구는 일종의 보호색을 지닌 몰래 카메라나 다름없었다. “하하하. 굳이 자세히 이해하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일단은 아무거나 잡아서 내용을 보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조승우는 한두 번 눈을 깜빡였다가 조심스레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침에 여러 보고를 끝내기는 했지만, 사실 그렇게 중요한 것들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자리를 맡은 이상 기본적으로 해내야 하는 일들이랄까. 김수현은 분명히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즉 진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지금 이 수정구를 봄으로써 부여되는 일을 처리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차후 그저 그런 사용자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조금 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용자가 될 것인가가 결정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조승우는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수정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조승우는 반사적으로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돌연히 김수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입술이 벌어지며 새하얀 이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조승우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떠보았다. 그러자 얼른 돌려보라는 듯 까닥 고갯짓을 하는, 평소의 김수현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조승우는 확실히 보았다. 김수현의 얼굴은 그늘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으나, 아래 씩 드러난 이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단순히 웃은 것에 불과할 수도 있으나, 애당초 웃음이 적은 사내다. 그리고 풍겨오는 분위기 또한, 지금껏 보아온 김수현과는 사뭇 다른 거리감이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원래 이런 분이셨던가?' 조승우는 머리를 갸웃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딱히 어쩔 수는 없어, 침착히 수정구에 손을 얹었다. 그때였다. 똑똑! 똑똑똑! “오라버니! 오라버니! 큰일났어요!” 문을 여러 번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다급한 목소리가 문을 타고 흘러들었다. 안솔의 목소리였다. 막 마력을 불어넣으려던 조승우는 깜짝 놀라 김수현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김수현은 한숨을 푹 내쉰 후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큰일이 아닐 테니까요. 그래. 무슨 일인데?” 김수현이 외치자 문이 벌컥 열리며 안솔이 걸어 들어왔다. 차분한 걸음걸이에 비해 눈은 빠르게 깜빡이고 있었다. “오라버니! 응…?” 막 입을 열려던 안솔은 조승우를 보고는 잠깐 흠칫했다. 그러더니 이내 몇 번의 헛기침을 하고 나서 목과 허리를 빳빳이 세웠다. 그리고 근엄한 얼굴을 짓는걸 보며 조승우는 쓰게 웃었다. 그래, 자기도 수행인원이라 이거다. “오라버니, 아니 클랜 로드의 수행인원인 안솔이 말씀 드리겠어요. 아. 중요한 말이니, 사용자 조승우께서는 잠시 자리를 피해주시겠어요?” “까불지 말…. 후. 괜찮으니까 그냥 말하려무나.” 김수현의 말이 마음에 안 드는지, 안솔은 앙증맞게 팔짱을 꼈다. 그리고 목을 가다듬은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손님이 찾아왔어요. 남부 자유 연합이라고 하던데, 클랜 로드님을 뵙기를 원하고 있어요.” 이윽고 안솔이 말을 꺼낸 순간, 김수현의 얼굴이 일변했다. 그리고 잠시 후. 한동안 침묵이 흐른 다음, 김수현이 한 마디 툭 던지며 몸을 일으켰다. “큰일이 맞았군요.” ============================ 작품 후기 ============================ 그대 없는 나날들이 그 얼마나 외로웠나. 멀리 있는 그대 생각 이 밤 따라 길어지네. 하얀 얼굴 그리울 때 내 마음에 그려보면 우리 다시 만날 날을 손꼽으며 기다렸네. 우~. 우우우우~. 풍문으로 들었소~. 그대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그 말을. 우~. 우우우우~. 풍문으로 들었소. 내 마음은 서러워 나는 울고 말았네. 요즘에 왜 이렇게 이 노래가 좋을까요? 저도 슬슬 나이를 먹어가나 봅니다. 대중 가요보다는 구성진 트로트가 확 끌리네요. 아, 어제는 감사했습니다. 군대나 연재 중지 등등 여러분이 걱정하시는 건 아니니, 마음 푹 놓으셔도 됩니다. 하하하. 아. 오늘 초반 내용을 쓰다가 한 번 전부 지웠습니다. 내용이 워낙 복잡해 쓰면서도 꼬여버렸거든요. 그래서 다시 구상을 적어놓은 노트를 봤는데, 다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네요. 아니면 조금 더 적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 구상 자체는 이것저것 복잡하게 섞여있지만, 독자 분들이 최대한 이해하기 쉬운 방향으로 내용을 끌어보겠습니다. 이번 음지 전쟁 파트는, 전쟁이라는 내용 치고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습니다. 이번 파트를 첫 번째 파트로 보면, 아마 전체 내용은 세 파트 정도면 끝날 것 같네요. :D 0473 / 0933 ----------------------------------------------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방문한 사용자는 스물 중후 반은 돼 보이는 젊은 여인이었다. 적당한 키에 호리호리해 보이는 여인은 활동성이 좋아 보이는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얼굴은 상당한 미인이었으나, 약간 올라간 눈썹이나 야무진 눈빛은 꽤 드세 보이는 느낌을 주었다. 특히 오른쪽 눈가에 새겨진 옅은 자상이 인상적이다. 어떻게 보면, 이유정과 비슷한 사용자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아르테미스 클랜 로드 우설희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머셔너리 클랜 로드 김수현입니다. 반갑습니다.” 여인, 아니 우설희는 생글생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손을 마주 잡자 거친 감촉이 느껴졌다. 아르테미스는 연합 내 전투를 담당하는 네 클랜 중 하나이며, 우설희는 그런 아르테미스의 클랜 로드이다. 그런 만큼 어느 정도 괜찮은 사용자 정보를 가지고 있는 듯싶었다. 잠시 후 약간의 탐색 시간을 거치고 나서, 우설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네. 명성은 익히 들어왔어요. 이렇게 불쑥 찾아왔는데도 방문을 허락해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해요.” “사실 조금 놀라기는 했습니다만, 이름 높은 연합의 인원이니까요.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어머? 심정을 되게 솔직하게 말씀하시네요?” “돌려 말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그리고 저는 솔직함 빼면 시체인 사내라서요. 하하하. 아무튼, 머셔너리에 오신 걸 다시 한 번 환영합니다.” 나는 일부러 성미에 맞지 않는 너스레를 떨었다. 이야기에 앞서 기운을 부드러이 풀기 위해서였다. 우설희 또한 이런 환대는 예상치 못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떠 끔뻑였다. 이윽고 나는 손을 내밀어 자리를 권했다. 그러자 사양 않고 매끈한 엉덩이를 내리는 우설희를 보며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우설희(5년 차) 2. 클래스(Class) : 빅토리아 정예 용병(Rare, Victoria Elite Mercenary,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아르테미스(Clan Rank : A Minus) 5. 진명 • 국적 : 죽음 위에 피는 꽃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8) 7. 신장 • 체중 : 171.3cm • 58.4kg 8. 성향 : 첨예 • 음란(Sharp • Obscene) [근력 92] [내구 84] [민첩 86] [체력 81] [마력 85] [행운 73] 레어 클래스 말고는 딱히 별다른 점은 찾을 수 없다. 성향이 조금 재미있기는 했는데, 우리 클랜원들을 생각해보면 사실 그렇게 이상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예전에 처음 음란이라는 성향을 봤을 때는 자못 신선한 충격을 받았는데 말이다. 아무튼 이냥저냥 괜찮은 수준이라 생각하며 나는 깍지를 껴 우설희를 응시했다. 고연주가 가져온 정보에 의하면, 우설희는 신혁의 파벌에 속해있는 사용자였다. 그리고 신혁은 이번 사건을 계획하고 주도한 천인공노할 놈이고. 설마 나를 잡아 잡수라고 찾아오지는 않았을 터. 그렇다면 어떤 일로 이렇게 몸소 찾아왔는지, 한 번 물어봐 주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그러면 오늘은 어떤 일로 찾아오신 거지요? 사실 지금껏 연합이랑은 이렇다 할 관계를 맺지 못한 터라, 이렇게 방문하신 이유가 사뭇 궁금해지네요.” “아…. 하기야 지금껏 머셔너리 클랜과는 거의 남남이나 다름없었죠.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래도 같은 남부 클랜인데요. 호호.” 우설희의 말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웃을 수 있었다. 지금쯤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신혁의 상태를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머셔너리를 용이 잠든 산맥으로 보낸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전원 생환한 것도 모자라 용이 잠든 산맥을 공략했고, 의뢰인을 제외한 다른 사용자들까지도 구출했다. 한 마디로 의도는 좋았는데 결과가 시궁창이라고 해야 할까. 말인즉슨 계획이 보기 좋게 실패함으로써, 신혁은 이번 헤일로 선발은 물론이요 차후 연합 내 입지가 상당히 약화될 거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아직 길이 없는 건 아니다. 신혁은 어떻게든 머셔너리가 헤일로를 포기하게 만들고,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현재 흐르는 상황을 반전시킬 묘수가 필요하다. 그렇게 하면 차후 입장을 말할 때도 할 말이 아주 없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무튼, 우선은 어떤 말을 하는지 들어볼 요량이었다. “흠.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지 상당히 기대가 되는군요.” “으음…. 돌려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하시니, 단도직입으로 말씀 드릴게요. 그런 만큼 어느 정도의 무례는 용서해주시길 바래요. 이번에 제가 찾아온 이유는 바로 용이 잠든 산맥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우리 연합에서도 그동안 용이 잠든 산맥에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차차 정보를 모아나가는 중이었고, 곧 역대 최고 규모로 원정에 나설 계획이었죠.” “용이 잠든 산맥이라…. 그렇군요. 하지만 말씀하신 지역은 이미 공략이 끝났습니다만. 그리고 아시다시피, 용이 잠든 산맥은 그 누구에게도 귀속된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알아요. 사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제 와서 그걸 따지는 건 의미 없는 일이죠. 하지만 이번에 연합, 아니 아르테미스에서 말씀 드리고 싶은 건 바로 용이 잠든 산맥에서 얻으셨을 성과에 대해서 에요.” “…성과라. 설마 지금 머셔너리 보고, 성과를 나누자는 말씀이십니까?” “어머. 머셔너리 로드도 참. 저희를 어떻게 보시고 그런 말씀을…. 사람이 염치가 있지, 절대로 아니에요.” 일순간 얼굴이 굳는걸 느꼈으나, 바로 이어진 우설희의 말에 곧바로 풀 수 있었다. 우설희의 방문 이후 계속 표정을 관리하고 있었지만, 성과는 그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부분이다.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오롯한 권한. 이 권한을 건드림에도 사람 좋게 웃는다는 건, 그냥 호구도 아닌 개병신임을 인증하는 셈이었다. 그러기는 싫었다. 우설희는 생글생글 웃으면서도 내 얼굴을 살피더니,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번에 구조해오신 사용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망한 사용자들의 장비를 전부 챙기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저희 쪽에서도요. 용이 잠든 산맥의 정보를 모으러 들어간 연합의 사용자들이 꽤 있거든요? 우리가 원하는 건 그 사용자들의 장비, 아니 유품이에요.” “유품이요?” “네. 유품. 우리 연합은 정말로 따뜻한 가족 같은 연합이에요. 한 명 한 명의 클랜원을 사용자가 아닌 가족으로 생각하죠. 실제 가족을 이룬 분들도 적지 않고요. 그런 만큼 최소한 그분들의 유품이라도 회수해, 가족을 잃은 분들의 슬픔을 달래고 싶어요. 아, 물론 회수할 때는 합당할 비용을 치르겠어요.” “오…. 그렇군요.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차마 몰랐습니다.” 아주 경우 없는 말은 아니다. 사용자들 중에서 지인의 유품을 간직하는 이가 없는 것도 아니고, 비용도 치른다고 했다. 즉 명분이나 절차상에서는 하등 문제가 없는 것이다. 또한 머셔너리 입장에서도 이런 처리 방법이 나쁜 건 아니었다. 적어도 창고에 쟁여두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하지만 이게 연합의…. 아니 신혁의 본심은 아닐 것이다.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는 일환으로, 나는 슬슬 예민한 문제를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어떠세요? 머셔너리 로드. 피차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닌 듯싶은데 말이죠.” “의도는 잘 알겠습니다. 확실히 괜찮은 의견 같군요. 하지만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저희 쪽 입장도 약간 애매한 터라.” “애매하다니요? 제가 말한 것 중에 무슨 문제라도….” “아니요. 서로 관행을 따르니만큼 전혀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말이라는 건 아 다르고 어 다른 법 아니겠습니까? 사실 그동안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머셔너리를 비방하는 기록이 나온 게 한두 개가 아니라서요. 그런 만큼 이번 사건을 빌미로 또 어떤 기록이 나올지 모르겠네요. 그러느니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나는 눈을 가늘게 만들어 앞을 주시했다. 그러자 우설희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사실 조금 전 말은 저격이라는 의도가 들어간, 다분히 공격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록의 대다수가 코란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리고 코란을 관리하는 클랜이 연합이라면. 우설희는 분명 내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으리라. 이윽고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후, 우설희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깊은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머셔너리 로드. 그동안 머셔너리를 비방하는 기록이 코란에서 나온 점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사실이기는 해요. 하지만 그것이 연합의 뜻이라고 생각하신다면 큰 오해라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오해라. 일단은 부인하지 않고 시인했다는 점이 의외였다. 어디 어떤 변명을 할지 궁금했기에, 나는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알아요. 언짢으실 거라는걸. 그 점은 무척 송구스럽게 생각해요. 하지만 그것은 저희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해요. 코란의 관리 방침은 바로 최대한의 자유 보장에 있죠. 그 점에 매력을 느껴 거주하는 사용자들도 적지 않고요. 저희가 그런 기사를 내지 못하도록 억압을 가한다면, 그것은 여태껏 이어온 방침을 위배하는 것과 진배없어요. 그리고 코란에서만 기록이 나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흠. 그렇긴 합니다만.” 변명을 하기는 했으나 속으로 코웃음이 나오는 변명이었다. 그래도 겉으로는 약간 수긍하는 척을 해주자, 나름 기회라고 여겼는지 우설희의 눈이 반짝였다. “잠시만요. 머셔너리 로드. 그럼 이래 보면 어떨까요? 조금만 통을 크게 잡아서, 이번에 가져오신 성과를 저희에게 전부 처리하는 거예요.” “…전부를 말입니까?” “물론 저희도 한계는 있으니 어느 정도 가격은 맞춰주셔야 해요. 하지만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저희는 남은 장비 전부를 무상으로 지인에게 돌려주도록 하겠어요. 하지만 겉으로는 연합의 부탁으로 머셔너리에서 무상으로 지급했다고 발표하는 거죠. 즉 일종의 대행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예? 아니 그걸 왜…. 왜 연합 쪽에서 대행하겠다는 겁니까.” “사실 그동안 언짢으신 것에 대한 보상이라는 점도 있고, 저희 쪽에서도 연합 이미지와 동시에 머셔너리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으니까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머셔너리와 연합의 관계는 새롭게 정리될 것이고, 도시 내 악의적인 기록도 상당 부분 줄어들 여지가 있어요. 어때요? 서로 윈 윈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오…. 호라. 그, 그렇군요. 아주 좋은 생각 같습니다.” 그 순간, 나는 목구멍 끝까지 치솟은 욕설을 간신히 삼키며, 겨우겨우 말을 뱉을 수 있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참 웃기네요. 조금 전까지는 자유 어쩌고 하셔놓고 이제는 자기들이 알아서 자제시키겠다? 딱 까놓고 말한 건 아니었으나, 분명히 그런 뉘앙스였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머리채를 잡아 테이블에 처박거나, 아니면 조용히 구슬을 틀어 얼굴이 변화하는 과정을 감상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지금 우리가 가진 최대의 무기는 바로 적이 현 상황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한순간의 카타르시스를 위해 3일 동안 밤낮으로 고민한 각본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 지금은 참자. 나는 잠깐 생각에 잠긴 척을 했고, 속으로는 눈앞의 여인을 한소영이라고 수없이 되뇌었다. 사실 이런 말을 한 상대가 이스탄텔 로우였다면, 나는 기껍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상대가 연합이라서 그렇지.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나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우설희 또한 예쁘게 눈웃음을 쳤다. “이렇게까지 해주신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지요. 좋습니다.” “그럼 이 손을 잡으면, 거래는 성립인가요?” 머리를 끄덕이자, 우설희는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며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러다 문득, 우설희가 아차 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혹시 사실 저희 쪽에서 이번에 입장을 발표해도 될까요? 사실 이 계획은 연합 전원이 아닌 남벌의 클랜 로드인 사용자 신혁에게서 나온 생각이거든요. 저 말고도 그분의 이름도 넣고 싶어요.” “큰 상관은 없습니다만. 하지만 머셔너리가 곧 공식적인 입장 발표가 있을 예정이라, 굳이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네? 공식적인 입장 발표요?” “예. 이번 용이 잠든 산맥에 관해서 말할 것도 있고…. 어쨌든 다른 사항도 이것저것이 있습니다. 이번 거래에 관한 내용은 그때 끼어서 하면 될 것 같네요.” 우설희는 심유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끄덕 주억이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더니 이내 흘리는듯한 말투로 살그머니 말을 걸었다. “이것저것이면…. 아~. 그러고 보니 곧 있으면 서부 도시가 공석이 되는군요. 머셔너리도 이번에 대표 클랜이 된다는 말이 많던데, 이거 미리 경사를 축하해야 하나요? 호호….” 그리고 마침내, 우설희가 미끼를 물었다. 바로 이 말을 기다려왔었기에, 나는 속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예? 경사라니요?” “아, 아닌가?” “나 참. 저번에도 한 번 발표한 적이 있는데 오해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머셔너리는 서부 도시에 일절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이번 선발 과정 자체에 아예 참가도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아니, 왜요?” “마법 도시 마지아 하나만 해도 벅찬데, 언제 다른 도시까지 관리합니까.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튼 이번 공식 발표를 통해 그 부분을 확실하게 밝힐 생각이며, 동시에 오늘 나눈 이야기도 말하겠습니다. 뭐, 적당한 각색은 들어가겠지만요. 아무튼, 그럼 오늘 이야기는 연합 전체가 아닌 그 신혁이라는 분과 우설희 님과 나눈 이야기로 말하면 될까요?” “네, 네? 네! 꼬, 꼭 그렇게 해주세요. 아, 아니. 네, 네! 그렇게 해주시면야 정말 감사해요.” 우설희는 잠시 멍한 얼굴을 보였다가 이내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리고는 벌떡 몸을 일으켜 손을 꼼지락거렸다. 눈을 빠르게 깜빡이고 있는 게, 한 시라도 빨리 나가서 이 소식을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하기야 나름 이해는 간다. 내가 돌아온 사실에 현실이 지옥처럼 변했다가, 갑자기 동아줄이 떨어졌으니. “아니. 벌써 가시려고요?” “네! 한 시라도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기도 하고, 앞으로 바빠질 것 같으니 미리미리 준비도 해야죠. 호호호.” “하하. 그래도 식사라도 하고 가시면 좋으실 텐데요.” “호호.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호호, 호호호호! 그, 그럼 조금 바쁘니 먼저 일어나겠어요. 배웅은 괜찮아요.” 우설희는 나와 급히 인사를 나누더니 나는 듯 달려가 밖으로 나섰다. 이윽고 급하게, 그리고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텅 빈 응접실을 둘러보았다. 동시에 나직이 웃어 젖혔다. 썩은 동아줄인지도 모르고 저렇게 반색하며 달려가는 우설희가, 자못 웃겼기 때문이다. * 우설희가 떠나간 후, 나는 바로 집무실로 돌아왔다.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집무실에는 여전히 조승우가 서 있었다. “그래. 영상은 잘 보셨습니까.” “예. 두 개 모두 보았습니다.” 차분히 자리에 앉으며 말을 건네가 잔뜩 굳어있는 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화난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조금 전 내가 연합 사용자를 만나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내 얼굴만을 살필 뿐. 마치 이 사건에 대한 억울함을 토로하기보다는, 내가 어떤 말을 하려는 지에 대해서 더욱 신경 쓰는 모습이다.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조승우를 선택한 이유였다. 잠깐 조승우의 성향을 떠올렸다가, 나는 느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마 궁금할 겁니다. 사용자 정하연의 자리를 대신하는 클랜원으로, 왜 사용자 조승우를 선택했는지 말입니다.” “…예.” “사용자 조승우. 저는 말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그런 좋은 성격은 못됩니다. 아니, 오히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속담을 지론으로 삼고 있지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알 것 같습니다. 아니, 옳으신 말씀입니다.” 많은 말이 생략되기는 했지만 아마 조승우라면 알아들었을 것이다. 말인즉슨, 앞으로 일을 벌이는데 하연을 파트너로 하기에는 애로사항이 많다는 소리였다. 그러니 하연이 하지 못하는 일을 네가 대신할 수 있겠냐는 소리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조금 전 생각이 약간 변했습니다.” “변했다 하심은?” “원래는 되로 주고 말로만 받을 생각이었죠. 하지만 하는 꼬락서니들을 보니 적어도 가마니, 아니 석으로는 받아야 이 성미가 좀 풀릴 것 같네요.” “…그렇군요. 그러면 제가, 무슨 일을 하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조승우는, 할 수 있다고 답했다. 나는 의자를 빙글 돌렸다. 그리고 앞을 쳐다보자 환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문을 볼 수 있었다. 이내 품에서 느릿한 손놀림으로 연초를 꺼내며, 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아마 당분간은 무척 바빠질 겁니다. 제가 들를 곳이 한두 군데도 아니고, 이런저런 밑밥도 뿌려놔야 하니까요. 하지만 사용자 조승우는 우선 바로 내일, 모니카의 광장에 공식적인 발표 자리를 준비해주십시오.” “그럼…. 공식 발표를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차분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불 붙인 연초를 한 모금 빨아들인 후, 나직이 입을 열었다. “예. 그게 바로, 실질적인 복수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 작품 후기 ============================ 오늘 김연아느님의 경기가 있습니다. 가장 기다려온 경기인 만큼 정말로 기대가 되네요. 부디 꼭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면 좋겠습니다. 참 이번 파트는 조율이 힘드네요. 적당한 부분에 적당한 내용이 들어가야 하는데, 적고 싶은 장면이 워낙 많다 보니 애로사항이 없잖아 있습니다. 하하하. 0474 / 0933 ---------------------------------------------- 생각해보니, 말은 부족하고 석으로 받아야 할 것 같다. 『머셔너리 클랜, 용이 잠든 산맥 공략 이후 공식 입장 발표.』 『코란 연합 내 남벌 클랜, 아르테미스 클랜과 이야기 중 뜻밖의 협약을 체결. 사망한 사용자 중 지인이 있다면, 지인에게 사망자의 모든 장비(유품)를 돌려주기로 결정. 머셔너리 클랜은 거진 무상으로 연합에 모든 장비를 넘기며, 연합 또한 무상으로 사망자들의 장비를 돌려주는 것으로 발표.』 『머셔너리 클랜 로드 김수현 曰, “이번 원정은 머셔너리 클랜의 힘만으로 이루어냈다 생각하지 않는다. 서부에서 북 대륙 전역에 도움을 청했던 만큼, 앞서 들어간 수많은 사용자의 희생을 토대로 얻어낸 성과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번 결정은 용이 잠든 산맥에서 사망한 사용자들과 지인들을 약소하게나마 위로하는 차원으로….”』 『남벌 클랜 로드 신혁 曰, “사실, 처음 말을 꺼낼 때는 조심스러운 면이 없잖아 있었습니다. 홀 플레인에 법칙이나 다름없는 관행이 있는 만큼, 말을 꺼내면서도 스스로도 무례하다 여겼으니까요. 하지만 연합 내 사용자들이 그냥 클랜원이 아닌, 한 가족이라는 말이 머셔너리 로드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머셔너리 로드는, 제 요청을 매우 흔쾌히 허락해주셨습니다. 저는 그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이번 일을 자청해서 대행하기로 한 것입니다.”』 『머셔너리 클랜과 코란의 연합. 그동안은 서로 무관심했으나 이로써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려는 준비?』 『또한 머셔너리 클랜에서 이번 서부 도시 대표 클랜 선발에 관심이 없다고 밝혀. 머셔너리 클랜 로드 김수현 曰, “현재 머셔너리의 관심은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에 오롯이 쏠려있다. 즉 이번 서부 도시 선발 과정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을 계획이며, 조만간 중앙 기구에도 직접 방문해 확실한 뜻을 밝힐 것.”』 (수현아? 수현아!) 한창 기록을 읽던 도중이었다. 언뜻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시선을 올리자, 어딘가 모르게 화난듯한 형의 얼굴이 보였다. 물론 실제로 앞에 앉아 있는 건 아니고 통신용 수정구에 맺혀있었다. 그러고 보니 형과 통신을 하고 있었던가. 아니, 확실히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대화에 지루함을 느껴, 나도 모르게 딴짓을 해버린 모양이다. 아무튼 아무리 형이라도 기분이 좋지는 않을 터.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미안. 형. 잠깐 다른 생각 좀 하느라.” (다른 생각? 무슨 생각? 수현아. 너 지금까지 형이 하는 말은 제대로 들은 거야?) “으응. 들었어. 그런데 말했잖아. 형 말처럼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좋은 의도에서 한 거야.” (아이고 이 답답한 동생아! 네 의도가 어떻든 간에 그건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고. 응? 형은 오늘 너희 클랜 기록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그래. 도시는 그렇다고 쳐. 하지만 성과는,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건 연합에서 너를 이용해 먹은 거라니까? 아 생각하니까 또 열 받네. 연합 이놈들 진짜…. 감히 내 동생을 등쳐 먹어?) 형은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책상을 후려갈기더니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나는 쓰게 웃었다. 사실 형이 이렇게 분노하는 데는 얼마 전 모니카의 광장에서 있었던 공식 발표에 있었다. 나는 우설희와 약속한 대로 사망한 사용자들의 장비를 무상으로 돌려주겠다 선언했고, 연합에서도 호응해 비슷한 기록을 내었다.(물론 서부 도시와 관련한 입장도 빠트린 건 아니었다.) 이 발표는 예상보다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그런 만큼 반응 또한 각양각색이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말로 이번 결정을 환영하는 사용자도 있는 반면, 굳이 관행을 깨트릴 필요가 있느냐 비판하는 사용자도 있었다. 혹은 머셔너리와 연합 간의 내부 거래가 있을 것이라 말하는, 상당히 예리한 사용자도 더러 있었다. 그렇게 발표 후 며칠 동안 북 대륙 전역이 들썩들썩했으나, 막상 당사자나 다름없는 우리 클랜은 조용했다. 왜냐하면 발표 전 한 번 회의를 소집해 대강의 사정을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우선 사실만 놓고 보면, 연합에서는 상당량의 금액을 지불하고 장비를 가져갔다. 값을 어느 정도 낮추기는 했으나, 장비 하나하나에 가격을 매긴 것이다. 제값을 받지 못함으로써 생긴 손해는 홍보 비용으로 생각하면 그리 손해도 아니었거니와, 또한 연합에 넘긴 장비는 전부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보통의 장비에 불과했다. 말인즉슨, 질 좋은 장비는 이미 몰래 빼돌린 상태였다. 분명 장비를 돌려주겠다고 했으나, 모든 장비가 있다고는 하지 않았다. 아무튼 사정을 아는 클랜원들은 잠잠했지만, 사정을 모르는 형은 그러지 못했다. 관련 기록이 나오고 장비를 넘길 즈음 통신을 넣더니 여태껏 온갖 잔소리와 연합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형을 말리느라 진땀을 빼야만 했고. 형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오늘 오후에도 여러 일정이 잡힌 나로서는 짜증을 안 내려야 안낼 수가 없는 노릇이다. 결국 나는 형을 지그시 노려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좀 해. 형이 자꾸 이러면 나 정말 화낼지도 몰라.” (너 지금! …아니, 아니 미안해 수현아. 형이 잘못했어. 말이 좀 심했지? 그러니까 화내지는 말아주라.) “그럼 정말 그만해. 어차피 이미 발표도 했고, 오늘 장비도 넘겼어. 나는 정말 좋은 의도에서 한 거란 말이야. 사용자들 반응도 괜찮고.” (…후유. 그래. 알겠다.) 형의 가장 큰 장점은 내 심리를 정확히 읽을 줄 안다는 것이다. 이제는 빠질 때라는 걸 알았는지 깊은 한숨을 흘리더니,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미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긴, 너는 현대에서도 그랬지. 마음이 참 따뜻했어. 혼자 가지는 것보다는 나누는 걸 좋아하고, 항상 남 도와주는 거 좋아하고, 아무튼 가여운 사람이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를 못했단 말이야. 하하하. 기억나니? 너, 비 오는 날 지하철 입구에서 장사하시던 할아버지한테 우산 씌워드린 거.) “…응? 어, 어? 그, 그랬나.” (그래. 하지만 수현아. 마지막으로 이 말만은 할게. 홀 플레인은 현대가 아니야. 현대보다는 훨씬 차갑고 매정한 세상이지. 물론 알고 있어. 네가…. 정상이었다는 걸. 하지만 그건 네 말에 따르면 운이 좋았던 거라며? 이번에도 운이 좋다고 장담할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조금 더 스스로를 챙기도록 해. 형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 “어…. 으응. 그럴게.” 형의 목소리는 한없이 따뜻했으나, 나는 당혹스러운 기분을 이기지 못해 얼떨떨하게 답하고 말았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자 그럴 만도 하다고 여겼다. 형한테 진실을 밝히기는 했지만, 있는 그대로 사실을 밝힌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나도 모르게 서글픈 마음이 들어, 거의 투정이 부리듯 힘들었던 일만 말해버린 것이다. 그런 만큼 형이 보는 나는 아직도 착한 동생이라는 개념이 박힌 듯싶었다.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한순간 무척 민망한 기분이 들었으나, 나는 가까스로 가라앉힌 후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고 보니 마침 형에게도 할 말이 있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말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이제는 턱을 괸 채 빙글빙글 웃고 있는 형을 향해,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차. 형. 그러고 보니 부탁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는데….” (오 그래. 네가 직접 말하기 그러면, 내가 연합에 가서….) “형!” (미안, 미안. 농담이다.) “…후. 다른 건 아니고, 최근에 알려준 유적 정보 있잖아. 혹시 거기 공략했어?” (아니 아직. 이제 가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왜?) 준비 중이라는 말에 나는 입맛을 다셨다. 근 2년 동안 나는 수많은 유적과 성과가 잠들어있는 장소를 탐험했다. 하지만 그것을 머셔너리에서 모조리 독식한 건 아니었다. 가는 장소마다 어떤 장비들이 나올지 미리 알고 있었던 만큼, 나는 성과 별로 유적을 A, B, C 세 등급으로 구분했다. A등급과 B등급은 머셔너리를 비롯한 해밀, 이스탄텔 로우 클랜과 나누어 먹었고, C등급은 이따금 친분 있는 클랜에게 슬쩍슬쩍 흘려주었다. 물론 C등급에도 성과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으나, 괴물들이 자주 출현하거나 부락에 불과한 정도였기에, 사실 유적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아무튼 어떠랴.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말도 있듯이, 받는 입장에서는 그것만해도 감지덕지일 텐데. “그러면 혹시 공략을 포기해줄 수 있어?” (응? 아, 그래. 그러도록 하마.) “…미안해. 하지만 줬다가 빼앗는 건 아니야. 잠깐 필요해서 그래.” (미안하기는 무슨. 수현아. 이거 네가 도로 가져간다고 해서, 우리 쪽에서 아무도 뭐라 할 사람 없어. 여태껏 너한테 받은 게 몇 개인데.) 형은 절대로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시원하게 말해주었다. 그 말에 조금은 마음이 놓여 나는 비로소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고마워. 아, 나 곧 있으면 나가봐야 하거든? 바쁘니까, 나중에 연락할게.” (그래 그래.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았구나. 아차. 그래도 언제 한 번 시간 내서 들르려무나. 뾰롱이가 너를 무척 보고 싶어 한단다.) “이름이 뾰롱이가 뭐야, 뾰롱이가.” (하하하.) 형의 웃음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통신을 종료했다. 그리고 뜨겁게 달궈진 수정구를 밀어 넣은 후, 있는 힘껏 기지개를 피며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해는 서서히 서쪽으로 넘어갈 기미가 보여,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원래 오늘 오후 일정은 총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스탄텔 로우에서 한소영을 만나기로 한 것과, 다른 하나는 바바라로 가는 것. 하지만 이리도 시간이 지난 걸 보니 아무래도 바바라 방문은 내일로 미루는 게 나을 듯싶었다. 그때였다. 차분히 이스탄텔 로우로 방문할 채비를 하던 도중, 문득 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얼른 사용자 정보를 띄운 후, 아래에 적혀있는 용의 권능에 관한 정보를 열람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예전에 잠깐 확인한 게 전부였고, 그동안은 이런저런 일로 바빠 자세히 확인하지 못했다. 아니 체력이나 성과 자체를 이번 일을 해결하고 나서 처리할 예정이라, 아예 볼 생각도 못했다는 게 맞았다. 『용의 축복 :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의 권능.(2/5)』 (1. 제한된 폴리모프(Polymorph). (설명 : 용언 폴리모프. 신화 시절 용들이 스스로의 편의를 위해 개발한 일종의 모습 변환 마법입니다. 시전자가 기억하는 모습이라면 생물과 무생물에 관계없이 어떤 모습이라도 변화할 수 있으며, 심지어 어느 용은 변환 대상의 특성이나 능력을 그대로 복사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용의 입장이며, 사용자의 경우에는 여러 제한이 적용됩니다. 사용자는 기억하는 생물에 한해서 모습을 변환할 수 있습니다. 무생물은 불가능합니다. 또한 겉모습만 변화할 뿐이지, 대상의 특성이나 능력을 가져올 수도 없습니다. 하루에 세 번 사용할 수 있으며 하루를 기점으로 횟수가 초기화됩니다.) 2. 제한된 용족화….) 그 중 내가 주목한 건 바로 폴리모프였다. 이 권능을 발동하면 내가 기억하는 생물의 모습으로 변환해준다. 일단 여러 제한이 걸린 만큼 아쉬운 마음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래도 어떻게 사용하냐에 따라서 나름의 효과를 볼 수 있을 터. 한 번 시험해봐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창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창문에 비치는 내 모습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문득 한 명의 사용자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폴리모프.” 그리고 그 순간, 삽시간에 내 몸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어서 알 수 없는 마력이 흐름이 몸 속으로 파고듦과 동시에 나는 몸이 약간 무거워진 기분을 느꼈다. 잠시 후. 창문에는 칠흑 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경국지색의 여인이 서 있었다. 우뚝한 콧날과 색기를 뚝뚝 떨어뜨리는 입술. 머리칼에는 햇살이 반사돼 아름다운 윤기를 흘리고 있었고, 흑 수정이 박힌듯한 한 쌍의 눈동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는 창문에 비치는 한소영의 모습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만족한다. 용의 권능치고는 이펙트가 수수하나 오히려 이 편이 더 깔끔하고 좋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고 딱히 고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이미 완성된 마력의 흐름을 덧씌워 모습을 변환해주는 마법이었다. “확실히 외양은 똑같네…. 분위기는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한데.” 한소영 고유의 카리스마가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에, 나는 빅토리아의 영광을 꺼내든 후 다시 창문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제야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조금이나마 비슷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돌연 까닭 없이 만족한 기분이 들어 나는 빙그레 웃으며 시선을 내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키도 약간 작아진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때. 문득 언제나 평평했던 하늘의 영광 가슴 부분이, 불룩하게 솟아오른 광경이 눈에 밟혔다. “…….” 나는 아주 잠시, 그 광경을 눈을 깜빡이며 멀거니 바라보다가 불현듯 나도 모르게 왼손을 들어 앞섬에 걸치고 말았다. 잠깐 손이 멈칫하기는 했지만. 그리고 왠지 모르게 손이 떨리기는 했지만. 나는 억지로 손에 힘을 주어 앞섬을 살그머니 열어보았다. 돌연히 목으로 침이 넘어간다. 그리고. 이내 한치도 여과 없이 모습을 드러낸, 새하얗고 아름다운 형태의 젖가슴을 발견한 순간. “헉.” 격한 신음을 터뜨리며, 가슴을 치듯이 앞섬을 닫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지체 않고 폴리모프의 해제를 외쳤다. 이윽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나의 모습을 보며 나는 한 손을 얼굴에 대었다. 이상하게 얼굴이 벌겋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한편으로는 죄책감도 들었다. 그렇게 한동안 화끈화끈한 얼굴을 식히다가, 마치 도둑질한 사람처럼 슬금슬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아직도 방망이질하는 가슴을 다스리려 애쓰며, 나는 빠른 발걸음으로 방문을 나섰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한 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생각보다…. 크시구나. ============================ 작품 후기 ============================ 어제 김연아의 쇼트는 잘 보았습니다. 점수 자체는 굉장히 높은 점수라 생각하는데, 퍼주기에 관련한 여러 기사를 보니 조금 씁쓸하더라고요. 아무튼, 저는 피겨에 대해 잘 모르는 편이라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김연아가 금메달을 땄으면 좋겠어요. :D 그리고 김연아 외에 기억에 남는 선수가 있다면, 이름은 잘 모르고요. 그 프랑스 출신의 흑인 선수가 기억에 남습니다. 뭐랄까, 네이버 동영상으로 보면서 실시간 코멘트도 보고 있었는데, 참 눈살이 찌푸려지는 코멘트가 많더라고요. 참 거기까지 열심히 노력해서 올라온걸 생각하면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텐데…. 아무튼 반발 심리가 작동한 모양인지 김연아 다음으로 응원했습니다. 하하하. 0475 / 0933 ---------------------------------------------- 생각해보니, 말은 부족하고 석으로 받아야 할 것 같다. 남부 소 도시 모니카. 머셔너리 클랜이 처음 자리를 잡았으며, 이스탄텔 로우 클랜이 관리하는 도시. 머셔너리는 그동안 많은 발전을 이루어냈지만, 이스탄텔 로우도 놀고만 있던 건 아니었다. 모니카의 대표 클랜으로써 그 어느 클랜보다 열심히 노력했으며, 내부 관리와 외부 안정화에 힘썼다. 그 결과 지금의 모니카는 다른 소 도시를 넘어서, 일반 도시와 거의 비슷하다고 평가 받을 정도였다. 사용자들이 거주 도시를 선택하는 기준은 크게 두 가지로 가늠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일단은 안전해야 한다. 도시 외부가 활동할 수 없을 정도로 괴물 천지라면 어지간한 사용자가 아니고서야 꺼려질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도시 내부에서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어야 한다. 즉 안전할수록, 살기 좋은 도시일수록 사용자들이 따라오는 건 자명한 이치였다. 한소영은 그러한 기준을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도시가 커질수록 내부 관리에도 신경을 기울였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치안이었다. 많은 사례 중 하나 예를 들어보면, 모니카에 대한 좋은 소문이 퍼지고 사용자들이 몰려들자, 밤의 거리 또한 그에 발맞춰 활성화됐다. 자연스러운 일이기는 했으나, 그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한소영이 아니었다. 한소영이 밤의 거리에 대한 입장은 간단하다. '하려면 걸리지 않게 해라.' 말인즉슨 모니카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한(생계를 위한 매춘 등등.) 밤의 거리를 일절 용납하지 않으며, 적발되는 순간 각오하라는 소리였다. 처음에 밤의 거리 사용자들은 코웃음 쳤다. 그동안 밤의 거리에 대한 제재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상납금 형식으로 수익의 일부를 넘기면 된다고 생각했거니와, 여차하면 다른 도시로 가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소영은 경고를 한 다음날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불시에 밤의 거리를 급습해 본보기로 스무 명 정도 잡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 스무 명의 사용자는 모니카의 광장에서 모조리, 공개적으로 처형당했다. 어떻게 보면 큰 사건이었으나 공개 처형 사건은 생각보다 물 흐르듯이 넘어갔다. 애당초 도시 관리 권한은 오롯이 대표 클랜에게 있거니와, 경고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또한 처형당한 사용자들이 별 연고가 없는 그저 그런 사용자라는 점도 한몫 했다. 한소영은 다음 번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면 똑같이 대응하겠다 엄중히 경고했고, 밤의 거리는 숨을 죽임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됐다. 물론 이후에도 모니카라는 좋은 시장을 포기 못한 자들이 종종 있었으나, 한소영은 그럴 때마다 족족 잡아들여 단 한 번도 예외 없이 목을 잘랐다. 이러한 결과, 현재에 이르러서는 모니카에서 밤의 시장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한소영의 집요함에 지친 사용자들이 결국 다른 도시로 떠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기실 철혈의 여왕이라는 말이 진명을 넘어서 호칭으로 변하는 것도 이즈음이었다. 떠나간 사용자들은 한소영을 피도 눈물도 없는 여인이라 비난했는데, 이스탄텔 로우의 무력을 사사로이 이용해 불필요한 피를 흘리게 했다는 소리였다. 도시 관리야 주관적인 부분이니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가부간 한소영은 그런 여인이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스스럼없이 철을 들고, 필요하면 피를 보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아마 이러한 과단성이 미래의 이스탄텔 로우를 만든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문득 시선을 들어 맞은편을 응시했다. “…….” 맞은편에는 한소영이 자리에 앉아 조용히 식사, 그러니까 국수를 먹고 있었다. 지금 내가 있는 장소는 바로 이스탄텔 로우 클랜의 식당이었다. 약속한 시간에 이스탄텔 로우를 방문한 나는 아직 식사 전이냐는 말에 그렇다고 답했고, 한소영에게 식사 권유를 받은 것이다. 애당초 약속 자체도 갑자기 잡힌 터라 느닷없는 요청에 당혹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래도 마다할 내가 아니었다. 기꺼운 마음으로 권유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사실 한소영이 안내한 장소가 구내 식당이라는 점에 잠시 의아한 기분을 느꼈지만, 음식을 한 입 먹어보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스탄텔 로우의 요리사도 거의 우리 클랜만큼이나 실력이 좋았다. 아무튼. 음식을 먹으면서도 표정 없는 얼굴이나 약간의 소리도 내지 않는다는 게 자못 신기했지만, 사실 내가 눈을 떼지 못하는 원인은 정작 따로 있었다. 한소영의 나이도 이제는 계란 한 판, 즉 서른이다. 그런데 겉으로 보면 전혀 서른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나이를 먹음으로써 본래의 매력이 더욱 농염하게 무르익었다고나 할까. 흑 수정 같은 눈동자는 보는 사람을 빨아들일듯한 기이한 마력을 흘린다. 오므린 입술은 국수를 씹는지 오물오물 느릿하게 움직이는데, 연하면서도 붉은 색상이 그렇게 농염하면서도 색스러워 보일 수가 없다. “후우….” “?” 나는 깊은 한숨을 흘렸다. 정말이지 한소영이라는 여인은….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 만날 때마다 느끼기는 하지만, 볼 때마다 결국 나도 한 명의 사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어쩌면 이렇게 사람을 홀리는 게 고유 능력 카리스마 때문일 수도 있지만, 한소영이란 여인의 매력도 무시무시했다. 겉모습은 말 그대로 철혈의 여왕에 걸맞은 차가운 카리스마가 넘치는 여인이었으나, 사소한 몸짓이나 행동 하나하나마다 은근한 색기를 뿌리고 흘린다. 이런 상반된 매력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일으키는 시너지는 그야말로 엄청난 수준이었다. 심안을 최고 수준까지 올린 나로서도 영향을 받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어쨌든 이렇게 계속 쳐다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억지로 시선을 내렸다. 그런데 하필 내린 시선이 가슴이었다. 그 순간 생각보다 크셨던 가슴이 떠올라 도로 한소영을 올려다보자, 절로 몸에 신호가 왔다. 나는 다리를 오므림과 동시에 다시 깊은 한숨을 흘렸다. 속으로 최악이라고 생각하면서. 잠시 후, 식사를 마친 모양인지 한소영은 젓가락을 놓아 나도 따라 놓았다. 한소영은 깨끗이 비운 반면 나는 반도 비우지 못한 상태였다. 찰나의 순간 내 그릇을 훑은 한소영은 눈을 빠르게 두 번 깜빡였다. 저건 조금 당황했다는 신호였다. 자신이 너무 빨리 먹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가만히 그릇을 쳐다보던 한소영은 이내 지그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의자를 최대한 앞으로 끌며 어설프게 웃었다. 한소영의 고개가 살짝 기울여졌다. “머셔너리 로드? 음식이 입에 안 맞으신 가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주 맛있습니다.” “굳이 억지로 드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저는 괜찮아요. 그럼 집무실에서 차라도 한 잔 하시겠어요?” “예? 아, 아니요. 정말 괜찮습니다. 하하하.” 지금 일어나면 큰일난다. 저 한소영이 눈치를 채지 못할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기껏 놓았던 젓가락을 필사적으로(?) 들었다. 그와 동시에 장기 중 하나인 화제 돌리기를 시전했다. “아, 그러고 보니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은데…. 아직 듣지 못한 것 같네요.” 그랬다. 지금껏 한소영을 만나 나눈 이야기래 봤자 전부 소소한 것들이었다. 용이 잠든 산맥의 공략이나 어제 조사단이 출발했다는 등등. 서로 바쁜 입장이기도 했거니와 한소영의 성격에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나누자고 불러냈을 리는 없을 터이니, 아마 다른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그러네요. 실은, 어제 머셔너리에서 발표한 기록을 봤어요.” 그러자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이 한소영은 곧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대충 비슷한 말이 나올 거라 짐작하고 있었기에, 나는 끄덕끄덕 머리를 주억였다. “연합과의 일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예. 그런데요?” “나쁠 것은 없지만…. 머셔너리 로드의 이번 선택은, 조금 의외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네요.” “의외라. 딱히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코란으로 이사 갈 생각도 없고, 그냥 있는 그대로 보시면 됩니다.” “아니요. 머셔너리 로드. 그런 말이 아니에요.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투로 말했으나, 오히려 한소영은 차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말씀처럼 있는 그대로 보기에는, 연합의 움직임이 조금 이상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네요.” “…….” “돌려 말하지 않겠어요. 혹시라도 연합과 사건이 있었다면, 저에게 말씀해주셔도 되요. 왜냐하면 이스탄텔 로우와 머셔너리는 공방 동맹이니까요.” “…하하.” 역시나 한소영인가? 아니면 이번 선택을 석연치 않게 여겨 그냥 한 번 말해본 걸까? 잘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이스탄텔 로우가 우리와 비슷한 독자 노선을 걷고는 있었지만, 코란 연합처럼 엄연히 남부에 속한 연합이었다. 그런데 산하 클랜도 아닌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무튼 기분은 좋다. 코란 연합도 어지간한 클랜인데, 이런 말을 한다는 건 한소영이 머셔너리를 더욱 높이 치고 있다는 방증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거절하기로 마음먹었다. 한소영을 이런 일에 끌어들이기 싫었고, 머셔너리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연합과 다른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좋은 의도에서 한 일이니까요. 물론 다른 효과도 노리고는 있습니다만.” “…그런가요?” “예. 그래도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네요. 혹시 모르니, 만일 버거운 일이 생기면 이스탄텔 로우에 꼭 요청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래 주세요. 지금껏 머셔너리 클랜한테는 이것저것 받은 게 많으니…. 아. 국수가 별로 시면 차 한 잔….” “후룩, 후루룩.” “…맛있게 드세요.” 맛있게 먹으라고는 하지만 자꾸 신경이 쓰이니 이제는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굴 탓하랴.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동생을 원망하며, 나는 시무룩한 기분으로 국수를 흡입했다. 그렇게 최대한 천천히 국수를 먹고 있을 즈음, 문득 젓가락으로 국물을 휘젓는 한소영이 보였다. 심심해서 저러는 것 같지는 않고,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것 같다. 그러자 한소영이 언뜻 눈을 들어 나를 흘겼다. 오늘따라 예지력이 상승한 모양이다. “머셔너리 로드는…. 항상 그렇네요.” “예?” “원래 그런가요? 주기 좋아하고…. 그런데 받지는 않고…. 가끔 궁금해요. 왜 이렇게 저한테, 이스탄텔 로우한테 잘해주시는지.” “…후루룩.” 나는 입에 문 국수를 빨아들였다. 조금 전 말은, 한소영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나올만한 말이었다. 딱히 바라는 것 없이 이런저런 질 좋은 정보들을 잔뜩 흘려주었고, 그것은 이스탄텔 로우가 고성장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이와 비슷한 질문을 받은 것 같기도 한데…. 그때는 미처 예상치 못해 당황했으나, 지금의 나는 다르다. 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애매한 물음에는 애매하게 답하는 게 최고다. “그거야 간단합니다.” “?” “처음 모니카에 자리를 잡을때 이스탄텔 로우 로드께서도 우리에게 무척 잘해주셨죠. 이런저런 일거리도 주시고, 클랜 하우스도 싸게 넘겨주시고.” “그랬죠.” “그렇습니다. 물론 아주 똑같지는 않겠지만…. 그것과 비슷한 맥락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요?” 한소영은 담담히 답하더니 눈을 슬쩍 내리깔며 다시 그릇을 저었다. 그리고 나는 약간 멍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한소영은 포커페이스의 여왕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얼굴 관리에 뛰어나다. 하지만 사람인 이상 감정이 아예 없을 수는 없고, 나는 한소영과 오랫동안 함께했던 만큼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할진대. 방금 한소영의 행동은 무언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나오는 습관, 혹은 버릇이었다. 혹시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결국 나는 다시 한 번 장기를 발휘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한 가지 궁금한 것도 있었다.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은 후 클랜 창고에서 챙겨온 검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 최대 성과 중 하나인 맹세의 검이었다. “아차. 이스탄텔 로우 로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어떤 게 궁금하시죠?” “잠깐 이 검을 보시겠습니까? 이번에 용이 잠든 산맥에서 얻은 성과로, 맹세의 검이라는 장비입니다.” “맹세의 검…?” 구즈 어프레이즐은 챙겨오지 못했다. 사실 필요도 없다. 어차피 한소영은 초감각이라는 매우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능력이 있어, 맹세의 검이 좋은지 나쁜지 정도는 자력으로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잘 보이도록 손잡이 부분을 잡자 어여쁜 흑 수정이 아래로 이동한다. 이내 건네주려는 순간, 한 번 깜빡인 눈동자에 강렬한 이채가 스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그리고 줄까 말까 고민하다가, 이내 검을 살짝 왼쪽으로 이동해보았다. 그러자 한소영의 눈동자가 주르륵 왼쪽으로 따라왔다. …어라? 오른쪽으로 옮기자 오른쪽으로 따라온다. 다시 왼쪽으로 옮기자 또다시 왼쪽으로 따라온다. 그렇게 진자 운동을 하는 것처럼, 한소영의 눈동자는 내가 맹세의 검을 이끄는 대로 끊임없이 따라왔다. 생각건대, 한소영은 예상대로 맹세의 검의 가치를 알아본 듯싶었다. 절로 욕심이 일은 모양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는데 사실 엄청 신선하면서도 웃겼다.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해, 결국 나도 모르게 약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킥.” 그때였다. 웃음소리를 들었는지, 문득 한소영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윽고 한소영은 서서히, 아주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얼굴은 무표정했으나, 나는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삽시간에 굳어버린 얼굴과 한층 싸늘해진 눈빛을. 나는 아차 한 기분과 동시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 “…….” 그렇게 한동안 싸늘한 침묵이 흐른 후, 한소영은 책상을 짚어 조금 세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이만 갈래요.” “예, 예? 어디를….” “이만 가겠다고요. 일이 바빠서요. 굳이 배웅은 하지 않으셔도 되요.” “그게 무슨…? 아니 배웅이라뇨. 여기는 이스탄텔 로우 클랜인데….” 나는 차분히 설명했다. 한소영은 잠깐 생각에 잠긴듯했다. 그리고 1초후 멍한 기색을 짓더니 확연히 보일 정도로 나를 노려보며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이 정도로 감정을 비치는 건 거의 없는 일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순간 뭐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만남 참 신선했어요. 머셔너리 로드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어서, 아주 좋았네요. 그럼 이만.” “자, 잠시만.” 뒤늦게 몸을 일으켰으나, 한소영은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몸을 돌리더니 쌩 걸어가버렸다. 나는 찬바람을 풀풀 날리는 한소영의 뒷모습을 망연히, 하염없이 응시했다. 호기심도 있기는 했지만 잠깐 옛날 생각이 나서 장난을 쳤는데, 이거 실수해도 정말 단단히 실수한 듯싶었다. 이내 한소영이 문을 열려는 찰나, 마침 벌컥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먼저 안으로 들어왔다. 연혜림이었다. 연혜림은 나와 한소영을 번갈아 보더니 의아한 얼굴로 팔을 잡았다. “어? 한소영? 어디가?” “비켜.” “아니. 머셔너리 로드가 아직 있는데….” “비키라고 했잖아. 내 말 안 들려?” 한소영은 팔을 가볍게 떨치고는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흠칫한 연혜림은 한두 걸음 물러나고는 이상한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나에게 다가와 궁금한 반 억울함 반이 섞인 얼굴로 물었다. “야. 머셔너리 로드. 쟤 갑자기 왜 저래? 왜 저렇게 삐친 거야?” “…삐친 거라고? 화난 게 아니라?” “엉. 쟤 화났을 때는 저렇게 눈썹이 안 올라가. 오히려 고요하지. 얼굴이 발갛게 익고 입술을 깨물 때는, 명백하게 토라졌다는 소리야. 어때. 좋은 정보지?” “…그랬던가.” 그러고 보니 얼굴 색은 체크 못했다. 히히 웃는 연혜림을 보며, 나는 마주 쓰게 웃어주었다. ============================ 작품 후기 ============================ 예전에 한소영의 표를 떨어트리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많은 독자 분이 반대하셨지만, 저는 결국 강행했습니다. 한소영의 표를 떨어트리기 위해서요. 그러기 위해 일부러 밉살스러운 한소영을 그렸습니다. 자.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저는 한소영의 표를 떨어뜨렸습니다. 저, 이렇게 무서운 사람입니다. PS. 어느 패러디인지 알아맞히시는 분은 대단합니다. PS2. J.F 님. 혹시 제가 사랑해도 될까요? >3< 0476 / 0933 ---------------------------------------------- 생각해보니, 말은 부족하고 석으로 받아야 할 것 같다. “그럼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몸을 돌리자 미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조승우가 보였다. 처음에는 생각 이상으로 긴장하는가 싶었는데, 며칠의 시간이 흐르자 훨씬 적응된 모습을 보여주는 중이었다. 사실 지금도 하연이 있을 때와 비교하면 그렇게 커다란 공백은 느껴지지 않는다. 조승우 본인의 능력도 있겠지만, 역시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 클랜 로드. 요즘 얼굴 보는 게 너무 힘든 것 같습니다.” 이런 농담도 건넬 줄 알고 말이다. 아, 농담이 아닌가? 확실히 요즘 이곳저곳을 많이 쏘다니기는(?) 했다. 그래도 어쩌랴? 그냥 놀러 다니는 것도 아니고, 할 일이 있어서 돌아다니는 건데. “클랜원들의 원성이 이제는 아우성처럼 들립니다. 한 시라도 빨리 성과를 확인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하하하.” “흠, 이거 어쩌나. 이 일이 끝날 때까지는 시간을 내기 힘들 것 같은데요. 정 그러면 알아서들 개봉하라고 하세요.” “에이. 클랜 로드가 없으신데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그럼 조금 더 기다리던가요. 아무튼 끝날 때쯤 수정구로 통신을 넣겠습니다.” 조승우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머리를 꾸벅 숙였다. 간단히 화답해주고 나서, 나는 바로 몸을 돌려 1층 입구를 나섰다. 해 뜬 하늘은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맑았다. 정원에 삼삼오오 모여있던 고용인들은 한창 수다를 떨고 있다가, 내가 보이자마자 쏜살같이 흩어졌다. 그리고 풀을 다듬거나 연못의 물을 교체하는 등 열심히 정원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별다른 말 않고 고용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어차피 고용인들과는 계약 그 이상 이하의 관계도 아니었고, 잠시 노닥거린다고 해서 그다지 조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정도가 심하다 싶으면 다른 클랜원들이 알아서 관리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정문을 나서 거리로 들어갔다. 그리고 워프 게이트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오늘 내가 방문할 장소는 바로 대 도시 바바라. 그중에서도 중앙 관리 기구라는, 2년 전에 신설된 일종의 목적을 지닌 북 대륙의 대표 기관이었다. 즉 대표 클랜이 도시를 관리한다면, 중앙 관리 기구는 북 대륙을 관리하는 하나의 거대한 연합 기구라고 볼 수 있었다. 이렇게 겉으로는 매우 거창한 명분을 지니고 출범한 기관이나, 사실 내막을 살피면 조금, 아니 상당히 웃긴 기관이었다. 전쟁과 복구 작업이 끝나고 나서, 가장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건 바로 바바라였다. 황금 사자의 몰락 후, 공백이 된 도시를 과연 누가 차지할 것인가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그 사태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1회 차 때도 비슷했다. 바바라의 소유권을 둘러싼 공방은 춘추전국시대가 오는 단초를 제공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따라서, 나름의 준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사태의 결과는 예상외로 1회 차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끝내 합의점을 찾지 못한 것까지는 똑같았으나, 결국 마지막에 이상한 방향으로 합의가 됐다고나 할까. 거두절미하면, 바바라는 공동으로 관리하는 도시가 됐다. 시작의 여관과 사용자 아카데미가 있는 만큼 병아리들의 적응과 활동을 돕는데 중점을 둘 것이며, 또한 차후 전쟁과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때를 대비해 북 대륙에 명성 있는 클랜들이 공동으로 관리한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불필요한 분란을 중재한다는 등등의 말이 있었는데, 아무튼 명분은 좋다. 내가 웃기다고 생각한 이유는 바로 중앙 관리 기구에 차출된 각 클랜의 분포에 있었다. 구성 현황을 살펴보면 동부 클랜 출신이 절반을 차지한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서부, 남부, 북부가 사이 좋게(?) 나누어 먹었다. 말인즉슨 바바라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클랜이 바로 동부라는 소리였다. 언젠가,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미래는 변했다. 그러나 변하지 않았다. 개인적인 생각이기는 하지만, 이 법칙은 그때의 상황에도 똑같이 적용됐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그냥저냥 넘어가는가 싶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혼란을 벗어나 안정에 접어들자, 남부에서 동부의 처사에 공공연하게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서로 정확히 반반으로 나누었다면 모를까. 동부와 함께 처음부터 전쟁에 참여했는데, 서부나 북부와 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을 참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동부 또한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전쟁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게 바로 동부이며, 가장 많은 공을 세운 것도 바로 동부이다. 그것을 감안해 인사를 구성했으며, 또한 바바라를 아주 차지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불만이냐는 생각이었다. 결국 여기에서도 서로 간의 입장 차이가 생겨버린 것이다. 그나마 동부의 말대로 지금껏 나름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고 커다란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정말로 춘추전국시대가 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만큼 현재 동부와 남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다만 겉으로 확연히 드러내지만 않을 뿐이지. “어디로 가시겠어요?” 생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워프 게이트에 도착했다. “바바라입니다.” “2골드 되겠습니다~.” 싱글벙글 웃으며 손을 내미는 사용자에게 이용 금액을 지불한 후, 나는 워프 게이트의 앞에 섰다. 그리고 포탈이 활성화되는 순간, 주저 않고 몸을 던졌다. * 바바라로 이동하고 나서 나는 현 중앙 관리 기구가 자리잡은, 구 황금 사자 클랜 하우스로 걸음을 옮겼다. 나름 북 대륙을 대표하는 기관인 만큼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장소는 아니었으나, 나는 예외였다. 쌓아놓은 명성도 있으며 이미 약속을 잡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간단한 신원 확인 절차만 거치고 바로 건물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간 순간,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용자를 확인한 순간. 나는 잠시나마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어서 와. 머셔너리 로드.” 이지적이면서도 성숙한 외모와는 달리, 아이처럼 가늘고 뾰족한 목소리가 나를 맞이했다. “이 장소는 처음이지? 후후.” “…너.” 푹신한 소파에 앉은 채 나를 보며 손을 흔드는 여인은, 다름 아닌 이효을이었다. 그리고 나는 어안이 벙벙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설마 이효을이 이 건물에, 이 방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효을은 북 대륙의 수호자다. 즉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차라리 사용자 아카데미 때처럼 그저 그런 말단 직이라면 모를까. 또한 이 방은 건물의 최상층에 위치한 방이었다. 이렇게 커다란 기관에, (지금껏 정체를 숨긴 탓이지만)아무런 명성도 쌓지 못한 사용자가 있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명백히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 잠깐만. 이렇다는 사실은…. “그만뒀냐? 수호자.” “그렇지! 역시 너라면 보자마자 맞춰줄 줄 알았어! 으하하!” 이효을은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두 팔을 번쩍 치켜들며 기분 좋게 웃어 젖혔다. 나는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웃을 일은 아닐 텐데. 사정을 알고 있는 사용자라면, 네가 수호자라는 사실이 알아차릴 수도 있을걸? 대모 사건처럼.” 그러자 웃음을 뚝 그친 이효을은 무너지듯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우아한 손놀림으로 찻잔을 들며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나는 혀를 찼다. 원래 감정 기복이 심하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조금이지만 정신병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아, 알고 있어. 그러니까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거지.” “그러니까 라니?” “아주 간단해. 수호자를 그만둔 이상 더는 가치가 없어졌다고나 할까? 하지만 아주 효용이 없는 것도 아니야. 네 말마따나 대모 님 때와 같은 사건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 나라는 방패막이가 필요한 거지…. 아, 그렇다고 멍청하다고 욕하지는 말아줘. 애초에 그만두는 조건에 포함돼있던 거야.” “멍…. 으음. 그럴 줄 알았지. 누누이 말했지? 천사들을 믿지 말라고.” “아아. 몰라 몰라. 그냥 그만두었다는데 의의를 둘래. 아무튼 시시한 이야기는 이쯤하고, 오늘은 무슨 일로 온 거야? 요즘 최고로 잘 나가는 머셔너리 로드께서.” “흠. 최고로 잘 나가는 건 아니지. 아니, 오히려 근래에 큰 사건도 있었고.” 이효을은 설레설레 손사래를 치고는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이만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뜻인 것 같아, 나는 기꺼이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이효을이 말했다. “근래에 큰 사건이라면…. 아, 용이 잠든 산맥? 오호오호.” “그래.” “그거 깔끔하게 처리했잖아? 의뢰도 해결했고, 공략도 완료했고, 사용자들도 구출했고, 성과도 빵빵하게 얻어왔을 거 아니야? 아, 차 한 잔?” “괜찮다.” “Ok. 아차차. 성과 하니까 생각난 건데, 너 좀 멋있더라? 얼마 전에 기록 읽었어. 사망한 사용자들의 장비를 무상으로 돌려주기로 했다며? 그것도 코란 연합과 공조해서. 내가 그거 읽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너처럼 이기주의의 극단을 보여주는….” “그만, 그만!” 수호자를 그만둔 게 어지간히도 신났던 걸까.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말을 듣고 있자니 머리가 다 어지럽다. 꼭 밥 달라고 짹짹대는 아기 새를 앞에 둔 기분이었다. 이내 지긋이 앞을 바라보자 혀를 살짝 내민 채 민망해하는 이효을이 보였다. 나는 잠시 이마를 매만지다가 품에 고이 모셔둔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앞으로 휙 던지자 이효을은 얍 소리를 내며 맵시 있게 잡아챘다. 그리고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호기심 어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건…. 영상 녹화용 수정구? 아니, 아닌가? 색이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아니야. 맞아.” “아하. 이거 나 보라고 준거야?” “얼마든지.” 나는 차분히 다리를 꼬며 답했다. 그러자 이효을은 곧바로 손끝을 겉면에 맞추었다. 이내 마력을 흘려 넣었는지, 수정구에서 말간 빛이 뿜어져 나옴과 동시에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흥미로운 기분으로 이효을의 얼굴을 주시했다. (음…. 보아하니 다 모인 것 같은데, 이제 슬슬 시작하는 게 어때?) (그렇지. 아주 똑똑해. 그나저나 역시나 다들 알고 있었네? 그래 맞아. 머셔너리 사건은 내가 주도했어.) 영상이 재생될수록 이효을의 얼굴도 변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기분 좋아 죽겠던 얼굴이 한없이 가라앉고 진중해진 것이다. 그래, 마치 예전 수호자 시절처럼. 이제 좀 이야기를 나눌만하겠다는 생각하며 나는 깍지 낀 손을 무릎에 얹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 마침내 수정구의 빛이 꺼졌다. 그와 동시에 이효을이 고개를 들어, 깊은 한숨을 흘렸다. “후.” “어때? 그걸 감상한 소감이 궁금해지는데.” “…일단 아까 말은 취소하겠어. 너 좀 멋지다고 한 거 말이야.” “음?” “얘네도 미쳤지만 너도 정말 어지간하다. 이러려고 그랬던 거였어? 복수하려고?” “하하. 고작 그 정도로 복수는 무슨.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안 그래?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이효을은 멍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고작 그 정도라는 말에 충격을 받은 듯싶었다. 하여간 반응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으나, 이효을도 어지간하다. 고작 영상 한 번 보고 내가 하려는 바를 정확히 짚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금 말했듯이 그 일이 복수의 메인이 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애피타이저에 불과하다. 사실 오늘 이 장소를 방문한 것도, 메인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일환이었다. “염병할. 그래도 어떻게 조용히 지내는가 싶었는데…. 하필 지금 이런 일이…. 아, 젠장….” 이효을 한동안 중얼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나를 쳐다보고는 거의 애원 조에 가까운 목소리로 간청했다. “머셔너리 로드야. 이거…. 그냥 적당히 넘어갈 생각은 없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게…. 이래 봤자 서로 좋을 게 없잖아? 싸움은 나쁘기도 하고.” “그렇지. 싸움은 나쁜 거지. 하지만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는 주의라.” 이효을은 그럼 그렇지 라는 기색을 짓더니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내 그 상태서, 약간 울리는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머셔너리 로드. 열 받는 건 이해하는데…. 사실을 말하자면, 이거 터뜨려봤자 생각만큼 효과는 얻기 어려울 거야. 물론 연합의 이미지는 추락하고 욕도 엄청 먹겠지. 관련자도 처벌을 면하기는 어렵겠고. 하지만, 딱 그 정도에 불과해.” “왜 그렇게 생각하지?” “코란 연합은 무시무시해. 한두 클랜도 아니고, 무려 여덟의 대형 클랜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연합체라고. 거기다 산하 클랜까지 합치면 그야말로 엄청난 수준이지. 지금 동부에서도 함부로 남부를 못 건드리는 이유 중 하나가, 푸른 늑대 때문이 아니야. 바로 코란 연합 때문이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아아. 알겠다. 그런데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고작 연합의 이미지를 떨어트리고, 욕을 먹게 하는 정도에서 그칠 생각이 없거든.” 실은 오늘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이 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탁! 얼굴을 감고 있던 손이 큰소리를 내며 책상에 떨어졌다. 이어서 드러난 이효을의 눈은 화등잔만 하게 커져 있었다. 눈동자에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서려 있다. 여기까지 말한 이상, 아무래도 이효을도 내 의도를 눈치챈 듯싶었다. “너…. 설마….” “그래.” 조용히 긍정한 후,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아니 머셔너리는. 끝까지 갈 생각이다.” ============================ 작품 후기 ============================ 아 죄송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이 형 졸업식인데, 아버지가 바쁘실 예정이라 오늘 저녁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려서, 집에 돌아오니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하하. 그나저나 독자 분들 정말 너무하십니다. 저는 표를 떨어트리려고 어제 한 회나 소비해서 한소영을 그렸는데, 오히려 좋아하시면 어떡하십니까. ㅜ.ㅠ 아무래도 제가 독자 분들의 기호를 잘못 파악한 모양입니다. 쩝…. 아무래도 다음에는 코 파고 방구 뿡뿡 뀌는 한소영이라도 그려야 할 것 같습니다. 하하하.(노, 농담입니다.) 0477 / 0933 ---------------------------------------------- 생각해보니, 말은 부족하고 석으로 받아야 할 것 같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처음 까불까불 한 얼굴은 어디로 갔는지, 영상을 확인한 이후 이효을은 시종일관 침중한 기색을 비치고 있었다. 한동안 시간이 흐른 후, 이윽고 눈을 가늘게 뜬 이효을이 입을 열었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해? 꼭 피를 봐야 직성이 풀리겠어?” “함부로 머리 굴리다 걸리면 피 보는 거 안 배웠나?” “김수현!” “하하. 진정하라고 북 대륙의 수호자…. 아니, 아니지.” 나는 진정하라는 의미로 서너 번 손을 저었고, 이내 양손을 맞잡으며 살며시 상체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 상태로 말을 이었다. “이봐. 사용자 이효을.” “왜.” “우리가 용이 잠든 산맥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어떤 일을 겪어야만 했는지. 알고 있나?” “그건….” “머셔너리는 용이 잠든 산맥의 공략을 완료했습니다. 이렇게 발표하면 끝인 줄 알아? 그 과정은 생각지도 않는 거야? 그냥 와 유적이구나~. 이러고 우르르 몰려가서, 대충 괴물 몇 마리 때려잡고 나온 것 같나?” “…….” 이효을은 순간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딱히 알 방도도 없겠지만 용이 잠든 산맥의 악명은 그동안 익히 들어왔으리라. “…그렇게 힘들었어?” “힘든 정도가 아니었지. 쉴 새 없이 출현하는 괴물들 때문에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어. 이것뿐만이 아니야. 신의 방패라고 알지? 한결이는 아예 영혼이 뽑혀서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겨우 몸을 되찾았지. 그리고 지금 요양 중이야. 사제 말을 들어보면 후유증, 그러니까 정신병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 하더군.” “저, 정신병이라고?” “그래.” 시크릿 클래스나 레어 클래스는 개수가 희귀한 만큼 중요 자원으로 분류되는 사용자다. 한두 번 정도는 이름을 들어봤을 터. 나는 머리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직 남았어. 어떤 지역에서는 필드 효과로 인해 구조대가 거의 와해 직전까지 갔었고, 어찌어찌 기껏 구해낸 안현은 몸이 미라가 돼있더라. 숨이 끊어지기 일보직전이었지. 안솔이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꼼짝없이 사망했을걸?” “…….” “우리는 이 모든 고비를 넘고 넘어서 도시로 돌아온 거야. 그러니까 아까처럼 어물쩍 넘어가라는 말은 하지도 마. 나는 처음 이 영상을 봤을 때 깡그리 다 쳐죽이려는 거 간신히 가라앉히고 여기로 온 거니까.” “아니.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이윽고 이효을이 조심스레 말을 이으려는 순간. 결국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이기지 못해 나는 벌컥 화를 내고 말았다. “알겠는데, 데, 데, 데! 그놈의 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고 있잖아! 알겠으면 그딴 말은 하지 말라고!” “깜짝이야! 야! 현실을 좀 보라고! 코란 연합이 그렇게 만만해 보여? 아니! 애초에 내 말도 안 들을 거면 여기는 왜 왔어?” “그럼 이대로 돌아갈까? 네가 그렇게 말하는 연합, 그리고 산하 클랜. 나도 공방 동맹 싹 다 모아서 한 번 제대로 붙어봐? 아. 동부 쪽에서도 호응할 클랜 꽤 있을 거 같은데. 우리가 가장 앞으로 나선다면 말이지.” “너 정말…!” 무슨 말을 하려던 이효을은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격한 숨소리가 들리는 게 어떻게든 속을 가라앉히려 애쓰는 모양이다. 나 또한 약간 격양된 가슴을 가라앉히는 일환으로 잠자코 연초를 꺼내 들었다. 이내 씩씩거리는 소리를 반주 삼아 조용히 연초에 불을 붙였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나는 절반쯤 태운 연초를 털고 입을 열었다. “맞아. 나는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니라, 통보를 하러 온 거야.” “…통보라고?” “그래. 통보. 말했다시피 머셔너리는 끝까지 간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연합을 박살내려는 거지, 산하 클랜까지 건드리겠다는 소리는 아니거든…. 마지막에 한 번의 기회를 주지.” “마지막, 한 번의 기회라고?” 어이가 없는 건지 아니면 정신이 없는 건지. 이효을은 아까부터 앵무새처럼 되묻고만 있었다. 어찌됐든, 나는 연초를 완전히 산화시킨 후 머리를 주억였다. “그래. 물론 통보라고는 했지만 선택이기도 해. 지금 내가 생각하는 모든 일을 마치면, 나도 그 정도에서 만족하고 물러나겠어. 즉 적당한 중재는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는 소리야. 하지만 중재가 없을 경우…. 신경 쓰지 않겠다는 걸로 해석하지.” “…하~아.” 이내 서로의 시선이 중간에서 마주쳤을 즈음, 도리가 없다고 여겼는지 이효을은 깊은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의자에 쓰러지듯이 몸을 묻어,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면 정말로 곤란한데….” “곤란하다고?” “…강철 산맥. 이제 북 대륙도 슬슬 강철 산맥을 공략할 준비를 해야 해. 저번에 한 번 실패했으니, 이번에는 어떻게든 성공을 해야 한다고. 북 대륙의 온 힘을 기울여서라도 말이지.”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그러자 이효을은 허공을 보던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더니 나직이 말을 이었다. “왜 상관이 없어. 사용자 정보로만 따지면 코란 연합은 소중한 전력이야. 그런데 너 때문에 연합이 박살 나면, 그 공백은 어떻게 하지? 누가 채워주지? 응?” 그리고 이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이제야 조금이나마 웃을 수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이효을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는 수호자도 아닐진대, 과하게 연합의 편을 드는 뉘앙스를 풍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편을 드는 게 아니라, 바로 강철 산맥 때문이었다. 말인즉슨 강철 산맥만 아니었다면 이효을도 이렇게까지 반대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소리였다. 조금은 속이 누그러진 것 같아, 나는 살살 달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좋게 좋게 생각하자고. 아니지. 네 말마따나 북 대륙의 온 힘을 기울여 강철 산맥을 공략할 거라면, 오히려 나를 응원하는 게 좋지 않을까? 지금의 남부가 퍽이나 동부가 하자는 대로 따를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되는데. 차라리 불협화음이 일어난다면 모를까.” “…….” “걱정하지 말라고. 해달라는 대로만 해주면, 머셔너리와 연합의 선에서 끝낼 테니까. 그리고 사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이거, 이 수정구. 고려 클랜에 보여주면 어떨 것 같아? 반색하면서 달려들걸? 즉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라고.” “…말은.” 목소리는 여전히 불퉁불퉁했으나, 더는 흰소리가 이어지지 않는다. 이쯤이면 충분히 알아들었다고 생각해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중앙 관리 기구와도 얘기를 마친 이상, 이제 더는 볼 일도 거리낄 것도 없다. 남은 건 기다리는 일뿐. 잠시 후. 나는 이효을 바로 앞으로 걸어가, 책상에 놓인 수정구를 톡톡 두드렸다. “이만 간다. 그리고 이건 두고 갈 테니까…. 한 3일 후? 그쯤에 터뜨려달라고. 바로 터뜨리지 말고.” 생각한 일들을 실행하려면 그 정도의 시간은 필요해 꺼낸 말이었다. 이효을은 답하지 않았다. 그냥 어깨를 한 번 들먹이고는, 마냥 힘이 없는 듯 끄덕끄덕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 반응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만족한 기분으로 몸을 돌려 문으로 걸어갔다. 그때였다. “김수현.” 이윽고 문 앞에 다다라 막 문을 열려고 할 즈음, 돌연히 등 뒤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나는 반쯤 머리를 돌려 이효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이효을은, 이내 질렸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는…. 정말 개새끼야.” “너도 만만찮은 개년이잖아.” 나는 빙그레 웃으며 화답했다. 그리고 지체 않고 문을 열어 건물의 복도로 나섰다. 이어서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이로써 명분은 확보했다. 녹화용 영상이 있기는 했으나, 이효을의 말대로 코란 연합이 가만히 있을 리는 만무할 터. 하지만 중앙 관리 기구가 결부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현재 북 대륙에서 가장 영향력이 높은 기관인 만큼, 연합이 아무리 언론 플레이를 한다고 한들 사용자들은 중앙 관리 기구의 말을 더욱 공신력 있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일은 단 하나. 상황 만들기. 확실히 현 상황만 놓고 보면 연합의 잘못이 크나, 전체적인 언론을 생각한다면 머셔너리도 그다지 유리한 건 아니었다. 이유야 간단하다. 이효을의 요즘 최고로 잘나가는 클랜이라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잘나가는 만큼 이유 없이 시기, 질투하는 세력도 부지기수다. 그나마 어느 정도 힘을 갖춘 상태였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벌써 별별 압박이 들어왔으리라. 아무튼 중앙 관리 기구라는 방패를 세워놨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이 필요하다. 즉 이번 사건에서 머셔너리를 철저한 피해자가 돼야 하고, 연합은 범죄자를 넘어서 철저한 개 자식이 돼야만 한다. 그리고 참고 참다가. 누가 봐도 어떻게든 좋게 해결을 보려 한 머셔너리는, 결국 참지 못해 폭발한다. 여기까지 일이 흘러갈 수 있다면, 그때부터는 일사천리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나는 대강 생각을 정리하고 시선을 들었다. 어느새 모든 계단을 내려와 1층을 눈앞에 둔 상태였다. “이제 방문을 마치시는 겁니까?” “예. 좋은 시간 보냈습니다.” “머셔너리 로드의 퇴실을 확인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퇴실 수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이 보였다. 잠시 동안 구름 한 점 없는 창공을 감상하다가, 나는 빠른 걸음으로 입구를 나섰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들어가 품속에서 둥그런 구슬 하나를 꺼내 들었다. 통신용 수정구였다. 곧바로 마력을 부여하자 약한 노이즈와 함께 겉면에 조승우의 얼굴이 비쳤다. 아마 아침에 나올 때부터 쭉 대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클랜 로드.) “예. 지금 막 얘기를 끝냈습니다. 원하는 건 얻어냈으니, 이제는 시행할 일만 남았군요.” (축하합니다. 클랜 로드.) “축하는요. 아직 끝나기는커녕 이제부터 실제로 접촉에 들어가야 하는데요. 아무튼 그건 그렇고,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까?” 조승우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약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말씀하신 헬레나 루 에이옌스라는 거주민을 현재 찾는 중입니다. 아. 그래도 이미 종적은 잡았다고 하니, 늦어도 오늘 밤에는 데려오신다고 합니다. 그림자 여왕님께서요.) “그래요? 고연주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그럼 박태진은요?” (전령만 보내면 됩니다. 내일쯤에 약속을 잡고, 제가 가도록 하겠습니다.) “사용자 임한나, 선유운은?” (이미 얘기는 마쳤습니다. 언제든지 준비 Ok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마지막으로, 그놈은요?” (그놈이요? 아아. 이미 손을 써뒀습니다. 말씀해주신 내용을 정확히 전달했습니다. 아마 오는 새벽, 그림자 여왕님과 함께 그곳에서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여기서 시간을 보내다가, 밤중에 코란으로 이동하도록 하죠. 거기 밤의 거리가 그렇게 대단하다는데, 자못 기대가 되네요.” 물 흐르듯 거침없이 답하는 게 마음에 들어, 나는 미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실실 웃던 조승우는 문득 반짝이는 눈으로 입을 열었다. (꼭 이러니까 무슨 007작전을 연상케 하는데요. 하하하. 클랜 로드. 혹시 작전명 같은 건 없습니까?) “호. 이제 어느 정도 적응을 하셨나 봅니다. 이런 말도 할 줄 아시고.” (죄송합니다. 언짢으셨다면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푸.” 삽시간에 정색하는 조승우를 보며 나도 모르게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만약 이것도 농담이라고 했다면 성공했다. 조금은 웃겼기 때문이다. 나는 잠깐 숨죽여 웃었다. 그리고 곧 가느다란 한숨을 흘리며 까닭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 글쎄요. 작전명이라….” 그러다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나는 도로 수정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살그머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광대놀음. 이거 좋네요. 작전명은 광대놀음이라고 하겠습니다.” * 남부 소 도시 코란. 남벌 클랜. “차례를 지키세요!” “증거를 가져오셔야 합니다, 증거를! 사용자 아카데미나 클랜 등록 확인서 등등! 지인도 아닌데 무상으로 장비를 발급받으려는 사용자는 용서치 않습니다!” 남벌 클랜은 한창 바쁜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한쪽에는 산처럼 쌓인 장비와 그 앞에 서 분주한 사용자들.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장비를 돌려받거나, 아니면 지인인척하며 무상으로 장비를 받으려는 사용자들로 북적대는 중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그러한 풍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사내와 여인이 있었다. 남벌의 클랜 로드 신혁과 아르테미스의 클랜 로드 우설희였다. 신혁의 얼굴은 무미건조했다. 아니. 정확히 보면 무표정해 보이면서도 눈가에 알게 모르게 어두운 그림자가 그늘지어있었다. 미간은 보일 듯 말듯 찌푸려져 있고 눈동자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무언가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었다. 한동안 풍경을 지켜보던 신혁은 잠시 후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이상해.” “응? 뭐가 이상해요? 자기?” 우설희는 슬그머니 팔짱을 끼며 반문했다. 그러나 신혁이 약간 짜증 어린 목소리로 팔을 치우자, 우설희는 입맛을 다시며 되물었다. “뭐가 이상한데요. 다 잘되고 있잖아요? 약속대로 머셔너리는 우리와 약속한 내용을 발표했고, 장비도 건넸고, 헤일로도 공식적으로 포기했어요. 이제 남은 건 3일 후 회의에서, 박태진만 잘 넘기면 되지 않아요?” “아니, 아니야.” “그러니까 뭐가 이상하냐고요. 이렇게나 잘만 돌아가는데.” “그게 이상하다는 거야. 갑자기 닥쳐온 위기치고는, 상황이 너무 잘 풀렸어. 돌아가도 너무 잘 돌아가…. 확실하게 수상해.” 그랬다. 신혁은 지금 이러한 상황에 뜻 모를 수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은 신혁 특유의 조심스러운 성격에 기인한 것으로써, 연합 내 2인자의 자리에 올려놓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한, 일종의 직감이었다. 지금껏 이 감이 한 번도 빗나간 적은 없다. 일이 너무 안 풀리는 것도 문제지만, 일이 너무 잘 풀려도 수상하다. 사실 처음 우설희에게 상세한 내용을 들었을 때부터 이상하기는 했다. 막상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먼저 헤일로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그리고 이렇게나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준다? 차라리 말만 하고 지키지 않았다면 모를까. 김수현은 정말로 약속을 지켰다. 이러한 처사는 마치 연합 내 자신이 처한 상황을 훤히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생각한 신혁은 더더욱 의심이 증폭되는 걸 느꼈다. “혁. 너무 어렵게 생각 말아요. 정 불안하면 감시역으로 애들이라도 풀까요?” “절대 안 돼. 고연주가 돌아온 이상 붙이나마나 야. 오히려 우리가 추적당할 가능성이 있어.” “헤~. 그 여자가 그렇게 대단해요? 소문으로는 그림자 창녀, 혹은 창녀의 여왕이라고….” “우설희. 입 다물어라. 앞에서 그렇게 말하다가 골로 간 사용자가 한두 명이 아니니까.” “치. 그럼 어떻게 해요? 이미 일은 벌어졌는데. 지금 와서 무를 수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입 다물어. 생각 중이라고 했잖아.” 워낙 말투가 진지한 탓에 우설희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신혁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느릿하게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신혁의 머릿속으로 여러 복잡한 생각들이 휘몰아쳤다.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는 성격상 정확한 뭔가를 확인하지 않고는 회의에 임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마침내 신혁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와 동시에 꾹 다물려 있던 입술이 비로소 살짝 열렸다. “그놈. 아무래도 그놈을 주시해야겠어.” “그놈이라니요?” “있잖아. 머셔너리 쪽에서 수에 꽂아 넣은 놈.” “아…. 박환희?” 그러자 알겠다는 듯 우설희가 고개를 움직인 찰나, 신혁의 눈가에 잠깐이지만 이채가 스쳤다. 이윽고 마주 머리를 끄덕인 신혁은 사늘한 목소리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김수현을 감시할 수 없다면, 그놈을 감시하면 돼. 다른 방법은 없어. 이게 최선이야. 그러니 앞으로 그놈의 일거수일투족을 나에게 보고하도록. 아니, 지금 당장!” ============================ 작품 후기 ============================ 신혁도 나름 눈치는 좋은 녀석입니다. 다만 이런 말이 있죠.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D. PS. 그러고 보니 김유현, 연혜림 사용자 정보를 안올렸더군요. 변경할 부분은 변경한 후, 다음 회 후기에 한 명씩 올려놓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연혜림은 차후에 나올 때 넣고는 싶네요. 하하하. 0478 / 0933 ---------------------------------------------- 작전명 : 광대놀음. 사용자들의 어두운 욕망이 실현되는 밤의 거리는 언제나 활기가 넘친다. 설령 그것이 보통의 사고방식에서 어긋난 비인도적인 소행들이 오고 가는 공간이라 해도, 거의 공식적으로 합법화된 코란에서는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다. “삼촌! 오늘도 데려갈게?” “자, 잠시만요! 시, 싫어요! 점주님! 점주님!” 한 앳된 비명이 주변을 약하게 울렸다. 사내치고는 예쁜 얼굴과 고운 이목구비를 지닌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여기에 있는 모두가 제 목적을 찾아 묵묵히 밤의 거리를 배회할 뿐. 특히 이렇게 창관(娼館)이 늘어서 있는 붉은빛이 흐르는 홍등가에서는 종종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이윽고 백금화 두 개가 짤랑 이는 소리를 내며 포동포동한 손에 떨어졌다. 뚱뚱한 사내는 군말 않고 여인에게 소년을 넘겨주었다. 여인의 품에 안긴 소년의 얼굴은 자못 볼만했다. 예의 은근히 기대하던 얼굴은 온데간데없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공포에 질린 표정만이 보일 뿐이었다. 이내 콧노래를 부르며 떠나는 여인과 비척비척 끌려가는 소년을 보며, 뚱뚱한 사내는 침을 탁 뱉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후. 약간은 조용해진 거리에 한 사내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빛 바랜 로브를 깊숙이 덮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키 하나만큼은 훤칠했다. 사내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빠른 발걸음으로 뚱뚱한 사내가 들어간 건물로 따라 들어갔다. 입구에 서자마자 시끄러운 음악과 환호가 고막을 웅웅 울렸으나, 사내는 조금도 아랑곳 않고 카운터로 직행했다. 그러나 카운터에 도착한 순간 사내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 카운터는 텅 비어있었다. 예전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맞이해준 여인은커녕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사내는 잠시 빈 카운터 앞을 서성였다. 그러다 문득, 한 번 더 주변을 둘러보고는 조심조심 안으로 들어가 카운터를 살폈다. 이윽고 한참 동안 카운터를 수색하던 사내는 이내 조용히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리고 이어서, 신속히 걸음을 옮겨 계단을 올랐다. 어느새 땀 맺힌 사내의 손은 뭔가를 꽉 움킨 상태였다. 2층의 복도는 조용했다. 미약한 신음이 들리지 않고, 상시 맴돌던 미묘한 열풍도 오늘만큼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뜻 모를 고요함만이 복도를 맴도는 중이었다. 사내는 일말의 불안감이 샘솟는걸 느끼면서도 후다닥 복도를 가로질렀다. 어느 문 앞에서 사내의 걸음이 멈췄다. 복도 왼쪽 끝을 기준으로 세 번째 방이었다. 사내는 움킨 손을 문고리에 대었다. 다급해 보이는 손놀림이었다. 달칵! 이내 자그마한 소음이 들리는 순간 사내는 지체 않고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재빠르게 문을 닫았다. 잠시 후, 문이 완전히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앞을 돌아봤을 때, 사내는 아니 박환희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흘릴 수 있었다. “하~. 계, 계셨군요. 형님.” “내가 왜 네 형님이냐.” 불퉁한 목소리가 되돌아왔으나 박환희는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조금 전 온몸을 엄습하던 뜻 모를 불안감과 비교해, 지금 이 방에서는 형님이라 부른 사내가 있다는 사실에 까닭없는 안도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박환희는 연신 가슴을 쓸어 내리며 사내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형님…. 아, 알겠습니다. 머셔너리 로드.” 그랬다. 박환희와 마주 보는 방향에 있는 사내의 정체는 바로 머셔너리 클랜 로드 김수현이었다. 오늘 새벽 박환희와 만나기로 약속해 미리 장소에 와있었던 것이다. 이내 황급히 말을 수정한 박환희가 자리에 앉자 김수현은 곧바로 손을 내밀었다. 박환희는 반사적으로 품에 손을 넣었다가 별안간 쓰게 웃었다. “이거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그래도 안부 한두 마디 정도는 물어봐 주실 줄 알았는데요.” “뭐, 별일이라도 있었나?” “별일까지는 아니고…. 항상 카운터에 서 있던 분이 오늘따라 안 보이던데요.” “아아. 행방불명 됐어.” “…예?” “행방불명 됐다고.” 일순간 박환희의 얼굴이 경직됐다. 그러나 그에 비해 김수현의 얼굴은 태연하기 그지없다. 한동안 멍한 기분을 느끼던 박환희. 그러나 얼른 달라는 듯 내밀어진 손이 두어 번 움직이자, 허둥지둥 품을 더듬어 두툼한 기록을 꺼냈다. 김수현은 그것을 낚아채듯이 받아 들었고, 이내 빠르게 눈동자를 굴리며 기록을 훑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잠시 동안 침묵이 내려앉았다. 팔랑…. 팔랑…. 그때였다. 조용히 기록을 넘기던 손이 돌연히 우뚝 멈췄다. 동시에 입꼬리를 씩 올린 김수현이 기가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지간히도 해먹었군. 정말 대단해.” “…어디나 다 똑같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그렇지. 아무튼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도 안 해주시는 겁니까?” 진정으로 서운하다는 목소리였다. 그러자 기록을 품속으로 넣던 김수현은 흘끗 시선을 들어 박환희를 응시했다. “오늘따라 왜 이러지? 나한테 그렇게나 칭찬을 받고 싶나?” “아니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는 요 며칠간 긴장 속에서 살았단 말입니다.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 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하하하.” “글쎄. 우리가 서로 수고했다고 등을 두드릴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지 않나? 그냥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는 사이지. 옜다.” “그거 참 냉정한…. 어이쿠.” 서운히 말을 잇던 박환희는 뭔가가 휙 날아오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간신히 받아보니, 가방이었다. 그것도 무언가 가득 들어있는 상당히 무거운 가방. 이게 뭐냐는 뜻으로 시선을 올리자, 김수현이 까닥 고갯짓하며 말을 잇는다. “한 번 봐봐. 그리고 지금부터 계획을 일러줄 테니까, 잘 들어. 보면서 들어.” 어찌 보면 강압적으로 들릴법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날 이후. 그러니까 절망에서 구원받은 이후로, 박환희는 지금껏 쭉 김수현이 시키는 대로 해왔다. 사실 원체 나서기를 좋아하는 원래 성격과 맞지 않는 일이었으나, 지금껏 시키는 대로 해서 단 한 번도 손해를 본 적이 없다. 그걸 잘 알고 있는 만큼, 박환희는 온순히 가방 끈을 풀며 귀를 기울였다. 김수현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시시각각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박환희의 얼굴은 다채로운 변화를 보였다.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어 머리를 끄덕였고, 깜짝 놀라 화들짝 고개를 들기도 했으며, 그러다 미간을 한껏 찌푸리기도 했다. 이윽고 김수현이 이야기를 마쳤을 즈음, 박환희가 마지막으로 지은 얼굴은 바로 질렸다는 표정이었다. “…무섭네요.” “음? 뭔가 잘못 들었나?” “아니, 아닙니다. 그러니까…. 전부 기억했습니다.” “그럼 됐고. 꺼낸 것들 도로 집어넣어.” 박환희는 기다란 한숨을 흘렸다. 동시에 속으로 혀를 찼다. 이 사내는 이런 말을 하면서 어찌 이리도 담담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자칫 잘못하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도 있는 판국에.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부터 계획 또한 시작됐다. 아까라면 모를까, 이제부터 우는 소리를 했다간 손해 보는 건 자신이다. 김수현이 자신을 거둔 이유는 바로 어딘가 쓸모가 있어서였고, 지금 바로 그 쓸모를 다하는 중이었다. 그런 만큼 조금이라도 쓸모가 없어지는 순간, 내침은 고사하고 목숨까지 위험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박환희는 가방에 주섬주섬 담으며 살그머니 앞쪽을 살폈다. 김수현은 마침 자리에서 일어나 있는 힘껏 기지개를 피고 있었다. 그러한 찰나, 김수현이 느닷없이 마주 내려다본 탓에, 박환희는 얼떨결에 눈을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차근차근 움직이던 손놀림이 갑자기 멈추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박환희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머셔너리 로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왜 저를 구원해주신 겁니까? 만약 이 질문이라면, 이번이 세 번째로 묻는 거라고 알려주지.” “알고 있습니다. 그건 아닙니다.” “그래? 그럼?” 김수현은 한 번 말해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한순간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쳤으나, 이왕 엎질러진 물이었다. 두근두근 방망이질을 시작한 가슴을 애써 다스리며, 박환희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혹시…. 제가 배신할거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혹시…. 한결이는 괜찮습니까?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어서요.” 그러나 끝내 나온 말은 본심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저 감정이란 털끝만치도 찾을 수 없는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도저히 하고 싶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김수현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태연히 입을 열었다. “정 걱정되면 병문안을 가보던가. 물론 이 일이 끝나고 나서.” “…예? 병문안을 가보라고요? 제가 말입니까?” “그래.” “하지만….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한결이 애인을.” “얕보지마. 한결이, 겉으로는 조용해도 속은 강단 있는 놈이야. 쓸데없이 정에 이끌려 다니는 것만 빼면, 거의 너만큼이나 이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고. 아마 가면 최소한 문전박대는 하지 않을 거다.” “그, 그러면 유나는 완전히 잊었다는 말입니까? 지금 유나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아요?” 화제를 돌리긴 했으나 이것 또한 놀라운 사실이었다. 박환희의 목소리가 확연히 높아졌다. 그러나 김수현은 더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한 번 어깨를 들먹였을 뿐. 그것은 마치 네가 직접 알아보라는 듯한 태도였다. 바짝 마른 입술에 침을 적시던 박환희는 불현듯 허공을 스치는 손길을 느꼈다. 어느새 가방은 다시 불룩해져 있었다. 이윽고 문 앞으로 걸어간 김수현은 차분히 귀를 대며 중얼거렸다. “그럼 할 말은 모두 끝났고. 이제 슬슬 탈출할 준비를 해야 하는데…. 아차, 박환희. 그러고 보니 아직 할 말이 남았다.” “예?” 할 말아 남았다는 말에 박환희는 서둘러 가방을 묶었다. 그리고 막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갑자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여 이게 뭔가 싶어 주변을 둘러본 순간. “헙….” 박환희는 비명을 지르려는 걸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바닥에 드리워진 자신의 그림자가 서서히 일어나 목을 죄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신해도 돼. 하고 싶으면.” 그러나 차마 추스를 새도 없이 냉랭한 목소리가 흘러 들자, 박환희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현상을 체험할 수 있었다. 절로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게…. 무슨….” “살문에서 알려주더군. 너를 믿지 말라고. 그러고 보니 신혁이 네 정체를 알고 있었지?” “그건…. 예전에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아니 오히려….” “누가 뭐래? 그냥 아까 네가 진짜로 묻고 싶었던 것에 대답해주는 건데.” “…….” “아무튼 이것 한 가지만 명심해. 배신하고 싶으면, 해. 해도 돼. 다만 이것 한 가지는 기억하라고.” 어느새 목에 닿은 싸늘한 기운에 박환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문에서 얼굴을 뗀 김수현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직 의자에 앉아있는 박환희를 보며, 새하얀 이를 드러내었다. 이윽고. “하려면 걸리지 않게 하는 게 좋을 거다.” 김수현 특유의 찬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순간, 박환희는 온몸에 끼치는 서릿발 같은 소름을 느껴야만 했다. * 여전히 붉은빛이 비치는 거리와 그 빛을 받아 야릇한 냄새를 흘리는 건물에서, 한 사용자가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빛 바랜 로브를 깊숙이 눌러쓴 터라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다만 커다란 키와 로브의 한 부분이 불룩하다는 것만이 특징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내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둘러보던 사내는 한쪽 방향으로 걸음을 틀었다. 무에 그리 기분이 좋은지 구석 골목으로 향하는 걸음걸이가 한없이 가벼워 보인다. 그러나 막 어두운 골목으로 한 걸음 들어선 순간, 사내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퍽! 사내가 들어가자마자 누군가 거세게 몽둥이를 휘둘러 머리를 가격한 탓이다. “억…! 읍! 으읍!” 사내는 휘청거리면서도 고개를 번쩍 들었으나, 이내 다시 내려쳐진 몽둥이에 몸을 고꾸라뜨릴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턱을 부술 정도의 강력한 힘을 지닌 손이 입을 막아, 사내의 비명은 외마디로 끝나고 말았다. 그 상태서, 수 차례 몽둥이 찜질이 이어졌다. 한두 명이 대기하고 있던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몇 번이고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진 후에 사내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사내는 누군가의 어깨에 들린 채 차분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사내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공간에 내동댕이쳐졌을 때였다. 머리가 지끈지끈한 듯 얼굴을 찌푸리고, 전신이 쑤시는지 몸을 꿈틀거린다.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바로 그때였다. 사내는 고통에 젖은 신음을 흘리면서 몸을 둘러보았다. 양손은 뒤로 돌려져 단단한 줄에 묶인 상태였고, 발도 마찬가지였다. 입에도 재갈이 꽉 물려 있었다. 오직 단 하나, 눈만큼은 트여있어 사내는 힘겹게 고개를 움직였다. 그리고 본능에 따라 전방으로 시선을 올린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사내의 입에서 거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흐, 흐아아아아아아아!” 사내의 앞에는 시체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그것도 목과 몸이 따로 분리된 심하게 훼손된 시체였다. 산발이 된 머리카락은 어딘가에 주렁주렁 매달려있었고, 목 잃은 몸은 전신이 발가벗겨진 채 바로 옆에 매달린 상태였다. 하지만 정작 사내가 비명을 지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눈을 홉뜬 채 혀를 빼 문 얼굴의 정체는, 바로 며칠 전 카운터에서 사내를 맞이한 여인이었다. ============================ 작품 후기 ============================ 이전 회 코멘트를 쭉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파트에서 저와는 약간 다르신 생각을 가지신 분들이 몇 분 보여, 죄송한 마음이 들더군요. 뉘앙스를 보니 소위 김수현이 '깽판'을 치기를 바라는 코멘트였습니다. 하지만 이전에 말씀드렸듯이 이번 파트는 음지 전쟁입니다. 즉 김수현이 압도적인 힘으로 적을 압살하는 내용이 아니라, 상황을 이용하고 조작해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는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하하. 사실 깽판은 저도 참 좋아해요. 그 편이 더욱 시원한 전개와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고, 또한 글 쓰는 입장에서도 그게 더욱 편하니까요. 이렇게 이야기나 구상을 일부러 배배 꼴 필요가 없거든요. 그럼에도 왜 이런 방향으로 갔냐고 하면, 지금껏 음지 전쟁과 비슷했던 내용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전쟁이나 여타 굵직한 사건 등등에서 김수현이 힘으로 몰아붙이는 내용이 참 많이 나왔습니다. 심지어 용이 잠든 산맥에서도요. 그런 만큼 이번 사건에서는 똑같은 방식이 아닌, 정 반대에 있는 방식으로 서술해 나름의 변화를 주고 싶었습니다.(물론 결과는 똑같겠지만요.) 작전명 광대 놀음 파트에 들어선 만큼, 이번 파트도 거의 팔부능선은 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제 와서 구상을 바꾸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을 듯싶습니다. 그러니 예정한대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겠으며, 이 부분 독자 분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유현(5년 차) 2. 클래스(Class) : 뇌제(Secret, The Lord of the Thunder,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해밀 (Clan Rank : AA - Double A) 5. 진명 • 국적 : 천둥과 벼락을 다스리는 자, 동생 바보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9) 7. 신장 • 체중 : 180.7cm • 73.7kg 8. 성향 : 철혈 • 냉정(Blood and Iron • Cool) [근력 71] [내구 88] [민첩 90(+2)] [체력 97] [마력 97(+2)] [행운 96(+2)] < 업적(1) > < 고유 능력(1/1) > 1. 천둥 • 벼락(Rank : S Zero) < 특수 능력(1/1) > 1. 극뇌(極雷)(Rank : EX) < 잠재 능력(3/3) > 1. 대 마법(Rank : EX) 2. 날씨 변화 : 먹구름(Rank : A Plus Plus) 3. 조준선 정렬(2)(Rank : EX) 『권능 : 뇌신(雷神)』 <최근 능력치 비교> (변경 전) [근력 70] [내구 87] [민첩 88] [체력 97] [마력 97(+2)] [행운 94] (변경 후) [근력 71] [내구 88] [민첩 90(+2)] [체력 97] [마력 97(+2)] [행운 96(+2)] 0479 / 0933 ---------------------------------------------- 작전명 : 광대놀음. 그때였다. “조용히 하지그래. 이년이랑 똑같은 꼴 나기 싫으면 말이야…. 박환희.” 한없이 낮은 목소리가 어둠이 내려앉은 공간을 울렸다. 언뜻 듣기로는 부드러운 저음이었으나, 음색은 명백한 적의를 포함하고 있었다. 경고가 먹혔는지 커져만 가던 사내, 아니 박환희의 비명이 뚝 멎었다. 이어서 덜덜 떨리면서도 당혹함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가 로브에서 새어 나왔다. “누, 누구십니까? 도대체 누구 시길래 저를 이렇게 대하시는 겁니까?” 스르릉. 처음에는 겁에 질려있었으나, 끝에는 애절함마저 묻어나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대답은 똑같은 말이 아닌 사늘한 검 소리로 되돌아왔다. 차가운 검광이 허공에서 번들번들하자 박환희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였다. 시퍼런 날이 바닥을 비스듬히 겨누었다. 목 부근을 찌르는 예리한 감촉을 느꼈는지 박환희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자 괴인은 칼끝으로 턱을 받치고선 강제로 고개를 추켰다. 이윽고 시선이 허공으로 향하는 순간, 박환희는 볼 수 있었다. 자신을 이 장소로 데리고 온 장본인을. 자신을 지그시 내려다보는 괴인의 얼굴을. 괴인의 정체는 바로 신혁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박환희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혀, 혁이 형….” “환희야. 나는 말이다.” 의도성이 다분한 말 끊기였다. 이윽고 신혁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이 세상에서 배신자가 제일 싫어.” “혀, 형님. 그게 무슨….” “그리고 두 번째로 싫어하는 건, 거짓말하는 거. 예를 들면, 배신자가 자기는 죽어도 배신자가 아니라 발뺌하는 거?” “오해…. 헉!” 박환희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한껏 빼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간당간당 목을 찌르던 칼끝에 일순간 힘이 들어옴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마 가만히 있었다면 틀림없이 목에 구멍이 났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박환희는 아니라는 듯, 절대로 아니라는 듯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었다. “미안미안.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네. 아, 상관없나? 어차피 죽일 건데 말이지.” 그러나 그런 박환희에 비해, 신혁의 태도는 태연하기 그지없다. 곧 반쯤 고개 돌린 신혁은 두어 번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러자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어둡기만 했던 공간에 환한 빛이 밝혀졌고, 줄에 걸려있던 목과 시체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르릉…. 그르릉…. 그르릉…. 그르릉…. 그리고 잠시 후, 지금껏 어둠에 숨어있던 것들이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사람이 아닌 짐승의 울음소리. 그리고 벌겋게 충혈된 눈과 네 발 달린 그것은, 틀림없는 늑대 아니면 개였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박환희는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저 다가오는 공포에 몸을 떨며 눈앞 털 달린 짐승들을 하염없이 응시할 뿐. 그러나. 애당초 목적이 달랐는지 짐승들은 박환희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바닥에 떨어진 시체를 향해 느릿느릿 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곧 시체에 다다른 짐승들이 주둥이를 쩍 벌리며 시체에 고개를 파묻었기 때문이다. 우득, 우드득! 쩝쩝…. 우득, 우드득! 쩝쩝…. 이윽고 뼈가 부러지고 살을 씹으며, 육신에서 피가 터져 나오는 그로테스크한 풍경이 보였다. 그렇게 멍하니 앞쪽을 응시하고 있을 무렵. 박수를 치느라 잠시 올라갔던 검이 도로 내려와 흙 묻은 볼을 쓰다듬었다. “저년, 참 독한 년이더라. 말을 안 해요, 말을. 하다못해 별 짓거리를 다해봤는데, 그래도 입을 다물더라니까. 누가 교육시켰는지, 참 대단해.” “…….” “그래도 나름 재미있는 시간이었어. 독한 만큼 건드리는 맛도 있어서 말이지. 가끔 사람이 개랑 섹스하면 반응이 어떨지 궁금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고. 흐흐.” “…….” 나름대로 친근하게 말을 걸고는 있었으나 정작 듣는 당사자는 그렇지 못했다. 앞에서 벌어지는 참상도 있거니와, 자꾸 얼굴을 비벼오는 시퍼런 날의 감촉에 무한한 긴장감이 샘솟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짐승들이 여인의 시체를 남김없이 먹어 치웠을 무렵, 박환희는 정수리에 얹힌 냉랭한 손길을 느꼈다. 어느새 신혁이 쭈그려 앉아 조금 더 가까운 거리에서 박환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환희는 아마 내 성격 알 거야. 귀찮은 건 딱 질색한다는 거. 그렇지?” “혀, 형님.” “그러니까 우리 좋게 좋게 가자고. 응? 지금부터 내가 서너 개 질문을 할 거야. 그리고 네 답 여하에 따라서, 그냥 고통 없이 죽을지. 아니면 저년처럼 온갖 고통을 당하다가, 시체까지 개밥이 될지. 이건 완전히 너한테 달린 거다. 알겠지?” “큭….” 과정은 달라도 결국 죽는 건 똑같다는 소리였다. 결국 견디지 못한 박환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걸 포기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체념이라고 생각했는지. 신혁은 박환희의 머리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그리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사실 너를 처음부터 눈여겨보고 있었어. 네가 우리 연합에 들어왔을 때부터 말이다. 왜인지 알아? 서부 전쟁에서 쫄딱 망한 놈이. 아무 연고도 없는데 갑자기 승승장구해서 세력을 일으키고, 스스로 연합에 합병을 신청했다? 누가 봐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겠어? 그래서, 분명히 배후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 그 순간 박환희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아, 신혁은 더욱 목소리를 높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나름 열심히 는 하는 것 같아 두고 보려고 했는데…. 결국에는 이렇게 돼버렸네. 아주 멋지게 뒤통수를 쳤어.” “혁이 형님! 이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아니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오 그래? 똑똑하네. 우리 환희.” “하지만, 오해입니다. 확실한 오해입니다.” “아 왜 그래. 나 거짓말 싫어한다고 했잖아.” “거짓말이, 거짓말이 아닙니다! 억울합니다!” 억울하다고 외친 찰나 박환희의 앞으로 무언가 털썩 떨어져 내렸다. 가방이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발길질로 가방은 힘차게 내용물을 토해내었다. 번쩍번쩍한 것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이야. 백금화에 보석에…. 이거 장난이 아닌데? 한낱 염탐꾼한테 이 정도로 보상을 해주다니. 역시 부자라고 소문난 머셔너리 클랜인가. 통이 아주 크네.” 그때였다. 그러니까, 신혁의 입에서 머셔너리 클랜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박환희는 뜨끔한 얼굴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건…. 그러니까….” “왜. 내 말이 틀렸나? 너 조금 전에 창관에서 머셔너리 로드 만나고 온 거 아니야? 응?” “…마, 만났습니다. 예. 그건 인정합니다.” “거봐, 그럴 줄 알았어. 아무튼 인정하니까 좋네.” 그와 동시에 신혁은 손을 힘껏 오므려 쓰다듬던 머리칼을 한 움큼 움켰다. 박환희의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졌고, 그 탓에 기껏 감았던 눈을 저도 모르게 뜨고 말았다. 그러한 와중에도, 박환희는 힘겹게 입을 떼었다. “큭…! 하, 하지만 형님. 아닙니다. 저는 형님이 생각하시는 스파이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니까 제발, 제발 제 이야기 좀 들어주십시오. 정말로 오해란 말입니다!” “오해라고…. 환희야. 우리 인간적으로 생각해보자. 과연 누가, 자기 클랜원도 아닌 남 클랜원에게 이런 보상을 해주겠어? 그것도 이런 야심한 새벽에 몰래 만나서까지 말이다.” “그러니까….” “이것뿐만이 아니야. 지금 상황은 알고 있지? 하물며 상황도 이러한데, 머셔너리의 행동은 더더욱 석연치가 않다고. 그럼 내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까. 응?” “상황이 애매한 건 인정합니다. 누가 봐도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형님. 도대체 몇 번을 말씀 드려야 합니까. 정말로, 정말로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 이건 도대체 뭐냐고!” 순간 부드럽게 이어지던 목소리가 일변했다. 거친 목소리로 고함친 신혁은 휙 가방을 잡아채 세차게 위로 올렸다. 흡사 잡아 던지려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러나 그 탓에 가방이 거꾸로 들려, 안쪽 깊숙이 있던 내용물이 마저 쏟아져 내렸다. 그 순간이었다. 탁! 탁, 탁! 데구루루….' 가방에서 동그란 물체가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그것은 말간 빛을 띠는 조막만 한 구슬이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기는 했지만, 신혁의 시선이 구슬을 향했다. 그리고 눈동자에 강렬한 이채가 스쳤다. 이내 가방을 대충 던진 신혁은 몸소 손을 뻗어 구슬을 잡았다. 음침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허. 이건…. 진실의 수정이잖아?” 그랬다. 떨어진 구슬은 바로 진실의 수정이었다. 물론 금화나 보석은 아니었으나, 가방에 있는 게 딱히 이상한 건 아니었다. 수요도 높고 물품 자체가 희귀한 터라 판매하려고만 하면 비싼 값에 팔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참. 이거 무슨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 어쨌든 괜찮네. 아주 좋아. 어이, 박환희.” “끅….” “억울하다고 했지? 그럼 어디 한 번 증명해봐. 마침 여기 좋은 것도 있으니까, 나에게 네 진심을 보여달라고.” “자, 잠시!” 박환희는 몸을 비틀었으나 몸이 묶인 상태로는 역부족이었다. 이윽고 신혁의 검이 차분히 허공을 갈랐고, 박환희의 손목을 묶은 줄이 잘라졌다. 그러나 어떻게 할 틈도 없이, 신혁은 진실의 수정을 활성화하는 것과 동시에 박환희의 손을 끌어 구슬에 강제로 손을 얹게 만들었다. “이러면 빼도 박도 못하겠지. 자 그럼 답해보라고. 박환희.” 잠시 중얼거린 신혁은, 곧 매우 기대하는 얼굴로 박환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아까 인정했지? 창관에서 머셔너리 로드를 만났다고. 그럼 말해봐. 둘이서 거기서 뭐했어? 밤의 꽃들 불러다가, 사이 좋게 떡이라도 쳤나? 서로 스와핑이라도 하면서?” 박환희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혁의 검이 서서히 올라갈 낌새가 보이자, 곧바로 입을 달싹였다. “사, 사용자 박환희는….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또박또박하려고 애쓰는듯했으나, 누가 들어도 긴장에 덜덜 떨리는 목소리였다. 원하는 답이 나왔는지 신혁은 살그머니 웃었다. 그리고 발끝으로 박환희를 톡톡 두드렸다. 물론 진실의 수정구 안에 피어오른 불꽃은, 여전히 처음의 색깔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하. 그렇게 딱딱하게 말할 필요는 없어. 네가 사용자 박환희인 건 알고 있으니까. 아무튼, 좋아.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지? 내가 계획한 사건을 실토했나?” “아닙니다! 저는 창관에서 형님의 계획을 실토하지 않았습니다!” 한순간 신혁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뜻밖의 대답이기도 했거니와, 불빛이 색깔도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곧바로 안색을 회복한 신혁은 허탈이 웃으며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야. 이놈 역시 머리 좋다니까. 수 쓰는 거 봐. 창관에서? 그래. 생각해보니까 오늘은 그냥 격려차 만났을 수도 있네. 그럼 다시 말해봐. 그럼 오늘이 아니라 예전에, 내 계획을 실토한 적이 있나?” “아니요. 저는 오늘은 물론이거니와, 예전에도 머셔너리 로드에게 계획을 실토한 적이 없습니다! 억울합니다!” 절절한 외침. 불빛은, 여전히 똑같은 색으로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그러자 여태껏 시종일관 차분한 얼굴을 보이던 신혁의 얼굴에, 비로소 변화가 찾아 들었다. 신혁은 한껏 굳은 얼굴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탓에 박환희의 몸이 약간 굴렀지만, 도로 손을 뻗어 구슬을 잡았다. 마치 이게 자신의 생명이라도 되는듯한 손놀림이었다. 쉬지 않고, 박환희는 절박한 어조로 외쳤다. “형님! 저는 머셔너리 클랜의 스파이가 아닙니다. 머셔너리 클랜에 스파이 지령을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또한 머셔너리 로드에게 계획을 실토한 적도 없거니와, 단순히 부탁을 들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뭐…. 뭐라고? 부탁?” 신혁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하여 본능에 따라 구슬을 확인했으나, 아래 진실의 수정은 박환희의 말을 진심이라 증명해주고 있었다. “이…. 무슨….” 자신의 예상이, 자신의 감이 빗나갔다는 생각에 신혁의 머릿속은 삽시간에 헝클어졌다. 어떻게든 다른 질문을 해보려고 했으나,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것만해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계획을 실토하지 않았다. 스파이가 아니다. 갑작스레 말문이 막힌 탓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오직 주변에서 웅성대는 소리만이 들려와, 한 명 한 명이 신혁의 옆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박환희를 이 장소로 데려온 사용자들이었다. 그들 또한 진실의 수정을 확인했는지, 하나같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님…. 뭔가 조금 이상한데요.” “계획도 실토하지 않았고, 스파이도 아니다…. 혁이 형. 진실의 수정 불빛이 그대롭니다. 아무래도 실수한 것 같습니다.” 어수선한 소음 속에서 신혁은 가까스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부탁이라고?” “예. 부탁입니다. 그냥, 단순한 부탁이라고요.” 이제는 거칠 것도 없는지 박환희는 신혁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앞선 증명이 먹혔다고 생각했는지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당당해진 상태였다. 신혁은 난감한 기분을 느꼈다. 직감은 아직도 끈임 없는 의심을 보내고 있었지만 현실은 의심을 거두라고 말하고 있었다. “머셔너리 로드가 무슨 부탁을 했지?”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어….” 그때였다. 마침 손이 풀려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던 박환희의 몸이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다. 그러자 골목서부터 끌고 온 사용자들이 반사적으로 달려들어 부축했다. “환희. 미안해. 우리가 조금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정말로, 정말로 미안하다. 의심하는 게 아니었는데….” 사용자들은 아까와 판이하게 달라진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박환희는 공식적으로 수 클랜의 소속이며 박태진이 항상 데리고 다니는, 즉 2인자나 다름없는 사용자였다. 차라리 스파이라고 밝혀졌다면 모를까. 아무 죄도 없는데 이런 사실이 알려진다면 과연 이들은 어떻게 될까? 신혁의 입장은 차치하고서라도, 오늘 이 장소에 참가한 사용자들은 틀림없이 불이익을 받으리라. 이윽고 사용자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박환희는 예의 사람 좋은 미소를 보였다. 그러다 여전히 물끄러미 보고 있는 신혁을 확인해, 도로 몸을 굽혀 진실의 수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리어 사용자들이 제지했다. “아니. 환희야. 이제 괜찮다. 네 진심은 충분히 들었어. 혁이 형도 이제 아실 거다. 너는 확실히 우리 가족이야.” “아니요. 그래도 주세요. 이런 건 확실하게 하는 게 좋습니다.” “환희야…. 아 혁이 형. 뭐라고 말씀 좀 해보십쇼. 미안하지도 않습니까.” “아 괜찮습니다. 오비이락이라고, 혁이 형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말씀대로 상황이 이러할진대, 제가 의심받을만한 행동을 했으니까요. 그러니까 맞아도 싸죠. 하하하.” 사용자들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제 괜찮다고 했음에도, 오히려 나서서 진실의 수정을 잡으려는 박환희를 보니 할 말을 잃어버린 탓이다. 거기다 아까 정말로 억울하다고 외치던 기억을 떠올리자 더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 구슬이랑 저 가방도 함께 주시겠습니까?” 이윽고 박환희가 바닥을 가리켰다. 사용자들은 앞다투어 내용물을 담고, 가방을 줍고, 그리고 구슬을 잡았다. 아니 잡으려는 찰나였다. 화륵, 화르륵! 파삭! 미약한 소음과 함께, 여태껏 타오르던 불빛이 꺼지고 진실의 수정이 쩍 갈라졌다. 약간 길었던 침묵과 사용자들이 부산을 떨면서 사용 시간이 다한 것이다. 막 구슬을 집으려던 사내는 잠시 손을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한 줌 재로 변한 수정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어차피 상관없지 않나. 안 그렇습니까 형님?” “…으음.” 신혁은 떠름히 머리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괜한 의심을 한 것 같군. 뭐라 할 말이 없어. 명백한 내 실수야. 미안…. 하다.”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제 실수도 있고, 그리고 살다 보면 사내자식이 몇 대 맞을 수도 있죠.”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과하지.” “아 괜찮습니다. 자꾸 그러시면 제가 다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아차, 그러고 보니 부탁이 궁금하다고 하셨죠? 이것까지 확실히 밝히고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박환희는 구변 좋게 답했다. 그리고 천연덕스레 웃으며 가방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신혁은, 여전히 꺼림칙한 눈동자로 박환희를 응시했다. 입안이 떫은지 조용히 입맛을 다시면서. ============================ 작품 후기 ============================ 오늘 이야기를 잘 기억해주시면, 차후 최종 해답을 적은 회의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실 거예요. :) 진실의 수정에 대한 설정을 여담으로 적고 싶었으나, 추리가 날카로운 분이시라면 스포일러가 가능하니 말을 아끼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PS. 2014년 2월 26일 06시 21분을 기점으로 479회 부분 수정 완료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내용을 쭉 읽어보는데, 차후 이야기전개상 매우 심각한 오류가 발견된 상태입니다. 하여 7 Page ~ 8Page를 일부 수정했고, 11 Page 또한 일부 수정한 상태입니다. 독자 분들께 혼란을 드려서 죄송하며, 깊은 양해를 구합니다. _(__)_ 0480 / 0933 ---------------------------------------------- 작전명 : 광대놀음. 딸랑.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두 사내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중 한 사내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아련한 눈길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실내는 깔끔했다. 벽 쪽에는 큼직한 창문이 반듯이 걸려있고, 창문을 따라 반들반들한 탁자들이 가지런히 비치돼있는 게, 깔끔한 인테리어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아무도 없다는 것. 이처럼 훌륭한 식당인데, 누가 봐도 이상하다 생각할 정도로 어떤 사용자도 보이지 않았다. 앞서 들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거한은 몸을 돌려 입구에 멈춘 사내를 바라보았다. “형님. 그쪽에서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뭐, 조금 늦을 수도 있지.” “…그게 말이 됩니까? 여기는 머셔너리 구역입니다. 자기들이 오라 해놓고. 아니, 형님을 오라 가라 한 것도 모자라….” “어서 오세요.” 그때였다. 거한이 벌컥 화를 내려는 순간, 주방에서 상냥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사뿐사뿐 한 걸음으로 홀로 나온 여인은 목소리 만큼이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마치 한 떨기 청초한 꽃처럼 아름다우며 기품이 흐르는 여인. 그러면서도 불룩히 솟아오른 가슴은 일순간 사내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윽고 입구의 사내와 여인이 마주친 순간, 두 남녀는 동시에 침음을 흘렸다. 꼭 아는 사이인 것처럼. “안녕…. 하세요.” 여인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으나, 약간 주저하는 목소리는 숨길 수 없었다. 사내는 곧바로 태도를 회복했다. 그리고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태연히 인사를 건넸다. “예. 오랜만입니다. 사용자 임한나. 여기 러브 하우스에 오는 것도 간만이네요. 아, 지금은 사랑 주점이었던가요?” “네. 한 번 개축 공사를 한 이후로 이름을 바꿨거든요…. 태진씨…. 아차. 수 로드라고 해야 하나요?” “그렇게 불러주시면 고맙겠네요. 지금은 엄연히 한 클랜의 로드니까요.” “네…. 수 로드.” 찰나의 순간 한나의 얼굴에 뜻 모를 서운함이 스쳤다. 수 클랜 로드, 박태진은 그러한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다 불현듯 예전 기억이 떠올라, 전혀 아랑곳 않는 기색과 사무적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머셔너리 클랜에서 활동하고 있다 들었는데…. 사랑 주점에서 일하시는 겁니까?” “그냥…. 그래요…. 아, 뭐라도 좀 만들어 드릴까요? 예전에 오실 때 자주 드시던 거….” “아니요. 괜찮습니다. 먹으러 온 게 아니라 일 때문에 온 거니까요. 그런데 그쪽 분은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나 봅니다?” “네, 네. 그럼 우선 자리를 안내해드릴 테니까, 이쪽으로 오세요.” 한나는 시무룩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약간은 가라앉은 어깨와 느릿해진 걸음으로 이동했다. 박태진은 조금이지만 통쾌한 기분으로 한나를 따라 탁자에 앉았다. “곧 오신다고 들었어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윽고 한나가 떠나간 순간 박태진의 머릿속에서 통쾌함이 사라지고 의아함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것은 거한도 마찬가지였는지, 의자를 한껏 밀어 앉으며 뇌까렸다. “그런데 형님. 도대체 왜 머셔너리에서 우리를 보자고 했을까요?” “글쎄. 일단 들어봐야 알겠지.” “저는 의심스럽습니다. 요즘 혁이 형이랑 한창 붙어먹고 있는 놈들이….” “백두산. 혹시나 싶어 미리 말하는데, 머셔너리 앞에서 말조심해라.” 일순간 눈을 가늘게 뜬 박태진이 날카롭게 말했다. 백두산은 허둥지둥 머리를 끄덕이고는 커다란 손으로 입을 단단히 막았다. 하는 짓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아, 박태진은 피식 웃었다. “나 원. 아무튼 조용히 기다리고 있자고.” 딸랑. 그리고 잠시 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박태진은 곱다고는 볼 수 없는 눈초리로 앞을 바라보았다. 한 인상 좋은 사내가 빙글빙글 웃으며 바른 자세로 앉아있다. 이목구비도 말쑥하니 초면에 악감정을 주는 인상은 아닌데, 사내를 마주 보는 박태진은 서슴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기실 이렇게 대놓고 불쾌감을 드러내는 원인은 하나였다. 감히 연합의 1인자를 오라 가라 해서도 아니었고, 사내가 머셔너리 소속이라서도 아니었다. 상대에 따라서 오라 가라 할 수도 있거니와, 비록 머셔너리가 박태진의 앞길을 가로막았다고는 하나 고의성은 보이지 않으니까. 그저 신혁의 손에 이리저리 놀아나는 게 한없이 한심할 뿐. 그러나 박태진이 정작 얼굴을 찌푸린 원인은 바로 탁자에 있었다. 조막만 한 녹화용 영상 수정구와 두툼한 기록 뭉치. 수정구는 이미 한 번 재생을 끝냈는지 빛이 바랜 상태였고, 두툼한 기록 뭉치 또한 사방으로 흩어진 상태였다. 그랬다. 지금 탁자를 둘러싼 사내들은 바로 코란 연합과 머셔너리 클랜의 사용자였다. 수 클랜 로드 박태진, 세렌게티 클랜 로드 백두산, 머셔너리 클랜원 조승우. 이 세 명의 사내가 한 탁자에 모여 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잠깐 이야기가 끊긴 건, 아무래도 탁자에 놓인 수정구와 기록 뭉치에 있는 듯싶었다.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도로 말문을 연 사내는, 우락부락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백두산이었다. 씩씩 콧김을 뿜으며 기록을 들추더니 돌연히 탁자를 거세게 후려친 것이다. 쾅 소리와 함께 탁자에 놓인 찻잔이 울리고 흐르던 침묵도 깨졌다. “염병! 지랄들을 하고 있군!” “아이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근력이 좋으신가 봅니다. 하하하.” “하하하? 하하하? 어이, 지금 웃음이 나오나? 스파이 뿌려놓은 게 그렇게 자랑스럽나?” “아. 그건 오해라고 말씀 드렸는데요.” “오해? 이 개….” “백두산.” 참지 못해 거친 욕설이 터져 나오려는 찰나, 박태진이 재빠르게 제지했다. 백두산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분기가 가시지 않는지 이를 가는 소리가 자못 살벌하다. 그러한 와중에도, 조승우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두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열이 뻗치는 건 박태진 또한 매한가지였으나, 침착하려 애쓰는 듯 숨을 가다듬었다. 지금 화를 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까. 이내 숨을 고른 박태진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우리한테 이것들을 보여준 이유가 뭐요.” “그거야…. 수 클랜 로드께서는 연합을 이끄시는 인물이니, 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우리 미사여구는 뺍시다. 그러니까 머셔너리 클랜에서 바라는 게 있을 거 아니요.” “…어라? 이런 반응은 의외네요. 수정구에서 보기로는….” 조승우는 살며시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이나 일부러 말을 흐렸다는 것쯤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용자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두 사내의 얼굴이 딱딱히 굳은 게 바로 그 증거였다. 이윽고 박태진은 탁자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지그시 주먹을 움키며 조승우를 노려보았다. “사용자 조승우라고 했던가…. 착각하지 마라.” “…….” “조금 경쟁이 과열된 건 인정하나, 연합은 가족이다. 한 가족이라는 기치아래 모여든 사용자들이란 말이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 것 같으나, 더는 입을 놀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하하.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제가 연합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나 봅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조승우는 곧바로 사과했다. 박태진은 차분히 숨을 흘리고는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목이 타는지 찻잔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후. 나도 사과하지요. 화가 나면 말이 험하게 나오는 성격이라. 아무튼, 머셔너리의 요구 조건이나 들어봅시다.” “그게 요구 조건이라기보다는…. 부탁이라는 말이 더 낫겠네요. 사실 딱히 요구할 거는 없거든요.” “뭐라고? 요구할게 없다?” “예. 참고로 이 영상과 똑같은 내용을 담은 수정구를 이미 중앙 관리 기구에 제출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이번 사건을 적당히 덮을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텅! 둔탁한 소음이 탁자를 울렸다. 기껏 들어올린 찻잔이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박태진은 멍한 눈길로 조승우를 응시하면서도 맹렬히 머리를 회전시켰다. 사실 머셔너리가 이번 사건을 덮는 조건으로 이것저것을 요구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미 중앙 관리 기구에 제출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지금 장난하자는 겁니까? 그럼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도대체 뭐요?” “수 로드. 목소리가 너무 높군요.” “그럼 지금 안 높아지게 생겼습니까?” “하. 이해가 안되네요, 이해가. 왜 이렇게 화를 내시는 겁니까?” 박태진은 벌컥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앞을 바라본 순간 도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인상이 일변한 조승우가,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괸 채 싸늘한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마치 조금 전과는 다른 사람을 보는듯했다. “장난이라. 지금 우리가 이러는 게 장난처럼 보이십니까?” “…….” “수 로드.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습니다. 우리 머셔너리는, 연합을 믿었습니다. 연합과의 좋은 관계를 맺으려 기껏 얻어온 성과도 내주었지요. 그런데. 그러니까 익명의 제보로 이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우리 기분이, 머셔너리 로드의 기분이 어땠을 것 같습니까?” “으음….” “수 로드야말로 함부로 목소리 높이지 마십시오. 화를 내야 하는 건, 연합이 아니라 머셔너리입니다.” “아니. 혁이의 잘못을 부인한다는 소리가 아니라…. 아무튼 혁이라면 모를까. 그럼 당최 왜 나를 보자고 한 거요.” 저 말이 사실인지는 모른다. 누가 그랬는지도 모른다. 연합의 적이 한둘이 아닌 만큼 지금의 박태진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박태진은 머리가 좋다. 그런 만큼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고, 정리했다. 이미 중앙 관리 기구에 제출한 이상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다. 그러니 적당히 구슬려 일을 덮는 건 무리고, 이제부터는 앞으로 불어 닥칠 폭풍에서 한 걸음 비키는 게 우선 과제였다. 늑대 같은 동부 놈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하니까. 그렇게 생각한 박태진은 은근슬쩍 신혁을 들먹이며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을 확인한 조승우는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물론 겉으로는 여전히 싸늘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지만. 조승우가 말했다. “…쯧. 저도 약 올리자고 이러는 거 아니니까 얼굴 붉히는 건 이쯤 하지요. 어쨌든 이렇게 수 로드를 뵙자 한 이유는, 차후 연합과의 관계를 위함입니다.” “관계를 위함이다?” “그렇지요. 우리 클랜 로드는 매우 현실적인 분입니다. 이딴 가당찮은 짓을 벌인 신혁은 용서할 수 없으나, 다른 분들은…. 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셨거든요. 그리고 사실, 중앙 관리 기구에서도 적당한 선에서 그치기를 요구했고요.” “중앙 관리 기구에서? 아니, 그게 정말이요? 거기서 왜…?” “예. 이 부분은 저도 자세한 사정은 모릅니다. 다만 이효을, 강철 산맥. 이것만 전하면 알아들을 거라 하시더군요.” “이효을…? 강철 산맥…? 아!” 처음에는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칼자루를 잡지 못한 입장으로서는 어떤 말을 들어도 불안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이효을과 강철 산맥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박태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리고 왜 중앙 관리 기구에서 중재를 해주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즉, 암담한 눈앞에 나름 그럴듯한 구명 줄이 떨어진 셈이다. “다행이네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신 것 같으니…. 아무튼 머셔너리의 부탁은 간단합니다. 아까 말처럼, 이 사건을 그대로 넘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이번 사건은 계획을 주도한 남벌 로드에게 집중하고, 다른 분들에 대해서는 눈을 감겠습니다.” “흠. 말씀은 고마우나, 그래도 연관이 아주 없는 건 아니라서. 연합 전체가 비난을 피할 수는 없을 거요.” “그 정도는 감수하시죠. 역지사지로 생각해보십시오. 연합이 이런 일을 당했다면 퍽이나 가만히 있겠습니다?” “…….” “물론 이번 사건으로 사이가 벌어지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연합의 힘은 잘 알고 있습니다. 클랜 로드도 그 점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고요. 이번 한 번만 깔끔하게 사과하시고, 남벌 로드의 처리를 도와주십시오. 아니. 그냥 방관만 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머셔너리는 이번 일을 완전히 잊겠습니다. 그리고 차후 연합과 좋은 관계를 맺을 의향도 있습니다.” “…후.” 박태진은 깊은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느릿하게 이마를 매만졌다. 사실 이미 중앙 관리 기구가 알고 있는 이상, 지금도 아주 나쁜 상황은 아니다. 아니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은 된다고 할까? 어떻게 보면 박태진으로서는 좋은 기회라고 볼 수도 있었다. 이번 사건이 터지면 헤일로 건은 어떻게 될지 모르나, 현재 연합 내 2인자인 신혁을 확실히 축출할 수 있다. 그것도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 점은 확실히 커다란 메리트였다. 하지만 아까 한 가족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던 주제에, 지금 와서 선뜻 승낙하기도 망설여졌다. 결국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꺼낸 말은, 완곡한 말 돌리기였다. “으음. 무슨 말인지는 확실히 알아들었는데…. 아무래도 머셔너리 로드와도 이야기를 해야 할 듯 싶소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무례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으나, 현재 클랜 로드는 굉장히 바쁘십니다. 이런저런 일로요. 그래서 이번 일을 완전히 맡기셨고, 따라서 권한도 전부 저에게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대답해주시면 됩니다. 좋다, 아니면 싫다라는 말로 말이지요.” 백두산의 눈썹이 한 번 세차게 꿈틀거렸다. 감히 하늘같은 형님에게 하는 말이 자못 거만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태진의 말이라면 껌뻑 죽고 따르는 만큼, 입술을 짓씹으며 최대한 참으려 애썼다. 한동안 시간이 흘렀다. 박태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더니 재차 깊은 한숨을 흘리며 자그맣게 머리를 끄덕였다. 속으로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어쩔 수 없다는 태도를 보여줄 필요는 있었다. 그리고 조승우는 반응을 확인하자마자 살그머니 미소 지었다. 동시에 오른쪽 머릿결을 살며시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까 조금 무례했던 언행은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사실 처음 말을 들었을 때 너무 화가 난지라….” “괜찮습니다. 말마따나 역지사지로 생각해보았을 뿐인데. 우리로서도 이번 사건은 매우 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사과를 해야 될 쪽은….” “아아. 아닙니다. 상황은 충분히 인지했습니다. 아까 수 로드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잘못은 오롯이 남벌 로드에게 있으니까요. 더구나 이렇게까지 코란 연합의 긍지와 배포를 보여주셨는데…. 이 정도면 우리 클랜 로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아까 말씀대로, 남벌을 제외한 연합에는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음? 뭐…. 아무튼 그렇게 말해주시고 이해해주시니 고맙군요. 이 사건 이후로 머셔너리와의 관계는, 저도 좋은 쪽으로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얼음장 같던 분위기는 삽시간에 화기애애하게 변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평소 신혁을 최고 경쟁자로 생각해온 박태진은 나름 만족할 수 있었다. 물론 원하는걸 얻은 건 조승우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이윽고 조승우는 탁자를 쓸어 수정구와 기록 뭉치를 자기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천연덕스레 입을 엶과 동시에. “그럼 이제 슬슬 얘기를 마무리 지어볼까요?” 이번에는, 왼쪽 머릿결을 쓸어 넘겼다. * 모든 얘기를 마친 후, 박태진과 백두산은 사랑 주점을 빠져 나왔다. 조승우가 여기 주방장 솜씨가 좋다고 추켜세우며 식사라도 하고 갈 것을 권했지만, 박태진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것도 주방장으로 소개된 임한나 앞에서. 그때 임한나가 알게 모르게 비친 서운한 태도를 떠올리며 박태진은 까닭없는 쾌감을 느꼈다. 동시에 쓴웃음을 지었다. 예전에 자신의 고백을 거절했다고 이런 태도를 보이며, 거기에 쾌감을 느끼는 자신이 옹졸하다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두산은 쓴웃음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 모양인 듯, 옆에서 걷던 도중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형님. 너무 자책하지 마시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요.” “…그래. 그렇지.”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나는 한편으로 조금 시원하기도 했소. 그냥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그 얄미운 놈이 박살 난다는 소리 아니요. 물론 우리도 비난은 받겠지만….” “백두산. 내가 말조심하라고 했을 텐데.” “아니 형님이 연합을 가족이라 말했을 때는 저도 감동적이기는 했는데.” “두산아. 그냥 조용히 입다물고 있자. 지금 와서 어떻게 할 수도 없잖아.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할 수도 없었고. 이건 일종의 통보야, 통보. 일방적인 통보. 그쪽에서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어. 그래서 내가 아무것도 못한 거라고.” 백두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박태진의 말뜻을 어느 정도는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입맛을 다시는 형님이 안쓰러웠는지, 이내 재차 입을 열었다. 물론 이번에는 다른 화제였다. “알겠어요, 알겠어. 그냥 입 꽉 막고 있으면 되잖아요. 그나저나…. 어떱디까? 생각해보니까 오랜만에 만났는데.” “응? 누구를 오랜만에 만나?” 박태진은 태연히 말을 돌렸다. 그러자 백두산은 음흉이 웃으며 옆구리를 툭 쳤다. “에이, 모르는 척 하시기는. 임한나요 임한나. 그 모니카의 꽃…? 뭐라더라. 아무튼 그, 그 가슴 큰 젖소 년. 아까 보니까 형님한테 관심 좀 있는 것 같던데.” “관심은 무슨. 머셔너리에서 레어 클래스까지 얻은 사용자야. 그런데 이상하긴 하더라. 왜 레어 클래스가 그런 데서 일하고 있는 거지?” “나야 모르죠. 그런데 내가 아마 그년이었다면 지금쯤 땅을 치고 후회했을 거요. 그때 형님의 고백만 받아들였다면 지금 우리 연합 일인자의 여자가 되었을 텐데….” “됐어 인마. 이제 와서 첫사랑 얘기를 꺼내봤자 뭐하겠어. 그리고 그 여자가 얼마나 철벽인데. 무수한 사용자가 구애했는데 단 한 번도 넘어가지 않은 여자야. 그리고 나랑 해봤자, 정신 사랑만 했겠지. 아무튼 이제는 아쉬운 것도 없고 미련도 없다.”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박태진은 백두산의 말에 솔깃함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임한나의 아름다운 얼굴을, 상냥했던 목소리를, 그리고 커다란 가슴을. 더구나 한때 철벽으로 유명했던 모니카의 꽃이었던 만큼, 한 번쯤은 정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욕망이었다. 백두산은 신나게 떠들었다. 그래도 다시 한 번 해보라는 등, 자기라면 몇 번 따먹고 버리겠다는 등 저속한 말들을 내뱉었고, 박태진은 적당히 맞장구 치며 워프 게이트로 향했다. 박태진의 말하지 말라고는 했으나, 도저히 조금 전 심각한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로는 보이지 않는 태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을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다는 사실을. 박태진이 철벽이라 말한 여인이 지금 스스로 옷을 벗으며 계획의 성공을 보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알몸으로 한 사내에게 안긴 채, 오늘 보였던 박태진의 태도를 깎아 내리며, 신음을 헐떡이고 있다는 사실을. 그러한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두 사내는 사이 좋게 워프 게이트 앞에 섰다. 그리고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발걸음으로 포탈에 몸을 묻었다. ============================ 작품 후기 ============================ 하하. 코멘트들은 잘 읽었습니다. 진행이 처진다고 느끼는 분이 두어 분 계시더군요. 다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인 게, 저번 회와 이번 회를 아무 의미 없이 넣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해답이 나오는 회와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지요. 그런 만큼 대화 하나하나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결국 오류가 생겨, 저번 회는 26일 오전 6시경에 1차 수정을 했습니다.(자세한 수정 내용은 저번 회 후기에 적었습니다.) 원하시는 내용은, 다음 회부터 나온다고 보시면 됩니다. :) 그리고 한 분의 질문에 답을 해드리자면, 저번 회에 사망한 여인은 박환희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인물이 아닙니다. 연합인도 아니고요. 박환희의 편은 맞으나, 도움을 주는 인물로 보시면 됩니다. 이에 대한 부가적인 내용은, 차후 전개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_(__)_ 0481 / 0933 ---------------------------------------------- 작전명 : 광대놀음. “후~우.” 한 번 크게 심호흡한 박환희는 속으로 하나씩 숫자를 세었다. 하나, 문고리를 잡았다. 둘, 문을 밀어젖혔다. 셋,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갔다. 그러자 예의 어두운 회의실과 여덟 명이 둥글게 앉아있는 원형 탁자가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방안에 있는 사람 전원이 일제히 박환희를 돌아보았다. 대다수가 무관심한 듯 바로 고개를 돌렸으나, 일부는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박환희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정중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사정이 생겨서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박환희가 걸음을 멈춘 곳은 바로 박태진의 옆이었다. “환희야. 무슨 일이냐. 항상 일찍 도착해있던 네가 오늘 지각을 다하고….” “정말로 죄송합니다. 형님.” 흘끗 곁눈질한 박태진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으나, 박환희는 아무 말도 않고 더욱 고개만 숙였다. 결국 어깨만 으쓱인 박태진은 앞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미안. 정말 사정이 있었나 보네. 이번 한 번만 양해를 구하지.” “아니 괜찮아. 사정이 있으면 늦을 수도 있는 거지. 아무튼, 계속 이야기해도 될까?” 박태진의 얼굴에 오묘한 기운이 깃들었다. 그리고 웃음 반, 떨떠름함 반으로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몇 번 헛기침을 한 신혁은 박환희와 눈을 한 번 마주친 후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거야. 이왕 이렇게 된 거, 일단 머셔너리와는 척을 지지 말자는 거지. 오히려 지금은 좋은 관계를 맺어보는 것도 하나의 길이라 생각해. 아, 나도 알아. 내가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게 얼마나 우습게 들릴지 정도는. 하지만 현실을 보자고, 현실을. 상황이 이런데 딱히 방법이 없잖아? 나라고 머셔너리가 용이 잠든 산맥에서 돌아올 줄 알고 있었나…. 아무튼 차선책이라고 하기도 그렇지만, 일단은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해야지. 좌우간, 나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해.” “그래요. 혁이는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그 상황에서도 머셔너리와 협의해 연합의 이미지를 개선했고, 결국에는 헤일로도 얻어냈죠. 물론 과정에 조금 진통은 있었지만…. 저는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낸 혁이의 노력에 박수라도 보내고 싶어요.” 신혁이 장황한 설명을 마치자 옆에 앉은 우설희도 얼른 말을 거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회의실 공기가 한없이 가라앉았다. 주변이 조용해지고 눅눅한 기류가 살금살금 탁자에 스며들었다. 잠시 머리를 돌린 서지환은 한두 번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혁이 입장은 들었고…. 태진이는 따로 할 말 없나?” 어차피 이번 회의는 박태진과 신혁에 초점을 맞춘 상태였다. 다른 사람들도 둘 중 하나가 선발될 것이라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박태진에게도 최종 투표 전 자신을 어필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딱히 할 말은 없으니 그냥 이대로 투표에 들어가시죠.”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박태진은 기회를 거절했다. 서지환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혁도 이건 예상치 못했는지 서너 번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곧 미소 지었다. 어떤 꿍꿍이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방금 발언은 헤일로를 포기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또한 지금껏 이어진 상황만 봐도 자신이 유리했다. “…정말 괜찮겠어?” “예.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연합은 한 가족인데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간에 깔끔하게 승복하겠습니다.” 서지환이 재차 확인하자 박태진은 끄덕끄덕 머리를 주억였다. 그리고 신혁을 보며 빙긋 웃었다. 신혁 또한 입꼬리를 올리며 응수했다. “으음. 그럼….” 서지환은 박태진과 신혁을 번갈아 보았다. 이내 두 사내가 동시에 머리를 끄덕인 순간, 마침내 서지환이 본론을 꺼내 들었다. “사전에 공지한 것처럼, 이번 투표는 기권이 없어. 무조건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 알고 있지? 그럼 다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이만 투표를 시작….” 그렇게 막 투표의 시작을 선언하려는 찰나, 외부에서 들려오는 어수선함이 서지환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쾅! 누군가 밖에서 문을 세게 걷어찬 듯, 굳게 닫혀있던 회의실 문이 활짝 열렸다. 아까처럼 조용히 문을 열었다면 또 모를까. 침묵과 숙연함이 가득하던 회의실에 불쾌한 소음이 울리자, 사람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구겼다. 특히 신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짜증 섞인 음색으로 고함쳤다. “누구야! 어느 미친놈이냐!” 그때였다. 뚜벅뚜벅, 뚜벅뚜벅. 뚜벅뚜벅, 뚜벅뚜벅. “미친놈이라니. 말이 좀 험한데? 남벌 로드.” 수많은 발걸음 소리와 동시에 사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어서 일단의 무리가 회의실 안으로 들어와 비로소 걸음을 멈췄다. 탁자에 있던 사람들과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신혁은 의아한 얼굴로 입구를 보았다가 곧 선두에 서 있는 사람을 확인하고서 말을 더듬었다. “너, 너는…. 조성호?” “고려 로드라고 불러주면 좋겠어. 우리가 서로 이름까지 부를 정도로 친근한 사이는 아니잖아. 안 그런가? 남벌 로드? 아니, 코란 연합 여러분?” 동부 일반 도시 프린시카의 대표 클랜, 고려 로드 조성호는 냉소하며 좌중을 훑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바로 대응할 생각을 못했다. 그저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멍한 눈길만 보낼 뿐. 그랬다. 지금 회의실에 난입한 무리는 바로 중앙 관리 기구 소속 사용자들이었다. 그것도 그저 그런 사용자가 아니라, 동부의 패자인 고려를 시작으로 리버스, 한, 해밀 등등 한 클랜의 로드를 맡고 있는 거물급 사용자들. 즉 코란 연합에 비해서 전혀 꿇리지 않는, 아니 오히려 더욱 강한 영향력을 지닌 사용자들이었다. 그러나 코란 연합이라고 해도 가만히 있는 건 아니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연합의 일인자 박태진이었다. 곧바로 안색을 회복하더니 태연한 얼굴로 마주 웃으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물론 서로의 관계가 매우 좋지 못한 만큼, 나오는 목소리는 살벌하기 그지없었지만. “이거 누군가 했더니만…. 공사가 다망하신 중앙 관리 기구 분들이 아니요. 아니 그런데, 이래저래 바쁘신 분들이 이런 외진 곳까지는 무슨 일이지?” “그러게나 말이야.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웬 한 미친 새끼 때문에 이 외진 곳까지 와야 할 일이 생겼네. 응? 그러니까 관리 좀 똑바로 하지 그랬어.” 조성호가 답을 하자 일순 박태진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미친 새끼? 허, 지금 막 나가자는 건가?” “먼저 막 나가신 분들께서 이리 말을 하니까 재미있네. 세상 참 재미있어.” “…당최 뭐 때문에 이러는지는 모르겠는데, 남 관리 지적하기 전에 자신부터 되돌아보는 건 어떤지? 이게 과연 예의 있는 행동이라 생각하는 건가? 고려 로드가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아, 클랜 로드를 날로 먹어서 배우지를 못한 건가? 하하하.” “그렇게 생각하나? 그래도 누구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 그동안 키워주고, 이끌어준 사람을 잡아먹은 배은망덕한 놈들보다는 말이야.” 박태진은 전쟁 때 전대 고려 로드가 사망한 일을 들먹였고, 조성호는 전대 연합의 수장 격이던 김용만의 실종 사건으로 비꼬았다. 그렇게 서로 한 치도 밀리지 않고 주고받았지만, 결국 먼저 얼굴을 굳힌 건 코란 연합이었다. 김용만의 일은 꺼냈다는 것은 연합의 역린을 건드린 것과 진배없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역시나 성미 급한 백두산은 두 눈을 부릅뜨며 분연히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한 순간이었다. “워워, 진정해.” 일순간 강렬한 힘이 어깨를 짓눌러 백두산은 아주 조금 떼었던 엉덩이를 도로 붙일 수밖에 없었다. 반사적으로 왼쪽 어깨를 돌아보니 두툼한 손을 얹은 채 빙글빙글 웃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얼굴을 확인한 백두산은 가래 끓는 침음을 흘렸다. “기, 김덕필….” “오야. 오랜만이야 친구. 그런데 모션은 취하지 마라. 그러다 다친다.” 백두산은 어떻게든 일어나려 용을 쓰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더욱 강한 힘이 짓눌러와, 이를 바드득 갈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고요한 침묵이 아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과 같은 침묵이었다. 이윽고 조성호가 한발 짝 앞으로 나선 순간, 지금껏 잠자코 있던 서지환이 입을 열었다. “고려 로드. 태진이 말대로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는 모르겠으나, 여기는 그대들의 안방이 아니요. 이런 행동을 해명할 원인이 충분치 못하다면, 지금의 무례는 그냥 일련의 사과만으로 넘어가기는 힘들 거요.” “그건 제가 말씀 드리도록 하죠. 지금부터 중앙 관리 기구의 입장 발표를 하겠습니다.” 서지환의 경고에 답한 사용자는 한 로드 성현민이었다. 언뜻 보기로는 예의 바른 태도와 사람 좋은 인상이었으나, 눈동자 한구석에는 숨길 수 없는 냉랭함이 자리잡은 상태였다. “오랫동안 보고 있기에는 서로 거북한듯하니, 거두절미하고 끝내겠습니다. 사용자 신혁. 이번 머셔너리 클랜의 용이 잠든 산맥 공략과 관련해 고발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니 잠시 같이 가주셔서 조사를 받으셔야겠는데요.” “뭐, 뭐라고?!” “못 들으셨을 거라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냥 순순히 같이 가주신다면, 불필요한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구차하게 굴지 맙시다.” “우, 웃기지마! 용이 잠든 산맥? 고발? 갑자기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기세 좋게 고함치고는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반사적으로 나온 말에 불과했다. 어느새 신혁은 얼굴을 하얗게 질리다 못해 창백해진 상태였다. 그러다 문득 송희선과 눈을 맞추고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가다듬었다. “그, 그래. 나는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증거? 그럼. 있지. 그럼 증거도 없이 우리가 이럴까?” 여전한 목소리로 비꼰 조성호는 품에 차분히 손을 넣어 구슬 하나를 꺼내 던졌다. 이내 데구루루 굴러 정확히 탁자 중앙에 정지한 구슬이 환한 빛을 흘리며 한 영상을 재생하기 시작했다. 녹화용 수정구였다. (그래! 내가 했어. 그거 내가 한 거야….) 이윽고 모든 재생이 끝났을 때, 연합 사용자들의 얼굴은 자못 볼만했다. 그 중 특히 신혁의 얼굴이 가관이었다. 왠지 모르게 절박해 보이는 낯빛은 차치하고서라도, 두 눈은 충격으로 인해 찢어질 듯이 커진 상태였다. “어차피 다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더는 말 안 한다. 어이, 저놈 끌어내.” 조성호는 까닥 고갯짓으로 멍하니 서 있는 신혁을 가리켰다. 그러자 불현듯 정신을 차린 신혁은 자신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사용자들을 보며 발악하듯 외쳤다. “이건, 이건 조작된 거야! 그래! 조작된 거라고!” “조작? 구차하군. 아무튼 조사하면 다 나오니까 얌전히 따라오라고.” “입 닥쳐! 지랄하지 마! 내가, 내가 따라갈 것 같아? 어디서 이딴 조작한 증거를 들이밀어!” “음? 다들 조심!” 그때 눈을 날카롭게 한 조성호가 외쳤다. 한순간 신혁이 고함을 침과 동시에 온몸에서 무시무시한 마력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한 클랜의 로드인 만큼, 그리고 클래스가 마법사인 만큼. 작정하고 마력을 일으키면 사상자가 일어날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렇게 생각한 조성호는 몸소 몸을 날려 상대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짜작! 짜자작! 문득, 입구의 가장 후방에서 한 줄기 황금빛 전류가 날아가 신혁을 덮쳤다. 굵기도 굵었지만 어찌나 강력했는지, 미처 대응도 못하고 얻어맞은 신혁은 쭈르륵 밀려 벽에 거세게 부딪쳤다. 꽝! “껙!” 굉음과 함께 터져 나온 외마디 비명. 신혁은 온몸에 방전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쓰러지려는 몸을 간신히 가누었다. 그리고 연합의 사용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곧 조성호 옆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사용자를 보며 흠칫 몸을 움츠렸다. 오른손을 뒤덮은 황금빛 마력과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회의실을 깡그리 집어삼킬듯한 살기. 뇌제(雷帝) 김유현의 등장이었다. “기, 김유현! 이게 무슨 짓이에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설희가 앙칼지게 외쳤으나, 마치 안중에라도 없는 양 김유현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신혁에게로 다가가 멱살을 틀어 올렸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지 신혁은 힘없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잠시 후, 김유현의 입술이 열렸다. “너냐.” “끄륵, 끄르륵….” “세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내 동생 건드린 게 너냐고.” “해, 해밀 로드! 그만두시오!” 어지간한 조성호도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했는지, 다급히 김유현을 제지했다. 김유현은 지그시 조성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신혁을 바라보더니 코웃음과 함께 몸을 돌렸다. 물론 아직 멱살을 쥔 상태였고, 신혁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며 질질 끌려 나왔다. 이내 입구 바깥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김유현을 보며 조성호는 성현민에게 속삭였다. “저러다 죽일지도 몰라. 빨리 쫓아가 봐.” “아 그러게 제가 데려오지 말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잠시 볼멘 소리를 내뱉은 성현민은 쓰게 웃으며 김유현을 뒤쫓았다. 조성호는 설레설레 머리를 저었다. 하지만 곧 만면에 가득한 웃음을 띠고는 잔뜩 얼어붙은 연합 사용자들을 향해 말했다. “약간의 사고는 넓은 아량으로 양해해주시길. 애당초 남벌 로드가 반항한 것도 있었고, 또 해밀 로드가 워낙 동생 사랑이 지극한지라. 하하하.” “뭐라고요? 약간의 사고? 장난하세요? 정말 너무하신 거 아닌가요?” 탕! 우설희는 탁자를 세게 내려쳤다. 사실 빼도 박도 못할 증거를 보인 이상 지금 함부로 나설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신혁의 죄가 확정되면 우설희 또한 무사하지 못한다. 이 바닥 생리가 어떤지 잘 알고 있는 만큼, 어떤 억지를 부리더라도 부인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건 횡포에요!” “횡포? 저 영상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봤어요. 하지만 아직 시인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영상에서 나온 말을 한 기억이 없는데요? 또 혁이 말대로 이 수정구가 조작된 게 아니라는 증거도 없고요!” “아하. 끝끝내 부인하시겠다?” 조성호가 불쌍하다는 듯 쯧쯧 혀를 찼으나, 우설희는 한결같은 태도로 소리를 질렀다. “시인할 게 없으니까요!” “예, 예. 알겠습니다. 무슨 말인지는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마시길. 조작 여부에 관해서는 확실히 가려낼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까요.” 우설희는 불안한 얼굴로 조성호를 응시했다. 목구멍 끝까지 '어떻게?'라는 말이 치솟았으나, 저리도 자신만만한 얼굴을 보니 차마 꺼내지 못한 탓이다. 그런 낌새를 느꼈는지 조성호는 유들유들하게 말을 이었다. “여기 계신 분들은…. 그러니까 2년 전, 부랑자 색출 사건을 알고 계실 겁니다. 백서연과 관련된 사건을 말이지요.” 연합의 사용자들이 이 말을 이해하는 데는, 정확히 3초가 걸렸다. 그리고 3초가 지나고 나서, 모두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지기 시작했다. “사실 이 수정구는 이미 중앙 관리 기구에서 면밀히 조사한 상태로, 조작의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억지를 부리시는 분이 있다면…. 우리는 머셔너리 클랜에 추궁 권한을 부여할 생각입니다.” 철푸덕! 우설희는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 채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보며 조성호는 빙그레 웃었다. “머셔너리 로드가 그러더군요. 머셔너리 클랜은 언제든지 준비돼있으니, 신혁만 넘겨달라고 말이지요. 오히려 그래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뼛속까지 털리기 싫으면 그냥 조용히 있으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이윽고 주변을 쭉 둘러본 조성호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그러나 비아냥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약간의 사고는 있었지만, 원하는 바는 이루었으니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지요. 그럼, 하던 회의 계속 하시길.” 그리고 회의실을 나가기 직전, 고개를 반쯤 돌려 말을 이었다. “이번 사건의 추이나 결과는 중앙 관리 기구에서 아주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연합 분들도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하하하.” 문은, 열렸을 때와는 달리 아주 자그마한 소음도 없이 얌전히 닫혔다. 그렇게 난입한 사용자들이 떠나고 회의실에는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조성호의 마지막 웃음소리만은 사라지지 않아, 마치 여운처럼 남아 감돌았다. ============================ 작품 후기 ============================ 오늘 자정에 제사를 치릅니다. 하하하. 오늘 아버지가 출장 때문에 밤늦게 돌아오셔서 형이랑 이런저런 준비를 도맡아 했는데, 준비하실 때마다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오늘이야 이해했네요. -_-a 항상 병풍이랑 상 올리고 제기만 닦던 저를 반성해봅니다. 아마 이 글이 올라갈 때쯤, 저는 후다닥 거실로 돌아가 절을 하고 있겠지요. 아니면 초혼 의식을 치르고 있거나 요. 약 1시간~2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서, 코멘트 확인은 그 이후에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 :D 0482 / 0933 ---------------------------------------------- The Downfall Of The Koran Union. 김수현과 이효을의 관계는 묘하다. 물론 서로 친근하지는 않다. 오히려 싫어하는 사이에 가깝다. 하지만 김수현이 이효을과 아슬아슬한 관계를 잇는 이유는, 나름 높이 평가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행동력으로 조금 다른 말로 정의하면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라 볼 수 있다. 의견을 조율할 때는 입장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잦으나, 일단 한 번 결정된 사항에 대해서는 군말이 없다. 아니. 그 누구보다 확실하게 밀어주고 도와주며, 그리고 처리한다. 이효을은 이번 사건에 대해서도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신혁이 중앙 관리 기구로 끌려온 직후, 코란 연합이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공개적으로 사건을 터뜨린 것이다. 물론 그 앞에 동부 클랜이 앞장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중앙 관리 기구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합니다. 이번 머셔너리 클랜의 용이 잠든 산맥 공략은 자의로 이룬 일이 아닙니다. 바로 코란 연합이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이는 악명 높은 지역으로 일부러 몰아넣어 머셔너리 클랜에…. 사용자들은 처음에는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너무 갑작스럽게 발표된 것도 있거니와, 하루 전까지만 해도 머셔너리와 코란 연합은 서로 좋은 관계를 맺는 중이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화 내용이 담긴 녹화용 수정구를 외부에 공개하고, 연합 내 헤일로를 차지하려는 암투, 그리고 그 일환으로 머셔너리를 이용했다는 발표를 덧붙인 순간. - 이 수정구가 바로 그 증거이며, 연합은 생환한 머셔너리 클랜은 상대로 사과는커녕 다시 한 번 기만하는 행동을 보였습니다. 먼저, 일단 이 수정구를…. 북 대륙은, 발칵 뒤집혔다. 기실 이러한 사건은 누가 옳고 그르냐를 따지는데 명분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 만큼 명분을 차지하려 개싸움을 벌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는 시작부터 머셔너리가 명분을 가졌다. 즉 이미 가해자와 피해자가 정해져 있다는 소리였다. 영상이 외부에 공개된 이후 사용자들의 반응도 일변했다. 그것도 무척이나 뜨겁게. 수천, 수만 사용자의 비난이 오직 코란 연합 하나를 대상으로 빗발치듯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연합은 처음에는 침묵을 선택했다. 애당초 명분이 없는 이상 비난을 감수해야만 하는 입장이었고, 또한 지금은 어떤 행동을 보인다고 해도 무조건 비난 받을 것이다. 그러니 우선은 이 상황을 감내하며 자숙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어느 정도 반응이 사그라졌다 싶으면, 그때 공개적인 사과를 하고 동시에 다른 관계없는 사건을 터뜨려 적당히 묻어 넘길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연합은 내부를 통제하는 데만 힘을 쏟으며 조용히 돌아가는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고서, 처음의 입장을 철회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건이 조용해지기는커녕, 어찌어찌 넘기기가 불가능할 만큼 기하급수적으로 덩치를 불린 것이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아니면 인과응보라고 해야 할까? 이번 사건을 넘어서, 머셔너리가 성과를 넘긴 일이나 그동안 유독 코란에서 머셔너리를 비방하는 기록이 지속적으로 나온 것 등등. 지금껏 연합이 수작을 부린 다른 일들까지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코란 연합은 적이 많고, 한 번 불붙은 사용자들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이번 사건에 순수하게 분노하는 이도 있었고, 누군가의 지령을 받아 은밀하게 선동하는 사용자도 있었으며, 이번 기회가 아니면 언제 공개적으로 연합을 비난해보겠냐는 사용자도 있었다. 하지만 동기가 어떻든 간에 결과는 모두 같다. 사용자들은 성난 들개처럼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렇게 한없이 뜯고 씹고 맛보고 즐기는 동안, 연합의 이미지는 날이 갈수록 추락했다. 심지어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코란에서 열폭(열등감 폭발) 연합은 물러나라는 시위도 한창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도대체 어디서 퍼졌는지도 모를, 연합의 치부가 낱낱이 적힌 기록이 북 대륙 전역에 뿌려졌다. 그리고 '이건 또 뭘까.'라며 기록을 본 사용자들은, 경악했다. 연합은 언제나 '우리는 한 가족이다.'라는 기치를 내세우며 코란을 홍보했다. 그런데 가만히 기록을 보고 있자니 이게 참 가관이었다. 도저히 선의의 경쟁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연합 내부에서 서로를 견제하고 공격하는 내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뿐일까? 이 기록과 연루하여, 묻었다고 생각한 김용만 실종 사건이 도로 수면에 떠올랐다. 연합은, 말 그대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남벌 클랜 하나로 끝내려 했던 일이었는데 어느새 연합의 근간을 뒤흔들만한 사건으로 번졌다. 이제는 열폭이라는 오명을 넘어서 패륜 연합이라는 말마저 나오는 중이었다. 사건이 여기까지 번지자 그나마 우호적이던 세력도 하나 둘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내부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려면 걸리지나 않게 하던가, 수뇌부의 안일한 처리와 무능한 대응을 꼬집으며 탈퇴하는 사용자들이 속출한 것이다. 결국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연합은 침묵을 깨고 움직이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물론 움직이고 싶어 움직이는 건 아니었다. 이대로 계속 잠자코 있다가는 오히려 모든 걸 인정해버리는 꼴이라, 거의 반 이상은 떠밀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 바바라의 워프 게이트에는 수많은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있었다. 박태진은 막 포탈에서 나오다가,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현재 연합의 상황은 너무 애매했다. 공식으로 입장 발표를 해야 하는데 돌아가는 상황이 매우 좋지 못하다. 무엇보다 조성호가 영상을 가감 없이 공개한 게 엄청난 타격이었다. 그것만 아니라면 나는 모르는 일이라 오리발을 내밀고, 신혁에 덮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너희도 알고 있었잖아?'라는 말은 현재 신혁뿐만 아니라 연합 전체를 공범으로 몰아가는 중이었다. 그래서 결국 지금은 어떻게든 시간을 끌자는 결정을 내렸다. 아직 인정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정한 것도 아니었다. 머셔너리와 어느 정도 입을 맞춘 것도 있으니, 우선 정확한 진상을 조사한다고 발표해 이번 사건과는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차후 때를 노려 적당히 신혁의 탓으로 돌린 후 공개적으로 사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놈의 사용자들이 연합을 가만히 두지를 않는다는 것. 코란에서 매일 일어나는 시위만해도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오늘 바바라로 온다는 사실은 또 어떻게 알았는지. 미리 자리를 잡은 사용자들이 앞다투어 질문하는 소리를 들으며 박태진은 질끈 눈을 감았다. 졸지에 공식 회견하게 생겼다. 질문을 거부할 요량으로 빠르게 입구를 가로질렀으나, 사용자들은 우르르 몸을 일으켜 길을 가로막았다. 수행 인원들이 최소한의 공간은 확보해주었지만 좌우서 수정구를 움킨 수십 개의 팔이 우수수 쏟아진 탓이다. “사용자 박태진씨! 이번 사건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직 아무것도 밝혀진 건 없습니다. 현재 우리도 연합 차원에서 진상을 밝히려 노력 중입니다.” “그렇다는 말은 이번 사건을 모르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남벌 로드가 단독으로 벌인 일이라는 말입니까? 하지만 영상에서는 연합의 다른 클랜도 알고 있었다는 내용이 나왔는데요?” “말씀드렸듯이, 아직 밝혀진 건 없습니다. 대화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에 불과하고요. 제가 오늘 바바라에 온 이유도, 남벌 로드를 만나 자세한 말을 들어볼 요량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건 정확한 진상을 밝힌 이후 발표하겠습니다. 아무튼 그만하죠. 지금 무척 불쾌합니다.” “박태진씨. 지금 도망가고 있습니다.” “어디서 수정구를 들이밀어! 영상 찍지 마! 씨발 찍지 마! 성질이 뻗쳐서 정말, 씨발 찍지 말라고 했잖아!” 결국 백두산이 험한 말과 함께 주변을 거세게 밀쳤다. 넘어진 사용자들은 울부짖으며 분개했다. 우리도 알 권리가 있다는 말을 뒤로한 채 박태진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현재 신혁이 수감된 장소는 중앙 관리 기구의 지하 건물로, 구 황금 사자의 클랜 하우스였다. 지하에는 2년 전 서 대륙 포로들을 넣어둔 감옥이 있었는데, 지금은 부랑자나 범죄자들을 관리하는 장소로 쓰이고 있었다. 그러나 박태진은 도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중앙 관리 기구로 가는 길 좌우로 머리에 하얀 띠를 질끈 동여맨 사용자들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던 탓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박태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마주친 순간, 가장 선두에 선 사용자가 북을 치며 외쳤다. “지금 이 사건에 대해서 남부 자유 연합은 왜 침묵하고 있는가! 연합은 더는 코란을 이끌 자격이 없다! 열폭 연합 물러나라! 물러나라, 물러나라!” “연합은 머셔너리에 사과해야 한다! 패륜 연합 물러나라! 물러나라, 물러나라!” 코란에서 시위를 벌이던 놈들이 바바라까지 따라온 것이다. 거기가 가락도 생각보다 흥겨웠던 탓에, 주변에서도 서서히 호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박태진은 입술을 짓씹었다. 하지만 여기서 화를 낼 수는 없어 꾹 눌러 참았다. 그리고 사용자들이 모이기 전에 거의 뛰는 걸음으로 거리를 돌파했다. 하지만 사용자들은 그런 박태진을 놓치지 않았다. 오히려 뒤를 졸졸 따라가며, 연신 북을 치고 물러나라는 구호를 외쳤다. 박태진은 이를 갈았다. '이 개새끼들이 진짜….' * 중앙 관리 기구가 관리하는 지하 감옥은, 여타 일반적인 감옥과는 달리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다. 중앙에 일직선으로 통로가 나 있고 좌우로 죄수를 수감하는 방이 보인다. 여기서 보인다는 말은 앞면을 안을 훤히 볼 수 있도록 강화 수정으로 도배했다는 뜻으로써, 예전 서 대륙 포로를 노예로 판매하면서 생긴 현상이었다. 구매를 원하는 사용자들이 직접 보고 선택할 수 있는, 거의 홍등가와 비슷한 구조랄까. 그런 지하 감옥의 어느 방에는, 한 사내가 구석에 쭈그려 앉아있었다. 무릎에 고개를 묻은 탓에 얼굴이 보이지는 않지만, 누가 봐도 혀를 찰 정도로 사내의 주변에는 암울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그랬다. 사내의 정체는, 바로 신혁이었다. 지하 감옥으로 끌려온 이후, 신혁은 몇 번의 취조에서 일체의 혐의를 부인했다. 자신이 어떻게든 혐의를 부인하는 동안 연합에서 어떻게든 이번 사건을 가라앉힐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사실, 신혁에게 남은 길이 그것밖에 없기도 했고. 만일 이번 사건을 시인했다면 지금쯤 공개 처형을 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신혁은, 지금 세상 그 누구보다 깊은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얼마 전 박태진이 면회를 명목으로 방문해 돌아가는 상황을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상황은 신혁의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누군가 희생하지 않으면 도저히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결국 갑갑함을 이기지 못해 왜 이 지경이 되도록 놔뒀느냐 고함쳤지만, 메아리처럼 돌아온 박태진의 일갈은 신혁을 수렁 속으로 빠트렸다.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라도 있냐! 애당초 사태가 이렇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남벌 클랜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지금 연합 내부가 어떤 줄이나 알아? 산하 클랜은 반 이상이 돌아섰고, 탈퇴자도 100명을 넘었어! 알아? 아냐고! 거기다 코란에서 물러나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는 말이다! 이뿐 인줄 알아? 해밀 클랜은 공공연하게 클랜전 의사를 내비치며 우리를 도발하고 있어! 네 같잖은 욕심 하나 때문에 말이야! 모든 게 헝클어졌다고!' '아무튼 조용히 기다리고 있어라. 우리도 놀고 있는 것만은 아니니까. 하지만 내가 너라면, 너였다면…. 어떻게든 이 사태를 책임졌을 것이다. 연합을 위해서 말이야.' 떠나기 전 박태진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무척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의미를 깨달은 신혁은, 더욱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말인즉슨 지금 사태를 해결하는 최고의 방법은 자신이 독박을 쓰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신혁은 그럴 수 없었다. 한 번 높게 올라갔던 만큼, 그것을 이대로 포기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갖은 고생 끝에 거머쥔 이인자의 자리였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 손만 뻗으면 닿을 위치에 일인자의 자리가 있었다. 헤일로만 차지할 수 있었다면 남벌 클랜은 명실상부한 연합의 최고로 올라섰을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일이 이렇게 돼버린 걸까. 나직이 뇌까린 신혁은 벽에 힘없이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살에 상처가 생길 정도로 손을 움켰다. 끊어지기 일보직전이었지만, 아직 실낱같은 희망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나가고 싶었다. 나가서 영상을 녹화한 놈을 죽이고 싶고, 머셔너리를 밟고 싶고, 이 지경이 되도록 놔둔 연합도 원망스러웠고, 시인을 종용한 박태진도 미웠다. 그냥, 모든 게 다 싫었다. 어느새 신혁의 손에서는 한 줄기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덜컹. “어이. 면회다.” 간수가 문을 열고 들어와 면회가 들어왔음을 알렸다. 그러나 신혁은 고개를 들기는커녕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간수는 혀를 쯧쯧 차고는 안으로 들어와 온몸에 억제구가 달린 신혁을 익숙하게 일으켰다. 그리고 부축하며 억지로 끌고 나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신혁이 끓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구지. 연합인가.” “아니야.” “그럼 기자로군. 거부하겠다. 나는 할 말 없어.” “기자도 아니니까, 잔말 말고 따라오지 그래. 힘들어 죽겠으니까.” 그러자 신혁의 눈동자에 약간이나마 생기가 감돌았다. 예전 같았으면 고작 간수 주제에 버릇없다고 경을 쳤을 테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연합도 아니고, 기자도 아니다? 그럼 도대체 누가 자신을 찾아왔을까? 의문은 면회실에 도착한 이후에서야 해결할 수 있었다. 신혁은 수정 창문 하나를 두고 앞에 덤덤히 앉아있는 사용자를 보며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이렇게 앞에서 대면하는 건 처음이었으나, 얼굴은 기록에서 많이 본 사용자였다. 이내 오른쪽 가슴에 그려져 있는 붉은색 바탕에 검과 방패 문양을 확인했을 무렵. 창 너머로 낮고 차가운,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재미있다는 기색이 깔린 목소리가 조용히 흘러들었다.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군. 네가 남벌 로드, 신혁인가?” 그리고 신혁은, 본능에 따라 입을 열었다. “머셔너리…. 로드…!” ============================ 작품 후기 ============================ 『북 대륙 기사.』 (내용 : 현재 해밀 클랜은 코란 연합에 공공연하게 클랜전을 하자는 의사를 내비치고 있다. 이것은 실로 의사보다는, 도발에 가깝다. 그렇다면 왜 아무 관계도 없는 해밀 클랜이 이번 사건에 이토록 분개하는 걸까? 이유는 바로 해밀 클랜 로드와 머셔너리 클랜 로드의 관계에 있다. 이 두 사용자는 서로 친형제이며 2년의 시간차를 두고 들어온 희귀 케이스로…. …일각에서는 해밀 클랜의 이러한 도발이 너무 성급하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두 사용자의 잘생긴 얼굴이 널리 알려진 이후, 해밀 클랜의 이러한 입장도 상당히 지지를 받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대다수의 지지가 여성 사용자에게서 나오며 남성은 소수라는 점. 특히 동인 클럽과 게이 클럽은 해밀의 입장을 열렬히 환호하며….) PS. 남벌 클랜만의 몰락? 아니요. 정답은 이번 파트 소제목에 있습니다. :) 0483 / 0933 ---------------------------------------------- The Downfall Of The Koran Union. 2년 전. 그러니까 황금 사자 클랜이 북 대륙에 군림하던 시절, 이런 일이 있었다. 서 대륙과 부랑자 연합군이 밀려온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북 대륙은 심하게 요동쳤다. 특히 연합군을 가장 처음 맞이해야 했던 서부 도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그러다 결국 어떤 일이 일어났냐 하면, 서부 도시에 거주하던 사용자들이 다른 도시로 피난을 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어쩔 때는 사용자들뿐만이 아니라, 캐러밴을 넘어 한 클랜 전체가 이동한 경우도 있었다. 그럼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표면에는 황금 사자의 미진한 반응과 서부 대표 클랜들의 미숙한 대응 등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면에 있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해보면 동부와 남부의 행동이라고나 할까. 평소 황금 사자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동남부는, 때는 이때다 싶어 도움의 손짓을 가장한 스카우트, 즉 오퍼를 넣었다. 그리고 서부에 불안함을 느꼈던 여러 클랜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거주 도시를 옮기는 방법을 선택했다. 잠시 피난을 간 게 아니라, 아예 관할 세력을 바꾸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그때와 상황이 많이 다르기는 하나,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중앙을 비롯한 동부, 서부, 북부. 심지어 같은 남부에서도 코란을 목표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코란 연합의 산하 클랜들은 시시각각 커져만 가는 사건에 불안함을 느꼈고, 다른 도시의 클랜들은 이러한 상황을 놓치지 않았다. 앞다투어, 그러나 은밀하게 개인 스카우트 또는 클랜 차원의 오퍼를 넣었으며, 그에 응한 산하 클랜은 적지 않은 수를 기록 및 갱신하는 중이었다. 말인즉슨,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소리였다. 그러다 결국, 하나의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킬만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 이끼 클랜 로드 구현규입니다. 지금 이 시간 부로 이끼 클랜은 남부 자유 연합의 탈퇴를 선언하며, 현재 사태에 대한 해명 및 머셔너리 클랜에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코란 연합의 주축을 이루던 여덟 클랜 중 한 클랜이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현재 사태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 단독으로 입장을 발표했고 그것도 모자라 연합의 탈퇴를 선언했다. 이것은 단순한 산하 클랜이 떠나간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일이었다. 이끼 클랜의 관할 하에 있던 산하 클랜까지 모조리, 전체의 8분의 1에 해당하는 전력이 연합에 등을 돌렸다는 소리였다. 구현규는 겉으로는 깊은 사과와 자신들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해명, 그리로 자숙하는 의미로 당분간 모든 활동을 중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머리가 조금이라도 돌아가는 사용자들은 모두 알아차렸을 것이다. 언젠가 이 사태가 가라앉을 즈음. 거주 도시를 옮기든 합병을 하든, 이끼 클랜이 코란을 제외한 어딘가로 이동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끼 클랜의 탈퇴 선언은, 겨우겨우 몸을 추스르던 코란 연합에 새로이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사건이 터진 지 일주일이 넘어가는 지금, 간신히 하향 곡선을 그리던 탈퇴 인원이 도로 상승 곡선으로 변했다. 지금껏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이리저리 눈치만 보던 사용자들에, 이끼 클랜의 선언은 더없이 좋은 구실이었다. 코란 연합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외부 상황만 해도 힘들어 죽겠는데, 내부에서 도와주기는커녕 더욱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안 그래도 울고 싶은데 뺨까지 때린 격이랄까. “후. 죽겠군.” 박태진은 앓는 소리를 내며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리고 잠시 천장을 쳐다보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요즘 들어 머리가 자주 아프고 몸에 힘도 없는 게, 이러다 병이라도 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앉아있을 무렵, 돌연히 뻐근하던 어깨가 시원해짐을 느꼈다. 누군가 지그시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한다. 흘끗 곁눈질을 하자 눈이 마주친 청년이 빙그레 웃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청년이 박환희임을 확인한 박태진은 피식 웃었다. “시원하네. 목 좀 더 주물러봐.” 그러자 박환희는 군말 않고 목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사실 박태진은 이 청년에 깊은 호감을 갖고 있었다. 아니 마음에 들어 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후계자로 생각하는 중이었다. 어찌나 싹싹하고 예의가 바른지, 적어도 수 클랜원치고 박환희를 싫어하는 사용자는 없었다. 외모도 준수하고 사용자 정보도 괜찮으며, 무엇보다 능력도 좋고 수완도 좋다. 박환희가 수 클랜의 이인자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다. 그런 박태진의 기대를 알아차렸는지, 박환희는 더욱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이 처음 홀 플레인에 들어왔을 때를 보는 것 같아, 박태진은 항상 박환희를 데리고 다녔고 총애했다. 오죽하면 한 클랜원이 그러다 결혼하는 게 아니냐고 질투할 정도였다. '내가 사람은 잘 봤지.' 현재 적잖은 수의 산하 클랜이 돌아섰고, 수많은 클랜원이 탈퇴했다. 그러나 박환희는 아직 남아있었다. 이것만 봐도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박태진은 살그머니 웃었다. 잠시 후, 박환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형님은 참 대단하네요. 이런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다니….” “응? 아…. 그럼. 내가 축 처져있으면 과연 누가 연합을 믿고 따르겠어? 그러니까 웃어야지.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척, 울고 싶어도 웃는 척….” “말이야 쉽죠. 하지만 실제로 그러기는 힘들잖아요.” “그렇긴 해. 하지만 지금 내가 앉은 자리는 그래야만 하는 자리야. 아무리 힘들어도 헤쳐나갈 방법을 찾아야 하고,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지. 그러니까, 긍정의 힘이라는 말도 있잖아? 너도 이 말을 기억해두라고.” 의외의 말이었을까. 눈을 동그랗게 뜬 박환희는 잠시 손을 멈추었다. 그러자 박태진은 손을 들어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내고는 기다란 한숨을 흘렸다. 그러자 박환희가 잔잔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걱정됩니다. 지금 형님 하나만 믿고 남아있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그런데 요즘 보면 지치신 게 눈에 보여요. 꼭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고요.” “걱정 마. 나 그렇게 쉽게 안 쓰러진다.” “걱정이 되니까 나오는 말 아닙니까. 그리고 아무리 사용자라고는 하지만, 근본은 사람입니다. 계속 달릴 수만은 없어요. 형님은 지금 휴식이 필요합니다.” “알았다. 알았어. 거 자식, 되게 뭐라고 하네. 누가 보면 내 마누라인줄 알겠어. 하하하.” 그래도 걱정해주는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박태진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차분히 몸을 일으켜 있는 힘껏 기지개를 폈다. 그러나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박환희는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앞을 응시했다. 이내 박태진이 짧은 신음과 함께 손을 내렸을 무렵, 박환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형님. 이왕 말 나온 김에, 조만간 정말로 기분 전환이라도 하시죠.” “아 알았다니까. 정 그러면 네가 나 좀….” 머리를 끄덕이던 박태진은 문득 말을 멈추었다. 갑자기 박환희가 기록 하나를 불쑥 내밀었기 때문이다. 얼떨결에 받아 대충 기록을 훑자, 일순간 박태진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두 눈을 끔뻑였다. “이건…. 유적 기록이잖아?” “예. 머셔너리 로드가 주신 겁니다.” “뭐? 머셔너리 로드가? 너…. 아는 사이였냐?” “사용자 아카데미 시절 때 교관으로 들어온 적이 있거든요. 그때 조금 알게 됐습니다.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닙니다.” 박환희는 어설프게 웃으며 설명했다. 박태진은 머리를 갸웃했다. “그래? 아무튼 그 양반이 줬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정말로 있을 가능성이 높거든. 그런데, 갑자기 왜?” “그게…. 미안하답니다.” “음?” “상황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답니다. 머셔너리와 중앙 관리 기구에서도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박태진은 거하게 콧방귀를 꼈다. 애당초 중앙 관리 기구서 나섰을 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일은 벌여놓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니. 쯧쯧 혀를 찬 박태진은 마땅찮은 기색으로 기록을 응시했다. “아무튼 좋아, 좋은데. 그래서. 지금 가자고?” “좋지 않습니까. 도시 밖으로 나가서 바람도 쐬고 간만에 칼질로 스트레스도 풀고요.” “야 인마. 지금 어떻게 가. 안 그래도 하루가 멀다고 지랄하는데, 여기서 탐험 간다고 해봐라. 난리 나지.” “물론 외부에는 변명을 해야지요. 모두가 납득할만한 변명이요.” 박태진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박환희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어차피 바로 입장을 밝히지는 않고, 진상을 조사한 후에 밝히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이 유적이요, 마침 용이 잠든 산맥으로 가는 길에 있거든요. 그러니 겉으로는 진상 조사를 위해 용이 잠든 산맥으로 간다고 하고, 유적은 우연히 발견한 걸로 하면 되요.” “환희야.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계~속 있어봤자 상황은 도긴개긴이잖아요. 어차피 나갈 놈들은 나가고, 비난할 놈들은 계속 비난하겠지요. 이대로 가만히 있느니, 차라리 정확한 진상을 조사한다고 해놓고 잠깐 다녀오는 게 좋지 않을까요. 행동도 보여줄 수 있고, 시간도 끌 수 있고, 기분 전환도 할 수 있죠. 또 우연히 유적을 발굴했다는 사실은 침체한 연합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겁니다.” “으음….” 박태진은 천천히 턱을 어루만졌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구미가 당겼다. 그렇게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기록을 책상에 놓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다. 아무튼 조금 생각해볼 테니까, 우선은 돌아가는 상황을 보자고. 정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네 말대로 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지.” 간다는 말은 아니었으나, 거의 반승낙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이 정도에 만족했는지 박환희는 미미하게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예. 그럼 천천히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 면회실은 이상하리만치 추웠다. 둘만 남게 된 순간, 신혁의 몸이 눈에 띌 정도로 크게 떨렸다. 그런 신혁을 보는 김수현의 눈동자는 차갑기 그지없다. 칠흑 색 눈동자는 은근한 살기를 내비쳤고, 어느새 주변 공기도 한없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신혁은 살그머니 눈동자를 굴렸다. 그리고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그래…. 머셔너리 로드께서 여기는 무슨 일이지? 시인을 하지 않으니까, 그 명성 높은 백서연 사건을 재현하러 온 건가?” 비꼼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김수현은 화내기는커녕 오히려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더니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응수했다. “못해줄 것도 없지. 그래도 백서연은 꽤 버텼는데 말이야. 너는 어느 정도 버텨줄지 기대되는데? 그래도 명색이 한 클랜의 로드인데, 한 사나흘은 버텨야 하지 않겠어? 하하하.” “누, 누가 무서워 할 줄 알고….” “그러고 보니 속담에 이런 말이 있지. 도둑이 제 발 저리다. 그리고 그렇게 덜덜 떠는 목소리로 말해봤자 별로 설득력 있게 들리지는 않는다고.” “누가!” 벌컥 고함을 치려던 신혁은 돌연히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한껏 조롱 섞인 목소리로 비아냥거리던 김수현이 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기 때문이다. 갑자기 까닭없는 절망감이 엄습했다. 속으로 올게 왔구나, 정말 하면 어떡하나 걱정하던 신혁은 이내 창 너머로 김수현이 놓은 구슬을 보며 의아한 기분을 느꼈다. 조막만 한 크기에 파란빛을 띠는 구슬은, 바로 진실의 수정이었다. “이건…. 진실의 수정?” “오. 역시나 잘 알고 있구나. 호호…. 아.” “…모를 리가 없지. 그런데, 이건 갑자기 왜 꺼내놓은 거지?” “흐흠. 이래봬도 나름 신사적이라. 처음부터 강압적으로 나가지는 않아. 그러니까, 기회를 주는 거라고나 할까?” 마치 살살 달래는듯한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 그러나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신혁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였다. 그럼에도 목이 바짝바짝 타오르는 탓에, 신혁은 한동안 진실의 수정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아야 했다. “김수현…. 나한테 뭘 원하는 거냐.” “뭘 원하냐고? 진실. 네가 알고 있는 모든 진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손을 얹어. 그리고 증명해봐.” “큭…! 상황은, 상황은 들어서 알고 있어! 그럼 이 정도면 충분하잖아!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거야! 이…. 피도 눈물도 없는 놈!” “아니 왜 이렇게 혓바닥이 길까? 입 다물고, 그냥 좋게 말할 때 손 얹지 그래. 지금 네가 이러는 건 네 행동을 결국 시인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거부….” “거부해봐. 한 번.” 신혁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외쳤다. 아니 외치려고 했다. 그러나 김수현이 곧바로 말을 끊은 탓에 입을 멍하니 벌린 채 멈추고 말았다. 목구멍에 맴도는 말은 미처 꺼내지도 못한 채. 김수현은 담담한 얼굴로 연초를 꺼내었다. 그리고 느릿하게 불을 붙이며 태연히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하는데, 네가 진실에 수정에 손을 얹든 얹지 않든 결과는 똑같아. 이미 중앙 관리 기구로부터 추궁 권한은 부여 받았고, 너를 인계 받으면 끝나는 일이니까. 사실 나는 네가 계속 부인하는 게 더 좋거든. 괜히 머리 아프게 질문할 필요도 없지, 진실의 수정도 아낄 수 있지, 그리고 무엇보다 정신 오염보다 확실한 방법도 없으니까…. 그리고 하나 더 말해주자면.” 김수현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이내 두 눈을 크게 뜨며 말을 이었다. “이 자리에서 약속하지. 거부한 순간을 기점으로 너는 죽는 날까지 절대 편하게 지내지 못할 거야. 무엇을 상상하든 간에, 그 이상을 보여줄 생각이니까. 이건 정말로 기대해도 좋다.” 그 말이 끝난 순간 신혁의 눈동자가 눈에 보일 정도로 흔들렸다. 자기도 모르게 입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를 확인했을 때,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끼친 것이다. 신혁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김수현의 말이 허세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에게는 어떤 선택지도 없다는 사실을 느꼈기 때문에. 이놈은 정말로 내가 거부하는 걸 원하고 있다. 아니, 어떻게 되도 상관이 없다. 결국 도달하는 방법의 차이뿐, 결론은 똑같다. 그렇게 생각한 신혁은, 이내 아래서 올라오는 싸늘한 눈초리와 마주하자 반사적으로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김수현은 이렇게 한없이 흘러가는 침묵이 싫었는지, 연초를 탁 튕기며 입을 열었다. “더 말을 나누는 건 시간 낭비겠지. 신혁? 마지막 기회다. 3초 안에 진실의 수정에 손을 얹어라. 만약 얹지 않으면 거부 의사로 간주하고 너를 인계 받겠어. 그럼 하나.” “자, 잠시만! 김수현 잠시만! 아니, 머셔너리 로드!” “둘.” “얹을게! 얹는다고! 그전에 하나만, 부탁이니까 하나만 대답해줘!” 신혁은 비굴해 보일 정도로 간청하며 재빠르게 손을 얹었다. 막 셋을 세려던 김수현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그리고 곧 입맛을 다시는 게, 결국 진실의 수정에 손을 얹은 걸 상당히 아쉬워하는 모습이었다. 그 반응을 확인한 신혁은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흠. 부탁이라. 하기야 죽은 사람 염원도 들어준다는데. 그래. 어떤 게 궁금하지?” “누가, 누가 그랬는지만 알려줘. 회의 내용을 녹화하고, 너한테 알려준 사용자가 누구인지 만 알려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최소한 누가 그랬는지는 알고 싶다.” “음? 아아…. 흐음. 글쎄. 개인적으로 비밀 엄수를 부탁 받아서.” “어차피 이제 모두 끝났으니까 상관없잖아! 누구지? 박태진? 아니 백두산인가? 아니면 박환희?” 김수현의 얼굴은 미묘했다. 알듯 말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게, 마치 말해줄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박환희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매끈한 미간이 살며시 좁혀졌다. “박환희? 걔는 누구…. 아. 아아! 맞다. 그러고 보니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만난 적이 있었지. 그런데 걔 이름은 갑자기 왜…. 박환희가 코란 연합이었나? 아무튼 걔는 아니야.” 이번에는 신혁의 얼굴이 일그러질 차례였다. 거의 혼잣말에 가깝기는 했으나, 흡사 박환희를 모르고 있었다는 뉘앙스를 풍겼기 때문이다. 또한 얼마 전 박환희가 머셔너리 로드를 만났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 만큼, 신혁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너는 박환희를 모른다는 소린가?” “아니, 아니. 잠깐 기억하지 못했을 뿐, 누군지는 알아. 사용자 아카데미에 교관 대 병아리로 만난 적이 있거든. 그때 약간 안면을 익혔지. 그리고 2년 전 전쟁이 끝나고 나서 조금 도와준 적도 있고. 우리 클랜에 그놈이랑 동기가 있었거든…. 아무튼 그러고 연락이 끊겼는데, 설마 코란 연합에 있을 줄은 몰랐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지?” 오히려 의아히 되물어보는 김수현을 신혁은 멀거니 바라만 보았다. 그러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자신이 알고 있는 바와 비슷한 이야기였으나, 연락이 끊겼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박환희는 스파이가 아니잖아.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박환희가 스파이가 아니라는 사실은 진실의 수정으로 입증됐다. 그리고 박환희는 그때 머셔너리 로드를 만났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머셔너리 로드는 박환희를 거의 잊고 있었다는 말을 꺼냈다. 이마에 현기증이 핑 감돌았다. 신혁은 지끈지끈한 머리를 부여잡았다가, 세차게 털며 외쳤다. “너는 어디까지 나를 농락해야 만족하려는 거냐! 얼마 전에, 코란에서 박환희를 만나지 않았나!” “응? 농락이라니? 이건 사실….” “시치미 떼지 마라! 다 알고 있으니까! 밤의 거리, 창관에서! 박환희와 밀담을 나누지 않았나! 그리고….” “아니 잠시만, 잠시만. 그게 무슨 헛소리야? 나는 그 이후로 박환희를 만난 적도 없다고. 그리고 창관에는 간 적도 없어. 다른 사람이랑 헷갈린 거 아니야?” 신혁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거짓말하지 마! 아니 잠깐만…. 아,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뭐, 뭐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나 참. 이해가 안가네.” 그러다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린 듯 신혁은 떨떠름히 말을 더듬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미친놈처럼 악을 쓰며 소리 치기 시작한다. 밀폐된 공간인 탓에 소음이 웅웅 울려 김수현은 살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네가 왜 그러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손을 내밀어, 먼저 얹은 손을 치운 후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리고 잠시 후, 진실의 수정에서 환한 빛과 함께 자그마한 불빛이 피어올랐다. “뭐, 뭘 하려는 거야?!” “귀 씻고 잘 들어라. 나는 최근 2년간 박환희라는 사용자를 만난 적이 없다. 나는 박환희와 어떠한 수단으로 연락도 한 적 없다. 나는 근래 네가 말하는 창관에 간 적도 없으며, 창관에서 박환희를 만나지도 않았다.” “…헉?!” “어때. 이 정도면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게 입증됐겠지?” 신혁은 반사적으로 진실의 수정을 살폈다. 그리고 불빛의 색이 그대로임을 확인한 순간, 괴상한 신음을 내었다. 그와 동시에 왼쪽 머리에 둔중한 충격이 느껴졌다. 갑작스레 온몸에 힘이 빠져 몸을 한쪽으로 고꾸라트린 것이다. “어이! 신혁? 어이!” “자, 잠깐! 입, 입 닥쳐!” “뭐라고?” “제발! 잠깐만이라도 좋으니까! 아니 그러니까! 입, 아니! 제발, 제발!”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횡설수설. 그러나 도로 허겁지겁 일어난 신혁은, 둥근 구멍으로 손을 넣어 빼앗듯 진실의 수정을 가져왔다. 그리고 아무 말이나 지껄여보자, 불빛이 변했다가 도로 원래 색깔을 되찾는 모습을 수없이 볼 수 있었다. 즉, 모조품이 아닌 진품이라는 소리였다. “이건…. 무슨….” 신혁의 안색이 삽시간에 빛을 잃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지금만큼은, 그 어떤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오직 하나.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이 하나의 물음만이 남아, 신혁의 온몸을 바늘처럼 찌르는 중이었다. 끼익! “클랜 로드. 잠시….” 그때였다. 앞에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와 김수현이 몸을 일으키는 소리, 그리고 잠시 나갔다 올 테니 그동안 머리나 식히고 있으라는 소리가 연속으로 흘러들었다. 하지만 지금 신혁에게는 조금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두 개의 기억, 그리고 두 개의 진실의 수정에서 생겨난 괴리감이 신혁의 전신을 사정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이내 탕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홀로 남은 신혁은 있는 힘껏 숨을 들이켰고, 힘차게 숨을 내뿜었다. 그런 비상식적인 호흡을 열 번을 넘게 하자, 잠시 놓쳤던 정신 줄을 힘겹게나마 잡을 수 있었다. 신혁은, 그때 박환희와 머셔너리 로드가 만나는 현장을 직접적으로 보지는 못했다. 그냥 그럴 것이라 생각했고, 그건 박환희도 인정했다. 그러나 지금 머셔너리 로드는 박환희를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신혁은 진실의 수정을 으스러질 듯이 움켰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아 필사적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이윽고 그때의 상황이 신혁의 머릿속에 하나하나 회상되기 시작했다. '…마, 만났습니다. 예. 그건 인정합니다.' 첫 기억을 떠올린 찰나, 신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때는 박환희는 진실의 수정을 사용하기 전이었다. 말인즉슨, 거짓말을 했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왜? 왜 거짓말을 했을까? 차오르는 의문을 뒤로한 채, 신혁은 최대한 침착함을 찾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박환희가 머셔너리 로드를 만나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회상을 지속했다. 여기서부터는 진실의 수정을 사용했다. '사, 사용자 박환희는….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 누군가와 확실히 이야기는 했다. 하지만 누구와 이야기했는지, 주체가 없다. '아닙니다! 저는 창관에서 형님의 계획을 실토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늘은 물론이거니와, 예전에도 머셔너리 로드에게 계획을 실토한 적이 없습니다! 억울합니다!' 신혁의 계획을 실토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 실토하지 않을 수도 있다. 상대가 이미 신혁의 계획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면,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더구나 계획 한정이라는 조건이 있으니, 얼마든지 다른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머셔너리 로드가 아닌 누군가와 말이다. '잠깐만. 내 계획을 알고 있던 상대라면…? 설마 그때 회의에 참가했던…?' 그리고 마지막으로. '형님! 저는 머셔너리 클랜의 스파이가 아닙니다. 머셔너리 클랜에 스파이 지령을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또한 머셔너리 로드에게 계획을 실토한 적도 없거니와, 단순히 부탁을 들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이 부분이었다. 박환희는 연합의 스파이가 아니다. 그러면 왜 머셔너리 로드를 만났다고 거짓말을 했을까? 그리고 부탁을 들어주기 위함이었다, 이것도 애매하다. 말이 미묘하게 연결되지 않는다. 그때는 머셔너리 로드와 만났다는 생각에 이야기를 진행했는데, 지금 보면 누굴 만나 부탁을 받았는지 정확히 말을 하지 않았다. 즉 이것 또한 주체가 없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신혁은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박환희가 거짓말을 한 이유도 모르겠고, 그때 누구와 만났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그때 박환희가 만난 사용자가 범인일지도 모른다. 아니, 아닌가? 그냥 위장이었나? 끼익. 그때였다. 여러 생각이 왔다 갔다 하던 와중, 조용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혁은 지금껏 꾹 쥐고 있던 진실의 수정이 산산이 바스러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본능에 따라 생각을 멈추고 문을 응시했다. 그러자 잠시 나갔다 온다던 김수현이 다시 면회실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신혁은 그런 김수현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모든 해답은, 저 사내에게 있었으니까. * 다시 면회실에 들어와 앉았을 때, 신혁의 얼굴은 정말 가관이었다. 처음 허세를 부리던 모습도, 이어서 미친놈처럼 꽥꽥 소리를 지르던 모습도 온데간데없다. 입을 딱 다문 채, 오직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웃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개인적으로 신혁 같은 사용자는 무척 좋아하는 편이다.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만, 똑똑하지 않다. 스스로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만, 특별하기는커녕 자신이 만들어낸 세상에서 사는 편협한 사용자에 불과하다. 그런 만큼, 뜻대로 다루는 게 쉽다. 몇 가지 그럴듯한 먹이만 던져주면 자기 멋대로 해석해 그걸 진실이라고 단정해버리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주었다. 물론 진실의 수정 사용 시간이 다할 시간이기도 했다. 아무튼 워낙 생각이 많은 놈이니만큼, 지금쯤 머릿속이 복잡하다 못해 미치기 일보 직전 일터. 그렇다면 이제는 그 모든 걸 하나로 묶어줄 먹이만 보여주면 된다. “어때. 머리는 좀 식혔나?” “…누구냐.” “…뭐, 이제는 알려줘도 상관없겠지.” “…….” 나는 머리를 갸웃해 보인 후, 어쩔 수 없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품에서 녹화용 수정구를 꺼내 들자, 신혁의 따가운 시선이 꽂혔다. 또 수정구냐는 눈초리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천연덕스레 말을 이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거든. 특히 너같이 의심 많은 놈은 말이다.” 나는 창 중앙 아래 트인 둥그런 구멍 안으로 수정구를 굴려주었다. 신혁은 생각보다 차분히 수정구를 받았다. 이내 조용히 손을 얹자, 곧 말간 빛이 흐르며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영상의 시작은 조승우가 오른쪽 머릿결을 쓸어 넘기는 부분부터였다. (그렇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까 조금 무례했던 언행은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사실 처음 말을 들었을 때 너무 화가 난지라….) (아아. 아닙니다. 상황은 충분히 인지했습니다. 아까 수 로드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잘못은 오롯이 남벌 로드에게 있으니까요. 더구나 이렇게까지 코란 연합의 긍지와 배포를 보여주셨는데…. 이 정도면 우리 클랜 로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아까 말씀대로, 남벌을 제외한 연합에는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영상은 그리 오랜 시간 동안 재생되지 않았다. 채 1분도 지나지 않아서, 조승우가 왼쪽 머릿결을 쓸어 넘기는 것으로 수정구의 빛이 꺼졌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수정구를 쥐고 있는 신혁의 얼굴을 살폈다. “…….” 뜻밖에도, 겉으로 보이는 신혁의 얼굴은 커다란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눈은 여전히 부릅뜬 상태였고 입술은 딱 다물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서서히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혼란스러워 보이던 눈동자가 깊게 침잠했다. 꼭 다문 입술이 서서히 짓 씹히고 있다. 수정구를 쥔 손은 부들부들 떨려 겉면에 미세한 금이 생겼을 정도였다. 이윽고 수정구를 보던 신혁의 고개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들리기 시작했고, 곧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쾅! 신혁의 주먹이 나와 경계를 나누는 창을 있는 힘껏 때렸다. 이어서 한껏 고개를 올려 천장을 쳐다보는 것과 동시에. “끄으으으으으으윽!” 신혁의 눈이, 반쯤 뒤집히는 걸 볼 수 있었다. “흐히! 후헤헤헤! 흐히히흐하헤하흐히히하하!” 그리고 흡사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거의 반 실성한듯한 사용자처럼, 신명 나게 웃어젖힌다. 그렇게 한동안 미친놈처럼 웃던 신혁은 돌연히 웃음을 뚝 멈추었다. 그러더니 얼굴을 흉신악살처럼 일그러뜨리며, 누군가의 이름을 절규하듯이 부르짖었다. “바악태애지이이이이이이인!” 나는 오락가락하는 신혁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고 몰래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밖에 있을 거주민…. 아니, 거주민이 아니지. 어쩌면 지금 밖에 있을 거주민의 탈을 쓴 용도, 함께 웃고 있지 않을까 하고. ============================ 작품 후기 ============================ 으음. 제가 왜 비축분을 쌓지 못하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하하하. 제 죄가 크지요. 이보다 절반도 안 되는 양으로 처음 구상한 한편이라는 진도를 빼시는 작가 분들이 존경스럽네요. :) 아. 그리고 오늘 후기에서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아마 다 다음 회 즈음에 모든 복수가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워낙 내용이 조금…. 아무튼 그렇다 보니, 마음이 여린 독자 분들께서는 눈살이 찌푸려지실 수도 있습니다. 미리 경고 문구를 드리는 바오니, 도저히 못 보겠다 싶으시면 절대 주저 마시고 스킵해주세요. 감사합니다. _(__)_ 0484 / 0933 ---------------------------------------------- The Downfall Of The Koran Union. 문을 닫고 나오자 앞으로 쭉 이어지는 일자형 통로와 좌우로 가지런히 배치된 감옥이 보였다. 지금이야 거의 텅텅 비어있으나, 2년 전만 해도 부랑자나 서 대륙 인으로 가득 차있던 감옥이었다. 듣기로는 전쟁에서 포로로 붙잡은 이들을 노예로 판매하려고 이렇게 만들었다는데, 사실 감옥보다는 방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으아아악! 으아아아아악! 박태지이이이이인!” 면회실 안에서는 여전히 고함이 들려오고 있다. 한 번 흘끗 뒤를 보았다가, 나는 입구 방향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러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는…. 또 한 명의 내가 보였다. “아직도 그러고 있었나?” “사내의 몸으로 변한 게 오랜만이라. 잠시 기분 좀 내고 있었사옵니다. 어머니.” “몇 번을 말해. 너 같은 자식 둔 적 없다니까? 아무튼 이제 나가야 하니,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호호호.” 또 한 명의 나는 여성스러운 웃음소리와 함께 몸을 똑바로 했다. 아, 이게 바로 자기 혐오라는 감정인가? 물론 저게 진짜 내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겉모습이 너무 똑같으니 절로 불쾌한 감정이 생긴다. 내가 싫어하는 기색을 느꼈는지, 이내 앞에서 환한 빛 무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칠흑 색 머리칼을 물결처럼 늘어뜨린 여인이 잔잔히 웃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헬레나 루 에이옌스였다. * 홀로 남은 신혁의 행태는 자못 볼만했다. 힘없던 눈동자는 붉게 충혈돼있고 얼굴은 한껏 일그러져있다. 상을 잡은 두 손은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로 떨리고 있었으며,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듯 입은 쉴 새 없이 달싹였다. 오죽하면 다시 데리러 온 간수가 흠칫 놀랐을 정도였다. 다 큰 어른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사뭇 우습게 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딘가 모르게 살벌하게 보였다. 그리고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어쩌면 지금의 신혁을 말렸을지도 모르리라. “크크큭…. 대단해…. 아주 대단해…. 정말 제대로 외통수를 맞았어…. 크크크큭….” 상황은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아주 간단하다. 머셔너리와 협의해 장비를 넘겨받았을 때만 해도 계획대로였다. 이건 확실하다. 하지만 그 이후 박태진의 개입으로 모든 게 어그러졌다. 박환희를 이용해 의심을 가라앉히고 신경을 돌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일이 이루어지기 바로 직전, 멋지게 외통수를 때렸다. 왜 박태진을 염두에 두지 못한 걸까? 그럴만한 동기도 행동력도 모두 갖춘, 범인에 최고로 근접한 놈인데. 그래. 박태진이라면 이 모든 게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다. 박환희의 말도 설명이 가능하다. '아닙니다! 저는 계획을 실토하지 않았습니다!' 상대가 박태진이라면 계획을 말할 필요가 없다. 이미 알고 있는 놈이니까. '형님! 저는 스파이가 아닙니다!' 상대가 박태진이라면, 역시나 이 말도 가능하다. 자신이나 박태진이나 같은 연합에 속해있으니까. 비록 자신에게 스파이 짓을 했다고 하더라도, 박태진을 위하는 일이라면 어떻게든 연합이 결부된다. 진실의 수정이 반응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사실 김수현의 말만 들었을 때는 연합 내 제 3의 인물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박태진이 흑막임이 확실해졌다. 왜냐하면, 저 수정구는 그 무엇보다 확실하고 강력한 증거였으니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박태진이 무슨 말을 했는지 추측할 수 있다. 마침내 기나긴 생각을 마친 신혁이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했다. 머릿속은 처음보다는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들끓고 있었다. 꼭 터지기 일보직전의 화산처럼. '예.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연합은 한 가족인데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간에 깔끔하게 승복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주제에…!” 꽉 움킨 손에서 멎었던 핏물이 도로 흘러내린다. 어느덧 조용해진 신혁은 뭔가에 홀린듯한 얼굴로 한참 동안 눈앞을 응시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돌연히 창 아래 덩그러니 놓여있는 수정구가 눈에 들어왔다. 박태진, 백두산과 조승우의 영상이 찍혀있는 녹화용 수정구였다. 김수현이 가져가지 않고, 오히려 놓고 간 것이다. 그때였다. 불현듯 하나의 생각이 신혁의 머리를 빛살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 어쩌면, 혹시. 일부러 놓고 간 게 아닐까 하는. 막 수정을 잡으려던 손이 멈칫했다. 어떻게든 잡으려는 듯 오므려졌다가, 이내 덜덜 떨며 벌리기를 반복한다. 왜 놓고 간 걸까? 이걸로, 나한테 원하는 게 있는 걸까? 그렇게 주저주저하기를 약 10분. 신혁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앞에는 박태진이 앉아있었다. 물론 실제로 앉아있는 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복잡한 심경이 만들어낸 환영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환영은 자못 엄숙한 얼굴로 말을 걸고 있었다.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라도 있냐! 애당초 사태가 이렇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네 같잖은 욕심 하나 때문에 말이야! 모든 게 헝클어졌다고! …아무튼 조용히 기다리고 있어라. 우리도 놀고 있는 것만은 아니니까. 하지만 내가 너라면, 너였다면…. 어떻게든 이 사태를 책임졌을 것이다. 연합을 위해서 말이야.' 그리고 그 순간, 한없이 침잠한 눈동자에 강렬한 이채가 스쳤다. 이어서 더는 주저하지 않고 수정구에 손을 얹는 것과 동시에, 신혁은 소리 높여 간수를 불렀다. 부름을 받은 간수는 곧바로 달려왔다. 그리고 신혁을 보자마자 약간이지만 놀라고 말았다. “간수. 개인적으로 면회를 하고 싶은 사용자, 아니 사용자들이 있는데.” “으음. 죄인의 신분으로 딱히 면회를 요청할 수는 없는데….” “그럼 내가 말하는 사용자들에게 조만간 면회를 한 번 오라고 얘기해줄 수 있나? 그렇게만 해준다면, 내 크게 사례하지.” “…그러면 상관이 없기는 합니다만.” 이윽고 불러주는 사용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받아 적으며, 간수는 흘끔 신혁을 살폈다. 처음 안 된다고 했을 때는 이래저래 난리 칠 줄 알았다. 밖에 있기는 했지만 고함치는 소리는 전부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리는커녕 오히려 조곤조곤 한 목소리로 타이르듯이 말을 한다. 그런데, 이게 더 무서웠다. 얼굴이나 목소리는 차분하기 그지없으나 눈동자에 번들번들한 빛이 흐르고 있다. 이따금 희번덕거리기도 하는 게, 흡사 미친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 이내 꼭 부탁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들은 후에 간수는 빠르게 몸을 돌렸다. 까닭 없이 불안한 기운이 온몸을 엄습하는 것만 같았다. 왠지 이번 일에 엮여서는 안 되는 기분이랄까. 그러니 일단 부탁은 들어주고, 조만간 발령 신청을 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신혁을 감옥으로 인도했다. 시간은 화살처럼 흘렀다. 간수가 신혁의 부탁을 코란 연합으로 소식을 전하기까지에는, 약 나흘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발령 신청을 하고 허가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느라 약간 시간이 걸린 탓이다. 그래도 성실히 자신의 직무를 다한 간수는 새로운 간수, 그리고 새로운 사용자들이 오는 걸 확인한 후 미리 챙겨둔 짐과 함께 감옥을 떠났다. 새로 온 사용자들은 죄인이 아닌 바로 신혁의 부하들로, 예전 박환희를 납치한 이들이기도 했다. 기실 현재 연합 전체가 흔들리는 중이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클랜은 바로 남벌이었다. 신혁이 클랜 로드로 있는 만큼 가장 많은 비난을 받아야 했으며, 김수현이 뿌린 기록은 남벌이 연합 내 다른 클랜을 공격한 현황이 적혀있었다. 물론 다른 클랜도 오십보백보이기는 했지만, 우선 드러난 상황으로는 내외로 버림받은 낙동강 오리 알 신세였다. 그런 만큼 가장 많은 사용자가 탈퇴했고 가장 많은 산하 클랜이 등을 돌렸으나, 그래도 아직 남아있는 사용자들도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신혁과 처음부터 함께해온 충복이었다. 그들은 클랜 로드가 찾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두말하지 않고 달려왔다. 그리고 면회실에 앉아있는 신혁을 확인했을 때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감옥에 들어가기 전과 후를 비교해 모습이 너무나 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눈만은 살아있어, 강렬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형님….” “안부는 됐다. 지금 내 모습 보면 알 거니까. 그나저나, 내가 알아오라는 사실은 알아왔나?” “예? 예, 예. 알아왔습니다.” “그럼 말해봐. 지금 박태진은 뭘 하고 있지?” “그…. 용이 잠든 산맥으로 간다고 합니다. 정확한 진상 조사를 한다고요.” “용이 잠든 산맥? 정말로?” 신혁이 눈을 번뜩였다. 그러자 사내는 약간 주저하는가 싶더니, 이내 한껏 낮춘 목소리로 소곤소곤 말을 이었다. “실은 제가 몰래 알아본 바로는…. 진상 조사는 어디까지나 명분이라고 합니다. …그냥 보여주는 행동에 불과하고요. 실제로는 같은 방향에 있는 유적을 발굴하러 간다는 말도 있습니다. 어디서 정보 하나 물은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진상 조사는 개뿔이고 머리나 식히러 간다는 소리네? 겸사겸사 칼질도 좀 하고.” “…그렇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역시였구먼. 박태진 그놈은 나를 실망하게 하지를 않아. 머셔너리의 선물이라고? 끝까지 나를 농락했어! 하하하! 그래. 어떻게 보면 틀린 말도 아니지. 겉으로는 놀고 있는 게 아니니까.” 신혁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사내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내 웃음을 뚝 그친 신혁은 긴 한숨과 함께 수정구 하나를 꺼내놓았다. 그리고 바로 영상을 재생해 앞으로 들이밀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일단 봐.” 사내들은 충실히 명에 따랐다. 건장한 사내 수 명이 옹기종기 모여 수정구 하나를 보는 모습은 꽤 웃겼다. 그러나 녹화 내용이나, 영상이 흐를수록 변화하는 사내들을 본다면 절대 웃을 수는 없을 것이다. 길다고는 하지 못할 시간이 지나고 나서, 수정구의 빛이 탁 꺼졌다. 끝까지 본 사내들은 하나같이 침묵했다. 그러나 곧, 모두 일제히 머리를 들며 부릅뜬 눈으로 건너편을 응시했다. 신혁은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그러자 한 사내가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말을 더듬거렸다. “형님! 설마 태진이 형이…!” “그래. 형은 무슨. 그놈이 이번 사태의 주범이다.” “아니…. 왜? 도대체 왜입니까? 우리는 가족 아닙니까? 같은 가족이면서 어떻게 이런 짓을…!” “왜냐고? 뻔하잖아. 내가 헤일로를 먹을 것 같으니까. 내가 일인자로 올라가는 게 두려우니까. 그래서 이런 더러운 짓거리를 벌인 거라고. 나하고 남벌을 몰락하게 만들려고. 선의의 경쟁? 가족? 너희가 보기에 이게 선의의 경쟁이고, 가족처럼 보여? 개뿔!” “…….” “나, 이대로 가만히 있어야 되냐?” 신혁의 마지막 말은 상당히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당혹해 하던 사내들은 서로만 번갈아 보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신혁이 쾅, 상을 후려갈기며 이를 갈았다. “그래. 이제 와서, 사실 나는 어떻게 되는 상관없어. 그런데 박태진이나 너희는 아니야. 나 죽고 나서 그놈이 가족가족 외치며 연합을 이끄는 꼴도 못 보겠고, 연합에서 버림받을 너희도 못 보겠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거 터뜨립니까?” “아니, 아니지. 그 정도로는 부족해. 완전히 엎어야 해. 명분도 충분하니까, 박태진이랑 연놈들을 모두 조져야 한다고. 이길 수만 있다면 최소 연합 내에서는 자리잡고 살아갈 수 있을 거다.” “…예?” 사내가 반문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남벌 클랜의 상태가 무척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세렌게티는 그렇다 치더라도, 수는 연합 내 가장 전투력이 높은 클랜이었다. 남벌 또한 아르테미스라는 우군이 있었으나, 둘 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모를까. 현재 상태로 클랜전을 선포한다면? 패배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상황이 어떤지는 알고 있어.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나한테도 생각이 있으니까.” 그러나 이미 그런 상황을 예상했는지 신혁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내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부터 내 말 똑똑히 들어. 전면전으로 붙으면 승산이 없다. 그러니 우선….” * 어두운 밤. 사막의 밤은 무척 고요하고 을씨년스러웠다. 낮에는 그 어떤 식생도 보이지 않는 붉은 모래벌판에 불과했다면, 밤에는 칠흑이 내려앉아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 같았다. 오직 하늘에 떠오른 달이 지면을 비추고, 어딘가에서 불어오는 바람만이 간간이 야영지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어~이. 환희야. 환희야? 박환희!” 한 사내가 야영지 외곽을 돌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사내의 정체는 백두산으로써, 세렌게티의 클랜 로드이며 박태진과 호형호제 사용자였다. 현재 백두산이 붉은 사막에 있음은, 바로 얼마 전 박환희의 요청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한 번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한 박태진은 사건 이후 처음으로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말인즉슨, 외부로는 자세한 진상 조사를 목적으로 용이 잠든 산맥에 다녀온다고 밝힌 것이다. 물론 속내는 시간을 끌고 행동을 보여주며, 겸사겸사 유적을 발굴하려는 것이었으나, 아주 경우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 사용자들은 대체로 납득했다. 박태진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부하들에게는 아주 관대하다. 그날로 수와 세렌게티 클랜에서,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사용자들만 선발해, 이번에 도시를 나서는 목적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용이 잠든 산맥으로 가는 척을 하며 몰래 김수현이 알려준 장소로 빠진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박태진도 반신반의했으나, 도시를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 그들은 정말로 유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박환희! 이놈 도대체 어디간 거야?” “그냥 먼저 들어가서 자고 있겠죠. 그만하고 형님도 이만 들어가 주무시오.” 기실 백두산이 이렇게 박환희를 찾는 원인은 조금 전까지 함께 불침번을 섰기 때문이다. 서로 주변을 경계하며 농담 따먹기를 한 게 10분전이었는데, 교대 시간이 돼 잠깐 다음 불침번을 깨우러 다녀오는 사이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백두산은 약한 침음을 흘리며 머리를 마구 돌렸다. “아닌데. 그놈이 그럴 리가…. 야. 혹시 먼저 유적으로 들어간 게 아닐까?” “그건 또 무슨 헛소리. 환희가 형님도 아니고, 아무리 궁금하다고 해도 그럴 리가 있겠어요. 그리고 태진이 형이 유적 공략은 내일 아침에 시작한다고 했잖소. 아니면 잠시 볼 일을 보러 갔다던가….” “아아. 그럴 수도 있겠군. 내가 그 생각을 못했어. 하하하.” “하여간…. 아무튼 이제 우리가 볼 테니까, 형님은…. 응?” 백두산은 이마를 탁 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하품하며 입을 두드리던 사내가 문득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살그머니 미간을 좁혔다. “이상하네? 누가 다가오는 기척이….” “환희겠지.” “아니, 아니야. 한 명이 아닌 것 같은데…?” “응?” 말을 흐린 사내는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려는 듯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이밀었을 때였다. 피융! 푹! 한순간, 어둠 속에서 날아온 화살이 사내의 머리를 꿰뚫었다. 마력이 깃들어있었는지 화살은 머리를 뚫다 못해 그대로 산산조각을 내버렸다. 퍽 소리와 함께 피 분수가 터지며 사내의 몸이 쓰러졌다. 모래를 덮친 몸은 서너번 후들후들 떨리더니 이내 조용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 “…….” 백두산도, 그리도 다른 사내도. 모두 멍하니 쓰러진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워낙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퍼벙! 퍼버벙! 슈슉! 슈슈슉! 돌연히 컴컴한 어둠을 밝히는 무수한 불덩어리들이 하늘을 날았고, 주변으로 적잖은 수의 화살들이 따라오고 있다. 그것들은 정확히 야영지를 노리며 낙하하고 있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백두산이 걸걸한 목소리로 크게 소리쳤다. “습격! 습격이다!” 하지만 너무 늦은 걸까. 잠시 후,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야영지에서 거대한 불길이 솟아올랐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속도에 최대한 집중해보았습니다. 기타 내용 진행 및 이해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 부분은 아예 쳐내고, 부분부분 심리 묘사도 깡그리 압축해보았지요. 적으면서 아 너무 빠르게 가는 게 아닐까 등 어색한 기분을 지울 수는 없었는데, 독자 분들은 어떻게 받아들이셨을지 궁금하네요. 오늘 속도는 어땠나요? ☞☜ 아. 그리고 어제 코멘트를 읽었는데, 정말 심한 부분에 대해서는 그냥 언급 정도만 하고 넘어가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특정 내용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신 분들이 보여서요. 사실 그다지 좋은 내용이 아니기도 하고요. :) 0485 / 0933 ---------------------------------------------- The Downfall Of The Koran Union. 코란 연합의 입장 발표가 있고 나서, 사태는 조금 완화되는듯했다. 박태진이 그날로 조사단을 꾸려 떠난 것도 있거니와, 일각에서도 정확한 진상이 밝혀지기를 기다려보자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일리 있다 생각한 사용자들 사이로 자숙의 여론이 형성되었고, 그에 따라 벌집 같던 북 대륙도 약간은 진정되는 듯싶었다. 그러나 과연 누가 알았을까? 그 기간이 채 2주일도 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박태진이 떠난 지 1주일이 흐르고, 또 1주일이 흘렀을 즈음. 새로운 사건이 북 대륙을 강타했다. 처음 출발했을 때만 해도 연합 조사단은 나름의 인원을 구성한 상태였다. 그러나 한창 용이 잠든 산맥으로 가고 있을 거라 생각한 조사단이, 돌연히 서너 명 소수의 인원만 남은 채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일부는 초주검 상태로 말이다. 사용자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해했다. 그러나 그들이 사건의 진상은커녕 연합 내 남벌과 아르테미스에 공격을 받았다고 밝힌 순간, 북 대륙은 또 한 번 크게 들끓었다. 그렇게 연합이 도로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갈 무렵, 중앙 관리 기구는 재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연합에서 더는 이 사건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 지금부터 공식적으로 개입하겠다 발표하는 것과 동시에 자체로 조사단을 구성해 파견한 것이다. 물론 용이 잠든 산맥으로 향하는 조사단은 아니었고, 이번에 새로 발발한 사태를 밝히려는 조사단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2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을 즈음, 돌아온 중앙 조사단의 발표는 북 대륙을 커다란 충격에 빠트렸다. - …이번 습격 사태는 남벌 클랜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으로 판명됐습니다. …중앙 관리 기구에서는 두 가지 의문을 쟁점으로 이번 사태를 조사했습니다. 첫 번째는 왜 연합 조사단이 유적 앞에서 야영을 했는가. 두 번째는 왜 남벌이 같은 연합의 조사단을 습격했는가 입니다. …수 클랜의 박환희 및 생환한 서너 명의 사용자를 소환해 심문한 결과, 놀라운 사실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어느 사용자의 양심 선언에 따르면, 이번 조사단은 애당초 진상 조사가 목적이 아닌 유적 발굴이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이번 남벌의 습격 원인은 아마 이번 머셔너리 사태를 둘러싼 갈등이 터진 것으로 추측하며…. * 남부 소 도시 코란. 연합 회의실은 어두컴컴했다. 그리고 엄숙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과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회의실을 채우는 사람의 수가 확연히 적다는 것이다. 한때 16명이 서 있던 회의실에는 이제 고작 3명만이 남아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박태진은 이번 모종의 습격 사태로 실종된 상태였고, 백두산은 사망이 확인됐다. 신혁은 감옥에 있었으며, 사공 운현과 구현규는 연합의 탈퇴를 선언했다. 말인즉슨, 이제 남은 인원은 총 3명이라는 소리였다. 상인 조합 클랜 로드 서지환은 침중한 안색이었고 백화 클랜 로드 민백화는 처연한 빛을 띠고 있었다. 도대체 사태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냐는 얼굴들이었다. 그러한 와중에도 민백화는 간간이 걱정하는 빛을 비췄는데, 원인은 얼마 전 아끼는 클랜원 중 한 명이 홀연히 사라진 사실에 있었다. 신혁과의 내연 사실과 머셔너리에 의뢰를 준 사용자가 송희선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모든 연락을 끊고 잠적했다. 한편, 아르테미스 클랜 로드 우설희는 좌불안석이었다. 온몸을 덜덜 떨면서도 자꾸만 손톱을 깨물고 있다. 왜냐하면 이번 습격 사태는 남벌 클랜이 주를 이루었지만, 아르테미스 클랜도 상당수 포함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왜 습격을 했는지 해명을 피할 수 없는 입장이었는데, 사실 우설희는 약간 애매한 입장이었다. 아니. 방관을 했다고 해야 할까? 신혁의 충복들이 몰래 찾아와 증거를 보여주고 동참할 것을 권했으나,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한 우설희는 참여하지 않았다. 나름 현명한 판단을 한 셈이다. 그러나 그들이 일부 클랜원들을 끌어들이리라는 걸 예상하고도 통제를 하지 못했으니, 결국 아주 책임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러한 사실을 밝혔다가는 정말로 모든 게 끝장나기 때문에,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 딱 잡아떼는 중이었다. 회의실에는 여전히 어두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설희야.” 그러다 문득 서지환이 나직이 침묵을 깨트렸다. 얼굴에는 우울한 빛이 가득했고 목소리는 한없이 가라앉아있다. 이제는 손톱을 넘어 손까지 씹던 우설희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냐? 왜 애들이 태진이를 습격했는지. 왜 애들이 용이 잠든 산맥으로 가지 않고, 왠 유적 앞에 있었는지 말이다.” “모, 몰라요. 모른다고 했잖아요. 저, 정말, 정말로 몰라요. 그냥 조용히 자숙하고 있었는데, 걔들 멋대로 벌인 일이란 말이에요…. 아 몰라요! 모른다고요!” 사실 절반은 알고 절반은 모르는 상태였지만 우설희는 후자에 초점을 맞췄다. 박태진이 왜 갑자기 유적에 갔는지는 정말로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얼굴에 정말 억울해하는 빛이 드러나, 서지환은 깊은 한숨과 함께 머리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후…. 당최 머셔너리 사태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왜 자꾸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냐. 아니 그전에, 뭘 알아야 해명을 하든지 말든지 할게 아니냐. 그런데 당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니….” 서지환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갑갑함이 드러나 있었다. 너희도 무슨 말이라도 좀 해보라는 어조였다. 그러나 말할 수 있을 턱이 없다. 한 명은 아무것도 모르니 할 말이 없고, 한 명은 입을 여는 순간 신혁과 똑같은 꼴이 될 것이다. 결국 서지환이 재차 한숨을 흘리는 것으로 회의실에 도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탁탁탁탁! 탁탁탁탁! 탁탁탁탁! 탁탁탁탁! 불현듯 누군가가 다급히 복도를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한 명이 달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여러 명이 한꺼번에 달려오는듯했고, 소리 또한 너무 급박해 회의실에 있던 세 명이 절로 문으로 고개를 돌렸을 정도였다. 쾅! “큰일났습니다!” 이내 문이 거칠게 열리는 것과 동시에 십 수명이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서지환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사태가 겉잡을 수 없는 지경인데, 또 일이 터졌다고 한다. “또 무슨 일이야?!” “그, 그게…! 머셔너리에서, 연합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선전포고라는 말이 나온 순간, 서지환의 안색이 딱딱히 굳었다. 마치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 같았다. 그것은 비단 서지환뿐만이 아니었다. 민백화도, 우설희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입을 멍하니 벌린 것이다. 서지환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해봐.” “마, 말 그대롭니다. 연합 조사단이 용이 잠든 산맥에 가지 않고 유적으로 갔다는 말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기다릴 만큼 기다렸고, 참을 만큼 참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코란 연합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중앙 관리 기구에서는? 아무 말도 없어?” “모, 모르겠습니다. 아,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 조용하던 회의실은 삽시간에 어수선해졌다. 서지환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입술만 짓씹고 있었고, 들어온 사용자들은 저마다 말을 꺼내며 대응을 요구했다. 그때였다. “다들 조용히 해!” 탕,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와 함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사용자들은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숨을 씩씩 내뱉는 우설희가 서 있었다. “선전포고? 씨발 하라 그래! 나도 이제 못 참아!” “설희야, 진정해라!” 서지환이 드물게 소리 높여 외쳤다. 어느새 우설희의 머리는 산발이 된 상태였고, 입술이나 손끝에서 피도 흐르고 있었다. 근래 너무 극한에 몰린 나머지, 현재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눈을 부릅뜬 우설희는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진정? 진정하라고?!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우리가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요? 박태진이랑 신혁이 벌인 일인데! 둘이 개싸움 하면서 벌어진 일인데!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우설희!” “씨발, 뭐! 저쪽에서 먼저 선전포고했다잖아! 오히려 좋잖아? 응? 어차피 사용자 정보가,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잖아! 머셔너리? 끽해야 50명 안팎이야! 우리가 지금 이렇게 됐다고 해도, 남은 애들 전부 끌어 모으면 못해도 수백 명은 돼! 그냥 이 기회에 다시는 까불지 못하게 밟아버리잔 말이야!” “너 정말…! 하….”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여긴 탓일까. 서지환은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이마를 짚었다. 우설희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휙 고개를 돌려 외쳤다. “뭐해? 애들 안 모으고? 선전포고했다며? 그럼 응수해야지?” 서릿발 같은 명령이 떨어졌으나, 사용자들은 주춤하며 서로만 번갈아 보았다. 설마 정말로 전쟁을 하게 될지는 몰랐던 것이다. 그러한 기색을 느꼈는지, 우설희가 얼굴을 와짝 일그러뜨렸을 때였다. 탁탁탁탁! 탁탁탁탁! 다시, 복도가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담겨있는 일말의 불길함을 느꼈던 탓일까. 벌컥 화를 내려던 우설희의 눈에 잠깐 의아한 기색이 서렸다. 그리고 잠시 후, 한 사용자가 들어와 헐떡이는 목소리로 외쳤다. “크, 큰일났습니다! 해밀 클랜에서도 연합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공방 동맹의 자격으로 이번 전쟁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머셔너리 클랜의 선전포고에 이어 해밀 클랜의 선전포고가 이어졌다. 탁탁탁탁! 탁탁탁탁! 그러나 채 놀랄 틈도 없이, 또다시 복도를 울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역시 헐레벌떡 들어온 사용자가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소리쳤다. “이, 이스탄텔 로우 클랜에서도 선전포고를 했다고 합니다! 머셔너리와는 공방 동맹으로 이, 이번 전쟁에 참가한다고…!” 머셔너리와 해밀의 선전포고. 거기다, 이스탄텔 로우까지 선전포고를 했다고 한다. 아주 잠시지만 회의실에 고요한 정적이 찾아 들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일반적인 침묵과는 차원이 다른 뜻 모를 조용함이었다. “아…! 이, 이…!” 이내 무언가 말을 하려던 우설희는 별안간 외마디 신음을 흘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아니, 주저앉은 정도가 아니었다. 어느덧 눈은 찢어질 듯이 커졌고 입은 더없이 벌어진 상태였다. 그러더니 결국 풀썩, 힘없이 바닥에 드러누웠다. 수많은 시선이 바닥으로 쏠렸다. 간간이 꺽꺽 숨막히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서진환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중앙 관리 기구에 다녀오마. 중재를 요청하겠다.” 그리고 지금껏 꾹 감고 있던 눈을 뜨며 침통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죄송합니다. 머셔너리 로드. 원래 일찍 찾아 사과를 했어야 했는데, 이런저런 사태가 있다 보니….” “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저 머셔너리 클랜의 선처만을 바랄 뿐입니다.” “선처라….” 불 붙인 연초를 탁탁 털며 나는 선처라는 말을 되뇌었다. 앞에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깊숙이 숙인 서지환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는 똑같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세 명의 사용자가 있었다. 민백화, 우설희. 그리고…. 자신이 다쳤다는 사실을 광고하려는 듯 온몸에 붕대를 둘둘 두른 박환희.(사실 회복 주문이 있는 만큼, 꼭 저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아무 말도 않고 있자, 불현듯 박환희가 살그머니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더니 살며시 웃어 보였다. 나는 웃지 말라는 의미로 정색했고, 박환희는 찔끔한 얼굴로 도로 고개를 숙였다. 지금 이들이 여기에 있는 이유는, 바로 어제 내가 발표한 선전포고 때문이었다. 신혁은 예상대로 유적 발굴에 부풀어있던 박태진을 습격해주었고, 살아 돌아오게끔 조치한 몇 명의 사용자는 진상을 밝혀주었다. 물론 진짜 진상이 아닌, 내가 의도한 진상. 명분이나 사용자들의 반응은 더는 볼 것도 없었다. 선전포고를 마무리 지은 '기다릴 만큼 기다렸고, 참을 만큼 참았다.'는 현재 사태를 정확히 반영한 말이었다. 기껏 자숙하자는 여론이 형성됐는데, 연합은 결국 그것마저도 멋지게 뒤통수를 때린 것이다. 사용자들의 분노는 어마어마했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선전포고가 이어진 이후, 중재는커녕 아예 콱 밟아버리라고 열렬한 환호를 보내는 정도랄까. 사실 내심으로는 연합에서 한 명이 픽 돌아 응수하는 상황을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아주 멍청한 놈들만 있는 건 아니었는지, 놈들은 선전포고를 하자마자 발 빠르게 중앙 관리 기구로 달려가 중재를 요청했다. '야! 김수현! 너네 진짜 전쟁하려는 건 아니지?' '뭘 안 해. 그쪽에서 응수하면 해야지.' '응수 안 해! 응수 안 한다고!' '응?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연합에서 중재 요청 들어왔어! 너 분명 마지막에는 개입하게 해준다고 했었지? 그러니까 이제 좀 끝내자, 응? 제발!' '쯧. 아쉽네.' 문득 어젯밤 이효을과의 통신이 떠올라 나는 잠시 킥킥 웃었다. 허겁지겁 연락해 길길이 날뛰던 게 꽤 웃겼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선전포고를 완전히 거둔 건 아니었다. 정확히는 잠깐 보류한 상태라고나 할까? 일단 약속한 바가 있는 만큼 중앙 관리 기구의 중재를 받아들였는데, 당연히 중재에도 절차가 있었다. 즉 코란 연합에서 머셔너리가 내건 조건을 이행한다면 그제야 중재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윽고 다시 앞을 바라본 순간, 나는 아차 하고 말았다. 사과 겸 협상을 하러 온 네 명이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것이다. 무릎 꿇은 것도 힘들 텐데 오랫동안 고개를 숙이려니 얼마나 힘들까. “아, 미안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 좀 하느라. 아무튼 고개들 드세요. 부담스럽네요. 하하하.” 비로소 말이 떨어지자, 네 명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나는 주변을 한 번 훑어보고는 약간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렇게 네 분이 함께 찾아오실 줄은 몰랐네요. 남벌과 세렌게티는 그렇다 치더라도…. 수와 아르테미스는, 이렇게 같이 있어도 괜찮습니까?” 이것은 얼마 전 신혁이 박태진을 습격한 사건을 겨냥한 말이었다. 남벌이 주도했다고는 하지만, 사망자를 확인한 결과 아르테미스 클랜원도 어느 정도 섞여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우설희의 안색이 보기 안쓰러울 만큼 새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휘휘 고개를 젓더니 한없이 불쌍해 보이는 얼굴로 애원했다. “아, 아니에요 머셔너리 로드.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정말이에요. 저는요, 이번 사태랑은 아무 관련도 없어요. 제발 믿어주세요.” “그래요? 그럼 저번에 성과와 관련해서 찾아온 건 어떤 의도였습니까?” 정곡을 찔린 탓인지, 우설희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목울대만 움직이며 병신처럼 말을 더듬었다. “그, 그건….” “뭐, 됐습니다. 굳이 안 들어도 알 것 같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죠.” 더 말을 잇는 건 시간 낭비 같아, 나는 바로 말을 끊으며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말했다. 어차피 우설희의 처리는 이미 정해진 상태였다. 방관한 세 클랜은 적당히 눈감아줄 요량이었으나, 직접적으로 관계한 사용자는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처리할 생각이었다. 물론 머셔너리의 기준으로 말이다. “사실 머셔너리의 조건은 이미 중앙에 전달한 상태입니다. 그쪽에서도 연합에 전달했다고 들었는데, 오늘 굳이 찾아오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만.” “예. 확실히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조건은 현재 연합이 감당하기에 너무 큰 부담이 있는지라, 조금 완화해주실수 없으실까 하고 찾아 뵌 것입니다.” 내 말에 답한 사용자는 가장 앞에 있는 서지환이었다. 아무래도 박태진과 신혁이 없는 이상, 현재 남은 연합을 이끄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1회 차 에도 몇 번 들은 기억이 있어, 나는 적당히 머리를 끄덕였다. “완화라. 이런 자리에서 완화라는 표현은 옳지 못합니다. 다만 첫 조건이 감당키 어렵다면, 다른 조건이 있을 뿐이지요. 어때요. 한 번 들어보시렵니까?” “…경청하겠습니다.” 경청하겠다는 말에 나는 조용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른 조건은, 바로 남부 자유 연합의 해체입니다. 즉 코란에서 물러나라는 말이지요.” ============================ 작품 후기 ============================ 이번 파트는 아마 다음 회에 끝날 것 같네요. 남은 건 협의, 그리고 박태진, 신혁, 송희선, 우설희의 처리 정도니까요. 오늘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다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아니, 아니다. 그냥 오늘 깔끔하게 끝내버리는 게 낫겠네요. 차라리 오늘 한 편 더 올려서 이 파트를 아예 끝내버리고, 내일부터 새로운 파트로 접어드는 게 낫겠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적으러 가겠습니다. 다만 저도 잠은 자야 하니, 오후쯤에 업데이트할 것 같습니다. :) 0486 / 0933 ---------------------------------------------- 평온한 한 때. “연합 해체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좋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순간, 나는 조금은 놀란 마음으로 서지환을 응시했다. 초연한 눈이 보였다. '설마 정말로 하라고 하겠어?'라는 허세는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는 눈. 서지환은 나를 찾아와 무릎을 꿇을 때부터 시종일관 진지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면 사용자 정보가 궁금해지지 않는가.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서지환(6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마법사(Normal, Magician,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상인 조합 클랜(Clan Rank : A Plus) 5. 진명 • 국적 : 상도(商道)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42) 7. 신장 • 체중 : 176.7cm • 87.6kg 8. 성향 : 기회 • 안전(Chance • Safe) [근력 37] [내구 63] [민첩 48] [체력 51] [마력 77] [행운 96]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다른 것은 그저 그렇지만, 진명, 성향 그리고 행운은 주목할만했다. 특히 성향. 기회와 안전이 한꺼번에 나오는 건 나도 처음 보는 사례였다. 그러고 보니, 1회 차 때도 코란 연합은 징글징글하게 내분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저 서지환이라는 양반은 연합이 망하는 날까지 자리를 지킨 몇 안 되는 사용자였다. 그때는 그저 처세술이 좋구나 라고 만 생각했는데, 성향이 저러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허언은 하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이 사태를 책임질 수 있다면, 기꺼이 연합을 해체하고 코란에서 물러나겠습니다.” “하하…. 조금 의외네요. 코란 연합이라면 첫 번째 조건은 어찌어찌 해결할 수 있으리라 보였는데요.” “…첫 조건 중 각 클랜의 사과와 발견한 유적을 넘기는 조건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특히 사과는 당연한 부분이고요. 하지만, 배상금은 앞선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문제입니다.” 말 그대로, 사과는 당연한 일. 그런데요. 그 유적도 원래 내 거예요 이 양반아. 우리 형한테 주려고 아껴놓은 건데…. 아무튼, 나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배상금으로 요구하신 2천만 골드는…. 무리입니다. 아니. 사실 저도 상인 조합을 맡고 있는 만큼, 온 연합을 쥐어짜내고 코란도 쥐어짜내면 어찌어찌 만들어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예. 그러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요?” “허나 그렇게 해버리면 연합은 폭삭 망합니다. 우리는 물론이고 모든 클랜원이 거리에 나앉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뿐이겠습니까? 연합이 망하면, 앞으로 코란의 경제는 어떻게 될지 불 보듯 뻔한 일이겠지요. 연합의 사용자들에게. 그리고 코란에 거주하는 이들에게 그런 고통은 안겨주느니, 차라리 연합을 해체하고 조용히 물러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흠.” 나는 턱을 매만지며 서지환의 말을 하나하나 음미해보았다. 과연. 진명이 상도라는 건 이걸 말하는 거였나. 잠시 후, 서지환은 재차 머리를 숙였다. 이번에는 아예 바닥까지 닿을 정도였다. “머셔너리 로드께서 두 조건을 고수하신다면, 저희는 두 번째 조건을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직 제 진정한 속내는 첫 번째 조건을 완화해주시는 것에 있습니다. 연합은 이번 일로 많은 것을 깨달았고, 반성했습니다. 부디 한 번의 기회만 더 주신다면 기필코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완화라. 어느 정도를 원하시는지를 모르겠네요.” “예. 배상금을 줄여주시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일시불이 아닌 분납으로만 완화해주시면, 제 모든 것을 걸고 마련해보겠습니다.” “분납…. 으음.” 서지환의 나이는 42살. 새파랗게 어린 젊은이한테 이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텐데, 모든 것을 버리고 매달리고 있다. 보아하니 책임감도 강한 편인 것 같은데…. 수완만 좋은 사용자라면, 약간은 탐이 날지도 모르겠다. 나는 결국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이쯤 하기로. 어차피 코란 연합은 이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수, 세렌게티, 남벌, 아르테미스, 가리사니, 이끼. 주축을 이루던 여덟 클랜 중 여섯 클랜이 거의 망하거나, 또는 탈퇴한 상태였으니까. 또한 중앙 관리 기구의 중재를 받아들이기로 약속했으니, 적당히 숨통을 틔워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코란 연합을 협력(을 가장한 산하) 클랜으로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하여, 나는 지긋이 말을 기다리는 이들의 기대에 부응해주었다. “좋습니다. 그럼 일단 연합을 해체하세요.” “…………예.” 침통한 목소리. 결국에는 이렇게 될 줄 알았는지 눈을 꾹 감는 게 보였다. 잠시 그 얼굴을 감상하다가 나는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사용자 서지환.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마시길. 제 기준으로 보면, 지금의 연합은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창설 의도는 좋았으나…. 시간이 흐른 지금, 물이 너무 고였다고나 할까요?”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요. 그럼 지금의 연합은 해체하시고, 새로운 연합을 만드세요.” “예…. 예?!” 그 말에 서지환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나는 잔잔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직 코란에서 물러나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은…!” “예. 물이 고여 썩었으면, 덜어내고 새로 부으면 되는 일입니다.” “물을…. 새로 부어라?” 서지환은 곰곰이 생각에 잠긴듯했다. 그러다 갑자기 바닥을 탁 치고는 번뜩이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보아하니 무슨 말을 한 건지 완전히 알아들은 듯싶었다. 말인즉슨 지금의 연합은 해체하고 새로운 연합을 만들라는 소리였다. “변화하는 연합보다는, 새 출발하는 연합이 더욱 보기 좋을 것 같군요. 그 편이 사용자 서지환의 뜻에도 더 좋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꺼낸 말은 아니었다. 연합을 새로 만들라는 멍석을 깔아주기는 했지만, 차후 똑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또한 코란이라는 커다란 파이를 포기하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이득이 있는 방향으로 이번 결정을 이끌어야 한다. 즉 보험이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지금 나를 보며 언뜻언뜻 웃고 있는, 저 보험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빙글빙글 웃고 있는 박환희를 응시한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 어디 한 번, 몇 가지 조건을 완화해볼까요? 한 두어 개 정도를 말이죠.” “두어 개라면….” “우선 첫 번째. 제가 듣기로는 현재 수 로드가 실종된 상태라 들었는데…. 어쨌든, 수 로드가 없는 동안에는 누군가 대표로 이 상황을 이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사과는…. 생각해보니까, 클랜마다 각각 사과하는 게 번거로울 것 같네요. 그러니까 여기 있는 분들 중 사용자 박환희가 여러분들의, 그러니까 새로운 연합의 대표로 나서 사과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읍시다.” “…환희가요?” 서지환은 서너 번 눈을 끔뻑이더니 약간 멍해 보이는 얼굴로 박환희를 돌아보았다. 비단 서지환뿐만이 아니라, 민백화와 우설희도 박환희를 응시했다. 저놈이 대표로 나온다는 게 어색해들 보이는 눈초리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명분으로 들어가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 기실 연합 내 종주 역할은 수 클랜이 맡고 있었고, 클랜 로드인 박태진은 현재 실종된 상태였다. 그러니 수의 2인자인 박환희가 연합의 전면으로 나서는 게, 아주 경우 없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박환희를 대표로 내세우라는 건 차후 새로운 연합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리고 서지환이 머리가 조금이라도 돌아가는 사용자라면, 방금 말에 담긴 뜻을 알아챘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조건은 어디까지나 거래에 불과하다. 박환희를 연합의 대표로 선출해라. 그렇게만 하면 두 번째 조건인 엄청난 배상금을 꽤 줄여줄 수도 있다는 일종의 거래.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한참 동안 박환희를 바라보던 서지환은 이내 시선을 돌려 침착히 머리를 끄덕였다. “예, 예. 좋습니다. 어차피 태진이가 없으면 환희가 맡는 것도 나쁜 모양새가 아니니…. 태진이가 돌아오기 전까지라면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그거야 연합 내에서 알아서 처리할 일이죠.” 서지환은 박태진이라는 상황을 걸었다. 하지만 나는 구변 좋게 화답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서지환이 덧붙인 말은, 어디까지나 박태진이 생환한다는 가정 아래 말하는 거였으니까. “좋네요. 그럼 두 번째 조건은…. 배상금을 줄이고 지불 방식을 바꾸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첫 번째 조건, 아니 거래를 받아들였으니, 이제는 본론인 두 번째 조건을 완화할 차례. 잔뜩 긴장한 얼굴들을 보며 나는 왼쪽부터 차례대로 시선을 던졌다. “원래는 연합 전체에 배상금을 지불하게 하려 했는데, 이것도 생각해보니 맞지 않는 것 같아서요. 구경한 클랜은 잘못한 클랜보다 상대적으로 죄가 덜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이건 앞선 사과 조건과는 반대로, 연합 전체가 아닌 각 클랜이 배상금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바꾸겠습니다.” “그, 그렇다면.” “예. 이왕 말 나온 김에 지금 바로 말씀 드리죠. 수는 300만 금화, 상인 조합도 300만 금화, 그리고 백화는 400만 금화를 지불하시면 됩니다. 이 조건은 어떻습니까?” “…예? 그게 정말이십니까?” 서지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그리고 나는 차분히 머리를 끄덕여주었다. 사실 1000만 금화도 결코 적은 수준은 아니었으나, 기존 2000만 골드보다는 절반이 줄어들었다. 이 정도면 나름 구색도 맞고 연합도 어느 정도 무리하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 정도면…. 반 년, 아니 아니. 4개월이면 완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십니까?” “저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합니다. 세 클랜 합해서 1000만 골드. 이걸로 두 번째 조건도 마무리 짓도록 하죠.” 우리 클랜 돈 많아요. 목구멍 끝까지 치솟은 말을 겨우 삼키며 나는 가볍게 손짓했다. 이야기는 끝났으니 이제 그만 일어나라는 신호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서지환은 뛸 듯이 기뻐하며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사정을 알고 있는 박환희는 웃는 듯 아닌듯한 미묘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남은 두 여인, 우설희와 민백화는 주춤주춤 몸을 일으켰다. 우설희야 왜 저러는지 알 것 같고, 나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민백화를 마주했다. “백화 로드도 사용자 송희선에 대해서 알고 있을 겁니다. 앞선 두 클랜보다 지불 금액이 높은 이유도, 바로 사용자 송희선 때문입니다.” “…네.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머셔너리 로드. 한 가지 말씀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예. 말씀하세요.” “외람된 말씀일지도 모르나…. 희선이라는 아이를 아실 거예요.”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송희선. 당연히 알고 있다. 신혁의 지시로 김수정 캐러밴이 머셔너리에 의뢰를 넣도록 만든 장본인. 민백화가 말을 이었다. “지금 희선이는 실종된 상태에요. 물론 행방불명 된 건 아니고, 연락을 끊고 잠수를 탄 거라 생각돼요.” “예.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만.”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나는 송희선의 근황을 알고 있었다. 하기야 민백화는 정황을 모르니 아마 잠적했다고 지레짐작한 모양이다. 좌우간 송희선을 가만히 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나는 적당히 장단을 맞추기로 했다. “그렇겠죠. 죄가 밝혀졌는데 처벌을 받기는 두렵다. 그런 심리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그래서요?” “…지금 저희 백화에서도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에요. 그런데 혹시 찾게 되면, 자비로운 선처를 부탁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사실 사용자 송희선에 대한 현재 제 심정은, 괘씸하기 이를 데가 없어서요. 아무튼 그거야 찾고 난 다음의 이야깁니다.” “혹시 찾게 되면 제가 잘 말해 볼게요. 부디 오늘의 부탁을 기억해주세요.” 나는 마음대로 하라는 양 머리를 까닥였다. 그리고 크게 기지개를 피는 것과 동시에 손사래를 쳤다. “아무튼 얘기는 여기까지 합시다. 방금 세 분은 협의가 된 걸로 아시고, 이만 나가셔도 좋습니다.” “예, 예. 머셔너리 로드!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조만간 좋은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멀리 나가지는 않겠습니다. 아직 남은 이야기가 있어서.” “아, 알겠습니다.” 서지환은 처음보다는 한결 나아진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뻣뻣이 굳어있는 한 명을 힐끔 쳐다본 후, 남은 두 명을 데리고 빠르게 방을 나섰다. 눈치 빠르게 자리를 비켜준 것이다. 이내 방문이 닫힌걸 확인한 후, 나는 남은 한 여인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설희. 이 여인이 다른 사용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이번 계획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다는 것. 우설희도 자신의 죄를 알고 있는지,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문득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 살랑살랑 움직이는 것을 보다가,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아르테미스 로드.” “네…. 머셔너리…. 로드….” “왜 혼자만 남겨놨는지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건….” “아니요.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아르테미스는 1000만 금화입니다.” “…네?” 1000만 금화. 그 순간 우설희는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나를 쳐다보았다.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이다. “마, 말도 안 돼요! 왜, 왜 저만!”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한다고 했는데요.” “하, 하지만…. 무리에요! 아르테미스가 상단 클랜도 아니고, 아니 상단 클랜이라도 힘들어요! 1000만 금화는 도저히 무리라고요!” “그래요? 그럼 그냥 돌아가시면 됩니다. 물론 그 결과는 잘 알고 있으실 겁니다.” 딱 잘라 말하자 별안간 우설희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착 가라앉은 기분으로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이어서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걸 보았을 때, 아무 예고도 없이 빠르게 다가오는 우설희를 볼 수 있었다. “머셔너리 로드!” 바닥이 쿵, 울릴 정도로 거대한 소리가 났다. 겨우 몸을 일으켰다가 도로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바짓단을 잡으며, 우설희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한 번만! 한 번만 봐주세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그때 그 성과의 일은…! 시, 신혁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그래요! 저도 피해자라고요!” “구차하게 이러지 맙시다. Yes Or No. 하나만 말해주시면 되는데, 그게 그리도 어렵습니까?” “왜 저한테만 이러시는데요? 네? 제발,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하라는 대로 할게요! 앞으로 개가 되라면 개가 되고, 옆에서 모시라면 모시겠어요! 그러니까 제발!” “하라는 대로?” 듣자 듣자 하니까 하는 말이 가관이다. 이건 매달리는 걸 넘어서 그냥 진상이었다. 하여, 하도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그때였다. “네! 하라는 대로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거라면,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어요!” 내가 솔깃해한다고 느낀 걸까? 거의 미친년처럼 붙잡고 늘어지던 우설희가 돌연히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더니 어떻게든 호흡을 가다듬으려는 듯 숨을 고른다. “저, 저요. 생각보다 정말 쓸만하거든요. 여, 여러모로 요. 아마 머셔너리 로드도 사용해보시면 만족하실 거예요.” “사용?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니까.” “……?” 우설희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러다 목울대가 꼴깍 움직이고 얼굴은 황혼이 비치는 강물처럼 발갛게 익었을 즈음. 우설희는 갑자기, 느닷없이, 그리고 서서히 자신의 가죽 바지를 끌어내렸다. 그러자 곧 매끈한 살결을 노출한 허벅지와 두툼히 솟은 둔덕을 가리는 새하얀 속옷이 보였다. 이내 내려간 바지가 종아리 부분에서 멈췄을 때, 나는 기함했다. “아르테미스 로드!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그러자 그렁그렁한 눈을 들은 우설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 말씀 드렸잖아요.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요. 정말이에요. 저 정말 잘해요. 춤도 출 수 있고, 흉내도 잘 내고. 또….” “춤? 흉내? 그만, 그만, 그만!” 그제야 비로소 무슨 의미인지는 알 것 같아, 나는 벌컥 소리치며 화를 냈다. 그리고 한심하다는 기분으로 우설희를 응시했다. 오랜만에 기분이 아주 더러워졌다. “머, 머셔너리 로드.” “나 참. 고작 한다는 생각이…. 그래서 그 몸으로 무얼 하겠다고?” 그런 내 기색을 느꼈는지, 결국 우설희는 눈에서 한 줄기 서러운 눈물이 흘렀다. 기껏 부끄러운 부분까지 보여가며 애원했는데도 먹히지 않자, 수치심 및 좌절감을 느낀 모양이다. 나는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갑자기 까닭없는 혐오감이 치솟아 속이 거북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슈욱! 아까부터 일렁거리던 그림자가 소리 없이 솟구쳤다. 갑자기 일어난 그림자는 곧 사람의 형상을 갖추더니, 나른한 목소리와 함께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와, 얘 좀 봐. 얘 진짜 웃기네? 호호호!” 그림자의 정체는 고연주였다. 지금껏 그림자에 숨어 사태를 관망하던 고연주가 비로소 존재를 드러낸 것이다. “꺄악!” 설마 그림자 여왕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우설희는 재차 비명을 지르며 꼴사납게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나는 의아한 기분으로 고연주를 바라보았다. 허락 없이 멋대로 나오면 안 된다는 지시를 내렸는데, 지시를 어기고 스스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사용자 고연주?” “수현. 정말 미안해요. 그런데 잠시만요.” 그러자 바로 나를 돌아본 고연주는 매섭게 눈을 빛냈다. 나는 떨떠름한 기분을 느꼈다. 조금 전 고연주의 눈에서…. 무언가가, 어떤 감정이 스친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왠지 모르게 복수심이라 느껴졌다. 설마 고연주와 우설희는 구면인가? 나는 머리를 갸웃하며 앞을 바라보았다. “얘 좀 봐. 얘 아주 꼴불견이네. 응? 남의 남편 앞에 두고 못하는 소리가 없어?” “나, 남편…? 죄, 죄송…! 몰랐어…. 요….” 꽤 놀란 모양인지, 우설희는 간간이 딸꾹질을 하며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중이었다. 고연주는 살기 어린 미소로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가만히 몸을 굽혀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얼굴을 바싹 들이밀며 우설희에 속삭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청력을 높였다. “얘. 너 내가 누군지는 아니?” “네? 네, 네. 그림자 여왕…. 님.” 우설희는 더듬거리면서도 간신히 답했다. 그러자 고연주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림자 여왕? 아닌데? 어디 사는 누구누구는 그림자 창녀 씨라고 했던데?” “힉! 어…. 어떻게…? 그때는 분명…!” “나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거든. 설마 내가 못 들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태진이가 입 조심하라고는 말 안 해주디?” “그, 그럴 수가…. 아, 아니 그게 아니라요….” “말실수로 한 번 죽어~. 봐야~. 정신~. 차리지?!” “히익!” 고연주는 나른히 말을 잇다가 끝부분에 이르러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그 순간, 우설희는 순간적으로 숨이 멎은 듯 보였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는 것처럼, 온몸의 미세한 동작마저도 정지한 것이다. 고연주가 내뿜는 살기는 그 정도로 차가우면서, 매서웠다. 나는 대강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마 우설희가 고연주에 말실수를 한 것 같은데, 어쩌다 고연주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다. 사실 저런 반응이 아주 이해가 안가는 것도 아니다. 예전에 똑같은 말을 한 반다희는 단번에 목이 찔려 죽지 않았던가. 고연주에게 그림자 창녀라 비아냥거리고 살아남은 사용자는, 내가 알기로는 처형의 공주밖에 없다. 뭐, 우설희 입장에서는 운이 없었다고나 할까. 잠시 후, 고연주는 가녀린 손으로 우설희의 턱을 강제로 움켰다. 우설희는 두려움에 벌벌 떨며 시선을 올렸다. 아무튼 다 좋은데, 바지라도 다시 입히지. 계속 아래로 내린 상태로 있으니까 솔직히 진짜 꼴사나워 보인다. 고연주가 말했다. “너. 아까 말 정말이니?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 거?” “네? 네, 네! 정말이에요!” “정말로? 나중에 다른 말하기 있기? 없기?” “어, 없어요! 그러지 않아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거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금화 걱정을 하는 걸까. 우설희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바탕 까르르 웃어 젖힌 고연주가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몸을 휙 돌리는 것과 동시에, 사르르 녹는 봄바람 같은 미소로 나에게 달려왔다. 어찌나 한순간에 변했는지, 조금 전 싸늘한 살기를 뿜어내던 여인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수현~. 나 부탁이 하나 있어요~.” “…우설희를 넘겨달라는 겁니까?” 무슨 부탁인지 알 것 같아 미리 선수를 치자, 고연주가 방실방실한 얼굴을 끄덕인다. 나는 잠깐 머리를 긁적였다. 우설희는 어떻게 처리할지 이미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 하지만 고연주의 부탁이라면 조금 말이 달라진다. 이번 일에 매우 고생한 것도 있거니와, 고연주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고민은 잠깐이었지만, 결정은 한순간이었다. “좋습니다. 뜻대로 하세요. 아, 그래도 경과 보고는 하셔야 합니다.” 물론 한 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연주는 진한 미소와 함께 그러겠다 답했고, 이내 우설희를 잡아 질질 끌며 방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가지 불편한 점이 있다면, 문이 닫힐 때까지 여전히 하의가 내려가 있었다는 것. 아무튼 어쩌다 고연주에 걸렸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쯧쯧 혀를 차며 우설희의 불행을 애도했다. 그리고 연초를 한 대 꺼내는 것과 함께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코란 연합과의 협의를 마쳤으니 이로써, 길었던 음지 전쟁도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아니, 아직은 아닌가? “후.” 연기를 뿜으며, 나는 가만히 상념에 잠겼다. 실종으로 발표된 박태진. 잠적했다 알고 있는 송희선. 감옥에 있는 신혁. 그리고 고연주가 처리하겠다고 한 우설희. 사실 이들은, 이미 모두 내 손안에 있다. 다만 아직 결과만 나오지 않았을 뿐. 이르나 늦으나, 곧 어떤 방식으로든 처리될 연놈들이다. 그렇게 간만에 찾아온 휴식을 즐기며 연초를 거의 태워갈 즈음. 문득 품 안에 요동치는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품에 손을 넣자 딱딱한 구슬이 잡혔다. 통신용 수정구였다. 다만 일반적인 수정구와는 달리, 거무칙칙한 빛을 띠는 게 특징이랄까. 공교롭게도 마침 소식이 왔다는 생각해, 나는 지체 않고 마력을 흘려 넣었다. 파츳! 파츠츳! 이윽고 밝게 달아오른 수정구가 거슬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이어서 노이즈도 완전히 사라진 순간, 이내 수정구 겉면에 검은색 형체가 불쑥 모습을 보였다. 살문이었다. (접니다. 머셔너리 로드.) “오호라. 마침 소식을 주는군.” (예?) “아니, 아니야. 좋은 타이밍이라고…. 그래. 일은 어떻게 됐지?” 일이 어떻게 됐냐고 물은 순간, 수정구가 보여주는 풍경이 일변했다. 어딘가 숲 속에 있는 모양인 듯, 검은색 일색이던 수정구에 나무와 풀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중요한 건 풍경이 아니었다. 어느덧 수정구에 누군가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뚝, 뚝, 뚝, 뚝. 뭔가가 뚝뚝 떨어진다. 나는 수정구에 비친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처음 눈에 보인 건, 핏방울이 찔끔찔끔 떨어져 내리는 풍경이었다. 한 칼에 베었는지 목 부근이 깔끔하게 절단돼있다. 거기서 조금 시선을 올리자 쩍 벌린 입이 보였고, 다음으로 까뒤집힌 눈동자가 보였다. 보아하니 기습을 당한 것 같은데, 아마 자신의 목에 언제 칼이 꼽혔는지도 모르고 죽었을 것이다. “Ok. 확실히 박태진이네. 고생했어.” (별말씀을. 그럼 시체는 어떻게 할까요?) “태워버려. 그런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거지? 나는 하루면 죽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도 마십시오. 박태진도 엄연한 강자입니다. 그리고 주변 부하 놈들이 어찌나 보호하던지…. 목숨을 걸고 탈출시키는데 정말로 놓칠뻔했습니다.) “하. 별일이야. 살문이 우는 소리도 다하고.” (그래도 의뢰는 완수하지 않았습니까. 원하시는 대로 박환희 포함 서너 명만 제외하고는 전부 추적 및 살해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송희선이란 사용자도 잡아드렸지요? 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그럼, 이걸로 빚은 다 갚은 겁니까?) 다시 풍경이 변했고, 검은색 형체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코웃음 쳐주었다. “헛소리. 너희같이 쓸만한 놈들을 왜 놔둬? 아무튼 흰소리는 그만하고 의뢰 금이나 받아가. 그래도 두둑이 챙겨줄 테니까.” (…설마 그러고서 저희를 죽이시려는 건?) “그 정도로 개 자식은 아니다. 그래도 명색이 용병 클랜을 운영하는데, 의뢰를 했으면 대가를 지불해야지. 그리고 걱정 마. 고연주한테 전해주라고 할 테니까. 아마 일주일 후에 창고로 오면 만날 수 있을 거야.” (창고요…? 아. 코란에 있는 창고 말씀이십니까. 잘 알겠습니다.) 그래도 안 오겠다는 말은 안 하는 걸 보니, 돈은 받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홀로 킥킥 웃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잊지마. 일주일 후니까…. 아차. 송희선은 잘 있나?” (걱정 마십시오. 우리 식구가 잘 지키고 있으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말씀 드릴게 있습니다. 머셔너리 로드. 그 송희선이라는 사용자, 어떻게 하실 겁니까?) “왜?” (실은…. 송희선, 아시다시피 현대에서 꽤 유명한 배우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결국 욕구를 못 참은 식구가 있어서 말이죠. 서너 번 가지고 논 것 같습니다.) “아아. 상관없어. 어차피 죽일 거니까. 하든 말든 상관은 없는데, 고연주가 갈 때까지 목숨만 살려놔. 일주일 후에 창고로 들어갈 놈이 한 명 더 있으니까.” (놈이라면…. 혹시 신혁입니까? 지금 감옥에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중앙 관리 기구와 모종의 거래를 하신 건….) 한없이 음침하던 목소리가 도로 은근하게 변했다. 이놈은 꼭 무언가 원하거나 궁금한 게 있을 때 이렇게 목소리가 변한다. 정작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오늘따라 이야기가 길어지네. 살문이 언제부터 내 일에 관심이 많았지? 의뢰, 돈. 이게 너희 모토잖아.”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그럼.) 실수했다는 사실을 느낀 걸까. 이윽고 실례했다는 말과 함께 흘러나오던 빛이 꺼졌다. 나는 잠시 수정구를 매만졌다가 이내 느릿하게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하지만 손을 바로 꺼내지는 않고, 또다시 연초 한 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실종으로 발표된 박태진은, 죽었다. 잠적했다 알고 있는 송희선은, 코란의 어느 창고에 있다. 감옥에 있는 신혁은, 곧 처리할 예정이다. 그리고 고연주가 처리하겠다고 한 우설희는…. 뭐, 알아서 하겠지. 나는 피식 웃으며 연초를 깊게 빨아들였다. 잠시 후, 한 줄기 흐릿한 연기가 서서히 피어올랐다. * 처음 눈을 떴을 때 눈에 보인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공간이었다. “…….” 주변을 둘러본 신혁은 어리둥절한 기분을 느꼈다. 분명 저녁을 먹은 후, 느닷없이 밀려오는 수마를 이기지 못해 잠이든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은 분명히 감옥에 있었다. 그런데 다시 눈을 떠보니 모든 게 변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곳이 감옥이 아니라는 것. 여기는…. “웁?!” 생각 도중, 신혁은 갑자기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자신의 몸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바로 그때였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있고, 손과 발도 무언가로 꽁꽁 묶여있다. 그 중 오직 하나, 시야만큼은 트여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혁은 공포보다는 위화감을 먼저 느꼈다. 마치 이곳을 처음 와본 게 아닌 것 같은, 아니 얼마 전에도 한 번 와본 것 같은 그런 위화감이었다. 그래. 마치 얼마 전 박환희를 데리고 왔을 때 있었던…. “!” 이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찰나, 한순간 호흡이 멎었다. 그리고 신혁은 본능에 따라 서서히 전방으로 시선을 올렸다. 이어서 고개를 최대한 끝까지 젖혔을 때, 신혁은 비로소 볼 수 있었다. 허공에서 느릿하게 흔들리는, 좌우로 진자 운동을 하는 하나의 시체를. “우우우우우우우웁!” 쩌렁쩌렁한 비명이 어두운 공간을 왕왕 울렸다. 어두컴컴한 공간에 곧 환한 빛이 켜졌다. 그러자 시체의 얼굴이 더욱 자세히 드러났고, 정체를 확인한 신혁은 더욱 크게 비명을 질렀다. 허공에 걸린 줄에는, 송희선의 시체가 매달려 있었다. “우우우웁! 우우우웁! 우우우우우우우웁!” “아, 정말 시끄럽네. 언니. 깨어난 것 같아요.” 그때 귓가로 들려온 나지막한 목소리. 음색으로 보아 여인의 목소리임이 분명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신혁은 자신도 모르게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그러자 곧 언니라고 추정되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아. 저놈이 깨어날 때 꿈틀거렸으니까. 그런데, 주연이가 어떻게 죽었다고 했지?” 목소리 자체는 무척 나른한 어조였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은은한 살기가 깃든, 어두운 목소리였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림자를 목소리로 표현했다고나 할까? 신혁은 온몸에 까닭 없이 소름이 돋는걸 느꼈다. 그러나 목소리들은 그에 전혀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들려왔다. 신혁이 깨어난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일부러 들으라는 것처럼. “시체도 못 찾았어요. 아마 여기서 기르던 개한테 모조리 뜯어 먹힌 것 같아요.” “그래? 그럼 똑같이 하면 되겠네. 적당히 데리고 놀다가, 개밥으로 던져. 아니면 산 채로 뜯어 먹히게 하던가.” “네 언니.” “우우우웁! 우우우웁!” 적당히 데리고 놀다가, 개밥으로 던진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신혁은 번뜩 고개를 들어 미친 듯이 휘젓기 시작했다. 누구냐고, 누가 이러는 거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만두라고, 하지 말라고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재갈이 꽉 물린 탓에 어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때였다. “쟤 발광한다. 아무튼 처리 잘하고, 나는 이만 간다.” “네 연주 언니. 살펴가세요.” 잠시 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문이 열린 틈으로 드러난 밤의 거리가, 쓰러진 신혁의 시야에 아주 잠시 들어왔다. 그렇게 밖의 풍경을 보았을 때, 신혁은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납치된 장소가 어느 공간이었는지를. 하지만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도 너무 늦은 상태였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풍경일지도 모르는데, 문은 너무도 매정하게 닫혔다. 그리고. 문을 닫자마자 들려오는, 수많은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들. 그르릉…. 그르르릉…. 그르릉…. 그르르릉…. 주변으로 무언가가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조금씩 가까워지는 기척들을 느끼며, 머릿속으로 자신이 이 장소에서 저질렀던 짓이 홀연히 떠올랐다. 그래. 신혁은 예전 박환희의 끄나풀이라 생각한 여인을 잡아와 차마 말 못할 짓을 저질렀다. 창관에 카운터를 보는 여인이었나? '저년, 참 독한 년이더라. 하다못해 별 짓거리를 다해봤는데, 그래도 입을 다물더라니까. 그래도 나름 재미있는 시간이었어. 가끔 사람이 개랑 섹스하면 반응이 어떨지 궁금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고. 흐흐.' 그때 그 여인이 어떤 기분이었을까? 지금 이런 기분을 느끼고 있었을까? 그렇게 처음으로 후회라는 감정이 찾아들 무렵, 신혁의 얼굴에 시커먼 그림자들이 드리웠다. 그와 동시에 뜻 모를 암울함이 눈동자에 스며들었다. 우득, 우드득! 쩝쩝…. 우득, 우드득! 쩝쩝…. ============================ 작품 후기 ============================ 드디어 이번 파트도 끝났네요. 하하. 혹시 궁금하신 부분이 있다면 부디 코멘트로 달아주세요.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자꾸만 머리가 멍해져서요. 여러분들 모두 맛있는 점심 드세요. :) 0487 / 0933 ---------------------------------------------- 평온한 한 때. “그럼 지금 이 시간 부로, 해밀 클랜을 헤일로의 대표 클랜으로 공인하는 바임을 선포합니다!” 이효을의 말이 끝난 순간 옆에서 형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단상에 선 이효을을 바라보더니 차분히 앞으로 걸어가 마찬가지로 단상에 올랐다. 그것을 시작으로 사용자들은 너도나도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수만 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이내 회의실은 다수의 갈채와 일부의 환호로 가득히 메워졌다. 나 또한 있는 힘껏 박수를 보내며 흐뭇한 마음으로 단상을 응시했다. 오늘은 서부 도시를 관리할 대표 클랜들을 선발하는 날. 사실 선발이라고 말하기도 조금 그런 게, 대표 클랜은 이미 며칠 전에 확정된 상태였다. 즉 이 자리는 단순히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자리에 불과하다고나 할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해밀 클랜이 헤일로를 차지한 명분에 불만을 제기할 클랜은 없다. 불만을 가질 만큼 성과를 쌓은 클랜이 없기도 했거니와, 코란 연합은 자격이 박탈됐고 머셔너리는 스스로 자격을 포기했으니까. 아무튼 아무래도 좋다. 이제는 정말로 다 끝났다. “감사합니다.” 형은 미미하게 웃으며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어떤 미사여구도 없는 그저 감사합니다 라는 한 마디. 어떻게 보면 가장 형다운 인사라고 볼 수 있었다. 짝짝짝짝! 짝짝짝짝! 짝짝짝짝! 짝짝짝짝! 갈채는 아직도 이어지는 중이었다. 이효을은 손사래를 치며 이제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고, 그제야 박수가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미약한 환호를 보내는 사용자들이 있었는데, 바로 해밀 클랜원들이었다. 어지간히도 좋은 모양이다. 이윽고 형이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역시나 해밀 클랜원들에게…. 아니 잠시만, 뭐야. 저 인간 왜 나한테 오는 거야. “수현아!” “꺅! 어떡해 어떡해! 꺅!” 내 이름을 부른 형은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다가왔다. 나는 당혹한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어디선가 미친 듯이 꺅꺅거리며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또 어디선가 따가운 눈초리들이 느껴졌다. 시선을 돌려보자 나를 지그시 노려보고 있는 여러 여인들이 보였다. 가희, 진하 누나, 혜린이 누나 등등…. 옷차림을 보니 오늘 열과 성을 다해 꽃 단장을 하고 온 모양인데, 왜 나를 노려보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흘리며 형을 맞이했다. “축하해. 형.” “축하는. 그렇게 말해주니까 오히려 미안하다. 원래는 네 클랜이….” “또, 또, 또, 또. 말했잖아. 우리는 마지아 때문에 포기한 거라고. 그리고 해밀도 충분히 자격이 있는 클랜이야. 그러니까 오늘은 좀 기뻐해보라고.” “…하하. 그래 그래. 아무튼, 정말 고맙다.” 형은 멋쩍게 웃더니 기어코 나를 한 번 안고야 말았다. 이 모습이 형제애로 보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왜 수정구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간간이 보이는 걸까? 저건 녹화용 수정구인데? “자자. 다들 조용히 해주세요. 이로써 헤일로, 베스, 도로시의 대표 클랜 선발은 끝났지만, 아직 여러분들에게 할 이야기가 남아있어요.” 잠시 후, 잠깐 자리를 비켰던 이효을이 다시 단상에 올랐다. 그러자 비로소 환호가 가라앉고, 비로소 회의실에 처음의 엄숙한 기운이 자리잡았다. 고마운 마음에 바라보자 이효을은 눈을 한 번 찡긋했다. 그리고 주변을 쓱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근 2년 동안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죠. 전쟁부터, 지금 이 자리에는 없지만 얼마 전 구 코란 연합의 사태까지요. …사실, 저는 그동안 북 대륙이 정말로 힘들었다고 생각해요. 일종의 쇠퇴기라고도 볼 수 있을까요? 어쩌면 강철 산맥의 실패 때부터 예정돼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건, 바로 지금부터라는 거예요.” 바로 지금부터라. 뭔가 심상찮은 이야기가 나올 조짐이다. 다른 사용자들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하나같이 진중한 얼굴로 이효을을 보고 있다. 이내 증폭 마법을 걸은 음성이 고요히 울려 퍼졌다. “터닝 포인트라는 말이 있어요. 전환점을 의미하는 단어죠. 저는 북 대륙 모든 도시의 주인이 정해진 오늘을, 바로 터닝 포인트라고 여기고 있어요. 길었던 쇠퇴기가 끝나고 이제 다시 부흥기로 돌입할 터닝 포인트요. 그리고 이 부흥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그때가 바로 강철 산맥에 재도전할 때라고 생각해요.” 터닝 포인트라.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지금 이곳에 계신 분들은 아시겠지요?” 이효을의 말은 간단했다. 한 마디로 터닝 포인트라는 단어를 사용해 강철 산맥에 재도전하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즉 그때를 대비해 괜히 싸우지 말고 힘을 비축하자는 소리였다. 뭐, 누구를 저격하는지 알 것 같은데. 어찌됐든, 그렇게 강철 산맥의 언급으로 말을 마무리 짓고 나서, 이효을은 자리가 파함을 선언했다. 사용자들은 한 명 한 명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냥 나가는 사용자들과 선발을 축하하는 사용자들로 나뉘어, 안은 도로 어수선해졌다. “우리도 이만 갑시다.” 좌우간 공식 선발도 끝났겠다, 나도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텅텅 빈 의자들이 보였다. 분명 고연주와 남다은, 그리고 임한나와 함께 자리에 참석했는데, 세 명 모두 홀연히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나는 없어진 세 여인을 곧바로 찾을 수 있었다. “형님. 오랜만이에요. 오늘 정말로 축하해요.” “아유, 아니에요 동서. 다 도련님 덕분이죠.” “네네. 아차, 아주버님은 잘 지내시죠?” “보시다시피요. 도련님이야말로 안색이 훤해지셨어요.” “호호호호호호호호.” “호호호호호호호호.” …없어진 세 명은 해밀 클랜원들과 함께 있었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축하를 하는데,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아주 꼴값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얼굴이 멍멍해 보인다. 나는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형. 나 간다.” “응? 어, 어? 간다고? 어딜?” “어디긴. 클랜 하우스에 돌아가야지. 나 오늘 바빠.” “그래? 그래도 식사라도 같이 하고 가지 그러냐. 오늘은 너랑 오붓하게 밥이나 먹을 생각이었는데…. 이런저런 얘기도 하면서 말이야.” 섭섭한 마음이 차오르는지, 형은 서운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시무룩한 모습을 보고 있자 약간이지만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확실히 나쁜 제안은 아니다. 더구나 오늘 같은 날은 더더욱.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우리가 저쪽의 이야기를 들었듯이, 저쪽도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탓이다. 이내 눈에서 레이저 광선을 뿜어내는 해밀의 여인들을 보며, 나는 차분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오늘은 이만 갈게. 그리고 나보다는 형 클랜원들이랑 보내는 게 더 좋잖아?” “게네들은 언제라도 볼 수 있는 애들이고. 그런데 너는 아니잖아.” “미안미안. 정말로 바빠서 그래. 다음에 시간이 나면 내가 자리를 마련할게.” “그래…. 알겠다.” 그렇게 간단한 작별을 나눈 후 형은 터덜터덜 해밀 클랜원들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와는 반대로, 세 명의 머셔너리 클랜원은 내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와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참 잘했어요 라고 느껴진다면, 내 착각일까? 이윽고 형이 여러 손길에 붙잡혀 밖으로 끌려가는 게 보였다. 그것을 확인한 후에야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응? 수현? 왠 한숨이에요? 오늘처럼 좋은 날에, 복 달아나게시리.” “그냥, 걱정이 돼서 그렇습니다. 걱정이 돼서요.” “걱정이요?” “예. 우리 형 말입니다.” 고연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 나는 혀를 쯧쯧 차며 근심을 털어놓았다. 갑갑한 가슴을 억누를 길이 없기도 했거니와, 또한 진심으로 형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고연주가 말했다. “왜요? 아주버님처럼 완벽한 남자도 찾기 드문데….” “그거야 저도 잘 알고 있지요. 그런데 옥에도 티가 있다고, 사람이 눈치가 없습니다. 없어도 너무 없어요. 조금 전에도 보세요. 저렇게나 손짓하는 여인들이 많은데, 저한테 오면 어떡합니까?” “…그, 그럴 수도 있죠. 수현은 친동생이니까요.” “아무리 그래도요. 저는, 언제나 형이 좋은 여자 만나기를 바라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저렇게 눈치가 없으니 걱정을 안 할래야…. 후유. 아무튼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 “사실 이럴 때마다 간혹 의심이 듭니다. 정말 같은 뱃속에서 태어난 게 맞을까 하는, 그런 의심이요…. 쯧.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네요. 이만 갑시다.” 나는 한숨을 폭폭 내쉬며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채 열 걸음을 걷기도 전에 도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따라오는 기척이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다시 뒤를 돌아보자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세 여인이 보였다. 그리고 세 명은 하나같이 게슴츠레한 눈초리로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아니. 왜 나를 저렇게 쳐다보는 걸까?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 다음 날 아침. 나는 실로 오랜만에 정상적인 아침을 맞을 수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세안을 하고 식사를 한다. 그리고 고연주가 타준 차 한 잔과 함께 집무실로 올라오면, 곧 조승우가 따라 들어와 아침 보고를 시작한다. 창문을 통해 내리쬐는 아침햇살을 받으며 차를 마시는 기분은 아주 그만이다. 그래. 이것은 정말 간만에 느껴보는 여유요 행복이었다. “오라버니는 성과를 개방하라! 개방하라! 개방하라!” “오빠는 용이 잠든 산맥의 성과를 개방해라! 개방해라! 개방해라!” …지금 문밖으로 들려오는 저 목소리만 아니라면 말이지. 탁. 찻잔을 너무 세게 내려놓은 탓일까. 막 기록을 정리하던 조승우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 문을 한 번 돌아보더니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안솔양과 예지양인 것 같습니다만. 하하. 클랜 로드. 저 귀여운 농성을 멈추려면, 아무래도 이제는 성과를 개방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귀여운 농성이라. 나는 물끄러미 조승우를 응시했다. 저게 귀엽게 보인다니, 취향 한 번 참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개뿔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손가락을 까닥까닥 움직였다. 그러자 묵묵히 서 있던 새로운 수행인원이 나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나는 지그시 문을 가리켰다. “사용자 선유운. 가서 한 대씩 쥐어박고 오십시오. 아주 세게요.” “예.” 담담히 대답한 선유운은 바로 문을 열어 복도로 나섰다. “하하하, 하하하!” 내 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조승우는 너털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부뎨에에~.” “우에에엥~.”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농성을 대신해 꺼이 꺼이 울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기 때문이다. 거기다 아예 내쫓아버렸는지, 곧 울음소리마저도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완료했습니다. 클랜 로드.” “예. 이제 좀 조용하네요.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이내 덤덤한 얼굴로 돌아온 선유운이 주먹을 쓱쓱 매만지자, 조승우가 웃음을 뚝 멈췄다. 그리고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깨나 당황한 듯 보였다. 좌우간 말 그대로 이제 좀 조용해졌다는 생각에, 나는 조금 남은 찻물을 말끔히 비웠다. 그리고 힘껏 기지개를 피며 입을 열었다. “사용자 조승우. 제가 분명 성과는 알아서 개방하라고 한 것 같은데…. 도대체 뭘 자꾸 개방하라는 겁니까?” “아…. 그게 말입니다. 실은 이 모든 게 바로 붉은 상자 때문입니다.” “예? 붉은 상자요?” “그렇습니다. 저번 용이 잠든 산맥 탐험에서 사용자 허준영이 얻어온 성과인데 말입니다.” 아. 판도라의 상자를 말하는 거였구나. 설마 아직까지도 개방하지 않고 있었던 건가? 그러자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이 조승우가 말을 이었다. “사실 사용자라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여러 클랜원들이 개방을 요구했는데. 사용자 허준영이 모두 거절했다고 합니다.” “아니. 왜요?”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당최 왜 그렇게 꼭꼭 숨겨두고 있는 건지…. 사실 클랜 로드가 개인 성과로 인정한만큼 딱히 할 말은 없지만 말이죠.” “흠.” 공개를 거부한다 라. 나도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대로 허준영의 성격을 알고 있는 만큼 필시 이유는 있을 거라 생각되었다. 그렇게 생각해, 나는 알겠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 문제는 제가 해결하죠. 허준영과 이야기를 한 번 해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괜한 일에 신경 쓰게 만든 것 같네요.” 조승우는 송구하다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머리를 저었고 이만 나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어차피 아침 보고도 모두 끝마쳤기 때문이다. 이윽고 조승우마저 문을 나서자, 집무실에는 나와 선유운만 남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번에 새로 수행인원을 교체한 건 정말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한다. 선유운은 누구처럼 쓸데없는 말도 않고 천성이 과묵해, 옆에 두는데 아무런 부담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묵묵이 내가 요구하는 일을 해내는 태도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수행인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불현듯 또 하나의 성과가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그래. 용이 잠든 산맥에서 얻어온 성과는, 판도라의 상자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다. 그건 바로…. - 헤. 잊지 않고 있었네? 아니, 이제야 떠올린 건가? 그때 내부에서 아름다운 미성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화정의 목소리였다. 이브의 혈통을 떠올린 순간 자동적으로 반응해 말을 걸어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새 하도 바빠 신경을 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얼른 체력을 올리라 노래를 부르던 화정이 아니던가. 그런 내 마음을 느꼈는지, 화정은 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아닌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말했다. - 아니, 괜찮아. 이 몸이 말했잖니. 2차 각성은 온몸이 편안한 상태에서, 그리고 아무도 없는 장소에서 치러야 한다고. '그랬던가? 아무튼, 그래서 일부러 그동안 말도 않고 기다려준 거야? 내가 떠올릴 때까지?' - 뭐, 그런 것도 없잖아 있었지. 괜히 내가 재촉하면 신경 쓰일까 봐서…. '와…. 화정. 이건 정말 감동인데. 그런 속 깊은 배려도 다해주고 말이야.' - 호호호. 겨우 이 정도로 무슨. 사실 꼭 너를 위해서 그런 건 아니야. 정확히는 한 번 해보고 싶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진짜로 감동하는 거보니까 기분은 좋네. 대충 이런 기분이었구나…. '응? 한 번 해보고 싶었다니? 이런 기분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아련하게 들리는듯한 화정의 말. 나는 의아한 기분으로 되물었다. '그래도 명색이 신인데, 하고 싶은 것도 있나?' - 그럼. 일종의 유희라고나 할까? 나 정말 꼭 해보고 싶었거든! 왜 그런 거 있잖아, 그런 거. '도대체 그런 게 뭔데.' - 그러니까. 너네 세상에서는 바깥양반이라고 해야 하나? 남편이 일 때문에 바빠서 막 돌아다니면, 부인은 서운해하면서도, 그래도 가족을 위해서 저러는 거니 생각하며 참고 내조하잖아? 그런 기분 말이야.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그럼 현모양처의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던 거로군.' - 응. 사실 바가지는 내 취향이 아니라서. 호호. '그리고 나를 남편으로 생각했고.' - 바로 그거…! 어…? 그때였다. 잠깐이지만 나와 화정 사이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신나서 떠들던 화정이 돌연히 말을 멈춘 것이다. 순간 약간 낯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나는 헛기침과 함께 볼을 긁적였다. '저, 화정. 그러니까…. 일단 고마….' - 다, 닥쳐! 입 다물어! 대답은, 아주 빠르게 돌아왔다. 어느덧 말투도 원래의 뾰족한 음색으로 되돌아온 상태였다. 왠지 화정도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계속 말을 걸기로 결심했다. '저기, 우리 잠시 이야기를….' - 시,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아니 너무 그러지 말고….' - 시, 시끄럽다고 했잖아! 지, 지금 안 그래도 충분히 부끄러우니까! 제, 제발 조용히 좀 하란 말이야! 나는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화정의 기세가 너무나도 엄청나, 이러다 또 폭주할지도 모른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옆에 잠잠히 서 있는 선유운이 눈에 밟혔다. 선유운도 내 시선을 느낀 듯 눈을 살짝 뜨며 입을 열었다. “클랜 로드?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 “…아, 그게 말입니다. 실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한순간 약간 고민이 들기는 했지만, 나는 이내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래서 조금 전 상황을 대충 각색해 말해주어, 여인의 심리에 대한 의견을 구하려는 순간. - 죽인다! '…….' - 말 하지마! 죽일 거야! 입만 열어도 죽일 거야! 확실히 죽일 거라고! '…….' 결국,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 작품 후기 ============================ 생각보다 길었던 음지 전쟁 파트가 끝나고, 드디어 새로운 파트로 돌입했습니다. :) 음지 전쟁 파트는 개인적으로 매우 야심 차게 준비한 파트입니다. 먼저 이 파트를 구성한 이유는, 예전에 어떤 분의 코멘트에 있었지요. 그 코멘트의 내용이 어땠느냐면, '김수현은 설정상 10년 차 사용자며, 음지에서 생활한 사용자다. 그러나 진행하는 내용을 보면 2회 차 때 얻은 힘으로 강제로 몰아붙이는 경우가 많다.'였습니다. 즉 10년 동안 음지에서 굴러먹었으면 사건을 다른 방향으로 해결할 법도 한데, 거의 일관된 방식만을 보여준다는 지적이었습니다. 그 지적이 일리가 있다고 여겨 준비한 파트가 바로 이번 음지 전쟁 파트였습니다. 최대한 김수현의 치밀함을 드러내는데 중점을 두었지요. 어느 분 말마따나 칼로 연합을 망하게 하는 게 아니라, 손 안 대고 코 푸는 형식으로 망하게 만드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번 파트는, 글쎄요. 사용자 아카데미 때와 비교하면 괜찮았고, 전쟁 때와 비교하면 실패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전쟁 때 신상용의 죽음으로 반응이 반전됐다면, 이번 파트는 거의 끝까지 고저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런 만큼 아쉬운 면도 상당히 많습니다. 중간중간 더 적고 싶은 내용도 있었고, 마무리도 확실하게 짓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결국 많은 부분을 쳐내고 마무리는 차후 진행 중간중간에 드러내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는 게 저나 독자 분들 에게나 더 낫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아마 용이 잠든 산맥부터 음지 전쟁 파트로 이어지기까지, 작품 내 분위기가 거의 어두웠던 탓에, 몇몇 분들은 지치셨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응원해주신 분들과, 따끔한 지적을 해주신 분들과, 읽어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드립니다. 하하하. _(__)_ 앞으로는, 지금껏 고생한 수현이에게 조금 휴식을 줄 예정입니다. 성과도 개방하고, 여태껏 뿌려놓은 복선들도 회수할 겸 말이지요. 어두웠던 분위기도 달콤하고 밝은 쪽으로 변화할 겁니다. 후기가 많이 길어졌네요. 오늘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D 0488 / 0933 ---------------------------------------------- 평온한 한 때. 머셔너리 클랜의 하우스는 항상 북적북적하다. 아니, 분주하다고 해야 할까? 현재 공식적으로 등록된 클랜원은 57명. 많다고는 할 수 없으나, 머셔너리는 용병 클랜이라는 특별한 타이틀을 걸고 있다. 그런 만큼 의뢰인들이 항시 드나들고 있으며, 이따금 가입 의뢰나 면담 요청 등, 모종의 목적을 지닌 사용자들이 찾아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리고 오늘, 나는 의외의 방문을 받을 수 있었다. 카운터에서 면담 요청이라며, 한 명의 사용자를 올려 보낸 것이다. 또 어떤 의뢰인지, 기대와 걱정이 반반씩 들었다. 사실 나와의 면담 요청이 이루어지는 건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한 1년 전부터 거의 모든 일과 의뢰는 아랫선에서 처리하고 있었는데, 클래 로드에 일이 넘어왔다는 것은 사안이 깨나 중하다는 소리였다. 즉 아래쪽에서 함부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안건이랄까. 그러나 사용자가 방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나는 처음의 기대와 걱정을 동시에 버릴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형님.” “…누구 멋대로 형님이냐? 아니, 인가요? 수 로드.” 수 클랜의 새로운 로드, 박환희가 방문한 것이다. 꾸벅 인사를 건넨 박환희는 어설픈 웃음으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하하. 수 로드라니요. 민망하네요.” “허. 그렇군요. 미안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새로 창설된 연합을 대표하는 분인데….” “아 왜 그러세요. 이름만이에요 이름만. 그냥 환희나 동생이라고 불러주세요.” “흥.” 나는 꿈도 꾸지 말라는 의미로 코웃음 쳤다. 그러자 멋쩍게 웃어넘긴 박환희가 소파 하나를 가리켰다. 앉아도 되냐는 의미 같았다. 아무튼 기껏 찾아온 애를 문전박대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는 마지못해 머리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 그 자리에 앉은 기분은 어때.” “예? 음…. 푹신푹신해요. 엄청 비쌀 것 같은데….” 박환희는 잠시 머리를 갸웃하더니 소파를 탁탁 치며 말했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 소파 말고.” “예? 그럼…. 아아. 그냥 그래요. 아직 형식에 불과하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부담도 없잖아 있고요.” “그런가…. 하기야 한 클랜의 로드도 아니고 무려 연합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지. 아무튼 열심히 해라.” “열심히 하면, 앞으로 예뻐해 주시는 겁니까?” “지랄도 정도껏 해야 개성이다.” “아 왜요. 하하하.” 서지환은 약속을 이행했다. 협의한 대로 연합을 해체함과 동시에, 수, 상인 조합, 백화 클랜으로 새로운 코란 연합을 창설한 것이다. 그리고 연합의 대표로 수 클랜의 이인자인 박환희를 선출했다. 물론 아직은 임시직 성향이 강한 자리였으나, 죽은 박태진이 돌아올 리가 없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저절로 자리가 굳어질 것이다. 그렇게 한동안 박환희의 푸념을 들어주다가, 나는 적당한 데서 말을 끊었다. 어딘가 모르게 화제가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기분이 느껴진 탓이다. “알았다, 알았어.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그래서…. 예?” “무슨 일로 찾아왔냐고. 나는 머셔너리 로드고, 너는 수 로드야.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몰라서 물어?” “아니…. 그냥…. 인사도 드리고…. 그리고 겸사겸사….” 겸사겸사라. 신나게 떠들던 박환희는 나직이 말을 흐리고는, 아주 약간 당혹해 하는 낯빛을 비췄다. 저놈의 성격이 어떤지 알고 있는 만큼 이런 반응이 자못 생소했으나, 동시에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지 알 것만 같았다. 하여, 나는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가.” “그게…. 나, 나가요?” “응. 나가서 7층으로 올라가. 계단을 기준으로 맨 왼쪽 방에 한결이가 있을 거야.”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박환희는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들켰다는 얼굴이다. “네 속셈이야 뻔해. 한 번 보고는 싶은데, 저지른 죄가 있으니 어색하겠지. 그래서 너네 클랜 로드가 한 번 보고 가라고 해서. 이런 핑계를 만들려고 했던 거 아니야?” “…무섭네요.” 역시나 예상이 맞았는지, 박환희는 고소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러게 잘 좀 하지. 쯧. 참고로 무슨 핑계를 대도 상관은 없는데, 한결이 반응은 책임 못 진다.” “그거야 제가 감내할 일이니까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박환희는 재차 꾸벅 인사한 후 몸을 돌렸다. 그러한 찰나, 나는 아차 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나도 볼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환희! 잠시만.” “예? 예 예.” “언제 한 번 사용자 서지환을 만나고 싶다. 적당한 시일에 자리 좀 마련해봐.” “지환이 아저씨요…?” 박환희는 잠깐 생각에 잠긴듯했다. 그러다 곧 씩 입꼬리를 끌어올리더니 능글능글한 목소리로 말했다. “와, 형님. 이제 연합도 박살냈겠다. 서서히 산하 클랜으로 만드시려고….” “말조심해라 인마. 산하 클랜이 아니고, 협력 정도로 생각해.” “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하하하.” “저 자식이….” 행여 내가 일어날세라, 박환희는 도망치듯이 방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그것도 끝끝내 웃는 얼굴로. 저놈은 정말, 마음에 들다가도 안 드는 놈이라니까. 혀를 쯧쯧 차며 머리를 가로저은 후, 나는 천천히 서랍을 열었다. 그러자 수많은 호출석이 보여, 그 중 하나를 골라 지그시 내리눌렀다. 박환희를 보니 아직 결과를 보고받지 못한 다른 한 명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금 기다리고 있자, 3분도 채 안되어 또각또각 복도를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여인은 바로 고연주였다. 이렇게 빠르게 호출에 응한 것을 보니 아마 고연주도 본관에 있었던 모양이다. 문득 막힘 없이 시원스럽게 드러난 아미가 눈에 들어왔다. “수~현~! 나 불렀어요?” 들리는 목소리에는, 뜻 모를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눈매도 보기 좋은 호선을 그리고 있다. 무언가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머리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사용자 고연주. 혹시 우설희에 관한 보고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응? 환희가 말을 안 해주던가요?” “…만났나요?” “네. 계단에서요.” “그렇군요. 아무튼, 예. 그놈한테는 듣지 못했습니다.” “흐응. 그렇군요. 우설희라…. 사실 아직 처리 중이기는 한데….” 살그머니 팔짱을 끼며 고민하는 고연주. 그러자 안 그래도 풍만한 가슴이 팔로 받침으로써 더욱 두드러진다. 이내 성적 매력이 물씬 묻어나는, 가슴 한가운데 오목하고 길게 패인 부분을 보며 침을 꿀꺽 넘길 즈음. 고연주가 살며시 눈웃음을 쳤다. “알고 싶으세요?” “…예?” “알고 싶으시냐고요. 우설희가, 어떻게 됐는지 말이에요.” “그거야 그렇죠. 애초에 중간중간 경과를 보고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먹인 고연주는, 곧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오기 시작했다. “할 수 없네요. 정 알고 싶으시다면야…. 호호.”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 했으나, 우뚝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고연주가 바로 옆까지 다가와 풀썩 쭈그려 앉은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책상 아래 빈 공간으로 엉금엉금 기어가기까지. 좌우로 살랑살랑 실룩이는 복숭아…. 아니 엉덩이를 보고 있자니, 꼭 강아지를 보는 것만 같았다. “잠시만요.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뭐하긴요? 보고하려고 하는 데요?” 고연주는 천연덕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고 완전히 안쪽으로 기어들어오더니 얼굴만 쏙 내밀어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와 동시에, 가녀린 손을 뻗어 내 하의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보고를 하랬지, 이건 무슨 강아지도 아니고…. 아니, 잠시만요. 왜 바지를 벗기는…! 고연주!” “어머, 강아지? 그거 정말 좋은데요? 수현만의 강아지라. 호호호호!” “여기는 집무실입니다. 당장 안 멈추면 정말 화냅니다?” “아잉~. 화내지 말아요 주인님~! 멍!” “…….” “멍멍?” 그 순간 너무나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고연주는 이 틈을 노렸는지, 차분히 그러나 재빠른 손놀림으로 하의를 끌어내렸다. 어찌나 솜씨가 좋은지 벌써 절반 이상 내려간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겨우 가출한 어이를 찾을 수 있었다. “사용자 고연주…!” “우설희는, 지금 창관에 있어요. 입을 함부로 놀린 죄로, 몸소 창녀 체험을 시켜주고 있는 중이죠. 즉 화대로 빚을 갚는 방식이랄까요?” 이내 벌컥 화를 내려는 순간, 고연주는 비로소 보고를 시작했다. 나는 또다시 말을 멈추고 말았다. 갑자기 본론을 꺼내기도 했거니와, 내용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문득, 어쩌면 고연주가 치밀하게 의도한 상황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우설희가 창관에 있다고?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설희가 창관에 있다니요?” “네. 이해가 잘 안 가시죠? 그러니까 지금 그년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제가 직접 보여드릴게요.” 고연주는 그러한 와중에도 착실히 하의를 벗겼고, 종래에는 속옷마저 내리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결국,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친 남성이 꺼떡꺼떡 한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었다. 나는 망연히 얼굴을 감싸 쥐었다. 세상에. 이런 대낮에, 그것도 집무실에서 이런 짓을 벌이다니. “사용자 고연주…. 그냥 밤에 하면 안되겠습니까? 아직 낮이란 말입니다….” “무슨 상관이에요? 이것도 엄연한 보고라고요. 응응.” 그러거나 말거나, 고연주는 양손을 꼭 맞잡았다. 이어서 남성을 보는 눈동자에 몽롱한 빛이 피어오르는 걸 확인한 순간. “어쩜…. 언제 봐도 늠름하다니까. 쪽.” 고연주는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남성의 끝에 진한 입맞춤을 선사했다. 안 그래도 예민한 부분인데,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마저 느껴지자 점점 피가 몰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결국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고연주의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머릿결마저도 부드럽다. 그러나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아니면 애를 태우려는 건지. 고연주는 느릿하게 입술을 떼고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어딘가 야하다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럼 제 소개를 할게요. 저는 수현만의 강아지로, 이름은 섀도우라고 해요. 품종은, 고연주 테리어죠.” “…요크셔 테리어가 아니고요?” “그럼요. 고연주 테리어. 그리고 좋아하는 음식은…. 바로 소시지랍니다?” “…….” 그 말이 끝난 순간, 고연주는 기습적으로 입을 벌려 남성에 고개를 묻었다. 이어서 맛을 보려는 듯 입을 우물우물 움직이자, 길고 둥근 살덩어리가 기둥을 촉촉히 적시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고연주의 양 볼이 서서히 홀쭉해지는걸 확인한 후,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푹하면서도 끈적끈적한 감각이, 온몸으로 퍼지는 기분을 느끼며. * 시간이 흘러, 어느덧 짙은 땅거미가 내려앉은 저녁이 되었다. 식당에는 고요하다 못해 엄숙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주변 테이블을 둘러보자 못해도 쉰 명은 돼 보이는 클랜원들이 보인다. 기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비슷한 시간에 식사를 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 식사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 다들 입맛에 맞는 시간에 따로따로 오기 때문이다. 사실 이미 식사 시간은 끝났다. 테이블에 접시가 보이지 않으며, 간간이 차나 음료들이 보일 뿐이었다. 클랜원들은 차와 음료를 마시는 척을 하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앉아있는 테이블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바로 나와 건너편의 허준영을. “그러고 보니 연주 언니가 안보이네?” “아…. 오늘 저녁은 거르신대요. 점심때 뭘 배불리 드셨다고….” 같은 테이블에 앉은, 소곤소곤 말을 나누는 한나와 다은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눈앞의 허준영을 응시했다. 허준영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묵묵히 찻잔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후후 웃는 안솔이 탐욕에 젖은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후후. 준영이 오빠. 오늘만큼은 피할 수 없을 거예요.” “…후룩.” “자아, 자아! 어서 그 꽁꽁 숨겨둔 붉은 상자를 내보이라고요! 그렇지 않으면, 오라버니가 이노오옴! 하실 거란 말이에요!” “…홀짝.” 안솔이 협박조로 연신 상자를 꺼내기를 종용했으나, 허준영은 한결같았다. 어떠한 대꾸도 않으며 계속 찻잔만 기울인 것이다. 마치 너는 짖어라 나는 무시한다는 것처럼, 허준영의 태도는 무시 그 자체였다. 안솔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양손을 꼭 쥐며 부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나를 휙 돌아보며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아니. 비단 안솔뿐만이 아니라, 식당에 있는 클랜원들 전부가. 결국 그 눈빛들을 이기지 못해, 나는 등을 떠밀리는 기분으로 기대에 부응했다. “이놈.” “…….” 그러자 비로소 허준영의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잠깐 찻잔을 잡은 손이 멈칫하더니 실눈을 떠 나를 바라본 것이다. 하지만 실망했다는 감정이 읽히는 것으로 보아, 좋은 선택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보지마. 농담이었으니까.” “…그거 참 다행이군. 자칫 잘못하면 크게 실망할뻔했다.” 나는 바로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너 그 상자 아직도 가지고 있지?” “상자? 판도라의 상자를 말하는 건가?” “그래. 그 붉은 상자 있잖아.” “아아. 가지고 있다. 아직 열지는 않았어.” “…그러고 보니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그거 어떻게 얻은 거야?” “으음.” 탁, 허준영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을 엇갈려 맞추더니 의자에 몸을 깊게 묻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처음에는, 카오스 미믹을 달라했었지. 예전에 너희 이야기를 듣고는, 도대체 어떤 성과인지 구경하고 싶었거든.” “…카오스 미믹? 그럼 그냥 궁금해서?” 의아한 기분에 반문하자 허준영은 차분히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럼 호기심을 해결하려 했다는 소리인데…. 그것도 욕심 아닌가?” “가네샤도 깨나 고민하더군. 그리고 그렇게 큰 욕심도 없었고. 그냥 주면 말고, 안 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었지.” “그럼 왜 그 상자가…. 그건 카오스 미믹이 아니잖아.” “거래를 했거든.” 거래라. 그러고 보니 확실히 허준영이 나왔을 때, 노란색 빛이 비췄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어, 나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사실 그때 약간 짜증이 났다. 신이라는 작자가 고작 카오스 미믹 하나 때문에 고민하는 게 어이가 없었거든. 그래서 배포 좀 크게 가지라고 몇 마디 던졌어. 그리고 스스로 나오려는 찰나였지. 그런데….” “그런데?” “가네샤가 갑자기 미친년처럼 웃어 젖히더군. 그렇게 한참을 웃더니 거래를 하자고 하더라고. 정 그러면 자기가 비슷한 상자를 하나 주겠다는 거야. 다만 이 상자는 카오스 미믹처럼 무조건 좋은 게 나오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나올 수 있다고 했지. 한 번 네 행운을 시험해보겠냐고 해서….” “그래서 가지고 나온 게 판도라의 상자다?” 허준영은 맞는다는 듯, 다시 한 번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보면, 가네샤나 허준영이나 서로 도발한 것이나 다름없다 생각됐기 때문이다. 하기야 안솔이나 비비앙보다는 낫겠지만…. '이년드으으을!' 불현듯 가네샤의 분노한 음성이 떠올라, 나는 피식 웃을 수 있었다. 좌우간 사정은 알았으니,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였다.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아무튼 좋아. 너, 그거 천년만년 가지고 있을 건 아니잖아?” “그거야 그렇지.” “그럼 그냥 지금 이 자리에서 개방하는 건 어때? 나도 그렇고, 다른 클랜원들도 궁금해하는 것 같은데.” “지금?” 두 눈을 추켜올리며 되물어, 나는 힘주어 말했다. “그래 지금.” “흠…. 뭐, 네가 궁금하다면야. 좋다.” 그리고 허준영은, 아주, 아주 간단히 승낙해주었다. 조금이지만, 나는 당혹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 “왜? 상자는 지금 여기 없어. 가지고 와야 돼.” “아, 아니…. 어, 그러냐. 그럼 기다리고 있으마.” “그럼.” 허준영은 일말의 주저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휘적휘적 식당을 나섰다. 그리고 나는 본능에 따라 조승우를 찾았다. 하지만 곧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앉아있는 모든 클랜원들이, 하나같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허준영이 나간 문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오오오오! 클랜 로드가 해냈다!” “드디어 상자를 여는구나!” “그동안 궁금해 죽는 줄 알았다고!” “두 분 예쁜 사랑하세요!” 하지만 이내 큰 상관이 없음을 알았는지, 일제히 환호하며 두 손을 치켜들었다. 그런데 잠깐만. 뭐라고? 클랜원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앉은 테이블로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정적이 흐르던 식당은 삽시간에 광란의 도가니로 일변했다. 어찌나 소란스러웠는지 꼭 토요일 밤 클럽에라도 온 기분이었다. 결국 조용히 하지 않으면 절대 개방하지 않겠다는 엄포를 놓은 후에야, 클랜원들은 어느 정도 자제하는듯했다. 그렇게 어수선함이 차차 가라앉을 무렵. 허준영이 돌아온 것도 그 즈음이었다. 상반신을 완벽히 가리는 큼지막한 상자를 들은 채 돌아와, 상자를 테이블에 쿵 내려놓은 것이다. 어찌나 컸는지 6인용 테이블의 절반이 가려질 정도였다. 어느새 테이블 주변은 클랜원들로 겹겹이 에워싸인 상태였다. 허준영은 상자를 슬슬 어루만지고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사실 몇 번 개방할 생각은 했어. 그런데…. 이상하게 상자를 열려고 할 때마다 가네샤의 웃음소리가 기억나더군.” “가네샤의 웃음소리?” “그래. 뭔가, 굉장히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고 해야 할까?” “흠.” 생각해보니 찜찜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 나는 우선 제 3의 눈으로 상자를 응시했다. 상자는 전에 보았던 대로 불길한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어딘가 모르게 미약한 행운이 느껴지는 게 이상하다. 『판도라의 상자(Pandora Box)』 (설명 : 희망이 들어있는 금단의 상자. 하지만 그 희망이 선한 것인지 아니면 불길한 것인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희망이든 절망이든 개방하는 사용자에 따라 정해집니다. 그러나 가네샤가 건방진 인간을 골리기 위해 약간의 수작을 부려, 불길한 것이 나올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 사용자 허준영이 개방할 경우. 1. 희망이 나올 확률 : 27%. 2. 절망이 나올 확률 : 73%.) …뭘까? 이 쓸데없이 정확해 보이는 확률은? 설명을 읽고 한 가지 느낀 게 있다면, 가네샤가 은근히 뒤끝 있는 여신이라는 것. “준영아! 일단 열자! 열고 얘기하자!” “열어라! 열어라! 열어라! 열어라!” “오빠! 제가 열면 안될까요? 네?” “싫어! 내가 열래!” 상자가 앞에 보이자 식당의 열기가 도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각양각색의 구호 앞에서 오직 허준영만이 담담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나와 눈을 마주친 순간, 허준영은 상자를 내 쪽으로 쭉 밀었다. “김수현. 네가 정해라.” “응?” “네가 열든, 아니면 한 명을 정하든. 네 마음대로 하라고. 왠지 내가 열어봤자 좋은 꼴은 못 볼 것 같은 느낌이야.” “…그래도 상관없어?” 허준영은 정말로 마음대로 하라는 양 어깨를 으쓱였다. 가만히 보면 이놈도 은근히 감이 좋은 것 같다. 이윽고 허준영으로 향하던 구호가 이번엔 나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나는 잠깐 고민에 잠겼다가 일단 내 손을 먼저 얹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상자를 확인했다. 『판도라의 상자(Pandora Box)』 (* 사용자 김수현이 개방할 경우. 1. 희망이 나올 확률 : 41%. 2. 절망이 나올 확률 : 59%.) 확률이, 변했다? 희망이 나올 확률은 아직 5할을 넘기지 못하고 있었으나, 허준영에 비해 14%나 상승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분명히 개방하는 사용자에 따라 나오는 게 달라진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떤 게 영향을 미치는 걸까? 설마 행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나는 퍼뜩 머리를 들었다. 빠르게 시선을 돌려 누군가를 찾았다. 그리고 자신이 열고 싶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안솔을 발견했을 때. 무언가에 홀린듯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안솔.” “네, 네?” “네가 열어봐라.” “오…. 오라버니!” 안솔의 안색이 확 밝아진다. 그러더니 거의 울듯한 얼굴로 상자를 덥석 껴안았다. 정말 어지간히도 열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는 곧바로 도로 상자를 응시했다. 물론 여전이 제 3의 눈을 활성화한 채. 그리고 나는, 볼 수 있었다. 『판도라의 상자(Pandora Box)』 (* 사용자 안솔이 개방할 경우. 1. 희망이 나올 확률 : + ???%. 2. 절망이 나올 확률 : - ???%. * 규격 외 행운이 감지된 상태입니다. 100% 희망이 나오는걸 넘어서, 무언가가 나올지 감히 예측할 수 없습니다.)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붙어있는, 물음표로 표시된 확률을. 그리고 아래 새로 생긴 문구를. 나는 멍하니 안솔을 응시했다. 복덩이다. 복덩이가 여기 있다. “오라버니! 정말 제가 열어도 되죠? 네?” 나는 머리를 크게 끄덕이며 지체 않고 외쳤다. “그럼!” 그리고 잠시 후. “영차! 여엉차!” 힘찬 기합과 함께 안솔이 상자를 개방했다. ============================ 작품 후기 ============================ 『김수현 회고록.』 (본문 中 : 어쩌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한나가 코란 연합에 관한 보고를 했을 때부터. 그때부터 그런 말도 안 되는 관습이 생겨난 것이다. 아마 한나가 다른 여인들한테 자랑했는지도 모르지.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왜 여인들이 보고를 할 때 몸으로 보고하는 관습이 생겨났는지, 나는 전혀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0489 / 0933 ---------------------------------------------- 평온한 한 때. 안솔은 힘찬 기합을 내지르며 판도라의 상자를 개방한 순간이었다. 화악! 활짝 열린 상자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와, 식당 내부를 물들였다. 강렬한 빛은 일순간 시야마저도 하얗게 만들었으나,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상자에서 총 열 개의 빛 줄기가 터져 나왔다는 것을. 그리고 그 중 두 개의 빛 줄기는 흐릿한 잔상을 남기며 식당 밖으로 사출됐다는 사실을. 시야는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회복되었다. 하여 바로 아래를 쳐다보자, 상자를 중심으로 테이블 외곽에 둥글게 놓여있는 여덟 개의 빛 무리가 보였다. 그것은 확실한 하나의 성과였으며, 아직도 환한 빛살이 사그라지지 않아 자신의 비범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잠시 후, 클랜원들 사이로 폭발적인 환호성이 터졌다. “성과다! 성과야! 성과라고! 성과란 말이다!” “어머, 이 꽃들 좀 봐! 엄청 예뻐! 이건 도대체 뭐야?” “구즈 어프레이즐! 야, 야! 구즈 어프레이즐!” “여, 여기! 이미 챙겨놨어!” 이어지는 클랜원들의 행동은 무척 민첩했고 또한 기민했다. 성과 개수에 맞춰 여덟 명의 마법사가 앞으로 척 나서더니, 구즈 어프레이즐을 영창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언제 챙겨왔는지 한 명씩 물품 감정 주문서를 쥔 채로. 좌우간 구즈 어프레이즐을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나는 이미 제 3의 눈이라는 훨씬 좋은 확인 도구(?)가있는 만큼, 바로 성과들을 응시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가지런히 놓인 일곱 송이 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회색빛 결정, 둥그런 구슬, 구슬과 비슷하지만 색이나 크기는 다른 둥근 구체, 또…. 이건 네모난 주사위인가? 아무튼 다음은 반짝이는 돌, 핏빛 단검, 그리고…. 마지막은 뭐지? 이건 하나가 아니라, 세트 같은데? 아무튼 보면 알겠지 라는 생각에, 나는 12시 방향에 놓인 일곱 송이 꽃을 시작으로 시계 방향으로 하나씩 돌며 확인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허공에 엄청난 양의 메시지들이 주르륵 떠오르기 시작했다. 『비아트리스 스텔라(Beatrice Stella).』 (설명 : 특별한 축복을 받은 별이 땅으로 떨어지면, 낙하한 지면의 일대로 별의 축복이 스며듭니다. 이후 백 년이라는 기간 동안 모종의 숙성 과정을 거치게 되면, 땅에 별의 축복이 깃든 7개의 꽃이 개화합니다. 비아트리스 스텔라는 바로 그 꽃들의 암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일종의 정수입니다. 사용자가 정수를 복용할 경우, 사용자 정보의 능력치 잠재성을 소폭 높일 수 있습니다. 다만 아직 열린 잠재성에 대해서만 효과를 볼 수 있으며, 이미 닫힌 잠재성에 대해서는 효과를 볼 수 없습니다. 아주, 아주 약간이라도 남아있다면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으나, 4년 차 이상의 사용자는 복용하지 않는 것을 권합니다. 또한, 중복 효과를 누릴 수 없습니다.) 『빛과 어둠의 결정(Crystals Of Light And Darkness).』 (설명 : 빛과 어둠이 혼재돼있는 혼돈의 결정입니다. 매우 강력한 정령과 연결돼있는 탓에, 여태껏 단 한 번을 제외하고 세상에 드러난 적이 없습니다. 재능이 아주 뛰어난 사용자가 아니라면 섣불리 사용하지 않는 것을 권합니다.) 『아니마 오라티오(Anima Oratio)』 (설명 : 한 사내와 여인이 있었습니다. 사내는 강함을 열망했고 강해지기 위해 일생을 바쳤습니다. 여인은 외지를 떠도는 사내를 기다리며, 항상 사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수십 년이 흐른 후. 여인이 생각난 사내가 돌아왔을 때 여인은 이미 사망한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습니다. 아니마 오라티오의 기원은, 한 사내를 사랑한 여인에게서 비롯된 영혼의 기도입니다. 사용자가 기도를 받을 시, 고유, 특수, 잠재 능력 중 무작위로 하나가 지정돼, 하나의 슬롯을 추가로 개방할 수 있습니다.) 『탈루스 프로페타(Talus Propheta).』 (설명 : 고대 홀 플레인. 안젤루스 교단의 교황에게만 허가되었던, 일종의 복원 주문이 담겨있는 구체입니다. 비록 예언을 기반으로 한 예언 주문에 불과하나, 교황의 예언은 하나의 현실로 확정될 정도의 매우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한 대상(무생물)을 지정해, 모종의 이유로 잃어버린 힘을 복원해줍니다. 예언이 적용되는 범위는 매우 광범위하며, 심지어 신기에 해당하는 힘도 복원할 수 있습니다.) 『메모리아 스톤(Memoria Stone).』 『코델리아(Cordelia).』 『베가스 스티그마(Vagus's Stigma).』 『은밀한 욕망 세트(Secret Desire, Set).』 네 개. 그러니까 여덟 개의 성과 중 절반까지 읽어낸 순간, 나는 잠깐 시선을 거두었다. 어지러웠다. 허공을 가득 메운 메시지는 물론, 벌써 구즈 어프레이즐을 붙였는지 클랜원들이 떠드는 소리가 한층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사실 시선을 멈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대박이 터졌다는 것. 분명 정보를 읽기는 했는데, 생각보다 크게 와 닿지는 않는다. 그저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아니, 뭐랄까.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고나 할까? 먼저 비아트리스 스텔라는, 사용자의 능력치 잠재성을 늘려주는 정수라고 한다. 물론 어느 정도 올려줄지도 미지수고, 닫힌 잠재성에 대해서는 효용이 없다는 제한은 있다. 하지만 어쨌든 올려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 아닌가. 더구나 하나가 아닌 일곱 개나 있으니, 무려 일곱 명의 유망주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다는 소리였다. 빛과 어둠의 결정은…. 나도 잘 모르겠다. 일종의 원소 결정으로 생각하면 정령사로 전직할 수 있는 수단으로는 보이는데, 불, 물, 바람, 대지, 전기라면 모를까. 혼돈의 결정은 나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래도 여태껏 단 한 번을 제외하고 세상에 나온 적이 없다고 하니, 그 성능이 어느 정도인지 자못 기대가 되었다. 그리고 아니마 오라티오. 이건, 정말로 대박이었다. 지금껏 본 성과 중에서 가장 최고라 생각됨과 동시에, 또한 가장 탐이 나는 성과이기도 했다. 다른 말은 필요 없다. 고유, 특수, 잠재 능력 중 하나가 선정돼 슬롯 하나가 추가로 늘어난다고 한다. 나는 안 그래도 다른 사용자보다 능력 슬롯 하나를 더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 이 상태에서 아니마 오라티오를 사용한다면? 여섯 슬롯을 넘어서, 일곱 슬롯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사용자 정보에서 능력이 차지하는 비중을 아는 만큼, 무척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탈루스 프로페타. 무생물에 한해서, 한 대상의 잃어버린 힘을 복원할 수 있다고 한다. 언뜻 보면 약간 애매한 성과였으나, 사실은 전혀 아니었다. 신기도 복원할 수 있다는 문구를 보자마자 한 성과가 머릿속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걸 사용하면 잃어버린 신기를 다시 되찾을 수 있다는 그런 생각. 이렇게 한동안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야, 나는 겨우 눈앞의 성과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 말 그대로 대박이다. 아니, 지금껏 얻어온 모든 성과를 넘어서는 초대박. 나는 곧바로 안솔을 찾았다. 안솔은 눈을 꼭 감은 채, 마치 자신이 해냈다는 양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꼭 오르가슴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얼굴에 야릇한 환희가 깃들어있다. 나는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제 3의 눈으로 보기는 했지만 여전히 믿기지가 않은 탓이다. 과연 이게 안솔의 행운이 이루어낸 일일까? 아니면 그냥 운이 좋아서일까? 아, 같은 말 이려나? 나는 새삼스런 기분으로 안솔을 응시하다가, 이내 시선을 돌려 남은 네 개의 성과를 바라보았다. 앞선 네 개만 해도 정말 엄청난 수준인데, 남은 네 개는 또 어떤 충격을 줄지 정말로 기대가 되었다. 그때였다. “형. 이 보석 좀 보세요. 코델리아라는 보석인데, 효능이 정말 말도 안 되는데요?” “이야, 허준영이 완전 복 터졌네.” 성과를 둘러싼 주변으로 아직 어수선한 소리들이 들려올 무렵. 순간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분명 테이블에는 여덟 개의 성과가 있었는데, 잠깐 눈을 뗀 사이 일곱 개로 줄어들었다. 즉 하나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는 소리였다. 메모리아 스톤은 제자리에 있다. 코델리아는 백승훈 손에 있고, 베가스 스티그마는 박동석이 들고 있었다. 그리고…. “은밀한 욕망 세트가 어디로 갔지?” 그렇게 말한 순간 누군가 후다닥, 황급히 달리는 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나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비앙?” 비비앙이 보였다. 그랬다. 비비앙은 무언가를 꼭 품에 안은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급히 달리는 중이었다. 중간에 한 번 꽈당 넘어지기는 했으나, 전혀 넘어졌다고 볼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일어나 유유히 입구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나는 그 광경을 약 5초 동안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릴 수 있어, 나는 곧바로 허준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허준영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이내 무심한 얼굴로 하품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흘리면서도 의아한 기분을 느꼈다. 하여 우선 쫓아갈 생각으로 한 걸음 옮긴 순간. “오빠!” 별안간 유정이 내 앞으로 뛰어들어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왜?” “오빠오빠! 있잖아아~. 우리이~. 오느을~. 파아~티 하면 안 돼? 응?” “…파티?” “응! 봐봐. 지금 분위기 엄청 좋잖아. 이미 다들 밥은 먹었으니까, 간단하게…. 응? 응? 응?” 유정은 한 잔 꺾는 시늉을 하더니 양손을 꼭 맞잡으며 초롱초롱한 눈길을 보냈다. 말끝마다 응을 붙이는 게, 한 마디로 술이 마시고 싶다는 소리였다. “무슨 파티…. 으음.” 처음에는 이제 저녁인데 파티는 무슨 파티냐고 말하고 싶었으나, 주변을 돌아보자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클랜원들이 하나같이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늦은 것도 아닌, 오히려 파티를 벌이기에는 적당한 시간이기도 했고. 결국 무언의 요구를 보내는 눈초리들을 이길 수 없어, 나는 마지못해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대신 적당히 해야 해. 저번처럼 밤새서 술 마시는 건 안 돼.” “꺅! 오빠 최고!” 유정은 두 손을 번쩍 치켜들며 비명을 터뜨렸고, 동시에 거센 환호가 뒤따라 들렸다. 나는 얼굴을 와짝 찌푸리며 귀를 막았다. 그리고 도둑 좀 잡고 올 테니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했으나, 터져 나온 함성에 힘없이 묻히고 말았다. “꺄하하! 그럼 모두 주방으로 돌격!” 유정 또한 이미 신나게 주방으로 달리는 중이라, 나는 결국 조용히 걸어 나오는 길을 선택했다. 저녁 빛이 깔린 정원은 어두컴컴했다. 비비앙의 흔적은 정원을 가로질러, 별관으로 이어져 있었다. 아마 복도를 달려나가, 아예 본관 입구를 빠져나간 모양이다. 그렇다면 숙소로 갔을 가능성이 가장 높을 터. 어디 한 번 잡히기만 해보라고 생각하며, 그리고 실컷 볼기짝을 때려주리라 생각하며, 나는 어두운 정원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런데 잠깐만. 비비앙은, 도대체 왜 아무 말도 않고 성과를 가져갔을까?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어.” 느닷없이 뜻 모를 위화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막 정원으로 들어가려던 나는 본능에 따라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눈앞에 덩그러니 놓인 별관을 보며 가만히 위화감을 느껴보았다. “…….” 왜. 왜 갑자기 불안해지는 걸까? 왜 저 별관에서 이상한 기운이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걸까? 지금 내가 느끼는 기분은 일종의 감으로, 행운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었다. 사실 행운에 관해서는 안솔이 워낙 갑이라서 그렇지 나도 절대 낮은 편은 아니다. 90포인트 정도면 어디 가서 절대로 꿇릴만한 수준이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런 행운이 지금 나에게 끈임 없는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지금 저 별관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고. 들어가는 순간, 내게 틀림없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거라고. 그래. 이 느낌은 꼭…. 더는 내가 아니게 되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랄까? 마치 나 자신을 잃어버릴 것 같다는 느낌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등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생각은 길었지만, 결정은 짧았다. 나는 결국 내 감을 믿기로 했다. 한참 동안 고민한 결과 일단은 발길을 돌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어차피 비비앙이 어디 가버리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용자를 통해 되찾아올 수 있을 테니까. 그러자 조금은 홀가분한 기분이 들어, 나는 야릇한 기운을 흘리는 별관을 뒤로한 채 지체 않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막 입구를 바라보았을 때, 나는 또다시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본관에서는 여전히 쿵쿵대는 미약한 소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가만히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별안간 오늘 밤에 실행하기로 한 계획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바로 이브의 혈통을 사용해 체력을 올리고, 끝에는 화정의 2차 각성을 이루려는 계획이었다. '나중에 올려.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을, 조용한 장소에서.' 불현듯 화정이 말이 떠올라,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정원은 고요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아무도 보이지 않고, 이따금 부드러운 바람만이 스치듯 지나갈 뿐. 나는 차분히 상념에 잠겼다. 아마 지금 식당으로 돌아가면 파티 때문에 적잖은 시간을 잡아먹을 것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지금 계획을 실행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밖으로 나오기도 했거니와, 정원에는 마침 아무도 없었다. 이 정도면 화정의 요구한 조건에 안성맞춤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곧바로 화정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화정아.' - ……. '화정. 화정? 지금 하려고 하는데…. 괜찮아?' - ……. '부인?' - 닥…! 나는 계속해서 말을 걸어보았다. 그러나 잠을 자고 있는 건지, 아니면 아직도 삐쳐있는 건지.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뭐, 잠깐 미약한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잠을 자고 있다고 판단,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차가운 흙의 감촉이 느껴졌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자 이제는 완연히 먹빛으로 변한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물끄러미 하늘을 응시하다가,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오늘 체력을 올리고, 화정의 2차 각성을 이룬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 요동치기 시작한다. 1차 각성으로 얻은 영역 선포. 그렇다면 2차 각성은 어떤 권능을 얻을 수 있을까? 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갈수록 심하게 방망이질하는 가슴을 억누르며, 있는 힘껏 숨을 들이켰다. 이어서 한 번에 내뱉는 것과 함께, 토해내듯이 입을 열었다. “이브의 혈통을 사용한다.” ============================ 작품 후기 ============================ 앞서 창문으로 나간 두 줄기 빛은 과연 어디로 간 걸까요? 과연 수현이 감을 무시하고 별관으로 들어갔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남은 네 개의 성과는 과연 어떤 용도일까요? 성과는 차후 어떻게 사용될까요? 화정의 2차 각성은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을까요? 여러분이 가장 궁금하신 건 어떤 부분이세요? 하하하. :D 0490 / 0933 ---------------------------------------------- 새로운 식구. 『이브의 혈통을 사용합니다.』 『이브의 혈통을 사용할 조건을 설정해주세요.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은 네 가지입니다.』 “네 번째 조건으로 하겠다.” 『이브의 혈통, 네 번째 조건을 선택하셨습니다.』 『체력이 92포인트에서 90포인트로 하향됩니다.』 『하락한 포인트 수치의 2배인, 4포인트가 새로이 생성되었습니다.』 『기준은 하향된 90포인트로 설정됩니다. 이 4포인트는, 91미만의 포인트에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브의 혈통을 사용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몸이 약간 화끈해진 걸 빼고는 딱히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싫은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러는 편이 더 좋다. 생각해보면 화정의 1차 각성도 전쟁을 치르는 도중에 이루어졌고, 그렇게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힘을 발현함으로써 정신을 잃기는 했으나, 지금은 그럴만한 상황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후딱 각성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정리한다. 그리고 축제를 적당히 즐기면서 사용자 정보를 확인한다. 그러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지체 않고 사용자 정보를 개방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수현(3년 차) [근력 96(+2)] [내구 94(+2)] [민첩 98] [체력 90(+2)] [마력 96] [행운 90(+2)]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6(Free)포인트와, 4(Terms)포인트입니다.) 확실히 체력이 딱 2포인트만큼 하락한걸 확인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포인트를 쏟아 부으려다가,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큰 실수를 저지를뻔한 것이다. 이대로 올리면 자유 능력치가 먼저 적용되니 추후 조건 포인트가 적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만큼 적용 순서를 변경해야 했다. 조건 포인트를 먼저 적용하고, 그 다음으로 잔여 능력치를 적용하면 된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수현(3년 차) [근력 96(+2)] [내구 94(+2)] [민첩 98] [체력 100(+2)] [마력 96] [행운 90(+2)]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체력 100포인트를 달성할 수 있었다. 100과 101의 차이를 생각하면 아직 화정을 다루기 한참 부족하지만, 70포인트로 활동하던 시절에 비해 장족의 발전을 이룬 것이다. …사실 약간 허탈한 마음도 없잖아 있기는 했다. 10포인트라면 못해도 두 개는 101, 102를 찍을 수 있는 포인트였다. 예전에 잠시나마 그 힘을 느껴본 바 있어, 어느 정도의 힘을 지녔는지는 몸으로 체감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미 저지른 이상, 그냥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무엇보다 강철 산맥을 공략하면 무조건 1포인트를 얻는다. 그러면 3차 각성을 이룸과 동시에, 화정을 완전히 다룰 수 있게 된다. 이미 102 능력치보다 화정의 힘을 상위로 생각하는 만큼, 이번 결정에 후회는 없었다. 아무튼, 이제는 2차 각성만이 남은 건가? '화정? 화정!' 나는 곧바로 화정에게 말을 걸었다. 역시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제 어쩌나 머리를 갸웃할 무렵, 나는 곧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허공으로 익숙한, 그러나 예전과는 조금 다른 메시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화정(火正)의 각성 2단계, 염안(炎眼) -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은.”가 시작됩니다.』 1단계는 영역 선포, 태고의 격으로 명할지 어니. 2단계는 염안,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은. 이때, 갑자기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마치 예전에 겪은 적이 있는, 마치 온 세상이 멈춘듯한 기분이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그리고 심장이 거세게 고동치는 소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전에도 그랬듯이, 세상은, 시간은 멈춘 게 아니었다. 주변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이따금 바람이 불어 풀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다만 그 속도가 마치 저속으로 되감기를 하는 것처럼, 매우 느릿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었다. 화륵, 화르륵! 눈앞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세상이 붉게 변한 건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갑자기 시야가 붉은색 일색으로 변했다는 것. 조금 전까지 각양각색을 보이던 정원의 풍경이 이제는 모두 붉게 보인다. 그때였다. 화륵! 일순간 눈앞이 번쩍 튀는가 싶더니 돌연히 눈동자에 화끈한 기운이 느껴졌다. “큭!” 나는 반사적으로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웬만한 통증에는 면역이 돼있다 생각했는데, 이건 차원을 달리하는 고통이었다. “크악! 크아아악!” 뜨거운 불에 녹인 쇳물을 그대로 부으면 이런 느낌이 들까? 흡사 눈동자가 녹아 내리는 것 같은 이 기분은, 정말이지 상상 그 이상이었다. 화륵, 화르륵! 그렇게 한동안 눈을 쑤시는듯한 통증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 불길이 재차 터져 나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삽시간에 주변이 뜨겁게 변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모른다. 시선을 돌릴 여유도 없다. 그저 주변에서 전해오는 감각에 겨우 상황을 인지할 뿐,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눈을 감았다가 떴다를 반복한다. “크으으으으으으으!” 결국 시시각각 차오르는 고통을 참지 못해, 지면에 벌렁 드러눕고 말았다. 동시에 약간이나마 후회하고 말았다. 1차 각성과 크게 다를 건 없다고 여겼는데, 찾아든 고통은 생각보다 끔찍했다. 처음 화정을 받아들였을 때처럼, 나는 눈물이 줄줄 흘러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화륵, 꽝! 화르륵, 꽈꽝! 이윽고 거센 폭음이 귓가를 울릴 무렵. 나는 모든 감각이 끊어지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하얗게 변하는 현상을 볼 수 있었다. 시야뿐만이 아니라, 머릿속에도 말이다.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친숙한 현상. 그러니까, 이제 곧 기절하게 되는 건가. 그러자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 이내 눈앞에 셔터를 내리듯이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모든 감각이 끊겼는지 더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잠시 후. 실처럼 뜬 눈 사이로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아직도 붉어 보이는 세상과 허공에 춤추듯 일렁이는 불꽃. 그러다 문득, 불꽃 사이로 한 줄기 기다란 불길이 뻗어 나와 내 눈을 덮은 것이었다. 그것이 마치 얼른 눈을 감으라는 듯 쓸어 내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 “오라버니! 괜찮아요? 오라버니, 오라버니!”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러자 눈앞으로 잔뜩 걱정하는 얼굴을 한 안솔이 보였고, 주변으로 비슷한 눈초리를 보내는 클랜원들도 보였다. 세상은, 여전히 붉었다. 지금 내가 있는 장소는 아무래도 식당인 것 같다. 반사적으로 창문을 쳐다보니 어둡고 붉은 밤 풍경이 보였다. 그렇다면 기절한지 그리 오랜 시간은 지나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갑자기 까닭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으음.” 나는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러자 안솔이 나를 보며 외쳤다. “오라버니! 괜찮아요?” “응?” “눈이, 눈이 이상해요! 붉은색이 번뜩이는 게…!” “붉은색이라.” 나는 우선 몸 상태를 점검했다. 그리고 있는 힘껏 힘을 주자, 생각보다 가뿐히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에서 더없이 개운한 기분이 느껴졌다. 과연. 이게 체력 100의 영향인가? 그러면 각성 중 겪은 과정은 도대체 뭘까? 해답은 한 명만이 알고 있으리라. '화정?' - …으응. 화정은 다행히 대답해주었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힘이 없어 보인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 내가 어떻게 된 거지? 말해줄 수 있어?' - …2차 각성은 무사히 완료됐어. 그리고 눈이 그렇게 된 거는…. 단순히 첫 각성의 영향에 불과해. 아마 하루 이틀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거야. 그러니 그때까지만 참아…. '너…. 괜찮으냐?' - 안 괜찮아. 간만에 현신해서 엄청 피곤해…. 그러고 보니 다 너 때문이잖아? 괜히 선물을 준다고…. '선물?' - …일단 나중에 얘기하자. 나 지금 너무 졸려. 아무튼 잘못된 건 없으니까, 이상한 걱정은 하지 말라고…. 여차하면 이 몸이 책임져줄게. '책임? 뭘 책임져? 화정? 화정!' 화정은 뜬금없는 말들을 내뱉었다. 당최 이해하지 못해 몇 번을 불러보았으나, 화정은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기야 목소리에서도 깨나 피곤하다는 걸 느꼈는데, 정말로 잠이 든 모양이다. “오라버니….” 그때, 문득 안솔의 조용한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나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식당에는 어색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고, 클랜원들은 불안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다들 병을 하나씩 들고 있는 걸 보아하니, 본의 아니게 축제를 망친 모양이다. 더구나 한동안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으니 더욱 이상하게 생각했으리라. 그러자 조금이지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2차 각성에 대해서는 내일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고, 우선은 이 자리에 집중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이거, 정말 미안합니다. 제가 즐거운 분위기를 망쳤나 보네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오….” “몸을 말하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잠깐 사소한 실수였을 뿐입니다.” “…….” 나름 해명은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은 것 같다. 여전히 시선은 거둬질 줄을 몰랐고, 특히 대부분이 내 눈동자에 꽂혀있었다. 이게 그렇게 이상해 보이나? 색 눈동자를 가진 사용자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닌데. 아무래도 화제를 돌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흘끗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곧, 아주 좋은 화제를 하나 찾을 수 있었다. 식당 한쪽 구석에 비비앙이 무릎을 꿇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양손을 든 채로. 그러고 보니, 원래 비비앙을 찾으러 나간 거였지. 턱짓으로 가리키자 누군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허준영이었다. “내가 잡아왔다. 네가 나가고서 한참 동안 들어오지 않아 나가보니, 정원에 쓰러져 있더군. 그래서….” “…설마, 내가 비비앙한테 당한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럴 가능성은 0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 뭐, 겸사겸사 가져간 성과를 되찾을 생각도 있었고.” “아, 아니야! 성과는 가져갔지만, 김수현은 나도 모르는 일이라고!” 허준영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비비앙이 억울해하는 얼굴로 외쳤다. 그리고 나는 한숨을 흘렸다. “후. 맞아. 비비앙이 그런 건 아니야. 내 실수였어.” “그, 그렇지?” “하지만.” “힉!” “…너. 뭘 잘못했는지는 알고 있지?” “그, 그게…. 미안…. 보자마자 정신을 빼앗겨서…. 나도 모르게 그만…. 정말 미안해….” 엄한 목소리로 말하자, 비비앙은 곧바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도 자기가 잘못한 건 아는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성과를 아무 말도 않고 가져갔다는 사실은 이대로 절대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즉 선례를 남기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옜다.” 철그렁, 철그렁! 툭! 무언가 검은색 물체가 휙 허공을 날더니 무릎 꿇은 비비앙의 앞으로 툭 떨어졌다. 비비앙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나는 잠깐 눈을 깜빡이다가, 놀란 마음에 허준영을 돌아보았다. 허준영이 비비앙이 가져간 성과를 도로 줘버린 것이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허준영은 무심한 얼굴로 비비앙을 응시하더니 귀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냥 주는 건 아니야. 어차피 연금술사인 이상 나중에 어떻게든 받아낼 건 있겠지. 그리고….” “…그리고?” 나는 일단 허준영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자 불쾌한 빛을 떠올린 허준영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구즈 어프레이즐을 봤는데,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가더군. 매혹 마법이 걸려있었어. 특히 저 치녀는 절대 피할 수 없는 매혹이….” “매혹 마법?” “그래. 그리고 어차피 나한테는 쓸모도 없는 성과야. 아니, 가지고 싶지 않은 성과라고나 할까? 간만에 아주 더러운 것을 봤어. 저런 건 차라리 가져가주는 편이 나아.” “…아무리 그래도.” 도대체 뭔가 싶어 시선을 돌렸으나, 비비앙은 이미 성과를 품 안에 넣은 상태였다. 그것도 화색이 만연한 얼굴로. 그리고 이내 정말 고마워하는 얼굴로 허준영을 바라보았으나, 나는 이를 갈았다. 그런 기색을 느꼈는지 허준영이 내 어깨를 톡 치며 말했다. “김수현. 이 자리에서는 그냥 적당히 넘어가주면 안되겠나? 괜히 나 때문에 얼굴 붉히기는 싫은데.” “그러지 못하겠다면?” “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라, 적어도 이 장소에서는 말이다. 얼마 전 안현도 그렇고…. 이 좋은 자리에서, 괜히 피곤해지기는 싫다.” “…쯧.” 허준영은 조심스레 안현을 들먹였다. 나는 혀를 찼다. 내가 갈등하는 걸 느꼈는지, 비비앙은 떨떠름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허준영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것 같았고. 결국 나는 머리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나 물론, 한 마디 하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 “비비앙. 너 나중에 꼭 한 번 나 좀 보자.” “으, 응. 정말로 미안해. 진짜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 이윽고 비비앙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성과 사건은 일단락됐다. 허준영의 부탁대로, 일단 이 자리에서는 말이다. 고요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나는 시선을 돌렸다. 테이블에는 이제 일곱 개의 성과가 남아있었다. 나는 두어 번 손뼉을 쳐 주의를 환기시킨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판도라의 상자에서 나온 성과는 오롯한 사용자 허준영의 소유입니다. 법칙은, 다들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만일 원하는 성과가 있다면 소유주와의 대화를 통해 얻으시면 됩니다.” 한 마디로 거래를 하라는 소리였다. 너무도 당연한 얘기라 클랜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웅성거리는 소리가 식당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아까처럼 불타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나는 일단 화제를 돌렸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이제 적당히 허준영을 축하해주는 분위기로 몰아가면 축제는 계속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마음에, 나는 있는 힘껏 기지개를 피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축하한다. 허준영. 아까 잠깐 봤는데, 좋은 것들 많이 나왔던데?” “음. 그렇더군. 뭐, 원하는 거라도 있나? 너와 안솔한테는 조금 양보할 생각도 있는데.” 허준영은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없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 아무튼 아직 다 본 건 아니라서….” “아니마 오라티오?”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막 테이블로 걸어가려던 것을 멈추고 도로 허준영을 돌아보았다. 아니마 오라티오. 정확히 맞췄다. “원한다면…. 못줄 것도 없는데.” 허준영은 나를 흘끔 살폈다. 그러자 기분이 착 가라앉음을 느꼈다. 허준영의 눈에서, 무언가 기이한 열망이 스쳤다. “…아무래도 원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우선 말이라도 해봐.” 허준영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천천히 음미하는 얼굴로 입을 움직이고는 목울대를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러더니, 이내 차분히 술잔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어빌리티. 네가 사용하는 어빌리티 중, 하나를 배우고 싶다.” * 시간의 흐를수록 밤은 깊어졌고 정원에는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8층까지 올라간 건물의 1층에서는 여전히 환한 빛을 비췄고, 떠들썩한 소리들이 즐겁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정원의 한구석은 조용하기 그지없다. 사방이 칠흑 같았고, 오직 밤하늘의 달만이 찬연한 빛을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건물에 비해 이 정원의 구석이 외로워 보이는 건 아니었다. 쓸쓸해 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건물에 흐르는 기운과는 조금 다른, 훈훈한 기운이 일대를 감돌고 있었다. 마치 어머니가 아가를 품을 때 느낄 수 있는 그런 따뜻함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한 기운의 근원은, 풀 사이로 웅크리고 있는 어떤 하얀 것에 있었다. 온몸을 덮은 은백색 털. 이제 제법 비죽이 솟아오른 뿔. 하얀 것의 정체는 바로 아기 유니콘 유미였다. 아니, 이제 아기라는 말은 적당치 않다.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며 유미도 성장해, 이제는 망아지라고 부를만한 정도는 되는 것이다. 달빛을 받으며 조용히 잠들어있는 유미의 자태가 약간은 불편해 보인다. 예전처럼 편하게 드러누워 자는 게 아닌, 무언가를 품은 듯 한없이 움츠러든 모습이다. 그것은, 아니 그것들은 길쭉하고 둥근 타원형으로, 알과 아주 흡사한 모양새였다. 그리고 한 개가 아니라 두 개였다. 하나는 한 점의 티도 찾을 수 없는 깨끗한 백색이었고, 다른 하나는 진한 노란빛을 띠고 있었다. 말인즉슨, 유미는 두 개의 알을 품은 채 잠들어있었다. 하지만 유미가 푹 잠들어있는 것에 반해, 알들은 그렇지 못한 모양이다. 불편한 자세를 감수하며 밤의 추위에 지켜주려는 것도 모르고, 이따금 살짝살짝 들썩이거나 이리저리 움직이는 등, 오만 방정을 다 떨고 있었다. 뀨르르르…. 그러자 유미도 뭔가 이상함을 느낀 탓일까. 살그머니 고개를 들더니, 비죽 혀를 내밀어 움찔거리는 알들을 핥는다. 하지만 그건 알들의 이상함을 확실히 인지했다기보다는, 잠결에 본능에 따라 핥은 것처럼 보였다. 이내 알들의 움직임이 서서히 잦아들자, 유미는 도로 품에 안으며 고개를 묻었다. 어쩌면, 유미가 가물가물하게나마 눈을 떴다면. 그랬다면 이 변화를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지금 알들의 겉면에 은은한 빛이 스며들어 빛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표면에 미세한 금이 생겼다는 사실을. ============================ 작품 후기 ============================ 이상하네요. 글은 업데이트가 되는데, 정작 보려고 하니 페이지가 뜨지 않습니다. 지금 저만 이런 건가요? 참고로 데스크 탑이에요. 0491 / 0933 ---------------------------------------------- 새로운 식구. 다음날. 나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지하 연무장으로 내려갔다. 어젯밤 사용자 정보와 화정의 2차 각성 등 여러 부분에서 변화가 생겼는데, 사실 크게 체감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니,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좋은 현상이라고는 볼 수 없다. 사용자의 강함은 사용자 정보의 완벽한 이해서부터 비롯된다. 지금 내 정보의 수준이 어떤지, 이 정보로 어느 정도의 출력을 낼 수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식으로 전투를 해야 할지. 이러한 것들을 토대로, 사용자는 자신의 사용자 정보에 가장 걸맞은 전투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출력의 효율에 문제가 생겨버리니까.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수현(3년 차) [근력 96(+2)] [내구 94(+2)] [민첩 98] [체력 100(+2)] [마력 96] [행운 90(+2)]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지하 연무장 중앙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나는 차분히 사용자 정보를 응시했다. 능력치를 집으로 비유한다면 체력은 기둥이다. 능력치를 나무로 비유한다면 체력은 뿌리다. 능력치를 자동차로 비유한다면 체력은 프레임이다. 말인즉슨, 체력은 다른 능력치들이 온전한 출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버텨주는 지지대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문득 체력 능력치가 70포인트이던 시절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는 정말로 힘들었다. 한없이 낮은 체력은 나를 쉽게 지치게 하였다. 높은 능력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음껏 전투해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화정? 사용할 때마다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지금 현재, 체력은 6개의 능력치 중 최고로 높은 포인트를 기록하고 있었다. 가장 낮은 포인트로 나를 괴롭히던 천덕꾸러기가, 3년이라는 시간을 거쳐 훌륭한 조력자로 변모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실제로 확인해볼 차례였다. 나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귀에 걸은 귀걸이를 빼자 하얀 빛과 함께 오른손에 빅토리아의 영광이 잡혔다. 잠시 그 상태로 호흡을 가다듬은 후, 횡으로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확인 절차를 시작했다. 훙! 검은 아주 가볍게 허공을 가르며 지나갔다. 분명히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다. 그런데 손에서 무언가를 자른듯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 증거로 검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빛이 벌어진 틈으로 스며들어, 흐릿한 잔상을 남기는 중이었다. 이내 눈앞에 아름다운 은빛 호선이 그려졌을 즈음, 나는 살며시 웃을 수 있었다. 딱 한 번 검을 그어봤을 뿐인데, 이전과는 사뭇 다른 묵중함이 느껴진 탓이다. 거기다 속도는 한층 더 상승했다. 체력이 제대로 뒷받침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럼 마력 증폭으로 어디까지 출력을 낼 수 있을까? 나는 곧바로 마력을 일으켰다. 회로에 마력이 돌기 시작하자 주변의 공기도 요동치기 시작한다. 나는 의도적으로 검의 속도를 낮췄다. 하지만 그럼에도 검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마력의 흐름은 격렬하기 이를 데가 없다. 마치 들끓는 물처럼 허공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나는 서서히 마력을 높이며 춤을 추는 기분으로 마음 가는 대로 검을 긋고, 찔러보았다. 검 끝으로 싸늘한 기운이 피어오르며 속도에 점차 탄력이 붙는다. 그러자 금세 기세가 일변해 예리한 기운이 사방을 긁고 찌르기 시작했다. 나는 가볍게 발을 미끄러트렸다. 한 걸음 디디며 횡으로 베고, 몸을 돌린 후 종으로 올려 치고, 옆으로 움직이며 한 번 강하게 끊어 치고, 앞으로 뛰면서 사선으로 베어 내렸다. 쐑, 쐑, 쐑, 쐑! 허공을 찢는 소리가 자못 요란하다. 그리고 가볍다. 아니, 가벼우면서 무겁다…? 아니, 아니야. 예전에는 무겁던 일격이 지금은 너무나 쉽고 가볍게 느껴졌다. 70포인트 때는 양손으로 있는 힘껏 후려야 간신히 나오던 위력이, 100포인트에 이르러서는 그냥 가벼이 휘두르는 일격에 비슷하게 터져 나오는 것이다. 펄럭! 뒤늦게 하늘의 영광이 나부꼈다. 그리고 조금씩 가라앉을 즈음, 빅토리아의 영광을 상단으로 들어 조용히 숨을 흘렸다. 여기까지 오는데 1초. 아니 2초? 머리를 갸웃한 후, 나는 힘껏 발을 굴러 도약했다. 그리고 짧은 기합을 내지르며 빈 허공을 향해 검을 후려쳤다. “흣!” 펑펑펑펑! 한 번의 기합과 동시에 네 번의 후려침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발이 땅에 닿았다. 닿자마자 재차 도약하며, 나는 아직 잔상이 남은 허공을 향해 또 한 번 검을 후려갈겼다. “하앗!” 펑펑펑펑펑펑! 이번에는 여섯 번의 폭음이 연이어 연무장을 울렸다. 어찌나 강한 울림인지 지면에 미약한 지진이 생겼다 해도 믿을 정도였다. 물론 설령 그렇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지하 연무장은 어지간한 충격에도 버틸 수 있도록 설계돼있으니까. 다시 발이 땅에 닿고 나는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문득 머리가 부쩍 상쾌해진 게 느껴졌다. 머리뿐만 아니라 몸도 가뿐하기 그지없다. 사실 간단한 자세들에 불과했지만, 오히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힘이 더욱 솟는 기분이었다. 아니. 실제로도 그랬다. 나는 이제야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자세한 건 조금 더 해봐야 알겠지만 대충 감은 잡은 것이다. 1회 차 때 내 전투법은 두 가지였다. 초반부터 모든 힘을 쏟아 부어 쉴 새 없이 몰아붙이거나, 아니면 적당히 수비하며 틈을 노리다가, 기회가 생겼을 경우 역시 모든 힘을 쏟아 부어 치고 나가는 것. 한 마디로 실패하면 도주밖에 길이 없는 양날의 검이었다고나 할까? 이러한 전투법은 2회 차로 오면서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체력 능력치가 90포인트로 오르면서 조금 사라지기는 했지만, 언제나 마음 한구석으로는 체력이 빠르게 소진될 것을 대비해 움직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더는 눈치 보며 싸우지 않아도 된다. 체력은 지지대 역할을 해주는 걸 넘어서, 능력치들이 본래 이상의 힘을 낼 수 있도록 확실하게 밀어주고 있었다. 말인즉슨, 전투 수행에 대한 선택의 폭이 비약적으로 넓어졌다는 소리였다. 나는 비로소 다른 능력치를 101, 102로 올리지 못한 아쉬움을 완전히 털어낼 수 있었다. 사용자 정보 면에서나 아니면 화정을 사용하는 면에서나. 두 번 세 번 생각해보아도 체력을 올린 건 정말로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래. 안정성을 확보함으로써 나는 확실히 더 강해졌다. 이 정도면 전성기 시절의 공찬호도 이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하~. 체력은 어느 정도인지 확인했으니…. 이제 화정의 각성만 확인하면 되는 건가?” 나는 매우 만족한 기분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다 불현듯 2차 각성에 생각이 미쳐, 화정에 말을 걸어보았다. '화정?' 조금 기다려보았으나 화정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어제는 피곤하다고 내일 말하자고 했던 주제에,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만 지하 연무장을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어제 2차 각성 이후로 화정의 남용에 대한 경계를 되새길 수 있었다. 이 힘은 내가 함부로 다룰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확인해본답시고 멋대로 힘을 일으켰다 또 기절하느니, 화정의 조언 아래 안전하게 수행해가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리라. 그렇게 생각한 나는 간만에 유쾌한 기분으로 지하 연무장을 가로질렀다. 강해진다는 사실은 언제나 사람의, 사용자의 기분을 들뜨게 만들어준다. 이윽고 문을 열고 계단을 바라본 순간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계단 아래로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진한 보랏빛이 감도는 장발. 한쪽 다리를 구부려 발을 벽에 대고, 비스듬히 기대어있는 사용자는 바로 허준영이었다.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눈동자 한 쌍이 나를 흘끔 응시한다. “눈동자 색이 원래대로 돌아왔군. 어제 홍안도 깨나 어울리던데 말이야.” 나는 반사적으로 눈가를 더듬었다. 그러다 아직 빅토리아의 영광을 쥐고 있는 걸 깨달아, 다시 귀걸이로 변환시킨 후 귀에 걸었다.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허준영은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차듯이 발을 떼더니 뚜벅뚜벅 내 앞으로 걸어와 눈을 마주쳤다. “어제 제안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은데.” “…어빌리티를 배우고 싶다는 거?” 어젯밤 허준영은 나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나온 성과를 넘기는 조건으로, 내가 보유한 어빌리티를 가르쳐달라고 한 것이다. “그래. 정확히는 네가 이형환위라 명명한 능력 말이다.” “흠.” 나는 가만히 턱을 매만졌다. 허준영의 돌려 말하지 않는 성격은 시원했으나, 이번만큼은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형환위는 내가 사용하는 어빌리티 중에서도 가장 효용이 높은 어빌리티였으니까. 개나 소나 사용하는 검기와는 차원이 다른 어빌리티였다. 내가 고민하는 기색을 느꼈는지, 허준영은 평소답지 않은 조금은 달아오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니마 오라티오만으로 부족하다면…. 다른 성과들도 넘길 용의가 있다. 밤새 생각하고 결정한 거야.” “다른 성과?” “그래. 필요하다면 전부를 넘기는 한이 있더라고 말이야.” “전부라.” 나는 피식 웃었다. “흐. 그 정도로 이형환위를 배우고 싶은 건가?” 허준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이한 열망이 어린 눈을 보니 그 심정을 알 것만도 같았다. 허준영의 눈동자는 내게 말하고 있었다. 강해지고 싶다고.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성과를 모두 넘긴다는 말이 약간 의외이기는 했지만, 이내 허준영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에 나온 성과들은 확실히 대단했으나, 허준영 개인에 국한하면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은 고작 한두 개에 불과하다. 물론 아니마 오라티오도 강해지는 수단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어떤 능력이 개화될지 모르니, 허준영은 차라리 이 모든 성과를 포기하고 확실히 강해지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다면, 허준영은 이형환위를 배움으로써 자신이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확신을 내렸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나 또한 동의하는 바였다. 허준영이 이형환위를 익히게 되면 분명 무궁무진한 효율을 낼 수 있을 테니까. 좌우간, 모든 성과를 넘긴다는 제안은 나로서도 조금은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어젯밤 축제 중 앞서 보지 못한 성과들의 정보를 확인했는데, 하나같이 매우 쓸만한 것들이었다. 『메모리아 스톤(Memoria Stone).』 (내용 : 이제는 소실된,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메모리아 스톤입니다. 일반적으로 마법 재료로 구분되나, 그보다 워프 게이트 건설의 핵심 재료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 중요성을 드러내는 사례로 '모든 것을 갖췄더라도 메모리아 스톤이 없으면 워프 게이트를 건설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메모리아 스톤만 있으면 워프 게이트를 건설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코델리아(Cordelia).』 (내용 : 바다의 보석, 코델리아입니다. 북쪽의 아직 알려지지 않은 바다에, 심해 깊은 곳에서만 서식하는 에브게니아라는 조개가 있습니다. 가장 깨끗한 장소만 찾아 다니는 에브게니아는 바다의 보물인 로씨오라는 해초만 먹고 자랍니다. 그리고 10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아직 살아남은 에브게니아 조개에 한해서 맑은 바다 빛 보석이 탄생합니다. 그 보석이 바로 코델리아입니다. 사용자가 이 보석을 복용할 시, 체내의 노폐물이 제거되며 마력의 흐름이 한층 원활해지는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항상 청량한 기분과 개운함을 느낄 수 있으며, 피부가 깨끗해지는 등 미적 효과도 상당합니다.) 『베가스 스티그마(Vagus's Stigma).』 (내용 : 설명 : 고대 홀 플레인에 노예 검투사의 해방을 이끌었던 용병 왕, 험프리 베가스의 낙인, 베가스 스티그마입니다. 일견 불에 달구어 찍는 도장처럼 보이나, 피부에 낙인을 찍을 경우 비로소 진정한 힘이 드러납니다.) 성과에 대한 생각을 마친 나는 가만히 허준영을 응시했다. 눈동자는, 여전히 강함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기실 이형환위를 가르치려는 마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 대상이 허준영은 아니었고, 원래는 안현과 유정이에게 가르칠 계획이었다. 이미 나를 따르는 애들이기도 했거니와, 이왕 써먹으려고 키웠으니 더욱 확실히 써먹자는 취지에 세운 계획이었다. 어쨌든 그렇다고 해서, 허준영이 둘과 비교해 딱히 건더기가 있는 사용자는 아니다.(사실 문제라면 그 둘이 더 문제겠지만.) 허준영은 겉으로는 차갑고 냉철해 보여도, 속으로는 일말의 따뜻함을 간직한 사용자였다. 하지만 다른 차원의 문제가 하나 있다면, 이따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허준영이 어떤 사용자인지 아직 잘 모르고 있다는 것. 1년이라는 시간과 사용자 정보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고민하는 시간이 너무 길었던 모양이다. 나는 머리를 세게 긁었다. 그리고 서너 번 입맛을 다시고 나서, 허준영을 그대로 지나쳤다. “우선은 나가자. 여기는 너무 어두워.” “김수현?” “정원으로 나가자고. 거기서 몇 가지 시험할게 있으니까.” “시험…? 그러면!” 허준영은 금세 뒤로 따라붙었다. 나는 한숨을 흘리며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후유. 아직 확실히 대답한 건 아니야. 보고 결정할 거야, 보고.” “그럼 통과하면 가르쳐주겠다는 건가?” “그럴지도. 그런데 너 이거 익히면 머셔너리에 뼈를 묻어야 할 텐데. 괜찮겠어?”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도 염치는 알고 있고, 그리고 애당초 머셔너리도 너 때문에 들어온 거니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얘기였는데, 허준영은 제법 진지하게 대답했다. 나는 어깨를 한 번 들먹인 후 바로 계단을 올랐다. “뭐야 그게. 나 때문에 들어왔다니.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그리고 쓰게 웃으며 1층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젖힌 순간이었다. 끼익. 문이 열림과 동시에 지상의 공기가 콧속으로 물씬 흘러들었다. 그러나 한 걸음 채 내디디기도 전에, 나는 절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이 냄새는….” 미약하지만, 비릿한 피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 작품 후기 ============================ 아. 어제 코멘트 보다가 정말 웃겨 죽는 줄 알았습니다. 배꼽이 빠지는 줄 알았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 1단계 각성, “태고의 격으로 명할지 어니.” 2단계 각성,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은.” 예.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요. 3단계 각성. “나는 김수현의 부인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진짜 이런 게 어디 있습니까. 마지막 멘트가 나는 김수현의 부인이라니요. 강제 결혼인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아이고. 어디 보자. 이 파트가 끝나면, 휴식 파트도 끝입니다. 그리고 바로 준비 파트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물론 어떤 것을 위한 준비인지는 독자 분들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아마 다 다음 회 쯤에 세라프가 후반 내용에 등장하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가겠네요. 이제 슬슬 1회 차 애들도 등장시켜야겠죠? :) 0492 / 0933 ---------------------------------------------- 새로운 식구. “아무래도 시험은….” “상관없다. 그보다 김수현. 어서.” 다음 기회로 미루자고 말하려는 찰나 허준영이 빠르게 선수를 쳐버렸다. 아마 얘도 이 냄새를 맡은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코를 두어 번 킁킁거린 후 지체 않고 걸음을 옮겼다. 가면 갈수록 피 냄새는 더욱 진해지고 있었다. 이내 1층 로비에 도착하자 어쩔 줄 몰라 하는 고용인들이 보이고, 동시에 냄새의 근원지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더는 코를 킁킁거릴 필요도 없다. 고용인들이 하나같이 건물 밖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정원에 도착했을 때, 십 수명의 클랜원이 모여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아니 많이 다른 상황을 볼 수 있었다. 먼저, 사샤가 지면에 쓰러져 있었다. 상반신을 일으킨 것으로 보아 죽지는 않은 것 같은데, 얼굴이 멍멍해 보이는 게 깨나 놀란 듯 보였다. 그리고 건너편에는, 10미터쯤 되는 거리를 두고 하얀 동물이 꼿꼿이 서 있었다. 유미였다. 척 봐도 유미의 상태는 이상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은은히 빛나는 뿔에 묻은 핏자국이었다. 아마 모종의 이유로 사샤를 찌른 듯싶은데 이유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눈매는 잔뜩 일그러져있고 꼬리는 빳빳하게 세운 상태였다. 한 마디로 무척 화가 나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아! 클랜 로드!” 재빠르게 다가가 물어보자 마침 사샤를 치료하던 박다솜이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입만 오물거리다 도로 유미를 바라보는 게 딱히 할 말은 없는 모양이다. 나는 발을 들어 사샤를 툭 건드렸다. “사샤. 괜찮나?” “아…. 괘, 괜찮다. 클랜 로드.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야.” “그럼 말해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게….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잘 있나 싶어서 다가가려 했는데, 갑자기 뿔로 나를….” 후르르르! 그때 유미가 큰소리로 울어 젖혔다. 어딘가 모르게 억울함이 느껴지는 소리였다. 사샤는 바로 입을 다물었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세한 상황은 모르지만, 우선은 주변을 정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유미는 지금 극도로 불안해하는 상태처럼 보이기도 했으니까. “사용자 박다솜. 사샤를 안으로 데려가서 치료해주세요. 그리고 다른 분들도 여기 계속 서 있지 말고, 우선은 안으로 들어가주세요. 유미가 불안해하는 것 같으니 제가 한 번 달래보겠습니다.” 사샤는 그러겠다 대답한 후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군말 않고 절뚝절뚝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내 클랜원들도 한 명 한 명 본관으로 들어가자 정원에는 나와 유미 둘만 남게 되었다. 나는 차분히 유미를 응시했다. 그렇게 서로 보며 약 3초의 시간이 흐르자, 이내 빳빳하던 꼬리가 살그머니 내려가는 게 보였다. 그 순간, 나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양팔을 내밀었다. “유미야. 이리 온.” 뀨르르르…! 다행히도, 유미는 울먹울먹한 소리를 내더니 한달음에 달려와 안겨 들었다. 몸에서 덜덜 떠는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부드러이 등을 토닥여주었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렁그렁한 눈망울과 마주하며 뿔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다. “그래 그래. 그런데 사샤한테 왜 그랬어. 둘이서 무슨 일 있었니?” 유미는 품에 묻은 얼굴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앞다리를 들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보라고?” 그러자 고개를 끄덕끄덕. 아무래도 그러라는 의미인 것 같아, 나는 머리를 갸웃하면서도 유미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정원의 끝, 그러니까 담 아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지점에 다다랐을 때. 발버둥쳐 내 품을 벗어난 유미는 구석으로 달려가 나를 돌아보았다. 하여 도대체 뭔가 싶어 아래로 시선을 내린 순간. 나는 크게 기함하고 말았다. “이건…?”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절반 이상이 깨져있는 두 개의 알. 그리고 그 알들 앞으로 두 생명체가 곤히 잠들어있다. 나는 숨을 내뱉을 생각도 못한 채 한동안 눈만 깜빡였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들었던 하연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 유미요? 지금 무척 바쁠 거예요?' '호호…. 보시면 조금 놀라실지도 몰라요.' 아, 그런 건가. 유미가 요새 안보인 이유는 알을 품고 있어서였나. 그리고 사샤를 찌른 이유는 알에서 태어난 새끼들을 지키기 위해서였고. 유니콘이라는 종족의 부성애나 모성애를 생각해보면 아주 납득 못할 일은 아니었다. 더욱이 대상이 뱀파이어인 사샤라면 더더욱. 이제야 이해가 가는 것 같아, 나는 새삼스런 마음으로 두 생명을 바라보았다. 페가수스의 알과 요정 여왕의 알. 하나는 카오스 미믹에서 얻었고, 다른 하나는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에서 얻은 것이었다. 물론 엄연한 성과라고 할 수 있으나, 사실 여태껏 큰 신경을 썼던 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굳이 부화시킬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실은 끽해야 언제가 프라이로 부쳐먹을 생각을 한 게 전부였다.) 그런데 설마 유미가 품어 부화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나로서는 생소한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게 과연 좋을 일일까? 아니면 나쁜 일일까? 좌우간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어, 나는 꼬물꼬물 뒤척이는 두 생명을 조용히 응시했다. 아기 페가수스는 마치 유미의 어린 시절을 꼭 닮은 모양새였다. 아기 고양이만한 크기와 약간 젖어있는 백색의 털. 그러나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마에 뿔이 없다는 것과 등에 자그마한 한 쌍의 날개가 달려있다는 것 정도? 이어서 아기 요정으로 시선을 돌린 찰나, 나는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나도 모르게, 절로 무릎을 꿇을뻔했다. 갓 태어난 탓에 비록 몸에 흙이 약간 묻어있었으나, 그걸 제외하고서라도 주변에 흐르는 거룩한 기운과, 깨끗한 모습이 너무도 놀라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굴. 온순해 보이는 얼굴과 살포시 다물어진 입술은, 한 여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인상이었다. 머리칼은 마르가리타와 같은 은은한 은빛을 발하고 있었고, 새하얀 등에 살짝 돋아난 한 쌍의 날개는 고결하기 그지없다. 머리칼 사이로 비죽 솟은 귀가 그나마 앙증맞게 보여, 이 요정이 아기라는 사실을 겨우 깨달았을 정도였다. 그래. 나는 이 아기 요정을 보자마자 요정 여왕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둘은 꼭 닮아있었다. “…….”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한참 동안 멍하니 아기 요정에 눈을 떼지 못하다가, 나는 아차 한 생각이 들어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이제나저제나 거주민 사이서 태어났으니 거주민 정보가 뜰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허공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 거주민 정보(Native Status) > 1. 이름(Name) : -(미정) 2. 클래스(Class) : -(미정) 3. 소속 국가(Nation) : -(미정) 4. 소속 단체(Clan) : -(미정) 5. 진명 • 국적 : 하프 엘프(Half Elf), 요정 여왕의 후계자 • 요정의 숲 6. 성별(Sex) : 여성(0) 7. 신장 • 체중 : 43.7cm • 2.7kg 8. 성향 : 질서 • 순수(Lawful • Pure) [근력 1] [내구 2] [민첩 2] [체력 7] [마력 87] [행운 97] < 업적(0) > < 고유 능력(1/1) > 1. 가네샤의 축복(Rank : EX) < 특수 능력(0/0) > 1. 꺼지지 않는 지혜의 빛(Rank : F Zero) < 잠재 능력(0/0) > 1. -. 2. -. 3. -. * 가네샤의 축복을 받아 태어난 요정입니다. * 인간 역사상 최고의 마법사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와, 최후의 요정 여왕 마르가리타 달란트 비트라이스 사이에 태어난 자식입니다. 비록 그 과정이 끔찍했다고는 하나, 최고의 마력 재능과 최고의 요정이 될 자질을 물려받은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직은 아기에 불과할지 몰라도, 무시무시한 성장성과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엽기적인 정보일까. 이제 갓 태어난 아기가 마력 능력치가 87포인트, 행운 능력치가 97포인트라고? 아니 그전에, 고유 능력과 특수 능력이 개화된 상태라고? 나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계획에 없던 일이라 어쩔 줄 모르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탓에 아직 멍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바스락, 풀을 밟는 거슬리는 소리가 흘러들었다. 그와 동시에, 나와 가까이 있던 아기 페가수스가 눈을 반짝 떠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삐이?” 작은 입에서 터져 나온 나지막한 울음소리.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주제에, 소리의 근원지를 찾으려는지 아니면 다른 누가 있다는 걸 느꼈는지. 아기 페가수스가 고개를 두리번두리번거리자 유미가 얼른 다가가 혀로 핥아주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나는 바로 관심을 돌렸다. 그리고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아기 요정을 한없이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우웅…? 으엉?!” 그러다 어느 순간, 미미하게 아미를 찡그린 아기 요정이 살며시 눈을 뜨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천천히 한다고는 했는데 아무래도 잠을 깨운 듯싶었다. 순간적으로 울음을 터뜨리는 게 아닐까 걱정이 들었지만, 곧 연한 푸른색 눈동자와 마주하자 걱정을 지울 수 있었다. 큼직하면서도 또랑또랑해 보이는 눈은, 나를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다. 마치 이 사람은 누굴까? 이러는…. 아. 지금 살짝 고개를 기울였나? 이윽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아기 요정은 조용히 아래로 시선을 내렸고, 이내 도로 시선을 올려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 모습이 꼭 품평이라도 하는 것 같아 헛웃음이 나올 즈음. 갑작스럽게, 아기 요정이 작지만 하얗고 통통한 팔을 내뻗었다. 그리고 방긋 웃으며 자그마한 입술을 떼었다. “빠!” “응?” “빠! 빠!” “빠…? 아빠…? 설마, 나를 아빠라고 생각하는 거니?” 뀨르르르! 뀨르르르! 그러자 그 말이 맞는다는 듯이 유미가 대찬 목소리로 울어 젖힌다. 아기 요정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그러다 아직도 허공을 휘젓는 손이 눈에 밟혀,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기 요정을 품에 안았다. “꺄아! 빠~!” 아기 요정은 까르르 웃어 젖혔다. 그리고 내 품에 꼭 안긴 채 이내 꾸물꾸물 고개를 묻었다. 여전히 본능에 따라 부드러운 등을 보듬어주자, 잠시 후 색색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허 참.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갑자기 뜻 모를 기분이 들어 나는 까닭없는 한숨을 흘렸다. 워낙 뜬금없이 벌어지고 맞이한 일이라, 당최 이 상황이 믿겨지지가 않는 것이다. 뀨르르르…. 그러나 재차 유미의 울음이 들려와 시선을 내렸을 때, 나는 번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래. 이제 갓 태어난 생명들이다. 그러고 보니 아기 요정의 등이 미미하게 떨리는 것 같기도 한데, 어찌됐건 간에 지금 이대로 밖에 두는 건 좋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불현듯 내 바지를 꾹 물어 당기는 감촉이 느껴졌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아직 불안함이 가시질 않은 얼굴로 나를 보는 유미가 보였다. 그 순간 나는, 무언가에 홀린듯한 기분으로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남은 손을 들어 천천히 유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가장 고생한 건 유미일 것이다. “이 애들은…. 네가 품은 애들이니?” 뀨르르르….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많은 신경을 못써줬구나.” 뀨르르, 뀨르르르…. “하하. 아니라는 거야? 아무튼…. 고생했어. 정말 수고했다. 네가 얘들의 엄마나 다름없어. 정말로 미안하고, 또 고맙다.” 후르? 후르르르…! 고맙다는 말을 한 순간 비로소 유미가 웃었다. 이어서 아니라는 듯, 괜찮다는 듯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예전의 순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더는 불안함이 보이지 않았다. “이거 참. 나도 졸지에 아빠가 되게 생겼네.” 하여, 나 또한 살며시 웃어주는 것으로 화답해주었다. 그렇게 약 5초간 서로 흐뭇하게 보고 있을 무렵. 후르릉…. 후릉후릉…. 뭔가 이상하게 들리는 소리와 함께 유미가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또 한 번 후르릉 울어 젖히더니 지면을 벅벅 긁기 시작했고, 이내 내 발에 고개를 들이밀어 살금살금 비벼대기 시작했다. 왜지? 나는 약간이지만 묘한 기분을 느꼈다. 언제나 하던 행동인데,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수줍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돌연히, 유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사뭇 비장함이 감도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의아한 기분으로 물어보았다. “왜?” 그러자 미약하게 울어 젖힌 유미는 천천히,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부끄러워하는듯한 모양새로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이윽고 나를 완전히 등진 상태서, 내 쪽으로 엉덩이를 쭉 들이밀었다. “…….” …어? ============================ 작품 후기 ============================ 아, 어제 오늘은 이상하게 피곤하네요. 하루 내내 축 처진 기분을 느꼈습니다. 몸도 찌뿌듯하고요. 오죽하면 글 적다가 체조만 두 번이나 했어요. 아무래도 내일, 아니 오늘이 월요일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ㅜ.ㅠ 0493 / 0933 ---------------------------------------------- 새로운 식구. 아기 요정과 아기 페가수스가 태어난 지도 며칠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머셔너리 클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그 변화라는 것은, 바로 아기 요정과 아기 페가수스의 내부 생활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두 아기가 사용자의 손길을 받아들이도록 유미를 설득한 것이다. 약간 고민하는 모습은 보였지만 어차피 유미도 사용자의 손에 길러진 입장이었다. 그렇게 아기 요정과 아기 페가수스는 본격적으로 사용자의 보살핌을 받기 시작했다. 사실 보살핌을 가장한 구경 및 꾹꾹 찌르기 등이 다반사였지만, 그래도 크게 걱정은 들지 않았다. 아직 완전히 마음을 놓지 못했는지, 그럴 때마다 유미가 꼬박꼬박 따라다니며 막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유미를 길러낸 전력도 있거니와, 사용자 노노나 원혜수의 아기도 있는 만큼 애당초 육아라는 부분에 큰 부담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아니, 분명 그래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점심을 마친 직후의 이 나른한 오후. 집무실 책상에는 창문을 통해 들어온 따뜻한 햇볕이 머무르고 있었고, 총 7개의 성과가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이것들은 판도라의 상자에서 나온 성과로, 허준영이 어빌리티를 배우는 조건으로 넘긴 것들이다. 그리고 이 성과들을 자못 신기하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유미와, 아기 요정과, 아기 페가수스. “…우웅.” “삐이.” “…어엉?” “삐삐?” 서로 뜻 모를 소리를 흘리는 아기 요정과 아기 페가수스를 보며, 나는 습관적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소리에 반응했는지, 아기 요정이 언뜻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 또한 한 손으로 턱을 괸 후 최대한 시선을 맞춰 아기 요정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기 요정의 이름은 마르. 어미인 마르가리타의 이름을 따서 마르라고 붙여주었다. 요 며칠간 쭉 관찰해본 결과, 나는 마르가 무척 신기한 요정이라는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뭐랄까, 그냥 아기 같지가 않다고나 해야 할까? 의례 그렇듯이, 아기라면 울거나 칭얼거림의 대명사가 아닌가. 그런데 지금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는 저 요정은, 태어난 이후 단 한 번도 울거나 칭얼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일을 할 때마다 조용히 옆에 앉아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로 들여다보는 경우가 잦았다. 그것도 이제 갓 태어난 주제에 말이다. 예를 들면…. 어디 한 번, 또 해볼까? 이내 깃펜을 잡아 무언가를 적으려는 모양새를 잡자, 역시나 마르는 바로 시선을 내렸다. 나는 '비비앙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찰싹.' 이라고 적었다가, 곧바로 지워버렸다. 일순간 마르의 귀가 쫑긋해졌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영아의 정서 발달에 그리 좋은 영향을 줄 것 같지는 않다. 마르는 어서 더 적어보라는 듯 팔락팔락 귀를 움직였으나, 나는 약간은 미안한 마음에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크게 놀라고 말았다. “삐이삐이~.” 잠깐 시선을 돌린 사이, 아기 페가수스가 책상에 놓인 성과 중, 빛과 어둠의 결정을 냠냠 깨물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나는 다급히 손을 뻗었다. “뭐, 뭐하냐 너. 그거 먹는 거 아니야.” “삐?” “하지마 도도야. 뱉어. 뱉으라고. 야, 야? 야 인마!” “삐, 삐삑?!” 나는 빛과 어둠의 결정을 떼어놓는 것과 동시에, 아기 페가수스를 최대한 방해했다. 그러나 오히려 내 손을 깨물려 발악하는 탓에, 결국 등에 달린 날개를 잡아 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 페가수스는 미친 듯이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결국 제 풀에 지쳤는지 씩씩거리며 나를 매섭게 노려본다. 하여 가만히 좀 있으라는 의미로 어깨에 올려주었으나, 이놈은 되레 내 목을 깨묾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 자식이 정말.” “삐익!” 목에서 느껴지는 간질간질한 감촉을 느끼며, 나는 결국 아기 페가수스를 도로 내려주고 말았다. 그리고 조용히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기 페가수스의 이름은 바로 도도였다. 도도하다 할 때의 그 도도 말이다. 물론 내가 붙인 이름은 아니었고, 클랜원들이 도도라 부르고 있었다. 아기 유니콘 시절을 생각해 접근한 클랜원들은 낭패를 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약간 나아지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자신의 몸에 손도 대지 못하게 하는 놈이었다. 혹시라도 안아 들라치면 있는 힘껏 발버둥치며 울어 젖혔기 때문이다. 그뿐일까?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는 행동 자체도 도도하기 그지없다. 그래. 마치 지금 눈앞에 하는 행동처럼. 도도는 어느새 다시금 빛과 어둠의 결정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그러나 아까처럼 입에 넣지는 않고, 앞발을 턱 걸친 채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자못 의기양양해 보이는 게, 마치 '내가 이게 참 신기해 보여 좀 갖고 놀 생각인데, 혹시 불만이라도 있느냐.'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결국 마음대로 하라는 뜻으로 손사래를 치자, 도도는 자기가 이겼다는 얼굴로 결정을 신나게 깨물기 시작했다. …진짜. 콱 쥐어박을 수도 없고. 그때였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간신히 속을 삭힐 즈음, 문득 문 쪽에서 자지러지는 소리들이 흘러들었다. “귀여워~.” “오빠 너무해요~. 혼자만 독점하는 게 어딨어요~.” 나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앞으로 시선을 들었다. 그러자 살며시 열린 문틈으로 얼굴만 불쑥 들이민 여인들이 보였다. 아래서부터 세어보니 예닐곱은 돼 보인다. 그 와중 고연주의 긴 머리카락에 가려 고개를 도리도리 흔드는 예지를 바라보다가, 나는 마침 잘됐다는 생각으로 고갯짓을 했다. 그리고 나는 괜찮으니 데려가려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꺄아아악! 마르야아아아!” “우리 도도! 도도도도도도도도!” 이건…. 폭풍? 단순히 고갯짓만을 했을 뿐인데, 여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우르르 집무실로 쳐들어왔다. 그러자 이게 왠 날벼락이라고, 한창 맛있게 결정을 깨물던 도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는 사이, 여인들은 삽시간에 마르와 도도를 안아 들어 순식간에 방안을 빠져나갔다. 밀물처럼 들어와 썰물처럼 빠져나간 것이다. 뀨르르르…. 그때, 비로소 유미가 몸을 움직였다. 지금껏 흐뭇한 얼굴로 나와 애들을 보고 있다가, 애들이 잡혀나가자 자못 불쾌한 얼굴로 따라나간 것이다. 이내 문밖으로 빠져나가는 유미를 보며, 나는 마침내 찾아온 평화에 머리를 늘어뜨렸다. 그러니까 진작에 좀 말리지. 이윽고 머리도 식힐 겸 잠시 연초와 시간을 보낸 후, 나는 겨우 허준영이 놓고 간 성과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애당초 개인 대 개인으로 넘긴 이상, 모든 소유권도 나에게 있다. 그중에서 일단 지금 바로 사용할 건 아니마 오라티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창고에 보관할 생각이었다. 나 또한 허준영과 처지가 비슷해 당장 효과를 볼 수 있는 성과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클랜 로드로써 사용할 수 있는 성과는 무궁무진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하나하나 정리를 해나가던 도중, 문득 아름다운 바다 빛이 흐르는 보석이 눈에 밟혔다. 코델리아였다. 나는 잠깐 바라보다가 살그머니 보석을 집어 들었다. 확실히 대단한 효능이 잠들어있는 보석이지만, 나는 이미 화정을 받아들일 때부터 몸 내부의 노폐물을 제거한 상태였다. 즉 코델리아는 복용해도 그다지 효과는 볼 수 없는 성과였다. 미적 효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고. 느닷없이, 한소영에게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형보다 덜 챙겨준 것도 마음에 걸렸고, 저번에 삐친 사건도 기억났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화해를 위한 선물이라고나 할까? 물론 안 그래도 경국지색의 미모를 지닌 한소영인데, 이 보석을 먹을 경우 어떻게 변할지 궁금한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그렇게 보석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한창 고민에 빠져있을 즈음. 불현듯 똑똑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들자 문이 달칵 열리며 누군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약간 피로해 보이는 얼굴을 한 안솔이었다. “안솔?” “네…. 오라버니…. 드릴 말씀이…. 흐암….” “…또 봉사 활동 다녀온 거야?” “네. 봉사활동…. 흐아암…. 그런데 신전에서 전할 말이 있다고…. 전해달래요오.” 봉사 활동이란, 사제들이 신전에 머물며 다친 사용자들을 무료로 치료해주는 활동을 일컫는다. 언제 어디서 다쳐올지 모르니 교대로 24시간을 지키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새벽반에 참가한 듯싶었다. 그나저나, 신전에서 전하라는 말이 있다고? “무슨 말인데?” “이번에 이스탄텔 로우에서 용이 잠든 산맥에 대한 조사가 끝났대요. 그래서 클랜 랭크에 관해서 할 얘기가 있다고….” “오호라. 클랜 랭크?” “네. 그리고….” 안솔은 고개를 끄덕끄덕 주억이더니 연신 입을 두드리며 말했다. “오라버니를 담당하는 천사 님이 계시를 내렸다는데요?” “…계시라고? 안솔. 제대로 말해. 확실히 계시라고 말했어?” “네? 네. 그게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최대한 빨리 오라고 했어요. 이번에도 무시하면 알아서 하라면서…. 아. 방금 말은 계시 내용이에요.” “…….” 나는 지그시 안솔을 바라보았다. 클랜 랭크에 관해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계시에 대해서는 믿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계시는 일종의 가르침이나 매우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나오지, 고작 호출에 사용할 성질은 아니었다. 기억해보면, 1회 차 때도 계시가 나온 적은 단 두 번에 불과하다. 하지만 안솔의 얼굴에는 일말의 거짓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피곤해 죽겠다는 얼굴만이 보일 뿐. 그렇다면, 정말로 중요한 일이 있다는 소리였다. “알겠다. 지금 바로 준비하고 나갈 테니까, 너도 그만 쉬어. 많이 피곤해 보인다.” 하기야 소환의 방에 가지 않은지도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러고 보니 세라프도 근 1년 만에 만나는 건가? 나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안솔이 내 목을 빤히 쳐다보는 게 느껴져, 손으로 쓱 닦아보았다. 아, 침 묻었어. * 머셔너리 클랜 하우스의 1층 로비는, 오늘따라 유달리 시끌시끌했다. 머셔너리 클랜원 내 여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한쪽 테이블 위에 마르와 도도를 올려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둘이 시끄러운 건 아니었다. 마르야 천성이 온순하고 도도는 애당초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냥 가만히 있는 모습 그 자체가 귀여운지, 둘을 둘러싼 여인들이 쉴 새 없이 재잘재잘 떠드는 중이었다. 그렇게 한창 시끄러운 대화가 이어지던 도중, 문득 마르의 귀가 쫑긋하게 세워졌다. 그러더니 퍼뜩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하염없이 쳐다보기 시작했다. 지금껏 가만히 있던 마르가 행동을 보이자 남다은이 곧바로 반응했다. “우리 마르~. 지금 어디보고 있어요~?” 그러자 마르가 한쪽을 가리켰다. 가리킨 방향은 정확히 계단을 향하고 있었다. 마르가 입술을 떼었다. “빠.” “빠? 그게 뭐야?” “우웅. 빠, 빠아.” “혹시 아빠를 말하는 게 아닐까? 후후.” 남다은이 고개를 갸웃하자 한나가 얼른 참견했다. 여인들은 농담이라 생각하면서도 일제히 계단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공교롭게도, 곧 김수현이 계단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디를 나가려는지 몸에는 외출복을 걸친 상태였고,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빠아! 빠아!” 이윽고 내내 가만히 있던 마르가 활짝 웃으며 팔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여인들이 얼굴이 일변했다. 가장 먼저 행동을 보인 여인은 남다은이었다. 휙 낚아채듯 마르를 양손으로 들더니, 거리를 잔뜩 줄이며 숙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르야 마르야? 언니보고 마~라고 해봐요. 자. 마~.” “우웅?” “엄~마! 마! 여기 엄마가 있어요~?” “어엉?” 남다은이 연신 마라는 말을 강조했으나, 마르는 고개만 갸우뚱 기울였다. 남다은의 얼굴에 슬퍼하는 빛이 떠올랐다. 그렇게 남다은이 절망하는 사이, 이번에는 한나가 두 번째로 선수를 쳤다. 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아무리 마라는 말을 강조해도 마르는 연신 고개만 갸웃할 뿐이었다. 하지만 아직 남은 여인들이 있었고, 여인들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물론 모두 그런 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여인들 사이로 엄마 열풍이 불었지만, 오직 김한별만큼은 처음부터 조용히 사태를 관전하고 있었다. 아니. 애당초 김한별은 마르를 보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테이블에 앉았을 때부터 도도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도도는, 어느덧 남몰래 테이블을 빠져나가 어딘가로 향하는 중이었다. 도도가 걸음을 멈춘 곳은 김수현이 내려오는 계단 바로 아래였다. 왼쪽 난간에 숨으려는지 몸을 잔뜩 웅크렸다. 그리고 고개만 살짝 내밀어 매의 눈으로 김수현을 주시한다. 김한별은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매만지며 흥미로운 기분으로 도도를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이내 김수현이 골똘히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막 1층 바닥에 첫발을 디딘 순간이었다. “삐앙!” 도도는 퉁기듯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치 이날만 기다려왔다는 듯, 김수현의 발목을 덥석 물어버렸다. “어헉.” 김수현은 기함했다. 안 그래도 계시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는데,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한 사이 불의의 습격을 당한 것이다. 물론 아주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김수현은 놀람 반 어이없음 반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뭐, 뭐냐 이놈.” “삐.” “놔라 인마. 지금 너랑 놀 시간 없다.” “삐삐.” “좀 놓으라고. 나, 지금 바로 나가야 한단 말이다. 알았으니까 그만 좀 해 제발.” “삐삐삐?” 얼른 떼어놓으려는 듯 김수현이 휘휘 발을 휘둘렀다. 그러나 도도는 온몸이 흔들리면서도 한 번 물은 발목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더욱 입을 앙다물며 자신의 의지를 확고히 했다. 그런 도도의 모습은 단순한 행동을 넘어서 비장한 의지를 보여주는 중이었다. 그것은 설령 영혼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이 발목을 놓지 않겠다는, 살을 내주더라도 뼈를 취하겠다는, 아무튼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반드시 물어버리겠다는 하나의 숭고한 의지였다. “후유.” 결국 이번에도 백기를 든 사람은 김수현이었다. 한 번 푹 한숨을 내쉬더니 네 멋대로 하라는 양 입구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해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물린 왼발을 놓는 김수현의 걸음걸이가 자못 조심스러워 보인다면, 그건 착각일까? “…킥.” 이내 비척비척 걸어가는 김수현의 뒷모습을 보며, 김한별은 미약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약간 식은 찻잔을 들어 차분히 들이켰다. 조금이기는 하지만…. 오빠가 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 작품 후기 ============================ Reader : 변태다! 변태가 출현했다! 로변태! 로유진 : 여러분들 너무하세요…. 어,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실 수가 있죠? 저는 그럴 의도가 눈곱만치도 있었다고요! 여러분 모두 음란 마귀가 씌셨어요! Reader : 망할 작가 XX! 모두 돌을 던져라! 로유진 : 엌! 0494 / 0933 ---------------------------------------------- 힘을 실어주다. 포탈을 통해 소환의 방으로 들어선 순간,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목소리가 나를 맞이해주었다. “오랜만입니다. 사용자 김…. 수…?” 언제나 그렇듯 소환의 방을 울리는 고요한 음색. 그러나 '현.'으로 끝났어야 하는 말은, 채 끝맺음을 잇지 못하고 아련히 흐려지고 말았다. 그것도 아주 미미한 의문을 품고서.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아, 나는 일부러 세라프의 시선을 피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내 품에 안긴 채 새근새근 잠들어있는 마르와, 여전히 발목을 꼭 물고 있는 도도가 보인다. …얘는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도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좌우간 조심스럽게 바닥에 앉으려는 찰나, 문득 앞으로 미약한 한숨이 흘러들었다. 그리고 약간은 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용자 김수현. 앉으시면 안됩니다.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십시오.” 나는 그제야 시선을 들어 앞을 응시했다. 그러자 비로소 제단에 앉은 세라프의 아름다운 자태가 눈에 들어왔다. 허공에 일렁이는 날개와 애틋해 보이는 눈동자. 근 1년 만에 보는 세라프는 기억 속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역시…. 이 둘을 데리고 들어오면 안 되는 건가?” “그렇습니다. 허락할 수 없습니다.” “이제 갓 태어난 애들인데.” “오십보백보일 뿐, 거주민이라는 성질은 같습니다.” 세라프는 단호한 목소리로 딱 잘라 거절했다. 나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쯧. 하여간 쓸데없는 것에 짜기는 여전해.” “쓸데없다니요. 그리고 짜다니요. 사용자 김수현. 이 소환의 방이라는 공간은, 저와 사용자 김수현만의 장소입니다. 그 누구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둘만의 공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할진대. 거주민이라는 존재가 침범한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 “제가 사용자 김수현을 바라보는 만큼, 사용자 김수현도 저만을 바라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이 공간에서는 말입니다.” 어느 정도 대화가 오고 가서 그런 걸까. 서로 언성을 높인 건 아니었으나, 워낙 조용하고 밀폐된 공간이라 작은 목소리도 왕왕 울렸다. 그 탓에 잠이 깼는지 여태 새근새근 잠들어있던 마르가 가물가물한 눈으로 고개를 돌린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반쯤 앉았던 몸을 도로 일으켰다. 세라프의 말을 타당했고 괜한 억지를 부릴 일도 아니었다. 혹시나 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안될 수 있다고도 예상한 만큼, 나는 군말 않고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는 찰나였다. “마!” 갑자기 마르의 입에서 '마!'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한 손으로는 내 가슴을 통통 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세라프를 가리키고 있다. 거기다 가물가물했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까지. 보아하니, 아무래도 세라프를 엄마라고 여기는 듯싶었다. 지금쯤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누가 들으면 무척 서운해할 거라 생각하며, 나는 싱겁게 웃었다. 우선 나가서 신전에 맡겨 논 후, 얘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되찾으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빙글 몸을 돌려 포탈로 한 걸음 한 걸음 옮겼다. “빠? 빠? 마아, 마아!” 처음으로 마르가 칭얼거렸다. 꼭 왜 엄마한테 데려다 주지 않는 거예요?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세라프 말대로 이들을 여기 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는 마르를 어르고 토닥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사, 사용자 김수현!” 전보다 확연히 높아진 목소리가, 막 포탈로 들어가려는 발길을 붙잡았다. 언뜻 시선을 돌리자 입을 살짝 벌린 채 나를 향해 손을 뻗은 세라프가 보였다. 그리고, 이내 나와 눈을 마주친 세라프는 살그머니 손을 오므리며 천천히 거두었다. “응?” “그, 그게….” “나갔다 오라며.” “그, 그냥…. 오, 오십시오….” “그냥 오라고? 왜? 안 된다고 했잖아.” “새, 생각해보니 오랜만에 찾아오기도 했고…. 아직 어린 아이들이기도 하고…. 아, 아니. 그러니까, 융통성입니다. 융통성.” 의아히 물어보자, 세라프는 뭔가 애가 타는듯한 태도로 말했다. 그런 세라프의 시선은, 언제부턴가 마르에 딱 꽂힌 상태였다. “흠. 융통성이라.” “…싫으신 겁니까?” 싫으신 겁니까. 세라프 치고는 깨나 귀여운 말투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왔다 갔다 할 필요가 없어지는데, 싫을 리가 없잖은가. 뭐,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는지 의아하기는 했지만. 나는 다시 걸음을 돌려 항상 앉던 자리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의 칭얼거림은 여전히 멎지 않았다. 자꾸만 세라프를 향해 팔을 젓는 게, 이렇게 보는 걸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힘들겠는데. 네 말대로 애당초 데리고 들어오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잠시, 그 아이를 저에게 주시면 됩니다.” “…세라프?” “이대로라면 대화의 진행이 어렵습니다. 계속 이대로 지지부진하느니, 차라리 모든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 제가 보고 있겠습니다.”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분명 그렇기는 한데, 아까부터 뭔가 이상한 기분이 엄습한다. 하지만 마르의 간절해 보이는 눈빛을 무시할 수 없어, 세라프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잘 생각해보면 이 또한 도우미 역할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빠른 걸음으로 제단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러니까, 마르를 건네준 순간. 돌연, 세라프가 옆으로 조금 비켜 앉았다. 그에 따라 제단에 약간의 공간이 생겨 내가 앉을만한 자리가 생겼다. …당혹스러웠다. 마르를 건네주고 돌아설 생각이었는데, 방금 행동은 마치 옆에 앉으라는 뜻 같지 않은가. 그러나 세라프는 고개를 숙인 채 품에 안긴 마르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처럼 한없이 거룩하고 성스러웠다. 문득 황혼 빛 노을이 드리운 강물처럼 발갛게 익은 볼이 눈에 밟혔다. “빠, 빠.” 그렇게나 원하던 엄마 품에 안겼음에도 마르의 칭얼거림은 그치지를 않았다. 이번에는 반대로 나를 보며 팔을 뻗고 있다. 나는 한동안 마르를 바라보다가, 이내 무언가에 홀린듯한 기분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세라프가 비킨 자리에 천천히 몸을 앉혔다. 분명히 널찍한 제단이었으나, 이상하게 바로 옆에 앉은듯한 기분이었다. 이윽고, 그제야 칭얼거림을 멈춘 마르가 비로소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흘끗 곁눈질을 해보자, 머리 아래와 가랑이 안을 감싸듯 받친 채 몸 쪽으로 한껏 끌어당긴 세라프가 보였다. 눈동자는 여전히 투명한 빛을 발하고 있었으나, 입가에 알듯 말듯 미미한 미소가 머금어져 있다. 점차, 그리고 서서히. 나도 모르게 시선이 돌아가는 게 느껴졌다. 그래. 세라프는 분명히 미소 짓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마르의 옹알이가 잦아들고 색색 고른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올 즈음. 조금의 움직임이나 흔들림 없이 잔잔히 마르를 보듬던 세라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 잠든 것 같습니다.” “그러네.” 나는 머리를 끄덕이며 원래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세라프가 항상 어떻게 나를 보는지 알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인간과 요정의 혼혈…. 외모는 말할 것도 없고, 타고난 잠재성이 정말 대단합니다.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마르. 요정 여왕인 마르가리타의 이름을 따서, 마르.” “마르…. 마르…. 정말 예쁜 이름이에요.” “…어?” 그 순간, 잠시나마 세라프의 말투가 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재차 세라프를 바라본 찰나, 나는 숨이 멎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세라프가, 가만히 몸을 들어 나와의 거리를 줄인 것이다. 이내 희고 아담한 어깨와, 고운 선을 그리는 목선과, 볼에 흘러내린 은빛 머리칼이 차례대로 눈에 들어온다. 그와 동시에, 세라프 특유의 향기가 물씬 풍겨와 콧속으로 흘러들었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처음 맡아보는 세라프의 향기는…. 뭐랄까. 정화되는 기분이라고 할까? 아무튼 좋은 냄새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아까 느꼈던 묘한 기분의 정체가 무언지 알 것 같았다. 소환의 방에 들어올 때 나와 세라프가 앉는 자리는 항상 정해져 있었다. 세라프는 제단, 나는 바닥. 그러면 결국 서로 시선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어깨를 비비고 있으면. 거기가 마르까지 있는 상태면. 이건 꼭, 부부 같지 않은가. 계속 이렇게 있다가는 어색함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아, 나는 서너 번 헛기침 후 입을 열었다. “신전에 계시를 내렸다고 들었어.” “광휘의 사제가 잘 전달했나 보군요. 그렇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은 그동안 총 7번의 호출에 단 한 번도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만큼, 계시를 이용해 신전을 방문할 동기를 더욱 강력히 부여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러면. 고작 호출에 응하지는 않았다는 이유로 계시를 내렸다는 말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세라프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곤히 잠든 마르를 차분하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사용자 김수현은 이번에 용이 잠든 산맥을 공략했습니다. 혹시 신전에서 얘기는 들으셨습니까?” “음. 조사 결과 완벽한 성과로 인정됐어. 그 결과 이번에 클랜 랭크를 상승시켜 준다던데.” “그렇습니다. 현재 머셔너리 클랜의 클랜 랭크는 AA. 그리고 이번 성과로 인해 S랭크로 상승할 예정입니다. 즉, 북 대륙 역사상 첫 번째로 S랭크 클랜이 탄생하는 겁니다.” “흠?” 북 대륙 역사상 첫 번째 S랭크 클랜이라. 한순간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세라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1회 차 때 S랭크 클랜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출현한 시기는 강철 산맥 공략 직후였다. 말인즉슨, 원래 지금 S랭크 클랜이 출현할 시기는 아니라는 소리였다. 사실 그동안 클랜 랭크가 올라간다고 실질적인 혜택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 딱히 관심을 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세라프의 말을 들어보니, 그냥 말을 꺼낸 것 같지는 않은 무언가 의미심장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렇기는 한데…. S랭크가 되면 좋은 일이라도 있나? 지금껏 머셔너리 말고도 서너 클랜들이 AA랭크까지 올렸지만, 별다른 혜택은 없었잖아.” “물론 클랜 랭크가 올라간다고 해서 주어지는, 사용자들이 바라는 정해진 혜택은 없습니다. 하지만 천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격을 판단하는 척도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자격? 무슨 자격?” “사용자 김수현은 지금껏 머셔너리 클랜을 이끌면서 수많은 실적과 업적을 쌓았습니다. 개중에는 악마의 계획을 분쇄한 굵직한 것들도 끼어있지요.” 깨나 갑작스럽게 악마를 언급한 탓에, 나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세라프를 응시했다. 1회 차와 2회 차를 통틀어, 악마라는 주제만 나오면 이야기가 좋게 흘러간 적이 드물었다. 그런 만큼 꼭 필요할 때를 제외하면 서로 말을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세라프가 먼저 말을 꺼낸 것이다. 어쨌든 일단 말을 더 들어볼 요량으로 나는 더욱 귀를 기울였다. “3년간 사용자 김수현이 이뤄낸 성과는 단연 독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를 비롯한 대부분의 천사들은 사용자 김수현의 능력을 매우 높게 평가합니다. 그래서 기나긴 회의를 거친 결과. 이 엄청난 성과를 기리는 의미로, 머셔너리 클랜의, 머셔너리 클랜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혜택을 부여할 생각입니다.” 세라프는 유난히 머셔너리 클랜이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었다. 나는 지긋이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아무튼 뜻은 고마운데, 그 특별한 혜택이라는 게 뭔지 말을 해줘야지.” “안 그래도 지금 말씀 드리려고 했습니다. 거두절미하면, 우리는 머셔너리 클랜에 아카데미를 건설할 권한을 부여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잠깐 세라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카데미? 그 바바라에 있는 사용자 아카데미를 말하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1회 차 때 사용자 아카데미는 오직 하나였다. 정상에 오르기까지도 그랬고, 북 대륙뿐만 아니라 전 대륙이 사용자 아카데미는 하나였다. 물론 아틀란타로 넘어가면서 시작의 여관과 사용자 아카데미의 권한이 이동한 경우는 있지만, 한 대륙에 두 개의 아카데미가 생긴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잠깐만.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당최 이해가 안 가는데. 애당초 사용자 아카데미는 바바라에 건설된 상태잖아?” “물론 바바라의 사용자 아카데미와는 조금 다릅니다. 제가 조금 전에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나는 자세히 말해보라는 의미로 머리칼을 크게 쓸어 넘겼다. 갑갑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라프는 서두르지 않고, 오히려 지긋이 나를 응시했다. 그렇게 잠시 뜸을 들인 세라프는, 이내 고요히 입을 열었다. “누구나 공용할 수 있는 사용자 아카데미가 아닌, 머셔너리 클랜만의 아카데미 말입니다.” ============================ 작품 후기 ============================ 아. 기다리신 분들에게 정말 죄송하다는 말을 드립니다. 제가 오늘 집에 늦게 돌아와서, 집필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_(__)_ PS. 로유진은 로리 거유의 준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얼마 전 친형이 제 작품을 검색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맛있게 밥 먹고 있는데, 갑자기 저보고 너보고 여군이라고 하던데 이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더군요. 순간 심장이 쿵덕했습니다. 친형뿐만이 아니라, 부모님도 이따금 코멘트를 보십니다.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요즘 가족들이 저를 보는 눈이 이상해졌단 말입니다. 엉엉엉엉! ㅜ.ㅠ 그리고 저는 크신 누님이 좋습니다. 0495 / 0933 ---------------------------------------------- 힘을 실어주다. 세라프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러나 자세한 내용은,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매우 중한 내용이었다. 세라프가 말한 용병 아카데미의 조건은 이랬다. 용병 아카데미는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에 건설할 것을 권장한다. 사용자 아카데미와 용병 아카데미는 중복 수료가 가능하다. 용병 아카데미 수료 기간은 머셔너리 클랜 로드의 재량으로 결정된다. 다만, 수료 시 얻을 수 있는 포인트는 사용자 아카데미의 절반에 불과하다. 즉 2포인트만 얻을 수 있으며, 이것은 Free포인트로 구분한다. 용병 아카데미의 입학 인원은 한 해 6명으로 제한한다. 가장 걸리는 조건은 한 해 입학 인원을 6명으로 제한한다는 것. 하지만 중복 수료가 가능한 이상, 어떤 조건이 붙더라도 이득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즉 사용자 아카데미가 고등학교라면 용병 아카데미는 대학교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아주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세라프는 용병 아카데미를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에 건설한 것을 권했다. 강요가 아니라고 말은 들었지만, 천사들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마지아가 최선이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현재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 활성 계획은, 약 1년 전부터 잠정 보류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거리가 문제였으니까. 모니카를 기준으로 왕복하는데 걸리는 시일은 평균 4주. 괴물 청소나 도시 내부 개축은 물리적으로 개선할 수 있으나, 거리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더구나 워프 게이트라는 편리한 이용 수단이 있는데, 그것을 마다하고 걸어올 만큼 마지아가 매력적인 도시도 아니었고. 그러나. 나는 설명을 마친 세라프를 게슴츠레 응시했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꺼냈다는 것이 꽤나 공교롭다 생각됐기 때문이다. “세라프. 너 알고 있었냐?” “무엇을 말입니까?” “시치미는. 얼마 전 머셔너리에서 메모리아 스톤을 얻었다는 것.” “우리가 부여한 설정입니다. 누구에게 갔는지 정도는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다만. 나는 턱을 괴며 상념에 잠겼다. 아마 예전 같았으면 이용해 먹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내 예상으로는 지금 나의 행보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을 천사들도 더러 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제안을 했다는 건, 도대체 어떤 의도가 숨겨져 있는 걸까? 하지만 그런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번에는 다르다. 일단 드러난 조건만 따지고 보면, 좋아도 매우 좋다. 만일 거리 문제를 해결하고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에 용병 아카데미를 건설한다면? 앞으로 들어올 능력 좋은 사용자들을 선점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고, 한쪽으로 넣어둔 마지아 활성 계획의 현실화에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떤 방향으로든 말이다. 그 정도로, 세라프의 말은 어떻게 보면 밀어주기라고 생각될 정도로 아주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나는 제단을 톡톡 두드렸다. “좋아. 하지만 그러면 마지아에 워프 게이트를 설치해야 한다는 말인데, 이 부분은 어떻게 해결하지? 나는 그에 관한 지식이 전무한데.” “걱정 마십시오. 우리가 가르쳐드릴 수는 없지만, 이미 사용자 김수현 휘하에 해당 지식을 알고 있는 거주민이 있지 않습니까?” “…헬레나 루 에이옌스를 말하는 건가?” “Yes. 정확히는 마그나카르타입니다. 워프 게이트는 고대 홀 플레인의 유산입니다. 그런데 신화 시절의 용이라면, 워프 게이트에 매우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건설에 들어가는 재료나 비용은?” “어디까지나 고대 시절이기는 하지만, 홀 플레인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든 조건을 갖추었더라도 메모리아 스톤이 없다면 워프 게이트를 건설할 수 없다. 하지만 메모리아 스톤만 있다면 모든 것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워프 게이트를 건설할 수 있다.” 이미 이 질문 또한 염두에 두었다는 듯, 세라프는 물 흐르듯이 대답했다. 나는 결국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결국 권한만 부여하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는 소리였지만, 그렇다고 귀찮다 해서 이 좋은 기회를 날릴 수는 없잖은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지체 않고 몸을 일으켰다. 삽시간에,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삽시간에 우수수 떠올랐다. 그러자 세라프가 차분히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가시는 겁니까?” “응. 네 제안을 실행하려면 또 바빠질 것 같으니까…. 아차, 마르는 이리 줘.” “…….” “깨지 않게 조심해서. 어서.” 이대로 나갔다면 애 하나 버려두고 올 뻔했군. 어느덧 마르는 세라프의 품에서 곤히 잠든 상태였다. 그때, 그러니까 얼른 달라는 의미로 손을 내밀었을 때. 불현듯 세라프의 얼굴이 일변했다. 갑자기 눈동자가 촉촉하게 변하고 한없이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 게 아닌가. 뭐지 이 묘한 기분은? 아니 이러면 꼭 애를 강제로 뺏어가는 것 같잖아. 이게 무슨 사랑과 전쟁도 아니고. “왜 그런 얼굴이지. 어차피 진짜 엄마도 아니잖아. 오늘 처음 만났으면서.” “사용자 김수현은…. 바ㅂ…. 멍ㅊ…. 입니까?” “뭐?” “아닙니다.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세라프는 어딘가 뚱해 보이는 얼굴로 말하고는 조심스럽게 마르를 넘겼다. 따뜻한 품에 있다가 찬 공기를 느꼈는지, 마르는 약간 몸을 뒤척였다. 그러나 잠에서 깨는 불상사 없이 내 품에 안착할 수 있었고, 나는 곧바로 몸을 돌려 푸른빛이 흐르는 포탈로 향했다. 그때였다. “사용자 김수현.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더 알려드릴게 있습니다.” 막 포탈에 몸을 묻으려는 찰나, 등 뒤로 세라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반쯤 시선을 돌리자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세라프가 보였다. 제단은 여전히 한쪽 자리가 휑하니 빈 상태였다. “뭔데.” “곧 시작의 여관이 활성화될 예정입니다.” “그건 수호자…. 아. 전 수호자한테 들었는데. 뭐, 그래서?” “그렇습니까. 그러면 다행입니다. 아무튼, 그게 답니다.” 다행…. 이라고? 순간 약간이지만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신규 사용자들이 들어온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세라프가 뜬금없이 또 한 번 알려준 것이다. 잠깐이지만, 나는 지그시 세라프를 응시했다. 세라프 또한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눈은 예의 고요한 눈동자가 아닌, 기이한 열망이 깃들어 있었다. 마치 내가 무언가를 깨닫기라도 바라는 것처럼. 그렇게 한동안 서로 쳐다보던 와중, 문득 한 생각이 번쩍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절로 머리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 고맙다.” “아닙니다.” “그럼 이만 가볼 테니까.” “…그리고. 앞으로 자주 와달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 호출에만 응해주십시오.” 세라프의 마지막 말을 뒤로한 채 나는 지체 않고 포탈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곰곰이 말을 곱씹어보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세라프가 괜한 말을 할 리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해답은 하나였다. 이윽고 홀 플레인으로 돌아온 직후, 나는 빠르게 품을 뒤져 통신용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이어서 바로 마력을 부여하자 약간의 노이즈와 함께 누군가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조승우였다. “사용자 조승우. 접니다.” (아. 클랜 로드. 연락하셨습니까.) “예. 다른 건 아니고, 혹시 지금 출장을 나간 클랜원이 몇 명이나 되는지 알 수 있습니까?” (출장 말입니까? 흠…. 오늘 아침에 새로운 일거리가 들어와서, 의뢰 대기 인원까지 합치면 총 7명입니다.) “좋군요. 그럼 바로 내일. 그러니까 출장을 나간 인원과 운영에 필요한 최소 인력을 제외하고, 모조리 호출해주십시오. 회의할 거리가 생겼습니다. 중요한 안건입니다.” (중요한 회의요? 알겠습니다. 확실하게 공지하겠습니다.) 의아한 목소리로 되묻기는 했으나, 조승우는 군말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 한 가지 더 말할게 남아있었다. “그리고 지금 바로 중앙 관리 기구로 연락을 해보십시오. 통신용 수정구는 제 집무실에 있습니다.” (예? 중앙 관리 기구라면…. 제가 말입니까?) 조승우는 한껏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수완은 좋은데, 아직 자신이 앉은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잘 모르는 모양이다. 아직 자각이 부족한 듯싶었다. “예. 사용자 이효을과의 연결을 요청하시면 됩니다.” (제가 어떻게…. 아니, 아닙니다. 그러면 이효을이라는 사용자한테 어떤 말을 하면 되겠습니까?) “곧 시작의 여관이 활성화될 겁니다. 이번에 머셔너리에서 최대한 참여하겠다는 의사와, 혹시 매물이 나오면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우선적으로 매입하겠다고 해주세요.” (으음. 예. 그 부분도 확실하게 처리해놓겠습니다.) 매물이란, 사용자 아카데미의 교관 참가권을 일컫는 말이었다. 참가한 교관이 많을수록 신규 사용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고, 영입에도 우선권을 가질 수 있다. 전쟁 이후, 사용자 아카데미는 최대한 많은 클랜이 참가할 수 있도록 새로운 체계가 구축됐는데, 이따금 교관 자격을 얻은 클랜이 얻지 못한 클랜에 참가권을 판매하는 경우가 있었다. 즉 일종의 거래라고나 할까? “잘 부탁합니다.” 아무튼, 나는 잘 부탁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통신을 종료했다. 그리고 우선 급한 불은 꺼놨다는 생각에 긴 한숨을 흘리며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그때, 별안간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너.” 발목에는, 여전히 도도가 내 발목을 꼭 물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한 와중에도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깜빡 잊고 있었는데, 이쯤 되면 근성을 인정해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도 이제 갓 태어난 놈인 만큼 조금은 딱한 마음이 들어, 나는 안쓰러운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안 힘드냐?” 그러자 도도는, 약간은 힘이 빠진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삐이….” * 다음 날 아침. 식사와 간단한 업무를 마친 후, 나는 바로 대 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대 회의실에는, 출장을 나간 클랜원과 운영에 필요한 최소 인력을 제외하고, 약 40명 정도가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석에 앉은 후 왼쪽을 돌아보자, 무언가를 열심히 정리하는 조승우가 보였다. 저 자리는 원래 하연의 자리였지. “회의를 시작하죠. 그럼 오늘 여러분을 모이라 한 이유를 말하기 앞서…. 사용자 조승우?” “예!” “어제 부탁한 건은 어떻게 됐나요? 중앙 관리 기구에서 답변이 왔습니까?” “아. 그게….” 아 그게. 처음의 시원한 대답과는 달리 조승우는 난색을 표했다. 아무래도 일이 잘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그게…. 이효을이라는 사용자와 연결이 되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실은 조금 이상한 답변을 받았습니다.” “이상한 답변이라니요?” “어차피 이번에는 머셔너리 클랜이 참가할 차례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일단 참가권 한 장은 확보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매물이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그 부분에 관해서는 확답을 주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나오지 않는다고요? 그럴 리가. 지금껏 매물은 아무리 적어도 5장 이상은 나온 걸로 알고 있는데요. 가격은 아무리 비싸도 8천 금화 선에서 거래됐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물어봤습니다만, 이런 답변을 받았습니다. 현재 우리 머셔너리와 같은 신청을 한 클랜이 수십 곳은 넘는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유난히 경쟁이 치열한 탓에, 매물 자체가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그리고 제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하지만, 이번에 설령 매물이 나오더라도 가격은 배로 뛸 것 같습니다.” “흐음….” 절로 무거운 침음이 나온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세라프가 나에게 알려주었다는 말은, 다른 천사들도 담당 사용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언질을 주었다는 소리였다. 비록 직접적으로는 못하고 완곡히 돌려 말했겠지만, 머리가 조금이라도 돌아가는 사용자들은 금세 의미를 눈치챘으리라. 애당초 수호자를 제외하면, 시작의 여관이 언제 활성화될지 알려주는 일도 드물었지 않은가. 그러할진대, 이번에 사용자에게 알려주었다는 것만 해도 아주 특별한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머리를 끄덕인 후, 나는 클랜원들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게 회의가 잡힌 탓에 다들 아직 어리둥절해 보이는 얼굴이다. 도대체 어떤 것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우선 본론부터 꺼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비록 추가 참가권에 대한 사항은 불투명하지만, 머셔너리에는 비장의 무기가 있다. 아니 있어야 하고, 이제 갖추어야 한다. 적어도 사용자 아카데미가 끝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ㄴr는…. ㄱr끔…. 눈물을 흘린ㄷr…. ㅁr음이 ㅇrㅍr서…. 독ㅈr들이 놀려서…. 집에서 짐승을 키웠ㄷr는 소리를 들어서…. 소리치며 울 수 있ㄷr는 건…. 좋은 거야…. 뭐 꼭 슬퍼야만 우는 건 ㅇr니잖ㅇr…? ^^* ㄴr는 로유미가 싫ㄷr…. 로유미ㄱr ㅇr닌…. 로리거유ㄱr ㅇr닌…. 차라리 로변태라 불리는…. 내ㄱr 좋ㄷr…. 0496 / 0933 ---------------------------------------------- 버림받은 마법사 사냥꾼.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의 재활성화와 용병 아카데미의 설립 권한이 부여됐다는 것까지, 나는 세라프의 제안을 가감 없이 말해주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은 클랜원들은, 절반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머지 절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난색을 보였다. 지금 꺼리는 빛을 띠는 클랜원들은 1년 전 마지아의 활성화에 참가한 이들이 대다수로, 거리 문제에 부딪혀 좌절을 맛본 경험이 있었다. 그때 굉장히 허탈해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클랜원들의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길을 뚫는 등 온갖 고생을 다 해서 도시가 활성화될 기반을 마련해놨는데, 계획의 성공 앞에서 등을 돌려야만 했으니까. “클랜 로드. 마지아를 재활성화한다는 말은, 예전의 계획을 처음부터 되풀이하겠다는 뜻인가요?” 역시 아직 그때의 기억을 떨치지 못한 듯 시작부터 우려의 목소리가 불거졌다. “그건 아닙니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즉답해주었다. 한 번 중지된 계획을 도로 꺼냈으니, 확실한 해결책 또한 제시해주어야 한다. 나는 양손을 엇갈려 맞추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이 우려하시는 바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거리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거리는 더는 문제가 되지 못합니다.” “네? 설마, 해결책을 찾으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이번에 얻은 성과 중에 메모리아 스톤이라는 성과가 있습니다. 메모리아 스톤은 워프 게이트를 건설하는데 핵심 역할을 하는 성과로써, 제대로 활용할 수만 있다면 마지아를 북 대륙의 새로운 도시로 등록할 수 있습니다.” “메모리아 스톤…?” 원혜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그와 동시에 클랜원들 사이로 어수선한 소란이 일었다. 그런 와중, 나는 회의실 한구석에 앉은 한 여인을 응시했다. 헬레나는 술렁거리는 속에서도 홀로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보일 듯 말듯 한 미소를 지은 채.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속담이 있다. 백 번 말하는 것보다는 한 번 보여주는 게 나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아까 챙겨둔 메모리아 스톤을 품에서 꺼냈다. “헬레나 루 에이옌스.” “말씀하소서.” 마치 자기를 부를 줄 알았다는 양, 헬레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현재의 워프 게이트는 고대 홀 플레인의 유산으로, 우리 사용자들은 건설 과정이나 동작 원리 등 상세한 사항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너는 신화 시절을 거친 거주민인 만큼,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되는데.” “그것은, 틀린 말씀이라 사료됩니다.” “음? 틀리다?” “그렇습니다. 워프 게이트는 본래 공간 이동 마법을 근원으로 삼은 것. 그리고 공간 이동 마법은 우리에게서 파생된 것입니다. 그러니 조금 더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지요.”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가 싶었는데, 헬레나의 정체를 떠올리자 이해할 수 있었다. 헬레나의 영혼은 수천 년 이상을 살아온 마그나카르타. 거기다 최강의 용이라 불린 만큼 공간 이동 마법 정도는 우스울 것이다. “그러면 마지아에 워프 게이트를 건설할 수 있다는 말인가?” “건설? 건설이라. 글쎄요. 좌우간 메모리아 스톤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워프 게이트를 활성화하고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럼 지금 보여줄 수 있나?” “어렵지 않습니다.” 헬레나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메모리아 스톤을 휙 던져주자, 솜씨 좋게 잡아낸 헬레나는 천천히 감싸듯 움켰다. 그리고 나를 한 번 바라보더니 곧 지그시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Spatio Ad Salire.” 이내 알아듣지 못할 주문이 흘러나오고, 이윽고 헬레나의 주변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정확히는, 메모리아 스톤을 움킨 주먹이 둥글게 일렁인다고 해야 할까? 마치 딱 그 부분만 김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모두가 집중한 가운데, 도로 눈을 뜬 헬레나가 입을 열었다. “메모리아 스톤은 한 지점이 장소를 기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저는 방금 어머…. 흐흠. 클랜 로드가 있는 장소를 기억했고, 좌표를 계산했습니다. Spatio Ad Salire는 계산한 좌표를 메모리아 스톤에 입력해주는 주문이지요. 즉, 이로써 준비는 끝났다고 보셔도 좋습니다.” 말을 마친 헬레나는 일렁이는 공간으로 남은 팔을 쑥 들이밀었다. “바로 이렇게 말이지요.”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헬레나의 팔이 홀연히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바로 내 앞으로 사라진 팔이 나타난 것이다. 나는 상석에, 헬레나는 탁자 끝 쪽에 앉아있었다. 그 거리가 10미터 넘게 떨어져 있었는데, 그것을 단숨에 뛰어넘었다. 클랜원들은 비로소 탄성을 터뜨렸다. 나 또한 기꺼운 마음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헬레나는 어떠냐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는 차분히 손을 거두었다. “저는 이 정도면 다시 해볼만하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여러분들의 생각이 궁금하네요.” 이내 흡족한 기분으로 입을 열자 확연히 달라진 반응들을 볼 수 있었다. “놀랍군요. 거리 문제가 해결됐다면 상관없죠. 저는 찬성이에요.” “그렇기는 하지만…. 사실 아직 걱정이 드는 게, 과연 우리가 도시에 투자한 만큼 그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 있을까요?” “무슨 소리야. 이건 본전의 문제가 아니라고. 용병 아카데미가 있잖아. 그것 하나만 해도 이번 계획은 기필코 성사해야 한다고. 이제 거리낄 것도 없잖아?” “아니지. 용병 아카데미만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어. 이왕 활성화하기로 한 거, 차후 마지아를 어떤 도시로 발전시킬지 방향을 정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까 난색을 보였던 클랜원들이 앞 다투어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마치 예전에 처음 계획을 구상하고 발표했을 때처럼, 하나같이 열띤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는 조용히 하라는 의미로 탁자를 탕탕 두드렸다. 흥이 오른 것은 좋지만, 너무들 앞서 가고 있다. 시간이 풍족하다면 모르겠지만, 부족한 만큼 지금은 엄연히 우선해야 할 일이 있었다. “자, 자. 일단은 조용히 해주세요. 여러분들의 생각은 알겠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어가야지, 한 번에 모든 일을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마지아와 모니카를 잇는 워프 게이트를 건설할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마지아에 병아리들을 가르칠만한 시설을 건설할 것. 이 두 일만 해도 몇 달은 훌쩍 지나갈 겁니다.” 어수선하던 회의실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나는 탁자를 빠르게 두 번 두드렸다. 동의를 이끌어냈으니 이제는 계획을 본격적으로 구체화할 때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회의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성과나 새로운 생명의 탄생으로 들뜬 분위기는 빠르게 가라앉았다. 나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력을 동원해 이번 계획을 추진하라 지시한 상태였다. 그러자 분주한 분위기가 빈자리를 대신에 빠르게 부상했다. 그러나 두 일은 우리가 한다고 바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사용자로서 지켜야 할 엄연한 절차가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회의 때 나름의 진전은 있어, 어느 정도 해야 할 일을 정리할 수는 있었다. 워프 게이트는 헬레나 말대로 금방 해결할 수 있었다. 메모리아 스톤을 제외하면 필수적으로 필요한 건 모니카 워프 게이트의 좌표였다. 그건 헬레나가 계산하면 그만이었다. 다만 도중에 필수적인 절차가 하나 있는데, 모니카 워프 게이트의 소유권을 가진 이스탄텔 로우에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껏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해왔으니 설마 거절하지는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용병 아카데미의 건설은…. 나 또한 사용자 아카데미를 나온 만큼 어떤 시설이 필요한지는 알고 있으나, 일단은 시설을 건축할 거주민들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물론 자재야 구입하면 되고 거주민은 고용하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아무리 그래 봤자 공사를 진행할 수는 없다는 것. 클랜 하우스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공사가 될 텐데, 모니카와 마지아를 왔다 갔다 하면서 공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말인즉슨, 결국 워프 게이트의 활성화가 필수라는 소리였다. 그래야 다음 일을 진행할 수 있으니까. 아무튼 아직은 산 넘어 산이라는 기분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본래의 목적을 잊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이번에 활성화될 사용자 아카데미였다. “오호~. 이게 누구신가요. 머셔너리 로드가 스스로 나를 찾아오다니. 소녀 이효을, 정말이지 감개가 무량하옵니다.” 탁. 이효을은 탁자에 찻잔을 내려놓고는 깐족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선을 내리자 허옇게 피어오르는 김과 잔잔한 파문이 퍼지는 초록빛 찻물이 보였다. 왠지 맛이 없어 보였다. “어머. 그 맛없어 보인다는 눈초리는 뭐야? 기껏 신경 써서 타줬더니만.” “그럼 안 마셔도 되나?” “호호. 호호호. 호호호호. 응?” “…고맙게 마시도록 하지.” 나는 조용히 찻잔을 들었다. 지금 내가 있는 장소는 바로 중앙 관리 기구였다. 시작의 여관이 활성화되는 정확한 일시나 교관 참가권 등등, 사용자 아카데미와 관련해 물어볼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관련한 총 권한을 지닌 사용자가 바로 이효을이었다. 이내 간신히 한 모금 넘겼을 즈음, 꼴깍꼴깍 목울대를 움직인 이효을이 입을 쓱 닦으며 말했다. “크하~. 역시 내가 탄 차는 맛있어.” “…그거 술이냐? 차가 아니라?” “실례야. 아무튼, 오늘은 무슨 일로 온 거야? 요새 머셔너리가 한창 바쁘게 움직인다고 들었는데?” “바쁜 건 맞는데, 나도 바쁘라는 법은 없지.” 찻잔을 내려놓은 후,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러자 이효을이 고개를 끄덕끄덕 주억였다. “하기야 머셔너리에는 유능한 사용자들이 넘쳐나니까. 너야 방향 제시만 해주면 그만이지.” “그래. 오늘 방문도 그 방향 제시를 위한 방문이지.” “헤. 그럼 역시 사용자 아카데미와 관련해 왔다는 건가?” “부정하지 않겠어. 시작의 여관이 활성화되는 일시와, 이번 교관 참가권에 관해서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이효을은 역시나 하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이어서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꽤나 곤란한 듯 보였다. “일시야 어려울 건 없지. 약 2주 후라고 보면 되는데….” “2주 후라.” “엉. 그런데…. 그냥 한 장으로 만족하면 안 돼?” “상황이 그렇다면 어쩔 수가 없지. 하지만 네 말이 이해가 안 되서 그래. 왜 매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지? 교관 자격은 공평하게 돌아가는 만큼, 대형 클랜이 아니고서야 분명히 매물을 내놓는 클랜이 있을 텐데. 더구나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처음 조승우에게 말을 들었을 때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천사가 언질을 주었다고 해도, 매물은 이번에도 나올 가능성이 높다. 아니, 확신한다. 왜냐하면 사용자 아카데미의 역대 오퍼 현황을 살펴보면, 성적이 좋은 병아리들은 거의 99%가 대형 클랜의 오퍼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번에 어떻게 운이 좋아 참가권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지는 클랜들은 고민할 수밖에 없다. 특히나 매물 경쟁이 심해지는 지금, 예전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참가권을 판매하려는 클랜도 분명히 한둘은 있을 것이다. 정곡을 찔렸는지 이효을은 다시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한동안 그러더니, 이내 긴 한숨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쩝.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너한테 부탁할 일이기도 했으니까. 이르든 늦든 말이지.” “나한테 부탁할 일이라니?” “그거야, 머셔너리 클랜은 돈이 많으니까.” “?” 자못 뜬금없기는 했지만, 일단 말 자체는 사실이었다. 수많은 유적을 발굴한 이상. 아니 보석의 숲을 공략했던 그날부터, 머셔너리 클랜의 재력은 독보적인 수준이라 볼 수 있었다. 현재 보유한 금화나 보석은 가히 어마어마하며, 보유한 장비나 클래스까지 따지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조금 더 자세히.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잖아.” “…사실 이번에 매물이 최소 한 장은 나올 예정이야. 물론 그 이상이 나올 수는 있지만, 그거야 내가 알 바는 아니지.” 예정이라. 그렇다면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는 소리였다. “아무튼 내가 너한테 부탁하려고 했던 건…. 만일 매물이 나왔을 경우, 머셔너리에서 입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었어. 왜냐하면 그 매물은 내가 대리인을 내세워 구매할 예정인데, 머셔너리 상대로는 자신이 없거든.” “이해시켜봐.” “미안해. 개인적인 사정이야. 밝힐 수 없어.” “그럼 어쩔 수 없지. 나도 한 장 한 장이 소중하거든.” “어휴.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물론 그냥 들어달라는 말은 아니야. 조건이 있어. 네가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머셔너리는 최소 한 자리를 추가로 얻게 될 거야. 그것도 공짜로 말이야.” “…말해봐.” 최소 한 자리. 그것도 공짜. 그렇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나는 곧바로 태도를 바꿔 경청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그러자 이효을은 쓰게 웃으며 자신의 심정을 드러냈다. 그때였다. 벌컥! “언니이이!”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앳된 목소리가 방안을 웅웅 울렸다. 나와 이효을은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하도 앵앵대는 목소리라 처음에는 안솔인줄 알았는데…. 아니. 잠시만. 이효을이…. 이상하다? 처음에는 나와 같이 시선을 돌렸다가, 놀란 얼굴을 보였다가,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가, 순식간에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잠시 후, 이효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너! 누가 멋대로 나…. 이 방에 들어오랬어?” “에, 에? 언니. 갑자기 왜 화내요…?” “지금 손님 있는 거 안보여?” “죄, 죄송해요!” 앵앵거리는 목소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일변했다. 이효을은 눈을 찌푸리더니 입술을 잘끈 씹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머셔너리 로드. 미안해.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한 동생인데 워낙 철이 없어서. 잠깐 기다려줄 수 있을까?” “엉? 머셔너리 로드? 그럼 저분이 우리 수….” “조용히 안 해?!” “힉!” 이효을이 빽 소리를 지르자, 여인은 퍼뜩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 북 대륙의 수호자였던 사용자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한 동생이라. 나는 찻잔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을 들었다. “잠깐이라면 상관없지. 다녀와.” “고마워.” 이효을은 곧바로 여인에게 다가갔다. 어떻게든 아무렇지 않으려 애쓰는 듯 보이지만, 몰래 팔을 잡아 끌고 있는 게 보였다. 마치 한 시라도 빨리 내 눈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처럼. 이효을이 당최 왜 이런 행동을 보이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한테는 제 3의 눈이 있다는 말이지. 나는 제 3의 눈으로 문 쪽을 흘끗 곁눈질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맹아라(1년 차) 2. 클래스(Class) ① 북 대륙의 수호자(Guardian of the Northern Continent) : 활성화 ② 일반 사제(Normal, Priest, Beginner) : 비활성화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마법사 사냥꾼(Clan Rank : C Plus) 역시나. 예상한대로, 방금 들어온 여인은 새로운 북 대륙의 수호자였다. 나는 싱겁게 웃었다. 아무리 수호자가 숨겨야하는 존재라고 해도, 사실 나한테는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효을도 나를 어쩌지 못했는데 고작 1년 차가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뭐, 지금 처음 보기는 했지만 이름대로 맹 해 보이는 구석도 있는 것 같고. 그나저나 지금 있는 클랜 이름이…. 마법사 사냥꾼? 우스운 건 둘째치고서 라도, 이건 꼭 나를 지칭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한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한 생각이 머리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어.” 탁. 나도 모르게, 찻잔을 놓았다. 그리고 약간은 멍한 기분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이윽고 아직도 떠있는 사용자 정보 창에서, 한 부분이 유난히 눈에 밟혔다. 4. 소속 단체(Clan) : 마법사 사냥꾼(Clan Rank : C Plus) 마법사 사냥꾼. 그것을 확인한 순간, 나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 작품 후기 ============================ 아무래도 제가 꽤나/깨나의 용법을 잘못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평소 한국어 맞춤법 검사기를 애용하는데, 여기서도 가끔 맞지 않는 사례가 나오더군요. 꽤나도 허용 가능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깨나는, 돈깨나 있구나, 이런 식으로 사용될 수 있고요. 하하하. 부끄럽네요. OTL. 용병 아카데미는 기존의 사용자들이 혜택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용자 아카데미와 마찬가지로, 신규 사용자들만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조건에서도 나와있듯이, 두 아카데미는 중복해서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즉 해당 신규 사용자에 대해서는 그만큼 혜택이 부여되는 기간이 늘어난다는 말이지요. :) 아. 내일은 많이 늦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아라에 방문하기로 해서요. 오늘 연락을 받았는데, 생각보다 길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ㅜ.ㅠ 그리고…. 하하 저는 괜찮아요. 정말로, 아주 괜찮습니다. 저 걱정해주시는분들, 저는 진짜로 괜찮으니 걱정은 꽁꽁 묶어두셔도 좋습니다. 그래요. 로유미, 로리거유보다는 로변태가 낫지 않습니까. 0497 / 0933 ---------------------------------------------- 버림받은 마법사 사냥꾼. 어디로 갔지? 금방 따라 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이효을이 보이지 않는다. 오직 좌우로 갈라진 복도만이 덩그러니 트여있을 뿐. 나는 양옆을 번갈아 보았다가, 마력 감지를 대폭 넓히며 청력을 높였다. 그러자 잠시 후, 오른쪽 복도 끝 쪽에서 두 명의 기척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나는 바로 걸음을 옮겼다. 걸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너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오는 거야? 도대체 네 역할에 대한 자각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하, 하지만…. 언니…. 천사들이, 천사들이 우리 수현이를….” “시끄러워! 조용히 못해?!” “히잉!” 한껏 낮췄지만 엄한 기색이 서려있는 목소리와 울먹울먹한 목소리가 차례대로 들려온다. 잠시 후, 이효을의 것으로 추정되는 긴 숨소리가 흘러내렸다. “후…. 하필이면 저놈이 있을 때…. 안 그래도 눈치 엄청 빠른 놈인데…. 알아차렸으려나?” “에? 머셔너리 로드님이요?” “그래 이 맹추야. 아무튼 어서….” “우와. 잘됐다. 그럼 이번 기회에 인사하고 가면 안 돼요?” 이내 맹아라의 천진한 목소리가 들리자, 이효을이 버럭 고함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살그머니 발길을 돌렸다. 곧 맹아라를 강제로 쫓아내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의자에 앉아 시치미 뚝 떼고 있자, 씩씩거리며 돌아온 이효을이 삽시간에 숨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호호. 미안미안. 아는 동생이 너무 철이 없네. 아무튼, 오래 기다렸지?” “별로. 이제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조건을 말해봐.” “응? 아, 조건은 이거야. 이번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특별 교관이라는 자리를 부활시킬 생각이거든? 혹시…. 알고 있어?” “특별 교관. 알고 있지.” 이효을의 협상 카드는 바로 나를 특별 교관 자리에 앉히겠다는 소리였다. 특별 교관이라 함은 기본 교육이 끝나는 6주차 이후에 특별히 들어가는 교관으로, 일반적인 교육, 생활 교관과는 달리 사용자 아카데미의 제한에 크게 구애 받지 않는 자리였다. 어떻게 보면 최고의 자리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런 만큼 아무나 들어가는 자리는 아니었다. 우선 실력은 물론이거니와, 누가 봐도 인정할 정도로 높은 명성과 인지도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사실, 특별 교관의 내면을 살펴보면 황금 사자 시절에 생겨난 일종의 특례로, 중앙 관리 기구로 넘어오면서 없어진 전례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 취지와는 확연히 다른 목적으로 악용되는 사례가 종종 발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나는 이효을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어떻게 용케 부활시킬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좌우간 나로서는 마다할 자리가 아니었다. 내가 교관이 돼야 한다는 제한은 있으나 특별, 교육, 생활 교관 중 가장 높은 가치를 지닌 자리가 바로 특별 교관이었으니까. 그렇게 서로의 조건을 확인하고 나서 우리는 빙긋 웃으며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누구를 교관으로 추천할 생각이냐, 정하연을 추천할 생각이다 등등 한두 마디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눈 후, 나는 중앙 관리 기구를 벗어나 워프 게이트로 향했다. 그러나. 특별 교관이라는 예상치 못한 소득이 생겼으니 기분이 좋을 법도 한데,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아까 이효을과 맹아라의 대화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 하지만…. 언니…. 천사들이, 천사들이 우리 수현이를….' 천사들이 우리 수현이를. 이어진 말을 생각해보면 그 수현이 나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다. 사실 처음 사용자 정보를 봤을 때부터 의심이 들기는 했다. 마법사 사냥꾼은 1회 차 때 아주 명성 높던 한 사용자를 지칭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검술 전문가라는 시크릿 클래스를 가졌으며, 세간에 마법사 사냥꾼이라 불렸던 사내. 그 사내는 사용자 김수현이 아닌, 진수현을 말하는 것이었으리라. 그때였다. 도도도도도도도도! 한창 하나하나 생각을 정리하던 도중 나는 갑작스럽게 걸음을 정지했다. 누군가 나를 몰래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 아니, 아닌가? 약간 헷갈린다. 몰래 따라온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대놓고 기척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장소는 바로 광장. 많은 사용자들이 오고 가는 만큼 방향이 겹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재차 걸음을 옮겼다. 도도도도도도도도! 그리고 채 스무 걸음도 걷지 않아, 도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이제는 따라오는 게 확실해졌다. 너무 대놓고 따라오는 탓에, 나 또한 대놓고 몸을 돌려주었다. 그러자 일순간 화들짝 놀라며 먼 건물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여인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얼굴을 크게 찌푸리고 말았다. 나를 쫓아오던 여인의 정체는, 이효을이 그토록 숨기려고 애썼던 맹아라였다. 그런데, 설마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걸까? 맹아라는 빠르게 눈을 깜빡이는 중이었다. 그리고 휘파람을 불면서도 설핏설핏 나를 곁눈질하고 있다. 한 번 어디까지 가나 보자 라는 생각에, 나는 끈임 없이 눈초리를 보냈다. 그러한 찰나였다. 갑자기. “아~. 날씨 참 좋네요~. 해님도 짱짱하고요~. 어?! 그러고 보니 배도 고프네요? 에헤헤!” 라고 말한 맹아라는 이내 배를 톡톡 두드리며 방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나는, 조금 전 맹아라의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가만히 분석해보았다. …병신인가?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약간 병신 같다고 생각은 했는데, 정말로 상 병신이었다. 나는 어이없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우선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생각해보니 아까 정보를 완전히 확인하지도 못했거니와, 도대체 성향이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저렇게 정박아 같은 짓을 보여주는지 사뭇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맹아라(1년 차) 2. 클래스(Class) ① 북 대륙의 수호자(Guardian of the Northern Continent) : 활성화 ② 일반 사제(Normal, Priest, Beginner) : 비활성화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마법사 사냥꾼(Clan Rank : C Plus) 5. 진명 • 국적 : 빛을 인도하는 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16) 7. 신장 • 체중 : 161.7cm • 45.8kg 8. 성향 : 천진난만 • 순수(Innocence • Pure) [근력 16] [내구 12] [민첩 15] [체력 17] [마력 91] [행운 99] 흠? 이건…. 조금 놀라운데. 사용자 정보를 확인한 순간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성향은 둘째치고서 라도, 1년 차임을 감안하면 마력과 행운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물론 여러모로(?) 안솔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다운 그레이드 판 정도로는 볼 수 있다. 아무래도 병신 같다고 생각한 건 취소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느릿하게 턱을 매만질 즈음이었다. “아 짜증나게! 여기서 왜 가만히 서 있어? 비켜!” “꺅!” 퍽, 소리와 동시에 맹아라의 비명이 터졌다. 혼잡한 광장에서, 어느 성질 더러운 사용자가 맹아라를 지나치며 거칠게 밀친 것이다. 이내 두 팔을 휘저으며 앞으로 기울어진 맹아라는, 여지없이 바닥과 진한 키스를 나눴다. 즉, 얼굴부터 부딪쳤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상태로, 3초의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몸이 한 번 꿈틀하는가 싶더니 맹아라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으우….” 그러더니 차츰 울먹울먹한 표정을 짓고서는, 종래에는 입을 왕 벌리며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으아아앙!” …아니 무슨 애새끼도 아니고. 잠시 잊고 있었다. 병신 불변의 법칙을.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잠시 후. “냠냠냠냠. 냐냠냠냠.” “…….” “냠냠냠냠. 얌냠냠냠.” “…….” 푸른 하늘, 그리고 밝은 햇살이 드리운 광장에서. 나는 분수대에 앉아 자그마한 분홍빛 입술을 오물거리는 맹아라를 바라보았다. 배가 고프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맹아라는 양손에 내가 사준 먹거리와 음료를 든 채 열심히 입을 놀리고 있었다. 샌드위치 한 번 먹었다가 음료 한 번 마셨다가. 참 복스럽게도 먹는다. 그러다 문득 내 시선을 느꼈는지, 맹아라는 쉴 새 없이 움직이던 고개를 멈췄다. 그에 따라 입을 놀리는 속도도 차차 느려지더니, 곧 살그머니 양손을 나에게 내밀었다. 아마 한 입 먹겠냐는 의미 같다. 요즘 들어 한숨이 늘었다고 생각하며 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들어 맹아라의 지저분해진 입가를 닦아주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해줄 생각은 없는데, 하는 행동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누군가가 연상됐기 때문이다. “으읍. 으부부.” “…천천히 먹어. 체한다.” 맹아라는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만들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어서 젖살이 통통히 오른 볼이 발그레하게 붉어지더니 고개를 휙휙 저으며 중얼거렸다. “아, 안 돼. 나에게는 수현이 오빠뿐이야.” 내 이름도 수현인데. 그러나 나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기에,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양손을 도로 밀어낸 후, 나는 분수대에 손을 짚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너. 도대체 왜 나를 따라온 거니?” 그러자 재차 입을 벌리던 맹아라는 한껏 불안해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 네? 설마…. 아, 알고 계셨던 거예요?” “그럼 설마…. 모,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건 또 무슨 자신감이냐. 그렇게 대놓고 따라오는데.” “그, 그런가…. 사람들이 많아서 숨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 이게 아니지. 정말 죄송해요!” “…….” “…기분 많이 나쁘셨어요?” “당연히 나쁘지.” 맹아라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아 나는 머리를 끄덕여주었다. 불현듯, 미약한 장난기가 일었다. “어, 얼마만큼이나 나쁘셨어요?” “너를 납치해서 이런저런 짓을 해보고 싶을 만큼.” “히, 히익! 페도다!” “…….” 맹아라는 크게 기함하며 삽시간에 거리를 떨어트렸다. 페도필리아라…. 그랬다. 나는 저 천진난만하다 못해 천연에 가까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앙증맞은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울부짖음을 들어보고…. 아니, 이게 아니야. 절대로 아니라고. 나는 이마를 탁 치며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농담이고. 이제 말해봐. 너 왜 나를 따라온 거지? 보아하니 내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자 일순간 시무룩해진 맹아라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그리고 속삭이는듯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그, 그게 말이에요. 실은요. 개인적으로요.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그래서 따라왔어요.” “부탁?” “네. 부탁이요.” “무슨 부탁인데?” 맹아라는 잠시 고민하는듯했다. 하지만 이왕 걸렸다고 생각했는지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곧 결심을 내린 듯 조금은 비장미가 감도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 것이다. “그러니까, 포기해주세요!” 그리고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뭘 포기하라는 거지. 아니 그전에. …내가 지금 왜. 도대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까.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맹아라는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그, 그러니까요…. 얼마 전에 계시가 내려오셨죠?” “…그런데.” “그럼요. 혹시 천사들에게 뭐 들으신 거 없으세요? 예를 들면 다른 사용자 얘기라던가….” “음? 다른 사용자 얘기?” 이제 뭔가 좀 얘기가 되는 것 같아 나는 비로소 감았던 눈을 떴다. “글쎄. 듣지 못했는데.” “정말이요? 아무것도요? 하나도요?” “응. 그런데 나한테 뭘 포기하라는 거지? 한 번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하게 말해봐.” “그,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비밀이에요.” 맹아라는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목소리도 아주 단호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나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래. 안녕.” “자, 잠시만요! 가지 말아요! 가지 말아주세요!” 맹아라는 손에 든걸 떨어뜨리면서까지 나를 붙잡았다. …먹거리와 음료를 포기한 의기를 가상히 여겨 나는 한 번은 자리에 앉아주기로 했다. “그럼 말해봐. 전후 사정을 아주 자세하게 말이야.” “그, 그게요. 저도 그러고는 싶은데요. 저도 나름의 입장이라는 게 있어서요.” “그래서 말을 안 하시겠다.” “하, 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다고요. 왜냐하면 저는 북 대륙의 수…! 으읍!” 이 멍청이가. 맹아라의 말이 채 이어지기 전, 나는 재빠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맹아라는 일순 크게 놀란 듯 보였으나, 곧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은 듯 보였다.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손에 닿은 보드라운 감촉을 느끼며, 나는 조용히 맹아라를 응시했다. 당최 어떻게 이런 애가 북 대륙의 수호자가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맹아라라는 사용자를 이해하기를 포기했을 뿐, 진실을 알아내고 싶은 욕구는 여전했다. 왜냐하면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사용자 진수현의 갑작스러운 출현과, 그 옆에 붙어있는 새로운 북 대륙의 수호자. 천사들이 우리 수현이를 이라는 말. 포기해주세요 라는 말. 그리고 처음의 의문으로 돌아가서, 이번 마지아와 관련한 천사들의 진의. 알아낸 정보는 아직 두서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 내 직감은, 왜인지는 모르지만, 이 정보들이 하나로 연결돼있다는 가능성을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관한 정확한 해답을 제시해줄 사용자가 바로 눈앞에 있다. 맹아라에 대해서는 포기했다. 그러나, 어쩌면 이런 성격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보아하니 이효을과는 비교하는 게 미안해질 정도로 미숙해 보이는데, 솔직히 이런 성격이라면 구워삶거나 이용하는데 훨씬 용이하다. 그래. 궁금한 게 있다면 구슬리면 되는 일이다. 이 사용자는 내가 아는 사용자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타인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느릿하게 손을 떼었다. 그리고 가볍게 발을 구르며 온몸의 마력을 방출했다. 동시에 한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려 애쓰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빠랑…. 잠시 이야기 좀 할까?” ============================ 작품 후기 ============================ 몸으로 말이야.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오늘 왕창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_(__)_ 오늘 조아라에서 미팅이 있어서 잠시 시간을 지체했습니다. 하하하.(아. 후기 맨 위에 있는 말은 무시하셔도 됩니다.) 매우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어떤 대화를 나눴느냐 면요. (1) A(두 분 중에 헷갈려서 모르겠어요.) : 로유미다! 로유미 로유미! 사인해주세요! 저 : ……. ……. ……. (2) B(전 담당 편집자 님.) : 아 안녕하세요. 메모라이즈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저 : 아, 정말 감사합니다. B : 그런데 얼마 전 후기를 봤는데 말이죠. 저 : …네? B : 로변태…. 저 : ……. ……. ……. (3) C(새로운 담당 편집자 님) : 어머 원고가 없네요? 어머머머머머머머.(양손을 흔들며.) 메모라이즈 이북 교정해야 하는 데 원고가 없어요! 저 : ^_ㅠ (4) D(아직은 밝힐 수 없는 그분.) : 아 안녕하세요. 메모라이즈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저 : 아, 감사합니다. D :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저 : 네! 말씀하세요! D : 그 유니콘이 엉덩이를 내민 이유가 도대체 뭐예요? 저 : ……. ……. ……. 그때는 어떻게 어떻게 웃어넘기기는 했는데, 속으로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0498 / 0933 ---------------------------------------------- 버림받은 마법사 사냥꾼. 잠시 후, 주변에 흐르는 마력의 기운이 일변했다. 물 흐르듯 유연히 흐르던 것이, 한순간 바닥에 박힌 돌덩이처럼 딱딱히 굳어버린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내가 시동한 일종의 간섭 현상이었다. 마력 방출 종류 중 점유를 통한 하나의 능력으로, 마력의 흐름을 이리저리 꼬아 블록 필드와 비슷한 효과를 내는 공간을 생성하는 능력이다. “와….” 소음이 차츰 잦아드는 걸 느꼈는지, 맹아라는 무척 신기해하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래도 어떤 능력인지 금세 파악하는 걸 보니 아주 바보는 아닌 모양이다. 속으로 키득키득 웃고 나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언제, 그리고 어디서나 입을 조심하라고. 네가 수호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골치 아파지니까.” “고맙습니다. …어? 그런데 알고 계셨어요?” 맹아라는 예의 바르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화들짝 놀라며 외쳤다.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참 빨리도 알아채는군. “가능성은 있다고 추측했지. 이효을의 행동이나 반응이 조금 이상하다 생각했거든.” “헉!” “헉 은 무슨 놈의 헉. 뭐, 확신하게 된 건 조금 전이지만.” “그, 그럼 제 잘못이네요…. 어떡해….” 맹아라는 또다시 시무룩하게 변했다. 그런 모습이 보기 싫어 정수리를 한 번 세게 쥐어박으려다가(아마 안솔이라면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부드러이 쓰다듬어주었다. 또 빽빽 울어 젖히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괜찮아. 어차피 전대 수호자와도 아는 사이였으니 딱히 곤란해할 필요는 없어. 비밀은 엄수해줄게.” “저, 정말이요?” “그래. 자 약속.” “헤….” 새끼손가락까지 걸어주자 맹아라는 한결 안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일순간 안색이 확 밝아진 게, 사람의 말을 잘 믿고 감정 변화가 빠른 사용자인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 이제 아까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 나보고 포기해달라는 말 말이야.” “네? 아, 아아. 하지만 그건….” “그러지 말고. 생각해봐. 나는 천사한테 아무것도 들은 말이 없어. 그런데 네가 다짜고짜 포기해달라고 하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뭘 알아야 도와주든지 말든지, 혹은 포기하든지 할 거 아니니.” “그래도…. 전 수호자인데…. 비밀은 지켜야 하는데….” “물론 그건 그렇지. 그래도 다는 아닐 거 아니야? 밝힐 수 있는 수준만 말해주면 돼. 아니면, 그냥 이대로 돌아갈래? 나는 그래도 상관없기는 하다만.” “으으으응.” 도리도리. 맹아라는 그건 싫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한동안 시간이 흘렀다. 한참 동안 고민하며 생각에 잠긴 듯 보이던 맹아라는, 이내 도로 고개를 크게 숙이며 외쳤다. “그럼, 포기해주세요!”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는 대신 맹아라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절반쯤 보이는 얼굴에는 전전긍긍한 기색이 가득했다. 마치 어떻게든 말은 하고 싶은데, 어떤걸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랄까? 그렇다면…. “포기해달라. 내가 뭘 포기해야 하지?” “그, 그건….” “좋아. 곤란하면 넘겨도 돼. 그러면, 내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걸 천사에게 얻음으로써, 너희 모두에게 모종의 불이익이 가는 건가?” “네, 네. 있어요. 모두는 아니지만, 제가 아는 어떤 오빠에게는 아주 커다란 불이익이에요. 이, 이대로라면…. 오빠는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고요!” “버림? 그럼 그 오빠라는 사용자는 누구지?” “에….” “…몇 년 차 사용자니?” “2, 2년 차요.” 맹아라는 마치 말 잘 듣는 여동생처럼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해주었다. 아, 꼬박꼬박 은 아닌가? 곧이곧대로 말하기 곤란한 것은 흐리거나 얼버무렸으니까. 그때였다. 우우우웅! 불현듯 어디선가 강한 진동음이 들려왔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 별안간 맹아라가 황급히 품에 손을 넣는 걸 볼 수 있었다. 이윽고 맹아라가 꺼내든 것은 조막만 한 돌 조각이었다. 다만 그냥 돌 조각이 아닌 호출석과 비슷한 효과를 지닌 일종의 물품인 것 같았다. 왜냐하면 돌 조각을 꺼낸 맹아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대충은 감이 잡혔다. “신전에서 호출이 들어왔구나? 아, 네 담당 천사인가?” 그러자 언뜻 맹아라의 시선이 움직였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흡사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놀라움이 서려 있었다. 이내 한 차례 더 강한 진동음이 들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맹아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가, 가봐도 되나요…? 지금껏 두 번이 울린 적은 없어서요. 아마 엄청나게 급한 일인 것 같아요.” “나를 무슨 납치범이라 생각하고 있었냐.” “죄, 죄송해요. 그럼 가볼게요. 얼른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놈의 죄송은. 이제 그만 좀 해. 아무튼, 오늘 만남은 재미있었어.” 어차피 방해가 들어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애당초 그런 점을 감안해 대화를 급하게 진행시킨 감도 없잖아 있었고. 나는 싱겁게 웃었다. 한 번 더 발을 구르자, 꽉 굳었던 것이 풀리며 마력이 다시 원래대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시끌시끌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맹아라는 여전히 불안해 보이는 얼굴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조금 주저주저하는가 싶더니 이내 몸을 돌려 도도도도 뛰어가기 시작했다. 바바라의 신전이 있는 방향이었다. * 어느덧 시작의 여관이 활성화되는 날이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약 10일쯤 남았을까? 이번에 머셔너리가 얻은 참가권은 총 2장으로, 각각 교육과 특별 교관을 맡은 자리였다. 그리고 각 교관마다 업무를 도와줄 인원을 데려갈 수 있으니, 총 4명은 입장이 가능하다. 누구를 보낼지는 이미 정한 상태였다. 교육 교관에는 하연을 선발할 예정이고, 6주차 이후에 입장이 허가되는 특별 교관은 무조건 내가 들어가야 한다. 물론 마지아까지의 왕복 거리를 계산하면 8주라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늦지 않을 자신은 있다. 왜냐하면 도착 후 워프 게이트만 활성화할 수 있다면, 약 2주라는 시간이 남게 되니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앞으로 시선을 돌리며 조곤조곤 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사내에 집중했다. “저번에 말씀하신 대로, 이번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로 떠나는 인원에 헬레나와 비비앙을 포함시켰습니다. 그 외 포함 인원은 사용자 허준영, 선유운, 남다은, 김한별, 이유정, 안솔으로 총 8명이며, 따라갈 거주민은 2명입니다. 시공에 관심을 보인 거주민들을 섭외했습니다.” “용케 거주민들을 섭외했군요. 그럼 저까지 합해도 열한 명인데, 괜찮다고 합디까?” “예. 이미 한 번 공략한 지역이거니와, 한 번 청소 작업이 들어간 상태라 큰 사고는 없을 거라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클랜의 명성도 한 몫 했고요. 사실 개개인의 전력을 생각하면 이번 인선에 과한 점도 없잖아 있습니다.” “그런가요. 그럼 다른 일의 현황들은 어떻습니까?” 한창 말을 잇던 조승우는 잠깐 말을 멈추고는 기록을 넘겼다. 그리고 그 중 한 장을 나에게 제출하며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이스탄텔 로우에서 공식적으로 답변을 보냈습니다. 우리의 요청을 수락한다고 합니다. 이미 헬레나 양도 좌표 계산을 끝낸 상태이니, 예정대로 내일이면 출발할 수 있을 겁니다.” “좋네요. 보고는 잘 들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실은 한 가지 더 이상한 말을 들었는데요.” “이상한 말?” 이제 그만 나가도 된다는 의미로 손을 저으려는 찰나, 조승우가 갑작스럽게 말을 꺼냈다.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은데, 약간이지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조승우의 말이 이어졌다. “여인이 한 번 삐치면 생각보다 오래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스탄텔 로우 로드가 특별 교관으로 참가한다고 하니, 이번 기회를 잘 노려보라고…. 아. 저는 무슨 말인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하하하.” “…전령으로 온 사용자가 누굽니까?” “처형의 공주로 명성 높은 연혜림입니다.” “…….” “클랜 로드는 참 좋으시겠습니다.” “헛소리가 꽤나 느셨네요.” 한껏 노려보며 톡 쏘아붙이자 조승우는 어이쿠 걸음을 물렸다. 그리고 하하 웃으며 손사래를 치고는 재빠르게 몸을 돌려 집무실 밖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이내 이스탄텔 로우의 직인이 찍힌 기록을 보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연혜림의 말이 은근히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물론 1회 차에도 아주 드물게 한두 번 삐친 적은 있었으나, 나는 그럴 때마다 한소영의 머리를 빗어주었다. 그러면 단박에 풀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이 그때와 같은 입장은 아니지 않은가. “정말 그러면 곤란한데.” 나는 머리를 벅벅 긁다가 좌우로 세게 흔들었다. 안 그래도 머릿속이 복잡한데 괜한데 신경이 쓰이니 짜증이 인 탓이다. 결국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후, 나는 조용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한쪽 구석을 흘끗 곁눈질했다. 구석에는, 묘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책상 아래로 발을 쓸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 나오셔도 됩니다.” 그러자 책상 아래서 여인의 옷가지들이 쓸려 나오는 것과 동시에, 구석의 그림자 스멀스멀 움직이며 나에게로 가까워졌다. 이윽고 그러모은 옷가지에 도착한 그림자에서, 누군가 쑥 솟아나온다. “짠.” 이내 짠, 소리와 함께 나타난 여인은 바로 고연주였다. “짠 은 무슨 짠 입니까. 어서 옷이나 입으세요. 보기 민망합니다.” “호호. 왜요. 나름 짜릿하지 않았나요?” 나는 절대 아니라는 뜻으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거의 알몸이나 다름없는 모습을 보며 나는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를 가리켰다. 고연주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지만, 그래도 주섬주섬 옷을 입으며 순순히 내 말을 따라주었다. “제발 당하는 제 입장도 좀 생각해보세요 좀. 좌우간 얼른 옷이나 입고 알아온 정보나 들어봅시다.” “치. 나는 만날 정보 셔틀이네요. 고연주 테리어는 애정을 주지 않으면 무척 상심한다고요. 앞으로 제대로 키우려면 꼭! 알아두세요.” “…고연주를 강아지로 생각하기는 싫습니다.” “멍멍?” …사실 조승우가 들어오기 전에, 나는 고연주에게 먼저 보고를 받고 있었다. 사흘 전 맹아라를 만난 이후 개인적으로 알아볼 것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수현에 대한 모든걸 알아오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문제는 고연주가 보고하는 방식에 있었다. 예전에 한 번 한 이후로 아주 맛이 들렸는지, 보고를 할 때마다 벗어 젖히는 탓에 여간 난감한 게 아니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조승우가 들어온 탓에 이 난리를 치게 된 거고. 아무튼. 어느새 옷을 모두 입은 고연주를 확인한 후, 나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아까 어디서 끊겼죠?” “제가 수현의 늠름함에 반해…. 알겠어요. 정말 그만할 테니까 그렇게 노려보지 말아요. 흠흠. 제가 알아낸 사실이 별로 없다는 것까지 말한 것 같네요.” “그런 것 같네요. 계속해보세요.” “음~. 사실 그게 다예요. 수현이 말한 그 진수현이라는 사용자에 대해서는, 그 사소한 것들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었어요. 그 사소한 것조차 굉장히 단편적이고요.” 고연주는 약간 민망해하는 듯 보였지만,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정보를 모아오라는 지시를 내리면서도 어쩌면 알아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앞선 코란 연합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고연주의 암부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클랜이라도 침입해서 중요한 기밀 정보를 가지고 나올 수 있다. 그러할진대, 고작 한 사용자의 행적을 쫓지 못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단 하나의 가능성이 있다면…. “사소한 거라도 좋습니다.” “음~. 아마 최근 거주지는 뮬이었던 것 같아요. 거기서 한 청년이 아주 가끔 상점에 들러 필요한 물품을 사고, 다시 도시 밖으로 나가기를 반복했나 봐요. 북문을 지키던 경비병에게 알아낸 사실인데, 아마 칠흑의 숲으로 향한 것이라 생각되네요.” “칠흑의 숲…. 그럼 마법사 사냥꾼 클랜에 대한 정보는요?” “그것도 마찬가지에요. 클랜 관리소에서는 대답을 회피했고, 밤중에 잠입해서 알아내려 하니 아예 자료를 찾지 못했죠. 그러고 보니 이상하죠? 뭔가 알고 있다는 듯이 대답하기를 꺼렸는데, 정작 자료는 없잖아요?” 바로 천사들이 수작을 부렸다는 것. 그랬다. 아무리 고연주의 능력이 엄청난 수준이라도, 천사들이 마음만 먹으면 정보의 수집에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으로서 생각할 수 있는 건 이 방향뿐이었다. 좌우간 천사들이 알아챈 이상, 여기서 더 정보를 얻기란 요원할 터. 하지만 괜찮다. 맹아라가 계시라는 말을 꺼냈을 때부터 나는 이번 계획에 세라프가 관여했다는 사실을 직감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최소한 해는 없을 것이다. 천사는 담당 사용자에게 의도적으로 해를 끼칠 수가 없으며, 미우나 고우나 세라프는 단 한 번도 내게 해를 입힌 일이 없으니까. 물론 이러한 생각은, 천사들의 측면에서 보면 상당히 주관적이다. 1회 차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결과가 무조건 좋다고는 할 수 없으니, 명확한 의도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긴장의 끈을 놓을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이미 최대한으로 단서를 모았으니 남은 건 조합하고 추측하는 일뿐이다. 설령 추측이 틀릴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나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튼 정말로 이게 다예요. 미안해요. 큰 도움을 주지 못해서.” 고연주는 잔뜩 미안해하는 얼굴로 안겨왔으나…. 아니 왜 미안해하면서 안기는 거지. 그래도 확 밀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는 고연주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고연주는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아무튼 얘기는 잘 들었습니다. 고생했어요.” “그러면 상관없지만…. 그런데 수현.” “예?” “내일이면 출발하지 않아요?” 그렇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이자 고연주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러면 한 번은 다녀와야 되지 않을까요? 아무리 바쁘더라도 말이에요.” 다녀오라고? 어디를? 나는 의아한 기분으로 고연주를 응시했다. ============================ 작품 후기 ============================ 아. 요즘 들어 자꾸 늦네요. 죄송합니다. _(__)_ 실은 오늘은 매우 개인적인 이유로 늦었습니다. 조아라 캐스트를 보고 있다가 한 작품을 봤는데, 너무 재미있다 보니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거든요. 나중에 가서는 다 읽는 게 아까워서 한 줄 한 줄 정독하며 읽어버렸네요. -_-a 여러분들도 혹시 시간 나면 한 번 읽어보세요. 비츄 작가 님의 Team name : 도깨비. 추천합니다. :) 아. 그리고 이번 파트에 많은 분들이 추측을 해주셨는데, 이번 회에 50% 해답이 들어가있습니다. 이번 파트는 음지 전쟁 파트처럼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되요. 그냥 강철 산맥 출발 전의 일종의 준비 과정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PS. 그리고 그만 좀 놀려주세요! 자꾸 이러시면 한소영이 김수현만 보면서 손가락만 빠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후후후후.(?) 0499 / 0933 ---------------------------------------------- 버림받은 마법사 사냥꾼. 하늘은 이미 어두운 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아침에 도시를 나섰다가 늦은 밤 즈음 돌아온 사용자들은, 하나같이 피곤한 얼굴로 번화가로 향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들에게는 탐험 후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잔이 몇 없는 낙이었다. 한동안 거리에 서성이던 사용자들은 곧 희끄무레한 불빛이 비추는 주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문에 '용병 주점'이라 적혀있는 문을 열자, 곧 왁자한 소리들이 밀려나왔다. 용병 주점은 그렇게 유명한 주점은 아니었지만, 음식과 맥주 맛이 나름 괜찮고 무엇보다 가격이 저렴해 밤이 되면 거의 만석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다행히 구석에 빈 탁자를 발견한 사용자들은 의자에 지친 엉덩이를 붙이며 크게 소리쳤다. “어이 동생! 여기 우선 맥주 큰 걸로 네 잔 갖다 주라!” “예 형님! 지금 바로 가져다 드립니다!” 잠시 후, 말쑥한 청년이 커다란 맥주잔 네 개를 들고 나타났다. 잔에 담긴 액체는 밝은 노란빛이 아닌 진한 주홍빛을 띠었는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수면에 놓인 거품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이윽고 청년이 팔을 활짝 펼치자 맥주잔이 핑그르르 돌며 사용자들 앞에 무사히 안착했다. 놀랍게도, 액체는 회전하는 방향으로 소용돌이칠 뿐 밖으로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익숙한 듯 사용자들은 싱겁게 웃으며 맥주잔을 들었다. “자식이 재롱은. 하여간 이건 볼 때마다 신기하다는 말이야.” “헤헤. 서비스죠 서비스. 안주는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항상 먹던 걸로 가져와. 아, 고기는 듬뿍 좀 넣어주고.” “알겠습니다!” 청년은 힘차게 대답하더니 날렵한 몸놀림으로 탁자를 지나쳤다. 그리고 주방으로 도착해 얼굴을 쑥 들이밀며 안을 둘러보았다. 안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현우 형! 하연이 누나! 볶음 4인분이요! 고기 듬뿍 넣어서!” “알았어~.” “어? 현우 형은요?” “계산하고 있으시잖니.” 한창 냄비를 휘젓던 하연이 턱짓으로 가리키자 청년, 아니 안현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하연의 말대로 한쪽 탁자에서 사용자들이 막 몸을 일으키고 있었고, 박현우는 옆에서 음식값을 계산하는 중이었다. 안현은 하연이 던져준 천을 받고 나는 듯 달려가, 재빠른 손놀림으로 탁자를 정리했다. 그러나 새로 들어온 사용자들로 탁자는 금방 채워졌고, 안현은 또다시 주문을 받아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나르고, 계산하고, 탁자를 정리하고. 한동안 종횡무진 식당을 휘젓던 안현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식당 내 탁자의 삼분의 이 정도가 정리됐을 즈음이었다. 이제는 서서히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적당히 배를 채운 사용자들이 일어나고 내일을 준비하는 시간. 그럼에도 아직 남아있는 사용자들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야! 마셔, 마시라고! 오늘은 내가 완전히 쏠 테니까!” “와, 이 새끼가 웬일이냐. 맨날 잠잘 돈도 없어서 빌어먹던 자식이….” “오늘 형님이 라돌로프 부락 하나 발견했다는 거 아니겠냐. 그래서 아주 싹싹, 깡그리 털어버렸지. 크하하하!” “오~. 그래? 반짝거리는 것 좀 모았나 봐?” 오늘 탐험이 성공해 내일 굳이 나갈 필요가 없는 사용자들. “시영아…. 미안해 시영아…. 혼자 버려두고 와서 미안해…. 으허어엉….” “적당히 해 임마. 그때 도망치지 않았으면 너까지 죽었다니까? 살 놈은 살아야지.” “내가 나쁜 놈이야…. 아, 아니야. 호, 혹시 살아있지 않을까? 그렇지? 응? 그럴 수도 있잖아?” “그만 좀 하라니까. 그냥 고블린도 아니고, 홉 고블린이야 홉 고블린. 그 괴물 놈들 잔인한 거 몰라서 그래? 그 어디냐…. 너 용수네 캐러밴이 홉 고블린 잡으러 갔다가 실종된 사건 들었지? 그런데 얼마 전 전원이 토막 나서 발견됐잖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포기하고….” 그리고 동료 혹은 연인이 죽어 슬퍼하는, 그래서 술에 취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사용자들. 안현은 항상 이 시간대만 되면 묘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들려오는 얘기들을 듣다 보면 어색한 기분이 차오르는 것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작 금화 이삼십 개 벌고 세상을 모두 가진 것처럼 행동하는 사용자들이 신기했고, 겨우 홉 고블린 하나를 처리 못해 엉엉 우는 사용자들도 이상했다. 오죽하면 스스로 나서서 해결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기야 어쩌면 안현이 이러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첫 탐험을 어지간한 사용자들도 들어가기 꺼려한다는 칠흑의 숲에서부터 시작했고, 그 이후로도 눈부신 성공의 길을 걸어왔다. 그뿐일까? 김수현이 금이야 옥이야 아끼며 먹여주고, 입혀주고, 키워주지 않았는가. 거기다 사용자라면 누구나 오매불망 꿈꾸는 레어 클래스도 척척 안겨주기까지. 훌륭한 리더와 좋은 동료들. 그리고 최소한 의식주에 대한 걱정은 일절 하지 않고 활동해온 사용자였기에, 안현은 지금 탁자에 앉은 사용자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비록 같은 세상에서 활동하는 똑같은 사용자일지라도, 서로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그렇지만 비 전투 사용자 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게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런 그들을 보다 보면, 이따금 '내가 만약 형을 만나지 못했다면?'이라는 생각을 할 적도 있었으니까. 물론 그 형이란, 김수현이었다. “안현. 새 손님이 온 것 같은데.” “예, 예? 아. 예!” 너무 깊은 상념에 빠져있었던 걸까. 박현우가 옆구리를 툭 건들자 안현은 깜짝 놀라 머리를 들었다. 문은 삐걱삐걱 움직이고 있었다. 누군가 밖에서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 같은데, 정작 들어오지는 않고 있다. 안현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재빠르게 달려갔다. 속으로 누가 지금 이 시간에 왔냐고 투덜거린 건 덤이었다. “어서 오세….” 이윽고 문 쪽에 도착했을 때, 안현은 잠시 멈칫했다. 문밖에는 추레한 복장을 한 사용자 서너 명이 서 있었다. 정확히는 여인만 셋이었다. 여인들은 하나같이 애처로운 얼굴로 문을 열고 나온 안현을 바라보았다. 안현은 뜻 모를 껄끄러운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에…. 식사하러 오셨어요?” “아니요….” 여인들 중 한 명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무척 가엾게 들릴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남는 음식 있으면 좀 얻을 수 있을까 해서요….” “…네?” “제발요. 오늘 한 끼도 먹지 못했어요.” “하지만.” “한 번만, 한 번만 도와주시면 안될까요? 이렇게 부탁할게요. 누가 먹다 남긴 음식이라도 좋아요.” “…….” 안현은 곤란해하면서도 머리를 저으려고 했으나, 여인이 처연한 얼굴로 애걸하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자세히 보니 정말로 며칠은 굶은 듯 볼 살이 쏙 들어가있다. 안현은 살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공교롭게도, 아직 앉아있던 사용자들이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두 탁자에는, 약간이기는 하지만 음식이 남아있었다. “…이번 한 번만이에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안현은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사용자들이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제일 깨끗해 보이는 접시에 남은 음식들을 적당히 덜기 시작했다. 마침 몸을 쭉 핀 채 두 팔을 뻗으며 나오던 정하연이 그런 안현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현이 너 지금 뭐해? 배고파?” “아, 아니요. 누나도 참. 밖에 사용자들이 찾아와서…. 배가 고프다네 요.” “…그래서. 그거 주려고?” “예. 안되나요?” “흐응. 후회할 텐데.” “……?” 안현이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으나, 하연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하긴. 이것도 당해봐야 알지. 가면서 소리내지 말고, 바로 나가지도 말고, 문에서 청력을 높여. 그리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봐.” 말하고는, 아직 어질러진 탁자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안현은 의아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하연의 말대로 한껏 높인 청력으로 문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 문 너머로 소곤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조금 전과 같은 애처로운 음색이 아닌, 어딘가 모르게 비열함이 담긴 음색이었다. “야 씨발. 드디어 호구 하나 물었다. 병신이 달란다고 진짜 주네? 봐봐! 내가 진작에 여기로 오자고 했잖아! 아무튼, 당분간 공짜 밥 먹을 수는 있겠네. 깔깔!” “그나저나, 애는 참 괜찮아 보이던데…. 있잖아 있잖아, 너희 그 소문 알지. 방금 나온 애, 머셔너리에서 존나 잘나가던 놈이었다는데? 레어 클래스까지 받았다잖아.” “그럼 뭐해. 어차피 지금은 완전히 버림받아서 개털인데. 그리고 딱 보니까 여자한테는 꼼짝 못 하는, 호구 중에 상 호구잖아.” “이년아 생각 좀 해봐라. 아무리 머셔너리라고 해도, 설마 레어 클래스를 버리겠느냐고. 언젠가는 다시 거두겠지.” “어. 생각해보니 그러네? 그럼 어떡하지? 작업이라도 칠까?” “가능성 있지. 보아하니 순수하다 못해 순진해 보이기까지 하는데…. 일단 적당히 인연 좀 쌓다가, 기회보고 몸이라도 몇 번 대주면서 확 물어버리면….” 거기까지가 참을 수 있는 한계였다. 안현은 이를 바드득 갈며 문을 세게 차 열었다. 그리고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는 여인들을 향해, 보란 듯이 접시를 음식 쓰레기통에 부어버렸다. 그리고서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음식들에 손을 내뻗는 여인들을 보며, 쾅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문을 닫았다. 그러고도 분이 식지 않아 씩씩거리고 있자, 하연이 다가와 거보라는 듯 토닥였다. 그리고 살며시 등을 떠밀며 말했다. “예전에 말했지. 홀 플레인에서 공짜 좋아하는 사용자치고 제대로 된 사용자는 없다고. 다음부터는 절대로 거절하렴.” “어떻게…. 알고 계셨어요?” “딱 보면 알지. 나 0, 1년 차 때 저런 애들 본 게 한두 명도 아니고. 아무튼 오늘은 이만 됐으니까, 먼저 들어가.” “도와드릴게요.” “괜찮아. 어차피 오늘 새벽 당번은 나니까. 그리고 내일 아침 당번은 너고.” “…예.” 안현은 힘없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하연은, 2층 계단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안현을 보며 잔잔히 미소 지었다. “현아~!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한다. 꼭 이야. 알겠지?” 안현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 후 2층에 있는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풀썩, 침대에 몸을 던졌다. 육체가 지친 건 아니었으나, 까닭 없이 피로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작고 냄새 나는 침대에서 안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잠들기 전, 여러 얼굴들이 안현의 머릿속을 스쳤다. 안솔, 이유정, 신재룡, 차소림, 그리고 김수현….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내 창문 밖으로 거친 욕설과 쓰레기통을 들추는 소리를 반주 삼아, 안현의 머릿속으로 서서히 어둠이 찾아 들었다. *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어느새 새벽 찬 공기가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코를 킁킁거리던 안현은 목을 뚝뚝 꺾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졸음 가득한 눈으로 창문을 들여다보자, 어젯밤 음식을 부어버린 쓰레기통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걸 먹고 싶나. 도둑 고양이도 아니고.” 아직 잠이 완전히 깬 것은 아니었지만, 안현은 비척비척 방문을 열어 계단을 내려갔다. 하연의 당부대로, 오늘 아침 당번을 맡았기 때문이다. 원래 주점은 아침보다는 밤에 장사가 잘되지만, 그래도 아침 식사를 하러 오는 사용자들도 간간이 있는 편이었다. 그런고로 청소를 마치고 문을 열어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했다. 그렇게 계단을 거의 내려간 찰나였다. 아무튼 상황은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네요…. 예. 아마 4주 정도는 걸릴 계획입니다. 오늘 점심쯤에 출발할 겁니다. 또한 많이 바빠서, 하연의 손이 필요하기도 하고요…. 호호. 그럼 휴가도 이제 끝난 건가요…? 아직 잠이 덜 깬 탓일까. 꿈결처럼 들려오는 목소리들에 안현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렇죠. 그리고 또한, 이번 사용자 아카데미는 뭔가 다릅니다. 어제도 말은 했지만,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겁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긴장되잖아요…. 그러라고 말한 거니까요. 아. 사용자 박현우도 이제 슬슬 돌아오셔야죠…? 하하하. 저야 언제든 준비 Ok입니다. 그동안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클랜 로드…. 그러나 마지막에 클랜 로드라는 말을 들은 순간, 안현은 벼락에 맞은 듯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잠시 후, 후다닥 내려가 1층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탁자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는 한 여인과 두 사내를 볼 수 있었다. 정하연, 박현우. 그리고…. “어머? 현이 일어났네?” “음? 흠.” 김수현이었다. “어…. 어…. 아….” 사실, 그동안 많이 꿈꾸기는 했다. 언젠가 김수현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와서, 자신을 용서해줄 것이라는 꿈을. 그동안 지내면서 그런 상황을 단 한 번도 바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막상 이렇게 오랜만에 눈앞에 보게 되자, 안현은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그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을 뿐. 안현이 더듬거리고 있는 사이, 정하연과 박현우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뜻 모를 미소를 날리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렇게 둘만 남게 되자, 1층에는 고요한 정적과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니. 어쩌면 안현 혼자만 그렇게 느끼는 건지도 모른다. 김수현이 여전히 관심도 없다는 양 품에서 태연히 연초를 꺼내고 있었으니까. 안현의 입이 바짝바짝 타 들어갈 즈음, 연초에 불을 붙인 김수현이 테이블을 두어 번 두드렸다. 안현은 여전히 얼어있었다. 김수현이 재차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까닥 고갯짓을 하자, 그제야 안현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속으로는 오만 가지 생각이 들면서도 안현은 나는 듯 달려가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하연이 앉았던 자리라 그런지 엉덩이가 따뜻했다. “후.” 푹 터져 나오는 연기와 약간의 불씨가 허공에 흩날렸다. 안현이 저도 모르게 불씨를 쫓을 즈음,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꽤나 열심히 하고 있다고는 들었는데…. 할만하냐?” 안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문득 긴장으로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그럭저럭 이요.” “그럼 아예 이 길로 나가보는 건 어때. 들어보니 나름 인기도 좋다며. 주점 매출도 제법 올랐다고 하고. 어떻게 생각해? 고용인?” 안현은 버릇처럼 헤헤 웃으려다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아직 웃을 처지가 아니라도 생각됐기 때문이다. 한동안, 시간이 흘렀다. 안절부절못하는 안현과, 그런 안현을 바라보는 김수현. 그러던 도중, 처음보다는 조금 누그러진 것 같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됐고, 뭐 하나만 물어보자.” “예, 예. 형…. 아, 아니 클랜 로드님.” 안현의 태도가 자못 웃겼는지, 김수현은 입술을 힘없이 터뜨리며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연초를 툭툭 털며 입을 열었다. “너. 도대체 용이 잠든 산맥에는 왜 갔던 거냐.” ============================ 작품 후기 ============================ 이번 회는 그동안 정하연과 안현의 생활을 담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행방불명이던(?) 박현우의 거취도 넣었지요. 뭐, 안현으로서는 직간접적인 체험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하하. 기분 전환 겸 좀 잔잔한 분위기로 쓰고 싶었는데, 어떻게 잘 다가갔으면 좋겠습니다. :) 0500 / 0933 ---------------------------------------------- Witch. 안현은 한동안 우물쭈물했다. “그게…. 얘기하면 화내실 거잖아요.” “너한테 화낸 적은 없다. 적법한 절차를 밟아 처벌했을 뿐이지. 그리고 이제 와서 말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잖아.” “…….” “그냥 호기심 차원이라고 생각해. 그냥 말해봐.” 그럴듯하다고 여겼는지 안현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였다. 그러고도 한참을 주저하더니 약간은 시무룩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형을 욕하는 게 듣기 싫었어요.” “형이 아니라 클랜…. 응?” “그때…. 용이 잠든 산맥과 관련해서 이것저것 안 좋은 기록들이 나왔잖아요.” “비방 기록들? 그건 내가 신경 쓰지 말라고 했잖아.”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아무리 트집이라고는 해도, 어떤 사용자들은 그런 기록이 사실인 것처럼 떠들고 다녔다고요. 바로 제 앞에서 그런 적도 있고요. 그래서….” “그래서. 그런 속이 빤히 보이는 도발을 참지 못해, 그렇게 일을 저질렀다.” 안현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사실 안현은 그때 사건이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졌는지 아직 잘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안현은 그냥 도발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 도발도 계획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말인즉슨, 코란 연합이 애당초 안현을 타깃으로 삼았다는 소리였다. 그때였다. 별안간, 안현이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그냥…. 형의 옆에, 가장 가까이 서 있고 싶었어요.” “……?” “앞서 말한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보여드리고 싶었다고요. 항상 등만 보고 쫓아가는 게 아니라, 한 번쯤은…. 한 번쯤은….” “…….” “형의 말은 잊은 건 아니었고, 완전히 무시한 것도 아니었어요. 그래도 초입에 잠깐 발을 걸치는 정도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는데….” “…가지 말라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 나는 혀를 차며 안현을 응시했다. 말을 들어보니 어떤 의도로 행한 건지는 알 것 같다. 질 나쁜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니라, 어쨌든 머셔너리를 위해 행동한 것이다. 아마 스스로 억울한 면도 없잖아 있을 것이고, 나름 하고 싶은 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현의 경솔함을 부인할 수는 없다. 적당히 덮을 생각도 없다. 지금 안현이 머셔너리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제대로 태도를 고치거나, 아니면 합당한 공을 세우거나. 그러나 사실상 이런 장소에서 공을 세우는 건 불가능하니, 결국에는 첫 번째 방법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나는, 아직 안현이 돌아올 수 있을 정도로 태도가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튼, 절로 한숨이 나온다. 지금이야 모든 사건을 마무리했고 좋은 방향으로 흘렀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전에 들었다면 또 열이 받을뻔했다. 아니 사실 화가 나기는 했지만…. 앞서 말한 것도 있거니와, 안현은 이미 처벌을 받은 상태였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가지고 온 가방을 휙 던졌다. 철그렁! 가방에서는, 둔탁한 철성이 터져 나왔다. 잠깐 흠칫한 안현이 고개를 들어 의아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사용하던 장비들이다. 사용자 아카데미에 들어가려면 필요할 거야.” “예? 사, 사용자 아카데미요?” “그래. 교관은 업무를 보조해줄 사용자 한 명을 데리고 들어갈 수 있으니까. 아무튼 자세한 설명은 하연에게 들어.” “그럼….” “물론, 착각은 금물이지. 원래는 다른 클랜원을 선발하려고 했지만, 하연과 안솔이 하도 부탁해서 너로 정한 거니까. 장비는 이번 사용자 아카데미가 끝나는 즉시 또 회수할거야. 즉 너는 끝나면 또 여기로 와야 된다는 소리지.” “누나랑…. 동생이….” 안현은 여전히 멍해 보였다. 아직은 무슨 말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어차피 하연이 자세히 설명해줄 것이고, 이제 슬슬 일어날 시간이었다. 오늘이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로 떠나는 날이라, 지금쯤 클랜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혀, 형! 가시는 거예요?” “형이 아니라 클랜 로드. 그리고 한 4주간 자리를 비울 예정이니 그리 알아. 아니 네가 딱히 알 필요는 없겠네.” 안현은 나를 잡으려는 듯 손을 내뻗었으나, 이내 아차 하며 도로 내렸다. 나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문을 열기 직전, 고개만 반쯤 돌려 탁자를 응시했다. 안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뭔가 형용할 수 없는 낯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두 손은 가방을 천천히 매만지고 있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고용인 안현.” “예…. 예!” “이번에는…. 잘해라.” “…예?” 의아한 물음으로 되물어, 나는 처음으로 간절함을 담아 입을 열었다. “잘하라고. 이번에 사용자 아카데미는 정말로 중요해.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다른 건 바라지도 않아. 무조건 하연이 시키는 대로만 해. 너는 어디까지나 보조야, 보조. 어떤 일을 보고 듣고 경험하더라도, 절대로 사고는 치지 마. 그냥 조용히 있다가 조용히 나오면 된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아…. 예, 예!” 할 수 있는 말이 예 밖에 없는 걸까. 하지만, 곧 안현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싱겁게 웃었다. “하여간 말은.” 그리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주점의 문을 열어젖히며 밖으로 나섰다. 꼭두새벽의 공기는 차가우면서도 시원했다. * 아틀란타였다. 아틀란타가 보였다. 바바라보다 몇 배는 돼 보이는 크기. 천사들이 입은 하얀 천을 두른 듯한 새하얗고 눈부신 외곽. 그래. 저것은,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분명히 아틀란타였다. 돌연히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가슴 깊숙한 곳에서 흥분이 차오르고, 갑작스럽게 기분이 굉장히 좋아졌다. 비록 이번이 두 번째로 공략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아틀란타에 들어온 이상 테라는 금방이다. 이제 조금만 더 고생하면 집에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 아주 잠시만이라도 누군가와 이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나는 얼른 시선을 돌려 형을, 한소영을 찾았다. 아니 그 누구라도 좋았다. 그리고 나는 곧 한 사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 사내는, 난생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왜 이 처음 보는 사내가 내 옆에 있을까? 그리고 왜 저렇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내 생각을 읽었는지, 사내는 돌연히 천천히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시선이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가리키는 방향과 시선의 방향이 일치하고 있었다. 그러자 무언가에 홀린듯한 기분으로, 나는 사내가 가리킨 곳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때였다. - 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 - 드디어 때가왔구나!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드디어 이때가 왔어! 일순간, 고막을 비틀어 찢는듯한 웃음소리가 주변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와 동시에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온몸을 스멀스멀 잠식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공간이 억지로 비틀어지는듯했고, 세상이 와짝 일그러지는듯한 감각. 그래. 이 감각은…. 꼭 아틀란타를 탈환할 때, 지옥 대공의 등장과 비슷한…. 아니 잠시만. 뭐라고? 불현듯 하나의 생각이 번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 나는 멍하니 시선을 올렸다. 그러자 허공에서, 하늘 높이 솟구쳐 올라가는 한 여인을 볼 수 있었다. - 웃기지 마! 이제 와서, 이제 와서 그만두라고? 그건 내가 예전에 너희한테 했던 말이었어! 하지만, 너희는 어떻게 했지? - 모른 척을 했지. 모른 척을 했다고! 그토록 그만두라고, 그토록, 살려달라고, 그토록 도와달라고 애걸복걸을 했는데도…! - 너희는 나를 버리고, 죽이기까지 했어. 이 비정한 살인자 새끼들아! - 하지만 괜찮아. 이제 나도 곧 살인자가 될 거니까~. - 그러니까, 이대로 혼자 죽는 건 억울하잖아? 그러니 일부는 나와 함께 제물로, 나머지는 소환된 괴물에 모두 함께 죽는다는 소리야! - ───. ───. ───. ───. ───. ───. ───. ───. ───. ───. ───. ───. 한 음성이 허공에 울릴 때마다 머릿속을 흔들어놓는 통에, 나는 잠시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세상은 이미 붉게 변해있었다. 지면에서는 더없이 불길한 기운을 흘리는 시뻘건 불길이 올라오고 있었고, 하늘도 핏빛으로 물들었다. 한순간 하늘과 땅이 불길한 붉은색으로 일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 모두 다 죽어버려! 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 여인이 양팔을 활짝 펼치며 웃음을 터뜨리는 것과 동시에.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 “오빠? 오빠!” 누군가 내 몸을 흔드는 기척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눈을 뜨자 어두운 공간과 누군가의 얼굴이 보인다. 막 잠에서 깬 터라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흐릿하게 형체만 인식할 뿐. “오빠! 수현이 오빠! 괜찮아요? 네?” 나는 조용히 좀 하라는 의미로 머리를 거세게 흔들었다. 왜인지 머릿속이 왕왕 울리고 호흡이 거칠었다. 등도 축축한 걸로 보아 식은땀도 흐르는 모양이다. 한동안 지그시 눈을 감아 호흡을 고르자, 조금이나마 안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도로 눈을 뜨니, 아름다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한별의 얼굴이 보였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가득한 게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다. 나는 튕기듯 침낭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김한별이 걱정이 담뿍 들어있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세상에…. 이 땀 좀 봐…. 오빠. 무슨 일이에요? 불침번을 서던 도중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왔는데….” “…별거 아냐. 그냥 조금 이상한 꿈을 꿨거든.” “꿈이면…. 악몽? 괜찮으세요?” “괜찮지. 고작 꿈인데. 뭐, 기분이 더럽기는 하네.” 실은 고작 꿈이라 말할 것은 아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조금 전 꿈은 1회 차 기억을 바탕으로 한 실제 경험이었다. 즉 일종의 회상이라고나 할까. 아틀란타의 탈환과 마녀의 저주. 그리고 지옥 대공의 등장. 왜 갑자기 그때의 꿈을 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분은 아주 더러웠다. 속이 갑갑하다 못해 터질 듯이 부글거렸다. “우선 땀부터…. 새벽이라 공기도 차가운데, 계속 이렇게 있으면 감기 걸려요.” “아니 아니. 정말 괜찮으니까. 물 한 병만 가져다 줄래?” 한별은 금세 일어나 물병을 가져다 주었다. 나는 자리에서 이동해 모닥불 부근에 앉은 후, 한껏 물을 들이켰다. 이내 시원한 물줄기가 식도를 타고 흘러 들자 들끓던 가슴이 서서히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결국 한 병을 전부 비우고 나서야, 나는 토해내듯 숨을 흘리며 바닥을 탁 짚었다. 이제 좀 살 것 같았다. 이제야 주변의 풍경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지금 현재 우리가 있는 장소는 섬망의 산으로, 내일이면 환각의 협곡을 거쳐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은 정확히 4주. 이미 시작의 여관은 활성화된 지 오래였고, 병아리들은 3주차 교육에 접어드는 중이었다. 그리고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쯤이면, 막 4주차 교육에 접어들 것이고. 그토록 사용자들의 관심을 받는 병아리들이 들어오기는 했으나, 나는 느긋하게 마음을 먹고 있었다. 이미 웬만한 사항에 대해서는 하연에게 하루걸러 통신으로 보고를 받고 있었고, 또한 초반에는 사용자 아카데미 특성상 무조건 교육에 집중하기 때문이다.(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홍보를 하다 걸리면, 해당 교관은 그 즉시 퇴관 조치를 받게 된다.) “오빠 잠시만….” 그때, 문득 목과 볼을 쓰다듬는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언뜻 시선을 돌리니 무척 집중한 얼굴로 손을 움직이는 한별이 보였다. 한별은 한없이 조심스럽게 손을 놀리며 내 몸에 묻은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왜, 왜 그래.” “잠시만요…. 닦아드릴게요….” 왠지 눈을 마주치기가 민망해져, 한 번 더 주변을 둘러본 후 앞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그 순간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건너편에는 안솔이 있었다. 한별이와 같이 불침번을 서던 모양인데, 깜빡 잠이 들었는지 고개를 푹 꺼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별이도 내가 웃는 이유를 알아챈 듯, 옆에서 소리 죽여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물끄러미 안솔을 응시했다. 그렇게 가만히 보고 있으니 고개 숙이는 모습도 제 오빠랑 똑같다는 생각이 들어, 혀를 쯧쯧 찰 즈음이었다. 휙! 갑작스럽게, 안솔이 고개를 들었다. ============================ 작품 후기 ============================ 행운 102 능력치 발동! 성녀의 예언이 발동했다! 그럼 다음 이 시간에…. 하하. 드디어 500회네요. 물론 공지까지 합하면 완전한 500회는 아니지만, 그래도 감회가 정말 새롭습니다. 예전에 독자일 때는, 500회 이상 연재된 작품을 보면 되게 신기했거든요. 아 어떻게 이렇게 많이 적었을까. 다 읽을 수나 있을까 등등. 그런 생각을 했는데, 설마 저도 이렇게 500회를 연재할 줄은 몰랐습니다. :) 사실 나름 의미 있는 회이니만큼 특집으로 하나 기획할까도 생각해봤는데, 그러기보다는 그냥 스토리 진행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 있는 그대로 이어서 적었습니다. 그래도 조금 특별한 게 있다면, 중간에 회상 내용이 있겠네요. 이제 슬슬 아껴놨던 설정들을 하나하나 풀어내야겠지요? :D 0501 / 0933 ---------------------------------------------- Witch. 한별이 흠칫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도 살짝 놀라기는 했지만, 이내 차분히 추스르며 안솔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잠에서 깼는지 흐리멍덩해 보이는 얼굴이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이상해 보인다.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마치 안솔이 안솔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눈동자는 흐릿하면서도 공허해 보이고 꼭 다문 입술은 지긋한 느낌을 주었다. 일순간 무척 낯선 기분을 느꼈으나,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낯설지가 않다. 왜냐하면 이런 안솔의 모순된 모습은 예전에도 서너 번 확인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주 가끔이기는 했으나 확실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른다. 서로 아무 말도 않은 채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 이내 뭔가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는지 한별이 천천히 손을 거두었을 즈음,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안솔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 “우리 오빠…. 지금쯤 사용자 아카데미에 있겠죠?” “안현? 그렇지.” 왜 갑자기 안현 이야기를 꺼내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서서히 청력을 높였다. 이런 일을 몇 번이나 겪은 만큼, 몸이 자동적으로 알고 반응하는 것이다. 안솔이 각성했을 때는, 사소한 말 하나하나라도 놓치지 않는 게 좋다는 것을. 잠시 후. 안솔은 머리를 끄덕끄덕 주억이더니 커다랗게 하품하며 말했다. “그래요…. 그럼 됐어요…. 흐아앙~.” “응?” “아무리 바보이며 멍청한 우리 오빠라지만…. 한 번쯤은 믿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지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러니까…. 오빠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오라버니의 악몽이…. 흐아아앙~. 음냐음냐….” “안솔? 안솔!” 그때, 한창 말을 잇던 안솔이 갑작스럽게 고개를 꺼트렸다. 조금 더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옆구리를 콱 찌르자, 안솔은 비명을 지르며 퍼덕거렸다. 그러나 도로 올린 얼굴에서는 조금 전과 같은 각성한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공허하던 눈동자는 그렁그렁하게 변했고, 꼭 다문 입술은 삐죽 내밀려있다. 이내 부뎨에에 울음을 터뜨리는 안솔을 보며 나는 허탈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 다음 날. 야영지 정리와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아침 일찍 행군의 출발을 알렸다. 섬망의 산은 거의 벗어난 상태였으나, 다음 진입 예정 지역인 환각의 협곡에서도 도시까지 근 하루는 걸리는 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중간에 최대한 휴식을 줄이며 부지런히 행군한 결과, 우리는 정오와 오후를 넘어, 저녁마저 한참은 넘긴 시간에서야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를 바로 앞에 둘 수 있었다.(이미 몇 번이고 대청소를 한 터라 괴물의 습격이 전무했고, 필드 효과도 해제된 탓에 시간이 단축된 것도 있었다.) “헥, 헥….” “나, 나는 이 계단이 정말 싫어….” 클랜원들 중 몇 명은 바닥에 한껏 널브러진 상태였다. 협곡에 세운 도시라 들어가기 전 필수로 거쳐야 하는 계단이 있는데, 길이가 워낙 길어 전부 오르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 그나마 체력이 높은 클랜원은 살만한 얼굴이었지만, 체력이 낮거나 거주민의 경우는 숨을 헐떡일 수밖에 없었다. 좌우간 이렇게 도시에 도착할 수는 있었으나, 고민은 드는 건 피할 수 없었다. 시간대가 너무 애매했다. 차라리 오후에라도 도착했다면 모를까. 뭔가 일을 하기에는 조금, 아니 많이 늦은 시간이 돼버린 것이다. 그래도 일단은 부딪쳐보자는 생각에, 나는 두어 번 박수를 쳐 이목을 집중시킨 후 헬레나를 바라보았다. 헬레나는 매우 흥미로운 얼굴로 도시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도시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초록색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헬레나?” “호. 이거 정말이지 엄청나구나. 건물의 배치로 하나의 거대한 마법 구조를 이룬 것 하며, 바닥에 각인돼있는 무수한 마법 진까지…. 아니. 이 구조는? 설마…! 인간이 신의 영역에 도전을 했다는 것인가?” “헬레나 루 에이옌스.” “어리석구나! 하지만 순수하다. 그래 너무 순수해. 마법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가진 인간만이…. 아. 부르셨는지요.” 아예 정신이 팔렸는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헬레나는, 곧 붕 뜬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한 시라도 빨리 도시에 들어가고 싶다는 일면을 엿볼 수 있었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워프 게이트를 설치하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시간이 오래 걸리나?” “…저번에 한 번 보여드리지 않았습니까?” 헬레나는 오히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더니 품속에서 메모리아 스톤을 꺼내었다. 그리고 그것을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이토록 정제된 메모리아 스톤을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 일뿐이지, 이렇게 손에 들어온 이상 워프 게이트의 활성화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제가 시동해서 그런 면도 없잖아 있습니다만.” “그렇다는 말이지.” “적당한 장소만 지정해주시면 예상 소요 시간은 17분 27초입니다. 계산한 좌표와 공간을 연결해야 하고, 아무래도 크기도 전보다 넓혀야 하는지라.” “흠.” 쓸데없이 정확한 시간 계산이라 생각하며, 나는 알겠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야 겨우 숨을 고르는 두 거주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 분은 어떻습니까.” “예, 예?” 대답한 거주민은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털보 사내였다. “원하신다면 무리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워프 게이트가 활성화되기까지 기다리셨다가, 내일 아침에 다시 오시겠습니까.” 두 거주민은 끔뻑끔뻑 눈을 깜빡이고는 서로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털보 사내가 가만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보아하니 이 사내가 의사 결정권을 가진 듯싶었다. “으음. 말씀은 한없이 감사하나, 그렇다면 굳이 고생해서 따라온 이유가 없으니까요. 건물이나 장소를 보는데 그렇게 힘이 드는 것도 아니고요. 그리고 공사는 최대한 빠르게 들어가는 게 좋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기는 한데, 보시다시피 시간대가 이런지라. 우리 사용자들은 상관없지만, 두 분은 건물을 보는데 약간 애로사항이 있지 않을까요.” 실은 약간이 아니라 많은 애로사항이 있었다. 사용자야 어두컴컴한 밤이라도 안력을 높이면 그만이나, 두 거주민은 그럴 수가 없지 않은가. 마볼로처럼 능력이 있는 거주민이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털보 사내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얼굴로 말했다. “그 부분은 여기 있는 분들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불을 밝혀주십시오.” “도시 전부에 말입니까? 그건….” “그러면야 좋겠지만, 아무래도 힘들겠지요. 허허. 그래서 말입니다. 실은 이곳에 오면서 하나 생각해둔 게 있습니다만…. 제안을 드려도 괜찮을는지요. 잘만 되면 공사 기간을 제법 단축시킬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둔 것? 예. 말씀해보세요.” 그러자 털보 사내는 한 걸음 성큼 앞으로 나서 도시를 돌아보았다. 그런 사내의 시선은 도시 외곽에서도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우뚝 솟은 성채를 보는듯했다. 이윽고 사내는 여전히 성채에 시선을 꽂은 채 입을 열었다. “혹시 이 도시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 혹은, 거점이라 부를만한 건물이 있습니까?” * 시작의 여관이 활성화되고, 사용자 아카데미가 시작된 지도 어느새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2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지만, 적어도 한 사람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안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몇 달간 비 전투 사용자나 다름없는 생활을 한 터라, 처음 장비를 착용했을 때는 어색한 기분마저 느꼈다. 하지만 어색함도 잠시. 요새 안현은 하루하루를 좋은 기분으로 보내고 있었다. 비록 옛날처럼 김수현을 따라다니며 일선에 나서지는 못했으나, 일단 이렇게 장비를 착용하고 전투 사용자로써 활동한다는 것 자체가 행복했다. 예전에는 당연하다 생각한 것들을 잃어보니, 비로소 지금 자신이 가진 것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깨달아가는 중이라고나 할까. 또한, 안현은 알고 있었다. 이번 보조는 안솔과 하연이 마련해준 하나의 기회라는 사실을. 안현도 인간인 만큼 낯짝이란 것이 있는 법이다. 안솔은 자신의 동생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이번에도 사고를 친다면 더는 하연을 볼 낯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안현은 양 주먹을 꾹 쥐었다. 그리고 분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는 정말 공부뿐이야. 아니, 공부가 아니지. 이제부터는 정말 정신 바짝 차리겠어.” “공부? 정신? 아무튼 의기는 좋네.” 그때, 어떻게든 머셔너리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던 찰나, 불현듯 안현의 등 뒤로 맑은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안현은 화들짝 놀라 문을 돌아보았다. 문 쪽에서는 기품 있게 입을 두드리며 하품하는 하연이 서 있었다. 안현은 볼을 긁적이며 헤헤 웃었다. 갑작스럽게 민망한 기분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어. 하연이 누나 오셨어요.” “으응~. 방금 교육이 끝났거든.” 하연은 무척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목을 주무르고는 있는 힘껏 기지개를 폈다. “생각보다 늦게 끝나셨네요? 다른 분들은 아까 저녁 식사하러 가시던데.” “그럴 거야. 교육이 끝나고 질문을 받느라 거진 두 시간은 지체됐거든.” “예? 두 시간이요?” “그렇다니까. 하여간 이번에 들어온 병아리들, 뭔가 이상해. 이제 막 들어온 사용자들 같지가 않아. 적응도 엄청나게 빠르고 호기심도 엄청 많은 거 있지?” 안현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저도 말은 들은 것 같아요. 이번 기수로 들어온 병아리들, 보스 괴물까지 잡았다는 소리가 있더라고요.” “사실일걸? 그러고 보니 이번에 시크릿 클래스도 한 명 들어왔는데, 못 잡으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헤. 그 영혼 명령자 말인가요?” “응. 아, 너 저녁 아직 안 먹었지? 가면서 이야기하자. 마침 부탁할 것도 있거든.” 계속 수다를 떨 생각은 없었는지, 하연은 엄지로 문 쪽을 가리켰다. 나가자는 의미였다. 마침 아까 같이 식사를 하자는 제의도 거절했던 터라, 안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맛있는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안현은 숙소로 돌아와 내일 있을 교육을 준비했다. 어느새 창틀에는 어두운 어둠이 내려앉은 상태였다. 하나하나 꼼꼼히 준비하고 검토하는 동안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 것이다. 하지만 안현은 곧바로 잠에 들지 않았다. 오히려 한 번 창가를 쳐다보고는 책상에 어질러진 기록을 탁탁 정리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애용하는 흑색 창을 들며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슬슬 나가볼까. 학술 정보 관이랑 창고 쪽만 돌면 된다고 했었나?” 안현이 지금 시간에 나가는 이유는, 아까 저녁 식사 중 들은 하연의 부탁에 있었다. 부탁이란 오늘 자정에 사용자 아카데미 내 일부 지역을 순찰해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순찰은 원래 생활 교관들이 담당해야 할 일이었으나, 이따금 교관 보조로 따라온 이들이 도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 병아리들과 친해질 기회가 있는 숙소 내 순찰이라면 모를까, 어떤 접점도 없는 외부 순찰은 일종의 경비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안현은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부르며 건물을 나섰다. 애당초 그런 것에 크게 개의치 않는 성격이기도 했거니와, 수면 전 가볍게 돌며 산책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자…. 학술 정보 관은 이상 무. 헤, 여기는 여전하네.” 오연히 서 있는 학술 정보 관을 둘러보고 나서, 안현은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며 걸어 나왔다. 그러다 문득 3년 전 이곳에서 네 명이 몰래 술자리를 벌였던 때가 떠올랐는지, 약간은 아련해 보이는 눈으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피식 웃어 보이고는 다음 순찰 지역인 창고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아악…!” 그때였다. 깊은 밤. 땅거미가 짙게 드리운 건물과, 곳곳에 쌓인 커다란 상자들과 낡은 컨테이너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찰나, 뭔가 이상야릇한 미미한 소음이 바람을 타고 안현에 흘러들었다. 하지만 소음은 곧바로 바람결에 파묻혀 흔적도 없이 사그라졌다. 안현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기척을 숨겨야 할 때 제일 중요한 건, 바로 침착해야 한다는 거야.' 느닷없이 김수현의 말이 떠오른 순간, 안현의 몸이 자동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흥얼흥얼하던 콧노래가 끊기고, 들떠있던 눈동자는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그리고 흑색 창을 부여잡는 것과 동시에, 광범위한 마력 감지가 은밀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비록 그 세밀함이나 속도가 김수현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안현의 본능은 배운 것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이내 지그시 눈을 감은 안현은 마력 감지에 걸리는 정보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왼쪽에서 세 번째 컨테이너 안. 인원은…. 넷, 아니 다섯.' 바로 눈을 뜬 안현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본 후, 신속한 발걸음으로 컨테이너 쪽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문은 굳게 닫힌 상태였다. 그렇다고 무작정 들어가기보다는 우선 상황 파악을 먼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안현은 최대한 발소리를 줄이며 컨테이너 벽을 따라 돌았다. 이윽고 왼쪽 벽면을 따라 이동할 무렵, 안현은 다행히 엄지 손가락 두 개가 들어갈 만한 구멍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워낙 낡은 컨테이너라 창고로 쓰여서 그런지, 군데군데 드물게 구멍이 나있던 것이다. 안현은 느릿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차분히 마력을 일으켜 안력을 한껏 높인 후, 숨을 죽인 채 구멍에 눈을 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뜨거운 공기가 살그머니 안현의 눈동자에 닿았다. ============================ 작품 후기 ============================ 많이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_(__)_ 오늘 너무 피곤해서 20시에는 도저히 글이 잡히지를 않더군요. 하루 쉴까 하다가, 그래도 어제 축하를 해주신 분들을 생각하니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헤헤. 그나마 자정이 돼서야 약간 정신이 들어서, 다행히 지금이라도 올릴 수 있었습니다. ㅜ.ㅠ 아. 독자 분들. 알고 있습니다. 메모라이즈에는 매의 눈을 갖고 있는 독자 분들이 많으시다는 것을요. 저번 회와 이번 회를 보면 뭔가 알아채신 분들이 꽤 계실 것 같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 수 있으니, 그분들을 위한 배려를 해주시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D 0502 / 0933 ---------------------------------------------- Witch. 그 순간, 안현의 두 눈이 커다랗게 부릅떠졌다. 그와 동시에 온갖 욕설이 목구멍 끝까지 치솟았으나, 겨우, 간신히 삼킬 수 있었다. 바드득! 이내 사나운 빛을 번뜩이며 구멍을 들여다본 안현은, 입을 꽉 깨물며 파르르 떨었다. 구멍 안 창고는 약간 낙후됐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냥 보통의 창고와 비슷했다. 그러나 문제는 창고가 아니라 창고 안에 있는 사람들에 있었다. “아악! 아아악! 이, 이제 그만해!” “헉…! 헉…! 가만히 있어 이년아! 소리 새니까! 어, 어? 나온다…!” 한 여인을 둘러싼 네 명의 사내들. 여인은 범해지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내가 이제 막 사정에 다다랐는지 머리를 한껏 치켜든 채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사내의 배아래 깔린 여인은 애처로이 울부짖으며 저항한다. 그랬다. 창고 안은, 난장판이었다. 그것도 이미 한창 진행 중인 난장판. “나, 나와? 시, 싫어! 하지마! 부탁해! 제, 제발 그만! 싫어어어어어어어!”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한순간 차가운 바닥에 흩뿌려진 머리카락이 미친 듯이 흔들렸으나, 헛된 저항에 불과했다. 사내의 몸이 한 번씩 움찔할 때마다, 여인의 몸 또한 도마에 놓인 물고기처럼 펄떡펄떡 뛴다. “끄아…. 죽이는구먼….” “흑…. 흑….” 잠시 후, 여인의 거친 저항에도 불구하고 한 차례 사정을 끝낸 사내는, 매우 만족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주변에 서 있던 세 명이 천천히 사내의 곁으로 다가갔다. “충분히 즐기셨습니까요. 헤헤.” “아. 아주 좋았어. 사용자 아카데미는 이런 맛에 하는 거지. 아직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즐길 수 있거든. 흐흐.” “만족하셨다니 다행이네요. 저…. 그러면….” “응? 아~. 걱정하지 말라고. 너희는 내가 확실히 눈여겨볼 테니까.” 주거니 받거니. 다들 흐느껴 우는 여인은 안중에도 없는듯한 태도였다. 그리고 그걸 보는 안현의 눈에 강한 불신감이 서렸다. 이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 사내의 상의에서, 뭔가 익숙해 보이는 문양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문양은 푸른 용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푸른 용은 고려 클랜을 의미하는 문양인데. 그럼…. 저 사내는 고려 클랜원이라는 말이야?' 안현은 사내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차분히 기억을 더듬어보았으나, 기억하는 교육, 생활 교관 중 사내의 얼굴을 한 이는 없었다. 물론 깜빡 잊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자신처럼 보조로 들어온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안현은 불현듯 가슴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처음 여인을 범하던 사내가 몇 걸음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다른 세 명이 훌렁훌렁 옷을 벗어 젖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사내는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연초를 뻐끔뻐끔 피우고 있었다. “후~. 어이. 그런데 그년, 입막음은 잘할 수 있어? 생각보다 저항이 심하던데. 뭐, 그것도 나름 즐겁기는 했다만.” “그럼요. 걱정 마세요. 실은 이것도 처음에 비하면 엄청 얌전해진 거거든요.” 여인은 어떻게 보면 그저 가련한 피해자라 볼 수 있었다. 죄가 있다면, 생존을 우선 목적으로 두는 통과의례에서 같은 지역에 떨어진 사람을 잘못 만난 죄랄까? 통과의례 때 잘못 맺어진 인연이 홀 플레인에 넘어와서도 지속된 것이다. “통과의례에서 만났을 때는 무에 그리 까다롭던지. 그래도 몇 번 박아주니까 조용해지더라고요.” “흐흐. 새끼, 말하는 거 하고는. 아무튼 조심하라고. 뭐, 터뜨려도 우리 쪽에서 무마하면 그만이지만.” 천박하기 그지없는 대화가 오고 가는 가운데, 음침한 웃음이 창고에 흐른다. 바닥에 쓰러져있는 여인의 눈동자는 너무나 흐릿했다. 그저 탁 풀린 눈동자로 하염없이 천장만을 바라보며 여전히 몸을 떠는 중이었다. 한편 창고에서 벌어진 일련의 광경을 확인한 안현은, 마치 망부석이라도 된 것처럼 딱딱히 굳은 채 구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손바닥에서는 아무 까닭 없이 땀이 쭉 배어 나오는 중이었다. “……!” 그러다 어느 순간, 안현은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을 수 있었다. 어디선가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세 명의 사내가 덮치기 직전 여인이 지그시 고개를 돌린 것이다. 여인의 시선을 돌린 방향은, 구멍 즉 안현이 들여다보고 있는 방향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과 눈을 마주치며 안현은 일순 고민에 빠져들었다. '어, 어떻게 된 거지? 나를 본 걸까? 아니면 그냥 우연히 고개를 돌린 걸까?' 그에 대한 해답은, 이어지는 행동에서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여인이 천천히 팔을 들더니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와…. 주세요….” 자그마한 목소리. 내부는 세 명의 사내가 시시덕거리는 소리로 울리고 있었으나, 청력을 잔뜩 높인 안현은 귀에는 여인의 목소리가 똑똑히 흘러들었다. 그에 흠칫한 안현은 저도 모르게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러다 아차 싶어 재차 구멍을 들여다보자, 이제 막 범하려는 듯 삐쩍 마른 사내가 여인의 위로 올라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여인은 저 구멍이 마지막 희망이라는 듯 손을 부르르 떨면서도 끝까지 팔을 들고 있었다. 안현은 눈동자에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아마 예전의 안현이었다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 확인한 즉시 안으로 뛰어들어가 여인의 구조 요청에 부응했을 터. 그러나 지금의 안현은 그러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럴 수가 없었다. 2주전, 식당에서 김수현과 나눴던 대화는 안현의 내면이 강하게 각인된 상태였다. '이번에 사용자 아카데미는 정말로 중요해.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다른 건 바라지도 않아.' '어떤 일을 보고 듣고 경험하더라도, 절대로 사고는 치지 마. 그냥 조용히 있다가 조용히 나오면 된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가슴은 저 여인을 구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그러한 기억은 당장에라도 뛰쳐나가려는 안현을 붙잡고 있었다. 더구나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정신을 차리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는가. 그러할진대 여기서 나서게 된다면, 설령 그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김수현의 지시를 어긴 셈이 된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상대는 고려 클랜과 연관이 있어 보이는 사용자. 아무리 정세에 둔한 안현이라도, 최소한 동부의 패자를 건드려봤자 좋을 건 없다는 것 정도는 인지할 수 있었다. 안현은 긴장한 와중에도 하나하나 생각을 정리했다. 그냥 못 본 척 눈만 감으면 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조용히 이곳만 떠나면, 모든 게 순리대로 흘러갈 것이다. 애써 그렇게 생각한 안현은 이를 꽉 물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숨을 흘리고 나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래서 보지 못한 건지도 모른다. 안현이 눈을 감은 순간 여인의 눈동자가 일순간 좌우로 세게 흔들렸음을. 그리고 툭, 소리와 함께 여인의 팔이 바닥으로 떨어졌음을. '미안합니다. 정말로, 미안합니다.' 속으로 사과한 안현은 천천히 고개를 떼었다. 그리고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도와주세요…. 제발…. 아무나 제발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여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돌아서는 안현의 가슴에 깊숙하게 꽂혀 들었다. 그러자 심한 죄책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첫 번째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지 말아요…. 제발…. 그러지 마요…. 구해주세요….” 애원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지 말라는 말은, 과연 누구한테 하는 말일까? 안현은 김수현과, 안솔과, 정하연을 떠올리며 필사적으로 무시했다. 그리고 두 번째 걸음을 내디뎠다. “왜….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 왜 다들 나한테만 그러는 건데….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흐아아앙….” 이번에는 허탈한,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분노에 찬 울먹임이 흘러나왔다. 그에 이어, 사내들이 낄낄거리는 소리들도 이어졌다. 이윽고 안현이 세 번째 걸음을 내디뎠을 때였다. “왜…. 왜…. 왜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거야…. 왜…. 도대체 왜…!” 이번에 들려온 목소리는, 지금껏 들어온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음색이었다. 명백한 분노. 아니. 분노를 넘어서, 절절한 증오가 어려있는 원념에 찬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순간. “…….” 갑작스럽게, 안현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반쯤 고개를 돌려 창고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여인의 목소리는 더는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그저 사내들이 내지르는 짐승 같은 신음과, 무언가 포기한듯한 헐떡임만이 들려올 뿐. 그렇게 한동안 창고를 바라보던 안현은, 별안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픽 웃음을 터뜨렸다. “하. 나도 참 병신이구나.” 그와 동시에, 숙소를 향하던 발길이 180도 회전해 창고 쪽으로 돌았다. 그런 안현의 얼굴은 무척 홀가분해 보였다. 마치 무언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 아닌 밤중에 홍두깨. 혹은 날벼락. 도대체 어떤 말로 지금의 기분을 표현해야 할까. 도저히 감을 잡을 수는 없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조금 전까지 아무 생각 없던 머릿속에서, 뜨거운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는 것. 도시에 도착한 후, 나는 조금 더 빠른 일의 진행을 위해서 클랜원들을 두 개의 조로 편성했다. 한 조는 워프 게이트를 설치할 적당한 장소를 찾는 임무였고, 다른 한 조는 중앙 성채로 이동해 거주민들의 작업을 도울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직 중앙 광장에도 채 도착하지 못했는데, 갑작스럽게 하연에게 통신이 들어왔다. 내용은 간단했다. 사용자 안현. 고려 클랜 교관 보조 사용자 한 명 및 2주차 사용자 세 명 일방적인 폭행. 상세한 정황은 파악 중. 고려 클랜 로드, 머셔너리 클랜 로드 긴급 출석 요구. 안현이 고려 클랜원을 폭행한 것도 모자라 병아리들까지 손을 대버린 것이다. 힘없이 늘어뜨린 손에는 서서히 빛이 사그라지는 중인 조막만 한 구슬이 잡혀있었다. 통신용 수정구였다. 한 번 있는 힘껏 으스러지듯이 쥐었다가, 이내 힘없이 손을 풀었다. “고려 클랜…. 2주차 사용자…. 이거 골치 아픈데….” 나는 이마를 꾹 눌렀다. 클랜원들 또한 바로 옆에서 통신을 들은 터라, 사안의 중대함을 인식한 모양이다. “돌겠군. 또 사고를 치다니. 정말 질렸다, 질렸어. 클랜 로드. 이 참에 확….” “오빠…. 안현도 뭔가 사정이 있었던 게 아닐까? 응?” 그 중 한두 명은 벌써부터 우려와 비난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불현듯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랜원들은 하나같이 불안한 얼굴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내가 흔들리면 모두가 흔들려버린다. 안 그래도 벌려놓은 일이 많은데, 이러한 태도는 차후 계획의 진행에 적잖은 지장을 초래할 수 있었다. 하여, 나는 속으로 차오르는 모든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들 조용히 합시다. 우리는 아직 어떤 상황인지 모르지 않습니까. 일단 상세한 정황을 조사 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중앙 관리 기구에서 출석 요청이 들어온 만큼, 우선 제가 가서 정황을 파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최대한 담담히 말하고 나서, 나는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시 안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아직은 초입에 불과한 지점이었다. 이 장소가 헬레나가 말한 적당한 장소라 보기는 어렵다. 워프 게이트는 도시의 요충지에 건설하는 게 상식이니까. 그러나 활성화가 용이하다는 말을 들었으니 나중에라도 옮기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헬레나 루 에이옌스. 지금 이 지점에서 바로 워프 게이트를 활성화하도록.” “알겠습니다.” 헬레나도 뭔가 심상찮다 느낀 모양인지, 군소리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메모리아 스톤을 꺼내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다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사용자 남다은. 저와 헬레나를 제외하고 지금 바로 중앙 성채로 이동하세요. 그리고 거주민들이 원하는 대로 해준 후에, 모든 일이 끝나면 워프 게이트를 통해 복귀하시고요.” “…네.” “부탁합니다. 그리고 혹시 제가 내일까지 못 들어오게 되면, 사용자 조승우와 얘기해 공사를 진행해주시면 됩니다.” “그럴게요. 이 일은 걱정 마세요. 클랜 로드.” 남다은은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그저 침착히 고개를 숙여보았다. 이윽고 다은이 클랜원들과 거주민들을 인솔해 떠나는 모습을 보며 나는 구슬을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제야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워프 게이트의 연결이 완료됐습니다. 클랜 로드.” 그렇게 약 20여분의 시간이 흘렀을 즈음, 나는 워프 게이트를 활성화했다는 보고를 받을 수 있었다. 헬레나의 말대로 정말 별다른 일없이 포탈이 열린 것이다. 일순간 너무 쉽게 완료된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으나,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웬일이냐. 둘만 있을 때는 꼬박꼬박 어머니라 부르면서.” “장난을 칠 때와 안칠 때의 구분 정도는 할 줄 압니다.” “…설마 다른 이상한 장소로 가는 건 아니겠지?” “잊으셨나요. 저는 그대에게 어떤 해도 끼칠 수 없다는 것을.” 헬레나의 말에, 나는 물결처럼 일렁이는 공간 앞에 서서 피식 웃었다. 그리고 긴 한숨을 흘린 후에 그대로 몸을 묻었다. 시원한 감각이 전신을 휘감았다. 이윽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익숙한 도시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모니카였다. 다행이 워프 게이트가 정상적으로 작동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기쁨을 느낄 새도 없이, 나는 던지듯이 금액을 지불하고 나서 곧바로 바바라로 이동했다. 마음이 다급했다. 비로소 혼자 있게 되자, 아까 억지로 억눌렀던 감정이 불쑥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 통신을 들었을 때는 배신감을 느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냥 조용히만 있어달라고 했다. 어떤 일을 겪더라도 절대 나서지 말아달라고 했다. 물론 나름의 사정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만 놓고 보면, 결국 안현은 이번에도 내 지시를 어긴 셈이다. 봐줄 만큼 봐줬고, 참을 만큼 참았다. 불현듯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번 상황을 내가 납득할 수 없다면, 안현에 관해서 만큼은 정말로 마지막 선택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주변 밤의 거리 풍경이 쏜살같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뛰고 있었던 모양이다. 멀리서, 사용자 아카데미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아무래도 담배를 줄이거나, 끊어야 할 것 같아요. 요즈음 필 때마다 자꾸만 구토가 나오네요. ㅜ.ㅠ 오늘은 약간 피곤한 관계로 후기는 간략히 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편안한 밤 보내세요. :) 0503 / 0933 ---------------------------------------------- Witch. 확실히 사건이 터지긴 터진 듯싶었다.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환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원래 2주차에는, 나처럼 자격이 없는 사용자는 사용자 아카데미에 얼씬도 하지 못하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특수성을 감안해, 나는 엄격한 확인 절차를 거친 후 안내 받을 수 있었다. “머셔너리 로드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이윽고 안내인이 문을 열어주는 방으로 들어가자, 이미 자리에 앉아있는 10명의 사용자를 볼 수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 이효을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누군지 모를 여인. 마찬가지로 고개 숙인 안현과 참담한 얼굴의 하연.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조성호와 비열해 보이는 얼굴의 사내. 또 그 옆으로 앉아있는 자신만만해하는 여인. 한두 번 본 기억은 있는데, 아마 고려 클랜의 외교 간부인 듯싶다. 그리고 약간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병아리처럼 보이는 세 명의 사내들. 방에는 어색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하연의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오직 조성호가 눈을 뜨더니 살며시 머리를 숙였을 뿐. 마주 머리를 숙임으로써 화답한 후, 나는 이효을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몇 번 머리를 긁적인 이효을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럼 머셔너리 로드도 도착했으니 자세한 이야기를….” “글쎄요.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요? 이미 상황 파악도 모두 끝났잖아요?” 이효을의 말은 끊은 사용자는 조성호의 옆에 앉은 여인이었다. 그리고 예의 자신만만해하는 얼굴로 나를 보더니 기록 한 장을 주르륵 내밀었다. “머셔너리 로드? 현재 사용자 아카데미의 총 교관이며, 고려 클랜의 외교 간부 김민서에요. 이건 이번 사건의 정황을 적어놓은 기록이에요. 우선 한 번 보시고, 하실 말씀이 있다면 해주세요.” 하실 말씀이 있다면 해주세요 라. 나는 팔짱을 낀 채로 흘끗 기록을 내려다보았다. 『사건 정황.』 1. 김성우, 임은규, 주연호(이하 세 명)은 차희영과 합의하에 창고에서 성관계를 맺었다. 2. 한채혁(고려 클랜원)은 이 사실을 우연히 발견, 처음에는 차희영을 도우려 접근했으나, 곧 합의하에 성관계를 맺는다는 말을 듣고 우선은 행동을 중지했다. 3. 그때 안현(머셔너리 클랜원)이 처음 한채혁과 같은 원인으로 난입, 사정을 설명하려는 한채혁을 무시한 채 무기로 세 명을 위협했다. 한채혁은 사용자 아카데미 법칙에 의거, 세 명과 차희영을 보호하려 어쩔 수 없이 맞대응 했다. 4. 이러한 과정에서 한채혁과 세 명은 안현에게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했다. 대충 훑어보자 문득 까닭없는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더는 볼 필요가 없다고 여겨 기록을 톡 튕겼다. 이내 물 흐르듯 밀려간 기록은 정확히 김민서의 앞에 안착했다. 그러자 김민서는 빙그레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벌써 읽으셨나 봐요?” “오기 전에 어느 정도 들은 터라. 별로 달라진 건 없는 것 같군요.” “네. 맞아요. 확실히 읽으셨네요. 호호호.” “…….”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자기네가 이겼다고 생각했는지 김민서는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지금까지 파악된 정황은 이렇고, 이 이상의 추가적인 정황은 나오지 않고 있어요. 그리고 이 정황이 사실로 인정될 경우, 우리는 머셔너리 클랜에 총 두 가지를 요구하겠어요. 첫 번째는 현재 사용자 아카데미에 있는 머셔너리 클랜원 전원의 퇴관. 그리고 두 번째는 머셔너리 로드의 공식적인 사과. 이상이에요.” 말투만 보면 이미 안현의 죄를 확정한다는 일종의 통보나 다름없었다. 나는 앞에 놓인 물병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살그머니 안현을 바라보았다. 안현은 여전히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거야 정황이 사실로 인정됐을 때 나올 이야기입니다.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시기상조요? 하지만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 이상의 추가 정황은….” “지금 장난하십니까? 계속 정황이라는 말을 사용하시는데, 정황은 사실이 아닙니다. 증거가 될 수 없어요. 그런데 왜 자꾸 오직 정황만가지고 죄를 만들려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하. 그래요?” 기가 찬 듯, 그러나 정곡을 찔렸는지 김민서는 격하게 숨을 흘렸다. 그러나 곧 태연한 얼굴을 보이더니 어깨를 들먹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머셔너리 로드는 이 기록을 인정할 수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물론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들고 있던 물병을 탁 내려놓았다. 그리고 여전히 안현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아는 안현은 그럴 리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 순간, 안현의 몸이 한 번 크게 움찔했다. “푸!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 “말인즉슨, 우리 쪽 정황도 들어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힘을 주어 말하자, 마침내 안현의 고개가 서서히 들린다. 나는 안현과 시선을 한 번 맞춘 후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안현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무 생각 없이 꺼낸 말은 아니었다. 회의실에 들어올 때부터 나는 모든 사용자를 주시한 상태였다. 한채혁이라는 놈과 세 명의 사내는 어딘가 모르게 초조해하는 빛을 띠고 있었다. 차희영이라는 여인은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언뜻언뜻 보이는 부분에는 약간 부어 오르거나 미약한 상처가 나 있었다. 저것은 차희영이 저항을 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고, 합의하 관계를 맺었다는 정황을 부정하는 나름 가능성 높은 증거였다. 물론 아직은 가능성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안현의 말을 들어봐야 한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그전에 잠시. 기공창술사의 말을 듣기 전에, 머셔너리 로드께서 꼭 짚고 가셔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나와 비슷한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발언권을 요청한 사용자는 조성호였다. 나와 이효을이 머리를 끄덕이자 조성호는 침착히 정황이 적힌 기록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잠깐이지만 쓰게 웃어 보였다. 갑작스럽게, 이상할 정도로 그 웃음이 눈에 밟혔다. 그것은 분명히 미안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머셔너리 로드. 지금 말씀 드려서 죄송하지만, 앞서 들으셨던 것들 중에서 몇 가지 정정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이 기록은 어디까지나 한채혁과 세 명의 진술만 기록돼있을 뿐, 기공창술사와 차희영의 진술은 하나도 기록돼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폭탄 선언. 회의실의 모두가 깜짝 놀란 얼굴로 조성호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조성호는 조금도 아랑곳 않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기공창술사는 머셔너리 로드가 오면 말하겠다고 했고, 차희영은…. 저도 방금 도착한지라, 충격을 받았는지 협박을 받았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아무튼 현재 진술에 어떤 이견도 말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니 머셔너리 로드의 말씀대로 기공창술사의 말도 들어봐야 하는 게 옳다고 사료됩니다.” “클랜 로드?” “그리고 또한.” “클랜 로드! 지금 무슨…?” 김민서는 새된 목소리로 조성호를 바라보았으나, 이내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오히려 조성호가 차가운 눈동자로 김민서를 노려본 것이다. 그리고 나와 이효을을 번갈아 보더니 천천히 머리를 숙여 보였다. “앞서 두 분께 저지른 외교 간부의 결례는 제가 대신해서 사과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조금은 흥미로운 기분으로 조성호를 응시했다. 돌연히 조금전 조성호의 입가에 지어진 쓴웃음이 떠올랐다. 어쩌면 조성호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안현의 말을 들어보고 정황 확인 절차에 들어가는 순간, 자신들이 한없이 불리해질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또한 조성호는 머셔너리가 주도했던 백서연 사건에 직접 참가한 사용자였다. 그런 만큼 진실을 밝혀내는 것쯤은 우리 쪽에서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성호는 현재 상황에서 가장 클랜 로드다운 결정을 내렸다고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조성호는 자신이 할 말을 끝냈다는 양 긴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나는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안현. 내가 왔으니까, 이제는 얘기할 수 있겠지?” “예. 거짓없이 말하겠습니다.” 안현은 순순히 대답했고, 나는 곧바로 심문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창고에는 왜 갔었지?” “순찰을 돌고 있었어요.” “보조가 순찰을?” “하연 누나가 해달라고 부탁했거든요.” 하연은 안현의 말이 맞는다는 듯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아주 없는 일은 아니라 나는 수긍할 수 있었다. “가서 무엇을 봤는데?” “…사용자 한채혁과 세 명이 차희영을 강제로 범하는 광경이요.” “기록에는 합의하 성관계라고 나와있는데?” “제가 본 광경은 전혀 아니었어요. 차희영은 끈임 없이 그만두라고 저항했고, 구멍에서 보는 저에게 도와달라고까지 말했으니까요.” “그러면 왜 이 사실을 미리 말하지 않았지?” “…처음에 결백을 주장했지만 차희영이 어떤 증언도, 아니 일말의 반응도 보이지 않아서요. 그래서 하연 누나의 말에 따라, 우선 클랜 로드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거예요.” 안현의 말대로 차희영은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협박을 받았는지 아니면 충격이 커서 저러는지는 모른다. 좌우간 차희영이 입을 다문 이상 안현의 말은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있었고, 또한 안현의 말에 맞추어 새로운 변명을 만들어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하연이 안현의 입을 다물게 한 것은 나름 괜찮은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어차피 진실은 밝혀지게 돼있으니까. 나는 계속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서 일방적으로 폭행을 했나? 차희영을 구하려고?” “구하려고 들어간 것은 맞지만, 일방적인 폭행은 아니었어요.” “거, 거짓말 하지마! 네가 먼저 그 흑색 창으로 나를…!” “조용히 해!” 상황이 심상찮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한채혁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되레 조성호가 고함침으로써 간단히 묻히고 말았다. 한채혁은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조성호를 바라봤으나, 조성호는 여전히 냉랭한 얼굴로 계속하라는 듯 안현에게 고갯짓을 했다. 안현은 한두 번 헛기침한 후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들어가서 신분을 밝히고 그만두라고 요청했어요. 하지만 사용자 한채혁은 상관 말라는 식으로 거절했고, 세 명도 제 말을 따르지 않았죠. 무기를 먼저 꺼낸 것은 맞아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차희영을 구하려고 꺼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계속해봐.” “결국 창으로 저 세 명을 떼어놓으려고 했는데, 그때 갑자기 사용자 한채혁이 달려들었어요. 그래서 싸움이 일어난 건데….” “그럼 일방적인 폭행은 무슨 말이지?” 안현은 쩝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조금 주저하는 듯 보이더니 어쩔 수 없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그게…. 너무 약해서…. 그냥 두세 번 가볍게 휘둘렀을 뿐인데 갑자기 쓰러져서….” “킥.” 과연. 그랬던 건가. 그럼 어쨌든 일방적인 폭행이 맞긴 맞네. 나는 가벼운 실소를 터뜨린 후 김민서로 시선을 돌렸다. “들으셨다시피, 우리 쪽 정황은 이렇습니다만.” “호…. 호호…. 저희 쪽이랑은 조금 상이하네요.” “조금이 아니라 많이 상이하죠. 아무튼 길게 끌 것 없이, 이제는 누구 말이 맞는지 확인 절차에 들어가야겠군요.” “그, 그렇겠죠?” 아까 전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김민서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한 모습을 보아하니 나는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조성호는 방금 도착했다고 했다. 그리고 김민서는 이번 사용자 아카데미의 총 교관이었다. 원칙상 사용자 아카데미에 일어난 사건은 총 교관이 책임 권한을 갖는다. 그러면 아마 사건 보고도 김민서에게 제일 먼저 들어갔을 터. 김민서는 어떻게든 사건을 유리한 쪽으로 이끌려 했던 모양이지만, 그건 나와 조성호를 대상으로 너무나 안일한 생각이었다. 김민서는 잠시 원망하는 눈초리로 조성호를 노려보고는 살그머니 내 눈치를 살폈다. “그, 그럼 어떤 식으로 사실 확인 절차를….” “방법이야 많죠. 궁수로 하여금 흔적을 조사하는 방법도 있고, 아니면 정신 계열 마법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 그렇지만 흔적도 정황이 될 뿐, 사실이 될 수는 없어요. 그리고 정신 계열 마법을 사용하면, 사용자의 정신이 오염될 가능성이 높아요. 그러니 두 방법 모두 거부하겠어요.” “흠.” 나는 가만히 턱을 매만졌다. 그러자 한 번 눈을 빛낸 김민서는 재빠르게 차희영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지, 지금으로서는 차희영에게 말을 들어보는 방법이….” “그건 우리 쪽에서 거절하겠습니다.” “뭐, 뭐라고요?” “보아하니 충격이 꽤나 심한 것 같아서요. 애당초 합의하 관계였다면 왜 충격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는데…. 아무튼, 저에게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절대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인만큼, 차희영의 증언은 분명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차희영이 증언을 한다고, 그 말이 무조건 진실이라는 보장은 없다. 말인즉슨, 차희영을 회유해 불리한 증언이 나오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였다. “클랜 로드. 괜한 참견일지는 모르나, 현재 머셔너리 창고에는 진실의 수정이 몇 개 남은 상태에요.” “아. 그거 참 좋네요.” 더 좋은 방법이 있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챘는지, 하연이 타이밍 좋게 말을 거들어주었다. 나는 아주 괜찮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인 후, 양손을 엇갈려 맞추었다. 그리고 입술을 꾹 물고 있는 김민서를 향해 태연히 입을 열었다. “이번 사건의 정확한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진실의 수정을 사용할 것을 제안하겠습니다. 물론 부담은 우리 쪽에서 하는 걸로 말이죠.” ============================ 작품 후기 ============================ 독자 분들. 의견을 말씀해주시는 것은 좋으나, 그렇다고 싸우지는 말아주세요. ㅜ.ㅠ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은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고, 그런 만큼 이런 코멘트도 저런 코멘트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냥 서로의 생각이 다를 뿐이지, 그것을 넘어서 과도한 비난을 하는 건 좋은 방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서로 존중할 수 있는 코멘트 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_(__)_ 0504 / 0933 ---------------------------------------------- 밀어주는 수현과 버림받은 수현. 벼르고 벼르던 순간이었다. 진실의 수정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자, 애써 태연하던 안색이 확 변하는걸 볼 수 있었다. 김민서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작게 벌렸으나, 미약한 신음만이 새어나올 뿐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길게 말할 필요도 없이, 진실의 수정은 특성상 이런 사건에서 가장 강력한 증거로 활용되는 물품이다. 물론 약점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 약점을 파고들 수 있는 사용자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더구나 진실의 수정도 우리 쪽에서 부담하겠다고 하니, 더는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만약 이 제안마저도 거부한다면? 그렇다면 고려 쪽에서 우리는 켕기는 게 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과 진배없다는 소리였다. 잠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음. 그거 좋네요.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그러던 도중, 여태껏 조용히 관망만하던 이효을이 비로소 입을 거들었다. 중앙 관리 기구의 자격으로 나왔으니 어느 한쪽 편을 들기도 애매했을 터인데, 명분이 생기자마자 곧바로 치고 나와준 것이다. 이효을은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조성호를 바라보았다. “진실의 수정을 사용하면 확실히 모든 정황을 정확하게 밝혀낼 수 있겠죠. 저는 아주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는데, 고려 로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조성호는 흘끗 옆을 곁눈질했다. 그러나 김민서가 입을 적시며 살그머니 고개를 돌리자, 이내 싸늘하게 조소하며 한채혁을 돌아보았다. “사용자 한채혁.” “예, 예….” “나는 여기서 도저히 거부할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는데. 자신 있나?” “예? 아…. 저…. 저는….” “다른 말은 집어치우고. 자신 있냐고. 아니 네 말이 맞는다면 거부할 이유가 없잖아. 안 그래?” “그, 그러니까….” 한채혁은 한껏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 도움을 구하는듯한 눈초리를 보냈으나, 김민서는 여전히 시선을 피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자 무언가 느낀 게 있는지 한채혁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그늘지었고, 결국 툭 머리를 떨구고 말았다. 이러한 태도가 의미하는 바는, 너무도 명백했다. “후. 그렇다는 말이지.” 조성호는 짧은 한숨을 흘리고는 나직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싱거운 웃음을 터뜨렸을 때였다. 퍽! 쿠당탕! 쿠당탕탕! “끄악!” 갑자기 폭죽 터지는 소리와 비슷한 소음이 터져 나오더니, 한채혁이 얼굴을 감싸 쥔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워낙 불시에 일어난 일이라 모두 크게 놀란 듯 보였지만, 나는 담담히 응시할 수 있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조성호가 있는 힘껏 한채혁의 안면을 가격한 게 확실하게 보였으니까. “추악한 놈! 이 병신 같은 자식!” 어찌나 세게 후려쳤는지, 코를 막은 손에서는 피가 배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그런 한채혁에 냉랭한 독설을 내뱉은 조성호는, 곧 힘이 빠진듯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굳이 진실의 수정을 사용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머셔너리 로드.” “…그러면 안현이 진술한 정황을 인정하겠다는 말씀입니까?” “예. 이 연놈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기공창술사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깔끔하게 인정하겠습니다.” “…….” 말을 마친 조성호는 재차 한채혁을 힘껏 노려보았다. 그리고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이번에는 김민서로 시선을 돌리며 비아냥거렸다. “네가 자신 있게 한 말이 그대로 돌아오게 생겼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외교 간부?” “크, 클랜 로드야말로…. 왜…. 어째서….” “입 다물지 그래. 누가 멋대로 정황을 사실인 것처럼 말하라고 했지? 이번 사건은 다시 처음부터 조사하겠어. 그리고 네가 조금이라도 연관돼있다는 사실이 밝혀질 경우, 그냥 넘어갈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거다.” “…큭!” 조성호는 정말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곧 어떻게든 화를 가라앉히려는 듯 차분히 숨을 고르더니, 이내 주먹에 묻은 피를 툭툭 털며 말했다. “사용자 차희영은 물론이고, 머셔너리 분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죄인을 처벌하려면 자세한 정황을 재조사해야겠으나, 그건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요. 그러니 우선 지금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를 보이겠습니다.” “성의요?” “예. 사용자 차희영에게는, 이번 사건으로 입은 피해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적절한 보상을 해드리죠. 그와 동시에, 현재 사용자 아카데미에 있는 모든 고려 클랜원들을 퇴거시키겠으며, 그로 인한 공석은 머셔너리 클랜에게 일체 양도하도록 하겠습니다.” “흠. 그건 아무래도 좋습니다만. 아무튼 고려 로드의 뜻은….” “또한, 이번 사건은 고려의 이름을 걸고 철저한 조사로 모든 잘못을 낱낱이 밝혀낼 생각입니다. 조금이라도 죄가 있는 사용자는 중앙 관리 기구와 협의해 적법한 처벌을 할 예정이며, 이 모든 과정이 끝난 후에는 한치의 가감 없는 공식 발표와 사과로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 또박또박한 조성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순간 할말을 잃고 말았다. 고려 클랜으로서는, 더는 굽힐래야 굽힐 수도 없을 만큼 최대한으로 숙이고 나온 것이다. 그러나 약간이지만 이상한 기분도 들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조성호의 태도가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역지사지로 생각해도 화를 내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만일 내가 조성호의 입장이라면 그냥 한채혁을 버리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김민서는 처음부터 보고를 잘못 받았다는 걸로 이야기를 이끌어 어떻게든 빼냈을 것이고. 그런데 조성호는 오히려 자 클랜원의 치부를 스스로 들추겠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아무튼 차후 처리는 지켜봐야 알겠지만, 중앙 관리 기구가 결부된 이상 허투루 넘어가기는 어려울 터. 스스로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데 막을 도리는 없으므로,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그러자 이효을이 손을 짝짝 부딪치며 입을 열었다. “일이 잘 끝나서 다행이네요. 그럼 사건도 어느 정도 마무리 지어진 것 같으니, 오늘 자리는 이만 파하도록 해요. 밤도 늦었고, 지금 당장은 처리할 수 없는 일도 있으니까요.” 나와 조성호는 동시에 동의했다. 그리고 잠시 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용자들이 들어와 김민서, 한채혁과 세 놈을 끌고 가는 것을 보고 있자, 돌연히 조성호가 몸을 일으켜 손을 내밀었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조성호의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미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조용히 손을 맞잡았다. “고려 로드의 결단은 잘 봤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개인적으로 존경심이 드는군요.” “아닙니다. 당연한 일인데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부끄럽네요. 오히려 저야말로 언제나 머셔너리 로드에게 도움만 받는 것 같네요. …이것저것 말이지요.” “…예?” “아니, 아닙니다. 그럼 조만간 또 한 번 뵙도록 하죠. 공언한 말들은 확실히 이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부디 좋은 밤 보내시길.” 조성호는 차분히 인사를 건넨 후 바람처럼 방문을 나섰다. 나는 잠시 방문을 바라보다가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갑작스럽게 긴장이 풀리자 그에 따라 몸의 힘도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육체적인 피로가 아닌 정신적인 피로함. “형….” 그렇게 이마를 꾹꾹 누르고 있을 무렵, 어느새 다가온 안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모든 일이 좋은 방향으로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안현은 여전히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러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아, 나는 지그시 안현을 응시했다. 절로 기다란 한숨이 흘러나온다. “후유.” “죄, 죄송해요 형.” “안현…. 너라는 놈은 어째, 바람 잘 날이 없는 거냐. 응?” “…알아요. 감정에 따라 행동하기는 했지만, 저도 잘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니 형의 지시를 어긴 죄는….” “시끄러워. 그리고 잘했다.” “죄송…. 예?” 안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그 순간 속으로 여러 말들이 떠올랐다. 확실히 모든걸 잘한 건 아니지. 내가 분명 조용히 있으라고 했을 텐데? 너는 어째 생각을 그렇게밖에 못하냐 등등. 그래.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잘못된 상황을 전해들은 것도 있지만, 신신당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사고를 친 안현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적어도 용이 잠든 산맥 사건과 차이가 있다면, 과정은 비슷하나 결과가 다르다고나 할까? 또한 주변에 보는 눈들이 있는 만큼, 적어도 이 자리에서 호통을 치는 건 좋은 모양새가 아닐 터.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안현의 정수리에 손을 세게 얹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잘했다고.” “어…. 어….” “물론 잘못한 것도 있지만, 지금은 그냥 그렇게만 생각하자. 나머지는 나중에 이야기하고. 머리 아프다.” “…….” 안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 그렇게 한동안 시선을 맞추고 있자, 문득, 갑작스럽게 안현의 눈에서 눈물 한 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속으로 깜짝 놀라 서둘러 손을 떼었다. 아니. 기껏 칭찬했는데 왜 우는 거지? “현아 울지마. 왜 울어. 잘했다고 하시는데.” “아니 그게…. 저도 잘…. 그냥…. 갑자기…. 큭…!” 안현은 말을 더듬으면서도 어떻게든 참으려는 듯 입을 앙다물었으나, 어느덧 닭 똥 같은 눈물은 볼을 타고 입술로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하연은 그런 안현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잔잔한 미소를 보였다. 이내 주먹으로 얼굴을 쓱쓱 문지르는 안현을 보며, 나는 볼을 긁적이며 시선을 돌렸다. 생각해보니 아직 방에 두어 명이 남아있는데, 뭔가 신파극을 보이는 것 같아 창피한 마음이 들었다. “오호. 보기 좋은데. 이런 세상에서 꽤나 보기 드문 장면이야. 그런데, 그동안 꽤나 엄했나 봐? 응?” 역시나 이효을이 흐뭇해하는 얼굴로 말을 걸어, 나는 닥치라는 의미로 눈을 부라렸다. 이윽고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이효을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 불현듯 아직도 몸을 떨고 있는 여인이 눈에 밟혔다. 차희영이라고 했던가? 아까 정황을 들어보니 대충의 상황은 그려졌다. 아마 통과의례 때 동료들을 잘못 만나 억지로 당한 케이스로 보이는데, 차희영 같은 경우는 상당이 운이 없는 케이스였다. 즉 박동걸 같은 놈들이 우글대는 곳에서 시작을 했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러한 관계는 홀 플레인에 들어와서도 이어졌을 것이고. 한동안 차희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사실 어떤 일을 당했든 내 알 바는 아니었으나, 이번 사용자 아카데미는 모든 병아리들을 대상으로 제 3의 눈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차희영 같은 경우는, 이번 사건을 빌미로 머셔너리 클랜에 꼬드길 여지가 어느 정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챙길 것은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사용자 정보가 훌륭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어야겠지만. 이윽고 허공으로 사용자 정보가 주르륵 떠올랐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차희영(0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마법사(Normal, Mage, Beginner) 3. 소속 국가(Nation) : -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증오하는 마녀(진)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1) 7. 신장 • 체중 : 167.4cm • 47.6kg 8. 성향 : 무기력 • 증오(Lethargy • Detestation) [근력 14] [내구 24] [민첩 34] [체력 44] [마력 84] [행운 4]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 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정확히 진명을 확인한 순간, 나는 숨이 멎는듯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 다음날 아침. 나는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사용자 아카데미를 떠나야만 했다. 나름의 호의로 숙소에 하룻밤 머물 수는 있었지만, 사용자 아카데미의 원칙상 그 이상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딱히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6주차 이후에 교관으로 들어올 예정이었으니까. “그러면 우리가 총 네 자리를 얻게 되는 건가?” “그렇지. 아무튼 총 교관의 자리는 오래 비우면 좋을 게 없으니, 최대한 빨리 보내달라고.” 이른 새벽. 사용자 아카데미의 정문에서, 나는 배웅을 나온 이효을과 가벼운 환담을 나누었다. 어제 말했던 대로, 조성호는 아침이 되기도 전에 사용자 아카데미 내 모든 고려 클랜원을 퇴거시켰다. 그에 따라 총 교관 겸 교육 교관 자리 하나와 생활 교관 자리 하나가 비었는데, 우리에게 양도하겠다는 의사를 이효을이 인정해준 것이다. 사실 생활 교관이야 안현을 올리면 되는 일이었지만, 교육 교관은 가장 얼굴이 팔리고(?) 또 매우 중한 자리인 만큼 아무나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머셔너리에 인재가 없는 것도 아니니, 나는 근시일 내로 적당한 클랜원을 추천하겠다 확답해주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 테니까, 다들 3주 후에 봅시다.” “네. 수현. 이렇게 와줘서 정말 미안하고, 또 정말 고마워요.” 이제 슬슬 갈 때가 된 것 같아 작별 인사를 건넸으나, 대답한 사용자는 하연뿐이었다. 이효을은 얼른 가라는 듯 손을 내젓고 있었고, 안현은 아직도 머쓱한지 머리만 긁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안현의 옆으로는, 또 한 명의 여인이 아직은 흐릿함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 감….” 여인은 나와 눈을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살그머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는 동시에 안현의 옷가지를 꼭 잡아 나를 두 번 놀라게 만들기까지. 어젯밤 자리를 파한 이후 안현이 차희영과 밤을 새며 대화를 했다고 하던데, 뭔가 관계에 진전이 있던 걸까? 아무튼 그 모습이 꼭 무척 수줍어하는 소녀를 보는 것 같아, 나는 어색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왜냐하면 저 여인이 내가 기억하는…. 그러니까 자신과 1700명을 제물로 바쳐 지옥 대공을 소환한 마녀가 맞는다면, 저런 태도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웃기지 마! 이제 와서, 이제 와서 그만두라고? 그건 내가 예전에 너희한테 했던 말이었어! 하지만, 너희는 어떻게 했지?' '모른 척을 했지. 모른 척을 했다고! 그토록 그만두라고, 그토록 도와달라고, 그토록 살려달라고 애걸복걸을 했는데도…!' 마녀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애당초 관심도 없었거니와, 아틀란타 탈환 전에는 누군지도 몰랐으니까. 그러나 아틀란타를 탈환하기 직전, 온 세상을 찢어발기는듯한 웃음소리와, 우리를 향해 퍼붓던 증오에 찬 저주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 당시 마녀가 보여주었던 공포는 거의 악몽에 가까울 정도였다. 오죽하면 내가 2회 차를 시작하며 모든 리스크를 감수하고 화정을 선택한 것도, 그때 느꼈던 공포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문득 안솔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오빠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오라버니의 악몽이…. 흐아아앙~. 음냐음냐….' 그럼 안솔이 안현을 사용자 아카데미에 보내자고 한 것도, 이러한 상황을 예견했다는 말일까? 물론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다. 근 3년 동안 2회 차 생활을 해본 결과, 미래는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그때였다. “가, 감사합니다….” “……?” “도와주셔서….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 내가 계속 쳐다보자 무언의 압박을 느낀 탓일까. 어느덧 한 손을 그러모은 차희영이 푹 허리를 숙였다. 비록 모기만한 목소리이기는 했지만, 나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1회 차에서는 그 무시무시한 증오와 저주를 퍼붓던 마녀가, 2회 차에서 나에게 인사를 건넨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 손으로 안현을 꾹 잡고 있는 것을 보자, 돌연 온몸이 일거에 가라앉으며 허탈한 감정마저 느껴졌다. 나는 과연 무엇을 걱정했던 걸까. 어쩌면, 1회 차의 망령에 사로잡혀 색안경이 끼었는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마녀는 위험하다. 그러나 나는 유현아 때를 떠올려보았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고, 차희영은 마녀로 각성하기 전이었다. 그러니 품을지, 아니면 죽일지. 조금, 아주 조금 더 기다리며 지켜봐도 괜찮지 않을까. 그래. 지금 바로 결정하기보다는, 차후 성장하는 과정을 보며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3주 후를 기약하며 차분히 몸을 돌렸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새벽의 찬바람은 정말이지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말 많고 탈 많던 안현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네요. 처음 메모라이즈를 기획할 때는 4부작으로 기획했습니다. 그러나 연재에 들어가면서 3부작으로 줄였고, 도중에 2부작으로 또 줄어들었지요. 다음 회부터 나오는 내용은 사용자 아카데미 파트로, 원래 3, 4부작에서 2부의 마지막을 담당하던 파트입니다. 그동안 여러 번 언급되었던 한 명 한 명이 나오는 파트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와 동시에, 진수현에 관한 떡밥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진행할 예정이기도 하고요.(마지아나 차희영 사건의 사후 처리에 관해서는 중간에 간간이 삽입하는 방식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러고 보니 참 오랜만에 자정에 업데이트하는 것 같네요. 하하하. 그리고 코멘트 란은…. 어제 부탁을 드렸는데, 사실 그렇게 나아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_-a 그래도 제가 독자 분들을 믿는 만큼, 독자 분들께서도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시리라 믿습니다.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서로의 의견은 충분히 다를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런데 내 말이 옳다 네가 틀렸다 이런 식으로 헐뜯고 비꼬는 태도는 정말로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부탁 드리건대, 서로를 향한 과도한 비난은 제발 하지 말아주세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코멘트 란이 되었으면 합니다. _(__)_ 0505 / 0933 ---------------------------------------------- 밀어주는 수현과 버림받은 수현. 사용자 아카데미 사건은 어찌어찌 해결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클랜 로드로써 봐야 하는 기본적인 업무도 있거니와 계획한 일들도 진행시켜야 했으니까. 그러나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일에 비해 내 몸은 하나였고, 그런 만큼 모든 일을 하나하나 쫓아다니며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나는 현재 가장 중요한 일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일은 클랜원들에게 맡기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렸다. 용병 아카데미는 이미 공사에 들어간 상태였다. 거주민은 아카데미를 새로 짓는 것 보다는, 도시 중앙 성채를 새로 개축하는 게 어떻겠냐고 건의했다. 말인즉슨, 어차피 한 해 정원이 6명인 이상 크게 지을 필요가 없다는 소리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맞는 말 같아 나는 바로 허락해주었고, 그 덕에 예정 기간도 상당히 줄어들어 수료 전까지 충분히 완공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눈을 돌린 건, 바로 새로 보낼 총 교관을 선발하는 일이었다. 김민서는 총 교관 겸 사제 클래스의 교육을 맡고 있었고, 그에 따라 이효을도 사제 계열 사용자를 보내주기를 원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떠오른 클랜원은 신재룡이었다. 사용자 정보나 성격이나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아 가장 무난하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안솔이 끼어든 것이었다. 신재룡을 추천하겠다는 말을 들은 안솔이 자기도 사용자 아카데미에 가고 싶다고 생떼를 부렸다. 바닥을 구르고 울며불며 난리를 치는 통에 엄청 짜증이 일었는데, 나는 문득 안솔을 데리고 가는 방향으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안현의 사건으로 사용자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앞서, 안솔에게 들었던 말이 기억에 강하게 남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안솔에게 총 교관은커녕 교육 교관을 맡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보조로 데리고 가겠다고 공언했다.(사실 보조는 필수가 아닌 조건이라 딱히 데리고 가지 않아도 되지만.) 그러자 안솔은 가는 것 자체로 만족했는지 더는 조르지 않았다. 시간은 화살처럼 빠르게 흘렀다. 그렇게 하나하나 일을 진행하고 처리하는 와중, 나는 중앙 관리 기구로부터 하나의 전령을 받을 수 있었다. 『발신인 : 이효을 & 수신인 : 김수현』 (내용 : 사용자 아카데미 5주차 교육 종료 안내. 중앙 관리 기구로 특별 교관 신고 및 교육 과목 배당. 최소 6주차 시작 하루 전까지는 도착 요망.) 전령으로 온 내용은 간단했다. 이제 곧 사용자 아카데미 6주차가 시작될 예정이니, 중앙 관리 기구에서 특별 교관 전입 신고를 마친 후 사용자 아카데미로 들어오라는 소리였다. 비로소 기다리던 때가 온 것이다. * “교관~! 보조~! 교관~! 보조~! 교관~! 보조~! 교관~! 보조~!” “…….” “나는 보조? 오라버니는 교관! 나는 보조? 오라버니는 교관!” “…….” 6주차가 시작되기 하루 전날. 오후쯤 클랜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기세 좋게 클랜 하우스를 떠났지만, 설마 바바라에 도착하자마자 후회하게 될 줄은 몰랐다. 원인은 지금 내 옆에서 걷고 있는 안솔 때문이었다. 당최 무에 그리 좋은지. 떠날 때부터 내내 뜻 모를 괴상한 노래를 불러 젖히며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있는 탓이다.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꼴에 양팔을 휙휙 휘두르며 리듬을 타니, 같이 다니기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이미 바바라로 오면서 수십 번의 킥킥거리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조용히 하라고 해도 도무지 들어먹지 않을 기세라 은근슬쩍 거리를 떨어트리려 했지만, 안솔은 되레 악착같이 쫓아오며 더욱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결국 중앙 관리 기구에 도착했을 때는 심신이 뜻 모를 피로에 지쳤을 즈음이었다. 뭔가 한 것도 없는데. 나는 곤히 잠든 마르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비척비척 계단을 올랐다. “가장 늦게 왔네?” 이윽고 방안으로 들어가 지친 몸을 앉힌 순간, 이효을이 빙글빙글한 얼굴로 말을 걸었다. 무슨 소리냐는 의미로 바라보자 이효을은 킬킬 웃으며 품에서 연초를 꺼냈다. “특별 교관 중에서 가장 늦었다는 소리야. 소영이는 꼭두새벽에 도착했고, 우리 유현씨는 아침에 도착했거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적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아, 어느 것부터 지적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차분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가 네 친구냐. 그리고 내 형 그렇게 부르지 마라. 마지막으로 연초 도로 집어넣어. 아. 마지막만 부탁이야.” 막 불을 붙이려던 이효을은 황당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너 번 눈을 빠르게 깜빡이더니 시선을 살그머니 아래로 내렸다. “…그러고 보니 곧 물어보려고는 했는데. 그건 뭐야?” “아기 요정이야. 이름은 마르.” “그럼 그 아래는?” “?” “네 발목을 물고 있는 동물처럼 보이는 것.” “아. 얘는 아기 페가수스. 이름은 도도.” 나는 당당히 대답했다. 이어서 왼발을 들어올려주자 발목을 꼭 물고 있는 도도가 때맞춰 날개를 퍼덕인다. 그러자 이효을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차분히 연초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콧잔등을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요새 피곤해서 그런가…. 헛것을 보는 기분이네. 아니, 아무튼 게네들은 외부인이잖아. 네가 사용자 아카데미 원칙을 모를 리는 없을 테고. 갑자기 왜 그래?” “외부인이라니. 말조심해. 이 둘은 차후 교육에 사용할 엄연한 성과의 일종이라고.” “…교육에 사용할 성과?” “그래.” 이효을이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해봐. 사용자 아카데미는 병아리들이 홀 플레인에 최대한 적응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잖아? 그러면 한 시라도 빨리 현대의 향기를 지우는 게 관건이고.” “그렇지. 그런데?” “마르와 도도를 데려온 이유가 바로 그거야. 요정과 페가수스는 현대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잖아. 그러니 홀 플레인에서만 존재하는 것들을 보여줌으로써,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보여주고 이해시키려는 의도가 있다는 말이지.” “…호.” 이효을은 설마 이런 의도가 있었는지는 몰랐다는 듯이 미약한 감탄을 흘렸다. 하지만 나는 가슴이 콕콕 찔리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왜냐하면 조금 전 뱉은 말은 전부 헛소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대로 얘기하면 도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을 터라,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한 것이다. “나름 괜찮은 방법인데?” “으음. 그런 거지.” 이효을은 가만히 턱을 괴었다. 그리고 흥미로운 얼굴을 하더니 눈을 반짝 빛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말만 들었지 보는 건 처음이라서. 잠깐 구경해도 돼?” “얼마든지.” “음~. 마르는 자고 있으니 안되겠고. 도도라고 했나? 도도야~. 이리 좀 와보련~.” “…….” 그러자 도도는 이효을을 흘끗 곁눈질했다. 그리고 무척 놀랍게도, 곧 죽어도 놓지 않을 것 같던 내 발목을 놓고서 종종거리며 달려갔다. 이내 이효을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손을 아래로 내밀자 도도는 그 손을 덥석 물어버렸다. “어머. 얘 좀 봐. 꽤 귀엽잖아?” 그래도 천성이 여인이라 그런지, 이효을은 예뻐죽겠다는 얼굴을 하고서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러나 이어진 도도의 행동은 전혀 귀엽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얼굴을 와짝 일그러뜨리더니 이효을의 손을 곧바로 놓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바닥에 침을 탁 뱉기까지. 누가 봐도 비위가 상했다는 행동이었다. 도도는 도로 아장아장 걸어와 내 발목을 물었다. 그리고 그런 도도의 행동을 보는 이효을의 얼굴은 자못 볼만했다. “무, 무슨 그런 놈이 다 있어?!” “네가 맛이 없었나 봐.” “나 참. 정말이지 기도 안차서. 아 됐으니까, 가서 교육을 하든 육아를 하든 마음대로 해.” “Ok. 어차피 애기들이야. 걱정할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이효을은 “퍽이나.”라고 말하며 손을 저었다. 아무래도 도도의 행동에 큰 상처를 받은 것 같아, 나는 속으로 고소해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튼 허락도 맡았고 어찌어찌 신고도 넘어갔겠다. 기분 좋은 마음으로 문을 나서려는 찰나,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생각해보니 이효을에게 한 가지 물어볼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효을. 궁금한 거 하나만 물어보자.” “응? 궁금한 거?” “아. 그 사용자들은 잘 지내고 있는가 해서.” “그 사용자?” “진수현. 그리고 맹아라.” “…….”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로 가면서 나는 중간중간 하연에게 사용자 아카데미에 대한 보고를 들었다. 물론 보고라고 해도 그리 거창한 건 아니다. 병아리를 최우선으로 보호하는 만큼 그에 관한 정보는 들을 수 없지만, 그 외의 것은 가능했다. 예를 들면 누가 교관으로 들어왔나 등 그런 것들은, 외부에서도 알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하연의 보고 중 의외의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진수현이라는 사용자가 교육 교관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것도 맹아라를 보조로 달고서. “…그래. 네가 결국 맹아라와 만났다는 얘기는 들었지. 그런데 알면서 물어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거야?” 이효을은 서너 번 입맛을 다시고는 뭔가 언짢은듯한 말투로 말했다. 아마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주제인데, 잊지 않고 말을 꺼내니 자못 불편한 모양이다. 진수현이 교관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은 놀랍기는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참가권이 있다면 그 누구도 교관에 참가할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예전에 이효을이 양보해달라던 참가권이 누구에게 갔을지 추측해본다면, 진수현이 교관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은 아주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의문이 가시는 건 아니었다. 우선 첫 번째. 진수현은 그동안 행방이 묘연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렇게 공식적으로 자신을 드러낸 걸까? 그리고 두 번째. 맹아라는 북 대륙의 수호자이다. 최대한 자신을 숨겨야 하는 입장인데, 정체가 드러날 것을 각오하고 보조로 따라 들어왔다. 드러내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야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뭔가 보일 것 같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아직은 뜬구름을 보는 느낌이랄까. 나는 이효을을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정확히 아는 건 없지. 거의 추측만하고 있을 뿐, 아직 정확한 사정은 모르니까. 어쨌든 이제는 말해도 상관없지 않나?” “…미안하지만 그래도 알려줄 수는 없어. 이건 비밀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사정이 연관돼있기도 하니까. 내가 그걸 말할 자격은 없잖아?” 이효을은 여전히 단호하게, 딱 잘라 거절했다. 사실 알려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 터라,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흠. 그럼 결국 천사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나.” “그걸 꼭 알아야 해?” “영 찜찜해서. 울먹울먹하면서 자기들이 버림받는다고 하는데,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잖아?” “…후. 그럼 그러시던가. 내가 그것까지 막을 권한은 없으니. 멋대로 해.”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다. 좌우간 이효을에게 이제 더는 볼 일이 없다. 그리고 안솔도 밖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럼.” “잠깐만.” 그렇게 생각해 문을 나가려는 찰나, 돌연 이효을의 말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반쯤 시선을 돌리자 아까 도도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매우 진지한 얼굴로 나를 보는 이효을이 보였다. “김수현. 갑작스럽겠지만, 내가 조언 하나 해도 될까?” “조언? 해봐.” 해보라는 듯 머리를 끄덕이자 이효을은 물끄러미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희고 고운 목울대가 꿀꺽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붉은 입술이 상하로 떼어진다. “전에도 한 번 바꾸려고 한 적이 있다지?” “…그게 무슨 소리지?” “네 담당 천사. 세라프라고 하던가?” “…….” “그 천사, 별로 소문이 좋지 않아. 아무튼 그냥 흘려 들어도 상관은 없는데, 웬만하면 바꾸는 게 좋을 거야.” “킥.” 무슨 소리를 하는가 했더니. 나는 힘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비로소 문을 밀어젖히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걱정 마. 나는 애당초 천사 자체를 믿지 않으니까.” ============================ 작품 후기 ============================ 제가 이틀 연속 자정 연재를 하다니…. 믿을 수가 없네요. ㅜ.ㅠ 0506 / 0933 ---------------------------------------------- 하룻강아지들, 범 무서운지 모른다. 그렇게 특별 교관 신고를 마친 후, 나는 홀로 손장난을 하고 있는 안솔을 데리고 사용자 아카데미로 향했다. 입구는 바로 통과할 수 있었다. 안현의 사건 때 안면을 익혀 놓은 터라, 예전의 엄격한 확인 절차가 생략된 것이다. 또한 오늘 특별 교관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이미 숙소 또한 배정된 상태였다. “후후후후후후. 드디어 오라버니와 같은 방을 사용하는 날이 왔네요.” 또다시 헛소리를 시작한 안솔을 나는 지그시 응시했다. 그리고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얘는 도대체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걸까? 그리고 맹아라와 붙여놓으면 어떤 일이 생길까? “왜 저를 그렇게 쳐다보시는 거예요? 설마…. 야한 생각 하신 건 아니죠?!” 이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솔은 고연주 표 눈웃음을 치며 살살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도발하는 건가? “글쎄. 과연 네 생각대로 될지. 아무튼 기대하마.” “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오라버니의 보조라고요, 보조. 일반적으로 교관과 보조는 같은 방을 사용하도록 되어있어요.” “누가 그래.” “교관용으로 배부되는 사용자 아카데미 안내 기록에요.” 어디서 책 좀 읽었는지 눈을 똑바로 뜨며 대꾸한다. 사실 안솔의 말이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우였다. 무조건 같이 써야 하는 것도 아니고 충분히 예외도 있다. 그러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이 아이는, 책에서 읽은 조항을 조목조목 들이대며 같은 방을 써야 한다 나를 설득했다. …얘는 꼭 이럴 때만 논리적이 되더라. 아무튼 신기해, 참 신기해. 쉴 새 없이 짹짹거리던 안솔의 부리가 닫힌 것은, 앞으로 내가 사용할 숙소에 도착했을 때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앞서 사용자 아카데미에 들어와있던 클랜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총 교관 겸 교육 교관인 신재룡, 보조 김한별. 생활 교관 안현, 보조 이유정. 하연은 교육 교관이었으나 따로 보조를 요청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와 안솔이 들어가자 총 7명으로, 그다지 작은 공간이 아님에도 방이 꽉 찬 기분이 들었다. “다들 모여있었네요.” “오늘이 5주차 주말 마지막이잖아요. 다들 교육도 없겠다, 오신다는 말씀을 듣고 기다리고 있었죠. …어머?” 하연은 새근새근 잠든 마르를 받아 들더니 작게 감탄했다. 동시에 발목을 두어 번 툭툭 털자 도도가 발라당 나동그라지는 게 느껴졌다. 도도는 “삐삑?!” 거리며 득달같이 달려들었으나, 나는 발로 적당히 밀어내며 자리에 걸터앉았다. 이내 도도가 분하다는 듯 빽빽 울어 젖히자 한별이 금세 다가와 품으로 안아 들었다. 왜인지 흐뭇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 클랜원들을 보며, 나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첫 타자는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신재룡이었다. “총 교관 역할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재미있는 자리는 아닐 텐데.” “확실히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냥 경험이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나저나 앞으로 꽤나 껄끄러우시겠는데요.” “아. 전혀 요. 특별 교관은 교관 중에서도 가장 높은 자격을 갖는지라, 저도 함부로 하기 힘든 자리입니다. 하하하.” 어찌 보면 예민한 문제일 수도 있는데, 신재룡은 되레 껄껄 웃으며 부드럽게 받아넘겼다. 물론 나 또한 농담으로 건넨 말이었기에 부담 없이 웃어줄 수 있었다. “아무튼, 요즘 아카데미 생활들은 어떤가요? …너는 어때? 조금 힘들어 보이는데.” 마지막 말은 안현을 겨냥한 말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안현은 정말로 힘들어 보였다. 쏙 들어간 볼하며 얼굴은 수척하기 그지없다. 흡사 피로에 찌든 모습이라고나 할까? 이윽고 볼을 긁적인 안현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요즘 좀 피곤해요.” 그와 동시에 방안으로 가벼운 웃음이 흘렀다. 신재룡은 대놓고 껄껄 웃었고 유정도 탁자를 탕탕 치며 깔깔거렸다. 심지어 한별이마저도 입을 가린 채 웃는 중이었다. 가만히 있는 사용자는 나와 안솔뿐. 도대체 왜들 이렇게 웃는 걸까? “아. 이렇게 웃으니까 너무 좋다. 꼭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 이윽고 실컷 웃었는지, 유정이 차분히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그렇기도 하다. 현재 여기 있는 클랜원은 거의 대부분 나와 초창기를 함께한 이들이었다. 나 또한 옛날 생각이 나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이내 곧바로 지워버렸다. 고작 옛날을 회상하려고 특별 교관으로 들어온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재미있게 지내는 것도 좋지만, 어디까지나 사용자 아카데미에 들어온 목적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하연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하연. 우리가 마지막으로 클랜원을 받은게 언제쯤이지요?” “클랜원이요? 으음…. 한 1년? 아니 8개월? 그 정도는 된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최소 6개월은 새로운 클랜원을 받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물론 나름 바쁘기도 했고 내부를 다듬는다는 나름의 명분은 있었지만, 클랜원을 새로 충원하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아무리 소수 정예를 지향한다고는 해도, 현재 머셔너리 클랜은 인원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이번 사용자 아카데미는, 그런 느낌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매우 좋은 기회였다. 나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예전에 한 번 말한 적도 있는 만큼, 이번 사용자 아카데미의 중요성은 다들 인지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그에 관해서는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이번에 최소 한 명 이상 새로운 사용자를 충원할 생각입니다.” “…….” “하지만 저는 방금 들어온 터라, 현재 사용자 아카데미 내 돌아가는 사정을 조금도 모르는 상태죠. 그래서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은 어떤지. 다른 클랜의 교관들은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이번 병아리들의 수준은 어떤지. 그리고 어느 병아리가 눈여겨볼 만한지.” “그래서 제가 준비한 게 있죠.” 말을 마친 순간 하연이 타이밍 좋게 받아주었다. 이내 마르를 유정에게 조심스럽게 넘긴 하연은, 탁자 아래서 두툼한 기록 뭉치를 꺼내 올렸다. 탁, 약간 쌓인 먼지가 허공으로 흩날렸다. “자. 앞으로 너희가 싫어하는 지루한 얘기가 시작될 거니까, 다들 나가있으렴. 아. 신재룡씨는 앉아있으세요.” 명백한 축객령. 그래도 애들은 군말 않고 일어나…. “에? 하지만 저는 앞으로 오라버니와 이 방에서….” 지는 않고, 역시나 안솔이 항의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뭐?” 그러나 유정의 눈에 쌍심지가 돋치는 순간, 안솔의 항의는 소리소문 없이 사그라졌다. “아, 아니. 그러니까요. 그게요….” “조금 전 말…. 언니가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렇지? 응?” “…느에에에.” “호호호. 그렇구나. 언니가 잘못 들었네. 걱정 마! 방은 많으니까!” 결국 한별이와 같은 방을 쓰는 것으로 결정이 난 안솔은, 부뎨에에 울며 짐을 챙겨 나가버렸다. 그래도 꺼이꺼이 우는 걸 보니 속으로 엄청나게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다가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아. 안현. 차희영은 잘 지내고 있나?” 막 방을 나서려던 안현은 순간 몸을 흠칫했다. 그리고 삐걱거리듯 머리를 돌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희, 희영이요?” “음. 언제 한 번 같이 시간 좀 내봐. 식사라도 하자고 그래.” “하, 하지만 교관은….” “홍보를 하려는 게 아니라, 저번 사건 때문에 그래. 그래도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만큼,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할 자격 정도는 있잖아?” 딱히 할 말은 없는지 안현은 떨떠름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한 번 말은 해볼게요….” 이윽고 힘없이 중얼거린 안현은 비틀거리듯 방을 나가버렸다. 그리고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둘이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아무튼. 어차피 곧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해, 나는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탁자에는 여전히 두툼해 보이는 기록이 뭉치로 쌓여있었고, 하연은 뿌듯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그시 신재룡을 돌아보자 '이건 정리 벽입니다.'이라 입 모양으로 말해주는 신재룡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한숨을 흘렸다. “수현을 위해 특별히 정리해놓은 기록들이에요. 제가 교육 교관 직을 하면서, 이번 병아리들의 특징을 하나하나 적어놓았거든요. 아마 적잖은 도움이 되실 거예요.” …아니. 그냥 제 3의 눈으로 보면 되요.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뜻은 가상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별 도움도 안 되는 일을 한 셈이었다. 그러나 기껏 고생한 하연에 면전에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 나는 태연히 웃으며 기록을 두드렸다. “고생했습니다. 하지만 이걸 지금 전부 볼 수는 없으니, 요약해서 듣고 싶네요. 이번에 병아리들의 수준이 그렇게 대단합니까?” “대단해요. 아주.” 하연은 단호한 목소리로, 딱 잘라 대답했다. 그것도 아주 라는 말을 붙여서. 하연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거의 최대한의 찬사를 보낸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자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어떤 점이 그렇게 대단합니까?” “여러 가지 의미로요. 역대 급이라고 보셔도 좋아요. 통과의례의 괴물을 잡고 왔다는 말도 있고, 시크릿 클래스도 한 명 들어왔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전부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적응력이 굉장히 높아요. 이제 겨우 5주차를 마친 병아리들인데, 하는 행동들을 보면 기존의 사용자들과 거의 비슷할 정도에요.” 이건 조금 의외였다. 아무리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의 시간은 필요하다. 그런데 이제 겨우 5주차 사용자들이 기존의 사용자들과 비슷하게 행동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번 병아리들은 확실히 범상치 않다는 소리였다. 하연의 말이 이어졌다. “또 사용자 아카데미 내 자신들의 가치를 잘 아는 것 같기도 하고요. 아무튼 병아리 같지가 않아요.” “이제 겨우 5주차가 그렇다는 말은 조금…. 혹시 교관들이 그럴만한 행동을 보여 빌미를 주지는 않았습니까?” 그러자 하연은 신재룡을 응시했다. 아마 총 교관인 만큼, 그런 사정을 더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이내 나 또한 시선을 돌리자, 팔짱을 낀 신재룡은 약간은 수심에 젖은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행동이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빌미라고 보기도 그렇고…. 사실 교관들 중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문제라뇨?” “…으음. 클랜 로드. 혹시 공찬호, 그리고 진수현이라는 사용자를 알고 계십니까?” “공찬호, 진수현?” 나는 의아한 기분으로 반문했다. 근력 101의 사용자와 마법사 사냥꾼. 둘이 교관으로 있다는 사실은 이미 하연에게 들어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둘 사이에 문제가 있다고? 계속 말해보라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이자, 신재룡은 기다란 한숨을 흘렸다. “그게 말입니다. 사용자 공찬호와 사용자 진수현은 둘다 교육 교관입니다. 그런데, 둘의 사이가 무척 좋지 않습니다.” “사이가 좋지 않다.” “예. 정확히는 공찬호 쪽에서 진수현을 공공연하게 비방하고 다닙니다. 자격 없는 놈이 교관으로 들어왔다, 낙하산이다 하며 말이지요. 심지어 병아리들 앞에서도 그런다고 들었습니다.” “참가권은 운 좋게 얻어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건 말이 안 되는데요. 혹시 싫어하는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신재룡은 가만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정도가 너무 심해서 따로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딱히 이유는 없다고 하더군요. 아. 그러고 보니 그냥 수현 그놈 자체가 싫다고 말을 듣기는 했는데….” 수현 그놈 자체가 싫다 라. 돌연히 뭔가 짚이는 바가 있어,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혹시 공찬호가 머셔너리에 피해를 입히지는 않았습니까?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말씀해보세요.” 그러나 이번에도 신재룡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교관 얘기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런 건 전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현재 사용자 아카데미 내 머셔너리의 인지도는, 선두를 달리는 중이라 보셔도 됩니다.” “호.” 나는 차분히 턱을 매만졌다. 확실히 희소식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의문감도 들었다. 인지도가 높다는 게 좋긴 한데, 이제 겨우 5주차에 불과한 만큼 아직 인지도를 운운할 때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신재룡이 괜한 말을 꺼냈을 리는 없을 터. 나는 설명해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그런 내 기색을 느꼈는지, 신재룡은 잔잔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차희영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하하하. 예. 머셔너리의 인지도가 이리도 높아진 건, 모두 안현 덕분입니다.” ============================ 작품 후기 ============================ 이럴 수가. 여러분. 제가 3일 연속으로 자정 업데이트를 했습니다! 믿을 수가 없어요! 3일 연속 자정 업데이트라니! 내가 3일 연속 자정 업데이트라니! 독자님들. 독자님들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나요? 저는 바로 지금입니다! Reader : 닥쳐. 네. 너무 기뻐서 저도 모르게 드립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용서해주시길. _(__)_ 아. 많은 분들이 물으시는데요, 예. 이번 사용자 아카데미는 원래 2부의 거의 마지막 파트였습니다. 원래 4부가 3부로 줄어들고, 3부가 2부로 줄어들며 회수도 줄어들었습니다. 예전에 강철 산맥만 공략하면 완결이 눈에 보인다 말씀드린적이 있었죠? 그게 이런 의미에서 말씀드린 거예요. :) 사실 사용자 아카데미 하면 걱정부터 하시는 분들이 많으신데(저지른 죄가 있으니 조금 찔리네요.), 이번 사용자 아카데미 파트는 독자 분들이 재미있게 느끼실 만한 부분을 많이 넣으려 노력했습니다. 수현이 신위를 보인다거나, 예상치 못한 좋은 사용자들을 발견하는 것 등등이요. 물론 김유현과 한소영에 관한 에피소드도 있고요. 최대한 노력해보겠으니, 많은 기대 부탁해요! PS. 리리플을 요청하시는 분이 계신데, 그럼 다음 회에 한 번 할까요? 전부는 무리고요, 예전처럼 10명만 랜덤하게 선발하는 식으로 진행할까 합니다. 물론, 1등은 무조건 첫 번째 답변으로 넣도록 하겠습니다. :D 0507 / 0933 ---------------------------------------------- 하룻강아지들, 범 무서운지 모른다. 다음 날. 6주차가 시작됨과 동시에 특별 교육 일정이 잡혔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해보면 내가 신재룡에게 요청한 교육이랄까. 교육 교관이 정기적인 정규 교육을 실시한다면, 특별 교관은 말 그대로 특별한 교육을 실시하는 교관이다. 물론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정규 교육 시간을 우선하는 만큼 비정기적이라는 제한은 있지만, 자신의 입맛대로 교육생을 선발하고 일정을 조정할 수 있다는 나름의 특혜가 있다. 기실 2년 전만 해도 특별 교관은 명예직이라는 인식이 강한 터라, 딱히 교육을 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렇게 행동하면 오만 욕을 먹을게 불 보듯 뻔하므로 최소한의 교육 시간은 맞춰야 한다. 뭐, 애당초 놀 생각도 없기는 했지만. 그리고 들어간 첫 교육은 나름 무난하게 마칠 수 있었다. 병아리들을 교육하면서 느낀 점은 두 가지. 첫 번째는 확실히 여느 병아리들과는 조금 다른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교육 참여에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고, 질문을 하거나 받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다고나 할까. 첫 교육에 들어온 총 91명으로, 나와 비슷한 검사 클래스를 가진 병아리들이었다. 혹시 후계자를 뽑을 수 있지 않을까 가장 기대하고 있던 교육이었는데, 딱히 눈에 차는 병아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냥 보통 이상인 수준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안현의 인지도가 의외로 높다는 사실이었다. 이따금 '교관님이 안현 교관님의 클랜 로드에요?' 등등 안현에 관한 질문이 몇 개 들어왔는데, 아마 저번 사건의 처리 결과가 퍼지면서 안현에 대한 좋은 소문도 함께 퍼진 듯싶었다.(안현에 관해 물어보는 병아리들 대다수가 여인이었다.) 아무튼 여러 가지를 확인하고 실망도 큰 첫 교육이었지만, 나는 느긋하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번에 들어온 총 인원은 총 483명으로, 아직 약 400명에 다다르는 병아리들이 남은 상태였다. 어차피 한 명 한 명을 대상으로 제 3의 눈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꾸준히 찾다 보면 한 명쯤은 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교육을 진행하며 잠재성 높은 사용자를 찾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렇다고 다른 것에 아예 신경 쓰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가장 신경 쓰고 있는 사용자는 따로 있었다. 차희영. 차희영은 사용자 정보를 떠나서, 지금 홀 플레인에 있다는 것 자체가 재앙, 혹은 폭탄이나 다름없는 사용자였다. 만에 하나 차희영이 1회 차처럼 회까닥 돌아 지옥 대공을 소환한다면?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미래는 변하고,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1%라도 있다면, 지옥 대공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심지어 악마보다도 말이다. 그런 만큼 차희영은 무조건 경계해야 한다. 아무리 경계하고 경계해도 부족하지 않은 사용자다. 안현에게 한 번 데려와 보라 말한 것도, 바로 그러한 맥락이었다. “혀, 형. 데리고 왔어요. 이, 인사해 희영아.” “…안녕하세요.” 이윽고 시간이 흘러 해가 중천에 올랐을 즈음. 안현은 지시한대로 차희영을 숙소로 데리고 오는데 성공했다.(?) 끝이 C자로 휘어지는 머리칼을 가진 차희영의 첫인상은, 세상 물정 모르는 공주님을 연상케 하는 청순한 인상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 일이 있은 후 무언가 변화가 생겼는지, 눈매는 신경질적으로 변했고 눈동자는 흐릿해졌다. 그에 따라 청순함은 알게 모르게 모습을 감추고, 어딘가 야하고 천박해 보이는 퇴폐 미를 물씬 풍기는 중이었다. 혹시 마녀 각성의 전조가 아닐까 걱정을 하면서도, 나는 잔잔히 웃으며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이제 막 교육이 끝났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불러서 미안합니다.” “아, 아니에요. 오히려 불러주셔서 감사해요.” “하하. 다른 건 아니고요, 그냥 잘 지내시는지 궁금해서 데려오라 했습니다. 혹시 처리 결과는 들으셨나요?” “…….” 차희영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말 그대로, 현재 그 사건에 관한 사용자는 전부 엄벌을 받은 상태였다. 우선 한채혁과 김민서는 둘 다 고려 클랜에서 탈퇴 당했다. 요지는 스스로 탈퇴한 게 아니라, 당했다 였다. 이 말인즉슨, 처벌 권한을 중앙 관리 기구에 완전히 넘긴다는 뜻으로, 둘을 지지든 볶든 고려에서는 일절 상관하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즉 고려라는 방패가 사라진 이상 둘은 사용자로서 끝났다고 봐도 좋다. 적어도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저지른 범죄에 관한 처벌은, 그리 가볍지는 않은 걸로 알고 있으니까. 차희영을 범한 세 명의 사용자도 비슷했다. 아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세 명은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쫓겨나는 걸로 매듭지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처벌의 시사하는 바는 절대 가볍다 볼 수 없다. 병아리가 한 명의 제대로 된 사용자가 되려면, 사용자 아카데미는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 세 명은 교육 도중 쫓겨남으로써 모든 교육을 이수하지 못했고, 수료 보상인 4포인트도 받지 못했다. 그뿐일까? 중앙 관리 기구에서 세 명을 쫓아낸 일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이상, 범죄를 저지르고 쫓겨났다는 꼬리표는 언제 어디서나 따라다닐 것이다. 아마 발붙일 곳 없이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결국에는 굶어 죽거나 아니면 괴물에게 죽을 거라 조심스럽게 예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할진대. “네. 듣긴 들었는데….” 이윽고 지그시 입술을 뗀 차희영은, 조용히 말끝을 흐렸다. 뭔가 걱정이라도 있는 걸까? “혹시 무슨 석연찮은 점이라도.” “석연치 않다기 보다는….” “예.” “그냥. 조금 걱정이 들어서요. 혹시 나중에 그 사람들이 저를 찾아와서 해코지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그러나 이내 차희영이 말이 이어진 순간, 나는 싱겁게 웃어버렸다.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그건 절대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럴 가능성은 0%에 수렴하니까요.” “…정말이요?” 차희영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나는 머리를 크게 끄덕인 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예. 물론 차희영 교육생의 걱정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들은 차희영 교육생을 털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을 겁니다. 주변의 사용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니까요. 이건 제가 장담하죠.” “하지만.” “설령 주변에서 도와주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저와 안현을 비롯한 머셔너리에서 만큼은 차희영 교육생을 무조건 돕겠습니다.” “…….” “아마 혼란스럽겠지요. 이상한 세상에 떨어지고, 안 좋은 일을 당하고. 하지만 조금만 더 사용자…. 흠. 사람들을 믿어보세요. 무조건 안 좋게만 보기에는, 홀 플레인도 나름 살만한 세상입니다.” “…감사해요. 한 번 노력해볼게요.” 차희영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색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지 마. 나도 이런 내가 어색하고, 너도 어색해 죽겠으니까. 아무튼 비로소 원하던 대답을 들을 수 있어, 나는 빙긋 웃어주었다. 그러자 일순간 차희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시선을 휙 돌렸다.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약간 붉어진 것 같기도 한데…. 어디 아픈가? 아니 왜 또 나와 안현을 번갈아 보는 거지? 이내 안현에게 시선을 고정한 차희영은, 뭔가 마음을 정했다는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안현은 그런 차희영이 부담스러운지 먼 산을 바라보며 덜덜 떨고 있었다. 도대체 둘이 왜 그럴까 생각하면서도, 나는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우선은 차희영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게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기에. “아무튼 노력한다니 다행이네요. 혹시 지내는데 다른 필요한 건 없습니까? 교관의 권한으로 몇 가지 편의는 봐드릴 수 있습니다만.” “아, 아니요. 필요한 건 없어요.” “흠. 그런가요?” “…저. 그 대신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궁금한 거요? 예. 말씀하시죠.” “네. 다름이 아니오라. 김수현 교관님께서는, 현이 오빠의 클랜 로드시죠?” 현이…? 오빠…? “그, 그렇습니다만.” “그럼…. 혹시 요….” 말을 하면 할수록, 차희영의 목소리는 끝없는 구멍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안현은, 여전히 먼 산을 보는 중이었다. 이제는 턱마저 부들부들 떨리는 게, 뭔가 이상해도 굉장히 이상해 보였다. 그러다 문득 차희영이 갑작스럽게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양손을 꽉 그러모으더니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외쳤다. “혹시! 현이 오빠 여자 친구 있나요?!” …뭐?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 데는, 정확히 3초가 걸렸다. 일단은 조용히 안현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잠시 후. 나는 눈을 꾹 감은 채, 얼굴을 한없이 일그러뜨리는 안현을 볼 수 있었다. * 안현과 차희영을 떠나 보냈다. 그런데 머릿속이 너무나 복잡하다. 나는 강의실이 몰린 복도를 걸으며 조금 전 있었던 일을 회상해보았다. 없습니다, 라고 대답한 순간. 차희영은 나와 만난 이후 처음으로 기쁘다는 듯 웃음을 보였고, 안현은 주르륵 한 줄기 눈물을 흘렸다. 도대체 안현은 왜 눈물을 흘린 걸까? 그리고 왜 나를 원망하는 눈으로 바라본걸까? 사실 약간 후회가 들기는 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말하는 게 아니라, 조금 더 생각하고 말했어야 한다. 무엇보다 아직 6주차에 불과한 만큼, 교관과 병아리의 관계는 철저히 선을 그어야 한다. 만일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도는 경우에는, 최악이면 안현의 퇴관이라는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 하여 다음에 만나면 웬만하면 선을 지키라고. 아니면 적어도 사용자 아카데미가 끝날 때까지는 티를 내지 말라고 단단히 조언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오후 햇살이 드리운 복도를 걸었다. 오후에 딱히 추가 특별 교육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순찰 겸 그리고 다른 병아리들은 어떤 식으로 교육을 받는지 알아볼 겸 도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앞으로 여러분이 제게 배우실 것들은 마력 가동의 응용이라고 보시면 되요. 즉 기본 회로의 가동을 넘어서….” 돌연히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 들어, 나는 무언가에 홀린듯한 기분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력에 관한 이론이라면 마법사 클래스의 교육일 가능성이 높다. 개인적으로 마법사 클래스는 굉장히 기대하는 교육이었다. 바로 시크릿 클래스인 영혼 명령자의 존재 때문이었는데, 하연의 말에 따르면 꽤나 4차원적인 성격과 드넓은 오지랖을 부리는 놈이라고 한다. 그것도 갓 들어온 병아리 주제에 말이다. 교육 도중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하연도 엄청 애를 먹었다고 하는데, 좌우간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은 사용자였다. 그러나 이내 소리가 들려오는 강의실로 도착했을 때. 강의실 앞쪽에 서 있는 여인을 바라본 순간, 나는 영혼 명령자에 관한 생각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흑 수정 같은 눈동자.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생각보다 크셨던 가슴을 양팔을 엇갈려 감싸듯 가리고 있는 여인은, 다름 아닌 한소영이었다. 한소영 또한 특별 교관으로 들어온 만큼, 마력 재능 계열 병아리들에게 오후 강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이 중요한 이유는 간단해요. 왜냐하면 마법사가 개화할 수 있는 능력 중…?” 그때 내 시선을 느꼈는지, 돌연 말을 멈춘 한소영이 차분히 나를 돌아본다. 그 탓에 강의에, 아니 한소영에 집중하던 여러 사내들도 따라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주 잠깐 나를 지그시 바라본 한소영은, 이내 도로 시선을 돌리며 병아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마력 회로 응용이라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요. 이 능력을 익히냐, 익히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마법사의 가치는….” …그러고 보니, 한소영이 아직도 삐쳐있다고 했던가? 약간 긴가민가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이렇게 강의에 집중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가벼운 눈인사 정도는 해주지 않을까 기대했던 탓이다. 하기야 포커 페이스의 달인인 만큼 이게 바로 한소영답다고 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절로 한숨이 나오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지금 여기서 쳐들어가면 그만한 막장도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쓰게 웃으며 강의실 복도를 지나쳤다. 아니. 지나치려는 찰나였다. “한소영 교관님! 질문이 하나 있는데 말입니다!” 아직 애 티를 벗지 못한 어린 목소리가, 한순간 강의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어찌나 컸는지 복도를 지나치는 내 귀를 살짝 울릴 정도였다. 나는 복도 앞을 바라보면서도 반사적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곧, 고요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곧바로 받아 친다. “질문은 좋은데, 소리를 조금 줄이도록 해요. 교육생.” “죄송합니다!” “…질문이 뭐지요?” “혹시 말입니다! 지금 밖에 지나가는 분이, 바로 이번에 특별 교관으로 들어오신 머셔너리 로드님! 즉 김수현 교관님이 아니십니까?” 아니 저놈이? 잠시 후, 한소영이 짧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흘러들었다. “맞아요. 그런데 그걸 왜 물어보시는 거죠? 지금 교육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질문인데요.” “그건 죄송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소리 줄이라고 했죠. 조용히 해요.” “…아. 예.” 웅성웅성. 강의실은 삽시간에 소란스럽게 변했다. 아. 이게 아니었는데. 정말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본의 아니게 한소영의 교육을 방해하고 말았다. 속으로 미안한 마음을 금치 못해, 나는 더욱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우선은 이 자리를 피해 주는 게 그나마 나은 선택일 것이다. 그러는 중에도 문답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또한 저분은 검사 계열 클래스로, 여러분과는 그렇게 만날 일은 없는 분이에요. 그리고 지금 여기에 서 있는 교관은 바로 저고요. 교육에 집중하세요.” “아니 그건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리고 그 순간. “김수현 교관님이 지나가시는데, 한소영 교관님이 자꾸 저분을 곁눈질로 흘끗흘끗 쳐다보시지 않았습니까!” 나는. “네…? 아, 아! 조, 조용히…!” 나도 모르게. “그래서 말씀을 드린 겁니다. 교관님도 우리에게 집중해주십시오.” 반사적으로. “…….” 본능에 따라, 한소영은 돌아보았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왼쪽 팔을 살며시 감싸고 있던 한소영의 손이, 일순 꽉 오므려진 것을. ============================ 작품 후기 ============================ 후유. 오늘 하루도 간신히 올렸네요. 잠은 한 한두 시간은 잔 것 같습니다. 어제 23시에는 진짜로 죽을 것 같았는데, 그래도 조금 자니까 머리는 개운하네요. 아무래도 올리고 나서 체조라도 좀 해야겠어요. 몸이 뻐근하고 찌뿌듯하고…. 하하하. 어제 기껏 적었던 내용을 삭제한 이유는요. 오늘 내용 중에 초반에 '그리고 들어간 첫 교육은 나름 무난하게 마칠 수 있었다.' 이 부분이 있죠? 처음에는 교육에 대한 내용을 상세하게 적었는데,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교육 부분만 3000천자가 넘어가더라고요. 그래도 조금 아까워서 일부는 조금 남겨놨습니다. 『원래 본문.』 하연의 말에 따르면, 근접 계열 클래스 중에서는 딱히 성적이 좋은 병아리는 없다고 한다. 물론 다들 평균 이상 가는 성적을 내고는 있지만, 원거리 계열들과 비교하면 조금 처지는 감이 있다고. 바꾸어 말하면, 이번 기수는 원거리 계열에 특별한 사용자들이 모여있다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근접 계열 클래스를 먼저 선택한 이유는, 교육 일정이 걸린 것도 있지만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아직 시간은 많다. 적어도 이번 기수에 한해서는 전원을 대상으로 제 3의 눈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자아, 자아! 조용히들 하세요! 이제 곧 특별 교관님이 오신다고요!” 강의실로 들어가기 전, 벽에 달린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자 탁상을 탕탕 치며 호통을 치는 안솔이 보였다. 사실 아무리 보조라고 해도 꼭 저럴 필요는 없다. 그냥 잠잠히 만 있어주면 더 바랄 것도 없겠는데, 안솔은 시키지 않은 것까지 스스로 나서 행동하고 있었다. 좋은 의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고, 아마 병아리들을 보며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는 듯싶었다. 그러한 안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강의실은 여전히 어수선했다. 안솔은 뜻대로 되지 않자 잔뜩 화가 난 눈으로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그러나 그 모습이 너무도 깜찍해, 병아리들은 되레 킥킥 웃는 중이었다. 나는 조용히 한숨을 흘리며 문을 밀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탁상으로 걸어가자 소란은 삽시간에 사그라졌다. 그와 동시에 여러 시선들이 우수수 꽂히는 게 느껴졌다. 안솔은 어떠냐는 얼굴로 병아리들을 둘러보고는 의기양양이 걸음을 물렸다. 중앙에서 걸음을 멈춘 후, 나는 똑같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하나같이 강한 호기심을 품고 있었다. 확실히 여느 병아리들과는 다른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한동안 시선을 맞추고 있다가,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이번 6주차부터 여러분들의 특별 교육을 맡게 된 김수현이라고 합니다.” “…….” “간단히 소개를 해보자면…. 사용자로써 연차는 3년 차이며, 현재 머셔너리라는 클랜을 이끌고 있습니다.” “…….” 묵묵부답. 그러나 무시하는 게 아니라, 이미 알고 있다는 얼굴들처럼 보인다. 어떻게 알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교육 중 몇 번 언급이 됐으리라 생각하며 나는 병아리들을 응시했다. 그리고 탁상에 한 손을 짚으며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궁금한 것들이 있는 것 같은데, 이번 시간에 한해서 모든 질문을 허락하죠. 궁금하신 게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병아리들은 서로만 번갈아 볼뿐,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고, 그냥 스스로 말을 꺼내기 주저하는 것처럼 보였다. “없나요? 없으면 이만….” “여기 질문 하나 있습니다.” 수업에 들어간다고 말하려는 찰나 굵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리자 중후한 인상의 사내가 손을 들고 있는 게 보였다. “교관님은 특별한 교육을 담당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한 교육이란, 어떤 교육을 말하는 겁니까?” 좋은 질문이었다. 어차피 곧 교육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니 백 번 듣는 것보다는 한 번 보는 게 나을 터. 나는 질문한 사내를 향해 나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사내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주춤주춤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래도 과도하게 빼지는 않아서 좋네. 사용자 아카데미에 있는 이상 교육이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니까 신뢰감의 문제라고나 할까?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이기도 하다. 개떡 같은 교육을 하는 교관보다는, 수준 높은 교육을 보여주는 교관을 더 신뢰할 건 자명한 일이니까. 사내를 앞에 둔 채, 나는 잠시 병아리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앞서 들어온 여러 교관들에게 물어본 결과, 이번 기수는 꽤 수준이 높다고 하더군요. …아무튼 6주차면 홀 플레인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 습득이나, 마력 회로를 가동하는 방법 등 기본적인 것들을 배우셨을 겁니다.” “…….” “제가 여러분들에 가르칠 것들은 일종의 실전입니다. 거기, 혹시 검 하나 가지고 있습니까?” “예? 아, 아니요. 오늘 교육이 갑작스럽게 잡힌 터라….” 지목 당한 사내는 살그머니 말끝을 흐렸다. 어차피 그럴 거라 생각해 크게 개의치는 않는다. 이내 귀에 걸린 귀걸이를 떼어내자, 귀걸이는 곧 새하얀 빛을 뿜으며 아름다운 검의 형체를 갖추었다. 빅토리아의 영광이었다. 그러자 가벼운 탄성이 강의실에 흘렀다. 아무래도 항상 그저 그런 검만 사용하다가, 뭔가 있어 보이는 검을 보자 놀란 듯싶었다. 잠시만 참아주렴. 속으로 나직이 읊조린 후, 나는 보릿자루처럼 서 있는 사내에게 빅토리아의 영광을 던졌다. 허둥지둥하기는 했지만 사내는 가까스로 검을 받았고,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교육생은 저를 있는 힘껏 치도록 합니다.” “예…. 예?”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검으로 저를 치라는 말입니다. 어디를 치셔도 좋습니다.” “하, 하지만…. 제가 어떻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어 나는 제 3의 눈으로 사내의 사용자 정보를 살폈다. 그리고 역시나 하는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현재 교육생들의 근력 능력치로는 제 내구 능력치를 뚫고 해를 입힐 수 없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주저함을 버리지 못했다. 아무리 적응력이 좋다고는 하지만, 막상 같은 사용자를 해하라고 하니 꺼리는 마음이 든 모양이다. 그렇게 아무리 기다려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아, 나는 결국 조건 하나를 추가로 내밀었다. “저 검의 이름은 빅토리아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장담컨대, 현재 홀 플레인에 존재하는 최상급 검이라고 할 수 있죠. 현대의 게임으로 비유하면 전설 급 장비라고 보시면 됩니다. 저에게 작은 생채기라도 내는 교육생들이 있다면, 이 검은 그 교육생에게 선물로 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사내가 멍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끝.』 중요한 인물이 나오거나 사건이 있으면 그럴 법도 한데, 그 어떤 것도 해당되지 않는 내용이었습니다. 즉 의미 없는 내용이랄까요. 무엇보다 제가 다시 읽는데 재미가 없더라고요. 시간은 다가오지, 용량은 아깝지, 머리는 아프지…. 발만 동동 구르다가, 그냥 깨끗이 삭제하는 걸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런 내용을 차마 보여드릴 수는 없었어요. ㅜ.ㅠ 독자 분들의 깊은 양해를 구하며, 저는 체조 후 잠을 자러 가보겠습니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D 0508 / 0933 ---------------------------------------------- 하룻강아지들, 범 무서운지 모른다. “으아~. 교육도 힘드네. 수현아. 저녁 일정 없으면 형이랑 밥이나 먹으러 가자.” “…….” “수현아? 수현아!” “어, 어? 아…. 나는 괜찮아. 형 혼자 먹어.” 너무 넋을 놓고 있었던 걸까. 형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어 나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멍한 기운이 가시지를 않는다. 그렇게 자꾸 허공만 응시하자 자못 걱정이 들었는지, 형이 살그머니 나를 들여다본다. “수현아. 정말 괜찮아? 어디 아픈 건 아니고?” “아프긴.” “얼굴에 힘이 없어 보이는데…. 그럴수록 밥을 먹어야 해.” “아 그놈의 밥. 정말 괜찮다니까.” 약간 귀찮은 기분이 들어 형을 밀어내기는 했지만, 사실 아무 걱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정확히는 걱정은 아니고 조금 신경이 쓰인다고 해야 할까. '곁눈질로 흘끗흘끗 보시지 않았습니까!' 한소영이. 그 한소영이 나를 곁눈질했다고 한다. 어느 오지랖 넓은 놈이 말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그러나 심란한 마음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보았다면 모를까. 아닌척하면서 나 몰래 곁눈질했다는 건, 어쩌면 나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말이 아닐까? 아니면…. …아. 모르겠다. “모르겠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응?” “방금 모르겠다고 했잖아. 아무튼 수현아. 그냥 형이랑 식당이나 가자~. 응?” “아 좀. 자꾸 왜 그래. 가기 싫다니까.” 형이 또다시 얼굴을 들이밀어 가까스로 밀어내는데 성공한 찰나. 돌연히, 멀리서 한소영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걸음을 옮겼다. 한소영이 오는 방향으로. “아.” 한소영은 금세 나를 확인했다. 그리고 잠시 흠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매우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다. 아마 나를 찾고 있었던 것 같은데, 가까이서 보니 조금 화나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오랜만….” “아까 안 봤어요.” 한소영은 다가오자마자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 탓에 조금이지만 당혹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예?” “저, 아까 머셔너리 로드 본 거 아니라고요. 그 교육생이 농담한 거예요. 스스로 농담을 했다는 자백서까지 받아놨으니, 원한다면 확인해보셔도 돼요. 아니. 확인해보세요. 여기 가져왔으니까.” 아니. 그렇다고 무슨 자백서까지? 목구멍 끝까지 치솟은 말을, 나는 간신히 삼킬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품을 들추려는 한소영의 손을 빠르게 붙잡았다. 그러자 약간 서늘하면서, 금방이라도 녹아 내릴듯한 감촉이 느껴졌다. 마치 부드러우면서도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잡은 느낌이랄까. “굳이 보여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소영은 일순 잡힌 손을 지그시 바라보고는 차분히 고개를 들었다.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사실 그럴 거라 생각했거든요.” “…네?” “하연에게 들은 것 같아서요. 이번 마력 재능 계열 교육생 중에 조금 맹랑한 놈이 있다면서요? 고생이 많으시겠네요. 하하하.” “네…. 네. 맞아요. 바로 그거에요.” 맵시 좋게 손을 비틀어 뺀 한소영은 얼굴 하나 변하지 않고 긍정했다. 나는 아차 하며 놓아주면서도,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생각해보면 한소영도 한 자존심 하는 여인이지 않은가. 또한 저번에 놀린 일로 삐쳐있었다고는 해도, 아까 전 벌어진 사건은 무조건 내 잘못이라 보기 어려웠다. 그 탓에 알게 모르게 속앓이를 한 것 같은데, 그냥 대충 져주고 한 발 물러나는 게 나을 것이다. 고작 이런 일들로 한소영과 기 싸움을 벌이기는 싫었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설마 웃는 낯에 침을 뱉지는 않겠지. “그건 그렇고, 마침 잘 만났네요. 이스탄텔 로우 로드. 혹시 시간 좀 내주시지 않겠습니까? 언제 한 번 차라도 한 잔 하시죠.” “시간이요?” “예. 저번 일도 사과를 하고 싶고, 겸사겸사 워프 게이트 건도 감사를 드리고 싶네요.” “굳이 그러시지 않으셔도 되는데. …아무튼, 딱히 상관은 없어요.” 어느덧 어색한 기운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주거니 받거니 말을 나누고 있자, 나와 한소영이 예전의 사이로 돌아간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애당초 한소영이 그렇게 속 좁은 여인도 아니고. 어차피 이렇게 될 것이었는데, 나는 무얼 그렇게 신경 쓰고 있었을까. “그런가요? 다행입니다. 하하.” “음. 그러고 보니 마지아 건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기는 하네요.” “몇 가지 이야깃거리는 있습니다. 일정이 없으실 때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주말에 좀 한가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소영은 살며시 고개를 숙인 후 내 옆을 지나쳤다. 아까처럼 급하게 걷는 게 아니라, 한소영 특유의 고고한 걸음걸이였다. 잠시 후. 복도를 도는 한소영의 모습이 사라지는 걸 확인한 후, 나는 있는 힘껏 기지개를 폈다. 먹먹했던 머릿속은 어느새 잔잔해진 상태였다. 창밖을 언뜻 보니 약간 어두워진 듯했다. 이제야 슬슬 배고픔이 느껴져, 나는 형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형. 그만 식당으로 갈까?” 그리고 그 순간, 형은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어깨에 올린 손을 치웠다. 그와 동시에 지그시 나를 돌아보며 볼멘 목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냥 혼자 갈게.” “응? 아까 배고프다며.” “그래. 아무튼 간다.” “형?” “너는 그렇게 좋아하는 이스탄텔 로우 로드랑 차 마시면 되잖아.” “아니 그건 주말에….” 그러나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형은 휘적휘적 복도를 걸었다. 그것도 한소영의 반대 방향으로. 나는 어안이 벙벙한 기분으로 형의 등을 응시했다. …형은 또 갑자기 왜 저래? * 사용자 아카데미는 초반에서 중, 후반으로 갈수록 일정이 빠듯하게 변한다. 말 그대로, 교육과 교육의 연속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100일 중 14주차를 기준으로, 12주차는 넘어서야 일정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며, 남는 시간은 개인 정비나 클랜 홍보 등으로 시간을 보낸다. 그것 또한 교육 일정을 정상적으로 끝냈을 때 얘기고, 그러지 못한다면 13주차, 14주차도 꼼짝없이 교육으로 보내야 한다. 어떻게 보면 병아리들의 입장에서는 재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튼 설령 특별 교관이라고 하더라도, 정해진 커리큘럼이 있는 이상 멋대로 행동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한소영의 말처럼 나와 마력 재능 계열 사용자들의 교육 접점은 거의 없다. 있다고 해봐야 중, 후반부부터 시작되는 정신 교육 즈음에 몇 번 기회가 있을까? 물론 아주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교육 일정을 총괄하는 총 교관이 신재룡인 이상, 해당 기간을 약간 앞당기는 것 정도는 가능한 수준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아직은 요원한 일이라, 지금은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직 보지 못한 근접 계열 병아리들이 많은 만큼, 그렇게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누누이 생각해왔듯이,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말이다. “크학!” 생긴 것과는 다른, 싱거운 웃음이 나올만한 재미있는 기합이 들렸다. 동시에 섬뜩한 빛을 흘리는 한 자루 창이 기세 좋게 그어 내려진다. 그러나. 탁! 어디까지나 기세만 좋았을 뿐. 정작 내 몸에 닿은 순간, 창 끝은 미미한 생채기도 내지 못한 채 도로 튕겨 나갔다. 그러자 창을 지른 거구 사내의 얼굴에 불신의 빛이 떠오른다. 아마 자신이라면 작은 상처라도 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앞서 돌아간 병아리들과 별다를 바 없는 결과를 내자 믿을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애당초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나는 한쪽으로 고갯짓을 하며 입을 열었다. “다음.” 사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걸음을 옮겼다. 현재 교육하는 인원은 총 52명으로, 주로 창을 다루는 이들을 소환한 상태였다. 오늘 교육 내용은, 바로 각자의 무기로 나를 치는 것. 이미 기본 교육은 어느 정도 받은 상태일 터. 예전에 사용자 아카데미의 백미라고 생각했던 주말 대련이 없어진 이상, 나름대로 자구책이라 생각해 마련한 교육이었다. 즉 이론보다는 실전으로 들어가, 같은 사용자에 살상 무기를 지르는 적응력을 높이는 훈련이었다. 겸사겸사 자세도 봐줄 수 있고. …사실 이러면서 제 3의 눈으로 한 명씩 사용자 정보를 확인하는 중이기도 했다. 잠시 후. 사내에 이어서 나온 병아리는, 결 좋은 머리칼을 짧게 커트한 기가 세 보이는 여인이었다. 여인은 꾸벅 인사를 건네더니 몇 걸음 쭉 물러나며 상체를 굽혔다. 찌르긴가? “핫!” 내 예상이 맞는다는 듯, 여인은 앙칼진 기합을 내지르며 곧바로 치고 들어왔다. 그러다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즈음, 오른발로 강하게 바닥을 밟으며 있는 힘껏 창을 뻗는다. 속으로 몇 번 혀를 찬 후, 나는 미리미리 왼쪽으로 팔을 내밀었다. 잠시, 몸을 쿡 찌르는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악.” 소리가 들리며 창이 미끄러지듯이 빗나가고, 여인은 입을 크게 벌리며 그대로 고꾸라진다. 이내 왼팔에는, 뭔가 부드러우면서 말랑말랑한 감촉이…. 어. 가슴 닿았네. 여인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미안하니까 조언은 조금 해줄까. “처음 자세는 나름 괜찮았는데, 오른발을 축으로 삼으셨으면 조금 더 무게를 실으셔야 합니다. 조금 전에는 무릎은 물론이고, 다리 전체에 힘이 들어가 지르는 순간 자세가 흐트러졌어요. 그래서 창이 빗나간 겁니다.” “아, 아, 아, 알겠습니다!” 여인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마구 고개를 끄덕이고는 도망치듯이 자리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한숨을 흘렸다. 어쩌면 이렇게 인재가 없는 걸까. 물론 아직 모든 병아리를 다 본 건 아니지만, 괜히 시간 낭비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불현듯 온몸을 엄습했다. 그렇게 잠깐 쓰디쓴 입맛을 달래고 나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음.” 그때였다. “이야~! 이게 누구신가~? 그 명성이 자자한 머셔너리 로드가 아니신가~?” 갑작스럽게 걸걸한 목소리가 강의실을 왕왕 울렸다. 막 걸어 나오던 병아리가 걸음을 멈추더니 의아한 얼굴로 문 쪽을 돌아본다. 하여 나 또한 문을 바라본 순간,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반쯤 열린 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는 사내는, 다름 아닌 공찬호였다. 공찬호는 등에 수라마창을 맨 채, 이죽거리는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흐. 이거 정말 오랜만인데? 저번에 사용자 아카데미 이후로 만나지를 못했으니까…. 거의 2년만인가?” 그렇게 말한 공찬호는, 내가 말할 틈도 없이 안으로 걸어 들어와 병아리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내 어깨에 자신의 팔을 얹어 어깨동무를 하고는, 툭툭 치며 말했다. 어깨를 짓누르는 팔은, 꽤나 묵직했다. “어이, 병아리들! 지금 여기 있는 이분이 누군지 아나?” “그…. 김수현 교관님입니다….” 누군가 쭈뼛쭈뼛 대답한다. 그러자 공찬호는 와하하 웃으며 머리를 크게 주억였다. “그래 그래! 머셔너리 클랜 로드라고! 다들 몇 번은 들어봤지? 시크릿 클래스! 10강 중 1인! 전쟁의 영웅!” “하…. 하하….” “그 누구냐. 지금 교관 중에, 같은 이름을 가진 놈이 한 명 더 있지? 그놈이랑은 비교도 안 되는 분이라고. 응? 특별 교관으로 들어올만한 자격이 있는 사용자라는 소리야! 그 누구랑은 다르게 말이야!” “…….” 직접적으로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미 진수현이라고 대놓고 광고하는 것과 다름없는 말이었다. 과연. 신재룡의 말이 이런 행동을 말하는 것이었나. 병아리들은 침묵을 지키거나 마지못해 따라 웃는 중이었다. 보아하니 그리 인기 좋은 교관은 되지 못한 듯싶었다. 좌우간 아무리 나를 추켜세워준다고 해도, 공찬호의 언행은 명명백백한 교육 방해였기에 정식으로 항의할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뭔가 모르게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하고. 문득 갑작스럽게 짜증이 치솟아, 나는 곧바로 어깨에 올린 손을 쳐냈다. 그리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사용자 공찬호. 교육 중입니다. 방해하지 마세요.” “응? 아 왜~. 그래도 내가 교육 교관으로 가르치는 애들인데, 조금 구경할 수는 있잖아? 안 그래?” “사용자 공찬호.” “그러고 보니 꽤 재미있는 교육을 하는 것 같은데…. 나도 한 번 해보면 안될까? 응? 내가 치고, 너는 버티고. 어때? 하하하!” 말을 마친 공찬호는, 무에 그리 웃긴지 혼자서 컬컬 웃어 젖혔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지체 않고 귀걸이를 빼어 들었다. ============================ 작품 후기 ============================ 아,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 일이 있어 집에 늦게 돌아왔습니다. 그러다 한 절반 정도 썼을 때,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네요. 요새 이상하게 몸이 많이 피곤합니다. 오늘 늦은 부분 독자 분들의 깊은 양해 부탁합니다. _(__)_ 최대한 빠르게 페이스를 회복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리리플.』 1. 천국의악당 : 1등 축하합니다. 오랜만에 이렇게 적어보니 감회가 새로운 기분마저 드네요. 하하하. :) 2. 마스터칼솔럼 :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초반에 버릇이나 습관을 그렇게 들이다 보니 고치는 게 쉽지가 않네요. ㅜ.ㅠ 3. 고오지이라아 : 재미있다고 보시는 분들이 많아서 오늘 추가로 넣었습니다. 공찬호 사건과 연계해서 넣을 수 있는 부분이 생기더라고요. :) 4. hohokoya1 : 그럼요. 작품도 중요하고, 학업도 중요하죠.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두 마리 토끼 모두 잡았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하하하. 5. 꿈꾸던그날 : 에이. 이미 2부작으로 줄였습니다. 4부작으로 가려면 초반에 마몬이 나오지 말았어야 해요.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후후.(?) 6. 오뭬 : 실은 김수현의 진명 중 마성을 약간 다른 의미로 적어놓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안현도 이제 나름 봄이 올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D 7. 꼬야 : 예전에 로유미라는 별명이 생기기전에, 다른 작가 분들은 저를 씬 고자라고 불렀습니다. 뭐, 로유미 덕분에(?) 금방 묻히기는 했지만 말이죠. -_-a 8. psk6492 : 한소영은 아직 더 많은 창피를 당해야 하고, 더 많이 부끄러워해야만 합니다. 이상하게 한소영만 보면 부끄러워하게 만들고 싶어지네요.(?) 9. 피로물질 : 아 그런가요? 잠시만요. 한 번 확인해볼게요.(확인 중입니다.) 443회 10 Page. 맞네요. 뭐! 뭐! 가 아니라 왜! 뭐로 적혀있습니다. 수정할게요~. 10. 감자띱 : 오, 오래 기다리셨나요? 2시 넘어서 올렸는데…. ㅜ.ㅠ 0509 / 0933 ---------------------------------------------- 하룻강아지들, 범 무서운지 모른다. 허공에 하얀 빛무리가 뿌려진다. 이어서 빅토리아의 영광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공찬호는 어이쿠 소리를 내며 걸음을 물렸다. 그러나 여전히 능글능글 웃고 있는 걸 보니 정말 놀란 것 같아 보이지는 않다. “워워, 진정해. 장난이야. 장난이라고.” “…….” 그런 장난기 어린 모습을 지그시 노려보면서도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2년 전 처음 공찬호를 만났을 때는, 정말 천하무쌍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어수룩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 눈앞에 서 있는 공찬호는 그때와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런 모습 또한 1회 차 때 보았던 천하무쌍과는 상당한 거리감이 느껴진다는 것. 내가 기억하는 천하무쌍의 태도가 자신감에 의한 발로였다면, 지금 공찬호의 모습은…. 자신감이 아닌, 자만심이라는 느낌이 더욱 강하다. 의문은 물처럼 빠르게 차 올랐지만, 나는 우선 눈동자에 힘을 주었다. 제 3의 눈은 이미 활성화된 상태였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공찬호(5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창술사(Normal, Lancer,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아수라(Clan Rank : A Zero) 5. 진명 • 국적 : 수라마창(壽拏魔槍)의 주인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36) 7. 신장 • 체중 : 191.3cm • 97.3kg 8. 성향 : 오만 • 열등감(Arrogance • Inferiority) [근력 101(+6)] [내구 87] [민첩 91] [체력 92(+2)] [마력 81] [행운 73] < 능력치 비교 > 1. 김수현 : 574 / 600~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근력 96(+2)] [내구 94(+2)] [민첩 98] [체력 100(+2)] [마력 96] [행운 90(+2)] 2. 공찬호 : 525 / 600~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근력 101(+6)] [내구 87] [민첩 91] [체력 92(+2)] [마력 81] [행운 73] 일단 능력치는 근력과 행운을 제외하고 모두 조금씩 오르기는 했다. 확실히 명성이 높은 사용자였던 만큼, 잠재성도 상당한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은 능력치보다는, 성향이 더욱 눈에 들어온다. 오만. 그리고 열등감…? “알겠으니까 그만 좀 노려봐. …거참 까다롭기는.” 그때, 공찬호가 양손을 번쩍 들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인다.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교육 방해 마시고 그만 나가시죠.” “아, 예 예. 제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무려 총 교관을 수하로 두신 김수현 교관님의 말씀인데요. 바로 물러나 드리죠. 흐흐.” 결국 끝까지 이죽거린 공찬호는 음침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고, 이내 건들건들한 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그런 공찬호의 등에 매어진 수라마창은, 그 어느 때보다 짙은 마기를 뿌리고 있었다. 오죽하면 가까이 있는 교육생이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흠.” 문득, 뭔가 짚이는 바가 생겼다. * 시간은 화살과도 같아, 어느새 6주차 교육을 시작한지도 5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남은 이틀이 교육 일정이 없는 개인 정비 시간인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6주차 교육은 끝난 셈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나는 5주차 교육 일정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이번에 머셔너리에서 참여한 모든 교육 교관들을 호출했다. 사용자 아카데미의 특성상, 주가 지나갈수록 병아리들을 클래스뿐만 아니라 수준별로 나누어 교육을 시행한다. 그런 만큼 교관들 또한 더욱 바빠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라, 교육 주차 중에는 서로 시간을 맞추기 힘든 게 다반사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 회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용자 아카데미에 들어온 이유가 무료 봉사가 아닌 이상, 서로가 아는 정보를 공유할 필요는 있었으니까. 툭툭, 창틀에 떨어져 내리는 빗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늦은 밤. 오늘 호출에 응한 인원은 하연과 안현으로, 신재룡은 총 교관 일이 바빠 참석을 하지 못했다. 보조는 애당초 부르지도 않았고. 사실 모두 모이게 하는 데는 주말을 이용하는 방법이 가장 좋으나, 아직은 개인 정비 시간을 침해하고 싶지는 않다. 적어도 주말은 각자 교육 때 받은 스트레스를 푸는 시간으로 보내게 하고 싶었다. 나름의 배려라고나 할까. 그렇게 오후에 시작한 회의는, 이제 거의 끝나가는 상태였다. “제 눈에는 그래도 괜찮은 병아리들이 몇 명 보이는데요. 수현의 기대가 너무 높은 게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초반에 경쟁이 과열된 것치고는 확실히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어요.” 나는 차분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하연은 고개를 살짝 갸웃하고는 기록 하나를 집어 들었다. 병아리의 성적이나 특이 현황 등이 적힌 기록이었다. “시크릿 클래스가 있는데도요?” “그것도 봐야 압니다. 아무리 클래스가 좋아도 능력치가 낮으면 헛일이에요. …아직 그쪽 계열은 보지를 못해서 모르겠지만 말이죠.” 확실히 하연의 말대로 괜찮은 병아리들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 쳐줘도 통과의례 때 애들의 수준으로(물론 안솔은 제외하고.),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딱히 끌리지 않는 게 사실이었다. 그만그만한 수준이라는 것은, 결국 전력으로 끌어올리는데도 비슷한 시간이 들어간다는 소리였으니까. 보모 짓은 이제 정말로 사양하고 싶었다. “아무튼 알겠습니다. 대충 들을 건 들은 것 같으니 오늘 회의는 이만하도록 하죠. 8주차부터 정신 교육을 조금씩 실시한다고 하니, 그때 한 번 자세히 볼 기회가 있을 겁니다.” “네. 혹시 성적이나 특기 사항 등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제가 눈여겨보고 있을게요.” “처음에 가져온 기록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연은 눈에 보이는 성적 말고, 특이 현황 쪽에 조금 더 집중해주세요. 혹시 사용자 신상용처럼 조화의 마방진 같은 특기를 가진 병아리가 있다면…. 영입도 고려해봄 직하니까요.” “알겠어요. 아차! 수현?” 하연이 끄덕끄덕하며 탁자에 어질러진 기록을 정리하려는 찰나, 갑작스럽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혹시…. 그 일은 괜찮아요?” “예?” 그 일?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그러자 하연이 조금 수심에 젖은듯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찬호요. 그 사람, 수현이 교육하는데 와서 난동을 피웠다면서요?” “아아. 난 또 무슨 일이라고. 난동까지는 아닙니다. 하여간 괜찮으니 걱정 말아요.”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그 사람 소문이 얼마나 안 좋은데요.” “음? 소문이요?” 정말로 그렇다는 듯 하연은 크게, 아주 크게 고개를 움직였다. 그리고 매우 불쾌해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사람 성격 엄청 이상해요. 숙소가 바로 제 옆인데, 보조랑 같은 방을 쓰거든요?” “보조라면….” 성하얀인가. “성하얀이라는 여성 사용자에요. 아무튼 같은 방을 쓰는 건 좋은데 밤마다 신음이 들려온다고요. 그게 꼭 저 들으라고 그러는 것 같다니까요?” “응? 신음이 들려온다고요?” “네. 관계를 맺는 거죠. 그뿐만이 아니에요. 가끔씩 고함치는 소리도 들려오는데, 그럴 때마다 꼭 하얀씨가 우는 소리도 들려와요.” “…미친놈이군요.” 맞장구를 쳐주자 하연은 “그렇죠?”라 말하며 눈을 흘겼다. 그나저나, 그렇게 아끼던 성하얀마저 막 대한다고? 나로서는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 동시에 공찬호에 대한 의문이 더욱 증폭되는 걸 느꼈다. 그놈은 도대체 2년 동안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 “저…. 형.” 그때였다. 여태껏 시무룩이 앉아있던 안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흘끗 시선을 주니, 여전히 힘이 없어 보이는 얼굴이다. “저…. 회의 끝났으면 그만 가봐도 될까요? 저 곧 순찰 돌 시간이라서요.” “어 그래. 고생했다.” “아니에요. 하하….” “아, 안현. 순찰 돌다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알지?” 그러자 막 몸을 돌리려던 안현은 일순 쓰게 웃어 보였다. “그럼요. 확실히 숙지했는걸요. 선 보고 후 조치. 그리고 걱정 마세요 형. 어차피 숙소 내 순찰이라 별일도 없을 거예요.” 나는 그런 안현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뜻 모를 한숨을 푹 흘리는 모습을 보며,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그렇게 싫으냐?” “예?” “차희영 말이다. 그때 내가 말을 잘못했다면, 미안하다. 다시 말해줄 수 있어.” “아…. 아니요. 아니에요 형. 절대, 절대, 절~대로 그러지 마세요. 그러니까 싫다기보다는….” “보다는?” “…….” 무언가를 말하려던 안현은 돌연 입을 다물었다. 하연은 어떤 대화인지 모르겠다는 듯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와 안현을 번갈아 보았다. 잠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창틀을 때리는 빗소리가 조금 거세어졌을 즈음. 안현은 갑자기 시답잖은 웃음을 흘리고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니에요. 생각해보니까 별로 큰일도 아니고, 사소한 일이잖아요. 이런 것까지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는 않아요. 제가 한 번 어떻게든 해볼게요.” 매우 기특한 말이기는 한데, 네 말처럼 그렇게 사소한 일은 아니라서 말이지. 마녀, 아니 차희영에 관한 일은 내가 가장 신경 쓰고 있는 일이란다. 그러나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낼 수 없는 말이라, 입맛만 다실 수밖에 없었다. 이내 안현이 꾸벅 인사한 후 문을 나가자, 하연이 상체를 바싹 기울이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방금 나눈 대화가 너무나 궁금하다는 얼굴로. “수현 수현. 무슨 일이에요? 현이, 혹시 연애해요?” 훌쩍 가까워진 하연을, 정면에서 지그시 응시한다. 시원하고 맑은 물 내음이 콧속을 물씬 찔러 들었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하연을 보고 있자, 불현듯 도도록이 붙어있는 적당히 붉은 입술이 눈에 들어온다. 잠시 침대를 돌아보아 마르와 도도가 자고 있음을 확인한 후, 나는 천천히 얼굴을 내밀어 하연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갰다. 일순 하연의 눈이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렸지만, 그것도 잠시. 하연은 곧 서서히 눈을 감았다. 부드럽고, 따뜻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입을 맞춘 후, 나는 천천히 얼굴을 떼었다. 하연은 한동안 여운을 음미하는 듯 보이더니, 잠시 후 차분히 눈을 떴다. 그리고 잔잔한 미소…. “헉.” 를 지으려다가, 갑작스럽게 격한 헛바람을 들이켰다. “히끅!” 이어서 히끅 딸꾹질을 하기까지? 그런 하연의 눈은 나를 보고 있지 않다. 시선으로 보아하니 어깨 너머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예상외의 반응. 하여 나 또한 시선을 돌려 침대를 바라본 순간, 나는 하연이 왜 그런지를 알 수 있었다. “…삐삨.” “…….” 언제 일어났는지, 침대에는 도도가 고개를 빠끔히 내민 채 나와 하연을 훔쳐보는 중이었다. 그것도 씨익 웃고 있는 채로. * 다음날. 비로소 6주차 교육 일정이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고, 개인 정비의 시간인 주말이 돌아왔다. 나는 아침 식사 내내 나를 보며 씨익 웃는 도도를 한 대 때린 후에, 안솔과 함께 총 교관 실로 향했다.(당연히 도도는 발작했지만, 한별에게 맡기고 나서 바로 식당을 나왔다.) 주말 동안 밖으로 나갈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실 병아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원칙적으로는 교관들도 교육 중에는 외출할 수 없다. 그러나 정 급한 사정이 생기면 총 교관의 허락 하에 주말에 한해서 외출이 가능했는데, 말인즉슨 신재룡의 재가가 들어가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지금 신재룡을 찾아가는 것이기도 하고. 주말에 할 일은 원래 총 두 가지였으나, 어젯밤 하나로 줄어들었다. 한소영이 갑자기 급한 사정이 생겨, 주말 동안 모니카에서 보내기로 했다고 연락을 보내온 것이다. 사실 나야 큰 상관은 없다. 한소영이야 추후에 아카데미 안에서 만나면 되고, 외출도 신전에만 잠시 들르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아니. 잠시일지 아니면 생각보다 오래 걸릴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동안 같은 장소에 있었다고는 해도, 아직 서로 만난 적은 없다. 나도 교육 첫 주차에는 나름 할 것들이 있어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기도 했고. 하지만 이제는 서서히 풀어야 하지 않을까. 진수현과 맹아라. 그리고 나와의 관계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더욱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독자 분들의 배려 덕분에 하루 동안 머리를 식힐 시간을 가질 수 있었네요.(사실 주구장창 잠만 잔 것 같습니다. 하하하.) 아. 오늘 여러분께 한 가지 알려드릴 게 있다면, 메모라이즈를 조금 색다른 방향으로 만나보실 수 있게 되실지도 모릅니다. 비주얼 노벨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하실 거예요. 스마트 폰 게임인 방 탈출이나 회색 도시처럼, 메모라이즈를 시각화한다고 보셔도 좋습니다. 얘기는 한 3달 전부터 오고 갔는데, 아마 4월 1일쯤에 확정될 것 같아요. 그때 계약서를 작성하기로 했거든요. :) 0510 / 0933 ---------------------------------------------- 99 Vs 102.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신재룡은 무척 바쁜 듯 보였다. 이제 막 꺼진 듯 빛이 사그라지는 수정구나 책상에 가득 쌓인 기록들이 그 증거였다. 그래도 신재룡 본연의 성격은 어디 가지 않아, 한껏 들떠있는 안솔을 보며 마냥 사람 좋은 미소만을 짓는다. “재룡이 아저씨! 외출증! 외출증 끊어주세요!” “외출증이요? 하하하. 오늘 클랜 로드님과 맛있는 거라도 먹으러 가나요?” 그럴 리가 있나. 밖으로 나가고 싶던 와중에 이때다 싶어 따라오는 것 같은데. …그나저나 참 자상하게도 물어본다. 마치 어린 조카를 보는 삼촌처럼 말이지. “네! 맞아요!” 아니. 내가 언제? “그러니까 얼른 끊어주세요! 어서요!” 그러나 안솔은 방방거리며 마구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아. 또 지끈거리는 것 같아. 우선 안솔의 정수리부터 꽉 누르고. “사용자 신재룡. 그게 아니라….” “예!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끊어드릴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러나 신재룡의 말이 이어진 순간, 나는 절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디 보자…. 아까 외출증을 몇 개 꺼내놨었는데…. 아. 여기 있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외출증을 끊어주는 신재룡. 이내 나는 듯 달려가는 안솔을 보고 있자, 문득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내 기색을 느꼈는지, 신재룡은 허허 웃으며 기록을 찢어 건네주었다. “허허. 괜찮습니다. 외출을 요청한 교관이 클랜 로드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들어온 요청 또한 모조리 허락해준 상태니까요.” 나는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렇게 해달라는 대로 척척 끊어주면, 그거 직무 유기 아닙니까? 나름의 원칙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논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예?” “논란이 일면, 콱 그만두면 되지 않겠습니까.” “사, 사용자 신재룡.” “클랜 로드. 제가 총 교관 일을 시작한 이후로 말입니다. 클랜 로드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정말로요. 후~.” 농담이라 치부하고 웃어넘기기에는 신재룡의 얼굴이나 말투가 너무나 참되 보인다.(?) 그러고 보니 며칠 못 본 사이에 수척해진 것 같기도 한데…. 총 교관 업무가 그렇게나 힘에 부치는 걸까. 하지만 결국 장난이었는지, 신재룡은 큰소리로 껄껄 웃어 젖혔다. 그리고 어차피 다 그럴듯한 사유를 만들어서라도 가져오니, 너무 걱정 마시라고 말함으로써 나를 안심시켰다. 이윽고 싱겁게 웃으며 몸을 돌리려는 찰나, 신재룡이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듯한 얼굴로 나를 붙잡았다. “아차. 클랜 로드. 혹시 맹아라라는 꼬마를 아십니까? 사용자 아카데미에 보조로 들어온 사용자입니다만.” 그 이름을 설마 여기서 들을 줄은 조금도 예상치 못해, 나는 의아한 기분으로 몸을 돌렸다. “표정을 보아하니 모르시는 것 같군요. 다른 건 아니고, 오늘 아침 일찍 총 교관 실을 찾아왔습니다.” “맹아라라는 사용자가요?” “예. 외출증을 요청하면서, 혹시 클랜 로드가 오늘 외출증을 끊었는지 물어보더라고요. 어떤 의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말씀 드리는 겁니다.” “…흠.” 신재룡의 차분한 설명을 들으며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사실 사용자 아카데미라는 같은 장소에 있는 만큼, 맹아라 쪽에서 한 번은 찾아오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고, 여태껏 서로 마주치기는커녕 스쳐 지나간 적도 없다. 오죽하면 그쪽에서 나를 의도적으로 피하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그러할진대, 왜 갑자기 내 근황을 물은 걸까? 그것도 신전을 방문하는 날에 맞춰서. 새로운 호기심이 거품처럼 솟아오른다. 하지만 우선 신재룡에게 고생하라는 말을 건넨 후, 나는 까불거리는 안솔을 데리고 총 교관 실을 나섰다. 이곳에 주야장천 계속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외출증도 무한정 허용되는 건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신전을 방문하면 사정을 알게 되지 않겠는가. 적어도 지금보다는 말이다. “와, 눈부셔. 오라버니! 오랜만에 밖에 나오니까 너무너무 좋아요.” 확실히 안솔의 말대로였다. 정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오자,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는 거리는 반짝반짝 빛을 내는 게 보였다. 마치 투명한 석영을 온 거리에 뿌려놓은 듯한 풍경이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우리 어서 신전으로 가요. 네?” “왜. 얼른 방문 끝내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고 싶어서?” “아이참. 아니에요. 오라버니는 저를 어떻게 보시는 거예요.” “아기 돼지.” 안솔이 고개를 번쩍 든다. “이익! 아, 아기 돼지라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왜. 아기잖아. 그냥 돼지가 아니라 아기 돼지. 아기 돼지가 얼마나 앙증맞은데.” 앙증맞다는 말에 혹한 듯, 안솔이 삐쭉 내밀던 입술을 도로 밀어 넣고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나를 응시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돼지라는 말은 싫은지,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고 말았다. “그, 그래도 싫어요! 저 밥 안 먹어도 괜찮아요!” “그래? 그럼 방문 끝나면 바로 아카데미로 돌아가야겠네. 그래도 괜찮지?” 물론 외출 시 밥 한 끼 정도 먹는 건 딱히 상관없기는 하다. 그래도 간만에 안솔이 난처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에, 반 장난으로 말을 건넨 것이다.(사실 시무룩해지면 조금 조용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없잖아 있었다.) “네! 그래도 괜찮아요. 자아, 자아! 그러니까 어서 신전으로 가자고요!” 어. 이게 아닌데. 안솔이 예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여주어, 순간 당황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그러나 곧 얼른 가자는 듯, 두 손으로 내 팔을 쭉 잡아당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싱거운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래. 생각해보면 안솔은 원래 이런 애였지. 일상 생활하는걸 보면 천진난만함의 대명사지만, 아주 가끔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백한결을 찾을 때나 또는 용이 잠든 산맥에서나. 발동 확률이 가뭄에 콩 나는 정도라는 게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안솔의 손에 끌려 광장을 지나치자 신전은 생각보다 금방이었다. 곧 눈앞으로 새하얀 건물이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러고 보니 2회 차를 시작하고서는 바바라의 신전에는 거의 가지 않았던 것 같은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더욱 빠르게 걸으려는 찰나였다. “응?” 돌연 팔이 확 땅기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의아히 시선을 돌리자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안솔이 보인다. 나와 손을 마주 잡고 잘 걷는 듯싶더니, 갑작스럽게 걸음을 멈춘 것이다. 안솔의 시선은 누군가를 발견한 듯 앞을 빤히 주시하는 중이었다. 하여 안솔을 따라 앞을 바라본 순간, 별안간 뻣뻣하게 굳은 감이 온몸을 엄습하는 걸 느꼈다. 그와 동시에, 총 교관 실에서 들었던 말이 뇌리를 스친다. '아차. 클랜 로드. 혹시 맹아라라는 꼬마를 아십니까?' '예. 외출증을 요청하면서, 혹시 클랜 로드가 오늘 외출증을 끊었는지 물어보더라고요. 어떤 의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신전으로 오르는 계단의 중앙에, 맹아라가 서 있다. 아직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진 상태였지만, 나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맹아라의 눈이 내가 있는 곳을 정확히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거리는 몹시 분주했다. 무수한 사용자들이 오고 가며 계단을 오르내린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오직 이 공간에 나와 맹아라만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렇게 서로 한참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다가, 나는 무언가에 사로잡힌 기분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오르자, 어느덧 중간 즈음에서 맹아라와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녕?” “안녕…. 하세요….” 무척 작은 목소리. 그러나 시선만큼은 피하지 않은 채 나를 똑바로 올려다본다. 그렁그렁해 보이는 눈동자는, 어딘가 모르게 애원하는 빛을 품고 있다. “그래. 오늘 아침 나를 찾았다는 얘기를 들었거든. …혹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니?” 끄덕끄덕. 아무 말도 않고 고개만 움직인다. “어떻게? 어떻게 알고?” 이번에는 난처해하는 빛이 떠오른다. 아무래도 자신도 모르거나, 아니면 곧이곧대로 말하기 어려운 모양.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는 게 나을 듯싶다. “그럼 무슨 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혹시…. 신전으로 들어가시려는 거예요?” 그러자 마침내 도로 말문을 틔운 맹아라. 나는 차분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보다시피.” “그럼…. 그러면요.” “그러면?” “그냥…. 가지 않으시면 안 될까요?” “응? 왜?” “…….” 신전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냐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의아한 감정이 치솟아 오른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그래도 여전히 묵묵부답. 조금 기다려보았지만, 맹아라는 또다시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 “…….” 아, 갑갑하다. 계속 이대로 서 있어야 하는 건가? 그때였다. 아무 말없이 가만히 있는 맹아라를 보며, 도대체 어쩌자는 건지 도저히 감을 잡지 못할 무렵. “오라버니…. 오라버니….” 누군가 나를 약하게 흔드는 게 느껴졌다. 이어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살금살금 흘러 든다. “오라버니. 그냥 가요.” “…응?” “신경 쓰지 마시고, 그냥 가세요.” “…….”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가라는 안솔의 목소리는, 흡사 감칠맛 나는 감주처럼 무척이나 달게 들려왔다. 좌우간 듣고 보니 그러했다. 할 말이 있으면 시원하게 말을 하던가. 저렇게나 뜻 모를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 내가 굳이 입을 열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어느덧, 맹아라는 고개마저 푹 숙인 상태였다. 어차피 얘한테서 들을 얘기는 전부 들은 것 같고, 더는 얽매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안솔의 말에 따라 그대로 맹아라의 옆을 지나쳤다. 아니. 지나치려는 순간이었다. 탁! 짝! “악!” “흥.” 돌연 내 팔을 꽉 잡는 감촉이 느껴지더니 갑작스럽게 살을 세게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짧은 비명이 들림과 동시에, 팔을 붙잡은 감촉은 곧바로 사라졌다. 한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할 수 없어, 나는 도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맹아라는 크게 찌푸린 얼굴로 오른손을 움키고 있다. 언뜻 보이는 손등은 붉은 자국이 확연히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안솔은, 한 걸음 물러난 맹아라를 코웃음 치며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러면서 천천히 손을 내리는 걸 보니, 아마 방금 살을 치는 소리는 안솔이 행한 듯싶었다. 그러면, 맹아라가 나를 못 가게 붙잡으려는 걸 안솔이 도중에 커트한 건가? 그러자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 안솔이 나와 맹아라의 사이로 불쑥 끼어들었다. 맹아라는 입술을 꾹 깨문 채 분한 얼굴로 안솔을 노려보았다. 비록 안솔의 얼굴이 어떤지는 보이지는 않으나, 나는 이 뜻 모를 기묘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차라리 어린애처럼 앵앵거리며 다투었다면 모를까. 이렇게 명백한 적의를 뿜어내며 서로를 대하니, 과연 내가 아는 안솔이, 또는 맹아라가 맞는가 싶다. 그때, 빠르게 시선을 올린 맹아라가 다급히 외친다. “머셔너리 로드님!” “오라버니. 들어가세요.” 그러나 이번에도 안솔이 맹아라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반쯤 몸을 돌리더니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그런 안솔의 얼굴은 모종의 느낌이 극에 다다른듯하며, 무언가에 굉장히 몰입한 눈동자를 보여주고 있었다.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이내 안솔이 재차 입을 열은 순간, 나는 지체 않고 몸을 돌려 신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잠시, 잠시만요!” 일순 등에 따가운 시선이 꽂힌다. 하지만 나는 안솔의 말처럼, 그냥 걸어 들어가며 아무 생각도 않으려 애썼다. 그리고 잠시 후. “어서 오십시오.” 불현듯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두운 잿빛 바닥을 밟고 있을 때였다. 동시에 세라프의 고요한 미성이 고막을 웅웅 울린다. “오랜만입니다. 사용자 김수현.” 비로소 소환의 방에 도착한 것이다. ============================ 작품 후기 ============================ 맹아라 :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어! 행운 능력치 99포인트 발동! 가자! 안솔 : ㅋ. 오늘의 교훈 : 99? 102에게는 깝 ㄴㄴ 에요. * 하하하. 안녕하세요. 어제 후기 내용으로 인해 약간의 논란이 있었네요. 몇 가지 추가적으로 말씀 드려보면, 우선 거짓말은 아닙니다. 4월 1일(화요일)이라고 말한 게 잘못이었군요. 그런데 정말로 4월 1일에 조아라에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계약서를 두 개 정도 봐야 되거든요.(하나는 이북 갱신, 다른 하나는 비주얼 노벨입니다.) 그리고 비주얼 노벨은 몇 달 전부터 얘기는 오고 간 게 맞는데, 아직 제작 단계에 들어간 건 아니에요. 이번에 노블레스에서 총 두 작품이 비주얼 노벨로 들어갈 예정이며(다른 작품은 그 작가님의 입장이 있을 수도 있으니 언급을 자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보다 그 작품이 먼저 제작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왜냐고 여쭈어보니 이런 답변을 받았습니다. 처음 대본을 만들었을 때 정신이 붕괴되는 줄 아셨다고요. 원래 600페이지가 기준으로 다른 작품이 비슷하게 맞췄다면, 저는 3000페이지가 나왔다고 하시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비주얼 노벨이기는 하지만 딱히 게임 성이 들어간다기보다는, 그냥 하나의 소설로 보시면 무방할 것 같습니다. 즉 소설의 내용을 시각화했다는 게 가장 적합한 말인 것 같네요. 잠시 1회로 예를 들어보면, [그 소리에 끌려 나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수록 잿빛 벽돌로 이루어진 바닥이 눈에 밟혔다. 그러다가 이내 서른 평에 달하는 공간을 시야에 담았을 즈음, 조금씩 올라가던 시선이 멈췄다.] 이 부분은 삭제된다고 보셔도 좋습니다. 굳이 글로 나오지 않아도, 배경 일러스트로 나오니까요. 충분한 답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0511 / 0933 ---------------------------------------------- 99 Vs 102. “오늘은 따로 호출하지 않았는데도 오셨군요.” 중앙 제단에 앉은 세라프가 웬일이냐는 듯 말을 건다. 왠지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싫은가?” “No.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언제나 사용자 김수현을 환영합니다.” 매우를 강조하는 세라프의 말을 들으며, 나는 차분히 돌 바닥에 착석했다. 그러자 역시나 한기가 엉덩이를 타고 올라왔으나 되레 익숙한 기분이다. 그래. 저번에 제단에 같이 앉았을 때는 어색해 죽을뻔했었지. 이윽고 세라프가 머리를 빠끔히 내밀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는가 싶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마르는 데려오지 않으신 겁니까?” “응? 응.” “…그렇습니까.” “내가 걔를 여기 왜 데려와? 저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만.” 일견 세라프의 얼굴에 서운한 빛이 떠오른다. 그러나 곧 표정을 회복한 세라프는 예의 고요한 미성으로 소환의 방을 울렸다. “그럼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글쎄. 과연 무슨 일로 왔을까. 너는 어떻게 생각해? 세라프.” 그렇게 본론으로 들어가기 직전, 나는 되물음으로 받아 쳤다. 말장난이나 하자고 꺼낸 말은 아니었다. 물론 스무 고개를 하자고 꺼낸 말도 아니었고. 세라프는 이미 내가 방문한 이유를 알고 있을 것이다. 전에 맹아라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천사의 호출로 방해를 받은 적이 있으니까. 물론 호출한 천사가 세라프일 리는 없지만, 적어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을까. 말인즉슨, 시치미 떼지 말고 털어놓으라는 소리였다. “사용자 맹아라와 관련된 일 때문입니까?” 역시 알고 있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어, 나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영 신경이 쓰여서 말이지.” “그렇게 신경 쓸만한 일은 아닙니다만. 사실 사용자 김수현과는 큰 관계가 없는 일이니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맹아라가 왜 그렇게 나를 찾아오는 건데.” “그건…. 의도한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모든 천사도, 그 부분은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의도한 행동이 아니다. 그리고 저를 비롯한 모든 천사도 라고. 이내 조금씩이지만, 예상했던 것들이 맞아가는 게 느껴졌다. “아무튼 작은 관계든 큰 관계든 간에, 이제는 아니야. 이렇게 된 이상 나를 둘러싸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야겠어.” 그저 그런, 아예 모르는 사용자라면 모를까. 소환의 방까지 온 이상 그냥 물러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더구나 진수현과 관련된 것이라면 더더욱 말이지. 그런 기색을 읽었는지 아니면 내 고집을 알고 있는 건지. 세라프는 잠시 가느다란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손을 들어 허공을 느릿하게 젓더니, 곧 텅 빈 공중을 보며 입을 달싹인다. 다른 천사와 교신을 나누는 모양이다. 이제는 익숙한 모습이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천천히 손을 떨어트린 세라프는, 연록 빛 눈동자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북 대륙 수호자의 관리에 실수가 있었던걸 참작해, 해당 부분에 관한 정보를 사용자 김수현에게 일부 공개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일부에 불과합니다. 모든 정보는 공개할 수 없음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좋아. 일단 말해봐.”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결정된 일이라 조금 고민이 듭니다.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에게 약 1분 12초 동안 정리할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예. 그러세요.”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까닥였다. 그러자 세라프는 조용히 눈을 감았고, 나는 속으로 초를 세기 시작했다. 이윽고 정확히 72초를 세었을 무렵, 세라프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입을 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정말 칼 같은데? “사용자 김수현은…. 근 3년 동안 정말 많은 업적을 이룩했습니다. 마족 벨페고르의 처단부터 시작한 악마에 관한 성과는 우리 모두가 찬탄을 금치 못한, 그야말로 엄청난 업적입니다.” “그거 이번이 열두 번째로 듣는 얘기다. 아. 그냥 참고하라고.” 그러자 조용히 눈을 뜬 세라프가 날개를 크게 일렁인다. 나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얼른 본론이나 얘기하라고 생떼를 부리기에는, 세라프의 태도에 무거운 무게가 넘쳐흐르고 있다. “하지만 그런 만큼 일각에서는 우려하는 목소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전에도 누누이 말씀드렸듯이, 바로 태도가 문제였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이 천사에 대한 적대심은 우리의 예상을 넘어서는 정도였습니다.” “허. 그래서?” “…결국, 내부 회의를 통해 사용자 김수현의 적대를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다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흠….” 딱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동안 천사를 적대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하기는 했으니까. 그래도 내부 회의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사용자 김수현의 태도는 확실히 문제가 될 만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태껏 이룬 업적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태도와 업적. 이 두 가지 사이에서 천사들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이 사용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내가 이룬 업적은 마음에 든다 이건가. 세라프의 말이 이어진다. “이 문제를 두고 생각보다 오랜 시간 동안 갑론을박이 이어졌습니다. 주어진 특전을 회수해야 한다. 특전을 건드릴 수 없다면, 적어도 화정만큼은 거두어야 한다. 아니. 이대로 놔두어야 한다. 혹은 조금 더 지켜보는 게 어떨까.” “특전을 회수한다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니. 애당초 그게 말이 돼?” “몇 번이나 호출이 무시당했을 때 사용자 김수현은 이미 통제가 불가능한 사용자로 낙인 찍힌 상태였습니다. 또한 여담으로 말씀 드리면, 특전의 회수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극렬히 반대하고 있으니까요.” “나 참. 어이가 없군.” 약간은 어이없는 기분이 들어, 나는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한때 소환의 방을 찾아가지 않은 동안 정말 별별 얘기들이 오고 간 모양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약한 의구심도 일었다. 천사들이 이 정도로 나를 문젯거리로 삼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적어도. 적어도 화정만큼은 거두어야 한다고? “그렇게 사용자 김수현의 문제를 두고 회의를 거듭할 무렵.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년 전, 한 명의 사용자가 홀 플레인에 새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 말이 나온 순간, 나는 바로 생각을 멈추고 세라프의 말에 집중했다. 드디어 진수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사용자는 비범했습니다. 여타 사용자와는 다르게 매우 높은 잠재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잘 키울 수만 있다면, 예전의 수현과 대적할 수 있을 만큼 말이지요.” 예전의 나라 해도 그리 만만한 수준은 아닌데. 그런데 진수현이 그 정도로 잠재성이 높다고? 그때였다. “사용자 김수현. 잠시,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지금껏 계속 설명만 하던 세라프가 처음으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 “질문? 뭔데.” 나는 별 생각 없이 바로 허락해주었다. “혹시 소설 또는 만화를 좋아하십니까?” “…좋아하기는 해. 그건 갑자기 왜?” 그러나 이어진 질문은 미처 예상치 못한 말이라, 일순 떨떠름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세라프는, 그런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이고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해하시기 조금 더 쉬울 것 같습니다.” “……?” 그리고 잠시 후. 잠깐 뜸을 들였던 세라프의 입술이, 이내 살며시 열린다. “그러면 지금부터 영웅 육성 계획. 즉 제 2의 김수현 생성 프로젝트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 모든 소설이나 만화가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대부분의 소설이나 만화에서는 하나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일종의 주인공 법칙이랄까. 소설, 만화 내 주인공은 언제나 그리고 한결같이 잘나간다.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기연을 얻고, 주변에 좋은 동료들이 알아서 모여들며, 설령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위기가 닥쳐와도 우연이라는 요소로 극복해버린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주인공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고, 추후에는 최강의 자리에 오르는 법칙. 세라프의 '혹시 소설 또는 만화를 좋아하십니까.' 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였고, 또한 영웅 육성 프로젝트의 실체이기도 했다. 즉 소설 내 주인공에게 일어날법한 모든 상황을 철저하게 계획하고 조작해, 말 그대로 진수현을 육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웅 육성 계획을 진수현을 대상으로 실행한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현재 나의 독주를 저지하고 견제할만한 사용자를 생성하는 것. 두 번째는, 첫 번째에서 더 나아가, 추후 악마들과의 전투에서 앞장서 활용할 사용자를 키우겠다는 것. 이런저런 구실을 붙이기는 했지만, 한 마디로 천사들의 통제가 용이한 사용자를 키우겠다는 소리였다. 즉 천사들은 말 잘 듣는 김수현을 원했다는 소리였다. 세라프의 얘기를 들으면서 한 가지 무서웠던 점은, 이 모든 게 철저한 비밀리에 붙여졌다는 것이었다. 나를 포함한 다른 사용자들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진수현도 자신도 모를 정도로. 좌우간 계획은 최소 3년이라는 장기간의 시간을 두고, 천사들이 엄선한 사용자들을 통해 수면 아래서 시행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1년 차, 그러니까 맹아라가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꽤나 적극적으로 추진된 모양이다. 그러나. 이후 또다시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며 여러 일들이 벌어졌고, 영웅 육성 계획은 기세 좋게 시작한 만큼이나 빠르게 식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전, 결국 계획의 폐지가 결정되었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세라프는 기다랗게 숨을 흘렸다. “후~. 앞선 계획이 폐지된 것 또한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애초 저를 포함해 지속적으로 반대한 천사들도 있었습니다만…. 가장 결정적이었던 건, 바로 근 1년 6개월간, 총 세 가지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 사건?” “흠. 말을 정정하겠습니다. 두 가지 사건과, 한 사용자 때문이라고 할까요. 아무튼 그 세 원인으로 우리 쪽에 힘이 실려, 폐지에 관한 안건을 통과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럼 그 세 원인이라는 게 뭐지?” 그걸 물어볼 줄 알았다는 듯 세라프는 차분히 목을 가다듬었다. “거의 비슷하기는 하지만, 각 원인마다 우리가 부여한 가치가 다릅니다. 가장 중요성이 낮은 순서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백옥과도 같은 검지를 펴 1자를 만들고는, 고요히 입을 열었다. “첫 번째 원인은, 용이 잠든 산맥에서 사용자 김한별이 언어와 지혜의 신, 가네샤에 빈 염원에 있습니다. 이브의 혈통 조건이 변경됨으로써, 사용자 김수현은 현존하는 사용자 중에서 도저히 대적 불가능한 존재가 돼버렸습니다.” 대적이 불가능한 존재라. 그 정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그러나 깊게 생각할 틈도 없이, 세라프는 곧바로 중지를 폈다. 이어서 곧게 선 손가락이 두 개로 늘어났다. “두 번째 원인은 악마 14군주 중 하나인 마몬과 수하 마족들의 처단. 다시 말하면, 그들을 처리한 과정에 있습니다.” “마몬을 처리한 과정이라면…. 아아. 심장 적출이나 강간 등을 말하는 건가?” “비록 처단 과정이 야만적이라는 목소리는 있었지만, 상대는 증오스러운 악마와 그 피조물들. 그 당시 수현이 보인 적대심은 우리를 대하는 태도와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상당수의 천사들이 계획을 폐지하는 것으로, 동시에 제가 발의한 새로운 계획에 힘을 실어주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큭.” 나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의 지시는 차후 출현할 악마를 상대하기 위해, 나름의 뜻이 있어 내렸던 지시였다. 그런데 설마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약지가 펴졌다. 이제 세 번째 원인이 나올 차례였다. “그리고 세 번째 원인은…. 바로 사용자 김수현의 행운에 있습니다.” 이 말은 조금 의외였기에, 나로서는 의아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행운? 행운이 세 원인 중 하나라고?” “그렇습니다.” “어째서? 내 행운 능력치는 고작 90포인트밖에 되지 않는데?” “사용자 김수현의 행운 능력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내 반문에 세라프가 담담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리고 세 손가락을 동시에 접고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사용자 안솔의 존재 때문입니다.” ============================ 작품 후기 ============================ 음. 많은 분들이 소제목을 보는데 불편하셨던 모양이네요. 알겠습니다. 앞으로 소제목을 지을 때는 조금 더 깊게 생각해, 내용과 더욱 많은 연관성을 짓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진수현과 공찬호는, 간단히 말해서 땡 처리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 땡 처리라고 하면 조금 이상할까요? 코멘트에 달려있는 내용은, 한 사건에서 동시에 일어날 예정입니다. 물론 그 후 해결 방향은 각각 달라지겠지만요. 현재 사용자 아카데미 내 공찬호와 진수현의 관계를 생각해보시면 조금은 감을 잡으실 수 있을지도. :) 그나저나 현재 공찬호의 심리를 정확히 맞춘 분이 계시네요. 그분은 언제 봐도 놀랍습니다. 하하하. 0512 / 0933 ---------------------------------------------- 99 Vs 102. “안솔? 안솔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예. 한 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사용자 안솔과 사용자 맹아라의 비슷한 점을 말입니다.” 비슷한 점이라. 그러고 보면 맹아라와의 첫 만남 때 확실히 안솔을 떠올리기는 했다. 말투나 하는 행동이 비슷한 것도 있지만, 단순히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우선 천연…. 아니, 아니지. 높은 행운. 똑같은 진명. 그리고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흡사 신 내림이라도 받은듯한 각성한 모습.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은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하다. 이내 제단을 바라보자, 세라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사용자 맹아라가 처음 홀 플레인에 발을 디뎠을 때, 모든 천사들이 그녀를 주목했습니다. 애초 영웅 육성 계획에 사용자 김수현의 행보를 상당 부분 참고한 상태였는데, 눈 씻고 찾아봐도 사용자 안솔의 대리인은 찾을 수 없었으니까요.” “그때 제 2의 안솔이 될만한 맹아라가 홀 플레인에 들어오게 됐고, 옳다구나 하고 진수현에게 붙인 거로군.” “그렇습니다. 우리는 맹아라라는 사용자가, 영웅 육성 계획에 한층 탄력을 붙여 줄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본격적으로 해보자는 뜻으로 수호자 자격까지 부여한 것이고요.” “그런가.” 담담히 수긍한 순간, 세라프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채 반년도 지나지 않아, 우리의 예상은 철저하게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어떤 점에서?” “우리는 사용자 김수현이 이루어낸 업적에, 사용자 안솔이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맹아라의 존재를 필수 불가결하다 여겼지요. 하지만 거두절미하고 말해보면, 진수현과 맹아라 두 사용자는 김수현과 안솔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차이는 더욱, 이제는 따라잡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벌어졌습니다. 결국 두 사용자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다운 그레이드라는 평가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음…. 다른 건 몰라도, 첫 부분에 대해선 내 생각이 조금 다른데. 확실히 안솔의 덕을 본 건 인정하겠어. 하지만 조력자의 역할로써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건 화정이라 생각해.” 여기서 나는 바로 이의를 제기했다. 원론에서 조금 엇나간 점은 있지만, 천사들이 안솔을 너무 높게 평가하는 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라프는 되레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화정의 힘은 확실히 강력하나 사용할 때마다 어마어마한 부담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사용자 안솔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사용자 김수현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조차도 뭐라 판단키 어려운 무시무시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건 사용자 김수현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그렇기는 하다만.” “그나마 유일한 약점이 있다면 일어나는 모든 상황에 대해서 발동하지 않는다는 것뿐입니다. 즉 발동 확률이 매우 낮다는 소리지요. 사실 이건 그냥 아쉬운 부분일 뿐이지 약점이라 부를 수도 없습니다.” “흠…. 그건 아무래도 좋으니까 그렇다 치고. 아직 궁금한 게 두 개 정도 남았거든?” 세라프는 허락한다는 양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첫 번째. 진수현 육성 계획에 내 행보를 상당 부분 참고했다고 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나는 지금껏 진수현의 행적은커녕 어떤 소식도 들어보지 못했어.”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이 계획은 수면 아래서 조용히 진행한 계획입니다.” “그럼 사용자 아카데미도 이수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Yes. 사용자 진수현에 관한 초반 교육은 특별한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주 활동 무대도 북 대륙 내가 아닌 북 방향 미개척 지역이었습니다. 이 부분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공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용자 진수현은, 사용자 아카데미 수료 보상 4포인트보다 훨씬 커다란 성과를 보상으로 얻었습니다.” 그랬던가. 사용자 아카데미를 이수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교육을 진행했고, 미개척 지역을 위주로 활동했다. 잘 생각해보면 충분히 그럴만한 일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으니까. 그리고 미개척 지역으로 나아간 것은, 아마 현재 북 대륙 내 딱히 성과를 얻을만한 장소가 없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사용자들의 눈에 띄지 않는데 안성맞춤이었을 테고. “두 번째. 맹아라가 말한 버림의 정확한 의미가 뭐지? 계획의 폐지를 말하는 건가? 그리고 그걸 나한테 와서 얘기한 이유는 뭐지?” “그거야 간단합니다. 아까 제가 새로운 계획을 발의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영웅 육성 프로젝트가 영구 폐지됨과 동시에, 사용자 진수현에게 가던 지원이 사용자 김수현에게로 돌려진 겁니다.” “나에게로? …아. 그럼 설마 용병 아카데미도?” “바로 보셨습니다. 이번에 부여된 새 아카데미 설립 권한은, 그런 지원 과정의 일환이라 보시면 됩니다.” 대충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 있어, 나는 양손으로 차가운 바닥을 짚으며 짧게 숨을 흘렸다. 어딘가 모르게 허탈한 기분이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버림받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사용자 김수현이 신경 쓸 것은 일절 없습니다. 사실 따져보면 버림받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지금껏 본인도 모르던 지원을 끊고, 귀속되지 않은 여러 특전을 회수할 뿐입니다. 회수하지 않을 성과들만 하더라도 상당한 수준입니다.” “틀린 말은 아닌데, 그거야 너희 입장이고. 맹아라 입장에서는 낙동강 오리 알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지. 그런데 하나만 더. 말을 들어보니 진수현은 사정을 모르는 것 같고, 반대로 맹아라는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럼 맹아라는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나서는 거지? 맹아라는 엄밀히 말하면 제 3자잖아?” “그 부분에 관해선 노 코멘트 하겠습니다. 다만 현재 사용자 맹아라의 수호자 자격에 관련한 논의가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것 정도만 알아두시면 됩니다.” “허.” 노 코멘트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나는 어떤 의미인지 단박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수호자는 언제나 중립적인 입장에 서 있어야 한다. 그런데 수호자 자격에 관한 논의가 오고 가고 있다고 함은…. 뭐 뻔하지 않겠는가. 잠시 정적이 이어진 후, 세라프가 말했다. “정보 공개는 여기까지입니다. 사용자 김수현.” 길고 길었던 설명이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 “그렇군…. 좋아.” 벌떡 몸을 일으키자 세라프의 시선이 나를 따라 천천히 올라온다. “그러면 납득하신 겁니까?” “하다마다. 상황도 완전히 알겠고, 왜 네가 이번에 사용자 아카데미를 언급했는지도 방금 이해했어.” “……?” “사실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왜 이번 사용자 아카데미가 이렇게 이슈가 됐는지 이해를 못했거든. 하지만 이제야 알겠어. 그래. 굳이 병아리들만 영입 대상으로 잡으라는 법은 없지. …아냐?” 나는 동의를 구하려는 의미로 세라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세라프는 살며시 고개를 갸웃했다. 이어서 뭔가 아닌듯한 얼굴로 턱을 매만지고는 차분히 어깨를 들먹인다. 이 반응은 뭐지? “사용자 진수현의 영입이라…. 나쁜 생각은 아닙니다만,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어째서? 어차피 이제 낙동강 오리 알이잖아? 본인은 모르고 있다고 해도. 좌우간 너희도 이제 상관없을 거 아냐.” “그렇기는 합니다만, 사용자 진수현은 지금껏 겪은 모든 일의 중심에 서왔습니다. 즉 홀 플레인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배에서 선장 역할을 맡고 있던 이라는 말이지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거야 내가 알아서 할 일이지. 아무튼 알겠다. 정보는 고마워.” 세라프의 말인즉슨, 진수현이 누구 아래 들어갈 성격의 사용자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사실 처음 맹아라를 봤을 때만 해도, 이미 클랜까지 창설된 만큼 진수현의 영입은 물 건너간 일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영웅 육성 계획이 중지된 이상 진수현은 이제 괜찮은 사용자 정보를 갖고 있는 한 명의 사용자에 불과하다. 그것도 아직은 북 대륙 내에 입지가 없는. 그렇다면 진수현의 가능성을 알고 있는 만큼, 이대로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아무튼 궁금했던 것들은 완전히 해결했다. 동시에 새로운 생각도 떠올라, 나는 지체 않고 걸음을 틀었다. 그때였다. “사용자 김수현.” 막 포탈로 나가려는 찰나, 세라프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는다. 가만히 뒤를 돌아보자 여전히 중앙 제단에 앉은 세라프가 보였다. 세라프는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중이었다. “Look Before You Leap.” “…응? 뛸 곳을 먼저 보고 뛰라고?” “Yes. 서 대륙 사용자들이 가끔 말하던 속담 중 하나입니다.” “미국 속담인 건 나도 알아.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모든 상황을 고려해서 판단하라는 말이잖아.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세라프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깐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이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진수현의 영입은 어디까지나 선택지에 불과합니다. 부디 사용자 아카데미의 본질을 잊지 마시길.” 사용자 아카데미의 본질을 잊지 말라고…? “물론 병아리들도 한 명 한 명 확인할 생각이야.” “그게 바로 좋은 선택입니다.” 사실 뜬금없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말이었다. 그러나 세라프는 더는 할 말이 없는지, 잘 가라는 듯 차분히 고개만 숙여 보였다. 이어서 천천히 고개를 드는 세라프를 바라보다가, 나는 조용히 포탈에 몸을 묻었다. 소환의 방에서 나와 신전 밖으로 나가자, 계단에 홀로 서 있는 안솔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껏 나를 쭉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라버니! 일은 잘 마치셨어요?” 방실방실 웃는 안솔을 보다가, 나는 주변을 훑으며 물었다. 맹아라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 덕분에. 그런데 맹아라는?” “응? 맹아라요?” “왜. 그 있잖아. 너랑 비슷한 애.” “아~. 걔는 일찌감치 가버렸어요…. 아니 잠시만요. 오라버니? 비슷하다니요?” 마치 '나 잘했죠?'라는 뉘앙스로 말하던 안솔은 삽시간에 태도를 바꿔 도끼눈을 보였다. 하지만 그 모습조차도 귀여워 보여, 나는 윤기가 찰찰 흐르는 머리칼을 보듬는 것으로 화답해주었다. “에헤헤.” 그러자 곧바로 얼굴을 푼 안솔이 천진난만하게 웃어 보인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 나 또한 절로 실없는 웃음이 나온다. 이런 애가 천사들 사이에서 엄청난 평가를 받고 있는 사용자란 말이지. 이윽고 안솔이 내 손을 꼭 쥐는 것과 동시에, 우리 둘은 사이 좋게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어,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솔. 혹시 배고프니? 돌아가기 전에 식당이나 잠깐 들렀다 갈까?” “네! 좋아요!” 안솔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 “으응! 으으으응! 오, 오라버니! 뜨, 뜨거워요…! 이, 이러시면 안 돼요…!” “솔아. 언니야 언니. 괜찮니? 괜찮아? 많이 아파?” “흐윽! 흐으으윽! 하, 항상 생각해오기는 했지만…. 저는 아직 마음의 준비를…! 하악…. 하악….” “솔아, 솔아! 그게 무슨 소리야? 응?” 나는 침대에 누운 안솔을 말없이 물끄러미 응시했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다 못해 터질 듯이 빨개져 있고, 무에 그리 더운지 아담한 어깨를 드러낸 채 숨을 헐떡인다. 그리고 하연은 그런 안솔의 몸을 물 묻은 천 조각으로 연신 닦아주는 중이었다. …안솔이 갑자기 왜 저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신전에서 볼 일을 마친 후, 우리는 거리에 들른 식당에서 밥만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서 별안간 안솔이 해롱거리는가 싶더니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픽 쓰러진 것이다. 그것도 온몸에서 뜨거운 열을 뿜으며.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수마가 찾아오는지 안솔의 비음도 차차 약해져 갈 무렵. 힘겹게 몸을 일으킨 하연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후. 일단 간신히 잠든 것 같아요.” “그, 그렇군요.” “그나저나 정말 큰일이네요. 사제가 와서 봤는데 딱히 아픈 곳이 없다고 하고. 그런데 열은 펄펄 오르고…. 수현? 혹시 솔이가 왜 저러는지 짐작 가는 게 없나요? 오늘 같이 나갔다 오셨잖아요.” “…예?” 나는 떨떠름히 대답했다. 개인적으로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고는 하지만(?), 아무 일도 없다고 말하기에는 뭔가 마음에 걸린 탓이다. 사실 그렇게 별일까지라 보기는 어렵고, 그냥 식당에서 간단한 대화를 나눴을 뿐이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저는요. 오라버니가 참 좋은데요. 오라버니도 나 좋아요?' '그럼.' '우웅. 대답이 너무 간단하잖아요오. 못 믿겠는데에. 증거를 보여주세요오.' '증거? 어떻게?' '간단해요! 여기 이 입술에 찐~한 입맞춤을…. 우~.' '그러지 뭐. 쪽.' '흐갹?!' '안솔? 안솔!' 물론 정말 입에다 입맞춤을 하지는 않았고, 이마에 입만 살짝 맞췄을 뿐이다. 또한 딱히 깊은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애당초 여동생이라 생각하는 면도 있었고, 또한 현재 내가 가진 최강의 무기를 더욱 공고히 하려는 의도도 있었으니까. 엄밀히 말하면, 용이 잠든 산맥에서 유정이 이마에 했던 것과 별다를 바 없는 입맞춤이었다. 그러할진대. “아앙…. 아아앙…. 어떻게…. 나…. 나…. 당해버렸어…. 드디어 당하고 말았어….” 그때부터 애가 아예 맛이 가버리더니, 이제는 저런 되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이다. 하연 또한 같은 말을 들었는지 의심이 담뿍 담긴 눈초리를 보내는 중이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기껏 밥 잘 먹고 와서 왜 저러는지…. 아 정말 왜 저러지.” 결국, 나는 어깨를 으쓱 일수밖에 없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오늘 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 사실 이전 회 코멘트가 자꾸 신경 쓰여 글에 집중을 못했습니다. 200, 300회가 넘어가며 코멘트 때문에 상처를 받은 적은 거의 없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정말 힘들더라고요. 이번 회도 일단 완성하기는 했는데, 실은 오늘 내용도 좀 뒤죽박죽입니다. 원래 이번 회 후반부에 예정돼있던 파트가 다른 내용이었는데, 조금 적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상태로는 도저히 손이 가질 않아 결국 조금 더 적기 쉬운 내용으로 교체하고 말았네요. 그냥 뭔가 좀 흔들린 것 같습니다. 저를 대상으로 내용에 관해 하시는 말씀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내용이 재미있으면 칭찬을 하실 수도 있고, 재미가 없으면 비판을 하실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저를 대상으로 한 게 아닌, 독자 분들간에 이뤄지는 내용에 관한 소통은…. 특히 어제는 사실 몇 번이나 읽어봐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크게 바랬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독자 분들의 생각이 똑같을 수가 없으니, 당연히 의견도 다르게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그게 어떤 상황이고, 어떻게 받아들였던 간에. 그것이 정말 그렇게나 대립 각을 세울 일인지 싶습니다. 초반 부분에 달린 코멘트를 보면 충분히 좋게 넘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불씨가 커지고 커져서 결국 필요 이상으로 과열되었습니다. 나중에 가서는 원색적인 비난들이 오고 가더군요.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그냥 몇몇 분들과 제가 생각하는 기준이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제 의도를 정확히 짚어주시는 분들에게는 정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의도한 대로, 원하는 방향으로 글을 읽어주셨다는 방증이니까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몇몇 분들이 내놓은 의견에 대한 말씀이 지나치셨다는 생각이 지워지지를 않네요. 그분들 중에서도 그냥 '이랬으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말씀하신 분들이 분명히 계실 텐데, 그분들이 받으셨을 상처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네요. 예전에 어떤 분이 남겨주신, 제가 아무리 말려도 독자들간의 분쟁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코멘트가 떠오릅니다. 밤이 늦었습니다. 지금껏 기다려주신 분들에게는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편안한 밤 보내세요. 0513 / 0933 ---------------------------------------------- Vs 101. 어느덧 사용자 아카데미도 7주차 교육에 접어들었다. 주가 늘어날수록 교육은 더욱 타이트하게 진행되었고, 교관들은 그만큼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그것은 특별 교관인 나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바쁜 일상을 보내는 와중에도 나는 진수현에 관한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꼭꼭 숨은 병아리와 기약 없는 숨바꼭질을 하는 것보다는, 보증 수표나 다름없는 진수현의 영입을 우선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병아리 탐색을 아예 포기한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진수현과는 아직까지 직접적인 접촉을 한 건 아니었다. 현재의 진수현은 가망성 하나만 보고 평가하는 유망주가 아니니까. 말인즉슨, 진수현은 이미 1인 투자자가 아닌 거대한 기업이라 봐도 좋은 사용자였다. 그런 만큼 개인 대 개인의 영입이 아닌 M&A의 개념으로 다가가야 한다. 또한 그러한 의미에서, 우선 진수현이라는 사용자에 대해 정확히 파악해야 했고. 진수현. 높은 잠재성과 검술 전문가라는 시크릿 클래스, 그리고 마법사의 악몽이라 불릴 정도로 명성 높았던 사용자.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외적인 요인에 불과하다. 이미 영입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더는 볼 필요가 없는 것들. 즉 그런 것들보다는 조금 더 내적인 요인을 파고들어 영입 전략을 구상해야 한다. 우선 진수현의 영입 가능성을 높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두 가지. 첫 번째는 현재 진수현의 신세가 낙동강 오리 알이라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1회 차 때 진수현이 지금처럼 클랜 로드가 아닌, 수하 사용자로써 활약했다는 것이다. 우정민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우정민은 1회 차 때 붉은 송곳니라는 매우 유명한 클랜을 이끌었지만, 2회 차에서는 머셔너리 클랜원으로써 활약하고 있었다. 우정민도 그러한데, 하물며 진수현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세라프의 말에 따르면, 진수현은 2회 차에서 소설의 주인공처럼 살아왔다고 한다. 지금껏 성공 가도를 걸어왔으며 수하 동료를 이끄는 입장에 있는 엄연한 클랜 로드였다. 세라프가 말한 선장이라는 표현은 그런 의미였다. 세라프의 걱정은 알고 있다. 한 배에 선장이 두 명일 수는 없다. 요지는 내가 진수현이라는 사용자를 품을만한 그릇이 될까, 라는 것. 결국 영입 작업에 앞서 진수현의 자존심, 혹은 자존감을 꺾는 게 선결 과제였다. “김수현 교관님 오십니다!” 그때, 앞쪽 복도에 보이는 강의실에서 내 이름을 크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우당탕 요란한 소음이 울리고, 곧 빠르게 소란이 잦아드는 기척이 느껴졌다. 상념이 너무 깊었던 걸까. 진수현 생각을 하며 하염없이 걷고 있자니 어느새 강의실 앞에 도착한 모양이다. 이내 창문 너머로 급히 자리에 앉는 교육생들을 확인한 후, 나는 차분히 문을 밀어젖히며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 교육할 인원은 약 50명 정도로 검사 클래스를 가진 교육생들이었다. 사실 딱히 볼 일이 없는 놈들이기는 했다. 이미 제 3의 눈으로 관찰한 결과 영입할만한 사용자는 없다는 판단을 내렸으니까. 그러나 일정이 바빠짐에 따라 가끔씩 어느 교육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고는 한다. 바로 오늘처럼. 사실 꼭 맡아야 할 의무까지는 없으나, 그래도 주변 평판을 생각해서라도 하는 게 좋았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오늘 일정은…. 근접 계열들 전체가 야외 교육으로 잡혀있네요. 맞습니까?” 뒷짐을 진 채 물어보자 “예~.” 하는, 약간 힘이 빠진듯한 목소리가 돌아온다. 그도 그럴 것이, 야외 교육은 다른 말로 체력 훈련 또는 실전 교육을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주말에만 하던 생사결이 사라진걸 좋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타 교육이 녹록하다 말할 수 있는 건 결코 아니었다. 방금 교육생들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다. 야외 교육이라 함은 십중팔구 체력 훈련을 하는 경우가 많아 지금 저렇게 울상을 짓고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벌써부터 허벅지를 두드리는 교육생도 보일 정도였다. 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오늘 야외 교육은 체력 훈련이 아닙니다. 다른 실전 교육을 할 생각이니, 다들 표정 풀고 밖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이미 다른 근접 계열들 모두가 운동장으로 나간 것 같으니까요.” 그러자 이번에는 “오~.” 하는, 생기 도는 감탄이 들려온다. 이어서 한층 의욕적인 얼굴로 장비를 챙기는 교육생들을 보아하니, 정말 체력 훈련이 어지간히도 싫은 모양이다. 이렇게 체력 훈련을 등한시했다간 나중에 후회할 텐데. 나는 쓰게 웃으며(사실 체력 걱정은 3년 전만 해도 남 일이 아니었다.), 들어온 지 채 5분도 되지 않은 강의실을 벗어나 복도로 나섰다. “김수현 교관님. 검술 교육생 57명 전원 준비 끝났습니다.” “그럼 출발하죠.” 이윽고 교육생 대표가 준비를 마쳤다 보고하자, 나는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다른 근접 계열들은 벌써 나갔는지 가면서 보이는 강의실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후. 살았다. 체력 훈련 하는 줄 알고 완전 절망했는데.” “아직 좋아할 때는 아니야. 혹시 아냐. 체력 훈련보다 더 힘든 훈련이….” “에이 설마. 그래도 교관이 김수현이잖아. 그래도 공찬호 그 새끼보다야 낫겠지.” “하긴. 그나마 얘 교육이 재미있기는 하지. 공찬호 걔는 진짜 무식의 극치를 달리잖아? 킥킥.” 가는 도중, 교육생들이 소곤거리는 소리들을 듣고 있자 싱거운 웃음이 나온다. 설마 내가 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나저나 공찬호에 대한 얘기가 꽤나 재미있다. 무식의 극치를 달린다 라. 도대체 어떤 식으로 교육을 했길래 저런 말들이 나오는 거지? 아무튼 조금 더 듣고 싶은 마음에 나는 살그머니 청력을 높였다. 그와 동시에, 입구를 지나 햇볕이 비치는 밖으로 한 걸음 나선 순간이었다. 쾅…. 흡사 폭탄이 터진듯한, 무언가가 거대하게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리를 감안하면 폭음이라 봐도 좋을 울림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정지했다. 그러자 교육생들도 갑작스럽게 걸음을 멈춘 탓에, 잠시 웅성거리는 소리가 복도를 울린다. 나는 온몸의 감각을 한껏 올리고, 발을 구르며 마력 감지를 최대한으로 퍼트렸다. 쾅…. 쾅…. 연이어 들려오는 폭음. 방향은 북서 방향으로 약 300미터. 장소는 운동장으로 추정. 나는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무언가 좋지 못한 일이 터졌다는 것을. 더구나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면, 현재 다른 클래스의 근접 계열 교육생들이 있다는 소리였다. 나는 곧바로 교육생 대표를 호출했다. “교육생 대표. 지금 당장 교육생들을 인솔해서 강의실로 돌아갑니다.” “…예? 하지만 오늘 야외 교육을 하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무언가 일이 터진 것 같은데,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좌우간 우선은 인솔해서 강의실로 돌아갑니다.” “으, 으아악! 도, 도와주세요!” 그때였다. 교육생 대표가 입이 열리는 찰나, 한쪽에서 누군가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는 들을 수 있었는지, 우리는 바로 구조 요청이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약 열댓 명의 교육생들이 있는 힘껏 달려오는 중이었다. 운동장이 있는 장소를 등지고서. “아,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교육생 대표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듯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교육생들이 주춤주춤 돌아가는걸 확인한 후 나는 바로 몸을 돌려 입구 쪽으로 달려오는 또 다른 교육생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또한 교관을 찾고 있었는지 나를 보며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중이었다. 헐떡거리면서도 굉장히 다급해 보이는 얼굴이다. “기, 김수현 교관님!” 이윽고 지척까지 다가온 교육생은 거의 무너질듯한 모습으로 나를 부여잡았다. “예. 무슨 일입니까?” “크, 큰일났습니다! 지, 지금 바로 운동장으로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진정하시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차분히 말씀해보세요.” “교, 교관 두 분이. 두, 두 분이 잠깐 말다툼을 했는데! 아, 아니. 그러니까 갑자기 대련을 보여준다고 했는데! 그런데 대련이…. 아후! 이게 아닌데!” 지금 이 사태가 너무나 황망스러운지, 교육생은 허둥지둥 횡설수설 말을 하다 스스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얘는 절대 영입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교육생의 말을 차분히 곱씹어보았다. 두 분이. 말다툼. 갑자기 대련. 그런데 대련이. “두 교관이 말다툼을 하다가 갑자기 대련을 했는데, 그 대련이 대련 같지가 않다. 그래서 제가 가봐야 한다. 이 말입니까?” 몸을 덜덜 떨던 교육생은, 한순간 나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리고 아차 하는 얼굴이 되더니 빠르게 고개를 끄덕거리기 시작한다. 나는 알겠다는 의미로 어깨를 한 번 쳐주었고, 지체 않고 땅을 박차며 달렸다. 그러자 정지돼있던 풍경이 삽시간에 물 흐르듯이 지나치는 풍경으로 변한다. 전쟁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있는 힘껏 달려보는 것 같다. 쾅. 쾅. 쾅. 쾅. 운동장까지는 약 300미터. 길다면 길고 짧으면 짧은 길이였다. 하지만 민첩을 한껏 끌어올린 터라 거리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달리면 달릴수록 폭음이 더욱 확연히 들려온다는 게 그 방증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린 걸까? 잠시 후 저 앞에서, 서서히 목적지가 모습을 드러낼 즈음. 나는 잔뜩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 그 교육생이 왜 대련이 대련 같지가 않다고 말했는지, 운동장을 보자마자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운동장에는 외곽을 둘러싸고 기백 명이 넘는 교육생들이 멀리멀리 퍼져있었다. 그러나 절반 이상이 두 다리로 서 있지 못한 채 바닥에 주저앉아있다. 그럴 만도 했다. 나조차도 눈살을 찡그릴만한 불길한 살기가 뭉클뭉클 퍼져 나오는데, 교육생들이라고 버틸 도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흙먼지가 자욱이 일은 운동장 중앙은, 흡사 수십 개의 클레이모아 지뢰를 터뜨린 듯 보기 싫게 쩍쩍 갈라진 상태였다. 홀 플레인에 지뢰가 있을 리는 없고, 누군가 강력한 근력이나 마력으로 바닥을 내려친 게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중앙 부근을 자세히 주시했다. 범인은, 생각보다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공찬호?” 최대한 높인 안력은 자욱이 흩날리는 흙먼지를 뚫고 들어가 바로 공찬호를 발견했다. 눈을 크게 뜬 채 눈동자를 번득이던 공찬호는 이내 양팔을 하늘로 번쩍 들어올렸다. 그러모은 양손에 짙은 마기를 흘리는 수라마창이 들려있다. 그것은, 누군가를 내려치려는 모션이 분명했다. 자세한 상황은 모른다. 하지만 공찬호를 보아하니 더는 어물쩍 거릴 틈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곧바로 온몸을 웅크렸다. 궁신탄영(弓身彈影)의 준비 자세였다. * 꽝! 강력한 돌진이 청년의 몸을 후려쳤다. “크악!” 반사적으로 방어하기는 했지만, 이내 청년은 정신 없이 허공을 날아가 바닥으로 거칠게 처박혔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짙은 빛을 흘리는 창 날이 청년이 처박힌 부근을 폭풍처럼 후려갈긴다. 꽝! 꽝! 꽝! 꽝! 청년은 본능에 따라 바닥을 데구루루 굴렀다. 그러면서 분하다는 듯 지그시 입을 깨물었다. 한 대. 딱 한 대였다. 공찬호의 압도적인 근력을 이기지 못해 최대한 회피하면서 틈을 노릴 생각이었는데, 일부러 드러낸 함정에 걸려 되레 한 대를 맞고만 것이다. 지금이야 어떻게든 몸을 굴러 피하고는 있지만, 이제는 한계였다. 빗겨 맞은 일격임에도 불구하고 하체는 후들거리다 못해 감각을 거의 상실해가는 중이었다. “후. 피하는 것 하나는 발군이군. 아주 도사야 도사.” 네 번의 일격 중 하나도 걸리는 것이 없자, 공찬호는 창을 땅에 질질 끌면서 청년과의 거리를 줄였다. 땅을 긋는 창에서는 불길하기 그지없는 칠흑 색 아지랑이를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큭.” 이윽고 바닥에 주저앉은 청년을 마주한 공찬호는 느닷없이 히죽 웃어 보였다. 그것은 마치 너는 역시 네 상대가 아니다라고 말하는듯한, 명백한 도발이었다. 청년의 가슴 한 켠으로 기이한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치솟아오르는 굴욕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청년은 알고 있을까? 그런 표정을 지을수록 공찬호가 더욱 기뻐한다는 사실을. 청년이 외쳤다. “미, 미쳤어? 이게 대련이야?” “음? 그럼. 대련이지.” “웃기지…!” “우리가 병아리는 아니잖아. 그래도 교관으로 들어온 북 대륙 내 정예 급 사용자인데, 그에 걸맞은 수준을 보여야지. 안 그런가? 수현 교관?” 그러자 청년, 아니 진수현의 눈에 불꽃이 튀겼다. 이내 어떻게든 일어나려는 듯 양손이 땅을 짚었지만, 상체만 들썩일 뿐이었다. 아까 창대로 얻어맞은 두 허벅지는 잠시지만 감각을 상실한 상태였다. “아니면. 설마 이 정도 대련도 못 버틸 실력인데, 꼴에 교관이랍시고 들어온 건가? 하하하!” 그런 진수현을 보며 느물거린 공찬호는 크게 웃어 젖히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무나 즐거워하는 얼굴. 보이는 그대로, 지금 이런 상황이 공찬호에게는 너무나 즐거웠다. 하나같이 두려워하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병아리들. 그리고 땅에 주저앉아 일어나지도 못하는 주제에, 분한 기색으로 노려보는 진수현. 이 모든 게 공찬호 내부의 흥분하게 만들고 있다. 이윽고 뚝 웃음을 그친 공찬호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공찬호의 시선에는, 여전히 자신을 노려보는 청년의 얼굴에 누군가의 얼굴이 오버랩 되었다. 공찬호는 생각했다. 2년 전, 똑같은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자신에게 커다란 자괴감을 안겨준 사용자를. 감히 자신을 품평하듯 거만하기 짝이 없던 눈동자를 떠올리자, 공찬호는 비틀린 웃음을 내었다. 그리고 처음 봤을 때부터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심지어 그 누군가와 이름마저 똑같은 청년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어때. 항복인가? 수현 교관?” “개소리하지 마! 대련에 무슨 항복이야!” 그러자 호오, 감탄하며 과장된 몸짓을 보이는 공찬호. “그럼 이번 기회에 똑똑히 알려주마! 수라마창의 진정한 주인이 누군지를 말이다! 크하하하하하하하!”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 받아 치려던 진수현은 한순간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공찬호의 눈에서 섬뜩한 빛이 뿜어지더니 양손을 하늘 높이 번쩍 들었다. 곧이어 창의 주변으로 무지막지한 죽음의 기운이 게걸스레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일순 진수현의 낯에 아연한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상태로 창을 까닥까닥 흔들자 곧바로 검을 거머쥔 진수현이 전의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도발에 넘어간 것을 확인한 공찬호는 킬킬 웃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진수현이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있는 힘껏 수라마창을 내리쳤다. 기습적인 공격이었다. 뒤늦게 마주 검을 찔러 올리는 진수현을 보며 공찬호는 광소했다. 죽일 생각까지는 없다. 하지만 어디 한 군데 정도 짓이기는 건 상관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는 공찬호였지만, 창에 담긴 마력은 강철도 일거에 터뜨릴 정도의 기운이 모여있었다. 그렇게, 오른팔을 노리는 창과 가슴을 찌르려는 검이 서로 교차하기 직전의 순간. 휘잉.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공찬호의 머리칼이 휘날렸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콰드득! 콰드드득! 꽝! 날카로운 철성과 땅을 헤집는 폭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공찬호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분명 자신이 한 발 앞서 내리쳤을 터인데, 애초 목표했던 팔을 짓이기기는커녕 되레 무언가와 부딪치는 느낌과 함께 엇갈리는 감각을 느낀 것이다. 동시에 온몸을 엄습해오는 무지막지한 충격. 마치 자신이 내려친 힘이 그대로 되돌아오는듯한 느낌이었다. “우욱?!” 공찬호는 입을 꽉 다물며 창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엇갈린 수라마창이 땅에 깊숙이 박힌 탓에 간신히 몸을 가눌 수 있었다. 겨우 신물을 삼킨 공찬호는 겨우 정신을 차려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말았다. 은은한 빛이 보였다. 아니. 한 사내가 은은한 빛을 흘리는 검을 비스듬히 세워 든 채, 공찬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언제 들어왔는지는 모른다. 비단 공찬호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모든 사용자들이 사내의 속도를 인지하지 못했다. 차마 눈 한 번 깜빡이기도 전에, 사내가 공찬호와 진수현의 사이를 바람처럼 파고들었던 것이다. 또한, 단순히 공찬호의 공격을 빗겨 막은 것만이 아니었다. 어느덧 아래에서 마주 찔러 올라오던 진수현의 검도 사내의 왼손에 잡힌 상태였다. 그것도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오오오오…. 재차 일었던 흙먼지가 가라앉은 후, 주변 교육생들 사이로 안도와 감탄이 뒤섞인 탄성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의 공찬호에게는,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까는 진수현의 얼굴에 겹쳐 보이던 누군가의 얼굴이, 지금은 실제로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찬호의 입에서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짐승과도 같은 신음이 흘러나온다. 2년 전, 그 잊지 못할 차가운 눈동자. 그 시선과 마주한 순간, 공찬호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기분이 삽시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걸 느꼈다. ============================ 작품 후기 ============================ 다음 회는, 공찬호가 어디까지 찌질해질 수 있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굉장히 중요한 후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꼭, 꼭, 꼭, 꼭 끝까지 읽어주세요. 우선 독자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정신은 완전히 회복했습니다. 앞으로 더는 어제와 같은 후기는 없고, 정 심하다 싶으면 제가 코멘트로 말리는 방향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음음. 그리고…. 독자 분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혹시 모래가 울면 뭔지 아십니까? 흙흙….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예. 제가 정말로 잘못했습니다. 이게 진짜는 아니고요, 실은 오늘 여러분들께 고백할게 하나 있지 말입니다. 하…. 도대체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지금도 조금 고민은 되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 말씀 드립니다. 실은 저는 말이죠. (후기 삭제.) 0514 / 0933 ---------------------------------------------- Vs 101. 역시 101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처음에는 정면에서 막아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공찬호의 창과 부딪친 순간, 나는 바로 생각을 수정해 비스듬히 흘려낼 수밖에 없었다. 이화접목으로 되돌렸는데도 이 정도인데, 아마 끝까지 정면에서 막아내려 했다면 그대로 함몰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깨어질 듯 시큰시큰한 비명을 내지르는 손목을 진정시키며, 나는 차분히 공찬호를 응시했다. 아무튼 간발의 차이로 구할 수는 있었으니까. “호~. 이게 누구신가. 또 다른 수현 교관님이 아니신가?” 또 다른 수현이라. 공찬호의 말에 흘끗 뒤를 돌아본 순간, 한순간 가슴이 두근거리는걸 느꼈다. 아직 2년 차라서 그런지 확실히 조금 앳돼 보이기는 하다. 하지만 바닥에 주저앉은 채 나를 멍하니 올려다보는 사내는, 분명히 기억 속 진수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극히 짧은 시간 동안 눈을 마주친 후, 나는 왼손으로 잡아챈 진수현의 검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다시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진수현에게 모든 신경을 쏟기에는, 공찬호의 기세가 심상찮게 커져가고 있었다. “교육생의 신고를 받고 왔습니다. 운동장에 큰 일이 벌어졌다고 하더군요.” 그러자 하? 탄식을 터뜨리는 공찬호가, 이내 느물느물한 얼굴로 크게 코웃음 친다. “그거 정말 웃기는군! 신고? 우리는 대련 중이었다고!” “방금 일격은 누가 봐도 대련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직접 수라마창을 받아낸 입장으로써 100% 확신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되레 어깨를 으쓱인 공찬호는 입꼬리를 슬쩍 비틀어 올렸다. “물론 조금 과하게 보였을 수도 있지. 하지만 사용자들이 진짜로 어떻게 싸우는지 좀 보여주겠다는데, 이것도 잘못인가? 아니 그전에. 애당초 교육 권한은 교육 교관에게 있는 거 아니었나? 특별 교관이면 이래라~저래라 해도 되는 거야?” “서로 간 약간의 말다툼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말다툼이야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않나? 그리고 이건 서로 합의하에 치른 대련이고, 또한 명백한 교육 목적도 가지고 있었으니까. 아무튼 어떡할 거야? 이건 명백한 교육 방해라고. 교, 육, 방, 해. 응?” “…흠.” 공찬호는 딱딱 끊어 말하며 교육 방해라는 말을 강조했다. 나는 조용히 침음을 흘렸다. 딱히 할 말이 없다기보다는, 그냥 별로 말을 섞고 싶지가 않았다. 어차피 주변에 증인도 수두룩하겠다, 교육 방해가 문젯거리가 된다면 이길 자신도 있다.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공찬호는 살짝 팔을 들어 땅에 박힌 수라마창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창 끝을 내 앞에서 살랑살랑 흔들며 이죽거리기 시작한다. “예전에 말이야. 어느 잘난 분께서, 교육 도중 내가 약~간 방해 좀 했다고 아예 검을 겨누신 적도 있었거든. 그럼 나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합니다. 정 억울하시면 그 부분에 대해서 정식적으로 항의하세요.” “크큭! 항의라. 뭐,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기는 하지. 하지만 나는 그게 별로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지는 않거든. 계집애도 아니고 고작 그런 것 가지고 일러바치나. 아! 또한 나는 총 교관을 수하로 둔 입장이 아니라서.” “헛소리.”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라, 나는 공찬호의 말을 가볍게 일축했다. 그러자 잠시 후. 공찬호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수라마창을 거두어 어깨에 안착시킨다. “…헛소리라. 그러면 말이야.” 그 말을 꺼낸 순간 공찬호의 표정이 일변했다. 조금 전까지 능글맞고 능청스럽기 그지없던 얼굴이 이제는 나를 지그시 노려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한껏 들떠있던 어린 아이가 맛있는 먹잇감을 발견한 것처럼. 공찬호의 말이 이어졌다. “여기서 저 애송이를 빼고, 네가 대신 하겠나?” 잠깐 귀를 의심하기는 했지만, 이내 늦지 않게 공찬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대련을 말하는 겁니까?” “물론. 어디까지나 대련이지.” 공찬호는 즉답했다. “아. 뭐 싫으면 어쩔 수 없고. 그럼 이 건은 그냥 불문에 부칠 테니, 얼른 그 애송이나 데리고 돌아가던가.” 그리고 씩 웃으며 예의 건들건들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도발성이 다분한 말투였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웃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공찬호의 제안이 무척 반가웠기 때문이다. 사실 무난하게 넘어가려면 여기서 상황을 매듭짓는 게 맞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몸이 너무나 근질거린다. 이것은 정말로 흔치 않은 기회였다. 또한 체력을 100포인트로 올린 이후, 단 한 번도 그 힘을 제대로 사용한 적이 없지 않은가. 더구나 상대는 바로 그 공찬호였다. 공찬호. 근력 101이자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으며, 모두에게 최강이라 칭송 받은 사용자. 1회 차 시절 보았던 천하무쌍의 모습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깊숙이 각인된 상태였다. 저번에 보아하니 2년 전과는 조금 달라진 것 같기도 한데…. 어쨌든 똑같이 근력 101을 이룬 만큼, 지금의 공찬호라면 분명 좋은 맞상대가 되어줄 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가슴속으로 한 번 붙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무럭무럭 일어난다. 그래. 사실 욕심이라고 봐도 좋다. 그럼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어떠한 준비 과정도 거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긴장감이 차오르는 기분이다. 그래도 나는 차분히 빅토리아의 영광을 다잡으며 자세를 잡았다. 무언의 허락이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크하하하하하하하!” 공찬호는 컬컬 웃어 젖히곤 내게 창을 겨누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온다. 나는 긴장 반 설렘 반으로 공찬호의 걸음을 주시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럼 간다!” 그리고 세 걸음째를 디딘 순간, 공찬호가 땅을 힘껏 박차며 창을 직선으로 내지른다. 피할까? 아니면 옆으로 빠지면서 안으로 치고 들어갈까? 생각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나는 급히 몸을 숙였다. 휙,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머리꼭지를 스치고 지나간다. 이윽고 그대로 자세를 낮춰 보이는 발목을 걷어차려다가, 순간 정수리에 짜릿한 살기가 느껴졌다. 하여 걷어차려던 걸 멈춘 후에 나는 바로 뒤로 뛰었다. 쾅! 눈앞으로 세로로 세워진 수라마창이 땅에 일직선으로 내려 꽂힌다. 과연. 찌르는 도중 궤도를 바꿔 내려찍은 건가? 그나저나 흙먼지가 장난이 아닌데. 역시나 근력 101 사용자다운 위력이다. 그렇게 한 번의 공격과 회피를 주고받은 나와 공찬호는 서로 빠르게 물러나 간격을 벌렸다. 그리고 이내, 나는 하늘에서 나풀나풀 떨어지는 머리카락 몇 올을 볼 수 있었다. “크하!” 생각을 정리할 틈이 없다. 벌써 자세를 가다듬었는지, 공찬호가 또 괴상한 기합을 외치며 저돌적으로 치고 들어온다. 이번에도 단순한 찌르기에 불과했지만, 거친 바람 소리를 내며 공기를 폭발적으로 가르는 창 끝은 무시 못할 기세를 품고 있었다. 이건 마치 한 마리 맹수를 보는듯한 몸놀림. 나는 재빠르게 검을 세웠다. 그리고 이화접목의 원리를 발동함과 동시에, 창 끝 방향에 맞춰 한쪽으로 크게 기울였다. 카앙! 시원한 철성과 함께 접합 면에서 불꽃이 튀었다. 동시에 나와 공찬호의 팔이 서로 반대쪽으로 튕겨나간다. 창은 이번에도 검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손아귀가 찢어질듯한 감각은 여전하다. 들어오는 충격을 최대한 분산시킨 것도 모자라 일부를 되돌렸음에도, 남은 충격만으로도 이 정도의 힘을 내보이는 것이다. 쐑! 그 순간, 지나쳤다고 생각한 공찬호의 창이 기이하게 각도를 꺾으며 짓쳐 들어온다. 찌르기인지, 베는 것인지, 아니면 내려치는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조금이지만 속으로 감탄하고 말았다. 아무리 어지간한 사용자라도 공격할 때마다 되돌아오는 반동으로 당황할 법도 한데. 나 또한 똑같이 공격을 튕겨냈음에도 불구하고, 공찬호는 조금도 지체 않고 연속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후웅! 베기였다. 나는 또 뒤로 물러나는 대신, 상체를 크게 젖히는 것으로 회피했다. 그러나 공찬호의 공격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흡사 끊임없이 도는 물레방아처럼 또다시 각도를 꺾으며 곧바로 치고 들어온다. 빗나갈 때마다 오히려 그 힘을 이용해, 더욱 강한 힘으로 노리는 게 확실했다. 결국, 나는 이번에도 뒤로 뛰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역으로 텀블링을 하며 거리를 벌리자, 별안간 공찬호가 히죽 웃는다. 그런 공찬호를 보며 나도 히죽 웃는다. 아니 웃었다. 그러자 빙글빙글 웃던 공찬호가 일순 정색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웃어? 지금 웃음이 나오나? 김수현?” 웃긴 놈일세. 저는 웃어도 되고, 나는 웃으면 안되나? “왜. 나는 웃으면 안되나?” “그건 아니지. 하지만 애써 태연한 척 하는 게 안쓰러워서 말이야. 크큭!” “응? 애써 태연한 척이라고? 내가 언제?” “그럼 아닌가? 이번 두 번의 공방에서 너는 모두 나에게 밀렸어. 계속 피하기만 했다고! 하하하! 뭐, 도망치는 것 하나는 인정해주지!” …병신인가? 와하하 웃는 공찬호를 보자 절로 콧방귀가 나온다. 도발하려는 의도가 눈에 뻔히 보이기도 하거니와, 지금껏 이어진 두 번의 공방은 단순 탐색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아직 본 싸움에는 들어가지도 않은 상태였다. 공찬호 정도라면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아무튼. 이 정도면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나름은 합격이다. 그래도 1회 차의 명성이 딱지치기로 얻은 건 아닌지, 공찬호는 확실히 괜찮은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행동 대부분이 공격 쪽에 치중된 건 조금 아쉽지만, 아직은 탐색전에 불과한 만큼 함부로 평가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나나 공찬호나, 아직까지는 서로 모든 힘을 드러낸 게 아닐 것…. 응? 뭐지? …갑자기 왜 저렇게 숨을 씩씩 몰아 쉬는 거지? 문득 눈에 밟힌 이상 현상에 나는 공찬호를 자세히 주시했다. 얼굴에 여유가 넘쳐흐르는 것에 반해 어깨가 조금씩 들썩인다. 이내 가만히 청력을 높여보자 헐떡거리는 호흡마저 들려왔다. 벌써 지친 건가? 아니면 진수현과의 전투에서 체력을 소비했나? 아니면…. 설마 방금 전투에서 온 힘을 다한 건가? 아니다. 아직 수라마창의 진정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으니 온 힘을 다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조금 전 전투가 사용자 정보라는 울타리 안에서 최선을 다한 거라면….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하지만 설마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있는 힘껏 몸의 마력을 일으켰다. 이로써 공찬호의 기본기가 과히 나쁘지 않다는 건 확인했다. 그러하면 이제는 천하무쌍의 실력을 확인할 차례였다. 고오오오…. 쿠쿠쿠쿠…! 지금껏 뜬구름처럼 주변을 표홀히 떠돌던 기운이, 한순간 일변해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그리고 그 순간, 조용히 호흡을 고르던 공찬호가 일순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한 걸음 물러섰다. “뭐, 뭐지?” “……?” “너…. 설마 지금까지 마력을 일으키지 않은 건가?” “아니. 일으켰는데?” 확실히 일으키기는 했다. 공찬호의 일격을 흘릴 때마다 이화접목의 원리를 사용했으니까. 다만 전력으로 뽑아내지 않았을 뿐. 시종일관 비웃음을 보내던 공찬호의 얼굴이 돌연 이상하게 변했다. 무에 그리 궁금한 건지는 모르나, 어쨌든 더는 사정을 봐줄 필요가 없다. 탐색전도 끝났으니 이제는 내가 먼저 공격한다.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그리고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무릎을 한껏 구부림과 동시에, 땅을 세게 박차며 공찬호에게 달려들었다. 공찬호는 얼굴을 와짝 일그러뜨리는 와중에도 눈을 크게 부릅떴다. 검로를 읽고 대응하려는 모양. 그러나 채 1초도 지나지 않아 공찬호의 눈이 황망스럽게 변한다. 내가 빅토리아의 영광을 좌우로 빠르게 흔들며, 공찬호의 빈틈을 정확히 노리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결국 공찬호가 내린 결정은 찍기였는지, 어쩔 줄 몰라 하던 창대를 가로로 들어 내리친다. 그러나 이미 두어 번의 격돌로 절대 부딪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지한 상태라, 나는 곧바로 검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창대는 하릴없이 허공을 그었다. “비겁한 새끼!” 공찬호는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걸음을 물렸다. 가만히 있다가는 그대로 재차 이어지는 칼침에 맞을 판인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가만히 보고 있을 생각도 없다. 아마 창을 자유로이 활용할 거리를 확보할 목적인 듯싶어, 나는 틈을 주지 않고 곧바로 따라 들어갔다. 공찬호의 근력이 나보다 높다면, 내 민첩은 공찬호를 상회한다. 남은 거리는 이제 1미터도 되지 않는다. 나나 공찬호나, 서로 사정거리에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바람결이 몸을 스친다. 쫓아가고 물러나는 와중에도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나는 머릿속으로 공찬호의 움직임을 그려보았다. 공찬호는 분명히 이대로 내가 들어올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파고들어간 순간 모종의 행동을 취할 터. 아마 예의 각도 공격으로 나를 후려칠 가능성이 가장 높다. 생각은 끝났다. 이내 공찬호가 눈을 한 번 깜빡인 순간 나는 두 번 발을 굴러 미끄러지듯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물론 직선으로 들어간게 아니라, 최대한 오른쪽으로 돌아 반월형으로 들어간 것이다. “걸렸구나!” 그 순간 공찬호가 외쳤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키며 있는 힘껏 수라마창을 가로로 휘둘렀다. 역시나 카운터를 노리고 있었다. 허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창대는 터지기 일보직전의 폭탄처럼 무시무시한 기세를 품고 있었다. 아마 부딪치는 순간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맞아줄 때의 이야기였다. 아까처럼 탐색전을 한다면 모를까. 본 전투에 들어간 이상 고스란히 맞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미 들어올 것을 예상했던 만큼, 나는 왼팔을 휘둘러 공찬호의 팔꿈치 안쪽을 거세게 가격했다. “크흡?!” 일순 가격한 팔이 크게 들리며, 동시에 수라마창 또한 궤도를 잃고 제멋대로 하늘로 튀어 오른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빅토리아의 영광을 휘둘렀다. 그 찰나의 순간,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눈앞을 응시했다. 공찬호의 생각을 역이용해 되레 카운터를 쳤다. 아마 내가 이런 상황을 맞았다면, 꼼짝없이 당할 것이다. 그런 만큼 마음 한 켠으로 기대감이 일었다. 공찬호라면. 과연 이 상황을 어떻게 회피할까? 그때였다. 빅토리아의 영광이 머리를 베어 가르기 직전, 공찬호의 얼굴이 멍한 빛을 보였다. 어떠한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곁눈질로 들어오는 검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 순간 의아한 기분이 들어, 나는 설마 설마 하면서도 반사적으로 검을 반 바퀴 돌렸다. 쫘악! 흡사 따귀를 때리는듯한 소리가 텅 빈 허공을 힘차게 울리고, 동시에 공찬호의 고개가 홱 돌아간다. “크악!” 공찬호는 비틀비틀 물러나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 나는 어이없는 기분으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김수현…! 이…! 이…!”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공찬호가 회까닥 돌은 얼굴로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런 공찬호의 오른쪽 볼은 발갛게 부어 오른 상태였다. 검면에 얻어맞은 자국과 검 끝에 긁힌 몇 줄기 선혈을 흘러내리며. “너…. 뭐냐? 도대체 왜 맞은 거야?” “뭐, 뭐라고? 이 자식이! 지금 끝까지 나를 우롱하겠다는 거냐!” “아니. 진짜로 전력을 다한 거 맞아?” “김수혀어어어어언!” 내 말이 도발이라 생각했는지, 공찬호는 노호성을 토하며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아직 의구심이 가신 건 아니었으나, 나는 다시 한 번 공찬호와 검을 섞었다. 그리고 결과는, 예상과, 아니 의구심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꽤나 열이 받았는지 공찬호는 미친 듯이 수라마창을 휘둘러 나를 압박했다. 그것을 하나하나 모두 피하고 나서, 아까와 똑같이 반월형으로 파고들었다. 공찬호는 재빨리 창을 옆으로 후렸지만, 나는 그것마저 한 바퀴 빙글 돌아 피해버렸다. 그리고 훤히 드러난 가슴을 걷어차버렸다. 퍽! 그러자 발길에 걷어차인 공찬호가 꼴사납게 나동그라지며 바닥을 구른다. “끄윽…. 쿨럭!” 제법 충격을 받은 듯 공찬호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기침을 토한다. 그러다 번뜩 고개를 들어 나와 마주하고는 망연한 얼굴을 보였다. 거뭇한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린다. 그런 공찬호의 눈은 마치 지금 상황을 믿을 수 없다 말하는 것만 같다. “…….” 그리고 나는,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사용자 정보에 한해서, 공찬호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게…. 뭐야.” 갑작스럽게, 어마어마한 실망감이 온몸을 엄습하는 게 느껴졌다. ============================ 작품 후기 ============================ 1회 차와 비교하면…. 뭐 수현이 무시무시하게 강해진 것도 있지만, 공찬호가 훨씬 약해진 것도 있죠. 더불어 엄청나게 찌질 해졌고요. 그 부분은 지금 후기로 말하기 보다는, 해답 파트에서 밝히는 게 좋겠죠? :) 그래도 한 가지 말씀 드리면, 지금 공찬호는 죽었다 깨어나도 김수현 못 이깁니다. 1회 차 때 전성기의 공찬호였다면…. 한 10%~20%? 한 10번 싸우면 한 번은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ㅋ_ㅋ 0515 / 0933 ---------------------------------------------- Vs 101. 공찬호는. 공찬호는 이런 사용자가 아니었다. 딱히 1회 차의 우상이나 영웅 등 거창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사실 공찬호와는 이야기 한 번 해본 적이 없고 검 한 번 나눈 적도 없으니까. 고작 공찬호가 싸우는 모습을 몇 번 본 게 전부랄까. 하지만 그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공찬호는 기억에 오랫동안 남을 정도로 내게 매우 강한 인상을 남겼다. 아주 오래 전. 오직 공찬호 한 명을 죽이려 연합군이 결성되고 결국 함정에 빠트리는데 성공했을 때. 자신의 수하보다 수십, 수백 배나 되는 인원에 둘러싸였음에도 공찬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웃었다. 입가에 씩 미소를 머금은 채 오연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 이 정도는 되야 나와 한 번 해볼만하지 않겠는가. 하하하!' 그 후에 이어진 전투는 무척이나 격렬했다. 그 당시 명성 높았던 사용자들은 너나없이 공찬호를 향해 달려들었으며, 공찬호는 오직 홀로 그들을 맞이했다. 결국 어찌어찌 공찬호를 쓰러트리는 데는 성공했으나, 연합군의 피해 또한 상상을 초월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전투를 기점으로 공찬호는 홀 플레인에 더는 족적을 남기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날 전투 참가한 이들이라면 그 누구도 공찬호의 강함을 의심하지 않았다. 일대일로는 불패의 신화를 쌓았으며 천하무쌍이라 칭송 받은 사용자. 그래. 내가 기억하는 공찬호는, 진정으로 싸울 줄 아는 사용자였다. 그런데. 그러할진대. “제기랄!” 지금 바닥에 꼴사납게 나뒹구는 저놈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저런 모습을 천하무쌍으로 인정할 수는 없다. 이제는 실망을 넘어서 갑작스럽게 분노가 치솟는다. 왜 화가 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까닭없는 분노였다. 그래도 한때는, 그나마 함께 해볼 만한 사용자라 생각했는데…. “이놈! 겨우 이 정도로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라! 아직 이 대 이에 불과하니까!” 미친놈. 이런 상황에서 한다는 게 고작 숫자 놀음인가? 결국 물밀듯이 차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나는 직선으로 힘껏 내달렸다. 공찬호가 주춤한다. 최대 속도로 돌진하는 나를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나는 약 2미터 정도의 거리를 남기고서 크게 도약했다. 그리고 빅토리아의 영광을 내리찍듯이 덮쳐 들었다. 아래서 보이는 공찬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카앙! 거슬리는 철성이 고막을 짜르르 울렸다. 찰나의 순간, 공찬호는 수라마창을 가로로 들어 내 공격을 막아냈다. 그래도 감은 좋은 모양이지만, 그뿐이었다. 겨우 이 정도였다. 아마 1회 차의 공찬호였다면, 막아내는 걸 넘어서 미처 예상치도 못한 반격을 가해왔을 것이다. 또 한 걸음 물러서는 공찬호. 하지만 이대로 거리를 벌리게 놔두거나 공격할 틈을 줄 생각은 없다. 나는 곧장 머리 쪽으로 두 번의 추가 공격을 날렸다. 좌로 한 번 우로 한 번. 카앙! 카앙! 공찬호는 정말 사력을 다한다는 얼굴로 막아내는 중이었다. 그러나 앞선 공격은 물러나지 못하게 하려는, 일종의 페이크에 불과했다. 나는 재빠르게 몸통으로 파고들어, 훤히 드러난 복부에 곧바로 무릎 차기를 먹였다. 퍽! “크헉!” 한순간 숨이 막힌 듯 공찬호는 허리를 구부렸다. 그 상태서 어찌어찌 자세를 추스르더니 머리를 번쩍 들어 입을 크게 벌린다. “적당히 좀 하란 말이다!” 부웅! 또 기상천외한 각도 공격을 하려는지 갈비뼈에 서늘한 공기가 스며든다. 하지만 상대의 공격을 읽고 이어질 움직임을 예측해서 날린 게 아니라, 그냥 베어오는 것에 불과하다. 즉 일방적으로 얻어터지자 발끈해서 공격한 것이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거의 땅에 닿을 정도로 한껏 몸을 굽혔다. 그리고 공찬호의 발목을 냅다 차버리며 있는 힘껏 검을 쳐올렸다. 팍! “어어!” 따앙! 공찬호의 발이 어지럽게 변한 것과 수라마창이 하늘 높이 떠오른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수라마창은 거의 5미터는 날아가는가 싶더니 이내 핑그르르 돌며 땅속 깊숙이 박혔다. 공찬호는 어떻게든 몸을 가누려는 듯 보였으나, 공교롭게도 갈라진 틈에 발이 걸려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자신이 작살낸 땅에 자신이 걸려 넘어진 것이다. “후.” 나는 차분히 몸을 일으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자 공찬호는 넘어진 자세 그 상태서 흠칫 몸을 움츠려,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멍한 낯빛과 흔들리는 눈동자. 누가 봐도 겁먹은 얼굴이다. 그런 얼굴을 보자 절로 눈이 가늘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제는 실망과 분노를 넘어서 허탈함 감정마저 느껴진다. 사실 한때는 한 번 같이 해보고 싶은 사용자라 생각한 적도 있다. 공찬호 정도면 그래도 서로 등을 맞대며 함께 나아갈 수준은 되겠다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 오산이었다. 아무튼 확실한 건, 2회 차의 공찬호는 그 어디서도 1회 차의 면모를 보이지 못한다는 것. 왜 이런지는 모르겠다. 도대체 1회 차와 어떤 게 다르길래 이렇게 병신이 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공찬호의 수준은 그냥 힘센 고기 방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한동안 무너진 공찬호를 주시하고 있자, 돌연 머리를 푹 숙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어서 낮지만 끓는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왜…. 왜 또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거냐….” 뭔 소리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천하무쌍이 아니란 걸 확인한 이상, 이제는 그렇게 관심도 가질 않는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공찬호가 아닌 저 멀리 떨어진 수라마창을 향해서. 이윽고 땅 깊숙이 박힌 불길한 기운을 흘리는 창에 도달한 순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일어나.” “나한테 명령하지마!” 공찬호가 외친다. 나는 눈을 뜸과 동시에, 아래 보이는 수라마창을 힘껏 발로 차버렸다. 탱,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한 바퀴 넓게 돌은 수라마창은 공찬호의 앞으로 정확히 꽂혔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기가 없어서, 발이 걸려 넘어져서 졌다는 말 듣기 싫다. 그러니까, 잔말 말고 일어나라.” 공찬호는 여전히 주저앉은 채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머리를 번쩍 들며 외쳤다. “그 거만한 눈! 뭔가 알고 있다는 눈!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지 말란 말이다!” 흡사 울부짖는듯한 목소리. 도대체 뭔 헛소린가 싶어 바라보자 공찬호가 발악하며 수라마창을 부여잡는다. “네가 뭔데 나를 깔아보는 거냐! 네가 뭔데 네 멋대로 나를 평가하는 거냐! 도대체, 도대체 네가 뭔데 나를 내려다보는 거냔 말이다!” 공찬호는 번쩍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꽉 잡은 수라마창을 정면으로 겨누며 거센 울분을 터뜨린다. “나는! 나는 지금껏 혼자서 모든 걸 해왔고, 가로막는 모든 걸 부수며 전진했다! 나, 혼자서 말이야! 그런데 고작 그림자 여왕 하나 잘 잡아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새끼가!” “…….” “그런 새끼가 수라마창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나는 인정 못해! 이 수라마창의 진정한 주인은, 바로 나! 공찬호란 말이다아아아!” “……?” 이윽고 공찬호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맹렬히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끈적끈적하면서도 불길하기 짝이 없는 이 어두운 기운은, 분명 수라의 기운이다.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기운이기는 하지만, 마음속으로 아주 조금의 동요도 일지 않는다. 심안 때문일까. 아니면 화정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관심이 사라져서일까. 반사적으로 화정의 힘을 일으키려다가, 그냥 조용히 빅토리아의 영광만 마주 겨누었다. 이어서 짧게 한숨을 흘리며 까닥까닥 검을 움직였다. 그러자 공찬호의 얼굴이 더없이 비뚤어지더니 버럭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확실히 기세 하나만큼은 엄청나다. 하지만 공격이라고 해봤자 근력을 내세운 무식한 창질밖에 보지 못했다. 말인즉슨 사용자 정보를 적절히 활용하지 못하고, 근력에 그리고 수라마창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무시무시한 기세를 피우는 공찬호가 흡사 성난 황소처럼 달려온다. 나는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공찬호를 주시하다가, 창이 한껏 젖혀진 순간 검을 세로로 크게 그어 올렸다. 따앙! 묵직한 감촉. 그와 동시에 수라마창은 또다시 허공을 빙글빙글 날았다. 그리고 공찬호는, 또 놓쳐버린 창을 따라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훙, 훙, 훙, 훙. 수라마창이 맥없이 도는 소리가 들려온다. 화가 났는지. 아니면 믿을 수가 없는지. 어느덧 하늘을 보는 공찬호의 얼굴은, 이제 뭐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괴상해진 상태였다. …나는 왼쪽으로 차분히 팔을 내뻗었다. 수라마창은 정확히 내 손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예전의 거부 현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잠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하늘서부터 따라온 시선이 손에 안착한 수라마창을 향한다. 그리고 그 순간. 그러니까, 아무 현상도 보이지 않는 수라마창을 확인한 순간. “끄어어억….” 쿵! 공찬호는 끓는듯한 신음을 흘리며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말았다. 나는 그대로 손을 펴 수라마창을 떨어트렸다. 그러나 그것을 받을 생각도 못한 채, 공찬호는 망망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설레설레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만하자. 이제 재미도 없다.” 빅토리아의 영광을 귀걸이로 변환시키자,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공찬호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어딘가에 있을 진수현을 찾았다. 마침 좋은 기회이기도 했거니와, 공찬호에게 이 이상 기대할 것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더 해봤자 시간 낭비에 불과하니, 이제는 더욱 가치 있는 것에 집중하고 싶었다. 곧 입을 쩍 벌린 채 한쪽에 힘없이 앉아있는 진수현을 볼 수 있어, 나는 지체 않고 걸음을 옮겼다. “어, 어디 가는 거냐! 거기서 김수현! 아직 전투, 아니 대련은 끝나지 않았어!” 보아하니 앉으려고 앉은 게 아니라, 움직이지를 못하는 것 같은데…. 발을 보니 부상을 당한 것 같기도 하고. 뭐, 2년 차임을 감안하면 아직 경험이나 기교적인 면에서 부족할 수는 있다. 무엇보다 영입 가능성이 높은 사용자가 아닌가. “하! 설마 도망치는 거냐! 고작 몇 번 이렇게 했다고 이긴 거라 생각하는 건가? 와, 와하하…!” 좌우간 천사들이 허투루 키웠을 리는 없을 테니 사용자 정보는 확실히 괜찮지 않을까? “아, 아! 이봐 김수현! 아까 나한테 전력을 다했냐고 물었지? 실은 다하지 않았다! 이제까지는 그냥 적당히 몸을 푸는 수준이었어! 좋아. 이제 제대로 한 번 해보자고!” 곧 진수현의 앞에 도착한 순간, 나는 빠르게 얼굴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침착히 손을 내밀며 물었다. 일단 공식적인 첫 만남인 만큼, 좋은 인상을 심어줄 필요가 있으니까.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약간 다치신 것 같은데요.” “예? 아…. 예.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했고, 진수현은 서너 번 눈을 깜빡이더니 떨떠름히 대답한다. 이어서 느릿하게 손을 맞잡으려는 순간이었다. 갑작스럽게, 진수현이 눈을 부릅떴다. “김수혀어어어어언!” 그런 진수현의 시선은, 내가 아닌 뒤쪽을 향하고 있었다. * 늦었다고 생각했다. “김수혀어어어어언!” 미친놈처럼 소리 지르며 마구잡이로 돌진해오는 공찬호. 그리고 그런 공찬호를 무시한 채 손을 내밀고 있는 김수현. 둘을 보는 진수현은 순간 어쩔 줄 몰라 함을 느꼈다. 하여 본능에 따라 김수현을 바라봤으나 여전히 미동도 않고 있다.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모르고 있는 걸까? 알려줘야 하나? 아니, 이제 늦었나? 그리 생각했을 때, 공찬호는 지척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이대로라면 자신에게 손을 내민 사내는 필히 커다란 타격을 입을 터. 그렇게 진수현이 어어 거리며 공황 상태에 빠졌을 무렵. 불현듯 진수현은 누군가 가늘게 한숨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짜증나네.” 그때였다. “흐아아아아악!” 공찬호가 우악스럽게 달려든 순간, 김수현의 몸이 홀연히 사라졌다. 아니. 김수현의 몸이 홀연히 투명하게 변했다. 이형환위. 진수현은 급히 헛바람을 들이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눈앞에 있었다. 눈조차도 깜빡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찰나의 상황을 읽지 못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직 진수현의 수준으로는 처음 본 최 상승의 어빌리티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진수현이 볼 수 있었던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어느새, 공찬호의 몸이 붕 떠올랐다는 것. 그리고 김수현은 아직도 진수현을 보고 있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공찬호의 공격을 피하고, 되레 멱살까지 잡아챈 것이다. 잠시 후. 멱살을 잡은 채 팔을 끌어올린 김수현은, 이내 어깨 앞쪽으로 거세게 공찬호를 넘겼다. “귀찮다!” 그리고 크게 외치며, 땅으로 있는 힘껏 땅으로 내다 꽂았다. 한 손으로 한, 완벽한 업어 치기였다. 꽝! 그렇게 공찬호와 땅이 부딪친 순간, 지면과 몸이 동시에 크게 들썩였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복선 하나 투척! 이후의 XX XX의 등장을 대비한 복선입니다. 우후후. 그나저나 독자님들 잠시 이리로 와보세요. 제가 뽀뽀해 드림. / (^3^) / 쪽쪽. 왜인지 이유는 말하지 않을게요. 헤헤헤. 아. 제가 어제 말을 잘못한 게 하나 있는데, 전성기의 공찬호가 김수현을 상대로 승률 10%를 조금 오해하신 분들이 계신 것 같아서요. 그냥 10번 붙으면 한 번 정도 이길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론 화정은 사용하지 않고요. 그럼 여기서 잠시 질문과 답의 시간을 가져볼까요? Q - 1. 화정을 쓰지 않은 김수현을 상대로 전성기 공찬호의 승률이 10~20%면 지금 김수현이 전성기 공찬호 보다 월등히 강하다는 말인데. 예전에 김수현의 회상에서 전성기의 공찬호는 회귀 전 10강의 한 축이었던 무신 차승현과 미친년 반다희의 합공도 이겨낸 괴물로 나옵니다만. 그렇다면 현재 홀 플레인에서 김수현과 대등한 상대는 없는 건가요?(화정 쓰지 읺는 다는 조건 하에) A - 1. 예. 적어도 사용자 중에서는, 현재의 김수현을 일대일로 이길만한 사용자는 없습니다. 물론 이길 가능성이 있는 사용자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만. 웬만해서는 현재의 김수현을 이기지 못합니다. Q - 2. 그리고 작가님께 하나 여쭈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건 꼭 좀 답변 좀 해주세요. 이번 회에 그동안 별로 언급이 되지 않았던 이화접목에 대해서 언급이 됐는데. 수현이 말하길 힘이 돌아갈 텐데 놀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말인즉 이화접목은 상대방의 공격을 받아 힘을 흘리면서 일부를 상대방 쪽으로 되돌리는 일종의 어빌리티 기술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게 맞는 건가요? A - 2. 정확히는 이화접목의 원리에 접목한 새로운 어빌리티라 보시면 되요. 일부는 흘리고, 일부는 받아들여 분산시키고, 또 일부는 되돌린 겁니다. 물론 이것 또한 굉장히 상승의 어빌리티입니다. Q - 3. 1.2할은 화정까지 써서인 거 같아요. 화정이 없으면 몇 퍼센트까지 올라가나요?? A - 3. 화정은 딱히 수치로 정의할 수가 없어요. 규격 외의 힘입니다. 어느 정도이냐 하면 그 천사들도, 악마들도 모두 두려워하는 힘이죠. 현재 설정상 화정 이상 가는 힘은 없습니다. 화정과 동급으로 설정된 힘은 단 3개에 불과하며, 조금이라도 대적 가능한 힘은 어느 정도 설정한 상태입니다. 0516 / 0933 ---------------------------------------------- Vs 101. 공찬호와 끝까지 갈 수는 없었다. 뒤늦게 교육생들의 신고를 받은 교관들이 달려와, 현재 상황을 정리해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거기서 더 버텨봤자 득 될 것도 없어 나는 순순히 물러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공찬호가 여전히 문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득달같이 달려들던 공찬호는, 업어 치기 이후 갑자기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교관들이 말을 걸어도 응답하지 않고, 오직 흐릿한 눈동자로 하늘만을 보고 있었다. 떠올리건대, 대(大) 자로 누운 그 모습은 흡사 죽은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 결국에는 사제의 치료 또한 소용이 없어, 교관들이 공찬호를 부축해가는 것으로 상황을 일단락 짓고 말았다. 아마 정신 쪽에 커다란 충격을 입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지금.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성하얀은, 나와 진수현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구했다. 그것도 양손으로 싹싹 빌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얼굴로. 성하얀을 보고 있자 조금이지만 애처로운 기분이 든다. 이 상황과 연관해서 안쓰러운 게 아니라, 그냥 성하얀 개인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성하얀의 모습은 2년 전 보았을 때와 굉장히 달라져 있었다. …도대체 무어라 해야 할까. 그냥 한 명의 노예, 혹은 걸인을 보는 것만 같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뺨에 미미한 자국이 비쳐 보일 정도였고, 심지어 작지만 퍼렇게 멍이 맺힌 부분도 보였다. 예전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선하게 웃어 보이던 청순한 공주님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뭐든지…. 하라는 건 뭐든지 다할 테니까…. 제발 한 번만 용서해주시면 안될까요….” 그런 성하얀은 아직 정확한 정황이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인 사과를 하는 중이었다. 기실 대충 짐작은 간다. 그래도 그동안 살을 부대끼고 살아온 만큼, 사건이 터지자 본능적으로 공찬호의 소행이라 여긴 듯싶었다. 뭐, 그게 거의 사실이기도 했고. 한동안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는 성하얀을 응시하다가, 나는 흘끗 옆을 곁눈질했다. 옆자리에는 진수현이 딱딱히 굳은 상태로 앉아있었다.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 듯 딱한 눈초리로 성하얀을 바라보는데, 그러면서도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다. 보아하니 이런 상황은 처음인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아무래도 경험 부족인 것처럼 보이니, 조금 나서주는 게 좋을 것 같다. 차후 돈독한 관계를 이어나가는 발판으로 말이지. 속으로 계산을 마칠 수 있어, 나는 양손을 바짝 엇갈려 맞추며 말했다. “2년 전이랑은…. 많이 달라지신 것 같습니다.” 최대한 부드럽게 하려 애쓰며 말문을 열자 성하얀이 고개를 번쩍 든다. 그러더니 이내 울긋불긋한 주먹으로 눈을 쓱 닦고는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네…. 흑! 머, 머셔너리 로드님도 그렇게 느끼셨군요…. 흑!” “음…. 많이 힘….” “머셔너리 로드님도 기억하실 거예요…. 우리 클랜 로드…. 2년 전만 해도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요….” “…예?” “그런데. 그런데 갑자기 왜 이렇게 됐는지…. 실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항상 무언가에 쫓기는 것 같고…. 웃다가도 화내고…. 밤에 자다가도 느닷없이 비명을 지르고….” “아…. 그렇습니까.” “네…. 그러다 보니까…. 어느 순간 사람이 변한 것 같아요….” “…….” 사실 공찬호가 아니라 성하얀을 지칭한 거였는데. 하지만 굳이 지적할 분위기가 아니라, 나는 잠자코 머리를 끄덕여주었다. “물론 변명에 불과한 이야기들이지만…. 그, 그래도 거짓말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제발…! 부탁 드릴게요…!” 성하얀의 애원. 나는 이번에는 대놓고 진수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시선을 느꼈는지, 진수현 또한 눈을 끔뻑이며 나를 마주 바라보았다. 이내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눈빛을 보내자 머리를 빠르게 흔들며 어깨를 으쓱인다. 이건…. 완전히 맡긴다는 의미인가? …공찬호. 과거 천하무쌍의 이름을 속으로 되뇐 후, 나는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성하얀은 걱정이 듬뿍 담긴 얼굴로 노심초사 내 말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 하늘이 보였다.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푸른 하늘이었다. 그러던 하늘이, 갑작스럽게 심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흡사 하늘에 지진이라도 난 듯 사정없이 흔들린다. 그러나 공찬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표정 없는 얼굴로 하늘을 주시한다. 왜냐하면, 알고 있었으니까. 정말로 하늘이 흔들리고 있는 게 아니라, 땅에 부딪친 몸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하늘이 흔들려 보일 뿐이라는 것을. 잠시 후. 하늘은 도로 잠잠해졌다. “머셔너리 로드!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공찬호 교관! 공찬호 교관!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뒤늦게 신고를 받고 달려온 교관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상황을 정리하고 또 누군가는 공찬호를 흔들며 말을 건다. 하지만 그 모든 자극에 공찬호는 일체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흐릿한 눈동자로 하늘을 올려다볼 뿐. 그런 공찬호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차오르고 있었다. '졌다.' 그랬다. 말 그대로, 공찬호는 김수현과의 대련에서 져버렸다. 더구나 아슬아슬하게 진 것도 아닌, 거의 압도적인 실력 차이를 보이며 패배한 것이다. 하지만 고작 패배라는 단어 하나로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하기에는, 공찬호의 입장이 조금은 가엾지 않을까. 왜냐하면, 공찬호는 무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결같이 이 순간을 기다려왔으니까. 처음 수라마창을 얻었을 때 공찬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 현재의 수라(壽拏)는 더는 신창이 아닙니다. 착용자에게 끈임 없이 피를 갈구하고 파괴를 부르짖는 하나의 마창(魔槍). - 수라(壽拏)에 잠재된 불길(不吉)은 착용자에게 지속적인 고난과 시련을 부여합니다. 조심하십시오. 마성(魔性)을 극복했다고 생각한 순간, 마창(魔槍)이 그대를 가차없이 삼킬 겁니다. 그 누구도 수라마창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이 창은 그저 힘을 빌려주는 것에 불과하며, 언제고 사용자를 잡아먹으려는 하나의 괴물이다. 그것은 하나의 마약이나 다름없는 감각이었다. 거칠 것 없는 힘에 절로 끌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경각심을 일게 만드는. 그렇게 생각한 공찬호는 수라마창을 잡았고, 동시에 극도로 경계했다. 그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철저히 관리했으며, 수라마창에 먹히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2년 전, 공찬호의 생각을 완전히 깨부수는 사용자가 등장했다. '수라마창을 직접 만져봐도 되겠습니까?' 김수현은 정말로 수라마창을 잡았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불길(不吉)을 되레 제압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수라마창의 실체를 이끌어냈으며, 종래에는 하늘마저 가르는 위력을 선보였다. 그것도 공찬호가 보는 바로 앞에서. 공찬호 내부에 열등감이라는 감정이 생겨난 것도. 그리고 수라마창을 경계하는 마음을 버리고 가까이 하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김수현이 수라마창을 온전히 다루는 것을 확인했을 때부터, 수라마창의 기운에 의도적으로 자신을 노출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나도 하늘을 갈라보겠다. 그리고 진정한 수라마창의 주인으로 인정받아 보이겠다. 굳게 다짐한 공찬호는 주변의 모든 걸 포기하면서까지 수라마창에 매달렸다. 그러나 김수현처럼 화정이라는 상승의 기운이 없는 이상, 가능할 턱이 없었다. 아무리 애를 쓰고 악을 써도 공찬호의 수준은 제자리걸음에 불과했고, 하늘을 베어 가르기는커녕 실체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럴수록 공찬호 내부의 열등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수라마창이 그런 공찬호에 지속적으로 악영향을 미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결과, 결국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어찌됐든, 현실은 어떻게 할 말도 없는 깨끗한 패배였다. 아니. 추잡한 패배였다. 구걸까지 했음에도, 막무가내로 달려들었음에도. 공찬호는 김수현에 상처하나 내지 못했다. …그토록 노력했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돌연 눈가가 아려오고 시야가 뿌옇게 변해오기 시작해, 공찬호는 지그시 눈을 감고 말았다. 이어서, 그제야 비로소 텅 비어버린 내부에 냉엄한 현실이 들이닥쳤다. 마치 전신의 감각이 끊어진듯한 감각을 느끼며 공찬호는 이미 감은 눈을 더더욱 꾹 감았다. 더는 그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거니와, 그나마 남은 힘도 술술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그저 언제 흘러내릴지 모르는 눈물을 참는 게, 공찬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이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얼마나,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른 걸까. 다시 눈을 떴을 때. 공찬호의 눈에 보인 건 하늘이 아닌 상아빛 천장이었다. 약 3초의 시간이 흐른 후 눈을 크게 뜬 공찬호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절반도 채 일으키기도 전에 도로 드러눕고 말았다. 온몸에 힘이 없기도 했고 갑작스럽게 목이 타는듯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띵할 정도의 강한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공찬호는 본능에 따라 손을 더듬었다. 그러자 누군가 쥐어주기라도 한 것처럼, 요행히 무언가 차가운 게 손에 잡혀 공찬호는 확인할 생각도 않고 입안으로 들이켰다. “꿀꺽…. 꿀꺽…. 꿀꺽…. 꿀꺽….” 차가운 액체가 범람하듯 흘러 든다. 가슴에 스며든 시원한 기운은 끓어오르는 갈증을 식혀주었고, 공찬호는 그제야 약간이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공찬호는 평소와는 다른 무언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이건….” 근 2년간 단 하루도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본 적 없는 공찬호였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이상하게도 머리가 맑음을 느꼈다. 악의에 가득 차 있는 게 아닌, 마치 온천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뜨끈뜨끈하면서도 홀가분한 기분이랄까. 공찬호는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야 주변 상황이 차분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숙소는 결코 성하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디 한 군데 성한 구석이 없다. 모조리 깨지거나 부서져 있었다. 이윽고 절반이 조각난 수정을 멍하니 들여다본 순간, 공찬호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수정에 반쯤 비치는 얼굴이 너무나 낯설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옛날에는 인상이 좋다거나 시원시원한 호남으로 평가를 받던 얼굴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한없이 초췌하고 형편없는 얼굴만이 눈에 보일 뿐이었다. “이게…. 나라고…?” 공찬호가 나직이 중얼거리며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은 찰나였다. “이제 정신이 좀 드세요?” 선한 목소리가 공찬호의 정신을 한층 일깨웠다. 공찬호는 곧바로 시선을 돌렸고 이내 한쪽 구석에 다소곳이 서 있는 성하얀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성하얀의 옆에는 잘 닦여진 수라마창이 곱게 세워진 상태였다. 또 그 옆으로는 미리 준비를 해놓은 듯 가득 찬 물병이 서너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문득 자신의 손에 쥐어진 물병을 응시하던 공찬호가 약간은 끓는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정신을 잃은 지 며칠이나 지났지?” “…….” “내 말 안 들려?” “…사흘이요.” 성하얀의 대답이 이어진 순간 공찬호는 숨을 멈췄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눈 한 번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무려 사흘이라는 시간이 지나있었다고?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다른 의문도 들었다. “사흘이면…. 그럼 나는 어떻게 된 거지?” 성하얀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한동안 공찬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다가와 천천히 A4용지만한 기록 하나를 내밀었다. 그리고 첫 줄을 읽자마자 공찬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중앙 관리 기구 징계 회의 결과.』 기록에 적혀있는 내용은 간단했다. 그간의 공찬호의 정황이 자세히 기록돼있었다. 같은 교관을 공공연히 비방하고 다닌 점. 교육생들에게 폭언을 일삼은 점. 그리고 교육을 빙자한 과도한 대련 등등. 거두절미하면, 그러한 점들을 종합해 교관 자격을 박탈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즉 퇴관 조치를 당한 것이다. “이건…. 뭐냐?” “거기 적힌 그대로예요. 앞으로 못해도 일주일 안으로는 나가야 해요.” “누가 몰라서 물어? 그러니까 내가 왜!” “…그래도 머셔너리 로드님이 최대한 신경을 써주신….” 성하얀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기록을 반으로 쫙 찢은 공찬호가 흉흉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쌍! 지금 뭐라고!” “히이이익! 죄, 죄송해요! 제, 제가 잘못했어요! 때, 때리지만 말아주세요!” 성하얀이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마치 이제 맞을 거라는걸 알고 있다는 듯,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탕! 탕, 탕, 탕…. 가지런히 세워진 물병이 바닥으로 떨어짐과 동시에. “……!” 한껏 팔을 젖힌 공찬호는 반사적으로 몸을 멈추고 말았다. 그런 공찬호의 눈동자는 수정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주시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어엉….” 기어코 서럽게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렇게 한참 동안 흐느낌이 이어진 후, 공찬호는 힘없이 팔을 떨어트렸다. ============================ 작품 후기 ============================ 으음. 복선을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으신데, 지금 알려드릴 수는 없어요. ;ㅇ; 일단 나온 내용대로라면 당연히 김수현과 공찬호가 연관돼있기는 합니다만…. 에잇. 아무튼 이로써 공찬호 파트도 끝입니다. 다음 회 초반에 나머지 처리 과정과 수현의 속내가 나온 후, 곧바로 새로운 파트로 진입할 예정입니다. :) 0517 / 0933 ---------------------------------------------- 떠난 101, 숨어있는 101. 공찬호와의 사건이 터지고 나서 사흘의 시간이 흘렀다. 여느 때와 같은 점심 즈음. 갑작스럽게 소식이 들려온 것은 정확히 정오가 조금 지나서였다. 교육을 마친 후 식당으로 가던 도중, 우연히 마주친 진수현에게 총 교관 실에서 공찬호의 퇴관 확인서를 수리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나가, 공찬호가 떠나는 모습을 응시했다. 공찬호는, 정말로 떠나고 있었다. 1회 차에 언제나 함께했던, 그리고 이번에 보조로 데려온 성하얀과 함께. 사실 조금 의외였다. 공찬호의 성격상 내가 왜 나가야 하냐고 한바탕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곱게 받아들인 것이다. 무언가 심경에 변화가 생긴 걸까?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사용자 공찬호와 수라마창에 관해서 자세한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날 밤. 나는 성하얀의 동의 하에 공찬호의 몸을 치료했다. 공찬호가 그렇게 변한 것이 수라마창이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 화정의 힘으로 몸 내부의 기운을 말끔히 정화해준 것이다. 물론 동정심으로 해준 일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공찬호가 하루 이틀 만에 달라질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공찬호가 지속적으로 수라마창을 들고 있는 이상, 화정의 정화는 임시 방편에 불과하다. 또 이미 변한 성격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럼에도 공찬호의 몸을 정화해주고 이렇게 곱게 보내준 것은, 단 하나. 바로 가능성 때문이었다. 지금의 공찬호에게는 더 기대할 것이 없다. 하지만 조금 더 성장할 여지가 남아있다면. 천하무쌍의 모습을 되찾을 가능성이 아주 약간이라도 남아있다면. …마지막으로 한 번의 기회 정도는 주고 싶었다. 어찌됐든, 이제 모든 건 공찬호의 의지에 달렸다. 다음에 만났을 때 내가 기대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다. 그러나 더 나은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면, 오히려 지금과 같은 모습을 답습한다면. …그때는, 수라마창의 주인이 바뀌게 될 것이다. 나는 한숨을 흘리며 다시 공찬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공찬호는 잠시 걸음을 멈춘 상태였다. 고개만 살짝 돌려 사용자 아카데미를 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옆에서 부축해주는 성하얀에게 더욱 몸을 기대며, 정문으로 비틀비틀 걸어가기 시작한다. 그런 성햐안의 등에는 무언가에 둘둘 말린 수라마창이 매어져 있었다. 앞모습이 보이지 않는 만큼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꼭 붙은 둘의 모습은 흡사 2년 전 풋풋했던 시절을 보는듯한 기분이었다. 잠시 후. 두 사용자의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크게 숨을 들이키며 몸을 돌렸다. 그러자 나를 따라온 진수현이, 뭔가 멍해 보이는 얼굴로 정문을 응시하는 것이 보인다. 자신을 괴롭히던 인물이 나갔으면 응당 기뻐해야 정상인데, 왜 어딘가 모르게 씁쓸해하는 기색이 보이는 걸까. 나는 머리를 갸웃하면서도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진수현(2년 차) 2. 클래스(Class) : 주문 저격수(Secret, Spell Sniper,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마법사 사냥꾼(Clan Rank : C Plus) 5. 진명 • 국적 :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6) 7. 신장 • 체중 : 181.2cm • 77.3kg 8. 성향 : 열혈 • 무기력(Hot Blood • Lethargy) [근력 91(+2)] [내구 85] [민첩 96] [체력 86(+4)] [마력 92(+2)] [행운 87] 이전에도 한 번 확인한바 있지만, 진수현의 사용자 정보는 정말 괜찮은 수준이다. 주문 저격수라는 시크릿 클래스도 그렇고 능력치도 아주 준수하다. 더구나 장비로 붙은 추가 능력치도 어마어마하니 확실히 천사들의 관리를 받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머셔너리 클랜원과 비교해보면, 아마 남다은과 비슷한 정도는 되지 않을까. 약간이라도 남은 잠재성을 생각하면 그 이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옥에도 티가 있다고, 그냥 좋다고 보기에는 눈에 밟히는 게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해보면 열혈과 무기력, 즉 상반 속성으로 설정돼있는 성향이 조금 걸렸다. 1회 차의 진수현은 매우 활발한 사용자였다. 구김살이 없고 붙임성도 제법 좋은 편이라, 누구와도 두루두루 친하게 지낸 사용자로 기억한다. 그런 만큼 차라리 열혈이라는 성향은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무기력이라는 성향과 연관 지어 생각하기에는, 너무 커다란 차이가 있지 않은가. “아.” 그때, 시선을 느꼈는지 불현듯 진수현의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나는 약하게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이번 사건도 어떻게 잘 마무리됐네요. 이제 편하게 지내실 수 있을 겁니다.” “예. 뭐…. 다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진수현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말하는 것 자체는 약간 퉁명스러운 감이 없잖아 있으나, 원래 말투가 그렇다는 걸 알고 있어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는다. 그러다 문득, 무기력이라는 성향이 열쇠의 역할이 돌파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한별이도 그랬듯이, 무기력이라 함은 내면에 상처가 있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그 상처를 아물게 해주는 게 영입의 열쇠가 되지 않을까. 물론 그전에 어떤 상처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내야겠지만. “저기 그런데 말입니다.” 잠시, 진수현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왜 그러느냐는 의미로 눈을 추켜 뜨자, 이내 조금 어색해하는 얼굴로 머리를 벅벅 긁는다. 그러더니 방금 보다는 훨씬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도와주신 건 정말 감사한데…. 왜 이렇게 저를 도와주신 겁니까?” “…예?” “그러니까…. 아 그냥 툭 까놓고 말하겠습니다. 사실이 그렇잖습니까. 일면식도 없는 사이인데 이것저것 도와주시고…. 또 필요 이상으로 세심하게 챙겨주시니까, 사실 조금 부담이 있어서 말입니다. 덕분에 많은걸 배우기는 했습니다만.” “흠.” 순간 '네 몸으로 보답을 하면 돼.'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그만두기로 했다. 아직 그 정도의 말을 주고받을 사이도 아니었거니와, 상당히 이상한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말마따나 이것저것을 도와준 건 사실이었다. 아직도 머리를 긁는 진수현을 보며 나는 픽 웃었다. “그냥 이름이 똑같아서 도와드렸습니다.” 진수현이 눈을 휘둥그렇게 변했다. 나는 농담이라며 바로 손을 저은 후,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농담이고요. 딱히 보답을 바라고 도와드린 건 아닙니다. 이번 사건은 누가 봐도 사용자 공찬호의 잘못이었으니까요. 그저 혹시나 모를 상황을 대비해, 선의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랬을 뿐입니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저 진수현의 열혈 성향을 고려해 적절한 말을 한 것일 뿐, 속내는 네가 멍청히 가만히 있으니까 내가 나선 게 아니냐는 소리였다. 아마 상대가 공찬호가 아닌 나였다면, 옳다구나 하고 상황을 조작하는데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결과는 나와봐야 알겠지만. 진수현은 끄덕끄덕 머리를 주억였다. 그러나 아직도 어색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는 것 같아, 나는 살그머니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제대로 소개도 하지 못한 것 같네요. 3년 차 사용자 김수현입니다. 현재 머셔너리라는 용병 클랜을 운영하고 있죠.” “실은 알고 있었어요. 머셔너리 로드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거든요.” “그런가요? 하하하. 아무튼 혹시 의뢰하실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찾아오세요. 아. 물론 그때는 의뢰 비를 받습니다. 지금처럼 공짜로 해드리지 않아요.” “…큭.” 넉살스레 말을 건네자 진수현은 툭, 어처구니가 없는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생기신 거랑은 다르게 말을 재미있게 하시네. 칭찬이에요. 나는 재미있는 사람이 좋아서. 그런데 뭐랄까, 처음 봤을 때는 되게 무뚝뚝해 보여서 조금 다가가기 힘들었거든요.” 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내가 생긴 게 어때서. 아무튼 그래도 이제야 조금 풀린 모양인지, 진수현의 입에서 말이 술술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이내 “에…. 저는 이제 클랜이라고 말하기도 그렇지만….” 이라 중얼거린 진수현은, 내가 내민 손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이어서 내 손을 힘차게 부여잡더니 스스로 휙휙 흔들기 시작한다. “마법사 사냥꾼의 클랜 로드이며, 2년 차 사용자인 진수현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친하게 지내고 싶네요.” 당차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첫 단추는 잘 끼운 듯싶다. * 한편, 같은 시각. 김수현이 진수현의 영입을 위한 발판을 성공적으로 쌓아 올렸을 무렵, 머셔너리 클랜원들은 모두 한 장소에 모여있었다. 아. 신재룡은 제외하고. 명색이 총 교관인 만큼 산더미 같은 일에 파묻혀있었으니까. 그래도 신재룡을 제외한 정하연, 이유정, 김한별, 안현은 현재 김수현의 숙소에 빠짐없이 모여있었다. 그럼 한창 바쁠 이들이, 도대체 왜 이곳에 모여있는 걸까? 그것도 하필이면 김수현의 숙소에? 그건 바로 안솔 때문이었다. 사건의 정황은 이렇다. 김수현에게 뜻밖의 입맞춤을 받은 안솔은 한동안 혼돈에 빠진 상태였다. 그에 따라 온갖 헛소리를 지껄이며 앓아 누운 터라 클랜원들의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안현의 걱정은 더욱 심했다. 애당초 팔불출 기질이 다분했던 만큼, 하루에 몇 번씩이나 드나들며 안솔을 확인했다.(오죽하면 김한별이 옷을 갈아입는 중에도 벌컥 들어와 한바탕 사달이 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오늘도 그랬다. 언제나처럼 안솔의 상태를 확인하러 간 안현은 방에 들어가자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끙끙 앓고 있던 안솔은 온데간데없고, 휑한 침대만이 보였기 때문이다. 즉 안솔이 사라졌다는 소리. 크게 기함한 안현은 곧바로 안솔을 찾기 시작했다. 사실 몸이 호전됐을 가능성을 생각하면 그렇게 큰일은 아니었으나, 눈이 뒤집힌 안현은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안솔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그 행동이 워낙 필사적인 터라 다른 세 명은 정말 큰일이 났구나 지레짐작했고, 덩달아 안솔을 찾으러 뛰어다녔다. 그러나, 안솔은 생각보다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곧바로 정신을 차린 김한별은 탐지 주문을 외웠고, 이내 흔적을 쫓아 안솔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흔적이 이어진 장소는 바로 김수현의 숙소였다. 그리고 안현이 문을 박차며 들어간 순간, 네 명은 김수현이 사용하던 침대에 누워, 한창 달게 자는 안솔을 볼 수 있었다. 그것도 베개에 침을 잔뜩 묻히며. “…그냥 코~. 자고 있는 것 같은데? 현아?” 한동안 안솔을 살피던 정하연이 입을 열자, 안현은 푹 고개를 숙였다. 좌우로 이유정과 김한별이 보내는 눈초리가 자못 따가워, 견딜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러나 눈초리만 보낼 생각은 없었는지, 곧 실제 사격이 안현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 대박. 정말 왜 그리 호들갑을 떠는가 했네.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좀. 응?” “어이가 없네요. 저번에 숙소에 다시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벌써 잊으신 거예요?” “하여간. 아주 대단하십니다~. 응? 지 동생 관련된 일이라면 아주 물불을 안 가려요. 너 그거 언제 고칠래?” “다시는 안 들어오겠다는 약속을 받고 오빠한테 말하지 않았는데, 이러시면 곤란해요.” 이유정과 김한별은, 사이 좋게 번갈아 가며 안현을 비난했다. 그것도 아주 신랄한 말투로. 그리고 한쪽에 가만히 앉아있던 마르와 도도는, 둘이 입을 열 때마다 한 번씩 한 번씩 시선을 옮겼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또다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동그래진 눈으로 서로를 보더니 동시에 고개를 끄덕끄덕. “헤헤…. 오라버니….” 그렇게 안현의 시선이 한없이 땅바닥을 향하는 찰나, 갑작스럽게 자그마한 잠꼬대 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모두의 시선이 안솔을 향했다. 안솔이 헤실헤실 웃고 있다. 베개를 꼭 끌어안으며 얼굴을 비비는 게, 무언가 좋은 꿈이라도 꾸는 모양이다. 꿈에서 김수현이라도 나오는 걸까? 아무튼 그 모습은 너무나 천진하고 맑아, 흡사 갓 태어난 아기를 보는듯했다. 조심조심 안솔의 이마를 쓸던 정하연은, 그런 안솔을 보며 잔잔히 웃었다. 사실 허탈한 기분이 없는 건 아니었다. 처음 안현의 말을 들었을 때는 무척 놀랐던 만큼, 걱정도 무척 많이 했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금방 찾기도 했거니와, 이제 혼수 상태에서 회복된 것처럼 보이니 걱정 하나를 덜었다 여긴 것이다. “모두 그만해. 그래도 찾았으니 다행이지, 만약 진짜로 나쁜 일이 벌어졌으면 어떡할뻔했어?” “그, 그래요 누님! 제 말이…!” “현이 너는 조용히. 아무리 그래도 이번에 네 대응은 전혀 옳지 않아. 설령 정말 나쁜 일이 있었다고 해도, 그렇게 천방지축으로 행동해야 해? 다른 사람들이 다 알도록? 클랜 로드님이 아시면 또 뭐라고 하실까?” “죄송합니다.” 안현은 곧바로 사과했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러는 와중에도 안솔의 잠꼬대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중이었다. “우웅…. 그래요…. 잘 생각했어요…. 그런 가슴만 큰 언니는 오라버니와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여전히 작은 목소리였지만 모두의 귀에 들릴 정도는 되었다. 한창 안현을 노려보던 이유정은 순간 “푸.” 볼을 크게 부풀렸다. 그리고 어이없다는 얼굴로 안솔을 돌아보더니 결국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가슴만 큰 언니? 까르르! 뭐, 뭐야 쟤? 지금 무슨 꿈을 꾸는 거야? 아니 아니. 방금 연주 언니 말한 건가? 아니면 한나 언니? 까르르르!” 그때였다. “그럼요…. 유정이 언니도 오라버니와는 어울리지 않아요…. 그런 선머슴 같은 언니는 애당초 아웃이라고요….” 이번에는 정확한 이름이 나왔다. 유정은 바로 웃음을 멈췄다. 그리고 삽시간에 정색하며 주먹을 그러모으자, 하연이 숨죽여 웃으며 안솔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 언니도 아니에요…. 도대체 그런 결벽증 투성이에 일 중독자 언니가 뭐가 좋다는 거예요….” 하연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살살 쓰다듬던 부드러운 손길은, 순식간에 돌변해 안솔의 머리칼을 틀어 올렸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안솔은 여전히 행복한 얼굴로 잠꼬대를 중얼거린다. “음냐음냐…. 오라버니도 참 여자 보는 눈 없어요오…. 자아, 자아. 그딴 호박씨 언니는 저기 멀리 버려두고, 어서 저에게….” 안현은 살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서늘하게 빛나는 김한별의 눈동자를 확인한 순간, 조용히 아주 조용히 걸음을 물렸다. 무언가 생각을 했다기보다는, 본능이 속삭이는 대로 몸이 행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서로를 꼭 부여잡은 채 덜덜 떨고 있는 마르와 도도의 구조 요청을 무시한 안현은, 이내 살며시 문을 닫으며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에, 에? 언니들?” “…….” “자, 잠시만요?! 왜, 왜 때리시는 거예요! 꼬, 꼬집지 말아요! 아프단 말이에요! 으아아아앙!” “…….” 아직 잠이 덜 깬듯한 목소리가, 안현이 서 있는 복도를 아련하게 울렸다. 안현은 지그시 눈을 감은 후,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 작품 후기 ============================ 아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 갑작스럽게 약속이 잡혔습니다. 최소 20시를 커트로 나오려고 했는데, 어떻게 얘기가 이어지다 보니 22시 커트가 됐네요. 한 한 시간 정도 자니 머리가 괜찮아져, 무사히 집필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요즘 생활이 무척 타이트하게 돌아가는 터라, 여러분들의 깊은 양해를 구합니다. _(__)_ 0518 / 0933 ---------------------------------------------- 떠난 101, 숨어있는 101. “이제 슬슬 영입 전을 준비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나름 폭풍 같던 7주차를 보내고 8주차를 앞두고 있을 즈음. 나는 주말을 이용해 현재 사용자 아카데미에 들어온 모든 클랜원들을 소집했다. 말 그대로 이제는 서로 의견을 조율해 영입할 교육생들을 추리고 걸러내는 작업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아직 6주라는 시간이 남은 만큼 '벌써?'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으나, 곰곰이 따져보면 절대 빠르다고는 볼 수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아직 영입할만한 교육생들을 한 명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 다른 클랜에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여태껏 성에 차는 교육생을 보지 못했다. 물론 아직 모든 교육생들을 확인한 건 아니다. 내일 8주차부터 정신 교육이 시작된다는 점을 감안하면(정신 교육은 교관과 교육생의 관계에서 클래스를 상관하지 않는다.), 아직 보지 못한 교육생들을 조금 더 살펴볼 만할 여지는 남아있다. 요지는 클랜 홍보 및 로비가 허용되는 10주차 전까지 선별 작업을 마쳐야 한다는 것이다. 나중 가서 후발 주자로 매달리느니 미리미리 선점해두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음~. 그러고 보니 2주만 지나면 영입 경쟁이 시작되겠네요. 확실히 미리 준비해둬서 나쁠 건 없는데…. 어떻게, 클랜 로드는 생각해두신 교육생이 있으신가요?” 차분히 기록을 정리하던 하연이 차분히 고개를 들며 묻는다. 나는 바로 머리를 끄덕였다. “예. 한 명 정도 있습니다.” “어. 정말요? 그게 누구예요? 저번에는 근접 계열 클래스 중에 딱히 볼만한 교육생이 없다고 하셨잖아요.” “흠. 말을 정정하죠. 교육생이 아니라 교관 중에 있습니다. 정확히는 진수현 교관으로, 이미 어느 정도 접근한 상태입니다.” “…네?” 하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한다. 아니. 비단 하연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일견 이해가 안 되는듯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들을 하는지는 알 것 같은데, 딱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이것저것 알아본 결과 영입할만하다 생각되어 접근한 거니까요. 물론 합병의 개념으로 보셔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어쨌든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하연은 담담히 말을 경청하는 듯싶더니, 알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요. 클랜 로드가 그렇다면야. 그러면 우리가 따로 도울 거라도 있을까요?” “아니요. 지금은 개인 대 개인으로 접근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해서요. 그보다, 혹시 마력 재능 계열 쪽에서 눈여겨본 교육생들은 없습니까? 뭔가 좀 특별해 보인다거나, 아니면 갑작스럽게 치고 나온 교육생들이라거나.” 갑작스럽게 치고 나왔다 함은 성적이 급상승한 교육생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일반적으로 재능이 좋으면 잠재성 또한 뛰어날 가능성이 높아, 성적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교육생들은 모든 교관들이 주시한다. “안 그래도 기록에 정리해왔어요.” “여기 사제 교육생 명단입니다. 특별히 추리고 추려낸 교육생들이죠.” 그러자 정하연과 신재룡이 기다렸다는 듯 몇 장의 기록을 내밀었다. 우선은 저번처럼 뭉치로 내민 게 아니라 잠시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 기록에 적힌 명단을 쭉 훑은 순간, 나는 머리를 갸웃하고 말았다. 언뜻 보이는 수만 해도 스무 명을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렇게나 많습니까? 아무리 많아 봤자 십 수명을 넘어갈 적이 드문데.” “클랜 로드와 우리의 기준이 다르니까요. 클랜 로드의 기준은 매우, 굉장히 엄격하잖아요.” 매우, 그리고 굉장히 라. 하연의 목소리에 알게 모르게 가시가 돋쳐있다고 느꼈다면, 내 착각일까? 머셔너리 클랜의 인원이 적다는 문제는 꽤 오래 전부터 대두된 만큼, 딱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었다.(하연은 예전부터 기준을 조금 낮추더라도 인원을 대폭 늘려야 한다 주장해온 입장이었다.) 가슴이 쿡 찔리는 기분에,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으음…. 알겠습니다. 여기 적힌 교육생들은 저도 한 번 자세히 보도록 하죠.” “자세히만요?” “물론, 최대한 긍정적으로.” “…클랜 로드. 제발요. 반년 이상 새로운 사용자의 가입을 받지 않은 건 우리 클랜밖에 없을 거예요. 가입 장벽이 높다는 말이 그리 좋은 소문은 아니잖아요.” 그때였다. 이제는 애원조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애꿎은 턱만 매만질 즈음. “아. 클랜 로드. 마침 한 가지 긴히 말씀 드릴게 있습니다.” 어색한 기분에 건네 받은 기록을 대충이라도 훑어보려는 찰나, 신재룡이 자못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나는 여전히 기록에 시선을 떼지 않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듣고 있으니 말해보라는 의미였다. “어제 중앙 관리 기구와 회의가 있었습니다. 그쪽에서 10주차쯤에 이벤트 하나 해볼 생각이 없느냐 하더군요.” “이벤트? 무슨 이벤트요?” “예. 주말에 모든 교육생들이 보는 앞에서 교관들끼리 대련을 시키는 겁니다.” “그렇군요. 그거 참 좋은…. …예?” 그 순간, 나는 기어코 기록에서 시선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귀를 의심하지 않고서야 도저히 듣고 넘기기가 어려운 말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저번에 공찬호 교관이 일으킨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온 겁니다. 즉 수준급에 오른 사용자들의 전투를 보여준다는 의도 자체를 나쁘지 않다 여긴 거지요. 또한 이것저것 볼거리를 제공함과 동시에, 어느 정도 홍보 효과도 있을 거라고 말하더군요.” …듣고 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도 교관들끼리 붙이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닐 텐데요. 당장에 교관들 사이에서도 실력 차가 확연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이벤트라고 해도, 상대적 약자의 입장에서는 그리 달갑지 않을 겁니다.” “물론 그렇겠지요. 그래서 아직 확정된 건 아니고 여러 가지 방향으로 논의 중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원자만 받는다던 지, 아니면 공평하게 기회를 주되 수준을 맞춰서 붙인다든지 말이지요.” 확실히 그러면 조금이나마 개선될 여지는 있다. 그리고 조금이지만 구미가 당기는 것도 없잖아 있었고. 가령 형이랑 한소영이 일대일로 붙는다면?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그러나 개인적인 호기심이 아닌 공적인 입장에서 생각하면 썩 좋은 방법이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알아서 하라지. 이제나저제나 나야 손해 볼 것은 없으니까. 좌우간 그것을 결정하는 건 내가 아니라 신재룡이었기에, 결국에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얘기는 잘해주셨고요, 확정되면 그때 다시 얘기해봅시다.” “예. 가장 먼저 알려드리죠.” 신재룡이 씩 웃으며 말한다.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나는 싱거운 기분을 느끼며 화답한 후,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좌우간 얘기는 대충 끝난 것 같은데. 뭐 따로 보고하실 것들이 있습니까?” 그러자 클랜원들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하나같이 멀뚱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묵묵부답. 더 할 말들은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럼 회의는 여기서 종료하도록 하죠.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건네 받은 기록들을 정리하며, 나직이 회의가 파함을 알렸다. * 사용자 아카데미도 비로소 8주차에 접어들었다. 교육에 들어간 지도 절반이 지난 만큼 한 가지 달라진 게 있다면, 정신 교육이라는 과목이 창설되었다는 것. 즉 이제야 합법적으로(?) 다른 클래스의 교육생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는 소리였다. 사실 정신 교육이란 것 자체가 편한 만큼 교관들 중에서도 아주 인기 있는 강의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교육생들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머리나 몸이 아픈 교육보다는 그저 편안히 앉아서 말만 들으면 되는 강의였으니까. 그리고 나는 8주차가 시작됨과 동시에 정신 교육 계획을 신청했다. 근접 계열들에게 더는 볼 것이 없다 여겨 마력 재능 계열로 시선을 돌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거두절미하고 말해보면, 나는 8주차에 정신 교육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정규 교육에 집중해야 할 시기인 만큼, 마력 재능 계열의 정신 교육 계획은 이번 8주차 일정에 딱 하나 배정된 상태였다. 그런 만큼 신청자가 엄청나게 몰려, 결국 높은 경쟁률은 뚫지 못한 것이다. 신재룡은 아무래도 8주차는 안되겠다는 말을 전하며 굉장히 미안해했지만, 나는 오히려 잘했다고 다독여주었다. 이렇게 모두의 관심을 받는 안건은 최대한 공평하게 처리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으니까. 또한 총 교관이 나를 봐준다는 말은 정말 듣기 싫었거니와, 어차피 기회는 공평하게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다가오는 주차를 기약하며 아쉬움을 털려는 찰나, 나는 뜻하지 않은 소식을 접하고야 말았다. 소식을 가져온 이는 다름 아닌 진수현이었다. 뜻하지 않은 소식이란, 진수현이 이번에 8주차 정신 교육에 앞서 합동 교육을 해줄 것을 요청해온 것이다. 나로서는 매우 의아할 수밖에 없는 요청이었는데, 사정을 들어보자 기가 막힌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그러니까….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 그렇죠 뭐.” 눈앞 진수현은 머리를 긁적이고는 어색한 얼굴로 시선을 피한다. 나와 진수현은 어느새 말을 편하게 놓고 있었다. 저번에 진수현이 친하게 지내자고 한 이후로, 서로 나이를 따져 형과 동생으로 지내기로 한 것이다. 내심 곧바로 말을 놓기에는 조금 그런 감이 없잖아 있었으나, 그래도 진수현의 붙임성 좋은 성격을 떠올리면 납득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이리저리 재는 것 없이 시원시원한 게 마음에 들어 기꺼이 받아들인 상태였다. 하지만 아무리 시원시원하더라도, 이런 성격은 결코 좋지 못하다. 세상에. 뭘 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교육을 신청하다니. 이건 그냥 눈 딱 감고 지른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그럼 애당초 교육 신청은 왜 한 거야?” “그냥…. 다들 신청하니까 따라 한 건데, 총 교관님이 저를 선택하실지 알았나요 뭐…. 정규 교육이라면 그래도 어찌어찌 가르치겠는데, 이건 아예 클래스가 다르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 “아무튼 정신 교육이 편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잖아요. 지금 취소하기에도 늦었고, 저 이대로 들어갔다가는 완전 창피당합니다. 들어가서 어버버 입만 우물거리다 나올 거예요. 형님. 이 아우 좀 살려주십쇼. 나 진짜 아무것도 몰라요.” 진수현의 말인즉슨, 합동 교육으로 나를 끼워 넣겠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교육의 진행은 전적으로 내가 맡고, 자기는 중간중간 거들기만 하겠다고.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셈을 튕겨보았다. 합동 교육. 교육 교관에 한해서 교육 권한이 꽤나 크게 주어지는 만큼, 합동 교육이란 게 불가능한 건 아니다. 실제로 교관들의 합의하에 몇 번 이뤄진 사례도 있었고. …그렇게 생각하면 딱히 나쁠 건 없을 것 같은데. 이윽고 여러모로 생각한 결과 나는 곧장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다가오는 정신 교육은 바로 내일. 매우 조금 급하게 잡힌 감이 있으나, 어쩌면 나라면 그렇게 걱정할 건 없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경험이라면 문제될 것은 없으니까. 그래. 그간의 경험을 살려 그냥 말만 잘하면 될 것이다. 겸사겸사 그동안 보고 싶었던 사용자 정보들도 확인하고. 그렇게 생각한 나는 도로 눈을 뜨며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정~말 어쩔 수 없다는듯한 말투를 내려 애쓰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어휴.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그런데 이거 의뢰 맞지?” “그럼요. 의뢰금은 식당에서 식사 한 번 대접하는 거로 퉁 치죠. 어때요?” 이내 헤헤거리며 넉살 좋게 웃는 진수현을 보자 절로 쓴웃음이 나온다. 하여간 붙임성 하나는 정말 좋다니까. 나는 바로 Ok 사인을 보내주었고, 진수현은 한결 안도한 얼굴로 나를 잡아 식당으로 끌었다. 그렇게 가장 비싼 음식을 주문해 진수현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한 날이 지나가고,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계획이 오전에 잡혀있는 만큼, 나는 식사를 마친 후 안솔과 진수현을 대동한 채 곧바로 강의실로 향했다. 이윽고 복도를 걸어 강의실로 들어선 순간, 왁자지껄한 소리들과 함께 약 스무 명에 다다르는 인원이 일제히 나를 돌아보는걸 볼 수 있었다. 잠깐 고요한 정적이 흐름과 동시에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쏟아진다. 나 또한 처음으로 대면하는 만큼 뜻 모를 설렘을 느꼈는데, 아마 교육생들 또한 비슷한 기분을 느낀 모양이다. 그러나 잠시 후. “어…. 쟤. 걔 아냐? 걔.” “아냐 아냐. 어제 들었는데, 합동 교육으로 바뀌었다고 하더라고. 아무래도 쟤가 김수현인 것 같은데?” 설렘은 잠시. 뭔가 품평하는 시선으로 나를 쭉 훑어본 교육생들은, 곧 저들끼리 도로 왁자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다들 나를 비롯한 교관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개중에는 짝짝 박수를 치며 환영하는 이도 있었지만, 분명한 건 기분이 과히 좋지는 않다는 것. 오늘 교육할 인원은, 마력 재능 계열 중에서도 최상위권을 차지하는 교육생들이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불현듯 저번에 한소영을 대하던 교육생들의 태도와, 어젯밤 하연이 말해준 경고가 떠올랐다. '수현. 금번 마력 재능 교육생들은 만만히 보시면 안돼요.' '교육을 하다 보면 굉장히 피곤할 때가 많아요. 교육생치고는 조금…. 거만하다고나 할까요?' 좌우간 들어가보면 알게 될 거라고 했는데, 과연 이런걸 말하는 거였던 모양이다. 확실히 근접 계열 교육생들을 교육할 때와는 분위기가 상당히 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스무 명 남짓한 인원을 천천히 둘러본 후 차분히 중앙 단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의 정신 교육 교관으로 들어온….” 그 순간이었다. “저기 교관님! 김수현 교관님! 교관님이 누구신지는 알고 있으니까 소개는 이만 됐고요.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는데, 질문 좀 해도 돼요?” 소개를 위해 막 말문을 열은 찰나, 누군가 곧바로 말을 끊으며 되레 질문을 던졌다. 그것도, 아주 태연한 목소리로. 나는 느릿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왼쪽 가장 앞자리에서 힘껏 손을 들고 있는 한 앳된 청년이 눈에 밟혔다. 청년은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이내 벙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초면에 죄송하기는 한데요. 우리가 교관님한테 궁금한 게 엄청 많아서요. 다들 그렇죠?” 이어서 다른 교육생들의 동의를 구하려는 듯 몸을 돌려 말한다. 이내 강의실에는 그렇다는듯한 환호성이 중구난방으로 울렸다. 그리고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갑작스럽게, 무언가 착 가라앉은듯한 기분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말년 병장 : 반갑다. 나는…. 갓 전입한 이등병 : 아 그쪽이 누군지는 알고 있으니 소개는 됐고요. 질문이나 받아주시죠. 말년 병장 : 나 화남. 갓 전입한 이등병 : 님 화남? 엌ㅋㅋㅋㅋ. 그렇다면 이등별로 진화! 말년 병장 VS 이등별. 과연 그 결과는?! PS. 사용자 아카데미는 여러분들의 생각보다 매우 엄격하게 돌아갑니다. 교관은 교관, 교육생은 교육생. 역할이 딱딱 구분돼있지요. 교육 교관은 오직 교육 시간을 통해서만 교육생들을 만날 수 있으며, 생활 교관 또한 그렇습니다. 당연히 간간이 지나치며 볼 수는 있지만, 사적인 얘기를 나누는 건 금지돼있습니다. 특히 교관 쪽에서 홍보 비슷한 얘기를 꺼내는 순간 바로 퇴관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정도입니다. 홍보 시간은 나중에 충분히 줄 테니, 괜한 수작 부리지 말라는 규칙이 세워진 겁니다. 물론 무조건적으로 원칙만을 내세우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융통성이라는 예외는 있습니다. 가령 차희영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차희영에게 벌어진 사건을 감안해 어느 정도 눈을 감아주는 사례는 있습니다. 나름(?) 관계자였던 김수현이 사건 마무리 후 잘 지내는지 보겠다는 명분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 또는 차희영이 직접적인 구조자인 안현에 스스로 기대는 것 정도는, 교육생의 심신 안정 차원에서 용인하겠다는 것이죠. :) 0519 / 0933 ---------------------------------------------- 떠난 101, 숨어있는 101. 이 교육생들과 대면한 첫 소감은, 그냥 개판 5분전이라고만 느꼈다. 그저 그뿐이었다. 내가 교육생이었을 때처럼 군대 같은 분위기를 바란 건 아니다. 그래도 이건 자유분방함을 넘어, 아예 도가 지나쳤다고 볼 수 있었다. 아니.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확실하다. 이윽고 안솔이 조심스럽게 나를 바라보더니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더니 교육생들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큰 목소리로 외친다. “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버릇없어요!” 그러나 교육생들은 여전했다. 오히려 “우~.” 야유하며 계속 웅성웅성 지껄인다. “조용히들 하시라니까요!” “에~이, 빡빡하시네. 너무 그러지 마시고 좋게좋게 가요. 어차피 상부상조하자는 건데.” “사, 상부상조?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상관 있죠. 김수현 교관님이 머셔너리라는 클랜의 클랜 로드시라면서요. 그럼 우리가 클랜에 관한 질문을 하면, 답변 겸 클랜 홍보도 되는 거고. 흠~. 안 그런가?” 처음 말을 꺼낸 앳된 청년이 재차 동의를 구하려는 듯 교육생들을 돌아본다. 그에 발끈한 안솔이 입을 열려는 찰나, 나는 차분히 손을 들어 안솔을 제지했다. 그리고 교육생들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까이, 더 가까이. “질문은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교육생들은 모두 조용히 하시길.” “아니 왜요?” “…저는 여러분들을 교육하러 온 교관입니다. 홍보는 아직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설령 교육생들이 먼저 질문을 해 그에 관한 답을 했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교육에 한정한 내용이어야 합니다.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홍보성이 짙은 말을 꺼내는 순간 원칙에 어긋나게 됩니다.” “어? 그래요? 이상하네. 다른 교관님들은 잘만 대답해주시던데?” 조곤조곤 설명을 해주었음에도 앳된 청년은 오히려 머리를 갸웃해 보였다. 그리고, 조금은 소란이 가라앉은 순간이었다. “알겠어요. 그럼 그런 것들 말고 다른 질문은 해도 되죠? 김수현 교관님은, 혹시 한소영 교관님이랑 무슨 사이세요?” 그 말이 나온 순간, 잠시 조용해졌다 싶은 강의실은 도로 커다란 웃음소리로 가득 차 버렸다. 아하하하! 깔깔깔깔! 손뼉을 치며 허리까지 꺾어가며 웃는 교육생들. 나는 그런 교육생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사실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상하리만치 높은 적응력. 시크릿 클래스나 통과의례의 괴물을 물리친 전적. 이전 여느 기수들보다 높은 평균 성적. 그리고 어디 한 번 우리 앞에서 클랜을 홍보해보라는, 뭔가 알고 있다는듯한 말투. 지금껏 들어온 교육생들의 정보나 방금 말하는걸 들어보면 뻔하지 않은가. 활성화 전부터 시작된 과도한 경쟁이 문제였다. 말인즉슨, 눈앞의 교육생들은 현재 자신들의 입장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다. 수료 후 자신들을 영입하려는 클랜들이 줄을 섰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까지 된 원인에는 아마 교관들의 태도가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확신하건대 직접적으로 말로 꺼내지만 않았을 뿐이지, 은연중에 드러낸 교관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마력 재능 계열 최상위권이라는 타이틀은 그러한 자부심을 더욱 고취시켰을 것이고.(마력 재능 계열 사용자들은 비단 사용자 아카데미뿐만이 아니라, 홀 플레인 자체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다.) 한 마디로, 이놈들은 자신들이 벌써부터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강의실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나는 차분히 마력을 일으키며 느릿하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건 완전히 개판인데….” 그렇게 큰 목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마력이 충만하게 들어간 목소리라, 교육생들의 고막은 확실히 흔들었을 것이다. 조금 전까지 왁자하던 소음이 약간이나마 잦아든 게 바로 그 증거였다. “헐~. 김수현 교관님. 개판이라니요. 그게 아니라요. 실은 제가 시크릿 클래스거든요.” 그때, 처음 말을 꺼낸 앳된 청년이 약간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시크릿 클래스?”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그러자 청년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의기양양이 말을 잇는다. “예. 그런데 김수현 교관님도 시크릿 클래스고, 머셔너리 클랜도 그런 사용자들이 많다고 들었거든요?” 말을 들으며,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한 후 앳된 청년을 지그시 응시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고영우(0년 차) 2. 클래스(Class) : 영혼 명령자(Secret, Soul Commander, Beginner) 3. 소속 국가(Nation) : -.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Pedophillia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18) 7. 신장 • 체중 : 174.7cm • 62.8kg 8. 성향 : 푼수 • 변태(Idiot • Lethargy) [근력 31] [내구 24] [민첩 37] [체력 25] [마력 48] [행운 53] 아아. 이놈이 그 4차원에 오지랖 넓다는 교육생인가. …그런데 성향이 왜 저래? 좌우간 별 볼일은 없다. 나는 보자마자 바로 제 3의 눈을 해제했다. 절로 코웃음이 나왔기 때문이다. 혹시나 또 초반 능력치가 엄청 좋다면 모를까. 이 정도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수준이다. 영혼 명령자라는 시크릿 클래스를 제외하면 전혀 끌리지 않는 사용자 정보였다. “어험. 그래서….” “교육생. 그만.” “…예?” “말을 못 알아들으시는 것 같군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나는 헛기침을 하는 고영우의 말을 중간에 끊어버렸고, 곧바로 마인드 트레이닝에 들어갔다. 교육생들의 얼굴에 증오스러운 악마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살그머니 오른발을 들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의 질문을,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그와 동시에, 적당히 마력을 폭발시키며 힘껏 바닥을 내리찍자. 쾅! 한순간 바닥을 타고 맹렬한 기세로 흘러간 마력의 파도가, 삽시간에 강의실을 점거했다.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이내 크게 솟구친 무형의 기운이, 스무 명 남짓한 교육생들을 모조리 찍어 내린다. 강의실에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 “…….” 감지, 점유에 이어 위압 효과를 받은 교육생들은 누구 하나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아니. 못하는 게 정확한 표현이지 않을까. 하나같이 하얗게 질린 얼굴에 눈에 보일 정도로 몸을 떨고 있었으니까. 그나마 적당히 조절했기에 이 정도지, 작정하고 했다면 지금쯤 강의실은 온통 비명으로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나저나 어째 약간이라도 저항하는 놈들이 한 명도 없나. 그래도 한 명쯤은 기대했는데, 정말 수준 높은 거 맞아? 나는 교육생들을 한 번 쭉 둘러본 이후, 풀었던 마력을 일거에 거두어들였다. 그러자 절반 이상의 교육생들이 격한 숨을 뱉으며 책상에 널브러지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 교육생들을 보며 나는 세심하게 손을 풀었다. 아무래도, 이번 시간에는 진정한 정신 교육을 해야 할 듯싶었다. * 3시간의 정신 교육을 마친 후. “거기서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하냐.” “죄송합니다. 형님.” 식당으로 가는 도중 핀잔조로 입을 열자, 진수현은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머리를 긁으며 헤헤 웃는다. …얘는 곤란하면 꼭 머리를 긁더라. 사건은 이랬다. 정신 교육을 빙자한 기합 교육을 마칠 즈음, 나는 선심이라도 쓰는 양 질문을 허락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3시간 내내 기합을 받은 놈들이 무슨 질문을 하겠는가. 그걸 예상해 그냥 던진 말에 불과한데, 거기서 진수현이 덜컥 나서버린 것이다. '저 형님. 혹시 저도 질문해도 됩니까?' 아까 전 팔을 번쩍 들던 진수현을 회상하며, 나는 한숨과 함께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형님 정말 대단하시네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하셨어요?” “응? 그런 생각이라니?” “이번 정신 교육이요. 오늘 걔들 기합 주시는 거 보니까 장난 아니던데요.” “아아. 별거는 아닌데. 그거 나도 당한 거거든.” 나는 싱겁게 웃었다. 진수현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보였으나, 정말 거짓말이 아닌 사실이었다. 아주 예전, 그러니까 홀 플레인에 넘어오기 전으로 막 군에 입대했을 무렵. 군생활을 통틀어 가장 힘들었던 기억을 꼽으라면, 나는 유격도 화생방도 아니었다. 바로 신병 교육대에서 받았던 기합이었는데, 나를 제외한 동기들이 기합 받는걸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기합 아닌 기합이었다. 어느 조교가 나와 동기가 몰래 떠드는걸 확인한 후, 나 그리고 떠든 동기를 제외하고 다른 동기 전부를 기상시켜 기합을 준 것이다. 너희는 편히 있으라는 조교의 명에 따라, 앉아서 동기들을 지켜봐야만 했던 입장은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그때 동기들이 나를 노려보던 눈빛은 아직도 잊혀지지를 않는다. 나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방금 교육에서 똑같은 기합을 주었다. 고영우와 한소영과 어떤 관계냐는 질문을 던진 교육생을 제외한 전원에게 기합을 준 것이다.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나는 둘에게 날씨도 좋은데 야외 교육 겸 산보나 하자고 했고, 다른 교육생들은 오리 걸음을 시키며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 탓에 다른 사용자들의 구경거리가 된 교육생들은 3시간 내내 사용자 아카데미를 돌아다녀야 했다. 아마, 지금쯤 허벅지를 두드리면서 방정맞게 입을 놀린 두 명을 원망할 테지…. 아. 계속 걷다 보니 어느새 식당에 도착했다. “저 형님. 그런데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요.” “급한 거야?” 이내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진수현을 향해 나는 식당을 가리켰다. 급한 게 아니면 밥 먹으면서 얘기하자는 소리였다. 진수현은 상관없다는 양 머리를 끄덕였고, 나는 곧바로 교관 전용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딱히 배가 고픈 건 아니나, 그래도 웬만하면 식사는 거르지 않는다. 요정의 숲 탈출 이후로 들은 일종의 습관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영양가 높은 음식을 주문하고 나서, 그릇을 들고 빈 테이블에 앉은 찰나. “여~!” “어머?” 누군가가 양 어깨를 툭 치는 게 느껴졌다. “머셔너리 로드! 오랜만이야!” “오랜만에 보네요.” 동시에 들려오는, 걸걸한 목소리와 색스러운 목소리. 이윽고 건너편으로 털썩 주저앉는 두 사용자는, 다름 아닌 김덕필과 선율이었다. 그 중 나는 김덕필을 향해,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연초 없습니다.” “…우리 오랜만에 보는데. 그게 보자마자 할 말이야? 응? 자기?” “무슨 개…. 오랜만입니다. 사용자 김덕필. 그런데 연초는 없습니다.” “…….” 한동안 김덕필은 망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 입을 막고는 무지 슬퍼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나와 김덕필은 동시에 실소를 흘렸다. “에라이. 달라고도 안 한다. 정말 치사하고 더러워서.” “좋은 결심이네요. 그나저나 사용자 아카데미에서는 처음 보는군요.” “아. 그렇지. 실은 네 말은 많이 들었는데, 요즘 바빠서 말이야. 나 교육 교관인 건 알고 있지?” “머셔너리 로드? 대화 중에 죄송한데, 혹시 저는 안 보이시나요?” 교육 교관인 건 알고 있었다는 말을 하려는 찰나, 서운해하는 기색이 가득 깔린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선율을 한 번 바라본 후 “안녕하세요.” 인사를 던졌다. 그리고 김덕필에게 도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선율은 침울해하는 얼굴로, 들고 온 접시에 젓가락을 깨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라니요?” 의아히 되묻자 김덕필은 한동안 배를 잡고 웃어대더니, 품에서 연초를 하나 꺼내며 말을 이었다. “소문 벌써 쫙 퍼졌어. 이번에 교육생들 한 번 제대로 잡았다며?” “아.” 응? 벌써 퍼진 건가? 하기야 그럴 수도 있겠네. 3시간 동안 광고하듯이 구석구석을 돌아다녔으니까. “사실 나는 그쪽을 안 맡아서 모르겠는데, 고소해하는 교관들이 꽤 있는 것 같더라고…. 그나저나 괜찮겠어?” “뭐가 말입니까?” “이번에 기합 준 거 말이야. 이번 기수 중에서 그놈들이 가장 주목 받는 놈들이라고. 마력 재능 계열 중 가장 성적이 높은 20명이잖아. 거기다 시크릿 클래스도 있고. 이러다 괜히 반감만 사는 거 아니야?” “상관없습니다. 어디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겠나요. 아닌 건 아닌 거죠.” 나는 딱 잘라 대답했다. 동시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제 3의 눈으로 샅샅이 훑어본 결과, 역시나 입맛에 맞는 교육생은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 있었어도 기합을 주지 않았을 리는 없으나, 중요한 건 내 눈에는 성에 차지 않는 놈들이라는 것. 어쩌면 하연의 말대로 내 잣대가 필요 이상으로 엄격하거나, 아니면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해도 영입하고픈 교육생은 없었다. 그때였다. “어머? 수현아?” 갑작스럽게 선율이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갑자기 이 여인이 미쳤나 싶어 시선을 든 순간, 나는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선율의 시선이 나를 보고 있지 않은 탓이다. 그런 선율의 시선은, 바로 내 옆쪽을 보는 중이었다. 이에 시선을 따라 옆을 보자 접시를 든 채 멍하니 서 있는 진수현이 보인다. 아마 주문한 음식이 약간 늦게 나왔던 모양.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서, 선율 누나?” 망망히 서 있던 진수현의 입에서, 돌연 사시나무 떨듯 바르르 흔들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는 사이인가? ============================ 작품 후기 ============================ ㅇ<-<. (반응이 없다. 아무래도 죽은 것 같다.) 0520 / 0933 ---------------------------------------------- 떠난 101, 숨어있는 101. 아는 사이인가? 둘의 반응을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선율은 짙은 눈동자로 차분히 진수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에 보이는 감정이 반가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냥 한때의 동료를 본 것처럼 담담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그런 선율의 고저 없는 태도에 반해, 진수현의 태도는 확연히 엇갈린다. 마치 망부석이라도 된 것처럼 딱딱히 굳어있었다. 오직 입만이 파르르 떨리는 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데 꾹 참고 있는 듯 보인다. 아니면 말이 나오지 않거나. “왜 가만히 서 있니? 이리 와서 앉으렴.” “…누나.” “그러고 보니 정말 오랜만이네? 근데 좀 서운하다 얘. 지금껏 같은 아카데미에 있었는데, 어떻게 한 번도 안….” “큭!” 그때였다. 진수현은 갑작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이내 머리를 푹 숙이며 앞쪽으로 빠르게 달려나가 버린다. 그리고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 모습을 감추었다. 의자를 톡톡 두드리던 선율은 곧 멀뚱한 얼굴로 우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한 차례 어깨를 으쓱이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양 맛있게 밥을 먹기 시작한다.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저러는 겁니까? 혹시 아는 사이에요?” “글쎄요~?” 선율은 숟갈을 입에 꼭 문 채, 오히려 고개를 갸웃갸웃 까닥이며 까불었다. 그리고 쪽, 소리가 날 정도로 숟가락을 강하게 빨아들인다. “왜요? 알고 싶어요?” “예. 궁금합니다. 요즘 친하게 지내는 동생이라서요.” 그러나 선율은 여전히 숟갈을 쪽쪽 빨며 깐족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니. 되레 잘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아항. 그렇구나. 그런데 어째요? 저는 얘기해줄 생각이 없는데. 그냥 아까처럼 저 무시하시고, 두 분 이야기나 나누세요. 쪽쪽쪽.” “마법의 탑 로드.” …이년이 밥 처먹기 전 소주를 한 숟갈씩 떠 처마시고 왔나. 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이래서 선율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싫다. 사용자 자체는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덧 나도 모르게 주제가 삼천포로 빠져버렸음을 깨닫는다. 한 마디로 종잡을 수 없다고나 할까. 그런 기색을 느꼈는지, 좌우로 천천히 흔들리던 고개가 비로소 멈춘다. 이윽고 선율은, 숟갈을 기울여 음식에 묻은 소스를 한 가득 퍼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입으로 가져가는 척하다가, 돌연 진한 웃음을 흘리며 숟갈을 반대로 뒤집었다. 이내 주르륵 흘러내린 소스가 선율의 훤히 드러난 가슴골을 가로지르며 기다란 호선을 그린다. “딸꾹.” 황급히 입을 틀어막는 김덕필. 선율은 그런 김덕필을 향해 농염한 미소를 흘리고는, 이내 살살 눈웃음치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머. 실수로 소스가 묻어버렸네.” “닦으시면 됩니다.” “그렇기는 하죠. 그런데 젠틀맨이 두 분이나 있는데, 굳이 레이디가 손을 움직여야 할까요?” “두 손 멀쩡히 가지고서 그런 말 하지 마시죠. 헛소리는 그만하고 얼른….” 진수현에 대한 정보나 뱉으라고 말하려는 찰나, 선율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 몰라 몰라. 마음대로 해요. 혹시 알아요? 건너편의 멋진 누군가가 상냥하게 닦아주면, 제 얼어붙은 마음이 사르르 녹을지도 모르잖아요.” 말인즉슨, 가슴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면 입을 열겠다는 소리였다. 나는 한동안 선율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빙글빙글한 저 면상을 후려갈기면 속이 시원해질 것 같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어, 어쩔 수 없이 천 조각에 손을 뻗은 찰나였다. “아. 그건 반칙. 무조건 손만 인정하겠어요.” 나는 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정말 이럴 겁니까?” “네. 정말 이럴 거예요.” 그때였다. 혈압이 머리 끝까지 치솟으려는 찰나, 문득 옆에 앉아있는 김덕필이 눈에 들어왔다. 왜인지 한없이 갑갑해하는 얼굴. 그 와중에도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지 수시로 입 모양을 바꾸는 중이다. 먹, 어. …먹어? 뭘? 그 순간, 불현듯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부디 후회하지 마시길.” “푸.” 선율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곤 오히려 상체를 바싹 기울였다. 흘끗 시선을 떨어트리자, 훤히 드러난 아담한 어깨와 그 아래 자리잡은 움푹 들어간 쇄골이 보였다. 그리고 거기서 더 아래를 보면…. 안 그래도 풍만한 젖가슴을, 원피스를 꽉 조임으로써 이제는 터질듯한 탄력감을 강조한 두 언덕이 잡힌다. 그렇게 가슴골이 서로 딱 붙은 탓에, 소스는 안으로 흘러 들어가지 못하고 고여 상당히 야릇한 기운을 흘리고 있다. 잠시 후. 나는 침착히 손을 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최대한 빠르게 손을 놀려 탁자에 놓인 김덕필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한순간 나를 부럽게 쳐다보던 김덕필의 눈이 크게 떠진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반응할 틈을 주지 않았다. 이내 잡은 손목을 그대로 들어 올려, 지체 않고 선율의 가슴골 사이를 파고들었다. 내 손이 아닌, 김덕필의 손으로. “아야?” 갑작스럽게 기습하자 아픔을 느꼈는지, 선율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동시에 옆에서는 괴상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으히히히힉?!” 나는 입꼬리를 한껏 비틀어 올리며 선율을 응시했다. 그러나 곧 떨떠름한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엿이나 먹으라는 심정으로 김덕필의 손을 빌린 건데, 선율은 어떠한 반응도 않은 채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머, 제기랄. 이 방법은 미처 생각 못했네요.” 목소리도 태연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무덤덤해 보이는 손놀림으로 손을 잡아 빼내고는, 나를 보며 가느다란 한숨을 흘린다. “오늘은 정말 작정하고 덤빈 건데…. 또 졌네. 저기 머셔너리 로드. 저번에도 한 번 여쭤본 것 같은데, 혹시 고자에요? 아니면 동성애자?” 나는 지그시 이마를 눌렀다. “둘 다 아닙니다.” “거짓말.” “아니니까 헛소리는 이쯤 하시죠.” “그게 아니라, 사내라면 눈 딱 감고 만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지금 이 사람처럼.” 선율은 어여쁜 검지를 들어 옆을 가리켰다. 뭔가 정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헤벌쭉 한 얼굴로 손을 부들부들 떠는 김덕필이 보인다. 그러다 나와 언뜻 눈을 마주치더니 이내 넙죽 엎드리는 한 털보. “지금 이 자리에서 맹세합니다. 사용자 김덕필은, 금일 부로 머셔너리 로드의 연초 셔틀이 되겠나이다. 부디 허락해주소서.” 그건 참 좋다고 생각하며, 나는 설레설레 머리를 가로저었다. “미안하지만 그쪽 가슴은 별로 만지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어서. 사실 그렇게 눈에 차는 가슴도 아니거든요. 주변에 마법의 탑 로드보다 몇 배는 훌륭한 여인들이 많은 터라.” 사실이었다. 고연주, 임한나 등등…. 그러나 선율은 짐짓 화난 얼굴을 지어 보이며 팔짱을 꼈다. “그 말은 그냥 듣고 넘어갈 수 없네요. 방금 발언은, 여인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혔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 들먹였다. “하지만 사실인걸요.” “…그게 누군데요?” “알아서 어쩌시렵니까.” “죽을 때까지 괴롭히겠어요.” “아하. 그럼 그러시죠. 그림자 여왕에게는 제가 직접 전해드리겠습니다.” “아 젠장. 항복이요.” 차마 고연주를 상대할 엄두는 나지 않는지, 선율은 기겁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치사해.”나 “제가 그림자 여왕님을 어떻게 상대해요?” 등등, 구시렁구시렁 중얼거리며 숟갈을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헛짓거리를 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먹어주었다. 나는 이마를 재차 꾹꾹 짓눌렀다. 가만히 잘 생각해보자, 결국에는 또 말려들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또 삼천포로 빠져있지 않는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아까 바로 따라 나갈걸 그랬다. 나는 힘없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무슨 사이인가요.” “예전의 동료요.” “그게 전부입니까?” “네.”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즉답. 선율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냥 어느 정도 괜찮아 보이는 것 같아서, 초반에 약간 도와준 것뿐이에요. 가능성이 보이면 마법의 탑으로 영입할 생각이었죠. 그러다 결국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헤어진 것뿐이고요.” 마법의 탑 로드가 일개 동료라. 절로 눈이 가늘어지는 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세라프는 진수현의 주변 상황을 모두 조작했다고 말했었다. 그 말인즉슨 주변 동료조차도 조작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해답은 하나. 저 말이 사실이라면, 선율은 천사들의 명을 받아 진수현의 동료로 들어간 사용자들 중 한 명이라는 소리였다. 순간 가만히 듣고만 있던 김덕필이 선율의 옆구리를 툭 건드린다. “그런 것치고는 반응이 너무 이상하잖아. 헤어질 때 안 좋게 헤어진 거 아니야?” “음…. 저는 나름 깔끔하게 헤어졌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쟤는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죠. 사실….” 그때, 선율이 일견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시선을 내리깔며 도로 음식을 퍼먹는다. “아무튼, 그런 일이 있어요. 개인 사정상 자세히 말하기는 곤란해요.” “에이. 괜찮으니까 사실대로 말해봐. 떡 정이라도 든 거 아니야? 그러다 헤어져서 저러는 거고.” “설마요. 떡 질이라고 해봤자 쟤랑은 서너 번밖에 치지 않았는데. 고작 그거 가지고 정이 들겠어요?” “…지, 진짜였어?” 잠시 후. 선율이 “농담이죠.”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는, 진수현의 성향 중 무기력을 떠올렸다. 동시에 더는 선율에게 얻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물론 아직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 그러나 직감상, 뭔가 중요한 단서가 나온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게임에서 중요한 선택지가 나온듯한 기분이랄까. 아직 보일 듯 말듯 하지만…. 하여간, 더는 볼일이 없으니 우선은 나가야 한다. “따라 가시게요?” “예.” “걔한테는 신경 끄시는 게 좋을 텐데. 이건, 진심으로 충고하는 거예요.” “그거야 제 마음입니다.” 그건 그렇다는 듯이 선율은 음식을 가득 퍼 넣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우물우물 씹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상황이 재미있네요. 죽은 수현이, 산 수현을 쫓다니.”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해 얼굴을 찡그리자, 선율은 흘끗 시선을 내렸다. 그런 선율의 눈동자는 정확히 내 성기가 있는 부분을 바라보고 있었다. * 진수현은 생각보다 금방 찾을 수 있다. 걸어나간 흔적을 찾아 쫓아보자 입구밖에 비치된 탁자에 앉은 채 홀로 밥을 먹고 있는 진수현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진수현은 굉장히 쓸쓸해 보이는 얼굴로, 밥 한 술 떴다가 한숨을 흘리기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와. 존나 궁상이다. 진짜.” 김덕필이 어이가 없다는듯한 말투로 말했다. 사실 그 말에 격하게 동의하는 바였지만, 이번에 노리는 게 있는 터라 나는 김덕필의 등을 떠밀었다. “그렇기는 하네요. 그런데 왜 따라 나온 겁니까?” “재미있을 것 같아서. 혹시 방해냐?” “예. 방해니까 식당에서 마법의 탑 로드와 꿍 짝이나 맞추시죠.” “그러려고 했는데, 나한테는 볼일이 없나 봐. 네가 가니까 바로 일어나서 가버리던데?” 뭔가 슬픈 이야기인 것 같은데 꽤나 담담하게 말하는군. “아무튼 저도 볼일 없어요. 그러니까 이제 방해는 그만하고 좀 가세요.” “암. 누구 명이라고. 그럼 나는 아까의 감촉을 음미하고 있을 테니까, 얘기 끝나면 불러달라고. 으흐흐.” 김덕필은 활짝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까 엄한 짓을(?) 한 손을 들어 보이고는, 혀로 게걸스레 핥으며 깡총깡총 뛰어간다. …솔직히 엄청 꼴불견으로 보였다. 아무튼. 진수현은 여전히 지지리도 궁상을 떠는 중이었다. 척 봐도 나 힘들어요 하는 모습.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런 모습을 보며 연민이라는 감정이 일었다. 진수현이 왜 저런 모습을 하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 때문이다. 천사들이 관리를 허투루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물샐틈없이 관리했을 것이고, 그런 만큼 동료나 사건을 비롯한 모든 것을 하나하나 철저하게 조작하고 일으켰을 것이다. 흡사 하나의 게임에서 일어나는 이벤트처럼. 그런 천사들의 목적은 단 하나. 바로 말 잘 듣는 제 2의 김수현을 만드는 것. 그래서 지금 저런 세상 물정 모르는 진수현이 탄생한 것이다. 비록 사용자 정보는 준수한 수준일지 몰라도, 그 외의 면은 아직 어린 아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영입에 앞서 내가 파고들어야 할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그러자 천천히 얼굴을 돌린 진수현이 힘없이 웃어 보였다. “아…. 형님.”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진수현 영입 절차…. xxx(스포일러) 등장…. 한소영과 꽁냥꽁냥…. 안현과 차희영…. 그리고 마무리…. 사용자 아카데미 파트도 이제 거의 팔부능선에 접어들었네요. 실은 사용자 아카데미 파트가 끝나갈수록 묘한 기분이 듭니다. 그냥 그래요. 뭔가 서서히 잡혀가는 기분이에요. :) 0521 / 0933 ---------------------------------------------- 떠난 101, 숨어있는 101. 왜, 살다 보면 다들 한 번쯤은 상상해본 적 있지 않을까. 현대에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다가, 어느 날 눈을 뜨면 처음 보는 세상에 와있는 상상. 우연한 기연을 통해 엄청난 힘을 얻는 상상. 하는 일마다 술술 풀리며 가는 곳마다 여복이 터지는 상상. 비록 약간의 고난과 역경은 있을지라도, 최종에는 승리해 영웅이 되는 상상. 즉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그런 상상 말이다. 영웅 육성 프로젝트는 바로 그런 요소들을 참착해 시행한 계획이었다. 계획의 중심인 진수현을 제외하고 모든 상황을 철저하게 조작하며 관리한 것이다. 우연히 얻은 시크릿 클래스와 우연히 만나서 같이 행동하게 된 동료. 그리고 우연히 발견한 유적 등등. 모두 우연이다. 정확히는 진수현 스스로 우연이라 생각할 것이나, 실상은 그 모든 게 천사들의 숨결이 들어간 것이었다. “괜찮으냐?” 걱정하는 체 물었으나, 진수현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여전히 시무룩해 보이는 얼굴만이 보일 뿐.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어, 나는 그런 진수현의 옆에 앉아 천천히 연초를 꺼내 물었다. “얘기는 들었어. 마법의 탑 로드와는 예전에 동료였다며?” “…예.” “그게 어때서? 말을 들어보니까, 깔끔하게 헤어졌다고 하던데.” “…누나가 그렇게 말했어요?” 맥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동시에 진수현이 비로소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연초에 불을 붙인 후, 깊숙이 빨아들이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허탈이 웃어 보인 진수현은, 이내 그릇을 한쪽으로 치우며 푹 머리를 떨궜다. 이어서 길고 가느다란 숨소리가 새어 나온다. “하…. 하기야 제가 어떻게 말할 처지는 안되죠….” “왜 그래. 말하는 거 들어보니까 꼭 서로 좋아하기라도 한 것 같잖아.” “예. 맞아요.” “…응?” 잠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냥 농담 삼아 꺼낸 말이었는데 진수현이 바로 긍정해버렸다. 그것도 굉장히 진지한 말투로. 이내 연기를 뱉으며 흘끗 옆을 쳐다보자 섭섭함과 슬픔이 아련히 어우러진 얼굴이 보인다. “정확히는 좋아하는 줄 알았죠. 하지만 아니었어요.” “난 또. 임마. 고작 차였다고 지금 이러는 거야?” 핀잔조로 말하자, 돌연 진수현이 힘없이 입술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억지로 웃는듯한 얼굴을 들어 보이며 나를 똑바로 응시한다. “그러고 보니까…. 형도 저와 비슷할 수 있겠네요.” “……?” 별안간 뜬금없는 말이 들려왔다. 하지만 태클을 걸기에는 워낙 얼굴이 진지해, 일단 계속 들어보는 게 나을 것 같다. 이윽고 진수현의 입이 열렸다. “형도 그렇잖아요. 형은, 지금 최고로 잘나가는 머셔너리 클랜의 클랜 로드잖아요.”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그 말에 진수현은 삽시간에 얼굴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뜸을 들이려는 듯 잠시 입을 닫았으나, 이내 자못 비장한 기세로 말을 잇는다. “형은. 형님은요. 혹시 한 번이라도 이렇게 생각해본 적 없으세요? 내가 바로 이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의 주인공이다. 이런 생각 말이에요.”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사실 저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거든요. 나는, 이 세상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되니까요. 뭘 해도 됐으니까요. 물론 형 앞에서 이러는 게 번데기 주름잡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저는요. 사용자라는 입장에서 보면 남들과는 180도 다르게 시작한 입장이에요.” “음.” 진수현의 목소리는, 지금껏 가슴에 쌓였던 것들을 토해내듯 들렸다. 오죽하면 뜻 모를 울분까지 느꼈을 정도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왜 그러는지도 알 것 같아, 속으로 잔잔히 웃은 후 계속 해보라는 듯 턱을 까닥였다. “정말로 달랐어요.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성능 좋은 시크릿 클래스를 얻을 수 있었죠. 또 남들은 초반에 하루 벌어 먹고 살기도 힘들다고 하잖아요? 아니요. 저는 전혀 아니었어요. 가는 장소마다 성과들이 빵빵하게 나와서, 자금적인 문제는 조금도 겪은 기억이 없네요.” 성능 좋은 시크릿 클래스. 연속적으로 얻은 빵빵한 성과. 자금 걱정을 하지 않는 넉넉한 출발.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생활적인 측면에서도 꿈같은 나날이 이어졌거든요. 나만 보고, 나만 믿고 따라오는 든든한 동료들. 그리고 그런 나를 좋아해주는 여러 여인들.” 안현, 안솔, 이유정, 고연주, 정하연, 비비앙, 신상용…. “그런 나날들이 계속해서 이어지니까. 아니. 오히려 더 좋아지니까 주체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와. 이게 이런 기분이었구나.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이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이 마음에 들기 시작하더라고요.” “홀 플레인이 마음에 든다고….” 중얼거리듯 되묻자, 정말 그렇다는 듯 머리를 크게 끄덕인다. “예. 생각해보세요. 현대에서는 평범한 대학생에 불과하던 제가, 여기서는 그 누구보다 잘나가는 놈이 됐으니까요.” “…….” 그때였다. “그런데요. 그런데 말이죠.” 불현듯, 진수현의 목소리가 한껏 낮아졌다. “…그런데?” 이윽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던 시선이 서서히 지면으로 떨어지는 게 보인다. 잠시 후. 진수현은 이전보다도 훨씬 줄어든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갑작스럽게, 모든 게 이상해지기 시작했어요.” “…어떤 것들이?” 되묻자, 진수현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예상대로였다. 요약해보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갑작스럽게 그간 이루어온 성공가도가 뚝 끊겼다는 것. 이제는 가는 곳마다 성과가 빵빵 터지기는커녕 건수 하나 잡기도 어려워졌다. 함께 해온 동료들은 어느 순간부터 이런저런 이유로 한 명 한 명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이었던 게 바로 선율 누나였죠…. 어느 날 갑자기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자기는 원래 한 클랜의 클랜 로드였는데, 저를 영입하려 신분을 속이고 접근한 거라고.” 과연. 그런 식으로 진수현에게 주어진 상황을 회수한 것인가. 좌우간 천사들의 철저함에는 혀를 내두르면서도, 속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사들이 계획을 중지한 순간부터, 진수현을 이끌어온 행운도 같이 떨어져 나가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진수현으로서는, 아마 그런 상황이 익숙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진수현은 어느새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좌절하고 있었다. 성향 그대로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모습. 이내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 틈으로 한탄 섞인 말소리가 새어 나온다. “그래서…. 설령 처음으로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동료들을 모아서 다시 시작해보려고 했는데….” 나는 진수현의 말을 들으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진수현은, 나와 애당초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나는 1회 차의 기억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행운을 부여잡았다. 그러나 진수현은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행운이 찾아왔을 뿐이다. 정리해보면, 진수현은 아직 그 시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볼 수 있었다. 아직 그때 그 시절을 잊지 못해, 어떻게든 발버둥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야 진수현이 사용자 아카데미에 들어온 이유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용자 아카데미에 들어오고 여러 사람들을 겪어보니까…. 하.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그 순간, 나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네 생각대로 일이 돌아가지는 않지?” 그러자 진수현이 흘끗 고개를 들었다. 이어서 뜨끔한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그 반응을 확인한 후, 나는 고개를 젖혀 하늘로 시선을 올렸다. “세상의 주인공이라…. 확실히,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지.” “…역시 형도 그렇죠? 사실, 저 형에 대한 소문 엄청 들었거든요. 그리고 여기서 처음 보자마자 이렇게 생각했어요. 아. 이 사람은 성공한 케이스구나. 이 사람이야말로 세상의….” “그런데, 아니야. 그건 아주 잘못된 생각이야.” “예?” 나는 딱 잘라 말을 끊었고, 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진수현의 앞에 서서 양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불안해보이는 시선이 천천히 올라온다. 길게 말할 생각은 없어,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애당초 홀 플레인에는 주인공이 있을 수가 없거든. 이 세상은 절대로 누구 한 명을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아. 오히려 자신의 뜻대로 사용자들을 움직이려고 하지.” “하지만 형은….” “하지만이고 저지만이고. 뭐, 네가 이 말을 곧바로 이해하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까 말했듯이,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으니까.” “…….” “그래도, 딱 하나 확실한 건 있다.” “그게…. 뭔데요?” 이내 조심스럽게 되물어온 순간, 나는 강제로 진수현의 몸을 일으켰다. 진수현은 기겁하며 어깨를 움츠렸다가, 눈을 끔뻑끔뻑 움직였다. 나는 그런 진수현을 보며 살그머니 웃어주었다. “적어도, 네가 잘못한 건 없다는 거야.” 그리고 그 순간, 진수현은 멍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 숙소 침대에 누운 채 창밖을 바라보자 어느덧 새카맣게 내려앉은 어둠이 보인다. 오늘 하루 참 많은 일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있는 힘껏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아직 돌아오지 않은 안현의 침대를 확인한 후, 오후에 있었던 진수현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내 말에 진수현은 의아히 되물었다. 하지만 나는 곧이곧대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저 한 번 잘 생각해보라는 말과, 다음에 너와 또 이 문제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말로 돌려보냈다. 왜냐하면, 지금 진수현의 사고방식으로는 백날 떠들어봤자 알아듣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말만 해주기보다는, 짧고 굵은 화두를 던져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자신의 생각의 잘못된 점을 깨닫는다면. 오늘의 대화에서 한 가지 틈을 찾을 수 있었던 만큼, 나는 그 점을 비집고 들어가 진수현을 구슬릴 것이다. 물론 자세한 건 가봐야 알겠지만, 나름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한다. 문득, 진수현이 들어옴으로써 상승될 전력을 상상해보자 절로 웃음이 나온다. “이로써 주문 저격수도 머셔너리로 들어오는 건가. 하하하.” 그렇게 온몸에 흐르는 엔도르핀을 한껏 만끽하며, 침대를 한 바퀴 뒹굴 구른 찰나였다. 달칵! “형님!” “어헉.” 안현이 갑작스럽게 문을 열며 들어왔다. 나는 엎드린 상태로 있다가, 곧바로 팔 굽혀 펴기를 하며 시선을 돌렸다. “으음. 순찰은 끝났냐.” “네. 방금 끝내고 오는 길이에요. …혹시 운동 중이셨어요?” “아아. 몸이 좀 굳은 거 같아서. 아무튼 왜?” “그렇구나. 아. 다름이 아니라, 혹시 저번에 선 조치 후 보고라는 말씀을 하셨잖아요?” 못 봤을 거라는 생각에 안도한 순간, 나는 머리를 갸웃하고 말았다. “선 조치 후 보고가 아니라, 선 보고 후 조치지.” “아~. 맞다. 아무튼 한 가지 보고 드릴게 있어서요.” “뭔데?” “그 아까 본관을 순찰하고 나오다가 교육생 한 명과 마주쳤거든요.” 돌연 불안한 기운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아무 까닭없는, 불안한 기운이 말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만들어 침대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안현을 노려보았다. “너 설마. 또.” “에이 형님도 참. 아니에요. 그래서 너 지금 뭐하고 있냐, 이 시간에 돌아다니면 안 된다. 그렇게 말을 했죠.” “그렇지. 그래야지. 잘했네.” “헤헤. 그런데요. 뭔가 좀 이상해서요.” 그때였다. 안현이 살그머니 얼굴을 찡그렸을 때, 안도와 함께 가라앉으려던 불안감이 도로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뭐가 이상한데.” “돌아가라고 말한 순간, 그 교육생이 갑자기 은은하게 웃더라고요.” “웃었다고?” “예. 그래서 처음에는 알겠다는 의미인줄 알고 몸을 돌렸다가, 아 그래도 순찰도 다 끝났으니까 돌아가는 것도 확인할 겸 데려다 주자. 이렇게 생각해서 또 몸을 돌렸거든요?” 안현은 또 내가 뭐라 할 것을 걱정했는지 열렬히 자신을 변호하는 투로 말했다. 나는 팔짱을 끼며 안현을 주시했다. “그런데.” “그런데, 없어졌어요.” “…뭐?” “저도 지금 어이가 없어요. 몸을 돌린 시간이라고 해봤자 5초도 안되거든요? 그런데 말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요. 꼭 귀신처럼 말이에요. 아우, 말하니까 또 소름 돋아.” 안현은 정말 소름 끼친다는 얼굴로 양팔을 벅벅 비볐다. 그리고 나는 의아한 기분이 차올라 차분히 턱을 매만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안현의 사용자 정보는 내가 알고 있다. 그런데 고작 교육생이 안현의 감각을 회피했다고? 그것도 5초도 안 되는 시간에? …뭔가, 이상하다. 나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너 잘못 본 건 아니지? 정말 확실해?” “아 그럼요 형. 저 시력 엄청 좋잖아요.” “어디서 봤다고?” “어? 형이 직접 나가시게요? 그냥 제가.” “아니. 너는 여기 가만히 있어. 또 사고 칠까 무서우니까. 그냥 나 혼자 보고 오마.” “…마주친 건 본관 입구 쪽이었어요.” 안현은 금세 시무룩해지더니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안현을 지나쳐 곧바로 숙소를 나섰다. 안현의 보고.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안현이 다시 가도 크게 문제 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그냥 넘기기에는, 아까 느꼈던 까닭없는 불안감이 아직도 가시질 않는다. 그게 내가 움직인 이유였다. 잠깐의 귀찮음을 감수하면 혹시 모를 사건을 방지할 수 있으니까. 교관 전용 숙소를 나와 힘껏 달리자, 안현이 말했던 본관 입구에는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본관에는 누구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밤공기와 새카만 어둠만이 을씨년스럽게 머무르고 있다. 하여 안력을 높이는 것과 동시에, 나는 제 3의 눈과 마력 감지를 동시에 펼쳤다. 이 정도까지 했으니, 아주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웬만한 흔적은 찾아낼 수 있다. 좌우간 정말 귀신이 아니고서야 두 발이 땅에 닿았을 터. 그렇게 세심하게 지면을 살피던 도중, 나는 돌연 한쪽에서 시선을 멈추고 말았다. 나는 지체 않고 걸음을 옮겨, 무릎 하나를 굽히며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처음 눈에 보인 건 10분도 채 되지 않은 걸음 자국으로, 안현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는…. “어.” 그때였다. 주변 자국을 훑은 찰나, 눈이 절로 가늘어지는 게 느껴졌다. 주변에 보이는 흔적은 그저 단순한 걸음 자국이 아니었다. 우선 한 가지 확실한 건, 희미하게나마 마력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 나는 눈을 크게 떠 제 3의 눈을 더욱 활성화했다. 그리고 잠시 후, 믿을 수 없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이건….” …워프 마법의 흔적인데. ============================ 작품 후기 ============================ 원래 이번 회는 진수현의 과거를 비롯해 아예 한 회를 배정할 생각이었는데, 싫어하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아 그냥 적당히 끊었습니다. 중간에 설명도 좀 생략했고요. 잘했다고 생각하시면 오랜만에 머리 한 번씩만 쓰다듬어주세요. 저 그럼 잠 잘 자거든요. ㅋ_ㅋ PS. 주의! 곧 밸붕급 사용자의 출현을 예고합니다. 0522 / 0933 ---------------------------------------------- 떠난 101, 숨어있는 101. - 이스탄텔 로우 클랜 하우스 기록. 『연합 전쟁이 끝난 후.』 - 총 12 Page 중 3번째 Page. (본문 : …그러다 문득 창밖을 보자, 중앙 나무에 덩그러니 걸린 두 여인의 수급이 보인다. 갑작스럽게 사망을 확인한 이후, 사기 진작 차원에서 저렇게 걸어놓았다 들었다. 우리 연합은 너도밤나무 연합을 완전히 격파한 이후, 주요 사용자들을 포획해 모두 감옥에 집어넣었다. 사실 그동안 당한걸 생각하면, 또 그동안 저들에 잃은 동료들을 생각하면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럼에도 우선 감옥에만 넣었던 것은, 아마 클랜 로드의 인재 욕심이 발동된 것이리라. 그러나 어젯밤 나는 한 가지 비보를 접해야만 했다. '성스러운 여왕' 유현아가 결국 간수들의 지속된 윤간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고만 것이다. '그녀' 또한 비슷한 처지였으나 그래도 꽤 잘 버틴다고 들었는데, 과연 주군의 죽음은 견딜 수 없었던 것일까. 뭐, 아무래도 좋다. 클랜 로드는 안타까워하시겠지만, 그래도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진다. …아니. 사실 아직도 믿기지는 않는다. 창 건너 저기 주렁주렁 매달린 '그녀'의 수급을 볼 때마다, 확실히 죽음을 확인했음에도 아직도 어색해지는 건 도대체 왜일까. 그것은 아마 지금껏 '그녀'가 보여준 능력에 기인한, 일종의 두려움이라고 생각된다. 비록 지금껏 서로 적대해온 입장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녀'는 비범한 사용자였다는 것. 그저 그런 비범함을 말하는 건 아니다. 매우 비상하던 두뇌도. 그 누구도 따라 하지 못할 창의적인 마법들도. 그리고 그동안 우리의 속을 끓였던 그 엄청난 수송 능력도. 아마 천재라는 자들과 동일 선상에 놓고 견주어도, '그녀'의 비범함을 따라올 자는 없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수송 능력이 약간 아깝기는 하다. 거리라는 말의 의미 없게 만드는 능력. 만일 '그녀'가 우리 클랜에 들어왔다면 그 능력은 정말 엄청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건 좋지 않으나,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다면 그래도 곱씹어볼 만하지 않을까. 가끔 클랜 로드가 한탄하시는걸 들어보면, 우리 클랜도 '그녀'를 영입할 기회가 한 번 있었던듯하다. 하지만 모종의 원인으로 놓쳐버린 것 같은데…. 아마 그때 이후로 클랜 로드의 인재 욕심이 한층 심해진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아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 연합군은 승리했고, 너도밤나무 연합은 이제 더는 홀 플레인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꽤 시간은 지났지만, 예전에 해밀 클랜이 악마 놈들에게 멸망한 사건, 전후 처리 그리고 북 대륙 안정화 등등. 해야 할 것도 많은데, 이렇게 홀로 끙끙 앓아봤자 무얼 하겠는가. 아차. 그러고 보니 요즘 용이 잠든 산맥에 관한 말들이 꽤 나오는 것 같은데…. 워낙 쌓인 악명이 어마어마하니 말만 들어도 괜히 불안해진다. 예감이 별로 좋지 않다고나 할까. 아무래도 오늘 수현이를 불러서 클랜 로드의 의중을 물어봐야겠다. 그래도 수현이가 가장….) - 기록자 : 사용자 정창민(용이 잠든 산맥 탐험 중 사망). * 갑작스럽게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꾹 감고 말았다. 이내 차분히 호흡을 고른 후 재차 바라보자, 여전히 지면에 각인된 시동(始動)의 흔적이 눈에 밟힌다. 이것은 분명 워프…. 아니. 아니다. 워프 게이트 활성진과 워낙 비슷하게 보여, 나도 모르게 잠깐 착각해버렸다. 정확히 말해보면, 이것은 워프 게이트 활성진을 기반으로 한 수송 마법의 흔적이었다. 물론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 워프 게이트 활성진은 고대 홀 플레인의 유산이며, 헬레나 루 에이옌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실전된 마법이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 눈앞에는 확실히 수송 마법의 흔적이 보이고 있다. 확실하다. 개인을 대상으로 해서 그런지 아주 자그마한 흔적에 불과했으나, 두 번 세 번 눈을 씻고 봐도 기억 속 수송 마법의 흔적이 분명하다. 의심할 여지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어찌 이 흔적을 잊을 수 있겠는가. 1회 차 때 수십, 수백. 아니 수천 번은 보았고, 당했던 마법인데.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한 후, 나는 멍하니 몸을 일으켰다. 수송 마법. 1회 차 시절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였으며, 거의 고유 능력이나 다름없는 보조 계열 최강의 어빌리티. 그 강대했던 이스탄텔 로우 연합군이 너도밤나무 연합군에 시종일관 밀렸던 것은, 이 능력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수송 마법이 출현했다는 건 단 하나를 의미한다. 바로 1회 차의 그녀가 홀 플레인에 들어왔다는 것을. 그러면, 언제 어떻게 들어온 걸까? 왜 지금까지 보이지 않은 걸까? 저번 마력 재능 계열의 정신 교육 때는 분명히 보이지 않았는데? 물론 제일 성적 높은 스무 명을 대상으로 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두각을 드러내지 못할 리가 없잖아? 아니 그전에. 벌써 수송 마법을 사용한다고? 고작 8주차된 교육생이? 삽시간에 여러 의문이 머릿속으로 차오른다. 하지만 나는 곧 모든 생각을 한쪽으로 밀어 넣고 말았다. 어차피 지금으로서는 알 수도 없는 것들. 그러니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찾아내서 정말 그녀인지 아닌지 직접 확인해야 한다. 좌우간 지금은 그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지체 않고 걸음을 틀었다. 수송 마법을 사용했다 함은 분명 어딘가에 이동한 장소가 있다는 소리일 터. 일단 그녀가 수송 마법을 개발하고 사용했다고 가정해보면, 그리 멀리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설마 사용자 아카데미를 벗어났을 리는 없을 테고, 그저 안현을 피하는 용도로만 사용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마력 감지를 최대한으로 돌리며 주변을 세심하게 훑었다. 흔적은 예상대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약 스무 걸음 정도 걸었을 무렵 감지 끝 쪽으로 뭔가 툭, 걸리는 게 느껴진 것이다. 이 정도면 안현이 가만히 있었다는 가정하에 충분히 이목을 피할 수 있을 만한 거리였다. 잠시 흔적을 응시하고 나서, 나는 그녀의 이동 후 흔적을 쫓아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간 모양인지 비교적 명확한 발걸음 자국들이 보인다. 그렇게 쫓고 쫓아 한없이 걷고 있자, 별안간 뜻 모를 기분이 온몸을 엄습했다. 방향을 가늠해보면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다. 흔적이 숙소 건물과 정반대 편으로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여전히 이상한 기분을 떨치지 못해 주변을 둘러보자, 무성한 나무와 흐드러진 풀들이 보인다. 그래. 뭔가 굉장히 오랜만인듯하면서도 낯설지 않은 이 기분은….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아무튼 우선 더욱 들어가볼 생각에 조금 더 걸음을 옮긴 순간, 시야를 빽빽이 가리는 나무들 틈으로 둥그런 공터가 언뜻 눈에 잡혔다. 그 순간이었다. “어머.” 방금 본 장소가 예전 내가 이스터 에그라고 부른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과, 아름다운 미성이 들려온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두근. 문득. 심장이 세차게 고동쳤다. “흔적은 확실히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실수했나?” 나는 바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뚫어져라 앞을 주시했다. 온몸의 감각은 이미 극한으로 활성화된 상태였다. “아무튼 얼른 도망가야지.” 그리고 물 흐르듯 이어지는 마력의 흐름. 도저히 교육생 수준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에 놀랄 틈도 없이, 나는 지체 않고 발을 들었다. 그리고 마력을 크게 끌어올리며 지면을 내려찍었다. 쿵! 지면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전력을 다한 마력의 기운이 물밀듯 공터로 짓쳐 들어간다. 아무래도 수송 마법을 사용한다는 소리 같아, 파해(破害)로 흐름을 어지럽힐 심산이었다. 이대로 놓칠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으음? 이얍.” 조용한 기합이 들린 찰나. 나는 되돌아오는 마력 충격에 두어 걸음을 물러나고 말았다. 내 마력 능력치는 96포인트. 그런데 내 파해를 방어하고 되레 받아 쳤다고? 이제는 놀라는 것을 넘어서 믿을 수 없는 기분. 나는 황급히 공터를 주시했다. 파해를 목적으로 들어간 마력은 어느새 전진을 멈춘 상태였다. 흡사 보이지 않는 장벽과 힘겨루기를 하듯이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재차 있는 힘껏 마력을 끌어올렸다. 지면을 박차며 공터 안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벽이 있다고 생각되는 곳을 향해 최대한으로 힘을 실어 주먹을 후려갈겼다. 꿍, 묵직한 감각이 주먹을 타고 들어온다. 그래도 확실히 효과는 있었는지, 허공에서는 흡사 계란 껍질이 깨지는 것처럼 무수한 균열이 일었다. “아?” 거기서 한 번 더 후려갈겨 마력 장벽을 완전히 깨부순 후, 나는 힘차게 공터 안으로 내려앉았다. 곧바로 시선을 들어올리자 마침 비틀, 쓰러져 엉덩방아를 찧는 한 여인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야.” 나는. “……!” 한순간, 심장이 터져나올 것만 같은 감각을 느껴야만 했다. “…….” “…….” 깊은 밤. 주변은 고요한 정적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밤하늘에 흐르는 별빛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환한 빛이 모인 공터의 중앙. 그곳에는 양손을 바닥에 붙인 여인이 다소곳하게 다리를 붙이고 있었다. 나이는 이제 20대 초반일까? 모델처럼 늘씬한 다리를 쭉 뻗은 여인은,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가진 긴 생머리의 미인이었다. 그 얼굴을 확인한 순간, 갑작스럽게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듯했다. 여인이 입을 열었다. “아. 들켰어.” “…….” “으흠. 우선은 죄송합니다~. 밤하늘 별들이 너무 아름다워서요. 저도 모르게 그만. 헤.” “…….” “응…? 저기~. 저기요~? 교관님~?” “…….” 흡사 세라프와 비슷한 아름다운 소프라노 톤의, 그러나 조금은 간드러지게 올라가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어 겨우 숨을 삼키며 여인을 자세히 바라보려는 순간이었다. 이내 다리가 천천히 반으로 접히는가 싶더니 여인이 영차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치 풀밭에 홀로 핀 꽃처럼, 나를 보며 화사하게 웃어 보인다. 그 웃음과 마주한 순간 나는 한껏 당황하고 말았다. 별빛이 집중적으로 모이는 곳이라 그런 걸까. 별빛이 반사하는 여인의 미소가 차마 마주볼 수 없을 만큼 너무나 아름답고 눈부시게 느껴진다. 심장은 아까 전부터 폭발하려는 듯이 요동치는 중이었다. 나는 차분해지려 애쓰며 지그시 가슴을 눌렀다. 그리고 생각했다. 예상하고 있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 아니 확신했다. 그래. 분명히 그러할진대. 막상 이렇게 마주하자 왜 이렇게 차분해지지가 않는 걸까. 왜 이렇게 입술이 떨리고 목이 바짝바짝 말라오는 걸까. 왜. 도대체 왜. “음~. 혹시 저, 벌칙이라도 받아야 하나요?” 나는, 간신히 머리를 저을 수 있었다. 그러자 여인의 눈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더니, 흑진주 같은 새카만 눈동자가 나와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너그러우시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교관님. 다시는 이러지 않을게요.” “…….” “교관님?” “…….” “…그럼 이만 가봐도 될까요?” “…….” 여인의 고개가 살며시 기울어진다. 하지만 곧 가볍게 목례한 여인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나를 지나쳤다. 아니 지나치려는 순간이었다. 살그머니 드러난 허여멀건 한 목덜미를 멍하니 응시하던 나는, 일순 여인의 팔을 세게 붙잡았다. 그리고 본능에 따라 왼손을 허리춤에 올렸다. 하지만 손은, 검을 쥐지 못하고 여지없이 허공을 저었다. 아니 잠깐만. 뭐라고? 뭘 쥐지 못했다고? “아.” 나는 아차 하고 말았다. 빅토리아의 영광을 생각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조금 전, 나는 본능에 따라 검을 찾았다. 아마 허리춤에 검이 있었다면 그대로 베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말인즉슨, 나는 이 눈앞의 여인을 죽일뻔했다는, 살해하고 싶어했다는 소리였다. 그것은 나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감정이었다. 그런 기색을 느낀 걸까. “……?” 어느새 나를 돌아본 여인의 시선은 허공에 멈춘 내 왼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한껏 깔린 눈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올라와 나를 정면에서 바라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생글생글한 눈이 갑작스럽게 큼지막하게 떠졌다. 『사용자 제갈 해솔의 고유 능력, '하늘을 굽어보는 지혜의 눈(Rank : S Plus)'의 발동을 확인합니다.』 『사용자 김수현의 고유 능력, '제 3의 눈(Rank : S Zero)'이 대응합니다.』 『대응 결과, '제 3의 눈'이 '하늘을 굽어보는 지혜의 눈'보다 2랭크 상승 판정을 받습니다.』 『'하늘을 굽어보는 지혜의 눈(Rank : S Plus)'을 간파합니다!』 “어?” 이번에는 여인의 입에서 의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여인은 깜짝 놀랐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가 두어 걸음 물러서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여전히 팔을 놓지 않은 채 여인, 아니 제갈 해솔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자 강제로 활성화된 제 3의 눈이 허공에 사용자 정보창을 띄우기 시작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제갈 해솔(0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마법사(Normal, Mage, Expert) 3. 소속 국가(Nation) : -.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스스로 자격을 깨우친 자 • 천재아(天才兒)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9) 7. 신장 • 체중 : 168.7cm • 48.7kg 8. 성향 : 합리 • 관찰(Rationality • Observe) [근력 38] [내구 43] [민첩 52] [체력 37] [마력 95] [행운 93] 8주차가 익스퍼트? 마력 능력치가 95? “교관님은…. 저를 보고 있지 않으시네요?” 그때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사용자 정보 창을 보고 있을 무렵, 흘러 녹는듯한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나는 다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시선을 마주치자, 제갈 해솔이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활짝 끌어올린다. “아. 이제 저를 쳐다보셨네요. 그전까지는 허공을 보고 계셨고요.”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 그러나 그조차도 세련미가 흘러 넘쳐, 매력적인 미소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잠시 후 제갈 해솔은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나의 손등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쓸어 내리며 예쁘게 눈웃음쳤다. “꼭 무언가를 읽는 것처럼 말이죠.” 팔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힘없이 떨어졌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마력 능력치 101 사용자가 등장했네요. 하하. 사실 이 캐릭터의 등장을 두고 초반에 엄청 고민을 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고심했던 건 바로 성격이었죠. 총 세 개의 성격을 꼽았습니다. 세라프처럼 고요하면서 흔들림 없는 차분한 분위기. 아니면 새침하면서도 속으로 걱정하는 새침새침한 분위기. 마지막으로 경쾌하고 발랄한 상큼한 분위기. 결국 선택한 건, 세 성격을 한 번 적절히 섞어보자였습니다. 정확히는 첫 번째와 세 번째 성격을 가장 많이 섞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하하하. 제갈 해솔이라는 사용자에 대해서 궁금하신 것들이 많으실 거라 생각됩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차후 내용에서 다뤄갈 생각이니, 천천히 기다려주시면 좋겠네요. 그런 일말의 바람이 있습니다. :) 아. 그리고 죄송한 소식을 하나 전해드려야 할 것 같네요. 며칠 후에 제가 잠시 일이 생겨서, 잠깐 휴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4월 11일(금요일)부터 4월 15일(화요일). 그런데 시작일과 마치는 일인 4월 11일과 4월 15일은, 무리하면 어찌어찌 올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다만 4월 12일, 13일, 14일은 정말 어려울 듯싶으니 해당 날짜는 휴재를 해야 할 상황입니다. 이 점 독자 분들의 깊은 양해를 구하며, 11일 후기에 한 번 더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_(__)_ 아. 쪽지도 많이 쌓이고 뜰에 질문도 있었네요. 오늘 이거 전부 답변을 작성하고 자야겠습니다. 하하하. 0523 / 0933 ---------------------------------------------- 혹시 갈림길이라고 아세요? 그러고 보니 사용자 정보창에 관찰이라는 항목이 있던가. 나는, 나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억지로 뱉었다. 바짝 마른 입술도 침으로 적셨다. 그리고 호흡을 고르며 가슴을 추스른 후,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교육생.” “아. 그냥 궁금해서요. 지금껏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어서. 혹시 허공에 메시지 같은 거 뜨지 않으셨어요? 저는 떴는데.” “저야말로 교육생에게 되묻고 싶네요. 정말로, 갓 들어온 교육생이 맞습니까?” “호호. 그럼요.” 지금 이 상황이 재밌어 죽겠는지 제갈 해솔의 눈과 입이 완곡한 곡선을 그린다. 그렇게 호호 웃어 보인 제갈 해솔은 양팔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 “아무튼 설마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는데. 정말 재밌는 분이네요. 머셔너리 로드님은.” “…저를 알고 있었군요.” “알다마다 요~. 교육생들 중에서 과연 김수현 교관님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 상큼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으나, 마냥 넘기기에는 의미심장하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잠시, 말이 끊겼다. 나는 지그시 입을 깨물었다. 제갈 해솔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이다. 아니. 되레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호기심 가득한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서로 응시했다. 그때였다. “눈동자가 복잡해 보이세요. 평소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시군요?” 나는 언뜻 눈을 감았다가, 도로 제갈 해솔을 응시했다. 그러나 제갈 해솔은 어느새 천천히 몸을 돌리는 중이었다. 그러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이대로 보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에 갑작스럽게 손을 뻗으려는 찰나였다. “어머. 괜찮은데.” 일순 나도 모르게 주춤,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돌연 고개를 반쯤 돌린 제갈 해솔이 나를 똑바로 응시한 것이다. 그러더니 소리 없이 빙긋 웃어 보인다. “에스코트는 좋아하지만, 오늘은 사양할게요.” “…아. 그게 아니라. 잠시.” “밤이 늦었잖아요. 그리고 생활 교관님이라면 모를까. 교육 교관님이 밤늦게 교육생들 데리고 오면, 누구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으음.” 확실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과 딱히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아, 나는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내 “기분 나쁘신 건 아니죠?”라고 말한 제갈 해솔은, 흡사 치마라도 입은 듯 두 손으로 바지를 살짝 잡아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공주 인사. 그렇게 인사를 마치더니 미련 없이 등을 돌려 걸어간다. 그 모습을 잠시 멍하니 보고 있자 뭔가에 홀린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귓불을 천천히 매만졌다. 거리는 10미터도 채 되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이 가장 최고 적기가 될 수 있다. “…….” 그러나. 나는 결국 어떤 것도 하지 못한 채, 도로 손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왜 이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갑작스럽게 온몸의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홀 플레인에 들어온 이후 처음 느껴보는 무기력함…. 아니. 처음은 아닌가. 1회 차에는 수백, 수천 번도 느껴본 감정이니. 마치 1회 차 시절, 성스러운 여왕의 옆에 있던 제갈 해솔을 본 것처럼. 실로 간만에 밀려오는, 그러나 차마 익숙해지지 않는 감정에 절로 어깨를 늘어뜨린 후. 나는 지그시 시선을 들어 앞을 주시했다. 어느새 제갈 해솔의 모습은 홀연히 사라져 있었다. * 9주차의 아침이 밝았다. 9주차 일정 확인과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신재룡의 호출에 총 교관 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주말을 이용해 마력 재능 계열 교관들과 회의한 결과. 이번 9주차 정신 교육도 클랜 로드에게 맡기기로 했습니다. 이러니저러니 말은 많아도, 다들 교육생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신재룡이 나를 호출한 이유는 간단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찔렸다. 말 그대로 교육생들에게 찔렸다. 저번 정신 교육 때 기합을 받은 교육생들 중 열 명 남짓한 정도가 단체로 들고 일어난 것이다. 기합의 강도가 너무 심하다고 토로하며 다시는 정신 교육을 맡지 못하게 해달라 요구했다고. 사실 듣자마자 화가 났다기보다는, 좀 웃겼다. 어떻게 보면 고맙기도 했고. 주말 내내 제갈 해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했는데, 그런 나를 잠깐이라도 웃겨주었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로 돌아가는 상황은 더욱 웃겼다. 신재룡이 여러 교관들을 불러 회의한 결과, 모두가 교육생이 아닌 내 손을 들어준 것이다. 오히려 교육생들의 썩어 빠진 정신 상태를 지적하며 생활 교관들을 시켜 흠씬 혼쭐을 내주었다고. 또한 이번 9주차 정신 교육도 내가 맡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고 한다. 말인즉슨, 오만 방자한 교육생들의 정신 상태를 나보고 잡아달라는 소리였다. “아무튼 상황이 이러니, 이번 주에도 정신 교육을 맡아주셔야겠습니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오후에 마력 재능 계열 전원을 대상으로 한 정신 교육이 있습니다. 원래는 다른 교관이 맡을 예정이었는데, 클랜 로드에게 양도할 의사가 있다고 하더군요. 오늘 아침에 갑자기 찾아와 말한 터라 시간이 좀 촉박하기는 한데…. 혹시 가능하시겠습니까?” “상관없습니다.” 나는 툭툭 끊어 말하며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불현듯 이상함을 느낀 듯, 신재룡이 웃음을 뚝 그치고서 나를 바라본다. 이런. 티를 너무 많이 낸 건가. “혹시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으십니까? 아니면 무슨 걱정거리라도?” 이윽고 끔뻑끔뻑 나를 바라보는 신재룡을 향해 나는 싱겁게 웃었다. “그냥 속이 훤히 보여서 그렇습니다.” “속이…. 보여요?” “그러니까 교육생들의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는데 함부로 건드리기는 조금 그렇다. 그러니 저를 앞으로 세워 대신 고치겠다는 생각입니다. 한 마디로 자기네들 이미지는 지키겠다 이겁니다.” “에이. 설마 그 정도까지야…. 교관들이 만장일치로 찬성한 안건인데요.” “그걸 교육생들이 알 리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오늘 아침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도 그렇습니다. 저보고 교육은 하지 말고, 그냥 기합이라 주라는 소리죠.” “…허.”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그들이 노리는 바는 잘 알 것 같으니 너무 걱정 마시길. 오후 교육은 제가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아무래도 좋았으니까. 그보다는, 제갈 해솔의 생각 하나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듯이 지끈거린다. 그날 밤의 만남 이후로, 주말 내내 제갈 해솔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떠올릴 때마다 까닭 없이 심장이 두근거리고 뜻 모를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냥 아무 까닭 없이. 이윽고 몸을 돌려 총 교관 실을 나서려는 찰나였다. “클랜 로드.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약간은 다급하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시선을 돌리자 책상을 더듬으며 무언가를 찾는 신재룡이 보였다. 곧 “아. 여기 있네요.”라고 말한 신재룡이 나를 바라보며 휙 무언가를 던진다. 반짝 햇살을 반사하는 그것은, 말간 빛을 띠는 수정구였다. 통신용 수정구가 아닌 녹화용 수정구. “머셔너리 클랜에서 보내온 겁니다. 클랜 로드에게 전하는 선물이라네요.” “녹화용 수정구가 선물? 아니 이걸 왜.” “원칙상 외부 물품이라 제가 먼저 확인해야 했는데, 꽤 재미나더군요. 꼭 한 번 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나 참. 재미는요. 또 하라는 일은 안하고 엉뚱한 거나 찍었겠지요.” 그러나 신재룡은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그리고 차분히 몸을 일으키더니 여전히 미소 만연한 얼굴로, 동시에 조금은 잔잔해진 말투로 입을 열었다. “클랜 로드.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힘내십시오.” 그 순간, 나는 수정구서 눈을 떼고 흘끗 신재룡을 응시했다. “우리는, 항상 클랜 로드를 믿고 있으니까요.” “…티 많이 납디까?” 신재룡은 아무 말도 않고 조용히 웃었다. 이윽고 총 교관 실에서 나온 후, 나는 가느다랗게 숨을 흘렸다. 하여간 신재룡 저 양반. 눈치 하나는 정말 도사라니까. 물론 티를 팍팍 낸 내 탓이 가장 크지만. …이 모든 게 다 제갈 해솔 때문이다. 그렇게 한숨을 푹푹 흘리며 복도를 걸어 나오는 찰나, 문득 녹화용 수정구가 눈에 들어온다. 느릿느릿 걸으며 한없이 수정구를 응시하다가, 나는 속는 셈치고 마력을 흘려 넣었다. 잠시라도 좋으니 이 복잡한 머리를 가라앉히고 싶었다. 그러자, 녹화용 수정구에서 한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럼 지금부터 우리 클랜 로드를 응원할 영상을 촬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번 계획을 발의한 세 분부터 모시도록 하죠.) 이건 조승우의 목소리인데. 그럼 조승우가 찍고 있다는 소린가? 이내 영상은 세 여인을 비췄다. 고연주, 남다은, 임한나. 이 세 명은 옹기종기 탁자에 모여 앉아 무언가를 나누어 먹는 중이었다. (오호. 무언가를 맛있게 드시고 있네요. 저게 과연 뭘까요?) 저건…. 떡이잖아. 아니. 떡 같아 보여. (아. 마침 고연주씨가 여기를 보면서 손을 흔드네요. 미소가 참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남다은씨와 임한나씨는 입술을 빠르게 움직이는군요.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근데 왜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죠?) 조승우의 말대로였다. 고연주는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남다은과 임한나는 쉴 새 없이 입을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정말 말은 들리지 않는다. …확실히 떡을 씹는 것치고는 너무 과도한데. 잠시만. 설마…. 떡떡떡떡떡떡을 연발하고 있다 느꼈다면 내 착각일까? 잠시 후. 세 여인의 음험(?)해 보이는 눈을 마지막으로 영상이 다른 곳을 비춘다. 다음으로 보인 것은, 바로 사샤와 헬레나였다. 둘은 영상을 찍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한창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젠장! 어디서 도마뱀 냄새를 풍기는 년이 기어들어와서…!) (그 입 닥치지 못하겠느냐. 감히 어느 안전이라 입을 함부로 놀리느뇨?) (크아악! 클랜 로드는 어찌 이런 괴물을 받아들였단 말인가!) (호호호. 괴물이라니. 여인에게 말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리고 이런 예쁜 괴물을 본 적 있느냐?) 발광하는 사샤와 태연히 받아 치는 헬레나. 아주 잘들 놀고 있다. 그리고 그런 둘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허준영도 보인다. 허준영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이내 머리를 설레설레 가로저은 허준영은 수정구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으며 차를 마신다. 저놈도 꽤나 한가해 보이는군. (시끌벅적 하네요. 아. 클랜 로드. 걱정 마십시오. 모두 맡은바 임무는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으니까요. 잠시 짬을 내서 찍고 있는 겁니다. 하하하.) 그런 내 마음을 느꼈는지, 조승우가 타이밍 좋게 보고한다. (자 그럼. 차소림씨도 한 마디 하셔야지요?) 이번에는 차소림이 보였다. 한순간 자신을 비추자 깜짝 놀란 듯 차소림의 눈이 화등잔만 해진다. 그러나 곧 고개를 푹 숙이더니 양손을 그러모으며 우물쭈물. 마치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 그….) (자자. 괜찮으니까 말씀하세요. 크게요. 클랜 로드한테 보내는 겁니다.) (그, 그러니까…. 크, 클랜 로드….) (차소림씨! 안 들려요! 더 크게요!) 조승우의 독촉에 차소림이 우뚝 말을 멈췄다. 잠시 정적. 그동안 훤히 드러난 목울대가 꼴깍 움직이는가 싶더니, 앞으로 모은 두 손을 힘차게 내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차소림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눈을 꼭 감으며 버럭 소리를 지른다. (보, 보고 싶습니다!) …응? 그러나 무슨 뜻인지 채 이해하기도 전에. (빨리 돌아와주세요!) 라고 외친 차소림은, 이내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도망가고 말았다. “푸.” 그런 차소림을 보고 있자 괜히 웃음이 나왔다. 나는 계속 걸음을 옮기며 수정구를 주시했다. 그후에도 영상에는 여러 클랜원들이 얼굴을 비췄다. 네 다리로 셔플 댄스를 추는 유미. 가마솥을 젓는답시고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드는 비비앙. 보석을 매만지다가 인자하게 웃으며 얼굴을 보이는 영감님. 무표정한 얼굴로 아기를 보는 원혜수와, 그런 원혜수를 바라보는 우정민과 선유운 등등. 마치 머셔너리 클랜의 일상을 찍어놓은 것만 같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한참을 재생하던 영상이 끝난 후 시선을 들자 문득 환한 햇살이 시야에 내리 꽂힌다. 나는 바로 눈을 감았다가 살그머니 떠보았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자 어느새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정말 정신 없이 보고 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응?” 그때, 나는 돌연히 입꼬리가 서서히 사그라지는걸 느꼈다. 하지만 웃은 기억은 없는데. …그렇다 함은, 조금 전까지 내가 웃고 있었다는 소린가? 나도 모르게? 나는 멍한 기분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복잡하기 짝이 없던 머리가, 어느덧 예전처럼 편안히 가라앉아있다. 주말 내내 제갈 해솔 때문에 고민했던 것이 거짓말이라 생각될 정도로, 삽시간에 심신이 안정된 것이다. 바로 이 수정구를 본 이후부터. 마치 무언가에 홀린듯한, 아니 홀가분한 기분이랄까. 이윽고 하늘을 올려다보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과 중천으로 떠오르는 해가 보인다.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가,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방금 본 영상을 하나하나 회상해보자 또다시 절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갑작스럽게 질박하면서도 끈끈한 무언가가, 내면을 따뜻하게 채워오는 게 느껴졌다. ============================ 작품 후기 ============================ 제갈 해솔에 관해 많은 의견을 내주셨네요. 그리고 수현의 내면에서도요. 아마 작중 수현의 입장과 독자 분들이 보시는 관점의 차이는 있을 겁니다. 아니 왜 저렇게 동요하지? 제갈 해솔이 그렇게 대단한 사용자인가? 사실 말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그냥 아껴두도록 하겠습니다. 차후 내용을 통해 드러내는 게 저도, 독자 분들도 바라는 것이라 생각하니까요. 하하하. 또한 이미 어떻게 끝낼지 구상이 잡혀있는 만큼, 그냥 그대로 이어가는 게 정답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아마 이번에는 여러분들도 끝까지 어떻게 될지 예상하지 못하실 겁니다. :) 사용자 아카데미 파트는 현재 구상으로는 약 6회~8회 정도 남았습니다. 제갈 해솔과 한소영에 관한 내용을 마무리 지으면, 그대로 후반 주차까지 쭉 진행할 예정입니다.(1, 2회 오차는 있을 수 있습니다.) 아. 그리고 어제 후기에 적었던 대로, 휴재에 관해서 다시 말씀 드릴게요. 메모라이즈는 4월 12일(토요일), 4월 13일(일요일), 4월 14일(월요일)은 제 개인 사정으로 휴재를 합니다. ㅜ.ㅠ 그리고 4월 15일(화요일)부터 다시 업데이트가 됩니다. 다만 그날이 일을 마치는 날이라, 업데이트가 늦어질 수 있습니다. 그 점 깊은 양해를 구합니다. _(__)_ 그럼 4월 15일(화요일)에 다시 만나요! 0524 / 0933 ---------------------------------------------- 혹시 갈림길이라고 아세요? 정말 신기한 일이지 않은가. 고작 수정구 영상 하나만 봤을 뿐인데 이렇게나 심신이 안정되다니. …정말로,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떠한 힘이 작용한 걸까? 불현듯 조금 전 총 교관 실에서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항상 클랜 로드를 믿고 있으니까요.' 그 말이 이제야 조금이나마 와 닿는 듯싶었다. 잠시 후. 나는, 양손을 들어 두 뺨을 힘껏 쳤다. 짝! 살이 부딪치는 소리에 이어 볼이 후끈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어찌나 세게 쳤는지, 얼얼하다 못해 얼큰한 기운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효과는 확실했다. 흐린 안개가 서서히 걷혀가는 것처럼, 복잡했던 머릿속이 점차 가라앉는 게 느껴진 것이다. 그렇게 한결 맑아진 머리로 나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제갈 해솔과의 예상치 못한 첫만남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건 사실이다. 거기서 사용자 정보를 확인했을 때 그 충격은 더욱 배가됐고. 그뿐만이 아니다. 1회 차 시절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수송 마법의 개발과 비등비등했던 공터에서의 마력 겨루기. 그런 것들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제갈 해솔은, 사용자 공찬호와는 달리 자신의 특별함을 입증했다. 아마 그래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예전의 제갈 해솔이 어땠는지. 그리고 지금은 얼마나 특별한지. 또 앞으로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커나갈지. 나는 제갈 해솔이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친 후, 차후 무시무시하게 성장할 것을 두려워했다. 1회 차의 망령에 사로잡혀, 나도 모르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상상한 것이다. 한 마디로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건대 그것은 기우였다. 아니. 적어도 아직은 기우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지금은 1회 차가 아니니까. 2회 차를 새롭게 시작하며 많은 것들이 변화했다. 녹화용 수정구에서 보았듯이 나는 이제 더는 혼자가 아니다. 나를 믿고 따라오는, 머셔너리 클랜원이라는 사용자들이 있다. 그것도 쉰 명이 넘는 정도로. 그에 반해 제갈 해솔은 이제 갓 홀 플레인에 들어온 상태이지 않은가. 물론 사용자 정보가 범상치 않음은 인정한다. 지닌바 재주가 높다는 것도 입증됐고 잠재성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다. 말인즉슨, 결국에는 품을 수 있느냐, 없느냐. 혹은 살리느냐 죽이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렇게 간단히 정리할 수 있는 걸 나는 도대체 왜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한 걸까. 이렇게 된 이상 이야기는 확연히 달라진다. 우선 처음에 아무 생각 없이 제갈 해솔을 죽이려 했던 것은 반성. 예전에도 생각했지만 무조건 죽이는 것이 능사는 아니니까. 더구나 1회 차에서 제갈 해솔이 충성을 바쳤던 유현아는 지금 죽고 없어진 상태이다. 그런 만큼, 오히려 이건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더 없는 확실한 기회 말이다. 이제 제갈 해솔이 어느 누구에게 갈지는 알 수 없다. 경우의 수는 굉장히 무궁무진하다. 거기서 만에 하나라도 내가 품을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가히 최고의 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용자 정보는 두 말하면 입이 아프고, 죽기 전까지 족히 수백 번이 넘었을 영입 제의를 받았음에도 넘어가지 않았다는 것도 높이 살만하지 않은가. 물론 제갈 해솔이라는 사용자를 떠올려보면, 마냥 장밋빛 미래만을 상상할 수는 없다.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야 한다. 즉 내가 제갈 해솔을 영입하지 못하는 경우. 사실, 나는 제갈 해솔과의 첫만남에서 굉장히 기묘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교육생치고는 당돌하기 짝이 없는 태도와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화사한 웃음. 흡사 잡힐 듯 말 듯한, 그러나 언제라도 사라질 것 같은 기분? 말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밤이 늦었잖아요. 그리고 생활 교관님이라면 모를까. 교육 교관님이 밤늦게 교육생들 데리고 오면, 누구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보면 볼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미묘하다. 흡사 자신이 활동할 클랜은 자신이 고른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쪽의 의중이야 어찌됐건 아무래도 좋다. 조금 미안할 얘기일지는 모르지만, 선택권은 제갈 해솔이 아닌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니까. 아무튼, 가장 중요한 건 제갈 해솔이 내게 오지 않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 사실 그러한 경우는 상황이 조금 애매해진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은 있다. 이제 갓 홀 플레인에 들어온 병아리쯤 흔적도 없이 살해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뭐, 상대가 제갈 해솔이라면 적당히 미지근한 죽 먹기 정도는 될 수 있을지도. 좌우간 그렇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 나는 있는 힘껏 기지개를 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여전히 맑고 푸른 날씨였다. 흘러가는 하늘을 보고 있자 돌연 싱거운 웃음이 새어 나온다. 아마 주말 내내 고민한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 신재룡에게 들었듯이, 오늘 오후 일정에는 정신 교육이 잡혀있었다. 그것도 일부만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닌, 마력 재능 계열 교육생 전원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었다. 그 말은 오늘은 제갈 해솔도 내 교육에 들어온다는 소리였다. “후.” “오라버니. 들어가세요. 오늘도 본때를 보여주시라고요!”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자 쫄랑쫄랑 따라온 안솔이 강의실 문을 열어주었다. 눈을 한껏 부라리고 있는 게 교육생들이 나를 찔렀다는 말에 어지간히 분노한 듯싶었다. 나는 안솔을 향해 가볍게 웃어준 후 차분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강의실은 무척 조용했다. 뜻 모를 고요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주변을 돌아보니 약 200명은 돼 보이는 교육생들이 입을 꽉 다문 채 나를 주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 바로 왼쪽 창가에 제갈 해솔이 앉아있었다. 모두가 긴장한 가운데 오직 홀로 태연한 얼굴. 그러다 돌연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안녕하세요.' 입 모양을 그리며 살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내가 지긋이 보고만 있자, 이내 눈으로 가만히 웃어 보이며 한 손을 살랑살랑 흔들기까지. 나는, 그런 제갈 해솔을 마주보며 픽 웃어주었다. 사실 아직도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번처럼 다짜고짜 검에 손을 대는 건 사양이다. 보아하니 관찰이라는 성향이 매우 강한 것 같은데,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니까. 좌우간 내가 상대방을 읽을 수 없다면, 상대방도 나를 읽을 수 없게 만들면 된다. 이내 눈에 이채가 스치는 제갈 해솔을 뒤로한 채, 나는 중앙의 단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늘 정신 교육 교관으로 들어온 김수현입니다. …뭐, 몇몇 분들은 반갑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요.” 그렇게 말하며 한쪽을 주시하자 시선을 피하는 스무 명의 교육생들이 보인다. 저번에 나한테 기합을 받은 교육생들이었다.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눈을 질끈 감는 게, 속된 말로 “X 됐다.”라는 얼굴들이다. 사실 예전 같았으면 시작부터 기합을 주었겠지만, 이번에 그럴 생각은 없었다. 우선 지금 보이는 태도들이 나름 괜찮았기 때문이다. 물론 찌른 게 괘씸하다고는 하지만 그저 자그마한 반항 정도로 생각하면 그만이었고. 그리고 그 무엇보다, 이번 영입 전쟁에서 나를 젖히려는 다른 교관들의 의도에 놀아날 생각은 없었다. 하여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라지만, 우선 저번의 기합 사건에 저 또한 심심한 유감의 뜻을 표시하겠습니다.” 그러자 번쩍 눈을 뜨는 교육생들. 그들의 얼굴에 혹시나 하는 빛이 떠오른다. “사실 오늘 교관으로 들어온 것도 다른 교관들의 부탁을 받아서였습니다. 이번 교육생들. 특히 마력 재능 계열 교육생들의 태도가 근래 개판이라는 소리가 많아서요. 그런데 본인들이 통제하는 게 여의치 않아, 저보고 단단히 혼 좀 내달라고 하더군요.” 이렇게 말하면 어느 정도는 다른 교관들의 탓으로 돌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개인적으로 하는 만큼, 보이는 만큼 대우해준다는 생각을 가진 터라. 그리고 오늘 여러분들의 태도는 아주 훌륭하거든요. 사실 이 정도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우리 교관들이 여러분들을 존중해주는 만큼, 여러분들도 우리를 존중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어렵지는 않지요?” 일단 틀린 말은 아닌지라 여러 교육생들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게 보인다. 그 와중, 문득 한 앳된 청년이 눈에 밟혔다. 영혼 명령자라는 시크릿 클래스를 가진 교육생이다. 저번에 까불까불 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오늘은 한쪽 구석에 처박혀 한껏 주눅든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보아하니 저번에 같이 수업 받던 교육생들과 한참이나 떨어진 자리인데…. 혹시 그때 일로 따돌림을 당하는 건가? 속으로 혀를 차며, 나는 잔잔히 말을 이었다. 이제 달래는 건 이쯤 해두고 정말로 교육에 들어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럼 바로 교육을 시작하죠. 아마 여러분들도 지금껏 많이 들어봤을 겁니다. 우리 교관들은, 여러분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주는 존재가 아니란 걸.” 교육생들이 조금은 멍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어쩌면 진부한 말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이나 중요한 이야기였다. “홀 플레인은 게임이 아닙니다. 목숨이 하나에 불과한, 죽으면 그대로 끝나는 하나의 현실이죠. 그리고 교육생들은 사용자 아카데미를 수료한 후, 이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에서 기약 없는 활동하게 됩니다. 어쩌면 일생을 여기서 살아야 될지도 모르지요.” 일생이라는 말을 꺼내자 몇몇의 얼굴에 암담한 빛이 그늘지는 게 보였다. 이제야 조금은 심각해지는군. “이 홀 플레인 세상은 사용자들의 사망률은 굉장히 높습니다. 통과의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어요. 당장 이 사용자 아카데미를 벗어나, 어느 도시든지 밖으로 나가는 순간. 그 누구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말인즉슨, 여러분들의 목숨이 보호받는 기간도 이제 약 4주 남짓이라는 소리입니다.” “…….” “거짓말처럼 들리십니까?” “…….” “안타깝지만, 사실입니다. 지금 제가 여러분들의 앞에 서 있는 이 순간에서도, 어디에서 누군가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 교육생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나를 빤히 주시하거나 서로를 번갈아 보기만 할 뿐. 하기야 아무리 적응력이 높다고는 해도, 아직 이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 이상 체감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조금은 화제를 전환하기로 했다. “이번에 들어온 인원이 약 400, 아니 500명 정도 되던가요?” 그러자 예, 하는 힘빠진 대답들이 들려온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저번 사용자 아카데미가 끝났을 때부터 이번 사용자 아카데미가 새로 활성화됐을 때까지, 딱 그 정도가 사망 또는 전력 외 판정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대체 인력으로 여러분들이 들어온 겁니다.” “…저 교관님?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전력 외 판정이라니요?” 그때, 누군가 조용히 손을 들며 물었다. 약간은 허스키한 목소리였으나 들리는 어조로 보아 여성 교육생인 모양. 나는 질문이 들려온 쪽을 올려다보았다. “말 그대롭니다. 사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하나의 가설입니다만…. 전력 외 판정이라는 소리는, 죽지는 않았지만 사용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기능…. 상실이요?” “예. 탐험을 나가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도시를 나서는 순간 여러분들을 습격하려는 무리는 굉장히 다양하거든요. 무작정 죽이려 달려드는 괴물도, 높은 지능을 갖춘 괴물도. 아니면 심지어 같은 사용자도…. 아. 이런 경우는 부랑자라고도 하죠.” “네, 네. 그건 들었어요.” “그렇군요. 아무튼 이 말은, 앞서 말한 적들이 여러분들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음을 뜻합니다.” “다른…. 목적이요? 죄, 죄송해요. 이해를 잘못하겠어요.” 이해를 못하겠다는 말에 나는 팔짱을 끼며 입맛을 다셨다. 하긴 최대한 완곡하게 돌려서 말하기는 했다. 순간 이 얘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들었지만, 그래도 해주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 교육이란 바로 이러한 부분들을 말하는 것이었으니까. “흠. 조금 잔인한 얘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적나라한 예를 들어보죠. 사실 목적 자체는 간단합니다. 사내 같은 경우는 그 자리에서 먹이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별로 쓸 데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여인들의 경우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단도직입으로 말해보면, 수태라는 능력이 있는 만큼 지능을 갖춘 괴물들은 바로 죽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수태라면…. 임신이요? 서, 설마. 괴물의 아이를 배는 경우도 있다는 말씀이세요?” “예. 정답입니다. 탁 까놓고 말해서, 모체 혹은 가축으로 전락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죽을 때까지 괴물의 종족 번식용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전력 외 판정이란 그런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여인으로 태어난 게 비운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마, 말도 안…!” 갑작스럽게 말이 끊겼다. 이후로 정확한 말들은 들려오지 않았으나, 여기저기서 자그마한 비명들이 속속이 터져 나온다. 아무래도 아직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한 얘기를 듣지 못한 모양이다. 아니면 들어도 설마 라고 생각했거나. 이내 웅성거리는 소음이 한층 심해져 나는 책상을 탕탕 치며 소란을 진정시켰다. 교육생들은 곧바로 입을 다물며 내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이윽고 교육생들을 돌아보며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참고로, 방금 얘기는 본 교관의 경험담입니다.” 소음은,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 암울하기 그지없던 정신 교육이 끝난 후. “오라버니. 수고하셨어요.” 곧바로 강의실을 나서자 안솔이 따라붙으며 수건과 음료수를 내밀었다. 나는 두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음료수만 집어 들었다. 내가 방금 링에서 내려왔던가? “으음. 이로서 오늘 오후 일정도 끝났군요. 이제 다음 일정은…. 어디 보자.” 머리를 갸웃갸웃하고 있을 즈음, 안솔이 앙증맞게 헛기침을 하며 허리를 빳빳이 세웠다. 그리고 안경이라도 낀 것처럼 손을 놀리며 기록을 살피기 시작. …아무래도 요즘에는 비서 놀이에 빠진 모양이다. 나는 음료수를 들이키며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없는 기록은 왜 쳐다보냐? 그리고 다음 일정 없잖아.” “아니요. 있어요.” “?” “안솔이라는 사용자를 찾아가서 놀아주는…. 으아앙. 때리지 말아요.” 안솔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머리라도 한 대 쥐어박으려 다가갔는데, 그새 눈치채고 도망간 것이다. 하도 맞다 보니 눈치가 는 걸까. 그렇게 종종종종 도망치던 안솔은 문득 우뚝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리고 정수리에 물음표를 동동 띄우는 게 왜 따라오지 않느냐 말하는 것만 같다. 그런 안솔을 향해 몇 번의 삿대질을 한 후, 이만 몸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저기~. 김수현 교관님~?” 돌연히, 간드러지게 올라가는 목소리가 나를 붙잡는다. 언뜻 시선을 돌리자, 기록 더미를 품에 꼭 안은 채 누군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 교육 정말 인상 깊었어요. 소문대로 말씀 재미있게 잘하시네요. 호호.” 나를 보며 정답게 웃으며 말하는 여인은 다름 아닌 제갈 해솔이었다. 참 잘 웃는 여인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잘 들었다니 다행이네요.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셨죠? 교육은 끝났습니다만.” 그때였다. 문득 누군가 옆으로 찰싹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거친 숨이 들려오는걸 보니 안솔이 도로 달려온 모양이다. 제갈 해솔은 잠깐 시선을 내려 안솔을 보았다가, 이내 나를 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러자 바르게 있던 머리카락이 기울인 쪽으로 사르르 몰리며 찰랑 움직였다. 이윽고 제갈 해솔의 입술이 열렸다. “네. 하지만 정말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러는데…. 몇 가지 질문 좀 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교육에 관한 질문은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으으응~. 이거 어떡하죠. 실은 교육에 관한 질문은 아니에요.” “음? 그러면요?” “약간 개인적인 질문이랄까요? 호호. 실은, 그날 밤에 관련한….” “그, 그날 밤?” 안솔이 흠칫하며 내 허리를 꽉 붙잡는다. 나는 가만히 있으라는 의미로 정수리를 꽉 눌러 내린 후, 차분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거절하겠습니다. 사적인 질문을 받는 건 허용돼있지 않으니까요.” “어머. 너무 매정하세요.” 확실히 생각을 고쳐 먹어서인지 그때와는 다르게 말이 술술 흘러나온다. …기실 그때는 내가 완전 찌질했지. 제갈 해솔을 앞에 둔 채 한 마디도 못하고 어버버거렸으니까. 하지만 이제 더는 아니다. 제갈 해솔은 두려움의 존재가 아닌, 하나의 커다란 먹이였다. “저는 그 말이 더 놀랍군요. 그 부분은 오히려 더 잘 알고 있으실 텐데요…. 아차. 그리고 그 장소는 제가 앞으로 자주 순찰할 터이니, 더는 밤중에 몰래 오지 않으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흐응. 그거 참 아쉽네요.” 그러자 제갈 해솔은 낮은 비음을 흘렸다. 그리고 잠시 후. 웃음이 만연하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어서 눈을 지그시 뜨며 나를 이모저모 살피는 게 흡사 관찰이라도 하는듯한 모습이다. 그 시선을 받으며 나는 미미하게 웃었다. “소용없습니다. 그 눈은 확실히 좋은 능력이기는 하지만, 보이는 것만 보이는 능력이니까요.” “…보이는 것만?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아까와는 다르게 상당히 가라앉은 목소리. 하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는 소립니다. 저항 능력이 있는 사용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역으로 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하하하…. 아. 말이 길어졌군요. 아무튼 교육에 관한 질문이 없다면 이만.”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리려는 찰나. “잠시만요.” 그 순간, 손에서 차가우면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제갈 해솔이 내 손을 잡은 것이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오늘 부로 복귀한 로유진입니다. :) 역시 글은 하루라도 놓으면 안되겠네요. 고작 3일 놓았을 뿐인데 어찌나 이리 어색할까요. 하하하. 기다려주신 독자 분들께는 정말 감사합니다. 웬만하면 자정에 맞추고 싶었는데, 시간이 여의치 않아 집에 돌아와서 적기 시작했네요. ㅜ.ㅠ 그래도 3일간은 정말로 뜻깊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메모라이즈에 관해 많은 생각을 했고, 또 상당 부분 정리할 수도 있었거든요. 우선 이 사용자 아카데미 파트를 어서 끝내고, 그 후를 진행하면서 하나하나 보여드릴 예정입니다. 원래는 남은 회가 한 8회~10회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줄이고 줄여서 6회로 마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만큼 다음 이야기를 빠르게 적고 싶어졌다고 할까요. :D 아무튼 다시 한 번 기다려주신 독자 분들께 감사하며, 오늘부터 다시 열심히 달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0525 / 0933 ---------------------------------------------- Date. 나는 일부러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시선을 반쯤 돌린 순간, 조금이지만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나를 붙잡은 제갈 해솔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다. 끈덕진 눈으로 나를 보고 있되, 입꼬리만 살짝 끌어올린 상태였다. “이런. 깜짝 놀랐습니다.” “어머. 왜요?” “이렇게 대단한 미인이 손을 잡아주는데, 놀라지 않을 사내가 어디 있을까요. 아무튼 손은 이만 좀 놓아주시죠.” “호호. 기분 좋아라. 하기야 제가 좀 예쁘기는 해요. …그런데 지금 이 미인의 손길을 거부하시는 건가요?” 나는 거칠지 않게, 살그머니 손목을 비틀었다. 그리고 “주변에 워낙 미인이 많은 터라.”라 말하며 손을 거두었다. 그러자 제갈 해솔 역시 차분히 손을 떨어트렸다. 문득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윽고 손을 잔뜩 그러모은 제갈 해솔이 입을 열었다. “그럼 다른 질문을 할게요. 혹시 이 세상에 모습이 변하는 마법이라도 있나요?” “있습니다. 다만 일반 마법에서는 배울 수 없는, 매우 고 등급의 마법입니다.” “아하. 그럼 그 마법을 알고 계시나요?” “후후. 글쎄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지체 않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복도를 걸어가자 안솔이 조심스럽게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제갈 해솔은 이번에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이내 저 여인은 누구냐, 그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칭얼거리는 안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방금 제갈 해솔이 던진 질문에 대한 생각이었다. 언뜻 들으면 뜬금없는 질문이라 생각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 의도를 알 것도 같았다. 그 제갈 해솔이 괜히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으니까. 그래. 아마 지금쯤 고개가 갸웃 기울어지겠지. “오라버니. 저 사람 정말 누구에요. 네? 자꾸 머리만 쓰다듬지 말고 말 좀 해주세요.” 안솔은 여전히 칭얼칭얼 조르는 중이었다. 쓰다듬지 말라 해 머리칼을 꽉 잡으며 이리저리 흔들다가, 안솔이 앙앙 우는 소리가 들려오자 퍼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안솔도 방금 봤겠지? 나는 머리를 도리도리 돌리는 안솔의 고개를 바로 한 후 속삭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안솔. 방금 저 교육생은 확실히 봤지?” “흑. 봐, 봤으니까 물어본 거잖아요! 어엉…. 아파아….” “그럼 어때? 저 교육생은 어떤 것 같니?” “아야…. 응? 아까 그 언니요?” 안솔은 바로 울음을 그치더니 바로 고개를 돌렸다. 한두 번 하는 일도 아니라 금방 알아들은 모양이다. 그러나 “어. 어디 갔지?”라는 말이 들려와 시선을 돌리자, 그 말대로 휑한 복도가 눈에 보인다. 제갈 해솔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새 모습을 감춘 건가? 잠시 강의실 앞을 바라보다가, 우리는 다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으응. 아까 보기는 했지만 참 이상한 언니에요.” 이내 안솔이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정수리에 또다시 물음표가 떠오른다. 마침 좋은 기회라 생각해 물음표를 잡으려 손을 내저었으나, 누가 보면 병신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바로 그만두고 말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안솔이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분명 뭔가 이상한 느낌은 드는데…. 드는데….” “…드는데?” “드는데에에에…. 아우. 모르겠어요. 뭔가 머릿속에서 느낌은 있는데, 말로 하려니까 이상하게 힘들어요.” “흠.” 그 기분 알지. 아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형용키 어려운 기분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딱히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나는 어깨를 들먹인 후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또 때릴 거라고 생각했는지 안솔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감히 어딜 도망가냐고 생각하며 나는 힘차게 안솔을 쫓았다. 아니. 쫓으려는 순간이었다. “어?” 갑작스럽게 놀란 듯 안솔이 미약한 소리를 지르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멍해 보이는 얼굴로 앞쪽을 응시했다. 안솔의 시선은 복도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오, 오라버니.” 그렇게 한참을 서 있던 안솔이 곧 돌아보며 어딘가를 가리킨다. “이, 이거요. 이거에요.” “…이거?” “그, 그래요. 이 느낌이었어요.” “이 느낌? 아.” 그 순간 아까 말하기 어렵다던 느낌을 말하는 것 같아, 나는 바로 안솔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복도의 끝에서, 다시 오른쪽과 왼쪽으로 갈라지는 두 개의 복도를. 그것은 갈림길이었다. * 9주차의 교육 일정이 끝나고 개인 정비 시간인 주말이 다가왔다. 이제 이번 주말만 끝나면 10주차로 돌입하게 되며, 교관들 또한 본격적으로 홍보에 들어가게 된다. 금번 사용자 아카데미의 모토가 '교육 주차에는 확실한 교육을, 홍보 주차에는 확실한 홍보를.' 인만큼, 과연 어떤 식으로 홍보를 허용해줄지 자못 궁금한 마음이 일었다. …아마 지금 9주차 주말에 벌어지고 있는 이벤트도, 이번에 색다른 홍보를 예고하는 하나의 일환이라 생각되지 않을까 싶다. “───. ───. ───. Shock Wave, Skid. Combination.” 문득 들려오는 주문 영창 하는 소리. 쿵! “으허허허허허허헉?!” 이어서 바닥이 크게 울리는 소리와 동시에 흡사 호들갑이 담긴 비명이 데굴데굴 구른다. 비명이 구른다는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눈앞의 광경을 보고 있으면 나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눈앞에는 마치 바퀴라도 된 것처럼, 데구루루 구르는 진수현이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중이었다. 그렇게 구르고 구르던 진수현은 결국 경기장을 넘어서 벽에 부딪치고 나서야 구르는걸 멈추었다. 잠시 후, 음성 증폭 마법을 사용한 목소리가 대 강당을 쩌렁쩌렁 울린다. - 이스탄텔 로우. 클랜 로드 한소영 승! 두 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와아아아! 오오오오! 그와 동시에 주변을 가득히 메우는 박수와 환호 소리. 승자인 한소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 넘기고, 패자인 진수현은 분연히 일어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는 않으나, 얼굴이 붉어진걸 보니 패배한 게 꽤나 분한 모양이다. 지금 둘이 저러고 있는 이유는, 오늘이 바로 교관들끼리 서로 전투를 벌이는 이벤트 매치전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처음 갑작스럽게 이 계획이 발표됐을 때는 예상대로 커다란 반향이 일었다. 예상대로 상대적으로 사용자 정보가 떨어지는 교관들이 커다란 불만을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닌 지원자만 받는다는 점과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는 말은, 그런 불만들은 간단히 묵살시켰다. 나야 이미 신재룡에게 들은 게 있는 터라 큰 감흥은 없었고. 결국 중앙 관리 기구에서는 이벤트 매치가 14주차까지 쭉 이어질 것이라 공표했고, 주말이 오기 3일 전부터 참가자를 받기 시작했다. 나 또한 참가할까 생각은 해봤지만 우선 9주차는 넘기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한 번 지켜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9주차 참가 신청이 끝나고 나서, 오늘 벌어지는 이벤트 매치의 개막전은, 바로 한소영과 진수현으로 잡혔다. 사실 한소영이 참가할거라 생각은 못해 조금 놀랐는데, 상대가 진수현이라는 점에서 약간 걱정이 일었다. 진수현이 마법사를 상대로 특화된 사용자라면, 한소영은 대인 전이 아닌 대군 전에 특화된 사용자였기 때문이다.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이벤트 매치가 시작되자마자 진수현은 매섭게 몰아붙였고, 한소영은 간신히 막아내며 연신 밀리는 상황을 그려냈다. 하지만 결국에는 한소영에게 승리가 돌아갔다. 진수현의 패인은 두 가지. 한소영의 노련미가 빛을 발했고, 진수현이 초반의 우세를 너무 과신하고 말았다. 초반의 우세함을 바탕으로 돌려 깎는 식으로 차분히 접근했다면 이겼을 수도 있었을 터인데, 한 방에 끝내려 무리하게 들어가다가 제대로 카운터를 얻어맞은 것이다. 그런 진수현을 보면 확실히 전투 능력은 엄청나지만, 경험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진수현 교관. 부적절한 언어의 사용으로 퇴장 명령을 내립니다. 아직도 중앙에서 고함을 치는 진수현에게 여러 명의 사용자가 달려들었다. 한소영에게 다시 한 번 싸우자고 조르고 난리를 치다가 결국에는 퇴장 명령을 받은 것이다. 이윽고 자기가 알아서 나가겠다며 크게 난동을 피운 진수현은 씩씩 콧김을 내뿜으며 쿵쿵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나 또한 안현과 함께 입구에서 나란히 구경하고 있던 터라 당연히 마주칠 수밖에 없었고, 나를 바라본 진수현은 순간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혀, 형?!” “오.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아, 아니. 이게 아니지. 처음부터 보고 계셨던 거예요?” “당연하지. 이 좋은 구경거리를 놓치려고?” 그러자 눈이 화등잔만해진 진수현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후다닥 달려오더니 나를 득달같이 붙잡는다. “으, 응? 왜, 왜 이래?” “혀, 형! 그, 그게 아니라요! 아 이건 진짜 이길 수 있었는데, 저 여자가 엄청 치사하게 나왔다고요! 보셨죠? 제가 처음에 엄청 우세했잖아요! 그런데…!” “그래 그래. 나름 아까웠어. 그래도 결과에는 승복을 해야지.” “아 분해서 그렇죠, 분해서! 진짜 치사 빤스 개 빤스…!” 진수현은 한소영을 삿대질한 채 침까지 튀겨가며 떠벌렸다. 그러자 갑자기 저 삿대질하는 손을 콱 부러뜨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 진수현 교관. 10초 내로 퇴장하지 않을 시 강제 집행에 들어가겠습니다. 신재룡의 음성이 다시금 대 강당을 울렸다. 정말 어지간히도 분했는지 한바탕 대거리를 하려던 진수현은, 머리를 번쩍 들며 벌컥 화를 냈다. “아 나가면 되잖아요! 나가면! 앙?! 진짜 치사하고 더럽네!” 과연 누가 더 치사하고 더러운 걸까. 이어서 “아무튼 형! 이번 경기는 제가 이긴 거예요!”라는 희대의 개소리를 지껄인 진수현은, 곧바로 문을 박차며 나가버렸다. 그렇게 잠깐 조용해진 사이, 가만히 구경만하고 있던 안현이 혀를 쯧쯧 차며 머리를 돌린다. “와. 진짜 어리네. 쯧쯧.” …뭐? “형님. 쟤가 바로 진수현이에요? 그…. 형님이 영입하려는?” “…어.” “아이고 형님. 제가 정말 진심으로 조언 드리는데, 이번만큼은 사람 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 나름 실력은 괜찮아 보이지만 정신이 완전히 어리잖아요.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저게 뭐예요.” “…….” 순간 어이가 없는 기분이 들어 나는 코웃음과 함께 안현을 응시했다. 지금 누가 누구보고 뭐라는 거야? “그래. 꼭 누구를 보는 것 같지?” “…왜 그렇게 게슴츠레 저를 보십니까. 어험.” 안현은 헛기침을 하며 다른 곳을 응시했다. 그리고 흥얼흥얼 딴청을 피우기 시작. 그래. 찔리는 게 있겠지. “그나저나 형님. 이스탄텔 로우 로드는 정말 대단하네요. 볼 때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봐봐요. 저것 좀 보세요.” 안현이 과도하게 호들갑을 떨며 중앙을 가리킨다. 화제를 돌리려는 게 다분히 보였지만, 그래도 한소영이 더 중요했기에 나는 기꺼이 시선을 돌려주었다. 그러자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리는 한소영을 볼…. 응? 방금 여기를 보고 있었던 건가? 아닌가? 아무튼. 진수현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가만히 교육생들이 환호를 받는 한소영은 정말로 아름답다. 볼 때마다 색다른 매력이 넘치는 게,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이 세상 사용자…. 아니. 사람 같지가 않다. 그렇게 가만히 한소영을 바라보고 있자 문득 내 옆구리를 쿡 찌르는 감촉이 느껴졌다. 흘끗 시선을 돌리니 안현이 장난 가득한 얼굴로 낄낄거리는 게 보였다. “형. 뚫어져라 쳐다보시네요. 그러고 보니 내일 주말에 이스탄텔 로우 로드와 만나신다 매요? 좋으시겠어요.” “좋기는. 이제 곧 홍보 주차에 들어가니까 여러 가지 상의할게 있어서 만나는 거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야.” 한순간 가슴이 뜨끔하기는 했지만, 나는 재빠르게 둘러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놈은 이 소리를 또 어디서 들은 거지. “에~이. 좋으시면서.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좋으시죠? 에헤헤.” “거참. 아니라니까 그러네. 왜. 너도 관심 있냐?” 그러자 삽시간에 정색한 안현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요. 저는 저런 여자 싫어요. 매력이 넘치는 건 인정하는데, 제 스타일은 아닙니다.” 이건 좀 의외인데.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괜찮은데, 감히 한소영 님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해? 화를 내야 할지 안도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자, 돌연 안현이 한소영이 있는 쪽을 바라본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따라가자 또다시 홱 고개를 돌리는 한소영을 볼 수 있었다. 아니 저 님은 왜 자꾸 고개를 돌리는 거야. 신경 쓰이게. 안현이 말을 이었다. “딱 보면 견적 나오죠. 저런 여자는요 매력 빼고는 볼게 없어요. 사실 연애하면 표현이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저렇게 무표정하고 차가운 철벽으로 무장한 여자는, 솔직히 말해서 아니올시다 거든요. 엄청 피곤합니다. 겪어봐서 알아요.” “그럼 네 이상형은 표현을 잘하는 여인인가 보군.” 안현은 그렇다는 듯 끄덕끄덕 하다가, 문득 심각한 표정을 짓고는 빠르게 머리를 젓는다. “아, 아니요. 그래도 너무 심한 표현은 부담되더라고요…. 뭐든 적당한 게 좋지요. 적당한 게.” 적당히 라. “으음. 뭔가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한데.” 순간 절로 남다은이 머릿속으로 떠오른다. 정확히는 나와 관계를 가질 때의 남다은이. '아아! 좋아요! 수현 님! 수현 님의 XX가 제 XX에 들어오고 있어요!' '나, 남다은. 부탁하는데 제발 관계 중에 그런 표현은….' '아아아아! 시, 싫어! 싫어어어어어! 이렇게 좋은걸 어떻게 참으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더, 더…!' '아. 제, 제발 그만 좀….' …그 순간 적당한 표현이라는 말이 심히 공감돼 나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침대에서의 남다은은…. 아. 정말 생각하기도 창피하다. 한 번 하고 나면 다음 날 아침 서로 얼굴을 보기도 민망할 정도랄까. “후.” “에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안현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갑작스럽게 내려앉은 꿀꿀한 분위기를 전환하려는지, 안현이 억지로 밝은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렇죠? 뭐, 사실 이건 말하기 좀 애매한 부분이니까 넘어갈게요. 개인 취향의 차이도 있으니까요. 아무튼.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조금 더 말해보면, 저는 포니테일이 어울리는 여자가 좋더라고요. 형은 포니테일 어때요?” “포니테일? 말총 머리?” “예. 그런 여자 있잖아요. 이마 시원~하게 드러내고, 편한 옷에, 긴 머리를 예쁘게 묶어서 늘어뜨린 여자요. 제가 예전에 도서관에서 그렇게 공부하는 여자를 본 적이 있는데, 그렇게 가슴이 떨릴 수가 없더라고요.” “호.” 평소라면 이런 시답잖은 얘기는 금방 끊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안현의 이야기가 맛깔 나게 들려온다. 한소영을 봐서 그런가? 나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다. 한소영과 함께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상상을. 안현의 말마따나 시원하게 드러난 이마에, 편한 옷에, 긴 머리를 말끔하게 묶은 한소영. 그런 한소영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절로 머리가 끄덕여진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거 괜찮네. 아니. 아주 좋을지도. 포니테일.” “헤헤. 그렇죠? 역시 형이랑은 뭔가 통하는 게 있다니까요.” 그러자 안현 또한 헤프게 웃으며 나를 따라 머리를 끄덕였다. * 9주차 주말 첫날을 뜨겁게 달구었던 이벤트 매치가 끝난 후. “수고하셨어요. 클랜 로드.” 한소영이 숙소로 돌아오자 같은 숙소를 사용하는 여인이 공손하게 맞이해주었다. 한소영은 예의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자리에 얌전히 몸을 앉혔다. 그리고 앞에 수정 거울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피기까지. 그런 한소영을 보던 여인은 가까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클랜 로드. 오늘 이벤트 매치 승리하신 거 축하 드려요.” “응. 고마워.” “헤헤. 저도 봤는데 정말 아슬아슬하더라고요. 그런데 클랜 로드는 어떠셨어요? 그 진수현이라는 교관, 보기보다는 실력이 있는 것 같던데.” “글쎄. 별로?” “에이. 솔직히 초반에 조금 밀리셨잖아요.” “조금이 아니라 많이 밀렸지.” “…네?” “일부러 밀린 거니까.” 툭툭 끊어서 말하는 말투. 거기다 자신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하는 태도에 여인은 쓰게 웃었다. 한소영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도저히 감히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반듯하게 깎인 얼음 덩어리를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처음에 어찌어찌 운 좋게(?) 수행인원으로 선발되었을 때는 마냥 설렜다. 존경해마지 않는 한소영과 같은 방을 쓰는 영광을 누리게 됐으니까. 하지만 막상 같은 방을 사용하니 신경이 이만저만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 그런가요? 호호. 아. 피곤하신 거 같은데. 음료라도…?” “됐어. 필요하면 내가 꺼내다 마실게. 그런 것 까지는 신경 쓰지마.” 이렇게. 사실 한소영이 딱히 뭐라고 한 것도 아니지만, 자신도 모르게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하고 있다고나 해야 할까. 그런 것들이 10주차 동안 쭉 이어지니 스트레스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리라. 그렇게 생각한 여인은 우물쭈물하며 걸음을 물렸다. 그때였다. “잠깐만. 소민아.” 돌연히 한소영이 여인의 이름을 불렀다. 잠시 나갔다가 밤이 되면 돌아오자 생각하던 소민은 깜짝 놀라 걸음을 정지했다. “네, 네?” 이내 떨떠름히 앞을 주시하자 이리저리 머리를 매만지는 한소영을 볼 수 있었다. 한소영은 한 손으로는 이마를 가리던 앞머리를 걷어내고는, 길게 늘어뜨린 뒷머리를 남은 한 손으로 그러모았다. 그 상태로 거울을 이모저모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돌리며 소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요히 입을 열었다. “어울리니?” “…녜?” 일순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와 버리고 말았다. 소민은 황급히 입을 가렸다. 그러나 그에 아랑곳 않고, 한소영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혹시 이상하지는 않아?” “네, 네네네네. 아, 아니 아니. 어, 어울려요. 매우, 엄청, 굉장히 잘 어울려요.” 한순간 당황하기는 했지만, 소민은 재빠르게 동의할 수 있었다. 사실 정말 자세히 보고 말한 거라기보다는, 반사적으로 말한 것에 불과했지만. 좌우간 대답이 어찌됐든, 한소영은 “다행이네.” 라고 중얼거리며 긴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럼 있잖니….” 이번에는 도대체 무슨 말이 나올까. 소민은 침을 꼴깍 삼켰다. 괜히 긴장되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다시 한 번 거울을 유심히 살핀 한소영은 재차 시선을 흘끗 돌리며 말했다. “머리 묶는 거 있으면 빌릴 수 있을까? 내일 하루만.” 그런 한소영의 얼굴은 어느새 엷은 발그스름한 색조를 띠고 있었다. 소민은 입을 쩍 벌렸다. ============================ 작품 후기 ============================ 하하하. 너무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원래 예정돼있던 부분에서 몇 가지 삭제를 한다는 뿐이지, 내용상 꼭 필요하거나 많은 독자 분들이 원하신다고 생각하는 부분도 그럴 생각은 없어요. 예를 들면 이번 회 같은 경우는 진수현과 한소영의 전투 내용을 생략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또한 제 전개 속도가 무척 느린 편이라, 한 회마다 용량을 추가로 담는 것도 고려하는 중입니다. 완급은 제가 충분히 고민하며 조절해볼게요. _(__)_ 음.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요. 독자 분들은 메모라이즈 초반 부분에서 꼭 일러스트로 나왔으면 하는 부분이 계신가요? 정확히는 초반 소환의 방 때부터 뮬을 떠날 때 부분까지요. 예를 들면 김수현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비비앙이라던지, 등등 말이에요. 혹시 인상 깊었던 부분이 계시면 코멘트로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0526 / 0933 ---------------------------------------------- Date. 서늘한 아침이었다. 밤중에 비 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렇게 많이 내리지는 않은 것 같다. 이따금 창틀에서 한두 방울 뚝뚝 떨어지는 정도? 이 정도면 가히 나쁘지는 않은 날씨라 생각하며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그 어느 날보다 세심한 세안과 어젯밤 고심해서 골라놓은 옷을 걸친 후. “형! 오늘 파이팅 입니다!” “시끄럽다. 인마.” 주먹을 번쩍 올리는 안현을 뒤로 한 채 나는 숙소를 나섰다. 마침 바람도 알맞게 불어와 생각보다 기분 좋은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오늘은 교육 주차의 마지막 주말이며 동시에 한소영과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다. 아마 만남 자체는 몇 주 전에 약속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동안 각각의 사정으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마침 홍보 주차를 앞두고 좋은 구실 거리가 생겨 다시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어렵사리 말을 꺼낸 것에 비해 '좋아요.' 라고 흔쾌히 허락해준 한소영을 떠올리며,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렀다. 반들반들 하면서도 길쭉한 것 하나가 잡힌다. 원래는 저번 용이 잠든 산맥에서 얻은 성과 중 하나인 코델리아를 선물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소영의 성격상 갑작스럽게 이런 선물을 주면 절대로 받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우선 이런 자그마한 선물로 부담을 없앤 다음, 나중에 익숙해졌을 때 건네는 게 받을 확률이 더 높으리라. 애당초 따로 챙겨놓은 만큼 이제야 줄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가벼운 걸음으로 복도를 돌았다. 약속 시각보다 조금, 아니 상당히 일찍 나오기는 했지만 기다림 또한 하나의 재미 아니겠는가. 그러나 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 나는 매우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기다림의 재미는커녕, 오히려 한소영이 약속 장소에 먼저 나와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한소영의 모습을 보았을 때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앞머리를 넘겨 시원하게 드러낸 이마와 깔끔하면서도 야무지게 묶어 올린 머리카락. 머리끝은 잘 정돈된 꼬리처럼 얌전하게 늘어트렸다. 거기다 다리에 착 달라붙어 다리맵시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상앗빛 바지와 살그머니 드러낸 발그스름한 복사뼈. 그리고 햇살을 받아 새하얀 빛을 반사하는 헐렁해 보이는 셔츠는, 산뜻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오죽하면 내가 아는 한소영이 맞나 헷갈릴 정도로 색다른 자태였지만, 그 모습조차도 본래의 카리스마와 조화롭게 섞여 들어가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흡사 유현아와 한소영을 절반씩 섞어놓은 듯한 모습이랄까. “머셔너리 로드?” 기척을 느꼈는지 한소영이 나를 부르며 차분히 몸을 돌린다.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어, 나는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호흡을 추슬렀다. …문득 혹시 시간을 착각한 게 아닐까 걱정이 일었다. 그러나 확인해본 결과, 약속 시간은 아직 30분도 넘게 남은 상태였다. *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후 나와 한소영은 곧바로 입구를 나섰다. 그리고 환한 햇살이 비추는 사용자 아카데미 내 거리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물론 서로 아무 말도 않고 걸은 게 아니라 적당한 이야기는 나누면서. 사실 이렇게 한소영과 만난다고 해봤자 갈 수 있는 거리나 이야기 주제는 한정돼있다. 애당초 서로 정답게 앉아 사랑을 속삭이는 사이도 아닐 뿐 더러,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가봤자 어디를 가겠는가. 그저 각자의 입장이 있는 만큼 꼭 필요한 이야기만을 나눌 뿐. 하지만 그래도 좋다. “그때 한 교육생이 그러더군요. 갑자기 손을 들더니 저보고 이스탄텔 로우 로드와 어떤 사이냐고 묻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렇군요. 실은 저도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그래도 참아야 한다고 생각해 적당히 무시해왔는데, 그게 능사는 아니었나 봐요.” 한소영은 조용히 내 말을 경청해주었고, 간간이 자신의 의견이나 이스탄텔 로우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래.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해봤자 용이 잠든 산맥의 공략이나, 용병 아카데미 설립이나, 마력 재능 계열 교육생들과 있었던 사건들뿐이라고 해도. 이것뿐이라도, 지금의 나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행복이다. 이렇게 나란히 서서 거리를 걷는 것은…. 1회 차에서 한소영이 죽은 이후,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여러 일 중 하나였으니까.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한참을 걷고 있자, 어느 순간 서로 입을 여는 횟수도 상당히 줄어든 게 느껴졌다. 이건 하나의 신호였다. 이야깃거리가 떨어진 게 아닌,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무언의 신호. 말인즉슨, 홍보 주차에 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자는 소리였다. 이내 꼭 맞대어진 한소영의 입술을 보며 나는 먼저 말문을 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 보니 사용자 아카데미도 내일부터 10주차로 돌입하죠?” “네.” “그럼…. 흠. 그냥 거두절미하고 묻겠습니다. 이스탄텔 로우에서는 금번 교육생들 중 누구를 염두에 두고 계신지요.” “음.” 한소영은 미약한 침음을 흘렸다. 그리고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듯한 얼굴. 그 얼굴을 멍하니 보고 있자, 돌연 하늘을 향하던 눈동자가 흘긋 나를 주시한다. 나도 모르게 재빠르게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잠시 후, 어딘가 모르게 끈끈하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척 달라붙는다. “한 두세 명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요. 전부 마력 재능 계열 교육생들이죠.” “오. 우리와 거의 같으신데요. 머셔너리 또한 마력 재능 계열로 두 명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은 아니군요.” “아직 단정하기는 이르다고 생각됩니다만. 혹시 어느 교육생들을 생각하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스탄텔 로우와의 영입 전쟁은 최대한 피하고 싶어서.” 한소영은 도로 고개를 내렸다. 끝을 알 수 없는, 한없이 깊어 보이는 두 눈이 나를 응시한다. “이번 시크릿 클래스로 들어온 교육생과 김희철 교육생. 그리고 제갈 해솔이라는 교육생이에요.” 시크릿 클래스와 김희철. 그리고…. 제갈 해솔? “제갈 해솔이요?” 깜짝 놀라 큰 목소리로 되묻자, 한소영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혹시 그 교육생이 겹치나요?” “…으음.” “괜찮아요. 아무튼 겹친다는 게 불행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으로 느껴지네요.” “예?” “머셔너리 로드가 찍었다는 건, 적어도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말이니까요.” “하, 하하.” 한소영의 말은, 여태껏 내가 영입한 사용자들이 차후 모두 좋은 성장과 괜찮은 활약을 보였다는 소리였다. 한순간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떠오른다. 제갈 해솔의 공식적인 성적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다. 그러할진대 설마 한소영이 영입을 생각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갑작스럽게 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는 어째서 제갈 해솔의 영입을 생각하신 겁니까? 그 교육생의 성적이 썩 좋지는 않을 터인데.” “글쎄요. 그냥 감이라고 할까요?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니까요.” 감이라. 사정을 모르는 사용자가 들으면 일부러 두리뭉실하게 말한다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제 3의 눈이 있는 만큼, 한소영이 말한 감의 정체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소영의 사용자 정보를 보면 초감각이라는 능력이 있다. 초감각은 물리적 감각 기관의 도움 없이 주변 환경의 세세한 변화를 인지해, 마음을 통해서 얻는 정보의 획득을 일컫는다. 생물, 무생물을 가리지 않고 굉장히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능력이라 어떻게 보면 제 3의 눈보다 부러운 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마 EX 랭크였었지? 아마 한소영이 제갈 해솔을 영입하려는 건 초감각이 연관돼있을 가능성이 높다.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후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이것 또한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지금껏 나는 제갈 해솔을 영입하지 못하면 살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누구도 영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반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소영이 제갈 해솔을 영입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을 수 있다. 머셔너리와 이스탄텔 로우는 현재 공방 동맹을 맺은 명백한 우방 클랜이다. 그렇다면. 제갈 해솔이 이스탄텔 로우로 가면 오히려 도움이 되면 되었지 최소한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 문득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너무 오래 생각하고 있던 모양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정리할 수 있어, 나는 한소영을 마주하며 말했다. “그러면 이렇게 하죠.” “……?” “우리 두 클랜에 한해서, 제갈 해솔의 영입은 우선 이스탄텔 로우에 넘기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이스탄텔 로우에서 실패한다면, 그 다음에 머셔너리에서 시도해보는 것으로요. 어떠신지요.” “그 말씀은. 양보하신다는 말씀인가요?” 한소영의 목소리가 쿡 찌르는 것처럼 파고 들어온다. 나는 천천히 어깨를 들먹였다. “어떻게 생각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이스탄텔 로우와 괜한 걸로 다투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괜찮아요. 이것 또한 선의의 경쟁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오해를 하신 모양이군요. 홍보에서는 양보할 생각이 없습니다. 기회를 먼저 드리는 건 맞지만, 선택권은 어디까지나 교육생한테 있지 않습니까?”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그렇다면 거부할 이유가 없죠.” 그러자 빼는 것도 없이 바로 받아들이는 한소영. 애당초 그런 성격이 아니기도 하지만, 그만큼 제갈 해솔을 영입하고 싶다는 뜻이리라. 그때였다. 약간 민감할 수도 있는 문제를 서로 기분 좋게 매듭지었다고 생각한 찰나. “머, 흠. 머셔너리 로드.” “예?” “호, 호의는 감사….” “……?” 별안간, 무표정 일변도를 달리던 한소영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 여전히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입술이 실룩, 움직이더니 곧 부르르 떨기까지. 마치 움직이지 않는 안면의 근육을 억지로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느닷없이 왜 이러는 걸까. 그렇게 뜻 모를 기분에 눈만 깜빡이고 있을 무렵. 실룩실룩 움직이던 입꼬리가 별안간 실그러지게 움직이며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망치에 얻어맞은 기분으로 한소영을 응시했다. 어설프면서 엉성하기 그지없었지만, 그것은 확실히 미소라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말인즉슨, 한소영이 나를 보며 웃어준 것이다. “이, 이스탄텔 로우 로드?” 한소영의 미소는 1, 2회 차를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다. 도저히 믿지 못할 기분에 되물은 순간, 한소영의 미소는 삽시간에 사그라졌다. 이어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오, 오래 걸었더니 다리가 아프네요. 잠시 어디 앉고 싶어요.” 그리고 홱 고개를 돌리더니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한소영을 시선만 돌려 쫓다가, 아차 싶어 주머니에 손을 찔렀다. 그리고 길쭉한 것을 꽉 부여잡은 채 황급히 한소영을 쫓았다. * 뚝. 하늘에서 빗방울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새벽 중 약한 비가 내리다 그쳤는데, 또다시 내릴 조짐인 모양이다. 이윽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무수한 빗방울들이 후드득후드득 땅을 때리고, 건조한 지면에 살금살금 얼룩이 지기 시작한다. 이내 빗방울이 예쁘게 묶은 머리칼을 적시고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으나, 한소영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급할 것 없다는 양 천천히 거리를 걷는다. '머리카락이 기신만큼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약간의 마법 처리도 해놓았으니 편리하게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 한소영의 손에는 새하얗고 길쭉한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그것은 빗이었다. 방금 헤어진 김수현이 선물한 것으로, 저번 용이 잠든 산맥의 성과 중 용의 뼈로 만든 나름 특별한 빗이었다. 거기다 솜씨 좋다고 소문난 머셔너리 클랜의 대장장이가 세심하게 세공을 한 터라, 여인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탐낼만한 아주 예쁜 빗이다. 오늘 한소영은 김수현과 만남을 가졌다. 물론 그것은 남녀간의 데이트가 아닌, 클랜 로드간의 공식적인 만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재미있을 수도, 달콤할 수도 없는 만남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의미 없느냐고, 지루했냐고 물어본다면 한소영은 자신 있게 아니라 말할 수 있었다. 오히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나 할까. 비록 딱딱한 업무 이야기만 오고 간 건 사실이지만, 한소영으로서는 김수현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것은 바로 한소영의 능력 중 하나인 초감각에 기인한 것이다. 불현듯 한소영의 맞은편에서 한 무리 교육생들이 나타났다.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를 피해 빠르게 달려오다가,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한소영을 보고 걸음을 줄인다. “어! 한소영 교관님이다! 안녕하세요!” “오~. 한소영 교관님? 한소영 교관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한소영은 고개만 까닥였다. 그리고 온몸을 타고 흐르는 소름을 참으며, 눈길도 주지 않고 교육생들을 빠르게 지나쳤다. 초감각이라는 능력은 한소영에 축복과 불행을 동시에 가져다 주었다. 이모저모 사용할 데가 많다는 점은 분명히 축복이었지만, 원하지 않는 정보까지도 강제로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조금 전 교육생들만 봐도 그렇다. 비에 젖은 새하얀 셔츠는 한소영의 살에 착 달라붙었고 굴곡진 몸매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교육생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곳에 꽂혔고, 한소영은 그 시선에 담긴 정보를 받아들였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성욕, 욕정, 음욕, 색욕 등 온갖 추악한 욕망이 담긴 어두운 정보들을. 점차 거세어지는 빗방울을 받으며 한소영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김수현이라는 사내를 떠올렸다. 기실 한소영이 김수현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도, 바로 그 초감각에 기인한 것이었다. 처음 황금 사자 소집령을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같은 여인은 차치하고서라도, 한소영은 사내를 만날 때마다 십이면 십 아까와 같은 정보를 느꼈다. 그게 처음 깨어졌던 게 바로 황금 사자의 소집령에서 김수현을 만났을 때였다. '남부 소도시 모니카의 대표 클랜, 이스탄텔 로우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머셔너리 클랜 로드 김수현입니다.' 그때 보았던, 아니 초감각으로 느꼈던 정보는 한소영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한두 가지의 정보가 아니었다. 걱정, 심려, 고뇌, 미안함, 송구함, 존경심, 동경심, 애통함, 애처로움 등등. 김수현의 시선에서는, 방금 교육생들에게서 느꼈던 추악한 욕망은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끝없이 걱정하고 보호해주려는, 오롯하면서도 애틋한 감정만을 느꼈을 뿐. 실제로도 그랬다. 초반에야 이스탄텔 로우가 머셔너리를 많이 챙겨주었지만, 나중 가서는 오히려 머셔너리가 이스탄텔 로우를 챙겨주었다. 그것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사실 한소영은 아직도 김수현이 왜 자신을 그렇게 보는지, 지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해하고 하지 못하고를 떠나서, 그런 감정을 받는다는데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그렇잖은가. 비록 표현을 잘못하기는 하지만. 그리고 이스탄텔 로우의 정점에 서서 부담을 짊어져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그 모든 것을 넘어, 챙겨주고 위해주는 사내가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기분 좋은 사실이었다. 초감각으로 스스로 마음을 닫고 철혈의 마음을 지니게 되었으나, 한소영 또한 한 명의 여인이라는 본성은 변하지 않으니까. 이윽고 한소영이 숙소 입구에 다다랐을 즈음, 어느새 비도 그친 상태였다. 이번에도 잠깐 내리다 만 모양이다. 한소영은 곧장 숙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숙소는 텅 비어있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 한소영은 문을 꼭 닫고 나서 수정 거울 앞에 앉았다. 그리고 공들여 묶어 올린 머리를 풀어 내렸다. 이어서 손에 쥔 빗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수정 거울로 시선을 옮기며 천천히 머리를 빗어보았다. 빗은, 물기를 쭉 빨아들이며 머리칼을 부드러이 쓸어 내렸다. ============================ 작품 후기 ============================ 한소영 : 나도 표현 잘하고 싶다…. 0527 / 0933 ---------------------------------------------- 홍보 주차. 그리고 다가오는 수료식. “그럼 오늘 교육은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아아아아~. 강의실 중앙에 선 채 교육 종료를 알리자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들이 흘러나온다. 주변에는 기백 명에 이르는 교육생들이 몰려있었다. 하지만 나를 쳐다보고 있지는 않다. 오직 단상에 올려 놓은 마르와 도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으로만 싫다고 아우성을 친다. “어떡해 어떡해. 얘 좀 봐. 내 손 꽉 물고 있는 거. 완전 귀엽잖아~.” “보여? 보여? 저 작은 날개 파닥파닥하는 거?” 여인들은 대다수가 도도에게 몰린 채 앞다투어 손을 내밀고 있었고. “하아…. 하아…. 오…! 마르 님…! 오 나의 여신 님…! 그대는 어찌 이리 아름다우십니까…? 하아…. 하아….” “미, 미친놈?! 김수현 교관님! 얘 좀 보세요! 얘 마르 보고 침 흘리고 있어요!” 사내들은 대다수가 마르에게 몰려 우쭈쭈 어르고 있었다. 이내 흘끗 시선을 돌리자, 눈이 그렁그렁한 채 한껏 불안한 얼굴을 한 마르와, 그 옆으로 양손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며 더운 숨을 내뿜는 앳된 청년이 보인다. 이상한 성향을 가진 시크릿 클래스 교육생이던가. 아무튼 그 간절한 눈초리를 차마 외면할 수 없어, 나는 마르를 데려와 번쩍 안아 들었다. “자자. 모두 그만. 교육 시간이 끝났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데려올 테니 오늘은 이만하죠.” “하아…. 하아…. 결혼…. 결혼하고 싶다….” …이놈 병 있는 거 아니야? 이윽고 내 품에 꼭 안은 채 몸을 부르르 떠는 마르를 토닥이며 몸을 돌리자(도도는 어느새 돌아와 내 발목을 깨물고 있었다.), 갑자기 어느 교육생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 나는 바로 걸음을 멈추었다. 시크릿 클래스인가 싶었지만, 처음 보는 교육생이었다. 교육생이 말했다. “저. 김수현 교관님!” “무슨 일이죠? 교육생?” “다름이 아니라, 실은 궁금한 게 하나 있어서요.” “궁금한 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교육은 홀 플레인에 살고 있는 특이한 생물(?)들로 삼은 만큼, 딱히 질문할 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내는 한동안 주저주저하더니 곧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이제 몇 주 후에는 수료식을 하잖아요?” “예. 그렇죠. 그런데요?” “그러니까…. 그 머셔너리 클랜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어서요.” “흠?” 그 말이 들려온 순간, 나는 비로소 질문의 의도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 그러니까 왜 머셔너리 클랜은 홍보를 하지 않느냐는 말이지요? 다른 클랜은 전부 홍보를 하는데?” 교육생은 잠깐 흠칫하더니 끄덕끄덕 머리를 주억였다. 나는 빙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간단합니다. 왜 그러느냐면, 머셔너리 클랜은 따로 홍보 계획이 없으니까요. 이미 영입 계획은 잡힌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에 해당하는 교육생은 따로 스카우트 할 예정이고요. 어디까지나 일대일로 말이지요.” “예? 자, 잠시만요! 그러면 스카우트 받지 못한 교육생은 머셔너리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인가요?”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저 사용자 아카데미에 한해서만 스카우트 제를 취할 뿐이지, 머셔너리의 문은 언제나 열려거든요. 그러니 원하신다면 직접 찾아오셔서 문을 두드려주세요. 물론 가입 전 간단한 테스트는 봅니다.” “아….” “아무튼 그렇습니다. 더 할 말이 없다면, 이만 가보도록 하죠.” “마, 마르 여신 님!” 이윽고 비통하게 울부짖는 시크릿 클래스를 젖히고 나서, 나는 곧바로 강의실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복도를 걸으며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모두의 관심을 모았던 사용자 아카데미도 마침내 홍보 주차에 접어들었다. 중앙 관리 기구는 애초 공약했던 것처럼, 10주차가 시작된 순간 홍보에 관한 일체의 제한을 풀어주었다. 교육 시간에 자 클랜을 언급하는 건 물론. 도를 넘지만 않는다면 식사를 사주거나 계약 조건을 제시하며 오퍼를 넣는 것도 허락해준 것이다. 그 결과, 지금껏 이리저리 눈치만 보고 있던 교관들은 미리 점 찍어둔 교육생들에 득달같이 달려들었고, 비로소 사용자 아카데미에도 본격적인 영입 전쟁의 막이 올랐다…. 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다른 클랜의 상황이고. 머셔너리는 치열한 영입 전쟁에서 한 발짝 비껴서 있는 상태였다. 왜냐하면 홍보 주차로 들어가며 클랜원들에게 그 어떤 홍보나 오퍼도 하지 말 것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물론 반발이 없는 건 아니었다. 현재 머셔너리 클랜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적은 인원수라 볼 수 있다. 그런 만큼 하연은 이 좋은 기회를 날릴 거냐며 베갯머리 송사까지 동원해 속살거렸지만, 나는 이번 결정은 절대로 철회하지 않을 거라 단단히 못을 박아두었다. 그냥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닌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첫 번째는 내가 구상한 머셔너리 클랜만의 고유한 색깔을 지키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사실 홍보를 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정확히는 아직 홍보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고나 할까. 그 엄한 교육 주차에도 몇 번이나 언급이 된 만큼(교육 목적에 한해서 클랜 언급을 하는 건 가능하다.), 교육생들은 이미 머셔너리가 어떤 클랜인지 알고 있다. 엄청 자세히는 모르더라도 어느 정도의 힘을 갖고 있는지, 대강은 짐작은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사용자 정보에 자신이 있는 사용자라면. 어중이떠중이가 들어가는 클랜보다는, 뭔가 좀 있어 보이는 클랜에 들어가고 싶어하지 않겠는가. 누구나 받아들이는 클랜이 아닌 가리고 가린 정예 사용자들만 받아들인다. 즉 우리가 교육생들을 끌어오는 게 아니라, 스스로 찾아오게 만드는 게 바로 내 전략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가만히 손 놓고 구경만 하는 건 옳지 않다. 챙길 건 챙겨야 한다. 진수현과 차희영. 적어도 이 둘은 예전부터 영입할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적당한 틈을 봐서 스카우트 할 것이다. 그리고 제갈 해솔은…. 우선은 조금 더 두고 볼 생각이다. 이스탄텔 로우와 이야기한 것도 있고, 적어도 수료식 까지는 시간이 있을 테니까. 그래. 적어도 수료식 까지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후, 나는 빠르게 복도를 걸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12주차 주말이 다가왔다. 이번 주말을 보내고 나면 사용자 아카데미도 이제 2주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다가오는 수료식을 생각하기 전에, 지금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9주차에 첫 시작을 끊은 이후, 이제는 사용자 아카데미 내 가장 큰 행사로 자리잡은 이벤트 매치 전이었다. 나는, 이번 12주차 주말에 참가 신청을 해둔 상태였다. 이벤트 매치에 참가한 이유는, 사실 홍보 효과를 노렸다기보다 심심풀이 삼아 참가한 것에 불과했다. 9주차, 10주차, 11주차에 벌어진 경기를 보다가 한 번쯤 출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여겼기 때문이다. “빨리 시작합시다~!” “저번 주차는 별로 재미없었는데. 이번 주차는 괜찮으려나?” 대 강당은, 어느덧 속속히 모여든 교육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비단 교육생들뿐만 아니라 모든 교관들도 모인 것이다. 사실 이번 이벤트 매치에는 사용자 아카데미 내 거의 모든 인원이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아마 오늘 경기가 그만큼 흥미를 돋구는 경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조차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 김수현 교관님. 준비되셨으면 중앙으로 이동해주십시오. 허공을 울리는 신재룡의 음성. 이윽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기대 어린 환호를 들으며 나는 차분히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오늘 나와 이벤트 매치를 벌일 상대는…. - 김유현 교관님. 준비되셨으면 중앙으로 이동해주십시오. 바로, 형이었다. 사실 이건 나도 좀 의외기는 했다. 이벤트 매치는 3일 전 미리 참가 신청을 받는 만큼 명단은 모든 교관들이 알게 된다. 그리고 이번 12주차 이벤트 매치의 참가자는 나와 형 둘뿐이었고. 그런데 내가 가장 먼저 신청한 것을 감안하면, 형은 내가 참가했다는 것을 알고서 신청했다는 소리였다. - 두 교관님이 나오신걸 확인했습니다. 그럼 곧 경기를 시작할 터이니, 두 분 모두 나름의 준비를 해주십시오. 가벼운 도발 정도는 허용하겠습니다. 이윽고 중앙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오는 형을 보며 나는 빅토리아의 영광을 손에 쥐었다. 그러자 형 또한 나를 지그시 노려보고는, 두 손을 상단으로 들어올렸다. 전투 직전에 나오는 형만의 준비 자세였다. …가벼운 도발은 허락한다고 했지? “설마 형이랑 싸우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무리 이벤트 매치라고는 해도.” “나 또한.” “흠. 과연 형이 제대로 싸울 수는 있으려나?” “걱정 마라.” “호.” “아무리 친동생이라고는 하지만, 사석과 공석은 구분한다. 그러니 너도 형이라고 봐줄 생각은 말고 전력을 다해라. …나도 그럴 테니.” 형의 말투는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나를 계속 노려보고 있는데…. 왜 저러는 거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흠. 구구절절 옳은 말이긴 한데. 오늘따라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하. 아~니?” 아니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싸늘하기 그지없다. 이어서 두 손에서 황금빛 전류를 뿜어내는 형을 보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려면 어떠랴. '나는 동생을 때리지 못해!' 라며 꼴사나운 경기를 펼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전투적으로 나오는 게 백 배는 낫다. 이런 태도는 오히려 원하던 바였다. 매우 기꺼운 마음이 들어, 나는 경직된 분위기를 풀 겸, 그리고 도발 겸 입을 열었다. “아하. 그렇구나. 난 또. 형을 오해했지 뭐야.” “…오해?” - 그럼 경기를 시작합니다! 마침 경기 시작을 알리는 음성이 고막을 왕왕 울린다. 그와 동시에 나는 살며시 자세를 굽혔다. 형의 얼굴 표정부터 행동 하나하나에 면밀한 주의를 기울인다. 차후 싸울 일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일단 형을 적으로 생각하면 굉장히 까다로운 존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는 게 싫었다. 오늘 경기는 한소영이 가장 앞쪽에서 관람하고 있으니까. 좌우간 이것 또한 좋은 경험이 될 거라 생각하며, 나는 앞을 응시했다. “오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아~. 저번에 형이랑 같이 밥 안 먹고 이스탄텔 로우 로드랑 약속 잡았다고 크게 삐친 적 있잖아. 그래서 아직도 화나 있는 줄 알았거든. 하하하.” “……!” “뭐, 아니라니까 됐어. 아무튼 잘 부탁해?” 그때였다. “어, 어….” 당장에라도 마법을 발출할 듯 보이던 형이, 갑작스럽게 몸을 움찔했다. 싸늘하던 눈동자가 당황한 빛으로 물들어간다. 거기에 주춤대며 두어 걸음 물러서기까지. 흡사 예상치 못하게 정곡을 찔린듯한 모습. 마치 어떻게 알았냐는 듯이. 순간 아차 한 기분이 들어, 나는 반신반의하며 입을 열었다. 물론 교육생들이 듣지 못하도록 최대한 조용히. “…형.” “어, 어.” “설마…. 진짜야?” “…어?” “…아니지?” “…….” 형은 아무런 말도 않았다. 그저 어만 연발하더니 한껏 당혹한 얼굴로 시선을 회피할 뿐. 형의 반응은 단 하나를 의미한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진짜야? 정말로?” 별안간 뜻 모를 허탈한 기분이 들어, 나는 말 그대로 어이없는 기분으로 자세를 풀었다. 그러자 객석에서도 이상한 기류를 느꼈는지, 경기장을 울리던 소음과 환호가 사뿐히 가라앉는다. 그리고 잠시 후. 계속 옆을 쳐다보던 형이 갑작스럽게 입을 질끈 깨물었다. 거세게 방전하던 전류가 삽시간에 사그라진다. 이윽고 형은 분연히 손을 떨쳐 내리며, 뭔가 굉장히 분해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그렇다면 어쩔 건데?” “…뭐?”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사실대로 말하마. 수현아. 너 형한테 정말 그러는 거 아니다. 나 근래에 너한테 진짜로 서운했다고. 어?” “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니 무슨. 어처구니가 없어 반문하려 했으나, 형은 그럴 틈을 주지 않고 되레 쏘아붙였다. “너. 저번 주말에 이스탄텔 로우 로드랑 데이트했다며?” 그리고 형의 말이 이어진 순간, 나는 크게 기함하고 말았다. 잠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 “…….” 하지만 그건 정말로 잠시였다. 형의 목소리가 거의 소리치는 정도라, 주변에 보고 있던 사용자들이 모두 들어버린 것이다. 오오오오오오오오. 이내 대 강당을 왕왕 울리는 나지막한 환호성. 나는 다급히 한소영이 있는 쪽을 살폈다. 그리고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히 앉아있는 한소영을 볼 수 있었다. …아니. 담담한 게 아니었다. 마치 군대에서 이등병이 TV를 볼 때 정좌로 앉아있는 것처럼, 허리를 딱딱히 세운 채 양손을 무릎에 놓고 있었다. 그것도 주먹을 꼭 쥔 채로. 시선이 바닥을 향하는 게, 완전히 얼어버린 것이다. 문득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에 나는 도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에 그리 억울한지, 형은 이제는 서글프다는 얼굴로 하소연을 토로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한 번 정도는 찾아와줄 줄 알았어. 그런데 끝끝내 나한테는 한 번도 안 찾아오더라?” 오오오오오오오오~. 머릿속이 삽시간에 헝클어졌다. 어질어질한 현기증이 이마를 엄습한다. 이건 새로 개발한 신종 공격인가? 아니. 지금 모두가 보고 있는 마당에, 이 무슨 해괴한 짓거리란 말인가? “저, 적당히 좀 해.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참고 기다리고, 또 참고 기다렸는데! 그런데 너는 누구랑 주말에 만나서…!” 오오오오오오오오~?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정말로 이상한 소문이 날 것 같아,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며 외쳤다. “데이트가 아니라 공무 때문에 만난 거라고!” 그리고 그 순간. “그럼 선물은 왜 줬는데?” 형이 그 말을 꺼낸 순간. 오오오오오오오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새하얀 백지처럼 말문이 콱 막힌듯한 기분이었다. “선물까지 줬으니까 데이트지. 아니야? 그리고…!” 이윽고 재차 말이 이어지려는 순간, 나는 지체 않고 빅토리아의 영광을 뽑아 들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느냐는 호기심도, 그리고 한소영의 반응도. 지금은 그 어떤 생각도 나지 않는다. 오직 형의 입을 다물게 하여야 한다는 생각뿐. 나는 곧바로 땅을 박차 올라, 형을 향해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 작품 후기 ============================ 김유현의 질투심 폭발! 이 모든 게 다 빗 때문입니다. 0528 / 0933 ---------------------------------------------- 홍보 주차. 그리고 다가오는 수료식. “수현아! 수현아?”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저 멍한 기분으로 상앗빛 천장을 응시한다. “수현아. 정말, 정말로 잘못했다. 형이 생각이 짧았어. 사과하고 싶으니까, 제발 문 좀 열어주라. 응?” 2주. 12주차 이벤트 매치가 끝난 이후로 무려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때 그 아수라장에서 느꼈던 낯깎임과,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도망치듯 나가던 한소영의 뒷모습은,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나를 괴롭힌다. “결국 오늘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구나…. 너 형 정말 안 볼 거니? 사용자 아카데미도 이제 다 끝나가는데?” 아까부터 나를 부르는 애타는 목소리. “…수현. 이제 그냥 사과를 받아주는 게 어떨까요? 아주버님, 이제는 안쓰러울 지경이에요. 벌써 2주째나 꼬박꼬박 찾아오시잖아요.” 그리고 이어서 들려오는 맑은 목소리에 끌려, 나는 천천히 시선을 이동했다. 옆에서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한 여인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힘없이 입을 열었다. “하연.” “네?” “시끄러우니까, 문 두드리지 말고 좀 가라고 하세요.” “아. 우리 수현이 자고 있었구나?” 그러나 하연이 아닌 형이 금세 호응한다. 아마도 마력으로 청각을 끌어올리고 있었던 모양. “미안해. 그러면 형이 나중에 찾아올게? 그때는 꼭 만나주는 거다?” “…….” “응?” “아 쫌!” 결국 벌컥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형의 기척이 후다닥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내 주춤주춤 멀어지는 기척을 들으며 나는 도로 천장을 응시했다. 아. 멍하다. 그냥 멍하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녀야 하는 걸까. “수현. 그러지 말고 좀 일어나세요. 네? 이틀 후면 사용자 아카데미도 끝나는데, 주말 내내 이러고 계시면 어떡해요.” “…….” “보세요. 지금 애들도 기다리고 있잖아요?” “…….” 물론 구구절절 옳은 말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근 2주간 온갖 음해에 시달려야만 했다. 아무리 아니라고, 거짓말이라고 외쳐도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았다. 그 모든 게 엄청난 스트레스였던 만큼, 지금은 그냥 아무 생각 않고 이렇게 있고 싶다. “혼자 있고 싶습니다. 회의는 됐으니까, 다들 나가주세요.” “… 후. 알았어요. 수현. 그럼 이것 하나만 말씀해주세요.” “……?” “그 이스탄텔 로우 로드에게 선물했다는 빗….” “젠장. 회의하죠.” “호호.” 나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예쁘게 웃는 하연을 한 번 지그시 노려보고 나서, 클랜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탁자에 몸을 앉혔다. 그러고 보니 애들 앞에서 별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 같아,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정신을 차린 후 주변을 둘러보자, 어딘가 모르게 뾰로통해 보이는 한별이 보인다. 안솔과 유정이도 무언가 굉장히 못마땅해 보이는 얼굴. 그에 반해 신재룡과 안현은 흐뭇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 아니. 이 양반들은 또 왜 이래. “후. 미안합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요즘 사정이 많이 안 좋은 터라. 아무튼 사용자 아카데미 건은 오늘로 매듭짓도록 하죠.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후, 나는 바로 안현을 바라보았다. 왜인지 다른 애들에게서 말을 붙이기 어려운 아우라가 물씬 풍겨오고 있었기에. “안현. 차희영은 어떻게 됐지?” “아. 안 그래도 말씀 드리려고 했어요. 우선 영입은 좋은 방향으로….” “영입은 저번에 허락한다고 했잖아. 그거 말고. 너도 문제 하나 있지 않았어?” “아….” 안현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볼을 긁적이며 곤란한 기색을 보였다. 나는 조금이지만 가슴이 따끔함을 느껴야만 했다. 우선, 차희영의 영입은 아주 수월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드러난 성적이 엄청나게 좋은 건 아니었다. 그때 받은 충격이 커서 그런지 처음에 많은 방황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희영의 사용자 정보는 굉장히 준수한 수준이다. 그걸 증명하듯이 안현이 여러모로 도움을 주며 빠르게 심신의 안정을 찾았고, 그 이후부터 무시무시한 기세로 잠재성을 터뜨렸다. 교육 후반 주차에 수직 상승한 성적 곡선을 봐도 알 수 있다. 그 탓에 여러 클랜들이 영입 제의를 했다고 들었지만, 이미 차희영은 안현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만큼 안현의 말 한 마디에 곧바로 영입을 확정 지을 수 있었다. 그렇게 영입은 별 까다로움 없이 진행됐으나, 걸리는 게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잠시 후. 적당히 긁었는지 안현이 나를 보며 헤프게 웃어 보인다. “헤헤. 사실 부담은 좀 되지만, 그래도 너무 걱정 마세요. 나름대로 좋은 방향으로 이야기를 끝냈거든요.” 그 순간, 귀가 번쩍 뜨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어떻게?” “처음에는 상처받으면 어떡하냐는 생각에 몇 주간을 고민하다가…. 사실 제가 말재주는 없잖아요? 그래서 그냥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말했어요. 그게 나을 것 같아서요. 희영아. 네가 나를 좋아해주는 건 무척 고맙지만, 사실 아직은 부담스럽다.” “그건 정말 돌 직구잖아.” “예. 그니까 희영이가 갑작스럽게, 느닷없이 울어버리더라고요. 오빠도 나를 버리는 거야? 이러면서….” 역시나. 그래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반응이라, 나는 탁자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래서?” “그래서 그게 아니라, 서로 조금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는 식으로 달랬죠. 세상에 좋은 남자는 많고, 너는 아직 이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을 겪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수료식이 끝나고 세상을 조금 더 둘러본 후에, 그때도 네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저도 한 번 생각해보겠다고요.” “오.” “이렇게 하기는 했는데…. 자, 잘 처리한 건가요?” 살그머니 눈치를 살피는 안현을 보며, 나는 그렇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였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클랜원들이 머리를 끄덕인다. 몇 명은 네가 웬일이냐는 눈초리로 안현을 보고 있을 정도였다. 아주 깔끔하게 정리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안현치고는 꽤나 잘 넘겼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걱정 하나 덜었다 싶을 무렵 하연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다 나중에 정말로 네가 좋다고 하면 어떡할래?” “음~. 그때 가봐야 알겠지만, 그럼 저도 마음이 변할 것 같기는 해요. 사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이런 적?” “네. 이렇게 저만 바라봐주는 여자는 처음이거든요. 그래서 내심 싫지만은 않아요.” 그러자 하연은 납득한 얼굴을 하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차희영 교육생은 현이한테 맡기기를 잘한 것 같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호호. 현이 공 하나 세웠네? 아무튼, 그럼 이건 됐다고 치고…. 그 진수현이라는 교관은 어떻게 됐나요?” “반반입니다.” 바로 넘어간 화제에, 나는 명료히 회답했다. 말 그대로 진수현의 영입 가능성은 현재로서 반반이었다. 하지만 그다지 크게 걱정되지는 않는다. 한 번 더 이야기를 해보자고 했던 만큼 아직 여지가 남아있으며, 설령 영입에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서로 형 동생을 할 정도로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으니까. 좌우간, 사용자 아카데미가 끝나기 전 한 번은 찾아가 이야기를 해볼 생각이다. 되면 좋고, 설령 거절하더라도 차선이라는 상황을 깔아놓은 상태였다. “아마 수료식 전까지는 확정될 겁니다.” 이내 한 마디 덧붙이자, 하연은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을 하더니 청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만일 진수현 교관이 오게 되면 같이 딸려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겠죠?” “예. 최소 한 명 정도는 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건 감수할 생각이지만, 제가 알기로는 동료도 크게 나쁘지는 않은 수준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럼 다행이네요. 최소한 세 명은 온다고 치면, 나름대로 영입했다고는 볼 수 있으니까요.” “하하…. 아직도 그 얘기입니까.” 하연은 좌천되기 이전, 기준을 낮추는 한이 있더라도 인원을 늘리자고 끈임 없이 주장했었다. 그런 만큼 이번에 3명이라도 영입한 게 다행스러운 모양이다. 아무튼 저번 9주차 이벤트 매치 이후 진수현의 주가도 상당히 올라간 터라, 클랜원들은 별 불만 없는 얼굴로 동의했다. “그럼 차희영과 진수현은 이렇게 매듭짓는 걸로 합시다. 그리고….” 나는 잠시 말을 끊었다. 사실 아직 영입할 사용자가 한 명 남아있기는 했다. 바로, 제갈 해솔. 몇 주 전 한소영이 보내준 비밀 전령으로 일차적인 경과를 들을 수는 있었다. 나와 얘기를 끝낸 후 13주차 즈음 비밀리에 영입을 시도했다고 하는데, 제갈 해솔의 회답은 '수료식 때까지 생각해보겠다.' 였다고 한다. 그것을 보면, 마치 자신이 클랜을 고르는듯한 태도라고나 할까. 하기야 사용자 정보를 보면 그럴 자격은 있지만.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건, 이스탄텔 로우를 제외하고는 오퍼를 넣은 클랜이 없다는 것. 말인즉슨, 만일 수료식 때 이스탄텔 로우의 오퍼를 거절한다면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기회가 돌아온다는 소리였다. 그때부터는 영입하든 죽이든 오롯이 머셔너리의, 아니 나의 선택에 달렸다. 좌우간 상황이 이런 만큼, 지금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는 우선은 나 혼자만 알고 있는 게 좋지 않을까. …그래. 클랜원들에게는 조금 갑작스럽더라도, 제갈 해솔을 둘러싼 상황을 생각해보면 그게 더 나을 듯싶다. “클랜 로드. 그리고요?”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오랫동안 뜸을 들였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오늘 회의는 이걸로 끝내도록 하죠.” * 14주차 주말이 지나고 수료식도 바로 내일로 성큼 다가왔다. 주말이 끝난 후의 사용자 아카데미는 분주했다. 교육은 이미 모두 종료됐지만 수료식 준비나 영입 전쟁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교관으로 참가한 클랜들은 어떻게든 수료식 전까지 교육생들을 끌어들이는 게 좋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수료식 준비를 적당히 도와주고 숙소로 돌아오자, 어느새 해가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폭풍 같은 사용자 아카데미 생활이었다. 고려 클랜과의 사건, 마녀 차희영, 진수현, 공찬호와의 전투, 제갈 해솔과 등등. 하지만 어찌어찌 잘 넘기며 올 수 있었고(아직 모두는 아니지만.), 이제 내일이면 이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나가야 한다. 나는 한동안 숙소를 둘러보다가 하나하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내일 클랜 하우스로 돌아가야 하니까. 안현은 오늘 늦게까지 남아 수료식 준비를 도와준다고 하니 짐 정리마저도 맡길 수는 없잖은가. 애당초 그리 많은 짐도 아니고. 그렇게 약간의 시간을 할애해 짐 정리를 모두 마치고 나자, 날은 미약하게나마 어두운 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창문을 열어 몸을 식힌 후 차분히 입구 쪽을 돌아보았다. 몸이 조금 간질간질하다. 아마 구석구석 정리를 하다 보니 먼지가 쌓인 모양이다. 시간이 늦지는 않았는데, 간단히 씻기라고 할까. 그때였다. 똑똑. 간단한 세안이라도 할 생각에 막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형님. 계세요?” 이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사용자는 다름 아닌 진수현이었다. 나는 약간 놀란 마음에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안 그래도 오늘 밤에 찾아가려고 했는데. “…진수현?” “역시. 기척이 있어서 들어왔어요.” “나 참. 그래도 노크하고 바로 들어오는 게 어디 있냐. 아무튼, 무슨 일이야?” “아~. 다른 건 아니고요. 그냥…. 내일이면 사용자 아카데미도 끝나잖아요? 끝나면 한동안 못 볼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그동안 감사한 것도 있고. 아무튼 마지막 인사라도 하려고 찾아왔어요.” 한동안 못 볼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라.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가겠다는 걸 굳이 바짓가랑이를 붙잡을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진수현은 한 번쯤 같이 해보고 싶은 사용자였다. 오랜만에 혓바닥 좀 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빙긋 웃으며 탁자를 가리켰다. “아하. 그거 좋네. 거기 앉아.” “감~사합니다!” 싱긋 웃으며 털썩 주저앉는 진수현. 나 또한 맞은편에 자리한 후, 연초를 하나 꺼내 들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마지막 인사라니. 그동안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나 봐?” “에. 글쎄요. 심경의 변화라기 보다는….” 잠시 말을 끊은 진수현은 쑥스러워하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 절로 누군가의 모습이 떠오른다. 얘도 어떻게 보면 안현이랑 상당히 비슷하단 말이야. 잠시 후, 진수현이 입을 열었다. “실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생각의 변화는 조금 있었던 것 같아요.” “생각의 변화?” “예. 제가 그동안 너무 예전의 기억에 이끌려 다닌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요. 그러니까 조금 급했다고나 할까요?” “흠. 계속 말해봐.” “사실 형님이 보시기에도 제가 아직 부족한 점이 많잖아요. 그러니까 사용자 정보에만 죽어라 매달리는 게 아니라, 홀 플레인에 대한 전반적인 것들도 한 번 알아보고 싶어서요.”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은데. 어떻게?” 되묻자, 진수현은 척 팔짱을 꼈다. 그리고 열린 창문을 우수에 찬 눈빛으로 지그시 쳐다보았다. 꼴값 떤다. “일단 이번에 교육생은 한 명도 안 구했어요. 누구를 챙기는 것 보다는 제 앞가림부터 스스로 해보려고요.” “음….” “그러니 끝나면 바로 개척 도시로 내려가서 이것저것 경험해볼 생각이에요. 정말로 맨 밑바닥부터 시작해보려는 겁니다. …형님 생각은 어때요? 이러는 게 과연 좋은 선택일까요?” “…….”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반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나쁘지는 않아. 아니. 아주 괜찮네. 좋은 선택이야.” “와. 이상하게 형님 말 들으니까 안심이 팍 되네요. 사실 좀 불안했는데.” 동의해주자 진수현의 얼굴에 환한 화색이 돌았다. 기분 좋은 웃음을 보인 진수현은 이내 아차 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튼 저는 이렇게 할 생각인데. 그럼 형님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끝나면 바로 돌아가셔서 용병 업무에 매진하실 거예요?”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진수현이 먼저 말을 꺼내주었다. 나는 아까 꺼내놓은 연초에 불을 붙인 후, 한 모금 길게 내뱉으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아. 아니. 돌아가면 따로 할 일이 있어서. 용병 업무도 하겠지만, 온전히 매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따로…. 할 일이요?” “응. 중요한 일이야. 대외적으로 비밀이기도 하고.” “에~이. 형님. 그러지 마시고 말씀해주세요. 궁금하잖습니까.” 나는 속으로 웃었다. 말은 저렇게 해놨지만, 아마 진수현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기실 알든 모르든 크게 상관은 없어, 나는 잠시 생각하는 척을 했다. 그리고 속으로 10초 정도 센 후에. “하긴. 언젠가는 발표될 일이니까.” 그리고 조용히 몸을 일으켜 창문을 닫고, 주변을 조심스럽게 둘러보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어디 가서 말하지는 마. 떠들어봤자 좋은 일은 아니니까.” “그럼요. 형님. 저 입 무겁습니다.” 진수현이 가슴을 탕탕 친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정말 중요한 말을 해준다는 것인 양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입을 열었다. “나는, 돌아가면 강철 산맥의 공략을 준비할 생각이야.” “…강철 산맥이요?” 그러자 두 눈을 살며시 치켜 뜨는 진수현. 그런 진수현을 보며 나는 몰래 입에 침을 적셨다. ============================ 작품 후기 ============================ 호오…? 그동안 제가 어떻게 해도, 무슨 말씀을 드려도 꿈쩍도 않으시던, 오히려 껄껄 웃으시며 태연하던 독자 분들인데. 어제는 몇몇 분들이 반응을 보이셨군요? 호…. 호오…. 호오…! PS. 오늘은 예약으로 올라갈 겁니다. :) 0529 / 0933 ---------------------------------------------- 큰 결정. 마침내 100일이라는 기나긴 장정을 마치고, 사용자 아카데미의 마지막을 장식할 수료식의 막이 올랐다. 애초 홍보 주차에 확실한 밀어주기를 약속했던 만큼, 중앙 관리 기구는 공약을 나름 잘 지켜주었다 볼 수 있었다. 교관으로 참가한 클랜들에 한해서 모두에 공평한 홍보 기회를 부여해주었으니. 그러한 기회는 수료식 때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중간중간 시간만 잡아먹는 코너를 과감히 삭제 및 축소하고, 새로운 코너를 개설한 것이다. 새로운 코너의 이름은 질의 문답으로, 교육생들이 클랜에 관해 여러 궁금한 점을 스스로 묻게 하는 목적으로 개설된 코너였다. 결국에는 홍보 기회를 한 번 더 마련해주겠다는 소리였으니, 교관들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물론 각 클랜에 배당된 코너에는 12분이라는 시간제한이 있고, 그러한 점을 고려하면 애초 처음의 수료식과 끝나는 시간은 엇비슷하다. 그렇다면 지루하게 기다리기보다는 나름 알차게 보내는 게 좋지 않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중앙 관리 기구에서 추가로 내건 조건은, ‘질의 문답’ 코너의 개설을 만장일치로 통과하게 해주었다. 그 조건이란 바로…. “예. 우리 한울 클랜은 아직은 그저 그런 클랜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현재에 불과합니다. 비록 아직은 작은 클랜에 불과할지라도,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는 클랜이라 믿습니다. …이 자리에서 저와 함께 클랜을 발전시킬 뜻있는 분이 있다면, 손을 들어주십시오.” 대 강당. 객석에는 중앙 관리 기구 인사들과 교육생들이 앉아 무대를 응시하고 있다. 중앙 무대에는 통통한 체형의 사내가 애처롭기 짝이 없는 얼굴로 열변을 토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사내의 열렬한 토로에도 불구하고 객석의 반응은 0%. 정확히는 별 관심이 없다고나 할까. 객석을 둘러보는 사내의 얼굴에 미묘한 절망감이 보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곧 입을 지그시 깨문 사내가 천천히 자세를 바로 한다. 그리고 털썩 무릎을 꿇으며 비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한울 클랜은 여러분들을 꼭 모시고 싶습니다!” 이윽고 사내의 후면에 서 있던 일련의 사용자들도 통통한 사내를 따라 무릎을 꿇는다. 웅성웅성. 비로소 객석에서 일말의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의 어이없다는 반응으로 결코 좋은 호응이라 볼 수 없다. 객석의 반응을 들었는지 사내의 얼굴에 참담함이 깃들었다. 기실 사내의 사정이야 어찌됐든 방금 행동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번 코너는 한 마디로 정리해, 교육생들에 과시하기 위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물론 교관 입장에서. 지금 사내의 후면에 있는 사용자들만 봐도 그렇다. 저들은 한울 클랜 소속 사용자들로 이번 코너를 위해 특별히 초청된 사용자들이다. 즉 교관으로 들어온 사용자만이 아니라, 소속 클랜원들이 함께 홍보하는 자리인 것이다. 그게 바로 중앙 관리 기구에서 내건 조건인 ‘코너에는 교관을 제외한 8명 이하의 소속 클랜원들의 입장 또한 허가한다.’였다. 그런 만큼 과시 혹은 화려한 퍼포먼스를 통해 우리 클랜은 이렇다는 걸 보여주어야 하는데, 사내는 오히려 정반대의 태도를 보였다. 진심을 통한 호소로 교육생들의 마음을 움직일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썩 좋은 방법은 아닌 모양.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으니까. 결국 통통한 사내를 비롯한 9명의 한울 클랜원들은 쓸쓸히 퇴장하고 말았다. 그들이 무대 아래로 내려간 후, 이어서 중후한 음성이 대 강당을 울린다. - 다음 질의 문답 코너에 나올 클랜은 머셔너리 클랜입니다. 모두 정숙해주십시오. 그 순간 객석에 흐르던 기류가 갑작스럽게 일변했다. 지루했던 기류는 한순간 사그라지고 호기심과 기대감이 대 강당을 가득히 메운다. 교육생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쭉 빼며 중앙 무대를 응시했다. 방금 한울 클랜 때의 태도와는 극명하게 비교되는 태도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냉정히 말해서 한울이 볼 것 없는 쭉정이라면, 머셔너리는 현재 북 대륙 내 첫손으로 꼽히는 클랜이었으니까. 더구나 다른 클랜들과는 달리, 머셔너리는 단 한 번 홍보한 적 없으며 교육생들의 영입에도 열을 올리지 않았다. 그런 만큼 머셔너리가 도대체 어떤 클랜인지, 어떻게 해야 들어갈 수 있는지 궁금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일체의 홍보를 금지한 김수현의 선택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코너에 한해서 아주 탁월했다고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저벅저벅. 저벅저벅. 저벅저벅. 저벅저벅. - 머셔너리 클랜이 입장합니다. 이윽고 발을 묵직하게 내디디며 잇따라 걷는 소리가 들리고, 동시에 증폭된 음성이 머셔너리 클랜의 입장을 알렸다. 곧 가장 선두에 선 사내를 시작으로 총 8명의 사용자가 무대로 걸어 들어오기 시작한다. 3명의 사내와 5명의 여인. 방금 한울 클랜원들과는 뭔가 다른 기운이 느껴진 것일까? 무대를 바라보는 교육생들은 어느새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인 상태였다. 오죽하면 지금 대 강당에 흐르는 정적이 엄숙하다 느껴질 정도였다. 그에 반해, 천천히 몸을 돌려 교육생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은 담담하기 그지없다. 되레 태연한 여유가 넘쳐흘러 보일 정도. 하지만 오만하게 보이지 않는다. 가슴 상단에 각인된 붉게 빛나는 문양은, 그들이 머셔너리 클랜원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윽고 김수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자 정하연이 반걸음 따라 나서며 주문을 외웠다. 음성 증폭 마법이었다. - 반갑습니다. 머셔너리 클랜 로드 김수현입니다. 이번 코너에서 총 8명의 클랜원과 여러분께 인사드리게 됐으며, 지금부터 12분 동안 질의 문답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거창한 미사여구 없는 매우 간단한 인사말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좋았다. 12분이라는 시간에 비해 물어볼 것은 산더미였으니까. 교육생들은 앞 다투어 손을 들었다. 이내 김수현이 한 명을 가리키자 지목받은 사내가 바른 자세로 몸을 일으킨다. “질문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부로 사용자가 된 조동현입니다.” - 반갑습니다. 그럼 사용자 조동현. 어떤 질문이지요? “예. 다름이 아니라 14주 교육을 받는 동안 머셔너리 클랜과 클랜원들의 이름을 몇 번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림자 여왕 님 등등 말이지요. 사실 조금 어긋난 질문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래도 궁금합니다. 혹시 지금 무대에 보이는 분들이 누구신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 어렵지 않네요. 질문을 허락합니다. 사내는 그 모든 말을 아주 빠른 속도로 말했고, 김수현은 곧바로 허락했다. 그리고 가장 왼쪽에 서 있는 여인을 가리킨 후 차분히 입을 열었다. - 우선 방금 조동현 교육생이 언급한, 그림자 여왕 고연주입니다. 고연주는 나른히 웃으며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조동현을 향해 살며시 눈을 감아 보이기까지. 그 모습에 조동현을 비롯한 여러 사내들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으나, 김수현은 전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 검후 남다은입니다. 검사 계열이라면 몇 번 들어봤을지도 모르겠군요. 남다은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 관심도 없다는 양 그저 냉랭한 얼굴로 바라만 보고 있을 뿐. - 신궁 선유운. 섬광 차소림입니다. 선유운과 차소림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둘이 원체 무뚝뚝한 성격이라 그런지 역시나 그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는다. - 그리고…. 흠. 나머지 네 명은 여러분들도 아실 테니 이만 생략하도록 하죠. 이상입니다. 충분한 답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머지 네 명이라 함은 안현, 안솔, 정하연, 신재룡이었다. 이미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활동했던 만큼 딱히 알려줄 필요가 없었던 탓이다. 질문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조동현은 아직 자리에 앉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저 한껏 붉어진 얼굴로 처음 소개한 고연주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뿐. 결국 옆에 앉은 여인이 툭 건드리자 그제야 황급히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렇게 첫 번째 질문이 끝난 후. 김수현이 다시 주변을 둘러보자 교육생들은 자동적으로 손을 들었다. 그때였다. 한 명 한 명 미끄러지듯 지나가던 시선이 갑작스럽게 정지했다. 누군가를 정확하게 응시하는 김수현의 눈동자에 강한 이채가 스친다. 이내 김수현이 한쪽을 가리키자 한 늘씬한 여인이 살랑 몸을 일으켰다. “질문을 받아주셔서 감사드려요. 저는 오늘부로 사용자가 된 제갈 해솔입니다.” - …예. 반갑습니다. 그럼 어떤 질문인가요? “음~. 사실 조금 실례되는 질문일 수도 있지만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릴게요. 제가 궁금한 건 바로 머셔너리 클랜의 인원에 대해서 에요.” - 인원?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 그런지 김수현의 눈 꼬리가 올라갔다. 제갈 해솔은 잔잔히 말을 이었다. “네. 인원이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머셔너리가 현재 북 대륙 내 최고의 클랜이고, 또 그렇게 들어오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따금 다른 클랜의 교관님들은 머셔너리는 적은 인원수가 가장 큰 문제라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명백한 한계가 있는 클랜이라 그러시던데….” 그 말이 나온 순간 대 강당이 크게 술렁였다. 방금 발언은 어찌 보면 고발이나 다름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갈 해솔은 전혀 아랑곳 않은 채, 오히려 예쁘게 눈웃음치며 질문을 마쳤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머셔너리 로드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김수현이 지그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인지, 이미 코너를 마치고 내려간 교관 중 몇몇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을 내비친다. 한 서너 명 정도가 김수현의 눈치를 살피면서 한편으로는 제갈 해솔을 올려다보았다. 아마 지금 심정으로는 찢어 죽이고 싶지 않을까. - 질문을 허락합니다. 그때였다. 어수선한 소란 속에서 말한 김수현이 차분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음성 증폭 마법의 범위를 벗어나 정하연이 따라오려고 했으나, 김수현은 손을 들어 막았다. 그러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 머셔너리가 현재 최고의 클랜 중 하나로 불리는 이유는 사용자가 많아서가 아니라, 많은 사용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무대의 가장 앞쪽까지 걸어간 김수현이 나직이 말했다. “여기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소란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 김수현은 곧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간혹 어떤 사용자들은 이렇게 말하고는 합니다.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수에는 장사 없다고. 하지만 반대로 이런 말도 있습니다. 잘 키운 사용자 하나, 열 사용자 부럽지 않다.” 비록 한없이 낮으나 마력이 충만이 들어있는 목소리였다. 교육생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김수현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시크릿, 레어 클래스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갖은 고생을 해 100명의 보통 사용자들을 모아봤자, 수준 높은 마법사 5명만 있어도 1초 만에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게 현실이죠. 그래서 클랜 내 핵심 사용자의 수준과, 그들을 받쳐줄 수 있는 장비 등의 수단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김수현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마치 누구보고 들으라고 하는 듯이. 그것은 비단 교육생만을 대상으로 한 게 아니었다. 코란 연합 때부터 시작된 인원 지적을 하는 사용자들과 항상 인원을 늘리자고 주장하는 클랜원들. “그래서 머셔너리 클랜이 잠재성이 높은, 어느 정도 수준이 될 수 있는 사용자들을 원하는 겁니다.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는 사용자가 아닌, 언제 어디서라도 살 수 있는 사용자. 그걸 위해 우리는 철저히 가르치고 지원해 핵심 사용자들만으로 클랜을 구성합니다.” 그 모두를 대상으로 한 김수현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 클랜원이 많으면 장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가용할 수 있는 인원이 많아지니 없을 리가 없죠.” “그러나. 우리와 비슷한 평가를 받는 대형 클랜들처럼 인원을 대폭 늘릴 계획은, 앞으로 결단코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머셔너리는, 머셔너리만의 창설 목적이 분명히 있으니까요.” “그들의 말이 틀리다는 게 아닙니다. 다를 뿐입니다. 저는 머셔너리만의 방식을, 생각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한 명이 열 명 백 명을 당해낼 수 있는, 적은 인원으로 열 배 백 배의 효율을 보일 수 있는, 그런 클랜. 소수 정예라 함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김수현의 말이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제갈 해솔이 다시 손을 번쩍 들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채 말이 나오기도 전에, 흘끗 바라본 김수현이 선수를 쳤다. “그렇다면 궁금하시겠죠. 그게 과연 가능하냐고.” 제갈 해솔은 입을 다물었다. “예. 가능합니다. 지금껏 머셔너리가 걸어온 길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머셔너리는 어느 클랜보다 많은 업적을 쌓았습니다. 탁 까놓고 말해서, 의뢰 좀 받고 유적 좀 발굴한 클랜입니다. 클래스, 재정, 장비 등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클랜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또한 앞서 말한 것들은 제외하고, 우리에게는 교육생들을 핵심 사용자로 성장시킬 수 있는 매우 강력한 수단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 어느 클랜도 가지지 못한 머셔너리만의 고유의 수단입니다.” 안 그래도 김수현의 연설에 빠져있던 교육생들은 하나같이 귀를 쫑긋 세웠다. 사실 교육생들이 클랜을 고르는데 가장 큰 관심사는 클랜의 명성이나 지원 정도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완벽하게 충족하고 있는데, 그것을 앞서는 무언가가 더 있다? 교육생들의 기대 어린 시선을 받으며 김수현은 차분히 숨을 골랐다. 이토록 말을 길게 한 건 실로 오랜만이라 약간은 숨이 찬 탓이다. 그렇게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 김수현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이번 수료식을 마치면 4 능력치 포인트를 받게 됩니다. 포인트의 중요성은 다들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말해보면. 머셔너리는 교육생, 즉 신규 사용자에 한해 2 능력치 포인트를 추가로 지급할 수단이 있습니다.” 2포인트 추가 지급. 분명 어려운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말이 나온 순간, 대 강당에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정적은 곧 미약한 술렁거림을 시작으로 요동쳤다. 흡사 폭풍이 다가오기 직전의 전야와도 같이. 그리고 바로 그 직전. 김수현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상입니다. 충분한 답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 수료식이 끝났다. 나는 클랜원들에 잠시 기다리고 있으라 지시한 후, 주변을 빽빽이 메운 인파를 헤치며 간신히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사실 더 일찍 나올 수도 있었는데 교육생들뿐만 아니라 교관들에게까지 붙잡혀 곤욕을 치른 탓이다. 하기야 나름 이해는 가지만서도. 사용자 아카데미와 견줄 수 있는 용병 아카데미의 설립은 그들로서는 믿기 어려운 일이었을 테니까. 그러나 나 또한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다. 차희영과 진수현은 괜찮다. 이미 모두 얘기를 끝내놓은 상태이니까. 차희영은 이미 안현의 옆에 붙어있는걸 확인했고 진수현은 기다리면 된다. 하지만 제갈 해솔은 아직 아니었다. 이스탄텔 로우의 영입 제안에 대한 가부는 오늘 수료식이 끝난 후 결정된다고 했으니, 지금쯤 슬슬 결과가 나와야 정상이다. 과연 승낙했을까? 거부했을까? 아니 그전에 왜 보이지가 않는 거지? 사용자가 많은 것도 있지만, 제갈 해솔이나 한소영이 그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한쪽으로 비껴선 채 계속해서 입구를 응시했다. 그러다 문득 걱정이 들었다. 혹시 수송 능력을 사용해서 나간 게 아닐까하는, 나름 가능성 높은 걱정이. 아까 당돌하게도 질문하던 제갈 해솔을 떠올리며 나는 걸음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입구에서 기다리는 게 가장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만, 뭔가 불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들어 마력 감지를 돌리며 찾으려는 찰나였다. “야! 김수현! 너 여기 있었어?” 간만에 들어보지만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시선을 돌리자 무에 그리 급한지. 후다닥 달려오는 한 사용자를 볼 수 있었다. 처형의 공주 연혜림이었다. “아 드디어 찾았네! 오랜만!” “연혜림? 네가 왜.” “어. 다른 게 아니라 한소영이 알려주라고 하는게 있어서.” “이스탄텔 로우 로드가?” 연혜림은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며 금세 바짝 붙었다. 그리고 목 부근으로 얼굴을 들이밀더니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갈 해솔 영입 실패.” 그리고 바로 떨어지며 몸을 돌렸다.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실패했다고?” “어, 어. 그런데 미안. 나 지금 엄청 급해서. 정신이 없어. 아무튼 확실히 전했다?” “잠깐만! 그럼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몰라! 얘기 방금 끝냈으니까 여기 있으면 알아서 나오겠지!” 그렇게 외친 연혜림은 이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 강당 안으로 들어갔다. 제갈 해솔 영입 실패? 그럼 거절했다는 소린가? 그때였다. 우웅. 느닷없이 아까 펼친 마력 감지에 무언가 미약한 마력의 흐름이 걸렸다. 나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운이 좋았다. 이내 마력이 이동한 지점을 쫓자, 사용자들이 몰린 입구를 넘어 그나마 한산한 장소에 생겨난 하나의 흔적을 발견 수 있었다. 익숙한 뒤태였다. 길게 흘러내린 생머리와 늘씬하게 뻗어 내린 다리맵시. 여인은 바로 제갈 해솔이었다. 어찌나 자연스러운 수송이었는지 그 누구도 이상함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감탄할 수는 없다. 이대로 놓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얼른 달리려는 찰나. 갑작스럽게 제갈 해솔이 몸을 돌아보더니 마치 여기 내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양, 정확히 나를 주시한다. 그렇게 서로 눈을 마주친 순간이었다. - 질문에 회답해주셔서 감사해요. 말씀은 잘 들었어요. 매우 인상 깊었어요. 정말로. 머릿속을 가볍게 울리는 미성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멈추고 말았다. 부근에 제갈 해솔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까부터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뿐. 말인즉슨, 제갈 해솔은 약 80미터의 거리를 넘어 내게 말을 전달했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나만 들을 수 있도록. 그러나 어떻게 한 거지라 생각하기도 전. - 그럼 안녕히. 그때 밤중에 만남은 엄청 즐거웠는데.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윽고 제갈 해솔은 예전 이스터 에그에서 한 공주 인사처럼, 나를 보며 살며시 고개와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바람처럼 몸을 돌려 사뿐사뿐 걸어간다. 내게로 오는 방향이 아닌 정문이 있는 방향으로.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주변은 여전히 웅성대는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갈 해솔의 모습은 인파에 묻혀 더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가만히 턱을 매만졌다. 그럼 안녕히 라고 했으니…. 아무래도 쫓아갈 필요는 없겠지. 사실 망연한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 이러한 경우를 예상한 만큼 미리 생각해둔 대비책을 실행해야 하는 게 우선이다. 왜냐하면 상대는 제갈 해솔이니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입구를 나서 최대한 사용자들이 없는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품속으로 손을 넣자 연초와 둥글둥글한 구슬이 잡혔다. 통신용 수정구. 그렇지만 여타 수정구와는 달리 거무칙칙한 빛을 내뿜는 수정구로, 오늘 아침 고연주가 가져와 건네준 것이었다. 나는 두 개를 동시에 그러모으며 꺼내들었다. 손가락 틈으로 연초를 끼고, 그 안으로 구슬을 잡는다. 이러면 혹여 다른 사용자가 보더라도 연초를 피우고 있다 생각할 것이다. 이윽고 연초에 불을 붙여 입으로 가까이함과 동시에, 나는 안으로 쥔 수정구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 무척 다행히도 통신은 바로 연결되었다. (아. 또 뭡니까. 머셔너리 로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저번에 코란 연합 사건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이내 투덜대는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재빠르게 속삭였다. “주변에 사람 많다. 헛소리 하지 마.” 어느덧 심장은 쿵쿵 뛰고 있었다. 차분해지려고 애쓰고는 있었지만 목소리는 스스로 들어도 굉장히 심각하다. 그러한 기색을 느꼈는지 투덜거림은 곧장 멈추었다. 이런 일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놈들인 만큼, 곧바로 어떤 상황인지 파악했을 것이다. 나는 연초를 무는 체하며 수정구를 더욱 가까이했다. 물론 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손을 최대한 오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세히 설명할 시간 없어. 의뢰는 저번이랑 똑같아.” (흠. 그렇군요. 그런데 잠시만요. 머셔너리 로드. 최근에 같이 간 창관 말입니다. 정말 죽이지 않았습니까?) 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곧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어 바로 회답했다. “그래. 확실히 죽여줬지.” (그렇죠. 그래서 다시 한 번 가보고는 싶은데, 거기가 어디였는지 잘 기억이 안 나네요. 혹시, 거기 이름이 뭐였는지 알고 있습니까?) “아아. 이제 갓 장사 시작한 곳이라 아직 유명하지는 않아. 그 건물 이름이 아마 해솔이었지? 그때 재갈 물고하는 플레이가 정말 죽여줬는데.” (크. 그렇군요. 사실 아직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말씀을 들으니까 또 가보고 싶어지기는 하네요. …아무래도 그래야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언제 한 번 같이 가시죠. 언제쯤 시간이 괜찮으십니까?) “나야 좋지. 지금 당장에라도 좋아. 아니. 제발 그랬으면 좋겠어.” (…그러시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목소리가 뚝 끊겼다. 마침 왁자지껄 떠드는 사용자 한 무리가 지나가, 나는 연초를 힘껏 빨아들이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어느새 수정구에서는, 더는 빛이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후. 드디어 사용자 아카데미 파트가 끝났습니다. 물론 완전히 라고 볼 수는 없지요. 하하. 진수현과의 대화 내용은 다음 회에 회상 내용으로 언급될 예정이고, 제갈 해솔의 처리도 다음 회에 나올 예정입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매듭을 지은 것 같아 속이 후련하네요. :) 0530 / 0933 ---------------------------------------------- 큰 결정. 회상. “강철 산맥이요…?” “그래. 강철 산맥.” 회답 후 나는 진수현의 기색을 살폈다. 보아하니 크게 놀라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렇다고 담담해 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멍해 보이지. 아마 대강은 알고 있지만 평소에 크게 염두에 두지 않은 모양이다. “저번에 중앙 관리 기구에서 이야기가 한 번 나왔거든. 이제 슬슬 준비들 하라고.” “준비라면 어느 정도의 기간을 말하는 거예요?” “글쎄.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르면 6개월? 아마 늦어도 1년 안에는 출발하겠지.” “6개월에서 1년….” 진수현은 애매한 얼굴로 머리를 갸웃했다. 나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그래. 애매하겠지. “원래 그 정도는 걸려. 강철 산맥을 공략하는 게 여타 유적 발굴하는 거랑은 다르잖아. 어디 한 클랜에서만 공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북 대륙 전역이 힘을 모아야 하는데.” “그러고 보니 예전에 한 번 공략 시도한 적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거야 대충 인원만 맞췄을 뿐이고. 엄밀히 말하면 애들 장난 수준이었지. 비교할게 못돼.” “그, 그래요? 형님이 그렇다면 그런 것 같기는 한데…. 으음.” 진수현은 깊은 고민에 빠진 듯 침음을 흘리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나는 최대한 왜 그러냐는 얼굴을 보이려 애썼다. 여기서 머리도 한 번 갸웃해주고. …이럴 때는 안솔이 정수리에 물음표를 띄우는 능력이 부럽군. 그렇게 가만히 보고만 있자, 진수현이 갑작스럽게 머리를 번쩍 치켜든다. “형님! 형님!” “으, 응?” “그거요. 만약에 하게 되면 하는 게 좋죠?” “그거?” “강철 산맥 공략이요. 형 말대로 1년 안에 공략 명령 떨어지면 참가하는 게 좋지 않아요?” “아. 그거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사실 사망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만, 그거야 항상 감수해야 하는 일이고. 또 이번에는 공략 가능성도 나름 높다고 보거든.”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내가 참가할거니까. “사실 북 대륙은 이제 거의 포화 상태라고 보면 돼. 뽑아먹을게 없다고 해야 할까?” “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미개척 지역으로 나간 거잖아요.” “그렇지. 왜냐하면 이 바바라도 똑같은 경우라 볼 수 있거든. 한 지역을 개척하고 바바라를 발견했던 것처럼, 강철 산맥을 공략하면 또 새로운 대륙이 나온다는 소리야. 생각해봐. 거기는 완전히 신천지일걸? 그냥 도시 밖으로만 나가면 유적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나올 거라고.” “오오오오….” 역시나 열혈이라는 성향이 있어서 그런지, 진수현은 사망 가능성이 높다는 말은 신경 쓰지 않는듯했다. 오직 감탄을 흘리며 맞장구를 칠뿐.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최대한 달콤한 과실들을 꺼내며 열심히 떠들고 있자, 서서히 시무룩하게 변하는 진수현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참가하는 게 좋다는 거야. 그러한 권리는 공략에 참가한 인원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지니까.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말을 잇다가, 적당한 때를 노려 도중에 말을 끊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공략 성공 시 능력치 포인트도…. 진수현?” “예, 예?” “왜 그래? 갑자기 시무룩해지고.” “아. 그렇게 보였어요?” 진수현은 멋쩍게 웃어 보이더니 코를 훌쩍 들이켰다. 그리고 입맛을 쩝쩝 다시기까지. “킁. 다 좋은데요. 사실 형이랑은 관계없는 이야기겠지만…. 별안간 걱정되는 게 하나 생겨서요.” “걱정?” “예. 형 말을 들어보니까 정말 엄청 참가하고 싶은데, 제가 상황이 좀 그래서. 혹시 참가할 때 개인으로 참가해도 상관없어요?” “아.” 여기서는 미처 그건 생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 좋겠지. “흠. 그러고 보니 그러네. 아무래도 개인보다는 클랜 단위로 선발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것도 대형 클랜들을 위주로.” “역시 그렇겠죠?” “냉정히 말하면 그렇지. 클랜이 있다고는 하지만 지금 인원이 너 포함 두 명밖에 없다며?” “예.” “그럼…. 아마 힘들지 않을까 싶은데.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선발 순위는 굉장히 낮을지도.” “…….” 그러자 진수현의 얼굴에 실망감 반 전전긍긍함 반이 눈에 띄게 자리 잡는다. 진수현도 한때 클랜 로드의 입장이었던 만큼 알고 있는 것이다. 고작 1년도 안 되는 시간에 대형 클랜으로 발돋움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즉 참가는 하고 싶지만 상황이 되지 않는다고나 할까. 물론 내가 노리던 게 바로 이 부분이었다. 이후부터는 우정민 때와 똑같이 나가면 된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실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그 순간 진수현의 어깨가 크게 들먹였다. 가만 보면 얘도 참 반응이 좋아. “우선 선택을 해야지. 강철 산맥 공략에 참가할 것인지, 아니면 숨을 고르고 힘을 모을 것인지.” “그거야 당연히 강철 산맥 공략 참가죠. 비전이 확실하니까요. 아무튼 어떤 방법인데요?” “간단해.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클랜 합병을 추진해봐. 그러면 길이 열릴 거다.” “합병이요?” 진수현은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긴듯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어색한 표정을 짓고는 어딘가 씁쓸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내가 이런 말을 할 것이라 추측했던 것처럼. “에…. 그러면 형 클랜에 들어오라는 소리에요?” 나는 차분히 속을 추슬렀다. 어차피 이런 반응이 나올 것은 예상했다. 여기서 부터가 중요하다. “아. 그렇게 들렸나? 그렇다면 미안. 우리 클랜에서 네 클랜을 받을 수는 없거든.” “…예?” 진수현은 떨떠름해 보이는 얼굴로 되물었다. 흡사 '어. 이게 아닌데.' 라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 나는 잔잔히 웃으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머셔너리는 용병 클랜이잖아. 그래서 애초 합병이라는 개념을 두지 않아.” “그게 무슨…?”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신분도 용병이거든. 정확히는 자유 용병. 일단 클랜원으로 등록해두기는 하지만, 사실 다른 클랜의 클랜원과는 다른 개념이야. 물론 정말 머셔너리가 좋아서 활동하는 사용자도 있겠지만, 경험을 쌓거나 금화를 벌기 위해 들어온 사람도 있는 걸.” “아, 아니. 그래도 상관없어요?” 이제야 조금 감을 잡았는지 진수현이 바로 되물었다. 나는 거리낌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우정민, 선유운, 원혜수라는 훌륭한 예가 있으니까. 문제는 그들이 나갈 생각은커녕, 이제는 뼛속까지 머셔너리 클랜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일 뿐. “그럼. 상관없지. 나는 하자만 없으면 받아들여. 거듭 말하지만 용병이니까.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보다 좋은 환경은 없잖아? 서로 상부상조하자는 거지.” “상부상조….” 빠르게 말을 잇자 진수현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쯤이면 됐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있는 힘껏 기지개를 피며 몸을 일으켰다. 진수현의 시선이 나를 따라 올라온다. “아무튼, 아무래도 괜한 말을 한 모양이다. 그래도 합병은 잘 생각해봐. 원한다면 좋은 클랜을 소개해줄 수도 있으니까. 그럼….” 그때였다. “자, 잠시 만요. 형님.” 갑작스럽게 진수현이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내 손을 덥석 붙잡는다. 살며시 시선을 돌리자 어딘가 모르게 다급해 보이는, 그러나 혹한 눈동자가 밟혔다. “응? 왜? 나 피곤한데.” 그리고 잠시 후. “죄송한데, 혹시 그 자유 용병에 대해서 조금만 더 알려주시면 안 돼요?”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 살문과의 통신을 마친 후, 나는 클랜원들이 기다리는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가는 도중 계속해서 미묘한 감정이 든다. 애당초 이렇게 하기로 마음은 먹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기분이다. 뭐랄까. 아쉽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혹은 믿을 수 없기도 하고. …사실 상대가 제갈 해솔만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윽고 앞에서 클랜원들이 보이기 시작해 나는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비록 최선은 아닐지라도 차선은 된다. 일 처리에 한해서이기는 하지만, 살문은 고연주 다음으로 믿을 수 있는 놈들이니까. 그래. 이미 끝난 일이나 다름없는데 이제 와서 어찌하랴. 죄책감인지 후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계속 붙잡혀있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아직도 쿵쿵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앞을 응시했다. 차희영은 안현의 옆에 꼭 붙어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진수현과 맹아라의 모습도 보였다. 아마 내가 자리를 비운 새에 도착한 듯싶었다. 다행히 미리 말을 해두어서인지 하연이 구김살 없는 얼굴로 말을 붙이고 있는 듯했고, 진수현도 딱히 어색한 태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보자마자 두 손을 흔들기까지 하며, 꽤나 설레어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에 반해, 맹아라는 착잡하기 짝이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오죽하면 나를 보는 눈초리에 원망 섞인 감정이 느껴질 정도였다. 사실 진수현을 품는다는 것은 수호자도 클랜 내로 들여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충분히 참작하고 진행한 일이다. 이효을이라면 모를까. 맹아라라면 그다지 큰 위협은 되지 못하고, 이제는 천사들도 상당수 내 쪽으로 돌아선 상태였다. “형님! 저희 왔습니다!” 아는 체하는 진수현에 손을 들어 화답한 후,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다들 모인 것 같군요.” “네. 아. 신재룡씨는 조금 늦는다고 하셨어요. 중앙 관리 기구에 들려야 해서, 끝나고 따로 가겠다 전해달라고….” 마침 하연의 회답해와 나는 싱겁게 웃었다. “총 교관인 게 죄죠. 아무튼 어서 나가도록 합시다. 사용자들이 많다보니까 정신이 없네요.” 확실히 그랬다. 주변에는 시끌시끌한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 안 그래도 인원이 많은데 이번 수료식으로 수백이 되는 인원이 들어온 탓이다. 그뿐일까? 밖에는 오퍼를 받지 못한 인원을 잡으려는 사용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룰 것이다. 다들 나와 비슷한 마음인지 빠르게 머리들을 끄덕여, 나는 곧바로 사용자 아카데미를 나서 워프 게이트로 걸음을 옮겼다. 사용자들이 많다는 점만 제외하면 가는 길은 순탄했다. 그저 한 시라도 빨리 모니카로 가고픈 마음에 빠른 걸음으로 이동하던 와중, 안현은 나를 계속 흘끔흘끔 흘겨봤을 뿐. 이내 워프 게이트 앞에서는 대놓고 머뭇거리기까지 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안현의 것까지 이용 대금을 지불했다. 그렇게 모니카로 이동하고 나서, 나는 한 가지 중요한 결정을 해야만 했다. 뒤에서 터벅터벅 따라오는 진수현과 안솔을 두고 조금, 아니 최대한 멀리 떨어져 걷기로 결정한 것이다. 마치 같은 일행이 아닌 것처럼. “에헴! 저 건물도 바로 우리 머셔너리 건물이라고요! 대장간인데, 매우 소문이 좋아 괜찮은 수입을 올리죠.” “우와~! 그럼 너희도 저기서 장비들을 공수하는 거야?” “아니요~. 저건 어디까지나 판매하는 상점, 즉 분점에 불과해요. 본점은 클랜 하우스 내에 있거든요? 본점의 장비는 판매는 절대 하지 않고요, 클랜원들이 사용하는 무기만 전문적으로 만들어요.” “우와아아~!” “그리고 저 건물은요. 사랑 주점이에요. 한나 언니랑 유정이 언니가 같이 운영하는데, 조심하셔야 해요. 한나 언니 음식은 괜찮지만, 유정이 언니 음식은 정말…. 아야! 왜 때려요! 사실이…! 어, 어? 유, 유정이 언니? …오라버니이이이이!” “우와아아아아~!” …도대체 언제 이렇게 친해진 걸까. 물론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니다. 붙임성이 좋다는 것은 그만큼 빠르게 적응할 수 있다는 소리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창피하다. 비단 나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닌지, 선유운과 차소림 또한 내 옆에서 걷는 중이었다. 이윽고 머셔너리의 클랜 하우스가 눈에 보일 무렵. 문득 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 나는 차소림을 향해 말을 걸었다. “사용자 차소림.” “네.” “빨리 돌아오지 못해 미안합니다.” “…딸꾹.” 차소림은 얌전하게 딸꾹질을 했다. 그리고 얌전하게 나를 쳐다보고는, 또 얌전하게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서서히 뒷걸음을 치기 시작. 그 반응이 너무도 얌전하면서 자연스러워, 속으로 한바탕 웃고 났을 때는 이미 모습이 사라진 상태였다. 사실 쫓아가 더 놀리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나는 곧바로 마음을 접었다. 어느덧 클랜 하우스에 도착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안쪽에서 감지되는 수십 명이 도열한 기척을 느끼며, 나는 곧바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정문은 이미 활짝 열린 상태였다. 예상대로 정원에는, 정문을 중심으로 수십 명의 클랜원들이 좌우로 나란히 서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수척한 얼굴을 한 조승우가 반갑게 웃으며 나를 맞이해주었다. “사용자 조승우. 얼굴이….” “어, 어서 오십시오. 정말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클랜 로드.” 그 순간 동시에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클랜원들. 동시에 등 뒤로 끈임 없이 들려오던 시끌시끌한 소리들이 뚝 끊겼다. 다행히 눈치는 있다고 생각하며, 나는 위쪽으로 손짓했다. 이만 고개를 들라는 신호였다. “다들 나와 있었네요. 수료식 마치고 바로 오는 길입니다.” “예. 자세한 사항은 어제 사용자 정하연에게 들었습니다.” “좋군요. 그럼 따로 별일은 없었고요?” “아. 그게 말이죠. 실은….” 우웅. 그때였다. 막 조승우가 말을 이으려는 찰나, 갑작스럽게 품에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넣으려다가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그러나 눈치 빠른 조승우가 곧바로 주문을 외워 블록 필드를 걸어주었고, 이내 필드가 형성됨과 동시에 통신용 수정구를 꺼내들었다. 살문에서의 통신. 설마 벌써 끝낸 건가? 나는 곧바로 마력을 흘려 넣었다. (머셔너리 로드.) “뭐냐. 벌써 끝냈어?” (저희야말로 되묻고 싶군요. 지금 장난하시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의뢰를 하신 겁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무슨 생각이라니?” (나 참. …하기야 머셔너리 로드가 장난칠 분은 아니지만. 아. 지금 말해도 상관없습니까?) “상관없어. 블록 필드 안이니까.” 그러자 수정구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수정구를 가까이 대자, 검은 천을 휘감은 놈이 반대로 멀찍이 떨어진다. (알겠습니다. 우선 말씀하신 병아리는 확실히 찾아냈습니다. 제갈 해솔. 맞습니까?) “정확한데.” (그러면 빨리 클랜 하우스로 들어가 보십시오. 보아하니 머셔너리 로드도 모르시는 것 같은데, 한 번 확인해보시고 다시 연락을 주시길 바랍니다.) “…왜? 지금 클랜 하우스에 막 들어왔는데?” (그럼 다행이고요. 곧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조심하십시오. 그 계집, 여간내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방심하지 않고 접근했는데, 하마터면 들킬 뻔했습니다.) “…뭐? 너희가?” (아무튼 저희가 해드릴 말은 이것뿐입니다. 그럼 이만.) “잠깐만….” 그러나 채 말이 끝나기도 전, 수정구의 통신은 끊어지고 말았다. 어이없는 기분에 멍하니 서 있자 이내 블록 필드가 서서히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잠시 후. 조승우는 흘끗 수정구를 보더니 걱정하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괜찮으십니까? 클랜 로드. 얼굴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별일 아닙니다. 괜찮아요. 그나저나 아까 말하려던 건?” “아. 다름이 아니고. 조금 전에 손님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클랜 로드 님을 뵙고 싶다고해서 우선은 안내했습니다만.” “손님이라고요?” 바로 되묻자, 조승우는 본관을 돌아보며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예. 사용자 아카데미 복장을 하고 있던데요?” ============================ 작품 후기 ============================ 1시 세이프! 제갈 해솔이 살아남아서 커다란 적이 되는 스토리는 저도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편이라. -_-a 아마 그렇게 썼으면 욕도 무지하게 먹었겠죠. 아니면 정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만들던가요. 하하하. 물론 그런 스토리도 확실히 있기는 한데, 하려고 했으면 아마 유현아를 대상으로 진작 써먹었을 겁니다. ㅋ_ㅋ 0531 / 0933 ---------------------------------------------- 큰 결정. 응접실 안. 한 여인이 길쭉한 다리를 가지런히 모은 채, 하얀 김이 조금씩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어올렸다. 이내 청초한 분홍빛 입술이 맞물리자 찻잔이 천천히 기울어진다. 홀짝. “응?” 첫 번째 들이킴에 여인의 두 눈이 살짝 떠지고. 후룩. “으음!” 두 번째 들이킴에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여인은 고개를 사뿐 들며 나를 바라보았다. 차 맛이 퍽이나 만족스러운지 생글생글한 눈으로 정답게 웃어 보인다. “와~. 차 맛이 정말 장난이 아닌데요? 저도 현대에서 전통 찻집 하나 운영했는데,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맛이에요!” “…….” “재료도 궁금하고 누가 만들었는지도 궁금하네요?” “…….” “…그래요. 평소 사내의 시선을 즐기는 편이기는 해요. 그래도 무슨 말이라도 해봐요 좀. 자꾸 그렇게 보니까 나 되게 민망하다.” “…….” 여인은 겸연쩍은 듯 어깨를 살짝 들먹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차를 후루룩. 나는 그런 여인, 아니 제갈 해솔을 보며 어이가 가출하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나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상황 자체는 간단하다. 살문의 통신과 조승우의 보고를 받은 후, 나는 손님을 안내했다는 응접실로 곧장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응접실에는 제갈 해솔이 태연히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오직 그것뿐이기는 하지만. “너…. 도대체 뭐냐.” 아마 지금 한 말이 내 심정을 완벽하게 대변해주지 않을까. 그때. 제갈 해솔은 분명히 작별 인사와 비슷한 말을 건넸다. 나는 영입이 실패했다고 판단, 살문을 시켜 살해를 의뢰했고. 그것으로 모두 끝났다 여겼는데 별안간 눈앞에 떡하니 나타난 것이다. 결국 제 발로 머셔너리에 들어왔다는 소린데, 솔직히 내 예측을 벗어난 행동이었다. 오죽하면 낚시를 당한 물고기가 된 기분이랄까. 잠시 후. 제갈 해솔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어머. 반말?” 그 순간, 나는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탕! “작작 놀려라. 사용자 제갈 해솔.” 탁자가 이리저리 흔들림과 함께 제갈 해솔이 흠칫 몸을 떨었다. 곧 눈을 동그랗게 뜬 제갈 해솔은 아미를 살그머니 찡그리며, 자못 서운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깜짝아. 화났다면 미안해요. 하지만 놀린 적도 없고, 그럴 생각도 아니었어요.” “그럼 왜 내 눈에는 지금 나랑 장난 한 번 해보자는 걸로 보일까? 사용자 제갈 해솔?” “알아요. 이제 더는 교육생이 아니라는 거. …그리고 그때 그 말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장난이 아니었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럼.” 무슨 뜻이냐고 말하려는 찰나,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제갈 해솔은 어느새 예의 심원한 눈동자로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치 천천히 관찰이라도 하듯이. 갑작스럽게 살문의 보고가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조심하십시오. 그 계집, 여간내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방심하지 않고 접근했는데 하마터면 들킬 뻔했습니다.' “사용자 아카데미를 나선 후, 채 20분도 지나지 않아 느꼈죠.” 탁, 찻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제갈 해솔이 천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 이 세상 참 무서운 세상이구나.”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해지는걸 느꼈다. 그냥 듣고 넘기기에는 제갈 해솔의 말투가 무척이나 의미심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저질러놓은 일도 있었고. 살문 이놈들. 정말 들키지 않은 것 맞나? 아무튼. 너무 필요 이상으로 흥분한 것 같아, 나는 침착히 숨을 골랐다. 그래. 마음을 가라앉히자. 내 예측을 벗어나기는 했지만, 우선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렇다면 일단 모르는 척부터. “…우선 방금 말을 함부로 한 건 사과하죠. 나를 놀린다고 생각한 터라. 아무튼, 확실히 갓 나온 병아리들을 노리는 놈들이 있기는 합니다. 좋아요. 그건 이해합니다.” “흐응.” “하지만 그럼 왜 우리 클랜으로 온 겁니까?” “네? 그게 무슨.” “사용자 제갈 해솔이 그렇게 느꼈다면, 이스탄텔 로우로 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보호를 요청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영입하려는 클랜이 그곳밖에 없었는데.” “흠?” 잠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제갈 해솔이 되레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또 어떻게 아신 건지…. 아무튼 그래서요?” “……?” “확실히 혼자서는 위험할 수도 있겠다 느끼기는 했어요. 그래서 어딘가 몸을 의탁할 장소를 찾아야 하는데, 그 장소로 머셔너리를 선택했을 뿐이죠. 그게 그렇게나 이상한 일인가요?” “아니. 그러니까 왜.” “이제 홀 플레인 갓 나온 제갈 해솔이라는 사용자 입장에서. 이스탄텔 로우보다 머셔너리에 더 높은 가치를 두었으니까요.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에요.” “…….” 나는 도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딱히 흠을 잡을 만한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 “뭐, 수료식 때 들었던 연설에 혹한 것도 없잖아 있지만요. 아니. 실은 그게 가장 커요. 여기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갑작스럽게 시선을 확 빼앗겼다니까요?” 제갈 해솔은 혀를 살짝 내밀더니 빙긋 웃으며 차를 들이켰다. 나는 조용히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래서. 결국에는 우리 머셔너리 클랜에 가입하겠다. 이 말입니까.” “네. 필요하다면 가입 테스트도 치를 생각이에요.” 목울대를 꼴깍 움직인 제갈 해솔은, 명료한 목소리로 회답했다.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 (그렇구나. 그럼 아직은 손님으로 대우하는 거야?) 늦은 오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붉은빛 석양은 집무실 책상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조막만 한 수정구가 밝은 빛을 내뿜고 있다. 나는 수정구가 비치는 인물에 얼굴을 더욱 가까이하며 말했다. “그렇지. 아무래도 덜컥 받아들이기에는 뭔가 찜찜하니까. 도저히 속을 읽을 수가 없다니까. 도대체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흠. 찜찜하다고….) “왜?” (그냥. 조금 이상해서.) “역시 형도 그렇지?” (아니 아니. 내 말은 그 제갈 해솔이라는 사용자가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네가 이상하다는 거야.) 그 말에 나는 멍하니 수정구를 응시했다. 형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들더니 곧 싱겁게 웃어보였다. (수현아. 이건 그냥 사실대로 말하마. 네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 확실하게….” (이거나 그거나. 아직 망설이고 있는 건 사실이잖아. 괜히 너 생각하기 좋은 방향으로 자기 합리화는 하지 마려무나. 그건 정말 나쁜 버릇이니까.) “…….”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인데. 그럼 좋아. 하나 물어볼게. 1회 차에 너와 적이라는 사실을 떠나서, 그 제갈 해솔이라는 사용자가 이상한 사용자였니? 네가 그렇게나 꺼림칙하게 생각할 만큼? 예를 들면 클랜 로드를 배신했다거나.) “…아니.” 나는 사실대로 회답했다. 배신은커녕 오히려 수많은 영입 제의를 뿌리치고 유현아의 옆을 지킨 게 제갈 해솔이었다. (그럼 뭐 악명이 높았어? 차마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잔인한 짓을 밥 먹듯이 했다거나 등등.) 그것도 아니었다. 나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럼 결국 어떤 하자도 없는 사용자라는 소리네?) “그렇기는 한데.” (그렇기는 한데가 아니지. 결국에는 그거잖아. 너는 그 제갈 해솔이라는 사용자를 두려워하는 거야.) “…두려워한다고? 내가?” (그래. 1회 차에 최고의 잠재성을 보였던 제갈 해솔. 그리고 지금 네가 가진 수많은 성과. 그 두 개의 요소가 합쳐져 탄생할 제갈 해솔을, 너는 괴물이라 지레짐작해버린 거지. 즉 너는 네가 통제할 수 없는 사용자를, 네 손으로 키워낼 것을 두려워했다는 소리야. 아니야?)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형의 말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형은 갑갑하구나. 네가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조차 이해가 안 가. 한 번 이렇게 생각해봐. 지금 네 앞에 탄탄대로가 펼쳐졌어. 그리고 너와 함께 그 길을 걸어가고 싶어 하는 사용자가 있어. 그럼 그냥 가면 돼. 그래. 그러면 되는 일인데, 너는 한 걸음 걷고, 주변을 살피고, 바닥을 두드리고, 같이 가는 사용자의 몸을 수색하고. 그리고 또 한 걸음 걷고 아까 과정을 또다시 반복하고.) “…….” (그러면 같이 가는 사용자가 너를 어떻게 생각할까? 응? 한 번쯤은 서로 손잡고 기분 좋게 걸어갈 수도 있는 거잖아.) “형.” 분명히 구구절절 옳은 말이기는 한데, 별안간 섭섭한 마음이 차오르는 건 왜일까. 그래서 간신히 입을 열은 찰나, 형은 빠르게 머리를 흔들었다. 조금 더 내 얘기를 들으라는 듯이. (수현아. 네 마음은 알고 있다. 1회 차에서 2회 차로 다시 돌아오는 걸 선택했을 때. 그때 네가 어떤 마음으로 돌아왔을지 생각해보면, 네가 왜 그런 태도를 보이는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해. 하지만 아는 거랑 옳은 거랑은 명백히 다르다.) 엄하기 그지없는 형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 문득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형의 얼굴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지금은 2회 차지, 1회 차가 아니잖아. …내 더는 다른 말은 하지 않으마.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네가 나를 믿고 있는 만큼, 그리고 내가 너를 믿고 있는 만큼. 적어도, 단 한 번만이라도 네가 다른 사람을 믿어봤으면 좋겠구나.) 믿음. 이라. * 형과의 통신을 마친 후, 나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 이 세상 참 무서운 세상이구나.' '한 번쯤은 서로 손잡고 기분 좋게 걸어갈 수도 있는 거잖아.' '…그래서 머셔너리를 선택했을 뿐이죠. 그게 그렇게나 이상한 일인가요?' '네가 나를 믿고 있는 만큼, 내가 너를 믿고 있는 만큼.'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책상을 물들이던 붉은빛에 서서히 땅거미가 섞여 들어올 즈음. 나는 번쩍 눈을 뜨며 힘차게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리고 곧바로 서랍을 열어 가지런히 정리된 호출석들을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지금부터 할 일들은. 2회 차 이후, 여태껏 내가 걸어온 길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혹은 내 생각이 틀린 것이라면. 형의 말대로 한 번쯤 시도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이것이 내 홀 플레인 인생 최대의 도박이라고 할지라도. 그렇게 생각한 나는 더는 주저하지 않고 호출석을 눌렀고, 곧바로 들어온 선유운에게 객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제갈 해솔을 데려오라 지시했다. 그리고 채 3분도 지나지 않아, 제갈 해솔이 사뿐사뿐 걸어 들어오는 걸 볼 수 있었다. “부르셨어요?” 나는 아무 말도 않고 기록 세 장을 집어 던졌다. 기록은 일직선을 그리며 허공을 날았고, 제갈 해솔은 솜씨 좋게 기록들을 잡아챘다. “이건….” “하나는 머셔너리 클랜 가입 신청서고, 다른 하나는 자유 용병 신분 변경 신청서입니다. 내일 아침에 회의가 있을 테니, 그때 제출하도록 하세요.” “오? 그럼 다른 하나는요?” “용병 아카데미 교육생 등록 신청서입니다. 이건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작성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 순간, 두 눈을 살며시 치켜뜬 제갈 해솔이 고요히 나를 응시한다. 사실 하고픈 말은 많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담아 누르며, 나는 차분히 손을 내밀었다. 제갈 해솔이 입을 열었다. “그럼.” “오랜 시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가보셔도 됩니다. 지금 바로 숙소를 배정해두라 지시할 테니, 부디 편히 지내시길.” “네, 네?” “머셔너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때 아주 잠시였지만, 나를 보는 제갈 해솔이 눈동자가 약간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아주 잠시였다. 곧 제갈 해솔의 새하얀 손이 내 손목을 덥석 잡는다. 이어서 내 손을 따라, 자신의 손을 강하게 쓸어내린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마찰감. 이건 무슨 의미일까. 새롭게 악수하는 방법? 의아히 시선을 들자, 어느새 방문 밖으로 모습을 감추는…. 아니. 방문을 나서던 제갈 해솔의 걸음이 별안간 우뚝 멈추었다. 그러더니 고개만 빠끔히 내밀며 한쪽 눈을 찡긋. 그와 동시에, 아까 쓸어내린 손바닥을 들어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춘다. “땡큐! 고마워요~.” 그리고 나를 향해 “후~.” 불어내기까지. 어디서 본 건 있는 모양이다. 이내 제갈 해솔의 기척이 빠르게 멀어지는 걸 느끼며,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째 온몸에 힘이 없다. 격렬한 전투를 치른 것도 아닌데 힘이 빠진 기분이랄까. 그냥 이대로 푹 잠들고 싶어진다. 그때였다. - 야. 갑작스럽게 내면에서 들려온 목소리. 막 눈을 감으려던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목소리는…. “부인?” - 후후. 그동안 나…. 이 자식이 진짜! 그리고 그 순간. 펑! 눈앞으로, 번쩍 불꽃이 튀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_(__)_ 실은 오늘따라 이상하게 글이 턱턱 막혀서요. 중간중간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나름 팍팍 나가는 부분도 있는데, 오늘은 처음부터 끝까지 꽉 막히더라고요. 진짜 꾸역꾸역 쥐어짠 기분입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요. OTL. 아무튼 내일부터는 더 힘내서 집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밤이 늦었네요. 기다려주신 독자 분들께 깊은 양해를 구하며, 부디 편안한 밤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 0532 / 0933 ---------------------------------------------- 새로운 여왕. 꼭두새벽.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으스스한 공기가 방안을 맴돌고 있었다. 그런 한기를 느꼈는지 제갈 해솔은 으응, 신음을 흘리며 살며시 눈을 떴다. 졸음 가득한 눈은 잠시. 별안간 제갈 해솔이 잠이 싹 달아난 듯한 얼굴을 하더니 한쪽을 흘끗 흘겼다. 도저히 무어라 딱 집어 말할 수 없는 미묘한 감각이 온몸을 엄습했기 때문이다. “으음~. 좋은 아침이에요. 확실히 사용자 아카데미와는 비교할 수 없네요. 침대도 푹신푹신하고.” 한 차례 가벼이 기지개를 피며 말했으나, 회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제갈 해솔은 휙 상반신을 일으켰다. 가볍게 손을 튕기자, 저절로 창문이 열리며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온다. 이내 기다란 머리칼이 바람결에 펄럭 나부낄 즈음. 제갈 해솔이 쭉 뻗은 팔을 도로 내리려는 찰나, 갑작스럽게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살그머니 시선을 떨어트리자, 어느덧 하얀 김을 피우는 찻잔이 왼쪽 목 부근에 닿아있음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제갈 해솔은 함부로 손을 내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뜨끈뜨끈한 왼쪽과는 달리, 오른쪽 목 부근에서는 서늘한 한기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 칼? 아니면 그냥 공기? 고개를 갸웃한 제갈 해솔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너무해요. 이 클랜은 원래 이렇게 배타적인가요?” “초창기에는 그런 면도 없잖아 있었지.” 비로소 들려온 목소리는 무척 성숙한 여인의 음색이었다. 그 순간, 제갈 해솔은 한껏 마력을 끌어올려 수송 능력을 사용했다. 퉁, 짙푸른 마력의 기류가 퍼지고 침대에 있던 제갈 해솔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1초 후, 창문 앞 공간이 약간 일그러짐과 동시에 제갈 해솔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순간이었다. “재밌는 능력이네.” 처음으로, 제갈 해솔의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됐다. 분명 수송 능력을 사용해 자리를 이동했음에도,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았다. 따끈한 김과 서늘한 한기는 여전히 목 부근을 맴돌고 있다. 어떻게? 그 생각을 읽은 듯, 나른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속살거리듯 들려온다. “사람은 누구나 다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 법이지.” 그림자. 그 말을 들은 순간 제갈 해솔은 곧바로 뒤에 서 있는 누군가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윽고 차갑지만 부드러운 감촉이 제갈 해솔의 어깨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그와 동시에 찻잔이 올라와 입술에 닿는다. “마시렴. 어제 차 맛이 좋았다며?” 돌연 척추를 타고 흐르는 오싹한 기운에 몸서리치며, 제갈 해솔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마치 아기라도 된 것처럼 기울여주는 대로 차를 받아 마셨다. “몹시 흥미로워. 확실히 그이가 관심을 가질 만도 해. 이제 갓 나온 교육생이 내 기척을 느끼고, 이동 능력을 사용해?” 그이? 뜨겁고 맛 좋은 차를 한 모금 꿀꺽 넘기며 제갈 해솔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애가 나온 거야? 너는 누구지?” “…….” 그림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름은…. 제갈 해솔. 나이는…. 29. 성별은…. 여성. 그리고 키는 168 정도에, 몸무게는 48 정도로 추정. 또한 특징은….” “다리가 길고 예쁘다.” “흠? 뭐, 확실히 예쁘기는 하네.” “역시. 그리고 가슴도 65 C컵이에요. 그것도 자연산. 어때요? 부럽죠?” 그림자는 힘없이 입을 터뜨리며 피식 웃었다. “별로? 나는 70 F컵이라서.” “…네?” “생리할 때는 G컵까지도 되는 것 같더라. 아. 물론 나도 참이란다.” “뻐, 뻥 치지 말아요.” 제갈 해솔은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훌쩍 몸을 돌렸다. 그러자 바로 뒤에,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 쌍의 시선과 마주할 수 있었다. 이내 잿빛 눈동자가 한 번 번뜩인 순간, 제갈 해솔은 거의 본능에 따라 두 눈을 크게 치켜 떴다. 『사용자 고연주의 고유 능력, '유혹의 눈동자'의 발동을 확인합니다.』 『사용자 제갈 해솔의 고유 능력, '하늘을 굽어보는 지혜의 눈'이 대응합니다.』 『대응 결과, 상성 상 '하늘을 굽어보는 지혜의 눈'이 '유혹의 눈동자'보다 4랭크 상승 판정을 받습니다.』 『사용자 고연주의 '유혹의 눈동자'를 간파합니다!』 “아?” 간파된 순간, 고연주는 반사적으로 눈을 가리며 두어 걸음 물러났다. 제갈 해솔은 담담히 응시했다. 물론 고연주의 풍만하다 못해 폭발적인 가슴을. 이윽고 제갈 해솔이 분하기 짝이 없다는 얼굴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을 때, 삽시간에 안정을 찾은 고연주가 눈을 슬슬 문지르며 허탈이 웃어 보였다. “나 참. 이제는 간파까지? 어쩜 그이랑 이런 것까지 모두 똑같니?” “그이가 누구….” “누구긴 누구야. 앞으로 함께 모실 클랜 로드 님이지.” “흐응.” 그제야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어 제갈 해솔은 미약한 비음을 흘렸다. 이스터 에그에서의 첫만남을 떠올린 것이다. 지금은 자신이 간파했다고 하지만, 그때는 되레 간파 당했으니까. 사실 그때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는 했지만,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윽고 고개를 주억인 제갈 해솔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 클랜, 신고식 한 번 참 독특해요?” “어머. 설마 고자질할 생각은 아니지?” “어머머. 오늘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일러바칠 건데요? 등쌀 때문에 못살겠다고.” “얘는.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리를. 나는 그냥 아침에 깨워주러 왔을 뿐이야. 그래서 직접 탄 차도 들고 왔는걸?” 그러고 보니 제갈 해솔의 손에 어느덧 찻잔이 쥐어져 있었다. 이건 또 언제 받게 된 걸까. 혹시 귀신에 홀린 건가 싶어 스스로를 의심할 무렵. “아무튼 다 좋은데, 우리 그이 너무 속 썩이지는 말아주렴. 안 그래도 머리 아픈 사람이야.” 고연주는 마치 이제 더는 볼 일이 없다는 듯, 돌연 빙글 몸을 돌리더니. “아. 머셔너리에 온 걸 환영해. 앞으로 잘 지내보자?” 느릿하게 손을 흔들며 방문 밖으로 스르르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후. 멍하니 서 있던 제갈 해솔은 천천히 손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차분히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는, 이내 고연주가 나간 방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부럽다.” *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끝낸 후 나는 곧바로 4층으로 직행했다. 어제 사전에 공지한대로 회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딱히 중요한 안건을 다룬다는 것 보다는 간단한 정리나 보고가 주를 이룰 테지만,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어야 하는 만큼 꼭 밟아야 할 과정이었다. 물론 새로 들어온 클랜원들도 정식으로 소개를 해야 하고. 아차. 이번에 복귀한 클랜원도 공식적으로 발표해야지. 그러고 보니 해야 할게 한두 개가 아니로군. 이윽고 상석에 앉아 클랜원들이 하나하나 들어오는 걸 바라보고 있자, 어느 순간 제갈 해솔이 사뿐사뿐 걸어 들어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어디로 앉아야 할지 모르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만 있자 한나가 상냥히 웃으며 자리를 안내해준다. 그러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자리에 앉은 제갈 해솔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눈을 마주쳤다. 이제 또 활짝 웃어 보이겠지. 그러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제갈 해솔은 웃기는커녕 흥,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홱 돌려버린 것이다. - 호. 재밌는 애가 보이네? 쟤는 또 왜 저러나 생각할 무렵, 내면에서 화정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재밌다니?' - 아아. 방금 너보고 고개 돌린 애. 쟤 누구야? '얼마 전에 들어온 사용자야. 어제 제 발로 걸어 들어왔지.' - 얼마 전에 들어온 사용자라…. 확실히 이 세상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데. 그런데 어떻게 하늘을 굽어보는 지혜의 눈이 보이는 거지? 문득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화정이 나 말고 이렇게 다른 사용자에게 관심을 보인 적이 있던가? 하지만 나는 곧 수긍할 수 있었다. 상대는 그 제갈 해솔이니까. 뭔가 특이한 게 있을 수도 있겠지. '하늘을 굽어보는 지혜의 눈? 그건 뭐지?' - 원래는 인간이 익힐 수 없는, 용들만이 고유한 능력이지. 마법의 원리를 파악하고 근원에 다다를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이라고나 할까. 원리와 근원?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어려운데.' - 뭐, 설명하자면 한도 끝도 없으니까. 아무튼 중요한 건 용들의 고유한 능력이지만, 간혹 천 년에 한 번 재능을 타고난 인간들이 나오기는 하거든. '그럼 제갈 해솔이 그 천 년에 한 번 나오는 재능을 타고났다는 말이야?' - 제갈 해솔? 아아. 쟤. …그렇게도 볼 수 있는데, 그게 또 이상해. 너희 사용자라는 존재는 원래 절대로 하늘을 굽어보는 지혜의 눈을 가질 수가 없거든. 차라리 꺼지지 않는 지혜의 빛이라면 모를까. '왜 사용자는 가질 수가 없는 건데?' - 사용자니까. 너희는 마력 회로라는 설정이 부여돼있는 상태라, 속성으로 마법을 배우는 입장이잖아. 하지만 여기 거주민들은 달라. 지금이야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득한 고대 시절에는 정말로 혹독한 연습과 수련을 거치고 나서야 마법사가 될 수 있었거든. 혹시 예전에 변태 마법사가 했던 말 기억나? 변태 마법사?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기억난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피나는 노력을 거쳐서 마력을 쌓아나가고, 머리가 터져라 책을 읽고, 손가락이 부서지도록 주문을 맺으며 연습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별 꼴같잖은, 수련 같지도 않은 수련을 하고 능력을 사용하는 주제에….' - 그래. 사실 그 말이 맞아. 걔 입장에서 보면 너희 마법사라는 사용자들이 아주 우습게 보일 거야. 속성으로 배울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근원은커녕 가동 원리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저 애는 다르지. 마력 회로라는 설정이 부여돼있으면서 하늘을 굽어보는 지혜의 눈이라는 희대의 재능까지 갖추고 있다고.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 순간 나는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걸 느꼈다. 그렇다면 제갈 해솔은 속성으로 성장할 수 있으면서, 마법의 원리 파악과 근원에 다다를 수 있는 자격을 가졌다는 말인가? 그때였다. “클랜 로드. 회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나직이 들려오는 조승우의 말에 나는 바로 정신을 차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60명이 넘는 클랜원들이 일제히 나를 돌아보고 있다. 그런 그들을 한 명씩 둘러본 후,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죠.” * 화륵. 오직 어둠만이 내려앉은 방에서 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 발간 불빛이 점으로 나타났다. 나타난 크기로 보아 연초에 불을 붙인 게 분명하다. “…미치겠군. 너무 안일했던 건가?” 언뜻 보기에 평범하게 보이는 사내. 아니 악마가 한 번 힘껏 빨아들이자, 연초는 삽시간에 필터 끝까지 재가 되어버렸다. 이내 우수수 떨어지는 재를 연기를 내뿜어 흩날리게 한 후, 악마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흐음. 이건 좀 위험한데.” 그리고 양손을 엇갈려 맞추더니 어둠이 들어찬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 번 더 말을 잇는다. “아니. 좀이 아니라 매우 위험해. 안 그런가?” 마치 방안에 누가 있기라도 한 듯 말을 거는 악마. 하지만 회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저 고요한 정적만이 흐르고 있을 뿐. 그러나 익숙한 건지, 아니면 아예 아랑곳하지를 않는 건지. 악마는 손을 잔뜩 구기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었던 듯 와자작, 종이를 구기는 소리가 들려온다. “벨리알. 아무래도 한 번 더 7대 악마를 소집해야겠다. 네가 책임지고 소식을 전해라. 그리고 아스타로트와 바알은 무조건 참석시키도록. 지금 바로.” “…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아스타로트 님은 더더욱.” 그때, 처음으로 천장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굵직하면서도 불쾌한 쇳소리와 비슷한 게, 딱히 듣기 좋은 음성은 아니었다. 막 방을 나가려던 악마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차분히 천장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전해. 대계의 연락이라고.” 반응은, 반 박자 늦게 들려왔다. “대계…? 설마.” “그래. 예언이 떨어졌다. 지금 난리가 났다고 하는군.” “그, 급한 상황입니까?” “매우.” 처음에는 담담하기 그지없던 목소리가 이제는 말을 더듬는다. 대계. 예언. 도대체 무슨 말들이, 아니 무슨 뜻이 있는 걸까? “그래. 이제 곧 새로운 대체 여왕이 출현하고, 그러면 네 명의 여왕이 왕의 곁에 자리잡는다. 전쟁 이후, 처음으로 다변화 패배의 일차 조건이 만족되었다고 하더군.” “그럴 리가!” “하지만 사실이야. 이제는 철수냐 속행이냐. 이번 회의에서 이 두 길을 놓고 선택을 해야 하니, 모이지 않을 수가 없겠지. 시간이 없다.” “……!” 그러자 잠시 후. 허공에서 시커먼 인영이 풀썩 뛰어내렸다. 그러더니 악마를 향해 거의 웅크리듯 몸을 굽히며, 예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것은, 사탄의 뜻대로.” ============================ 작품 후기 ============================ 오늘은 자정 세이프! 역시 적고 싶은 내용을 적으니 어제와 같은 기분은 없네요. 하하하. 예전에 서로 능력 간파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신 분들이 계시는데, 오늘 회로 의문이 해소됐으면 좋겠어요. 물론 능력의 수준을 나타내는 랭크도 영향을 미치지만, 능력 자체의 랭크. 즉 격이라고 표현할까요. 그게 최우선으로 영향을 미치거든요. 그렇게 따지면 제 3의 눈이 얼마나 사기적인 능력인지 감을 잡으실 수 있을 겁니다. 요새 반전이 재미있어요. 사실 딱히 반전이랄 것은 없으나, 그런 거 있잖아요. 독자 분들이 '이렇구나.' 생각하게 만들고, 저렇게(?) 나가는 거요. :) 후후후.(?) PS. 저번에 김유현의 말에 공감해주신 분들에 대해서 정말 감사. 근래 들어 가장 기분 좋은 코멘트였습니다. :D 0533 / 0933 ---------------------------------------------- 새로운 여왕. 요즘 조금이지만 요정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후 처리 과정에서 성 노예로 전락한 요정들은, '천사의 눈물'로 시작된 열풍에 한동안 시달려야만 했다. 그러나 '요정의 눈물'에는 별 효능이 없다는 게 알려지자, 이번에는 육체 실험의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확실히 요정들의 자태는 아름답고 능력은 굉장하다. 특히 우리를 그토록 애먹였던 정령 소환 능력은 필자 또한 무척 관심이 많으며, 밝혀낼 수 있다면 전력이 엄청나게 상승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 또한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이 있다 해도, 처지를 바꿔 생각해보면, 근래 북 대륙 사용자들이 요정들에 하는 행태는 도를 넘어섰다고 보인다. 솔직히 눈뜨고 보기 끔찍할 정도이다. 그나마 약물 실험은 양반 축에 속한다. 일부 과격한 사용자들은 요정들의 사지를 찢거나 이종 임신에 관심을 보이며, 심지어 요정들의 날개를 찢어발겨 서로 이식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중 필자가 가장 경악을 금치 못한 실험은 요정 날개 이식에 관한 실험이다. 필자는 한때 요정이라는 종(種)에 깊은 관심을 가진 적이 있어, 날개가 요정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상세히 아는 편이다.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날개는 또 하나의 요정이라고 볼 수 있다. 요정이 태어날 때부터 등에 달려있으며, 평생을 함께하는 동반자라고나 할까. 그런 만큼 요정의 날개에는 힘, 지식 등 요정의 일생이 담겨있다. (여담이지만.) 이 부분을 증명할 수 있는 게 바로 요정마다 다른 날개의 개수인데, 일반적으로는 오랜 시간을 살아온 요정일수록 많은 날개를 갖고 있다고 알고 있을 것이다. 틀리지는 않다. 하지만 바꾸어 생각해보자. 예전 전투에서 증명됐듯이, 많은 날개를 가진 요정일수록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점은…. - 북 대륙의 고명한 탐험가 양기덕(7년 차 사용자)의 저서. ‘홀 플레인의 두 번째 열풍, 요정 실험에 관한 고발'에서 발췌. * 1층 로비에는 많은 클랜원이 각자의 장비를 걸친 채 모여 있었다. 화살을 점검하는 선유운, 싸늘한 얼굴로 아기를 넘기는 원혜수, 어색한 얼굴로 서 있는 안현. 그리고 한껏 들뜬 채 설레어 하는 진수현 등등. 실종된 캐러밴을 찾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장소는 동부의 붉은 달이 떠오르는 강가. 한때 내가 발굴한 유적인 이바노치 연구 도서관으로 유명해진 지역이다. 사실 붉은 달이 떠오르는 강가에서 실종됐다고 하면 아예 의뢰를 받지 않는 게 좋다. 실종된 사용자들의 구조는커녕 시체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아마 강에서 기어 나온 괴물이 습격한 것 같은데, 이미 뱃속으로 들어간 사용자들을 무슨 수로 찾겠는가. 그렇다고 강으로 잠수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럼에도 의뢰를 받아들인 것은, 바로 진수현 때문이었다. 새 출발로 한껏 달아오른 몸을 식히게 하려는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 격의 차이를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까지의 활동과 머셔너리에서의 활동이, 무엇이 다른지를 말이다. 이윽고 활을 툭툭 치며 일어나는 선유운과 눈짓을 주고받은 후, 나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의뢰도 중요하지만 너무 깊숙이 들어가지는 마십시오.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요.” “부랑자들을 걱정하시는 겁니까.” “예. 비록 소규모라고는 해도, 서너 번 출현의 보고된 지역이라….” “걱정 마십쇼 형님! 제가 소싯적에 부랑자들한테 칼질 좀 해본 몸입니다! 으흐흐흐!” 그러자 진수현이 가슴을 탕탕 치며 냉큼 끼어들었다. 제 3의 눈으로 재빠르게 성향을 확인하고 나서, 나는 싱겁게 웃으며 가볍게 어깨를 쳤다. “인마. 그래도 조심해. 우리도 겨우 7명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조장 말 잘 듣고. 무슨 말인지는 알고 있지?” “에이 형님. 그럼요. 저도 군대 다녀온 놈인데요. 설마 명령 불복종이라도 하겠습니까.” 어찌 보면 민감한 사안일 수도 있지만 진수현은 자신감 있게, 밝은 목소리로 회답했다. 보아하니 우선은 마음을 놓아도 될 듯싶다. “그럼 클랜 로드. 출발하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출발 보고를 알리는 선유운과 힘차게 외치는 진수현. 그리고 이번 의뢰에 참가하는 클랜원 모두를 정문까지 배웅한 후, 나는 걸음을 돌려 본관 7층으로 향했다. 사용자 아카데미가 끝난 이후, 생각보다 많은 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우선 하연과 안현은 공식적으로 복귀하는데 성공했다. 사실 하연은 몰라도 안현은 반대가 나올 줄 알았는데, 다들 환영해주는 분위기라 의외였다. 하기야 원래 좋은 평가를 받고 있기도 했거니와,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공을 세운 게 아마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제갈 해솔과 차희영은 현재 대기 상태에 있다. 용병 아카데미는 완공됐지만, 아직 세세한 것들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교관이라던가, 가르치는데 필요한 여러 물품 등등. 하지만 그런 물리적인 것들은 금방 채울 수 있는 부분이라 큰 걱정은 없다. 오히려 바로 보내는 것 보다는 어느 정도 클랜에 적응할 시간을 주고 보내는 게 좋지 않겠는가. 물론 기간이 너무 길면 안 되겠지만. 그리고. 나는 며칠 전 회의에서 반가운 소식을 하나 들을 수 있었다. 사실 그동안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던 것으로, 약간이지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근래 많이 바빴다고는 하나, 클랜 로드로써 진작 신경을 썼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아마 조금이나마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7충에 도착했다. 아무튼 지금이라도 들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두어 번 노크한 후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어젖혔다. “응? 누구…. 수, 수현이 형?” “한결아. 오랜만이네.” 방안에는 한결이 있었다. 책을 읽고 있었는지 상반신을 비스듬히 기댄 채 누워 있다가, 나를 보자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며 허둥지둥 책을 덮는다. 뭐지. 야한 책이라도 읽고 있었나. “미안하다. 진작 와 봤어야 했는데. 서운했지?” 침대 빈 부분에 적당히 앉으며 말하자, 한결은 고개와 두 손을 동시에 흔들었다. “아, 아니요. 아~니요. 절대 아니에요. 사용자 아카데미로 들어가셨잖아요. 못 보는 게 당연해요.” “이해해주면 고맙고.” “이해는요. 오히려 저야말로 죄송하죠. 다른 분들 모두 열심히 활동하시는데, 저 혼자만 이렇게….” “병자니까. 누구라도 이해할 거야. 아무튼, 조만간 복귀한다며? 거의 회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 말이 맞는다는 듯 한결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한결을 보며 나도 마주 웃어주었다. 뭐랄까. 한결이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머리가 정화되는 기분이다. 말도 참 예쁘게 하거니와, 얼굴도…. 아니. 이건 아니야. 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다 문득 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 곧바로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박환희가 자주 찾아왔다며?” “네? 아, 네. 환희 형이 자주 병문안 와줬어요.” “형님이라. 그럼 이제 다시 친하게 지내기로 한 거야?” “네. 사과도 확실히 받았고…. 어차피 홀 플레인이잖아요? 괜히 제 감정을 앞세우기보다는, 기왕이면 친하게 지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한 한결은 배시시 웃어 보였다. 나도 따라 웃기는 했으나, 한편으로 미묘한 기운을 느꼈다. 기왕이면 친하게 지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라. 현재 박환희의 위치나 머셔너리와의 관계를 고려하면 꽤나 의미심장한 말이다. 나는 한동안 한결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하지만 곧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짐을 느끼며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 좋은 마음가짐이다.” “아. 가시는 거예요?” “많이 바빠서. 이제 곧 굉장히 많은 것들이 변할 것 같아. 그때는 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구나.” “네? 아. 네. 잘은 모르겠지만, 하루라도 빨리 복귀할 수 있게 노력할게요.” 이윽고 방긋 웃는 한결을 뒤로한 채, 나는 방문을 나섰다. 그리고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가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강철 산맥. 클랜원들은 아직 이 건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실은 저번 회의 때 말할까도 생각해봤지만, 우선은 마음속에만 담아둔 상태였다. 모든 것이 확실해졌을 때, 그때 말을 하는 게 더욱 설득력이 높고 몸에 와 닿을 테니까. 좌우간 그때가 오면, 방금 한결에 말했듯이 많은 것들이 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바로 강철 산맥이 있으리라.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방향을 변경하는 게 좋다. 이런 변한 것 없는, 세를 불리는데 중점을 둔 운영보다는, 어떻게 하면 강철 산맥을 최대한 빠르게 공략할 수 있는가.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클랜을…. 우우우우우우우웅! 그때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막 다음 계단을 내려가려는 찰나, 갑작스럽게 복도에서 거대한 빛의 파동이 느껴졌다. 마력의 파동은 복도에서부터 흘러들고 있다. 재빠르게 주변을 살피자 지금 내가 3층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이 성스러우면서도 웅혼한 마력의 파동은…. “으아아아아아아앙!” 그때, 느닷없이 터져 나오는 아기의 울음소리. 나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빛의 파동과 울음소리는, 창고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 한 시간 전. 벌컥! 집무실 문이 활짝 열렸다. 이유정은 벌어진 문틈으로 고개를 삐쭉 들이민 후, 집무실 내부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흠. 역시 아무도 없네.” 이윽고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이유정이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책상 서랍을 뒤적인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도 용납지도 않을 일. 그러나 김수현의 허락을 받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유정은 오늘 창고 정리 및 결산 임무를 부여 받았다. 그리고 지금 찾고 있는 것은, 바로 창고에 출입할 수 있는 열쇠였다. 기실 원래는 출입 가능한 인원에 공문을 제출하고 문을 열어주기를 부탁하는 게 정석이나, 공교롭게도 현재 출입 가능한 인원이 모두 출타한 상태. 그래서 김수현에 사정을 설명하고 열쇠를 가지러 온 것이다. “히. 왠지 도둑질하는 기분인데.” 혼잣말을 중얼거린 이유정은 곧 삼각형 모양의 물건을 집어 들었다. “찾았다.” 라 말하는걸 보니 아마 그게 열쇠인 듯싶다. 한 차례 고개를 주억인 이유정은 서랍을 곱게 닫은 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바로 나가려는 찰나. “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왜냐하면, 소파 아래에서 얼굴만 쏙 내민 채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내 바닥을 내려다본 이유정의 두 눈에 안쓰러움 반 반가움 반이 깃든다. 소파 아래 숨어 이유정을 지켜보던 이는 다름 아닌 요정 여왕의 적통 후계자, 마르였다. “마르야~. 우리 마르~. 여기 숨어있었어?” “웅.” “여기 있는지 꿈에도 몰랐네? 우리 마르~. 혼자서 뭐하고 있었어?” “우웅….” “아이고…. 아빠 기다리고 있었어? 아빠가 놀아주지 않아요?” “…….”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는 마르. 그러자 안쓰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해, 유정은 얼른 다가가 마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빠 정말 너무하다. 그치?” 사실 약간 섭섭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우리 마르 정말 착하네~. 그럼 아빠는 언제 올지 모르니까, 엄마랑 같이 창고 구경이나 갈까요?” 도리도리. “응? 싫어? 그럼 계속 여기 있을래?” 도리도리. “그럼 엄마랑 같이 창고 갈 거야?” 도리도리.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연신 고개를 잘락잘락 흔드는 마르. 이유정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언니랑 같이 창고 갈까?” 끄덕끄덕! 단순히 단어 하나를 바꾸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야 비로소 마음에 드는지, 마르는 밝은 얼굴로 빠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유정은 그런 마르를 보며 쓰게 미소 지었다. “정말. 엄마라고 한 번 해주면 덧나니.” 이윽고 마르를 한 번 고쳐 안은 이유정은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며 집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잠시 후. “마르야. 언니는 잠깐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여기서 조용히 구경하면서 놀고 있어요?” “우웅.” 창고에 도착한 후, 이유정이 마르를 선반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몸을 돌려 무언가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 평소 정리가 잘돼있기는 하지만, 워낙 성과가 많은 탓에 무언가를 찾고 기록하는 것도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유정의 사정이고. 똑같이 주변을 둘러보던 마르는 곧 두 눈을 반짝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너무나 심심했는데, 갑자기 신기해 보이는 것들이 우수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삭막하기 짝이 없는 김수현의 집무실에 비해 이곳은 아마 신천지나 다름없으리라. 결국 조용히 구경하는 건 잠시. “웅아!” 이내 마르가 입을 헤 벌린 채 한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유정은 이런 마르의 이동을 모르고 있었다. “보자…. 저번에 들어온 게 빛과 어둠의 결정이고. 다른 결정 두 개는 어디 있지?” 이번 임무를 잘 마치면, 어쩌면 김수현이 또 이마에 뽀뽀해줄지도 모른다는 덧없는 상상을 하며, 한창 창고 정리 삼매경에 빠져있을 뿐. 그러나 이유정은 알까? 오늘 마르를 이 창고에 데리고 옴으로써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그일 때문에, 지금 이유정으로서는 알지 못하는 어딘가가 발칵 뒤집혔다는 사실을. 그리고. 예전 두 번이나 품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유현아를 처단한, 돌이킬 수 없던 김수현의 선택을 되돌렸다는 것을. 아마, 영원히 모를 것이다. ============================ 작품 후기 ============================ 싸늘하다. 키보드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이후 내용은 아직은 나만이 알고 있으니까.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의 성과. 제가 해솔. 그리고 뭔가 있어 보이는 등장…. Reader : 동작 그만. 밑장 빼기냐? 로유진 : 뭐, 뭐야? Reader : 제갈 해솔을 등장시키고 여왕이라는 단어를 꺼내?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이 새X! 로유진 : 즈, 증거 있어? Reader : 증거? 있지. 너는 소제목에 새로운 여왕이라고 썼을 것이여. 그리고 이제 등장시키려는 거, 이거 이거 대체 여왕 아니여? 자 모두들 보쇼. 마침 예전에 유현아랑 붙어먹었겠다. 제갈 해솔을 새로운 성스러운 여왕으로 대체하겠다, 이거 아니여? 로유진 : 시나리오 쓰고 있네. 독자 분들이.(소심.) Reader : 으헣허헣헣허헣허허헣허헣허허헣헣허허헣. Reader2 : 유진이! 다음 회 내놔 바, 그게 정말이야? Reader : 다음 회 건들지마! 손모가지 날라가붕게. 가서 채찍 갖고 와. 로유진 :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돼? 꼭 그렇게 연참을 시켜야겠어? Reader : 소설 쓰다 예측 당하면 연참하는 거 안 배웠냐? 로유진 : 좋아. 제갈 해솔이 성스러운 여왕이 아니라는데 앞으로 한 달간 2연참을 건다. 쫄리면 그냥 읽으시던지. Reader : 이 X벌 놈이 어디서 약을 팔어? 로유진 : 천하의 조아라 노블레스 독자님의 키보드가 왜 이렇게 길어? 후달리세요?(소심2.) Reader : 후달리세요? 허헣허허허허헣. 오냐, 내 추천 모두랑 앞으로 한 달간 꼬박꼬박 코멘트 건다. 둘 다 묶어! 잠시 후. Reader : 준비 됐어? 까볼까? 자 지금부터 확인 들어가겄습니다잉. 딴 따라란 따라란 따라란 딴, 쿵짝짝 쿵짝짝 따라리라라. Reader2 : …마르네? Reader3 : 제갈 해솔 아니야? Reader : 내, 내가 봤어. 이 시벌 놈 밑장 빼는 거 똑똑히 봤다니께! 로유진 : (씨익 웃으며.)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마라 이런 거 안 배웠어? 뭐해, 너네 형님 손 안 찍고? Reader : 야 이 시벌 놈 손모가지 찍어! Reader2, 3 : ㅇㅇ. 쿵! 로유진 : 꽥! - Fin. 0534 / 0933 ---------------------------------------------- 새로운 여왕. 온몸을 저릿하게 만들 정도의 강력한 마력의 파동과 익숙한 울음소리. 무언가, 일이 잘못됐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나는 약간 내려간 계단을 다시 올라와, 곧바로 복도를 달렸다. 이윽고 창고의 보안을 해제해 안으로 들어간 순간. 나는 내부서 한 가득 흘러나오는 빛의 향연에 잠시 눈을 감고 말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앙!” 그때, 재차 들려오는 고통에 찬 비명. 나는 이를 악물고 시선을 돌렸다. 이어서 안력을 한 가득 끌어올리자, 비로소 내부 상황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허공에는 마르가 떠올라 있었다. 순간적으로 멍멍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 강렬한 빛에 휩싸인 채 사방팔방으로 웅혼한 마력을 쏘아 보내는 그 모습이, 잠시지만 마르의 비명을 잊게 할 만큼 성스럽고 거룩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오빠!” 애타는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리자, 바닥에 주저앉은 채 벌벌 떨고 있는 유정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크게 심호흡하며 다가가, 가늘게 떨리는 어깨를 붙잡았다. “무슨 일이야? 어떻게 된 거야?” “오, 오빠! 내, 내가 어떻게 한 게 아니라!” “잠시만. 진정해.” “어, 어?” 나는 지긋이 유정을 응시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는 호들갑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건 오직 두 가지. 우선 발생한 일에 대한 대처 방안을 마련하는 것. 그리고 그 방안을 마련하려면 왜 일을 터뜨렸냐고 다그치는 게 아닌, 어떤 과정을 거쳐 일이 발생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제발 진정하고. 어떻게 된 건지 말해봐.” 그런 내 마음을 느낀 걸까. 불안히 흔들리던 유정의 눈동자가 조금이나마 가라앉는다. “모, 모르겠어. 그냥 심심해하는 것 같아서 창고나 구경시켜주려고 데려왔는데, 갑자기 비명이….” “갑자기 비명만 들렸다고?” “으, 응. 그냥 저쪽 선반에만 앉혀놓고 창고 정리하고 있었는데….” “저쪽 선반.” 나는 유정이 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재빠르게 선반을 훑자, 곧 어지럽혀진 성과들 사이로 이상한 점 하나가 눈에 밟혔다. 가로 세로 15cm 정도 돼 보이는 푸른 상자. 예전 판도라의 상자에서 나온 성과 중 하나인 탈루스 프로페타였다. 하지만 무언가 다르다. 상자가 개봉된 건 둘째 치고서라도, 예전에는 겉면에 은은한 빛을 흘렸던 것 같은데, 지금은 빛은커녕 평범한 상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마치 이미 사용한 것처럼. 그때였다. “빠, 빠아아아아아!” 나를 부르는 외침에 급히 허공을 쳐다본 순간, 돌연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강렬한 빛을 내뿜는 무언가가 마르의 등에 화살처럼 내리 꽂히고, 이어서 허공에 떠 있던 마르가 갑작스럽게 바닥에 떨어진다. 이윽고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받아낸 순간, 나는 마르의 등에 꽂힌 빛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빛은, 화살이 아니었다. 예전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에서 가져온 찢겨진 요정 여왕의 날개였다. 아니. 더는 찢겨진 상태가 아니다. 이제는 열두 쌍 모두가 마르의 등에 달린 채 눈부실 정도의 찬연한 빛을 내뿜고 있다. 아까 창고로 들어오면서 느꼈던 성스럽고 거룩한 기운을 폭풍처럼 흘려내면서. 곧, 변화가 시작되었다. 창고 내부를 가득 메우던 빛이 천천히, 그러나 한꺼번에 마르의 몸 속으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 조금씩 조금씩 밀려오던 것들은, 이내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 내며 마르의 자그마한 몸에 파도처럼 들이닥치고 있었다. 척 봐도 절대로 좋지 않은 상황. “무슨 일이야?!” “갑자기 거대한 마력의 흐름이…! 크, 클랜 로드?” 그와 동시에, 마찬가지로 이상 현상을 느꼈는지 클랜원들이 한 명 한 명 달려오는 기척을 느꼈다. 하지만 차마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나는 침착해지려 애쓰며 마르를 내려다보았다. 밀려오는 마력의 파도를 견디기 힘든지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간신히 눈을 떠, 나를 향해 힘겹게 손을 내미는 마르. “빠…. 빠아…. 빠아아…. 으어어엉…!” 고사리 같은 손을 꼭 붙잡아주며,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신기를 복원하는 능력을 가진 탈루스 프로페타. 요정 여왕의 일생이 담겨있는 열두 쌍의 날개. 그 순간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 나는 곧장 눈을 뜨며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 거주민 정보(Native Status) > 1. 이름(Name) : 마르 2. 클래스(Class) : -(미정) 3. 소속 국가(Nation) : -(미정) 4. 소속 단체(Clan) : -(미정) 5. 진명 • 국적 : 하프 엘프(Half Elf), 요정 여왕의 후계자 • 요정의 숲 6. 성별(Sex) : 여성(0) 7. 신장 • 체중 : 54.7cm • 5.3kg 8. 성향 : 질서 • 순수(Lawful • Pure) [근력 ???] [내구 ???] [민첩 ???] [체력 ???] [마력 ???] [행운 ???] - 금기로 일컬어지는 요정의 날개가 강제로 이식되었습니다. 원래는 금기의 부작용으로 이식 즉시 사망했어야 마땅하나, 과거 요정 여왕의 날개라는 점. 그리고 피 이식자가 요정 여왕의 적통 후계자라는 점. 이 두 가지 원인이 호환돼 강제 시험에 든 상태입니다. - 하지만 여전히 금기라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강력한 혈통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고 해도, 800년간 쌓아 올린 신기는 이제 갓 태어난 후계자가 받아들이기에 많은 무리가 따릅니다. - 내부에 감당할 수 없는 폭주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중상입니다. 이대로 시간이 경과한다면 곧 100% 사망에 이릅니다. 수많은 정보들이 주르륵 떠올랐지만,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곧 사망에 이른다는 말만이 보일 뿐.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해결책 하나를 떠올렸다. 머릿속에 비비앙을 치료했던 일이 떠올라 나는 머리를 번쩍 들며 외쳤다. “엘릭서!” “에, 엘릭서? 금방 가져올게!” 그나마 가장 가까이 있던 유정이 곧장 반응했으나, 나는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갑작스럽게 마르가 비명을 뚝 멎었기 때문이다. 오직 간헐적인 떨림만이 전해져 오는 게, 온몸에 불길한 감각이 엄습하고 있었다. “여, 여기!” 이내 유정의 외침이 들려옴과 동시에, 나는 손을 뻗어 허공섭물의 묘리를 일으켰다. 엘릭서는 노란 액체를 찰랑이며 날아와 내 손에 잡혔다. 그 순간. “끄륵!” 한순간 마르의 눈이 까뒤집히며 허리가 곡선으로 휘었다. 동시에 한껏 벌려진 입에서 허연 거품이 흘러나온다. “마, 마르야! 오, 오빠아악!” 유정의 괴성과 동시에, 나는 주저 않고 병마개를 부러뜨려 엘릭서를 박아 넣었다. 그때였다. “In fluxum lineae.” 누군가 담담히 주문을 영창하는 소리. 이윽고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꿀렁꿀렁 천천히 내려가던 엘릭서가, 마치 빨대처럼 하나의 줄기로 압축된 것이다. 이어서 가느다란 줄기로 변한 액체가 마르의 입안으로 유연히 흘러내려간다. 이내 모든 액체가 물 흐르듯 사라졌을 무렵, 그 누군가가 건너편에 털썩 주저앉는다. “혹시 늦을 수도 있어, 허락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손을 썼습니다. 부디 용서를.” 마법을 사용한 장본인은 헬레나 루 에이옌스였다. “…고맙다.” 나는 조용히 중얼거린 후, 다시 마르를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즉효라는 설정을 지닌 엘릭서라 그런지 마르의 몸은 빠르게 가라앉고 있었다. 조금 전 당장에라도 숨이 멎을 것만 같던 모습이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다. 안정되어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부르르 떨리는 입에서 격한 숨이 터져 나오는 것은 아직은 숨이 붙어있다는 증거이리라. 간발의 차로 고비를 넘긴 건가 싶어, 나는 참았던 숨을 흘렸다. “후…. 정말 위험했다. 겨우 안정된 건가.” “아직입니다. 엘릭서는 임시 방편에 불과할 뿐.” …뭐? 뭔 소린가 싶어 시선을 들자, 전에 없던 긴장한 얼굴로 마르를 내려다보는 헬레나가 보인다. 헬레나의 말이 이어졌다. “오히려 이제 시작입니다.” “그게 무….” 그때였다. 그것은, 무척이나 뜬금없었다. 쿠쿠쿠쿠, 쿠쿠쿠쿠…. 별안간 창고에 마력의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 마치 갑작스럽게 차오른 물을 감당치 못한 둑이 터져, 물이 한꺼번에 개방된 느낌이랄까. 이어서 벌어진 현상은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삽시간에 벌어졌다. 돌풍은 사방팔방에서 휘몰아쳐 오르며 마르의 몸으로 게걸스레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잠잠해지던 것도 잠시였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마력의 흐름이 마르의 몸을 스칠 때마다 굉음이 창고를 휩쓸었다. 휘몰아치는 돌풍 속에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금기의 부작용입니다.” 헬레나가 담담히 회답한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말투라, 나는 곧장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요정에게 허락된 날개는 최대 열두 쌍 까지니까요. 그것도 오직 여왕만이 열두 쌍의 날개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 이상은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리고 지금 마르의 날개는 13쌍입니다.” 그 말에 나는 멍하니 마르를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그랬다. 원래 가지고 있던 한 쌍과 새로 이식된 열두 쌍의 날개를 합쳐, 마르의 등에는 총 13쌍의 날개가 달려있었다. “요정 여왕의 후계자라는 점과 엘릭서의 효능으로 어찌어찌 상황은 호전됐지만…. 그런데 과연 이 세상이 13쌍의 날개를 허락해줄지 의문이군요.” “에, 엘릭서 더 있지 않아? 그럼 또 엘릭서를!” 유정이 발악하듯 외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헬레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용없습니다.” “어, 어째서?” “엘릭서기 천고의 영약이기는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각성 과정은 최소 며칠은 걸린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며칠 사이에 수십, 수백 번의 위기가 찾아올 터인데. 그때마다 엘릭서를 사용하실 겁니까?” “…….” 불가능하다. 엘릭서라고 해봐야 10병도 채 안 되는데, 수십 수백 번을 사용할 여유는 없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어느덧 끈임 없이 들려오던 울음소리가 더는 들려오지 않는다. 그저 마력이 파도 칠 때마다 온몸을 덜거덕거릴 뿐. 그러나 여전히 얼굴에 고통의 빛이 떠오르는걸 보면 아직 정신은 있다는 방증이다. 나는 마르를 꼭 붙잡았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간섭할 수 없는 차원입니다. 그저 기다리며,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할 뿐이지요.” 그러나 헬레나는 냉정하다 생각될 정도로 고요히 말을 이었다. 기적이라.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아니. 생각나지 않는다. “나, 나 때문에! 나 때문에…!” 털썩, 유정이 주저앉는다. 돌풍은 시시각각 거세어지고 있었다. 마르는 마치 목이 마른 사람처럼 더운 숨을 뿜어내며 내 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게 마치 도와달라고 절절히 외치는 것 같아, 나는 더더욱 무력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내가 이토록 무력했다는 말인가? 정말로 이대로 보고만 있어야 하는 건가?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이윽고 마르의 몸이 축 늘어지며 피부에 연한 실금이 떠오를 무렵.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본능에 따라 손을 뻗었다. 그러자 한 병의, 아니 남아있는 모든 엘릭서가 우수수 날아와 손에 잡히고, 일부는 바닥에 떨어진다. 곧 피부가 살그머니 갈라지는 광경을 보며, 손가락에 반사적으로 힘을 주려는 순간. “모두 비켜주세요!” “어, 어어?” 문득 등 뒤로 한별이가 다급히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 우당탕 달려들어와 내 손을 휙 잡아채는 게 느껴졌다. “……!” 시선을 돌리자, 정말 급하게 달려온 듯 숨마저도 참고 있는듯한 얼굴이 보인다. 모습을 보인 사용자는 한별이 아니었다. “…너.”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눈을 부릅뜬 여인은, 바로 안솔이었다. 안솔은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오른팔을 내밀었다. 이윽고 안솔의 손에 쥐어진 지팡이가 내 얼굴을 비스듬히 지나쳐 정확히 마르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 순간. “…기적!” 안솔은 참았던 숨을 일거에 토해내며 한 단어를 외쳤다.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퇴고를 마치고 후기를 적느라 약간의 시간이 지체되었네요. 하하하. 음. 다름이 아니오라, 이번 회로 새로운 여왕의 파트가 끝났음을 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즉, 예전 구상으로 따지고 보면 2부가 끝났다고 보셔도 좋습니다. 물론 2부의 끝이 원래 이런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정확히는 마몬을 처치하고, 이후 돌아와 강철 산맥 공략의 소집령이 떨어지는 순간이었지요. 그러나 총 4부를 3부로, 또 2부로 줄인 이상 구상을 변경할 수 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이번 회로 2부를 마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몬 처치 내용을 앞으로 옮기고 강철 산맥 소집령을 최대한 뒤로 미루게 된 것이지요. 그 편이 더 이어지는데 부담이 적으리라 생각됐으니까요. 아마 조금 갑작스럽게 느끼는 독자 분들도 계시겠지만…. 사실 이후의 구상 중 필요한 내용은 있습니다. 새로 영입한 사용자들의 성장이나, 저번에 얻은 성과들의 배분이나, 능력을 가르치거나, 마르의 변화 등등 말이지요. 하지만 그 부분은 상세히 적지 않고 점프할 생각입니다. 물론 완전히 생략하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저 이 모든 과정은 최소한으로 축소됐으며, 결과를 중심으로 언급될 예정입니다. 아마 2회 안으로 모두 정리될 듯싶네요. 그런 만큼, 다음 회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의 내용이 나올 예정입니다. 물론 예전처럼 2년을 뛰어넘는 건 아니고 그저 한두 달 정도의 공백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4부를 2부로 줄인 만큼 매우 기나긴 2부이지만, 이제는 실질적으로 3부로 돌입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다음 회 부터는 강철 산맥의 공략을 중점으로 다룰 예정이며, 악마와 타 대륙 사용자 등이 모습을 비출 계획입니다. 이점 독자 분들께 양해를 구하며, 이만 긴 후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 0535 / 0933 ---------------------------------------------- 두 달 후. 홀 플레인은 총 네 개의 대륙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동, 서, 남, 북 대륙. 그 중 남 대륙의 최남단에는(물론 미개척 지역은 제외한다.), 요정의 숲이라는 명칭을 지닌 거대한 수림(樹林)이 자리 잡고 있다. 숲의 넓이도 상당하지만,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요정의 숲은 인간이나 괴물들이 살지 않는다. 오직 요정들만이 살 수 있고, 활동할 수 있는 숲. 그게 바로 요정들의 왕국으로 불리는 요정의 숲이다. 날은 아직 어스름했다. 짙푸른 구름으로 가려진 탓인지, 하늘에 아직 해가 완전히 보이지 않는다. 하얀 안개가 뽀얗게 내려앉아 숲을 몽환적으로 휘감고 있었고, 풀잎에 촉촉이 맺힌 이슬이 새벽녘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숲의 새벽은 몹시 춥다. 이따금 간간이 부는 숲 바람 소리만이 들릴 뿐, 숲은 무척 조용했다. 휘이잉, 휘이이잉. 그때 마침 불어오는 찬바람을 느꼈는지, 수풀에 누워있던 한 여인이 눈을 떠 한두 번 깜빡였다. 곧 느릿한 손놀림으로 풀잎에 맺힌 이슬을 훔쳐 핥아 마신 여인은, 차분히 몸을 일으켜 한쪽 방향을 응시했다. 잠시 후, 희뿌연 안개 속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한 쌍의 눈동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안개 속에서 나타난 인영은 키가 훤칠하고 귀가 긴 호리호리한 사내였다. 그러나 여인의 귀도 비슷한 점을 고려하면, 사내와 여인이 바로 요정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사내가 적당한 거리를 남긴 채 지그시 응시하자, 여인은 처연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로 60일째인가요? 위그드라실의 꽃이 개화한지?” “그렇지. 정확히 60일째.” “그렇군요….” “왜. 아쉽나? 몇 백 년을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코앞에서 여왕의 자리를 놓친 게?” 사내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낮았다. 어찌 들으면 짐승이 낮게 으르렁대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여인은 한숨을 가느다랗게 흘리며 차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아니에요. 저는 그 누구보다 마르가리타의 귀환을 바라고 있었으니까요. 여왕의 자리는…. 애당초 저와는 맞지 않는 자리에요.” “그런가. 그럼 새로운 여왕의 탄생에 모두가 기뻐하는 지금, 왜 그렇게 슬퍼하는 거지.” “슬프니까요. 저는 여왕의 공백이 채워지기를 기다렸던 게 아닌, 친우로서의 마르가리타가 생환하기를 바랐으니까요.” “800년 전 태어난 꽃은 이미 3년 전에 시들었다. 이제 와서….” “알아요. 이런 감정이 옳지 않다는 건. 하지만 새로운 위그드라실의 꽃이 피어났다는 건, 결국 새로운 여왕이 탄생했다는 소리. 바꾸어 말하면 제가 여태껏 간직하던 마르가리타의 기억을 떠나 보내야 한다는 소리죠. …그것이 저에게 견딜 수 없는 상실감을 주는군요.” “정신차려. 지금 이런 중요한 때에 그런 인간들이 느낄만한 감정에 휘둘린다는 말인가? 하이로서 실격이다!” 사내의 입에서 고함이 나왔지만 여인의 얼굴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이 맞는다는 듯 고요한 눈으로 사내를 응시할 뿐.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죠.” “…니뮤에!” 결국 한동안 여인을 지그시 노려보던 사내는 입을 꾹 닫으며 몸을 돌렸다. “따라와라. 모든 하이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다시 낮아진 목소리에 여인은 고개 돌려 사내를 바라보았다. 찰나의 순간, 쓸쓸함이 감돌던 눈동자에 강렬한 이채가 스쳤다. “모든 하이들이 기다리고 있다고요? 이 시간에?” “가면 알게 될 일이다.” “지금 말해줘요. …설마. 새로운 여왕을 찾아 나서려는?” “아니. 다른 일이야. 남 대륙 인간들이 연락을 보내왔다 하더군.” 이윽고 우뚝 걸음을 멈춘 사내는 반쯤 얼굴을 돌려 여인을 주시했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검이 소식을 전해왔다.” * 화창한 아침. “이건 좀 어려운데.” 편한 자세로 서 있는 허준영이 뚱한 얼굴로 투덜거린다. “흠. 그럼 다시 한 번 설명을….” 나는 잠시 턱을 매만졌다가 머리를 갸웃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허준영은 귀찮다는 얼굴로 머리를 흔들고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아. 설명은 그만. 이건 이해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실행의 문제라고. 아니. 마력 회로의 문제야. 흐름이 꼬이거나 엉키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네가 말해준 마력 흐름의 속도를 맞출 수가 없다는 말이다. 내가 무슨 괴물도 아니고.” “음? 너 그래도 궁신탄영은 꽤 빠르게 익혔잖아.” “궁신탄영과 이형환위가 같나? 어빌리티 난이도가 비교도 안되니까 이러고 징징대는 게 아닌가. …젠장.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수준인걸 알았다면 애당초 교환하는 게 아니었는데.” “왜 그래.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니까? 궁신탄영을 2주 만에 익혔으면 이형환위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텐데. 끽해야 4주….” “네가 4주 만에 익혔나 보군. 미안하다. 6주가 지나도 못 익혀서.” “…….”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얼마 만에 익혔더라? 그때였다. “미친. 지금 누구 놀려요?” 옆에서 들려오는 뾰족한 외침에 시선을 돌리자 온몸을 웅크리고 있는 유정이 보였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노력하는 모습은 보이지만, 얼굴에 짜증이 잔뜩 서린 게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 모양이다. 마치 위협을 인지한 풍뎅이처럼 한껏 웅크리던 유정은 이내 힘찬 기합을 내지르며 상반신을 활짝 펼쳤다. “핫!”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높이든 채 만세를 하고 있는 유정만이 보일 뿐. “핫.” 이내 조용히 따라 한 허준영이 입을 가리며 반대편으로 얼굴을 돌리자, 유정이 발끈한 얼굴로 거칠게 두 손을 내렸다. “적당히 쪼개지? 못하고 있는 건 서로 마찬가지인데. 기분 존나 더럽게 만드네.” “성격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라. 나는 적어도 궁신탄영은 익혔다. …이렇게 말이지!” 그 말이 끝난 순간 허준영이 잔뜩 몸을 웅크리는가 싶더니, 퉁, 발을 구르는 소리와 함께 저 앞으로 멀어져 간다. 그리고 재차 궁신탄영을 사용해 제자리로 원위치 하기까지. 곧 어깨를 으쓱이며 검지를 좌우로 흔들자 유정의 두 눈이 사납게 치켜 떠졌다. 하지만 할 말이 없는지 발만 동동 구르다가, 결국에는 나를 쳐다보며 방방 뛰었다. “아 오빠! 나도 좀 가르쳐줘! 응? 왜 나는 안 가르쳐주고 준영이 오빠만 가르쳐주는데?” 내가 언제?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유정의 성질머리를 알고 있는 만큼 나는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다. 이윽고 한 번 더 상세히 설명해주려는 찰나, 유정이 온몸을 흔들며 호들갑을 떤다. “아이. 나도 설명 말고. 저번에 해줬던 거 해줘.” “저번에 해줬던 거?” “그 있잖아. 서로 찰싹 붙어서 자세도 잡아주고, 마력 흐름도 이끌어주는 거. 응?” “…….” 아니 무슨 말을 해도. 엄밀히 말하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서로 찰싹 붙어서 자세를 잡아준다니. 누가 들으면 오해하기 좋은 말 아닌가. 그러고 보니 눈이 묘하게 반짝이는 게, 뭔가 염불에는 맘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곧 허준영이 “제 2의 치녀 등장인가.”라 중얼거리는 말이 들려와, 나는 바로 마음을 잡을 수 있었다. 오늘 전수는 그만두기로. “미안한데. 오늘은 그만 가봐야 할 것 같다. 전수는 다음에 해주마.” “응? 어딜 가? 오늘 아침 내내 봐주기로 했잖아.” “곧 점심이잖아. 이 정도면 충분히 봐줬지. 그리고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너도 알 텐데?” “…아. 맞다. 오늘 그날이었지.” 그러자 오늘 어떤 일정이 있는가를 떠올렸는지 유정이 아차 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이내 서운한 빛을 비추는 게 약간 마음에 걸렸으나, 나는 가슴과 허리를 당당히 폈다. 오늘 일정은 나름 중요한 이벤트인 만큼 유정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 이윽고 조금 더 연습하겠다는 둘에게 격려를 빙자한 절대 싸우지 말라는 말을 신신당부한 후, 나는 밝은 햇살이 드리운 정문을 나섰다. “나도 한 번 해볼까. 핫.” “이 자식이 진짜!” …목적지는 워프 게이트.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였다. *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에 도착했다. 사방팔방에 흐드러져있는 부스러기나 거의 다 쓰러져가는 건물들. 주변을 둘러보자 처음 공략했을 때와 별다를 게 없는, 여전한 모습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번에 한 번 청소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거야 길을 트는 정도에 불과했을 뿐이다. 좋게 말하면 고풍스럽다고 할 수 있으나, 사실 누군가 눌러앉아 살만한 곳은 못되었다. 하지만 큰 상관은 없다. 어차피 개방 도시로의 계획을 포기한 만큼 괜한 돈을 들일 필요는 없으니까. 오늘 내가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를 방문한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용병 아카데미 때문이다. 근 두 달 전 제갈 해솔과 차희영을 첫 번째 교육생으로 입소시킨 후, 오늘이 바로 대망의 첫 번째 수료식을 거행하는 날이었다.(사용자 아카데미와 용병 아카데미의 교육 기간은 약 40일 정도 차이가 난다.) 잠시 후. 폐허 속에서 홀로 깔끔하고 웅장한 위용을 뽐내는 과거 마볼로의 성채, 현재 용병 아카데미를 바라본 후, 나는 마력 감지를 돌리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1층 로비에 다다를 수 있었다. 기실 사용자 아카데미와 비교하면 용병 아카데미가 손색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성채 하나만 달랑 개축하고 아카데미라 부르는 것도 웃기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한 해에 정원이 6명이라는 제한이 걸려있는데, 교관까지 합쳐 10명 내외로 활동할 아카데미를 큼지막하게 짓는다면, 그것 또한 웃기는 일이었으니까. “흠?” 그렇게 생각한 순간, 불현듯 마력 감지에 세 명 정도의 기척이 걸리는 게 느껴졌다. 오. 같은 층에 있는 건가? 마침 같은 1층에서 느껴지는 기척이라 나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과거 응접실을 개조한 방의 창을 들여다본 찰나. “호.” 조금이지만, 감탄하고 말았다. 안에는 앞에서 열심히 강의하고 있는 헬레나 루 에이옌스와 한껏 집중한 얼굴로 듣고 있는 제갈 해솔과 차희영이 있었다. 특히 헬레나는 어찌나 열심히 강의하는지 얼굴과 몸짓을 곁들여 열변하고 있을 정도. 오늘이 수료식이라 설렁설렁하고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그러기는커녕 마지막 날까지 열과 성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모습을 보고 있자, 갑작스럽게 마음에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열심히 하는 모습은 나쁘지 않으니까. 그러다 문득 미약한 호기심이 일었다. 도대체 무슨 강의를 하는데 저렇게 연기까지 하며 열심히 하는 걸까? 돌연 궁금한 기분이 들어, 나는 창문을 들여다본 채 한껏 청력을 돋웠다. “…그래서 저는 외쳤습니다. 아아! 마그나카르타!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심지어 제 몸마저도 바치겠어요!” …뭐? 아니. 누가 누구를 사랑해?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하지만 마그나카르타는 오히려 저를 더럽다는 눈빛으로 보았지요. 아~. 하지만 이해합니다. 저와 마르나카르타는 적의 관계. 이 헬레나 루 에이옌스는 어쩔 수 없이 인간들의 지휘관을 맡은 몸이라….” “자, 잠시 만요. 헬레나 교관님!” “응? 갑자기 왜 그러지요? 차희영 교육생?” “다름이 아니라 조금 이상한 점이 있어서요. 저도 예전에 우리 클랜의 용이 잠든 산맥을 공략한 기록을 읽어본 적이 있거든요. 그리고 관심이 깊어져서, 나름 관련 설화도 찾아봤고요. 그런데….” “지금 내 설명이 기록과 상이하다 이 말입니까?” “네, 네.” 그러자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헬레나는 혀를 쯧쯧 차며 말을 이었다. “이런 말이 있죠. 드러난 거짓말은 아름답고, 가려진 진실을 추악하다. 차희영 교육생은 참 순수하군요.” “…네?” “그 설화에 대한 기록들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인간들이 자기 편하게 해석해놓은 일기에 불과하죠.” “그, 그게 정말이에요?” 차희영이 화들짝 놀라며 말하자, 헬레나가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네. 생각해보세요. 차희영 교육생은 누가 적었는지도 모르는 기록을 믿겠습니까? 아니면 그때 그 일을 직접 겪은 당사자인, 이 헬레나 루 에이옌스의 말을 믿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조금 석연치 않은 점이 있기는 했어요. 왜 모든 전투가 끝났는데, 대 영웅이 저주를 받아들였는지. 아, 아! 설마!” “네. 바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너, 너무해요! 고작 사랑 때문에!”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만큼이나 마그나카르타를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 당당히 맞받아치는 헬레나. 하지만 그런 헬레나의 오른팔은 눈에 보일 정도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마 내면에 공존하는 진정한 헬레나의 영혼이 난동을 부리는 게 틀림없다. 하기야 억울하기도 하겠지. 저리도 개소리를 지껄이는데. “실은 여기서 하나 더 추가로 밝히건대. 저는 마그나카르타의 아이를 임신한 적이….” “네에에에~?!” 서로 꿍 짝을 주고받는 헬레나와 차희영. 이윽고 나를 보며 배시시 손을 흔드는 제갈 해솔과 눈을 마주친 후. 나는 주먹을 슬슬 쓰다듬으며 문을 열어젖혔다. 아까 잠시나마 감동했던 마음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 작품 후기 ============================ 오늘 다행히 자리가 일찍 끝나서 예약 취소하고 자정에 올립니다. :) 0536 / 0933 ---------------------------------------------- 두 달 후. 회상. 빛이 사그라졌다. 그리고 천장에 닿을 정도로 소환된 천사를 확인한 찰나, 나는 아차 함과 동시에 뜻 모를 안도의 기분을 느꼈다. 그래. 기적.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던 걸까. “마르르으으으으을!” 곧바로 터져 나오는 안솔의 숨 넘어갈듯한 외침. 그러자 고요히 감겨있던 천사의 눈이 살며시 떠지며 나를 내려다본다. 이내 천사의 몸 전체에서 찬란한 광채가 발현되는 것과 동시에, 마르를 감싸고 있던 마력의 파도가 커다랗게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윽고 광채와 파도가 마주친 순간, 마치 벼락이 친 것처럼 쾅, 엄청난 굉음이 주변을 떠르르 울렸다. 굉음의 지점은 바로 중간 지점. 정확히 중앙에서 맞부딪친 두 힘은, 화려한 불빛들을 미친 듯이 터뜨리고 휘날리며 심한 방전 현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렇게 어떻게든 뚫으려는 광채와, 어떻게든 밀어내려는 마력의 파도. 두 힘은 서로 물고 물리는 접전을 벌이며 한동안 대치 상태를 벌였다. 나는 물론 그 헬레나마저도 넋 나간 듯한 눈으로 두 힘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문득 깨달을 수 있었다. 천사가 얼굴을 한껏 찡그린 채 온몸을 덜덜 떨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조금씩이기는 했지만 광채가 서서히 약해져 간다는 사실을. “으응! 으으응! 으으으응! …빠, 빠아!” 뚝 끊겼던 마르의 신음이 갑작스럽게 흘러나왔다. 거기다 힘겹게 나를 부르며 몸을 떨기까지. 충돌 때문일까. 창백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나를 찾는 그 모습은, 정말이지 안쓰럽다 못해 가련해 보일 지경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사리 같은 손을 움켜 속으로 조용히 기도했다. 부디 마르가 이겨내기를. 그때였다. - O, Ego Sum Cantus. Numquid A, Adipiscing Vitae, Usque Nunc, Filii…. 그것은 노래였다. 하나의 노랫가락처럼 들렸다. 여태껏 단 한 번도, 심지어 수천의 신화 영웅들을 구원할 때도 들어본 적 없는 아름다운 천사의 노래. - Bamboo Caecus Quis Audierit. Omnes Vult Superesse Tibi. Puer, Parvulus Enim Est…. 정말로 신기한 일이었다. 천사의 노래가 이어질수록 하염없이 약해져 가던 광채가 서서히 빛을 되찾기 시작한 것이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이내 수백 수천 갈래로 갈라져 나와 힘차게 밀어붙이기 시작한다. 마치 마지막을 불태우는, 꺼지기 일보 직전의 촛불처럼. 더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는다. 클랜원들의 기척도, 창고를 가득 채우던 돌풍 소리도. 오직 천사의 노래만이 희미하게 들려와 고막을 아득히 울리고 있었다. 결과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력의 파도가 밀려나고 있다. 현재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모른다. 저게 어떤 현상인지도 알 수 없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였다. 나는 마르의 손을 더더욱 부여잡으며 온 정신을 집중해 앞을 주시했다. 그때, 그간 꿋꿋이 버텨오며 매섭게 몰아치던 마력의 파도가 마침내 한순간 멈칫했다. 그러자 마치 지금 이 한 번의 기회를 기다려왔다는 듯, 천사가 눈을 크게 부릅뜨며 양손을 내뻗었다. 그리고. - Factus Est. Miraculum! 이어지는 외침에 시야는 예고 없이 다시 한 번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비록 보이지는 않아도 마르의 몸에서 일어난 파도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그리고 천사의 광채가 수천 갈래로 쏟아져 들어와 마르의 몸을 물들이는 것을. 잠시 후. 할 일을 마쳤다는 양 힘겨운 얼굴로 사라지는 천사를 마지막으로, 창고는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소음도, 돌풍도, 노래도, 광채도 그 모든 게 삽시간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오직 하나 남은 게 있다면…. 나는 천천히 시선을 깔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은은한 빛을 흘리는 13장의 날개를 등에 단 채, 어느새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있는 마르를 볼 수 있었다. * 수료식이 끝났다. 어차피 적은 인원이라 거창하게 할 것도 없어 금방 끝낼 수 있었다. 그렇게 간소한 수료식을 마친 직후, 나는 로비에서 헬레나와 함께 교육생들을 기다렸다. 그래도 짐을 챙겨 내려올 시간은 주어야 했으니까. “정말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교육생들이 다 보는 앞에서….” 옆에서 들려오는 투덜거림에 시선을 돌리자 정수리에 볼록 불거진 혹을 문지르는 헬레나가 보였다. 지그시 쳐다보자 헬레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교육하라고 보내놨더니 헛소리만 하고 있어. 뭐? 사랑? 임신?” “그냥 단순히 옛날 이야기를 해주었을 뿐입니다. 겸사겸사 욕망을 채운 것도 있습니다만.” “그래서. 잘하셨다.” “마지막 날이니까요. 그리고 이제 얼마 남지도 않은 인생, 하고 싶은 거라도 마음껏 해야 하지 않겠나이까.” 그 말에 나는 한숨을 멈추고 헬레나를 흘겼다. 얼마 남지도 않은 인생이라. 생각해보면 그렇기도 하다. 인간의 육체에 용의 영혼은 애당초 그릇이 맞지 않으니까. “얼마나 남았는데?” “글쎄요. 한 3, 4년?” “3, 4년….” “가속화를 고려하면 더 줄어들 수도 있고요. 좌우간 인간들의 관점에서는 어떨지 모르나, 제 입장에서는 찰나의 시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부디 이해를.” 하기야 원래는 인간 세상을 둘러보고 대 영웅의 복수를 하려고 나왔는데, 2달 동안 이런 데 처박혀있었으니 불만이 생길 법도 했다. 조금은 이해가 갈 것 같아 나는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이번 일도 끝났으니 조금 풀어주도록 하지. 수고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요. 안 그래도 무척 가보고 싶은 장소가 하나 생겨서.” “가보고 싶은 장소? 어디?” “아. 창관이라는 건물에 한 번 가볼 계획입니다. 즉 창녀로서 굴러본다고나 할까요. 아무래도 꽤 재미있는 반응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재미있는 반응. 누구를 말하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참 악취미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일. 멋대로 하라는 의미로 손을 저으며 나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수료식도 마쳤는데. 네가 보기에는 어때?” “교육생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거야 제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최대한.” “장황한 설명은 됐고. 간단하게.” “흠. 차희영 교육생은 그냥 딱 기대한 정도입니다. 나름 괜찮은 성장과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었지요. 물론 어디까지나 사용자라는 입장에서요. 그리고 제갈 해솔 교육생은….” 사실 차희영의 잠재성은 사용자 중에서도 수준급이라 볼 수 있으나, 들려오는 목소리는 시큰둥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헬레나의 실체가 종말의 용이라고 불렸던 마그나카르타임을 참작한다면 나름 후한 평가가 아닐까. 아무튼 차후 제 3의 눈으로 확인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흥미로운 기분으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이제는 제갈 해솔의 차례였다. 과연 제갈 해솔은 종말의 용에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 “…….”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헬레나의 말을 이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말은 하려는 듯 입은 달싹이는데, 뭔가 애매모호해 보이는 얼굴이다. “왜 말을 안 해.” “그게. 장황한 설명은 싫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처럼 딱 끊어서 말할 수가 없나이다.” 굉장히 곤란하다는 말투로 항변하는 헬레나.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설마 이런 말 때문에 그런가? 하늘을 굽어보는 지혜의 눈. 예를 들면 마력의 원리를 파악한다거나, 아니면 근원이 다다를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었다거나.” 헬레나는 깜짝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나를 보는 눈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다. “호.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제대로 의미만 알고 있다면, 아주 정확한 표현입니다.” “여기서.” 심장을 툭툭 치자 헬레나는 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살그머니 팔짱을 끼며 계단을 돌아보았다. 그쪽으로 감지를 돌리자, 계단으로 내려오는 두 명의 기척이 잡혔다. 아무래도 어제 짐을 챙겨두었던 모양이다. 헬레나의 말이 낮은 목소리로 이어졌다. “한 마디로 표현해보면, 후계자로 삼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 정도인가?” “물론 인간을 후계자로 두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제갈 해솔이라는 인간은 그렇습니다. 수천 년을 살면서 그 정도의 재능을 지닌 인간은…. 한 5, 6명 정도 봤을까요? 아마 고대 홀 플레인에 태어났다면 틀림없이 한 시대를 주름잡았을 겁니다.” “그렇군.” 이 정도면 충분한 평가였다. 이윽고 나는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지척까지 다가와있던 탓이다. 곧바로 돌아갈 생각에 발걸음을 돌린 찰나, 돌연 헬레나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실은 저도 질문이 하나 있는데 말입니다. 클랜 로드.” “어머니라 부르지 않았으니 허가하지.” 그리 말하자 헬레나가 가볍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름이 아니오라. 혹시 그 아이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두 달 동안 못 본 터라 상황이 꽤나 궁금합니다.” “그 아이…. 마르?” 나는 잠시 말을 끊고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채 서서히 모습을 보이는 두 여인을 확인한 후, 조용히 말을 이었다. “잘 지내고 있지.” * 용병 아카데미에서 둘을 데리고 온 후. 몇 가지 업무를 끝마치자 날도 순식간에 저물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잔업을 끝마치려 집무실에 돌아왔으나, 아무래도 너무 많이 먹었던 걸까. 속이 약간 더부룩함을 느껴 잠깐 가라앉힐 겸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리고 한쪽에서 놀고 있는 마르와 도도를…. 아니 이놈은 또 언제 책상 위로 올라온 거야. 이윽고 나를 정면에서 지그시 쳐다보던 도도는 파닥파닥 날개를 흔들며 날아와 내 목을 앙 깨물었다. 나는 한숨을 흘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도대체 전생에 나랑 무슨 원수가 졌는지. 보기만했다 하면 어디든지 깨물고 보는데, 사실 이제는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 정도 근성이면 나름 인정해줄 만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입을 오물거리며 목 살(?)을 맛보는 도도를 무시한 채 가만히 마르를 응시했다. 물론 제 3의 눈도 활성화했다. < 거주민 정보(Native Status) > 1. 이름(Name) : 마르 2. 클래스(Class) : -(미정) 3. 소속 국가(Nation) : -(미정) 4. 소속 단체(Clan) : -(미정) 5. 진명 • 국적 : ? • 요정의 숲 6. 성별(Sex) : 여성(0) 7. 신장 • 체중 : 114.1cm • 20.25kg 8. 성향 : 질서 • 순수(Lawful • Pure) [근력 7] [내구 12] [민첩 21] [체력 17] [마력 ???] [행운 ???] - 현재로서는 정의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원래 존재해서는 안 되는 대상이나, 본인의 의지와 기이한 현상이 합쳐 이루어진, 말 그대로 기적의 현존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새로운 날개의 힘은 아직 내면에 잠들어있으며, 조금씩 대상의 힘으로 녹아 내리는 중입니다. 아직 모든 힘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요정들이 공통적으로 거치는 각성 과정을 거쳐 힘을 어느 정도 다스릴 수 있는 날이 오면, 그때 정의 가능한 존재로 탈바꿈할 것입니다.(기이한 현상의 여파로, 차후 성장에는 굉장한 가속이 붙습니다.) < 업적(0) > < 고유 능력(1/1) > 1. 가네샤의 축복(Rank : EX) < 특수 능력(1/1) > 1. 꺼지지 않는 지혜의 빛(Rank : EX) < 잠재 능력(1/3) > 1. 하늘의 기적(Rank : S Plus) 2. -. 3. -. 마르는 너무나 많은 것이 변했다. 진명, 신장, 체중, 능력치, 상황, 능력 등등. 이러한 변화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아직 속단할 수는 없다. 제 3의 눈에 나와있는 만큼, 마르가 각성 과정을 거치고 정의 가능한 존재가 되는 날이 오면, 그제야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지금은 간신히 목숨을 구했고 건강히 자란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릴 뿐. 그때, 한 자리에 가만히 앉은 채 무언가를 열심히 읽던 마르가 갑작스럽게 고개를 들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끙끙 몸을 일으켜 아장아장 걸어오더니 자못 자랑스러운 얼굴로 그 무언가를 내게 내밀었다. “아빠아. 나아, 이 책 오늘 다 일것서요오.” 무언가는, 바로 책이었다. 그것도 꽤나 두꺼워 보이는 책. 나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마르야. 이게 무슨 책이니? 누가 줬어?” “으응. 뺭뺭 엉니가 줘써요.” 뺭뺭? 아. 비비앙. “어헉.” 그 순간 나는 곧바로 책의 제목을 살폈다. 안 그래도 모든 방면에서 광속으로 성장하고 있는 마르였다. 그런데 이상한 책을 읽히면 어떡하겠는가. 그러나 곧 마력에 관한 제목을 볼 수 있어, 안도의 한숨을 흘릴 수 있었다. “후유. 다행이다.” “우웅?” “아니, 아니야. 아무튼 대단한데? 이걸 정말 다 읽었어?” “으응! 이거 봐요오. 이러케 하며언…. 이얍!” 그 순간. 그러니까 마르가 앙증맞은 기합을 외친 순간, 펑 소리와 함께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바로 정신을 차려보니 깜짝 놀란 듯 얼어붙어있는 마르가 보이고, 허리로는 뜨겁게 달구어진 태양의 영광이 느껴졌다. 속으로 항마력 만세를 외치며 나는 곧장 마르를 안아 들었다. “마르야. 그런 힘은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되요. 함부로 사용하면, 너나 다른 사용자들이 다칠 수도 있으니까.” “죄, 죄송해요오.” “괜찮아. 다음부터 안 그러면 되지. 그렇지?” “응!” 조곤조곤 타이르자 마르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휘저어 내 목을 감싸 안고는, “아빠가 좋아.”와 “아빠 사랑해.”를 연발하며 응석을 부려오기 시작했다. 흠.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인데. 이래서 아빠들이 딸 바보가 되는 건가? 그런 마르의 등을 토닥여주다가, 나는 시선을 돌려 문을 응시했다. 멀리서 누군가가 서서히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시 후. 똑똑. 예상대로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 작품 후기 ============================ 아. 갑자기 베드신을 집어넣고 싶어졌네요. 재미있는 구상이 떠올랐거든요. 야한 내용을 쓰고 싶은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소소한 웃음을 줄 수 있는 내용이요. 동시에 남다은의 존재감도 어느 정도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지금 집어넣으면 차후 스토리가 뚝 끊기는 터라, 기회만 엿보는 중입니다. 하하하. 자. 그럼 이제 다음회로 정리 및 일상 파트는 마무리 짓고. 한 번 시작해봅시다. 아마 강철 산맥 파트는, 그 어느 파트보다 길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강철 산맥의 준비 및 공략으로 말이죠. 전장으로! 0537 / 0933 ---------------------------------------------- 평온한 날은 끝나고. 문을 두드린 클랜원은 신재룡이었다. 내부 소식을 가져온 것이다. 혹시나 했지만, 다행히(?) 별것 아닌 소식이었다. 2주전 의뢰를 받아 떠난 클랜원들 무사히 완수하고 방금 귀환했다는 소식. 기별을 듣고 1층으로 내려가자 마침 선두에서 왁자지껄 떠들며 들어오는 두 사내와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안현과 진수현이었다. “형. 의뢰 완수하고 돌아왔습니다.” “형님! 이번에도 제대로 완수했다고요! 벌써 3승 0패에요! 3승 0패!” 안현은 깍듯이 머리를 숙이며 귀환을 보고했고, 진수현은 손가락 3개를 펼치며 신나서 떠들었다. 얼굴을 보니 기분이 무척 좋은 모양. 3승 0패라 함은, 의뢰를 3번 받아 전부 완수했다는 말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 올리며 회답했다. “그래. 수고했다.” “에이. 수고는요. 재미만 있었는데요.” 천성이 전투를 꺼리지 않는, 호전성이 강해서 그런 걸까. 진수현은 전혀 아니라는 듯이, 머리를 빠르게 흔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런 진수현을 보며 나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근 두 달간 진수현은 그 누구보다 왕성히 활동했고, 또 그 누구보다 빠르게 적응했다. 원체 붙임성 좋은 성격인 것도 있지만, 사실 다른 이유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진수현을 보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게 한 가지 있기 때문이다. 아. 이 사용자는 정말로 홀 플레인을 사랑하는구나 라고. 말 그대로 진수현은 진심으로 홀 플레인을 좋아하고 또한 즐길 줄 아는 사용자였다. 거기서 내가 해준 것은, 사실 별다른 것은 없다. 그저 환경을 충족시켜주었을 뿐. 목에 힘 좀 주고 다닐 수 있는 소속감, 훌륭한 장비, 좋은 동료들, 색다른 임무, 맛있는 밥과 술, 그리고 다시 돌아와 따뜻하게 쉴 수 있는 클랜 하우스 등등. 말인즉슨, 활동하는데 그 어떤 걱정도 하지 않도록 만들어준 것이다. 그 결과는? 과거에 암담한 시절을 겪었던 만큼, 진수현은 현재 내가 만들어준 환경에 흠뻑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중이었다. 물론 그게 바로 내가 노린 것이기도 했고. “아참.” 그때였다. 흐흐 웃어 젖히던 진수현이 갑작스럽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서는, 나와 안현을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약간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요. 형님.” “응?” “실은 말입니다. 저 이번에 중대한 결심을 하나 하게 되었습니다.” “중대한 결심?” “예. 이번 의뢰 중 안현한테 자세히 들을 수 있었거든요. 사용자 신상용에 대해서 말이죠.” “신상용?”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그 양반 이름은 갑자기 왜 나와? 진수현의 말이 이어졌다. “바로 2년 전 전쟁에서 동생들의 목숨을 구하고 대신 사망한 사실과, 안현이 부활을 위해 GP를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요. …저 진수현. 그 사정을 듣고 나서 정말로, 참말로 감동했습니다.” “아…. 그래. 다 예전 일이지.” “그래서 말입니다.” “……?” 잠시 말을 멈춘 진수현은 촉촉한 눈동자로 안현을 응시했다. 안현 또한 살짝 젖은 두 눈으로 진수현을 돌아봤다. 그렇게 한동안 마주하던 둘은, 별안간 서로의 주먹을 세게 맞부딪쳤다. 그리고 진수현이 선두로, 안현이 이어서 외쳤다. “비록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홀 플레인에 들어오지는 못했으나!” “죽기만은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이기를 바라오니!” “어…. 에…. 으, 으음! 나 진수현은 안현을 도와 사용자 신상용의 부활에 한 팔 거들기로!” “음…. 흠…. 흐, 흐흠! 아무튼 그래서 진수현과 의형제를 맺기로 했습니다!” 이어지는 말은 황천토후여. 이 뜻을 굽어 살피소서…. 이기는 한데. 하지만 아무래도 딱 앞 두 구절까지만 아는 듯, 둘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한 번 더 주먹을 마주쳤다. 그리고 아파죽겠다는 얼굴로 입을 꽉 깨물기까지. 와. 어떻게 저렇게 똑같이 행동하는 거지? 그렇게 앞뒤를 깡그리 잘라먹은, 매우 간소한 도원결의를 맺은 두 사내는 서로 사이 좋게 어깨동무를 하며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 둘을 보다가 나는 차분히 시선을 돌려 어둠이 내려앉은 정원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신상용의 무덤이 있는 방향이었다. 보고 있습니까? 신상용? 지금 여기에 당신을 살리려고 노력하는 사용자가 있습니다. “크로스!” “크로스!” 그것도 둘이나요. “아빠아. 저런 사람들을 보고 바보라고 하는 거예요?” 잠시 후, 품에 안겨있던 마르가 살짝 고개를 들어 내 귀에 속닥거렸다. 나는 그 말에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그래요. 바보라는 게 문제지만요. 그렇게 신상용에 보내는 전언을 마친 후, 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마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왜 그렇게 생각하니?” “보니까아, 이상하게 불편한 기분이 들어서요. 이게 한심하다는 감정인가요?” 얘야. 가끔은 너무 솔직한 것도 죄가 된단다. 자꾸만 고개를 갸웃하는 마르의 등을 토닥인 후, 나는 바보 듀오를 따라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왕 내려왔으니, 식당에서 차라도 한 잔 마시고 올라갈 셈이었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왁자지껄한 소리가 귓전을 가득히 메워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나는 약간이지만 놀라고 말았다. 생각보다 식당에 있는 클랜원들이 많았던 것이다. 군데군데 빈 테이블은 보이나, 식사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고 자유롭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늘 보이는 인원은 유난히 많다. 곧 나를 보며 인사하는 클랜원들을 향해 나는 곧바로 마르를 앞세워 주의를 돌렸다. 마르는 떨어지기 싫다는 듯 내 옷깃을 세게 움켰으나, 나는 기어코 억지로 떠넘긴 후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주방과 붙은 테이블에 몸을 앉힐 수 있었다. “어. 클랜 로드. 또 오신 겁니까?” 마침 나와 있었는지, 머셔너리 클랜의 주방장인 사용자 박상남이 다가오며 인사를 했다. “아. 차 한 잔 생각이 나서요.” “그렇군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사용자 박상남은 음식 솜씨는 물론, 서글서글한 인상과 부드러운 태도를 지닌 클랜원이었다. 오죽하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들 상남 형님이라고 부르며 좋아할 정도였다. 이윽고 박상남이 가져온 차를 마시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리, 리더! 펴, 편안한 밤은 보내셨습니까? 하, 하하하….' 신상용.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동시에 조금이지만 미묘한 기분도 들었다. 딱히 마음에 두고 있다기보다는…. 예전 마르와 관련해 일어난 사건과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조금은 착잡한 기분이 든다고나 할까. 설마 그때 느꼈던 무력감을 또 느낄지는 몰랐으니까. 그렇게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을 무렵, 문득 박상남이 맞은편에 앉는 게 느껴졌다. 흘끗 시선을 올리자 너그럽게 웃고 있는 얼굴이 보인다. “클랜 로드. 그러고 보니 요즘 클랜 분위기가 참 평온한 것 같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런가요? 저는 정신이 없는데.” “하하하. 확실히 시끌시끌하기는 합니다. 저는 말입니다. 그래도 이런 시끌벅적함이 참 좋습니다. 큰 사건이나 사고 없이, 모두 열심히 활동하고 있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보면 평온하기는 하지요. 무슨 뜻인지는 이해했습니다.” 박상남은 흐뭇한 얼굴로 옆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을 돌리자 여러 테이블에 삼삼오오 모여 시끄럽게 떠드는 클랜원들이 보인다. 그 중 단연 압권은 바로 안현과 진수현이었다. 벌써 주문하고 음식이 나왔는지, 테이블에 그릇을 가득 채운 채 신나게 떠들며 먹고 마시는 중이다. “상남 형님! 여기 추가 주문이요!” 그러고도 부족한지 안현이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박상남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런. 이만 일어나야겠네요.” “너무 많이 주지는 마세요. 배 나옵니다.” “허허. 알겠습니다. …그리고 클랜 로드. 아마 오늘 밤 잠은 잘 오실 겁니다. 차에 술을 약간 섞었거든요.” “예?” “들어오실 때 얼굴이 조금 안 좋아 보이셔서. 아무튼, 오늘 밤은 부디 푹 주무시길.” “…예?” 의아한 기분에 쳐다보았으나 박상남은 빙긋 웃기만 하고 주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잠시 후. 차에서 허연 김이 피어 오를 무렵, 나는 뒤늦게 박상남의 배려를 깨달을 수 있었다. 열 마디 말의 격려가 아닌 하나의 행동으로 보여준 격려를. 과연. 이래서 클랜원들이 박상남을 좋아하는 건가. 안현과 진수현은 테이블에 놓인 접시를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었다. 어느새 음식을 깡그리 흡입한 모양. 그리고 바로 옆 테이블을 쳐다보더니 서로를 보며 낄낄 웃기 시작했다. 옆 테이블에서는, 유정, 안솔, 차희영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음료를 마시는 중이었다.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해답은 곧 나왔다. 곧 몸을 일으킨 안현이 양손에 접시를 든 채 살금살금 다가간 것이다. “거기 붉은 머리칼을 한 아름다운 숙녀 분?” “그래서 내가 있지…. 응?” 유정이 고개를 돌리자 안현은 정중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테이블에 접시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유정이 채 입을 열기도 전, 점잖은 목소리로 진수현이 앉아있는 테이블을 가리킨다. “저쪽 테이블의 신사 분께서 시키셨습니다. 아름다운 숙녀 분께 갖다 드리라고….” 유정이 멍하니 고개를 돌린다. 따라 시선을 돌리자 실실 웃는 얼굴로 입에 물고 있던 포크를 빼고는, 살랑살랑 흔들어 보이는 진수현을 볼 수 있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안현은 끝까지 정중한 태도를 보이며 몸을 돌렸다. 잠시,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물론, 정적은 아주 잠시였다. 우당탕탕! 유정이 예쁜 입술에서 온갖 욕설을 터뜨리며 분연히 몸을 일으킨 것이다. 저 둘을 당장에라도 찢어 죽일듯한 얼굴로. 그러자 안솔과 차희영은 덩달아 일어나 유정의 양팔을 휘감았다. “야! 이 미친 새끼들아! 죽고 싶어서 환장했냐? 너희가 처먹은 접시를 왜! 밥맛 떨어지게 무슨 짓거리야!” “언니! 참아요! 원래 바보들이잖아요! 오히려 이러는 게 지는 거라고요!” “놔. 안 놔? 씨발 노라고! 저 쌍놈 새끼들이…!” “어, 언니. 죄송해요. 제가 대신 사과 드릴게요. 진정하세요. 네?” 안 그래도 소란스럽던 식당이, 한순간 더욱 소란스럽게 변했다. 이내 왁자하게 웃으며 도망치는 둘을 보며, 유정은 비명을 질렀다. “이 물 내리고 똥 싸는 새끼들아!” 그건 또 무슨 새끼일까. 나는 피식 웃으며 차를 들이켰다. 그리고 혀에 부드럽게 녹아 드는 찻물을 느끼며 박상남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큰 사건이나 사고 없이 모두가 열심히 활동하는 평온한 일상. 그래. 어쩌면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절일지도 모르겠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두 번 다시 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그런 평온한 나날. 그러면 나도…. 쾅! 그때였다. 막 찻잔을 놓으려는 찰나, 누군가 문을 거세게 열어젖히는 소리가 식당을 울렸다. 약간은 소란이 가라앉을 걸 느끼며 나는 입구 쪽을 응시했다. 입구에는 숨을 헐떡이는 선유운이 서 있었다. 어찌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허리를 반쯤 접은 채 얼굴만 간신히 들고 있었다. 매우 다급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클랜 로드! 급보입니다!” 평소 덤덤한 성격의 선유운을 생각해보면, 괜한 말을 꺼내지는 않으리라. 정말로 급보인 모양이다. “급보? 무슨 일이죠?” “이스탄텔 로우에서 개별 소집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냥 소집령이 아니라, 개별 소집령을요? 이스탄텔 로우에서?” “예, 예! 그것도 모니카에 있는 전 클랜을 대상으로 한 소집령입니다.” 왜? 무슨 말이냐는 뜻으로 쳐다보자 선유운은 크게 숨을 흘렸다. 그리고 호흡을 가다듬는가 싶더니, 번쩍 몸을 일으켜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저녁 시간대를 기점으로 중앙 관리 기구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했습니다. …강철 산맥의 공략을 선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식당 내 소란이 완전히 가라앉았다. 강철 산맥 공략에 대한 공식적인 선포라. …그렇다면, 드디어 일이 벌어진 건가. 시선이 쏠린 가운데,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개별 소집령이라면…. 지금 바로 이스탄텔 로우에 전령을 보내세요. 머셔너리가 소집에 응하겠다고.” 아무래도 평온한 날은, 오늘이 끝인 것 같다. ============================ 작품 후기 ============================ 이런. 죄송합니다. 오늘 1시간 업데이트가 늦어버렸네요. ;ㅅ; 요새 도로 자정을 지키는가 싶더니….(퍽퍽.) 아는 동생이 군생활 중입니다. 많이 친한 동생입니다. 작년에 학교에서 만났지만, 정말 친하게 지내는 동생이에요. 사실 사람과의 관계는 오래 사귈수록 깊어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그 공식을 깨뜨린 녀석이기도 하고요. 원래는 5월 초에 외박을 나오기로 했는데, 갑자기 오늘 나왔다고 연락이 오더라고요. 왜 이렇게 빨리 나왔냐고 물어봤더니 안산 고잔역으로 간다고 합니다. 피해 가족이라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더는 묻지 않았습니다. 프사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어서…. 평소 지인에게 힘내라는 말은 잘 하지 않는 편이에요. 말로만 힘내라고 하는 것 보다는, 그냥 조용히 지켜봐 주는 게 좋다는 생각을 해서요. 그런데 지금 약간, 아니 많이 후회되는 게, 그때 통화할 때 무언가 위로를 할걸, 자꾸 그런 생각이 듭니다. 가슴이 갑갑하다 보니 말이 길어졌네요. 월요일입니다. 독자 분들 모두 우울한 월요병을 이겨내시기를 바랍니다. 편안한 밤 보내세요. 0538 / 0933 ---------------------------------------------- 평온한 날은 끝나고. 다음 날. 아침이 밝음과 동시에 이스탄텔 로우의 클랜 하우스는 북새통을 이뤘다. 전날 저녁에 떨어진 개별 소집령 때문이다. 물론 모니카뿐만이 아닌 모든 도시에서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고, 그 근원에는 중앙 관리 기구에서 발표한 강철 산맥 공략 선포가 있었다. 그렇게 각 도시 대표 클랜에는 많은 사용자가 모여 야단스럽게 부산을 떨고 법석였지만, 북 대륙 전역으로 보면 딱히 시끄럽다고 볼 수만은 없었다. '어? 강철 산맥을 공략한다고?'라는 반응보다는, '드디어 공식적으로 선포했군.' 정도? 그 이면에는 중앙 관리 기구, 정확히는 이효을의 전략이 있었다. 두 달 전, 이효을은 각 도시의 명성 높은 클랜들에 비밀리에 전령을 보냈다. 내용 자체는 별것 없었다. 이제 강철 산맥을 공략할 생각이니 서서히 준비하고 있으라는, 저번 헤일로 선발 때 한 발표와 별다를 것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효을이 진정으로 노린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 확실히 비밀리에 전령을 보내기는 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비밀이 유지되는 법은 극히 드물다. 전령을 한두 군데 보낸 것도 아니었거니와, 소문은 어떻게든 흘러나가기 마련이니까. 이효을의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클랜 로드는 간부에게, 간부는 클랜원에게, 클랜원은 지인에게. 강철 산맥 공략에 관한 소문은 위에서 아래로 차츰차츰 퍼지기 시작했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웬만한 사용자들은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그 결과 강철 산맥의 공략 준비는 자연스레 자발적으로 이루어져, 공식 발표 때도 충격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다. 기실 지금 대표 클랜들이 북새통을 이루는 것도, 갑작스러운 선포 때문이 아닌 그동안의 준비에 기인한 것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소영씨도 올해 나이가 서른이라고 들었는데요.” 이스탄텔 로우 클랜 하우스 집무실. 한소영은 아침부터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다. 어젯밤 강철 산맥 공략의 공식 발표가 떨어진 바람에, 아침이 되자마자 모니카에 자리 잡은 온갖 클랜 로드들이 우르르 들이닥친 탓이다. 물론 단순히 이야기만 나눈다면 크게 힘들 것은 없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초감각이 전해주는 정보를 받아들여야 하는 한소영은 필요 이상의 체력이 소진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그 정보가 혐오감과 불쾌감을 일으키는 정보라면 더더욱. 더욱이 개별 소집령을 내린 사정상 한 명 한 명 따로 상대해야 하는 입장이라, 한소영은 아침부터 심신이 지치는 경험을 맛봐야만 했다. 지금 집무실에 들어앉은 중년 사내만 봐도 그렇다. “이야.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까 도저히 서른 살로 보이지가 않아요. 꼭 미모의 커리어 우먼을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으허허허!” 할 이야기만 딱딱 끝내고 가면 되는데,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와 헛소리만 지껄이고 있다. 아마 무사(武士)라는 나름 이름 있는 무력 클랜만 아니었다면, 진즉 내쫓았을지도 모른다. 비록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지만, 이제 곧 한계인 듯 무표정한 얼굴에도 서서히 싸늘함이 그늘지고 있었다. “실은 저도 나이가 마흔이 넘기는 했지만.” “네. 그래서 무사 클랜에서는 이번에 남부 원정대로 참여하신다는 말씀이신가요.” “예? 아. 뭐 그렇죠. 소영씨는 걱정을 하지 말아요. 우리 진정한 사내들만 모인 무사 클랜이 강철 산맥 공략의 선봉에 앞장설 테니까.” “그럼 그런 걸로 알고 있겠어요. 무사 클랜의 참가에 감사 드려요.” “으허허. 별말씀을. 오! 그런데 해가 벌써 중천이네요. 그러고 보니 배가 약간 고픈 것 같기도 한데…. 어떻게, 같이 식사라도.” “1층에 식당 있어요. 혜림아? 무사 로드 나가신다. 식당으로 모셔다 드리렴.” 딱 잘라 거절한 한소영은 곧바로 연혜림을 호출했다. 결국 사내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지만, 문을 나가는 순간까지도 음험한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한소영은 수십 마리의 송충이가 온몸에 우수수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러나 조금 쉴 틈도 없이 누군가 또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박다연이었다. “응? 언니 왜 그러고 있어요?” “…힘들어서.” “흐응? 하기야 아침부터 지금까지 거의 20명은 찾아왔으니까요. 그런데 어떡하죠? 마침 한 분이 더 찾아오셨는데.” “하~아.” 한소영은 끈적한 한숨을 흘렸다. 정말, 진심으로 힘들다는 듯이. 박다연은 두 눈을 끔뻑끔뻑하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떡해…. 그럼 잠시 쉬고 계실래요? 마침 점심 시간이기도 하니까, 제가 그분과 식사라도 하면서 시간을 끌어드릴 수는 있는데.” 그 말에 한소영은 살며시 눈을 떴다. 말투는 한소영을 위하는 듯했으나, 초감각이 전해주는 정보는 그와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마치 꼭 허락해주었으면 하는 것처럼. “누군데?” “…머, 머셔너리 로드님이요.” “들어오시라고 하렴.” “…….” 한소영은 곧바로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자 박다연의 눈이 대번에 가늘어졌다. “언니. 혹시 정말로 머셔너리 로드랑 사귀는 거 아니에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 그렇잖아요. 머셔너리 로드라고 하니까 갑자기 태도가 바뀌어서는.” “왜 너마저 헛소리니. 그냥 한 명 남았다니까 얼른 끝내고 쉬려고 그러지. 그리고 머셔너리 로드 같은 거물급은 기다리게 하는 것 자체가 실례니까.” “거짓말! 그럼 왜 갑자기 머리는 묶는 건데요?!” “……!” 박다연의 외침에 한소영은 흠칫 행동을 멈췄다. 동시에 가슴이 뜨끔해짐을 느꼈다. 정말로 뒷머리를 그러모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한소영은 아무 말도 않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빨리 모셔 오기나 해.”라는 말과 함께, 박다연의 앙증맞은 정수리에 꿀밤을 콩 쥐어박았다. 결국 박다연은 어엉 울음을 터뜨리며 집무실을 나섰고, 그 사이 한소영은 재빠르게 머리와 옷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문이 달칵 열리며 한 사내가 모습을 보였다. 머셔너리 로드 김수현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어젯밤 소집령을 받아 바로 응했습니다.” “네. 오시느라 수고하셨어요. 이쪽에 앉으세요.” 무사 로드를 대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이내 한소영이 설레는 마음으로 초감각을 느끼려 할 무렵, 자리에 앉은 김수현이 곧장 입을 열었다. “오늘 몸이 별로 안 좋으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얘기를 빨리 끝내달라는 부탁을 받아서요.” “네…. 네?” “우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리면, 머셔너리 클랜은 남부 원정대로 참가할 생각입니다. 이번 강철 산맥 공략에 한해서, 우리 머셔너리는 이스탄텔 로우에 전적으로 협력하겠습니다.” “아…. 네…. 협력에 감사 드려요….” 간신히 회답한 한소영은 살며시 주먹을 쥐었다. 조금 전, 어디 한 번 두고 보자는 듯 입술을 꼭 깨물며 나간 박다연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소영 또한 만만치 않은 여인이라, 곧바로 화젯거리를 하나 찾아낼 수 있었다. “좋은 소식이네요. 그런데 헤일로의 대표 클랜인 해밀 로드의 의중이 조금.” “아.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서부는 이번에 4번째 전력을 판정을 받은 터라, 선발대가 아닌 후발대에 포함 된다 들었거든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확실히 얘기해뒀으니, 혹시라도 제가 중간에 마음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순간, 한소영은 말문이 막히는걸 느꼈다. 서부의 4번째 전력 판정.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이미 모든 사정을 알고 왔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거의 끝났다고 봐도 좋다. 아까 수십 분을 허비한 무사 로드와는 달리, 단 6마디 만에 이야기가 끝난 것이다. 그러나. 아까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지만, 한소영은 돌연 뜻 모를 서운함을 느꼈다. 그때였다. “…그런데, 오늘 정말 몸이 안 좋으신 것 같군요. 힘이 없어 보이십니다.” 문득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한소영의 귓전을 울렸다. “흐흠. 그냥 조금. 그렇게는 나쁘지는 않아요. 다연이가 엄살을 부렸나 봐요.” “그래도요. 건강은 항상 관리하시는 게 좋습니다.” 김수현이 따뜻한 미소로 화답하며 품을 뒤적였다. 그러더니 곧 탁자에 무언가를 살그머니 올려놓았다. 그 무언가는, 바다 빛으로 반짝이는 예쁜 보석이었다. 한소영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한두 번 헛기침을 한 김수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예전에 얻은 성과 중 하나인데…. 코델리아라는 보석입니다. 체내를 깨끗하게 만들어주고, 마력의 흐름을 한층 빠르게 만들어주죠. 복용하시면 적잖은 도움이 되실 겁니다. 마침 몸이 안 좋으시다고 하니 더 잘됐네요.” 김수현의 설명에 한소영이 두 눈이 살짝 치켜 떠졌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 보석은 누구나 열망하는 천고의 영약이라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특히 마법사는 더더욱. 마력의 흐름이 빨라지면, 더 빠른 속도로 마법을 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상승의 주문을 사용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그런 귀한 영약을 준다고? 이윽고 한소영이 김수현을 바라본 순간이었다. 문득, 한소영은 온몸에 따뜻한 기운이 사르르 내려앉는 걸 느꼈다.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에서 예의 애틋한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다른 사내들의 음험한 감정은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오로지 김수현이라는 사용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감정. 그런 순수한 걱정으로 이루어진 그런 정다운 감정은, 오늘 아침 내내 시달린 한소영의 육체에 끝없는 감미로움을 가져다 주었다. 오죽하면 이게 힐링이구나라고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럼 지금 한 번 복용을.” “아니요. 죄송하지만…. 이런 선물은 너무 부담스러워요. 그냥 마음만 받을게요.” “예?” “이런 귀한 영약은 제가 받을 선물이 아닌 것 같아서요.” 왜냐하면 이걸 받는 건 잘못된 일이었으니까. 자신에게도, 그리고 머셔너리 로드에게도. 그렇게 생각한 한소영은 고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머셔너리 로드. 이 선물은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건 제가 아닌 머셔너리 로드, 혹은 머셔너리 클랜원들에 돌아가는 게 맞는 일 같아요.” “아, 아니요. 제가 먹어봤자 큰 효과는 없어서요. 그리고 괜찮습니다. 이건 어차피 개인 성과라.” “그렇다고 해도. 이건 제가 받을 수 없는 선물이에요. 클랜원들 중에서도 분명히 이 성과를 원하는 분들이 있을 거고요. 그런 만큼, 그분들께 선물로 주시는 게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비록 개인 성과라고는 하지만, 클랜 로드의 입장은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어요.” “…….” 어떻게 보면 일종의 가르침이 깃든, 꽤나 의미심장한 의미가 깃든 말이었다. 그리고 그걸 알아듣지 못할 김수현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잠시 고민하기는 했지만, 김수현은 담담히 수긍했다. 그와 동시에 한소영은 약간 당황하고 말았다. 이내 주섬주섬 보석을 챙기는 김수현의 모습에서, 시무룩해하는 감정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마치 칭찬을 받으려 꼬리를 흔들고 있던 강아지가 삽시간에 풀이 죽은 모습이랄까. 차라리 아까 무사 로드가 선물을 주었다면 받았을지도 모른다. 받고 입만 싹 닦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한소영은 김수현을 진심으로 생각해서 한 말이었고, 그래서 더욱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바꾸어 말하면, 김수현의 감정 또한 진심이었으니까. 결국 너무나 미안한 마음에, 한소영이 탁자를 짚으며 살짝 상체를 기울였다. “미안해요. 마음은 정말 기쁜데…. 혹시 기분 나쁘신 건 아니죠?” “하하. 아닙니다. 설마 요…? 어헉.” 그 순간, 김수현의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한소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내 김수현의 시선이 상체에 꽂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몸을 앞으로 기울인 탓에, 헐렁한 옷이 아래로 내려가 가슴골을 드러낸 것이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한소영은 어색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 음.” 김수현의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 한소영의 두 눈에 밟혔다. 항상 한결같던 태도가 처음으로 변했다. 그리고 시시각각 변하는 초감각이 전해주는 정보 등등. 그러한 모든 것들이 한소영에게는 무척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들이다. 아니. 정확히는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초감각을 얻은 이후 잊고 있던 감정들이었다. 잠시 후. 이 신선한 기분을 조금 더 느껴보고 싶다는 욕심에, 침을 꼴깍 삼킨 한소영이 차분히 단추 하나를 풀었다. 그러자 안 그래도 헐겁던 상의가 스르륵 내려갔다. “그러고 보니 조금 덥네요. 머셔너리 로드는 괜찮으신가요?” “예에…. 저는…. 괜찮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 단추를 풀었다. 이제는 가슴 가리개가 보일락말락 했다. “아차. 저번에 주신 빗은 정말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어요. 머리칼이 길어 아침마다 정리하는데 곤욕을 치렀거든요.” “그거…. 참…. 다행이군요…. 하하….” 다음으로는, 두 팔을 한껏 걷어붙여 새하얀 팔을 드러내며, 보란 듯이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이번에 남부 원정대에 참가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해요. 머셔너리 클랜이 참가해준다니, 이보다 좋은 소식은 없을 거예요.” “그거야…. 당연한 일….” 이제는 아예 시선을 돌린 채, 얼굴까지 덜덜 떨고 있는 김수현. 그런 김수현을, 한소영은 담담히 응시했다. 아니. 실은 담담한 척이었다. '…큰일이야.' 느닷없이 속으로 애가 타는 기분이 엄습했다.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머리로는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거…. 너무 재미있어….' 묘한데 재미를 붙인 한소영이었다. ============================ 작품 후기 ============================ 『쟁반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손을 올리지 않았다. 제발 이 버릇 좀 고쳤으면 좋겠는데. 일전에 한번 말한 적은 있었는데, 다들 미묘히 웃기만 하고 아무도 따르지 않았다. 몰래 말해준 신상용의 귀띔에 따르면, 클랜 내 여성 사용자들이 식사를 시작할 때마다 묘하게 어쩔 줄 몰라 하는 내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나.』 클랜원들이 괜히 예전에 김수현의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한 게 아니죠. 반전 매력이라고나 할까요? 하하하. 0539 / 0933 ---------------------------------------------- 평온한 날은 끝나고.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 칠흑이 드리운 고요한 지하 연무장.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긴장한 기분으로 시선을 돌린다. 눈에 들어오는 3개의 검들. 일월신검, 칼리고 아브락사스, 그리고 빅토리아의 영광…. 약 2미터 정도 떨어진 사방으로 3개의 검이 허공을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다. 조금 더 자세히 보면, 검들은 모두 불그스름한 빛을 흘리며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이내 서서히 마력의 한계가 느껴졌다. 수련을 시작한 지 벌써 1시간이 지난 모양. 이제 슬슬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마력을 세 갈래로 나누어 이동시키자, 공중을 부유하던 검들이 마치 살아있는 새처럼 날아와 차례대로 손에 들어온다. 그렇게 모든 검을 회수한 후. “후. 저번보다 고작 5분 는 건가?” 나는 텅 빈 내부를 느끼며 사용자 정보를 열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수현(3년 차) 2. 클래스(Class) : 검술 전문가(Secret, Sword Specialist, Master) 3. 소속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S Zero) 5. 진명 · 국적 : 마성(魔性 : 사람을 속이거나 현혹하는 악마와 같은 성질.) · 검의 주인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7) 7. 신장 · 체중 : 181.5cm · 75.5kg 8. 성향 : 중용 · 혼돈(Moderation • Chaos) [근력 96(+2)] [내구 94(+2)] [민첩 98] [체력 100(+2)] [마력 96] [행운 90(+2)] * 심장에 화정을 품은 상태입니다.(현재 2차 각성이 진행된 상태입니다.) * 체내에 한 치의 노폐물도 찾을 수 없습니다.(마력의 흐름이 두 배로 상승합니다.) * 심장에 고대 무녀의 각인이 새겨진 상태입니다.(마력 회로가 안정되고 효율이 증가하며, 흐름 또한 추가로 상승합니다.) < 업적(6) > < 고유 능력(1/1) > 1. 제 3의 눈(Rank : S Zero) < 특수 능력(1/1) > 1. 신검합일(Rank : EX) < 잠재 능력(4/5) > 1. 백병전(Rank : EX) 2. 쓰러질 수 없는(Rank : A Plus Plus Plus) 3. 심안(정)(Rank : EX) 4. 전장의 가호(Rank : EX) 5. - (잔여 능력 포인트는 1(Special, Latent) 포인트입니다.) < 권능 : 결(검술 전문가는 어떤 것이라도 베거나 자를 수 있습니다.) > < 용의 축복 :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의 권능(2/5) > 1. 폴리모프(제한). 2. 용족화(제한). 3. - 4. - 5. - 또 사용자 정보가 갱신됐다는 생각도 잠시. “…….” 5번째 슬롯이 여전히 비어있음을 확인한 순간, 절로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아직도 잠재 능력이 개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자못 입맛이 썼기 때문이다. 실망을 금치 못하며 사용자 정보를 닫은 후,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두 달 전. 정확히는 강철 산맥 공략에 관한 전령을 받은 이후, 나는 더욱 강해질 필요성을 느꼈다. 강철 산맥 이후로 출현하는 적들은 지금껏 상대해온 적들과는 차원이 다른 강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바로 아니마 오라티오(사용 시 고유, 특수, 잠재 능력 중 하나 무작위로 추가 슬롯 생성.)였다. 아니마 오라티오는, 거의 모든 방면에서 한계에 다다른 내가 조금이나마 더 나아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으니까. 이후 나는 5번째 잠재 능력 개발에 착수했고, 곧 좋은 생각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바로 예전에 무협 소설에서 읽었던 이기어검을 개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물론 이기어검이라 해봤자 단순히 이름만 붙인 것에 불과하고, 실상은 다른 방식이었다. 96 포인트라는 막대한 마력 능력치를 이용, 검과 마력 회로를 연결해 억지로 조종하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아무튼 의도 자체는 좋다고 생각한다. 평소 사용하지 않는 검들의 재발견은 물론, 검 빛 등 각 검에 내재된 특수한 능력들을 생각하면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한 게 엊그제 같은데. 조금, 문제가 생겨버렸다. 마력 문제는 아니었다. 마력 소모가 어마어마할 것이라는 건 애당초 예상한 바였으니까. 진짜 문제는 바로 아직도 공란으로 돼 있는 잠재 능력이었다. 그날 이후 두 달 내내 수련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잠재 능력이 개화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 짚이는 게 없는 건 아니다. 이 정도의 집중 수련에도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건, 아마 내 수련 방향과 설정이 어긋났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즉 이기어검을 잠재 능력이 아닌, 어빌리티로 판정했을 확률이 다분하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해버리면 기껏 고안해낸 수련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어떻게 보면 진퇴양난의 상황이라 할 수 있을까. “쯧. 너무 안일했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될 거라 생각해 두 달이라는 시간을 공을 들였는데, 아무 소득도 없이 헛수고나 하게 생겼으니까. 좌우간 조만간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가볍게 혀를 참과 동시에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정적이 흐르는 지하 연무장을 나섰다. * 과거 강철 산맥의 공략 시도는 딱 한 번 있었고, 보기 좋게 실패했다. 아니. 보기 좋게 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으려나? 근 5000명이 들어가 5일 만에 90%가 사망 및 실종됐으니 처참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중앙 관리 기구에서는 그때의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이번에는 그 세 배에 달하는 원정 인원을 편성했다. 인원만 어림잡아도 1만 5천명이다. 현재 상황으로 보면 인원은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다만 이번 원정에 가장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면, 바로 원정대를 네 부대로 나누었다는 것. 바로 동부, 서부, 남부, 그리고 북부로.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우리 머셔너리는 이번 강철 산맥 공략에 남부 원정대로 참여하게 됐습니다.” 회의실에는 모든 클랜원들이 앉아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아마 강철 산맥에 대해 첫 번째로 갖는 공식적인 자리라 그런지, 모두의 얼굴에 미미한 긴장의 빛이 보인다. “남부 원정대는 이번에 2번째 전력으로 순위가 매겨졌는데….” 그때였다. 잠깐 말끝을 흐린 사이, 누군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신재룡이었다. “클랜 로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예. 질문을 허가합니다.” “도대체 왜 원정대를 네 개로 나눈 겁니까? 그냥 한꺼번에 가는 방법이 더 좋아 보이는데요.” “흠.” 이건 나름 핵심을 찌르는 질문인데. “그 부분에 의문을 품은 이들도 적잖이 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관점의 차이라고 할까요.” “관점의 차이요?” “예. 중앙 관리 기구는 저번 공략의 실패 원인 1위를 어수선한 지휘 체계로 꼽았습니다. 한꺼번에 많은 수의 인원이 몰리면 위급 상황 시 대처 능력이 현저히 떨어질 거라 판단한 거지요.” “으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네 개로 나누는 건 좀. 그러면 한 원정대당 평균 4천명도 안 된다는 말인데, 각개 격파의 위험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신재룡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클랜원들이 있는 듯 대다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나는 차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이번 강철 산맥 공략에 중앙 관리 기구가 내건 모토는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이죠.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최대한 안전하게 가겠다고 하더군요. 이미 계획도 잡혀있다고. 그렇게 말한 이상 무언가 생각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아마 이 부분에 대한 계획은, 지금 각 도시에서 벌어지는 편성 작업이 완료된 후, 이어지는 바바라 소집령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질 겁니다.” 한 마디로 일단은 기다려보자는 소리였다. 중앙 관리 기구가 미치지 않은 이상 불만이 많은 계획을 그대로 고수할리는 없으니까. 아니면 모두를 혹하게 할 만한 깜짝 놀랄 계획을 구상해오거나. 이윽고 차분히 가라앉은 클랜원들을 보며 나는 나직이 말했다. “다들 궁금하신 건 많겠지만, 어쨌든 현재까지 밝혀진 건 이 정도입니다. 그 외의 것들이라면…. 앞서 말한 것들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3년 전 조건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겁니다. 0, 1년 차들은 참가할 수 없고, 클랜 단위로 참전할 수 있다. 아마 이 정도?” 여기서 잠시 말을 끊은 후 나는 천천히 클랜원들을 둘러보았다. 아직 긴장한 낯빛들이 역력한 게, 대충 나올만한 얘기는 거의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기다리는 얼굴들이었다. 마치 아직 가장 중요한 게 남았다는 것처럼. “…그리고.” 말을 해야 할까. 아니면 말아야 할까. 순간 고민이 들었다. 그러나 어차피 밝혀질 일. 대충이라도 미리 알려주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번 강철 산맥 공략에 참가할 인원은 대부분 확정한 상태입니다.” 역시나. 그 말을 꺼낸 순간, 클랜원들은 하나같이 놀랐다는 얼굴로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이어서 미약한 술렁거림까지. 기실 아마 클랜원들 입장에서는 공략이든 뭐든 간에, 현재로써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이 이 부분일 것이다. 참가 또는 비 참가. 클랜 로드인 나와는 관점이 한참이나 다를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웅성거림이 심해지는데. “그만. 그만.” 술렁거림이 점차 심해질 기미가 보여, 나는 두어 번 박수를 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아직 대부분이라고 했습니다. 다들 하고 싶은 말들은 많겠지만, 적어도 공식적으로 인선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섣부른 추측들은 삼가 주세요.” “그럼 공식 발표는 언제 하실 겁니까?!” 그러자 누군가 다급히 외치는 소리가 들려와, 나는 곧바로 회답했다. “그것 또한 바바라 소집령 이후가 될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고, 그에 맞춰서 인선을 조정해야 하니까요. 지금 확정한 인원은 어디까지나 1차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일단은 각자 할 일들을 하면서 차분히 기다려주세요.” 그제야 클랜원들은 간신히 소란을 가라앉혔다. 저번 전쟁 때도 느꼈지만, 인선 발표는 언제나 예민한 문제다. 각자가 보이는 성향이 다른 만큼, 받아들이는 것도 다를 테니까 말이다. 이윽고 느릿하게 연초를 꺼내며 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제가 지금 여러분들에게 해드릴 수 있는 말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강해지라는 것.” “…….” “지금 모든 일을 스톱한 이상 시간은 넉넉할 겁니다. 따로 터치하지 않겠습니다. 어떤 방식을 사용해도 좋습니다. 홀로 수련해도 좋고, 창고에서 성과를 꺼내가도 좋습니다. 아니면 저처럼 클랜원들과 서로의 사용자 정보를 교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겠지요.” “…….” “한 가지 확실한 건…. 추후 인선을 발표할 때. 제 기준에 의해 이번 공략에 가장 적합하다 생각되는 이들을 선발했고, 또 선발할 수도 있다는 점을 알려드리겠습니다.” “…….” 클랜원들은 고요한 침묵으로 회답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들었으리라. 방금 내 말에 담긴 진의를. * 회의가 끝난 이후. “자. 각자 이것들 가져가.” 나는 유정과 한별을 따로 호출해 집무실로 데리고 왔다. 그냥 놀려고 데리고 온 건 아니었고, 둘에게는 따로 줄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책상에 도장 하나와 보석 하나를 올려놓자 유정이 득달같이 달려와 얼굴을 들이밀었다. “오빠~. 뭔데 뭔데? 뭘 줄려고 그러는데?” 이내 그 뒤로 쭈뼛쭈뼛 다가오는 한별을 확인하고 나서. 나는 도장은 유정에게, 그리고 보석은 한별에게로 각각 내밀었다. “저번에 용이 잠든 산맥에서 얻은 성과들이야. 원래는 진작 줬어야 되는 건데, 미안하다. 그동안 까먹고 있었어.” “응? 아니 그건 괜찮은데. 이거 도장 아니야?” “이름은 베가스 스티그마. 겉보기에는 도장인데, 신비한 힘이 깃든 일종의 신기라고 할까. 구즈 어프레이즐로 확인한 결과 네가 쓰기에 딱 일 것 같아서.” “내가? 그럼…. 설마 이거 단검이라는 소리야? 이게? 어떻게?” “아아. 호들갑은 그만. 일단 네 마력을 흘려 넣고 신체 아무데나 찍어봐. 그럼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니까.” “찌, 찍으라고?”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는 유정을 보며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한쪽에 밀어놓은 보석을 집어 들며 이번에는 한별에게 시선을 돌렸다. 잔잔한 바다 빛이 흐르는 보석, 코델리아. 원래는 한소영에 줄 생각이었지만 거절당한 비운의 보석.(?) 그러나 잘 생각해보니 한소영의 말이 맞는 것 같아, 나는 한별에게 주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딱히 다른 의도가 있다기보다는, 지금 내 체력 문제를 일부 해소해준 건 한별의 공이 가장 크니까 말이다. 겸사겸사 빚을 갚는다고나 할까. “한별아. 이건 코델리아라는 보석이야. 복용 시 효능은.” “아, 아. …효능은 알고 있어요.” “그래? 그럼 설명은 됐고. 가져가. 이건 너한테 줄 테니까.” “…네? 저, 저한테요?” 멍하니 되묻는 한별을 향해 나는 또 한 번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꺅! 오빠 최고! 사랑해~!” “아…. 음…. 그, 그러니까….” 둘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유정이 환호를 지르며 내게 폴짝 안겨 든 것에 반해, 한별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걸음을 물러선 것이다. 거기가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입술을 깨물기까지. 아니. 갑자기 왜 이래. 가져가라면 얼른 가져갈 것이지. 왜 이렇게 뜸을 들여? 흡사 고양이처럼 얼굴을 비벼오는 유정을 겨우 밀어내며, 나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괜찮으니까 받아. 너한테는 고마운 것도 있잖아.” “아, 아니에요. 오빠. 제가 어떻게 이걸.” “어허. 어차피 개인 성과…. 야?” “오빠 오빠!” 그때. 그러니까 야, 라고 말을 매듭지으려는 순간, 돌연 한별을 보고 있던 시선이 홱 돌아가는 걸 느꼈다. 이내 침착히 눈을 감았다 뜨니 한껏 들뜬 얼굴로 생글생글 웃는 유정이 보였다. 인석이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잡아, 자신에게 억지로 돌려 고정한 것이다. 마치, 한별에게는 신경 쓰지 말라는 것처럼. “오빠~. 나 이거 어디다 찍을까? 응?” 유정은 자신의 옷을 살그머니 들추며 되도 않은 애교를 부려왔다. 성과를 받은 게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나는 한별의 얼굴이 차갑게 굳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마 유정의 행동이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 눈치 챈 듯싶었다. 하기야 눈치하면 김한별 아니던가. 나는 “네 마음대로 해.”라고 중얼거린 후, 간신히 왼손을 들어 보석을 흔들었다. 적당히 빼고 얼른 가져가라는 의미였다. 그때였다. 유정을 한껏 째려보던 한별이, 별안간 비장해 보이는 얼굴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리고 내 손가락에 잡힌 보석을 잠시 응시하고는. “한별아?” 갑작스럽게,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그리고 잠시 후. 쪼~옥. “어헉.”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끈적한 감촉에, 나는 한순간 기함하고 말았다. 한별이가. 그 한별이가 스스로 입을 벌려 내 손가락, 아니 코델리아를 빨아 먹은 것이다. 그것도 입으로 쪽, 소리가 날 정도로 강렬하게. 잠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오빠. 감사합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한쪽 볼을 불룩이 만든 채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한별. “…하?” 유정은 그런 한별을 어이없다는 얼굴로 응시했고. “흥.” 그러자 한별 또한 싸늘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코웃음을 흘렸다. …둘 사이에 찌릿찌릿 방전 현상이 보이고 있다면, 내 착각일까?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약속한 시간보다 15분 가량 늦었습니다. 퇴고 작업에 약간 시간이 걸렸습니다. _(__)_ 0540 / 0933 ---------------------------------------------- 평온한 날은 끝나고. 머셔너리 클랜 하우스에 묘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일전의 회의 이후 나는 더 이상 의뢰를 받아들이지 말라 지시했고, 그 결과 클랜 내 상주하는 클랜원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릴없이 노는 클랜원들은 보이지 않는다. 다들 알게 모르게, 자신이 선택한 방식으로 모종의 활동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항상 클랜을 시끄럽게 만들던 바보 듀오가 조용해진 게 명백한 방증이리라. 물론 그와는 별개로, 조금 더 직접적인 행동을 보이는 클랜원도 있었다. “저도 참가하고 싶어요.” 흘끗 시선을 올리자, 두 손으로 책상을 짚은 채 상체를 한껏 기울여오는 여인이 보인다. 약간 화난 듯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간 여인은, 다름 아닌 제갈 해솔이었다. “일단 앉지 그래요. 무슨 말인지는 알겠으니까.” 제갈 해솔은 대번에 엉덩이를 붙였다. 의자가 아닌 내 책상에. 이내 보란 듯이 다리를 쭉 뻗어 올리는 제갈 해솔을 보며 나는 가볍게 한숨을 흘렸다. “애 앞에서 이상한걸 가르칠 생각입니까? 여기 말고 저쪽 소파에 앉으세요.” 그러자 막 다리맵시를 뽐내려던 제갈 해솔이 깜짝 놀라 시선을 돌린다. 책상 한쪽에는 낑낑거리며 다리를 들어 올리는 마르와 도도가…. 아니 너는 또 왜 따라 하는 건데. 잠시 후, 얌전히 소파에 앉은 제갈 해솔은 힘 있게 팔짱을 끼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흡사 무슨 말이라도 해달라는 것처럼. 나는 연초를 꺼내 불을 붙이는 척을 하며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제갈 해솔(0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마법사(Normal, Mage, Expert)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S Zero) 5. 진명 • 국적 : 스스로 자격을 깨우친 자 • 천재아(天才兒)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9) 7. 신장 • 체중 : 168.7cm • 48.7kg 8. 성향 : 합리 • 관찰(Rationality • Observe) [근력 43] [내구 47] [민첩 57] [체력 41] [마력 95] [행운 94] (잔여 능력 포인트는 6(Free) 포인트입니다.) < 업적(0) > < 고유 능력(1/1) > 1. 하늘을 굽어보는 지혜의 눈(Rank : S Plus) < 특수 능력(1/1) > 1. 용언(Rank : E Plus) < 잠재 능력(2/3) > 1. 정통 마법(Rank : B Plus) 2. 고대 마법(Rank : D Zero) 3. - (잔여 능력 포인트는 0 포인트입니다.) “후.” 절로 나오려는 감탄을 나는 연기를 내뿜는 것으로 대신했다. 다른 능력치는 차치하고서라도, 마력 능력치를 벌써 101까지 확보했다는데 놀라움이 일었다. 물론 용병 아카데미가 매우 큰 역할을 해주기는 했지만, 아무튼 놀라운 건 놀라운 거니까. 거기다 마법으로 특화돼있는 능력도 만만치 않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나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일단 사용자 제갈 해솔의 참가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해가 안가요. 왜…. 네?” 막 말문을 연 제갈 해솔이 한순간 의아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마치 이건 예상 못했다는 듯이. 아니면 내가 거절할 줄 알았거나. 하지만 진심이었다. 강철 산맥에 데려갈 수만 있다면, 제갈 해솔은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말이다. 다만 이 안건이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하지요.” “클랜 로드. 저는 정말로 참가하고 싶고, 또 도움도 될 자신이 있어요.” “사용자 제갈 해솔. 강철 산맥 공략은 본인이 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중앙 관리 기구에서 0년 차, 1년 차는 참가할 수 없다 이미 못을 박았고, 그 사항이 바뀐 적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심지어 개판이라고 불리는 3년 전에 있었던 공략도, 그거 하나만은 철저하게 지켰다는 말입니다.” “왜요? 왜 개인의 실력이 아니라 연차로 끊는 거죠? 사실 저는 지금 웬만한 마법사 사용자를 상대로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못 믿겠다면 보여드릴 수도 있고요.” “사용자 제갈 해솔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연차에 의해서 사용자 정보의 고하가 결정되니까요. 더구나 이런 거대한 이벤트인 경우, 개인의 입장보다는 단체의 입장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사용자 제갈 해솔이 제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 나는 딱 잘라 말을 끊었다. 더는 말꼬리 잡지 말라는 의미였다. 이건 지금 이 자리에서 해결할 수 없는 성질의 문제였으니까. 제갈 해솔은 결국 입을 다물었지만,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약간의 침묵이 흐르고. “…그럼 결국 방법이 없다는 말씀이잖아요.” 제갈 해솔은 약간 풀이 죽은듯한 목소리로 회답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정말 어지간히 참가하고 싶은 모양. 아무튼 항상 화사하게 웃던 제갈 해솔이 저런 시무룩한 모습을 보이니, 조금은 신선한 기분이 들었다. 피우던 연초를 마저 태우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중요한 건 여기서 아무리 떠들어봤자 탁상공론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저로서도 지금은 확답을 할 수가 없는 문제에요.” “치.”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저는 사용자 제갈 해솔의 참가를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이 문제는 중앙 관리 기구에 제가 직접 건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 직접 건의하신다고요?” 닭 부리처럼 입을 삐쭉 내밀던 제갈 해솔은 단박에 집어넣으며 되물었다. 나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바바라 소집령이 다음 주쯤 잡힐 것 같습니다. 그전에는 중앙 관리 기구도 바빠서 안 될 것 같고, 소집령이 끝나는 즉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한 명만 어떻게 안 되겠느냐고요.” “저, 정말요?” “물론 중앙 관리 기구에서 받아들일지는 미지수입니다만. 그래도 사용자 제갈 해솔이 그렇게나 참가를 원하니, 저도 최대한 힘닿는 대로 도와보겠습니다.” “…….” 제갈 해솔은 잠시 입을 다물더니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면서 두 눈을 빠르게 깜빡이는 게 떨떠름해하는 것 같기도, 또 어떻게 보면 민망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 반반인가? 그렇게 한동안 나를 관찰하던 제갈 해솔은 곧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치, 치사해.” “……?” “그렇게 말하니까 되게 미안해지잖아요. 꼭 내가 생떼라도 쓴 것 같아.” “하하. 설마요.” 그 순간 목구멍까지 기어 나온 말을, 나는 간신히 삼킬 수 있었다. 그럼 이게 생떼지 아니냐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괜히 꼬투리를 잡힐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챙겨주니까 좋네요. 고마워요. 클랜 로드.” “챙겨준다니요. 클랜 로드로서 클랜원의 요청에 힘을 쓰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 너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갈 해솔은 막 문을 나서려다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만 살짝 돌리더니 한쪽 눈을 살며시 감아 보였다. “바~보. 그게 바로 챙겨준다는 거예요.” 이내 살랑살랑 손을 흔든 제갈 해솔은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또 그 능력을 사용한 모양이다. 그리고 잠시 후. “아빠.” 지금껏 잠자코 있던 마르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응. 왜?” “저 언니 좀 이상해요.” “괜찮아. 마르야. 세상은 넓고, 미친ㄴ…. 이상한 사람들은 많으니까.” “그게 아니라아.” 마르는 제갈 해솔이 사라진 자리를 가리켰다. 그러더니 무척 이상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꼭 아빠 관심 끌려고 저러는 것 같아.” “그건…. 글쎄다.” …에이. 설마 그 제갈 해솔이?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 시간은 화살과도 같이 흘렀다. 동부, 서부, 남부, 북부. 그렇게 지역마다 순차적으로 편성을 마치고 나서, 예상대로 중앙 관리 기구는 곧바로 소집령 개최를 선포했다. 장소는 당연히 바바라. 물론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소집령이 아닌, 참가한 클랜들 중에서도 클랜 로드만이(다만 수행 인원은 한 명까지 동행할 수 있다.) 참여할 수 있는 소집령이었다. 대 강당 내부는 어둡고 고요했다. 그리고 조용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일부러 불빛을 꺼두어 어둠이 내려앉은 대 강당. 오늘 소집령이 개최되는 건물은 거대한 대 강당으로, 천 명은 가볍게 수용할 수 있을 만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흡사 노천극장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나는 최대한 뒤쪽에 자리를 잡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나마 유일하게 밝은 빛이 드리운 공간이 있다면, 바로 중앙 관리 기구 인사들이 나오는 중앙 무대였다. 아마 집중을 위해서 일부러 이런 장치를 마련한 듯싶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는, 못해도 수백 명은 돼 보이는 사용자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있다. 사실 여기 있는 절반이 고기 방패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지만(물론 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각 지역에서 난다 긴다 하는 사용자들의 모임인지라, 명성 높은 이들도 간간이 눈에 밟혔다. 아무튼. 언제 시작할지는 모르나, 나는 살짝 긴장한 기분으로 무대를 주시했다. 소집령 특유의 분위기도 있지만, 단순 분위기 때문에 긴장한 건 아니었다. 지금 시시각각 왼손이 떨리고 마음이 조여 오는 이유는, 바로 옆에 앉은 사용자 때문이었다. 한소영. 어찌어찌 우연히 마주치기는 했는데, 설마 같이 앉겠냐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아무튼 이런 장소에서, 이렇게 옆에 앉게 되니 뭔가 묘한 기분이다. 꼭 같이 대학로 연극이라도 보러 온 기분이랄까? 그렇게 한창 흐뭇한 기분에 사로잡혀있을 무렵. “그런데 수현아. 너 정말로 서부로 올 생각 없어?” 옆에서 산통을 깨는 목소리가 소곤소곤 흘러들었다. 누군지는 안 봐도 뻔하다. 왼쪽에 한소영이 앉아있다면, 오른쪽에는 형이 앉아있으니까. 나는 한숨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했잖아. 이미 편성 끝났다고. 이제 어쩔 수 없어.” “그래도. 아직은 바꿀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면 욕먹지. 안 그래도 용병 자격으로 참가하는데, 4 전력 판정을 받은 서부로 가면 사용자들이 뭐라고 하겠어?” “흠~. 그래? 정말? 정말로 그것 때문이야?” 어느새 살그머니 팔을 감아오는 감촉이 느껴졌다. 이게 무슨 짓이냐는 의미로 뿌리쳤으나, 형은 되레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그리고 게슴츠레한 눈초리로 나를 보더니. 갑작스럽게 씩, 웃어 보였다. “왜, 왜 그래?” “아니. 네 속셈을 알 것 같아서.” “속셈이라니?” “그렇잖아. 그렇게 죽어라 오지 않으려는 게, 실은 너의 그녀인 이스탄텔 로우 로드를 지키기….” 그 순간, 나는 힘껏 형의 옆구리를 찔렀다. 형은 컥 소리를 뱉으며 몸을 고꾸라뜨렸고, 나는 재빠르게 속닥거렸다. “미쳤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 아니. 그 뜻이 아니라…. 쿨럭쿨럭.” 형의 말한 의미는 알고 있다. 내 1회 차를 알고 있는 만큼, 형도 한소영이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 대략은 알고 있는 것이다. 기실 그렇다면 딱히 틀린 의미는 아니었지만…. 잠깐.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엄청 오해할말이 아닌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다급히 한소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한소영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무대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나를 흘끗 보고는, 이내 반대로 고개를 돌려 누군가와 자그맣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듣지 못한 건가? 그럼 다행인데. 그럴 거라고 생각한 나는 차분히 가슴을 추슬렀다. 그리고 형을 한껏 째려보며 주먹을 그러모았다. 한 번만 더 헛소리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잠시 후. - 소집령을 시작하겠습니다. 음성 증폭 마법을 걸은 간단한 음성이 대 강당을 울렸다.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에 중앙 무대를 주시하자, 곧 한 사내가 약간 긴장한 모양새로 걸어 나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살짝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의 사용자들을 아우르려면 이효을이 나와야 정상인데, 웬 처음 보는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비단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닌 듯, 웅성거리는 소음이 일었다. 좌우간 한 번 지켜보자는 생각에 무대를 바라보자, 곧 중앙에 도착한 사내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 반갑습니다. 우선 바쁘신 몸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모여주신대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누구지? - 아마 지금 왜 제가 모습을 드러냈는지 의아한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그 이유는 차차 설명 드릴 테니, 잠시 제 말에 집중해주십시오. 그제야 곳곳에서 흘러나오던 소란이 차차 가라앉았다. 사내는 긴장되는 듯 입에 침을 적시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말씀을 드리기에 앞서, 우선 제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8년 차 사용자, 주호입니다. 8년 차. 꽤 오래 살아남았는데. - 그리고 3년 전 황금 사자 소속으로 강철 산맥에 참가했고, 살아 돌아온 10%중에 한 명입니다. …3년 전의 참가자라.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지만, 사내의 행동은 꽤나 용기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감정의 골은 생각보다 깊고, 오래간다. 아직 과거 황금 사자에 대한 감정이 남은 이들은, 분명 곱지 않은 시선을 볼 테니까. 이래서 꼬리표가 무섭다는 거다. - 우선 제가 이 자리에 선 이유를 말씀 드리면,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전 지역 클랜 로드 분들을 대상으로 하나의 제안을 하기 위함입니다. “서두는 대충하고 얼른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애초 소집령을 개최한 이유가 뭐요?” “아니 그전에. 그쪽이 이번 소집령의 총 책임자에요?” 그때, 어디선가 짜증 어린 말투들이 하나하나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역시나 곱지 않은 시선들을 느꼈는지, 사내는 당황한 얼굴로 반들반들한 이마를 닦았다. - 그, 그럼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저는 어젯밤 회의에서 강철 산맥을 공략할 계획을 하나 꺼냈고, 회의에 참가한 많은 분들이 나름 가능성이 높은 계획이라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깊은 상의를 한 결과 오늘 중추 계획을 말하기 전, 이 자리에서…. “아~. 알겠으니까…!” - …여기 있는 모든 분들에게! 강철 산맥에 대규모 화계를 실행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 순간, 곳곳에서 터져 나오던 불만들이 뚝 끊겼다. 그것도 매우 갑작스럽게. 나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강철 산맥을 향해 대규모 화계를 실행한다고? 잠시 후, 누군가 번쩍 손을 들며 몸을 일으켰다. “고려 로드. 조성호요. 강철 산맥에 대규모 화계라니.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요?” - 말 그대로입니다. 정확히는 우리가 강철 산맥으로 들어가기 전에, 아예 불태워버리자는 소리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 산맥이 무엇입니까? 뭐가 됐든, 풀과 나무로 이루어진 것들 아닙니까? 즉 이것들은 불에 활활 타오른다는 말입니다. 어차피 공략할 지역이고, 차후 길도 터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굳이 들어가서 고생할 필요 없이, 그냥 불태우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여기까지 말한 이상 알아듣지 못할 사용자는 없다. 사용자들은 서로만 번갈아 보다가, 곧 한 명 한 명이 일어나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잠시 만요. 그게 가능한 계획인가요? 강철 산맥이 얼마나 넓은 지역인데…!” - 굳이 모든 지역을 태울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지나갈 수 있는 길만 태우면 그만입니다. 요지는 우리가 시작부터 들어가서 고생할 필요 없이, 외부에서 안전 공간을 만들 수 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위험한 계획이요! 그러다 불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지면 어쩌려고!” - 아까 어느 분이 말씀하셨듯이, 강철 산맥이 얼마나 넓은 지역입니까. 번지면 오히려 더 좋지요. “그렇게 쉽게…!” - 그리고 설령 걷잡을 수 없다고 해도, 무슨 걱정입니까? 지금 북 대륙 전역의 마법사들만 끌어 모아도 못해도 수천 명은 됩니다. 그중에서 한 천 명 정도만 대기하고 있다가, 정 위험하면 풍계 마법으로 불길의 방향을 바꾸거나, 수계 마법으로 불을 꺼트리면 됩니다. 잠시 가라앉았던 소음은, 도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소음은 이내 일파만파 퍼지며 대 강당 내부를 삽시간에 시끄럽게 만들었다. - 그리고 산맥 내에 활동하는 생물들이라고 해봤자 우리의 적인데,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과정이야 어찌됐든, 좌우간 강철 산맥만 깡그리 불태워버리면 공략은 성공 아니겠습니까? 아까의 당황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자신의 말이 점차 먹혀 들어가는 것에 자신감을 찾았는지, 사내는 열띤 목소리로 질문에 회답하며 더더욱 크게 외쳤다. 사실 1회 차에 강철 산맥을 겪어본 만큼, 나는 공략 법을 알고는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어느 장소에 어느 괴물이 출현하고, 또 어디로 가야 할지 아는 것뿐. 공략 법을 알고 있다는 말이 피해가 없다는 말과 직결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앞에서 열변을 토하는 사내, 아니 주호를 보며 나는 가만히 턱을 괴었다. 강철 산맥에 대한 대규모 화공이라. “…….” …천잰데? ============================ 작품 후기 ============================ 김수현 : (속으로.) …듣지 못했겠지. 다행이다. 한소영 : (옆을 쳐다본다. 그리고 소곤거리며.)혜림아. 너의 그녀라는 게 무슨 뜻이니? 연혜림 : 응? 너의 그녀라니? 그건 왜? 한소영 : 그냥.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 사내가 여인한테 너의 그녀라고 하면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가? 아니면 그냥 나는 여인? 연혜림 : 아아. 별거 아니야. (새끼 손가락을 피며.) 그냥 이거라는 뜻이지. 한소영 : (따라 하며.) 이거? 연혜림 : (별것 아니라는 말투로.) 응. 한 마디로 애인이라는 소리지. 한소영 : ! * 수현이는 참 본의 아니게 자신의 속마음을 들키네요. 하하하. 아무튼 새로운 5월의 시작이네요. 하하하. 이번 해도 벌써 절반이 가까워진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습니다. 시간은 정말 빠르게 가는 것 같습니다. :) 여러분들도 새로운 5월달을 맞아 모두 파이팅하시고, 또 오늘은 근로자의 날이죠? 열심히 일한 직장인 분들에게는 꿀맛 같은 휴일입니다. ㅎㅎㅎㅎ. …호, 혹시 오늘도 출근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_(__)_ PS. 저번 회 무검은 일부러 넣지 않았습니다. 수현도 상시 휘두를 검은 하나 있어야 하니까요. 그리고 수현이 바로 그 검을 무검으로 선택했습니다. :D 0541 / 0933 ---------------------------------------------- 사탄의 우울. 웅성웅성. - 그럼 더는 질문이 없는 것으로 알고,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이후의 자세한 사항은 사용자 이효을께서 말씀해주실 겁니다. 화계 계획에 대해 일장 연설을 마친 주호는, 처음 때와는 다른 자못 의기양양한 얼굴로 물러났다. 그리고 주호가 물러나자마자, 텅 빈 무대에 곧바로 한 여인이 걸어 들어왔다. - 이효을입니다. 매우 간단히 소개를 마친 여인은, 바로 이효을이었다. 전 북 대륙의 수호자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잠시 후. 확실히 이름값 높은 사용자라 그런지, 한창 시끄럽던 대 강당이 조금이나마 잠잠해졌다. 이효을은 예의 오연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사용자 주호의 말은 어느 정도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하고. 그럼 지금부터는 강철 산맥 화계 공략 계획과 연관되는, 본 계획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이효을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동글동글하게 생긴 그 무언가는, 수정구였다. 딱! 곧 손을 튕기는 경쾌한 소리가 울리고, 중앙 무대로 반투명한 화면 하나가 생성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수정구에 저장된 영상을 확대한 것이다. 이내 눈에 보이는 영상은, 다름 아닌 강철 산맥이었다. 나는 약간 미묘한 기분을 느끼며 강철 산맥을 응시했다. …저 산맥만 넘을 수 있다면. - 자. 그럼 지금부터 설명을 시작하려 하는데. 아직 지방 방송이 조금 있는 것 같네요? 궁금한 게 있으시면 손을 들고 저한테 물으세요. 혼자서 떠들지 마시고. 그때, 약간 짜증 어린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그러나 질문을 하는 사용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눈치를 보는 듯싶다. 정체를 알고 있는 사용자들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고, 모르는 사용자들은 갑작스럽게 입을 다문 사용자들에 이상한 낌새를 느꼈을 것이고.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어수선함이 남아있어, 나는 천천히 손을 들며 몸을 일으켰다. 이효을은 단박에 나를 알아보더니 아주 살짝 아미를 찌푸렸다. 흡사 무척 껄끄럽다는 얼굴이랄까. 저게 도와주려고 해도 저러네. “머셔너리 로드 김수현입니다.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만.” - …질문해주세요. “첫 번째. 제가 알기로 강철 산맥은 굉장히 드넓고 끝을 알 수 없을 만치 깊은 산맥으로 알고 있습니다. 화계 공략은 확실히 좋은 발상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모든 지역을 불태우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되는데요. 또한 마법사들의 사정거리를 감안하면, 결국에는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겠지요. 그 부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 궁금하며, 두 번째는 이번에 각 지역별 네 개의 원정대를 나눈 것과, 방금 들은 화공 계획이 상호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 아하…. 좋은 질문이네요. 정리해주신 점, 감사 드려요. 그제야 내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이효을은 약간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곳곳에 남아있던 소란이, 비로소 완전히 잦아들었다. 별다른 일은 한 건 아니었다. 그저 현재 가장 쟁점이 되는 두 질문을 정확히 짚어냈을 뿐. 이윽고 나에게서 시선을 뗀 이효을은 객석을 돌아보며 영상을 가리켰다. - 확실히 머셔너리 로드의 말씀대로, 모든 산맥을 불태울 수는 없어요. 정확히 말해보면 할 수는 있으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점이 단점이지요. 좌우간 요지는, 이제나~저제나. 결국에는 강철 산맥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거예요. - 그럼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화계 공략 계획의 최우선 목표가 모든 것을 깡그리 불태운다는 게 아닌, 안전 지역을 확보한다는데 있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도록 하죠. …그럼, 안전 지역의 명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이게 궁금하시겠죠? 이효을은 잠시 말은 끊었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단도직입으로 말씀 드리죠. 중앙 관리 기구는 강철 산맥 내에 요새를 구축할 예정입니다. 말 그대로 수천 명이 거주할 수 있는, 동시에 괴물들이 몰려와도 능히 수비할 수 있는 하나의 요새. 화계 공략에 이은 요새 구축 계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아.” “흠.” 나는 한소영과 형이 동시에 탄성을 터뜨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요새라는 말을 들은 순간, 중앙 관리 기구에서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대강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몇몇 분들은 눈치 채신 것 같네요. 네. 중앙 관리 기구는 지난 몇 달간 3년 전 생존자들을 모아 최대한의 정보를 모았고, 그 결과 강철 산맥은 단번에 공략할 수 없는 지역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 여기서 바로, 각 지역별 원정대를 네 개로 나눈 이유가 나와요. 지휘 효율을 높이려는 의도도 있지만, 진정한 의도는 바로 교체입니다. 말하자면 지역별 순차적인 공략 시도라고나 할까요? 즉 선발로 들어간 원정대가 일정 지점에 도달한 경우, 그 장소에 대기하며 요새를 건설하고, 이어서 후발 원정대가 2차 공략에 나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공략을 완료할 때까지 이러한 순환을 반복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런 말인가? 1차 전력인 동부가 강철 산맥에 들어가 일정 지점에 들어가게 되면, 그 자리에 요새를 건설해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한다. 그러면 2, 3, 4차 전력이 1차 전력이 건설한 요새로 이동하고, 이후 1, 3, 4차 전력이 대기하는 동안 2차 전력이 재차 내부로 공략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반복한다. - 물론 직접 겪어보지 못한, 머릿속에서 계획인 이상 우리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거예요. 무엇보다 강철 산맥이 그렇게 만만한 지역이라 생각되지도 않고, 정확한 건 들어가 봐야 아니까요. - 하지만 그래서 요새가 더욱 중요하다는 거예요. 화계 공략과 내부 공략의 공통점은, 어쨌든 여러분들이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는 데 있죠. 저는 이 요새 구축 계획이,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여러분을 지켜줄 최소한의 방패가 되어줄 거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이효을의 말은 단순히 요새를 세운다는 관점에서 국한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강철 산맥은 유적이 아닌 하나의 거대한 지역이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공략할 수 없는 지역임을 고려하면, 이번 원정의 쟁점은 첫 전력을 중간중간 잘 유지할 수 있느냐 라 볼 수 있다. 이효을의 그 점을 잘 캐치한 것이다. 무엇보다, 화계 공략 계획을 만능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이효을의 말마따나 강철 산맥은 절대로 만만한 지역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해보면, 중앙 관리 기구에서 세운 계획은 나름 괜찮은 계획이라 할 수 있다. 우선 화계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안전 지역을 확보한다. 그리고 확보한 안전 지역에 요새를 구축함으로써 안전성을 더욱 증강시킨다. 마지막으로 요새에 대기 원정대를 주둔시켜, 적절한 교체로 최대한의 전력 유지한다. 말인즉슨, 이 삼박자를 잘 조합해 최대한의 효과를 노리겠다는 소리였다. 만일 이효을의 말대로만 된다면? 북 대륙은 요새를 기점으로 최상의 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원정대를 3교대로 돌릴 수 있게 된다.(4 전력은 예비이므로 제외하고.) 그와 더불어, 강철 산맥 초입부터 끝까지 연결되는 병참 기지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 효율성은 가히 무궁무진할 것이다. 정적이 흐른다. 어느덧 대 강당 내부는 완전히 가라앉은 상태였다. 누군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 이로써 1차로 세운 계획은 대강 말씀 드렸는데…. 이윽고 이효을은 태연한 얼굴로 객석을 둘러보고는, 살며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 그럼, 질문을 받아볼까요? * 소집령이 끝났다. 대 강당에서 나온 이후, 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참으며 중앙 관리 기구로 걸음을 옮겼다. 눈물을 머금은 이유는, 소집령이 끝나고 한소영이 이번 계획에 대해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며, 식사를 제의한 데 있었다. 하지만 끝나고 곧바로 약속이 잡혀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거절하고 말았다. 웬만하면 앞선 약속을 미루고 싶었지만, 요즘 중앙 관리 기구가 바쁜 것을 아니 별 도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효을과의 대면도 간신히 잡을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 이동이라는 특이한 능력을 지닌, 제갈 해솔이라는 0년 차 사용자의 참가를 허용해 달라. 그것도 갓 사용자 아카데미를 나온 병아리를?” 이효을은 책상에 아예 상반신을 엎은 채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무대에서 날카롭게 말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으나, 이해할만했다. 집무실 곳곳에 보이는 흐트러진 흔적들은, 그동안 이효을이 얼마나 치열하게 강철 산맥 공략을 준비했는지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뭐, 볼까지 내려온 눈 그늘이 눈에 밟힌 것도 있지만. “음. 0년 차라고 너무 색안경을 끼고 보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연차로 따지면 아직 병아리지만, 정말 실력 있는 사용자야. 웬만한 고년 차 마법사 뺨치는 정도라고.” “흠….” 이효을은 뜻 모를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책상에 엎은 채 고개를 반만 돌리더니, 중구난방으로 흩어져있는 기록 더미를 뒤지기 시작했다. “으응…. 졸려…. 사용자 아카데미…. 사용자 아카데미…. 여기 어디 있을 건데…. 아. 찾았다.” 그리고 기록 하나를 뽑아내더니, 유심히 살피기 시작.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효을의 두 눈이 살짝 치켜떠졌다. 아마 이름이 특이하니 금방 찾은 모양이다. “여기 있네. 제갈 해솔. …응? 수료 성적이 별론데? 아니. 매우 좋지 않아. 이건 완전 하위권이잖아.” 그 말에 나는 턱 말문이 막히는걸 느꼈다. 갓 나온 병아리를 평가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면 사용자 아카데미가 유일한데, 이효을의 말대로 제갈 해솔의 수료 성적은 썩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용자 정보를 확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면, 그나마 어필할 수 있는 게 수송 어빌리티 뿐인가. “그건 과거의 자료에 불과하고. 현재는 정말 많은 성장을 이룬 상태야. 그리고 생각해봐. 이 이동이라는 능력은 네가 말한 병참 기지 건설 계획에도 적잖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럴 수도 있는데…. 그런데 현재는 상용화 단계가 아니지 않아? 뭐 하루 걸릴 거리를 이동한다거나, 또는 수십, 수백 명이 한꺼번에 이동할 수 있다거나. 설마 그 정도는 아닐 거잖아?” …그랬다. 확실히 그 정도까지는 되지 않는다. 오기 전 제갈 해솔에게 물어본 결과, 수송 어빌리티가 아직 개발 초기 단계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개발할 여지는 많이 남아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아무튼 현재는 이효을이 말하는 기준을 충족시킬 수는 없다. 이윽고 몸을 느릿하게 일으킨 이효을은 피로에 젖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머셔너리 로드~. 이 제갈 해솔이라는 사용자. 정말 참가시켜야겠어?” “본인이 강력하게 원하고 있고, 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꼭? 꼭꼭? 꼭꼭꼭?” “…….” 애처로운 눈망울로 되도 않은 애교를 부리는 이효을. 순간 토가 쏠릴 뻔 했지만, 간신히 삼키며 입을 열었다. “장난하지 말고. 그리고 이건 강제가 아니라 부탁이잖아. 어떻게 안되겠냐, 네 의중을 물으러 온 거야.” “에엥? 부타악?” 그 순간 나를 보는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꺼졌다. 그러더니 멍한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이효을. 또 왜 저러나 싶어 가만히 바라보자, 약간은 생기를 되찾은 듯 예의 새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너 그거 알아? 네가 나한테 부탁이란 말 처음 꺼낸 거?” 그랬나?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웬만하면 이 자리에서 답변을 받았으면 좋겠는데.” “으음….” 다시 회답을 요구하자 이효을은 금방 고민에 빠져들었다. 사실 여기까지 회답을 미루는걸 보면, 답은 이미 나왔다고 봐도 좋다. 성격상 되면 된다, 안되면 안 된다고 딱 잘라 말을 할 터인데, 아마 나를 앞에 두고 있다 보니 약간 조심스러운 모양이다. 아니면 속으로 제갈 해솔을 높이 평가하고 있거나. 그렇게 서로 침묵을 지킨 채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뭔가 깊이 생각하듯 입맛을 다시던 이효을은 곧 쯧, 혀를 차는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미안.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어.” “…그러냐.” “확실히 그 능력은 인정해. 그러나. 그거 하나만 보고 네 부탁을 들어주기에는, 너무 리스크가 커.” “리스크?” 의아히 되묻자 이효을은 살며시 인상을 찡그렸다. 흡사 질렸다는 듯한 얼굴. 그러더니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너도 왜 0년 차, 1년 차를 제외하는지는 알고 있지?” 이효을은 주섬주섬 연초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한 모금 깊숙이 빨아들여 연기를 흘렸다. “후아. 이제 좀 살겠네. …아무튼. 실은 그런 부탁을 해오는 사람들이 너 하나만 있는 게 아니거든. 의외로 많아.” “많다고?” “응. 뭐, 이해는 해. 만일 공략을 성공한다면, 모든 특권은 참가자에 우선적으로 돌아가니까. 하지만 솔직히 이해한다고 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는 아니잖아. 또, 너도 클랜 로드니까 알 거 아냐. 이런 대규모 공략에서는 개인의 의지를 존중하기가 정말 어렵다는 거. 룰을 하나 정한 이상, 단체의 입장을 중요시 할 수밖에 없어.” “…….” 이런 말을 들을 거라 예상하기는 했다. 왜냐하면 지금 이효을의 말은 내가 일전에 제갈 해솔에 했던 말이니까. 그 말이 지금 고스란히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머셔너리 로드. 나는, 여태껏 자격이 안 되는 사용자들의 요청을 모조리 거절해왔어. 그런데 여기서 네 부탁을 허락해버리면, 그 사용자들에게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아니 그전에. 능력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과연 그 사용자들이 아 그렇구나~. 이러면서 온전히 받아들일까?”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더구나 너희는 북 대륙 내 유일한 S Zero 클랜이야. 사용자들의 시선이 집중된 만큼, 더욱 부탁을 들어주기 힘든 상황이라고. 너라면…. 내 말 이해하지?” 그렇다. 인간이란 그리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니까. 오히려 자신이 받은 불이익에 들고 일어날게 눈에 뻔히 보인다. “사실 네 부탁은 웬만하면 들어주고 싶어. 이러나저러나 네 덕을 꽤 본 입장이니까. 그리고 네 말을 들어서 손해 본 적도 없는 것 같고.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결과가 빤히 보여. 너도 그래서 부탁이라는 말을 꺼낸 거잖아.” “으음….” “머셔너리 로드. 나 이번 공략, 정말로 성공하고 싶어. 지금 강철 산맥 문제 하나만 해도 벅찬데, 이런 문제를 일부러 일으키면서까지 변수를 만들고 싶지는 않아.” “…….” 그래서 더욱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이효을 입장에서도 기껏 소집령까지 잘 이끌어왔는데, 괜한 분란 거리는 만들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결국, 안 되는 건가.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효을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더는 방법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억지로 강행한다고 쳐도, 잘못하면 북 대륙 전역을 대상으로 비난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그만 깔끔히 포기하기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래. 알겠다.” “응? 가려고?” “네 입장은 충분히 들었으니까.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지. 클랜원한테는 내가 잘 말해두도록 하마.” “…그, 그래?” 너무 쉽게 포기했다 생각한 걸까. 이효을은 떨떠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인 후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머셔너리 로드.” 막 문을 열은 찰나, 이효을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차분히 시선을 돌리자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 보이는 이효을이 보였다. “왜?” “혹시…. 거절했다고 기분 나쁜 건 아니지?” “별로?” “그럼….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이효을은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말을 할까 말까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곧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 같은 거…. 하지 마?” “이상한 일이라니? 무슨 이상한 일?” “예를 들면. 예전에 코란 연합을 무너….” “헛소리.” 무슨 소리를 하는가 했더니. 나는 딱 잘라 받아 친 후, 곧바로 문을 나섰다. ============================ 작품 후기 ============================ 오늘 내용을 적다 보니 독자 분들께 문득 궁금한 점이 들었습니다. 혹시 독자 분들의 홀 플레인 내 거주하는 사용자라면. 그런데 강철 산맥에 참가할 수 없는 입장이라면?(강철 산맥에 관한 특권은 확실히 좋습니다. 능력치 포인트도 주어지고, 이후 신 대륙에 관한 모든 권한을 우선적으로 부여 받습니다.) 여기서 머셔너리 클랜의 한 0년 차 사용자, 그것도 병아리가 참가권을 부여 받았다는 말이 나온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ㅎㅎ 0542 / 0933 ---------------------------------------------- 사탄의 우울. “───. ───. ───.” “───. ───. ───.” “───. ───. ───.” “───. ───. ───.” 주문을 외우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한 명만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아니다. 수천 명은 될 듯한 마법사 사용자들이 동시에 주문을 외우는 소리였다. 듣기로는 약 3000명에서 4000명 사이의 마법사가 참여했다고 하는데, 정확한 인원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정도의 인원이 동시에 주문을 외우는 소리는,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웅장하고 또 장엄했다. “이제 곧 결과를 볼 수 있겠군요.” 옆에 서 있던 신재룡이 나직한 목소리로 속닥였다. 나는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다. 눈앞에는, 지금껏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강철 산맥이 있었다. 그냥 단순히 구경하러 온 것은 아니었다. 예전 소집령에서 나온 화계 공략 계획을 실행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기 때문이다. 소집령이 끝난 이후. 중앙 관리 기구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계획은, 생각보다 큰 호응을 받았다. 그 중 화계 공략 계획은 정도가 심하다 생각될 정도로 열렬한 호응이 있었다. 나름 이해는 간다. 계획 자체는 단순하기 그지없으나, 현실성이 무척이나 높았으니까. 더구나 그 계획은 사용자들에게 하나의 환상의 주었다고나 할까. 말인즉슨, 이제껏 난공불락이라 여기던 강철 산맥을 손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어려운 길을 쉽게 갈 수 있다는데 마다할 사용자는 없으니까. 공식적으로 발표된 화계 공략 계획은, 열렬한 호응을 받은 만큼 엄청난 속도로 탄력이 붙었다. 하나의 환상의 생겼으니, 사용자들이 하루라도 빨리 계획을 실행하고 결과를 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런 호응에 가만히 있을 이효을이 아니었다. 이효을은 곧바로 각 지역에 전령을 보내 협조를 요청했고, 그 즉시 참가를 희망하는 마법사들이 대거로 모이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우리끼리 한 번 해보자는 사용자들도 생겨, 중앙 관리 기구에서 통제를 해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고르고 고른 정예들로 하나의 마법사 군단을 꾸린 후, 북 대륙은 4주라는 시간을 거쳐 강철 산맥에 도착할 수 있었다. - 대기. 준비가 되신 분들은 강철 산맥을 겨냥해 하늘 높이 지팡이를 들어주세요. 직격 방향은 지양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슬슬 시작하려는 걸까. 음성 증폭을 걸은 목소리가 평야를 망망히 울렸다. 그러자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 우리가 서 있는 지점과 광활히 펼쳐진 산맥 사이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마력 흐름이 느껴졌다. 문득 동시다발적으로 작열하는 색채에 눈이 부시는 게 느껴졌다. 마법사들이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리는 지팡이에는, 하나같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빛이 주변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 1제대 화계 마법 준비 완료. - 2제대 화계 마법 준비 완료. - 3제대 화계 마법 준비 완료. - 4제대 화계 마법 준비 완료. 각 제대 장들이 준비가 완료됐음을 보고한다. - 5제대 풍계 마법 준비 완료. - 6제대 수계 마법 준비 완료.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5제대, 6제대마저도 준비 완료를 보고했을 때. - 모두 준비. 비로소, 발사 직전의 명령이 떨어졌다. 나는 무검을 꽉 쥐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예를 들면 열 받은 괴물들이 미친 듯이 튀어나오거나.), 여차하면 앞으로 나가 마법사들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 “…….” 잠시 정적이 이어지며 긴장감이 내부로 가득 차 올랐다. 그러나 정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 발사! 이내 이효을 특유의 날카로운 음성이 울리는 것과 함께, 마법사들 또한 모두가 시동어를 외쳤다. 그와 동시에 지팡이 끝에 맴돌던 불빛들이, 흡사 폭죽을 터뜨리는 것처럼 거의 한꺼번에 터져나가는 걸 볼 수 있었다. 나는 침착히 귀를 막으며 얼른 시선을 들었다. …불덩이? 아니 불 줄기? 도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수백, 아니 수천의 염화 마법이 일제히 하늘을 날고 있다. 그 여파가 어찌나 대단한지,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뜨거운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한없이, 한없이 올라가던 마법들은 하늘에 이르러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하지만, 정말 잠시에 불과했다. 최고점에 다다른 마법들이 이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일거에 아래로 궤도를 달리해, 우수수 떨어진다. 목표는 정확히 강철 산맥을 겨냥하고 있다. 마치 불로 이루어진 비가 떨어져 내리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래. - 모두 조심! 말 그대로, 불의 폭우가 강철 산맥에 그대로 내리 꽂힌다! 쾅쾅쾅쾅쾅쾅쾅쾅! 쾅쾅쾅쾅쾅쾅쾅쾅! 강철 산맥과 마법이 첫 충돌을 일으켰다. 지면에 내리 꽂힌 불꽃들은 앞 다투어 폭발해 강철 산맥의 내부를 새하얗게 물들였다. 바로 옆에서 대포가 터지는 것처럼 엄청난 굉음이 고막을 때렸지만, 나는 눈을 떼지 않았다. 있는 대로 안력과 청력을 끌어올리며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 악착같이 앞을 주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화르르르르르르륵! 숲의 곳곳에 퍼진 하얀 빛들 사이로, 거대한 불길들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강철 산맥 공략의 첫 발을 내디디는 신호탄이 쏘아진 것이다. * 조용한 방. 가득히 내려앉은 어둠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솟아올랐다. 느릿하게 형체를 갖춰가는 그림자는, 약간 마른 체구와 호리호리한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곧 그림자가 완전한 형체를 갖춘 순간, 어둠은 의자에 앉아있는 모두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적대자.' '모든 악마의 왕.' 사탄의 등장이었다. 대계의 예언을 빌미로 7대 악마의 회동을 주최하고, 가장 늦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모두 모였군.” 느긋한 말투. 그러나 차갑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의자에 앉아있는 악마들에 인사했다. “늦어. 주최. 너.” 회답한 목소리 또한 냉랭하기 그지없다.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치 조금의 고저도 없는 목소리. 그러나 거의 자기 상체만한 곰 인형을 꼭 안고 있는 그 모습은 목소리와는 정반대였다. 깊숙이 가라앉은 푸른색 눈동자로 사탄을 쳐다보는 악마는 작달막한 여아(女兒)였다. 외양으로만 본다면 이제 갓 8살이나 됐을까. 통통한 종아리를 드러낸 채 칠흑색 고스로리타 드레스를 입은, 흡사 정교한 인형을 보는듯한 사랑스러운 소녀. 그 정체는 바로 '잔혹한 파괴자.'이자 '동쪽의 왕'인 바알이었다. “미안하군. 회동 전에 준비할게 좀 있어서.” 시큰둥하게 대답한 사탄은 자신의 의자에 가뿐히 몸을 앉혔다. 그리고 부자연스럽게 보일 정도의 기다란 손가락을 주머니 속에 넣어, 연초 하나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한 점 타오른 불빛은 주변을 자그맣게 밝혀, 가로로 쭉 찢어진 눈과 새빨간 눈동자를 비췄다. 그러나 곧 불이 새빨갛게 타 들어가며 연초가 부서져내려, 잠시 비췄던 사탄의 얼굴에 도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사탄? 대계에서 연락이 왔다고 들었는데? 지금 한가로이 연초나 필 여유가….”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걸까. 끈적끈적한, 어딘가 야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다른 악마들도 내심 동의하는지 잠자코 사탄을 응시했다. 그러나 여전히 사탄은 아무 말도 없다. 시간이 흐르며 모두에 의아한 기분이 차오를 무렵. 돌연 사탄이 빠르게 손을 놀렸다. 휘리릭! 탁! 악마들이 앉아있는 각 의자의 팔걸이에 손바닥만 한 종이가 박혔다. 일반 종이와 다른 점이 있다면 면이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다는 것이다. “대계의 연락을 정리해 넣어놓았다. 사용법은 다들 알고 있을 테고. 우선 먹고 얘기하지.” 일단 먹고 얘기하자. 이상한 말이었다. “쳇. 누가 들으면 꼭 만찬에라도 초대받은 줄 알겠어.” 그러나 이어지는 행동은 더욱 이상했다. 나직이 투덜거린 아스타로트가 종이를 우악스럽게 쥐어 입으로 한 번에 구겨 넣은 것이다. 리리스는 돌돌 말은 종이를 입술을 오므려 빨아들였고, 바알은 끝에서부터 조심스럽게 뜯어먹었다. 아무튼 먹는 방식의 차이는 있으나, 말 그대로 악마들은 종이를 먹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엥? 새로운 여왕의 출현? 그리고 패배의 예언? 아니 아니. 철수를 염두에 두라고!” “이해 불가. 갑자기. 무슨 소리.” 가장 먼저 먹은 아스타로트가 종이를 꿀꺽 삼키며 외쳤다. 바알 또한 아기자기한 아미를 찌푸리며 바로 말을 이었다. 사탄은 한껏 당황해 하는 악마들을 지그시 둘러보고는, 약간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 회동을 개최한 것이다. 너희의 의중을 묻기 위해서.” “…….” “지금 우리에게 선택의 때가 도래했다. 계속할 것이냐, 아니면 철수할 것이냐.” “철수? 철수라니 그게 무슨 헛소리야! 아직 약속의 신전은커녕 테라에도…. 아니! 플로렌스, 아이리스, 라그나로크, 아틀란타! 이방인 놈들은 아직 그 누구도 이 지역에 도달하지 못했어!” 역시 '분노의 악마'라 그런지, 아스타로트는 두 눈을 이글이글 불태우며 으르렁거렸다.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처럼. “저도 분노의 악마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비록 대계의 연락이라고는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지시입니다. 모든 악마들의 왕이여. 혹시 왜 이런 지시가 내려왔는지, 내막을 알고 계십니까?” 루시퍼 또한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목소리 자체는 정중했지만, 언제 어느 상황에서나 신사적인 태도를 보이던 '타락 천사'치고는 이례적인 모습이었다. “…대계의 예언은 여태껏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지.” 그렇게 말한 사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북 대륙에서 강철 산맥을 공략하려는 시도가 포착되었다.” “그래서? 고작 그것 때문에 이런 지시가 내려온 거야?” “관련 없지는 않겠지.” “정말~?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대계도 이제 한물갔네. 호호호.” 리리스는 진정 어이없다는 말투로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들.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군.” 그러나 사탄의 차갑게 한 마디 내뱉자 리리스의 웃음이 뚝 멈췄다. 이윽고 사탄이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자 모든 악마들의 시선이 중앙으로 쏠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사탄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한 명의 왕과 네 명의 여왕. 패배의 일차 조건 만족. 뭐, 일단 뜬구름 잡는 소리는 집어치우도록 하지. 그보다, 우리는 정말로 패배가 닥쳐왔음을 직시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말이야.” “젠장. 나한테는 아직도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패배가 닥쳐왔다니 무슨 말이야?” “현실적으로 생각하라고 했을 텐데?” “그래서. 백 번 양보해서 강철 산맥이 공략되면, 네 말마따나 우리가 패배한다는 소린가? 응? 사탄?” “그럼 물어보마. 지금에 이르기까지, 네가. 아니 우리가 이루어낸 일이 뭐가 있지?” “그건…!” 벌컥 화를 내려던 아스타로트는 갑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분노에 앞뒤를 가리지 않고 말했지만, 잘 생각해보니 아무리 찾아도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일러. 일러도 너무 일러. 플로렌스, 아이리스, 라그나로크, 아틀란타. 우리는 이 네 도시를 잇는 통로가 개척되기까지, 적어도 3, 4년은 더 걸릴 거라 예상했다. 그래서 그 시간에 맞춰 여러 안배들을 해놓았는데…. 지금 상황이 어떻더라?” 힐난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몇몇 악마들은 머리를 숙이거나 고개를 돌리는 등 사탄의 시선을 회피했다. 왜냐하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 네 말대로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말인데. 좋아. 네 말대로 위험한, 정확히는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건 인정하겠어. 강철 산맥이 공략되면 테라는 금방이니까.” 그때, 천하면서도 깊숙한 목소리가 사탄에 말을 걸었다. 리리스였다. 사탄이 조용히 걸음을 멈추자 무언의 승낙이라 여긴 리리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강철 산맥이 공략될 거라는 예상을 전제로 한 말이 아니야?” “그렇지 않으면 대계의 예언이 나올 리가 없으니까.”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3년 전 우리는 똑같은 일로 이렇게 모였었지. 그때도 너는 우려의 목소리를 냈지만, 결과는 어땠지?” “흠.” 사탄은 미약한 침음을 흘렸다. 나름 일리 있는 말이라 여긴 탓이고, 사탄 스스로도 아직 강철 산맥이 공략될 때가 아니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3년 전의 사건이 리리스의 말을 뒷받침한다. 리리스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패배 예언이라고 해봤자 다 변화라는, 일차 조건에 불과하잖아? 즉 여전히 우리의 힘으로 변화가 가능하다는 말이니까, 철수라는 말은 아직 이르다 생각하는데.” “…….” “그러니까 오히려 이 난관을 반전하기 위해 힘써야 하지 않을까? 너도 그걸 위해서 이 회동을 개최한 거고. 안 그래?” “그래. 그게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사탄의 동의했다. 리리스는 그제야 만족한 듯 진한 미소를 짓더니 뻐기는 얼굴로 한 쪽을 주시했다. 아스타로트가 입을 질끈 깨물었다. “나 또한 철수라는 말은 마음에 들지 않고, 그럴 생각도 없다. 하지만 이제는 인정해야 해. 더는 유리한 상황도 아니고, 여유를 부릴만한 입장도 아니야. 우리는, 달라져야 한다. 지금까지와는 판이하게 다른 방식으로 말이야.” 다시 걸음을 옮긴 사탄이 마침내 방의 정 중앙에 도착했다. “하지만 너희에게는 백날 말로 하는 것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게 낫겠지. 그러니 우선 내가 준비한 안배를 보여주도록 하지. 모두 집중해주었으면 좋겠군.” 그렇게 말한 사탄은 길고 창백한 손을 들었다. 그러더니 흡사 여인의 젖가슴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부드러이 허공을 휘저었다. 우웅! 신기한 일이었다. 사탄이 두어 번 손을 놀리자, 허공에 커다란 마법 진이 절로 생겨난 것이다. 이내 음침한 빛으로 밝혀진 마법 진은, 곧 허공에 한 커다란 영상을 비췄다. 영상은 차마 광대하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드넓은 수림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강철. 산맥.” 바알의 말에 사탄이 머리를 끄덕였다. 곧바로 몸을 돌린 사탄은 악마들을 한 명 한 명 돌아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다들 알고 있다시피 강철 산맥은 총 네 개의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중에서 우선….” “저게. 안배?” 이윽고 사탄이 막 안배에 대해 입을 열려는 순간, 바알이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비단 바알만 그런 게 아니었다. 모든 악마들이 멍해 보이는 기색으로 영상만 응시하고 있다. 그때였다. - 화륵, 화르륵, 화르르륵! - 와아…. 와아아…. 와아아아….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무언가 타오르는 소리. 그리고 간간이 들려오는 함성. 그제야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사탄도 영상을 돌아보았다. 영상을 확인한 순간, 사탄도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화마(火魔)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푸르던 수림이, 어디선가 밀려오는 불길에 휩쓸려 삽시간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불길은 마치 이 모든 수림을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풀과 나무들을 게걸스레 불태워 없애버리는 중이었다. 엄청난 속도였다. 한눈에 봐도 이상한 광경. 하지만 악마들은 머리를 저으며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그래도, 그래도 사탄이니까. 7대 악마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며, '모든 악마들의 왕'이라 불리는 사탄이니까. 뭔가 좀 이상해 보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뭔가 묘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악마들은 한껏 기대하는 얼굴로 사탄의 안배를 기다렸다. 그러나. “?” 모두의 기대를 배신하고, 사탄의 머리 위에 자그마한 물음표 하나가 떠올랐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오늘 이상하게 몸 상태가 별로라서 잠깐 쉬려고 누웠는데, 그대로 푹 잠들어버렸네요. 이래서 아무리 피곤해도 어지간하면 눕지 말자고 다짐하는데…. 역시 수마가 무서워요. ㅜ.ㅠ 코멘트는 잘 읽어보았습니다. 제 예상과 비슷한 생각을 지닌 분들이 많이 보이시더군요. 제갈 해솔에 대한 결과는 빼먹지 않고 내용에 들어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질문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하하. :D PS. 소제목 수정했습니다. 동쪽의 왕은 바알의 명칭이고, 사탄은 모든 악마들의 왕입니다. 제가 잠시 착각했네요. _(__)_ 0543 / 0933 ---------------------------------------------- 인선 발표. - 한 달 전. “거절했다고요?” 제갈 해솔은 눈에 띄게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차분히 머리를 끄덕인 후, 중앙 관리 기구에서 왜 거절했는지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물론 이효을이 말했던, 타 사용자들의 반응과 시선을 위주로. 잠시 후, 모든 설명을 마치자 제갈 해솔은 나직한 침음을 흘렸다. “으음. 듣고 보니 확실히 그러네요.” 제갈 해솔은 아직 이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을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저번에 그런 생떼를(본인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부린 것일 테고. 그래도 역시나 합리적인 성격이라 그런지, 하나하나 설명해주자 금방 이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후유.” 하지만 곧 눈을 내리깔며 긴 한숨을 흘리는 걸 보니 여전히 아쉽기는 한 모양이다. 그런 제갈 해솔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실은,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네?” 제갈 해솔이 화들짝 눈을 뜨며 반문했다. “하지만 안 된다고 했잖아요? 중앙 관리 기구라면 북 대륙을 관리하는 최고의 연합 기관 아닌가요?” “중앙 관리 기구가 최고의 연합 기관이라면, 머셔너리는 최고의 클랜이니까요.” “…클랜 등급 상으로요?” “그렇기는 하지만, 빈말은 아닙니다. 아무튼 앞서 말했듯이 사용자 제갈 해솔이 아무리 능력을 증명해도, 분란이나 비난은 무조건 생길 겁니다. 이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에요.” “네. 아무래도 그렇겠죠.”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감수할 자신이 있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참가시켜드리죠. 지금의 머셔너리에 그 정도 힘은 있으니까요.” 말을 마친 후, 나는 제갈 해솔을 유심히 살폈다. 과연 어떻게 반응할지, 어떤 선택을 내릴지 자못 궁금했기 때문이다. 제갈 해솔은 잠깐 생각에 잠긴 듯싶더니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어요.” “호?” “호? 는 무슨 호? 에요. 누구를 얌체로 보는 것도 아니고. 아 그렇잖아요. 저 때문에 이런 큰 이벤트를 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클랜원들까지 싸잡아 비난 받는 것도 미안하고. …좋은 사람들 많은데, 제 욕심 때문에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깔끔하게 포기하죠. 흥.” “하하하. 그런가요?” 제갈 해솔은 매우 빠르게 말했고, 나는 가볍게 웃었다. 좋은 사람이 많다는 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 제갈 해솔도 머셔너리를 나쁘게 생각지는 않는 모양이다. 어쨌든 회답은 들었다. 제갈 해솔은 합리적인 선택을 내렸다. 이해를 구한 만큼 원래는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야 마땅하지만, 나는 입을 닫은 채 천천히 책상을 두드렸다. 제갈 해솔도 나와 비슷한 마음인지, 전처럼 훌쩍 몸을 일으켜 바로 나가지 않고 머뭇거리는 중이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가고 싶은 모양이네요.” “그거야 당연하죠. 이럴 거면, 차라리 2년 더 일찍 올걸 그랬어요.” “…정말로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할 정도입니까?” “누, 누구 놀려요?” 제갈 해솔이 눈을 가늘게 뜨며 흘겼지만, 나는 빙긋 웃어주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그러면 말입니다.” 잠시 뜸을 들인 후,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다른 방법이 하나 더 있다면 어떡하시겠습니까?” “응? 하나 더 방법이 있다고요? 하지만 아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방법이 실현될 수만 있다면, 세간의 비난은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네?” 제갈 해솔이 아미가 부드러이 꿈틀거렸다. 의심 반, 솔깃함 반인 듯한 얼굴. 드르륵. 나는 곧바로 서랍을 열었다. 넓은 공간에 가지런히 놓인 호출석을 훑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물론 이것도 100%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나름 실행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뭐, 뭔데요? 무슨 방법인데요?” 이내 헬레나라는 이름이 붙여진 호출석을 찾을 수 있어, 나는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제갈 해솔은 한껏 기대하는 듯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여인도 참 감정 변화가 풍부하다는 말이야. “하지만 이 방법이 성공한다손 쳐도, 사용자 제갈 해솔은 여러 행동에 굉장히 많은 제한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까?” “그럼요. 참가할 수만 있다면, 무언들 못 참겠어요?” 마지막 경고라는 생각에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으나, 제갈 해솔은 별생각도 않고 단박에 승낙했다. 나는 그제야 조금이나마 확신할 수 있었다. 어쩌면, 제갈 해솔은 공략 성공 시 보상으로 주어지는 1 능력치 포인트를 원하고 있는지 모른다. …좋다. 이왕 밀어주기로 결심한 거. “그렇다면, 좋습니다.”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호출석을 눌렀다. * 강철 산맥을 불태우는 과정은 장장 사흘에 걸쳐 지속되었다. 사실 첫 계획은 나름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안에서 어떤 괴물들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계 공략 계획이 생각보다 높은 효율을 보였고, 괴물이 튀어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결국 사흘 내내 쉬지 않고 숲을 불태운 이후, 나는 거의 폐허나 다름없게 변한 초입을 보고 나서야 귀환 길에 오를 수 있었다. 무리 없이, 첫출발을 잘 끊은 계획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일단 화계 계획이 실행된 이상, 강철 산맥은 이미 공략을 시작됐다고 봐도 무방했다. 현재 초입에서는 중앙 관리 기구가 전초 기지를 건설하고 있었고, 서부와 북부가 남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는 중이었다. 동부는 고려 클랜의 지휘 아래 매우 빠른 속도로 편성을 끝마쳤고, 출발 초읽기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도 그런 것이, 1전력으로 판정을 받은 만큼 가장 먼저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아마 전초 기지에서 연락이 오는 순간, 3전력인 북부와 교체하는 동시에 강철 산맥 공략을 위한 진군을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남부도 시간이 많은 게 아니었다. 모니카로부터 강철 산맥 초입까지 걸리는 시간은, 최대한 빨리 가도 3주. 동부가 첫 공략 시도 후 약 1주에서 2주 사이로 진군을 멈출 것을 생각하면, 남부도 그 사이에 출발 준비를 끝내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런 만큼, 모니카로 돌아온 이후에도 쉴 틈은 없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용자들이 있는지, 남부는 돌아오자마자 소집령을 개최했다. 남부 원정대에 참가하는 클랜들만 모이는, 남부만의 소집령이었다. 남부 소 도시 모니카. 이스탄텔 로우 클랜 하우스. “그럼 제대로 된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여러분에게 먼저 양해를 구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모두가 앉아있는 가운데, 상석에서 홀로 몸을 일으킨 사용자가 인자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이는 이제 얼추 40중반일까. 턱수염을 근사하게 기른 나이스 미들의 모습을 한 사내는, 다름 아닌 칸(남부 대 도시)의 대표 클랜, 푸른 늑대의 클랜 로드였다. 이름은 안효섭이라고 하던가? “공략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갑작스러운 말씀일지도 모르겠지만….” 잠시 말을 끊은 안효섭은 천천히 좌중을 둘러본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푸른 늑대 클랜은 이번 남부 원정대의 지휘권을 이스탄텔 로우 클랜에 양도할 예정입니다.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요.” 웅성웅성. 그 말이 끝난 순간, 회의실 사이로 미약한 어수선함이 살며시 일었다. 하지만 심한 소란은 아니었다. 마치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듯, 머리를 끄덕이는 클랜 로드들도 서너 명 보인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소집령이 칸이 아닌 모니카에서 개최한다고 들었을 때부터 예상이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전달한 점 다시 한 번 깊은 양해를 구합니다. 하지만 수천의 목숨이 달려있는 막중한 임무인 만큼, 지휘권은 그에 어울리는 클랜이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명분이군. “…그리고 남부에서, 이스탄텔 로우보다 그 자격이 어울리는 클랜이 없다고 생각했고요. 좌우간 푸른 늑대는 차후 이스탄텔 로우의 지휘 아래 맡은바 임무를 성심껏 수행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안효섭은 정중히 인사를 마친 후 스스로 상석에서 내려왔다. 그걸 보며 의아한 기색을 비치는 이들도 적지 않았으나, 내심 안효섭의 속셈을 알 것도 같았다. 한 마디로 말하면 책임의 문제랄까. 2년 전 벌어진 전쟁 이후, 푸른 늑대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오히려 성과를 내는 것보다는, 대표 클랜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최대한 안전을 지향하며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비추어보면. 이번 강철 산맥 공략에서 중앙 관리 기구가 해주는 역할은, 방향을 제시해주는 일뿐이다. 그 이상은 간섭하지 않는다. 즉 세세한 공략 권한은 각 원정대의 재량으로 부여되는데,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안효섭이 스스로 물러난 것이다. 왜냐하면 혹시라도 실패했을 경우, 총지휘를 맡은 클랜이 가장 큰 책임을 떠안아야 하니까. 푸른 늑대는 아마 그러한 부담을 짊어지는 것보다, 그냥 참가하는데 의의를 두었을 것이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한소영입니다.” 한소영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상념에서 깨어 시선을 돌리니 어느새 상석으로 이동한 한소영을 볼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교체에 당황하신 분들이 계실 거라 생각하지만, 이야기 자체는 꽤 오래 전에 오고 간 상태입니다. 그런 만큼 이스탄텔 로우에서도 그만한 준비를 해왔고, 여러분을 최대한 안전하고 합리적으로 이끌 생각입니다. 그러니 지휘권 교체로 인한 걱정은 이만 접어두세요.” 어찌 보면 오만하다 느껴질 정도로 자신에 찬 말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기백 명은 넘는 사용자들의 박수가 회의실을 메웠다. 보아하니 조금 당황한 사용자들은 있지만 큰 불만은 없는 듯싶다. 하기야 근 2년 간 돌아가는 상황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용자라면, 푸른 늑대보다 이스탄텔 로우를 신뢰하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닐까. “감사합니다. 그럼 시간이 많지 않은 관계로,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나흘 전, 저는 각 도시에서 보내온 참가 현황 자료를 받았고, 1차적으로 편성을 완료할 수 있었습니다.” 머셔너리 또한 예전에 편성 현황을 발송한 상태였다. 물론 그 현황은 클랜원들에게는 아직 발표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웬만해서는 인선을 바꾸지 않겠다는 하나의 의지 표명이라고나 할까. 물론 꼭 필요하거나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바꿔야겠지만, 편성은 출발 전까지는 얼마든지 수정이 가능하니 크게 잘못된 일은 아니었다. “물론 이후 각 클랜의 사정에 따라 언제든지 편성이 변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오차가 크지는 않을 거라 예상되니, 우선 지금 바로 간단한 현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칸. 푸른 늑대, 신 하늘지기 등 12개 클랜 참가. 총원 약 1200명.” “코란. 신 코란 연합, 적심 등 10개 클랜 참가. 총원 약 1000명.” “모니카. 이스탄텔 로우, 머셔너리 등 14개 클랜 참가. 총원 약 1400명. 이상으로 총 36개 클랜에서, 약 3600명이 참가할 예정입니다. 동시에 요새를 건설할 거주민과 비 전투 사용자까지 합치면 4000명 내외로 원정대가 꾸려질 것 같습니다.” 한소영의 말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크흠…!” 그러다 어느 순간, 문득 옆에서 불편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 흘끗 시선을 돌리니 살짝 안색을 구긴 한 사내가 보였다. 문양을 보면 무사 클랜인 것 같은데…. 설마 자기 클랜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고 이러는 건가? 그래도 원정대의 일석을 차지한 클랜인데. 설마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며, 나는 도로 한소영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럼 여러분이 가장 궁금해 하실, 어떤 식으로 내부 편성이 이루어졌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한소영의 말이 끝나자, 사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스탄텔 로우 클랜원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몇 명은 한소영 뒤쪽으로 커다란 종이를 붙이고, 또 몇 명은 사용자들 사이를 누비며 기록을 나눠주었다. 이내 박다연이 놓고 간 기록을 살펴보자, 중앙에 일렬로 그려져 있는 세 개의 커다란 동그라미를 볼 수 있었다. 각 동그라미 안에는 또 수십 개의 작은 동그라미들이 그려져 있었고, 그 옆으로 클랜 이름들이 빽빽하게 적혀있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중앙 관리 기구는 이번 공략에서 지휘권을 높이는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저는 우리 남부 원정대를, 내부적으로 선봉, 대장, 후미 총 세 개의 부대로 나누어 운용할 생각입니다.” 머셔너리의 이름은 크게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한소영의 말에 따르면 선봉 부대에서도, 가장 앞쪽에 배치돼있었으니까. “부대를 나눈 기준은 바로 역할입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배정된 역할을 총체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그러니까 각 부대에 돌발 상황 대응에 조금 더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적절한 통제가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럼, 모두 이쪽에 집중해주세요.” 기록에서 시선을 떼자, 벽에 붙인 기록 중 후미 부분에 손을 댄 한소영이 보였다. 한소영은 잠시 숨을 돌린 후, 고요히 입을 열었다. “우선 후미 부대입니다. 후미 부대의 역할은 후방 경계와 더불어 거주민과 비 전투 사용자의 보호입니다. 기록에 적혀있다시피, 후미 부대의 총괄은 신 코란 연합에서 맡아주실 겁니다.” 다음으로 한소영의 손이 대장, 즉 중간 동그라미를 짚었다. “대장 부대입니다. 대장 부대의 역할은 총 경계, 그리고 선봉과 후미를 아우르는 지원 전투를 맡고 있습니다. 대장 부대는 우리 이스탄텔 로우 클랜에서 맡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마지막으로 한소영의 손이 선봉을 가리켰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선봉 부대입니다. 선봉 부대의 역할은 전방 경계, 초반 전투 대응, 그리고 길잡이 역할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 남부 원정대의 명운을 쥐고 있는 부대라고 볼 수 있어요. …그리고 이 자리를 총괄하는 클랜은, 제 소견으로 머셔너리 클랜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됩니다.” “으음…!” 그때였다. 한소영의 말이 끝난 찰나. “이의 있소.”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한 사내가 불퉁한 목소리로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얼굴에 잔뜩 불만이 어린 사내는, 아까 불편한 기색을 비치던 무사 로드였다. ============================ 작품 후기 ============================ 어제 재미있는 코멘트를 하나 보았습니다. 혹시 메모라이즈가 개그 물로 전향하는 게 아니냐는 코멘트였지요. 하하하. 사실 여러분이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근래 최대한 진도를 빠르게 빼려고 부단한 노력 중입니다. 강철 산맥에 들어가기 위한 꼭 필요한 과정만 밟고 있으며, 그 외에는 모조리 생략해버리고 있지요.(다시 말하면, 지금 내용에 나오는 사건은 차후 강철 산맥에 어떤 식으로든 연결이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다 보니 소소한 재미를 드릴 수 있는 일상 파트가 줄어드는 게 사실이고요. 여기서 일단 말씀 드려보면, 요즘 할 수 있으면 최대한 웃음을 드릴 수 있는 요소를 집어넣는 건 사실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강철 산맥 때문입니다. 앞으로 빠르면 2, 3회 안으로 남부 원정대가 강철 산맥 내부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강철 산맥에 들어간 이후에는, 내용상 그리고 전개상 달달 하거나 소소한 내용이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무겁고, 어둡고, 음침한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지요. 물론 저는 여러분의 항마력(?)을 믿습니다만. 내용에 따라서는 소수의 독자 분들의 불쾌하게 느끼실 만한 내용들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또한 강철 산맥의 파트는 상당히 깁니다. 그러니 그 기간 동안 지칠지도 모르는 독자 분들을 위해, 지금 어느 정도 충전을 하고 있다. 이 정도로만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_(__)_ 0544 / 0933 ---------------------------------------------- 인선 발표.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고오환(6년 차) 2. 클래스(Class) : 검사(Normal, Sword User, Master) 3. 소속국가(Nation) : 북 대륙 4. 소속단체(Clan) : 무사(武士)(Clan Rank : B Plus) 5. 진명 • 국적 : 정복감을 즐기는 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42) 7. 신장 • 체중 : 174.6cm • 87.3kg 8. 성향 : 호전 • 욕망(Aggressive • Ambition) [근력 93] [내구 84] [민첩 67] [체력 83] [마력 71] [행운 56] …이름이 고환? 아, 아니구나. 고오환이었구나. 그나저나 참으로 재미있는 이름이군. 아무튼, 무사 로드가 이의를 제기했다. 사실 이의라고 해봤자 듣지 않아도 뻔하다. 기록에 그려진 선봉 부대의 현황만 봐도 답이 나오니까. 무사는 머셔너리 바로 뒤에 배치돼있었다. 잠시 시선을 교환한 후, 한소영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아직 이의를 받겠다 한 적 없습니다. 앉으세요.” “그래도 해야겠소만. 지금 배치가 이게 뭐요? 이건 약속과….” “저는 무사 로드와 어떤 약속도 한 적 없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 드립니다. 앉으세요.” “하! 이렇게 나오시겠다? 그때 분명 우리 무사가…!” 그때였다. 무사 로드가 코웃음 치며 외치려는 찰나, 한소영이 두 눈을 살며시 치켜 떴다. 이어서 항상 한결같던 아미가 부드러운 굴곡을 그리며 휘어진 순간. 『사용자 한소영의 고유 능력. 카리스마(Apriority, Rank : A Plus)의 발동을 감지했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의 잠재 능력. 심안(정)(Rank : EX)이 대응합니다.』 갑작스럽게, 주변의 공기가 일변했다. “선봉…. 으…. 에….” 동시에 무사 로드가 돌연 말을 더듬었다. 한순간 변화한 흐름. 차츰차츰 차오르는 긴장에 절로 침이 넘어간다. 예의 흑 수정 같던 적요한 눈동자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무사 로드를 바라보는 한소영의 두 눈은 눅진한 핏빛을 비추며 번들거리고 있다. 흡사 사냥감을 눈앞에 둔, 피를 갈구해 마지않는 여인처럼. “앉으세요.” 그윽하다. 하지만 진득한 살기가 깊숙이 숨겨져 있는, 듣는 이의 등골을 서늘하게 훑는듯한 목소리였다. “으…. 어….” 털썩! 잠시 후, 거의 무너지듯이 의자에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 “…….” 모두가 침묵을 지킨다. 어느덧 회의실은 숨소리마저도 멎은 상태였다. 시선만 내린 채 무사 로드를 내려다보는 한소영을 보고 있자, 진득하면서도 묘한 살기가 척추를 서늘하게 훑는다. 감히 거역할 수 없는 기운이라고나 할까. 살기와 긴장이 어우러진 회의실에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자, 어깨가 무겁게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과연, 이게 바로 한소영의 카리스마. 마치 여황(女皇)을 보는듯하다. “죄, 죄송합니다! 그냥 이스탄텔 로우의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아까 기세 등등하게 일어나던 모습은 어디 갔을까.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무사 로드가 겨우 외쳤다. 그제야 회의실을 가득히 메우던 살기가 조금이나마 흐려져, 참았던 숨을 내쉬는 소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왔다. 한소영이 말했다. “선봉 부대는 남부 원정대의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 부대입니다. 그리고 제가 머셔너리 클랜을 최고 선봉으로 선발한 데는 당연히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 말은요….” “가장 최근에 악명을 떨쳤던 용이 잠든 산맥에 대해서는 알고 계실 겁니다. 그리고 그 지역을 어느 클랜이 공략했는지도요. 머셔너리는 모두가 포기하다시피 한 지역을, 열 명 남짓한 인원으로 공략했습니다. 이런 실적을 하나하나 따져 길잡이 역할을 맡긴 건데, 그게 그리도 불만이신지요.” “아,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하지만….” “물론 우리 이스탄텔 로우가 근 2년간 두드러진 실적을 올렸다고는 하나, 이조차도 머셔너리에 비하면 조족지혈입니다. 수치화시켜 비교해보면, 17배 정도 차이가 났으니까요.” “1, 17배….” “참고로, 무사와는 약 457배 가량 차이를 보였습니다.” “…….” 계속 쏘아지는 날카로운 비수에 무사 로드는 결국 고개를 수그리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한소영의 말에 급격한 관심이 쏠렸다. 도대체 어느 걸 기준으로 잡았길래 저런 수치가 나온 걸까? 이윽고 핏빛 시선을 거둔 한소영은 예의 칠흑 색 눈동자로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아까도 말씀 드렸습니다. 이스탄텔 로우는 여러분을 최대한 합리적이고 안전하게 이끌어갈 생각이라고. 저는 강철 산맥에 들어간 이후, 발생하는 모든 일에 책임을 질 각오가 돼 있습니다.” “…….” “하지만 그런 만큼 여러분도 제 권한을 존중해주시길 바랍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의 소소한 분란은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강철 산맥으로 들어간 이후에도 제 지휘권을 침범하는 사태가 벌어질 시, 그때는 이 정도로 넘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 “궁금하신 분이 있다면, 한 번 시험해봐도 좋습니다. 다만 그렇게 하시기 전, 제가 이 모니카의 밤거리를 어떻게 청소했는지 한 번 기억해주시길.” “…….” 모니카의 밤거리를 어떻게 청소했는지 기억하라. 이 말은 어떻게 보면 선전포고라 할 수 있을 만큼 과격한 말이었다. 한소영은 예전에 모니카에 밤거리를 형성하려던 사용자를 잡아 공개 처형한바 있다. 그 사용자가 대형 클랜의 소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즉결 처분한 것이다.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강철 산맥에 들어간 이후로는 알아서 기라는 소리였다. 한소영 말마따나 명령 불복종 등 지휘권을 침범하는 사태가 벌어질 시, 즉결 처분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이다. 아마 다른 사용자, 예를 들면 안효섭이 그렇게 말했다면 믿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소영은 다르다. 전례가 있는 만큼, 또한 내가 아는 한소영은 정말로 그러고도 남을 여인이었다. “충분히 알아들으셨기를 바라며, 그럼 계속 이야기하도록 하죠. 우선….” 모두가 조용히 듣기만 하는 가운데, 나는 홀로 소리 없이 빙긋 웃었다. * 머셔너리의 인원은 총 몇 명일까? 전투 사용자, 비 전투 사용자, 거주민, 아기, 영물 등등을 합치면 정말 많지만, 우선 클랜원으로 등록돼있는 인원은 총 64명. 그중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부부와 마르를 제외하면 61명. 즉 이 61명이 현재 머셔너리가 가용 가능한 실질 인원이라 볼 수 있다. 물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사항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연차로 구분한다면? 0년 차 2명, 1년 차 4명, 2년 차 8명, 3년 차 11명, 4년 차 14명, 5년 차 11명, 6년 차 4명, 7년 차 5명, 8년 차 1명, 9년 차 1명. 클래스로 구분한다면? 근접 클래스 26명, 궁수 클래스 10명, 마법사 클래스 14명, 사제 10명, 특수 1명. 이번에 강철 산맥 이야기가 나오기 앞서, 나는 새롭게 정리한 클랜원 현황을 두고 무척 많은 고민을 했다. 클랜원들 중 일부는 정말 누가 봐도 강력한 사용자고, 그런 클랜원들은 애써 머리 싸맬 필요가 없다. 어떤 방식으로는 써먹을 수 있을 테니 그냥 고민 않고 집어넣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그 아래 사용자들은 나로서도 장고에 장고를 거듭해야만 했다. 차라리 연차 제한이 있거나 실력이 좋지 않으면 모를까. 일단 머셔너리에 가입한 이상 다들 준수한 사용자 정보를 갖춘 상태였고, 그렇다면 여기서는 조합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조합은 단순히 클래스간의 적절한 조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것 또한 중요하기는 하지만, 자기 자신의 사용자 정보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클랜원과 얼마나 손발을 맞출 수 있는지도 고려해야 할 사항이었다. 결국 나름 최선이라고 생각한 인선을 짜고 현황을 제출하기는 했지만, 아직 낙관하기에는 이르다. 왜냐하면 머셔너리 클랜원들 거의가 자신이 어디 가서 꿀리는 수준이 아니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만큼 인선 발표는 사용자 개인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도 있는 매우 예민한 문제였다. 머셔너리 클랜 하우스. 4층 대 회의실. “모두 어젯밤 연락을 받았을 겁니다. 오늘 오전을 기준으로 동부에서 강철 산맥을 향한 진군을 시작했습니다.” 말 그대로였다. 남부 소집령이 끝나고 일주일 후, 중앙 관리 기구에서 동부에 연락을 보냈다. 가장 빠르게 편성을 마친 동부는 곧바로 호응했고, 바로 오늘 아침 모니카로 대규모 워프 후 강철 산맥을 향해 떠났다. 나를 비롯한 모든 클랜원들이 떠나는 광경을 보고 왔으니 다들 알고 있는 사실들일 것이다. 말을 마치고 주변을 둘러보자 하나같이 입을 딱 다물고 있는 클랜원들이 보였다. 이제 정말로 공략이 코앞에 다가왔다는데 긴장한 걸까, 혹은 다른데 관심이 있는 걸까. 아니.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말인즉슨, 우리도 이제는 늦어도 3주 안에는 모니카를 떠나야 한다는 말이었다. 회의실에 참가한 61명의 클랜원이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얼굴이 뚫릴듯한 기분을 느끼며 앞에 놓인 기록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나를 보던 시선들이 일제히 기록을 주시한다. 개중에는 안력을 끌어올린 클랜원들도 보일 정도였다. “미리 말해두지만 1차로 편성한 인선은 이미 이스탄텔 로우에 제출한 상태입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1차에 불과하고, 출발 전날까지 변경할 여지는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토록 늦게 발표하는 이유는, 어지간하면 바꿀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공략할 지역은 그 어느 유적도 아닌, 용이 잠든 산맥도 아닌, 바로 강철 산맥이니까요.” 나름 길게 말한 것 같은데도, 여전히 일말의 반응도 보이지 않는 클랜원들. 얼른 인선을 발표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느끼며 나는 짧게 한숨을 흘렸다. “후. 말이 길었나 보군요. 그럼 다른 건 차치하고, 우선 인선부터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상 인원 총 61명. 그 중 이번 강철 산맥에 참가하는 인원은 총 31명입니다. 물론 저를 포함한 인원이므로, 여기서는 총 30명의 이름을 호명하겠습니다. 그럼….” 웅성웅성. 웅성웅성. 잠깐 말을 끊으며 기록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제야 클랜원들 사이로 미약한 어수선함이 일었다. 총 참가 인원 31명. 아마 예상보다 너무 적다고들 생각하고 있겠지. 잠시 클랜원들을 바라본 후. “그럼 우선 근접 클래스부터 발표하도록 하죠.” 도로 시선을 돌리자, 소란은 삽시간에 잦아들었다. 이내 갑작스럽게 팽창하는 뜻 모를 긴장감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기록에 적혀있는, 클래스 별로 나뉘어진 선발 인선 현황을 보며 나는 차분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잠시 후, 조용히 이름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근접 클래스. 사용자 고연주, 구예지, 김동석, 남다은, 박현우, 안현, 우정민, 이유정, 진수현, 차소림, 허준영. 이상으로 11명. 그리고 저를 포함한 총 12명이 강철 산맥에 참가합니다.” “궁수 클래스. 사용자 강채린, 선유운, 엄백현, 임한나. 이상으로 4명이 강철 산맥에 참가합니다.” “마법사 클래스. 사용자 김한별, 박효찬, 원혜수, 정하연, 표혜미. 그리고 거주민 비비앙, 사샤, 헬레나. 이상으로 8명이 강철 산맥에 참가합니다.” “사제 클래스. 사용자 박다솜, 백승훈, 서지훈, 신재룡, 안솔, 이우석. 이상으로 6명이 강철 산맥에 참가합니다.” 중간중간 잠시 끊은 것 빼고는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인선을 발표하자, 조금이지만 숨이 차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발표해야 할 클랜원이 한 명 더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특수. 사용자 백한결. 이상으로 1명이 강철 산맥에 참가합니다.” 나는 여전히 기록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아직 남은 마지막 인원을 발표했다. 그리고 바로 시선을 올리자 손톱을 깨물던 백한결이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마주 살짝 웃어주며, 차분히 기록을 테이블 위로 흘렸다. 그리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총원 31명이, 이번 강철 산맥을 공략하는 남부 원정대에 참가합니다. 이상으로 인선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 작품 후기 ============================ 4부에서 2부로 줄인 건 제가 결정한 일입니다. 애초에 1회 연재 시작할 때부터 4부에서 3부로 줄였고, 연재 중 2부로 줄였지요. 그 부분은 제가 결정한 거라 이전 후기에서도 말씀드린 듯한데요. 이건 쭉 읽어오신 독자 분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시는 부분일 겁니다. 혹시 전 회 후기에 뭔가 잘못 적은 게 있나 다시 봤는데, 딱히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습니다. 개그 물로 변환하는 게 아니라, 강철 산맥에 들어가기 전에 최대한 웃음을 드리는 내용을 집어넣고 있다가 요지였습니다. 아니면 혹시 저번 후기에 문제가 있었나요? 예를 들면 독자 분들이 뭔가 불쾌하게 받아들이실 만한 요소가 있었는지요? -_-a 0545 / 0933 ---------------------------------------------- 강철 산맥으로! 머셔너리 클랜의 일원인 표혜미는, 홀 플레인으로 들어온 지 이제 2년이 조금 넘는 사용자였다. 나이는 22. 클래스는 일반 마법사. 그 외 특징이라면 약간 밝히게(?) 생긴 얼굴과 발랄한 성격을 지닌 여인이라는 것 정도? 표혜미는 어찌 보면 머셔너리 표 제 1호 사용자라고 할 수 있다.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올린 준수한 성적은 당시 교육 교관으로 있던 정하연의 눈에 띄었고, 괜찮은 마법 센스와 잠재성을 인정받아 머셔너리 클랜의 오퍼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머셔너리 클랜에 가입한 표혜미는, 이후 반 년간의 견습 기간을 거쳐 현재는 정식 클랜원으로서 나름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표혜미 또한 일상에 매우 만족하며 지내는 중이다. 크게 욕심을 부리지 않고 하라는 것은 착실하게 따른다. 사내를 밝히는 게 약간 흠이기는 해도, 어차피 성적으로 개방된 홀 플레인에서는 큰 문젯거리도 아니니까. 그러던 어느 날. 머셔너리의 톱니바퀴로써 열심히 활동하던 표혜미의 일상에 자그마한 변화가 생겼다. 아니. 어떻게 보면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을까?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다. 3년 전 북 대륙 원정대의 몰살 사건만 봐도, 강철 산맥 공략에 참가한다는 게 일상이라고 볼 수는 없을 테니. 첫 인선 발표를 들었을 때 표혜미는 의아한 기분을 느꼈다. 이번에 선발된 31명의 인선 중 29명이 3년 차 이상이었으니까. 0년 차, 1년 차는 애초 제외 대상이고 2년 차는 표혜미 포함 2명밖에 뽑히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1명이 '신의 방패' 백한결임을 감안하면 표혜미의 선발은 누가 봐도 의아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같은 2년 차라고는 하지만, 여러모로 견주어봤을 때 표혜미는 백한결에 비해 엄연히 손색이 있는 사용자였다. 물론 처음에는 마냥 기분이 좋았다. 어쨌든 강철 산맥에 참가했다는 것은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소리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표혜미는 곧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준비 과정의 일환으로 강철 산맥에 관한 기록을 찾아봤는데, 이건 뭐 어디 유적 탐험이나 단순한 의뢰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떤 괴물이 출현하는지, 어느 지역이 그나마 안전한지는 거의 기록돼있지도 않고, 오직 실종과 사망에 대한 기록만 우수수 쏟아져 찾을 수 있었다. 그걸 보니 오히려 왜 자신을 선발했는지 의구심이 일 정도였다. 결국 표혜미는 참가를 놓고 거대한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그럴 법도 했다. 웬만한 고년 차 사용자도 얼씬도 안 하는 곳이 강철 산맥인데, 이제 2년 차 사용자인 표혜미가 느끼는 부담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선발됐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낄 수는 있어도, 자부심이 목숨을 챙겨주는 건 아니지 않은가? 더구나 표혜미는 큰 욕심 없이 일상에 만족하는 사용자였다. 그러니 '무조건 참가한다!'보다는 '글쎄…. 이걸 굳이….'라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출발 날짜는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동부에서는 강철 산맥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그러한 상황에서, 표혜미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무렵. 문득, 표혜미는 김수현의 호출을 받았다. 그리고 찾아간 집무실에서 놀라운 제의를 들을 수 있었다. 나른한 오후. “후유.”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간 표혜미는 4층의 집무실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차분히 호흡을 고르며 꾹 닫힌 문을 응시했다. 오늘 표혜미는 김수현의 호출을 받았다. 사실상 클랜원이라면 누구나 클랜 로드를 자유로이 만날 수 있지만, 공식 석상을 제외하면 표혜미는 김수현을 거의 본 적 없다. 이렇게 1:1로 대면하는 것도 저번의 호출 이후 2번째였다. 표혜미가 들어온 후 김수현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것도 있지만, 딱히 만날 이유도 없었다. 표혜미는 애초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자는 주의였으니까. 아무튼, 표혜미는 한동안 애꿎은 문만 바라보다가, 갑자기 숨을 크게 들이키며 문을 벌컥 열며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아차 한 기분을 느꼈다. 원래는 노크를 하고 회답을 기다리는 게 정상이지만, 과도하게 긴장한 탓에 자신도 모르게 실수한 것이다. “아, 안녕하세요! 호, 호출해서 왔는데요?”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결국 표혜미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에 눈을 꾹 감으며 허리를 60도로 굽혔다. “예. 왔군요…. 응? 사용자 표혜미? 그런 인사는 됐으니 자리에 편히 앉으세요.” 그러나 들려오는 김수현의 목소리는 무척 평안했다. 마치 표혜미가 들어올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표혜미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 김수현의 얼굴을 살핀 후, 자리에 얌전히 엉덩이를 붙였다. 그렇게 자리에 앉자마자 김수현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 사용자 표혜미를 호출한 이유는…. 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거라 생각합니다만.” “마, 맞아요. 그러니까 클랜 로드께서 저번에 저에게 하나의 제의를 하셨고요, 당황한 저는 며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고요, 그리고 또….” 바로 본론에 들어가자 표혜미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구구절절 말을 늘어놓았다. 김수현이 가볍게 웃었다. “하하. 그렇게 구구절절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그냥 편하게, 그동안 생각한 바를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죄, 죄송….” 표혜미는 속으로 바보를 외쳤다. 오죽하면 스스로 머리를 콩콩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편히 이야기하라는 말은 들었지만, 또 마냥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북 대륙에서 가장 명성 높은 사용자와 모종의 일로 만난다는 것 자체가 긴장되는 일이었으니까. 잠시 후, 간신히 속을 가다듬은 표혜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그동안 쭉 생각해봤는데요. 그럼 이름만 빌려드리면 되는 건가요?” “정확히는 모습이죠. 사용자 표혜미의 겉모습이요. 공식적으로 사용자 표혜미는 강철 산맥에 참가한 게 됩니다. 그리고 공략이 끝날 때까지 타인의 모습으로 생활하는 겁니다. 즉 사용자 제갈 해솔의 모습으로 말이지요.” “네, 네. 맞아요. 그런데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요? 공략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타인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게…. 사실 조금 걱정 되요. 그러다 갑자기 마법이 풀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큰일나는 거잖아요.” “사용자 표혜미의 걱정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헬레나의 말에 따르면 못해도 6개월 동안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저 또한 꽤나 신빙성 있는 말이라 판단했고요.” 그랬다. 김수현이 생각한 제갈 해솔이 대리로 참가하는 방법이란, 바로 폴리모프였다. 그리고 그 대상으로 사용자 표혜미를 선발한 것이다. 그나마 가장 참가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타깃으로 잡은 것이다. 물론 그 방법은 김수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완벽한 폴리모프가 아닌 제한된 폴리모프였으니까. 하지만 헬레나는 다르다. 한때 마법의 근원이라 불리는 용들 중에서도 정점에 군림한 종말의 용이라면, 완벽한 폴리모프를 구사할 수 있을 것이라 김수현은 생각했다. 그런 김수현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헬레나에게 계획의 협조를 구한 결과, 적어도 반년 동안은 문제없다는 긍정적이 회답을 들을 수 있었다. “으음. 그렇다면야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그렇지요. 문제가 될 소지는 거의 없습니다. 남은 건 사용자 표혜미의 결정뿐이죠. 물론 이건 강요가 아닌 부탁입니다. 그리고 이 일에 협조해주신다면,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일체의 장비와 마력을 1포인트 높여주는 영약을 지급할 생각입니다.” 표혜미는 침을 꼴깍 삼켰다. 일체의 장비와 영약. 표혜미도 클랜원인 이상 어지간한 장비는 대급 받을 수 있지만, 그것도 한도라는 게 있다. 정말로 좋은 장비들은 철저한 보안 속에 보관해두었다가, 공을 세운 사람이 나올 경우 김수현이 직접 언급하며 대급한다. 김수현의 말인즉슨, 그런 A급 장비들을 한 세트로 대급해주겠다는 것이다. 영약은 더 말할 필요도 없고. 안 그래도 강철 산맥의 참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목숨과 맞바꿀 정도로 굳이 참가해야 하나 싶었는데, 거기에 김수현이 덜컥 미끼를 던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나쁜 제안은 아니다. 어찌됐든 공식적으로는 참가한 게 되니 추후에 특권을 누릴 수도 있고, 눈이 번쩍 뜨일만한 보상도 굴러들어온다. 지금 이 제안을 수락하면, 그리고 몇 달간만 조용히 지낸다면? 앞으로의 일상을 더욱 좋은 방향으로 이어나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표혜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의 시간은 길었지만 결국 결정을 내린 것이다. “네. 그렇게 할게요. 오히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좋네요. 사용자 표혜미를 믿는 만큼 따로 계약서는 작성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아시죠?” “물론이에요. 이 일에는 저도 연관돼있으니 절대로 비밀을 지키겠어요.” “마음에 듭니다. 그럼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 짓도록 하죠. 아까 말한 장비는 인사 쪽에 얘기해놨으니, 가는 길에 들러보시길.” 표혜미는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갸웃했다. 인사 쪽에 얘기를 해놨다고? 그럼 내가 허락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는 말이야? 하지만 곧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일피일 미루는 것보다는 이렇게 확실하고 빠른 게 더 좋으니까. 이내 고개를 꾸벅 숙인 후 표혜미는 빠르게 집무실을 빠져 나왔다. 그제야 약간이나마 긴장이 해소되는 것과 동시에, 홀가분한 기분이 찾아 들었다. 이제 더는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표혜미를 안정케 한 것이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잖아?” 혼잣말을 중얼거린 표혜미는 혀를 살짝 내밀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바로 보상을 받으려 걸음을 돌린 순간, 표혜미의 눈에 미약한 이채가 스쳤다. 타박타박. 계단에서 누군가가 막 올라와, 표혜미가 서 있는 복도를 바라보았다. * 인선 발표가 끝났다. 제갈 해솔의 대리 참가 문제도 방금 해결했다. 이걸로 모든 준비는 마쳤다. “그러면….” 이제는, 정말로 떠날 일만 남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일어나 기지개를 피려는 찰나, 돌연 문이 달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게 아닌가 싶어 급히 돌아보자, 표혜미가 아닌 의외의 사용자를 볼 수 있었다. “너는….” 우울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나를 보는 여인은, 다름 아닌 맹아라였다. 현 북 대륙의 수호자. 꽤나 느닷없는 방문이었지만, 어차피 강철 산맥 전 한 번쯤은 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나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노크도 않고.” “…빼주세요.” 갑작스럽게 쳐들어온 것도 부족해, 다짜고짜 빼달라고 말한다. 물론 나름 짚이는 바는 있다. 나는 잠시 맹아라를 응시하다가 가만히 소파를 가리켰다. 아까 표혜미가 앉았던 자리였다. “그건 또 무슨 말인지. 아무튼 일단 앉아.” “싫어요.” “나 참. 그럼 서 있던가.” “좋아요.” 곧바로 외친 맹아라는 한순간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그래. 스스로 말하고도 이상하다는 걸 느꼈겠지. 어이없는 기분에 실소를 흘리고 있자, 맹아라는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씨잉.” 입을 툭 내밀더니 곧바로 입을 열었다. “아, 아무튼! 우리 수현이 오빠, 이번 인선에서 빼주세요!” “안 돼.” “왜요!” “내가 어떻게 빠지냐? 클랜 로드인데.” “이익! 진, 수, 현, 오빠요! 김, 수, 현, 이 아니라!” “아아. 미안. 착각했어.” 맹아라는 한 글자씩 끊으며 강조했다. 나는 속으로 킥킥 웃었다. 사실 알고는 있었지만 장난 삼아 던져본 말이었다. 하지만 입을 꾹 깨물며 그렁그렁한걸 보니 더 하면 정말로 울 것 같아,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 그럼 제대로 얘기해보지. 그러니까, 네 말은 진수현을 이번 인선에서 빼달라. 이 말인가?” “네.” “왜?” “으응….” “내가 알기로는 진수현은 이번 공략에 엄청 참가하고 싶어하던데. 애당초 그래서 우리 클랜에 들어오기도 했고.” “으으응….” 맹아라는 여전히 입을 깨물고 있었다. 하지만 두 눈에 비장한 빛이 감도는 게, 어떻게든 진수현을 빼내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니면. 진수현의 마음이 변한 건가? 네 앞에서는 참가하기 싫다고 했어?” 도리도리. “그것도 아니고. 그럼 말을 해. 도대체 왜 빼달라고 하는 거야? 뭔가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나도 검토를 할 수 있잖아.” “…당신을 믿을 수 없으니까요.” 이윽고, 비로소 입을 연 맹아라의 말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뭔가 대비할 틈도 없이 직구가 들어온 기분이랄까? 문득, 속이 착 가라앉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저는 알고 있으니까요.” “무엇을 알고 있는데?” “3년 전. 뮬에서 당신의 도움을 구하러 온 사용자들을 오히려 살해한 사건이요. 설마 모른다고 하지는 않으시겠죠?” 아아. 무슨 말은 하는가 했더니. 이제는 거의 사생결단이라는 태도를 보이는 맹아라를 주시하며, 나는 천천히 이마를 매만졌다. 그리고 연초 한대를 느릿하게 꺼내 물었다. 당신을 믿을 수 없다. 그리고 뮬에서의 사건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들었거나 아니면 스스로 찾아봤다는 말인데. “궁금한 게 하나 생겼는데. 네 담당 천사가 누구니?” 그 순간, 맹아라가 눈을 크게 뜨며 화들짝 놀랐다. “어, 어떻게…?” 뻔하지. 예전 사건과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나를 탐탁잖아 하는 천사도 있다는 소리니까. 세라프의 말에서 힌트를 얻었는데, 아무래도 예상이 맞은 모양이다. 맹아라가 말했다. “그,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아무튼! 저는 그 외에도 많은 것을 알고 있어요. 당신이 천사들을 적대한다는 것과….” “아. 됐어. 별 같잖은 거 말하면서 대단한 거라도 말하는 양 생색내지 말고.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뭐, 뭐라고요?” “그러니까 어떡하자고. 내가 천사들을 적대한다. 그래. 그건 인정할게. 그런데 그게 그리도 잘못된 일인가?” 당당하게 말하자 맹아라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보였다.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야말로 이해 불가였기 때문이다. “왜. 그럼 왜 천사들을 적대하는 건데요? 천사들은 도우미잖아요. 사용자를 도와주는….” “얼씨구. 그럼 너는 천사들이 좋아? 천사라면 무조건 네네 따라야 돼?”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적대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왜? 지구에서 잘 살고 있던 우리를 이 거지같은 세상에 던져놓은 년들을 내가 왜 좋아해야 해?” 그러자 맹아라는 갑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동시에 떨떠름해하는 얼굴을 보이기까지. 그걸 보자 서서히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 천사를 적대한다는 말까지 나온 이상 배후는 확실해졌다.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간을 보겠다는 것 같은데…. 나는 살그머니 입에 침을 적셨다. “나는 말이다. 3년 전에 군대를 전역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잠들었지. 일어나보니 뜬금없이 이 세상에 보이더라. 그런데, 나를 이 세상에 데려다 놓은 장본인인 천사를 좋아하라?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못하겠다.” “구, 군대를 전역하고 돌아오는 길이요?” 맹아라는 한껏 당혹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나는 크게 머리를 끄덕이려다가 맹아라를 보고 살짝 흠칫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오빠도 지금 군대에 있을 텐데….” “…그렇구나. 아니. 그렇다고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는 말아줘. 꼭 우리에 갇힌 동물을 보는 눈이잖아. 기분 나쁘다고.” 맹아라는 “핫?” 소리를 지르더니 고개를 빠르게 흔들었다. 마치 정신을 바짝 잡으려는 것처럼. “으, 으음. 좋아요. 그러면 아까 말한 뮬에서의 살해 사건은….” “그거야 이미 마무리된 사건이잖아. 그리고 그놈들이 기껏 얻어낸 성과를 노리고 억지로 접근한 것도 모자라서, 우리 애들을 죽일뻔했는데. 너라면 가만히 있겠냐?” “네? 주, 죽이려고 했다고요?” “너…. 사건 기록 읽어보기는 한 거야?” 되레 쏘아붙이듯 말하자, 맹아라는 망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굉장히 혼란스러워 보이는 얼굴이다. 보아하니 아마 한쪽 말만 들었을 가능성이 다분한데. 그제야 연초에 불을 붙이며 나는 기다란 한숨을 흘렸다. “후유. 사용자 맹아라. 아니 북 대륙의 수호자. 나는 도대체 네가 뭘 말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진수현을 빼달라고 말하러 온 거야? 아니면 천사의 지시로 내 속을 떠보려고 온 거야?” “그게 아니라!” “조용히 해. 물론 저번 사건으로 나를 곱게 보지 않는 것도 알고 있어. 그런데, 그건 내가 의도한 게 아니잖아. 너도 그 정도는 알 거 아니야.” “하지만.” “하지만이고 저지만이고.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너는 나를 믿을 수 없다고 했지만, 내가 진수현에게 딱히 잘못한 거라도 있나? 우리 클랜에 들어온 이후로 말이야.” “윽. 그건….” 진수현? 문제없다. 오히려 너무 적응을 잘해서 문제였다. 머셔너리 클랜에 들어온 이후 진수현은 그 누구보다 왕성한 활동을 보이며, 빠르게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으니까. 그건 맹아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할 말을 잃은듯한 맹아라를 보며 나는 약간 더 몰아붙이기로 했다. “너도 참 그렇다. 강철 산맥 참가도 본인이 원해서 참가시켜준 건데. 왜 나한테 불만을 쏟아내는 거야?” 그러자 맹아라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쯤 하면 됐겠다는 생각에 나는 의자를 반쯤 돌려 창가를 응시했다. 창문에서도 맹아라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이제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론 네가 진수현을 걱정하는 마음은 알고 있어. 하지만 공략에 참가한 모든 사용자들이 공통적으로 짊어지는 부담이야. 그건 최고 선봉 중에서도, 가장 앞에 서야 하는 나도 똑같다고. 오히려 더 심하면 심했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 “어쨌든 본인이 원하지 않는 이상 진수현을 뺄 수는 없어. 너는 참가 자격이 안되니까, 그냥 조용히 기다리고 있어. 아니면 감시는 적당히 하고, 이만 수호자의 의무를 다 하던가.” “…알고 계셨어요?” 그럼. 북 대륙의 수호자가 그리 한가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더는 할 말 없으니 돌아가라는 말을 삼킨 후, 나는 애꿎이 타 들어가는 연초를 마저 태웠다. 그리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한동안 시간이 흐르고, 이내 타박타박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흘끗 시선을 돌리자 책상에 한 장의 기록을 놓는 맹아라가 보였다. 뭔가 하고 보니 다름 아닌 클랜 탈퇴서였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두 눈에는, 어느새 짙은 슬픔이 어려있다. 진수현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걸까. “모르겠어요.” 맹아라는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누구 말이 맞는 건지. 어떤 게 진실인지.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네가 억지를 부리는 거라는 생각은 안 들고?”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래도 이거 하나만은 확실해요. 저는, 아직도 당신이 너무 불안해요. 아니. 당신의 옆에 있는 수현이 오빠가 불안해요.” “이 정도로 말했는데도 그렇게 느낀다면 어쩔 수 없지.” “네. 겉으로는 이유가 있고, 언뜻 들어보면 말도 타당성이 있어요. 하지만…. 무어라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겉으로는 수현이 오빠가 원해서 참가시켜준다고 말은 하지만! …그것조차도 제 눈에는 뭔가 목적이 있어 보여요.” “목적? 설마 내가 나쁜 마음이라도 품었을까 봐?” 그러자 맹아라가 돌연 입을 다물어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후, 나직이 입을 열었다. “마치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 같은…. 꼭 악마 같이 느껴진다고요.” 그렇게 말한 맹아라는, 이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이윽고 맹아라가 나간 자리를 보며, 나는 거의 타 들어간 연초를 비벼 껐다. 그리고 차분히 사용자 정보를 열었다.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1. 이름(Name) : 김수현(3년 차) 2. 진명 • 국적 : 마성(魔性 : 사람을 속이거나 현혹하는 악마와 같은 성질.) • 검의 주인 • 대한민국 맹아라의 말을 떠올리자, 문득 미약한 웃음이 나왔다. 악마라…. 어쩌면 그리 나쁘지는 않을지도. 꼭 선이 악을 잡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오늘 많이 늦었죠? 가기 전에 제갈 해솔의 참가와 맹아라는 제대로 마무리 짓고 가려고 했는데, 이 파트가 생각보다 상당히 길어졌습니다. 덕분에 간만에 등장시키려 한 비비앙이 저 멀리 사라졌네요.(비비앙 미안해.) 다음 회에 이어서 넣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오늘은 한 8시간 정도 걸렸네요. 아. 이북도 수정해야 하고 비주얼 노벨도 각색해야 하는데, 두 작업이 약간 정체된 느낌입니다. 작년 첫 중간 고사 시험 기간 때는 정말 어떻게 연재한 건지 모르겠어요. 하하하. 0546 / 0933 ---------------------------------------------- 강철 산맥으로! 시간은 화살과 같이 흘러, 어느덧 출발 전날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클랜 하우스는 조용했다. 엊그제만 해도 장비를 교체해야 할 것 같다, 준비한걸 재확인한다 등으로 떠들썩했는데, 오늘은 정말로 조용하다. 아마 출발 전날인 만큼, 각자의 방식으로 마지막 밤을 보내는 거라 생각된다. 바로 나처럼. “마르야. 아.” “아~.” 책상 위에 앉은 마르가 또랑또랑한 눈을 깜빡이며 자그맣게 입을 벌렸다. 창고에서 가져온 정수 중 하나를 그 안으로 쏙 집어넣어주자, 마르는 통통한 볼 살을 불룩 이며 천천히 정수를 음미하기 시작했다. 우물우물. 잘도 먹는군. 이윽고 목울대를 꼴깍 움직인 마르가 눈을 반짝이며 남은 정수들을 가리킨다. “와아…. 아빠아빠. 이게 뭐예요?” “왜? 맛있니?” “응! 되게 신기한 맛이에요. 꼭 밤하늘에 떠 있는 별님을 맛보는 것 같아요.” “하하. 별님이라.” 마르의 말에 가볍게 웃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감탄하고 말았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마르의 표현은 상당히 정확하다. 아니. 상당한 정도가 아니라 무서울 정도로. 방금 마르에게 먹인 정수는 비아트리스 스텔라라는 이름으로, 용이 잠든 산맥의 성과 중 하나였다. 별의 축복이 스며든 대지에서 100년이라는 숙성 기간을 거치면 7개의 꽃이 개화하는데, 그 꽃들의 암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주 귀한 정수였다. 효능은 복용 시 잠재성을 소폭 높일 수 있으나, 아직 개발할 여지가 있는 잠재성만이라는 제한이 있다. 즉 모든 잠재성을 개발한 상태라면 효능을 볼 수 없다는 소리. 그래서 마르에게 먹인 것이다. 마르는 현재 무시무시하다 생각될 정도로 폭풍처럼 성장하고 있었으니까. 잠시 후, 마르는 입맛을 다시며 정수 하나를 더 집어 들었다. 나는 기함했다. 비아트리스 스텔라의 효능은 중복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급히 제지하려는 찰나, 나는 갑작스럽게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한순간, 정수를 집은 마르가 내 앞으로 팔을 쑥 내밀었기 때문이다. 작은 달걀처럼 오므려진 손 틈으로, 별빛처럼 밝은 기운들이 줄기줄기 흘러나온다. …지금 나보고 먹으라는 건가? “아빠도. 아앙~.” “마르야. 아빠는 이걸 먹을 수 없어요. 먹어봤자 별로 효과를 누릴 수 없단다.” “효오과? 으응~. 그래도 아아앙~.” “…….” 눈을 동그랗게 뜨는 마르. 하지만 곧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작고 뾰족한 귀를 쫑긋쫑긋 움직이며 한껏 기대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한순간 고민이 들었다. 이걸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책상 한쪽을 흘끗 바라보니 남은 정수 5개가 보인다. - 그냥 먹어. 딸이 주는데 거절할 셈이야? 그때였다. 속으로 심한 갈등이 일 무렵, 심장의 화정이 말을 걸어왔다. 나는 반색하며 속으로 외쳤다. '부….' - 죽인다! '…….' - 기필코 죽인다! 화정의 목소리에는 말 그대로 기필코 죽이겠다는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그러자 예전 얼굴이 타버릴 뻔한 기억이 떠올라, 나는 차분히 속을 가다듬었다. 강철 산맥 출발 바로 전날인데, 어이없게 죽을 수는 없으니까. - …그렇다고 진짜 말 안 하네. 사내가 좀스럽기는. '응? 뭐? 방금 뭐라고 했어?' - 아 됐어! 이 쫀쫀한 자식아. 됐으니까 빨리 먹기나 해. 요정 여왕의 행동에는 하나하나 이유가 있는 법이니. 그리고 지금 당장 1, 2 포인트가 아쉬운 지경인데, 네가 이것저것 가릴 처지야? 지푸라기라도 잡아야지! '…행동에 이유가 있다?' 화정이 화를 내며 말했다. 왜 화를 내는지, 또 무슨 말은 하는지 잘 이해가 안 가기는 했지만, 아무튼 곧 결심을 내릴 수 있었다. 그래. 어차피 개인 성과 아닌가. 아니면 그냥 개인 욕심이라고 봐도 좋다. 화정의 말마따나 내가 이것저것 따지며 가릴 처지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그제야 마르가 내민 정수를 받아먹었다. 『비아트리스 스텔라를 복용합니다.』 “오.” 나는 살짝 입을 매만졌다. 정수를 머금은 순간, 돌연 뭔가 환하게 느껴지는 식감이 입안을 가득히 메워왔기 때문이다. 동시에 톡톡 튀는 감촉도 느껴지기까지. 과연. 이래서 마르가 별 같다고 표현한 건가? “와아. 와아.” 내가 정수를 먹은 게 그렇게나 좋은 걸까. 까르르 웃어 젖힌 마르는 방실방실 웃으며 양팔을 내밀었다. 안아달라는 뜻. 이내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들어보니, 전보다 확연히 무거워진 무게를 느꼈다. 어이쿠. 그새 또 성장한 건가? 잠시 후. 품에 안은 채 한동안 등을 토닥여주니,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흐아암.” 하품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내리자 살짝 졸린 얼굴로 눈을 비비는 마르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잠들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상태였다. “마르야. 이만 잘까?” “으으응. 아직 코 안 할래요.” “하지만 졸려 보이는데? 그러지 말고 이만 아빠 침대에서 자자. 봐. 저기 유미랑 도도도 자고 있잖아?” “싫어어. 오늘은 아빠 옆에 계속 있을 거야아.” 나는 침대에서 고롱고롱 자고 있는 두 영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나 마르는 연신 하품을 하는 와중에도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더욱 내 품으로 파고들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옷깃을 꾹 움키기까지 했다. 마치, 이대로 절대 놓지 않겠다는 것처럼.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조금이지만 미묘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르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내 말을 거스른 적이 없다. 정확히는 싫다라는 표현을 한 적이 없다고나 할까. 그런데 방금,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확실한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 이내 마르가 살그머니 고개를 들어 나와 시선을 맞췄다. 역시 밀려오는 수마를 이기지 못하겠는지 어느새 눈꺼풀이 반쯤 덮인 상태였다. 하지만 그래도 두 눈은 여전히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이윽고 앙증맞은 두 귀가 축 늘어짐과 동시에 마르가 시무룩이 입을 열었다. “아빠아.” “응?” “내일이면…. 또 가는 거예요?” “…….”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마르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기야 모를 리가 없다. 모니카로 돌아온 이후 거의 모든 클랜원들이 준비다 뭐다 부산을 떨었으니. 그래도 그동안 티를 내지 않아 모르고 있었는데, 전날 어떻게 말을 꺼낸 모양이다. 사실 이렇게 길게 떠나는 게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또 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나는 아빠 안 갔으면 좋겠는데….” 마르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내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투정 부려서 죄송해요. 아빠.”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았는지 마르도 곧바로 사과했다. 조금 묘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마르의 등을 계속해서 쓸어 내렸다. 이내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마르의 고개가 꾸벅 꺼트려지며 고른 숨소리가 흘러들었다. 그렇게 마르가 잠든걸 확인한 후,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날은 한없이 어두워져 있었다. *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오늘 남부 원정대가 강철 산맥으로 떠나는걸 축하라도 하듯이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웅성웅성. 웅성웅성. 모니카의 남문은 이미 각지에서 모인 사용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오늘 공략에 참가하는 사용자들. 참가하지는 못하지만 같은 클랜원을 응원하러 온 사용자들. 아니면 단순히 출발을 구경하러 온 사용자들 등등. “머셔너리 클랜이다! 머셔너리 클랜이 도착했다!” “오? 어디어디?” 그것은 이제 막 남문을 나서는 머셔너리 클랜 또한 마찬가지였다. “배웅은 여기까지만 해주시면 됩니다. 여기서부터는 참가 클랜들만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예. 그럼 클랜 로드. 우리는 여기서 떠나시는걸 지켜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없는 동안 클랜을 잘 부탁합니다. 사용자 조승우.” “하하하. 그건 걱정 마시고 클랜 로드는 그저 생환만 해주시면 됩니다. 모두와 함께요. 뭐, 그래도 강철 산맥이니까. 어디 한두 군데 가볍게 다치는 건 이해해드리겠습니다.” 조승우가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농을 건네자 김수현이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그런 조승우의 뒤에는 거의 서른 명 남짓한 클랜원들이 각양각색의 얼굴로 서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압권은 차희영이었다. 벌개진 눈으로 자꾸만 안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차희영의 시선을 느꼈는지 안현은 볼을 긁으며 헛기침을 했다. 과연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몸 성히 다녀오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언제나 이것밖에 없구먼.” 이만성도 미약한 기침을 뱉으며 조승우의 말을 받았다. 잠시 몸을 돌아본 김수현은 덤덤히 머리를 끄덕였다. “따로 작별 인사는 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충분히 나눴고, 또 어차피 모두 돌아올 테니까요. 그저 언제나와 같은 일입니다.” “부디 그러기를 바라네.” “그럼 거의 모인 것 같으니 우리도 서두르겠습니다. 최고 선봉 부대가 집결에 늦으면 그만한 망신도 없을 테니까요.” “…….” 이만성은 아무 말도 않은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걸 마지막으로 김수현은 바로 몸을 돌려 남부 원정대 집결지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30명의 클랜원들이 조용히 뒤쫓기 시작했다. 그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떠날 이들은 떠나고, 남는 이들은 바라볼 뿐. 남부 원정대의 집결지는 바로 성문 앞. 참가하지 못한 사용자들은 성문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워낙 참가자들이 많아 혹시 모를 끼어듦을 대비하고, 정확한 인원수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머셔너리가 약간 늦은 편인지, 집결지에는 이미 수천 명의 사용자들이 모여있었다. 하지만 집결지는 생각보다 혼잡한 상황이 아니었다. 예전 소집령 때 기록에 적혀있던 대로, 참가 클랜들은 각각 자리를 찾아 모여있다. 한소영의 지휘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윽고 김수현을 선두로 한 머셔너리 클랜이 집결지에 들어서자 한 여인이 금세 나와 맞이해주었다. 가슴에 그려진 문양으로 보아 이스탄텔 로우 클랜원이었다. “머셔너리 클랜 참가합니다. 총원 31명입니다.” “네. 확인했습니다. 배치 부대는 알고 계시죠?” 여인이 전원을 훑으며 빠르게 입을 열자 김수현은 가볍게 머리를 까닥였다. “중앙 부대에서 쭉 앞으로 가시면 될 거예요.” 그렇게 말한 여인은 이내 집결지를 돌아보며 음성 증폭 주문을 외웠다. - 머셔너리 클랜 31명. 참가 확인했습니다. 지금 들어갑니다. 그 순간 중앙에 모여있던 사용자들이, 흡사 모세의 기적처럼 좌우로 갈라지며 머셔너리가 지나갈 길을 터주었다. 그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 김수현은 곧 중앙에서 오연히 서 있는 한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칠흑 빛 갑주에 붉은 망토를 두른 여인은 다름 아닌 '전장의 지휘자' 한소영이었다. 한소영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김수현을 마주보고 서 있었다. 김수현은 잠시 걸음을 정지했다. “약간 늦었습니다. 같은 도시인데, 면목이 없군요.” “아니. 전혀 아니에요. 오히려 10분 일찍 오셨지요. 다른 클랜들이 매우 일찍 모인 거예요.” “벌써 다 모인 겁니까? 그럼 출발은….” “이제 한 클랜만 더 오면 되요. 오자마자 바로 출발할 생각이에요.” 그때였다. - 코란 연합 215명. 참가 확인했습니다. 지금 들어갑니다. 아까 여인의 음성이 울리고 후방에서 약간의 어수선함이 일었다. 후방을 담당하는 코란 연합이 참가함으로써 재배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로써 남부 원정대에 참가하는 모든 클랜이 모였다. 이윽고 서로를 바라보던 김수현과 한소영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소영은 주문을 외운 후 곧바로 입을 열었다. - 출발 10분 전. 모두 빠른 시간 내에 배치를 끝내도록. 한소영의 음성이 울리자 사용자들이 모두 배치를 재확인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중앙에 계속 서 있는 건 민폐라고 생각한 김수현은 클랜원들 이끌고 가장 선두로 이동해 진을 형성했다. 근접, 궁수, 마법사, 사제 순으로 이루어진 층진(層陣)이었다. 그렇게 배치가 끝나고 모든 사용자들이 자리를 잡았을 즈음. - 총 36개 클랜. 전투 사용자 3847명. 거주민, 비 전투 사용자 454명. 제 2차 강철 산맥 남부 원정대. 총원 4301명 전원 참가 확인했습니다. - 남부 원정대. 강철 산맥을 향해 출발한다. 참가 완료 보고가 끝나고, 한소영이 손을 들며 출발 지시를 내렸다. 그윽한 목소리가 허공에 아름답게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이어서 구경하던 사용자들이 하나가 되어 커다란 환호를 질렀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강철 산맥의 공략을 기원하고 있었다. 그런 응원과 환호와 기도 속에서, 가장 선두에선 머셔너리 클랜이, 그 중에서도 김수현이 첫 걸음을 떼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남부 원정대에 참가한 사용자들은 묵묵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비로소 북 대륙의 제 2차 강철 산맥 공략이…. 아니. 김수현의 2회 차 첫 강철 산맥 공략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3주 후. 최고 속도로 행군한 남부 원정대는, 탈없이 강철 산맥 전초 기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강철 산맥의 진정한 시작이네요. 개인적으로 두근두근합니다. 저번에 사탄의 대화에서 밝혔지만, 강철 산맥은 크게 4개의 지역으로 잡을 수 있습니다. 그 중 1지역은 이미 거의 돌파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만. 나머지 3개의 지역에서는 하나하나 큼지막한 이벤트가 잡혀있고, 그와 연관된 여러 사건들도 얼기설기 얽혀있지요. 강철 산맥을 구상할 때 처음 떠올렸던 소재는, E-SPORTS였습니다. 제가 스타 크래프트1을 정말로 좋아했거든요. 응원하던 프로게이머도 있었고요.(여담이지만 테란이 주종인 프로게이머였습니다. 하하하.) 아주 예전에. 그러니까 제가 어렸을 때 스타 결승전인가? 아니면 4강전인가. 아무튼 경기를 보는데 아마 5판 3선 승제였을 겁니다. 두 프로게이머 중 한 명이 박정석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 판부터 정말로 치열하게 경기를 하는 겁니다. 거의 1시간 가깝게 하거나, 넘을 정도로요.(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딱 하나 기억하는 게 해설자의 말인데, 해설자가 그러더군요. “아니 이제 첫 경기잖아요. 제 1경기요. 이제 겨우 첫 경기에 불과한데 이렇게 치열할 수가 있나요? 남은 경기는 어떻게 하려고, 또 어떤 경기를 보여주려고 두 선수가 시작부터 이러는 걸까요?” 대충 이랬던 걸로 기억합니다. 거기서 강철 산맥의 구상을 떠올렸습니다. 개인적으로 강철 산맥 파트에서 바라는 게 있다면, 그와 비슷한 느낌을 드리고 싶네요. :) 0547 / 0933 ---------------------------------------------- 수상한 기운. 모니카에서 출정식을 가진 후, 남부 원정대는 21일만에 강철 산맥에 다다를 수 있었다. 정확히는 강철 산맥 바로 앞의 전초 기지에. 원래 4주 정도 걸리는 거리를 3주로 줄였으니 상당히 빠르게 도착한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새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밤이 깊은 상태였다. 그렇게 8주 만에 다시 돌아온 요새에 대한 첫 감상은, 사실 조금 실망했다고나 할까. 자고로 요새란 무엇인가.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튼튼하게 만들어놓은 방어 시설이 아닌가? 하지만 눈에 보이는 전초 기지의 모습은, 요새라기보다는 그냥 캠프에 가까웠다. 수천 명을 수용해야 하니 부지를 드넓게 잡은 건 좋으나, 방어 시설이라고 해봤자 어설픈 초소나 망루가 전부였다. 그 외에는 둥글게 둘러친 울타리와 무수한 천막 정도? 하기야 건축을 시작한지 이제 8주가 지났으니 무엇을 바라겠냐 만은, 그래도 지금 당장 괴물들이 튀어나오면 깡그리 쓸릴 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튼. 남부 원정대가 요새로 입성한 후, 한소영은 내일 아침 일찍 강철 산맥으로 들어갈 예정이니 천막에서 여독을 풀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예외였다. 각 부대를 맡고 있는 장들은 따로 모여 회의를 해야 했다. 듣기로는 2주 전에 들어간 동부가 현재 진군을 멈춘 상태라, 진군 경로나 특이 사항 등의 정보를 넘겨받으며 차후 공략 계획을 다듬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정보 전달의 역할을 맡은 사용자는 따로 있었다. “어서 와요. 소영씨. 머셔너리 로드도 어서 오고. 그리고…. 코란 로드? 라고 불러야 하나?” 중앙의 큼지막한 천막에 들어서자 이효을이 손을 흔들며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하하. 아니요. 그냥 환희라고 불러주세요. 코란 로드라니, 뭔가 쑥스럽네요.” 박환희가 웃으며 회답했다. 이효을은 “그럼 환희.”라고 말한 후, 우리를 자리로 안내했다. 천막 내부는 별것 없었다. 아니.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휑한 상태였다. 정 중앙에 놓여진 큼직한 탁자와 그 위에 올려진 커다란 지도 하나. 그리고 천막 내부를 약간이나마 밝혀주는 라이트 스톤 서너 개. 마지막으로 구석에 박힌 침대 하나가 천막 내부의 전부였다. 심지어 의자도 보이지 않는다. “요새가 조금 그렇지요? 하지만 이해해줘요. 워낙 도시와 떨어진 지역이라 재료 공수하기도 어렵고, 또 아무리 금화를 준다고 해도 꺼려하는 인부들이 상당히 많아요. 할건 많은데 주변 여건이 이러니, 정말 진퇴양난이랍니다.” 이윽고 우리가 탁자 주변에 모이자 이효을이 정말 미안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한 모습이 마치 얌전한 숙녀를 보는 것 같다. 나는 실소를 흘리며 이효을을 응시했다. 지금 한소영이랑 박환희 앞이라서 이러는 건가? 나랑 말할 때도 저런 태도로 말했으면 좋겠는데. 한소영은 차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해해요. 저도 인부를 동원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니까요. 어쩌면 450명을 모은 게 기적이라 할 수 있죠.” “어머. 450명이나요? 2주 전 지나간 동부도 채 300명을 못 채웠는데. 소영씨의 수완은 정말 대단하네요.” “별말씀을.” “호호. 정말이에요. 자~. 그러면. 아무튼 다들 오시느라 수고하셨고.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죠. 우선 동부의 진군 경로부터 말씀 드려보면….” 그때였다. 이효을이 막 지도를 짚으며 설명에 들어가려는 찰나, 갑작스럽게 말을 멈추었다. 마주보는 방향에 있는 한소영이 천천히 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손은, 곧 나를 가리켰다. “진군 경로는 머셔너리 로드와 말씀을 나누시는 게 좋을 거예요. 우리 남부 원정대의 길잡이 역할을 맡고 있으니까요.” “네? 하지만 이스탄텔 로우 로드가 남부 원정대의 총 사령관이잖아요.” “물론 그렇고, 저 또한 옆에서 들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선봉 부대를 머셔너리 로드에 맡김으로써 모든 권한 또한 위임했죠. 그런 만큼 이 부분에서는 제가 부가 되지, 주가 될 수 없어요.” “…그래요?” 이효을은 한두 번 눈을 깜빡이고는 새삼스런 시선을 보냈다. 나는 겉으로는 무덤덤하려고 애썼지만 속으로는 살며시 웃었다. 이게 바로 한소영의 무수한 장점 중, 가장 돋보이는 장점이다. 어떤 일을 하든 간에 괜한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적재적소에 부하를 사용할 줄 안다. 내가 길을 찾는 능력이 더 높으니, 이 부분에 대한 권한을 완전히 맡긴다. 한소영의 입장에서 보면 그만큼 나를 믿고 신뢰한다는 소리였다. 기분은 가히 나쁘지 않다. 스르륵. “흐흠. 그럼 머셔너리 로드. 이 부분을 먼저 자세히 봐주겠어?” 이효을은 미약한 헛기침을 하고 나서 내가 보기 편하게 지도를 이동시켰다. 그 탓에 한소영이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와 상체를 기울여, 나는 꿀꺽 침을 삼켜야만 했다. 성숙한 어른의 향기…. 아 젠장. 집중하자. 나는 마인트 트레이닝까지 동원하며 이효을이 짚어준 부분을 응시했다. 이효을의 검지는 강철 산맥의 초입, 정확히는 전초 기지가 있는 부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일단 동부 원정대의 첫 진군은 굉장히 성공적이야. 어제 연락 온 바에 따르면 현재 지점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습격을 받지 않았어. 운이 좋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중간중간 괴물로 추정되는 생물이 도망친 흔적을 발견한 것으로 보아, 아마 화계 공략 계획이 상상 이상의 효과를 거두었다고 추측할 수 있지.” “그럼 괴물들이 대규모 화계에 놀라서 도망쳤다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아무튼 머셔너리 로드. 처음부터 자세히 말해보면, 동부는 2주 전 전초 기지에 도착했고, 다음 날 바로 강철 산맥 안으로 들어갔어. 그리고….”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이효을은 주르륵 검지를 이동시켰다. 미끄러지듯이 이동한 손끝은 처음에는 일직선을 그렸다. 하지만 갑자기 왼쪽으로 살짝 곡선을 그리더니 어느 한 부분을 지나쳐 우뚝 이동을 정지했다. 나는 그 부분을 자세히 주시했다. 멈춘 부분이 아닌, 우회한 부분을. “바로 어제. 여기서 진군을 정지했지.” “더 나아가지는 않고?” “응. 아마 이 지점에서 요새를 건설할 생각인 것 같아. 지금 화계 계획을 실행하면서 자리 잡기에 들어가고 있다고 하던데?” “자리 잡기라. 글쎄. 내 생각에는 조금 더 들어가도 될 것 같은데.” “그렇기는 한데, 나도 일단 동의하기는 했어. 괜히 더 들어가다가 피 보는 것 보다는 안전 지대 확보가 우선이니까.”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진군 거리가 너무 적어. 이 정도면…. 일주일? 아니. 아무리 길게 잡아도 10일 정도 밖에 진군하지 않았어. 중간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건가?” 그랬다. 이효을의 검지가 멈춘 지점은 이리재고 저리 재봐도 도저히 2주일을 진군했다고 생각되지 않는 거리였다. 하지만 이효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문제는 아니고. 뭐, 너도 알다시피 동부가 초반 진입에 덕을 본 건 사실이야. 사흘 동안 내리 불을 질렀으니, 화계의 여파가 미친 지역은 어느 정도 빠르게 돌파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진군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어. 동부 원정대의 총 사령관인 조성호는 조금 느리더라도 안전하게 가는 방법을 선택했거든.” 그렇다면야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하지만 여전히 찜찜한 기분이 가시질 않는다. 나는 다음으로 이효을이 우회한 부분을 가리켰다. “그럼 하나 더. 왜 쭉 직선으로 나아가다가 여기서 방향을 틀었지?” 그때였다. 그 말을 꺼낸 순간, 이효을의 두 눈에 고민의 빛이 스쳤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아…. 그거? 으음.” “사용자 이효을. 각 원정대는 모든 정보를 공유하기로 한 거 아니었나?” 약간 위협하듯이 말하자 이효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두 손을 흔들었다. “아니야!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거야 지금? 그 부분은 별로 중요하지는 않거니와, 아리송한 것도 없잖아 있어서 말을 꺼내지 않은 거야. 잘못된 정보를 전해줄 수는 없잖아?” “아리송하다고?” “엉. 동부 원정대가 거기서 괴물 부락을 발견했나 봐. 물론 괴물이 출현한 건 아니고, 아까 말했듯이 도망친 흔적뿐이야.” “그럼 더 이상한데. 그것뿐이라면 우회할 이유가 전혀 없잖아.” “실은 나도 그래. 그래서 아리송하다고 한 거고. 하지만 지휘권은 조성호한테 있으니 내가 간섭할 건더기는 없지. 걔도 딱히 중요하게 언급하지도 않았고. 여하튼, 그 부분이 정 궁금하면 가서 따로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 이효을은 항변하듯이 말을 매듭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 억울해서 말한다는 것보다는, 마치 이런 질문이 나올 줄 알고 회답을 미리 준비한듯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한동안 이효을을 응시하다가 차분히 속을 추슬렀다. 이런 협동 공략에서는 서로의 불신과 다툼을 가장 경계해야 하니까. 시작부터 삐거덕거리는 건 절대로 지양해야 한다. 좌우간 이번 회의를 통해 적어도 한 가지 가능성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동부 원정대가 진군을 멈춘 데는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것. 도대체 조성호는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 또 무슨 일에 직면한 걸까? 나는 지도로 시선을 돌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 “마음에 안 들어.” 천막에 들어선 유정이 가방을 거칠게 내팽개치며 씨근거렸다. 구석에서 열심히 침낭을 정리하던 사샤는 살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무에 그리 마음에 안 드는가. 암컷 고양이여.” “그냥 다! 이 허술한 요새도 마음에 안 들고! 사사건건 들이대는 그 꼬추 새끼도 마음에 안 들고! 총 사령관이라는 작자도 마음에 안 들어! 젠장. 지가 뭔데 우리 오빠한테 이래라저래라 야? 그것도 반말 찍찍 내뱉으면서.” 유정이 거친 불만을 쏟아내자 사샤는 잠시 손을 놓고 생각에 잠겼다. 꼬추 새끼라는 말이 고오환이라는 작자를 지칭한 것도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마지막 말에 더 관심이 가는 게 사실이었다. “다른 것 보다는, 아무래도 총 사령관에게 불만이 많나 보군. 그 이스탄텔 로우 로드랬나?” “어. 나 참. 행군 도중인데 뻑 하면 음성 증폭 마법으로 이것저것 지시를 하지 않나. 아니. 우리 오빠가 무슨 지 종이야? 하여간 졸라게 부려먹어요.” “글쎄. 그 인간 여인이 별로 지시를 내린 기억은 없는 것 같다만. 그리고 지시라고 해봤자 거의가 훈련 명목이 아니었나? 어쨌든 나는 딱히 불만스럽게 여길 기억은 찾지 못했다. 너는 아닌가?” “아 그렇잖아. 원래는 총 사령관도 우리 오빠가 맡아야 정상이었는데, 어디서…. 아무튼 기분 더러워. 내가 왜 그 사용자 말을 따라야 해? 나한테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오빠 한 명뿐이야.” 유정은 연신 불만을 쏟아내며 신경질적인 걸음을 보였다. 그리고 사샤가 정성껏 깐 침낭에 벌렁 드러누웠다. 사샤는 끔뻑끔뻑 눈을 깜빡이다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흐음. 네가 무슨 기분을 느끼는지 대충 알 것 같다. 그래도 겉으로 티는 내지 말도록. 한 인간에 대한 과도한 충성심은 때로는 독이 되는 법이니까. 새겨 들어라. 암컷 고양이여.” “나는 그런 거 몰라요~. 그리고 한 번만 더 암컷 고양이라고 해봐. 이 수컷 흡혈귀야.” “뱀파이어다. 긍지 높은 혈통이지. 그건 그렇고, 이 침낭은 내가 사용할 예정이었다만.” “긍지 높은 혈통이라며. 레이디 퍼스트도 모르냐?” 사샤는 “도둑 고양이인가?”라고 중얼거렸다. 유정은 빙긋 웃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런 유정을 도로 눕힌 사샤는 도망치듯이 천막을 빠져 나왔다. “정말 제멋대로인 아가씨로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깊은 한숨을 내쉰 사샤는 이내 차분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른 천막을 찾는 게 아닌, 요새의 외곽 방향이었다. 강철 산맥을 가장 가깝게 볼 수 있는 최남단으로. 강철 산맥은 조용했다. 그리고 어두웠다. 비록 화계 공략 계획으로 일부가 뻥 뚫리기는 했으나, 그래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따금 묘한 기운을 품은 바람이 불어왔지만, 주변을 에워싼 정적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 뿐. 밤하늘의 달빛조차 먹혀버린 숲의 내부는 오로지 어둠만이 들어차 음침한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마치 전초 기지를 향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굳은 얼굴을 한 사샤가 뻥 뚫린 입구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을 무렵. “아까는 가장 먼저 천막으로 들어가던데. 여기에는 갑자기 무슨 일이지? 개 코.” 아름다운 미성이 사샤의 귓전을 울렸다. 둥글게 쳐진 울타리를 따라 느릿하게 걸어오는 여인은, 다름 아닌 헬레나였다. “안 그래도 바람결에 누린내가 나는가 했더니. 도마뱀 한 마리가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군.” “호호. 숲이 어둠에 먹혀버릴 뻔한 주제에. 말이 많구나.” 태연히 웃으며 다가온 헬레나는, 이내 몸을 돌려 사샤와 똑같이 숲의 내부를 응시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한동안 물끄러미 숲을 바라보던 사샤가 헬레나를 흘끗 흘기며, 궁금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도마뱀. 어떤가.” “어떻느냐니?” “숲 말이다. 숲. 이상하리만치 조용하지 않나. 네가 느끼기에는 어떻지?” “숲의 밤은 언제나 조용한 법이지.” 헬레나는 가볍게 대꾸했다. 그러나 사샤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걸 묻는 게 아님을 알고 있을 텐데.” “그럼? 왜. 네 개 코가 또 이상한 냄새라도 맡은 건가?” “이상하다기 보다는….” “보다는?” “그래. 네 말대로 숲의 밤은 항상 조용한 법이지. 헌데….” “……?” 휘이잉. 휘이이잉. 그때 마침 또 한 번 바람이 불어와, 사샤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어서 코를 벌름거리며 불어오는 바람을 힘껏 들이켰다. “절규…. 비명…. 절망….”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마치 혼잣말을 하듯 조용히 중얼거리는 사샤 펠릭스. 헬레나가 물었으나 사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껏 집중하는 얼굴로 불어오는 바람을 들이마실 뿐. 그리고 잠시 후. “분명 이렇게나 조용한 숲인데….” 바람이 끊기며 도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비로소 눈을 뜬 사샤는, 살그머니 인상을 찌푸렸다. 동시에 두 눈을 벌겋게 빛내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어째서…. 이렇게나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는 거지?” ============================ 작품 후기 ============================ 아우. 요즘 들어 미치겠습니다. 혹시 전자 담배 피워보신 분 계신가요? 최근 기침이 좀 심해진 감이 있는데, 아무래도 원인이 담배 같아서요. 줄여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마음대로 안되네요. 이제는 거의 습관적으로 찾는 지경이라…. 어떻게 끊거나 줄여야 할 텐데, 이렇게나 금연이 어려운지 몰랐습니다. ㅜ.ㅠ 0548 / 0933 ---------------------------------------------- 수상한 기운. 어젯밤 회의 이후 이효을은 밤새 계속해서 고민에 시달렸다.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새벽이 밝아올 즈음 말하는 게 좋겠다 생각, 결국 천막에서 나오기까지 했지만 이효을은 종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일단 자세한 일은 함구해달라는 조성호의 의견을 존중해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렇게 밤은 조용히 흘러갔고, 남부 원정대는 아침 일찍 출발했다. 비로소 강철 산맥 안으로 들어간 남부 원정대의 모습이 사라졌을 즈음, 이효을은 가느다란 한숨을 흘리며 천막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말간 빛이 흐르는 수정구를 꺼내 마력을 흘려 넣었다. 통신용 수정구였다. 잠시 후, 약간의 잡음이 흐르고 한 사내가 얼굴을 비췄다. (이효을인가.) “그래. 나야. 지금 상황은 어때?” (겉으로 보기에는 조용하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동요하는 사람들이 많아. …어떻게든 최대한 진정하며 요새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지.) “사용자 주호는?” (그 일이 있은 후로 심한 충격에 빠진 상태다. 아직 변한 건 없어.) “변한 건 없다고….” 이효을이 살며시 말끝을 흐리며 이마를 쓸어 넘기자, 조성호는 살짝 머리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왜 통신한 거지? 무슨 특이 사항이라도 있는 건가?) 이효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남부 원정대가 도착했고, 오늘 아침 일찍 떠났어.” (호. 상황은 전달했고?) “드러난 것만. 그런데 머셔너리 로드가 조금 의심스러워하는 거 같아. 어제 그러더라. 동부의 진군 거리가 짧은 것 같다고.” (그렇군. 하기야 그 정도의 사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상하지.) “너희, 더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야? 자칫 잘못하다가는….” (그건 무리다. 지금 우리 원정대는 처음과 같은 결속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어. 그러니 설령 더 들어가야 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남부 원정대가 도착한 이후에야 가능할 거다.) 조성호의 단호한 목소리에 이효을은 더는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지금 수정구에 비치는 사내가 저렇게 말한 이상, 절대 결심을 바꾸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기색을 느꼈는지 조성호가 약간 누그러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효을. 너무 걱정 마라. 남부 원정대와는 내가 잘 이야기해볼 테니까. 그나저나 총 사령관이 이스탄텔 로우 로드라고 했었나?) “그렇기는 한데 너희와는 조금, 아니 상당히 다른 구성이야. 선봉, 중앙, 후미 3개의 부대로 구분돼있는데, 각 부대가 독립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지.” (머셔너리 로드는?) “선봉. 그중에서도 최고 선봉.” (더 잘됐군. 아무튼 알겠다.) “조성호! 잠깐만!” 그때였다. 조성호가 통신을 끊으려는 듯 막 얼굴이 멀어진 찰나, 이효을이 다급히 조성호를 불렀다. (응?) “잊지마.” 그렇게 말한 이효을은 별안간 수정구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그런 이효을의 얼굴은 어느새 한없이 진지해져 있었다. “어디까지나, 공략이 우선이라는걸.” 소곤거리는듯한 목소리는,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봐도 좋을 만큼 나직했다. 잠시 이효을을 빤히 응시하던 조성호는, 이내 느릿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 공략이 우선이지.” * 약간의 구름은 꼈지만, 아름답고 조용한 아침이었다. 아니. 해가 서서히 중천으로 오르는걸 보면 정오 즈음이라 봐도 좋을까. 간간이 바람도 불어오는 게 상쾌하기 그지없는 날씨였으나, 산줄기를 걷는 남부 원정대 사용자들의 얼굴은 그다지 상쾌해 보이지 않는다. 물론 강철 산맥 내부로 진입한 이상 하하 호호 웃을 수는 없겠지만, 그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사용자들의 얼굴은 확실히 이상했다. 힘들어한다기보다는, 약간 어색해 보인다고나 할까? 그렇게 남부 원정대가 강철 산맥을 통과하는 가운데, 선두에서 물 흐르듯이 걷던 김수현의 속도가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한 여인이 사용자들을 이리저리 헤치며 앞으로 달려 나왔다. 얇은 가죽 갑옷을 걸친 여인의 가슴에는 이스탄텔 로우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윽고 여인이 다다르자, 김수현은 마치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양 바로 머리를 돌렸다. “머셔너리 로드. 총 사령관님의 전언이에요.” “예. 말씀하세요.” “이 장소에서 휴식 대기했으면 한다고 하시네요. 후미 부대가 살짝 흐트러져서 추스를 시간이 필요해요.” “어려울 것 없죠. 모두 정지! 여기서 잠시 휴식한다!” 김수현이 조금도 지체 않고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그러자 사용자들은 거의 동시에 걸음을 정지하고 나서, 주저앉거나 연초를 꺼내는 등 각자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딱 하나 공통점이 있다면, 각각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사 방향을 경계하는 것. 어디서 어떤 괴물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대기나 휴식 시간에도 경계의 끊을 놓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신속한 전환이 이루어짐이 가능한 것은, 도시를 떠난 후 3주간의 행군에서 있었던 훈련의 성과였다. 빠른 처리에 만족한 듯, 여인은 미미하게 웃으며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앞으로 이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휴식이나 출발은 알아서 가늠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알겠습니다.” 김수현이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이내 볼 일을 마친 여인이 돌아가는 동시, 언뜻 그 말을 들은 한 사내가 속으로 투덜거리며 연초를 힘껏 빨아들였다. 남부 원정대가 전초 기지를 떠난 지 어느새 이레라는 시간이 흘렀다. 7일. 짧다면 짧은 시간이라고 볼 수 있지만, 적어도 강철 산맥을 통과하는 사용자들은 전혀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 들어온 이후 매 순간을 잔뜩 긴장하며 보내야 했던 만큼, 짧다고 느껴졌다면 그게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다. 어차피 공략에 참가한 이상 각오한 일이었고, 나름 베테랑들이니만큼 익숙한 상황이기도 했다. 그러나 연초를 태우는 사내를 비롯한 여러 사용자들의 얼굴이 이상한 것은, 기실 다른 문제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김수현이 행군하는 방식에 있었다. 첫 번째. 행군이 너무 빠르다. 물론 속행이라는 경우도 있지만, 그거야 주변이 안전의 확실하게 확보됐을 때의 이야기였다. 비록 동부의 흔적을 따라가고 있다고는 하나, 강철 산맥은 아직 안정화된 지역이라 보기는 어렵다. 즉 이러한 지역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행군 방식이었다. 두 번째. 궁수를 활용하지 않는다. 자고로 궁수란 무엇인가. 민첩 능력치가 특화된 빠른 발이 주특기인 이들이다. 능력 또한 그렇다. 천리안이나 추적에 관련된 능력을 생각해보면 위험 탐지에 최적화된 사용자들이라 볼 수 있다. 그런 만큼 행군 시 가장 앞에 서서 일행을 이끄는 게 정석인데, 김수현은 그러지 않는다. 그저 가끔 측면으로만 활용할 뿐, 단 한 번도 궁수를 선두에 내세우지 않았다. 즉 정석으로 알려진 기초 절차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화계 공략의 여파가 닿은 지역이니까. 조금 시간이 흐르고는, 그래. 그래도 머셔너리 클랜이니까. 그렇게 뭔가 생각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가면 갈수록 사용자들은 의구심을 품었다. 오히려 행군 속도가 떨어지기는커녕 더더욱 높아질 기미마저 보이고 있었으니까. 결국에는 후미 부대의 배열이 흐트러졌다는 보고까지 나오지 않았는가. 그래서 사용자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다만 총 사령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니 겉으로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삭힐 뿐. 이러다 갑자기 괴물들이 떼거지로 출현하면 어떡하지. 그렇게 생각한 사내는 거의 다 태운 연초를 땅에 비비며 푹 한숨을 흘렸다. 그때였다. “괜찮으세요? 얼굴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누군가 사내의 앞으로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일순 깜짝 놀란 사내는 재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새하얀 로브와 어깨에 살짝 닿는 머리카락. 그리고 봉긋하게 솟은 가슴 아래 그려진 칼과 방패 문양을 보는 순간, 사내는 단박에 깨달을 수 있었다. 머셔너리 클랜원이구나. “안색이 조금 편찮으신 것 같아요. 간단한 회복 주문이라도 걸어드릴까요?”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 괜찮으세요?” “예 예. 어…. 잠시만요!” “네?” “혹시 머셔너리 클랜이십니까? 그러니까, 그…. 광휘의 사제라는….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요.” 자신을 알아봤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은 걸까. 실룩실룩. 여인은 어떻게 알았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티 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한쪽 입꼬리가 실룩 올라가는 건 막지 못했다. “흐흠. 네! 맞아요! 제가 바로 광휘의 사제, 안솔이라고 하죠!” “아. 그렇군요. 그럼 다름이 아니라,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에~. 그러시군요? 어떤 게 궁금하세요?” “으음. 저…. 실은 선봉 부대장님 말입니다.” 사내는 말을 하면서도 살그머니 여인, 아니 안솔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묘한 반항심에 자신도 모르게 말을 꺼내기는 했지만, 사내 또한 선봉 부대에 포함된 사용자. 부대장에 대한 의문 제기는 어찌 보면 하극상으로 번질만한 소지가 다분하다. 그렇기에 사내는 최대한 완곡하게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게 아니라. 선봉 부대장님은 왜 궁수들을 선두에 활용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아아. 그거야 당연하죠.” 안솔은 곧바로 회답했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해, 사내도 한순간 전혀 이상한 바를 느끼지 못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행군이 너무 빠른 감도 없잖아…. 예?” “활용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안솔 한 번 더 힘주어 말하고는, 왜 그런걸 물어보느냐는 듯 되레 의아한 눈초리를 보냈다. 사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뭐라고? 활용할 필요가 없다고? 어느새 주변의 시선은 안솔과 사내에게 쏠린 상태였다. 그리고 주변 사용자들의 얼굴도 사내의 얼굴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조금 전 안솔의 말은, 각 클래스가 지닌 특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한 시선을 느꼈는지 안솔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는 천연덕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마력 감지 사용할 줄 아세요?” “그, 그거야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만.” “그럼 한 번 사용해보시겠어요? 그럼 아실 수도.” “……?” 한순간 '이게 지금 나를 놀리나?'라고 생각한 사내였지만, 곧 잠자코 마력 감지를 일으켰다. 일단 한 번 하라는 대로 해보자는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사내는 어떤 것도 느끼지 못했다. “…잘 모르겠는데요?” “으응? 이상하다. 저는 확실하게 느껴지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이 주변에 마력 감지는 저 밖에….” “아~. 지면에 마력을 흘리셨구나. 그럼 지면을 대상으로 말고, 조금 더 깊숙이 해보세요. 지면 속을 투과한다는 느낌으로요.” 안솔은 이제야 알았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땅을 탁탁 밟았다. 사내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스쳤다. 안솔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다. 확실히 지면 아래로 마력을 투과해 감지를 돌리는 방법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 방법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진동을 통해 전달받는 정보의 정확성이 조금 더 높아지는 효과는 있지만, 마력의 소모가 너무 심해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애당초 마력 감지 자체가 알게 모르게 마력의 소모를 요구하는 어빌리티라, 웬만한 사용자들은 그냥 필요할 때마다 능력에 의존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사내는 여전히 한숨을 푹푹 흘리면서도, 안솔이 말한 대로 지면 아래로 깊숙이 마력을 흘려 보냈다. 그 순간이었다. “어헉?” 한순간 사내의 입에서 격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놀란 이유인즉슨, 흘려 보낸 마력에서 가히 수십 개에 이르는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당장 앞의 안솔도 그렇고, 전방에서도 수십 개의 마력의 흐름이 각양각색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31명의 머셔너리 클랜원들이 모조리 마력 감지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내가 진정 놀란 건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앞서 느낀 흐름들을 모조리 덮어버리는 광대한 마력의 흐름. 그 흐름은 사내가 흘린 마력이 새 발의 피라고 생각될 만큼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또한 정교했다. 흡사 이 수천 명을 넘어서 일대를 모조리 아우르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이제 아시겠죠? 우리는 궁수가 필요 없어요.” 사내의 입이 쩍 벌려지는 것을 보았는지 안솔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사내는 황급히 입을 닫으면서 선두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두에는, 김수현이 있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지면에 대고 있다. 지그시 눈을 감은 그 모습은, 마치 무언가를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 차분히, 그러나 세심하게 주변을 둘러본다. “으아. 지루해.” 그러던 도중 나날이 이어지는 행군이 지루했는지, 누군가 뒤에서 하품을 하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로 보아하니 유정이가 분명하다. 나는 살그머니 시선을 돌려 눈짓으로 경고를 보낸 후,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군데군데 시커멓게 타오른, 이제는 거의 형체도 찾아볼 수 없는 강철 산맥의 풍경. 이효을의 말에 따르면 동부는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화계 계획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그 말이 사실인 모양이다. 이래서야 행군이 늦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입맛을 다시면서도 나는 여전히 주변의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아흐레. 전초 기지를 떠난 지도 아흐레라는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그동안 그 어떤 습격도 받지 않으며 행군을 지속했다. 말 그대로 오직 행군, 행군, 행군의 지속이었다. 물론 습격을 받지 않은 건 고무적인 일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무조건 좋은 일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내 기억에 따르면 여기에 이르기까지 이미 수십 번은 괴물과 전투를 치렀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전투는커녕 괴물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발견한 것이라고는, 이효을의 말대로 부락으로 추정되는 장소와 도망친 흔적뿐. 강철 산맥도 엄연히 여러 생물이 거주하는 지역인만큼, 그러한 분포가 흐트러졌다는 건 딱히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사기의 문제도 있다. 행군이 계속해서 지속되면 사용자들은 지루함에 지쳐버린다. 중간중간 적당히 괴물들이 나와야 처음의 날카로운 기세를 버무릴 수 있는데, 항상 똑같은 패턴의 날을 보내면서 점점 무뎌져 가는 걸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 결국 들어온 이상 후퇴는 없으니까. 일단은 부단히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주변에 뿌려놓은 마력 감지의 밀도를 한층 높이며 더욱 걸음을 빨리 했다. 그렇게 9일차 해 질 녘이 될 즈음. 우리는 비로소 동부 원정대가 멈춘 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어느덧 눈앞으로 차마 요새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캠프가 서서히 가까워지는 게 보였다. 마침내 2주일 전 출발한 동부 원정대와 합류한 것이다. “남부 원정대가 도착했습니다!” “문을 개방하겠습니다!” 이미 도착하기 전 연락은 넣어놓았다. 이내 나무로 급조한 듯한 문이 불쾌한 소음을 울리며 활짝 개방됐고, 그 안으로 수백의 사용자들이 좌우로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정 중앙에는, 한 사내가 홀로 우뚝 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려 클랜 로드. 조성호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머셔너리 로드. 무사 합류를 환영합니다.” “별말씀을. 성공적으로 첫 공략을 마친 점 축하 드립니다.” 문안으로 들어간 후.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자 조성호는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머셔너리 로드에게 들으니 오히려 부끄럽군요. 흐흠. 그나저나 남부 총 사령관은….” “아마 중앙 쪽에 계실 겁니다.” 조성호의 시선이 언뜻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내 한두 번 입을 열었다 닫은 조성호는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군요. 아무튼, 여기까지 오시느라 피곤하실 테니 우선 안으로 들어오시죠. 아직 요새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만, 그래도 일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부지는 넓게 잡았습니다. 하하.” 조성호가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 억지가 가미됐다고 느꼈다면 내 착각일까? 아니. 비단 조성호만 그런 게 아니었다. 좌우로 보이는 동부 사용자들의 사이로도 알 수 없는 미묘한 기운이 흐르고 있다. 겉으로는 환영한다는 기색이나, 뭔가 모르게 불안해하는 것처럼. 흡사 요새 전체가 착 가라앉은 느낌이랄까. 아마 한소영도 필시 이 기운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나는 침착히 속을 추슬렀다. 우선은 이야기를 들어보자. “알겠습니다. 그럼….” “아차. 머셔너리 로드.” 그때였다. 막 회의에 대해 물어보려는 찰나, 조성호가 나를 불러 세웠다. 이윽고 조성호는 저기 멀리 떨어져있는,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머셔너리 로드의 천막은 따로 잡아두었습니다. 비록 별것은 없지만, 그래도 다른 천막보다는 사용하시기 나을 겁니다.” 가리킨 천막은 중앙에 하얀색으로 쳐진, 눈에 잘 띄는 천막이었다. “그럼, 저는 잠시 이스탄텔 로우 로드와 이야기를 나누고 오지요.” 그리 말한 조성호는 곧바로 몸을 돌려 중앙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야기를 나누고 오지요 라. 그냥 흘려 넘기기에는 의미심장한 말투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조성호가 가리킨 천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 깊은 밤. 나는 삐걱대는 허름한 침대에 누워 어둠이 스며든 천막을 바라보았다. 동부와 합류하고 나서도 별다른 일은 없었다. 기껏 기대했던 지휘관 회의도 동부의 요청으로 내일 아침으로 미뤄졌다. 그저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지루하다, 기대하던 강철 산맥이 아니다 등의 투정을 부리는 애들을 혼낸 후, 각자 천막 안으로 들어가 내일을 대비할 잠을 잘 뿐. 물론 경계를 서야 하는 사용자들도 있겠지만, 나는 오늘 순번에 포함돼있지 않다. 지그시 눈을 감는다. 단조롭다. 단조로워도 너무나 단조롭다. 공략이 이렇게나 순조로이 진행되는 게 매우 의심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착착 들어맞아 순조로운 게 아니다. 무언가 얽히고 설킨듯한…. 아니. 모르겠다. 그냥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안한 단조로움이랄까. 마치 조만간 쾅 터질듯한 그런 느낌 말이다. 문득, 갑갑한 기분이 한 가득 차오른다. “젠장.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까닭 없이 갑갑한데, 아는 게 없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결국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장막을 내려 입구를 가리고 나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이대로 계속 고민하는 것 보다는 그냥 잠이나 자는 게 더 나을 것 같았기에. 그렇게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려 할 무렵. 부스럭. 돌연, 입구를 가린 장막이 조심스럽게 걷히는 소리가 흘러들었다. 이어서 검은 인영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그러한 모습을 확인하자 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암살자라면 저렇게 당당히 들어오지는 않을 테니까. 검은 인영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과 동시에, 나는 차분히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내가 일어난 것을 확인했음에도 인영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이윽고 약간 피로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사용자는, 다름 아닌 조성호였다. “깨어있으셨군요. 다행입니다.” 조성호는 평소의 깔끔한 목소리가 아닌 약간 허스키한 음색으로 말했다. “예. 그런데 이 시간에 어쩐 일로…? 회의는 내일이라고 들었습니다만.” “회의는 확실히 내일로 미뤘지요. 아무튼, 우선 이런 시간에 찾아와 미안합니다. 머셔너리 로드.” “…….” “회의 때문에 찾아온 건 아닙니다. …머셔너리 로드에게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고? 이야기가 아니라? “물론 이야기도 하고 싶습니다. 머셔너리 로드와 단 둘이 말입니다.” 의아한 기색을 읽었는지 조성호는 바로 입을 열었다. 나는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잠자코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나왔다. 느닷없다는 기분은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에는, 조성호의 얼굴이 너무나 절박해 보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지금 느끼는 갑갑함을 풀어줄 돌파구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한 몫 했다. 침대에서 나온 것을 허락이라 여겼는지 조성호는 따라오라는 손짓과 함께 장막을 빠져나갔다. 밖은 여전히 조용했다. 경계를 서는 사용자들을 제외하면 누구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다. 지휘관용 천막은 따로 모여있는 만큼, 그리 긴 시간 동안 걷지는 않았다. 바로 옆에 동부 지휘관들이 천막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가장 큼지막한 천막으로 들어간 조성호는, 갑작스럽게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라이트 스톤을 키기 않은 탓에 내부는 시커먼 어둠이 들어차 있었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천막 내부에 또 하나의 천막이 있었다는 것. 정확히 말하자면 여러 겹의 장막으로 가려진 비밀 공간이라고 해야 할까. 안력을 높이자 두 손으로 휘장을 잡고 서 있는 조성호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조성호의 바로 뒤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머셔너리 로드….” 그러자 조성호가 나직한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머셔너리 클랜은, 용병 클랜이지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하지만 일단 틀린 말은 아니기에, 나는 긍정하기로 했다. “그렇습니다만.” “그러면 말입니다. 제가 알기로 용병은 돈을 받고 의뢰를 수행하며, 의뢰 내용을 철저히 엄수해주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 “그리고 우리는 분명히 용병으로 참여했지만, 현재 원정 대원이라는 신분도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조성호가 의뢰라는 말을 꺼냈다. 수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혹시나 싶어 원정을 우선한다는 의미로 못을 박아두자, 조성호는 약간 힘이 빠진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잠시 후. “하지만, 지금 제가 기댈 곳이라고는 머셔너리 로드밖에 없습니다.” “…고려 로드? 도대체.” “예. 아마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시겠지요. 실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 또한 지금 닥친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머셔너리 로드에 의뢰를, 아니 자그마한 도움이라도 구하고 싶습니다.” “……?” 그리고 그 순간. “일단…. 후. 거두절미하고, 일단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조성호는, 내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 두 손을 좌우로 한껏 젖혔다. 사륵, 사르륵! 이윽고 장막이 걷히며 조성호의 몸이 가리는 부분을 제외한, 일부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뭔가, 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오늘 많이 늦게 올렸죠? 그만큼 내용을 길게 적느라 상당히 늦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연참이라고 생각해주시고 부디 용서해주세요. 하하하. 아. 그리고 어제 적어주신 코멘트들은 잘 보았습니다. 확실히 제가 조금 성급하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전자 담배는 조금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실은 오늘 금연을 해보려고 했는데, 점심 먹고 바로 실패했습니다. 욕구를 참을 수가 없더군요. 코멘트에 금연에 성공하셨다는 분들도 많으신데, 정말 대단하시다고 느꼈습니다. ㅜ.ㅠ 0549 / 0933 ---------------------------------------------- 3년 전의 흔적. 8년 전, 홀 플레인에 한 여인이 있었다. 한없이 자애로운 얼굴에 포근한 미소가 어울리는, 마치 천사와 같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여느 사용자와 같이 갑작스럽게 소환된 입장이었지만 여인은 항상 미소를 잃지 않았다. 또한, 여인은 강자였다. 강자지존으로 돌아가는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에서, 여인은 홀로 그 법칙을 거부했다. 외모만큼이나 성격도 아름다운 여인은 항상 남을 도와주고 싶어했다. 자애를 베푸는 사랑과 정이 깊어, 항상 누군가를 돕고 싶어 했다. 어느 때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쏟아내는 엄마처럼, 또 어느 때는 따뜻하게 보듬고 보살피는 누나처럼. 여인은 진정으로 강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약자를 존중할 줄 아는 사용자였다. 그래서 여러 사용자들은 그 여인을 좋아했다. 비록 사용자인 이상 한 클랜에 적을 둘 수밖에 없는 입장이나, 여인이 베푸는 사랑은 적아를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사용자 거주민도 가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한 결과, 적대 클랜의 사용자들도 그 여인만큼은 인정하고 존중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확히는,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여인은 평소 자신이 보살피던 사용자들을 모아놓고 입을 열었다. - 이번에 강철 산맥 공략에 참가하게 됐어요. 여인의 보살핌을 받던 사용자들을 극구 만류했다. 예나 지금이나 강철 산맥의 악명은 여전했으니까. 하지만 여인은 상냥히 웃으며 차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 미안해요. 여러분들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는 알지만, 이건 제가 참여해야 하는 일이에요. - 너무 걱정 말아요. 꼭 돌아올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 여인은 결국 강철 산맥 공략에 참가하고 말았다. 그리고 채 이레도 지나지 않아, 원정대의 패퇴 소식이 북 대륙 전역에 퍼졌다. 5000명이 넘는 인원이 참가했으나, 돌아온 인원은 500명밖에 되지 않았다. 생환 명단에 여인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여인을 알고 있는 사용자들은, 거주민들은 여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언제나 그랬듯이 빙긋 웃으며 나타나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날이 지나고 달이 지났음에도, 여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꼭 돌아오겠다는 말을 믿고 희망을 갖고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여인의 돌아오는 모습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여인은 서서히 잊혀져 가는듯했다. * 처음 눈에 들어온 건, 불에 시커멓게 타오른 삐쩍 마른 나무였다. 그러나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확인한 순간, 무언가 이상한 점들이 느껴졌다. 새까맣게 타서 굳어버린 두 개의 가지. 가지 못지않은 길이를 보이는 두 개의 뿌리. 그리고 가지와 뿌리를 잇는 몸통. 마지막으로 몸통에 돋은 둥그런 형체를 확인한 순간, 나는 천천히 무릎을 굽혀 나무를 살며시 만져보았다. 가칠가칠한 게, 흡사 연탄을 만지는듯한 감촉이다. …나무가 아니었다. “시체입니까?” “…정확히는 불에 탄 시체요.”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조성호를 돌아보았다. 착잡해 보이는 얼굴이다. “듣기로는, 동부 원정대에 사망자는 없다고 들었습니다. 아니 사망은커녕, 습격도 안 받지 않았습니까?” “그래요. 사실입니다.” “그럼 이 시체는 무엇입니까?” “…일단 잠시 나와주시겠습니까.” 나직이 말한 조성호는 몸을 돌려 탁자로 걸어갔다. 탁탁, 무언가를 건드리는 소리와 함께 어둡던 천막에 미약한 빛이 생겼다. 라이트 스톤으로 불을 밝힌 것이다. 이내 장막 밖으로 나온 찰나, 나는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언제 들어온 걸까. 한 사내가 입구에 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당신은….” 사내는 아무 말도 않고 꾸벅 머리를 숙였다. 우울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지만, 이상하게 낯이 익다. “미안합니다. 이야기에 필요하다고 생각해 제가 불렀습니다. 사용자 주호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사내의 정체를 떠올릴 수 있었다. 바바라 소집령에서 화계 공략 계획을 건의했던 바로 그 사용자였다. 중앙 관리 기구 소속 사용자가 지금 여기 있음은, 아마 연락책으로 참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잠시 후, 우리 세 명은 아무 말없이 조성호가 이끄는 대로 탁자에 둘러앉았다. 주변은 여전히 어둑했다. 오직 라이트 스톤에서 흘러나오는 탁한 불빛만이 근처를 미약하게나마 밝혀줄 뿐. 곧 무거운 침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어디서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지….” “고려 로드. 제가, 제가 이야기하겠습니다.” 조성호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을 무렵, 주호가 침중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양손으로 이마를 쓸어 올리던 조성호는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한 듯, 주호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머셔너리 로드. 우선 이렇게 와주신 점 정말로 감사 드립니다.” “아니요.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온 것은 고려 로드와의 안면 때문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 그렇습니까.” “사실 두 분께서 저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직 상황을 모르니까요. 허나 그런 만큼, 어디까지나 이야기를 듣고 판단할 생각입니다.” “…….” “그걸 인정할 수 없다면 저는 지금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듣고 튀었다는 말은 듣기 싫으니까요.” 스스로 생각해도 냉정하다 생각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꼭 필요한 말이기도 했다. 저들이 도대체 어떤 걸 기대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현재 남부 원정대의 일원으로 참가한 상태였다.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주는 한소영을 생각해서라도 다른데 신경 쓸 여유는 없다. 잠시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주호는 잠시 조성호와 시선을 교환하는 듯싶더니 살짝 고개를 떨궜다. “예. 좋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씀이지요.” 그렇게 말한 주호는 입을 질끈 깨물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것 같아, 우선은 경청해보기로 했다. “머셔너리 로드. 혹시 고은솔이라는 사용자를 알고 있습니까?” “고은솔?” “예. 구 황금 사자 클랜 소속 사용자이며, 10강 중 한 명이었습니다.” “구 황금 사자 클랜에, 10강이라.” 나는 지그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흐릿하다. 구 10강이라면 사실상 거의가 강철 산맥 이후로 사망했기에 딱히 기억할만한 접점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도 기억날 듯 말듯 하는걸 보면 나름 이름있는 사용자인 것 같은데. 그 순간, 아주 예전에 고연주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강철 산맥을 공략하는데 황금 사자의 10강 중 세 명이 참가했어요. 그 중 한 명. 그러니까 황금 사자 로드의 생존은 확보한 상태고, 두 명 중 한 명은 사망 확인.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실종됐다고 하네요.' 아. 그 사용자를 말하는 건가? 고은솔…. 그러고 보니 황금 사자 로드와 묶어서 나름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사용자 고은솔. 다소나마 들어본 기억은 있는 것 같습니다.” “오. 혹시나 했는데, 역시 알고 계셨군요. 머셔너리 로드가 알 정도라니, 역시 그분은….” 주호는 흠칫 놀라더니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다 감동한 것처럼 가늘게 몸을 떨기까지. 고작 기억한다는 것에 어떤 감동을 받아서 저러는 걸까. 당최 사정을 몰라,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장막을 돌아보며 툭 던지듯 내뱉었다. “혹시, 저기 놓인 불탄 시체가 그 고은솔이라는 사용자입니까?” “아닙니다!” 회답은, 즉각 들을 수 있었다. 지금껏 골골거리며 죽기 일보 직전처럼 보이던 주호가 벌떡 몸을 일으킨 것이다. 이내 물끄러미 쳐다보자 주호는 실수했다는 얼굴로 떨떠름한 기색을 보였다. “아, 아니. 그러니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후. 머셔너리 로드. 아까 보셨다시피 시체는 불로 인하여 심하게 훼손된 상태입니다. 아직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주호가 어버버 말을 잘못하자 조성호가 빠르게 끼어들었다. 그러더니 주호를 살짝 노려보았다. 입을 다물라는 신호 같은데, 아마 조성호가 다시 말을 이어갈 모양이다. 나로서도 좋은 일이었다. 조성호는 적어도 이야기가 통하는 상대였으니까. 주호가 도로 자리에 앉는 사이 조성호는 차분히 숨을 골랐다. 무언가 심한 갈등이 이는 듯 목울대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머셔너리 로드. 일단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바라던 바입니다.” 이윽고 조성호는 무척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강철 산맥에 생존자가 있다고 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예?” “그러니까 3년 전, 강철 산맥으로 들어간 사용자들이 아직까지 살아있다면 믿으시겠냐는 말입니다.” “푸.” 그 순간, 나는 바람 섞인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터뜨린 웃음이었다. 꽤나 심각해 보인 터라 나도 약간 진지해진 상태였는데, 갑작스럽게 뜬금없는 말을 내뱉지 않는가. 설마 웃으라고 말한 건가? “하, 하하. 아. 정말 미안합니다. 미처 예상치 못했던 말이라서요.” 나는 결국 또 한 번 웃고 말았다. 아니. 무슨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생존자? 그럼 3년이 넘는 동안 강철 산맥에서 살아남았다고? 그건 정말로, 정~말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와 동시에 나는 조성호와 주호가 지금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 불탄 시체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은데. 그러면 뭐, 나름 이해는 간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강철 산맥에 어떤 괴물들이 존재하는지 아는 만큼, 왜 저런 시체가 나왔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강철 산맥도 9일차. 조금 이른 감은 없잖아 있지만, 슬슬 그놈들이 나올 만도 하다. 잠시 후 멍한 눈초리를 보내는 조성호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거짓말이라기보다는, 그냥 믿을 수가 없네요. 세상에. 강철 산맥에 생존자라니요.” “머셔너리 로드.” “고려 로드? 잠시만요. 저 시체를 보고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우리 조금만 다르게 생각해봅시다.” 결국 나는 그만 자리를 파하기로 마음먹었다. 기대와는 달리 그다지 영양가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저 두 사내의 발상을 조금만 바꾸어주면 된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시체가 사용자가 아니라 괴물의 시체라는 생각이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지역이니만큼, 우리와 비슷한 괴물이 출현할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게 더 설득력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게 아닙니다.” “설령 사용자의 시체가 맞는다고 해도, 생존자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차라리 이번 공략에 몰래 따라오다가 화계에 휘말린 사용자일 수도 있겠지요. 그쪽일 경우에는 자업자득이겠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조성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세차게 머리를 저으며 힘주어 말하기까지 했다. 나는 뚱한 기분으로 조성호를 응시했다. 적어도 그럴 수도 있겠다 정도는 생각할 줄 알았는데 여전히 고집을 부리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런 시선을 느꼈는지 조성호는 한두 번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갑자기 품으로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내더니 내 쪽으로 쭉 밀어주었다. 그 무언가는, 다름 아닌 기록이었다. “일단 한 번 보시죠. 머셔너리 로드와는 아마 그 이후에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하지만 곧 살짝 시선을 내렸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일단은 속는 셈치고 읽어볼 생각이었다. 『계약서(Contract).』 1. 사용자 고은솔과 거주민 줄리앙 피트 쿠란은 이하 아래 내용에 따라 상호 계약을 맺는다. 2. 사용자 고은솔은 거주민 줄리앙 피트 쿠란을 보호하며, 힘이 닿는 한 성심껏 돕는다. 3. 거주민 줄리앙 피트 쿠란은 사용자 고은솔을 친엄마, 혹은 친언니처럼 믿고 따르며, 함부로 죽는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4. 1, 2, 3의 계약은 이후 4년간 유효하며, 거주민 줄리앙 피트 쿠란이 성년이 되었을 시 계약을 해지한다. 다만 해지 시 보호자로써 사용자 고은솔의 동의가 필요하다. 사용자와 거주민간의 계약서. 내용 자체는 꽤나 재미있었다. 나와 비비앙이 맺은 계약과는 정반대의 내용이 적혀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걸로 어쩌라는 걸까? 조성호는 또 왜 갑작스럽게 이 계약서를 내민 걸까? “아까 말했듯이 고은솔은 3년 전 강철 산맥에 참가한 사용자중 한 명입니다. 머셔너리 로드. 어떻습니까.” 어떻습니까? 조성호는 마치 잘 생각해보라는 듯 조곤조곤 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확신에 찬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아.” 그 순간, 나는 짧게 헛바람을 들이키고 말았다. 사용자. 거주민. 계약서. 이 세 관계를 떠올린 순간, 계약서에 자동적으로 실행되는 하나의 계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도, 예전에 겪은 적이 있다. 뮬에 부랑자들이 쳐들어왔을 때, 클랜원들은 나의 생존을 확신했다. 비비앙 덕분에.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4달 전. 그러니까 강철 산맥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화됐을 때, 한 거주민이 중앙 관리 기구를 찾아왔습니다. 정확히는 저를 말이지요.” 돌연 아까 이후로 가만히 있던 주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번뜩 고개를 들었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올해로 성년이 된 그 거주민은 계약서를 들고 신전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찾아간 신전에서, 무척 놀라운 답변을 들었습니다.” 서늘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흐른다. 이어지는 말이 내 예상과 맞는다면, 설마 했던,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다. “조건의 불만족…. 이라고 하더군요. 머셔너리 로드. 4번째 조건을 다시 한 번 봐주십시오.” 4번째 조건. 해지 시 보호자로써 사용자 고은솔의 동의가 필요하다. “설마….” 주호는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 사용자 고은솔의 생존이 확인된다. 그러므로 아직은 계약의 해지가 불가능하다…. 이게 바로 신전의 답변이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무언가 쿵 내려앉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첫 사건의 시작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개인적으로 이 파트를 구상할 때 가장 고민이 들었습니다. 단순한 생존에 관한 개연성뿐만이 아니라, 계약서 설정, 클랜간의 관계, 원정대 등등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았거든요. 하하하. 아 여러분. 죄송한데, 내일도 또 늦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가 내일 아침 6시에 일어나서 나가야 하는데, 오후 늦게 돌아옵니다. 아마 다음 주 월요일까지는 계속해서 바쁠 것 같네요. 그래도 최소한 일일 연재는 펑크내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바쁜 날이 지나면 다시 자정 연재가 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PS. 쪽지는 주말 중으로 전부 답변 드리겠습니다. 0550 / 0933 ---------------------------------------------- 3년 전의 흔적. 3년 전 강철 산맥으로 들어간 사용자들이 아직 생존해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조금의 가능성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1회 차에 직접 경험해봤고 또 공략까지 해봤으니, 강철 산맥이 어떤 지역인지는 잘 알고 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나왔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조성호가 꺼내놓은 계약서는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깡그리 뒤집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한 순간, 약간이지만 창피한 기분도 들었다. 발상을 전환해보라 기세 좋게 소리친 주제에, 오히려 나야말로 꽉 막힌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고작 1회 차의 알량한 경험 하나만을 믿고서. 그래. 미래는 변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았다. 이걸 도대체 몇 번이나 되뇌어야 하는 걸까. “미안합니다. 고려 로드.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해, 조금 심한 말을 드린 것 같네요. 아까의 발언은 사과하겠습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테니까요. 저 또한 계약서를 보기 전까지는 머셔너리 로드와 똑같이 생각했습니다.” 조성호는 조금도 신경 쓰지 말라는 양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나는 아직도 쿵쿵 뛰는 심장을 추스르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우선은 생존자가 있다는 가정하에. “아무튼, 좋습니다. 고려 로드. 그리고 사용자 주호. 방금 두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서너 가지 의문점이 생겼는데요. 그래서 지금부터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 최대한 숨김없는 회답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입니다. 고려 클랜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지요. 혹시나 가지고 계시다면, 진실의 수정을 꺼내셔도 좋습니다.” 조성호는 우회적으로 회답했다. 사실 말로 하는 맹세 따위는 믿지 않지만, 여하튼 나는 곧바로 질문을 시작하기로 했다. “우선 첫 번째 질문입니다. 사용자 주호는 화계 공략 계획을 건의한 장본인입니다. 그리고 고려 로드 또한 강철 산맥에 들어간 이후 지속적으로 화계를 사용했고요.”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두 분은 몇 달 전부터 생존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화계 계획을 계속 밀어붙였다는 건, 사실 조금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입니다. 만에 하나 생존자가 휘말릴 거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는지요.” “그 부분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성호가 곧장 손을 들었다. “확실히 그런 위험성도 염두에 두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화계 계획을 건의하고 지속적으로 활용한 건, 현재 북 대륙의 상황과 생존자의 입장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북 대륙의 상황과, 생존자의 입장.” “생각해보십시오.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무척이나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 살아있다는 건, 어딘가 깊숙한 곳에 숨어있거나 아니면 괴물들에 붙잡혀있을 가능성이 높겠지요.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화계 계획은 여러 이점이 있습니다.” “어떤 이점들이 있지요? 구체적으로요.” “일단 강철 산맥을 공략하는 입장에서 화계는 확실히 매력적인 계획입니다. 오행 중 화와 목의 상극 관계를 생각해보면, 가장 확실하면서도 빠른 속도로 안전을 확보할 수 있으니까요. 이뿐만이 아닙니다. 저는 이 거센 불길이 생존자들에게 하나의 신호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신호라.” “예. 그런데….” “…….” 한동안 말을 잇던 조성호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착잡해 보이는 얼굴로 장막으로 가린 곳을 돌아보았다. 저기에는, 불에 탄 시체가 있다. 여러 이점들을 고려해 화계 계획을 진행했지만 최악의 경우가 나와버린 것. 물론 어디까지나 조성호의 입장에서. 나는 아직도 저 시체가 괴물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 정확히는 정말 시체일수도 있고, 괴물일 수도 있다. 가능성은 최대한으로 열어놓는 게 좋으니까. “그런데 저 시체는 어떻게 발견하신 겁니까?” “…괴물 부락 부근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조성호는 회답과 동시에 깊은 한숨을 흘리며 입을 깨물었다. 괴물 부락 부근이라면, 직선으로 나아가던 동부가 느닷없이 방향을 튼 부분을 말하는 것이리라. “머셔너리 로드. 동부의 진군 방식은 간단합니다. 주변으로 대규모 화계를 실행하고, 안전 지역을 확보. 그리고 진군. 이러한 단순한 과정의 반복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 “사흘 전. 그러니까 언제나처럼 한창 화계 계획을 실행하고 있을 때, 저는…. 아니 우리는, 갑작스럽게 한 비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비명이요.” “예. 비명. 그건 분명 인간의 비명이었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끔찍한 비명이었지요. 온몸이 불에 타 들어갈 때나 내지를 수 있는, 그런 울부짖음이었다는 말입니다.” “으음.” 시체가 사용자라는 점을 확실시하고 싶은 듯 조성호는 계속해서 비명을 강조했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알겠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고려 로드. 잠시 중간 상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경청하겠습니다.” “강철 산맥에는 생존자가 있다. 고려 로드와 사용자 주호는 생존자를 구출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 도중, 생존자로 추정되는 한 사용자가 화계에 휘말려 사망했다.” “정확합니다.” 조성호와 주호가 동시에 수긍했다. 나는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이후 현재 동부 원정대는 진군을 정지했다. 그에 따라 생존자 수색도 중지. 하지만, 이후로 2차 원정을 시도하는 남부 원정대에 지속적인 수색을 의뢰하고 싶다. 맞습니까?” “그것도 정확합니다. 다만…. 그…. 남부 원정대가 아닌 머셔너리 로드에 의뢰하는 겁니다. 알려져 봤자 좋은 일은 없을 테니까요.” 나는 물끄러미 조성호를 응시했다. 이런 말을 꺼냈다고 함은, 조성호도 남부 원정대의 구성을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무슨 속셈을 가지고 있는지도. 아니. 속셈이라기보다는, 걱정이라는 말이 맞을까. 어쨌든 아직 질문이 하나 더 남아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직구를 던지기 보다는 완곡히 돌려 말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조성호의 말을 들어보면 대강이나마 동부의 상황을 추측할 수 있었으니까. “동부 원정대의 사용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이 정도로 정확히는 모를 겁니다. 하지만 그때 그 비명은 거의 모든 사용자들이 들었지요. 그 결과 이 사실을 퍼뜨린 적은 없으나, 지금은 공공연한 비밀이나 다름없는 상태입니다. 다만 쉬쉬하고 있을 뿐.” “그리고…. 아니 그래서 진군을 멈추신 거군요.” “…예.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이후로 저는 계속 진군하기를 원했으나, 그때마다 강한 반발에 부딪쳤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아예 출발 전에 밝히는 게 좋았겠다. 제가 몇 번이나 후회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조성호의 말인즉슨, 사용자들의 이기심이 폭발했다는 소리였다. 동부가 진군하는 방법은 화계 계획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한 도중, 갑작스럽게 화계 계획에 제동을 걸만한 좋은 명분이 하나 생겼다. 명분이라는 건 만들기 나름이었으니까. 또한 마침 2주를 진군함으로써 지정된 최소 시일도 거의 맞췄겠다. 동부 원정대의 사용자들은 자신들은 충분히 할 만큼 했다고 생각, 추가로 진군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물론 사용자라면 누구나 개인의 목숨을 중요시하는 게 당연하지만, 어찌 보면 씁쓸한 일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다면, 다른 지역의 원정대는 동부를 절대로 곱게 보지 않을 것이다. 결국 조성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진 것이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동부는 남부와는 달리 모든 권한이 조성호에게 집중돼있다. 그럼에도 조성호가 자신의 뜻을 접었을 정도라면, 도대체 얼마나 반발이 심했다는 걸까.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명백한 능력 부족입니다.” 조성호도 나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는지 쓰게 웃어 보였다. 아무튼. 이로써 웬만한 이야기는 들었다. 조성호나 주호도 더는 할 말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응시하고 있다. 그저 미안한 눈초리만이 느껴질 뿐. 이제는 내 결정만 남은 상태였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나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아침에 별다른 일은 없었다. 그저 전날 미뤘던 지휘관 회의를 열어, 그간의 정보를 교환하는 시간을 가졌다.(사실 교환할 정보도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별 소득 없는 회의를 마치고 나서, 한소영은 점심 즈음 요새를 나갈 예정이니 그전까지 출발 준비를 마치라는 지시를 내렸다. 비로소 오늘부터 남부의 진정한 공략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준비를 마치기에 앞서, 나는 잠깐의 틈을 이용해 고연주를 찾았다. 어젯밤 생존자 이야기 이후 몇 가지 궁금한 것들이 생겼고, 고연주의 능력을 빌리고 싶은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고연주는 현재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클랜원이었으니까. “사용자 고은솔이요?” 자초지종을 들은 고연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반응을 보아하니 모르지는 않는 것 같은데. 이내 자세히 알려달라고 부탁하자, 고연주는 얼굴이 상냥하다, 눈물 점이 예쁘다, 착하다, 가슴이 크다, 몸매가 좋다는 등 헛소리만 늘어놓기 시작했다. 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장난치지 말라는 의미로 지그시 째려보자 고연주는 곧장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어흠. 알았어요. 그런데 고은솔이라. 정말 오랜만에 듣는 이름인데.” “알고 있습니까?” “그럼요. 알다마다 요. 같은 10강이었는데 모를 리가 없죠.” “고은솔은 어떤 사용자였습니까?” “노 터치 사용자였어요. 적어도 고은솔을 알고 있는 사용자라면, 누구도 그녀를 인정하고 존중해주었죠. …그나저나 그 나이팅게일이 생존해있다니. 이건 진짜 재미있는데.” “…….” 확실히 연륜이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나와는 다른 사고방식을 지녀서 그런지. 꽤나 충격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고연주는 매우 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아니면 그냥 아무래도 좋은 걸까? “수현. 그러면 결국 고려 로드의 의뢰를 받아들이신 거예요?” 이윽고 살며시 팔짱을 낀 고연주가 나를 흘긋 흘기며 물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사용자가 없음을 확인한 후, 가만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의뢰는 거절했습니다.” “응? 그럼 왜 물어본 거예요. 구조하려고 마음먹은 거 아니었어요?” “전혀 요. 생존자라고 해봤자 별로 안면도 없고. 또 동부 원정대의 행동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짐까지 떠맡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런 그렇죠? 아까 얘기 들으면서 동부 원정대의 행동이 진짜 괘씸했는데.” 저도 괘씸해요. 그런데 일단 겉으로는 흠잡을 거리가 없고, 괜한 분란을 만들기 싫어서 가만히 있는 거지. 나는 속으로 회답한 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랬다. 나는 어젯밤 고려 로드의 의뢰를 거절했다. 왜냐하면 공략과 생존자 수색은 그 최종 목적이 엄연히 구분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생존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꽤나 흥미가 동하는 일이었다. 그러한 흥미는, 지금 강철 산맥의 분포가 상당히 흐트러졌을 것이라는 추측에서 기인했다. 그렇잖은가. 현재로서는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거기서 3년간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흔적을 찾을 수만 있다면, 차후 공략에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라지만, 일단은 공략. 무조건 공략이 우선이다. 그래서 나는 조성호의 의뢰를 거절하고 부탁이라는 말로 바꾸어 받아들였다. 의뢰가 책임감을 갖고 해야 하는 일이라면, 부탁은 그만한 부담을 질 필요가 없으니까. 즉 공략을 최우선으로 삼되, 수색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목적에 불과하다고나 할까. 한 마디로 찾을 수 있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사실 절박한 입장에서는 야속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것만해도 큰 양보라고 할 수 있었다. 도리어 큰소리를 칠 입장이 아니었던 만큼, 조성호와 주호도 그 정도에 만족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때였다. - 남부 원정대. 출발 1시간 전. - 다시 말씀 드립니다. 남부 원정대. 출발 1시간 전. 인원을 조사해야 하니 모두 30분 안으로 요새 남문으로 집결해주세요. 증폭된 음성이 허공을 두어 번 울렸다. 그래도 캠프라고 안하고 요새라고 불러주기는 하는군. “아무튼 자세한 건 가면서 이야기하도록 하죠.” 출발이 임박했다는 생각에 나는 고연주의 팔을 잡아 끌었다. 일단 나는 공략을 우선해야 하는 입장이니, 수색은 미안하지만 고연주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그렇게 걸음을 떼려는 찰나. “킁! 킁킁! 킁킁킁! 킁킁킁킁!” “어머. 정말 변태 같아라. 거기 변태 씨. 내 냄새가 그렇게 좋아요?” 시선을 돌린 곳에서, 문득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 광경은, 나와 고연주를 향해 서서히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태연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대꾸하면서도,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는 여인 하나. 그리고 코를 벌름벌름 벌리며 여인을 졸졸 쫓는 사내 하나. 아니 뱀파이어? 두 남녀는 다름 아닌 표혜미와 사샤였다. …정확히는 표혜미로 모습을 변환한 제갈 해솔. “킁~. 수상해! 수상한 냄새가 난다! 이건 표혜미의 냄새가 아닌데?!” “응? 잠시만요. 다 좋은데 엉덩이에 코를 들이밀지는 말아요. 성적 수치심이 느껴지니까요.” “앗. 그러고 보니 왠지 구릿한 냄새도 나는가 싶었는데. 어이. 혹시 아침에 똥 쌌나?” “뭐, 뭐라고요? 아니 이봐요. 지금 그게 숙녀 앞에서 할 말이에요?” 제갈 해솔은 이제 정말 화가 났는지 팔짱을 끼며 두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러나 사샤는 멀뚱멀뚱한 얼굴로 머리를 갸웃할 뿐. 참 잘들 놀고 있군. 그나저나 헬레나가 신경 쓴 만큼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개 코인 사샤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모양이다. 아무래도 사샤의 입을 다물게 하려면, 차소림에게 부탁할 거리가 늘어날 듯싶다. 그렇게 사샤를 보며 입맛을 다신 순간이었다. “아.” 별안간, 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작품 후기 ============================ 음. 어제 코멘트는 잘 읽어보았습니다. 몇몇 분들께서 우려의 코멘트를 달아주셨더군요. 저는 여전히 여러분들의 항마력을 믿습니다. 수많은 경험이 증명하지요. 제가 아무리 난리 발광을 치고 부르스를 춰봤자 “별론데요? 이게 뭐가 강해요?”라고 말씀하실 거잖아요! 하지만. 그래도 소수 마음이 여리신 분들을 위하여, 혹시 해당 내용(?)이 나오게 된다면 전회에 경고 코멘트는 집어넣겠습니다. 그러니 그러한 부분이 나오는 내용은 스킵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름이요. 고은솔. 네. 고은솔. 아 왜요. 고은솔. 이름 예쁘잖아요. 얼마나 예뻐요. 고은솔. 저번에 나온 이름이 맞기는 맞아요. 원래 임한나의 이름을 고은솔이라고 하려고도 했고요. 그런데 그때 아쉬워서 지금껏 아껴두고 있었는데, 지금 쓰게 되네요. 제가 생각하는 이미지와 최대한 맞는 이름이라서요. 예쁘게 봐주세요. ㅜ.ㅠ 0551 / 0933 ----------------------------------------------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강철 산맥을 넘어 아틀란타로 가는 길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조금 오래된 기억이라고는 해도, 처음 공략을 시작으로 이후 안정화 작업에 이르기까지 수십, 수백 번을 들락날락한 지역이다. 이 지경에 이르면 길이 눈에 어느 정도 잡히기 시작한다. 어느 방향으로 가면 되는지, 또는 어디서 괴물들이 출현할 가능성이 높은지. 즉 굳이 사실을 확인하지 않아도 그런 것들이 저절로 눈에 보인다고나 할까. 아마 탐험에 구르고 구른 베테랑 사용자들이라면 내 생각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이다. “킁!” 그래서, 나는 남부 원정대를 이끌고 빠른 속도로 행군했다. 그러나 지금 이끄는 길이 가장 빠르게 아틀란타로 갈 수 있는 길이라 말하기는 힘들다. 거의 엇비슷하기는 하나, 애초 내가 가려는 길과 비교해보면 약간 틀어진 상태였다. “킁킁!” 왜냐하면 나흘 전 동부 요새를 떠난 이후, 방향을 가늠하고 길을 정하는 과정에 두 명의 클랜원을 새롭게 추가시켰기 때문이다. 한 명은 오른쪽 앞에서 매서운 눈길로 근처를 탐지하는 고연주. 그리고 또 한 명은…. “킁킁킁!” …왼쪽 앞에서 세찬 콧소리를 내며 열심히 코를 벌름거리는 사샤 펠릭스였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흘리며 건들건들 걸어가는 사샤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저 콧소리. 정말로 거슬린다. 하루 이틀은 참을만하다손 쳐도, 나흘 내내 듣고 있자니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다. 그럼에도 계속 이어지는 콧소리를 들으며, 나는 속으로 참을 인을 되뇌었다. 생각 같아서는 적당히 좀 하라고 한 대 힘껏 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사샤 입장에서는 내가 내린 지시를 열심히 수행하는 중이니 그렇게 하기도 애매하다. 아무튼. 내가 내린 지시라 함은, 물론 생존자 수색이었다. 사샤의 말에 따르면 뱀파이어의 코는 개 코가 아니라고 한다.(사샤는 이 말을 굉장히 강조했다.) 뭐라고 하더라? 대상의 역사를, 인생을 느낄 수 있는, 뱀파이어 중에서도 혈족에게만 허락된 후각 능력이라고 했었나? 좌우간 아무래도 좋다. 그 말이 맞는다면 생존자의 수색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 사샤는 강철 산맥이 죽음의 냄새로 진동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와 반대되는 생존과 연관된 냄새를 찾으면 된다. 예를 들면 희망이라던가, 아니면 구조에 대한 바람 등등.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중천에 떠오른 해가 서서히 저물어갈 무렵, 선봉대는 어느새 수림이 무성한 지역으로 접어든 상태였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동서남북 방향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심하게 우거진 상태였다. 사실 아직 사용자의 손길이 닿지 않은 만큼, 어디를 가도 거의 비슷한 풍경일 것이다. 1회 차 때도 그랬다. 가도가도 계속 똑같은 풍경이 나와 정말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절로 의구심이 일게 만든다. 하지만 그 의구심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강철 산맥의 행군 법칙 중 하나가 절대로 당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방향을 한 번 정했으면 무조건 밀고 나아가야 한다. 자칫 잘못해 이리저리 방향을 틀었다가는 십중팔구 강철 산맥에 잡아 먹히게 된다. 말인즉슨, 괴물만 조심해야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 지역을 점령한다는 의미는, 강철 산맥 자체를 적으로 봐야 한다는 소리였다. 또 그게 옳은 말이기도 했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행군하던 도중, 문득 평평하던 지면이 조금씩 조금씩 높아지는 게 느껴졌다. 시선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자, 저 멀리서 하늘을 뚫을 듯 솟아오른 거대한 산봉우리 하나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선봉 부대에 포함된 클랜 로드들을 호출했다. 현재 선봉 부대의 인원은 총 전투 인원의 6분의 1정도로, 약 600명 가량이었다. 구성 클랜은 머셔너리 포함 총 일곱. 호출을 받은 클랜 로드들은 대부분이 빠르게 모여들었다. 이내 늘그막이 나타난 무사 로드를 마지막으로 확인한 후, 나는 저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오늘은 저기 보이는 산봉우리를 넘을 생각입니다.” “예? 저 산봉우리를요?” 누군가 질린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선을 돌리니 이마에 살짝 땀이 맺힌 잿빛 로브를 입은 사내가 보였다. 라이트 클랜이었나? 선봉 부대 중 마법사와 사제의 인원이 가장 많은 걸로 기억하는데. 아마 체력이 낮은 사용자들이 반 이상이다 보니 저러는 듯싶다. “그렇습니다. 지금 지면이 조금씩이나마 높아지고 있습니다. 아마 경사가 꽤 높을 거라 생각되니, 다들 배열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저기 머셔너리 로드. 그럼 행군 속도를 조금만 줄여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어려울 것 없다. 어차피 오르는 도중에는 행군 속도를 줄일 생각이었으니까. 나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지요. 최소한 오르는 와중에는 쫓아오는데 큰 부담은 없으실 겁니다.” “후유. 다행입니다.” “다만 그만큼 경계를 철저히 해주셔야 합니다. 주변을 보면 아시겠지만, 수림이 워낙 울창해 좌우는 물론 전후까지 시야에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아직 딱히 걸리는 건 없으나, 언제 어디서 괴물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행군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클랜원들에게 탐지 마법을 활성화하도록 전하겠습니다.” 행군 속도를 줄인다는 사실이 그리도 좋은지, 라이트 로드는 옅은 미소를 띠며 머리를 끄덕였다. 이내 모든 클랜 로드들이 돌아가는 모습을 확인한 후, 나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샤.” “불렀나.” 사샤는 곧바로 회답했다. 언제 서 있었는지 어깨너머로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그런 사샤의 얼굴을 멀찍이 밀어내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상황은 어때.” “조금 이상하다.” “이상하다고?” “아아.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이질적인 냄새가 맡아졌는데, 어느 순간부터 희미해지기 시작했어.” “방향에서 멀어져서 그런 거 아닌가?” “그러다 싶다가도, 또 갑자기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맡아졌다가, 희미해졌다 가를 반복하고 있다. 나도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다.” 사샤는 담담히 말을 맺었다. 고연주 또한 딱히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을 뿐. 확실히 수상했지만, 아무튼 지금은 정한 방향으로 가는 게 낫겠다 생각. 나는 곧바로 행군의 재개를 알렸다. 수색은 부가되지 주가 될 수는 없으니까. 행군을 재개한 가운데, 또다시 킁킁거리기 시작한 사샤의 콧소리를 무시하려 애쓰며 산봉우리를 향해 걸었다. 지금 저렇게 육안으로 보이는걸 보면 금방 다다를 것 같지만, 실제 거리를 따져보면 그렇게 가깝지는 않다. 오히려 보이는 것보다 훨씬 멀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별다른 낌새를 느끼지 못한 채 계속 행군하다 보니, 주변에 황혼 빛이 깔리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깎아지른 듯 높이 솟은 산맥을 앞에 둘 수 있었다. 확실히 멀리서 볼 때와 바로 앞에서 볼 때의 느낌은 다르다. 어찌나 높이 솟았는지, 흡사 하나의 절벽을 보는듯한 기분이었다. “사샤. 고연주. 잠시 정시.”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따라오는 원정대가 잠시 추스를 시간을 주려는 것도 있지만, 이 거대한 산맥 앞에 선 순간 뭔가 짜릿한 감각이 온몸을 엄습했기 때문이다. 아까 생각한 느낌. 무언가 있을 거라는 느낌. 지형만 봐도 그렇다. 산맥이란 여러 개의 산이 선상으로 길게 연속돼있는 지형을 의미한다. (어디를 가도 그렇겠지만.) 괴물이 습격하기 딱 좋은 장소라고나 할까. 지금까지는 화계 공략 계획의 덕을 봤거나 아니면 운이 좋았다고 해도, 더는 그런 행운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제부터는 정말로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숨을 크게 들이키며 무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돌연 이상한 광경이 눈에 밟혔다. “흐음. 흐으음.” “왼쪽에서 두 걸음. 아니 세 걸음인가?” 나보다 조금 앞쪽에서 걷고 있던 사샤와 고연주가 갑작스럽게 기괴한 말과 행동을 시작한 것이다. 아니. 기괴한 게 아닌가? 그렇다고 보기에는 둘의 얼굴이 상당히 진지하다. 고연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계속 왔다갔다하며 한쪽을 주시하고 있다. 사샤 또한 어느새 킁킁거리는걸 멈췄다. 그 대신 한 자리에 가만히 서, 한쪽을 지그시 노려보고 있다. 둘의 공통점을 똑같은 방향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 돌연 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 나는 반사적으로 마력 감지의 밀도를 높였다. 하지만, 딱히 걸리는 건 없다. “사샤? 고연주? 갑자기 왜 그럽니까?” “수현. 보이는 풍경이 달라요.” 먼저 회답한 사용자는 고연주였다. “보이는 풍경이 다르다?” “왼쪽이요. 거기서는 어떻게 보여요?” 나는 고연주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보이는 거라고는 예의 심하게 우거진 수림뿐. 그때였다. “이상하군. 확실히 이상해.” 지그시 노려보던 사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거의 희미해지던 냄새가…. 갑작스럽게 강해졌어. 그 어느 때보다.” “그 어느 때보다?” “그래. 그런데.” “……?” 입을 닫은 사샤는 앞쪽 방향으로 한 걸음 더 이동했다. 그리고 여전히 노려보는 채로 말을 이었다. “여기서는 또 갑자기 사라졌다.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다르게 보이는 풍경. 그리고 딱 한 걸음에 심한 차이를 보이는 냄새. 결계다. 거기다 마력 감지에 걸리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대응 결계의 종류가 아닌 진로 결계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나는 곧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그러자 예상대로 근처에 진로 결계가 존재하는걸 확인할 수 있었다. 단 한 걸음으로도 전혀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진로 결계. 고연주와 사샤는 이미 외적 영역 안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진로 결계네요. 선유운! 후방으로 대기 명령을 전파해라!” 듣고 있었는지, 선유운이 빠르게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제 3의 눈으로 주변을 샅샅이 훑으며 입구를 찾기 시작했다. 예전 비비앙의 던전을 찾을 때도 이와 비슷한 사례를 겪은 적 있다. 하지만 그때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 보이는 진로 결계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 마치 유리창에 돌멩이가 날아와 박힌 것처럼, 결계의 군데군데가 쩍쩍 갈라져 있었다. 고연주가 나를 돌아보았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러면 아예 결계를 파괴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진로 결계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고연주의 의견은 정론이었지만, 나는 가만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함부로 파괴하면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모를뿐더러, 갑작스럽게 괴물들이 우수수 출현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억지로 뜯어내기보다는, 직접 들어가 길을 찾는 게 위험 부담이 덜할 것이다. 또 어차피 반파 상태나 다름없지 않은가. 어찌어찌 형태는 갖춘 상태라고 쳐도, 결계 내 기능이 상당히 떨어졌을 거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가장 큰 균열이 일어난 곳에서 살며시 안을 들여다보았다. “지금부터 소수의 인원으로 진로 결계 안으로 들어갑니다. 고연주, 사샤, 신재룡, 김한별, 우정민. 부른 순서대로 일렬로 따라올 것.” 세세한 오더는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진로 결계의 특성을 알고 있는 만큼, 곧 등 뒤로 옷깃을 부여잡는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리고 그대로 지면에 고정한 채, 나직이 입을 열었다. “고연주. 지금부터 안으로 들어갈 테니, 부탁합니다.” “걱정 말아요. 눈 역할은 확실해 할 테니까.” 고연주의 회답이 들려온 순간, 나는 일단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하나의 선을 그리는 길을 주시하며 천천히 진로 결계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길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었다. 나는 최대한으로 집중한 채 정확한 부분만을 밟았다. 가장 중요한 건 무조건 정확한 부분만을 밟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주 조금이라도 삐끗하는 순간….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모른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로 수준 높은 결계사일 경우 아예 다른 장소로 이동시켜버리는 것도 가능하다고 들었으니까. 특히나 이런 지역에서는 절대로 지양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점은 결계가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거진 반파 상태였다는 것. 그리고 제 3의 눈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내가 꽤나 빠르게 그리고 제대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결계 내에 흐르는 특유의 이질적인 공기가 차차 옅어지고 있다는 게 명백한 증거였다. 그 순간이었다. 걸음을 내디디는데 한창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문득 묘한 기분이 느껴졌다. 어느 순간부터, 등이 휑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옷깃을 잡은 감촉이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 “…고연주?” 나는 멍하니 시선을 들었다. ============================ 작품 후기 ============================ 후기 적다가 깜빡 졸았네요. 후후. 후후후. 지금 시간은 새벽 3시 3분. 33입니다. 네. 33이에요. 우후후후.(?) 아. 내일, 아니 오늘 오전에 약속만 끝나면 조금 시간이 한가해질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일단 자고 싶네요. 하하. 하하하. 푹, 푸욱, 푸우욱, 푸우우욱 자고 싶어요. 아. 요새 잠이 부족해서 정말 미는 아니고 파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롤 올스타 결승이 있었네요? 3:0으로 이겼어요. 아. 나도 보고 싶었는데. 흐규흐규. 아. 죄송해요. 오늘 좀 횡설수설이죠? 아마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후기를 지울지도 몰라요. 왜냐하면 저는 갈대니까요! 꺄하하하! 아. 저번처럼 캡쳐는 거부하겠습니다. 흑 역사는 만들고 싶지 않거든요. :D 0552 / 0933 ----------------------------------------------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처음 눈에 보인 건 다름 아닌 동굴이었다. 자연적으로 생성된 게 아닌, 어딘가 인공적인 흔적이 묻어있는 깊고 넓은 굴. 정신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진로 결계의 끝에 다다른 것이다. 하지만 그건 지금 중요하지 않다. 나는 다급히 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멍한 얼굴로 서 있는 고연주를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흘려버렸다. 고연주는 두 손을 힘없이 늘어뜨리고 있었다. “고연주?” “…….” “사용자 고연주!” “…아. 수, 수현?”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연주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곧바로 고연주의 어깨를 감싸, 안쪽으로 조심조심 끌어내었다. 이제 막 진로 결계를 벗어난 상태라 아직 영역 안에 있는 클랜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고연주를 시작으로 사샤, 신재룡, 김한별, 우정민이 차례대로 걸어 나온걸 확인한 후. 나는 간신히 한숨을 돌리면서도 강한 의문이 들었다. 왜 갑자기 저런 반응을 보인 걸까?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고연주인데?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수현. 나도 모르게 그만….” 고연주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눈을 찡그렸다. 고연주치고는 드물게도 혼란스러워하는 반응. 아마 무언가 다른 원인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일단 눈앞의 일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괜찮습니다.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되니까, 우선은….” “네, 네. 그럴게요. 이제는 정말로 괜찮아요.” 차분히 숨을 고른 고연주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동굴을 노려보는 두 눈에 차가운 빛이 스쳤다. 그걸 보니 어느 정도 안정된 것 같아, 나는 한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별은 곧바로 보석 하나를 꺼내 들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 ───. ───. 쥬얼 라이트(Jewel Light). 화이트(White).” 그 순간 꺼내든 보석에서 환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일반 라이트 마법보다 몇 배는 밝아 보이는 빛은 동굴에 들어찬 어둠을 삽시간에 몰아내었다. 마력 감지에도 딱히 걸리는 게 없는 터라, 나는 간단히 진형을 정리한 후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동굴 내부는 조용했다. 아니. 조용한 정도가 아니었다. 마력 감지는 물론 온몸의 감각을 극도로 활성화시켰으나,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고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이따금 클랜원들이 장비가 부딪치는 철그렁거리는 쇳소리만이 미미하게 들려올 뿐. 흡사 공허를 걷는듯한 기분이었다. 어차피 안으로 이어지는 길은 하나. 그러나 입구에서 발견된 인공적인 흔적으로 보면, 혹시 모를 비밀의 방이 있을 수도 있다. 하여 나는 한쪽 벽면을 더듬으며 이어지는 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이러니까 꼭 예전에 탐험을 하는 생각이 나는군요.” 그렇게 한 150미터 정도 추가로 이동했을 무렵, 누군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신재룡의 목소리였다. 고연주 이후 필요 이상으로 경직된 기운을 풀어보려 말을 꺼낸 것 같은데…. 응? “잠시 정지.” 적당히 회답해주려는 찰나, 나는 지체 않고 정지 지시를 내렸다. 꾸준히 더듬고 있던 벽면에서 돌연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벽면 자체는 울퉁불퉁하지만 그래도 무리 없이 지나치던 와중이었는데, 느닷없이 덜컥 걸리는 느낌이었다. 마치 벽면이 무언가에 패인 것처럼. “한별아. 이쪽으로 빛을 비춰봐. 지금 내가 손을 대고 있는 벽면으로.” 그러자 전방 10미터에서 떠다니던 보석이 빠르게 돌아와 내가 가리킨 벽면에 환한 빛을 뿌렸다. 나는 서너 걸음 물러나 벽면 전체를 응시했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살. 고. 싶. 다. 한글로 쓰여진, 벽면에 깊숙이 음각된 글자를. “…….”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나 명백하다. 아마도 생존자가 남긴 흔적일 것이다. 예상보다 쉽게 찾은 것이다. …그나저나 살고 싶다 라. “살고…. 싶어…?” “이게…. 무슨…. 여기는 강철 산맥인데….” 클랜원들도 벽면의 글자를 확인했는지 대부분이 당황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차분함을 유지하는 이는 두 명. 나는 고연주, 사샤와 한 번씩 시선을 교환한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일단은 안으로 들어갑시다. 무엇이 있든 간에, 우선 보고 판단합시다.” 클랜원들은 여전히 당황한 빛을 숨기지 못했지만, 어정거리면서도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처절하군.” 사샤의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안쪽으로의 전진을 재개했다. 길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100미터 정도를 추가로 전진했을 즈음, 비로소 동굴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보석이 비추는 방향으로, 하나의 커다란 중간 통로와 안쪽의 공간 일부가 언뜻언뜻 눈에 들어왔다. 마력 감지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이내 완전히 안으로 들어선 순간, 신재룡과 우정민이 짧은 탄성을 터뜨렸다. 동굴 끝에 놓인 공간은 생각보다 거대했다. 가로로 80미터, 세로로 100미터 정도 돼 보이는 공간. 마치 널찍한 방 하나를 보는듯하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지면이나 주변 곳곳에 새겨진 여러 흔적들이었다. 중구난방으로 흐트러진 마른 검불이나 구석에 아무렇게나 처박힌 천 쪼가리 등등. 사용자의 손을 탄 흔적을 부지기수로 발견할 수 있었다. “믿을 수는 없지만…. 사용자들의 흔적이 보입니다.” 신재룡이 낮은 신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애써 차분함을 유지하려는 듯 근엄한 목소리였으나 미미한 떨림을 동반한 음색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예상하던 일. 마침 잘 말했다는 생각에 동의하려는 찰나, 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고연주가 어느새 공동 안을 비틀비틀 돌아다니고 있다. 그러다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 당최 왜 그러나 싶어 따라 시선을 들어올린 순간. “아…?” “으음…!” 클랜원들은, 거의 동시에 숨을 터트렸다. 천장에는 희끔희끔한 무언가가 축 늘어져 있었다. 길쭉하게 보이는 그 무언가는, 다름 아닌 해골이었다. 정확히는 목을 맨 해골 시체 하나. 목에 밧줄이 감긴 채 천장에 홀로 매달려 있다. 지면의 흔적을 보느라 바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클랜 로드.” 우정민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나는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이내 스르릉, 철이 쓸리는 소리가 울리며 우정민이 가벼운 팔매질을 했다. 허공을 가르며 쏘아진 단검은 천장에 달린 줄을 정확히 끊어내었다. 풀썩! 파가각! 툭 떨어져 내린 시체의 일부는 지면에 닿자마자 힘없이 바스러졌다. 아마 죽은 지 꽤 오래된 모양. 상태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시체는 간신히 걸친 옷가지를 제외하고서라도 완전한 해골 그 자체였다. 그나마 두개골에 듬성듬성 돋은 기다란 머리카락이 여인일 것이라는 가능성을 알려주고 있다. 오직 딱 하나 이상한 점이 있다면, 왼쪽 가슴 부근이 불룩히 솟아올라있다는 것. 나는 잠시 해골을 내려다보다가,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옷가지를 들추며 뒤져보았다. 잠시 후, 안쪽 주머니 사이로 손을 넣자 무언가 한 움큼 잡히는 감촉이 느껴졌다. 가칠가칠하면서도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금방 바스러질 것 같다. 혹시 몰라 살살 빼내어보자, 먼지가 뽀얗게 쌓인 빛 바랜 기록들을 볼 수 있었다. 못해도 열댓 장은 넘어 보인다. “수현. 생존자의 기록인가요?”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고연주의 물음에 나는 담담히 머리를 주억였다. 아닌 게 아니라 지면을 아끼려고 했는지, 하나의 기록에 여러 내용들이 빽빽이 적혀있었다. 나는 잠시 클랜원들을 돌아보았다가, 침착히 기록 한 장을 넘겼다. 동글동글하고 예쁜 필기체의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살아남았다. 정말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건 정말 운이야. 이 동굴을 발견한 것도, 그 공룡같이 생긴 놈들이 더는 쫓아오지 않는 것도. 그리고 내가 결계사라는 것도. 사실 결계는 괜히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때 써먹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공룡들도 결계는 읽지 못하는 것 같아. 다행이야.』 적힌 내용을 보아하니 아마 생존자의 생존 일기인 듯싶다. 첫 시작은 꽤나 담담한 느낌이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하다. 당장에 목숨이 달린 급박한 와중에 누가 미쳤다고 기록을 하겠는가. 아마 이 기록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이후 적기 시작했을 것이다. 『오늘 생존자 두 명 추가로 발견. 이제 총 인원은 67명. 좋아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모르겠어. 식량이나 물이 무한정한 것도 아닌데.』 『처음에는 67명. 지금 남은 인원은 35명. 단 한 번의 탈출 시도로, 32명이 죽었다. 역시 무리였던 걸까.』 『싸움이 일어났다. 하지만 은솔이 언니의 중재로, 간신히 각자의 주장을 인정했다. 들어온 길로 나갈 수는 없다. 무조건 죽는다. 그러나 이대로 버틸 수도 없다. 굶어 죽으니까.』 『결국 은솔이 언니가 31명을 이끌고 나갔다. 새로운 길을 찾는다고 한다. 지금 상황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기록은 하루하루 이어지는 게 아니라, 상당히 띄엄띄엄 쓰여져 있었다. 그나저나 은솔이라. 아마 조성호가 말한 사용자 고은솔을 말하는 것 같은데. 나는 일단 계속 읽어보기로 했다. 『2주가 지났어. 돌아오지 않아. 지금 남은 인원은 단 3명.』 『자고 일어나보니 소라 언니가 보이지 않는다. 어디간 걸까? 설마….』 『결국 소라 언니도 돌아오지 않는다. 현진이 오빠가 찾으러 나간다고 했다.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결국 나가버렸다. 이제 남은 건 나 혼자. …무서워.』 『처음에는 67명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 혼자 있다.』 기록은 가면 갈수록 점점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져있었다. 나는 남은 내용을 빠르게 훑었다. 『혼자가 된 지 3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오늘 잠을 자는데, 꿈에 현진이 오빠가 나왔다. 특이하게도 우리는 현관문 구멍 사이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오빠가 그랬다. 결계를 새로 치라고. 나오지 말라고. 그리고 절대로, 절대로 대응하지 말라고. 특히 이 말을 강조했다. …사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오빠의 얼굴이 무서우리만치 굳어있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일단, 결계를 변화시켜야겠다.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잘못들은 게 아니라면, 나는 오늘 분명히 들었다. 진아야. 진아야. 우리가 돌아왔어. 그런데 길을 찾을 수가 없어. 누군가 결계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나를 부른다. 계속해서.』 『오늘 새로운 말을 들었다. 처음에는 사내의 목소리. 그 다음에는 여인의 목소리였다. 어어라라. 분분명명 이이 길길로로 기기억억하하고고 있있는는데데? 흠. 이 연놈들이 기억을 잘못한 게 아닐까? …뭘까? 이 연놈들? 기억? 나는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기록은 여기서 끊겨있었다. 어쩌면 마지막 기록은 아까 벽면에서 본 살고 싶다 란 말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도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중간이 뚝 끊긴 채 하염없이 흔들리는 밧줄 하나. 그러면 이 결계사는 결국 자살이라는 방법을 선택했다는 건가. “클랜 로드. 혹시 뭔가 특이한 기록이라도 있습니까?” 문득 신재룡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한두 번 입맛을 다시며 기록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특이한 기록이라. 사실 내 입장에서는 딱히 특이한 기록이란 건 없다. 특이하다기보다는, 짚이는 바가 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면, 어쩌면 이번 원정에서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확실한 단서 하나를 잡았다는 것. 이윽고 기록을 천천히 품속으로 밀어 넣으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글쎄요. 별로 특이하다기보다는…?”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요?” 짜증 어린 목소리가 허공을 왕왕 울렸다. 마치 주변의 모두가 들으라는 듯 커다란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근원지는 현재 산맥을 앞에 두고 잠시 멈춘 남부 원정대. 그 중에서도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는 사내였다. 가슴에 武(무) 문양이 그려진 걸로 보아 무사 클랜, 아니 무사 로드 고오환이 분명하다. 그러나. 누가 봐도 명백한 짜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유운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기다리시오.” “그렇게 간단하게….” “내가 받은 명령은 주변을 경계하며 가만히 대기하고 있으라는 것뿐. 진로 결계에서 나오시면 어련히 알아서 하실 테니, 그냥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시오.” “아니! 벌써 30분이 지났잖아! 오늘 저 산을 넘는다며! 그런데 날이 벌써….” 때는 이때다 싶어 기세 좋게 소리치던 고오환은, 돌연 살며시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지금껏 잠자코 있던 선유운이 순간적으로 한쪽 눈을 흘긋 뜨며, 매섭게 주시했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고오환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머셔너리 로드만 없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잘 생각해보니 눈앞의 사내도 신궁이라 불리는 엄청난 사용자였다. 그러자 그 생각이 맞는다는 듯, 선유운의 팔이 고오환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지금 전권을 위임 받은 건 나다. 다시 한 번 말하지. 조용히 입 다물고 있어라.” “아,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요.” “입 다물고 있으라 했다. 더는 경고하지 않겠다.” “…….” 그 말을 마지막으로 끼릭, 석궁을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고오환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선유운의 얼굴에서 진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오환이 말을 해주었으면 하는, 그런 기분이랄까. 고오환은 살짝 질린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미간 정 중앙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살기에 온몸이 절로 떨릴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간신히 몸을 돌릴 수는 있었다. 그때였다. - 거거기기 누누구구 있있어어요요? 어느 목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선봉 부대로 흘러들었다. 고오환의 걸음이 멈칫함과 동시에, 선유운의 몸이 바짝 굳었다. - 누누가가 있있다다면면…. 도도와와주주세세요요. 한 가지 확실한 건 인간의 육성이 분명하다는 것. - 살살려려주주세세요요. 제제발발…. 그러나 자세히 들어본다면, 어딘가 모르게 이질감이 느껴지는 기괴한 목소리였다. ============================ 작품 후기 ============================ 아. 죄송합니다. 오늘 비주얼 노벨 관련한 분들과 미팅 및 저녁 식사가 있어 집에 늦게 돌아오게 되었네요. 꾸벅. _(__)_ 그래도 참 재미있고 즐거운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정말 재미있는 제안을 하나 받았거든요. 시즌이나, 티저 사이트 같은 말도 좋았지만, 가장 흥미로운 건 분기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껏 수현이 많은 선택을 해왔잖아요? 거기서 분기점을 가른다는 말이에요. 예를 들면 박동걸을 놔둔다. 혹은 유현아를 살린다. 아니면 비비앙을 죽인다. 등등 말이지요. :) 이런 게 줄기줄기 꼬리를 물고 이어져 엔딩도 달라질 수 있고요.(물론 아직 확정은 아니고, 논의 중이기는 합니다.) 개인적으로 재미있을 것 같은데, 약간 엄두가 나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예 스토리를 하나 더 만드는 것과 진배없는 작업이거든요. 대표님 : 자 그럼 작가님. 그렇게 하시기로 한 겁니다? 로유진 : 예? 저는 아직 회답을…. 대표님 : 방금 커피 드셨잖아요. 그게 Yes죠. 로유진 : ? 정신을 차려보니까 저도 모르게 동의한 걸로 돼 있더군요. 그래서 여러분들의 도움을 구하고 싶습니다. 혹시 지금껏 메모라이즈를 보시면서 이 부분이 이랬으면 어땠을까. 이건 이렇게 했으면 어땠을까. 등등 아쉬운 부분이 있으시면 코멘트에 간략하게라도 적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 새로 트리를 짤 계획인데, 혹시 제가 놓치는 부분을 독자 분들이 기억하고 계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D 0553 / 0933 ---------------------------------------------- 폭풍의 시작. - 도도와와주주세세요요. 구조를 원하는 목소리가 거듭 허공을 울렸다. 조금의 고저도 보이지 않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 오직 전방에서 들려온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 누구도 정확한 위치는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선봉 부대에 포함된 사용자들은 확실히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모두가 조용히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용자는 선유운이었다. “누구냐. 신분을 밝혀라.” - 혹혹시시 구구조조하하러러 오오신신 분분이이신신가가요요? “우리는 구조대가 아니다. 그리고, 신분을 밝히라고 했다.” - 괴괴물물한한테테 당당했했어어요요. 다다쳐쳐서서 움움직직일일 수수가가 없없어어. “괴물? 지금 괴물이라고 했나? 그게 무슨 소리지?” - 도도와와주주세세요요. 너너무무 아아파파. 흑흑흑흑….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선유운은 소름이 주뼛 돋는걸 느꼈다. 예민한 궁수의 청각이 쉴 새 없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들려오는 건 흐느낌이 분명한데, 몹시 서러운 기색은커녕 높낮이가 일정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선유운이 고오환을 겨냥하던 석궁을 전방으로 돌렸을 때였다. “잠시만요. 왜 석궁을 겨누시는 거예요?” 상앗빛 사제 로브를 입은 여인이 다급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돌아가.” 그러나 선유운은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까닥이며 지그시 전방을 노려볼 뿐. 그런 선유운의 행동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가장 선두에 있는 머셔너리 클랜원들이 한 명 한 명 무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걸 보는 여인의 얼굴에 갑갑한 기색이 어렸다. “이봐요. 지금 무슨 짓들이에요? 지금 사람이 죽어가는데 당장 달려가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야. 도와주지 않을 거면 닥치고 꺼져. 신경 거슬리니까.” 그러나 여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 날 선 목소리가 딱 잘라 끊어버렸다. 여인은 기막히다는 듯 얼굴을 돌렸으나 돌연 흠칫하고 말았다. 어느새 유정이 단검 두 개를 뽑아 든 채 서늘한 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아니. 분명 사람의 목소리가….” “멍청한 년.” “뭐, 뭐라고요?” “마력 감지는 폼으로 있어? 지금 앞쪽에서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 거 몰라?” 여인이 아미를 찌푸렸다. 방금 유정이 한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들려오는 목소리로 봐서는 감지에 무언가 잡혀야 하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상하지 않은가. 사람이든 괴물이든 누구나 기척은 존재하는 법인데, 기척이 잡히지 않는다? 모순. 그렇다면 해답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거리가 닿지 않는다는 것. 아니면 웬만한 감지로는 잡을 수 없는 새로운 괴물의 출현했다는 것. - 안안 돼돼. 그그놈놈들들이이 또또 오오고고 있있어어. 그 순간, 또다시 기괴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여전히 높낮이는 일정했지만 아까와는 달리 말하는 속도가 빠르다. 마치 급한 상황을 연출하려는 듯이. - 빨빨리리 도도망망쳐쳐. 괴괴물물들들이이 이이곳곳을을 찾찾아아냈냈어어. 어어서서. 이제는 도와달라고 하는 게 아닌, 오히려 도망치라고 한다. 속여서 끌어들이려는 게 아니었나? 선봉 부대의 사용자들의 얼굴에 혹시나 하는 빛이 스쳤다. 오죽하면 선유운조차도 미간을 찡그렸을 정도였다. “이 겁쟁이들!” 그때 방금 들려온 말에서 모종의 확신을 얻었는지, 여인이 표독스럽게 내뱉으며 앞으로 달렸다. 누군가 급히 어깨를 붙잡았지만, 오히려 여인은 강하게 뿌리치며 외쳤다. “놔! 설령 괴물이라면 저렇게 말을 하겠어? 저건 사람의 목소리잖아!” 그리고 지팡이를 꺼내 들어, 결국에는 선봉 부대를 벗어나고 말았다. “정확히 어디에요? 지금 갈게요!” - 여여기기 이이쪽쪽. 더더 앞앞으으로로. 여인이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목소리는 곧바로 회답했다. 이내 무성하게 우거진 수풀 안에 있을 거라 추측한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달리기에 가속을 붙였다. 아마도 여인이 조금만 더 똑똑했다면,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걸음을 정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기에, 여인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강제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휘리릭! 탁! 허공을 가르는 흉흉한 소리. 이내 힘껏 달리던 여인의 몸이 돌연 우뚝 정지했다. 관성으로 몸이 절로 비틀거리는 가운데, 여인의 시선이 절로 발목을 향했다. 더러운 채찍이 두 발목을 단단히 감고 있었다. 아니. 채찍이 아니었다. 끈적끈적한 액체와 표면에 오돌토돌한 돌기가 돋아있는 그것은, 마치 촉수를 보는듯했다. 잠시 후, 여인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하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이나 늦은 상태였다. “아?” 한순간, 여인이 보는 세상이 오른쪽으로 크게 기울어졌다. 이윽고 몸이 완전히 기울어 땅에 닿은 순간, 여인은 때늦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수풀 안쪽으로 끌려들어갔다. 그것도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여인의 동료들이 애타게 외쳤으나, 이미 다리는 물론 상반신까지 빨려 들어가는 중이었다. “사, 살려어어어어!” 두 팔이 의미 없이 허공을 휘젓는다. 곧 한없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던 여인의 몸이 별안간 우뚝 멈추었다. 하지만 이미 거의 다 들어간 상태와 진배없다. 우거진 수풀 밖으로 보이는 거라곤 오직 가녀린 두 개의 팔뿐이었으니까. 두 팔은 여전히 구조를 원하는 듯 허공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와드득! “아아아아아아아악!” 갑작스럽게 와짝 깨무는 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새된 비명이 주변을 떠르르 울렸다. 그것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와드득! 와드득! “까아아악! 아파아아!” 소리가 이어질수록, 여인은 두 팔이 이리저리 비틀며 바닥을 미친 듯이 두들기기 시작했다. 어찌나 절박한지, 사제임에도 불구하고 지면의 수풀이 찢겨져 나갈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콰드드드드드드득! 무언가 크게 부서지는 소리. 동시에 지면을 치던 여인의 팔이 뻣뻣하게 변했고, 부르르 떨리며 그대로 힘없이 축 늘어졌다. 이내 후루룩, 액체를 들이마시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비로소 여인의 두 팔마저 수풀 안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사용자들은 하나같이 멍한 얼굴로 왼쪽 수풀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게 눈 몇 번 깜빡 할 사이에 지나갔다. 여인이 발목을 잡힌 시점부터 지금까지 흐른 시간은, 채 10초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 아아아…. 아아아…. 잠시 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틀림없이 죽었을 거라 생각한 여인이 수풀에서 솟아올라 느릿하게 허공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런 여인의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목에는 촉수가 칭칭 감겨있었고, 하체는 흡사 믹서기에 넣어 갈아버린 것처럼 무참히 짓이겨진 상태였다. 피는 뚝뚝 떨어지다 못해 강물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 도도도와와와…. 제제제발발발 도도도와와와…. 아아아…. 여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의 목을 죄는 촉수를 붙잡은 채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리며 구조 요청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상하다. 표정은 정말 구조를 바라는 듯 애절하기 그지없었으나, 목소리는 아까 들었던 기괴한 목소리였다. 선유운은 입을 질끈 깨물었다. 아니. 모든 사용자가 비슷한 생각이었다. 정체 모를 괴물. 그러나 어디 있는지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거기다 또 지금 저 여인을 구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등등. 이 모든 것을 처음 맞이해야 하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사고에 혼란이 온 것이다. 그때였다. 팍! - 살살살려려려…. 켁켁켁! 느닷없이 백색 빛을 뿌리는 검이 쏘아져, 허공에 떠오른 여인의 목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그 탓에 꺽꺽 거리며 말을 잇던 여인의 몸이 좌우로 크게 흔들리더니,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모두 전투 준비!” 그와 동시에, 약간 화난듯한 목소리가 선봉 부대를 쩌렁쩌렁 강타했다. 하지만 익숙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이내 시선을 돌린 사용자들은 마찬가지로 왼쪽 수풀에서 우수수 달려오는 네댓 명의 사용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 중 선두에서 달려오는 사용자를 확인한 선유운의 얼굴에 밝은 화색이 감돌았다. “클랜 로드!” 김수현이었다. 진로 결계에서 빠져 나오자마자 바로 상황을 파악해, 일말의 주저 없이 검을 날린 것이다. 곧장 선봉 부대로 복귀한 김수현은 여전히 목에 꼽힌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검이 절로 움직여 여인의 목을 베어 나와 김수현의 손으로 안착했다. 잘린 단면에서 피가 왈칵 쏟아져 나온다. “잠시만! 머셔너리 로드! 저 여인은 내 여동생이요!” 누군가 크게 소리질렀지만 김수현은 조금도 아랑곳 않았다. 오히려 마력이 충만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외쳤다. “장소는 왼쪽 수풀 안. 거리는 2미터부터 25미터. 무사, 적심은 왼쪽 전진 이동으로 측면 보호. 마법사들은 지계 마법으로, 사제들은 방어막을. 궁수는 지금…!” “머셔너리 로드!” 결국 참지 못한 사내가 달려들었다. 아까 잠시나마 여인의 어깨를 붙잡았던 사내였다. 그러나 보지도 않은 채 사내의 턱을 잡더니 강제로 틀어 한쪽을 보게 만들었다. 이내 허공을 바라본 순간 사내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죽었을 거라 생각한 여인이, 어느새 고개를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지만, 여인의 얼굴은 평온했다. 아니. 입가에 피를 주룩 흘리면서도 도리어 씩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먹잇감을 앞에 둔 동물처럼. “발사!” 첫 타로 수십 발의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나아갔다. 여인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러더니 허공으로 더욱 높이 떠올라 노리고 들어온 화살을 모조리 피해버렸다. 더구나 그 상태서 멀찍이 물러나기까지. 김수현은 한 번 더 투척하려는 듯 검을 들었다가, 천천히 도로 내리고 말았다. 곧 여인을 감은 촉수가 더욱 멀리 물러나더니 이내 수풀 안으로 쏙 숨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수풀들이 좌우로 사르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흔들림은 곧 무척이나 신속한 속도를 보이며, 남부 원정대와는 반대 방향으로 멀리멀리 사라졌다. * 결국 남부 원정대는 그날 목표했던 산을 넘지 못했다. 오히려 걸어온 길을 되짚어 물러나 조금 이르지만 야영을 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비로소 처음 조우한 괴물의 출현에, 수뇌부가 긴급히 회의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소영은 원정대에 한 가지 특명을 내렸다. 특명이란, 다름 아닌 오늘부터 경계를 대폭 강화하겠다는 것. 들리는 소문으로는 건의자가 머셔너리 로드라는 소문이 있었다. 사실 괴물이 출현한 이상 경계 강화는 당연한 일이기는 했으나, 그 정도가 조금 심하다는 게 문제였다. 더구나 잠이 체력 회복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특성상 사용자들도 불만을 가질 법한 일이었다. 깊은 밤. 숲에는 침침한 어둠이 가득히 들어찬 상태였으나, 야영지 부근은 타오르는 불빛으로 환하게 밝혀진 상태였다. “젠장.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한 사내가 나무 그루터기에 털썩 주저앉으며 투덜거렸다. 그러자 한쪽 방향을 경계하던 두 남녀 중 한 여인이 흘긋 고개를 돌렸다. “야. 너 언제 왔어? 어디 갔다 온 거야?” “볼 일 좀 보고 왔다. 왜.” “미친. 너는 화장실을 1시간이나 넘게 다녀오니? 하마터면 보고할 뻔 했잖아!” “예~. 예~. 미안합니다~. 큰 거였습니다~.” 여인이 핀잔조로 말하자 사내는 귀찮다는 얼굴로 느물거렸다. 여인이 살며시 얼굴을 찌푸렸다. “쟤 또 왜 저래. 너는 왜 매사에 불만이니?” “아 그렇잖아. 우리가 지금 뭐 하는 거야. 잠도 못 자고.” “잠을 못 자서 그래?” “잠을 못 자서가 아니라,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 같아서 그런다. 경계 타임 한 번에 병력의 4분이 1이나 운용하는 게 말이 돼?” 사내는 쉬지 않고 불만을 쏟아내었다. 여인은 더는 상대하기 싫은지 어깨를 으쓱한 후, 옆에 서 있는 다른 사내의 팔에 살그머니 팔짱을 끼었다. “어쩔 수 없지. 상황이 이런데. 아무튼 상황이 이러니까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잖아. 수뇌부들이 뭔가 좋은 수단을 강구해오지 않을까. 그지? 자기야?” 여인이 동의를 구하는 듯 물었으나, 사내는 아무 말도 없었다. “자기야? 자기야! 왜 그래?” 여인이 연신 팔을 흔들었다. 그러자 잔뜩 굳어있던 사내가 간신히 입을 열어 속닥거렸다. “…소연아.” “왜? 너도 급해서 그래?” “그게 아니라…. 마력 감지.” “마력 감지?” 사내가 느릿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여인은 순간 바짝 긴장이 들었다. 사내의 클래스는 궁수. 위험 감지에 최적화된 클래스이다. 혹시 괴물이 야습해오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에, 여인은 곧바로 마력 감지를 일으켰다. 하지만 예상외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느껴지는 거라고는 오직 두 개의 기척뿐. 자신의 기척과 옆에 서 있는 사내의 기척. 그 외에는 어떤 기척도 잡히지 않는다. “왜? 주변에는 너랑 나밖에…?” 그리고 그 순간. 여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 작품 후기 ============================ 새로운 괴물의 출현입니다. 일반 사용자들의 입장에서는 나름 까다로운 부분이 있는 괴물이죠. 설정에 꽤 공을 들였습니다. 한 가지 힌트를 드리자면, 괴물이 말하는 음절의 수라고 할 수 있겠네요. 뭐 그렇게 대단한 힌트는 아닙니다만. 하하. 아무튼 시체는 아닙니다. 물론 도플갱어도 아니고요. 이후 내용을 진행하며 차차 드러낼 예정이니, 아마 곧 아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 PS. 어제 코멘트는 감사히 봤습니다. 한 번 숙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0554 / 0933 ---------------------------------------------- 폭풍의 시작. 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야영지 인근을 떠나가라 울렸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닌 두 번이나 연달아. 나를 비롯해 회의에 참가한 클랜 로드들은 곧바로 회의를 중단하고 현장으로 달렸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앞서 달려온 사용자들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상황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사용자들이 오기 전에 도망쳤는지 괴물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지면에 뿌려진 다량의 핏물만이 여기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줄 뿐. “이쪽 경계를 맡고 있던 사용자들이라면…. 아마….” “제기랄!” 어느 사내가 바닥을 세게 짓밟으며 분노를 터뜨렸다. 나와 같이 달려온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이내 주먹을 꾹 움키며 부르르 떠는걸 보니 아마 당한 사용자들이 부하 클랜원인 듯싶다. 아니면 그냥 아는 지인이거나. “젠장!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자자. 신 하늘지기 로드. 고정하세요. 심정은 이해하지만 보는 눈이 많습니다.” “빌어먹을.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소? 부하 놈들이 습격을 당해 죽었는데…!” “아.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잖아요. 정보가 없는데 그럼 어떡합니까.” 확실히 말 그대로였다. 현장만 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나마 추측할 수 있는 거라고는, 괴물들이 외곽 지역을 경계하는 사용자들을 습격, 그리고 목적을 달성한 후 재빠르게 물러났다는 것. 아마 머리가 좀 돌아가는 사용자라면 여기서 조금 더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괴물은 사용자를 먹이로 생각할 만큼 공격 성향이 강하지만, 그 성향을 억누를 수 있을 만큼의 지능도 갖췄다는 걸. 신 하늘지기 로드는 계속해서 광분을 터뜨렸고, 말리는 사용자들의 언성도 서서히 높아지기 시작했다. 주변에 모인 이들은 모두 어색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반응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현 상황을 생각하면 별로 좋은 행동은 아니었다. …어차피 오늘 회의도 더는 이어지지 않을 것 같은데. 잠시 현장을 살펴본 후, 나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천막으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잠을 자야 내일 제대로 활동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다음 날. 하늘은 밤사이 있었던 일이 거짓말이라 생각될 정도로 맑고 화창했다. 나는 아침이 되자마자 간단한 세안을 마친 후, 빠르게 출발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별 소득 없는 아침 회의를 끝나고 나오자, 이미 야영지 대부분이 정리된 상태였다. 사용자들 또한 각자 포함된 부대에 맞춰 출발 준비를 끝내놓은 상태였다. “출발 10분 전입니다. 모두 마지막 점검을 마치도록.” 선두로 이동해 몸을 풀며 말하자 약간은 침울해 보이는 진수현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형님. 이번 회의 때 무슨 중요한 이야기라도 나왔나요?” 그러자 진수현뿐만이 아니라 모든 클랜원들이 시선이 쏠리는걸 느꼈다. 나는 있는 힘껏 기지개를 피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 별로?” “괴물에 대한 이야기도 안 나왔어요?” “나오기는 했는데 어제와 별로 다를 건 없더라. 그냥 사용자를 먹이로 생각하고, 지능이 높다는 것 정도?” “…그렇군요.” 진수현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큰 한숨을 흘리더니 힘없이 머리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원정대 전체를 훑어보았다. “…….” 거의가 무표정한 얼굴이다. 물론 처음 시작 때부터 아주 활기찬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침침하다 생각될 정도로 상당히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좋다. 지금껏 흘러온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기조가 무조건 나쁘다고는 볼 수 없다. 물론 지금도 형성되는 과정에 불과하기는 하나, 조금씩이나마 내가 원하는 기조가 서서히 만들어지고 있다. - 선봉 부대. 출발. 이윽고 한소영의 출발 지시가 떨어져, 나는 둘러보기를 멈추고 앞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그대로 시선을 들자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산봉우리가 시야로 들어온다. 어제는 넘지 못했지만, 오늘은 기필코 넘어야 한다. 그렇게 약간 침체된 기조 속에서 남부 원정대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시간이 흘렀다. 야영지를 떠날 때부터 시작된 침체된 기운은, 산맥을 오를 때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바로 긴장감으로. 그러니 행군 속도도 자연히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오르막 길을 걸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언제 어디서 괴물들이 튀어나올지를 모르니 경계심이 확연히 높아진 것이다. 그러나 괴물의 정체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 사용자들이 아무리 경계해봤자 100% 방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버릇 또는 습관의 함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제 출현하기 시작한 괴물들은 북 대륙과는 차원이 다른 괴물이다. 예를 들면 어지간한 마력 감지로는 기척을 잡을 수 없다는 것 등등. 좌우간, 그러면 그에 맞추어 새로운 방식으로 대비를 해야 하는데, 여태껏 해왔던 대로만 방비하니 뚫리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걸어 올라가는 주변 지리도 우리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데 일조하는 커다란 요인이었다. 거칠고 울퉁불퉁한 오르막 길과, 방향을 가늠키 어려울 정도로 무성하게 돋아난 수림은 시야마저 제한하고 있다. 말인즉, 괴물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홈 그라운드나 다름없는 지역을 최대한 활용할 여건이 된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어차피 공략하러 들어온 이상 감안해야 하는 일. 나는 시시각각 불안해하는 원정대를 이끌고 계속해서 산을 올랐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수림은 더욱 우거진 상태로 나와 원정대의 진로를 방해했다. 거기다 구름 안개까지 근처에 깔리기 시작하자, 어느새 나조차도 살짝 머리를 갸웃할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정상까지 약 100미터 정도 남은 찰나였다. 문득, 마력 감지에 모종의 기척이 잡혔다. “흠?” 그것은 정말로 갑자기 잡힌 기척이었다. 수백의 기척이 좌우 방향으로 은밀하게, 그러나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짓쳐 들어오고 있었다. 또한 매우 광범위하다. 이 정도라면 선봉 부대뿐만이 아니라, 중앙과 후방마저 위험할 정도였다. 온몸에 짜릿한 감각이 차오른다. 더 이상 생각할 틈은 없었다. “적이 좌우로 몰려온다! 전원 전투 준비!” 그 순간이었다. 휘리릭! 휘리릭! 말이 끝남과 동시에 들려오는 허공을 찢을듯한 날카로운 파공음. 첫 타로, 가장 선두에 있던 나를 노리고 좌우로 두 개의 촉수가 날아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무검을 뽑아 간단히 쳐낸 후, 재빠르게 좌우를 훑었다. 그리고 2초 후. 아주 잠깐의 정적을 가르며, 이번에는 수십 개의 촉수가 수풀 속에서 폭발적으로 튀어나왔다. 괴물들이 사정 거리에 다다르는 족족 공격해 들어오는 것이다. 하지만 간단히 당해줄 생각은 없어, 나는 지체 않고 외쳤다. “한결아!” 한결 또한 산맥을 오를 때부터 바짝 긴장하고 있었던 만큼, 바로 대응해주었다. “이지스 시스템!” “보석 증폭!” 동시에 한별의 호응이 이어졌다. 이윽고 촉수의 비가 선봉 부대에 쏟아져 들어오려는 찰나, 허공에 큼지막한 정육각형 방패가 생성된다. 이어서 반짝이는 다량의 보석이 뿌려진 순간, 방패는 삽시간에 수를 늘리며 간발의 차이로 선봉 부대를 뒤덮었다. 터터터터터터터텅! 기세 좋게 날아온 촉수들은 한결의 방패에 모조리 가로막혔다. 그것도 모자라 날아온 방향 그대로 되돌아가기까지 했다. 아마 고유 능력인 되비침의 효능인 듯싶다. “오, 오오오오!” “사, 살았다!”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방패를 확인했는지, 일대 혼란에 휩싸일뻔한 선봉 부대는 바로 침착함을 되찾았다. 나는 추가로 지시를 내리며 최대한 신속하게 진형을 변경했다. 머셔너리는 선두를, 무사는 좌측을, 적심은 우측을. 그 사이 한 번 더 수십의 촉수들이 날아들었으나, 정신을 차린 사제들이 보호막을 마구잡이로 펼침으로써 별다른 피해 없이 막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두 번의 공격을 막아내고 나서야, 간신히 텀이 생겼다. “클랜 로드.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궁수들은 발사 직전 대기. 마법사들은 전부 지계 마법 준비. 나머지는 현상 유지로.” 신재룡의 요청에 빠르게 지시를 내리고 나서, 나는 무검을 꽉 쥐었다. 그리고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좌우를 점거했던 수백의 기척이, 곧 미끄러지듯이 후방으로 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마치 선봉 부대에 더는 볼 일이 없다는 것처럼. 정말로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준비가 완료됐습니다. 발사합니까?” “아니요. 잠시 대기.” 일단 괴물들이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알 것 같다. 어떻게 인지는 모르겠지만, 놈들은 내가 자신들의 기척을 잡을 수 있다는 것과, 뿌리는 마력 감지의 형태를 알고 있다. 그래서 정면을 노리지 않은 것이다. 좌우 멀찍한 곳에서 잠복해있다가, 우리가 지나가는 순간 빠른 속도를 이용해 덮쳐들어 왔다. 설령 알아도 대응하지 못하도록. …놈들은 오늘 우리가 이곳을 지나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괴물들은 여전히 모습을 숨긴 상태였다. 긴장된 가운데, 일단 적당히 반격해보려는 생각에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때였다. 콰쾅, 후방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들려옴과 동시에 붉은 불빛이 삽시간에 사방을 가득히 메우기 시작했다. 나는 화들짝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멀찍한 후방에서, 시뻘건 불길이 하나 둘 치솟기 시작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급작스럽게 멍한 기분이 들었다. 사방에 수풀이 돋아난 곳에서, 화계 마법을 실행했다고? “멍청한 놈들!” 절로 욕설이 나왔다. “클랜 로드?” “마법사들! 준비한 마법을, 후방으로 사용하세요!” “예, 예?” “젠장. 후방 부대의 좌우 방향 수풀로 지계 마법을 사용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수계 마법 준비를!” 마력이 담긴 충만한 목소리로 있는 힘껏 외쳤다. 선봉 부대 마법사들은 일순 떨떠름해하며 나를 바라보았으나, 곧 한 명 한 명 후방으로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 ───. ───. 디그 인 더 그라운드!” “───. ───. ───. 어스 퀘이크!” “───. ───. ───. 그라운드 오브 퓨리!” “───. ───. ───. 록 블래스터!” 비로소 기백에 이르는 마법사들이 마법을 발출했다. 콰르르르르르르르! 땅이 파이고, 흔들리며, 갈라지고, 터져나간다. 이어서 멍멍할 정도의 굉음이 고막을 뒤흔들었다. 효과는 곧바로 볼 수 있었다. 애초에 후방으로 달려든 놈들은 물론, 이동하고 있던 놈들의 기척이 느닷없이 확실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껏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놈들은 갑작스럽게 퍼부어진 마법에 우왕좌왕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궁수들 발사!” 수십의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발사했다.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쏘아진 수많은 화살 비는, 점점 거세어지기 시작한 불길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거대한 비명과 함께 놈들의 기척이 도로 옅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사방으로 빠르게 흩어지는걸 느낄 수 있었다. 모두가 움직임을 멈추고 후퇴를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한 놈도 남김없이 도망치는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무검을 칼집에 꽂아 넣었다. 남은 건 주변 수림을 게걸스레 삼켜가는 화마뿐. “사용자 신재룡. 수계 마법이 준비되는 즉시 진화에 들어가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신재룡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회답했다. 워낙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런지, 아직 정신이 멍한 듯싶다. “한결아. 한별아. 너희도 그만 해제하고.” “그, 그래도 되요?” 어차피 괴물들은 도망갔다. 나는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다. 이윽고 여러 물줄기가 불길에 뿌려지는걸 확인한 후, 나는 후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른 건 몰라도 누가 화계 마법을 사용했는지는 확실히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건 적에 대한 정보를 아냐 모르냐를 떠나서, 상식의 문제였다. 그러나. 나는 막 중앙 부대로 넘어가기 직전, 우뚝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는 선봉 부대의 후미와, 중앙 부대의 선봉이 갈리는 지점에서. “크아악! 내 팔, 내 팔!” “우욱! 우우욱!” 주변은, 완전한 난장판이었다. ============================ 작품 후기 ============================ 바로 다음 회 갑니다. 0555 / 0933 ---------------------------------------------- 반격의 시작. 약 열 명은 돼 보이는 사용자들이 바닥에 쓰러진 채 신음하고 있고, 사제들이 달라붙어 치료 주문을 외우고 있다. 아마 처음 기습 공격을 완벽하게 방어하지 못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기습을 당한 거지! 궁수랑 마법사들은 도대체 뭘 했나!” “제기랄!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고 했잖소! 경계를 했는데도 안 되는걸 어쩌라는 말이요!” “선봉 부대에는 그럼 어떻게 대응했고? 그리고 화계는 또 누가 실행했어? 미쳤어? 우리까지 타 죽을 있게?” “선봉 부대에서 진화해주고 있어요! 일단 싸우지들 말고 주변이나 진정시켜요!” 욕설이 섞인 거친 고성들이 사방을 넘나들었다. 그래.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나는 후방으로 가려던 걸 멈추고 조용히 근처를 둘러보았다. 그때 잠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무리를 짓고 있던 사용자들이 반으로 갈라져 길을 텄다. 그리고 그 사이로, 한 여인이 천천히 걸어 나온다. 한소영이었다. 이러한 난장판 속에서도 한소영은 여전히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직접 나서 빠르게 주변 상황을 가라앉힌 후,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머셔너리 로드.” “이스탄텔 로우 로드.” 곧바로 달려가자, 한소영은 차분히 아미를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척 하고는 있지만, 약간은 피곤한 모양이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네. 후미가 생각 이상으로 흐트러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최대한으로 진정시키고 있어요. 선봉 부대의 피해는 어떤가요?” “전무합니다.” “…대단하군요.” 한소영은 살며시 시선을 내리깔며 회답했다. 그 순간, 나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쿡 찔리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중앙이나 후미는 어떻습니까? 피해가 큽니까?” “중앙은 2명 실종, 11명이 부상. 그리고 후미는 5명이 실종, 14명이 부상당했어요.” 실종이라. 그렇다면 끌려갔다는 말인가. 엄청난 피해는 아니었다. 하지만 공략을 시작한 이후,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다. “그나마 선봉 부대의 적절한 대응 덕분에…. 피해가 더 커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윽고 한소영은, 서서히 진화되는 불길을 보며 간신히 말을 꺼냈다. 후미는 코란 연합이 맡고 있다. 도대체 누가 시행한 건지는 몰라도, 박환희의 명백한 통제 실수라고 할 수 있었다. 이내 낮은 한숨 소리가 흘러들었다. 아마 한소영도 어이가 없을 것이다. 나조차도 조금 전에는 이런 놈들을 데리고 공략을 해야 하는 건가, 라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이만 걸음을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겉으로는 담담해 보이지만, 한소영도 지금 무척이나 속이 끓을 것이다. 나도 거기에 일조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선두로 돌아갈 테니, 상황이 진정되면 알려주세요.” “네. 그렇게 할게요.” 나와 한소영은 동시에 몸을 돌렸다. 이윽고 약 10여분이 흐른 후 소란이 잦아들었고, 추가로 또 10분이 지난 후에야 출발 지시가 떨어졌다. 나는 천천히 앞으로 걸으며 원정대를 이끌었고, 곧 정상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내 산맥을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숲은 더욱 깊어졌다. 그나마 내리막길이라 행군 속도가 조금 더 빨라져, 남부 원정대는 마침내 목표했던 산봉우리를 완전히 넘을 수 있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남부 원정대는 오늘 목표한 산맥을 넘고, 추가로 두 개의 산맥을 더 넘고서야 진군을 멈추었다. 그리고 서둘러 야영지를 구축하고 식사를 마치다 보니, 어느덧 부근을 물들였던 해 질 녘 노을은 사라지고 서서히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아침에 습격을 받은 이후, 괴물들은 한 번 더 추가로 습격해왔다. 두 번째 산맥을 내려갈 즈음 또다시 갑작스럽게 기습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아침에 한 번 겪은 만큼 그때는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었고, 놈들은 아주 근소한 피해만을 입히고 물러나고 말았다. 물론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근소하기는 하나 피해가 났다는 소리는 결국 타격을 입었다는 말이고, 그와 반대로 괴물은 여전히 정체도 드러내지 않은 채 도망쳤으니까. 탁 까놓고 말하면 현재 남부 원정대는 주구장창 당하고만 있었다. 그런 만큼 계속되는 게릴라에 사용자들의 신경이 예민해진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깊은 밤, 야영지의 중앙에 마련된 커다란 천막에는 거의 모든 클랜 로드들이 모여있었다. 이제는 거의 연례 행사로 봐도 될 정도로 굳어진 지휘관 회의였다. 아니. 일례 행사인가? 천막에 흐르는 기운은 전보다 훨씬 냉랭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아침에 첫 습격을 받은 이후, 서로 얼굴을 붉힌 이들이 적지 않으니까. “내 생각에는 애당초 길을 잘못 잡은 것 같소만.” 조용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누군가 애써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사 로드였다. 고오환은 팔짱을 낀 채 무척이나 근엄해 보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괴물들과 조우한지 벌써 거의 이틀이라는 시간이 흘렀지요. 하지만 현재 우리 상황이 어떻습니까? 괴물의 정체를 알아내기는커녕, 계속 피해만 속출하고 있어요. 이건 명백히 길을 잘못 잡은 탓에 벌어진 일입니다. …일단 이 점은, 선봉 부대에 포함된 이로써 사과 드리지요.” “아니. 그건 무슨 소리에요? 길은 또 무슨 상관입니까?” 어디서 웃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던 찰나, 어디선가 뾰족한 목소리가 응수했다. 시선을 돌리니 머리를 말끔히 빗은 사내가 보인다. 저번에도 한 번 본 기억이 있는데. 라이트 로드였나? 고오환은 헛기침을 했다. “허험. 그러니까 내 말은….” “말이고 자시고. 강철 산맥에 들어온 이상 괴물의 출현은 당연한 일이잖아요.” “아니….” “문제의 본질을 보라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게 대책을 마련하자고 모인 거지, 누가 힘 싸움하자고 모였습니까? 그리고. 나도 선봉 부대에 포함된 이로써, 누구 멋대로 사과를 합니까? 지금 가장 피해를 적게 입은 부대가 어디인데.” 고오환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얼굴이 대번에 험악해지는 게, 머리 끝까지 화가 치솟은 모양이었다. 속은 시원했지만 이러면 또 회의가 되지 않는다. 하여 이쯤에서 중재를 해주기로 마음먹어, 나는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자. 모두 그만합시다. 지금 여기 계시는 모두가 머릿속이 복잡할 터인데, 이러는 건 소모적인 분쟁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니. 머셔너리 로드. 방금 들으셨잖습니까. 무사 로드가 자꾸만 나서니까….” “갑갑하니까 그러셨겠지요. 자꾸만 피해는 속출하는데, 우리는 아직 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 않습니까. 무사 로드도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닐 겁니다. 오히려 정말 열정적으로 공략에 임해주시는 건,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어흠. 그, 그렇습니다.” 고오환은 곧바로 동의했다. 그러면서도 떨떠름한 기색을 보이는 게, 내가 자신을 감싸주자 꽤나 어색한 모양이다. 아무튼. “일단, 이번 회의에서 개인적으로 여러분들께 말씀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나는 우선 발언권을 요청할 생각으로 한소영을 응시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한소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내 기대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클랜 로드들을 돌아보며 나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사실 나는 괴물이 출현한 이후 오직 방어만할 뿐, 지금껏 별다른 활약을 하지 않았다. 대책을 마련하는 회의에서도 딱히 말을 꺼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원하는 게 있었으니까. “우선 현재의 상황을 간단히 정리해보겠습니다. 남부 원정대는 공략을 시작했고, 새로운 괴물이 출현했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밝히고 시작하면 당연히 나도 편하다. 지금 출현하는 괴물은 이런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대응해야 한다. 아니면 어느 길을 통해 가면 정말 빠르게 공략할 수 있을 것이다 등등.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러면 당장은 편할지 몰라도, 추후 모든 공략이 끝나면 틀림없이 의심의 시선을 받게 된다. 머셔너리는, 안 그래도 북 대륙에서 비슷한 의심을 받는 입장이었다. 그런 만큼 이번 기회를 통해 어떤 식으로 우리가 유적을 발견했는지, 또 공략해왔는지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괴물은 매우 교활합니다. 지금껏 습격은 총 3번 있었지만,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기는커녕 모습을 숨기며 지속적인 게릴라 전을 펼치고 있지요.” 그러나,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남부 원정대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개인적인 입장으로 보면, 선봉 부대를 이끌며 갑갑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처음 전투만 봐도 그렇다. 머셔너리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지시를 내리면 재깍재깍 이행을 해야 하는데, 어버버하다가 당하기 일쑤인 것이다. 물론 사용자 개개인으로 보면 실력은 확실히 괜찮은 수준이다. 또한 분명 이효을의 의도대로 세세한 지휘를 내릴 수 있는 멍석은 만들어졌지만, 일단 기본 베이스를 생각해보면 각자의 개성이 지나치게 강하다. 거기다 처음 지역을 별다른 피해 없이 지나치며, 남부 원정대는 전체적으로 느슨해진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지금껏 상대해오던 괴물이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을 보이기까지 하니, 이 모든 요인들이 어우러져 악재의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지역을 공략하려면 지금까지 괴물에 대해 가지고 있던 고정 관념을 버려야 한다. 나아가서, 대응하는 방법도 변해야 한다. “지금 이 난관을 타파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첫 번째. 우선 괴물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최우선적으로 괴물의 샘플을 확보해야겠지요.” 하지만 습관을 하루 아침에 바꾸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내가 한 이틀 정도를 아무런 말도 않고 두고 본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다. 이러한 기조를 바꾸는 데는, 백 번 듣는 것 보다는 한 번 제대로 당하는 게 더 낫다. 죽음이라는 굴레를 눈앞에 갖다 놓아야 사용자들의 변화가 가속화될 테니까. 말인즉, 사용자들의 생존 본능을 각성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내 실수가 하나 있었다면, 화계가 시행될 줄은 몰랐다는 것. 설마 그런 병신 같은 사용자가 있을 거라고는 정말로 생각지도 못했다. …좌우간 그에 따른 피해는 어쩔 수 없겠지만, 어쨌든 내 알 바는 아니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괴물의 근거지를 빠르게 습격해 섬멸하면 되지요.” 말을 마치고 주변을 둘러보자 멍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그러한 눈초리들이 마치 그걸 누가 생각 못하냐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속으로 가볍게 웃었다. 잠시 후, 한소영이 입을 열었다. “옳은 말씀이에요. 괴물의 정보를 수집하고, 약점을 파악한다. 그리고 근거지를 습격해 일망타진. 그렇다면 괴물의 샘플을 확보하는 게 선결 과제가 되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면, 머셔너리 로드는 어떻게 그런 것들을 이루어낼 생각인가요?” “흠. 글쎄요.”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천막 밖을 쳐다보며 말했다. “제 생각에는, 괴물 샘플은 조만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르면, 아마 오늘 밤 즈음?” “오늘. 밤이요?” 한소영이 의아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비단 한소영만 그런 게 아니라, 곧 어수선한 소란이 천막을 가득히 메웠다. “아니 아니. 잠시만요. 머셔너리 로드. 오늘 밤이라고요? 그러면 놈들이 야습이라도 해온다는 말씀입니까?” 누군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어와, 나는 그렇다는 의미로 머리를 주억였다. “개인적인 생각을 물어보시는 거라면,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 나름 길었던 회의는 새벽에 이르러서야 종결을 알렸다. 중간중간 여러 이야기들은 오고 갔지만, 결국에는 괴물의 샘플을 가장 우선적으로 확보하자는 것에는 모두가 이견이 없었다. 나도 크게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다. 여기 모인 사용자들이 어정쩡한 이들도 아니고. 확실한 증거를 들이밀어야 이후의 계획이 더욱 수월할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천막을 나와 10여 보를 걷자, 나는 잠시 걸음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선가 빤히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차분히 시선을 돌리니 어둠 속에 서 있는 한 사용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사내는, 다름 아닌 선유운이었다. “이런. 지휘관 회의를 엿듣고 있었습니까?” “…그냥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가는지 궁금했습니다.” 선유운은 솔직히 인정했다. 좋은 행동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딱히 상관은 없다. 나는 어깨를 으쓱인 후 천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선유운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주춤했지만, 이내 조용히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클랜 로드. 궁금한 게 있습니다.” 하지만 천막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선유운이 침묵을 깨고 나직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곧장 걸음을 멈추었다. “예.” “왜 그런 놈을 계속 감싸주시는 겁니까?” “그런 놈?” “아까 회의에서 말입니다.” 나는 머리를 갸웃했지만, 곧 선유운이 누구를 지칭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아. 무사 로드. 나는 또 누구라고. 하하하.” “웃으실 일이 아닙니다. 놈은 계속해서 클랜 로드의 권한을 넘보고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고, 괜찮습니다. 그리고 너무 기 죽이지는 마세요.” “예?”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고맙습니까. 목숨을 사리지 않고 알아서 나서주겠다는데. 자고로 원정대에는 그런 사용자도 필요한 법이니까요.” “…아.” 선유운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곧 내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달았는지, 허탈이 웃으며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서. 그거 때문에 이야기를 엿듣고,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까?” “아니요.” 나 또한 마주 웃으며 조용히 말하자, 선유운이 한 차례 더 머리를 저은 후 입을 열었다. “그럼?” “실은 말입니다. 아까 이야기 중에서….” 그때였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오늘 2편을 올렸어요. 연참이죠. 따, 딱히 어제 응원 코멘트에 정말로 힘을 얻고 감사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하루 푹 쉬니까 머리가 맑아지기도 했고, 아무튼 어쩌다 보니 글이 2편으로 써졌네요. 어차피 비축분 만드는 성격도 아니고. 그래서 그냥 올린 것 뿐이에요. 흐, 흥. 0556 / 0933 ---------------------------------------------- 반격의 시작. 삐이이이이익! 펑! 어디선가 하얀 불빛 하나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이내 요란스럽게 터지는 소리와 동시에 불빛은 사방으로 점점이 뿌려졌다. 마치 불꽃놀이를 보는 듯 아름답기 그지없는 풍경이었지만, 아쉽게도 그런 감상에 젖을만한 시간은 없다. 저건 보초들이 쏘아 올리는 일종의 신호였다. 대충 거리를 가늠해보니 아마 야영지를 벗어난 최 외곽에서 쏘아 올린 신호인 듯싶다. 말인즉, 지금 상황이 굉장히 위급하니 한 시라도 빨리 지원을 바란다는 뜻이다. “…아까 회의에서 말씀하셨죠. 오늘 괴물이 야습해올 것이다. 샘플은 오늘 밤 안으로 확보할 수 있다.” 지그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선유운이 석궁을 꺼내며 말했다. 그리고 오른팔에 장착한 후 끼릭끼릭, 화살을 재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내 모든 준비를 마쳤는지 선유운은 입을 슥 닦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자신 있으시냐 여쭈고 싶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 같습니다.” “확신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가능성이죠. 사례가 있으니까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선유운은 나직이 웃더니 신호가 쏘아진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살그머니 몸을 굽히는 게 바로 달려가려는 것 같아, 나는 곧바로 제지했다. “잠시만요. 선유운. 지금 바로 가면 안됩니다.” “예? 바로 가면 안 된다니요? 상황이 급할 텐데요.”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예상하고 있었다고요. 어느 정도 시간을 끌 수 있을만한 조치는 이미 해두었습니다.” “조치요.” “가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입니다. 아무튼, 선유운은 우선적으로 머셔너리 클랜원들을 모으세요. 적어도 최소한의 구성은 갖춘 후에 지원을 가야 합니다. 아마 지금쯤 거의가 신호를 감지했을 테니,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선유운 또한 내 말이 옳다고 여겼는지 묵묵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장 걸음을 틀었다가 돌연 또 한 번 우뚝 멈추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럼 클랜 로드님은….” “저는 먼저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말끝을 흐리는 선유운을 향해 나는 소리 없이 빙긋 웃어주었다. 그리고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따로 할 일이 있어서요.” * 털썩! 한 사내가 지면에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이내 사내의 두 팔에 더러운 촉수가 단단히 감기고, 전신을 덮을 정도의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곧 벌어질 일을, 아니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걸까. 언뜻 보기에 사내의 얼굴은 망연함 그 자체였다. 그러나 부들부들 떨리는 몸과 눈동자를 물들인 공포의 빛은, 현재 사내의 심리를 정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내의 눈초리는 한곳에 고정된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사내는 괴물을 보고 있었다.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키는 한 2미터쯤 될까. 중간중간 때가 낀 더러운 상앗빛 피부에 두 팔과 두 다리를 가진 사람과 비슷한 모습이다. 그러나 개미핥기를 연상케 하는 길쭉한 머리와 툭 튀어나온 주둥이, 그리고 기다랗게 늘어져있는, 흡사 촉수처럼 보이는 사지는 영락없는 괴물의 모습이었다. 한 가지 더 특징이 있다면, 괴물의 얼굴에 눈과 귀가 없다는 것. 보이는 거라고는 오직 코와 길쭉한 입뿐이다. 촉수에 감긴 사내의 몸이 천천히 떠올랐다. 괴물이 느릿하게 입을 벌리자 안으로 수십 개는 되어 보이는, 촘촘히 박혀있는 이빨이 날카로운 빛을 번쩍였다. 사내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윽고 사내의 머리부터 쩍 벌려진 주둥이 안으로 들어가버리고, 괴물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우드득! 무언가 우악스럽게 찢겨 터지는 소리. 사내의 몸이 한 번 거세게 요동쳤다. 이어서 괴물의 양 볼이 불룩해짐과 동시에 주둥이 사이로 벌건 핏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그것을 시작으로 괴물은 목, 몸통, 팔, 다리를 거쳐 삽시간에 사내를 뜯어먹었다. 어찌나 빠른 속도로 잡아먹는지, 그냥 흡입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꺄아아악!” 그렇게 식사를 끝마친 괴물이 쩝쩝 입맛을 다시고 있을 무렵, 문득 높은 비명이 근처를 울렸다. 이내 한쪽 수풀에서, 입맛을 다시는 괴물과 똑같이 생긴 괴물이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그 괴물의 촉수는 마찬가지로 한 여인의 몸통을 칭칭 감아 붙잡은 상태였다. 그랬다. 인근에는 사내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한 명의 여인이 더 숨어있었다. 두 손으로 입을 꽉 막고 있는 걸로 봐서는 어떻게든 숨으려 노력한 것 같은데, 괴물이 냉큼 찾아내 포박한 것이다. “시, 싫어! 싫어어어어어!” 여인은 두 팔과 두 다리를 바동거리며 저항했지만, 괴물은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맛을 보려는 듯 돌기가 잔뜩 돋은 혀를 내밀어 매끈한 목을 휘감아 핥는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지 여인의 몸이 크게 자지러졌다. 그런 여인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기척은 느끼지 못했지만, 처음 보는 괴물들이 대놓고 모습을 드러난 탓에 들어오는 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신호를 쏘아 올리고 곧바로 도망쳤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따라 잡혀버리고 말았다. 그때였다. 앞서 사내를 잡아먹은 괴물이 여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몸을 잔뜩 웅크렸다. 그리고 잠시 후, 갑작스러운 변화가 시작되었다. 별안간 괴물의 온몸에 돌출된 미세한 돌기들이 반응하더니 난데없이 크게 부풀어 오르며 전신을 뒤덮는다. 결국 돌기들은 크게 팽창하다 못해 툭 터지며 진득한 체액을 쏟아내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에 불과했다. 곧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터져 나온 체액이 흘러내리지 않고 잔류하더니 도리어 몸으로 주르륵 흡입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괴물의 몸에 흐물흐물 파문이 생기며 또 한 번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체구가 줄어드는걸 시작으로, 사지가 줄어들고 머리가 작아지며 주둥이가 들어간다. 이내 작아진 머리에 머리칼이 돋는걸 마지막으로, 괴물은 완전히 변화를 끝마쳤다. 아니. 이제 괴물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을까. 왜냐하면 변태를 끝낸 괴물의 모습이 어느새 아까 사내의 모습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입고 있는 옷마저도 말이다. 그러한 변화에 엄청나게 경악했는지 여인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괴물, 아니 사내의 모습을 응시했다. 자신을 붙잡은 괴물이 아가리를 쫙 벌리며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 순간, 사내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만. 먹지마.” 막 닫히려던 주둥이가 순간 정지했다. 이빨에서 떨어지는 침 방울이 여인의 머리칼에 찔끔 떨어졌다. “암컷이잖아. 암컷은 먹지 말고 가져가야 한다. 파파의 명령이다.” 괴물이 머리가 대번에 사내를 향했다. 괴물의 얼굴에는 분명히 눈이 없다. 그에 따라 표정도 보이지 않아 정상인데, 어딘가 모르게 불쾌한 빛이 흘러나오는 것 같다. 마치 너는 먹었으면서 왜 나는 안되냐는 듯이. 둘 사이에만 통하는 감각이 있는지, 사내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우리에게는 사람 암컷이 필요해. 파파의 명령을 거스를 셈인가?” 그렇게 한동안 노려보던 와중, 사내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괴물이 가만히 있자,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다음 먹이 중 사람 수컷을 사냥하게 되면, 너에게 최우선으로 주도록 하지.” 그제야 납득했는지 괴물은 머리를 도로 빼며 기껏 벌렸던 주둥이를 닫았다. 사내는 만족한 듯 끄덕끄덕 머리를 주억였고, 여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사내와 괴물을 번갈아 보았다. 아무튼 일단은 산 건가? 그렇게 생각한 찰나였다. “그럼 적당히 하고, 잘 보관하고 있어.” 사내의 말이 이어진 순간, 여인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떠졌다. 적당히 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파악할 틈도 없이, 하복부를 파고들어오는 묘한 감촉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촉수였다. 동글동글하게 도드라진 돌기가 잔뜩 달린 괴물의 팔이 사정없이 꿈틀거리며 여인의 하복부를 더듬는다. 마치 무언가를 열심히 찾는 것처럼. 여인의 머릿속으로 혹시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무, 무슨 짓을…!” 그러나 여인의 말은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물컹물컹하면서도 굵은 무언가가 자신의 소중한 곳을 꿰뚫으려는 듯이 파고들어 왔기 때문이다. 이미 들어온 상태였지만 여인은 반사적으로 다리를 오므렸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우우우우우웅! 거세게 진동하는 소리. 소리의 근원은 촉수에 돋은 돌기였다. 여인의 음부를 파고들어간 촉수의 외피가 한순간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응은 곧바로 볼 수 있었다. “흐게에에에에에엑!” 헛바람을 들이켰던 여인의 입에서 절규에 가까운 비명이 폭발했다.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아프다는 느낌뿐이었지만, 진동이 시작된 이후 그 어떤 전조도 없이 내면의 감각이 벌컥 일깨워진 것이다. 그 감각의 정체는 극도의 쾌감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오르가슴. 음부부터 시작된 감각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순식간에 온몸에 흘러 넘쳤다. “흐엑! 흐엑! 흐부레에에에에엑!” 진동은 시시각각 심해졌고, 그럴수록 여인의 반응도 더욱 격렬해졌다. 한껏 젖힌 고개에서는 눈물과 콧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여인의 소중한 곳에서는 희뿌연 애액이 물총처럼 뿜어지는 중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여인의 눈이 까뒤집히고 혀까지 빼물려 나왔을 무렵, 비로소 소음이 사그라졌다. 이내 흥건히 젖은 촉수가 살그머니 빠져 나오자 여인의 몸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간간이 경련하는 걸로 보아 살아있는 것 같지만, 두 눈은 이미 초점을 잃은 상태였다. “좋아. 그럼….” 일련의 과정을 구경하던 사내는 괴물이 여인을 어깨에 걸치는걸 확인한 후 느릿하게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뭔가를 생각, 아니 찾으려는 듯 얼굴을 찡그리는가 싶더니 곧 한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쪽이다. 이쪽이 가장 경계가 없다.” 그렇게 말한 순간이었다. 한순간 사내와 괴물이 등지고 서 있던 수풀 틈으로 수백의 괴물들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와 동시에 여인을 걸친 괴물도 몸을 납작 엎드리더니 얼른 먹이를 먹고 싶다는 듯 사지의 촉수를 꿈틀꿈틀 움직였다. “가자. 사냥하러.” 이윽고 사내의 몸이 미끄러지듯 부드러이 나아가자, 괴물들 또한 같은 방향으로 일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분명 수백의 개체가 이동하고 있음에도, 그 어떤 소리도 그 어떤 기척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같은 시각. “흥~. 나는야~. 흐흥~. 천재 연금술사~. 흐흐흥~. 미소녀라네~.” 야영지 외곽, 어디선가 미성의 노랫가락이 울린다. 가사는 말도 안되나, 가락 자체는 꽤나 흥겨운 노래였다. 하지만 정작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추측은 할 수 있다. 하늘에 떠오른 달은 환한 달빛을 곳곳을 어슴푸레 비추고 있었지만, 오직 한곳만은 비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곳은 간이로 설치된 울타리 인근으로, 뜻 모를 어두운 운무가 감도는 곳이었다. 아마 김수현이 안력을 돋구어 주시한다면 울타리에 걸터앉은 채 방정맞게 다리를 흔드는 여인은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고요히 흐르는 정적. 오직 아름다운 노래만 흐르는 와중, 한쪽 방향에서 불길한 바람이 홀연히 들이닥쳤다. 그 탓에 고고하게 흐르던 운무가 움찔 흐름을 정지하자, 끈임 없이 이어지던 노래도 뚝 끊기고 말았다. “응응.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엥? 거의 다 왔다고? 벌써?” 과연 누구랑 말을 하는 걸까? 그때였다. 여인의 목소리만 홀로 이어지는 가운데, 돌연 남쪽 방향으로부터 무언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거미처럼 납작 엎드린 채 물 흐르듯이 들어오는 그것은, 다름 아닌 보초를 잡아먹은 괴물들이었다. “와. 진짜네. 하여간 김수현. 이런 건 정말 도사라니까. 도대체 오는 방향까지 정확하게 맞추는 게 말이 돼?” 여인이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수백의 괴물들은 울타리 지척까지 짓쳐 들어온 상태였다. “헤~. 저렇게 생긴 놈들이구나. 생각보다는 귀엽네.” 하지만 여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태연했다. “정지.” 이윽고 한없이 치고 들어오던 괴물들은 울타리를 넘지 못하고 우뚝 멈추고 말았다. 정확히는 어두운 운무를 약 30여 미터 남긴 채 정지했다. 달빛이 미치지 못하는 구역. 선두에 서 있던 사내가 부근에 광범위하게 흐르는 어둠에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다급히 정지 지시를 내린 것이다. “왜? 계속 들어오지 그래? 들어와~. 들어와 들어와~.” “먹이. 아니?” “먹이는 개뿔. 야. 들었냐? 너보고 먹이래. 요호호호~.” “…미친 암컷?” 사내가 머리를 갸웃했다. “뭐 임마?!” 반응은 즉각 튀어나왔다. “정신에 이상이 있다면, 진화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니 먹지 말고 그냥 죽여라. 그게 더 나을 것이다.” 그에 아랑곳 않고 사내가 괴물들을 쳐다보며 말했을 때였다. 쿠르르르르르르르! 뭔가가 맹렬히 끓어오르는 소리에 이어 어두운 운무가 돌풍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으로, 형이상학적 문양이 그려진 마법 진이 비로소 환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말을 멈춘 사내는 지그시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여인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오라! 피에르! 제 4군단을 지배하는 미친 불꽃의 어릿광대여!” 빠르게 소용돌이치던 운무가 중앙으로 똘똘 뭉치는가 싶더니, 이내 좌우로 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 후헤…. 후헤헤…. 후헤헤헤…. 그리고 들려오는 소슬한 웃음소리. 흡사 지하 깊숙한 구렁텅이에서 흘러나오는 듯, 어스름한 악성이 주변을 가득히 메우기 시작한다. 이내 갈라지는 중앙으로, 가히 수백에 다다르는 마수들이 차차 모습을 드러내었다. 여인의 정체는 비비앙이었다. 수백에 이르는 괴물 군단에 맞서, 똑같이 수백으로 이루어진 마수 군단을 소환한 것이다. 곧바로 모습을 드러낸,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거진 2미터는 되어 보이는 사내.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각양각색의 인간형 마수들. 그들의 모습 자체는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어디 서커스단이 왔나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뭐해? 가만히 서 있기만 할 거야?”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지면을 향하던 마수들이 일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동시에 여태껏 조용히 감겨있던 피에르의 두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떠지며, 시뻘건 살의가 폭사되듯이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그 순간, 비비앙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어렸다. “깡그리 먹어 치워버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피에르의 머리가 좌우로 괘종 시계추처럼 까딱까딱 흔들렸다. 두 눈은 초승달만치 휘어지며 맞은편 괴물들을 응시한다. 이윽고 빨갛게 칠해진 입이 귀밑까지 쫙 찢어졌다. - 끼에에에에에에엑! 기괴한 비명. 그것은 하나의 명령이 되어, 4군단의 마수들이 우르르 달려들기 시작했다. “크에에에에에에엑!” 물론 사내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곧바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 미친놈들처럼 정신 없이 달려오는 마수 군단을 가리켰다. 그렇게 서로의 기괴한 소리들이 중앙에서 맞부딪쳤다. 바야흐로, 두 괴물들의 먹고 먹히는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 작품 후기 ============================ 오늘 글을 쓰면서 들었던 BGM을 여러분들께 들려드리고 싶은데, 아쉽게도 인터넷 주소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 부분은 조금 아쉽네요. 하하하. 아. 그리고 혹시 오늘 내용의 수위는 어느 정도로 받아들이셨는지 궁금하네요. 차후 본 내용이 나오기 앞서, 살짝 맛보기로 보여드린 정도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의견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PS. 오xxx19 님께. 죄송합니다. 어제 말씀대로 코멘트를 자세히 보지는 못했습니다. 하루 쉰만큼 연참을 할 생각이었기에, 자정이 되기까지 글만 붙잡았거든요. 이후에 코멘트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급하게 다는 것 보다는, 그리고 늦었지만 후기로 정식으로 축하 드리고 싶었습니다. 생일 축하 드립니다. 부디 너무 속상해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0557 / 0933 ---------------------------------------------- 김수현, 한소영. 그리고 빗. 수백에 이르는 괴물과, 마찬가지로 수백의 마수. 모두 합치면 일천이 넘는 마물의 격돌. 그 중 살육의 첫 시작을 끊은 마물은 가장 선두에서 달려가는 제 4군단장. 미친 불꽃의 피에르였다. - 후헤헤헤! 마주 달려오는 괴물과 맞부딪치기 직전, 피에르는 크게 도약해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주둥이를 벌리며 자신을 돌아보는 괴물을 향해, 미친 듯이 웃어 젖히면서 두 팔을 휘둘렀다. 괴물의 눈앞에 섬뜩한 광채가 폭사되듯이 교차한다. 괴물의 목이 여지없이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둥근 곡선을 그리며 도로 떨어지더니, 어느새 입을 앙 벌리고 있는 피에르의 입 속으로 정확히 안착했다. 콰직! 단 한 입에 머리를 으깨버렸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간다는 듯, 피에르는 피가 흐르는 입을 닦으며 킬킬 웃었다. 두 눈동자가 시뻘건 빛으로 희번덕거리는 게 다음 먹잇감을 찾는 게 분명하다. 그것은 하나의 개전 신호나 다름없었다. 이내 군단장을 따라 우르르 뛰어든 마수들이 보이는 괴물마다 득달같이 달라붙기 시작한다. 비록 선공을 당하기는 했지만 괴물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사내의 지시에 따라 곧바로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여전히 엎드린 채 주둥이를 벌려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었고, 또 일부는 몸을 번쩍 일으켜 촉수를 현란하게 휘둘렀다. - 키에에에에에에엑! 사방에서 달려드는 마수에 촉수가 이리저리 찢긴 채 무너지는 동료를 감지했는지, 한 괴물이 분노에 찬 괴성을 터뜨렸다. 그리고 곧장 촉수를 내뻗어, 신나게 노니는 마수를 휘어 감고는 있는 힘껏 땅바닥에 처박아버렸다. 쾅! 쾅! 쾅! 쾅! 한 번 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는지, 부딪쳐 울리는 소리가 네 번이나 연달아 울렸다. 씩씩거리며 자욱이 피어오른 흙먼지를 바라보던 괴물은 순간적으로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단단히 감긴 마수가 부딪친 충격에 머리가 기괴하게 비틀린 상황에서도, 번들번들한 긴 낫 같은 손톱을 촉수로 찔러 넣었다. 거기다 와득 깨물며 히히 웃음을 흘리기까지. 그러자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은 괴물이 촉수를 재빠르게 회수하며 아가리를 쩍 벌렸다. 결국 날카로운 이빨에 몸통이 찢겨나가고 나서야 마수의 웃음소리가 사그라졌다. - 키히, 키히히히! - 키에에엑! 카아아악! 본궤도에 오른 두 마물들간의 격돌은 치열한 양상을 띠었다. 땅이 푹푹 파이고 흙먼지가 세차게 터져나간다. 괴성이 울부짖을 때는 여지없이 선혈이 허공을 수놓았다. 사방이 난전. 아니. 사실 난전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그냥 개싸움. 그래. 개싸움이다. 그 어떠한 전술도 전략도 배제한 채 살을 물어뜯고 사지를 찢어발기는 원초적인 광경은, 말 그대로 진흙탕의 개싸움을 보는 듯했다. “흐음….” 그 광경을 지켜보던 비비앙은 나직한 침음을 흘렸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전투의 흐름에서 뭔가 묘한 낌새를 느꼈기 때문이다. 피에르의 기선 제압까지는 좋았다. 첫 격돌에서는 확실한 우세를 점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괴물들의 대응이 점차 유연해졌고, 이제는 거의 비등비등한 상황까지 왔다. - 후헤헤헤헤헤헤헤! 어쩌면…. 지금 중앙을 종횡무진 휘젓는 피에르의 활약이 없다면, 전황은 불리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비비앙은 밝은 휘광을 뿌리는 질서의 오르도를 거머쥐었다. 지금 소환된 제 4군단은 총 66군단 중 6번째로 강력한 군단이다. 여기서 질서의 오르도에 내재된 마력 충전을 사용하면 하나의 군단을 추가로 소환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군단을 소환하느냐가 문제였다. 비비앙은 66 마수 군단 전부와 계약을 맺었다. 그런 만큼 이론상으로만 따지면 66군단 전부 소환이 가능하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보면, 지금의 비비앙은 66군단 전부를 소환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상위 군단의 소환에 필요한 마력이 한없이 부족한 상태였으니까. 지옥 친위대라 불리는 제 2군단은 물론, 지옥 정규 토벌대라 불리는 제 3군단도 힘겹다. 상황이 이러니 아직 세상에 단 한 번도 드러나지 않은, 오직 전설로만 전해지는 1군단은 언감생심이다. 특수한 상황과 조건을 만족해야 하는 6군단과 66군단을 제외하면, 결국 현재 비비앙이 소환 가능한 가장 강한 마수 군단은 바로 제 4군단이었다. 그래서 고민이었다. 단순히 한 군단을 추가로 소환해 수적 우위를 점하기에는, 눈에 보이는 괴물들의 움직임이 꽤나 애매하다. 애당초 4군단이 저렇게 박 터지게 싸우는데 하위 군단이 얼마나 힘을 실어줄지도 미지수였고. 오히려 가장 개성이 강하다는 4군단과 충돌해 전황이 더욱 어지럽게 변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였다. “흐으으읍!” 갑자기 어디선가 짤막한 기합 소리가 들리더니. 피피피피피피피핑! 몇 개인지도 모를 날카로운 파공음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비비앙이 느낀 거라고는 무언가 예리한 게 우수수 자신을 스쳤다는 것뿐. 잠시 후, 마수를 짓누른 채 거칠게 물어뜯던 괴물이 키에에엑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다. 멍하니 눈만 깜빡이던 비비앙은 이내 괴물의 미간에 정확히 꽂혀 들어간 열 개의 화살을 볼 수 있었다. 이내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려던 괴물은 재차 날아온 한 줄기 섬광에 도로 무너지고 말았다. 그제야 비비앙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더는 고민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번에 열 개의 화살을 쏘거나, 화살을 섬광으로 변화해 날리는 능력을 지닌 사용자는, 비비앙도 익히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왔구나!” 비비앙이 외쳤다. 그러자 그렇다는 듯, 오른쪽 팔을 들어올린 호리호리한 사내와 풍만한 가슴을 출렁이는, 아니 긴 머리를 휘날리는 여인이 지면에 가볍게 착지했다. “클랜 로드가 말씀하신 게 바로 너였군.” “고생했어요. 비비앙. 지금 클랜원들과 사용자들이 도우러 오는 중이에요.” 그들은 다름 아닌 선유운과 임한나였다. 비비앙은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두 궁수는 잠시 전방을 응시하고는 비비앙을 보며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런데 클랜 로드는 어디 계시지?” “클랜 로드님은 어디 있어요?” 비비앙은 도리어 어리둥절한 얼굴로 둘을 번갈아 보았다. “응? 김수현? 못 봤는데?” “못 봤다고?” “엉. 그냥 시간 좀 끌고 있으라는 말만 들었지, 여기 오지는 않았어.” “……?” 선유운의 얼굴에 의아함이 임한나의 얼굴에는 걱정 어린 기색이 그늘지었다. 하지만 곧 그럴 틈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갑작스럽게, 뭐라 형용키 어려운 기괴한 울림이 인근을 처절하게 울렸기 때문이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 소리가 워낙 거슬린 터라 임한나는 저도 모르게 두 귀를 틀어막았다. 선유운도 반사적으로 얼굴을 틀었다가 아차 하며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전방을 확인한 순간, 살며시 미간을 찡그리고 말았다. “…뭐지?” 한창 개싸움을 벌이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전황은 방금 울림을 기점으로 급작스럽게 변화하는 중이었다. 별안간 괴물들이 모조리 몸을 납작하게 엎드리더니, 처음 들어올 때처럼 물 흐르듯이 도망을…. 치지는 못했다. 피에르를 비롯한 마수들이 눈을 벌겋게 뜨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건 괴물들이 퇴각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 이내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울타리 안쪽에서 수십이 달려오는 기척과 무수한 함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괴물들은 더는 볼 것도 없다는 듯 빙글 몸을 돌렸다. 그걸 보는 선유운의 두 눈에 의미심장한 빛이 어렸다. * 환한 달빛이 숲 속을 비춘다. 대부분 수풀이 무성하게 깔려있으나, 드문드문 나 있는 너른 공터에는 달빛에 그림자가 소리 없이 꿈틀거리고 있다. 언뜻 보아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그림자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공터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런 그림자들의 선두에는 한 사내가 열심히 달리는 중이었다. 아니. 달린다는 말은 옳지 않을지도.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사내의 몸은 마치 미끄럼틀을 탄 듯 부드러이 흐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제 막 우거진 수풀 속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사내는 우뚝 몸을 멈추고 말았다. 그랬다. 사내와 뒤를 따르는 것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남부 원정대를 습격한 괴물들이었다. 지원군이 온 것을 알아차린 사내는 선두에서 싸우던 동료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재빠르게 도망치는 길을 선택했다. 사내는 캄캄한 숲 속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숲 안에서 무언가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 전신을 사정없이 찔러 들어온다. 익숙한 감각. 아까도 그랬다. 괴물들이 울타리를 채 넘지 못한 이유는 주변을 맴돌던 어두운 운무에서 묘한 기운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내에게는 길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현재 후, 좌, 우. 모두가 틀어 막혔다. 마수들과 사용자들이 세 방향에서 에워싸며 몰려오고 있다. 결국 길은 하나뿐이었다. 잠시 멈칫한 사내의 몸이 다시금 움직인다. 그리고 잠시 후. “흠. 이제 온 건가.” 낮은 목소리와 함께 전방에 조용히 서 있는 한 청년이 사내의 눈에 밟혔다. 사내는 안도했다. 아까와 같은 대규모 인원은 보이지도 않고, 오직 청년 홀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연초를 뻐끔뻐끔 피우는 여유만만한 태도로. 전방으로의 퇴각을 결정한 이상, 사내와 괴물들은 더 이상 흐름을 멈추지 않았다. 오죽하면 한 괴물이 벌써부터 사내를 우측에서 덮쳐들어 가는 중이었다. 어깨에 축 늘어진 여인을 걸친, 사내가 가장 먼저 먹이를 주겠다 약속한 괴물이었다. 그때였다. 괴물의 한껏 벌어진 주둥이가 막 닿으려는 찰나, 청년이 왼팔을 침착히 들어올렸다. 그리고 괴물이 들어오는 방향에 맞추어, 있는 힘껏 주먹을 후려갈겼다. 뻥! 주먹이 괴물의 머리를 강타했다. 그러자 타격한 지점이 깊숙이 함몰되는 것과 동시에, 반대편이 크게 부풀어 오르며 시원스럽게 터져나간다. 기세 좋게 달려가던 괴물은 터진 방향으로 피를 분사하며 하릴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때, 멈출 생각이 없던 사내의 몸이 저도 모르게 정지했다. “238…. 아니 237마리. 그래도 두 자릿수 정도로는 줄일 줄 알았는데. 설마 비비앙이 밀린 건가?” 그러나 이번에 멈춘 건 사내 혼자뿐이었다. 괴물이었을 때의 본능. 그리고 인간의 오감이 합쳐 이루어낸 하나의 진화된 감각이, 마침내 드러낸 청년의 살기에 반응해 경고를 보낸 것이다. 그러나 아직 진화하지 못한 괴물들은 다르다. 먼저 들어간 동료가 어이없게 당했음에도, 여전히 촉수를 휘두르며 미끄러지듯이 돌진하고 있었다 청년은 그에 아랑곳 않고 연초를 툭 떨구며 손을 털었다. 그러면서 쩝 입맛을 다셨다. “이러면 검을 쓸 수밖에 없잖아.” 첫 타로, 네 마리의 괴물이 청년을 에워싸며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청년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달빛을 섬뜩하게 반사하는 기다란 장검이었다. 청년의 눈에도 그 반사광처럼 서늘한 빛이 번뜩였다. 그리고 그 순간, 청년의 기세가 일변했다. 청년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거의 2미터를 넘게 뛰어오르자 사방에서 달려오던 괴물들이 일제히 촉수를 내뻗었다. 그러나 허공에서 빙글 몸을 회전시켜 공격을 가볍게 피하고는, 정면의 괴물을 향해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푹! 청년의 발이 괴물의 어깨에 닿음과 동시에 검이 정수리를 파고들었다. 동시에 괴물의 머리에 울룩불룩한 고저가 생기더니 또 한 번 펑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 피와 뇌수가 우수수 비산하는 가운데 다른 괴물들은 재차 촉수를 날렸고, 그것들은 이번에는 사내의 몸을 정확히 꿰뚫었다. 지켜보던 사내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그리고 잠시 후, 청년의 몸이 미약한 노이즈를 일으키며 홀연히 사그라졌다. 탁! 어느 틈에 움직인 걸까? 청년의 신형이 하강하며 원래 서 있던 자리에 사뿐히 착지했다. 사내는 청년의 움직임을 읽지 못했다. 오직 보이는 거라고는, 검 끝에서 실처럼 이어지는 가는 핏줄기. 그리고 한 발짝 늦었지만, 동료들의 부근을 밝히는, 눈부실 정도로 쉴 새 없이 번쩍이는 빛무리들. 채채채채채채채채챙! 이윽고 뜻 모를 검음이 사라지며, 괴물들은 온몸에서 체액을 뿜어내며 동시에 허물어졌다. 쿵! 비로소 전투가 멎었다. 사내뿐만 아니라 모든 괴물들이 동작을 정지해 청년을 응시했다. 퇴각을 목적으로 한 괴물들이 전력으로 달려들었는데, 너무나 손쉽게 쓰러졌다. 그것도 모자라 마치 몸풀기는 됐다는 듯 검을 빙글빙글 돌리기까지. 문득 불어온 바람에 단정히 가라앉은 머리가 살며시 휘날린다. 이윽고 청년이 시선이 주변을 쓱 훑었다. 사내는 온몸이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 돌아보던 두 개의 눈동자가, 일순 붉은 안광을 흘리며 사내에게 고정됐기 때문이다. “파더는 안보이네…. 다른 놈들은 잔챙이고. 그나마 저놈이 여기서 유일하게 진화한 놈인가?” 그 말을, 사내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 순간 사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외쳤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리고 있는 힘껏 옆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괴물들 또한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청년은 삽시간에 멀어지는 사내를 보고는 싱겁게 웃었다. “여전히 상황 판단은 빠른 놈들이군.” 청년은 잔뜩 몸을 웅크렸다. 이어서 곧바로 활짝 펼치는 것과 동시에, 청년의 신형이 사내가 도망친 방향으로 크게 퉁겨졌다. 삽시간에 모두가 사라진 공간에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오직 지면에 흐트러진 5개의 시체만이 쓸쓸히 남아있다. 깊은 밤. 그리고 어두운 숲에서. 학살이라고 부르기는 조금 미묘한, 때아닌 사냥철이 시작되었다. ============================ 작품 후기 ============================ 어제 코멘트 감사합니다. 의견은 잘 읽어보았습니다. 사실 솔직하게 말씀 드려보자면…. 글을 적으면서 개인적인 바람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바로 야한 내용을 적을 때, 여러분의 반응이 제가 원하는 대로 나오기를 요.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음. 설마 로유진 님이 이렇게 수위 높은 내용을 쓰실 줄은 몰랐는데요. 아무튼 더는 씬 고자는 아니신 듯.” “어머 어머. 민망해라. 이거 너무 야하잖아요. 망측해. 어쨌든 이 정도면 씬 고자는 아니시네요.” “오. 이렇게 음란하게 쓰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리 노블레스라지만, 이거 너무 야한데요? 씬 고자 아니세요.” “와. 글만 읽었는데도 흥분되네요. 얼굴이 화끈거려요. 확실히 이 정도면 씬 고자가 아니죠.” 예. 제가 아는 분들에게 씬 고자라고 놀림을 받아서 이러는 건 절대 아니고요. 아무튼, 물론 그리 건전하지는 않은 바람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완결 전 한 번쯤은 이런 반응이 나오게끔 적어보고 싶습니다. …그냥 그렇다고요. ㅜ.ㅠ 0558 / 0933 ---------------------------------------------- 김수현, 한소영. 그리고 빗. 다음날 아침. 남부 원정대의 야영지는 그 여느 때보다 시끄러웠다. 그럴 수밖에 없다. 괴물이 출현한 이후 남부 원정대는 여태껏 줄곧 당하기만 한 입장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괴물의 정체를 파악하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오죽하면 이번 괴물이 실체가 없는 유령이 아닐까 하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 새벽 습격 이후, 상황이 일변했다. 비비앙은 내가 지시한 지점에서 괴물들과 맞닥뜨렸고, 마수 군단을 소환해 전투에 임했다. 그 결과 유령이라고 불리던 괴물의 시체를 다수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 또한 놈들의 도주로를 예상해 숲 속에서 기다림으로써, 비록 한 마리에 불과하지만 사람의 모습으로 변태한 개체를 잡을 수 있었다. 지금껏 주구장창 당하기만 하던 남부 원정대에, 비로소 첫 승전보가 울린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승리는 단순히 기조의 반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괴물의 샘플을 무려 두 종류나 얻었다는 것. 말인즉, 괴물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에서 나아가 시체를 분석할 여지가 생겼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오늘 아침은 정말이지 무척이나 소란스럽다. 이미 괴물에 대한 분석은 끝난 상태였다. 새벽의 모든 전투가 끝난 이후, 나는 진화한 시체 한 구와 상태가 양호한 시체를 모조리 수거해 이스탄텔 로우에 양도했다. 한소영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사용자들을 끌어 모아 밤을 새며 분석했고, 아침이 되자마자 분석한 사실을 부대장과 클랜 로드들에 전파했다. 물론 그 내용은 나도 받을 수 있었다. 대충 훑어보니 맞는 것도, 조금 다른 것도, 틀린 것도 있었으나, 약 70% 일치하는 정도였다. 진화에 관한 부분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거야 내가 아닌 이상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이고. 그 외의 부분은 거의 맞았다. 예를 들면 시각을 제외한 다른 부분이 매우 예민하다는 것과 온몸에 돋은 돌기의 용도. 그리고 그에 대한 예상 대응 방법 등등. 한소영은 밝혀낸 모든 부분을 확실하게 숙지해두라는 엄명을 내렸다. 또한 차후 부대장들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즉 돌발 행동을 하는 사용자가 나온다면, 즉결 처분까지 염두에 두겠다고 덧붙여 내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그 말이 얼마 전 화계를 실행한 사용자들 지칭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좌우간 아침의 소란과 괴물에 관한 확인 사항 등으로 조금 늦어지기는 했지만,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즈음, 남부 원정대는 야영지를 정리하고 새로이 진군을 시작할 수 있었다. 가장 선두에서 행군을 하면서 확실히 기조가 변한 게 느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무언가 억지로 이끄는듯한 기분을 받았는데, 오늘은 다르다. 오르막길도 쭉쭉 올라가는 게 꽤나 탄력적인 느낌이다. 오죽하면 행군 와중 “오늘은 이놈들 안 나오나?”라는 말이 들려올 정도였다. 그렇게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으며 기억 상으로 마지막 산봉우리를 통과한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풍경을 맞이할 수 있었다. 산을 오를 때까지의 길이 울퉁불퉁하고 수림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무성했다면, 내려온 후의 풍경은 판이하게 다르다. “이건…. 꼭 능이 빽빽이 모여있는 것 같은데요.” 마침 내려온 고연주가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눈에 보이는 건 우거진 나무나 수풀이 아닌, 지면이 구불구불하게 비탈진 여러 언덕의 모임을 보는 듯했다. 각각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 외에는 어느 것도 보이지 않는 게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감돌기까지 했다. “와. 그래도 좋네요. 시야도 탁 트이고, 산봉우리도 보이지 않고. 그동안 엄청 갑갑했는데.” “맞아요. 맞아요. 근접 계열 분들은 괜찮을지 모르지만, 우리 같은 사제나 마법사들은 산을 오르는 것도 힘들다고요.” 남다은이 두 팔을 활짝 펼치며 상쾌한 목소리로 말하자 안솔이 금방 동의했다. 나는 눈앞의 지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여기도 그리 안심할 수 있는 지역은 아닙니다. 확실히 시야는 트였지만, 언덕들 사이사이로 숨을 수 있는 지형이 많으니까요. 그러니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클랜원들은 새로 출현한 지대에 좋아하다가, 내 경고에 냉큼 입을 다물었다. 나는 잠시 언덕을 둘러보고 나서 선유운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선유운.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중앙 부대가 내려오면 방금 말한 내용을 그대로 전달해주세요. 그리고 오늘부터 행군 속도를 조금 높이겠다고도 해주시고요.” “알겠습니다.” 선유운은 차분히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행군을 재개하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동부 요새를 나온 이후 총 4개의 산맥을 넘었다. 그리고 방금 돌입한 지역은 1회 차에서 언덕의 그림자라 불리는 지대로, 지금 우리를 습격하는 놈들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었다. 즉 이 지역만 무사히 넘길 수만 있다면 놈들의 근거지가 나온다는 소리였다. 사실 지금 괴물들이 출현하고 서너 번 전투를 벌였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전초전이라 보기도 어렵다. 탁 까놓고 말해서, 그냥 살짝 맛을 본 수준에 불과했다. 진정한 전투는, 근거지를 넘어 놈들의 수장 격인 파더가 잠들어있는 안쪽 장소까지 공략하러 들어갔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그리고 거기서 파더를 공략하게 되면, 그제야 강철 산맥 공략의 절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흠?” 그때였다. 한창 차후 공략에 고심을 거듭하던 와중, 돌연 마력 감지에 매우 미약한 기척이 걸리는 게 느껴졌다. 어느덧 우리는 한 언덕의 정상에 올라 도로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저 속도를 한껏 낮추며 기척이 잡힌 곳을 흘끗 응시했다. 60미터 앞. 딱히 눈에 들어오는 건 없다. 그저 높이 솟은 언덕과 햇빛을 가려 생긴 그림자만이 여전히 보일 뿐. 하지만 나는 마력 감지를 자신했다. 놈들의 촉수는 지면에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고 미끌미끌하지만, 어쨌든 움직임 자체의 진동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결국 놈들의 기척을 느끼려면 마력 감지의 밀도를 얼마나 높이느냐가 관건이다. 또한 언뜻 느끼기에는 주변 자연의 흐름과 다른 게 없으므로, 아주 잠시 생기는 미세한 비틀림을 알아내야 한다. 예를 들면 지금 저기 보이는 그림자가 잠깐 꿈틀거리는걸 알아챌 정도로. “수현. 무슨 일이에요?” 가장 처음 이상함을 감지한 건 고연주였다. 내 옆으로 바짝 붙으며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행군 속도를 높이겠다고 해놓고 오히려 느려지는데 의아함을 느낀 모양.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섯…. 아니 여섯 마리 정도.” 고연주의 두 눈이 대번에 가늘어졌다. “어디인가요?” “50미터 앞 언덕 두 개. 좌측에 둘…. 아니 넷. 우측에 둘.” “Ok. 어디인지는 알겠어요. 마침 좋은 방법이 생각났으니 저한테 맡겨주세요.” “좋은 방법이요?” 고연주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고연주가 드리운 그림자가 삽시간에 여러 갈래로 갈라져 쇄도했다. 그걸 확인한 순간 그 방법이란 게 무엇인지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어, 나는 지체 않고 무검과 일월신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날카로운 쇳소리와 동시에 클랜원들이 흠칫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내가 검을 뽑았다는 건 일종의 개전 신호와 다름없다. 그렇게 약 10미터를 추가로 전진했을 무렵. “지금!” 고연주가 날카롭게 외치며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자 마치 낚싯대에 걸린 물고기가 낚여 올려지듯이, 두 언덕에서 6마리 괴물이 우수수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그런 괴물의 촉수에는 시커먼 그림자들이 꽁꽁 묶인 상태였다. 언덕을 등진 채 몸을 숨기고 있었지만, 고연주의 그림자를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가만히 있던 것도 잠시. - 키에에에에엑! - 키에에에에엑! 놈들은 곧 허공에 매달린 채 괴성을 질렀고,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듯 미친 듯이 난동을 부렸다. 나는 들고 있던 검 두 개를 곧장 허공으로 날렸다. 궁수들 또한 허공에 떠오른 표적들을 향해 곧바로 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허공으로 날아간 검과 화살은 각각 좌우 괴물들의 몸을 정확히 꿰뚫었다. 그러자 2차로 솟아오른 수십 줄기의 그림자가 그 사이로 재빠르게 파고들더니, 이내 울컥 터지며 괴물들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거센 비명이 주변을 왕왕 울렸다. “아?” 하지만 모두를 처치하지는 못했다. 온몸이 걸레가 된 괴물은 네 마리에 불과했다. 나머지 두 마리는 화살이 꽂히기 직전, 스스로 그림자에 잡힌 촉수를 떼어내 도로 떨어졌다. 떨어진 두 마리는 곧바로 언덕 사이로 몸을 숨겼고, 이내 종적을 감추었다. 나는 재빠르게 마력 감지를 돌렸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감지를 벗어나는 기척 두 개가 잡혔다. “놓치면 안 돼! 전방으로 40, 45, 아니 50미터!” 그러자. “Terraemotus.” 콰르르르르르르릉! 헬레나의 목소리와 동시에, 전방의 일대가 무섭도록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강도가 심했는지 언덕이 무너질 정도였다. 이윽고 감지에 더욱 확실히 잡히기 시작한 두 마리의 기척을 느끼며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오늘 한소영이 발표한 대응 중 하나가 바로 놈들과 맞닥뜨리면 무조건 지계 마법을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괴물들은 이동 시 촉수와 돌기를 이용해 기척을 거의 남기지 않는다. 하지만 지면 자체를 흔들어버리면 결국에는 이리저리 부딪칠 수밖에 없으니, 그에 따라 기척이 강제적으로 확실해지는 것이다. 이 정도로 기척이 확실해졌다면 다른 사용자들도 감지가 가능하다. “───. ───. ───. 디그 인 더 그라운드!” “───. ───. ───. 디그 인 더 그라운드!”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 영창을 마친 마법사들이 일말의 주저 없이 주문을 외웠다. 디그 인 더 그라운드. 지면을 강제로 파내 구덩이를 만드는 기초 중의 기초 마법. 하지만 아무리 기초라고 하더라도, 수십 명의 동시에 시동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앞을 보면 알 수 있다. 무너진 언덕 너머로 평평하던 지면이 푹푹, 사정없이 파이기 시작한다. 언뜻 보면 중구난방으로 파이는 것 같지만, 계속해서 파이다 보면 결국에는 하나의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진다. 아마 지금쯤 괴물들은 죽을 맛일 것이다. 몸을 가누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조금이라도 이동할라치면 구덩이가 사정없이 파여버리니. 물론 여기서 끝나는 건 아니었다. 피피피피피피피핑! 구덩이를 표적으로 재차 날아가는 수십 발의 화살. “천벌을 내리소서!” 이어서 안솔의 앙증맞은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번쩍! 하늘에서 내려온 서너 줄기의 새하얀 벼락이, 구덩이 안쪽을 거세게 내려쳤다. 좋은….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번쩍! 번쩍! 번쩍! 번쩍! …한 번으로는 모자랐는지 안솔은 연달아 네 번이나 천벌을 발동했다. 그리고 잠시 후, 조금 전까지 느껴졌던 두 개의 기척이, 천벌을 기점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흘끗 시선을 돌리자, 숨을 씩씩 몰아 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잘했어.” 칭찬해주자, 안솔이 벌건 얼굴을 한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잘했어요?” “응. 좋은 연계였다.” “와. 칭찬받았다. 그럼 한 번 더!” “……?” “천벌을 내리소서!” “…….” “천벌을…!” “아니. 이제 그만해도 돼.” 이미 죽었는데 왜 자꾸 마력을 낭비하는 걸까. 어쨌든, 안솔은 그제야 천벌을 멈췄다. 잠시 후, 누군가 조용히 주문을 외우자 크고 깊게 파인 구덩이 안에서 흙으로 만들어진 뾰족한 기둥이 솟아나왔고, 그에 괴물들의 시체도 슬금슬금 밀려나왔다. 비로소 드러난 괴물의 시체는, 화살이 우수수 꽂힌 것도 모자라 온몸에서 허연 김을 피우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일단 적던 내용 중간에 잘라서 올립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네요. 아마 오늘 1회 더 올라갈 듯싶습니다. 아침쯤이면 보실 수 있으실 거예요. 최대한 빠르게 적어 올리겠습니다. :) 0559 / 0933 ---------------------------------------------- 김수현, 한소영. 그리고 빗. 좋다. 절로 흡족한 기분이 들어, 나는 가볍게 머리를 주억였다. 비록 6마리밖에 출현하지 않았지만, 쭉 이어진 흐름을 보면 나름 괜찮은 전투였다. 한소영이 요구한 대응 방법을 그대로 실행해주었다. 그 방법이 정말로 효과가 있는지, 이번 전투에서 우리가 증명한 것이다. 또, 예전처럼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인가. 나는 우선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전투가 끝난 후, 나는 자리에서 10분 가량 대기할 것을 명령했다. 흐트러진 배열을 가다듬고 시체를 회수하려는 일환이었다. 이내 앞쪽에서 무참히 찢어진 시체를 들어올리며 머리를 설레설레 젓는 선유운을 보고 있자, 문득 고연주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이상하네요. 수현. 이번에는 왜 6마리만 습격한 걸까요? 예전처럼 대규모가 아니라.” 그거야 간단하다. “습격이 아닙니다. 정찰하러 나온 놈들이지요.” “네? 정찰이요?” “예. 놈들은 지능이 있습니다. 그리고 매우 교활하죠. 무작정 달려드는 짐승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런 만큼, 어젯밤 패배 이후로 우리가 무엇이 달라졌는지 확인하러 나왔을 겁니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한 명 정도 납치를 시도했을 수도 있고요.” “아.” 그제야 이해가 됐는지 고연주가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아까 놓치지 말라고 한 거군요.” “이제부터는 절대로 정보를 주지 말아야 하니까요. 이번에 그림자를 이용한 방법도 아주 좋았습니다.” 나는 터벅터벅 걸어오는 사용자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회답했다. 이윽고 시체가 너무 훼손이 심해 도저히 가져올 수가 없었다는 보고를 마지막으로, 나는 행군의 재개를 알렸다. *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6마리 괴물들을 간단히 처리한 이후, 자신감을 얻은 남부 원정대는 계속해서 언덕을 넘으며 진군했다. 그러나 괴물들은 더는 습격해오지 않았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해 질 녘 노을이 깔릴 때까지 행군하는 동안 단 한 놈도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밤을 새고 행군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결국 남부 원정대는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야영지를 설치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모두가 저녁 식사를 마친 이후, 사용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일부는 경계를 서야 했고, 일부는 잠을 자러 천막에 들어갔다. 그리고 또 일부는 중앙의 커다란 천막으로 모였다. 이제는 연례 행사처럼 굳어진 지휘관 회의였다. 하지만 오늘 회의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럼 회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고, 오늘 밤은 푹 쉬도록 하세요.” 한소영이 회의가 파함을 선언하자, 가벼운 박수가 뒤따랐다. 그리고 하나같이 웃는 얼굴로 몸을 일으킨다.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광경이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서로 씨근거리며 얼굴을 붉히기가 일쑤였는데, 이제는 서로 악수를 나누거나 수고했다고 덕담을 나누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랬다. 원정대의 분위기는 확실히 변화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더는 정체 모를 괴물에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한소영이 발표한 대응 방법도 오늘 아침 교전에서 확실한 효과를 보았다. 첫 괴물 출현 이후 삐걱거리던 남부 원정대가, 공략에 한 발 진전을 보임으로써 다시 원활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모든 사용자들이 천막을 나선 후, 한소영은 텅 빈 천막을 보며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는 바로 오른쪽 자리에 시선을 고정했다. 머셔너리 로드가 앉았던 자리였다. 그러나 회의가 끝나자마자 나갔는지 김수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한소영은 한동안 김수현이 앉았던 자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휑하네.” “언니. 회의 끝났죠? 그럼 치울게요.” 두 명의 높은 목소리가 동시에 흘러들었다. 한소영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있는 힘껏 기지개를 피는 늘씬한 여인과 찢어지듯이 하품하며 입을 두드리는 한 꼬맹이를 볼 수 있었다. 연혜림과 박다연이었다. “나는 기록 정리할게. 너는 의자 집어넣어.” 한소영의 침묵을 긍정으로 알아들었는지, 연혜림은 탁자에 흐트러진 기록을 하나하나 모으기 시작했다. 이내 하품을 마친 박다연도 의자 쪽으로 자박자박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한소영도 도와줄 생각에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막 의자를 집어넣으려던 박다연이 얼핏 고개를 돌렸다. “아차. 소영이 언니. 고맙다는 말은 했어요?” “응?” 한소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박다연은 배에 잔뜩 힘을 주며 의자를 드르륵 밀어 넣었다. “머셔너리 로드한테요. 들어오면서 마주쳤어요. 오늘 경계 순번이라고 하시던데.” “…그래?” “네. 그런데 그 사람 확실히 대단하기는 해요. 고작 하루 만에 원정대 분위기를 완전히 뒤바꿨잖아요. 아무튼 언니. 이대로 입 싹 닫기는 좀 그러니까, 찾아가서 고맙다고 말이라도 좀 해봐요.” “왜? 뭐가 고맙고, 대단한 건데?” 회답은, 한소영이 아닌 연혜림에게서 나왔다. 박다연은 다시 종종 걸음을 옮기며 의자를 잡았다. “어제 새벽 습격이요. 시체 우리한테 건네줬잖아요.” “그런데?” “네? 그런데 라니요?” “나는 열 받던데. 그거 때문에 잠도 못 자고 밤새 조사에 매달렸잖아.” 그러자 박다연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연혜림을 응시했다. 그리고 한숨을 푹 흘리더니 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후유. 됐어요. 말을 말죠.” “너 또 그런다. 빈정대지 말고. 그럼 설명을 해주던가.” “아니. 정말 몰라서 물어요? 어제 습격에서 괴물들이랑 부딪치고, 시체 수습한 사용자들이 누구에요?” “머셔너리 클랜이지.” “그렇죠. 그럼 그 시체를 하나의 성과로 볼 수 있겠죠? 그런데 그 성과를 모조리 우리한테 넘기고, 조사 및 발표를 우리가 했어요. 그리고 우리가 발표한 내용이 오늘 실제로 효과를 봤고요. 물론 그것도 머셔너리 클랜이 증명해주었고요. 즉 이 모든 게 다 머셔너리 로드가 우리한테 양보한 거고, 이루어준 거라고요. 네? 이제 이해했어요? 언더스탠드?” “아니.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 박다연의 말인즉, 재주는 머셔너리가 부리고 돈은 이스탄텔 로우가 챙겼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연혜림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박다연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래. 머리에 전투만 들어찬 사람한테 기대한 내가 바보지.”라고 중얼거리고는, 설명을 포기한 듯 도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박다연의 두 눈이 휘둥그래 변했다. “어?” 한소영이 보이지 않는다. 언제 나갔는지 텅 빈 의자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한편. 같은 시각. 둘이 다투는 사이 천막을 나선 한소영은, 어딘가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박다연의 말에 따르면 오늘 김수현은 경계를 서야 한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김수현은 남부 원정대에서 클랜 로드를 넘어 부대장의 신분이지만, 경계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 심지어 한소영도 순번이 되면 경계를 서야 하는 입장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의 혜택은 있다. 다른 사용자들과 똑같이 외곽을 경계하는 건 아니고, 야영지 중앙에 가만히 앉아있는 정도랄까. 그런 만큼 혹시 모를 일이 터지게 되면, 경계를 서는 사용자들은 중앙의 지휘관의 명령을 받게 된다. 타닥타닥! 타닥타닥! 그 중앙에는, 모닥불 하나가 탁탁 불똥을 튀기며 타오른다. 그리고 모닥불 주변으로는, 한 사내가 통나무에 걸터앉은 채 무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내의 정체는 다름 아닌 김수현이었다. 한소영은 가만히 그런 김수현을 관찰했다. 무척이나 집중하는 얼굴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회의가 끝났음에도 공략을 점검하고 있구나. 불빛이 스며든 발간 눈동자로 지도를 보는 모습은, 뭇 여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정도로 진지했다. 왜. 그런 말도 있잖은가. 여인은 무언가에 집중하는 사내에 반한다고. “응?” 그때였다. 모종의 시선을 느꼈는지, 한창 지도를 짚던 김수현이 언뜻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가만히 서 있는 한소영을 바라본 순간 놀란 토끼 눈으로 입을 열었다. “어. 이스탄텔 로우 로드?” 한소영은 순간적으로 멈칫했지만, 이내 담담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모닥불로 다가가 남몰래 호흡을 추슬렀다. 김수현의 시선이 따라 올라왔다. “놀랐습니다. 여기는 어쩐 일로….” “머셔너리 로드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하고 싶은 말이요?” “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앉아도 될까요?” 실례가 될 리가 있나. 김수현은 곧장 머리를 끄덕이며 한 쪽으로 비켜 앉았다. 그리고 걸치고 있던 하늘의 영광을 벗어 통나무에 덮어주기까지. 한소영은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한 가슴을 추스르며, 김수현이 마련해준 자리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 “…….” “…….” 잠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타닥타닥! 아니. 잠시가 아니었다. 한소영이 앉은 이후, 꽤 오랜 시간 동안 침묵이 흘렀다. 분명히 할 말이 있다고 한 것 같은데. 김수현은 안절부절못하며 옆을 힐끔거렸으나, 한소영은 양 무릎을 꼭 모은 채 지그시 모닥불만 바라보고 있었다. “음….” 결국 참지 못한 김수현이 먼저 입을 열 무렵, 문득 꾹 닫혀있던 한소영의 입술이 살그머니 떼어진다. 김수현은 반사적으로 입을 닫았다. 그리고 뚫어질 듯이 한소영을 응시했다. 그런 김수현의 눈에 뇌쇄적인 미를 뿌리는 새하얀 목울대가, 꼴깍 움직이는 게 밟혔다. “머셔너리 로드.” 오랫동안 주저하기는 했지만, 마침내 한소영의 말문이 조용히 열렸다. 김수현은 덩달아 긴장했다. “저….” “예, 예. 말씀하세….” “되게 한심하지 않나요?” “…예?” 김수현은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한 채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한소영은 도리어 무덤덤했다. 오히려 서글픈 기색을 내비치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김수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번에 강철 산맥을 공략하면서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만일 머셔너리 로드가 남부 원정대에 없었다면 어땠을까….” “…….” “사실, 어제까지 남부 원정대의 상황이 굉장히 안 좋았잖아요. 제가 어떻게든 해결했어야 하는 일이었어요. 그래야 했는데, 총 사령관이라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하고 구경만 했죠.” “…….” “그렇게 하루하루를 소득 없이 고민만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머셔너리 로드는 아주 간단하게 해결해주셨어요.” “…….” “요즘 제 능력이 한참이나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어쩌면 총 사령관의 자리는, 제가 아닌 머셔너리 로드에 더….”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그 순간, 지금껏 묵묵히 듣고만 있던 김수현이 한소영의 말을 딱 짤라 끊었다. 단호한 목소리였다. 이윽고 김수현은 전보다 더욱 높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스탄텔 로우 로드가 잘못 생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쓸데없는 걱정이죠.”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신랄한 비판. 김수현의 말이 이어졌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강철 산맥은 혼자서는 절대로 공략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닙니다.” “알고 있어요. 분명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리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르는 법이에요. 저는 그 책임을….” “예. 그렇죠. 그리고 이스탄텔 로우 로드는 그 책임을 나누었죠. 저를 신뢰해 선봉 부대에 임명했고 또 그만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건, 이번 공략에서 저에게 기대하는 게 있어서 그러신 게 아니셨는지요.” “…네.” 이제는 약간 화난듯한 김수현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한소영은, 간신히 수긍했다. 강철 산맥은 혼자서 공략할 수 없다. 김수현도, 한소영도 알고 있다. 그 한 마디에는, 사실상 김수현이 할 수 있는 모든 조언과 위로를 포함한 상태였다. 그제야 김수현이 굳은 얼굴을 풀고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이해하신 것 같아 다행이네요.” “머셔너리 로드.” “아니요. 똑같은 말이라면 더는 듣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아까 말도 못 들은 걸로 하지요. 설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말씀하신 건 아닐 테니까요.” “…….” 이번에는 한소영이 입을 다물었다. 왜냐하면 그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사실 처음에는 박다연의 말마따나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왔는데, 김수현을 보고 앞에 서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약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왜 그런지는 한소영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모른 척 하려고 하는 건지도. 평소에는 무시무시한 철벽을 쌓아두지만, 결국에는 한소영도 여인이다. 힘들 때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고, 위로 받고 싶어하는 한 명의 평범한 여인. 철혈의 여왕은 홀 플레인에 들어와 갖게 된 이명에 불과하지, 한소영의 본질을 이루지는 못한다. 서로 침묵한 채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한소영은 다시 모닥불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한소영의 입가가 곧 천천히, 그리고 미미하게 움직였다. 정작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여전히 한소영을 쳐다보는 김수현의 얼굴에 돌연 멍한 기색이 떠올랐다. 한소영이 입을 열었다. “혹시 아시나요?” “예, 예?” “저는 머셔너리 로드를 볼 때마다 항상 감사하고, 또 미안해요.” “어…. 음….” “잘 생각해보면, 어느 순간부터 항상 받기만 한 것 같거든요. 머셔너리 로드는 주시고, 주시고, 또 주시고. 저는 받고, 받고, 또 받고.” “아. 저는…. 그냥….” “알아요. 머셔너리 로드가 저를 진심으로 생각해주시고 아껴주시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래서 더욱 미안해하는 건지도 몰라요. 계속 받기만 하는 입장에서는요.” “그, 그러신가요.” “네. 그래서, 가끔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아니, 확실히 생각을 해요.” “……?” 문득 말을 멈춘 한소영은 이내 후우, 숨을 길게 흘렸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김수현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나도…. 나도, 머셔너리 로드에게 무언가 해드리고 싶은데…. 라고….” 이것은, 어떻게 보면 폭탄 발언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한소영으로서는 최대한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그 누구도 넘을 수 없는 철벽을 쌓았고, 차후 철혈의 여왕이라 불리는 여인이 그런 발언을 했다? 다른 사내들이라면 언감생심 꿈도 못 꾸는 일. 여기서 김수현이 조금만 더 눈치가 좋았다면. 아니, 한소영에 품은 감정이 아주 약간만 달랐다면. 그 의미를 정확히 알아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김수현이었다. 타닥타닥! 활활 타오르는 불빛에 한소영의 양 볼이 발갛게 익은 가운데. 한동안 망연히 있던 김수현의 얼굴에, 갑작스럽게 앗 하는 기색이 스쳤다. 그리고 무언가를 기대하는듯한 한소영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이스탄텔 로우 로드. 조금 뜬금없지만, 혹시 저번에 제가 드린 빗, 가지고 계십니까?” “…빗이요? 네. 있어요. 항상 가지고 다녀요.” 정말 뜬금없는 말이기는 했지만, 한소영은 곧장 회답했다. 달라졌다. 예전이라면 놔두고 왔다거나, 아니면 자기도 모르게 갖고 있다고 말을 했을 텐데. 이제는 항상 가지고 다닌다는 하나의 진실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면 김수현이 기뻐해줄 것 같았으니까. 이윽고 한소영이 정말로 빗까지 꺼내 보이자 김수현의 두 눈동자에 밝은 이채가 스쳤다. “저 그러면 말입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간절한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간절한 부탁? 한소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초감각이 변화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수현에게서 하나의 확고한 자신감이 느껴졌는데, 갑작스럽게 굉장히 조심스럽게 변했기 때문이다. 한소영은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김수현은 입에 침을 적시더니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머리…. 음….” “응?” “그러니까, 머리…. 머리 한 번만 빗어드리면 안되겠습니까?” “…네?” 한소영은 의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처음으로 예쁜 아미가 좁혀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용기 내어 진심을 말했는데,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기껏 돌아온 말이 머리 좀 빗어주면 안되겠냐고 한다. 화를 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웃어야 하나. 당최 감을 잡지 못할 무렵, 또 한 번 초감각이 전해주는 정보가 변화했다. 그것은 하나의 욕망이었다. 그래. 욕망. 하지만 성욕이나 육욕 같은 추악한 욕망은 아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기분 나쁘게 느껴지는 욕망은 아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저 꼭 한 번 해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 한순간 무수한 고민이 들었지만, 한소영은 곧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어차피 해둔 말도 있겠다. 또 딱 잘라 거절하기에는 그 열망이 너무나 간절하고 애절하게 전해져, 결국 한소영은 고개를 끄덕여 허락해주었다. 이윽고 빗을 건네 받은 김수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한소영의 뒤에 섰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등 뒤로 덜덜 떨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러자 한소영의 내면으로 뜻 모를 창피함과 부끄러움이 가득 차오른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걸까? 요즘에는 머리 제대로 다듬지도 못했는데. 등등. 아직 당혹감이 가시질 않았는지, 한소영의 머릿속으로 실없는 상상이 자꾸만 차오른다. “그럼.” 그때, 김수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다루는 듯이, 빗을 정수리 위에 올려놓았다. 살짝, 닿았다. 이내 빗을 살그머니 구부린 김수현은 정수리부터 아래까지 단번에, 그러나 부드러이 빗어 내렸다. 빗에 걸린 윤기 흐르는 머리칼이 사르르, 곱게 정리된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아…?” 두 눈이 절로 크게 떠지는 것과 동시에, 한소영의 입에서 야릇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본능적으로, 재빠르게 입을 막았다. 그러나 미처 생각할 틈도 없이, 한소영은 자신의 머리칼을 살며시 그러모으는 기척을 느꼈다. 그 누구에게도 허락한 적 없는, 처음으로 닿는 외간 사내의 손길. 이윽고, 빗은 다시 한 번 머리칼을 시원스럽게 쓸어 내렸다. “하아…. 읍!” 또다시 절로 흘러나온 신음. 한소영은 흐트러지려는 얼굴을 참으며 최대한 무표정 하려 애썼다. 그러나 김수현의 빗은 계속해서 빗어졌다. 빗는다. “윽…!” 빗는다. “흡…!” 빗는다. “흑…!” 한소영은 필사적으로 신음을 삼켰다. 하지만, 김수현은 그저 단순히 머리를 빗어줄 뿐이었다. 그럼 한소영은 도대체 왜 이렇게 반응하는 걸까? 그것은 한소영의 초감각. 그리고 김수현의 한소영의 머리를 빗어주는 행위에 품은 감정에 기인한다. 초감각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무조건 감각화된 정보를 받아들인다. 상대가 추악한 욕망을 크게 품을수록 한소영은 더욱 크게 고통 받는다. 그런 만큼, 그 반대의 상황도 가능하다. '조금 더 세게.' '머리 상해요.' 1회 차 시절. 이스탄텔 로우에 들어간 이후, 김수현은 한소영의 머리를 부단히 빗어주었다. 그럴 때마다 한소영은 항상 기분 좋은 얼굴로 김수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잘 빗고 못 빗고를 떠나서, 그러한 일들은 김수현에게는 더없이 그립고 그리운 기억이었다. 오직 둘만이 간직하는 소중한 추억. 한소영을 잃은 이후, 김수현은 항상 그런 추억들을 회고했다. 그런 기억 하나하나가 김수현이 미치지 않고 버티게 해준 원동력이나 다름없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되살리면 몇 번이고 다시 빗어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찌어찌 되살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바람은 미묘한 방향으로 엇나가버렸으니까. 그러할진대. 그러한 바람이,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던 오늘 비로소 이루게 되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갑작스럽게. 그 결과 1회 차 때부터 수 년 동안 더듬으며 매달려온 감정들이, 바로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 크게 폭발한 것이다. 동경. 갈망. 사모. 슬픔. 애처로움. 애통함. 우울. 구슬픔. 서러움. 애석함. 애틋함. 괴로움. 절망. 실망. 좌절. 낙담. 비관. 체념. 희망. 기쁨. 환희. 희열. 이 모든 감정들이 넘쳐흐른다. 그러다 종래에는, 하나의 '위하는 마음'으로 귀결돼 한소영에게 고스란히 흘러들고 있었다. 한소영의 온몸에 따뜻한 쾌감과 끝없는 감미로움이 넘치고, 흐른다. 마치…. 아니. 그 어떤 말이 필요할까. 지금 이 한순간. 한소영을 잃은 이후, 김수현이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품었던 모든 감정들이 하나하나 전해지고 있는데. 이 사내는…. 도대체…. 그렇게 생각한 순간, 한소영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내면을 꽁꽁 옭아매던 무언가가, 스르륵 힘없이 풀려나가는 것을.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항상 무표정하던 얼굴이 마침내 서서히 무너진다. 한소영은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로 김수현을 돌아보았다. 온몸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그제야 김수현도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챈 듯 끈임 없이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괜찮으십니까?” 한소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렁그렁한 눈동자를 들어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김수현은 당황했다. “미, 미안합니다. 그렇게 싫어하실 줄은…. 정말로 미안합니다.” 당황한 김수현이 곧장 손을 떼려는 찰나, 문득 한소영이 김수현의 손을 굳게 붙잡았다. 찰나의 순간, 김수현의 눈에 의아함이 서렸고 한소영의 눈에 고민이 서렸다. 사실은, 아직도 부끄럽다. 그러나 이제는 부끄러움보다는, 다른 감정이 한소영을 더욱 강하게 이끌고 있었다. “아…. 으…. …세요.” 마치 미묘한 수치심이 섞인듯한, 속살거리는듯한 목소리. 김수현의 의아함이 더욱 짙어졌다. “예?” “…주세요.” “이, 이스탄텔 로우 로드? 미안합니다. 잘 안 들려서 그러는데, 다시 한 번 말씀을….” “빗…. …주세요.” “…빗을 달라고요?” “계속…. 계속, 빗어주세요!” 결국, 한소영은 차오르는 수치심을 참으며 큰소리로 외치고 말았다. “기분 좋아요…. 그러니까 계속, 계속 빗어주세요….” 이왕 내친 거, 한 번 더 소리쳤다. 그리고 잠시 후. 마치 달콤한 키스를 하는 것처럼, 천천히 그리고 상냥하게 빗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 다시금 흘러들어오는 감각적인 감미로움에, 한소영의 허리가 살며시 비틀렸다. 한소영은 더 이상 입을 막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밤새 적었습니다. 이렇게 집중하기는 정말 오랜만이네요. 하얗게 불태운 것 같은데, 이상하게 하나도 피곤하지 않아요. 아무튼, 아. 드디어 이 내용을 적었네요. 200회에 뿌려둔 떡밥인데, 회수하는데 참 오래도 걸렸습니다. 그래도 개운해요. 정말로. 하하하! 0560 / 0933 ---------------------------------------------- 꿈속의 여인. “…그러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머셔너리 로드의 의견을 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네. 그럼…. 머셔너리 로드.” “…….” “머셔너리 로드?” “…아. 예, 예.” 두어 번 나를 부르는 목소리. 화들짝 놀라 시선을 들자, 수십 명의 사용자들이 모조리 나를 쳐다보고 있다. 그 중 상석에 앉은 한소영은 예의 무감정한 눈초리를 지그시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털었다. 아무래도 잠시 정신을 놓고 있었던 모양이다. “방금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 알고 계시나요?” “예. 괴물의 샘플을 확보하는 건 성공했으니, 이제 차후 선도 계획을….” “…그래도 듣고는 계셨군요. 하지만, 회의에 조금 더 집중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죄송합니다.” 딴생각에 빠져있던 게 사실인 터라, 나는 깔끔하게 사과했다. 한소영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면에 걸린 지도를 가리켰다. 나가서 설명하라는 뜻이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서도 나는 의아한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아니. 실은 살짝 서운한 감정을 느꼈다고나 할까. 어젯밤, 한소영은 확실히 이상했다. 어떻게 이상한지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그냥 내가 알고 있던 한소영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랄까? 심란한 마음에 나는 밤에 잠도 이루지 못하고 회의에 참가했는데, 정작 당사자는 언제나와 똑같다. 흡사 어젯밤 일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더욱 기분이 미묘했다. 언제나와 같은 한소영을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섭섭한 마음이 차오른다. …젠장.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아무튼. “그럼 앞으로의 선도 계획에 관해서 간략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해답을 찾을 수 없다면, 한소영의 말대로 모든 걸 잊고 공략에 집중하는 게 나을 터. 그렇게 생각한 나는 몸을 돌려 커다란 지도를 돌아보았다. 이 지도는 길을 찾기 위한 지도가 아닌, 공략을 하면서 만들어가는 미완성 지도이다. 그런 만큼 지금껏 북 대륙이 걸어온 길을 제외하면 그 어떤 정보도 적혀있지 않다. 나는 현재 남부 원정대가 멈춘 지점을 짚고 나서, 일직선으로 쭉 그어 올렸다. “우선 가는 길은 간단합니다. 지금까지와 다를 것 없이, 무조건 일직선으로 나아갈 생각입니다.” “일직선이면…. 정면 방향이군요. 그럼 왜 그 방향을 선택하셨는지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한소영이 곧바로 물어와 나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일전에 회의에서 말씀드렸듯이, 괴물들을 상대하는데 우리는 총 3단계 계획을 설정했습니다. 1단계. 샘플 확보. 2단계. 조사 및 대응 방법 연구. 3단계. 근거지 습격 및 섬멸.” “네. 그렇죠.” “이 중 우리는 현재 2단계까지 이루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3단계. 그렇다면, 우선적으로 괴물들의 근거지를 찾는 게 선결 과제가 되겠죠. 그리고 저는, 지금 우리가 가는 방향에 괴물들의 근거지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확신합니다.” “…….” 한소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냐는 듯, 여전히 궁금해하는 얼굴이다. 물론 다른 사용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한 사내가 차분히 손을 들며 발언권을 요청 의사를 표시했다. 허락한다는 의미로 손짓하자 침착히 몸을 일으킨다. 오며 가며 몇 번 얼굴은 본 것 같은데, 자세한 이름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머셔너리 로드. 괴물들이 우리를 지속적으로 습격하고 있는 건 확실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이, 어째서 차후 가는 방향에 근거지가 있을 거라는 생각과 연관 지을 수 있는지. 저는 그 부분이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정론이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저는 근거지가 어디 있는지 알거든요. 라고 말하고 싶은걸 꾹 눌러 참으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담이기는 하지만, 잠시 이렇게 생각해보시죠. 예를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예를…. 말입니까?” “예. 가령 우리가 북 대륙에 있고, 강철 산맥에서 괴물들이 대규모로 공격해왔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행동할까요?” “그거야…. 아.” 막 무언가를 말하려던 사내의 얼굴에 한순간 이채가 스쳤다. 머리가 아주 멍청하지는 않은 듯싶다. 말인즉, 괴물과 서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자는 소리였다. “물론 우리를 먹이로 생각하고 습격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됩니다. 틀리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괴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습니다. 놈들은 어제, 도대체 왜 우리를 정찰하려고 했던 걸까요?” “우리의 정보를 파악하려고…. 그런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풀어보면, 그건 놈들이 아직 우리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으로도 해설될 수 있지요. 엄밀히 말해서, 괴물들의 입장에서는 우리는 보금자리에 쳐들어온 침략자에 불과합니다. 저는 바로 그 부분에서 선도할 방향을 설정했습니다.” “으음.” 나는 여기서 대충 말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일부러 자세하게 말하지 않고, 두리뭉실하게 뭉뚱그려 말했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말하는 것들은 거의가 핑계에 불과했으니까. 맞고 안 맞고를 떠나서, 구구절절 말해봤자 나만 피곤해진다. 여기서 나는 강철 산맥을 전혀 모르는 입장이 돼야만 한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쪽으로 진군해야 한다…. 는 당위성을 심어주는 정도로만 말해도 충분할 것이다. 사내는 머리를 갸웃했다. 하지만 곧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다고 말을 하며 일어날 때처럼 차분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사내가 앉자마자, 누군가 곧바로 이어서 손을 들었다. 무사 로드, 고오환이었다. 왠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아, 나는 지체 않고 입을 열었다. “설령 근거지를 찾지 못하더라도, 큰 상관은 없습니다.” “머셔너리 로드.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요. 그러다 만에 하나 근거지를 찾지 못….” 냉큼 입을 열은 고오환은 도중에 말을 멈추고서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우리의 목적은 길을 트는 것에 불과하지, 강철 산맥 모든 지역의 안정화가 아니니까요. 근거지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대로 좋지 않겠습니까? 남부 원정대는 지정된 일시까지 최대한으로 진군한 후, 다음 차례인 북부 원정대와 교체하면 그만입니다.” 사실 이런 자리에서 함부로 꺼낼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큰 상관은 없다. 모르긴 몰라도, 현재 동부 원정대에 불만을 가진 사용자들이 한두 명은 아닐 것이다. 정확히는 공략 과정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화계 공략 계획의 덕을 가장 크게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적당히 진군하다 멈추었으니까. “저도 머셔너리 로드의 의견에 동의해요.”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에, 한소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강철 산맥에 들어온 이상, 어차피 가야 할 길이고 또 공략해야 하는 지역이에요. 그러니 이제 와서 괴물을 피할 이유는 없지만, 마찬가지로 일부러 찾아 다닐 필요도 없겠지요. 우리는, 우리가 할 일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일만 하면 됩니다. 그래. 이게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이윽고 한소영은 곧게 몸을 일으켜 나를 응시했다. “그럼 머셔너리 로드의 선도를 수용하는 걸로 하고, 아침 회의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죠. 모두, 바로 출발 준비를.” 그렇게 아침 회의가 끝이 났다. * 시간이 흘렀다. 야영지를 정리한 후, 나는 회의에서 말한 대로 언덕의 그림자 지대를 일직선으로 횡단했다. 그러나 아침에 출발한 원정대는 늦은 오후까지도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았다. 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괴물은 습격은커녕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그 탓에 빠른 속도로 행군해 상당한 거리를 진군할 수는 있었으나,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1회 차 때 여기서 엄청나게 힘들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쉽게 지나치지는 못했다. 사실 약간 아쉬운 상황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기조라는 건 하나의 흐름이라고 생각하니까. 내려갈 때는 한없이 곤두박질치지만, 반대로 올라갈 때는 끝을 모르고 올라간다. 어제 부로 남부 원정대의 기조가 상승하기 시작한 이후, 나는 괴물들이 어느 정도는 출현해주기를 원했다. 이제 대응 방법도 밝혔겠다. 차근차근히 전투를 풀어나가다 보면 경험은 물론 괴물을 상대하는데 자신감이 생기게 되고, 그에 따라 상승세인 기조가 더욱 탄력을 받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갈고 닦으며 진군하다가 근거지를 공략할 때 즈음 최대한 날카롭게 만들 생각이었는데, 이래서는 도로 무뎌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쨌든 상당히 아쉽기는 하지만 이건 나도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니. 좌우간, 언덕의 그림자 지대만 넘으면 근거지는 코앞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최대한 빠르게 벗어나려는 일환으로 행군 속도를 올렸으나, 후방에서 제발 휴식 시간을 달라는 요청이 들어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근접 계열들은 딱히 힘들어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아마 마법사나 사제들이 체력이 부치는 모양이다. 결국 20분 휴식 명령을 내린 후, 나는 언덕을 등지고서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찜찜한 기분을 지우고자 머릿속 의문을 하나씩 차분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문득, 무척 중요한 것 하나를 놓치고 있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 주변은 어두웠다. 말 그대로 어두운 공간이었다. 모든 공간에 검은 장막을 씌웠는지 칠흑같은 어둠이 가득히 들어차 있다. 흡사 땅속이라도 되는 듯 단 한 줄기 빛조차도 들어오지 않는 공간. 그리고, 그런 공간을 헤매는 한 여인이 있었다. “오라버니!” 여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안솔이었다. 다급하기 짝이 없는 안솔의 얼굴은 내면의 심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벌써 이 공간을 돌아다니는 것도 30분째. 사실 안솔도 왜 자신이 이 공간에 있는지는 모른다. 그저 기억하기로는, 오늘도 무사히 행군을 마치고, 저녁 식사를 한 다음, 경계를 마치고 천막 안으로 들어와 바로 잠이 들었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처음 보는 공간에 서 있었다. “오라버니!” 다시 한 번 외쳐보지만, 회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하기야 이미 몇 번이고 불러봤으나 모두가 의미 없는 외침에 불과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안솔은 어쩌면 꿈이 아닐까라고 생각도 해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꿈이라면 깨야 하는데, 볼을 꼬집고 바닥을 미친 듯이 뒹굴어봐도, 눈에 보이는 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라버니이이이이!” 하지만 그래도 안솔은 김수현을 불렀다.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결국 안솔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으니까. 누군가가 구해주기를 기도하며 하염없이 기다릴 뿐.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이제 돌아다니는 것도 서서히 지쳐갈 즈음. - 도와…. 주세요…. 어느 순간, 어디선가 자그마한 목소리가 조용하게 흘러들었다. 조금씩 느려지던 안솔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불안하기 그지없는 눈동자로 살그머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 방금 누구에요? 누구 있어요?” - 도와주세요…. 제발…. 이번에는 확실히 들었다. 누군가 도와달라고 말을 하고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안솔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틀었다. “사, 사람이에요?” - …그쪽이야말로 여기는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조금은 낮아진 목소리가 안솔의 물음에 회답했다. 무언가 모진 고초를 겪은 듯 목소리는 쉬다 못해 갈라터져 상당히 거슬렸다. 그래도 어딘가 모르게 부드러운 느낌이 남아있는 게, 원래는 꽤나 아름다운 목소리였을 듯했다. “모, 모르겠어요. 저도 왜 여기에 있는지. 도, 도대체 여기가 어디죠?” - …그렇군요. 알겠어요. 그럼 먼저 진정하시고, 지금부터는 절대로 목소리를 낮추도록 해요. 절대로, 절대로 크게 소리내지 말아요. 안솔은 자신도 모르게 한껏 목소리를 낮추었다. “네? 네, 네.” - 좋아요. 그럼 우선 제가 있는 곳으로 와주시겠어요? 뛰지 말고, 천천히. 그러자 허공의 목소리는,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타이르는 것처럼 조곤조곤 말하며 안솔을 이끌기 시작했다. 차분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 안솔의 마음에 비로소 한 줄기 위안이 찾아 들었다. 단순히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왜인지는 모르나, 목소리에서 나쁜 기분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 불쌍한 느낌이 들었다. - 거기서 왼쪽으로 두 걸음…. 그래요. 잘했어요. 그럼 이제, 정면으로 팔을 내뻗어보세요. 안솔은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걸음을 옮긴 후, 차분히 팔을 내뻗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지금껏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공간이 한순간 변화가 생겼다. 물론 어두운 공간 자체는 그대로였다. 그러나 안솔은 내뻗은 손끝에서 뭔가 가슬가슬한 감촉을 느꼈다. 동시에 차가운 기운도 전해지는 게, 마치 잔뜩 녹이 슨 철문을 만지는 느낌이었다. - 그대로 문을 밀어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정말 조금씩 밀어도 좋으니까 절대로 소리를 내면 안 되요. 안솔이 지금껏 하라는 대로 해오며 계속해서 들은 말은, 절대로 소리를 내지 말라는 것. 절로 긴장된 마음에 안솔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들은 대로 손에 조금씩, 조금씩 힘을 주며, 보이지 않는 문을 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끼릭, 끼리릭! 너무 오래된 문이라서 그런 걸까. 최대한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결국에는 소음이 나고 말았다. 소음 자체는 미미했지만, 워낙 조용한 공간이라 그런지 이상할 정도로 크게 울렸다. - 아…. 아…. 안 돼…. 그 순간, 잔뜩 실망한 목소리가 안솔의 귓전을 울렸다. 안솔은 뭔가 직감적으로 일이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이, 이제 어떻게 해요?” - 저는 괜찮으니, 빨리 도망쳐요. 어떻게든. “네, 네?” - 어쩔 수 없어요. 그쪽이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소리로 파더의 의식이 깨어났어요. 파더는, 지금 그쪽이 있는 걸 확실하게 느끼고 있어요. “네? 그게 무슨…?” - 벌써 지척까지 왔어요. 설명할 틈이 없으니, 어서! 지금껏 최대한 낮은 음색을 유지하던 목소리가 처음으로 높아졌다. 안솔은 당황했다. 도망을 치라고는 하는데,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즈음. - ……. 문득, 주변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그와 동시에 안솔은 온몸에 엄청난, 말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불길함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멍하니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안솔은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엄청나게 사악한 기운을 흘리는 정체 모를 무언가가 자신이 있는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이대로 있으면, 확실히 죽는다. 아니. - 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 무언가는 이미 안솔의 앞까지 다다른 상태였다. - 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 순간적으로, 안솔의 정수리가 어둠에 붙잡혀 한껏 틀어 올려졌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상황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안솔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오라…. 버니….” 그때였다. - 가만히 있지 마! 안솔이 열은 문에서, 느닷없이 새하얀 팔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 안솔의 팔을 붙잡는 것과 동시에, 우악스럽게 안쪽으로 잡아 끌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악!” 배꼽 부근이 훅 쏠리는 느낌과 함께, 안솔의 몸이 문안으로 삽시간에 끌려들어갔다. 뾰족한 비명이 어두운 공간을 왕왕 울렸다. - 도망쳐! 도망쳐! 그러는 와중에도 도망치라는 소리가 연달아 귓가를 때렸다. 안솔은 손길에 끌려가면서도, 아까부터 자신에게 계속 말을 걸어온 방향을 향해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러니까 문 안쪽에서 말을 걸어온 목소리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 도망치라고 했잖니…. 히히히히히히히히! 안솔의 두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떠졌다. * “아아아아아아아악!” 거센 비명이 천막을 떠르르 울렸다. 고연주는 본능적으로 눈을 떴다. “으학, 으하후학, 으헤히하하학!” 기괴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고연주는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이어지는 행동 또한 신속했다. 그림자를 이용해 라이트 스톤을 키는 것과 동시에 베개 밑에 넣어둔 단검을 꺼내며 사방을 살폈다. 그러나 고연주의 눈에 들어온 건, 적의 침입이 아니었다. 오직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안솔만이 보일 뿐. 이윽고 같은 천막에서 자던 머셔너리 클랜원들이 한 명 한 명 일어나기 시작했다. “꿈…. 꿈….” 안솔의 입에서 쥐어짠듯한, 그러나 공포에 젖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연주는 곧바로 다가가 안솔을 감싸 안았다. “솔아. 왜 그러니. 응? 왜 그래?” “도와달라고…. 도와달라고…. 그런데…” 연신 헛소리를 내뱉으면서도 안솔의 두 손은 끈임 없이 의미 없이 허공을 젓고 있다. “괜찮아. 괜찮아. 응? 이제 괜찮으니까 진정하렴.” “아니…. 아니 아니…. 도망치라고…. 그리고 알려달라고….” 하지만 말하는 사용자가 안솔인 이상, 무조건 헛소리로 치부할 수는 없다. 이제는 침낭을 미친 듯이 그러모으는 안솔. 고연주는 그런 안솔의 행동을 가만히 보다가, 아직 멀뚱멀뚱 눈만 끔뻑이는 클랜원들로 고개를 돌렸다. “유정아. 지금 빨리 클랜 로드님 모셔와.” “으, 응? 아니. 네?” “어서!” “네, 네!” 엄하게 소리치자 이유정이 후다닥 밖으로 달려나갔다. 다음으로, 고연주는 임한나를 응시했다. “한나. 너는 빨리 기록 하나랑 깃펜 하나 가져오고. 기록은 되도록이면 큰 걸로.” 임한나는 되묻지 않았다. 그저 졸린 듯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가, 곧바로 몸을 일으켜 배낭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재빠르게 기록 하나와 깃펜 하나를 가져오자, 고연주는 두말 않고 안솔의 앞에 기록을 놓았고, 손에는 깃펜을 쥐어주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안솔이 손이 깃펜을 꾹 잡았다. 마치 이걸 원했다는 것처럼. 고연주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안솔을 품에 꼭 안아 괜찮다고 속삭이며 보듬어줄 뿐. 잠시 후. “일곱…. 열하나…. 아니. 열넷…?” 안솔은 미미하게 떨면서도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깃펜을 으스러져라 잡으며 기록에 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의 그림이었다. 안솔은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애당초 솜씨도 서툴거니와 손마저 떨리는 터라 엉망진창이었지만, 확실한 건 그림이 분명 하나의 형체를 보이고 있다는 것. “하나….” 이내 하나의 형체를 그린 안솔은, 옆 공간에 또 하나의 형체를 그려내었고. “두, 둘….” 빈 공간을 찾아 또 하나를 추가로 그려내었다. 조금씩 틀리기는 하지만, 형체는 거의가 엇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고연주는 가장 명확하게 그려진 형체를 유심히 주시했다. 그리고 형체에서 연상된 이미지를 떠올린 순간, 아미를 살짝 찡그리고 말았다. “이건…?” ============================ 작품 후기 ============================ 늦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_(__)_ 저를 매우 치세요. 엉엉. 0561 / 0933 ---------------------------------------------- 꿈속의 여인. 조용하다. 홀로 환한 불빛을 뿜어내는 야영지 중앙의 천막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그리 넓은 천막은 아니다. 원정대 부대장이 사용하는 만큼 나름 신경 쓴 티는 역력하나, 애당초 빠른 설치 및 철거를 염두에 두고 제작된 천막이라 누가 봐도 좋다라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공간이 작은 만큼, 너덧 개의 라이트 스톤으로도 새벽의 어둠을 몰아내는데 충분하다는 게 그나마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랄까. 고요한 정적은 제법 긴 시간 동안 이어졌다. 천막에는 한 사내와 두 여인이 탁자를 둘러싼 채 앉아있었다. 그 중 유독 어려 보이는 소녀는 한껏 겁에 질린 얼굴로 옆에 앉은 여인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여인은 그런 소녀의 머리를 부드러이 보듬으며 시선을 들었다. 건너편에는, 사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수현. 혹시 짐작 가는 거라도 있나요?” 혹여 방해할까 봐 그런지 고연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록을 보고 있던 김수현은 흘긋 시선을 올려 고연주를 응시했다. 안솔이 오밤중에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이후, 이유정은 고연주의 지시로 곧장 김수현에게 보고했다. 상황 파악을 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수현은 곧바로 안솔의 입을 틀어막은 채 자신의 천막으로 데려왔다. 다른 사용자들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것도 있지만, 이상한 소문이 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참 유난 떤다고 할 것이다. 고작 꿈 하나에 이 새벽 밤중에 난리를 친다고. 그러나 김수현과 고연주는 다르다. 안솔의 신기에 가까운 능력을 몇 번이나 보고 덕을 본 입장이라,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내 도로 시선을 내린 김수현은 기록을 이모저모 살피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글쎄요. 워낙 그림이 개떡….” “어엉….” “흠. 약간 알아보기 힘들어서요. 그래도 짚이는 게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그래요?” 무척 서러워하는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김수현은 곧바로 말을 정정했다. 그러자 고연주의 눈이 반짝였다. 짚이는 게 있다는 말이 자못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수현은 차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개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확신하는 건 아니에요.” 말하기 싫다는 뜻. 고연주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혹시 그거 아닌가요?” “그거?” “오늘 행군 중에요. 수현이 그랬잖아요. 뭔가 중요한걸 놓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아아.” 김수현은 잠시 눈을 끔뻑였으나 곧 싱겁게 웃어 보였다. 마치 별걸 다 기억한다는 듯한 미소였다. 문득, 고연주는 한없이 칭얼거리던 안솔이 갑작스럽게 잠잠해진 것을 느꼈다. 김수현의 말이 이어졌다. “그건 아닙니다. 제가 무얼 놓치고 있는지는 이미 기억해낸 상태거든요.” “그래요?” “예. 이거랑은 상관없는 부분인 듯싶습니다.” “…그렇군요. 어쨌든 미묘하네요. 불행 중 다행인지. 아니면 다행 중 불행인지.” 기억했다는 건 다행이지만, 해결했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골칫거리가 될 소지가 다분한, 또 하나의 문제가 튀어나온 것이다. 그것도 명확한 게 아닌 암시하는 수준으로. 고연주가 말한 건 바로 그런 뜻이었다. 하지만 김수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설상가상. 원래 공략이 그런 거죠. 아무튼,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건 제가 따로 염두에 두도록 하지요.” 그리고 주섬주섬 기록을 챙겨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별로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다. 그런 김수현을 보자 고연주는 가슴을 맴돌던 불안감이 서서히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언제는 한 번 쉬운 적이 있었나. 항상 여러 문제가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 문제를 모조리 깨부수며 온 게 바로 저 사내가 아니던가. 그렇게 생각한 고연주의 입가에 비로소 짙은 미소가 그려졌다. 이윽고 아직도 멍하니 김수현을 쳐다보는 안솔에게 고연주가 소곤거리듯 속삭였다. “우리 솔이~.” “응?” “오늘 밤 오라버니랑 언니랑 같이 잘까?” “오라버니랑, 언니랑?” 안솔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빠르게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득돌같이 김수현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앓는지 흐느끼는지 구분이 가지 않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어필하려 애썼다. 고연주는 킥 실소를, 김수현은 어이없다는 기색을 비쳤다. 그러나 곧 길게 한숨을 흘리며 어깨를 들먹였다. 마음대로 하라는 의미였다. 안솔은 쪼르르 달려가 침대에 다이빙하듯이 뛰어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이트 스톤의 불빛이 꺼짐과 동시에 천막으로 아늑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비록 3명이 눕기에는 한참이나 비좁은 침대였으나, 그래도 안솔은 좋았다. 킁카킁카 때문만은 아니었다. 앞에서는 김수현의 넓고 단단한 가슴이, 뒤에서는 고연주의 풍만하고 부드러운 젖가슴이 빈틈없이 밀착시켜와, 온몸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잘 자라 우리 아가~. 앞뜰과 뒷동산에~.” 거기다 자장가까지. 사실 고연주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섹시한 터라 자장가에는 어울리지 않는 음색이다. 하지만 김수현이 서너 번 등을 토닥토닥해주자, 안솔은 곧 나른한 기분을 느끼며 서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고른 숨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안솔은 꿈을 꾸었다. 이번에도 같은 공간이었다. 오직 시꺼먼 어둠만이 들어차 있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의 공간. 겨우 안 좋은 기분을 털고 신나게 잠이 든 것 같은데, 눈을 떠보니 또 같은 공간에 서 있다. 안솔은 멍하니 고개를 돌리다가 우뚝 시선을 멈추었다. 근처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사악한 기운이 느껴졌다. 안솔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 기운은 아까 자신을 잡기 직전까지 갔던 정체 모를 무언가였다. 이번에는 시작부터 나온 것이다. 마치 네가 다시 올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이윽고 그 무언가가,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안솔의 얼굴이 울상으로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두 눈이 그렁그렁해진다. 그때였다. 돌연히, 안솔은 누군가 자신의 정수리에 툭 손을 얹는걸 느꼈다. 깜짝 놀라기도 전에, 한 사내가 안솔을 휙 지나쳐 사악한 것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어두운 공간에 섬뜩한 빛 줄기가 사선으로 그어졌다. 사악한 것이 비명을 지르며 사그라진다. 사내가 단숨에 처리한 것이다. 익숙하게 들어오는 사내의 뒷모습에 안솔의 얼굴에 화색이 만연해졌다. “오라버니!” 그랬다. 안솔의 꿈에 나타난 사내는, 다름 아닌 김수현이었다. 안솔이 반갑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김수현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주변을 쓱 훑어보더니 어딘가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안솔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마찬가지로 김수현을 뒤쫓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쫓은 것 같은데, 안솔은 김수현과의 거리를 도저히 좁힐 수 없었다. 도중에 몇 번이고 이름을 불렀으나 김수현은 묵묵히 앞만 보고 걸어갈 뿐이었다.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더는 쫓지 못해 힘들어할 때쯤이면 김수현도 걸음을 멈추며 기다려주고는 했으니까. 차오르는 의문을 이기지 못하면서도, 안솔은 중간중간 목이 터져라 김수현을 불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안솔의 눈이 갑자기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른다. 눈을 뗀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부터 김수현은 또 무언가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사악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없이 파괴적이면서도, 동시에 경건하며 거룩한…. 마치 신을 상대하는듯한 느낌이랄까. 사악한 기운을 흘리던 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엄청난 기운이었다. 이번에는 제법 거세게 저항하는 듯 격렬한 감각들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승자는 김수현이었다. 곧 거센 비명이 귓전을 가득히 울리더니 어둠이 떠나갈 정도의 빛무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이윽고 빛이 완전히 사그라졌을 무렵, 간신히 눈을 뜬 안솔은 곧바로 김수현을 찾았다. 김수현은 여전히 어딘가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아까와는 달리 기다려주지 않는다. 어느새 거리가 상당히 벌어진 상태라, 안솔은 바쁘게 걸음을 놀렸다. “어?” 그때였다. 앞으로 쭉쭉 나아가던 김수현의 모습이 한순간 홀연히 사라졌다. 흡사 느닷없이 땅이 푹 꺼지기라도 한 듯이,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춘 것이다. 왜인지는 모르나 자꾸만 급한 마음이 들어, 안솔은 더욱 빠르게 달렸다. 그리고 김수현이 사라진 장소에 다다른 순간, 안솔은 볼 수 있었다. 지면에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크기의 구렁텅이를. 그것은 마치 블랙홀을 보는 듯했다. * 추가로 이틀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한 번 정도는 습격을 해올 거라 예상했는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언덕의 그림자 지대를 건너는 와중 놈들은 단 한 번도 습격해오지 않았다. 아니. 습격은커녕 기척도 드러내지 않았다. 언덕의 그림자 지대는 정말로 텅 비어있었고, 또 서서히 끝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 이 속도로만 간다면 아마 오늘 점심 즈음에는 100%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좋아 좋아. 아주 좋아.” “너는 또 무슨 헛소리야?” “헛소리는. 야. 그런데 오늘이 6일째인가? 아니면 7일째인가?” “한 일주일 됐나? 그건 왜?” “아. 빨리 진군 좀 멈추고 싶어서.” “푸. 왜. 무서우냐?” 안현과 이유정의 목소리. 어떻게 보면 행군 중에 금지해야 할 잡담이었으나 나는 굳이 막지 않았다. 그냥 아무 말도 없이 계속 걸었다. 적어도 이제부터는, 기조가 다시 침체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말이다. 기조를 날카롭게 버무리려는 계획은 실행하지 못했으니, 근거지에 다다르기 전 상승세를 최대한 보존할 필요는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지치지 않는 수다를 반주 삼아 계속해서 걷다 보니, 어느새 언덕의 그림자 지대도 막바지에 다다른걸 느꼈다. 왜냐하면 눈앞으로, 내가 하나의 지점으로 기억하는 커다란 언덕이 보였으니까. “엥. 이게 언덕이야? 산이 아니라?” 그 말대로였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언덕은 거의 남산만하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여타의 언덕과는 차별화되는 크기를 보였다. 언덕의 그림자 지대의 끝을 알리는 하나의 지점. 아마 이 언덕을 내려가면 이 지대는 거진 통과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천천히 언덕을 오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현재 강철 산맥을 공략하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의문은 세 가지. 첫 번째는 내가 놓치고 있던 것으로, 1지역을 지나며 느꼈던 의문이었다. 남부 원정대는 지금 2지역을 돌파하는 중이다. 그럼 1지역에 있던 괴물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1지역에서 도망친 흔적만 보았을 뿐, 이후로는 아예 흔적조차 보지 못했다. 그리고 두 번째. 2지역의 괴물들은 왜 사흘전의 습격 이후 더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세 번째. 안솔의 꿈. 나는 품속에서 안솔이 그려낸 기록을 꺼내 들었다. 기록에 그려진 그림은 정말로 엉망진창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림 자체가 굉장히 간단하다는 것. 우선 가장 아래쪽으로 울퉁불퉁한, 바람 빠진 타이어 같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바로 위에는 비교적 반듯한 동그라미 하나가 얹어져 있다. 크기는 아래보다 확연히 작다.(크게 보면 8자, 혹은 눈사람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얹어진 동그라미의 윗면으로, 무수한 직선들이 다닥다닥 붙은 그림이었다. 이 형체를 하나로, 거의 십수 개에 이르는 그림들이 기록에 그려진 상태였다. 처음 기록을 봤을 때 해석은 그 정도였다. 아무리 꿈이 흐릿한 기억이라고는 하지만, 처음에는 나조차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틈이 날 때마다 그림을 들여다본 결과, 나는 한 가지 특이점을 추가로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 기묘한 형체들이 한쪽에 이상할 정도로 몰려있다는 것이다. 또 어느 형체는 굉장히 크지만, 또 어느 형체는 상당히 작다는 것. 나는 여기서 하나의 힌트를 얻었다. 원근감. 그것을 떠올린 순간, 비로소 안솔이 그린 그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동안 왜 이해하지 못했는지. 그럴 만도 했다. 처음부터 보는 방법이 옳지 않았으니까. 말인즉, 거꾸로 뒤집어보면 해답이 나온다. 그렇게 보자마자 나는 기억 속 묻어둔, 2회 차 초반 때의 광경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 유쾌하지는 않은 기억이라 절로 쓴맛이 감돌 무렵, 문득 발이 상당히 편해짐을 느꼈다. 생각을 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덧 언덕의 정상에 오른 것이다. 제법 커다란 언덕에 오르자 주변의 경관이 한눈에 훤히 들어왔다. 나는 전방을 응시했다. 그리고 지체 않고 걸음을 멈췄다. “형님! 왜 갑자기 멈추셨어요?” 진수현이 물었지만 나는 굳이 회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조용히 무검을 뽑았다. 그러자 끈임 없이 이어지던 수다가 뚝 끊기며, 허겁지겁 올라오는 기척들이 느껴졌다. 이윽고 어느 정도 올라왔다고 생각될 즈음, 나는 침착히 손을 들어 전방을 가리켰다. “어….” 누군가 넋을 잃은듯한 탄성을 터뜨렸다. ============================ 작품 후기 ============================ 생각해보니 후기가 너무 창피해서 삭제합니다. 0562 / 0933 ---------------------------------------------- 하나의 폭풍이 되어. 커다란 언덕의 정상에 오른 순간, 눈앞을 빽빽이 메울 정도로 울룩불룩 솟아있던 언덕들이 일시에 사라졌다. 그리고 500미터쯤 떨어진 건너편으로 또 하나의 언덕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사실 저것 또한 언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지금 이 언덕을 오를 때도 산이 아닐까 하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렸는데, 건너편의 언덕도 그에 준하는 크기를 보이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언덕은 하나가 아니었다. 정면의 언덕을 기준으로, 비슷한 크기의 언덕들이 좌우 방향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다. 가로로 가지런히 나열된 풍경을 보고 있자니, 흡사 언덕으로 이루어진 장벽을 보는 것 같다. 그래. 여기다. 언덕의 그림자 지대를 통과하고, 비로소 놈들의 주 활동 지역에 다다른 것이다. 저 언덕의 장벽만 넘으면 곧바로 놈들의 근거지가 나온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언덕. 그리고 건너편의 언덕 사이로 움푹 패어 들어가 있는, 하나의 거대한 지형. 거기에는…. 차마 셀 수도 없다. 골짜기에는 가히 수백? 어쩌면 1천을 넘을지도 모르는 괴물들이 떼로 모여 득시글거리고 있었다. 또한 놈들은 단 한 놈도 예외 없이 언덕을 정확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형님…. 저건….” 진수현이 넋을 잃은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뽑은 무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손을 풀기 시작했다. 빅토리아의 영광까지 뽑을까 고민이 들었지만, 우선은 한 손으로 해보는 게 나을 것 같다. 양손 검을 다루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한 손 검이 더욱 익숙하니까. “싸, 싸우실 거예요?” 화들짝 놀라는 목소리가 물었다. 나는 “그럼?”이라고 회답해준 후, 천천히 몸을 돌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모두가 망연하기 짝이 없는 얼굴. 저번 습격 때보다 거진 서너 배는 돼 보이는 인원을 보니 넋이 나간 모양이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우리 선봉 부대가 골짜기를 정면으로 돌파하겠습니다. 모두 단단히 준비를 갖추도록.” “혀, 형님! 정말로요?” “왜. 무서우냐?” “아니요. 무서운 게 아니라…. 정말로 정면으로 돌파하시려는 거예요?” “의외네. 이런 게 오히려 네가 원하는 거 아니었어?” “…….” 진수현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멍하니 나를 바라볼 무렵, 돌연 몇 명의 사용자들이 허겁지겁 달려오는 게 보였다. 선봉 부대에 포함된 클랜 로드들이었다. 따로 부르지도 않았는데 온걸 보니, 어떻게 괴물이 출현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모양. 급하게 아래를 내려다본 클랜 로드들은 마찬가지로 침음을 흘렸고, 이내 주변을 둘러보더니 뜨악한 얼굴을 보였다. 어느새 클랜원들은 내 지시를 따라 봉시진(鋒矢陣)을 꾸린 상태였다. “머셔너리 로드. 설마 지금 이 골짜기를 정면으로 돌파하실 생각입니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용자는 말쑥한 사내였다. 라이트 로드라고 했었나. “예. 그럴 생각입니다.” “머, 머셔너리 로드. 그다지 좋은 방법으로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언덕에 서 있고, 놈들은 골짜기 안에 모여있습니다. 차라리 지리적 이점을 살려, 이 자리에서 화살이나 마법을 퍼붓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놈들이 가만히 앉아서 당해줄 리는 없겠지요.” “그, 그렇지만!” 가만히 머리를 가로젓자 무언가를 말하려던 라이트 로드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의아한 기색은 지우지 못하는 게, 여전히 정면 돌파가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라이트 로드의 의견은 당연히 정론이다. 지리적 이점을 살려 원거리 공격을 퍼붓는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싫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해보면, 나와 머셔너리와 남부 원정대. 그러니까 딱 한 번 정도는,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북 대륙의 힘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이유인즉, 비단 강철 산맥뿐이 아니라 차후에 여러 괴물들이 출현할 텐데, 그런 놈들과 비교하면 지금 눈앞의 괴물들은 그리 강하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놈들이 어떤 꼼수를 부렸다고 해도, 그것을 정면으로 돌파할 수 있는 힘을 지녔는지 알고 싶었고, 보고 싶었다. 물론 그렇게 어수룩하기 그지없는 호기로만 저지른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1회 차 때와 똑같다. 1회 차 때도 나는 이 자리에 똑같이 섰었고, 지금과 똑같은 광경을 보았다. 그때와 똑같이 나올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가능성은 높다. 거의 1천 마리에 달하는 정도로 우글거리고는 있지만 보이는 건 괴물들뿐이니. 지금껏 꽤나 잡아갔을 터인데 진화한 인간의 모습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럼 돌파 계획을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삽시간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나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가장 먼저, 머셔너리 클랜만이 돌진하겠습니다. 우리의 역할은 아래 괴물들의 진형을 최대한 흐트러뜨리고, 혼란을 주는데 있습니다.” “뭐, 뭐요? 정말 미치기라도…!” “그리고, 남은 부대의 지휘는 무사 로드가 맡아주셔야겠습니다.” “어…. 으, 으흠?” 그러자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고오환이 한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좋겠지. 그토록 원하던 지휘권인데. “무사 로드는 여기서 계속 틈을 보다가, 어느 정도 혼란됐다 싶으면 곧바로 치고 내려와주시면 됩니다. 계획은 그게 답니다. 어때요. 참 쉽죠?” “머셔너리 로드! 재고해주십시오. 아무리 강력한 마수 군단이 있다고는 하지만, 너무 불리합니다.” “더 이상의 이견은 받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최소한 중앙 부대와 같이…!” 그거야말로 절대로 안될 말이다. 만일 내 예상이 들어맞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최악의 수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언덕을 성으로 삼아 수성을 하는 게 낫지.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났다. 하여 그대로 돌격을 명하기 직전, 나는 언뜻 스친 생각에 네 명의 클랜원을 따로 호출했다. 그래도 최소한의 보험은 필요할 것 같았기에. 곧 호출한 김한별, 박다솜, 비비앙, 선유운이 차례차례 다가와, 나는 생각한 바를 빠르게 설명해주었다. 이내 모든 계획은 들은 선유운은 이내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럼….” “예. 이스탄텔 로우 로드에게는 그렇게 전해주시고, 나머지는….” 선유운은 잠시 나를 지그시 쳐다보는가 싶더니 빠르게 몸을 돌려 사용자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다음으로 걱정스런 얼굴로 서 있는 세 여인을 쳐다본 순간, 비비앙이 하늘 높이 번쩍 손을 들었다. 그런 비비앙의 손에는 환한 빛을 흘리는 질서의 오르도가 쥐어져 있었다. “오라! 마누밤브! 제 5군단을 지배하는 자폭의 폭마들이여!” 그러자 한순간 어두운 운무가 주변에 퍼지는가 싶더니, 곧 사방으로 걷히며 새로운 마수 군단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 킥, 키킥! - 켈켈켈, 켈켈켈켈! 언뜻 보기에는 푸른 산맥의 스켈레톤 부대처럼 보였지만, 거의 전신을 가리는 헐거운 로브와 등에 삐죽하니 돋아난 커다란 뿔이 특이하다. 또한 로브 안으로 붉게 빛나는 동그란 두 불빛은, 역시나 마수 특유의 흉흉한 기운을 흘려내고 있었다. “미안해. 원래 4군단을 주고 싶었는데, 네 말대로라면 아껴놓는 게 낫겠지. 혼란이 목적이라면 5군단도 나쁘지는 않을 거야.” 비비앙답지 않은 미안해하는 목소리였다. 나는 상관없다는 양 어깨를 으쓱인 후 가장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클랜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갑시다.” 구구절절 말할 필요가 있을까.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놈들은 자신들이 활용할 수 있는 최대 이점을 포기하고 몸을 드러냈다. 물론 교활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니만큼 모종의 수작은 부려놨겠지만, 그것 또한 받아 칠 자신이 있다. 아니. 그럴 것이다. “그리고, 보여줍시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빙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래로 쭉 뻗은 언덕을 보며 최대한의 속도로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등 뒤로 클랜원들과 마수들이 우르르 밀고 내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괴물들은, 조용했다.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씩 꿈틀꿈틀하던 것도, 우리가 내려오기 시작하자 동시에 움직임을 정지했다. 마치 가만히 덫에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모습처럼 보인다. 최대한의 속도로 달린 만큼 언덕은 금방 내려갈 수 있었다. 괴물들과의 거리도 거의 가까워졌다. 놈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다. 그렇게 거리가 적당히 줄여졌을 무렵. “흡.” 나는 있는 힘껏 땅을 박차,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씨잉, 바람결이 머리에 스친다. - 키에에에에에에엑! 동시에 귓전을 울리는 기괴한 괴성. 놈들이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는지, 수십 수백의 촉수들이 허공에 떠오른 나를 노리고 일제히 쇄도해 들어온다. 그래. 이걸 노리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이형환위를 사용했다. 놈들이 밀집해있는 중앙 지점으로. 이윽고 지면이 보이는 순간, 마력을 한껏 끌어올리며 지체 않고 무검을 지면 깊숙이 박아 넣었다. 그리고 검을 하나의 매개체로 삼아 끌어올린 마력을 아낌없이 밀어 넣었다. 지면을 대상으로 한 마력 폭발이었다. 1초. 1초 동안,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러나 그 1초가 지난 순간, 비로소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콰득! 콰드드득! 콰드드드드드드득! 휘날리는 흙먼지 사이로, 흡사 가뭄 속의 밭처럼 대지가 쩍쩍 갈라져 나간다. 종래에는 주변으로 30미터 정도의 지면이 한 번 크게 들썩였다. - 키에에에? 아직 부족하다. 허공의 신형이 사그라졌는지 놈들이 시선이 하나하나 모이는걸 느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더욱 강하게 마력을 흘려 넣었다. 회로를 가득히 메우던 마력이 한순간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만큼, 지면으로 흐르는 양 또한 가히 어마어마했다. 꿍! 그때, 갑작스럽게 지면이 꿀렁 웨이브를 쳤다. 그와 동시에, 갈라진 틈으로 눈부신 푸른빛 마력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나는 있는 힘껏 숨을 들이켰고, 내쉬는 것과 함께 마지막 마력을 쏟아 부었다. 꾸웅! 더욱 커다란 웨이브. 쿠쿠쿠쿠쿠쿠쿠쿠! 그리고 마침내, 더욱 강렬해진 빛무리가 황량한 대지를 가득히 밝히며 폭발적으로 솟구쳐 올랐다. * 김수현이 허공에 떠오르고, 무수한 촉수들이 허공으로 쇄도했다. 언덕에 서 있던 사용자들은 비명을 질렀다. “어어어어어어어어?!” 그러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이형환위를 사용한 김수현은 털끝도 다치지 않고 촉수를 투과해 지면에 착지했으니까. 물론 그걸 알아본 사용자들은 없겠지만. 쿵! 잠시 후, 지면 내부에서 울리는 거대한 폭음과 함께 골짜기 인근이 크게 들썩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사용자들의 눈이 휘둥그래 변했다. 그 순간이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 어느새 쩍쩍 갈라진 지면이 환하게 밝아오더니, 푸르스름한 빛깔을 내는 빛무리가 크게 솟아올랐다. 그러더니 김수현이 서 있는 장소를 기점으로 둥글게 퍼져나가며 주변의 괴물을 덮쳐 들어갔다. 그것은, 하나의 파도와 다름없었다. 하나, 둘, 셋, 다섯, 여덟, 열셋…. 땅에서 솟구친 푸른빛의 마력은, 하나의 성난 파도처럼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삼키며 좌충우돌 범위를 넓혀간다. 괴물들은 빛의 파도에 닿는 족족 체액을 뿜으며 수수깡처럼 쓰러져가는 중이었다. 그에 따라 밀집해있던 괴물들이 자연스럽게 흐트러지며 이리저리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눈 몇 번 깜빡 하기도 전에 전위가 붕괴한 것이다. 사용자들은 하나같이 입을 멍하니 벌렸다. 비슷한 위력을 가진 마법은 몇 번 본 적 있지만, 저렇게 거대한 마력을 이용해 땅을 터뜨리는 마법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전에. 저 사용자, 검사가 아니던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가, 간다! 들어간다! 궁수, 마법사! 모두 지원 사격 준비!” 누군가가 외쳤다. 무엇이 들어간다는 소리일까? 김수현이 굳이 홀로 선두에서 달려간 이유는, 뒤따라오는 클랜원들이 용이하게 돌파할 근간을 마련해주기 위함이었다. 물론, 마수 군단이 더욱 신나게 날뛸 여지를 만들어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결과는 곧 볼 수 있었다. 우왕좌왕하는 괴물들을 향해 고스란히 덮쳐간 두 번째 파도가. - 키킥! 키키키킥! 아니 제 5군단이, 그런 김수현의 기대에 100% 부응한 것이다. 가장 먼저, 괴물들의 사이를 파고든 마누밤브가 신명 나게 웃어 젖혔다. 촉수들이 몸을 휘감든 날카로운 이빨이 깨물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그저 두 팔을 힘차게 드는가 싶더니,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로브 안 붉은 안광이 화르륵 타올랐다. 그러자 각각 사방으로 비집고 들어간 군단의 마수들도, 마누밤브를 따라 두 팔을 힘차게 올렸다. - 켈켈켈켈켈켈켈켈! 흡사 마지막을 알리는 것 같은, 마수의 광소(狂笑). 그리고 잠시 후. 번쩍! 곳곳에서 터져 나온 화려한 폭음이, 골짜기를 붉은빛으로 가득히 물들였다. ============================ 작품 후기 ============================ 생각해보니 후기가 너무 창피해서 삭제합니다. 0563 / 0933 ---------------------------------------------- 하나의 폭풍이 되어. “어, 어떻게 된 거지?” 붉은빛이 서서히 사그라져갈 즈음, 눈을 꼭 가렸던 박다솜이 살그머니 손을 내리며 말했다. 다소 얼떨떨해 보이는 얼굴. 김한별은 아무 말도 않은 채 지그시 골짜기를 가리켰다. 박다솜이 도로 아래를 내려다볼 무렵. 번쩍! 붉은 불빛이 재차 시야를 물들였다. 박다솜은 아앙 소리를 지르며 허겁지겁 물러났다. 그리고 원망 어린 눈초리로 김한별을 쳐다보자, 처음부터 눈을 떼지 않던 비비앙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폭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아.” “네, 네?” “첫 번째는 두 팔을 제물로, 두 번째는 두 다리를 제물로, 세 번째는 자신의 몸과 머리를 제물로. 그렇게 총 세 번의 연쇄 폭발을 일으키지.” “그게 가능한가요?” 박다솜은 얌전히 입을 벌렸고, 김한별은 쌀쌀맞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곁눈으로 흘긋 흘겨본 비비앙의 입가에 돌연 잔인한 미소가 자리잡았다. “저번 전투에서 저놈들은 소환하지 않은 건, 시체를 최대한 보존하라는 김수현의 지시 때문이었어. 5군단은 마수들의 특성상 지속적인 전투가 불가능하거든…. 하지만.” “…….” “그런 만큼, 지금 이 순간 5군단의 폭발력은 타 군단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지. 얕보지마. 한 자릿수 군단이라고.” “…그런가요.” 번쩍!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세 번째 폭발이 일어났다. 이제 마지막을 알리는 듯, 앞선 폭발보다 화려하게 일어난 빛무리는 멀리멀리 퍼져나가 언덕에 서 있는 사용자들까지 비췄다. 온몸에 붉은 불빛이 스며든 비비앙을 바라보며 김한별은 조용히 생각했다. 그래. 이 사람도 한때는 괴물이었지. 오오오오오오오오! 문득 엄청난 함성이 언덕을 떠르르 울렸다. 마지막 폭발이 끝난 후, 사용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경악하는 얼굴로 아래를 가리키고, 보고 있었다. 골짜기에는 커다란 불길이 솟아오르고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마수들의 자신의 몸을 제물로 일으킨 연쇄 폭발은 빽빽이 모여있던 괴물들을 고스란히 덮쳐 들었다. 그 결과, 지면에는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발기발기 찢겨나간 시체들과, 사방으로 비산한 핏물이 합쳐져 시냇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나는 그럼.” 비비앙은 볼 일이 있다는 양 홱 몸을 돌리더니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몸을 감추었다. 김한별은 잠시 비비앙이 달려간 방향을 응시하다가, 다시금 골짜기 전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김수현이 안배한 파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그라져 소멸한 마수 군단을 잇는 세 번째 파도, 머셔너리의 사용자들이 지체 않고 들이닥친 것이다. 어느새 괴물들은 처음처럼 정연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폭발의 여파가 너무도 거대해 아직까지 남아 괴롭히고 있다. 그 덕에 전열은 완전히 무너져내려, 머셔너리 사용자들은 국지전임에도 불구하고 기습적으로 공격해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중 가장 처음으로 들어간 사용자는, 은빛으로 빛나는 창을 휘두르는 여인, 차소림이었다. “발할라의 가호여!” 차소림의 온몸이 찬란한 빛무리로 뒤덮였다. 그리고 눈 한 번 깜빡이기도 전 괴물들의 앞에 다다르더니, 창을 전방으로 찔러 들어가며 삽시간에 중앙을 돌파했다. 걸리는 족족 꿰뚫고 휘두르자, 괴물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한 놈 한 놈 목이 달아났다. 돌파력도 엄청났지만, 더욱 놀라운 건 목표를 정확히 찌르는 정교함이었다. 달리는 와중에도 균형이 흔들리지 않고 정교하기 그지없는 창술을 펼쳐낸다. 그러한 차소림의 몸놀림은 보는 이들의 정신이 아찔하리만치 경이롭고, 또 아름답다. 흡사 한 줄기 빛살과도 같은 그 모습이, 가히 섬광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다. 그것을 기점으로, 아직 남은 수백의 괴물들과 서른 남짓한 머셔너리 사용자들이 뒤엉켰다. 괴물들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곧바로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기 시작해, 머셔너리 사용자들은 한순간 수백의 괴물들에 둘러싸였다. 폭발의 여파가 비교적 적게 닿은, 조금 멀리 떨어진 괴물들도 촉수를 꿈틀꿈틀 드러냈다. 잠시 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촉수가 하늘을 뒤덮었다. 물론 머셔너리 사용자들 또한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후방에서 앞쪽을 주시하던 안솔이 지팡이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그 어느 빛보다도 찬란한 이여, 모든 빛을 관장하는 안젤루스여! 고대의 영광을 떨쳐 울리는 그 이름을 빌어, 그대의 사제 안솔이 바랍니다! 우리를 지키소서! 보호하소서! 수호하소서!” 그리고 지팡이가 새하얗게 작열하는 그 순간, 안솔의 주변에 환한 빛을 뿌리는 빛들이 사르르 내려앉았다. 그와 동시에 아직 남아있는 수림이 번쩍 빛을 토해내더니 쑥쑥 자라나며 머셔너리 사용자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즈믄 가락!” 언제 주문을 마쳤는지 백한결도 지지 않고 능력을 발동했다. 이내 한쪽으로 내뻗은 두 손에서, 반투명한 색의 거대한 손이 하나하나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 삽시간에 두 개, 네 개, 여덟 개, 열여섯 개, 서른두 개, 육십사 개, 백이십팔 개로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더니, 종래에는 일천 개를 넘는 손들로 갈라져 날아오는 촉수들을 맞상대했다. 괴물들이 수림으로 이루어진 방어막에 부딪쳤다. 촉수들은 일천 개의 손에 막히거나 붙잡혀 하릴없이 되돌아갔다. 보이는 그대로, 안솔과 백한결의 합작으로 이루어낸 완벽한 방어였다. 김수현의 지론인 '잘 키운 사용자 하나, 열 사용자 안 부럽다.'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언덕에서 구경하는 사용자들도 모두가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 들어갈 때만 해도 무모하다고 여겼다. 겹겹이 둘러싸일 때는 헉 하기도 했다. 그러나 상황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고작 서른 남짓한 사용자들이다. 그러할진대, 오히려 열 배는 넘는 괴물들의 진형이 붕괴하고 있다. 마법사들이 한 번 주문을 외울 때마다, 땅이 우르르 흔들리고 보도 못한 마법들이 괴물들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한다. 그러한 광경은 서른 명이 아닌 삼백 명, 아니 그 이상의 사용자들이 보여주는 파괴력과 맞먹을 수준이었다. 쾅! 갑작스럽게, 거대한 울림이 사용자들의 정신을 강타했다. 절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한 사내가 있었다. 김수현이었다. 적어도 언덕에 서 있는 사용자들이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김수현을 바라보았다. 머셔너리 사용자들의 활약도 대단하지만, 단연코 최고로 빛나는 이가 김수현이었기 때문이다. 쾅, 콰앙! 사용자들의 공통적인 생각. 도대체 무슨 묘수를 부린 걸까. 김수현의 전투는 마치 하나의 폭풍과도 같았다. 검을 놀릴 때마다 휘두른 방향으로 무지막지한 검풍이 일어났고, 바람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괴물들을 무자비하게 찢어발겼다. 한 번의 칼질에 서넛의 괴물이 피를 뿜으며 쓰러진다. 비단 검뿐만이 아니었다. 김수현의 온몸이 무기였다. 뻗어오는 촉수를 솜씨 좋게 되잡고는, 허공으로 번쩍 끌어올렸다가 힘차게 지면으로 내리꽂는다. 꽈아앙! _ 크헤에에에에에엑! 그렇게 터져 죽는 괴물들의 수도 부지기수였다. 마치 보병들을 짓밟는 하나의 탱크처럼, 김수현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종횡무진 골짜기를 휘젓고 있었다. 결국 하다 하다 안되겠는지, 열 마리는 넘는 괴물들이 일제히 펄쩍 뛰어올라 김수현을 향해 하강했다. 하는 공격마다 족족 되받아 치니 무게로 압살하겠다는 의도였다. 그걸 보던 어느 사내가 “어.”라고 외친 순간, 김수현의 손이 벼락같이 움직였다. 그리고 낙하한 괴물들은 들어올 때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그것도 각각 한 부위가 크게 찢겨나간 채. 그 찰나의 순간, 두 주먹을 이용해 모조리 퉁겨낸 것이다. “…….” “…….” 언덕에, 잠깐의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러다 문득, 골짜기를 보는 사용자들의 가슴에서 무언가 뜨거운 감정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감정의 정체는 그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머셔너리 사용자들을, 그리고 김수현을 볼수록 전신에 뜨거운 것이 차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시작할게요.” 그때,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던 박다솜이 말했다. 김한별 고개를 끄덕이며 또한 품에서 보석을 꺼내 들었다. 새빨간 빛깔의 예쁜 보석이었다. 이윽고 박다솜이 몰래 지팡이를 꺼내 들어, 사용자들을 겨냥했다. “───. ───. ───. 광화.” “대상 지정 광화. 사용 보석 라이트시암(Light Siam).” 발간 빛이 터져 나왔다. 보석은 사르륵 가루로 변해 지팡이에서 흘러나오는 빛에 녹아 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빛이 힘차게 약동하며 사용자들 사이로 멀리, 멀리 퍼져나갔다. 결과는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볼 수 있었다. “하악….” “크흐으….” 갑작스럽게 사용자들의 기세가 일변했다. 돌연 거칠게 숨을 몰아 쉬고, 가래 끓는 신음이 흘러나온다. 목이 바짝바짝 타올라 자꾸만 침을 삼키게 된다. 어느새 모두의 눈동자에 벌건 빛이 흐르기 시작했다. 두 눈을 희번덕거리는 그 모습은, 명백한 살기 그 자체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뜨겁게 끓어오르던 감정이, 광화와 섞이며 한순간 살기로 폭발했다. 그것은 지금껏 사용자들이 괴물들에 가지고 있던 두려움과 불안함에 기인한다. 동료를 잃은 사용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래저래 당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느꼈던 무기력감. 그런데, 골짜기의 전투를 보며 그간의 생각이 확실하게 변했다. 저 빌어먹을 놈들. 생각보다 별거 아니잖아? 원정대에 참가한 사용자들은 각 클랜에서 한가락하는 이들이다. 당연히 웬만한 괴물로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그러할진대. 이러한 상황에서, 그때의 기억을 되살림과 동시에, 그동안 억눌렀던 울분이 광화를 토대로 터져 나온 것이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선유운은 스리슬쩍 고오환에게로 다가섰다. 혹시나, 만에 하나 머셔너리가 당할 때까지 가만히 구경만할까 봐 걱정이 든 탓이다. “무사 로드. 이제 슬슬…. 음?” 그러나 고오환을 쳐다본 순간, 선유운은 자신의 걱정이 기우임을 깨달았다. 고오환은 어느새 자신의 무기를 꺼내든 채, 입에서 침까지 질질 흘리는 중이었다. “크아아아아악!” 고오환이 괴성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러더니 사용자들의 앞에서 걸음을 멈춰, 커다란 도를 높이 들어올리며 외쳤다. “뭐하냐, 이놈들아! 이대로 가만히 있을 거야?” 하지만 사용자들은 누구도 회답하지 않았다. 그저 각자의 무기를 으스러지듯이 쥐며, 입을 질끈 깨물며, 몸을 들썩들썩 움직일 뿐. 그러한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가자! 씨발, 모두 조져!” 쩌렁쩌렁한 울림. 그와 동시에. 와아아아아아아아! 엄청난 함성, 아니 거의 포효라고 봐도 될 정도의 소리가 언덕을 진동했다. “죽여라!” “모두 죽여버려!” 죽이라는 성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토해졌다. 두두두두두두두두! 그리고, 어마어마한 발소리들이 언덕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사용자들의 머릿속에는 무조건 죽이겠다는, 기필코 죽이고야 말겠다는 살육에 대한 일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한 본능에 따라, 벌건 안광을 흘리는 사용자들이 한창 격전을 벌이는 골짜기로 덮쳐 들었다. * “선봉 부대가 모두 들어갔습니다!” 언덕의 모든 사용자들이 내려간 순간, 돌입 보고가 한소영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한소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앞에서는 엄청난 살기의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으니까. “저. 총 사령관님. 우리도 도와야 하는 게 아닐지….” 누군가 머뭇머뭇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한소영은 차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도와주는 건 크게 어렵지는 않다. 굳이 내려갈 필요는 없고, 마법이나 화살 정도 지원하는 건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조금 전 머셔너리 로드가 보내온 전령은 그런 생각을 고쳐먹게 만들었다. '지원은 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하시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때였다. 휘리릭! “으, 으아아악!” “습격이다!” 중앙에서 들려온 외침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후미 부대에서 들려온 비명. 그것을 인지한 순간, 한소영의 두 눈이 살짝 떠졌다. '머셔너리 로드께서, 괴물들의 기습을 예상하셨습니다. 진화한 개체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자리를 떠나면, 그놈들로 이루어진 부대가 기습할 가능성이 높다고요.' 속으로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선봉 부대를 저렇게 자기 입맛대로 휘두르는 것도 모자라, 적의 수를 읽기까지 했단 말인가? 그러나 한소영에게는 더는 생각할 틈이 없었다. 후미 부대라면 아직 언덕에 오르지 못한 배열이 있을 테니까. 예상했던 만큼, 당황하지 않았다.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가운데, 한소영이 침착히 손을 들어올렸다. 이내 꾹 맞붙어있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라운드 하우스(Round House).” ============================ 작품 후기 ============================ 오늘은 오랜만에 자정에 업데이트했네요. 라운드 하우스. 익숙한 분들이 많으실 거라 생각되는데요. 하하.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군대 용어입니다. 군대 하니 얼마 전 인터넷에서 재미있는 글을 본 게 떠오르네요. 군대에 다녀오신 분들은 모두 한두 번은 진지 공사 해보셨죠? 그 진지 공사가 어느 정도인지, 여성분들께 쉽게 이해시키는 방법입니다. (본문.) 1년 중 봄과 가을에 1주일 동안 김장을 해야 하는데, 배추 5000포기씩 날라서 김장해야 돼. (본문에 달린 코멘트.) 1. 그것도 시어머니 20명과. 2. 시누이 20명도 있지. 3. 다른 재료는 없이 배추만 있어. 4. 남편은 뒤에서 술상 봐~. 하면서 술만 먹고 있지. 5. 간혹 시가 쪽 친척들이 김장 잘하고 있나~. 하고 오지. 6. 그리고 집안 최고 어르신이 나타나 딱 한두마디 하셔. 그럼 처음부터 다시 해야 되지. 7. 막내 며느리는 말도 안 들어. 8. 김장을 다했는데 젤 높은 할머니가 와서 하시는 말씀. 좀 짜네? 그럼 다시 김장을 담그지~. 9. 근데 이거 안 하면 감옥 감. 10. 열 받아서 이혼하고 싶은데 합의를 안 해줘. 그렇다고 짐 싸서 나가면 지옥까지 쫓아가서 잡아와. 11. 그래도 수고했다고 용돈은 준다. 1시간에 300원. ^^ 아. 동의하시는 분들도, 모르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정말 이거 보고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하하하. 그래도 예비군이라서 재미있다며 웃는 거지. 아마 현역이었다면 못 웃었을 것 같네요. 0564 / 0933 ---------------------------------------------- 싱크 홀(Sink Hole). 벤다. 촤악! 찌른다. 푸욱! 그리고, 터뜨린다. 꽈꽝!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피를 분수처럼 쏟으며 무너지는 괴물들. 자세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지금 내가 죽인 수만 해도 100마리는 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다. 시선을 돌리는 곳마다 놈들이 보이고, 검이 가는 곳마다 여지없이 걸려든다. 조금도 방심할 수는 없다. 아차 하는 순간 당하는 건 순식간일 테니. - 키에에엑! 바로 지금처럼. 나는 차분히 호흡을 고른 후 무검을 역수로 잡았다. 그리고 괴물이 아가리를 쩍 벌리며 달려드는 순간, 주먹 쥔 왼손으로 두개골을 강하게 후려갈겼다. 뭉툭한 손맛. 잠시 후, 입에 잔뜩 머금은 물을 뿜어내는 것처럼 놈의 아가리에서 핏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 키르르르르륵! 아직 죽지 않았다. 그래도 충격이 아주 없지는 않은 듯 움직임이 상당히 굼떠졌지만, 놈은 여전히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나를 씹으려 들었다. 나는 바로 오른손을 들어 역수로 쥔 무검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비틀며 좌우로 세게 헤집자, 비로소 온몸을 부르르 떨며 하릴없이 무너진다. “후…. 응?” 그렇게 한 놈을 추가로 처리했을 무렵, 돌연히 등에서 찌릿한 느낌이 전해졌다. 나는 얼른 몸을 돌려 시선을 들었다. 여기서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하게 느껴졌다. 언덕에서 피어오르는, 불길하면서도 익숙한 기운들을.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비비앙이 마수 군단을 소환했다. 그러면 예상이 맞아떨어졌다는 걸까. “잘하고 있으려나.” 그래. 한소영의 능력이라면 분명 막고도 남을 터. 우선 골짜기부터 차근차근 정리할 생각에 나는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잠깐이지만 당혹한 기분을 느꼈다. “와하하하하하!” 한 사내가 우렁찬 웃음을 터뜨리며 거대한 대검을 내려찍자, 괴물이 그대로 두 동강이 나버린다. “끼히히히히히!” 한 여인이 미친년처럼 웃어 젖히며 창을 올려 젖히자, 괴물은 사타구니에서 핏물을 뿜으며 구슬픈 비명을 내질렀다. 이윽고 눈깔을 희번덕거리며 다음 먹잇감을 찾아 달려가는 사내와 여인. 비단 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어느덧 골짜기는 괴물이 내뿜은 피와 체액 냄새로 진동을 하고 있었다. 사용자들은 몸을 아끼지 않고 괴물들 사이를 누비며 악착같이 무기를 박아 넣는다. 일방적인 학살. 마치 누가 누가 많이 죽이나 내기라도 했는지, 앞다투어 괴물을 찾아 죽인다. 이제는 난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그저 무기를 꼬나 쥔 사용자들이 무작정 앞으로 돌격해 들어가는 것에 불과할 뿐. 아주 나쁘지는 않다. 어쩌면 이런 상황에 한정해 생각해보면, 저렇게 마구잡이로 밀어붙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키킥, 키키킥, 키키키킥!” 사용자들의 상태가 심해도 너무 심하다는 것. 말인즉, 정도가 지나쳤다고나 할까. 어느 여인은 쓰러뜨린 괴물의 촉수를 와짝 깨물어 물어뜯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 눈물을 죽죽 흘리는 모습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묘하다. 짚이는 바가 없는 건 아니다. 광화는 사용자 내면에 잠든 감정을 폭발시키는 능력. 근래에 느낀 감정일수록 더욱 커다란 효과를 볼 수 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저 여인은 괴물에 무척 가까운 지인을 잃었을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면 혈육이나, 아니면 애인이라던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혀, 형님!” 어디선가 진수현의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지체 않고 무검을 고쳐 잡은 후 어깨 뒤로 찔러 넣었다. 무언가 부드럽게 파고들어가는 감각이 전해진다. 하여 그대로 마력 폭발을 일으키자, 아니나다를까. - 카하아아아악! 뻥 터지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후드득, 터져 나온 찌꺼기들이 등을 두드리는걸 느끼며 나는 바로 진수현을 응시했다. “왜.” 조용히 입을 열자 진수현은 멍하니 나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주춤주춤 손을 들어 가리켰다. “뒤, 뒤….” 흘긋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방금 쓰러트린 놈 바로 뒤쪽으로, 다른 괴물이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시간차 공격을 하려 했던 모양이다. “…….” - ……. 그렇게 지그시 보고만 있을 무렵, 문득 놈이 홱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주둥이를 쩍 벌리더니 그대로 나를 지나쳐 어딘가로 달려들었다. 이건 진수현이 있는 방향인데. “이, 이 씨발놈이?” 흠. “괴물 주제에 사람을 가려? 오~냐, 와라! 이 개새끼야!” 이윽고 진수현의 분노 어린 음성에 이어 복날 개 패듯 처맞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속으로 웃으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덧 전장은 거의 정리돼가는 상황이었다. 어디를 봐도 빽빽하게 모여있던 놈들이 이제 드문드문 보이고 있다는 게 명백한 증거였다. 생각보다 전투가 빨리 끝날 것 같다. 이내 건너편의 언덕 쪽으로 시선을 돌린 나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괴물들이 도망치고 있었다. 사용자들에 둘러싸인 괴물들은 이미 거진 전멸한 상태였다. 그러나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던 괴물들은 반대로 몸을 돌려 언덕을 기어오르는 중이다. 하기야 상황 판단이 빠른 놈들의 습성상 오히려 늦은 퇴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어디를 도망가냐! 깡그리 잡아 족쳐주마!” 그때, 성난 목소리가 골짜기를 왕왕 울렸다. 고오환의 목소리였다. 고오환은 거의 몸만한 도로 언덕을 가리킨 채, 입에서 게거품까지 튀겨가며 외치고 있었다. 그러자 사용자들 또한 희번덕 언덕을 돌아보더니 포효를 내지르며 뒤쫓아 오르기 시작했다. …추격이라. 확실히 지금 상황에서는 이 기세를 몰고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보아하니 아직도 광화의 여파가 강하게 남아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조금 위험할 수도 있다. 언덕을 넘으면 놈들의 근거지가 나온다. 이대로 계속해서 앞뒤를 가리지 않고 돌격한다면 수많은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는 노릇.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곧바로 안솔을 찾았다. 다행히 안솔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안솔!” “네, 네!” 쉬지 않고 보호와 회복 주문을 외우던 안솔이 화들짝 놀라며 나를 돌아본다. “지금 당장 각성, 아니면 진정 주문을 사용해라!” “각성, 진정 주문이요?” “지금 광화가 너무 강하게 걸렸어. 상태가 너무 지나치다.” “그, 그렇기는 한데….” 안솔은 재빠르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약간 곤란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 수는 있는데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지금 너무 중구난방으로 분포돼있어서….” “으음.” “기적이라면 한 번에 해결이 가능한데. 사용할까요?” “아니. 그건 안 돼.” 나는 조금도 고민 않고 머리를 저었다. 가장 강력한 무기나 다름없는 기적을 여기서 허비할 수는 없다. “일단 최대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 다른 사제들과 힘을 합쳐도 좋고.” 이윽고 알겠다고 회답하는 안솔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 나는 즉시 언덕을 돌아보았다. 어느 성질 급한 사용자들은 이미 언덕을 반쯤 오르는 상황이다.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조금도 지체 않고 달렸다. * “라운드 하우스(Round House).” 한소영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운드 하우스. '적이 집 근처를 어슬렁거린다.'라는 의미. 그러자 곧 신기한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한소영이 내뻗은 손이 화려한 빛에 휩싸였다. 그 빛에 반응했는지 주변의 땅이 눈부신 보라 빛을 토해내더니, 이내 원형 모양의 무언가가 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 무언가는, 다름 아닌 마법 진이었다. 온갖 형이상학적인 문양이 그려진 직경 1미터는 돼 보이는 보랏빛 마법 진. 그것은 하나가 아닌 수십, 아니 수백에 다다를 정도의 엄청난 수량을 뽐냈다. 그러더니 완전히 떠오른 마법 진들이 흡사 지면이 빙판이라도 된 듯, 사방팔방으로 휘돌며 사용자들의 시선을 어지럽히기 시작한다. “노,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후미 부대가 주 목적인 것…. 아니 아니! 일부는 중앙 쪽으로도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급한 보고가 이어졌다. 한소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엄청난 속도로 주변을 맴돌던 마법 진들이 돌연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전전긍긍한 빛으로 발만 동동 구르던 사내는 순간 망연한 얼굴로 지면을 돌아보았다. 어느덧 움직임을 멈춘 마법 진들이, 한소영을 중심으로 하나의 거대한 진형을 형성한 것이다. 어떤 체계로 이루어졌는지 몰라도, 진형은 분명 나름의 질서를 갖추고 있었다. “화스트 페이스(Fast Pace : 상황이 빠르게 전개된다.).” 그 순간 안 그래도 밝게 빛나던 마법 진들이, 더더욱, 엄청난 빛무리를 뿜어내었다. 이제는 이글이글 뜨겁게 타오른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작열하고 있다. 곧 어디서 들려오는지도 모를 찬란한 미성이, 허공을 아련하면서도 웅혼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한소영의 소환 능력, '여왕의 군대' 출현이 임박했다는 증거였다. 한소영이 살그머니 주먹을 쥐었다. “칵키드…!” 그리고 힘차게 입을 열려는 찰나. “오라! 피에르! 제 4군단을 지배하는 미친 불꽃의 어릿광대여!” 돌연 한쪽에서 들려온 낭랑한 목소리가 소환 주문을 도중에 끊어버렸다. 흠칫한 한소영은 아미를 살짝 좁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리저리 소용돌이치는 어두운 운무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어두운 운무가 좌우로 쩍 갈라지더니 안에서 수많은 마수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그랬다. 적들의 습격을 예상한 김수현이 혹시 모르는 상황을 대비해 비비앙을 남겨둔 것이다. 이윽고 마수들은 특유의 웃음소리를 남기며 괴물들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한소영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천천히 팔을 내렸다. 한편, 같은 시각. “죽여라!” “쫓아! 쫓아가서 조져버려!” 골짜기에서의 전투는 이미 거의 정리된 상태였고, 전장은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동안 꾹꾹 쌓아둔 분노를 터뜨린 사용자들과 패배를 직감하고 도망치는 괴물들. 물론 속도는 괴물들이 훨씬 빠르다. 사용자들이 두 발로 달려 올라가는 것에 비해, 괴물들은 미끄러지듯이 쭉쭉 올라가고 있었으니까. 괴물들이 아예 도망치기로 작정한 만큼, 김수현 같은 민첩 능력치가 특화된 사용자가 아닌 이상 잡기란 요원한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미 괴물들이 언덕너머로 모습을 감추었음에도 부단히 쫓아 올라가 기어코 언덕의 정상에 서고야 말았다. 그리고 벌겋기 그지없는 눈으로 괴물들의 자취를 확인하려는 순간. “……?” 한없이 쫓고 쫓던 사용자들의 걸음이, 정상에 오른 찰나 갑자기 정지했다. 정확히는 언덕 너머의 광경을 확인한 순간부터.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필요 이상의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사용자들은 여전히 괴물을 쫓아 달렸지만, 성향이나 항마력으로 비교적 영향을 덜 받은 사용자들은 그러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확인하고 받은 충격이, 뇌리에 한 줄기 남은 이성을 간신히 일깨운 것이다. 이윽고 그런 사용자들의 머리에 하얀 빛 가루가 사르르 내려앉자, 살의가 가득하던 눈동자가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사용자들은 하나같이 떨떠름한 얼굴로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뒤늦게 언덕을 올라온 안솔이 숨을 헐떡이며 사용자들을 가리켰다. 하지만 아무런 회답도 들려오지 않는다. 하여 의아한 기분에 겨우겨우 고개를 올린 순간, 안솔의 얼굴도 앞서 올라온 사용자들과 똑같이 변했다. 언덕에는, 언덕너머 아래쪽에는…. “이게…. 뭐야?” 아무것도, 없다. 숲도, 수림도 아니었다. 그저 보이는 거라고는 둥글게 둘러싸인 언덕들 아래, 깊게 파여진 시꺼멓기 짝이 없는 구덩이 하나. 직경이 100미터는 가볍게 넘어 보이는 구멍에는, 오직 끝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만이 들어차 사용자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것을, 도대체 무어라 표현을 해야 할까? 커다란 마른 웅덩이? 아니면 거대한 구렁텅이? 아니. 흡사 지옥의 입구라도 된 듯 그 끝을 알 수 없는 그 구멍은, 꼭 초대형 싱크 홀(Sink Hole)을 보는듯했다. ============================ 작품 후기 ============================ 아기 괴물 : 누나. 너무 무서워요. 아빠는 꼭 살아 돌아오시겠죠? 누나 괴물 : (아기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그럼. 걱정 마렴. 아빠는 부족 제일의 용사란다. 꼭 침입자들을 물리치고 안전하게 돌아오실 거야. 사용자 : (쓰러트린 괴물을 뜯고, 씹어먹으며.) 키킥, 키키킥, 키키키킥! 아빠 괴물 : 도, 도망가! 크아아악! 아기 괴물 : 아, 아빠? 아빠아아! 누나 괴물 : 아버지이이이! 한 번 괴물의 입장에서 서술해보았습니다. :) 0565 / 0933 ---------------------------------------------- 반나절 간의 휴식. 전투가 끝났다. 정오쯤 시작된 전투는, 해가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하면서 완전한 종결을 알렸다. 결과만 놓고 보면 대승이다. 골짜기에서는 거의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혔고, 언덕에서도 비슷한 성과를 냈다. 물론 남부 원정대도 어느 정도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괴물들과 비교했을 때 조족지혈인 수준이었다. 치료할 수 있는 부상자를 제외하면 모두 합쳐도 한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한소영도 전투를 아는 여인이다. 기세를 중하게 여기면서도 주변 상황을 읽는걸 놓치지 않는다. 언덕의 장벽너머 거대한 구덩이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은 한소영은 곧바로 진군을 멈추고 야영지를 설치할 것을 지시했다. 좋은 선택이다. 현재 남부 원정대는 새로 출현한 구덩이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런데 기세만 믿고 섣불리 달려들었다가는 어떤 낭패를 볼지도 모르거니와, 또한 잔뜩 흥분한 사용자들을 가라앉힐 필요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을 고려한 한소영은 겸사겸사 승리에 대한 회포도 풀 겸, 오늘 하루 조금 긴 휴식을 베풀어준 것이다. 그렇게 언덕의 정상에 빙그르르 둘러치듯 야영지를 설치한 후, 남부 원정대는 전투에 지친 심신을 달래는 휴식에 들어갔다. 오늘만큼은 적당량의 음주나, 개인적으로 가져온 재료를 따로 요리해서 먹어도 누구도 터치하지 않는다. 나 또한 간만에 고연주가 만들어준 요리를 맛보고 싶었으나 지휘관 회식이 따로 잡히는 바람에 눈물을 머금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전투의 피로로 거절해도 상관없겠지마는, 한소영이 꼭 참석해달라 요청해왔는데 어찌 감히 거절하랴. 목숨을 내놓는 일이 있더라도 가야지. 회식은 꽤나 떠들썩한 기분으로 진행되었다. 누가 나서서 띄운 것도 아닌데 절로 흥겨운 분위기가 연출돼 서로 웃으며 차려진 음식을 먹는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아무리 대승이라고는 하나 사망한 사용자가 없는 게 아니었으니까. 운이 좋고 안 좋고를 떠나서,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이도 분명 있을 터. 부하를 잃은 클랜 로드들은 조용히 주류만 마시며 좌우만 설핏설핏 살폈다. 한소영도 그런 이들을 배려하고 싶었는지 가끔 적당히 대꾸만 해주며 조용한 식사를 이어나갔다. 하여 나 또한 가만히 수저만 깨지락거리며 사선 방향, 상석에서 앉은 한소영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가만히 보면 먹는 모습도 참 예쁘다. 어떻게 행동 하나하나에서 저런 기품이 나오는 걸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돌연 한소영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 고개를 갸웃하는 한소영. “혹시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 “예?” “자꾸 쳐다보셔서.” “…아니요. 아닙니다.” 무표정한 얼굴과 마주하니 차마 속내를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아, 나는 간신히 회답한 후 시선을 떨구었다. 이내 미약한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 한소영의 시선이 떨어지는걸 느꼈다. 그때였다. “야!” 느닷없이 높은 소프라노 톤의 목소리가 귓전을 왕왕 울렸다. 흘긋 시선을 돌리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나를 삿대질하는 비비앙이 보였다. “김수현!” 비비앙은 지휘관이 아니지만 이번에는 예외적으로 회식에 참가할 수 있었다. 한소영이 그동안 세운 공을 기려 특별히 초청한 것이다. 하기야 지금껏 세운 공이 어지간한 사용자들을 훨씬 넘어서는지라, 비비앙의 참가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비앙을 보자마자 한껏 추켜세우며 치근덕거리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인정하기는 싫지만, 확실히 비비앙도 독특한 매력을 지닌 미인이다. 성격이 4차원이라서 그렇지.) “너 말이야~. 그러면 안 돼~.” 비비앙은 혀 꼬인 목소리로 말하고는 드르륵 의자를 끌어 바짝 다가왔다. 아까 실컷 떠들며 부어라 마셔라 하더니 벌써 얼큰하게 취한 모양이다. 나는 머리를 설레설레 저은 후 손사래를 쳤다. 상대하기 싫으니 가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비비앙은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도대체가 말이야~. 약속도 안 지키고~.” “무슨 약속?” 그러자 “이거 봐~. 이거 봐~. 내 이럴 줄 알았어~.” 느물거린 비비앙은 별안간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이제는 서로의 코가 맞닿을 정도였다. 문득 사선 방향에서 얌전히 딸꾹질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수현, 너!” 비비앙은 두 눈을 게슴츠레 뜬 상태서 속살거리듯 입을 열었다. “내 엉덩이, 도대체 언제 때려줄 거야?” “푸.” 어디선가 물을 뿜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비비앙도 아니다. 급히 시선을 돌리자 사레가 들렸는지 콜록콜록 기침을 하는 한소영이 보였다. 기침하는 모습도 어쩌면 저렇게…. 아니. 이게 아니지. 아무튼, 순간 넋이 날아가고 혼이 흩어지는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곧바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래. 나는 홀 플레인에 들어온 지 13년 차 되는 사용자. 고작 이런 일로 당황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의연한 모습을 보이며 비비앙의 주정으로 몰아가는 게 의심을 줄이는데 현명한 방안이리라. 겨우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 나는 태연한 행동을 보이려 애쓰며 비비앙을 도로 밀어내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밀려나지 않으려는 듯 얼굴에 끙 힘을 주는 비비앙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재미있게 노는 건 좋은데, 주정은 부리지 마. 헛소리도 적당히 하고.” “왜! 뭐!” “비비앙.” “…….” 나는 목에 힘을 주어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단박에 입을 다문 비비앙은 이내 나를 살살 살피기 시작했다. 이 녀석, 잔뜩 취해있던 게 아니었던가? “우리끼리 있는 자리가 아니잖아. 아무리 특별 초청을 받았다고 해도, 너무 과도한 행동은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엄중히 경고한 후, 나는 앞에 놓인 음식 접시를 쭉 밀어주었다. 비비앙은 이게 뭐냐는 얼굴로 멀뚱히 나를 바라보았다. “가져가. 어차피 음식 안 먹으면 달라고 온 거잖아?” “…….”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비비앙은 벌컥 화를 내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접시를 가져가는걸 보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잠시 후, 사선 방향에서 자꾸만 빤한 시선이 느껴져 나는 헛기침을 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주류를 들이켰다. 결국 추가로 30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간신히 의심 어린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었지만, 회식은 대체로 좋은 기분으로 흘러갔다. 그러다 서서히 접시가 비어가고 주류도 떨어질 무렵, 다가오는 파장의 분위기 속에서 한 사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기 총 사령관님. 이 좋은 자리에서 여쭈기에는 외람되지만, 그래도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리 높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조용히 있는 사용자가 아니라면 그냥 흘려 들을 정도랄까. “하세요.” “내일…. 그러니까, 그 구덩이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러나 그 말을 꺼낸 순간, 떠들썩하던 소리는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그 구덩이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라. 말 자체는 간단했지만 무척 복합적인 의미를 품고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한소영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두 눈을 살짝 추켜 뜨기는 했지만,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자세를 고쳐 앉을 뿐. “일단 여기서 진군은 멈출 생각이에요.” “그럼….” “물론 어디까지나 진군만 멈출 생각이에요. 공략은 계속됩니다.” “…….”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괴물을 쫓아간 몇몇 사용자들이 구덩이 안으로 도망치는 모습을 목격했다 밝혔다. 말인즉, 구덩이 안쪽까지 들어가 괴물을 완전히 청소하겠다는 소리였다. “차라리…. 그냥 지나치고 진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미 대승을 거뒀습니다. 굳이 근거지로 추정되는 곳에 들어가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누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여기 있는 거의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동부의 첫 공략을 보고 아직 그 여파가 남아있어, 우리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동부 원정대가 해놓은 짓거리가 있는 만큼, 아주 근거 없는 생각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럴 수는 없어요. 우리는 구덩이에 관한 조사를 마치는 즉시 근거지 공략을 실시할 겁니다.” 그러나 한소영의 생각은 확고했다. 단호한 목소리로 딱 자르더니 오히려 무 감정한 눈빛으로 주변을 지그시 돌아보았다. “여러분의 생각이 어떤지는 알고 있어요. 아니, 알 것 같아요. 적당히 진군하며 시일을 채우다가 요새 건설. 그리고 차후 지역을 공략할 원정대에게는 정보만 전해주면 된다. 아닌가요?” 한소영의 말이 정곡을 찔렀다. 건의한 사용자들은 약간 민망해 보이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물론 이대로 그냥 지나치고 갈 수는 있겠죠. 그걸 원하는 사용자들도 많을 테고요. 하지만 지금 여기서 분명히 밝히건대, 그건 의미 없는 일이에요.” “…….” “중앙 관리 기구에서 왜 요새를 건설하기를 원했는지, 부디 여러분들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저기. 그러면 말입니다.” 이윽고 한소영의 말이 끝나자, 또 한 명의 사용자가 조금은 풀이 죽은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총 사령관님도 아시겠지만 진군 거리 문제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구덩이를 빠르게 공략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지정된 시일이 초과될 정도로 시간이 걸린다면….” “지정된 시일을 초과한다면, 근거지 공략 후 인근에 요새를 건설할 장소를 찾아야겠죠. 어쨌든 무조건 공략이 우선이에요.” “그러면 다른 원정대에서 진군 거리를 트집 잡아 이의를 제기할 소지가 있지 않을까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그렇게 말한 한소영은 오른손을 들어 테이블에 살포시 얹었다. “혹여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제가 책임지고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어진 의무를 다했다면,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전보다 더욱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말뿐이 불과했으나 이상하게 확신을 전해주는 목소리였다. 사용자들도 서로를 번갈아 보다가 이내 하나 둘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회식은 파장을 알렸다. * 깊은 밤. 골짜기에서 전투를 치른 지가 바로 조금 전 같은데, 어느새 어두운 어둠이 내려앉았다. 오늘 하루 푹 쉰 사용자들은 밤이 되자마자 언제나와 같이 행동했다. 일부는 언덕에 서서 주변을 경계하고, 나머지는 천막에 들어가 내일을 대비한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실 경계를 서기까지 약간 남은 상태였으나, 이번에 야영지를 둘러치듯이 세운 탓에 순번이 앞으로 확 당겨지고 말았다. 즉 야영지가 길쭉한 원 형태를 그려 경계를 해야 하는 부분도 자연스럽게 늘어났고, 그에 따라 각 부분을 담당하는 지휘관들이 추가로 필요하게 된 것이다. 한소영이 경계 하나만큼은 정말 철저하게 생각하는 터라, 결국에는 싫든 좋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나는 언덕 정상에 앉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흡사 보고만 있어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구덩이를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문득 회식 때 나온 이야기에 웃음이 나왔다. 그냥 지나치면 안되겠냐 라. 사용자들은 과연 알고나 있을까? 앞으로 추가로 진군해 새로운 괴물과 맞닥뜨리는 것보다, 여기서 저 구덩이를 공략하는 게 백 배, 천 배는 더 낫다는 것을. 그게 훨씬 더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말이다. 왜냐하면 이 앞에는…. 그때였다. 한창 상념에 빠져있는 찰나, 문득 한쪽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적은 아니다. 그럼 사용자라는 소리인데…. 그 순간, 나는 지체 않고 품에서 지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곧장 앞으로 펼쳐 열심히 보는 척을 했다. 사실 이렇게 경계를 서다 보면 가끔 접근해오는 사용자들이 심심치 않게 있는 편이다. 아무래도 현재 남부 원정대에서 높은 위치를 가진 터라, 여러 제안을 해오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전투에서 자기 클랜을 더 보호해달라고 하거나, 누구에게 조금 더 위험한 역할을 돌려달라고 하거나, 아니면 한 번 하지 않겠냐고 유혹을 하거나. 좋게좋게 거절하는 것도 한두 번. 이러한 일이 지속되면, 짜증은 둘째치고서 라도 서로 얼굴을 붉히는 일까지 생긴다. 그래서 결국 나는 한 가지 대응책을 마련했는데, 그게 바로 지도를 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선도의 역할을 맡고 있고 또 그 중요성을 아는 사용자라면, 함부로 끼어들 수 없는 부분이었으니까. 일단 지금은 머리가 복잡하니까 오늘은 그만 가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곧 등장한 사용자는 내 예상을 철저히 빗나가게 해주었다. 아니. 등장한 여인은 사용자가 아닌 거주민이었다. “어험.” 비비앙은 어떤 말도 않은 채 나를 그대로 지나쳤다. 언뜻 시선을 돌리니 한껏 무게를 잡으며 터벅터벅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꼴을 보아하니 목이랑 허리가 아주 빳빳하다 못해 부러지겠는 게, 아마 회식 때 여기저기서 추켜세워준 여파가 남아있는 듯싶다. 그래서 나한테도 거드름을 피우러 온 것일 테고. 그래. 요즘 왜 이리 조용하나 싶었다. 이윽고 저 멀리 사라질 것 같던 비비앙이 역시나 몸을 돌려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 무시하기로 마음먹고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에헴!” 아까보다 한층 강한 헛기침. 그게 마치 자기를 알아봐 달라는 것 같다. 무시, 무시하자. “에헤헴! 으헤헤헴!” 하지만 비비앙은 포기하지 않았다. 자꾸 왔다갔다하기도 창피할 텐데, 오히려 더욱 오기 어린 목소리로 힘껏 기침을 하고 있다. 지금 해보자는 건가? 나는 속으로 웃으며 지도를 보며 중얼거렸다. 흡사 절대로 방해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매우 진지한 목소리로. “흠. 이 지점은…. 조금 위험할 것 같기도 한데. 1지역이랑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아차! 저기 뭘 떨어뜨리고 왔네? 다시 주워와야겠다!” 헛기침에서 멘트가 바뀐 건가. 하기야 상관없겠지. “여기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을 생각해서…. 음. 그렇게 진군해야겠군. 모호로 비치치의 불연속면도 염두에 두어야겠어.” “아. 내 천막이 어디였지? 천막이 어디 있더라~.” “음. 그렇군…. 이렇게 하면 되겠어. 하지만 상대성 이론을 생각하면 이 부분은 조금 조심해야 할 것 같고. 그런데 이렇게 하면 과연 챔스에서는 누가 이길까?” “어? 맞다. 나 화장실 가려고 나왔지? 화장실이 어디더라? 혹시 알고 있는 사람 없으려나~.” 그렇게 계속해서 헛소리를 지껄이기를 수십 분. 놀랍게도 비비앙은 여전히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다. 아마 몇 십 번은 왔다갔다하지 않았을까. 어느새 처음의 오기 어린 목소리는 사라진 상태였다. “화장실…. 흑…. 화장실 어디 있어…. 흑…. 윽….” 무에 그리 서러운지. 이제는 울먹임 가득한 목소리만이 들려올 뿐.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비비앙이 깜짝 놀라며 화들짝 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나는 반대 방향을 쳐다본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 주류를 너무 많이 마셨나. 피곤하네.” “어, 어?” “그냥 자야겠다. 혹시 모르니까 경계한테 말하고 와야지.” “…….”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는 정말로 가까이 경계를 서고 있는 사용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물론 비비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무시한 채로. 그러자 잠시 후. “어엉….” 털썩, 주저앉는 소리와 동시에 목놓아 우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아이고…. 어허엉…. 아이고오 분해애…. 흐어어엉….” 그래. 울어라, 울어. ============================ 작품 후기 ============================ 울어라, 비비앙아! 불타라, 엉덩이야! 0566 / 0933 ---------------------------------------------- 달콤한 갈등. 그것이, 언제 태어났는지는 모른다.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처음 의식을 깨고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거라고는, 그저 사방에 들어찬 캄캄한 어둠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한없이 웅크린 채 자신이 누구인지 또 왜 여기에 있는지 알아가는 것뿐이었다. 이후 무수한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자아를 확립할 무렵. 그것은 태어나 처음으로, 감정이라는 내면의 정서를 깨닫게 되었다. 거기서 처음으로 느낀 감정은, 다름 아닌 외로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세월을 홀로 보내면서, 오직 하는 거라고는 가만히 앉아 의식을 헤엄치는 것뿐이었으니. 그러던 어느 날, 그것이 고독감에 몸부림치며 조용히 힘을 키우던 와중, 무언가가 앞으로 뚝 떨어졌다. 태어난 이후 처음 보는 기묘한 생물이었다. 동글동글한 게 하나, 길쭉한 것이 아래위로 각각 한 쌍이 달려 허우적거렸다. 그것은 그 기묘한 생물에 깊은 흥미를 느껴 곧장 탐구에 들어갔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 수 있었다. 바로 종족 번식이라는 개념을. 그리고 종족을 번식하기 위해서는 수태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것은 생각했다. 아쉽지만 자신에게는 수태 능력이 없다.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은 능력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수태 능력을 가진 생물이 있다면, 이 새로운 개념을 실행시킬만한 충분한 요건이 된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그리고 이 정도면 되겠다고 생각이 들 즈음, 곧바로 종족 번식을 시작했다. 하지만 변수는 언제나 생기는 법.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모체의 역할을 해주는 생물이 너무 약한 탓에, 긴 시간 동안 이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 많이, 더 강한 모체가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한 그것은 이후로 기를 쓰고 모체를 모을 방안을 강구했다. 이미 번식에 성공한 놈들을 키워 이용하기도 했다.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처음 우연찮게 들어온 생물과 비슷해 보이는 생물들을 잡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여전히 그것의 고민은 해결되지 않았다. 수태 능력을 가진 생물을 찾기도 어려울뿐더러, 기껏 잡아와도 그저 그런 모체가 대다수였으니까. 심지어는 모습만 비슷할 뿐이지 수태 능력이 없는 생물도 있었다. 아주 이따금 바라마지 않던 강한 모체를 발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끝없이 지속되는 종족 번식을 버티지 못해 결국에는 망가져버리고 말았다. 더욱 많이, 더더욱 강한 모체가 필요하다. 종족 번식을 시작한 이후 수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것은 아직도 외롭다. 그래서 더욱 갈망한다. 자신과, 자신의 아이들과 언제까지나 함께할 수 있는, '파더'의 반려가 될 수 있는 '마더'를. * 다음날. 아침이 밝자마자 남부 원정대는 곧바로 구덩이 조사에 착수했다. 사실 조사라고 해봤자 별거는 없다. 구덩이가 얼마나 깊은지 혹은 내면이 지층이 어떤지 조사하는 정도랄까. 조사하는 방법도 상당히 원초적이다. 예를 들면 구덩이 깊이를 재는 방법이, 중간중간 줄을 매듭지어 기다란 밧줄을 만든 후 끝에 무거운 돌을 매다는 것이다. 그리고 감각이 예민한 사용자가 줄을 늘어트려 돌이 땅에 닿았을 때를 기준으로 거리를 가늠한다나. “그럼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이내 얼기설기 이은 줄을 잡고 자세를 잡는 사내를 보며 나는 남몰래 한숨을 흘렸다. 속으로는 소용없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어쩌겠는가. 내 말을 뒷받침해줄 근거가 하나도 없는데. 괜한 말을 꺼내서 의심을 받기보다는 그냥 스스로 깨달을 때가지 가만히 구경하는 게 나을 테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사내가 구덩이를 향해 휙 밧줄을 던졌다. 안으로 들어간 밧줄은 주르륵 흘러내려가며 빠르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낚시를 하는 것처럼 솜씨 좋게 줄을 조절하는 사내를 보며 주변에서 작은 탄성이 나왔지만, 나는 무덤덤한 기분으로 구덩이를 응시했다.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꽤나 길게 이은 듯 밧줄은 몇 분이 지났음에도 계속해서 흘러내렸지만, 이제는 서서히 끝을 보이고 있었다. 사내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는지, 처음에는 호쾌하게 내려가던 줄이 어느새 느릿느릿하게 내려가는 중이다. 그러다 결국 모든 줄이 내려갔을 때, 허공에 헛손질을 한 사내가 흠칫 놀라며 멍한 얼굴을 보였다. “어?” “왜 그래?” “아, 아니. 밧줄이 다 내려갔잖아. 그런데 아직 아무 느낌도 없어.” “…그럴 리가. 무려 500미터도 넘게 이었는데. 실수한 거 아니야?” 누군가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하기야 거주민들이 가지고 온 밧줄은 물론, 길이를 늘이려 별걸 다 엮었다는데 의심할 법도 하다. “아니야. 진짜 온 신경을 기울였다니까. 아무 느낌도 없어.” 그러나 사내는 억울하다는 얼굴로 항변하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용자들 사이로 잠시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일단은 다시 끌어올리는 것으로 결정이 났는지, 사내는 머리를 갸웃하면서도 밧줄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대단하네.” 문득 옆에서 같이 구경하던 고연주가 살며시 기대어오며 말했다. “수현. 도대체 구멍이 얼마나 깊은 걸까요?” “글쎄요.” “정말로 들어갈 수나 있으려나….” “방법이 없는 건 아닐 겁니다. 길이야 만들면 되니까요.” 나는 적당히 대꾸해주며 팔을 들어 고연주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정수리부터 살며시 쓸어 내리려는 찰나. “흥!” 갑자기 어깨와 옆구리로부터 강한 충격을 느껴야만 했다. 동시에 나와 고연주는 강제로 떨어지고 말았다. 누군가 나와 고연주 사이를 억지로 파고들어 지나친 것이다. 주춤하는 와중 시선을 들자 풀을 거세게 짓밟으며 지나가는 비비앙의 모습이 보였다. “어머?” 고연주는 어이가 없다는 듯 아미를 찌푸렸지만, 나는 그냥 덤덤하다. 아마 어제 일 때문에 이러는 거겠지. “비비앙?” “뭐!” 이름을 부르자 비비앙은 빽 소리를 지르며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나는,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밤새 울었는지 눈은 벌겋다 못해 퉁퉁 부어있었고, 입은 닭 부리처럼 튀어나온 상태였기 때문이다. 씩씩거리며 몰아 쉬는 숨소리는 애교로 보일 정도. 얼굴에는 나 지금 서러워 죽겠으니 얼른 달래줘라 라는 기색이 잔뜩 어려있다. 하지만 나는 그 기대를 간단히 배반해주었다. “아니. 잘 잤어?” “…남이사!” “그래? 그러면 됐고. 아무튼 좀 비켜봐.” “뭐, 뭐라고?” “구덩이 안보이니까 비키라고. 간만에 오붓하게 있는데, 방해되잖아.” “끄, 끄윽!” 비비앙은 또 한 번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이를 바드득 갈며 나를 노려보더니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보이며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면서도 주먹 쥔 손으로 자꾸만 눈을 쓱쓱 닦는 게, 아마 또 눈물을 흘리는 모양이다. …조금 너무한 건가 라는 생각에 지금이라도 달래줄까 고민할 무렵, 고연주가 다시금 찰싹 달라붙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를 살짝 잡아당기는 게 느껴졌다. “수현, 수현!” “예?” “저기 좀 보세요.” “……?” 전방의 구덩이를 가리키는 고연주. 벌써 다 끌어올린 건가? 이내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자, 구덩이 앞에서 멍하니 서 있는 사내가 보인다. 어느덧 밧줄은 완전히 끌어올린 상태였다. “어이. 왜 그래? 왜 가만히 있는 거야?” 사내를 등지고 서 있는 방향에서 누군가 채근하듯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멍하니 서 있던 사내가 천천히 몸을 돌리며 밧줄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그와 동시에 곳곳에서 의문에 찬 탄성이 튀어나왔다. 나는 지그시 밧줄 끝을 응시했다. 내리기 전 밧줄 끝에는 분명히 돌멩이가 묶여있었다. 그런데 끌어올린 지금, 아무것도 묶여있지 않았다. 심지어 단단히 묶은 매듭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잘린듯한 단면만이 덩그러이 남아,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 1차 조사가 끝나고 곧바로 회의가 열렸다. 사실 아직 알아낸 게 별로 없는 터라 클랜 로드들도 대부분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계속 이렇게 있어봤자 무의미한 일이다. 그렇다면 결국 해답은 하나. 안으로 직접 들어가야 한다. 한소영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바로 회의를 소집한 것일 테고. “제 생각에는, 아마 저 구덩이가 싱크 홀과 비슷한 종류라 생각됩니다.” 회의 시작 직후, 지층 조사를 맡은 라이트 로드가 차분히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싱크 홀?” “예. 싱크 홀. 간단히 말하면 가라앉아 생긴 구멍을 의미합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커다란 구덩이로, 어느 곳에서나 발견할 수 있지요. …물론 그것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겠지만, 대충은 비슷한 원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럼 다른 특징은 없나요? 예를 들면 주의해야 할 것들이라거나.” “으음.” 한소영의 물음에 라이트 로드는 짧은 침음을 흘렸다. 그리고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가 싶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도 주워들은 것에 불과한 터라 자세한 지식은 모릅니다. 그래도 현대의 지식에 기반해 말해보면, 싱크 홀은 갑자기 많은 양의 지하수가 지하 암반에서 유출되면, 지반이 지층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무너지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죠. 모두 보셨겠지만, 저 구덩이는 직경이 100미터는 넘습니다. 지층이 정말 심하게 어긋나있고, 또 매우 길게 균열이 가있는 상태입니다.” 길게 말을 해서 숨이 차오르는지 라이트 로드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빠르게 호흡을 추스르며 말을 이었다. “말인즉, 문제는 균열입니다. 현재 지층의 상태가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태라는 거죠. 사실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아직 이렇게 유지되고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저에게 좋은 생각이 있지요.” 말을 받은 사용자는 다름 아닌 무사 로드 고오환이었다. “라이트 로드의 말이 저러한데, 우리가 꼭 들어갈 필요가 있겠소?” 그리고 잘려진 밧줄 끝을 들고는 다들 보라는 듯 휙휙 흔들었다. “아마 놈들은 아래서 우리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요. 즉 이대로 내려가면 맛 좋은 먹잇감만 될 가능성이 높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러면은 무슨 그러면. 아 간단하잖아요. 그냥 마법사들만 깡그리 끌어 모아 안쪽으로 마법을 퍼붓거나, 아니면 지계 마법을 사용해서 아예 구덩이를 무너뜨려버립시다. 생각해봅시다. 지층이 와장창 무너지는데 놈들이라고 별수 있겠소? 그냥 깔려 뒈지기만 하겠지.” “푸.”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아야만 했다. 동시에 조금은 부럽기도 했다. 저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게. …아니 그런데. 왜 다들 그럴듯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그, 그건 절대로 안됩니다!” 라이트 로드가 기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정상인이 한 명은 있었어. 다행이다. “왜 안 된다는 거지?” “무사 로드의 말씀대로 해버리면, 빈대를 잡으려다가 초가집을 태우는 꼴이 될 테니까요.” “그러니까 그게 무슨….” “지금이야 지면이 어찌어찌 맞물려 함몰이 멈춘 상태라고는 하나, 저 구덩이는 언제, 어디서든지 넓어질 수 있습니다. 싱크 홀이 원래 그렇습니다.” “아니. 고작 넓어져봤자….” “고작? 싱크 홀을 얕보시는군요.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지금 우리가 있는 장소까지 순식간에 함몰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순식간입니다. 눈 깜짝할 새에 아래로 떨어지는 겁니다.”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라이트 로드는 고오환의 말을 딱 잘라 끊으며 말했다.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러자 어지간한 고오환도 두려움을 느낀 듯,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비단 고오환뿐만이 아니라 회의에 참석한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럼 결국 남은 게 아래로 내려가는 방법밖에 없는데, 아까 밧줄이 잘린걸 봤으니 선뜻 나서기도 애매할 것이다. 잠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때였다. “두 분의 말씀은 잘 들었어요.” 서로 이리저리 눈치만 살피고 있을 무렵, 지금껏 잠자코 있던 한소영이 입을 열었다. “들으면서 이것저것 생각을 해봤는데….” 그리고 차분히 좌중을 둘러보더니 고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상황이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결국 하나뿐이라 생각되네요.” ============================ 작품 후기 ============================ 오프 더 레코드. 로유진 : 야! 비비앙! 비비앙 : 왜? 로유진 : 너 때문에 어제 독자님들한테 혼났잖아! 또 고자질했냐? 비비앙 : 무슨 헛소리야! 네가 그렇게 적어놓고는! 그럼 진작에 잘해주던가! 로유진 : 하. 이렇게 나오시겠다? 두고 보자. 비비앙 : 두, 두고 보자니? 로유진 : 말 그대로야. 두고 보자고. 김수현이 주변에서 예쁘게 연애할 때, 너만 손가락 쪽쪽 빨게 만들어주마. 푸헤헤헤. 비비앙 : 그, 그런 게 어디 있어! 이 쫌생아! 로유진 : 안 들려~. 안 들려~. 비비앙 : 독자님들! 얘 좀 보래요! (어디선가 나타난 독자 A, B, C가 나타나 로유진을 끌고 간다.) (퍽퍽! 때리는 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로유진을 다시 끌고 와 던져놓는다.) 로유진 :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비비앙 : 헹. 그러면 앞으로 잘해라? 로유진 : 그, 그건 좀. 지금 공략 중이기도 하고…. 비비앙 : 그래서. 못하시겠다? 독자님들…! 로유진 : 자, 잠깐만! 기다려봐! 비비앙 : 응? 로유진 : 지금 나나와 카오루 읽는 중이야.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줘…. 비비앙 : …그게 뭐야? - Fin - PS. 다음 회는 일부 독자 분들이 보시기에 불쾌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께서는 후반 내용은 어지간하면 스킵하시기를 권해드립니다. _(__)_ 0567 / 0933 ---------------------------------------------- 달콤한 갈등. * 이번 회는 불쾌한 내용이 없습니다. 후반 부분을 스킵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긴 회의가 끝났다. 삼삼오오 모여 웅성거리고 있던 사용자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중앙의 커다란 천막을 주시했다.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과연 어떻게 결론이 났는지, 궁금하다는 기색이 자못 역력했다. 이윽고 천막에서 사용자들이 한 명 두 명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이는 얼굴들은 그리 밝지 못하다. 무언가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걸까? 안현은 사용자들에 끼인 상태서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다가 의아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제 슬슬 거의 다 나온 것 같은데 김수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탓이다. 설마 아직도 천막에 있는 건가 싶어 안현이 머리를 갸웃할 무렵. “정말 큰일이네요.” 문득 자그맣게 한숨을 흘리는 소리가 흘러들었다. 천막에서 걸어 나오는 사용자들 중, 한 여인이 사내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안현은 반사적으로 청력을 높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네?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다니요? 두 분 사이는 정말 좋았잖아요.” 터졌다? 안현은 더더욱 귀를 기울였다. “권한 앞에서는 모든 게 초기화되죠. 한 배에 선장은 한 명입니다. 두 명이 될 수가 없어요. 어쩌면 총 사령관님도 그걸 알고 부대장이라는 직함을 미리 만들어둔 걸지도 모르죠. 이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려고요.” “그래도요. 아까 두 분이 싸우시는 동안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사실 저는 머셔너리 로드를 이해할 수 없어요.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총 사령관님이잖아요. 그렇게나 간곡하게 얘기하시는데, 딱 잘라 안 된다고 하는 건 조금 너무하지 않나요?” “글쎄요. 저는 오히려 그 입장이 이해가 갑니다만. 말이야 바른 말이지, 여태껏 굵직한 성과는 거의가 머셔너리 클랜에서 올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계속 희생을 강요당하니 억울하기도 하겠지요. 그러한 점을 감안하면 도리어 우회적으로 표현하셨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는 않으셨으니까요.” “…그런가요? 정말 그런 뜻으로 말하신 건가? 아무튼 기분은 별로네요~. 지금껏 큰 불화 없이 잘 나갔는데, 갑자기 삐거덕거리는 기분이에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사내와 여인은 안현을 지나쳐 멀리 사라졌다. 안현은 멍하니 머리를 들었다. 두 분이 싸우시는 동안. 큰 불화. 이것만 들어도 전말은 명백하다. 직접 상황은 보지 못했지만 머릿속으로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졌다. 김수현과 한소영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럼 왜? 안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물고는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괜한 불안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이제껏 남부 원정대가 커다란 문제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한소영이 부대를 3개로 나눈 것에 있었다. 선봉 부대는 김수현이 자신의 능력을 선보여 각인시켰고, 동시에 나서려는 자들이 적당히 이용하면서 다스렸다. 중앙 부대는 이스탄텔 로우, 정확히는 한소영에 눌려 찍소리도 못한다. 후방 부대는 크게 거리낄 것이 없다. 애당초 푸른 늑대가 권한을 포기했고, 역할상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하니까. 말인즉, 그러한 상황에서 각 부대를 통제하는 사용자들이 서로 존중하고 양보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불화가 생겼다? 그것도 각 부대를 통제하는 우두머리끼리? 예삿일이 아니었다. 불화는 모든 문제의 시초가 된다. 차라리 고만고만한 클랜 로드끼리 싸우는 게 낫지, 남부 원정대에서 김수현과 한소영의 영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 만큼 두 우두머리가 부딪친다는 소리는 남부 원정대의 근간이 흔들릴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최악의 경우, 더 이상의 공략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안현은 바보가 아니다. 멍청하지도 않다. 아무리 정세에 관심이 없다고는 하나 방금 들은 말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형님….” 안현은 손을 질근질근 씹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아직도 김수현이 나오지 않은 천막을 보며 속으로 기도했다. 부디 큰 문제가 없기를. 한편, 같은 시각. 중앙 천막에서는, 아직도 나오지 않은 두 남녀가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절대로 안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쾅, 김수현이 탁자를 거세게 치며 몸을 일으켰다. 표정 자체에 큰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두 눈에 성난 기색이 가득한 게, 누가 봐도 화났다고 생각할 얼굴이었다. 한소영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보이고 있었다. 포커 페이스의 달인이라 어지간해서는 표정을 읽기 힘들다. 그저 차가운 눈초리로 김수현을 지그시 응시할 뿐. 한소영의 입술이 떼어졌다. “그만. 회의는 끝났어요.” “저는 아직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아니요. 나가주세요. 혼자 있고 싶네요.”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아까의 의견을 재고해주시기 전까지는요.” 김수현이 딱 잘라 거절했다. 조금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깃들어있는 단호한 목소리. 그러자 비로소 한소영의 얼굴에도 은은한 노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무례하시네요. 이런 말씀까지 드리기는 싫었지만, 남부 원정대의 총 사령관은 저예요.” “그럼 저는 선봉 부대장입니다. 그만한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고, 또 제 생각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머셔너리 로드.” “그래도 정 강행하시겠다면, 저는 여기서 그만 선봉 부대장 직을 내려놓겠습니다.” 마침내 폭탄 선언이 터져 나왔다. 설마 그런 말까지 나올 줄은 몰랐는지, 한소영은 두 눈이 살며시 커졌다. 곧 오롯이 김수현을 바라보던 흑 수정 같은 눈동자에 서서히 서운한 기운이 깃들기 시작했다. 평소의 한소영을 생각해보면 이례적인 감정 표현이었다. 순간 흠칫한 김수현이었지만, 이내 주먹을 꾹 말아 쥐며 입을 깨물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손으로 이마를 살며시 짚은 한소영이 피로에 젖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머셔너리 로드는. 도대체 제 의견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이 안 드시는 건가요.”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소수 정예 부대를 편성해 싱크 홀로 돌입한다. 이건 좋습니다. 그런데 왜 그 위험한 임무에 총 사령관이 참가하냐 이 말입니다.” “제가 참가하지 않으면, 그럼 누가 참가하려고 할까요?” “왜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서로 한치도 밀리지 않는 공방전. 그랬다. 지금 이 두 남녀가 서로 언성을 높이는 이유는, 구덩이를 공략할 정예 부대 편성 중 한소영의 참가 여부에 있었다. 한소영은 라이트 로드의 의견을 채택했다. 그리고 최소한의, 최고 정예들로 구성된 소수 정예 부대를 편성해 구덩이를 공략하자는 새로운 의견을 꺼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문제는 선뜻 참가하겠다고 나서는 사용자가 없었던 것. 그렇게 서로 눈치만 살필 무렵, 한소영이 결국 자신이 우선적으로 참가하겠다 선언했다. 그리고 그 순간 김수현이 펄쩍 뛰며 반대한 것이다. 솔선수범해 참여를 독려하겠다는 한소영. 그리고 총 사령관이라는 자리를 자각하라는(사실은 한소영'만' 걱정하는.) 김수현. 사실상 공식적인 명분만 따지면 둘의 의견은 누가 옳고 그르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둘 다 일리 있는 말이었으니까. 여기서 딱 하나 차이가 있다면, 역시나 1회 차를 알고 모르고의 차이랄까. 탁 까놓고 말해서, 김수현은 1회 차에 싱크 홀을 직접적으로 공략한 입장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밖에서 기다리는 대기조에 포함돼있었고, 공략이 끝난 후 작성된 기록을 읽어봤을 뿐이다. 물론 기록에 모든 정보가 완벽하게 들어간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 안에 어떤 놈이 도사리고 있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격렬하게 반대하는 것이다. '파더'라는 존재를 알고 있기에, 또 그놈이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아마 모르긴 몰라도, 한소영을 보는 순간 환장해서 달려들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1회 차에서 김수현은 한소영이 어떻게 죽었는지 눈앞에서 직접 지켜본 입장이다.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감정이 폭발하고 절로 살의가 솟구친다. 그런 만큼,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 일어날 여지는 눈곱만치도 만들고 싶지 않은 게 김수현의 솔직한 현 심정이었다. 다만 있는 그대로 말할 수가 없을 뿐. 하지만, 그러한 김수현의 감정은 고스란히 한소영에게로 흘러들고 있었다. 계속되는 설전에 지쳤는지 어느덧 한소영은 다시금 입을 다문 상태였다. 사실, 고맙기는 하지만 섭섭한 마음도 없는 건 아니다. 이 사내는 어쩌면 내 마음을 이렇게 몰라주는 걸까. 그렇게 생각한 한소영은 여전히 뻣뻣하게 버티고 있는 김수현을 보며 고요히 입을 열었다. “외골수시군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본인은 참가하시면서, 저는 참가하면 안 된다.” “예. 저는 됩니다. 하지만 이스탄텔 로우 로드는 안됩니다.” “방금 그 말씀이 모순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으세요?” “갑갑하시네요. 저는 입장이 다르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스탄텔 로우 로드는 현재 남부 원정대의 중심입니다.” 갑갑하다? 한소영의 아미가 꿈틀 움직였다. 그러나 김수현은 정말로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좁히더니 침착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마치 조곤조곤 달래는듯한 말투인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갖고 계신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높은 자리에는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필요로 하는 법입니다. 굳이 이스탄텔 로우 로드가 참가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갑갑하다고? 지금 정말로 갑갑한 게 누구인데? 한소영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또 남은 사용자들도 생각하셔야죠. 모두가 몰려가버리면 남은 사용자들은 누가 맡겠습니까?” 안 된다, 안 된다. 이 사내는 안 된다는 말밖에는 모르나? 내 기분은 헤아려주지도 않고? 주먹을 살며시 말아 쥐었다. “아니면, 꼭 참가하셔야 할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그래. 있어. 생각을 마친 한소영은 비로소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기다리고 있어야만 하잖아요.” “……?” 그 순간, 계속 말을 이으려던 김수현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너무 작은 목소리라 미처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에 아랑곳 않고 한소영은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자기는 참가한다고 하고서…. 나는 왜….” 여전히 작달막한 목소리가 마치 투덜투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듯했다. 한소영답지 않은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죄송한데, 잘못 들었습니다.” 비슷한 기분을 느꼈는지, 김수현의 얼굴에 서린 의아한 기색이 더욱 강해졌다. 한소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잠시 후. 한소영은 당당히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과는 다르게, 시선을 피하려는 듯 고개가 절로 돌려진다. “그러니까….” 그리고 살며시 두 눈을 내리깔며, 한없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돼서…. 그렇다고요…. …머셔너리 로드가.” 어느새 한소영의 가냘픈 검지는 애꿎은 탁자만 문지르고 있다. “혼자 기다리면서…. 애태우기는 싫으니까….” 도톰한 입술은 살짝 오므렸고, 얼굴은 발갛게 익어 붉은 석류를 연상케 한다. 그렇게 완전히 토라진 한소영을 보는 순간. “…예?” 김수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 밤이 깊었다. 충분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진 후, 나는 곧바로 클랜원들을 호출했다. 조금 비좁은 느낌은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커다란 천막이라 30명 정도는 어찌어찌 수용할 수 있었다. “다들 정예 부대 편성에 대한 이야기는 들으셨을 겁니다.” 천막은 고요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하나같이 뜨거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 좋다. 일단 빼지 않으려 하는 자세는 마음에 든다. “우리 머셔너리에서는 최소 4명, 최대 10명이 참가해야 합니다. 정확히는 인원을 모아봐야 알겠지만, 아마 많이 모여봤자 100명 내외로 구성될 것으로 생각되네요.” 이미 대략적인 사항은 고연주를 통해 전파한 만큼, 다들 어느 정도는 알고 왔을 것이다. 하여, 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이르면 내일 당장 구덩이로 돌입할 수도 있거니와 오래 끌어서 좋을 일도 아니다. “그럼 인선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그전에. “백한결. 비비앙. 둘은 앞으로 나오도록.” 백한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비비앙은 여전히 뚱한 얼굴로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둘은 무조건 참가한다. 백한결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테고. 비비앙. 너는 최후의 보루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회답은 “흥.”으로 되돌아왔다. 이어서 쭈뼛쭈뼛 앞으로 나가는 백한결을 확인한 후, 나는 남은 클랜원들로 시선을 돌렸다. 이로써 남은 자리는 7자리. “고연주, 안솔, 신재룡. 앞으로.” 이름을 호명하자 세 명은 차분히 몸을 일으켜 걸어 나왔다. 이윽고 주춤주춤 한쪽으로 시립하려는 그들을 나는 손짓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품에서 연초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이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세 명. 자세한 건 모두 끝나고 설명하겠습니다. 그러니 일단, 지금부터 저를 포함한 세 명은 각자가 원하는 클랜원을 한 명씩 지정합니다. 정확히는 자신을 가장 잘 뒷받침 할 수 있거나, 혹은 뒷받침해줄 수 있는 클랜원을요.” “…네?” 고연주의 반문. 그와 동시에 클랜원들 사이로 술렁이는 소리가 일었다. 하지만 나는 가만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방금 말한 대로 나중에 설명하겠다는 뜻이었다. 좌우간 우선은 내가 첫 시작을 끊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러면 저부터 해볼까요.” 나는 서로를 번갈아 보는 클랜원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러다 홀로 덤덤히 있는 사내가 눈에 밟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용자 선유운.” “예.” 선유운은 무뚝뚝히 회답하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내 터벅터벅 걸어 나오는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천천히 고연주를 돌아보았다. “그럼 고연주부터 호명하시죠.”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오늘 자리에 일찍 앉기는 했는데, 어지간히도 글이 안 나오더군요. 하루 쉴까도 생각해봤지만, 휴재가 버릇이 되는 게 무서워서요. 결국 한 3시간 정도 앉아있다가 샤워에 체조에 별 짓을 다하니까 겨우겨우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회는 분량 조절이 실패했습니다. 어제 다음 회 구상을 보면서 마지막 부분에는 해당 부분을 적을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글이 길어지더군요. 하여 어제 후기에 적은 경고는 다음 회로 염두에 두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혹시 기대하신 분이 계신지는 모르겠으나, 비비앙과의 SM은 강철 산맥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도 공략 도중인데, 그 짓(?)을 하는 게 꽤나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서요. 그럼에도 제가 나나와 카오루를 본다고 말씀드린 건 여러분들의 추천해주신 것도 있거니와, 언젠가는 확실히 적겠다는 나름의 의지 표명이었습니다. 다만 SM 방면에 대해 제가 아직 자세한 지식이 없는 터라, 함부로 적기에는 많은 부족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추가로 말씀 드리자면, 제가 5월 29일(목요일)에 아침 기차로 부산에 내려갑니다. 비주얼 노벨 관련해서 내려가는데, 조아라와 협업하는 회사가 부산에 있거든요. 그리고 하룻밤을 보낸 후, 5월 30일(금요일)에 다시 돌아올 예정입니다.(언제 돌아올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5월 30일(금요일) 하루는 아마 휴재를 하게 될 것 같으며, 5월 31일(토요일)에 연재를 재개하겠습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독자 분들의 깊은 양해를 구합니다. _(__)_ 후기가 길어졌네요.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PS. 고장난선풍기 님. 방금 제 뜰에 새로 올려주신 고연주 팬 아트 보았습니다. 정말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잘 그려주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0568 / 0933 ---------------------------------------------- 싱크 홀(Sink Hole)로의 돌입. 아직은 어두컴컴한 하늘. “으하하함~. 졸려….” 막 천막에서 나온 사내가 입이 찢어져라 긴 하품을 했다. 그리고 흘긋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입 부근을 쓱쓱 매만지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연신 하품을 하면서 비척비척 걷는 게 아직도 완연히 잠에 취한 모습이다. 비칠비칠 걷던 사내가 걸음을 멈춘 곳은 아래 구덩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지점이었다. “어~이. 이제 그만 교대하자고.” 사내는 여전히 잠이 덜 깬 듯 반쯤 감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회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그저 고요한 밤바람만이 스치듯 불어와 사내를 살랑 지나칠 뿐. 인근은 그저 고요하기만 하다. “……?” 어리둥절한 얼굴도 잠시. 한순간 사내의 두 눈동자에 깃들어있던 졸음이 싹 가셨다. 이내 날카로운 빛을 번득이더니 사내가 자세를 한껏 낮추며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사내의 클래스는 궁수. 뭔가 묘한 기분이 온몸을 엄습해 들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느릿하게 전진하며 주변을 자세히 살필 즈음이었다. “어. 교대하러 온 거야?” 아래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말한 듯 자그마한 목소리였으나 예민해진 사내의 청각은 확실히 들었다. 하여 곧바로 안력을 높여 시선을 내리자 구덩이 앞에서 한 손을 흔드는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같은 동료이니만큼 사내도 확실히 알고 있는 여인이었다. 사내는 안도의 한숨을 흘린 후 터덜터덜 언덕을 내려갔다. “뭐야. 왜 여기 내려와 있어? 위험하게시리.” 사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여인은 시선을 거두고 아래를 지그시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그냥. 조금 이상해서.” “이상하다고?” “응. 뭔가 이상한 게 보이는 것 같아서…. 뭔가가 자꾸만 고개를 올렸다가, 내렸다가. 또 고개를 올렸다가, 내렸다가.” “뭐야?” 사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리고 재빠르게 두어 걸음 물러나 구덩이 안을 살폈으나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칠흑 같은 어둠만이 캄캄하게 들어차 있을 뿐. “아무것도 없는데? 잘못 본 거 아니야?” 사내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인은 정말 미안하다는 얼굴을 하더니 살며시 콧등을 눌렀다. “미안해. 사실은 깜빡 졸았어.” “야 인마.” “그래도 언뜻언뜻 보이기는 한 것 같은데…. 확실하지 않아서 나도 내려와 본 거야.” “잠결에 잘못 본 거겠지. 하여간 깜짝 놀랐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됐으니까 들어가서 잠이나 자.” 여인은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이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사내도 같이 올라가려다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번 더 구덩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너 혼자 온 거야?” “응? 아, 그렇지. 희영이는 조금 있다가 올 거야. 수철이랑 잤잤했는지 조금 힘들어 보이더라. 큭큭.”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응? 뭐가 할 수 없어?” 자신이 한 농담에 웃던 사내가 여전히 낄낄 웃으며 여인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여인의 몸이 스르륵 미끄러지듯이 재빠르게 다가왔다. “어?” 미처 놀랄 틈도 없었다. 그저 사내가 느낀 거라고는 자신의 가슴을 떠미는 두 손의 감촉과, 시야에 들어오는 서서히 기울어지는 세상뿐. 사내가 마지막으로 본 건, 자신을 지그시 내려다보는 여인의 싸늘한 얼굴이었다. “어어어어어어어어?!” 긴 비명이 구덩이 속으로 쑥 떨어져 내렸다. 여인은 잘 내려갔다 확인해보려는지 깨금발로 구덩이를 살피고는 차분히 몸을 돌려 언덕을 응시했다. 잠시 후 누군가 한 명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었다. 여인은 번쩍 손을 올렸다. “어. 교대하러 온 거야?” * 고연주는 잠시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였지만, 곧바로 한 명을 지목했다. “저는 다은이로 하겠어요.” 남다은. 좋은 선택이다. 머셔너리 내 근접 계열 사용자들의 순위를 매겨보면 남다은은 확실히 첫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사용자니까.(물론 나는 제외한다.) 용이 잠든 산맥에서 나와도 호흡을 맞춘 적이 있으니, 검후라면 그림자 여왕과도 좋은 궁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남다은은 생글생글 웃으며 걸어 나왔다. 다음으로, 나는 안솔을 보며 고갯짓했다. “안솔. 호명하도록.” “으응…?” 안솔은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머리 위로 물음표를 동동 띄우더니 이리저리 클랜원들을 훑기 시작했다. 왼쪽으로 갔다가, 오른쪽으로 갔다가. 또 왼쪽으로 갔다가, 오른쪽으로 갔다가. 또다시 왼쪽으로 갔다가…. 이 녀석이? “그만. 장난하지 말고.” 자꾸 고개를 휙휙 돌리는 게 이제는 거의 틱 장애로 보일 지경이라, 나는 강제로 안솔의 머리를 잡아 고정했다. 안솔은 갑갑하다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비틀었지만 꿀밤을 한 대 먹이자 금세 얌전해졌다. 잠시 후, 나는 물음표가 느낌표로 반짝 변하는걸 볼 수 있었다. “저기, 저~기로 할래요.” 안솔이 가리킨 사용자는 다름 아닌 허준영이었다. 아마 차소림이랑 두고 고민한 것 같은데…. 그래. 그래도 허준영 정도면 나쁘지 않지. 아니. 안솔 치고는 상당히 괜찮은 선택이다. “부르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허준영은 차분히 걸어 나오더니 안솔의 머리를 퍽 때렸다. “악! 뭐, 뭐예요! 왜 때려요!” “내 이름은 저기가 아니라 허준영이다.” “그냥 넘어간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려고 했는데. 네가 으스대는 꼴을 보니 왠지 때리고 싶어졌어.” 안솔이 캬악 화를 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신재룡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용자 신재룡. 호명하시면 됩니다.” “흐음….” 신재룡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클랜원들을 응시했다. 진수현이 자신을 뽑아달라는 듯 두 손을 번쩍 들었다. 헬레나는 가슴골을 드러내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안솔은 어떻게든 돌진하려는지 이익이익 용을 쓰고는 있었지만, 허준영의 한 손에 얼굴부터 막혀 속절없이 양팔만 휘두르는 중이었다. 그리고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도대체 얘들은 왜 이러는 걸까. 그때였다. “안현으로 하겠습니다.” “…예?”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나는 바로 두 손을 내렸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의외라는 얼굴이다. 심지어는 안현마저도 눈을 휘둥그래 만들었을 정도였다. 안현이 부족하다기보다는 그보다 더 좋은 사용자 정보를 가진 클랜원들이 많기 때문이다. “예. 현이로 호명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재룡은 잔잔한 미소를 띄운 채 조용히 말했다.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한 번 더 호명할 기회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혀, 형!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안현은 정말로 바꿀세라 허겁지겁 튀어나왔다. 내가 물끄러미 응시하자 신재룡은 차분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호명을 번복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의지였다. …안현이라. “형.” “어.” “저.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비록 형에게 힘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노력해볼게요.” “……?” 안현은 무언가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뜨거운 눈초리를 내게 보냈다. 얘는 또 왜 이래. 결국에는 한숨을 흘리며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안현도 기본 이상을 하는 사용자였고, 신재룡이 아무 생각 없이 호명했으리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러고 보니 둘이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는데, 그만큼 호흡을 잘 맞출 수도 있는 노릇이니. 이윽고 다른 클랜원들은 모두 돌려보낸 후, 나는 호명된 이들을 모아 구덩이 작전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어디선가 흘러내린 차가운 물방울이 사내의 이마에 똑 떨어졌다. 사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정신을 차린 것이다. 눈도 뜨지 않은 채 주변을 더듬은 사내는 뭔가 딱딱하면서도 부드러운 것을 느꼈다. 이어서 온몸에 고통이 찾아 들었다. “크으….” 짧은 신음을 흘린 사내가 힘겹게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건 벽에 걸려 아른아른 타오르는 횃불이었다. “오. 이제 일어났나?” 그때 거친 쇳소리가 귓전을 거슬리게 울렸다. 사내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신음을 삼키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몸을 더듬었으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사내는 그제야 자신이 알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운이 좋았지. 마침 내가 구덩이 부근에 있었거든. 깜박하고 지나쳤으면 너를 못 볼뻔했지 뭐야. 영영 말이지. 히히히.”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사내는 천천히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말을 건 이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입을 쩍 벌리고야 말았다. 한 괴이한 사내가 의자 같은 것에 앉은 채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 평범한 모습은 아니었다. 적어도 눈에 보이는 부분은 온통 시커먼 문신으로 뒤덮여있어, 흡사 괴물을 보는 듯했다. 거기다 미친 야수처럼 번뜩이는 눈동자까지. 하지만, 그러면서도 사내는 어딘가 익숙한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이윽고 괴이한 사내가 몸을 일으키더니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몸은 좀 괜찮나? 형식이 너, 꽤나 오랫동안 잠들어있었다고.” 형식이. 그 말을 들은 순간, 형식이라 부른 사내의 눈동자에 경악의 빛이 스쳤다. “…너, 너!” “응? 갑자기 왜 그래.” “혀, 현호? 현호 아니야?” “…호오.” 작은 감탄. 현호라 불린 괴이한 사내의 입가가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차마 미소라고 말하기에는 상당히 미묘하다. 하지만 사내는, 아니 현호는 히히 웃으며 형식의 어깨를 짚었다. “역시. 너라면 알아봐 줄 줄 알았지. 살린 보람이 있어.” “뭐라고? 하지만 분명 현호는 3년 전에….” “강철 산맥 공략에서 실종됐지. 하지만 죽은 건 아니잖아? 히히히!” “아, 아니야. 아니야! 너 괴물이지? 현호를 잡아먹고,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잖아!” 그러자 현호의 입에서 또 한 번 감탄이 터져 나왔다. “이야~. 벌써 거기까지 알아낸 건가? 꽤나 유능한 사용자가 있나 보네?” “이 괴물 자식이!” “하지만.” “……!” 현호는 형식의 고함에 아랑곳 않고 도리어 몸을 부축해 일으켜주었다. 떨어진 여파가 남은 건지 온몸이 비명을 질렀으나 그보다는 현재 느끼는 충격이 더욱 크다. 형식은 고통마저도 잊은 채 현호를 바라보았다. 조심조심 몸을 일으켜주고 어깨를 툭툭 쳐주는 행동에서, 조금도 살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친근하고 반가운 모습만이 보일 뿐이지. “걱정 마.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괴물은 아니니까.” “뭐, 뭐라고?” “뭐, 사실대로 말하면 영향을 안 받은 건 아니야. 하지만 정체성은 너랑 처음 홀 플레인에 들어왔을 때의 주현호. 그대로라고. 히히히.” “…….” “아무튼 정신은 차린 것 같은데. 그러면 우선적으로 신고를 해야 하니까, 나가자고. 상황이 비록 이렇게 됐지만, 어쨌든 너도 살고 싶을 거 아니냐.” “시, 신고?” 형식이 의아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얼굴은 멍하기 짝이 없다. 이제 막 깨어났는데 여러 믿을 수 없는 정보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새 현호는 몸을 돌려 문을 나서는 중이었다. 그러자 이제야 비로소 주변 환경이 눈에 들어오는지, 형식은 느릿느릿 걸어가면서도 시선을 돌렸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형식은 멍하니 현호를 따라가면서도 생각했다. 일단 확실한 건 구덩이에 떨어진 것. 그러면 여기는 구덩이 아래, 땅속이라는 말인가? 그러고 보니 공기 중에 축축한 습기가 가득하다. 기다란 통로를 걷는 것 같은데 어두운 어둠뿐이라 잘 보이지 않는다. 발바닥으로 차가운 흙을 밟는 감촉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천장을 쳐다보니 둥글게 깎인 흙이 보이면서도, 마치 핏줄처럼 보이는 것들이 울룩불룩 돋아나와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뭔지도 모를 입구를 나서자 기다란 토굴이 나왔는데, 걸으면서 상상 이상으로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역겨운 냄새가 콧속을 찔러 들었다. 묘하게 철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결국 형식이 지금 여기서 기댈 곳은, 한 곳뿐이었다. “너…. 정말 현호 맞아?” “왜. 그러면 너 어렸을 때, 남의 차에 오줌 싸다가 걸린 얘기까지 해야 믿겠냐?” 영문 모를 물음에 앞에서 걸어가던 현호가 비웃는 목소리로 회답했다. 그 순간이었다. “끼아아아아아아악!” 갑작스럽게, 거센 비명이 통로를 떠르르 울렸다. 그것도 바로 옆에서. 현호의 걸음이 우뚝 정지했다. “보지 마.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와. 봐서 좋을 거 없다.” 처음으로 낮아진 목소리가 나직하게 경고했다. 그러나 형식은 이미 마력을 끌어올려 안력을 돋운 상태였다. 현호가 혀를 차는 소리가 이어졌다. 흐릿하던 어둠 속의 통로가 확실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형식은 본능적으로 근처를 살폈다. 이내 자신이 나올 때와 비슷한 입구와 굳게 박혀있는 쇠창살. 그리고 그 안의 공동을 바라본 순간, 형식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키고 말았다. 빠직! “끄아아악, 끄아아아아악!” 공동에는 한 사내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형식과 마찬가지로 알몸이었다. 그리고 알몸의 사내를 4명의 사람이 둘러싸, 각자 팔과 다리 하나씩을 잡은 채 있는 힘껏 뜯어 당기는 중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빠지지직! 피가 사방으로 튀겼다. 어찌나 힘이 강력한지, 살이 쭉 늘어지다 못해 찢어져 내부의 속살을 노출한다. 벌건 근육도 여지없이 찢어지고, 하얀 뼈도 사정없이 떼어졌다. 종래에는, 사내는 사지가 잘린 모습으로 배를 푸들푸들 떨었다. 더 이상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사이 좋게 사지를 나누어 먹은 놈들은, 아직 부족하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배를 갈랐다. 그리고 갈라진 부분으로 하나같이 머리를 처박아 후루룩, 핏물과 장기를 들이마신다. “아….” 형식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소리를 들었는지 한창 심장을 우물거리던 여인이 언뜻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형식을 보는 순간 희번덕 눈빛을 빛냈다. 형식은 혼이 빠져나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때였다. “그러니까 보지 말라고 했잖아.” 얼른 다가온 현호가 형식의 목을 휘어 감았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강제로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저, 저건…. 뭐, 뭐….” “필요가 없어진 놈이야. 안 그래도 수컷은 쓸모가 없는데, 효용이 다하면 결국 먹이 행이지.” “뭐, 뭐라고? 너 지금 그게 할 말…!” “어이, 어이! 진정해! 큰소리는 내지마!” 형식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멱살이라도 잡으려는 듯 손을 휘저었으나 하릴없이 허공만 젓는다. 어느새 현호는 두어 걸음 물러난 상태였다. 그리고 긴 한숨을 흘린 현호가 으쓱 어깨를 들먹였다. “너무 화내지는 마. 여기서는 나도 어쩔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니까. 사실 너 하나 데려온 것도 엄청 힘들었다고.” 막 주먹을 꽂으려는 형식의 손이 멈칫했다. 현호는 빙그레 웃으며 그런 형식을 잡아 끌었다. “가자.” “젠장! 자꾸만 어디를 가자는 거야! 지금 여기가 어딘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나는 지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이해해. 하지만 일단 가자. 가면 알게 된다. 어차피 거의 도착했다.” “주현호!” “조용히 해. 방금 놈들이 우르르 몰려오면 그때는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른단 말이야.” “…….” 그 말에 형식은 입을 다물었다. 아까 사지가 찢기며 비참하게 울부짖던 사내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차라리 죽으면 곱게 죽었지, 그렇게 되기는 죽기보다 싫다. 잠시 후, 현호가 다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형식은 멍하니 서 있다가 홀린듯한 기분으로 따라가기 시작했다. 거의 다 왔다는 현호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약 10분 정도를 추가로 걸었을 무렵 또 하나의 입구가 보였고, 그 안으로 들어간 현호가 번쩍 손을 들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다른 곳은 여전히 어두컴컴했으나 현호가 들어간 입구는 약간 탁한 빛이 비친다는 정도일까. “왕의 굴에 온 것을 환영하마.” 이윽고 형식이 따라 들어가자 현호가 두 팔을 번쩍 들며 맞이해주었다. “왕의…? 굴…?” 망연한 반문. 하지만 현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씩 웃으며 손을 들어 천장을 가리켰을 뿐. 형식은 현호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더러운 머리칼이었다. 다음으로 까뒤집힌 눈이 보였다. 형식은 설마 설마 하면서도 더욱 머리를 젖혔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무언가가. 아니, 무언가가 아니다. 형식과 똑같이 발가벗겨진 여인들이었다. 천장에는, 사지가 묶인 여인들이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 작품 후기 ============================ 이번 회에 눈살을 찌푸리신 분이 있다면, 다음 회 초반 부분은 필히 스킵 하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오늘 내용보다 몇 배는 더 불쾌하실 겁니다. * 문양으로 시점을 변경할 테니, 그 이후부터 보시면 됩니다. PS. 현호와 형식이라는 인물을 간단히 기억해주세요! 0569 / 0933 ---------------------------------------------- 싱크 홀(Sink Hole)로의 돌입. 약 20명 남짓한 정도일까? 긴 머리카락이 치렁치렁 아래쪽으로 처졌다. 알몸의 여인들은 하나같이 사지가 구속한 채 허공에 떠 있는 상태였다. 결박한 촉수가 두 팔과 두 다리를 적당히 잡아당기는 게, 죽은 개구리를 뒤집어놓은 것과 흡사한 모습이다. 천장을 올려다보는 형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뻣뻣한 등으로 식은땀이 흐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수한 생각을 떠올리던 사고 회로가 한순간 정지했다.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그냥,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그런 형식의 반응을 확인한 현호는 씩 입꼬리를 올리며 천천히 중앙을 거닐었다. 잠시,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오직 토굴 곳곳에 박힌 횃불만이 탁한 불빛을 뿌리며 이따금 타오르는 소리만을 낼 뿐. 그때였다. “여기는…. 그래. 하나의 도시야. 그러니까 땅속의 도시라고나 할까?” 현호의 목소리가 짧은 정적을 깨트렸다. 하지만 형식의 움직임은 조금도 변화가 없다. 일말의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양팔을 힘없이 축 늘어트린 게, 흡사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모습이다. “물론 너와 나.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도시와는 개념이 다르지.” “…….” “하지만 땅속 도시라고 무시하면 곤란해. 이래봬도 나름대로의 시설은 갖추고 있거든.” “…….” “집, 연구실, 함정, 감옥, 광산 철도 등등…. 심지어 폭발 장치까지 갖추고 있다고?” “…….” 이윽고 한없이 천장만 응시하던 형식의 두 눈동자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아. 물론 TV, 라디오, 컴퓨터. 이런 거는 없어. 히히!” 어느새 건너편 벽면에 도착한 현호는 양팔을 활짝 펼친 채 너스레를 떠는 중이었다. 형식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여기는…. 도대체…. 무슨….” “좋은 질문이야. 여기는 바로 이 땅속 도시의 모든 것이 시작된 곳.” 현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회답하고는 빙글 몸을 돌려 벽면을 침착히 매만졌다. 그러자 허공에서 미약한 변화가 일었다. 사지를 꽁꽁 구속하던 촉수들이 차차 느슨해진다. 이어서 쭉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허공에 둥둥 떠 있던 여인들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천천히 내려오던 여인들은 형석의 복부 높이쯤에 이르러서야 우뚝 멈추었다. 촉수가 재차 잡아당기자 잠시 느슨해졌던 여인들의 사지가 도로 팽팽해졌다. 형석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아래서는 보이지 않던 여인들의 정면을 보는 순간, 다시금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쭉…. 쭉…. 쭉…. 쭉…. 무언가를 빨아들이는 소리. 여인들은 그저 매달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껏 사용자들을 괴롭혀온 커다란 괴물이 아닌, 마치 팔뚝만한 크기의 괴물들. 마치 애벌레와 비슷한 형상을 지닌 작은 괴물들은, 여인들의 복부에 똬리처럼 앉아 젖가슴을 물고 힘차게 빨아들이는 중이었다. “이, 이게….” 형석이 말을 더듬거리며 주춤거리듯 물러났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인들의 상태 또한 정상이 아니었다. 불룩하다 못해 터질 듯이 부풀어오른 배는 출산 직전 만삭의 여인을 연상케 했다. 안쪽에 무언가 살아있는 듯 팽배한 배에 울룩불룩한 고저가 생길 때마다, 여인의 입에서 처량한, 힘없는 신음이 터져 나온다. 이윽고 삶의 의지를 잃은, 어느 여인의 흐릿하게 풀린 두 눈동자와 마주했을 때, 형식은 정수리부터 벼락을 맞은듯한 기분을 느꼈다. “희영…. 아?” 그랬다. 형식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비교적 깨끗한 모습을 하고 있는 여인은 다름 아닌 희영이었다. 원래는 형식과 같이 경계를 설 예정이었던 동료 사용자. “희, 희영아!” 왜 여기에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형식은 곧바로 달려나갔다. 가장 최근에 들어와 그나마 깨끗할 뿐이지, 희영 또한 다름 여인들과 별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젖을 물고 있는 괴물과 한껏 부푼 배. 음부에서는 투명하면서 진득진득한 액체가 실처럼 흘러내린다. “으아아아아아아악!” 형식이 괴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손을 내젓는다. 괴물을 움켜 억지로 끌어당긴다. 괴물은 놓지 않으려는 듯 주둥이를 꾹 다물며 반항했으나, 형식이 힘을 주어 터뜨리자 체액을 뿜으며 머리를 떨구었다. 비로소 드러난 젖꼭지에서 희멀건 한 액체가 흘러내려 괴물의 체액과 섞여 들었다. 비참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희영은 정작 미동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희영을 보는 형식의 두 눈에서는 어느새 뜻 모를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흐억…. 흐어어억….” “아. 그러고 보니 희영이도 있었지. 얘도 오랜만에 봤는데.” 담담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 형식의 시선이 대번에 현호를 향했다. 당장에라도 죽일 듯한 눈초리를 받으면서도, 현호는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너무 그렇게 보지는 말라고. 희영이는….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뭐, 뭐라고?” “말했잖아.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자신이 쓸모 있음을 입증해야 돼. 하지만 사내와 여인의 입장은 다르지. 여인은 수태 능력 자체만으로도 가장 귀중한 취급을 받을 수 있어. 왜냐하면 여기 괴물들은 임신의 축복을 받지 못했거든.” “지금…. 무슨….” “하지만 너는 달라. 네가 여기서 나를 만난 건 행운이야. 그분이 지금껏 나의 공을 생각해 너를 인정해주신다면, 너도 나처럼 특별해질 수 있는 거야. 어때. 상상만해도 좋지 않냐?” “…….” 현호는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형식이 이해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커다란 충격까지 먹었으니 머릿속이 복잡하게 휘몰아치는 것이다. 그런 형식을 보며 현호는 빙긋이 웃어 보였다. “그냥 간단하게 생각해. 여기는 도시야, 도시. 다만 도시의 주인이 사람이 아닌 괴물인 것뿐이지.” 그리고 이번에는 중앙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결론부터 말해보면, 우리의 일원이 되라. 형식.” 그 말을 들은 순간, 형식은 지금껏 놓고 있던 정신의 한 줄기를 간신히 붙잡을 수 있었다. “너도 나처럼 그분께 충성을 맹세하고, 모든 것을 마치고, 모체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라. 그러면 너도 진정한 일원이 될 수 있어.” “모…. 체…?” “그래. 새로이 태어날 너를 위해 자궁을 제공해줄 모체.” “씨발, 개소리 하지 마!” 형식이 벌컥 외쳤다. 그러나 현호는 그에 아랑곳 않는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모체는 내가 추천해주지. 어디 보자. 어느 년이 좋으려나…. 아. 희영이는 어때? 가장 최근에 들어오기도 했고, 또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한때 친구였던 여인이 너의 새로운 엄마가 된다는 사실이. 히히, 히히히히!” 희영이? 새로운 엄마? 형식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그제야 떠올릴 수 있었다. 처음 깨어났을 때 자신을 바라보던 미친 야수와 같은 눈동자를. 그래. 저놈도 정상이 아니다. 아니. 확실히 미쳤다. 정말로 현호인지 괴물인지는 이제 상관없다. 겉보기에는 친근한 척 반가운 척을 하고 있지만, 저놈은 옛 친구의 탈을 쓴 괴물 놈이다. 그렇게 생각한 현석이 주먹을 오므리며 마력을 일으킬 즈음이었다. “아. 참고로 내 모체는 이년이었어.” 문득 어느 여인의 앞에서 현호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기다랗게 드리운 머리카락을 잡아채더니 한 번 보라는 듯 이리저리 흔들었다. 몸 안의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 형식의 시선이 저절로 향했다. 뭔가 부스스해 보이면서도, 묘한 은빛이 흐르는 아름다운 머릿결이 눈에 밟힌다. “너도 알고 있는 년일걸?” 현호가 비열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머리채를 확 잡아당기자 여인의 고개가 한껏 젖히며 형석에게 얼굴을 드러내 보였다. “힉…. 힉….” 그리고 그 순간, 형식은 단단한 망치로 머리를 후려 맞은듯한 충격을 느꼈다. 어찌나 충격이 컸는지 활활 타오르던 분노마저 잠시 잊을 정도였다. * 아침이 밝았다. 조금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싱크 홀 안으로 들어갈 사용자들을 대강은 추릴 수는 있었다. 수는 정확히 102명. 나름 실력 좋은 남부 원정대 중에서도 추리고 추린 사용자들인지라, 한 명 한 명이 북 대륙에 명성을 드높인 사용자들이다. 예를 들면 이스탄텔 로우의 처형의 공주 연혜림이나, 아니면 푸른 늑대의 죽음의 기사 유지태. 조합을 떠나 개개인으로 보면 확실히 화려한 구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약 이틀이 걸려 인원 편성을 끝내고 돌입할 준비도 마쳤지만, 곳곳에 구름의 그림자가 드리운 야영지는 오늘따라 유독 조용했다. 괜히 조용한 게 아니라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이틀 전 경계를 서던 사용자들 중, 두 명이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한 명은 백형식. 다른 한 명은 현희영. 둘 다 같은 클랜이고, 무척 가깝게 지내던 사이라고 한다. 이후 남부 원정대는 흔적을 찾거나 간단한 수색을 해보았지만, 그 어디서도 사라진 사용자들을 찾을 수는 없었다. 오직 건진 거라고는 의도적으로 흔적을 지운 자국뿐. 이번 사건을 놓고 원정대 내의 의견은 분분했다. 의도적으로 흔적을 지웠으니 도망쳤다. 그게 무슨 소리냐. 강철 산맥에서 도망쳐서 어디로 가겠다는 거냐. 분명 잘못된 게 틀림없다 등등. 많은 말들이 있었지만 한소영은 결국 편성을 우선했다. 안 그래도 이틀이라는 시간이 지체됐는데, 지정된 진군 시일을 생각해보면 더는 지체할 수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일이야 어찌됐든 어느 쪽으로 생각해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구덩이로 들어가는 오늘, 출발 준비로 살짝 부산스러운 기운은 느껴졌지만 말소리는 거의 들려오지 않았다. - 30분 후 구덩이 안으로 돌입한다고 합니다. 편성된 사용자 분들께서는 모두 나와서 준비해주세요. 이윽고 증폭된 음성이 야영지를 울렸다. 단단히 장비를 챙기고 천막을 나서자 이미 대부분의 클랜원들이 거의 모여있었다. 배웅해주러 나온 건지 이번에 편성되지 못한 클랜원들도 우르르 몰려나온 상태였다. “모두 모였습니까?” “네. 한결이만 빼고요.” 클랜원들을 돌아보며 묻자 고연주가 금세 다가와 회답했다. 그런데 한결이가 없다고? 나는 의아히 반문했다. “한결이요? 한결이는 왜요.” “1차 돌입 조 중 핵심이잖아요. 내려갈 줄의 길이를 정확하게 잰다고 먼저 데려갔어요.” 아. 그 웃기지도 않는 내려가는 방법 말인가. 나는 속으로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1차 돌입 조였죠. 얼른 갑시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클랜원들도 모두 준비가 끝난 상태서 나와있었을 터라, 아무 말도 않은 채 나를 따라왔다. 오래 걷지는 않았다. 야영지가 언덕 부근에 설치돼있는 만큼, 우리는 금방 언덕의 정상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렇게 언덕 아래 구덩이와 주변에서 옹기종기 모인 사용자들이 보일 즈음, 문득 누군가 내 옆으로 바짝 붙었다. “클랜 로드. 출발 직전에 미안하지만, 할 말이 있다.” 이건 사샤 펠릭스의 목소리. 나는 계속 구덩이 주변을 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뭔데.” “괴물의 냄새가 난다. 그것도 아주 진하게.” “그거야 당연하지. 강철 산맥 안인데. 너 공략 전에도 그랬잖아. 죽음의 냄새가 진동을 한다고.” “아니 아니. 그런 냄새가 아니다. 정확히는 이틀 전 그 사건부터 나기 시작한 냄새다.” 그 말에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차분히 옆을 돌아보았다. “어디서.” “지금은…. 이 아래쪽에서 나는군.” 사샤가 언덕 아래를 가리켰다. 구덩이가 있는, 정확히는 사용자들이 모여있는 방향이다. “구덩이 안에 괴물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니야?” 엿듣고 있었는지 유정이가 냉큼 끼어들었으나, 나는 곧바로 손을 저었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샤를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봐.” “더 자세히 말할 것도 없어. 말 그대로 사용자들 사이로, 괴물의 냄새가 희미하게 풍겨와.” “…그걸 왜 지금 말하는 거지?” “확신을 못했으니까. 나도 처음에는 내가 착각하는 줄 알았고, 사실 지금도 확신하지는 못해. 아마 이틀 전 사건이 아니었다면 그냥 입 다물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냥….” “…….” “네가 떠난다니까, 갑자기 불안해져서 말하는 거다.”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사샤의 말이 상당히 애매모호했기 때문이다. 꽤나 무책임한 말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샤의 능력은 나도 알고 있는바. 일단 귀담아들을 생각에 최대한 정확한 방향을 가르쳐달라고 말하자, 사샤는 여전히 언덕 아래를 가리켰다. “그럼 지금 괴물이 몰래 섞여 들었다는 소리야? 말도 안 돼.” “가능성은 있지 않아요? 놈들은 사람의 모습을 할 수 있잖아요. 또 얼마 전 사건을 생각해보면 시기가 공교롭기도 하고요.” 클랜원들이 이리저리 떠드는 말들을 들으며 나는 차분히 제 3의 눈을 활성화했고, 언덕 아래 사용자들을 왼쪽부터 한 명씩 훑기 시작했다. 이윽고 절반, 그러니까 중앙 부분을 지나치려는 순간, 돌연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절로 침음이 나온다. “하.” …그래. 왜 이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사용자 선유운.” 선유운은 곧장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아직도 가리키고 있는 사샤의 손가락을 내리게 하며,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 채 말을 이었다. “구덩이를 하나의 원으로. 중앙 아랫부분에 모여있는 사용자들이 보입니까? 수는 열두 명 정도인데.” “예.” “그중에서, 왼쪽에서 네 번째 여인. 머리는 단발머리. 얼굴은 무표정하고 방금 박수를 쳤습니다.” “보입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챈 걸까. 끼릭, 시위를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바로 쏘세요. 정확히 머리를 꿰뚫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지시에 당황할 법도 한데, 선유운은 곧바로 회답했다. 그리고 목표를 조준하려는 듯 오른팔을 내밀더니,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화살을 발사했다. ============================ 작품 후기 ============================ * 다음 회 초반 부분도 다소 불쾌한 내용이 들어가있으니, 스킵하실 분은 스킵해주세요.(이 경고 메시지는 소수의 가녀린 분들을, 그리고 경고 메시지를 요청한 분들을 위한 메시지입니다. 웬만한 독자 분들은 그냥 보셔도 무방합니다.) 1. 5월 29일(목요일)입니다. 저번에 후기에 말씀드렸듯이, 오늘 아침 비주얼 노벨 관련으로 제가 부산에 내려갑니다. 그리고 5월 30일(금요일)에 돌아올 예정입니다. 그에 따라 5월 30일(금요일) 하루 휴재를 하고, 5월 31일(토요일)부터 연재를 재개하겠습니다. 이 점 독자 분들께 깊은 양해를 구합니다. 2. 경고 메시지는 독자 분들을 무시하는 의도에서 드리는 게 아닙니다. 예전에 경고 메시지를 없앴다가 다시 넣어달라고 부탁한 소수의 분들이 계셔서 적는 것 뿐입니다. 이점 오해 마시고, 부디 너그럽게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_(__)_ 3. 쪽지 모두 답신했습니다. :D 0570 / 0933 ---------------------------------------------- 싱크 홀(Sink Hole)로의 돌입. 주현호가 치렁치렁한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고개가 한껏 젖혀진 여인의 얼굴이, 백형식의 시야에 똑똑히 들어왔다. 그 얼굴을 확인한 순간, 백형식은 심장이 정지하는 기분을 느꼈다. “고….” 나이는 20대 후반쯤 돼 보일까? 머리카락 색과 똑같은 은색의 눈동자, 엷고 가느다란 속눈썹, 살짝 늘어진 포근해 보이는 두 눈, 미끈한 콧날, 어여쁜 분홍빛 입술. 이목구비가 가지런히 자리 잡힌, 신비로우면서도 단아한 매력을 지닌 굉장한 미인. 아마 상냥히 미소 짓는다면 무수한 사내들의 애간장이 녹을 것 같다. 하지만 더 이상 여인의 미소를 보기란 요원한 일일 것이다. 다른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흐릿하게 풀린 두 눈동자는, 이미 여인의 이지가 상실된 상태임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고은솔 님…?” 그리고 백형식은, 간신히 말을 매듭지었다. “역시 기억하고 있었군. 히히…. 야. 형식아. 이것 좀 봐라?” 주현호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두 손으로 고은솔의 탐스러운 젖가슴을 그득히 그러모으자, 돌출된 젖꼭지에서 허여멀건 한 액체가 힘차게, 줄기줄기 내뿜어진다. “아앙…. 아아아앙….” 살짝 떼어진 고은솔의 입술에서 간드러진 교성이 흘러나왔다. 주현호가 서서히 손을 풀었다. 그리고 살그머니 머리를 숙여, 젖가슴을 타고 흘러내리는 모유를 혀로 게걸스럽게 핥기 시작했다. “좋으냐? 이년아?” “네…. 좋아요….” 자신의 아가라고 착각하는 걸까? 고은솔의 손이 한두 번 허공을 허우적거리더니 주현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다. 동시에 히죽, 백치처럼 미소 지었다. 그러자 주현호가 젖을 우물거리면서 비열하게 웃는다. “킥킥. 이년 좀 보게. 외간 사내가 지 젖을 빠는데 웃어? 이거 완전히 천박한 년이로세?” “네…. 그러니까 더…. 이 천박한 은솔이의 젖을 더 빨아주세요….” “그럼 한 번 울어봐. 돼지처럼.” “꿀….” 고은솔은 헐떡이는 와중에서도 돼지 우는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만족하지 못한 걸까? 주현호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몸을 일으켰다. “마음에 안 드네. 어이. 지금 형식이 앞이라고 내숭 떠는 거야?” “꿀…. 꿀….” “어쭈? 이 빌어먹을 암퇘지 년이! 빨리 똑바로 안 해?” “꿀꿀…. 꿀꿀….” 흡사 가축을 다루는 듯한 언행. 고은솔은 더욱 열심히 돼지 우는 소리를 흉내 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에 차지 않는지 주현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년이 진짜!” 갑작스럽게, 주현호는 터질 듯 부풀어오른 고은솔의 배에 두 손을 겹쳐 댔다. 그리고 꾹 힘을 주어 짓누른 순간, 고은솔의 두 눈이 커다랗게 치켜떠졌다. “꾸이이이이익?!” 이제는 꽤나 늘어진 지저분한 음부를 비집고, 무언가 불쑥 모습을 드러내었다. 애벌레 괴물이었다. 고은솔이 품고 있던 괴물이 주현호가 가하는 압력을 이기지 못해 밀려나온 것이다. “끼이이익! 꾸이이익!” 공중에 떠 있는 고은솔이 몸이 심하게 발버둥을 쳤다. 어지간히 고통스러운지 기괴한 비명이 토굴을 왕왕 울렸다. 하지만 주현호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고은솔이 발버둥칠 때마다 더더욱 거센 압력을 가했고, 그럴수록 이리저리 움직이는 애벌레 괴물이 꿈틀거리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결국에는 밀려나는 것을 이기지 못한 애벌레 괴물들이 한 마리, 두 마리 툭툭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잘한다! 잘해! 바로 그거야!” 주현호는 이제야 낄낄 웃으며 거센 비명을 지르는 고은솔을 응원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이라는 듯, 서서히 줄어들어가는 배를 있는 힘껏 짓눌렀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푸드드드드드드득! “꾸이이이이이이익!” 고은솔의 음부가 활짝 열렸다. 넓어진 입구를 통해 미처 나오지 못하던 애벌레 괴물이 한순간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끈적한 점액질로 덮인 애벌레 괴물들이 후드득 떨어지며 겹겹이 층을 쌓아간다. 그렇게 마지막 괴물까지 나오고 나서야, 허공에서 미친 듯이 비틀리던 사지가 힘없이 늘어졌다. 고은솔의 상태는 처참했다. 눈동자는 돌아가다 못해 흰자위만 보인지 오래였고, 어느새 혀도 길게 빼 물린 상태였다. 그러다 문득, 고은솔의 육체가 거볍게 떨렸다. 쪼르륵! 쉬이이, 쉬이이이! 드넓어진 음부에서 샛노란 액체 한 줄기가 분사돼 바닥을 적셨다. 강제 출산으로 인한 커다란 충격을 이기지 못해, 저도 모르게 실금해버리고만 것이다. 비참했다. 정말로, 비참했다. 과거 10강의 1인이었으며 홀 플레인의 나이팅게일이라 우러름 받던 고은솔의 명성은, 이제는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추잡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형식아. 봤냐? 봤어? 우헤헤헤!” 주현호는 잘했다는 듯 고은솔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려주고는, 자랑하는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이년이 바로 그 고은솔이라고. 맨날 우리 앞에서 상냥한 척 도와주면서 콧대 높이던 그년이라는 말이다.” “너….” “믿겨지냐? 응? 어~이? 백형식? 봤냐고?” “이…. 이….” 주현호가 물었다. 그러나 백형식은 눈을 감은 채 머리를 숙인 상태였다. 그 상태로,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꾹 말아 쥔 두 손만은 사정없이 떨리다 못해, 핏물이 절절히 배어나올 지경이었다. 백형식은 고은솔을 알고 있다. 주현호도 고은솔을 알고 있다. 초반에 잘 풀린 사용자들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사용자들은 병아리였을 적 시절의 기억을 그리 좋게 여기지는 않는다. 클랜의 오퍼를 받지 못한 입장에서, 그 어떤 도움도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여러 악조건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백형식도, 주현호도 그랬다. 0년 차 시절 하루하루를 배고픔과 잠잘 곳을 걱정하며 살아가는, 그저 그런 사용자들이었다. 하지만 백형식이 기억하는 병아리 시절은 마냥 암울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어느 날, 계속해서 힘들어하던 두 병아리 앞에 고은솔이 나타났으니까. 일종의 구원이라고 해야 할까? 고은솔은 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잠잘 곳도 마련해주었다. 홀 플레인을 살아가는데 있어 필수적인 정보들도 알려주었으며, 사용자로서 제 구실을 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전투법도 가르쳐주었다. 그러한 고은솔의 호의 덕분에, 백형식과 주현호는 번듯한 전투 사용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사람들을 좋아하던 여인. 사람들이 좋아하던 여인. 강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약자를 챙겨주는 여인. 그런 만큼 형식에게 있어서 고은솔은 하나의, 아니 형식과 비슷한 입장에 있는 모두의 빛이었다. 어머니요, 친 누나나 다름없는 여인. 고은솔은, 그런 여인이었다. 그러할진대. 마음속에 간직하던 빛의 여인이, 지금 저 모양 저 꼴이 되었다? 같이 은혜를 입은 놈은 재미있다고 낄낄대며 웃는다? 백형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입장이었다고는 해도,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이 있다. “이 금수만도 못한 새끼…!” 처음에는 낮았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높아졌다. 백형식은 천천히 한 걸음 내디뎠다. 입을 깨문 것처럼 발바닥이 흙 바닥을 지그시 누른다. 여전히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고통이 엄습하지만, 분노는 그 모든 것을 억누르게 만들었다. 마침내 백형식이 번쩍 머리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고은솔의 젖가슴을 양껏 주물럭거리는 주현호를 똑바로 노려보며 가슴속 울분을 토해내었다. “이 개 같은 새끼야아아아!” 쩌렁쩌렁한 외침. 백형식은 표범처럼 몸을 날렸다. 근력과 마력은 물론, 절절한 분노까지 서린 주먹을 거칠게 내뻗는다. 퍼억! “억?” 경쾌한 소리와 동시에 얼굴을 얻어맞은 주현호가 바닥을 데구루루 굴렀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주현호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오히려 깜짝 놀란 눈초리로 백형식을 쳐다보고는, 얻어맞은 부분을 한 번 쓱 매만졌다. 백형식이 전력을 다한 한 방을 직격으로 맞았음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였다. “야 인마! 놀랐잖아! 갑자기 왜 때려?” 그 한순간, 백형식은 흠칫하고 말았다. 백형식이 기억하기로는 주현호는 마법사 사용자였다. 그런데 근접 계열인 자신의 주먹을 맞고도 저렇게나 태연하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 어? 형식아. 너 지금 우냐?” 그때 벌컥 화를 내던 주현호가 우뚝 말을 멈추었다. 백형식을 바라보는 눈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와, 이 새끼. 정말 미치겠네. 울어? 천하의 백형식이 운다고? 야. 너 지금 이년이 이렇게 됐다고 화내는 거야? 꼴랑 그것 가지고?” “꼬, 꼴랑? 그것 가지고? 그게 이분한테 감히 할 말이냐 이 개새끼야!” “나 참. 어이가 없네. 야, 야. 알았어. 정 그러면 너도 이년이랑 한 번 하던가. 하지만 솔직히 나는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아.” “뭐, 뭐? 뭘 해?” 백형식은 기함했다. 지금 주현호는 이야기의 본질을 전혀 잡지 못하고 있다. 빗나가도 한참이나 빗나갔다. 도대체 사람이 얼마나 비틀리고 꼬였으면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그런 백형식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현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손사래를 쳤다. “뭐, 사실 고은솔이야 몇 년 전만 해도 꽤나 싱싱하고 맛있기는 했지. 나름 반항하는 맛도 있었고. 그런데 아까 봤지? 이 괴물들을 벌써 수백, 수천 번은 출산한 년이야. 그러니까 지금 해봤자 별 느낌도 없을 거다. 차라리 허공에 대고 혼자 허리 흔드는 게 낫지.” 거기다 방금 고은솔이 출산한 애벌레 괴물을 들고 머리를 절레절레 젓기까지. “좆같은 새끼! 으아아악!” 백형식은 다시금 괴성을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주현호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황소처럼 달려드는 백형식을 흘긋 보더니 차분히 한숨을 흘리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꽝꽝! 두어 번의 폭발음이 들렸다. 이윽고, 백형식의 몸이 속절없이 허공을 날았다. 더러운 흙 바닥에 풀썩 나동그라지더니 한두 번 거세게 꿈틀, 또 꿈틀. 그러다 결국, 힘없이 축 늘어지고 말았다. 당최 무슨 묘수를 썼는지는 모르나, 주현호의 단 두 번의 타격에 기절한 것이다. “어휴. 멍청한 놈. 꼭 이래야만 했냐.” 주현호는 얼굴을 찌푸린 채 한동안 입맛을 다시며 백형식을 응시했다. “뭐, 어차피 새로 태어나면 달라질 테니까. 차라리 기절시켜두는 게 낫겠지.” 그렇게 말한 주현호는 곧 지그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돌연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절을 했다. “파더. 이로써 충실한 수족을 만들어낼 준비가 완료됐습니다. 부디 그대의 권능으로, 이 생물에게 저와 같은 일원이 될 수 있는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과연 누구에게 말을 하는 걸까? 누가 보면 혼잣말하는 미친놈이라 생각하겠지만, 정작 주현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아니요. 아닙니다. 그냥 제 친구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썩 쓸만한 놈입니다.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때였다. 주현호의 말에 화답하려는지 천장에 울룩불룩 튀어나와있던 핏줄 같던 것들이 조금씩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뱀이 기어가는 것처럼 S자를 그리며 움직인다. 이윽고 천장의 흙이 동그랗게 패이더니 구멍 안에서 무언가가 불쑥 흘러내렸다. 한없이 검으며 길고 굵직한 그것은, 다름 아닌 촉수였다. 촉수는 천천히 내려와 기절한 백형식의 앞에서 멈추었다. -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어디서 들려오는 걸까? 알아들을 수 없는 음침한 울림이 토굴을 웅혼하게 울렸다. 왠지 모르게 슬퍼하는 울림. “예, 예? 고은솔이 완전히 끝났다고요?” 주현호의 머리가 번쩍 들렸다. “아…. 한 번 더 출산하면 죽는다고….” “하지만 괜찮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깔끔하게 버리시죠. 어차피 위쪽에는 수태 능력을 지닌 생물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있지 않습니까. 설마 그 중에 고은솔을 대체할 수 있는 한 명이 없겠습니까.” “예. 확신합니다. 고연주, 남다은, 연혜림, 한소영 등 제법 강한 생물들이 많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개인적인 의견을 물으신다면….” “으음. 고연주, 남다은, 연혜림이라는 생물은 고은솔과 비슷한 정도라 생각되고, 한소영은 그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더 있을 수도 있고요.” 계속해서 이어지는 주현호의 혼잣말. 자세히 모른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정말로 잠시였다. 주현호의 말이 가능성이 높다고 여긴 건지, 이내 가만히 있던 촉수가 움직여 백형식의 머리에 찰싹 붙었다. 그리고,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마치 청소기가 쓰레기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머리부터 촉수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머리. 목. 몸통. 다리. 그리고 발까지 전부 빨려 들어갈수록, 긴 장대 같던 촉수가 중간 부분부터 둥글게, 둥글게 크기를 키워나갔다. 마치 백형식을 녹여 하나의 덩어리를 만드는 것처럼.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백형식의 몸이 완전히 사라졌을 즈음. 어느덧 촉수의 중간은 작은 바위 크기 정도로 둥글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 상태로 다시 움직여 촉수의 입구 부분을 고은솔의 음부 안으로 세차게 꽂았다. 잠시 후. 촉수 전체가 부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중간 부분의 둥그런 덩어리가 아래로 서서히 이동을 시작했다. 천천히 이동하던 덩어리는 백형식을 흡수한 입구 부분을 거쳐 도로 빠져나와 버렸고, 고은솔의 안으로 그대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결국에는, 질을 통해 무사히 자궁에 안착했다. 그에 따라 잠깐 홀쭉하게 쪼그라들었던 고은솔의 복부가 다시금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음부를 틀어막고 있던 촉수가 미끄러지듯이 흘러나왔다. 일련의 과정을 마친 촉수는, 어느덧 처음의 장대 같던 모습을 되찾은 상태였다. “오오! 성공했군요!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주현호는 연신 감사하다고 외치며 머리를 조아렸다. 얼굴에 화색이 가득한 게, 이 알 수 없는 과정의 성공이 진심으로 기쁜 모양이다. 그와 동시에. “아….” 여전히 까뒤집혀있는 고은솔의 눈동자에서, 투명한 액체 한 방울이 살며시 흘러내렸다. ============================ 작품 후기 ============================ 이로써 이번 파트에서 가장 수위가 높았던 부분은 마무리 지었네요. 사실 나름 들어갈 복선이나 정보가 있어 총 3회로 나누어 끊으려고 했는데, 그냥 이번 회로 몰아넣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다음 회에 김수현의 시점이 돌아옵니다. 그리고 사건을 마무리함과 동시에 구덩이 안으로 돌입하는데, 아무래도 계속 시점이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요. 사실은, 몸이 조금 피곤한 것도 있습니다. 오늘 부산에서 올라왔거든요. 새벽에 3차까지 달리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하하. 그래도 정말로 유익한 시간이었고, 또 부산에 갔다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담이지만, 부산은 정말로 좋은 도시인 것 같아요. 뭐라고 해야 할까요? 자유로우면서, 활기찬 느낌? 처음 부산역에서 내렸을 때만 해도 그냥 똑같구나 싶었는데, 바다를 보는 순간 기분이 확 달라졌습니다. 다리에 갈매기가 날갯짓하는 영상이 나오는 것도 신기했고, 바람을 맞으면서 용처럼 똬리를 튼 도로를 올라가는 것도 기분 좋았고, 횟집으로 도배된 건물을 보고 놀라웠고, 무엇보다 꿀 생맥주가 참 맛있었어요. 앞으로 부산을 사랑하게 될 것 같네요. 하하하. :) 0571 / 0933 ---------------------------------------------- 싱크 홀(Sink Hole)로의 돌입. 화살은 바람을 시원하게 가르며 날아가 여지없이 목표물에 명중했다. 화살촉이 목을 부드러이 파고들어간 그 순간, 안 그래도 조용하던 언덕 아래는 더욱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한순간의 침묵이 내려앉음과 동시에 주변의 모두가 행동을 정지했다. 그러나, 정적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누구냐!” “이게 무슨 짓이야!” 화살을 맞은 여인이 목을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거친 비명과 고성이 오고 갔다. 좌중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올라와 언덕에 서 있는 우리를 응시한다. 대다수가 의아해 보이는 얼굴이나 일부는 벌써부터 흉흉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다. 하기야 저 여인이 동료라면, 아니 동료로 인식하고 있다면 그럴 만도 하겠지. “머셔너리 로드! 이게 무슨 짓이요!” 한 사내가 우악스럽게 검을 뽑으며 성난 기세로 일갈했다. 근처에 있던 사용자들도 하나 둘 무기를 들어 우리를 겨냥한다. 일촉즉발의 상황. 일단 진정시켜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곧바로 입을 열려는 찰나, 누군가 후다닥 앞으로 달려가 아래로 검을 겨누었다. 갑자기 누군가 하고 보니, 진수현이었다. “뭐 임마! 지금 한 번 해보자는 거냐!” …야 인마. “뭐, 뭐요? 정녕 미치기라도 하신 게요?!” 진수현은 똑같이 검을 겨눈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사내는 기막혀하며 고함쳤다. 억울함이 듬뿍 배인 목소리였다. 고연주가 재빠르게 앞으로 달려나갔다. “오히려 살려준 것도 모르는 이 배은망덕한…. 꽥!” 그리고 한 번 더 기세 좋게 소리치려는 진수현의 머리를 거세게 가격한 후, 질질 끌어 눈앞에서 사라졌다. 속으로 안도하면서도, 나는 바닥에 쓰러진 여인의 동태를 살폈다. 여인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치료를 받는 와중에도,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선유운. 한 발 더. 이번에는 목이 아니라 머리로.” “알겠습니다.” 끼릭, 핑! 곧바로 장전하는 소리에 이어 한 발의 화살이 망설임 없이 날아간다. 하지만 이번에는 여인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자신을 치료해주던 사제를 끌어당겨 방패막이로 삼은 후, 곧바로 몸을 일으켜 사지를 구부렸다. 화살은 사제의 귓불을 스쳐 바닥에 꽂혔다. 여인은 구덩이로 도망갈 생각인지 그대로 땅을 박차 올랐다. 핑! 그러나 그 순간, 또 한 발의 화살이 쏘아져 정확히 여인을 맞췄다. 머리가 직격당한 여인의 몸이 속절없이 흔들리며 무너져 내린다. …아니. 그러는가 싶더니 이리 비틀 저리 비틀거리며 간신히 몸을 가누었다. “…희선아?” “저, 저거 괜찮은 건가?” 사용자들의 경악 어린 얼굴에 불신의 빛이 스쳤다. 그럴 만도 하다. 나나 공찬호 수준의 근접 계열이라면 모를까. 사제로 보이는 사용자가 머리와 목에 마력이 가득 들어간 화살을 맞았는데, 저렇게 움직인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난 거니까. “크르르르! 키에에에!” 이제 본색을 드러내는 건가. 여인이 기괴한 괴성을 토하며 마구잡이로 몸부림치자 사용자들이 주춤주춤 물러난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중간에 공백이 생겨 구덩이로의 길이 트였다. 여인 또한 그걸 놓칠 생각은 없는지, 커다랗게 울부짖으며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클랜 로드.” 끼릭, 석궁이 장전되는 소리와 함께 선유운이 약간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어느새 여인은 구덩이 지척까지 다다른 상황이었다. 나는 침착히 거리를 재며 무검을 잡았다. 그리고 여인이 구덩이 안으로 그대로 달음박질치려는 찰나, 나는 지체 않고 무검을 뽑아 들었다. 그때였다. 막 안으로 들어가려던 여인의 허리가 갑작스럽게 반으로 접히며 도리어 솟아올랐다. 그러더니, 구덩이 안에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투척하려던 것을 멈췄다.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저건 또 누군지 싶어 유심히 보고 있자, 문득 고연주가 “쯧.” 혀를 차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고연주가 혀를 찬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구덩이에서 올라와 터벅터벅 걸어 나오는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처형의 공주 연혜림이었다. 연혜림은 여인을 어깨에 걸친 채로 주변을 쓱 돌아보았다. 얼음과도 같은 냉랭한 시선이 나와 마주친다. 이내 가볍게 발을 구른 연혜림이 마치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며 삽시간에 정상에 안착했다. 그리고 연한 푸른빛 머리칼을 찰랑이며 나에게 다가왔다. “갑자기 왜 이렇게 분위기가 흉흉해? 얘는 또 왜 자살하려고 하는 거고?” “너….”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김수현?” “…….” 연혜림이 새침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야말로 구덩이 아래서 뭘 하고 있었는지 되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으나, 나는 우선 연혜림이 어깨에 걸친 여인을 가리켰다. 아니. 이제 여인이라고 하기도 그런가? 괴물이 어느새 연혜림의 머리를 향해 입을 찢어져라 벌리고 있었으니. “……?” 살기를 느낀 걸까. 연혜림이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엥. 괴물이네.” 그리고 쩍 벌려진 주둥이를 보는 순간, 일말의 주저 없이 왼손을 들어 괴물의 머리를 훑었다. 잠시 후, 괴물의 얼굴에 5개의 섬뜩한 사선이 그어지며 그대로 조각조각 나뉘어 떨어졌다. 연혜림은 얼굴 없는 시체를 아래로 던지며 손을 툭툭 털었다. 손가락에 묻은 핏방울이 허공에 점점이 뿌려진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왠 괴물?” “하여간. 무식하게 싸우는 건 여전하네?” 회답은 내가 아닌 고연주에게 들려왔다. 계속해서 손을 털던 연혜림이 흘긋 시선을 돌렸다. 고연주를 봤는지, 차갑던 눈동자에 명백한 살의가 스쳤다. 역시나. 한동안 잘 참는가 싶더니 갑작스럽게 또 터진 것이다. 연혜림은 손을 터는걸 멈추고 피식 웃었다. “무식?” “혼잣말이니까 신경 쓰지마~.” “요즘 한동안 안보이더니 거기가 간질간질한가 봐?” “어머. 말하는 것 좀 봐. 천박하기는.” “그럼 우아하게 처형인의 대검이라도 소환해줄까? 말만해. 얼마든지 쑤셔줄 테니까.” “그러는 너야말로 심연의 그림자에 둘러싸여 헐떡이던 때가 그립지 않니? 너, 그런 거 즐기잖아?” 그렇게 말한 고연주는 한 손을 살며시 입에 대며 “푸.” 비웃었다. 걸쭉한 농담, 아니 살의 어린 말들이 오고 간다. 하지만 지금 둘의 감정 싸움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는 조용히 고연주를 가리켰다. 더는 입을 놀리지 말라는 의미였다. 입술이 삐쭉 나오기는 했지만, 고연주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다시 연혜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싸울 때가 아니야. 괴물이 들어왔다.” “먼저 시비건 게…. 알았어. 아무튼, 그건 나도 알아. 그런데 얘가 왜 여기 있냐고.” “일종의 간첩이지.” “간첩?” 연혜림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머리를 갸웃했다. 얘가 이렇게 멍청했던가? “괴물의 진화. 그리고 얼마 전 실종 사건을 떠올려봐.” “아하.” 그제야 탄성을 지른 연혜림이 문득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잠깐만. 그럼 더 있을 수도 있다는 소리잖아?” “…음.” 그것도 그렇다. 정확히는,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바로 사샤를 돌아보았다. 사샤는 잠시 멀뚱한 얼굴을 해 보이더니 차분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더 없다는 걸까, 아니면 모르겠다는 걸까. * 괴물이 숨어들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야영지 전체로 퍼졌다. 그것은 얼마 전 사건이 탈영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줌과 동시에, 남부 원정대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괴물이 들어와 동료인 척하며 호시탐탐 끌어들일 기회를 노리고 있다?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니었다. 오죽하면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는 사태까지 일어날 정도였으니까. 소식을 접한 한소영은, 결국 구덩이 진입을 하루 더 늦추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아무리 진군 시일이 걸린다고 해도 남부 원정대 자체보다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후 한소영은 곧바로 나를 찾아와 간첩을 발견한 방법을 물었고, 나는 사샤를 빌려주는 것으로 회답을 대신했다. 결국 사샤는 그날 하루 종일 코를 킁킁거려야만 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녹초가 되어 돌아온 사샤는 다시는 냄새를 맡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도대체 무슨 냄새를 맡았길래 그렇게 밤새 흐느낀 걸까? 아무튼. 더 이상 숨어든 괴물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 다음날 정예 편성 조는 곧바로 구덩이 돌입을 시작했다. 사실 처음 구덩이를 내려가는 방법은 꽤나 조악하다. 우선은 1차적으로 구덩이를 내려갈 20명을 선발한다. 선발된 20명은 지면에 착지해 안전을 확보한 후, 지상으로 연락 및 신호를 보낸다. 여기까지는 좋다. 문제는 어디까지나 내려가는 방법 그 자체였다. 각 사용자에게 목재 두 개를 지급하고 그걸 몸에 고정한다. 그리고 목재와 몸에 천을 감아 하나의 낙하산을 만들어 내려간다…. 라고는 하는데. 그냥 말이 좋아 낙하산이지, 추후 지급된 목재와 천을 보니 그냥 봉 두 개 달린 파라솔과 다름없는 모양새였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내구가 약한 사용자가 내려가면 죽기 딱 좋은 장치였다. 결국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던 나는, 예전 용이 잠든 산맥에서 안현을 구출한 과정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 그러니까 안현이 섞여있던(?) 공터를 발견했을 때, 우리와 동행했던 여인의 영혼은 공중 부양 마법을 사용해 우리를 아래로 안전하게 착지하게 해주었다. 나는 곧바로 헬레나를 찾아가 비슷한 마법을 사용해줄 수 있는지 물었고, 헬레나는 자존심 상한다는 기색을 보여 나를 흡족하게 해주었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남부 원정대는 제대로 된 구덩이 공략을 시도할 수 있었다. 해는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언덕 아래에는 이번에 들어갈 102명, 그리고 한소영과 헬레나 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언덕 정상에 서서 우리가 내려가는걸 구경하고 있었다. 이미 들어갈 준비는 거의 마친 상태였다. 나를 제외한, 1차적으로 들어갈 19명 모두가 아래만 쳐다보고 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그저 구덩이 앞에서 조용히 한소영의 지시를 기다릴 뿐. 하기야 아무리 정예 사용자 중에서 골라낸 이들이라고 하지만, 긴장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공간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니. “시작하세요.” 이윽고 한소영의 지시가 떨어졌다. 헬레나는 곧장 나를 바라보았다. 살짝 머리를 끄덕여주자 조용히 주문을 웅얼거린 헬레나는, 우리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Levitation.” 헬레나의 손이 은은한 빛으로 감싸였다. 그 순간 지면이 웅혼하게 울리며 새하얀 빛을 토해내었고, 동시에 몸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고연주, 남다은, 백한결, 비비앙, 선유운 등등. 나를 포함한 20명 전원이 일제히 허공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곧 구덩이 안으로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비로소 2지역의 진정한 마지막 공략이 시작된 것이다. 이내 햇살이 비치는 세상이, 구덩이 안의 어둠에 서서히 위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시야가 완연한 어둠에 물들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나를 쳐다보다가 살그머니 시선을 회피하는 한소영이었다. 그렇게 뜻 모를 기분과 함께 하강이 시작되었다. 내려가는 속도는 적당했다. 굳이 따지자면 엘리베이터보다 약간 빠른 정도? 초당 2, 3미터를 내려가는 정도였다. 1회 차의 기록에 따르면 이 구덩이의 높이는 500미터에서 600미터 사이. 그렇다면 어느 정도 계산이 된다. 이후 2분 30초 정도가 지났을 즈음, 나는 안력을 돋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검은색 일색인 세상에서 서서히 흙 바닥처럼 보이는 지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외의 이상한 낌새는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얼른 시선을 돌려 한결을 찾았다. 마침 한결도 서서히 능력을 발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결아.” “네. 형님.”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한결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차분히 양손을 겹치더니 고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지스 시스템.” 그러자 일전에 본 정육각형의 보호막이 생성돼 우리를 희뿌옇게 감싸 안았다. 3분. 지면이 더욱 확실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무검을 꺼내며 외쳤다. “모두 전….” 하지만 곧 외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이미 전원이 각자의 무기를 꺼내든 채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정확히 3분 15초가 경과했을 때, 나는 마침내 발에 무언가 닿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Off The Record.』 (세 남자가 여전히 머리에 하얀 띠를 질끈 동여맨 채, 우렁차게 외치고 있다.)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 화정을 너프하라! 너프하라! 시몬 : 아니다! 김수현을 너프하라! 너프하라! 네르갈 : 그냥 다 너프하라! 너프하라! (그때 한 거대한 그림자가 세 남자에게로 다가선다.) 거대한 그림자 : 우우우우우우우우….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잠시 시위를 멈추며.)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 응? 어헉! 이 괴물은 무엇인고?! 거대한 그림자: (구슬픈 목소리로 울어 젖힌다.) 우우우우우우우우…. (처음에는 놀랐지만, 우는 소리를 들으니 세 남자 모두 짚이는 바가 있다.)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 혹시…. (거대한 그림자, 촉수를 들어 앞부분을 쓱쓱 닦는다. 서글프게 우는 모습으로.)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 …그렇구먼. 울지 말게. 내 다른 것은 묻지 않겠네. 자네. 혹시 뭔가 굉장히 있어 보이는 등장을 했는데, 김수현에게 처참하게 발리지 않았는가? (네르갈이 촉새처럼 끼어든다.) 네르갈 : 아니면 찍소리도 못하고 터져 죽었거나? (시몬도 끼어든다.) 시몬 : 그것도 아니면 사지가 찢기면서 비참하게 죽었거나? (침묵이 흐른다.) (잠시 후. 거대한 그림자, 처음으로 말을 꺼낸다.) 거대한 그림자 : 시발…. 0572 / 0933 ---------------------------------------------- 철혈(鐵血) 여왕의 분노, 김수현의 환희. …결국 간신히 격퇴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패배한 전투나 다름없었다. 겨우 반격을 가하고 승기를 잡으려는 찰나, 살아남은 놈들이 삽시간에 도망쳐 언덕의 장벽을 넘었으니까. 그렇게 그림자 언덕의 기습과 골짜기 전투에서 무수한 피해를 입었지만, 당시의 상황은 그대로 멈출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원정대는 언덕 아래 구덩이를 발견한 순간, 곧바로 가용 가능한 인원 전부를 투입해 공략을 시도했다. …지금 돌이켜보건대, 인원을 그렇게 많이 투입한 건 그다지, 매우 좋은 선택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많은 인원이 깔려 죽을 일도 없었을 테니까. 아무튼, 우리는 무사히 구덩이로 안착할 수 있었다. 이윽고 20분쯤 통로를 걸은 후, 비로소 땅속 도시 첫 번째 광장인, '구 사로(死路), 아니 구 사로(邪路)'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 신 대륙 아틀란타(Atlanta) 고대 도서관. '강철 산맥 공략 회고록.' 中 발췌. * “꺅!” 새된 비명과 아울러 누군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건너편에 있던 '죽음의 기사' 유지태가 빠르게 비명이 들린 곳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아. 미안해요.” 다행스럽게도 여인은 곧바로 회답했다. 유지태는 짧은 한숨을 흘리더니 차분히 손을 내밀었다. “조심하셨어야죠. 아무튼 얼른 일어나세요.” “네, 네. 주변을 경계하느라 발 밑을…. 잠시만요.” 여인은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말을 하며 유지태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넘어진 자세 그대로 흙 바닥을 더듬거리더니 흠칫 몸을 떨었다. 이내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킨 여인은 아미를 찌푸리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무언가 하얗고 길쭉한 것이 쥐어져 있다. “…뼈?” 누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말대로 여인의 손에 들린 것은 뼈였다. 동물의 뼈가 아닌 벌건 살점이 덕지덕지 묻은 사람의 뼈. 마침 누군가 라이트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려, 나는 여인이 서 있는 부근으로 시선을 내렸다. 잠시 후, 새하얀 빛이 근처를 환하게 밝혔다. “…….” 정적. 아래를 내려다본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바닥에는 해골과 뼈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시뻘건 핏물이 적어져 있었다. 그래. 뿌려진 게 아니라, 적어져 있다. 이리저리 심하게 삐뚤어지기는 했지만, 핏물은 확실히 하나의 메시지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것도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언어로. 『안녕?』 『어서 와.』 상당히 도발적인 문구였지만, 한편으로는 놈들이 우리가 들어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집주인이 참 예의가 바르군요. 이렇게 환영도 해주고 말이죠.” “저는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네요. 환영하는 방식이 저질이에요.” 여인이 투덜거리며 뼈를 내던지자 유지태가 가볍게 웃어 젖혔다. 그 웃음에 긴장이 풀린 걸까? 사용자들이 하나 둘 정신을 차렸는지 각자 할 일을 시작했다. 일부는 둥글게 모여 사방을 경계하고, 일부는 통신용 수정구를 꺼내 무사히 안착했다고 보고한다. 나 또한 한쪽 방향을 맡은 채 어둠이 들어찬 통로를 조용히 응시했다. 어느덧 통신하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다시금 쥐 죽은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약 5분이 지났을 즈음. 보고가 제대로 들어갔는지 허공에서 수많은 사용자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미 안전을 확보한 이상 헬레나도 거리낄 것이 없는 모양이다. 두 번째로 내려온 인원은 처음 내려온 인원의 2배인 40명이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한소영을 포함, 남은 42명 전원이 내려왔다. 그렇게 총원 102명은 15분만에 구덩이 안으로 무사히 착지할 수 있었다…. 라는 건, 불행스럽게도 내 착각에 불과했다. 세 번째로 내려온 42명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그들이 내려온 이후, 허공에서 두 명이 추가로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싶어 자세히 보니 빙글빙글 웃고 있는 사샤와 헬레나를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사샤와 헬레나가 사뿐히 지면에 안착했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두 거주민을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헬레나는 그렇다 치고. 사샤. 너는 왜 왔지?” “음. 그거야….” 문득 사샤가 도중에 말을 멈추더니 떨떠름한 기색을 보였다. “왜 나는 그렇다 쳐주지 않는 거지? 헬레나는 그냥 넘어갔으면서?” “헬레나는 올라갈 때 필요할 테니까.” “…어, 어쨌든 차별이다. 어차피 총 사령관의 허락도 받았겠다. 헬레나가 가만히 있는다면, 나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겠다.” “…….” 총 사령관의 허락을 받았다? 의아한 기분에 시선을 돌리려는 찰나, 마침 한소영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머셔너리 로드. 제가 허락해주었어요. 왜냐하면….”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사샤라는…. 네?” “이왕 참가하게 됐으니 사샤와 헬레나도 머셔너리 쪽으로 참가시키겠습니다.” 한소영의 말끝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나는 가만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사샤와 헬레나도 충분히 좋은 활약을 보여줄 수 있거니와, 이렇게 구덩이에 들어온 이상 더는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한소영의 지휘권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저번에 회의에서 발끈한 건 아직도 후회하는 중이다.) 무엇보다, 지금은 그냥 공략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한소영도 내 뜻을 느꼈는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렇게 총원은 102명에서 104명으로 늘었다. 한소영은 인원을 정확히 파악하고 추스른 후, 곧바로 출발할 것을 지시했다. 어차피 통로도 하나밖에 없는 터라, 사용자들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동쪽 방향으로 향했다. 역시나 땅속이라 그런지 빛은 한 점 찾아볼 수도 없다. 가는 도중 일부 사용자들은 흙으로 칠해진 벽면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천장을 힐끔힐끔 올려다보았다. 통로는 상당히 넓었다. 좌우로 약 12미터 정도는 돼 보이는 너비였고, 천장은 8미터쯤 돼 보이는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서너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통로의 벽면이 반듯하게 닦여있다는 것과 사람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어있다는 것. 그리고 천장에는 크게 부푼 핏줄 같은 것들이 울룩불룩하게 돋아나와 있다는 것이다. 벽면이야 짐작 가는 게 없는 건 아니지만, 천장의 것들은 나도 잘 모른다. 1회 차에는 공략에 참가하지 못해 오직 기록으로만 읽은 게 전부였다. 보고 기록에서조차도 그저 그런 게 있다고만 적혀있었을 뿐이지, 정확한 정체는 밝혀내지 못했다. 잠시 후, 서서히 통로가 좁아지는 게 느껴졌다. 길이 평행선이 아닌 사선으로 이루어져 있어 가면 갈수록 통로가 작아지는 형태였다. 그에 따라 사용자들은 줄을 합치는 것으로 진형을 변경했으나, 이내 변경된 진형으로도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또다시 통로가 좁아졌다. “형. 이러다 나중에는 한 줄로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곁으로 다가온 안현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안현의 걱정은 기우였음이 드러났다. 가장 선두에서 걷던 한소영이 걸음을 멈추고 정지 신호를 보낸 것이다. 바로 앞으로 나가보자, 기억하는 대로 2미터 정도의 커다란 입구와 안쪽으로 거대한 공동이 하나가 보였다. 그리고 건너편에는 입구와 비슷한 크기의 굴 9개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이윽고 안으로 들어가자 직경 80미터는 돼 보이는 공동이 우리를 맞이했다.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한소영은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9개의 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지그시 바라보는 게, 아마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양이다. 나는 천천히 사용자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멍한 얼굴로 굴을 바라보는 안솔을 발견한 순간, 살금살금 옆으로 다가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삐아!” 안솔이 옆구리를 잔뜩 비틀며 교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사용자들 사이로 의아한 시선이 잔뜩 모여들었다. 나는 재빠르게 반대로 시선을 돌려 모르는 척을 했다. 시선이 가까스로 가라앉을 즈음 살며시 머리를 돌리자, 입을 삐쭉 내민 채 '오라버니 나빠요.'라는, 원망 섞인 눈초리를 보내는 안솔이 보였다. “안솔. 궁금한 게 있는데.” “흥.” “안솔?” “흥!” “…머리 쓰다듬어줄까?” “정말이요? 헤헤…. 아, 아니지. 흐, 흐응!” 넘어오지 않는군. 이제는 사탕을 살랑살랑 흔들어도 쫄랑쫄랑 따라오지 않는 정도로는 성장했어. 이 오라버니는 정말로 기쁘구나. 결국 흥흥거리는 안솔을 까꿍 우쭈쭈 등으로 어르고 달래고 나서야, 나는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어때. 혹시 저 굴 중에서 느껴지는 것이라도 있니? 예를 들면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라거나.” “으응. 잠시만요. 실은 저도 아까부터 노력하고는 있었는데….” 안솔은 실눈을 뜬 채 한참이나 굴을 바라보다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모르겠다? 나는 바로 사샤를 찾아보려다가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안솔이 모른다고 했는데, 사샤가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좌우간, 행운 능력치가 102포인트나 되는 안솔이 잘 모르겠다고 회답했다. 그렇다면 경우의 수는 두 가지. 아니, 세 가지. 하나는 능력이 발동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나머지 두 가지는…. “인원을 나누겠어요.” 그때였다. 어느새 생각을 정리했는지 한소영이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입구는 총 9개가 있지만,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는 알 수 없어요. 그러니 우선….” 한소영의 말이 고요하게 이어졌다. 그 말인즉, 굴이 9개가 있으니 인원도 9등분해서 동시에 들어가겠다는 소리였다.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내가 아는 거라고는, 어차피 지금 나온 입구가 추후 하나로 이어진다는 것. 하지만 통신용 수정구로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음을 고려하면, 그다지 나쁜 선택은 아니다. 물론 전력 또한 9분의 1로 약화된다는 문제는 있지만, 어차피 여기 있는 사용자들 모두가 어지간한 이들이 아닌가. 더구나 좁은 통로에서 싸울 것을 생각하면, 우르르 혼잡하게 몰리는 것보다는 인원을 줄여 최대한의 공간을 확보해주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터. 그렇게 생각한 나는 동의한다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이들이 많은지 딱히 반대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한소영은 사용자들의 반응을 확인한 후 바로 인원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냥 적당히 나누는 게 아니라 최대한 클래스를 맞추면서, 최대한의 효율성(서로간의 호응 정도 등.)을 고려한다. 머셔너리는 딱히 인원을 나누거나 합칠 필요가 없었다. 근접 계열로는 검술 전문가인 나, 검후 남다은, 기공창술사 안현, 침묵의 집행자 허준영. 지원 전투 계열로는 그림자 여왕 고연주, 피의 군주 사샤. 원거리 계열로는 일반 궁수 선유운, 키메라 소환술사 비비앙, 일반 마법사 헬레나. 사제 계열로는 일반 사제 신재룡, 광휘의 사제 안솔. 거기가 특수 계열인 신의 방패 백한결까지. 이미 참가한 12명의 인원만으로도 클래스 비율이나 인원을 딱 맞출 수 있었다. 비록 머셔너리 최고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다른 어떤 조보다 호화로운 구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우리에게는 9개의 입구 중 가장 중앙의 입구가 배정되었다. 거의가 비슷하기는 하지만 유독 중앙의 입구가 조금 더 크고, 음험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 20분에 걸친 재편성이 끝나고, 적게는 11명, 크게는 14명으로 이루어진 9개의 조가 각각의 입구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소영의 조는 우리가 맡은 중앙 입구의 바로 오른쪽에 있는 입구였다. “절대 무리하지는 마세요. 우선은 길을 찾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혹시라도 어렵다 싶으면 곧바로 연락 및 물러나도록 하세요.” 한소영이 나를 지그시 쳐다보며 말했다. 분명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 같은데, 왜 계속 나만 쳐다보며 이야기하는 걸까? 돌연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나는 볼을 긁적이며 입구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출발하세요. 각 조의 건투를 빌어요.” “머셔너리 클랜. 들어갑니다.” 한소영의 건투를 빈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차분히 한 걸음 안으로 내디뎠다. ============================ 작품 후기 ============================ 이제 강철 산맥 2지역 파트도 서서히 마무리로 접어드네요. 개인적으로 이번 파트를 적으면서 꼭 적고 싶은 내용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저번에 신상용의 파트인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라는 파트처럼요. 그 중 두 가지가 이번 파트인 ' 철혈(鐵血) 여왕의 분노, 김수현의 환희.',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파트인 '다시 한 번, 빛나는 그 시절로 되돌아가기를. ~ 웃으며 안녕.'입니다. 굳이 따져보면 이번 파트보다는 마지막에 나오는 파트가 더 적고 싶기는 해요. 하하. 아무튼 적고 싶은 파트들이 다가오니 갑자기 소재가 넘쳐나기 시작했어요. 글 적는 게 너무 즐겁답니다. :D ㅎㅎㅎㅎ. 여러분도…. 즐거우세요? ☞☜ PS. 다음 회는 찾을 수 있는 여건이 되면 BGM 하나 소개시켜 드릴게요! 0573 / 0933 ---------------------------------------------- 철혈(鐵血) 여왕의 분노, 김수현의 환희. 통로는 여전히 어두웠다. 비비앙이 라이트 주문을 밝히기는 했지만, 정통 마법이 전공이 아니라 그런지 동굴에 들어찬 어둠을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문득 하연이 그리워졌다. 하연 정도로 정통 마법에 통달해있는 사용자라면 전투는 물론 이런 때에 커다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기야 안력을 높여 어둠 속의 사물을 인지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아예 시야를 환하게 밝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아무튼, 이제 약 50분 정도 흘렀을까? 중앙 입구로 들어온 이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선두에서 행군하는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괴물들을 보지 못했다. 약간의 이상한 낌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걸어온 느낌으로는 그저 텅 빈 통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로 계속 행군만 하는 건, 사실 상당히 지루한 일이다. 애들도 조금씩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는지, 10분 전부터 작은 목소리로 가만가만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애당초 과묵한 성격이라 그런지, 아니면 소곤거리는 소리가 거슬렸는지 선유운이 가끔 못마땅한 기색으로 뒤를 돌아보았지만, 한 번 그냥 놔두라는 의미로 머리를 가로젓자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저기, 클랜 로드. 문득 궁금한 게 하나 생겼습니다.” 그렇게 지루한 행군을 계속하던 와중, 헬레나가 스리슬쩍 다가와 말을 걸었다.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입은 묘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이, 아마 정말 궁금한 게 생긴 모양이다. 선유운에게 잠시 선도를 해달라 부탁한 후, 나는 살짝 걸음을 늦췄다. “뭐가 궁금한데.” “다름이 아니고…. 지금 인간들은 이 강철 산맥이라는 지역을 넘으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럼 왜 이 강철 산맥을 굳이 넘으려고 하는 겁니까? 죽음이라는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말이지요. 이미 인간들은 하나의 대륙에 터전을 잡았고, 살아가는데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을 터인데.” “그거야 강철 산맥을 넘으면 새로운 대륙이 나오니까.” “그 새로운 대륙이란 걸 꼭 발견하고 가져야만 합니까? 지금 주어진 것들에 만족할 수는 없는 겁니까?” 흠. 사람이 아닌 용의 입장에서 보면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는 건가? 처음에 장난스러웠던 헬레나의 목소리는 이어질수록 낮아지고 있었다. 마치 현자에게 답을 구하는 말투처럼. 그러고 보니 어느덧 사샤도 은근슬쩍 다가와 귀를 들이밀고 있다. 나는 잠깐 목을 가다듬은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만족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야. 우선 사용자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지?” “다소 들어본 바는 있어, 약간이나마 알고는 있습니다.” “좋아. 일단 홀 플레인은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야. 사용자들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강해질 의무가 있지. 하지만 그 강해지는 방법이, 크게 보면 굉장히 한정적이라는 거야.” “자기 수련이라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사용자 정보라는 설정이 들어온 이상 수련으로 강해지는 건 한계가 있어. 그건 스스로의 잠재성에 의해 결정되는 거라 시작부터 선이 그어져 있는 거나 다름없다고.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거고. 밖을 돌아다니며 괴물들을 처리하고, 고대 유적을 발견하고, 탐험해서 좋은 무기나 클래스 금화 등을 얻는 것 등등. …하지만 결국에는 그것 또한 한계가 있지. 한 대륙에 잠들어 있는 자원이나 성과는 절대로 무한하지 않아. 계속해서 캐고 발굴하다 보면 언젠가는 사라져. 그리고 지금 북 대륙이 바로 그런 포화 상태인데, 사용자들은 계속해서 들어오는 상황이지.” “호. 그러면 새로 들어오는 사용자들을 위해 새로운 대륙을 개척하는 겁니까?” “물론 새로운 사용자들을 키울 여건을 마련하는 측면은 있지만, 그게 궁극적인 목적은 되지 않아. 우스갯소리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새로운 대륙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도 하거든? 아직 개척되지 않은 만큼, 새로운 대륙에는 아직 손 닿지 않은 값진 자원과 짭짤한 성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대륙이 있는데 사용자들이 가만히 있겠어? 또한 목숨을 걸고 원정에 참가했으니 나름의 특권은 누려야지. 어느 정도 뱃속을 채우고 난 후에야 아마 다른 사용자들에게도 개방이 될 거야.” “발전을 위해서 새로운 대륙을 개척하지만, 그래도 고생한 이들에게는 우선권을 보장해준다는 말씀이시군요.” 나는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저와는 관점이 달라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들은 부차적인 이유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아요. 왜, 그러니까 왜 꼭 이 강철 산맥을 넘어야 하는 겁니까? 새로운 대륙이라면 북쪽으로도 개척되지 않은 지역이 있지 않습니까? 왜 그런 데는 이런 대규모 원정대를 편성하지 않는 겁니까?” 헬레나는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 순간, 나는 가슴이 뜨끔해지는걸 느껴야만 했다. 돌연 주변이 고요한 게 모두가 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 모양이다. 별안간 말을 조심해야 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확실성이 없으니까. 그리고 가만히 있으면 안되니까.” “확실성?” “지금으로부터 8, 9년 전 바바라도 미개척 지역이던 때가 있었지. 지금 강철 산맥과 같이 중앙의 숲을 통과해서 바바라를 공략했고, 이후 다른 도시들도 발견해서 북 대륙이라는 하나의 터전을 마련했어. 그 공략하는 과정에서…. 정확히는 바바라에 있던 고대 도서관에서 아틀란타라는 새로운 대륙이 있다는 기록을 발견한 거야. 그에 반해 북쪽의 미개척 지역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없었고.” “과연. 확실성이란 그런 뜻이었군요. 그러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말씀은….” “그 아틀란타라는 대륙도 언젠가는 포화 상태에 이르겠지. 그러면 우리는 또 새로운 대륙을 찾아야 할 테고. 과연 또 다른 새로운 대륙의 기록이 아틀란타에 있고 없고를 떠나서, 문제는 이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에 북 대륙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소리야.” “하나가 아니다?” “우리 북 대륙은 강철 산맥을 남진하면 아틀란타라는 새로운 대륙이 나오잖아? 다른 대륙도 똑같아. 동 대륙이 불모의 황야를 서진하면 플로렌스, 서 대륙이 서리 협곡을 동진하면 아이리스, 그리고 남 대륙이 오크 성을 북진하면 라그나로크라는 새로운 대륙이 나오지. 그러면 생각해봐. 이렇게 각 대륙이 현재 위치한 지점의 반대 방향으로 계속 밀고 간다면, 종래에는 어떻게 될까?” “…서로 부딪치게 되는군요.” 정답이었다. 정확히는 테라라는 마지막 대륙을 두고 경쟁해야 하지만, 그것까지 말할 수는 없는 노릇. 다행스럽게도 헬레나는 충분히 호기심을 해결했는지 더는 묻지 않았고,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덕분에 홀가분한 기분입니다.” …홀가분한 기분이다? 이윽고 헬레나는 약간은 쓸쓸해 보이는 얼굴로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러자 갑작스럽게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헬레나는 왜 느닷없이 이런 질문을 한 걸까? 홀가분한 기분이라는 건 무슨 뜻일까? 그리고 마지막에 보인 쓸쓸한 기색의 의미는 무엇일까? “클랜 로드!” 그러나 미처 깊숙이 생각할 틈도 없이 선유운이 다급히 나를 불렀다. 생각을 접고 선두로 다가가자 걸음을 멈춘 채 우뚝 서 있는 선유운이 전방을 가리켰다. 나는 곧바로 정지 신호를 보낸 후 선유운을 가리키는 방향을 유심히 살폈다. 너무 이야기에 빠졌던 걸까. 잠시 지루한 기분은 잊을 수 있었지만, 어느덧 전방에는 탁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직 어느 정도 거리가 남아있었지만, 이제 거의 통로의 끝에 다다랐는지 새로운 입구가 보인 것이다. 그리고 그 안으로, 무언가 꼿꼿이 선 채로 우리를 마주보고 있다. 그것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어떻게 보면 사용자 같기도 했지만, 또 어떻게 보면 허수아비 같기도 했다. 안력을 한껏 높여도 이 거리에서는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쿵! 그때였다. 갑자기 무언가 울리는 소리에 이어, 꼿꼿이 서 있던 것들 중 하나가 맥없이 무너졌다. 그 순간 눈동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내 클랜원들이 재빠르게 모이는 기척을 느끼며, 나는 조용히 무검을 뽑았다. …적어도 나는, 확실히 볼 수 있었다. 하나가 무너지는 순간, 어디선가 검은 그림자가 재빠르게 입구 너머 공간을 스쳤다는 것을. “수현. 그림자를 보내볼까요?” “안개화로 선 진입 할 수도 있다.” 고연주와 사샤가 동시에 말했다. 그러나 나는 차분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방금 마력 감지를 최대한으로 높여 돌렸는데도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설마? “바로 진입하겠습니다.” 지시를 내린 후, 나는 지체 않고 걸음을 옮겨 통로를 통과했다. 그렇게 약 5분 가량을 빠른 걸음으로 걷자, 곧 입구 너머의 너른 공동에 다다를 수 있었다. 새어 나오는 탁한 불빛의 정체는 다름 아닌 벽에 걸려있는 횃불이었다. 넓이는 아까 공동보다 3분의 2정도 되는 크기였고, 우리가 들어온 쪽으로 총 9개의 굴이 뚫려있었다. 말인즉, 한 공간으로 모든 통로가 이어져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빠르게 주변 탐색을 마치고 중앙을 바라본 순간, 옆에 있던 선유운이 “헉.”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수현. 무슨 일이에요?” 고연주가 물었다. 그러나 곧 중앙을 확인했는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주변으로 고개를 돌리며 건너편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중앙에는 꼿꼿이 서 있는 건 허수아비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허수아비의 모양을 한 8구의 시체였다. 흙 바닥에 박힌 8개의 나무 막대기 끝에는 사용자들이 각각 가슴께부터 꽂힌 상태였다. 복부 아래는 무참히 뜯긴 상태였고, 내장이나 장기는 싹싹 긁어먹었는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그나마 온전한 거라고는 머리와 덜렁덜렁 늘어진 두 팔뿐. 나는 가장 정면에 있는 사내의 시체로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았다. 사내는 죽을 때 꽤나 고통스러웠는지 온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는데, 그에 반해 입은 귀밑까지 찢기고 고정된 상태였다. 아직도 피가 흘러나오는 게, 웃는지 우는지 모를 기괴한 형상을 보이고 있다. “아까 오른쪽에서 두 번째로 들어갔던 조에요.” 어느새 한쪽 무릎을 꿇은 남다은이 무너진 시체를 뒤집으며 말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조라면…. 처음 구덩이에 들어왔을 때 뼈에 걸려 넘어졌던 여인이 포함된 조였다. 유지태의 농담에 환영하는 방식이 저질이라고 욕하던 여인. 말인즉, 한 조가 몰살당했다. 방금 설마 하고 추측한 것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잠깐. 그러고 보니 여인의 시체는 보이지 않고, 사내의 시체만 보이는데? “클랜 로드. 잠시만요. 여기 좀 보세요.” 남다은은 머리가 꽂힌 막대기를 치우고서는 바닥을 가리켰다. 아까 시체가 무너졌던 자리였다. 약간 허리를 굽혀 살펴보자 지면에 삐뚤 빼뚤 그려진 벌건 핏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 구덩이로 내려왔을 때 본 것과 똑같은 필체였다. 『건방지게. 멋대로 들어온 주제에 어디서 불평 불만이야?』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신경 좀 썼지. 어때. 이 정도면 저질이 아닌가? 히히, 히히히! PS. 아. 다른 3명은 고맙게 사용하도록 할게.』 “이 개새끼들!” 안현의 분노한 목소리가 공동을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안현을 흘긋 흘겼다가 어깨를 건드리는 기척에 시선을 돌렸다. 탐색을 마치고 왔는지 고연주가 약간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수현. 이상해요.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아요.” 터벅…. 터벅…. “분명 나가거나 들어온 기척이 있어야 하는데…. 수현?” “고연주. 쉿.” “…아.” “…….” 고연주도 이제 들은 걸까. 나는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후 금방 들어온 굴을 돌아보았다. 누군가 힘없이 걸어오는 소리. 그 소리는 지금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우리가 들어온 굴 바로 오른쪽에서 들려오고 있다. 터벅터벅…. 터벅터벅…. 정상적인 걸음 소리는 아니다. 느릿느릿 힘없이 걷는 것 같으면서, 이따금 발을 질질 끄는 기척까지 들려온다. 그리고…. “…피 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코를 쓱 닦은 사샤가 코를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 작품 후기 ============================ 아. 오늘 종합 소득세를 해결하는데 정말 정신이 없더라고요. 아는 분 말씀으로는 그냥 영수증 출력하고 은행으로 가서 내는 게 깔끔하다고 해서, 점심 조금 넘어서 PC방에 갔습니다. 집 프린트기가 고장 났거든요. 그런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보안 키보드 충돌로 문제가 일어났는지 비밀번호가 계속 이상하게 쳐지더라고요. ㅜ.ㅠ 한 1시간 동안 씨름하다가 결국 집에 돌아왔어요. 그리고 전자 납부로 30분만에 해결했습니다. 지방세 납부가 복잡하다고 겁을 주셨는데, 하라는 대로 하니까 금방 해결했습니다. -_-a 오늘 초 중반 내용은 개인적으로 모 독자 분의 궁금증이 해결됐으면 좋겠습니다. 지도를 그려드리고는 싶은데, 제가 그림 재주는 없어서요. 한 번 그려는 보았는데 그냥 동그라미와 네모의 집합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창피해서 그림은 못 보여드리고, 그 외의 부분을 포함해 그냥 글로 최대한 설명을 드렸습니다. 0574 / 0933 ---------------------------------------------- 철혈(鐵血) 여왕의 분노, 김수현의 환희. …모든 길에서 어마어마한 적들이 출현해, 우리는 9개의 길에서 상당한 전력을 잃어야만 했다. 그렇게 간신히 두 번째 공동에서 모인 이후, 당시 총 사령관이었던 사용자 한소영은 모든 인원을 통합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어떤 말도 않고 두 번째로 나타난 5개의 길, 아니 함정의 길을 향한 진군을 시작했다. 문득 생각나건대, 그때의 클랜 로드(이하 한소영.)는 조금 이상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뭔가 화를 내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실 그 당시 한소영의 쾌속한 진군을 매우 걱정하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탁월한 방법이었다. 그때부터 뭔가 서로의 손발이 맞아가기 시작한 것 같으니까. 그래. 그때부터 원정대 내의 무언가가 변화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감히 평하건대, 그 변화는 우리가 강철 산맥 공략을 성공할 수 있었던 하나의 원동력, 혹은 밑거름이 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 신 대륙 아틀란타(Atlanta) 고대 도서관. '강철 산맥 공략 회고록.' 中 발췌. * 잠시 후, 어두운 통로 너머 일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면면이 살펴볼 것도 없이 구덩이 공략에 참가한 사용자들이었다. 하지만 우리와는 다르게, 보이는 모습이 과히 좋지 못하다. 입구를 드리운 탁한 불빛이 비추는 사용자들의 모습은 온 장비에 피를 덕지덕지 바른 상태였다. “…괜찮으세요?” 안솔의 목소리였다. 가장 앞에서 걸어오던 사내는 무사 로드 고오환이었다. “젠장, 보면 모르쇼? 습격 한 번 거하게 당했수다.” 고오환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입구 안으로 들어오고는 “끙.” 힘을 주어 가슴께에 박힌 화살을 뽑아내었다. 약간의 피가 튀는가 싶더니 화살을 뽑아낸 자리가 삽시간에 붉게 물들었다. 안솔이 금세 치료 주문을 외우려고 했지만, 또 한 번 머리를 저은 고오환은 뒤에 들어오는 사용자들을 가리켰다. 다른 사용자들 또한 고오환과 거의 비슷하거나 아니면 더욱 심한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9번째로 사용자를 마지막으로 더는 들어오는 이가 보이지 않는다. “두 명 당했소. 골짜기에서 족쳤던 놈들이랑 똑같이 봤다가 아주 제대로 당했지.” “수가 많았습니까?” “우리보다는 많았지요. 그래도 충분히, 피해 없이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우라질! 칼, 활, 마법, 심지어 치료까지! 도대체 어떻게 놈들이 사용자 설정을 사용할 수 있는 거지?!” “…우선 치료부터 받으시죠.” 일단 진정시켜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자 한창 분노를 터뜨리던 고오환이 돌연 우뚝 말을 멈췄고, 이내 나와 클랜원들을 쓱 훑어보았다. “…헌데, 그쪽은 습격을 받지 않은 거요? 상태가 꽤나 괜찮아 뵈는데.” “우리는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중앙 바닥을 가리켰다. 고오환의 두 눈이 멍하니 따라가는가 싶더니 “억.” 소리와 함께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도대체 이게 뭐냐고, 어떻게 된 일이냐는 혼비백산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더 이상 회답해줄 여유는 없었다. 어느새 우리가 들어온 입구 바로 왼쪽의 굴에서 새로운 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입구라면 한소영이 들어간 굴이었다. 나는 밀려오는 불안을 억누르면서 침착히 어둠 너머를 응시했다. 이윽고 정확히 11명의 인원이 두 번째 공동에 도착했다. 다행스럽게도 따로 습격을 받지는 않았는지 한소영 일행은 모두 정상적인 상태였다. “머셔너리 로드.” 한소영은 처음에는 차분히 걸어 들어왔으나, 심하게 다친 사용자나 허수아비 시체들을 보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한소영은 역시나 침착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무사 로드가 오다가 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무사 로드 조의 습격 소식은 오면서 들었어요. 그런데, 이 시체들은요?”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세워진 상태였습니다. 아마 습격을 완료한 후 우리보다 먼저 이 공동에 도착해 모종의 작업을 한 것 같습니다.” “모종의 작업?” “…이걸 보시죠.” 약간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핏물로 바닥에 적힌 글씨를 가리켰다. 고개를 내린 한소영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나는 조금 더 한소영의 반응을 지켜보다가 입구 쪽으로 도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여러 굴에서 무수한 기척이 동시다발적으로 잡혔다. 무사 로드의 조만 습격 받은 게 아니었다. 남은 6개의 조에서도 습격을 받은 조가 하나 있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른 5개 조가 무사히 들어왔다는 것과, 습격 받은 조의 피해가 상당히 미미하다는 것. “그냥 골짜기 전투 때와 똑같았습니다. 놈들의 수도 적었고, 제대로 부딪치기도 전에 도망치더군요. 이 정도면 딱히 보고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통신하지 않았습니다.”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긴 사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한 조는 아예 몰살을 당했고, 한 조는 2명이 죽고 여러 명이 다치는 커다란 피해를 입었으며, 한 조는 살짝 건드리기만 했다. 나머지 조는 모두 무사하다. 이것만 봐도 적의 의도는 명백히 알 수 있었다. 적의 수뇌부는 지금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상황을 이용해 심리전을 가미한 유격전을 벌이는 중이다. 말인즉, 자신들의 보금자리까지 최대한 야금야금 전력을 갉아먹으면서 동시에 원하는 판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새 다친 사용자들의 치료는 거의 완료된 상태였다. 생각을 마친 나는 다시 한소영을 바라보았다. 한소영은 여전히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했다. 길게 늘어진 머리가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한소영을 보고 있자니 조금이지만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 결과는 명백한 한소영의 실수였다. 물론 인원을 나눌 때는 한소영 나름대로 여러 방면을 고려하고 생각해 내린 결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적은 한소영의 의도를 꿰뚫고 역으로 이용하기까지 했다. 적이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것에 반해, 우리는 적은 물론 이 땅속 도시도 자세히 모른다. 정보의 부재가 가져온 패배였다. 물론 나는 한소영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입장이기는 했다. 아마 이번에도 선두에 나를 세웠으면 총 전력의 10%에 해당하는 13명을 잃는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터. 그러나 구덩이 내에서는 한소영이 지휘권을 잡았다. 그런 만큼 나는 조언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지만, 그 조언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면 입을 열어서는 안 되는 입장이기도 했다. 아무튼, 이유야 어찌됐건 한소영은 구덩이 내 첫 전투에서 패배했다. 좋게 말하면 어쩔 수 없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냉정히 말하면 적의 손에 놀아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갑작스럽게, 한소영이 주먹을 질끈 말아 쥐었다. “모두.” 담담하기 그지없는,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목소리. 그러나. 비로소 한소영이 서서히 고개를 들어올린 순간, 나는 그 생각을 수정해야만 했다. 도대체 무어라 말을 해야 할까?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하지만 두 눈은 아니었다. 흑 수정 같은 눈동자 속에는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북풍한설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폭풍이 건너편 5개의 입구, 정확히는 정 중앙을 응시한다. 그래. 한소영은 지금 분노하고, 화를 내고 있었다. “정렬하세요.” 한소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용자 한소영의 고유 능력 카리스마(Rank : A Plus)의 발동을 확인합니다.』 『전장의 지휘(Field Maestro)의 권능, 파괴 • 돌격을 발동합니다. 사용자 김수현의 속도 및 파괴력, 돌진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시원한 기운이 몸에 내려앉았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한소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용자들이 제자리를 찾아 하나의 진형을 만들고 있었다. 지금의 한소영은 마치 차갑게 불타는 얼음을 보는 듯했다. 한소영은 여전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부터 인원은 더 이상 나누지 않아요. 중앙의 굴을 통해 무조건, 최대한 빠르게 구덩이를 공략하겠습니다. 나머지에 대한 역할은 여러분들에게 맡기겠어요.” “…….”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소영은 바람처럼 앞으로 달려나갔다. 권능의 영향일까? 그 누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한소영의 몸이 입구 안으로 사라졌다. 가장 먼저 한소영을 따라 달려간 건, 이스탄텔 로우의 클랜원들 이었다. 나는 그 다음으로, 곧바로 땅을 박찼다. 그제야 등 뒤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부랴부랴 쫓아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입구로 들어가자 또다시 공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문득 몸이 한없이 가볍고 힘이 넘쳐흐르는 것을 느꼈다. 오죽하면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무언가,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한소영은 거침없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중이었다. 내 주변의 어둠도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여태껏 최대한 조심스럽게 행군해오던 것과는 달리, 갑작스럽게 진도가 쭉쭉 나가기 시작한다. “초, 총 사령관님! 잠시, 잠시만요!” 그때였다.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와 간신히 한소영을 따라잡았다. 그러나 한소영은 일말의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오히려 더욱 걸음에 박차를 가한다. “왜, 왜 이렇게 급하십니까? 일단 차분히 사정부터 알아본 후….” “필요 없어요.” 한소영은 간단히 회답했다. “습격에 대한 정보는 이미 들었어요.” “그, 그래도….” “그 이상의 정보를 알아본답시고 있어봤자 추측밖에 되지 않아요. 적에게 시간만 주는 꼴이에요.” “하, 하지만! 그러면 최소한 선두에서는 물러나주십시오! 어떤 함정이 있을지 모르고, 또 어떤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사내가 악을 쓰듯이 말했다. “그러면 그러세요.” 그러나 한소영은 또다시 말을 끊었다. “예, 예?” “함정이 보이면 해체하고, 위험을 감지하면 알려주세요. 나머지 역할은, 알아서 맡긴다고 하지 않았나요?” 사내는 달리는 와중에도 멍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 하지만 그걸 제 멋대로….” “왜 그게 제 멋대로인 일이죠? 그대가 궁수라면 당연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요?” “…어, 음. 그, 그렇죠.” “제 결론이 필요 없거나, 제가 결론을 낼 수 없는 보고는 필요 없어요.” 그제야 사내의 눈동자에 아차 한 빛이 스쳤다. “할까요, 말까요. 그걸 묻기 전에, 먼저 하고 나서 보고하세요.” 그 말이 들린 순간이었다. “함정을 발견했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클랜 로드.” 이제껏 쭉 내 옆에서 달리던 선유운이 한 마디 툭 내뱉었다. 그리고 갑자기 속력을 내어 앞으로 쭉쭉 달려가더니 한소영마저 지나쳐 더욱, 더더욱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다 한참이나 앞쪽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고는 무릎을 굽혀 지면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 때문에 저러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선유운의 두 손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현란하게 움직일 뿐. 이윽고 우리와의 거리가 30미터 가량 남은 찰나, 돌연 선유운이 무언가를 쭉 잡아당기며 물러났다. 그 순간, 선유운의 서 있던 흙 바닥이 쩍 벌어지며 커다란 구렁텅이가 생성되었다. 그리고 한소영은, 느닷없이 생성된 구렁텅이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그 구렁텅이가 무엇인지 보지도, 묻지도 않았다. 그저 뛰어넘고 계속해서 달릴 뿐.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무릎을 털고 일어난 선유운이 몸을 돌려 전방의 천장을 향해 팔을 들어올렸다. 핑, 화살이 발사되는 소리가 들렸다. 화살이 무언가를 건드린 걸까? 천장이 점점이 둥글게 벌어진다. 이내 그곳에서 성인의 다리만한 수십 개의 쇠창살들이 일제히 떨어져 내리 꽂히더니, 끝부분만 간신히 보일 정도로 바닥에 깊숙이 박혔다. 하지만 한소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바닥에 박힌 쇠창살을 지지대 삼아 그곳마저도 가볍게 뛰어넘었다. 한소영의 몸이 한 마리 새처럼 허공을 가르고, 칠흑 같은 머리칼은 바람결에 강렬하게 찰랑인다. 엄청난 진군 속도였다. 이건 강행을 좋아하는 나조차도 한 번도 내본 적이 없는, 말 그대로 쾌속의 행군이었다. 지금 이 속도만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놈들의 근거지에는 금방 다다를 수 있다. 나는 약간 멍하니 시선을 들어, 가장 앞에서 달려나가는 한소영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가히 신속(迅速)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한소영의 모습이, 무언가 굉장히 낯설면서도 한편으로는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속도만 높이면 금방 따라잡고 또 가볍게 지나칠 수도 있을 터인데, 왜 이렇게 자꾸만 쫓아간다는 기분이 드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일부러 이러는 걸까? 지금의 한소영은, 마치 1회 차에서 수천, 수만의 사용자들을 호령하고 이끌던, 최 전성기의 철혈의 여왕을 보는 듯한…. 그러다 문득, 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눈동자에 힘을 주며 전방을 응시했다. 그리고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며 기어이 한소영의 곁으로 다가갔다. ============================ 작품 후기 ============================ 개인적으로 오늘 적었을 때 들었던 BGM을 들려드리고 싶은데, 어디서도 찾지 못하겠네요. 공식적인 곡은 아니고 누가 자작해서 만든 곡 같은데(신나는 뉴 에이지 같은 BGM이에요.), 저장할 때 분류하기 편하게 이름을 변경해놔서요. 이걸 도대체 어디서 구한 건지 원…. 대충 들리는 느낌으로는 이래요. 빰빰.(뚜뚜딱. 뚜뚜딱. 뚜뚜딱. 뚜뚜딱.)(으아아아아앙~. 우주 소리?) 빰빰.(뚜뚜딱. 뚜뚜딱. 뚜뚜딱. 뚜뚜딱.)(으아아아아앙~. 우주 소리?) 빰빰.(뚜뚜딱. 뚜뚜딱. 뚜뚜딱. 뚜뚜딱.)(으아아아아앙~. 우주 소리?) 빰빰.(뚜뚜딱. 뚜뚜딱. 뚜뚜딱. 뚜뚜딱.)(으아아아아앙~. 우주 소리?) 빰빰 빰빰빰빰 빰빰빰빰빰빰, 빰빰 빰빰빰빰 빰빰빰빰빰빰. 치지직. 빠빠빠라라빠빠빠, 빠빠빠라라빠빠빠, 빠빠빠라라빠빠빠…. 대충 이렇게 들리는데 혹시 느낌 오시는 분 계신가요? ㅜ.ㅠ 0575 / 0933 ---------------------------------------------- 철혈(鐵血) 여왕의 분노, 김수현의 환희. “이스탄텔 로우 로드. 앞쪽에서 적의 기척들이 잡힙니다.” 김수현이 조용히 말했다. 한소영이 흘긋 시선을 흘기고는 계속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거리는 약 200미터. 자세한 수를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통로의 좌우를 꽉 채울 정도의 엄청난 비틀림이 느껴집니다.” 200미터. 길다면 긴 거리였으나 지금 이 신속에 가까운 행군이라면 금방이다. 한소영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런 한소영을 김수현은 마치 관찰하듯이 천천히 살펴본다. 이내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한소영의 눈에 강렬한 이채가 스쳤다. “사용자 유지태.” 고요하지만 마력이 충만이 들어간 목소리였다.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이 서린 호출에, 유지태는 곧바로 다가왔다. “앞쪽에 적이 무리 지어 있다고 하네요. 거리는 200미터 정도.” “예.” “선두로 나가주세요. 남부에서 명성이 자자한 유령마의 명성을 확인해보고 싶군요.” “후후. 이 정도 버프를 받았는데 실망하게 해 드릴 수는 없지요. 똑똑히 보여드리겠습니다.” 선두로 나가라는 말인즉, 방패 역할을 하라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지태는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추호의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가 무언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유령마의 소환 의식을 펼치는 걸까? “마법의 사용은 보조로 제한합니다. 유지태는 화살 지원이 들어가면 곧바로 치고 들어가 선진(先陣)을 무너뜨리세요.” 그것은 비단 유지태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같이 달리는 모든 사용자들이 한소영의 말을 들었고, 각자 나름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120미터를 추가로 진군했을 즈음. 선두 사용자들의 육안에도 서서히 괴물들의 실체가 잡히기 시작했다. 확실히 김수현의 말대로였다. 현재 구덩이 공략 조의 인원은 91명. 그러나 보이는 괴물들의 수는 그보다 2배는 넘어 보였다. 더 이상의 진군은 허락할 수 없다는 듯이 통로에 빽빽이 들어차 사용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괴물들의 정보는 모른다. 아니, 알고 있다고 해도 굉장히 단편적이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변수가 있다면 지금 들어가는 사용자들이 남부 원정대의 최정예라는 것. 그리고 아까처럼 9개로 분산된 게 아닌, 모두가 하나로 응집돼있다는 것. 한소영은 그 힘을 믿고 있었다. - 히히히힝! 그 순간, 어디선가 말이 우렁차게 울어 젖히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소환 의식을 마쳤는지 유지태가 유령마를 소환한 것이다. 이윽고 죽음의 기사 평생의 반려라고 불리는 유령마가 그 웅장한 위용을 드러내었다. 기본적인 모습은 용맹한 군마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두 눈에서는 강렬한 안광을 내뿜고, 전신은 반투명하면서도 시퍼런 불길에 휩싸였다. “하!” 유지태가 힘껏 땅을 박차 멋들어지게 유령마에 올라탔다. 그와 동시에 궁수들이 활을 장전하는 소리가 일제히 이어졌다. 어느덧 남은 거리는 40미터로 좁혀졌다. 인간의 모습을 한 소수의 괴물들과, 인간의 모습을 하지 않은 잔뜩 웅크린 괴물 다수가 사용자들을 인지한다. - 키에에에에에에에! “발사!” 이내 기괴한 괴성이 들려온 찰나, 한소영의 매서운 외침이 사용자들의 귓전을 울렸다. 마법사들이 보조 주문을 외우고 사제들은 방어 주문을 외웠다. 거의 동시에 궁수들 또한 각자의 표적을 향해 시위를 놓았다. 그리고 그 순간, 유지태가 내지른 한 차례 기합과 함께 유령마가 펄쩍 뛰어올랐다. 피피핑, 피피피핑! 괴물과 사용자. 서로의 진영에서 무수한 화살들이 교차한다. 괴물들도 적은 수는 아니었지만, 날아가는 화살의 개수나 보조 마법 등의 영창은 사용자 진영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괴물들은 모자란 수를 유일한 원거리 공격인 촉수 공격으로 메웠다. 터텅, 텅텅텅텅! 그마저도 소용없었다. 유지태를 노리고 들어간 소수의 화살이나 대량의 촉수는, 겹겹이 둘러친 보호막에 모조리 막히거나 떨어졌다.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나 유령마를 노리는 공격들도 어떠한 타격도 주지 못했다. 그저 들어간 그대로 몸통을 뚫고 지나가 하릴없이 허공만 스칠 뿐. 그에 반해, 궁수들이 날린 화살은 괴물들의 머리 위로 고스란히 쏟아졌다. 그리고 화살들의 뒤를 바로 이어, 유지태를 태운 유령마가 미끄러지듯이 짓쳐 들어간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이 선진의 괴물들에 부딪친다. 콰앙! 저릿한 폭음이 통로에 퍼졌다. 유령마는 선진을 단숨에 흐트러트리며 이미 무너진 괴물들을 향해 말발굽을 크게 들어올렸다. 거센 콧김을 내뿜으며 깡그리 부숴버리겠다는 듯 무차별적으로 짓밟는다. 온몸에 피어오르는 시퍼런 불길이 한순간 명멸(明滅)하더니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폭발했다. 미친 듯이 용틀임 치는 유령마가 다시 한 번 거대하게 울부짖었다. - 키히히히히히히힝! 그 폭발은, 그 울림은 이제껏 조용하게, 숨죽이며 달려오던 사용자들의 억눌린 마음을 일깨워주었다. 번뜩 고개를 치켜든 사용자들이 하나같이 거친 숨결을 내뿜었다. 때가 되었다고 여긴 걸까. 한소영의 오른팔이 반으로 접히는가 싶더니 이미 붕괴한 선진을 정확히 겨냥한다. 명백한 공격 명령. 그러자 지금껏 마음속으로 칼을 갈던 근접 계열 사용자들이, 거대한 함성을 내지르며 한꺼번에 뛰어나와 어지러워지는 괴물들과 맞부딪쳤다. 가장 먼저 허준영, 김수현, 연혜림이 각각 3갈래로 갈라져 좌, 중앙, 우 방향으로 번개처럼 짓쳐 들어갔다. 막아서는 괴물들의 몸을 기세 좋게 꿰뚫고 베어 넘기며 더욱 커다란 공간을 창출한다. 그리고 유지태와 세 명이 만들어준 그 틈으로, 사용자들이 마치 해일과도 같은 기세로 들이닥쳤다. “빠샤!” 무에 그리 신이 나는 걸까? 한껏 상기된 얼굴과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는 사내. 고오환이 가로막는 괴물을 향해 있는 힘껏 이마를 부닥치고는 춤추듯 대검을 휘둘렀다. 고오환뿐만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칼이 휘둘러지고 창이 쇄도하듯이 날아다닌다. 그럴 때마다 구슬픈 비명과 함께 괴물들이 고꾸라졌고, 비산한 핏물들이 바닥의 흙을 붉게 물들였다. 전장 지휘자의 권능, 『파괴 • 돌격』의 위력 때문일까? 보이는 그대로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보이는 돌진력이었다. 괴물들의 진형은 덮쳐오는 해일에 속절없이 휩쓸려 깡그리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마치 텅 빈 통로를 그냥 있는 그대로 통과하는 것처럼, 사용자들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괴물들을 뚫고 지나갔다. 대승. 말 그대로 대승이었다. 사용자들은 단 한 번의 격돌로, 단 한 명의 피해도 없이 200에 가까운 괴물을 전멸시켰다. 그러나 한소영은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더는 볼 것도 없다는 것처럼, 시체도 살피지 않는다. '무조건, 최대한 빠르게 구덩이를 공략하겠습니다.' 그저 이 말을 지키려는 듯, 무너지면 무너진 그대로 또다시 앞으로 달려나간다. 잠시 멈춰 섰던 사용자들은 반사적으로 앞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바람처럼 내달리는 한소영을 확인한 순간, 모두가 홀린 듯한 기분으로 걸음을 움직였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전장에 나선 병사들이 여왕을 따르는 게 당연한 일인 것처럼, 사용자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한소영을 따르고 있었다. 김수현 역시 그랬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한소영에게 시선이 집중된다. 김수현은, 그제야 아까 느꼈던 미묘한 기분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실 지금껏 한소영의 지휘력은 그다지 좋은 편은 못되었다. 어디까지나 김수현의 시선에서. 그럴 수밖에 없다. 김수현이 기억하는 1회 차에 절정의 한소영과, 이제 갓 대규모 병력의 지휘권을 잡은 한소영은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김수현이 더욱 한소영을 보호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은 한소영도 알고 있었다. '이번에 강철 산맥을 공략하면서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만일 머셔너리 로드가 남부 원정대에 없었다면 어땠을까….' '제가 어떻게든 해결했어야 하는 일이었어요. 그래야 했는데, 총 사령관이라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하고 구경만 했죠.' '…그런데, 머셔너리 로드는 아주 간단하게 해결해주셨어요.' '요즘 제 능력이 한참이나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고나 할까요?' 그때 김수현에게 했던 말은 한소영의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랬던 한소영이, 갑작스럽게 터졌다. 단순히 도발 문구 때문에 터진 게 아니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무력감이, 총 사령관의 입장에서 꾹꾹 억눌러왔던 감정의 둑이, 일거에 터져 나온 것이다. 거기서 한소영이 선택한 방법은 바로 회귀(回歸)였다. 대규모 병력 운용에 관한 모든 전술을 버렸다. 새로 등장한 적이나 전략에 관한 생각도 멈췄다. 그저 자기 자신만의, 아니 스스로가 가장 자신 있는 방법으로 병력을 이끌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한소영은 호칭만이 아닌 진정한 철혈 여왕으로의 각성을 이루어내기 시작했다. 한소영은 여전히 바람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김수현은 그런 한소영을 차분히 응시했다. 아까 느꼈던 낯설면서도 익숙한 기분이 이제 뭔지 알 것 같다. 김수현이 기억하는 철혈(鐵血)의 여왕이 돌아왔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갑작스럽게 뜻 모를 기쁨을 느꼈다. 절로 들썩거리려는 어깨를 간신히 진정시키며 김수현은 입을 질끈 깨물었다. 머릿속부터 일어난 상쾌한 기분이 하나의 환희로 변하여 전신을 물들인다. 잠시 후, 구덩이 내로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김수현이 골짜기에서 첫 번째 돌풍을 일으켰다면, 지금 이 바람은 한소영이 일으킨 두 번째 돌풍이었다. 그렇게 한소영을 선두로 한 사용자들은 돌풍처럼 통로를 통과했다. * 한소영을 필두로 한 구덩이 공략 조는 엄청난 속도로 보이는 모든 통로를 통과했다. 걸리는 모든 것들은 배제한다. 5개의 길이 나 있던 함정의 방은 이미 진작에 지나쳤다. 이후 계속 달리면서 두 개의 공동을 추가로 발견했지만, 한소영은 전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사용자들을 독려하며 더욱 행군 속도를 높였다. 이러한 쾌속의 행군을 가능케 한 것은 한소영의 권능도 있지만, 사용자들이 자신의 역할을 다시 되새겼다는 점도 한 몫 했다. 할까요, 말까요 묻지 말고, 우선 하고 보고하라. 결론을 낼 수 없는 보고는 필요 없다. 그 말인즉, 알아서 하라는 소리였다. 이심전심이라는 말이 있다. 모두가 거의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할 일을, 아니 해야 할 일을 알아서 하고 있다. 지금껏 살짝살짝 어긋나던 톱니바퀴들이, 세 번째 통로를 통과한 이후 갑자기 딱딱 맞춰 돌아가기 시작하고 있다. 거기서, 안현은 생각했다. 지금 여기 있는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안현은 달리는 와중에도 주변을 쉴 새 없이 둘러보았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신세계였다. 한 팀에서만 활약하다가 느닷없이 올 스타 전에 서 있는 듯한 기분. 그러한 상황에서 안현은 홀로 미묘한 어색함과 소외감을 느꼈다. “현아.” 그렇게 생각한 순간, 별안간 어깨를 짚는 감촉과 동시에 자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린 안현은 인자하게 웃으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신재룡을 볼 수 있었다. “재, 재룡 형님.” “괜찮아. 너무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 “내가 들어오기 전에 했던 말을 기억나지?” 안현은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곧 가만히 머리를 끄덕이고는 한결 차분해진 기색으로 얼굴을 들었다. 그런 안현을 보는 신재룡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과연 신재룡은 안현에게 무슨 말을 한 걸까? 어느덧, 앞쪽에서 탁한 불빛이 비치며 새로운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한편, 같은 시각. “으으…. 으으으…!” 주현호는 토굴을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며 이상한 신음을 내고 있었다. 이따금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머리를 미친 듯이 긁기도 했다. 흡사 미친놈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그도 그런 게, 주현호의 입장에서 갑작스럽게 모든 계획이 틀어졌기 때문이다. 현재 괴물들의 상황은 굉장히 좋지 못했다. 골짜기와 언덕에서의 전투는 절대 의미 없는 전투가 아니었다. 괴물들은 그 전투에서 가용 가능한 태반의 병력을 잃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사용자들이 구덩이로 들어온 이후. 처음에는 좋았다. 두 번째 통로인 9개의 길에서만 해도 생각대로 되는 것만 같았다. 5번째 통로를 지나쳐 여기에 이르기까지, 최대한 사용자들의 수를 줄이고 파더의 힘을 빌어 제대로 한 판을 벌인다는 작전.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상황이 급격히 반전되었다. 사용자들의 병력을 갉아먹기는커녕 반대로 자신들이 병력이 뭉텅이로 깎여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마련해놓은 모든 장치를 해체하고 무시하며 오직 직선으로만 달려오고 있다. “젠장!” 주현호가 소리를 질렀다. 이제 남은 괴물이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4백, 아니 3백은 될까? 그나마 믿을 거라고는 굴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둔 높은 진화를 이루어낸 놈들이지만, 그들의 수는 절대적으로 적다. 뒷받침해줄 수 있는 병력이 없는 이상, 주현호와 진화된 괴물로는 너무나 부족하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하, 하다못해 형식이라도 태어난다면…!” 그때였다. “응?”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돌아다니던 주현호가 문득 머리를 들었다. 토굴의 입구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돌연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주현호의 코끝을 스쳤다. 그리고. 두두두두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귓전을 미약하게 울렸다. 이윽고 허둥거리면서도 황급히 벽면에 손을 댄 순간, 주현호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마, 말도 안 돼! 벌써 5번째 통로를 통과했다고?!”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많이 늦었죠? 오후에 투표하고 오는 길에 가족들과 외식을 했는데, 너무 많이 먹었나 봐요. 집에 오자마자 졸고 말았습니다. '-'a 독자 분들 모두 투표는 하셨나요? 하하. 그나저나 슬슬 새로운 일러스트를 염두에 두어야겠군요. 예전에도 그랬듯이 새로운 일러스트 또한 투표로 선출할 생각입니다. 지금은 아니에요. 원래는 캐릭터 투표가 3천 표가 넘으면 하려고 했는데, 2천 표로 줄은 상태이거든요. 지금 1931명의 독자 분이 투표해주셨으니 이제 곧 2천 표를 돌파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번 투표에서 한소영은 제외할 생각입니다. 지금 홀로 45%의 득표율을 보이며 강세를 보이고 있는데, 재투표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서 한소영은 무조건 일러스트를 제작하는 것으로 하고, 나머지 캐릭터들 중 가장 높은 득표율을 보인 4명을 따로 뽑아 여러분들께 의견을 구할 예정입니다. 즉, 이번에는 2장의 일러스트가 새로 나오겠지요. :) 0576 / 0933 ---------------------------------------------- Predator. …그렇게 모든 퇴로를 차단당한 우리는, 꼼짝없이 포위된 채 전투를 치러야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건대 구덩이 공략은 정말로, 진심으로 끔찍한 기억이다. 많은 것을 얻었지만 그만큼 많은 것을 잃어야만 했으니까. 구덩이는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확실히 강한 괴물들이 나왔다. 일전에 그냥 괴물의 모습을 한 놈들은 그저 과자에 불과했다. 진짜는 구덩이 안,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놈들이었다. 바로 인간의 모습을 한 괴물들. 모든 공략이 끝난 후, 사용자들이 예상하기로 그때 그 괴물들의 전투력은 아마 사용자들을 섭취한 수에 상관 관계가 있지 않을까…. 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필자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우선, 한 명의 사용자를 제물로 진화를 한다. 그리고 다음에 섭취하는 사용자들부터는 그 사용자가 생전에 지닌 경험이나 기억 등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심지어 사용자 정보마저도. 아무리 가설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등이 섬찟할 정도로 소름 돋는 일이다. 그러면 개중에 10명, 20명을 넘게 섭취한 놈들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확실히 그런 놈이 있었다. 다른 인간화된 괴물들보다 수 배, 아니 수십 배나 강한 전투력을 보이는, 말 그대로 괴물 같은 놈이.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본래 괴물로서의 힘. 그리고 인간을 섭취함으로써 받아들인 힘. 그놈은 그것 말고도 분명히 무언가 다른 게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 신 대륙 아틀란타(Atlanta) 고대 도서관. '강철 산맥 공략 회고록.' 中 발췌. * 주현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어둠 너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코끝을 스친 바람은 더욱 강렬하게 불어 닥치고 있었고, 지축을 울리는 소리 또한 점차 선명히 들려오는 중이었다. 이리 생각해보고 저리 생각해봐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씨발!” 정말 말도 안 되는 쾌속의 진군이었다. 그러나 당하는 입장에서는, 아니 목숨이 걸려있는 입장에서는 절로 욕설이 나올만한 상황이기도 했다. 조금만 머리가 돌아가는 자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저 공략 조가 왜 이렇게 죽자 사자 직선으로 짓쳐 들어오는지를. 벌써부터 따끔따끔한 살기를 느꼈는지, 주현호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젠장, 안 돼. 당황하면 안 돼! 아직…!” 스스로 당황하면 안 된다 말을 하면서도, 이미 주현호의 얼굴에는 당혹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결국 주현호가 선택할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내 한쪽 방향으로 급하게 달려간 주현호의 몸이 금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주현호가 서 있던 자리의 건너편으로 90여명의 사용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현호가 상황을 인지하고 모종의 행동을 하는 동안, 구덩이 공략 조가 막다른 곳에 도착한 것이다. 앞쪽에 막혀있는 벽면을 봤는지 계속해서 질주하던 한소영이 마침내 걸음을 멈추었다. 끊임 없이 움직이던 사용자들의 다리도 자동적으로 정지했다. 상당한 거리를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사용자들은 호흡만 살짝 거칠어졌을 뿐 딱히 힘들어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낌새를 눈치 챈 것일까? 막다른 벽면에서 좌우를 둘러보던 고연주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조금 전까지 사람이 있었네요. 보아하니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어느새 흙 바닥으로 내려간 눈초리가 주르륵 오른쪽으로 미끄러졌다. “아무래도…. 오른쪽으로 달려간 것 같은데.” 고연주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매듭지었다. 그저 그런 사용자가 아닌, 암부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그림자 여왕의 말이었다. 이내 한소영의 고개가 살며시 돌아가는 것과 동시에, 잠시 멈췄던 공략 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막다른 곳이라고 해서 다른 통로가 없는 건 아니다. 어느새 공략 조를 스치는 풍경은 처음 들어왔을 때와 비해 상당히 달라진 상태였다. 애당초 이 땅속 도시는 개미굴과 무척 흡사한 구조를 지닌 도시다. 예를 들면 알 방이나 노예 방 혹은 여왕 개미 방과 같이, 애벌레 괴물의 방이나 사용자들을 감금하는 방 혹은 왕의 방 등이 존재한다. 다만 보통의 개미굴과 이 구덩이 간의 명확한 차이점이 하나 있다면, 바로 굴과 도시의 차이라는 것이다. “……!” 하염없이 달리는 와중 안현은 이상한 감촉을 느꼈다. 어느 순간부터 발바닥에 부드러운 흙의 감촉이 아닌 딱딱한 쇠의 감촉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래로 흘긋 시선을 떨어트린 순간 안현은 약간이지만 기함하고 말았다. “이건…. 철도잖아?” 그랬다. 지면에는 쭉 이어지는 고정된 침목에 설치된 기다란 철의 궤도가 있었다. 통로를 타고 사방팔방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철도. 흡사 어디 광산에서나 볼 법한 광산 철도였다. “흠. 정말 철도구나.” 안현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다가온 신재룡이 조용히 회답했다. “설치 자체도 엉성하고 녹이 많이 슬었지만, 확실히 철도야.” “이, 이게 가능한 일인가요?” 그리고 한 번 더 힘주어 말하자 안현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신재룡은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가능할지도. 아까도 이와 같은 것들이 종종 보였거든. 혹시 통로를 지나칠 때 기억하니?” “통로를 지나칠 때라면…. 함정이요?” “그렇지. 그런 함정도 있는데 철도가 없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이 구덩이가 괴물들의 서식지임을 고려해보면, 철도는 아마 인간화된 괴물들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구나.” “인간화된…. 괴물들의 편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안현이 머리를 갸웃했다. “그래.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지만, 내 예상이 맞는다면 이 철도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만들었을 거다.” “사람들이 왜 이런걸 만들어요?” “여러 경우의 수가 있지. 노예로 잡혀와서 어쩔 수 없이 만들었거나. 아니면 이러한 지혜를 기반으로 생존을 구걸했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 신재룡은 잠깐 생각에 잠기는 듯싶었으나 곧 입을 열었다. “괴물들이 사람들을 잡아먹은 후, 우리의 지식을 흡수해 만든 것일 수도 있고.” 안현의 얼굴이 딱딱히 경직됐다. 그리고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고는 뜻 모를 한숨을 흘렸다. “…여기는 도대체.” “클랜 로드의 말씀 그대로야. 아마 단순한 구덩이가 아니라, 일종의 도시를 이루었을 가능성이 높다. 괴물의 지배하는 땅속 도시 말이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신재룡은 안현의 등을 살짝 두드렸다. 그 뜻을 모를 안현이 아니었다. 궁금한 점이 우후죽순처럼 돋아나고는 있었지만 가까스로 접어두었다. 일단은 공략이 우선이었으니까. 궁금한 것들은 그 후에 해결할 수 있다. 실제로 철도를 발견한 사용자들 또한 하나같이 의아한 빛을 띠고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모두가 입도 벙긋 않으며 앞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한 번쯤 빛나는 시절이 온단다.' 안현은 출발 전 신재룡과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애용하는 흑색 창을 꼭 쥐고서는 한껏 긴장한 눈초리로 전방을 노려보았다. * 공략 조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후,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통로는 상당히 길고 중간중간 갈라지는 길도 많았지만, 사용자들은 주현호가 남긴 흔적을 따라 무조건 직진했다. 그렇게 통로를 달리기를 한참, 비로소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이 끝나고 새로운 입구가 공략 조 앞에 출현했다. 입구 안으로 보이는 공간은 언뜻 보기에도 굉장히 넓어 보였다. 천장까지의 높이도 10미터는 넘어 보이고, 지름도 처음 공동보다 넓으면 넓었지 절대 좁지 않다. 무엇보다 바닥이나 벽이 흙으로 된 게 아니라 돌을 반듯하게 깎아 덧댄, 그런 공간이었다. 마침 끝없이 이어지던 철도도 입구 앞에서 끝나는걸 보면, 아마 주요한 방이 모두 연결되거나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광장(廣場) 같은 공간이 아닐까 싶다. 사용자들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지금껏 여러 공동을 지나쳐왔지만 이처럼 커다란 공간은 또 처음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감이 좋은 사용자들은 알아차리고 있었다. 공간 안에서 흘러나오는 무시할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을. 오직 강자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기운. 아까 200마리 괴물에 대승을 거둔 이후로 한동안 나오지 않다가, 새로운 괴물이 출현한 것이다. 그것도 지금껏 겪어온 괴물과는 차원이 다른 괴물이. 이윽고 공략 조가 달려오는걸 봤는지, 광장 내 제단 비슷한 것에서 한 사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에 시커먼 문신이 그려져 있고 두 눈을 야수처럼 번뜩이는 괴이한 사내는, 다름 아닌 주현호였다. 잠시 후, 한소영을 선두로 한 사용자들이 우르르 광장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어서들 오시게.” 한껏 여유로운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러나 한소영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눈앞의 사내를 신경 쓰면서도, 재빠르게 공간 내부를 훑었다. 주목할만한 것은 공간을 둥글게 둘러싸는 육중한 철문. 철문은 꼭 닫혀있는 상태였다. 어림짐작으로도 6개는 되어 보인다. 하지만 그 외에는 딱히 특이한 게 없다.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지만…. 아무튼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들 하셨소. 사용자 나리들?” 있는 거라고는 오직 한 사내, 아니 사내의 모습을 한 괴인. 목소리도 그렇고 제단에서 내려와 정중히 인사를 건네는 게 정말로 여유만만한 모습이다. 그러나 한소영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빙글빙글 웃으면서도 살짝살짝 흔들리는 눈동자와, 꼴깍 움직이는 목울대. 그리고 무엇보다 초감각이 현재 괴인의 심리를 전해주고 있다. 초조. 불안. 시간을 끌려고 한다. 생각을 정리한 한소영이 지체 않고 공격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핑! 한 발의 화살이 괴인을 향해 쏘아졌다. 그 화살은 여지없이 괴인의 목을…. 탁! “이런.” 아니. 화살은 주현호의 목을 꿰뚫지 못했다. 분명히 주현호의 목에 정확히 닿았으나 살을 뚫지 못하고 그대로 튕겨져 나간 것이다. 얼굴을 크게 찌푸린 선유운을 보며 빙긋 웃은 주현호는 차분히 몸을 굽혀 화살을 주웠다. “아이고. 뭐가 그렇게들 급하십니까. 자자. 일단 진정들 하시고, 우리 평화롭게 이야기부터 나눠봅시다. 거 참, 같은 사람끼리 박정하기는.” “같은 사람?” 한소영이 반문했다. “너는 누구지? 이 구덩이의 주인인가?” “주인? 글쎄요. 이스탄텔 로우 로드. 히히히!” 한소영의 아미가 꿈틀거렸다. 주현호의 입가가 비틀리듯이 올라간다. 그리고 주운 화살을 까닥까닥 흔들며 입을 열었다. 살랑, 돌연히 어디선가 미약한 바람이 불었다. “우선 그 무서운 살기부터 거두시죠. 어차피 이런 공격들을 해봤자, 저한테는 생채기도 낼 수 없으니까…. 크아아악!” 그때였다. 푸확! 얄밉게도 말하던 와중, 문득 주현호의 오른쪽 팔이 기다란 자상이 생겼다. 베어진 부분에서 피가 왈칵 터져 나왔다. 일반적인 붉은 색깔이 아닌, 먹물을 보는 듯한 시꺼먼 색깔이었다. 생각보다 깊게 베여서 그런 걸까, 아니면 뜻밖의 일격이라서 그런 걸까. 한순간 끔찍한 비명과 동시에 주현호의 몸이 크게 젖혀졌으나 가까스로 추스를 수 있었다. 이내 간신히 몸을 가다듬은 주현호가 성난 얼굴로 사용자들을 응시했다. 한소영의 옆, 유독 한 청년이 눈에 밟혔다. 칼자루를 잡고 돌리는, 그러나 정작 칼날은 보이지 않는 이상한 칼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청년. 그 청년이 주현호와 마찬가지로 씩 웃으며 새하얀 이를 드러내 보였다. 청년과 주현호의 눈이 마주쳤다. “낼 수 있는데?” “이…?!” 청년이 이죽거렸다. 반사적으로 발끈하려는 찰나, 주현호는 별안간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정확히는 사내의 두 눈을 마주보았을 때부터.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 매서운 눈초리가 주현호의 전신을 훑는다. 포식자(捕食者). 그 살기 어린 눈초리와 마주한 순간, 주현호는 가슴 한 켠이 싸늘해짐을 느껴야만 했다. ============================ 작품 후기 ============================ 『문제.』 6월 6일, 메모라이즈의 576회 촬영이 끝났습니다. 주현호는 드디어 자신이 제대로 등장한다는 말에, 한껏 좋은 기분으로 대본을 받아 들었습니다.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6월 7일, 그러니까 577회의 대본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주현호는 포장마차에서 우울한 얼굴로 술을 마시며 주정을 부렸습니다. 여기서 주현호의 기분이 왜 우울해졌는지 20자 내외로 이유를 말하시오.(자유 해답 형.) Hint. 1. 주현호가 술을 마시던 테이블에는 577회 대본과, 김수현(화정) 너프회 가입 신청서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0577 / 0933 ---------------------------------------------- Predator. 고통의 강도는 삽시간에 크기를 키웠다. 처음에는 아릿하게 아프던 것이 갑작스럽게 쇄골이 끊어질 듯한 고통으로 변해 온몸을 엄습했다. 당장에라도 비명을 내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주현호는 주춤 서너 걸음을 물러났다. 사실상 자상(刺傷)의 고통보다는 지금 자신을 노려보는 청년의 눈초리가 더욱 커다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주현호는 느꼈다. 아니, 느낄 수 있었다. 생존에 대한 남다른 갈망이 본능적으로 직감하게 만들었다. 저놈에게 맞서는 순간 나는 죽는다! 무조건 죽는다! “히, 히이이익!” 결국 참지 못한 주현호는 허둥지둥 거리면서도 재빠르게 벽 쪽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다급해 보이는 손놀림으로 몇 번 벽면을 더듬은 순간이었다. 그르르르르르르릉! 그르르르르르르릉! 사방에서 돌이 끌리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아니, 실제로 돌이 마찰되는 소리였다. 주현호가 모종의 조작을 했는지 광장의 사방을 감싸던 육중한 문들이 일제히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내 커다란 문들이 모두 올라가 어두운 공간이 보일 무렵, 입구 너머로 수십 개의 번쩍이는 안광들이 모조리 사용자들을 응시했다. 그리고. “모두 나와! 어서, 빨리!” 주현호가 발악적으로 외친 순간 사방의 열린 문에서 일련의 무리가 걸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괴물들의 모습은 가지각색이었다. 사용자들이 그동안 숱하게 보아온 괴물의 모습도 있었지만 수상한 기운을 흘리는 인간화된 괴물의 모습도 간간이 섞여 있다. 지금껏 구덩이 깊은 곳에 꽁꽁 숨어있던, 아끼고 아껴온 괴물들조차 모조리 끌어낸 것이다. 괴물들의 수는 못해도 3백은 넘어 보였다. 딱 한 방향, 사용자들이 들어온 입구를 제외하고는 모든 방향을 점거했다. 퇴로는 있으나 어떻게 보면 거의 포위된 형국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한소영도 퇴각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 이것 봐라? 허겁지겁 물러나는 주현호를 보며 나는 조금이지만 머리를 갸웃하고 말았다. 무검을 돌리는걸 멈추었다. 이죽거리기는 했지만 팔 하나는 확실히 가져갈 생각이었다. 그래서 어깨 부분을 정확히 노려 검기를 날렸는데, 그냥 베이는 선에서 그쳤다. - 조심해. 그때였다. 이제껏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화정이 조용히 말을 걸었다. '조심하라니?' 나는 곧바로 반문했다. - 저놈을 보고 있으면 뭔가 기분이 좋지 않아. 그러니까 방심하지마. '그럼 저놈이 나보다 강하다는 말인가?' - 그게 아니라. 너보다 강하고 안 강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저 쓰레기 같은 자식 자체가 문제라고. 홀로 존재하는 게 아닌 무언가 거대한 것과 연결돼있는…. 아무튼 기분이 그래. '호.' 화정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그래도 범상치 않은 놈일 가능성이 높다. 나는 지체 않고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 거주민 정보(Native Status) > 1. 이름(Name) : 주현호 2. 클래스(Class) : 일반 마법사(Normal, Mage,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새로 태어난 돌연변이 • 강렬한 생존의 열망 • 홀 플레인 6. 성별(Sex) : 남성(3) 7. 신장 • 체중 : 172.4cm • 67.5kg 8. 성향 : 악 • 안전(Evil • Safety) [근력 87(+44)] [내구 98(+44)] [민첩 91(+44)] [체력 88(+44)] [마력 93] [행운 -100] * 처음에는 사용자(Player)였지만, 이제 더 이상 사용자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똑같은 사용자 고은솔을 모체로 새로 태어났지만, 임신 및 산란 과정에서 어둠의 기운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실상 이제는 인간으로도 볼 수 없는 새로운 종으로, 돌연변이로 정의합니다. * 인간이었을 적 자아는 살아있으나 어둠이 몸의 통제권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대가로 주현호는 신체 능력의 비약적인 상승을 이루었습니다. 내구 능력치가 98포인트. 그제야 아까 어깨가 완벽히 베이지 않은 것이 이해가 갔다. 그와 동시에 조금이지만 감탄하고 말았다. 마법사가 이런 어마어마한 능력치를 갖고 있다니. 마치 형을 보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1회 차에서 구덩이를 공략할 때 사용자를 엄청 죽인 놈이 한 놈 있다고 하던데…. “전투 준비.” 그때 한소영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사용자들이 사방을 경계하는 형태로 방진을 형성하는 것을 보며 나는 무검을 고쳐 잡았다. 새로 등장한 인간화된 괴물들 중에서도 괜찮은 기운을 흘리는 놈들이 있지만, 우리도 강한 사용자들이 있다. 놈들의 처리는 그 사용자들에게 맡기면 된다. 나는 저 돌연변이를 맡는다. “모, 모두 공격해!” 이윽고 주현호가 외친 순간, 괴물들이 우르르 달려드는 것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잠시 후, 사방에서 산만한 소리들이 들려왔지만 나는 오롯이 한 놈에 시선을 집중했다. 주현호는 괴물들을 앞세운 채 멀찍이 떨어지더니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래도 꼴에는 마법사라 이건가. 그래도 화정의 경고가 있었으니 나는 조심스럽게 주현호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놈을 막아라! 어떻게든 막아!” 그러나 살기를 느꼈는지 돌연 주현호가 나를 가리키며 꽥꽥 소리를 질렀다. 원래는 기습으로 승부를 볼 생각이었는데 저놈이 저렇게나 나를 경계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는 한 번 혀를 찬 후 곧바로 땅을 박찼다. 빠른 기습으로 단번에 승부를 볼 생각. 그러나 미처 주현호에게 닿기도 전, 앞쪽으로 무수한 괴물들이 나타나 길을 가로막았다. “막아! 아니, 버텨! 무조건 버텨!” 주현호의 명령과 동시에 괴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해 들어온다. 무검을 가로로 크게 휘두르자 마침 한꺼번에 들어오던 네 놈이 일거에 목이 잘려나갔다. 하지만 놈들은 방패에 불과했다. 베어낸 놈들의 몸이 허물어지고 후방의 공간이 드러난 순간, 좌우 방향으로 열 가닥의 촉수가 내 온몸을 꽁꽁 묶었다. 그와 동시에, 왼쪽 시야가 커다란 불덩어리로 메워졌다. 쾅! 『염화(炎火) 계열의 마법을 확인합니다. 하늘의 영광, 태양의 영광이 대응하여 발동합니다. 일부 방어로 판정합니다!』 『일부 방어 판정을 받았습니다. 전장의 가호(Rank : EX)가 추가로 발동합니다. 완전 방어로 판정이 상향됩니다!』 살짝 머리를 털자 눈앞으로 사그라진 불씨가 흩날린다. 그리고 나를 향해 손을 뻗은 채 멍한 얼굴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주현호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또다시 돌격해 들어오는 괴물들로 인해 주현호의 모습은 금세 가려졌다. 나는 힘주어 몸을 비틀어 촉수들을 끊어낸 후 일단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길을 뚫는 게 아닌, 전력을 다해 방어하기 시작했다. 촉수와 이빨 공격이 주를 이루고, 그 사이로 인간화된 괴물들의 공격이 연달아 짓쳐 들어온다. 정신이 산만해질 정도의 공격들을 받아내고 쳐내며, 나는 입을 질끈 깨물었다. 무척, 거슬린다. 힘든 게 아니었다. 높은 진화를 이룬 놈들이니 어쩌니 해도 크게 관심은 없다. 어차피 적이나 다름없는 놈들이고, 내 상대가 되지 못하는걸 알고 있으니까. 그냥 보이는 족족 죽이면 그만이다. 문제는 이놈들이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하고 마구잡이로 나를 노리고 있다는 것. 사실, 마음만 먹으면 이놈들을 한 번에 뚫고 주현호에게 다가갈 수는 있다. 높이 점프를 하거나 아니면 이형환위를 연속으로 사용하면 되는 일. 그러나 지금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잖은가. 우리는 포위된 형국이었고 하나의 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거기다 주현호가 나를 경계하고 지목하는 바람에 근처로 더욱 많은 괴물들이 몰려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멋대로 빠져버린다면? 괴물들이 몰려든 만큼 진이 뚫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한 번 뚫린 진은 겉잡을 수 없는 속도로 무너진다. 더구나 근처에 한소영이 있는 이상 그러한 가능성을 외면할 수는 없다. 결국 하나하나 정리하는 방법으로 가야 하는가. 물론 그것도 나쁜 방법은 아니다. 오히려 정공법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차분하게 가기에는 아까 버티라는 말이 묘하게 신경 쓰인다. 특히나 화정의 경고를 떠올리면 더더욱.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형!” 안현의 목소리에 이어 허공을 예리하게 가르는 바람 소리가 흘러들었다. 그 바람은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 마침 내 옆으로 들어오던 괴물의 머리에 명중했다. 구슬픈 울음만 남기며 괴물이 무너진 자리에 한 번듯한 청년이 훌쩍 뛰어들었다. 역시나 안현이었다. “형. 여기는 제가 맡을게요.” “…네가?” “아니 아니. 저와 다은이 누나가요.” “……?” 안현이 왼쪽으로 고갯짓을 한 후, 오른쪽으로 몸을 돌렸다. 한 놈을 추가로 처리하면서 빠르게 시선을 돌리자 온몸에 기이한 기운을 두른 채 시원하게 검을 휘두르는 남다은이 보인다. 남다은의 기운에 모종의 능력이 있는지, 파상공세를 퍼붓던 놈들은 어느덧 주춤주춤 거리는 중이었다. …기공창술사와 검후라. “그럼 부탁한다.” 나는 곧바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돌아서 있는 안현의 등을 한 번 쳐주고 나서, 적당히 힘을 주어 땅을 박차 올랐다. 너무 힘을 주면 천장에 부딪칠 테니까. 몸이 허공으로 떠오른다. 흘긋 아래를 내려다보자 얼마나 많은 괴물들이 몰려들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흡사 개미떼를 보는 듯하다. 이내 허준영이 안현과 남다은을 지원하는걸 확인한 후, 주현호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으아악, 으아아악!” 주현호 또한 나를 확인한 모양이다. 비명이 주문이라 생각될 정도로 주현호는 계속 주문을 외워 마법을 쏘아 보냈다. 지그재그로 뻗어오는 번개부터 뾰족한 얼음의 창까지 종류는 다양했으나 그 어느 것도 내 항마력을 뚫을 수준은 아니었다. 잠시 후, 공중에서 몸이 뚝 떨어지며 주현호와의 거리가 삽시간에 줄어들었다. “사, 살려!” 주현호는 급히 몸을 피하려 했지만, 나는 그보다 빠르게 무검을 내리쳤다. 일직선으로 그어진 무검이 어깨를 후려치듯이 베어 들어가 기어코 끊어버렸다. 무언가 잘리는 감촉과 함께 한쪽 팔이 하릴없이 날아간다. 나는 입맛을 다셨다. 이번 공격으로 정수리를 쪼개려고 했는데, 주현호의 움직임이 궤도를 비틀게 만들었다. 그래도 충격은 있는지 등을 보인 주현호의 몸이 한순간 비틀거렸다. 그러나 너덜너덜해진 어깨를 붙잡으면서도 계속 도망가려고 한다. 나는 주현호가 완전히 몸을 추스르기 전 끝낼 생각으로 달려들었다. “씨발! 도대체 왜 나만 갖고 이러냐, 이 개새끼야!” 그래도 자존심은 있는지, 아니면 도망가기가 글렀다고 생각하는지. 돌연히 주현호가 훌쩍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하나만 남은 팔을 들어 나를 향해 난타하기 시작했다. “흠?” 확실히 능력치가 좋아서 그런지 속도는 제법 빠르다. 그러나 결국 근본은 마법사. 근접 계열의 눈으로 보기에는 엉성하기 그지없는 놀림에 불과했다. …하기야, 마법이 통하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인가? 나는 조용히 웃으며 머리를 틀었다. 내 웃음을 보았는지 주현호의 얼굴이 한없이 일그러졌다. 주먹이 엇갈리며 스쳐 지나간다. 나는 지나치는 팔을 잡고서는 있는 힘껏 끌어당겼고, 동시에 미끄러지듯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끌려오는 주현호의 복부를 향해 마력은 듬뿍 담은 발차기를 선사했다. 퍽, 경쾌한 타격 감이 느껴졌다. “키에에엑!” 주현호는 기괴한 비명을 쏟아내며 발라당 나동그라졌다. 그러나 곧 눈을 부릅뜨며 이를 악물고는 나동그라지는 그대로 땅을 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그대로 훌쩍 공중제비를 돌더니 빠르게 간격을 벌리며 나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이형환위를 사용했다. 주현호의 옆으로. “개 같은…. 어?!” 주현호의 시선은 여전히 앞을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조금 전 내가 서 있던 자리로. 그러나 발출한 마법이 내 환영을 그대로 투과하고 하릴없이 사그라지자 새된 소리를 내었다. 이내 주현호의 머리가 서서히 나를 돌아보는 찰나,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침착히 목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푹! 살을 파고들어가는 섬뜩한 감촉. 무검은, 주현호의 목젖을 정확히 찌르고 들어가 목을 완전히 꿰뚫었다. 시꺼먼 두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망연히 나를 응시한다. 이윽고 나와 주현호 사이로 일어난 한 줄기 피 분수가, 마치 물감이 번지듯 허공에 물보라처럼 흩어졌다. ============================ 작품 후기 ============================ 오늘 한 번 김수현의 전투력을 점검해봤는데요…. 마법사들이 수현을 상대로는 답이 없겠더라고 요. 초반 설정이 마법사 킬러를 설정으로 잡아서 그런가 봐요. 주현호가 근접 계열 사용자였다면 나름 멋진 전투력을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요. 하하. 그래도, 여기서 끝나면 살짝 아쉽겠죠? 그래도 나름 설정(?)을 들인 캐릭터인데요. 자세히 말하면 스포일러가 될 가능성이 높으니 그저 다음 회를 기다려달라는 말씀밖에는 못 드리겠네요. :) 벌써 2시가 다 되어가네요. 기다려주신 독자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부디 편안한 밤 보내시기를 바래요. :D 0578 / 0933 ---------------------------------------------- 해와 달을 바라는 괴물. “끄륵!” 주현호의 입에 핏빛을 번들거리는 거품이 맺혔다. 그 상태서 잠시 나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몸이 축 늘어지며 옆으로 쓰러진다. 하지만 나는 놓치지 않았다. 쓰러지는 그 찰나의 순간, 주현호의 눈동자를 스친 모종의 이채를. 휙! 역시나. 귓전으로 무언가 톡 쏘이는 듯한 살기가 느껴졌다. 흘긋 곁눈질을 하자 나를 향해 매섭게 쇄도해오는 더러운 발이 보였다. 주현호가 넘어지는 척을 하면서 낮게 돌아 발길질을 날린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알고 있는 공격. 나는 가볍게 머리를 틀어 발길질을 피했다. 그리고 한 발 더 앞으로 나가면서 넘어지는 주현호의 복부를 아예 찍어 눌러버렸다. 우당탕, 요란하게 부딪치는 소리와 동시에 한껏 부릅떠진 두 눈이 나를 응시한다. “이, 이 괴물 같은 새끼! 도대체…!” “시끄러워. 괴물은 너잖아.” 나는 조용히 회답했다. 그리고 나불거리는 입 속으로 차분히 무검을 박아 넣었다. 칼날이 보이지는 않지만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자신의 입안을 건드리는 날카로운 감촉을 말이다. 아무튼 목에 구멍을 뚫어도 죽지 않는 몸이라면…. “…목을 잘라도 살아나겠지?” 그 말을 꺼낸 순간 주현호의 얼굴에 떨떠름한 기색이 서렸다. 아무래도 맞는 모양인 것 같아 나는 더욱 깊숙이 무검을 찔러 넣었다. 재생력이 좋은 놈들을 처리하는 방법은 의외로 상당히 간단하다. 이윽고 주현호가 손을 젓는 것과 동시에, 나는 힘껏 마력을 일으켰다. 마력 폭발이었다. “자, 잠깐…!” 꽝! “끄으으윽!” 강렬한 폭발음에 이어지는 격한 신음. 이내 주현호의 목울대를 비롯한 온몸이 울룩불룩한 고저를 그렸다. 선천성이든 후천성이든, 높은 재생력은 체내에 조작된 모종의 요인을 기반으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면 외부의 마력을 직접 내부로 흘려 넣어 그 기반을 흐트러뜨리거나 파괴하면 그만. 물론, 한 번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 꽝, 꽝! 나는 연거푸, 계속해서 마력 폭발을 일으켰다. 그럴 때마다 주현호의 몸은 마치 경기를 일으키는 환자처럼 덜거덕덜거덕, 사정없이 흔들렸다. 어느새 나를 주시하던 두 눈은 멍하니 초점을 잃은 채 까뒤집혀진 상태였다. 이쯤이면 됐다는 생각이 들어 살며시 무검을 빼내자, 주현호의 벌려진 입에서 다량의 핏물이 울걱거리듯이 게워진다. …이긴 건가. 쿵! 그때였다. 이겼다고 생각한 순간, 갑작스럽게 커다란 굉음이 귓전을 울렸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들었다. 소음은 바로 앞, 약 5미터 정도 떨어진 건너편 벽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벽을 확인한 순간 나는 절로 눈이 가늘어지는걸 느꼈다. 아까까지만 해도 번듯하던 벽면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균열이 발생해있다. 그것도 일부가 아닌, 눈에 보이는 벽면 전체에. 쿵, 쿵! 쩍…! 쩍…! 굉음이 연이어 울릴수록 벽면의 틈이 더더욱 심하게 갈라진다. 어느덧 중앙부터 시작된 균열은, 흡사 부서지기 일보직전의 계란 껍질처럼 전면으로 이어지는 상황이었다. 아마 몇 번의 충격을 더 받으면 틀림없이 무너질 것이다. - 그놈이다! 김수현! 물러나! 때마침 화정의 경고가 이어졌다. 나는 무검을 회수하는 것과 동시에 있는 힘껏 땅을 박차 역방향으로 공중제비를 돌았다. 콰아아앙! 쩌저저적, 쩌저저적! 벗어난 찰나, 무언가 커다랗게 치는 소리에 이어서 곳곳에 생겨났던 균열이 한 번에 이어졌다. 이내 원래 있었던 자리로 착지한 순간, 나는 결국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벽면을 볼 수 있었다. 우르르르르르르르! 균열이 이어진 만큼, 붕괴는 한순간이었다. 어찌나 거대한 충격파를 뿜어내는지 우리가 서 있는 지면까지 흔들릴 정도였다. “…….” 전투는 잠시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지금까지의 전황은 유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괴물이 몰린 방면에서는 남다은, 안현, 허준영이 잘 버텨주었고,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어진 다른 방면에서 괴물을 압도했으리라. 거기다 중간 보스로 보이는 주현호를 내가 처리했으니 이대로 시간만 흘렀다면 확실한 승리를 거두었을 터. 거기서, 방금 새로운 변수가 끼어들었다. 죽자 사자 달려들던 괴물은 어느새 모두 물러나 무너진 벽면을 바라보며 경배하고 있다. 마치 우리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침을 삼키며 침착히 무검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잠시 후. -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붕괴의 여파로 인한 먼지가 가라앉기도 전, 거대하면서도 웅혼한 울림이 광장을 떠르르 울렸다. “으윽!” “큭!” 그 울림이 무척이나 거슬리는지, 가까이 있던 안현과 허준영이 얼굴을 찌푸리며 귀를 틀어막는다. 『파더(Father)의 기운이 사용자들의 정신을 강하게 압박합니다!』 『사용자 김수현의 잠재 능력, 심안(Rank : EX)이 대응합니다. 정신적 압박에서 벗어나고,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그렇게 한 차례 엄청난 울림을 토해내고 나서야 벽면을 무너뜨린 근원이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었다. 아직 연기가 모두 가신 건 아니었으나 나는 안력을 높여 앞쪽을 주시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시야에 모두 잡히지도 않을 정도로 엄청난 넓이를 지니는 보이는 몸체였다. 넓고 커다란 몸통은 올라갈수록 여러 갈래로 갈라져 가지와 같은 모양새를 보이고 있었고, 거기에는 잎새 비슷한 것들로 수북이 덮인 상태였다. 나도 기록에서만 읽어봤지 이렇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도대체 무어라 말을 해야 할까? 나무? 그래. 흡사 엄청나게 거대한 나무를 보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좌우간, 벽면이 어떻게 한꺼번에 무너졌는지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높이 또한 장난이 아니다. 천장까지의 높이가 10미터는 돼 보이는데, 천장에 거의 닿을 듯 말듯한 키를 보여주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까 벽면이 무너질 때 같이 깨졌는지, 중구난방으로 흩어진 바닥에는 가히 셀 수도 없을 정도의 굵은 줄기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못해도 일천 개는 넘어 보인다. 휘릭! 돌연히 줄기가 꿈틀거리더니 지면을 빠르게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촉수인가?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껏 보아온 괴물의 촉수와는 다른, 훨씬 굵고 색깔도 다른 시꺼먼 촉수라는 것. 그 촉수는 쓰러진 곧 쓰러진 주현호를 휘감았고 공중으로 천천히 들어올렸다. 이윽고 촉수의 끝이 주현호의 안으로 들어간 순간, 나는 볼 수 있었다. 축 늘어진 주현호의 몸이 삽시간에 쪼그라들기 시작한 것을. 이내 주현호가 말라 비틀어진 미라처럼 변하고 나서야 촉수는 천천히 풀렸고, 주현호가 땅으로 툭 떨어졌다. “저, 저건 또 뭐야?” “망할…!” 이제야 눈에 익기 시작한 걸까. 여기저기서 사용자들의 탄식이 터져 나온다. 괴물들은 여전히 엎드린 채 경배를 하는 중이었다. “…모두, 전열을 가다듬으세요.” 간신히 압박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렸는지 한소영이 말했다.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휘리리릭! 휘리리릭! 휘리리릭! 휘리리릭! 휘리리릭! 휘리리릭! 휘리리릭! 휘리리릭! 사용자들이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일천 개의 촉수 줄기들이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왔다. * “이지스 시스템!” 한결의 외침과 동시에 새하얀 막이 생성돼 사용자들을 감싸 안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한 박자 늦은 감이 있었다. “사, 살려!” “꺄아아악!” 방어막의 영향을 받지 못한 외곽에서, 약 열댓 명에 다다르는 사용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허공으로 떠오른 것이다. 나머지는 다행히 한결의 방어 아래 시간을 벌어주기는 했으나,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른다. 파더는 무리하지 않았다. 일단 잡아챈 사용자들을 먼저 처리할 생각에, 그들을 자신이 있는 쪽으로 쭉 끌어당겼다. 소중한 자식들의 떼죽음에 분노해있던 만큼, 이어지는 파더의 처리 또한 신속했다. 정확히는 성별에 따른, 아니 수태 능력의 유무에 따른 일종의 처리를 시작했다. 사용자들의 온몸을 칭칭 감고 있던 촉수는, 우선적으로 사내의 입을 강제로 벌려 안으로 파고들었다. “으, 으아아악!” 그러자 사내의 몸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아까 주현호가 그랬던 것처럼 삽시간에 쪼그라들어, 종래에는 바싹 마른 미라가 돼버린 것이다. 그렇게 한순간에 모든 사내들이 미라로 변하자, 남은 타깃은 여인들 뿐이었다. 이윽고 여인들을 감고 있던 촉수가 크게 부풀어 오른다. 펑, 펑! 그리고 체내의 무언가를 배출하듯, 마치 풍선 터지듯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촉수에서 터져 나온 싯누런 꽃가루들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며 여인들의 몸을 덮쳐 들었다. “콜록, 콜록!” 연기를 맡은 여인들은 각각 심하게 재채기와 기침을 해대었다. 그렇게 서너 번의 기침이 이어진 후 사르륵 촉수가 풀리며 여인들이 지면으로 떨어졌다. 파더가 스스로 풀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인들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죽은 건 아니었다. 몸을 움찔움찔 떨면서도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리고는 있었으니까. 그러나 딱 봐도 정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입에서는 투명한 침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가랑이는 절로 벌어지고 있었으며, 두 손은 젖가슴과 국부를 더듬거린다. 그러한 모습은, 흡사 심하게 발정한 여인을 보는 듯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10초도 지나지 않았다. 파더의 능력에 단숨에 열댓 명의 사용자들이 무력화된 것이다. 이제야 좀 분노가 풀린 걸까? 파더는 타오르는 분노를 삭히고는 한결 여유를 가지고 사용자들을 둘러보았다. 죽은 자식들은 어쩔 수 없다. 여기서 최대한 암컷을 잡아 추후 그 이상으로 보충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한 파더가 중앙을 바라본 순간이었다. 중앙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여인을 확인했을 때, 파더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파더의 감각이 절로 여인의 모든 것을 분석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암컷이다! 강렬하면서도 고고한 게, 마치 달과 같은 암컷이구나! 지금껏 보아온 암컷들 중에서 단연 최고로 꼽을 수 있다! 저 정도의 암컷이라면 고은솔이라는 모체보다 갑절은 훌륭한 모체가 될 가능성이 있다! 파더가 보는 여인은 다름 아닌 한소영이었다. 평가가 끝난 이상, 파더에게 더는 망설일 것은 없었다. 휘리리릭! 휘리리릭! 모든 촉수들이 오롯이 한소영을 향해 쇄도한다. 한결의 방어막이 잠깐 막아내는 듯싶었으나 한 점에 집중된 파더의 공격을 받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곧 보호막에 툭툭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이윽고 안으로 파고들어간 촉수가 꽁꽁 묶으려고 했으나, 한소영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빠르게 주문을 외우며 짓쳐 들어오는 촉수를 향해 손을 내젓자, 갑작스럽게 촉수의 돌진이 정지했다. 보이지 않는 저항에 가로막힌 것이다. 바로 끌려오지 않고 저항하는 한소영을 보며 파더는 속으로 웃었다. 즐거움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워낙 훌륭한 모체이다 보니 오히려 저 정도는 인정해줘야 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굳이 잡지 못해도 상관없다. 퍼퍼퍼퍼퍼펑! 한소영의 주변에서 가로막혔던 촉수가 일제히 싯누런 가루를 터뜨렸다. 그 가루는 삽시간에 한소영에게로 쏟아져 내렸고, 저항은 순식간에 약해졌다. 이내 촉수로 한소영의 몸을 차곡차곡 감은 파더가 천천히 끌어오려는 순간이었다. 문득, 한소영을 잡은 촉수에서 따끔한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따끔한 기운은 잠시에 불과했다. 화륵, 화르륵! 처음에 따끔하기만 하던 기운은 곧 엄청난 속도로 강도를 키웠다. 흡사 뜨거운 불로 내부를 지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처음 느껴보는 엄청난 아픔과 촉수가 가닥가닥 끊어지는 감각에, 파더는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깜짝 놀라 고통의 근원을 찾았다. 이윽고 자신이 점 찍은 암컷을 바라본 순간. 아니, 정확히는 옆에서 암컷을 안아 드는 새로운 생물을 확인한 찰나, 파더는 사고가 통째로 흔들릴 정도의 엄청난 충격을 맛봐야만 했다. 너무나, 너무나 대단하다. 나조차도 눈이 부실 정도로 밝고 빛나는 게, 마치 태양과도 같다. 지금껏 보아온 모든 생물들 중에서 가장 강력하다. 심지어, 이 몸과도 견줄만한 수준이다. 달과는 비교할 수 없다. 아니, 이제 달은 필요 없다. 저 태양이야 말로 진정으로 나의 반려가 될만한 생물이다! …그런데, 수태 능력이 보이지 않는다. 거기까지 인지한 순간, 파더는 돌연 화가 나는 것을 느꼈다. 갑작스럽게 실망을 넘어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쉽다, 아쉽다! 저 엄청난 신체 능력! 체내에서 느껴지는 뜨겁고도 고결한 기운! 이제야, 이제야 겨우 반려가 될만한 이를 찾았는데!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너는 수태 능력이 없는 거냐! 도대체 왜! 아쉬움, 실망, 분노, 슬픔. -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그런 마이너스한 감정이 담긴 파더의 절규가 땅속 내 광장을 가득히 메웠다. 그리고. - 가, 감히 어딜 넘보는 거야! 이 미친 자식아! 그러한 감정을 고스란히 느낀 화정이, 벌컥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 작품 후기 ============================ 문득 오늘 내용을 적다 보니…. 한소영 : (몸이 촉수에 감기며.) 어머? 나? 나 참~. 이 몸의 인기란~. 호호. 파더 : (김수현을 발견한다.) 헉! 한소영 : 뭐하니? 왜 가만히 있어? 파더 : 시끄럽다능! 한소영 : …어? 파더 : 너는 이제 필요 없다능! 저리 꺼지라능! 한소영 : 뭐, 뭐라고? 파더 : 핰핰! 수현! 수현찡! 핰핰핰핰! 너는 내꺼라능! 김수현 : 으, 응? 왠지 이런 기분을 느꼈습니다. 이것도 김수현의 마성으로 봐야 할까요? -_-a 『577회 리리플.』 1. 쥬얼마스터 : 1등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2등까지 차지하셨네요? :) 2. manama2세 : 죄송해요. 앞으로 최대한 자정에 업데이트할수있도록 노력할게요. ㅜ.ㅠ 3. [엘리시움] : 엑. 그래도 악역에게 명복을 비실 필요까지야! 4. 니르쪼 : 여, 연참이요. 연참. 연참! 어…. 음…. 여, 연참이 무엇인가요?(ㅌㅌ!) 5. dddfaaaf : 푸하하하. 그렇지요. 수현이라면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너무 표현이 적나라하셔서 순간 웃었습니다. 6. cefcfg : 아. 그들의 강함의 순위라면 간단합니다. 단, 이 순위는 힘의 제한 없이 '모든 힘'을 가졌을 때를 기준으로 할게요. 1. 종말의 용. 2. 마족 네르갈. 3. 파더. 4. 시몬. 이 순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7. 라셸티 : 음? 저는 원래 무척 얌전하답니다. 그러므로 후기도 얌전하지요. 앞으로 저를 얌전한 '로'라고 불러주세요. :D 8. Lea : 그렇지요. 마족은 기본적으로 2개의 생명을 갖지만, 벨페고르는 수현이 확인 사살까지 마쳤지요. 주현호도 이제 더는 인간으로 볼 수 없고, 말 그대로 돌연변이 입니다. 그에 걸맞은 신체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악마들은, 2지역 공략이 끝난 후 다시 등장할 예정입니다. :) 9. 쉬라야 : 후자가 정답이었습니다. :) 10. 다산람 : 우선 첫 번째. 두 희선은 같은 사용자가 아닙니다. 남부 자유 연합의 희선은 그때 이미 처리를 당했어요. 두 번째. 남다은의 능력 발동은 본인의 능력, 권능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추가적으로 어드밴테이지를 얻는 경우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때 뜬 메시지는 경고의 메시지 정도로만 보셔도 무방해요! 충분한 답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PS. 어제 하루 휴재를 양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_(__)_ 0579 / 0933 ---------------------------------------------- 해와 달을 바라는 괴물. 생각하건대, 그 괴물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아마 행운이 가장 커다란 작용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때 같이 싸운 동료들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정신이 없을 정도의 무수한 촉수 공격과 조금도 방심할 수 없던 가루 공격. 그리고 우리의 공격은커녕 접근도 허용치 않았던 그 능력은 정말이지…. - 신 대륙 아틀란타(Atlanta) 고대 도서관. '강철 산맥 공략 회고록.' 中 발췌. * 간신히, 간발의 차이로 한소영을 구할 수 있었다. 무검으로 베어 넘기자 우수수 떨어지는 촉수 너머로 살짝 비틀거리는 한소영이 보였다. 나는 곧바로 다가가 한소영을 부축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한소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반응했다. 한소영은 예의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눈만큼 아니었다. 예전과는 다르다. 뭔가 묘한 눈초리로 나를 직시하는 두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색정(色情)의 빛이 어려있다. “하아….” 살짝 열린 입술에서 뜨거우면서도 달콤한 내음을 풍기는 숨결이 토해졌다. “이스탄텔…!” 그러나 그 순간, 한소영이 와락 나에게로 안겨 들었다. 두 팔이 빠르게 타고 올라와 내 목을 감싸 안는다. 천천히 시선을 내리자, 매달린 모양새로 한없이 애처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한소영이 보였다. “머셔너리…. 로드….” 한소영의 목소리가 귓전에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마치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끈덕진 음색과 온몸을 짓누를 정도의 육감적인 감촉들. 한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을 느꼈지만, 나는 겨우, 그리고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언제 혀를 깨물었는지 입안에서 비릿한 피 내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나는 곧바로 후방으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한소영의 명치 부근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리며 화정의 힘을 일으켰다. “으음…!” 역시나 화정의 힘에는 별도리가 없는지 한소영의 눈동자가 삽시간에 정상적인 빛을 되찾았다. 잠시 후, 한소영이 한결 차분한 태도로 떨어졌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괜찮으십니까?” “이제는 괜찮아요. 아무런, 아무런 문제도 없어요.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한소영은 빠르게 고개를 젓더니 입술을 꼭 깨물었다. 마치 더 이상 이에 관한 질문은 원하지 않는 것 같아, 나는 차분히 머리를 끄덕이고 시선을 돌렸다. 파더 등장 때 걸렸던 압박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는지 사용자들이 서서히 정신을 차리는 모습들이 보인다. 그러나 파더를 향해 경배를 하던 괴물들 또한 하나하나 몸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결국 변한 건 없는 건가. 저기 새로 등장한 파더만 제외한다면. “아흑, 아흐흐흑!” 문득 열띤 교성들이 들려온다. 아까 파더에게 잡혀 가루를 뒤집어쓴 여인들이 내는 신음이었다. “아앙~. 아아앙~.” 개중에는 이미 상하의를 탈의한 채 정신 없이 국부를 쑤시는 여인도 있었다.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핏줄기를 보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 가루가 여인이 스스로 처녀성을 깨뜨리게 할 정도라면, 단순히 발정 효과만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이미 하나의 독 가루나 다름없다. …좋지 않다. 생각을 모두 정리한 건 아니었으나 일단의 결정은 내릴 수 있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우선은 물러나시죠?” “퇴각하라는 말씀인가요?” 한소영이 눈을 살짝 치켜 뜨며 반문했다. 나는 가만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후방으로 물러나서 남은 괴물들의 상대를 지휘해주세요. 보이는 수가 제법 되는 만큼, 우선적으로 떨거지들의 청소가 시급합니다.” “그럼 그동안 저 괴물은 누가…. 머셔너리 로드!” 그제야 깨달았는지 한소영의 말끝이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 가, 감히 어딜 넘보는 거야! 이 미친 자식아! 그 순간이었다. 파더가 괴성을 내지르는 것과 동시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화정이 벌컥 화를 냈다. 어느새 괴물들도 모두 일어나 우리를 보며 전투 의지를 불태우는 중이었다. 더 이상 설득할 시간은 없다.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처리할 수 있으면 처리하고, 안되면 시간이라도 끌고 있겠습니다. 지금 저 괴물을 이대로 놔두는 건 최악의 수나 다름없습니다.” 말인즉, 최대한 빠르게 남은 괴물들을 처리하고 지원을 와달라는 소리였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는 지체 않고 파더를 향해 달렸다. “그, 그게 아니라!” 등 뒤로 한소영의 애타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일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소영을 믿고 있으니까. 정말로 철혈 여왕으로서의 각성을 시작한 한소영이라면, 절대로 멍청한 선택은 내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상황은 나한테 달렸다. 지나치는 괴물들의 행동이 이상했다. 파더에게 다다르기 전 조금이나마 수를 줄여주려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달려가면 좌우로 정중히(?) 피해주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길을 터준다고 해야 하나? 마치 파더와의 만남을 권하는 모습처럼 말이다. 이윽고 파더와의 거리를 어느 정도 남겨두고서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문득 이상한 기분이 전신을 엄습했기 때문이다.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미묘한 위화감이라고 해야 할까? - 조심해. 지금 저놈은 너를 최우선으로 노리고 있으니까. 그때, 아까 소리를 질렀던 화정이 말을 걸어왔다. '나를 최우선으로 노리고 있다고?' - 그래. 저놈은 지금 너를…. 아, 아무튼! 너만 보고 있는 중이야. 네게로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어. 절대로 지면 안 돼! 그렇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오히려 잘됐다. 사실 어떻게 하면 파더의 어그로를 끌어올 수 있을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저놈 스스로가 나를 보고 있다면 거리낄 것은 없다. - 조심! 휘리리릭! 휘리리릭! 휘리리릭! 휘리리릭! 그러나 화정의 경고가 이어진 순간, 나는 그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차 한 순간에 수백의 촉수들이 짓쳐 들어와 나를 파도처럼 덮쳐든 것이다. 깜짝 놀란 나는 무검으로 대응하려다가 촉수의 수를 보고 피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꽝! 지면에 촉수가 처박히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돌덩어리가 떨어진 것 같은 폭음이 울렸다. 어찌나 위력이 강렬한지 지면이 떠르르 울릴 정도였다. 꽝! 꽝! 꽝! 꽝! 공격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파더는 내가 피한 자리에마다 쉴 새 없이 쫓아와 촉수를 후려쳤다. 나 또한 민첩에는 자신이 있는 터라 요리조리 피할 수는 있었지만, 파더의 촉수는 정말 마구잡이로, 아니 집요하게도 나를 쫓아왔다. 정말로, 기필코 꼭 잡고 말겠다는 듯이. 어느덧 방금 내가 서 있던 자리의 부근은 흡사 해일에 덮쳐진 것처럼 휩쓸린 상태였다. 나는 침을 삼키며 파더를 응시했다. 다른 방해 없이 일 대 일을 하게 된 건 좋으나 방심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가시질 않는다. 잠시 후, 이번에는 촉수들이 세 갈래로 나뉘어져 슬금슬금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나는 잡을 수 있을까 하는 것처럼. 나는 천천히 다가오는 갈래들을 보며 추가로 빅토리아의 영광을 들었다. 촉수 세 줄기가 아니라, 세 갈래였다. 차라리 마법 공격이라면 모를까. 한 갈래당 못해도 2, 3백 개의 촉수들이 함께 움직일 텐데, 그러면 그쪽에서 행사되는 물리력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휘리리릭! 다시, 온다. 이번에는 마구잡이 공격과는 다르다. 하나는 정수리부터 찍어 내려오고, 다른 하나는 옆구리를 노리며, 마지막 하나는 지면으로 낮게 쓸어온다.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지면으로 들어와 발을 노리는 촉수들이었다. 곧바로 땅을 박차 피하고 난 후에, 나는 상체를 한껏 기울인 채 한 번 더 허공을 걷어차며 앞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손과 발이 땅에 닿은 그 순간, 남은 촉수들이 들어오는 방향을 계산하며 있는 힘껏 두 다리를 치켜들어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러자 시야가 상하 반전을 함과 동시에, 등과 목덜미를 쏜살같이 스치고 지나가는 매서운 감촉이 느껴졌다.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 내리며 빠르게 가까워지는 파더의 몸통을 향해 두 개의 검을 교차시켰다. 그때였다. 파앙! 파앙! 파앙! 파앙! “큭?!” 막 검을 그어 내리기 직전, 그러니까 파더의 바로 앞까지 다다랐을 즈음. 갑작스럽게 파더의 인근에 대기하던 촉수들이 한껏 부풀더니 바람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몸에 강한 압력이 밀려들었다. 흡사 거센 폭풍을 압축한 공격을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이내 압력에 밀려나 아슬아슬하게 지면에 착지한 찰나, 나는 돌연 몸이 비틀거리는걸 느꼈다. - 김수현! 하지만 화정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바로 몸의 균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몸을 휘도는 뜨거운 기운에 무언가가 녹아 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 뜻밖의 공격을 받으면서 나도 모르게 중독된 것 같은데, 때마침 화정이 나서준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압력 공격이 여파는 남아있어, 이마에 미약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 야, 이 멍청이야! 그렇게 무턱대고 들어가면 어떻게 해! 죽을뻔했잖아! '죽을뻔했다고?' - 방금 공격을, 아니 아까 가루 공격을 보고도 몰라? 촉수로 공기를 빨아들여 단단히 압축시켜놨다가, 네가 들어오는 때에 맞춰서 가루랑 함께 터뜨린 거잖아! '그럼…. 거기서 발생한 압력으로 자신을 보호함과 동시에, 나한테 공격을 했다는 건가?' 그러고 보니 기록에 비슷한 내용이 있었던 것 같은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화정과 마력을 일으킴과 동시에 오른발로 힘껏 땅을 굴렀다. 화륵, 화르륵! 삽시간에 주변으로 수십 개의 열화검들이 떠오른다. 저번 전쟁 이후 꽤나 오랜만에 사용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래저래 생각할 필요 없이, 나는 일단 떠오른 열화검들을 모조리 파더를 향해 발사했다. 그리고 그 순간, 주변을 떠돌던 촉수들이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화검의 위험을 인지한 걸까? 촉수들은 삽시간에 파더의 몸체 앞으로 둥글게 모여들었다. 그리고 또다시 줄기를 빵빵하게 부풀리고는, 열화검이 들어오는 타이밍에 맞추어 파앙! 소리를 내며 공기를 발출했다. 그 결과, 기세 좋게 날아간 열화검들이 하나같이 궤도가 빗나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멍한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모든 것을 벨 수 있는 검술 전문가의 권능 결. 모든 것을 태울 수 있는 화정. 그러할진대. 귓전이 멍멍히 울릴 정도의 굉음이나 도복이 펄럭이는 것은 둘째치고서 라도, 내 권능이나 화정의 힘이 통하지 않았다는 건…. - 통했어! 이 바보야! '뭐라고?' - 통했다고! 네 권능이나 내 힘은 확실히 통했어! '그럼 어째서….' - 젠장, 너 오늘따라 왜이래?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칼 한 자루, 불 한 점으로 폭풍을 꺼트릴 수 있어? 없잖아! '…….'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화정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촉수 하나하나만 따지면 별것 없으나, 일천 개가 넘는 촉수가 한꺼번에 뿜어내는 압력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권능이나 화정의 영향을 벗어난 압력은 나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거기다 압축해서 터뜨린 공기는 물리력으로 인정되니, 내가 자랑하는 항마력의 도움을 얻을 수도 없는 것이다. 상황은 인지했지만 해답은 나오지 않아다. 나는 파더를 경계하며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영역선포? 아니. 영역선포도 불가능하다. 파더는 화의 속성을 지닌 괴물이 아니었으니까. 그럼 촉수를 오는 족족 베어내서 수를 줄인다? 그것도 불가능하다. 인위적으로 도시와 동화돼 몸 전체에 하나의 매커니즘을 갖춘 마볼로라면 모를까. 눈앞의 파더는 고작 촉수를 건드는 것으로 그 매커니즘을 건드릴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말인즉, 촉수는 계속 베어내도 끊임없이 재생할 것이다. “…….” 잠시 후, 다시 촉수들이 꿈틀거리는 뱀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문득 갑갑한 기분이 들었다. 파더의 능력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막연하게 권능과 화정이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친 것이다. 물론, 계속 이대로라도 지지 않을 자신은 있다. 파더의 수가 자신을 건들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내가 가진 여러 수도 파더의 공격을 무위로 돌리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이대로 버티는 게 아닌, 바로 이기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수현 형님! 지원할게요!” 한결의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원한다고? 그럼 벌써 괴물들의 처리가 끝난 건가? 아니면 따로 나를 지원하는 건가? “디펜시브 매트릭스!” 그러나 미처 생각이 끝나기도 전, 주변으로 바람이 세게 불기 시작했다. 디펜시브 매트릭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시퍼런 바람이었다. 갑자기 바람의 속도가 빨라지며 나를 서서히 감싸는 형식으로 둥글게 올라오고 있었다. 말마따나 하나의 방어 공간을 보는 듯했다. “되비침!” 그리고 한결의 목소리가 이어진 순간, 비로소 푸른 바람이 새하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크기가 천천히 작아지는가 싶더니 내 주변으로 직경 2미터 정도의 공간을 형성했다. 크기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방어막을 이루는 바람 소리가 더욱 강렬해졌다. 디펜시브 매트릭스, 그리고 되비침. “……!” 두 말을 무심코 되뇐 순간, 나는 번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한 생각이 머리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파더의 저 능력을 파훼할 수 있는 한 생각이 말이다. 방어 공간이 생성돼서 그런지, 슬금슬금 다가오던 촉수들은 어느새 이리저리 주변만 어정거리며 기회만 엿보는 중이었다. -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겠는데, 기회는 딱 한 번뿐이야. 저 정도의 지성체한테 두 번의 기회는 없어. 명심해. 내 생각을 알아차린 걸까? 화정이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나는 회답 대신, 무검과 빅토리아의 영광을 으스러져라 쥐며 침착히 무릎을 굽혔다. ============================ 작품 후기 ============================ 와, 잠깐 안 본 사이에 뜰에 새로운 팬 아트가 엄청나게 올라와있었네요. 이유정, 정하연, 차소림(창창이), 남다은(검순이), 김한별(보석이), 선유운(활활이), 우정민, 정말로 예쁜, 여성 같은 백한결, 안현, 수영복 차림의 고연주, 그리고 화난 김수현까지! 정말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D 정말 모든 팬 아트들이 감사하지만….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제가 워낙 거칠고 야성미가 넘치는 사내라서요. 아무래도 수영복 차림의 고연주에게 자꾸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하하하. 팬 아트 그려주신 고장난선풍기 님께 이 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_(__)_ 그림들은 모두 제 뜰에 올려져 있으니, 여러분들도 한 번 구경 오시는걸 추천 드립니다. :) 0580 / 0933 ---------------------------------------------- 누구나 한 번쯤은 빛나는 시절이 있다. 디펜시브 매트릭스라는 방어 공간에 되비침이라는 능력이 덧붙여졌다. 되비침의 효능을 떠올린 순간 머릿속으로 한 생각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저 무시무시한 공방 능력을 깨트릴 묘수가. 물론 이것도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해볼만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거리를 계산해 힘을 조절한 후 땅을 박차 앞으로 뛰었다. 거리는 삽시간에 좁혀졌다. 그러나 파더도 보호막이 생겼을 때부터 예상했던 걸까? 무리해서 나를 잡으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곧바로 촉수를 회수해 아까와 같이 둥그렇게 모여들게 만들었다. 이내 안으로 파고들지 않고 바로 앞에 다다랐을 때, 촉수들은 역시나 공기를 한껏 빨아들이며 줄기를 빵빵하게 부풀렸다. 이윽고, 발바닥이 지면에 완전히 닿은 찰나였다. 파앙! 파앙! 파앙! 파앙! 파앙! 파앙! 파앙! 파앙! 파앙! 파앙! 일천 개에 이르는 촉수들이 일제히 압축한 공기를 터뜨렸고. 파가각, 파가가각! 쨍그랑! 한결이 걸어준 방어막은 1초도 견디지 못하고 유리 깨지는 소리를 내며 금이 가고 말았다. 금은 매우 짧은 시간에 방어막 전체로 번져 깨지기 일보직전의 모습이 되었다. 그 찰나의 순간, 나는 이를 악물었다. 예상이 빗나간다면? 이제 곧 부서진 틈으로 터져 나온 공기들이 폭풍처럼 밀려 들어올 것이다. 그럼 또다시 여지없이 밀려나는 수밖에 없다.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방어막 주변으로 반짝이는 가루들이 내려앉았다. 화아아악! 그러자, 깨질 듯하던 방어막이 한순간 돌변했다. 꺼지기 직전의 양초가 마지막을 장식하는 화려한 불꽃을 피우는 것처럼, 방어막이 돌연 찬연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틈새로 들어오던 공기의 폭풍이 멈추고, 도리어 반대쪽으로 밀려나는 것이 느껴졌다. 비로소 되비침, 반사 능력이 발동한 것이다! 와장창! 마침내 방어막이 깨졌다. 그러나 아주 잠깐이기는 했지만, 온몸을 압박해 들어오던 감각이 사라졌다. 그리고 일순간 공기와 보호막 사이로 공백(空白)이 생겼다. 기회였다. 두 번은 오지 않을 천재일우의 기회. 나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곧바로 이형환위(移形換位)를 발동했다. 한순간, 풍경이 변했다. 징그러울 정도로 많던 촉수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대신, 촉수가 모이지 못한 후방의 몸체가 눈앞으로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는 회로를 따라 마력을 이동시키며 온 힘을 다해 두 칼자루를 잡았다. 그리고 몸체를 향해 힘차게 휘두르자 절로 화정의 힘이 칼날을 타고 올라왔고, 여전히 보이지 않는 무검과 시뻘겋게 작열된 빅토리아의 영광이 그대로 몸체를 뚫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화륵, 화르륵! 두 검이 교차해서 그어지자 파더의 몸체에도 고스란히 X자의 자국이 남았다. 그것도 모자라 화정의 영향으로 더욱 깊숙이 타 들어가며 번지기 시작한다. 비로소 한 번의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다. 그러나 결과를 지켜볼 여유도, 기쁨을 만끽할 여유도 없었다. 어느덧 양쪽에서 무언가가 매섭게 쇄도해오는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재차 이형환위를 발동했다. 쾅! 어디선가 허공을 거대하게 후려갈기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촉수의 갈래가 나를 노렸겠지. 하지만 여전히 볼 필요도, 여유도 없다. 한결이가 마련해준 귀중한 단 한 번의 기회였다. 나는 그저 이를 악물고 최대한 빠르게 검을 교차로 그었다. 이번에는 검 끝에서 발출된 타오르는 파동이 그대로 직진해 몸체를 강타했다. 표면이 조각조각 부서지며 화정의 힘이 사방으로 옮겨 붙는다. 그러나, 다시 나를 노리고 들어오는 수많은 기척들. 생각이 허락된 시간은 단 1초였다. 1초 만에 시선을 돌려 빈 공간을 찾고, 어빌리티를 발동한다. 나를 노리는 촉수들을 이형환위로 건너뛴 후 눈앞에 보이는 파더를 또다시 공격했다. 무검과 빅토리아의 영광이 각자 섬뜩한 섬광을 빛내며 몸체에 깊숙한 상처를 남겼다. 완벽한 유효타였다. 그러나 상처를 입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나를 노리는 만큼, 조금도 지체할 틈은 없었다. “콜록, 콜록!” 잠깐 재채기를 하기는 했지만 기침은 곧 사그라졌다. 당하는 와중에도 가루를 살포한 것 같지만 조금도 걱정되지 않는다. 어느덧 몸의 내부에는 화정이 그 어느 때보다 가열차게 돌고 있었으니까. 나는 공격을 시작한 직후 지금껏 단 한 번도 화정의 힘을 끌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화정이 스스로 나서서 나를 서포트하고 있는 것이다. - 크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파더가 분노에 찬 기괴한 괴성을 질렀다. 그리고 촉수를 미친 듯이 돌리며 나를 잡으려 했지만, 나는 오히려 촉수 하나를 잡고 쏜살같이 솟구치며 더더욱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공격하려고 하다가, 정수리부터 느껴지는 살기에 곧바로 건너편으로 이동한 후, 두 검을 역수로 잡고 똑같이 아래로 찍어 눌러주었다. 이어서 빠르게 두어 걸음 물러나는 동시에 빈 공간을 찾아 돌아가 두 검을 연타로 날렸다. 그렇게 또 한 번의 추가 공격이 성공했다. 서서히, 흐름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내가 집중해야 되는 일은 하나였다. 확실하게 잡은 이 기회를 계속해서 이어가는 것. 나는 딱 한 번 먼저 제대로 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원했다. 그리고 아까 잠깐의 공백이 생겼을 때부터, 마침내 공격의 주도권이 내게로 넘어왔다. 정말 간신히 쥐게 된 주도권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동원해 이 주도권을 지켜야 한다. 파더가, 쓰러질 때까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지체 않고 이형환위를 발동했다. * 그렇게 김수현과 파더, 그리고 사용자들과 괴물들의 전투가 한창 열을 더해갈 무렵.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광장의 한쪽에서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변화의 중심은, 다름 아닌 구석에 얌전히 놓여있는 주현호였다. 놀랍게도, 아까 파더에 의해 미라처럼 쪼그라들었던 몸은 어느새 정상으로 복구된 상태였다. 까닥까닥, 손이 움직인다. 움찔움찔, 발이 움직인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감겨있던 주현호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혼란은 길지 않았다. 눈동자는 곧 정상적인 빛을 되찾았다. 이내 살그머니 눈을 굴려 주변을 살펴본 주현호가 끙, 힘을 주었다. 촤악! 그러자 잘린 오른팔에서 촉수가 불쑥 돋아나오더니 삽시간에 부풀어 오르며 모종의 조직을 형성해나가기 시작했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어떻게 한 번 죽었던 주현호가 다시 살아날 수 있던 걸까? 해답은 바로 파더(Father)에 있었다. 아까 사내들이 순식간에 미라가 돼버린 것처럼, 파더의 촉수는 생물의 생명력을 흡수하는 기능이 있다. 생물의 내부로 파고들어 생기를 모조리 빨아들이는 것이다. 흡수한 생기는 하나의 에너지가 되어 파더의 내부에 축적된다. 그런 만큼, 그 반대의 일도 가능하다. 파더는 주현호의 상태를 파악한 후, 직접 손상된 생기를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주현호의 몸이 쪼그라들었다. 파더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내부에 저장해두었던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어 주현호의 생명력을 되살린 것이다. “으, 으으….” 주현호의 입에서 미약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새로 부여 받은 생명의 영향인지, 어느새 잘렸던 팔 또한 새롭게 돋아난 상태였다. 우선 외관으로는 완벽히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김수현에 의해 진탕이 된 내부는 아직 어떤지 모르나, 일단 재생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는 회복된 게 분명했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는 되었지만, 주현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시 살아났으면 응당 기뻐해야 정상인데, 오히려 계속해서 죽은 척을 하며 흘끗흘끗 곁눈질을 하기에 바빴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그런 주현호의 두 눈동자에는, 어느덧 숨길 수 없는 공포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편, 같은 시각. 사용자들과 괴물들간의 전투는 서서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사용자들은, 한소영의 지휘 아래 매섭게 괴물들을 몰아치는 중이었다. 득달같이 달려드는 괴물들과 서로 조직적으로 협동해 전투하는 사용자들. 그런 이상 아무리 새로운 괴물들이 출현했다고는 하나, 전황은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이따금 사용자들의 비명이 들려오기는 했지만 그보다 쓰러지는 괴물의 수가 훨씬 압도적이었다. 그중에서도 안현이 가장 열정적으로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창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여지없이 괴물의 피가 쏟아지고, 들어오는 공격은 능숙한 몸놀림으로 피하며, 거기다 적절한 반격까지. 그러다 문득, 안현이 자신의 흑색 창을 꼬나 쥐고는 사방으로 사정없이 찔러대며 무섭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5마리 괴물들이 몰려있는 방향이었다. 후방에서 지원을 하던 궁수나 마법사, 사제들은 그런 안현을 눈 여겨보다가, 각자 화살이나 보호 마법들을 날리며 엄호해주었다. 안현은 계속해서 창을 놀리며 괴물들을 견제하다가, 목표한 부분에 다다른 순간 힘껏 도약해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앞을 가로막는 괴물의 목에 가볍게 창을 찔러 넣고는, 곧바로 빼내어 풍차처럼 휘두르기 시작했다. 붕붕붕붕붕붕붕붕! “하!” 이윽고 안현은 한 차례 기합을 지르며, 창에 원심력의 힘을 그대로 실은 채 곧바로 직선으로 내리꽂았다. 그 일격에는 근력은 물론, 젖 먹던 힘까지 뽑아낸 마력까지 담겨있었다. 꽝! 파파파파파파파팟! 그리고 창이 지면을 직격한 순간, 흑색 창 끝으로 똑같은 묵 빛의 창들이 줄기줄기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1개에서 2개로, 2개에서 4개로, 4개에서 8개로. 그것은 삽시간에 수십 개의 창으로 변해 남은 4마리 괴물들을 모조리 덮치고, 쓸어버렸다. 안현이 가장 처음 배웠으며, 가장 즐겨 사용하는 창술사격이었다. 한 번에 거대한 힘을 쏟아 부은 안현은 잠시 숨을 고른 후, 빠르게 후방으로 물러나 주변을 경계했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적어도 인근에서는 더 이상 괴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잠시 후, 안현은 주변이 한없이 고요해진 것을 느꼈다. “…끝난 건가?” 조용히 중얼거린 안현은 혹여 남은 괴물이 있을까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앞쪽을 훑어보는 찰나, 돌연 안현의 시선이 우뚝 정지했다. 안현이 바라보는 방향에는 김수현과 파더가 한창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순간, 괴물들을 휩쓸 때만 해도 날카롭기 짝이 없던 눈빛이 갑작스럽게 멍하게 변하고 말았다. “…….” 눈앞의 광경은…. 당최 무어라 말을 해야 할까. 파더를 둘러싸고, 수십에 이르는 김수현이 전투를 벌이고 있다. 아니, 수십의 김수현은 아니었다. 전투를 벌이는 김수현은 분명 하나. 그러나 김수현의 극한의 속도와 이형환위로 이루어내는 잔상이 그러한 착각을 들게 하는 것이다. 한 번 김수현이 번쩍이며 사라질 때마다, 파더의 몸체에 여지없이 붉은 섬광이 그어진다. 이미 파더의 몸체는 상처가 나지 않은 곳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붉은 상처투성이였다. 거기다 화정이 지속적으로 타오르며 누적 데미지를 주니, 일부는 이미 시꺼멓게 그을려 재를 떨어뜨리고 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파더는 꾸준히 촉수를 움직이며 김수현을 쫓고 있었다. 흡사 술래잡기를 보는 듯했다. “어이, 안현. 잘했다.” 그때 누군가 안현의 어깨를 치며 말을 걸었다. 허준영이었다. 안현은 아차 한 얼굴로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아직 전투 중이었음을 상기한 것이다. “상관없다. 전투는 끝났고, 괴물들은 모두 처리했으니까. …그보다.” 그러나 허준영은 가만히 머리를 가로저으며 앞쪽을 응시했다. 안현 또한 떨떠름한 얼굴로 도로 김수현을 응시했다. 아니,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했다. 도대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 걸까? 1초에 2번? 3번? 4번? 안현이 아무리 안력을 높이고 집중해도 김수현의 움직임을 잡기가 힘들다. 그것은 비단 안현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용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일부 성미 급한 사용자들이 어서 안 돕고 뭐하냐며 나서려고 했지만, 눈썰미 좋은 사용자들이 빠르게 제지했다. 그들은 자세한 상황은 몰라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는 있었다. 지금 저 전투가 주도권과 타이밍의 싸움이라는걸. 그리고 자신들이 함부로 끼어들만한 전투가 아니라는걸. 오직 김수현이, 김수현만이 가능한 전투였다. 그때였다. 아무리 쫓고 쫓아도 지치지 않는 김수현이 버거웠는지, 돌연 파더의 움직임에 변화가 생겼다. 갑작스럽게 사방으로 물샐틈없이 얌전히 촉수를 늘어뜨린 것이다. 곧 촉수가 빵빵하게 부풀더니 파리지옥이 입구를 닫는 것처럼 일제히 촉수를 치켜 올렸다. 도저히 움직임을 쫓을 수가 없으니 아예 모든 방향을 대상으로 공기를 터뜨리려는 것이다. 그러면 위력은 약해지겠지만, 지금 파더에게 필요한 건 김수현의 움직임을 잠시라도 멈추는 것, 즉 빼앗긴 주도권을 되찾아오는 일이었다. 잠시 후. 파앙! 파앙! 파앙! 파앙! 파앙! 파앙! 파앙! 파앙! 파앙! 파앙! 고막이 멍해질 정도의 굉음이 광장을 울렸다. “아!” 동시에, 누군가 안타까운 탄성을 흘렸다. 그러나 그 탄성은, 곧 경악으로 바뀌었다. 그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김수현의 신형이 아예 촉수의 영향을 받지 않는 외곽으로 이동한 것이다. 거기다 발출이 끝난 공백기가 찾아오자마자 곧바로 다시 안으로 파고들기까지. 이내 외곽으로 이동한 신형이 서서히 허공에 녹아 드는 동시에, 한쪽에서 화르륵 타오르는 궤적이 파더를 무참히 난도질했다. 그 신기에 가까운 움직임에, 철혈 여왕인 한소영마저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이래서 괴물들과의 전투가 끝나 직후에도 사용자들이 함부로 돕지 못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능력은 둘째치고서 라도, 현재 김수현은 엄청난 고수준의 멀티 태스킹을 보여주고 있었다. 단 한순간에 파더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공격하며, 회피할 공간을 찾는다. 그런 만큼 최소한 김수현의 예민해진 감각을 어지럽히지 않는, 그리고 타이밍을 방해하지 않는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차라리 안 도와주느니만 못한 일이었다. “형을…!” 그렇게 생각한 허준영은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나가려는 안현의 어깨를 세게 붙들었다. “가지 마라.” “주, 준영이 형? 하지만 지금 수현이 형이!” “가봤자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특히 근접 계열들은 더더욱.” “…….” 허준영은 담담히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안현이 멈칫한걸 확인한 후에야 차분히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잘 생각했다. 괜히 방해를 하느니, 차라리 따로 할 일을 찾는 게 낫지.” “따로…. 할 일이요?” 허준영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안현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서렸다. 허준영이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보았으나, 괴물의 시체만 제외하면 휑한 광장만 보일 뿐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죽어있는 줄 알았는데….” 이윽고 안현의 얼굴에 서린 의아함이 더욱 짙어질 무렵, 허준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한 놈이 도망친 것 같다.” ============================ 작품 후기 ============================ 문득 보니까 투표가 2000표를 넘었습니다. 정확히 2014표였어요. 예전에 2000표를 넘으면 일러스트를 그릴 투표를 하겠다고 말씀 드렸으니, 슬슬 준비를 해야겠죠? 아마 다음 회 후기에 여러분들께 의견을 구하게 될 것 같습니다. 우선 한소영은 무조건 그리는 것으로 하고, 나머지 7명 중에서 상위 4명을 뽑아 코멘트로 재투표를 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1등을 한 캐릭터로 일러스트를 그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번 일러스트는 총 2장이 나오게 되겠네요. :) 0581 / 0933 ---------------------------------------------- 누구나 한 번쯤은 빛나는 시절이 있다. (오늘 후기를 꼭 읽어주세요. 독자 분들의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해주세요.) 한 사내가 어두운 통로를 이동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사내라는 말은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살가죽에 그려진 검은 문신과 어둠 속에 동화된 듯한 시꺼먼 모습을 보면, 그냥 괴인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지 않을까. “헉, 허억….” 그런 괴인의 입에서는 계속해서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호흡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지, 이동을 하면서도 자꾸만 헐떡거린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다리가 꼬이며 괴인이 크게 비틀거렸다. 벽을 짚으려는 듯 반사적으로 팔이 올라왔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간에서 우뚝 멈추고 말았다. 정확히는 괴인 스스로 팔을 멈춘 것이다. 그랬다. 괴인의 정체는 바로 주현호였다. 광장에서 죽은체하며 상황을 파악하다가, 격한 전투가 벌어지는 틈을 타 몰래 도망 나온 것이다. 이윽고 간신히 균형을 잡은 주현호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코에서는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주르륵, 핏줄기가 인중을 타고 흘러내리자 괴인은 인상을 와짝 찌푸리며 천천히 입을 벌렸다. 핏방울은 주현호의 입안으로 정확히 떨어졌다. 비록 새로 태어났다고는 하나 주현호는 한때 사용자였고, 그 시절의 기억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만큼 사용자들의 습성 또한 알고 있다. 처음 사용자들과 맞닥뜨렸을 때, 그렇게나 앞에서 까불어댔으니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확실히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또한 도망친 사실을 알아차리거나 차후 시체를 찾지 못한다면 100% 추적대를 구성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현호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이 구덩이 내 구조가 굉장히 복잡하다는 것과, 자신은 구조를 빠삭하게 알고 있다는 것. 이것을 최대한 유리하게 활용하려면 절대로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일부러 벽을 짚지 않았고 피까지 받아먹은 것이다. “…빌어먹을.” 잠시 후, 겨우 호흡을 고르고 몸을 추스른 주현호는 천천히 머리를 돌려 후방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걸어온 통로를 바라보는 두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분함과 확실한 공포가 스며들어 있었다. 그런 주현호의 뇌리 속에는 아직도 아까 들었던 말들이 떠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시끄러워. 괴물은 너잖아.' '…목을 잘라도 살아나겠지?' 자신을 무심히 내려다보던 눈빛. 마치 '너는 내 적수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 눈빛!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소름이 끼치는지 주현호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식도를 파고들어오던 칼날의 싸늘함과, 내부가 진탕이 될 때의 감촉은 아직도 생생히 살아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무슨 항마력이 그렇게나 높은지 기껏 주문을 외워도 티끌도 건드리지 못하고 사그라지고, 신체를 강화해 육탄전을 걸어도 여유롭게 웃으며 상대하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사실상 주현호는 전혀 약하지 않다. 오히려 어지간한 사용자 열댓 명은 단숨에 때려눕힐 정도로 매우 강하다. 일반 마법사이기는 하지만 달인(Master)의 경지에 올랐고, 돌연변이가 됨으로써 신체 능력의 비약적인 상승을 이루었다. 마법사라면 누구나 오매불망 꿈꾸는 전투 마법사(War Mage)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수준까지 오른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았다. 나와는 상성이 최악인 놈이다. 그놈은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주현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거기다 최후의 보루로 믿고 있던 파더의 상황을 확인한 순간, 곧바로 도망이라는 길을 선택했다. 사실 곧 다른 괴물들이 정리될 상황임을 고려하면 꽤나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무사히 도망친 지금, 주현호의 입장에서 두 개의 선택지가 새로이 놓였다. 첫 번째는 이대로 멀리멀리 도망쳐 사용자들의 시선을 피해 숨어 지내는 것. 아니면…. “흐…. 흐흐…. 이놈들….” 문득, 주현호의 입에서 섬뜩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다 같이…. 모조리, 깡그리 죽여버리겠어….” 파르르 떨면서도 입가가 기묘하게 비틀어졌다. 그렇게 뜻 모를 말을 지껄인 주현호는 도로 미끄러지듯이 이동했고, 금세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 김수현의 화려하기 그지없는 움직임에 광장에 있는 모두가 시선을 빼앗겼다. 그러나 넋을 잃은 건 잠시. 한소영은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광장이라는 공간에 한정해서 서로 쫓고 쫓기는 숨막히는 추격전을 벌이고 있다. 현재 상황은 김수현이 확실한 우위를 점하고는 있었으나, 상황 자체가 굉장히 아슬아슬하다. 잠깐 삐끗하기라도 한다면 한순간 주도권을 놓치고 말 것이다. 한소영은 생각했다. 이대로 가만히 구경하면서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 어떻게든 머셔너리 로드를 방해하지 않으며 확실하게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해. 그러면 적어도 저 어마어마한 움직임을 정확히 예측해야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거기, 총 사령관…. 아니. 이스탄텔 로우 로드인가? 맞나?” 그때였다. 한소영이 한창 고민에 빠져들려는 찰나, 조용한 목소리가 귓전으로 흘러들었다. 흘긋 시선을 돌리자 담담해 보이는 사내와, 담담해 보이는 척을 하려 애쓰는 사내가 보였다. 허준영이 안현을 대동한 채 한소영 옆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리고 꼿꼿이 서 있는 허준영을 확인한 순간. “아.” 한소영의 머릿속으로 모종의 생각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사실 한소영과 허준영은 서로 모르는 사이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아주 잘 아는 사이도 아니고. 정확히는 얼굴만 한두 번 익힌 사이랄까? 한때 이효을이 북 대륙의 수호자였던 시절 한소영 역시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고, 같이 활동하는 과정에서 허준영과 안면을 익힐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만해도 허준영은 이효을의 전담 도우미로써 여러 일을 도와주던 사용자였으니까. 아무튼 그때 한소영이 허준영을 보며 느꼈던 감정은, 매우 수준 높은 민첩 계열 특화 사용자라는 것 정도였다. 허준영이 입을 열었다. “상황이 급해 보이니 이만 각설하지. 한 놈이 도망쳤다.” “한 놈? 도망?” 한소영이 반문했다. 더 자세히 말해달라는 의미였다. 허준영은 차분히 머리를 끄덕이고는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아까 주현호가 쓰러져 있던 자리였다. 지금은 휑하니 비어있지만. “처음 들어왔을 때 깐죽거리든 놈 기억하나? 김수현이 처치한 놈 말이야.” “기억해요.” “그대로 죽은 줄 알았는데, 갑자기 모습이 사라졌어. 시체도 보이지 않으니 도망친 게 확실하다. 추적을 하고 싶은데.” “…….” 허준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소영은 곧장 광장을 훑어보았다. 허준영의 말대로 그 어디에도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 상황을 완전히 인지한 순간, 한소영의 사고 회로가 빠르게 회전하며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괴물은 일반 괴물과는 범상치 않은 놈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괴물이 보이지 않는다. 도망친 것 같다. 동료들은 싸우고 있는 와중에 도망쳤다? 왜? 가망이 없다 생각해 도망쳤을 가능성이 높고, 그러면 차후에 추적해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그 괴물이 모종의 계획을 꾸미고 있고, 그래서 도망쳤다면…. 어차피 괴물과의 전투가 끝난 지금, 필요 없는 클래스들이 있다. 생각은 약간 길었지만, 결정은 곧바로 내릴 수 있었다. “근접 계열 클래스 서른 명을 차출하겠어요. 지금 당장 도망친 놈을 최대한 빠르게 추적하세요. 필요하면 그 자리에서 죽여도 좋아요.” “으, 응? 서른 명?” 허준영이 깜짝 놀란 목소리로 회답했다. 저 예쁜 얼굴에서 아무렇지 않게 죽여도 좋다는 말이 나온 것보다는, 서른 명이나 차출해가라는 말이 더욱 놀라웠다. “네. 서른 명. 근접 계열이요. 하지만 그림자 여왕은 차출에서 제외하세요. 사용자 고연주는 저와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아아, 알겠는데…. 서른 명? 그 정도까지는…. 그냥 열 명, 아니 다섯 명 정도만 있어도 될 것 같은데.” “구덩이 구조는 굉장히 복잡해요. 흔적이 섞여있거나 찾기 어렵다면, 인원을 나누어야 할지도 몰라요.” “아하. 그건 생각 못했군. 아무튼, 좋아. 그렇게 하지. 그럼 허락도 받았으니….” 허준영은 단박에 한소영의 말을 이해했다. 이내 안현을 데리고 미련 없이 등을 돌리려는 찰나, 우뚝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갑자기 한소영이 손을 들어 제지했기 때문이다. “그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군요.” “……?” “당신, 머셔너리 로드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나요?” “김수현의…?” 허준영이 의아한 얼굴로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잠시 김수현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으쓱 어깨를 들먹였다. “왜 갑자기 묻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글쎄. 약간은?” “약간?” “사실 완벽히 잡아낼 자신은 없어. 하지만 저 어빌리티는 나도 배운 적이 있거든. 그때 배우는 과정에서 김수현이 여러 움직임을 알려줬는데, 그 움직임들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의 추측은 가능하지. 내가 아는 김수현이라면…. 이 정도?” “좋아요. 그러면 당신도 방금 할 일이 생겼네요. 그러니 차출 및 추적 임무는 여기 있는 기공창술사에게 맡기겠어요. 아까 제가 했던 말은 기억하시겠죠?” 사실상 반쯤은 기대하지 않고 던진 말이었으나, 뜻밖에도 긍정적인 회답이 돌아왔다. 아까 잠시 스쳐 지나간 인연의 기억이 하나의 키가 되어준 것이다. 정확히는 한소영이 생각하는 계획의 성공 가능성을 그나마 높여주는 것에 불과했지만. 좌우간 아예 읽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안현은 물론, 허준영도 떨떠름한 기색을 보였다. 지시를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다. 한소영의 말인즉, 안현에게 나름 중대한 임무를 맡기겠다는 소리였다. 안현은 실력은 확실히 준수하지만 지휘 쪽에서는 한참이나 경험이 부족한 사용자였다. 엄밀히 말하면 통과의례 때는 리더의 기질을 보였을지는 몰라도, 김수현과 함께 지내면서 그 재능을 잃어버렸다. “그 임무는 제가 맡도록 하지요.” 그때, 패닉에 빠진 안현을 구원해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순간 모두의 시선이 한소영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신재룡이었다. 언제부터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지는 모르나, 적당히 이야기가 마무리됐다 생각하자 끼어든 것이다. “아무리 한 놈이라고는 해도, 그놈은 확실히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근접 계열만 가는 건 위험할 수도 있어요. 마침 제가 사제이기도 하니, 허준영군을 대신해 임무를 맡겠습니다.” 신재룡은 안현의 어깨를 짚으며 진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허준영은 한결 안도한 얼굴로 한숨을 흘렸다. 신재룡이라면 경험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김수현이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몇 안 되는 클랜원들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한소영도 큰 불만은 없었다. 신재룡의 말이 옳다고도 생각했고, 척 봐도 기공창술사보다는 노련해 보이는 사용자였다. 그와 동시에, 이 상황에 조금 맞지는 않지만, 한소영은 김수현이 부럽다는 감정을 느꼈다. 머셔너리 클랜원들은 여느 사용자들보다 한 발 앞서 상황을 읽고 침착하게 행동하고 있다. 적어도 클랜 로드의 입장에 있는 이라면 그 누가 이런 사용자들을 탐내지 않을까? 이윽고 한소영이 살짝 누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근접 계열, 궁수, 사제는 적당히 차출해도 좋아요. 하지만 마법사들은 3명 이하로 차출해주세요. 미안하지만 지금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현아. 가자꾸나.” “예!” “하하. 너무 긴장하지는 말고. 그냥 언제나처럼 의뢰 하나 맡았다고 생각해. 아무튼 나는 사용자들을 모으고 있으마. 그리고 너는 일단 헬레나 양을 찾아서….” 신재룡이 왔다는 사실에 힘을 얻었는지 안현이 힘찬 목소리로 회답했다. 이내 서로 의견을 나누며 멀어지는 두 사용자를 보다가, 한소영은 도로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방에는 여전히 김수현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움직이며 파더를 유린하고 있다. 그리고 누적 데미지로 인해 슬슬 지쳐가기 시작했는지, 어느덧 파더도 처음보다는 약간은 굼뜬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걸 보는 한소영의 목울대가 아름다운 고저를 그렸다. 호재다. 움직임이 느려지면 느려질수록 성공 확률은 더욱 높아가니까. 아무튼 임무는 맡겼으니 이제 자신이 할 일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차라리 같은 여인이라면 모를까. 그럼 차라리 납득이라도 하겠다. 그런데 저런 괴물에게 빼앗기면(?) 왠지 모르게 자존심에 금이 갈 것 같은 느낌이다. 한소영은 아까 파더에게서 전해졌던 초감각을 떠올렸다. 그리고 입술을 꼭 깨문 찰나, 때마침 천천히 다가온 허준영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갔군. 그나저나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들었는데, 정확히 무엇을 하면 되지?” ============================ 작품 후기 ============================ 벌레 : 화정에 1표. 사준환 : 화정에 2표. 야베스 : 화정에 3표. yuleca : 화정에 4표. MoonLightfantasia : 화정에 5표. 영혼의숲 : 화정에 6표. hohokoya1 : 화정에 7표. 판타지시청자 : 화정에 8표. ……. 물ing : 화정에 19표. ……. …………. ………………. ……………………. 아니. 독자님들. 잠시만요. 제가 처음에 코멘트를 보고 잠깐 헷갈리기까지 했습니다. 설문 조사를 몇 번이나 확인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화정이라는 이름이 보이지가 않아요. 네? 아쉽지만 화정은 2차 투표에 없었어요. 저 지금 굉장히 단호하며, 진지합니다. 얼마나 진지하냐면 말이죠, 다들 진지는 드셨나요? …죄송합니다. 한 번은 해보고 싶었어요. 어쨌든 지금 이것도 워드에서 궁서체로 적고 있어요.(사실은 새 굴림체입니다. '- ^*) 자자. 아무튼 모두 진정하시고요. 안타깝지만 화정은 현재 투표에 없어요. 3차 투표를 열면 그때를 기약해주세요. _(__)_ 『2차 캐릭터 투표 결산(총 2035표.).』 『캐릭터(이름) / 득표(%) / 순위 / 비고』 1. 한소영 / 897표(45%) / 1위 / 일러스트 제작 확정! 2. 김유현 / 374표(19%) / 2위 / 2차 본선 진출. 3. 비비앙 / 309표(16%) / 3위 / 2차 본선 진출. 4. 김한별 / 170표(9%) / 4위 / 2차 본선 진출. 5. 남다은 / 78표(4%) / 5위 / 2차 본선 진출. * 6. 차소림 / 77표(4%) / 6위 / 탈락. 7. 임한나 / 72표(4%) / 7위 / 탈락. 8. 이유정 / 58표(4%) / 8위 / 탈락. 현황이 이렇게 됐습니다. 후후. :) 우선 차소림, 임한나, 이유정은 조금 안타깝지만 다음 기회를 노리겠습니다. 그리고 한소영은 일러스트 확정이고, 나머지 네 명. 그러니까 김유현, 비비앙, 김한별, 남다은으로 새로 경합을 벌일 예정입니다. 즉 독자님들의 코멘트로 가장 일러스트를 보고 싶으신 캐릭터를 적어주시면, 제가 하나하나 세어서 결산 후 다음 회 후기를 통해 알려드릴게요.(또한 이번 회에 적힌 코멘트만 결산하겠습니다.) PS. 그리고 혹시나 말씀 드리지만, 김유현, 비비앙, 김한별, 남다은. 이 네 명에서만 말씀해주세요. 제발요. 독자 분들의 소중한 한 표를 소중하게(?) 행사해주세요. 화정은 물론, 저번 1차 투표 때처럼 (에)로X미나, (에)로유X는 절대로, 절~대로, 저어어어어어어얼~대로 표로 인정하지 않겠어요. 0582 / 0933 ---------------------------------------------- 누구나 한 번쯤은 빛나는 시절이 있다. 매우 당연한 말이기는 하지만, 김수현은 인간이다. 그런 만큼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한 명의 인간으로써 살아오며 몸에 배인 여러 습관 혹은 버릇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중에서 '그르다.'라고 분류될 수 있는 것들 중 하나를 꼽아보면, 기본적으로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이다. 크게 잡으면 서로간의 관계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거기서 조금 더 범위를 좁혀보면 부하들의 일 처리를 믿지 않는 버릇이 있다. 말인즉,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꼭 자신이 과정을 이끌어야 하고, 그게 여의치 않다면 결과라도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랄까? 그러한 관점으로 보면 김수현은 부하들의 입장에서는 까다로운 클랜 로드가 틀림없다. 한편으로는 그 버릇이 현재 머셔너리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지나친 김수현 중심 체제.'의 시발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김수현이 지나치게 간섭하고 활동함으로써 다른 사용자들의 활동할 수 있는 부분이 죽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 그리고 어디서나 예외는 있듯이 김수현이 자신의 버릇을 접어두는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정확히 6명, 아니 이제는 5명의 클랜원에 한해서는 김수현도 자신의 터치를 최소화하는 경향이 있다. 한 명 한 명을 말해보자면 우선 근접 계열에서는 남다은, 원거리 계열에서는 선유운, 마법사 계열에서는 비비앙, 사제 계열에서는 신재룡, 그리고 암살자 계열에서는 고연주 정도를 들 수 있다. 물론 이 5명 중에서도 엄연히 서열이 존재하며, 이중 김수현이 가장 신뢰하는 사용자는 단연코 '그림자 여왕' 고연주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할 정도로 신뢰하는 클랜원이 한 명 더 있으니, 다름 아닌 사용자 신재룡이었다. 신재룡은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에서 김수현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일로 첫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뮬이 부랑자들에게 습격을 받아 김수현이 실종됐을 때는, 은혜를 갚는다는 일념으로 사지일지도 모르는 곳에 자원했다. '그럼…. 저를 구하려고 구조대에 참가하신 겁니까?' '예. 제 목숨을 구해주셨으니까요.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은인이 곤경에 처한 것을 알고서도 모른척하는 것은, 금수만도 못한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그 말에 김수현은 나름 깊은 인상을 받을 수 있었고, 거기서부터 비로소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되었다. 이후 신재룡은 김수현을 그림자처럼 따르며 여러 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어긋나지 않았고, 나설 때와 물러날 때를 알았다. 그러나, 과시하지는 않았다. 사실상 소싯적부터 김수현을 따라다니며 무수한 경력을 쌓았으면 자연스럽게 영향력이 따라오는 법이다. 하지만 신재룡은 스스로 그 권한을 거부했다. 고연주를 선택한 김수현의 결정을 존중했거니와, 자신으로 말미암아 생길 수 있는 클랜 내의 불화를 애당초 방지한 것이다. 그저 무소의 뿔처럼 조용하게, 그리고 언제나 묵묵하게. 그게 바로 신재룡이라는 사용자였다. 김수현과 고연주가 그런 신재룡의 태도를 모를 리가 없다. 그래서, 김수현은 신재룡을 신뢰한다. 김수현만 빼면 무서울 것 없다는 고연주지만, 신재룡 앞에서는 항상 깍듯한 예의를 차린다. 그리고. 두 10강의 인정을 받은 사용자 신재룡은, 지금 이 상황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중이었다. “재룡 형!” 빠르게 사정을 설명하고 헬레나를 데려온 안현은, 한쪽에 사용자들을 모아놓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신재룡을 보고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자신이 고작 한 명을 찾고 데려오는 사이에 신재룡은 어느새 30명의 사용자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정확히는 신재룡 포함 26명이었지만. 이내 안현과 헬레나가 합류함으로써 인원은 총 28명이 되었다. 무사 로드 고오환, 죽음의 기사 유지태, 처형의 공주 연혜림….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헬레나 양. 사실 마법사들이 부족해서 약간 걱정하고 있었는데,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입니다.” 도대체 언제 이런 사용자들을 불러모은 거지, 라고 생각하며 안현이 모여있는 사용자들을 둘러보고 있을 무렵. 신재룡과 헬레나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별말씀을. 오히려 이런 재미있어 보이는 일에 초대를 받으니 한없이 감사할 따름이옵니다.” “허허. 그리 재미있는 일은 아닐 텐데요. 아무튼 사정은 현이에게 들으셨죠?” “듣지 못했다면 재미있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겠지요.” “좋습니다. 저도 막 설명을 끝냈으니 바로 출발하도록 하죠. 현아! 옆으로 와라!” 이윽고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린 안현이 신재룡의 옆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신재룡과 안현을 선두로 한 28명의 사용자들은 곧바로 광장에서 벗어나 주현호의 추적을 시작했다. 그렇게 막 광장을 벗어나기 직전. “현아?” 안현이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돌려 광장을 바라보았다. 김수현은 여전히 파더를 상대하며 전력을 다해 싸우고 있다. 남은 사용자들은 한소영의 지휘 아래 모종의 준비를 차곡차곡 진행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안현은 잠시 생각했다. 수현이 형은…. 지금 내가 떠나는걸 과연 알고 계실까? 뜬금없이 든 생각이었다. 안현 스스로도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그저 걱정인 듯하면서도 불안인 것 같기도 한, 뜻 모를 오묘한 감정에 전신이 사로잡혔다. “현아!” 하지만 그런 기분도 잠시. 신재룡의 채근에 안현은 바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광장 내 여러 개의 문 중에서, 주현호의 핏자국이 이어진 문을 나서 어두운 통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추적은 처음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지면에 찔끔찔끔 떨어져있는 핏자국들이 주현호가 도망친 길을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통로로 돌입한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추적대는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한소영의 말대로,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흔적이 사라지는 동시에 통로가 두 갈래로 갈라졌기 때문이다. “음. 이러면 약간 곤란해지는데요.” 유지태는 두 갈래의 길을 보며 혀를 쯧쯧 차더니 신재룡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용자 신재룡?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까 말씀해주신 계획대로 하시겠습니까?” 아까 말씀해주신 계획? 안현이 의아한 기분으로 시선을 돌리자 묵묵히 서 있던 신재룡이 차분히 머리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하죠. 아까 말씀드린대로, 사용자 유지태는 편성한 조원들을 이끌고 이쪽 통로를 수색해주십시오.” “으음. 인원을 나눈다는 의견에는 동의합니다만…. 사용자 신재룡. 도망친 놈은 고작 한 놈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앞으로 통로가 얼마나 갈라질지 모르는데, 7명은 약간 많은 감이 없잖아 있는 것 같습니다.” 말인즉, 나누는 인원을 줄이자는 소리였다. 혹여 신재룡의 기분을 상하게나 하지는 않을지 유지태는 조곤조곤 한 목소리로 의견을 개진했다. 신재룡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더니 가볍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통로에 관한 말씀은 동의하지만, 그래도 여기서 인원을 더 줄일 수는 없습니다. 사실 7명도 최소한으로 생각하는 인원입니다. 여러분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놈은 여타의 괴물과는 확연히 다른 놈이라 생각됩니다. 또한 그놈 말고도 다른 괴물들이 더 있을 수도 있음을 고려해주셨으면 합니다.” 부드러운 회답이었다. 신재룡의 침착한 목소리에서, 잔잔한 미소에서 무언가를 느낀 걸까? 유지태는 한두 번 눈을 깜빡이다가 돌연 빙긋 웃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혹여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연락을 드리도록 하죠.” 그리고 통신용 수정구를 들어올리더니 삽시간에 6명을 추려 왼쪽 통로를 향해 달렸다. 이내 저 멀리 사라지는 7명의 사용자를 확인한 후 안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재룡 형. 조를 나누다니요?” “통로가 갈라지고 있잖니. 지금 28명이 있으니까, 이런 상황을 대비해 미리 조를 4개로 나눈 거란다. 물론 너와 헬레나 양은 나랑 같은 조고.” 신재룡이 자상히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설명을 마친 후, 곧장 오른쪽 통로를 향해 출발을 알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른쪽 통로로 들어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지태의 걱정이 현실로 나타났다. 안현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끄럽기 짝이 없던 광장에 있었던 게 거짓말 같다고 생각할 즈음, 또다시 통로가 갈라진 것이다. 더구나 이번에는 두 개가 아닌 세 개로 갈라졌다. 그것은 남은 21명이 완전히 찢어져야 한다는 소리였다. “헤에, 완전히 미로가 따로 없네. 정말 장난이 아니잖아?” 연혜림이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빈정거렸다. “어쩔 수 없지요. 아무튼, 각 조장 분들께서는 차후 갈라지는 통로가 나와도 절대로 임의대로 인원을 나누지 마십시오. 무조건 7명을 유지하셔야 됩니다.” “그래야겠지 뭐.” “좋습니다. 그럼 처형의 공주께서 왼쪽 통로를, 저는 중앙 통로를, 그리고 나머지 분들께서는 오른쪽 통로로 가시면 되겠습니다.” “Okay~.” 상큼한 목소리로 회답한 연혜림은 바로 6명을 끌고 왼쪽 통로로 사라졌다. 이어서 다른 조마저 오른쪽 통로로 들어가버리자, 비로소 통로에는 7명만이 남게 되었다. 문득 남은 인원을 둘러본 안현은 미약한 불안감을 느꼈다. 고오환, 신재룡, 헬레나 등…. 물론 약하다고는 할 수 없는 전력이지만, 아까 든든히 믿고 있던 죽음의 기사나 처형의 공주가 사라지니 뭔가 휑한 기분마저 들었다. “저기, 재룡 형. 우리 괜찮을까요?” “응? 괜찮을까요 라니?” “그, 그렇잖아요. 예를 들면 아까 괴물 같은 놈들이 갑자기 떼거지로 나온다거나….” “엉? 어이,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그때였다. 아까부터 주변을 어정어정 서성이던 고오환이 갑작스럽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안현이 흠칫한 순간, 고오환을 흘긋 살펴본 신재룡이 옅게 미소 지으며 안현을 바라보았다. “괜찮다. 물론 어느 정도의 위험은 고려해야겠지만, 다 최대한 고려해서 조를 나눈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무사 로드도 계시잖아?” “어흠, 어흐흠!” 벌컥 소리를 지르려던 고오환이 돌연 어색한 헛기침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대검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었다. “그럼 그럼. 너희는 아무 걱정 말고 나만 믿고 따르면 된다고. 도망친 괴물 따위가 나와봤자 내가 한 칼에 도륙을 내버릴 테니까!” 그렇게 말한 고오환은 빙글 몸을 돌려 중앙 통로를 향해 대검을 겨누고는, “그러니까 징징거리는 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가기나 하자고!”라고 외쳤다. 그리고 약간 비틀거리는 듯한 팔자 걸음으로 앞장서서 걸어가기 까지. 그러자 멍멍히 서 있던 안현의 미간이 살그머니 좁혀졌다. 요새 좀 잠잠한가 싶더니 또 발동이 걸린 모양이다. 그것도 다른 사용자들이 있을 때는 가만히 있다가, 7명만 남게 되자 나서기 시작했다. “잠시만요. 무사 로드.” 그때였다. 안현이 발끈하려는 찰나, 문득 어깨를 지긋이 누르는 감촉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아까와는 다른, 한없이 낮게 깔린 신재룡의 목소리가 안현의 귓전을 울렸다. 안현은 떨떠름히 시선을 돌렸다. 신재룡이 고오환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폐가 옥죄어오는 게 느껴지고, 온몸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있다. 그러고 보니 약간이지만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으로 호흡을 조절하며 계속해서 이형환위를 사용해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화륵, 화르륵! 무검으로 만들어낸 상처가 시뻘겋게 타들어 가는걸 확인한 후, 나는 주변을 빙글빙글 돌듯이 빠르게 발걸음을 놀렸다. 벌써 몇 번이나 이형환위를 사용한 걸까?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100번은 넘었을 것 같은데. 그나마 파더의 움직임이 조금이나마 굼떠졌다는 사실을 한 줄기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사실 조금 의아하기는 하다. 지금껏 계속해서 공격을 성공시키는 동안 파더의 몸체는 거의 걸레짝 비슷하게 변했다. 이러한 상황이 이어지면 뭔가 다른 수를 내보일 법도 한데, 파더는 여전히 촉수와 가루를 이용한 공격만을 고집하고 있었다. 마치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꼭 잡고 말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휙! 바로 이렇게. 한순간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촉수 공격에 간담이 서늘해졌으나 나는 곧바로 정신을 다잡았다. 방금 공격에서 처음과 같은 날카롭게 쇄도하는 기세가 아닌, 힘없이 마구잡이로 들어오는 기세가 느껴졌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나도 온전한 상태라고는 말 못하지만 파더가 완연히 지친 기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호. 이건 누구 생각이지? 꽤나 재미있는데? 그때, 묵묵히 서포트하던 화정이 갑작스럽게 말을 걸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 아. 지금 설명할 수는 없어. 아무튼…. 어이, 김수현. 준비해. 무슨 준비를 해야 하냐고 반문하려다가, 나는 속으로 꾹 밀어 넣으며 움직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묘하게 촉수 공격 빈도가 줄은 것 같은데? - 잘 들어. 지금부터 천천히 속도를 줄여. 그리고 이형환위도 웬만하면 사용하지 말고. '뭐?' 나는 순간 귀를 의심하고 말았다. 지금 화정이 무슨 말을 한 거지? - 공격은 하지 않아도 좋아. 무조건 회피에만 집중하되, 어그로는 계속해서 유지시켜. 그리고 내가 말할 때, 그 한 번의 타이밍을 노려. 그것 외에는 너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 '타이밍? 도대체 무슨 소리야.' - 말했잖아. 내가 말할 때, 그때 단 한 번만 정통으로 저놈한테 검을 꽂아 넣기만 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응? 알아들어? '아까부터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네 말은 나를 못 믿겠다는 뜻인가?' 그러자 화정이 갑작스럽게 침묵을 지켰다. - …미, 미안해.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너를 조금이라도 돕고 싶어서…. '…….' - 기분…. …많이 상했어? '킥.' 나는 결국 참지 못해 속으로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갑자기 생기기 시작한 여유의 원인이 궁금하지만, 우선은 화정의 말에 따를 생각이었다. 나보다 넓은 시야를 가진 만큼 하라는 대로 해도 최소한 손해는 보지 않을 테니까. 이제야 알아차린 걸까? - 죽인다! 화정이 벌컥 화를 내며 거칠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때마침 파더가 뿌려낸 가루 공격이 온몸을 뒤덮어 나는 가볍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아니야! 이게 아니란 말이야!' 라고 발광하는 화정을 뒤로한 채 지면에 사뿐히 착지했다. “…허.”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징글징글하게 많던 촉수가 어느덧 절반 이상이 사라졌다는 것을. 그것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사실 저번 투표 때 코멘트가 200개 정도가 달려서 그쯤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설마 600개가 넘게 달릴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결산하면서 정말…. ㅋㅋㅋㅋ. 그래도 많은 관심 정말로,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_(__)_ 우선 결과 보여드릴게요! 『2차 캐릭터 투표 결산.』 『캐릭터(이름) / 득표 / 순위 / 비고』 * 한소영은 2차 투표 1등으로 일러트스 제작 확정입니다. 1. 비비앙 / 234표 / 1위 / 일러스트 제작 확정! 2. 김한별 / 87표 / 2위 / 탈락. 2. 남다은 / 87표 / 2위 / 탈락. 4. 김유현 / 57표 / 4위 / 탈락. * 아래는 무효 표 목록입니다. 1. 화정 / 29표 / 화정은 다음 투표를 노려주세요~. 2. 파더 / 4표 / 파더~. 정말 보고 싶으신 거예요? ㅎㅎ. 3. 한소영 / 4표 / 한소영은 일러스트 제작 확정이에요~. 4. 김수현 / 4표 / 김수현은 주인공 특권으로 일러스트 확정입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요. :) 5. 마르 / 1표 / - 6. 수라마창 / 1표 / - 7. 아내 / 1표 / - 8. 임한나 / 1표 / - 9. 빙정 / 1표 / - 10. 헬레나 / 1표 / ? 11. 김비앙 / 1표 / ?? 12. 로유미 / 16표 / ??? 13. 로리유미 / 1표 / 아 진짜. 14. 에로유미 / 12표 / 아 가짜.(…ㅈㅅㅈㅅ. 쥬스쥬스란 뜻이에요.) 15. ロユミ(해석 : 로유미) / 1표 / ㅡㅡ. 이거 검색기 돌려보고 억 소리 나왔어요. 16. 에로유진 / 12표 / 아 쫌. 17. 로유진 / 6표 / 그나마 낫다고 생각이 드는데, 왜 슬퍼지는 걸까요. ㅜ.ㅠ 18. 로리거유진 / 1표 / 아나. 19. 로변태 / 1표 / 콘다. 20. 거유미 / 1표 / ……. 21. 에로유미현 / 1표 / 음? 22. Ero유미 / 1표 / 헐. 대단하십니다. 23. X유미 / 1표 / =ㅁ= 24. 로으리유미 / 1표 / ㅋㅋㅋㅋㅋㅋㅋㅋ. 25. 로유미짜응 / 1표 / 에베베베? 26. 유미유미로유미 / 1표 / 에베베베베베베베? 27. 로(리+거)유미 / 1표 / 후…. 28. 에로작가 / 1표 / 음. 이건 받아들일 만 하네요. 어쨌든 일러스트는 한소영, 그리고 비비앙으로 확정됐습니다! 남다은이나 김한별도 선전했지만, 아깝네요. 김유현도 생각보다는 많은 표를 받은 것 같고요. ㅎㅎ. PS. 음…. 무효 표 목록을 보면, 제가 그동안 숨겨왔던 BL력을 발휘할까 생각하게 만드네요. 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이만 타협하도록 해요. :) 0583 / 0933 ---------------------------------------------- 누구나 한 번쯤은 빛나는 시절이 있다. 신재룡이 고오환을 불렀다. “앙?” 팔자 걸음으로 비틀비틀 걸어가던 고오환은 바로 몸을 돌리더니 떨떠름한 기색을 보였다. 그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만 짓고 있던 신재룡이 살짝 굳은 얼굴로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걸음 두 걸음 성큼성큼 다가가자 고오환은 약간 당황한 얼굴로 끔뻑끔뻑 눈을 움직였다. 고오환도 한 덩치 하는 사내였으나 신재룡도 그에 못지않다. 이윽고 신재룡이 바로 앞에서 멈추자 고오환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냥 마음씨 좋은 부드러운 사내인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마주보게 되니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이윽고 언뜻 눈을 내리깐 신재룡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혹시, 다치셨습니까?” “무슨…! 어, 어?” “아까 전투하시면서 부상을 당하셨냐는 말입니다.” “…….” 예상치 못한 말을 들어서일까? 일순 고오환의 얼굴이 멍하게 변했다. 신재룡은 참을성 있게 회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말이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라 양해를 구하곤 천천히 팔을 뻗었다. 오른쪽 대퇴부 부근으로. “왜, 왜 이래?” 고오환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물렸다. 아니 물리려고 했지만, 갑작스레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몸을 크게 비틀거렸다. 찌그러진 입 사이로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신재룡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였군요. 부상이 있으면 말씀을 해주셨어야죠. 제가 사제인데요.” “어이, 어이!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부상은 경미했어. 그리고 전투가 끝나고 사제한테 확실히 치료도 받았다고.” 고오환이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했다. 그러나 신재룡은 머리를 가로젓더니 차분히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 ───. ───. 치료(Cure).” 잠시 후, 지팡이에서 하얀 빛이 흘러나와 고오환의 대퇴부로 스며들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신재룡은 한 번 더 주문을 외웠다. “───. ───. ───. 신념의 오러(Aura Of Faith).” 이번에는 찬연한 빛을 품은 기운이 고오환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그리곤 은은한 광채를 흘리며 둥글게 흐르기 시작했다. “치료를 보강하고 버프 주문을 외웠습니다. 기본적으로 활동력을 높여주는 버프지만, 치료를 받았을 경우 재생력을 높여주는 효과도 있습니다.” 두 개의 주문을 외운 신재룡은 그제야 얼굴을 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 참. 고작 경미한 부상 가지고 법석 떨기는. 아무튼 알겠으니까, 어서 가기나 하자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았으면 응당 감사할 법도 한데, 무에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고오환이 뚱한 얼굴로 퉁명스레 내뱉었다. 그러나 신재룡은 이번에도 머리를 가로저었다. “안됩니다.” “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우리 7명은 여기서 잠시 휴식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오래 쉴 수는 없으니 한 5분 정도만 쉬도록 하지요. 그 정도면 충분할….” “잠깐 잠깐.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여기서 휴식을 하시겠다? 이봐, 당신 정신 나갔어?” “신성 주문이 만능은 아닙니다. 정말 작은 부상이거나 대 치료 급의 주문이 아니라면 치료 후 휴식 시간을 갖는 게 정석이죠. 겉모습만이 아닌, 파손된 부분이 제 기능을 회복할 시간을 줘야 합니다.” “아니, 그러니까 말했잖아. 경미한 부상이었다고. …치료도 받았고.” “치료를 받으신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정말 경미한 부상이었다면 아까처럼 비틀거리지 않으셨겠지요. 허벅지를 뚫고 나간 관통상, 아니면 이빨에 깊숙이 씹혀 지속적인 출혈. 최소한 이 정도로 생각되는데요?” “…….” 신재룡이 설명이 이어지자 고오환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변했다. 크게 떠진 두 눈에는 흡사 귀신이라도 본 듯한 경악이 서려 있다. 결국 고오환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말았으나 신재룡은 괜찮다는 듯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지금부터 딱 5분만 쉬도록 할까요? 나중에 괴물 놈을 한칼에 썰기 위해서라도 말이죠.” 그리고 한쪽 눈을 찡긋하며 먼저 바닥에 털썩 주저앉기까지. 고오환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제스처를 보였으나 같이 있던 사용자들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신재룡의 말 하나하나가 사리에 들어맞거니와, 애당초 사제는 일행의 건강을 책임질 의무가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신재룡은 굉장히 유능한 사제임을 입증한 셈이며, 고오환은 억지를 부린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젠장. 나도 몰라!” 그렇게 아무도 호응해주지 않자 고오환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벌렁 드러누웠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신재룡을 흘끔거리며 더 이상 떠들지 않는걸 보니,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 모양이다. “오.” 그리고,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안현은 작게나마 감탄하고 말았다. 사실 안현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유정이 그리워지던 찰나였다. 언제나 허허 웃는 신재룡 성격에 고오환에게 끌려 다닐까 봐 걱정도 들었다. 그러나 신재룡은 김수현이나 이유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고오환을 잠재웠다. 저 나서기 좋아하는 고오환이 어느 순간 조용히 있는 걸 보니 신기한 기분마저 들었다. 아무튼. 걱정도 덜었겠다, 5분간 휴식한다는 말에 이곳저곳 둘러보던 안현이 문득 한 곳에서 시선을 멈췄다. 자신과 약간 떨어진 지점에서 헬레나가 하염없이 천장을 쳐다보고 있다. 그것도 무척 흥미로워하는 얼굴로. 안현의 다리가 자동적으로 움직였다. “헬레나. 뭘 보고 있는 거예요?” 슬쩍 말을 걸자 헬레나의 눈동자가 살그머니 내려와 안현을 흘겼다. 그러나 곧 도로 올라가더니 빙그레 웃으며 천장을 가리켰다. “천장?” 안현이 의아한 목소리로 반문하곤 천천히 머리를 젖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은 토굴답게 흙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딱히 별다른 게 보이진 않았다. 핏줄처럼 울룩불룩 튀어나온 부분들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구덩이로 들어왔을 때에도 본 것들이다. 도대체 뭘 보라는 걸까? 딱! 안현이 머리를 갸웃할 즈음, 별안간 헬레나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안현이 보고 있던 천장의 일부가 깊게 파이며 흙들이 조각나 떨어져 내렸다. 안현은 본능적으로 파인 부분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번듯하던 이마에 미미한 주름살들이 생겨났다. “어…?” 텅, 비어있다. 파인 부분 너머로 흙이 들어차 있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텅 비어있었다. 마치 안에 있던 무언가가 빠져나간 것처럼. 여전히 부스스 떨어져 내리는 흙 가루들이 볼을 간질이자 안현은 잠깐 놓았던 정신 줄을 되찾을 수 있었다. “헬레나. 지금 저게 왜….” “자, 5분이 지났네요. 그럼 이제 출발하도록 합시다.” 그러나 안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신재룡의 출발 지시가 떨어졌다. 거기다 헬레나도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그냥 걸어가버려, 안현은 궁금함을 해소하지 못한 채 마지못해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통로로 들어가기 직전, 안현은 다시 한 번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까 광장을 나오면서 느꼈던 오묘한 기분이 자꾸만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신재룡 일행은 중앙 통로로 들어간 후 여전히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다. 아니, 걷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까? 아무튼 중간중간 갈라지는 통로가 3개 정도 나오기는 했지만, 말한 대로 신재룡은 더 이상 인원을 나누진 않았다. 그저 꿋꿋하게 중앙 통로를 고수하며 행군했다. 통로는 조용했다. 사용자들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따금 지면에 설치된 광산 철도를 밟는 소리만이 귓전을 두드릴 뿐,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텅! 그러나 약 100미터를 추가로 이동했을 즈음 갑작스럽게 무언가 크게 부딪치는 소리가 통로를 울렸다. 사용자들은 반사적으로 바짝 굳었다가 곧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신재룡의 왼쪽에서 이동하던 사내가 미안하다는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다. “뭡니까?” 신재룡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내는 머리를 갸웃하며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잠깐 무언가를 만지는가 싶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광산 열차인 것 같습니다.” “광산 열차요?” “예. 아마 이 철도에 쓰였던 것이라 생각되는데…. 크기는 서너 명이 들어갈 정도는 되는데, 모양새가 굉장히 조악합니다. 그냥 자전거 앞에 달린 바구니를 보는 기분이에요. 꽤나 낡아 보이기도 하고요.” “별로 중요해 보이지는 않는군요.” 그렇다는 듯이 사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신재룡도 따라 머리를 끄덕이고는 행군의 재개를 알렸다. 이후로 한 5분 정도가 흐르자, 이번에는 어디선가 미약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용자들은 또다시 행군을 정지했다. 자연스럽게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안현은 청각을 높여 소리의 근원을 파악하려 애쓰다가, 일행 중 날씬한 여인이 앞으로 나서는걸 보고 조용히 기다리기로 했다. 등에 맨 활을 보면 궁수가 분명했고, 그렇다면 자신보다는 훨씬 더 잘 들을 수 있을 테니까. 그동안 신재룡은 통신용 수정구를 꺼내 각 조에 연락을 시도했고, 아직 아무 이상 없다는 보고들을 받을 수 있었다. 수정구를 도로 품 안으로 집어넣은 신재룡은 아직도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여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떻습니까?” “음…. 누가 고함을 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비명인가?” “고함, 비명이요?” “아. 방금 끊겼어요. 이제 조용해졌네요. …아무튼 여기서는 잘 들리지 않아요. 조금 더 가봐야 알 것 같아요.” 한동안 앞을 주시하던 여인이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몸을 돌렸다. 신재룡은 잠깐 생각에 잠겼지만 별다른 도리는 없었다. 결국 추가로 전진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앞장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더 가보자는 말에 궁수 여인이 머리를 질끈 묶어 넘기며 요청했고, 신재룡은 흔쾌히 허락했다. 약 10분 동안 추가로 나아가자 앞쪽에서 서서히 어른거리는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통로는 여전히 고요했다. 중간에 한 번 더 갈라지는 통로가 나왔으나 사용자들의 신경은 온통 전방의 불빛에 쏠려있었다. 아까 광산 열차를 건드렸던 사내는 벌써부터 큼직한 방패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젠장! 이년아! 빨리, 빨리 형식이를 낳으란 말이야!” “아악…!” 사용자들이 조심스럽게 불빛을 향해 다가가고 있자, 어느 순간 돌연 날카로운 목소리가 고요한 통로를 크게 울렸다. 정적이 깨졌다. 사용자들의 걸음이 멈췄다. 가장 앞서있던 궁수 여인은 날쌘 몸놀림을 보이며 거의 자동적으로 벽에 붙었다. “빌어먹을! 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암퇘지 같은 년이!” “아, 아직은 안 돼요…. 아가가…. 아가가…!” 그러는 와중에도 소리는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하나는 사내가 거칠게 화내는 목소리였고, 다른 하나는 여인이 애처롭게 애원하는 목소리였다. 잠시 후, 다른 사용자들이 따라 벽에 몸을 붙이자 여인이 천천히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손가락 3개를 폈다가, 꽉 오므려 주먹을 쥐었다가, 전방을 가리키고, 오른쪽으로 꺾었다. 전방 30미터, 오른쪽에서 들려왔다는 소리였다. 이윽고 사용자들이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이동하려는 찰나. “빌어먹을! 추적대가 코앞까지 다가왔단 말이다! 이 망할 년아!” “하아…. 하아….” “콜록, 콜록! …제기랄! 어쩔 수 없지. 조금 이르더라도…!” “아, 아…?” 한순간, 궁수 여인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다른 말은 무슨 소리인지 몰라도, 벌써 추적대가 왔다는 말이 나왔으면 이미 들켰다고 봐도 무방했다. 거기다 어쩔 수 없지 라는 말을 듣자 뜻 모를 불안감이 전신을 엄습했다. 언제, 어떻게 들킨 거지라고 자책하기 전에 여인은 빠르게 신재룡을 돌아보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얼른 돌입해 상황을 정리하자는 무언의 허락을 구하는 눈빛이었다. 이내 신재룡이 지체 않고 머리를 끄덕이자, 사용자들은 각각 무기를 꺼내 들며 여인이 가리킨 방향으로 빠르게 달렸다. 그렇게 삽시간에 30미터를 달려가, 궁수 여인이 가장 먼저 오른쪽으로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악!” 느닷없이 여인의 기다란 비명과 동시에. 철푸덕! 무언가 흠뻑 젖은 것이 지면에 떨어질 때 나는 소리가 들렸다. 한편, 같은 시각. “아?” 후방으로 조용히 물러나 있던 안솔이 갑작스레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찾으려는 듯이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그런 안솔의 두 눈동자는 알 수 없는 불안과 걱정으로 젖어있다. 그러나 원하는 이를 찾지 못한 걸까? “오빠…?” 안솔이 조용하면서도 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안솔은 기본적으로 김수현을 오라버니라 부르지, 오빠라 부르지는 않는다. 또한 오빠라 부르는 사용자는 많다. 그럼 과연 누구를 말하는 걸까? “아저씨…?” 그때, 안솔이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적어도 머셔너리 클랜 내에서, 안솔이 아저씨라 부르는 사용자는 딱 한 명이다. 신재룡이었다. ============================ 작품 후기 ============================ 오늘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특히 이 시간까지 기다려주신 분들에게는 한없이 죄송하며, 또한 감사합니다. 그리고…. 독자 분들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혹여 이번 회에서 Flag나 중요한 복선을 느끼신 분이 있으시다면, 이번 파트가 끝날 때까지는 추측 코멘트는 잠시 마음속에 담아주셨으면 합니다. 특히 이번 회는 더더욱 이요. 혹시 아직 모르실 다른 독자 분들을 위한 배려를 바랍니다. 그럼 모두 즐거운 주말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_(__)_ 0584 / 0933 ---------------------------------------------- 누구나 한 번쯤은 빛나는 시절이 있다. 광장은 조용했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사용자들은 두 부류로 나뉜 채 묵묵히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부류는 조용히 후방으로 물러나 대기하는 사용자들이었고, 다른 부류는 앞쪽에서 모종의 준비를 하고 있는 사용자들이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앞으로 나선 서른 명의 사용자들 중 대다수가 마법사용 로브를 입고 있다는 점일까. 이윽고 그 모종의 준비란 걸 마쳤는지 사용자들이 한껏 긴장한 얼굴로 한소영을 응시했다. 잠시 후, 한소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바인드(Bind).” 20명이 넘는 마법사들이 동시에 똑같은 주문을 외웠다. 개인 기량에 따른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애당초 바인드 자체가 기초 중의 기초 마법이다. 이내 사용자들이 들고 있던 지팡이가 일제히 새하얗게 작열하기 시작했고, 지팡이 끝에 박힌 반투명한 줄기를 몇 가닥씩 토해내었다. 적게는 서너 가닥부터 많게는 열한 가닥까지. 마치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내는 것처럼 보석에서 끝없이 흘러나오는 반투명한 줄기는, 곧 지면으로 살며시 내려앉았다. 특이하게도 바인드 마법이 내려앉은 부분은 하나같이 사용자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때가 되었다고 여긴 걸까? 이번에는 한소영이 고연주를 돌아보았다. 고연주는 한쪽 눈을 살그머니 깜빡이는 윙크로 회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자신의 목을 두르고 있는 얼룩진 스카프를 부드러이 쓰다듬었다. 고대 유적 '잃어버린 낙원'에서 얻은 성과로써, 예전 김수현이 고연주에게 대급한 장비. 낙원의 왕이자 반신이었던 아담의 피가 스며든 '피 묻은 스카프(Bloody Scarf)'였다. “동화.” 고연주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가 울렸다. 피 묻은 스카프에 잠재된 능력 중 하나인 동화(Assimilate)가 발동됐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갑작스레 그림자에 시꺼먼 빛이 짙어지는가 싶더니 지면에 흘러내린 반투명한 줄기들이, 그림자 안으로 서서히 녹아 들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둘이서 동화 작용을 이루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연주는 바인드 마법과 동화하는 그림자를 지긋한 눈길로 응시했다. 그러다 이 정도면 됐다 싶었는지 문득 동화 작용을 멈추었고, 깊숙이 심호흡하며 그림자로 마력을 흘려 넣었다. 바인드 마법과 동화를 이룬 그림자들이, 고연주의 마력이 이끄는 방향으로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니, 길게 늘어지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까? 아무튼 그림자의 이동은 굉장히 느렸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마치 먹잇감을 눈앞에 둔 표범의 그것처럼 조심스럽기 그지없다. 그렇게 사방팔방 어지러이 늘어나는 그림자들을 응시하며 한소영은 침착히 속을 추슬렀다. 이로써 준비는 거의 80%가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남은 건 저 그림자들이 들키지 않고 무사히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것. 그리고 자신과 허준영이 적절한 타이밍을 잡는 것. 그러나,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지금 이 상황에 한정해서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은 없다. 단 하나라도 잘못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오는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가 발생할지도 모르니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김수현과 파더의 전투는 가히 그러고도 남을 정도의 전투 수준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그림자들에 바인드 마법을 연결한 채 지팡이를 으스러져라 쥐고 있다. 고연주는 천천히 그림자들을 이끌며 목적지까지 인도한다. 그리고 한소영과 허준영이 김수현의 움직임을 읽으려 애쓰고 있을 즈음. “아.” 돌연 한소영의 반듯한 아미가 살짝 좁혀지고 말았다. 김수현을 잡으려는데 여념이 없던 파더가 갑자기 행동의 변화를 보였다. 쉴 새 없이 허공을 휘젓던 촉수의 일부를 내려놓더니 성난 코브라처럼 바짝 세우며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머, 제기랄.” 고연주도 파더의 행동을 확인했는지 예쁘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파더가 한소영의 계획을 알아차리고 경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거의 다 왔는데.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그러나 남은 것 두 개 중 벌써부터 하나가 막혀버렸다. 이러면 아예 시작조차 할 수 없잖은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한소영은 반사적으로 입술을 꼭 깨물었다.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보려 했으나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다. 파더를 노려보던 눈매가 살며시 가늘어지며 안타까운 빛이 스쳤다. 그때였다. 한소영의 눈동자를 물들이던 안타까운 감정이 한순간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파더가 경계하는 행동을 보인 그 순간, 별안간 김수현의 행동도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움직이던 속도가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공격도 멈췄다. 오직 파더의 앞을 깔짝깔짝 돌아다니며 어그로를 끄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런 김수현을 보는 한소영의 어여쁜 입술이 서서히 벌어진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수현도 우리 계획을 알고 있었나 봐요.” 느닷없이 들려오는 나른한 음색. 그 목소리에 한소영은 번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럼, 속행해야겠지요?” 고연주가 앞을 가리키며 물었다. 당연하다는 듯 한소영은 단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번에도 김수현이 남은 문제 모두를 해결해주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남은 두 개 모두 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해보면, 그러한 한소영의 생각은 파더뿐만 아니라 김수현이 자신의 계획을 알아차렸다는 것에 있었다.(사실은 화정이 알려준 거지만.) 지금껏 단 한 번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던 김수현이 저런 행동을 보였다는 게 명백한 증거였다. 거기다 경계하는 촉수들 주변을 돌아다니며 어그로를 유지해주기까지. 그렇다면 이야기는 간단해진다. 한소영은 주먹을 꾹 쥐었다. 승리가 목전까지 다가왔다. 드디어. 비로소. 마침내. 저 지긋지긋한 파더를 처리할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소영의 두 눈이 매섭게 빛나기 시작했다. * “아아아아아아아악!” 철푸덕! 무언가 흠뻑 젖은 것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입구 안으로 돌입한 순간 사용자들은 자동적으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는 귓전을 떠르르 울릴 정도의 거대한 비명을 들어야만 했고, 두 번째는 돌입한 공간 내에 펼쳐진 끔찍한 참상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사지가 허공에 잡힌 채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여인들과 한껏 부풀어있는 배. 그리고 이곳저곳을 기어 다니는 괴물 애벌레들. 적어도 눈이 있다면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추측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심지어 여인들 중에는 같이 구덩이에 들어왔던 사용자들도 섞여 있었다. 물론 현재 상태는 여타의 여인들과 다를 바는 없었지만. 충격에 멍해지는 것도 잠시. 사용자들은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이…. 개호로 잡놈의 새끼….” 가장 먼저, 고오환이 서서히 대검을 치켜들었다. 칼자루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삐죽삐죽 한 턱수염을 올올이 세운 것이, 흡사 분노한 사자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주현호는 태연했다. 아니, 사실 처음에는 굉장히 놀라기는 했다. 한 번 죽음에 이르렀던 만큼 한 청년에 대한 공포심이 뼛속 깊숙이 각인된 상태였으니까. 그러나 들어온 사용자들 중 김수현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순간, 주현호는 안도의 한숨을 흘릴 수 있었다. 그리곤 오히려 사용자들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며, 천천히 무릎을 굽혀 바닥에 떨어진 것을 살폈다. 놀랍게도, 바닥에는 한 아기가 온몸이 양수로 흠뻑 젖은 채 드러누워 있다. 그러나 온전한 아기라고 보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었다. 전신에 검은색 일색의 기괴한 문신이 그려져 있거니와, 무엇보다 느린 속도이기는 하지만 꾸준한 성장을 보이고 있다. 몸집이 불어나고, 머리가 커지며, 팔과 다리가 길어진다. 아기가 아닌, 그냥 괴물이다. 주현호가 머리를 갸웃했다. “으음. 뭔가 잘못됐나? 이렇게 느릴 리가 없는데…. 아무래도 억지로 출산시킨 게 잘못인가?” 핑! 그때였다. 날카롭게 시위는 당기를 소리가 들렸다. 참상에 의한 분노부터 무시까지. 결국 참지 못한 궁수 여인이 주현호를 향해 화살을 날린 것이다. 그러나. 탁! 화살은 기세 좋게 날아갔지만 주현호의 몸을 꿰뚫지는 못했다. 광장에서처럼, 그저 몸을 건드리는 선에서 그치며 하릴없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제야 그때의 일을 떠올렸는지 사용자들의 얼굴에 반짝 경계심이 서렸다. 주현호는 화살은 전혀 아랑곳 않는 얼굴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가차없이 탯줄을 끊은 후, 모체로 보이는 여인을 향해 피식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러고 나서야 사용자들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마치 품평이라도 하는 듯한 시선이 사용자들을 빠르게 훑는다. “흠. 좋아. 다들 고만고만한…. 음?”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두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주현호는 재빠르게 손을 올렸다. 펑! 쨍그랑! “아악!”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세찬 비명이 귓전을 울렸다. 사용자들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뒤로 쏠렸다. 후방에는 로브를 입은 사내가 한껏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오른손을 부여잡고 있다. 주변으로 깨진 수정 조각들이 허무하게 떨어진다. 통신용 수정구가 파괴됐다. 신재룡은 낭패감을 느꼈다. 주현호 몰래 다른 조에 연락을 넣으려 일행에게 건네주었는데, 그새 몸을 일으킨 주현호가 재빠르게 파괴한 것이다. 무(無) 영창 주문을 생각지 못한 게 실수라면 실수였다. 주현호가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 “자자…. 지원군을 부르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마시게. 응? 사용자 나으리?” “모두 전투 준비!” 더 이상 얘기할 필요도 없다는 듯 신재룡이 바로 외쳤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주현호는 여전했다. 계속 태연자약한 태도를 보이며 머리를 설레설레 흔드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거참. 아까도 그렇고, 이분들이 왜 이렇게 성미들이 급하실까. 사람이 말을 하면 일단 들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주둥아리 다물어라! 이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자식!” 고오환이 당장에라도 주현호를 내려찍고 싶다는 듯 대검을 쾅, 내려찍었다. 주현호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고오환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며 한 손으로 탁 이마를 짚었다. “후…. 정말 이놈이고 저놈이고. 안 그래도 짜증나는데, 정말 열 받게 만드네.” “누가 할 말…!” 그러나 고오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별안간 주현호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아 씨발 진짜…! 말 한 번 좆같이도 안 들어!” 그리고. “너희도 내가 우스우냐? 어?!” 펑! 느닷없이 주현호가 손가락을 튕기는 것과 동시에 아까의 폭음이 재차 공간을 울렸다. 고오환은 약간 멍해 보이는 얼굴로 정면을 응시했다. 눈앞으로 새하얀 빛이 흐르고 있다. 쩍쩍 금이 가있기는 했지만, 확실히 새하얀 보호막이 생성돼있었다. 미리 주문을 외워둔 신재룡이 때맞춰 보호막을 걸어준 것이다.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신재룡은 이를 질끈 깨물었다. 간신히 막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충돌로 인한 반발이 장난이 아니었던 탓이다. 단 한 방에 전력을 다한 보호막이 깨지기 직전까지 몰렸다. 전략을 짜야 한다. 절대로 섣불리 상대할만한 괴물이 아니었다. “하? 그래도 쓸만한 놈이 없는 건 아니네? 히히!” 유들유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재룡은 약간 복잡한 기분으로 주현호를 응시했다. 어느새 주현호는 다시금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한순간에 감정이 죽 끓듯 바뀌는 게, 흡사 미친놈을 보는 듯하다. 그리고 미친놈은 더욱 상대하기 까다롭다. 왜냐하면 언제, 어떻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히히히. 어때. 이제 슬슬 이야기할 마음이 들었나?” “…….” “아, 한 번 들어보기라도 하라고~. 있잖아 있잖아, 너희한테 좋은 이야기일수도 있어. 응? 예를 들면 목숨을 살려줄 수도 있다거나….” “…….” “아 씨발, 갑갑해! 그냥 한 번 들어보라고 하잖아!” “그러고 보니, 한 가지 궁금한 게 있구나.” 주현호가 돌연 얼굴을 바꾸며 험하게 말한 찰나, 고요한 미성(美聲)이 회답했다. 헬레나였다. 그러자 신재룡을 노려보던 주현호가 또다시 빙그레 웃었다. “어 그래? 누구누구? 거기 금발 언니?” “그래.” “이야, 예쁘시네. 아이 낳기 딱 좋게 생겼어~?” “칭찬은 됐으니 묻는 말에나 답하거라. 이 공간에서 벌어진 짓거리들, 다 네가 한 짓이더냐.” “응? 짓거리? 아~. 강제로 끌고 온 여인들을 이 굴에 처박아놓고, 싫다고 하는 거 억지로 모체로 만든 그 짓거리?” “…호.” 마치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것처럼, 주현호가 얼굴을 까닥까닥 흔들며 얄밉게도 말했다. 헬레나의 입가에 지어져 있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스스로 시인하는구나.” “응, 맞아. 내가 했어. 왜, 언니도 한 번 해보고 싶어서? 해볼래?” 주현호가 킬킬 웃으며 조롱했다. 그러나 헬레나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주현호를 바라보다가 지그시 눈을 감는다. 그때였다. 헬레나가 눈을 감은 그 순간, 몸 내부로 미약한 변화가 일었다. 큰 변화는 아니었다. 그저 한 몸에 공존하는 진짜 헬레나의 영혼, 그러니까 '대 영웅' 헬레나의 영혼과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의 영혼이 처음으로 뜻이 일치했을 뿐이다. 한순간, 헬레나의 기세가 일변했다. 한 세기를 떨쳐 울렸던 두 개의 거대한 영혼이 눈앞의 괴물을 향해 오롯한 분노를 뿜어낸다. 그 변화가 일으킬 또 다른 변화는 절대로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약간의 침묵이 흐르고, 헬레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놈은.” “으응~? 뭐라고~?” 주현호는 잘 안 들린다는 듯이 까불거리며 귀를 기울였다. 그러한 찰나, 지금껏 지그시 감겨있던 헬레나의 두 눈이 일시에 번쩍 떠지었다. 이윽고 드러난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시종일관 지랄 맞던 주현호의 얼굴이 갑작스레 딱딱히 굳어버렸다. 주현호는 이제 더는 인간이 아닌, 돌연변이 괴물이다. 그렇기에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더는 인간의 눈동자로 보기는 어려웠다. 흰자위는 싯누런 색으로 물들어있고, 아름답던 눈동자는 세로로 쭉 찢어져 흉포하기 짝이 없는 기세를 줄줄 흘려내고 있다. 그래. 저 눈은 마치 아득한 신화 시절…. 그 순간. “참으로 추악한 놈이로구나!” 헬레나의 입이 커다랗게 찢어졌다. 참으로 추악한 놈이로구나! 참으로 추악한 놈이로구나! 참으로 추악한 놈이로구나! 참으로 추악한 놈이로구나! 모든 것을 갈기갈기 찢어발길 듯한, 흡사 사나운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포효가 왕의 굴을 쩌렁쩌렁 이 뒤흔들었다. 용의 포효(咆哮). 처음으로 뜻이 일치한 두 영혼의 협력은, 진정한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Mageunakareuta)의 재림을 불러일으켰다. ============================ 작품 후기 ============================ ㅇ<-<. 1) 로유진은 죽었다. 그냥 두고 가버리자. 2) 아니다. 아직 안 죽은 것 같다. 한 번 나뭇가지로 콕콕 찔러보자. 0585 / 0933 ---------------------------------------------- 누구나 한 번쯤은 빛나는 시절이 있다. 거대한 용의 포효가 공간을 쩌렁쩌렁 이 울렸다. 비로소 해방된 종말의 용이 분노가 오롯이 주현호를 향해 쏟아져 들어간다. 주현호는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마그나카르타(Mageunakareuta). 한때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의 정점에 군림했으며, 끝을 일컫는 '종말.' 칭호를 부여 받은 최초이자 최후의 용. 그런 용의 분노를 일개 인간이, 아니 괴물이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풀썩! 결국 견디지 못한 주현호가 입을 쩍 벌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꼴사납게 엉덩방아를 찧는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신재룡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갑자기 헬레나가 왜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지팡이를 높게 치켜든 찰나 돌연 헬레나가 손을 뻗어 제지했다. “그만두어라.” “…헤, 헬레나?” 신재룡이 의아한 목소리로 반문했으나 헬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재룡은 그래도 어떻게든 나서려고 했지만, 갑작스레 온몸을 짓눌러오는 무형의 기운에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었다. 아니, 입도 벙긋할 수 없다. 그건 비단 신재룡뿐이 아니라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용자들은 하나같이 경악한 얼굴로 헬레나를 향해 눈동자를 굴렸다. “나의 힘이 해방된 이상 너희는, 아니 나를 제외한 모두가 끼어들 수 없다.” “…….” “이것은 나의 자존심 문제이기도 하며, 그녀와의 약속이기도 하다. 그러니 조용히 구경이나 하고 있거라.” “…….” 과연 용의 자존심일까? 아니면 대 영웅 헬레나와의 모종의 약속, 아니 제약 때문일까? 아무래도 좋다. 잠시 후, 헬레나는 가증스럽다는 듯이 주현호를 바라보며 매섭게 눈을 치켜 떴다. “Ecce, Deus. Stulte Seokin Monstrum.”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주현호를 곧바로 쳤다. “히이이익!” 주현호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삽시간에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무너진 자세 그대로 다리를 미친 듯이 번갈아 움직였다. 헬레나가 차분히 손을 들어 겨냥하자, 아직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불침 맞은 망아지처럼 후닥닥 머리를 수그린다. 헬레나가 한 걸음 내디뎠다. “In Cunctis Capitibus Ejus! Et Noli Timere!” 그리고 또다시, 헬레나가 한 걸음 내디뎠다. “Numquid Non Expectas? Ecce!” 그저 한 마디 말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헬레나가 입을 열 때마다 엄청난 마력의 파장이 주현호의 전신을 고스란히 덮쳤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하나의 명령이요, 권능. 즉 용언의 실체였다. “으, 으아아아아아아악!” 결국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주현호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빙글 돌렸다. 흙 바닥을 박박 긁으며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헬레나는 금세 따라잡았다. 이내 부들부들 떨리는 등에 발 하나를 살포시 올려놓자, 주현호의 움직임이 우뚝 정지했다. 고양이에게 잡힌 생쥐가 이러할까? 헬레나가 나서기 시작했을 때부터 주현호의 몸은 시종일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천식이라도 걸렸는지 호흡도 이상하다. 파르르, 가엾게도 떨리는 머리가 천천히 돌아가 헬레나를 응시한다. “왜,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건데….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삐쭉 내민 주둥이에서 울먹이는 말투가 흘러나왔다. 자기가 정말로 뭘 잘못했냐는, 억울하기 짝이 없다는 말투였다. 돌연 주현호의 눈동자가 뿌옇게 흐려지더니 눈물 한 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느새 주현호는 흐느끼고 있었다. 흐느끼는 주현호를 보며 헬레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이더냐?” “그러니까 왜…. 컥!” 그러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헬레나가 등을 밟고 있던 발에 강한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외마디 비명을 지른 주현호의 몸이 흡사 죽은 개구리처럼 납작하게 짓눌렸다. 그때였다. “이….” 별안간 주현호가 입을 질끈 깨물었다. 양 주먹을 꽉 말아 쥔다. 무에 그리 분한지, 징징거리던 눈매가 와짝 일그러지고 두 눈동자가 불똥을 튀겼다. “개 씨발 년이…!” 한순간 주현호의 태도가 변화했다. 번쩍 머리를 치켜들었다. 흡사 무언가를 떨쳐버리려는 것처럼, 사지를 마구 휘두르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런 주현호를 내려다보는 헬레나의 두 눈에 반짝이는 이채가 스쳤다. “호, 놀랍구나. 삼라만상의 현상 중 죽음을 명하였거늘…. 그게 아니라면, 혹시 죽음을 겪어본 적이 있느냐?” 기특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순간 주현호의 움직임이 자동적으로 정지했다. 머릿속에 본능적으로 광장에서 겪었던 일이 떠오른다. 자신을 갖고 놀던 김수현, 내부를 싸늘하게 헤집던 칼날…. “크아아아아아아악!” 주현호가 울부짖었다. 온몸에 그려진 검은색 문신이 시뻘겋게 작열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양팔을 쫙 펼친 주현호는 괴성을 내지르며 서서히 몸을 일으키기까지. 킥킥 웃은 헬레나가 가볍게 발을 치우자, 벌떡 일어나 몸을 돌려 찢어 죽일 듯한 눈빛으로 노려본다. “이제 상황 반전이다. 내 기필코 네 아가리를 찢어주마, 이 개 같은 년아!” “재미있는 놈이로고. 그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어디 한 번 마음대로 해보라는 양 헬레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주현호는 곧바로 걸음을 물렸다. 그리고 양손으로 수인을 맺으며 주문을 외운다. “───. ───. ───.” 무에 그리 엄청난 주문을 외우는지, 이마의 혈관이 툭툭 불거지고 식은땀을 비오 듯이 흘린다. 하지만, 헬레나는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다 돌연 비웃는 듯한 미소를 머금더니 천장을 향해 오른손을 올렸다. “하늘을 빛내는 해는, 꺼지지 않는 지혜의 근원이며.” 이번에는 지면을 향해 왼손을 내린다. “대지를 굽어보는 그 눈은, 이 몸의 마음을 이룬다.” 그 순간이었다. 두 마디 말이 끝난 바로 그 순간, 헬레나의 전신이 어스름한 새벽빛으로 찬연히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모든 것을 간파할 것처럼 빛나는 희미한 여명이, 왕의 굴이라 불리는 공간을 가득히 메운다. “왜, 나를 껴안고 자폭이라도 할 속셈이었느냐?” “───. ───. ───. 뭐, 뭣?!” 눈을 질끈 감은 채 주문을 웅얼거리던 주현호는 저도 모르게 기함했다. 그리고 반사 작용으로 눈을 부릅뜬 찰나, 자신을 지그시 응시하는 헬레나의 시선과 마주해버리고 말았다. 그때, 세로로 찢어진 헬레나의 두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황금빛을 발했다. 이윽고 주현호는 사방을 덮치며 달려드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눈 깜짝할 새 에 알 수 없는, 무형화된 힘이 주현호의 전신을 사정없이 찌그러트린다. “여담이지만, 미크라라는 미물도 굴복시켰던 봉인 권능이다. 어디 한 번 네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시험해보마.” 꽝! “커헉!” 단 일격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현호의 입에서 왈칵 핏물이 토해졌다. 그와 동시에, 헬레나의 입에서도 한 줄기 핏방울이 살그머니 흘러내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헬레나가 하나하나 이루어내는 마법은 상대방의 확실한 죽음을 강요하는, 오직 용만이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이다. 그 정도로 고수준의 권능이면 당연히 반작용이 있을 수밖에 없다. 지금 일시적으로 힘이 해방됐다고는 하나 권능을 발현하는 근원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몸이다. 사실상 헬레나의 몸은 김수현에 의해 되살아났을 때부터, 죽음을 향해 고속으로 달려가는 기차였다. 말인즉, 영혼을 담는 그릇의 부조화로 인한 붕괴(崩壞). 가만히 있어도 몇 년 안에는 죽는다. 힘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그 속도는 가속화된다. 그것이 바로 반작용이라는 현상으로써, 헬레나로서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다. 그러나 부활을 결정했을 때부터 각오한 굴레이기도 했다. 주현호는 전신을 강하게 압박 당하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버텨내고 있었다. 어떻게든 헬레나를 노려보며 애쓰며 전투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헬레나는 시야가 약간 뿌옇게 변한 것을 느꼈다. 몸은 계속해서 경종을 울리며 붕괴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었다. 헬레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주현호를 가리켰다. 그러면서도 본능적으로 감각을 차단했다. 자꾸만 흐릿해지려는 정신을 바짝 다잡으며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타올라라.” 주현호를 압박하던 무형의 기운이 한순간 변화했다. 곧 환한 빛을 뿜어내는 유형화된 기운으로 일변해 굉음을 동반한 폭발을 일으켰다. 헬레나의 머릿결과 똑같은 황금빛 불꽃이, 주현호의 전신을 게걸스레 삼키듯이 감싸 안는다. 화르르르르르르륵! “흐아아아아아아악!” 처절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주현호는 느꼈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들끓으며 뭉그러지는 감각을. 허공에 매달린 여인들처럼 눈이 까뒤집히고 전신에서 피가 배어 나오다 못해 그대로 연소돼버린다. 화르르륵, 화르르륵! 결국 견디다 못한 주현호의 몸 자체가 시꺼멓게 그을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주현호는 용케 죽지 않고 있다. 끝끝내 비명을 지르며 생존을 갈망하는 절규를 외치고 있었다. 그걸 보는 헬레나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탄의 빛이 스쳤다. 사실상 헬레나가 일으킨 불꽃은 물리적인 피해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적인 부분, 즉 영혼의 완전한 연소를 목적으로 하는 상승의 염화였다. 보통 인간이라면 몸이 부서지기도 전에, 10초도 견디지 못하고 정신이 끊어진다. 그러할진대 주현호는 버티고 있었다. 아직도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주현호 특유의 생존에 대한 갈망이었다. 감각을 차단함으로써 인지하지는 못했지만, 어느덧 헬레나는 입뿐만이 아니라 코에서도, 귀에서도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주현호를 응시하는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우렁차게 울어 젖히던 주현호의 절규가 서서히 잦아들고 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그러면 저놈의 영혼은 완전히 소멸돼 다시는 이 세상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푹! 갑작스럽게, 헬레나의 몸이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전신을 물들이던 여명의 빛이 한순간에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주현호를 삼키고 있던 염화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내 불꽃이 꺼진 주현호의 몸이 하릴없이 허물어지는 순간, 헬레나는 간신히 눈동자를 굴려 옆을 곁눈질했다. “…….” …도대체 언제 일어난 걸까. 오른쪽으로 어느덧 완전한 성장을 마친 괴인이 보였다. 무덤덤해 보이는 얼굴을 한 괴인은 헬레나의 옆구리로 오른쪽 주먹을 쑤셔 넣은 상태였다. 그리고 살그머니 비틀어 빼내자 진득한 핏물과 우그러진 장기들이 흘러내린다. “…실수, 했구나.” 말 그대로 실수라면 실수였다. 감각을 차단한 건 둘째치고서 라도, 워낙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지금껏 죽은 듯이 누워있던 형식이 단숨에 튕기듯이 돌진해 헬레나를 공격한 것이다. 이윽고 헬레나의 몸이 천천히 기울어지는 것과 동시에, 사용자들을 압박하고 있던 제약의 기운도 풀렸다. “헬레나!” 안현이 고함과 함께 흑색 창을 무섭게 휘두르며 달려나갔다. * 쐑! 수십 가닥의 촉수가 사방을 점거하며 짓쳐 든다. 비록 파괴력이나 속도는 줄어들었다고 해도, 여전히 파더는 괴물이다. 1회 차 때 무수한 사용자들을 죽음에 빠트렸던 만큼, 그 어느 때라도 방심할 수는 없다. 촉수는 이번에야말로 나를 잡겠다는 듯이 세차게 꿈틀거렸지만, 가볍게 발을 놀리자 허공을 그대로 미끄러지듯이 스치고 지나가버렸다. 사실상 지루한 신경전이나 다름없는 전투였다. 내가 이렇게 방어에 치중하고 있는 한은.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지?' 파더의 주변을 돌아다니며 간간이 촉수를 처리하고, 어그로를 유지한다. 과연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되나 싶어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 예상으로는 33초. 그러나 되돌아온 화정의 회답은 나를 크게 놀라게 만들었다. 33초? 그러고 보니 몇 가지 달라진 점이 있기는 하다. 갑작스럽게 주변을 시꺼멓게 물들이는 어둠. 이건 고연주의 그림자일 것이다. 하지만 인근의 지면을 물들였을 뿐이지, 이후로 딱히 별다른 행동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약간 소극적으로 변한 파더의 행동. 무언가 아까와는 달리 움직임이 현저히 느려졌는데, 단순히 지쳤다고 생각하기에는 머리가 갸웃해진다. 마치 이것도 하지 못하고 저것도 하지 못하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태도라고나 할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나는 속으로 한숨을 흘리며 옆으로 쇄도해 들어오는 촉수를 간단히 쳐냈다. - 마력 반응. 15초. 화정은 아까부터 딱딱 끊어 회답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아까 놀렸을 때부터. 사실 일부러 그러는 의도가 다분히 보인다. 그러니까 삐쳤다는 소리다. 미안하다고 달래주고는 싶었으나 나는 그 대신 무검을 고쳐 잡았다. 빅토리아의 영광은 진작에 집어넣었다. 화정이 요구한 바를 시행하는 데는, 양 손 검보다는 한 손 검이 최적이다.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일깨우고 몸에 긴장을 불어넣는다. 처음 파더를 상대하던 그때처럼. 그때였다. 화아아악! 갑작스럽게, 근처를 물들이던 어두운 그림자가 새하얀 실 가락들을 토해내었다. 저건…. 바인드 마법인데? - 2초. 기다려. 나는 그때가 지금을 말하는 것인 줄로만 알고 바로 움직이려 했으나, 그것조차도 예상했다는 듯 화정이 기다리라는 말로 나를 제지했다. 기다리는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그림자에서 토해진 기백 개의 바인드 마법이 파더의 촉수를 휘어 감는다. 그리고 마치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를 끌어당기듯, 바인드 마법에 휘감긴 촉수가 어딘가로 끌려가며 강제적으로 팽팽하게 변했다. 그것은 하나의, 아니 여러 개의 지지대 역할이 되었다. 비로소 어두운 그림자가 파더를 집어삼킬 듯이 대규모로 몸을 일으켰다. 흡사 해일과도 같은 움직임. 그리고 바인드 마법이 이루어낸 팽팽해진 촉수를 지지대 삼아, 파더를 칭칭 둘러 감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림자는 원래 무엇이든 통과할 수 있는 것. 칭칭 감는 것도 모자라, 파더와 촉수 사이의 공간을 모조리 메우며 까맣게 물들였고, 그대로 아래로 덮어 내렸다. 그 광경은, 채 2초도 되지 못해 모조리 그리고 순차적으로 일어났다. 나는 이제야 겨우 사용자들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찰나일지도 모르는 시간에, 대다수의 촉수를 강제로 봉인한다. 나에게 하나의 새로운 공백을 만들어준다. 그 어느 때보다 제대로 된 일격을 날릴 수 있는, 그 한순간의 틈을! - 지금! 화정이 외쳤다. 칼만 꽂아 넣으면 된다. 깊게 생각할 틈은 없다. 아니, 화정의 외침을 들은 순간 나는 이미 앞으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휙, 휙, 휙, 휙! 그 와중에도 용케 빠져 나온 것들이 있는지, 서너 개의 촉수들이 또다시 나를 노리고 달려온다. 나는 아예 바로 접근할 생각에 이형환위를 위한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때, 문득 한 줄기 서늘한 감각이 가슴에 스며들었다. 아까 파더가 소극적으로 행동하던 움직임이 잠시 뇌리를 스쳤다. 파더 또한, 사용자들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했고, 아니 당해주었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생각한 순간은 이미 늦은 상태였다. 이미 이형환위가 발동됐다. 이내 시야가 변하는 것을 느끼며, 나는 본능적으로 마력을 연달아 일으켰고 몸을 한껏 웅크렸다. 그리고 온몸을 활짝 펼치며 곧장 궁신탄영을 사용했다. 그 순간. 승리를 확신한 건 과연 누구였을까. 꽝! 몸이 바로 튕겨나가는 것과 동시에, 등을 세차게 훑는 어마어마한 촉수의 감촉이 느껴졌다.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엄청난 기세였다. 파더 또한 사용자들의 계획을 알아차리고, 혼신의 힘을 다한 카운터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피했다. 오른발을 내뻗었다. 그리고 발에 흙 바닥 감촉이 느껴지는 찰나, 나는 있는 힘껏 땅을 박차 파더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이윽고, 한순간 여러 광경이 눈앞을 교차하며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파더의 몸체가 눈에 들어온 바로 그 순간, 나는 호흡을 멈췄다. 그리고 모든 힘을 집중시킨 일격을 일직선으로 내질렀다. 푸욱! 흡사 썩은 통나무를 뚫고 들어가는 듯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확실히 볼 수 있었다. 나조차도 모르게 변한 무검의 형태를. 항상 보이지 않던 칼날의 부분이 갑작스레 휘황찬란이 빛나며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웅웅웅웅웅웅웅웅! 『차원을 뛰어넘는 힘이 무검의 실체를 강제로 소환합니다.』 『혼돈 왕의 상징, 절멸(絶滅)자의 검이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갑작스럽게, 시야가 어두운 빛으로 물들었다. ============================ 작품 후기 ============================ 생각해보니 너무 창피해서 후기 삭제합니다. 0586 / 0933 ---------------------------------------------- 누구나 한 번쯤은 빛나는 시절이 있다. 허공에 두 개의 메시지가 떠오른 순간, 나는 정신이 망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무검은 내가 2회 차를 시작했을 때부터 쭉 함께해온 검이다. 그런 만큼 몇 번이고 되풀이해 설명을 읽어보았으며, 실체를 이끌어내려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런데도 도통 변화를 보이지 않던 무검이었는데, 뜬금없이 절멸자의 검이라고? 이 무슨 갑작스러운 일이란 말인가. 그때였다. 『무검의 상세 정보가 변화합니다.』 『절멸(絶滅)자의 검.』 (설명 : 정령 계는 총 9개 속성의 지배하에 있으며, 또한 각각의 속성마다 그에 걸맞은 역할이 부여돼있습니다. 9개 속성이란 염(炎), 수(水), 풍(風), 무(無), 토(土), 뇌(雷), 광(光), 암(暗), 그리고 혼돈(渾沌)이며, 그 중 혼돈에 부여된 역할은 바로 정령 계를 위협하는 적의 '절멸'입니다. '절멸자'는 혼돈의 정령 왕을 일컫는 말이며, 끊을 절(絶), 멸할 멸(滅). 즉 '아주 없애다.' 혹은 '멸망'의 의미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1. 이 검에 잠재된 가장 큰 위력은 상대방의 목숨 개수를 가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설령 무한의 목숨을 지닌 존재라고 해도, 절멸자의 검은 무조건 '하나'로 계산합니다. 2. 이 검에 의하여 목숨이 거두어진 존재는 혼돈의 정령 왕이 관장하는 모종의 홀(Hole)에 가두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두 번 다시 이 세상에 발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말인즉, 더 이상 환생, 부활의 축복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 절멸자의 검은 굉장히 무서운 검입니다. 본래는 중간 계에 소환은커녕 존재해서도 안 되는 검이나, 아득한 상위의 격(格)을 지닌 존재에 이끌려 강제 소환된 상태입니다. 웬만하면 사용하지 않는 것을 추천하며, 설령 다룰 자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부디 두 번, 세 번 고심하고 신중하게 사용하기를 하기를 바랍니다.) 기나긴 설명 메시지가 출력되는 것과 동시에. - 멍하니 있지 마! 이 멍청이야! 화정의 외침이 머릿속을 왕왕 울렸다. 나는 곧장 정신을 차리고서는 인근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침착함을 유지하려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여기는.” 모든 게, 변했다. 말 그대로 모든 게 변했다. 촉수도 보이지 않고 파더도 사라졌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공간은 더 이상 광장이 아니었다. 그저 칠흑으로 일색 된 어두컴컴한 공간일 뿐. 그러나. “…….”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이 어두운 공간에는,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가까운 곳에서 매우 거대하면서도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딱히 정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는 기운이다. 무언가 마구 뒤섞여 갈피를 잡을 수가 없는 기운이라고나 할까? 굳이 말해보라면 혼돈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지도…. “아.”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비로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무검의 변화와 심상치 않아 보이는 설명. 그리고 이 정도의 정보를 지닌 검이라면…. 그래. 메시지의 경고를 떠올리면 된다. 말인즉 이 검은 누구나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장비가 아닌 만큼, 주인 의식을 치러야 한다는 뜻이었다. 쿵. 그러자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 어디선가 거대하게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에는 여전히 어둠뿐이다. 그러나 하나의 형체는 보인다. 어둠과 동화된 것 같은 그 형체는 차마 내 시야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 영원히 타오르는, 꺼지지 않는 태고의 불꽃이여. 이 미천한 혼돈의 종이 모든 불의 어머니께 삼가 인사를 올립니다. - 이렇게 뵙게 된 것을 진심으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무언가 굉장히 거칠면서도 쇳소리 비슷한 목소리가 귓전을 조용히 울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절대자만이 보일 수 있는 중후한 위엄이 깃든 음색이기도 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저 형체가 혼돈의 정령 왕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바깥에 관한 걱정은 이미 접어둔 지 오래였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거니와, 검을 꽂은 이상 내가 할 일은 끝난 것과 다름없다. 이것이 화정이 계산한 일이라면, 분명 바깥 상황도 염두에 두었을 터. - 화정 님께서는…. 무어라 말씀하시는가. 그때, 혼돈이 재차 말을 걸었다. 웅혼한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들려오는 말투였다. 아무튼 화정을 대상으로 한 것 같지는 않아,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무 말도 없는데.” - 그런가. 그렇군. 그렇다면, 여기서부터는 너와 나 둘이 해결하라는 뜻일 것이다. 돌연 어두운 형체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한껏 머리를 올리다가, 어느 순간 더는 젖혀지지 않자 포기하고 말았다. 당최 어떤 식으로 주인 의식을 치를지 감이 잡히지 않기에, 나는 어리둥절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다리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잠시 후, 허공으로부터 무언가 길쭉한 검 하나가 사선으로 느릿하게 내려오는 게 보였다. 나는 지그시 검을 응시했다. 처음 검을 보고 든 생각은, 정말로 아름다운 검이라는 생각이었다. 정말로 그랬다. 각진 모양으로 반듯하게 정제된 검은 살상용 무기가 아닌, 흡사 정교한 세공품을 보는 듯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빛은커녕 어둠마저 빨아들일 듯한 칠흑 빛 검신은, 어둠 속에 동화돼 꿈틀꿈틀 움직이며 살아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정말, 너무나 아름답다. 꼭 한 번 사용해보고 싶다. 나는 뭔가 홀린 듯한 기분으로, 검을 향해 천천히 손을 내뻗었다. -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막 칼자루를 잡으려는 찰나, 혼돈의 목소리가 다시금 고막을 흔들었다. -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움직임을 멈추고서 흘긋 시선을 올렸다. 여전히 보이지는 않지만. - 내 비록 그분의 명으로 이곳에 왔다고는 하나, 네게 절멸의 권능을 허락하고 안 하고는 별개의 문제. “…….” - 망연해 보이는 얼굴이군. 그럼 확실하게 말하도록 하지. 너는, 아직 이 몸을 다룰 자격이 없다. “…어째서?”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곧장 반문하고 말았다. 사실 약간 당혹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지금껏 검에 관해서는, 나는 단 한 번도 거부 받아본 적이 없다. 물론 왜인지는 모른다. 아마 진명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막연히 추측만할 뿐. 아무튼, 그런데 저놈은 왜 나를 거부하는 거지? “내 능력이 부족해서인가?” - 능력? 사용자 정보를 말하는 거라면 별로 상관없다고 말할 수 있겠군. 아니, 오히려 충분하다고 볼 수 있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주인 의식은 능력이 가장 중요한 요소일 텐데? 그럼 능력은 충분한데, 자격이 없다는 소린가?” - 그래. 능력이 가장 중요하기는 하지. 하지만 바꾸어 말하면, 오직 능력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말이다. 능력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럼 다른 기준이 있다는 말인데. - …정말 모르고 있는 건가. 혼돈의 정령 왕이 한숨을 쉬었다고 느꼈다면, 과연 내 착각일까? - 이봐. 너는 검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응? 검을 무엇으로 생각하냐니? 그게 무슨….” 그 순간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상대가 상대인지라 간신히 삼킬 수 있었다. - 그래.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겠지. 그냥 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도구로서만 사용해왔겠지. 그럼 결국, 네가 생각하는 게 딱 그 정도라는 말일 테고. “잠깐.” -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확인하게 되니 약간 화가 나려고 하는군. 하나의 자아를 가진 검은 자신을 사용하는 주인을 생의 동반자라고 생각한다. 헌데, 너는 어째서 그 모양이지? “그러니까….” - 그러니까 모든 검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면서도, 왜 사랑을 줄 생각은 하지 않느냐, 바로 이 말이다. 검의 주인이여. “…….” 혼돈의 정령 왕이 내 진명을 정확히 언급했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동안 검을 도구로만 취급한 건 반박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그게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둘째치고서 라도. - …쯧. 해줄 말은 여기까지다. 그렇게 끔뻑끔뻑 눈만 움직이고 있자, 문득 허공에 떠 있던 검이 누군가에 떠밀리듯이 억지로 내 손안으로 들어왔다. 이어서 혼돈의 정령 왕이 등을 돌리는 기척이 전해졌다. - 아무튼, 이번에는 힘을 빌려주도록 하지. 하지만 착각하지는 마라. 그 누구도 아닌 그분의 명이 있으니 빌려주는 것이지, 나는 여전히 너를 인정하지 않는다. 콰직! 콰지직! 그리고 그 순간, 온 세상을 물들이던 어둠이 유리 깨지는 소리를 내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주인 의식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리는 신호였다. 조각난 어둠들이 부스스 떨어지는 광경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강하게 투덜거렸다. 이왕 빌려줄 거면 좀 기분 좋게 빌려주던가, 주인 의식 한 번 치르러 왔다가 별말을 다 들었다. 어딘가 좀스럽다는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 아차.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콰지지직! 콰지지직! 그때, 느닷없이 혼돈이 갑작스레 말을 걺과 동시에, 균열이 더욱 심해졌다. 당장에라도 부서지기 일보직전처럼. - 나보다 빅토리아라는 계집을 더 자주 사용해서 이러는 건 절대로 아니니, 부디 서운하게 생각은 말도록. …뭐? 와장창, 와장창창! - 그럼. 그러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온 세상이 부서져 내렸다. 마치 기껏 맞춘 퍼즐을 한꺼번에 털어내는 것처럼, 어둠의 조각이 사방으로 떨어지며 그 너머의 공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검은, 여전히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화아아악! 강렬한 빛살이 시야를 물들였다. 돌연 엄청난 바람이 주변을 휘몰아쳐와, 머리칼은 물론 도복마저 세차게 펄럭인다. 그동안 어두운 공간에 있어서 그런 걸까.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리면서도 안력을 높여 정면을 응시했다. 웅웅웅웅웅웅웅웅! 그렇게 비로소 되돌아온 광장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엄청난 검음이 주변을 미친 듯이 몰아치는 중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바람결에 날리는 머리칼을 왼손으로 정리하며 조용히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앞의 광경을 확인한 순간. - 왔어? 나는, 비로소 절멸이라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 헬레나가 쓰러졌다. “헬레나아아아아아!” 온몸을 압박하던 제약이 풀린 순간, 안현이 커다란 고함을 지르며 매섭게 돌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괴인, 정확히는 괴인이 된 백형식은 무덤덤했다. 그저 사용자들이 들어오는 방향을 흘긋 보고는 몸을 돌려 전투 자세를 잡는다. 그러더니 오히려 힘껏 땅을 박차 안현을 마주보며 돌격. “비켜라!” 그 찰나의 순간, 안현은 들리는 대로 옆으로 비켰다. 이어서 한 사내가 안현이 비킨 공간으로 쏜살같이 달려들어갔다. 사내가 정면으로 들어올린 큼지막한 방패를 확인한 순간, 안현은 곧바로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사내가 들어올린 방패와 백형식이 날린 주먹이 맞닥뜨렸다. 쾅! 고막이 얼얼해질 정도의 굉음이 울렸다. 이어진 결과는, 놀랍게도 사내의 패배였다. 굵은 철 방패는 정면이 움푹 들어가다 못해 아예 절반이 날아가 버렸고, 충격의 여파가 그대로 전해졌는지 사내는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벌어진 입에서 침이 흘러내리고, 사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힘겹게 비틀거린다. 그에 반해, 백형식은 아직도 쌩쌩하다. 태연하기 그지없다. 이내 주춤주춤 물러나는 사내의 머리를 백형식의 두 손이 와락 부여잡았다. 그러나 사내의 방패 돌격이 헛되지는 않은 걸까? 사내가 백형식에 잡힌 그 순간은, 이미 고오환과 안현이 각기 왼쪽과 오른쪽으로 짓쳐 들어가는 중이었다. “으랴!” 고오환이 정수리를 쪼갤 듯이 대검을 후려갈기고. 쐐액! 안현의 창 끝이 유성처럼 백형식의 심장을 찔러 들어간다. 그 두 공격은, 모조리 백형식에게 적중했다. “…큭?” …정확히는, 적중만했다. 고오환의 대검은 정수리를 쪼개지 못해 그대로 미끄러지고 말았고, 안현의 창은 아주 살짝 들어가는 선에서 그친 것이다. 도리어 백형식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모기가 물은 양 세차게 머리를 털고는, 머리를 잡은 손에 꽉 힘을 주었다. 와득, 와드득! 사내의 목이 기어코 180도 돌아가더니 반으로 꺾이며 목뼈가 드러났다. 툭! 뜯긴 머리가 무참히 바닥을 뒹굴었다. 백형식이 무심히 좌우로 시선을 돌렸다. 고오환과 안현을 한 번씩 번갈아 보는 게, 마치 어느 놈을 먼저 죽일까 고민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리고 백형식의 시선이 한쪽에 고정된 순간, 고오환이 흠칫 놀라며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때였다. 핑! 한 줄기 바람 소리가 스치듯 지나가, 백형식의 눈에 정확하게 명중했다. 거기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커다란 화염구가 곧바로 가슴을 직격하기까지. 잠깐 놀랐던 안현은 속으로 환호함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꼈다. 아무리 강한 괴물이라도 시야가 제한되면 약점을 드러내기 마련이니까. “크륵, 크르르륵!” 그러나 안현이 느꼈던 안도감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경악으로 바뀌었다. 백형식의 가슴에 들러붙던 불길은 별 피해를 주지 못한 채 사그라졌다. 뽑은 화살에서는 눈알이 딸려 나왔지만, 곧바로 새로운 눈동자가 재생되었다. 물리 공격력, 물리 방어력, 마법 방어력. 이 모든 게 상상 이상이다. 수준 높은 사용자를 기반으로 새로 태어난 돌연변이는, 안현의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이었다. 문득 안현은 흑 창을 잡은 손이 미미하게 떨리는걸 느꼈다. 도대체 이런 놈을 어떻게 죽이라는 걸까? 형은 어떻게 이런 놈을 그렇게 갖고 놀듯이 죽였을까? 주춤, 물러나는 안현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그늘지었다. 한편, 같은 시각. “끄으으으….” 바짝 마른 입 틈으로 깊숙한 신음이 흘러나온다.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는지 눈동자는 흐릿하게 풀려있고, 초점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주현호는 아직 살아있다는 것.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한동안 죽은 듯 벽에 기대어있던 주현호가 힘겹게 머리를 일으켰다. 그리고 간신히 자세를 추스르는가 싶더니 천천히, 벽을 지지대 삼아 매우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흐어, 흐어어어….” 이윽고 완전히 몸을 일으킨 주현호는, 여전히 벽에 등을 기댄 채로 힘없이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헬레나를 확인한 순간,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흐, 흐…. 씨발…. 년….” 주현호의 등이 벽에서 떼어졌다. 퍽. 걷어차인 헬레나의 몸이 빙글 돌아 얼굴을 드러냈다. 주현호는 한참을 낄낄 웃다가, 자신이 당했던 것처럼 발을 들어 헬레나의 얼굴을 짓밟았다. “기분이 어때? 응?” 거기다 좌우로 진득하게 비비며 이죽거리기까지. 그러나 헬레나는 마치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차분히 눈을 감고 있다. 주현호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너는…. 씨발아, 응? 너는 정말로 기대해도 좋아…. 있잖아…. 아후, 씨발 숨차. …나, 너 같은 년을 정말로 좋아하거든? 강한, 아주 강한 암컷을 말이야! 히히히히!” “…….” “후욱…. 후욱…. 마침 고은솔도 곧 죽을 예정이었는데, 이거 아주 훌륭한 대체품이 생겼어.” “…….” “그러니까 제발 죽지 말고 이대로만 있어달라고. 응? 나중에 모든 일이 정리되면, 내가 아주 귀여워해줄 테니까…! 이, 퉤!” “……!” 피 섞인 침이 헬레나의 얼굴에 떨어져 내렸다. 이윽고 한 차례 추가로 낄낄 웃은 주현호는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며 헬레나를 지나쳤다. 그리고 잠시 후. “…참으로 망할 놈이로다.” 주현호가 떠나자마자 지긋이 감겨있던 헬레나의 눈이 살그머니 떠졌다. 헬레나의 두 눈은, 여전히 흉흉한 빛을 띤 용의 눈동자였다. “흐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헬레나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주현호가 떠난 이상 헬레나는 이제 혼자나 다름없다는 것. 그런데 과연 누구하고 말을 하는 걸까? “후후. 과연 누가 알았겠느냐. 삼라만상의 죽음에 이어, 영혼 봉인 주문까지 버텨냈을 줄은. 정신력 하나만큼은 찬사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야.” “아아. 그건 동의한다. 이미 침식 진행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야. 다른 놈은 몰라도, 저놈은 절대로 구제가 불가능한 놈이다.” “뭐라? 이제 그만 너한테 맡기라고? 헬레나, 지금 네 상태를 모르고 있는 것이냐?” “허…. 내가 실패했으니, 이제 네가 말하는 방법을 따라야 한다 라…. 결국 시키는 대로 하라는 소리구나.” 헬레나의 혼잣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러다 문득, 헬레나가 몸을 빙글 돌려 옆 편을 바라보았다. “…빛나는 시절이라.” “정말로, 확신하느냐? 잘못되면 여기 있는 모두가 죽을 수 있는데도?” 마침 마법사 사내를 추가로 살해하는 백형식과, 시종일관 밀리는 사용자들. 터벅터벅 걸어가는 주현호. 그리고 그 옆으로, 차갑게 식어가는 은빛 머리칼의 여인까지. 그 모든 것들이 헬레나의 한 눈에 들어온다. “인간들의 유대….” 시간이, 없다. 그렇게 생각한 헬레나가 돌연 피식 미소 지었다. “뭐, 나쁘지는 않겠지. …나를 한 번 패배시켰던 너의 말이라면.” “좋다. 그러면 어디 한 번 구경해보마.” 별안간 헬레나의 두 손이 천천히 어딘가를 향한다. 왼손은 백형식을 향해. 오른손은 고은솔을 향해. “Convertimini, Et Fulgentibus Saeculum….” 그리고 헬레나가, 조용히 주문을 읊조린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음….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오늘 어떻게 후기를 시작해야 할까 참으로 많은 고민이 들었는데요…. 우선은 깊이 고개 숙이며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꾸벅. _(__)_ 어제는 제가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코멘트를 하나하나 읽으면서 정신이 붕괴되는 현상을 겪었습니다. BL을 적고 사랑스러운 독자 분들께 선전포고를 한 것은, 아마 그러한 붕괴 현상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후기는 삭제했습니다. 오늘 감로 차를 천천히 마시면서 생각해보니까,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서요.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속된 말로, 제가 정말 못 볼꼴을 보여드린 것 같네요. 정말로,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그런 만큼 자숙하겠다는 의미로, 이번 주 금요일까지 '후기'에 한해서 묵언 연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독자 분들의 너그러운 양해를 구합니다. 로유진 올림. 0587 / 0933 ---------------------------------------------- 누구나 한 번쯤은 빛나는 시절이 있다. 퍽! “아악!” 묵직한 타격음. 주먹을 맞은 사내의 얼굴이 움푹 함몰되며 붉은 핏물을 뿜어낸다. 쓰러진 사내가 한두 번 꿈틀대는가 싶더니 몸을 축 늘어트렸다. 이로써 또 한 명의 사용자가 사망했다. 백형식은 담담히 주먹을 매만졌다. 죽은걸 확인하려는지 사내를 두어 번 발로 차더니 무심한 눈으로 남은 사용자들을 응시한다. 이제 남은 사용자는 신재룡, 안현, 고오환, 궁수 여인으로 고작 4명에 불과했다. 처음 7명으로 들어왔던 인원이 어느새 절반 가까이 줄어든 것이다. 이윽고 백형식의 멍멍한 눈초리가 한 사내에게로 고정됐다. 흐릿한 눈동자가 마치 '다음은 너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신재룡이 입을 질끈 깨물었다.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기분이 들었다. 저 괴물의 육체적인 강함은 둘째치고서 라도, 전투 내내 아무런 감정을 표하지 않는 무심함이 더욱 무섭게 다가온다. 그냥, 당연하다는 듯이 사용자를 살해하고 있다. 하기야 괴물한테서 인간의 감정을 기대하는 건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한때는 인간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물론 인간 시절의 기억은 아직도 뇌에 존재하나, 그 기억을 떠올려도 백형식은 어떠한 감각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현재의 백형식은 이제 갓 태어난 어린 아이나 다름없으니까. 파더의 체내에 흡수되고 모체를 통해 돌연변이로 태어나는 과정에서, 백형식의 인격은 소실됐다. 그리고 그 자리로 파더가 부여한 괴물로서의 인격이 들어앉았다.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백형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인즉 인간으로서 그 시절의 기억을 대하는 게 아닌, 괴물로서 새로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백형식은 사용자들을 살해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아직 괴물로서의 경험 및 성장을 겪지 못한 이상, 파더가 사용자들을 생각하는 입장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아무리 인간 시절의 기억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백형식은 사용자들을 먹이 혹은 모체로밖에 보지 않는다. 잠시 후, 백형식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찌나 재빠른 속도인지 몸이 잔상을 일으키며 그대로 신재룡을 향해 돌격한다. 그러나 고오환과 안현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이제껏 몰살당하지 않고 어찌어찌 전투를 이끌어온 데는 신재룡의 필사적인 조율이 있었다. 사제는 무조건 지켜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고오환이 마력을 크게 일으켜 대검에 주입한 채 정면으로 끼어들었다. 그리고 달려들어오는 백형식을 향해 푸른 마력이 생성된 대검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그러나, 기세 자체는 정말로 폭발적이었지만 고오환의 공격은 백형식을 맞추지 못했다. 백형식이 갑작스레 몸을 빙글 돌려 회피하는 동시에 가까이 접근해 주먹을 날린 것이다. 쾅! 우직, 우지직! 그저 주먹 공격임에도 불구하고 폭탄을 터뜨린 듯한 굉음이 울렸다. 다행히 고오환은 무사했다. 일격에 박살 직전까지 몰리기는 했지만, 신재룡이 걸어준 보호막이 충격을 흡수해준 것이다. 어쨌든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전투는 아까부터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고 있었으니까. 전투가 시작된 이후 쉬지 않고 신성 주문을 걸어주곤 있었지만, 신재룡도 이제 슬슬 마력이 떨어져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방금 보호 주문도 회로를 박박 긁어 모은 마력으로 일으킨 주문이었다. 크게 놀란 고오환이 허겁지겁 물러난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백형식이 쫓아가려는 그 순간, 이번에는 안현이 후방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내었다. 고오환이 공격하는 순간부터 안현은 몰래 옆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백형식의 등 뒤를 점거해 강력한 공격을 퍼부을 생각이었다. 이윽고 기회를 포착한 순간, 안현은 백형식의 머리를 향해 전력으로 창을 겨누었다. 슈슈슈슝! 창 끝에서 발출된 4자루 창격이 백형식의 머리를 과녁 삼아 짓쳐 들었다. 안현이 자랑해 마지않는 창술사격이었다. 그와 동시에 안현은 생각했다. 저놈은 절대로 만만한 놈이 아니다. 지금까지 전투로 미루어보아 이 공격은 분명히 실패할 것이다. 고오환이 어그로를 끌고 있는 동안, 추가 타격을 줄 수 있는 연타 공격이 필요하다. 이윽고 창을 꼬나 쥔 안현의 신형이 앞서 들어가는 창격에 이어 미끄러지듯이 들어간다. 그러나 백형식은 자신의 뒤통수를 노리고 들어오는 공격을 감지했다. 한순간, 흐린 눈동자가 섬뜩한 빛을 뿜었다. 퍼퍼퍼펑! 4개의 창격이 고스란히 뒤통수를 직격했다. 백형식의 몸이 자연스레 앞으로 쏠린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일권을 날려, 물러나는 고오환의 가슴에 꽂아 넣었다. 콰직, 챙그랑! 주먹은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던 보호막을 가차없이 깨트렸다. 고오환은 직감적으로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마력을 모아 검으로 막으려고 했으나, 주먹은 그것마저도 튕겨내며 그대로 가슴을 후려쳤다. “커헉!” 핏물을 왈칵 토해낸 고오환이 외마디 신음을 흘리며 주르륵 밀려났다. 동시에 빙글 몸을 돌린 백형식은 창을 한껏 치켜든 안현을 보며 오른 다리를 쭉 올렸다. 그 외에는 어떠한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한 마디로 맞아주겠다는 소리였다. 기회를 노린 이상 선공 권은 안현에게 있다. 아주 미세한 차이라 할지라도 분명히 안현의 공격이 먼저 들어간다. 그러나 이 일격으로 백형식을 절명시키지 못한다면, 저 번쩍 들어올린 다리가 곧바로 반격을 가할 것이다. 아무리 호신강기가 있다고는 해도, 지금껏 백형식이 보여준 파괴력을 생각하면 안심할 수 없다. 아니, 운 나쁘게 정수리라도 찍힌다면 오히려 즉사하는 건 안현일 것이다. 하지만 안현은 신재룡을 믿었고, 그대로 들어가는걸 선택했다. 힘껏 내려쳐진 창이 공기를 찢는 거센 파공음을 내었다. 기다리고 있던 발이 안현을 향해 사선으로 내리 꽂힌다. 그리고 신재룡이 안현을 향해 지팡이를 겨눈, 그 찰나의 순간. 타앙! 갑자기 외마디 총성이 신재룡의 귓전을 울렸다. 1초. 1초 동안, 총성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신재룡은 직감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으로 무수한 생각이 스쳤다. “───. ───. ───. 보호!” 그러나 결정을 내릴 필요도 없이 신재룡은 이미 외치고 있었다. 안현을 향해서. 후드득! 그리고 나서 재빠르게 몸을 비틀었지만, 무언가 알갱이 같은 것들이 옆구리에 박히는 감촉을 느껴야만 했다. 반사적으로 이를 꽉 깨문 신재룡은 흔들리려는 몸을 다잡았다. 탕, 타앙! 그러나 채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두 번의 총성이 추가로 울렸다. * 회심의 공격이라고 생각했던 일격이 실패했다. 안현은 망연한 기분으로 눈앞에 쩍쩍 갈라진 보호막을 응시했다. “쿨럭, 쿨럭! 무, 물러나라! 현아…!” 신재룡이 거센 기침을 토하면서도 물러나기를 종용했다. 그제야 번뜩 정신을 차린 안현이 재빠르게 창을 회수하며 물러났다. 지금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걸까? 탁, 탁, 탁, 탁…. 그러나 미처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힘없이 끊어 치는 박수가 들려온다. 안현은 주춤주춤 물러나며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머리를 돌렸다. 시선을 돌린 곳에는, 온몸이 걸레로 변한 괴인이 비틀거리면서도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다. 주현호였다. “대단해…. 아주 존경스러워….” 특유의 유들유들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주현호가 백형식의 옆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엄지와 검지만 핀 손을 천천히 들어올리더니 이거 보라는 듯이 까닥까닥 흔들었다. 검지의 끝에는 얼음 빛으로 둘러싸인 냉랭한 구체가 섬뜩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하고 동료의 목숨을 구한다…. 사제라서 할 수 있는 생각인가?” 그 순간 안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말았다.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한다? 사제라서? “그놈 말에 흔들리지 마라! 나를 돌아보지도 말고, 무조건 앞에 집중해라!” 안현은 곧바로 몸을 돌아보려고 했으나 이어진 신재룡의 외침에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면서도 전신에 뜻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주현호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가만히 서 있는 백형식에게 척 어깨동무를 하더니 살그머니 몸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그래. 형식이를 상대해보니까 어때? 참 쓸만한 녀석이지?” “…….”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내 친구라서가 아니라, 이놈은 정말 쓸만하거든. 뭐, 그래서 이렇게 만든 것도 있지만.” “…….” “그나저나 기분들은 어떠셔? 이제 완벽하게 상황 반전인데.” “…….”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을 한다. 한쪽 발을 건들건들하면서 말하는 게 명백히 놀리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나 사용자들은 아무런 말도 않았다. 아니, 못했다. 왜냐하면 주현호의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어느덧 고오환마저 바닥에 쓰러져 일어날 생각을 않고 있다. 처음 7명으로 시작했던 인원이 이제 3명으로 줄어들었다. “아차, 너희 그거 알아? 그 궁수 계집애, 아~까 전에 도망친 거?” 그 말을 들은 순간, 안현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변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화살 지원이 끊긴 것 같기도 했다. 기함한 안현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그러나 주현호의 말대로 그 어디서도 궁수 여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같이 싸우는 동료를 버리고, 도망쳤다. 안현과 신재룡. 이제는 둘만 남았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안현이 느끼던 불안감은 삽시간에 거대한 절망감으로 변해 해일처럼 덮쳐 들어왔다. 결국 밀려들어오는 공포를 이기지 못한 안현은, 질끈 눈을 감고 말았다. 항상, 언제나 김수현을 보조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앞으로 나서야 한다. 책임지고 적들을 물리치고 신재룡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안현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한 명도 상대하기 힘든데, 두 명으로 늘어버렸다. 비록 한 명이 너덜너덜해 보인다고는 하나, 새로 등장한 놈만 해도 상대하기 버겁다. 상대조차 되지 못한다. 아니, 이대로라면 진짜로 죽는다. 죽음에 대한 공포.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감. 그러면서도 혹시 형이 와주지 않을까 바라는, 자신에 대한 한심함. 무슨 놈의 기공창술사인가. 도대체 뭘 해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자신은 할 수 없다는 좌절감이 전신에 차오른다. 결국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안현은 머리를 떨구고 말았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너…. 설마 우냐? 울어? 히히히히! 이 찌질 한 새끼! 그러길래 아까 진즉 이야기했으면 좋았잖아…. 히히히히히히히히!” 주현호가 큰 목소리로 웃는다. 신재룡 또한 딱히 뾰족한 수는 없는지 침중한 기색을 비췄다. 그렇게 한 차례 낄낄 웃은 주현호는 백형식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자…. 그럼 이만 끝내자고. 혹시 도망친 계집이 지원군을 끌고 오면 골치 아파질…?” 그때였다. 화아아악! 한순간, 느닷없이 백형식의 전신이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깜짝 놀란 주현호가 얼른 몸을 떼었다. “이게 무슨…?!” 어떠한 전조도 없이 일어난 현상. 입을 꾹 깨물고 있던 안현은 서서히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찬연히 흘러나오는 빛무리를 볼 수 있었다. 빛은, 한 곳에서만 나오지 않았다. 어디선가 또 다른 곳에서 흘러나오는 빛무리가 왕의 굴을 밝히고 있다. “어이, 어이! 형식아! 갑자기 왜 그래!” 이윽고 주현호가 빛에 휩싸인 백형식을 부여잡은 찰나. “크륵!” 가래 끓는 소리와 동시에, 흐릿하던 눈동자에 밝은 기운이 감돌았다. “크아아아아아아악!” 그리고 그 순간, 고통에 찬 비명이 폭포수처럼 터져 나왔다. 무언가, 위험하다. 주현호는 흠칫 물러나면서도 시선을 돌려 헬레나를 찾았다. 그러나 헬레나는 이미 바닥에 누운 채 편안히 눈을 감은 상태였다. 그러면, 지금 백형식한테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0588 / 0933 ---------------------------------------------- 누구나 한 번쯤은 빛나는 시절이 있다. 해답은 바로 헬레나가 외운 주문에 있었다. 'Convertimini, Et Fulgentibus Saeculum.' 이 주문의 정체는 최고 수준의 정신계 마법으로, 정확히는 인간의 뇌에 관여하는 마법이다. 물론 사용자들 사이에서는 설정을 벗어난 정신적 고통은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헬레나는 다르다. 설정을 사용하지 않으며, 마법의 근원에 다다를 수 있는 '하늘을 굽어보는 마음의 눈'을 지닌 존재다. 사용자들에게 불가능이라 생각되는 일이라도, 헬레나에게 똑같이 적용되지는 않는다. 무수한 뉴런과 시냅스 연결로 이루어진 뇌. 인체는 신비롭다. 그중에서도 뇌는, 아직도 대다수가 밝혀지지 않은 최고로 복잡한 신비를 품은 부분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흔히들 말하고는 한다. '사람은 망각의 축복을 받은 동물이다.' 그러면 뇌는 어떻게 기억을 저장하고, 망각하는가. 기본적으로 외부의 정보를 인식하면 저장, 유지, 회상이라는 재구성 과정을 거쳐 기억으로 남는다. 어떤 기억은 금방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또 어떤 기억은 깊숙이 각인돼 일생 동안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건, 뇌 속에서 기억을 처음 저장하는 곳과, 기억을 회상하고 재저장하는 곳이 같다는 것. 물론 기억만해서는 의미가 없다. 사람이 모종의 기억을 떠올렸을 때. 그 기억에 어떤 감각이 있는지 같이 떠올려야만 비로소 의미가 있는 법이다. 헬레나의 마법이 건드린 게 바로 이 두 부분이었다. 감각은 뉴런이 신호를 표현하게 하며, 뇌의 같은 부분으로 이동한다. 그 부분이 바로 기억이 저장된 곳이다. 말인즉, 기억과 감각의 연관 작용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백형식이 지금 이렇게나 괴로워하는 것이다. 직접 대상의 정신 세계에 침투해 파더가 훼손한 신경계를 되살리고 재 연결시킨다. 통상의 기억과 망각하고 있던 기억까지 모조리 끄집어내며 감각을 대응시킨다. 그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소실된 인격을 되살리고, 상실된 이지를 부활시킨다.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과, 인간이었을 때의 감각. 아마 백형식은 지금 미치기 일보직전일 것이다. 되살아나는 원래의 인격과 새로 부여된 인격의 충돌은 물론, 망각하고 있던 기억까지 모조리 떠올리고 있으니, 뜬금없이 자신이 살아온 일생을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순식간에. “크아아악, 크아아아아아아악!” “형식아! 어이, 백형식! 정신 차려!” 갑자기 백형식이 주현호를 뿌리쳤다. 건드리지 말라는 듯, 온몸을 꼬아 비틀어대며 머리칼을 쥐어뜯는다. 그 순간. “형식아…?” 문득 들려오는 잔뜩 쉰, 그러나 고요한 목소리. “우, 우?” 그러자 갑작스럽게 백형식의 괴성이 우뚝 멎었다. 조금 전까지 난잡하기 짝이 없던 공간에, 돌연 거짓말처럼 차분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서서히, 백형식의 머리가 돌아갔다. 주현호의 머리도 따라서,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돌아간다. “허억?!” 이윽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주현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백형식과 주현호가 보는 곳에는, 다름 아닌 한 여인이 주저앉은 채 상반신만 일으키고 있었다. 치렁치렁 흘러내린 기다란 은색 머리칼과 너무나 상냥해 보이는 인상, 살짝 늘어져 포근하게 보이는 눈매. 그리고 그 안으로 잔잔히 가라앉은 또렷한 은빛 눈동자. 그랬다. 여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고은솔이었다. 헬레나는 백형식뿐만이 아닌 고은솔도 주문을 걸은 것이다. “우…. 어…?” 고은솔을 보는 백형식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거대한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과, 입에서는 괴로운 듯한 신음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고은솔은,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덜덜 떨리는 팔을 든다. 한 번, 두 번, 세 번. 팔은 계속해서 도중에 떨어졌지만, 기어코 팔을 들어올리는데 성공한 고은솔이 백형식을 향해 손짓한다. 한없이 자애로운 손놀림이었다. 백형식은, 처음에는 머리를 저었다. 혼란스럽다는, 아니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주춤거리면서 물러나기까지 했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그러나 고은솔이 괜찮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인 순간, 백형식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네 잘못 아닌 거 알아. 그러니까, 이리 오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고은솔의 말. “우…. 윽…!” 그러자 계속해서 물러나던 발걸음이, 처음으로 전진했다. “혀, 형식아!” 번뜩 정신을 차린 주현호가 급하게 외쳤다. “주, 죽여버려! 가서 죽여버려! 그년을 제일 먼저 죽이란 말이야!” 어찌 보면 처절한 절규라고 봐도 좋을 외침이었다. 그러나 백형식에게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눈빛으로, 느릿하게나마 고은솔을 향해 걸어간다. “백형식! 뭐 하는 거야, 지금!” 결국 참다 못한 주현호가 발을 끌면서 달려가 백형식의 팔을 붙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우어어어!” 퍽! 마치 방해하지 말라는 듯이 백형식이 팔을 거세게 휘둘렀다. 거기가 팔꿈치로 주현호의 안면을 가격하기까지. 졸지에 거하게 얻어맞은 주현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백형식을 응시했다. 백형식은, 여전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주현호가 얼굴을 와짝 일그러뜨렸다. “이익…!” 푹! 그때였다. 꾸준히 고은솔과의 거리를 줄여나가던 백형식이 갑작스럽게 정지했다. 몸이 앞뒤로 거세게 흔들린다. 백형식을 기다리던 고은솔이 살며시 아미를 좁히며 정면을 노려본다. 어느새 백형식의 왼쪽 가슴에는, 누군가의 손이 불쑥 뚫고 나와있었다. 범인은 주현호였다. 물론 주현호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 거기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도리어 해까지 입히자, 등 뒤에서 공격을 가한 것이다. 애당초 정말 친구라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 살려준 것이니만큼, 주현호의 행동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자신이 공격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 쾅! 쾅! 이어서 두어 번의 폭발음이 추가로 울리고, 백형식의 몸이 크게 떨렸다. 이내 주현호가 천천히 손을 빼내자 백형식의 몸이 하릴없이 허물어진다. 그래도 아직 살아있는지 등이 들썩들썩 움직였으나 입에서는 피 거품이 흘러나온다. “…멍청한 자식!” 무언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지 욕설을 내뱉는 주현호. 그러나 곧, 주현호의 미간이 사정없이 찌그러졌다. 숨을 헐떡거리는 와중에도 백형식이 낑낑거리며 팔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꼭 고은솔에게 닿겠다는 듯이 온몸을 질질 끌면서 기어간다. 주현호는 그 광경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백형식이 고은솔에 닿았다. 백형식이 꺽꺽 거리는 울먹임을 흘리면서 고은솔을 올려다보았다. 고은솔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부르르 떨기만 하는 백형식을 안아 들었다. “많이 괴로웠지?” “우욱…. 죄, 죄송…. 정말….” “그래 그래. 정말 힘들었구나. 괜찮아…. 괜찮아….” “고…. 흑…. 흑…. 끅….” 흐느끼는 신음을 흘리는 백형식과, 그런 백형식의 등을 토닥토닥 다독이며 연신 괜찮다고 속삭이는 고은솔. 비록 백형식의 말투가 어눌하기 그지없으나 모두 다 이해한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안현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벌어진 입에서 흡사 피리 부는 듯한 쉰 소리가 빠져 나온다. 안현은 전신이 텅 비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울고 싶었다. 물론 안현은 아무런 사정도 모른다. 그저 다 죽어가는 여인과, 마찬가지로 죽기 일보직전의 괴인이 재회에 불과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사내와, 괜찮다고, 잘못 없다고 말해주는 여인. 둘 사이에서 전해지는 진실된 감정이 안현의 가슴을 까닭 없이 흔들고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느꼈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사르르 사그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씨발, 지랄하고 자빠졌네. 곧 있으면 죽을 연놈들이.” 별안간 주현호가 이를 바드득 갈며 외쳤다. “어제까지만 해도 박아주면 좋다고 꿀꿀거리던….” “주현호.” 그리고 계속해서 폭언을 퍼부으려는 찰나, 고은솔의 낮은 목소리가 딱 잘라 끊어버렸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엄숙한 목소리였다. 이윽고 눈을 슬쩍 치켜 뜬 고은솔이 백형식을 보듬으며 입을 열었다. “부끄러운 줄 알렴. 이 구제불능아.” “뭐, 뭐? 뭐라는 거야 이 미친….” “너, 후회할 거야. 분명히.” “……!” 흡사 사형 선고처럼 이어진 고은솔의 말에, 주현호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말한 고은솔은 더는 볼 것도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두고 차분히 고개를 돌렸다. 고은솔 또한 알고 있었다. 자신이 기억을 되찾고 이지를 되찾은 데에는 외부의 개입이 있었다는 것을. 비록 몸이 차갑게 식어가고는 있었지만, 그리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까지 모두 떠올려버렸지만. 상실된 이지가 돌아온 이상, 예전 강인했던 정신력도 부활했다. 고은솔은 멍하니 서 있는 안현과 신재룡을 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기품이 넘치는 인사였다. “곧 죽을 몸이기는 하지만….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마지막 장식이 별로 나쁘지는 않겠네요.” “…….” “그리고,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하지만 두 분은 꼭 이기실 거라고 믿어요.” “…….” 안현과 신재룡은 회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반응했을 뿐. 이내 빙긋이 웃은 고은솔이 천천히,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처연하게도 흘러내리는 머리칼이 얼굴을 가렸다. 죽기 전에 백형식을 보려는 걸까? 그때였다. 얼굴을 간질이는 머리칼을 느꼈는지 백형식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무언가를 떠올린 듯한 얼굴로 힘겹게나마 사용자들을 돌아본다. “죄…. 죄송….” 그리고 이번에는 주현호를 가리켰다. “조…. 심…. 폭발…. 장치….” 거기까지 말한 순간, 간신히 들어올린 팔이 툭 떨어졌다. 고은솔은 아까 고개를 숙였을 때부터 미동도 않는 상태였다. 흘긋 위를 올려다본 것을 마지막으로, 허벅지를 베고 누운 백형식의 눈이 편안하게 감긴다. 그리고 두 남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 “…….”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와중에도 상황을 파악한 신재룡은 옆구리를 막으면서 안현에게로 다가갔다.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괴인이 이탈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상처 입은 괴인 뿐이니, 자신이 최대한 막는 동안 안현을 도망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꿋꿋해 보이는 안현의 등을 보는 순간 신재룡은 입을 열지 못했다. “후우.” 안현이 숨을 크게 들이키고, 내뱉었다. 뜻 모를 여운이 조금씩 가시며 온몸이 공허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 공허함은 이내 무언가로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이기실 거라고 믿어요.' 고은솔의 건넨 한 마디에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빠져나가고, 갑작스레 질박한 용기가 솟아오른다. 안현은 비로소 알 것만 같았다. 모든 걸 내려놓은 홀가분한 기분을 느낀 그 순간, 느닷없이 깨달음이 찾아왔다. 안현은 차분히 눈을 감았다. 문득 김수현의 말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아무리 두려워도 물러나지 마라. 그 두려움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두 다리는 땅에 똑바로 박아.' '전투를 계속해서 분석해라. 본능에만 이끌리지 말고 계산을 하는 거야. 포기하지 않으면 분명히 한 번의 찬스는 온다. 전투를 뒤집을 역전의 찬스가.' “예, 형.” 마치 옆에 김수현이 있는 것처럼 안현이 회답했다. 두 다리가 자연스럽게 꼿꼿해진다. '왜 자꾸 나를 따라 하려고 하는 거냐. 너는 검사가 아니야. 창병이잖아. 그것도 기공창술사.' '거리를 활용해! 기공술을 왜 그렇게 써? …안현아. 기본적으로 창과 검이 붙으면, 창이 더 유리하단다. 그런 만큼 창병은 창병만의 전투 법이 있는 거야.' 오래 전에 들었던 말이었다. 그것은 이미 해답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형이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니, 아니다. 형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이것도 아니다. 애당초 전제가 잘못되었다. 그러니 답이 나올 수가 없다. 김수현이 아닌, 안현이라면. 기공창술사인 안현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게 바로 안현이 찾아 헤맨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제대로 된 전제였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어이, 거기 구제불능의 찌질 이.” 안현이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뭐?” 멍하니 서 있던 주현호가 한껏 낮은 목소리로 회답하며 안현을 돌아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당장에라도 폭발할 듯한 살기가 억눌러져 있었다. 절대로 좋지 못한 신호. 그러나 안현은, 도리어 씩 웃어 보였다. “미쳤군. 웃어? 아까 죽겠다고 울먹거리던 새끼가, 고작 한 놈 없어졌다고 기세 등등하냐?” 맞는 말이었다. 백형식이 사망함으로써 상황이 호전됐다고는 하지만, 앞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또한 남은 인원은 둘이며 신재룡은 부상을 입은 상태. 괴인이 극심한 상처를 입었다고는 하지만 어느 정도의 전투력을 발휘할지는 미지수였다. 그래도 안현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래. 나도 찌질 하지.” “…….” “너처럼 구제불능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하.” 주현호가 어이없다는 탄식을 흘렸다. 그리고 곧장 한 손을 들어올려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내 들어올린 손이 무시무시한 기운이 휩싸이기 시작한다. 계속 눈을 감은 채, 안현이 천천히 창을 겨누었다. 예전처럼 바스러지도록 쥐지는 않았다. 살짝 건드려도 흘러내릴 듯한 헐겁게 잡은 창이, 침착히 주현호를 겨냥한다. “그러니까….” 그와 동시에, 안현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어디 한 번, 싸워보자.” 돌연히 한 줄기 눈물이 주르륵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러나, 안현의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서로 같은 놈들끼리 말이야. 이 찌질 한 새끼야….” 0589 / 0933 ---------------------------------------------- 누구나 한 번쯤은 빛나는 시절이 있다. 때는 며칠 전 밤. 구덩이 공략이 결정 난 후, 김수현이 인선 발표를 끝냈을 즈음. “후우….” 천막에서 걸어 나온 안현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다. 평소의 활기찬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눈은 힘없이 내리깔고 어깨는 축 늘어져 있는, 명백히 우울한 얼굴이다. 잠시 후, 천천히 머리를 젖힌 안현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빛이 뿌려진 밤하늘은 무척이나 아름다우면서도 고요한 정적이 흐르고 있다. 한동안 밤하늘을 응시하던 안현의 얼굴에 문득 처연한 빛이 스쳤다. 무언가 회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서서히 눈이 감기기 시작한다. '안현으로 하겠습니다.' '예. 현이로 호명하겠습니다.' 인선 발표에서 신재룡은 안현을 선택했다. 그 말은 안현에게 놀라움과 기쁨을 동시에 가져다 주었다. 설마 자신을 호명해주는 클랜원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안현은 기뻤다. 김수현이 말한 '뒷받침할 수 있는'의 의미는, 여러 의미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이를 꼽으라는 소리였으니까. 그러나. 이어지는 클랜원들의 반응은, 안현의 기분을 삽시간에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다. 모두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아니. 어쩌면 의외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 오히려 클랜원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 안현도 미약하게나마 알아챌 수 있었다. 용이 잠든 산맥 사건 이후 자신을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들을. 무언가 겉돌고 있다는 기분을. 그리고 언제부턴가 자신의 내부에 자리잡은 뜻 모를 불안감을. 확실하게는 아니더라도, 막연히 느끼고는 있었다. 그리고. '한 번 더 호명할 기회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수현이 말을 뱉은 순간. 그동안 막연하게 느끼고 있던 모든 것들이, 갑작스럽게 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모종의 불안감이 시시각각 크기를 키워갔다. 김수현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딱히 해석하지 않아도 명명백백했다. 그러나 안현을 더욱 미치게 하는 건, 그 말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현실이 그랬으니까. 항상 김수현을 따라다녔지만, 정작 이루어낸 일은 없다. 언제나 그늘 속에 가려져 있기만 했다. 나름 노력도 해보았다. 무언가 스스로 해보려고 한적도 있었다. 그러나 하는 일마다 번번이 실패했다. 그 결과가 지금의 안현이었다. '머셔너리 로드의 총애를 받는 사용자.' '레어 클래스, 기공창술사.' 그 누구도 '사용자 안현'이라는 이름을 기억해주지 않는다. 비로소 그 사실을 인지했을 때, 안현은 뼈가 저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한없이 허무했다. 자신감이 떨어졌다. 외톨이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냥, 울고 싶었다. 그때였다. “현아.” 자상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안현은 흠칫하는 동시에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과는 정반대 쪽으로. “예. 예, 형. 언제부터 계셨어요?” 아닌척하면서도 빠르게 눈을 훔친다. 그걸 보는 신재룡의 얼굴에 안타까워하는 감정이 서렸다. 언제부터 있었냐면, 신재룡은 안현이 하늘을 보고 있을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신재룡은 안현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까 클랜 로드님이 하신 말씀 때문에 그런 거니?” 안현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입을 닫은 채 가만히 있었다.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리라. “너무 신경 쓰지 말거라. 그냥 걱정돼서 하신 말씀일수도 있고, 또 어쨌든 허락하셨잖아?” 끄덕끄덕. 안현이 힘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마지못해 하는 반응이었다. 여전히 신재룡을 보지 않는 게 그 증거였다. 머쓱한 기분에 신재룡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말거라. 사실 네가 그동안 어지간히 속을 썩이기도 했잖니. 용이 잠든 산맥도 그렇고, 또 예전에 그 사건도 그렇고…. 하하하.” 신재룡은 일부러 화제를 돌리며 유쾌하게 웃었다. 그러나 안현의 얼굴이 더더욱 시무룩한 빛을 띠었다. 예전의 안현이라면 '헤헤. 그렇죠?'하고 멋쩍게 웃어넘길 텐데, 오늘은 아무래도 역효과인 듯싶다. 신재룡은 효과적인 위로의 말을 생각해내려고 애썼으나, 모두 거기서 거기였다.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신재룡이 돌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안현의 어깨에 살그머니 손을 올렸다. “내가 아는 말 중에, 이런 말이 하나가 있지.” “…….” “사람이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빛나는 시절이 온다고.” “……?” 비로소 안현이 반응을 보였다. 느릿하게 머리를 돌려 신재룡을 마주한다. “빛나는…. 시절이요…?” 우울함에 젖은 목소리가 반문했다. “그래. 빛나는 시절.” 그러나 신재룡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함박 웃음을 지으며 그렇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게…. 무슨 뜻인데요?” “흠. 무슨 뜻이라…. 글쎄, 아마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대단한 말은 아니야. 왜냐하면 누구나 한 번쯤은 거치는 시절이니까. 즉 개인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이지.” “…….” “예를 들어보면, 누구는 걱정 없이 뛰놀던 어린 시절을 회상할 수 있을 테지. 아니면 학생 시절 좋은 성적을 받은 것을 회상할 수도 있을 테고. 또 누구는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던 시간을 생각할지도 몰라.” 신재룡이 팔짱을 꼈다. 그리고 안현에게 말해보라는 듯 까닥, 턱짓으로 가리킨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저요?” 안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한동안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돌연 쓰게 웃어 보였다. “글쎄요. 지금 딱히 생각나는 건….” “그래? 정말로?” “예. 어렸을 때는…. 오히려 암울한 시절을 보냈죠. 사실 좋은 가정은 아니었으니까요. 물론 저도 좋은 오빠는 아니었지만 말이죠. 아무튼 딱히 기억나는 건 없네요.” “…그럼 홀 플레인에서는?” 안현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와 동시에 입가에 머금어진 쓴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신재룡이 재차 입을 열었다. “정말로 없어?” “그냥….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과연 제가 잘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또 뭘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으음. 그래?” “언제부턴가, 계속 겉도는 것 같아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헤매는 기분이랄까요?” 비로소 속내가 약간 드러났다. 그렇게 말한 안현은 시답잖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아직 저한테는 오지 않았나 봐요. 그 빛나는 시절이라는 게요.” “…확실히 그럴 수도 있지.” 신재룡은 살짝 눈을 치켜 떴다가 곰곰이 상념에 잠겼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였다. 한참 동안 코를 매만지며 생각하던 신재룡이 별안간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구나. 그럼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이번에는 안현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와 닿지 않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사실 아까부터 신재룡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다시 안현의 머리가 좌우로 흔들린다. “저, 형. 죄송한데요. 실은 아까부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이해가….” “그러니까….” 그때, 갑작스레 신재룡이 씩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퍽! “어헉…. 콜록, 콜록!” 안현이 거센 기침을 토했다. 등에서 얼얼한 감촉이 느껴졌다. 잠깐 방심한 사이, 신재룡의 솥뚜껑 같은 손이 안현의 등을 강타한 것이다. 안현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신재룡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힘내라는 말이다! 이 녀석아.” “예, 예?” 안현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클랜 로드 말씀처럼 만에 하나 각개 전투를 해야 할 상황이 오면, 네가 최우선적으로 찾고 보호해야 할 사람이 누구지?” “다, 당연히 형이죠. 그렇게 조가 짜여졌으니까요.” “그래. 내가 너를 선택한 건, 너를 가장 믿고 있어서야. 그런데 네가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기껏 너를 호명한 내 기분은 어떻겠니?” “그, 그건….” 무언가 말을 하려고는 했으나 결국에는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탓이다. 그러나 신재룡은 괜찮다는 듯 안현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아무튼, 청승은 적당히 떨고 이만 들어가서 자라. 푹 자면 한결 기분도 나아질 테니까.” 안현은 계속 떠름해하면서도, 반사적으로 꾸벅 허리를 숙였다. “…예, 예. 그럴게요. 형도 좋은 밤 보내세요.” 이윽고 천천히 등을 돌린 안현이 천막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신재룡은 걸어가는 안현의 모습을 지그시 응시했다. 아까 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힘없어 보이는 걸음걸이였다. 그러다가, 안현이 약 서른 걸음 정도 걸었을 즈음. “현아. 깜빡 잊고 못해준 말이 있다.” 신재룡이 약간 높아진 목소리로 안현을 불렀다. “이거 하나만은 기억해라.” 잠시 멈칫한 안현이 의아한 얼굴을 한 채 몸을 돌렸다. “빛나는 시절의 빛이라는 건 말이다.” 말을 잇던 신재룡이 번쩍 손을 들어올렸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법이란다.” 그리고 잔잔히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 안현이 몸을 날려 창을 휘둘렀다. 주현호의 주문이 완성되기 직전 정면으로 치고 들어간 것이다. 달려들어오는 안현을 보며 주현호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가볍게 몸을 젖혀 창 끝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고는 차분히 손을 내뻗었다. 안현 역시 곧바로 허리를 접으며 회피 동작을 보였다. 이내 번쩍, 눈부신 플래시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어마어마한 폭음이 뒤따랐다. 어찌나 강력한 폭발인지 공기가 떨리고 흙 바닥이 깊숙이 파헤쳐질 정도였다. 잠시 후, 누군가 한 명이 허공으로 튕겨나갔다. 안현이었다. 안현은 허공에서 그대로 공중제비를 돌아 사뿐히 지면에 착지했다. 그와 동시에 재차 주현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주현호는 나름대로 안현의 실력을 평가했는지 여전히 여유만만이었다. 안현은 아까와 똑같이 자세를 잡으며 그대로 창을 찔러 넣었다. 그때였다. 문득 한 줄기 바람이 주현호의 머리카락으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 올곧게 들어오던 창이 별안간 위아래로 흔들리며 궤도의 변화를 보였다. “어?”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갑작스레 주현호가 눈을 크게 뜨며 기함했다. “하!” 그에 대응하듯이 안현은 짧은 기합을 내지르며 그대로 주현호를 덮쳐 들었다. 차차창, 무언가 세차게 부딪치는 소리가 나며 이번에는 주현호가 쭉 밀려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갑자기 어떻게 된 거지? 그러나 채 생각을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안현은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좌로 우로 불규칙하게 이동하며 가열차게 창을 때려 넣는다. 그 어지럽기 짝이 없는 공격에, 혼비백산한 주현호의 정신도 차차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안현의 몸이 사선 방향으로 미끄러지듯이 움직였다. 주현호의 왼쪽으로 스치듯 비껴 지나가는가 싶더니, 비스듬히 잡은 흑 창을 아래서부터 강하게 쓸어 올린다. 갑작스러운 공격. 확인하고, 피할 시간도 없다. 주현호는 본능적으로 머리를 한껏 치켜들며 있는 힘껏 몸을 비틀었다. 싹! 맹렬한 모터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면 이런 느낌일까? 절로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흘긋 시선을 내리자, 채 메마르지도 않은 눈물 자국과 무시무시한 눈빛을 뿜어내는 안현이 보였다. 주현호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말았다. 0590 / 0933 ---------------------------------------------- 누구나 한 번쯤은 빛나는 시절이 있다. 안현은 훌쩍 물러나는 주현호를 보며 온 신경을 집중했다.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지금 안현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마법사를 상대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거리 유지가 가장 큰 관건이라 할 수 있지. 즉, 주문을 외울 틈만 주지 않으면 된다.' '물론 그건 일반적인 경우에 불과하고. 조금 특수한 경우를 상정해볼까? 예를 들면 이동 마법을 연속적으로 사용할 줄 아는 마법사라거나, 아니면 신체 능력이 무척 높은 마법사. 이럴 때는….' 머릿속으로 하나의 그림이 그려졌다. 안현은 창을 풍차처럼 휘두르며 물러나는 주현호를 무섭게 추격했다. '물론 항마력을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하지만, 안현. 너는 회피가 더 맞을 거야. 왜냐고? 당연하잖아. 너는 기공창술사니까. 정확히는 기공창술사의 체술을 극대화하라는 말이야. 그 체술은 회피에 최적화된 움직임을 보이면서도 동시 공격까지 가능케 하는데….' '여기서, 하나를 추가로 섞을 수 있지. 바로 페이크다.' 그 순간, 계속해서 전진하던 안현의 다리가 돌연 신들린 듯 신묘한 놀림을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정면으로 창을 찌르는가 싶더니, 벼락같이 왼쪽으로 파고들어 창을 그어 내렸다가, 또다시 오른쪽으로 몸을 틀며 후려갈기듯이 창을 휘두른다. 주현호는 정신이 아득해지는걸 느꼈다. 원래 힘들기도 했지만, 어느새 호흡도 무척이나 거칠어져 있었다. 지금 상대하는 사용자가 한 명이 아닌, 세 명과 상대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괜찮다. 한 명이든 세 명이든 간에 일단 눈에 잡을 수만 있으면…! 그렇게 생각한 주현호는 억지로 눈을 부릅뜨며 안현의 움직임을 눈에 익히려 애썼다. 그리고 세 명의 안현이 거의 동시에 치고 들어온 순간, 모조리 머리를 박살내겠다는 듯 파괴 주문으로 감싼 손을 횡으로 힘차게 휘둘렀다. 그러나 무시무시한 기운을 품은 손은 하릴없이 허공을 내젓고 말았다. 일순 주현호의 얼굴에 멍한 기색이 내려앉았다. 반사적으로, 망연히 시선을 들어올린다. 어느새. 도대체 어느새 허공으로 오른 걸까? 공중에는 안현이 있었다. 두 손으로 잡은 창을 하늘 높이 치켜든 채 몸이 초승달처럼 휜 안현의 모습은, 기형적인, 흡사 곡예를 보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부웅! 이내 탄력적으로 몸이 접힘과 동시에 안현이 흑 창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공기를 찢어발기며 짓쳐 내려온 창대가 주현호의 머리를 세차게 강타한다. 빠아아악! “끄어어억….” 붉은 액체가 점점이 뿌려졌다. 머리가 크게 꺾여졌다. 주현호의 얼굴이 멍멍해지는가 싶더니 서서히 벌어지는 입에서 숨 넘어갈 듯한 신음이 새어 나온다. 이윽고 가볍게 지면에 착지한 순간, 안현은 곧장 주현호를 노려보았다. 주현호가 온몸을 간헐적으로 떨면서 비틀비틀 물러나고 있다. '좋아. 그렇게 정타를 먹였다면, 절대로 멈추지 마라. 끝장을 볼 때까지 고삐를 늦추지 말라는 말이다.' '상대가 그로기 상태에 몰렸다면, 그건 지금껏 네가 잘 싸워온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야. 조금 더 강한 공격을, 조금 더 확실한 공격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보상. 그런데, 고작 공격 한 번 성공시켰다고 기뻐하느라 그 기회를 날릴 셈이냐?' 안현은 지체 않고 오른발을 들어올렸다. 상체가 올라가고 창도 올라간다. 발바닥, 다리, 허벅지, 복부, 가슴, 그리고 팔로 순차적으로 힘이 이어진다. 이어진 힘은 마력의 증폭을 받아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이내 발을 크게 벌리며 내려 밟음과 동시에, 안현은 그 모든 힘을 모아 창 끝으로 보냈다. 쿵! 오른발이 내려오고, 상체도 내려왔다. 그에 따라 창도 똑같이 내려온다. 정석적인 찌르기가 아니다. 크게 기울었던 창이 원래대로 수평을 이루는 순간, 아래로 내리쳐진 창 끝이 정확히 주현호의 가슴을 쿡 찔러버렸다. 꽈앙! 한 점에 집중된 폭발적인 힘이 주현호의 가슴을 터뜨렸다. 엄청난 충격파! 주현호의 입과 가슴에서 다량의 핏물이 터져 나왔다. 몸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것도 모자라, 그대로 데굴데굴 나뒹굴 정도였다. 그리고. “아.”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신재룡은 자그마한 감탄을 내뱉고 말았다. 어느덧 신재룡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마력이 완전히 떨어진 이상 신재룡은 더는 전투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아니 그전에, 이미 양 옆구리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욱신욱신한 아픔이 밀려오고 시야가 서서히 흐려진다. 그러나 신재룡은 바짝 정신을 다잡았다. 안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주현호가 괴성을 부르짖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채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안현이 먼저 공격해 들어갔다. 이성을 잃었는지, 주현호의 손이 안현의 목을 잡아채려는 듯 뻗어나간다. 하지만 안현은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초근접전을 펼치지 않았다. 창을 길게 쥐며 슬쩍 빠졌다가, 주현호의 공격이 빗나갈 즈음 창을 고쳐 쥐고는 길게 찔러 넣었다. 자신이 상처를 낸 곳을 향해서. 창은 여지없이 가슴을 관통했고 피가 솟구쳤다. 그 모든 과정을 신재룡은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애당초 전투를 재개했을 때부터 시선은 안현에게 고정된 상태였다. 신재룡이 탄성을 질렀다. 안현이 달라졌다. 아니,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용자 안현의 새로운 능력이 개방됩니다. 4번째 잠재 능력 슬롯이 소비됩니다.』 『축하합니다! 잠재 능력, 신창합일(身槍合一)이 개화됩니다!』 빛난다. 안현이 빛난다. 빛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그런 안현을 보는 신재룡은 갑작스레 설레기 시작함을 느꼈다. 환한 빛에 휩싸인 안현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아름답게 보인다. 그것은 이성에게 느끼는 설렘이 아닌, 정말로 아름다운 것을 봤을 때 느끼는 일종의 감동이었다. 문득, 신재룡은 회상했다. 예전에 보았던 어느 광경을. 하늘에서 눈이 내려오는 광경이었다. 신재룡은 가만히 벤치에 앉아 눈이 내려오는 광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내리고, 녹는다. 내리고, 녹는다. 내리고, 녹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눈이 덮이기 시작한다. 덮이기 시작한 눈은 더 이상 녹지 않았다. 쌓이기 시작했다. 내리고, 덮여서, 쌓인다. 그 당시, 문득 정신을 차린 신재룡은 무척 놀라고야 말았다. 그저 녹아 내리기만 하던 눈송이들이, 어느새 길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북이 쌓여있었다. 눈이 부실 정도의 환한 빛을 발산하던 그날의 눈의 벌판을, 신재룡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신재룡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안현을 생각했다. '안현…. 너는….' 사실상, 지금껏 함께하면서 몇 번의 고비가 있기는 했다. 자의든 타의든, 안현이 고비에 부딪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그랬다. 안현은 한 번도 도망친 적이 없다. 주어진 재능과 뼈를 깎는 노력으로 어떻게든 고비를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설령, 나락으로 떨어지더라도. - 첫 번째. 안현의 클랜원 직위를 해제합니다. 지금 이 시간 부로, 안현을 더는 머셔너리 클랜원으로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안현은 포기하지 않았다. - 형. 저 정말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악바리 근성으로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 제가 뭘 해야 할까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다시 올라오겠다고 발버둥을 쳤다. 안현이 한 행동 모두가 옳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이것 하나만은 부인할 수 없다. 안현은, 언제나 노력했다. 그리고 어디서나 최선을 다했다. 비록 그 노력이 바로 바로 보답으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안현은 항상 신재룡에게 무언가가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용자였다. 그게 바로 신재룡이 보는 안현이었고, 또 이번에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안현…. 너란 녀석은…. 정말….' 신재룡은 감았던 눈을 떠 안현을 응시했다. 여전히 주현호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안현은 주변으로 휘황찬란한 광채를 뿌리고 있었다. 활기찬 눈동자. 기형적으로 비틀리는 몸.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창을 조종하는 팔. 그러나 쉴 새 없이 지면을 밟는 발. 모든 게 불규칙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안현의 창과 몸은 마치 하나가 된 듯한 신들린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신재룡은 환호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환호였다. 그래, 바로 그거다. 저게 바로 진정한 기공창술사다. 아니, 기공창술사 안현이다! 지금껏 안현이라는 대지에 눈이 내리면 무조건 녹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아니었다. 내리고, 덮여서, 쌓인다. 계속해서 덮이고 쌓여서, 빛을 발산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안현에게도 빛나는 시절이 다가오는 것이다. “크아아아아악!” 승부가 난 것일까? 결국, 버티지 못한 주현호가 쓰러졌다. 안현이 쓰러진 주현호의 배를 밟고 올라갔다가, 곧바로 창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이미 박살 나다 못해 걸레로 변한 가슴을 보며 있는 힘껏 창을 내려찍는다. 그 모든 움직임이 물 흐르듯이 이어졌다. 그때였다. 그러니까 안현의 창이 아래로 내려가는 찰나, 주현호의 다리가 꿈틀 움직였다. 그 순간, 신재룡은 저도 모르게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주현호가 자신을 밟고 있는 안현의 등을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해 발을 차올린다. 서로의 동시 공격. 그 찰나의 순간, 보이는 시야가 거짓말처럼 정지했다. 아니, 정지했다고 생각될 정도로 느릿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신재룡이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모인 한 줌의 마력을 지팡이 끝에 담았다. “───. ───. ───. 보호!” 휙! 카캉! 주현호와 안현의 공격은 모두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주현호의 발차기는 신재룡이 걸어준 보호막에 막히고 말았다. 안현의 창은, 주현호가 머리를 한껏 젖힘과 동시에 두 손으로 창을 부여잡았다. 목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기는 했지만, 간신히 피할 수는 있었다. 잠깐의 정적. 그동안 주현호는 미칠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애송이라고 생각하던 상대가 갑자기 이상하게 돌변했다. 아무리 김수현과 헬레나에 의해 몸이 걸레짝 수준이었다고는 하나, 제대로 된 반격도 하지 못하고 처참히 쑤셔지고, 두들겨 맞았다. “크윽, 크으으윽!” 잠시 후, 주현호는 어떻게든 창을 치우려는지 끙 신음을 흘리며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안현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미 전투는 끝난 것과 다름없다. 재빠르게 발을 움직여 박살 난 가슴을 휘젓자 주현호가 구슬프게 울부짖었다. 그 사이 다시금 창을 올렸다가, 그대로 내려찍었다. 푹! 이번에는 빗나가지 않고 정확히 목에 꽂혔다. 안현은 멈추지 않았다.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목이 완전히 관통될 때까지, 안현은 몇 번이고 창을 찍어 내렸다. 결국 열한 번째 찍고 나서야 주현호의 살에 구멍이 파이며, 창이 완전히 목을 뚫고 흙 바닥에 틀어박혔다. 그 상태 그대로, 안현은 주현호를 밀쳐내듯이 창을 깊숙이 돌렸다. “크르르륵!” 벌어진 입에서 액체와 거품이 반반씩 섞인 핏물이 왈칵 토해졌다. 터져 나온 피가 사방으로 흘러내려 지면의 흙에 진득한 얼룩을 만들어냈다. “…하아, 하아!” 그제야 안현은, 참았던 숨을 일거에 터뜨렸다. 동시에 뜻 모를 환희를 느끼고 있었다. 그냥 가르침 받은 대로만 했을 뿐이다. 그저 지금껏 자신이 추구해온 길을 버리고, 원래 가야 했던 길로 선회했을 뿐이다. 그런데, 모든 게 생각대로 된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겪지 못했던 경험. 계속해서 이어지는 환희에 온몸이 떨리는 듯한 착각마저 일어나고 있었다. 이윽고 차분히 숨을 고른 안현이 간헐적인 떨림을 보이는 주현호를 응시했다. 전신이 엉망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주현호는 아직 살아있었다. “이제, 말해봐.” 그런 주현호를 내려다보는 안현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심. 폭발 장치. 이게 무슨 말이지?” 0591 / 0933 ---------------------------------------------- 웃으며 안녕. 전투는 끝났다. 백형식은 헬레나의 마법으로 고은솔과 사망했고, 주현호는 재생으로도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고 쓰러졌다. 물론 사용자들도 만만찮은 희생을 치르기는 했으나, 어쨌든 승리를 거머쥐었다. 툭, 툭. 문득, 천장에서 떨어진 흙 가루들이 눈물 자국 맺힌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현재 안현의 신경은 온통 주현호에게로 집중돼있었다. 여전히 창을 꽂은 채 지그시 응시하다가, 안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말해라. 폭발 장치라는 게 무슨 소리냐?” “콜록, 콜록!” 힘껏 창을 비틀어 빼내자 주현호가 거센 기침을 토했다. 툭툭, 툭툭. 흙 가루들은 계속해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흘러내린 가루 중 하나가 우연히 주현호의 눈동자를 때렸다. 주현호는 반사적으로 눈가를 찌푸렸다가, 느닷없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웃는지 우는지 모를 괴상한 소리였다. “흐흐…. 콜록, 폭발 장치? 흐흐흐흐….” 안현이 눈이 가늘어졌다. 곧바로 발을 들어 거칠게 가슴을 짓밟는다. 뚝! “끅! 웨에에엑…!” 늑골이 부러졌다. 주현호가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입에서 다량의 핏물이 울걱울걱 솟아오른다. “말해. 어디 있는지.” “크륵! 말하면…. 살려줄 건가…?” 주현호의 목숨 구걸. 그러나 안현은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 바로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그래도 말해주면, 적어도 고통 없이 보내주도록 하마.” “히…. 어쨌든 죽는다는 거네? 그럼 말할 것 같으냐?” 일견 태연히 들려오는 목소리에 안현이 코웃음 쳤다. 그리고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창을 높이 들어올렸다. 약식이기는 하지만, 김수현은 한때 이런 경우를 대비한 교육도 어느 정도 실시한 상태였다.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시간 끌리지 마라.' 그때 받았던 가르침에 따라, 안현은 지금 정말로 주현호의 머리를 박살낼 생각이었다. “잠깐. 생각이 바뀌었다.” 안현의 눈동자에 깃든 진심을 읽은 걸까? 주현호가 잠깐을 외쳤다. “어차피 죽는다면 말해주도록 하지. 천장을 봐라.” 막 움직이려던 창이 멈칫했다. 주현호는 히죽히죽 웃는 채로 힘겹게 손을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안현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흘긋 시선을 올렸다. 그리고 어느새 쩍쩍 금이 가 있는 천장을 확인한 찰나 크게 기함하고 말았다. 우지직! 그 순간, 딱딱하게 굳은 커다란 흙덩이 하나가 갑작스럽게 떨어졌다. 퍽, 떨어진 흙덩이는 정확히 주현호의 얼굴에 내리 꽂혔다. 안현이 재빠르게 흙 조각을 치우자, 핏물로 범벅 된 이가 드러나며 킬킬 웃는 소리를 내었다. 실핏줄이 터진 듯 한없이 붉어진 눈이 안현을 응시한다. “좋아. 이로써 확실해졌구나….” 처음으로 주현호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조금이지만 회한이 섞여 있는 음색이었다. 안현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벌써 장치를 발동한 건가?” “아~니? 너희가 이겼다는 소리야. 축하해.” “말장난은 그만두지 그래.” “말장난은 개뿔. 파더가 죽었다는 소리다. 이 멍청한 자식아. 그래서 지금 이 구덩이가 무너지려고 하는 거고.” 파더? 안현이 머리를 갸웃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아까 광장에 출현했던 거대한 괴물임을 알 수 있었다. 안현이 차분히 팔을 움직이자 창 끝에서 뿜어진 섬뜩한 빛이 주현호의 인중에 스며들었다. “그럼, 지금 이 현상이 폭발 장치 때문이 아니라는 말인가? 그 파더라는 놈이 죽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래 이 등신아. 오면서 천장에 돋은 울룩불룩한 자국 정도는 봤겠지? 그게 뭔지 알아?” “…….” “줄기 자국이다, 줄기 자국. 즉, 파더는 원래 나무였다. 그런데 구덩이를 떠받치던 줄기들이 모조리 빠져나간 것도 모자라, 죽어서 힘을 잃었어. 그럼 과연 이 구덩이가 무너질까요~? 안 무너질까요~?” “…나무? …줄기?” “어쩌냐? 나도 이제 곧 죽겠지만, 너희도 죽을 텐데. 그것도 모조리 압사당해서 말이야! 히히히히!” 안현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김수현이 예전에 말했듯이 안현은 멍청하지 않다. 오히려 영리한 편에 속한다. “아.” 약 3초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안현은 비로소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처음 든 생각은,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재룡이 형!” “그래. 들었다. 한 시가 급하니 얼른 처리하고 나가자꾸나.” 어차피 이대로 두어도 주현호는 죽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안현의 창과 발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입과 양손을 짓이기고 나서야 등을 돌렸다. 그때. “어이, 아직 듣지 못한 말이 있을 텐데?” 발음이 심하게 새기는 했지만, 안현은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안현은 아차 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폭발 장치…. “마지막으로 하나 더 말해주자면…. 나는 폭발 장치 없다고 말한 적은 없다?” 심상찮은 목소리였다. 무언가를 느낀 걸까? 안현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리고 거기도 범위 내에 속한다? 히히히히히히히히!” 이어서 미친놈이 웃어 젖히는 듯한 광소(狂笑)가 귓전을 울렸다. 거기서 안현이 선택한 건, 주현호를 돌아보지 않고 반사적으로 앞으로 몸을 날린 것이었다. 꽝! 그것은,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주현호 몸에 각인된 문신이 뻘겋게 달아오름과 동시에, 온몸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돌연 안현의 주변으로 엄청난 폭음이 돌풍처럼 덮쳐 들어와 호신강기를 두드렸다. 어마어마한 충격파는 물론, 살점 섞인 붉은 흙바람이 왕의 굴을 휩쓸었다. 그 힘에 밀려난 안현은 한쪽으로 쭉 날아가는 것도 모자라 지면을 나뒹굴고 말았다. * 처음 눈에 보인 건, 아까처럼 가만히 서 있는 파더의 모습이었다. 웅웅웅웅! 이어서 몸체에 깊숙이 박힌 무검, 아니 절멸자의 검에서 흘러나오는 웅혼한 검음이 귓전을 왕왕 울렸다. - 다 끝났으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 화정의 말대로 딱히 무슨 행동을 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파더에게서 더 이상의 반응이 느껴지지 않았거니와, 변화는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 힘을 잃었는지, 용케 빠져 나온 몇 안 되는 촉수들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와 지면에 흐드러졌다. 그와 동시에 파더의 몸체가 사정없이 비틀리기 시작했다. 마치 초 강력 청소기를 붙여 논듯, 검이 박힌 곳을 기점으로 이리저리 우그러지며 집중적으로 빨려 들어온다. 웅웅웅웅웅웅웅웅!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까 메시지에서 읽은 혼돈으로 빨려 들어가는 현상이라는걸. 파더가 혼돈에 흡수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몸체부터 시작해서 가지나 뿌리 촉수까지. 절멸자의 검은 삽시간에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이내 공간이 도로 원래대로 돌아옴과 동시에, 잠시 모습을 보였던 검신도 차차 희미해졌다. 일련의 현상을 확인한 나는 속으로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파더가 죽은 상태였다고는 하나, 가히 무시무시한 힘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다. …아무튼. 이제 정말로 끝난 건가. 파더를 무너뜨림으로써, 구덩이 공략도 끝이 난 건가. 참 길었던 전투였다. 이윽고 천천히 몸을 돌아보자 하나같이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사용자들을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자그마한 소란이 일었다. “이겼다! 이겼다고!” “와아아아! 드디어 끝났다!” 어느 사용자는 두 팔을 번쩍 들며 환호하고, 어느 사용자는 털썩 주저앉는다. 모두가 기뻐하고 있다. 심지어 한소영마저 약간은 풀린 얼굴로 가벼운 숨을 흘려낼 정도였다. 그러나. “…….” 언뜻 사용자들 사이로 보이는 안솔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갑작스럽게 전신이 착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안솔은, 왜 홀로 저러고 있는 거지? 왜 저렇게 불안한,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그 순간이었다. 우지직! 쿵! 갑작스럽게 무언가 세차게 떨어짐과 동시에. “헉…. 헉…. 어라? 끝났습니까?” 광장 옆쪽으로 이어지는 문에서 한 무리의 사용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추 세어도 스무 명 남짓한 사용자들은, 무척 급하게 달려왔는지 하나같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환호는 잠시. 광장에는 다시금 조용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갑자기 나타난 사용자들. 나는 머리를 갸웃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생각보다 광장에 사용자가 적다 싶었는데…. 어디 탐험이라도 다녀온 건가? 내가 파더와의 싸움에 집중하는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 이럴 때가 아닙니다!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그때, 유지태가 다급히 달려오며 정적을 깨트렸다. “구덩이가, 구덩이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외침에, 나는 망치로 머리가 강타당하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나는 재빠르게 1회 차의 기억을 더듬었다. 1회 차 때도 구덩이가 무너지기는 했다.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용자들이 추론하기로는, 당시 파더와의 전투에서 천장을 무너뜨린 전략과, 사방으로 난사한 마법이 주된 원인이 아닐까 하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나 또한 그것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는 있었다. 라이트 로드가 주장한 지면 구조가 비틀렸다는 설과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도 그런 부분이 없지 않았는가. 들어온 사용자들도 굉장히 적은 편이었고, 지면에 부담을 줄만한 마법도 최대한 자제했다. 그런데, 어째서? 구덩이가 무너질 전조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는데? “모두 조용히!” 그 순간, 한소영의 날카로운 외침이 귓전을 울렸다. “일단 상황을 정리하겠어요. 사용자 유지태. 구덩이가 무너지고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죠?” 유지태는 회답 대신 지면을 가리켰다. 지면에는 아까 소음의 원인인 큼지막한 흙덩이가, 산산이 부서진 상태로 놓여있었다. 나는 그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래. 이미 일어난 일이라면 해결하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 경험상 구덩이가 단번에 붕괴할 리는 없으니, 지금부터라도 전력으로 탈출에 집중하면 충분히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혹시나 무너지는 경우를 대비해 해결책도 갖고, 아니 데려오지 않았는가. 나는 전전긍긍하는 백한결을 잠시 보았다가, 여전히 떨고 있는 안솔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잠시만요. 보이지 않는 사용자들이 몇 명 있는 것 같은데요?” “그건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순간 통신이 되지 않아….” “네? 모르겠다니 요?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예. 처음에 총 28명이 출발했고, 중간중간에 7명씩 4조로 나뉘었거든요. 그래서….” “그럼 그냥 오시는 게 아니라 탐색을 하셨어야죠. 빠른 탈출에는 헬레나가 필요하다는 건 모르셨다는 건가요?” “탈출은 밖에 있는 사용자들과 연계하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사용자 신재룡 조와의 연락 두절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고요. 길도 상당히 복잡하거니와, 방금 우리가 탐색한…. 젠장! 총 사령관! 지금 상황이 급합니다! 그러니까 외곽 부분으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붕괴 현상이 상당히 심하게 일어나고 있단 말이오! 그러할진대, 저희보고 모두 죽으라는 말씀이십니까?” 사용자들을 지나치는 도중 한소영과 유지태과 빠르게 주고받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간간이 고성도 들렸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지나쳤다. 지금은 붕괴 현상을 막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안솔. 안솔?” 이윽고 지척에 다다른 순간, 나는 곧바로 안솔을 불렀다. “으…. 으….” 그러나 안솔은 회답하지 않고, 오히려 시선을 살며시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저런 모습을 보니 갑갑함이 가슴 깊숙한 곳까지 차 올랐지만, 나는 참을 인자를 그리며 속으로 눌렀다. 그리고 지체 않고 귓가에 속삭였다. “안솔. 기적…. 있지?” “…….” “왜 갑자기 말을 안 해? 있어?” “…….” “…안솔!” “어, 없어요.” …뭐? 안솔의 회답을 들은 순간, 나는 멍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 대기 시간이….” 기적이…. 없다? 나도 모르게, 안솔의 어깨를 부여잡고 말았다. “아윽!” 너무 세게 잡았는지 안솔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면서도 필사적으로 얼굴을 돌리며 내 시선을 피하고 있다. “시, 싫어요! 안 돼요! 여기서, 여기서…!” 거기다 반항까지. 애원하는 어조로 싫다고,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주체가 기적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 안솔을 보자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안솔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말인즉, 기적을 사용할 수 있는데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나는 차분히 호흡하며 속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용이 잠든 산맥 때나, 마르를 구할 때나. 평소 꽤나 맹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정작 중요할 때는 항상 한 건 해주던 안솔이었다. 또한 102포인트라는 안솔의 행운 능력치를 만든 장본인은 바로 나였다. 그런 만큼 나는 안솔을 믿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남은 한 손으로 안솔의 고개를 강제로 돌려 고정시켰다. 무에 그리 서러운지, 어쩔 수 없이 나를 보게 된 안솔의 눈에서 서글픈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린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왜.” 그 순간이었다. 『사용자 안솔의 특수 능력, 성녀 예언(Rank : F Minus)의 발동을 감지합니다.』 아주 짧은 순간이기는 했지만, 안솔의 두 눈에 옥빛 광채가 스쳤다. ============================ 작품 후기 ============================ 6월 초에 한 번. 6월 중순에 한 번. 6월 달에 들어서 벌써 2번이나 휴재를 해버렸네요. 우선, 정말 죄송합니다. _(__)_ 안 하겠다 안 하겠다 항상 마음먹고 말씀은 드리는데, 이게 정작 지켜지지 않는 것 같아요. 몸이 아프다는 것 또한 변명이겠지요. 자기 관리를 잘못한 방증이니까요. 그래도 앞으로 휴재는 물론, 업데이트 시간에도 조금 더 성실한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디 너무 서운하다 생각지는 마시고, 어여쁘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제가 최근 후기 때 너무 날뛴 것 같습니다. 어느 독자님들은 너그러이 받아주셨을지도 모르나, 분명히 눈살을 찌푸린 분도 계실 거라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코멘트에 작품 관련 내용이 거의 없다는 게 제게 깊은 깨달음을 주더군요. 그래서 차후에는 다른 작가 님들처럼 얌전한 후기를 적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거칠고 야성적인 로유진이 아닌, 현숙하고 얌전한 요조청년이 되도록 할게요. :) 0592 / 0933 ---------------------------------------------- 웃으며 안녕. 성녀의 예언 발동을 감지했다는 메시지가 보였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메시지였다. 왜, 하필, 지금…. 머릿속에 끊이지 않고 복잡함이 차오른다. 나는 안솔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하고 있으면서도 살이 패일 정도로 입술을 짓씹고 있다. 절대로 기적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단호함이 엿보인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안솔.” “…….” “사실대로 말하마. 나는 아직 자세한 상황을 몰라. 하지만, 적어도 굉장히 위급한 상황이라는 건 알 것 같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아까울 정도로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만 물어보자.” “…….” “이번 일이 어떤 식으로 끝나든 간에.” “…….” “너는,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 말인즉, 나는 네가 기적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안솔은 사용하지 않겠다고, 아니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 차후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나든 간에, 안솔은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내가 물어 보고픈 요지였다. 안솔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눈을 꼭 감는다. 또다시 한 줄기 눈물이 처연히 흘러내리고, 핏물이 나올 정도로 세게 물고 있던 입술이 서서히 떼어졌다. “네.” 그리고, 안솔이 말했다. …좋다. 나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고, 등을 돌렸다.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같은 조였는데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니요?”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마침 한소영이 서 있는 쪽에서 사내와 여인이 말다툼을 벌이는 광경이 보였다. 벌컥 화를 내는 사내는 유지태였고, 당혹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여인은…. 처음 보는 사용자였다. 활을 걸고 있는 걸 보니 궁수 같기는 한데. 일단은 한 번 가보자.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야기를 끊으며 끼어들자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마치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겠다는 태도랄까? “머셔너리 로드.” 잠시 후, 한소영이 약간 착잡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우선 경청하겠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였다. 이윽고 고요한 미성이 빠른 속도로 이어졌다. 한소영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간단하게 상황을 요약해주었다. 서른 명 남짓한 사용자가 주현호를 추격했다는 것부터 시작해, 중간에 조를 4개로 나누었고, 지금 신재룡 포함 안현과 헬레나가 돌아오고 있지 않다는 것까지. “저, 저는….” 유일하게 돌아온 사용자는 지금 말을 더듬는 궁수 여인뿐. 다른 사용자들과는 달리 따로 홀로 돌아왔다고 한다. 아까부터 잘 모르겠다는 말만 연발하고 있는데, 사실상 듣지 않아도 뻔하다. 신재룡의 조가 주현호를 만났고, 전투를 치르는 과정에서 홀로 도망쳤을 것이다. 거짓말을 해도 소용없다. 한소영의 초감각이 바로 알아챌 수 있을 테니까. “…….”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익숙한 클랜원들이 몇 명 보이지 않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저 마음속 불안감이 한층 깊어지고 다급해질 뿐이다. 『신상용(사망).』 한순간, 그때의 생각에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제 3의 눈으로 사망을 확인했을 때의 기억이, 잠자듯 편안히 눈을 감고 있던 신상용의 얼굴이. 『안현(사망).』 『신재룡(사망).』 『헬레나(사망).』 그리고 확실하게 이어질 미래가…. 아니 가장 가능성 높은 미래가 그려졌다. …이제는 형의 시체를 버려두고 달려야만 했던 기억마저 떠오른다. “싫어….” 나는, 곧바로 감았던 눈을 떴다. 여전히 천장이 갈라지고 암석 같은 흙덩이들이 떨어지는 가운데, 모두가 나를 주시한 채 입을 다물고 있다. 아깝다. 지금 이렇게 서 있는 시간조차 너무나도 아깝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네.” “우선은 사용자들을 데리고 탈출하시는 게 옳을 듯합니다. 헬레나가 없다고는 하지만….” “바깥의 사용자들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이미 연락했어요.” 그렇다는 말이지. 머릿속은 아직도 복잡하다. 지금 바로 문을 나가 그들을 찾아내고 싶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뜻 모를 불안감이 아직도 온몸을 강하게 엄습하고 있다. 여기서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만 한다. 찾아서 살리는 게 전부가 아니다. 그래. 그들을 살리는 것뿐만이 아닌, 살린 채로 데리고 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또 하나의 장치가 필요하다. “좋습니다. 그럼 제 클랜원인 안솔을 이곳에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안솔을 백업으로 남기겠다. 한소영이라면 이 말의 뜻을 이해했을 것이다. “…아.” 그 순간, 한소영의 얼굴이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변화를 보였다. 그 얼굴이 의미하는 바는 모르겠으나, 나는 지체 않고 몸을 돌렸다. 이제는, 가야 한다. “잠시….” “잠시만요.” 그렇게 땅을 박차려는 찰나, 누군가 나를 덥석 부여잡았다. 흘긋 시선을 돌리자 꽤나 진중해 보이는 얼굴을 한 유지태가 보였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러나 머셔너리 로드. 지금은 이성적으로 사고하셔야 할 때입니다.” 시끄럽다. 나는 잡힌 팔을 비틀어 빼내며 입을 열었다. “머셔너리 로드! 지금 머셔너리 로드뿐이 아니라…!” “도와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며 유지태를 돌아보았다. “제 클랜원들이니까, 제가 구하겠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까?” “어, 어…. 에….” 그때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눈을 마주친 유지태가 갑자기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거기다 주춤주춤 물러나기까지. 비단 유지태만 그런 게 아니라, 인근의 모든 사용자들이 그러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그 순간. 『사용자 한소영의 권능, 파괴 • 돌격이 부여됩니다.』 “다녀오세요. 머셔너리 로드.” 약간은 아련하게 들려오는 한소영의 목소리와 동시에, 시원한 기운이 온몸을 바람처럼 휘감아 올랐다. 비로소 한소영의 허락이 떨어졌다. “그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최대한 빠르게 몸을 날렸다. * 간신히 폭발이 가라앉을 즈음, 신재룡은 힘겹게 머리를 들어 안현을 찾았다. 안현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쓰러져 있었다. “안현!” 목이 터져라 부르는 외침. 다행스럽게도 안현이 꿈틀 반응했다. 이내 한껏 찌푸리면서도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는걸 보니 그래도 목숨은 붙어있는 모양이다. 호신강기가 어느 정도 폭발의 충격을 막아준 것이다. “큭!” 그러나, 100% 막아주지는 못했다. 몸을 일으키는 와중 안현이 좌우로 살짝 흔들렸다. 몸이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것으로 보아 오른 다리가 다친 모양이다. 신재룡은 침음을 삼켰다. 목숨에 지장이 없는 건 다행이나, 상황이 최악이라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나빠졌다. 이윽고 겨우 몸의 중심을 잡은 안현이 비척비척 걸어왔다. “재룡이 형. 죄송한데 저 치료 좀…?” 그러나 신재룡의 상태를 확인한 순간, 절로 입을 다묾과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언뜻 봐도 신재룡의 상태가 안현보다 갑절은 심각해 보였기 때문이다. 주저앉은 주변으로는, 이미 질척거리는 핏물이 흘러나와 자그마한 웅덩이마저 고인 상태였다. 안현의 얼굴을 확인했는지 신재룡이 쓰게 웃었다. “미안하구나. 지금 회로가 텅텅 빈 상태라 주문을 외울 수가 없어.” “아니, 아니요. 형. 그것보다 상처가….” “별거 아니다. 아무튼, 최대한 서두르자꾸나.” “아.”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안현이 빠르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는 감정이 눈동자에 서렸다. 왕의 굴에는 아직 수십 명의 여인이 있었다. 오래 전에 붙잡혀온 여인도 있지만, 가장 최근에 잡혀온 동료도 있는 것이다. 그런 여인들은 하나같이 배가 빵빵하게 부풀어있고, 살아남은 애벌레 괴물들한테 젖을 빨리는 중이었다. 당연하지만, 이 모두를 구하는 건 단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끙.” 힘겹게 몸을 일으킨 신재룡은 돌연 정신이 또렷해지는걸 느꼈다. 자꾸만 흐려지려는 시야가 갑작스럽게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옆구리에서 전해지는 고통이 줄어들고, 온몸의 세포가 힘을 보내주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흡사, 촛불이 사그라지기 전 한 차례 크게 불꽃을 일으키는 것처럼. …본인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잠깐 숨을 들이킨 신재룡의 눈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여전히 서 있는 안현의 어깨를 짚었다. “현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야.” “…….” “안타깝지만,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그러니 가서 헬레나양을 데려오거라.” “알겠습니다.” 조금 망설이기는 했지만, 안현 또한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아는 터라 빠르게 걸음을 움직였다. “헬레나, 헬레나!” 안현이 애타는 마음으로 불렀으나, 헬레나는 일말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안현은 덜컥 겁이 나는걸 느끼면서도 손수 헬레나를 업으며 몸을 일으켰다. 차갑게 식은 몸이 혹시나 하는 경우를 상상케 했지만, 안현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입구 쪽을 응시했다. 그리고 재차 놀라고야 말았다. “됐니? 그럼 가자.” 어느새 입구 쪽에 서 있는 신재룡은, 어깨로 한 명 사내를 부축하고 있었다. 거센 기침을 하면서도 비몽사몽 해 보이는 사내는, 다름 아닌 무사 로드 고오환이었다. 그랬다. 고오환 또한 심한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아직 죽지는 않은 상태였다. “혀, 형?” “자자.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클랜 로드가 이 상황을 인지했다면, 분명 구조의 여지를 남겨두셨을 게다. 우리는 그걸 믿고 가는 거야.”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 사용자는 왜!” “…….” 처음으로 안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가슴이 터질 듯이 갑갑해졌다. 저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은 탓이다. 물론 자신도 괜찮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경우가 다르다. 헬레나는 무조건 구해야 하는 사용자였다. 그러나 신재룡은 척 봐도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이거니와, 목숨을 걸고 무사 로드를 구할 의리는 없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내의 사이로,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스스로한테 떳떳해지고 싶으니까.”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곧 신재룡이 말했다. “예?” 안현은 입구를 향해 어기적어기적 걸으면서도,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신재룡은 미약한 신음을 흘리는 고오환을 잠깐 바라보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현아. 나는 말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후회를 남길만한 짓은 하고 싶지 않구나.” “형. 왜 이러세요. 제발, 제발요. 상식적으로 형이 지금….” “할 수 있다.” “…아니요. 아니에요.” “아까 말하지 않았느냐.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할 수 있으니까 이러는 거다.” “할 수 없어요.” “그리고 나는…. 차후 클랜 로드에게 상황을 설명할 때, 떳떳해지고 싶다. 나는, 정말로 최선을 다했다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같이 싸운 동료를 버리지 않고, 여력이 닿는 한에서 할 수 있는 만큼 구해왔다고.” “…….” 그런 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는 의미는 그런 의미였던 건가. 결국 안현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사실 아직도 하고 싶은 말은 굴뚝같았으나, 신재룡이 얼굴을 보자 차마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쳐다보는 신재룡의 얼굴에는 자신이 차마 알지 못할 무언가의 감정이 잠재돼있었다. 잠시 이야기가 끊기는 것과 동시에, 안현도 입구에 다다랐다. “나는 사제다.” 마지막으로 말한 신재룡이 차분히 몸을 돌렸다. 안현은 아직 걱정을 지우지 못한 얼굴로 피로 얼룩진 등을 응시했다. ============================ 작품 후기 ============================ 코멘트를 쭉 읽어보는데…. 아마 예전에 신상용의 죽음이 독자님들께 상당한 충격을 드린 것 같네요.(사실 저는 그 정도로 같이(?) 슬퍼해주실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사실 지금 말씀 드려보면, 구상에 아주 약간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독자님들이 제가 그려낼 상황에 대한 여러 의견을 말씀해주셨고, 제가 깊이 고민해보게 만들어주시더군요. 음. 지금은 여기까지만 말씀 드릴게요. 하하하. 0593 / 0933 ---------------------------------------------- 웃으며 안녕. 구덩이 붕괴 현상이 시작되고 김수현이 광장을 벗어난 이후. 그제야 사용자들의 본격적인 탈주가 시작되었다. 『전장의 지휘자(Field Maestro)의 권능, 파괴 • 돌격을 발동합니다. 사용자들의 속도 및 파괴력, 돌진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두두두두두두두두! 권능이 발동되자 사용자들이 달리는 속도가 가일층 빨라졌다. 되돌아가는 진형에서 한소영은 선두에 서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후방에서 사용자들을 쫓아가고 독려하며, 혹시 모를 이탈자를 방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렇게 탈주는 생각보다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한소영의 옆에서 달리던 연혜림은 이따금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앞만 보고 달려도 모자랄 판인데, 한소영이 중간중간 자꾸 고개를 뒤로 돌리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탈주에 집중하라고 한 마디 하려던 연혜림은, 이내 한소영의 얼굴에 그늘진 한 줄기 수심을 보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제 클랜원들이니까, 제가 구하겠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까?' 문득, 아까 광장에서 들었던 말이 연혜림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유지태를 죽일 듯 노려보던 살기 가득한 눈동자를 떠올리자, 돌연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 김수현의 눈초리가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비켜라, 방해하지 마라. 절로 침이 꼴깍 넘어간다. '머셔너리 로드가…. 그런 사내였나?' 연혜림이 쉬지 않고 다리를 움직이면서도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사용자들이 지나쳐온 길을 응시했다. 연혜림의 시야에는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한소영과 가장 후방에서 달리고 있던 만큼,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그러나 뜻 모를 미련이 남는지 계속해서 고개를 돌리던 연혜림은, 별안간 빤한 시선을 느껴야만 했다. “……?” “…….” 어느새 한소영이 연혜림을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를 바라본 두 여인은 거의 동시에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가는 사용자들을 살피며, 부지런히 걸음을 놀렸다. 한편. 툭, 투둑! 우직, 우지직! 이곳저곳에서 벽면이 갈라지고 부서지는 소음이 들려온다. 아직까지 어느 정도 형태는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대로라면 광장이 무너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남은 시간은 그리 많다고 보기는 어렵다. 퉁! 그때 천장에서 떨어진 암석만한 흙덩어리가 희뿌연 막에 부딪쳐 지면으로 흘러내렸다. 흙덩어리를 튕겨낸 허연 막 안에는, 새하얀 빛을 발하는 지팡이를 든 여인이 홀로 서 있다. 아니. 비단 막 안에서 뿐이 아니라, 아예 광장 자체에 남은 사용자가 안솔 혼자뿐이었다. 김수현은 이곳에 자신의 구조를 백업할 사용자를 남기겠다고 말했고, 직접적으로 안솔을 언급했다. 그에 따라 같은 클랜원들이, 다른 사용자들이 구덩이를 빠져나가는걸 보고만 있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면 상황상 아니면 성격상 응당 두려움을 느껴야 정상인데, 홀로 남은 안솔의 얼굴에서는 조금도 그런 빛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두려움과는 확연히 다른, 죄책감과 갈등의 빛이 서려 있다. 마치 무언가를, 지금이라도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것처럼. “기…!” 그때였다. 안솔의 입에서 '기.'라는 말이 튀어나옴과 동시에, 안솔이 쥐고 있던 지팡이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 화아아악! 그리고 그 순간, 지팡이가 눈부실 정도의 찬연한 빛에 휩싸이며 광장을 환하게 물들였다. 기적(Miracle)이 사용되기 직전의 전조 현상이었다. 그러나. “ㅈ…. 저….” 거기까지였다. 기적이라는 완전한 단어가, 정확히는 두 글자 중 끝말인 '적.'이 추가로 들려오지 않는다. 안솔은 몇 번이나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달싹 움직였으나, 결국에는 마지막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말았다. 그 결과, 공간을 환하게 물들였던 빛이 점차 희미하게 사그라졌다. 안솔의 상태는 척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언뜻언뜻 옥빛이 깜빡이는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입술은 가련해 보일 정도로 파르르 떨리고 있다. 흡사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이랄까? 사실, 안솔도 알고는 있다. 아까 안현과 신재룡이 사라졌을 때부터 모종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여기서 김수현이 시킨 대로 기적을 사용한다면? 물론 생존에 대한 100%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숨통을 크게 틔워주는 역할은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솔이 기적을 사용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바로 성녀의 예언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성녀의 예언은 일전에 안솔이 꿨던 꿈과 이어졌으며, 꿈을 해석해주었다. 김수현이 나타났던 꿈. 무언가를 해치우고, 또 무언가를 해치우고, 종래에는 김수현이 블랙홀로 사라져버린 그 꿈.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온 예언의 메시지는…. 『필요할 때를 위한 작은 행운을!』 그것을 확인한 순간, 하늘 높이 들어올렸던 지팡이가 힘없이 서서히 떨어져 내렸다. 꽤나 애매모호한 메시지였지만 안솔의 직감은 분명히 경고하고 있었다. 지금 기적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사용해버리면…. 차후, 김수현이 죽는다. “흑!” 이 딜레마와 같은 상황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지, 결국 안솔의 두 눈에서 서러운 눈물이 툭 터져 나왔다. “어엉…! 어어어엉…!” 뜻 모를 미안함이 담긴 서글픈 울음이, 바작바작 부서져가는 광장을 자그맣게 울렸다. 안솔은, 여전히 홀로 서 있었다. 같은 시각. 김수현은 아주 살짝 비탈진 어두운 통로를 온 힘을 다해 오르고, 달리고 있었다. 거칠 것이 없는 움직임. 주변에 어마어마한 돌풍을 일으키는 김수현의 속도는 가히 신속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였다. 중간중간 몇 번이나 통로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지만, 김수현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이따금 주변으로 떨어지는 흙 조각은 깡그리 무시한 채 무조건 앞만 보고 달린다. 마치 신재룡의 조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다는 듯, 하나의 통로를 잡고 오롯하게 달리고 있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현재 김수현이 돌리는 방대한 범위의 마력 감지와 제 3의 눈의 활성화 덕분이었다. 탁탁탁탁탁탁탁탁! 그러다 어느 순간, 딱딱한 철도를 밟아 젖히는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김수현의 눈이 매섭게 주변을 탐색한다. 김수현의 사용자 정보와 한소영의 권능. 이 두 요소가 합쳐진 김수현의 전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잠시 후, 김수현의 모습이 빛살과도 같은 속도를 보이며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실제로는 많은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안현이 체감하는 시간의 흐름은 상당히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시 바삐 이곳을 벗어나고픈 마음에 비해, 몸이 생각대로 따라주지 않고 있었으니까. 지친 몸은 계속해서 충분한 산소를 요구하고, 부상당한 다리는 자꾸 엇나가려고만 한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기껏 전투에서 이겼는데, 이제야 겨우 나아갈 길을 찾았는데, 그런데 여기서 죽는다면…. 이 구덩이에 들어와 이루어낸 모든 일들이 도로아미타불이 돼버릴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현이 믿고 희망을 가질 것은 결국 하나뿐이었다. 구조(構造). 다시 말해, 클랜 로드가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클랜 로드가 이 상황을 인지하셨다면, 분명 구조의 여지를 남겨두셨을 게다.' '우리는 그걸 믿고 가는 거야.' 안현은 신재룡의 말을 생각했다. 그래. 형은 클랜원을 버릴 사람이 아니다. 용이 잠든 산맥에서 실종됐을 때도 형이 구해주셨다. 그러니 이번에도 분명 구해주러 오실 것이다. 그래서, 안현은 걸었다. “헉, 헉….”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입에서 단내가 나도 걸었다. 우직, 우지직! 천장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소리가 자꾸만 신경을 거슬리게 했으나, 그래도 걸었다. 김수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반복적으로 멈추려는 발을 억지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없이 걷고 걷던 도중, 잠시 쥐 죽은 듯 조용히 있는 헬레나를 고쳐 업으려 팔에 힘을 주었을 즈음. 쾅! 쾅! 쾅! 쾅! 돌연 안현의 눈앞으로 거대한 흙 암석 덩어리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안현의 발걸음이 더 이상 내디뎌지지 못하고, 반사적으로 멈추어졌다. 아까 굴을 나올 때부터 부단히도 쫓아오던 붕괴의 균열에 마침내 따라 잡힌 것이다. 또한 이렇게 따라 잡힌 이상, 앞질러지는 것은 삽시간일 터였다. 안현은 살그머니 입을 깨물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운이 좋아 피하기는 했지만, 만에 하나 정수리가 직격당했다면 정말 일 날뻔했다. 아마 그대로 고꾸라졌을 것이다. 아무튼 이 거치적거리는 장애물을 돌아서 갈 생각에, 안현이 살짝 몸을 튼 찰나였다. “…형.” 그러나 잠깐 옆을 바라본 안현은, 저도 모르게 멍한 빛을 보이고 말았다. 신재룡과 고오환이, 쓰러져 있다. “형! 형!” 쓰러진 주변으로는 조각난 흙 조각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안현은 곧바로 헬레나를 바닥에 내린 후 신재룡을 향해 달렸다. “으으으음…!” 신재룡의 악 다문 입 사이로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형! 재룡 형! 괜찮으세요?” 안현은 다급하게 부축해주며 걱정스레 묻자 신재룡은 간신히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의례적인 회답일 뿐,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 사실이 그랬다. 신재룡의 상태로 고오환을 부축한 채 여기까지 걸어온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상황은 이제 최악을 넘어 종착역을 향해 치달리는 중이었다. 헬레나는 아까부터 싸늘하게 식은 상태였다. 고오환은 간간이 신음을 토하며 반응을 보이고는 있으나, 여전히 일어날 생각은 않고 있다. 거기다 신재룡은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상태. 여기서 그나마, 그나마 괜찮은 사용자라고는 안현뿐이다. 잠시 후, 힘겹게 눈을 뜬 신재룡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현아…. 미안하다….” “뭐, 뭐가 미안해요 형.” 신재룡의 미안하다는 말. 안현은 문득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애써 부정하고는 있었지만, 신재룡이 왜 미안하다고 말했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안현의 예상이 맞는다는 듯이 신재룡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이렇게는 더 이상 힘들 것 같구나….” “아, 안 되요 형! 할 수 있는 만큼 해보자고 하셨잖아요!” “그게 아니라….” “젠장, 싫어요! 저는 절대로, 절대로 형을 버리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신재룡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안현이 머리를 세차게 저으며 발악적으로 외쳤다. 마치 신재룡이 어떤 말을 할지 알고 있다는 것처럼, 그리고 그 말을 듣기 싫다는 것처럼. 아예 신재룡의 입을 막아버린 안현은 남은 한 손을 겨드랑이 아래로 넣어 억지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신재룡은, 나지막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지, 이 녀석아.” “…예?” 그러자 씩씩거리면서 신재룡을 일으킨 안현이 돌연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주변에 계속해서 흙덩이가 떨어지는 와중에도 신재룡은 허허 웃으며 한쪽 벽면을 가리켰다. “나는 저걸 사용하자는 말이었다.” 이윽고 신재룡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 머리를 돌린 안현은, 벽면에 세워진 무언가를 보는 순간 벼락을 맞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광산 열차인 것 같습니다.' '예. 아마 이 철도에 쓰였던 것이라 생각되는데…. 크기는 서너 명이 들어갈 정도는 되는데….' 광산 열차. 생존의 희망이 사라져가던 이들의 눈앞에, 지푸라기 하나가 떨어졌다. ============================ 작품 후기 ============================ 한 번 더 나에게 질풍 같은 집필을~. 거친 슬럼프에도 굴하지 않게~.(굴하지 않게~.) 18시에 컴퓨터 의자 착석. 21시까지 지우고 썼다 반복. 21시 넘어서 비로소 첫 문장 완성. 그리고 03시 52분. 수십 번의 휴재 공지 유혹을 참아내고 악으로 깡으로 완성. 참 어지간히도 안 적히는 날이었지만…. 그래도 독자 님들. 저는, 이겼습니다. 저를 짓누르려는 슬럼프와 싸워서 이겼어요. 엉엉. ㅜ.ㅠ 부디 제가 내일도 싸워서 이길 수 있게 쓰담쓰담으로 힘을 주세요! 0594 / 0933 ---------------------------------------------- 웃으며 안녕. 광산 열차. 지금 상황에서는 확실히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아니, 어쩌면 이게 마지막 남은 구명줄일지도 모른다. “현아!” 한순간 무수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으나, 곱씹을만한 틈은 없다. 신재룡의 외침에 안현은 곧바로 반응했다. 쿵! 엎어놓은 바구니, 아니 광산 열차를 번쩍 들어올려 힘차게 철도에 얹었다. 덜컥! 그러자 신기하게도 바퀴가 마치 자석이라도 된 것처럼 레일에 바짝 붙는다. 안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최대한 침착해지려 애썼다. 지금부터 이 녹슬고 낡아빠진 광산 열차를 굴려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어딘가 장치가 있을까? 무언가 당기는 거라도 있을까? “안현!” 그때, 다시금 신재룡의 외침이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머리를 돌린 안현은 기절한 헬레나를 주섬주섬 둘러업는 신재룡을 볼 수 있었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인데, 도대체 어디서 저런 힘이 나는 걸까? “열차 내부, 아니면 주변을 자세히 찾아봐라! 분명히 무언가가 있을 게다!” 그러나 의문이 채 끝나기도 전, 다급하기 그지없는 외침이 이어졌다. 안현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래. 여기는 홀 플레인이었지. 그렇게 생각한 안현이 재빠르게 열차 내부를 훑는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내벽에 덩그러니 붙어있는 적당한 크기의 보석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것의 정확한 정체는 모르나,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안쪽에 보석이 하나…!” “보석? 보석이면 마력과 관련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말을 이해 못할 안현이 아니었다. 곧장 열차 안으로 뛰어들어 내벽에 붙은 보석에 마력을 주입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그 순간, 갑자기 열차 아래서 격한 진동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각각 꼭지점에 달린 바퀴에서 들려오는 소음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저 진동음만 들려올 뿐 그 이상의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광산 열차는 여전히 레일에 붙은 채로 서 있었다. 이제 됐다는 기쁨도 잠시, 안현은 당황한 기분으로 이리저리 머리를 돌렸다. 풀썩! “어쩔 수 없지. 지체할 시간이 없어. 누군가 밀어야 할 것 같구나.” 그 순간 신재룡이 열차 안으로 헬레나를 집어넣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들었는지 열심히 열차를 더듬던 안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머리를 돌렸다. “예? 미, 밀어요?” “그래.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다.” “그, 그럼 제가….” “아니. 안 돼.” 금방 나오려는 폼을 잡는 안현을 신재룡이 얼른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미는 건 내가 한다.” “형!” 당연하게도, 안현이 크게 반발했다. 그리고 막으려는 신재룡을 무시하고 억지로 나오려는 찰나, 돌연 온몸이 바짝 굳는 것을 느꼈다. 안현은 멍하니 신재룡을 응시했다. 어느새 신재룡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안현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안현으로서는 처음 보는 신재룡의 얼굴이었다. “어리광부리지 마라! …사용자 안현.” 그랬다. 신재룡은 지금 화를 내고 있었다. 아주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내 살짝 힘을 푼 신재룡은 서로간의 얼굴 거리를 서서히 줄였다. “현아. 지금 상황이 굉장히 급하다. 이러고 투덕거릴 시간이 없어. 우리는, 합리적으로 생각해야 해.” “혀, 형….” “앞길을 보거나 천장에서 떨어지는 것 등…. 너는 열차 자체는 물론,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변수에 대비해 동료를 보호해야 한다. 이게 쉬운 일인 것 같으냐?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 돌연 안현은 지금 이 공간에 신재룡과 둘만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신재룡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그 정도로 엄청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마치, 무조건 해야 한다는 것처럼.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이 열차를 미는데 집중하는 것뿐이야. 알아들었니?” “…그럼.” “현아. 제발!” “알겠으니까! …하나만, 제발 하나만 약속해줘요.” 그러한 상황에서, 결국에는 안현이 쥐어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절대로 죽지 말아요. 어느 정도 열차를 밀면 무조건, 무조건 타겠다고 약속해요.” “…좋다. 약속하마.” 약간의 텀을 두고, 신재룡이 머리를 끄덕였다. “정말이죠? 괜히 저와 헬레나를 살리겠다고 거짓말하는 건 아니죠?”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느냐?” 없다. 적어도 안현이 기억하기로는 한 번도 없었다. 결국 흙 암석 하나가 추가로 떨어지고 나서야, 안현은 신재룡의 약속을 믿기로 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그때였다. “끄응….” 신재룡이 막 고오환을 부축해 일으키는 찰나, 미약한 침음이 거뭇거뭇한 입에서 새어 나왔다. 깜짝 놀란 신재룡이 잠시 주춤한 사이, 지금껏 감겨있던 고오환의 두 눈이 서서히 떠졌다. 그리고 천천히 눈동자를 굴리더니 비틀거리면서 몸을 바로잡는다. “무사 로드…?” “아아. 됐소.” “저, 정신을 차리신 겁니까?” “뭐, 이야기는 아까부터 언뜻언뜻 듣고 있었고…. 업혀오면서 느낀 것도 있으니까. 아무튼 상황은 대충 알고 있수다.” 아직은 정신이 어지러운지 고오환이 이마를 지긋이 눌렀다. 그러면서도 입은 멈추지 않았다. “아우~. 무슨 현기증이…. 아무튼 말은 됐으니까, 그쪽도 얼른 타기나 하쇼. 미는 건 내가 하리다.” 이윽고 터벅터벅 걸어간 고오환은 가볍게 몸을 풀며 양팔을 걷어붙였다. 정말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러면 정신이 약간은 깨어있었다는 소리일까? 안현은 열차에 선 채로 멍하니 고오환을 응시했다. 대신 밀어준다고? 안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고오환의 이런 행동은 물론, 애당초 깨어날 거라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문득 고오환과 안현의 시선이 마주쳤다. “뭘 봐. 인마.” 백형식에게 당한 가슴은 아직도 피를 철철 흘리는 중이었다. 그러나 고오환은 조금도 아랑곳 않으며 광산 열차의 후면을 부여잡았다. “저…. 감사….” “감사는 개뿔. 여기 볼 여유 있으면 앞이나 봐라. 자식아…. 콜록, 콜록!” 한껏 투덜거리면서도 기침을 뱉은 고오환이 끙 힘을 주며 서서히 열차를 밀려는 듯 폼을 잡았다. 그리고 와짝 찌푸린 얼굴로 옆으로 휙 머리를 돌렸다. “사제 형씨는 뭐하쇼? 어서 타지 않고.” “무, 무사 로드.” “주변 상황 안 보여? 빨리 가자며!” “그냥 제가….” “아 속 터지네 진짜! 형씨, 내 몸은 내가 알아요. 어차피 이거 탄다고 해봤자 가다가 뒤질게 뻔히 보이는데…. 나는 그렇게 죽기는 싫어.” “…….” 그제야 신재룡이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 다시 앞으로 머리를 돌린 고오환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애송이 자식아.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마라. …사실 알고 있었으니까. 너희가 나를 싫어하는 것 정도는.” “그, 그건.” 안현이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어! 나도 너희를 싫어했으니까!” 뜬금없이 킬킬 웃은 고오환이 왠지 모르게 신나는 목소리로 외쳤다. “…애송아. 그래도 말이다.” 그러다 문득, 말끝에 이르러 갑작스럽게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까 저 양반이 그랬잖아. 자기도 한 번도 같이 싸운 동료를 버린 적이 없다고.” “…….” “그러면 나도 지금은. 적어도 지금만큼은 너희 동료라는 말이지? 응?” “…예. 그렇죠.” 안현의 회답했다. “좋아.” 고오환이 씩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도 지금껏 동료를 버린 적은….” 그리고, 정말로 만족해하는 얼굴로 한 차례 숨을 들이킨다. “단 한 번도 없거드으으은!” 그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힘을 잔뜩 주는 얼굴로 격한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힘을 세게 줬는지 가슴에서 핏줄기가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광산 열차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녹이 심하게 슬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뭔가 다른 원인이 있는 걸까? 고오환이 찡그린 얼굴로 있는 힘껏 밀어붙이고 있음에도, 마치 레일에 딱 붙어버린 것처럼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고오환은 발악하는 얼굴로 신경질을 부렸다. “제기랄! 이거 왜 이래?!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자자. 한 번 같이 밀어봅시다.” 때마침 신재룡이 옆으로 걸어와 빠르게 팔을 걷어붙였다. 그러자 흘긋 눈을 흘긴 고오환이 헛기침을 하며 약간 자리를 비켜주었다. “…젠장. 민망하고만.” 그것도 잠시. 이내 두 거한의 사용자가 동시에 광산 열차를 밀기 시작했다. “으으으으으음!” “크으으으으윽!” 그래도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광산 열차였으나 두 사내는 포기하지 않았다. 정말로, 정말로 온 힘을 끌어내며, 사력을 다해 열차를 힘차게 밀어붙였다. 그러자. 끄르르릉! 우우우웅! 무언가 끌리는 듯한 소리와 동시에, 점차 잦아들던 소음이 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안현은 느릿하게나마 몸이 천천히 이동하는걸 느낄 수 있었다. 마침내, 광산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끄르르릉, 끄르르릉! “안현! 이제부터는 절대로 우리한테 신경 쓰지 말고, 무조건 앞쪽에 집중해라!” 별안간 신재룡의 호통이 이어졌다. 안현은 보석에 재차 마력을 주입하며 한 손으로 흑 창을 꼬나 쥐었다. 그리고 기나긴 통로를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이곳을 통과해야 한다. 광산 열차가 서서히, 아주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 번 간신히 움직인 바퀴는, 두 번, 세 번을 돌아갈수록 더욱 빠르게 회전했다. 처음의 억지로 끌리는 듯한 느낌은 사라지고, 가면 갈수록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듯한 느낌이 밀려온다. 덜커덩…. 덜커덩…. 덜커덩…. 덜커덩…. 통로는 아직 뚫려 있었다. 붕괴 현상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으나 아직은 갈라지는 선에서 그칠 뿐. 아예 무너져 길이 막히는 광경은 보이지 않는다. 안현은 부릅뜬 두 눈으로 천장을 응시했다. 열차 문제로 지체하는 사이, 어느덧 붕괴의 균열은 자신들을 한참이나 앞질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무의미하게 허비한 시간이 아니었다. 이제는 이 열차로 다시 쫓아야 하고, 앞질러야 한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두 사내가 광산 열차를 밀어주고 있다. 여기서 안현이 해야 할 일은 열차와 헬레나를 최대한으로 보호하는 것이다. 덜커덩…! 덜커덩…! 덜커덩…! 덜커덩…! 돌연 안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차차 속도가 빨라지면서 주변의 풍경도 비슷한 속도로 지나가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가속이 붙으면 붙을수록, 소음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안현은, 딱 붙어있던 열차가 느닷없이 좌우로 흔들거리는 게 느껴졌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설상가상으로 천장에서 흙 암석들이 우수수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부는 안현이 창을 휘둘러 쳐냈지만, 나머지는 그대로 바닥에 꽂히거나 아니면 철도를 건드렸다. 한 번 지면에 부딪칠 때마다 적잖은 충격파가 광산 열차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지면에서 전해져 오는 진동의 감촉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안현의 경종을 울리고 있다. 안현은 이를 악물었다. 신재룡과 고오환에게는 더 이상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 그들은 안현을 믿고 광산 열차의 보호를 맡겼고, 또한 지금 밀고 있는 것만으로도 지나칠 정도로 무리하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어떻게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 이 찰나의 순간, 한 생각이 안현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덜커덩! 덜커덩덜커덩! 덜커덩! 덜커덩덜커덩! 흔들림이 심해졌다. 안현은 보석에 손을 댄 채 곧바로 마력을 일으켰다. 지금은 되냐, 안 되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무어라도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안현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안현이 선택한 방법은, 다름 아닌 최근에 개화한 능력인 신창합일. 창술의 일정 이상의 경지에 이르면 사람이 창이 되고 창이 사람이 되는 능력. 안현은 바로 그 능력을 응용했다. 보석에 댄 손과 자신의 마력을 이어 넣어, 광산 열차를 창으로 대입한다. 어찌 보면 들어오는 피해를 고스란히 받을지도 모르는 도박에 가까운 방법. 덜커덩, 덜커덩! 그리고 그 방법은, 보기 좋게 성공했다. 아까 주현호와의 전투 때 느꼈던 창과의 일체감이 이번에는 광산 열차와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보석으로 흘려 넣은 마력은 차체는 물론, 안현의 뜻에 따라 열차 전체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덜컹덜컹, 덜컹덜컹! 덜컹덜컹, 덜컹덜컹! 당장에라도 날뛰고 넘어질 것 같은 광산 열차가 삽시간에 안정됐다. 불규칙하던 소음이 규칙적으로 변화함으로써 반발력이 최소화되고, 그에 따라 저항이 적어진 열차에 가일층 가속이 붙기 시작한다. “…하다. 현아.” 우우우우우웅! 바퀴가 맹렬하게 회전한다. 처음 들려왔던 소음이, 이제는 웅혼한 마력음을 울리며 한층 안정된 상태로 통로를 빠르게 통과한다. 안현이 흘긋 시선을 올리자, 저기 멀리서 앞질러가던 붕괴의 균열이 차차 시야에 잡히기 시작했다. 거리는 착실하게 좁혀지고 있었다. 이 속도라면 충분히 따라잡거니와, 곧 추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됐다, 됐다! 안현이 속으로 환호했다. 어떻게 이루어지는 원리인지는 모르나, 광산 열차를 사용하는 게 정답이었다. 그제야 신재룡에 생각이 미쳤는지, 안현은 한껏 기뻐하는 와중 아차 한 기분을 느꼈다. 이 정도로 가속이 붙었다면 적어도 열차가 멈추기 전까지는 괜찮을 것이다. 이제는 신재룡이 타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 재룡이 형! 이제…!” 그렇게 생각하며 빠르게 뒤를 돌아본 순간. “…형?” 안현은, 망연히 말을 흘리고 말았다. 광산 열차는 여전히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 그러나 신재룡과 고오환이 보이지 않는다. 열차의 뒤편은, 휑하니 비어있었다. ============================ 작품 후기 ============================ 다음 회는 '웃으며 안녕.' 파트의 마지막 회입니다. 드디어 이 파트를 종결 내는군요. 엉엉….(감동의 눈물이에요.) PS. 어제 응원 감사합니다! 덕분에 오늘도 열심히 싸워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D 0595 / 0933 ---------------------------------------------- 웃으며 안녕. 우직, 우지직! 구덩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뻥 뚫린 구멍 아래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사용자들이, 하나같이 불안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곧 서너 줌의 흙 가루가 후드득 떨어지는 동시에, 얼기설기 얽힌 조잡한 밧줄들도 우수수 흘려내려 허공에서 대롱거린다. 그제야 밧줄을 바라본 이들의 안색이 확연히 밝아졌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이제는 가셔야 할 때입니다.” 잠시 후, 밧줄을 힘껏 부여잡은 사내가 조금은 급해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아직은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 한소영은 미동도 보이지 않는다. “너무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먼저 올라가도록 하세요.” “이스탄텔 로우 로드.” “저는 조금 더….” 사내가 간곡한 목소리로 연거푸 권했으나 한소영은 차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득이 먹히지 않을 것임을 알았는지, 사내는 결국 한숨을 흘리며 밧줄을 두어 번 세게 잡아당겼다. 이내 바깥에서 여러 명이 밧줄을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 사내의 몸이 빠르게 허공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이로써 구덩이 아래 남은 사용자는 한소영을 제외해도 10명 남짓한 정도였다. 붕괴 현상이 시작된 직후, 빠른 대응으로 대다수의 사용자를 무사히 올려 보낸 한소영이었지만, 정작 자신은 아직 구덩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않았다는 말이 더 정확할까? 처음 밧줄이 내려왔을 때부터 몇 번이나 기회가 있었음에도 거절한 건, 다름 아닌 한소영 자신이었으니. 한소영은 잠시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도로 시선을 내려 달려온 통로를 응시했다. 그저 어둡기만 한 통로. 아무도 보이지 않고,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 사실은 한소영의 가슴을 한층 복잡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언제 오는 걸까라는, 오랜만에 맛보는 초조감에 한소영이 살그머니 이를 짓씹은 찰나였다. 탁탁탁탁! “……!” 하염없이 통로를 쳐다보던 무감정한 동공에 별안간 이채가 스쳤다. 한소영은 자동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안력과 청력을 한층 드높여 통로를 더욱 유심히 응시한다. 탁탁탁탁, 탁탁탁탁! 들려온다. 통로를 밟아 울리는 나지막한 발소리들이 들려온다. 들려오는 발소리는 1명이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최소한 2명. 그리고 무척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는 한소영의 눈동자에 비로소 설렘이라는 감정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내 서서히 모습을 보여오는 여러 그림자들까지 확인한 순간, 가슴을 짓누르던 초조감이 사라지고 기다리기를 잘했다는 안도감이 내려앉았다. “후.” 가벼운 한숨을 흘린 한소영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구덩이는 여전히 붕괴 현상이 진행 중이었으나 아직까지 무너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거기다 아까 줄을 잡은 사용자들의 구조가 끝났는지, 마침 새로운 밧줄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좋다. 가히 나쁘지는 않은 상황이다. 저들이 도착했을 때 바로 이 밧줄을 잡고 올라갈 수만 있다면, 올라가는 데 시간적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한소영이 아주 살짝 미소 띤 얼굴로 통로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사용자들을 확인한 순간, 그 미소는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아…?” 없다. 아니, 보이지 않는다. 통로로 달려오는 사용자는 총 3명. 정확히는 사내 1명과 여인 1명, 그리고 사내의 등에 업혀 오는 여인 1명. 3명은 각각 기공창술사 안현, 광휘의 사제 안솔, 거주민 헬레나로 한소영도 익히 알고 있는 이들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정작 한소영이 오매불망 기다리는 머셔너리 로드, 김수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달려오는 3명의 사용자를 보는 한소영의 낯에 도로 시름이 깊어졌다. * 덜컹덜컹, 덜컹덜컹! 덜컹덜컹, 덜컹덜컹! 광산 열차에 서 있는 안현은 후방으로 머리를 돌린 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형?” 신재룡이 보이지 않는다. 고오환도 보이지 않는다. 죽을 힘을 다해 열차를 밀어주던 두 사내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안현이 광산 열차를 안정시키는데 집중하는 사이 홀연히 떨어져 나간 것이다. “아….” 깊은 생각에 빠져있기는 했다. 그런데 도와달라는 말은커녕,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조용하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열차를 잡은 손을 놓았다. 신재룡이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모를 안현이 아니다. “아…!” 사실 열차를 밀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조금이나마 직감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안현은 그 직감을 애써 외면했다. 왜냐하면, 약속했으니까. 절대로 죽지 않겠다고, 어느 정도 열차를 밀면 무조건 타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아아아악!” 그러나 신재룡은 약속을 어겼다. 같이 살겠다는 말을 지키지 않았다. 희생이 아니었다. 체력이 한계에 다다른 이상 짐이라고 생각했고, 거기서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했을 뿐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안현은 그 모든 것을 알 것 같음에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거짓말쟁이!” 결국에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눈물이 차올라 시야도 뿌옇게 흐려졌다. “거짓…! 말쟁이…!” 울먹임 가득한 목소리가 빠르게 지나치는 통로에 메아리 친다. 당연하게도 회답은 없다. “크흑…. 크흐흐흑….” 결국 안현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창을 지팡이 삼아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전방을 확인하려 애썼다. 그런데, 그러기가 힘들다. 힘들어도 너무 힘들다. 이제는 신재룡이 없다는 현실을 인지했는데. 울고 싶지 않은데…. 정말로, 정말로 울고 싶지는 않은데. 이렇게 된 이상 자신과 헬레나의 탈출에 집중하고 싶은데. 그러는 게 정답이거니와, 신재룡이 진정으로 원하는 사실이라는 것도 알고 있는데.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신재룡을 되찾고 싶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당초 어디서 사라졌는지도 모르거니와, 이미 가속이 붙을 대로 붙은 열차는 레일을 한참이나 달려온 상태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속이 붙기를 원해 마지않았던 열차가, 지금은 한없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크흑흑흑….” 눈물은 닦아도, 닦고 또 닦아도 여전히 멈추지 않는다. 덜컹덜컹, 덜컹덜컹! 덜컹덜컹, 덜컹덜컹! 그러는 와중에도 광산 열차는 맹렬히 레일을 치달렸고, 어느새 균열과의 거리를 거의 좁힌 상태였다. 그때였다. 쩌저저저저저저적! 마침내 광산 열차가 붕괴의 균열을 거의 따라잡았을 즈음, 돌연히 갈라짐이 커다랗게 이어졌다. 마치 이대로 간단히 따라 잡힐 수는 없다는 듯 앞쪽으로 쭉쭉 뻗어나가며 저만치 앞서나간다. 그리고, 그 갈라진 틈으로 조각난 흙 암석들이 그대로 아래로 하강하려는 듯 흔들거리는 폼을 잡는다. 아니, 실제로 몇 개는 떨어지고 있었다. 지금 이 속도대로라면 저 낙석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명백히 위험한 상황. 열차에 직격하는 건 물론, 스치거나 아니면 철도에 내리 꽂혀 진로를 방해하는 이 모든 게 생명과 직결된다. 아무리 열차를 강화했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창으로 쳐낸다고 하더라도, 빗줄기처럼 쏟아질 모든 흙 암석을 감당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 상황에서 안현이 기대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간신히 속도가 붙은 열차를 멈출 수도 없거니와, 애당초 조작 방법도 모른다. 그저 이대로 무사히 돌파하는, 열차가 영향권을 돌파하기까지 흙 암석이 늦게 떨어지는 요행 등을 바랄 뿐. 우직, 우지직! 그러나 낙하 영향권까지 어느 정도 거리를 남겨두고, 천장은 안현이 기대를 보기 좋게 배신했다. 최악을 넘어서는, 어쩌면 이대로 끝날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 정말로 최악까지 간다면 광산 열차도 버릴 것이다. 그렇게 각오한 안현이 이를 질끈 악물었을 때였다. 번쩍! 느닷없이, 안현의 시야에 한 점의 빛이 번쩍였다. 그 빛의 발광에 한순간 안현의 낯에 의아한 빛이 스쳤다. 건너편에서 반짝인 빛은 삽시간에 거리를 줄여왔다. 때마침 천장에서 떨어진 흙 암석들이 어딜 들어오냐는 듯 중구난방으로 하강을 시작한다. 그러나 빛은, 아무렇지도 않게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흙 암석의 한복판에 파고들었다. 이어지는 광경에, 안현은 멍하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번쩍! 안현이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이전보다 훨씬 거리를 줄여온 빛무리를 볼 수 있다. 번쩍! 번쩍! 번쩍! 번쩍! 한 번 번쩍일 때마다, 빛은 지금껏 안현의 걱정이 우습다는 듯 화려한 움직임으로 흙 암석 사이를 물 흐르듯이 누비며 통과한다. 흙 암석은 빛을 털끝만치도 건들지 못했다. 오히려 빛이 지나갈 때마다 흙 암석은 절반으로 쩍쩍 갈라지며 하릴없이 좌우로 굴러 떨어진다. 거짓말 같은 일이었다. 저렇게나 쏟아지는 흙 암석을 피하는 것도 모자라, 모조리 갈라내고 쳐낸다? 그것은 안현이 정상적인 상태라도 절대로 자신할 수 없는 일. 그러나 그 순간 안현은 아차 한 기분을 느꼈다. '클랜 로드라면, 분명히 우리를 구조할 여지를 남겨두셨을 게다.' 신재룡이 확신하며 했던 말. 지금껏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었음에도 꾸역꾸역 걸어왔던 원동력. 안현은 혹시나 하는 기분으로 자동적으로 시선을 올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번쩍! 또다시 빛이 번쩍였다. 큼지막한 흙 암석이 반으로 동강난다. 그리고 갈라진 틈으로 새하얀 빛을 발하는 검광이 새어 나와 안현의 시야를 가득히 물들였다. 그 빛은 마침 안현의 정수리로 낙하하는 흙 암석을 추가로 잘라내고서 빙글, 공중제비를 돌았다. 공중에서 저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사용자는, 안현이 기억하기로는 단 한 명. “…혀엉!” 비로소 빛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안현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랬다. 마침내 빛이, 아니 김수현이 나타났다. 정말로 신재룡의 말대로 자신들을 버리지 않고 구원하러 와준 것이다. “형!” 안현이 재차 외쳤다. 이 급박한 상황에도 일견 무덤덤해 보이는 얼굴이 보였으나, 오히려 안현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김수현이 와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제껏 자신을 괴롭혀온 모든 감정이 일거에 눈 녹듯 사그라지며, 그 자리에 뜻 모를 환희가 차오르고 대체한다. 절망만이 남았던 구덩이에 갑자기 모든 것이 변화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윽고 그대로 허공을 지나치는 김수현의 시선이 흘끗 아래로 떨어졌다. 안현도 머리를 한껏 젖히며 김수현을 보려고 애썼다. 그렇게 한 명은 아래에서, 다른 한 명은 허공에서. 서로가 서로를 마주보는 찰나의 순간. 김수현이 잠시 열차를 훑는가 싶더니 앞으로 쭉 이어지는 통로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신재룡은…!”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안현은 본능적으로 반대쪽 통로를 가리켰다. 그렇게 서로가 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것과 동시에. 덜컹덜컹, 덜컹덜컹! 열차는 흙 가루 묻은 레일을 무리 없이 지나쳤다. 번쩍! 빛이 번쩍이며 김수현의 모습이 사라졌다. 김수현과 안현은, 서로를 스치듯이 지나쳤다. * 때는 몇십 분 전. 덜커덩! 덜커덩덜커덩! 덜커덩! 덜커덩덜커덩! 당장에라도 레일을 이탈할 듯 비명을 지르는 광산 열차와, 그 후면을 부여잡고 밀어붙이는 두 사내가 있었다. 신재룡과 고오환. 두 거한의 사내는 진심으로 있는 힘껏 힘을 짜내 열차를 밀고 있다. 그럴수록 열차에서 들려오는 소음은 더욱 심해졌지만, 신재룡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조금이라도 힘을 빼는 순간, 그대로 무너지고 말 것 같았으니까. 사실 신재룡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다. 아까 지면에 한 번 넘어졌을 때부터 자신은 끝났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찬연하게 타오른 회광반조의 불길조차, 이제는 서서히 사그라져가는 중이라는 것을. 말인즉, 안현에게는 거짓말을 한 셈이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았다면 안현은 절대로 광산 열차에 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신재룡은 더더욱 열차를 미는데 힘을 주었다. 그리고 앞에서 무언가를 하는 듯한 안현의 등을 바라보며 미안한 기색을 비췄다. 열차는, 점차 속도가 붙고 있었다. 어느덧 씽, 칼날 같은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어이, 사제 형씨!” 이내 차차 쫓아가기도 힘들 지경으로 속도가 오른 순간, 문득 고오환의 외침이 신재룡의 귓전을 울렸다. “예!” 신재룡은 여전히 앞만 응시하며 회답했다. “죽기 전에 하나 궁금한 게 생겼는데! 사실대로 말해주쇼!” “말씀하시죠!” 마지막임을 직감한 걸까? 열차를 밀어붙이는 두 사내가 거의 발악하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그런 두 사내는 똑같이 미소 띤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까, 거기서! 나를 동료라고, 버리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는 참 고마웠는데 말이지! 진짜로 감동했다고!” “별말씀을! 그런데, 그게 궁금한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실은, 우리 말이야!” “……?” 잠깐, 고오환의 목소리가 끊겼다. 하지만 침묵은 길지 않았다. “조금만 더 일찍, 다른 상황에서 만났더라면! 서로 꽤나 괜찮게 지냈을 것 같지 않아?” 비로소 들려온 뜻밖의 질문. 하지만 신재룡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도리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곧장 입을 열었다. “그랬겠죠!” “정말?!” “예! 무사 로드와 같은 성격! 딱히 싫어하지는 않아서요!” “…크흐흐큭!” 고오환의 웃는지도 우는지도 모를 웃음이 돌아온다. 그리고. “…그래, 고맙수다.” 별안간 약간 낮아진 목소리가 신재룡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그에 입을 열려던 신재룡은 돌연 도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왼쪽에서 휑한 느낌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열차를 미는 부담감이 일시적으로 강해졌다. 가속이 붙고 있어 바로 나아지고는 있었지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굳이 머리를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애당초 예상하고 있던 만큼 별일은 아니었다. 그저…. 고오환의 체력이 먼저 다했을 뿐. “…정말로 재미있었을 겁니다.” 이내 조용히 중얼거린 신재룡은 차분히 머리를 들었다. 이제는 시야마저 흐릿해질 대로 흐릿해진 상태였다. 아무리 애를 써도 초점이 잡히지 않는다. 온몸이 천근만근으로 무겁게 느껴졌고, 자꾸만 머릿속으로 어둠이 내려앉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몸이, 다리가 더 이상 열차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끝이 다가온 게 아니라, 끝에 다다랐다. 이제는 때가 되었다는 것을 신재룡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신재룡은 마지막 힘을 짜내었다. 잠깐 잡힌 시야에 보석에 손을 대고 무언가를 하고 있는 안현이 보였다. 그것이 정말로 마지막, 최후의 힘이었다. 이내 곧바로 시야가 가물가물해지며 갑자기 전신이 툭 끊기는 듯한 기분이 엄습했다. 그러기 전에, 신재룡이 서글픈 미소 지었다. 서글프게 웃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현아.” 거의 동시에, 지금껏 끈덕지게 잡고 있던 열차를 놓았다. 갑작스럽게 주변의 모든 게 느려지는 듯한 착각도 잠시. 풀썩! 덜컹덜컹, 덜컹덜컹! 덜컹덜컹, 덜컹덜컹! 열차는 한층 안정된 소리를 울리며 삽시간에 레일을 통과했다. 끝까지 열차를 바라보려고 하던 신재룡은, 결국 머리를 툭 떨구고 말았다. 이내 광산 열차가 저 멀리 사라지고, 소리마저 완전히 사그라질 즈음. 통로에 어둠이 지긋이 내려앉았다. 계속 이어지는 붕괴 현상으로 땅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으나, 신재룡은 그 어떤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누웠다는 사실이, 볼에 닿는 보드라운 흙의 감촉이 끝없는 아늑함과 홀가분함을 가져다 주고 있었다. “…….”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신재룡은 문득 온몸이 가라앉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러한 기분 속에서, 지금껏 자신이 지나쳐온 시절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회상하기 시작했다. 일전에, 안현이 물은 적이 있다. '그럼 형의 빛나는 시절은 언제였는데요?' 그때는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몰라서 말하지 못한 게 아니라, 쑥스러워서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럼…. 저를 구하려고 구조대에 참가하신 겁니까?' '제 목숨을 구해주셨으니까요.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은인이 곤경에 처한 것을 알고서도 모른척하는 건 금수만도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맺게 된 인연이…. '그럼 마음의 결정은 내리신 겁니까?' '예. 어제 비로소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 동안 머셔너리 클랜에서 지내면서 참 좋은 사람들이 많다고 느꼈고, 이 기회를 놓치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입을 받아주신다면 최대한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머셔너리 클랜원으로서의 시절이…. '머셔너리 클랜의 가입을 환영합니다.' 다름 아닌, 신재룡이 생각하는 자신의 빛나는 시절의 시작이었으니까. 우르르르르르르릉! 마침내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던 회상이 끝났을 즈음, 주변을 찢어발길 듯한 어마어마한 소음이 귓전을 강타했다. 동시에 얼굴로 부스스 쏟아져 내리는 적잖은 흙 가루까지도.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완전한 붕괴의 전조(轉調). 긴장이 차오르고, 숨이 막힌다. 이제 곧 이어지고 맞이해야 할 미래가 보인다. 이 어두컴컴한 구덩이 안에서, 홀로 흙에 압사당할 미래가. 무섭지 않다면, 슬프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그러나, 적어도…. '후회는…. 없다….' “하하하….” 그래서 신재룡은 웃었다. 적어도 지금 후회하지 않기에, 신재룡은 웃을 수 있었다. 쿠르르르르르르릉! 이내 그 웃음을 기점으로, 무수한 흙 암석이 낙하한다. 간신히 뜬 실눈의 어둠 반 흐릿함 반이던 시야에도, 무언가 큼지막한 것들이 한꺼번에 가득히 메워오고 있었다. 신재룡의 눈이 초연이 감기고, 무너진 흙덩이들이 수직으로 하강한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번쩍! 한 줄기 빛이, 통로를 가로질렀다. 빛살처럼 치고 들어온 반사된 검광은 하강하는 흙 암석들은 물론. 화아아악! “사용자 신재룡!” 통로에 들어찬 모든 어둠까지, 모조리 새하얗게 반전시켰다. ============================ 작품 후기 ============================ 으어어어. ㅇ<-< 죄송해요. 오늘 어떻게든 끝낼 생각이었는데…. 네. 용량 조절에 했습니다. OTL 이 불민한 저를 매우 치세요! ㅜ.ㅠ 내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무조건 구덩이를 끝내겠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오해가 있는 것 같아 답변을 드리고자 합니다. 1. 신씨한테 사기 당한 전력이 있나? Sol ) 아닙니다. 그런 적 없어요. 2. 신씨 성을 가진 사람한테 10번 이상 차인 적이 있나? Sol) 연애요? 흠. 신xx. 강xx. 김xx. 오xx. 김xx. 아. 그러고 보니 중학교 3학년 때 신xx한테 이별 통보를 들어보기는 했네요. 3. 연애하다 신씨한테 차였나? Sol) 으음. 엄밀히 말하면 없는 건 아닌데, 그것 때문은 아니라고요! 4. 신씨만 골라 죽인다? Sol) 아니에요. 제발. OTL 5. 작가 님께서 고오환을 죽이는 것은 복선입니다. 본인은 고오X이 없음, 즉 자신은 로유미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Sol) ㅡㅡ. PS. 오늘 구조는 역순에서 다시 역으로 꼬았습니다. *를 기점으로 따져보면 3, 2, 1의 진행이 나왔으며, 1에서 시간이 흐른 이후로 4의 진행이 나왔다고 보시면 됩니다. :) 0596 / 0933 ---------------------------------------------- 웃으며 안녕. 미친 듯이 통로를 달려왔다. 도중에 만난 안현도 그대로 지나쳤다. 그리고 오직 계속해서 달려, 마침내 저 멀리서 간신히 신재룡을 발견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쿠르르르르르르릉! 그것은 신재룡을 발견하자마자 일어난 일이었다. 지금껏 겨우겨우 버텨오던 천장이 더 이상의 붕괴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진다. 확실히 신재룡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닥에 쓰러진 신재룡. 거의 동시에 무너지려는 천장. 아마 저 상태로라면 8초 안에 압사당한다. 괜히 멈춘 게 아니다. 지금 여기서 무슨 수를 쓰더라도, 8초 안에 목적지에 닿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과연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할까. 이미 컵은 엎어졌고 물은 흘러나온다.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없다. 나는 토(土)라는 기운과 어떤 연관도 없으며,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저만한 규모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그냥 흙 암석만 떨어지는 거라면 모를까, 아예 천장 그 자체가 무너지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러면 이대로 가만히 있어야 하나? 이대로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건가? 정말로 빛처럼 빠른 속도를 낼 수 있거나, 아니면 시간을 늘릴 수 있는 묘수가 있다면…. 5초. 잠깐. 빛, 시간. …어쩌면. 4초. 빅토리아의 영광을 들었다. 있는 힘껏 마력을 끌어올려 파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냥 한 번 쏘고 끝나는 파동이 아닌, 발출 후 형상이 남아 지속적으로 주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런 파동. 3초. 찰나의 순간, 전신의 회로가 가열차게 회전한다. 두 발부터 시작으로 허벅지, 복부, 가슴, 심장, 머리까지 일주한 마력을 소용돌이 형태로 모은다. 모으고 모아 한층 강렬해진 마력을 둥글게 꾹꾹 눌러 담고, 오른팔을 하나의 통로로 삼아 모조리 빅토리아의 영광에 불어넣는다. 2초. 웅웅웅웅! 비로소 빅토리아의 영광이 환한 빛을 밝히며 가열찬 검음을 울어 젖힌다. 그와 동시에 검 끝으로 동그란 구체 하나가 생성된다. 마치 전신의 마력이 빨려나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지만, 이대로 멈출 수는 없다. 해일처럼 밀고 나가는 기세를 최대한 보존하며, 검 끝의 구체를 힘차게 밀어낸다. 그리고, 그대로 발사. 1초. 콰앙! 그 순간, 나는 0.1초나마 숨이 끊기고, 온몸이 경직되는 반발력을 느껴야만 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충격. 아무리 조절하지 않고 완성하는데 집중했다고 하더라도, 체력 능력치가 100포인트임을 감안하면 절대로 흔한 일이라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효과는 확실했다. 0초. 아슬아슬한 직전의 순간, 빛과 어둠이 교차했다. 10초 안에 절대로 닿을 수 없으리라 여겼던 거리를, 파동은 하나의 섬광이 되어 삽시간에 가로질러버렸다. 화아아악! 한순간, 통로에 들어찬 어둠이 새하얀 빛으로 반전한다. 눈부실 정도의 어마어마한 빛의 축제였으나, 확실히 볼 수 있었다. 검 끝부터 통로 끝까지 미끄러지듯이 가른 파동이, 영향권에 들어온 것들을 모조리 꿰뚫고 없애버리는 것을. 그렇게 쭉 이어진 파동은 하나의 막이 되어 주었다. 신재룡을 향해 무너지는 천장을 잠시나마 막아주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래. 성공했다. 신재룡을 구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면, 지금이 바로 두 번 다시는 오지 않을 최후의 기회였다. 웅웅웅웅웅웅웅웅! 빨리 가라고 재촉하는 듯한 빅토리아의 영광을 부여잡았다. 이미 몸은 움직이고 있었다. 달리기, 점프, 궁신탄영, 이형환위…. 파동의 영향이 미치는 그 틈을 이용해,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돌진했다. 그 결과, 정확히 11초 만에 신재룡에 닿을 수 있을 정도까지 간격을 줄일 수 있었다. 나는 재빠르게 손을 내뻗었다. “사용자 신재룡!” 그리고, 마침내 붙잡았다. 사르르르…. 쿠르르릉, 쿠르르릉! 그때였다. 돌연 통로를 가득히 메우던 빛이 약해지며 등골에 짜릿한 감촉이 내려앉았다. 조금이라도 지체할 틈은 없다. 그 즉시 붙잡은 손에 힘을 주는 동시에, 사선으로 한껏 몸을 기울이며 힘껏 땅을 박찼다. 쿵, 쿵, 쿵, 쿵! 한순간 시야에 노이즈가 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무언가 단단한 것들이 몸을 긁듯이 스치고, 또 어떤 것은 정수리를 강타했다. 흡사 들이닥친 해일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기분. 그러나 지금 내가 신경 써야 하는 건 하나뿐이었다. 왼손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감촉만을 놓지 않은 채, 나는 발이 닿자마자 역으로 궁신탄영을 사용했고, 몸이 멈출라치면 재차 사용했다. 마치 뛰지 않으면 죽는다는 강박증에 걸린 것처럼, 그저 무조건 달려온 통로를 되돌아가는데 온 힘을 쏟아 부었다. 우당탕!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발이 꼬임과 동시에 세차게 지면을 구르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올리자 비교적 온전해 보이는 천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면…. 적어도 영향권은 완전히 벗어났다는 소린가? “헉…. 헉….”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덧 숨도 턱 끝까지 차올라있었다. 하기야 파더와 전투를 치를 때부터 지금껏 몸을 한계까지 가동하고 있었거니와, 간간이 화정도 얹어서 사용했다. 지치지 않는다면 그게 거짓말이리라. 나는 잠시 숨도 돌릴 겸 신재룡의 상태를 확인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그냥 계속 도망치는 게 낫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신재룡이 버텨준다는 가정하에 일어날 수 있는 일. 일단 구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완전한 구조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척 봐도 신재룡의 상태가 숨 넘어가기 일보직전처럼 보였으니까. 제 3의 눈으로 확인한 결과, 역시나 신재룡의 상태는 무척이나 심각했다. 아닌 게 아니라, 수십 초 이내 사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아마 안현과 만났을 때 조금이라도 지체했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으리라. 아무튼, 괜찮다. 신재룡을 확실히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예전에 그 사건 이후로, 밖으로 나갈 때는 무조건 엘릭서 한 병씩은 꼬박꼬박 챙기고 다니니까. “……!” 이윽고 아무 생각 없이 품에서 엘릭서를 꺼내려는 찰나, 나는 잠시나마 흠칫하고 말았다. 동작을 멈춘 원인은, 처음 이들을 구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나를 끊임없이 괴롭혀온 일종의 고민이었다. 그러니까 뭔가 나 자신답지 않은 위화감이라고나 할까…? 천천히 시선을 내려 신재룡을 응시했다. 그리고 차갑게 식어가는 얼굴과 잔잔한 미소를 확인한 순간. “저는….”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위화감이 삽시간에 사그라졌다. 탁! 곧바로 엘릭서를 묶는 줄을 끊고, 마개를 찢었다. 황금과도 같은 액체에서 흘러나오는 청량한 내음이 콧속을 상쾌하게 찔러온다.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신재룡이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병을 기울였다. …과연 잘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역시나 엘릭서라 그런지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차차 안정된 호흡을 보이는 신재룡을 확인한 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흘리며 통로로 시선을 돌렸다. 아마 지금쯤이면 안현이 안솔과 만났을 테고, 헬레나가 사제 치료를 받았을 테지. 조금 더 빠르면 아예 도착했을 수도 있고. 그러면 괜찮다. 한소영이 기다려주든 기다려주지 않든, 헬레나가 치료받은 이상 3명의 탈출은 거의 확실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럼 이제 남은 일은…. 아니, 이러고 있을 틈이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나는 지체 않고 신재룡을 둘러 업은 후 무너질 듯 말듯한 통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 지면이 무너지는 광경을 본 적이 있는가? 그것도 이미 한 번 무너져 구덩이를 형성한 지면이, 재차 무너지며 더욱 넓혀가는 광경을. 그것은 상상 이상으로 공포를 느끼게 한다. 우르르르르르르릉! 흡사 천둥이 울리는 듯한 거대한 굉음이 사방을 휩쓸었다. 그 여파로 인해 일대가 지진이라도 난 듯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고, 언덕에 서 있던 사용자들은 혼비백산한 얼굴로 뒷걸음질쳤다. 그러한 사용자들 중에서, 오직 한 여인만이 꼿꼿이 선 채 구덩이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다. 한소영이었다. 한소영은 결국 끝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어떻게든 김수현을 기다리려고 했으나, 안현이 도착했을 때가 최후의 마지노선이었다. 어느덧 구멍 주변을 감싸고 있는 내벽조차도 조금씩이나마 붕괴될 기미를 보이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거의 반강제적으로 끌려 나온 한소영은, 나오자마자 부상자 후송을 처리한 후 남은 인원의 구조에 직접 힘을 기울였다. 사실상 한소영이 마지막으로 나온 셈이니 남은 인원이래 봤자 김수현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시간이 계속 흐르면서 그것조차도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붕괴 현상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바깥쪽 구덩이 지면도 이상 현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구조를 위해 대기하고 있던 사용자들이 거듭하여 철수를 호소했고, 3번이나 참은 한소영은 4번째 호소에 가슴을 억누르며 철수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언덕의 장벽까지 철수할 생각이었으나, 구덩이를 둘러싸고 있는 이상 그곳도 안전 지역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그림자 언덕 최전방까지 물러나고 말았다. 이로써 김수현을 구조할 수 있는 길은 모조리 끊겨버린 셈이다. 물론 아직 남은 희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첫 번째로 김수현이라는 사용자 자체에 기대할 여지가 있다. 파더와 전투할 때 보였던 움직임이라면 자력으로 탈출하는 게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밧줄보다 그러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계속해서 구덩이를 응시하던 한소영이 잠시 고개를 돌려 한쪽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돌린 곳에는 한 여인이 한소영과 똑같은 선에서 구덩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냥 보고만 있는 게 아니라, 온몸에 화려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채로. 여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안솔. 그랬다. 안솔은 지금 기적을 준비하고 있었다. 구덩이에서는 사용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으나, 이번에는 사용 대상이 달라졌다. 애당초 김수현 때문에 기적을 사용하지 않았으니, 사용 대상이 김수현으로 확정된 이상, 당연히 안솔의 마음도 바뀔 수밖에 없다. 꽈르르릉, 꽈르르릉! 그 순간, 엄청난 소음과 동시에 구덩이 주변의 대지가 푹 꺼지듯이 가라앉았다. 아직까지 완전히 가라앉은 건 아니었으나 눈에 확실히 보일 정도로 들어간 것이다. 멀찍이서 보고 있던 머셔너리 클랜원들은, 하나같이 불안한 얼굴로 안솔과 구덩이를 번갈아 응시했다. 기적의 효능은 익히 알고 있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김수현이 나오지 않으니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안솔은 여전히 보고만 있었다. “안솔, 안솔! 지금 사용해야 하는 거 아냐? 응?” 결국 참지 못한 이유정이 안솔에게 달려들어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러자 한껏 집중력을 짜내고 있던 안솔이 얼굴을 찡그리더니 귀찮다는 듯 고개를 털었다. “언니. 조용히 하고 있어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약간은 차갑게 마저 느껴지는 목소리. 그러나 이유정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기적을 준비한다고 해서 억지로 억누르고는 있었지만, 시시각각 무너지는 땅을 보고 있자 더는 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직 사정을 듣지 못해 모르지만, 김수현이 나오지 못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방법만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아래로 내려갔을 것이다. 이유정이 도로 안솔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지 말고, 응? 빨리…!” “시끄럽다고 했잖아요!” 돌연히 안솔이 날카롭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일갈했다. 저도 모르게 주춤한 이유정의 머릿속으로 별안간 멍한 기분이 찾아 들었다. “뭐, 뭐…?” “누구는…. 누구는 지금 사용하고 싶지 않은 줄 알아요?” “…….” “…아무것도 모르면서!” 꽈르르르르르르릉! 그때였다. 안솔이 거의 울먹이는 투로 말을 끝맺으려는 찰나, 느닷없이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이 사용자들의 귓전을 떠르르 울렸다. 지면의 떨림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안솔과 이유정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정말로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이라고 생각하던 사용자들의 예상보다 빠르게 일어났다. 쿠르르릉, 쿠르르릉! 구덩이가 무너진다. 말 그대로 일거에 무너지고 있다. 지금껏 어찌어찌 버텨온 것도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대지 자체가 아래로 움푹 내려가며, 지면이 깨진 계란 껍질처럼 갈라져 서서히, 그러나 깡그리 허물어진다. 그 엄청난 파괴 현상에 절로 숨이 막히면서도, 이유정은 재차 소리쳤다. “안솔!” 아니, 비단 이유정뿐만 아니라 다른 클랜원들까지 똑같이 외쳤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이상, 안솔도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지팡이를 잡은 손이 올라갔다. 『필요할 때를 위한 작은 행운을!』 『필요할 때를 위한 작은 행운을!』 『필요할 때를 위한 작은 행운을!』 『필요할 때를 위한 작은 행운을!』 마치 누군가 안솔을 만류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메시지가 출력됐으나,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기…!”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화륵, 화르륵! 별안간 어디선가 홀연히 불타오르는 소리가 나더니, 아직 채 무너지지 않은 지면이 녹아 내렸다. 파앙! 그와 동시에, 지면을 뚫고 나온 누군가가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 작품 후기 ============================ 끄, 끝났어요. ㅇ<-< 0597 / 0933 ---------------------------------------------- 죽도록 싸운 자는 살고, 죽도록 도망친 자는…. 하늘 높이 솟구친 김수현. 그러자 일부 사용자들이 허공을 바라보고는 “어, 어.” 소리를 내며 주춤거렸다. 여전히 땅은 푹푹 꺼지고 있는데, 워낙 무너지는 지면이 거대하다 보니 그대로 수직 하강하면 어쩌나 걱정이든 탓이다. 그러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김수현은 도약 최고점에 다다른 찰나 공중에 가볍게 발길질을 했고, 그대로 재차 떠오르며 공중제비를 돌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걱정했던 사용자들은 하나같이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지면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고, 하늘에 뜬 상태로 공중제비를 도는 건 지금껏 보지도 듣지도 못한 능력이었다. 그렇게 몇 번이고 연속해서 공중제비를 돈 김수현은, 정확히 8번 만에 지면이 무너지는 영향권을 벗어나, 사용자들이 모인 그림자 언덕 지대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풀썩! “후.” 언덕에 사뿐히 착지한 김수현이, 둘러업은 신재룡을 내려놓으며 깊은 한숨을 흘렸다. 모든 사용자들의 시선이 김수현에게로 쏠렸다. 한소영은 애초 김수현을 기다리고 있었고, 보고 있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땀으로 범벅이 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전혀 추해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한소영만큼은 지금 김수현이 왜 저 꼴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그렇기에 행색은 비루하나 오히려 환하게 빛나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오셨네요.” 한소영이 고요한 정적을 깨트리며 말했다. “조금 늦었습니다.” 김수현은 별것 아니라는 양 바로 회답했다. 그때였다. 쿠르르르르르르릉! 구덩이는 마치 김수현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지금껏 겨우겨우 버텨오던 부분마저 와르르 무너져 내리며 빠르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무너지든 말든, 크게 상관이 없다. 대다수의 사용자들이 이미 무사히 빠져 나왔거니와, 김수현도 자력으로 구덩이를 빠져 나오는데 성공했으니까. 이로써 모두 끝났다. …아니, 아직 완전하게 끝난 건 아니었다. 문득 한소영은 주변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일부 사용자들이, 정확히는 구덩이 공략에 참가한 사용자들이 묘한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한 눈빛. 심지어 방금 탈출한 김수현도, 당장에라도 달려 나오려는 자신의 클랜원들을 진정시키며 가만히 한소영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 아직 하나가 남았지. 한소영은 그제야 사용자들이 원하는걸 깨달았고, 바로 입술을 떼었다. “우리는, 작전명 싱크 홀 공략을 완료했습니다.” 야무지게 주먹 쥔 손을 천천히, 그러나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이로써 지금 이 시간 부로, 남부 원정대의 제 2전력 강철 산맥 공략 또한 종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완전한 공략 선언이 떨어진 순간, 기다렸다는 듯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만세! 끝났다! 드디어 끝났다고!” 총 사령관의 공식 선포를 기점으로, 남부 원정대가 마침내 강철 산맥 제 2지역의 공략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젠장, 잘됐어! 정말 잘됐다고!” “클랜 로드! 클랜 로드! 왜 우리 클랜 로드는 안 보이는 거야?” “흐엉…. 흐어어엉….” “오빠아아!” 환호성은 이내 각 사용자들의 입장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바뀌었다. 어느 사용자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뻐하기도, 안 보이는 누군가를 찾기도, 주저앉아 울기도, 혹은 누군가를 향해 나는 듯 달려가기도 했다. 그냥 구덩이를 공략했다고 해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아니었다. 처음 괴물이 출현했을 때 느꼈던 공포감부터 시작해서 구덩이가 무너지기까지의 불안감까지. 그 모든 게 지금 이 순간 해냈다는 성취감과 살았다는 안도감으로 변했고, 사용자들에게 짜릿한 희열을 가져다 주고 있었다. “축하합니다. 총 사령관.”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한소영은 주변에서 쏟아지는 축사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계속해서 김수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한소영도 지금 이 기쁜 상황을, 축하를 나누고는 싶었다. 정말로 기다리고 싶었는데, 끝까지 기다리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로 축하를 나누고 싶은 사용자는, 이미 자신의 클랜원들에게 겹겹으로 둘러싸인 상태였다. 이유정은 한껏 째진 목소리로 무어라 모를 괴성을 지르며 김수현의 얼굴에 키스를 퍼부었다. 다른 머셔너리 클랜원들도 모조리 김수현에게 몰려가 호들갑을 떨며 공략 완료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정작 김수현은, 한껏 귀찮다는 얼굴로 머리를 흔들며 신재룡을 가리키는 중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던 한소영은 간신히 시선을 떼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생각했다. 이렇게 남부 원정대의 강철 산맥 공략은 끝났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은 남았다. 그러나…. 오늘 하루라도 이 기쁨을 조금 더 만끽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 구덩이 공략이 끝난 다음날. 한소영은 아침이 되자마자 정비를 명목으로 하루 더 휴식할 것을 지시했다. 물론 모두를 대상으로 한 휴식은 아닌, 구덩이 공략에 참가한 사용자들만 대상으로 내린 지시였다. 참가하지 않은 사용자들은 경계를 서거나, 부상자를 돌보거나, 아니면 주변에 적절한 장소를 탐색하라는 등의 지시가 내려졌고, 거주민들에게도 이제 슬슬 요새 건설을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미 참가한 사용자들은, 그런 한소영의 지시에 조금도 불만을 품지 않았다. 애당초 '생각보다' 보이지 않는 사용자들이 있는 탓에 미약한 의구심을 품었고, 밤사이 공략 이야기를 들으며 나름 놀란 탓이었다. 하기야 그 누가 구덩이 안에 그런 어마어마한 괴물이 숨어있을 거라 예상했겠느냐 만은. 어쨌든 이미 끝난 일이니만큼 사용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해가 저물고 노을 빛 황혼이 내려앉았다. 안현이 정신을 차린 건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왔을 때였다. 안현은 눈을 뜨자마자 극심한 허기짐을 느꼈다. 지칠 대로 지친 안현의 몸은 원정에 상황이 일단락된 이후 곧바로 수면을 요구했고, 시간으로 따지면 꼬박 하루를 넘게 잠에 빠졌다. 그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못했으니 공복감이 느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 천막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반사적으로 주변을 더듬은 안현은 자신의 흑 창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 다른 데로 옮겨놓은 걸까? 약간은 허전한 기분이 느껴졌다. 때마침 밖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터라, 어수선한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겨와 안현은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입맛을 다시며 천막을 나서려는 찰나, 공교로이 천막을 지나치는 여인을 보며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긴 생머리를 단정히 늘어트린 날씬한 여인은, 다름 아닌 검후, 남다은이었다. 남다은 또한 안현이 나오는걸 봤는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반듯하기 그지없는 아미가 살짝 꿈틀거렸다. 그러더니 곧 꼭 다문 도톰한 입술이 자그맣게 열린다. “이제, 일어나셨네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안현은 잠시나마 귀를 의심하고 말았다. 남다은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경우는, 특정한 인원을 제외하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특히 상대가 사내라면 더더욱.(물론 한 명만큼은 제외한다.) 그렇다고 아주 모른 체하며 지내는 건 아니었으나, 보이는 태도를 보면 아무래도 스스럼없이 말을 붙이기 어려운 여인이었다. 조금 거리감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지그시 응시하자, 안현은 아차 하며 빠르게 머리를 끄덕였다. “예, 예. 그, 그렇지요. 늦게 일어나서 죄송합니다. 너무 피곤해서….” “…응? 어차피 오늘도 휴식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으니 별로 미안해할 필요는 없는데요.” “그, 그런가요?” “네. 하기야 종일 주무셨으니 듣지 못하셨을 거예요.” 힐난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있는 그대로 말을 하는 걸까? 꼬르륵! 남다은의 종잡을 수 없는 말투에 머리를 갸웃할 즈음, 돌연 뱃속에서 끓는 소리가 울렸다. 안현은 약간 당황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지만, 남다은은 잠깐 눈을 흘긴걸 제외하고는 어떠한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식사하시는 게 좋겠네요. 마침 저녁을 준비 중이니까.” “예. 그…. 래야죠.” “그럼, 몸조리하시길.” “아. 거, 검후 님은요?” 남다은의 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잠시 안현을 빤히 바라보더니 나직이 입을 열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제 식사는 제가 알아서 챙길게요.” 그렇게 말하고 바로 몸을 돌리고는 찬바람을 남기며 한쪽으로 사라져갔다. 혹시 말실수 한 게 있나, 고민하던 안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걸음을 옮겼다. 일단 서서히 불타오르려는 낌새를 보이는 공복감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커다란 모닥불이 타오르는 곳에 도착한 안현은, 한창 식사를 진행 중인 머셔너리 클랜원들을 볼 수 있었다. 중앙에는 임한나가 능숙하게 재료를 다듬고 고기를 꼬챙이에 꿰며 현란하게 손을 놀리고 있었다. “어. 현이 왔네?” 이내 안현이 쭈뼛쭈뼛 다가가자 임한나가 힐끗 고개를 돌리더니 상냥한 목소리로 아는 체를 해왔다. 안현은 조심스럽게 머리를 끄덕였다. “네. 누나. 방금 일어났어요. 그런데 시간이….” “응응. 피곤해하는 것 같아서 일부러 깨우지 않았어.” “아. 들었어요. 오늘 하루 추가로 휴식 지시가 떨어졌다고….” “아, 그래? 들었으면 됐고. 아무튼 어서 와. 배 많이 고프지?” 임한나는 마치 친 누나처럼 안현을 자상하게 챙겨주었다. 이내 나긋나긋한 손길에 끌려 천천히 자리에 앉았을 때, 안현이 앉기만을 기다렸던 클랜원들이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어이, 안현. 오자마자 미안한데….” “방금 깨어났다잖아요. 그리고 식사 중이에요.” 우정민이 막 입을 열은 찰나 임한나가 예의 상냥한 목소리로, 그러나 단칼에 끊어버렸다. “…아니. 그냥 어서 오라고.” 그러자 우정민은 임한나를 흘끗 살피더니, 떨떠름한 말투로 어서 오라는 의례적인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다시 조용히 식사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안현은 뭔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앉자마자 질문이 쏟아질 것을 예상했는데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어쨌든 나름대로 배려라는 건 알겠지만…. 안현은 무언가 이상한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굳이 표현해보면 무언가 충분하지 않다는 기분이랄까? 탁! “자.” 그때, 임한나가 안현의 앞으로 접시를 내려놓았다. 육즙이 듬뿍 배인 고기 한 덩이와 스튜, 그리고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술 한 잔까지. 무척 시장하기는 했지만, 안현은 바로 손을 대지는 않았다. “저, 한나 누나. 혹시….” “걱정 마. 재룡이 아저씨랑 헬레나 양 모두 무사하니까.” 마치 그 질문을 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임한나는 바로 회답했다. “아, 그래요?” “그렇지. 아직 두 분 모두 정신을 차리지는 못하고 있지만…. 솔이가 밤을 새면서까지 달라붙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목숨에 지장이 없다고 듣기도 했고.” 임한나가 정말 걱정 말라는 듯 안현의 어깨를 부드러이 토닥여주었다. “…다행이네요.” 안현은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허겁지겁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모닥불에서 불이 크게 일어나고, 연기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 허공으로 흩어지는 연기 너머로 어느새 깊어진 밤하늘이 아름다운 별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후우우우…. 미치겠네.” 식사를 마친 후, 자리에서 나온 안현은 홀로 걸음을 옮겨 한적한 곳에 드러누웠다. 탁 트인 밤하늘을 보고 있음에도 절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식사 때부터, 아니 사실상 처음 일어났을 때부터 느껴졌던 미묘한 기분이 계속해서 전신을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좋게 끝났는데. 구덩이 공략도 성공했고, 동료들도 목숨을 구했는데. 그런데 왜 자꾸 뜻 모를 기분이 느껴지는 걸까. 왜 자꾸만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걸까. 쇠사슬에 온몸이 꽁꽁 사로잡힌 듯하다. 별안간 가슴이 터질 듯이 갑갑해져 와 안현은 차분히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었다. 처음 구덩이를 들어갔을 때부터 광산 열차를 타고 구덩이를 나올 때까지. 통로를 지나치고, 괴물들과 전투를 하고, 거대한 괴물과 조우하고, 다른 괴물을 추격하고, 또다시 전투하고, 겨우겨우 이기고…. 그때였다. “…아.” 주현호와 전투했던 기억을 떠올린 순간, 안현은 저도 모르게 양 주먹을 꽉 쥐고 말았다. 허전한 기분이 더욱 강해졌다. “뭐하냐. 여기서 혼자.” 그러한 찰나, 어디선가 익숙한 저음이 들려왔다. 번쩍 눈을 뜬 안현은,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용자를 보고는 크게 기함하고 말았다. 언제 왔는지 김수현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던 것이다. “혀, 형?!” 안현은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곧바로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괜찮아. 누워있어.” 김수현이 괜찮다는 듯 손을 젓더니 옆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하…. 피곤해 죽겠네. 너도 연초 하나…. 아. 너는 안 피지.” 안현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이 갑자기 치익, 작게 불을 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수현이 연초를 꺼내 불을 붙이고 있었다. 안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 그동안 어디 계셨어요? 아까 식사 시간 때는 안보이시던데.” “못 먹었어. 바빠서. 부상자들한테도 가봐야 했고, 또 요새를 건설할 적당한 장소도 찾아야 했으니까.” “예? 그걸 왜 형이…. 휴식 지시가 떨어졌잖아요.” “…쉴 필요가 없으니까.” 조용히 중얼거린 김수현은 돌연 스리슬쩍 눈매를 올리며 안현을 흘겼다. 안현은 본능적으로 침을 삼켰다. “안현.” “예.” “변한 건 없어. 우리는 여전히 강철 산맥의 한 가운데에 있고, 앞으로 얼마 동안은 쭉 이대로 있어야 해. 클랜 하우스로 돌아가서 탐험 하나 끝냈다고 축제하는 게 아니라.” “……?” “너한테 하는 소리야. 구덩이 하나 공략했다고 끝이 아니라고. 즉 이게 바로 공식 원정과 탐험의 차이지.” “그렇죠.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안현은 당연하다는 말투로 회답했다. 그러자 후욱, 연기를 내뱉은 김수현이 시답잖은 웃음을 흘렸다. “흐. 그럼 왜 그러고 청승은 떨고 있냐? …꼭 꿈꾸는 사람처럼.” “제, 제가요?” 안현은 아니라는 듯 반문하면서도 가슴이 뜨끔해지는걸 느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그랬던가? 확실히 안현의 몸 상태는 김수현의 말대로였으나, 이번 원정의 기초 목적은 잊지 않았다. 자신이 지금 묘한 기분을 느끼는 것은,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렇게 생각한 안현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요. 저도 형이 말한 건 알고 있는데…. 그냥 꿈만 같아요. 구덩이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이….” “흠, 그래? 왜. 무슨 충격적인 일이라도 겪었어?” “그런가? …모르겠어요. 뭔가가 잡힐 듯 말듯 하고…. 무언가 충분하지 않은 기분도 들고…. 허전해요. 정말 왜 이러는 걸까요?” “…….” 안현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아서일까. 그러고 보니 안현의 행동은 아까부터 꽤나 이상해 보였다. 입은 힘없이 벌어져 있고, 손은 자꾸만 의미 없이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으며, 몸은 느슨하게 풀려 있다. 하지만 두 눈은 일견 흐리멍덩해 보이면서도,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 뜻 모를 빛을 언뜻 발하고 있다. 정작 자신은 모르고 있는 모양이지만. 뭔가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는지, 김수현이 약간은 가라앉은 심원해 보이는 눈동자로 안현을 응시했다. 그 상태로,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김수현이 헛웃음을 흘리며 차분히 옆을 더듬었다. “허 참. 설마 그런 건가?” “그런 거라니요?” “…아니. 너 혹시….” “예?” 그때, 느닷없이 안현에게 뭔가가 휙 날아와 복부에 떨어졌다. 미미한 충격. 안현이 어리둥절해하면서 복부를 더듬자 순간 장대 같은 게 잡히며 손아귀가 꽉 찬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 안현은 숨을 꿀꺽 삼키며 눈을 살짝 떴다. 약간이지만 허전한 기분이 가셨다. “지금, 싸우고 싶은 거냐?” “!” 그리고 김수현의 말이 이어진 순간, 안현은 삼켰던 숨을 크게 토해냈다. 싸우고 싶다. 그때처럼,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끌어낸 채로 싸워보고 싶다. 안현은 저도 모르게 상체를 일으켰다. 갑작스럽게 찬물을 맞은 듯한, 정신이 번쩍 깨는 기분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아. 예정 시각보다 1시간이나 늦어버렸습니다. 집필 자체는 1시가 약간 넘어서 끝났는데, 퇴고가 예상 이상으로 많이 걸리더군요. -_-a 그래도 페이스는 점차 회복되는 느낌입니다. 일단은 펑크를 내지 않는데 주력하고는 있지만, 조만간 자정 연재 복귀도 염두에 둘 수 있을 것 같아요. :) 이번 파트는 총 4회로 이루어져 있으며, 2회는 가벼운 휴식 파트고 나머지 2회는 상황 정리 파트입니다. 앞선 2회가 인물들의 내면을 정리하는데 초점을 맞췄다면, 후반 2회는 드러난 상황들을 정리하는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아마 이전 내용 중 주현호와의 전투를 눈여겨보신 분이 있다면, 이번 소제목이 의미하는 바도 아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드네요. :D 0598 / 0933 ---------------------------------------------- 죽도록 싸운 자는 살고, 죽도록 도망친 자는…. 나른한 몸에 느닷없이 찬물을 뒤집어쓰면 이런 기분이 들까? 갑작스럽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머릿속의 안개가 걷혔다. 흐리멍덩하던 눈동자가 빛을 발한다. 이내 창을 꽉 움켜쥔 안현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주현호와 맞섰던 기억이 하나하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저 가르침 받았던 대로만 했을 뿐이었다. 검사로서의 버릇을 버렸을 뿐이었다. 그러할진대 모든 게 변했다. 시야가 변하자 상대의 행동 하나하나가 생각대로 움직였다. 창을 놀리면 상대는 마치 빨려 들어오듯이 창 끝으로 걸려들었다. 그리하여 힘겨운 전투 끝 승리를 거머쥔 것은 안현이었다. 안현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깨어난 직후 내내 자신의 온몸을 사로잡았던 이상야릇한 기분의 정체를. 그것은 일종의 갈망이라 볼 수 있었다. 말인즉, 또다시 그때처럼 싸우고 싶다는, 투쟁에 대한 갈망. 안현의 변화를 눈치챘는지 김수현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땅을 짚어 살짝 허리를 젖힌 채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럼 어디 한 번 들어볼까.” “……?”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봐라. 하나씩, 차분하게.” “…예.” 안현은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김수현이 요구한대로, 주현호를 추적할 때부터 겪었던 일들을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스스로 되짚어보자 무언가 차곡차곡 정리되는 것 같아 조금이나마 힘이 나는 기분을 느꼈다. 자연스럽게 마음도 가라앉아 말도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김수현은 흥미롭다는 듯 안현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했다. “그렇게 창을 찔러 넣자 갑자기 그놈의 가슴이 터지면서….” “응? 잠깐만.” “……?” “그러니까 주…. 아니, 그놈을 이겼다는 말인가?” “예. 그렇죠. 그런데 말씀드렸듯이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어요.” “그래도. 그놈을 거의 너 혼자서 상대했고, 또 이겼다고? 정말로?”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지만, 목소리 어딘가에 기특하다는 투가 깔려있었다. 그 말투에 용기를 얻은 안현이 재차 머리를 끄덕이자, 김수현이 헛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네가 그놈을 이겼다고…. 아무리 극심한 부상 상태였다고는 하지만, 이건 정말 엄청난데. 믿을 수 없을 정도야.” “에, 그 정도에요? 그 정도로 놈이 강했어요?” “꽤. 아마 놈이 최상의 상태였다면 우리 클랜에서도 맞상대할 수 있는 사용자가 거의 없을 거야. 아마 남다은 정도는 되야 할걸?” “헐.” “아니, 어쩌면 남다은도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지도 몰라. 처음 2, 30분 정도는 우세할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끌면 끌수록 질 확률이 높아지겠지.” “거, 검후 님도요?” “물론 제대로 붙어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네가 상대한 놈은 그 정도로 강한 놈이었다고.” “…….” 김수현이 안현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기실 방금 분석은, 김수현이 남다은의 내구 능력치가 낮다는 것을 아는 상태라 꺼낼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안현으로서는 그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김수현이 정확한 지표를 제시해주자 막연하던 것이 슬슬 감이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튼. 이후 추가로 시간이 흐르고, 안현은 광산 열차를 탔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그렇게 된 거였군.” 사정을 들은 김수현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머리를 주억이며 몸을 일으켰다. 이내 바로 몸을 돌릴 기세라, 안현은 재빠르게 김수현을 붙잡았다. “저, 형. 잠시만요.” “…왜?” “그…. 재룡이 형은 괜찮으시겠죠?” “응? 소식 못 들었어? 목숨에 문제 없다고.” 김수현이 어깨를 으쓱였으나 안현은 여전히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들었어요. 그런데 아직 정신이….” “어쩔 수 없지. 거의 죽음 문턱까지 갔다 왔는데. …아무튼 걱정 마. 엘릭서까지 먹였으니 괜찮을 거다.” 그때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안현은 김수현의 눈에 뜻 모를 복잡한 감정이 스치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이상하게 피곤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형도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한 안현은 곧 자신이 잘못 보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김수현이 시선을 지그시 내렸을 때, 달빛에 비친 낯은 언제나처럼 무덤덤해 보이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엘릭서를….” “상관없어.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 어차피 너랑 한결이한테 사용할 거, 마르랑 신재룡씨한테 사용한 셈치면 되니까.” “하하. 아, 아픈 기억을….” “…….” “음…. 저…. 그러니까….” “…….” 어느 순간부터, 이야기가 겉돌기 시작했다. 김수현은 잠시 침묵을 지켰으며, 안현은 계속해서 말을 더듬고, 흐렸다. 마치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남았다는 것처럼.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자꾸 이리저리 돌리지 말고.” 그래서 김수현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을 때 안현은 고마운 마음까지 일었다. 안현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사실 말을 하면서 어느 정도 풀어내기는 했지만 가슴은 아직도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야기는 그저 감정의 정체를 확인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싸우고 싶다는, 투쟁의 감정. 뭔가 자꾸 초조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창이 없어 허전한 감정을 느꼈던 것도, 모두 그러한 이유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잠시 후, 안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형. 사실 그때 전투를 하면서 새로운 능력 하나를 깨우쳤거든요” “신검합일…. 아니 신창합일이랬지. 축하해. 아주 쓸만한 능력이야.” 한순간 안현이 흠칫했다. 그러나 곧 아까 이야기 때 꺼냈음을 상기하고는 차분히 호흡을 골랐다. 어쨌든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크게 상관없는 문제였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가슴속에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불덩이를, 어떻게든 꺼트리는 것. “그래서….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뭘. 지금 네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어느덧 김수현은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안현은 느릿하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물론 수준을 확인하고픈 마음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욱 확인해보고 싶은 건…. “형의 진심이, 어느 정도인지 보고 싶습니다.” 비로소 안현이 자신의 진심을 토해내었다. 그와 동시에 처음으로 김수현의 얼굴이 변화했다. 안현의 태도에 깃든 진심을 읽어낸 것이다. 진심. 상황에 따라 여러 용도로 해석할 수는 있으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김수현이 안현이 말한 뜻을 모를 리가 없다. …요컨대. “…감당할 수 있겠냐?” 나직한 중얼거림이 귓전으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안현은 처음으로, 김수현에게 처음으로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격한 반발심. 그것은 더 이상 김수현을 쫓는 것을 그만두고, 오롯한 창병의 길을 걷기로 한 기공창술사가 가지는 감정이었다. 즉 김수현의 말은 안현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모르겠습니다. 저 또한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안현은 간신히 호흡을 추스르며 회답했다. 하지만 약간 날 선 어조는 숨기지 못했다. 잠깐이나마,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정적이 흘렀다. 김수현과 안현의 시선이 교차하고, 둘 사이로 보이지 않는 불꽃이 부딪친다. 정적의 시간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나쁠 것 없지. 좋다.” 마침내 김수현의 허락이 떨어졌다. “일어나.” 곧바로 이어진 서릿발 같은 어조에 안현이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이내 두 사내가 천천히, 동시에 서로 몇 걸음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안현이 창대를 부드러이 잡으며 정면으로 창을 겨냥했다. 신창합일을 발동하자 흑 빛 일색이던 창의 전신에 새하얀 빛이 칠해졌다. 그리고 김수현은, 천천히 허리를 굽히고는 지면에 돋은 잡초 하나를 꺾어 들었다. 그걸 보는 안현의 눈이 한 번 거세게 꿈틀거렸다. 잠시 후, 잡초도 새하얗게 물들며 은은한 빛을 흘리기 시작했다. “…형.” “검 꺼내라는 소리는 하지 마라.” “하지만.” “하지만이고 저지만이고.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대련이 아닌 정말로 진심을 원하는 거라면…. 건방지다고 생각되니까.” “…….” “정 억울하면 네가 직접 꺼내게 만들어봐.” 그리고. “더 이상 말은 필요 없겠지. 그럼, 간다.” 그 말이 들려온 순간. “!” 무척이나 갑작스럽게, 김수현의 기세가 일변했다. 그저 뜬구름 같던 기운이, 삽시간에 폭발적으로 휘몰아치며 인근을 장악해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윽고 김수현의 두 눈이 섬뜩한 빛을 뿌려내는 순간, 안현은 돌연 온 세상이 멈춘 듯한 착각을 느꼈다. 갑자기 눈이 빠질 듯한 고통이 느껴지고, 몸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냥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 무형의 기운이 전신을 옥죄어 오는 기분. 보이지 않는 칼끝이 온몸을 사정없이 찔러대는 기분. 안현의 직감은 확실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죽는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지만, 그래도 안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입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전의를 불태웠다. 어차피 실력 차이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자 안현을 노려보던 김수현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호. 그냥 입만 산 건 아니었나 보군.” 김수현이 기특하다는 목소리로 칭찬했다. 그러나 지금의 안현으로서는 하등 기쁘게 만은 들을 수 없는 칭찬이었다. 그에 발끈한 안현이 창을 살짝 아래로 흘렸다. 주현호 때 얻었던 경험을 되살린다. 신중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예전처럼 도발 당했다고 성급하게 달려드는 게 아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두 수, 세 수 앞을 대비한다. 상대는, 머셔너리 클랜 로드. 사용자 김수현이다. 이내 머릿속에 하나의 그림을 그린 안현이 약간 몸을 기울인 찰나였다. 갑작스럽게, 김수현의 먼저 움직였다. 퍽. 채 반응할 틈도 없었다. 그냥 무언가가 보였다. 그게 전부였다. “억….”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려내었다. 약 1초 후 안현이 느낀 것은, 어느새 몸이 허공을 날고 있다는 것. 그리고 복부에서 뒤늦게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는 것. 그러니까…. 씨잉! 당한 건가, 라 생각하기도 전, 옆으로 서늘한 바람이 짓쳐 들었다. 안현이 날아가는 와중에도 겨우 창을 들 수 있었던 것은, 이대로 있으면 정말로 죽는다는 절박함에서 나온 반응이었다. 바람결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잡초가 새하얀 잔상을 남기며 안현을 사선으로 훑는다. 서걱! 쨍그랑! 단 1격에 호신강기가 부서졌다. 안현은 돌연 손아귀가 쫙 찢어지는 감촉을 느꼈다. 미처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몸이 허물어지는 것도 모자라, 땅바닥을 데구루루 구르기까지. 그나마 칭찬할게 있다면 용케 창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과, 바닥을 구르자마자 체술을 이용, 곧장 몸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머리가 핑핑 돈다거나 아픔은 차치해야 할 문제였다. 그냥, 차원이 다르다. 안현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지금껏 상대해왔던 적들이, 김수현을 앞에 두고 어떤 기분을 느껴야만 했는지를. 그것은 절망, 아니 죽음 그 자체였다. 말 그대로 압도적인 공포. 주현호? 비교할 수도 없다. 진심인 김수현과 맞상대를 하느니, 차라리 알몸으로 주현호 100명과 대치하는 게 몇 배는 더 나으리라. 사실상 안현은 이미 2번이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안현은 몸을 날리는 와중에도 흘긋 시선을 돌리며 김수현의 위치를 확인했다. 왼쪽으로 1미터. 확인한 순간, 안현은 바로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가만히 있으면 당할게 뻔히 보였거니와, 우선 머릿속 그림을 가다듬을 생각이었다. 아니, 김수현을 상대로 그림을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 수를 보이기도 전 시작부터 박살내버리는데, 아무리 잘 그린 그림이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안현이 인중을 크게 찡그렸다. 그러면 남은 방법은 결국 하나. 목숨을 도외시한 공격뿐. 그렇게 생각하며 간신히 자세를 추스른 찰나. “…….” 안현은, 그대로 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서늘한 기운을 품은 잡초가 목 부근을 간질이고 있었기에. 전, 좌, 우 방향 모두 김수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말인즉, 쥐도 새도 모르게 후방이 점거 당했다는 소리였다. …이게 형의 진짜 전투인가? 안현은 결국 헛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천외천(天外天). 하늘 위의 하늘이었다. “졌어요. 뭘 하지도 못했네요.” “이제 만족해?” 끄덕끄덕. 머리를 주억이며 수긍하는 안현. 김수현이 싱긋 웃는다. 그리고 그대로 잡초를 태우더니 재빠르게 연초를 꺼내 들어 불을 붙였다. 후욱, 안현의 어깨 너머로 흐릿한 연기가 전해졌다. “창을 놓치지 않은 건 칭찬해주지.” “헤. 감사합니다.” “애써 태연한 척 웃기는. 그래서, 어때? 확인했으니까, 이제 도로 의기소침해질 건가?” “으음. 그건 잘 모르겠네요.”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거 하나는 확실히 알겠어요.” 그러나 비로소 몸을 돌린 안현의 얼굴은, 만면에 미소가 가득 차 있었다. 정말로 후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잠시지만, 안현을 보는 김수현의 낯에 의아한 빛이 스쳤다. 안현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런 형의 모습이, 제가 항상 생각해오고, 쫓아가려고 했던 그 모습 그대로라는 거.” “…음?” “형은…. 정말로 강해요. 강해서 다행이에요.” “…….” 이번에는 김수현이 입을 다물었다. 설마 이런 말이 나올지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형이 강해서 다행이다. 생각해보면 무척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안현을 빤히 응시하던 김수현은, 별안간 픽 웃어 보였다. 그리고 입에 문 연초를 뱉고는 느닷없이 안현의 어깨를 한 번 세게 쳤다. 짝! 안현의 몸이 약간 세게 흔들렸다. 마력이 담긴 공격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아프기는 매한가지였다. “아야야.” 신음을 흘린 안현이 도로 김수현을 응시할 무렵, 김수현은 어느새 몸을 돌려 천막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형….” 그때였다. “안현.” 갑작스럽게 우뚝 걸음을 멈춘 김수현이 천천히 머리를 반쯤 돌렸다. 그리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 “잘했어.” “…예?” 한순간, 안현의 얼굴이 멍해졌다. “잘했다고. 구덩이에서도 그렇고, 방금 전투도 그렇고.” 그리고 재차 걸어가는 김수현. 잠시 후, 망연해 보이던 안현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와 더불어 입가가 함지박만하게 벌어졌다. “예, 예!” 안현이 그 어느 때보다 힘찬 목소리로 회답했다. ============================ 작품 후기 ============================ 싸움 싫어 싫어~. 분란 싫어 싫어~. 독자들 반목, Oh No~. 어수선 싫어 싫어~. 혼잡함 싫어 싫어~. 어여쁜 코멘, Oh Yes~. 눈 좋고, 기분 좋고, 영양도 최고. 깔끔한 내 입맛에 코멘이 딱 이야. 독자들 의견 또한 정성이 가득. 건강한 내 입맛에 코멘이 딱 이야~. 코~멘 좋아. 코~멘 좋아. 코~멘 주세요~.(예~쁘게요.) 코~멘 좋아. 코멘~이 좋아. 세상에서 제일 좋아. 코멘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도 싫어 싫어! 코멘이 제일 좋아. 코멘트만 줘! …여기까지만 할게요. 흠흠. 그냥 노래에 불과할 뿐이랍니다!(?!) 독자 분들은 어렸을 적 우유 송을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네요. 하하하. :) 혹시 몰라 아래 주소를 첨부합니다. 되게 재미있는 노래에요. 한 번 들어보세요! :D http://bgmstore.net/view/WKh8m 0599 / 0933 ---------------------------------------------- 죽도록 싸운 자는 살고, 죽도록 도망친 자는…. 어두운 구덩이 안. 신재룡이 죽어가고 있다. '저는….' 신재룡을 바닥에 눕히며 지그시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나. 또 하나의 내가 품에서 엘릭서를 꺼내 들었다. '신재룡이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고 마개를 열어 병을 기울인다. 엘릭서를 먹이는 또 하나의 나는, 정말로 신재룡을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그 순간. “!” 갑자기 정신이 돌아왔다. 바로 눈이 떠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려보니 밤늦게 돌아온 천막이 그대로 보인다. 중앙에 놓인 탁자, 장막으로 가린 입구, 반듯하게 넣어진 의자 등등. 모든 게 그대로였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 어떻게 된 일일까? 꿈이라도 꾼 걸까? 문득 살에 닿는 공기가 차갑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층층이 쌓인 피로감이 전신을 무겁게도 짓누른다. 하지만 나는 잠을 더 자는 것 대신, 침대에서 일어나는 길을 선택했다. 왠지 모르게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거니와, 억지로 잠이 든다고 해도 아까와 같은 꿈을 꾸는 건 더는 사양하고 싶었다. 요즘 안 그래도 심경이 복잡한데…. 장막을 걷고 밖으로 걸어나가자 아직은 어스름한 새벽 하늘이 보였다. 마침 이 시간대라면, 곧 1차 탐색 조들이 활동할 시간이다. 아직 별다른 지시는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 구덩이 공략에 참가한 사용자들은 오늘도 가만히 대기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느니 몸을 움직이고 생각도 잊을 겸, 탐색 조에 참가하는 게 낫지 않을까. 어제도 그랬듯이. 결국 첫 생각으로 아침 일정을 정한 나는 북쪽 초소를 향해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그쪽 부근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어제처럼 밖으로 나가려는 탐색 조들과 마주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결과적으로 내 예상은 절반만 들어맞았다. “목적. 주변 경계 및 요충지 탐사.” “C - 1조 총원 12명. 탐색 조 이스탄텔 로우의 이종학 외 11명 확인.” “총 사령관의 허가 기록을 확인했습니다.” “나가셔도 좋습니다.” 북쪽 경비를 서고 있던 사용자들이 간단한 확인 절차를 마쳤다. 이종학은 알겠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더니 경비들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천천히 나를 돌아보며 푹 한숨을 쉰다. “후. 죄송하지만 말씀은 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머셔너리 로드.” “사용자 이종학.” “아니요, 안됩니다. 탐사에 도움을 주시겠다는 말씀은 정말 감사하나, 이번만큼은 정중히 거절하도록 하지요.” “…….” C - 1조 탐색 조장인 이종학이 단호한 목소리는 물론, 머리를 세차게 가로젓기까지 한다. 그 명백한 의사 표현에 나는 머리를 갸웃하고 말았다. “아니 왜….” “탐색은 우리에게 부여된 임무니까요. 그러나 머셔너리 로드는 우리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아시잖습니까.” “하지만 어제는….” “머셔너리 로드. 제발.”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으며 무조건 안 된다고만 하는 이종학. 나는 어안이 벙벙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제 탐사 합류를 요청했을 때는 이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호들갑까지 떨면서 환영해주었다. 그러면 아예 처음부터 안 된다고 하던가. 어제는 기분 좋게 웃으며 같이 나가게 해주었으면서, 왜 오늘은 안 된다고 하는 걸까? 그것도 이렇게나 갑작스럽게. “…저 좀 살려주십쇼.” 그때였다. 이종학이 갑자기 내 어깨를 부여잡더니 한없이 애절한 목소리로 도리어 부탁해왔다. 당최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나, 정말로 간절해 보이는 얼굴이라 절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저 말입니다. 어제 탐사 다녀오고 우리 클랜 로드한테 엄청 깨진 거, 아십니까?” 응? 깨졌다고? 이종학의 클랜 로드라면…. 당연히 한소영이잖아. “아니. 이스탄텔 로우 로드가 왜….” “머셔너리 로드 때문에요.” “……?” “내가 분명 구덩이 공략에 미 참가한 사용자들만 데리고 나가라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엄한 머셔너리 로드는 붙잡고 나가느냐! 이러면서 엄청 욕…. 아니 욕은 하지 않으셨지만!” 갑자기 이종학이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우리 클랜 로드, 한 번 화나면 엄청 무섭단 말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아니, 모르시겠죠! 당해본 사람만이 아니까요!” 엄청 이라는 말을 연발하고,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억울해하는 이종학. …그, 그거야 나도 알지. 무감정한 목소리로 잘못한걸 하나하나 세심하게 읊어주고, 그러면서 물끄러미 바라볼 때의 한소영은…. 흠. 좀 무섭군. “사실 관계를 말씀 드리면 되지 않았을까요? 사용자 이종학이 저를 찾아오신 게 아니라, 제가 직접 찾아와 부탁한 거라고요.” “예, 그렇죠! 그렇고 말고요! 확실히 그렇게 말씀 드렸습죠! 그런데 그렇게 말하니까 뭐라고 하시는지 아십니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덜컥 받아들였냐고! 그리고!” 벌컥 하소연(?)을 하던 이종학이 돌연 말을 멈추더니 느닷없이 얼굴을 최대한 무표정해 보이도록 가라앉혔다. 그러더니…. 잠깐. 저 얼굴은? “어쨌든 허락하신 건 사용자 이종학이 아닌가요? 그러니까 괜히 머셔너리 로드한테 책임 전가하려고 하지 마세요. …이렇게 또 까였다는 말입니다!” 이종학은 한소영의 말투를 흉내 내듯이, 약간 높으면서도 고저 없는 목소리로 종알거렸다. 순간 커다란 웃음이 터질 뻔 했지만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설마 한소영이 저렇게 쫑알쫑알 말했을 리는 없겠지만, 그랬다고 생각하니 꽤나 웃겼다. “제가 정말 화가 나는 게 왜인지 아십니까?” 이제는 아예 한풀이를 하려고 하는지, 한 번 터진 이종학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아, 그래요. 아무리 이런 각박한 세상이라고는 하나, 사람이 살면서 걱정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요즘 안 그래도 옆구리가 시려 서러워 죽겠는데, 두 분만 그렇게 뜨듯~하시면 다냐, 바로 이 말입니다!” “…예?” “젠장, 솔로 부대 만세! 만세! 만세!” “…….” …느닷없이 초점이 상당히 어긋난 말들이 들려왔지만, 나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태클을 걸기에는, 만세를 외치는 목소리가 너무나도 서글펐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차례 크게 자폭한 이종학은 “흠흠.” 곧 어설프게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고 보니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군요.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머셔너리 로드.” “잠시만….” “모쪼록, 제 입장을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 결국 이종학은 머리를 꾸벅 숙이며 힘없이 돌아섰고, 그대로 걸어가버리고 말았다. 서로의 오해를 풀지도 못한 채. 나는 그런 이종학을 붙잡지 못했다. 아니, 붙잡을 수 없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래서는 안 된다는, 오해를 푸는 건 이종학을 두 번 죽이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 그렇게 이종학이 떠남으로써 기껏 세워둔 오전 일정이 틀어져 버리고 말았다. 돌연 서늘한 새벽 공기가 바람에 실려 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이렇게 가만히 있기는 싫으니 무어라도 해야 할 텐데. 부상자 관리소라도 가볼까? 문득 신재룡과 헬레나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둘 다 심각한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다행히 적절한 치료를 받아 목숨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오늘 밤사이, 관리소에서 보내온 전령으로 마침내 정신을 차렸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비록 둘이 깨어나자마자 미약한 어지럼증을 호소한 탓에 별다른 말을 나누지는 못했지만.(안정이 최우선이라는 사제의 말에 거의 떠밀리듯이 나와야만 했다.) 현재 시간이 약간 이르기는 하나, 그래도 지금은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바로 몸을 돌려 부상자 관리소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새벽 이미 한 번 찾아갔던 만큼 두 클랜원이 회복 중인 천막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 클랜 로드?” 그러나 천막 안으로 스리슬쩍 들어간 순간, 나는 약간 의외의 상황과 마주해야만 했다. 헬레나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그 자리는 안솔이 차지한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그리고 옆에 놓인 간이 침대에는, 신재룡이 상반신만 일으킨 채 나를 휘둥그래 쳐다보고 있었다. 허벅지에 놓인 음식 그릇을 보니 아마 한창 식사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드, 들어오시죠.” 황급히 입을 닦은 신재룡이 그릇을 소리 나지 않게 치우며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도로 나가면 모양새가 조금 그럴 것 같아, 나는 사양 않고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약간은 미안하니 일찍 자리를 비켜주어야겠지. “아직 시간이 많이 이른데. 배가 많이 고프셨나 보군요.” “예. 하루 내내 쫄딱 굶었는데 별수야 있겠습니까. 하하하.” 침대 바깥쪽에 걸터앉으며 말하자 멋쩍어하는 얼굴로 웃어 젖힌다. 신재룡의 구김살 없는 미소를 보니 마음이 조금 불편해지는걸 느꼈지만, 간신히 억누르며 억지로 미소 지었다. “좋은 현상이지요. 식사를 원한다는 건 건강하다는 증거니까요.”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 클랜 로드는 식사하셨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 순간적으로 가슴이 뜨끔해졌다. 엄밀히 말하면…. 그동안 식사를 아주 안 한 건 아니었으나 거의 한두 술 정도 뜬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입맛도 없거니와 속도 거북해 음식이 잘 넘어가지가 않았다. “그냥…. 아직 식사 시간이 아니라서요.” “으음. 하기야 그렇겠지요. 그래도 여기는 언제든지 식사할 수 있도록 준비가 돼있는 모양이더라고요.” “부상자 관리소니까요. 아차. 그나저나 헬레나는 어디간 거죠?” “헬레나양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깨어난 이후 계속 어지럽다고 갑갑하다고 투덜대더니, 결국에는 산책이라도 하겠다고 나가버렸거든요.” “말씀대로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요.” “허허…. 아, 솔양은 방금 잠들었고요. 아마 우리를 밤새 간호하느라 많이 지쳤을 겁니다.” 흠, 그런가. 밤새 간호했다 라. 그러고 보니 안솔과도 하나 이야기할게 있는데…. 그래도 지금 당장은 무리겠지. 그래. 어차피 이제 막 2차 공략도 끝났겠다. 당분간 크게 바쁜 일은 없을 테니, 느긋하게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색색 고른 숨소리를 내는 잠들어 있는 안솔을 잠시 바라보다가, 나는 도로 신재룡을 응시했다. “아무튼 좋아 보여서 다행입니다. 특히 현이가 정말 많이 걱정했습니다.” “이런, 미움 받을 줄 알았는데요. 그래도 걱정해주었다니 기쁘네요. 하하하.” 나는 이제 슬슬 자리를 비켜주기로 마음먹었다. 식사나 산책을 할 정도라면 거의 회복됐다고 봐도 무방하니까. 아마 내일쯤이면 완전히 복귀할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때 남은 일을, 아니 해야 할 일을 처리하면 될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푹 쉬게 해주고 싶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 일어나십니까?” 벌써 가냐는 듯한 말투에 나는 머리를 끄덕여주었다. “예. 아직은 휴식이 우선이기도 하거니와, 음식 다 식겠습니다. 식사 방해해서 미안했습니다.” “아…. 잠시만요. 클랜 로드.” “예?” “가시기 전에…. 실은 궁금한 게 하나 있어서요.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신재룡이 얼른 입을 열었다. 조금이지만 다급하다 생각되는 목소리였다. 어쨌든 거리낄 것은 없어 나는 가볍게 턱을 까닥거렸다. “그럼요. 말씀하시죠.” “그게….” “……?” “혹시, 저를 구해주셨을 때, 주변에 다른 사용자는 보지 못하셨습니까?” 다른 사용자? 나는 의아한 기분을 느끼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있었던가? 아니. 없다. 신재룡에 집중하느라 보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때 느낀 바로는 파악된 기척은 하나뿐이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주변에서는요.” “음…. 그렇습니까….” 무언가 일이 있는 걸까? 돌연 신재룡의 얼굴에 한 줄기 수심이 어렸다. 하지만 그건 잠시에 불과했다. “알겠습니다. 괜한걸 물어봐서 죄송했습니다.” 곧 쓰게 웃은 신재룡이 그늘진 어둠을 걷어내며 차분히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상관없다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그리고 바로 천막을 벗어나려는 찰나. “구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클랜 로드.” 한 번 더, 신재룡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구해주셔서, 감사하다.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채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그대로 나와버리고 말았다. “…….” 갑작스럽게 온몸의 힘이 빠지는 듯한, 심한 탈력감이 전신을 엄습해온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이 도로 복잡해졌다. 그러나 조금씩 비틀거리는걸 느끼면서도, 나는 억지로 다리를 움직였다. …이제는 또 어디로 가야 하나. 아니 그전에, 나는 왜 아침부터 이렇게 방황하고 있는 걸까. 시간이 흐른다. 멍한 기분으로 하염없이 걷던 와중 문득 얼기설기 세워진 울타리가 눈에 들어왔다. 어느덧 야영지 외곽 부분에 다다른 것이다. 머리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서서히 동이 터오는 푸른 하늘이 보인다. 아직 새벽이 채 가시지 않아 조금은 흐릿하기는 했지만. 나는 천천히 울타리에 걸터앉은 후, 연초를 한 대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가만히 상념에 잠겼다. 오늘 아침에 꿨던 꿈. 그리고 그에 관한 생각. 사실상 별로 마주하고 싶지는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껏 의도적으로 방황하며 피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 자신의 내면과 연관된 일이었으니까. 1회 차부터 2회 차의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는 수많은 죄 있는 사용자들을 살해했지만, 한편으로는 죄 없는 사용자들을 살해한 적도 있다. 동료를 살려본 적은 있지만, 그만큼이나 잃어본 적도 많다. 그러한 과정들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지울 수 없는 내면의 상처들이 생겨났다. 계속해서 새겨지는 상처들을 견디기 위해서는 스스로 살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하나의 선을 긋고, 흑백 논리로 구분하며, 사용자들을 도구와 연관 짓기 시작한 것은. 그렇게 하나의 가치관이 생겨나고, 그것을 나만의 모토로 삼아 이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에서 활동해왔다. 내가 2회 차로 돌아올 때도 마음먹은 건 단 하나뿐이었다. 무조건 형과 한소영에게만 집중하겠다는 일종의 목적. 그 외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말인즉 다른 사용자는, 사실상 그 목적을 이루려는 일종의 수단으로 생각해온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제, 나는 신재룡을 구했다. 물론 누가 봐도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구했다는 결과 자체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정작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신재룡을 구하는 과정에 있었다. 그때. 그러니까 대비책으로 생각했던 안솔의 기적이 무산되고, 클랜원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머릿속으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니, 그저 그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됐다. '머셔너리 로드. 조금 더 합리적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유지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살릴 수 있는지, 살릴 가치가 있는지 조금이라도 생각해보고 움직여야만 했다. 심지어, 엘릭서를 사용할 때도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내가 내 클랜원들을 구하겠는데,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습니까?' 그래. 그 당시는 무조건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잘 몰랐지만, 어쩌면 다른 미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신재룡도 구하고 엘릭서도 아끼는, 내가 생각하는 입장에서의 최선의 미래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선택은 신재룡의 생존이라는 최선의 결과를 가져왔다. 구하는 모든 과정에서 잠시라도 지체했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바로 거기서 전해져 오는 괴리감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모든 일이 마무리된 지금에서야 느껴진다. 지금껏 나를 지탱해준 가치관과 180도 다른 그때의 행동이, 서로간의 차이가 극명해지며 비로소 간극이 드러나는 것이다. 다른 사용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박수 쳐줄지도 모르지만…. 그 간극은, 나에게는 지독하기 짝이 없는 모순이었다. 이제껏 이 지옥 속에서 나를 버티게 해 준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랄까.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왜 이러는지. 이럴 거면서 안현 앞에서는 무슨 잘난 척을 그렇게 했는지. 치익, 치이익. “…응?” 돌연 아주 살짝 따뜻해진 기운에 아래를 쳐다보자, 어느새 연초 끝까지 타 들어간 불씨가 손가락에 닿은걸 볼 수 있었다. 너무 생각이 길었던 모양이다. 정신이 돌아오자, 갑작스럽게 목이 타는 기분이 들고 이마에 어지러운 감각이 맴돈다. 그러고 보니 구덩이에서 나온 이후 제대로 휴식했던 적이 있던가? “…에휴.” 누굴 욕하냐. 내 잘못인데. 절로 한숨이 나왔으나, 일단은 연초를 버리고 밟아 비볐다. 그리고 연초를 추가로 꺼내며 확인 차 시선을 떨어트리려던 찰나, 나도 모르게 머리를 떨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어.” 느닷없이 어지러움이 한층 심해지며, 극심한 현기증과 갑작스러운 수마가 찾아 들었다. 툭! 거의 동시에, 무언가 뜨끈한 액체가 인중을 타고 흘러 지면에 툭 떨어졌다. 작지만, 붉은 핏자국. 반사적으로 코를 훑자 손등에 혈흔이 묻어 나온다. 코피임을 확인한 순간, 스스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에 갑갑함이 물밀듯이 차오른다. “진짜….” 우선은 현기증부터 안정시킬 생각에, 나는 느릿하게 손을 들어 이마를 받쳤다. “뭐…. 이러냐….” 그리고 밀려오는 수마를 이기지 못해, 그대로 눈을 감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자정에 다음 회 갑니다. 0600 / 0933 ---------------------------------------------- 죽도록 싸운 자는 살고, 죽도록 도망친 자는…. 태양이 떠올랐다. 해가 점점 중천으로 떠오르며 그림자도 늘어날 무렵. 야영지 중앙 커다란 천막에는, 한 여인이 천천히 기록을 넘기는 중이었다. 겉모습만 보면 스물 중 후반은 돼 보이는 여인은, 기록을 비스듬히 든 채 한 줄 한 줄 세심하게 읽으며 차분히 다리를 꼬았다. 오늘은 밖으로 나갈 일이 없어서 그런 걸까? 예의 전투 갑옷이 아닌 활동성을 강조한 편한 복장을 입은 터라, 매끈한 빛을 흘리는 허벅지 살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그랬다. 여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한소영이었다. 이틀 전 한소영은 남부 원정대의 공략 종료를 선포했고, 이로써 전체 공략의 팔부능선은 넘었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모두 끝났다고 보기는 어려운 터라, 아직 북 대륙에 연락을 한 건 아니었다. 제 3전력인 북부 원정대의 공략을 요청하는 시점은, 어디까지나 요새 건설이 시작된 이후여야만 한다. 그러려면 적당한 장소를 찾는 게 선결 과제였고. 물론 그 작업 또한 거의 끝나가는 중이었다. 이미 괜찮아 보이는 장소는 서너 개 선별해 논 상태였으니, 늦어도 내일까지는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안이 결정된다고 해도, 그래도 모든 일이 끝나는 건 아니다. 아직 한 가지 일이 더 남아 있다. 어쩌면 남부 원정대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도망자'에 대한 처리. 아니, 사실 한소영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미 명백한 필벌(必罰)이나 다름없었다. 상대방 쪽에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양해를 구해오고 있었으나, 한소영은 절대로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상황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홀 플레인에서는 '도망자'를 용서한 전례가 전무하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인식이 좋은 편이 아니다. 가장 좋게 끝난 게 전투 사용자로서의 완전한 매장이었으니, 가히 어느 수준인지 짐작이 가는가? 탁. 한동안 기록을 살피던 한소영은, 모든 기록을 넘기자마자 책상에 놓고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검지로 볼을 톡톡, 두어 번 두드리더니 곧 결정했다는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천막을 나선 한소영의 걸음이 향한 곳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다른 지휘관의 천막이었다. 이내 천막 내 기척을 느낀 한소영이 한두 번 미약한 헛기침을 했다. 그러다 아차 한 얼굴을 하더니 재빠르게 몸을 돌려 도로 자신의 천막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30분이 지나고 천막을 나온 한소영의 머리는, 예쁜 줄로 깔끔하게 묶여 내려져 있었다. 말총 머리였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끝마친 후. “머셔너리 로드.” 살짝 허리를 굽힌 채 입구를 가리는 장막을 걷으며 들어간 찰나, 한소영의 걸음이 우뚝 멈추고 말았다. 여전히 한 명의 기척이 느껴지고는 있었으나, 천막 내부에 있는 사용자는 김수현이 아니었다. 탁자에 앉은 채 한소영을 흘긋 쳐다보는 여인은, 다름 아닌 그림자 여왕 고연주였다. 딱딱히 굳은 한소영을 보며 고연주가 나른하게 미소 지었다. “어머. 총 사령관께서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하지만. “그것도, 그렇게 예쁘게 하시고 말이에요…? 나 그런 모습 처음 보는 것 같아.” 살며시 올라간 눈매나 목소리는 하나같이 날카롭기 그지없다. “아차. 아까도 누가 잠깐 앞까지 왔다가 다시 가버렸는데. 혹시 총 사령관이셨어요?” 혹시 천막을 잘못 들어온 건가 한창 생각하고 있던 한소영은, 그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도발적인 눈빛을 보내는 고연주를 고요히 마주했다. 잠시 후, 한소영이 장막을 닫고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찰나의 순간이기는 했지만, 묘하게 눈웃음치던 고연주의 눈썹이 아주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렇게 왕을 찾아온 두 여왕이 한 자리에 서게 되었다. “머셔너리 로드와 의논해야 할 일이 있어서 왔어요.” “음~. 의논~? 좋죠. 그런데 이걸 어째요? 지금 우리 그이가 안 보이는데.” “…네?” “그이요, 그이. 우리 바깥양반, 요즘 식사도 잘 안하고 계속 돌아다니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저도 아침이라도 같이 먹으려고 왔는데, 아무래도 한 발 늦었나 봐요. 계속 기다렸는데, 통 보이지가 않으시네~.” 고연주가 탁자를 탁탁 치며 종알거렸다. 그런데, 목소리가 참 얄밉다. 거기다 그이, 바깥양반이라는 표현까지. 한소영이 이런 고연주의 말이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다. 이미 활성화된 초감각은 고연주의 말 하나하나를 명백한 도발로 전해주고 있었으니까. 굳이 표현해보자면 '감히 어딜 넘보니?' 혹은 '건드리기 있기 없기?' 정도랄까. 사실 그림자 여왕의 입장에서는, 그러니까 공적인 입장을 제외하면, 철혈의 여왕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을 리가 없다. 그렇잖은가. 초저녁부터 김수현과 만날 때마다 무수한 염문을 뿌려대는데, 머셔너리 클랜의 안주인으로서 기분 나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물론 한소영이라고 고연주의 도발을 기분 좋게 받아넘긴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한소영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보이고 있었으나, 손에 약간의 힘이 들어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이윽고 한소영은 고연주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탁자에 마주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건 처음 듣는 말이군요. 식사도 잘하지 않으시고, 계속 돌아다니신다고요?” “네~. 나 참. 기가 막히죠? 어제도 휴식은커녕, 지역 탐사하러 나간다고 하루 종일 돌아다녔다니까요? 누구더라? 이스탄텔 로우에 누구랑 같이 나간 것 같던데…. 아무튼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네요.” 그러자 고연주는 시선을 살그머니 피하고는, 어깨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배배 꼬며 말했다. 이것 또한 도발. 말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말하는 태도나 말투를 보면 한소영을 겨냥했다는 감도 없잖아 있었다. …그냥 탁 까놓고 말해서, 지시만 띡 내리지 말고, 너네 클랜원 관리 좀 잘하라는 소리였다. 한소영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이를 갈다가 태연히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휴식 지시를 내렸음에도 따르지 않았다면, 그건 개인 문제일 가능성이 크지요.” “뭐, 따지고 보면 그렇기는 하죠.” “아무튼 이종학씨는 제가 어제 단단히 혼을 냈으니, 아마 더 이상 어제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거예요.” “그것 참 고맙네요.” 고연주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순간, 한소영은 눈을 살짝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드물게도 천연스러운 기색이 약간이나마 엿보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분도 참 안타깝네요.” “네?” “아. 그냥 요. 그렇게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면…. 아마 저라면 진작에 말렸을 것 같아서. 어쨌든, 같은 클랜이잖아요?” “……?” “그렇게 꽉 막힌 분도 아닌 것 같고. 안주인정도 되는 분이 말씀하시면 들을 법도 한데….” “…하?” 이번에는 고연주의 입술에서 새된 반문이 흘러나왔다. 한소영의 말 또한 크게 문제는 없으나, 역시나 해석에 따라 달라질 여지가 있다. 말인즉 너는 그이, 바깥양반이라고 부르면서 그거 하나 내조하지 못했냐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너 정말 안주인 맞아?'라는 말. “호호, 호호호호…. 우리 수현이 원래 좀 그런 면이 있어서요. 워낙 겉으로 표현을 안 하시기도 하고, 또 고집도 세요. 그이는 한 번 결정 내린 일은 어지간해서는 번복하지 않아요.” “흐음. 뭐, 알겠어요.” 한소영 또한 아까 고연주가 그런 것처럼, 어깨를 들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연주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전혀 좋지 못한 미소가.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형! 오늘도 힘세고 좋은 아침!” 누군가 장막을 활짝 젖히며 힘차게 걸어 들어왔다. 한 손에 창을 든 사내는, 어젯밤 이후로 완전히 원기를 회복한 안현이었다. “누구냐고 묻는다면 내 이름은 안….” 그러나 기세 좋게 천막 안으로 걸어 들어온 안현은, 두 탁자에 앉은 여인을 보는 순간 절로 기세를 꺼트릴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차가운 한기가 사정없이 몸을 휘감아오는 기분이었다. 서로를 지그시 노려보는 두 여인을 보며 안현은 직감할 수 있었다. 아. 여기 있어봤자 득 될 건 없겠구나. “…저 그냥 나갈게요.” 그렇게 바로 등을 돌리려고 했지만. “어머. 현이 왔네?” “기공창술사?” 두 여인이 놓칠세라 안현을 붙잡았다. 불길한 기운. 어느새 닫힌 장막을 바라보며 안현은 속으로 절규했다. 한 발짝만! 한 발짝만 더 나가면 됐는데! “현아. 혹시 우리 그이 못 봤니? 여기 총 사령관 님이 공적으로 볼 일이 있다고 하셔서.” 고연주가 유난히 공적으로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이? 아…. 형이요? 저도 모르죠. 애당초 여기 계신 줄 알고 온 건데요.” 안현은 힘없이 돌아보며 곧바로 회답했다. 그러자 고연주가 잘했다는 양 활짝 미소 지었지만, 반대로 한소영의 눈매가 아주 조금 가늘어졌다. “아, 안녕하세요. 이스탄텔 로우 로드.” 기껏 인사해도 고개만 까닥이는 걸로 대신하는 한소영. 뭔가, 이상하다. 안현은 본능적으로 말조심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니, 그게 아니라면…. '대화가 힘들 때는 아예 화제를 돌려버려. 그게 최고의 방법이다.' 한때 김수현에게 받은 기타 교육을 떠올린 안현의 머릿속에, 마침 좋은 생각 하나가 번쩍 떠올랐다. “아차차. 그런데요. 혹시 형님 오늘 아침 괜찮으셨나요?” “응? 아니? 못 봐서 모르는데, 괜찮으시냐니?” “다른 건 아니고, 어제요. 형이랑 잠깐 얘기를 나눴는데…. 조금 힘들어 보이시는 것 같아서요.” “왜?” “그냥 중간에 혼잣말로 힘들어 죽겠다고도 하시고, 얼굴빛도 안 좋으시고…. 뭐랄까, 되게 외롭고 힘들어 보이셨어요.” “…힘들다고, 직접 말씀을 하셨다고?” 그 순간이었다. 그냥 화제나 돌릴 겸 말한 것에 불과했는데,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일순 안현은 말을 잘못한 건가 고민했으나, 이왕 내친 김이었다. 거기다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니, 그대로 머리를 움직이고 말았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잠시 후. “불안하네.” 얼굴을 찌푸린 고연주가 탁자를 짚고서 몸을 일으켰다. “총 사령관. 미안한데 잠깐 자리 좀 비워야겠어요. 수현을 찾아야 할 것 같거든요.” “…별로 상관없기는 한데. 그냥 기공창술사의 말대로, 혼잣말일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니요. 아까 말씀 드렸잖아요. 그 사람, 어지간해서는 속으로 눌러 담지, 겉으로 표현하는 사람 아니에요. 지금껏 같이 살면서 수현이 힘들다고 말하는 거 들어본 적, 세 번도 안 돼요.” “…….” 그렇게 말한 고연주는, 초조해 보이는 얼굴로 손톱을 씹으며 혀를 찼다. “설마 또 예전처럼 무리해서 정신이라도 잃은 건가? 완전히 치료된 줄 알았는데. …쯧.” “…네?” 그리고 이어진 중얼거림을 들은 순간, 한소영도 몸을 일으켰다. 무리? 기절? 사실 반문할 것도 없었다. 초감각은 고연주의 말을 진실이라고 전해주고 있었으니까. “아무튼, 안현. 너는 부상자 관리소에 가봐. 나는 남문 쪽 경비 초소부터 들러볼 테니까.” “예, 예.” 고연주가 지시를 내리자, 안현은 곧장 회답하고서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치듯이 천막을 나섰다. 이윽고 고연주가 한소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저도 같이 찾아볼게요.” 한소영 또한 바로 회답했다. 고연주는 마음에 들지는 않는 듯 입맛을 다셨지만,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렇게 처음으로 뜻을 맞춘 두 여왕이 서로 동시에 천막을 나섰다. 어딘가에 쓰러져 있을 왕을 모시…. 아니 찾으러.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메모라이즈도 어느새 600회까지 왔네요. 문득, 예전 1부 때 독자 분들과 나눴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로유진 : 개인적인 바람이기는 하지만, 메모라이즈 완결은 600회 정도에서 내고 싶어요! Reader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Reader2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Reader3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로유진 : 아니 왜 웃으시는 거죠? 저는 정말로 진심인데요? Reader : X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가 잘도 600회에 완결하겠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Reader2 : 진심이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600회는 무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최소 800회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Reader3 : ㄴ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보기에는 1000회도 넘어야 함 ㅋㅋㅋㅋㅋㅋㅋㅋ. 로유진 : (부들부들.) 두고 보세요! …이랬던 게 엊그제 같은데. 하…. 독자 님들 예지력 상승~! '- ^*(퍽퍽!) 어흠, 어흐흠. 아무튼 600회 축하해주신 독자 분들 모두에게, 정말로 감사의 말을 드립니다. 지금이야 이 꺌꺄라꺙꺙 같은 슬럼프에 허우적거리고는 있지만, 곧 페이스를 되찾으리라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제 6월도 다 끝났고, 오는 7월 1일부터는 다시 정상적인 시간에, 더 좋은 내용으로 찾아 뵐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 0601 / 0933 ---------------------------------------------- 죽도록 싸운 자는 살고, 죽도록 도망친 자는…. 그렇게 안현은 부상자 관리소로, 고연주는 남쪽 초소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김수현을 가장 먼저 찾아낸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늦게 출발한 한소영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안현과 고연주가 김수현이 갔을 법한 장소를 찾아갔다면, 한소영은 애초부터 초감각을 활용해 김수현의 흔적을 쫓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북쪽 초소로 갔다가, 중간에 부상자 관리소로 갔다가, 도로 서쪽 외곽 지역에 이르기까지. 한소영이 울타리에 걸터앉아있는 김수현을 발견하는 데는, 채 20분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머셔너리 로드…!” 생각보다 빠르게 찾았다는 생각 반, 그리고 자신이 이겼다는(?) 생각 반에, 한소영이 약간 상기된 어조로 김수현을 불렀다. 그런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한소영이 기척을 숨긴 것도 아니고, 예전 같았으면 접근하기도 전에 반응을 보였을 텐데. 그러할진대 김수현은 여전히 울타리에 앉은 채 미동도 않고 있다. 그러고 보니 머리를 푹 숙이고 있는데…. 혹시 잠깐 자고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한 한소영이 발소리를 죽인 채 살금살금 거리를 줄여갔다. 그러나 김수현의 바로 옆까지 접근했을 때, 한소영의 아미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갑자기 진한 피 냄새가 코를 물씬 찔러왔다. 이내 지면에 얼룩진 상당한 양의 핏자국을 확인한 순간, 한소영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떠졌다. “머셔너리 로드? 머셔너리 로드!” 그리고 다급한 목소리로 부르며 늘어진 어깨를 부여잡은 찰나. “아….” 서서히, 김수현의 몸이 기울어졌다. 한소영의 품속으로. * 무언가 굉장히 부드러운 감촉이 얼굴을 부드러이 쓰다듬는다. 그 간드러진 촉감에 정신을 차린 나는 천천히 눈을 떴고, 곧 중천에 떠오른 해와 구름이 한가로이 떠다니는 하늘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햇살을 받아 흰빛을 은은하게 흘려내는 누군가의 얼굴까지도. 꿈인지 생시인지 어렴풋한 비몽사몽 한 기분이었지만, 적어도 하늘을 등지고 나를 내려다보는 이가 누군지는 알 수 있다. 지금 내 볼을 간질이는, 이처럼 탐스럽고 윤기 흐르는 칠흑 색 머리카락을 가진 이는…. 확실히 한소영이다. 그런데 왜 한소영이 여기에? 새벽만해도 혼자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는데…. 아, 꿈인가? 꿈이라서 그런가? 그렇지. 꿈이겠지. 아니면 한소영이 짠하고 나타날 리는 없으니까. 안 그래도 요즘 한창 바쁘실 텐데. 그렇구나. 꿈이구나. 잠시간의 고심 끝에, 나는 지금 이 상황이 꿈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런 현상을 뭐라고 하더라. 기시감? 아니, 아닌데…. 아. 루시드 드림, 자각몽이라고 하던가? 아무튼, 그래도 좋다. 설령 꿈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꿈은 언제든지 환영이다. 근래 이래저래 속이 거슬렸는데, 이렇게 힐링을 해주는 꿈도 꾸는걸 보니 그래도 아주 죽으라는 법은 모양이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꿈속의 한소영은 어떤 말도 없었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으음. 천사는 싫어. 그럼 요정처럼…. 요정도 싫은데. 어쨌든 그저 입을 꼭 다문 채 조용히 내려다보기만 하고 있다. 그렇게 잠시 눈을 맞추고 있자, 가물가물한 와중 돌연 용기가 솟는걸 느꼈다. 생각해보니 지금 이 상황이 꿈이라면, 이런저런 짓(?)을 해도…. 아니, 아니야! …후. 좌우간, 어떤 말을 해도 괜찮을 게 아닌가. 예를 들면 재회한 이후 하지 못했던, 아니 할 수 없어 가슴속에 담아두기만 했던 말들이. 클랜 로드. 그거 알아요? 보고 싶었어요. 정말로, 정말로 보고 싶었다고요. 이제는 내가 꼭 지켜줄게요. 아, 말했다. 한소영을 정말 오랜만에 클랜 로드라고 부르니 조금 어색한 기분도 들지만, 그래도 드디어 말했다. 꽤나 낯부끄러운 말들이 오늘따라 술술 나온다. 역시 꿈이라서 그런 건가? 하하하.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머리가 상당히 편안하다. 마치 따뜻하면서도 말랑말랑한 무언가를 베고 있는 기분이랄까? 목 언저리서 전해지는 기분이 너무나 포근해, 나는 도로 눈을 감으며 반쯤 돌아누웠다. 그러자 이번에는 코가 어딘가에 파묻히는 감촉이 들며 무척이나 향기로운 살 내음이 물씬 풍겨온다. 거기다 정수리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쓰다듬어주는 감촉까지. 아아. 여기가 천국이로구나. 감사해요. 클랜 로드. “아니요. 괜찮아요.”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그대로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정적이 나를 한없이 불안하게 만든다. 나는 그 상태서 살짝 몸을 뒤척여보았다. “감사하실 건 없는데…. 한참 기분 좋아 보이시는 와중에 죄송하지만, 머리는 도로 돌려주시면 안될까요? 아니면 아예 반대로 돌려주시거나.” 응?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거기다 코를 묻으시면…. 예민한 곳인데….” 그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을 느꼈다. 바로 눈을 뜨고 시선을 올리자,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한소영의 얼굴이 보인다. …잠깐. “…아직 잠이 덜 깨신 것 같네요.” 어버, 어버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냥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그 움직임은 한소영이 내 이마에 살며시 손을 얹음으로써 간단히 제압되고 말았다. 가, 가만히 있으라는 소린가? “───. ───. ───. 정화(Purification).” 이윽고 한소영이 주문을 외운 순간, 내부에서 상쾌한 청량감이 삽시간에 치솟았다. 전신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정제해준다. 마치 가득 쌓여있던 갈증을 녹여주는 듯한 기분에, 나는 잔뜩 들어간 힘이 서서히 풀리는걸 느꼈다. 잠시 후, 주문을 끝낸 한소영이 나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이제 좀 괜찮으신가요?” “예, 예. 괜찮습니다. 매우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그, 그렇죠. 다행이죠.”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나도 잘 모르겠다. 아니 그전에, 이렇게 계속 허벅지를 베고 있어도 괜찮은 걸까? 어떻게 감히, 라는 생각이 머리 한 켠을 스쳤지만, 나는 그럼에도 상체를 일으키지 못했다. 지금 이 상황이 더 이상 꿈이 아니라는 건 깨달았으나, 그럼에도 꿈결같은 기분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말 미친 듯이, 몸서리쳐질 정도로 아늑하다. 이대로 죽어도 좋을 정도로. 이 상태서,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한소영이 가까이서 쳐다본다는 부담감과, 전신에서 느껴지는 붕 뜬 기분 사이를 넘나들고 있을 무렵. 한소영이 입술이 떼어졌다. “30분 전까지 울타리에 앉아계셨어요. 갑자기 쓰러지시는걸 제가 받았고요.” “어떻게 아신 겁니까?” “찾기는 제가 찾았지만…. 머셔너리 클랜원들한테 이모저모 말을 듣기도 했지요. 특히, 그림자 여왕께서 재밌는 말씀을 해주셨거든요.” “고연주가요?” “네.” “…….” “…왜 그러셨어요?” “예…?” 돌연 한소영의 목소리가 한껏 가라앉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내 이어진 한소영의 말은, 구덩이 공략이 끝난 이후 내 행적을 그대로 읊고 있었다. 탐색 조에 끼어 돌아다닌 거나,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거나 등등. 심지어 안현에게 흘리듯이 중얼거렸던 힘들다는 말까지. 그 녀석은 도대체 왜 이런 것까지 말한 거야? “왜 말리지 않았냐고 여쭈어보니까, 그림자 여왕이 그러시더군요. 말린다고 들을 분이 아니라고요.”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처럼 가슴에 푹푹 꽂힌다. 특히나 목소리에 알게 모르게 깔린 힐난하는 어조는, 자기 관리에 실패했다는 것을 깨우쳐주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한소영한테 들켰다는 사실이 너무나 창피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잠시 후, 잠깐 말을 멈춘 한소영은 가벼운 한숨을 흘리고는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러한 와중에도, 불어오는 바람결에 스치는 머릿결이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아무래도 중증인 모양이다. “클랜 로드라는 자리는, 소속한 클랜원들의 우러름을 받은 자리죠. 특히나 머셔너리 클랜처럼 모든 게 머셔너리 로드에게 집중돼있다면 더더욱 그렇고요.” “이스탄텔 로우 클랜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렇다고 머셔너리 클랜의 구조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언제이든 간에 분명 클랜 로드가 나서고, 떠안아야 할 때는 오니까요.” 한소영은 목소리가 마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아름답게 이어진다. “예나 지금이나. 머셔너리 로드는 그럴만한 능력과 자격이 있다는 걸 충분히 증명하셨어요. 그래서 지금의 머셔너리 클랜이 있는 것이겠지요.” “저 또한 그래요. 금번 머셔너리 로드의 활약 덕분에, 어렵겠다고 생각했던 공략을 결국에는 성공적으로 종료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러다 문득, 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이 도로 내려와 나를 바라본다. “같은 클랜 로드라는 입장으로써, 이렇게 제멋대로 구는 머셔너리 로드는 인정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 말을 끝으로, 한소영의 노래가, 아니 이야기가 매듭지어졌다. “…….” 그리고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나름 S랭크라는 클랜 로드라는 딱지를 달고 나서도 이런 소리를 듣다니,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기분이 가히 나쁘지는 않다. 그 누가 아닌 내가 가슴 깊이 동경하는 사람이 해 준말이니까. 오히려 한 수 배웠다는 생각이 들어, 절로 미소가 나온다. “기분 나쁘셨나요?” “아니요. 그냥….” “……?” “…고맙습니다.” 그렇기에. “그리고 죄송합니다….” 나는 머리를 흔들고, 진심으로 사과할 수 있었다. 갑자기 고요한 정적이 찾아 들었다. 나는 웃고 있다. 그리고 눈이 감아 보이지는 않지만, 왠지 한소영도 웃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잠시 후, 정수리를 살며시 매만지는 감촉이 전해졌다. 그게 마치 조금 더 이러고 있어도 된다는 무언의 허락 같아, 나는 마음 놓고 온몸의 힘을 풀었다. 그리고…. “아니요. 저야말로 고마워요.” 곧 천천히 밀려오는 수마에 차분히 몸을 맡겼다. * 다음날.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아름답고 조용한 아침이 밝았다. 그러나 내가 사용하는 천막은 전혀 조용하지 못했다. 마침내 요새 건설 지역이 확정됐다는 소식과 동시에, 부상자 관리소에 있던 신재룡과 헬레네가 오늘 아침 부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마침 할 말도 있는 터라 나는 곧바로 그 두 명을 비롯한 모든 클랜원을 호출했고, 한 명 두 명 들어오는 통에 이리저리 시끄러운 소리들이 귓전을 가득히 울렸다. 물론,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우리 언니, 아니 클랜 로드가 보내주신 선물이에요!” 막 클랜원들을 조용히 시키고 말을 시작하려던 찰나, 느닷없이 이스탄텔 로우의 박다연이 들이닥쳤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선물이라면서 보라 빛 액체를 찰랑이는 병 하나를 내민 것이다. 『이스카르트의 Te - amo 물약.』 (설명 : 고대 연금술사, 이스카르트가 평소 연모하던 여인이 불치병에 걸리자, 여인을 구하려 갖은 고생 끝에 만들어낸 영약 중 하나입니다. 비록 무수한 세월이 흐르고 관리 과정의 실수로 예전 '엘릭서와 견줄만하다.' 의 효능은 보이지 못하지만, 그래도 치료로서의 효과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습니다. 복용한 사용자는 즉시 피가 맑아지고 온몸에 활력이 돌며, 이후로 서서히 건강을 회복하게 됩니다.) 허공에 출력되는 메시지를 읽은 순간, 나는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이스카르트의 공방은 2년 전 내가 한소영한테 소개해준 유적 중 하나였다. 아마 거기서 얻은 성과인 것 같은데, 이걸 왜 나한테…. “저기, 사용자 박다연.” “네. 어서 드세요.” “예, 예? 그게 아니라요. 이런 귀한 성과를….” “괜찮으니까 어서 드세요. 우리 클랜 로드가 머셔너리 로드 마시는 거 보기 전까지는, 돌아올 생각도 말라고 하셨거든요? 증거로 빈 병 가져가야 해요.” 뻥 치지 마. 라고 말하고는 싶었지만, 박다연의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어서요. 얼른 회의하셔야 하잖아요?” “…….” 허, 참. 결국 나는 박다연을 비롯한 모종의 시선을 이기지 못해, 못 이기는 척 물약을 비울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 박다연은 정말로 빈 병을 가져가더니 “감사합니다.” 배꼽 인사를 하고는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천막을 나서기 직전, “이게 진짜 내조지. 호호호호.”라고 혼잣말을 종알거리기까지. 응? 저게 무슨 소리지? “호호…. 이렇게 나오시겠다?” 어디선가 이를 바득바득 가는 소리들이 들려왔지만, 나는 헛기침을 하고 클랜원들을 응시했다. “자, 그럼 모두 모인 것 같으니…?” 그때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있는 고연주가 눈에 밟혔다. 아니, 거의 여인들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고, 사내들은 하나같이 묘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본다. …이 사람들이. ============================ 작품 후기 ============================ 아마 다음 회로 재판을 마무리 짓고, 제 3지역으로 돌입할 듯싶습니다. 강철 산맥은 총 4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공식적인 공략'으로 따지면, 3지역이 끝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사실상 4지역은 아틀란타의 거의 앞마당이나 다름없으며, '4지역'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요. 물론, 이건 다음 기회에 내용에서 드러낼 계획입니다. :) 아무튼 공식적인 공략은 3지역으로 종결되며, 4지역은 하나의 커다란 '전투'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럼 3지역에서는 어떤 괴물들이 등장할까요? 사실 이미 힌트는 드렸습니다. 서 대륙과의 전쟁에서 한 번, 그리고 안솔의 꿈에서 한 번이요. 아마 기억하고 계시는 분들은, “아, 그거구나!”라고 유레카를 외치실지도 모르겠네요. 하하하. 그나저나 오늘은 00시 17분에 업데이트했네요. 좋아요, 아주 좋아요. 점점 페이스를 찾는 느낌이 들어요! 자. 얼른 페이스나 더 찾으라고, 머리나 좀 쓰다듬어주시죠?(건방건방.) し○へ        へ○/       \○へ        へ○ヘ      く○/  / ヘ       ( ヘ        ヘ /           ( ヘ       ( ヘ 〈         〈          〉        〈        く 에헤라디야! 0602 / 0933 ---------------------------------------------- 죽도록 싸운 자는 살고, 죽도록 도망친 자는….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은데…. 짝, 짝! 주의를 환기시킬 겸 박수를 두어 번 치자 삽시간에 이목이 집중됐다. 나는 약하게 헛기침을 한 후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모두가 모인 것도 참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그러자 대다수의 클랜원이 갸웃하는 반응을 보였지만, 일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구덩이 공략에 참가한 이들이다. 상대성 이론이라고 했던가? 거기서 겪어야 했던 일들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을 테니, 체감한 시간의 흐름도 상대적으로 느렸을 것이다. …아무튼. “그럼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잠깐 말을 멈추고 시선을 돌리자, 한쪽에 옹기종기 앉아있는 3명이 차례대로 눈에 들어왔다. 안현, 신재룡, 헬레나. 그중에서도 신재룡은 꽤나 멋쩍어하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저를 쳐다보는 겁니까? 사용자 신재룡?” “에…. 그러니까, 괜찮습니다.” 직접 지목해 말을 꺼내자 신재룡이 기다렸다는 듯이 회답했다. 왜 저러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지만, 조금은 짓궂은 기분이 들어 일부러 천연덕스레 말을 이었다. “으음? 괜찮다니요?” “환영 인사요. 이미 오늘 아침부터 수십 번은 받은 것 같아서…. 더 받으려니 쑥스럽네요.” “하하하.” “그, 그냥 넘어갔으면 좋겠습니다만….” 말끝을 흐리며 머리를 긁적이는 신재룡을 보고 있으니, 왜인지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아까 아침 클랜원들과 조우했을 때 환호성에 파묻혔던 것이 꽤나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어쨌든 안현 또한 큰 불만은 없어 보이고 헬레나는 애초 무덤덤하게 일관하고 있어, 나는 결국 신재룡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에는 섭섭한데. …아무튼, 세 분 모두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사실 '큰 일을 해내셨습니다.'와 '고생하셨습니다.'라는 말이 먼저 떠올랐지만, 두 개 모두 상황에 맞지 않는 것 같아 중간 즈음으로 생각되는 적절한 말을 골랐다. 짝짝짝짝…. 이어서 생환 및 회복을 축하하는 가벼운 박수가 이어지고, 박수가 끝나자마자 천막에는 조용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마침내 잠잠해진 클랜원들을 보며 나는 열 손가락을 엇갈려 맞췄다. 이제는 본론에 들어가야 할 때였다. “아마 여러분들도 어느 정도 이야기는 들으셨을 겁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에게 들은 바로는, 현재 요새를 건설할 지역이 확정됐으며 곧 그 장소로 이동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고 들었습니다.” “…….” “거두절미하고 말씀 드리면, 재판은 내일 오후입니다. 그리고 원고의 자격으로 참석하는 이들은 안현, 신재룡, 헬레나. 이 3명이고요.” “저기요, 클랜 로드님.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질문이 있는데요.” 그때였다. 잠시 말을 끊은 찰나, 한쪽에서 한껏 궁금하다는 상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한 여인이 인어처럼 앉은 자세로 손을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표혜미, 아니 정확히는 표혜미의 모습을 한 제갈 해솔이었다. “재판이라는 게 정확히 어떻게 이루어지는 건가요? 이 세상에서요.” 그런 제갈 해솔의 눈은 약간 부담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마치 정말 오랜만에 신기한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 아이처럼. 하기야 그럴 만도 하다. 제갈 해솔은 공략 기간 동안 조용히 지내겠다는 조건으로 강철 산맥 공략에 합류했고, 이제껏 정말로 쥐 죽은 듯이 지내왔다. 물론 개인적으로 그 부분은 무척 흡족하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원래 가지고 있던 성질이 어디로 가겠는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제갈 해솔은 '나 심심해요.'라는 기색을 대놓고 드러냈으며, 어쩔 때는 'AC. 괜히 따라왔어.' 라는 투덜거림을 표출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재미있어 보이는 일이 터지니(물론 제갈 해솔의 입장에서.) 저렇게 흥미를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조금은 관대해져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지금 상황이 어떤지는 알고 계시는지요.” “네, 대충은요. 저 세 분이 열심히 전투하는 와중에 한 분이 도망갔다. 그래서 그 도망자에 대한 처벌을 논의해야 한다. 아닌가요?” 그건 또 너무 심하게 요약했는데. 뭐,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니. “그렇죠. 사실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 자체는 굉장히 간단합니다. 이미 벌어진 상황 하나만을 두고 당사자들이 결정을 내리며, 그 과정에서 나오는 의견들을 수렴해 최종 결정권자가 판결을 내립니다. 여기서 최종 결정권자란 총 사령관, 즉 이스탄텔 로우 로드를 의미합니다.” “에…. 그러니까 그 질투 날 정도로 예쁘게 생기신 분이 판사다?” 질문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찰나, 갑자기 고연주가 도끼눈을 뜨며 나를 주시했다. 질투 날 정도로 예쁘게 생기신 분…. 설마 고연주가 한소영을 질투하는 건가? 그런데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잖아. “…예.” “그럼 검사, 변호사, 증인, 배심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요?”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상황이 중요합니다. 이미 모든 상황이 확정된 이상, 증인이나 배심원은 필요치 않으니까요.” “그럼 판사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글쎄요. 굳이 따져보면 저 3명이 원고 겸 검사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지만, 도망자의 처리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는 선에서 그치는 정도겠죠. 피고인 그 도망자도 마찬가지고요. 물론 주변 지인들이 변호사 역할로 나설 수 있겠지만, 아마 저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군요.” “왜요? 왜 변호해주지 않는 건데요?” 질문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슬슬 다른 클랜원들 중에서도 불편한 심기를 비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분이 상했다기 보다는, 혼자서 자꾸 이야기를 끊어먹으니 '쟤 뭐야?' 싶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살그머니 신호를 보내 그들을 진정시켰다. 신재룡, 헬레나는 이미 알고 있다거나 별로 관심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지만, 안현은 무척 열심히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혜미씨. 그건 제가 말씀 드릴게요.” 그때,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나 대신 제갈 해솔의 질문에 회답했다. 누군가 하고 봤더니 현숙함이 한껏 무르익은 여인의 자태가 눈에 들어왔다. 정하연이었다. “그래도 될까요? 클랜 로드.” 허락을 구하려는 듯 나를 쳐다보는 정하연을 보며 나는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다. 문득, 저번 용이 잠든 산맥 사건 이후 정하연과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유는 간단해요. 이 홀 플레인에서는 도망이라는 개념을 상식으로 두지 않아요. 오히려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종의 불문율로 치부되죠.” “……?”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혜미씨가 탐험 대장을 맡게 됐고, 마침 사제 자리가 비었다고 가정해봐요.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 중에서 1명을 골라야 하는데, B라는 사람은 예전 어느 탐험에서 동료들을 버리고 도망친 전력이 있죠. 그럼 혜미씨는 이 B라는 사람을 탐험대에 포함시키겠나요? 언제, 어디서든지 동료를 버리고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을?” “아니요. 당연히 A를 선택…. 아?!” “네. 바로 그거에요. 그리고 한 가지 추가로 덧붙여드리면, 애당초 북 대륙은 지금껏 도망자를 용서한 사례가 없어요. 99%가 처형. 그리고 설령 공식으로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사용자로서는 완전하게 매장당하죠.” “헤~. 매장이라. 재미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섭네요.” “그럴 수밖에요. 소문이라는 건 그만한 파급력이 있으니까요. 생각해보세요. 모든 상황은 탐험 기록에 꼬박꼬박 남겨지며, 북 대륙의 인구는 많아 봤자 5만. 거기서 전투 사용자를 추리면 더욱 적어지겠죠? 즉 선례가 생김으로써 나타날 수 있는 보편화를 방지하고, 소문이라는 화살을 도망자에게 돌리는 것이지요. …그러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들을 이번 상황에 대입해보시겠어요?” “아아, 네! 이제 완전히 이해했어요. 충실한 설명 감사 드려요!” 제갈 해솔은 이제야 만족했다는 얼굴로 배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미소 지었다. 마치 맛있는걸 잔뜩 먹어 기분 좋아 보이는 어린 아이처럼 말이다. 일부 클랜원들은, 약간 멍해 보이는 얼굴로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분명 같은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무지에서 비롯된 망연함이리라. 그렇게 호기심을 충족한 제갈 해솔은 곧바로 얌전해졌고, 나는 정하연에게 남몰래 눈인사를 건넸다. 정하연은 어질게 미소 지으며 화답해주었다. 언제나처럼. “자. 이야기가 조금 길어졌으니 슬슬 마무리를 짓도록 하죠.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는 내일 공개 재판을 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해왔으며, 우리 3명의 의사를 존중하겠다고 말씀하셨죠.” 사실 공개 재판을 열겠다는 것부터가 이미 결론을 내렸다는 것과 진배없으나, 그래도 한소영은 재판을 벌일 여지는 두었다. 그건 바로 1차적으로 3명의 의사를 수렴하겠다는 것. “말인즉, 그 도망자에 대한 처분은 살아나온 당사자 3명의 의견이 가장 많이 반영된다는 소립니다.” 그때, 무료하게 허공을 바라보던 헬레나가 은근슬쩍 손을 들었다. “클랜 로드. 혹시 그 재판이라는 거, 그냥 참석하지 않으면 아니 되옵니까?” 별로 관심 없다는 말투이기는 했지만, 목소리에는 알듯 말듯한 피로함이 깔려있었다. 그러나 불참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 나는 곧바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나저나 헬레나라면 흥미를 보일 줄 알았는데, 나름 의외로군. “참석은 무조건 해야죠. 그러나 의견 개진이 힘들 경우에는, 그 장소에서 스스로 권리를 포기한다는 기권을 행사하면 됩니다.” “기권이라…. 알겠사옵니다.” “예. 그러면 남은 두 명은….” “저는 참석하겠습니다. 남은 하루라는 시간 동안 생각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서 옆의 두 명으로 시선을 돌리자, 신재룡이 딱딱히 굳은 얼굴로 바로 회답해왔다. 이미 각오한 일이기도 하거니와, 아마 부상자 관리소에 있으며 어느 정도 생각해둔 게 있는 모양. 그러나 안현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자신의 말 한 마디에 한 명의 생명이 달렸다는 사실이 자못 어색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이스탄텔 로우 로드는 이 상황을 최대한 빠르게 정리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 하루라는 시간이 남아있으니, 내일 오전까지는 각자의 생각을 정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말 그대로, 이번 선택은 오롯한 안현의 몫. 내가 끼어들 수도, 또 그럴 생각도 없다. 금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클랜원들의 선택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뿐이다. “그럼 회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곧바로 회의가 파함을 알렸다. * 다음날 오후. “…그러므로 지금부터 하는 질문은 형식적인 것들에 불과하며, 사용자 이희원이 회답은 네, 아니오 로만 하시면 됩니다.” 거의 모든 남부 원정대 사용자들이 모인 가운데, 한소영의 목소리가 꾸짖듯이 들려왔다. 나는 야외에 마련된 재판장을 훑다가 중앙에 마련된 의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의자에는, 한 여인이 앉아있었다. 물론 저 여인이 바로 도망친 사용자였으며, 이번에 처벌을 받을 피고이기도 했다. “소속 클랜은 적심. 6년 차 사용자. 클래스는 궁수. 이름은 이희원. 맞나요?” 고저는 없지만 날카롭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간신히 회답한다. 이윽고 노려봄 반, 호기심 반이라는 시선이 쏟아지는 가운데, 한소영의 추궁이 이어졌다. “사용자 이희원은 구덩이 공략 조에 참가했지요. 맞나요?” “네.” “그리고 전투 도중, 광장에서 도망친 괴물을 추적하는 임무를 맡았고요. 맞나요?” “네, 거기까지는 맞아요. 하지만.” “조용히 하세요. 이후 중간에 조가 나뉘었고, 사용자 신재룡이 조장으로 있는 조에 포함됐지요. 맞나요?” “…네. 그러나….” “그 조는 괴물과 조우했으며, 차후 이어진 전투에서 사용자 이희원은 홀로 도망쳤습니다. 맞나요?” “자, 잠시만요. 그건!” “사용자 이희원. 한 번만 더 제가 지정한 답변의 범위를 벗어날 시,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제 권한으로 즉결 처분하겠어요.” “…….” “마지막 기회에요. 아까 질문에 대해, 다시 답변하세요.” “…네.” 한소영은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고 이희원을 매섭게 몰아붙였고, 결국에는 도망친 사실을 인정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그 순간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용자들 사이로 미약한 웅성거림이 일었다. 어수선한 소란으로 발전되지는 않았지만, 곧 일부 사용자들이 노골적인 적대감을 이희원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나름 명성이 있는 사용자가 저런 짓을 했다니, 꼴불견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좋아요. 추궁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요. 그럼….” 그때였다. “초, 총 사령관! 잠시만 기다려 주시요!” 붉은빛으로 일색 된 복장을 걸친 사내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적심 로드였다. 들어보니 어떻게든 좋게좋게 넘어가려고 무진 애를 썼다고는 하는데…. 아쉽게도 한소영이 그렇게 만만한 여인은 아닌지라. “무슨 일이지요? 적심 로드.” “바, 발언권을 요청하겠소!” 적심 로드는 나름 절차를 준수하려는 듯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지만, 한소영은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한소영의 좌우로 착석한 안현, 신재룡, 헬레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기각하겠어요. 이제 막 이 3분의 의견을 들을 예정이라.” “우, 우리 쪽 말도 들어줄 수는 있는 거잖소!” “이미 충분히 들었으니까요. 어쨌든, 결국에는 사용자 이희원의 살 길을 열어달라는 말씀이 아니었나요?” “그거야!” “네. 어제 그냥 좋게, 이대로 넘어가달라고 말씀하셨죠. 하지만 이번 선례로 인해 발생될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실 수 있겠냐고 여쭈니, 어떤 회답도 하지 않으셨잖아요?” “…큭!” 적심 로드가 할 말을 잃었다는 얼굴로 입을 짓씹었다. “저는 이 일을 별로 오래 끌고 싶지 않네요. 이대로 지속하겠어요. 그럼….” “기권.” 이윽고 한소영이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헬레나가 손을 번쩍 들며 입장을 발표했다. 와, 참 빨라서 좋구나. 잠시 후 두어 번 눈을 깜빡인 한소영이 입을 열었다. “사용자 헬레나는, 기권이라고요?” “네. 저는 어떻게 처리되든 별 상관이 없는지라.” 고개를 끄덕끄덕 주억인 헬레나가 길게 하품을 한다. 의자에 앉아있던 이희원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혹시나 하는 기색이 얼굴에 서린다. 하기야 꼼짝없이 죽겠다 싶었는데, 처음부터 기권 표가 나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 다른 분은….” “저는 처벌을 원합니다.” 한소영이 오른쪽 끝을 쳐다보며 물은 순간, 신재룡의 회답은 이희원을 단번에 핼쑥하게 만들었다. 신재룡의 얼굴은 의외로 굉장히 단호해 보였다. 한두 번 깊이 심호흡을 하더니 이희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모든 전투가 끝나고 도망치는 도중에, 저는 동료라고 생각한 한 사내를 잃었습니다. 비록, 서로 소속한 클랜은 달랐지만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돌연 그제 신재룡이 물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저를 구하실 때 다른 사용자는 보지 못하셨습니까?' “긴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복수심은 접고서라도, 그때 그 사내의 마지막은 정말로 사내, 아니 무사다웠습니다. 그런 만큼, 그 사내와 대비되는 도망자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대해질 수 없을 것 같군요. 그러므로 저는 처벌을 선택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알겠어요. 의견, 감사해요.” 신재룡이 말을 끝냈고, 한소영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로써 처벌 1표, 기권 1표. 이제 남은 건 안현의 의견뿐. 그렇다면 안현의 의견으로써 이희원이 처벌, 아니 생사가 결정된다고 봐도 옳을 상황이었다. 한소영의 고개가 안현에게로 돌아갔다. “사용자 안현?” “…예, 예?” 안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회답했다. 뭐랄까, 이제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얼굴? 한소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안현의 의견을 기다리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문제는 안현이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 지금도 나를 흘끗흘끗 바라보고 있다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그러나 나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듦으로써 안현의 요청을 거절했다. 사실상 선택에 도움을 주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서는 발전이 없을 테니까. 이제 막 내면의 성숙해지려는 흐름을 타기 시작했는데 그걸 가로막을 수는 없잖은가. 그렇게 나와 계속 눈을 맞추려고 노력하던 안현은, 결국 머리를 푹 숙이며 지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안현은 계속해서 땅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래. 네 성격에 복잡하겠지. 그것도 무척이나. 잠시, 시간이 흘렀다. “…사용자 안현.” 곧 얼른 결정을 내려달라는 서릿발 같은 촉구가 이어졌을 때. “저, 저는….” 비로소 안현의 입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청력을 높였다. “처, 처벌을 하되….” “아, 아니 그러니까…. 물론 처벌은 받아야 할 일이지만…. 그래도 목숨은….” 띄엄띄엄 이어지는 목소리. 그러니까 처벌은 원하지만, 그래도 목숨까지 빼앗는 건 싫다는 말인가? “어떤 처벌을 할지는 제가 정해요. 아무튼 처벌에는 동의한다는 말씀이시죠?” 한소영 또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고요히 반문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아니요!” 갑자기 안현이 머리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거의 노려보는 수준으로 한소영을 정면에서 응시하더니, 전보다 확연히 높아진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한 번!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선언했다.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었으면 좋겠다고. …이게 네 선택인가. 안현의 의견이 끝난 순간 주변에 몇몇 사용자들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안현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정작 이희원과 적심 로드의 얼굴은 환하게 밝아졌지만. 활로가 열렸다고 생각하는 걸까? 확실히 드러난 것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찬성 1표, 반대 1표, 기권 1표. 이렇게 결과가 나왔으니 당사자들의 의견만으로는 결정을 내릴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별다른 걱정은 들지 않는다. 이렇게 조율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자동적으로 1표가 추가적으로 생성되며, 그 권한은 당연히 판사에게 돌아간다. 즉 이제 모든 결정이 한소영에게 달린 것이다. “말씀해주신 의견은 받아들이죠.” 그런 안현을 잠시 빤히 쳐다보던 한소영이 말했다. 그런 한소영의 얼굴은 시종일관 전혀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안현이 한결 진정된 기색으로 한숨을 흘리는 찰나. “그러나. 안타까우시겠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사용자 안현.” 싸늘한 목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사용자 안현과의 생각과 다르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한소영은 처벌을 원한다는 소리였다. 뭐, 애당초 공개 재판을 진행하겠다 한 이상, 한소영은 이미 결론을 내린 것과 다름없는 상태였으니. 웅성웅성. 주변이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잠깐 밝아졌던 이희원과 적심 로드의 얼굴은 도로 검붉은 빛을 띠었으며, 안현은 망연해 보이는 얼굴로 한소영을 응시했다. “왜냐고 물어보시는 얼굴이네요. 간단해요. 저는 남부 원정대는 전투 중 도망쳐도 괜찮아, 라는 소리가 들려오는걸 원하지 않아요.” 솔직하다면 솔직한 이유였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반박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저 말은 반박하려면, 이후 도망으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책임지겠다는 전제가 들어가야 하니까. 그건 나조차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제 의견은, 무조건 처벌을 해야 한다 이며….” 한소영의 말이 이어진 순간, 벌떡, 연혜림이 몸을 일으켰다. 주변에 있던 사용자들이 흠칫하며 걸음을 물렸다. 처형의 공주가 일어났다는 소리는…. “처벌 내용은 처형. 으로 정하겠어요. 이상입니다.” 그렇게 한소영의 처형 선고가 떨어지는 동시에. 쿵! 무언가가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리 꽂혔다. 자세히 보자, 처형의 공주 전용 무기인 처형자의 대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저거 오랜만에 보네. “에…. 그러니까, 지금?” 이윽고 앞으로 걸어나간 연혜림이, 목을 좌우로 꺾으며 한소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소영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인 순간, 이희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 작품 후기 ============================ 왜, 왜, 왜, 왜…. 왜 또 페이스가 이렇게 됐을까 생각했는데, 용량을 보고 이해했습니다. 24K! 음하하하. …OTL. 죄송해요. 구덩이 파트의 실질적 종결이라는 생각에, 욕심껏 이것저것 집어넣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 에, 가설라무네. 음. 그런데 글을 적다보니 문득 여러분들의 의견이 궁금해져서요. 독자 분들은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에 입각했을 때, 어떻게 생각하세요? 남부 원정대의 기조 유지를 위해 처형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너무 심하다. 한 번 정도 기회를 줬어야만 했다고 생각하시나요? 0603 / 0933 ---------------------------------------------- 되돌아온 천하무쌍(天下無雙), 그리고 뇌신(雷神). 늦은 밤. 후드득, 후드득! 아침만해도 어둑한 먹구름이 가득했던 하늘은 저녁을 넘어서야 빗줄기를 뿌리기 시작했다. 낮에는 공기 중 수증기가 가득 낀 탓에 습도가 최고조를 찍었지만, 이렇게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한껏 높아졌던 불쾌 지수도 서서히 가라앉는 중이었다. 비는 처음에 땅을 점점이 찍는 정도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빗발치듯이 쏟아지며 온 세상을 적셔가고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숲을 앞에 두고 있는 북 대륙 전초 기지 중앙에는, 주변의 다른 것들과는 달리 유난히 커다란 규모를 보이는 상앗빛 천막이 하나 있었다. 문득 떨어진 빗방울이 삼각형 모양의 지붕을 타고 흘러내리다가, 천막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 탓에 아주 짧은 스쳐 지나가는 정도의 시간에 불과했지만, 물방울 표면에 천막 내부의 광경이 언뜻 비쳤다. 새하얀 빛…. 탁자 하나…. 두 인영…. 탁! 그러다 어느 순간, 탁자에 놓인 수정구가 발하던 새하얀 빛이 미약한 노이즈 소리를 내며 한순간 꺼져버렸다. “통신이 끊어졌네요.” 딱딱 끊어지는 목소리.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말하며 수정구를 품으로 챙기는 여인은 바로 이효을이었다. “아무튼 얘기는 같이 들으셨을 거예요. 생각보다 조금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남부 원정대가 제 2차 공략을 마치고 요새 건설을 시작했다고 하네요.” 후욱, 후욱…. 말을 하는 와중 이효을의 이마가 살며시 찌푸려졌다.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거칠고 불쾌한 숨소리 때문은 아니었다. 천막에 들어온 이후, 아니 눈앞의 사내가 이 전초 기지에 도착한 이후 보여온 태도가 내내 거슬린 탓이다. 딱히 무례하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어지간해서는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앞서 거쳐 지나간 조성호나 한소영과 심도 깊은 토의를 나눴던 이효을로서는, 어느 정도 어색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후욱, 후욱…. 하지만 이효을은 직접적으로 자신의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았다. 선천적으로 간덩이가 작은 여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건드릴 상대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상대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맞은편에서 지긋이 팔짱을 낀 채 침묵을 지키고 있는 거구의 사내는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될 사용자였다. “…….” 밖에 쏟아지는 빗줄기를 아무렇게나 갖다 붙인 듯 치렁치렁하게 엉킨 머리카락과, 톡 건드리면 그대로 터질 것 같은 울퉁불퉁한 근육들. 질끈 감은 눈을 보고 있으면 흡사 기회를 노리고 웅크리고 있는 맹수를 보는 듯했다. 무엇보다 등에 맨 새까만 창에서 알듯 말듯 흘러나오는 불길한 기운은, 서로간의 미묘한 긴장감을 형성케 하는데 가장 큰 주범이었다. 김수현이 건드리면 좋은 꼴을 보지 못할 사용자라면, 이 사내는 건드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럼 이제 북 대륙 원정대도 제 3차 공략을 시작해야 하는데…. 언제쯤 진군하실 계획인가요? 총 사령관, 아니 사용자 공찬호?” 그렇게 생각한 이효을이 얼른 이 자리를 파하고자 말한 찰나였다. 후욱! 느닷없이 사내, 아니 공찬호가 거센 콧김을 내뿜으며 번쩍 눈을 떴다. 별생각 없이 마주한 순간 이효을은 온몸이 경직되는걸 느꼈다. 흡사 야생의 맹수와 같은 그 흉포한 눈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이윽고 공찬호의 입이 살짝 열리며 짐승이 낮게 우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금.” “…네?” “바로, 가도록 하지.” “사, 사용자….” 그러나 이효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찬호가 몸을 일으켰다. 거의 2미터에 다다르는 거한이 몸을 일으키자, 멍하니 고개를 젖히는 이효을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공찬호는 번뜩이는 눈으로 이효을을 지그시 낮추어 보았다. 그게 전부였다. 잠시 후, 미련 없이 등을 돌린 공찬호가 성큼성큼 천막 밖으로 걸어나갔다.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던 이효을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자, 잠시만요! 사용자 공찬호! 지금 날도 늦었고 밖에 비도 오는데! 무슨…!” 그러나 뒤늦게 몸을 일으켜 허겁지겁 공찬호를 따라나간 이효을은, 천막 밖으로 나간 순간 도로 망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사방에서 찔러 들어오는 날카롭기 짝이 없는 기세에,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도대체, 언제 온 걸까. 중앙 천막 밖으로는, 어느덧 물경 5천명은 넘어 보이는 사용자들이 가지런히 정렬한 상태였다. 추적추적 떨어지는 비를 맞으면서도,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한 모습은 자못 엄숙함을 넘어서 뜻 모를 웅장함 까지도 보이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이번에 북 대륙 전체 원정대 인원은 전투 사용자만 추산해서 약 15000명. 그러므로 각 원정대의 평균 전투 인원은 3000명 ~ 4000명 사이여야 정상이다. 그러할진대 지금 공찬호가 걸어 들어가는 북부 원정대는 전투 사용자만 5000명을 넘기는 상태. 과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윽고 공찬호가 중앙을 가로지르자, 사용자들이 자동으로 좌우로 갈라지며 하나하나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결국….” 이효을은 그런 사용자들을 말리지 못한 채, 그저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동부 원정대 1차 공략에 걸린 시일 10일. 남부 원정대 2차 공략에 걸린 시일 14일. 마침내 첫 공략을 개시하고 24일이 지난 후, 북부 원정대가 3차 공략을 시작하는 신호탄을 알렸다. * 후웅! 거대한 대검이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내며 휘둘러졌다. 촤악! 검 끝이 이희원의 목을 깔끔하게 훑는다. 이내 터져 나온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분리된 얼굴이 공중을 날았다. 마치 모든 것을 체념한 것만 같은 얼굴. 허공을 바라보는 안현의 낯이 새하얗게 질렸다. “처형, 끝났습니다.” 직접 처형을 실행한 연혜림이 살그머니 하품을 하며 보고한다. “이것으로 재판을 종료하겠어요.” 그리고 한소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것을 시작으로 신재룡과 헬레나도, 다른 구경하던 사용자들도 하나하나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바로 안현이 있는 쪽으로. “왜, 왜…?”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는데 안현이 의아함을 느낀 찰나였다. 짝! “안현.” 익숙한 박수에 이어 낮은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너, 왜 그런 선택을 내렸지?” 이윽고 옆을 돌아본 안현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느새 다가온 김수현이 자신을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비단 김수현만이 아닌, 모든 사용자가 안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안현은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채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김수현은, 사용자들은 안현의 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이 세상은 네가 살다 온 현대가 아니야. 홀 플레인이잖아. 그런데 왜 그래?” “너 도대체 몇 년 차니? 이제 갓 들어온 병아리야? 3년 차면서 똥 오줌도 못 가려? 분위기 파악 못해?” “혼자서만 착한 척하고 자빠졌네. 호구 같은 놈.” “뭐?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자고? 나 참, 정작 배신당한 당사자가 저런 말을 해? 이런 배알도 없는 자식!” 마치 이 재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하나 둘 비난을 쉴 새 없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안현은 속으로 절절하게 외쳤지만, 왜인지 모르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한껏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비난하는 사용자들만 번갈아 볼뿐. 결국 참다 못해 도로 김수현 쪽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안현은 흠칫 놀라고야 말았다. “!” 어느덧 얼굴을 바짝 붙여온 김수현이 자신을 정면에서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채 가슴을 추스르기도 전. “또, 구덩이 들어가고 싶어?” 김수현의 목소리가 속닥거리듯이 안현의 귓전을 울렸다. 그 순간이었다. “허억!” 눈을 번쩍 뜬 안현이 격한 신음을 흘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천막의 천장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소스라치게 놀란 눈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꿈이구나.” 안현이 조금은 진정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꿈이기는 했다. 그러나 꿈치고는 너무나 생생했거니와, 재판이 종료됐을 때부터 이어진 내용은 사실이 아니었기에 안현은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꼭 자신이 품고 있던 내면의 불안이 그대로 형상화된 것 같았으니까. 사실 재판 자체는 이미 2주 전에 끝난 일이기는 했지만, 그때 느꼈던 감정은 아직도 안현의 뇌리에 깊숙이 박힌 상태였다. 그 궁수 여인은 그 자리에서 처형당했다. 재판은 종료됐다. 그래. 그것으로 모두 끝난 거다. 간신히 생각을 정리한 안현은 억지로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 상태서 한참 동안 뒤척이다가, 결국에는 복잡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천막을 나섰다. 밖으로 나가자 때마침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안현이 흘린 식은땀을 식혀주었다. 이제 해가 뜨기 시작했는지 아직은 어스름한 새벽이었지만, 이제 곧 아침이 찾아올 것이다. 한동안 새벽 바람을 맞으며 아직 한창 건설 중인 요새를 돌아보니, 안현은 어느 순간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기분이 한결 나아진걸 느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경계를 제외하면 돌아다니는 사용자들이 보이지 않는다. 안현은 적당한 곳에 이르러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가지고 나온 창을 높이 들어올리고 자세를 잡았다. 아직 남아 있는 꺼림칙한 기분을 떨치려는 일환으로 수련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적어도 창을 움직이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안현이 무아지경에 빠져 수련하는 동안,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서서히 올라온 아침 해는 이제 서서히 모습을 갖춰가는 요새에 따뜻한 햇살을 늘어트렸고, 그러는 사이 한 명 두 명 일어난 이들이 천막 밖으로 나와 활동을 시작했다. 사용자는 식사를 준비하거나 안현과 같은 아침 수련을 했으며, 거주민은 삼삼오오 모여 오늘은 어떻게 요새를 건축할지 의논했다. 그렇게 고소한 냄새가 요새 전체를 물들일 무렵. “하아, 하아!” 수련을 시작한 이후 한 번도 쉬지 않던 안현이 비로소 창을 거두고 동작을 멈췄다. 마침내 아침 수련이 끝난 것이다. 숨을 거칠게도 헐떡였지만, 한결 개운해 보이는 얼굴을 한 안현은 적당한 그늘로 걸어 들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실컷 흘린 땀도 닦을 겸 손을 들어 이마를 닦으려는 찰나였다. “수련, 잘 봤어요. 비약적으로 성장하셨네요.” 얌전한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안현은 목 언저리에 차가운 감촉이 닿는걸 느껴야만 했다. 한순간 펄쩍 뛴 안현이었지만, 이내 뒤를 돌아본 순간 “어.” 자신도 모르게 얼떨떨한 탄성을 뱉고 말았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환한 미소를 보이는 차소림이 살짝 무릎을 굽힌 채 물방울이 잔뜩 맺힌 물병을 내밀고 있었다. “소, 소림이 누나?” “마셔요. 목마를 텐데.” 안현은 꾸벅 머리를 숙이고는 차분히 물병을 받아 들었다. 안에 얼음이 차 있었는지, 손에서 느껴지는 냉한 감촉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마침 굉장히 목이 말랐던 터라 안현은 허겁지겁 물을 마셨고, 차소림은 차분히 바닥을 고른 후 조신하게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 잠시 후, 단번에 병을 반 이상 비운 안현이 캬, 탄성을 지르며 이제야 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후, 좋구나.” “수련을 마친 후에는 기분이 정말 상쾌하죠.” “맞아요, 맞아요. …그런데, 소림 누나는 언제부터 보고 계셨던 거예요?” “중간 때부터요. 저도 수련이나 할까 하고 조금 일찍 나왔는데, 동생의 수련을 보고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지요.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창과 하나가 되었나요?” 창과 하나가 되었다. 이것은 신창합일을 이뤘냐는 말을 완곡히 돌려 표현한 것으로써, 창병들이 주로 사용하는 말이었다. 어차피 차소림에게 지도를 받은 적도 많거니와, 같은 클랜원인 만큼 안현은 주저하지 않고 머리를 끄덕였다. 차소림이 기특하다는 듯한 기색을 비췄다. “그렇군요. 왠지 요즘 들어 굉장히 수련 빈도가 잦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처음 그 능력을 익히면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자꾸 창을 잡고 움직이고 싶을 거예요. 물론, 좋은 현상이죠. 축하해요.” “에이, 뭘요. 그냥 머리가 복잡해서 움직인 것 뿐이에요. 헤헤….” 안현이 헤프게 웃으며 머리를 설레설레 젓는다. 차소림은 모은 무릎에 고개를 살짝 기대며 입을 열었다. “머리가 복잡하다…. 설마 2주 전의, 그 일 때문인가요?” 안현의 웃음이 멈췄다. “에…. 뭐….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네요. 그래도 딱히 상관은 없어요. 이미 지나간 일인데요. 끝난 일이기도 하고.” 그리고 약간 곤란해하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인다. 차소림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동생은 후회하고 있는 건가요? 그때의 결정을?” “음? 아니요. 그건 절대 아니에요. 오히려 처벌에 수긍했다면 지금 무척 후회하고 있겠죠?” 후회하냐는 물음에 안현은 딱 잘라 회답했다. 차소림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사실…. 그때 고민을 많이 하기는 했어요. 그냥 돌아가는 상황에 맞게 머리 한 번만 끄덕이면 되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렇죠. 또한 그게 사리에 맞는 일이기도 했고요. 아,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에요.” “바로 그게 싫었어요.” “…네?” 이번에는 차소림이 반문했다. 그리고 안현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차소림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왜냐하면, 저는 변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 작품 후기 ============================ 안현의 진실된 속마음! 절치부심 공찬호! 엉큼한 뇌신! 새침데기 김수현! 이 모든 게 다음 회에…!(퍽퍽!) 어흠, 어흐흠. 어제 코멘트가 폭발을 했네요.(우선 어제 안현 때문에 화가 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으셨다는 분께는 심심한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꾸벅!) 그럼 잠시 아줌마에 빙의 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안현은 제 아들로요. 로유진 : 아니! 우리 현이가 좀 안 죽인다고 할 수도 있지! 왜 우리 애 기를 죽이고 그래요? Reader : 죽어라! Reader : 매우 쳐라! 로유진 : GG. 는 농담이고요. 사실 이희원의 경우에는 처형이 맞기는 합니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자신의 생존만을 생각하고 도망쳤으니까요. 홀 플레인에서는 굉장히 예민하게 받아들여질 만한 문제죠. 하지만 그럼에도, 거의 모두가 Yes를 원하는 상황에서도 안현 홀로 No를 외친 이유는, 안현도 스스로 간직하고, 지키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최후의 마지노선이라고나 할까요.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회 초반 부분에'만' 언급될 예정입니다. 북부 원정대는 다음 회에 바로 도착합니다. 제대로 된 페이즈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파트당 2회씩 톡톡 끊어서 빠르게 나갈 생각이에요. :) 0604 / 0933 ---------------------------------------------- 되돌아온 천하무쌍(天下無雙), 그리고 뇌신(雷神). 변하는 게 싫다? 차소림이 고개를 갸웃했다. “동생. 변화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홀 플레인에서는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이죠.” 사용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야 하는 통과 의례. 차소림은 그 점을 꼬집어 말한 것이었으나, 안현은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렇죠. 사용자라면 응당 그래야겠죠. 하지만 누나. 있잖아요, 저는 이 세상이 정말로 싫어요.” “네?” “말 그대로 에요. 저는 지금껏 활동하면서 단 한순간도 지구를 잊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억지로 끌려와야 한 제가, 왜 이 세상에 100% 맞추고 적응해야 하는 거죠? 아무렇지도 않게, 아니 어쩔 때는 웃으면서 사람을 죽여야 하는….” “…어리군요.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 힐난하는 어조로 말한 차소림이 살짝 눈을 흘겼다. 기실 소환된 이상 누구나 동등한 입장이거니와,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즉 방금 안현의 말은 어리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알고는 있어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 정도는…. 하지만.” 안현이 조금은 풀이 꺾인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슴이 갑갑한지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차가운 한숨을 흘린다. “후. 누나. 혹시 그거 알아요?” “그거?” “우리 형이 처음 클랜을 창설할 때요. 이 머셔너리라는 클랜의 궁극적인 목적을 언급하셨거든요.” “클랜 로드님이…? 궁극적인 목적…?” 차소림이 의아한 낯으로 되물었다. “별거는 없어요. 그냥 집으로 돌아간다. 그 한 마디만 하셨죠.” “집으로 돌아간다고요?” “예. 집이요. 언젠가는 이 지긋지긋한 세상에서 벗어나,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으응.” 그때를 회상하는지 차분히 눈을 감은 안현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차소림은 침묵을 지켰다. 사실상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라는 바람은 사용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봄직한 생각이었다. 차소림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생은…. 정말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럼요. 지금은 무릴지라도 언젠가는,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천사도 이 세상의 끝을 보면 돌아갈 수 있다고 말했으니까요. 그러니 언젠가는 분명히 그 방법도 밝혀지지 않을까요?” “글쎄요….” “저는 그날이 오게 되면…. 아니, 그렇게 돌아가는 날이 오기까지 최소한의 마지노선은 지키고 싶어요.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을 수 있는, 돌아간 후 그냥 홀 플레인에 있을걸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지금의 안현이요.” 장황한 말을 마친 안현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얼굴로 차소림을 돌아보았다. 차소림은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다가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어리석네요.” 그리고 사뿐히 몸을 일으키고는 시선을 낮추어 안현을 응시했다. “하지만 순수해요. 동생은 꼭 회색 인간을 보는 것 같아요.” “회색 인간이요?” “네. 상황상 어쩔 수 없이 적당히 타협은 했지만, 흰색이나 검은색이 되기를 거부하는. 그런 회색 인간이요.” “…….” “개인적으로 동생의 생각은 존중할게요. 하지만 그 생각이 그만큼이나 위험하다는 것 또한 알아주셨으면 하네요.” “예. 그래서 힘을 키우려는 겁니다. 이번에도 제가 조금만 더 힘이 있었다면….” 안현이 얼른 말을 꺼냈다. 하지만 차소림은 좌우로 느릿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말하려는 건 그런 뜻이 아니에요. 선택의 비 일관성…. 즉 선택이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소리죠. …이해 못하시겠으면, 질문을 하나 해도 될까요?” 조곤조곤 말을 잇던 차소림은 도중에 안현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추가로 말을 덧붙였다. 안현은 바로 머리를 끄덕였다. “만에 하나, 이번 작전 중에 사용자 신재룡이 사망했다면….”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차소림이 곧 재차 말을 이었다. “아니면 비슷한 상황에서 사용자 안솔이 사망했다면. 그때도 동생은 똑같은 선택을 내리실 건가요?” 의미심장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안현은, 차소림의 말을 들은 순간 할 말을 잃은 듯한 기색을 보였다. 차소림이 정확히 정곡을 찌른 것이다. 안현이 가진 신념의 맹점을. 그렇게 서로간에 잠시간의 침묵이 내려앉았을 때였다. - 남부 원정대 전체에 알립니다. 갑자기 증폭된 음성이 요새 전체를 고요하게 울렸다. - 10분 전 북부 원정대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제 곧 도착할 예정이오니…. 문득 들려오는 알림에, 안현과 차소림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 마침내 북부 원정대가 도착했다. 점심 즈음 도착한 북부 원정대 사용자들은, 요새에 도착하자 절도 있는 행동을 보이며 마련된 천막으로 들어가 여독을 풀었다.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군기가 잘 잡혀 보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새로운 원정대가 도착하게 되면, 우선 해당 원정대의 지휘관들을 초청해 그간의 자료를 넘겨주고 과정을 설명하는 게 정석이다. 설령 앞서 모든 자료를 보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즉 공식적인 인수인계의 절차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려면 필연적으로 한 자리에서 얼굴을 맞대야만 한다. 그러나. 한소영의 요청으로 인수인계 자리에 참석하고, 이후 한 명 한 명 들어오는 북부 원정대 지휘관들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나는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공찬호를 따라 들어온 또 한 명의 사내를 확인한 순간, 내 눈을 의심하고야 말았다. 왜냐하면 탁자 건너편에서 싱글벙글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사내는, 다름 아닌 내 형이었으니까. 김유현. 해밀 로드. 서부 도시 헤일로를 통치하며, 이번에 편성된 제 4전력 원정대를 이끄는 총 사령관. 그런데 공찬호와 같이 왔다는 건…. 이건 나도 예상치 못했고, 또한 모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모르고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 사실상 서부 원정대는 공식 공략 원정대가 아닌 지원 격으로 편성된 원정대였고, 그렇게 생각하면(물론 백 번 양보해서.) 이런 상황이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껏 아무런 연락도 없다가, 아니 북부 원정대만 온다고 하다가 느닷없이 서부 원정대가 같이 왔다? 아무리 각 원정대가 서로 독립된 성격을 갖고 있다고는 해도, 이건 남부 원정대 입장에서는 당황스럽게 받아들일 만한 일이잖은가. 통신용 수정구가 뻘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럼 이야기에 들어가기 앞서…. 이유를 들어도 될까요? 서로 다른 원정대를 이끌고 계신 두 분이, 왜 북부 원정대라는 이름 하에 같이 계신 건지요.” 그때 한소영의 목소리가 귓전을 자그맣게 울렸다. 나는 바로 잡생각을 떨쳐버렸다. 그래, 우선은 들어보자. 들어보면 알겠지. “…….” 그러나 회답이 나오지 않는다. 총 사령관인 한소영이 물었다면, 응당 같은 총 사령관인 공찬호가 회답해야 정상이다. 그러할진대 공찬호는 아까부터 계속해서 나만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것도 바로 정면에서. 잠깐 시선을 돌려 눈을 마주하자 씩 이를 드러내며 웃기까지 한다. “흐, 드디어 나를 봐주는군. 머셔너리 로드.” 그렇게 생각할 무렵, 비로소 공찬호가 입을 열었다. 꽤나 거친, 흡사 쇳소리가 연상될 정도의 목소리였다. “흐흐. 아주 오랜만이야…. 나는 무척 반갑거든. 그런데, 머셔너리 로드는 심기가 꽤나 불편해 보여.” “…….” “설마 해밀 로드 때문인가? 네가 사랑하는 형이 나와 같이 있어서? 흐흐흐…!” “…뭐?” 나는 순간 어이없는 기분에 반문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눈에 힘이 들어가는걸 느꼈다. 한소영이 물었음에도 무시하고 내게 말을 걸었다는 건, 상당히 커다란 실례였다. 다행히 표정 관리가 뛰어난 한소영은 겉으로 내비치지는 않았지만, 이미 같이 들어온 남부 원정대 지휘관 중 몇 명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물론, 나 또한 그랬고.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때 좀 덜 맞았나 보군. 아직도 헛소리를 찍찍 뱉는걸 보니까 말이야.” 그러자 돌연히, 꼭 짐승이 우는 것만 같던 낮은 웃음 소리가 뚝 그쳤다. “하기야, 네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야. 이래봬도 나는 상당히 상대방의 외관을 따지거든.” 하지만 여기서 그칠 생각은 추호도 없어 천연덕스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화정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갑자기 공찬호 특유의 수라마창의 기운이 서서히 강해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뭐?”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너는 내 취향이 아니올시다, 라는 뜻이야.” “흐?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어라, 기억 안 나는 거야? 나는 확실히 기억하는데. 예전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나한테 걷어차이고 나서, 가지마, 김수현 제발 가지마! 애절하게 나를 원하던, 네 구걸 어린 애원이….” 그때, 갑작스럽게 보이지 않는 불길한 기운이 나를 향해 짓쳐 들어왔다. 딱히 확인하지 않아도 수라마창의 기운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찰나의 순간, 속으로 코웃음이 나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기세 싸움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화륵, 화르륵! 어차피 미리미리 준비하고 있던 터라, 나는 곧바로 화정의 기운을 끌어 올려 맞대응 했다. 물론 공찬호 개인에게 집중해서. “큭!” 쿠당탕탕! 그 결과, 공찬호가 격한 외마디 신음을 흘리며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머셔너리 로드!” “수현아!” 한소영과 형이, 거의 동시에 나를 불렀다. “머, 머셔너리 로드….” 한소영은 흡사 팔짱을 끼듯 내 팔을 살며시 감싸 안으며 간곡해 보이는 눈초리를 보내왔다. 괜찮으니까, 이러지 말라는 의미. 하지만 아까 얼굴을 굳혔던 남부 원정대 지휘관들은 나를 보며 속 시원하다는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형은 얼굴을 살짝 붉힌 채, 무언가 굉장히 곤란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아니, 형은 또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건데. 방금 말은 진심이 아니었어. 그러니까 그렇게 보지 말라고. 오해하잖아. “크흐…. 짜릿한데?” 그때였다. “여전하군…. 역시 대단해. 그래, 바로 이거지. 아주 좋아…!” 주변 사용자들이 놀란 가운데, 주섬주섬 몸을 일으킨 공찬호가 컬컬 웃어 젖혔다. 정말 무척이나 만족스럽다는 태도였다. 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예전처럼 한 방 먹었다고 산불 난 멧돼지처럼 달려드는 게 아니라, 웃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될걸 알면서도 덤볐다는 소린가? 왜? “사용자 공찬호. 지금 굉장히 무례해 보이니, 진정하시길.” 잠시 후, 형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도로 앉는 공찬호를 보며 말했다. 그러자 공찬호가 흘긋 형을 흘겨본다. “지금, 나한테 명령하는 건가?” “그렇다면?” 공찬호가 위협하는 어조로 으르렁거렸으나, 형 또한 지지 않았다. 삽시간에 낯을 굳히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맞받아쳤다. 그래, 저 모습이야. 나 볼 때도 저렇게 좀 봤으면 좋겠고만. 그렇게 한동안 기 싸움이 이어졌지만, 결국 먼저 물러난 건 공찬호였다. 문득 픽 입꼬리를 올리더니 마음대로 하라는 양 어깨를 들먹인 것이다. 그리고 도로 나에게 시선을 돌리며 또다시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병신인가? 이윽고 잠깐 한숨을 내쉰 형이 입을 열었다. “우선 앞서 일어난 소동은 제가 대신해서 사과 드리겠습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괜찮아요. 저희 쪽도 아주 살짝 과잉 대응했다는 건 인정하니까요. 하지만, 사과는 하지 않겠어요.” 형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자 한소영이 고개를 까닥이며 회답했다. 이대로 넘어가겠다는 소리였다. …마치 얼음과 얼음이 맞부딪치는 것 같은데. 아무튼, 이제야 뭔가 좀 이야기가 나오는 건가? “예, 당연하죠. 그럼 사용자 공찬호를 대신해 제가 대신 말씀을 드려도 괜찮으실는지요?” “…저야 상관은 없는데. 오히려 그쪽 분들이야말로 괜찮나요?” 한소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공찬호로 고개를 돌렸다. 왜냐하면 총 사령관이 공찬호였으니까. “…….” 그러나 공찬호는 계속해서, 아직도 나만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중이었다. “…….” 참…. 겉으로 표현은 못하겠지만, 정말 미친 듯이 부담스럽다. 갑자기 왜 저러는지도 모르겠고. 결국 아예 신경을 끊는 게 나을 것 같아, 나는 다시금 형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괜찮습니다. 애당초 이런 부분, 아니 실제 공략에 관한 모든 권한은 제가 가지고 있으니까요.” “…네?” 이윽고 한소영의 반문한 찰나. “거두절미하고 말씀 드리면…. 우리 서부와 북부는, 이번 제 3공략에 들어가기 앞서….” 형의 목소리가 곧바로 이어졌다. “강철 산맥 공략 한정, 서북 동맹을 맺기로 결정했습니다.” …뭐라고? ============================ 작품 후기 ============================ 다음 회부터 본격적인 제 3지역 공략에 들어갑니다. 사실상 '강철 산맥' 내에서는 마지막 지역 공략으로 보셔도 무방합니다. 조금 신기한 게 있다면, 이런 상황을 예견한 독자 분이 한 분 계셨다는 겁니다. 제가 '동서남부는 독립된 원정대를 운영한다.'는 연막을 쳐놨음에도, '상황상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무엇보다 '전쟁 후, 각 북 대륙 내 상황'과 '분열'에 초점을 맞추셨을 때는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마치 제 머릿속을 열어보신 것 같다는 느낌이랄까요? 하하하. 잘 생각해보시면 지금 상당히 얌체 짓을 하고 있는 원정대가 하나 있다는 걸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 독자 분들이 궁금해하시는 것들은 알고 있습니다. 다음 회에 차근차근 풀어드릴 예정이니,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0605 / 0933 ---------------------------------------------- 커다란 줄기는 변하지 않는다. …않을까? “잠시만요.” 그때였다. 의아한 기분이 채 가시지도 않은 찰나, 한소영이 재빠르게 형의 말을 제지했다. 한소영의 낯은 마치 얼음처럼 딱딱히 굳어있었다. 그 태도를 보고 나서야 나는 왜 도중에 말을 끊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서북 동맹. 서부와 북부와 동맹을 맺었다. 처음에는 한창 공략하는 와중 무슨 동맹이냐는, 뜬금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걸 떠나서라도, 동맹이라는 말이 갖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무엇보다 지금, 듣는 귀가 많다. 만일 열에 하나 이에 관한 자세한 사항이 어떤 식으로든 밖으로 유출된다면, 차후 결코 좋은 영향을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다. 소문은 와전되는 법이니까 말이다. “방금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역시나.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 한소영이 바로 일대일 대화를 요청했다. 형은 상관없다는 양 머리를 끄덕여 수긍했고, 결국 나를 비롯한 다른 사용자들은 하릴없이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사실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은 공사를 구분해야 할 자리였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오늘 이 천막에서 들은 이야기는 철저하게 비밀을 엄수하셔야 할 거예요. 그 어떤 이야기라도요.” 한소영은 '그 어떤' 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경고를 잊지 않았다. 나는 천막을 나서기 전 형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 한소영과 이야기가 끝나면 내가 머무는 천막으로 와달라는 신호였다. 형은 환한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 형이 천막으로 찾아온 건, 점심은커녕 저녁 시간도 훌쩍 넘겼을 때였다. “아, 수현아~. 형 힘들어 죽겠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정말로 깐깐한…. 어, 어? 수현아?” 형은 들어오자마자 힘껏 기지개를 피며 앓는 소리를 내었지만, 나는 곧장 어깨를 부여잡고 강제로 의자에 앉혔다. 형이 한껏 당황한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기다리느라 지쳐 죽는 줄 알았어. 자, 이제 말해. 어서 말해봐.” 채근하듯이 말하자 형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한없이 불쌍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사랑하는 동생아. 형 조금만 쉬면 안될까? 조금 전까지 이스탄텔 로우 로드한테 죽을 만큼 시달렸다고.” “알았으니까 말해. 말하면서 쉬면 되겠네.” “제발…. 같은 말을 두 번이나 해야 하는 내 입장도 생각해주려무나.” “그래서 말 안 하겠다고? 정말로 안 할 거야?” 나는 형을 한껏 노려보며 말했다. 이 다음에 준비된 말은 '그래. 그러면 마음대로 해.'였다. 어조는 매우 뾰족하게. 그런 낌새를 느꼈는지 형은 체념한 얼굴로 머리를 떨구었다. 그리고 간이 탁자에 비치된 음료를 들어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폭 한숨을 내쉰다. “쩝….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야 어쩔 수 없지. 그래, 무에 그렇게 궁금한데?” “당연히 전부 다 궁금하지. 도대체 우리가 공략하는 동안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이효을 걔는 또 뭐했고?” “아차, 그러고 보니 이효을이 전해달라고 하더라. 내 탓 아니니까 내 욕하지 마! 라고.” “…….” …왠지 머릿속에서 이효을의 음성이 자동 재생되는 것 같아,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윽고 한 차례 쓰게 웃은 형은, 천천히 턱을 어루만지며 끄덕끄덕 머리를 주억였다. “뭐, 좋아. 어쨌든 너한테는 따로 얘기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어.” “조건? 입 조심하라는 거?” “아니.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이르든 늦든 밝혀질 일일 테니까. 그냥 내가 말하는 도중에 툭툭 끼어들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누구처럼 말이야.” “…응?” 뭔가 상당히 이색적인 조건이라는 생각에 나는 서너 번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형은 계속해서 턱을 매만지다가(하도 말을 많이 해서 그런지 턱이 아픈 모양이다.), 돌연 질렸다는 얼굴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갑자기 형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심했어?” “어. 매우, 굉장히 심했어. 두세 문장 말할 때마다 꼬치꼬치 캐묻는데…. 무슨 말을 못할 정도야. 그 사람 원래 그런 성격이니?” 형은 강조에 강조를 거듭했다. 그러다 문득 내 눈치를 살피더니 한두 번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흐흠. 아무튼…. 그거 하나만 약속해주면 지금 바로 말해주도록 하마. 네가 원하는 대로 처음부터, 전부 다 말이야.” 말인즉 가만히 듣기만 하라는 소린데…. 궁금한 게 생기면 끝나고 몰아서 질문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중간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구두로 약속했고, 형은 그제야 그간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형의 말을 경청했다. 이야기의 첫 시작은, 북 대륙의 구조에 관한 원론적인 내용이었다. 북 대륙은 총 5개의 부(部)로 구분할 수 있다. 중앙, 동부, 서부, 남부, 북부. 그리고 3년 전, 그러니까 내가 갓 2회 차를 시작했을 때. 그때는 중앙의 황금 사자 클랜을 기준으로 서부와 북부가 우호 관계를 맺은 상태였고, 그들과 갈등 관계에 있던 동부와 남부 또한 서로간 암묵적인 우호 관계를 형성했다…. 아니, 잠시만. “형. 이거 나도 아는….” “약속했지?” …젠장. 아무튼, 그러던 어느 날. 서로 미묘한, 아니 공공연하게 드러내며 갈등하던 북 대륙에 커다란 지각 변동이 일으킬만한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1차 강철 산맥 공략이었다. 1차 강철 산맥 공략을 주도한 황금 사자는, 자신들과 우호 관계에 있던 서부와 북부를 위주로 원정대를 편성했다. 편성 과정에서 동부와 남부는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그러나 공략은 실패라는 말이 부족하다 생각될 정도로 처참하게 끝나버리고야 말았다. 10강 중 7명이 참가했으며, 결과적으로 전원이 사망했다. 처음 출발할 때의 원정대 규모는 5000명을 웃도는 수준이었으나, 생환한 이는 10%도 되지 않았다. 북 대륙의 실 전력을 담당하던 4700명의 정예 사용자들이(2년 차 ~ 6년 차), 단 한 번의 공략에 떼 몰살을 당한 것이다. 심지어는 클랜 자체가 아예 깡그리 몰살당한 사례도 있었다. 그 당시 피해는, '북 대륙 수준이 몇 년은 퇴보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가히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고는 해도, 남은 이들은 고스란히 후 폭풍을 맞아야만 했다. 각 부를 주름잡던 클랜들이 버티지 못하고 하나하나 무너지는 것을 기점으로, 힘의 저울추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강철 산맥 공략 전후로, 중앙, 서부, 북부와 동부, 남부의 입장이 반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허나,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 서 대륙과 부랑자들로 이루어진 대규모 연합군이 북 대륙을 침공해온 것이다. 북부 소 도시 뮬이 기습당한 것을 시작으로, 헤일로, 베스, 도로시 등의 서부 도시들이 깡그리 점령당했다. 종래에는 바바라까지 함락당하는 치욕까지 겪어야만 했다. 말 그대로 설상가상, 엎친 데 덮친 격. 결국 간신히 격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북 대륙은 또다시 의도치 않은 희생을 치르고야 말았다. 이 사건으로 서부와 북부가 더욱 힘들어진 건 자명한 일이었다. 안 그래도 휘청휘청하던 와중이었는데, 아예 도시가 박살 날 정도의 타격을 추가로 입어버렸으니까. 그나마 전 도시가 멸망한 서부보다는, 한 도시만 멸망한 북부가 양반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동부 또한 바바라를 탈환하는데 만만찮은 희생을 치르기는 했지만, 앞선 두 부와는 상황이 다르다. 적어도 자신들의 기반은 건재한 상태였다. 또한 서 대륙의 주력을 격파했다는 명성과, 북 대륙의 상징인 바바라를 되찾았다는, 사용자들에게 어필 가능한 상징성을 획득한 것도 무시할 수 없다. 남부는 애당초 거의 비다시피 한 서부 도시를 되찾는 역할을 맡았으니 피해가 거의 없는 편이었고. 그렇게 각 부의 상황이 각양각색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추가로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중앙 관리 기구가 출범한 이후, 이효을은 근 2년 동안 딱 하나에 초점을 맞췄다. 그동안 북 대륙에 누적된 피해를 치료하고, 퇴보한 수준을 예전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으로. 거두절미하고 말해서, 계획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었다. 전쟁 이후 신규 사용자들이 폭증하는 베이비 붐(Baby Boom) 사태가 일어났고, 중앙 관리 기구의 지원 아래 복구 작업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새로운 강자들 또한 속속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순환 과정은 그간 북 대륙이 입었던 상처를 자연스럽게 치료해주었고, 어느 순간 예전 이상의 전력을 갖추게 만들어주었다. 그렇지마는. 좋게 보면, 딱 거기까지였다. 북 대륙 전체를 놓고 봤을 때는 확실히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가 아닌, 부를 구분해서 생각해보면 문제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다름 아닌, 각 부가 가진 힘의 균형이 문제였다. 정말 냉정하게 본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아무리 이효을이 중앙 관리 기구를 합리적으로 운영하려 애썼다고 해도, 각 부가 시작하는 출발선이 다른 이상 '차이'는 날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서부와 북부가 도시를 재건하고 새로운 사용자들이 자리잡게 만드는데 2년이라는 시간을 쏟았다면, 동부와 남부는 원래 가지고 있던 힘을 불리는데 사용했으니까. 그러면, 만약 몇 년이라는 시간을 더 주었다면, 언젠가는 서부와 북부도 예전의 성세를 되찾을 수 있었을까? 아니, 그건 아니었다. 도시가 발전을 하려면 사냥을 통한 안정화나 유적 발굴 등, 실적을 쌓을 수 있는 자원을 필수적으로 필요로 한다. 그러나 북 대륙이 가지고 있는 자원은 절대로 무한정하지 않다. 엄연히 일정한 한도나 한계가 있으며, 자원이 떨어진 도시는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법이다.(이 말을 들을 때 조금 뜨끔하기는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 대륙이 그와 비슷한 상태였다. 사용자들은 시시각각 늘어만 가는데, 자원은 말라가는 상황. 그렇게 일종의 포화 상태에 다다른 이상, 아무리 시간을 할애해봤자 도시는 발전하지 않는다. 잘해봤자 현상 유지, 아니면 고착화 현상만 심해질 뿐. 결국 거기서 남은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새로운 대륙을 개척하는 것. 그래서 이효을이 적절한 시기를 조절해 2차 강철 산맥 공략 계획을 선포한 것이다. 사용자가, 클랜이, 아니 북 대륙이 오매불망 기다려온 강철 산맥 공략. 그러나 기다려왔다고 해서, 누구나 다 참가할 수 있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중앙 관리 기구는 강철 산맥 공략 참가 자격으로 3가지 조건을 걸었다. 1. 0, 1년 차는 참가 불가. 2. 클랜 단위로 선발. 3. 동, 서, 남, 북 지역별 원정대 창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이미 1차 공략 때 실행된 조건이었고, 그때의 실패를 거울삼아 새로 보완한 조건이 바로 세 번째였다. 사실 선발이 거의 확정된 소수의 대형 클랜들을 제외하고, 다른 소형 중형 클랜들은 미리미리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강철 산맥을 공략하겠다는 사안은 이미 몇 달 전부터 공공연한 비밀이나 다름없었고, 그에 따라 참가를 원하는 클랜은 일찌감치 문을 활짝 열어 사용자들을 모으는 중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클랜 단위로 선발하겠다고는 했지만, 그게 모든 클랜이 선발된다는 소리는 아니었기 때문에. 바로 여기서, 클랜과 사용자간의 관계가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강철 산맥 공략 참가를 원하는 사용자들 또한 적지 않았고, 참가하려면 클랜에 소속된 상태여야만 한다. 마침 기를 쓰고 사용자들을 모으려는 클랜이 부지기수로 생겨났으니, 사용자 입장에서는 나름 가능성 높겠다 싶은 곳에 응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용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강철 산맥 공략에 참가하고는 싶지만, 그보다 우선시하는 건 자기 자신의 안전. 즉 목숨이다. 공략 성공 시 주어지는 장밋빛 미래는, 응당 살아있어야만 주어지는 특권이다.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강철 산맥의 악명은, 그 지독하다는 용이 잠든 산맥조차도 몇 수는 접고 들어갈 정도였다. 황금 사자가 주도했던, 그 당시 나름 정예들만 모인 1차 원정대가 어떤 결과를 맞이했는가? 강철 산맥 공략에 참가하고 싶다. 그러나 내 목숨은 소중하다. 이 두 명제를 놓고 저울질하던 사용자는 과연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간단하다. 포기가 아닌 참가를 결정한 이상, 가장 자신의 안전을 잘 지켜줄 수 있는 클랜을 찾아 1차적으로 문을 두드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클랜들은 서부와 북부가 아닌, 동부와 남부에 집중적으로 분포해있는 상태였고. 바로 이 시점부터. 그러니까 차후 3번째 조건을 공개했을 때부터, 북부의 상황이 상당히 애매해지기 시작했다. “사용자들이 클랜을 평가할 때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지.” 오랫동안 이야기를 해서 그런 걸까. 잠시 말을 멈춘 형은 남은 음료를 전부 들이킨다. 그리고 바로 말을 잇는다. “어느 유명한 사용자가 있는지, 자금력 및 지원은 어떤지, 실적은 어느 정도인지, 클랜 랭크가 어떻게 되는지 등등….” 그 모든 기준을 아울러 '명성'이라고 정의해보면, 북부로서는 사용자들의 발길을 끌어당길 만한 명성 높은 클랜이 전무한 상태였다. 확실히 형의 말대로였다. 동부에는 고려 클랜을 비롯한 여러 전통 있는 클랜들이 산재해있다. 전쟁에서 획득한 명성과 상징성을 십분 활용해 사용자들을 꾸준히 모집했고, 이후 고려 클랜은 암묵적으로 동부의 패자로 떠올랐다. 남부 또한 만만찮다. 앞서 형이 열거한 여러 사건을 겪는 동안, 가장 전력을 잘 보존한 지역이 바로 남부였다. 꾸준히 세를 확장하며 동부와 마찬가지로 힘을 불렸고, 그러한 과정에서 이스탄텔 로우라는 클랜이(내가 약간 도와준 것도 있지만.)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뿐일까? 우리 머셔너리 클랜 또한 온갖 유적을 쓸어 담으며 클랜 역사상 최초로 S랭크를 달성했고, 난공불락이라 여기던 용이 잠든 산맥까지 보란 듯이 공략했다. “하지만 북부는?” 갑작스러운 형의 질문에 나는 침묵을 지켰다. 왜냐하면 북부에서 딱히 내세울만한 게 생각나지 않았으니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형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말한 대로, 북부는 꽤나 애매모호한 상황에 처하고야 말았다. 차라리 서부처럼 애당초 전력 외 판정을 받으면 속이라도 시원할까. 그러나 서부처럼 모조리, 쫄딱 망한 수준 까지는 아니었던 터라, 상대적으로 빠르게 회복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수준이다. 오랜 전통을 가진 동부처럼, 두터운 사용자층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었다. 남부처럼 실적을 우후죽순으로 쌓거나, 10강의 태반이 소속돼있는 화려한 명성을 날리는 클랜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전쟁 이후 새로 부임한 대표 클랜들은 실적도 없고, 명성도 없다. 그저 현상을 유지하는 데만 급급했을 뿐. 예전에는 북부에도 북녘, 스텔라, 멸화랑 등, 명망 높은 클랜들이 다수 포진해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영광에 불과하며, 지금은 사그라진 기억의 잔재일 뿐이다. 설령 어찌어찌 북부 원정대를 구성한다고 하더라도, 3년 전 1차 원정대보다 수준이 나을 거라는 보장이 없을 정도였다. 어쨌든 수요는 충분한 만큼 외부 사용자 영입을 통해 수준을 높이려는 움직임을 꾀했을 수도 있지만, 이미 동부와 남부에서 한 번씩 거르고 남은 이들임을 감안한다면 큰 상승폭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한 마디로 북부는 서부보다는 낫지만 동부나 남부보다는 떨어지는, 딱 원정대를 구성할만한 커트라인에 있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아예 참가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쉽다는 감정은 둘째치고서 라도, 서부처럼 합당한 명분이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기서 물러나버리면, 차후 북부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발전 가능성이 사라진 지역에 사용자들이 남아 있을 이유는 없으니까. 그렇게 북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커다란 딜레마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대표 클랜을 딱지 치기로 얻은 게 아니라면, 아마 북부를 관리하는 사용자들도 이런 상황은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억지 춘향 격이라고는 해도, 자멸할 생각이 없다면 참가는 필수적인 일. 그리하여 참가를 결정하기는 했지만, 필연적으로 총 사령관 자리에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형이 공찬호에게 들은 바로는, 북부는 총 사령관의 자리를 두고 매우 심한 갑론을박을 벌였다고 한다. 서로 하겠다고 가 아닌, 서로 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원래는 일반 도시 대표 클랜이 맡는 게 정석이지만, 꼭 그래야만 한다는 법은 없다. 남부 원정대만 봐도 그렇다. 칸의 대표 클랜인 푸른 늑대가 스스로 후미에 서기를 자청하고, 이스탄텔 로우에 권한을 이양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남부와 북부 사이 커다란 차이점이 하나 있다면, 현재 처한 상황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 한소영은 자타가 인정하는 사용자였고 그만한 명성도 있었다. 푸른 늑대가 물러난다고 하더라도, 이스탄텔 로우라는 훌륭한 후임자가 있다. 그러나 북부는 애당초 한소영 정도의 사용자가 없거니와(나는 여기서 또 뜨끔해야만 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북부에 적잖은 영향력을 끼칠 너도밤나무 클랜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누구도 맡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총 사령관이라는 직책은 그만큼 막중한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 자리였으니까. 공략만 성공하면 그 누구보다 달콤한 과실을 맛볼 수 있는 자리이기는 했지만, 실패 시 그만한 반대급부도 각오해야 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이게 바로 공찬호가 총 사령관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공찬호는 어느 정도 명성이 있기는 했지만, 총 사령관을 맡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표 클랜들이 '나는 총 사령관 싫다.', 다른 클랜들도 '나도 총 사령관 싫다.'고 하는데 별수가 있겠는가? 순번이 돌아가는 족족 거절당한 탓에, 우선 순위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던 공찬호한테도 제의가 들어간 것이다. 솔직히 공찬호가 무슨 생각으로 총 사령관 제안을 덥석 수락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탁 까놓고 말해서, 현재 '총 사령관' 공찬호는 얼굴 마담, 혹은 버릴 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겨우겨우 총 사령관이 정해졌을 무렵. 그 시점에서 하나의 변수가 추가로 생겼다. 바로 사용자 주호의 입안으로 계획된, 화계 공략 안건이 발표된 것이다. 화계 공략 계획. 그 계획은 딜레마에 빠진 북부 원정대를 구원해줄 수 있는 최고의 변수였다. 이유야 간단했다. 적어도 화계 공략 계획이 시행된 지역은 한층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을 테니까. 상대적으로 수준이 달리는 북부 원정대로서는 동아줄 같은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획 발표 후 이어진 동부의 움직임은 북부의 기대를 곧장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조성호가 동부 원정대가 제 1전력이라는 명분을 들어, 첫 번째로 돌입할 기회를 냉큼 빼앗아 가버린 것이다. 북부로서는 어이가 가출할만한 상황이었다. 동부와 북부의 원정대 수준은 누가 봐도 명백한 차이가 있다. 물론 누가 꼭 첫 번째로 가야 한다는 법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북부는 도의상 자신들이 첫 번째로 돌입하기를 원했다. 그러할진대, 동부는 스스로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얌체 같은 행동을 보였다. 차라리 동부가 화계 공략이 시행된 거리를 포함시키지 않고 그만큼 추가로 진군했다면, 그랬다면 최소한 이해라도 했을 것이다. 적어도 서로 동등하게 최선을 다하자는 입장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을 테니까. 하지만 동부는 그러지 않았다. 처음 돌입 때부터 거리를 계산해 10일만에, 정확히는 7일치 거리에서 진군을 멈추고 공략을 완료했다는 보고를 보냈다. 그 과정에서 어떠한 피해도 습격도 입지 않았다. 기실 똑같이 하려고 했던 북부 입장에서도 할 말은 없지만, 그래서 더욱 속이 터질 것이다. 하기야 나도 동부를 곱게 생각하지는 않는데, 북부 입장에서는 오죽할까. “…….” 문득, 어쩌면 한소영이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 남부 원정대의 실제 진군 거리는 동부 원정대와 비슷하지만, 시일은 4일이 추가로 걸렸다. 그런데 나중에 듣기로는, 한소영은 공략 완료를 보고할 때 꽤나 상세한 자료를 덧붙였다고 한다. 그동안 모은 사체나, 괴물들의 특성. 심지어 구덩이 속 전투를 영상으로 찍어 보여주기까지. 그때는 그냥저냥 참 열심히 하시는구나 생각했는데, 지금 말을 들어보니 아마 서로간의 오해를 피하려고 그러셨던 게 아닐까. “아무튼 그 상황에서…. 서부와 북부. 이 두 지역이 서로의 이해 관계가 일치한 거지. 그래서 서북 동맹이 탄생한 거고.” 이야기를 하느라 지쳤는지 형이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 서북 동맹. 이제야 그 의미가 확연히 다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해 관계의 일치. 확실히 형의 말대로였다. 서부와 손을 잡는다는 선택은, 공략 강행이 결정된 이상 북부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막강한 전력으로 평가 받는 해밀 클랜. 또한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지휘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형의 존재는 북부 입장에서 가뭄의 단비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공략을 도와준다면, 차후 누릴 수 있는 특권을 공유해주겠다는 매력적인 제안을 건넨 것이다. 서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지금까지 강철 산맥 공략은 성공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애초 정식 공략에 끼지 못한 채, 가만히 구경만 하는 서부는 나름대로 아쉬운 감정이 없잖아 있었을 터. 어차피 지원 임무도 맡았겠다, 명분상으로 문제될 것은 없다. 한편으로는 이대로 콩고물이 떨어지는걸 기다리기보다는, 설령 절반에 불과할지라도 떡 그 자체를 먹고 싶었을 것이다. 거기서 북부가 총 사령관은 공찬호로 둔 채 지휘 권한까지 일체 넘겨주겠다고 하니, 형으로서는 더 이상 거부할 이유는 없었을 테고. “후. 이로써 어느 정도 이야기는 마쳤는데….” 이내 상당히 지쳐 보이는 얼굴로 침대에 멋들어지게 드러눕는 형을 보며, 나는 가만히 상념에 잠겼다. 확실히 서북 동맹의 의미도 이해했고, 그럴만한 상황이라는 것도 이해했다. 그냥 복잡한 이해 관계가 얼기설기 얽혀있을 뿐,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제 궁금증 좀 풀렸어?” …그리고 무엇보다, 돌연 형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주 예전에. '수현아. 너 정말 서부로 올 생각 없니?' 형은 나보고 서부로 와달라고 반 장난 식으로 부탁을 한 적이 있다. 그때는 그 말을 흘려 들었다. 그저 나를 안전이 보장된 원정대에 넣으려는 의도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형 또한 한 명의 사용자로써 직접 강철 산맥을 공략하고 싶어했고, 그래서 머셔너리 클랜의 도움을 필요로 한 것이었으리라. ============================ 작품 후기 ============================ 이전 회의 해답편입니다. 나름 독자 분들의 이해를 도우려 상세한 설명을 곁들이려 노력했는데, 너무 힘이 들어가지 않았나 걱정이네요. 그래도 최대한 노력했으니 너무 갑갑하다 여기지 마시고 어여삐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용을 읽고 궁금하시거나 의문점이 생기신다면, 그리고 꼭 답변을 듣고 싶으시다면 쪽지를 보내주세요. 주말을 이용해 밀린 쪽지를 전부 답신할 예정이니, 성심껏 답신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어떻게든 자정에 올리려고 했는데, 퇴고 중에 깜빡 졸았네요. 코멘트는 내일 아침에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0606 / 0933 ---------------------------------------------- 커다란 줄기는 변하지 않는다. …않을까?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큰일이다.” 잠시 후. 침대에 드러누웠던 형이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키며 말했다. “큰일?” “응. 갑자기 탐험의 법칙이 떠올라서. 너도 무슨 말인지는 알고 있지?” 탐험의 법칙. 당연히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숲을 탐험한다고 가정해보면,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초입보다 강한 괴물이 나온다는 상황을 빗댄 말이다. 물론 그 법칙이 100% 들어맞는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경험에 비추어보면 보스 괴물은 거의 마지막에 출현하는 경우가 잦다. 따라서 아주 틀린 말이라고 보기는…. 아니, 잠깐만. “사실 너희 공략 자료를 보면 살짝 걱정이 들기도 해. 지금 이 지역에서 그 정도의 괴물이 나왔다면, 다음 지역에서는 도대체 얼마나 강한 괴물이 나올지….”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모호하던 정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나는 3지역에 어떤 괴물들이 주로 출몰하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형은 근시일 내 서북 동맹을 이끌고 3지역으로 들어가야 한다. 말인즉, 형이 사지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현실이 갑작스럽게 다가온 것이다. “그럼…. 온다고 미리 말을 하던가!” 물밀듯 차오르는 불안감을 이기지 못해,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최소한 사나흘 전에 알기라도 했다면 생각할 시간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하하하.” 그러나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형은 태연자약하기만 했다. 오히려 속 편하게 웃더니 살며시 몸을 일으켜 다가온다. “너무 화내지는 마. 동맹 소식을 전하지 않은 건 내 의지가 아니니까.” “뭐라고? 그럼….” “서북 동맹…. 아니. 정확히 말하면 북부의 의지랄까.” “북부의 의지?” 절로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럼 까먹은 게 아니라 잊고 있었다는 말인가? 왜? 그 이유를 생각해보려는 순간 돌연 하나의 가정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어때? 수현아? 나는 이제 네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바로 앞에서 멈춘 형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을 보이며 내 어깨를 부드러이 부여잡았다. 그리고 나와 시선을 맞추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너는 우리 서북 원정대가 다음 지역을 공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 형이 돌아간 것은 저녁 시간을 지나 서서히 밤이 깊어갈 즈음이었다. 밤이 늦었으니 자고 가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형을 강제로 돌려보낸 후, 나는 천막을 나와 한적한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사방이 칠흑 색으로 칠해졌고, 오직 밤하늘에 떠오른 별만이 은은한 별빛을 지상으로 뿌리고 있다. 이따금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와 몸에 살랑거렸으나 별로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슬슬 자야 할 시간임에도 나온 이유는 하나. 잠이 오지 않아서였다. 가슴속 깊숙이 자리잡은 이 불안감을 어떻게든 해소하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아주 예전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미래는 변한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다. 중간중간 사소한 과정, 즉 줄기는 변할 수 있으나, 그 줄기는 어떤 식으로든 원류(源流)로 돌아가려 한다는 의미였다. 2회 차로 들어온 이후, 나는 지금껏 원래 일어났어야 할 수많은 일들을 바꾸었다. 죽었어야 할 사용자를 살린 적도 있고, 살았어야 할 사용자들 죽인 적도 있다. 아예 연합을 무너뜨린 적도 있다. 나중에 다른 사용자가 발견하게 되는 유적을 선점하고 빼앗았다. 원래는 등장하지 말아야 할 머셔너리라는 클랜을 세우고 북 대륙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그것들 하나하나를 하나의 줄기라고 생각해보면, 나는 이제껏 무수한 과정을 뒤바꾼 셈이다. 그러한 결과 미래는 어느 정도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여태껏 한 일들 중에서 가장 잘한 일을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다. 바로 북 대륙이 춘추 전국 시대를 겪지 않고 바로 다음 흐름으로 넘어가게 만들었다는 것. 이건 정말 폐허의 연구소에서 뜻하지 않게 벨페고르를 잡았을 때보다 더욱 대박이라고 볼 수 있었다. 1회 차 때 북 대륙은 지금쯤 지역 간, 클랜 간 서로 한창 힘을 겨루고 있을 시점이다. 원래대로라면 강철 산맥은커녕, 악마들이 출현하고 도로 힘을 합칠 때까지 2, 3년은 소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효을의 생존은 중앙 관리 기구 출범이라는 결과를 낳았고, 다행스럽게도 춘추 전국 시대는 찾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최대한 힘을 비축해 예정보다 훨씬 빠른 시점에 강철 산맥 공략이 시작되었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그게 아니었다. 형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알 수 있었다. 분명히 미래는 앞당겨졌지만,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것을. 과도하게 줄기를 비튼 결과 나도 모르는 새에 부작용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갈등'이라는 형태로. 모르긴 몰라도, 지금 동부를 곱게 보지 않는 사용자들이 많을 것이다. 특히나 북부는 거의 전체가 동부에 깊은 반감을 갖고 있다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동부와 북부의 갈등이 나 때문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북부가 그런 상황에 처한 건 내 영향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다. 후에 북부를 이끌어갈 사용자를 살해했고, 북부에서 발견될 자원은 깡그리 쓸어가 모조리 남부에 투자했으니까. …아무튼. 형이 그랬다. 북부는 일부러 동맹 사실을 알리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잘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나도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의아하기 짝이 없는 기분이 들었고, 미묘한 낌새를 눈치챈 한소영은 재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면 동부는, 안 그래도 북부와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동부는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미리 알려준 것과, 알려주지 않은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말인즉 지금 북부는 '너희는 너희 멋대로 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걸 꼭 알릴 의무가 있느냐?' 이 소리였다. 북부는 서부를 끌어들임으로써 서북 동맹을 하나로 세력화시키는데 성공했고, 그러한 행동이 누구를 겨냥한 건지는 안 봐도 비디오. 동부로서도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중요한 건, 바로 이 시점에서 각 지역 간의 갈등이 새로 생겼다는 것. 그냥 그렇구나 하고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이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어쩌면 황금 사자 시절의 각 지역 간 관계를 재현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기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미래는 아무리 변화시키려고 해도, 스스로 변하려 하지 않으니까. 지금까지 그것을 몇 번이고 체감해오지 않았는가. 이래서는 강철 산맥 공략이 잘 끝나도 문제였다. 북 대륙에서 일어나지 못한 춘추 전국 시대라는 흐름은, 아틀란타라는 새 무대에서 새로이 태동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러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순간이었다. “오호. 이게 누구신가.” 밤하늘을 바라보며 한창 상념에 잠겨있을 무렵, 돌연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뜻 듣기로는 낯설었으나 잘 생각해보면 익숙한 목소리였다. “우리 남부 원정대의 전설인 머셔너리 로드가 여기 계셨군? 응? 하하하!” 창을 어깨에 비스듬히 얹은 채 성큼성큼 다가오는 사내는, 역시나 공찬호였다. 예전의 건들건들한 걸음이 아닌, 꽤나 안정된 자세로 걸어오는 공찬호를 나는 물끄러미 응시했다. 공찬호가 왜 갑자기 나타난 걸까? 여기는 경계 목적을 제외하면 어지간해서는 사용자들이 오고 가지 않는 외곽인데. 설마 북부 원정대인 공찬호가 경계를 서고 있을 리가 없을 테고. “전설? 보자마자 헛소리군.” “이거 왜 그래. 다들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데. 이번 공략에 어마어마한 활약을 보였다면서?” 계속해서 다가오는 공찬호가 유들유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별다른 감흥은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 처음에는 공찬호라는 사용자에 굉장한 기대를 한 적도 있었다. 적어도 같이 일을 벌여볼 만한 수준은 되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저번 사용자 아카데미 이후로 정이 뚝 떨어졌다. 공찬호는 더 이상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설령 그렇다고는 해도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지? 네 앞가림이나 신경 쓰지 그래.” “흐. 그 배배 꼬인 비아냥은 여전하구먼. 아무튼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는 말라고. 이래봬도 경계 중이니까. 정확히는 순찰 임무 중이지.” 그러나 이어진 목소리는 공찬호가 경계를 서고 있을 리가 없다는 내 추측이 완전히 빗나갔음을 알려주었다. “순찰? 네가 왜?” “아아. 동부 놈들이 지은 요새에 도착했을 때 놈들이 그러더군. 너희가 야영하는 지역 경계는 알아서 해결하라고.” “응?” “그래서 여기 도착했을 때는 미리 말을 해놨지. 우리 경계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 이렇게. 뭐, 딱히 나쁜 의도가 있는 건 아니니까 걱정 말라고. 좋은 게 좋은 거잖아?” 그 당시 우리야 스스로 요청했다고는 해도, 동부가 북부한테 그렇게 말했다는 건…. 조성호도 좋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보군. 어쨌든, 경계를 하는 도중이었다니. 이건 상당히 의외인데. “…너 총 사령관 아니었냐?” “총 사령관은 개뿔. 누구도 맡지 않으려던 자리인데,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지.” 공찬호가 침을 탁 뱉으며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묘하게 초점이 어긋난 말이기는 했지만, 저렇게 말했다는 건 공찬호도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지금 북부 원정대의 상황과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그럼 왜 공찬호는 총 사령관의 자리를 맡겠다고 나선 걸까? “궁금한가 보군. 내가 왜 이 총 사령관 직을 맡았는지 말이야.” 공찬호가 내 생각을 읽었는지 궁금증을 콕 집으며 말했다. 그리고 내가 채 입을 열기도 전 곧바로 말을 이었다. “간단하다. 그냥 싸우고 싶었을 뿐이야.” 나는 순간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싸우고 싶었을 뿐이라고?” “그렇지. 적어도 총 사령관이라면 싸울 때 방해는 받지 않을 거 아닌가? 즉 누구의 명령도 들을 필요가 없는, 마음 놓고 싸울 수 있는 자리.” “…참.” “이 자리를 맡고 살아남을 수 있다면, 나는 한층 더 강해져 있겠지. 흐흐흐.” …싸울수록 강해진다 라. 사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사정이나 이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데 말한다는 게 고작 싸우고 싶었을 뿐이라고? 그때였다. 이해 불가라는 생각에 입맛만 다신 찰나.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춘 공찬호가 돌연 나를 보며 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생각해보면, 공찬호는 처음 천막에서 나를 봤을 때부터 계속 웃었다. 싸우다가 머리라도 맞은 건가? “어이. 하나 더 궁금한 게 생겼는데.” “음?” “너, 왜 아까부터 나만 보면 실실 쪼개는 거지?” “…….” 공찬호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기뻤으니까.” “기뻤다고?” 이건 또 무슨 말일까. “그래. 내가 목표로 삼은 사내가 예전보다 더 강해진걸 확인했는데, 기쁘지 않을 리가 없지. 쉽게 따라잡는 목표는 의미가 없으니까.” “목표…?” “그래. 바로 너 말이다, 너.” “……?” 공찬호가 나를 가리키며 연이어 강조한다. 나는 잠깐이지만 당혹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지금 이놈이 갑자기 뭐라는 거야? 하지만 공찬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창을 내려놓더니 머리를 좌우로 꺾었다. 뚜둑뚜둑, 리드미컬한 뼈 소리가 들렸다. “저번에 너한테 패배한 이후, 나는 정말…. 아니, 그만두지. 성미상 구질구질한 과거를 들추는 건 별로라서.” “…….”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히 말해두마. 나 또한 그 사건 이후로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라고. …그래, 나는 달라졌다. 왜냐하면 적어도 지금 하나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거든.” “느껴?” “예전에 근력만 믿고 있을 때는 몰랐지. 하지만 지금은 느낄 수 있어.” “그러니까….” “나는, 아직도 너보다 약하다는 걸. …그것도 훨씬.” “흠.” 문득 예전 공찬호의 모습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기는 지지 않았다고, 다시 돌아오라고 울부짖던 찌질 한 모습이.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때의 패배를 시인했고, 아직도 자기가 약하다는 걸 인정했다. 돌연 미약한 호기심이 느껴졌다. 공찬호는 더 이상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저 잠자코 나를 응시하더니 무척 진지해 보이는 태도로 어깨에 걸친 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창 끝을 겨누며 기본 자세를 잡는다.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알면서 물어보는 건가, 아니면 정말 모르고 물어보는 건가?” 공찬호는 바로 회답했다. 알고는 있다. 저건 싸우자는 태도 아닌가. 하지만…. “나보다 약하다면서. 알고 있다면서?” “그렇지. 확실하게 알고 있다. 너는 다른 사용자들과는 달라. 오직 너만 보면,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지 않는다. 그 강하다는 뇌제를 처음 봤을 때도 이 정도의 기분은 아니었어.” “그럼, 질걸 알면서도 덤비겠다는 건가?” “그래. 아마 너는 의아하겠지. 내가 이렇게 계속해서 너를 자극하는 게. …하지만 내 입장은 또 다르거든.” 다르다고….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분명 아직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데…. 하지만 너를 볼 때마다, 내 안의 무언가가 미친 듯이 끓어오른다는 말이다. 사실 이제 승패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 “설령 또 진다고 하더라도…. 또다시, 아니. 그때보다 더 강해진 너를 실감한다고 하더라도…!” “…….” “설령 그때처럼 나락으로 굴러 떨어져도, 이제는…. 이제는 얼마든지 다시 올라갈 자신이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직 검을 뽑지는 않았고, 뽑을 생각도 없다. 아직은. “그래서, 나랑 지금 싸우자는 건가?” “아니. 지금 너랑 나는 싸우는 게 아니야.” 공찬호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창을 더욱 강하게 잡으며 이를 드러내 보였다. “내가 너한테 도전하겠다는 거다.” ============================ 작품 후기 ============================ 사실 공찬호는 김수현을 좋아합니다. 자신은 모르고 있는 상태지만, 김수현을 잊지 못하고 있지요. 사건을 사용자 아카데미 때로 거슬러, 김수현과 공찬호는 서로 싸웠습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까요? 공찬호의 김수현에 대한 사랑의 시작은. 김수현은 처음 검면으로 공찬호의 뺨을 세차게 때렸죠. 쫘악! 소리가 날 정도로요. 그때 공찬호가 느낀 기분은 이랬습니다. '아. 나의 뺨을 때린 사용자는 네가 처음이야.' 여기서 공찬호가 처음으로 호감을 갖게 됩니다. 그 이후로도 김수현한테 신나게 두들겨 맞았죠. 바로 거기서 공찬호가 SM에 눈을 뜨게 됩니다. 김수현이 타격이 너무 찰진 나머지, 몸이 더 때려달라고 자신도 모르게 반응을 해버린 겁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방치 플레이. 김수현은 가지 말라 애원하는 공찬호를 두고 매정하게 등을 돌리죠. 결국 거기서부터…. …라는 상상을 해봤는데, 어떠세요? 좋으시면 코멘트를, 싫으시면 저를 때려주세요.(?) 0607 / 0933 ---------------------------------------------- 북부, 진군하다. 그 순간 갑자기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공찬호는 어느새 눈동자를 이글이글 불태우며 나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공찬호는 나를 목표로 삼았다고 말했다.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1회 차에서는 천하무쌍이라 우러름을 받은 사내가 나를 넘어보겠다는 도전을 선언한 것이다. 정말로, 정말로 기분이 묘하다. 기분에 휩쓸린 탓일까? 나도 모르게 무검을 뽑아 자세를 잡고 말았다. 이러면 안 된다고, 마인트 트레이닝으로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면서도, 공찬호를 보고 있으면 한 번 해볼까? 라는 생각이 자꾸자꾸 치솟는다. 그러나 나는 결국 본능을 억누르는데 성공했다. 다시금 머릿속에 들어앉은 이성은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또 궁금한 게 생겼는데. 사용자 성하얀은 지금 어떻게 지내지?” 뜬금없는 물음이라서 그런 걸까? 공찬호의 자세가 살짝 흐트러지는 게 보였다. “하, 하얀이? 그건 왜…. 그, 글쎄. 아무튼 잘 지내고 있겠지.” “말을 더듬는군.” “…아마 저주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저주?” “엉. 총 사령관을 맡아달라는 제의가 들어왔을 때 하얀이가 엄청나게 반대했거든. 하지만 결국 수락해버렸으니까.” “고작 그것 가지고 저주를….” “그런데 이후로 계속 따라오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출발하는 날 강제로 기절시켰어. …위험한 건 나 혼자면 족하잖아?” “…….” 출발하는 날 강제로 기절시켰다 라. 그거 참 화끈한 방법이군 그래.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저렇게 말한다는 건 더 이상 예전처럼 맞고 살지는 않는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느 정도 속을 가라앉힐 수 있어, 나는 차분히 무검을 집어넣었다. 공찬호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알겠다. 그럼 이쯤에서 관두지.”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천천히 창을 늘어트린 공찬호가 의외라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눈을 두어 번 끔뻑끔뻑 감았다 뜨는 게, 맥이 빠졌다는 기색을 다분히 보여주고 있었다. '왜?'라는 무언의 눈빛에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여주었다. “글쎄. 내키지 않는다기 보다는…. 나는 입만 산 놈들은 별로 신뢰하지 않아서.” 그러자 공찬호의 얼굴의 와짝 일그러졌다. 나름 진심을 말한다고 말했는데, 입만 살았다고 매도 당하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으리라. “그러니까. 어디 한 번 증명해봐.” “증명?” “아까 네가 그랬잖아. 너는 싸우면서 강해지는걸 느낀다고. 이번 공략에서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 더욱 강해져 있을 거라고.” “…아.” 이제야 의도를 알아챈 걸까? 불만으로 가득 찬 낯에 미묘한 이채가 스쳤다. 찌푸렸던 얼굴이 서서히 정상으로 되돌아온다. “싸우는 건, 아니 도전은 그 이후에 받아주도록 하지.” 공략이 끝나면 도전을 받아주겠다는 일종의 약속. 공찬호는 그제야 완전히 창을 거두고는 자세를 풀었다. “흠…. 좋아.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아직도 아쉽다는 감은 없잖아 있는 듯했으나 납득 못한 기색은 아니었다. 하기야 예전에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벌인 짓거리를 생각하면 스스로도 찔리는 게 있으리라. 나는 가볍게 숨을 흘리고 몸을 돌렸다. 잠깐 머리라도 식히려고 나왔는데 까닥 잘못하면 분위기에 휩쓸려버릴 뻔했다. 괜히 입맛만 버린 기분이랄까? 이게 무슨 꼴이람. “잠시만. 머셔너리 로드.” 그때였다. 억지로라도 잠을 청할 생각에 천막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조금은 낮아진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나는 고개만 반쯤 꺾어 시선을 돌렸다. 공찬호는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문득 공찬호가 저렇게 정상적으로 부르는 게 자못 어색하게 느껴졌다. 사용자 정보라도 한 번 봐볼까? “왜?” 나는 반문하는 동시에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공찬호(5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창술사(Normal, Lancer,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아수라(Clan Rank : A Zero) 5. 진명 • 국적 : 수라마창(壽拏魔槍)의 주인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36) 7. 신장 • 체중 : 191.3cm • 95.3kg 8. 성향 : 열혈 • 노력(Hot Blood • Effort) [근력 101(+6)] [내구 87] [민첩 91] [체력 92(+2)] [마력 81] [행운 73] < 능력치 비교 > 1. 김수현 : 574 / 600~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근력 96(+2)] [내구 94(+2)] [민첩 98] [체력 100(+2)] [마력 96] [행운 90(+2)] 2. 공찬호 : 525 / 600~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근력 101(+6)] [내구 87] [민첩 91] [체력 92(+2)] [마력 81] [행운 73] “보아하니 뇌제에게 얘기는 들은 것 같은데…. 이번 북부 원정에 참가할 생각인가?” 오호라. 열혈, 노력이라. 나름 괜찮은 성향이라고 볼 수 있거니와, 예전 오만, 열등감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라고…. 아니. 잠깐만. “뭐?” “음? 아직 듣지 못했나?” “아니 아니. 북부 원정에 참가할 생각이냐고? 왜 그런 생각을 했지?” “내가 생각한 건 아니야. 하지만 서북 동맹 내부에서는 확실히 이야기가 오고 가는 중이지. 너와 뇌제의 관계나, 아니면 머셔너리가 용병 클랜이라는 것 등등…. 여하튼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놈들이 많거든.” 확실히, 아주 경우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차피 남부는 공략도 끝났겠다, 의뢰 형식으로 도와달라는 말이 나왔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공략을 위해서만 나온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현재 동부와 북부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가능성은 더더욱 높아진다. 어쨌든 머셔너리는 현재 남부 소속이며, 남부가 북부를 도와주는 행동은 동부 입장에서는 그리 달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즉 고립감을 느낀다고나 할까? 북부도 바로 그 점을 노리는 것일 테고. 그러면 북부는 왜 지금껏 나한테 접촉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혹시 내 형도 그랬나? 나한테 도움을 구하겠다고?” “아니.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뇌제가 가장 극렬하게 반대했다. 참가 요청이든 정식 의뢰든, 너한테 도와달라고 말을 꺼내는 그 순간, 자신은 지휘권을 놓겠다고 으름장을 놓더군.” 그렇군. 그럼 형은 나한테 참가가 아닌, 단순 정보만을 원한다는 말인가? 나머지는 본인이 알아서 하겠다는 소리고? “그래서 네 생각이 궁금한 거다. 머셔너리 로드.” “으음….”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아무래도 좋다. 참가하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참가해도 공사 구분은 확실하게 해주지.” “…….” 공찬호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고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마치 무조건 이 자리에서 답을 듣겠다는 듯이. 하지만 여러 이해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지라, 쉽게 생각하고 결론을 내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일단 어떻게든 진군 시기를 늦춰봐. 하루, 아니 최소한 이틀 정도.” * 밤새 몸을 뒤척이며 생각해본 결과, 우선은 참가해보자는 방향으로 잠정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물론 걸리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 동부의 입장도 고려해야 하고, 클랜원들의 양해도 구해야 하며, 한소영의 허락도 받아야 한다. 이 모든 걸 북부가 진군하기 전에 처리해야 하니 사실상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생각하든 간에 무조건 참가는 해야 한다. 그렇게 결론이 나왔다. 아무리 모든 상황을 최상으로 가정하고 생각해봐도, 서북 동맹이 제 3지역을 공략할 가능성은 5할도 채 되지 않는다. 반대로 모든 상황을 최악으로 가정하면 공략 가능성은 2할로 떨어진다. 차라리 형이 없으면 미련 없이 잘 가라고 손 흔들어주기나 했지. 형이 죽을 가능성이 높은데, 사지로 걸어 들어가려는 걸 빤히 보고만 있으라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어불성설이다. 이럴 거라면 애당초 2회 차로 돌아오지도 않았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아침이 밝자마자 곧바로 형을 찾았다. 아니, 찾을 필요도 없었다. 이제 슬슬 진군을 해야 하는 만큼 형이 직접 나를 찾아와 3지역에 대한 정보를 요청했으니까. 그러나. 내가 아는 한의 모든 정보를 건네고, 끝으로 머셔너리도 참가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살그머니 꺼내려는 순간. “절대로 안 돼.” 형은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끊어버렸다. 그것도 무척이나 단호한 목소리로. “혀, 형?” 나는 한순간 당혹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공찬호에게 극렬하게 반대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갑자기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형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내가 적어준 기록을 차곡차곡 정리해 품에 넣더니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어제와는 사뭇 다른 태도. 당황스러운 기분을 느끼면서도, 나는 재빠르게 형을 붙잡았다. “형! 잠깐만…?” 이윽고 형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마주한 순간, 나도 모르게 붙잡았던 팔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 지금 나를 바라보는 형은, 예의 따뜻한 눈동자가 아닌 차가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다른 사용자를 대하는 것처럼. 돌연히 서운한 감정이 밀려온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형이 확고하다는 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어지간해서는 나한테 져주는 편이지만, 일단 아니라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양보는커녕, 일절 용납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마는, 나 또한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형이야말로 갑자기 왜 이래? 내 말 들은 거 맞아?” “들었어. 그런데 안 돼.” “미치겠네. 말했잖아. 3지역은 1지역, 2지역과는 차원이 다른 지역이라고. 그러니까….” “김수현.” 재차 설득에 들어가려는 찰나, 형이 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살며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완전히 몸을 돌려 나를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찾아온 고요한 정적. “너는 진짜 네가 다 나서서 해야만 직성이 풀리나 보구나.” 이내 형의 목소리가 곧 정적을 깨트렸다. “그게 아니라….” “알아. 네 마음이 어떤지는. 하지만 고마운 마음은 들지언정, 네가 이러는 게 딱히 달갑지만은 않아.” “왜? 왜 달갑지 않은 건데? 내가 지금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잘못됐지. 그것도 엄청나게 잘못된 행동이지.” 나는 잠깐이지만 형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후.” 내 표정을 읽었는지 형이 미약한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곧바로 말을 잇는다. “물론 나는 네가 1회 차의 끝을 봤다는 것도 알고 있고, 네 능력도 인정해.” “그러니까 왜….” “잘 생각해봐. 지금은 1회 차가 아니잖아. 모든 게 리셋 된 2회 차잖아.” “…….” 모든 게 리셋 된 2회 차. 형은 과연 무얼 말하고 싶은 걸까? 잠시 후, 형이 품 안에서 기록을 꺼내 서너 번 약하게 흔들었다. “쉽게 가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야. 그래서 너를 찾아와 이 정보를 요구한 거고.” “그런데?” “여기서 또 네가 앞장서서 모두 해결해버리면…. 물론 편하기야 하겠지. 하지만 나는, 지금보다 더 성장할 여지가 사라져 버려. 너는 그걸 원하는 거야?” “…그러면. 형은 지금, 이번 공략에서 활약을 해보고 싶다는 거야?”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는 지금 목숨을 걱정해서 꺼낸 말인데, 형은 명성이나 성과를 생각하고 있다는 건가? 그러나 형은 그게 아니라는 듯 머리를 가로젓더니 더욱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구나.” 기록을 도로 품 안으로 집어넣더니 별안간 나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 그렇게 자신 있어?” ============================ 작품 후기 ============================ 아. 야한 거 적고 싶다아. 고연주랑 꽁냥꽁냥하는 거 적고 싶다아. 남다은이랑 잤잤하는 거 적고 싶다아. 비비앙 막막 괴롭힌 다음, 엉엉 서럽게 우는 거 달래주는 장면 적고 싶다아. 아~. 야한 거 적고 싶다아아아아~. …그냥 그렇다고요. 저도 엄연한 한 명의 사내라고요. ㅠ_ㅠ 0608 / 0933 ---------------------------------------------- 북부, 진군하다. …그렇게 자신 있냐고? 이윽고 형을 바라본 찰나, 목구멍 끝까지 올라온 말을 간신히 삼킬 수 있었다. 매섭기 그지없는 눈빛. '응. 있어.'라고 말하기에는 형의 기운이 심상찮다. 무엇보다 형은 지금 다른걸 말하고 싶어하고 있었다. 아직 내가 완전히 깨닫지 못한 어떠한 부분을. 견딜 수 없는 정적이 흐른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형이 입을 열었다. “그래. 네 도움을 받으면 확실히 편하기는 할 거야. 그걸 모르는 건 아니야.” “…….” “좋아. 네가 참가해서 이번 공략을 성공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이후에는 어떻게 할래?” “이후?” “네가 그랬잖아. 강철 산맥을 공략하고 아틀란타로 입성하게 되면, 분명히 그 악마라는 놈들이 움직일 거라고. 아니, 악마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대륙의 사용자들도.” “…응.” 틀린 말이 아니다. 강철 산맥이 공략되는 순간 악마들이 움직일 가능성은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왜냐하면 아틀란타 다음 지역인 테라에는 제로 코드가 잠들어 있으니까. 아니, 어쩌면 지금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아틀란타에서도 네 생각대로만 된다면 모두가 행복해지겠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서 바로 테라까지 진군하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해?” …그럴 리는 없겠지. '악마'라는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또한 놈들이 얼마나 제로 코드를 원하는지도 알고 있고. 더욱이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벼올 것이다. 언제나처럼, 상상 그 이상의 방법으로. “여기가 그렇게 만만한 세상은 아니잖아. 이건 네가 제일 잘 알 거 아니냐.” 형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놈들은 분명히 방해 공작을 시도해올 거야.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한테 위기도 찾아오겠지. 네가 지금 그렇게나 걱정하는, 제 3지역 공략과는 비교도 안될 위기가.” “그날이 오면, 그때도 네가 이렇게 일일이 나설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네 몸은 하나니까.” 그리고 나는, 이제야 형이 하고 싶은 말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만능 치트키가 아닌 이상, 너는 사람이 필요해. 네 사정을 알고 네 목적을 아는, 필요하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너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은 너 혼자서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다. 너 혼자서 목적을 이룰 수는 없다. 이게 바로 형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를 가장 가까이서 도와줄 수 있는 사람 또한 바로 형이었다. “후유.” 잠시 후, 가벼운 한숨을 내쉰 형은 기록을 도로 품속에 집어넣고서 예의 따뜻한 낯으로 나를 응시했다. “얘기는 여기까지 하마. 이 정도면 네가 못 알아들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구김살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직도 그런 얼굴이네. 너무 걱정하지 마. 나도 죽을 생각은 없으니까.” “…형.” “물론 능력 이상으로 무리하지는 않을 거야. 또 네가 건네준 이 상세한 정보도 십분 활용할 생각이고. 무조건 생존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겠어.” “…….” “그렇게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고…. 뭐 그래도 안되면, 그때는 너한테 도움을 요청하도록 하마. 최소한 이러는 게 맞는 것 같다.” “…….” 그렇게 말하는 형 앞에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럼 간다.” 몸을 돌리고 망설임 없이 걸어가는 형의 등을 하염없이 응시할 뿐. * 새 아침이 밝자마자, 형은 바로 북부 원정대를 이끌고 제 3지역으로 진군을 개시했다. 내가 어떻게 할 틈도 주지 않고. 물론 우리 또한 동부 요새에 도착한 다음날 바로 떠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를 않는다. 분명 공찬호보고 최소한 이틀은 시간을 끌어달라고 말한 것 같은데, 아무래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모양이다. 하기야 공찬호가 얼굴 마담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딱히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면 형이 일부러 서둘렀을 가능성도 있을 테고. 개인이 아닌 클랜에, 원정대에 묶인 나로서는 한없이 갑갑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문득 머리를 젖혀 하늘로 시선을 올리자 쨍쨍한 햇빛이 시야를 눈부시게 물들여온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땅이 뜨겁게 느껴질 정도로 상당히 화창하다. “───. ───. ───. 안젤루스여! 그대의 미천한 종이 바라오니…!” “안개화!” 펑! 돌연히 들려오는 폭음에 시선을 내리자,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하는 안솔과 사샤가 눈에 들어왔다. 큰일은 아니다. 둘은 지금 대련을 하는 중이었다. 둘 사이서 어쩌다 시비가 붙은 것 같은데 1:1로 시시비비를 가릴 셈인 모양. 그리고 나는 심판을 봐달라는 부탁을 빙자한 억지에 끌려 나온 상태였고. 사제와 뱀파이어. 사실 클래스만 보면 이미 승자는 정해져 있는 셈이나, 장담할 수는 없다. 사샤도 그냥 뱀파이어가 아닌 피의 군주라는 무시 못할 클래스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상성상 안솔이 더 유리할 거라 생각하고 있지마는. 그렇게 두 명이 툭탁툭탁 싸우고 있는 동안, 사용자들은 삼삼오오 둥글게 모여 앉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 사용자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화색이 돌고 있다. 조금의 걱정도 없어 보인다. 오늘 아침 제 3지역으로 떠난 사용자들과는 극명하게 갈리는 태도였다. “…….” 저런 태도를 딱히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남부 원정대는 정당하다. 우리 또한 한창 공략을 하던 와중에는 하루하루 불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이겨내고, 구덩이 공략으로 마침표를 찍음으로써 제 2공략을 매듭지었다. 물론 지금도 아주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이젠 남은 거라고는 요새 건설을 기다리고 주변 경계만 철저히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남부 원정대가 이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건, 하등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정당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면 나 또한 이 한가로움을 즐겨야 할 터인데, 왜 그러지 못하는 걸까? 왜 나 홀로 이렇게 좌불안석인 걸까? 사실 해답은 이미 알고 있다. 결과적으로 북부 원정대는 떠났고, 남부 원정대는 남았다. 그리고 나는, 북부 원정대에 참가하지 못했다. 애당초 형이 거부한 이상, 한소영의 허락이나 클랜원들의 설득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사실 나 스스로 북부와 접촉해 억지로라도 참가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형은 내가 참가하는 즉시 지휘권을 놓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아니, 엄포가 아니었다. 나 때문에 가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한이 있더라도, 형이라면 정말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건 내가 잘 알고 있다. 물론 오직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형한테 설득을 당했다고나 할까? 그만큼이나 형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고, 또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일전에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 구덩이 공략 초반, 한창 애를 먹고 있던 와중 한소영이 갑작스럽게 각성했다. 주현호의 도발에 열이 오를 대로 오른 한소영은 이후 권능 『파괴 • 돌격』을 이용, 삽시간에 나머지 통로를 통과해버렸다. 그 당시 한소영은, 악마들과 맞서 사용자들을 이끌던 1회 차 철혈의 여왕과 가장 근접한 모습을 보였다. 형 또한 그렇다. 뇌제(雷帝) 김유현. 1회 차 최고 전성기 시절의 형은 마족은 물론, 어지간한 악마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엄청난 명성을 떨친 사용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객관적으로, 또 냉정하게 말해보면, 그때의 형과 지금의 형은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게 현실이었다. 그냥 사용자 정보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어느 상황에 대처하는, 돌아가는 흐름을 읽는, 사용자들을 이끄는 능력 등등. 즉 일개 사용자로서의 형이 아닌, 사용자들에 군림하는 군주로서의 형의 능력. 1회 차의 형은 북 대륙에서 터진 여러 굵직한 사건들을 스스로 헤쳐 나온 역전의 사용자였다. 어떤 일이든 앞장서서 척척 해치우던 형의 등을 볼 때면 나 또한 항상 든든함을 느꼈으니까. 아마 나만 아니었다면 끝끝내 제로 코드를 쥔 건 형이 됐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형은…. 그래. 아무리 좋게 봐도 나름 잘 나가는 클랜 로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공찬호 또한 비슷한 경우라 볼 수 있다. 공찬호는 스스로 싸우면서 강해지는걸 느낀다고 했다. 1회 차의 공찬호는 정말 부단히 싸움에 휘말린 사용자였다. 언제나 전투에 전투를 거듭했다. 그렇다면 내가 기억하는 천하무쌍은, 그냥 갑자기 짠하고 나타나는 게 아닌, 바로 그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탄생한 게 아니었을까? …말인즉, 형이 말한 성장은 개인의 욕심이나 영달을 바라는 성장이 아니었다. '그날이 오면, 그때도 네가 이렇게 일일이 나설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네 몸은 하나니까.' '너는 사람이 필요해. 네 사정을 알고 네 목적을 아는, 필요하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너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말 그대로였다. 형은 아틀란타 이후 전개될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차후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는 게 아닌, '필요하면 목숨을 걸고 나를 도와줄 수 있을 정도'가 되기를 원했다. 형이 말한 성장이란 바로 그런 의미였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악마들의 저력을 알고 있고, 그런 만큼 지금보다 더욱 강해져야 한다는 사실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으니까. 나만이 아닌, 다른 사용자들 또한. 쾅! “꺄악!” “크악!” 한창 생각에 잠겨있던 와중 느닷없이 폭음이 들려왔고, 안솔과 사샤의 비명이 동시에 이어졌다. 상념에서 깨어 앞을 바라보니 서로 멀찍이 떨어진 채 바닥을 구르는 둘이 보였다. 서로 약한 신음을 흘리면서 바닥을 기는걸 보니 꽤 커다란 충돌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야야….” “크으…! 과연 안젤루스의 사제인가….” 얼굴을 한껏 찌푸린 채 엉금엉금 몸을 일으키던 사샤는 문득 안솔을 쳐다보고는 크게 기함했다. “앗! 그, 그 자세는?!” “아파라….”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고 있던 안솔은, 양손에 쥔 지팡이를 지지대 삼아 막 몸을 일으키려는 중이었다. 그냥 그러고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사샤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서, 설마! 그럴 생각이었던 거냐!” “……?” “신성 주문 중 바인드 마법을 통해 내 몸을 묶고, 그 다음에는 네 권능인 천벌을 이용해 나를 공격하겠다는 속셈이군! 너와 나의 상성을 생각하면 내 안개화도 제한되거나, 아니면 아예 통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면 나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겠지!” “…우웅?” 사샤의 외침을 들은 안솔은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정수리에 물음표가 동동 떠오른다. 이윽고 안솔은 한참을 깊게 생각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느낌표를 띄우며 “앗!”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떨떠름해 보이는 얼굴로 사샤를 바라보기까지. “그, 그래요! 네! 맞아요!” “크윽…! 역시나!” “그런 좋은 방법이…. 아, 아니! 이제 그러려고 했다고요!” “제, 제길! 분하다!” '…….' - …저거 병신들 아니야? 지금껏 가만히 있던 화정이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한 마디 툭 내뱉었다. 이유정이 땅을 데굴데굴 구르며 참 잘들 논다고, 웃겨 죽겠다고 외치는 소리도 들려온다. 나는 가벼운 한숨을 흘리고서 차분히 이마를 짚었다. “후유.” …저것들은 곧 죽어도 내 마음은 모르겠지. 그때였다. 탁! “날도 더운데…. 목마르지 않으세요?” 저것들을 데리고 어찌 악마들을 상대해야 하나 심도 깊은 고민에 빠져들려는 찰나, 돌연 쌀쌀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바로 옆에서. 흘긋 시선을 돌리자 어느새 얼음을 동동 띄운 음료가 탁자에 놓인걸 볼 수 있었다. 이윽고 건너편 간이 의자에 차분히 엉덩이를 붙이는 여인이 보였다. 가늘고 길쭉하게 뻗은 가랑이와 아름다운 굴곡을 그리는 늘씬해 보이는 골반. 어깨 아래 살며시 흘러내린, 시원해 보이는 선명한 푸른색 머리칼. 그리고 나를 조심스럽게 쳐다보는 파란빛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나는 비로소 여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보석아?” 우당탕탕!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김한별이 갑작스럽게 나동그라졌다. ============================ 작품 후기 ============================ 음. 거짓말은 아니에요. 정말 적고는 싶습니다. 다만 지금 그럴만한 상황이 되지 않으니 적지 못하는 것 뿐이지요. 하하. 그렇다고 억지로 상황을 만들어 넣는 건, 저나 독자 분들이나 서로 원하지 않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외전으로 적는 것도 좋기는 한데…. 그러면 아무래도 본편이 밀리게 되니까요. 이건 전적으로 제 책임이 크네요.(ㅜ.ㅠ) 후기에 적는 건 개인적으로 사양하고 싶습니다. 고연주나 남다은이나, 그냥 응응이 아닌 나름의 상황을 맞춘 응응을 구상해놔서요. 항상 수현을 애 취급하는 고연주가 각성한 수현한테 단단히 혼나는 과정이나, 아니면 남다은과의 상황극 등등이요. 후기로 날리기에는 꽤 아까운 소재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 아무튼 한 번 타이밍은 재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전에도 말씀 드렸죠? 연재 끝나기 전에 독자 분들에게 '씬 정말 잘 적으시네요.' 이런 말 들어보는 게 소원이라고요. 하하하. 0609 / 0933 ---------------------------------------------- Nevertheless. 잠시 후.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일으킨 김한별은 의자에 얌전히 앉은 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미안.” 하지만 그러는 내내 물끄러미 나를 쳐다봐, 결국에는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눈초리에서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너무해요.” 그제야 쳐다보는걸 멈춘 김한별은 시선을 살짝 내리깔며 입을 삐죽였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보석이. 나름 귀여운 애칭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그래. 갑자기 웬일이야?” “날도 덥고 목도 마르실 것 같아서….” 김한별의 시선이 살그머니 탁자로 떨어진다. 탁자에 놓인 컵은 얼음이 가득 쌓여 있어서 그런지 컵 면에 물방울이 잔뜩 맺혀 있었다. 정말로 시원해 보인다. “그래. 고맙다.” 그러나 나는 컵을 한쪽으로 살짝 밀어놓았다. 마음이 고맙기는 하나 지금은 별로 마시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김한별은 내가 밀어낸 컵을 잠시 바라보더니 차분히 나를 응시했다. “…고민이 있으신 것 같아요.” 고민이라. 그래. 확실히 고민 중이기는 하지. 하지만 네가 끼어들 고민은 아니란다. “왜. 네가 해결해주게?” 물론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할 수는 없어 완곡히 말을 돌렸다. “해밀 로드 님 때문이시죠?” 그러나 곧바로 들려오는 말에 나는 흘긋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김한별은 여전히 흔들림 없는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소문이 흘러나간 건가? 내 표정을 읽었는지 김한별이 아니라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나는 아차 한 기분을 느꼈다. “…티 많이 나니?” “엄청 요. 그리고 저뿐만이 아니라, 이미 눈치챈 분들도 많을 거예요. 왜냐하면 오빠랑 해밀 로드님은 서로….” “야. 그건 헛소문이야.” “아니요. 그게 아니라요.” “음?” “두 분은 혈육 관계시잖아요. 형제요.” 이런.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기분을 알겠군. “또한 서부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오빠의 걱정은 누가 생각해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흠.” 서부의 상황이라. 나는 새삼스런 기분으로 김한별을 응시했다. 하기야 소싯적부터 눈칫밥을 먹고 자라기도 했거니와, 머리도 영리하니만큼 나름대로 상황을 읽는 능력은 있으리라.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스스로 듣기에도 목소리는 상당히 가라앉아있었다. “그냥…. 오빠가 너무 고민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김한별도 그것을 느꼈는지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고민하지 말라. 사실 '힘내세요.'와 비슷할 정도로 진부한 말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말투에 깃든 진심은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나도 그러고는 싶지.” 아까 밀어놓은 컵을 살짝 집어 올렸다. 원을 그리듯이 빙글빙글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세상사 모든 게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 “그건 그래요.” “지금이 그런 상황이야. 한다, 안 한다 의 문제가 아니라고. 바로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인 거야.” “으응….” 얘가 웬일일까? 김한별은 과하지 않게,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얘기를 경청해주었다. 다른 사용자도 아닌 김한별이 이러니 상당한 어색함이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그와 반대로, 조금이지만 신선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김한별이 이렇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내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꼭 하소연을 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그 어떻게 라는 걸 모르겠어. 얘기를 하는 지금도 안심이 되지 않아 속이 타 들어가는데, 아까 말했듯이 걸리는 게 한두 개가 아니거든.” “그럼 그 걸리는 것들을 해결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김한별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그게 말처럼 쉬우냐고 말하려는 순간. “있는 그대로만 보면 북부 원정대는 떠났고, 오빠는 해밀 로드님을 돕고 싶은 거잖아요. 그게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요?” 김한별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 나는 비로소 완전히 몸을 돌렸다. 정면에서 눈을 맞추자 몸을 흠칫 떤 김한별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무, 물론 저는 오빠가 말한 사정이라는 것도 자세히 모르고, 그저 제 추측에 불과하지만….” “재미있네. 계속 말해봐.” 나는 중간에 말을 끊고서 가볍게 발을 굴렀다. 그러자 주변에 흐르던 마력의 기운이 일변했다. 일종의 간섭 현상으로 예전 맹아라와 이야기를 나눌 때 사용한 능력이다. 소리나 흘러나가지 않도록 미리 막을 친 것이다. 놀란 토끼 눈으로 돌아보는 것도 잠시. 김한별은 곧 다시금 나를 응시했다. 일순 희고 고운 목울대가 미약한 고저를 그린다. “어, 어쨌든 추측이기는 하지만….” “추측이라는 말 빼고.” “일단 지금껏 동부의 공략 현황과 서부가 참가한 사실을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거두절미하고.” “…우선 동부의 눈치는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왜지?” 나는 곧바로 물었다. “오히려 지금은 동부가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이니까요. 설령 그들이 오빠의 행동을 좋게 보지 않는다고 해도, 감히 대놓고 뭐라 할 수 있을까요? 자존심 챙긴다고 고립을 자초할까요?” 김한별 또한 지체 않고 회답했다. …좋아. 이건 나도 비슷하게는 생각하고 있었어. 그러나 이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남은 걸림돌이야말로 현실에 당면한 진짜 문제였다. “좋아.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북부도 내 도움을 받고 싶어하지 않아. …정확히는 형이. 그리고 그 이유는 굉장히 타당해.” “그렇군요. 그런데 도움을 줄 때 꼭 상대방이 알고 있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뭐?” “해밀 로드님이 거부했으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그래도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잖아요. 모르게 도우면 되죠.” 그 순간, 나는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걸 느꼈다. 모르게 도우라. 이 말의 뜻을 모르는 건 아니다. 김한별의 말인즉, 지금 머셔너리 보고 보험 역할을 맡으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러면…!” “네. 문제가 생기겠죠.” 그 말대로였다. 이제 남은 문제는 두 개. 바로 한소영의 허락과 클랜원들의 설득이었는데, 여기서 더 어려운 건 바로 후자였다. 왜냐하면 클랜원들은 나처럼 모든 걸 희생하면서까지 북부를 도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한별은 지금 그 길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고. “…차라리 나 혼자, 아니 따라오겠다는 클랜원들만 데리고 가는 건?” “절대로 안 돼요. 가장 최악의 선택이에요. 정말로 그렇게 해버리시면 클랜원들은 물론, 남부 사용자들도 오빠를 제멋대로라고 생각할 거예요. 즉 신뢰도, 명성도 흔들리게 되는 거죠.” “…….” “…힘드시겠지만 클랜원들을 설득하셔야 해요.” 김한별이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힘든 정도가 아니다. “명분이 없는데 어떻게 말을 하라는 거야? 그냥 정이나 의리에 기대라는 소리나 진배없잖아.” “그러면 안되나요?” “…….” “왜요?”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하기에는 묘한 질문이었다. 나는 2회 차로 들어선 이후, 단 한 번도 이유 없이 움직인 적은 없다.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모종의 목적을 갖고 행동하려 애썼다. 그리고 클랜원들한테도 그러기를 요구했다. 그럼으로써 지금의 머셔너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어진 김한별의 말은 다시 한 번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오빠는 머셔너리를 위해 많은 희생을 하셨어요. 그런데 클랜원들은 왜 그러면 안 되는데요?” “희생? 내가?” “네. 바로 일전에도 현이 오빠랑 재룡이 아저씨를 목숨 걸고 구해주셨잖아요.” “그건….” “아니면, 오빠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지도 모를 사용자들을 거두어 훌륭하게 키워내기도 하셨고요.” “…….”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것조차도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물론 지금까지 오빠의 행동에는 항상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어요.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냈죠. 그렇지만 모든 클랜원들이 오빠는 아니잖아요. 오빠처럼 생각할 거라는 보장은 없잖아요.” 그래.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지. 하지만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오빠가 걱정하는 건, 북부를 도움으로써 얻을 수 있는 성과로 어떻게 클랜원들을 움직일 것이냐는 것. 하지만 저는, 오빠가 단순히 성과로 작금의 상황을 재단하는 게 아닌….” 나는 가만히 말을 경청했다. 아까와는 반대로, 이번에는 내가 김한별의 말을 듣고 있다. “클랜원들이 오빠의 생각을 알고 공감할 수 있도록, 진심으로 도움을 구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진심, 진심이라. “…….” 잠시, 정적이 흘렀다. “클랜원들이…. 과연 그렇게 생각해줄까?” 흔들리는 마음속에서,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요. 확답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까요.” 회답은, 약간 매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저라면 오빠를 외면하기 힘들 것 같아요.” 하지만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조심스럽게 이어졌다. “…저는 항상 오빠를 믿고 있고, 결정을 존중하고 싶으니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김한별은 입을 다물었다. 다시 한 번 침묵이 내려앉고,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진심, 진심. 사실 그냥 말을 꺼내는 건 쉽다. 하지만 말에 진심을 담는 건 조금 어렵다. 그리고 진심으로 상대방을 이해시키고 공감하도록 만드는 것은, 더욱, 정말로 어렵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그래도 방법이 이것밖에 없다면…. 그때였다. 돌연 아까 탁자 한쪽으로 밀어낸 컵이 밟혔다. 갑자기 무언가 홀린 듯한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컵을 잡고 입으로 기울였다. 한 모금 액체를 들이킬 때마다, 가슴이 시려올 정도의 청량한 기운이 전신으로 스며들듯이 퍼져나간다.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천천히 고개를 젖히자 아직도 화창한 날씨와 쨍쨍하게 내리쬐는 햇빛이 시야를 물들여온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문득 형의 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해볼 수 있는 데까지 해볼게. 이러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래. 그럼, 나도 한 번 해보자. 해볼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 떠났다고 이렇게 계속 무력하게 있는 것 보다는, 후회 없는 결정을 내려보자. 방법은 없는 게 아니다.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없으면, 설령 부딪치는 한이 있더라도 만들어내면 된다. 번쩍, 눈을 떴다.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켰다. 아래서 물끄럼말끄럼 한 시선이 느껴진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별아. 부탁이 하나 있는데.” * 시간이 흐르고, 밤이 깊어졌다. 저녁 식사도 끝났고 건설 작업 일과도 끝났다. 그런 이상, 이제 남은 건 경계를 서거나 천막에 들어가 잠을 자는 것 뿐. 하지만 딱 한 곳만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해야 정확할까. 머셔너리 클랜원들은 각자 하루를 마무리하러 가지도 못한 채 어느 천막 앞에 모여야만 했다. 이유는 단 하나. 클랜 로드의 호출이 떨어졌으니까. 웅성웅성. 클랜원들이 모이면 모일수록, 자연스럽게 어수선한 소란이 생겨났다. “형. 도대체 무슨 일이래요?” “글쎄. 나도 갑자기 호출을 받은 터라. 그것도 이렇게 늦은 밤에 말이지.” “딱히 이제 할 것도 없는데…. 아. 혹시 그거 때문인가?” “음? 그거?” 아직 눈치채지 못한 클랜원들은 갸우뚱 머리를 기울였고. “…아무래도 결정을 내리신 것 같은데.” “어, 언니. 설마…. 아니시겠죠?” “그렇다면 이렇게 모이게 하셨을 리도 없겠지.” “말도 안 돼요. 우리가 왜요? 명분도, 타당한 이유도 없잖아요.” 일부 눈치챈 클랜원들은 한쪽에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 소란은, 천막에서 김수현이 걸어 나온 순간 삽시간에 사그라졌다. “…모두 모인 것 같군요.” 잠시 후, 클랜원들을 쭉 훑어본 김수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부 클랜원들이 한껏 긴장한 태도를 김수현을 응시하자, 덩달아 긴장감이 든 다른 클랜원들의 얼굴도 바짝 굳어졌다. “그럼 호출한 이유를 말씀 드려야 하는데…. 사실 이미 눈치챈 분들도 있으실 겁니다.” 무거운 분위기가 형성된걸 느꼈는지, 김수현이 살짝 입을 물었다. “하지만 더 이상 숨길 생각도 없고, 돌려 말하지도 않겠습니다. 단도직입으로 말씀 드리죠.” “…….” “저는…. 우리 머셔너리가….” “…….” 그리고. “지금 북부 원정대가 공략 중인, 제 3지역 공략의 보험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마침내, 김수현이 나직한 목소리가 클랜원들의 귓전을 울렸다. ============================ 작품 후기 ============================ 어제 하루 쉬어서 죄송합니다. 지인의 연락을 받고 급하게 응급실로 달려갔습니다. 경사가 어느 정도 있는 언덕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심하게 굴렀다고 하는데, 다행히 친구의 목숨에 지장은 없었습니다. 수술도 잘 끝났고요. 뼈가 부러진 탓에 오른쪽 다리 전체에 깁스를 했음에도, 자전거 부러져서 어떡하냐, 카본 어쩌고, 선수용인데 이제 단종된 터라 부품 구하기도 어렵다 등등 투덜거리는 모습을 보고(사실 꼴이라고 하고 싶네요. -_-a) 안심하고 돌아왔습니다. 아무튼 오늘부터 다시 정상적으로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3지역 공략 파트는 611회부터 시작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0610 / 0933 ---------------------------------------------- Nevertheless. 공기가 갑작스럽게 내려앉았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도 차가워졌다. 시작부터 직구를 던진 결과, 모든 클랜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눈빛만 봐도 느껴진다. 가기 싫다. 가고 싶지 않다. 왜 가야 하나. 꼭 가야만 하는 건가. 굳이 듣지 않아도 클랜원들의 반응은 익히 짐작된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대놓고 입을 열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말을 꺼낸 사용자가 바로 나였으니까. 사실…. 기나긴 장고 끝에 결정을 내리기는 했지만, 아직도 확신은 서지 않는다. '정말 이 방법밖에는 없는 걸까.' 스스로 수십 번을 되뇌어봐도 해답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물은 엎질러진 상태였다. 지금 여기서 클랜원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면 이후의 상황은 불 보듯 뻔하다. 사기 저하는 물론, 서로간의 신뢰가 흔들릴 수 있으며, 지금껏 내가 지켜온 이미지에도 금이 갈 수 있는 치명적인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불안 요소들을 감수하고 말을 꺼냈다. 진심이라는 방법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서. 그러므로. “아주 예전…. 여러분들은 용이 잠든 산맥이 처음 발견됐을 때를 기억하실 겁니다.” 비로소 기나긴 정적을 깨트리고 말을 시작했다. “그 당시 저는 용이 잠든 산맥을 공략하지 않겠다고 공언했고, 여러분들은 처음에 나름 불만을 표시하셨죠. …그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용이 잠든 산맥은 우리가 공략할 수 없다. …아니, 나는 그 지역을 공략할 자신이 없다고요.” “…….” “불만은 약 6개월 정도가 지나서야 완전히 사그라진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마 이후 그 지역을 기준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보셨을 테고, 결과적으로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제 말뜻을 받아들이고 이해하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클랜원들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집중하고 있었다. 모두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다문 채 지그시 나를 응시한다. 나는 정신을 바짝 잡을 필요성을 느꼈다. “생각해보면 저는 항상 그랬고, 여러분들도 그러기를 원했습니다. 자유 용병이라는 신분 하, 행동에는 목적을, 최종적으로는 성과를 두고 움직였습니다. 이러한 행동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개인적으로는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잠시 말을 멈췄다. 이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가여운 얼굴로, 불쌍한 목소리로 인정에 호소를 해야 할까? 아니, 그건 싫다. 그럼 예전처럼 그냥 담담하게 말을 해야 할까? 아니, 그것도 싫다. 할 수만 있다면,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고 싶다. 클랜원들이 정말로 그동안의 나를 생각해준다면, 적어도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다. “이번에는, 상황이 아주 다릅니다. 겪어보셔서 아시겠지만, 강철 산맥은 용이 잠든 산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역입니다. 사실상 우리의 힘만으로 제 3지역을 공략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우며….” 그리고. “또한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번에 우리가 맡아야 할 임무는 보험입니다. 설령 운이 좋아 어찌어찌 공략을 성공한다손 쳐도, 이전처럼 여러분들에게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그 어떤 성과도 약속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잠시 숨을 삼켰다가.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이 임무에 임하고 싶습니다.” 토하듯이 입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클랜원들의 눈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방금 말씀 드렸듯이, 저는 공략도 자신할 수 없고, 그 어떤 보상도 약속할 수 없습니다. …허나. 딱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사위가 던져졌다. “여러분들이 이번 임무에 임해주신다면…. 저는 선두에 앞장서서 여러분들을 이끌겠습니다. 혹시 단 한 명의 클랜원이라도 위험에 처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제 목숨을 걸고 구해내 드리겠습니다.” 선두에 서서 클랜원들을 이끌고, 단 한 명도 포기하지 않겠다. 언제나처럼 똑같은 일. “…예.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단 이것뿐입니다.” 문득, 숨이 차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그냥 느낌이 아니라, 정말로 숨이 찼다. 이야기만 하고 있을 뿐 인데, 왜인지 모르게 힘들다는 기분. 그러나,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분들의 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꼭 가야만 하는가.” 나는 자꾸만 닫히려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몇몇 분은 아시다시피, 제 형은 북부 원정대 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허나 북부 원정대는 현재 굉장히 불안정한 상황이며, 개인적으로 제 3지역을 공략할 수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최대한 사실을 말할 것이다. “그래서, 저는 가고 싶습니다.” 1회 차처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만에 하나…. 북부 원정대가, 그리고 형이 잘못된다면….” 2회 차에서, 한 번 더 형의 죽음이라는 상황을 직면해야 한다면. “저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잠시 후. 몸이 탁 풀리는 듯한 기분이 전신을 엄습했다. 한 걸음이라도 떼면 몸이 비틀거릴 것 같다. 이제는 목소리를 짜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건 강요도, 강제도 아닙니다. 저를 도와달라는, 오롯한 제 개인적인 부탁입니다.” 간신히 버텨내며, 나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이 지금 저를 외면하지 않고 도와주신다면, 저 또한 여러분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신뢰하며, 이 세상의 끝을 볼 때까지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랬다. 이게 바로 내가 내걸 수 있는, 그러나 자세히 말할 수는 없는 유일한 조건이었다. '너는 지금 사람이 필요해. 목숨을 걸고 도울 수 있는 이들이….' 형의 말대로, 이들이 정말로 목숨을 걸고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이들이라면. 나 또한 이들을 '사용자'가 아닌, 차후 같이 돌아갈 하나의 '사람'으로써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이상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클랜원들을 한 번 훑어보았다가. “그럼 저를 도와주실 수 있는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말을 매듭지으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 …완전히 눈을 감을 때까지, 일어나는 기척은 들려오지 않았다. * 마침내 김수현의 말이 끝났다. 거의 동시에, 클랜원들 사이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까는 그냥 침묵하고만 있었다면, 지금은 숨이 막힐 정도라고나 할까? 그 누구도 함부로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다들 느끼고 있었으니까. 김수현이 어떤 생각으로, 어떤 자세로 이 자리를 만들었고 또 이 자리에 임했는지를. 사실 거부해도 딱히 책잡힐 건 없는 부탁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클랜원들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됐든 머셔너리 클랜에서의 김수현은 일종의 핵(核)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그런데, 그런 김수현이 처음으로 아쉬운 말을 꺼냈다. 그냥 아무 생각도 않고 꺼낸 말이 아닌, 당연하니까 따라달라고 요구한 것도 아닌, '머셔너리 클랜 로드'로서의 위치를 걸고 지금 이 자리에 임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 걸까? 앞에 눈을 감은 채 오연히 서 있는 김수현을 보자, 클랜원들은 뜻 모를 묘한 기분이 드는걸 느꼈다. 1초, 2초, 3초…. 시간이 흐른다. 김한별은 한껏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훑었다. 클랜원들은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4초, 5초, 6초…. 고개를 갸웃하는 클랜원, 눈치를 살피는 클랜원, 여전히 탐탁잖은 기색을 보이는 클랜원,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은 클랜원…. 그러나, 아직 일어나는 클랜원은 보이지 않는다. 7초, 8초, 9초…. 시이이잉…. 시이이잉…. 돌연히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스쳐서 그런지 아니면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누군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김한별은 입술을 질끈 씹었다. 그리고 자신이라도 일어나려는 생각에 분연히 땅을 짚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탁! “따라갈게요. 아니, 무조건 따라가겠어요.” “저는 참가합니다.” 막 10초가 지난 순간, 두 명이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깜짝 놀란 김한별이 고개를 돌리자, 한쪽에서 각자 창과 지팡이를 딛고 일어난 두 사내를 볼 수 있었다. 안현과 신재룡이었다. 김수현에게 쏠려 있던 시선이 삽시간에 두 명에게로 향한다. “음…. 그러니까….” 안현이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저는 형처럼 거창하게 말은 못해요.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알겠어요. 만일 제 동생이 그곳에 끼어있었다면 저도 똑같은 선택을 내렸을 거라고요. 그런 만큼 저는 여기서는 사용자가 아닌, 형의 동생으로써, 그리고 한 명의 사람으로써 형을 돕겠어요.” 그렇게 말한 안현이 신재룡으로 시선을 돌렸다. “클랜 로드는 제 목숨을 구해주셨죠. 그것도 두 번이나요.” 신재룡은 잔잔히 웃으며 곧바로 화답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은혜를 받은 입장으로써…. 은인이 곤경에 처했음에도, 그리고 도움을 원하고 있음에도 외면하는 건, 금수만도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 김수현이 뮬에 갇혔을 때, 구조대에 참가했을 때 꺼낸 이야기와 똑같은 말. “그 말씀에는 차마 반박할 수 없군요.” 그 신재룡의 말은 다소곳이 몸을 일으킨 차소림이 받았다. 차소림 또한 리치에 의해 몸이 죽어가고 있을 때, 김수현에게 구원받은 전력이 있는 사용자였다. 차소림마저 일어나자 여러 클랜원들의 기색의 일변했다. 그리고 잠시 후. “에라, 젠장! 다들 그러면 할 말이 없잖아! 나도 간다! 간다고!” 다른 사내가 투덜투덜 거리며, 하지만 웃는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한쪽 팔은 잘렸는지, 불어오는 바람에 소매가 헐렁헐렁 휘날린다. 김동석. 뮬을 습격한 부랑자에게 한 팔을 잃었으나, 김수현의 보호 아래 무사히 탈출할 수 있던 사용자였다. 물론 그런 사용자가 김동석 한 명만은 아니었다. “이런. 그럼 저도 일어나야 하잖아요.” 그때 똑같이 구원받은, 박다솜을 비롯한 여러 사용자들이 추가로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서른 명 남짓한 인원 중, 1/6 정도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은혜는 바다같이, 복수는 칼날같이.” 계속 앉아있기만 하던 클랜원들이, 드디어 한 명 한 명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 말을 평생의 신조로 삼아왔지.” 지금껏 과묵하게 앉아있던 긴 머리 사내가 침묵을 깨며 몸을 일으켰다. 우정민이었다. “그리고 이제 은혜를 갚을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드는군.” 우정민, 선유운, 원혜수. 3명 모두 서 대륙과 전쟁 후 전투 사용자로써 막다른 입자에 몰렸으나, 김수현에 의해 재기에 성공한 이들이었다.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저도 갈게요.” 김한별이 벌떡 일어서자. “나, 나도!” 이유정도 질세라 몸을 일으켰다. 안솔과 백한결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저도 참가합니다.” 황금 사자의 몰락 후, 머셔너리의 비호 아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박현우도. “흥. 어차피 안 간다고 해봤자 계약서나 팔랑팔랑 흔들겠지.” 비비앙도 엉덩이를 떼고 일어난다. 그렇게 절반에 가까운 클랜원들이 몸을 일으켰다. 아직 앉아있는 클랜원들 중 몇 명은, 떨떠름한 얼굴로 허둥거렸다. 이윽고 그들의 시선은 한 곳으로 모아졌다. 그곳에는 정하연, 고연주, 남다은, 임한나. 4명의 여인이 모여 앉아있었다. 어쩌면, 여기서 김수현과 맞서 가장 크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인들이었다. 시선이 모인걸 느낀 걸까? “갑자기…. 예전에 어느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네요.” 4명의 여인 중, 정하연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공익성을 상실한 사업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설령 어느 정도 자리를 잡더라도, 무수한 견제를 받을 것이다. 물론 현재 클랜 로드의 뜻이 공익성을 추구한다고 볼 수는 없으나….” 그렇게 말한 정하연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번 임무는 머셔너리에 가장 결여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므로 저는 찬성하겠어요.” 정갈한 몸가짐으로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뭐…. 아주버님이시니까….” 이어서 나른히 목소리를 흘린 고연주도, 서로 한 번씩 시선을 맞춘 남다은과 임한나도 똑같이 일어나 배시시 미소 짓는다. 이제는 절반을 확실하게 넘긴 인원이 일어났다. 그것도 거의 주력 사용자들이 몸을 일으킨 것이다. 대세는 확실하게 기울었다. 아직 앉아있는 사용자들도 그제야 꿈틀꿈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김수현이 살며시 눈을 떴을 때. “……!” 김수현의 두 눈에 강렬한 이채가 스쳤다. 물론 귀로 듣고 있던 만큼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직접 볼 때의 감흥은 다를 수 밖에 없다. 거의 모든 클랜원들이, 일어서 있다. 개중에는 개인의 이유로, 혹은 분위기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일어난 클랜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들이 일어나 있다는 것이고, 김수현의 도움 요청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 오직 1명만 빼고. “흠….” 거의 모두가 일어났음에도 아직 남아 있는 사용자는, 다름 아닌 허준영이었다. 자기 키만한 얇고 긴 칼을, 마치 사무라이처럼 일직선으로 잡은 채 눈을 감고 있다. 그때였다. 곧 허준영의 두 눈이 살그머니 떠졌다. 착 가라앉은 눈빛이 김수현을 응시한다. “뭐….” 천천히 올라간 두 팔이 하늘을 향하는 칼자루를 잡았다. “따라가주지. …혼자 남으면 심심하니까.” 허준영이 손에 살짝 힘을 주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다. 이로써 머셔너리 클랜 31명 전원이 기립했다. “헤…. 어차피 일어났을 거면서, 뭐 그렇게 뜸을 들여요?” “닥쳐라. 그냥 이래저래 빚도 갚을 겸….” “거참, 솔직하지 못하시네. 사내가 그렇게 새침….” “닥치라고 했을 텐데. 천둥벌거숭이.” 안현이 설렁설렁 다가와 툭 건들며 말하자, 허준영이 살짝 얼굴을 붉히더니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안현이 낄낄 웃으며 몸을 피했다. 허준영의 새침한 모습이 자못 웃겼는지, 주변에 있던 클랜원들도 한 명 한 명 따라 웃기 시작했다. “흐흐흐흐!” “하하하, 하하하하!” 그리고. “모두….” 김수현의 말이 이어진 순간, 웃음은 곧 하나의 함성으로 변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비록 서른 남짓한 인원에 불과했지만, 마력이 충만한 함성은 요새 구석까지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천막에 들어가 있던 무슨 일이 난 건가 싶어 걸어나올 정도로. 그것은 한소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팔랑, 팔랑…. 돌연히 들려오는 함성에, 중앙 천막에서 기록을 넘기던 한소영은 고개를 들어 입구 밖을 바라보았다. “…….” 그렇게 한참 동안 밖을 응시하다가, 이내 도로 기록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런 한소영의 입가에는, 어느새 알듯 말듯한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 작품 후기 ============================ 차후 진행되는 3지역 공략은, 앞선 2지역과는 다른 구성을 보여드릴 것을 약속 드립니다. 물론 괴물이라는 존재가 있는 이상 전투는 필요 불가결 하지만, 2지역처럼 차곡차곡 진행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애초 구성이 그러하니까요. 조금 더 재미있게 적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죄송하고, 또 항상 감사합니다. _(__)_ 0611 / 0933 ---------------------------------------------- 아스타로트, 직접 움직이다. 어두운 밤. “응….” 미약한 침음을 흘린 한소영은 콧잔등을 살짝 어루만지고는, 책상에 놓인 라이트 스톤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톡톡, 두어 번 가볍게 두드리자 천막을 환하게 밝히던 빛이 약간은 줄어들었다. 그만큼 어둠이 몰려들기는 했지만 천막 안에는 조금은 아늑한 기운이 깔렸다. 깊은 밤, 그러나 완연한 새벽이라 말하기는 아직 이른 시간. 사락…. 그렇게 빛을 줄인 한소영은 다시금 원래 읽던 기록을 넘겼다. 잠시 누그러졌던 눈매가 도로 글자에 집중한다. 사실 총 사령관인 한소영이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깨어있을 필요는 없다. 애초 남부는 공략이 끝난 상태였거니와, 요새 건설이나 경계 등 하는 일도 모두 원활히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럼 모두가 자야 할 시간에 한소영이 깨어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자기 자신만이 알고 있겠지마는, 아마 밖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부산스러운 기척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예를 들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거나. 사르륵! 그때였다. 누군가 한소영 홀로 있는 천막의 입구를 젖히고 살그머니 들어온다. 한소영도 기척을 느꼈는지 기록을 읽는 걸 멈추고는 차분히 고개를 올렸다. 정면 입구 방향으로 한 사내가 걸어 들어온다. “이제 오셨군요. 머셔너리 로드.” 그랬다. 야심한 밤, 총 사령관의 천막을 찾은 이는 바로 김수현이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확신한 건 아니에요.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높겠다고 생각했죠.” 조금은 이상하게 들릴 법한 대화. 한소영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또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을 건네고 있었다. 곧 김수현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소영이 앉은 탁자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허락을 구하러 왔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치고는, 일을 앞서 진행시켰다는 생각은 안 드시나요?”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 드리지요. 허나 클랜원들의 허락이 우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흠.” 가벼운 콧숨을 흘린 한소영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이 느닷없이 찾아온 사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 사내는 확실히 사람을 끌어당기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오만하지 않고, 비굴하지 않다. 보기 좋은 자신감이 전해진다. 그 누가 이럴 수 있을까? 이렇게나 애먹게 만드는 강철 산맥을 앞에 두고서. 그렇게 생각한 한소영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그럼 제가 허락하지 않는다면요?” 물론 한소영은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냥 일종의 농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작금의 상황에서 농(弄)은 확실히 적절치 못한 선택이었다. 농담도 어울리는 사람이 해야 상대도 웃으며 받아넘기지, 한소영 같은 사람이 하면 상대는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이내 초감각이 '당황'이라는 정보를 전해주자 한소영은 속으로 쓰게 웃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농담이에요.” 그리고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고는 김수현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농담과는 별개로, 가지 않으셨으면 하는 마음은 있네요.”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이유랄 것이 있나요? 강철 산맥은 위험하잖아요.” “그렇죠.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한소영의 말인즉, '저는 머셔너리 로드가 다치는걸 원하지 않아요.' 정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수현은 머리를 갸웃했다. 마치 그래서 어쩌라는 듯이. 아마 그저 그런 여인이라면 참 눈치도 없다고 투덜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한소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를 이해심 많고 배려심 깊은 여인이라 여기고 있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두 개만 약속해주신다면, 허락해드리겠어요.” “약속이요?” “네. 하나는 부디 몸조심하실 것.” “예.” “그리고 꼭 살아서 돌아오실 것.” “알겠습니다.” 정말 어려운 약속이, 무척이나 간단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정말.”이라고 중얼거린 한소영이 두 손이 팔짱을 끼듯 자신의 팔꿈치를 감싸 안는다. 그 상태서 양팔에 살짝 힘을 주자, 가냘픈 몸매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가슴이 더욱 돋보인다. “…미안해요.” 그러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 김수현의 낯에 의아함이 서렸다. “저도 도와드리고 싶은데….” “…….” “저도 무언가 해드리고 싶다고 했는데….” “…….” “또, 홀로 애만 태우며 지켜볼 수밖에 없겠네요.” “…….” 한소영은 예전에도 이 말을 한 적이 있다. 정확히는 모닥불 앞에서, 김수현과 단 둘이 있을 때. 그제야 김수현이 눈이 약간 커졌다. 약속을 해달라는, 그리고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여인을 빤히 응시한다. 아무튼 마음이 어떻든 한소영은 움직일 수 없다. 김수현처럼 누구나 공감할 여지가 있는 혈육과 관련된 명분도 없거니와, 설령 나선다고 해도 그만한 웃기는 일도 없으리라. 그걸 알고 있음에도, 한소영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나 요요히 빛나는 흑 수정 같은 눈은, 가지런한 속눈썹이 수줍은 듯 내려옴으로써 서서히 아래를 쳐다본다. 늦은 밤. 사람의 감성이 가장 충만해지는 시간. 약간의 정적이 흐른다. 한소영은 여전히 말을 않는다. 그러나 아래로 내리깔린 눈동자와 점차 발그스름한 빛을 띠는 흰 볼을 보고 있으면, 한소영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누구라도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늦은 밤의 공기는 차갑기 그지없는데, 유독 김수현과 한소영 사이서 공기가 뜨끈하게 달아오르며 열기를 내뿜는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문득, 김수현이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거의 동시에 라이트 스톤의 불빛이 꺼지고, 어둠이 내려앉는다. 아니. 사실 불빛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김수현이 낯을 들이민 순간, 한소영이 반사적으로 눈을 감아 불이 꺼졌다는 착각을 했을 뿐. “저….” 한소영의 반듯한 이마가, 김수현의 손에 앞머리가 걷혀 드러난다.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이제는 숨결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어스레한 불빛을 머금은 어여쁜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한소영은 눈을 꼭 감은 채로, 천천히 뒤꿈치를 들어 키를 높였다. 그 순간이었다. “혹시, 어디 아프십니까?” 정말로 걱정된다는 투로, 조심스럽게 꺼낸 김수현의 말은.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셔서….” 이해심 많고 배려심 깊은 여인을, 한순간 사라지게 만들었다. 한소영은, 반사적으로 오른 주먹을 꽉 움켜쥐고 말았다. '…때릴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한소영이었다. * 한편, 같은 시각. 한소영이 김수현의 복부를 후려갈길까 고민하고 있을 즈음, 오늘 원정 첫날을 끝낸 김유현도 깊은 시름에 잠겨있었다. 동부 원정대는 공략이 끝날 때까지 어떤 괴물과도 조우하지 않았다. 남부 원정대는 진군 후 사나흘이 지나고 나서야 괴물과 조우했다. 그리고 북부 원정대는, 진군 후 반나절이 지나자마자 괴물과 조우하고 말았다. 그것도 처음 보는 괴물과. 키는 약 3미터는 넘을까? 거뭇거뭇한 온몸과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굵은 꼬리. 거기다 툭 튀어나온 주둥이 끝에 돋은 뿔을 보면, 흡사 공룡을 보는 듯했다. 우선 결과만 놓고 보면 원정 첫날은 나름 성공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습격의 정도가 크지 않기는 했지만, 북부 원정대는 강철 산맥에서의 첫 전투를 단 한 명의 전상자도 없이 매우 훌륭하게 치러냈다. 괴물들이 약했다기 보다는 김유현의 대처가 굉장히 적절했다. 흔들리는 사용자들을 재빠르게 추스른 후, 괴물들의 약점을 집요하게 노리는 공격을 지시한 것이다. 물론 그 지시는, 김수현이 알려준 정보가 바탕이 됐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그러한 결과 원정대의 사기는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기실 아무리 괴물의 수가 적었다고는 하나, 이 악명 높은 지역에서 첫 시작을 잘 끊었다는 사실은 어쨌든 자축할만한 일이었다. 사용자들은 뇌제를 칭송하고, 서북 동맹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고 끄덕거리며 떠들썩하게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 단 한 명만 빼고. “흐음….” 김유현은 한숨을 푹 내쉬며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면, 김유현은 지금 왜 이러고 있는 걸까? 다른 사용자들은 모두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 지었는데, 왜 김유현만 시름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해답은 바로 오늘 출현한 괴물에 있었다. '거리로만 계산해보면, 6일에서 8일 정도면 공략 지점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음. 그놈들의 영역에 처음 들어가기까지는…. 이르면 하루? 늦어도 이틀?' '아, 형. 이건 내 생각인데…. 아무래도 1지역 놈들이 불안해. …응? 아니 아니. 동부 놈들 말고.' '1지역에서 나오는 괴물들 있잖아.' '응. 사실 2지역에서 나올 줄 알았는데 나오지 않더라고. 말인즉, 제 3지역에서 이놈들이 출현할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해. 그러니까….' 김수현은 김유현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여러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예측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적중했다. 1지역에서 도망친 남은 괴물들은, 2지역을 통과해 3지역까지 들어가 있던 것이다. 그래서 김유현은 기뻐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제 3지역을 다스리는 놈들은 물론, 그밖에 출현이 예상되는 괴물만 해도 골치가 아픈데 설상가상으로 1지역 괴물들까지 몰려왔으니까. 이쯤 되면 김유현도 동부에 좋은 감정이 생길 리가 없다. 아무리 한때 같이한 이들이라고는 하나, 서부로 근거지를 옮긴 이상 이제는 남남이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쯧. 어쩔 수 없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유현이 딱히 주눅들거나 한 건 아니었다. 어차피 쉬울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극복해야 할 시련이 하나 더 생겼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잠시 후, 머리를 탈탈 털은 김유현은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나갔다. '이번 공략은…. 오래 끌면 끌수록 힘들어진다.' 무엇보다, 쓸만한 사용자가 없다. 전투적인 부분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사용자를 이끄는 자질을 말하는 것이다. 기실 김유현은 남부 원정대처럼 북부 원정대를 구성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그럴 수가 없었다. 선봉은 상황을 읽는 능력과 순간적인 판단이 정점에 이른 사용자가 맡아야 한다. 후미는 앞서 가는 부대를 잘 따라가며 돌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용자가 맡아야 한다. 그러할진대, 눈 씻고 찾아봐도 그런 사용자가 눈에 띄지 않는다.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동부처럼 중앙이 모든 상황을 아우르는 형태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형태는 시간이 지날수록, 괴물들이 본격적으로 출현할수록 부담감이 가중된다. 그러므로…. '정보는 충분하다. 그러니 조금 무리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최대한 빠르게 공략 포인트까지 도착해야 해. 그리고 속전속결로….' 이윽고 김유현은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며 탁자에 놓인 지도를 차곡차곡 접기 시작했다. 그때. 쿵…. 갑작스럽게, 어디선가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진동이 김유현의 귓전을 미약하게 울렸다. 정말 약하게 들려온 터라 그냥저냥 넘어가도 될 정도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곳은 강철 산맥. 김유현의 머리는 본능적으로 입구 밖을 향했다. 어느새 두 눈은 매서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쿵…! 진동이 다시 한 번 들려온다. 푸드득, 푸드득! - 쪼롱쪼롱! 돌연 날갯짓하는 소리가 나며, 황금빛을 띤 아름다운 새가 김유현의 어깨에 살짝 내려앉았다. 김유현은 얼른 몸을 일으키고는 빠른 걸음으로 천막을 나섰다. “이, 이게 무슨 소리지?” “내가 어떻게 알아!” “총 사령관님께 알려라!” “경계조들한테 가봐! 빨리!” 웅성웅성. 비단 김유현만 들은 게 아닌지, 이미 야영지는 소리를 듣고 나온 사용자들로 어수선해지는 중이었다. 잠시 후, 경계조에 통신을 넣은 사용자들이 하나하나 보고를 시작했다. “동부 경계조의 보고입니다! 소리는커녕, 아무런 기척도 잡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서부 경계조의 보고입니다! 소리가 확실하게 들리고, 지면에 아주 미약한 진동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기척은 잡히지 않습니다!” 급박한 목소리들이 이어졌다. 김유현 또한 이미 마력 감지는 최대한으로 활성화한 상태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서부 경계를 맡고 있던 사용자들도 비슷한 상황임을 보고했다. 결국, 답은 하나. 괴물은 기척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야영지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동이 들린다는 것은, 괴물이 그만한 힘을 가졌다는 소리였다. '설마 벌써?' 김유현은 입을 짓씹었다. 바로 지시를 내릴 생각에 음성 증폭 마법을 활성화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쿵…! 조금 더 확실해진 진동이 들려옴과 동시에. - 끼루루루루루루룩! 괴물의 것으로 추정되는, 찢어지는 비명이 강철 산맥을 떠르르 울렸다. 김유현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 작품 후기 ============================ 이런, 어제 내용이 많은 독자 분들의 손과 발을 오그라들게 만든 모양입니다. 제가 오그라들게 만든 범인인 만큼, 직접 풀어드려야 마땅한 도리겠지요. 그럼 차후 어떤 내용으로 독자 분들의 손과 발을 부드러이 풀어드릴지, 고민 좀 해봐야겠네요. 하하하. PS. 황금빛 새는 예전 김수현이 김유현과 함께 공략을 했을 때 얻은 성과로써, 형에게 선물한 새입니다. 겉모양이 굉장히 아름다우며, 지닌 능력도 뇌제와는 굉장히 상성이 잘 맞는 새이지요. 이름은 쪼롱이입니다. 쪼롱쪼롱하고 울거든요. 그 외의 특징이라면 분명 주인은 김유현이나, 김수현을 더 잘 따르고 좋아한다는 사실이 있겠네요. '자연'과 관련된 새이니만큼, 김수현의 내부의 '화정'에 끌리는 상태거든요. 0612 / 0933 ---------------------------------------------- 아스타로트, 직접 움직이다. - 끼루루루루루루룩! 갑자기 찢어지는 포효가 강철 산맥 일대를 떠르르 울렸다. 이번에는 고막마저 진동시킬 정도라 사용자들도 확실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때였다. “어, 어?” “하, 하늘! 하늘이다!” 여인이 어떻게 된 거냐는 듯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누군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외치며 하늘을 가리켰다. 가까이 있던 사용자들을 반사적으로 머리를 젖히고 시선을 올렸다. 펄럭, 펄럭! 그리고 들려오는 엄청난 날갯짓 소리. 그것은…. 도대체 무어라 말을 해야 할까? 괴조(怪鳥). 그래. 괴조였다. 흡사 비룡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새가 막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4미터는 가볍게 넘어 보이는 길이와 거대한 덩치, 그리고 좌우에서 펄럭이는 거대한 날개까지. - 끼르르륵! 괴조는 척 봐도 무척이나 화가 난 상태였다. 살기 어린 눈으로 아래를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주둥이를 쩍 벌려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다. 그리고는 삽시간에 자세를 바꿔 지면으로 하강을 시도한다. 다시 한 번, 절규처럼 들려오는 괴성이 허공을 왕왕 울렸다. 그 괴성에, 망연히 하늘을 바라보던 김유현은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전원…. 전투 준비!” 지시를 받은 사용자들은 사방으로 달려나가며 동료들을 깨우고 상황을 알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계속해서 괴성과 진동이 들려오는 가운데, 북부 원정대의 사용자들이 재빠르게 진형을 갖췄다. 애초 소리를 듣고 있었거니와, 원정 첫날이라 긴장을 놓지 않고 있어 신속하게 모일 수 있었다. - 발생 장소를 향해 최대한 은밀하게 접근하며, 에워싸도록 하겠습니다. 증폭된 음성이 사용들의 귓전을 울렸다. 방향은 서쪽. 하지만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쪼롱아. 부탁한다.” - 쪼로로롱, 쪼로로롱! 김유현이 낮은 목소리로 부르자 어깨에 앉아있던 새가 아름다운 황금빛을 흘리며 하늘 높이 날았다. 이윽고 사용자들이 움직이는 것을 시작으로, 돌연 김유현의 눈동자가 황금빛을 발했다. '동화'라는 능력이 있다. 사용자나 때에 따라서 여러 의미로 쓰이기는 하지만, 김유현 같은 경우에는 '감각 공유'라는 능력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내 하늘 높이 날아오른 쪼롱이가 아래를 쳐다보자, 김유현의 시야에도 강철 산맥 일대가 한 눈에 잡힐 듯이 보이기 시작했다. 쿵! 별안간 흙먼지가 풀썩 일어나는 장소로 김유현의 시선이 집중된다. 안력을 돋우면 돋울수록 더욱 자세한 상황이 눈에 들어온다. 그곳에는 아까 본 괴조와 한 인간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아니, 인간이 아니었다. 아까 본 괴조와 비교해도 절대 꿀리지 않는, 오히려 더욱 커다란 덩치를 지닌 일종의 거대한 인간형 괴수라고 볼 수 있을까? - 캬아아악! 치열한 전투이기는 했지만, 우선 보이는 상황은 괴조에게 유리해 보였다. 몸 곳곳에 심한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는 괴수와는 달리, 괴조의 상태는 양호해 보였으니까. 그러나 속단할 수는 없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괴조가 오직 위협하는 모습만 보이며 방어적으로 나오는 것에 반해, 괴수는 완전히 공격적인 모습만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 크아아아아앙! 괴수가 범상치 않은 포효를 지르며 괴조를 향해 짓쳐 들었다. 갑작스럽게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삽시간에 괴조의 목을 잡아챈다. 거대한 덩치를 무색하게 만드는 비호와 같은 몸놀림! 그러나 괴조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목이 잡힌 순간, 곧바로 주둥이로 깨물며 앞발로 괴수의 노출된 상체를 세차게 훑어버렸다. 가슴을 깊숙이 파고 틀어박힌 발톱은, 그대로 살을 찢으며 기다란 두 줄기 상처 자국을 남겼다. 괴수가 고통에 젖은 비명을 지른다. 부웅! 이윽고 아무렇게나 휘두른, 그러나 분노를 담은 괴수의 주먹이. 퍼억! 괴조의 복부를 정통으로 후려갈긴다. 뜻하지 않은 일격. 막 괴수의 목을 씹으려던 괴조의 주둥이가 끼루룩, 울음을 토하며 하늘로 젖혀졌다. 한 방. 고작 한 방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한 방을 허용한 괴조는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내부의 무언가가 터졌는지 주둥이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안면에는 괴로워하는 기색이 가득하다. 괴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온몸을 힘껏 웅크렸다가 폭발하듯이 뛰쳐나갔다. 그리고 흔들리는 괴조를 그대로 밀쳐 쓰러트리고는 거칠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쿠당탕탕, 쿠당탕! 단 한 방에 기세가 괴수에게 기울었다. 괴수는 재빠르게 자세를 추슬렀다. 그리고 괴조의 배를 깔고 올라타더니 붉은빛을 번들거리는 눈으로 괴로워하는 괴조를 내려다본다. 잠시 후, 괴수의 입이 살짝 벌어지며 허연 이가 드러났다. 무시무시하다. 온몸에 피를 비오 듯 흘리며 웃는 인간형 괴수의 모습은, 흡사 고대의 야만 전사를 떠올릴 정도로 끔찍한 형상이었다. 괴조는 어떻게든 반항하려는 듯 목을 길게 빼고 반항했으나, 괴수의 주먹이 가슴 깊숙이 틀어박히자 별 도리가 없었다. 쿵! 쿵! 쿵! 쿵! 연거푸 주먹이 틀어박힐 때마다 가슴이 박살 나며 피가 비산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괴수는 괴조의 앞다리를 하나씩 부여잡고는 통째로 잡아 뜯어버리기까지 했다. 뿌지직! 살이 강제로 뜯겨짐에 따라 허연 뼈가 드러나고 붉은 액체가 흘러 적신다. 미친 듯이 몸부림치던 괴조의 반항이 서서히 약해졌다. 그러더니 축 늘어진 괴조의 목을 단단히 부여잡고서 그대로 세게 내팽개쳤다. 꽝! 그렇게 하릴없이 허공을 날아간 괴조는 나무에 부딪치고 나서야 지면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아까와 같은 모습은 보이지 못했다. 간신히 눈을 뜨기는 했지만, 전신에서 심상치 않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 괴조의 시선은 터벅터벅 걸어오는 괴수를 향하지 않았다. 그저 끊임없이 걱정하는 눈길로 지면의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 크아아악…! 그러나 괴수가 다가와 승리를 알리는 듯한 나직한 포효를 터뜨린 순간, 괴조의 눈이 흐릿하게 풀렸다. 툭, 고개가 떨구어졌다. 비로소 두 괴물의 전투가 종결을 알린 것이다. 치열한 전투가 끝나고 남은 건, 느닷없이 찾아온 고요한 정적과 진득한 피 내음, 그리고 승자의 나직한 울부짖음뿐. - 끼요오…. 그러나 그때,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울음 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깨뜨렸다. 포효가 그쳤다. 바로 입을 다문 괴수는 소리가 흘러나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 끼융…. 끼유웅…. 그곳에는, 놀랍게도 또 하나의 괴조가 있었다. 전신이 박살 난 또 하나의 괴물 시체 옆에서 구슬프게 울어 젖히고 있다. 크기는 괴수의 손바닥 정도 되는 걸로 보아, 아기 괴조임이 분명하다. 그럼 이게 어찌된 일일까? 왜 아기 괴조가 다른 괴물의 시체 옆에서 울고 있는 것일까? 물론 전후 사정은 오직 한 놈만이 알고 있겠지마는, 어느새 다가온 괴수는 아기 괴조를 살려줄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였다. 여전히 눈동자는 붉은빛을 번뜩이고 있었고, 빽빽 울기만 하는 아기 괴조를 무심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내려다본다. 이윽고 그대로 짓밟으려는 듯, 상처 입은 괴수가 비틀거리면서도 서서히 발을 들어올린 순간이었다. - 크륵?! 돌연 거대한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괴수의 머리가 사방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시선이 한곳에 고정돼 빤히 응시하기 시작한다. “……!” 김유현은 소스라치게 놀라고야 말았다. 괴수의 눈이 자신이 있는 방향을 정확히 바라봄을 인지한 탓이다. 북부 원정대는 이미 방금 전투가 일어난 장소를 빽빽이 둘러싼 상태였다. 사용자들이 도착했을 때는 거의 전투가 끝나가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넋을 잃고 괴조와 괴수의 전투를 지켜보았다. 사실 영역 다툼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괴물간의 싸움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그러나 처음 보는 괴물들의 피 튀기는 혈투는 사용자들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바로 두려움으로. 괴조를 잔인하게 박살낸 전투나 4미터를 넘기는 거대한 덩치의 위용, 그리고 온몸에서 핏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야만성 짙은 모습은, 사용자들의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형상이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괴수는 자신이 에워싸였음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저 씩씩 숨을 몰아 내쉴 뿐, 가만히 서 있기만 했으니까. 사용자들은 모두 무기를 장전한 채 총 사령관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유현은 입을 질끈 깨물었다. 얼른 공격 지시를 내려야 한다는, 저 괴수가 체력을 회복할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만 떠오르고 있다. 그냥 말 한 마디만 하거나 손만 한 번 저으면 해결될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알듯 말듯한 묘한 감이 정수리를 간질인다. 김수현이 건네준 정보와 지금도 자신을 쳐다보는 저 괴수의 붉디붉은 눈동자가 어우러져, 무언가 잡힐 듯 말듯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젠장.' 결국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르고 나서야 김유현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신호를 인지한 사용자들이 무기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김유현이 지체 않고 손을 내리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 크륵…! 순간, 괴수의 입에서 진한 신음이 흘러나온다. 그와 동시에 눈동자를 물들이던 시뻘건 빛이 삽시간에 옅어졌다. 한순간 정상으로 되돌아온 눈이 여느 인간과 같은 흰자위에 검은 눈동자를 보인다. 그리고 잠시 후. 갑작스럽게, 거대한 괴수의 몸이 힘없이 허물어진다. 쿠웅! 지면과 부딪친 몸은 육중한 소리를 내었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김유현의 입이 살며시 벌어졌다. * 때는 약 2달 전. 북 대륙에서 강철 산맥을 향한 화계 공략 계획이 시행되고 있을 무렵. 한 곳에 모여 앉아있는 악마들의 낯은 그리 좋은 빛을 띠고 있지는 못했다. 아니. - 화륵, 화르륵! - 와아아아…! 와아아아…! 오히려 영상에서 보이는 불길이 타오를수록, 흘러나오는 함성이 커질수록 더욱 안 좋아져만 갔다. 어느 악마는 눈을 감은 채 깊은 시름에 잠겨 있고, 또 어느 악마는 얼굴을 대놓고 와짝 찌푸리고 있다. 천사들의 본거지를 천계라고 부른다면, 악마들의 본거지는 대계라고 부른다. 그리고 바로 그 대계에서 홀 플레인에서 활동하는 악마들의 패배를 예언했다. 물론 아직 변화가 가능한 1차 예언에 불과하나, 지금껏 대계의 예언이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음을 감안하면 확실히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상황이 좋지 않음은 악마들도 알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이제 막 체감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사탄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설마 북 대륙이 저런 계획을 사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고, 그에 따라 애써 준비한 안배는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되면 사용자들이 강철 산맥을 공략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그러면? 강철 산맥이 공략돼버리면 아틀란타로의 길이 뚫리고, 아틀란타 다음에는 바로 테라가 나온다. 그리고 그 테라에는 악마나 그렇게나 염원하는 제로 코드가 잠들어 있다. 아무튼 상황을 정리해보면, 악마들은 정말 눈만 뜬 채 아무것도 못하고 제로 코드를 빼앗길 처지에 놓인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사탄을 탓할 생각은 못했다. 비록 사탄의 안배가 수포로 돌아갔다고는 하나, 다른 악마들도 딱히 할 말이 있는 입장은 아니었으니까. 침묵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북 대륙은 아무래도 힘들 것 같은데. 이제라도 다른 대륙으로 눈을 돌려봄은 어떻습니까?” 루시퍼의 의견이나. “그러지 말고. 차라리 우리 쪽으로 꼬셔보는 건 어때? 그 있잖아. 저번에 마몬을 살해한 인간.” 리리스의 의견이나. “그냥. 파괴. 죽여.” 바알의 의견 등등. 이렇게 간간이 의견이 나오고는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다른 악마들의 공감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물론 아주 나쁜 계획은 아니었으나, 작금의 상황은 빠른 진행을 필요로 한다. 헌데 시간을 최대한 아껴야만 하는 상황에서, 어느 정도 준비 과정이 필요한 계획들만 나오니 받아들여질 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저 처음 유리하다고 해서 여유를 부린 것을 후회할 뿐. “후.” 문득 사탄이 짧은 한숨을 흘리며 머리를 뒤로 젖혔다. 도저히 답이 안 보인다는 무언의 제스처. 그걸 본 다른 악마들은 새삼 발등에 불이 떨어진걸 느꼈다. 저런 사탄의 모습은 정말로, 정말로 드물게 보이는 모습이기에. 그때였다. “이이제이.” 지금껏 가만히 앉아있던 아스타로트가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그것도 뜻 모를 말을. “이이제이. 오랑캐로서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인간들이 자주 쓰는 말입니다만.” “맞아. 비슷한 말로는 독은 독으로 다스린다는 말이 있지.” 루시퍼가 아는 체하며 말을 받자 아스타로트는 그렇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우리 쉽게 생각해보자고.” “…….” “우선 상황 정리부터 해보면…. 북 대륙 인간 놈들이 강철 산맥을 공략한다. 하지만 우리는 최대한 그 시간을 지연시켰으면 좋겠다. 지금 대충 이런 상황이 아닌가?” “…….” 악마들은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두 말하면 잔소리였다. “좋아. 그러면….” 모두의 반응을 확인한 아스타로트는 곧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단순히 그 역할을 해낼 녀석이 필요하다면…. 뭐, 꼭 우리가 나설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그러자 바알의 얼굴이 멍하니 변하며 품고 있던 곰 인형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비단 바알만 그런 건 아니었으나, 앳된 소녀의 모습을 한 바알이 그러니 볼을 살포시 꼬집고 싶을 정도의 귀여움이 물씬 묻어났다. 아무튼, 우리가 나설 필요가 없다? 대 악마나, 악마 14군주나, 피조물인 마족들이 나설 필요가 없다? “그럼. 누가?” 바알이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악마들의 시선이 아스타로트에게 쏠렸다. 그리고. “그게 누구냐면….” 검지 하나를 핀 아스타로트는. “이 아래 있는 놈들.” 아래, 즉 땅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지옥이었다. ============================ 작품 후기 ============================ 원래 악마들에 관한 내용은 지금 나오면 안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조금 더 일찍 나왔어야 했죠. 아마 구덩이 공략이 끝났을 때가 적기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하지만 제 실수로 그때 넣지 못했고, 지금 넣어버렸네요. 사실 제 3공략과는 아주 영향이 없는 건 아니나, 내용 전체를 아우를 정도의 커다란 연관성이 있는 건 아니거든요. 그래도 더 늦기보다는 지금 넣는 게 좋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아마 다음 회 초반 부분에 상세한 설명이 이어지고, 이후 제 3공략이 끝날 때까지는 다시 악마들이 등장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오늘도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613 / 0933 ---------------------------------------------- 우리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 아스타로트가 땅을 가리켰다. 잠시간에 불과했지만 악마들은 멍멍해 보이는 기색을 비쳤다. 그러나 곧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하나같이 얼굴을 구겼다. 마치 말도 안 된다는 것처럼. “분노의 악마, 미쳤습니까? 저번에 그렇게나 당해놓고도….” 루시퍼가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어조로 물었다. 그러나 듣는 이의 입장에서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아스타로트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이것들이 진짜….” “그만. 다들 조용히 하지.” 그때였다. 지금껏 가만히 있던 사탄이 재빠르게 나서 소란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아직도 재생되는 영상을 꺼트린 후, 지그시 아스타로트를 응시했다. “우선…. 얘기라도 들어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사탄은 알고 있다. 아스타로트가 어떤 악마인지를. 자존심이 강하고 성질이 급하기는 하나, 그래도 아스타로트는 7대 악마의 1좌를 차지한 대 악마였다. 그런 만큼 '분노의 악마'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무의미한 행동을 보인 적이 없다. 물론 저번에 처참하게 실패한 '홀 플레인 내 지옥 정벌' 계획처럼 최악의 결과를 맞이한 사태도 있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예상외의 일. 아스타로트는 한때 다른 차원의 지옥을 호령하는 제후였고, 불에 관해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막강한 흑염(黑炎)을 소유한 악마다. 그런 악마가 불이 천지인 지옥에서 패배했다는 것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아무튼. “말해봐라. 아스타로트.” 양손을 깍지 낀 사탄이 경청하겠다는 자세를 잡자, 다른 악마들도 덩달아 태도를 고쳤다. 다른 악마도 아닌, 무려 사탄이 이렇게까지 나오자 아스타로트도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흐흠. 그럼 시작해볼까.” 이윽고 한두 번 헛기침을 한 아스타로트가 입을 열었다. “다들 알고는 있을 거야. 이 홀 플레인의 지옥을 다스리는, 지옥 대공이라는 자식을.” 들어는 봤다. 그러나 자세히는 모른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죽고 아스타로트는 꽁지 빠지게 도망쳐왔으니, 그냥 매우 강하다는 것 정도? “저번 정복 계획으로 들어가본 결과, 이 홀 플레인의 지옥에 관한 구조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지.” 아스타로트의 설명이 이어졌다. “간단히 말해보면 총 8개의 구간으로 이루어져 있거든? 쫄따구들이 돌아다니는 등활(等活) 지옥부터 시작해서 흑승(黑繩), 중합(衆合), 규환(叫喚), 대규환(大叫喚), 초열(焦熱), 대초열(大焦熱)…. 그리고 무간(無間) 지옥까지.” “아스타로트, 잠시만. 저번에는 어디까지 들어갔었지?” “초열 지옥.” “초열…. 6구간까지인가. 그럼 자기 마음대로 구간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말이로군.” 사탄의 물음에 아스타로트가 머리를 끄덕였다. 확신은 못하지만 정황상 그럴 것이라 추측한 것이다. “우선 내 계획의 첫 번째는, 제 1구간인 등활 지옥을 점령하는 것부터 시작….” “설명, 짜증. 결론, 빨리.” 그렇게 차분히 말을 이어가던 와중, 바알이 아스타로트를 무심히 흘기며 볼을 부풀렸다. 그러자 혀를 찬 아스타로트가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루시퍼라면 몰라도 '잔혹한 파괴자'이자 '동쪽의 왕'이라 불리는 바알은, 사탄 다음으로 쳐주는 2인자나 다름없는 악마였다. “좋아. 그럼 거두절미하고 말하마. 내 말은 무간 구간에 있는 지옥 대공을 어떻게든 등활 구간까지 끌어내서, 지옥에서 없애버리자는 거야.” 비로소 계획의 요지가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열심히 듣고 있던 악마들은 각양각색의 기색을 비쳤다. “지옥에서, 지옥 대공을 없애자고…? 그럼 아예 죽이자는 소리야?” 리리스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말하자 아스타로트는 대놓고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는 또 무슨 헛소리야? 그 자식을 어떻게 죽여?” “아니 네가…!” “지금 한창 구간 얘기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받아들이냐.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지옥 대공은 못 죽여. 특히 그 자식 홈 그라운드에서는 더더욱.” “뭐, 뭐?” “아니 아니, 취소. 못 죽일 정도는 아니지…. 음~. 아마 나랑 사탄, 루시퍼, 바알이 한꺼번에 붙으면 어느 정도 해볼 만은 할 거야. 지옥은 중간계와는 달리 힘의 제한을 받지 않으니까.” “…….” 아스타로트가 한껏 무시하는 어조로 말했으나 리리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화낼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이다. 4명의 대 악마가 달려들어야 해볼 만하다? 그것도 모든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상태서? 아스타로트가 평가한 지옥 대공은, 그 정도로 악마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선사해주었다. '설마….'라고 말하기에는, 악마들 또한 어지간해서는 굽히지 않는 아스타로트의 자존심을 알고 있다. “조용히.” 그때 이번에도 낮은 목소리가 주변을 가라앉혔다. 사탄 또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지금 중요한 건 계획의 성사 여부. 사탄은 그 점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말하는 없앤다는 뜻은, 하나의 계(界) 차원에서의 의미인가?” “맞아.” “그럼 아까 말한 등활 지옥을 점령한다는 말은, 바로 그 준비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겠군.” “바로 그거야! 역시, 너라면 알아줄 줄 알았지.” 짝짝, 아스타로트가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무언가 걸리는 게 있는 걸까? 사탄은 상당히 탐탁잖은 얼굴을 보였다. “으음.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리고 깊이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이더니 머리를 절레절레 젓는다. “물론 현 상황에서 어느 정도 리스크는 감수해야겠지. …하지만 그걸 참작하고서라도, 네 계획에는 커다란 허점이 있다. 아스타로트.” 지옥으로의 진출이 불가능한 건 아니다. 차원을 뚫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같은 세상 내, 그리고 예전에도 한 번 뚫은 전력이 있는 만큼, 우선 여기까지는 가능한 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바로 그 다음부터였다. “과연 지옥 대공이…. 네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일까?” 대 악마 4명이 붙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지옥 대공. 그 정도의 존재가, 다른 차원도 아닌 관할 차원 내에서 벌이는 일을 눈치 못 챌 것 같으냐는 의미였다. “무간에서 등활 까지는 총 7구간을 거쳐야 하지. 그런데 그 지옥 대공이, 우리가 준비한 지역까지 순순히 오리라는 보장이 있느냐는 말이다.” “흐흐흐. 그렇지.” 그 순간 사탄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계획의 맹점을 짚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스타로트의 눈동자는 여전히 자신감을 보이고 있었다. 사탄은 조금 더 들어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아스타로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들어봐. 놈은 우리를 먹이로 생각하고 있거든?” “그건 네 생각….” “아니 아니. 이건 내가 예전에 지옥 정벌 때 알아낸 사실인데 말이야…. 지옥 대공은, 불이라는 것에 상당한 집착증을 가지고 있다고. 즉 탐욕이라고나 할까?” “불에?” “그래. 너희 메피스토펠레스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나?” “…….” 당연히 모른다. 그 광경을 직접 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여기에는 지옥 대공과 직접 대면하고, 부하의 최후를 목격한 악마가 있다. “먹혔다.” “…먹혔다고?” “그래. 지옥 대공은, 말 그대로 메피스토펠레스를 잡아먹었어. 단지, 자신과 같은 불의 힘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 말이야.”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메피스토펠레스를 잡아먹고 나서, 그 자식이 이렇게 말했거든. …흐응. 제법 기대했건만, 썩 괜찮은 불은 아니로구나.” “…….” “또 나를 보며 이렇게 말하더군. 너는, 내 기대에 부응해줄 수 있겠느냐? …그리고서 정말 죽어라 쫓아오더라고.” “…하.” 누군가 탄식을 터뜨렸다. 딱히 슬픈 건 아니었으나, 같은 존재가 한낱 먹이로 전락했다는 사실이 썩 기분 좋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정적이 흘렀다. 잠시 말을 멈춘 아스타로트가 주섬주섬 연초 하나를 꺼내는 동안, 사탄이 입맛을 다셨다. “그러니까…. 네 말은 미끼를 걸겠다는 소린가.” 막 연초를 입에 문 아스타로트가, 그렇다는 듯이 끄덕끄덕 머리를 주억인다. 아스타로트가 동의하자 다른 악마들이 서로를 번갈아 보며 웅성거렸다. 미끼로 꾀어내겠다는 말까지는 이해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문제가 없는 게 아니다. 지금은 좋은 영양분이 된 메피스토펠레스의 이명은 '미친 불꽃'. 악마 14군주 중에서도 첫손으로 꼽을 수 있는, 강력하기 그지없는 악마였다. 말인즉, 지옥 대공의 관심을 끌려면 최소한 그 정도는 되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러면 누가? 과연 누가 그 미끼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나, 나는 불을 다룰 수 없는데….” 리리스가 스리슬쩍 시선을 돌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사탄을 바라본 순간, 두 눈이 돌연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사탄은 어느새 무서운 눈빛으로 맞은편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탄이 입을 열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후욱, 그럼. 이게 농담처럼 보이나?” 칼날 같은 물음에, 연기를 내뿜고는 낄낄거리며 회답한다. 리리스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건너편을 향했다. 그리고, 리리스는. “여기….” 아까 땅을 가리키던 아스타로트의 검지가. “최고의 미끼가 있잖아?” 이번에는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다음날.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조용한 아침이었다. 아니, 조용하다는 말은 어폐가 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조용하기는 했으나, 북부 원정대에는 야영지 전체를 아우를 정도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으니까. 아직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사용자들은 사방에서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다. 그 경계의 중앙에는, 온몸이 꽁꽁 묶인 거대한 인간형 괴수가 기둥에 칭칭 감긴 채 앉아 있었다. “저 괴물, 죽이지 않을 건가?” 문득 김유현 옆에 서 있던 공찬호가 머리를 돌리며 물었다.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오늘은 진군하지 않을 셈인가?” “생각 중이다.” “생각 중? 이봐, 뇌제. 설마 진군을 하게 되면, 저놈을 나보고 들고 가라는 소리는 안 하겠지?” “…….” “아니. 다들 궁금해하고 있다고. 잡아온 것까지는 좋아. 그런데 내 말은, 왜 계속 가만히만 있냐 이거야.” “…후유. 어제 말하지 않았나?” 공찬호가 계속 불만이 가득한 투로 말하자, 김유현은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 두 괴물간의 격렬한 전투가 끝난 후 승리한 괴수는 그대로 쓰러져 기절해버렸다.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그저 온몸에 입은 심한 상처가 원인이라 추측할 뿐. 어쨌든 북부 원정대는 손대지 않고 코 푼 셈이었고, 김유현은 전투가 벌어진 장소를 수습할 것을 지시했다. 거기서 확보한 괴물은 총 4마리. 공룡 시체 하나, 괴조 시체 하나, 아기 괴조 하나, 그리고 기절한 괴수 하나. 사실 북부 원정대 모두가 공찬호 같은 마음은 아니었다. 오히려 시체를 가져온 김유현의 결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탐험이나 원정이나, 공략의 첫걸음은 출현하는 괴물의 샘플을 확보하는 것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와는 별개로, 아직 조사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궁금해하고 있었지만. 잠시 후. 괴수와 괴조를, 그리고 공룡 시체를 한 번씩 가리킨 김유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생각해봐. 저 괴물들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차이? 글쎄. 생긴 거?” “…….” “…왜 그렇게 나를 쳐다보나?” 공찬호가 멀뚱멀뚱한 얼굴로 말했다. '참자, 참자, 참자. 우리 수현이는 최고.' 동생을 떠올리며 간신히 속을 가라앉힌 김유현은, 곧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겉모습을 말하는 게 아니다. 바로 선공, 그리고 비 선공으로 나눌 수 있지.” “그게 무슨 차이가 있는데?” “있지. 아주 큰 차이가 있지. 어제 상황을 떠올려…. 아니. 간단히 말하면 괜히 자극할 필요가 없다 이거야.” “엉?” 공찬호가 반문했다. 김유현은 돌연 오소소 소름이 돋는걸 느꼈다. 만일 북부가 서부와 동맹을 맺지 않고 그저 공찬호만을 내세운 채 들어갔다면, 과연 어떤 결과를 맞이했을지 가히 짐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장담컨대, 사흘 안으로 전멸했을 것이다. 김유현은 또다시 동생을 떠올렸다. '제 3지역은 괴물들의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지. 그런 만큼 영역 다툼이 굉장히 심하게 일어나.' '보이는 수가 적다고 얼씨구나 달려들지 마. 기본적으로 태반이 무리 지어 생활하는 놈들이니까.' '그뿐만이 아니라고. 지성을 갖고 있는 놈들이, 거인만 있는 게 아니야.' '명심해. 형이 해야 할 건 정복이 아닌, 그냥 길만 트는 거. 즉 그 거인 놈들만 상대하면 된다는 거야. 괜히 다른데 들쑤셨다가….' 이 정보를 어떻게 말해줄까, 잠시 생각을 정리한 김유현이 거인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우선은 저놈하고는 대화를 해볼 생각이다.” “엥? 대화?” “응.” “하! 정말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일단 보이는 모습이 우리랑 비슷하니까. …왜. 시도해보는 것도 안되나?” “시도라. 좋지. 그래, 백 번 양보해서 저놈이 지성이 있다고 가정해보자고. …어이. 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나?” 공찬호가 느물거리며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차마 '응. 우리 수현이가 말할 수 있다고 하던데?' 라고 할 수는 없어, 김유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오호. 고어를 익힌 사용자와 번역 마법이 있다는 사실이 이리도 놀라운 일이었나?” “…….” 공찬호는 단박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떨떠름한 기색을 보이더니 이번에는 왼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끼앵…. 끼애앵…. 전신이 박살 난 괴조의 시체와, 쉰 목소리로 빽빽 울고 있는 아기 괴조가 보인다. 간밤에 잠을 설친 게 기억났는지 공찬호의 눈이 한껏 가늘어졌다. “그러면, 저놈하고도 대화를 할 생각인가?”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크게 기대하기는 어렵지. 하지만 저놈들이라고 지성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잖아?” “으음.” “봐봐. 저 새끼 괴조가 왜 저렇게 울고 있겠어? 그것도 시체 바로 옆에서?” “죽은 놈이 지 부모라서 그렇겠지.” “그럴 가능성이 높지. 그럼 바꾸어 생각해보자고. 만일 누가 네 동료를 죽이고 시체를 맘대로 훼손시켰다면, 기분이 어떻겠어?” “당연히 죽여버리고…. 아.” “그래. 이제 알겠나? 새끼라는 존재를 확인했는데, 이 지역에 저런 종류의 괴물이 두 놈만 있을 리가 없잖아.” 아무 생각 없이 말하던 공찬호는 순간 약한 탄성을 질렀다. 이제야 김유현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은 것이다. “하, 하지만 동족 놈들이 그 사실을 알아줄까?” “모르지. 그래서 저 괴조 새끼랑 저 거인이 필요한 거고. 두 종간의 사이가 안 좋다면, 그리고 각자 의사 소통할 수 있는 체계가 있다면. 그렇다면 한 가닥 기대를 걸어볼 만한 여지는 있겠지.” “그럼 그냥 차라리 놔두고 오는 게….” “안 돼. 아예 모르고 지나쳤다면 모를까, 주변 장소에 흔적을 남긴 이상 어쩔 수 없어. 지금은 이러는 게 최선이야.” 이번에는 공찬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김유현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나자, 비로소 북부 원정대가 어떤 상황에 직면했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경외심이 드는걸 느꼈다. 공찬호 자신은 그냥 무조건 죽이고 싸우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유현은 북부 원정대만이 아닌 외부 상황마저 염두에 두고 대응하고 있다. 아직 지휘 경험이 일천한 공찬호로서는 정말 굉장하다고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대단하군.” “그럼, 총 사령관 권한을 괜히 이양 받은 줄 알았나?” “어련하시겠어.”라고 중얼거린 공찬호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여전히 머리를 떨군 거인과 빽빽 울고 있는 괴조를 한 번씩 보더니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김유현이 공찬호의 등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늦어도 점심 전까지는 결정을 내릴 거니까,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예이, 예이.” 이내 저 멀리 사라지는 공찬호를 보다가, 김유현은 도로 앞쪽을 바라보며 가만히 상념에 잠겼다. - 끼액! 그러다 문득, 아기 괴조의 찢어지는 괴성이 귓전을 울렸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자, 양손에 음식과 물을 든 채 천천히 다가가는 여인과, 갑자기 날개를 활짝 펼치며 경계하는 아기 괴조가 보였다. “진하야? 뭐해?” “아. 음식이랑 물 좀 먹이려고요.” 천천히 다가가던 여인, 아니 백진하가 김유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새벽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다며?” “그래도요. 불쌍하잖아요. 이제 목소리도 잔뜩 쉬었는데….” 워낙 동물을 좋아하는 백진하로서는 주구장창 울어 젖히는 아기 괴조를 두고 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뭐, 해보던가.” 김유현이 마음대로 하라는 양 어깨를 들먹이자, 백진하는 차분히 무릎을 꿇어앉고는 음식 그릇과 물그릇을 밀어주었다. 당연하게도, 아기 괴조는 주춤주춤 물러나며 더욱 크게 으르렁거렸다. “이상한 거 아니니까 걱정 말고 먹으렴. 이거 봐라? 언니도 먹는다? 냠냠.” - 끼액! “…정말, 어쩌려고 이러니? 먹고 또 힘내서 울면 되잖아?” - 끼액! 마치 개소리 말라는 듯이 아기 괴조가 소리쳤다. 이내 두어 번 혀를 찬 백진하가 자그마한 빵 조각 하나를 집은 채 서서히 다가갔다. 아기 괴조는 아기자기한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했지만, 오히려 백진하의 움직임을 더욱 재촉할 뿐이었다. “아이, 우리 아가. 입도 잘 벌리네.” 그렇게 약간의 거리를 남겨둔 백진하는 주둥이를 휘휘 내젓는 아기 괴조를 향해 손을 놀렸다. 그러자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날아간 빵 조각은, 정확히 주둥이 안으로 쏙 들어갔다. 백진하가 불끈 주먹을 쥐었다. 그러나. - 퉤! 아기 괴조는 굉장히 불쾌하다는 얼굴로 빵 조각을 뱉었다. 백진하의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이 녀석! 누가 뱉으랬어!” 그리고는 새로 빵 조각을 집어 들어, 다시금 입안으로 던져 넣는다. 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 퉤에! “뱉지 말고 빨리 삼켜!” - 퉤에에! “…너.” 백진하는 던지고 아기 괴조는 뱉는다.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는 광경을 보며 김유현은 쓰게 웃었다. 그리고 동생인 김수현을 생각했다. 기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저게 당연한 일이다. 야생에서 자라난 괴물은 본능적으로 인간을 경계한다. 그러나 어디나 예외는 있으니, 바로 김수현이 그 예외의 절정이었다. '만약 수현이가 있었다면….' 아마 저 아기 괴조도 좋다고 달려들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한 김유현이 살며시 입꼬리를 끌어올린 찰나였다. “총 사령관님!” 돌연히, 어디선가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한 사내가 헐레벌떡 달려와 김유현 앞에 멈춰 섰다. “서, 서쪽을 돌던 경계조에서 대규모 움직임을 감지했다고 합니다!” 김유현은 곧바로 얼굴을 굳히고 사내가 달려온 방향을 응시했다. “서쪽, 그리고 대규모라고요?” “예, 예! 어떻게 할까요?” “경계조는 모두 물러나라고 하세요. 사용자들은 제가 서 있는 장소를 중심으로, 신속하게 진형을 갖춥니다.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김유현의 망설임 없는 지시가 믿음직스러운 걸까? 사내의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곧바로 몸을 돌려 달려온 방향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진하야. 이제 그만 괴롭혀라.” “아이, 클랜 로드는. 제가 무슨…. …네.” 김유현의 얼굴을 확인한 백진하는 군소리 않고 물러나 어딘가로 뛰어갔다.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야영지 안이 부산스럽게 변했다. 조금 느슨하게 풀려가던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김유현 또한 서서히 기분이 가라앉는걸 느끼며 서쪽을 응시했다. '과연 어느 놈들일지 궁금하군.' 어제 전멸 시킨 공룡 괴물들의 복수일까? 아니면 거인이나 괴조의 동족일까? 그것도 아니면, 새로운 괴물의 출현? 해답은,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 끼루루루루루루룩! 갑작스럽게 익숙한 괴성이 들려오며, 서쪽 숲이 흔들릴 정도의 엄청난 바람이 일었다. 펄럭, 펄럭, 펄럭, 펄럭! 펄럭, 펄럭, 펄럭, 펄럭! 그와 동시에, 커다란 무언가가 느닷없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그 무언가는 하나가 아니었다. 마치 어둠이 하늘을 뒤덮듯이 수십, 아니 수백 개의 검은 그림자가 날갯짓하며 떠올라 하늘을 빽빽이 가렸다. “괴, 괴조 떼다! 괴조 떼가 나타났다!” 누군가가 하늘을 가리키며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한층 소란이 심해지는 가운데, 오직 김유현만이 흔들림 없는 눈으로 하늘을 응시했다. ============================ 작품 후기 ============================ 휴. 간신히 1시에 세이프했군요. 이번에 3지역에 출현하는 여러 괴물들에게는, 각각 재미있는 설정을 짜서 넣어봤습니다. 독자 분들도 재미있게 느껴주셨으면 좋겠네요. :) 그럼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편안한 밤 보내세요. _(__)_ 0614 / 0933 ---------------------------------------------- 우리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 『회상(Reminiscence).』 “…여기서 재미있는 건, 바로 놈들의 성격이야.” 한창 거인들에 관한 설명을 잇던 김수현이 갑자기 성격이라는 주제로 화제를 돌렸다. “성격?” 열심히 깃펜을 놀리던 김유현은 언뜻 머리를 들며 반문했다. “그래. 성격.” 한 차례 머리를 끄덕인 김수현은 습관적으로 품을 뒤져 연초 한 대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김유현의 눈매가 자동적으로 가늘어지며 엄한 빛을 띠었다. 이내 김수현이 시무룩이 연초를 집어넣자 봄바람 같은 미소가 도로 자리잡는다. “그래서, 성격이 어떤데?” 김수현이 헛기침을 했다. “흐흠. 글쎄. 우직하지만 순박하다고 해야 할까?” “우직하지만, 순박하다?” “응. 어리석고 고지식한 면은 있지만, 한편으로는 거짓이나 꾸밈없이 순수한 면도 있어. 나름대로 의리도 있고, 또 인정도 두터운 편이고. 사실 마음 같아서는 동료로 삼고 싶을 정도야.” “오호. 동료라.” 열심히 귀 기울여 듣던 김유현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혹시 그런 사례가 있었어? 아, 물론 1회 차에서.” “아니. 안타깝지만 없었어.” 약간 기대하는 목소리로 물었으나 김수현은 단박에 머리를 가로저었다. 김유현은 “에이, 그럼 그렇지.”라고 중얼거리고는 계속 말해보라는 제스처를 보냈다. 김수현의 말이 이어졌다. “아까도 말했지만 거인들은 상당한 지성을 가진 놈들이야. 그 지랄 맞은 강철 산맥 제 3지역에 터전을 잡고, 하나의 부족 사회를 이루었을 정도니까. 물론 그만한 힘과 타고난 기량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아마 순수 전사로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전투 종족일걸?” “흐음. 가장 완벽한 전투 종족이라….” 잠깐 받아 적는걸 멈춘 김유현이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간이 탁자에는 이미 빽빽이 적힌 기록 열댓 장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김유현은 기록을 하나하나 들추다가, 거인의 신체적 특징에 관한 부분이 나오자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거인들은 천성적으로 전투라는 관념 자체를 숭배하는 종족이다. 거의 싸움을 즐기는 수준. 덩치는 최소 5미터에 근력은 말할 것도 없고, 피에는 강력한 마법 저항이 흐르고, 감각도 예민하며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순발력…. 어휴. 진짜 전투 종족 맞네 뭐.” 소리 내어 읽던 김유현이 질렸다는 기색을 보이며 머리를 설레설레 젓자 김수현이 가볍게 웃었다. “후후. 아무튼, 뭔가 이상하지 않아?” “응? 이상하다니?” “생각해봐. 비록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축복은 받지 못했지만, 반대급부로 정말 완벽한 신체 조건을 갖췄지. 또한 전투를 숭배하고 싸움을 즐겨. 그래서 사용자들이 거인들을 보고 전투 종족이라 일컬은 거고.” “그런데?” “그러할진대, 성격은 순박하고 우직하다…. 어때, 이 두 설명의 차이점을 못 느끼겠어?” “…글쎄? 타 종족에 배타적인 태도를 가졌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김유현은 잘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들먹이며 말했다. 사실상 정론이기도 했다. 그러나 쯧쯧 혀를 찬 김수현은 그게 아니라는 듯 검지를 까딱까딱 흔들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아니야.” “아니야?” “아주 틀린 건 아니지만, 더 확실한 이유가 있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네가 말한 설명의 간극을 뒷받침하는 근거?” “그렇지.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잘 들어. 이건 강철 산맥 공략이 끝나고, 누군가 아틀란타 내 비밀 도서관을 발견했을 때 드러난 사실인데 말이야.” “오호. 비밀 도서관이라.” 형을 도와준다는 사실이 그렇게나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거기서 거인들의 기원과 관련된 아주 재미있는 기록이 나왔거든?” 김수현은 드물게도 진정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화색이 가득하고 신이 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클랜원들은 물론, 한소영한테도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태도였다. 형도 동생이 좋아하는 기색을 느낀 걸까? 김유현은 양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리고 “궁금하지?”라고 말하는 김수현을 보며 흐뭇해 보이는 미소를 머금었다. “응, 궁금해. 어서 말해봐.” * 가히 수백은 넘어 보이는 괴조들이 일제히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유난히 커다란 몸집을 가진 괴조 한 마리가 선두로 치솟고, 상대적으로 1, 2미터는 작은 비슷비슷한 괴조들이 쫓아 오르는 형태였다. 하늘이 가려지고 어두운 그림자들이 드리워진다. 이 상상을 초월하는 광경에 사용자들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돌연 맨 앞에 있던 괴조가 주둥이를 크게 벌렸다. - 크롸롸롸롸롸롸롸! 하늘을 찢어발길 듯한 포효가 사방을 떠르르 떨쳐 울린다. 어제 들었던 괴성과는 사뭇 다르다. 김유현은 저 괴조가 무리의 우두머리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척 봐도 심상치가 않다. 크기도 크기지만, 괴성에 담긴 웅혼한 영력은 여느 짐승이 낼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더구나 상앗빛을 띠는 다른 괴조들과는 달리, 유독 홀로 은은한 푸른빛을 흘리고 있다. 아마 최소 수백 년 이상은 살아온, 그리하여 모종의 기이한 힘을 지니게 된 영물이리라. 그렇다면, 정말로 어쩌면 대화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김유현이 음성 증폭 마법을 활성화한 채 있는 힘껏 외쳤다. - 모두! 내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절대로 대응하지 마라! 마력이 충만이 담긴 목소리가 하늘 멀리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를 들은 걸까? 계속해서 메아리 치던 괴조의 포효가 갑자기 뚝 그쳤다. 이윽고, 어느 정도 거리에 이른 우두머리가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그대로 지면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쪽의 괴조들도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낙하를 시도한다. 목표는 야영지, 김유현의 건너편. 괴조 수백 마리가 모조리 강하하는 광경은 한 폭의 그림이라 봐도 좋을 정도로 장관이었다.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은 괴조들이 무서운 기세로 한꺼번에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콰콰쾅, 콰콰콰쾅! 마침내 지면에 착지한 순간, 한 번의 간격을 두고 엄청난 흙먼지와 충격파가 불어 닥쳤다. “크으으윽!” “으아아악!” 땅이 크게 흔들리고 태풍과도 같은 바람이 사용자들을 휩쓸었다.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나동그라지는 사용자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잠시 후. 펄럭, 펄럭! 고오오오…. 고오오오…. 크게 일어났던 흙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을 즈음, 괴조 군단이 비로소 그 웅장한 위용을 드러내었다. - 키르르르르륵…. - 끼르르르르륵…. 나직한 으르렁거림, 날카로운 빛을 반사하는 이빨, 지면을 깊게 파고든 발톱, 그리고 흉흉하게 쏘아보는 눈동자…. 날개를 차곡차곡 접는 괴조들이 사용자들을 향해 명백한 적의를 내뿜는다. 그 중 못해도 5미터는 돼 보이는 우두머리 괴조가 가장 심한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으윽….” 간신히 정신을 차린 궁수는 어느새 손이 덜덜 떨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서히 오금이 저려오는걸 느꼈으나, 꿀꺽 침을 삼키고는 시위를 당긴 손에 억지로 힘을 준다. 아직, 김유현의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밀려나면 안 된다.' 강철 산맥은 원래 괴물들의 터전이다. 공략이라는 목적이 있다고는 하나, 어쨌든 안으로 들어온 이상 사용자들도 산맥 내 구축된 시스템을 받아들여야 한다. 말인즉, 약육강식(弱肉强食). 여기서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저 괴조들은 차후 사용자들을 일종의 먹이로 여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김유현은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파지지직, 파지지직! 두 눈이 삽시간에 황금빛으로 물듦과 동시에 전신으로 노란빛 스파크가 어지럽게 일어난다. 무시무시한 기운이 번개처럼 뻗어나가며 사용자들을 향하는 적의에 대응한다. - 키륵? 그제야, 괴조들 사이로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맹목적으로 보내던 적의가 한풀 꺾이며 일부가 주춤주춤 물러난다. 사용자들이 우두머리 괴조를 보고 놀란 것처럼, 괴조들 또한 김유현의 기세를 느끼고 크게 놀란 것이다. 한 차례 공방을 주고받은 두 무리는 서로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숨 쉬는 소리는 제외하고는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렇게 일촉즉발이 대치 상황이 이어지며 침묵이 내려앉으려는 찰나였다. - 끼요오오! 문득, 이런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앙증맞은 울음이 들려왔다. 사용자들은 물론, 괴조들의 시선도 한쪽으로 쏠렸다. 아기 괴조가 종종 걸음으로 파닥파닥 뛰어가고 있었다. 동족이 온 것을 확인한 것이다. “이, 이런!” “그냥 보내세요!” 누군가 황급히 아기 괴조를 잡으려 했지만 김유현이 재빠르게 제지했다. 뇌신의 기운을 일으킨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는 먹이가 아니라는걸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헌데 지금 저 아기 괴조를 인질로 잡아버리면, 그건 대놓고 전쟁하자는 말과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그러자 우두머리 괴조가 사용자들을 쭉 훑어보고는, 앞으로 살짝 나가 달려오는 아기 괴조를 맞이해주었다. - 끼요! 끼요끼요! 끼요오오오오오오! 무에 그리 서러운지, 아기 괴조는 다다르자마자 서러운 소리로 울어 젖혔다. 무언가 고자질이라도 하듯이 쉴 새 없이 주둥이를 놀리며 양 날개를 팔락팔락 움직인다. 허나 이러한 상황에서 그 누가 아기 괴조를 보며 귀엽다는 생각을 할까? 차라리 백진하처럼 노심초사하며 떨면 떨었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생각보다 길게 이어지던 아기 괴조의 울음이 서서히 그쳐갈 무렵,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던 우두머리가 흘끗 김유현을 흘겼다. 그리고는 끔찍하게 박살 난 동족의 시체와 공룡 괴물의 시체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크르릉, 낮은 소리로 울었다. 김유현의 뇌리에 한 생각이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모두 열 걸음 뒤로 물러납니다.” 사용자들도 어느 정도 눈치는 있다.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읽은 터라, 군소리 않고 걸음을 물렸다. 오직 김유현만이 가만히 서 있을 뿐. 사용자들이 조용히 물러서자, 괴조들이 비로소 움직임을 보였다. 우두머리 괴조와 서너 마리 괴조들이 추가로 걸어 나와 신속하게 시체를 수습한다. 물론 수거한 건, 동족의 시체 뿐이었다. 꽝! 거센 진동이 사용자들의 귓전을 울렸다. 다른 괴조들이 시체를 물고 돌아가는 사이, 우두머리가 이미 죽은 공룡의 시체를 거칠게 밟아버린 것이다. 이윽고 괴조가 육중한 발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고개를 빠끔히 올린 사용자들은 납작이 눌리다 못해 곤죽이 돼버린 공룡의 시체를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두 시체를 처리한 우두머리는 이번에는 기둥에 꽁꽁 묶인 거인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거인을 노려보는 두 눈에서,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살기가 폭사하듯이 흘러나온다. 마치 철천지원수를 보는 듯한 눈초리였다. 그때, 지금껏 가만히 상황을 관망하던 김유현이 드디어 걸음을 움직였다. - 크륵? 그러자 살기를 풀풀 날리며 터벅터벅 걸어가던 우두머리의 두 발이 우뚝 정지했다. 김유현은 전혀 아랑곳 않고 천천한 걸음으로 괴조와 거인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느릿하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기 괴조나 방금 두 시체는 넘길 수 있지만, 거인은 넘길 수 없다는 의미였다. - 크르르르…. 한껏 가늘어진 괴조의 눈이 김유현을 집중적으로 노려본다. 김유현도 지지 않고 맞섰다. 한 순간. 아주 살짝 풀린 것 같던 긴장이, 각 우두머리가 대치한 중앙을 기점으로 팽팽하게 되살아나 사용자들의 목을 옥죄어 온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한참 동안 김유현을 노려보던 괴조가 돌연 살그머니 주둥이를 열었다. 그 순간이었다. - 인간은…. 꽤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 김유현은 순간적으로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어떠한 전조도 없었다. 그저 무척이나 갑작스럽게, 김유현의 머릿속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저음이 웅혼하게 울렸을 뿐. 비록 진동을 동반한 음성이라 아주 명확하게 들려온 건 아니었으나, 확실한 건 조금 전 괴조가 분명한 '의사'를 전달했다는 것. - 내 구역에서 보는 건 거의 800년 만인가…. 물론 영물의 출현이나 존재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알고만 있을 때와 직접 대면했을 때와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다. 그나마 어느 정도 정보를 알고 있는 김유현이었기에,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정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 말해라, 인간. 이 숲에는 무슨 일로 들어온 거지? 이제야 정복이라도 하러 들어온 건가? 김유현은 여기서 말을 잘 골라야 함을 느꼈다. 왜냐하면 김수현이 신신당부했으니까. 쓸데없는 적을 만들지 말라고. 무조건 거인만 상대하라고. 그렇다면. “아닙니다.” - 아니다? 반문하는 의사가 울려옴과 동시에 사용자들 사이로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괴조가 상대의 머릿속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것에 반해, 김유현은 직접 일을 열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김유현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가 원하는 건 숲의 정복이 아닙니다. 그저 다른 대륙으로 가려는 길을 트려고 왔을 뿐입니다.” - 길을 트려고 왔다? “예. 남쪽 방향으로 진군하는 중이었습니다.” - 남쪽 방향이라면…. 괴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김유현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살짝 눈매를 찌그러트렸다. - 설마…. 그 저주받은 산맥의 지배자들한테 도전하겠다는 건가? “…저주? 산맥의 지배자?” - 모르는 건가? 저놈 말이다. “저놈이라면….” 김유현의 의아한 낯빛을 비추자 괴조가 주둥이 끝으로 기둥을 가리켰다. 김유현의 얼굴에 아차 한 빛이 떠올랐다. “모릅니다. 어제 처음 존재를 확인했거니와, 그냥 거인 정도로만 알고 있으니까요.” - …….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씀 드리지만.” - 알고 있다. 너희 인간들이 우리 동족을 해치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괴조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의사를 전달했다. 김유현은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예. 하지만 그것 말고도 우리는 저 거인이 필요합니다.” - ……. “복수의 명분은 이해하지만…. 저 거인이 우리가 가려는 방향을 가로막은 종족이라면, 지금 포획한 거인을 통해 정보를 얻어야만 합니다.” - 흐음…. 사실 딱히 그렇다기 보다는, 괴조 군단을 상대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꺼낸 말이었다. - 재미있군…. 수백 년 만에 들어온 인간이, 수천 년 동안,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한 산맥의 지배자들한테 도전장을 내민다고…. 약간 벌어진 괴조의 입에서 마치 피리를 불듯이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시퍼렇게 빛나는 눈이 여전히 황금빛 스파크를 튀기는 김유현의 전신을 샅샅이 훑는다. 다시 한 번, 기나긴 정적이 흘렀다. - …좋다. 그리고 오랜 정적을 깨고 전달된 괴조의 의사는 다름 아닌 승낙이었다. - 사실 너희의 목적은 우리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이거니와, 앞선 두 번의 호의를 봐서 우선은 물러나 주도록 하지. 적어도 한 번 지켜볼 가치는 있겠어. “그러면…!” - 하지만, 이번 기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고하도록 하마. “음?” - 예전에도 그래왔듯이…. 우리는, 인간들을 믿지 않는다. “…….” 우리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 그러한 의사를 전달한 괴조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려 키루루룩 울어 젖혔다. 그러자 아까 내려올 때 그랬던 것처럼, 일제히 날개를 펼친 괴조 군단이 힘찬 날갯짓을 하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이내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수백의 괴조를, 김유현은 약간 멍해 보이는 눈으로 하염없이 응시했다. 잠시 후. “클랜 로드….” 백진하가 비틀거리듯이 다가와 김유현의 어깨를 건드렸다. 안색이 하얗게 변한 게 마음 고생이 꽤나 심했던 모양이다. “후유…. 이제 괜찮아. 잘 끝났어.” 김유현은 지체 않고 마력을 풀어버리고는 깊은 한숨을 흘리며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러나 백진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김유현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게 아니라….” “응?” “아무래도 서서히 깨어나려는 것 같아요.” “깨어나려는 것 같다고?” 이어지는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김유현이 무슨 말이냐는 듯이 반문했다. 그러자 백진하가 옆으로 힐끔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들어 기둥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거인이요.” ============================ 작품 후기 ============================ 퇴고에 시간이 예상외로 많이 걸렸습니다. 죄송합니다. _(__)_ 오늘 한소영 일러스트를 그려주시기로 한 분과 만남 약속을 잡았습니다. 비비앙 일러스트는, 현재 일러스트레이터 분과 접촉 단계에 있습니다. 약간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겼는데, 예전에 그려주시던 분이 현재 일본에 계신 걸로 알고 있어서요. 그러면 계약서를 작성하는데 애로사항이 생겨서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PS. 다음 회에서는 김수현의 시점이 일부 돌아옵니다. 0615 / 0933 ---------------------------------------------- Night Of Beginning. 남부 요새를 떠날 때 중천에 걸려있던 해는,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서쪽으로 넘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쨍쨍하던 햇살이 사그라지고, 이제는 짙은 황혼을 머금은 산맥의 수풀들이 각양각색으로 어우러져 절경을 펼쳐내고 있다. 이따금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은 마치 소풍이라도 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으나, 사실 절대로 해서는 안될 생각이다. 오늘이 행군하기 좋은 날씨라는 건 부인할 수 없으나, 다르게 생각해보면 괴물들 입장에서도 활동하기 딱 좋은 날이니까. 긴장의 끈을 풀지 않은 채, 나는 요새를 나온 이후 남쪽 방향으로 천천히 직진하며 클랜원들을 이끌었다. 아니, 사실상 앞서 지나간 북부 원정대의 이동 경로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고나 할까? 물론 마음 같아서는 지속적인 강행으로 얼른 따라잡고는 싶다. 그러나 이번 임무는 어디까지나 들키지 않는 것을 전제하며, 한편으로는 클랜원들의 상태도 고려해야만 했다. 탐험이나 원정이나, 공략이 끝나고 난 이후 찾아오는 피로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1달에 걸쳐 탐험을 다녀왔다고 가정해보면 넉넉잡아서 3달, 최소 2달이라는 재정비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할진대, 편안한 클랜 하우스도 아닌 긴장의 연속인 강철 산맥에 계속 있으니 피로가 어디 쉽게 사그라지겠는가. 나야 체력이 100포인트라 견딜만하다손 쳐도, 클랜원들은 아니었다. 체력이 상당히 떨어지는 이들도 여럿 있다. 비록 내색은 않고 있으나 아마 상당히 고단한 상태일 것이다. 어차피 북부 원정대가 대규모로 이동 중인 것을 감안하면, 우리는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근시일 내로 따라잡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클랜원들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적절히 행군 속도를 조절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게 하나 있다면, 출발 이후 해가 질 무렵까지 괴물들의 습격을 받지 않았다는 것 정도? 울창한 수림을 벗어나 계곡 지대로 접어들자 어느 순간 너른 평야가 눈앞에 나타났다. 남쪽으로는 완만한 경사의 구릉지가 쭉 뻗어 나가고, 그 옆으로 트인 길에는 아름다운 노을 빛을 반사하는 물이 잔잔히 흐르고 있다. 야영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생각해보니 슬슬 시간도 된 것 같아, 나는 잠깐 하늘을 쳐다보고는 번쩍 손을 들어올렸다. “오늘 행군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야영 준비를.” 그러자 “만세!”라는 환호성으로 화답한 클랜원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땅을 파고 나뭇가지를 가져와 모닥불을 지폈다. 낙엽을 수북이 쌓고는 침낭을 배치했다. 사방에 마력석을 박아 넣고 일종의 경계 진을 형성한다. 마치 야영만을 기다렸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뚝딱뚝딱 야영지를 만들고 있는 가운데, 곧 한쪽에서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겨오기 시작했다. 고된 행군 후, 꿀맛 같은 식사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사실 중간에 남다은과 비비앙이 오늘 저녁을 책임지겠다는 거의 재앙이나 다름없는 의사를 밝혔으나, 다행스럽게도 선유운의 결사적인 반대로 저지할 수 있었다. 예전에 축제 때 두 여인의 음식을 맛본 전력이 있는 클랜원들은, 누구 다 죽일 일 있냐며 대들듯이 말하는 선유운의 태도를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들 식사하세요~.” 잠시 후, 귓가로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연주가 펄펄 끓는 큼지막한 냄비를 번쩍 들어올리며 국자를 빙글빙글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마침 야영지 건설을 마치고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클랜원들은, 거의 동시에 몸을 일으키고는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오늘 메뉴는 언제나처럼 고기 스튜. 질린다고 생각할 수는 있으나 요리사가 고연주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림자 여왕의 음식 솜씨는 어지간한 미식가조차도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울만한 정도였으니까. “누님! 빨리 주세요! 어서요!” “얘는. 왜 이렇게 방정맞니?” 1등을 차지한 진수현이 발을 구르며 그릇을 한껏 들이밀자, 고연주가 국자로 냄비를 탁탁 두드리며 가볍게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진수현은 전혀 아랑곳 않았다. “아 빨리요! 지금 꼬르륵거리는 소리 안 들려요? 누님이 만든 음식 보니까 머리에 현기증이 일 정도라니까!” “나 참. 누가 보면 며칠은 굶긴 줄 알겠다 얘.” 고연주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으나 입가에는 나긋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기야 요리를 만든 입장으로서 저런 태도가 썩 기분이 나쁠 리는 없다. 맛있게 먹고 싶어 죽겠다는데 어느 요리사가 마다하겠는가. “아무튼, 그렇게 아양 떨어봤자 소용없어. 고기는 무조건 정량 배식이란다.” 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고연주는 상당히 푸짐한 양을 그릇에 덜어주었다. 크게 환호한 진수현이 나는 듯 달려간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클랜원들은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로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그 후, 고연주를 향해 쏟아지는 온갖 미사여구의 행진을 들으며 나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고연주가 까르르 웃으며 하나하나 응대해주었고, 거의 마지막 차례였던 허준영만이 오직 무뚝뚝하게 그릇을 내밀어 자존심을 지켰다. 그렇게 모든 클랜원들이 배식을 마치고서야 나의 차례가 돌아왔다. 사실 처음에 받을 수도 있었지만, 나름의 배려라면 배려였다. 나는 천천히 접시를 들고 멍하니 냄비를 바라보는 고연주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헌데, 갑자기 왜 저러고 있는 거지? “어.” 그러나 냄비를 바라본 순간, 나는 고연주가 왜 멍하니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 스튜로 가득 차 있었던 냄비는 어느새 텅텅 비어있었다. “미, 미안해요 수현. 신나서 퍼주다가, 저도 모르게 그만….” 고연주가 무척이나 미안해하는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하기야 아까 미사여구에 너무 홀랑홀랑 넘어간다 싶었다. …뭐, 어쩔 수 없나. “괜찮습니다. 건더기라도 긁거나, 아니면 십시일반이라도 하죠.”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서 냄비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여기저기 건더기가 붙어있는 게 딱딱 긁으면 어느 정도 모일 것 같기도 하다. “어휴, 정말.” 그러나 그 순간, 눈앞으로 그릇 하나가 불쑥 내밀어졌다. “수현 앞에서는 농담도 못하겠네요.” 그릇에는 뜨끈뜨끈한 김을 흘리는 고기 스튜가 한 가득 얹어져 있었다. 그 누구보다 압도적일 정도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다른 클랜원들이 그냥 고기 스튜만을 받았다면, 내 그릇에는 익숙한 초록색 약초가 보기 좋게 얹어져 있었다. 돌연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고기 스튜.』 (설명: 파그라가 첨가된 아주 맛있는 고기 스튜입니다. 사용자 고연주가 누군가와의 섹스를 원하는 염원이 깃든 음식입니다. * 파그라(Pagra) : 약초의 일종으로, 특히 사내의 정력 증강에 커다란 도움을 주는 효능이 있습니다.) ……. - 오호, 그렇군. 야! 이게 바로 아내가 남편의 정액을 농축시키는 과정이야? 이건 너무 솔직한 정보…. 아니 화정은 또 무슨 헛소리야? 나는 머리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고, 고연주. 이건….” 그러나. “아무렴 제가 수현 걸 잊었겠나요. 혹시, 서운해한 거는 아니죠?” 사근사근하게 말하고는 있었으나, 고연주의 눈동자는 형형한 빛을 뿜고 있었다. 마치 '딴 년한테 썼다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 아니 생각해봐. 주기적으로 빼서 농도를 옅게 만드는 것 보다는, 꽉꽉 눌러 담았다가, 한 번에 팍! 터뜨리는 게 좋지 않겠냐고. 아니, 얘는 무슨 말을 해도…. “자자~. 잔뜩 담았으니까, 어서 드세요. 스튜는 뜨거울 때 먹어야 더욱 맛있다고요?” 그러나 결국 등까지 떠밀리는 탓에, 나는 화정의 헛소리에 반박도 못한 채 떨떠름한 기분으로 식사 대열에 합류할 수 밖에 없었다. 날은, 이상할 정도로 야릇하게 깊어져만 갔다. * 산맥에는 어둑한 땅거미가 내려앉았으나 북부 원정대의 야영지는 환한 빛이 밝혀져 있었다. 경계를 서는 사용자들이 곳곳에 보였지만, 일부 사용자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 이유인즉슨, 거인이 깨어났기 때문이다. 거기다 정신을 차리고서는 사용자들을 보며 일말의 반응을 보였다. 지성을 갖춘 존재라는 게 드러난 것이다. 희소식이라면 희소식이었다. 그러나 미처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하나 생겨버리고 말았다. 바로 거인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문제가. 깊은 밤. 야영지를 빠르게 가로지르는 한 사내가 천막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뇌제. 방법을 찾았다고 합니다.” 곧바로 들려오는 보고에,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김유현이 번쩍 머리를 들었다. “방법을, 찾았다고요?” “예.” 회답한 사내는 돌연 시선을 돌려 천막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잠시 후, 입구를 가린 장막이 살짝 걷히며 누군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턱에는 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고 배가 약간 나온, 좋은 말로 풍채가 좋아 보이는 사내였다. “당신은….” “사용자 양기덕입니다.” 성큼성큼 걸어온 사내가 부드러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김유현은 가볍게 손을 맞잡았다. “반갑습니다. 사용자 김유현입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거인과의 대화에 난항이 있다고 들어서요.” 난항이란 바로 거인의 피에 흐르는 마법 저항을 뜻하는 말이었다. 모든 마법에 '무조건' 저항하는 피가 문제가 된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번역 마법은, 상호간에 아는 만큼 나온다고. 번역 마법은 일반 마법처럼 설정으로 끝나는 마법이 아닌, 사용자들의 연구로 개발된 '마력 회로 응용'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마법이다. 비록 일시적이기는 하나, 상대에게 강제적으로 언어를 들리게 하는 만큼 시동자가 정의한 마력의 흐름을 무조건 유지해야 한다. 엄밀히 말하면, 김유현이 거인에게 번역 마법을 걸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강제로 건다손 쳐도, 마력 저항이 일정하게 흐르는 번역 마법의 흐름을 조금이라도 어지럽힐 시, 번역 마법은 완전히 어그러져 버린다. 물론 꼭 상대방에게 걸 필요는 없고, 반대로 자기 자신에게 거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아까 말하지 않았는가. 번역 마법은 상호 아는 만큼 사용할 수 있다고. 고어에 관한 지식이 없는 김유현으로서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그놈의 마법 저항이 문제라…. 그나저나 방법을 찾았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다. 사실 제가 고어도 익히고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특별한 능력도 지니고 있거든요. 물론 확신은 할 수 없지만….” 그렇게 말한 양기덕은 주섬주섬 품을 뒤적이고는 탁자에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말간 빛을 띠며 그것은, 다름 아닌 수정구였다. “이건….” 김유현의 의아한 낯으로 묻자 양기덕은 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백문이 불여일견. 저도 확신은 못하는 만큼 우선은 실험부터 해보시죠. 대략적인 건 가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안 그래도 오늘 하루 진군을 포기했는데, 마다할 김유현이 아니었다. 망설임 없이 두 수정구를 쥐고 양기덕과 함께 천막을 나섰다. 두 사내의 걸음이 향하는 곳은 바로 거인이 묶여 있는 기둥이었다. 가는 도중, 양기덕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 두 수정구에는 두 개의 음성이 녹음돼있습니다. 하나는 국어, 또 하나는 제가 아는 고어입니다.” “고어라면….” “거인이 깨어난 후 말하는 단어를 주의 깊게 들어봤습니다. 개인적으로 분석해본 결과, Humanum이라는 말을 자주 언급하더군요.”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 “그러나 제가 알고 있는 고어 중에 비슷한 철자라고 생각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Homo, 사람이라는 뜻이죠. 우선 그 두 개의 수정구를 들어보시겠습니까?” 양기덕은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매우 빠른 속도로 말을 이었다. 얼른 해보라고 채근이라도 하듯이. 어차피 쥐고 있던 터라, 김유현은 부담 없이 양손을 들어올렸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마력을 흘려 넣되, 그냥 활성화시키는 게 아닌, 일반적인 번역 마법의 흐름대로 수정구 활성화해 보십시오.” 서서히, 저기 멀리서 기둥이 보이기 시작했다. 김유현은 순순히 마력을 일으켜 수정구들을 대상으로 번역 마법을 시동했다. “그리고요?”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그리고요?) (Quid Ergo?) 갑작스럽게 두 수정구에서 각각 다른 언어가 흘러나왔다. 김유현의 두 눈이 크게 떠졌고, 양기덕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성공이군요.” (성공이군요.) (Pro Eo.) 이번에도, 똑같다. 양기덕의 생각은 간단했다. 각 수정구에 국어와 고어의 철자를 차례차례 육성으로 녹음하되, 그 목소리에 양기덕 개인의 고유 능력인 '마력 각인'을 사용해 마력을 담은 것이다. 그러면 마력이 각인된 목소리는 재생 시 새로 들어오는 마력에 반응할 수 있다. 음성 번역기에서 힌트를 얻은, 꽤나 혁신적인 생각이었다. 물론 문제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마력 각인은 영구적인 능력이 아니거니와, 똑같은 마법을 사용해 흐름을 해치지 않는다고 해도 애당초 입력자와 시동자의 마력 파장이 다르다. 그런 만큼 지속되는 시간이 상당히 짧을 수밖에 없는 1회용에 불과한 장비였다. 또한 들려오는 모든 말을 강제 번역하니 공공장소에서의 효율성이 상당히 떨어지며, 아직 확인해보지 않은 만큼 100% 완전한 번역도 자신할 수 없다. 거기다 '마력 회로 응용'을 익힌 마법사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제한까지. “뭐 양산은 가능하겠지만, 사실 문제가 많지요. 상용화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래도 대단합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양기덕이 입을 쩝 다시며 머리를 긁적였으나 김유현은 진심으로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그냥 죽이고 진군할까라고 생각할 정도로 거의 포기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끝에서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김유현의 칭찬이 머쓱했는지 양기덕이 머쓱하게 웃어 젖힌다. “하하. 아무튼, 얼른 가시죠. 거의 다 왔습니다.” ============================ 작품 후기 ============================ Night Of Beginning. 시작의 밤이라는 뜻입니다. 아마 이번 파트부터는…. 어떤 분들은, 김유현에게 조금 실망하실지도 모르겠네요. 0616 / 0933 ---------------------------------------------- Night Of Beginning. 거인(Giant). 거인이란 무엇인가. 거인이란 과연 어떤 종족인가. 아마 이 세상에서 태어난 이라면, 그래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바로 '용이 잠든 산맥, 최후의 전쟁'에 얽힌 아득하기 짝이 없는 신화를. 예를 들면 용과 우리 인간이 공존하던 시절이 있었다거나, 아니면 세상의 주도권을 놓고 기나긴 전쟁을 통해 용을 몰아냈다는 것 등등. 사실 어지간해서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이다. 객관적인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며, 어쩌면 인간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데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일부러 꾸며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래서 신화라고 부르는 것이고. 각설하고. '용이 잠든 산맥, 최후의 전쟁'보다 더욱 전에 기록된 신화가 하나 있다면, 거신 전쟁(Colossus War)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거신 전쟁. 거신 전쟁은 거인과 신이 천상의 주도권을 놓고 전쟁을 벌인 기록이다.(그러니까, 똑같다. 거신 전쟁은 이 세상 최초의 주도권 쟁탈전이라 볼 수 있으며, 그러므로 최후의 전쟁은 2차 전쟁이라 볼 수 있겠다.) 안타깝게도 거신 전쟁 중 거인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없다. 그저 거인을 보고 묘사하기를. “모든 이능의 힘을 허용하지 않고.” “몸이 무척 크고, 근력은 산을 들어올릴 정도였으며.” “묠니르로 땅을 한 번 내려찍으면 지진이 일고, 목소리는 천둥과도 같다.” “천성은 순박하고 정이 많으나, 한편으로는 전투를 즐기는 호전적인 지배 종족이다.” “특히 '쿠샨'의 성을 지닌 거인이 한 번 크게 울어 젖히면, 주변의 모든 괴물들이 달려와 머리를 조아렸다.” “거인들의 제왕이라 불리는 '쿠샨 토르'는 지상에서 모든 괴물들의 제왕이 될 자질을 지녔다.” 이 정도로 기록하고 있다. - 추가적으로 덧붙이자면, 거인들의 제왕이라 불렸던 '쿠샨 로드'는 거의 반신에 오를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고 한 줄 언급돼있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거신 전쟁의 승리는 신들에게로 돌아갔다. 거인들은 패배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전쟁 직후 신과 거인이 나눈 이야기에서 거신 전쟁의 발발 원인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 대화록. 거신 전쟁 중 신들을 이끌었던 슬픔의 여신 '아리안로드'가 묻기를. “이미 지상을 지배하는 부러울 것 없는 종족이, 어찌하여 천상을 넘보는가.” “우리와 굳이 싸울 이유가 있던가.” 그러자 거인들의 제왕 '쿠샨 토르'가 말하기를. “지상에서는 더 이룰 것이 없기에 천상으로 눈을 돌린 것뿐.” “굳이 싸울 이유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싸운다.” “우리는 싸움을 위하여 살아가는 종족이다. 그래서 싸우는 것이다.” 그 당시 '쿠샨 토르'의 말은 실로 호쾌하며 거인답다고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거신 전쟁이라 명명될 거대한 전쟁을 일으킬 명분까지라 보기는 어렵다. 글을 적는 이도 이렇게 느끼는데, 그 당시 말을 들은 신들은 얼마나 기가 막혔겠는가. 안 그래도 무수한 동족의 죽음에 깊은 비탄에 빠져 있던 '아리안로드'는, '쿠샨 로드'의 말을 듣고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 “힘에 인성이 먹힌 것인가. 타고난 기량만 믿고 살아가는 놈들이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오냐. 그럼 어디 한 번 너희가 원하는 대로 실컷 싸워보라. 그러나, 너희는 다시는 지상을 지배하지는 못하리라. 이제는 지배자가 아닌 당해야 하는 고통도 느껴보라. 그래야 반성을 할 것 같다.” 아리안로드의 저주는 말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직접 돌아다니며 살아남은 신들을 찾아가 거인들을 저주할 궁리를 했고, 신들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방도를 하나 찾을 수 있었다. 그 방도라는 것은 바로. “용맹함은 남겨두나, 전략을 앗아갈 것이며.” 아테나도. “사랑은 남겨두나, 평화는 없을 것이며.” 헤스티타도. “지성은 남겨두나, 진화할 지혜는 허락하지 않을 것이며.” 가네샤도. “천성은 남겨두나, 기이한 신력을 빼앗아갈 것이며.” 인드라도. “살아갈 터전은 남겨두나, 괴물들의 경외를 거두어갈 것이며.” 판도. “주체할 수 없는 광기를 부여할 것이며.” 칼리도. “너희가 자신의 마음에 충실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파르바티까지. 7명의 신이 아리안로드에게 거인을 향한 저주를 건네주었다. 이 7신의 저주를 모은 아리안로드는. “나는 너희에게서 슬픔을 빼앗아갈 것이다.” '거인은 더 이상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없다.'는 조건으로 거인에게 일종의 봉인을 걸었다. 그렇게 신은 거인들을 향해 총 7개의 저주로 힘을 제한했고(아리안로드의 조건까지 포함하면 8개다.), 지상의 어느 산맥에 떨어트리게 되었다. 이후 거인들이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고대 무녀와 거인.'에 기록된 내용을 제외하면 딱히 남아 있는 건 없다. 아니면 아직 발견되지 않았거나.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은 가능하다. 저주에 관한 내용을 보면 신들은 거인들의 멸족을 원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더 큰 복수를 그렸다고나 할까? '너희는 다시는 지상을 지배하지는 못하리라. 이제는 지배자가 아닌 당해야 하는 고통을 느껴보라.' 즉 아리안로드의 저주에서 미루어보건대, 차후 이어진 거인의 삶은 굉장히 암울했을 것이다. 더 이상 지상을 지배할만한 원천을 제한당한 것은 물론, 미래마저도 제한당했다. 한때 천상의 신들과 주도권 전쟁을 벌이던 최고의 종족이, 이제는 다른 괴물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 저자 불명, 아틀란타 비밀 도서관에서 발췌. * 드디어 거인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거인이 있는 장소는 한산한 편이었다. 기둥에 묶여 있는 거인과 그런 거인을 경계하는 열댓 명의 사용자들. 그들 사이로 묘한 긴장감이 돌고 있다. 문제는, 바로 거인의 태도에 있었다. 만일 괴물이 포로로 잡힌 상태라면 응당 난동을 부려야 정상이다. 어떻게든 탈출하려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하기야 기둥에 꽁꽁 묶인 터라 불가능하기는 하다만, 하다못해 아기 괴조처럼 적대적인 모습이라도 보여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지금 저 거인은, 아니다.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순박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머리를 두리번거리고 있다. 거기다 주변 경계를 서는 사용자는 물론, 이따금 지나가는 사용자들을 호기심 어린 눈길로 쳐다보기까지. 흡사 구경을 하고 있다고나 할까? '정말로 천성이 우직하고 순박한 걸까? 아니면….' “뇌제, 어서…. 지속 시간이 길지 않습니다.” 잠시 거인을 분석하고 있을 즈음, 양기덕이 약간 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겠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인 김유현은 거인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경계를 서던 사용자들이 놀라 제지하려고 했으나 양기덕이 눈치를 주자 슬슬 물러난다. 이윽고 약 1미터 남짓까지 거리를 줄이자 거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김유현을 향했다. 지금까지 아무리 말을 걸어도 회답은커녕(물론 알아듣지 못한다고는 하지만.),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던 인간들이다. 그런데 처음으로 인간이 가까이 다가왔다. 기둥에 묶인 상태라 하반신은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거인은 인간을 아래로 내려다본다. 그 시선을 담담히 받아넘긴 김유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말이 들리나?” (내 말이 들리나?) (Vos Legere?) 그러자 거인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커진다. 김유현은 본능적으로 성공을 직감했다. “Quod, Quod?” (아, 아?) (Quod, Quod?) 진짜로 성공했다. 양기덕은 불끈 주먹을 쥐었다가, 눈을 휘둥그래 뜬 사용자들을 향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저 수정구가 모든 말을 강제로 번역하는 이상, 미약한 소리도 허용할 수 없다. 이야기에 방해되니까. (드, 들려요. 그럼 거기도 Hoc 말이 들리는 건가요?) (들린다. 아무래도 성공한 것 같군. 이제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는데.) 김유현은 Hoc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나, 문맥상 인칭 대명사 역할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거칭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두 개의 수정구가 동시에 음성을 말하고는 있었으나, 필요한 것만 골라 들으면 되는 일. 하지만 그전에, 이상하게도 대화가 어색하기 짝이 없다. (와, 신기하다. 그 Crystal에서 목소리가 나오는 거 맞죠?) 그러나 거인의 말이 이어진 순간 김유현은 어색함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건 바로 말투였다. 사용자들이 거인에 대한 첫인상은 공포이다. 일전의 전투에서 거인은 야만 전사의 기운을 풍기며 괴조를 잔인하게 죽여버리지 않았는가. 그럼 뭔가 좀 있어 보이는(?) 말투가 나와야 인상과 매치가 되는데, 지금 말하는걸 들어보면 말투가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다. 몸집은 산 만하고 상체는 근육질인데, 말투는 마치 어린 아이가 말하는 듯한 느낌. 온몸에 문신을 한 무서운 인상의 어깨 형님이 갑자기 '어머.'하고 어깨를 움츠리면 이런 기분을 느낄까? 구경하던 사용자들도 놀라기는 매한가지였지만, 그냥 생각하는걸 포기하기로 했다. 차라리 번역 마법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게 속 편하니까. 하지만 김유현은 도리어 한층 깊어진 눈으로 거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동그란 눈과 동글동글한 코, 얼굴 곳곳에 나 있는 솜털. 덥수룩한 수염은 보이지도 않는다. 전투에서 받았던 인상을 최대한 배제하고 살펴보자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오히려 하나하나 뜯어보니 애 티가 어린, 생각보다 앳돼 보이는 인상이 곳곳에 보인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김수현은 거인들의 키가 최소 5미터는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눈앞의 거인은 5미터까지는 안되고, 4미터를 넘는 정도였다. '혹시 어린 놈인가?'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한 김유현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맞아. 이 수정구를 이용했지. 그래서 너와 말을 나눌 수 있는 거고.) (헤에. 신기하네요. 인간들은 선천적인 힘이 부족하나 Apocrypha를 사용해 보완한다고 들었는데, 역시 아버지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인간? 아버지?' (인간을 알고 있나?) (네! 아버지한테 자주 들었거든요!) 거인은 힘차게 말하며 헤헤 웃었다. 그러자 더 이상 어색함을 이길 수 없겠는지, 두어 명의 사용자가 탄식을 흘리며 몸을 돌린다. (뭐, 저도 보는 건 처음이지만요. 그래서 되게 신기해요!) 그러나 전혀 아랑곳 않은 거인은 여전히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라면….) 마침 '아버지'라는 단어가 나와, 김유현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냥 다짜고짜 '우리는 이 숲을 공략하러 왔다!'나 '네가 왜 여기 있는지 알고 있나?'라고 직설적으로 묻기보다는, 지금 이 분위기를 이어가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 지금 여기 계시지는 않아요.) 거인은 곧바로 회답해와 김유현은 약간 당혹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상당히 민감할 수도 있는 비화인데, 어째 말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안 계신다고?) (네. 몇 년 전에 Litura 내에서 커다란 다툼이 있었거든요. 그 다툼에서 밀려나셔서 어쩔 수 없이 무리를 떠나셔야 했어요.) 그 찰나의 순간, 한껏 가늘어진 김유현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금방 원래대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거 참 안된 일이로군.) (괜찮아요. 모두가 틀렸다고 말하지만, 저는 아직도 아버지가 옳다고 믿고 있으니까요.) 뜻 모를 말들이 들려온다. 그러나 김유현은 하나라도 놓칠세라 머릿속에 기억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가. 나쁘게 들리지는 않는데.) (헤헤.) 칭찬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거인이 해맑게 웃는다. 그때였다. 꼬르르르르르르륵! 느닷없이 배가 끓는 소리가 꽤나 우렁차게 주변을 울렸다. 거인은 눈을 끔뻑끔뻑 감았다 뜨더니 천천히 시선을 내려 자신의 배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거인은 잡힌 이후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우리….) 이윽고. (뭐라도 좀 먹으면서 이야기 좀 더 해볼까?) 갑작스럽게, 김유현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 다음날, 나는 아침이 밝자마자 행군을 시작했다. 왜냐하면 기억상 오늘은 산맥을 하나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제 하루 푹 쉬었던 만큼 클랜원들은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상태였다. 하지만 오후쯤 되면 다시 지칠게 예상되니, 해가 저물기 전에 부지런히 산맥을 넘을 필요가 있었다. 이제부터는 정말로 제 3지역에 들어선 것과 진배없거니와, 괴물들 입장에서도 우리가 산맥을 오르내릴 때가 가장 기습하기 좋은 기회일 테니까. 그러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부지런히 걸은 결과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산맥을 넘을 수 있었는데, 그동안 단 한 번의 습격도 받지 않은 것이다. 물론 나쁜 현상은 아니지만, 산맥을 오르기 전 클랜원들을 향해 단단히 경고한 게 무색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하여 빠르게 산맥을 넘은 우리는, 해가 중천에 걸릴 즈음에는 어느 정도 고저 없는 지역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잠깐 휴식을 취한 후 행군을 재개하자, 중간중간 혼잣말처럼 들려오는 콧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해이해졌다기 보다는, 아마 예전 2지역에서 산맥을 오를 때 습격을 받았던걸 떠올리고, 이번에는 무사히 넘었다는 안도감에서 나온 콧노래일 것이다. 그렇게 조금 더 평지를 가로지르자, 어느 순간부터 눈앞으로 넓은 공터가 펼쳐졌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서 야영을 했군.' 계곡이 없다는 게 흠이기는 해도 진군 첫날이니만큼 식수는 충분할 것. 5천명을 지휘해야 하는 형의 입장으로서는 이보다 적합한 야영지도 없으리라. 무엇보다 야영한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게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잠시 정지합니다.” 아까 한 번 쉬기는 했지만, 나는 다시 한 번 정지 명령을 내렸다. 물론 휴식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아마…. 여기서 첫 번째 야영을 한 모양인데요.” 눈치 빠른 고연주가 바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더니 지면에 남은 흔적을 살펴보려는 듯 천천히 무릎을 굽히고는 땅을 쓸어 모았다. 나는 조용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추적 능력 자체는 고연주가 나보다 더 나으니까. “일단 떠난 건 오늘 이른 아침…. 응?” 이내, 고연주의 입에서 미약한 의문이 터져 나왔다. “왜 그럽니까?” “이상한데요? 분명 야영을 하기는 했는데….” “했는데?” “어제의 흔적이랑, 그저께의 흔적이 섞여 있어요.” 그럼 거리를 최소 반나절로 줄였다는…. 아니, 잠깐만. '벌써?' 반사적으로, 눈이 가늘어졌다. 고연주의 말인즉, 북부 원정대가 여기서 이틀간 머물렀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공략 포인트를 앞두고 있다면 모를까, 진군 첫날에 이틀이나 있었다는 건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었다. 무언가 있는 게 분명하다. “아무래도 한 번 조사할 필요는 있을 것 같군요.” 이내 가볍게 손을 내젓자, 클랜원들이 삽시간에 사방으로 흩어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나,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나를 부르는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도 고연주였다.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다가가자, 쪼그리고 앉은 채 약간 멍해 보이는 얼굴을 한 고연주가 보였다. “벌써 발견한 겁니까?” “아니…. 발견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고연주는 말끝을 흐리며 땅을 가리켰다. 이윽고 시선을 내린 순간. “……!” 지면에 남겨진, 굉장히 커다란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두 개의 발자국. 사람이든 괴물이든, 기본적으로 누구나 지면에 흔적은 남는다. 또한 사람은 사람만의 괴물은 괴물만의 흔적이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지금 보이는 발자국은 사람의 발과 흡사한 모양새를 지니고 있었다. 아니, 거의 똑같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문제는 흔적의 크기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그냥 2배 정도만 되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겠는데, 크기나 너비나 보통 인간의 발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건 분명….' “한 가지 확실한 건.” 문득 고연주가 몸을 일으켰다. “이 흔적은 절대로 사람이 아니며, 괴물이라는 것.” 그러더니 슬쩍 발을 들어 한 지점을 가볍게 두드렸다. “여기 기둥을 세운 흔적이 있어요. 아마도 묶어 놨겠죠.” “흠….” '그러면 형은 벌써 거인과 조우했다는 소린가?' 묶어 놨다는 건, 샘플을 확보할 목적일 가능성이 가장 높을 테고. 잠시 생각에 잠겨있자, 곧 사방으로 흩어졌던 클랜원들이 서서히 모여들어온다. 이미 흔적의 정체를 알고 있는 터라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고연주가 나름 정확한 추리도 해줬는데, 그냥 여기서 확 밝혀버릴까? 그러는 게 더 편할 것 같기는 한데.' “그럼…. 혹시, 거인이 아닐까요?” 그때였다. 고연주를 따라 주변을 살펴보던 임한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거인? 이 세상에 거인이 있습니까?” 차소림이 고개 돌려 묻자, 임한나는 상냥히 눈웃음치며 입을 열었다. “네, 있어요. 예전에 연합군과의 전쟁 때, 클랜 로드님이 거인으로 추정되는 괴물과 싸운 적이 있거든요?” 그제야 떠올렸는지 곳곳에서 “아.”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확실히 그런 적이 있었다. 그때 나와 붙었던 거인의 이름이 쿠샨 토르였나? 아마 진짜 이름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거인이라는 부족에도 당연히 우두머리가 있으며, 신화에서는 거인들의 제왕을 '토르'라고 기록했다. 말인즉, 제왕으로 불렸던 거인들은 모두 쿠샨 토르라고 불렸다. 그 외라면 제왕의 자리는 혈족간의 직계 전승으로 이어지며, 오래 전부터 '쿠샨'이라는 성을 가진 거인들이 차지해왔다고 하는데…. 뭐, 사실 거기까지는 내 알 바 아니고. “연합군과 전쟁이라면…. 그러면 그놈들과 연관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으응. 글쎄요. 그건 잘…?” 그것까지는 모르는 듯, 임한나는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밝힐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임한나 덕분에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아마….” 그렇게 속으로 고마움을 표시하며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야, 솔아. 우리도 거인이랑 싸워본 적 있지 않아?” 돌연히 옆에서 이유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랜원들의 시선이 모두 왼쪽으로 쏠린다. 나 또한 눈을 돌리자 무척이나 당연하다는 고개를 끄덕끄덕 주억이는 안솔을 볼 수 있었다. “너희가? 어디서?” 재빠르게 묻자 안솔이 고개를 갸웃한다. “우웅? 오라버니 기억 못하시는 거예요? 그때 거기서 같이 싸웠잖아요.” “그러니까 어디서.” “거기서요.” “…….” 앵무새처럼 회답하는 안솔을 보고 있자 절로 주먹을 움켜쥐고 말았다. 안솔이 화들짝 정수리를 가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그, 그러니까요…. 그때…. 오라버니랑, 저랑, 우리 오빠랑, 하연이 언니랑, 뺭뺭 언니랑….” “내가 왜 뺭뺭이야!” 그러자 하나하나 손으로 세던 안솔이 갑자기 펄쩍 뛰어올랐다. “까, 깜짝이야! 제가 언제요!” “방금 그랬잖아!” “비, 비비앙 언니라고 했거든요?!” “웃기시네! 말이나 더듬고 말이야!” “이익!” “그리고 그걸 왜 기억 못해?! 1층에서 한 놈, 3층에서 한 놈씩 각각 만났잖아!” 비비앙이 빽 소리를 지르자 안솔이 할 말 없다는 얼굴로 주춤 물러났다. 그나저나 1층에서 한 놈, 3층에서 한 놈이라. 여하튼 비비앙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이거지? “비비앙. 어디였어? 어디서 우리가 거인과 싸웠었지?” 그러자 팩 고개를 돌린 비비앙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흥,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 “그리고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뭐?” 잠시 후. 주변에서 살짝 숨을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와 동시에 내 기분도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얘들이 오늘 왜 이러지?' 안 그래도 마음이 급한데, 그냥 폐허의 연구소 1층이랑 3층에서 봤다고 말하면 되는데. 그런데, 왜 자꾸 신경을 긁는 거지? “폐, 폐허의 연구소.” 내 표정을 읽었는지 얼른 입을 집어넣으며 말을 더듬었다. 폐허의 연구소 1층이랑 3층이라…. 그래. 그러고 보니 거기서도 거인이 있었다. 2회 차 극 초반이라 가물가물했는데, 이제 기억났다. “수, 수현. 우선은….” 문득, 하연이 살그머니 팔을 감아오는 게 느껴졌으나 나는 곧바로 빼고 둘을 가리켰다. “너희 둘.” 안솔과 비비앙이 흠칫 몸을 떨었다. “따라와준 건 고마운데….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지?” “…….” “이딴 식으로 개판칠 거면 그냥 돌아가지 그래.” “…….” 이윽고 안솔은 “죄송해요….”라고 말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비비앙은, 무언가 대단히 서럽다는 듯한 기색을 비췄다. 아마 나와 오랫동안 함께해온 만큼 다들 알고는 있을 것이다. 밖으로 나왔을 때 내가 가장 싫어하는 행동이 무언지. 헌데, 한때 이유정이 자주하던 짓거리를 지금 저 둘이 하고 있다. 약간은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한동안 둘을 노려보다가 경고는 한 번 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등을 돌렸다. “갑시다.” ============================ 작품 후기 ============================ 거인은 지금껏 총 3번 등장했습니다. 폐허의 연구소에서 2번(89회 - 5미터 거인, 96회 - 거인(상체) + 바실리스크(하체) = 기가스(신화 속 동물)), 서 대륙 전쟁(365회 ~ 366회 - 거인들의 전대 제왕 '쿠샨 토르'). 이렇게 해서 총 3번입니다. 이번 3지역 공략 파트는 그때 뿌려놨던 떡밥을 회수하는 파트라고 보시면 됩니다. 김유현한테 실망하실 수도 있다는 말은, 뇌제가 갑자기 호구가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보시면 됩니다. 말인즉,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드릴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동생인 김수현한테는 아낌없는 나무가 될 수 있는 김유현이며, 이제껏 그런 모습을 자주 보여왔습니다. 허나 다른 사람, 특히 적에게는 가차없는 캐릭터이기도 하지요. 김수현은 1회 차 때 2년 차까지 빌빌대다가, 형을 만나고 나서 많은 성장을 이뤘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독자 분들이 보아온 김수현이 과연 누구한테서 가장 영향을 받았는지를 한 번 생각해보시면, 이번에 김유현이 보이는 행동을 추측이 가능하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코멘트는 어제 잘 읽어보았습니다. 오늘 글을 적기 전에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구상에 변화를 주는 게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지역 파트가 길어지면서 저도 지쳤는데, 제가 이러니 독자 분들도 당연히 지치시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더구나 김유현이 지금 주가 되고 있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겠지요. 물론 지금 와서 김유현을 김수현으로 바꾸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한 번 최대한 압축하고 또 쳐내보겠습니다.(김유현의 과거 부분 삭제, 비비앙 달래주고 화해하는 부분 삭제, 회상 및 기록 내용은 총 6번 등장에서 4번으로 압축 등등.) 그리고 어지간하면 각 회당 분량도 늘리고요. 체감하시는 전개 속도가 빨라진다는 장담은 드릴 수 없으나, 이번 3지역이든 차후 파트이든 전개에 꼭 필요한 내용이 아니면 집어넣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PS. 고연주, 남다은, 김한별, 이유정 등등. 씬은 나중에 아틀란타로 들어가게 되면 질리도록 써드릴게요. :) 0617 / 0933 ---------------------------------------------- Night Of Theater. 거신 전쟁과 최후의 전쟁. 사람들은 이 두 개의 신화를 놓고 '사실이다.' 혹은 '아니다.'로 의견이 분분하다. 사실 신화의 참과 거짓을 가리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일 수도 있지만, 이에 관한 필자의 의견을 말해보라면 '거신 전쟁'은 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최후의 전쟁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시피 한 반면, 거신 전쟁에 관한 기록은 전후 사정을 담은 기록이 어느 정도 남아 있으니까.(어디까지나 상대적이지만 말이다.) 우선 아래의 기록을 한 번 보도록 하자. 해당 내용은 거신 전쟁 이후 수천 년이 지난 이후의 기록으로, 산맥에 터전을 잡은 거인과 지금은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고대 무녀의 대화록이다. 『대화록.』 쿠샨 토르가 묻기를. “천상과의 전쟁 이후 수천 년이 흘렀다. 지금 살아가는 우리는 그 시절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정녕 이 이상의 방법은 없는가.” 그러자 고대 무녀가 이르기를. “전쟁 이후로 많은 시간이 흐르기는 했다. 그대들의 잘못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으로써 나와 그대가 이렇게 인연을 맺은 것이라 생각한다. 이 만남은 신이 허락한 것이다.” “아마 내 힘으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회복하였을 터.” “헌데, 그럼에도 만족을 못하는 건가.” 쿠샨 로드가 묻기를. “그런 뜻은 아니다. 확실히 고대 무녀의 힘, 그리고 그대의 노력과 수고에는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억울하다. 우리는 한때 지상을 지배하는 종족이었으나, 전쟁 이후 고통과 굴욕으로 점철된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자 고대 무녀가 이르기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신의 입장에서 시간의 흐름은 커다란 의미를 주지 못한다.” “들어보니 우습구나. 신의 분노가 고작 시간에 좌우되리라 생각했는가.” 쿠샨 로드가 묻기를. “그럼 도대체 어찌해야 하는가.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이 저주를, 신의 분노를 계속 감내해야 한다는 말인가.” “특권을 누리고 싶다는 게 아니다. 우리가 원래 누려야 했던, 원래 가져야 했던걸 되찾고 싶다는 것이다. 어찌 이 갈망을 우습게 느낄 수 있는가.” “모든 노력을 했다고 자신한다. 고통과 굴욕도 당해보았고, 진정으로 반성하고 용서도 구해보았다. 하지만, 변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정녕, 정녕 예전의 영광을 되찾을 방법은 없는 것인가.” 그러자 한참을 생각한 고대 무녀가 조용히 이르기를.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거신 전쟁 때 신들은 이끌었던 아리안로드는, 무수한 동족을 잃었음에 깊은 슬픔을 느꼈다. 이후 7신은 각각의 저주를 아리안로드에게 건넸고, 아리안로드는 그대들에게 하나의 봉인 조건으로 저주를 내렸다.” “봉인 조건이라 함은, 거인들이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 “말인즉, 그대들도 아리안로드가 느꼈던 슬픔을 고스란히 느껴보라는 것이다.” 쿠샨 로드가 묻기를. “슬픔을 느껴야 한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허나, 모순이다.” “우리는 그 감정을 느껴본 지 오래됐다. 사실 어떤 감정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리안로드가 우리에게서 슬픔을 빼앗아가지 않았는가.” “빼앗아 갔으면서 느껴보라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는가.” 그러자 고대 무녀가 이르기를. “그러니까 한 번 느껴보라는 것이다.” “슬픔은 말 그대로 봉인 조건이다. 그것은 아리안로드가 지정한 절대불변의 법칙.” “거인들이여, 슬퍼하라. 어디 한 번 슬퍼해보라.” “어떤 상황이든 좋으니, 신이 빼앗아간 감정을 다시 되살릴 정도의, 절절하고 슬픈 감정을 느껴보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르기를. “그리하여 조건이 해제된다면 슬픔을 되찾음은 물론, 저주로 속박된 힘까지 풀려날 것이며.” “과거의 영광 또한 자연스레 되찾을 것이다.” - 기록 명 '고대 무녀와 거인.', 저자 불명, 아틀란타 비밀 도서관에서 발췌. * 기묘한 동행이라는 말을 아는가? 어쩌면, 현재 북부 원정대가 그 말에 딱 걸맞은 상황인지도 모른다. 원정대를 구성할 때 가장 중요시 여기는 건 바로 진을 어떻게 형성하느냐는 것이다. 정면 습격이든 측면 후면 기습이든 간에, 총 사령관은 어느 때나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진을 구성해야 한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김유현은, 나름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상의 진을 구성했다. 그러할진대, 오늘 아침 부로 진의 구성에 변화가 생겼다. 아니, 추가라고 해야 옳을까? 김유현은 아침이 되자마자 특별한 지시를 하나 내렸다. 바로 거인의 다리를 풀어주고, 진의 선두에 세우고 진군하라는 지시였다. 아직 샘플을 조사하는 중이라면 아주 이해 못할 지시는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사용자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차라리 중앙이라면 모를까. 두려움은 차치하고서라도, 선두에 세우면 도주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우려가 있었다. 허나 그 우려를 모를 김유현이 아니었고, 추가로 2가지 명분을 내세웠다. 첫 번째는, 강철 산맥 내 일어나는 영역 다툼과 이 거인이 가장 강한 종족이라는 것을 근거 삼아, 다른 괴물들이 경각심을 높여보자는 것. 말인즉, 허수아비 효과를 노려보자는 소리였다. 두 번째로, 김유현은 해밀 클랜의 배치를 중앙에서 선두로 변경했다. 이것의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다. 만일 거인이 모두의 우려처럼 도주에 성공했을 시, 모든 책임을 김유현이 지겠다는 소리였다. 기실 이 지시가 심각한 불화로 불거지지 않은 배경에는, 북부 원정대가 김유현을 신뢰하는데 있었다. 총 사령관의 자리는 모두를 아우르는 자리이지만, 그만큼 모두의 기대를 받는 자리이기도 하다. 여기서 기대라 함은, 사용자로서의 강함만이 아닌,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을 거라는 기대이다. 그리고 김유현은, 바로 얼마 전 자신의 특별함을 증명했다. 일전에 큰 피해가 예상됐던 괴조 군단과의 충돌 때 단 몇 마디 말로 돌려보내지 않았는가. 사용자들은 그 광경을 한 명도 빠짐없이 눈앞에서 지켜봤다. '그래도 뇌제니까.' '무언가 노리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북부 원정대는 결국 김유현이 내세운 2개의 명분을 받아들였다. 받아들였다는 게 납득했다는 말은 아니지만, 군소리 않고 따르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하여 약간의 우려 속에서 시작된 북부 원정대의 진군은, 결과적으로 김유현이 내세운 명분이 맞아떨어졌음을 증명했다. 아침부터 해 질 녘까지, 괴조가 몇 번 하늘을 배회한 것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습격을 받지 않은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고작 하루에 불과하다. 김유현이 말한 '허수아비 효과'는 며칠은 더 지켜봐야 확실해지는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사용자들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괴물과 싸우는 것보다는, 거인을 경계하고 식사를 따로 준비해주는 게 몇 배나 더 쉬운 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콧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기분으로 야영지를 설치하고, 거인의 식사를 준비할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상황은 거인의 입장에서도 가히 나쁘지는 않은 일이었다. 거인도 일말의 지성을 갖춘 존재인지라 자신이 현재 포로라는 것을 아주 잘 인지하고 있었다. 즉 당장 죽어 신체 곳곳을 해부 당해도 모자랄 판인데, 적대적인 모습은커녕 진군 내내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를 시도하고, 때가 되면 밥도 꼬박꼬박 챙겨준다. 그 의도가 어떻든 간에, 평소 인간에게 커다란 호기심을 갖고 있던 만큼 현재의 상황은 거인에게도 나름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체를 구속하는 건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었고, 또 참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거인이 그렇게 느끼게 만들기까지는, 김유현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겠다. 아무튼. 이렇게 북부 원정대의 진군이 끝나고, 오늘 하루 공략을 마무리 짓는 저녁 식사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김유현은 저녁 식사를 거인과 함께하는 중이었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런저런 대화를 시도한 결과, 둘의 관계는 서로 식사를 같이 하고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준까지는 발전한 상태였다. (저는 정말 억울하다니까요? 그때 저는, 그 날개만 큰 놈들하고 싸우려 했던 게 아니라고요.) 기둥에 몸이 꽉 묶인 거인이 오른팔을 방방 휘두르며 열변을 토한다. 아까 진군하고 있을 때는 양팔이 꽁꽁 묶여 있었다면, 지금은 약간 다른 모습이다. 이것 또한 김유현의 지시였다. 최소한 식사 때는 거인의 한쪽 팔을 풀어줄 것을 지시한 것이다. 그래야 밥을 먹을 수 있을 테니까. 말할 것도 없이, 식사가 끝나면 거인의 양팔은 어김없이 도로 묶이며, 김유현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최대한 경계하고 있었다. (그때 어린 놈 하나 보셨죠? 저는 그 녀석을 구하려 했다는 말이에요.) (그래 그래.) (요즘 다른 지역에 있던 괴물들이 우리 지역으로 넘어오는 일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어린 놈이 멋모르고 혼자서 나왔다가, 그 넘어온 괴물한테 딱 걸렸단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우연히 그걸 보고, 도와주려고 했다는 말이죠.) (맞아.) 그때를 떠올리기만 해도 무척이나 갑갑한지, 거인은 앞에 놓인 큼지막한 냄비를 통째로 들어올렸다. 입에 대고 들이키자 냄비에 가득 차 있던 뜨거운 스튜가 벌컥벌컥 안으로 쏟아져 들어간다. 하얀 김을 펄펄 날리는 게 꽤나 뜨거워 보이는데, 거인은 조금도 아랑곳 않고 스튜를 깡그리, 한 입에 먹어 치웠다. 그것도 모자라 한 통을 추가로 비우기까지. 가히 어마어마한 식탐이었다. 거인은 삽시간에 두 통을 해치우고는 인중을 삭 닦으며 입을 열었다. (아 정말이라니까요. 생각해보세요. 저는 실제로 그 어린 놈을 구해줬는데, 갑자기 나타난 그 날개만 큰놈이 저를 공격해왔어요. 그럼 제가 화가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당연히 화가 나겠지. …그런데.) 그때, 가만히 듣고만 있던 김유현이 가벼운 한숨을 흘리며 수저를 놓았다. 그리고 주머니에 가득 찬, 수정구를 살살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방금 이야기, 벌써 세 번째 듣는 거야.) (그러니까…. 에? 세, 세 번째요?) (응. 그 다음에 네가 우리를 보고 기절하고, 그 날개만 큰놈들이 찾아오고, 내가 돌려보냈다는 것까지. 나도 이야기해줬잖아?) (아. 그, 그랬나요? 에헤헤.) 거인은 머쓱하게, 그러나 해맑게도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더니 한쪽에 무더기로 쌓인 빵을 한 움큼 집고는 우적우적 씹어먹는다. 음식이 꽤 마음에 드는 눈치다. 김유현도 진정으로 힐난하는 어조는 아니었다. 오히려 적당히 맞장구도 쳐주고 간간이 미소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두 눈동자만큼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이야기를 하는 내내 쉴 새 없이 번뜩이며 거인을 관찰한다. '너무 여유가 넘친다.' 생각 그대로였다. 거인은 붙잡힌 이후, 단 한 번도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생각이 있다면 왜 자신을 앞으로 내세웠는지, 그리고 왜 인간이 산맥으로 들어왔는지 짐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건, 최소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과…. '자신감이 강하다.' 혹은 자부심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수천 년 동안 이 산맥의 일부를 다스려온 지배자로서, 거인들은 단 한 번도 주도권을 놓치지 않았다. 이번 인간들의 공략도, 그저 예전에 있었던 외부 침입 중 하나로 치부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김유현은 물끄러미 거인을 응시했다. 그 사이 빵마저 모두 먹어 치웠는지, 어느새 거인의 주변에는 텅 빈 냄비 두 통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으음. 인간들의 음식, 입맛에 꽤 맞는데요? 상당히 맛있어요.) (더 먹을래?)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쩝쩝 다시는 거인을 보며 김유현은 자신이 먹던 그릇을 내밀었다. 진짜 주려는 건 아니었고, 그냥 의례적인 말이었다. 크기로 보나 그릇에 담긴 양으로 보나 설마 벼룩의 간을 빼먹겠냐고 생각했으니까. (감사합니다!) 그러나 거인은 사양하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내밀어 잽싸게 채가더니 그릇 채로 입안에 날름 집어넣은 것이다. 아주 잠시간에 불과했지만, 김유현의 얼굴에 떨떠름한 기색이 스쳤다. ============================ 작품 후기 ============================ 바로 다음 회 갑니다. 0618 / 0933 ---------------------------------------------- Night Of Theater. 와드득, 와드득! (야, 그릇까지 먹으면 어떡해.) (네? 아, 죄, 죄송해요. 하도 맛있어서….) '만족이라는걸 모르는 건가.' 속으로 쓰게 웃은 김유현은 슬슬 화제를 돌리기로 결정했다. 친분은 이제 어느 정도 확립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대놓고, 갑작스럽게 화제를 돌릴 생각은 없었다.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서서히 구슬려야 한다. 딱! 휘리릭! 가볍게 손을 튕기자 어디선가 밧줄이 날아와 거인의 오른팔을 칭칭 휘감는다. 식사가 끝난 이상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거인은 그저 신기하다는 얼굴로 자신의 오른팔에 차곡차곡 감기는 밧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 반응을 살피던 김유현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너 참 착하구나.) (네? 제가요?) (응. 네 말을 들어보니까 내가 그동안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아. 사실 어제 만났던 날개 큰놈들은 너를, 아니 너희 종족을 엄청 나쁘게 말했거든.) (뭐, 뭐라고 말했는데요?) (…전투에 미친 종족이라고.) (으으으음.) 거인은 미묘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뭐…. 트,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약간 말이 심한 건 있네요.) (그래?) (네. 그렇게 따지면 그놈들도 만만치는 않거든요. 우리가 먼저 싸움을 건 적도 있지만, 그놈들이 먼저 건 적도 많아요.) (그동안 많이 싸웠나 봐?)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쭉 싸워왔다고 하니까요. 뭐, 사실 그놈들도 제법 강한 종족이기는 해요.) (확실히. 그 파란 빛을 놈은 엄청 강해 보이던데.) 김유현이 상대 종족을 인정하는 말을 꺼내자 거인의 낯에 발끈하는 기색이 서렸다. 하지만 곧 콧방귀를 뀌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름 강하기는 하죠. 하지만 그뿐이에요. 지금껏 그놈들의 도전은 무수하게 받아왔지만, 우리는 한 번도 진 적이 없어요.) (이런, 자신감이 넘치는 발언인데?) (하지만 사실인걸요. 우리 아버지가 다스리던 시절에는, 그놈들은 날개도 못 펼치고 다녔거든요.) (오호.) 아버지. 드디어 원하던 단어가 나왔다. 그러나 '다스리던'이라는 추가 정보까지. 그렇다면 이 거인의 아버지는 한때 거인들의 제왕이었다는 소리였다. '쿠샨 로드. 수현이가 거인들의 제왕 자리는 직계 전승이라고 했던가?' 그렇게 생각한 김유현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도리어 놀랍다는 얼굴을 보였다. 그 표정을 읽었는지 거인이 우쭐해 하며 자랑스러워하는 티를 낸다. (아버지를 많이 좋아하나 봐?) (좋아하고, 존경하죠. 아버지는 형제들과는 달리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계셨거든요.) (다른 생각? 어떤 생각인데?) (네. 뭐냐 하면…. 아, 이건 좀 자세히 말하기가 그렇네요. 딱히 좋은 내용도 아니라서.) 신나게 말하던 거인이 돌연 조심스럽게 말끝을 흐렸다. 아마 거신 전쟁의 흑 역사와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한 김유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슬쩍 말을 흘렸다. (하지만, 지금은 이 산맥에 없다고 했지? 무리와 다투고 떠났다고 했던가?) (뭐, 그렇죠. 다퉜다기 보다는, 그냥 서로 다른 생각으로 충돌했을 뿐이에요.) (아무튼, 그럼 너도 조금 그렇겠네.) (응? 뭐가 그래요?) 김유현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거인은 머리를 갸우뚱 기울이며 되물었다. 김유현의 두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좋아하고 존경하던 아버지인데, 네 말을 들어보면 쫓겨난 거나 다름없잖아. 동족, 아니 형제들이 밉지 않아?) (에엥? 그분들은 왜 미워해요? 그분들이 저를 얼마나 예뻐해 주시는데요.) 그러나 거인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머리를 휘휘 저었다. (아버지가 나가신 건, 그저 서로의 신념이 달랐을 뿐이에요. 충돌의 과정도 정당했고요. 그러니까 쫓겨나신 게 아니라, 스스로 왕의 자리를 내려놓고 나가신 거죠. 그만큼 생각이 확고하셨으니까요.) 간단하고도 명료한 말. 김유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어제 불화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하나의 계획을 세웠는데, 이래서야 이야기가 안 되는 것이다. 인간과 거인의 관점에 큰 차이가 있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기에 나온 실수였다. '젠장, 막혔네.' 김유현은 몰래 입맛을 다신 후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곧 안됐다는 얼굴로, 가엾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겨우 꺼낸 계획이 시작부터 수포로 돌아갔으니 얼른 수습해야만 했다. (그렇구나. 아무래도 내가 오해하고 있었나 보네.) (그럼요.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신 거예요?) (아아. 그냥…. 네 말에서 아버지를 무척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하는 감정이 느껴졌거든. 그리고 우리 인간 세상에서도 비슷한 일이 굉장히 많이 일어나기도 하고.) (아하. 그건 맞아요. 물론 아버지가 보고 싶죠. 그래서 지금 이렇게…. 아, 아차.) 그때였다. 헤헤 웃으며 말하던 거인이 느닷없이 당황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김유현의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더욱 당혹한 기색을 비추며 입을 열었다. (이, 인간 세상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고요? 헤헤헤. 우, 우리는 그럴 걱정은 없어요. 우리는 제왕의 자리를 무조건 쿠샨 일족이 잇게 돼 있거든요. 그, 그리고 아직 제가 자격이 부족하거니와, 지, 지금 맡고 계신 분도 임시로 맡고 있을 뿐이고, 때, 때가 되면 저에게 넘겨주실 거예요. 그, 그렇죠.) 갑자기 말을 더듬고, 횡설수설하며, 속도도 빨라졌다. 누가 봐도 화제를 돌리려는 의도가 다분히 엿보인다. 그러한 찰나, 김유현의 두 눈에 강렬한 빛이 스쳤다. '쿠샨'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잠깐 막혔던 머릿속에 새로운 길이 트였다. (쿠샨 일족?) 적어도 거인에 관해서는 김유현도 김수현 정도로 알고 있다. 김수현은 1회 차의 기록만이 아니라, 2회 차에서 겪었던 경험까지 모조리 말해주었으니까. 거기다 전쟁도 같이 경험하지 않았는가. (네, 네. 쿠샨, 쿠샨. 좋은 이름이죠?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아직 서로 이름도 모르지 않나요?) (쿠샨….) 거인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으나 김유현은 돌연 깊이 생각에 잠긴 체 하며 쿠샨을 되뇌었다. 거인은 그런 김유현을 초조해하는 얼굴로 응시한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김유현이 아차 한 얼굴로 시선을 들었다. (쿠샨…. 아, 맞아! 쿠샨, 쿠샨 토르. 나 그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 것 같다.) 이번에는 거인의, 아니 쿠샨의 두 눈이 휘둥그래 변했다. (에? 토, 토르라면…. 제왕만이 가질 수 있는 이름인데?) (어어, 맞아 맞아. 확실히 쿠샨 토르였어.) (아니, 잠시만요. 그 이름은 어떻게 알고 계세요? 저는 말한 적이 없는데요?)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소문으로 들어봤거든. 다른 대륙에서, 쿠샨 토르라는 거인이 인간이랑 함께 다닌다고. 그래, 확실해.) (어, 언제요?) (글쎄. 한 3, 4년 됐나?) 김유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말하자, 쿠샨의 얼굴에 더욱 큰 놀라움이 번진다. (우, 우리 아버지가 나간 게 4년 전이에요!) (그럼….) 김유현은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렸다. 왜냐하면 나머지는 저 쿠샨이라는 일족의 거인이 해줄 테니까. (그, 그분이 제 아버지일 거예요!)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다. 혹시 이전에 다른 거인이 나간 적은 없고?) (없어요. 한 분도 없어요.) (그럼 거의 확실하네. 이야, 신기하다. 이래서 세상이 좁다고 하는구나.) 김유현은 일부러 과장해서 말하며 손뼉을 쳤다. (저, 저….) (응?) 문득 쿠샨이 매우 애타는 목소리로 김유현을 불렀다. 굳이 듣지 않아도 뻔하다. 그렇게나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고 보고 싶어 하는데, 당연히 소식을 듣고 싶어하지 않겠는가. (흐음. 알고 싶나 봐?) (다른 소식도 있어요?) (최근에는 아니지만, 예전에 몇 개 들은 건 있어.) (알려주세요!) 쿠샨이 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김유현은 팔짱을 끼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보였다. (하하. 그런 모습을 보니까 맨입으로 알려주기가 싫어지는데?) (에, 에이. 그러지 마시고요…. 저 진짜 궁금하다는 말이에요.) 그러자 쿠샨의 얼굴에 눈에 띄게 실망한 빛이 그늘지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쿠샨의 속이 달아오르기를 기다린 김유현은, 곧 전전긍긍해 하는 빛이 절정에 오름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혹시 협상이라고 알아?) (협…? 상…?) 거인이 간신히 발음을 따라 한다. 아무래도 협상의 개념을 모르는 모양이다. 참 별것에서 발목이 잡힌다고 생각한 김유현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래. 서로 어떤 목적이 있다면, 그 목적에 부합되는 결정을 하기 위해 상호 거래를 하는 거지.) (……?) (그러니까…. 예를 들어볼게. 너희가 그 날개 큰놈들이랑 싸워야 하는데, 어떤 사정이 생겨서 못 싸운다고 가정해보자고. 그럼 우리가 대신 싸워주는 대신, 너희는 우리 부탁을 하나 들어주는 거야. 이 과정을 바로 협상이라고 하지.) (아하.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해는 확실히 되네요.) 전투에 연관 지어 설명해주자 곧바로 이해하는 쿠샨이었다. 김유현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내 말은, 내가 알고 있는 소식을 너한테 알려주면, 너는 내 가벼운 부탁 하나를 들어주는 거야.) (부탁이요?) (물론 이 부탁은 어디까지나 네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그칠 거고. 무리라고 생각되면 거절해도 좋아.) (에, 제가 할 수 있는 선이라면…. 네, 좋아요!) 쿠샨은 생각할 것도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김유현의 입가에 짧은 미소가 어렸다가 사라진다. 그리고. (좋아.) 바로 이 순간. (그럼 내 부탁은….) 마침내, 시작되었다. 앞으로 5일 후, 제 3지역의 공략이 끝날 때까지. 거인들을 대상으로 한 연극의 밤이(Night Of Theater). 그 김수현조차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다는 김유현의 능력이, 서서히 그 태동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 “오빠.” “응?” “오빠의 오빠는 어떤 사용자야?” “…형?” '형이라.'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의아한 기분에 시선을 돌리자, 입가에 스튜 자국을 잔뜩 묻힌 채 나를 바라보는 이유정이 보였다. 거기다 바닥에 잔뜩 쌓여 있는 그릇까지 시야에 들어오자, 절로 한숨이 나온다. '에휴.' 지금은 식사 시간이 아니다. 야영 중 가장 중요한 불침번을 서는 중이니만큼, 적당히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곤히 자는 동료들을 지키려고 불침번을 서는 것인데, 저렇게 배부르게 먹으면 자연스럽게 졸릴게 아닌가. 아니,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먹는 것 자체는 뭐라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새벽 불침번은 배고플 수도 있고, 적당한 섭취는 피로 회복에도 도움이 되니까. '그래도 좀 얌전하게 먹으면 안되나?' 건너편의 차소림은 정말 얌전하게 숟가락을 놀리는데, 이유정은 정말….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이유정은 얼른 얼굴을 들이밀었다. “다 큰 처녀가, 이렇게 묻히고 먹으면 어떡해.” “응? 으읍, 으으읍!” 손을 내밀어 윗입술을 닦아주자, 이유정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비틀다가 곧 얌전하게 변했다. 문득 어디선가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제 됐다. 아무튼….” 이윽고 대충 닦아주고 손을 떼려는 찰나, 이유정이 갑작스레 또다시 아랫입술에 스튜를 묻혔다. 거기다 또 닦아달라는 듯 입술을 쭉 내밀기까지 한다. 나는 멍하니 이유정을 바라보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뭐 하는 거긴. 위쪽을 닦아줬으니까, 아래쪽도 닦아달라 이거지. 봐봐. 아랫입술이 막 질투하는 중이잖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입술이 어떻게 질투를 하냐.” “이렇게 하지~.” 그렇게 말한 이유정은 아랫입술을 삐쭉 내밀고는 요리~조리 움직였다. 그리고 그 상태서 “나도 닦아주세요! 닦아달란 말이에요!”라고 우물우물 말하기까지. 그 모습이 자못 웃겨, 나는 결국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 나 참, 녀석도. 알았다, 알았어.” “히히.” 그렇게 아랫입술까지 마저 닦아주자, 이유정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떨어졌다. 그러자, 아까 느꼈던 시선이 더더욱 강해진다. 누구지? 차소림인가? 아무튼. “그런데, 우리 형은 왜?” “그냥. 궁금해서?” 그냥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이유정은 심심해하는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뭐가 궁금한데?” “음~. 어떤 사용자인지?” 어떤 사용자인지…. 이건 상당히 광범위한 질문인데. 나는 타닥타닥 불똥을 터뜨리는 모닥불을 잠시 바라봤다가, 머리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내 시커멓게 칠해진 밤하늘에, 형의 얼굴이 떠오른다. '우리 형은….' “대단하지. 아주 대단해.” “헤, 오빠보다 대단해? 그 오빠가 오빠보다 더 세?” “물론 무력은 내가 더 셀 거야. 하지만….” “하지만~.” 이유정이 발을 들었다 놨다 하며 내 말을 따라 했다. 보아하니 제대로 듣고 있지도 않은 것 같다. 이럴 거면 왜 물어본 것인지.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공략 자체는 나보다 더 잘할걸?” “에? 말도 안 돼. 그 오빠가, 오빠보다 공략을 더 잘한다고?” 비로소 이유정의 입에서 의아해하는 탄성이 흘러나온다. 사실 그렇게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유정이 생각하는 형이 2회 차의 사용자라면, 내가 말한 형은 1회 차의 형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2회 차의 나는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과, 압도적인 사용자 정보로 밀고 나갈 뿐이지, 순수 공략 실력을 비교해보면 형이 나보다 앞설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1회 차의 한소영보다도. 서로의 전성기를 비교해보면 그렇게 생각이 든다. 한소영과 형은 닮은 점도 있지만, 공략 방식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한소영이 과감한 결정과 상황에 따른 대처 능력, 그리고 신속한 진행이 특징이라면, 형은 정반대였다. 공략 자체는 조금 느린 감은 있지만,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그려놓은 그림대로 판을 만들어놓고 시작한다. 마치 먹이를 잡아먹기 전 거미가 하는 행동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형의 공략하는 방식은 상당히 기상천외하다. 아니, 누구도 생각지 못하는 방법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아마 악마도 형을 가장 큰 걸림돌이라 여겨, 나를 이용해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는지도 모르는 일이고. '형의 방법은…. 무섭지.' 탁 까놓고 말해서, 나는 형이 적이 아니라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형은, 그냥 힘으로 몰아붙여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까. 진정으로 적이었다면, 아마 무척이나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그때였다. “킥킥….” 한창 형의 생각을 하던 와중, 돌연 숨죽여 웃는 소리에 이어 나를 콕콕 찌르는 감촉이 느껴졌다. 흘끗 시선을 돌리자,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건너편을 가리키는 이유정이 보였다. '얘는 또 왜 이러니….' 참 가지가지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유정은 정말 간신히 웃음을 참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건너편은 차소림이 앉아 있는 자리이며, 아까 묘한 시선이 느껴지던 방향이기도 했다. 이러면 또 상황이 궁금해지지 않는가. 나는 별생각 없이 맞은편으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뭐, 별일이야 있겠느냐 마는. 그러나. '헐.' 이윽고 차소림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나는 크게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지, 지금 뭘 그렇게 열심히 바르고 있는 거야?' “사, 사용자 차소림?” 너무나도 놀라웠던 터라, 나도 모르게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응아?” 그러자 한창 무언가에 열중하던 차소림이 흠칫 몸을 떨더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그맣고 귀여운 비명을 질렀다. 1초, 2초, 3초. 정확히 3초가 되는 순간, 차소림의 고개가 흡사 기계라도 된 듯 삐걱삐걱 움직이며 나를 돌아본다. 파르르, 애처롭게도 떨리는 입술. 거기다 입 주변에 덕지덕지 묻은 스튜 자국. 아니, 비단 입 주변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입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마와 코까지 스튜가 묻어 있다. 그것도 먹다 묻은 자국이 아닌, 굉장히 정성스럽게 바른 듯한 자국이. 시선이 마주쳤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나는 일부러 매우 조심스럽게 물었다. “…….” 그러나 회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탁! 그저, 차소림의 손에 들려 있던 수저가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을 뿐. “아, 아….” 한순간, 멍해 보이는 차소림의 얼굴에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들이 스쳤다. 그중에서는 '나 지금 어떡하면 좋아요?'라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기색도 섞여 있어, 나를 매우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아니,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하냐고. “아, 아닙니다!” 이윽고 허둥지둥 수저를 주운 차소림이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두 눈동자에는 여전히 당황이 물결처럼 번져가고 있었지만. “그, 그러니까…. 이, 이건….” 당황하지마. 그러니까 더 이상해 보이잖아. 그 순간이었다. 잠시 후, 돌연 차소림의 두 눈에 안광이 번쩍였다. 뭔가 변명, 아니 방법을 찾은 모양이다. 나는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하며(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저냥 적당한 수준이면 장단을 맞춰주기로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그러는 게 서로 더 좋을 것 같으니까. …아무튼. 자, 그럼 이제 말을 들어볼…. “예, 예! 그러니까, 지금 저는 화, 화장 중이었습니다!” “푸!” 그 순간, 이유정은 황급히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최대한으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였다. “끅…. 끅…. 흑….” 억지로 참고 있다는, 흐느끼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온다. 몸도 움찔움찔 떨고 있다. 이러지 말라고, 너는 지금 차소림을 두 번 죽이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실 탓할 수는 없다. 나조차도 순간적으로 터질뻔했으니까. 그 모습을 본 차소림이, 이제는 거의 울기 일보 직전의 얼굴로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크, 클랜 로드. 제, 제가 화장을 잘못한 것 같습니다. 에, 에?” 화장을 잘못한 게 아니라, 말을 잘못한 거겠지. 지금 무척이나 당황스러운지, 차소림은 평소 하지 않던 말실수까지 하는 중이었다. 문득 고개 숙인 유정에게서 “힉! 날 죽여…! 히힉! 차라리 날 죽이란 말이야…!”라는 말이 들려온다. 정말 어지간히도 참기 힘든 모양이다. “아니, 아니! 그, 그러니까! 화장이 아닙니다!” “흐…. 흑…. 힉…. 흐힉….” “화장이 아니라, 위장 중이었습니다!” “흐힝힝힝?!” 결국, 여기까지였다. “깔깔깔깔깔깔깔깔!” 더 이상 참지 못한 이유정이, 미친 듯이 바닥을 구르며 지금껏 참아온 웃음을 한꺼번에 터뜨린 것이다. 아주 웃겨 죽겠는지, 눈물까지 쭉쭉 흘려낸다. 그리고 차소림은, 입술을 꾹 깨묾과 동시에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왜…. 왜 그렇게 쳐다봐. 내, 내가 뭘 어쨌다고. ============================ 작품 후기 ============================ 오늘 연참을 한 이유는…. 그냥 글 쓰는 게 재밌어서, 쓰다 보니 연참이 가능한 용량이 됐습니다. 부디 늦은 것에 대해서는 용서를. _(__)_ 요즘 느끼는데, 제가 진짜 변태는 맞는가 봐요. 이번 소제목이 연극의 밤이잖아요? 다음 회부터 작중 캐릭터로 상대를 속이고, 기만을 할 생각을 하니까 갑자기 의욕이 솟구치네요. 이히히히. …그나저나 오늘 최소한 박동걸, 이신우, 이보림. 이 3명은 비주얼 노벨의 캐릭터 설정 작업을 해야 하는데, 언제 잘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_ㅠ 0619 / 0933 ---------------------------------------------- Night Of Theater. 북부 원정대가 제 3지역 공략을 시작한지도 어느새 닷새라는 시간이 흘렀다. 처음에는 우려와 불안 속에서 시작된 공략이었다. 그러나 김유현이 거인을 선두로 내세우는 '허수아비 효과'를 구상한 이후, 북부 원정대의 공략은 계속해서 순항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이따금 하늘을 배회하는 괴조만 몇 번 발견됐을 뿐이지, 닷새째의 진군도 어제와 크게 별다를 바 없었다. 그러면, 현재 거인을 허수아비로 내세우는 전략이 통하고 있는 걸까? 여느 괴물들이 이 3지역에 터전을 잡은 거인이 두려워 함부로 덤비지 못하고 있는 걸까? 정말로? 아주 영향이 없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고작 그것 하나로 100%라고 보기도 어렵다. 현재 북부 원정대의 거리낌 없는 진군이 가능한 것은, 지금 통과 중인 지역과 연관 지어 생각해야만 한다. 김수현은 그랬다. 이르면 6일, 늦어도 8일 안에는 공략 포인트에 도착할 거라고. 이틀의 차이를 둔 것은 진군 도중 괴물과 조우함으로써 지체되는 시간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북부 원정대는 첫날 같은 지역에서 이틀 동안 머물렀지만, 이후로는 한 번도 방해 받지 않고 남쪽 방향으로 꾸준히 직진했다. 단순하게 계산해보면 못해도 2, 3일 안에는 공략 포인트에 도착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여기서 공략 포인트는 바로 '거인들의 터전'을 의미한다는 것. 말인즉, 현재 통과 중인 지역은 허수아비 거인만이 아닌, 제 3지역을 호령하는 모든 거인들의 영향이 미친다는 소리였다. 이게 바로 지금까지 순조로운 진군이 가능했던 결정적인 이유라 볼 수 있다. 하늘을 날 수 있는 괴조가 아니고서야, 어느 괴물이 거인들의 영향이 강한 지역을 버젓이 돌아다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북부 원정대가 공략 포인트에 가까워질수록 순항은 필연적인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좋게 보면, 여기까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행운이 공략 끝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는 건 매우 요원한 일일 것이다. 사용자들도 알고 있다. 강철 산맥에 들어온 이상, 괴물의 출현을 확인한 이상, 또한 놈들이 지성을 갖춘 존재라는걸 확인한 이상. 언젠가는, 아니 근시일 내로 괴물과 부딪쳐야만 함을. 혹은 지금 이 순간조차도 맞닥뜨릴 수 있음을. 바로 제 3지역을 지배하는 최강의 전투 종족인 거인들과. 그래서 사용자들은 긴장을 놓지 않는다. 분명 진군의 순항에 기분이 좋은 건 틀림없으나 해이해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 누리는 이 순탄함이 바로 1초 후에도 끝날 수 있음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그저 현재의 상황에 감사하며 행운이 끝나는 때를 대비해 차곡차곡 준비를 해나갈 뿐. “정지! 정지 명령입니다! 여기서 진군을 마치겠다고 하십니다!” “모두 야영을 준비하도록! 그리고….” 그렇게, 닷새째 날이 저물어갔다. * 해 질 녘, 늦은 오후. (아 잠시만, 잠시만요!) (잠시만은 무슨 잠시만. 빨리 가자. 준비 다 끝내놨다니까?) (실은 제가 아직 준비가….) (아니 네가 무슨 준비가 필요해?) 야영지 중앙에서 수정구를 통해 흘러나오는 음성이 연신 들려온다. 아마 사정을 모르는 사용자가 보면 이게 지금 무슨 일이냐 눈이 휘둥그래질 것이다. 음성이 들려오는 곳에서 한 사내와 거인이 옥신각신 다투고 있었으니까. 저런 모습을 보면 그동안 상당히 친해진 듯싶으나 정작 다투는 모습도 우습기 그지없다. 거인은 기둥을 꼭 껴안은 채 가기 싫다며 머리를 휘휘 젓고 있고, 사내는 그런 거인을 억지로라도 끌고 가려는지 팔을 꽉 붙잡은 채 끙끙 힘을 주고 있었으니까. 뭐, 그런다고 거인이 끌려가겠느냐마는. 헌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진군이 끝나면 기둥에 묶여 있어야 하는 거인이, 왜 갑자기 온몸의 속박이 해제된 상태일까? 그리고 준비는 또 무슨 말이고? (후유.) 결국에는 끌고 가는걸 포기했는지 김유현이 깊은 한숨을 흘렸다. 그러자 기둥을 꽉 붙잡고 있던 쿠샨이 스리슬쩍 돌아보더니 끔뻑끔뻑 눈을 깜빡였다. 김유현은 티 한 점 보이지 않는 쿠샨의 맑은 눈동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때 말해준 거 때문에 그러는 거야?) (…….) 대답은 없다. 그러나 침묵은 긍정이라는 말이 있다. 기실 두 종(?)이 지금 이러고 있는 이유는, 바로 부탁 때문이었다. 일전에 아버지의 소식을 말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쿠샨은 김유현의 부탁을 하나 들어주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김유현은, 다름 아닌 '사용자들과 한 번 가볍게 대련해줄 것'을 주문했다. 김유현은 쿠샨이 자신의 부탁을 거리낌없이 수락하리라고 예상했다. 왜냐하면 거인은 전투를 즐기는 종족이 아니던가. 물론 가벼운 대련을 전투와 동일시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범주 안에 포함된다고 볼 수는 있으니까. 그러나 예상을 깨고 쿠샨은 김유현의 부탁에 난색을 보였다. (마, 말씀 드렸잖아요. 아무리 가벼운 대련이라고 해도…. 저한테는….) 쿠샨이 우물우물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이러는 이유인즉, 바로 아주 오래 전 신들이 거인에게 내렸던 저주와 연관이 있다. '너희에게 광기를 부여할 것이며.' '너희가 마음에 충실하게 할 것이다.' 처음 쿠샨을 발견했을 때를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의 쿠샨은 지금처럼 맑은 눈동자나 순박한 태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붉은 빛을 희번덕이고 피를 뚝뚝 흘리며, 괴조를 야만적으로 살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느 정도 조절할 수는 있다며?) (그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라서요. 오랫동안 살아오신 분들은 스스로 조절이 가능한데, 저 같은 경우는 조금 애매해서…. 아, 아직 좀 부족하달까요.) (목숨 걸고 싸우는 전투가 아니라 가벼운 대련이라니까? 이 대련에서 너한테 적대감을 가질 사용자는 없으니, 네가 이성을 잃는 일도 없을 거야.) (아이 참.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니까요. 굳이 상대방이 적대감을 표출하지 않아도, 저 멋대로 반응하는 경우도 있다는 말이에요.) 이해가 안되냐는 듯 갑갑해하는 음성이 들려온다. 그러나 김유현은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래도 걱정 마. 설령 네가 이성을 잃는다고 해도 우리가 충분히 제압할 수 있으니까. 지금 기다리는 인간들, 상당히 강한 편이라고?) (…별로 강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뭐, 뭐?) (엄청 약할 것 같은데….) 쿠샨이 김유현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사실 사용자 정보 중 '마력'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보면, 쿠샨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거인은 육체적인 면에서는 나무랄 데 없지만, 선천적으로 마력의 축복을 받지 못한 종족이다. 흐르는 피는 매우 강한 마법 저항 능력을 지녔으나, 반대급부로 마력에 관해서는 그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하니까. 그것은 김유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거 꽤나 무시당하는 기분인데. 우습게 보지 마.) (무시하는 게 아니라, 해봤자라는 소리에요.) (무슨 소리! 너희의 힘이 강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이 세상은 힘이 다가 아니거든. 만만히 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헤….) 거인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입을 조금 벌렸지만, 여전히 기둥은 놓지 않고 있다. 아무래도 어지간해서는 정말 가지 않을 것 같다. 결국 김유현은 방법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진짜 이럴 거야? 우리 약속, 아니 협상했잖아. 이럴 거면 먼저 얘기해주는 게 아니었어.) (으음. 하지만 꼭 들어줄 필요는 없다고 하셨잖아요?) (이렇게 나오시겠다? 흠…. 그러고 보니 쿠샨 토르에 관한 다른 소식이 있었던 것 같은데….) (뭐, 뭐라고요?) 쿠샨이 곧바로 반응했다. 김유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씩 웃어 보였다. (가면 말해줄게.) (치, 치사해요!) (그래, 나 치사하다. 그런데 너도 치사하잖아.) (이익! 이건 다르잖아요!) 할 말이 없는지 쿠샨이 볼멘 소리를 냈다. 그러나 김유현은 머리를 갸웃하고는 어떻게 할거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쿠샨의 볼이 빵빵 해졌다. 그러나 아버지라는 단어에는 별도리가 없는지 쿠샨은 곧 천천히 손을 떼고 몸을 돌렸다. 행동 하나하나에 불만이 잔뜩 배어있다. 그런 쿠샨을 지켜보던 김유현은 돌연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왜, 왜 웃어요?) (그냥, 지금 이 상황이 갑자기 웃기게 느껴졌거든. 우리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하하하.) (저는 하나도 안 웃긴데요.) 쿠샨이 여전히 볼멘 소리로 투덜거리자 김유현이 서서히 웃음을 멈췄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해. 그런데, 너를 보고 있으면 누가 떠오르거든.) (네?) (그래. 생각해보니까, 너랑 꼭 닮았네…. 하는 행동이 말이야.) (……?) 갑작스럽게 음성이 가라앉는다. 그제야 불만을 거둔 쿠샨이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그때였다. 쿠샨을 바라보는 김유현의 낯에 아주 잠깐 아련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누군가를 떠올리고 그리워하는 듯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누군데요?) 기다리다 못한 쿠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문득 (아차.)한 김유현이 별안 두 눈을 크게 감았다 뜨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궁금해하는 쿠샨을 향해 연한 미소를 보였다. (이것도 가면 알려줄게.) (이익!) * 야영지 외곽, 너른 공터에는 약 30명에 이르는 사용자들이 모여 있었다. 일부 해밀 클랜원과 여타 클랜 로드를 맡고 있는 지휘관급 사용자들이다. 오늘 김유현이 '샘플 분석'을 명분으로 주최한 대련에 초청된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기다려온 샘플 분석임에도 불구하고 지휘관급 사용자들의 안색은 그리 밝지 못했다. 오히려 떨떠름해 보이는 기색이 그늘지어 있다. 거기다 약간 불안해하는 얼굴로 서로 수군거리기까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아무튼. 그렇게 공터에 미약한 어수선함이 일었지만, 이내 멀리서 김유현과 쿠샨이 다가오자 소란은 바로 사그라졌다. 물론 속박이 풀린 거인을 보고 놀란 사용자도 더러 있었으나, 크게 반응하지는 않았다. 김유현의 장담이 말뿐이라지만, 그동안 쿠샨이 보여왔던 행동도 있었거니와, 만에 하나를 대비해 곳곳에 사용자들을 포진시켜놨다. 보이지만 않을 뿐이지. 이윽고 김유현과 쿠샨이 도착했다. 이미 서로 얘기가 돼 있던 만큼 과정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쿠샨이 공터의 중앙에 서자 건너편에서 한 체격 좋은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 나온다. 쿠샨과 첫 대련을 벌일 사용자로서, 비록 거인보다는 작지만 190에 넘는 키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건장한 사내였다. 다른 사용자들은 그저 담담히 지켜볼 뿐. (자. 전투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서로 대련일 뿐입니다. 이 점은 분명히 인지해주시기 바랍니다.) 본격적인 대련에 들어가기 직전 김유현의 간단한 설명이 이어졌다. 문득, 잠깐 김유현을 돌아본 사내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였다. 잠시 시선을 마주쳤다가 크게 심호흡하며 도로 쿠샨을 돌아본다. 그 순간, 등에 맨 창을 뽑아 겨눔과 동시에 은근슬쩍 사내의 태도가 일변했다. “알겠습니다. 뭐, 제법 튼튼해 보이기는 하는데…. 까짓거 살살하죠. 흐흐!” (Omnes Rectus. Etiam Eget Est Satis Fortis…. Kkajit Ego Lenis. Heuheu!) 김유현은 아직도 수정구를 활성화한 상태였다. 수정구는 들려오는 모든 말을 강제로 번역한다. 말인즉, 방금 사내의 말 또한 거인에게 고스란히 들렸을 게 뻔하다는 소리였다. 쿠샨의 눈이 가늘어진 게 바로 그 증거였다. (상대는 거인 일족 중에서 가장 어리다고 한다. 감안하고, 너무 과하게는 하지 말도록.) 심지어 김유현까지. (이런. 그럼 상대가 안 맞는 거 아닙니까? 저를 상대하려면, 일족 최고의 용사 정도는 데려와야 하지 않을까요? 하하하!) (그래도 너무 방심하지는 말고.) 사내가 또 한 번 거드름을 피우며 큰 목소리로 웃어 젖혔다. 자꾸만 쿠샨의 신경을 긁는 소리들이 하나하나 번역되어 들려온다. 수천 년 동안 강철 산맥 제 3지역을 지배해온 자부심 높은 종족으로서, 저 말이 오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리라. 한순간 발끈할 뻔 했지만, 쿠샨은 차분히 속을 가다듬었다. 최소한 '전투'에 관해서는 거인은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 입 한 번 열 시간에,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바로 거인이라는 종족이다. (그럼….) 그리고 잠시 후. (시작.) 김유현의 말을 기점으로, 대련을 빙자한 연희(演戱)의 막이 올랐다. ============================ 작품 후기 ============================ 조금 더 적을까 하다가, 그러면 너무 늦어질 것 같아 끊고 올렸습니다. 하하. 음, 이건 여담인데요. 독자 님들. 거인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물론 본격적인 등장은 다음 회부터지만, 쿠샨이라는 거인을 독자 분들이 어떻게 보셨을까요? 저는 이게 궁금해요. 김수현이 예전에 이랬잖아요. 천성이든 전투든, 거인은 가능하면 동료로 삼고 싶은 놈들이라고.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네요. :) 0620 / 0933 ---------------------------------------------- Night Of Theater. 회상(Reminiscence). “기록은 사실로 밝혀졌어.” 거신 전쟁부터 고대 무녀 대화록까지. 너무 오래 입을 놀려서일까? 일장 연설을 마친 김수현이 턱을 부여잡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김유현이 반문했다. “사실로 밝혀졌다고?” “응. 제 3지역을 공략한 후 고대 무녀의 증표를 발견했거든.” “고대 무녀의 증표?” “아까 말했잖아. 제 3지역에서 고통과 굴욕의 시절을 보내던 거인들은, 고대 무녀를 만난 이후 어느 정도 힘을 회복할 수 있었거든. 바로 그 증표가 거인들의 힘을 회복시켜주는 하나의 촉매 역할을 하는 거지.” “촉매라. 그러면….” “맞아. 이건 공략이 끝나고 나온 얘기이기는 하지만, 아마 그때 증표의 존재를 알았더라면 우리도 조금 다르게 접근했을지도 모르지.” 그 순간 김유현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탐험이든 원정이든, 모든 사용자는 해당 과정을 기록하고 보고할 의무를 갖고 있다. 해당 괴물에 관한 정보는 물론, 차후 비슷한 괴물이 나왔을 시 한 번 되짚어 볼만한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했으면 우리는 조금 더 쉽게 공략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사용자들도 더러 있는 편이다. “고대 무녀의 증표라…. 그럼 그것만 어떻게 조작할 수만 있다면, 회복된 거인들의 힘을 도로 떨어트릴 수 있지 않을까? 예전 수준으로 말이야.” “그렇지. 사실 방법 자체는 간단해.” “간단하다고?” “생각해봐. 고대 무녀의 증표는 일종의 신물이라고 볼 수 있거든? 그런데 신물이라는 게 아무데서나 발동하는 건 아니잖아. 무녀의 힘을 지닌 이가 갖고 있거나, 아니면 지정된 장소에 있어야 하지. 아니 신역이라고 해야 하나? 예를 들면 무녀가 신과 접촉하려고 만든 제단이라던가.” 부적 혹은 신주를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한 이야기였다. 곧바로 알아들은 김유현은 기쁜 빛을 감추지 못하며 활짝 미소 지었다. 아까 거인의 특징을 들을 때만 해도 방법이 없겠다 싶었는데, 생각보다 쉽게 공략할 길을 찾아낸 것이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불가능해.” “그럼 그 증표를 훔치거나 제단을 파괴하면…. 뭐, 뭐라고?” 신나게 말을 잇던 김유현은, 동생의 부인에 저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말았다. 문득, 김수현은 얼굴을 딱딱히 굳히고는 심각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연초를 하나 꺼내 들었다. 마치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이. 그러나 김유현의 눈이 한껏 가늘어지자 투덜투덜거리며 도로 집어넣었다. “어쨌든, 형 말이 틀린 건 아니야. 그래도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해.” “왜? 아, 물론 그 증표가 거인들에게 중요한 물건이기는 하겠지. 그만큼 경계도 심할 테고. 하지만 거인은 마력을 느끼지 못한다며? 그러면 은신 능력이 절정에 오른 사용자들을 투입하면 되는 일 아니야?” 그러자 김수현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비웃음은 아니었다. 하나를 말해도 전혀 알아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두 개, 세 개 이상을 알아먹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김유현은 당연히 후자에 속한다. 가만히 입만 벌리고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밥상을 차릴 방법을 찾으려고 하니 나름 기분이 괜찮은 것이다. “일리는 있지만 힘들어. 왜냐하면 증표가 있는 장소는 신역으로 구분되거든. 신의 힘이 미치는 영역인 만큼 출입 또한 제한되지.” “신역?” “그래, 신역.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그 장소는 인간은커녕 거인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영역이야. 오직 고대 무녀, 아니면 거인들의 제왕인 쿠샨의 피를 이어받은 거인만이 들어갈 수 있어.” “…그럼 1회 차에서는 어떻게 증표를 얻었는데?” “글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신역을 유지하는 건 신물이거든. 그때 쿠샨 일족 중 누군가가 신물을 건드렸거나, 아니면 거인들의 멸망과 연관 지을 수 있겠지.” “…그래?” 김유현이 살짝 갸웃하며 말하자 김수현은 그렇다는 듯이 머리를 크게 끄덕였다. “으음….” 아까 기뻐하던 빛은 금세 사라져버리고, 김유현은 무거운 침음을 흘리며 시름에 잠겼다. 고대 무녀의 증표 이야기가 나왔을 때만 해도 방법을 찾았다 싶었는데, 김수현이 저렇게 말한 이상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온 것과 진배없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정면 승부밖에는 답이 없는 건가?” “힘들걸? 동부, 서부, 남부, 북부가 모든 힘을 합친다면 몰라도.” 김유현이 거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으나 김수현이 머리를 흔들며 대답했다. “…….” 그리고 나서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아주 잠시 머뭇거리더니 곧 빤한 눈초리로 김유현을 응시했다. “혹시….” * 사용자와 거인의 대련. 공식적이지 않은 만큼 큰 의미는 부여할 수 없으나 그래도 은근한 자존심 싸움은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게 30명의 사용자들이 조용히 지켜보는 가운데, 사내가 은색으로 빛나는 창을 움켜쥐고는 서서히 쿠샨에게 다가갔다. “하!” 그러다 어느 순간, 사내가 힘찬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나갔다. 일직선 돌격이 아닌, 풋 워크(Foot Work)로 지면을 밟으며 지그재그로 이동해 쿠샨의 시선을 어지럽힌다. 겉으로는 담담히 사내의 움직임을 쫓는 쿠샨이었으나 속으로는 살짝 놀란 상태였다. 짓쳐 들어오는 사내의 속도가 생각보다 상당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살짝 몸을 웅크리고는 움켜쥔 주먹으로 갈비뼈 부분을 살그머니 가렸다. 잠시 후, 현란하게 움직이던 사내의 발이 느닷없이 왼쪽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쿠샨의 시선이 사내의 발이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 차분히 움직인다. 그러한 찰나, 사내의 발이 급작스럽게 오른쪽으로 선회해 커다란 반원을 그렸다. 쿠샨이 왼쪽으로 머리를 돌린 틈을 타서 있는 힘껏 창을 내뻗었다. 창은 바람을 시원하게 가르며 뻗어나가 여지없이 쿠샨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아니, 틀어박히려는 순간이었다. 탁! 한순간, 사내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쿠샨의 머리는 여전히 왼쪽을 보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할진대, 갈비뼈를 가렸던 왼쪽 주먹이 내려와 보지도 않고 창 끝을 잡아챈 것이다. 사내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당혹감이 서서히 차오른다. “어, 어?” 창을 꽉 잡은 상태서 쿠샨은 천천히 머리를 돌렸다. 사내는 반사적으로 창을 빼려고 용을 쓰고 있었지만, 거인의 손아귀에 잡힌 창은 미동도 보이지 않고 있다. 결국 창대를 잡은 손이 옆으로 뿌리치듯이 움직이자, 그제야 사내는 해방된 창을 들고 지면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동그라졌다. “시, 실수였다! 다시!” 화가 난 걸까, 아니면 창피한 걸까? 사내는 번쩍 몸을 일으키고는 다시금 다급하게 달려들었다. 쿠샨은 코웃음을 쳤다. 실수라는 말이 웃기기도 했거니와, 방금 전의 공세 교환으로 서로의 실력은 명백하게 갈린 상태였다. 속도가 빠르기는 하지만 대응 못할 정도는 아니고, 근력은 하잘 것 없는 수준이다. '에이, 시시해.' 그렇게 생각한 쿠샨은 황소처럼 치고 들어오는 사내를 응시했다. 조금 전과 똑같은 움직임. 아까는 몰라서 허용했다고는 해도, 한 번 경험한 이상 두 번 당하지는 않는다. 예상대로, 사내는 빠른 속도로 경로를 틀어 측면에서 공격을 가해왔다. 쿠샨은 그 커다란 몸집에도 불구하고 민첩하게 반응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창을 왼손으로 걷어내고는 그대로 몸을 절반쯤 돌려 오른손으로 사내의 복부를 밀어낸 것이다. 퍽. 말 그대로 친 게 아니라, 밀어냈다. 허나 약간이라도 회전력이 가미된 거인의 근력은 절대 무시 못할 수준이다. 사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공중으로 붕 몸을 날았다가, 거칠게 땅에 나동그라졌다. 우당탕, 우당탕! 한순간 구경하던 사용자들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느 사용자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입을 쩍 벌렸고, 또 어느 사용자는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서 가벼운 소란이 일었다. (마, 말도 안 돼! 어, 어떻게 된 거야?) (이, 인간 최고의 용사 중 한 명이….) 웅성웅성, 웅성웅성. 번역되는 말들 중에서 몇 가지가 쿠샨의 귀로 흘러 들어온다. 사실 잘 들어보면 거의가 비슷한 말이다. 종합해보면, 저 사내가 당한 게 믿을 수 없다는 정도. 그러나 그런 말을 듣는 쿠샨의 생각은 단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 이게 인간 최고의 용사 수준이라고?' 확실히 김유현도 그러지 않았는가. 상당히 강한 인간을 준비했다고. 그런데 결과는…. '이건 너무 약하잖아….' 거드름 피우는 인간들을 이겼다는 고소한 마음도 잠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딱딱히 굳은 김유현을 확인한 순간, 쿠샨은 도리어 미안해지는 마음에 머리를 긁적였다. 어느 정도 싸움이 되야 통쾌함을 느끼지, 이건 이겼다고 보기도 미안한 수준이었다. (그, 그만. 모두 조용히.)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김유현이 더듬더듬 말을 꺼내 주변의 소란을 진정시켰다. (이번에는 3명으로 해보도록 합시다.) * 일대일, 삼대일, 오대일, 십 대일. 총 4번에 걸친 거인과의 대련이 끝났다. 결과는 인간들의 처참한 패배였다. 분명 수가 늘어날수록 버티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쿠샨을 상대로 단 한 번도 유효타를 성공시키지 못한 것이다. 결국 더 해봐야 의미 없다고 판단한 김유현은 대련의 종료를 알렸고, 쿠샨을 데리고 다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거의 압도적으로 이기기는 했지만, 쿠샨의 기분도 썩 좋은 건 아니었다. 인간이 개미를 이겼다고 자랑스러워하지 않듯이, 쿠샨 또한 비슷한 입장이었다. 오히려 전투가 끝나고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인간들의 눈초리가 마음에 걸릴 뿐. (헤헤, 어때요. 저 엄청 강하다고 했죠?) 쿠샨은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보았다. 그러나 김유현의 말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저 크게 충격 받은 얼굴로 멍하게 걸어가고만 있었다. 이따금 비틀거리기도 하는 게, 온몸의 힘도 없어 보인다. (저…. 아까 얘기해주신다는 건….) 그러나 계속 반응을 보이지 않자, 쿠샨은 그냥 입을 다물기로 결정했다. 눈에 보이는 김유현의 얼굴이 워낙 심각했거니와, 왠지 모르게 인간들의 기분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최고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게 무참히 깨졌으니 이런 행동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둘은 기둥이 있던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에 도착했다. (어? 저거는….) 두리번거리며 기둥을 찾던 쿠샨은 눈앞에 놓인 큼직한 천막을 보고 미약한 탄성을 질렀다. 어찌나 커다란지 자신을 수용하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돌연히 쿠샨의 안색에 화색이 돌았다. (이, 이건 뭐예요? 저를 위해 만들어주신 거예요?) 그리고 김유현을 돌아보며 한 발짝 다가간 순간이었다. (허억!) 문득, 김유현이 불침이라도 맞은 양 크게 놀라며 쿠샨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그러다 아차 한 얼굴을 하더니 억지가 다분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낯에 서린 숨길 수 없는 공포심을 확인하자, 쿠샨은 말문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어, 어. 그, 그렇지. 일종의 선물이랄까?) (……) (하, 하하. 저건 네 천막이고 옆에 천막이 내가 사용하는 천막이거든…. 그게 더 편할 것 같아서.) (……) (무, 물론 안에 기둥은 따로 있고, 그냥 비바람을 피하는 정도겠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꿀까? 조용한 곳에 따로 설치해줄 수도 있는데.) (…아니요. 괜찮아요.) 천막을 선물 받았다는 기쁨도 잠시에 불과했다. 간신히 대꾸한 쿠샨은 시무룩한 기분으로 천막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만약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랬다면, 쿠샨도 별다른 감흥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김유현과 쿠샨은 행군 중에서든 야영지에서든, 함께 식사는 물론, 서로 틈만 나면 대화를 해왔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서로 나름 깊은 교감을 나눠온 관계였다. 또 결과적으로 지금에 이르러서는 상당히 친해진 상태이기도 했고. 그러할진대, 차라리 처음부터 무서워했다면 모를까. 이제 와서 대련 한 번 했다고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건, 쿠샨 입장에서는 상당히 서운하게 생각할만한 일이었다. (…제가 실수한 거라도 있어요?) 결국 천막에 들어간 후, 입을 뿔뚝 내민 쿠샨이 자못 섭섭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주문을 외워 속박을 걸고 있던 김유현이 당황한 낯으로 머리를 들었다. (으응? 아니. 없어.) (그럼 다들 왜 이러는 건데요.) (어? 뭐, 뭐가?) (거짓말하지 말아요. 저도 보는 게 있고 느끼는 게 있다고요. 진짜 너무해요.) (으음.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하다.) (치…. 이래서 하기 싫다고 한 건데….) 쿠샨이 시무룩이 말끝을 흐리자 김유현은 짧은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서둘러 주문을 마치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대련 결과가 조금, 아니 많이 예상외였어.) 그러자 '정말 그 사내가 인간 최고의 용사에요?'라고 물어보려던 쿠샨은 목구멍 끝까지 올라온 말을 겨우 삼킬 수 있었다. 김유현의 얼굴을 보니 왠지 물으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에. 그때, 김유현이 살그머니 입을 열었다. (우선은 하나만 물어보자. 너, 강하지?) (네?) 갑작스러운 물음에 쿠샨이 반문했다. (너 쿠샨이라며. 거인들의 제왕이 일족이라며. 그럼 후계자인 거 아니야? 거인들 중에서도 엄청 강한 거 아니야? 응? 그렇지? 네가 최고로 강한 거지?)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게 마치 '네.'를 바라는 듯한 물음처럼 느껴졌다. 잠시 김유현을 물끄러미 응시한 쿠샨은 곧 도리도리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아니라고?) (네, 아니에요. 저는 오히려 약한 편이에요.) (약한 편이라고?) (성인식을 치르고 토르의 힘을 받으면 비약적으로 강해지겠지만…. 아직은 아니에요. 제가 제일 어리고, 저보다 강한 분들은 훨씬 많아요.) (…총 몇 명이나 있는데?) 쿠샨은 800명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김유현의 얼굴이 확실하게 보일 정도로 일그러졌다. (800명…. 800명이라….) 마치 혼이 빠진 것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린 김유현은 이내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그래…. 알겠…. 다….) 예전 같았으면 다른 이야기라도 나눴을 텐데, 그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쓰러질 듯한 걸음으로 천막을 나섰다. 쿠샨은, 김유현이 나간 천막을 하염없이 응시하다가, 돌연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몸을 비틀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단단히 묶인 밧줄이 자못 거슬리게 느껴진 탓이다. 그리고. “후.” 천막에서 나온 김유현은 가볍게 숨을 흘리며 기지개를 폈다. 그와 동시에 죽겠다는 얼굴로 머리를 좌우로 꺾고 마사지 하듯이 안면을 주물렀다. 말은 물론, 간만에 표정이나 행동에 신경을 쓰려니 여간 힘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내 힘없어 보이던 걸음걸이 또한 곧바로 정상으로 되돌아온다. 그때였다. “아, 뇌제!” 갑자기 전방에서 서너 명의 사용자들이 김유현을 발견하고는 신속하게 다가왔다. 아까 대련 장소에 서 있던 지휘관급 사용자들이었다. “어, 어떻습니까. 이제 슬슬….” “쉿.” 그리고 무언가 물으려는 찰나, 김유현이 돌연 검지를 입에 대며 소리를 내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사용자들이 서로를 떨떠름히 바라보며 입을 다물자, 김유현은 날카로운 눈으로 천막을 한 번 흘기고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당연히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입 모양으로 의사를 전달한다. 김유현의 말은 단 두 마디에 불과했다. '거인은 귀가 밝습니다.' '자리를 옮기도록 하죠.' ============================ 작품 후기 ============================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0621 / 0933 ---------------------------------------------- Night Of Battle. “그래서, 갑자기 무슨 일로들 찾아오신 겁니까?” 쿠샨에게 마련해준 천막에서 멀찍이 자리를 옮긴 후, 김유현은 자신을 찾아온 사용자들을 보며 말했다. 사실 약간 피곤함을 느낀 터라 어지간하면 물리고 싶었지만, 눈앞의 사용자들 또한 북부의 클랜 로드들. 일단 협력하는 관계인만큼 괜한 일로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다. 물론 그것은 북부 클랜 로드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게….” 한 사내가 살짝 운을 떼더니 잠시 김유현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리고는 한없이 조심스러워하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 이제 슬슬…. 말씀해주실 때도 된 것 같아서….” “예?” “아, 물론 그동안 거인에 관한 여러 이야기나 지시를 듣기는 했지만…. 그, 뭐랄까…. 그러니까…. 목적을 조금 더 분명히 알고 싶다는 뜻일까요? 하하하….” “…아하.”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이 김유현이 빙긋이 미소 지었다. 그러자 뭔가 뜨끔한 게 있는지 말을 꺼낸 사내가 황급히 머리와 손을 가로젓는다. “아, 미리 말씀 드리는데 이건 절대 불만이 아닙니다. 믿지 못하겠다는 뜻도 아니고요. 그냥 궁금해서, 아니 순수한 호기심에서 드리는 말씀으로….” 한 원정대의 총사령관이라는 자리는 국가 대표의 감독 자리와 비슷한 면이 있다. 잘할 때는 모두의 우러름과 칭송을 받는 자리이지만, 못할 때는 무수한 의심과 비난을 받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 잘나가던 황금 사자도 한 번의 원정 실패로 엄청난 비난을 받지 않았던가. 여하튼 그러한 면에서 본다면 김유현은 지금껏 나름 잘해왔다고 볼 수 있다. 그것도 무척이나. 그래서 지금 이 클랜 로드들이 조심조심 대하고 있는 것이다. 말인즉, 조건부 신뢰라고나 할까? 만약 이제껏 진군이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다면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으리라. “하하, 그렇군요.” “혹시 기분이 나쁘셨다면….” “아닙니다. 안 그래도 이제 슬슬 본격적인 회의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아, 정말이십니까?” 긍정적인 답변을 들어서일까? 말을 꺼낸 사내의 안색이 확연히 밝아졌다. 김유현은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머리를 끄덕였다. “어찌 보면 무리한 요구들일 수도 있는데, 여러분들은 저를 믿고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셨습니다. 이 점은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에이, 아닙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애초에 모든 권한을 넘기는 것으로 모셔온 건데요.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저도 감사하지요. 아무튼, 결전을 치를 날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전에 모든 것을 정리하는 회의를 해야 하는데….” “…….” 김유현이 스리슬쩍 말끝을 흐리자 비로소 사용자들의 얼굴에도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결전을 치를 날이 다가오고 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그전에.” 그때. “여러분들 말입니다.” 갑작스럽게. “혹시, 연극 좋아하십니까?” 김유현의 입가에, 이전과는 약간 달라 보이는 미소가 걸렸다. “…예?” 뜬금없는 말이라 그런지 사용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김유현이 입을 열었다. “제가 그동안 저 거인과 많은 시간을 보낸 건 다들 알고들 계실 겁니다.” “예, 예. 그렇지요.” “그런데, 방금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서 말입니다.” “……?” 재미있는 이야기? 아직 영문을 모르는 사용자들은 더욱 얼떨떨해하는 얼굴로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니까, 회의 전 여러분들의 도움을 한 번 더 받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말한 김유현은 돌연 살짝 혀를 내밀고는 마른 입에 침을 발랐다. …아무래도 형이나 동생이나, 형제간 똑같은 버릇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오후를 알렸던 해 질 녘 노을 또한 저물어가고, 그 자리를 어둑한 땅거미들이 대신해 내려앉는다. 저녁이 찾아온 것이다. 툭. 문득, 하늘에서 빗방울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한 방울, 두 방울 이어서 떨어지는 물방울들도 지면을 점점이 적셔갔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후드득, 후드득!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산맥은 빗방울 소리로 가득해졌다. “…….” 천천히 시선을 돌린 쿠샨은 천막의 입구를 응시했다. 빗소리를 제외하고는 주변은 고요했다. 점점 젖어 드는 지면에 웅덩이가 고이고, 조금씩 차가워지는 공기가 살에 와 닿는다. 사실 거인의 입장에서는 춥다기보다는 시원한 정도였지만…. 이상하게도 쿠샨의 마음은 땅에 고여가는 흥건한 웅덩이처럼 쓸쓸하기 그지없다. 슬픈 건 아니었다. 그와는 다른 종류의 감정이다. 그러니까, 외로움이라고 해야 할까? 예전 같았으면 아마 지금쯤 김유현이 들어왔을 것이다. 그것 보라고, 천막을 치기를 잘하지 않았냐고 웃으면서 스튜가 가득 담긴 통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그리고 마주보며 앉아 같이 식사를 하며, 인간 세상에 관한 이야기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 등을 도란도란 나누었을 것이다. 헌데, 저녁이 찾아온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식사는커녕 김유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비록 최근에 인연을 맺기는 했지만, 김유현과 쿠샨은 근래 확실히 친한 관계를 맺어왔다. 그것은 서로가 지성을 갖추고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이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즉 한 '명'의 인간으로서, 또는 한 '명'의 거인으로서. 김유현은 거인을 그저 그런 괴물이 아닌, 지성을 가진 동등한 인격체로서 대우했다. '인간이란 종족은 말이다….' 갑자기, 쿠샨의 머릿속으로 아버지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강해, 아주 강하다. 개개인으로 보면 한낱 미물로 느껴질지 몰라도, 인간의 강함은 바로 엄청난 적응력과 끝없는 진화에 원인이 있다.' '우리가 거신 전쟁의 대가로 미래를 제한당한 것에 반해, 인간들은 끝없이 미래를 개척해가는 종족이야. 즉 진화가 허락된 종족이지.' '전투를 부정하는 건 아니야. 허나 지금처럼 무조건 상대를 배척하고, 또 무조건 우리가 최고라는 인식은 잘못됐어. 이대로 계속 있다가는, 언젠가 길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건 바로 멸망뿐일 게다.' '예전의 영광은 과거에 불과하다. 가만히 있으면 뒤처질 뿐이다.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더 나아가 예전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이제는 달라져야만 해. 그래서 나가야만 한다는 거다.' 전대 거인 제왕의 입장. 전투를 부인하지는 않으나, 무조건적인 전투는 지양해야 한다. 살아남으려면 현재에 안주해서는 안되며, 진화를 이루어야만 한다. 우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외부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한다. 바로 예전에 고대 무녀가 그랬던 것처럼. 이러한 이유로 전대 쿠샨 토르가 나간 것이고,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어린 쿠샨이었다. 이후로, 아버지가 떠난 후 비록 몇 년이 지나기는 했지만, 강철 산맥에 스스로 인간들이 들어왔다. 쿠샨이 겪어온 인간들의 모습은 아버지가 말한 모습 그대로를 그리고 있었다. 비록 개개인으로서는 약할지라도, 살아가는 방식에서는 확실히 거인과 다른 점을 지니고 있었다. 애당초 '포로'라는 개념도 인간들에게 붙잡힌 후 처음 배웠으니, 두 말하면 숨가쁘지 않겠는가. 그래서,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궁극적으로 목표했던 예전의 영광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달라질 기회는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할진대…. 단 한 번의 대련에,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그라졌다. 대련이 끝난 후 쿠샨을 쳐다보던 인간들의 눈초리는, 두 종간의 교류가 불가능하다는, 극복 못할 간극이 존재한다는 방증이나 다름없었다. 터벅터벅. 그때였다. (으음, 여기 있나?) 쿠샨이 시무룩이 머리를 숙일 즈음 돌연히 누군가가 천막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혹시 김유현인가 싶어 번쩍 머리를 치켜든 쿠샨은 처음 보는 사내에 의아한 기분을 느꼈다. (밥이다. 갑자기 비가 내려서 식사가 조금 늦었다.) 무뚝뚝하게도 말한 사내는 들고 온 냄비를 쿠샨의 앞에 내려놓고는 짧게 주문을 외웠다. 잠시 후, 쿠샨의 팔에 묶여 있던 밧줄이 스르륵 풀려나갔다. 하지만 쿠샨의 입장에서는 지금 중요한 건 밥이 아니었다. (저, 저와 대화하실 수 있어요?) (당연하지. 이 수정구를 만든 게 바로 나거든.) 사내는 목에 건 두 개의 수정구를 툭툭 치고는, (됐으니까, 얼른 먹기나 하라고.)라고 말하며 쿠샨에게서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마치 감시라도 하겠다는 듯이. 쿠샨은 잠시 냄비를 멀뚱히 응시하다가 사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 (응?) 사내가 시선을 돌리자 쿠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분은 오늘 안 오시나요?) (그분? 아, 총사령관은 무척 바쁘시다.) (총사령관?) (그냥 여기서 가장 높은 인간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지금 그분은 아주 중요한 회의 중이시거든? 바로 옆에 천막에서 말이지.) 사내가 등지고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쿠샨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 회의란 거…. 오래 걸려요?) (글쎄.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러면요. 끝날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혹시….) (거참 끈질기네. 짧게 걸리든 오래 걸리든, 그냥 먹으라니까? 애초 너 때문에 하는 회의인데….) 쿠샨의 부탁이 귀찮았는지 사내는 미약한 짜증을 내며 얼굴을 찡그렸을 때였다. (사용자 양기덕! 잠시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한 찰나, 누군가 밖에서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데? 급한 일이야?) (호출이라서, 빨리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젠장. 또 누가 부르는 거야?) (어서…!) 자꾸만 채근하는 목소리에 양기덕은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이, 너. 잠시 다녀올 테니까 얌전히 먹고 있어라.) 그리고는 목에 걸고 있던 수정구를 지면에 내려놓고는 곧바로 천막을 나섰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기는 했지만, 냄비의 스튜는 뜨끈뜨끈한 김을 피어 올릴 뿐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상체의 속박은 풀렸지만, 쿠샨은 조금도 손을 움직이지 않은 채 아까처럼 입구 밖만 응시하고 있다. 주변은 여전히 고요하고, 그저 땅을 치는 빗소리만이 들려온다. 그러다 어느 순간. 쾅! (지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돌연히, 무언가를 거세게 치는 소리와 동시에 마력이 충만한 고성이 귓전을 울렸다. 깜짝 놀란 쿠샨의 뇌리에 아까 사내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지금 그분은 아주 중요한 회의 중이시거든? 바로 옆에 천막에서 말이지.' '너 때문에 하는 회의인데….' 쿠샨의 눈이 곧바로 천막의 옆면을 향했다가, 사내가 놓고 간 빛나는 수정구로 떨어졌다. 이내 머리가 최대한 옆쪽으로 기울어졌다.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가겠다니! 무슨 헛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공략이 거의 코앞이요. 지금 제정신이요, 총사령관?) 여러 목소리들이 들려오지만, 아직 김유현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그게…. 오늘 다들 보셨다시피….) 허나 공교롭게도, 때마침 김유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거인의 힘이 제 예상을 초과했습니다. 설마 이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인과 한 번 이야기를 해보겠다고 하지 않았소? 잘만하면 싸우지 않고 공략할 수 있겠다고 하지 않았소?) (예. 그랬습니다. 하지만 오늘 모두가 보셨다시피, 우리 인간 최고의 용사가 거인에게 참패했습니다. 헌데, 거인의 말로는 자신보다 더 강한 거인이 800명이나 더 있다고 합니다…. 완벽한 제 불찰입니다.) (거참 답답하구먼. 그럼 진작 말을 하시던가! 지금껏 저놈이랑 뭐하고 지낸 게요? 짝짜꿍이라도 하셨소?) '내가 한 얘기들을…. 다 말하고 있어?' 물론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지만, 일말의 배신감을 느낀 쿠샨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은 현재 이 산맥을 공략하고 온 입장이니까. (자자, 다들 진정들 하십시다.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화만 내서야 어떡하겠습니까?) (맞아요. 굳이 총사령관만을 탓할 일은 아니에요. 설마 거인이 이렇게 강할 줄, 우리도 예상하지 못했잖아요.) 이번에는 아까와는 다르게 김유현을 옹호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이미 시간이 너무 많이 허비됐어요. 여기서 서로 화내면서 시간을 더 허비하기보다는, 이제 그만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공략을 포기하자는 말씀이십니까?) (어쩔 수 없지요. 공략보다는 목숨이 우선이니까요. 우선은 후퇴하는 게 가장 올바른 결정일 것입니다.) (다른 분들은 너무 실망하지는 마세요. 작전상 후퇴라는 말도 있잖아요? 우리는 공략을 실패한 게 아니라, 다시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니까요.) '작전상 후퇴? 재정비?'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쿠샨은 본능적으로 청각에 집중하며 귀를 기울였다. (그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물론 거인들이 강한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수가 고작 800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수적으로는 우리가 절대로 우위에 있습니다.) (우위에 있는 정도가 아니죠. 인간의 장점이 뭔가요? 지금은 비록 5천명 밖에는 없다지만, 돌아가서 더 병력을 모으고 재도전하면 되는 일이잖아요.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여기 계신 분들이 조금만 힘을 쓰면 5만, 아니 10만 이상도 가볍게 모을 수 있잖아요?) (장담컨대, 10만 이상도 가능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미 길도 터놨으니 다시 오기도 쉬울 테고, 거인을 상대할 다른 마법이나 도구도 만들어올 수 있겠지요.) (맞아요. 그러니 지금 여기서 잠깐만 물러나면, 몇 개월 후 우리는 확실하게 이길…. 아, 아니. 죄송…. 아, 확실하게 거인을 멸망시킬 수 있어요. 흐흠.) 쿵, 쿠샨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처음에는 궁금해서 엿들을 생각에 불과했는데, 듣고 보니 심상찮은 이야기들이 오고 가는 중이었다. 다른 건 차치하고서라도, 항상 몇 백 단위로 살아온 쿠샨은 10만이라는 수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까 10명 정도야 가볍게 이겼다손 쳐도 그 10배인 100명, 아니 수백 명이 동시에 달려들면 쿠샨도 자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거기다 마법이나 도구까지 곁들인다고 하면, 인간들의 말은 절대로 틀린다고 볼 수 없다. '어, 어떡하지?' (아, 그리고 저 거인도 데려가도록 하지요. 보아하니 인간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일단 살살 구슬려서 데려간 후 고문을 하든 해부를 하든, 거인을 상대할 추가 정보를 얻도록 합시다.) (두 말하면 잔소리죠. 이 역할은 당연히 총사령관이 맡아주시겠죠?) 그 순간, 계속해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쿠샨은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왜냐하면 지금 인간들이 말하는 저 거인이 누구를 말하는지 알 것 같았기에. 그리고 잠시 후. (저는….) 조용히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쿠샨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후유….) 잠깐 틈을 두고 들려온 말소리는, 바로 끝나지 않고 아까 들어본 듯한 한숨으로 흐려졌다. 쿠샨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온 신경을 청각에 집중했다. 그러지 않으려고는 해도, 최근 김유현과 보냈던 나날들이 자꾸만 머릿속으로 떠오른다. 김유현은 과연 어떤 대답을 할까? '그러겠다고…. 하겠지…?' 그렇게 잠시간의 정적이 이어진 후. (개인적으로…. 그 거인을 놓아주었으면 합니다….) (뭐, 뭐라고요?) 간신히 들려온 김유현의 음성이, 누군가 크게 놀란 목소리에 묻혔다. 그러나 적어도 쿠샨은 확실하게 들을 수 있었다. 두 눈이 화등잔만 해진 게 바로 그 방증이었다. (비록 거인이기는 하지만…. 쿠샨은….)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쿵! 문득, 어디선가 땅이 크게 울리는 소리가 쿠샨의 귓전으로 흘러들었다. ============================ 작품 후기 ============================ Night Of Battle. 결전의 밤의 파트를 시작합니다. 총 4회로 기획돼있으며, 이 파트의 다음 파트가 제 3지역 공략의 종결 파트라 보시면 됩니다. 2지역 공략이랑 비교하면 많이 줄어들었죠? :) 그리고 김수현은 다음 회 출현 예정이기는 하지만, 비중 있는 출현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원하시는 비중 있는 출현은, 이번 파트의 마지막인 4번째 회에 예정돼있습니다. 그럼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_(__)_ 0622 / 0933 ---------------------------------------------- Night Of Battle. 처음에는 그저 가벼운 진동인줄 알았다. 쿵! 쿵! 쿵! 쿵! 그러나 지면에 심상찮은 진동이 추가로 전해져 왔을 때, 그제야 사용자들은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걸 느꼈을 때는 이미 늦어도 한참이나 늦은 상태였다. 변화는 야영지 측면으로 2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빽빽한 수림 속에서부터 일어났다. 깜빡깜빡, 등불이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점멸 현상이 일어나더니 갑자기 수림 사이로 몇 개의 밝은 빛이 드러난 것이다. 아니, 그저 밝은 빛이 아니었다. 이따금 깜빡깜빡 움직이며 진한 붉은 빛을 흘리는 그것은, 틀림없이 누군가의 눈동자였다. 붉은 안광을 번들거리는 눈동자들이 수림을 헤치고 점차 야영지로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붉은빛이 드러난 건 고작해야 서너 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거리가 줄어들수록 붉은 안광이 점차 우수수 모습을 드러내더니, 종래에는 수십 개의 불빛이 번쩍번쩍 빛나기 시작했다. 쿵, 우지끈! 쿵, 우지끈! 한 번 소리가 울릴 때마다 거대한 나무가 부러져 하릴없이 무너져 버린다. 그렇게 무너지는 수림 속에서 이내 불빛을 이루는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이 소리는?” 한창 회의를 엿듣고 있던 쿠샨은 요란한 소리들이 들려오자 기겁하며 시선을 돌렸다.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애초 이 지역은 쿠샨의 홈 그라운드나 다름없는 곳이었으며 저 굉음도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낼 수 있는 소리였으니까. 말인즉, 오직 동족만이 낼 수 있는 소리였다. “으, 으아아아아악!” 이윽고 굉음이 뚝 끊김과 동시에 바깥에서 비명이라고 생각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비명을 질렀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아, 안 돼!” 쿠샨이 이를 악물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회의를 엿듣고 나니 우선은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기둥에 꽁꽁 묶인 탓에 옴짝달싹 도 할 수 없었다. “거인이다! 거인이다!” 시시각각 비명이 커지고 소란스러움도 강해진다. 그에 따라 쿠샨의 마음도 계속 급해져만 갔다. 마침 식사 시간이었던 터라 팔의 속박은 풀려 있었다. 쿠샨은 지체 않고 자신을 구속하는 밧줄을 부여잡았다. “끙…!” 힘껏 힘을 주었지만 마력의 힘으로 묶인 밧줄이 어디 쉽게 풀리겠는가. 아무리 애를 써도 밧줄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으며 쿠샨의 신체를 단단하게 조여왔다. “끄윽…!” 그러나 쿠샨은 침음을 흘리며 더욱 세게 밧줄을 잡아당겼다. 그럴수록 복부에 시큰시큰한 감각이 느껴졌지만 쿠샨은 조금도 아랑곳 않으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자신이 가진 힘을 모두 쏟아 부었다. 찌직, 찌지직! 결국에는 쿠샨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 우악스러울 정도의 근력에 밧줄이 조금씩 조금씩 늘어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시원스럽게 찢어진 것이다. 사정없이 뜯겨진 밧줄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마침내 해방된 쿠샨이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쿠샨은 여전히 들려오는 비명을 향해 힘차게 내달렸다. 한편, 같은 시각. “이게 무슨 소란이죠?” 김유현의 천막에 모여 있던 사용자들이 하나같이 당황한 얼굴로 입구를 바라보았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다들 김유현이 건네준 기록 하나씩 들고 차례대로 소리 내서 읽던 도중이었는데, 뜬금없이 굉음이 들려오고 야영지가 어수선해진 것이다. 그때였다. “크, 큰일났습니다! 거인들이 습격입니다!” 한 사내가 헐레벌떡 천막을 젖히고 달려와 소식을 전했다. 김유현은 물론, 다른 사용자들 모두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거인들의 습격이라고?” “예, 예! 갑자기 서쪽 수림에서 모습을 드러내서…!” 서쪽 수림이라면 북부 원정대가 진군 불가 지역으로 지정해놓은 장소였다. 워낙 수풀이 울창하거니와, 커다란 나무들이 빽빽이 가로막은 터라 굳이 들어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헌데, 그곳에서 거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서!” 그러나 사내가 생각할 시간도 없다는 듯 황급한 목소리로 입을 연 찰나였다. “────────────!” 갑작스레 바깥에서 무시무시한 고함이 멀리멀리 울려 퍼지며 사용자들의 고막을 떠르르 뒤흔들었다. 어찌나 커다란 목소리인지 사용자들이 흡사 천둥이 치는 듯한 착각을 느낄 정도였다. “크, 큰일입니다!” 이윽고 또 한 명의 사내가 방금 들어온 사내와 비슷한 말을 외치며 천막으로 도망치듯이 달려왔다. “거,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까는 습격이라며!” “아, 아닙니다! 습격 당할 뻔했는데, 작은 거인이 갑자기 나와서 거인들을 저지했습니다!” “뭐, 뭐?” 사내는 숨을 가쁘게 내쉬면서도 새로운 소식을 전달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사용자들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당최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데, 작은 거인이라느니 저지라느니 라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김유현 또한 이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니 예상하지 못했다기 보다는, 너무 갑작스럽다고나 할까. “나갑시다. 일단 나갑시다.” 어차피 지금 여기 있어봤자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김유현은 바로 몸을 일으킨 후 망설임 없이 천막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제야 멀뚱히 앉아 있던 사용자들도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김유현을 따라 천막을 나섰다. 그리고 밖으로 나온 순간, 천막에 있던 사용자들은 머리를 끝까지 젖히고서야 사내들의 보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맙소사….” 서쪽을 응시한 사용자들 중에서 누군가 미약한 탄식을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 한 마디가 모든 사용자들의 심정을 대변할지도 모른다. 서쪽에 나타난 존재는 그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으니까. 저걸…. 도대체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그들은 크다. 커도 정말 무지하게 크다. 가장 선두에 서 있는 형상은 쿠샨보다 2배는 돼 보이는 엄청난 몸집을 갖고 있다. 어쩌면 10미터도 넘을지도 모르는 크기였다. 군데군데 나뭇잎 조각이 묻어 있기는 했지만, 훤히 노출된 상체는 인간과 비슷한 피부 빛깔을 띠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눈이나 입, 손, 발 등 모든 것이 인간과 비슷했으나 유사한 것은 형상뿐. 부처님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축 늘어진 귓불이나 두 눈동자 사이의 드넓은 미간 등등, 실제 크기 자체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그래, 그들은 신화 속에서나 전해지던 거인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 거인들 기백 이상이 서쪽 수림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상황은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Quid Inferorum Loqueris! Dimitte Me, Ut Citius Homo!” “Et Quid Infernum, Quid Tibi Non Hic Agitur. Haec Sunt Hostes.” 당장에라도 덮칠 것만 같던 거인들은 야영지 외곽에서 걸음을 멈춘 채 조용히 대기하고 있다. 어느 거인은 뽑아온 게 분명한 나무를 움켜쥔 채, 또 어느 거인은 팔짱을 끼고 인간들을 지그시 노려보는 게 마치 누군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거인들의 습격을 저지한 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쿠샨이었다. “Cura Tibi! Et Curabo Me Ne Faciam Hoc!” 양팔을 좌우로 벌린 채 홀로 거인들을 가로막고 있다. 정면을 바라보며 가장 선두에 서 있는 거인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얼굴은 화가 난 것처럼 보였으나 목소리만큼은 필사적이었다. “Abi, Semel Huc Ante Tempus, Huh?” “Tu Vero Hic Agitur, Num Mentem.” 가장 큰 거인과 쿠샨의 대화가 오고 가는 사이, 사용자들은 조심조심 물러나며 거인들을 살폈다. 분명 거인들의 수는 고작 일백 남짓한 정도. 그러나 한 명 한 명이 내뿜는 위용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선두의 거인이 내뿜는 기백은 지금껏 겪어온 그 어느 괴물보다 막강하기 그지없다. 각자 무기를 꺼내 들며 경계하고는 있었지만, 낯에는 질렸다는 기색이 완연히 드러난 상태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Ut Liberet Te Cura Guam Ego Possem Gerere Pro Me!” “Sed Hoc Verum Est?” '아차. 수정구.' 번뜩 정신을 차린 김유현이 서둘러 수정구를 찾으려는 찰나. “HeuHeuHeuHeuHeuHeuHeuHeuHeuHeuHeuHeu….” 문득, 낮디 낮은 웃음이 사용자들의 귓전으로 고요히 흘러들었다. 김유현은 그제야 거인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쿠샨과는 사뭇 다른 음성이다. 중후하면서도 웅혼한 힘이 느껴지는 귓속을 웅웅 울리는 목소리라고나 할까? 홀로 10미터를 넘는 거대한 키와 다부진 이목구비, 그리고 우묵해 보이는 눈동자.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린 김유현은 거의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맨 앞에서 웃고 있는 저 거인이 바로 현재 거인들의 제왕이라는 것을. “KeuHaHaHaHaHaHaHaHaHaHaHa!” 이어서 갑자기 커진 웃음소리가 야영지를 한 차례 폭풍처럼 휩쓸었다. 고막이 짜르르 울릴 정도의 소음에 사용자들이 인상을 찌푸린 순간, 돌연 거인이 웃음을 뚝 그치고는 마치 돌을 던지듯이 팔을 놀렸다. 그러자 손에서 떨어져 나온 무언가가 허우적거리며 허공을 날았다. 아까 거인들이 들어올 때 재수없게 잡힌 사용자였다. 철푸덕! “흐, 흐아아악!” 사용자는 아직 살아있었다. 공교롭게도 흙탕물이 고인 곳에 첨벙 떨어지더니 허겁지겁 몸을 일으켜 도망쳐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자못 웃겼는지 거인들 사이로 또다시 가벼운 웃음이 흘렀다. 그러나 진정으로 웃겨서 웃는 게 아닌, 명백한 비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Melius Est. Kuschani Successor Noster.” 싱거운 웃음을 터뜨린 선두의 거인은 일말의 미련도 없다는 듯 자신들이 뚫고 들어온 수림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돌연 반쯤 머리를 돌리고는 아직도 서 있는 쿠샨을 보며 입을 열었다. “Ut Recte Agere. Certum Exspectat.” (…하도록. 기다리고 있으마.) 뒤늦게 킨 수정구가 거인의 목소리를 번역해 들려주었다. “Nos Autem Fratres! Ha, Ha, Ha!” (가자 형제들이여! 하, 하, 하!) 그 말을 마지막으로 거인은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고, 다른 거인들도 하나하나 몸을 돌려 제왕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모든 거인이 서쪽 수림으로 사라졌다. “…….” “…….” 폭풍이 들이닥친 후 남은 건, 그저 고요하기 짝이 없는 정적뿐. 그렇게 인간과 거인의 첫 만남은, 거인들이 먼저 물러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 깊은 밤, 그러나 아직 새벽이라 말하기에는 이른 시간. 야영지에는 사물의 흐릿한 윤곽만이 보일 정도의 어둑한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어느새 비는 그쳤지만, 오히려 그래서 그런지 더욱 을씨년스러운 적막함이 지면을 맴돌고 있었다. 이따금 불어오는 조용한 바람은 어딘가 모르게 스산한 기운을 품은 것만 같다. (쿠샨.) 문득, 어디선가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식은 스튜의 냄새가 흐르는 어두운 천막 안, 홀로 밝게 빛나는 수정구가 소리의 근원지였다. (네가…. 막아준 거니?)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는 사내의 건너편에는 한 거대한 인영이 기둥을 등지고 앉아 있다. 김유현과 쿠샨이었다. 오늘 거인들이 북부 원정대의 야영지를 습격했다. 아니 습격하려는 찰나, 쿠샨이 나서자 그냥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이게 어찌된 일인지는 김유현도 모른다. 그냥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추측만 할뿐, 자세한 사정을 아는 이는 따로 있었다. 잠시 후, 쿠샨이 자그맣게 머리를 끄덕였다. 김유현은 뜻 모를 한숨을 흘렸다. (후유…. 그렇구나…. 이거 고맙다고 해야 하나? 정말 깜짝 놀랐거든.) (…….) (아직도 화난 거야?) (아니요.) 김유현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쿠샨은 곧바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응?) (계속…. 하실 거예요?) (…….) 계속. 뒷말이 생략되기는 했지만, 김유현이나 쿠샨이나 어떤 말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모르겠다.) 잠깐 생각하던 김유현이 돌연 그 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아마 그만둬야겠지.) (그럼 돌아가시는 건가요?) 이어지는 말에 쿠샨은 긴장한 기분으로 물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침묵. 결국에는 무언의 긍정이라 여긴 쿠샨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 공략이라는 거. 꼭 해야 하는 건가요?) (…해야지. 필요하니까.) 이번에는 대답이 들려온다. (욕심 때문인가요, 꼭 필요하기 때문인가요?) (흠. 그거는 좀 어려운 질문인데.) 김유현이 바닥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굳이 말해보면, 각 인간들의 사정이라고나 할 수 있을까?) (사정이요?) 무슨 말이냐는 듯한 반문에 김유현이 살짝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멍해 보이는 눈으로 천장을 응시하더니 얼핏 쿠샨을 가볍게 흘겼다. (누구는 생존일 수도, 또 누구는 욕심일 수도…. 각 인간마다 다를 수 있다는 소리야.) 쿠샨은 머리를 갸웃했다. 이해가 안 갔다기 보다는, 문득 김유현의 사정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화제를 도로 원점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 어떡하실 거예요?) (돌아갈 거야. 내일.) 김유현은 자포자기한 음성으로 간단히 대답했고, 쿠샨은 입을 물었다. 내일 인간들이 돌아간다고 한다. 아까 회의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나오고 있었다. 그러면…. (쿠샨.) 그때였다. 갑작스레 김유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상체만 일으킨 게 아니라, 아예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는 쿠샨을 정면에서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런 김유현의 두 눈은 아까와는 다르게 형형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중대한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그 기세를 느꼈는지 쿠샨이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쿠샨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김유현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친구지?) 그 말을 들은 순간, 쿠샨은 저도 모르게 멍한 빛을 띠고 말았다. 설마 이런 말을 들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것이다. (네…?) 김유현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그동안 너와 지내면서, 정말 즐거웠거든. 정말로, 정말로 말이야.) 쿠샨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쿠샨도 즐겁기는 했다. 김유현과 함께 지내면서 새로운 세상을 체험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친구. 그 개념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제껏 살아오면서 쿠샨은 친구 하나 사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인간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자못 기분이 생소할 수밖에 없다. 김유현은 여전히 두 눈을 빛내며 쿠샨을 응시하고 있다. 예의 장난이 아닌, 진심이 깃든 얼굴. 그런 얼굴을 보고 있으니 딱히 나쁜 기분은 들지 않는다. 김유현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이어서 손을 들어올림과 동시에. (친구로서 조언하마. 도망쳐라. 지금, 당장!) 딱! 손가락을 부딪친 소리가 울리며, 쿠샨의 몸을 속박하던 밧줄들이 모조리 아래로 흘러내렸다. 한순간에 자유를 되찾은 쿠샨의 두 눈이 휘둥그래 변했다. 그러나 쿠샨이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김유현의 양손이 쿠샨의 어깨를 붙들었다. (쿠샨. 잘 들어. 거인들과 대화를 시도하려는 계획은 무산됐어. 오늘 회의에서 인간은 완전히 되돌아가는 것으로 결정 났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야. 비록 지금은 물러난다고 해도, 인간들은 곧 이 산맥을 다시 공략하러 올 거야.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인원으로, 또 막강한 화력으로.) 김유현은 굉장히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 쿠샨 입장에서는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아까 천막에서 흘러나온 얘기들을 모두 엿들었으니까. (이것뿐만이 아니야. 너를 데려가자고 하는 말도 나오고 있다. 이건 절대로 좋은 의미가 아니다. 가면 틀림없이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우선은 도망쳐라. 응? 듣고 있어?) 그러나 쿠샨이 정작 놀라 하는 건, 김유현이 그 사실 모두를 자신에게 고스란히 밝히고 있다는 것. 심지어 데려가자는 이야기까지도. 김유현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지는 모른다. 그러나 쿠샨은 아까 들었던 친구라는 말이 조금 더 깊숙이 와 닿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간신히 정신을 차린 쿠샨이 김유현을 지그시 응시했다. 도망치라는 말을 들었다. 아마 아까 회의를 듣지 못했다면 정말 김유현의 말대로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정말 이렇게 헤어져버린다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걸까? 아니다. 이후에 벌어질 일을 알고 있는 쿠샨으로서는 그냥 팔자 좋게 도망칠 수만은 없었다. 동족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야 해.' 온몸의 자유를 되찾았지만 쿠샨은 도망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대로 기둥을 등지고 앉은 채 미동도 않고 있다. (그러면, 인간은 이제 우리를 적으로 생각하겠다는 건가요?) 목소리가 달라진걸 느낀 걸까? 한동안 쿠샨을 빤히 바라보던 김유현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흘린 후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실…. 그동안 너와 지내오면서 약간의 희망을 가지기는 했어.) (희망이요?) (그래. 너희는 우리와 상당히 비슷하거든. 지성이라는걸 갖고 있지. 그래서 생각했다. 어쩌면 이들과는 싸우지 않고, 서로 다투지 않고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마,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쿠샨이 재빠르게 맞장구 쳤다. 김유현도 머리를 끄덕였다. (맞아.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기는 해. 굳이 너희를 적으로 돌리지 않고 길을 뚫을 수만 있다면, 서로 불필요한 피를 흘리지 않고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테니까. 아니, 서로 거기서 나아가 교류도 하는 등. 상호 도와줄 수 있는 관계가 되기를 원했다.) 아주 살짝 이기는 했지만, 쿠샨은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조금 어려운 말들이 섞여 있기는 했지만, 익숙한 터라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조금 다르기는 해도 아버지가 항상 해오던 말이었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내 생각에 공감했고, 그래서 나는 너를 데리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그런데, 아무래도 내 생각이 틀렸던 것 같다.) 그러나 틀렸다는 말을 들은 순간, 쿠샨은 기분이 확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김유현의 입장은 차치하고서라도, 아버지가 해오던 말들이 전면으로 부정 당하는 것 같았으니까. (…아무튼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나직이 중얼거린 김유현은 쿠샨의 어깨에 힘을 주었다. 시간이 없으니 어서 일어나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쿠샨은 전혀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최소한 자신이라도 살리겠다는 김유현의 생각을 알고 있고, 그 마음은 고마웠지만 쿠샨은 아직 제대로 된 이야기도 못 꺼낸 상태였으니까. 쿠샨이 머리를 도리도리 저으며 벌컥 외쳤다. (하지만! 처음에는 대화할 생각도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아까 들어온 거인들을 보고 너희 종족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이 변했다. 거인은 강해. 강해도 너무 강하다. 우리는 너희가 무섭다.) (인간은 겁쟁이인가요? 무섭다고, 아니 무서우면 다른 종족과 대화가 불가능한 건가요?) (겁쟁이라고? 아니! 그건 강자의 여유에 불과하다. 너희는 우리 입장을 몰라. 이건 힘의 차이가 너무나도 현격해. 이건 대화를 해볼만한 수준이…!) 거기까지 말을 잇던 김유현은 돌연 입을 꾹 깨물었다. 별안간 쿠샨의 어깨를 짚고 있던 손이 하릴없이 떨궈지고, 머리도 숙여졌다. (…미안하다.) 그리고 김유현은 무언가 꾹 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제야 쿠샨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인지했다. 조금 전 자신의 말이 김유현의 자존심에 얼마나 커다란 상처를 입혔는지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절박하기도 했다. 아무리 쿠샨이라도, 이렇게 인간들과 함께 지내는 날이 흔한 일이 아닌 특별한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두 번 다시 찾아오기 어려운 기회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아니, 사실상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다. 쿠샨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인간들이 돌아가면 종족의 멸망은 기정 사실화된다. 결국에는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바로 눈앞의 사내를 움직이는 것. 물론 자신의 생각대로 될 가능성은 적겠지만, 쿠샨은 예비 제왕 후보이다. 다른 거인들과는 달리 어렸을 때부터 종족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왔고, 자신도 나중에 똑같은 걱정을 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적어도 가만히 기다리는 것 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노력이라도 해보고 싶은 게 쿠샨의 입장이었다. (…친구라고 하셨잖아요.) 그러자 순간적으로 김유현의 어깨가 움찔했다. (말 그대로, 몇 개월 후 인간들이 더 많이 몰려온다면 우리도 힘들어지겠죠. 아니, 틀림없이 멸망할 가능성이 높아요. 그런데 친구라고 하셨으면서, 지금 우리 종족의 멸망을 그냥 지켜보시겠다는 거잖아요.) (그게 아니라!) 약간씩 힐난하는 어조가 이어지자 자연스럽게 김유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쩔 수가 없잖아. 모든 거인이 너 같다면 좋겠지만, 아니잖아.) 이 말에 쿠샨은 잠깐 말문이 막히는걸 느꼈다. 김유현의 말은 예전 아버지가 산맥을 떠난 사건을 꼬집어 얘기하고 있었으니까. (그, 그래도 여기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 매요. 그럼 한 번 시도해볼 수는 있는 일이잖아요.) (불가능해.) (아니, 왜 자꾸….) (쿠샨. 너는 지금 협상이라는 개념은커녕, 이 상황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아니, 애초에 우리 입장에서 생각해주지를 않잖아. 그게 바로 배타적이라는 거야.) 김유현의 단언에 쿠샨의 머릿속에 의문이 차 올랐다. '우리 입장? 인간들의 입장?' (협상이 성사되려면 서로 원하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너희는 우리한테 원하는 게 없어. 그저 자기 자신들로만 해결하려고 하지.) (물론 우리가 배타적인 점은 인정해요. 하지만, 오늘 보셨잖아요? 제가 오늘처럼 도와드릴 수 있다면, 한 번 이야기해보는 것쯤은…. 혀, 협상! 그래요. 협상을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김유현한테 배운 말을 떠올린 쿠샨이 곧바로 외쳤다. (으음.) 미약한 침음을 흘린 김유현이 잠시 고민에 빠진 기색을 보였다. 쿠샨의 얼굴에 혹시나 하는 빛이 스쳤다. (아니. 힘들어.) 그러나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은, 거절이었다. (설령 네가 도와준다고는 해도, 사람들이 가려고 하지 않을 거다. 왜냐하면 무서우니까. 막말로 협상이 어그러졌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이후 우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아? 한 번 생각해봐.) 쿠샨이 미처 생각도 하기 전, 김유현의 말이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의 협상은, 최소한 서로가 비슷한 힘은 갖추고 있어야 해. 만에 하나 협상이 어그러졌다고 해도 서로를 견제할 수 있는 비슷한 힘이. 그래야 적어도 시도라도 해볼 자격이 생기는 거다. 그게 안 된다면 한쪽의 일방적인 죽음이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김유현의 말은 간단했다. 어찌어찌 대화의 장이 마련된다고 쳐도, 그게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소리였다. 오히려 거인들을 보면 거절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러면 협상이 어그러진 후 거인들이 인간들을 고이 보내 줄까? 안녕히 가라고 손이라도 흔들어 줄까? 아니. 그럴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오늘도 인간들을 습격했다가 쿠샨이 나섬으로써 간신히 돌려보내지 않았는가. 말인즉, 김유현의 걱정하는 건 바로 그 이후에 벌어질 상황이었다. '이게…. 인간들의 입장….' 강자가 아닌, 약자의 입장. 아까 김유현이 외친 강자로서의 여유라는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되는 쿠샨이었다. (너희는 강하고 우리는 약하다. 우리는 너희와 협상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도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할 수가 없다는 거다.) 그러므로 협상을 할 수 있는 최소 조건은, 서로 엇비슷한 힘을 갖추었을 때야 가능하다. 그렇게 말한 김유현은. (미안하다.) 다시 한 번 머리를 숙이고는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막의 입구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정말, 정말로 방법이 없는 걸까?' 한 걸음, 두 걸음. 점점 멀어지는 김유현의 등을 보며 쿠샨의 머릿속이 삽시간에 복잡해졌다. 그러다 문득, 뇌리에 여러 가지 말들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너는 지금 협상이라는 개념은커녕, 이 상황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아니, 애초에 우리 입장에서 생각해주지를 않잖아. 그게 바로 배타적이라는 거야.' '이런 상황에서의 협상은, 최소한 서로가 비슷한 힘은 갖추고 있어야 해. 그래야 적어도 시도라도 해볼 자격이 생기는 거다.' 김유현의 말이. '장담컨대, 10만 이상도 가능합니다. 이미 길도 터놨으니 다시 오기도 쉬울 테고, 거인을 상대할 다른 마법이나 도구도 만들어올 수 있겠지요.' '지금 여기서 잠깐만 물러나면, 몇 개월 후 우리는 확실하게 거인을 멸망시킬 수 있어요.' 인간들의 말이. '지금처럼 무조건 상대를 배척하고, 또 무조건 우리가 최고라는 인식은 잘못됐어. 이대로 계속 있다가는, 언젠가 길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건 바로 멸망뿐일 게다.' '예전의 영광은 과거에 불과하다. 가만히 있으면 뒤처질 뿐이다.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더 나아가 예전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이제는 달라져야 해. 그래서 나가야만 한다는 거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말이 뇌리를 강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방법이 있어!' 쿠샨이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잠시만요!) 쿠샨이 큰 목소리로 외치며 김유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다급한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김유현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천천히 다리를 움직이며 입구를 향해 걸어간다. 쿠샨이 한 번 더 외쳤다. (방법이, 방법이 있어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방법이!) 그리고 그 순간. 비로소, 김유현의 몸이 우뚝 정지했다. (…방법?) (네! 서로의 힘을 맞출 수 있는 방법이 있다니까요!) 쿠샨의 말이 이어졌다. 김유현은 여전히 입구 방향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씨익. 김유현이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드디어, 드디어 원하던 이야기가 나왔다. ============================ 작품 후기 ============================ 아, 죄송합니다. 오늘 많이 늦었죠? 내용이 설마 이 정도로 많아질 줄은 몰랐습니다. _(__)_ 원래는 다음에 김수현의 시점까지 적고 2편으로 나눠 올릴 계획이었는데, 더 이상 쓸 여력이 나지가 않더라고요. 하하하. 사실 지금도 정신이 약간 멍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한소영 일러스트 제안서를 정리해야 하기 때문에 언제 잘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_ㅠ 독자 분들 모두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편안한 밤 보내세요. 0623 / 0933 ---------------------------------------------- Night Of Battle. 칠흑이 짙게 깔린 강철 산맥. 달빛조차도 차단해버리는 어두운 숲 안에서, 나는 한쪽 무릎을 굽히고는 천천히 지면을 쓸어보았다. '이상해.' 흔적을 보면 알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야영하는 지역은 어제 북부 원정대가 야영한 장소였다. 말 그대로 여기서 야영을 하고 아침에 떠난 장소. 그 외에는 어떤 특별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상하다. 분명 흔적만 보면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야영하고 떠나는 건 당연한 이치니까. 그렇지마는 너무 특별한 흔적이 없는 게 문제라고나 할까? '여기뿐만이 아니야.' 이제껏 북부 원정대의 경로를 따라오면서 잇따라 느낀 의문이었다. 강철 산맥 제 3지역이 어떤 지역인가. 괴물의 천국이라고 불리는 지역이 아니었던가. 그러면 못해도 괴물과 충돌한 흔적을 한 번쯤은 발견해야 정상인데, 지금껏 시체는커녕 핏자국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거기다 거인들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나서는 확인한 거라고는 진군한 흔적뿐. '우리도 마찬가지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클랜원들도 조금씩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 또한 여기까지 오면서 단 한 번도 괴물과 마주치지 않았으니까. 오죽하면 갑자기 강철 산맥이 얌전해졌다고 말하는 클랜원도 있을 정도였다. 다른 클랜원들은 그렇다고 동의하며 깔깔 웃었지만, 1회 차를 겪어본 입장에서는 결코 수긍하지 못할 말이었다. 나는 도로 몸을 일으키고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보이는 거라고는 칠흑 같은 어둠과 무성한 수림뿐. 그리고 고요한 정적까지. 하지만 무언가 다르다. 주변을 둘러볼수록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든다. 아니, 확신이라고 해야 할까? 강철 산맥은 절대로 얌전해진 게 아니라, 오히려 숨을 죽이고 있는 거라고. 보이는 생물 하나하나가 몸을 잔뜩 웅크리고 덜덜 떨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그래. 이 기분은 마치…. '전운.' 부스럭! 그때였다. 예전 연합군과의 전쟁 직전 느꼈던 기운을 떠올린 찰나, 후방에서 마른 잎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마력 감지를 돌리자 적어도 괴물은 아니라는걸 알 수 있었다. “우웅….” 야영지에서 다가오는 검은 인영은 다름 아닌 안솔이었다. 한쪽 눈을 쓱쓱 비비면서 잔뜩 졸린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아무래도 잠에서 깬 모양이다. “안솔?” “……?” 조용히 이름을 부르자 안솔의 정수리로 물음표가 반짝 떠올랐다. …참, 저건 언제 봐도 신기해. “오라버니…?” 비척비척 걸어오던 안솔은 나를 발견하고서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양팔을 천천히 벌리며 달려오려는 자세를 보였다. 물론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뀐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안 돼.” 강한 목소리로 타이르듯이 말하자 안솔이 멈칫했다. 그리고 입을 삐쭉 내밀기까지. 아직 몽롱해 보이는 기색이 가득함에도 저러는걸 보니 조금은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나만 보면 무조건 반사로 저러는 건가….' “여기는 갑자기 무슨 일이야?” “쉬….” “쉬?” “솔이…. 쉬야할래요오….” 희미하게 말한 안솔은 그대로 지면에 쭈그려 앉더니 고개마저 푹 숙여버렸다. '뭐지? 저 상태로 싸려는 건가?' 가서 손수 바지를 벗겨줘야 하나 고민이 들 즈음. “…그런데, 이대로 계속 구경하실 생각이세요…?” 갑작스레 한껏 낮아진 목소리가 귓전으로 흘러들었다. 안솔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상태였다. “응? 그런데 너 바지가….” “빨리 가세요.” “…….” “빨리요, 빨리.” '나 참. 통과의례 때는 혼자서 오줌도 못 싸서 같이 손잡고 가자 하던 녀석이.' 아니, 원래 이러는 게 정상인가? “알았다, 알았어.” 나는 어깨를 으쓱인 후 야영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안솔을 지나치려는 순간이었다. “더 늦으면….” 돌연히, 한 번 더 안솔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기껏 나온 의미가 없어질지도….” 그리고 이어지는 말이 들려온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저기 앞에서 보이는 모닥불이 비추는 불빛이 사정없이 일렁였다. 갑작스레 온몸에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스치고 섬찟해지는 기분이 든다. “안솔…?”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안솔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매우 느릿한 속도로 몸을 일으키는 안솔을. '더 늦으면, 기껏 나온 의미가 없어진다?' 이윽고 완전히 나를 돌아본 안솔은 아까와는 다른 스산한 눈빛을 뿌리고 있었다. 서로 눈을 마주친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작두 탔구나.' 그동안 몇 번 불안해하는 건 보긴 봤어도, 저렇게 확실한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사실 나도 뭔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안솔이 저렇게 말한 이상 100% 확실해진 것과 진배없다. 여태껏 안솔의 능력은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으니까. 나는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클랜원들 깨워. 지금 당장.” “그러시는 게 좋을 거예요.” 안솔 또한 곧바로 대답하고는 나를 지나쳐 야영지를 향해 달려갔다. 이내 서서히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머리를 젖히고는 밤하늘을 응시했다. 고요한 정적. '…형.' 문득 뜻 모를 불안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지금….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야…?' *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조용한 아침이었다. 야영지에도 조용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용자들은 간간이 보이나 딱히 어수선한 기운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야영지 남쪽 외곽에 쿠샨과 김유현이 서 있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응.) 쿠샨이 밝은 목소리로 말한 것에 반해, 김유현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어두웠다. 겉으로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으나 얼굴 곳곳에 그늘진 불안해하는 기색은 숨기지 못했다. …아니, 숨기지 않았다고 해야 정확할까? 그러나, 이러나저러나 김유현을 응시하던 쿠샨은 조금이지만 착잡한 기분을 느꼈다. 인간들, 아니 약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본 결과 김유현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아직도 많이 불안해요?) (하, 하. 들켰나?) (…너무 걱정하지는 마요. 제가 말한 대로만 하면…. 형제들도 분명히 인간들을 함부로 할 수 없을 거예요. 어쩌면 바로 돌아올지도 모르죠. 다들 신역은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저, 정말 그럴까?) 김유현은 여전히 떨떠름해하는 낯으로 반문했다. (저를 못 믿으시는 거예요? 친구라고 하셨잖아요.) 쿠샨은 어깨를 툭툭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김유현의 목울대가 작게 움직였다. (아, 아니야. 믿어, 믿을게.) (그래요. 저도 믿을게요.) (응. 그런데….) (아 정말, 너무 걱정 말라니까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바로 달려갈게요. 그래서 이것도….) 말끝을 흐린 쿠샨이 흘끗 자신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그제야 김유현이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럼…. 부탁한다.) (맡겨두시라고요. 대신 약속은 잊지 않으셨죠?) (물론이다. 나도 최대한 노력해서 쿠샨 토르의 마음을 움직여보도록 하마.) (헤헤.) 그 후로 김유현이 (죽기는 싫으니까….)라고 자그맣게 중얼거렸지만, 쿠샨은 그저 바보처럼 헤헤 웃기만 할뿐이었다. (그럼, 이제 진짜로 가봐야겠네요. 저도 시간에 맞추려면 빠르게 움직여야 하니까요.) (응. 괜히 붙잡아서 미안하다.) (괜찮아요. 그나저나 잊지 말아요. 내일 오후….) (그래 그래. 반나절 정도 가면 나오는 드넓은 초원까지였지.) 결국에는 꼭 가겠다는 확답을 두 번 세 번 받고 나서야 쿠샨은 몸을 돌렸다. 마침내 그동안 함께 해온 인간과 거인이 작별한 것이다. 서로 모종의 목적을 갖고서. 그리고 잠시 후, 서서히 숲 속으로 사라지는 쿠샨을 확인한 순간 김유현의 얼굴이 일변했다. 조금 전까지가 따뜻한 봄바람 같았다면, 지금은 차가운 북풍한설처럼 냉랭하기 그지없다. 한동안 차가운 눈초리를 빛내며 쿠샨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김유현은, 곧 몸을 돌려 야영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천막이 있는 방향이었다. 천막에는 여러 사용자들이 탁자를 두고 앉아 있었다. 그저 그런 사용자들이 아닌, 각 클랜의 클랜 로드인 지휘관급 사용자들이었다. “방금 쿠샨과 그들이 떠났습니다.” 김유현이 상석에 앉으며 말을 꺼내자 조용히 침묵하고 있던 사용자들이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딱히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이제 시작됐구나.'라는 기색이 다분했다. “그러면….” “예. 이제 시작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접선 장소는 여기서 반나절 거리의 초원, 시간은 해가 떨어지는 오후입니다. 아마 아침을 먹고 느긋하게 출발하면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때까지 모든 준비를 끝내놔야 합니다.” 웅성웅성. 그러자 사용자들 사이로 어수선한 소란이 일었다. 그러나 가볍게 탁자를 두드려 소란을 잠재운 김유현은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전력 분석과 편성 현황은 어떻습니까? 대충이라도 통계가 나왔습니다?” 김유현의 물음에 오른쪽에 앉은 사내가 안경을 치켜 올리며 입을 열었다. “전력 분석은 이미 마쳤고, 편성도 1차적으로 완료한 상태입니다.” “말씀해보세요.” “아마 거인 1명당 50명이면 어느 정도 여유롭게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50명이나요? 그건 너무 많은데.” 이윽고 김유현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50명은 너무 많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아요. 거인의 힘이 약화됐을 때를 대비해 편성을 새롭게 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으음. 애당초 거인의 힘도 추측된 자료에 불과하고, 설령 약화된다손 치더라도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없어서….” “1명당 25명으로 줄여보세요.” “2, 25명이요? 그건 너무…!” 사내가 불가능하다며 기함했지만 김유현은 차분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1차 편성 조는 우선 그대로 두시고, 필요하면 언제든지 반으로 나누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예. 그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난색을 표하던 사내는 곧바로 표정을 바꾸며 알겠다고 머리를 끄덕였다. 김유현은 이번에는 왼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걸로 편성은 됐고, 트랩 준비는 어떻습니까?” “궁수들과 암살자들을 총동원해서 만들고 있는 중이에요. 그런데, 따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그러자 왼쪽에 앉아 있던 여인이 곧바로 대답했다. “어떤?” “트랩에 관해서요. 아무래도 휴대할 수 있는 트랩만 만들려니 위력이 떨어지는 것들이 대다수에요. 그러니 함정을 추가로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함정이요?” “네. 접선 장소가 정해져 있는 만큼, 미리 도착해서 함정을 설치하는 거죠. 트랩보다 더욱 위력적인 함정을요. 어쩌면 살상까지 노려볼 수 있을지도 몰라요.”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인지라, 김유현은 또 한 번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생각이 끝났을 때, 김유현은 이번에도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그 장소는 거인들의 앞마당이라고 합니다. 괜히 함정을 설치하다가 거인들의 눈에 걸리면 의심만 살 수도 있으니까요. 최악에는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흐응.”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에게 기회는 단 한 번 밖에 없습니다. 제가 신호하기 전까지 우리는 최대한 거인들이 방심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가요. 어쩔 수 없네요.” 여인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였다. 이후로도 김유현이 하나씩 묻고 확인하는 회의가 이어졌다. 그렇게 2시간이 흐른 후, 어느덧 길었던 회의도 서서히 끝에 다다랐다. “…알겠습니다. 우선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김유현은 짧은 숨을 흘린 후 살짝 몸을 비틀었다. 두둑두둑, 자그마한 뼈 소리가 조용한 천막을 울렸다. 이윽고 한 차례 몸을 푼 김유현이 주섬주섬 기록을 정리하는 사용자들이 보며 입을 열었다. “다들, 감사합니다.” “……?” 느닷없는 감사 인사에 사용자들이 기록을 정리하던걸 멈추고서 김유현을 빤히 응시한다. 김유현의 말이 이어졌다. “계획을 수립한 건 저지만, 그 외의 것들은 준비해주신 건 여러분들입니다. 여러분들 덕분에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하하, 아닙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는 약간 의문을 가졌지만…. 뇌제의 계획을 듣고는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괴물을 그저 괴물로만 보는 저였다면, 절대로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제 얼굴에 금칠을 해주시는군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지요.” “운도 실력이죠. 그러니까 빼지 마세요. 이번 계획이 맞아떨어진다면, 공략 성공의 주역은 바로 뇌제에요.” 김유현은 그러지 말라는 듯 겸손히 대꾸했으나 왼쪽의 여인이 더욱 추켜세워주었다. 물론 이러는 와중에도 누군가는 이렇게도 생각할 것이다. '정말 계획대로 될까?'라고. 그러나 누구도 그 사실을 입에 담지 않는다. 쿠샨이 떠난 것을 기점으로 계획이 실행되기 시작했다. 늦어도 내일 밤까지는 이 계획의 성패 결과가 나올 것이다. 목숨을 건 사용자들의 입장에서는, 계획의 실패보다는 성공을, 또는 어떻게 성공시켜야 할까 만을 생각해야 할 시기였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잠시 후, 머리를 끄덕거리는 사용자들 속에서 누군가 두 손바닥을 마주쳐 소리를 냈다. 그것을 시작으로 사용자들은 뇌제를 향해 가벼운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짝짝짝짝…. 쏟아지는 박수 속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김유현이 가볍게 머리를 숙임으로써 간단히 답례했다. 이내 박수 소리가 살짝 잦아듦과 동시에, 뇌제의 입이 열렸다. “그럼 이 시간 부로 작전명 자명고, 그리고 동시 작전인 트로이 목마의 시행을 선포합니다.” 자명고(自鳴鼓). 트로의 목마(Trojan Horse). 그렇게 작전 시행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걸 마지막으로 회의의 종료를 알렸다. 그리고 다음날. 북부 원정대는 해가 떨어지는 시간에 약속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생각보다 빠르게 업데이트할 수 있었습니다. :) 요즘 코멘트 분위기는 무척 마음에 드네요. 예전에는 작품에 관한 코멘트보다는 저(…….)에 관한 코멘트가 압도적으로 많은 경우가 있었는데, 요즘에는 모두 작품에 관해서 말씀해주시니 저도 참 기분이 좋아요. :D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0624 / 0933 ---------------------------------------------- Night Of Battle. 강철 산맥, 거인들의 터전. “뭐라고?” “…인간들의 이야기를 한 번만 들어주세요.” 상석에 앉은 거인이 눈을 치뜨며 묻자 쿠샨은 머리를 푹 숙이며 말했다. 그러자 상석의 좌우로 시립 해있던 열댓 명의 거인들 사이로 자그마한 소란이 일었다. 아니, 작은 소란은 아닌가? 쿠샨을 제외하면 모두가 7, 8미터가 넘는 몸집을 갖고 있었으니 목소리 또한 우렁차기 그지없다. “작은 주인, 그게 무슨 소리요! 지금 우리보고 인간들과 손을 잡으라는 소리요?” “아니, 나는 애초 이럴 줄 알았어! 그러길래 진작에 인간 놈들을 박살내고 데려오자고 했잖아!” 거인들 사이서 터진 고함이 홀로 중앙에 서 있는 작은 주인한테로 향한다. 쿠샨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입을 질끈 깨물고는 좌우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저는 지금 이 자리에 돌아왔습니다. 제 스스로의 의지로요. 인간들과 지내면서 어떤 상처도 입지 않았어요. 이걸 보고도 모르시겠어요?” “작은 주인은 아직 인간이란 종족에 관하여 잘 모르지 않소!” “네, 잘 몰라요. 하지만 이번에 인간들과 생활하면서 최소한 이거 하나만은 알겠어요. 지금 초원에서 기다리는 인간들은 우리와 싸울 생각이 없어요. 아니, 싸우고 싶어하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이야기라도 한 번 들어보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이야기? 허! 인간들의 이야기라. 소용없는 일이외다.” 어느 거인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자 쿠샨의 낯에 발끈한 기색이 서렸다. 상황의 심각성을 모른 채 타고난 힘만 믿는 거인들을 보니 속이 갑갑해 죽을 지경인 것이다. 하여 다시 한 번 설득을 시도하려는 찰나였다. “그만!” 일순 상석에 앉은 거인이 어마어마한 고함을 질렀다. 주변에 서 있는 여느 거인들보다도 커다란 몸집을 가진 거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웅혼한 울림을 담은 범상치 않은 목소리는 삽시간에 소란을 가라앉혔다. 이윽고 좌우를 쓱 둘러본 거인이 중앙의 쿠샨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고작….” “…….” “고작 이런 얘기나 하려고 돌아온 거냐.” “고작이 아니라…!” “고작 이런 얘기나 하려고 그때 우리를 가로막은 거냐. 작은 주인.” “…….” 정면에서 전해져 오는 거인이 지긋한 시선에 쿠샨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닫고 말았다. 한껏 낮아진 목소리에는 감히 항거할 수 없는 기이한 기운이 느껴지거니와, 어딘가 모르게 실망했다는 기색이 깔려 있었다. “허허허.” 그때 입을 둥글게 벌린 거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거리낌없이 웃어 젖혔다. 역시나 몸집은 거대했으나 곳곳에 진 주름살이나 허연 수염 등등, 주변 거인들과는 다르게 얼굴에 늙어 보이는 기색이 가득했다. 아마 여기 있는 거인들 중에서 가장 연장자인 듯싶었다. “이거, 형제들의 열기가 너무 과열된 것 같구려. 아마 모두가 작은 주인의 행동에 불만이 많은 것 같소.” “…….” “허나,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어떻습니까? 그 심정들은 이해하나, 이렇게 윽박지르기만 해서는 전혀 옳지 못한 일로 보입니다.” “…….” 늙은 거인이 차분한 말투로 중재에 나섰다. 그러자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보이던 주변의 거인들이 하나 둘 헛기침하며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물론 노려보는 눈초리는 여전히 거두지 않았지만. 이내 “쯧.” 혀를 찬 상석의 거인이 쿠샨을 보며 말했다. “…초원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그러나 이어지는 물음에 쿠샨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머리를 한 번 천천히 끄덕였을 뿐. “후….” 이윽고 골이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은 거인은 치뜬 눈을 내리고는 입구 쪽으로 손짓했다. “다들 이만 나가보도록.” “그러면…!” “모든 형제를 소집하고 기다리고 있도록. 나는 작은 주인과의 말을 마무리 짓고 나가도록 하겠다.” “…알겠소이다.” 쿠샨 토르의 축객령에 다른 거인들 모두가 수긍하며 걸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사실상 '소집하고 기다리고 있도록.'이라는 말은, 상석의 거인이 찾아온 인간들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지 공식적으로 선포한 셈이었다. 전쟁 준비. 쿠샨의 얼굴에 암울한 기운이 깃드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주변에 서 있던 거인들이 걸음을 물린 자리에는 상석의 거인과 쿠샨만이 남아 있었다. “쿠샨.” 문득 상석의 거인이 걸걸하지만 부드러이 쿠샨을 불렀다. 아까처럼 뻣뻣한 목소리가 아닌, 따뜻한 정이 담긴 음색이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부르는 것처럼. “갑자기 왜 이러는 거냐. 말해봐라.” “…쿠챠르 대부.” 쿠샨이 상석의 거인을 쿠챠르 대부라 불렀다. 물론 서로 피가 이어진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쿠샨이 어렸을 때부터 이것저것을 가르쳐주고, 또 전대 쿠샨 토르가 나간 이후 아버지 역할을 대신해준 이가 바로 상석에 앉은 거인이다. 그런 만큼 쿠샨이 일족 중 가장 믿는 거인이 쿠챠르였다. “그냥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을 뿐이에요. 쿠챠르 대부. 이제 우리 일족도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다가온 거라고요.” “또, 또. 또 아버지의 말을 꺼내는 거냐? 그는 너를 버리고 나갔어.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너에게 신역을 관리하라는 막중한 책임을 떠넘기고 나가버렸다고.” “버리고 나간 게 아니에요! 일족의 미래를 걱정해 스스로 나가신 거라고요!” “걱정? 그건 우리 모두가 반대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틀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반대를 무릅쓰고 나가신 거고요!” “틀렸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처음으로 쿠챠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쿠샨이 몸이 흠칫 움츠러들었다. 그러자 아차 한 쿠챠르가 곧바로 굳은 표정을 풀고는 깊숙한 한숨을 흘렸다. “…하지만 달라. 달라도 너무나도 달랐어. 틀린 것과 다른 것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는 법이다. 왜 이걸 이해하지 못하는 거냐.” “…이해 받지 못하는 건 저도 마찬가지잖아요.” “네가 이럴수록 비단 우리뿐만이 아니라 다른 형제들에게도 영향이 생긴다. 네 말은 너무나 위험해. 특히 상대가 인간이라면 더더욱!”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요? 우리 외에는 모조리 적으로 규정하고, 어떤 교류도 하지 않은 채 폐쇄된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게 어떤 이유인데요.” “쿠샨….” “말씀해주세요. 말씀해주지 않으신다면, 저는 이번에도 모두의 앞에서 인간들을 보호하겠어요.” 쿠샨의 말투가 도전적으로 변하자 쿠챠르가 한층 간곡해진 어조로 중앙의 거인을 불렀다. 그러나 쿠샨은 이번에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빛내며 양손을 움켜쥔다. “하….” 이번이 세 번째 한숨이다. 긴 탄식을 내뱉은 쿠챠르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런 행동은 옳지 못해. 너한테 해가 될 뿐이다. 그리고 지금의 너는 너무 어려.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았다. 나중에 크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야.” “하지만 이번 기회는 커도 다시 오지 않아요.” “너는 이제 마지막 남은 쿠샨의 일족이야. 우리가 너한테 원하는 건 단 하나밖에 없어. 조금 더 성장하고 성인식을 치러서 제왕의 자리에 앉아라. 그리고 우리를 이끌어라. 그때가 되면 내가 직접 너에게 묠니르를 넘겨줄 것이다. …그러면 되는데, 왜 자꾸 다른데 눈을 돌리려고 하는 거냐.” “설령 그때가 온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다른 건 없을 거예요. 아니, 저도 똑같겠죠. 제 주장과 일족의 주장이 부딪치고, 저는 결국에는 떠나버리고 말겠죠.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요.” 그 순간, 쿠챠르의 입에서 깊은 침음이 터져 나왔다. 한 일족의 지도자가 떠난 것이니만큼, 당시 전대 쿠샨 토르가 일족을 떠난 사건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거기서 가장 강하게 반대하고 말리던 거인이 바로 쿠챠르였다. 말인즉, 쿠샨의 말은 그때 그 사건을 재현하겠다는 폭탄 선언과도 같은 말이었다. “으음….” 깊은 상념에 잠기려는지 쿠챠르가 팔짱을 끼며 지그시 눈을 감는다. 쿠샨은 계속 떨리는 손을 꽉 움키며 상석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을 때. “…좋다.” 나직이 중얼거린 쿠챠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쿠샨의 눈이 휘둥그래 변했다. 방금 자신이 잘못 들었는지 귀를 의심했다. “쿠챠르 대부?” “네 뜻이 정녕 그렇다면, 이야기는 한 번 들어보도록 하지.” “저, 정말이에요? 정말이죠?” “그래. 어디까지나 이야기뿐이라면.” 그러자 쿠샨의 낯에 갑작스레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들어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해주세요!” “흠?” 쿠챠르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쿠샨이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 이게 약속이라는 의미인데요…. 이렇게 새끼 손가락을 걸고 엄지를 맞추면….” “…인간들의 풍습이냐?” 쿠샨은 조심스럽게 머리를 끄덕였다. 쿠챠르는 싱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나쁠 건 없지. …하지만! 내가 약속하면 너도 약속해라.” “네? 저도요?” 쿠샨이 머리를 갸웃하자 쿠챠르는 엄숙한 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우선 이번 이야기에서 너는 빠질 것.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그리고 다시는 일족을 떠나겠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 쿠샨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조, 좋아요.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다시는 떠나겠다는 말을 하지 않겠어요.” “좋다. 그러면 한 번 약속이라는걸 해보자.” 이윽고 성큼성큼 다가온 쿠챠르가 쿠샨과 마찬가지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새끼 손가락을 걸고 엄지를 맞춘다. 그렇게 두 거인 간의 약속이 이루어졌다. “헤헤.” “녀석, 그리도 좋으냐?” 헤프게 웃는 쿠샨을 따라 웃던 쿠챠르는 순간 “아.” 미약한 탄성을 질렀다. 마치 무언가 까먹고 이야기 못한 게 있다는 듯이. “쿠샨. 그러고 보니….” 잠시 말끝을 흐린 쿠챠르가 유심한 눈초리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챠르를 조심해라.” 느닷없는 말에 쿠샨이 머리를 갸우뚱 기울였다. 하챠르는 일족 중 가장 오래된 거인이었다. 아까 쿠샨을 살짝 감싸준 거인이기도 했다. “그분은 갑자기 왜….” “요즘 행동이 이상해. 눈빛이 심상치가 않아.” “…네? 하지만.” “아까 말도 모종의 목적으로 네 환심을 사려는 걸 수도 있어. 생각해봐라. 하챠르는 원래 가장 인간들을 싫어하는 형제이지 않았느냐.” 그러고 보니 확실히 이상한 게 있는지 쿠샨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스쳤다. 쿠샨이 안색을 확인한 쿠챠르는 곧 걸걸한 목소리로 웃으며 쿠샨의 어깨를 가볍게 손을 얹었다. “그렇다고 너무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 그냥 경계만 하라는 소리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겨, 경계요?” “그래. 아무튼, 너무 걱정하지는 마. 나와 형제들이 있는 이상, 너한테 잘못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 별안간 쿠샨은 쿠챠르를 빤히 응시했다. 아까의 행동을 생각하니 갑작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쿠챠르는 자신을 아껴주는 건 물론, 항상 적절한 조언을 해주고 도와주는 어찌 보면 진짜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나는….' 그때 쿠샨은 어깨에 얹은 쿠챠르의 손이 서서히 떨어졌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마. 아까 약속은 잊지 않았지?” “무, 물론이죠.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요. 약속이니까요.” 약속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쿠샨은 가슴 한 켠이 쿡 찔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쿠샨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쿠챠르는 “그럼, 다녀오마.”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일족이 기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점차 멀어져 가는 쿠챠르의 등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쿠샨은, 이내 쿠챠르가 완전히 사라진걸 확인하고 나서 머리를 떨구었다. 시선은 자신의 그림자를 향하고 있었다. 쿠샨이 입을 열었다. “저기….” “허허허.” 그러한 찰나, 갑자기 누군가 불쑥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까 쿠챠르의 주변에 서 있던 거인 중 한 명인, 하챠르였다. 쿠샨이 깜짝 놀라 시선을 돌리자 하챠르가 벙글벙글 웃으며 걸어 들어온다. “하챠르?” “이거 이거, 의외입니다?” “……?” “크게 혼나서 풀이 죽어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얼굴이 밝아 보이시는군요.” 하챠르의 갑작스런 출현에 쿠샨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혹시나 아까 말을 들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든 것이다. “괜찮아 보이니 다행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듣지는 못했는지 가까이 다가온 하챠르가 인자한 웃음을 보였다. “아하하…. 감사합니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잘 풀렸거든요.” “오호라.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그것 또한 굉장히 다행이군요.” “다행이요?” “응? 작은 주인. 저를 왜 그렇게 보는 겁니까?” “하지만 하챠르는….” “…아.” 그제야 반응의 원인을 알아차렸는지 하챠르는 허허롭게 웃었다. “작은 주인이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는 더욱 거리를 줄여와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는, 작은 주인의 생각에 딱히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쿠샨은 재차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말았다. 허나 채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하챠르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찬성하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작은 주인의 말대로 한 번 이야기를 들어보는 건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을 뿐입니다. 허허허.” “그런가요…. 저도 기쁘네요.” 쿠샨이 간신히 수긍했을 즈음. 하챠르가 두어 걸음 물러나더니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쿠샨을 바라보았다. “흠…. 이번 일이 어떻게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 “끝나고 나면, 한 번 놀러 오시지 않겠습니까?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 따로 말씀 드리고 싶은 것도 있고, 또 보여드리고 싶은 것도 있어서 그럽니다.” “네?” 쿠샨이 반문했다. 그러나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은 하챠르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리고는 휘적휘적 걸어가버리고 말았다. '아까 말도 모종의 목적으로 네 환심을 사려는 걸 수도 있어.' '생각해봐라. 하챠르는 원래 가장 인간들을 싫어하는 형제이지 않았느냐.' 예전 같았으면 뛸 듯이 좋아했겠지만, 쿠챠르의 말은 들은 이후 본능적인 경계심이 생긴 쿠샨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편을 들어주는 동족을 만났음에도 딱히 기쁘거나 한 건 아니었다. 쿠샨은 하챠르가 사라질 때까지 물끄럼말끄럼 쳐다보다가, 완전히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허둥지둥 머리를 숙였다. 시선은, 다시 그림자를 향했다. 이번에는 정말 주변에 아무도 없는걸 확인한 후, 쿠샨은 살그머니 쭈그려 앉아 자신의 그림자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다 검지로 그림자의 중앙 부분을 꼬옥 누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기…. 이제 다 갔어요….” 그리고 그 순간, 그림자에서 무언가가 쑥 올라왔다. 정수리를 쓱쓱 쓰다듬는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머리였다. 이내 주변을 한 번 둘러본 사용자는 정말로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완전히 그림자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쿠샨과 한 번 시선을 맞춘 후, 품에서 동그란 무언가를 하나 꺼내놓았다. 통신용 수정구였다. 이윽고 그림자에서 올라온 사내가 잘 보라는 듯 수정구를 톡톡 두들기고는 살며시 손을 얹었다. 이내 사용자가 마력을 흘려 넣는 것을 기점으로, 통신용 수정구가 말간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쿠샨은 침을 꿀꺽 삼키며 뚫어져라 수정구를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우웅! 미약한 진동음이 들려오는 동시에, 수정구의 중앙으로 어느 초원의 풍경이 나타났다. 인간과 거인의 접선 장소였다. ============================ 작품 후기 ============================ 바로 다음 회 갑니다. 0625 / 0933 ---------------------------------------------- Night Of Battle. 초원은 조용했다. 사용자들과 거인이 만나기로 한 초원은 지금껏 지나온 강철 산맥과는 약간 다른 풍경을 보이고 있었다. 강철 산맥이 기본적으로 수림이 무성한 지역이라면, 지금 사용자들이 서 있는 초원은 탁 트인 느낌을 주는 너른 공터 같았다고나 할까? 중간중간 파헤쳐진 땅이나 쓰러진 나무를 보면 황량한 느낌도 없잖아 있지만, 그만큼 시야가 확보된다는 장점도 있다. “젠장. 이놈들은 도대체 오는 거야, 안 오는 거야?” 문득 선두에 서서 거인들을 기다리던 공찬호가 지면에 놓인 돌멩이를 걷어차며 불만을 터뜨렸다. 다른 사용자들이 진득하게 기다리는 모습과 비교해보면 눈살이 찌푸려질 수도 있지만, 그동안의 진군을 생각해보면 공찬호가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애당초 공찬호는 오직 전투 하나만 보고 이 원정에 참여한 입장이다. 그런데 김유현의 수작(?)으로 전투는커녕 하릴없이 진군만 하는 세월을 보냈으니 그동안 불만이 쌓일 법도 한 일이었다. 그나마 오늘 실컷 전투를 하게 해준다는 말에 희희낙락하며 달려왔는데, 도착한지 몇 시간이 지나도 거인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결국에는 폭발하고만 것이다. 그러나, 김유현은 그런 공찬호를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생각도 없었다. 긴장된 마음으로 초원의 저편을 바라보는 것도 잠시. 처음 초원에 도착했을 때는 그래도 해가 중천에 걸려 있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저물어가기 직전이었다. 여기서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지금 초원을 물들인 황혼이 금세 어둠으로 변할 것이다. “우라질 놈들! 몸집은 산만 한 놈들이 꽁꽁 숨어 있고나 말이야!” “…….” “어이, 뇌제! 그냥 진군하자! 응? 진군해서 화계를 쓰자고!” “…….” “조금만 더 가면 놈들의 터전이 있다며? 아 그러니까, 한 번 해보면 될 거 아냐?! 지들 터전에 불을 싸질러 놓는데, 제깟 놈들이 안 나오고 배기겠어?” “…….” 공찬호가 꽥꽥 고함지르는 것을 들으며 김유현은 속으로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사실 아주 나쁜 생각은 아니었지만, 애당초 계획에 포함되지 않은 생각이다. 거기다 바로 어제 비가 억수같이 내린 점을 고려해보면 지금 공찬호의 말이 얼마나 억지인지 굳이 따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뇌제!” '제발 조용히 좀 해라….' 자꾸만 자신을 부르는 공찬호의 고성에 김유현의 살며시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서서히 지끈거려오는 미간을 지그시 눌렀을 때였다. 쿵! 문득 전해져 오는 초원의 미약한 떨림. 그러자 공찬호가 고성을 뚝 그치는 동시에, 초원 건너편에서 무언가 강하게 부딪치는 소리들이 울려왔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서너 개의 인영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었다. 인영의 정체를 사용자들은 굳이 안력을 높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원에 물든 황혼을 드리우는 어두운 그림자 수십 개, 아니 수백 개가 동시다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거, 거인이다! 거인이 나타났다!” 땅이 울리는 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듯 어느 사용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거인들 또한 인간들을 발견한 게 분명했다. 그러나 거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저 걸어오는 데만 집중했다. 처음에는 점으로만 보이던 거인들이 삽시간에 위용을 드러낼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자, 사용자들 사이로 미미한 어수선함이 흘렀다. 쿠샨은 일족의 숫자가 총 800명이라고 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800명의 거인이 성큼성큼 걸어오는 광경은 가히 장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치 인간으로 이루어진 파도를 보는 기분이랄까? 바로 어제 기백 명의 거인들과 마주했을 때도 뜻 모를 묘한 압박이 느껴졌는데, 8배나 되는 거인들과 마주하니 온몸이 짓눌리는 기분이 느껴졌다. '드디어 왔군.' 그러나 김유현은 차분히 속을 추스른 후, 완전히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거인들을 침착히 응시했다. 그러는 사이, 문득 거인들이 거의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오직 한 거인만 빼고. 가장 선두에서 걸어오던 거인은 그대로 계속해서 걸어오더니 거리를 어느 정도 남겨두고서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 김유현의 뇌리에 한 생각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쿠샨이…. 성공한 건가?' “공찬호.” 그렇게 생각한 김유현이 곧바로 공찬호를 불렀다. “어, 어?” 침을 꿀꺽꿀꺽 삼키던 공찬호가 떨떠름히 머리를 돌렸다. “작전은 잊지 않았겠지?” “작전?” 공찬호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김유현의 표정을 보고는 빠르게 머리를 끄덕였다. “어, 어. 그러니까 네가 신호하면….” “Ok. 거기까지.” 공찬호가 어물어물 말을 이으려는 찰나 김유현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혹시라도 거인이 들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번역 수정구는 키지 않았지만 괜한 의심을 줄 필요는 없었다. 잠시 후, 거인을 향하던 시선 일부가 김유현에게로 쏟아졌다. 김유현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후.” 그리고 도로 길게 내쉰 후, 쿠챠르가 서 있는 지점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기 시작했다. 지금 홀로 걸어 나온 거인의 키는 못해도 김유현의 5배를 넘는다. 무려 10미터를 넘는다는 소리다. 그런 만큼,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쿠챠르의 몸집은 시야에 전부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졌다. 그에 따라 김유현이 느끼는 압박감도 한층 심해져만 갔다. 크기는 둘째치고서 라도,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선은 차치하고서라도, 오른손에 쥔 거대한 망치를 보니 절로 오금이 저리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게 묠니르인가?' 그랬다. 시퍼런 색의 기이한 기운을 흘리는 거대 망치는, 바로 거인의 제왕을 상징하는 '묠니르(Mjolnir)'였다. 잠깐 시선을 뺏긴 사이, 어느덧 쿠챠르와의 거리가 5미터 안으로 가까워졌다. 김유현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갑자기 하늘이 가려지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느새 쿠챠르가 스리슬쩍 허리를 굽혀 김유현을 굽어보고 있었다. 마치 자세히 살펴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김유현은 지체 않고 번역 수정구를 활성화했다. 때마침 쿠챠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가 쿠샨이 말한 인간들의 우두머리인가.) 여기서 보이지는 않지만, 쿠샨의 이름이 거론됐다. 아마 어느 정도 이야기를 해놨을 거라고 생각한 김유현이 천천히 머리를 주억였다. (그렇습니다. 우두머리는 아니나, 대표로 보시면 됩니다.) (그런가. 대표라…. 뭐, 아무래도 좋다.) 쿠챠르는 상관없다는 양 말하고는 굽혔던 허리를 폈다. 잔뜩 드리워진 그림자가 약간이나마 걷혀졌다. (그러는 당신은….) 이윽고 김유현이 말이 이어지려는 찰나. (그럼.) 풀썩! 문득, 김유현은 갑작스레 몸이 튀어 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자, 하늘 끝까지 젖혀졌던 머리가 40도 가까이 도로 숙여졌다. 어느새 쿠챠르는 오른손에는 묠니르를 쥔 채, 그리고 왼손은 무릎에 얹은 채 지면에 걸터앉아 있었다. 김유현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마주 앉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말해보라.) 김유현이 앉자마자 쿠챠르는 어떤 표정도 짓지 않은 무 감정한 얼굴로 말했다. (예?) (쿠샨에게 들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그러니까 말해보라. 들어는 보겠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김유현은 순식간에 머릿속이 차가워지는걸 느꼈다. 들어는 보겠다. 이 말에 함축된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말 그대로 이 거인은 들으러 나왔다. 즉 듣기만 할 것이다. 그 후의 일은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물론 이런 태도를 보인 이상 거인의 마음이 움직일 가능성이 1%라도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바꾸어 말해보면 99%가 넘는 확률로 실패한다는 소리였다. 1%의 성공을 잡으려면 어지간한 달변가도 힘들 텐데, 김유현은 달변가 스타일도 아니었거니와 상대는 쿠샨처럼 어수룩하지도 않다. 자신보다 훨씬 오랫동안 살아온, 무려 거인들의 제왕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우리는 돌려 말하거나 숨겨 말하는걸 싫어한다. 그리고 길게 말하는 것 또한 싫어한다.) '협상은 이미 결렬됐구나.' 속으로 쓴웃음을 지은 김유현은 서서히 마력을 일으켰다. (알겠습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이제부터는 신호를 보낼 타이밍을 잡아야 한다. 김유현이 입을 열었다. (그럼 돌려 말하지도, 숨겨 말하지도, 그리고 길게 말하지도 않겠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거인들과 서로 화친을 맺고 싶습니다.) (화친? 너희가?) 우습다는 투의 말이 들려왔으나 김유현은 꾹 참으며 말을 이었다. (현재 우리의 목표는 이 산맥을 건너 나오는 대륙까지의 길을 트는데 있습니다. 말인즉, 거인들이 다스리는 영역을 통과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 화친을 통해 관계를 맺고, 차후 길을 오고 가는데 있어서 충돌을 피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하지?) 아무리 목적을 구구절절 말해도 상대가 이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어진다. 김유현이 입을 다물자 거인이 가열찬 콧숨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이건 인간들의 방식이 아니지 않나? 길을 원하면 억지로라도 개척하고, 걸리는 게 있으면 깡그리 쓸어버리는 게 너희 방식이 아니었나?) (그건 오해입니다. 분명 그런 면도 있기는 하나 상대를 가려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거인들은 우리와 비슷한 지성을 갖춘….) (오. 그러시겠지. 너희 인간들에 한해서 말이야.) (…….) 시종일관 툭툭 거리기는 했지만, 김유현은 별안간 거인의 어조가 한층 곱지 않아졌음을 직감했다. 말을 들어보니 인간에게 굉장한 불신감이 있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증오라고 봐도 좋을 정도의 뿌리 깊은 불신감이. '상관없나.' 어차피 초원에 들어왔을 때부터 화친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쿠샨을 볼 낯이 없군요. 애초에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쿠샨은 이야기를 들어달라 요청했고, 나는 허락했다.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 그대의 혀를 탓해야겠지.) (거인들의 강함은 인정합니다. 허나 우리가 싸우면 서로 무익한 피해를 낼 뿐입니다. 안 그래도 적이 많다고 들었는데, 굳이 우리와 싸울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싸울 이유라.) 짧게 답한 쿠챠르가 문득 머리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혹시 거신 전쟁에 관하여 들어봤는가.) (다소나마 들어는 봤습니다.) (의외군. 아무튼, 그때 우리 조상의 상대였던 아리안로드가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우리와 굳이 싸울 이유가 있던가…. 라고.) (으음.) 이윽고 다시 김유현을 내려다본 거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때 우리의 조상인 쿠샨 로드가 했던 대답을 똑같이 들려주지.) (경청하겠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래. 우리가 굳이 싸울 이유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싸운다. 목적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우리는 싸움을 위하여 살아가는 종족이다. 그래서 우리가 싸우는 것이다.) (그건 이유가….) (또한, 무엇보다.) (…….) 김유현이 도중에 항변하려 했으나 쿠챠르는 가차없이 말을 끊어버렸다. 아직 거인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이어진 선언은 김유현에게 어느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우리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 어느 생각이란, 며칠 전 괴조와의 첫 대면 때 들었던 말이었다. '결국에는 똑같네.' 그렇게 생각한 김유현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쿠챠르가 그런 김유현을 힐끔 흘겼다. (충분한 답변이 되었으면 좋겠군.)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지도 알겠구나.) (글쎄요.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이거 하나만은 알겠습니다.) 김유현은 슬슬 이 무의미한 대화를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마음먹자 돌연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린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김유현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또박또박하게 입을 열었다. (교류가 무서워서 싸우는걸 선택하다니…. 적어도 거인들이 겁쟁이라는 건 아주 잘 알겠습니다. 하하하.) 그리고서 의도성이 다분한 웃음 소리를 내자, 쿠챠르가 무덤덤한 낯으로 김유현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죽고 싶나?) 잠깐이기는 했지만 김유현은 쿠챠르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그저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는 거인의 몸체와, 귓가로 들려오는 딱딱한 목소리뿐. (꺼져라. 이야기는 끝났다.) 이윽고 완전히 몸을 일으킨 쿠챠르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말했다. 그 순간 김유현은 눈을 살짝 찌푸리고 말았다. '꺼지라고? 이야기는 끝났다고?' (쿠샨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죽었을 놈들. 하지만 며칠이나마 쿠샨을 돌봐주고, 무사히 돌려보낸 점을 고려해 이번 한 번만은 살려주도록 하마. 당장 꺼지고, 다시는 우리 눈에 띄지 마라.) 이어지는 쿠챠르의 설명에 김유현은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이해만했을 뿐이지, 전혀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다. 무사히 보내준다는 말은 김유현도 미처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였으니까. '이러면 나가린데….' (역시, 도망치는 거군요. 쿠샨의 핑계를 대서 말이지요.) 황급한 마음이 들었지만, 김유현은 겉으로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며 곧바로 받아 쳤다. 막 몸을 돌리려는 폼을 잡던 쿠챠르가 그제야 덜컥 행동을 정지했다. (도망?)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반문하고는 우묵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본다. (…미친 것 같지는 않고, 일부러 나를 도발해 마음을 움직이려는 것처럼 보이는데. 정말 그렇다면, 아주 잘못된 선택이라고 말하고 싶어.) 사실 이미 충분하기는 했지만, 김유현은 한 번 더 도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대화 도중 솔직한 마음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미 끝난 거 아니….) 그러나 김유현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어떤 전조도 없이 갑자기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몸을 일으킨 쿠챠르가 김유현의 멱살을, 아니 아예 목을 감아 올린 것이다. 이내 서서히 멀어지는 지면을 보다가 김유현은 조용히 눈을 감아버렸다. 사실 쿠챠르의 말로 미루어보아, 분위기상 이야기를 좋게 끝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유현이 쿠챠르를 도발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왜냐하면 거인이 그러하듯이 인간들도 진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러 온 게 아니었으니까. 전쟁. 허나 전쟁을 하려면 거인들의 힘을 제한시켜야만 한다. 힘을 제한시키려면 쿠샨이 신물을 건드려야 하는데, 신물을 건드리게 만드는 데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바로 인간들이 위험에 처하는 상황이 연출될 것. 만일 거인이 이대로 인간들을 곱게 보내주려 했다면 쿠샨은 그걸로 만족하고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김유현으로서는 절대로 바라지 않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갑작스럽게 쿠챠르를 도발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안 그래도 좋지 못한 태도를 보이던 쿠챠르는 대번에 도발에 넘어가주었으니까. 어쩌면 도발에 넘어가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적어도 김유현이 원하는 행동은 해주었다. 이제부터는 정말로 운에 맡겨야 한다. (눈을 떠라. 건방진 인간.) 명령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내 도로 눈을 떴을 때는, 김유현의 시야에 쿠챠르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가깝게 들어오고 있었다. 아니, 실제로 가까워지고 있다. 쿠챠르가 김유현을 향해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있었다. (대답해라, 인간. 죽고 싶나? 대답하지 않으면 이대로 목을 꺾겠다.) (…어차피 살려 보내줄 생각도 없지 않았습니까?) (호오.) 쿠챠르가 중얼거렸다. 씩 입꼬리를 끌어올려 이를 드러내고는 가볍게 어깨를 떨었다. (정말 싸우자는 건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살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찬 건 네놈이 아니었나?) 그렇게 말한 쿠챠르가 섬뜩하게 웃기 시작했다. 웃음 소리가 무척이나 거슬리면서도, 어떻게든 시간을 벌려는 김유현이 재차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뭐, 소원대로라면.) 그 순간, 쿠챠르의 두 눈이 갑작스러운 변화를 보였다. 삽시간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피가 몰려 핏발이 선 눈동자가 김유현을 노려본다. 돌연 붉은빛을 뚝뚝 흘리기 시작하는 게 흡사 핏물이라도 흘리는 모양새였다. 이야기 중 보이던 담담해 보이던 눈동자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피에 미쳐 날뛰기 직전의 야수 한 마리뿐이었다. 쿠챠르의 눈을 마주한 순간, 김유현은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섬찟한 소름이 온몸에 일어나고 직감이 경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잘못 건드렸다는, 이제 곧 죽는다는 공포에 전신이 사로잡히는 기분. 문득 공략을 떠나기 전 동생에게 들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형. 꼭 살아야 해?' 그러자 그냥 지금 신호를 보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겨우 참아낼 수 있었다. '제발.' 김유현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평소 신을 믿지는 않으나 이때만큼은 절박하게 기도했다. 지금 이 상황은 하나도 빠짐없이, 아니 목소리만 빼고 쿠샨에게 중계되고 있을 것이다. 지금 멀찍한 후방에 있을 자신의 클랜원이 통신용 수정구로 현 상황을 찍고 있을 것이며, 일찍이 쿠샨을 보낼 때 그림자에 숨겼던 사용자들과 연동하고 있을 테니까. 어쨌든 김유현으로서는 최대한의 노력을 한 셈이다. 행동만 본다면 누가 봐도 쿠챠르를 의심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아무런 전조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전조는커녕 오히려 더욱 광폭하게 변한 쿠챠르가 김유현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손아귀에 더욱 힘을 가할 뿐이다. 시시각각 목을 옥죄어 오는 굵직한 감촉에 김유현은 뜻 모를 거북함과 죽음의 공포를 동시에 느껴야만 했다. 이윽고 쿠챠르의 오른팔이 천천히 하늘 높이 올라간다.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정수리에 느껴지는 짜릿한 느낌만으로도 눈앞의 거인이 하려는 것을, 곧 벌어질 일을 알 수 있었다. '제발.' 다시 한 번, 김유현은 속으로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그대가 자초한 일이니 원망은 하지 않겠지.) 그러나 신은, 쿠챠르의 목소리를 통해 지금 이 상황이 현실임을 매정하리만치 일깨워주었다. 잠시 후. 후웅! 무언가가 바람을 강렬하게 찢으며 짓쳐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흡사 폭풍처럼 몰아치는 바람결에 김유현은 자신의 머릿결이 휘날리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꽈앙! 마치 포성이 울린 듯한 폭음이 김유현의 귓전을 멍멍하게 울렸다. 그와 동시에 몸의 균형 감각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리다 못해 노이즈 현상까지 일어날 정도였다. 그 상황에서도 김유현은 용케 번역 수정구를 쥐고 있었다. (헉, 허억….) 이윽고 간신히 흔들림이 멈췄을 때, 김유현은 자신의 호흡이 무척 거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마와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도, 세상이 비스듬하게 보인다는 것도, 목을 부러뜨릴 듯이 옥죄던 손길이 갑자기 미약해졌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이내 흘끗 시선을 내린 순간, 김유현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자신을 스치고 지나간, 아니 순간적으로 힘의 조절에 실패해 궤도가 빗나간 묠니르가 땅에 틀어박혀 있음을. 그리고 무기를 놓친 쿠챠르가 오른손으로 땅을 짚은 채 무릎을 꿇고 있음을. (네, 네놈…?) 또한, 그 무엇보다. (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힘겹게 머리를 올리는 거인이 한껏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일련의 상황을 모두 확인한 순간, 김유현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됐다…!' 드디어, 됐다는 생각이. 더 이상 아까와 같은 무시무시한 기백이 느껴지지 않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렵기 짝이 없던 거인들의 제왕이, 이제는 한낱 몸집만 큰 괴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툭, 툭! 김유현은 곧바로 손을 펴 쥐고 있던 수정구를 떨어트리고는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그러자 꾹 말아 쥔 손등에서 뇌신의 문양이 떠오르고, 동시에 황금빛 기운을 발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드디어 찾아온 기회였다. 비로소 찾아온 기회였다. 마침내 찾아온 기회였다. 몇 날 며칠 동안 되도 않은 연극을 해오면서, 죽음 직전의 공포까지 감당하면서 겨우 붙잡은 단 한 번의 기회. 제 3지역 공략을 성공시킬 수 있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마지막 기회! 그런 만큼, 더 이상 생각할 틈도 없다. 파지지지지지지직! 짜릿짜릿한, 뇌제 특유의 마력 방전 현상이 사방을 떨쳐 울리기 시작한다. 곧 눈동자는 물론, 온몸이 황금빛으로 물들여지고, 전신에서 뻗어 나온 황금빛 전류가 사방으로 물감처럼 번져간다. “크으으윽…!” 쿠챠르 또한 미칠 지경이었다.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건 알 것 같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쿠챠르도 모른다. 그저 묠니르로 저 건방진 인간의 머리를 후려치기 직전, 갑작스럽게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힘이 떨어져 버리니 약화된 몸이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수수깡 같던 묠니르가 지금은 한없이 무겁게만 느껴진다. 마치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랄까? “이, 이게 어떻게…!” 최대한 시선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음에도 어떠한 이상한 점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저 아까부터 사방이 환하게 밝아지고, 대지에 황금빛이 물들었다는 것만이…. 쿠릉, 쿠르릉! 그 순간 귓전을 떨어 울릴 정도의 요란한 천둥 소리가 사방을 가득히 메웠다. 쿠챠르는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황혼 빛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고, 먹구름은 지면에서 솟구치는 노란 전류에 서서히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꽈릉, 꽈르릉! 구름과 구름이 부딪치고. 파직, 파지직! 구름 사이를 노니는 황금빛 전류를 확인한 순간, 쿠챠르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그리고 그 순간. “손 떼.” 김유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짜자자자자자자자자자자작! 눈부신 황금빛을 분사하는 벼락의 폭우가 하늘에서 빛살처럼 내리 꽂혔다. ============================ 작품 후기 ============================ 바로 다음 회 갑니다. 0626 / 0933 ---------------------------------------------- Night Of Battle. “하아…. 하아….” 호흡이 잘되지 않는 듯 쿠샨은 힘겨운 빛으로 숨을 골랐다. 온몸에 땀을 비오 듯 흘리고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다. 외양만 보면 마라톤이라도 완주한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윽고 멍하니 입을 벌린 쿠샨은 천천히 시선을 내려 무언가를 쳐다보았다. 꾹 오므린 오른손을 벌리자 땀에 절은 손바닥 안, 은은한 빛을 흘리는 자그마한 돌멩이가 보인다. 반들반들한 윤기가 나고 중앙에 자그마한 홈이 나 있는 게, 마치 예쁜 조약돌을 보는 듯했다. 김유현의 예상대로, 쿠샨은 초원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자신의 그림자에 숨어든 사용자들이 가져온 통신용 수정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지켜본 결과, 거인과 인간이 만나고 큰 충돌 없이 쿠챠르와 김유현이 대면했을 때만 해도, 쿠샨은 일말의 기대를 걸 수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점차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두 우두머리가 차례차례 일어나더니 쿠챠르가 갑자기 김유현의 멱살을 잡아 올리고 묠니르를 치켜 올린 것이다. 사실 여기까지만 해도 쿠샨은 설마 설마 하는 마음에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나 쿠챠르의 두 눈이 붉어진 것을 확인했을 때, 쿠샨은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협상이 어그러졌다는 현실은 차치하고서라도 김유현이 죽을 위기에 처했다. 쿠샨은 처음 사귄 친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낼 수 있는 한의 최대한의 속도로 달려가 신역으로 진입했고 고대 무녀의 증표를 가지고 나왔다. 그러한 결과, 쿠샨 또한 거인인 만큼 힘을 제한 받는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정도가 생각보다 상당히 심한 터라, 쿠샨 또한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잘한 걸까?” 한참 조약돌을 바라보던 쿠샨이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혼잣말인 만큼 그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쿠샨이 몸이 약간 안정된걸 느꼈을 즈음. “아!” 한동안 신물을 바라보던 쿠샨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황급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친구를 구하겠다는 일념 하에 일단 저지르기는 했는데,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른다. “어?” 그런데 사용자들이 보이지 않는다. 들어온 사용자들은 총 4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수정구를 보면서 쿠샨을 계속해서 채근했는데,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별안간 도통 보이지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인근이 아닌 멀리까지 시선을 돌린 순간, 쿠샨은 비로소 사라진 4명 중 1명을 찾을 수 있었다. 어느새 터전의 입구까지 달려간 사용자는 얼굴은 물론, 무척이나 급박한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빨리 오라는 듯 쿠샨을 향해 팔락팔락 손짓하고, 수정구를 쥐고 여 보라는 듯 흔들기까지. 비록 암살자들이라 번역 마법은 사용할 수 없지만, 왜 그런 말도 있잖은가. 제스처는 만국 공통의 몸짓이라고. 그런 사용자의 태도를 확인하자 쿠샨은 뜻 모를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마음 한 켠으로는 안정감을 느꼈다. '왜 혼자만 있지? 다른 3명은 어디 가고? 벌써 나간 건가?' '아, 설마 아직도 인간들이 위험한 건가? 그러니까 얼른 가서 막아달라는 건가?' 하기야 쿠샨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법도 했다. 지금껏 같이 생활하면서 경험한 바로는 인간들은 굉장히 허약한 존재였으니까. 최고의 용사라는 인간도 쿠샨의 가벼운 한 방에 나가떨어지지 않았는가. 또한 지금 초원에 나가 있는 형제들은 모두가 자신보다 강하다. 그러니 아무리 힘이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인간에게 맥없이 당할 수준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쿠샨은 곧 입구를 열어젖히고 다급하게 달려가는 사용자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 “가, 같이 가요! 나도 갈게요!” 이전보다 확연히 무거워진 몸이 느껴졌지만, 쿠샨은 사용자가 나간 입구를 벗어나 금세 숲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갔나?” 쿠샨이 서 있던 자리 주변으로 3명의 사용자가 불쑥 솟아올랐다. 그랬다. 들어온 4명의 사용자 중 나간 이는 처음 1명뿐이었다. 나머지 3명은 주변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쿠샨이 나가자마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말인즉, '3명은 상황이 급해 먼저 나갔을 것이다.'라고 쿠샨 멋대로 추측했다는 소리였다. “후유…. 그럼 자명고 작전은 일단 성공했다고 봐야 하나?” “아무래도 그렇다고 봐야겠지?” 오랫동안 은신을 하고 있던 게 피곤했는지, 한 사내가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말하자 옆으로 다가온 사내가 그렇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남은 건…. 트로이 목마 작전뿐인가?” “에이, 거창하게 무슨 작전까지? 그냥 신역만 파괴하면 되는 일인데.” 남은 3명 중 유일한 여인이 타박하듯이 말했다. 그러자 몸을 비트는걸 멈춘 사내는 아까 쿠샨이 달려간 신역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신역이라고 해봤자 딱히 별거는 없다. 오직 제단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그 외 특징이라고 해봤자 다른 풍경이 시야에 선명하게 들어온다면, 신역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흐물흐물하게 보인다는 것 정도? 허나 신물이 빠져나간 이후, 이제는 신역도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자, 그럼 얼른 처리하고 우리도 가보자고.” * 시크릿 클래스 뇌제(The Lord Of The Thunder). 그리고 뇌제의 권능 뇌신(雷神). 뇌신의 능력을 간단히 정의해보자면, 하늘에서 천둥과 벼락을 소환해 적들에게 우수수 쏟아 붓는 권능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것 자체로도 굉장히 강한 능력임은 부인할 수 없지만, 여느 능력이 그렇듯이 어느 사용자가 발동하느냐에 따라 위력도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그러한 점에서 본다면, 김유현은 안 그래도 특별한 '뇌신'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두 가지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첫 번째는 김유현의 잠재 능력인 조준선 정렬(2)(Rank : EX)로, 마법의 명중률을 비약적으로 높여주는 효과를 갖고 있다. 두 번째는 김수현이 선물해준 황금빛 새인 쪼롱이로, 일종의 피뢰침 역할을 해주는 것과 동시에 증폭의 효과를 갖고 있다. 이 두 개의 무기는 뇌신의 벼락을 김유현이 원하는 곳에 떨굴 수 있는 능력을 가져다 주었고, 한편으로는 힘을 집중할 수 있는 능력도 가져다 주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하늘에서 벼락의 폭우가 쏟아졌다. 언뜻 보면 중구난방으로 쏟아지는 것 같지만, 아니다. 떨어져 내리는 벼락 하나하나가, 단 하나도 빗나감 없이 800명의 거인들을 향해 정확하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꽝! 꽝! 꽝! 꽝! 꽝! 꽝! 꽝! 꽝! 하늘에서 대지로 추락한 벼락이 그대로 거인들을 세차게 강타했다. “크아아악!” 그 순간, 마침내 도처에서 거인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짜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벼락은 그대로 거인들을 투과해 온몸에 짜릿한 충격을 남겼고, 지면에 닿은 이후 아직 남아 있는 물기를 타고 주변으로 흘러가 시퍼런 불꽃을 튀겼다. 그렇게 지속적인 데미지를 입은 거인들 중 일부는 수염이 사방으로 뻗쳤거니와, 또 일부는 온몸이 시커멓게 그을렸다. 물론 그뿐이기는 했다. 분명 고통에 몸부림치는 거인들은 많으나 아직 딱히 쓰러진 거인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약화됐다고는 해도 거인은 거인이었으며, 어느 정도 남아 있는 마법 저항이 완충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 그래도 신역이 해제돼 힘이 약화된 거인들이었다. 그런데 기습적으로 벼락을 한 방씩 얻어맞자 다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김유현이 노린 게 바로 이것이었다. 일시에 힘을 약화시킴으로써 빈틈을 만들고, 뇌신의 능력으로 틈을 더욱 크게 만든다. 이 틈을 후벼 팔 수단은 바로 이 다음부터 준비돼있었다. 뇌신의 능력을 사용했을 때부터 이미 신호는 보낸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인즉. “────. ────. ────. 아이스 랜스!” “────. ────. ────. 아이스 랜스!” “────. ────. ────. 아이스 랜스!” “────. ────. ────. 아이스 랜스!” 북부 원정대의 인원은 약 5000명. 그 중 마법사 인원만 추려보면 약 850명 정도. 그 850명 모두가 일제히 주문을 외우고 똑같은 마법을 생성시켰다. 김유현이 앞으로 나가서 대화하는 동안 북부 원정대도 놀고만 있는 건 아니었다. 약속한 신호를 기다리며 철저하게 준비했다. 여기서 준비란, 바로 한 조당 마법사를 최소 15명씩 묶어서 총 56개조로 편성하고 각 조마다 타깃을 지정하고 있었다는 것. 항마력을 가진 괴물을 상대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항마력은 맞으면 맞을수록 방어력이 떨어지는 성질을 지니고 있거니와, 저항력을 넘는 마법을 맞으면 곧바로 깨져버린다. 그런 만큼 타깃 하나를 지정하고 마법 저항이 뚫릴 정도로 화력을 집중시키면 되는 일이었다. “발사!” 이윽고 지팡이를 든 채 명령을 기다리던 마법사들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거의 동시에 마법을 발사했다. 한 조에서 15개씩 생성된 원뿔 모양의 얼음 랜스가, 각각 하나의 타깃을 향해 빛살처럼 퍼부어졌다. 챙그랑, 챙그랑! 푹, 푹! 챙그랑, 챙그랑! 푹, 푹! 효과는 확실했다. 처음에는 거인의 피부를 뚫지 못하고 튕겨나가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살을 뚫고 틀어박히는 마법들이 보이기 시작한 탓이다. 한두 명이라면 모를까, 안 그대로 떨어질 대로 떨어진 거인들의 마법 저항력은 사용자들의 집중 포화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크허허허허허허헝!” 결국 한 명 두 명 괴성을 지르며 쓰러지는 거인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마치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얼음 창이 꽂힌 거인들이 하릴없이 지면으로 무너진다. 그렇게 두 번을 연달아 마법을 사용했을 때, 바닥에 쓰러진 거인들의 수는 벌써 기백을 넘어가고 있었다. 엄청난 성과였다. 그제야 거인들도 서서히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크어어어어어어엉!” 비교적 마법의 영향을 덜 받은, 가장 후방에 있던 거인들이 긴 울음을 토하며 대지를 울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사용자들 또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25명씩 120개조로! 25명씩 120개조로! 얼른 편성된 조로 이동해!” “궁수들과 암살자들은 트랩을 준비한다! 어서어서 움직여!” 마치 이럴 것이라고 예견이라고 한 듯이 거인들의 행동에 맞추어 움직이고 있었다. 한 사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사용자들이 삽시간에 자리를 이동했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한 조당 25명으로 이루어진 120개조가 생성됐다. 앞서 마법사들이 활약을 보였으니 이제부터는 근접 계열들이 시간이었다. 한편, 같은 시각. 사용자들이나 거인들이나, 이제 서서히 진영에서 나와 서로를 향해 돌격하려 할 즈음. 김유현과 쿠챠르가 대면했던 중앙은 이미 거의 상황이 정리된 상태였다. '어느 정도 효과는 봤구나.' 얼음 창들이 건너편 거인들을 노리는걸 확인한 후, 그제야 뇌신을 거둔 김유현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으하하하하하하하!” 이윽고 앞에서 들려오는 광소에 시선을 돌리자, 지면에 크게 뻗은 쿠챠르와 거인의 복부에 올라탄 채 사정없이 창을 휘두르는 사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공찬호였다. '보아하니 쿠샨 토르도 어느 정도 처리한 것 같고.' 공찬호가 창을 휘두를 때마다 움찔거리는 반응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쿠챠르는 쓰러졌다. 뇌신이 끝난 후 공찬호에게 치명상을 허용하고만 것이다. 생각보다 허망한 쿠샨 토르의 최후라고나 할까? 쿠챠르의 기습은 김유현과 공찬호 둘만의 작전이었다. 갑작스러운 힘의 약화와 뇌신의 권능으로, 쿠챠르는 물론, 다른 거인들 또한 혼란에 빠져 있는 사이 공찬호가 기습해 쿠챠르를 처리한다는 작전이었다. 김유현의 성격에, 가장 성가신 존재를 처리할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만무했다. 아무튼. 거인들의 제왕까지 처리한 이상, 김유현은 이제 자신은 슬슬 물러나야 할 때라고 느꼈다. 초원 건너편에서 온몸을 시꺼멓게 그을린 거인들이 쿵쾅쿵쾅 뛰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쏟아지는 마법들을 맞으면서도 저렇게나 달려오는 건, 아마 쿠샨 토르 때문이리라. 공교롭게도, 때마침 사용자들도 나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앞선 계획들이 사용자 진영이 일방적인 입장에서 취한 이득이라면, 이제부터가 진정한 전투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만치가 않은데.'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거인들을 보며 김유현은 약간 질리는 기분을 느꼈다. 확실히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이번 계획의 연쇄 작용으로 김유현이 얻은 건 총 4가지였다. 거인들 힘의 약화. 뇌신으로 인한 선제 타격. 쿠샨 토르의 전투 불능화. 기습 공격으로 인한 거인들 인원수 감소. 이러한 결과, 정면 승부를 해도 어느 정도 유리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까지는 맞춰놨다. 처음에 '정면 승부를 하면 무조건 질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와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하지만 그래도 거인들이다. 제왕을 처리했다고는 하나 아직 남은 거인은 600명이 넘었으며, 하나같이 눈이 뒤집힌 채 달려오고 있다. 사실 김유현도 지금 상황에서 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어마어마한 피해는 각오해야 한다고 직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질렸다는 기분을 느낀 것이고. 쿵, 쿵, 쿵, 쿵! “공찬호!” 하지만 일단은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김유현은 커다란 목소리로 공찬호를 불렀다. 그때였다. - 끼루루루루루루룩! 갑작스럽게 귀가 찢어질 듯한 괴성이 초원을 떠르르 울렸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괴성이기도 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올린 김유현은, 곧 하늘을 바라본 순간 멍한 기색을 비출 수밖에 없었다. 펄럭, 펄럭, 펄럭, 펄럭!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걸까? 수백의 괴조들이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가장 선두에서 날고 있는 푸른빛을 띤 괴조는, 일전에 김유현과도 일면식이 있는 사이였다. - 설마…. 그 저주받은 산맥의 지배자들한테 도전하겠다는 건가? - 사실 너희의 목적은 우리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이거니와…. 적어도 한 번 지켜볼 가치는 있겠어. 망연해진 김유현의 머릿속에 예전에 들었던 말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쿠샨도 그러지 않았는가. 괴조들과는 정말 지겹게도 싸워온 사이라고. 김유현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금 이 전장에 저들이 나타났다는 것은 단 하나만을 의미한다. 그러자 그 생각이 맞는다는 듯이 돌연 맨 앞에 있던 괴조가 주둥이를 크게 벌렸다. 인간들이 아닌, 거인들을 향해서. - 크롸롸롸롸롸롸롸! ============================ 작품 후기 ============================ 바로 다음 회 갑니다. 0627 / 0933 ---------------------------------------------- ShowDown. 어느덧 해는 완전히 서쪽으로 넘어가고 산맥에도 완연한 어둠이 찾아왔다. 무언가 묘한 밤이다. 적어도 쿠샨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자꾸만 전신을 엄습하고 있었다. 단순히 신체 능력의 저하 때문만은 아니었다. 쫓아가던 사용자가 갑자기 없어져서도 아니었다. 그냥 정말로 무언가가 묘했다. 지면을 밟는 쿵쿵거리는 소리도, 턱 끝까지 차오른 숨소리도, 이따금 넘어가는 침 소리도. 결국 쿠샨이 처음으로 묘한 기분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은 초원을 바로 앞두고 괴조의 비명을 들었을 때였다. - 끼루루루루루루룩! “응? 이 소리는?” 쿠샨은 처음에는 소리의 정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초원에는 당연히 인간들과 동족만 있을 거라 생각한 탓이다. 설마 괴조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펄럭, 펄럭, 펄럭, 펄럭! 그러나 곧 하늘 높이 떠오른 괴조 무리를 확인했을 때. 그리고 그 무리의 발톱에 잡힌 채 축 늘어져 있는 동족을 확인했을 때. 쿠샨은 비로소 현실과 마주하게 됐다. “아…?”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비현실이라는 생각만 강하게 들었다. 쿠샨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두 번 보고 세 번 봐도 괴조 무리에 붙잡힌 건 동족이 분명했다. 쿵! 이윽고 하늘 높이 떠오른 괴조 무리가 발톱을 놓자 거인이 하릴없이 추락해 지상과 부딪쳤다. 이어서 쏜살같이 하강하는 괴조 무리를 확인한 순간, 그제야 멈췄던 쿠샨의 다리가 움직였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얼른 동족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쿠샨이 초원으로 들어간 찰나였다. “…….” 마침내 초원의 광경…. 아니 참상을 목격한 쿠샨은 또 한 번 얼어붙고 말았다. 머리에 얼음이 박힌 시체, 온몸이 난자 당한 시체, 다리가 터진 시체, 전신이 그을린 시체. 그랬다. 온 사방이 시체 천지였다. 그것도 그냥 시체가 아닌, 쿠샨의 동족인 거인이 시체가. 한참 동안 망부석처럼 서 있던 쿠샨의 머릿속에 드디어 한 생각이 서서히 떠오른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제야 초원의 상황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초원은 아직도 곳곳에서 격전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인간들은 조직적으로 거인을 전방에서 몰아치고, 괴조들 또한 떼로 모여 거인의 후방을 공략한다. 그리고 거인은 최선을 다해 응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쿠샨의 눈에 들어오는 상황은 단 3가지 뿐. 거인을 공격하는 인간과, 거인을 공격하는 괴조. 그리고 그 두 공격에 하나하나 쓰러져가는 동족들.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800명에 달하던 동족들이, 이제는 절반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절반의 절반도 보이지 않는다. 쿠샨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조금도 모른다. 그러나 이쯤 되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추측은 할 수 있었다. 가령, 예를 들면…. 톡…. 문득, 그리도 소중하게 여기던 신물이 절로 쿠샨의 손에서 빠져 나왔다. “으아아아아아!” 그리고 그 순간, 쿠샨은 저도 모르게 초원의 중앙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동안 여러 소리들이 들려왔다. 동족이 외치는 비명은 물론, 엄청난 폭음 소리, 괴조들이 날갯짓하는 소리 등이 중구난방으로 쿠샨의 귓전을 울렸다. 쿠샨은 아예 귀를 막아버렸다. 심정 같아서는 눈도 감아버리고 싶었다. 왜냐하면…. '쿠샨, 도망쳐라!' 혹시라도. '우리, 친구지?' 정말 혹시라도 보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니야아아아!” 자신의 동족과 싸우는 친구의 모습을. 이윽고 쿠샨이 초원의 중앙에 도착했을 때, 정면에서 동족들 수십 명이 모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둥글게 모인 거인들은 수백의 괴조 떼에 맞서 있는 힘껏 항전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지키려는 듯이. “쿠챠르! 쿠챠르 대부!” 쿠샨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러자 목소리가 들렸는지, 둥글게 모여 있던 거인들 중 몇 명이 머리를 돌리고 반응했다. “작은 주인! 도대체…!” “작은 주인! 위험…!” 여러 소리들이 들려왔으나, 쿠샨의 귀에는 쿠챠르가 여기 있다는 말 한 마디만이 들려왔다. 쿠샨은 곧바로 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그곳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쿠챠르의 키는 일족 중에서도 가장 크다. 그럼 지금쯤 당연히 보여야 정상인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서 있지 못하는 상태라는 소리였다. 이윽고 동족들이 만든 원 안으로 파고들어간 쿠샨은 드디어 확인할 수 있었다. 지면에 누워 있는 쿠챠르의 처참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몸의 절반 이상이 장기가 드러날 정도로 파헤쳐졌다. 흘러내린 피가 고여 웅덩이를 이룬다. 예리한 창에 난자 당했는지, 목 부분은 물론 가슴부터 복부까지 어디 한 군데 성한 곳이 보이지 않는다. “쿠챠르! 쿠챠르!” 하지만 놀랍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챠르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쿠샨이 거의 무너지듯이 주저앉아 몸을 흔들자 힘겹게나마 눈을 뜬 것이다. 쿠샨을 확인하고 억지로 웃어 보이기까지 한다. “쿠샨…. 이냐….” “쿠챠르! 쿠챠르 대부! 괜찮죠? 아직 죽은 건 아니죠? 아니, 안 죽을 거죠?” “그거…. 봐라…. 인간은…. 믿으면…. 안 된다고….” “마, 맞아요. 쿠챠르 말이 무조건 맞아요. 앞으로 다시는 생떼 안 부릴게요. 아니, 이상한 소리도 하지 않을게요. 네? 그러니까 괜찮은 거죠?” 그 순간 쿠챠르가 거센 기침을 하더니 입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걸 보는 쿠샨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괜찮으냐고 묻는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더없이 찡그려져 가고 있었다. 쿠샨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목소리가 젖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사실 쿠샨도 이미 알고는 있었다. 쿠챠르가 이제 곧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그저 받아들일 수가 없을 뿐. “허억…. 허억….” 그때 힘겹게 숨을 뱉던 쿠챠르의 눈동자가 느닷없이 형형한 빛을 발했다. 천천히 손을 들어올리자 쿠샨이 얼른 내밀어 잡았다. 쿠챠르는 그대로 쿠샨의 손을 인도했다. 잠시 후, 쿠샨이 손이 무언가에 닿았다. 그걸 쥐라는 듯이 쿠챠르가 온몸의 힘을 손 하나에 집중한다. “쿠챠르…?” 손이 파르르 떨리는걸 느꼈는지 쿠샨이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지면에 반듯하게 놓인 묠니르를 확인한 순간, 쿠샨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러면서도 본능적으로 묠니르를 움켜잡았다. 그제야 쿠챠르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졌다. “이제…. 진짜 주인…. 쿠샨 토르….” 쿠챠르의 몸은 물론 목소리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잠깐 형형하던 눈동자가 다시금 빛이 사그라지기 시작한다. “언제라도…. 옆에서…. 보필하고 싶었는데….” “쿠챠르 대부! 정신차려요! 네?” “우리를…. 이끌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쿠, 쿠….” 쿠챠르의 진심을 들은 순간 쿠샨은 가슴속으로 무언가 왈칵 솟아오르는걸 느꼈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데,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 “헉, 허억….” 떨리는 숨을 길게 흘려내는걸 마지막으로, 가늘게 이어지던 쿠챠르의 떨림이 사라졌다. 한 줄기 핏물을 뱉어낸 입이 힘없이 달싹인다. “끝까지…. 못해서…. 죄송….” 그 순간, 두 눈의 빛이 완전히 꺼져버렸다. 쿠챠르는 끝내 말을 매듭짓지 못한 채 머리를 떨구고 말았다. 묠니르까지 간신히 인도했던 손이 툭, 하릴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쿠챠르…?” 언제는 형처럼, 언제는 삼촌처럼, 또 언제는 아버지처럼 지켜주고 조언해주던 존재였다. “쿠챠르…!” 그런데, 이제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 “쿠챠르….” 그렇게 쿠챠르가 정말로 숨을 거뒀다는 걸 인지한 순간. “…….” 쿠샨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고요히 흘러나왔다. 투명한 눈물이 아닌 진한 핏빛을 띤 눈물이 흘러나온다. 마치 피눈물처럼. 그리하여. 마침내, 지금 바로 이 순간 시작되었다. '거인들이여, 슬퍼하라. 어디 한 번 슬퍼해보라. 절절하고 슬픈 감정을 느껴보라.' 슬픔을 느낀 거인이. '슬픔을 되찾음은 물론, 저주로 속박된 힘까지 풀려날 것이며, 과거의 영광 또한 자연스레 되찾을 것이다.' 모든 것을 되찾기 시작했다. '용맹함은 남겨두나, 전략을 앗아갈 것이며.' 전략적인 사고가 가능해지고. '사랑은 남겨두나, 평화는 없을 것이며.' 평화를 구축할 수 있게 됐고. '지성은 남겨두나, 진화할 지혜는 허락하지 않을 것이며.'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지혜가 허락되고. '천성은 남겨두나, 기이한 신력을 빼앗아갈 것이며.' 타고난 신력이 돌아오며. '살아갈 터전은 남겨두나, 괴물들의 경외를 거두어갈 것이며.' 다시금 괴물들의 복종을 받고. '주체할 수 없는 광기를 부여할 것이며.' 주체할 수 없던 광기가 사라지고. '너희가 자신의 마음에 충실하게 할 것이다.' 비로소, 마음의 자유를 되찾았다. 이윽고, 초원의 전역에 갑작스럽게 침묵이 내려앉았다. 숨이 막힐 것만 같은 정적. 이상한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폭음이 끊이지 않던 초원이, 한순간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하고 괴괴한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사용자든 괴조든,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초원의 중앙에서 갑작스레 피어오른 전신을 전율케 할 정도의 기운을. 초원을 잠식하는 것도 모자라, 온 산맥으로 범람해가는 광포하기 그지없는 기운을. 그렇기에,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스산한 바람이 초원을 스치고 지나갔다. 번쩍! 그 순간, 초원의 중앙에서 어둠을 밝히는 몇 개의 눈동자가 비춰졌다. 눈동자들은 더 이상 광기를 뜻하는 붉은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뜨겁게 작열하는 듯한 새하얀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칠흑 같은 어둠 속 새하얗게 작열하는 눈동자들의 수가 점차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잠시 후. 종내 끊임없이 피눈물을 흘리는 눈동자가 마지막으로 몸을 일으킨 찰나.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증오와 슬픔이 담긴 엄청난 절규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퍼져 나가 온 산맥을 떠르르 떨쳐 울렸다. 지상의 모든 괴물의 경외를 명하는 토르의 함성. 아득한 신화 시절. 지상의 지배자로서 거신 전쟁을 이끌었던 거인들의 전설이, 강철 산맥의 초원에서 되살아난다. 그리고. “전원 전투 준비.” 초원의 한쪽. 화륵, 화르륵! 반신의 함성마저 불태워버리는 태고의 불꽃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 작품 후기 ============================ 7월 25일(금요일) 하루 휴재합니다. 독자 분들의 양해를 부탁 드려요. :) 0628 / 0933 ---------------------------------------------- ShowDown.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고막을 뒤흔들 정도의 어마어마한 함성에 나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있는 힘껏 마력을 끌어올려 몸을 보호했음에도, 엄청난 기세로 덮쳐오는 음파에 절로 몸이 떨렸다. 꼭 이대로 주저앉고만 싶은 기분이다. 화륵, 화르륵! 결국 화정의 힘을 끌어내고 나서야 간신히 함성의 여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장난이 아닌데.' 스르릉! 속으로 헛웃음을 흘린 후 나는 무검을 뽑으며 입을 열었다. “전원 전투 준비.” 그리고 곧바로 초원을 살피며 전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장소는 초원. 사용자. 거인. 괴조.' 우선 보이는 것들로만 판단하면 전황은 가히 나쁘지 않다. 초원에 쓰러진 시체는 대다수가 거인이며, 사용자나 괴조의 시체는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분명 전황이 유리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사용자들이 주춤주춤 물러나고 있다. 괴조들은 더욱 가관이다. 하늘은 날고 있기는커녕 모두가 지상에 추락한 채 거인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래. 거인들 때문이다. 유리해 보이는 전황이 불리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거인에 있다. 중앙에서 눈을 새하얗게 빛내며 초원 전역을 아우르는 모습은, 수적 차이를 뒤집고도 남을만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저주가 풀렸구나.' 그때 갑자기 내 팔을 살며시 감아오는 감촉이 느껴졌다. “수현….” 고연주가 살짝 불안감이 깃든 음색으로 나를 부른다.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 있어, 나는 천천히 몸을 돌아보았다. “…….” 비단 고연주뿐만이 아니다. 데리고 온 모든 클랜원들이 하나같이 불안한 얼굴로 나를…. 아니, 나만 바라보고 있다. 아마 클랜원들도 느꼈을 것이다. 저 거인들이 전해오는 어마어마한 압박감을. 하지만 그럼에도 내 지시에 따라 각자의 무기를 들고 전투 준비를 마쳤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저 괴물을 상대해야 함을 말이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갑시다.” 그리고 도로 시선을 돌린 후 사용자들이 물러나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곧 나를 따라오는 발소리들이 들려왔다. “형!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이대로 측면에서 들어가실 건가요?!” 그렇게 초원을 가로지르는 와중 등 뒤로 안현이 외침이 들렸다. 호기롭게 고함치기는 했으나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억지로 외친 기색이 다분하다. “자살할 일 있어? 일단 북부 원정대와 합류할 거야!” 나 또한 마주 고함쳐준 후 아직 제자리에 서 있는 거인들을 응시한 찰나, 문득 이상한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거의 사람 몸만한 기이한 기운을 흘리는 거대한 망치가 하늘 높이 치켜 올려져 있는 것이다. 나는 한 눈에 망치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묠니르다.' 그 순간이었다. 쿠르릉! 쿠르릉! 돌연히 먹구름 낀 하늘로부터 뇌성을 동반한 무수한 전광(電光)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꽝! 이내 푸르스름한 색을 빛내는 섬광이 지상에 내리 꽂힌 순간, 번개가 눈부신 방전 현상을 일으키며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충격의 여파가 전역으로 몰아치며 초원을 휩쓸어간다. “아아아악!” “끄아아악!” 번개에 맞은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튕겨져 나가고, 여파에 휩쓸린 이들은 온몸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며 하릴없이 쓰러져갔다. 가히 살 떨릴 정도의 위력이었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하늘을 메운 먹구름은 여전히 우렁찬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내 구름과 구름이 재차 부딪치고 하늘에서 천둥이 치려는 찰나, 먹구름 낀 하늘의 절반이 갑작스레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이어서 푸른 번개가 지상으로 추락하려는 순간, 거의 동시에 내리쳐진 노란 벼락이 푸른 번개를 공중에서 정확히 맞췄다. 번개와 벼락이 부딪쳤다. 번쩍! 공중에서 일어난 폭발이 한순간 시야를 하얗게 물들여왔고, 백색 소음은 고막을 사정없이 울려댔다. 무시무시한 바람이 온몸을 찢어발길 듯이 불어 닥쳤다.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한 차례 격돌이 끝난 후였다. 허공에서 뿌려지는 불똥의 비가 강철 산맥의 곳곳에 불길을 일으킨다. 그렇게 폭음과 비명이 삽시간에 주변을 메우는 것을 기점으로, 잠시 멈췄던 전쟁이 재개를 알렸다. 곳곳에서 쿵쿵거리는, 거인이 지면을 밟는 소리들이 울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껏 거인들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던 괴조들도 서서히 움직이려는 낌새를 보이고 있었다. 마치 기지개를 피듯 날개를 활짝 벌리고 펄럭인다. 전혀 좋지 못한 징조였다. 거인들만 상대해도 버거울 것 같은데, 괴조까지 상대한다면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나마 한 가지 불행 중 다행인 게 있다면, 조금 전 격돌로 형이 있는 장소는 파악했다는 것. '결국 방법은 하나밖에 없나?' 형의 힘이 느껴진 장소로 걸음을 돌리며 나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비비앙!” “…왜!” 대답은 반 박자 늦게 들려왔다. “저기 괴조들 보이지? 이길 수 있겠어? 네 마수 군단으로!” “뭐, 뭐라고?!” “아니, 꼭 이길 필요는 없어! 우리가 거인들을 상대할 동안 시간만 끌어주면 돼!” “저, 저놈들을…?” 의외라고 해야 할까? 비비앙이 약간은 자신 없다는 투로 말을 더듬거렸다. 조금 기다려보았지만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곧 형이 있는 장소에 도착할 것 같아, 나는 속으로 혀를 차고 입을 열었다. “자신 없으면….” “하, 할 수 있어!” 그때, 별안간 비비앙이 빽 소리를 질렀다. “…할 수 있다고?” “그래!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무리는 개뿔! 아예 깡그리 쓸어버릴 테니까!” 허세가 분명하다. 그러나 그만한 자신감도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지금껏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는 만큼, 이번에도 그럴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아니, 무조건 그래야 한다. “그럼 부탁해!” “맨날 이럴 때만…!” 중얼중얼 투덜거리는 소리가 이어졌지만, 나는 픽 웃고는 앞쪽에는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전방으로 사용자들을 향해 급하게 지시를 내리는 형의 모습이 서서히 보여오기 시작했다. * 쿠샨 토르의 각성으로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모든 사용자들이 일순간 혼란에 빠져들었고, 그것은 김유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김유현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거인들을 보며 지시를 내리는데 여념이 없었다. “50명씩 한 조로! 50명씩!” “절대로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면 승부는 회피해! 계속 시간을 끌어!” 현재 북부 원정대는 마법사들을 후방에 배치한걸 제외하면 전원이 앞으로 나온 상태였다. 김유현은 여기서 50명씩 한 조로 거인들을 상대하는 산개 진형을 선택했다. 물론 각개 격파를 당할 위험이 굉장히 높기는 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거인들에 비해 새로 진형을 꾸릴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기껏 하나로 모아봤자 무참히 짓밟히기만 할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산개해서 최대한 시간을 끄는 동안, 마법사들의 집중 사격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한 김유현이 어느덧 100미터 앞까지 다가온 거인들을 보며 입을 질끈 깨문 찰나였다. “형!” 문득 익숙한 음성이 귓가로 흘러들었다. 김유현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것과 동시에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형!” 그러나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려온 순간, 의심은 곧 확신으로 변했다. 김유현의 눈썹이 한껏 치켜 올라가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한다. 그곳에는 김수현을 필두로 서른 남짓한 머셔너리 클랜원들이 정연히 달려오고 있었다. “너, 너…. 읍?!” 이내 김유현의 앞에 도착한 순간, 김수현은 무어라 말하려는 형의 입을 손으로 막아버렸다. 그리고는 서로의 코가 근접할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일단, 나중에 얘기하자. 응?” “……!” “상황이 급하잖아. 우선은 도와줄 테니까, 저놈들부터 처리하고 얘기하자고.” “…….” 그러자 형형히 빛나던 김유현의 눈빛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이어서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사실 김유현이 처음 김수현을 봤을 때 느낀 감정은, 놀라움을 제외하면 안도감이 가장 컸다. 상황이 그러했다. 거의 억지 춘향 격으로 산개 진형을 펼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문제점이 많은 진형이었다. 무엇보다 각 조를 이끌 사용자들이 고만고만하다는 게 문제였다. 앞장서서 거인들을 상대하고 사용자들을 이끌어줄 강자가 없다는 소리였다. 있다고 해봐야 공찬호 정도랄까? 그런데 바로 여기서 김수현이 나타났다. 머셔너리 클랜원 중에서 적어도 열댓 명은 어딜 가나 알아주는 사용자들이다. 아니, 최소한 이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곤두박질친 사기를 어느 정도 끌어올릴 수는 있다. 그 증거로 벌써부터 주변에 김수현이 나타났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용자들이 생겨나지 않았는가. “알겠지?” 김수현이 확인 차 물었다. 쿵, 쿵, 쿵, 쿵! 아주 짧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거인의 발과 지면이 부딪치는 소리가 지척까지 가까워졌다. 흘끗 시선을 돌린 김유현은, 거인이 80미터 앞까지 다가왔음을 확인한 순간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치아가 부서질 정도로 이를 세게 깨물었다. 잠시 후, 입을 틀어막고 있던 김수현의 손이 살그머니 떨어졌다. “…도와줘.” 마침내 김유현의 나직한 목소리로 구원 요청을 했다. “아주버님. 마법사들의 지휘권을 잠시 맡을 수 있을까요?” 그와 동시에 정하연이 성큼 다가와 마법사들의 지휘를 맡기를 요청했다. 사실 절차를 깡그리 무시한 요청이기는 했으나,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만큼이나 상황이 급박했으니까. “부탁합니다. 마법사들은 후방에 모두 모여 있습니다.” 김유현이 머리를 끄덕였다. 정하연은 이번에는 김수현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녀오세요.” 김수현 또한 허락했다. “감사해요. 그럼 한별이랑 헬레나는 저를 따라오세요.” 그러자 정하연은 싱긋 웃어 보인 후 김한별과 헬레나를 데리고 후방으로 달려갔다. “50미터….” 김수현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나마 김유현이 빠르게 진정시킨 탓에 북부 원정대도 서서히 조를 짜고 진형을 갖춰가고 있었다. 산개 진형으로 싸운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난전이나 다름없는 상황. 이러한 상황에서 전세를 역전하고 승기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 김수현은 그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좋아. 그러면….” 이윽고 빙글 몸을 돌린 김수현이 클랜원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선유운, 고연주, 안솔, 백한결. 방금 네 명은 저와 형을 따라옵니다.” 호명된 4명은 곧바로 김수현의 옆으로 걸어왔다. “우리는 조를 두 개로 나누겠습니다. 한 조는 남다은을 대장으로, 다른 한 조는 차소림을 대장으로….” 김수현의 지시가 이어지고 머셔너리 클랜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비비앙은 아까 얘기했던 대로 괴조들을 상대해주고….” “잠깐, 수현아. 괴조 군단을 상대하다니?” 김유현 또한 괴조들의 행동 변화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상대해야 하나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김수현이 해결책을 낸 것이다. “말 그대로야. 우리 쪽에 마수 군단을 소환할 수 있는 거주민이 있거든.” 김유현의 낯에 잠깐이나마 화색이 돌았다. “그러면….” “물론 우리는 따로 상대할 놈이 있지.” 김수현이 김유현의 팔을 잡아 끌며 정면을 가리켰다. “저기…. 봐.” “……?” 이내 동생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린 순간, 김유현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저놈이 분명 우두머리일 거야.” 그랬다. 초원 중앙, 여러 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오는 거인. 몸집은 가장 작지만, 두 눈을 하얗게 불태우며 한 손에 묠니르를 든 채 걸어오는 거인. 그 거인을 과연 어찌 잊겠는가. “쿠샨….” 쿠샨을 확인한 김유현이 망연한 얼굴로 나직이 뇌까렸을 때였다. “김수현! 김수현이 왔다고?” 돌연히 한쪽에서 우락부락한 사내가 멧돼지처럼 달려왔다. “…공찬호?” 사내를 보는 김수현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마침 잘됐군. 너도 이리와.” “너…. 어, 어?” 막 무어라 입을 열려는 찰나, 김수현이 마침 잘됐다는 투로 이리 오라 손짓한다. “급하다고! 어서 안 오고 뭐해?” 한 번 더 강하게 다그치자 공찬호의 낯에 떨떠름한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곧 쭈뼛쭈뼛한 걸음으로 다가오자 김수현이 대번에 어깨를 잡고 끌어당기며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잘 들어. 아군이 괴조나 여타의 거인을 맡는 사이, 우리는 제왕을 처리한다.” 잠시, 공찬호가 흠칫했다. “우, 우리?” “구구절절 설명할 시간 없어. 그냥 캐러밴이라고 생각해. 여기서 네가 해줄 일은 하나야. 최대한 버티면서 시선을 끄는 거. 알아들어?” 공찬호 또한 현 상황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건성으로 대답하며 주변을 둘러보자 주변에 서 있는 사용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 알겠다.” 공찬호는 간신히 수긍할 수 있었다. 사용자로서는 처음으로 김수현과 힘을 합치는 일이었다. 그렇게 간신히 상황이 일단락된 사이, 어느새 거인들은 정말로 지척까지 다가오고 말았다. 중앙에 남은 7명의 사용자들이 하나같이 긴장한 얼굴로 다가오는 거인들을 응시했다. 전사, '수라마창의 주인.' 공찬호. 암살자, '그림자 여왕.' 고연주. 마법사, '뇌제.' 김유현. 궁수, '신궁.' 선유운. 사제, '광휘의 사제' 안솔. 키퍼, '신의 방패.' 백한결. 조커, '검술 전문가.' 김수현. 이로써, 현 상황에서 각성한 반신, '쿠샨 토르'를 상대할 최강의 캐러밴이 조직됐다. 그때였다. 문득, 30미터까지 거리를 줄여온 쿠샨 토르의 움직임에 변화가 생겼다. 걸어오는 속도가 서서히 느려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발을 크게 들었다가 지면으로 강하게 내리찍는다. 콰앙! 흡사 천둥 치는 소리가 나며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힘을 가한 방향으로 달려들었다. 지면이 파도 치는 것처럼 사정없이 꿈틀거리고, 충격을 이기지 못한 흙과 돌덩이들이 사방으로 솟구쳤다. 어떠한 마법적 행사도 부리지 않고, 순수 근력으로만 이런 진동을 일으킨 것이다. 충격의 여파가 고스란히 사용자들을 덮쳐 든다. 그러나 당하고만 있을 김수현이 아니었다. “흡!” 별안간 힘찬 기합을 내지른 김수현이. 콱! 지면에 무검을 있는 힘껏 내리 꽂았다. 그러자 주변으로 모여든 공기가 미친 듯이 요동치며 하나의 거센 파동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 공기를 찢어발기는 마력의 덩어리에 거친 회전력이 가미된 순간, 파동이 땅에 깊숙한 자국을 남기며 일직선으로 짓쳐 들었다. 김수현이 쏘아 보낸 파동이, 이제 막 덮쳐오려는 진동과 격돌한다. 꽈꽝!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대폭발이 일어나며 맹렬한 폭음이 이어졌다. 무언가 심상찮음 을 느낀 걸까? 쿠오오오오오오오! 쿠샨 토르가 잠깐 걸음을 멈추고는 커다란 함성을 질렀다. 두 눈은 이제는 하얗게 빛나다 못해 이글이글 작열한다. 때마침, 하얀 이를 드러낸 김수현의 두 눈에서도 맑은 불꽃이 흘러나온다. 그렇게 두 괴물이 서로를 마주보는 것을 기점으로, 비로소 새로운 전투가 시작되었다. 김수현의 1, 2회 차를 통틀어, 가장 치열했던 5번의 전투 중 하나가 그 서막을 알린 것이다. ============================ 작품 후기 ============================ 이제 제 3지역 공략도 서서히 마지막으로 접어들었네요. 하하하. 반신으로 각성한 쿠샨 토르. VS. 현 상황에서 구성할 수 있는 최고의 사용자들. 그리고 다음 회에는 새로운 마수 군단도 등장할 예정입니다. :) 그럼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PS. Bios라는 BGM 말씀해주신분 감사해요. 코멘트란 보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들어봤는데, 덕분에 오늘 즐겁게 집필할 수 있었습니다. :D 0629 / 0933 ---------------------------------------------- ShowDown. 고요하다. 아니, 고요하지 않다. 고함치는 소리, 쿵쿵거리는 소리, 무언가 쨍 하고 부딪치는 소리, 비명을 지르는 소리 등등. 주변은 분명 고요하다는 표현과는 거리가 있는 상황이다. 그러할진대 조용하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나는 차분히 시선을 들어 전방을 응시했다. 4미터를 넘는 키에 온몸을 이루는 근육.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와 오른손에 쥔 커다란 망치. 거기다 전신에서 끓어오르는 광포(狂暴)하면서도 신성한 기운과 마주하고 있으면, 그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저 거인이 그저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반신(DemiGod)에 해당하는 힘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그래. 새로이 각성한 쿠샨 토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인의 제왕은 우리와 약 20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무조건 돌격만 할 줄 아는 괴물과, 상황을 관찰하고 탐색전을 할 줄 아는 괴물이 있다면, 당연히 후자가 더욱 까다로운 괴물이다. 왜냐하면 최소한의 이성은 살아있다는 말이었기에.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높이면서도 나는 묘한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동족의 죽음 때문에 그런 걸까. 쿠샨 토르는 우리를 지그시 노려보면서도 끊임없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눈초리가 나를 향하고 있지는 않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하고 있었다. 또한 무엇보다, 저렇게 피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꼭 1회 차 형을 잃은 후의 나를 보는 기분이랄까? 그때였다. “아무래도 곧 올 것 같다.” 공찬호가 수라마창을 한 번 크게 회전시키고는 양손으로 단단히 부여잡았다. “탐색전은 생각도 하지 마. 처음부터 무조건 전력으로 가야 한다.” “그 정도는 알고 있다.” 혹시나 싶어 말을 걸자, 공찬호가 창을 상단으로 끌어올리는 자세를 잡으며 대답한다. 그러자 쿠샨 토르 또한 묠니르를 서서히 들어올리며 무릎을 굽혔다. 전신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기운의 농도가 훨씬 짙어졌다. 마치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활화산 같은 기운에, 공기마저 팽팽해지는 게 느껴졌다. 무의식 중 마른침이 넘어간다. “쿠샨….” 돌연 형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쿵…. 그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쿠샨 토르가 느릿하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 순간. “쿠아아앙!” 별안간 쿠샨 토르가 지상을 미끄러지듯이 가르며 달려들었다. 20미터의 간격을 한순간에 무로 돌려버리는 무시무시한 속도의 돌진! 공찬호의 눈이 크게 떠지는가 싶더니 황급히 수라마창을 정수리로 올린다. 카앙! 수라마창과 묠니르가 충돌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 끓던 대기 중의 공기가, 마침내 폭발했다. “끄윽…!” 지면에 굳건히 서 있던 공찬호의 발이 그대로 초원을 푹 파고든다. 단순히 내리쳐진 일격을 막았을 뿐인데, 지면이 푹푹 파이며 버티기 힘들다는 듯 격한 신음을 흘리고 있다. 첫 격돌에서는 쿠샨 토르가 확실한 우위를 점했다. 그러한 찰나, 약간 숙였던 쿠샨 토르의 눈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묠니르가 그대로 하늘 높이 올라간다. 그제야 해방된 공찬호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살짝 비틀거렸다. 그러나 해방은 한순간에 불과했다. 미처 자세를 가다듬을 시간도 없이, 쿠샨 토르가 거의 미쳐 발광한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묠니르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콰앙, 콰앙, 콰앙, 콰앙! 묠니르가 포효한다. 한 번 내리쳐질 때마다 충돌의 여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공기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이제 겨우 5합을 겨뤘을 뿐인데 주변 지면은 지진이라도 난 듯이 들썩들썩 젖혀지고 있다. 쿠샨 토르는 마치 휘몰아치는 폭풍처럼, 조금도 틈을 주지 않고 공격을 때려 넣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공찬호는 겨우겨우 하나씩 쳐내고는 있었지만, 말 그대로 간신히 막는 것에 불과했다. 패색은 확연하게 짙어져 가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을 쓰다듬었다. 본능은 도와줘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이성은 아직이라고 말하고 있다. 쿠샨 토르의 왼팔이 그 증거였다. 첫 격돌 후 계속해서 걸음을 움직여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조금씩 몸을 틀거나 왼손을 흔들며 위치를 바꾸고 있다. 나를 인지하고 경계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크악!” 그 순간 공찬호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크게 튕겨 나가버리고 말았다. 나는 칼자루를 꽉 움켜잡았다. 이제는 기회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나는 곧바로 땅을 박차 몸을 날렸다. 그러자마자 역시나 쿠샨 토르가 나를 돌아본다. 하지만 어차피 예상하고 있던 일. 일말의 망설임 없이 달리는 속도에 가속을 붙이자, 비로소 완전히 몸을 돌린 쿠샨 토르가 정면으로 묠니르를 내밀었다. 이윽고 사정거리에 진입한 순간, 옆으로 한껏 젖혀진 묠니르가 내가 들어오는 때에 맞춰 후려갈기듯이 짓쳐 들어온다. 공격에 동반된 바람에 머리칼에 세차게 나부낀다. 그 어떤 기교도 없는 눈에 훤히 보이는 공격. 하지만, 그렇기에 방심할 수 없다. 단순한 공격이지만 군더더기가 없으며, 깃들어 있는 파괴력은 내가 도저히 상대할만한 수준이 아니다. 아니, 상대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곧바로 이형환위를 사용했다. 쿠샨 토르의 눈이 내 잔상에 팔린 사이, 옆쪽으로 돌아가 옆구리를 찌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오른쪽으로 돌아간 순간, 나는 잠깐이지만 망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향해 치고 들어오는 주먹 쥔 손이 보였기 때문에. 후웅! 예상치 못한 공격이라서 그런 걸까? 주먹이 마치 슬로우 마법에라도 걸린 양 천천히 다가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몸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반응 속도가 빠른 건지, 아니면 이형환위가 간파 당한 건지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건, 솥뚜껑만한 손이 내 정수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 그렇게 주먹이 내 머리를 때리기 직전이었다. “안 돼!” - 피해! 형과 화정의 목소리가 함께 들려왔고. 번쩍! 폭발하듯 터져 나온 빛무리에 시야게 하얗게 물들었다. 안력을 돋우자 주먹이 시꺼멓게 그을린 채, 찡그린 얼굴로 주춤 물러나는 쿠샨 토르가 보였다. '기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순간적으로 발을 내질렀다. - 그, 그냥 물러나! 퍽! 순간 화정의 뒤늦은 외침이 들려왔지만, 발은 여지없이 거인의 가슴을 강타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쿠샨 토르는 별 타격을 받지 않은 듯, 여전히 번쩍이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 피하라고 했잖아! 이 멍청한 자식아! 쐐애애액! 돌연 화정이 외침이 이어지는 동시에,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가 파고들었다. 반사적으로 머리를 한껏 뒤로 젖히자 무언가가 내 콧등을 싹 베고 지나갔다. 그것이 묠니르임을 인지한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 피해, 피해, 피해, 피해! 제발 피해! 이놈이 어떤 놈 인지나 알아? 아니, 애당초 저놈은 너를 노리고 있었단 말이야! '뭐라고?' 나는 반문함과 동시에 얼른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쿠샨 토르는 내가 물러나는걸 봤음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조금의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곧바로 묠니르를 휘둘러온다. “흡!” 일순 역으로 텀블링을 돌아 간신히 손을 피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마주해야 했던 건, 허공에 떠오른 나를 걷어차려는 발길질이었다. - 이형환위! 화정의 외침과 동시에 나는 이형환위를 사용해 지면으로 착지를 시도했다. 간신히 지상에 발을 붙이자, 허공의 잔상을 후리고 지나가는…. 아니, 멈췄다? 허공으로 올라가던 쿠샨 토르의 발길질이 멈췄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채 반응할 틈도 없이 그대로 아래로 내리 꽂힌다. 나는 그대로 흙 바닥을 굴렀다. 꽈앙! 직격은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지만, 그 여파까지 피하지는 못했다. 발이 지상을 폭격한 순간, 지면이 쩍쩍 갈라지며 근원에서 터져 나온 거대한 충격파가 나를 덮쳐든 것이다. 말 그대로, 순수한 물리력으로 이룬 파괴 행사였다. 몸은 물론 시야도 미친 듯이 흔들리고, 백색 소음이 고막을 강하게 울리며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마치 지진 난 지역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듯한 기분.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결국 중심을 잡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윽고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 차차 잡히는 시야에 들어온 건,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치켜 올려진 묠니르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저건, 피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그렇게 묠니르가 꿈틀 움직였을 때였다. 땅, 따다당! 어디선가 빛살처럼 날아온 서너 발의 화살이 쿠샨 토르의 얼굴을 정확히 가격했다. 불의의 일격이라서 그런지, 쿠샨 토르가 낯을 크게 찌푸리며 반의 반 걸음 정도 물러났다. 비록 한 발도 파고들지는 못하고 튕겨 나가기는 했으나, 거인의 제왕을 살짝 물러나게 만들 정도의 위력이다. 바로 몸을 일으키며 흘끗 보자, 저쪽에서 무릎을 꿇은 채 석궁을 겨누고 있는 선유운이 보였다. 그 틈을 타서 뒤로 훌쩍 물러난 찰나, 어딜 가냐는 듯 쿠샨 토르가 나를 노려본다. 그 순간이었다. 휘리릭! 휘리릭! 갑작스레 쿠샨 토르의 주변으로 그림자 수십 개가 치솟더니 마치 원을 그리듯이 몸을 부드러이 휘감았다. 그리고 사방으로 잡아당기는 동시에, 쿠샨 토르의 목 뒤에서 앙칼진 눈을 한 고연주가 불쑥 솟아올랐다. 양다리로 목을 단단히 감고는 오른손에 든 단검을 재빠르게 찔러 넣는다. 그러나 쿠샨 토르는 가볍게 목을 젖혀 공격을 피하고는, 몸을 있는 힘껏 뒤틀어 그림자 구속을 모조리 끊어버렸다. 어마어마한 순발력. 그러자 고연주는 혀를 한 번 차더니 나를 보며 눈을 찡긋한 후,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쿠샨 토르는 방해 받은 데 무척이나 화가 났는지 구속이 풀리자마자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미 고연주는 물론, 나 또한 어느 정도 거리를 확보한 상태였다. 잠시 후, 거인의 얼굴에 약간 멍청해 보이는 기색이 스쳤다. 나는 콧등에 흐르는 피를 쓱 닦고 나서 아직도 나를 노려보는 쿠샨 토르를 응시했다. 거칠어진 숨을 추스르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삽시간에 1회전이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써 3번이나 위기를 맞고 말았다. 물론 그때그때 적절히 이어진 원호에 어찌어찌 넘길 수는 있었지만…. '진짜로 장난이 아니구나.' 반신이라고 마볼로와 동급이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한 오산이었다. 확실히 가짜 반신과 진짜 반신은 그 궤를 달리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거의 모든 행사를 순수 근력으로 해버리니 내가 자랑하는 마법 저항도 이번만큼은 아무 소용도 없다. 거기다 근력, 내구, 체력, 민첩 등 신체 계열 능력은 물론, 순발력이나 상황 판단을 일컫는 순수 전투 능력조차도 나를 앞서고 있다. 2회 차에 들어서 처음으로 나보다 모든 것을 앞서는 근접 계열의 적을 만난 것이다. 아니. 1, 2회 차를 통틀어서도 이 정도의 적을 만난 기억은 드물다. 그나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면, 지옥 대공 정도는 되야…. 아, 그년 정도라면 아마 저놈도 가볍게 찜 쪄 먹겠지? …아무튼. 1회전에서는 정신 없이 밀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아직 살아 있고, 그동안 적어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충분한 치료를 받았는지, 때마침 공찬호도 건너편에서 성난 황소처럼 달려오는 게 보였다. 쿠샨 토르는, 아직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한 번 크게 숨을 들이킨 후 왼손에 검을 하나 추가로 쥐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마력을 밀어 넣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마검 칼리고 아브락사스(Caligo Abraxas)의 봉인이 풀렸습니다. 변화가 시작됩니다.』 키아아아아아아아! 마검이 울부짖는 소리가 2회전의 시작을 알렸다. 이내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가공할(可恐) 어둠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반격의 시작이다. ============================ 작품 후기 ============================ 비비앙아 미안해. ㅜ.ㅠ 너의 마수 군단을 출현시키지 못했어. ㅜ.ㅠ 0630 / 0933 ---------------------------------------------- ShowDown. - 잠깐만. 저 녀석 뭔가 좀 이상한데? 슬슬 2회전을 개시하려는 찰나, 화정의 목소리가 나를 제지했다. '이상하다니?' - 아까는 저놈이 무조건 너만 노리는 줄 알았거든? 여기서 네가 가장 강하기도 하고, 또 나를 품고 있으니까. '그런데?' - 그런데…. 잘 모르겠어. 처음에는 너를 처리하려다가, 이제는 걸리적거려 하는 것 같아. '그게 그거 아냐?' - 아니야. 그러니까 저놈의 목적이 네가 아니라는 소리야. 쿠샨 토르의 목적이 내가 아니다? 일순 화정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곱씹을 틈은 없었다. “도와리야!” 성난 코뿔소처럼 달려온 공찬호가 돌연 이상한 기합을 지르며 쿠샨 토르의 넓적다리에 몸을 들이받았기 때문이다. 꾸웅! 그러자 격한 충돌음이 들리며 거인의 몸이 살짝 기울어졌다. 이어서 번쩍 들린 수라마창이 그대로 허벅지를 찌르려 했으나 거인의 빠른 반응에 빗나가고 말았다. 이내 쿠샨 토르는 나직한 울음을 흘리며 자세를 잡고는 공찬호를 노려보았다. 그 틈을 타서, 이번에는 내가 달려들었다. 좌로 비스듬히 지나가며 정강이를 노리고 검을 날렸지만, 쿠샨 토르는 빠르게 몸을 틀어 회피에 성공했다. 나는 쉴 틈 없이 빠르게 발을 놀렸다. 그리고 양손의 검을 교차시킨 후, 이번에는 원을 그리듯이 거인의 뒤로 돌아가 발목을 노리려는 찰나였다. - 조심! 화정의 경고가 들려온 순간, 나는 곧바로 연타를 포기하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무언가 쇳덩이 같은 것이 정수리를 살짝 치고 지나갔다. 약간 스친 정도에 불과했으나 그 정도만 해도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아픔이 느껴졌다. 나는 입을 깨물며 그대로 앞쪽으로 몸을 내던졌다. 쿵! 곧이어 등 뒤로 전해져 오는 충격파. 몸이 살짝 뜨는 기분이 들었지만 아까처럼 황급한 기분이 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잔잔하다. 왜냐하면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지금도 그렇다. 방금 앞으로 굴러 피했다고는 하나, 쿠샨 토르는 내가 자세를 추스를 때까지 기다려줄 마음씨 좋은 녀석이 아니다. 아마 지금쯤 바로 나를 쫓아와 내려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칼리고 아브락사스의 잠재 능력. 부서진 파편(Broken Fragments)을 발동합니다.』 땅을 구른 후, 나는 바로 일어나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왼손에 쥔 칼리고 아브락서스를 있는 힘껏 투척했다. 키아아아아아아아! 칼리고 아브라삭스가 거친 울음을 토해내며 수직 상승한다. 뭉클뭉클한 검은 기운이 허공에 물감처럼 번졌다. 갑작스런 기습에 당황한 걸까? 역시나 바로 뒤에 서 있던 쿠샨 토르가 주춤, 몸을 멈칫한다. 그 순간이었다. 와장창! 쿠샨 토르에 닿기 직전, 칼리고 아브락사스가 거센 폭발을 일으켰다. 흡사 수류탄이 터졌을 때처럼, 산산조각 난 주먹만한 파편들이 거인을 목표로 전방위적으로 덮쳐 들어간다. 계속해서 몸을 물리는 와중에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크릉!” 쿠샨 토르가 순간적으로 묠니르를 앞세운 이후, 이어지는 광경에 나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퍼퍼퍼퍼퍼퍼퍼펑! 수십 개의 검은 조각들이 갑작스레 생겨난 바람에 종이처럼 나부낀다. 한껏 튕겨져 나간 파편이 공중에서 하릴없이 폭발한다. 이 순간만큼은 그저 놀랍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니, 나를 상대했던 마볼로가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어마어마한 반응 속도. 쿠샨 토르가 묠니르를 전광석화처럼 휘두르며 파편을 받아 치고 있다. 한 번 허공을 가를 때마다 매서운 폭풍이 휘몰아친다. 그 짧은 시간에 반응한 것도 놀랍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사방으로 흩어진 파편을 하나하나 보고 쳐낸다는 게 진정 놀라운 일이었다. 실로 엄청난 동체 시력이요, 솜씨였다. 그렇게 간단히 막히기는 했지만, 효과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애당초 투척한 이유가 잠시라도 좋으니 쿠샨 토르의 발을 묶어주기를 원했고, 칼리고 아브락사스는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물러나고 쿠샨 토르가 주춤하는 동안, 다른 사용자들 또한 이미 자세를 추스르고 기회를 포착한 상태였다. “천벌을 내리소서!” 광휘의 사제 권능 천벌. “극뇌!” 그리고 형의 잠재 능력인 극뇌. 이 두 능력이 만나자 무시무시한 시너지 효과가 일어났다. 하늘에서 추락하는 새하얀 번개가 송곳처럼 예리하게 모이더니 쿠샨 토르의 정수리를 그대로 관통한다! 짜작, 짜자작! “크허허헝!” 비로소 몸을 경직시킨 쿠샨 토르가 가열찬 비명을 내질렀다. 형의 마력 능력치는 97. 안솔의 마력 능력치는 99. 아무리 거인들의 제왕이라도 이 수치에 아무런 타격도 없을 리가 없다. 아니, 오히려 저렇게 합격을 맞고도 잠깐 움찔했다는 것 자체가 무시무시한 마법 저항력의 방증이리라. 그러나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선유운은 자신의 화살로는 거인의 방어력을 뚫을 수 없음을 확인, 집요하게 눈동자만을 노리며 쿠샨 토르가 자꾸만 눈을 깜빡이게 만들고 있었다. 고연주는 있는 대로 그림자를 끌어올려 거인의 사지를 묶고, 곳곳에 깔린 어둠에서 솟아나와 목 아니면 고환 부분을 돌아가며 공격하고 있다. 그러자 기겁한 거인이 목을 이리저리 돌리고 허벅지를 움츠린 사이, 이번에는 그 틈을 타서 공찬호가 허벅지를 목표로 끈질기게 창을 찔러간다. 다른 클랜원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형이나 공찬호나 기막힌 협동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들 1회전을 겪은 이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나름의 결론을 내린 것이다. 물론 쿠샨 토르 역시 이 정도에서 무너질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쿠오오오오오오오!” 1회전과 다르게 진행되는 양상에 화가 난 걸까? 갑작스레 전신에서 새하얀 빛을 뿜어내더니 왼손으로는 온몸을 훑어 내리며, 오른손으로는 묠니르를 미친 듯이 내려치기 시작했다. 몸을 감은 그림자를 우악스럽게 찢어발기고, 묠니르는 흡사 두더지를 잡듯이 땅을 세차게 파헤친다. 그러나 이미 어그로가 풀렸을 때부터 사용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진 상태였다. 이내 쿠샨 토르가 눈을 번쩍 빛내며 몸을 돌리고 물러나는 이들을 쫓으려 자세를 잡는 찰나, 나는 가볍게 호흡을 추스른 후 빅토리아의 영광을 왼손에 쥐었다. 그리고 나를 등진 거인의 등을 향해 최대한의 속도로 달려들었다. 그렇게 단숨에 등에 무검을 꽂으려는 시도를 했지만, 쿠샨 토르가 몸을 반쯤 비틂으로써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어서 빅토리아의 영광을 휘둘러 횡으로 베듯이 쳐봤으나, 그것 또한 왼팔에 가로막혔다. 막 사용자들을 향해 으르렁거리던 쿠샨 토르가 그제야 나를 되돌아본다. 그리고는 마치 귀찮다는 듯이, 나를 물러나게 만들 기세로 묠니르를 휘둘러왔다. 부웅! 커다란 망치가 빠른 속도로 가까워져 온다. 이 찰나의 순간, 여러 생각이 한 번에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쿠샨 토르가 아까처럼 전력을 다해 내리쳤다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을 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일격은 어디까지나 나를 물러나게 만들 요량으로 뿌린, 비교적 약한 아니 덜 강한 공격. 무슨 생각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아까 화정이 건넨 말이 마음에 걸린다. 그런 이상 놈의 의도대로 움직여줄 생각은 없어, 나는 곧바로 두 검을 교차시켰다. 그리고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마력을 힘차게 끌어올렸다. 이 정도면, 어떻게든 막을 수는…! 카앙! 그 순간, 엇갈린 검의 중앙 지점에서 격렬한 불꽃이 튀겼다. 동시에 양손이 저릿해질 정도의 충격이 느껴졌지만, 분명한 건 도로 튕겨 올라가는 묠니르가 보인다는 것. '성공…!' 카앙, 카앙! 버티는데 성공했다는 생각을 한 찰나, 연이은 두 번의 공격이 가열차게 엇갈린 지점을 타격한다. 한 번 막을 때마다 절로 혀를 깨물 정도의 충격이 전해졌으나, 그 두 번의 공격조차 나는 모조리 튕겨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는 와중 문득 웃음이 나왔다. 사용자 중 최강을 자처하던 내가 고작 공격 3번 막았다고 이러는 게 자못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카아아앙! 마침내 4번째 공격을 막아냈을 때, 칼을 쥔 감각을 일부 상실함과 동시에 더 이상의 연타가 이어지지 않았다. 슬쩍 시선을 올리자 묠니르가 중앙 지점을 맞춘 상태서 우뚝 멈춘 게 보였다. 그러더니 이대로 나를 눌러버리려는 듯 그대로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속절없이 팔이 굽혀지려는 순간. 『잠재 능력, 쓰러질 수 없는(Rank : A Plus Plus Plus)이 발동합니다.』 나는, 두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걸 느꼈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이. 쿠샨 토르의 묠니르를 붙잡은 순간이, 내가 그토록 바래왔던, 그려왔던 한 번의 기회였다. “끄으으으으으으으!” 짓눌린 신음을 지르면서도, 나는 지체 않고 마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사용자 정보나 장비는 물론, 이화접목이나 사량발천근 등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원리를 동원해, 쿠샨 토르의 묠니르를 막아내는 중앙 지점에 집중한다. 웅웅웅웅웅웅웅웅웅웅웅웅!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그러자 마력 회로가 거센 울음을 토하는 동시에, 주변의 지면이 모조리 들썩들썩 일어나며 사방으로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스스로 한 일이기는 하지만, 나는 속으로 크게 놀라고 말았다. 언제나 마를 일 없었던 마력이, 갑작스레 기하급수로 소모되며 서서히 말라가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더 이상 내려오지 못하게 하는 게 전부였지만, 적어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시시각각 회로가 녹아 내릴 것처럼 뜨거워지며 뜻 모를 신호를 보낸다. 아마 한순간에 이 정도로 마력을 사용하는 일은 앞으로도 어지간해서는 없을 것이다. 파츳! 파츠츠츳! 무검과 빅토리아의 영광에서 어마어마한 마력이 뿜어져 나오고, 마주친 묠니르도 강렬한 스파크를 쉴 새 없이 터뜨린다. 결국에는 이대로는 안되겠는지, 쿠샨 토르가 한 걸음 물러나며 묠니르를 거두려는 찰나였다. 그러나 쿠샨 토르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내가 전신전력을 다한 어빌리티가 묠니르를 붙잡아두고 있었으니까. “크릉?!” 깜짝 놀란 쿠샨 토르가 이번에는 양손으로 묠니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화정!”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내 발을 굴렀다. 그나마 남은 마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내면이 텅 비는 기분이 들었다. - 좋아! 화륵, 화르륵! 그 결과는 주변에 우수수 떠오른, 이글이글 타오르는 수십 개의 열화검으로 나타났다. - 간다! 화르르르르르르륵! 그렇게 수십 개의 열화검이 쿠샨 토르를 향해 뿜어져 나가는 동시에, 묠니르를 끌어당기던 마력이 뚝 끊기고 말았다. 그 찰나의 순간에도, 쿠샨 토르는 삽시간에 물러나며 방어 자세를 잡았다. 비록 마력은 느끼지 못하더라도, 반신이라면 화정의 힘을 기반으로 한 열화검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느꼈을 것이다. 물론 알고는 있다. 이 공격으로 부족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열화검만 날렸을 것이다. 아니, 애당초 열화검은 쿠샨 토르의 방어를 무너뜨리기 위한 1차 공격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나는 아직 중앙 지점에 모인 마력을 회수하는 대신, 다른 선택을 했다. 즉, 황급히 물러나는 쿠샨 토르를 향해. “흐읍!” 교차시킨 두 검을 굴리듯이 그어 내리며, 집중된 마력을 한꺼번에 발출시켰다. 콰콰콰콰콰콰콰콰! 회전이 가미된 마력은, 한순간 어마어마한 파동으로 변해 쿠샨 토르의 가슴을 향해 짓쳐 들었다. * 전쟁이 새로이 개시된 지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사용자들은 김유현의 지시에 따라 조를 이루어 움직였고, 거인들 또한 그에 맞춰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초원 곳곳에서 비명과 마법을 사용하는 소리가 들려오며, 중앙에서는 당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연신 심상찮은 진동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아직 제대로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여인이 한 명 있었다. “으으으! 어, 어떡하지?” 중앙에서 약간 후방으로 물러난 비비앙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현재 비비앙의 고민은 하나. 김수현의 임무를 제대로 해낼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홧김에 맡겠다고는 했지만, 아무리 고민해봐도 저 괴조 군단을 상대할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물론 아무 군단이나 소환해도 어느 정도 활약은 해주겠지만, 문제는 바로 괴조들의 비행 능력에 있다. 적어도 똑같이 비행 능력이 있는 군단이나 아니면 대응할 수 있는 군단을 소환해야 하는데, 마땅한 마수들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나마 비행 능력을 지닌 마수가 하위 군단에 편성돼있으니 소환해봤자였고, 대응 능력이 있는 상위 군단을 소환하자니 없다는 게 문제였다. 1, 2, 3군단은 현재로서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다. 4, 5군단은 강력하기는 하나 공중 괴물에는 대응 능력이 없는 군단들이다. 그리고 6군단은…. “어….” 그때, 발만 동동 구르던 비비앙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6군단. 그리고 66군단. 마수들에게 있어서 '6'이라는 숫자는 범상치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두 군단의 특징은, 6군단은 4, 5군단보다 더욱 강한 군단이며 66군단은 6군단보다 더 강한 군단이다. 다만 그냥 소환할 수 있는 게 아닌, 특정한 요소를 만족시켜야만이 소환할 수 있다는 조건이 있었다. “…좋아.” 이윽고 무언가 결정을 내렸는지, 비비앙의 두 눈이 결연한 빛을 띠었다. 어느새 오른손에는 질서의 오르도가 쥐어져 있었다. 비비앙으로서는 드물게도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 ────.” 폭음이 터지는 초원에, 비비앙이 주문을 영창 하는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 작품 후기 ============================ 자정 업데이트! 올레! 0631 / 0933 ---------------------------------------------- ShowDown. 누군가는 그럴지도 모른다. 고작 주문 하나 가지고 고민하고 있다고. 혹은 그게 그렇게도 어려운 일이냐고. 하지만 정작 당사자가 돼보면 전혀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이야 인간으로 돌아왔다고는 해도, 비비앙은 한때 이 능력을 얻으려 일생을 바친 여인이다. 그러할진대 아직도 모든 마수 군단을 소환하지 못한다. 비록 자세한 사정은 잠깐 넣어둔다 치더라도, 최소한 비비앙의 입장에서 상위 군단을 하나 소환한다는 의미는 절대로 가볍게 여길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 ────. ────. ────.” 비비앙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주문을 영창하고 있었다. 온몸에서 땀을 비오 듯이 흘리고, 꼭 감은 눈에서 뻗어 나온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심지어는 온몸마저 떨고 있는 중이었다. 예전 다른 군단을 소환할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비비앙의 등 뒤로 커다란 마법 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른 때보다 2배는 커 보이는 마법 진이었다. 온갖 형이상학적인 문양이 그려진 마법 진이 곧 느릿하게나마 핑그르르 오른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동시에 질서의 오르도가 잠시 빛을 잃었다가, 도로 빛이 차오르는 모습을 보였다. 마력 충전 시 일어나는 현상. 말인즉, 비비앙의 주문이 이제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소리였다. 마법 진이 돌아가는 속도가 가일층 빨라진다. 이내 주문을 마친 비비앙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하나 꺼내 들었다. 심장처럼 보이는 물건이다. 일순 얼굴에 아깝다는 빛이 스쳤지만, 곧 표독스러운 표정은 지은 비비앙은 심장을 마법 진에 던져 넣었다. 신기하게도, 심장은 마법 진에 닿은 순간 믹서기에 갈아버린 것처럼 분해돼버렸다. “오라!” 마침내, 비비앙이 질서의 오르도를 번쩍 들며 외쳤다. 그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초원에서는 여전히 전쟁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오라!” 한 번 더 외쳤지만, 결과는 똑같다. 적어도 이쯤 되면 모종의 반응이라도 느껴져야 한다. 하지만 그저 마법 진만 빙글빙글 돌고 있을 뿐, 그 어떤 마력의 흐름도 잡히지 않는다. 비비앙이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오라, 오라, 오라, 오라! 오라오라오라오라! 아 쫌 오라고! 이 나쁜 자식아!” 그런다고 올리는 만무하나, 연신 오라를 외치는 비비앙의 목소리가 어느새 서서히 울먹이고 있었다. 마수 군단을 소환하는데 우선적으로 필요한 요소는 3가지. 정확한 소환 술식, 충분한 마력,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의지. 나머지는 모두 마수의 의지에 달려 있다. 마수가 소환에 응해 마법 진에 반응한 순간, 비로소 첫 계약을 맺게 되는 것이다. 사실 비비앙도 어떤 부분이 잘못됐는지는 모른다. 반쯤은 도박한다는 기분으로 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실패해버리면, 스스로 소환할 수 있는 군단에 한계를 그어버리는 것과 다름없는 일. 그렇기에 비비앙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질서의 오르도가, 돌연히 내려와 초원의 흙 바닥을 향한다. “오라! 네비로스! 제 6군단을 지배하는, 시체와 사령을 관장하는 불멸의 왕이여!” 그리고 비비앙이 목이 터져라 외친다. “나는, 아직 너희가 쓰러지는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평소와는 조금 다른 영창이 추가된 순간이었다. 끼이이이이이이잉! 느닷없이 마법 진에서 불쾌한 소음이 새어 나오더니. - 끼히히히히히히히…. 불현듯 어디선가 섬뜩한 웃음소리가 홀연히 흘러나온다. 비비앙의 눈이 크게 떠졌다. 드디어 6군단을 관장하는 불멸의 왕이 소환에 응한 것이다. “어, 어디? 어디어디?” 비비앙이 빠르게 고개를 돌려 마법 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 없이 전과 같이 돌고만 있는 마법 진. 그때였다. 화아아아아아아악! 갑자기 전역을 덮을 정도의 어둠이 덮쳐옴에, 비비앙이 엉겁결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살그머니 눈을 도로 뜰 무렵. - 쿠우우우…. - 우우우우…. - 기우우우…. 서로 다른 세 종류의 울음이 초원 곳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한창 격전이 벌어지는 전장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죽었던 거인이 몸을 일으키고, 죽었던 사용자가 깨어나며, 죽었던 괴조가 날갯짓을 보인다. 단 하나도 예외 없이 깨어나 심상찮은 기운을 피어 올린다. 그 수는 거인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건….” 비비앙이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랬다. 제 6군단, 시체와 사령을 지배하는 네비로스. 거인이든, 사용자든, 괴조든. 분명 한 번 사망한 이들이었으나, 네비로스의 권능을 부여 받고 되살아나 다시 한 번 전장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이전과는 다른, 특별한 능력을 하나 부여 받고서. 그 능력이란, 다름 아닌 날개 소환. 파악! 주섬주섬 일어난 목 없는 거인의 등에서, 시커멓고 커다란 날개가 살을 찢고 모습을 드러내었다. * 화정이 신호한 순간, 공중에 떠오른 수십 개의 열화검이 일제히 쿠샨 토르를 향해 쇄도했다. 한 박자 늦게 발출한 파동은, 허공을 가르며 열화검을 잇따르듯이 짓쳐 들었다. 주변의 마력이 미친 듯이 요동친다. 두 어빌리티가 내뿜는 빛무리는 잠시나마 초원의 어둠을 몰아내고 시야를 환하게 만들 정도였다. 이윽고 열화검들이 황급히 물러나는 쿠샨 토르를 금세 따라잡고서 상반신에 폭격을 퍼붓는다. 펑펑펑펑펑펑펑펑! 폭음과 함께 들려오는 가열차기 짝이 없는 타격음. 한 발 한 발이 꽂힐 때마다 쿠샨 토르의 상체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몸은 연신 뒤로 밀려난다. 허나 그러한 와중에도 거인은 여전히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자 잇따라 들어간 파동이 흔들리는 쿠샨 토르의 가슴 정중앙을 직격했다. 꽈앙! “크르르륵!” 그제야 헛바람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간신히 버티는 것 같던 쿠샨 토르의 몸이 한순간 크게 휘청거린다. 이내 그대로 몸이 무너져 내리는가 싶었으나, 거인은 안간힘을 쓰며 넘어가려는 상체를 도로 기울였다. 쿵! 그렇게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던 쿠샨 토르가 결국에는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말았다. 하지만 구부린 무릎이 바닥에 닿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무릎만은 꿇을 수 없다는 듯 절반 정도 접힌 상태에서 버티고 있었으니까. 쿠샨 토르와 일전을 벌인 주변 지역은 어디 한 군데 성한 곳이 없다. 흡사 지진 혹은 융단 폭격이라도 맞은 듯한 모양새. 그러나 쿠샨 토르의 몸은 더욱 처참하다. 1차로 들어간 열화검 무리는 거인의 몸 곳곳을 뚫고 들어가 상처를 남겼고, 지금도 이글이글 타들어 가며 지속적인 피해를 주고 있다. 파동에 직격당한 가슴은 아예 흉하게 일그러진 상태였다. 자상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상체를 흠뻑 적시기 시작한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샨 토르는 아직도 무너지지 않았다. 비록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졌을지언정, 한쪽 무릎을 구부렸을지언정, 여전히 두 발로 버티고 선 채 여전히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이 공격조차도 버텨내는가.'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차분히 숨을 가다듬었다. 한순간 마력을 거진 사용해 회로가 불안정해진 게 느껴졌지만, 심장에 각인된 고대 무녀의 문신이 흐름을 안정시켜주고 있다. 그런 만큼 지금은 어설프게 행동하기 보다는, 3회전을 대비해 호흡을 추스르고 마력을 모아야 한다. 그러는 사이, 쿠샨 토르도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한 움직임으로 우리와의 거리를 한껏 벌렸다. 그렇게 2회전이 끝났다 여겼을 때였다. “크르르릉!” 별안간 구부려졌던 다리 하나가 똑바로 세워졌다. 그리고 쿠샨 토르가 묠니르를 쥔 손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문득 나를 노려보는 두 눈이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한 안광을 발했다. 쿠르르릉, 쿠르르릉! 파츠츠츠츠츠츠츳! 그때, 갑작스레 고막을 아릿하게 울려오는 우레와 방전음. 소리의 근원으로 시선을 들어올리자, 묠니르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푸르스름한 빛깔의 번갯불이 눈에 들어왔다. 시퍼런 불똥이 사방으로 튀기며 허공에 춤추듯이 흩뿌려진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변화가 시작되었다. 묠니르가 변한다. 묠니르가 변하고 있다. 그저 커다란 망치에 불과했던 묠니르가, 미친 듯한 전광을 일으키며 서서히 형체를 변화시키고 있다. 그것을 도대체 무어라 형용해야 할까? 색이 푸르스름하게 변하고, 전신이 지그재그로 비틀리고, 점차 크기와 두께를 키워나간다. 종래에는 흡사 거대한 번개와 같은 모양새로 변해나간다. 그래, 번개. 어느새 쿠샨 토르는 형상화된 번개를 하나 손에 쥐고 있었다. 아니, 중요한 건 모양이 아니다. 파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하나의 번개로 화한 묠니르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흐르는 공기를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주변 공간을 우그러뜨리며,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기세를 방출한다. 흡사 폭풍이 강림한 것처럼, 무시무시한 바람이 팽이처럼 회전하며 지상마저 깡그리 뒤엎어버렸다. 쿠르르르르르르릉! 두두두두두두두두! 하늘이 갈라지고, 대지가 일어난다. 빛의 기둥이 강림한다. 동시에, 기둥을 받은 쿠샨 토르의 온몸이 찬란한 빛무리를 뿌려내기 시작했다. 눈부실 정도의 찬연한 빛깔. 그 빛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뜻 모를 압력이 느껴졌다. 사방으로 퍼지는 신성한 기운. 그 기운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감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리저리 휘날려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걷어내며,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치뜨며, 나는 억지로 정면을 응시했다. 문득 쿠샨 토르의 허리가 꼿꼿해진다. 약간 웅크렸던 상처 입은 가슴을 똑바로 핀다. 가슴과 어깨가 일직선을 그린다. 그렇게 오연히 머리를 젖힌 거인들의 제왕이, 하늘을 바라보며 거칠게 포효한다. “Ego Sum Dominus Gigantum, Kuschani Thorrrrr!” 이윽고 하나의 선언처럼 들려오는 천둥과도 같은 울부짖음이, 창공을 떠르르르 뒤흔들며 초원 전역을 떨쳐 울린다. 그리고 그 순간. - Ohhhhh, Domine Deus Noster! Kuschani Thorrrrr! - Ohhhhh, Domine Deus Noster! Kuschani Thorrrrr! - Ohhhhh, Domine Deus Noster! Kuschani Thorrrrr! - Ohhhhh, Domine Deus Noster! Kuschani Thorrrrr! 나는, 비로소 진정한 반신(DemiGod)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귓전을 울려오는 음성들은 메아리 따위가 아니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나,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쿠샨 토르의 포효를 들은 거인들의 함성, 아니 환희였다. 우리가 최강이라는, 패배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제왕의 외침에 거인들이 일제히 소리 높여 환호한 것이다. 마치 승리를 노래하는 듯한 함성이 멀리멀리 퍼져나가, 초원의 전장을 가득히 메운다. 빠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묠니르도 그 환호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한층 가열찬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쿠샨 토르가 마침내 오른팔을 한껏 뒤로 젖혔다. 그리고. “Mjolnirrrrrr!” 쿠샨 토르의 우레와 같은 외침과 함께, 번개가 허공을 갈랐다. 투척된 묠니르가 푸르스름한 빛을 분사하며, 모든 것을 찢어발길 듯한 번갯불을 튀기며, 일직선으로 내리 꽂히듯이 하강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를 노리고 들어오던 번개가 갑작스러운 궤도 변화를 보였다. 그리고 내가 아닌, 머리 위를 한참이나 지나쳐 기다란 잔상을 남기며 후방으로 넘어간다. 거의 동시에, 쿠샨 토르가 힘껏 땅을 박차 하늘 높이 도약한다. 그 행동이 무어라 생각하기도 전. '그러니까 저놈의 목적이 네가 아니라는 소리야.' 문득, 화정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쿠샨 토르를 따라 허공으로 솟구치고 말았다. 왠지 모르게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 작품 후기 ============================ 오늘도 자정 업데이트에 성공했네요. 기분이 정말 좋아요. :D 거인들의 파트도 이제 슬슬 끝이 보이는 군요. 보자~. 으악, 이놈, 쩌정, 갸웃, 꺄악, 우엉.(각 단어는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제가 임의로 압축한 단어임을 알려드립니다. 후후.) 아마 2회~3회안으로 끝날 것 같습니다. 거인들과 사용자들의 전투는 쿠샨 토르와의 전투처럼 몇 회를 소비할 생각은 없거든요. :) 0632 / 0933 ---------------------------------------------- ShowDown. 6군단. 시체와 사령을 관장하는, 불멸의 왕 네비로스. 기원은 네크로맨서(Necromancer)에 두고 있지만, 본 역할은 지옥의 전체를 감시하며 또한 모든 장소에 날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겉으로는 군단 없이 홀로 다니는 마수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네비로스가 가진 언데드 능력은 전장에서 적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능력이다. 사망한 시체를 되살리는 것은 물론, 생전의 능력을 8할 이상으로 발휘할 수 있게 해주며, 되살아난 시체는 네비로스의 권능으로 인해 비행 능력을 부여 받는다. 말인즉 그저 그런 시체 군단이 아닌 공중전이 가능한, 엄청난 기동성을 지닌 군단이 새롭게 탄생되는 것이다. 펄럭, 펄럭, 펄럭, 펄럭…. 등을 찢고 돋아난 날개가 움직인다. 한 번 사망했던 거인들이, 사용자들이, 괴조들이 각자의 날개를 움직이며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른다. 이미 공중을 선회하던 괴조들도 그 광경을 확인하고서는 혼란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냥 사용자만 있다면 모를까, 동족인 괴조들과 아군으로 돌아선 거인들까지 올라오니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흑!” 지상에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비비앙이 자그맣게 눈물을 터뜨렸다. 눈에 눈물이 넘칠 듯이 그득하게 고였으나 닦을 생각도 못했다. 슬픔이 아닌 기쁨의 눈물이었다. 비록 군단장을 소환하지 못한 절반의 성취에 불과하나, 어쨌든 소환에는 성공했다. 질서의 오르도를 얻은 이후, 오랫동안 정체됐던 경지를 진일보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제 시작이라고 봐도 옳을지 모른다. 마수 군단을 소환했다고 끝난 게 아니니까. 이윽고 주먹 쥔 손으로 눈을 쓱쓱 닦은 비비앙이 허공을 향해 있는 힘껏 외쳤다. “가라! 전략이고 전술이고 필요 없어! 그냥 마구잡이로 밀어붙여 버려! 나한테 너희의 힘을 보여 달란 말이야!” 공중 난전 유도. 숫자에서 꿇리지 않는 만큼, 아니 근소하게나마 압도하는 만큼 김수현이 내린 임무를 이행하는 데는 이보다 좋은 계책이 없다. 한 번 소환에 응한 이상 소환사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비비앙의 말이 떨어진 순간, 허공에 둥둥 떠 있던 날개 달린 시체들은 지체 않고 명령을 이행했다. 말 그대로 사 방향에서, 한쪽에 모인 괴조 무리를 향해 마구잡이로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 끼루루룩? 괴조들도 곧바로 반응했다. 마주 대응하는 게 아닌, 일단 후퇴하는 것으로. 아직 혼란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달려드니 제대로 대응할 틈이 없었다. “우헤헤헤헤헤헤헤.” 이내 지리멸렬 흩어지는 괴조 무리를 보며 비비앙이 웃어 젖혔다. 눈은 여전히 글썽글썽했지만 웃음소리는 방정맞기 그지없다. 실패의 걱정이 사라지자 원래 성격이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비비앙은 알고 있을까?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사실을. 괴조들 중에서도 수백 년에 걸쳐 지능을 발달시킨 조류가 있다는 사실을. 시체들에 밀려 날아오르는 와중에도 주변을 면밀히 살피는 한 괴조가 있었다. - 크르르르….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덩실덩실 흥겨워하는 비비앙을 발견한 순간, 수많은 괴조들 중에 오직 홀로 푸른빛을 띤 괴조가 나직이 울어 젖혔다. 잠시 후. 펄럭, 펄럭! 괴조들의 우두머리가 힘찬 날갯짓을 했다. 한편, 같은 시각. “막아, 막아아아!” “────. ────. 보호!” “아니! 도망쳐!” “마법사들은 어떻게 된 거야?” 초원 곳곳에서는 한창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니. 난장판이라고 해야 맞을까?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힘을 보이며 진군하는 거인들. 어떻게든 진군을 막으려 악을 쓰는 사용자들. 상황은 사용자들에게 극히 불리했다. 아무리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고는 해도, 상대는 더욱 압도적인 힘을 가진 존재였다. 육중한 발에 찍힌 사용자들은 온몸이 터져나가며 찌그러지고, 거대한 팔에 쓸린 사용자들은 홈런성 타구처럼 허공으로 쭉쭉 뻗어나간다. 사용자들도 온갖 방법을 동원해 필사적으로 분투하고는 있었으나, 뛰어난 사용자들이 포함된 소수의 조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조가 속절없이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는 중이었다. 물론 이와 달리, 아주 손쉽게 거인들을 처리해나가는 조도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딱, 한 조가 있었다. “흐응….” 제갈 해솔, 아니 표혜미의 모습을 한 제갈 해솔이 때 아닌 야릇한 신음을 흘렸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가녀린 검지로 턱을 톡톡 두드리며 동료들이 거인과 싸우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아마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혀를 찰지도 모른다. 동료들은 죽어라 싸우고 있는데 혼자서 태평하게 구경하고 있다고. 그러나 제갈 해솔이 눈이 황금빛을 빛내고 있는 걸 본다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심원(心源)해 보이는 눈으로 거인을 관찰하는걸 본다면, 아까의 생각은 아직 시기상조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좋아! 이제 알겠네.” 그 순간 여유롭게 거인을 구경하던 제갈 해솔이 돌연 예쁘게 웃으며 짝 소리가 나도록 박수를 쳤다. 동시에 눈에서 뿜어지던 황금빛이 툭 꺼졌다. “어쩜, 신체 구조가 인간이랑 완전히 똑같구나? 신기하기도 해라.” 그리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별안간 양손을 둥그렇게 모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생글생글하던 제갈 해솔의 낯이, 처음으로 진지한 빛을 띠었다. 이전의 상큼하고 발랄한 분위기가 아닌, 마치 김수현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신비롭고 고요한 분위기가 제갈 해솔을 감싸기 시작한다. 우웅! 이윽고 둥글게 모은 손아귀 중앙에서 갑자기 밝은 빛을 띠는 구체가 생성됐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덩어리였다. 제갈 해솔이 계속해서 마력을 흘려 넣는지 시시각각 구체의 크기가 커져만 간다. 그때였다. 문득 쓰다듬듯이 한쪽 손을 움직이자, 계속해서 커져만 가던 마력의 덩어리의 크기가 삽시간에 줄어들었다. 물론 지속적으로 마력을 흘려 넣음에 구체는 재차 덩어리를 키웠지만, 그럴 때마다 제갈 해솔이 손을 움직여 도로 작아지게 만들었다. 그런 과정을 열댓 번 반복하고, 구체의 크기도 좁쌀만 해졌을 무렵. 비로소 제갈 해솔이 고개를 들어 가는 한숨을 흘렸다. 어느새 땀이 밴 머리카락이 흰 볼에 착 달라붙어 있다.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뽀얀 치아가 드러난다. “이름은 강화 익스플로전(Reinforcement Explosion)…. 정도면 적당하려나?” 잠시 후, 제갈 해솔의 시선이 한창 전투가 이어지는 전방을 응시했다. 그리고 쌀알만 한 구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는, 입술을 오므려 가벼운 바람을 불었다. “후….” 그러자 손바닥을 떠나 너울너울 기묘한 호선을 그리며 날아간 구체가, 거인의 귓구멍 속으로 쏙 들어갔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걸까? 막 주먹을 내리치려고 했는지 한껏 팔을 젖힌 거인이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머리를 갸웃한 순간이었다. 딱! 손을 튕기는 소리와 동시에. 꽝! 결코 얕볼 수 없는 폭음이 거인의 몸, 정확히는 귓속에서 울렸다. “크아아악!” 거인의 비명이 이어졌다. 상당히 고통스러운지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더니 느닷없이 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갈 해솔의 마력 능력치는 95포인트. 거인의 마법 저항력이 되살아나기는 했지만, 95라는 수치는 아주 타격을 주지 못하는 정도는 아니다. 거기다 마력을 꾹꾹 눌러 담은 덩어리를 몸 내부에서 터뜨렸으니 어느 정도 피해를 입어야 정상. 물론, 그렇다고 한 방에 죽을 정도도 아니지만. 확실히 거인은 죽지 않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행동은 모두에게 의아함을 가져다주었다. 고통에 주춤주춤 물러나는 와중에 몸의 흔들림이 점차 심해지더니, 종래에는 발을 헛디뎌 쿵 소리를 내며 쓰러진 것이다. 마치 균형 감각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의아함은 잠시. “아직 죽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어서어서!” 제갈 해솔이 양손을 입에 모아 소리 지르자, 멍하니 거인을 바라보던 머셔너리 클랜원들이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면에 쓰러진 이상, 거인의 죽음은 시간 문제나 다름없었다. 곧 득달같이 달려가는 이유정을 보는 제갈 해솔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지어지려는 찰나, 누군가 옆으로 스리슬쩍 다가왔다. “어떻게 한 거야?” 제갈 해솔이 흠칫했다. 그러나 같은 마법사인 원혜수임을 확인하고는 빙긋 웃어보였다. “아아, 별거 아녜요. 보니까 인간이랑 신체 구조가 비슷한 것 같아서요. 그래서 반고리관이랑 전정 기관을 건드렸지요.” “반…. 뭐?” 원혜수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자 제갈 해솔이 킥킥 소리 죽여 웃었다. “기울기랑 회전 감각을 망가뜨렸다는 소리에요. 귓속으로 압축한 마력 구체를 밀어 넣고 빵~! 터뜨린 거죠.” “거인의 마법 저항력은?” “그래서 압축한 거예요. 사실 아예 죽일 작정으로 15번이나 압축시켰는데, 그래도 버티네요. 크기 줄이는데 약간 힘들었는데. 어쨌든 확실히 저항력이 장난 아닌 것 같아요.” “1, 15번?” 15번 압축했다는 말을 들은 순간, 아니 정확히는 그러면서 크기를 줄였다는 사실에 원혜수가 기함했다. “어, 어떻게 했는데? 나도 가르쳐줘.” “네?” “혜미야. 그러지 말고 대충 요령이라도. 지금 상황이 급하잖아. 나중에 사례할게.” “아니, 아니요. 가르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냥 되던데요? 이게 왜 안 돼요? 언니는 못해요?” 제갈 해솔은 오히려 왜 안 되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러나 원혜수가 얼굴을 찌푸리자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는 천연덕스레 말을 이으려는 찰나였다. 갑작스레 원혜수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지고, 시선이 자신의 어깨 너머를 향하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제갈 해솔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저공으로 비행하는 거대한 괴조였다. 그리고 괴조의 앞쪽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양팔을 활짝 벌린 채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쳐오는 여인이 보였다. “꺄아악! 꺄아아악! 꺄아아아악!” 모두의 귓전을 울려오는 낭랑한 비명. 비비앙이었다. * 그것은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번개로 화한 묠니르는 이미 나를 지나쳤다. 쿠샨 토르의 몸이 허공으로 도약했다. 거인을 따라, 반사적으로 있는 힘껏 땅을 박찼다. 이 모든 게, 정말로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동시에, 쿠샨 토르를 담은 시야가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저속도 촬영을 하는 것처럼,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느릿하게 흘러간다. 사용자들은 전투 시 어지간해서는 공중으로 떠오르지 않는다. 허공에서는 회피 동작이 상당 부분 제한돼버리기 때문이다. 나처럼 이형환위나 허공을 박차는 능력이 없는 이상, 죽기 딱 좋은 행동이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공으로 도약했다는 건, 일반적으로 3가지 의미를 지닌다. 회피하겠다는 것. 상대를 얕보고 있다는 것. 상대와의 거리를 단번에 줄이겠다는 것. 화정의 말과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쿠샨 토르의 목적은 아마 3번째. 그래서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해 똑같이 뛰어오른 것이다. 목적을 간파한 이상, 막아야 하니까. 시시각각 다가오는 쿠샨 토르의 모습을 주시하며 나는 두 검을 교차시켰다. 늦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비록 묠니르를 놓치기는 했지만 백한결과 안솔의 방어 능력이면 최소한 목숨은 잃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나뿐만이 아닌, 공찬호도 건너편에서 뛰어오른 상태였다. 여기서 내 생각이 빗나가지 않는다면 쿠샨 토르는 분명히 중간에 궤도를 비틀 것이다. 그나마 최소한의 회피도 하지 않고 계속 도약의 목적을 고수한다면, 분명히 두 개의 치명타를 먹일 수 있다. 그래. 그걸 아는 쿠샨 토르라면 분명히 묠니르를 던진 것에서 만족하고, 나와 공찬호의 공격을 방어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칼자루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화정도 내 마음을 알았는지 묵묵히 칼날에 힘을 흘려준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쿠샨 토르와의 거리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서걱! 칼끝에서 전해져오는 어깨의 살을 잘라 들어가는 감촉. 허공으로 비산하는 핏줄기. “어…?” 분사하는 핏방울 사이로, 그 어느 때보다 진한 안광을 흘리는, 피눈물을 흘리는 쿠샨 토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쿠샨 토르에게 치명타를 먹였다. 아니. 치명타'는' 먹였다. 쿠샨 토르가 치명타를 허용하고, 자신의 도약한 목적을 고수했다. 그대로 나를 지나친 쿠샨 토르의 몸이, 묠니르를 잇따라 들어간다. 그렇게 하릴없이 지상에 착지한, 그 찰나의 순간. 느릿하게 돌아가던 시야가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거의 동시에, 묠니르가 폭발하는 하늘을 찢을 듯한 굉음이 귓전을 울려온다. 챙그랑! “안 돼!” 이어서 들려오는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 안솔의 찢어질 듯한 비명. 쿵! 그리고 쿠샨 토르의 착지로 예측되는, 지면을 디딘 발에서 전해지는 진동. 나는 그저 망연한 기분으로 몸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강하로 인한 충격의 여파 때문인지, 등 뒤는 이미 자욱한 흙 연기가 일어나 있었다. 그 탓에 거의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단 하나. 흙먼지를 뚫고 힘없는 모양새로 솟구치는, 펄럭거리는 로브 사이로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오는 한 사용자만이 오직 눈에 들어왔을 뿐.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 머리가 바람에 휘날린다. 새하얀 로브가 줄기줄기 솟구치는 핏물에 흠뻑 적셔진다. 나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지금 허공에 떠오른 사용자가 안솔이라는 사실을. 그 순간. “씨발…. 새끼가….” 눈에서 불꽃이 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아, 죄송합니다. 오늘 정말 많이 늦었네요. 요즘 페이스가 좋다 싶었는데, 이러니까 도로아미타불이 된 기분입니다. ㅜ.ㅠ 사실 더 일찍 올릴 수는 있었는데, 집필 중간에 배탈이 났습니다. 왜 배탈이 났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아무래도 저녁이 문제였던 것 같아요. 오늘 오후 약속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너무 배가 고팠거든요. 어차피 집에 들어가 봤자 아무도 없을 것 같고…. 그래서 제가 정말 좋아하는 치즈 라볶이라도 한 그릇 사먹자는 생각에 분식집에 들렀는데, 아마 그게 탈이 난 것 같습니다. 새벽에 한 스무 번은 화장실을 들락날락했던 것 같아요. -_-a 앞으로는 조금 더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_(__)_ 그리고 계산해봤는데, 거인 파트는 다음 회에서 종결될 것 같습니다. 원래는 2회 정도 남았다 싶었는데, 1회 안으로 종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껏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부디 빵빵한 보상을 기대해주세요! '- ^* 0633 / 0933 ---------------------------------------------- 낯 뜨거운 전조(?). 『필요할 때를 위한 작은 행운을!』 안솔이 기적을 사용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떠오른 하나의 메시지. 안솔은…. 사실 미약하게나마 느꼈는지도 모른다. 쿠샨 토르가 묠니르의 번개를 소환할 때부터 누군가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피하지 않은 건, 그 사실이 미미한 감에 불과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왠지 자신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도 아니었다. 묠니르가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궤도를 틀어서도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큰 이유는…. “디펜시브 매트릭스(Defensive Matrix)!” “안젤루스여! 우리를 보호하소서!” 푸른빛을 뿌리는 번개가 한순간 김수현을 지나쳐 쇄도해올 때, 곧장 앞으로 나선 한 사용자 때문이라 볼 수 있었다. 뇌제(雷帝) 김유현. 어쩌면. 백한결과 안솔이 한 발 앞서 가로막는 동안, 적어도 김유현은 피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아마 김유현도 쿠샨 토르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기에, 오늘만 무려 3번째로 뇌신의 힘을 발동한 채 방어막 선두로 걸어간 것이다. 반신의 전력이 담긴 묠니르의 번개는 김수현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힘을 품고 있었다. 백한결과 안솔이 펼친 두 개의 방어막은 압도적인 힘 앞에서 종잇장처럼 찢겨버렸다. 결과적으로 힘을 약화시키는데 그쳤을 뿐, 짓쳐 들어오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바로 거기서, 김유현이 나섰다. 비록 방어막으로 힘을 떨어트렸다고는 하나 근소한 정도에 불과했다. 묠니르의 번개는 여전히 주변을 모조리 날려버릴 정도의 위력을 보이며 밀려들어 오고 있었고, 그에 반해 김유현의 뇌신은 처음 위력의 절반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럼에도 김유현은 피하지 않았다. 여기서 물러나버리면 백한결과 안솔이 위험해지는 건 당연지사. 기억하기로는 두 명 모두 김수현이 끔찍이도 아끼는 사용자였다. 그런 만큼 동생이 슬퍼하는 얼굴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시작된 뇌(雷)와 뇌(雷)의 대결. 콰콰콰콰! 비록 100%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확실히 뇌신의 힘은 녹록하지 않았다. 김유현의 두 손에서 뿜어지는 노란 전광은, 지상을 시꺼멓게 태우며 달려드는 묠니르의 번개를 한순간이나마 정면에서 막아내고 있었다. 황금빛 전류와 푸른빛 전류가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물고 물리는 접전을 펼치는 광경은, 장관이라 봐도 좋을 정도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다. 적어도 안솔의 눈에 비친 광경은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눈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겪는 것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직접 마주한 김유현은 극심한 차이를 느끼고 있었다. 그 차이는 곧 결과로 나타났다. 김유현이 묠니르의 번개를 가로막은 것은 단 3초에 불과했다. 3초의 다음, 돌연 커다란 방전 현상이 발생했다. 푸른 번개가 무시무시한 불꽃을 튀기며 뇌신의 힘을 불살라버렸다. 그리고 마치 이대로 먹어 치워버리겠다는 듯이 서서히 전진해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김유현은 본능적으로 옆으로 한 걸음 움직였다. 피하려는 게 아니었다. 막아내는데 실패했으니 궤도라도 비틀어 지면으로 흘려내려는 것이다. 물론 그래도 심한 타격은 피할 수 없겠지만, 어떻게든 목숨이라도 건질 생각이었다. 최소한 이대로 직격당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한 찰나. 부웅. 한 걸음 옆으로 옮긴 지점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허공을 건너온 쿠샨 토르가 나타났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상태에서도 작열하는 안광은 아래를 똑똑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절대로 살려두지 않겠다는 듯 오른팔을 힘차게 휘두르며 강하한다. 그것을 김유현은 모르고 있었다. 오직 묠니르의 번개를 비틀어버리는데 전신전력은 물론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볼 수 있는 사용자가 있다면 두 명. 앞서 튕겨 나간 백한결과 안솔, 그중에서도 안솔은 확실하게 보고 있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을. 사선으로 떨어지는 솥뚜껑만한 주먹을. 몇 초 후에 일어날 누군가의 죽음을. 그 순간이었다. “안 돼!” 입술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자동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아직 반발력의 여파에 괴로워하면서도 안솔은 달려가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머릿속에 죽음이라는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살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딱히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굳이 이유를 대보라고 한다면, 김유현과 똑같은 이유라 볼 수 있다. 안솔도 김수현이 얼마나 자신의 형을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오라버니가 슬퍼하는 얼굴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 이 모든 건, 바로 김수현을 위해. 잠시 후. 간신히 궤도를 비틀어낸 순간 안솔이 김유현을 있는 힘껏 부딪쳐 밀어냈다. 김유현의 몸이 밀려나고 안솔이 그 자리에 대신해 들어갔다. 지면을 파고들어간 묠니르가 초신성 폭발을 일으키고, 안솔의 갈비뼈에 쿠샨 토르의 주먹이 틀어박힌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후로 안솔은 그 어떤 것도 느끼지 못했다. 잠깐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시야에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는 밤하늘만이 들어올 뿐. “으아아아!” 이윽고 김수현의 고함이 들려오는걸 마지막으로, 안솔은 그대로 까무러치고 말았다. *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괴성을 지르며 돌진해 마구잡이로 검을 날렸다. 그러나 오른쪽으로 몸을 돌린 것도 잠시. 쿠샨 토르는 바로 묠니르를 잡아채더니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고 나와의 거리를 벌렸다. 여전히 오른 방향을 바라보는 얼굴에는 아쉽다는 기색이 강하게 풍겨왔지만, 거인의 선택은 지독하다 생각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검은 하릴없이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이대로 놓칠 수는 없다. 어떻게든 저놈을 죽여 버려야 이 끓어오르는 머리를 식힐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여 곧바로 쫓아가려는 찰나. - 진정해! 화정의 애달픈 외침이 내 행동에 제지를 걸었다. '뭐라고?' - 진정하라고! 지금 뭐하는 거야? 혼자 열 받아서는! '너 지금….' - 너야말로, 이 정도밖에 안 돼? '…….' - 그래. 네 동료가 당했어. 그랬다고 이성을 잃고 폭주하면 끝이야? 방금 저놈 행동 안 봤어? 반신이 그렇게 만만해 보여? 다른 말은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말만큼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 네가 지금 본능에 이끌려버리면, 그게 바로 저놈이 원하는 거라고! 그 순간 부글거리던 머릿속으로 한 줄기 차가운 이성이 찾아 들었다. 이어서 허공에 심안의 발동이 실패했다는 메시지가 눈에 밟혔다. “…후.” 나는 반사적으로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제야 심안이 정상적으로 발동됐다는 메시지를 확인한 후, 멀찍이 물러난 쿠샨 토르를 지그시 응시했다. 거인도 나를 마주보며 노려보는 눈초리를 빛내고 있었다. 그래, 이제 좀 괜찮아진 것 같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선유운.” “예!” “3명의 상태는?” “…….” 선유운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나 곧 등 뒤를 분주히 돌아다니는 소리와 약하게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가 차례대로 들려왔다. “…3명 모두 숨은 붙어있습니다.” 일단, 숨은 붙어있다라. “하지만 안솔의 상태가 굉장히 심각하며, 또…. 어, 어?” 그때였다. 어둡게 말을 잇던 선유운이 갑작스레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이어서 후방으로 약한 침음이 들려오더니 누군가 내게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발소리만 들으면 정상이라 착각할 정도였다. 이윽고 누군가 내 어깨를 턱 짚음과 동시에. “수현아.” 문득 형이 옆으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흘끗 시선을 돌렸다가 형을 보고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에서 피를 흘리는 형의 모습이 가히 혈인을 연상케 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형….” “괜찮다.” 그러나 무어라 말하기 직전 형이 말을 도중에 끊어버렸다. 사실 하나도 괜찮아 보이지 않다. 허나 분명 그렇게 보임에도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순간적으로 지금 형에게서 1회 차 때 형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 형의 눈은 나를 보고 있지 않다. 핏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와중에도 두 눈을 형형히 빛내며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단호한 결심을 내린 것처럼. 나는 이를 세게 깨물었다. 그리고 외쳤다. “선유운, 고연주! 지금 당장 각각 안솔과 백한결을 데리고 전장을 이탈합니다!” 전장 이탈 명령.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전까지 주변에서 느껴지던 두 개의 기척이, 곧 다른 두 기척과 서서히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얼마나 상태가 심각한지는 모른다. 그러나 숨이 붙어있다면 살릴 수 있다. 이로써 남은 인원은 3명. 나와 형, 그리고 공찬호. …과연 이 인원 가지고 이길 수 있을까? - 이길 수 있어. 그때, 내 생각을 읽었는지 화정이 말했다. '이길 수 있다고?' - 지금은. 딱 지금이 이길 수 있는 기회야. 지금 저놈의 상태를 관찰해봐. 쿠샨 토르는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화정의 말대로 나는 안력을 높여 거인의 상태를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곧 알 수 있었다. 왜 저놈이 지금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지. 사실상 형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지금 내 상태도 굉장히 안 좋은 상태였다. 다른 건 차치하고서라도 전투를 이어나갈 수 있는 마력이 극히 부족하다. 남은 양이라고 해봤자 약 한 줌? 어빌리티 하나를 겨우 사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만큼, 쿠샨의 상태도 굉장히 좋지 않았다. 강림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지쳐 보이는 기색도 역력하다. 아까까지 조금도 티를 내지 않았다는 걸 생각해보면 확실히 이상하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열화검으로 전신에 타격은 물론, 이후로도 지속적인 피해를 입었다. 마력 전부를 파동에 얻어맞은 가슴은 흉하게 박살 나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다. 무엇보다 허공에서 먹였던 치명타가 크다. 나는 왼쪽 어깻죽지 부근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데 성공했고, 공찬호는 오른쪽 허벅지에 주먹만 한 구멍을 뚫어 놨다. 저렇게 서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다른 괴물이었다면 이미 백 번은 넘게 죽었어야 정상이다. 그나마 쿠샨 토르라서 버티고 있을 뿐이지. - 그래, 맞아. 저놈은 애초부터 네 형이 목표였던 거야. 문득 화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저놈은 무조건 네 형을 죽일 셈이야. 그래서 아까 치명타를 허용하면서도 무리해서 들어간 거고. 너, 아까 네가 달려들었을 때 저놈이 급하게 물러난 거 기억나? '기억나.' - 생각해봐. 아까 그 꼬맹이의 희생으로 한 번 실패하기는 했지만, 네 형은 가까이에 있었거든. 너한테 한 번 더 치명타를 허용하는걸 고려해보면, 분명히 한 번 더 죽일 기회가 있었다는 소리야. 그런데, 아까 허공에서와는 다르게 왜 이번에는 물러난 걸까? '…저놈도 한계에 다다랐다는 소리겠지.' 화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무언의 긍정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 좋아. 잘 들어. 이상한 기교 부릴 생각은 하지도 마. 네가 해야 하는 건, 어떻게든 저놈의 급소에 검을 꽂아 넣는 일이야.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결심을 굳혔다. 화정의 말이 맞다. 서로가 한계에 다다른 이상, 화려한 기교도 화려한 능력도 필요치 않다. 그저 누가 먼저 상대에게 무기를 꽂아 넣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말로는 쉽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나보다 모든 게 뛰어난 이를 상대로 그저 순수 전투 능력만으로 이겨내라는 소리였으니까. 신체 능력에서는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수 싸움으로 기회를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곧바로 자세를 잡았다. 오른손에 든 무검은 왼쪽 겨드랑이 사이로 끼워 넣었다. 왼손에 든 빅토리아의 영광은 상단으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살짝 무릎을 굽혔다. 그러자 형도, 건너편의 공찬호도 동시에 자세를 잡는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이게 마지막 공격이라는 걸 알고 있는지, 다들 표정이 신중하기 그지없다.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다 문득, 나직한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나도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다.” “…죽지만 마.” 이어지는 목소리에 나는 조용히 뇌까렸다. 형은 싱겁게 웃으며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고, 곧 양손에서 환한 전류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가자.”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잠시 형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다리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형이 그 말을 끝으로 먼저 앞서 달려 나가기 시작했으니까. 동시에 건너편의 공찬호도 마주 달려오기 시작한다. 이로써 마지막 4회전이 시작되었다. 나는 바로 형을 따라잡고 오른쪽 옆에서 달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형의 신체 능력치는 어지간한 근접 계열을 뺨치는 정도. 근력은 70을 넘고, 민첩은 97을 넘는다. 그러니 괜히 근접전을 자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긴장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강하게 마음을 다잡으며 눈앞의 쿠샨 토르에 시선을 집중했다. 20미터. 수 싸움에 희망을 걸기는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기회를 만드는 선에서 그쳐버린다. 가장 중요한 건 타이밍. 생과 사를 넘어가는 와중에 잠깐 드러나는 틈을 잡아야 한다. 10미터. 비로소 쿠샨 토르가 움직임에 변화를 보였다. 앞뒤로 모두 달려오는 만큼 몸을 사선으로 비스듬히 틀었다. 오른손에 쥔 묠니르는 우리를 향하고, 왼손은 공찬호를 향한다. 5미터. 나와 형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땅을 박찼다. 몸이 살짝 허공으로 떠오르며 남은 거리를 삽시간에 줄인다. 그리고 발이 땅에 닿으려는 찰나, 드디어 쿠샨 토르가 오른팔을 움직였다. 묠니르가 뒤로 한껏 젖혀진다. 3미터. 부웅! 그리고 마침내, 묠니르가 바람을 갈랐다. 형과 나를 동시에 날려버리겠다는 듯 세찬 소리를 내며 왼쪽 횡 방향으로 들어온다. 어찌 보면 우직하다 볼 수 있는 공격이나, 그만큼 정교하고 정확한 공격. 그때였다. “수현아!” 땅에 발이 닿은 순간. 그러니까 짓쳐 들어온 묠니르가 막 형의 주변까지 근접했을 때. “가라!” 형이 갑작스럽게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들어오는 묠니르를 향해 양손을 내뻗는다. 의아한 기분을 느끼기도 전, 순간적으로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이 일었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분명히 볼 수 있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형의 손이 묠니르와 마주치는 것을. 허공에, 불꽃이 튀긴다. 나는 이제야 형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형은 쿠샨 토르가 자신을 노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끼를 자처했다. 나와 공찬호에게 더욱 확실한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그것을 인지한 순간, 나는 머리를 비웠다. 그저 본래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한 번 더 크게 도약했다. 그대로, 형을 지나쳤다. 바로 다음, 쿠샨 토르가 왼손을 꽉 주먹 쥐는 게 시야에 잡혔다. 그것은 거인이 공찬호를 포기하고 나를 결정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2미터. 쿠샨 토르의 주먹이 움직인다. 아직은, 아직은 쿠샨 토르가 유리하다. 비록 묠니르는 형을 미끼로 묶었다고는 하나, 왼팔이 남아있다. 비록 속도를 높였다고는 하나, 팔의 길이는 거인이 훨씬 더 길다. 그런 만큼, 먼저 사정거리에 닿지 못한 이상 선공은 무조건 거인이 가져갈 수밖에 없다…. 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도 쿠샨 토르는 내가 들어오는 속도에 맞춰, 정확하게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거대한 손이 내 머리통을 부숴버리겠다는 듯 빠르게 가까워진다. 1미터. 더욱 몸을 웅크리며 자세를 크게 낮췄다. 양손의 칼자루를 으스러지도록 쥐었다. 한 줌 남은 마력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그리고 주먹이 지척까지 다가온 순간. 나는 웅크렸던 몸을 활짝 펼치며, 남은 모든 마력을 터뜨리듯이 개방했다. 궁신탄영(弓身彈影). 배꼽이 쏠리는 기분과 함께, 몸이 앞으로 퉁 튕겨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뒤통수를 싹 스쳐 지나가는 섬뜩한 감촉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끝내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다. 확실히 쿠샨 토르의 공격은 정확했다. 거인이 계산한 내 최대 속도는 틀리지 않았다. 다만 그게 한계라고 생각한 게 패인이다. 신체의 한계 속도. 거기에 어빌리티로 가산을 붙여, 나를 노리고 들어온 타이밍을 흩뜨린 것이다. 이내 가깝게 다가오는 거인의 가슴을 바라보며, 나는 양손을 움직였다. 무검은 횡으로 휘두르고, 빅토리아의 영광은 일직선으로 눕혀 찌른다. 들어가는 검은 이미 맑은 불꽃을 머금은 상태였다. 사악! 무검이 쿠샨 토르의 복부를 깊숙하게 베고 지나갔다. 칼날에서 진득하면서도 익숙한 감촉이 느껴졌다. 푸욱! 빅토리아의 영광이 쿠샨 토르의 왼쪽 가슴 아래를 꿰뚫었다. 뼈를 부수고 들어간 칼끝에서 무언가를 터뜨리는 듯한 느낌이 전해졌다. 쿠샨 토르는 어떤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고장 난 장난감처럼 덜거덕, 잠깐 몸을 멈췄을 뿐. 그리고 잠시 후. 이글이글 작열하던 새하얀 눈동자가 서서히 빛을 꺼트렸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몸이 천천히 넘어가기 시작한다. 쿵! 그리고, 땅이 울었다. 거인들의 제왕. 쿠샨 토르의 최후였다. ============================ 작품 후기 ============================ 하하…. 02시 00분에 업데이트하겠다고 말씀 드렸는데, 1시간 22분이나 늦어버렸네요. 정말 유구무언일 뿐입니다. 조심스레 변명을 하자면, 마지막 내용을 적는데 시간이 예상외로 많이 걸렸습니다. “젠장! 그냥 화정으로 바이바이 할걸!”이라고 몇 번이나 후회했는지 모르겠네요.(농담~.) 아무튼, 확실히 머릿속에 상상한 장면을 글로 옮기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 것 같습니다. 거인과의 전쟁 파트는, 이것으로 끝났습니다. 다음 회에는 예전 타로 카드와 관련한 비밀 하나를 풀어드릴게요. :) 0634 / 0933 ---------------------------------------------- 낯 뜨거운 전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얼마나,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모르겠다. 오직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먹구름 낀 하늘과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뿐. 눈물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울음처럼 비가 내려온다. 마치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기라도 하듯이. 떨어지는 빗방울을 온몸으로 받으며 나는 꿈결 같은 기분을 느꼈다. 말 그대로 꿈을 꾸듯 어렴풋한 기분이 전신을 지배한다. 이상한 일이었다. 힘겨운 상대를 이겼으면 응당 기쁘거나 후련해야 정상인데, 왜 자꾸만 묘한 기분이 드는 걸까? 문득, 등에서 차갑고 축축한 감촉이 느껴졌다. 빗물이 모여 고인 웅덩이가 흘러온 모양. 이내 지면에 흐르는 피와 빗물이 섞여, 썩 유쾌하지 못한 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 초원은 고요하다. 아니, 조금 전부터 고요해졌다. 정적이 흐르는 초원의 중앙에서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상념에 잠겼다. 쿠샨 토르가 사망했다. 쿠샨 토르를 최대한 빠르게 처리한 건 확실히 정답이었다. 이후 전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인들의 제왕이니만큼 사기 저하 효과도 볼 수 있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이득은 괴조들이 돌아섰다는 것. 추측하건대, 쿠샨 토르가 사망한 순간 강제 복종 효과도 같이 풀렸을 것이다. 정신을 차린 괴조들은 전장에서 이탈하는 길을 선택했다. 말인즉, 괴조 무리를 상대하던 마수 군단을 지상에 증원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예상대로 비비앙은 곧바로 마수 군단을 투입시켰고, 사용자들과 힘을 합쳐 거인들을 공격했다. 아마 그 시점부터 전황이 반전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게 초원의 중앙에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기는 했지만, 사실 나는 전쟁에 직접 참여한 입장은 아니었다. 그저 가만히 관망하기만 했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클랜원들을 찾아 도와주고는 싶었으나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쿠샨 토르와의 전투 직후, 갑자기 마력 탈진 현상이 찾아와 꼼짝없이 누워있어야만 했으니까. 공찬호에게 죽은 듯 기절한 형을 부탁한 게,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래. 그저 그게 전부…. - 와아아아…. 그때였다. 몽롱한 와중 상념에 잠겨있던 찰나, 돌연 어디선가 여러 사람이 외치는 함성이 들려왔다. 함성이라. 지금 함성이 들려오는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다. ‘이긴 건가? 아니, 끝난 건가?’ 이겼으니 함성을 지르지, 설마 졌는데 환호할 리는 없잖은가. 띠링! 그렇게 생각한 순간, 맑은 신호음이 귓전을 울렸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메시지 음이었다. 나는 의아한 기분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전설의 업적!』 『사용자 김수현 외 6명은 거인들의 제왕인 쿠샨 토르를 처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신화 시절, 거신 전쟁의 주역이었던 쿠샨 토르. 그 시절 거인들의 제왕은 지상 모든 존재의 경외를 받던 지상의 지배자였습니다. 비록 현재는 저주로 힘이 약화됐다고는 하나, 인간으로서 쿠샨 토르의 존재를 처치한 업적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사용자 김수현 외 6명에게 60.000 Gold Point를 부여합니다!』 이윽고 허공에 주르륵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나는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걸 느꼈다. ‘응? 전설의 업적? 이게 지금 여기 왜 나와?’ 대단한, 엄청난, 전무후무한, 전설 등등 업적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그중 전설 급 업적은 총 8개로 나뉘는 등급 중 2번째에 해당하는 매우 높은 등급으로, 나도 1회 차 때 딱 3번밖에 쌓지 못했던 업적이었다. 아니, 아니지. 전설 이상 가는 업적이라고 해봤자 제로 코드를 얻었을 때밖에 없으니, 사실상 전설 등급이 가장 높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아무튼 업적의 등급은 높으면 높을수록 좋다. 보상이 무척이나 빵빵 하거니와, 이것저것 추가로 챙겨주는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설의 업적 보상이 겨우 6만 포인트면 엄청 짠 건데….’ 띠링! 그러자 마침 메시지가 추가로 출력되기 시작해, 나는 우선 읽어보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보상 결과를 정정합니다. 쿠샨 토르가 ‘저주’ 상태가 아닌, ‘반신’으로 각성한 상태에서 처치했음을 확인합니다. 기존 Gold Point 보상의 100배를 곱한 만큼의 수치가 새로이 계산됩니다. 총 보상은 6.000.000 Gold Point입니다.』 『그러나 쿠샨 토르의 각성 원인을 제공한 사용자 김유현은 분배에서 제외됩니다. 그리하여 총 6등분으로, 각 사용자당 1.000.000 Gold Point를 분배 받습니다.』 『캐러밴 시스템 확인! 각 사용자의 공헌도에 따라 추가 Gold Point를 지급합니다. 1위. 김수현(78%)…. 총 보상 Gold Point의 78%(4.680.000 Gold Point)를 추가로 지급합니다!』 『캐러밴 시스템 확인! ‘막타’를 친 사용자 김수현에게 50.000 Gold Point를 추가로 지급합니다!』 ‘헐.’ 그리고 나머지 4개의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나는 넋을 잃고 허공을 응시했다. 다른 건 모두 차치하고서라도, 이번 보상으로 얻은 GP만 세 자릿수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것도 단 한 번의 전투로. ‘수당 한 번 후하네.’ 이 정도라면…. 지금껏 벌어둔 GP도 적잖은 편이니, 언제라도 사용자 상점에서 즐거운 쇼핑을 할 수 있으리라. 뭐, 지금은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인 후 허공을 가득 채운 메시지를 하나하나 지우기 시작했다. 띠링! 그러나 마지막 메시지를 지운 순간, 돌연 또 하나의 메시지가 허공에 출력됐다. 『사용자 김수현이 ‘신살자.’ 칭호를 획득합니다. 해당 칭호에 관한 효과를 알고 싶으시면 인근 신전을 방문해주십시오.』 ‘신살자? 그리고 진명이 아니고 칭호?’ 칭호는 나도 처음 확인하는 시스템 이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 사용자 정보를 띄우려는 찰나였다. “오빠, 오빠! 어디 있어! 대답해 오빠!” 문득 가까운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유정의 음성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사방에서 들려오던 함성이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그 대신 초원 곳곳에서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소리와,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기척들이 느껴지는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전장 정리에 들어갔구나.’ 전장 정리. 말인즉, 정말로 전쟁이 끝났다는 소리였다. “오빠~. 오빠~?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응? 제발 대답 좀 해봐….” 그렇게나 걱정이 되는지, 애달프게도 나를 찾아 다니는 이유정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 나도 덩달아 걱정이 이는 걸 느꼈다. 아까 치료를 부탁했다고는 하나, 안솔이나 백한결, 형의 상태가 어떤지 한 번 더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것뿐만이 아니더라도 이제는 슬슬 일어날 때였다. 그리하여 나는 천천히, 힘겹게나마 몸을 일으켰다. * 안솔은 자고 있었다. 아니,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비록 온몸에 깨끗한 천을 감고 있기는 했지만, 꼭 감은 두 눈과 편안해 보이는 얼굴을 본다면 누구나 푹 자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제 3자가 보기에. ‘수현…. 어떡하면 좋아요? 우리 솔이가….’ ‘치료는 마쳤습니다. 우선은 경과를 지켜보는 수밖에요.’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안솔은 현재 자신의 상태에 무척이나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러는 수현은요. 수현도 많이 다치지 않았어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냥 마력 탈진 현상만 일어났을 뿐이니, 푹 쉬면 그만입니다.’ 분명히 정신도 깨어있고, 주변에서 나누는 대화 소리도 어렴풋하게나마 들려온다. ‘아차. 아주버님은요? 들어보니 아주버님도 굉장히 심한 상처를….’ ‘이미 다녀왔습니다. 상처가 심하기는 한데, 다행히 목숨에 지장은 없다고 하네요. 솜씨 좋은 사제들도 붙어있고, 또 강한 사람이기도 하니…. 조만간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겁니다.’ 바로 지금처럼. 그런데 문제는,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눈을 뜨려고 해도 떠지지 않고, 팔이나 다리를 움직이려고 해도 꼼짝도 않는다. 꼭 몸의 통제권을 빼앗긴 기분이랄까? ‘그건 정말 다행이네요. 하지만 솔이가…. 강한 타격으로 쇼크를 받아 혼수 상태에 빠진 거면, 방법이 없는 거 아니에요? 설정이 아니잖아요.’ ‘…우선은 지켜보는 방법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좌우간, 그러면서도 의식은 깨어있으니 진정으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 안솔은 새끼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이려 무진 애를 썼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간간이 들려오던 대화조차 서서히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낑낑대던 안솔은, 결국 제풀에 지쳐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온몸에 잔뜩 주던 힘을 일시에 풀어버렸다. 그 순간이었다. ‘어?’ 정말 갑작스럽게, 안솔은 전신이 편안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 편안한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편안하다는 기분을 느꼈다는 게 자못 생소하게 다가왔다. 조금 전까지 아무 감각도 느끼지 못했기에 더욱 그랬다. 이윽고 사지를 움직여본 안솔이 살그머니 눈을 떴다. 그리고 사방에 들어찬 어둠을 확인한 순간, 흠칫 몸을 떨었다. 여기는 또 어디일까. 말 그대로, 안솔이 서 있는 주변은 어두웠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광대한 공간은 검은 장막이라도 두른 듯 온통 칠흑 색으로 칠해져 있다. 거기다 어떠한 기척도 들려오지 않아 을씨년스러운 기운마저 감돌고 있었다. 잠시 후,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고 있던 안솔의 두 눈에 미약한 이채가 스쳤다. ‘여기는….’ 안솔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더니 곧 아차 한 얼굴로 주변을 황급히 둘러보았다. 그랬다. 안솔은 이 어둠 일색의 공간에 처음 온 게 아니었다. 두 번, 아니 이번이 세 번째. 이윽고 한참 동안 공간을 둘러보던 안솔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걷던 걸음이 어느 지점에서 우뚝 멈췄다. ‘맞아. 여기서 어느 여인이 도와달라고 했었어.’ 첫 번째 여인의 정체. 괴물에게 임신 당한 채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여인들. ‘여기서는 불길한 기운을 흘리는 괴물을 만났고.’ 두 번째 괴물의 정체. 구덩이를 지배하던 파더. 그러나 김수현이 간단히 물리쳤다. ‘여기는 크고, 신성한 기운을 흘리는 괴물이 있었지?’ 세 번째 괴물의 정체. 거인들의 제왕 쿠샨 토르. 상당히 고전하기는 했지만, 역시나 김수현이 물리쳤다. ‘그리고 여기는….’ 안솔의 걸음이 다시금 멈췄다. 이제는 안솔도 모르는 지역이다. 아니, 불안하다고 해야 할까? 두 번째, 세 번째는 모두 김수현이 구해줬지만 여기서부터는 아니었다. 안솔이 기억하는 꿈의 내용에 따르면, 여기서는 앞서 걸어가던 김수현이 느닷없이 사라졌다. 그때 안솔이 본 거라고는 블랙홀 같은 커다란 구멍뿐. 그리고, 그 구멍은 지금도 있었다. 안솔의 바로 눈앞에. ‘…으.’ 볼까, 말까? 한참 동안 고민하던 안솔의 낯에 돌연 결연한 빛이 서렸다. 흰 목 울대가 꼴깍 움직였다. 잠시 후, 안솔이 비로소 고개를 빠끔 내밀어 블랙홀 안을 쳐다보았다. 이어서 완전히 안을 들여다본 찰나, 긴장감으로 가득 찼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화륵, 화르륵! 블랙홀 안에는 두 개의 불꽃이 서로 공존하고 있었다. 왼쪽은 무척이나 따뜻한, 안솔에게도 익숙한 기운을 품은 불꽃. 오른쪽은 감히 측정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인 기운을 발산하는 불꽃. 서로 상극의 기운을 가진 두 불꽃이 보였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건, 두 상극의 불꽃이 서로 뒤엉켜 있다는 것. 그냥 서로 닿아있는 정도가 아니다. 마치 서로를 탐하기라도 하듯이 정신 없이 움직인다. 이따금 따뜻한 불꽃이 무언가를 찌르듯이 공격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파괴적인 불꽃은 어떤 반항도 하지 않았다. 그저 첫날밤을 치르는 새색시처럼 수줍고 얌전하게 받아들일 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화륵, 화르륵! 한참을 물고 빨던 두 불꽃이 동시에 커다랗게 일어나더니. - 응애…. 응애…. 어디선가, 아기의 귀여운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안솔의 정수리에 수십 개의 물음표가 나타났다. 얼굴은 더없이 얼빠진 빛을 띠고 있다. 블랙홀 안의 상황이 당최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이다. 차라리, 차라리 두 불꽃이 역할이 바뀌었다면 느껴지는 기운상 이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화륵~. 화르륵~. 그렇게 두 불꽃이 알콩달콩 서로를 뜨겁게 달구는 동안.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안솔은 괜스레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어두운 공간에서 홀로 비명을 질렀다. 물론 현재로서는 그 비명에 답할 길은 없다. 그저 시간만이 해결해줄 수 있을 뿐. …어쩌면, 곧. ============================ 작품 후기 ============================ 같이 블랙홀을 구경하던 흑염(검은색 불꽃.) : (시무룩)힝…. 목숨까지 걸면서 준비했는데…. ㅜ.ㅠ 0635 / 0933 ---------------------------------------------- 하챠르의 물건. 잠에서 깨어나 상체를 일으켰다. 흘끗 입구 밖을 쳐다보니 이미 곳곳에 진을 친 어둑한 땅거미들이 보였다. ‘아마 새벽쯤 됐으려나.’ 평소 최대한 생활 리듬을 지키려고는 하나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바로 쉴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새벽이 되어서야 전장 정리가 끝났고 아침이 되어서야 야영지 설치가 끝났다. 이후로도 백한결, 안솔과 형의 상태를 보러 몇 번을 왔다 갔다 한 터라, 정오 즈음에 겨우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 탓에 일어난 시간이 상당히 애매해졌다. 한동안 멍하니 밖을 바라보다가, 나는 간이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입구 절반을 가린 장막을 완전히 걷어내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몽롱한 정신이 서서히 깨어나는 기분이다. ‘산책이라도 해야겠다.’ 부상자 관리소에 가볼까도 생각해봤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하루 한두 번이면 모를까, 그 이상은 방해만 될 뿐이다. 실컷 잔 덕분에 더 이상 잠도 오지 않는다. 이대로 하릴없이 있느니 바람이라도 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검 하나만 들고 천막을 나섰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이들이 많은지 야영지에는 이미 상당히 많은 사용자들이 나와 있었다. 심각한 얼굴로 얘기를 나누는 이들도 있었고, 구석에 주저앉아 망연한 기색을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대체로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하지.’ 오전에 언뜻 듣기로는 확인된 사망자 수만 9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시체를 찾지 못한 인원까지 합치면 1000명을 넘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부상자 수까지 합치면 총 피해 인원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가히 어마어마한 손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우울한 기운이 감도는 것일 테고. “안녕하세요. 머셔너리 로드.” “아, 머셔너리 로드.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웃는 이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지만, 이따금 나와 눈을 마주치는 사용자들은 꼬박꼬박 감사 인사를 건넸다. 딱히 별다른 말을 한 기억은 없는데 저러는걸 보면, 아마 클랜원 중 누군가가 미리 상황을 설명했을 것이다. 아무튼 예의 바르기도 해라. 우리가 천막을 친 장소가 울타리 인근이라 야영지 외곽은 금방 벗어날 수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조용히 밤바람을 쐬며 돌아다니다가, 적당한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한참을 멍하게 있던 와중, 문득 입이 심심해 연초 하나를 꺼내 물었을 때였다. 터벅터벅…. 별안간 누군가 느릿느릿 힘없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살그머니 검을 잡았으나 딱히 살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기척은 점차 내가 있는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잠시 후, 기척이 바로 뒤에서 멈춤과 동시에 발소리도 끊겼다. 이내 누군가도 풀썩 주저앉더니 등을 기대어오는 감촉이 느껴졌다. 딱히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는 알 것 같았다. “칼자루 잡은 거 그만 놓지 그래. 무섭다.” 그러자 내 예상이 맞는다는 듯 곧바로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싱거운 기분이 들어 피식 웃고 말았다. “언제 깨어난 거야?” “4시간 전.” “4시간 전에? 그럼 왜….” “깨어나고 2시간 정도 지나서 한 번 찾아갔는데, 네가 곤히 자고 있더라고. 깨우기 싫어서 놔뒀지.” 그러면 형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말인가. “후….” 그때, 나와 맞대고 있던 형의 등이 살짝 미끄러지는 감촉이 들었다. 이내 오른쪽 옆 수풀에 형의 상체가 풀썩 눕혀진다. 밤하늘을 바라보는 형의 얼굴이 어딘가 모르게 망연해 보인다. 형의 입이 열렸다. “…아무튼, 결국에는 네 도움을 받고 말았네.” “설마 화내지는 않겠지?” 목소리에 화난 기색은 보이지 않았으나 혹시나 싶어서 물었다. 형은 쓰게 웃었다. “당연히 못 내지. 너 아니었으면 공략도 못했을 건데.” “그럼 다행이고.” “아, 그러고 보니 그 사제는….” “안솔은 걱정 마. 적어도 목숨에는 지장이 없으니까.” “혼수 상태라고 들었다. 설정이 아닌, 실제 혼수 상태. 그 사제는 나를 구하려다가 그렇게 된 거야.” “자책하지 마. 그렇게 따지면 애당초 끌고 온 내 잘못이 가장 크니까. 그리고 갑작스러운 쇼크로 인한 혼수 상태는 곧 깨어날 가능성이 높데.” “…확실해?” “사제, 아니 전직 의사라는 자가 그러더군.” 정확히는 곧이 아닌 언젠가는 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일부러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괜한 부담을 주기 싫었으니까. 그러자 형은 깊은 한숨을 흘리고는 몸의 절반을 돌렸다. 오른 방향으로. “…미안하다.” 혼잣말이라 생각될 정도로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 나는 아무 말도 않았다. 그저 아까 물었던 연초에 이제야 불을 붙일 뿐. 형은 조용했다. 예전 같았으면 곧바로 눈치를 줬을 터인데, 오늘따라 웬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찾아 들었다. “내 능력이 부족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자조 어린 목소리가 침묵을 깨트렸다. 형의 말이 이어졌다. “북 대륙에서는 무서운 게 없었는데…. 모든 게 생각대로 돌아갔는데….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 “이제 알 것 같다. 그게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생각이었는지. 나는 총 사령관의 자격이 없어.” “…흠.” 말을 듣고 있자 문득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와 비슷한 말을 예전에 어디선가 한 번 들었던 듯하다. ‘저보다는 머셔너리 로드가 총 사령관의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한소영이었던가.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 강철 산맥부터는 북 대륙에 나오는 괴물들을 생각하지 말라고. …뭐, 반신 강림은 예외라손 쳐도. 그런 건 아틀란타에서도 특별한 경우니까.” “거인 같은 괴물들이 많은가 봐?” “꽤 있지. 예를 들면 난쟁이, 수인, 인어. 아니면 가끔 숲을 돌아다니는 요정 등등…. 즉 거인 정도로 강하다는 게 아니라, 한 종족으로서 사회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비슷해.” “…종족이라. 그럼 1회 차에서 말이다. 그 종족의 존재가 우리한테 밝혀지고 나서, 다들 어떻게 됐어?”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됐냐.’ 라 함은 그 종족들의 미래를 물어보는 말이었는데, 하나같이 극히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난쟁이 같은 경우는 물건을 다루는 솜씨가 좋아 대장간의 노예 생활을 해야만 했다. 수인은 잡히는 족족 사용자들의 애완용으로 전락했다. 물론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키우는 애완용이 아닌, 성적인 의미에서의 애완용. 또한 아주 가끔이기는 해도, 남 대륙 요정의 숲에서 나온 요정들이 아틀란타 인근 숲까지 왔다가 잡히는 경우도 있었다. 잡힌 요정들은…. 뭐, 말할 것도 없겠지. 용모가 굉장히 아름다운 이상 용도는 정해져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요정들로만 이루어진 창관을 세운 사용자가 떼돈을 벌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인어 같은 경우에는 더욱 심하다. 반인 반어 임에도 불구하고, 맛 좋고 몸에 좋다는 이유로 고급 요리 재료로 전락해버렸으니까. 대충 생각나는 대로 말해주자 형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믿지 못할 말은 아니었다. 누가 그러지 않았는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동물은 바로 인간이라고. “그래서, 이런 말을 해주는 이유가 나보고 자기 합리화라도 하라는 소리냐.” “갑자기 무슨 소리? 형이 물어봤으니까 대답해준 거지.” “아, 그랬지.” “받아들이는 건 형 나름이야. 아니면 위로라도 해줬으면 좋겠어?” 그러자 형은 도로 몸을 돌려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리고는 “푸.” 가볍게 입을 터뜨렸다. “아니, 아니야. 그냥 고맙다.” “고맙기는. 성장하겠다고 말했으면 한 번 의연해져 보라고.” “그래야지…. 아차, 그러고 보니 너한테 줄게 있었지.” “……?” 그렇게 말한 형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고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무언가는 중앙에 홈이 파인 은은한 빛을 흘리는 작은 돌 조각이었다. 마치 조약돌을 보는 듯했다. “이게 뭔데?” “고대 무녀의 증표. 네가 챙겨달라고 했었지?” 그 말에 절로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게 고대 무녀의 증표라고?” “응. 어제 전장 정리를 하면서 우리 클랜원이 찾아냈나 봐. 운도 좋지.” “그러면….” “걱정 마. 아직 아무한테도 말 안 했고, 내가 단단히 함구시켰으니까. 그리고 설령 알려지더라도 너한테 뭐라 할 사람 아무도 없어.” 확실히 그렇기는 한데, 성과 문제는 워낙 예민한 부분이 있어서 말이지. 약간 갈등이 일기는 했지만, 우선 장비 정보부터 보자는 생각에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띠링! 『제 3의 눈 효과로 기록된 정보가 아닌, 고대 무녀의 증표에 대한 추가 정보가 밝혀집니다.』 ‘응?’ 『고대 무녀의 증표.』 (일반 설명 : 고대 무녀.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은둔을 원했던 고대 무녀들은, 신을 모시는 아래 영원한 안녕과 질서를 기원했습니다. 고대 무녀의 힘은 총 3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축문을 기반으로 한 비술. 2. 음각을 기반으로 한 문신. 3. 신언을 기반으로 한 강신. 시간이 흐르며 3가지 힘은 따로 나뉘어 세상에 잠들었는데, 고대 무녀의 증표는 신언을 기반으로 한 강신의 힘을 품고 있습니다.) (추가 설명 : 세간에서는 고대 무녀의 증표로 알려져 있으나, 이 증표는 사실은 슬픔의 여신 아리안로드의 흔적입니다. 그 당시 거인과 인연을 맺고 저주를 일부 해제해준 고대 무녀는, 사실 아리안로드가 강신한 상태였습니다. 거신 전쟁 이후 아리안로드는 꾸준히 저주를 유지했지만, 거인들에게 조금씩이나마 내성이 생기게 된 걸 확인한 후 하나의 결단을 내립니다. 이 증표는 거인의 힘을 일부 회복시켜주는 효능은 있으나, 실상은 저주를 영원히 유지하는 신척이었습니다.) ‘그러면 일부 힘을 회복시켜주는 건 부가적은 효능이고, 중추는 저주의 영구한 유지였다는 말인가?’ 살짝 머리를 갸웃하게 만드는 설명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기에 나는 일반 설명을 재차 읽어보았다. ‘신언을 기반으로 한 강신의 힘.’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이 증표는 고대 무녀의 3가지 힘 중 마지막 조각이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커다란 젖가슴이, 아니 임한나가 떠올랐다. 축문 비술의 힘은 뮬에서 얻었다. 그걸로 황혼의 무녀라는 레어 클래스를 계승했다. 음각 문신의 힘은 저번 용이 잠든 산맥 원정에서 만난 고대 영웅에게 선물로 받았다고 들었다. 그리고 이제 신언 강신까지 발견했으니…. ‘시크릿 클래스다.’ 사실 이렇게 모든 조각을 모아야만 계승 가능한 시크릿 클래스는, 레어 클래스 단계에서는 생각만큼 강한 위력을 보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반대로 모든 조각을 모았을 경우, 각 힘의 시너지 효과가 발생해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말인즉, 그제야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고나 할까?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나는 결국 고대 무녀의 증표를 받아 챙기고 말았다. 머셔너리 클랜에 강력한 시크릿 클래스가 추가되는 일은 매우 환영할만한 일이니까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곧바로 줄 생각은 없다. 아틀란타를 발견하기까지는 공략이 끝난 게 아니니까. ‘아무튼 주면서 생색 좀 낼 수 있겠네.’ “고마워. 잘 사용할게.” “고맙기는. …그런데, 수현아.” 그때였다. 싱글벙글 웃으며 고대 무녀의 증표를 만지작거리고 있자, 돌연 형의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아까까지는 조금 힘없는 음색이었다면, 지금은 비교적 또렷한 음색이었다. “이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이윽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 형은 형형히 빛나는 눈동자로 나를 정면에서 쳐다보았다. “거인들 있잖아. 네가 전에 기회만 닿으면 동료로 삼고 싶다고 했었지?” “응? 그렇지. 불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러면 말이다. 만일 네가 이 공략을 지휘했다면, 그리고 공략 도중 정말로 동료로 삼고 싶을 정도의 거인을 만났다면….” “…만났다면?” “한 번 시도라도 해봤을까? 거인을 동료로 삼으려는 시도 말이다.” “아니.” 무슨 말인가 했더니. 어쨌든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질문이라 즉답했다. 형은 두 눈을 치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쉽게 대답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말했잖아. 1회 차에서 실패한 사례가 있다고. 안 되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지.” “…그러냐.” 형은 잠깐 생각에 잠기는 듯 싶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 알겠다.” 이어서 갑작스레 몸을 번쩍 일으키고는 나도 일어나라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만 돌아가자.” “응? 뭐야, 갑자기.” “갑자기는 무슨. 내일부터 바빠질 거야. 아침에 진군해서 거인들의 터전을 점령하고, 바로 요새 건설에 들어갈 거다.” “아, 그건 그래야지.” 하등 틀린 말이 아니라, 나는 형의 손을 맞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형과 사이 좋게 야영지로 돌아간 후, 나는 천막으로 들어가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했다. 그리고 다음날. 형은 새벽에 말했던 대로, 아침이 되자마자 곧바로 야영지를 정리하고 진군을 시작했다. 그리고 북부 원정대는 채 1시간도 지나지 않아 거인들의 터전을 발견하고, 점령할 수 있었다. 마침내 강철 산맥 제 3지역 공략이 공식으로 종료된 것이다. ============================ 작품 후기 ============================ 실은 7월 31일(목요일) ~ 8월 1일(금요일) 사이 조아라 관계자 분과 지방에 다녀왔습니다. 중간에 두어 번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어요. 1. - 7월 31일 아침 9시쯤에 조아라 관계자 분과 만났습니다. 그리고 맥도날드로 들어가 맥 모닝 세트를 시켰는데요. 조아라 관계자 분 : 그런데, 오늘 연재는 어떡하실 겁니까. 예약하고 오셨습니까? 로유진 : 아니요. 최근 회를 새벽 3시 넘게 올려서요. 4시부터 집필하기는 했는데, 완성하지는 못했습니다. 조아라 관계자 분 : 그러면 휴재입니까? 로유진 : 후후. 아니요. 2000자 정도는 써뒀죠. 그래서 울트라 북이랑 USB를 갖고 왔습니다. 나머지는 기차에서 적게요. - 그리고 자랑하려고 USB를 찾으려 가방을 열었는데, 아뿔싸. 몇 번을 찾아도 보이지가 않는 겁니다. 집에 놓고 온 거예요.(오늘 오후에 돌아와서 확인해본 결과 컴퓨터에 꽂혀있었습니다.) 아무튼 이때는 진짜 정신이 붕괴하는 줄 알았습니다. 밤을 새면서까지 적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진짜…. 조아라 관계자 분 : 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로유진 : 아…. 조아라 관계자 분 :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냥 쉬시죠. 어쩔 수 없네요. 로유진 : 안 돼요. 저번에 4연참하고 한 번 휴재해서…. 버릇되잖아요. 조아라 관계자 분 : 예. 그럼 파이팅 입니다. 저는 열심히 방해하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로유진 : ㅜ.ㅠ (열심히 방해하겠다고 하셨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반대로 행동하셨습니다. 기차, 협업 회사 회의실, 잠자는 방에서까지 글을 적었는데요. 여러분들이 가끔 말씀하시는 통조림이 뭔지 실제로 경험했습니다.) 아무튼 결국 23시 31분에 집필 완성, 예약 걸어두고 조아라 관계자 분과 술 마시러 갔네요. :) 2. - 이건 기차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열심히 자판 두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스마트 폰으로 무언가를 보여주시더라고요. 뭔가 하고 봤더니 조아라 블로그였습니다.(네이버에 조아라 블로그라고 치시면 나옵니다.) 거기에 다른 관계자 분이 적은 제 작품 리뷰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쭉 읽고 리뷰에 담긴 코멘트를 보는데…. 조아라 관계자 분 : 어, 이 코멘트 좀 보세요. 작가님 성애신 별로라는데요. 로유진 : 윽…. 이건 인정합니다. 실제로 많이 들어봤어요. 신 고자입니다. 조아라 관계자 분 : 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로유진 : 험험. 어서 다른 코멘트를…. - 여기서 거의 마지막 코멘트를 봤는데, 이게 압권이었습니다. 리뷰 글에 텍본 사이트 홍보 글이 달려있던 거예요. 어디어디 텍본 많으니 이쪽으로 오세요~. 이렇게요. 그것도 메모라이즈 리뷰 글에 말입니다.(잘 기억은 안 나는데 사이트는 이미 닫혀있더라고요. 현재 그 코멘트는 지워졌습니다.) 여기서부터 입장이 반전됐죠. 조아라 관계자 분 : ……. 로유진 : ㅋ. 조아라 관계자 분 : …………. 로유진 : ㅋ? 조아라 관계자 분 : ………………. 로유진 : ㅋ! - 그리고 조아라 관계자 분은 바로 조아라로 전화하셨습니다.(통화 내용은 생략!) 아무튼 빵 터지는 일들이 많았던 이틀이었습니다! :) 0636 / 0933 ---------------------------------------------- 하챠르의 물건. 서북 원정대가 거인들의 터전에 도착했다. 어제 김수현한테 말했던 대로, 김유현은 목표한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행동을 개시했다. 공식적으로 제 3지역 공략의 종료를 알리고, 곧바로 요새 건설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그 일환으로, 김유현은 우선 거인들의 터전을 정리하는데 사용자들의 손을 빌렸다. 요새를 최대한 빠르게 건설하고 싶다는 명분으로. 그러나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사용자들은 힘겨운 전투를 치르고 동료를 잃는 아픔을 맛봤다. 이러한 상황에서 승리는 그다지 위안거리가 되지 못한다. 단 하나 상처를 달랠 수 있는 게 있다면, 단연코 보상이 특효약이라 말할 수 있다. 물론 터전을 정리하면서 얻는 보상은 분배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손대지 않는 게 불문율이다. 그러나 수천 명 모두가 그 원칙을 지킬 것이라 기대하는 건, 사실 상당히 요원하거니와 가능성 낮은 일이다. 예를 들어 묠니르 같은 커다란 성과는 어쩔 수 없다손 쳐도, 새알만한 보석은 서너 알 몰래 챙겨도 별다른 티가 나지 않는다. 탁 까놓고 말해서,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소리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현재 터전을 정리하는 사용자들은 크게 3가지 성향으로 분류할 수 있다. 성과 발견 시 착실히 신고하는 사용자. 성과 발견 시 우선 주변부터 둘러보는 사용자. 성과 은닉을 노리고 처음부터 개인 행동을 하는 사용자. 특히 세 번째의 경우는 궁수나 암살자 클래스가 많은 편이다. 직업 특성상 눈썰미가 좋은 편이라, 드러난 성과뿐이 아닌 숨겨진 성과들도 곧잘 발견해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홀로 터전의 외진 곳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내처럼. 기실 거인들의 제왕이 사용하던 장소처럼, 좋은 성과는 통상적으로 중앙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내가 외진 곳으로 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중앙은 애당초 사용자들이 가장 많이 몰리니만큼 은닉하려는 행동에 상당한 제한을 받는다. 그러느니 좋은 성과를 포기하고서라도, 비교적 노출될 걱정이 적은 외진 곳으로 향하는 게 더 낫다. 그렇게 신속하게 발을 놀리던 사내의 걸음이 멈춘 곳은, 터전 중앙과는 꽤나 떨어진 거리에 있는 캠프처럼 보이는 장소를 발견했을 때였다. 물론 실상은 한 거인이 거주하던 천막에 불과했지만, 사용자 입장에서는 2~4인용 캠프라 봐도 좋을 정도로 커다란 공간이었다. 사내는 조심스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 대충 찢어 걸쳐놓은 게 분명한 가죽을 열어젖혔다. 이윽고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간 순간, 코를 푹 찌르고 들어오는 익은 가죽 냄새에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늙은 놈이 쓰던 방인가? 냄새 한 번 고약하네.” 캠프 내부는 지름이 30미터 정도로 상당히 넓은 편이었다. 천장은 때가 낀 가죽으로 덮여있고, 벽 또한 줄에 걸린 가죽으로 가려져 있다. 지면에는 거무스름한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마치 원시 시대의 움막을 보는 듯했다. 언뜻 보면 딱히 별다른 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내가 줄에 걸린 가죽을 둘러본 순간, 찡그리고 있던 눈매가 활짝 호선을 그렸다. 가죽을 뚫고 튀어나온 뼈 걸이에, 윤기가 찰찰 흐르는 목걸이 같은 것이 걸려 있었다. “오, 비싸 보이는 거 발견.” 사내가 흡족한 미소를 보이며 목걸이를 잡아챘다. 뼈로 이루어진 싸구려 장식이 눈에 밟혔지만 사내는 개의치 않았다. 알알이 박힌 알 굵은 보석들이 시뻘건 빛을 번쩍번쩍 뿜어내며 자신을 뽐내고 있었으니까. “이 정도면 못해도 금화 3천 개는 되겠는데. 시작이 좋네.” 이내 목걸이를 품속에 고이 넣은 사내는 천천히 캠프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 5분이 지나도록 사내는 별다른 성과를 발견하지 못했다. 괴물의 고기나 괴조의 것으로 보이는 눈알 등이 간간이 보였지만, 사용자 입장에서는 하등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염병할.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더니.” 사내는 5분을 더 추가로 둘러본 후 시큰둥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뭔가 엄청난걸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실용적인 장비 하나 건지지 못했다는 사실에 과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고작 목걸이 하나로는 사내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 한참이나 부족했다. 결국 더 찾기를 포기한 사내는 이만 나가기로 마음먹고 몸을 돌렸다. “에이, 씨발.” 마침 아까 훑었던 낙엽 더미가 눈에 들어와 사내는 씨근거리며 발길질을 했다. 이어서 발끝이 낙엽 더미를 강타했을 때였다. 팍! 무언가 툭, 걸리는 느낌이 발끝에서 전해졌다. “응?” 사내 또한 이상한 감각을 느꼈는지 두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이윽고 사내의 시선이 살짝 걷힌 낙엽 속 둥글게 솟아오른 흙더미를 발견했다. 일견 무덤의 모양을 보이는 흙더미는 보통 접시만한 크기를 보이고 있었다. “이건…?” 멍하니 중얼거리던 사내의 두 눈에 별안간 이채가 스쳤다. 잠시 후, 황급히 엎드린 사내가 두 손으로 낙엽을 치우고 흙을 조심스럽게 쓸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갑작스레 외부에서 인기척이 하나 둘 잡혀오기 시작하자, 사내는 급한 마음에 흙 무덤 중앙으로 손을 푹 꽂아 넣었다. 그 상태서 이리저리 더듬어보자 돌연 손끝으로 무언가가 잡혔다. 씨앗만한 크기에 딱딱한 감촉. 그러나 무엇인지 명확히 감이 오지는 않는다. 아니, 볼 시간조차도 없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까. “어, 여기 벌써 온 사람이 있나 봐?” 문득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지는 사내의 행동은 굉장히 신속했다. 손에 잡힌걸 아까 목걸이를 넣어둔 품에 집어넣으며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고, 발로 낙엽을 쓸어 흙을 덮는다. 약 3초가 지난 후에, 누군가가 살짝 가죽을 젖히며 캠프 안으로 들어왔다. “누구 있어…? 아, 너였냐?” 아는 사람의 목소리일까? 사내는 잠깐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담담한 얼굴로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우웅! 돌연히, 사내의 가슴에서 시뻘건 광채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그러나 그 광채가 무엇인지 채 알 틈도 없었다. “크, 크윽?!” 갑자기 심장 부근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낮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 한편, 같은 시각. “됐군.” 어두운 공간, 화려한 의자에 느긋하게 앉은 한 인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음색 자체는 굉장히 낮았으나 어딘가 모르게 만족해하는 기색이 깔린 음성이었다. “씨앗이 뿌려진 겁니까?” 그때, 갑작스레 다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의자 앞 부복하고 있는 인영에게서 나온 음성이었다. “아아. 일단 강제 이식에는 성공했어. 이제 최소 2주 동안은 지켜봐야지. 자리를 잡을 수 있는지, 없는지.” 그 물음에 의자에 앉은 인영이 대답했다. 그리고 서서히 눈을 뜨자 시뻘건 안광이 어둠 속에서 타올랐다. 붉은 안광은 곧 의자 아래를 응시했다. “벨리알.” 벨리알. 악마 14군주 중의 하나이며 대 악마 사탄의 최 측근. 그랬다. 지금 이야기를 주고받는 두 인영은 바로 '모든 악마의 왕' 사탄과 '마귀' 벨리알이었다. 사탄은 바로 말을 잇지 않았다. 잠시 오른손에 쥔 와인 잔을 천천히 들이키고는 연초 하나를 꺼내 들었다. 치익, 치이익. “현재 진행 상황이 어떻지?” 비로소 목소리가 이어졌다. “준비는 모두 끝난 걸로 압니다. 이제 등활 지옥으로 가는 포탈만 열 수 있다면….” “호, 벌써? 아스타로트 치고는 꽤 성실한데.” “아스타로트 님만 진행하신 게 아니니까요. 벨제부브 님, 아스모데우스 님, 바알 님….” “그렇지. 벨제부브나 아스모데우스는 그렇다고 쳐도, 바알은 꽤 의외였어. 아마 잔혹한 파괴자로서 호승심을 느낀 모양이던데.” 사탄은 그렇게 말하고는 킬킬 웃었다. “…그리고 사탄 님까지, 입니다.” 그러나 벨리알이 한 박자 늦게 말을 잇자 사탄은 웃음을 뚝 그쳤다. 그리고 와인 잔을 들어올리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보였다. “내가 끼어든다는 게 마음에 안 드나? 사실대로 대답해라.” “…예.” “흐흐, 그런가.” “죄송합니다.” 벨리알은 곧바로 머리를 조아렸으나 사탄이 상관없다는 듯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 상관없기는 한데. 그냥 좋게 생각하라고. 실제로 건너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씨앗 하나만 뿌렸을 뿐이야. 그것도 무용지물이 될 뻔한 씨앗을 말이야.” “허나….” 거기까지 말한 벨리알은 잠깐 숨을 삼켰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자 무언의 허락이라고 생각하고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아직도 대계의 예언이 마음에 걸립니다.” “…….” “사탄 님도 아시다시피, 대계의 예언은 지금껏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 이 계획이 그 예언의 일부를 실행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결과는 똑같겠지.” 사탄은 벨리알의 말을 전부 듣지 않고 중간에 끊어버렸다. 벨리알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지만, 사탄은 여전히 부드러운 태도로 와인 잔을 들어올렸다.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번 계획을 꽤 높게 평가하고 있어. 지옥 대공을 끌어들인다는 것도 그렇고, 그 계획에 4명, 아니 5명의 대 악마가 참가하는 것도 그렇고. …항상 개별적으로 움직이던 대 악마들이 처음으로 힘을 합쳤다는 말이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 계획은 확실히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데.” 이어진 발언은 평소 사탄이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건설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벨리알의 낯에 미미한 걱정이 그늘지었다. 그 누구보다 '독립된 존재.'임을 강조하던 사탄이 저런다는 건, 사탄 또한 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말인즉, 악마들이 얼마나 몰려있는지에 대한 방증이었다. “사실, 나도 알고는 있어. 이번 계획이 성공하지 못할 거라는 것 정도는.” 그때였다. 벨리알의 얼굴이 잔뜩 굳음과 동시에 사탄의 눈매가 가로로 쭉 찢어졌다. 한순간 두 눈동자에 진득한 빛이 스쳤다. “지옥 대공이 그 정도로 강한 존재라면…. 거기다 지옥은 그년의 홈 그라운드잖아. 아무리 완벽하게 준비한다고 해도, 무조건 변수는 생길 거다.” 벨리알이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그러면….” “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는 말이 무조건 실패를 의미하는 건 아니잖아? 변수는 잡으면 된다. 그래서 내가 몰래 끼어드는 거고.” “주, 주군.” “뭐, 실패해도 어쩔 수 없지만. 하지만 그때는 정말로 북 대륙을 포기해야겠지.” “…….” “아, 그나저나. 벨리알. 너도 이번 계획에 참가해보는 건 어때?”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벨리알이 허겁지겁 머리를 들었다. 사탄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아스타로트한테 들어보니 지옥 대공은 정말 굉장한 절색이라고 하던데. 신은 물론, 어지간한 천사가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로. 가서 구경이나 한 번 해보지 그래.” “…예?” 그러자 이번에는 벨리알이 어안이 벙벙하다는 기색을 비췄다. 그 표정 변화가 재미있는 걸까? “하하. 농담이다. 지금 재밌는 계획을 앞두고서 지금 한창 기분이 좋으니까, 이해하라고.” 사탄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튼, 이 정도면 충분한 대답이 되었나? 벨리알.” 벨리알은 대답할 수 없었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탄의 진정한 의중을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사탄의 휘하로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모든 악마들의 왕.'을 의심했는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오늘 사탄의 말투나 태도는 예전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모든 것은 사탄의 뜻대로.” 그러나 결국 벨리알이 대답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다. 이윽고 한 번 더 와인 잔을 들이켠 사탄은 태연히 몸을 일으켰다. “아무튼, 경과는 계속 보고하도록.” 태우던 연초를 잔 안에 넣고는 공간을 나섰다. 이내 사탄의 발소리가 멀어져 갈 무렵, 공간에는 고요한 정적이 찾아 들었다. 미묘하게 곤두서 있던 기류도 가라앉았다. 그렇게 벨리알은 공간에 홀로 남게 됐지만, 여전히 의자를 향해 부복한 채로 있었다. “저는….” 문득, 벨리알의 입이 열렸다. 마치 여전히 사탄에게 말하는 것처럼. “…계획이 실패에서 그치지 않았을 때가 두려운 겁니다.” 그리고 막연한 불안감이 담긴 목소리가 나직하게 이어졌다. ============================ 작품 후기 ============================ ㅇ<-<…. 0637 / 0933 ---------------------------------------------- 비비앙과 화해하다. “이제 강철 산맥은 지긋지긋해. 그러니까 어서 나가자.” 거인들의 터전에 도착한 다음날. 형은 아침이 되자마자 나를 호출하더니 생뚱맞은 말을 꺼냈다. 나는 최대한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며 형을 응시했다. “…왜 그렇게 쳐다보니?” “아니,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해서. 지금 바로 나가자는 소리야?” 그러자 형은 싱겁게 웃고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 말이 아니라. 그러려면 애초에 요새 건설도 하지 않았지.” “그럼?” “어차피 이제 곧 끝나지 않아? 네가 그랬잖아. 거인들의 터전까지만 공략할 수 있다면, 강철 산맥 공략은 거의 끝난 것과 다름없다고.” “흠.” 확실히 그렇게 말하기는 했다. 이제 사흘만 진군하면 강철 산맥을 벗어날 수 있고, 이후 나흘 정도 되는 거리에 아틀란타가 있다. 말인즉, 여기서 아틀란타까지는 약 이레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어떻게?” 형의 말은 이해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어떻게?’가 문제였다. 형이야 내가 말해줬으니 알고 있다손 치더라도, 다른 사용자들은 곧 강철 산맥이 끝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잖은가. 그렇다고 사흘 거리까지 정찰 부대를 운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걱정 마. 이미 생각해둔 방법은 있으니까.” 그러나 형은 씩 웃으며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잠시 머리를 갸웃했으나 자신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형을 보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쪼롱이가 없네?’ 나만 보면 항상 짹짹거리며 달려들던 녀석이 오늘따라 웬일로 조용하나 싶었다. “그럼 쪼롱이를 이용하겠다는 소리야?” “이용이라니. 그냥 이삼일 정도 바람 좀 쐬고 오라 했어.” ‘이미 보냈구나.’ 하여간 잔머리(?) 하나는 정말 잘 돌아간다. 그러나 설령 형의 생각대로 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있다. 동부, 남부, 북부가 한 번씩 공략을 완료했으니 이제는 다시 동부가 나설 차례였다. 허나 이제껏 해온 꼬락서니를 보면 동부가 순순히 나설 지…. 아니 잠깐만. ‘이제 강철 산맥은 끝났잖아?’ 나는 그제야 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형. 설마….” “후후. 너는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으라고. 나머지는 형이 알아서 할게.” 내 표정을 읽었는지 형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어서 자신을 믿으라는 듯 가슴을 탕탕 치기까지. 하기야 엄밀히 따지면 나는 남부 원정대 소속이니 이 문제에 끼어들 건더기가 없다. 거기다 저렇게까지 말하니 이쯤에서 빠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알았어.” “그래 그래. 아차, 수현아.” 이제 더 할 이야기는 없다는 생각에 몸을 돌리려는 찰나, 형이 까먹은 게 있다는 듯 나를 불렀다. “왜?” “아, 다른 게 아니라 혹시 이스탄텔 로우 로드 연락 받았나 해서.” 응? 한소영의 연락을 받았냐고? ‘있었나?’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남부 요새를 나온 이후 딱히 받은 기억은 없다. “아니? 없는데.” “그래? 이상하네….” “……?” “어제 연락이 두어 번 왔거든. 그래서 그림자 여왕한테 전해달라고 했는데, 듣지 못했어?” 두 번이나 연락이 왔는데 고연주가 중간에서 가로챘다…. 이거, 뭔가 냄새가 풍긴다. “한 번 알아봐.” 결국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형의 천막을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고연주를 찾아가고 싶었지만, 우선은 갈 데가 있었다. 형이나 백한결이나 금방 회복할 수 있었지만, 안솔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어찌 보면 그렇게 된 게 내 책임도 있으니만큼, 회복 추세도 확인할 겸 하루에 두 번은 꼬박꼬박 병문안을 가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드나들었던 만큼 부상자 관리소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막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나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나보다 먼저 온 선객이 있었기 때문이다. 슬쩍 안을 들여다보자 간이 침대에 죽은 듯 누워 있는 안솔과, 좌우에서 걱정스러운 기색을 비추는 두 남녀가 보였다. 임한나와 안현이었다. 안현은 머리를 약간 숙인 채 애틋하기 그지없는 눈으로 안솔을 보고 있다. …왠지 모르게 들어갈 분위기는 아닌 것 같다. “후….” “얘는. 복 달아나게 한숨을 쉬고 있어.” “그냥…. 갑갑해서요.”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응?” 임한나가 달랬으나 안현이 머리를 가로젓는다. “사실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요. 계속 이렇게 혼수 상태라니….” “현아.”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데….” “…그럴 거야. 분명 그럴 거니까, 이만 가서 쉬고 있어. 솔이는 누나가 보고 있을게.” 안현은 미동도 보이지 않고 한참이나 안솔을 응시했다. 그러나 결국 머리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내 힘없이 반대편으로 나가는 안현을 보다가 나는 한 걸음 안으로 내디뎠다. “왔어?” 그러자 임한나가 몸을 살짝 굽힌 채 간이 침대를 매만지며 말했다. 아마 아까 왔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임한나의 반대편, 아까 안현이 서 있던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냥 들어오지. 괜찮은데.” “분위기가 조금 아닌 것 같아서. 아무튼 안솔은 어때?” 그제야 나를 바라본 임한나는 상냥한 미소를 짓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차도가 없다는 뜻인가? 제 3의 눈으로 확인해보자 그렇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꿈이라도 꾸는 건가? 얼굴이 참 편안해 보여.” 임한나는 마치 엄마를 연상케 하는 온화한 얼굴로 안솔의 머리를 사분사분 쓰다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신재룡과 임한나가 쭉 부상자 관리소를 돕고 있다고 했던가.’ 문득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래 이래저래 신경을 쓰지 못한 일이 많았는데, 클랜원들이 알아서 처리해주고 있었다. 대강 듣기로는 부상자 관리소는 물론, 경계 임무도 빼먹지 않고 꼬박꼬박 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도와주러 온 입장에서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지만, 클랜원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아니, 스스로 하겠다고 나섰다. 그런 만큼 현재 사용자들이 생각하는 머셔너리는 ‘쟤네 왜 왔어?’가 아닌, ‘역시 머셔너리구나.’였다. 왜 서북부 사용자들이 나만 보면 부담스러울 정도로 인사를 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물론 안솔한테도 고맙다. 그때 대신 맞아주지 않았다면 지금 간이 침대에 누운 사람은 안솔이 아닌 형이었을 테니까. “수현아.” 그렇게 한참 상념에 잠겨있던 찰나, 문득 임한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우리 솔이 자는 모습 참 예쁘지? 꼭 천사 같아.” 임한나는 색색 숨을 내쉬는 안솔을 예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보고 있었다.(사실 임한나가 상반신을 굽힌 탓에 가슴이 아래로 크게 쏠린 게 먼저 눈에 밟혔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나는 가만히 안솔을 응시했다. 잘 보면 자고 있을 때의 안솔은 임한나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조금의 걱정도 없어 보이는 편안한 얼굴, 꼭 다문 앙증맞은 입술, 그리고 벌름거리는 코…. ‘…어?’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비볐다. 그러나 재차 바라본 안솔은 확실히 코를 벌름거리고 있었다. 살짝 벌어졌다가, 우므러졌다가. 마치 냄새라도 맡는 것처럼. 그때였다. “으응….” 미약한 침음을 흘린 안솔이 갑자기 행동을 개시했다. 천장을 보는 방향으로 반듯하게 누워 있다가 내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린 것이다. 흡사 레이저 탐지기라도 된 듯이 말이다. 이어서 그대로 꾸물꾸물 고개를 움직여오더니 내 오른 허벅지에 폭, 코를 묻었다. 그리고는 “으~응.” 미묘한 신음을 흘린다. ‘뭐, 뭐지? 분명 아까 확인했을 때는 혼수 상태였는데?’ “소, 솔아? 솔아! 정신이 들었니?” 임한나가 급한 목소리로 외쳤지만 안솔은 일말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스리슬쩍 한 걸음 물러난 순간. “히잉….” 안솔은 곧바로 아미를 찌푸리며 앙탈을 부렸다. 그러나 도로 코에 허벅지를 대주자 금세 표정을 풀기까지. “…얘 혼수 상태인 거 맞아?” 어이없는 기분에 물었으나 임한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못 말리겠다는 듯 쓴웃음으로 화답했을 뿐. ‘참 신기한 아이라니까.’ * 거인들의 터전을 정리한 이후, 본격적인 요새 건설이 시작되었다. 그와 동시에 서북 원정대에는 잠깐의 휴식 시간이 찾아 들었다. 요새 건설은 거주민들이 맡은 임무이니만큼 사용자들은 딱히 할 일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형만큼은 휴식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총 사령관은 공략이 끝나고 나서도 가장 바쁜 자리였다. 형은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공략이 종료됐음을 연락했다. 그러면 순서상 이제 동부가 나서야 하는 건 당연지사. 그러나 예상대로 동부는 순순히 원정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 시일이 짧은 거 아니냐.’ 혹은 ‘진군 거리가 의심스럽다.’는 등등, 거의 트집에 가까운 태클을 걸었다. 서북 원정대의 예상치 못한 공략 성공에 심기가 거슬린 것 같은데, 아마 이번 공략에 참여한 사용자라면 동부의 태도가 도를 넘어섰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조차도 그냥 동부를 박살내버릴까 심각하게 고려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형은 그러지 않았다. 무수한 사용자들의 분노 어린 외침에도 묵묵히 기다리더니, 이틀 후, 쪼롱이가 돌아온 것을 기점으로 갑작스럽게 추가 발표 및 연락을 넣은 것이다. ‘쪼롱이로 확인해본 결과, 사나흘 거리에 강철 산맥이 끝나는 지점이 있음을 확인했다.’ ‘동부의 의견이 그렇다면 우리가 며칠 더 진군하기로 하겠다.’ 바로 이렇게. 사실 형의 발표도 말이 안 되는 발언이기는 했다. 강철 산맥 횡단이나 새로운 대륙 발견은 100% 업적으로 나올 것이며, 업적은 보상과 직결된다. 그런 만큼 모든 원정대가 동일하게 부여 받아야 하는데, 그걸 혼자서 독식하겠다는 말이었으니까. 그러나 누구도 형을 욕하지는 않았다. 다들 형이 무엇을 노리고 그런 발언을 했는지 암암리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인즉,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동부 원정대는 ‘가겠다.’고 입장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괜한 자존심을 세운다고 업적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옛말에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고 하던가? 약 사흘에 걸쳐 옥신각신 이루어진 공방은 형의 완승으로 끝났다. 동부는 자신들의 치졸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만천하에 웃음거리가 돼버린 것이다. 남부처럼 가만히 있었다면 중간이라도 갔을 텐데 말이다. 어쨌든 결국 동부가 먼저 출발해 남부와 합류하고, 이후 동남부가 같이 오는 걸로 일이 매듭지어졌다. 물론 여기서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아니, 동서남부 전체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업적을 부여 받으려 오는 것까지는 좋지만, 요새를 지은 이상 최소 방비 인원도 남겨놔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성공을 앞둔 상황에서, 과연 어느 사용자가 남고 싶어하겠는가. 결국에는 필연적으로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내가 신경 쓸 건 아니지.’ 생각 그대로, 최소한 ‘남는다.’에 대해서는 내가 하등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머셔너리는 이미 남부 요새에서 나온 상태였고, 한소영 성격상 이 문제와 관련해 다시 돌아오라고 할 일은 만무했기 때문이다. 서북 원정대와는 소속이 다르니 애당초 언급할 가치도 없고. 그렇게 공략 성공을 앞두고 미묘한 눈치 싸움이 벌어지는 가운데, 오직 우리 머셔너리 만은 편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런데, 뭔가 중요한걸 까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 작품 후기 ============================ 아 독자 분들, 진짜 미치겠습니다. 큰일났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말씀 드리면, 634회 내용을 어머니가 읽어보신 것 같습니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요, 그 내용을 그때 지방에 내려가서 썼잖아요. 그런데 그걸 쓴 상태에서 워드를 끄고 울트라 북을 종료했어야 했는데, 그대로 놔둔 겁니다. 그러자 절전 상태로 전환됐는데, 제가 그걸 종료했다고 착각해버린 거예요. 그 이후로 한 번도 키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어머니가 필요하시다고 하셔서 빌려드렸는데, 몇 시간 후에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거 워드가 켜져 있었다고요. 진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말씀은 안 보셨다고는 하는데, 최소화 시켜놨다고는 하셨는데, 아 그러면 왜 몇 시간 후에 알려주셨을까요. 거기 불꽃 성애 신도 있는데…. 아 신경 쓰여 죽겠네요 진짜. ㅜ.ㅠ 0638 / 0933 ---------------------------------------------- 비비앙과 화해하다. 제 3지역 공략이 종료된 후, 시간은 화살처럼 흘렀다. 강철 산맥의 끝을 발견했다는 발표 이후, 동부는 예상외로 빠르게 내부 상황을 정리했다. 이틀 전 남부 요새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아마 지금쯤 남부와 함께 이곳으로 오고 있을 것이다.(동부의 신속한 진군 소식을 들은 형은 ‘수현아. 정말 사흘만 진군하면 강철 산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 맞지?’ 라고 걱정스레 물어와 나를 웃게 하였다.) 요새 건설도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틀이 잡혀가고 있었다. 물론 완성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지만, 이제 좀 뭔가 정리가 되어가는 기분이랄까? 한여름 밤의 꿈같았던 거인들과의 전투는 차차 기억 한구석으로 묻히고, 서서히 현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원정대가 안정되자 형도 무조건 바쁘게 움직이지만은 않았다. 오후에 갑자기 나를 비롯한 클랜 로드들을 호출하더니 거인들의 터전에서 얻은 고기를 각각 한 아름 안겨주었다. 그리고 ‘지금껏 정말 고생들 하셨습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는 말을 건네며 오늘 딱 하루 음주를 허가해주겠다고 하기까지. 형의 의도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동료를 잃은 슬픔을 이제 막 극복해가는 시점에서, 축제의 힘을 빌어 초극(超克)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겠다는 의도였을 것이다. 고기를 들고 돌아와 오늘 밤 우리끼리 간소하게 축제를 벌이자는 얘기를 꺼내자, 클랜원들은 두 팔 벌려 환영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사실 너무 격하게 좋아해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그냥 이해하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이제껏 계속 달리기만 하면서 지치기만 했지, 그동안 어지간히 축하할 일이 없지 않았는가. 그렇게 강철 산맥의 공략에 성공했다는, 그리고 안솔의 회복을 기원하는 명분 아래 클랜원들은 축제 준비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느 클랜원들은 식사 준비에 들어가고, 어느 클랜원들은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주류를 얻어왔다. 안현과 진수현은 식사를 준비하는 곳 앞에서 그릇을 두드리며 각설이 노래를 부르다가, 국자에 정수리를 한 대씩 얻어맞고 쫓겨나기도 했다. “아야야…. 아파라….” 머리를 부여잡은 채, 지면에 주저앉아 울상을 짓고 있는 진수현을 보며 나는 픽 웃고 말았다. “그러게 진득하니 기다리지 그랬어.” “혀, 형님. 그게 아니라요….” “……?” “그냥 좋으니까 그랬죠. …어?” 그 순간, 입을 삐쭉 내민 채 웅얼거리던 진수현이 갑자기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내 울상 가득한 얼굴에 곧바로 화색이 돌더니 내 어깨너머를 바라보며 외쳤다. “혀, 형님! 술이에요, 술!” “술?” “보세요! 저렇게나 많이 가져왔다고요!” “흠?” 흘끗 시선을 돌리자, 진수현의 말대로 서너 명이 양손 가득 주류를 든 채 낑낑거리며 오는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비비앙이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걸어오고 있었다. “이야, 역시 비비앙이네! 오늘 술 걱정은 덜겠어요! 형님!” 확실히 그렇기는 했다. 남부 요새를 떠날 때 급하게 나오느라 최소한의 필요한 것만 챙겼는데, 저 정도면 오늘 주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그나저나, 역시 비비앙이라니? 관심 있는 거 아니면 움직이기도 싫어하는 녀석인데? “비비앙은 왜?” “아, 모르셨어요 형님?” 궁금한 기분에 묻자 진수현이 나를 돌아보더니 해맑게 웃으며 비비앙을 가리켰다. “비비앙, 요즘 엄청 인기 좋아요!” “인기가 좋다고?” “예. 그때 우리가 거인들한테 존나게 밀리고 있을 때요, 마수 군단으로 뒤치기 한 번 제대로 해줬잖아요?” “그랬지. 그러니까 목숨을 구해줘서 고맙다는 의미야?” “그게 가장 크죠. 그런데 그 후로 사용자들이 좀 알아주니까, 이곳저곳 꽤 으스대고 다녔거든요.” “…으스대고 다녔다고?” “그런데 그 모습이 사랑스럽다고 난리 치는 애들이 쫌 있나 봐요. 그래서 요즘 상당히 거만해요.” “…….” 생각보다 상세히 이어지는 진수현의 설명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다들 알아서 자제하는 줄 알았는데, 설마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기야 비비앙이니까.’ 어쨌든 사랑스럽게 봐줬다니 다행이기는 하나(사실 어디가 그런지 이해는 잘 안 가지만 서도.), 비비앙을 생각지 못한 게 큰 불찰이다. “아, 맞다!” 그때였다. 싱글벙글 웃고 있던 진수현이 갑자기 두 눈을 크게 뜨며 소리를 질렀다. 마치 무언가를 생각지 못했다는 듯이. 가만 보면 얘도 참 표정 변화가 풍부하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우, 우리…. 오늘밤 경계 있지 않아요?!” …어라? ‘이건 진짜 큰일인데.’ 적어도 이 상황에서는 가벼이(?) 볼 수 없는 발언이었다. 형은 생각보다 완고한 면이 있어, 어느 상황에서도 절대로 경계를 느슨하게 하지 않는다. 아까도 경계만큼은 제대로 하라고 확실히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렇게 맛있고 즐거운 시간을 앞두고, 그 누가 경계를 서고 싶어 할까? 차라리 순번이 정해져 있으면 깔끔하다. 그러나 듣기로는 근래에는 따로 순서를 정하지 않고, 여유가 되는 이들이 돌아가면서 경계를 섰다고 한다. 아무튼 방금 진수현의 외침은 아마 모두가 들었을 것이다. 조금 전까지 시끌시끌하던 주변에 삽시간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으니까. “아~. 나, 나는 요리나 도와주러 가볼까나…?” 스리슬쩍 침묵을 깨트린 비비앙은 여기서 빠지겠다는 듯 살금살금 걸음을 움직였다. 그러나 “개소리 마십시오.”라 말한 선유운이 쏘아 보낸 화살에 비명을 지르며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 그냥 솔이를 데려다 눕혀놓는 건 어때?” 이유정도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그러나 곧 무수히 쏟아지는 뜻 모를 눈초리에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말았다. 이후 조금 더 기다려보았으나, 역시나 누구 한 명 자신이 하겠다고 나서겠다는 이는 없다. 이해는 가지만 쓴웃음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 제가 하겠습니다. 하, 하하….’ …아마 그 사람이었다면 이럴 때 바로 나서주었겠지?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결국에는 내가 정할 수밖에 없다. 이내 모두의 시선이 내게 모여,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경계는 몇 명이 나가야 하는데?” “두 명이요.” 대답은 옆에서 들려왔다. 나는 진수현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이렇게요?” “처음 말을 꺼낸 사람이 여기서 경계 나갈 사람을 정하는 거야.” “에엑? 그,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말인즉, 일종의 떠넘기기라고 할 수 있었다. 누구를 고르든 원망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포기하기는 싫다. 진수현은 절대로 싫다는 듯 세차게 손사래를 쳤으나 바꿀 생각은 없다. “그 대신에.” 물론 그냥 떠넘기려는 생각도 없었다. “이번 경계는 내가 설게. 끝날 때까지, 쭉.” “…예?” “두 명이 가야 한다며? 그러니까 한 자리는 내가 맡을 테니, 나머지 한 자리만 네가 뽑으면 되잖아.” “아, 아니요. 굳이 형님이 가실 필요는….” 진수현은 약간 멍해 보이는 낯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갑자기 두 눈에 강렬한 이채를 띠었다. 이윽고 입꼬리를 씩 끌어올린 진수현이 꾸벅 머리를 숙였다. “예, 형님. 알겠습니다. 나머지 한 명은 제가 책임지고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부탁한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몸을 돌려 경계 지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잠시 후. “자자! 한 자리, 딱 한 자리가 남았어요! 오늘밤 내~내! 그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형님과 일대일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자리가 딱 한 자리!” 등 뒤로 진수현이 신나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자리를 원하시는 분은 저한테 합당한 성과를 제시…! …어, 어? 왜 달려오는 거예요? 때, 때리지 마! 갑자기 왜 때리는 건데?!” * 먼저 경계 지점에 도착한 후, 어느새 1시간이 흘렀다. 기다리는 동안 주변에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았으나 딱히 지루한 감은 없다. 축제처럼 시끌벅적한 것도 나쁘지 않지만, 아무래도 조용히 있는 걸 더 선호하니까. ‘하지만 과연 누가 올지는 궁금한데.’ 아까 진수현의 외침을 들어보니 상당히 경쟁이 치열한 것 같던데. 과연 누가 오게 될까? 이런 기분은 정말로 오랜만이다. 마치 친구 소개로 첫 번째 소개팅을 할 때의 기분이랄까? 해답은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별안간 공기 중에 고소한 음식 냄새가 섞여 듦과 동시에 저쪽에서 누군가 비틀비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양손에 그릇과 주류를 한 아름 들고 오는 사용자는(심지어 정수리에도 병을 얹은 상태였다.), 다름 아닌 비비앙이었다. 절로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하니 비비앙이 올 줄을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네가 여기 웬일이야?” “흥. 오해할 것 같아서 미리 말해두는데 말이야.” 그러나 비비앙은 조심스럽게 그릇과 주류를 내려놓고는 톡 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경계에 지원하면 음식을 가장 많이 준다고 해서 그런 거야. 절대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는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그리고는 건너편에 털썩 주저앉는다. 뭔가 묘하게 납득 가는 말이라 생각하며 그릇에 손을 뻗은 찰나, 갑작스레 비비앙이 빠르게 접시를 치웠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기분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으~응? 너야말로? 이건 내가 먹으려고 가져온 건데?” “뭐?” “내가 가져왔으니까 내 것이지. 주류도 내가 직접 얻어온 거고. 네 것은 없어.” “야, 치사하다.” “그래~. 나 치사해~. 아무튼 네건 네가 직접 받아와~. 아니면 먹는 거 구경이나 하던가~. 아! 경계 도중이니까 자리 이탈은 불가능 하려나~?” 그렇게 열심히 깐족거린 비비앙은 정말로 혼자서 먹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따금 손가락을 쪽쪽 빨면서 “음~. 맛있다~. 역시 고연주와 임한나의 음식 솜씨는 최고야~.”라고 말하기까지. 누가 봐도 나를 약 올리려는 태도일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머리채를 휘어잡아 그릇에 처박아버리고 싶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비비앙이 음식을 먹는 와중 나를 자꾸만 힐끔힐끔 쳐다봤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먼저 말을 걸어주었으면 하는 것처럼. ‘나 참, 애도 아니고.’ 속으로 헛웃음을 지은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지 그래? 애처럼 굴지 말고.” “뭐, 뭐?” 마침 나와 눈을 마주친 비비앙은 깜짝 놀라며 새된 소리를 냈다. 그러나 곧 표정을 관리하더니 한껏 비웃음을 띤 얼굴로 종알거렸다. “하, 그게 무슨 말씀이실까? 너야말로 먹고 싶으면 먹고 싶다고 말해?” “별로? 그냥 네가 나와 대화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정말 웃기지도 않아. 아니, 그전에 어쩐 일이야? 맨날 나를 무시하는 분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을 거실까~?” “오호, 그렇게 나오시겠다?” 비비앙은 오늘 아예 날을 잡은 듯했다. 목소리도 악에 받쳐 있었다. 아주 작정하고 온 모양이다. 하기야 그동안 내가 좀 심하기는 했다. 고연주 앞에서 빨리 비키라는 심한 말도 했고, 경계 때 몇 시간 동안 내 주변을 서성이는걸 무시하기도 했고, 저번에 약간 강도 높게 면박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비비앙이잖아?’ 그렇게 생각한 나는 품으로 손을 넣어 주섬주섬 하나를 꺼내 들었다. 비비앙이 저렇게 나온다면 나도 생각이 있다. 이윽고 나는 완전히 꺼낸 기록 하나를 여 보라는 듯이 크게 펄럭였다. 계약서였다. 나는 차분히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계약서의 이름으로 명하오니.” “어, 어?” 한창 냠냠거리며 고기를 먹던 비비앙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어서 손에 들린 계약서를 봤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자, 잠깐만!” 하지만, 말은 행동보다 빠르다. “지금 이 자리에 온 진실된 이유를 말하라.” 그러자 한순간 비비앙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삐걱삐걱 몸을 움직여 내 앞으로 오더니 돌연 몸을 굽히며 넙죽 엎드린다. 오, 이거 재미있는데? “그래서, 오늘 경계에 지원한 진짜 이유는?” “저, 저는…. 주인님인 김수현 님과 둘이서만 있고 싶어서 경계에 지원을 했습니다. 경쟁이 무척이나 심했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겨우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럼 왜 아까 그렇게 말했지?” “최근에 주인님인 김수현 님에게 서운한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야속하다는 생각에 마음에도 없는 말을 지껄였습니다.” “애초에 그렇게 말하면 됐잖아?”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에는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주인님인 김수현 님이 먼저 저에게 말을 걸어주고 살살 달래주시면, 못이기는 척 받아들이겠다는 맹랑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근래 소원해진 관계를, 이번 기회에 회복하고 싶었습니다.” 음음. 역시 그랬어. 비비앙은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아. 아주 말이 술술 나와. 아무튼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에 나는 계약서를 아래로 툭 떨어트렸다. 그리고 그릇 앞에 주저앉아 낄낄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는데? 어떻게 생각해. 비비앙?” “…….” “아무튼 네가 그렇게 원하니까 같이 먹어주도록 하지. 이리와. 같이 먹자.” “…….” 그러나 뜻밖에도 비비앙은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몸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넙죽 엎드린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뿐. 이제 어떻게 하나 보려는 마음에 홀로 잔을 비우며 구경했지만, 10분이 지나도 비비앙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몇 가지 달라진 게 있다면, 양손을 꽉 말아 쥐었다는 것과 조금 전 아담한 어깨가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점차 숨소리가 거칠어져 간다는 것. ‘설마….’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비비앙의 턱 끝에 손을 댔다. “너…. 혹시 우냐?” 억지로 들어올리자 비로소 비비앙이 얼굴을 보였다. 그러나 무에 그리 분한지,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고 숨은 씩씩 몰아 내쉬고 있다. 나를 노려보는 두 눈에는 이미 눈물이 가득 괴어 글썽글썽해진 상태였다. 그러다 결국, 눈물 한 줄기가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너, 너 진짜….” 아랫입술을 꾹 깨문 비비앙이 간신히 울음을 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존심이 크게 상했는지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나를 죽일 듯이 째려본다. “이 나쁜 자식…. 이제 너랑은…. 정말로, 정말로 끝이야.” 그러나 곧 목울대를 한 번 크게 움직이고는 표독스럽게 내뱉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쿵쿵거리며 걸어간다. 꽤나 강수를 두었지만, 나는 계속해서 유들유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로?” “시끄러워! 이 나쁜 새끼야!” “뭐, 마음대로 해. 그런데 정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계약서….” “……!” 그러자 비비앙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계약서의 이름으로 명하오니…. 돌아와서 나한테 안겨라.” “이, 이익!” 이어지는 비비앙의 행동은 참으로 볼만했다. “이이이익! 시, 싫어!” 싫다고 끝끝내 반항하는 비비앙. 흡사 오기 싫다는 듯, 격한 신음을 흘리고 안간힘을 쓰며 반항했지만, 결국에는 몸을 돌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로보트처럼 말이다. 결국에는 내 품에 얌전히 안긴 비비앙을 보며 나는 크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하하하, 하하하! 아, 미치겠네 진짜.” “뭐가 웃겨! 네가 계약서를 이용해서 억지로 명령한 거잖아!” 웃음이 거슬린 걸까? 비비앙은 나를 꽉 안은 상태에서 여전히 노려보기를 멈추지 않으며 벌컥 화를 냈다. 마치 어쩔 수 없이 안겼다는 태도가 다분히 엿보인다. 하지만 웃길 수밖에 없다. 사실 나는 방금 계약서의 힘을 이용하지 않았다. 계약서는 아까 비비앙의 앞에 떨어트렸고(계약서는 내가 갖고 있어야만 효력이 발동한다.), 아직 줍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그, 그렇기는 한데…. 큭! …비, 비비앙. 사실은 말이야.” “…뭐!” “나, 나 있잖아. 실은, 이번에 계약서의 힘은 이용하지 않았어.” “…어?” 그 말을 꺼낸 순간 비비앙의 눈이 휘둥그래 변했다. 나는 더 말하는 대신 아까 계약서를 떨어트린 자리를 가리켰다. 잠시 후, 얌전히 땅에 놓인 계약서를 확인했는지, 비비앙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으며 기막히다는 빛이 스쳤다. 나는 놀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참, 너도 솔직하지 못하다. 응?” 비비앙은 한동안 할 말을 잃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잠시 후, 코를 훌쩍훌쩍 들이키며 수 차례 눈을 깜빡 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얼굴을 서글프게도 일그러뜨리며 입을 삐쭉삐쭉 내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으허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결국에는 참지 못했는지, 비비앙은 목젖이 보일 정도로 입을 크게 벌리고는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동안 참고 참은 눈물이 서럽다는 듯이 넘쳐흐른다. ‘아, 울렸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킥킥 웃으며 비비앙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아까는 몰랐지만, 지금만큼은 비비앙이 무척이나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아, 진짜 엄청 오랜만에 일상 내용을 적으니까 재미있네요. 하하하. 오늘 내용으로 지금껏 쭉 이어진 무거운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해소됐기를 바래요. :) 그리고 어제 코멘트는 잘 읽어보았습니다. 제 성별 논란은 여전하더군요. 혼란스러워하는 독자 분들께 말씀 드리건대, 저는 남자에요. 남성이에요. 사내에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도 1로 시작해요. XY 염색체에요. 그리고 다른 독자 분들도 이상한 말씀은 하지 말아주세요. 강도가 심해질 경우 2차 로리 전쟁이 발발될 수도 있습니다. 1차 로리 전쟁은 제가 하루 만에 항복하고 용서를 구하기는 했지만, 2차부터는 진짜 후기만 아니라 내용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제발요. 네? …후. 그나저나 오늘 어머니가 저에게 복분자를 갈아서 주스를 만들어주셨거든요. 꿀도 잔뜩 넣고 얼음도 동동 띄워주셨지요. 그런데 어제까지는 복분자는 아버지 드리는 거라고 형이나 저나 손도 못 대게 했다는 말이에요? 헌데 오늘 저한테 주셨습니다(형한테는 주지 않으셨고요.). 말씀으로는 피로 회복에 좋다고는 하시는데,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ㅜ.ㅠ 0639 / 0933 ---------------------------------------------- 男 : 미안해. 女 : 뭐가 미안한데? 비비앙은 서글프게 울었다. 정말로, 정말로 구슬프게도 울어 젖히며 한참을 하소연했다. “어엉…. 너, 너 진짜 그러는 거 아니야…. 저번에 고연주 앞에서 기억나…? 나 그때 울면서 걸어갔는데도 결국에는 달래주지도 않고…. 어어엉….” ‘그러니까 누가 그때 성질 부리래?’ “그리고! 그때 너 불침번 설 때…! 야, 사람이 공을 세웠으면 조금 우쭐할 수도 있는 거지…. 그렇게 무시하는 게 말이 돼? 내가 무슨 보상을 바랬냐? 성과를 바랬어? 그냥 잘했다고, 그 칭찬 한 마디 해주는 게 그렇게 어렵니? 허어어엉….” ‘아니. 그건 네가 솔직하지 않으니까.’ “그래. 나도 무조건 잘한 건 아냐. 공략 도중에 안솔이랑 싸운 건 나도 잘못한 게 있으니까 이해해. …하지만, 이건 아니지? 응? 김수현, 이건 진짜 아니잖아. 이렇게 사람 가지고 놀면 재밌어? 사람 마음 갖고 놀면 재미있냐고오! 으아아아아아아앙!” ‘그러게 누가 먼저 까불래?’ 엉엉 우는 비비앙. 울음 반, 서글픔 반이 섞인 목소리로 그동안 느껴왔던 서러움과 야속함을 모조리 토해낸다. 그럴 때마다 꼬박꼬박 되받아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속마음에서 그쳤다. 이제는 거의 대성통곡 수준으로 울고 있었으니까. “하라는 것도 다 하고, 시키는 것도 다 하는데! 너어, 이번에 내가 어떤 마음으로 6군단 소환했는지 알아?” “그럼~. 알고 있지. 내가 너를 얼마나 든든하게 생각하는데. 그만큼 너를 믿으니까 맡긴 거야.” 비비앙은 양손으로 내 가슴을 번갈아 쳤고, 나는 그런 비비앙의 등을 연신 쓸어 내리고 어루만져주었다. 마치 아기를 어르고 달래는 것처럼. 그렇게 계속해서 달래주자 가슴을 치는 주먹의 강도가 서서히 약해져 가는 걸 느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왜 맨날 나만 미워하는 건데….” “아니야. 비비앙은 잘못한 것도 없고,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아.” “그럼 왜 자꾸만 못살게 구는 거야아…. 조금은 상냥하게 해줄 수도 있는 거잖아…. 아앙….” “그래, 맞아. 들어보니까 내가 잘못한 것 같다. 하지만 다 비비앙이 좋아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이만 뚝 하자. 응?” 그제야 비비앙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는 쳐다보았다. 벌겋게 변한 코는 여전히 훌쩍이고 가는 속눈썹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모습조차도 예뻐 보인다. “옳지…. 착하다….” 나는 한 손으로 비비앙의 머릿결을 쓸어 내렸고 다른 한 손으로는 눈물 자국 진 얼굴을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비비앙은 약간 얼굴을 찡그리기는 했지만 딱히 거부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손길을 느끼려는지 조금은 진정된 얼굴로 지그시 눈을 감기까지. 그 모습을 보자 절로 연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한바탕 실컷 눈물을 쏟은 비비앙은, 여전히 울먹임 가득한 목소리로 훌쩍이며 말했다. “…김수현. 나 정말 안 싫어해? 아니지? 막 진짜로 미워하고 싫어하는 거 아니지?” “물론이지. 내가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비비앙을 왜 싫어할까?” “정말로?” “그럼, 진심으로. 오히려 정말로 좋아하는걸.”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한두 번 눈을 깜빡인 비비앙의 얼굴이 삽시간에 황혼 빛으로 물들었다. “…거짓말.” 자그맣게 중얼거리기는 했으나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은 아니었다. “거짓말이 아니야.” “그, 그럼 증거를 보여줘.” 비비앙의 요청에 나는 알겠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였다. “어떻게?”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비비앙의 말이 이어졌다. “머리 쓰다듬어줘.” “좋아.” “아까처럼 얼굴도 닦아주고, 등도 쓸어내려 줘.” “알았어.” “예쁜 말 해주면서, 달래듯이 온몸을 막 어루만져줘.” “하하하.” 계속 이어지는 요청에 나는 가볍게 웃어 젖혔다. 하지만 하나도 거르지 않았다. 말 그대로 머리칼을 부드러이 쓰다듬어주고, 얼굴도 깨끗이 닦아주고, 등도 두드려주고, 예쁜 말을 하면서 전신을 어루만져주기까지. 그러는 사이 완전히 진정된 비비앙은 아랫입술을 살짝 내민 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빙긋 웃었다. “이제 됐어?” “…그리고 하나 더 약속해줘.” 그러나 비비앙은 약간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약속?” “그래. 앞으로 나를 또 괴롭힐 경우, 오늘처럼 꼭 달래주겠다고 약속해.” “응?” “시, 싫어?” 돌연 비비앙이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차라리 앞으로 아예 안 괴롭힌다는 건 어때? 오늘처럼 예쁜 말만 해줄게.” “어, 어?” 그러자 눈을 동그랗게 뜬 비비앙은 떨떠름히 나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굉장히 실망해 하는 기색이 얼굴에 역력히 드러난다. ‘왜 그러지?’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싫어?” 기껏 물었으나 비비앙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어라 말은 하고 싶은지 입술은 달싹이는데, 자꾸만 망설이는 모습이 보인다. “왜?” “우, 우으….” “응?” “괴, 괴롭히는 거는….” 우물우물 말을 잇던 비비앙은 결국 말끝을 흐리며 스리슬쩍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얼굴은 터질 듯이 빨개져 있다. 시무룩이 바닥만 바라보는 비비앙을 보며 나는 가만히 말을 음미해보았다. “그러니까 괴롭히는 건 괜찮다는 소리야?” “괘, 괜찮다는 게 아니라!” “……?” “그, 그거는 너의 자유 의지니까…. 내, 내가 간섭할 거리가 없다고나 할까….” 비비앙은 더욱 얼굴을 붉힌 채 몸을 슬슬 꼬며 말을 더듬거렸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사실 무슨 말인지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쯤에서 그만 져주기로 했다. 비비앙도 그걸 원하는 것 같고, 지금은 달래주는 입장이니까. “좋아. 그러면 앞으로 괴롭혀도 꼭 달래준다고 약속할게.” “그, 그래. 그거면 됐어.” “Ok, 알았어.” “…말해두지만 괴롭힘 한 번에 달래주기 한 번이야.” 이어지는 재확인에 나는 머리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렇게 확답을 해주자 비비앙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꼬물꼬물 몸을 움직였다. 서서히 자세를 바로 잡으려고 하는 게, 이제 좀 창피한 기분이 밀려오는 모양이다. 갑자기 얌전해진 비비앙이었지만, 이대로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비비앙.” 나는 비비앙의 몸을 천천히 돌린 후, 강제로 등을 내 가슴에 기대게 만들었다. 그 상태로 어깨에 팔을 둘러 껴안자 흠칫, 떠는 기척이 느껴졌다. 딱히 보지 않아도 얼굴은 잔뜩 긴장해있을 것이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기, 김수현? 지, 지금 뭐 하는 거야?” “우리 잠깐만 이러고 있자.” “나, 나 배고픈데…. 음식 식는데….” “그래서, 싫어?”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이자 비비앙의 몸이 부르르 떨린다. 이어서 입술을 살짝 벌리더니 미미하게 머리를 가로젓는다. 좋다는 의미겠지? 문득 느닷없이 장난기가 일어, 나는 한 번 더 비비앙의 귓가에 속살거리듯 말했다. “정말로 괜찮아? 나는 오늘 하루 종일 이러고 있고 싶은데. …후.” “히, 히이잉!” 끝에 살그머니 바람을 불어넣자 비비앙은 또 한 번 싱싱한 물고기처럼 퍼덕거렸다. 반응을 보니 약간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은 몰랐는데, 비비앙도 보아하니 몸이 상당히 민감하지 않은가. 어지간하면 참을 텐데,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도 격하게 반응을 한다. 그러면…. ‘비비앙이 오르가슴을 느끼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아니, 잠깐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하, 하지 마아….” 마침 비비앙의 애달픈 목소리가 들려와 장난은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오늘 목적은 비비앙의 마음을 완전히 풀어주는 것. 나는 그 목적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여전히 비비앙을 안은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구름이 낀 탓에 생각보다 달빛이 환하지는 않았지만, 흐릿하게나마 빛나는 광경도 가히 나쁘지는 않다. “달빛 예쁘지?” 그러자 끄덕끄덕. “그만 보고 밥 먹을까?” 이번에는 도리도리. ‘귀엽네.’ 색색거리는 잔뜩 긴장한 숨소리가 들려온다. 딱딱히 굳은 비비앙의 몸을 부드러이 쓰다듬으며 나는 계속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나는 비비앙을 안은 채, 비비앙은 내게 기댄 채. 우리는 한참 동안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밤하늘에 떠오른 달을 응시했다. ‘그런데 왜 자꾸 뭔가를 까먹은 기분이 드는 거지….’ * 축제 이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형의 의도대로 축제는 무사히 끝남으로써 원정대 분위기는 한층 밝아졌다. 나 또한 그동안 소원해졌던 비비앙과의 관계를 완벽히 회복할 수 있었으니, 아주 무의미한 시간은 아니라 볼 수 있을 것이다.(축제 다음날, 완전히 회복한 비비앙은 평소대로 까불며 이곳저곳을 방방 뛰어다녔다.) 아직 안솔이 깨어나지 않는 게 유일한 걱정이긴 하나, 예전보다는 희망이 생긴 상태였다. 적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였거니와, 내가 병문안을 갈 때마다 자꾸만 이상한(?) 반응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담당 사제로부터 도대체 왜 안 깨어나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말까지 들은 터라, 근시일 내로 깨어날 거라는 확신 아닌 확신이 생겼다. 그렇게 지금껏 쌓인 피로를 풀면서 기다리는 사이, 드디어 동남부 원정대가 서북 요새에 도착했다. 첫 번째 합류 연락을 받은 이후 눈 깜짝할 새에 닷새라는 시간이 흐른 것이다. 말인즉, 다음날 북 대륙 전체 원정대가 바로 요새를 떠난다는 소리였다. 중간중간 연락을 주고 받는 동안 서북 원정대도 차곡차곡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예상대로 동부 원정대는 커다란 환영을 받지 못했다. 아니, 환영이라는 말은 옳지 않을까? 정확히 말해보면 무시라는 말이 정답일 것이다. 기실 지금껏 북부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동부를 무시하는 처사는 사실 이해가 갈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동부 원정대 총 사령관인 조성호는 서북부의 태도에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뭔가 공략을 축하한다는 덕담을 건네기는커녕, 똑같이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나마 주변 부하 사용자들이나 이따금 한소영에게만 말을 붙이는 광경을 보았을 뿐, 형이나 북부 관계자들과는 속된 말로 '쌩까는' 모습을 보였다. 나로서는 조성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아무튼, 동서북부의 관계는 그렇다 치더라도. 동남부가 도착한 이후, 내 입장에서 한 가지 이해 못할 일이 생겼다. 이해 못할 일이란, 다름 아닌 한소영의 태도였다. 예상대로 한소영은 동부와 서북부 사이에서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했으나, 문제는 바로 나를 대하는 태도에 있었다. 딱히 두 팔 벌려 안아주거나 공식적인 치하를 바란 건 아니었다. 보는 눈도 많으니까. 그러나 직접 문까지 나가 맞이한 나를, 한소영은 본체만체하며 그대로 지나쳐버렸다. 찬바람이 스쳐 지나갈 정도로 말이다. 사실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나를 비롯한 머셔너리 클랜은 남부 원정대 소속이지 않은가. 하다못해 눈이라도 한 번 마주쳤다면 이런 감정을 느끼지는 않았을 텐데. 물론 평소 한소영다운 태도라고 할 수 있으나, 요새에서 나를 보낼 때 보였던 태도와는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옷깃이라도 살짝 붙잡고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동남부가 도착한 직후, 한소영의 주최 하 각 원정대의 총 사령관들만 모이는 회의가 잡혀있었으니까. 나는 자격이 되지 않아 회의에 참가할 수 없다. 결국에는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천막에 돌아와 머리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 그렇게 간이 침대에 걸터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을 즈음. “야! 머셔너리 로드!” 돌연히 새침한 목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흘끗 시선을 돌리자, 누군가 입구에 불쑥 얼굴을 들이민 채 나를 바라보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여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의외라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의아한 기분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연혜림?” ============================ 작품 후기 ============================ 띠링!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638회를 기점으로 수현 쟁탈 전쟁에 정식으로 참가함을 확인합니다.』 『비비앙의 주무기는 마조 모드로, 김수현의 사디즘을 각성시켜 관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 전쟁 참가 인원 : 정하연, 고연주, 남다은, 임한나. +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 중간 탈락 인원 : 유현아.』 『곧 참가 예정 인원 : 1. 김한별 2. ?? ??(??? ??) 3. ?? 4. 이유정.』 0640 / 0933 ---------------------------------------------- 男 : 미안해. 女 : 뭐가 미안한데? 나는 약간 멍한 기분을 느끼며 눈앞을 응시했다. 갑자기 찾아온 것도 모자라, 어느새 허락도 구하지 않고 들어온 연혜림은 의자에 앉은 채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보고 있다. “큰일났네~. 큰일났어~. 김수현은~. 큰일 났대요~.” 거기다 이상한 노래를 부르기까지. 나는 차분히 정신을 추슬렀다. “그래서, 갑자기 무슨 일이야?” “으응? 내가 별로 반갑지 않은가 봐?” 조용히 입을 열자 연혜림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뭔가 굉장히 자신감 있어 보이는 얼굴이다. “아니, 당연히 반갑기는 하지. 그냥 조금 당황했을 뿐이야.” “그렇지, 그래야지. 너를 위해 무려 두 가지나 중요한 정보를 들고 오신 몸인데.” “오호. 그거 구미가 당기는데?” “흐응~. 말해줄까~. 말까~.” 연혜림은 고개를 갸웃갸웃 움직이며 까불었다. 얼른 경청하겠다는 자세를 잡자 연혜림이 킥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말해줄 테니까, 너 나한테 하나 빚진 거다?” “아니. 무슨 빚까지야….” “아까 한소영의 태도에 관해서 하나. 그리고 너한테 경쟁자가 생긴 거 하나.” “Deal.” 나는 곧바로 연혜림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러자 까르르 웃어 젖힌 연혜림이 새침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그만 웃고 어서 말해봐.” “좋아. 그럼 우선 첫 번째.” “응.” “너 왜 그동안 소영이 연락 안 받았냐?”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아.”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그동안 자꾸 까먹은 게 있었나 싶었는데, 바로 수정구 연락이었다. “보아하니 아예 모르지는 않았나 보네? 고연주 고것이 중간에서 끊어내는 줄 알았는데.” “으음, 까먹고 있었달까. …많이 화나셨어?” “정확히는 네가 멀쩡한 상태인걸 확인하고 나서부터. 그전까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애태우면서 지냈다니까?” “애태우면서 지내셨다고?” “고럼.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내 눈은 못 속여. 특히 네가 마지막 전투에서 큰 부상을 당했다는 소문이 돌 때가 절정이었지.” “그, 그건….” 나는 말을 더듬고 말았다. 사실 부상을 당한 건 맞으나 그렇게까지 큰 상처는 아니었다. 고작해야 마력 탈진 현상을 겪었을 뿐인데. 그런데 이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잖아. ‘어떡하지.’ 그렇게 머리를 부여잡고 싶은 충동을 느낄 즈음, 연혜림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달려와 내 옆으로 풀썩 주저앉는다. 침대가 한층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있잖아 있잖아. 그리고 너 경쟁자도 생겼다?” 그런 연혜림의 얼굴은 한층 상기돼있는 게, 아주 입이 근질거려 죽겠는 모양이다. 이쯤 되면 정보를 주려고 온 게 아니라, 자기가 말하고 싶어서 온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기야 얘도 남 얘기 하는 거 엄청 좋아했지.’ 그러고 보니 1회 차 때는 고연주를 자주 씹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조금 느닷없기는 하지만, 갑자기 1회 차 때 기억이 떠올라 우선은 가만히 들어보기로 했다. “경쟁자라니?” “한소영 말이야, 한소영!” “그분이 왜?” “조성호가 한소영한테 꼬리쳤다니까?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그 순간, 나는 1회 차고 뭐고 무언가가 와장창 무너져 내리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이 새끼가?’ 감히 조성호 따위가, 그분한테 꼬리를 쳤다고? 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봐.” “그러니까…. 조성호가 소영이한테 어떻게 했냐 하면….” 갑자기 연혜림이 목소리를 죽였다. 그리고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돌연 내 어깨를 감싸듯이 손을 얹는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이어서 일부러 굵은 목소리를 내며 얼굴을 서서히 들이밀기까지. 아마 그때의 일을 재현하려는 모양이다. 나는 긴장된 기분으로 이어질 언행을 기다렸다. 잠시 후, 연혜림의 입술이 떼어졌다. “우리는….” “연혜림.” 그때였다. 한창 하이라이트를 기다리던 찰나, 차가우면서도 익숙한 목소리가 한 줄기 흘러들었다. 나와 연혜림은 차례대로 한 번씩 흠칫하고서 거의 동시에 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그곳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매력을 뿌리는 여인이 우리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한소영이었다. “하, 한소영?” 연혜림은 후닥닥 떨어지더니 어색하기 짝이 없는 낯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어, 언제 왔어?” “방금.” “이, 일찍 왔네?” “회의가 일찍 끝났으니까.” 한소영은 고저 없는 음색으로 연혜림을 쉬지 않고 압박하며 몰아쳤다. 그냥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뿐인데, 분명히 그런 기분이 들었다. 연혜림이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이는 게 그 방증이리라. “그, 그렇구나.” “그래서. 답변은?” 그렇게 한소영이 말한 순간, 이어지는 연혜림의 행동은 무척이나 신속했다. “아, 아하하하! 나는 그럼 이만!”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 소리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놓은 것이다. 이내 삽시간에 멀어져 가는 연혜림을 보며 나는 뜻 모를 배신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배신감은 곧 서늘한 바람으로 되돌아왔다. 한소영은 도망가는 연혜림을 쫓지 않았다. 계속 그 자리에 서서는 서릿발 같은 두 눈동자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목에 절로 침이 넘어간다. ‘사, 사과해야겠지?’ 그렇게 생각한 찰나, 돌연 한소영이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천막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아까 연혜림이 처음 앉았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붙이기까지. “…….” “…….” 그러면서도 아무런 말도 없다.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면서도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응시할 뿐.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화나셨구나.’ 화났다. 100% 화났다. 1회 차에서 겪었던 패턴과 비교해 분석해보면, 지금 한소영의 행동은 화났을 때와 100%의 싱크로율을 보이고 있다. 더구나 연락을 받지 않은 건 내 잘못이 크기에 뭐라 할 말도 없는 상황이다. 결국 더 늦기 전에 사과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이스탄텔 로우 로드.” “…….” “미안합니다.” “뭐가 미안한데요?” 비로소 한소영이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도전적이라 느꼈다면 내 착각일까? 마치 단단히 벼르고 온 느낌이다. “그…. 연락을 받지 못한 건 말이죠….” “아니요. 괜찮아요. 바쁘셨다면 못 받으실 수도 있었겠죠. 사실 공략도 끝났는데 뭐가 바쁜지 이해는 잘 안 가지만요.” “그, 그러니까요.” “뭐, 다쳤다는 말을 듣고 조금 걱정하기는 했는데, 연혜림이랑 시시덕거리시는 거 보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나 보네요.” …엄청나게 빠른 말속도. 한소영은 내가 알고 있던 한소영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한소영이다. 예의 고요하고 색스러운 태도는 보이지 않고, 성난 암사자 같은 기세를 뿜으며 나를 압박한다. ‘수현아. 마누라랑 싸워봤자 하등 좋을 거 없다. 무조건 져줘라.’ 문득 떠오른, 이제 10년도 더 된 아버지의 격언을 떠올리며 나는 속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억지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마지막 전투 이후 약간 생각이 복잡했습니다. 연락이 왔다는 말을 듣기는 했는데 언뜻 들은 터라 저도 모르게 까먹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건 괜찮다고 말씀 드렸는데요?” “…아무튼, 정말 미안합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혹시 제 행동이 심기를 거스르게 했다면….” “그러니까 뭐가 미안하신데요. 아까부터 자꾸 사과만 하시는데, 이러니까 꼭 제가 나쁜 년이라도 된 것 같잖아요.” 아니 오늘따라 왜 이러십니까. 내가 점쟁이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화난 이유를 말해줘야 내가 제대로 사과할 거 아니냐고. “아 솔직히 화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러시는 거고요.” “지금 화내시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왜 화내시는지를 모르겠으니까….” “그럼 머셔너리 로드는, 결국 제가 왜 화났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는 거네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지금껏 참고 참아온 무언가가 뚝 끊어진걸 느꼈다. ‘…아. 더는 못 참겠다.’ 말을 할 때마다 말꼬리를 잡으니까 대화가 쳇바퀴를 돌고 있다. 무엇보다 아까 경쟁자가 생겼다는 말도 묘하게 신경 쓰이는데, 한소영마저 이렇게 나오니 억울하고 서운한 마음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진짜 어떻게든 참으려고 했는데, 울컥하는 포인트가 예상보다 일찍 찾아와버렸다. 그래. 어디 한 번 해보자. 나도 어디 가서 말로 밀리지는 않는다. …형한테는 빼고. 나는 잠깐 생각에 잠긴 척을 하다가 한소영을 똑바로 직시했다. 그리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알 것 같네요. 왜 이렇게 화를 내시는지.” 그러자 한소영이 의외라는, 아니 뜨끔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 뭔데요?” “알지만 말하지 않겠습니다.” “…네?” “왜 화를 내시는지 알겠는데, 말하지는 않겠다고요.” “아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말씀이라니요?” 바로 이 순간을 기다려왔기에 나는 곧바로 받아 쳤다. “그럼 이스탄텔 로우 로드는, 제가 왜 말하고 싶지 않은지 모르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리고 적반하장 격으로 말을 이었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하게. 말인즉, 지금 이 상황을 거하게 꼬집은 뜻이 담긴 말이었다. 그렇게 말하고 나자 한소영의 몸이 순간적으로 빳빳하게 굳었다. 이내 얼굴에 당황한 빛이 스치는걸 확인하자 속이 다 시원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 한소영도 방금 말뜻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래, 할 말이 없겠지. 이게 조금 전 내가 느낀 기분이라고.’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최대한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어깨를 들먹였다. 그렇게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려는 찰나, 나는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걸 직감했다. “…….” “……?” 한소영은 확실히 할 말이 없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무에 그리 서운한지, 온몸을 파르르 떨면서 나를 흘겨보고 있다. 거기다 길고 예쁜 눈썹은 서서히 치켜 올라가는 중.(1회 차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이건 한소영이 심히 삐치거나 토라졌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잠시 후. 탁! 탁자를 강하게 짚은 한소영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나 이만 갈래요.” 그리고 결 좋은 머리칼이 사르르 흩어질 정도로 몸을 세게 돌리기까지. ‘이건 반칙이잖아.’ 한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리고 얼른 달려가 한소영을 붙잡았다. “자, 잠시만요.” “됐어요. 놔요.” * 그렇게 김수현과 한소영이 한창 자존심을 건 살벌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이, 이스탄텔 로우 로드. 정말 미안합니다. 그러니까 좀….” “흥.” …아니. 사실은 알콩달콩한 연인 다툼을 하고 있을 즈음. 중간부터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천막과 조금 떨어진 거리서 양손을 꾹 쥐고 있는 사내는, 다름 아닌 동부 총 사령관 조성호였다. “배, 배 안 고프십니까? 식사라도 하실까요?” “몰라요. 제가 무슨 먹을 것만 밝히는….” 꼬르륵~. “…마, 마음대로 하세요.” 천막 내 벌어지는 콩트를 보는 조성호의 얼굴은 묘하기 그지없었다. 김수현의 태도도 놀랍지만, 지금 눈에 보이는 한소영의 태도는 조성호에게 절로 비틀린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문득, 조성호의 머릿속으로 며칠 전 한소영에게 거부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동부와 남부는 오랫동안 동맹 관계를 지켜오지 않았습니까?’ ‘네?’ ‘하하하. 말인즉, 우리는 조금 더 친해질 필요가 있다는 소리입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이제 곧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가 양분하게 될 텐데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손대지 마세요. 굉장히 불쾌하네요.’ 그 당시, 은근슬쩍 신체 접촉을 하려 했던 조성호는 단번에 퇴짜를 맞고 말았다. ‘큭. 예민하시군요.’ ‘제 어깨에 손을 올리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에요.’ ‘…이건 거부라고 봐도 상관없습니까?’ ‘무슨 말씀이시죠? 저는 다른 사람이 제 몸에 손대는걸 굉장히 싫어해요. 특히 사내는 더더욱.’ ‘이런, 그러셨군요.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머셔너리 로드와의 소문이 상당히 뜨겁던데요.’ ‘그쪽이 머셔너리 로드는 아니잖아요?’ 그때, 조성호는 자신을 쳐다보던 한소영의 눈을 잊지 못했다. 일견 무표정해 보이면서도 자신을 비웃는 듯한 차가운 눈빛.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혐오 어린 눈초리. ‘그렇게 말한 주제에.’ 이내 조성호의 시선이 도로 천막을 향한다. 조성호는 손도 대지 못했던 한소영의 어깨와 팔을 붙잡은 채, 살살 달래는데 여념이 없는 김수현. 그리고 싫은 척, 쌀쌀맞게 시치미를 떼면서도 결국에는 김수현에게 이끌려가는 한소영. 그런 두 남녀를 확인한 순간, 조성호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래도 그나마 똑똑한 계집인줄 알았는데 말이지…. 뭐, 상관없나.’ 한순간 가슴속에 굴욕감이 치밀어 올랐으나 곧 사그라졌다. ‘어차피 공략은 끝났어. 이제 새로운 도시에만 도착하면….’ 그렇게 생각한 조성호의 입가에 전보다 더욱 진한 미소가 자리잡는다. 한편, 같은 시각. 부상자 관리소. 번쩍. 간이 침대에 누워 있던 사내가 눈을 떴다. 일전 하챠르의 캠프에서 성과 은닉 작업을 하던 사내였다. 이후 오랫동안 기절해있었는지, 사내가 초점이 맞지 않는 듯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어, 이제 깨어났어? 깨어난 거야?” 그때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 사내는 간신히 음성이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한 여인이 천막에 비스듬히 기댄 채 놀란 얼굴로 사내를 보고 있었다. “야, 이정필. 괜찮아? 정신이 들어?” “…어떻게 된 거지?” 여인이 천천히 다가오자 이정필이 힘겹게 물었다. 잔뜩 쉰 목소리였다. 다가온 여인은 침대 끝에 살짝 엉덩이를 붙이고는 물끄러미 이정필을 내려다보았다. “그건 오히려 나야말로 묻고 싶은 거야. 너야말로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나?” “정말 아무것도 모르나 보네. 터전 정리하는 것까지는 기억해?” “기억한다.” “그럼 너 작업 치다가 기절한 거는?” “…거기서부터 끊긴 것 같다.” 이정필은 약간 늦게 대답했다. 여인의 말에서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를 느꼈기 때문이다. 아니, ‘작업 치다가.’ 라는 말이 나온 이상 확실하다 봐도 무방하다. 다만 여인이나 이정필이나 서로 비슷한 부류라 스스럼없이 말을 주고받을 뿐. “내가 얼마나 누워 있던 거지? 하루? 이틀?” “엄청 오랫동안. 일주일도 넘을걸?” 사내가 은근슬쩍 화제를 돌리자 여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뭐?” 그제야 깜짝 놀랐는지 사내가 두 눈을 치뜨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여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거짓말이 아니야. 사제들은 원인을 모르겠다 말하고, 너는 죽은 듯이 자고 있고.” “일주일도…. 넘는다고…?” “그래. …설마 이것 때문인가?” “……?” 혼잣말을 중얼거린 여인이 가슴 안으로 손을 넣었다. 이내 손끝에 걸려 딸려 나온 물건은 다름 아닌 뼈로 장식된 목걸이였다. 그 목걸이를 보는 순간 이정필의 눈이 한껏 가늘어졌다. 이정필이 기억하기로는 목걸이에 분명 시뻘건 빛을 뿌리는 보석이 박혀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목걸이는 그저 뼈로 이루어진 장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정필은 본능적으로 여인을 노려보려다 그만두고 말았다. 생각해보니 설령 여인이 보석만 따로 챙겼다 하더라도 큰소리칠 입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성과 은닉 사실을 덮어준 것만해도 감지덕지해야 할 처지였다. “이건 돌려줄게. 어차피 별로 값나가 보이지도 않고.” 그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인은 태연한 목소리로 말하며 침대에 목걸이를 놓았다. 이정필의 낯에 그늘진 피로를 읽었는지 여인의 말이 이어졌다. “어쨌든 지금은 푹 자둬.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내일?” “그래. 강철 산맥의 끝이 다가왔거든. 원래 너는 여기 두고 가려고 했는데, 클랜 로드가 꼭 챙기고 가겠다고 하더라. 나중에 잊지 말고 감사 인사나 하라고.” “자, 잠시만.” 이정필은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한 터라 머리를 갸웃했으나, 여인은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는 빙글 몸을 돌렸다. 결국 여인은 그대로 천막을 나섰고, 이정필은 침대에 덩그러니 놓인 뼈 목걸이를 한동안 하염없이 응시했다. “아차.” 그러다 어느 순간 이정필의 눈동자에 강렬한 이채가 스쳤다. 마치 무언가 잊고 있던 걸 떠올린 듯한 표정을 짓더니 황급히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정필이 하챠르의 천막에서 얻은 건 목걸이 하나뿐이 아니었다. 자그마한 흙 무덤에 얻은 성과가 하나 더 있었다. 비록 급한 와중에 챙긴 터라 정확히 확인은 못했지만 서도. “부, 분명 여기에 넣었을 텐데?” 그러나 손에 잡히지 않는지 이정필이 잔뜩 찡그린 얼굴로 웃옷을 벗었다. 그 순간이었다. 두근! 막 옷을 벗으려는 찰나, 갑작스레 심장이 크게 펄떡였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이정필의 움직임이 일시 정지했다. 두근두근! 이윽고 심장이 재차 크게 뛰자, 이번에는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지며 시뻘건 빛으로 물들었다. “크으으윽!” ============================ 작품 후기 ============================ 1차전. 女 : ……………………. 男 : …미안해. 女 : 뭐가 미안한데? 男 : 이러저러해서 미안해…. 女 : 아닌데? 나 그거 때문에 화난 거 아닌데? 男 : 그래? 그럼 왜 화냈는지 가르쳐주지 않을래? 女 : 그럼 오빠는 결국 내가 왜 화났는지도 모르면서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는 거네? 男 : ……………………. 2차전. 女 : 정말 내가 왜 화났는지 몰라? 男 : 아니. 생각해보니까 알 것 같아. 女 : 그, 그래? 뭔데? 男 : 알지만 말하고 싶지 않아. 女 :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왜 말을 안 해? 男 : 너야말로 내가 왜 말하고 싶지 않은지 몰라? 3차전. 女 : 나 갈 거야!(간다고 안 잡기만 해봐?!) 男 : 자, 잠시만!(치, 치사하다!) 女 : 됐어! 놔!(이런다고 진짜 놓기만 해봐! 빨리 더 안 끌어당겨?) 男 : 미, 미안해. 응?(이씨…. ㅜ.ㅠ) …아마 공감하시는 분들은 경험해보신 분들이겠지요? :) 아무튼, 이 정도면 김수현도 쉴 만큼 쉬었지요(?). 이제 그만 갑시다. 떠납시다. Move, Move, Move! 0641 / 0933 ---------------------------------------------- 강철 산맥을 벗어나다. 서북 요새의 아침은 그 어느 때보다 소란스러웠다. 천막을 정리하는 사용자들과 인원을 점검하는 사용자들, 그리고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내고 노가리를 까고 있는 사용자들 등등. 눈에 보이는 사용자들마다 하나같이 밝은 얼굴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원정대 전체가 모여서 그런지 오늘따라 수선스럽다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우리가 가장 선두였던가?’ 남은 진군은 남부 원정대가 선봉에 서는 것으로 결론이 모였다. 제 2지역 공략 때는 우리가 가장 선두에 섰는데, 이번에도 똑같은 자리에 배치됐다. 즉 전 원정대를 선도하는 역할로, 나름 중요한 임무를 맡은 셈이다. 아마 지금쯤 클랜원 전원이 선두에 모여 있을 것이다. 늦장 부리는 꼴을 못 보는 정하연의 성격상, 억지로 끌고 나와서라도 기다리게 하고 있을 테니까.(사실 현숙한 이미지인 정하연이 누군가를 억지로 끌고 나온다는 상상은 잘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안현을 비롯한 여러 클랜원들이 ‘형이 있을 때와 없을 때와 사람이 너무 달라요.’ 라 입을 모아 증언하니 아주 없는 얘기는 아닌 듯하다.) 아무튼 어서 가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사용자들의 틈을 헤치며 걸음을 옮길 즈음. “아 싫다니까! 왜 자꾸 짐 덩이를 맡기려고 해?” 돌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소리가 나는 곳으로 걸음을 돌리자, 요새 중앙 부근을 둥글게 둘러싼 한 무리 사용자들을 볼 수 있었다. “공찬호. 그러지 말고….” “싫어, 싫다고! 왜 나한테만 시키는 건데?!” 둥근 원 안에는 형과 공찬호가 한창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었다. 잠시 의아한 기분이 들었으나 공찬호가 묠니르를 가리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 대충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아마 이번 진군 때 들어달라고 부탁한 것 같은데(묠니르는 거의 성인 남성만한 크기를 갖고 있으며 무게도 꽤 무거운 편이다.), 공찬호가 싫다고 앙탈을 부리는 모양이다. “저 저번에도 내가 들었고, 저번에도 내가 들었는데! 이번에도 또? 허 참.” “확인해보니까 근접 계열만 사용할 수 있다는 제한이 붙어있어서 그래. 그리고 너만 시키는 게 아니라, 너를 줄 생각이니까 시키는 거지.” “아 됐수다. 그냥 뇌제 님 가지십쇼, 예?! 나 이거 필요 없다니까?” “그러지 말고 좀 도와줘라. 봐봐, 주변 사람들도 다 네가 들어주기를 바라고 있잖아.” 그러자 공찬호가 눈을 사납게 치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용자들이 하나같이 얼굴을 돌리는 가운데, 문득 그 시선이 나를 발견했다. 공찬호는 갑자기 잘됐다는 얼굴을 하고는 나를 삿대질하며 입을 열었다. “오, 마침 잘됐네. 저~기 머셔너리 로드….” “안 돼.” 그러나 형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뭐, 뭐?” “수현이는 안 된다고.” “왜 안 되는데?” “앞으로 수현이 손에는 물 한 방울 안 묻힐 거니까.” 형이 가슴을 쫙 피며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찬호는 너무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은 듯한 표정을 지었고, 주변에서 소리 죽여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낯 뜨거운 기분도 참 오랜만인데 말이지. 잠시 후, 머리를 설레설레 저은 공찬호는 몸을 빙글 돌리더니 콧방귀를 꼈다. “아무튼, 나는 이 짐 덩어리 떠맡을 생각은 추호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말라고. 에이, 그냥 내가 들고 가겠어!” 그때였다. 공찬호가 ‘추호도….’ 까지 말한 찰나, 돌연 누군가가 똑 닮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공찬호는 한순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더니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 “뭐, 너무 고마워하지는 말라고! 힘이 센 내가 드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말이야!” “누, 누구야! 누가 지금 나를 흉내 내는 거야! 이…!” “이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하하!” 와, 엄청나다. 목소리가 똑같은 것도 놀랍지만 말을 잇는 타이밍이 정말 기가 막히는데? 아무튼,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기회(?)를 살리기로 마음먹었다. 겸사겸사 형도 도와주고 말이지. “음, 공찬호. 스스로 발벗고 나서준다니…. 다시 봤다, 정말로.” 그러자 공찬호가 득달같이 나를 돌아보더니 한껏 눈을 부라렸다. “뭐, 뭔 헛소리야? 방금 목소리는…!” “자, 박수.” 그러나 나는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박수를 보냈다. 사용자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기색을 보였지만, 곧 내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똑같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내 공찬호의 얼굴이 대번에 붉으락푸르락 변한다. “닥쳐! 어디서 지금 개수작…!” 짝짝짝짝…. “이, 이익!” 짝짝짝짝짝짝짝짝…. 그렇게 박수가 이어지는 가운데, 공찬호는 한참 동안 버티는가 싶더니 결국 거친 욕설을 쏟아내며 묠니르를 잡고 말았다. 이래서 군중 심리가 무서운 거로군. 음음. ‘아주 좋은 받아주기였어요, 클랜 로드!’ 그때, 갑작스레 머릿속으로 상큼한 음성이 울려왔다. 마력이 느껴진 지점으로 시선을 돌리자, 쓴웃음을 머금고 있는 신재룡과, 신재룡의 등 뒤로 얼굴만 쏙 내밀고 있는 표혜미…. 아니 제갈 해솔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비로소 아까 공찬호의 목소리를 흉내 낸 주인공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담담한 얼굴을 한 제갈 해솔은 애초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성대모사 솜씨가 어떻느냐는 듯이. 나는 대답 대신 왼손 엄지를 슬쩍 치켜 올려주었다. 제갈 해솔은 그제야 활짝 웃어 보이더니 손가락으로 브이(V)를 그리며 화답했다. ‘참 재주 많은 여인이야.’ * 해가 완전히 떠오른 것을 기점으로, 3 원정대 중 선봉 역할을 맡은 한소영이 출발을 신호했다. 사실상 강철 산맥에서의 마지막 행군이 시작된 것이다. 거의 1만이 넘는 사용자들이 행군함으로써 주변은 발소리로 가득…. “제기랄!” …차야 정상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빌어먹을!” 유독 공찬호 주변만큼은 조용하기 그지없다. 묠니르를 짊어진 채 걸어가는 공찬호는 가끔 분에 찬 욕설을 뱉으며 살기등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누구 하나 걸리기만 해보라는 것처럼. 그 기세에 눌린 사용자들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발소리를 최대한으로 죽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공찬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살금살금 곁으로 다가갔다. 사실 진군이 시작된 이상 배치된 자리로 가야 정상이나, 한소영한테 잠깐 양해를 구한 후 후방으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왜냐하면 공찬호에게 확인해볼게 하나 있었으니까. “어이, 공찬호.” “앙? 누구…! …김수현?” 공찬호는 부르자마자 벌컥 화를 냈으나 나를 보고는 떨떠름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얼굴을 와짝 일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뭐냐, 이 치사한 자식!” “치사하다니. 말이 심하잖아.” “놀리려고 온 거면…!” “아니. 궁금한 게 있어서.” 나는 얼른 말을 끊었다. “…궁금한 게 있다고? 나한테?” 이건 의외였는지 공찬호는 성난 기색을 누그러뜨리고는 이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틈을 타 나는 빠르게 머리를 끄덕인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까 왜 묠니르를 거부했지?” “응? 뭔 소리야 지금.” “들어보니까 형이 묠니르를 너한테 주려고 한 것 같은데, 싫다고 한 거 아니야?” “그렇지. 그런데?” 공찬호는 대수로운 게 있냐는 듯이 반문했다. “왜 거부한 건데?” “나는 창병이니까. 묠니르는 망치잖아. 그렇다고 설정된 정보가 수라보다 좋은 것도 아니고.” 공찬호치고는 명료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는 가지 않는다. “하지만 묠니르도 상당히 쓸만하잖아? 네 근력 정도면 다루는데 큰 문제는 없을 테고, 그리고 상황상 묠니르가 더 알맞은 쓰임새를 보일 때도 있을 텐데.” “…아아, 무슨 소리를 하는가 했더니.” 이제야 내 질문의 진의를 깨달았는지 공찬호는 잠깐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쩝 입맛을 다시며 빈손을 움직여 수라마창을 꺼내 들었다. 예의 고혹적인 자태를 뽐내는 칠흑의 창은 여전히 불길한 기운을 곳곳에 뿌리고 있었다. 공찬호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나는 이 창 말고는 다른 무기를 사용할 생각이 없어.” “왜?” “이유야 간단해.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이 무기를 얻은 이후 수라마창을 거의 연인으로 생각해왔거든. 그러니까 함부로 바꿀 생각을 못하는 거지.” “연인으로 생각한다고? 무기가 어떻게 연인이 될 수 있지? 네 연인은 사용자 성하얀이잖아.” 나는 진지하게 반문했다. 애당초 무기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는 터라, 공찬호의 말이 하등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그런 뜻이 아니라! 동반자 개념으로 생각하라고!” 그러나 공찬호는 오히려 갑갑해 죽을 것 같다는 얼굴을 하더니 수라마창을 휙휙 흔들며 침을 튀겼다. “입장을 바꾸고 생각해보라고! 네 검은 어떤지 모르지만, 수라는 자아가 확고한 창이라고. 어쨌든 자신을 사용할 수 있도록 나를 선택해줬어. 주인 의식을 치르는 과정이 괜히 있는 건 아니잖아?” 우웅~. 그때였다. 한창 공찬호의 말을 경청하는 와중 별안간 허리 부근서 짧은 검음이 흘러나왔다. 지금껏 가만히 있던 무검이 갑작스레 반응한 것이다. 그러나 공찬호는 듣지 못했는지 여전히 말을 잇고 있었다. “즉 무기 입장에서는 주인한테 몸도 마음도 모두 갖다 바친 셈이라고. 그런데 주인이 사용해주기는커녕 홀랑 다른 무기로 갈아타봐. 네가 무기 입장이라면 어떨 것 같아?” 우웅우웅~. “아 물론, 그냥 어느 대장간에나 걸려 있는 검이라면 상관없겠지. 하지만 수라 같은 경우는 달라. 너도 알잖아, 심상찮은 힘을 지닌 무기라는 거. 이런 무기들은 대체로 자아를 갖고 있고, 또 그만큼 자존심도 강해. 정말 어지간한 차이를 보이는 무기가 아니면 자기 자신이 주인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무기라고 생각한다는 말이야.” 우웅우웅우웅~. “그러니까 결국 중요한 건 교감이야, 교감. 어느 상황이든 간에, 무기는 주인을 만났을 때부터 겪는 모든 걸 기억하고 간직하지. 그런 게 하나하나가 쌓이다 보면, 무기도 스스로 고민하고 변화를 꾀하기 시작하거든. 가령 예를 들면, 수라는 내가 자주 실수하는 나쁜 버릇을 알고 있어. 그리고 전투시 나도 모르게 그 버릇이 나왔을 때,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여서 정확한 공격을 하도록 도와주는 경우가 있지. 아니면 위기 때 내가 알지 못하는 능력을 발동해서 목숨을 구해준 적도 있고.” 우웅우웅우웅우웅~. 공찬호의 말은 예상외로 장황했지만, 그만큼이나 영양가 있는 설명이기도 했다. 그 동안 계속 고민해왔던, 무검에 관한 비밀에 조금이나마 가까이 다가간 기분이니까.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다면, 무검의 반응이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가 나는 거 같은데? 혹시 못 들었어?” 이제야 겨우 들었는지 공찬호가 의구심 어린 눈빛을 빛냈으나 차마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공찬호가 말할 때마다 꼬박꼬박 반응하는 무검의 검음이, 꼭 ‘맞아 맞아, 네 말이 맞아!’ 라고 추임새를 넣는 것 같았으니까. …우선은 화제를 돌리는 게 낫겠지?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튼 대답해줘서 고맙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천연덕스레 말했다. “…쯧. 생각 외로 말이 길어졌군.” 공찬호는 혀를 한 번 차더니 휙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우웅! 그때, 느닷없이 무검이 크게 울어 젖혔다. “어?” 이번에는 확실히 들었는지 공찬호가 우뚝 걸음을 멈추는 게 보였다. 한순간 당황하기는 했지만 나는 최대한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그리고 앞으로 가는 척을 하며 행렬을 이탈한 후, 무검을 들어 지그시 응시했다. 그러자 또 한 번 검음을 흘리는 무검. 오늘따라 이놈이 상당히 반항적이라고 느낀다면 내 착각일까?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야, 갑자기 왜 이래? 지금 저 말 들었다고 이러는 거야?” 우웅? “알겠어, 알겠다고. 공찬호 말은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 조용히 좀 하자.” 우웅? ‘이놈이?’ 오늘 날을 잡았다 이건가? 공찬호 말을 이해했다고는 했지만 받아들이겠다 말한 적은 없다. 나는 무검을 얼굴과 거의 맞닿을 정도로 가져온 후, 속삭이듯이 말을 이었다. “한 번만 더 멋대로 울면, 공찬호 똥구멍에 처박아버리겠어. 기필코 말이야.” 우…?! 무검은 곧 조용해졌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어제 하루 잘 쉬었네요. 잠을 충분히 자서 그런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착각까지 들더라고요. 하하하. 덕분에 오늘 자정 연재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어제 약속으로는 오늘 1회를 더 올리기로 했었죠? 못 올린 회를 벌충하는 의미에서요. 네, 지금 열심히 작성하고 다듬고 있어요~. 바로는 올리기 힘들 것 같고, 늦어도 당일 정오(12시 00분)에는 업데이트하도록 하겠습니다. 점심 맛있게 드시고, 잠시 휴식 겸 한 번 들러주시면 다음 회를 보실 수 있으실 거예요. :) 이제 저는 열심히 남은 내용을 적으러 가겠습니다!(오늘 제가 조금 부드럽다고 느끼신다면, 잠을 잘 자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주세요! 하하하.) 그럼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PS. 쪽지는 주말에 답신을 드리도록 할게요! 0642 / 0933 ---------------------------------------------- 강철 산맥을 벗어나다. 깊은 밤, 어두운 하늘.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딱히 인기척은 들려오지 않는다. 아마 지금쯤 다들 침낭 아니면 천막으로 들어가 곤히 자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경계를 선지 얼마나 지났더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대충 가늠해보면 거의 끝날 시간일 터. 경계 교대 시 통상적으로 10분 가량 일찍 온다는 점을 감안하면 곧 교대하러 올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오게 되면, 아마 나를 보고 놀라겠지. 왜 나 혼자 경계를 서고 있냐고. 다른 사용자는 어디 있냐고.(기실 어지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경계는 최소 2인이 서는걸 원칙으로 삼는다.) 물론 나 또한 몇 시간 전만 해도 이유정과 경계를 서고 있었지만, 자꾸 졸린다고 칭얼거리는 바람에 그냥 돌려보내버렸다. 적당히 칭얼거리면 그냥저냥 받아넘기겠는데, 깊이 생각하는데 방해가 될 정도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지금 우리만 경계를 서는 것도 아니고, 또 항상 마력 감지를 활성화해두는 만큼 나 혼자서도 충분하겠다 싶어 내린 결정이었다. “흠…. 오늘 정오 전에는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자리에 등을 대고 눕자 자연스럽게 밤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하늘에 떠오른 보름달은 찬연한 빛을 뿌리고, 주변에 점점이 박힌 수십 개의 별들은 경쟁하듯이 별빛을 반짝인다. 약간 멍한 기분으로 밤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 문득 일전에 들었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래서 조성호가 소영이한테….’ 연혜림한테 들었던 한소영에 대한 조성호의 접근 설. 이성적으로 사고해보면 그냥 그렇게 웃어넘길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상 공략 완료를 거의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근래 조성호의 행동은 확실히 범상치 않다. 탁 까놓고 말하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눈에 보인다. ‘새로운 대륙을 기점으로, 현재보다 영향력을 배로 키우겠다는 속셈이겠지.’ 앞으로 주 활동 무대가 바바라에서 아틀란타로 옮겨가는 건 필연적인 일이다. 그런 만큼 아틀란타에서 이루어질 힘의 구조는 우선적으로 선점 여부로 나눌 수 있는데, 같이 선점을 한 입장이라면 얼마나 빨리 주변 안정화를 이루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번에 상당한 전력을 잃은 서북부보다는 동부나 남부가 조금 더 유리한 위치에 있는 건 맞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조성호가 제 2의 황금 사자가 되는 걸 꿈꾸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정말 밑도 끝도 없는 허황된 꿈이거니와, 지금껏 조성호를 겪어본 바로는 그 정도로 바보처럼 보이지는 않으니까. 또한 남부가 건재한 이상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그러나 조성호가 지금껏 숨겨온 이빨을 드러냈다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는 없다. 기존 북 대륙에서는 동부의 패자에서 그쳤다면, 아틀란타에서는 그 이상을 노리고 있는 게 확실하다. 무엇보다 한소영한테 접근한 사실로 미루어보아, 아마 남부와 새로운 대륙을 양분하자는 생각에 접근했을 터. 즉 남부를 건드리지는 않는 대신 서부와 북부를 제물로 삼겠다는 소리랄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은, 조성호도 내전이라는 최악의 상황까지는 원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건데…. ‘이미 각 원정대 간에 감정의 골이 생겼다는 게 문제지.’ 딱히 조성호라는 사용자가 변했다고도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이제 진짜 모습을, 정확히는 야욕을 드러냈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새로운 대륙을 발견한 이상, 어느 사용자라도 현 시점을 기회 삼아 지금 이상으로 발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 사실이니까. 나 또한 거기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조성호가 발전을 이루려는 방법이 상당히 치사하고 비열하다는 것. 가만히 생각해보면, 조성호라는 사용자에 관해서는 나쁜 기억은 없어도 좋은 기억도 없는 것 같다. 자박자박…. 그때였다. 한창 조성호에 관한 상념에 잠긴 와중, 갑작스레 등 뒤로 수풀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감지에 집중하자 서서히 가까워져 오는 두 개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이건 내 예상인데…. 아마 수현이 좋아하는 여성상은….” “…정말요? 수현이 오빠가 정말 그래요?” 흘끗 시선을 돌리자, 터질 듯한 볼륨을 자랑하는 여인과 푸른색 로브를 깊숙이 눌러쓴 여인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걸어오는 게 보였다. 고연주와 김한별.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교대 시간이 된 것 같아, 나는 상념은 이쯤 하기로 하고 머릿속을 정리했다. 너무 생각을 많이 하는 것도 좋은 버릇은 아니니까. 우선은 강철 산맥을 완전히 벗어나고 아틀란타에 무사 입성하는 게 최우선 목표다. 그렇게 생각하고 몸을 일으키자, 돌연 깔깔 웃으며 손뼉 치는 고연주와 떨떠름한 기색을 보이는 김한별이 보인다. ‘그런데 둘이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걸까?’ * 해가 뜨고 아침이 밝았다. 식사 때부터 전 원정대에는 한껏 설레는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형의 발표에 따르면 오늘이 바로 강철 산맥을 벗어날 수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형이 식사 시간 때 나를 찾아와 부담감을 토로하는 상황이 생겼지만, 나는 웃으며 걱정 말라는 말로 안심시켜주었다. 식사가 끝나고 시작된 행군은 자연스럽게 강행군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말인즉, 사용자들의 기대 심리가 작용했다고나 할까? 애초 요새를 떠난 이후 지금껏 단 한 번의 걸림돌 없이 순조롭게 진군해오지 않았는가. 여기서 조금이라도 눈치가 빠른 사용자라면 이전과 비교해 몇 가지 변화를 느꼈을 것이다. 시종일관 어두운 빛을 띠던 수풀이 조금씩 밝은 빛으로 변해간다는 것을. 그리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하던 삼림이 서서히 트여 간다는 것을. 이런 풍경 하나하나가 정말로 강철 산맥의 끝에 다다랐다는 신호나 다름없다. ‘이 속도라면 진짜 정오 전에 도착하겠는데?’ 주변을 둘러보자 문득 감회가 새롭다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길이거니와, 쭉 직진만 하면 그만이기에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정말로 강철 산맥을 벗어날 기미를 보이자 내 발걸음도 서서히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미 한 번 겪은 나조차도 이런데 다른 사용자들의 기분은 어떻겠는가. 사실 사흘 동안 끊임없이 행군만 하면 어느 정도 따분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러나 드디어 끝났다는 해방감, 우리가 해냈다는 성취감, 그리고 새로운 대륙은 어떨까라는 기대감 등등. 클랜원들은 지루한 기색 없이 한껏 부푼 얼굴로 쉴 틈 없이 재잘거렸다. 특히나 이미 알고 있는 입장에서, 새로운 대륙에 관한 예측 부분은 듣는 재미도 있었기에 나도 무료함을 잊고 즐겁게 행군할 수 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계속해서 직진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산 길 아래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지평선을 그리는 평야를 확인하고서 잠시 숨을 멈추고 말았다. 이윽고 서둘러 아래로 내려간 후, 발바닥에 평평한 땅을 밟는 느낌이 전해지는 순간 나는 바로 걸음을 멈췄다. 이어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자 갑갑한 수림이 아닌,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탁 트인 들판이 눈에 들어왔다. “…….” 나는, 차마 다른 생각은 못한 채 나도 모르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끝없이 이어지는 풀빛 풍경. 이제 막 산맥을 벗어난 터라 아직 일부에 불과하지만,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크기를 키워가는 초원은 중천에 떠오른 햇살을 받아 시야를 선명하게 빛내온다. 무려 수백 년간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대지가 비로소 새색시처럼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은 차마 말로 형용키 어려운, 가히 아름다운 풍경 이었다. “아….” “우와….” 마침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누군가가 자그맣게 탄성을 지른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 있어,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확실히, 벗어났다.’ 오늘은 서북 요새를 떠난 지 정확히 4일째가 되는 날이다. 제 1지역 공략을 시작한지 약 50여 일이 흘렀다. 강철 산맥 공략 계획이 선포되고는, 아마 90일 정도가 흘렀을 것이다. 그래. 그러니까 거의 3달은 넘는 대장정을 거친 끝에…. 띠링! 『전무후무한 업적!』 『북 대륙의 사용자들은 험난한 강철 산맥을 통과하고, 그간 불모의 땅이었던 새로운 대륙을 잇는 통로를 개척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새로운 대륙의 이름은 아틀란타. 과거 여러 왕국들이 서로 각축을 벌이며 최고 황금기를 구가하던 시절의 역사가 잠들어 있으며, 또한 역대 홀 플레인의 통일에 가장 근접했던 빅토리아 왕국의 산실이 남겨져 있는 대륙입니다. 이 대륙을 발견한 성과는 역사에 언급될만한 업적입니다.』 『원정에 참가한 사용자 전원에게 각각 100.000 Gold Point를 부여합니다!』 우리는, 비로소 강철 산맥을 벗어날 수 있었다. 마침내 아틀란타가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 작품 후기 ============================ Ssul 1. 아 베켄 유~. 유워라 원~. 아원유~. 츄챡챡츄츄챡! 츄챡챡츄츄챡! 아 베켄 유~. 유워라 니~. 아니듀~. 츄챡챡츄츄챡! 츄챡챡츄츄챡! 후루루루루루루루~! 강철 산맥을 벗어났어요! 만세, 만세, 만세, 만세! Ssul 2. 형이 여자 친구랑 스위스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저는 얼씨구나 춤을 췄습니다. 형 방의 책상이 더 좋거든요. 그리 하여 어젯밤 헤헤 웃으며 울트라 북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지요. 그러나 방안을 보고 도로 방문을 닫고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시에 형의 의도에 대하여 심히 고찰에 잠길 수밖에 없었지요. 방안이 너무 더러웠거든요. 설마 내가 방을 사용할 것을 알고, 일부러 더럽힌 건가? 질 수 없다는 생각에 방을 깨끗이 치웠습니다. 책상도 깨끗이 닦았습니다. 그리고 카톡을 보냈습니다. 다음날 새벽 3시, 카톡이 왔습니다. ‘책상 쓰러 왔다가 방 치움.’ ‘굳.’ ‘뭐가 굳?’ ‘계획대로임. ㅋ.’ ㅋㅋ? 돌아오기 전에 다시 어지럽힐 겁니다. ㅋ_ㅋ 0643 / 0933 ---------------------------------------------- 게헨나(Gehenna). 우리는 마침내 강철 산맥을 통과하고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이제는 굳이 주변 풍경을 볼 필요도 없다. 허공에 떠오른 메시지가 가장 명백한 증거였으니까. 이 메시지는 비단 나뿐만이 아닌, 원정대에 소속된 모든 사용자들에게도 출력됐을 것이다. ‘하나, 둘, 셋….’ 나는 속으로 하나하나 숫자를 셌다. 그리고 정확히 3초를 센 순간.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새로운 대륙이 떠나갈 듯한 엄청난 환호가 귓전을 쩌렁쩌렁하게 울려왔다. 사용자들의 합창이 땅을 울리고 하늘 저편으로 멀리멀리 퍼져나간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동서남북 가릴 것 없이 모두 하나가 되어 함성을 지르고 있는 듯했다. 강철 산맥을 통과했다는 사실이 그만큼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이리라. “머셔너리 로드! 총 사령관의 전언입니다!” 시간이 흘러도 함성이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에는 한소영이 전령을 보내왔다. 마침 점심 식사 시간이 됐으니 적당한 장소를 찾아보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기꺼이 그 요청에 응해주기로 했다. 마침 부근에 적당한 장소를 알고 있거니와, 후방에 있는 사용자들도 얼른 새로운 대륙의 풍경을 보고 싶을 것이다. 나는 곧바로 손을 들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 정렬하고, 출발하겠습니다!” 그리고 재개된 진군은, 약 30분 후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지점에 이르고 나서야 가까스로 멈출 수 있었다. 전 원정대의 분위기는 아직도 떠들썩했다. 아마 한소영도 이 분위기에서는 정상적인 진군이 어렵다고 판단, 그래서 최대한 빨리 적당한 장소를 찾으라는 전령을 보냈을 것이다. 식사 시간을 통해서 어느 정도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의도였다. ‘하기야 도시를 발견할 때까지는 원정이 끝난 게 아니니까.’ 이 상황에서도 냉정한 이성을 유지하는 한소영에게 감탄하면서, 나는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클랜원들은 식사 준비에 들어간 상태였다. 김한별은 풍경을 구경하려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백한결은 주먹 쥔 손으로 눈을 닦으며 울었고, 정하연은 달래는데 여념이 없었다. 안현, 이유정, 진수현, 사샤 네 명은 만세를 부르고 강강술래를 돌며 기뻐했고, 표혜미, 아니 제갈 해솔은 어색이 웃음 짓는 차소림의 손을 붙잡고 빙글빙글 춤을 추었다. 식사를 준비하던 고연주는 스튜를 살짝 찍어 먹어보고는 아쉬워하는 얼굴로 “우유가 있으면 참 좋겠는데….”라고 중얼거렸다. 마침 옆을 지나가던 원혜수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더니 양팔로 가슴을 가리며 도망갔다. 고연주가 고개를 갸웃하자 옆에서 식사 준비를 돕던 임한나가 쓰게 웃었다. 김동석과 박다솜은 무에 그리 즐거운지 키득키득 웃고 있었고, 남다은과 비비앙은 서로 꼭 붙어 앉은 채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박현우는 홀로 주먹을 불끈 쥔 채 남쪽을 바라보며 “으아아아!” 괴성을 질렀다. 선유운, 우정민, 허준영 세 명은 서로 등을 맞대고 앉은 채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신재룡이 자리에 침낭을 깔고 안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자, 구예지가 살금살금 다가와 안솔의 볼을 콕콕 찌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연초를 꺼내 물어 불을 붙인 후 남쪽을 바라보며 연기를 흘렸다. 하늘에는 뭉게구름들이 떼를 지어 흘러가고 있었고, 그 아래 구름 그림자가 드리운 풀빛 초원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참으로 한가로운 풍경이요 경치였으나, 사실 내 입장에서는 아픈 기억이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제 4지역.’ 이곳은 1회 차에서 제 4지역으로 명명된 지역으로 아틀란타 탈환전이 벌어진 장소였다. 그 당시 거의 승리 직전까지 몰아붙인 찰나, 적군이 거의 자폭 격으로 마녀를 이용해 소환한 지옥 대공에 엄청난 피해를 입고 물러나야만 했다. 이후 지옥 대공이 역 소환되기 전까지는 아틀란타에 얼씬도 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니 조금 우울해지기는 했지만, 나는 곧 털어버리고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다른 사용자들처럼 이 상황을 즐기기로 결심했다. 마녀였던 차희영은 지금 내 손아귀에 있거니와, 1회 차는 1회 차일 뿐이니까. 지금은 2회 차니까. 그래, 현재 지옥 대공이 소환될 건더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좋았어! 내가 첫 번째다!” “무슨 소리! 내가 첫 번째야!” 그렇게 생각한 나는 돌연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아까 강강술래를 돌던 네 명이 하나같이 시냇물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시냇물을 꿀꺽꿀꺽 들이켰는지, 번쩍 머리를 치켜든 안현이 “캬!” 탄성을 지르며 입을 쓱 닦는다. “물 맛이 장난이 아닌데? 전신으로 청량감이 스며드는 기분이야!” “맞아! 은근히 톡톡 쏘는 맛이 있는 게, 뭔가 몸 안에 활력이 도는 것 같아!” 이어서 고개를 들어 올린 이유정이 끄덕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이내 진수현이 내부의 변화를 느껴보겠다고 자세를 잡는 걸 보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고작 시냇물에 뭘 기대하는 걸까? 하기야 새로운 대륙에 들어온 만큼, 뭔가 특별한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이후 네 명은 ‘치료에 효능이 있을지도 모른다.’ 로 의견을 모아 안솔을 시냇물에 담그려는 시도를 했으나, 신재룡이 아픈 사람가지고 장난치지 말라고 엄한 목소리로 주의를 줌으로서 무산되고 말았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사용자들은 킥킥 웃었고, 나는 한적한 곳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바보 네 명이 자꾸만 시냇물에 특별한 효능이 있기를 강요하니 창피한 기분을 억누를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냇물도 상당히 억울하겠군.’ 스스로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나는 적당한 곳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한동안 그러고 있자 지난 3년간의 기억이 하나하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드디어 아틀란타로 왔다.’ 그것도 단 3년 만에. 만일 나 말고 다른 1회 차 사용자가 있다면 거짓말이라고 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해냈다. 해내고야 말았다. 1회 차 때 걸렸던 시간보다 훨씬 단축된 시간에 아틀란타로 오는데 성공했다. 말인즉, 그동안 흐릿하게만 느껴왔던 집에 돌아간다는 목표가, 이제야 눈에 잡힐 듯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 잿빛 세상. 하늘도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고, 황폐화된 대지도 재색으로 일색 된 척박한 세상. 생기는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오직 죽은 기운만이 드리운 칙칙하기 짝이 없는 세상. 모든 것이 고정된,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세상. 이 공간의 실존을 아는 존재들을 해당 세상을 가리켜 ‘무간 지옥.’ 이라 부른다. 무간 지옥(無間 地獄). 언뜻 보면 악마들이 활동하는 마계와 비슷한 부분이 있으나, 실상은 그보다 훨씬 위험한 곳이다. 팔열 지옥(八熱 地獄) 중 최하층의 구간으로, 한 눈에 봐도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잿빛만이 눈에 들어올 뿐 그저 허무한 공허밖에 보이지 않는 죽은 공간이다. 그러나 딱 하나 눈에 띄는 게 있다면, 바로 무간 지옥 정중앙에 배치된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어탑(御榻). 사방을 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세상이기는 했지만, 오직 어탑 하나만큼은 멀리서 봐도 보일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잿빛 세상에 보이는 거라고는 오직 우뚝 솟은 어탑 하나뿐이었으나, 그곳에서…. 정확히는 어탑 아래에서 뿜어져 나오는 존재감은, 무간 지옥 전체를 채우고도 남음이 있었다. 철그렁, 철그렁…. 그때, 잿빛 세상 어딘가에서 기분 나쁜 쇳소리가 울려오기 시작했다. 소음의 근원은 다름 아닌 어탑을 향해 걸어가는 해골에서 울리고 있었다. 그냥 해골이 아니다. 크기는 보통 성인 남성만 했으나, 연신 불쾌한 소음을 내는 시꺼먼 갑옷과 탐스러울 정도의 반사광을 내뿜는 검으로 미루어보면 전사 혹은 기사가 분명했다. 무엇보다 뾰족한 뿔 투구 아래 퀭한 동공에서 흘러나오는 악기는 그 해골이 범상치 않은 존재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해골 기사가 목적지에 다다랐다. 어탑에 도착한 후, 이어지는 해골의 행동은 굉장히 이상했다. 차마 눈도 마주칠 수 없다는 듯 동공을 내리깔더니 그대로 무릎을 꿇어 부복한 것이다. 그것도 머리가 땅에 땋을 정도로. “등활 구간이 점령당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흡사 쇠를 가는 듯한 거슬리는 목소리. 해골 기사가 부복하는 방향에는 어탑이 있었고, 어탑 아래는 분명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아까 무간 지옥을 채우던 존재감의 주인이었다. 그러나 해골 기사의 말을 듣지 못한 걸까? 기록이라도 읽고 있는지 그저 사락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골 기사는 미동도 보이지 않고 그대로 부복하는 자세를 유지했다. “침략자 중, 예전 초열 구간까지 들어온 놈이 포함돼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사락, 사락….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와 비슷한 힘을 지닌 존재가 추가로 3개체가 감지됐으며, 또한 이전에 섭취하신 개체와 동급의 존재도 여럿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사락, 사락…. “저번 침략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입니다. 이대로 있으면 저번처럼 대규환 구간까지는 단번에 뚫릴지도 모릅니다.” 사락, 사락…. “대공이시여, 결단을. 저희 토벌대에게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탁! 그 순간이었다. 마침 기록을 모두 읽었는지 세차게 덮는 소리가 들려왔다. 콰르르르! 이어서 무언가를 불태워버리는 파괴적인 기운까지. 해골 기사는 곧바로 입을 다물고는 반사적으로 온몸을 움츠렸다. 그때였다. “기다려라.” 마침내 어탑에 앉은 존재, 아니 대공이라 불린 존재에게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이한 마력이 담긴 음성이었다. 일견 듣기로 해골 기사가 보고한 침략 사실은, 대공이라는 존재에게 어떤 감흥도 주지 못하는 듯보였다. 목소리 자체는 여성 특유의 톤이 들어간 무척 아름다운 음색이었으나, 낮은 음성은 조금도 관심 없다는 듯 일말의 고저도 보이지 않고 있었으니까. “기다리면 알아서 찾아올 것이다.” 한 번 더 목소리가 들려오자 한순간 뻥 뚫린 눈구멍에 안광이 번쩍였다. 해골 기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오면….”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여기까지였다. 대공의 목소리가 곤두선 순간, 해골 기사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허리를 숙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해골 기사는 몸을 돌렸고 어딘가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철그렁, 철그렁…. 그렇게 쇳소리도 서서히 사라져갈 즈음. “차원 이동진이라…. 흑염 녀석, 제법 재미있는 일을 꾸미는구나.”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채 한참 동안 앉아 있던 대공이 돌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어탑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양손을 올려 천천히 머리를 쓸어 넘겼다. “원래는 상대할 가치도 없는 저급한 녀석이지만….” 그것은 한 폭의 그림 같은 광경이었다.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살결에 연한 불빛이 덧대어진 손. 그리고 섬섬옥수를 연상케 하는, 옥을 깎아지른 듯한 매끈한 손가락은 일견 보기에도 너무나 매력적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풍성하게 넘어가는 머리칼은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이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용암 폭포가 콰르르 쏟아지는 것처럼 폭발적인 마력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심심하니, 한 번 어울려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도톰한 붉은 입술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 작품 후기 ============================ 띠링! 『2. ?? ??(??? ??)의 참가 예정이 확인됩니다!』 『2. 지옥 대공(지옥의 겁화)으로 확인됐습니다!』 『수성 중인 한소영이 혼란에 빠집니다!』 『공성 중인 정하연, 고연주, 남다은, 임한나,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가 혼란에 빠집니다!』 『유현아는 팝콘을 먹으며 구경합니다!』 『곧 참가 예정 인원 : 1. 김한별 2. 지옥 대공(지옥의 겁화) 3. ?? 4. 이유정.』 0644 / 0933 ---------------------------------------------- 게헨나(Gehenna). 아스타로트의 계획은 간단했다. 한 마디로 정리해보면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 오랑캐를 무찌른다는 뜻으로 한 세력을 이용해 다른 세력을 제어한다는 뜻이다. 말인즉 북 대륙 사용자들이 아틀란타로 도착하기 직전, 지옥 대공을 강제로 인간 세상(정확히는 아틀란타.)으로 보내버려 서로 싸우게 만들겠다는 소리였다. 악마들의 입장에서는 성공만 하면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는 계획이다. 물론, 설령 지옥 대공이더라도 이 세상에 작용하는 법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인간 세상에 소환되는 즉시 힘의 상당 부분을 제한 받게 된다. 그러나 지옥 대공 전력(全力)을 생각해보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아무리 제한된 힘이라 할지라도, 나약한 사용자들을 상대로 학살을 벌이기에는 차고 넘칠 정도였으니까. 여기서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지옥 대공을 데려오느냐?’ 는 것이다. 계획의 성공을 위해서는 2가지 조건이 전제돼야만 한다. 하나는 지옥 대공을 보내버릴 ‘차원 이동진’을 준비하는 것. 다른 하나는 진을 완성하고 발동한 후, 온전한 상태의 지옥 대공을 끌어들이는 것. 처음 조건은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차원 이동진을 준비하는 게 굉장히 번거로운 작업임은 부인할 수 없으나, 까짓거 한 번 구성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지옥 대공을 온전한 상태로 진의 발동 지점으로 끌어들이는 일은, 마(魔)의 정점에 군림하는 대 악마라 할지라도 100% 자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계획의 성공을 위해 아스타로트는 자신이 미끼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저번 지옥 침략 때 메피스토펠레스(악마 14군주 중 하나로, ‘미친 불꽃’이라는 이명을 갖고 있다.)의 희생으로 얻을 수 있었던, ‘지옥 대공은 불에 이상할 정도로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다.’ 는 정보를 활용한 것이다. 물론 이것 또한 지옥 대공이 생각대로 움직여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지금 열심히 지옥 구간을 넘고 있는 아스타로트는 나름 자신 있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 아스타로트도 아주 조금은 이상한 기분은 느끼고 있었다. 예전 초열 지옥까지 내려갔을 때는 구간마다 막아서는 마수들로 상당한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은 가로막기는커녕 마수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실상은 이미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지옥 대공이 기다리라는 명을 전했기 때문이나, 그걸 알 턱이 없는 아스타로트로서는 당연히 가질 법한 의문이었다. 어쨌든 일은 벌려놨고 계획은 시작됐다. 악마들은 이미 등활 지옥을 점령한 상태였다. 지금쯤 주법에 일가견이 있는 벨제부브가 한창 차원 이동진을 구성하고 있을 것이다. 거기다 바알과 아스모데우스까지 따라왔으니, 아스타로트가 자신 있어 하는 것도 나름 이해가 갈만한 일이었다. 이 정도의 전력이라면 지옥 대공을 이기지는 못해도, 나름 버틸 수는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한참 동안 달리던 아스타로트는 멀리서 어탑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현재 아스타로트가 가로지른 구간은 ‘대규환 지옥’ 으로 8열 지옥 중 5번째에 해당하는 구간이다. 이 다음 구간이 바로 6번째인 ‘초열 지옥’ 으로, 예전 아스타로트가 지옥 대공에게 패배해 도망친 구간이기도 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미간을 찡그린 아스타로트는, 이내 어탑까지 20미터를 남겨두고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걸음도 정지했다. 전방을 바라보는 아스타로트의 시선은 어느새 황당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우뚝 솟은 어탑 아래에는, 전신에서 은은한 붉은빛을 흘리고 있는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미끈한 두 다리는 꼭 붙인 채 비스듬하게 기울였고, 양손은 가지런히 모아 왼쪽 무릎에 얌전히 얹었다. 약간 멍해 보이는 눈동자는 먼산을 향하고 있다. 마치 하염없이 애인을 기다리는 여인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 여인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아스타로트는 숨이 막힐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잡티 하나 보이지 않는 투명한 살결도 그렇지만, 교교하게 가라앉은 두 눈동자는 어떻게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그윽한 빛을 품고 있었다. 그렇게 아스타로트는 한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을 맛봤지만. “네놈은 여전히 행동이 굼뜨구나.” 이내 지옥 대공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굼뜨다…. 고?” “그래. 며칠을 기다렸는데도 오지 않으니, 결국에는 이 몸이 직접 올라올 수밖에 없지 않느냐. 이 느릿하기 짝이 없는 것.” 아스타로트가 더듬거리자, 지옥 대공이 어탑에서 우아한 자태로 일어나며 말했다. 목소리는 고요했지만, 말은 상대를 조롱하려는 의도를 다분히 품고 있었다. 아스타로트의 입을 비틀렸다. “이야, 이거 기분 좋은데. 너 정도나 되는 존재가 이렇게 친히 올라오시다니 말이야. …그렇게나 나의 힘이 탐나는 건가?” “헛소리도 그 정도면 수준급이구나.” 아스타로트가 천연덕스레 말을 꺼냈지만, 코웃음 친 지옥 대공은 헛소리로 일축해버렸다. “확실히 저번에 일말의 관심을 두기는 했지. 허나 패배한 수캐의 힘에는 더 이상 관심 없다.” 그러더니 더는 상대하기 싫다는 듯 가볍게 손짓했다. “너와는 이 이상 말을 섞기 싫다. 되었으니 안내나 하거라. 홀로 불쑥 찾아가는 것보다는 네놈이랑 가는 게 낫겠다.” “…하?” 아스타로트의 눈매가 절로 가늘어졌다. 그러자 지옥 대공이 한껏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짓는다. “무얼 그리 의아해하느냐. 그럼 설마 이 내가, 네놈들의 하찮은 계획도 모를 거라 생각했느냐? 그것도 이곳에서?” “그, 그럼.” “하지만 걱정 말거라. 마침 심심하기도 하니 어느 정도 어울려줄 의향은 있으니까. 적어도 네 역할은 완수하게 해줄 터이니.” “…너.” 비로소 지옥 대공의 진의를 깨달은 아스타로트는 끓는 듯한 침음을 흘렸다. 이미 모든 계획을 알고 있단다. 그런데도 어울려주겠으니 얌전히 안내나 하란다. 고작 심심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악마와 마족의 정점에 군림하는 대 악마가 이런 취급을 받을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해일처럼 밀려오는 치욕에 아스타로트의 몸이 부르르 떨린다. 하지만 무어라 입을 열 생각은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니면, 그냥 여기서 죽겠느냐?” 앞에서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 존재는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태고(太古)의 불이라 불리는 화정과 동급이며, 순수 파괴력에서는 화정도 한 수 접고 들어간다는 종미(終尾)의 불, ‘지옥의 겁화’ 를 지닌 존재였으니까. 고심해온 계획이 파쇄됐다. 지금 이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결국에는 하나뿐이었다. 아스타로트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치밀어 오르는 굴욕감을 씹어 삼키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옳지. 보기보다는 착한 놈이로구나.” 여전히 들려오는 조롱 어린 목소리에 아스타로트는 바드득 이를 갈았다. ‘개 같은 년. 도착하고 두고 보자…!’ * 등활(等活) 지옥. 8열 지옥 중 최상층을 담당하는 첫 번째 구간으로, 지금은 악마들에게 점령당한 구간이기도 했다. 등활 지옥을 점령한 이들은 대 악마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래 거느린 악마 14군주들도 데려왔으며 마족들도 최하급부터 최상급까지 다양하게 데려왔다. 모두 합치면 거의 하나의 군단으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이들은 지금 한창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차원 이동진의 구성을 맡은 벨제부브의 지시 아래 차곡차곡 준비해나가는 중이었다. 그러던 등활 지옥에 갑작스레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돌연 어탑 주변 하늘에서 시꺼멓고 둥그런 구멍이 생기더니 그곳에서 두 인영이 툭 떨어진 것이다. 하나는 정수리에 뿔이 돋은 잘생긴 청년이었고, 다른 하나는 온몸에서 불그스름한 빛을 흘리는 절색의 여인이었다. 등활 지옥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하나같이 넋을 잃은 듯한 표정으로 여인을 응시했다. 그러나 여인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김샜다는 얼굴로 가는 숨을 흘렸다. “후유…. 다들 별볼일 없는 놈들만…. 그나저나 준비는 아직인가?” 적어도 앞에 말은 듣지 못했을지 몰라도, 뒷말은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여인 아니 지옥 대공이 진의 중앙에 서 있는 벨제부브를 정확히 주시하며 말했으니까. “켈…?” 그리고 벨제부브는 아주 잠깐 직면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잖은가. 차라리 살기를 풀풀 날리며 들어왔으면 이해라도 하지. 동네 마실 나온 것처럼 태연하게 들어오더니 보자마자 준비가 덜됐냐고 묻고 있다. 거기다 같이 들어온 아스타로트는 아무런 말도 않은 채, 그저 시뻘개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있기까지. “…쯧.” 지옥 대공은 주변의 반응에 살짝 혀를 차더니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박자박 걸어가 어탑에 앉고는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지그시 악마들을 응시한다. “그럼, 끝나면 아뢰도록 하라. 허나 너무 오래 기다리게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마치 아랫것들을 대하는 말투. 악마들은 그제야 하나하나 서서히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어이가 없는걸 넘어서 분노를 느낄 지경이었다. 아스타로트는 계획이 어그러졌다는 것을 알고는 지옥 대공 앞에서 자존심을 접었다. 그것은 계획을 생각해서기도 했으나, 무엇보다 예전 지옥 대공의 진면목을 일부나마 겪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말로만 들은 입장이라면, 자존심 강한 악마의 특성상 아스타로트처럼 참아 넘기지 못한다. 특히 ‘파괴’ 에서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대 악마라면 더더욱. 잠시 후. “방해. 비켜.” 한 손에 곰 인형을 든 작달막한 체구의 여아가 어탑을 향해 아장아장 걸어간다. 단발로 짧게 친 백금 색 머리칼에 무척 사랑스러운 인상의 여아였으나, 푸른색 눈동자만큼은 표독스럽기 짝이 없는 빛을 띠고 있다. 마치 금방이라도 상대방을 갈가리 찢어발길 것처럼. ‘동쪽의 왕.’, ‘잔혹한 파괴자.’ 바알이 나선 것이다. 무미건조하던 지옥 대공의 낯은 바알이 걸어오는걸 확인하고는 흥미롭다는 빛을 띠었다. 이윽고 바알이 어탑과 어느 정도 거리를 남기고 걸음을 멈춘 찰나, 지옥 대공이 입술이 열렸다. “흐응, 귀여운 아이구나.” 그 순간이었다. 지옥 대공이 한 마디를 한 순간. “고마.” 짧게 대답한 바알의 두 눈이 갑작스레 찢어질 듯 커지며 새빨간 빛을 뿜었다. 그러자 창졸간에 소용돌이 친 막대한 마기의 소용돌이가, 곧바로 지옥 대공이 앉아 있는 어탑을 무자비하게 덮쳤다. 콰콰콰콰콰쾅! 단 한 방에, 어탑이 와르르 박살 나며 연기를 피운다. “내, 내 진이…. 켈….” 벨제부브가 힘없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바알은 여전히 뻘겋게 빛나는 눈으로 전방을 담담히 응시했다. 확실히 바알도 처음에는 이해가 안 가기는 했다. 그러나 상대를 적이라고 결론지은 이상, 바알은 가차없이 행동한다. 물론 계획은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옥 대공이 이 정도 공격도 막아내지 못한다면, 계획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해 다짜고짜 공격을 가한 것이다. 말인즉, 바알식 인사랄까? 그때였다. “흠, 나와 같은 파괴의 힘이라…. 그래. 이 정도면 심심하지는 않겠다.” 흩날리는 연기 속에서, 별안간 고요한 미성이 흘러나왔다. 바알이 역시나 라고 생각하고 옅은 미소를 머금었을 때였다. “아, 칭찬이다.” 콰르르르! 이윽고 자욱한 연기를 헤치며…. 아니 폭발적으로 태우며 뚫고 나오는 붉게 물든 손을 확인한 순간, 바알의 눈이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또 한 번 커졌다. 전보다 확연히 붉은 빛을 흘리는 손 하나가 시시각각 다가온다. 상당히 빠르기는 하나 그래도 눈에 잡히는 속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알은 완전히 반응할 수 없었다. 왜 갑자기 그런지는 바알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들어오는 손을 관찰만 하고 있을 뿐, 몸이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정확히는 저 공격에 대응할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못했다. 바알은 그냥 묘하게, 상대의 의지가 자신이 대응하려는 의지를 불태우는 느낌을 받았달까? 마침내, 뻗어 나온 손이 가만히 서 있는 바알의 목을 차분히 감싸 잡는다. 작달막한 몸이 하릴없이 허공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뽀드닥!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와 동시에, 바알의 작은 머리가 기괴하게 비틀렸다. ============================ 작품 후기 ============================ 지옥 대공의 힘은…. 이렇게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예전에 우리엘이 김수현에 관해 경고를 하는 내용을 기억하는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우리엘은 이렇게 말했지요. 체력 90은 화정의 1차 각성, 100은 2차 각성, 101은 3차 각성이다. 그리고 102가 되는 순간 천사가 부여한 설정을 벗어나 본래의 힘을 되찾는다. 그것은 세상을 편집할 정도의 힘. 말인즉, 천사가 위험을 경고할 정도의 힘이지요. 적어도 지옥 내에서의 지옥 대공은, 김수현이 화정의 1, 2, 3차 각성을 모두 이루고 체력 102를 찍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 이상의 수준으로 보시면 됩니다. 0645 / 0933 ---------------------------------------------- 위험한 소개팅(?). 강철 산맥을 벗어난 지도 어느새 사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사흘째 진군이 끝나고, 전 원정대는 아직도 이어지는 초원에 야영지를 설치했다. 근래 이틀은 경계를 서지 않고 나름 편하게 보낼 수 있었으나, 어느덧 순번이 돌아온 탓에 오늘도 경계를 서게 됐다. 뭔가 경계를 자주하는 것 같아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애초 직책을 막론하고 모두 경계를 서야 한다고 말한 사용자가 나인 터라, 군말 없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말번이라는 사실에 위안을 받으며. 자박자박, 자박자박. 타닥타닥, 타닥타닥! 깊은 밤을 보내는 동안 불씨가 줄어든 모닥불이 미약하게 타오른다. 앞선 불침번들이 땔감을 낭비했는지 남은 건 잔가지들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모닥불 속으로 잔가지를 하나 집어넣은 후,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별아, 고마워.” 물론 혼잣말로 고맙다고 한 건 아니었다. 등 뒤로 누군가 조심조심 걸어오는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경계는 최소한 두 명이 서야 하는 만큼, 이제 나와 같이 말번 시간을 보낼 사용자에게 건넨 말이었다. “…….” 예상대로 후방에 느껴지던 기척이 잠깐 멈칫한 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에 불과했고, 기척은 곧 자박자박 걸어와 내 옆으로 살며시 주저앉았다. “죄송하지만, 두 번 당할 생각은 없어요.” 그리고 들려오는 쌀쌀맞은 목소리. 흘끗 옆을 돌아보자 못마땅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김한별이 보였다. 당연히, 오늘 김한별이 내 짝꿍이라는 사실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나는 시답잖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뜬금없는 말로 저를 당황시켜서 넘어지게 만들려는 속셈이셨잖아요. 저번에 당한 거 기억하고 있어요.” 이런, 들켰나? 역시나 얘한테는 한 번 통한 수법이 두 번 통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장난만 치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간은 강철 산맥을 벗어났다는 사실에 잊고 있었으나, 한 번쯤은 김한별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지금 이렇게 좋은 기분으로 있을 수 있는 건 모두 김한별의 조언 덕분이었으니까. 그때 조금이라도 더 미적거렸더라면, 각성한 쿠샨 토르에 형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김한별의 입술이 삐쭉 튀어나온 게 보여, 나는 속마음 그대로 말하기로 했다. “하지만 정말로 고맙기는 해.” “또 장난치시는 거예요?” “아니, 진심이라니까. 너야말로 왜 내가 고마워하는지, 정말로 모르는 거야?” “…….” 그제야 내 말이 헛소리가 아님을 알았는지 김한별이 도로 입술을 집어넣는다. “…그때 제가 말씀드린 일 때문이에요?” 그리고 우물거리며 말하기까지. 나는 빙긋 웃었다. “그것도 고맙고, 저번에 가네샤 때도 고맙고.” “그, 그거야…. 가, 가네샤 건은 이미 예전에 고맙다고 하셨는데요.” 쑥스러운 기분이 드는지 김한별이 살그머니 시선을 회피했다. 그 모습을 보니 살짝 장난기가 일어, 나는 일부러 화난 투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또 고마워하면 안 되는 거야?”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러자 김한별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짓더니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볼을 긁었다. “굳이 고맙다고 하실 필요까지는….” “왜. 설마 나를 고마운 것도 모르는 파렴치한으로 본 거야? 와, 실망이다 너.” “아, 오늘따라 왜 이러세요 진짜.” “하하하.” 결국에는 궁지에 몰린(?) 김한별이 아미를 찌푸리며 투정을 부렸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두 손을 들어 항복 의사를 표시했다. 김한별도 의외로 놀리는 맛이 있다. 김한별은 무척 불만스러워 보이는 얼굴로 한동안 투덜대더니,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딱히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렇게 따지면 저는 수십 번이나 오빠한테 고마워해야 하니까요.” “응? 수십 번이나? …에이, 과장이 심한데.”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서너 번이면 몰라도, 수십 번이라는 말은 동의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김한별이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다. “과장이 아니라…. 생각해보면 저도 오빠한테 고마운 게 참 많거든요.” “…뭔데?” 조용히 되묻자, 김한별은 잠깐 생각에 잠긴 듯싶더니 곧 말을 이었다. “그냥…. 통과의례 때도 그렇고…. 시크릿 클래스도…. 아.” 돌연히 김한별이 아차 탄성을 질렀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시크릿 클래스도….’ 라는 말을 놓치지 않았다. 김한별은 보석 마법사라는 시크릿 클래스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건 내가 얻어준 게 아니었으며,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수료식 전날에야 확인할 수 있었던 클래스였다. 김한별이 화제를 돌리기 전에, 나는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너 그 클래스는 어떻게 얻은 거야?” 김한별은 당황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 우두둑, 우두둑! 푸확! 바알의 머리는 꺾이는 선에서 그치지 않았다. 지옥 대공이 무시무시한 악력을 발휘, 움켜쥔 목을 그대로 우그러트린 것이다. 우묵하게 휘어진 목은 사정없이 비틀려 버렸고, 결국에는 몸과 분리돼 그대로 땅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아직 허공에 들린 몸 또한 힘없이 축 늘어진다. 툭! 데구루루…. 이윽고 땅을 구르던 머리가 정지했다. 절반쯤 드러난 바알의 얼굴은 한껏 까뒤집힌 두 눈을 보이고 있었다. 지옥 대공을 주시하던 이들은 악마와 마족을 가리지 않고 하나같이 숨을 삼켰다. 비록 목숨이 두 개인 점을 감안해도, 이건 정말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냥 마족도 아니고, 대 악마 중 하나가 이리도 허무하게 죽을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잠시 후, 지옥 대공이 살며시 손을 놓자 바알의 자그마한 몸도 풀썩 떨어졌다. “설마 이 정도 공격에 당할 줄은…. 나도 꽤나 얕보인 모양이구나.” 지옥 대공은 기품 있게 손을 털며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이내 손에서 뿌려진 핏방울이 바알의 얼굴에 점점이 떨어졌을 때였다. “…모두 조져!” 아스타로트의 절박한 노호(怒號)가 고요해진 등활 지옥을 왕왕 울렸다. 그리고 악마 14군주 들과 마족들은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마계는 상하 절대 복종이라는 명령 체계를 갖고 있다. 마족은 만들어진 피조물의 입장으로서, 조물주인 악마에게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낸다. 그러할진대 조물주인 대 악마 중 하나가 죽었으니 눈이 뒤집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바알 휘하의 마족들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우오오오오오오오! 살기가 충만한 함성을 지르고 사방에서 성난 파도처럼 덮쳐오는 마족 군단을 보며, 지옥 대공은 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무나도 태연하고 여유만만한 태도. 그 태도에서 일말의 불안감을 느낀 걸까? 명령을 내린 아스타로트가 급하게 다리를 움직였다. 하지만, 목표는 지옥 대공이 아니었다. 아스타로트가 달려간 방향은 무너진 어탑 주변으로, 이제 막 전투에 참가하려 폼을 잡는 벨제부브가 있는 곳이었다. “벨제부브!” “케, 켈?” “진! 너는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진을 완성해라!” “뭐, 뭐라고?” 벨제부브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의아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러나 황급해 보이는 와중에도 차갑게 빛나는 아스타로트의 눈동자를 확인한 순간, 벨제부브는 입을 다물었다. 문득 예전 사탄이 농담조로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만일 언젠가 우리 악마를 위협할 정도의 놈이 나타난다면….’ ‘아스타로트, 아마 그 녀석이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놈일 거다.’ 벨제부브는 차분히 아스타로트를 응시했다. 그러자 ‘분노의 악마’ 라고 불리는 대 악마가, 스스로 분노를 억누르며 주변 상황을 면밀히 살피는 모습이 보였다. “진, 어떻게든 진만 완성시켜! 최대한 빠르게!” 아스타로트의 요청. 신경 쓰지 말고 어떻게든 진만 빠르게 완성시켜라. 직접 차원 이동진의 구성을 담당하고 있는 만큼, 그 뜻을 모를 벨제부브가 아니었다. “…켈!” 결국 벨제부브가 알겠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동의를 얻어낸 아스타로트는 이제 아스모데우스를 찾을 요량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였다. 우웅우웅우웅우웅우웅우웅우웅우웅! “……?!” 갑작스레 아스타로트는 온몸이 터질 듯 한 진동을 느꼈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자, 마족들의 공격이 집중되는 중앙으로 전신에서 폭발적인 염화를 솟구쳐 올리는 지옥 대공을 볼 수 있었다. 동시에 등활 지옥 내, 지옥 대공을 제외한 모두는 느닷없이 시야가 붉은색으로 밝아지는걸 느꼈다. 그때, 별안간 지옥 대공이 가녀린 손을 꽉 움켜쥐었다. 찰나의 순간, 전신에서 피어 오르듯이 흘러나온 여덟 갈래 불 줄기가 찬연한 불빛을 번쩍이며 파열(破裂)하기 시작한다. 콰르르르르르르륵! 그러자 갈라지고 깨져나간 불의 파편들은, 이내 하나의 폭풍이 되어 주변을 소용돌이처럼 휩쓸어버리기 시작했다. 달려들어오는 마족을 게걸스레 집어삼키고, 이후 또 한 번 폭발하며 마족의 몸을 사방으로 퍼트린다. 삽시간에 터져나간 마족 수백 명의 신체며 장기는 공중 곳곳에 뿌려졌다가, 곧 새빨갛게 그을려 부서지며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큭…!” 그 엄청나게 파괴적인 경관에, 대 악마들은 동시에 입을 벌린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 화려하기 짝이 없는 불꽃놀이에, 지옥 대공은 희열에 찬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더니. “…이, 내가.” 갑작스레 뚝, 웃음을 그치며 지긋이 가라앉은 눈으로 아스타로트를 직시했다. 그리고 주먹 쥔 손을 들어올려 하늘을 향하게 만들었다. “이런 잔챙이들이나 상대하려고, 예까지 올라온 줄 아느냐?” 그렇게 말한 지옥 대공이 힘껏 움켰던 섬섬옥수를 활짝 폈다. 그러자 아직도 휘몰아치는 불의 폭풍이 서서히 줄어들더니, 이번에는 하나의 기다란 불 줄기로 변한다. 지옥 대공이 마치 채찍을 치는 것처럼 힘차게 손을 꿈틀거렸다. 곧이어 불 줄기가 탄력적으로 흔들리는가 싶더니 마치 아우성을 치듯이 하늘 높이 부상한다. 어느새 시꺼먼 재로 덮은 허공을 시원하게 뚫고 지나간 그것은, 이내 하늘을 스치듯이 훑으며 붉은 잔상을 기다랗게 남겼다. 그 순간이었다. 쩌저저적! 그저 불의 채찍이 허공을 스쳤을 뿐이었다. 그런데 잔상이 그어진 부분에서 무언가 벌어지고 갈라지는, 섬찟한 소음이 울리기 시작한다. 뭔가 심상찮은 기분을 느낀 걸까?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본 마족들은, 문득 풍겨오는 진한 유황불 냄새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하늘의 광경에 추가로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말았다. 쩌저저적, 쩌저저적! 그래. 하늘이, 갈라지고 있었다. 갈라지는 하늘에서 틈이 생기고, 그 안에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광경이 모든 이의 눈에 들어온다. 시시각각 커져가는 틈은 아까 둥근 원반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크기를 보이고 있었다. 이윽고 틈이 이제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찢어지고 벌어진 순간. “열려라, 게헨나의 문.” 살짝 입술 뗀 지옥 대공이 낮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그리고 이 순간을 기점으로 하늘에서, 아니 불타오르는 지옥의 광경에서 모종의 존재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젠장.” 이내 서서히 다가오는 지옥 군단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아스타로트의 두 눈에 암담한 빛이 스쳤다. 한편, 같은 시각. 마계(魔界). “…지금 막, 지옥 대공과의 격돌을 확인했습니다.” 벨리알의 보고가 이어졌다. 그러자 느릿하게 와인 잔을 들어올리던 사탄은 행동을 멈추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더 얘기해보라는 듯한 무언의 압박에 벨리알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또한, 북 대륙 인간들이 이제 도시를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는군.” 비로소 사탄이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까지는 아니지만. 기껏 해둔 안배가 무용지물이 될 뻔했어.” “무용지물이요? 보내버리는 시기는 큰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지금이나 나중이나….” “아니, 지옥 대공을 말하는 게 아니다. 악마의 씨앗을 말하는 거야.” “아.” 사탄이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제야 뜻을 깨달았는지 벨리알이 작은 목소리로 탄성을 지르고는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온몸에 사슬이 칭칭 감긴, 축 늘어진 마족이 허공에 떠 있었다. “그럼, 이제 곧 씨앗을 틔우시겠군요.” 한동안 마족을 바라보던 벨리알이 약간 아깝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사탄은 천천히 잔을 매만지다가 픽 웃었다. “어쩔 수 없지. 강제로 이식한 이상, 오랫동안 공을 들인 씨앗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잖아. …뭐, 어차피 이번 계획에 1회용으로 쓰고 버릴 생각이었으니까.” “그건 그렇습니다.” “그래,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하오면.” 벨리알이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려는 순간, 돌연 사탄이 자리에서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상대가 지옥 대공인 이상 변수는 분명히 생길 것이다. 하지만 아스타로트라면, 어떻게든 진의 발동까지는 버텨낼 수 있을 거야. 설령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말이야.” 그리고는 돌연 손을 와짝 우그러트렸다. 애꿎은 와인 잔이 산산조각 나며 쨍그랑 떨어진다. “그리고 발생한 변수는…. 내 안배로 조정한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반격을 알리는 계획이 완성된다.” 아직 손바닥에 남은 조각들을 어루만지는 사탄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오른다. 마치 지금 이 상황이 재밌어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그런 사탄을, 벨리알은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올려다보았다. “조금 후가 너무나도 기대되는군. 성공을 눈앞에 둔 인간 놈들이, 지옥 대공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 지가 궁금해.” 그렇게 말한 사탄의 입에서, 곧 낮디 낮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 잠시 후, 어두운 공간에서 섬뜩한 웃음이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김수현 : 있잖아, 사탄아. 그거 해봐. 그거. 사탄 : 어~. 또…? 김수현 : 해봐~! 빨리~! 사탄 : 으, 응…. 알았어. (잠시 후, 사탄. 정색하는 얼굴로.) 사탄 : 그리고 발생한 변수는…. 내 안배로 조정한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반격을 알리는 계획이 완성된다…. 김수현 : 아하하핳하하하하하하하핳! PS. 후기의 의미가 궁금하신 분은, 네이버에 ‘그거 해봐 그거’ 라고 치고 검색해보시면 됩니다. :) 0646 / 0933 ---------------------------------------------- 위험한 소개팅(?). 김한별은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로 얼버무렸다. 그러나 낯빛이나 태도와 매치가 되지 않는데 누가 그 말을 믿겠는가. 정말 별게 아니라면 이야기해줄 수 있는 게 아니냐고 말하자, 김한별은 할 말을 잃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푹 고개를 숙였다. “3년 전 일이잖아. 이제 와서 탓하겠다는 게 아니야. 그냥 순수 호기심이라 봐도 좋아. 설마 네가 나쁜 짓을 해서 얻은 건 아니잖아?” 결국 이렇게까지 덧붙이자,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김한별이 비로소 스리슬쩍 얼굴을 보였다. 잠시 후, 서너 번 달싹달싹하던 말문이 천천히 열린다. “…통과의례에서 얻은 거예요.” 그리고 이어진 목소리는 약간은 머리를 갸웃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통과의례? 어디서?” “트랩 포인트에서요.” 트랩 포인트. 우리가 숲을 벗어난 다음에 머무른 장소로, 함정 도시를 일컫는 말이었다. 김한별도 이제 3년 차 사용자인 만큼 그 지점의 정체를 어디선가 들어본 모양이다. 그나저나 그곳에서 보석 마법사를 얻었다고? “언제? 어떻게?” “…오빠가 없을 때였어요. 제대로 된 휴식 공간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다가, 우연히 붉은 보석을 발견할 수 있었죠. 그게 시크릿 클래스였고요.” 지금 이 자리가 자못 불편한 걸까. 김한별의 말투에서 얼른 이야기를 끝내고 싶어 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사실 나는 별로 큰 감흥은 없는데 말이다. 어쨌든 김한별의 말은 사실처럼 들렸다.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통과의례에서 레어, 시크릿 클래스를 얻는 경우도 있으니까. 하지만 아직 모든 의문이 풀린 건 아니었다. 그 당시 통과의례를 통과하고 홀 플레인으로 입장한 후, 나는 몇 번이고 김한별의 사용자 정보를 확인했다. 아마 통과의례 6주차까지는 김한별의 클래스가 일반 마법사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수료식 전날 보석 마법사임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렇다면 최소한 한 달 이상의 시간 동안 일반 클래스로 있었다는 말인데…. “그러면 그때 바로 시크릿 클래스를 계승한 거고?” “아니요. 그러지 않았어요.” 완곡히 돌려 묻자 김한별은 곧바로 해답을 말해주었다. “자세히 기억은 안 나는데…. 아마 사용자 아카데미가 10주차를 넘어갔을 때였을 거예요.” “그럼 그때까지 계속 가지고만 있던 거야?” “네.” “왜?” 이 물음에 김한별은 도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마치 올 것이 왔다는 듯이 눈을 꼭 감았다. 나는 참을성 있게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3분의 시간이 흘렀을 즈음, 김한별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때는…. 그 누구도, 아무것도 믿지 못했으니까요.” “응? 그 누구도, 아무것도 믿지 못했다?” 갑자기 초점이 어긋난 들려와 나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네. 말 그대로 모든 것들이요. 천사가 하는 이야기도, 통과의례에 떨어진 것도, 주변 사람들도…. 아니, 그냥 저를 제외한 모든 것을 부정하고 의심했어요.” 그 순간이었다. 잠깐 말을 멈춘 김한별이 돌연 눈을 똑바로 뜨며 나를 직시했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걸까? 여기는 어디야? 이 사람들은 누구지? 저 괴물은 또 뭐야? 이 보석은 도대체 뭘까? 집에는 갈 수 있을까?”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키더니. “그래요. 제 성격이 조금 날카롭고 의심이 많은 건 인정해요. 하지만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약해보이지 않으려고 애는 썼지만, 속으로는 불안해 미칠 것만 같았다고요.” 그동안 쌓아온 무언가를 토해내듯이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허나 그러는 와중에도 무언가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는 뉘앙스가 전해졌다. 마치 변명하려는 사실을 숨기려는 듯이. “그러니까 제발 왜냐고 묻지 말아요. 그때의 저는, 남자 친구한테 차이고 꼴사납게 울면서 돌아오는 길에 소환된…. 고작 21살의 여대생에 불과했으니까요.” …방금 뭔가 재미있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하지만 캐묻기에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그냥 머리나 끄덕여야겠군. “그래그래. 알았어. 그러니까 결국 불안해서 그 보석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는 말이지?” 말 그대로였다. 김한별은 그 당시 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든 걸 믿지 않았다고 했다. 말인즉, 아마 스스로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보석의 사용을 보류했을 것이다. “…비슷해요.” 김한별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 거의 데카르트를 방불케 할 의심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려보면 나름 이해는 간다. 김한별은 안현, 안솔, 이유정 이 3명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오두막에서나 사용자 아카데미에서나 참 어지간히도 의심했었지. 김한별 성격이 그랬어. 이 의심쟁이 같으니라고. 이윽고 그간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흘려낸 김한별이 자포자기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된 거예요. 아무튼 저는 다 말했으니까 욕이든 비난이든, 마음대로 하세요.”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어? 뭐라고?” “…네?” “아니, 내가 왜 너를 욕하고 비난해?” “……?” 그러자 김한별은 도리어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왜라니…. 화 안 나세요?” “그러니까 내가 왜 너한테 화를 내야 하는데.” “그, 그거야…. 어쨌든 저는 그 사실을 숨긴 입장이고…. 또 어떻게 보면 오빠를 배신….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더듬더듬 말끝을 흐리는 김한별을 보며 나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나 참, 뭔 생각을 하는 가 했더니. 설마 아직도 그 일에 관한 트라우마가 남아 있었던 건가? “애초 네가 발견한 거잖아. 그리고 그때 우리는 단순한 협력 관계에 불과했고. 소유권이 너한테 있는 이상 숨기든 말든 네 마음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저,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사실 말을 하면서도 가슴이 조금 찔리기는 했다. 수료식 전날, 김한별이 보석 마법사인 걸 보고 일말의 배신감을 느끼기는 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고방식에 변화가 생겼고, 방금 김한별의 해명을 들으며 나름 이해를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현 상황에서 ‘그래! 너는 못된 배신자야!’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잖은가. 나는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김한별은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래도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은 있는지, 흡사 악단 지휘자처럼 이리저리 손을 젓더니 결국에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우리 이만 다른 이야기하면 안 돼요?” “안 될 거야 없지.” 어차피 궁금한 건 해결했다. 그리고 시무룩해하는 김한별의 모습을 보고 있자 꼭 내가 괴롭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화제를 돌리는 게 나을 듯싶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또 하나 궁금한 게 있었던 것 같은데…. ‘Amor Nuntios : 이것은 사용자 김한별이 사용자 김수현만을 오롯이 생각해 말한 염원의 효과입니다.’ “아, 맞다.” 갑작스레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에 나는 가볍게 손뼉을 쳤다. 예전 이브의 혈통 조건이 갱신될 때 나온 메시지인데, 당시 ‘Amor Nuntios’ 라는 단어를 몰라 궁금해 하던 기억이 있었다. 흘끗 시선을 돌리자 조금은 불안해 보이는 김한별이 보였다. “왜 그렇게 좌불안석이야?” “이번에는 또 어떤 질문을 하실까 불안해서요.” “…저번에 가네샤 때 사건 기억해?” “네.” 다행히 정상적인(?) 질문이라고 느낀 걸까? 김한별은 한결 풀어진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 혹시 Amor Nuntios,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 그러나 말을 꺼낸 순간 김한별의 얼굴은 또다시 급변했다. 온몸을 이용해 흠칫 놀라는 모습을 보이고는, 이내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때 갱신된 정보 중에서 그런 단어가 있었거든.” 뭔가 또 잘못한 기분이 들어 얼른 말을 덧붙였지만, 김한별은 어이없다는 눈초리로 나를 응시했다. “오빠. 그냥 솔직히 말해주세요.” “응? 뭘?” “아까도 그러셨고, 지금도 저 곤란하게 하려고 놀리시는 거 맞죠?” “아니?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거, 거짓말!” “야! 갑자기 왜 소리를….” 삐이이이이익! 그렇게 김한별의 앙탈에 맞받아치려는 찰나, 갑작스레 어디선가 거슬리는 소리가 들렸다. 펑, 펑! 이어서 무언가 두어 번 폭발하는 소음까지. 반사적으로 시선을 올리자,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는 새하얀 불빛이 눈에 들어온다. 위급 상황을 알리는 신호. 나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김한별. 지금 당장 클랜원들 깨워.” “네, 네!” 마침 김한별도 몸을 일으켰는지 바로 달려가는 기척이 전해졌다. 그리고 나는 허공에 떠오른 신호를 보며 거리와 방향을 가늠한 후, 최대한의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 어느새 동이 튼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선선한 날씨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전 원정대의 분위기는 그리 좋지 못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밝고 쾌활하던 사용자들은 오늘 아침 곳곳에 모여 수군수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전혀 좋지 못한 낯빛으로. 잠시 주변 분위기를 살피다가 나는 조용히 앞쪽을 응시했다. “씨발, 어떡할 거야! 네놈 클랜원 하나 때문에 지금 전부 좆 되게 생겼다고!” “그, 그게…. 일단 주변을 수색하고는 있는데….” “개소리 집어치워! 수색한지 벌써 30분이나 지났다며!” “윽…!” 전방에는 시뻘게진 얼굴로 고함치는 공찬호와 죽을죄를 지었다는 듯 머리를 푹 숙이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새끼…! 감히, 감히 도망을 쳐?” “사, 사용자 공찬호. 아직 아무것도 확인된 건 없습니다. 우선 진정을….” 공찬호는 진정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흘끗 시선을 돌리자 옆에 담담한 얼굴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형이 보였다. 또한 무표정한 인상으로 팔짱을 끼고 있는 한소영도. 애써 평정을 가장하고는 있으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상당히 가라앉은 상태였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흘렸다. 오늘 새벽, 신호탄이 터진 지점으로 달려간 나는 의외의 상황을 보고받고 말았다. 다름 아닌 탈영을 확인했다는 보고였다. 탈영병의 사용자 정보는 서북, 아니 정확히는 북부 소속 사용자 이정필. 올해 7년 차 사용자로 주변에서 꽤나 실력을 인정받는 궁수였던 모양이다. 특이 사항은 거인들의 터전에서 갑자기 기절했다가, 진군 하루 전 회복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전무. 사건 경위는 대강 이렇다. 경계 교대를 하려고 찾아간 사용자가 이정필이 자리에 없는 걸 확인, 처음에는 볼 일을 보러 간 줄 알고 10분 가량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나 계속 기다려도 모습이 보이지 않아 찾아 돌아다녔으나, 어디에서도 이정필을 발견할 수 없었다…. 고는 하는데. 사실 아직 강철 산맥 안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커질 일은 아니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탈영은 즉시 처형이 당연하지만, ‘목숨이 아까워서 도망갔구나.’ 라고 암암리에 이해라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강철 산맥을 벗어난 이상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안 그대로 업적이나 보상에 예민한 사용자들인데, 탈영 사건이 발생한 이후 별의별 추측이 나오는 중이었다. 개인의 능력으로 도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아니면 독식하려는 욕심에 무모한 결정을 내렸는지. 이정필이 어떤 의도를 갖고 탈영했는지는 나도 알 수 없다. 사용자 대다수가 아틀란타의 사정을 모르는 만큼, 그래도 한 번 지켜보자 라는 설이 지배적이기는 했다. 허나 도시가 목전에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나로서는 속이 타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직까지는, 아주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이정필이 독식을 목적으로 한 탈영이 아닌, 정찰 등의 ‘순수한’ 개인 목적으로 이탈해 도시를 발견했을 때는 누구나 똑같이 업적을 받을 수 있다. 그런 경우는 설정이 이정필을 원정대 소속으로 판단하니까. 허나 그럴 가능성은 극히 낮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결국 지금으로서는 이정필이 방향을 잘못 잡았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이거 이거, 분위기가 상당히 심각하군요?” 그때였다. 한창 상념에 잠겨 있던 와중 별안간 천연덕스러운 목소리가 귓전으로 흘러들었다. 천천히 등을 돌리자 한껏 여유로운 태도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사내의 모습이 눈에 잡혔다.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은 채 다가오는 사내는, 동부 총 사령관 조성호였다. ============================ 작품 후기 ============================ 『Q & A』 Q 1. Reader : 도대체 지옥 대공은 언제 인간 세상에 출현하나요? 로유진 : 다음 회에 출현합니다. Q 2. Reader : 거짓말. 또 분량 조절 실패했다고 할 거잖아요. 로유진 : 이정필은 예전에 뿌려놓은 복선이니 제외하고, 오늘 김한별과의 대화를 마지막으로 지옥 대공 파트 마지막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무대는 준비됐습니다. 다음 회에 나오지 않으면 완결 전까지 무조건 하루 2연참씩 하도록 하죠. 후훗. Q 3. Reader : 그런데 너 오늘따라 묘하게 말투가 건방지네. 야, 그럼 스탯 포인트 1은 언제 얻냐? 로유진 :하, 강철 산맥을 벗어나고, 도시로서의 아틀란타를 발견하면 얻을 수 있는데? Q 4. Reader : 어디서 반말질이야. 죽고 싶냐? 로리 전쟁 한 번 더 할래? 로유진 : 죄, 죄송해요. 잠깐 컨셉 좀 잡느라요. ㅜ.ㅠ Q 5. Reader : 후. 좋아. 한 번 봐준다. 그나저나 왜 저번에 먹은 잠재성 높여주는 영약은 효과를 보지 못했지? 로유진 : …김수현은 원래 안 먹으려고 했습니다. 다만 마르가 억지로 먹이고 화정의 설득으로 먹었을 뿐이지요. 그 부분에 관한 설정을 다시 읽어보시면 이해가 가시리라 생각해요. Q 6. Reader : 그럼 업적 설정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로유진 : 아, 간단해요. 기본적으로 분배 원칙을 따른다고 보시면 됩니다. 저번에 강철 산맥을 벗어나고 개인당 100,000 GP를 얻었지요? 그때 벗어난 인원을 15,000명으로 가정해보겠습니다. 만일 김수현 혼자서 강철 산맥을 돌파하고 벗어났을 경우, 1,500,000,000 GP를 얻었을 거라는 뜻이지요. :) Q 6. Reader : 오빠,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왕이 뭐게~? 로유진 : 최저임금. 0647 / 0933 ---------------------------------------------- 위험한 소개팅(?). 안 그래도 좋지 않은 기운이 흐르는 와중에 조성호가 등장했다. 자연스럽게 장내의 공기가 경직되고 사용자들은 얼굴을 굳혔다. 오직 조성호만이 미소 지은 얼굴로 걸어오고 있을 뿐. ‘건수 하나 잡았군.’ 지금껏 서로 없는 사람처럼 취급해왔으면서, 이렇게 갑자기 찾아온 이유야 뻔하다. 조성호도 귀가 있으니 이미 탈영 사실은 듣고도 남았을 터. 무슨 말을 꺼낼지는 모른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황은 사실 조성호가 명분상 무조건 이기고 들어가는 싸움이다. 어떤 이야기를 하든 간에 소속 사용자를 관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굉장히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나는 조성호가 오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옳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형이 밀리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아, 머셔너리 로드.” 진로를 가로막자 조성호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아는 체를 했다. “동부 요새에서 만난 이후….” “예, 오랜만입니다.” 의도적으로 말을 끊자 조성호가 눈을 살짝 치뜸과 동시에 수행 인원들의 낯빛이 일변했다. 그러나 조성호가 재빠르게 눈짓을 보내자 대놓고 나서지는 않았다. 그저 불쾌하기 짝이 없다는 눈초리로 나를 노려볼 뿐. 그 시선들을 받아넘기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갑자기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음? 마치 제가 못 올 곳을 왔다는 것처럼 들립니다만?” “…급한 일이 아니라면 이만 돌아가 주셨으면 좋겠군요. 보시다시피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 설마 탈영 사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조성호가 느닷없이 목소리를 높여 탈영 사건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실은 이렇게 찾아온 이유도 그 사건과 관련해서입니다.” “아직 아무것도 확정된 건 없습니다. 지금 상황을 정리하는 중이니 아직은 고려 로드가 상관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거야 제가 판단할 일이지요. 조언은 감사합니다만, 어쨌든 머셔너리 로드와 나눌 이야기는 아닌 것 같군요. 마침 여기 두 분이 모여 계시니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더 할 말 있냐는 듯 조성호는 빙긋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럼.” 이라고 말하며 그대로 지나치려는 찰나, 나는 똑같이 걸음을 움직여 또다시 진로를 가로막았다. 조성호가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묻는 듯이 도로 나를 응시한다. “이런…. 머셔너리 로드?” 화난 듯 아닌 듯 오묘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그러나 여기서 물러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예리하게 들어오는 시선을 맞받아치며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는 찰나였다. “머셔너리 로드가 총 사령관이었나요?” 돌연히 조성호가 선수를 치고 들어왔다. “아니면…. 혹시 제가 모르는 사이에 남부의 총 사령관이 교체된 겁니까?” 그리고 이어진 말에 갑작스레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조성호의 말은 총 사령관이 아닌 이상 나서지 말라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계속 버티면 그건 한소영을 무시하는 태도가 된다. 외통수였다. ‘이 빌어먹을 놈이….’ 그때였다. “머셔너리 로드는 남부의 총 사령관이 아니에요. 정확히는 선봉 부대장이죠.” 문득 왼쪽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살짝 눈동자를 굴리자 팔짱을 낀 채 도도히 걸어오는 한소영이 보였다. 조성호가 나를 보던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린다. “아하, 그렇군요. 저는 또 제가 착각한 줄 알았습니다. 저를 막는 머셔너리 로드의 태도가 너무 당당해서요. 하하하.” “네, 그럼요. 머셔너리 로드인데요.” 조성호는 일부러 그런다는 게 보일 정도로 크게 웃어 젖혔다. 그러나 한소영이 바로 반응해오자 곧 웃음을 그쳤다. 조성호를 바라보는 한소영의 입가에 차가운 비웃음이 자리잡는다. “이번 공략에서 정말 엄청난 공을 세우셨잖아요? 그런 만큼 당연히 당당하셔도 되지 않을까요?” “아니….” “여기, 그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활약하셨는데.” “…….” 한소영은 특히 ‘그 누구와도’ 라는 말을 강조했다. 이번에는 조성호가 단박에 입을 다물었다. 잠깐이지만 얼굴이 굳은 빛이 스친 것도 확인했다. 한소영의 말은 언뜻 들으면 나를 칭찬하는 것처럼 들렸으나, 실상은 조성호의 행동을 세차게 꼬집는 뜻을 담고 있었다. 이윽고 한소영의 오연한 눈길에 조성호가 히죽 웃었다. “물론 그렇죠. 머셔너리 로드의 활약은 익히 들었고,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그머니 한 발 물러나더니 한결 부드러운 얼굴로 말을 잇는다. “그리고 제가 지금 찾아온 건, 우선 수색을 중지하고 최대한 빠르게 출발했으면 하는 마음에 온 겁니다. 이렇게 진전이 없는 이상, 의미 없는 수색이 길어질수록 우리한테 좋을 게 없으니까요. 그뿐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정필이 돌아오지 않는 이상 먼저 도시를 찾기 전에 우리가 찾아야 한다는 소리였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또 하나 말씀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한소영도 공감하는지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을 즈음, 여전히 한소영을 바라보는 조성호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현재 원정대의 배치 변경을 요청하고 싶습니다. 오늘부터는 동부가 선봉으로 올라가고 싶습니다만.” “그러세요. 그럼 우리 남부가 중앙으로 옮기도록 하죠.” 조성호의 미소가 진해졌다. 아주 잠깐이기는 했지만 나는 멍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조성호의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한소영이 1초 만에 허락해버린 것이다. 마치 네가 그럴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한순간 그게 무슨 말이냐고 받아 치고 싶었으나 차마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한소영이 모종의 신호를 보내 나를 말리고 있었으니까. “감사합니다. 사실 사용자들이 너무 시끄러운 터라 꽤나 곤란했는데, 동부는 제가 책임지고 진정시키도록 하죠.” 나는 이제야 조성호의 진짜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말인즉, 거래였다. 일단 도시를 찾기 전까지는 이걸 공론화하지 않을 테니 선봉 자리를 달라는 소리였다. 차후 동부가 앞장서서 도시를 찾았다는 명분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그럼 조만간 진군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동부는 이미 모든 준비를 끝냈으니 아무쪼록 최대한 빠르게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조곤조곤 말한 조성호는 주변을 한 번 천천히 훑고는 더는 말 않고 등을 돌렸다. 그렇게 조성호가 떠난 이후로 조용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상하리만치 꺼림칙한 기분이 느껴졌지만 결국 나 또한 준비하러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문득 누군가 무척이나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 안솔이 있었다면….’ * 그렇게 북 대륙 사용자들이 진군을 시작하고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 즈음. 다른 차원인 등활 지옥에서는 아비규환을 방불케 하는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악마의 군세와 지옥의 군단이 맞붙은 공간은, 말 그대로 지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방에서 괴성이 메아리치고 피가 솟구친다. 이미 전장의 광기에 휩쓸린 괴물들은 이성 따위는 저편으로 날린 채 서로를 물어뜯고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데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활약을 펼치는 존재는, 당연히 지옥 대공이었다. 지옥 대공은 딱히 처음처럼 화려한 능력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한 손에 든 불의 채찍만을 사용해서 벌떼처럼 밀려오는 마족들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단연코 최고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한 번 채찍이 요동칠 때마다 마족들을 장난감처럼 쓸어버린다. 악마 14군주 바로 아래 급으로 평가되는 최상급 마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옥의 겁화가 옮겨 붙는 족족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한 줌의 잿더미로 변한다. 그런 지옥 대공을 바라보는 아스타로트는 시시각각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감을 느꼈다. 차원 이동진을 준비하는 벨제부브를 제외하고, 자신과 아스모데우스, 그리고 목숨 하나를 희생하고 되살아난 바알도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옥 대공과의 전투는 피하고 있었다. 대 악마들은 벨제부브가 진을 완성할 수 있도록 움직이고 있었고, 악마 14군주들은 견제를, 그리고 마족들이 지옥 대공과의 직접적인 전투를 담당하고 있었다. 애당초 마족들이 지옥 대공을 상대할 수 있다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무조건 진의 완성이 최우선이니만큼, 어떻게든 시간이라도 벌어볼 속셈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마족들의 수가 눈에 띄게 확연히 줄어들어 있다. 물론 대 악마들도 그만큼 지옥 마수들을 박살 내기는 했지만, 지금도 불살라지는 수하들을 보며 아스타로트는 섬찟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의 지옥 대공은…. 너희가 먼저 진을 완성할까? 아니면 내가 먼저 이놈들을 박살낼까? 라고 말하는 것처럼, 마치 일종의 유희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았기에. 그것도 대 악마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그렇게 지옥 대공이 무표정한 낯으로 전장을 종횡무진 휘젓고 있을 때. “차, 차원 이동진을 발동한다!” 비로소, 약간 마지못한 기색이 담긴 목소리가 등활 지옥을 울렸다. 우우우우우우우웅! 그러자 등활 지옥 곳곳에서 웅혼한 울림이 공간을 메워오며 흐르던 마력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목소리의 정체는 벨제부브였다. 혼란한 와중에도 어찌어찌 차원 이동진을 완성한 것이다. 이내 흔들리던 마력이 지면으로 깊숙하게 스며들며 차원 이동진이 서서히 발동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진을 완성한 벨제부브의 낯빛은 그리 좋지 못했다. 스스로 성공을 확신하지 못하고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애초 이런 혼잡한 전장에서 진을 완성시키는 게 어불성설이거니와, 설령 완성했다손 치더라도 차원 이동진 같은 거대한 진법은 발동에 단계적인 절차를 밟아야 한다. 말인즉 즉시 발동이 아닌, 처음 진을 돌리고 마지막 좌표를 지정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끄그그긍, 끄그그긍! 드디어 차원 이동진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스며들었던 마력이 한꺼번에 요동치기 시작한 순간, 벨제부브는 몸 내부로 커다란 충격이 들어오는걸 느꼈다. 자동적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냥 압박이 아닌 직접적인 충격이 전해진다는 것은, 차원 이동진이 발동에 이르기까지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황급하게 구축하다 보니 어딘가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미 진은 발동된 상태였고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다. 벨제부브는 마치 세포가 끓어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2번째 절차로 돌입한 순간, 제물로 이용할 마족들에게 움직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마족들이 빠르게 이동을 시작했다. 대 악마들이 확보해준 공간으로 속속히 들어가 진의 구성 요소를 채우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삽시간에 이동을 끝마친 마족들은, 어느새 벨제부브를 중심에 두고 사방으로 포진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렇게 2번째 절차를 끝내고서 벨제부브는 곧바로 3번째 절차인 ‘차원문의 개방’ 에 들어갔다. 이 3번째 절차만 끝나면 마지막 절차인 ‘좌표 지정’ 만 남는다. 그렇기에 벨제부브는 몸 내부가 진탕이 되는걸 느끼면서도 주문을 외우는데 박차를 가했다. 그럴수록 등활 지옥을 메우는 웅혼한 울림도 점점 더 강해져만 가고 있었다. 그러자, 지옥 대공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걸까? 한창 마족들을 압살하던 지옥 대공은 돌연 풍겨오는 심상찮은 기운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곳곳에 서 있는 마족들을 확인한 찰나, 이어지는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퍼석, 퍼석, 퍼석, 퍼석! 사방에 포진해있던 마족들의 몸이 갑자기 퍽퍽 터지더니 하나의 핏물로 화한다. 액체로 변한 살점 섞인 핏물들은 그대로 진을 따라 흘렀고, 불그스름한 빛을 흘리기 시작했다. “호오…!” 그걸 보는 지옥 대공의 입에서 처음으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계속해서 무료하던 얼굴에 처음으로 흥미로운 빛이 떠오른다. 물론, 벨제부브 입장에서는 전혀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콰르르르르르르르! 왜냐하면, 흥미를 느낀 지옥 대공이 온몸에서 폭발적인 염화를 뿜어냈으니까. 그리고 망설임 없이 걸음을 돌려 벨제부브를 목표로 날아가기 시작했으니까. “쿨럭, 쿨럭쿨럭!” 마침 3번째 절차를 완료한 벨제부브의 입에서 시꺼먼 핏물이 토해졌다. 아마 할 수만 있다면 지옥 대공을 향해 욕을 한 사발로 퍼부었을 것이다. 가뜩이나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차원 이동진이, 지옥 대공이 난리를 치기 시작하자 아예 균형이 깨져버렸다. 그러한 결과, 진을 억지로 유지하려는 벨제부브에 한층 부담이 가중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벨제부브는 지옥 대공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진득한 살기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꼭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윽고 지척까지 날아온 지옥 대공의 존재를 느낀 순간, 이어서 막으러 들어온 3명의 대 악마들이 모조리 튕겨나가는걸 확인했을 때. “……!” 벨제부브는 그냥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차원 이동진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라 다른데 신경 쓸 여유도 없었거니와, 이제 자신이 살 길이 1초라도 빠른 진의 발동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무시무시한 지옥 대공을 마주했다가 아차 하는 순간에는 죽음은 물론, 지금까지의 모든 희생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주문을 외우는 벨제부브를 보며 지옥 대공은 희열에 찬 표정으로 손을 쭉 내뻗었다. 바알에게 했던 것처럼 그대로 목을 꿰뚫고 비틀어버리려는 듯이. “이제 좀 재미있구나! 어디 한 번 해보거라!” 지옥 대공의 외침이 벨제부브의 귓전을 왕왕 울린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파앗! 지면에서 터진 단 한 번의 빛의 폭발에, 구간 전부를 메울 정도의 찬연한 빛무리가 등활 지옥을 물들였다. 끄그그그그그그긍! 어떻게 형용할 수 없는 기괴한 소음이, 공간이 와짝 일그러지고 비틀어지는 광경이 곳곳에서 연출된다. 그리고. “켈!” 벨제부브가 눈을 번쩍 뜬 것과. 푹! 목에 지옥 대공의 손이 틀어박힌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내 온몸이 불타오르는 벨제부브가 쓰러지고, 빛무리는 지옥 대공을 칭칭 감싸 안는다. 차원 이동진이 요동하기 시작했다. 한편, 같은 시각. 마계. “차원 이동진의 발동을 확인했습니다!” “…그래, 좋아.” 벨리알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자, 사탄은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오른쪽에 사슬에 감긴 마족을 돌아본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도 안배를 실행한다.” * 아틀란타(Atlanta). 김수현의 예상대로 도시는 정말로 목전에 있었다. 북 대륙 원정대는 진군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초원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지역인, 초원보다 풀이 한참 적은 피처럼 붉은빛을 띤 황무지에 들어간 이후,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홀로 우뚝 솟은 거대한 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성호가 탑을 자세히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고어 해석 능력을 지닌 사용자들은 모조리 달려 나와 해석을 시도했다. 그 결과,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발견한 탑이 도시까지의 거리 및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임을 밝혀내었다. 아마 평소라면 사용자들은 또 한 번 환호하며 기뻐했을 것이다. 정말로 도시가 있음을 확인하고, 또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까.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아니, 걱정스럽다는 표현이 옳을까? 오늘 새벽 이정필이 탈영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만한 사용자들은 모두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도시의 실존을 확인했다는 기쁨보다는, 혹시 그 궁수가 먼저 발견하고 도착하지 않았을까 싶은 걱정이 든 것이다. 사용자들의 걱정을 읽은 조성호는 곧바로 강행군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반론은 허용치 않겠다는 듯 아예 최선두로 걸음을 옮겼다. 물론 이렇게 마음이 급한 상황에서 사용자들 또한 하등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저…. 클랜 로드.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그렇게 강행군이 시작된 이후, 조성호를 따라 선두까지 온 사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조성호가 흘끗 눈을 굴렸다. “뭐가 괜찮아?” “강행군말입니다. 후방 원정대에게도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게 옳지 않을지….” 그러자 조성호는 픽 웃음을 터뜨리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가 선봉 부대인 이상 큰 상관은 없지 않나? 알아서 따라오지 않을까 싶은데.” 조성호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나름의 생각도 있었다. 어차피 진군 속도는 선봉에 선 원정대가 정하는 것이며, 설령 갑작스러운 강행군으로 항의를 해오더라도 탈영 사건을 들먹이면 그만이다. ‘이정표를 발견한 순간 1초라도 빠르게 발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라고 대답하면, 아마 꿀 먹은 벙어리가 되리라. 사실, 조성호는 이번 탈영 사건을 일으킨 이정필이라는 사용자를 아주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덕분에 알게 모르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동부가 한순간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나아가 ‘동부가 처음으로 도시를 발견했다.’ 는 명분도 쥘 수 있게 해주었다. 아틀란타 입성 이후 충분히 한 자리 차지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었는데,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감사의 키스라도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다. “…킥.” 조성호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머리를 숙인 채, 여전히 걱정스런 낯빛을 하고 있는 사내를 보며 입을 열었다. “걱정 말라고. 서북부에서 해놓은 짓이 있으니 딱히 항의하지는 못할 거다.” “…….” “교체하자마자 이정표를 발견하다니, 운이 좋았지.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얼른 도시만 발견하면 돼. 처음으로 입성하고 천연덕스럽게 축하하면 그만이야.” “…저, 클랜 로드.” 그때였다. 계속해서 머리를 숙이며 걷던 사내가 갑자기 심각한 목소리로 조성호를 불렀다. 이어서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우뚝 걸음을 멈추기까지. 덩달아 심각해진 조성호가 걸음을 멈추자, 자연스럽게 강행군도 정지했다. “응? 갑자기 왜 그래?” 조성호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내는 서너 번 눈을 끔뻑이더니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여기….” “어이, 왜 그러냐니까?” “피 냄새…. 나지 않습니까?” “…뭐?” 비로소 사내의 입이 열리자 조성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내 사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내리자, 처음 붉은 핏빛을 띤 황무지가 눈에 들어왔다. 조성호는 저도 모르게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손을 내려 천천히 지면을 쓸어보았다. 처음에는 잘 몰랐다. 얼른 도시를 발견하겠다는 급한 마음도 있었고, 또 황무지도 핏빛을 띠고 있어 딱히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자 확실히 뭔가 이상한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내의 말대로 미약하게 풍겨오는 피 냄새도 그렇지만…. “이건….” 무엇보다 지면의 흙이 이상하다. 손에 쥔 흙은 적토가 분명했다. 그러나 흙을 쥐고 몇 번 손을 비벼보자 뭔가 끈적끈적한 기분 나쁜 감촉이 느껴졌다. 마치 살짝 굳어 응고한 피를 만지는 것처럼. 어느덧 손에는 흙을 비빈 것치고는 진한 붉은 자국이 묻어 있었다. 주변 일대는 온통 핏빛 황무지. 처음 들어왔을 때는 이상함을 느낄 수 없었는데, 유독 이 장소에서만 미약하게나마 피 냄새가 흐르고 있다. 그 사실을 인지한 찰나, 조성호의 직감이 경종을 울렸다. …그러니까, 무언가 이상하다라고. 그렇게 생각한 조성호는 일단 물러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조성호는 알고 있을까? 이미 주변 대지에는 사탄이 안배한 이정필이 모종의 행동을 마쳤다는 사실을. 그리고,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번쩍! 그렇게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갑작스럽게 땅에서 붉은빛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아?” 그와 동시에, 강렬한 현기증이 조성호의 뇌리를 습격했다. 그리고 잠시 후. 조성호의 행동에 변화가 생겼다. 절반쯤 펴졌던 무릎이 도로 하릴없이 꺾이고, 몸은 크게 휘청인다. 조성호는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했지만,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귀가 멍해지며 이상한 소음이 들려온다. 시야는 갑자기 좌우로 나뉘어 춤을 추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붉어졌다. 흡사 눈알에 피를 적신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온 세상이 핏빛으로 채색돼 천천히 흘러간다. 그 어떤 징조도, 전조도 없었다. 조성호가 확인한 거라고는, 땅에 묻은 피와 잠깐의 붉은 번쩍임뿐. 하다못해, 그전까지는 마력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데…. 문득, 조성호는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는 걸 느꼈다. 번쩍임을 확인하고, 1분이나 흘렀을까? 무언가가 빙글빙글 돌고 있다. 붉디붉던 시야는, 어느새 형체가 흐릿하게 들어올 정도로 가물가물해지고 어둡게 변한 상태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회로를 가득 채우던 마력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쭉쭉 빠져나가는 감각이 느껴진다. 이제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잠시 눈을 스치고 지나간, 흙 바닥에 쓰러진 누군가의 모습을 확인해도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는다. 전신을 엄습해오는 노곤함은 모든 걸 잊게 만들었다. 결국에는 머릿속에 내려앉은 ‘쉬고 싶다.’ 는 생각에 몸을 맡기고, 조성호는 눈을 감았다. 지금, 주변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지도 못한 채. 이윽고 서서히 무너지는 조성호가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건. 어둠이 들어찬 시야를 환하게 밝혀올 정도의 불빛을 내뿜는, 불그스름한 황금색을 띠는 형상이었다. ============================ 작품 후기 ============================ 드리고 싶은 말은 많은데…. 일단 잘게요. 자야 할 것 같아요…. ㅜ.ㅠ 0648 / 0933 ---------------------------------------------- 위험한 소개팅(?). 그것은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갑작스럽게 벌어졌다. 미처 대응할 겨를도 없이. 야영지를 떠날 때는 조성호를 어떻게 족칠까 고민하고 있었다. 핏빛 황무지에 진입하고 탑의 이정표를 발견했을 때는 이제 정말 끝났다고 생각했다. 잠깐 진군이 멈췄을 때는 약간 긴장이 풀어졌다. 진군 정지가 길어지고 전방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와도 별일이야 있겠냐 싶었다. 그러나. 우웅! 돌연 마력의 흐름이 느껴지고. 우우우웅! 삽시간에 강도를 키우더니. 우우우우우우우웅! 온 세상을 구성하던 형형색색의 빛이 모조리 붉은 빛으로 반전한다. ‘저건…?’ 이내 둥근 접시를 거꾸로 엎어놓은 듯한 붉은 장막을 확인한 순간, 저절로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몸은 차오르는 의문을 이기지 못해 자동적으로 앞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 가지마! 그러나 막 한 걸음 뗀 찰나, 화정의 다급한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 젠장, 가지마! 절대로 가지마! 아니, 도망쳐! 빨리 도망치라는 말이야! ‘화, 화정?’ 어떠한 상황 설명 없이 무조건 도망치라고만 하니, 나 또한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화정의 목소리는 지금껏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절박한 음색을 띠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차원 이동 간섭(陣).』 (설명 : 차원 이동진에 대응하는 차원 이동 간섭진입니다. 차원 이동진이 발동 시 대응해 연결시키면, 차원 이동 간섭진의 시전자에게 말 그대로 ‘간섭’ 할 여지가 생깁니다.) (상세 설명 : 현재 사용자 김수현이 확인한 진은 정식이 아닌 약식으로 이루어졌으며, 구성 요소에서 마족의 선혈을 확인했습니다. 간섭 효과는, 범위 안에 있는 모든 생물체들을 액체화시켜 소환되는 대상의 원천으로 삼습니다.) ‘…뭐?’ 갑자기 출력된 말도 안 되는 설명에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반문했다. - 아, 안 돼! 늦었어…! 그리고 화정이 절망하는 목소리가 이어진 순간이었다. 끄그그긍, 끄그그긍! 돌연히, 어디선가 녹슨 기계가 돌아가는 듯한 거슬리는 소음이 들려온다. 그와 동시에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감촉이 온몸을 스멀스멀 잠식해 들어오기까지. 마치 이 세상을 이루는 공간이 억지로 비틀리고 일그러지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아니, 잠깐만.’ 눈앞의 상황을 하나하나 인지해나가는 순간, 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벌어지는 현상이 언제 어디선가 겪어본 적 있다는 상황이라는 것을. 즉 이 감각은 아틀란타를 탈환할 때 느꼈던, 그러니까 지옥 대공이 등장할 때와 비슷한…. ‘…아?’ 그 순간, 불현듯 예전의 기억이 번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설마 설마 하면서도, 나는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처음 눈에 보인 건, 시뻘건 빛을 띤 불길한 기운이 흐르는 하늘이었다. 이어서 둥근 장막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아지랑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수백 가닥의 아지랑이들이 중구난방으로 피어 오르니 마치 하늘에 붉은 강이 흐르는 듯했다. 그리고 공중으로 느릿하게 떠오르는 불그스름한 형체 하나. 붉은 아지랑이들 또한 똑같이 허공을 오르고 있다. 그것들은 마치 형체에 흡수라도 되듯이 빛에 닿는 족족 빨려 들어가는 중이었다. 그 광경을 확인한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도망치라는 화정의 경고. 제 3의 눈으로 확인한 설명. 1회 차의 기억. 그리고 이미 늦었다는 말. 머릿속 복잡하게 쌓인 기억들과 생각들이 갑자기 하나로 합쳐졌다. 거의 동시에,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껴야만 했다. 그래, 이제 알겠다. 이제야 왜 화정이 도망치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가장 상상하기 싫은 최악의 시나리오가 아틀란타를 앞두고 재현된다. 이윽고 하늘로 떠오른 형체의 빛이 조금씩 걷히고, 그 안으로 소환된 존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나는, 볼 수 있었다. 가히 조각상을 연상케 하는 고운 이목구비. 무심한 듯 보이는 진홍색 눈동자. 벌건 황금을 녹여 뽑아낸 듯한,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풍성한 머리칼. 그리고 온몸에 연한 불빛이 흐르는 여인을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호흡을 정지하고 말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오직 하나. ‘지옥…. 대공….’ ‘전방의 사용자들은 어떻게 됐는지.’, ‘어떻게 지옥 대공이 소환됐는지.’ 라는 생각은, 곧 사라졌다. 그저 갑작스럽게 의식이 얼어붙었다. 절로 이빨이 딱딱 부딪치기 시작한다. 지옥 대공을 봤을 때부터 이상하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자꾸만 의식이 멍해지고 다리가 느슨해지려고만 한다. 그런데 가슴은 지금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이 쿵쾅쿵쾅 요동치고, 숨은 턱턱 막혀오고 있었다.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떠봤지만, 그럴 때마다 저 하늘에 떠 있는 존재가 지옥 대공이 분명하다는 사실만을 되새길 뿐. …나는, 그제야 내가 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랬다. 나는 지금 공포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느닷없이 소환된 지옥 대공을 확인한 순간, 그 존재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기운에 질려버린 것이다. 쿠샨 토르 앞에 섰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어떻게든 추스르려 노력해봤으나, 심안으로도 다스려지지 않을 정도의 압박감. 결국 해일처럼 밀려들어오는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 나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간신히 좌우로 시선을 돌리자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사용자들이 보인다. 모두 이 갑작스런 사태에 놀랐는지 하나같이 넋을 잃은 얼굴로 지옥 대공을 바라보고 있다. 여전히 사지를 구속당한 기분을 느낀 채, 나는 겨우 머리를 젖혀 도로 시선을 올렸다. 황혼 빛 하늘 아래, 지옥 대공은 한 눈에 봐도 기분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무에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차분히 허공을 둘러보는 거만스러운 낯빛은 사나운 노기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내 오연히 시선을 떨어트리더니 땅에서 바라보는 사용자들을 쓱 훑어본다. 그 순간, 나는 지옥 대공이 어쩌면 그냥 넘어가주지 않을까라는, 혹시나 걸었던 기대가 얼마나 부질없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진홍색 눈동자는 명백한 혐오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마치 한낱 미물, 아니 벌레를 보는 눈초리였다. 그렇게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던 지옥 대공이 마침 내가 있는 부근을 훑은 순간. 지금껏 내내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지옥 대공의 낯에 돌연 흥미로운 빛이 나타났다. 사나운 시선을 거두고 호기심 어린 눈초리를 빛낸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있는 지점을 향해. 그래, 지옥 대공이 나를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공중에서 이내 느릿하게 내려오는 지옥 대공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아차 한 사이 뜨거운 불 냄새가 코를 푹 찌르고 들어왔다. 천천히 내려온 지옥 대공은 지상에서 약 2미터 높이를 남겨두고서 강하를 멈췄다. 그리고 허공에서 의자에 앉는 자세로 다리를 꼬더니 한 손으로 턱을 괴어 나를 가만히 응시한다. 이제 지옥 대공과 나와의 거리는 채 1미터도 되지 않는다. 사방에 내려앉은 침묵.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하고 있자 ‘절대로 이길 수 없다.’ 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아주 예전에는 화정만 있으면, 설령 지옥 대공이 출현해도 상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느끼건대, 그건 내 착각에 불과했다. 서로 비슷한 힘을 이루고 있다고는 하나, 그 힘을 바탕으로 이룬 경지가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감히 가늠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나는 아래로 시선을 내리깔고 말았다. 이 이상은 차마 마주칠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왜 갑자기 나를 보고 내려온 걸까? ‘혹시 화정 때문에?’ 확실히 가능성은 높다. 파괴력에서는 따라올 자가 없다는 종미의 불을 지닌 존재라면, 태고의 불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지 않을까? “호. 웬 미물들만 가득하나 싶었는데, 제법 흥미를 돋우는 놈도 있구나.” 그때, 문득 지옥 대공의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상상을 초월하는 미성에 한순간 그대로 홀릴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지만, 나는 간신히 정신을 다잡고 귀를 기울였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로다. 모로 보나 한낱 인간이 분명한데….” “…….” “이만큼이나 격의 차이가 벌어져 있다면, 응당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야 정상이거늘. 지금 다른 미물들처럼 말이다.” “…….” “헌데, 오직 네놈만이 나를 느끼고 있다? 이 몸의 존재를 인식하고 파악한다?” “…….” 계속해서 이어지는 지옥 대공의 말소리. 나한테 뭔가를 묻는 것 같은데 사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것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지옥 대공이 나를 목표로 내려온 이유가 화정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러고 보니 조금 전부터 화정의 반응이 느껴지지 않고 있다. 힘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딱히 따로 말을 듣지는 못했지만, 아까 화정의 반응으로 미루어보면 자신의 기운을 일부러 꺼트렸을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이유를 짐작한다면, 아마 지옥 대공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숨기기 위함이 아닐까. 그렇다면….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지 궁금하구나. 그러니 한 번 아뢰어 보거라.” 지옥 대공이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절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적당히 둘러댈 생각은 일찌감치 접었다. 거짓말이 통할 상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서 말해보래도. 대답이 마음에 들면 살려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기에는 화정의 행동이 마음에 걸린다. 화정도 괜히 이런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고 계속 이대로 침묵을 지킬 수만도 없고. 그럼 나는, 여기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참, 어지간히도 말을 듣지 않는군.” 지옥 대공도 인내심이 그렇게 깊지는 않은 모양이다. 잠시 후, 계속 땅만 바라보는 시야로 검지만 핀 지옥 대공의 손이 불쑥 들어왔다. 이어서 검지 끝을 내 턱에 조심스레 갖다 대더니 입 아래서 살짝 힘을 주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머리를 들라는 소리 같다. 차마 거부할 수 없어 이끌리듯이 머리를 들자, 여전히 허공에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나를 바라보는 지옥 대공이 보였다. 이윽고 지옥 대공은 한 번 말해보라는 듯이 연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 마지막 기회다. 너는 무엇을 숨기고 있지?” 바로 그 순간이었다. 0649 / 0933 ---------------------------------------------- 마성(魔性) Vs 겁화(劫火). “수현아!” 불현듯 들려온 형의 외침에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흔들리던 시야에 초점이 잡히고 얼어붙었던 의식이 정상으로 되돌아온다. 그제야 주변 상황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선봉의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클랜원들은 비롯한 주변 사용자들은 나와 지옥 대공을 에워싼 채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 사이로 눈을 날카롭게 빛내는 형의 모습이 보인다. 마치 당장이라도 구하러 달려오기라도 할 것처럼. “무례하구나. 이 보잘것없는 미물아.” 그때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 아차 싶어 시선을 돌리자 은은한 노기를 흘리는 진홍빛 눈동자가 보였다. 지옥 대공은 살짝 고개를 든 채 굉장히 불쾌하다는 얼굴로 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몸이 묻는 중인데, 어디서 감히 끼어드는 게냐. 역시나 벌레라서, 낄 때와 안 낄 때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더냐?”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얼른 내 동생한테서나 떨어져라. 이 벌레 같은 괴물 자식아.” 그러나 형은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한껏 노려보는 눈초리로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하?” 그러자 지옥 대공이 어이가 없다는 듯한 탄성을 질렀다. 이내 농염함을 품고 있던 거만스러운 표정이 사라지고 분노가 번들거리기 시작한다. “이 하찮은 버러지가….” 지옥 대공은 자못 짜증난다는 듯이 아미를 찌푸리고는, 턱을 괴고 있던 왼손을 천천히 들었다. “하기야 너희 놈들은 항상 그랬지. …그냥 짓밟으면 그만인 것을.” 한심하다는 어조로 내뱉은 지옥 대공이 가볍게 손을 튕겼다. 딱! “쉴드 오브 리플렉트(Shield Of Reflect)!” “이지스 시스템(Aegis System)!” 그 순간 정하연과 백한결이 거의 동시에 외쳤다. 아무래도 지옥 대공이 출현했을 때부터 잔뜩 경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내 짓쳐 들어가는 무형의 기운을 황금빛과 반투명한 보호막이 정면에서 가로막는다. 와장창! 그러나 두 개의 보호막은 1초도 저항하지 못하고 부서졌다. “꺄악!” “아아아악!” 엄청난 반동이 전해졌는지 정하연과 백한결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허공을 날았다. 그렇게 지옥 대공이 발출한 기운이 고스란히 형을 덮쳐 든다. 그 순간이었다. 파지지지지지지직! 무형의 기운이 덮이기 직전, 황금빛 전류가 형의 전신에서 화려한 분수처럼 솟구친다. 물에 탄 물감처럼 사방으로 번져나가는 무시무시한 방전은 더 이상의 전진을 불허한다는 듯이 기운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건…. 뇌신의 힘인데?” 이윽고 옆으로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형은 꼼짝도 않으며 흔들림 없는 얼굴로 지옥 대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지옥 대공은 빙긋 미소를 짓더니 한 번 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다. “하지만 아직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구나. 더욱 분발해보거라. 살고 싶다면 말이다.” 그리고 또다시 손을 튕겼다. 딱! “큭!” 그러자 형의 입에서 갑작스레 격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시선을 돌리자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강력해진 기운의 흐름이 느껴졌다. 뇌신의 힘은 꺼지기 직전 타오르는 촛불처럼 화려하게 불타오르고는 있었지만, 무형의 기운은 그 이상의 힘으로 맞부딪치고 있었다. “끄으으윽!” 형은 어떻게든 버티려고 애쓰는 듯 보였으나 인상은 점차 일그러지고 있었다. 하지만 무한정으로 버틸 수는 없었는지 결국에는 한쪽 무릎을 땅에 풀썩 꿇고 말았다. 이제야 조금 마음에 드는지 지옥 대공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형…!”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달려가려고 했지만,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옥 대공이 여전히 내 턱을 받치고 있는 검지를 움직여 톡톡, 두드렸기 때문이다. 마치 가만히 있으라는 듯이. 아니,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에워싼 사용자들이 움직이려고 할 때마다, 지옥 대공이 곧바로 알아채고 눈을 돌려 무언의 협박을 가하고 있었다. 오직 눈빛만으로 황무지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정하연과 백한결의 보호막을 종잇장처럼 찢어버리는걸 보았으니 사용자들도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떻느냐. 이제 좀 말버릇을 뉘우칠 마음은 드느냐?” 지옥 대공이 조롱하는 언사로 말했다. 형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거친 호흡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저항하는 중이었다. 계속해서 밀려나려는 발을 땅에 박은 채 눈을 부릅뜨고 있다. 그 모습을 보니 그만하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형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쥐어짜는 듯한 침음을 흘리더니 한 차례 용을 쓰며 꿇은 무릎을 서서히 들어 올린다. 몸을 찢으러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기운 속에서, 형은 기어코 일어서 보였다. “그 입…! 닥쳐라…!” 어지간하면 욕설을 담지 않는 형의 입에서 악을 쓰는 듯한 목소리가 고함쳤다. 두 눈은 이제 황금빛으로 빛나다 못해, 예전 쿠샨 토르의 눈동자처럼 이글이글 작열하고 있다. “호?” 지옥 대공은 눈을 살짝 치뜨며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내 고운 눈매가 매혹적인 호선을 그리더니 입술이 살며시 벌어진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어서 갑작스레 흡사 천둥과도 같은 웃음이 온 세상을 떠르르 울렸다. 고막이 아플 정도로 떨려오는 탓에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무형의 기운이 점차 사그라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지옥 대공의 웃음에는 감히 항거할 수 없는 마력이 담겨 있었다. 갑자기 거대해진 존재감은 지옥 대공을 제외하고는,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 착각을 일게 할 정도. 눈에 보이는 사용자들이 우르르 주저앉는 게 그 방증이었다. 지옥 대공이 드디어 자신의 진면목 중 일부를 해방하고 드러낸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래도 꽤나 노력은 하는구나.” 느닷없이 웃음을 뚝 그친 지옥 대공이 무심한 눈으로 오롯이 서 있는 형을 바라본다. 문득 형이 짓씹은 입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이 눈에 밟힌다. “그 기개, 높이는 쳐주마. 허나 생각보다 재미는 없다.” 그렇게 말한 지옥 대공이 느릿하게 손을 들어 형을 겨냥한다. 콰르르르! 이내 들어 올린 손이 가공할 정도의 시뻘건 염화에 감싸이기 시작한다. 그 순간 나는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에 온몸을 떨고 말았다. ‘저 기운이 바로….’ 종미의 불이라 불리는, 지옥의 겁화. 화정을 품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1회 차보다 더욱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저 염화가 가진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아무리 뇌신의 힘을 지닌 형이라도 저건 버틸 수 없다. 이대로 놔두면 확실하게 죽는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한다 생각하기도 전, 몸은 이미 허공으로 떠오른 지옥 대공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으, 응?” 살짝 눈을 흘기며 나를 보는 지옥 대공의 얼굴이 삽시간에 가까워졌다. 나는 양팔을 벌려 그대로 지옥 대공을 덮쳤다. 어떻게든 시간이라도 끌어볼 속셈이었다. 풀썩! 뜻밖에도, 지옥 대공은 조금의 반항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몸을 힘껏 끌어안는 것도, 그렇게 신체를 접촉한 채 허공에서 끌어내려 그대로 땅에 눕힌 것도, 모두 허락해주었다. 그저, 약간 놀란 듯 반투명한 진홍색 눈동자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전신에서 전해져 오는 따뜻한 기운과 미칠 듯이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이 느껴졌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부여잡았다. 나는 2회 차 들어 처음으로 절박한 심정에서 외쳤다. “모두 도망쳐!” “수, 수현아?” 땅으로 쓰러진 터라 주변의 상황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 전 의아한 반문은 형의 목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도망쳐! 도망치라고!” “오, 오빠! 그게 무슨 소리에요? 우리가 어떻게…!” 이번에는 김한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생각 같아서는 뺨이라도 한 대 치고 억지로라도 보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다. 흥미로이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와 더는 마주할 수 없어,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지옥 대공을 더욱 거세게 안았다. “제발, 제발 한 번만 내 말을 들어! 지금 소환된 존재는 급이 달라! 쿠샨 토르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1초 만에 처리하는 존재라는 말이야!” “머셔너리 로드, 진정해요. 우선 진정하고 얼른 빠져 나와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바로 이어서 한소영의 목소리로 들려왔다. 나는 얼굴을 와짝 일그러뜨렸다. 젠장, 한소영도 있었다. 물론 형도 왔으니 한소영도 올 수 있으나 상황이 너무 안 좋다. “더는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까, 제발…!” “너는….” 그렇게 말이 나오는 대로 외친 찰나였다. 지금껏 나에게 깔린 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지옥 대공이, 돌연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정말로, 정말로 이상하구나.” 살그머니 눈을 뜨자 지옥 대공이 발그스름한 낯빛으로 나를 직시하는 게 보였다. 딱히 살기는 느껴지지 않지만 긴장된 기분은 가시지 않는다. “원래대로라면, 감히 이 몸에 손을 대고 함부로 한 죄를 물어 목을 부서뜨려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만….” 홀연히 목 부근에서 나긋한 감촉이 느껴졌다. 어느새 지옥 대공이 두 손을 뻗어 내 목에 닿은 것이다. 한순간 흠칫하기는 했으나 예상한 악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목울대를 감돌던 손은 느릿느릿 움직여 내 양 볼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정말 이상하게, 나를 안은 네가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도리어 그립고 설레는 기분이 느껴지는구나.” 그리고 요염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손을 내려 볼을 부드러이 쓸어 내린다. 그 애틋하게 마저 느껴지는 감촉에, 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지만, 지옥 대공에게서 쓸쓸한 감정이 전해졌다. “말해보거라. 어이하여 그대의 손길은, 나의 정신을 음란하게, 또 육체는 발정하게 만드는가.” …이건 진짜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옥 대공은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하. 궁금한 게 많은데 여전히 대답을 않는 게냐. 이거 참, 그냥 죽일 수도 없고…. 참으로 밉살스럽지 않은가.” “…….” “아무튼, 그대와는 이야기를 나눌 가치는 있겠어.” “……?” “놈들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 같아 기분은 좋지 않으나…. 어쨌든 원활한 대화를 위해서라도 우선은 청소부터 해야겠군. 그대여, 조금만 기다리고 있거라.” “……!” 그 말을 들은 순간, 눈동자에 강한 힘이 들어가는걸 느꼈다. 그러나 정신을 차렸을 때는, 눈앞의 지옥 대공이 사라지고 가슴이 턱 막혀옴을 느꼈을 때였다. 어느 순간 몸을 일으킨 지옥 대공이 내 가슴을 발로 밟은 채 사방으로 살기를 뿜어내고 있다. 나는 그제야 지옥 대공이 말한 청소라는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콰르르르르르르르! 이내 하늘 높이 들어 올린 손끝에서 지옥 겁화의 기운이 엄청난 속도로 맺혀가기 시작한다. 어느덧 눈 한 번 깜빡하기도 전에, 허공에는 하나의 태양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까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어마어마한 파괴가 주변을 휘몰아친다. 마치 융단 폭격이라도 당한 듯이 지면이 날아가고, 갈라진 황무지가 곳곳에서 올라와 이곳저곳을 날아다닌다. 거의 동시에 사방에서 아우성을 치는 무력한 소리들이 들려온다. 그저 지옥 대공이 약간이나마 진심이 돼버린 것만으로도, 1만이 넘는 사용자들이 전의를 상실한 것이다. 그제야 현실을 직시하고 나는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제는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까딱 잘못하면 가장 중요한 두 명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 13년 동안 바래온 목표가 일거에 사라질 상황이 온 것이다. 안될 것은 알고 있다. 지옥 대공이 나조차도 가볍게 격파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살아야 한다. 아니, 살려야 한다. 덤비는 즉시 죽을 수밖에 없는 상대를 앞두고 있지만,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 그러니까…. 싸우기 싫지만, 싸워야 한다. 그렇게 마음의 결정을 내리자 돌연히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형환위를 발동해 지옥 대공에게서 벗어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가슴을 억누르던 갑갑한 기분이 사라지고, 약 10미터 거리에 지옥 대공이 모습이 보였다. 내가 벗어났음에도 지옥 대공은 일말의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있는 것이다. 지옥 겁화 또한 화정과 똑같은 신화계급 힘인 만큼, 자신이 파괴할 대상을 지정할 수 있는 권능이 있다. 그렇게 화정의 힘을 끌어내기 직전. ‘……’ 아주 잠시, 고민이 들기는 했다. 그러나 고민은 1초 이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지금 내게 남은 길은 두 가지. 같이 살거나, 같이 죽거나. 말인즉 모 아니면 도. 이윽고 지옥 대공이 손을 내리려는 순간. 화륵, 화르륵! 나는, 마침내 주먹에 화정의 힘을 일으켰다. “…아?” 그와 동시에 막 손을 내리치려던 지옥 대공이 흠칫 행동을 정지했다. - …바보. 어디선가 화정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앞으로 내달렸다. 저 태양이 내려오기 전에 어떻게든 지옥 대공을 멈춰야 하니까. 잠시 후, 비로소 몸을 돌린 지옥 대공이 나를 바라본다. 얼굴을 보니 지옥 대공도 화정의 힘을 인지했다는 걸 100% 확신할 수 있었다. 아까처럼 거만한 표정이 아닌, 두 눈을 크게 뜬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으니까. 1회 차를 포함해,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는 낯빛이다. “너, 너…!” 지옥 대공이 깜짝 놀란 목소리로 부르짖는다. 그러나 이미 거리는 완전히 줄어든 상태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불타오르는 어깨를 한껏 젖혔다. 그리고 주춤, 뒤로 물러나는 지옥 대공을 향해 젖 먹던 힘까지 뽑아내 주먹을 내뻗었다. “자, 잠깐…!” 퍽! 주먹은, 여지없이 지옥 대공의 얼굴을 거세게 강타했다. ============================ 작품 후기 ============================ 음…. 어제 코멘트를 쭉 읽어봤는데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독자 분들이 자꾸 저를 여성으로 만드시려는 것 같은데, 앞으로 저도 똑같이 하면 어떨까 하고요. 예를 들면 어느 분은 섹시한 누님으로 생각하고, 또 어느 분은 새침데기 동갑 친구로 생각하고, 또 어느 분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동생으로 생각하고 대하는 것이지요. 그럼으로써 저와 똑같은 정신적인 붕괴를 주는 계획입니다. 제가 왜 이 생각을 진작에 못했을까요? 하하하! 앞으로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0650 / 0933 ---------------------------------------------- 마성(魔性) Vs 겁화(劫火). 힘껏 뻗어낸 주먹이 정확히 꽂힌 순간, 비스듬히 기울어진 지옥 대공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이내 풀썩 나동그라진 지옥 대공은 예상외로 바로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냥 상반신만 일으킨 인어 자세를 잡더니 맞은 부분에 자신의 손을 살며시 갖다 대었다. “근래 수천 년간은…. 한 번도 맞아 본적이 없는데….” 그리고 멍한 낯빛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기까지. 지금은 아무래도 좋다. 어쨌든 지옥 대공이 이루어낸 태양을 사라지게 하는 데는 성공했으니까. 잠시 후, 지옥 대공은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표정이나 태도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깊고 그윽한 눈동자는 나를 하나하나 살피고 있었다. 이윽고 지옥 대공의 시선이 아직 불타오르는 내 오른손에 닿았을 때였다. “…아!” 갑자기 지옥 대공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자 아리송해 하던 기색이 확신으로 변하더니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화사하게 미소 짓는다. 흡사 꽃봉오리가 활짝 개화하는 듯한 아름답기 그지없는 미소였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그대가….” 지옥 대공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대가…!” 지옥 대공이 더욱 높아진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양손을 맞잡아 가슴에 대었다. “이제야, 이제야 찾았어!” 지옥 대공이 희열에 찬 목소리로 고함쳤다. 기쁨과 환희가 섞인 애틋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 시선을 노려보는 것으로 받아 쳤으나, 지옥 대공은 조금도 상관없다는 듯 반색하는 낯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러는 사이에도 지옥 대공의 혼잣말을 계속해서 이어졌다. “정말, 정말 믿을 수가 없구나…. 이제껏 그토록 찾아 헤매도 보이지 않던 것이…. 어이하여 지금…. 이게 운명이라는, 아니. 그놈들한테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는 것인가? 하하하!” 이제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게 무척이나 흥분한 상태처럼 보인다. “그래, 이제 좀 알겠구나. 너는 나와 동격의 힘을 지닌, 태고의 불을 지닌 존재였어. 그래서 너한테 그런 감정들을 느꼈던 거야.”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왼쪽 가슴 아래를 지그시 눌렀다. 어쩌면 지옥 대공이 화정을 노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화정이 왜 갑자기 자신을 숨겼을까. 스릉. 나는 천천히 무검을 뽑아 상단으로 세워 올렸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기는 했으나 어느 것도 변하지 않았다. 현실을 체감하니 오히려 암담한 상황이 더욱 크게 와 닿을 뿐. 사용자들은 여전히 지옥 대공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좀 힘을 느꼈는지 아까보다는 크게 물러난 상태였다. 물론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마침 나도 벗어났겠다, 사방에서 마력의 흐름이 느껴지는걸 보니 집중 사격을 준비하는 것 같은데…. 나쁜 선택은 아니지만, 상대가 지옥 대공이라는 게 문제였다. 적은 오직 1명에 불과하고 아군은 1만 명이 넘는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다. 적이 마음만 먹으면 나조차도 1초 만에 격파할 수 있는데, 과연 그 누가 지옥 대공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수가 많다고는 하나, 지금 상황에서는 날개를 기름에 적시고 불덩이로 날아가는 불나방이나 다름없다. 지옥 대공은, 그런 존재였다. “흠? 그건 절멸자의 검?” 그때 마치 나를 품평이라도 하듯이 하나하나 뜯어보던 지옥 대공의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 “그건 정령 차원에 존재하는 혼돈 왕의 검일 텐데…. 꽤나 재미있는걸 가지고 다니는구나.” 지옥 대공은 친근하게 말을 건네왔으나 나는 칼자루를 세게 움켰다. 행동 하나하나마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엄습한다. 보고 있는 것만해도 눈알이 터질 것 같고,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러니 지금은 무조건 전투에만 집중해야 한다. 애초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도 덤비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남고 또 살리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이윽고 지옥 대공이 다른 사용자들은 일절 신경 쓰지 않는 태도로, 오롯이 나만 바라보며 걸음을 내디뎠을 때였다. 핑! 돌연 건너편의 궁수가 지옥 대공을 겨냥한 화살을 쏘았다. 아무런 전조도 없는 공격. “수현! 물러나요!” 그러나 나를 제외하고 이미 얘기가 돼 있던 걸까? 궁수의 화살을 시작으로 갑작스레 무서운 바람이 몰아쳤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 주문을 외웠는지 주변으로 수 겹의 보호막이 겹겹이 쳐졌다. 시선을 올리자 하늘을 빽빽이 가릴 정도의 마력 구체와 화살 비가 눈에 들어온다. 얼음으로 이루어진 마법들과 마력을 품은 빛나는 화살들이, 오직 지옥 대공 하나만을 목표로 빗발치듯이 낙하한다. 그러나 지옥 대공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쯧.” 아니. 당황하기는커녕 혀를 한 번 차고는 잠깐 걸음을 멈춘 게 전부였다. 아직도 시선을 나한테 고정한 채 사방으로 짓쳐 들어오는 마법과 화살의 소나기를 향해 양손을 내뻗는다. 이어지는 광경은, ‘역시나.’ 라고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절로 입을 벌어지게 만들었다. 지옥 대공은 손을 한 번 내젓는 우아한 손놀림을 보였을 뿐이었다. 그냥 그랬을 뿐인데, 지척까지 다가갔던 모든 공격들이 갑작스레 변화를 보였다. 사용자들이 지정한 목표를 타격하는걸 멈추고, 지옥 대공이 손을 저은 방향을 따라 그대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일련의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던 터라, 미처 어색함을 느끼지도 못했다. 회전(回轉). 그래, 말 그대로 대 회전이었다. 마치 춤을 추듯이 빙글빙글 돌아가던 회전은,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가속이 붙어 하나의 소용돌이를 형성했다. 사방을 몰아치는 여파로 다시 한 번 지면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으나, 정작 폭풍의 눈에 서 있는 지옥 대공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그저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소용돌이를 흘끗 흘기고는 좌우로 힘차게 손을 뻗는다. 그 다음 순간, 무지막지한 압력이 폭발하며 소용돌이를 이루던 파편들이 총알같이 도처로 뻗어나갔다. 콰콰콰콰콰콰콰콰! 폭풍에 삼켜진 핏빛 황무지가 끓어오른다. 해방된 소용돌이는 한층 가속된 속도로 모조리 되돌아가, 땅에 깊숙한 크레이터를 남긴 채 사용자들의 비명을 이끌어냈다. “…….” 거의 절규에 가까운 소리들을 듣고 있으면서도, 나는 차마 더 이상 둘러볼 생각을 못했다. 왜냐하면 지옥 대공은 오직 내가 있는 방향으로만 힘을 보내지 않았으니까.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조용해지겠군.” 비명이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와중, 고고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지옥 대공이 도로 나를 응시하며 옅은 미소를 짓는다. 그 모습이 마치 ‘내가 너를 보고 있으니, 너도 나를 바라보거라.’ 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 어디 한 번….” 이윽고 지옥 대공이 재차 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한다. 한 걸음 한 걸음 거리가 줄어들 때마다 인지하고 있던 절망도 커져만 갔다. 마주하면 마주할수록, 헤어나올 수 없는 깊숙한 수렁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싸우겠다고 마음은 먹었는데, 모로 봐도 공격할 틈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이런 존재를 상대로 어떻게 공격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화정만 믿고 싸움을 거는 게 가장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건 알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방법밖에 생각나지 않는 게 현실이었다. 사실 이대로 걸음을 물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나 억지로 참았다. 여기서 물러나 버리면, 차라리 도망가지 않느니만 못한 상황이 돼버리니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침착히 자세를 잡고서 회로에서 마력을 끌어올렸다. 이내 무검에 맑은 불꽃이 타오르며 백열(白熱)된 검신이 세상에 드러난다. 내 투지를 읽은 걸까? 그러자 지옥 대공의 표정에 아주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입에 걸린 연한 미소가 아찔하리만치 진해지고 두 눈이 초승달처럼 휜다. 어디 한 번 네 마음대로 해보라는 듯이. 무언가 특별하기를 바라는 눈초리와 마주하자 왠지 모르게 시험 당한다는 기분이 들었으나, 지금의 나로서는 어떻게든 응할 수밖에 없다. 상대는 나보다 강하다. 어설픈 잔재주는 통하지 않으리라. ‘그러면….’ 결국 아랫입술을 깨물며 땅을 박찬 순간. “……!” 나는, 크게 놀라고야 말았다. 마치 내 행동을 알고 있었다는 듯 지옥 대공이 나와 똑같이 사뿐히 뛰어올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장 놀란 건,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지옥 대공의 움직임이었다. 아차 한 순간에 내가 뿌린 모든 감지와 경계를 뚫고 정면으로 접근해오는데, 절로 ‘억.’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오죽하면 움직임으로 일어난 바람결이 한 박자 늦게 스쳐왔을 정도였다. 아주 짧은 순간,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러면서 검을 비스듬히 기울여 빗겨 치려는 찰나, 느닷없이 시야로 시뻘건 빛이 번쩍였다. 내가 읽지 못한 무언가가 지옥 대공에게서 솟구쳤다. 그리고. 콰앙! 미처 대응할 틈도 없는, 한순간 무검이 구부러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다. 신음을 참으며 반사적으로 충격을 몸 전체로 퍼트렸으나, 나는 곧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마력 회로가 들끓는다. 최대한 완화하려고 분산시켰는데도, 분산된 충격에 몸이 이상 신호를 보내오는 것이다. “버텨냈느냐~?” 그러자 기특하다는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신경 쓸 여력은 조금도 없었다. 첫 공세를 교환하자 정신이 망연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차이가 클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체감해보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아무튼 우선은 내부를 가다듬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나는 궁신탄영으로 거리를 벌리며 지면에 착지했다. 삽시간에 멀어지는 지옥 대공이 오른손을 빙글빙글 돌리는걸 보고 있자 아까 시뻘건 빛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때였다. - 조심! 지금껏 침묵을 지키던 화정이 느닷없이 경고를 외쳤고. 꽝! 아까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거대한 폭음이 고막을 왕왕 울렸다. 화정의 경고를 듣자마자 이형환위를 사용한 탓에, 몸은 어느새 하늘을 날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아래를 쳐다보자, 1초 전까지 서 있던 자리에 이글이글 일렁이는 시뻘건 용암이 보였다. 방금 공격은 어떤 전조도 느낄 수 없었다. 아마 화정이 경고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예전 파더와의 전투 때 경험을 살렸기에 곧바로 반응할 수 있었다. “호, 이걸 피해내?” 고개를 젖힌 채 나를 바라보는 지옥 대공의 표정에는 의외라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빨리 끝내고 싶어 다소나마 진심을 담아 공격했는데…. 회피 감지는 네가 그 여아보다 낫구나. 하하하!” 지옥 대공은 곧 정말 즐겁다는 얼굴로 웃어 젖혔다. “아, 그나저나 방금 능력은 어떻게 한 것이냐?” 그 순간이었다. “…이렇게 한 건가?” 무어라 입을 열 틈도 없이 귓가로 감미로운 목소리가 속닥속닥 흘러들었다. 거의 동시에, 지면에서 고개를 젖힌 채 웃고 있던 지옥 대공의 신체가 사르르 사그라진다. 잔영이 사그라지는 현상. 말인즉, 지옥 대공이 똑같이 이형환위를 사용했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내가 사용한걸 딱 한 번 보고서 완벽하게 구사한 것이다. 목소리는 바로 왼쪽에서 들려왔다. 멍하니 시선을 돌리자, 처음 공중에서 내려왔을 때처럼 허공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지옥 대공이 보였다. 그때와 하나 다른 게 있다면, 턱을 괴고 있던 손이 어느덧 내 이마에 닿아 있다는 것. 눈동자를 올리니 엄지가 반쯤 구부린 중지를 누르고 있는 모양새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딱밤이라도 때리려는 듯이. 그리고 잠시 후. “그 표정은 심히 마음에 드는구나. 마음 같아서는, 질릴 때까지 핥고 싶을 정도야.” 지옥 대공은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중지를 튕겼다. 딱! 이마에 둔중한 충격이 가해지고, 머리가 강제적으로 젖혀졌다. 이어서 몸이 기우뚱 기울어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아.” 그대로 몸이 떨어진다. 하강하면서 볼 수 있었던 건,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어깨를 떠는, 배시시 미소 짓는 지옥 대공의 얼굴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어제 코멘트가 폭발했네요. 괜찮습니다. 저는 정신이 멀쩡해요. 정말이냐고요? 네. 저는 어제 후기를 지우지 않았어요. 그게 명백한 방증이지요. 다시 말씀 드리지만, 저는 여러분들의 코멘트를 모두 여성으로 가정하고, 제 멋대로 입맛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말이죠. 1. 로유진이 남자라는 입장에서, 독자 분을 섹시하고 포근한 누나라고 생각하기로 한 경우. Ex ) 플룻 로유미씨 또 바보같오...왠지 즐기는거같어.......음.... 또 댓글판이 난리났따... 귀엽다고.. (2014.08.16 09:03) Sol ) 아이 우리 유진이. 또 장난치는구나? 정말, 너무 장난꾸러기라니까? 하지만 정말 귀여워~. 이리와. 누나가 한 번 꼭 안아보자~. 2. 로유진이 남자라는 입장에서, 겉은 새침하지만 속은 상냥한 동갑 여성으로 생각하기로 한 경우. Ex ) aria2301 어머 이 언늬 겁도없이 독자들에게 선포하는거???? (2014.08.16 07:57) Sol ) 야 이 멍청이야! 누가 네 멋대로 또 선포하는 거야? 겁을 상실했어? 거, 걱정되잖아! 흐, 흥!(피…. 바보….) 3. 로유진이 남자라는 입장에서, 사랑스러운 여동생이라도 생각하기로 한 경우. Ex ) GLaDOSbird ♡ (2014.08.16 06:38) Sol ) 유진이 오빠아…. 요즘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아서 걱정이 들어요오…. ㅜ.ㅠ 하지만 좋아해요오. 부디 제 마음을 받아주세요오! 예.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하하. 기분 좋네요. 이거 그린 라이트 맞나요? :D 0651 / 0933 ---------------------------------------------- 마성(魔性) Vs 겁화(劫火). 쿵! 등과 땅이 맞닿은 순간 충돌로 솟구친 흙먼지가 좌우로 교차하듯이 하늘을 가렸다. 시야가 흔들리고 공기도 흔들린다. 딱밤을 맞은 것치고는 엄청난 위력이었으나 몸에 커다란 이상은 느껴지지 않는다. 지옥 대공이 일부러 그 정도의 힘으로 나를 공격한 것이다. “…….” 그래서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치밀어 오르는 굴욕감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조금 전 지옥 대공이 배시시 지은 미소가 마치 나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실 이 정도로 실력 차이가 난다면 상대방이 봐준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분한 마음이 앞섰다. 그러다 문득 등 뒤로 나를 부르는 여러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나는 있는 힘껏 손을 저었다. 오지 말라는 의미였다. 마음 같아서는 어깨라도 붙잡고 왜 도망치지 않느냐고, 지금 내가 안보이냐고 실랑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그럴만한 여유가 나지 않는다. 어느새 공중에서 내려온 지옥 대공이 약 10미터의 거리를 두고 착지한 상태였으니까. “뭐, 인간치고는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이구나. 설마 이 몸을 상대로 이 정도로 버틸 줄은 몰랐다.” 지옥 대공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회피 능력은 내가 알지 못했다손 치더라도…. 보아하니 그대는 1초에 최소 6번은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 같더구나. 상황 판단만큼은 거의 정점에 오른 수준이야.” 그렇게 말한 지옥 대공은 돌연 “다만.” 이라는 단어를 언급해 말의 반전을 알렸다. 그리고 한 손을 노출된 쇄골에 살며시 갖다 대더니 아까와 같은 미소를 짓는다. “지금 상대가 이 몸이라는 게 너한테는 아쉽겠구나.” 그 말을 들은 순간 무언가 울컥하는 감정이 솟아올랐다. 안 그래도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상태인데 저렇게 부채질까지 해대니 짜증이 치솟는다. 도발이 목적이라면 그냥 웃어넘기면 그만이나, 진심으로 말하는걸 알고 있으니 자괴감마저 들 지경이었다. “어쨌든, 이 정도면 안심할 수는 있겠어. 태고의 불을 그 정도 수준으로 다룰 수 있다면…. 최소한 죽지는 않겠지.” 그 순간 뜻 모를 말을 꺼낸 지옥 대공이 작게 한숨짓더니, 갑자기 하늘 높이 손을 들어올렸다. “서운케 생각하지는 말거라. 이것도 버텨낼 수 있다면, 나 또한 너를 인정해주도록 할 테니까. 아무리 그 힘을 갖고 있다고는 하나, 그래도 돼지 목에 진주인지 아닌지는 판단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럼 태고의 불에 적합한 예를 갖추는 뜻에서…. 이제는 장난이 아닌, 진심으로 간다.” 그러나 무어라 채 물어보기도 전, 들어올린 손이 눈부신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화아아아아아아악! 빛이, 울부짖었다. 이리저리 나부끼는 찬연한 신음을 울리면서, 삽시간에 허공에 엄청난 마력이 모여들었다. 우르르르르르르릉! 두두두두두두두두! 하늘이 열리고, 땅이 갈라진다. 공간이 찌그러질 정도의 마력이 모이더니, 이내 하나의 거대한 구체를 이루어내며 온 세상을 비추는 찬란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이제는 아름답게 마저 느껴지는 광경. 그러나 그것은 잠시간에 불과했다. 이어서 펼쳐진 장면은 한순간이나마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아래쪽부터 타오르기 시작한 시뻘건 불빛이 폭발적으로 거대한 구체를 잠식해 들어갔기 때문이다. 저것은 보이는 그대로, 순수한 지옥 겁화로 이루어낸 하나의 덩어리나 다름없다. 이렇게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주마등이 아른거릴 정도의 무시무시한 공격이다. 그리고 잠시 후. 콰르르르르르르르! 이글거리는 아지랑이를 피어 올리는 하나의 태양을 인지한 순간, 그리고 온 세상을 집어삼키며 서서히 들이닥치는 커다란 불덩이를 확인한 순간. 머릿속으로,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떠올랐다. ‘죽는다.’ 그래, 말 그대로 죽는다. 유일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피하는 것. 그러나 지옥 대공은 내 회피를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딱히 구속이나 제한을 받은 건 아니다. 허나 내가 여기서 몸을 피해버리면 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태양에 휩쓸릴 것이다. 형과 한소영을 포함한 모두가. ‘그럴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양손으로 무검을 쥔 채 상단으로 세워 올렸다. 그리고 본능에 따라 온몸으로 화정의 힘을 있는 힘껏 불어넣었다. 지옥 대공이 발출한 태양이 맞닿은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펑펑펑펑펑펑펑펑! 화정과는 서로 극을 달리는 상성이라서 그런 걸까? 환한 빛을 발하는 구체는 화정과 부딪친 순간, 펄떡 요동치며 거센 폭발을 일으켰다. 생각보다 강한 반발력에 움찔하기는 했지만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곧 폭발로 흘러나온 염화가 내 몸을 감싸 안는 걸 마지막으로, 시야가 온통 하얗게 물들었다. 그러한 찰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상황을, 이 고통을 2회 차를 시작하면서 한 번 겪어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그 다음 순간. 치지지지지지지직! “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화정을 받아들일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에 나는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전신을 인두로 지지는 소리가 흘러나오며 체내의 피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파괴하려는 지옥 겁화와 지켜내려는 화정이 동시에 날뛰자, 나라는 존재 자체가 소멸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2회 차를 시작하면서 비명을 지른 적이 손에 꼽은 것 같으나, 이런 고통은 수천 수만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기절하는 게 편하지 않을까. 그렇게 마력 회로 하나하나가 녹아 내리는 기분을 느끼는 동안,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느덧 태양의 중앙을 지나쳤다는 기분을 느꼈다. 그럼 이제 절반만 더 견디면 된다는 소린데, 내 입장에서는 그 절반조차 구만 리 창천처럼 느껴졌다. 잠깐이라도 정신을 놓치는 순간, 이 미칠 듯한 폭발을 일으키는 태양에 그대로 먹힐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이 연신 들었지만, 나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끌어내 두 다리로 버티고 섰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불타오르는 화정의 기운을 북돋우며, 여전히 새하얗게 작열하는 시야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입을 크게 벌렸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다시 한 번 비명을 질렀다. 아까와 같은 고통에 젖은 비명이 아닌, 고통에 대항하려는 뜻으로 지른 비명이었다. 이 비명이 끊기는 순간이 바로 내가 쓰러지는 순간이라 생각하며, 나는 악착같이 비명을 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비명을 지르고 서서히 소리가 잦아들어갈 즈음. “…….” 갑자기 하얀색 일색이던 시야가 한순간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동시에 시원한 공기가 느껴지며 무언가 익는 듯한 냄새가 흘러들었다. 태양은 어떻게 된 걸까? 나는 버텨낸 걸까? “…믿을 수가 없다. 그래도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로 견뎌냈구나.” 돌연 약간 상기된 듯한, 지옥 대공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들어올리려 했지만, 그 순간 갑자기 세상이 90도로 틀어지는 광경이 보였다. “아…?”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기분이다. 시야도 초점이 잡힐 듯 말듯이 가물가물하다. 어떻게든 힘을 주려고 해도, 머리는 이미 점차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내 의지와는 반대로 지옥 대공이 아닌 땅이 눈에 들어온다. 이내 눈을 가리는 머리를 걷어내려는 찰나, 축 늘어진 팔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제야 몸의 통제권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결국에는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쿵. 보드라운 흙의 감촉이 느껴졌다. 이대로 잠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처럼 일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갑작스레 턱 아래로 무언가 쑥 밀치고 들어오더니 내 머리를 강제로 들어올렸기 때문이다. 곧 꼿꼿이 서 있는 지옥 대공이 눈에 들어오는걸 보니, 아마 발등으로 내 턱을 젖힌 모양이다. “방금 공격은 전력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진심을 담았다고는 할 수 있다. 아마 보통 인간이라면 부딪친 지 5초도 안되어 존재 자체가 연소할 터. 헌데….” 지옥 대공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이를 갈았다.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묘하게 열이 받치는 기분이다. 적어도 한 번 제대로 타격을 먹이고는 싶었는데, 그럴 수 있는 힘이 부족한 게 천추의 한이었다.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지옥 대공을 뚫어져라 노려보는 것뿐. “그 꼴을 하고서도 투지를 불태우는가….” 그러나 지옥 대공은 잠깐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리더니, 오히려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정말, 그러지 말거라. 자꾸 그러니까 반할 것 같지 않느냐.” 그리고 발을 빼더니 천천히 허리를 굽히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이제는 정말로 인정해야겠군. 네가 정녕 최후의 왕이 될 자질을….” 그때였다. 부웅! 지옥 대공이 무어라 말을 잇기도 전, 느닷없이 아랫배가 확 잡아당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잠깐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니 어느새 내 몸이 허공을 날고, 지옥 대공과는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있다. 나는 그제야 내 몸을 움킨 모종의 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기운에 이끌려 어딘가로 날아가는 것이다. 풀썩!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등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과 좋은 향기가 흘러들었다. 누군가 내 몸을 꼭 끌어안는다. 동시에, 주변으로 여러 아는 얼굴이 밀려들어 무어라 소리친다. 하지만 나는 제대로 듣지 않으며 여전히 지옥 대공에 시선을 고정했다. 정신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굽혔던 허리를 도로 피는 지옥 대공의 얼굴에는 의외라는 낯빛이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서. “이건 무엇이지…?” 의연하게 팔짱을 낀 지옥 대공이 주변을 천천히 둘러본다. “뇌신은 아까 봤고…. 초월자와 수라…? 그리고 용…? 아, 영혼만 용인가? 이거 참, 이상한 조합이로구나.” 지옥 대공이 의아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뇌신은 아마 형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초월자는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아마 수라와 연관 짓는걸 보니 공찬호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용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헬레나일 테고. “그리고…. 너는 또 어떻게 된 거지?” 이윽고 지옥 대공이 시선이 도로 나를 향한다. ‘……?’ 아니, 내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내 어깨 너머, 그러니까 나를 껴안고 있는 이를 향하고 있었다. 나 또한 힘겹게 시선을 돌리자 의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나를 안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표혜미, 아니 제갈 해솔이었으니까. “신기한 일이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벌레가…. 어찌하여 갑자기 초월자가 된 것이냐?” 초월자. 그 순간 뇌리를 번뜩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어, 나는 딱딱히 굳어 있는 제갈 해솔을 바라보며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제갈 해솔(0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마법사(Normal, Mage,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S Zero) 5. 진명 • 국적 : 진리를 깨닫고 마도의 극에 다다른 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9) 7. 신장 • 체중 : 168.7cm • 47.8kg 8. 성향 : 합리 • 관찰(Rationality • Observe) [근력 43] [내구 47] [민첩 57] [체력 41] [마력 101] [행운 94] (잔여 능력 포인트는 0 포인트입니다.) 제갈 해솔이 마력 능력치가 101포인트에 다다랐다. 그러나 미처 생각을 잇기도 전, 또 한 번 몸이 뒤로 끌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에 의해 몸이 땅에 눕혀지고 하얀 로브를 입은 사용자들이 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수 개의 지팡이에서 빛이 번쩍이자 약간은 눈이 부셨다. “치료, 치료오오!” “이, 이상해요! 치료가 듣지를 않아요!” “그럼 물약! 아, 아니 물약 붓고 있어!” “엘릭서 가져올게요!” …내 상태가 그렇게 심각한 건가? 그러나 곧 온몸을 적셔오는 물약에 따끔따끔한 통증을 느껴 얼굴을 찌푸렸을 때였다. 『몸 내외로 일반적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축하합니다. 2슬롯 잠재 능력인 ‘쓰러질 수 없는(Rank : A Plus Plus Plus).’ 이 1단계 상승합니다.』 『‘쓰러질 수 없는(Rank : A Plus Plus Plus).’ 이 ‘쓰러질 수 없는(Rank : S Zero).’ 으로 진화합니다.』 『현재 남은 잔여 능력 포인트는 1(Special, Latent) 포인트입니다.』 허공에 네 개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 작품 후기 ============================ 1. 저번 지옥 대공과 관련한 연참 약속은 지켰다고 생각해요.(그때 다음 회 코멘트에 의견을 밝혔는데 아마 못 읽으신 분들이 있으시리라 생각해요.) 불그스름한 형체가 지옥 대공이 아닌 게 아니라, 맞습니다. 그 표현은 포탈을 의미하는 게 아닌, 그 속에 지옥 대공이 이미 소환된 상태를 의미해요. 어느 분 말마따나 아슬아슬하게 성공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자꾸 연참을 강요하시면 곤란해요. ㅜ.ㅠ 2. 어제와 같은 그린 라이트는 잠시 넣어두도록 할게요. 솔직히 조금 더 하고는 싶은데, 몇몇 분들이 그동안 제가 받아왔던 고통(?)을 조금은 이해해주신 것 같아서요. 하하하. :) 3. 이번 파트 하이라이트는 이번 회가 아니에요. 653회, 그러니까 2회 후에 예정돼있습니다. 물론 지옥 대공이 좋게 봐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김수현이니까요. 그런 만큼 하이라이트 또한 김수현한테 맞춰져 있습니다. 그리고 655회 정도에는 이번 파트도 결말이 날 예정입니다. 4. 이 정도로 실력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주인공에 맞춘 하이라이트가 가능하냐고요? 하하하. 지금이 바로 뿌려둔 복선을 회수할 때죠. 음 그러니까…. (이하 단어는 스포일러 방지를 위한 제 나름대로 단어를 함축한 것이라 보시면 됩니다.) 으쌰, 1, 하아, 츤츤, 선물. 이 5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김수현도 어느 정도는 지옥 대공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는요. :D 0652 / 0933 ---------------------------------------------- 마성(魔性) Vs 겁화(劫火). 허공에 출력된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한 생각이 뇌리를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보상 포인트.’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외쳤다. “고연주…!” 생각보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쥐어짜내듯이 말했으나, 다행스럽게도 고연주는 얼른 달려와주었다. “수현…!” 고연주는 나를 보고는 서글픈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짓더니,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내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 가능한 행동이었으나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다. 나는 억지로 손을 들어올린 후 검지로 오른쪽을 가리켰다. 도시가 있는 방향이었다. “언니! 오빠가…!” 줄곧 고개를 돌리고 있으면 어쩌나 싶은 와중, 익숙한 목소리가 고연주를 불러주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목이 편하고 누군가 계속 물약을 부어준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김한별이었던 모양이다. 잠시 후, 부름에 눈을 뜬 고연주는 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의아한 낯빛을 비췄다.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쪽…. 아틀란타….” “수현?” “전장…. 이탈….” “…지금 저보고 전장을 이탈하라고요?” 간단한 단어만 말했음에도 고연주는 바로 알아들어주었다. 나는 그렇다는 의미로 눈을 한 번 지그시 감았다 떴다. “수현!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러자 고연주는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아마 도망치라는 의미로 알아들은 모양이다. 조금은 갑갑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느릿하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도망이 아니라…. 고연주가 아틀란타로….” “그럴 수 없어요. 아니, 그러지 않을 거예요. 차라리 같이…!” “업적…. 보상….” “…네?” 가까스로 업적 보상이라는 말을 꺼내자 그제야 고연주의 말이 흐려졌다. 내가 고연주에게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아틀란타로 달려가서 업적 보상을 받아달라는 말이었다. 아까 탑의 이정표를 발견한 이상 아틀란타는 정말로 목전이다. 고연주가 낼 수 있는 최대 속도를 생각해보면 금방 다녀올 수 있을 터. 이정필처럼 ‘탈영’ 이 아닌 ‘탐색’ 을 목적으로 행동하다 아틀란타를 발견하는 경우, 설령 고연주 혼자서 발견했다손 치더라도 원정대 사용자 전원에게 업적 보상이 부여된다. 그러면 다른 건 모두 차치하고서라도, 능력치 포인트가 보상으로 굴러들어온다. 즉 그 포인트로 체력을 올림으로서 화정의 3차 각성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고연주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러니까…. 지금 아틀란타로 가서 업적 보상을 받으라는 말인가요?” 고연주는 바바라 공략 전에 소환된 사용자인 만큼, 이제는 내가 원하는 바를 알아챘을 것이다. 또한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사용자에 한해, 1 능력치 포인트가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도. “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저하는 기색이 보이는 고연주. “제발…!” 그래서 나는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재촉했다. 그 마음은 정말로 고마우나, 지금 그나마 생각나는 방법이 이것밖에는 없었다. 아까의 전투로 완전히 깨달을 수 있었다. 현재 내 사용자 정보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지옥 대공을 이기지 못한다. 이대로라면, 설령 기적적으로 몸을 회복해 2차전을 벌인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똑같을 것이다. 그런 만큼,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표정에 깃든 진심을 읽은 걸까? “…알았어요.” 아랫입술을 깨문 고연주가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녀올게요. 다녀올 테니까, 절대로 죽지 말아요.” 그리고 나를 잠깐 내려다보더니 가리킨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절대로 죽지 말아요.’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고연주는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점이 되었고 그대로 사라졌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멀어져 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마 지금쯤 이를 악물고 달리고 있겠지. 이렇게 고연주를 보내기는 했으나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다. 여전히 허공에 떠 있는 네 개의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그리고 냉엄한 현실을 직시한 순간 깊은 수렁으로 곤두박질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능력치 포인트로 잠깐 희망을 가졌다고는 해도, 상황은 야속하리만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물론 객관적으로 상황은 나아졌고, 또 나아질 것이다. 제갈 해솔의 마력 능력치가 101포인트를 달성했고, ‘쓰러질 수 없는.’ 의 랭크가 상승했다. 거기다 고연주가 도시를 발견하는 즉시 체력을 101포인트까지 찍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래서?’ 라는 생각이 가시지를 않는다. 어떻게 반격의 수단을 마련하려는 시도는 했으나, 지금 이 상황이 절대로 녹록하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차라리 상대가 쿠샨 토르였다면 이길 수 있겠다며 주먹이라도 불끈 쥐었겠지. 그러나 현재의 상대는 지옥 대공. 사실대로 말하면, 내가 화정의 3차 각성을 이뤄도 이길 수 있는 상대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까 잠깐 붙어본 결과 본능적으로 느낀 직감이었다. 나와 동격의 힘을 지닌 지옥 대공은, 이미 3차 각성을 벗어나 더 높은 경지를 이루었을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말인즉, 내가 아무리 발버둥치고 발버둥쳐도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존재라는 것. 어중간한 각성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아까 절박하게 도망치라고 외치던 화정의 목소리가 이제야 뼈저리게 느껴진다. “…….” 돌연 전방에서 번쩍이는 섬광과 살 떨릴 정도의 폭음이 들려온다. 아니, 실은 아까부터 들려오던 굉음들이었다. 비록 눕혀진 상태라 보이지는 않으나 어떤 상황인지는 느낄 수 있다. 공찬호가 고래고래 외치는 소리도 들려왔고, 번개가 번쩍이는 소리, 무언가 크게 터지는 소리, 액체가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 지옥 겁화가 타오르는 소리 등…. 비명은 물론, 무지막지한 마력의 흐름들이 1초가 멀다 하고 전해져 오고 있었으니까. 그 소리들이 듣기 싫어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마음 같아서는 귀도 틀어막아 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도망치라고 했는데도….’ 아니, 어쩌면 도망가도 소용없는 일이었을지도.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작스레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문득, 회한이라는 감정이 찾아 들었다. 이제 다 왔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아틀란타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지금껏 무엇을 위해서….’ 아직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어떻게든 무엇이라도 해보고 싶은데, 상황은 이미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그 간극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괴리감. 설마 그때 느꼈던 감정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여기서 또 느끼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해답이 보이지가 않는다….’ 그때. 똑! 느닷없이 이마에 빗방울이 하나가 떨어졌다. 갑자기 무슨 비가 내리나 싶어 살그머니 눈을 뜬 순간, 나는 절로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걸 느꼈다. 그와 동시에 또 하나의 물방울이 흘러내려 내 이마를 맞춘다. …아니. 빗방울도, 물방울도 아니었다. 그것은, 눈물이었다. 김한별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울고 있었다. 그러나 울음소리는 나지 않는다. 억지로 참고 있는지 목울대가 계속해서 고저를 그리고 있다. 소리 죽여 오열하고 있었지만,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은 턱을 지나 자꾸만 떨어지는 중이었다. 그런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슬픔과 공포심이 서려 있었다. 김한별은 왜 울고 있는 걸까. 도대체 무엇을 보았길래 저렇게 우는 걸까. “…아.” 내 시선을 느꼈는지, 불현듯 김한별이 고개를 숙여 나와 눈을 맞추었다. 엉겁결에 파르르 떨리는 입술이 눈에 밟힌다. “오, 오빠….” 김한별은 흔들리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오빠…. 오빠….” 다시 한 번 나를 부른 김한별은 코가 맞닿을 정도로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와 눈을 마주친 채, 속살거리듯이 말을 잇는다. “얼마 전에 물어보신…. Amor Nuntios…. 그 단어….” 응? ‘Amor Nuntios?’ 사실상 상당히 뜬금없는 말이라 나는 머리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다가 잔뜩 눈 흘김만 받은 단어이지 않은가. 그러나 김한별은 조금도 아랑곳 않았다. 그저 아주 잠시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실, 사랑 메시지라는 뜻을 가진 단어에요.” …이건 또 무슨 말일까? 망연히 시선을 들어올리자 결연한 눈빛을 빛내는 아름다운 눈동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 말을 차마 이해하기도 전, 김한별의 입술이 떼어졌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것 같아요.” …사랑? 그러자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것도 모자라, 온 정신이 멍해지는걸 느꼈다. 하지만 김한별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사랑해요.” “…….” “네. 저는 오빠를 사랑해요.” “…….” “사랑해요. 통과의례에서 첫 눈에 반했을 때부터, 쭉 좋아해왔어요.” “…….” 김한별은 똑같은 말을 세 번이나 되뇌었다. 한순간 머릿속이 혼란스럽게 변했다. 혹시 잘못들은 게 아닐까 싶었으나, 아니었다. 중간중간 흐느낌으로 인해 목이 메었어도, 사랑한다 속삭이는 목소리는 또렷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이것만큼은 제대로 말하겠다는 듯이. ‘갑자기 왜 이런 말을….’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다못해 저번처럼 경계를 서는 도중이면 몰라도, 지금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의 고백은 너무 뜬금없지 않은가. 그 순간 김한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숨결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던 얼굴이 서서히 멀어졌다. 김한별이 입을 열었다. “궁금하시죠?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했는지….”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여전히 눈물이 맺힌 낯으로 서글프게 웃어 보였다. “왜냐하면….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말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요.” 그제야. “오빠. 죄송해요.” 나는, 그때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만 해도 고막을 시끄럽게 울리던 소음들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앞쪽에서 누군가 성큼성큼 걸어오는 기척도 느껴졌다. ‘왔구나.’ 상황은 굳이 보지 않아도 뻔하다. 지금 들려오는 걸음 소리는, 지옥 대공이 자신에게 덤벼든 사용자들은 모조리 침묵시키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뒤통수에 땅이 조심스레 닿는 감촉이 전해졌다. 김한별이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그러면서 덜덜 떨고 있는 손을 품 안으로 집어넣더니 보석을 한 움큼 끄집어내는 모습이 보였다. 이어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 한별아.” 몸은 여전했다. 똑바로 일어서기는커녕 제대로 가누는 것조차 힘겨운 상태였다. 그런 만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전무하다. 그래, 나는…. ‘…….’ …젠장. “씨발….” 또다시 찾아온 무력감에 절로 욕설이 나오고 말았다. 그 순간이었다. - …살리고 싶어? 까닭 없이 혐오감이 치솟아 애꿎은 땅만 긁을 즈음, 갑작스레 화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정?’ - 길게 이야기할 시간 없어.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살고 싶어, 살리고 싶어? 언뜻 듣기로는 화정의 어조는 명령조에 가까웠다. 어찌 보면 화가 난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살고 싶으냐, 살리고 싶으냐?’ 일견 들으면 비슷한 말이다. 그러나 두 말은 커다란 차이점을 갖고 있다. ‘그거야….’ 아무튼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꺼냈는지는 모르나,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뻔하지 않겠는가. ‘살리고 싶다.’ 그렇게 속으로 대답한 순간이었다. 띠링! 『사용자 고연주가 아틀란타 대륙의 도시를 발견했습니다!』 『축하합니다….』 『고대 아틀란타는….』 『아틀란타 내 도시 발견 보상으로, 원정에 참가한 사용자 전원에게 GP를….』 홀연히 허공에 여러 개의 메시지가 삽시간에 출력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 개의 메시지 중에서도 내 눈에 들어오는 건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아틀란타 내 도시 발견 보상으로, 원정에 참가한 사용자 전원에게 능력치 포인트를 1(Free Point)만큼 지급합니다!』 마침내, 지푸라기 하나가 눈앞에 떨어졌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어제 04시 06분쯤에 집필을 완료했는데, 업데이트를 하려고 보니 조아라가 점검 중에 있더군요. 제가 점검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지 못한 상태라 굉장히 당황하고 말았습니다.(점검은 04시 00분을 시작으로, 08시 00분을 기점으로 풀린 것으로 압니다.) 이 점 독자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 드리며, 깊은 양해를 구합니다. _(__)_ PS. 다음 회는 BGM 하나를 추천 드리겠습니다. 업데이트 전에 이번 회 코멘트란 에 올려놓을게요. 0653 / 0933 ---------------------------------------------- 회광반조(回光返照).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눈이 절로 번쩍 떠졌다. 이건 고연주가 도시를 발견했다는 소리였다. “큭…!”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갑자기 전신을 칼끝으로 쑤시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나도 모르게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지만, 때마침 두 개의 메시지가 허공에 새로이 출력됐다. 『사용자의 체력이 30% 이하임을 확인했습니다. TOPG의 잠재 능력 ‘분노’ 가 활성화됩니다.』 『사용자의 능력치 중 근력, 체력, 내구, 민첩이 소폭 상향합니다.』 공교롭게도 ‘분노’ 가 활성화된 탓에 몸에 약간이나마 힘이 돌아왔다. 물론 그렇다고 고통이 아주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래도 그 미미한 활력에 힘입어 나는 겨우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내 기척을 느낀 걸까? 서서히 가라앉는 초점에, 서로 대치하고 있던 두 여인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는 게 잡혔다. “흐응?” “오, 오빠?” 다행히 김한별은 서 있는 상태였다. 아직 전투에 들어가지는 않은 모양이다. 여전히 머리는 어지럽고 몸을 가누는 게 힘들었으나,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걸음을 내디뎠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와중, 주변 상황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옥 대공이 서 있는 지점을 중심으로 수많은 이들이 찢겨진 휴짓조각처럼 널브러져 있다. 개중에는 내가 아는 사용자들이 대다수였다. 배에 큼지막한 구멍이 뚫린 채 대(大)자로 뻗은 공찬호. 전신이 시커멓게 그을려 쓰러진 형. 복부를 감싸 안고 누운 한소영. 핏물 고인 웅덩이에 처박힌 이유정. 안현…. 연혜림…. 신재룡…. 헬레나…. 그렇게 곳곳에 쓰러진 사용자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아두고 있을 즈음. “…어떻게 된 거지?” 조용히 묻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리자 고개를 갸웃한 채 팔짱을 끼고 있는 지옥 대공이 보였다. 그리고 지옥 대공의 손에 머리칼이 붙잡힌, 축 늘어져 있는 제갈 해솔까지도. “육신은 물론, 영혼마저 불사르는 고통을 맛봤을 터인데….” 그랬나. 왠지 호흡할 때마다 폐가 아프고 자꾸만 정신이 아득해진다 싶었는데, 영혼까지 불살랐던 건가. “보통 인간이라면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은 죽었다 깨어나도 목숨이 모자랄만한 타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일어섰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폭 한숨을 흘리는 지옥 대공. “정말, 놀라움에 앞서 정신력 하나만큼은 찬사를 보내고 싶을 지경이구나.” 잠시 후, 지옥 대공은 오른손에 쥔 것을 흘끗 내려다보더니 제갈 해솔을 옆으로 휙 던졌다. 그리고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을 짓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너무 걱정은 말거라. 그대에게 경의를 표하는 차원에서, 어지간하면 죽이지 않으려 애썼으니. …뭐, 잠깐의 유희로 괜찮은 놈들도 상당히 있었고.” 어지간하면 죽이지 않으려 애썼다…. “그건 조금 고마운데.” 나는 전투에 들어간 이래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갑작스레 찾아온 홀가분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냥 아무 이유 없는, 까닭없는 웃음이었다. 지옥 대공이 두 눈을 살짝 치뜨며 나를 바라본다. “오, 오빠….” 걱정스런 눈초리와 애틋한 목소리가 나를 막아 섰으나, 나는 가만히 머리를 가로저은 후 김한별을 지나쳤다. 그리고 지옥 대공과 약간의 거리를 남겨두고서 걸음을 정지했다. “…그냥 누워 있지 그랬느냐.” 문득 지옥 대공의 딱하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투지는 기특하다마는…. 너도 이제 알고 있지 않느냐.” “…….” “침묵은 긍정으로 생각하마. 지금까지의 투지는 칭찬해주마. 그러나 이 이상의, 괜한 오기는 이만 접어두거라.” “…….” 순간적으로 머리를 끄덕일 뻔했다. 지옥 대공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아까 만전의 상태에서도 순식간에 격파 당했는데, 지금 이 상태로는 정말로 일초지적도 되지 못한다. 말 그대로 오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다. 나는 계속해서 호흡을 고르며 기절한 공찬호가 있는 방향으로 왼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회로를 따라 천천히 마력을 일으키자 옆에 처박힌 수라마창이 두어 번 들썩들썩 움직이더니, 곧 불쑥 뽑혀 나와 빙그르르 돌며 가볍게 손에 안착했다. “수라를…?” 지옥 대공은 잠시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이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왠지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알 것 같아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마 내가 수라마창의 힘을 이끌어낸다고 해도 별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겠지. 문득 아주 오래 전 형이 해준 말이 떠오른다. ‘수현아. 아무리 불리한 전투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역전의 찬스가 한 번은 온다.’ 이 말은 예전에 내가 안현에게 해준 말이기도 했다. 스포츠 경기든 전투든 어느 일을 하든 간에, 일종의 ‘흐름.’ 이라는 게 있다. 지금까지의 전투는 시종일관 지옥 대공의 흐름이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 흐름이란 것이 넘어올락 말락 하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분노’ 가 활성화됐을 때부터 미묘하게 느껴지던 역 흐름이었다. 물론 상대가 지옥 대공인 만큼 여전히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래도, 그래도 최소한 반격의 기회 정도는 마련할 수 있는 흐름은 되지 않을까. 무엇보다 조금 전 화정이 그랬다. 살고 싶으냐, 아니면 살리고 싶으냐고. 거기서 나는 살리고 싶다는 길을 선택했다. 이제야 그 진정한 뜻을, 화정이 화내듯이 말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화정은 아마 지금 흐름을 반전시키고, 또 반전한 흐름을 증폭시킬 수 있는 무언가의 방도를 갖고 있을 것이다. 다만 양자택일로 말한 이유는…. 아마 억지로 흐름을 증폭하는 것에 대한 대가가 분명히 있을 거라는 것. …그 대가란, 나의 죽음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나는 여기서 죽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돌연 몸이 덜덜 떨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진정하려고 애써도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10년이 넘게 꿈꿔왔던, 그리고 간신히 눈앞으로 다가온 희망을 스스로 포기해야 한다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해야 하는 일이었다. 화정은 아까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은 대답만이 아닌 나의 결정이 필요한 때였다. 나는 무검과 수라마창을 힘껏 부여잡았다. 그래…. ‘이제는, 같이 돌아가지 못한다고 해도 좋다.’ 온몸의 마력을 하나하나 끌어 모았다. 그리고 허공에 출력된 사용자 정보 창을 향해 물끄러미 응시하며 생각했다. 아니,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원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한 번만. ‘단 한 번만, 흐름을 가져올 수 있다면…!’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이제껏 끌어 모은 모든 마력과 염원을, 모조리 무검과 수라마창에 불어넣었다. 그리고, 시작되었다. 『무검이 사용자 김수현의 의지에 응답해 소환됩니다!』 『혼돈 왕의 상징, 절멸(絶滅)자의 검이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수라마창(壽拏魔槍)이 사용자 김수현을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합니다!』 『근력이 6포인트 상승합니다!』 가장 먼저 응답한 건 무검과 수라마창이었다. 웅웅웅웅웅웅웅웅! 키아아아아아아아! 둘 다 가공할만한 마력을 뿌리면서 미친 듯한 공명음을 토해낸다. 하지만 알고 있다. 이 정도로는 지옥 대공에 턱도 없다는 걸. 그렇다면…. 『잔여 능력 포인트인 1(Special, Latent) 포인트를 사용합니다. 해당 포인트는 단계 상승이 아닌, 랭크 상승 포인트로 판정됩니다!』 『축하합니다. 2슬롯 잠재 능력인 ‘쓰러질 수 없는(Rank : S Zero).’ 이 1 랭크 상승합니다!』 『‘쓰러질 수 없는(Rank : S Zero).’ 이 ‘쓰러질 수 없는(Rank : EX).’ 으로 진화합니다!』 『해당 능력은 더 이상 상승할 수 없습니다!』 『체력이 101 포인트로 상승합니다!』 『화정(火正) 각성의 3단계가 시작됩니다!』 ‘쓰러질 수 없는’ 의 랭크 상승과 체력 능력치 101 포인트. 이로써 화정의 제 3차 각성이 시작됐다. 그래도, 그래도 여전히 부족하다. 지옥 대공이 거머쥔 흐름을 가져오기에는 아직 한참이나 부족하다. 그런 만큼 지금 할 수 있는 건 모두 끌어내야 한다. 『‘용족화’ 를 발동합니다!』 『자세한 능력은 사용자 정보를 확인해주십시오.』 나는 곧바로 허공을 바라봤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수현(3년 차) 2. 클래스(Class) : 검술 전문가(Secret, Sword Specialist, Master) 3. 소속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S Zero) 5. 진명 • 국적 : 마성(魔性 : 사람을 속이거나 현혹하는 악마와 같은 성질.) • 검의 주인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7) 7. 신장 • 체중 : 181.5cm • 75.5kg 8. 성향 : 중용 • 혼돈(Moderation • Chaos) [근력 102(+8)] [내구 94(+2)] [민첩 98] [체력 101(+2)] [마력 96] [행운 90(+2)]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 포인트입니다.) * 심장에 화정을 품은 상태입니다.(현재 3차 각성이 진행된 상태입니다.) * 체내에 한 치의 노폐물도 찾을 수 없습니다.(마력의 흐름이 두 배로 상승합니다.) * 심장에 고대 무녀의 각인이 새겨진 상태입니다.(마력 회로가 안정되고 효율이 증가하며, 흐름 또한 추가로 상승합니다.) * 용족화를 사용한 상태입니다.(물리 방어력과 마법 저항력이 크게 상승하며, 행운을 제외한 모든 능력치에 추가 어드벤티지가 붙습니다. 용의 날개를 소환할 수 있고, 허공을 활보할 수 있습니다.) < 업적(8) > < 고유 능력(1/1) > 1. 제 3의 눈(Rank : S Zero) < 특수 능력(1/1) > 1. 신검합일(Rank : EX) < 잠재 능력(4/5) > 1. 백병전(Rank : EX) 2. 쓰러질 수 없는(Rank : EX) 3. 심안(정)(Rank : EX) 4. 전장의 가호(Rank : EX) 5. -. (잔여 능력 포인트는 0 포인트입니다.) < 권능 : 결(검술 전문가는 어떤 것이라도 베거나 자를 수 있습니다.) > < 용의 축복 :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의 권능(2/5) > 1. 폴리모프(제한). 2. 용족화(제한). 3. - 4. - 5. - 무언가 변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느낀 감각은 시원함 이었다. 전신이 개운하고 상쾌하다. 더 이상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 회로를 휘도는 마력이 전에 없이 저돌적이고, 몸을 구성하는 요소 하나하나가 깨어나 힘을 보내주는 기분이다. 마치 사그라지기 직전, 한 차례 크게 불꽃을 일으키는 촛불처럼. 지옥 대공은 무언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아까와 같은 여유로운 낯빛은 온데간데없고, 약간 짜증난다는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본다. “어리석은…. 그렇게 해서라도 현실을 부정하려고 드느냐.” 현실 부정이라. “자신 있나 보군.” 나 또한 곧바로 맞받아쳤다. “자신?” 그러자 지옥 대공은 가볍게 코웃음 치며 시답잖게 웃었다. “그건 오히려 이 몸이 해야 할 말 아닌가?” 그 순간,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던 두 눈이 한껏 가늘어졌다. 지옥 대공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대야말로, 고작 그 정도로 자신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콰르르르르르르르! 돌연 부릅떠진 두 눈에서 시뻘건 안광이 폭사하듯이 뿜어져 나온다. 지옥의 겁화가 춤추듯 사방으로 타오르고, 당장에라도 집어삼키겠다는 것처럼 사정없이 일렁인다. 이제껏 유희를 즐기던 지옥 대공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옥 대공이 강림한 것이다. 그것은 지금껏 끌어낸 내 모든 것을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의 기운이었다. - 김수현. 그때, 비로소 화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정?’ - 시끄럽고, 예전에 기억해? 2차 각성 끝내고, 선물 하나 주겠다고 했던 거. ‘선물? 선물이라면….’ - 그래, 이게 내 선물이야.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화정의 말이 끝난 순간이었다. 『화정(火正)이 사용자 김수현에게 모종의 기운을 보내기 시작합니다!』 『간섭의 영향으로, 5슬롯 잠재 능력 ‘염화(炎化)’ 가 개화됩니다!』 느닷없이 추가로 떠오른 두 개의 메시지. - 간다. 정신 똑바로 붙잡아. 그 말을 마지막으로. 화르르르르르르륵! 눈앞으로, 맑은 불꽃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어제 코멘트 보고 울 뻔…. 사실 요즘 왜 이렇게 휴재가 잦냐고 오만 욕을 먹을 줄 알았는데, 따뜻하게 걱정해주시는 거 보고 감동을…. 흠흠. 정말로 감사합니다. _(__)_ 아무튼 오랜만에 정시 연재하니까 좋네요.(하이라이트는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사실 이 파트가 끝날 때까지 하이라이트라고 보셔도 좋아요.) 선물의 의미는 예전 축제 당시 2차 각성이 끝나고 깔아둔 복선이었습니다. 염화는 지금 수현이 가진 잠재 능력 중에서 가장 굉장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페널티도 있지요. 자주 쓸 수 있는 능력은 아닙니다. :) 아, 그리고 그저께 한소영 일러스트 중간 보고 받았어요. 지금 엄청 예쁘게 제작 중입니다. 일러스트레이터 분께서 밤을 새시고 매달리고 계시는 중이지요. 저도 기간은 조금 늦어져도 좋으니 최대한 퀄리티를 높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아마 기대하셔도 좋을 거예요. :D 0654 / 0933 ---------------------------------------------- 회광반조(回光返照). 시야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염화(炎化)의 능력이 무엇인지 자세하게는 모른다. 설마 잠재 능력으로 개화될 줄도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직감적으로 화정이 숨겨둔 비장의 수라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나를 바라보는 지옥 대공의 아미가 찌푸려졌다는 게 그 방증이 아닐까. “실망이구나.” 잠시 후, 지옥 대공이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실망했다는 말이었다. “무슨 수작을 부리는가 했더니…. 고작 한다는 게 이것저것 끌어 모은 각성이더냐? 그것도 네 목숨을 담보로 한?” 어찌 보면 틀린 말도 아니지만, 딱히 대답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게 최선이었으니까. 나는 대답 대신 창과 검을 거머쥔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상태로 힘을 주자 불꽃이 더더욱 크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 바보 천치 같은….” 이라 중얼거린 지옥 대공은, 돌연 오른손을 허공으로 내뻗었다. “나와라. 게헨나의 신열.” 목소리 자체는 온건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우웅, 거슬리는 소음이 고막을 긁으며 시작된 광경은 전혀 부드럽지 않았다. 엄청난 마력이 삽시간에 허공에 모이며 방대한 양을 이루더니, 종래에는 공간이 와짝 일그러지며 큼지막한 구멍이 뚫렸다. 지옥 대공이 그 구멍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는다. 이윽고 지옥 대공이 구멍 속에서 끄집어낸 것은 ‘무기’ 라고 보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는 것이었다. 가장 비슷한 형상은 밧줄, 아니 채찍? 그러나 온전한 채찍이라 보기도 어렵다. 끝부분인 손잡이는 보이지도 않는다. 오롯이 불꽃으로만 이루어진 불의 줄기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이건 나와 상당히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일종의 자아(自我) 노라.” 돌연 천천히 팔을 들어올린 지옥 대공이 허공을 향해 힘차게 불의 채찍을 후려쳤다. 쫘아아악! 허공을 불태우며 날아간 채찍은 흉흉한 기운을 뿜으며 빈 공간을 파고들듯이 때렸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공중이 쩌저적, 벌어지며 균열이 일고, 타격 지점은 아예 공간이 짜부라지는 현상이 벌어졌다. 그것도 모자라 불의 채찍은 아직도 부족하다는 듯 스스로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가히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어찌됐건,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문득 고개를 좌우로 꺾은 지옥 대공은 채찍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이 몸에게 일말의 패배 가능성을 예상케 하고, 그로 인해 이것을 꺼내 들게 했다는 점은 칭찬해주마.” 말인즉 이대로라면 질 것 같으니까 꺼냈다는 소리였다. 바꾸어 생각해보면 저 무기를 꺼냄으로써 나를 이길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고. “말이 길어졌군.” 입맛을 다신 지옥 대공은 채찍을 두 손으로 팽팽하게 늘려 잡으며 자세를 잡았다. “오너라. 그대가 한 줌의 재가 되기 전까지, 최대한 빠르게 끝내야겠다.” 정말 어지간히도 얕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나는 곧바로 땅을 박차 돌진했다. 화정이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상태가 이 흐름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후의 여력을 생각할 전투가 아니었기에 나는 시작부터 전력으로 달려들어 양손을 교차시켜 휘둘렀다. 그러자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허공에 새겨진 잔상은, 맑은 불꽃으로 타오르며 지옥 대공의 정면으로 쏘아졌다. “흠.” 지옥 대공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마주보는 방향에서 팔을 수평으로 들어올리고는, 마치 리본 체조를 하는 것처럼 손목을 느릿하게 내젓는다. 이내 매섭게 베어가는 두 기운을, 빙그르르 돌기 시작한 불의 채찍이 맞이한다. 그 순간, 무섭게 짓쳐 들어가던 두 불꽃이 그대로 채찍에 말려들었다. 불꽃은 마치 맷돌처럼 채찍에 맞물려 회전하는가 싶더니, 지옥 대공이 우아하게 손을 들어 떨쳐내자 하릴없이 허공에 뿌려졌다. “이제 차이를 느끼겠느냐?” 나는 못 느꼈다는 뜻으로 있는 힘껏 수라마창을 휘둘렀다. 1단계인 창의 형상이 아닌 진화한 낫의 형태를 띠고 있기에 베기 공격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지옥 대공은 잠깐 코웃음을 치더니 오히려 수라마창을 밟고 올라가, 아래쪽으로 세차게 손을 훑었다. 휘리리릭! 사방으로 불똥을 뿌리며 치고 들어오는 불의 채찍. 급히 몸을 숙여 피하려는 찰나, 갑작스레 옆으로 무언가가 찔러오는 느낌이 들었다. 흘끗 시선을 돌리자 정수리를 스치는 줄기 하나와, 그 줄기에서 파생된 뱀처럼 파고들어오는 또 하나의 채찍을 볼 수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속도에 경악하며 황급히 무검을 들어올렸다. “막아도 소용없느니라.” 그러나 그 순간, 지옥 대공이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검과 채찍이 부딪치며 쨍 하는 소리가 울리는 것과 함께, 정수리를 스치고 지나간 채찍이 기괴한 각도로 꺾이며 재차 나를 노렸다. 신속하게 수라마창을 회전시켜 진로를 가로막은 순간, 채찍 끝이 펑 터지며 무지막지한 굉음이 귓전을 울렸다. 화려한 불꽃이 시야를 가득히 메워온다. 나도 모르게 아차 한 순간. 웅웅웅웅웅웅웅웅! 돌연 무검이 웅혼한 검음을 왕왕 울리더니 주변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순식간에 나를 뒤덮은 아지랑이는, 아주 잠시간에 불과했지만 나를 덮쳐오는 폭발을 가로막았다.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멸절’ 의 능력이 발동된 것이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아무리 멸절이 강력한 능력이라 해도, 지옥의 겁화를 상대로는 격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 증거로 발동된 멸절은 불꽃을 먹어 치우기는커녕, 도리어 먹혀 들어가는 실정이었다. 멸절이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나는 재빠르게 걸음을 물렸다. 그 덕에 폭발의 피해를 최소화하며 빠져나올 수는 있었다. 그러나 채찍은 금세 폭발과 아지랑이를 뚫고 나와, 낭창낭창한 움직임을 보이며 또다시 가슴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겨우 팔을 들어올려 겨드랑이를 지나치게 한 찰나, 이번에는 아까 스쳐 지나간 또 하나의 줄기가 나선으로 꺾이며 사각으로 파고들어온다. 말 그대로 시간차를 노린 타이밍 공격이라 일반적으로는 회피가 어려운 공격이었다. “큭!” 그러나 이대로 고스란히 맞을 수는 없어, 결국에는 그 자리에서 텀블링을 돌 수밖에 없었다. 곧 섬찟한 감각이 어깨를 가볍게 쓸고 지나갔다. “회피 능력 하나는 정말 대단하구나!”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공중제비는 몸을 크게 움직이는 동작이라 지옥 대공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는 것이다. 허공을 한 번 돌고 내려오며 눈을 부릅뜨자, 예상대로 지옥 대공의 모습이 잡혔다. 오른손은 채찍을 들고 왼손은 불꽃을 머금은 채, 내가 착지할 지점으로 따라붙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혀오는 기분이 들었다. 근접 전투에서 압도당하기 시작한 순간, 지옥 대공은 시종일관 나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아까처럼 몇 번 공세를 견디지도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분명한 것은 아직도 지옥 대공이 나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 거기다 아까처럼 여유도 부리지 않고 쉴 새 없이 연속 공격을 가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간신히 붙잡은 흐름이 다시금 지옥 대공에게 되돌아가려고 한다. 그러기 전에 무언가 반전의 수를 하나 마련하는 수밖에 없다. ‘결국 그 방법밖에 없는 건가.’ 결심이 섰다. 사실 선택할 도리가 없다는 게 맞겠지만, 어쨌든 떨어지기 직전 나는 한층 마력을 끌어올리며 오른발을 들었다. 그리고 지면에 착지한 순간, 마력을 한꺼번에 해방하며 힘차게 발을 굴렀다. 그 순간이었다. 쿵! 화르르르르르르륵! 넘실거리는 대지가 갈라지며 곳곳에서 염화를 토해낸다. 솟아오른 수십, 아니 수백 개의 염화는 이내 하나하나 검의 형체를 갖춰가며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살짝 놀라고 말았다. 염화 능력의 영향 때문일까?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기운을 흘리는 열화검들이 찬연하게 피어오르며 개화한다. 일찍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내가 발동한 열화검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또 가장 강력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약간이지만 자신감이 생겼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나는 정면 방향을 향해 곧바로 열화검들을 발출했다. “…아? 그, 그건…!” 지척까지 다가왔던 지옥 대공이 두 번째로 놀랍다는 기색을 표하더니, 황급히 몸을 비틀어 발을 움직였다. 서 있는 지점을 기점으로 지옥 대공의 몸이 원을 그리듯이 미끄러진다. 그러면서도 자세에 한치 흔들림이 없는 게 고수준의 회피 능력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피할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열화검들이 그대로 지나치기 직전, 나는 망설임 없이 왼쪽 방향으로 손을 쓸었다. 그러자 내 의지에 따른 열화검들은 곧바로 유턴하며 지옥 대공에게 가열차게 따라붙었다. “감히!” 지옥 대공에게서 처음으로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드센 발짓으로 땅을 박차더니 삽시간에 하늘 높이 도약한다. 나는 또 한 번의 손짓으로 그것마저 따라붙게 만들었지만, 그때는 지옥 대공도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어느 안전이라고!” 그렇게 외친 지옥 대공은 채찍을 든 채, 한쪽 발을 축으로 몸을 빙글 돌렸다. 회전은 한 번에서 그치지 않았다. 계속해서 핑그르르 돌며 선회하더니,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무시무시한 가속이 붙었다. 마치 피겨 선수가 업라이트 스핀(Upright Spin)을 도는 것처럼, 공중에서 핑그르르 휘돌기 시작한다. 펑펑펑펑펑펑펑펑! 그에 따라 채찍은 곧 지옥 대공을 감싸는 하나의 돌풍이 되었고, 사방에서 쏘아진 열화검을 모조리 쳐버리거나 그 자리에서 터뜨려버렸다. 내가 이따금 사용하는 검막과 비슷한 원리로 막아낸 것이다. 이내 서서히 회전 속도를 줄이는 지옥 대공을 보며 나는 차분히 호흡을 골랐다.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첫 격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손해 본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계속 밀릴 것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열화검을 드러냈다는 사실이 가장 뼈아프다. 새삼스런 생각이지만, 지옥 대공은 모든 능력이 나보다 우월하다. 다른 능력치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102로 오른 근력마저도 비슷하거나 상회하는 수준을 보이고 있었다. 열화검은, 그런 지옥 대공을 생각하고 개발한 유일한 필살기성 어빌리티였다. 애초 반격을 염두에 두고 만든 능력이었거니와, 어찌어찌 상황도 맞아떨어져 사용하기는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지옥 대공에 타격을 주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한 번 보인 이상 지옥 대공에게 두 번은 통하지는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시선을 들어올리자 아직도 공중에 떠 있는 지옥 대공이 보였다. 나도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눈에 보이는 지옥 대공은 무언가 굉장히 화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짜증나.” 나는 순간 귀를 의심하고 말았다. 아니, 눈도 의심하고 말았다. 이제껏 기품 넘치는 말투를 유지하던 지옥 대공이, 처음으로 소녀처럼 짜증내며 신경질을 부렸기 때문이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하다. 금방이라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던 장난감이, 갑자기 성장해 반항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그냥 받아넘길만한 정도가 아닌, 지옥 대공 스스로가 위협을 느낄 정도였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그것과는 별개로, 왜 저렇게 애증과 걱정이 뒤섞인 눈초리를 보내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내가 죽지 않기를 원하는 여인네처럼 말이다. 화정 때문인가? “왜! 그대는 왜 자꾸만…!” 별안간 벌컥 화를 낸 지옥 대공은 콧김을 푹 내뿜으며 하늘 높이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잠시 후, 지옥 대공의 손을 중심으로 어마어마한 마력이 모여들어 찬연한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저건….’ 태양. 나를 단번에 그로기 상태까지 몰았던 능력이었다. 문득, 아까 이형환위를 쓰고 간파 당했을 때의 기억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아, 그나저나 방금 능력은 어떻게 한 것이냐?’ ‘…이렇게 한 건가?’ 나는 물끄러미 태양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마력을 끌어올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건 어떻게 하는 거지?” “…뭐, 뭐라?” 지옥 대공의 얼굴에 잠시나마 떨떠름한 빛이 스쳤다. 그 순간, 나는 손이 잔뜩 무거워지는 감각을 느꼈다. 화르르르르르르륵! 흘끗 시선을 올리자, 어느새 내 손에도 가공할만한 마력이 둥그렇게 모여들고, 맑은 불꽃이 덮이듯 타오르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사실 저것과 똑같은 원리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본래 마력 운용 하나만큼은 자신 있거니와, 염화 능력을 사용했을 때부터 회로에는 마력이 넘쳐흐르는 중이었다. 마르지 않는 샘까지는 아니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충분히 흉내를 내고도 남을 정도였다. 이윽고 서서히 형체를 갖춰가는 또 하나의 태양을 보며, 나는 다시금 지옥 대공을 담담히 응시했다. “이렇게 하는 건가?” 지옥 대공은 아주 잠깐 얼굴을 굳혔다. “하, 하!” 그러나 곧 짧은 탄성을 연이어 외치더니, 황홀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대는…. 정말…. 정말로 나를 미치기 일보직전으로 만드는구나.” “흠?” “…그래. 왕이라면 그 정도 기개는 있어야지 않겠는가. 방금 도발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마.” “…….” “아무튼 결심했어. 여기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대는 내가 품어버리겠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내 것으로 만들 것이다.” “꿈도 크군.” 품겠다거나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말은, 아마 화정을 대상으로 한 말일 것이다. 단번에 말을 자르자 지옥 대공이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 그리고 손을 더욱 높이 들어올리는 게 보여, 나도 그에 맞춰 마력을 한층 쏟아 부었다. …왠지 모르게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 엄습한다. 그리고 잠시 후. 콰르르르르르르륵! 화르르르르르르륵! 하늘과 지상에서, 온 세상을 밝히는 두 개의 태양이 떠올랐다. ============================ 작품 후기 ============================ 음, 아직까지 김수현과 지옥 대공을 50 : 50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굳이 계산해보면 25 ~ 30(김수현) : 75 ~ 70(지옥 대공)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아마 수현이 지금 이 상태에서 추가로 체력을 102까지 찍으면 45 ~ 50(김수현) : 55 ~ 50(지옥 대공) 정도로 볼 수 있겠네요. 그렇게 생각해보면 지금 김수현은 굉장히 잘 싸우고 있는 겁니다. 대 악마와 마족들을 대하던 지옥 대공의 태도와, 지금 김수현을 대하는 지옥 대공의 태도를 비교해보시면 감이 잡히실 듯합니다. 어느 분이 말씀하셨듯이, 지옥 대공은 홀 플레인의 끝판 왕으로 보시면 됩니다. 대 악마보다도요. 앞으로도 전개에서도 지옥 대공 정도의 존재는 다시는 출현할 일이 없을 겁니다. :) 이제 이 파트도 서서히 끝이 보이네요. 앞으로도 많은 기대 부탁 드립니다. _(__)_ PS. 쪽지가 지금 엄청 쌓였는데, 이번 주말 중 토요일 일요일에 나눠 답신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0655 / 0933 ---------------------------------------------- 회광반조(回光返照). 진득한 진홍빛을 뿌리는 태양과, 청명한 다홍빛을 흘리는 태양. 자신만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려는 태양이 하나는 하늘에서, 하나는 지상에서 생겨난다. 스스로를 ‘최강’ 이라 일컫는 종미의 불, 지옥의 겁화(劫火). 스스로를 ‘최고’ 라고 일컫는 태고의 불, 화정(火正). 최강과 최고를 자처하는 두 개의 맹화(猛火)가 지금 막 공중에서 부딪친다. 그 순간. 번쩍! 이어진 광경은 시야가 명멸할 정도의 환함도 보이지 않고, 귀를 멀게 만들 정도의 폭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하얗다. 그 순간부터 두 태양이 새하얗게 작열하기 시작했다. 부딪친 면이 서로 맞물려 일그러지고, 압력을 견디지 못한 기운들이 사방으로 광선처럼 뻗어 나갔다. 그러나 곧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되돌아와 충돌해 무수한 폭발을 일으켰다.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는 어마어마한 마력의 흐름이, 강물에 파문이 일듯이 원을 그리며 넘실넘실 퍼져나간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어떻게든 서로를 밀어내려는 물고 물리는 접전. 두 구체가 섞여 공중에서 요동하는 광경은 진정 장관에 가까운 장면이었다. “…….” “…….” 흘러나오는 기운이 너무나 강렬해서일까? 스리슬쩍 물러난 사용자들은 물론, 기절해있던 사용자들도 서서히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본능에 따라 허공을 올려다본 사용자들은 하나같이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구체의 맞물림이 끝난 하늘에는 붉은 바다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아니 아직 한창이었다. 온몸에 불을 두른 사내와 여인은, 마치 곡예비행을 펼치듯 허공 곳곳에서 번쩍번쩍 부딪치고 있었다. 한 번 부딪칠 때마다 터지는 무수한 불똥이 하늘을 점점이 수놓으며 춤추듯이 흩날린다. “형…?” 김수현의 모습을 확인한 누군가가, 그러나 확신이 서지 않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허공에서 이루어지는 교전 속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겨우 시야에 잡을라치면 곧바로 다른 곳에서 불빛이 번쩍이는, 말 그대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거기다 현재 김수현은 염화(炎火)의 능력으로 전신에 불을 두르고 있거니와, 용족화의 영향으로 등에 날개까지 돋아난 상태였으니 사용자들이 단번에 알아보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그때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사용자들이 간신히 김수현과 지옥 대공을 인식했을 즈음. “클랜 로드께서…. 최후의 기력을 불태우고 계시군요.” 누군가 홀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서너 명의 사용자들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황금빛으로 물든 눈으로 하늘을 응시하는 헬레나가 있었다. “최후의 기력을…. 불태우고 계시다고요?” 차소림이 간신히 상체를 일으키며 의아한 낯빛을 비췄다. 언제나 은은한 빛을 흘리는 아르쿠스 발키리 갑옷은 어느덧 흉갑 부분이 박살 난 볼품없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촛불은 사그라지기 직전, 한 차례 크게 불꽃을 일으키는 법이지요.” 헬레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잠시 후, 주변 사용자들의 안색이 핼쑥하게 변했다. 다들 헬레나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생각해보면 그렇다. 사용자들은 처음에는 격(格)의 차이로 인해 지옥 대공이 어느 정도나 강한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지옥 대공이 진면목을 드러내고, 또 직접 당해보면서 비로소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제대로 반항도 못하고 쓰러진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런 만큼 사용자들도 지금은 느끼고 있었다. 지금 이 장소에 소환된 지옥 대공은, 넘기는커녕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는 아득한 차이를 보이는 존재라고. 그것은 김수현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실상 김수현도 첫 격전에서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지 않았는가. 그런데…. 번쩍! 그 순간이었다. 공중에서 또 한 번 불빛이 부딪치고 두 형상이 좌우로 떨어진다. 사용자들은 도로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김수현이 생성한 수백 수천 개의 열화검이 사방팔방 뻗어나가고, 지옥 대공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회피하는데 여념이 없다. 염화에서 흘러나온 짙은 잔상이 유성의 꼬리처럼 길게 이어지며 허공에 그려진다.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 아닌, 그 외적인 존재가 벌이는 전투의 광경. 꿀꺽.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 광경만큼은 모든 사용자들이 볼 수 있었다. 지옥 대공이 있는 힘껏 후려친 두 갈래 불의 채찍과 그것을 가까스로 튕겨낸 김수현의 검과 창. 그리고 이어지려는 공격을 어빌리티로 내쫓아버리고, 도리어 반격을 가하는 김수현의 신위(神威). 사실 전황 자체는 아직도 지옥 대공이 우세하다. 지닌 힘의 급이 동격일 뿐, 그것으로 이룩한 경지 자체는 훨씬 높다. 애초 뼈를 깎는 수련이나 목숨을 건 경험이 아닌, ‘설정’ 으로 이루어낸 경지는 진정한 경지라 말할 수도 없다. 아마 지옥 대공이 화정을 필요로 하지만 않았더라도 김수현은 이미 골백번은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진 상황에서, 김수현은 분명히 지옥 대공과 대등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 만큼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사용자들이 하늘을 보며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가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 김수현이 계속해서 저 상태를 이어나갈 수만 있다면. “그럼…. 클랜 로드가…. 곧 쓰러지신다는….” “크게 타오른 촛불은, 그만큼 빠르게 꺼지는 법이지요.” 차소림이 더듬더듬 말을 잇자 헬레나가 지그시 눈을 감으며 말했다. 지옥 대공과 엇비슷하게 싸울 정도로 힘을 증폭시켰으니 그만큼 지속 시간도 짧을 거라는 의미였다. “그럼 기적을…! 아, 아니 엘릭서라도!” “글쎄요.” 안현은 기적을 쓰자고 외치려다가, 안솔이 혼수 상태임을 떠올리고는 엘릭서를 사용하자고 외쳤다. 그러나 이번에도 헬레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음에 이를만한 상처를 치료하는 것과 고유한 생명력을 소진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기적이라면 몰라도, 엘릭서로는….” “헛소리.” 계속해서 부정적인 말이 이어지는 도중, 돌연 단호한 목소리가 헬레나의 말을 끊어버렸다. 한쪽에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사내가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선 사내는 시커멓게 그을린 로브를 거칠게 벗어 젖혔다. 차갑게 눈을 빛내며 주변을 둘러보는 사용자는 다름 아닌 김유현이었다. “지금 다들 구경만 할 때가 아니잖습니까. 다들 허공에 출력된 메시지를 보세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용자들이 지그시 허공을 응시했다. 그리고 하나같이 탄성을 질렀다. 허공에는 고연주가 아틀란타를 발견함으로써 부여된 업적 보상이 출력돼있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가서 사제를 불러와 주세요.”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한소영도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여전히 복부는 부여잡고 있었으나 얼굴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했다. 죽을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까처럼 무작정 달려들 수는 없어요. 조금이라도 정비를 해야 해요.” 한소영의 추가 설명에 김유현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곳에도 사제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다들 죽거나 기절한 상태였다. 그러니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어딘가로 물러났을 새로운 사제가 필요했다. 어디 한 군데 성한 곳은 없었지만 두 클랜 로드가 결연히 의지를 다졌다. 그에 따라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던 사용자들도 한 명 한 명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용자들 사이로 분주한 움직임이 일 즈음, 헬레나는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은 채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는 중이었다. 다른 이들이 모두 몸을 회복한 후 김수현을 원호하려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을 때, 오직 헬레나만이 원론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대로 능력치를 올리고 몸을 회복한다손 쳐도, 지옥 대공의 발목이라도 잡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헬레나는 생각했다. 정황상 저 여인은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존재가 분명하다. 여기서 문제는, 그렇다면 저 정도의 존재가 도대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이 차원에 소환됐냐는 것. 헬레나는 물론, 그 누구도 어떠한 징조도 전조도 느끼지 못했다. 말 그대로 행군 도중 갑작스럽게 지옥 대공이 소환된 것이다. 결국 소환된 장소에 직접 가서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헬레나는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 “도마뱀? 지금 어딜 가는 거지?” “너는 따라오지 말거라.” 마침 사망한 사용자들에게서 얻어낸 물약을 마시고 있던 사샤가 의아히 물었으나, 헬레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일축하고는 앞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지옥 대공이 처음 소환된 장소에 도착한 헬레나는 심원한 두 눈으로 주변을 자세히 살폈다.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거라고는 아무도 없는, 알게 모르게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핏빛 황무지뿐. 그러나 헬레나는 이 장소에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확신에 가까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잠시 가라앉았던 헬레나의 눈동자가 도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진리에 다다를 수 있는 자격이자 능력이며, 모든 마법의 근원을 파악할 수 있다는 ‘하늘을 굽어보는 마음의 눈’ 이 발동된 것이다. 황금빛 눈동자가 이 황무지에서 이루어진 모든 마법적인 행사를 분석하고 해석한다. “아…!” 그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걸까? 헬레나의 화등잔만 하게 커지며 입에서 짧은 탄성이 터졌다. 한편, 같은 시각. 지금 한창 전투가 벌어지는 장소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지점에서는…. “엄마! 깜짝이야!” 무언가에 깜짝 놀란 비명을 지른 구예지가 후닥닥 상체를 크게 젖혔다. 현재 구예지는 전투에 참가한 상태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스리슬쩍 물러난 사용자는 아니고, 모종의 임무를 맡고 후방으로 물러난 상태였다. 그 임무란 신재룡의 부탁으로, 어떻게든 안솔을 보호하고 가능하면 깨워보라는 임무였다. 사실 임무를 빙자한 배려라고도 볼 수 있지만, 어쨌든 구예지는 나름 최선을 다해 안솔을 돌보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봐도 변하는 건 없었다. 앞쪽에서는 살 떨릴 만큼의 마력 충돌이 전해져 오는데도 안솔은 그저 편안한 얼굴로 색색 숨만 내쉴 뿐, 깨어날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결국 깨우는걸 포기한 구예지가 전전긍긍한 얼굴로 앞쪽과 안솔을 번갈아 보고 있을 무렵. 정말 갑작스럽게, 안솔이 느릿하게 상반신을 일으켰다. 마치 이제 자신이 나설 때라는 듯이. “아, 안솔…?” 놀란 토끼 눈을 한 구예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솔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구예지는 기뻐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상했기 때문이다. 평소의 안솔이었다면 지금 이게 어떻게 됐냐며 호들갑을 떨거나 김수현을 찾아야 정상이다. 그러나 지금 깨어난 안솔은 반쯤 감긴 졸린 눈을 하고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기류를 보이고 있었다. 예전과 같은 천연한 기색은 한치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함부로 다가가기 힘든 어색하기 짝이 없는 아우라를 뿌리고 있다. 아마 김수현이 여기에 있다면 ‘작두 탔구나.’ 라고 생각했을 만한 모습이었다. “너….” 그때였다. 침을 꼴깍 삼킨 구예지가 살금살금 다가가려는 찰나, 돌연 안솔이 느닷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에 재차 놀란 구예지가 발라당 엉덩방아를 찧는 사이, 멍해 보이는 안솔의 눈동자가 허공을 응시한다. “…….” 그렇게 잠깐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곧 느릿느릿 손을 들어 차분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튼을 누르는 것 모양새가 마치 사용자 정보를 조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잠시 후. 띠링! 『사용자 안솔의 행운 능력치가 103 포인트로 상승합니다!』 『축하합니다! 비정상적인 행운 능력치의 영향으로 사용자 안솔의 모든 능력에 ‘Blue Dahlia’ 의 효과가 추가됩니다!』 안솔의 앞으로 업적 보상을 제외하고 두 개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한 커다란 기적을!』 이윽고 새로운 메시지 하나가 추가로 출력됐다. 이전의 ‘필요할 때를 위한 작은 행운을!’ 과는 다른 메시지가. 그 메세지를 확인한 순간 안솔은 망설임 없이 구예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팡이.” ============================ 작품 후기 ============================ Blue Dahlia. 직역하자면 좀처럼 없는 것, 불가능한 일, 얻을 수 없는 것 정도로 해석하시면 됩니다. 개인적으로 안솔의 말도 안 되는 행운 능력치에 어울리는 능력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하하하. 아, 그리고 독자 님들. 오늘은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제가 다음 회를 내일 자정이 아닌 정오, 그러니까 12시 00분에 업데이트해도 될까요? 다름이 아니라, 내일 정말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아침 일찍 집에서 나가야 되거든요. 5시에 집에서 나가고, 아마 밤늦게까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 집에 돌아오면 아무리 빨라도 22시가 넘을 것 같아요. 그러면 돌아와서 씻고 새벽 02시 00분쯤까지 집필한 후 잤다가, 아침에 일어나서 정오까지 추가 집필해서 올릴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물론 오늘도 밤을 새서 집필하는 방법도 있지만,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거니와, 저번 휴재로 간신히 회복된 페이스가 또다시 어그러질 것 같아서요. 그래서 업데이트 시간을 자정이 아닌 정오로 늦추는 게 가장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부분 독자 분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_(__)_ PS. 어제 말씀 드렸듯이 지옥 대공과의 전투 파트는 곧 끝납니다. 다만 그 이후 지옥 대공을 찌르기로 굴복시키는…. 아니 아니, 신혼…. 으흠. 뭐라 표현해야 할지. 어쨌든 그 파트는 더 남아 있습니다. 안솔이 꿨던 꿈 중에 김수현이 마지막에 어떻게 됐는지를 떠올려보시면, 대강이나마 감을 잡으실 수 있을 것 같네요. :) PS2. 쪽지는 일요일에 일괄적으로 답신을 드릴게요! 0656 / 0933 ---------------------------------------------- 회광반조(回光返照). “차원 이동진…! 그런데 약식?” 가벼운 탄성을 터뜨린 헬레나가 얼른 무릎을 굽혔다. 이어서 적토(赤土)가 쌓인 지면을 가볍게 쓸어 몇 번 손을 비볐다가 펴자, 손바닥에 묻은 진한 붉은 자국이 드러났다. 그 자국은 적토의 흔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선명한 선홍 빛을 띠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진득한 점성도 느껴졌다. “이건…. 혈액….” 조용히 중얼거리던 헬레나는 돌연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 이내 황금색으로 빛나던 눈동자가 정상으로 되돌아오고 눈매가 한껏 가늘어진다. “역시…. 차원 이동진은 없는 게 아니었어. 이곳에 확실하게 존재한다.” 그랬다. 말 그대로 황무지에는 헬레나가 언급한 차원 이동진이 그려져 있었다. 바로 누군가의 혈액으로 그려진 약식 소환 진이. 그러나 황무지에 혈액과 비슷한 빛깔을 가진 적토가 쌓인 터라 눈에 잘 띄지 않은 것이다. 헬레나는 여전히 실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건 누군가가 상당히 오랫동안 공을 들인 계획이군.’ ‘하늘을 굽어보는 마음의 눈’ 으로 정보를 획득한 이후, 헬레나의 사고 회로가 팽팽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세한 계획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지옥 대공을 소환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처럼 간섭 효과를 지닌 소환 진이 있을 리가 없잖은가. 사실상 헬레나의 생각은 거의 정답에 가까웠다. 사탄이 악마의 씨앗에 감염된 이정필을 이용해 그려낸 약식 차원 이동진이야 말로, 이번 안배의 결정체라고 볼 수 있었다. 이것으로 사탄이 간섭한 효과는 두 가지. 첫 번째는 불안정하게 발동된 정식 차원 이동진의 좌표를 인간 세상으로 고정시켰다는 것. 두 번째는 인과율의 법칙에 따른 제한으로 지옥 대공이 크게 약화될 것을 대비해, 힘을 어느 정도 회복시킬 방안을 마련했다는 것. 범위 내 사용자들이 모두 녹아내려 지옥 대공에 흡수된 건, 바로 그러한 간섭 효과로 벌어진 일이었다. 즉 대 악마들이 정식 진을 발동해 지옥 대공을 보내버리는 것과, 사용자들이 약식 진에 진입한 틈을 정확히 예측하고 잡아낸, 그야말로 기가 막힌 타이밍에 이루어낸 안배인 것이다. 진소위(眞所謂) 사탄만이 가능한 계획 균분(均分)이었다. 그리하여 지옥 대공이 소환되고 한창 전투를 벌이는 지금, 계획은 어느 정도 효과를 봤다고 봐도 무방하다. 허나 옥에도 티가 있다고, 이렇게 착착 맞물린 계획에서도 흠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딱 하나 결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북 대륙 원정대 중 차원 이동진을 알아보는 한 사용자, 아니 한 개체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현재 인간 세상에 차원 이동진에 관한 자료는 아예 남아 있지 않고, 설령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행할 능력을 갖춘 사용자는 전무하다. 그런 만큼 사탄이 그 사실을 간과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북 대륙 원정대에 ‘사용자’ 가 아닌 존재가 있다면? 더 나아가서, 그 존재가 차원 이동진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고, 응용할 수 있는 지식까지 갖추고 있다면? 그러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니, 달라질 수도 있다. “…쯧.” 잠시 후, 조금이나마 전후 사정을 알게 된 헬레나는 무겁게 혀를 찼다.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결과 마침내 결론을 내릴 수는 있었다. 그러나 결론을 냈다고 해봤자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옥 대공이 어떻게 소환됐는지, 또 어떤 존재인지 한층 명확하게 되새겼을 뿐이다. 어쨌든 헬레나의 최종 결론은 현 상황에서는 지옥 대공을 죽일 수 있는 방도가 없다는 것. 김수현과 사용자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저 정도의 존재를 물리적으로 죽이는 건 100%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만큼은 절대 불변(絶對 不變)의 법칙이라고 봐도 좋다. …그래.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도마뱀?” 그렇게 막 속마음으로 결심을 한 찰나, 돌연 익숙한 목소리가 헬레나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몸을 돌린 헬레나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분명 따라오지 말라 말했을 터인데, 진의 외곽에 사샤가 홀로 서 있었다. 언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다는 눈초리를 보내는걸 보니 헬레나의 기행을 지켜본 모양이다. 헬레나는 왜 그렇게 쳐다보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살그머니 팔짱을 꼈다. 그 행동에 사샤가 황급히 입을 열은 순간이었다. “너 지금…!” “마침 잘 왔구나.” ‘무슨 짓을 하고 있냐.’ 라고 말하려던 사샤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까 따라오지 말라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잘 왔다고 말하는 게 이상했기 때문이다. “우선….” 그 순간 갑자기 말을 멈춘 헬레나가 하늘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러나 싶어 똑같이 돌아본 사샤는 허공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며 입을 벌리고 말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한창이던 전투는 어느새 멈춘 상태였다. 그리고 하늘에서 온몸에 불을 두른 인영 하나가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우주에서 낙하하는 혜성의 꼬리처럼. 굳이 달려가지 않아도 저 광경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설명할 시간도 없는 건가….’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문 헬레나는 지체 않고 사샤를 불렀다. “사샤 펠릭스! 얼른 가서 전해라. 적을 없앨 방도를 찾았다고.” “뭐, 뭐라고?” 사샤가 기함했다. 그것은 헬레나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곳까지만…! 저 존재를 어떻게든 이곳까지만 데리고 오라고. 그러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다.” “너….” “어서!” “아, 아니.” 사샤는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지금 상황이 굉장히 급박해 설명을 들을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헬레나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가 매우 심상찮았다. 무언가 커다란 결심을 한 듯 눈동자를 비장하게 빛내고 있었다. 마치 죽음을 각오하기라도 한 것처럼. “…알겠다.” 결국 사샤는 무언의 압박에 짓눌려 그대로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흘끔흘끔 뒤돌아보는 것도 잠시. 이내 왔던 길을 달려서 되돌아가는 사샤를 확인한 후, 헬레나는 주변 황무지를 되돌아보며 깊은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진의 중앙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이미 헬레나의 내면은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지옥 대공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아까 사샤한테 말했듯이 ‘없애버리는 건’ 가능하다. 이 세상에서. 이 진을 재사용해서. 이미 모든 정보는 이 장소에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지옥 대공을 돌려보낸다.’ 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현재 2가지 조건이 새롭게 필요하다. 첫 번째는 약식에 불과한 진을 재구성해 정식 차원 이동 진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까다로운 작업임은 분명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미 진이 어느 정도 완성된 상태이기도 하거니와, 지금 진의 중앙으로 걸어가는 존재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고대를 넘어선 아득한 신화 시절, 거인들 다음으로 이 세상을 지배하던 용이지 않은가. 그중에서도 종말이라는 칭호를 부여 받은, 종족의 정점에서 군림하던 마그나카르타라는 존재가 헬레나의 실체였다. 두 번째는 진의 발동에 필요한 제물을 준비하는 것이다. “후유.” 그때였다. 진의 중앙에 다다른 헬레나는 걸음을 멈추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딱히 후회는 없다만.”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린 헬레나의 눈동자에는 무수한 감정들이 스치고 있었다. 무언가 홀가분해하는 것 같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무척 아쉬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눈동자에 흐르는 복잡하고도 미묘한 감정의 흐름이 멈춘 순간, 헬레나가 처연하게 웃음지었다. “그래도 창관에는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 하늘에서 낙하한 인영이 지면에 부딪친다. 쿵! 그러자 핏빛 흙먼지가 풀썩 일어나며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이어서 누군가가 아직도 진동이 남은 대지에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이렇게 맞아본 적도 오랜만이구나.”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중얼거리는 지옥 대공을 확인한 순간, 인근에 있던 사용자들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했다. 아직 정비에 들어가기도 전에 하늘에서의 전투가 끝난 것이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척 봐도 지옥 대공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아까의 오연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곳곳에 상처를 입은 어딘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서 있는 자는 지옥 대공이었다. 말인즉, 방금 땅에 부딪친 인영은 김수현이라는 소리였다. “아무튼, 이제….” 지옥 대공이 기품 있게 핏물 섞인 침을 뱉어낸 후 조용히 입을 연 순간이었다. 문득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김수현이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작스럽게 침묵이 내려앉았다. 심지어 지옥 대공조차도 말을 이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한쪽 날개는 꺾이고 전신은 피 칠갑을 한, 온몸이 아예 너덜너덜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김수현은 몸을 일으켜 자세를 잡고 있었다. “아직도!” 지옥 대공이 얼굴을 와짝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비호처럼 몸을 날려 손에 든 채찍으로 거칠게 김수현의 가슴을 후려쳤다. 쫙, 경쾌한 타격음과 동시에 김수현의 몸이 크게 비틀렸다. 그러면서도 김수현은 수라마창을 휘둘렀으나 아까처럼 강렬하지도 정교하지도 못한 공격이었다. 그저 반사적으로 휘둘렀을 뿐이라, 지옥 대공은 수월하게 피해내었다. 김수현의 입과 가슴에서 선명한 핏물이 터져나오며 그대로 몸이 허물어진다. 아니, 허물어지려는 찰나였다. “……!” 절반 이상으로 구부러지던 김수현의 다리가 순간적으로 정지했다. 그러더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도로 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발이 대지에 굳건하게 박힘에 따라 하릴없이 무너지던 몸이 제자리를 찾는다. 그러니까, 김수현이 다시 일어섰다. 쓰러져도 쓰러지지 않는 오뚝이처럼. “무, 무슨?” “수, 수현아!” 이윽고 김수현이 다시 자세를 잡자 지옥 대공과 김유현이 동시에 외쳤다. 그래도 형의 말에는 반응을 한 걸까? 별안간 김수현의 몸이 움찔했다. 이어서 느슨하게 풀린 팔이 올라오더니 느릿하게 허공을 젓는다. 그저 간신히 손목만 움직인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김유현은, 아니 그걸 지켜본 모든 사용자들은 느닷없이 무언가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느꼈다. 왠지 모르게 저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김수현은 거의 초주검이 된 상태에서도 지인들에게 도망치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대로 떨어진 김수현의 팔이 부르르 떨면서도 재차 지옥 대공을 겨냥한다. 그 흔들림 없는 오롯한 시선을 받은 지옥 대공은 할 말을 잃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적당히 상대한 것도 아니었다. 김수현이 각성한 이후, 지옥 대공도 목숨만 빼앗지 않을 뿐이지 나름대로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방금 채찍질도 심혈을 기울인 일격이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이미 흔적도 없이 파괴됐어야 지극히 정상이다. 그런데, 그런데…. ‘진정으로…. 죽이는 길밖에는 없다는 말인가?’ 혼란을 느낀 지옥 대공이 침을 삼켰다. 그리고 무겁게 침묵하며 김수현을 응시했다. 서서히 옅어져 가는 다홍색 불길은 염화(炎化) 능력의 유지 시간이 거의 끝나감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김수현은 포기하지 않았다. 눈동자만 봐도 알 수 있다. 간신히 거머쥐었던 흐름이 다시 떠나가고 있음에도, 승리를 원하는 갈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의식이 끊길락 말락 하는 상황에서도 힘을 모으며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고 있다. 지옥 대공은 갑자기 뜻 모를 불안함이 온몸을 엄습하는걸 느꼈다. 분명 전황을 압도하고 있을 텐데, 오히려 지옥 대공이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차오르는 긴장감에 지옥 대공이 돌연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자신이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콰르르르! 말아 쥔 주먹이 삽시간에 진홍색 염화로 휩싸인다. 그리고 오른손을 떨치듯이 휘두르자 둥글게 모인 지옥의 겁화가 그대로 김수현을 향해 비수처럼 쏘아졌다. 그 순간 덜컹,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는 과연 누구에게서 난 소리일까. 그렇게 주먹만한 불길이 김수현의 가슴에 닿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안젤루스여!” 갑작스레 앳된 목소리가 전장을 울려오는 동시에. 화아아악! 은은한 파란 빛이 흐르는 하얀 빛무리가 드넓게 퍼지며 김수현의 전신을 감싸 안는다. 그 다음 순간. 퉁! 지옥의 겁화로 이루어진 불길은, 그 빛무리를 뚫지 못하고 사선으로 빗나가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다행스럽게도 약속했던 시간보다 50분 일찍 올릴 수 있었네요. :) 이번 파트에서 총 2가지 정도가 수정이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제갈 해솔의 능력치를 다시 점검해야 할 것 같고(어느 고마우신 분이 알려주셨네요.), 두 번째는 Blue Dahlia에 관해서입니다. Blue Dahlia는 기적의 진화 판이라고 보시면 되는데, 메시지를 보면 아예 새로운 고유 능력이 개화했다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어서요. 수정이 완료되면 따로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회는 리리플을 하도록 할게요. 왜 갑자기 리리플이냐고 물으신다면…. 오랜만에 해보고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다음 회가 3부의 마지막이거든요. 물론 실질적으로는 2부고, 첫 구상 시 기획했던 3부의 마지막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 평소 궁금했던 부분이 있으시면 질문해주세요. 다만, 모두 저번처럼 모두 리리플을 하지는 않습니다. 이건 답변해도 괜찮겠다 싶은 것 딱 5개만 뽑아서 답변을 드릴 예정이에요. :D 0657 / 0933 ---------------------------------------------- 사랑해요. 갑자기 생성된 빛무리에 지옥의 겁화가 엇나간 순간, 지옥 대공의 눈썹이 세차게 꿈틀거렸다. 가로막혀 소멸된 게 아니라 빗나갔을 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파괴’ 하는 지옥 겁화의 특성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불가능한 일이다. 현 상황에서 절대로 얻을 수 없는 결과였다. 그런데 그게 현실로 이루어졌다. 자박자박…. 자박자박…. 그러다 문득 어디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용자들은 물론, 지옥 대공마저 발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오는 안솔을 확인했을 때 사용자들 사이로 기쁨에 가까운 탄성이 터졌다. 사제가 절실히 필요한 현 시점에서, 사제 직업 중 끝판 대장이 등장한 것이다. “솔아!” “안솔!” 안현과 이유정이 동시에 외쳤다. 그 외침에 화답이라도 하듯 안솔이 지팡이를 높이 들어올렸다. 그러자 지팡이 끝에서 번쩍 터진 빛무리가 지옥 대공을 제외한 전원의 몸에 사르르 내려앉는다. “힘이…. 회복되고 있어?” 안현이 자신의 몸 전체를 물들인 빛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는 차소림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들 놀라고 있었다. 딱히 기적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고작 주문 하나만으로 몸의 상처가 사라지고 기력이 회복되고 있었다. 이 정도면 100%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다시 싸우기에는 차고 넘칠 정도였다. 그것은 김수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온몸에서 일어나는 출혈이 멎고 부러진 뼈가 맞춰지고 있었다. 거의 걸레짝이나 다름없던 김수현의 신체가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되돌아온다. 물론 그렇다고 이미 소진한 생명력이 되돌아오는 건 아니다. 어쨌든 염화 능력을 사용한 대가로 김수현의 죽음은 이미 확정된 상태였으니까. 그러나 EX 랭크로 오른 ‘쓰러질 수 없는’ 으로 겨우겨우 버티던 김수현의 생명을 잠시나마 연장시키는 데는 성공한 것이다. “방금 짓거리는 네 년이 한 것이냐?” 지옥 대공이 안솔을 노려보며 불편한 어조로 말했다. 하기야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누가 봐도 전투는 거의 끝난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왠 사제가 불쑥 끼어들더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상황에 이르지 않았는가. 그것도 눈 깜짝할 새에. “글쎄요.” 차분히 대답한 안솔이 김수현의 옆에서 걸음을 멈췄다. 하늘을 향하던 지팡이가 이번에는 지옥 대공을 겨냥한다. “믿을 수 없다면, 한 번 더 시험해보셔도 좋아요.” 지옥 대공의 입술이 기묘하게 비틀렸다. 건방지다는 생각보다는 안솔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자신감이 거슬린 탓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몸을 회복한 사용자들이 어느새 사방으로 이동해 지옥 대공을 노리고 있다. 또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신이 반쯤 날라갔던 김수현이 의식을 완전히 회복한 상태였다. “이제 일어난 거냐.” 김수현이 여전히 지옥 대공을 응시하는 채로 나직이 말했다. “꿈이 조금 길었어요.” 안솔도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방금 공격은 정말 어떻게 막은 거지? 아니, 빗나가게 만든 건가?” “기적(Miracle)과 있을 수 없는 일(Blue Dahlia)이 합쳐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 거라 생각하세요?” 물음에는 물음으로 대답한다. “…그건 사기 아닌가?” 조용히 중얼거린 김수현이 싱겁게 웃었다. 그리고 한 번 크게 숨을 들이키더니 무검을 힘주어 잡으며 들어올렸다. 그때였다. 웅웅웅웅웅웅웅웅! 어디선가 울리는 웅혼한 마력음이 사용자들의 귓전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잠깐 맑아졌던 세상이 도로 붉은빛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까 지옥 대공이 소환될 때와 똑같은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옥 대공이 무슨 수작을 벌인 건 아니다. 이미 소환은 끝난 상태였으니까. 그러나 그 순간, 사용자들은 들려온 마력음이 전투 재개의 신호라도 된 듯이 모조리 지옥 대공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김수현은 물론이고 지금 여기 있는 누구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고 있다. 그러니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자 ‘지옥 대공이 모종의 수작을 부렸다.’ 고 생각해 신속히 공격에 들어간 것이다. 지옥 대공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한 생각이었으나 어쨌든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김수현은 거의 끝나가는 상태였고, 다른 사용자들이야 회복되든 말든 떨거지에 불과하다. 그렇게 생각한 지옥 대공이 후방으로 훌쩍 물러나 마구잡이로 짓쳐 들어온 마법 공격을 피하고, 왼손에 든 불의 채찍을 다잡았을 때였다. 뻐억! “……?!” 거칠게 타격하는 소리와 함께 지옥 대공의 고개가 한껏 하늘로 젖혀졌다. 지옥 대공의 머릿속으로 한순간 혼란이 찾아 들었다. 분명 모든 마법 공격을 피했을 터인데, 쥐도 새도 모르게 들어온 마력 공격에 턱을 허용하고 말았다. 물론 심대한 타격도 아니고 그냥 고개 한 번만 떨치면 회복할만한 수준이었으나, 중요한 건 타격 자체를 허용했다는 것. 지옥 대공의 턱을 가격한 마력은 다름 아닌 제갈 해솔의 작품이었다. 현재 제갈 해솔의 마력 능력치는 102포인트. 100포인트와 101포인트의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라면, 101포인트와 102포인트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다. 아까와 같은 수준으로 생각해 느슨하게 대응한 지옥 대공의 실수였다. 이 한 번의 실수가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지옥 대공이 한 번 더 물러나는 틈을 타, 근접 계열 사용자들이 벌떼처럼 달려든 것이다. 톱니바퀴처럼 착착 맞물리는 합격은 아닌 그냥 무작정 들이대는 공격이었지만, 목숨을 도외시하고 들어오는 만큼 마냥 얕볼만한 공격은 아니었다. “이놈들이…!” 지옥 대공이 노호성을 지르며 있는 힘껏 불의 채찍을 휘둘렀다. 두 갈래 채찍이 무자비하게 후려치자 대다수의 사용자들이 여지없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러나 거의 동시에 안솔이 기다렸다는 치료 주문을 발동했고, 이내 전신이 빛무리에 휩싸인 사용자들이 벌떡 일어나 재차 달려오기 시작했다. 고작 사제 하나가 가세했을 뿐인데, 전투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도와리야!” 결국 아차 한 순간에 지척까지 다가오는걸 막지 못한 지옥 대공은, 멧돼지처럼 들어온 공찬호에게 다시 한 번 어깨 박치기를 허용하고 말았다. 물론 이것 또한 지옥 대공에게 커다란 타격은 주지 못했다. 그러나 자세가 허물어진 지옥 대공이 또다시 뒤로 물러나게 만들 정도로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한순간의 방심으로 제갈 해솔에 마력 공격을 허용한 이후, 지옥 대공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워낙 창졸간에 이어진 일들이기도 했지만, 아까와는 확연하게 달라진 한두 개의 공격들이 신경을 무지하게 긁는다. 그중에서도 후방에서 졸졸 따라오며 계속 치료 주문을 외우는 사제가 특히나 거슬렸다. 그 탓에 아까까지만 해도 한 방이면 무력하게 나가떨어지던 것들이, 지금은 오뚝이처럼 벌떡벌떡 일어나 죽자사자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마치 저 사제에게 여벌의 목숨을 맡기기라도 한 것처럼. ‘이 내가, 이까짓 놈들한테?’ 처음 마법 공격에 한 번. 제갈 해솔의 마력 공격에 한 번. 공찬호의 돌격에 한 번. 정리해보면 지옥 대공으로서는 이미 3번이나 크게 물러난 상태였다. 그렇기에 인정할 수 없었다. “적당히 좀 하란 말이다!” 결국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지옥 대공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이렇게 까지 몰린 이상 적당히 상대하겠다는, 사정을 봐주겠다는 생각은 더 이상 들지 않는다. 그저 아예 치료 주문이 들지 않도록 일격에 죽여버리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을 뿐. 그렇게 생각한 지옥 대공이 막 지옥 겁화의 힘을 터뜨리려 힘을 모았을 때였다. 사앙…. 돌연히 정면 방향으로 바람 소리가 흘러들었다. 그러나 그냥 흘려 들을만한 바람이 아닌, 무언가 묘한 쇳소리가 섞인 이질적인 바람 소리였다. 그것은 사용자들 사이를 뚫고 지옥 대공이 전혀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베어오고 있었다. “……!” 찰나의 순간, 지옥 대공에 두 가지 선택지가 놓였다. 이대로 힘을 터뜨린다. 또 한 번 물러난다. 그리고 무수한 전장을 헤치며 쌓여온 직감은, 여기서 지옥 대공에게 후자를 선택하라 말하고 있었다. 이윽고 지옥 대공이 황급히 걸음을 물렸을 때. 삭. 가느다란 바람결이 지옥 대공의 목젖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내 눈앞으로 실선처럼 이어지는 다홍색 불빛을 보며 지옥 대공은 섬찟한 기분을 느꼈다. 방금 일격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몸소 깨달은 것이다. 누가 공격했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지옥 대공에게 죽음을 느끼게 할 정도의 공격을 할 수 있는 인간은, 지금 이 장소에 한 명밖에 없다. 그제야 비로소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열이 흩어지고 차가운 이성이 흘러들었다. 안솔이 출현한 이후 갑자기 사용자들의 기세가 찌를 듯이 높아졌다. 지금도 그렇다. 아까 김수현의 모습에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사용자들은 물러나는 지옥 대공을 향해 악착같이 달려들고 있었다. ‘이대로는 불리하다.’ 그렇게 판단한 지옥 대공은 있는 힘껏 땅을 박찼다. 이것으로 몇 번째 물러나는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아예 후퇴를 목적으로 한 도약이라 지옥 대공의 몸이 공활(空豁) 한 허공을 크게 날았다. 우선 흐트러진 자세를 가다듬을 요량이었고, 한편으로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대응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옥 대공은 알고 있을까? 눈앞의 사용자들에게 신경을 쓰느라 한 가지 실수를 더 해버렸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실수가 이미 지옥 대공의 근처까지 다가왔다는 것을. 아니, 지옥 대공이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고 해야 옳은 표현일까? 말인즉, 공중으로 도약한 몸이 최고점에 다다랐을 즈음. 지옥 대공은 느닷없이 시야가 더욱 붉어진걸 느꼈다. “…아?” 이제야 심상찮은 이변을 느꼈는지 지옥 대공이 망연한 음성을 흘렸다. 문득 아까 들었던 웅혼한 마력음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껏 놀란 눈이 빠르게, 그러나 어느 것도 놓치지 않고 사방을 하나하나 훑는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원반을 거꾸로 뒤집어놓은 듯한 붉은 결계였다. 그리고 아래서 미친 듯이 요동치며 흐르는 방대한 마력까지. 거기까지 확인한 순간 지옥 대공은 마침내 이변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차원 이동 진이 발동됐구나!’ 그 생각은 정확했다. 아까 이상한 마력음이 들리고 세상이 붉게 변했을 때부터 이미 차원 이동 진은 발동된 상태였다. 거기서 지옥 대공이 헬레나가 발동에 성공한 차원 이동 진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물론 지옥 대공이 의도한 일은 아니었고, 사실상 천운이 따랐다고 봐야 옳은 일이었다. 사샤가 헬레나의 말을 듣고 전하러 달려갔을 때는, 이미 전투가 재개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전투가 헬레나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안솔의 참가와 갑자기 달라진 사용자들의 공격에 연신 물러나던 지옥 대공은, 김수현의 공격을 간발의 차로 피하고 잠시 추스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일단 거리를 벌리려 있는 힘껏 후방으로 뛰었는데, 너무 많은 거리를 도약한 것이다. 바로 차원 이동 진의 범위 안에 들어갈 정도로. 지금 차원 이동 진이 발동된 목적은 간단하다. 이 진을 이용해 지옥 대공을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겠다는 것. 그걸 알고 있는 지옥 대공이었으나, 다른 생각보다는 ‘도대체 어떻게?’ 라는 의문이 앞섰다. 백 번 양보해서 진의 구동에 성공했다손 치더라도, 제물이 없으면 차원 이동 진은 발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몸이 생각보다 빠르게 낙하하고, 의아하게 생각한 지옥 대공이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그리고 진의 중앙에 홀로 서 있는 금발의 여인과 눈을 마주쳤을 때, 지옥 대공의 두 눈에 황망한 감정이 물감처럼 번지며 찢어질 듯 커졌다. 금발의 여인은 확실히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겉모습만 인간일 뿐, 내면의 영혼은 인간이 아니다. “너, 너는…!” “저 정도면 제물로 충분하겠지요?” 두 여인의 목소리가 겹쳤다. 이어서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지옥 대공의 몸이 아래로 빨려 들어가듯이 추락하고 말았다. 그러자 진의 중앙 공간이 쩍 벌어지는 것과 동시에 불그스름한 빛이 지옥 대공을 덮쳐 들었다. 끄그그긍, 끄그그긍! 이어서 들려오는 거슬리는 쇳소리. “아, 아…!” 지옥 대공이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하반신이 갈라진 공간에 삼켜졌을 때였다. 크게 놀란 지옥 대공이 아래를 내려다보자, 점차 공간 안으로 말려들어 가는 자신의 몸을 볼 수 있었다. “아, 안 돼!” 지옥 대공이 절박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떻게든 나오려는 듯 용을 쓰며 기어 나오려 했지만, 그럴수록 전신을 감싼 불그스름한 빛이 한층 강렬하게 발하며 도로 밀어 넣는다. “저, 저건?” 마침 지옥 대공을 쫓아온 김수현을 비롯한 사용자들은, 붉은 결계를 보고 절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붉은 결계에 흐르는 어마어마한 마력. 결계 중앙의 갈라진 공간. 그 공간에 먹혀 들어가는 지옥 대공. 그리고 서서히 몸이 희미해지는 헬레나. 과연 누가 이 상황을 보고 전후 사정을 알아낼 수 있을까? “헬레나!” 김수현이 큰 소리로 외쳤다. “들어오시면 안됩니다.” 그러나 헬레나는 담담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들어오면 저처럼 용해되어 차원 이동 진에 흡수될 테니까요.” 그 말에 무작정 들어가려던 성질 급한 사용자들이 멈칫 걸음을 정지했다. “그게 무슨…?” “어라? 사샤한테 듣지 못하셨는지요.” “……?” “제물은 저 하나로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사용자들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까 제 3의 눈으로 확인한 정보를 떠올린 김수현의 낯에는 아차 하는 기색이 스쳤다. ‘제물’ 이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 무언가 짚이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헬레나가 자신을 희생해서 차원 이동 진을 발동시켰다는 사실을 직감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걸 깨달았다고 해도 지금 김수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니, 헬레나가 진을 발동했을 때부터 이미 늦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세상은 여전히 붉었고, 크게 갈라졌던 공간은 차차 크기가 줄어들고 있었다. 거기다 헬레나의 몸은 이제 거의 사라져 상체만 간신히 보이는 상태. 이것은 차원 이동 진의 발동이 거의 완료에 가까워졌음을 알려주는 일종의 신호였다. “이럴 때는…. 안녕이라고 해야 합니까?” 헬레나가 묘하게 웃음 짓는다. 그 미소를 보며 김수현은 왠지 모르게 급격한 피로를 느꼈다. 사실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죽음을 각오한 채로, 지옥 대공을 상대하는 데만 온 정신을 집중했을 뿐이다. “너….” 그런데 지옥 대공의 마지막을 앞두고 있는 지금, 동시에 헬레나와의 갑작스런 작별 또한 앞두고 있는 지금. 김수현은 도저히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냥 갑자기 긴장이 풀린 탓에, 머릿속이 텅 비어지고 이대로 주저앉고 싶다는 생각만이 간절하게 들었다. 탱강, 왼손에 쥐었던 수라마창이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참으로 놀고들 있구나.” 돌연 지옥 대공의 태연한 목소리가 사용자들의 귓전을 울렸다. “제물이 너 하나로 충분해?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이어지는 목소리에 깜짝 놀란 김수현은 도로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진의 중앙을 확인한 순간 절로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헬레나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당황함이 나타난다. 지옥 대공의 얼굴에서 당황함이 사라지고 미소가 나타난다. 상황이 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분명 벌어진 공간은 점차 줄어들고 헬레나는 거의 사라져 가는데, 지옥 대공은 아직 하반신만 삼켜진 상태였다.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 정확히 말해보면 차원 이동 진의 발동은 거의 끝나가는데, 지옥 대공이 역 소환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옥 대공을 감싼 불그스름한 광채도 차차 빛이 약해지는 중이었다. “고작 죽은 용의 영혼으로 이 몸을 강제로 보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정말이지 우습기 짝이 없구나.” 지옥 대공이 진정 우습다는 듯이 이죽거렸다. 말인즉, 지옥 대공 정도의 존재를 강제로 보내버리기에는 제물이 부족하다는 소리였다. 설마 이럴 줄은 몰랐는지 헬레나의 낯에 망연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그때였다. “충분하지 않으면 채우면 그만이에요.” 별안간 앳된 목소리를 가진 누군가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말했다. 그러자 흘끗 시선을 돌린 지옥 대공이 안솔을 확인하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하, 또 네 년이냐?” 지옥 대공의 살기 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안솔은 침착하게 받아넘겼다. 한동안 안솔을 노려보던 지옥 대공이 돌연 비웃는 얼굴로 코웃음 쳤다. 이대로 가면 차원 이동 진의 발동은 곧 실패로 끝나게 된다. 그러면 끝나기 전에 충분한 제물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 짧은 시간에 준비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래. 네가 과연 어쩔 셈인지 나도 궁금해지는구나. 어디 한 번 해보거라.” “…….” “어서 해보래도? …왜, 설마 네가 추가 제물이라도 될 생각이었느냐? 그럼 들어오던가? 아니면 목숨이 아깝다던가?” “…….” 마치 어서 해보라는 듯한 조롱 섞인 언사에 안솔의 눈이 가늘어졌다. 김수현은 지그시 입을 깨물었지만, 혹시 몰라 안솔이 넘어갈 것을 대비해 잡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안솔은 지옥 대공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헬레나 언니.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이제는 형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헬레나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을 뿐. 그 행동에 일말의 불안감을 느낀 걸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지옥 대공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러나 안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오른손에 쥔 지팡이를 천천히 앞으로 들어올리고는. “기적…!” 또렷하면서 고요한 목소리로 두 글자로 이루어진 단어를 내뱉었다. 그리고. 화아아악! 하늘에서 내려온 새하얀 빛이, 온통 붉은빛 일색이던 세상을 따스하게 감싸 안았다. ============================ 작품 후기 ============================ 1. 죄송합니다. 오늘 많이 늦었죠? 생각보다 들어가는 내용이 많아서요. 하하. 하…. 고백하자면 오늘 분량 조절에 실패했습니다.(미리 말씀 드리지만, 이번에는 연참 약속 안 걸었어요!) 어떻게든 끝내려고 했는데, 예상 밖으로 들어갈 내용이 많더라고요. …잠시만요! 부디 돌은 내려놓아 주세요. 제 말을 들어주세요. 어제 끝내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오늘 안으로 이 파트는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은 너무 졸려 글이 안 나오는 탓에, 한숨 자고 난 후에 나머지 내용을 올리도록 할게요. 사실 오늘 보셔서 아시겠지만, 남은 내용이 그리 많지는 않아요. 2. 리리플은 다음회로 미루겠습니다. 지금 한다 해도 제가 너무 비몽사몽인 상태라, 제대로 답변을 드리지 못할 것 같아요. 3. 현재 답신을 드리지 못한 쪽지가 22개? 그 정도 남은 상태입니다. 오늘 자고 일어나서 연참을 한 후에, 순차적으로 답신을 드릴게요. 4. 네. 어느 분이 질문하셨는데, 기획상 시즌 3이 끝나면 잠깐 쉴 예정입니다. 그동안 너무 달려오느라 알게 모르게 많이 지친 상태이거든요. 그렇다고 너무 오래 쉴 생각은 없고요, 짧으면 하루, 길어봤자 사흘 정도로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0658 / 0933 ---------------------------------------------- 사랑해요. 그 순간이었다. 시야가 새하얀 빛으로 물드는 동시에. ‘…….’ 온몸을 스치는 모든 감각들이, 하나하나 느릿하게 흘러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문득, 예전 구덩이에서의 기억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안솔. 기적…. 있지?’ 내 물음에. ‘시, 싫어요! 안 돼요! 여기서, 여기서…!’ 안솔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럼…. 안솔은 그때부터 이 일을 예견하고 있었던 걸까?’ 정황상 그랬을 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렇지 안고서야 이렇게 타이밍 좋게 기적을 사용할 리 없으니까. 놀랍다는 감정도 들었지만, 지금은 그저 안도감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내 몸의 생명이 종국을 향해 치닫는 지금, 기적이 없었다면 지옥 대공이 붉은 결계를 깨고 나왔을 것이다. 그 이후의 일은 상상조차도 하기 싫다. ‘그러면….’ 잠시 후, 빛이 사그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눈을 뜨자 또다시 변한 상황이 눈에 들어온다. “아아아아아아아아!” 차차 줄어들던 공간이 재차 커다랗게 벌어지고 있다. 불그스름한 광채도 본연의 빛을 되찾았다. 지옥 대공은 갈라진 공간을 부여잡은 채 온몸을 비틀며 비명을 지르고 있다. 어느새 헬레나는 처음의 완전한 형체를 되찾았으나, 다시금 희미해지는 현상을 반복하고 있다. 나는 이제야 왜 안솔이 헬레나를 향해 고맙다고 했는지, 또 미안하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안솔은 기적을 모자란 제물을 채우는 용도로 사용한 게 분명했다. 즉 헬레나를 회복시켜 또 한 번 제물의 용도로 사용한 셈이다. 그러나 정작 헬레나는 큰 상관이 없는지, 나처럼 안도의 한숨을 흘리고는 표정의 안정을 되찾았을 뿐. …그 모든 현상이 천천히, 굉장히 느리게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마치 눈동자가 저속도로 촬영을 하는 카메라라도 된 듯한 느낌. 오직 나 홀로 세상에서 동떨어져 이 사태를 관망이라도 하는 듯한 기분. 계속해서 파노라마처럼 흘러들어오는 광경에 나는 어색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왜 이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한 가지 짚이는 바가 있다면, 나 또한 서서히 죽음이 가까워져 오고 있다는 것. ‘그럼 이제 곧 주마등을 보게 되는 건가?’ 시답잖은 생각이기는 했지만, 내 상태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엄밀히 말해서 지금도 한두 번 움직일 기력 정도는 미약하게나마 남은 상태였다. 치료를 받은 만큼 몸 자체에도 큰 문제가 없고, 필요하다만 화정의 힘도 뽑아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한 번 불사른 생명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까 염화 능력이 사그라졌을 때부터 내 생명력은 모두 소진된 상태였다. 그나마 기대해볼 만한 건 안솔의 기적이었지만, 그조차도 지옥 대공을 돌려보내는데 사용하고 말았다. 그렇지마는, 그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설령 안솔이 기적으로 내 생명력을 회복시켰다고 해도, 결계를 뚫고 나온 지옥 대공을 감당할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그러니 안솔은 이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내린 셈이다. …그래. 그럼 이제 남은 일은,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얼마나, 얼마나 많은 시간을 찾아 다녔는데! 이제야 겨우 찾아냈는데에에에!” 지옥 대공은 여전히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당최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서글픔마저 느껴지는 비명이 귓전을 왕왕 울린다. 물끄러미 쳐다보자 이제는 가슴 아래까지 먹혀 들어간 모습이 눈에 밟혔다. 아마 지옥 대공도 기적까지는 예상치 못한 모양이다. ‘이제…. 정말로 끝난 건가….’ 나는 멍하니 서 있다가 가볍게 숨을 흘렸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마지막으로 지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천천히 몸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이대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어! 이렇게 된 이상…!” 돌연 지옥 대공에게서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터졌다. 동시에 나도 모르게 지옥 대공을 돌아본 순간이었다. 갑자기, 한껏 일그러진 얼굴로 오른팔을 힘껏 떨치는 지옥 대공이 보였다. 마치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는 것처럼.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 그 외침에 이어, 두 갈래로 나뉜 불의 채찍이 나와의 거리를 가로지른다. 나를 단번에 집어 삼키겠다는 일직선으로 짓쳐 들어온다. 그 순간. ‘……!’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휘리리릭! 내가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 수 있었던 건, 그리고 두 갈래 채찍이 아슬아슬하게 나를 스치고 지나간 건, 모두 아까부터 한없이 느리게 흘러가는 시야 덕분이었다. 착! “아?” “어?” 그렇게 얼떨결에 무사히 피해낼 수는 있었지만, 순간적으로 온몸에 섬찟한 소름이 돋았다. 절로 눈이 커졌다. 지옥 대공의 마지막 발악에 질려서가 아니었다. 간신히 회피한 순간, 등 바로 뒤에서 들려온 자그마한 비명 때문이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두 명이 지른 탄성. ‘도대체 무슨 일이?’ 라고 생각하기도 전, 일은 이미 벌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지옥 대공의 머리가 공간에 삼켜졌다. 하지만 앞으로 쭉 뻗은 오른팔은 여전히 팽팽하게 당겨진 불의 채찍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팔마저 점차 빨려 들어감에 따라, 좌우에서 누군가가 나를 스치고 앞으로 끌려 들어간다. “오, 오빠!” 왼팔이 불의 채찍에 감긴 채, 애타는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오른손을 내뻗는 김한별. “아, 아…?!” 오른팔이 불의 채찍에 감긴 채, 멍하니 나를 응시하는 한소영. 그러니까, 김한별과 한소영이 결계 안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 광경을 확인한 순간, 느닷없이 호흡이 멎으며 극심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내가 피해버리는 바람에, 저 두 명이 대신 붙잡혔다. 두 여인은 어떻게든 버티려는 듯 발을 끄는 등의 온갖 반항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애초 헛된 반항이다. 지옥 겁화로 이루어진 불의 줄기가 그렇게 단순하게 끊어질 리가 없다. 아니, 아니. 시간이 없다. 이미 두 여인은 붉은 경계를 통과해 안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용해가 문제가 아니다. 이대로 두 명이 질질 끌려간다면, 저 공간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은 명약관화. 찰나의 순간, 나는 아직 남겨둔 모든 기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 없이 붉은 경계 안으로 스스로 뛰어들었다. “수현아!” 순간적으로 형의 외침이 들렸으나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로서는 한 명밖에 구할 수 없으니까. 조금이라도 지체하는 순간 그 한 명도 구하지 못하고 말 것이다. 이윽고 순식간에 시야가 더욱 붉어지고 나를 놀란 빛으로 쳐다보는 두 여인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한 번 더 땅을 박차려는 찰나, 나는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왼쪽. 손을 내뻗은 채 애타게 나를 부르는 김한별. 오른쪽. 애틋한 빛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한소영. ‘나는…. 누구를….’ 그 고민은 곧 사라졌다. 누구를 정했는지 결정을 내린 건 아니었다. 그러나 두 여인이 벌어진 공간 근처까지 다가갔을 때, 몸이 자동적으로 움직였다. 결국 나는 김한별을 외면한 채, 오른 방향을 향해 있는 힘껏 땅을 박찼다. 그리고 삽시간에 가까워진 한소영을 끌어안고 오른팔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단단히 감겨 있던 불의 채찍이 화정의 힘에 반응해 흩어진다. 그렇게 일련의 과정을 마치고 나서, 나는 지체 않고 한소영을 후방으로 세게 밀쳤다. “머, 머셔너리 로드!” 한소영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대로 계속 있으면 둘 모두가 용해돼버리거니와, 또한 아직…. “오빠….” 그때, 별안간 김한별의 미약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내 멍해 보이는 두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나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감각을 느꼈다. 내가 외면했음에도 불구하고, 김한별은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는 두 눈동자에서 원망의 감정은 추호도 보이지 않는다. 딱히 분노한 낯빛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저렇게 서글퍼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윽고 불의 채찍에 감긴 왼팔부터 시작으로, 김한별이 그대로 구멍 안으로 흐르듯이 들어간다. 그리고 아직도 나를 향해 뻗은 오른팔만이 간신히 보이는 찰나. “아….” 갑작스레 시간이 멈췄다. 모든 상황이 그대로 정지했다. 문득,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기억이 우수수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것 같아요.’ ‘아니, 사랑해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 김한별. ‘네. 저는 오빠를 사랑해요.’ ‘사랑해요. 통과의례에서 첫 눈에 반했을 때부터, 쭉 좋아해왔어요.’ 그리고 나는…. ‘궁금하시죠?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했는지….’ ‘왜냐하면….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말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요.’ 나는…! “한별아…!”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내 다리는 미친 듯이 달리는 중이었다. 내 생각과는 다르게 공간이 빠르게 눈앞으로 다가오고, 내 의지와는 다르게 팔을 뻗어. “김한별!” 이제 손만 남은 김한별의 손바닥을, 있는 힘껏 부여잡는다…! 그 순간이었다. 우우우웅! 돌연히 배꼽 부근이 훅 쏠리는 듯한 느낌에 이어, 공간이 나를 사정없이 삼켜버린다. 이어서 어디론가 한없이 추락하는 기분이 엄습한다. 그리고 잠시 후. ‘여기는….’ 한순간, 눈앞으로 거대한 우주가 펼쳐졌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각들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죽음의 늪 아래로 침잠해 들어가는 것처럼 시야가 어둡게 변하고,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의식 또한 서서히 흐려진다. 그 와중 확실하게 느껴지는 거라고는,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한별이의 감촉뿐.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결국 그 생각에 대한 해답은 구하지 못한 채, 나는 그대로 눈을 감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아, 이로서 기획상(강조!) 시즌 3 파트를 전부 마쳤네요. 하하하. 마지막 지옥 대공 파트를 연재하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바로 이거인 것 같습니다. ‘지옥 대공이랑은 차후 어떻게 되나요?’ 그 질문은 오늘 내용으로 어느 정도 답변을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즉 김수현은 끝끝내 김한별을 외면하지 못했고, 결국 같이 떨어지는 길을 선택했지요. 이 부분이 바로 시즌 3 파트의 마지막으로 구상한 내용이었습니다. 즉 안솔이 꾸었던 꿈의 마지막 내용대로 흘러간 것이지요. 아무튼 이렇게 모든 파트를 끝내니까 시원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오늘은 간소하게 KGB 맥주라도 한 캔 사서 달콤하게 하루를 마무리해야겠습니다. :) 자! 그럼 이렇게 시즌 3의 모든 파트가 끝난 이상, 독자 분들께 말씀드릴 몇 가지 공지사항이 있습니다. 1. 이후 연재 내용? 기획상 시즌 3이 끝났지만, 바로 시즌 4로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시즌 3에 해당하는 외전을 연재할 예정입니다. 물론 외전이라도 해도 본 내용과 아주 관계가 없지는 않아요. 외전 연재는 주로 지옥 구간을 바탕으로 이어나갈 계획이며, 김수현, 김한별, 지옥 대공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번 외전 연재의 목표는 총 5가지입니다. - 김수현과 김한별이 사라진 이후 인간 세상의 이야기(아주 약간.). - 모든 생명력을 소진한 김수현의 소생. - 김수현과 일행들의 업그레이드(따지고 보면 지옥도 하나의 지역이자 8개로 나뉜 세상으로 볼 수 있으니까요. 지옥에도 신기한 물건들이 많을 겁니다.). - 김수현 각성(어느 각성?)과 지옥 대공의 2차전. - 왕의 귀환. 사실 4번은 넣을까 말까 고민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정말 지겹도록 싸웠는데 나름(?) 또 싸우는 내용을 넣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지옥 대공에 몇 번이나 당하고, 또 헬레나를 잃은 지금 김수현이 복수를 하려고 하겠죠. 그런 만큼 정말 화끈한(?) 복수전을 적을 예정이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미리 스포일러를 하자면, 이번에는 김수현이 이깁니다. 지옥 대공을 거세게 몰아붙여서, 아주 그냥 남아나지를 않게 만들 겁니다.(어디를?) 흠흠. 어쨌든 이렇게 시즌 3 외전을 끝내고, 다음으로 ‘결말’, ‘완결’ 내용이 들어있는 시즌 4를 시작할 생각입니다. 2. 이후 연재 계획? 2014년 8월 26일(화), 27일(수), 28일(목). 이 3일 동안 휴재할 예정입니다. 그동안 야한 소설을 읽으면서 모종의 충전을…. 아니 아니. 어흠! 그냥 얌전하게 쉴 예정입니다. 강철 산맥 파트는 연재하는 동안 정말로 힘들었거든요. 어쩔 때는 집필 수명이 깎인다는 느낌을 받은 적도 있고요. 아마 독자 분들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을 거예요. ㅜ.ㅠ 아무튼 3일 동안 푹 쉰 다음, 2014년 8월 29일(금)에 외전으로 연재를 재개하겠습니다! 중요한 공지사항은 여기까지. 그리고…. ‘도대체 그건(?) 언제 나오는 건데!’ 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에게 한 말씀 드립니다. 그건요 외전에도, 시즌 4 초반 부분에 주구장창 포함돼있습니다. 그동안 많이 구른 만큼, 외전이 끝나고 김수현에게 조금 긴 시간 동안 휴식을 줄 예정이거든요. 쉬는 동안 주지육림의 향연을…. 아무튼 나중에 너무 많이 나오니까 ‘제발 베드 씬 좀 그만 써!’ 라고 말하셔도 전 모릅니다. 몰라요. 몰라요~. ( --) 이것으로 드릴 말씀은 모두 드렸습니다. 이제 리리플 시간을 가져보아요! 『 리리플. 』 1. J.F / 네. J.F 님의 예측이 맞습니다. 다만 화정과 지옥 겁화의 격이 10이라면, Blue Dahlia는 8 ~ 9 정도로 보시면 되겠네요.(인간이 지닌 힘치고는 엄청나게 높은 겁니다.) 이 정도면 대응이 가능한 수준이지요. 한 가지 추가로 말씀 드리면, Blue Dahlia는 일종의 Passive 능력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2. HerbPia / 여기까지 온 소감이요? 소는 한우가 최고고, 감은 아삭아삭하니 달고 맛있어요! 3. sennheiser / 중간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시즌 4가 시작되고 타 대륙 사건까지 세세하게 풀어내면, 정말 완결이 늦어질 것 같아서요. 꼭 필요한 내용은 넣겠으나, 타 대륙 내용이 북 대륙 정도로 자세하게 나오지는 않을 예정입니다. 애당초 아틀란타에서도 악마와 사소하게 부딪칠 뿐이지, 결전 자체는 테라에서 벌이는 것으로 구상이 잡혀있습니다. 4. 디무 / 마지아에는 비비앙이 가야하고, 용은 결말 부분에 나옵니다. 중요성을 따지자면 마지아가 훨씬 더 중요하겠네요. 그곳은 중요한 거점이니까요. :) 5. 슈퍼테크닉 / 와우. 그 부분은 어떻게든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했는데, 정확히 짚어주신 분이 계시네요. 사실 입이 근질근질하기는 합니다. 왜 안솔이 그러는지에 대해서요. 하지만 아직은 밝힐 사항이 아니라서, 간단하게나마 말씀을 드리지 못하겠네요. 안솔이 제대로 작두를 탔을 때는 차후 그때의 기억을 100% 확실하게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어렴풋하게 기억할 뿐이죠. :) 0659 / 0933 ---------------------------------------------- 1. 김칫국과 설레발의 차이점. 고연주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종료돼있는 상태였다. 고연주 스스로도 인근에 다다랐을 때부터 느끼고 있었다. 전장을 이탈할 때 들리던 요란한 소음들이 더 이상 들려오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헐레벌떡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눈물 바다가 된 일대를 바라보며 고연주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양손으로 창대를 부서져라 쥔 채 소리 죽여 울고 있는 안현. 멍하니 선 채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안솔. 엎드린 자세로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이유정. 망연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은 정하연. ‘설마….’ 그러고 보니 김수현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 외에도 보이지 않는 클랜원은 많았으나 유독 김수현이 없다는 사실이 고연주에게 크게 다가왔다. 혹시나 하면서도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한 고연주는 클랜원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막지 못했어…. 막지 못했어….” 안솔은 흡사 정신 나간 사람처럼 계속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안솔이 깨어났다는 사실에 놀란 고연주는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냐고 물으려는 찰나였다. “놔, 놓으라고! 수현이가, 수현이가!” 갑자기 절절한 외침이 오른쪽에서 들려왔다. 곧 시선을 돌린 고연주는 두 가지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클랜 로드, 제발…! 이미 늦었어요, 늦었잖아요!” 너덧 명의 사용자들이 애원하는 목소리로 누군가를 힘껏 제지하는 모습이 보였고. “구멍이, 구멍이 작아져 가잖아! 놓으란 말이다아아아!” 사용자들에 둘러싸인 채 양팔을 허우적거리면서 어딘가로 달려가려는 김유현도 보였다. 예전의 차갑고도 차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광인과도 같은 절박한 분노를 내뿜고 있었다. 안솔은 여전히 혼잣말을 되뇌는 중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고개를 돌린 고연주는 돌연 한쪽에 홀로 서 있는 제갈 해솔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자 고연주의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저 아이가 왜?’ 제갈 해솔은 어느새 표혜미의 모습에서 원래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헬레나가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이 세상에서 사라짐으로써 폴리모프 효과도 같이 사라진 것이다. 다만 이제 막 전투가 끝났고 받은 충격이 큰 탓에 알아챈 이가 없을 뿐. 왜 제갈 해솔이 여기 있는지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 그러나 모로 봐도 누가 알게 되면 좋지 않을 거라 판단한 고연주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그림자를 일으켰다. “앗?” 그림자가 자신을 감싸 안자 제갈 해솔이 미약한 침음을 흘렸다. “지금 이게 어떻게 된 거니?” “이, 이거요?” 고연주가 물어보자 제갈 해솔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그러자 고연주는 우선 다른 건 됐으니 전장에 관한 설명을 해달라 요구했고, 그제야 진정한 제갈 해솔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거의 초주검 상태까지 몰렸던 김수현의 회광반조(回光返照). 그리고 헬레나의 희생과 김수현, 김한별이 공간 안으로 끌려들어갔다는 것까지. “아….” 제갈 해솔의 설명을 들은 고연주는 가장 처음 암담한 기분을 느꼈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쿡 찔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수현은 첫 만남 때부터 어마어마한 능력을 보여주던 사용자였다. 때로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상대를 박살냈고, 때로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적을 무력화시켰다. 누구나 해결하기 힘들 거라 생각한 위기도 보기 좋게 타개해왔다. 물론 그 과정에는 클랜원들의 도움도 적잖이 들어갔으나 중심은 언제나 김수현이었다. 그래. 그랬는데…. 그때였다. “모두…. 전장을…. 정리합니다….” 홀연히 들려오는 고요한 음성. 몸을 돌아본 고연주의 눈에 한소영이 전장 정리 지시를 내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언제나 무표정하던 얼굴이 오늘따라 더더욱 북풍한설이 몰아치고 있다. 지독할 정도로 냉정한 명령이었으나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이미 실종되거나 죽은 사람보다는, 부상당한 사람을 구조하고 산 사람을 우선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머셔너리 클랜원들이 움직이지 않는 건…. 아니 못하는 건,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리라. 바로 지금 이 자리에 김수현이 없다는 사실을. 이러한 상황에서 고연주는 간신히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현재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머셔너리는 지금껏 김수현을 구심점으로 활동해온 중앙 집권 형 클랜이다. 그런데 김수현이 사라졌으니 차후 행보에 어떤 식으로든 좋지 못한 영향이 미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말인즉 이제는 머셔너리의 미래마저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그렇게 생각한 고연주는 제갈 해솔에게 이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 신신당부한 후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이유정! 그만 질질 짜고 일어나!” 이유정은 아기처럼 서럽게 울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너희도 언제까지 가만히 있을 거야? 빨리 안 일어나?” 고연주로서는 드물게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 탓인지 망연하게만 있던 클랜원들이 하나하나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고연주는 짧은 한숨을 흘리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느덧 저 멀리서부터 은근슬쩍 물러났던 사용자들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 덜컹덜컹…! 덜컹덜컹…! - 승객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승객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안내 방송에 눈을 뜨자 흐릿한 시야가 보였다. 반사적으로 서너 번 눈을 감았다 뜨자 가물가물하던 세상이 천천히 잡히기 시작했다. 전역 신고를 하고 룰루랄라 기차를 탄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아무래도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흐아아암~. 어제 전역 축하주를 너무 많이 마셨나….” 부대를 나올 때는 드디어 전역한다는 기쁨에 몰랐는데, 한숨 푹 자고 일어나니 몰랐던 숙취가 갑자기 느껴졌다. 원래는 골이 깨질 듯한 숙취는 전혀 좋아하지 않으나, 오늘만큼은 이 숙취가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다. 아니, 오늘은 어떤 일을 당해도 헤헤 웃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왜냐하면 오늘은 내가 전역한 날이니까! - 이번 역은 서울역, 서울역입니다. 이제 곧…. 그렇게 한껏 들뜨려는 찰나, 아까부터 이어진 안내 방송이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서울역에 거의 도착했다. 오늘 전역했다고 되도 않은 사치를 부려 KTX 특실을 끊었는데, 생각보다 자리가 편안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잤다. ‘이래서 돈이 좋은 거야.’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창문을 한 번 바라본 후 나는 당당하게 몸을 일으켰다. 하차할 때는 기차 입구에 사람들이 몰리니 미리 나가서 기다리고 있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복도로 나가려는 찰나. “응?”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왜냐하면 바로 옆자리에 한 묘령의 여인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탈 때부터 출발할 때까지 옆자리에 누가 앉은 기억은 없는데…. 그러고 보니 이 기차, 무 정차가 아니었던가? 아니었나? 급 헷갈리네. 나는 최대한 앞으로 붙어나갈 생각이었으나 곧 나도 모르게 여인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옆자리 여인은 어디 가서도 흔하게 보지 못할 미모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한 갈색 빛이 흐르는 결 좋은 머리칼, 길고 가느다란 속눈썹, 복숭아 빛으로 물든 뺨, 도톰하게 돋은 입술…. 그리고 무척이나 선해 보이는 인상은 꼭 껴안아 보듬고픈 충동을 일게 만들 정도였다. 흡사 가녀리고 청초한 한 떨기 꽃을 보는 모습이랄까? 그리고 무엇보다, 옷을 불룩해질 정도의 두드러진 미사일 형 가슴은 정말이지! “에구구구….” 그 순간 건너편 좌석에서 무언가 힘들어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들자 왠 할머니가 까치발을 들고 힘겹게 짐을 꺼내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여인을 건드리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조심 나간 후, 얼른 할머니의 짐을 대신 꺼내 들었다. “할머니. 이 짐 맞으시죠?” 그러자 할머니는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시고는 인자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려 그려. 그거 맞아. 정말 고마우이….” “아니에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요.” “아이고, 건장한 청년이 심성도 곱고만. 우리 손녀라는 것은 저기서 잠이나 자빠져 자고 있는데….” “예?” 머리를 긁적이며 웃고 있자 할머니가 혀를 끌끌 차며 짐을 챙기셨다. 의아한 기분에 여쭈자 할머니는 “저년 말이여, 저년.” 이라 말씀하시며 건너편을 향해 눈짓했다. 아까 내가 앉아 있던 자리였다. …잠깐. 그렇다는 소리는? “현아야, 다 왔다! 일어나 이것아! …유현아!” “에…. 에, 에?” 할머니가 연거푸 외치자 유현아라 불린 여인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그리고 반쯤 감은 졸음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 나와 눈을 마주친 찰나 갑작스레 시선을 고정했다. 좋아. 이대로 눈싸움…. 은 아니고. ‘…뭐지?’ 한없이 선량해 보이는 눈동자가 나를 물끄럼말끄럼 바라보는 순간, 나는 전역의 효과로 들떠있던 기분이 돌연 가라앉는걸 느꼈다. 이어서 뜻 모를 어색하고도 불안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혹시 아까 가슴을 보고 불경한 생각을 해서 죄책감을 가진 건가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자꾸만 온몸을 엄습한다. 결국 나는 그 기분을 견디지 못해 먼저 눈을 돌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대로 복도를 달려 입구를 벗어났다. 잠시 등 뒤로 할머니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재빠르게 문을 닫고 다음 칸 객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이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후~.” 이윽고 한 칸 건너 입구에 다다르고 나서야 나는 간신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마침 기차도 정차 구역에 들어선 터라 오래 기다리지 않고 입구에서 하차할 수 있었다. ‘정말 이상한 여인이었어.’ 아니, 사실 정작 이상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여인은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이고 나 혼자 멋대로 반응한 것뿐이니까. 아무튼 이왕 이렇게 된 거 빨리 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해, 나는 기분도 환기할 겸 있는 힘껏 숨을 들이키며 머리를 젖혔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나는 입에 부딪치는 서너 개의 빗방울을 느껴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하늘도 먹구름으로 가득하게 들어차 있었다. 부대를 나올 때만 해도 화창한 날씨였는데 어느새 날이 흐려진 모양이다. 이런, 안 그래도 겨울 바람이 싸늘한데 비까지 내리다니. 최악이다. 후드득, 후드득! 잠시 후 먹구름 낀 하늘에서 빗방울이 세차게 내려오기 시작했다. 역은 곧바로 분주하게 변했다. 나도 일부 사람들처럼 편의점으로 들어가 우산을 살까 했으나, 엄청나게 몰린 인파를 보고 포기하고 말았다. 비를 맞는걸 딱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아니 그런데 왜 자꾸 아까부터 빗방울이 입에만 잔뜩 떨어지는 거야? 나는 투덜거리며 입을 연신 닦아냈지만, 곧 하늘이 내 전역을 축하하려는 의미에서 키스를 보내는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좋아. 이런 실없는 생각이 드는걸 보니 확실히 아까의 기분에서는 벗어난 것 같다. 나는 속으로 킥킥 웃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다 문득 영화의 한 장면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 똑같이 해볼 요량으로 양팔을 활짝 벌리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남들은 꼴값 떤다고 욕할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상관없다. 지금은 어떤 창피한 상황도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니까. 할짝…! 할짝…! 비는 계속해서 규칙적으로 떨어졌다. 역시나 입에만 떨어지는걸 보니 어쩌면 내 생각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바로 지금도, 빗방울은 내 입을 나긋이 핥고 있었으니…. ‘응? 빗방울이 나를 핥아?’ 핥핥…. 핥핥…. …확실하다. 비가 나를 핥고 있다. 그런데 이건 말이 안 되잖아. 빗방울이 나를 어떻게 핥지? 아니 흐르는 건가? 가만히 느껴보니 입에 흐르는 빗방울도 차가운 게 아니라 뜨거운 것 같은데…. 그럼 뜨거운 빗방울?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 들었다. 아까 기차에서 느꼈던 잠에서 깰 때와 비슷한 기분. 그리고 잊고 있던 기억들이 느닷없이 잠을 깨고 천천히 일어나는 기분. ‘그, 그래. 이제 기억났어. 아까 여인은….’ 그러는 와중에도 비는 계속 입을 맛보고(?) 있었고, 그와 동시에 뒷목이 상당히 편안해진걸 느꼈다. 굉장히 감미롭고 포근한 감촉이었다. 이대로 눈을 감은 채 있으면 잠이 올 것 같지만, 아까부터 입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결국 나는 살그머니 눈을 뜨고 말았다. “…….”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역에서 본 하늘이 아니었다. 오히려 용암이 콸콸 흘러내리는 것 같은 풍성하기 그지없는 누군가의 머리칼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찾아오는 극심한 현기증. “큭!”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자 입에서 느껴지던 감촉이 잠깐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한순간 머릿속에 어마어마한 격통이 찾아와 고통에 몸부림쳐야만 했으니까.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현기증도 느릿하게 사그라질 즈음. “이제 일어났느냐?”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가 귓전을 조용히 울렸다. 이내 한껏 찌푸렸던 눈을 도로 뜬 순간, 나는 멍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까만 해도 보이던 풍성한 머리칼은 보이지 않고, 갑자기 붉은 혀 같은 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 붉은 혀는 점차 가까워지며 시야에서 크기를 키워오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후후.” 어여쁜 입술 사이로 살짝 배어 나온 혀는. 할짝! 그대로 내 입을 부드러이 핥았다. ‘……?’ ============================ 작품 후기 ============================ 지옥 대공이 김수현을 선명하게 핥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독자 분들, 저 이렇게 오자마자 결말 떡밥 던지고 말았어요! 하하하. 아무튼 각설하고, 그럼 시즌 3 외전 시작합니다. 전장으로! 0660 / 0933 ---------------------------------------------- 1. 김칫국과 설레발의 차이점. 지옥 대공의 혀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입을 핥던 촉촉한 감촉은 곧 뺨으로 옮겨졌고, 또다시 코를 거쳐 눈에 닿았다. 이윽고 지옥 대공이 부드러운 손길이 내 앞머리를 젖히고 이마마저 핥을 즈음. ‘허?’ 나는 그제야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왠지 꿈에서 빗방울이 자꾸 입으로만 떨어진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지옥 대공이 나를 핥고 있어서 촉촉함을 느꼈던 모양이다. ‘아니. 이게 문제가 아니잖아.’ 시선을 올리자 여전히 나를 맛(?)보고 있는 묘령의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지옥 대공은 혀만 살짝 베어 문 채 아주 조신하게도 혀를 움직인다. 마치 어미 사자가 새끼 사자를 핥아주듯이 말이다. 그러니까…. “자, 잠깐만!” 버럭 소리를 지르자 쉬지 않고 움직이던 붉은 혀가 멈칫 정지한다. “…응?” 이어서 눈을 동그랗게 뜬 지옥 대공이 왜 그러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최대한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그러나 한 번 더 고개를 갸울인 지옥 대공은 도로 눈을 지그시 감더니 천천히 혀를 내밀어 오기 시작했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야?!” 결국 나는 크게 고함치며 있는 힘껏 지옥 대공을 밀치고 말았다. 그러나 지옥 대공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되돌아온 반동력에 내가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서너 번 바닥을 구르자 멍한 기분이 내려앉는 동시에 목덜미에서 무언가 뜨끈뜨끈한 액체가 느껴졌다. 시야에 보이는 하늘은 그저 붉기만 하다. ‘여기는…. 지옥이잖아.’ 나는 본능적으로 1회 차서 지옥에 떨어졌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물론 아직 속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하늘은 그때 보았던 지옥의 기억과 아주 흡사한 풍경을 보이고 있었다. “움직이는걸 보니 확실히 몸은 괜찮아진 것 같구나.” 그러자 문득 들려오는 기품 있는 목소리. 시선을 돌리자 어느새 몸을 일으켰는지 지옥 대공이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여전히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아 나는 말을 흐리고 말았다. 도대체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곳은 정말로 지옥일까? 나는 왜 여기 있는 걸까? 나는 살아 있는 걸까, 아니면 죽은 걸까? 지옥 대공은 왜 나를 핥고 있었을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느냐?” 그 순간 돌연 지옥 대공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나는 반사적으로 마력을 일으키며 자세를 잡았다. 아직 모든 것이 정리되지 않은 상황이기는 하나, 어쨌든 죽기 살기로 싸웠던 만큼 지금으로서는 지옥 대공을 경계할 수밖에 없다. “그만두지 그러느냐?” 그러나 지옥 대공은 피식 싱겁게 웃더니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절로 긴장된 기분이 들어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의미지?” “여기서는 싸워봤자 라는 소리다.”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 지옥 대공은 별안간 정색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애당초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고 나와 싸우겠다는 거지?”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방금 지옥 대공의 말로 적어도 의문 하나는 해결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금 내가 있는 장소는 확실하게 지옥이라는 것. 잘 생각해보면 추론이 가능한 일이었다. 헬레나가 지옥 대공을 돌려보내는 진을 발동했다면 당연히 대상 좌표는 지옥일 수밖에 없잖은가. 애초 1회 차에도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만큼, 홀 플레인에 지옥이 있다는 사실이 그다지 놀랍지도 않고. 그러나 정작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이곳이 정말로 지옥이라면 여기서 지옥 대공과 맞붙는 건 진정 무의미한 일이다. 인간 세상에서는 어찌어찌 상대할 수는 있었다. 지옥 대공 정도의 존재가 소환되면 크게 힘을 제한 받게 되며, 나는 그와 반대로 각종 버프를 받은 상태였으니까. 허나 지금은 다르다. 지옥은 인간 세상이 아닌 지옥 대공의 홈 그라운드나 다름없는 곳이다. 그런 만큼 전신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은 물론, 마음만 먹으면 그 이상도 얼마든지 낼 수 있을 것이다. 말인즉 지금의 나로서는 수억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소리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아,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자세를 풀고 마력을 가라앉혔다. “그래, 그래야지. 착하구나.” 그제야 만족했는지 지옥 대공은 바로 표정을 풀며 요염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뜻 들으면 기특하다는 투도 깔려 있는 게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는 어조였다. 비록 마력을 거두기는 했지만 나는 여전히 지옥 대공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어떻게 된 일이냐니?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만.” “말장난하지 마라. 왜 나를 죽이지 않았냐는 소리다.” “…풋!” 그러자 지옥 대공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산드러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죽여? 내가 그대를?” “말꼬리….” “오히려 나야말로, 그대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 그렇게 말한 지옥 대공은 한층 높아진 소리로 까르르 웃어 젖혔다. 그리고는 서서히 진정하며 검지를 들어 나를 가리켰다. “말이 나온 김에, 나도 그대에게 하나 묻도록 하지. …그러니 우선은 앉지 않겠느냐?” 이윽고 지옥 대공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인어처럼 자세를 잡더니 어서 앉으라는 듯이 지면을 가볍게 두드린다. 그 엄청난 지옥 대공이 저런 점잖은 모습을 보이자 조금이지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딱히 살기는 느껴지지 않는 말투라 나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 또한 궁금한 게 산더미처럼 쌓인 상태였거니와, 사실상 대화하자는 걸 거절할 처지도 아니었다. 잠시 후, 나를 빤히 응시하던 지옥 대공이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그러면 이 몸이 먼저 물어도 되겠느냐?” 나는 그러라는 의미로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그대는, 왜 내가 그대를 죽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귀를 의심하고 말았다. “지금 무슨….”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느니라.” 반사적으로 입을 열려고 했으나 지옥 대공의 제지에 도로 다물고 말았다. 이내 짧은 한숨을 흘린 지옥 대공의 말이 이어졌다. “그때의 기억을 천천히 되짚어 보거라. 한 번 잘 생각해보라는 말이다. 그대는 정말로 이 몸이, 그대를 비롯한 인간들을 진심으로 상대했다고 생각하느냐?” “…….” “잠깐이라고 외친 나에게 먼저 달려든 것은 그대였다. 그런데도 그대가 죽을까 봐 전투 내내 걱정하고, 죽자 살자 달려드는 인간들도 적당히 상대하려 애썼고, 거기다 거의 죽음 직전까지 이른 그대에게 이 몸의 생명력을 나눠주기까지 했는데. …여기까지 들었는데도 모르겠느냐? 아니면, 일부러 모른 척을 하는 건가?” “…어?” 그 순간 나는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무언가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래. 한 번 잘 생각해보자.’ 나는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추스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지옥 대공이 소환된 직후부터…. 그러자 여러 기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 잠깐…!’ ‘…그냥 누워 있지 그랬느냐.’ ‘너무 걱정하지는 말거라. 그대에게 경의를 표하는 차원에서, 어지간하면 죽이지 않으려 애썼으니.’ ‘결심했어. 여기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대는 내가 품어버리겠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내 것으로 만들 것이다.’ 그렇게 곰곰이 생각해보자 무언가 막연하던 것이 서서히 구체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확실히, 나는 지옥 대공이 등장했을 때부터 명백한 적으로 규정했다. 그렇게 한 이유는 1회 차의 기억이 상당 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1회 차의 지옥 대공은 정말로 지옥 그 자체를 재현했으니까. 그래서 당연히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미래는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 하에서.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2회 차의 지옥 대공은 사용자들에게는 가차 없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유독 나에게는 지나칠 정도의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 말 그대로 몇 번이나 나를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냥 넘어갔을 만큼. 그럼 ‘왜?’ 그랬느냐가 또 궁금해지는데….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나는 일단 호기심을 접어두기로 했다. 우선 당면한 의문을 해결하는 게 좋거니와, 별안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엄습했다. 또한, 무엇보다. “그럼 설마….” “설마?” 시선을 들자 지옥 대공이 싱긋 웃으며 말을 따라 했다. 그러자 혹시나 했던 의문이 더욱 증폭되며 점차 몸이 떨리는걸 느꼈다. “그럼 너는 도대체 왜 그곳에 소환된 건데? 뭔가 목적을 갖고 소환 의식을 치렀을 거 아니야?” 그 의문이 확신으로 변하기 직전, 나는 간신히 머리를 저으며 외칠 수 있었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필사적이 돼버렸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실을 인정해버리면, 왠지 무척 서글퍼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응? 딱히 목적은 없다만.” “…뭐?” 그러나. “나는 스스로의 의지로 그곳에 소환된 게 아니라, 누군가의 의지로 강제 소환된 것인데.” “누, 누군가에게 아틀란타로 강제 소환을 당했다고?” 지옥 대공의 말이 이어진 순간. “그래. 그러니까…. 악마들이라고 했었나?” “……!” 나는 망치로 정수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껴야만 했다. ============================ 작품 후기 ============================ 김수현 : 설레발! 이것은 바로 설레발의 맛이구나! X XX : 김칫국! 이것은 바로 김칫국의 맛이구나! 지옥 대공과의 격렬한 전투를 치러 굴복시키는 내용은…. 에이, 이제 다들 눈치채셨죠? 네. 그 내용은 아직 나오지 않아요. 제 머리로는 도저히 김수현이 눈을 뜨자마자 응응하는, 그런 상황을 만들 수가 없어서요. 하하하. 1. 남은 의문 해결. 2. 지옥 대공과 화정과 연관된 의문. 3. 김한별과의 만남. 4. 김수현의 정신적인(?) 각성. 이 4가지 관문을 거치고서야 적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 3회 ~ 4회 후 정도가 되겠네요. 특히 4번 과정은 필수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아틀란트로 들어가서 응응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는 터라, 독자 분들의 너른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그럼 독자 분들 모두 불타는 금요일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 0661 / 0933 ---------------------------------------------- 1. 김칫국과 설레발의 차이점. 내 표정을 읽은 걸까. “응? 또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느냐?” 지옥 대공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을 이모저모 살피는가 싶더니 자신이 소환된 경위에 관해서 천천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 지옥 대공이 모든 설명을 마쳤을 때 나는 할 말을 잃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지옥 대공 소환에 엮인 전후 사정을 알게 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미처 생각지 못한 악마의 개입과 놈들의 손에 놀아났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아니. 그 모든 것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헬레나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사실 용이 잠든 산맥에서 만난 이후 헬레나한테 큰 의미를 두고 있던 건 아니었다. 스스로 2, 3년 동안 살 수 없는 몸이라 밝혔으며 그전까지 인간 세상을 돌아보고 싶다는, 일종의 계약을 맺고 데려온 관계였을 뿐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했고 실제로도 그래왔다. 그냥 가끔 필요할 때마다 적재적소의 마법을 사용해주는, 도라에몽의 4차원 주머니 정도로만 생각해왔다. 그래. 그랬는데…. ‘이럴 때는…. 안녕이라고 해야 합니까?’ 까드드득! 헬레나의 마지막 인사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순간, 나도 모르게 주먹을 세게 움키고 말았다. 슬픈 것 보다는 분한 감정이 앞섰다. 지옥 대공의 말을 듣고 보니 내 초반 대응이 얼마나 거지 같았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막을 수 있는, 아니 달라질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정황상 지옥 대공의 출현은 정말로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고, 또 충분히 위협적이기도 했다. 실제로 지옥 대공은 청소를 하겠다고 말하기까지 했으니까. 그런 만큼 누가 봐도 내 반응을 탓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타인의 시선에 불과하다.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정말 어지간히도 설레발을 쳐버린 셈이다. 거기서 내가 조금만 침착할 수 있었다면, 지옥 대공이 하는 말을 흘려 듣지 않았다면, 아니,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지레짐작하지만 않았다면…! 사실 이것 또한 막연한 추측에 불과하다. 그래도 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고 대응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결과를, 다른 미래를 이끌어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문득 예전에 형이 했던 말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거인들과 동료가 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아틀란타? 그럼 지성을 가진 종족들과의 관계는 어땠는데?’ 그때는 갑자기 왠 약한 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이제야 그 당시 형이 느꼈던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 것만 같다. 형은 거인에 한정해서 말한 게 아닌, 그 이상의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말을 새겨 들었어야 했는데….’ 늦은 후회가 찾아 들어, 나는 결국 머리를 떨구고 말았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헬레나의 죽음이 미화되지 않는다. 정말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개죽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굉장히 괴로워 보이는구나.” 어느새 가까이 다가왔는지 바로 앞에서 지옥 대공의 음성이 들려왔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다만…. 너무 자책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어쨌든 그대가 목숨까지 걸면서 최선을 다했다는 건 사실이고, 그건 나도 높이 평가하고 있으니.” 아까와는 다른 조심스러운 말투가 마치 위로라도 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 그렇게 생각한 순간 실소가 흘러나왔다. 적이라고 생각했던 존재에 위로를 받는다. 이 무슨 코미디 같은 상황이라는 말인가. “뭐 하나만 물어보자.” 시선을 들고 말하자 지옥 대공은 허락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너는 처음에 우리와 대화할 생각이 있었다는 말인가?” “아니. 그건 아니다. 우리가 아닌 그대와 이야기할 의향이 있었지.” “그럼 만일 내가 그때 없었다면?” “흠….” 물어보면서도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른다. 지옥 대공은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 안타깝지만 그때 기분이 굉장히 안 좋아서. 아마 조금이라도 거슬렸다면 깡그리 청소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래. 그런가.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지?” 지옥 대공의 물음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은 내가 원하는 말을 들음으로 위안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최악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지독한 자기 합리화였으나, 지금은 이렇게까지 하면서라도 가슴을 식히고 싶었다. ‘…젠장.’ 하지만 곧 밀려오는 자기 혐오라는 감정에 나는 질끈 눈을 감고 말았다. 몇 가지 의문은 해결했으나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진 기분이다. 그러자 지옥 대공이 자그맣게 한숨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그대에게는 현 상황과 내면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군.” 그 말을 들은 순간 문득 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고 보니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의문이 하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왔다면 필시 김한별도 같이 왔을 터. 그러면 김한별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혹시….” 그러나 입을 열며 옆을 돌아본 찰나 나는 절로 말을 멈추고 말았다. 또 언제 사라졌는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던 지옥 대공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 갔나 싶어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자 곧 정면 방향으로 멀찍이 걸어가는 지옥 대공의 뒤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잠깐…?” 따라가려는 생각에 몸을 일으켰을 때, 돌연 걸음을 멈춘 지옥 대공이 가볍게 손을 들어올렸다. “곧 올 테니 가만히 기다리고 있거라.” 그 순간 나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지옥 대공의 목소리가 상당한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또렷하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내 재차 걸음을 옮기는 지옥 대공을 보며 나는 결국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어디로 가는 거지?’ * 지옥 대공이 떠나고 나서 아주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곧 돌아온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지옥 대공은 채 5분도 걸리지 않고 내가 있는 장소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왔을 때는 혼자가 아닌 누군가를 대동한 채였다. “오, 오빠.” 지옥 대공의 옆에서 살짝 젖은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그 누군가는 바로 김한별이었다. 나는 지그시 김한별을 응시했다. 잠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애초 살아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지옥 대공이 스스로 생명을 나누면서까지 나를 살린 만큼 김한별도 생존해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깨, 깨어나셨다는 말은 들었는데…. 정말로….” 무언가 굉장히 북받쳐 오르는지 김한별은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을 떨었다. 김한별의 쌀쌀맞은 성격을 생각해보면 조금 놀라운 반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등이라도 토닥거려주고는 싶었지만 나는 우선 옆에서 미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지옥 대공을 돌아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를 보는 지옥 대공의 눈은 투명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적의는 한 줌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눈동자였으나 계속 마주하자 되레 속이 불편해지는걸 느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어 나는 가볍게 머리를 숙이는 것으로 말을 대신했다. 그러자 고혹적인 미소로 화답한 지옥 대공은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럼 이 몸은 잠시 자리를 비켜주도록 하지. 그대는 생각이 정리되면 나를 찾아오도록.”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지옥 대공은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디로 찾아가야 하냐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오빠!” 지옥 대공이 자리를 떠난 순간 김한별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이내 나를 와락 껴안는 김한별의 등을, 나는 천천히 손을 올려 두드려주었다. 그러자 김한별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오빠, 오빠….” “그래 그래. 한별아.” “정말 오빠 깨어나신 거 맞죠? 몸 괜찮으신 거 맞죠?” “으응. 괜찮아. 이제 정말로 아무 이상 없어.” 그렇게 계속해서 등을 다독여주던 와중 문득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내 상태에 대해서 묻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 김한별은 나를 굉장히 오랜만에 대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또한 어디까지나 내 기준이기는 하나 반응도 약간 과한 감이 없잖아 있었고.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한별아.” 그러자 내 가슴에 고개를 묻은 채 흐느끼던 김한별이 서서히 얼굴을 보였다. 무에 그리 서러운지 뺨에 자국 진 눈물 자욱이 상당히 애처로워 보인다. 나는 아직도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혹시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기절해있었는지 알고 있니?” 지금 내가 있는 장소가 지옥인 이상,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1회 차 때 한 번 경험한 적이 있는 만큼 방법도 알고 있으니까. 물론 과연 지옥 대공이 순순히 보내줄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겠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지옥을 인간 세상과는 다른 하나의 차원으로 정의한다면, 각 차원마다 존재하는 고유한 ‘법칙’ 이라는 게 있다. 당연히 이 법칙은 각 차원마다 커다란 차이가 있는데, 1회 차 시절 우여곡절 끝에 원래 세상으로 되돌아간 나는, 인간과 지옥 차원 사이 존재하는 법칙 간 괴리감으로 인해 크게 고생한 전력이 있었다. 어쨌든 이대로 지옥에 눌러앉을 생각이 없는 이상, 차후 돌아갈 때를 대비해 이 괴리감을 최대한 줄일 필요가 있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가능한 한 빠르게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얼마 동안 기절해있었는지 가늠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고. “모르겠어요.” 그러나 김한별은 아주 간단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아무리 지옥에서 시간 개념이 없다고는 하나, 저렇게 모르겠다고 말하는 건…. “아까 그분이 가끔 저를 데려와 오빠를 보여주셨는데, 오늘이 열네 번 째에요. 그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내가 예상하는 것 이상으로, 매우 긴 시간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주(週)로 계산해서 2주가 넘는 기간 동안 기절해있었는지도 모른다. “음…. 그래. 알겠다.” 결국 지금 당장 확실한 건 없다. 나는 한두 번 머리를 끄덕인 후 나직한 한숨을 흘렸다. 머리가 한층 무거워진 기분이다. 그때 김한별이 살그머니 몸을 떼 자세를 바로 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오빠.” “응?” “…정말 방금 일어나신 거 맞아요?” “응. 맞는데. 왜?” 나는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손등으로 눈을 훔치던 김한별이 별안간 의아하게 눈을 빛내며 나를 응시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아니….” “……?” “방금 일어나신 것 치고는…. 너무 침착하신 것 같아서….” 한순간 아차 한 기분이 들었으나 나는 곧바로 진정할 수 있었다. 하기야 사정을 모르는 김한별의 입장에서는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당연히 나도 처음에는 놀랐지.” 억지로 웃으며 말하자 김한별이 “그래요?” 라고 되묻는다. “저는 처음에 엄청 놀라서…. 거의 공황 장애 상태까지 갔었거든요.” “나도 비슷해. 그런데 네가 오기 전에 지…. 흐흠, 그 여인과 잠깐 이야기를 나눴거든.” 나도 모르게 지옥 대공이라 말할뻔한걸 간신히 여인으로 바꿀 수 있었다. 문득 극도로 말을 조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안 그래도 눈치 빠른 아이니까….’ 아무튼 다행히도 김한별은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이며 이해했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그런 김한별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 잠깐 이야기 좀 하지 않을래?” ============================ 작품 후기 ============================ 몸으로 말이야. 는 농담입니다. 하하하. 아. 독자 님들. 제가 어제 코멘트를 보다가 빵 터진 게 하나 있습니다. ㅋㅋㅋㅋ. 『걍 바로 미약 처먹었다 치고 바로 좀 엉? 바로 씬 가라고요 현기증 나잖아! 빨리 연참 어서어서.』 ㅋㅋㅋㅋ 아 진짜 ㅋㅋㅋㅋ. 아 이러는 게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일어나자마자, 그것도 미약은 또 어디서 구해요 ㅋㅋㅋㅋ. 코멘트 보면서 계속 낄낄 웃었네요. 뭐랄까, 사실 같은 사내끼리 표현이 조금 그렇지만, 이 코멘트가 귀엽다고 느껴버렸어요. 저 이런 코멘트 완전히 좋아하거든요. 그냥 뜬금없이 웃기는? 갑자기 빵 터지게 하는? 그런 코멘트요. 아마 옛날에 현오 님이 달아주신 안솔 관련 코멘트 다음으로 재미있었던 것 같습니다. ㅋㅋㅋㅋ. 네, 아무튼요. 제가 베드 신을 잘 쓰고 못쓰고를 떠나서, 쓰겠다는 것 자체는 거짓말이 아닙니다. 믿어주세요. 다만 김수현이 애초 이성만 보면 흥분하는 발정 난 캐릭터도 아니거니와, 차후 연재 내용을 오직 베드 신으로만 도배하고 싶지는 않아요. 이 부분은 독자 분들도 저와 같은 생각이시라 믿습니다. 이번 지옥 대공 같은 경우도 최소한 왜 지옥 대공이 김수현을 원하는지, 왜 불을 탐하고 다녔는지, 왜 전투 도중 자꾸만 김수현을 원하는 소리를 꺼냈는지 등등. 이러한 부분에 관한 충분한 설명이 들어간 후에, 모든 독자 분들이 납득할 수 있는 베드 신을 적고 싶습니다. 이건 제 개인적인 욕심이라고 보셔도 좋습니다. 그러니 독자 분들께서는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주신다면, 제가 진정으로 감사할 것 같습니다. :) 오늘은 후기가 약간 길었네요.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_(__)_ 0662 / 0933 ---------------------------------------------- 1. 김칫국과 설레발의 차이점. 얘기 좀 하자는 말에 김한별은 처음에는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지옥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려달라는 말을 덧붙이자, 그제야 내 곁에 쭈뼛쭈뼛 다가와 앉고는 하나하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말을 들어보니 지옥으로 들어온 직후 내 상태는 굉장히 심각했던 모양이다. 지옥 대공이 나를 보며 잔뜩 안색을 굳히고는 어딘가로 데려갔다고 하니까. 지옥 대공이 나를 어떻게 살렸는지 궁금한 마음에 물었으나 김한별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지옥 대공이 매우 황급하게 떠났기 때문에 이후의 일을 보기는커녕, 오히려 홀로 남겨졌다고. 그렇게 어쩔 줄 몰라 하던 와중 문득 한 해골 기사가 자신의 앞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 해골 기사는 한껏 놀라는 자신을 진정시키고는 매우 정중한 태도로 어딘가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 어느 순간 지옥 대공이 찾아와 이것저것을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어떤 질문을 받았냐고 물어보자 나와의 관계에 관한 질문이 주를 이뤘다고 한다.) “처음에는 꼼짝없이 죽겠구나 싶었는데…. 딱히 나쁜 일을 당하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나름 친절하게 대해주셨다고 생각해요. 저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김한별은 대략적인 설명을 마쳤다.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그 이후로 계속 같은 자리에서만 있었던 거야?” “아까 말씀 드렸듯이 가끔 그분이 찾아와서 오빠를 보여주시고는 했어요.” “그거 말고. 그러니까 혹시 활동에 제한을 받았다거나.” “아니요. 그런 건 전혀 없었어요.” 그러자 김한별은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라치면 어김없이 그 해골 기사 님이 나타나주셨거든요. 그리고 저를 데리고 지옥의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주셨죠.”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구경을 시켜줬다고? 지옥을?” “네. 음, 그러니까….” 김한별은 어떻게 말을 할까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사실 저도 처음에는 놀랐는데…. 그동안 지내본 결과, 이 지옥이라는 곳도 하나의 세상으로 생각돼요. 그러니까 집이 없는, 아니 집만 없는 세상이라고 할까요?” 집만 없는 세상이라. 재미있는 표현이다. “아무튼 제가 아는 지옥이랑은 완전히 다른 개념의 세상이었어요. 자아를 갖고 돌아다니는 이들도 봤고, 또 우리가 있던 세상이랑 비슷한 시설들도 많이 봤고요.” “시설도 있다고? 몇 가지만 말해봐.” “말 그대로 에요. 대장간 같은 것도 봤고, 창고도 봤고, 제단처럼 보이는 것도…. 아! 여기에 기록 같은 것도 있더라고요.” “…흠.” 이어지는 말을 들으면서 나는 약간 혼란이 오는걸 느꼈다. 나 또한 1회 차에 지옥을 경험한 만큼 김한별의 설명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보면 나는 그 당시에 현재 김한별이 말하는 시설들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내가 보지 못한걸 수도 있다.’ 그러나 별안간 오히려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밀히 생각해보면 1회 차서 지옥에 떨어졌을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탈출이 목표였으니까. 팔자 좋게 이곳저곳 구경할 생각은 당연히 하지도 못했다. “오빠. 괜찮아요. 저도 처음에는 정말로 생소한 기분을 느꼈으니까요. 한꺼번에 너무 많은걸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자 김한별이 조곤조곤 한 어조로 말하며 나를 다독였다. 마치 이런 반응이 정상이라는 듯이. 문득 지옥 대공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새삼 느껴졌다. 김한별이 말이 진정 사실이라면 지옥을 이루는 8구간 전부가 각각 하나의 세상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옥 대공은 8개의 세상의 정점에 군림하는 지배자라는 소리였다. ‘나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존재와 싸운 거지….’ 돌연 까닭 없이 씁쓸한 기분이 엄습해 깊은 한숨을 흘렸다. “오, 오빠…?” 그러자 나를 빤히 바라보던 김한별이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얘는 또 왜 이래. “…죄송해요.” 그 순간 김한별이 느닷없이 죄송하다는 말을 꺼냈다. “응? 갑자기 뭐가 죄송해?” “생각해보니 지금 오빠 속은 타들어 가실 텐데…. 저 혼자만 신 나서….” 우물우물 말을 잇는 김한별.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나를 조심스레 살피는 기색이 보였는데, 이야기하는 내내 내 낯빛이 별로 좋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건 헬레나의 죽음에서 발로한 자책감 때문이지 김한별 때문은 아니었다. “또 저만 아니었다면 오빠가 이곳으로 끌려들어올 일도….” 어느새 좌절 모드로 들어간 모습을 보며 나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침울하게 중얼거리는 김한별의 등을 가볍게 쳤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렇게 따지면 애초 채찍을 피한 내 잘못이 가장 크지.” 김한별이 아직 우울한 기색이 남은 얼굴로 나를 돌아본다. “그리고.” 순간 다음 말을 할지 말지 고민이 들었으나 이왕 말 나온 거, 아무래도 지금 해두는 게 낫겠다 싶어 말을 이었다. “그때…. 먼저 구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김한별은 잠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다. 그러나 곧 김한별의 얼굴에 그늘졌던 우울함이 싹 걷히는걸 볼 수 있었다. 이내 아니라는 듯 괜찮다는 듯 세차게 고개를 젓기 시작한다. “아, 아니!” “…안 어지럽니?” 그제야 고개를 멈춘 김한별이 떨떠름한 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저…. 저도 하나 여쭤봐도 되요?” “뭘 새삼스레.” “그때…. 왜 끝끝내 제 손을 잡아주신 거예요?” “흠.” 이건 나름 정곡을 찌르는 질문인데. 그러고 보니 나는 정말 왜 김한별을 구한 걸까? 나도 모르게? 아니면 어차피 죽을 거 같이 죽겠다는 생각에? …둘 다 정답은 아닌 것 같아 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는 동안 김한별이 무언가 기대하는 듯 잔뜩 상기된 얼굴로 나를 바라봐, 뜻 모를 부담감을 느껴야만 했다. 결국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그냥 버릴 수가 없었던 것 같아.” “왜요?” “왜라니? 야, 네가 내 입장이 돼 바라. 나 좋다고 고백한 애를 어떻게….” “자자자자자자잠깐만요!” 그때였다. 갑자기 김한별이 빽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더니 삽시간에 내 입을 틀어막았다. “애, 애으애?(왜, 왜 그래?)” 너무 심하게 틀어막다 보니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최대한 이게 무슨 짓이냐는 의미를 담아 시선을 올리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숨을 씩씩 몰아 쉬는 김한별이 보였다. 설마 지금 부끄러워하는 건가? “그, 그게 그거랑 무슨 상관…!” 김한별은 기세 좋게 입을 열었으나 곧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그래. 스스로 생각해도 상관이 없다고 말은 못하겠지. 아마 구한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어.(치워.)” 나는 이제 그만 치워달라는 의미로 내 입을 막은 손을 톡톡 두드렸다. “…….” 그리고 잠시 기다려보았으나 김한별은 손을 치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틀어막는 압박감이 더욱 심하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만 지을 뿐. ‘이렇게 나오시겠다.’ 딱히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입에 닿은 손바닥 감촉도 상당히 보들보들했고 김한별의 반응도 상당히 신선했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한 켠으로는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입을 살짝 벌린 후 혀를 내밀어 손을 핥았다. “꺅?!” 그러자 김한별이 펄쩍 뛰었다. 아니 그것도 모자라, 새된 비명을 지르며 발라당 나동그라지기까지. ‘얘 정말 김한별 맞아?’ 평소 보여오던 태도와는 너무나 거리가 있는 모습에 한순간 도플갱어가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제 3의 눈으로 확인한 결과 확실히 김한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 참. 이미 다 말해놓고는 이제 와서 뭐가 부끄럽다고.” “대, 대답해요!” 투덜거리면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찰나, 돌연 뾰족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시선을 내리자 이제는 자포자기한 듯 넘어진 채로 나를 한껏 노려보는 김한별이 보였다. 아랫입술까지 꽉 씹고 있는 게 무언가 굉장히 분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다. “대, 대답하라니까요! 빨리!” “…뭘?” “뭐, 뭘? 지금 장난해요?!” “아. 그거야 당연히 고맙지. 한별이가 고백해준 건 정말로 고맙게 생각해.” 나는 최대한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그러나 김한별의 표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태도를 보이더니 지면을 박박 긁기 시작했다. 흡사 발정 난 고양이를 보는 듯했다. “아, 암 걸릴 것 같아….” 이윽고 김한별이 간신히 내뱉은 혼잣말을 들은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말을 잘못했음을 직감했다. ‘…암에 걸릴 것 같다 라.’ 곱씹어보니 왠지 모르게 이상한 표현이라고 생각되어, 나도 모르게 살짝 웃고 말았다. 그 순간이었다. ‘어?’ 내가, 웃었다고? 나는 재빠르게 얼굴을 매만졌다. 아니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김한별이 이제는 거의 울기 직전인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으니까. 자신은 심각해 죽겠는데 내가 웃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듯 보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웃었다는 것. 억지 웃음이 아닌 말 그대로 진심에서 발로한 웃음. 그러고 보니 어느새 머리가 한결 가벼워진 게 느껴졌다. 아마 김한별과 옥신각신 다투는 동안, 복잡하던 내면이 나도 모르는 사이 가라앉은 모양이다. ‘아무래도 그대에게는 현 상황과 내면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군.’ 설마 지옥 대공은 이런 효과를 노리고 김한별을 데려온 걸까? 그거야 본인 외에는 모르는 일이겠으나, 여하튼 지옥 대공은 생각하면 할수록 내가 가늠할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나는 이제야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현재 내가 있는 장소는 지옥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 살아 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은 한 가지. 자책하면서 주저앉는 게 아니라, 다시 돌아가 원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짝! 그렇게 생각한 나는 두 손을 들어 있는 힘껏 뺨을 쳤다. 한 번으로는 모자란 것 같아 두 번, 세 번, 네 번까지 쳤다. 그제야 볼에서 얼얼한 기운이 느껴지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몸에 가득하던 무력감이 서서히 사라지는 기분이다. “에? 오, 오빠?” 그러자 조금 전까지 나를 노려보던 김한별이 떠름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하기야 갑자기 자해를 하는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정신병자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우두둑, 우두둑! 그렇게 뺨을 친 후, 나는 몸 군데군데에서 느껴지는 뻣뻣함에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리고 아직도 주저앉아 있는 김한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한별아. 우선은 일어나자. 어서.” “…네? 네…. 가 아니라. 잠, 잠깐만요. 치사하게. 오빠 지금 은근슬쩍 화제 돌리려는 거죠?” “그게 아니라, 지금 우리가 이럴 때가 아니잖아. 네가 원하는 대답은 나가서 해줄 테니까. 약속할게.” “갑자기 무슨 말씀을….” 김한별은 아미를 잔뜩 찌푸리며 반문했다. 그러나 돌연 말을 끝맺지 못하고 흐리더니, 종래에는 화등잔만 해진 두 눈에 강렬한 이채가 스쳤다. 김한별도 기본적으로 머리가 영리한 사용자인 만큼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가자.’ 라는 의미를. 이윽고 동그래진 눈을 서너 번 감았다 뜬 김한별은 조심스레 내 손을 잡았다. “…어떻게요?”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한결 진정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지옥 대공이 걸어간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이 몸은 잠시 자리를 비켜주도록 하지. 그대는 생각이 정리되면 나를 찾아오도록.’ 지옥 대공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다. 아까는 신경 쓸 여력이 없어 몰랐으나 지금은 알 수 있었다. 비록 정확한 장소는 알기 어려우나 지옥 대공의 기운만큼은 확실하게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돌아가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방법은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가장 큰 걸림돌은 지옥 대공이 우리를, 아니 나를 순순히 놔주지 않을 거라는 것. 이게 바로 내가 당면한, 그리고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오빠?” 이내 김한별이 채근하는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 여인과 담판을 지어야 할 것 같다.” ============================ 작품 후기 ============================ 오늘의 교훈. 강제로 무덤에 눕혀질 지언정 스스로 무덤은 파지 말자. 후기는 삭제했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주세요. _(__)_ 0663 / 0933 ---------------------------------------------- 2. 지옥 왕. 사실 지옥 대공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도망치는 경우도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미물에 불과한 존재라면 모를까. 그간의 반응으로 미루어보면, 지옥 대공은 내게 상당한 관심을 두고 있었다. 또한, 정말 일이 잘 풀려서 돌아가는 데 성공했다손 치더라도 김한별의 의심을 피하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그렇게 여러모로 곰곰이 따져보자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결론을 낼 수 있었다. 결국에는 직접 담판을 짓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소리였다. 내 계획을(사실은 계획이랄 것도 없지만.) 들은 김한별은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했으나 나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화정이니 겁화니 이런저런 말들이 나올 가능성이 높은 이상, 혼자서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김한별은 필요 이상의 고집을 부리지 않았고, 나는 바로 걸음을 옮겼다. 지옥 대공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서. 지옥 대공을 찾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어탑(御榻)을 발견한 순간 그 아래 앉아 있는 붉은 머리칼의 여인을 볼 수 있었다. 한 가지 의외인 건 지옥 대공이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 어탑 앞에는 시꺼먼 갑옷을 입은 형상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부복하고 있었다. “음?” “아.” 내 기척을 느낀 걸까? 지옥 대공과 시커먼스가 동시에 나를 돌아본다. 이윽고 투구 안쪽 푹 꺼진 눈구멍을 마주한 순간, 나는 김한별이 언급한 ‘해골 기사’ 를 떠올렸다. ‘그럼 저 검둥이가….’ “호. 조금 더 걸릴 줄 알았건만.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찾아왔구나.” 지옥 대공이 대견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자 해골 기사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퀭한 눈구멍에서 붉은 안광을 번뜩였다. 돌연 허리춤에 걸린 멋들어진 반사광을 번들거리는 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대공이시여. 그럼 저 분이….” “음.” 지옥 대공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해골 기사는 짧은 탄성을 지르며 완전히 나를 돌아보았다. 애초 뿔 투구를 장착한 상태였거니와 해골이니만큼 표정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나를 쳐다보는 눈초리에서 왠지 모르게 신기해하는, 혹은 무언가 기대하는 듯한 느낌이 전해졌다. 철그렁, 철그렁! 이윽고 갑옷이 맞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다가온 해골 기사가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머리를 기울여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기까지. ‘…강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생각보다 장대한 체구는 물론,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강대한 기운과 마주하자 나도 모르게 긴장된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안녕하십니까.” 거슬리는 쇳소리가 귀를 긁는가 싶더니 돌연 해골 기사의 허리가 꾸벅, 절반으로 접혔다. ‘뭐, 뭐지?’ 그냥 간단한 인사가 아닌, 허리를 90도 이상으로 굽혔을 정도로 정중한 인사였다. 솔직히 적대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주얼 상 ‘흥. 네가 바로 그놈인가.’ 정도의 인사를 예상한 나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무어라 말도 못하고 있는 동안 해골 기사가 천천히 허리를 폈다. 그리고 양손을 살포시 마주잡고는 딱딱, 이빨을 맞부딪쳤다. “아…. 저, 처음 뵙겠습니다.” “?” “그동안 대공께 말씀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로, 진정으로 감사합니다.” “??” “아 이런.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토벌의 임무를 부여 받은 제 3군단장 베히모스라고 합니다.” “???” 아마 내가 안솔과 같은 능력(?)이 있었다면 지금쯤 정수리에 수십 개의 물음표가 떠오르지 않았을까. ‘왜, 왜 이렇게 예의가 바른 거지?’ 여태껏 보고 겪어온 마수와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태도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니. 대 악마들마저 포기한 지옥이 이렇게나 개방적인 세상이었나? 그러나 해골 기사는 내 의문은 아랑곳 않은 채 연신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혹시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같이 넘어오신 분을 지금껏 성심껏 모시기도 했죠. 하하하.” 그래. 그렇구나. 그건 확실히 고맙기는 한데.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나는 당최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뜻을 담아 어탑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지옥 대공은 일말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생글생글 웃고 있을 뿐. “아차. 그러고 보니 이야기를 하러 오셨군요. 제가 너무 혼자서 떠들었나 봅니다.” 쓰, 쓸데없이 눈치도 빨라. “그럼 이만 자리를 비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멀리 가지는 말거라. 이야기가 끝나면 다시 부를 테니.” 이윽고 해골 기사가 재차 깍듯하게 허리를 숙이자 지옥 대공이 차분히 말을 덧붙였다. “기억해주십시오. 저는 제 3군단장 베히모스입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해골 기사, 아니 베히모스는 몸을 돌려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서서히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설레설레 머리를 저었다. 시꺼먼 갑옷을 입고 무게만 잡고 있지 않았다면 나름 괜찮은 첫인상을 받았을 텐데. 간신히 혼란을 가라앉힌 후 나는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여기까지 온 이상 전후 사정은 아무래도 좋다. 지금 당면한 목표는 오직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 하나뿐이니, 그거 하나만 신경 쓰면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눈동자에 가득 힘을 주며 어탑에 앉은 지옥 대공을 한껏…. “계속 그렇게 쳐다보거라. 그럴수록 괴롭혀주고 싶은 마음이 커지니까 말이다.” 노려보려다가, 곧바로 표정을 풀고 말았다. 아까 지옥 대공이 내 얼굴을 핥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자 “풋.”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음, 그럼.” 이윽고 지옥 대공이 미끈한 오른 다리를 쭉 피며 들어올렸다. 이어서 들어올린 허벅지를 왼쪽 허벅지에 살며시 얹고는, 오른손으로 턱을 괴며 지긋한 시선을 보냈다. 다리 한 번 참 섹시하게도 꼬는군. “그대, 이제는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되었다 봐도 무방하겠지?” “…그래.” 그 순간 나를 보며 눈웃음을 짓던 지옥 대공의 두 눈에 갑작스레 강렬한 이채가 스쳤다. 너무나 찰나 간에 스치고 지나가 혹시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보거라.” 일견 감미롭게 들리는 목소리였으나, 어딘가 모르게 묘하게 색정적으로 느꼈다면 내 착각일까? 문득 지옥 대공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더욱 진해진 것만 같은 착시가 일었다. 한순간 아찔해지려는 정신을 붙잡으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보다는 네가 할 말이 있지 않은가?” “이 몸이?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러자 지옥 대공은 피식 웃더니 거만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 사실 그대 말이 틀린 것도 아니지. 하지만 나는 별로 아쉬운 입장이 아니라서 말이다.” 순간 이게 말인가 방구인가 싶었다. 기껏 얘기를 하자고 해놓고 이딴 식으로 반응하면 도대체 어쩌라는 말인가. 그러나 아주 틀린 말도 아닌 게, 그 말대로 나는 지금 지옥 대공의 손아귀에 붙잡힌 상태였다. 또한 철저한 약자이기도 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목숨까지 구원받은 입장이었다. 결국에는 아쉬운 사람이 먼저 말을 꺼내라는 소리였다. 허나 그렇다고 다짜고짜 보내달라고는 할 수 없는 노릇. 우선은 지옥 대공의 의도를 파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목숨을 구해준 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낯 간지럽구나. 간을 볼 생각이라면 집어치우거라. 혓바닥이 긴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니까.” 아주 단칼에 끊어내는군. “좋아.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어느새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지만, 나는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네가 나를 살려준 이유는 아무래도 이 힘 때문이겠지?” 심장을 지그시 누르며 말했으나 지옥 대공은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여전히 턱을 괴고 다리를 꼰 채 나를 쳐다보고만 있을 뿐. “그렇게 생각해보면 상황은 간단해지지. 너는 모종의 이유로 화정의 힘을 원하고 있다. 아닌가?” “흠.” 본론으로 들어간 이후 지옥 대공이 처음으로 반응했다. 그냥 단순한 콧숨에 불과할 뿐이지만, 나는 무언의 긍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좋아. 그러면…. “네가 원하는 만큼 더 이상 구구절절 늘어놓지는 않겠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말해봐.” “…응?” “네가 나를 죽이지 않고 살린 이유 말이야.” 말 그대로였다. 지옥 대공은 나라는 인간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화정을 품고 있었기에 나름 특별한 대우를 받은 거라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면, 지옥 대공이 정말로 화정의 힘을 원하고 있다는 가정하에. 왜 나를 죽이고 화정을 빼앗는다는 아주 간단하고도 손쉬운 방법을 사용하지 않은 것일까? 이것 또한 몇 가지 이유를 예측할 수는 있겠으나 나는 여기서 말을 아끼기로 했다. 이제는 지옥 대공이 입을 열 차례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지옥 대공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뭐, 그래도 아주 멍청하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다행이야.”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방금 말은 내가 방향을 잘못 잡은 게 아니라는 방증이었으니까. 말인즉 지옥 대공에게는 나를 함부로 죽일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소리였다. “세세한걸 따지지 않고 크게 보면, 확실히 그대의 말은 정답에 가깝다 볼 수 있다.” 지옥 대공이 인정했다. 이러면 자연스레 내 목소리가 높아진다. 물론 그렇다고 갑질을 하거나 개길 생각은 추호도 없다. 말마따나 세세한 이야기도 들어봐야 모든 게 명확해질 테니까. 하지만 최소한 ‘내가 네가 원하는걸 들어줄 테니, 그 대신 우리를 보내달라.’ 라는 말을 꺼낼 여지는 생긴 셈이다. “허나.” 그때 돌연 반전을 알리는 단어가 지옥 대공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정작 그대는 지닌 힘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군. 가까이 오거라.” 그렇게 말한 지옥 대공은 돌연 어탑에 걸친 손을 들어 이리 오라는 듯 검지를 까닥까닥 움직였다. 마치 애완견을 대하는 듯한 태도에 부아가 치밀었으나 속으로 참을 인을 되뇌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약 2미터 정도 거리를 남기고 걸음을 멈추려 했다. 그러나 지옥 대공의 집게 손가락은 더 다가오라는 듯이 계속해서 움직였고, 결국 바로 앞까지 다가가고 나서야 손가락을 접었다. 지옥 대공의 입술이 떼어졌다. “그러니까….” 잠시 후 살짝 말을 흐린 지옥 대공이 느닷없이 손을 뻗어왔다. 내밀어진 손은 여지없이 내 가슴에,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심장 부근에 닿았다. 지옥 대공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마치 무언가를 느끼려는 것처럼. “태고의 격을 지닌 화정. 영원히 타오르는 정화의 불. 이게 바로 그대가 가진 힘의 정체다.” 한순간 돌연히 마음이 변한 건가 걱정이 들었으나, 이어진 음성은 혹시 모를 심장이 뜯길 걱정을 덜어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느긋하게 눈을 뜬 지옥 대공은 이번에는 양손을 움직여 내 손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어딘가로 끌고 가려는 듯 느릿하게 당기기 시작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억지로 끌고 가는 느낌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강제는커녕 오히려 무척 따뜻한 굉장히 기분 좋은 감촉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저항할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내 오른손은 나긋나긋한 손길에 이끌려 지옥 대공의 봉긋한 가슴으로…. ‘어, 어?’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을 때는 이미 한참이나 늦은 상태였다. 무어라 말하기도 전, 내 손바닥은 여지없이 지옥 대공의 왼쪽 젖가슴을 감싸듯이 덮었으니까. 이내 손바닥에 물컹하면서도 살살 녹을 듯한…. 아니,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극상의 부드러운 감촉이 전해질 즈음. “느…. 느낌이 어떻느냐?” 마치 첫날밤을 맞이한 새색시마냥, 양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지옥 대공이 수줍은 목소리로 물었다. ============================ 작품 후기 ============================ 오늘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늦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_(__)_ 0664 / 0933 ---------------------------------------------- 2. 지옥 왕. 갑자기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온 세상이 하얗게 칠해지고, 이 공간에 나와 지옥 대공 둘만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느낌도 들지 않는다. 오직 오른손에 닿은 살결의 감촉만이 시시각각 선명하게 느껴져 숨이 막혀올 지경이었다. 사실 젖가슴 한 번 쥐었다고 이러는 건 꽤나 웃긴 일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누군가. 바로 지옥 대공이 아닌가. 과연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저 ‘공포’ 로만 각인돼있던 존재가 이렇게 스스로 젖을 내어줄 줄은. …아니. 사실 그것보다는, 지금 느끼는 감촉이 그 정도로 감미롭다는 표현이 옳으리라. “응? 갑자기 왜 그러느냐?” 내 반응을 확인한 걸까. 지옥 대공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흘러 든다. “그대. 어서 말을 해보래도. 내 겁화의 느낌이 어떻느냐 묻지 않았느냐.” 응? ‘겁화의 느낌?’ 속으로 지옥 대공의 말을 되뇐 순간, 돌연 아까의 기억이 머리를 스쳤다. ‘태고의 격을 지닌 화정. 영원히 타오르는 정화의 불.’ 이어서 지옥 대공이 내 가슴에 손을 얹었을 때, 그때 무어라 말했는지도 자동적으로 떠올랐다. ‘…….’ 아차 싶은 기분이 들었다. 말인즉 지옥 대공도 나와 똑같은 장소에 겁화의 힘을 품고 있다는 소리였다. ‘가슴이 아니라, 겁화의 기운을 느껴보라는 뜻이었구나.’ 그제야 한 줄기 이성이 되돌아와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정상으로 돌아온 시야로 나를 이상하다는 눈길로 올려다보는 지옥 대공이 보였다. 그러자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어 얼른 눈을 감은 후, 나는 겁화의 기운을 느끼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아?”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뜨거운 기운을 느낀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러버렸다. 화정은 딱히 한 의미로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 기운이 아니다. 그것은 겁화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저곳을 종횡무진 휘젓는 거칠고 거친 기운.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을 연상케 하는 기운. 당장이라도 쾅 하고 터질 것 같은 활화산과도 같은 기운. 부글부글 진득하게 끓어오르는 용암을 떠올리게 하는 기운. ‘이게…. 진짜 겁화의 기운이구나….’ 물론 겁화를 처음 겪어보는 건 아니었다. 지옥 대공과 싸울 때 질리도록 경험해봤으니까. 그러나 전투 때 느꼈던 겁화와 지금 느끼는 겁화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다. 그러니까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조금 색다르다고나 할까? 단순히 ‘파괴적이다.’ 라고 알고 있던 나로서는 이번 경험이 상당히 신선했다. “후후. 그럼 비교해보거라. 지금 느끼는 기운이 그대가 가진 힘과 어떠한 점이 다른 지를.” 지옥 대공의 말이 이어졌다. “겁화와 화정은 아예 상극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기운이다.” 지옥 대공의 말이 맞다. 두 기운은 정말 똑같은 염화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상반된 성질을 보이고 있었다. “분명 나는 그 힘을 거둘 능력은 있으나, 그래 봤자 라는 말이다. 지극히 자연적인 방법이라면 모를까, 억지가 가미된 방법으로 두 기운을 강제로 섞으면…. 이후의 일은 나조차도 감히 예상할 수 없다. 왜 그런지는 그대도 이해하겠지?” 그래. 직접 느껴보자 지옥 대공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말인즉, 두 기운은 합일은커녕 공존마저도 불가능한 상반된 기운이라는 소리였다. “아무튼 이쯤이면 대답이 되었겠지.” “…….” “…그런데 왜 자꾸 손에 힘을 주는 것이냐? 기분이 이상하구나. 이제 그만 놓거라.” “…….” “놓, 놓으라 하지 않았느냐.” “…응? 아, 아.” 3번째로 채근하는 음성이 들려왔을 때 나는 겨우 반응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기분이 좋아 나도 모르게 계속 쥐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죽하면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행복한 기분까지 느꼈을까. 겨우 정신을 차리자 지옥 대공이 묘한 눈초리로 나를 응시하는 게 보였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쑥스럽고 창피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갑자기가 아니라 아까부터 그랬다. 지옥 대공과 눈을 마주할 때마다 이상할 정도로 내면의 무언가가 자극 받는 기분이 들었다. 여하튼 정신을 차리고서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서서히 손을 떼려고 할 즈음. ‘응?’ …착각일까? 문득 지옥 대공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듯한 착시가 일었다. 그때. 화르르륵! - 놀고 있네. 응? 아주 놀고 있어! 돌연히 뾰족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익숙한 음색이었다. 나는 아주 잠깐 멍한 기분을 느꼈다가 곧 음성의 정체를 떠올린 순간 크게 기함하고 말았다. “화, 화정?”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지옥 대공이 의아한 눈초리를 보내와 곧바로 속으로 말을 걸었다. ‘깨, 깨어 있었던 거야?’ - 어. 네가 일어나기 전부터 깨어 있었는데? ‘그, 그럼 왜….’ - 시끄럽고. 정신이나 똑바로 차려 이 멍청한 자식아! 화정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머릿속이 왕왕 울렸다. 어조가 굉장히 날이 서 있는 게 화가 난 게 분명했다. 지금껏 가만히 있다가 왜 갑자기 화를 내는 걸까? ‘야. 왜 화를 내는 거야?’ - 뭐? 왜 화를 내는 거야? 이러니까 암시에 걸렸다는 사실도 눈치 못 채지! ‘…암시?’ - 이 바보 멍청이야! 아까부터 너 질질 끌려 다니는 거, 알고는 있는 거야? ‘내가? 질질 끌려 다닌다고?’ - 그래! 처음에는 담판을 짓겠다고 해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는데, 하여간 가슴이라면 사족을 못 쓰니까…! 바보, 멍청이, 해삼, 멍게, 말미잘, 치한, 변태, 저질! 화정은 결국 분을 이기지 못했는지 다양한 단어를 동원해 나를 매도했다. 무어라 말을 하고는 싶었지만,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또 왜 혼란스러워 하는 것이냐? 그리고 손은 언제쯤 거두어 주겠느냐?” 그때였다. 화정이 나를 계속해서 비난하고 있을 즈음, 또다시 감미로우면서도 색정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들자 내 오른손을 꼭 부여 잡은 채 수줍게 미소 지은 지옥 대공이 보인다. 아까라면 지옥 대공의 저런 모습이 반칙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화정의 말을 듣고 보니 무언가 확실히 이상했다. 그러니까 마치 일부러 저러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아니. 애초 저렇게 붙잡고 있으면 손을 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따발총처럼 쏘아붙이던 화정이 우뚝 험담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씩씩 호흡을 몰며 말을 이었다. - 야, 너. 이제부터 내가 하라는 대로 얘기해. 알겠어? ‘그건 좀….’ - 시끄러워시끄러워시끄러워! 어차피 별로 아는 것도 없고, 가슴이나 보면서 헬렐레 나 하는 주제에!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으면 내 말을 따르란 말이야! ‘…알겠어. 알겠다고.’ 확실히 그랬다. 지옥 대공의 말을 이해하고는 있었으나 애당초 나는 겁화나 화정에 관한 깊이 있는 지식을 갖추지 못했다. 도대체 어떤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갈지는 모르나, 적어도 나보다는 화정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지금껏 화정의 말을 들어서 손해 본 기억은 없으니까. - …좋아. 우선은 이렇게 말해. 헛짓거리는 적당히 하라고.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살그머니 지옥 대공을 살폈다. 무에 그리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다. 딱히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아,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헛짓거리는 적당히 하지 그래?” 그러자 지옥 대공이 두 눈을 살짝 치뜨며 나를 바라본다. 입가에 미소는 아직 살아 있었다. 화정의 말이 이어졌다. - 나쁘지 않은데 말은 더듬지 말고. 그리고 이번에는 이렇게. 내숭 떨지 마.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도 막 나가는 수가 있으니까. 여기서 어조는 비장하게. 무, 무언가 주문이 상당히 상세하잖아. 어쨌든 화정의 말은 내가 세웠던 전력과는 완전히 반대로 나가고 있었다. 사실 마음 한 켠으로 정말 잘하는 걸까 의구심이 일었으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말을 따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숭 떨지 마.” “흐응? 그대여,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내숭 떨지 말라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도 막 나가는 수가 있으니까.” “…킥! 어떻게 막 나갈지 꽤나 궁금해지는데, 한 번 해보지 그러느냐?” 화정의 주문대로 최대한 비장하게 말하려 애썼으나 지옥 대공의 반응은 예와 같았다. 그저 싱겁게 입술을 터뜨리고는 심드렁히 중얼거릴 뿐. - 이번에는…. 이어서 주문을 마친 화정은 전체 어조는 웅장하게, 그리고 말을 끝내면 아랫입술을 천천히 깨물며 눈동자에 힘을 주라는 요구까지 덧붙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적당한 애드립을 구사하라기까지. ‘…왜. 아주 그냥 물구나무서서 말하라고 하지 그래?’ - 괜찮아. 그렇게 말해도 쟤 절대 너 못 죽인다니까. 지금 나를 못 믿겠다는 거야? 전하라는 말의 내용은 둘째치고서 라도,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분명 화정은 나름 속사정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그걸 모르니 갑갑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저 한숨만 나온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모르는 게 죄지. 나는 결국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얕보지 마. 나도 산전수전 공중전 시가전까지 겪은 몸이야. 그러니까 말이나 암시로 어떻게 조종할 생각은 그만두고, 얌전히 요구 조건이나 말하지 그래?” “…무어라?” 그 순간이었다. 시종일관 태연한 기색을 보여오던 지옥 대공이 갑자기 아미를 찌푸렸다. 물론 아주 약간이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표정 변화를 보인 것이다. 화정은 마치 때는 이때라는 듯 계속해서 조잘거리며 나를 채근했다.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될 대로 되라지. 나는 화정에게 들은 그대로,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꺼냈다. “네가 단순히 더 높은 경지를 원하든, 죽은 무간 지옥의 재구성을 원하든, 아니면 1군단의 부활을 원하든…. 좌우간 도대체 뭘 원하는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그 어떤 생각을 갖고 있든 간에…. 에….” - 왕으로 내세울 생각 말라고. 하도 말이 긴 탓에 까먹을 뻔 했으나, 마침 화정이 핵심적인 문장을 되짚어줘 도로 기억해낼 수 있었다. “네 목적을 이루려는 일환으로 나를 왕으로 세울 생각이라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어.” - 좋아. 자연스러웠어. 그러자. “네, 네놈! 도대체 어떻게…?” 지옥 대공이 한껏 놀란 얼굴로 어탑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두 눈이 더없이 커진 게 마치 이건 예상치 못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베히모스가 알려주었나? 아니면 그 아이가?” “…….”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 그러면….” “…저기.” 그 순간 화정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머릿속을 울렸다. 나는 바로 내뱉지 않고 곰곰이 화정의 설명을 되새겼다. 더 높은 경지. 무간 지옥의 재구성. 1군단의 부활. 왕의 소멸과 내세움. 사실 지금의 나로서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들이다. 그러나 무언가 다르다. 화정이 한 말을 그대로 뱉어내기 시작한 이후, 이야기가 더 이상 빙빙 돌지 않고 조금씩이나마 진전되기 시작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 지옥 대공의 저 반응이 명백한 방증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처음으로 맑은 기분을 느끼며 지옥 대공을 응시했다. 내 손은 아직도 지옥 대공의 오른 젖가슴을 쥐고 있었다. 이윽고 천천히 손을 빼내려는 순간. 꽈악. 돌연 지옥 대공이 내 손을 더욱 강하게 부여잡았다. 그리고 눈을 강렬히 빛내며 나를 쳐다보았다.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나 더 전할게 있으니까, 이거 하나만 제대로 대답해줘.” “…전한다고?” “화정의 질문이야. 너는 스스로 지옥의 왕이 되려고 한 적이 있나?” “그, 그건 2천 년도 더 전에 포기한 일이다만. 나로서는 왕의 자격이…. 아!” 지옥 대공은 당황해 하는 와중에도 대답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탄성을 지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마 ‘화정의 질문’ 이라는 말에서 방금 질문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깨달은 모양이다. “그분이 무어라 말씀하셨지?” 지옥 대공이 급해 보이는 얼굴로 물었다. “자기도 확신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네가 왕이 되는데 실패했다면 나 또한 마찬가지일 거라고.” “어째서?” “너와 나는 동격의 힘이니까. 네가 실패했다면 나 또한 실패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하…. 하지만…. 나야 파괴니 실패했다손 쳐도, 화정의 힘은 분명 정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터…. 그러면….” 그러자 지옥 대공의 낯에 멍한 빛이 그늘지었다. 무언가 큰 충격을 받았는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다. 그 사이 나는 손을 이리저리 비틀어 기어코 빼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가볍게 손을 털은 후,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화정의 마지막 말을 전했다. “정화 하나만으로는, 부활이나 재구성을 정의할 수 없어. …라는군.”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독자 분들. 어제 오후에 글을 올리겠다 해놓고 결국 올리지 못했습니다. 우선 이 점은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며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이후의 일은 말씀을 드릴까 말까 고민을 했는데…. 아무래도 제 코멘트 하나만 보고 기다린 분들을 생각해 사정을 말씀 드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령 변명으로 들릴지라도 그게 예의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사실 사정 자체는 아주 간단합니다. 어제 잠을 잔 이후, 아침에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이미 코의 출혈은 멎은 상태였고 가끔 목으로 넘어오는 것만 제외하면 큰 이상함은 없었습니다. 피로가 쌓여 코에 점막이 약해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돌아와서 글을 쓰는데…. 써지지가 않았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크게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글이 안 써진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그때마다 나름 해결해왔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원인 분석에 들어갔을 때부터였습니다. 1. 글 자체가 막혔다. 2. 체력이 떨어졌다. 1, 2번 어느 것도 해당 사항이 없었습니다. 글이 막힌 경우는 노트를 보며 구상을 점검하는 편입니다. 이전에 구상에 조금 변화를 주기는 했으나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냥 짜놓은 대로 적으면 될 일이었습니다. 체력이 떨어졌다고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1주일 전부터 새벽 운동을 병행하고 있으며 아침에도 개운하게 일어났으니까요. 여기서부터 정말 미칠 것 같더라고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해봐도, 잠깐 산책을 해봐도, 데스크 탑에서 울트라 북으로 옮겨 봐도, 형 방으로 환경을 바꿔봐도, 누워서 써봐도, 결국 다시 원래 방법으로 돌아와도. 결국 하다 하다 안 돼서 벽에 머리를 쿵쿵 찧기까지 해봤는데도 똑같더라고요. 정말 별 짓거리를 다 했는데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감은 더해가고 가슴이 갑갑해졌습니다. 오죽하면 폭탄 하나 삼키고 펑 터뜨리면 시원해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냥 써놓은 것만 올릴까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러기는 싫었습니다. 아무리 외전이라고는 하나 지옥으로 오는 강수까지 뒀는데, 의미 없는 파트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결국 500단어(2000자)까지 적은걸 날리고 다시 적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고, 비슷한 부분에서 집중력을 잃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원래 오늘 조아라와 만나는 약속이 있었는데, 그것도 연락도 드리지 못하고 펑크를 내고 말았습니다. 결국 오후까지 끙끙 앓다가, 오후에 조아라에서 전화 한 통이 왔습니다. 오늘 약속도 있었으나, 연재도 안 올라와 있어 걱정하시는 마음에 전화를 주셨더라고요.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상황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어느 정도 적절한 조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한 번 까지는 내용을 엎으셔도 좋습니다만, 그 이상으로 엎지는 마세요. 그러는 순간부터 연중으로 들어가는 수순을 밟게 됩니다.” “우선 안 써지는 부분은 놔두세요. 그리고 쓰고 싶은 부분, 이후의 부분을 먼저 적으시고요. 그 다음에 두 내용의 연결 고리를 생각해보세요.” 저에게는 천금과도 같은 조언이었습니다. 이후로 연락을 끊고 다시 집필을 시작해, 다행히 1회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상 지금도 내용은 크게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초고보다 나아지기는 했지만, 어느 분의 말씀처럼, 아직도 소설이 아닌 설정의 나열이 주를 이루는 설명문이라는 느낌이 강하지요. 이 부분은 제가 노력해서 해소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이 어제 하루 동안 있었던 일입니다. 솔직하게 밝힌다는 생각에 길게 적어놓기는 했는데 읽고 보니 조금, 아니 많이 부끄럽고 창피하네요. 이렇게 못난 저임에도 응원해주시는 독자 분들이 있다는 사실에 항상 감사하고, 또 죄송함을 느낍니다. 언젠가 제가 다시 페이스를 찾을 수만 있다면. 어제 지키지 못한 약속은, 불시에 연참으로 갚도록 하겠습니다. 독자 분들 모두 행복한 그리고 편안한 밤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로유진 올림. 0665 / 0933 ---------------------------------------------- 2. 지옥 왕. 잿빛 세상이었다. 고즈넉한 하늘도 척박한 땅도. 어디를 둘러봐도 회색밖에 보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재색 일색으로만 이루어진 세상이었다. “무간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하지.” 옆을 돌아보자 무릎을 살짝 굽히며 동시에 고개를 숙이는 지옥 대공이 보였다. 어여쁜 공주 인사였으나 이런 세상에서 받으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달까. “그래서, 어떻느냐.” “음?” “이 구간 말이다. 그대의 소감을 듣고 싶구나.” “무간? 글쎄. 소감이라고 해봤자….” 나는 말끝을 흐리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간 지옥. 사실 1회 차 때 한 번 경험한 것도 있지만 그걸 떠나서라도 정말 볼게 없는 세상이다. 생기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다. 아닌 게 아니라 그 흔한 나무조차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느껴지는 거라고는 허무와 공허뿐인데 거기서 어떤 감흥을 느낄 수 있겠는가. 을씨년스럽기만 하지. 그러나 어서 말해보라는 듯 눈을 반짝이는 지옥 대공을 무시할 수는 없어, 마지못해 말을 꺼냈다. “꼭 죽은 세상 같아.” “흠? 조금 더 자세히.” “그러니까…. 마치 불에 타고 남은 재를 보는 느낌이랄까?” “…….” 차마 빈말로도 ‘괜찮네.’ 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완곡하게 표현하기는 했다. 곁눈으로 슬쩍 흘겨보자 지옥 대공이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냥 고풍스러운 기운이 감돈다고 할걸 그랬나?’ 혹시나 해코지를 할까 봐 조금씩 긴장하고 있을 즈음.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라고 하시더냐.” “응? 아니.” 그분이라는 말이 화정을 지칭함을 깨달은 순간 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까 대화가 끝나고 구간을 넘어 무간에 도착한 이후, 화정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흐응.” 그러자 의외라는 듯 가볍게 콧숨을 흘린 지옥 대공이 빙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지옥 대공의 뒤태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따라 걸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글쎄.” 조심스레 물어보았으나 돌아온 대답은 애매함의 극치였다. “그럼….”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그럼 너는 이 구간을 재구성하려는 목적인 건가?” “글쎄.” 이번에도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지옥 대공. 나는 한없이 갑갑해지는 가슴을 억누르며 팔짱을 꼈다. 지옥 대공은 아까 화정과의 대화를 마친 이후 무언가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무간으로 가자고 억지로 끌고 오더니 또다시 저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래서 이제 어쩔 거냐고 연신 채근하고 싶었으나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러지 말아야 된다는 정도의 눈치는 있으니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대는…. 이 무간 지옥의 진명을 알고 있는가?” 하염없이 걸으며 지루한 기분을 느끼는 찰나, 문득 지옥 대공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나저나 무간 지옥의 진명? 구간에도 진명이 존재하나? 그러자 지옥 대공의 말이 이어졌다. “왕이 태어나고 잠드는 곳이라 부른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퉁명스레 내뱉고 말았다. 무언가 사정을 알아야 쿵 짝이라도 적당히 맞추지, 아무것도 모르는데 자꾸만 질문을 던지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하기야. 그대에게 큰 상관은 없겠지.” 이윽고 가볍게 웃음을 터뜨린 지옥 대공이 우뚝 걸음을 멈춘다. 나도 따라서 걸음을 멈추자 지옥 대공이 나를 돌아보며 양팔을 활짝 벌린다. “실은 말이다. 아까 그대의 표현은 상당히 정확했다.” “……?” “불에 타고 남은 재와 같은 세상…. 이 몸이 원하는 건, 바로 그 재에서 불씨를 만들고 크게 일으키는 것. 그래서 그 역할을 화정이 해주기를 원했느니라.” “하지만 화정은 불가능하다고 했어. …그러니까 왕이 될 수 없다고 했었나?” 그러자 지옥 대공이 두 눈을 동그랗게 만들더니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 듣는 귀는 있나 보구나.” 듣기만 아니라 직접 말해주기까지 했지. “그러면….” 어쨌든 화정이 어느 정도 이야기를 진행해준 이상, 나는 슬슬 이 상황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사실 지금도 궁금한 건 무지하게 많다. 지옥에 어떻게 왕이 존재하는지, 어떤 존재인지, 왜 부활시키려고 하는지, 아까 진명은 또 무슨 의미인지 등등. 하지만 질문을 가려서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막말로 대공도 존재하는데 왕이 존재하지 말라는 법은 없잖은가. 그리고 내가 아는 ‘왕’ 의 개념과 크게 다를 것 같지도 않고. 또한 부활의 이유는 개인적인 사정일 가능성이 다분하니 질문한 것이 되지 못하며, 진명은…. 뭐, 괜히 말을 꺼내지는 않았겠지. 말인즉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지옥 대공의 목적을 이룰 방법을 찾고 도와주는 것. 그래야만이 내가 인간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아까 끊었던 말을 도로 이었다. “너는 왕을 부활시킬 생각이지?” “음?” “대충 들어보니까 너는 이 무간이라는 구간을 재구성할 생각을 갖고 있어. 그리고 그 일환으로 왕을 부활시키려고 하고 있고. …맞나?” “표현이 적절치 못하구나. 왕의 부활이 아니라, 왕을 새로 세우는 것이다.” 지옥 대공이 미미하게 고개를 저으며 내 말을 정정해주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정답이라고 볼 수 있겠군. 관건은 왕을 새로 세우는 것. 그러면 다른 모든 것들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들에 불과하다.” “그러면 새로운 왕이 나타나는 순간 이 무간 구간도 되살아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아까도 말했듯이 무간은 왕의 탄생과 최후를 함께하는 곳. 즉 일종의 무덤 역할을 하는 구간이라 볼 수 있지.” “무덤이라.” 무언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왕이 태어난 이후의 무간 지옥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무튼. 나는 이제야 조금씩이나마 이해가 가는걸 느꼈다. 말 그대로 현재 관건은 새로운 왕을 세우는 것이다. 지옥 대공은 그 기대를 나한테 걸고 있었는데 화정이 가능성을 부정했다. 그러면…. “조금은 예상하고 있기는 했으나…. 이거 참, 난감하구나.”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던 와중 돌연 지옥 대공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옥 대공은 겉으로는 담담해 보였으나 애꿎은 땅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 조금이지만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새로운 왕이 필요한 거야? 그냥 형식적으로나마 네가 왕이 되면 되지 않나?” “글쎄.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기왕이면 있는 편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있겠군. 그래야 원래의 내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다라. 이건 또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잠시 후. 쓸쓸히 땅을 내려다보던 지옥 대공이 천천히 고개를 젖혀 오연히 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도 안 되고 그대도 안 된다…. 최고의 염화라 불리는 종미의 불과 태고의 불이 안 된다면…. 도대체 어찌해야 하는 거지?” 홀연히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사실 지옥 대공이 자신의 염원을 얼마나 간절히 바래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 또한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했을 때의 상실감이 어떤지 경험해본 적이 있는 터라, 최소한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 때문일까. 조금이지만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이봐. 지옥 대공.” “음?” “왕은 무조건 한 명이어야만 되는 건가?” “그렇다만?” 간단하게 대답한 지옥 대공이 왜 그러냐는 듯이 반문했다. 나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럼 이건 어때? 두 힘을 합쳐보는 건.” “두 힘을 합친다?” “그래. 네가 그랬잖아. 무간 지옥은 왕의 탄생과 최후를 함께 하는 곳이라고.” “그랬지.” 지옥 대공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 생각해봐. 화정은 태고의 불이잖아. 태고는 아득한 먼 옛날, 즉 시작과 관련이 있는 단어지. 그리고 겁화는 종미의 불. 종미는 멸망, 즉 최후와 관련이 있는 단어고.” “그런데?” “그걸 무간 지옥의 특성에 대입해보자고. 만일 이 두 힘을 함께 지닌 존재가 있다면 무간 지옥의 특성에도…. 아차.” “……!” 한창 말을 잇던 순간 갑자기 아차 싶었다. 나름 의견을 꺼낸다고 꺼냈는데, 처음 내가 물었던 질문과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옥 대공이 말하지 않았는가. 애초 서로의 속성이 상극이기 때문에 내 힘을 거두지 않았다고. 말인즉 시작부터 잘못된 전제를 깔고 들어간 이야기라는 소리였다. ‘…괜히 얘기했네.’ 그렇게 미안하다고, 괜한 얘기를 꺼냈다고 사과하려고 할 즈음. - 어? “하?” 지금껏 가만히 있던 화정과 지옥 대공이 탄성이 겹쳤다. “그대가….” 이어서 한껏 놀란 눈을 깜빡깜빡 감았다 뜨는 지옥 대공이 보이고. - 나름 괜찮은 의견이기는 한데. 그런데 두 힘을 어떻게 합치게? 내가 했던 고민을 비슷하게 말하는 화정의 음성이 머릿속을 울렸다. “그렇지. 맞아. 그대의 말도 일리가 있어. 아니 아니, 남은 방법도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아.” 지옥 대공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무어라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고개를 번쩍 치켜들더니 눈을 강렬히 빛내며 나를 쳐다보았다. 오죽하면 붉은 안광이 흘러나올 정도라 나도 모르게 흠칫하고 말았다. “왜,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지옥 대공이 갑자기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걸어오는 폼이 금방이라도 내 심장을 적출하고도 남을 기세였다. “잠깐만!” 내 외침에 다행히 지옥 대공은 걸음을 멈춰주었다. “왜, 왜 그래 갑자기?” “응? 그대야말로 갑자기 왜 그러지? 의견을 개진한자는 그대가 아닌가. 그저 일리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아니. 아까는 안 된다며. 두 힘은 상극이라서 서로 겹칠 수가 없다며.” “…아하.”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겠는지 지옥 대공은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이더니 돌연 뜻 모를 묘한 미소를 짓는다. “확실히 함부로 행할 일은 아니라고 했지. 그러나 아예 방법이 없다고는 하지 않았다만?” 그, 그런가? ‘분명 나는 그 힘을 거둘 능력은 있으나, 그래 봤자 라는 말이다.’ ‘지극히 자연적인 방법이라면 모를까, 억지가 가미된 방법으로 두 기운을 강제로 섞으면….’ …기억을 더듬어보니 확실히 그런 말을 들은 것 같기는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간단히 말하면 두 기운은 서로 상이한 기운을 갖고 있기는 하나, 어쨌든 같은 염화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는 말이다. 즉 화정과 겁화는 물과 불처럼 애초 서로 섞이기가 불가능한 기운은 아니라는 소리지. …그대의 말을 들은 이후, 나는 여기서 가능성을 잡았다.” “……?” “들어보거라. 두 기운은 그저 서로의 고유한 성질이 너무나 극명해 반발력이 생길 뿐. 순리상 두 기운의 합일이 이치에서 벗어나는 현상은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까 정리해보면, 두 기운이 납득할만한 지극히 자연적인 방법으로 합일을 이루면 된다는 소리다.” “그럼 그 자연적인 방법이라는 게 뭔데?” “그건….” 여전히 감이 잡히지가 않아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리고 지옥 대공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잉태.” 라고 말했다. 나는, 아주 잠시 동안 지옥 대공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 오, 그러네. 생각해보니 그런 방법이 있었네. 바로 화정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 야, 답 나왔다. 김수현 너 제법인데? 그런 방법을 생각하다니 말이야. 화정은 무척이나 기특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그대를 데려오는 건 정답이었어.” 이윽고 환한 얼굴을 한 지옥 대공이 다시금 걸어오는 게 보여, 나는 주춤주춤 물러나며 속으로 외쳤다. 한순간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돼버린 기분이다. ‘화정, 화정! 저게 무슨 소리하는 거야 지금?’ - 응? 너야말로 무슨 소리야. 네가 의견을 말해놓고 모른다고 하면 어떡해. ‘그게 아니라, 갑자기 뭔 놈의 잉태야?’ - 아 잉태? 응. 쟤 말 틀린 거 하나도 없어. 매우 온당하다는 듯이 지옥 대공의 의견에 태연하게 긍정하는 화정. 그러는 사이 어느새 지옥 대공과의 거리는 5미터 안으로 좁혀져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 - 왜 물러나? 왜 당황해? 들어봐. 새끼를 배는 현상은 어느 차원에서나 똑같이 적용되는, 말 그대로 세상이 허락한 이치요, 또 당연한 순리야. 거의 근간을 이룬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태초부터 이어져온 현상이지. 이것만큼 자연적인 방법이 없다니까? ‘…….’ - 아. 설명이 너무 어려웠나? 그러니까 인간의 관점에서는 후계자 개념으로 생각하면 돼. 생각해봐. 겁화의 기운을 지닌 지옥 대공의 자궁에, 내 기운을 품은 네 씨앗을 뿌리면…. 틀렸다. 지옥 대공이나 화정이나 무언가 조곤조곤 설명은 해주고 있는데, 지금 내가 당황하는 포인트를 조금도 잡지 못하고 있다. - 못 잡긴 뭘 못 잡아? 그냥 여기서 지옥 대공한테 몸 한 번 대주면 된다고. 이해 못하겠어? 그렇게 생각한 순간 화정이 핀잔조로 투덜거렸다. 나는 기어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너 신 맞냐?’ ============================ 작품 후기 ============================ 음…. 다음 회는…. 사실 그리 예쁜 내용은 아닙니다. 미리 말씀 드리자면, 김수현이 열 받은 상태로 나오거든요. 에 그러니까…. 중 후반 부분에 SM이 살짝 섞여 있거든요. 거부감을 가지신 분들은 그냥 넘기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지옥 대공이 충격을 받아 눈물을 흘릴 정도의 내용이라서…. 그럼 독자 분들 좋은 하루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_(__)_ 0666 / 0933 ---------------------------------------------- 2. 지옥 왕.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대여. 자꾸 어디를 가는 것이냐? 왜 계속 걸음을 물리는 것이지?” 성큼성큼 나를 쫓아오는 지옥 대공과. “잠깐만. 있잖아, 있잖아 지옥 대공아. 일단 진정하고, 우리 잠깐 이야기 좀 하지 않을래?” 애써 부드러운 말로 달래면서 연신 물러나는 나. 아니. 그렇잖은가. 아까는 조금 안쓰럽다는 마음에 위로 차 한두 마디 던졌을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내 말이 옳다며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이제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다가오고 있다. 거기다 화정은 눈 한 번 딱 감고 몸을 대주라 종용하기까지. 이게 도대체 말이야 방구야? “흠? 이 몸은 충분히 진정하고 있다만? 아니, 기쁨으로 인해 조금 흥분된 상태인가?”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건 지옥 대공이 마냥 막무가내는 아니라는 것. 여하튼 걸음을 멈춰준 지옥 대공을 보며 나는 가슴을 추슬렀다. 그래. 지옥 대공도 높은 지성을 갖춘 존재인 만큼, 지금 이 사태를 충분히 대화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진정했어?” “음.” “흥분도 가라앉혔고?” “음.” “좋아. 그럼 우선….” “음.” 그러나 내가 채 말을 잇기도 전,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 지옥 대공이 또다시 사뿐사뿐 다가오기 시작했다. 잇따라 가볍게 발을 내디뎌오는 행태를 보고 있자니 이제는 기가 막히다 못해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 아 진짜 갑갑해! 그냥 쟤랑 떡 한 번 쳐! 그럼 된다니까? …이제 아주 막 나가는구나. ‘부탁이니까, 제발 좀 닥쳐주라.’ 화정은 진정 갑갑하다는 듯이 외쳤으나 나는 제발 닥쳐달라고 사정했다. 안 그래도 어지러워 죽겠는데…. 그러나 화정은 전혀 내 간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 나보고 닥치라고? 너 말 다했어? 이게 예쁘다 예쁘다 오냐 오냐 해줬더니 아주 맞먹으려 드네? 너와 내 관계를 잊은 거야? 이쯤 되자 무언가 뜻 모를 억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건 배신이다. - 정말 어이가 없네. 무에 그리 억울하고, 또 배신인데? 그 순간 갑자기 욱하는 감정이 솟구쳤다. ‘화정. 설마 네가 이럴 줄은 몰랐다.’ - 뭘 그럴 줄은 몰라. 그러니까 제대로 말을 해봐. ‘아니, 말을 해도 쫌. 대주라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와? 너 내 부인 맞아?’ -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러나 화정은 내 항변을 한 마디로 일축했다. -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돌아가실 지경이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란다.’ - 시끄러워. …아 갑자기 열 받네. 고자나 동정이면, 그래 이해라도 해. 그런데 지금껏 실컷 여러 암컷들과 물고 빨고 지지고 볶고 난리 블루스를 추던 주제에, 이제 와서 어째? 야, 너 지금 장난해? 그럼 내가 질투라도 해주기를 바라는 거야? ‘…….’ 마, 말을 듣고 있으니까 열 받는다. 그런데 할 말이 없으니까 더 열 받는다. - 그래~. 원한다면 해줄게~. 수현앙~. 있잖앙~. 나는 네가 쟤랑 자지 않았으면 좋겠엉~. 물론 그러면 네가 돌아갈 수 있을지 어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쟤랑은 자지 않았으면 좋겠엉~. …됐냐? 이제 만족해? 화정은 일부러 코맹맹이 음성을 내더니 한껏 비꼬는 투로 종알거렸다. - 정신 차려! 이…! 그 후에도 화정의 잔소리가 이어졌으나, 미처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이제야 잡았군.” 돌연히 만족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양 어깨를 붙드는 나긋한 감촉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떻게 할 틈도 없이 시야가 천천히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내 하늘이 보이고 붉은 머리칼이 보이는 순간, 나는 마침내 붙잡히고 말았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풀썩! 딱딱한 대지가 등에 닿는 동시에 지옥 대공의 엉덩이가 내 사타구니를 깔고 앉는다. 이어서 두 손으로 내 가슴을 지그시 누르기까지. “시, 싫어!”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들고 말았다. 이대로라면 진짜로 당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허,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로다.” 그러자 완벽한 기승위(騎乘位) 자세로 나를 구속한 지옥 대공이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한다. “혹시, 두려운 게냐? 정녕 두려워서 거부하는 것이더냐?” “무, 무슨….” “혹여 두려운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그대는 씨를 뿌려주기만 하면 된다. 씨앗을 자궁에 수정하고 합일의 과정을 감당하는 건 오롯한 내 몫 이니까….” “그게 아니라!” 지옥 대공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조곤조곤 말했다. 그러나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더욱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아.” 그러다 어느 순간, 의아함이 역력하던 지옥 대공의 낯에 아차 한 빛이 스쳤다. 그리고 약간은 조심스러워진 태도로 말을 잇는다. “그럼…. 혹시 성기능에 문제가 있다던가…?” 이게 정말. 계속 이어지는 성희롱에 가까운 발언을 나는 결국 참지 못했다. 가슴을 누르는 두 손을 거칠게 치운 후, 있는 힘껏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렇게 지옥 대공의 얼굴과 삽시간에 가까워지려는 순간이었다. “적당히 좀 하랍…!” “왜 화를 냅…?” 나와 지옥 대공의 목소리가 겹치는 동시에. 쪽. 서로의 입술도 겹쳤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알듯 말듯 입을 자극해오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 너무 저돌적으로 일어난 탓에 나도 모르게 힘을 조절하지 못한 것이다. “어, 어버버버.” “…흠.” 그럼에도 지옥 대공은 그저 입을 한 번 쓱 훑었을 뿐, 정작 담담하기 짝이 없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숨결도 닿을 거리에서 깜빡깜빡 움직이는 붉은 눈동자와 마주했을 때. “어헉.”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키며 머리를 크게 젖히려는 찰나였다. “무얼 그리 놀라느냐.” 지옥 대공의 목소리와 들려옴과 동시에 무언가에 걸리기라도 한 듯 머리가 덜커덕 정지했다. 그제야 목 부근을 감싼 보드라운 손바닥의 감촉이 느껴졌다. “인간 세상에서는 두 번이나 멋대로 안아놓고서는. 그때의 패기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약간 한심하다는 듯이 말한 지옥 대공은 곧 살짝 벌어졌던 거리를 도로 줄여오기 시작했다. 나는 어떻게든 얼굴을 빼려 안간힘을 써봤으나, 그럴수록 목에서 느껴지는 압박만 심해질 뿐이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머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서로의 코가 맞닿았을 즈음. “어쨌든 딱히 다른 문제는 없다는 말이렷다?” 지옥 대공이 무언가 확인하겠다는 느낌으로 물었다. 나는 시야의 절반을 채울 정도로 가까워진 붉은 눈동자를 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무슨 짓? 뻔하지 않느냐.” 내가 절절하게 말한 것에 반해, 지옥 대공은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사실 어지간하면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만….” “…….” “방법을 찾은 이상, 이 몸이 더 이상 기다릴 인내심은 없어서 말이다.” “……?” 이어지는 말에서 나는 묘한 불안감을 느껴야만 했다. “아무튼 따로 염려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대의 성기능도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그리고 그저 그대가 이유 없이 싫을 뿐이라면….” 잠시 말끝을 흐린 지옥 대공이 빙긋 미소 짓는다. “이 몸으로서는 승자의 권리를 행사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그 말을 들은 순간 뜻 모를 불안감이 심해졌다. 갑자기 머릿속의 경종이 따르르르 울리기 시작한다. “나는…!” 그리하여 재빠르게 말을 하려는 찰나, 지옥 대공의 손바닥이 내 입을 빈틈없이 틀어막았다. 어떻게 목소리를 내려고 해보았으나 지옥 대공의 악력은 내 저항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치 이제 더는 기다리기 지쳤다는 듯이. “되었다. 그대와 더 실랑이하기도 싫으니 이제는 내 마음대로 하겠다.” 그 순간이었다. “그냥, 좋은 꿈을 꾼다고 생각하면 된다.” 화아아악! 불현듯, 바로 앞에 있던 지옥 대공의 두 눈동자가 갑자기 요사스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현상은 무척이나 불시에 일어난 일이었거니와, 애당초 가까이서 마주보고 있던 터라 미처 반응할 틈도 없었다. ‘이, 이건…?’ 결국 불빛이 불가항력으로 시야를 가득하게 물들여오는 것에 이어, 나는 갑작스레 정신이 멍해지는걸 느꼈다. “괜찮으니까….” 이제는 지옥 대공의 음성이 더 이상 또렷하게 들려오지 않는다. 마치 가수면 상태에서 듣는 것처럼 한없이 아련하게 귓가로 흘러 든다. 이윽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한숨 푹 자고 일어나 있으면….” 나는 물에 천천히 가라앉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모든 게 끝나 있을 테니까.” 세상이 점차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 암시(暗示). 암시란 일반적으로 사람의 심리를 파고들어, 감각이나 판단이 이성을 거치지 않고 타인이 전하는 자극을 통하여 무의식적으로 발현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암시에 걸린 사람은 대체로 최면 혹은 가수면 때와 비슷한 상태를 보이는데, 이때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고 한다. 이러한 경우 외부에서 가해지는 자극을 거의 감각하지 못한 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며, 그에 따라 내면의 심리나 태도가 변화한다. 그러나 암시에 의한 효과가 항상 일정한 건 아니다. 강도가 세면 세질수록 외부 자극으로 간섭할 수 있는 여지가 늘어난다. 암시가 약할 때는 각성 상태를 유지한 채 약간의 감정 변화만을 유도하는 정도이나, 제대로 걸었을 때는 대상자 내면의 깊숙한 곳에 잠든 기억을 일깨우는 건 물론, 암시에 정통한 자가 정말 작정했을 경우 대상자의 기억 조작마저 가능하다. 그리고 지금. “후후.” 지옥 대공이 머리를 푹 숙인 채 미동도 않는 김수현을 보며 만족한 미소를 짓는다. 자신이 발동한 암시가 제대로 먹혔음을 확인한 것이다. 그 상태로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크흐….” 별안간 머리를 숙이고 있던 김수현의 입에서 나직한 침음이 흘러나왔다. 이제 서서히 깨어날 때가 됐다는 일종의 신호. 그러자 김수현을 바라보는 지옥 대공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대가 과연 어떤 꿈을 꾸면서 일어날지 기대되는군.” 사실상 지옥 대공이 암시를 사용한 이유는 간단했다. 뚜렷한 이유 없이 자꾸만 빼는 행동을 보이는 김수현이 너무 갑갑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화정도 이번에는 군말 않고 지옥 대공의 암시를 용인한 것이고. 그러한 결과, 김수현은 현재 상당히 강력한 암시에 걸린 상태였다. 물론 기억이 조작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아까 어탑에서 만났을 때 스리슬쩍 걸었던 암시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강도였다. 그 정신력 강한 김수현이 단번에 가수면 상태에 빠졌을 정도였으니까. 그럼으로써 지옥 대공이 노린 효과는 하나. 김수현의 ‘성’ 과 관련된 경험 중, 가장 강렬한 욕망으로 점철된 기억을 끄집어내 태도와 심리의 동시 변화를 꾀하는 것. 어떻게 보면 김수현이 마인드 트레이닝을 사용했을 때와 비슷한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잠시 후, 김수현이 완전히 머리를 들어올렸을 때. “…응?” 지옥 대공은 거의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인 지옥 대공은 김수현을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눈앞의 사내는 김수현이었다. 그래. 분명히 김수현이다. 그런데 김수현 같아 보이지가 않는다. 김수현에 한해서만 시간이 빠르게 흐른 걸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20대에 불과하던 청년이 갑자기 나이를 먹었는지 얼굴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나타났다. 피로에 한껏 찌든 낯은 30대를 넘어 거의 40대에 가까운 인상을 보이고 있었다. 거기다 차분해 보이던 눈동자는 흐릿하게 풀려 흡사 죽은 이의 눈을 연상케 했다. 지금 자살한다고 해도 하등 이상하다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음울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멍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던 김수현은, 문득 지옥 대공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리리스?” 가래가 끓는 듯한 잔뜩 쉰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리리스라?’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지옥 대공이 아미를 찌푸렸다. “그대…? 지금 도대체 무슨 꿈을…?” 바로 그 순간. “리리스…!” 숨이 끊어질 듯이 외친 김수현이 지옥 대공을 향해 우악스럽게 달려들었다. 아차 한 순간, 그대로 덮쳐진 지옥 대공은 하릴없이 땅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아까와는 상황이 반대로 됐다. 애초 김수현을 해할 입장도 아니었으나, 잠깐 딴 생각에 빠져 있던 사이 김수현의 접근을 허용한 것이다. 이윽고 지옥 대공이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지면에 엎드린 채 김수현에 깔려진 상태였다. “이, 이게 무슨…?” 겨우 고개를 돌려 김수현을 바라본 지옥 대공은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까 흐릿하게 풀려 있던 눈동자는 온데간데없다. 어느새 벌겋게 충혈된 흉신악살과도 같은 눈에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지옥 대공을 갈기갈기 찢어 죽일 듯한 흉흉한 증오가 폭발하고 있다. 그 증오는 지옥 대공마저도 잠시나마 공포를 느끼게 할 정도로 맹렬한 분노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래. 지옥 대공은 암시를 사용했고 화정은 용인했다. 그 과정에서 두 존재가 실수 혹은 간과한 게 있다면, 딱 하나였다. 바로 김수현이 어떤 삶을 헤쳐왔는지 정확히 모르는 상태서, 현재의 모습만 보고 지레짐작해 암시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 작품 후기 ============================ 아, 오늘 많이 늦었네요. 중간에 구상을 한 번 변경하고 새로 적느라 많이 늦어졌습니다. 원래는 지옥 대공과 화정이 김수현을 도발하고, 그 도발에 넘어간 김수현이 SM 플레이로 넘어가는 내용으로 적으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읽어봐도 김수현이 열이 받는 과정이 상당히 어색해서요.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삭제했습니다. 그래도 전부 삭제하는 건 아까워서, 내용을 조금 남겨두기는 했어요. 아래 내용은 그냥 가볍게 읽어주세요. _(__)_ * “그때랑 지금이랑은 다르잖아.” 나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다 문득 정말로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어 결국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입을 열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잠깐만 시간 좀 주면 안될까?” 지옥 대공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한숨을 흘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 그래도 곧 기승위 자세를 풀고 얌전히 옆으로 내려앉는걸 보니 무언의 허락인 모양이다. 겨우 몸의 자유를 되찾긴 했지만, 하도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다 보니 이제는 뭐가 뭔지도 잘 모르겠다. 갑자기 연초가 간절하게 생각나 품에 손을 넣자 다행히 연초가 잡혔다.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는 연초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 야! 나 담뱃불로 사용하지 말랬지! 화정이 빽 소리를 질렀으나 한 귀로 흘리며 연기를 푹 내뱉었다. 그렇게 애꿎은 연초만 뻑뻑 태우고 있자 지옥 대공이 살금살금 옆으로 다가와 인어 자세를 잡는다. “속으로 삭히지만 말고 말을 해보거라. 왜 나를 도와주지 않겠다는 것이냐?” 왜 도와주지 않겠다는 것이냐고…. 역시나. 지옥 대공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던 것인가. 하기야 나와 지옥 대공이 살아온 시간이나 환경이 다르니 서로의 입장과 관점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한편으로는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말이었다. 사실 화정이 왜 아까 그런 말을 했는지도 알고 있다. 아마 화정의 뜻도 나와 같은 목적에 초점을 두고 있을 테니까. 그래서 지금 이렇게나 갑갑해하는 것이고. 아무튼 그 마음은 알겠으나 그래도, 그래도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 지옥 대공은 아직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가 연초를 두어 번 툭툭 턴 후 말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너는 지금 내 애를 낳고 싶다는 거잖아.” “그렇지.” “그럼 그 아이의 어머니가 되겠다는 소리고.” “…응?” 시선을 돌리자 눈을 휘둥그래 뜬 지옥 대공이 보인다. 왜 저러는 거지? “아니야?” “그, 그렇지. 그대 말이 맞다.” “맞잖아. 아무튼 그러면 똑같이, 나는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는 뜻이겠지?” “…그, 그런데?” “그런데 라니. 말인즉 너나 나나 부모로서의 자격이 생긴다는 거지.” “…….” 그랬다. 화정의 말마따나, 아까부터 떡 한 번만 치라는걸 망설였던 이유는 바로 ‘잉태’ 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지옥 대공이 단순히 나와 한 번 자는걸 원했다면 아마 기꺼이 응했을지도 모른다. 몇몇 여인들한테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명분은 충분하니까. 어쩌면 지옥 대공이라는 존재와 잠자리를 한다는 사실에 한껏 흥분했을 가능성도 있고. 하지만 ‘아이’ 가, 아니 ‘내 아이’, ‘내 자식’ 이 연관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약 3년 전, 나는 형, 한소영과 같이 지구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제로 코드를 사용했다. 그리고 2회 차를 시작한 이후, 지금껏 그 목적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며 생활하고 또 활동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해보면 미련이나 후회를 남길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 차후 돌아갈 때 스스로 발목을 잡을만한 여지를 남기지 않으려 노력한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아이가 태어나는 건 100% 부모에게 책임이 있다고 봐야 하는 이상, 자식을 만드는 일은 가장 경계해야 할 요소 중 하나였다. 만에 하나 내 아이가 태어난 상황에서 2회 차의 끝을 봤을 시, 지구로 돌아가는 길이 썩 깔끔하지만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다른 세상에 내 피를 이은 아이가 있다고 가정해보면, 어떤 식으로든 신경이 쓰이지 않겠는가. 최악에는 지구로 돌아가서도 아이가 생각나 홀 플레인을 그리워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고. …기껏 지구로 돌아갔는데, 홀 플레인을 그리워한다? 그것은 내가 절대로 바라지 않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제껏 어지간하면 거주민과 관계를 가지지 않은 건데…. 그 누가 알았으랴. 설마 이런 상황을 맞이할 줄을. “…킥.” 그때였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한참 고민하던 찰나, 돌연 누군가 소리 죽여 웃는 소리가 들렸다. “……?” 시선을 들자 아까와는 달리 아예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린 지옥 대공이 보였다. 지옥 대공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이따금 가볍게 어깨를 떠는 게 꼭 웃음을 참는 모습처럼 보인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까부터 연신 잔소리를 하던 화정도 어느 순간 침묵하고 있다. 갑자기 이러니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옥 대공?” “……!” 그 순간, 지옥 대공의 온몸이 크게 움찔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덜덜 떨면서 나를 돌아본다. 이내 완전히 나를 돌아본 지옥 대공의 양 볼은 매우 빵빵하게 부풀려진 상태였다. …갑자기 왜 저래? 그래서 한 번 더 입을 열려는 찰나. “끅…!” - 푸…! “아, 아하하하하하하하!” - 푸하하하하하하하! 두 여인의 신명 난 웃음 소리가 귓전과 머릿속을 동시에 울렸다. 0667 / 0933 ---------------------------------------------- 2. 지옥 왕. 꿈. 꿈이다. 꿈을 꾼다. 그래. 나는 꿈을 꾸고 있다. 말인즉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상황. 그러니까 이걸 루시드 드림이라고 하던가? 아무래도 좋다. 아무튼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약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우선 첫 번째. 시야와 의식이 이상하다는 것. - 미, 미안해! 내, 내가 잘못했어! - 요, 용서해줘! 부탁할게! 바닥에는 왠 여인이 쓰러져 애처롭게 애원하고 있었는데, 한 사내가 조금도 아랑곳 않은 채 무참한 폭행을 가하고 있다. 여인의 턱을 걷어차고 복부를 연거푸 강타하는 사내는 다름 아닌 ‘나’ 김수현이었다. 헌데 그렇게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제 3자의 입장에서 지켜보는 또 하나의 내가 있었다. 물론 이것 또한 또 하나의 나. 즉 시야가 매우 미묘하다. 유체 이탈을 한 것도 아닌데, 내가 나의 모습을 보고 있다. 그러는 동시에 폭행을 가하는 또 하나의 나와 시야를 공유하고 있으니, 생각해보라. 이상하지 않은가. 이러나저러나 꿈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그리고 두 번째.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 사, 살려! 아니 살려주세요! 목숨만 살려주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겠습니다! - 지, 짖을게요! 짖을게요! 멍멍, 멍멍! 멍멍멍멍! 지금 눈에 보이는 김수현은 내 통제를 벗어난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해보면 의지대로 조종이 불가능한 상태라고나 할까? 그것뿐만이 아니라 나와 저 여인을 제외하면 주변의 모든 형체가 희미하게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게 가장 확실한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 아니야! 나는 벨페고르한테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어! 그건 벨페고르가 멋대로…! - 하, 한소영은…. 지금 꿈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내가 1회 차 때 겪었던 경험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 악마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리리스를 포로로 붙잡았을 때의 기억이었다. - 제발…. 제발…. - 미, 미안해. 한소영은…. 내가 정말 잘못했어. 응? 그때였다. 문득 들려오는 앙칼진 외침에 나는 생각을 중단하고 현상에 집중했다. 리리스는 바닥에 엎드린 채 간신히 고개만 들고 있었다. 창백하기 짝이 없는 낯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상반신은 힘없이 바닥에 닿아 있고, 하반신은 무릎을 꿇은 채로 엉덩이만 한껏 치켜들었다. 목은 물론, 사지가 사슬이 묶인 채 개처럼 엎드려 있는 모습은 굉장히 비참해 보였다. 흡사 엎드린 암캐를 보는 듯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의복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은 이제 막 샤워라도 하고 나온 듯, 등에서 허여멀건 한 정액과 싯누런 오줌이 흐르고 있었다. 흠뻑 젖은 머리카락은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고, 등에 달린 검은 날개는 무참하게 찢겨진 상태였다. - 차라리 죽여! 이 개 자식아! - 하, 하지마! 제발 하지마! 미, 미안하다고 했잖아아아아아악! 리리스가 퉁퉁 부은 눈으로 두려움에 떨며 애원한다. 그러나 나는 들은 체 만 체 무시하고는 되레 미친 듯이 웃으며 리리스를 능욕한다. - 크하하하! 이거 정말 장관이잖아? 설마 대 악마인 리리스가 인간한테 목숨을 구걸할 줄은 몰랐는데? 부하들이 보면 아주 좋아하겠어? 아니, 벨페고르한테 보여주지 못하는 게 천추의 한일 정도야! - 아, 아니라고 했잖아! 네 형을 죽인 건 벨페고르가 멋대로…! 그것은 전신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의 살의(殺意). - 입 닥쳐! 설령 그렇다고 해도 너는 한소영을…! - 꺄아아아아아악! 쿵! 쿵! 쿵! 쿵! 어느덧 나는 리리스의 머리를 휘어잡은 채 허리를 미친놈처럼 흔들어 젖히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한 번 왕복 운동을 할 때마다 리리스의 이마를 사정없이 바닥에 내려찍는다. 그럴수록 리리스의 비명은 커져만 갔지만 나는 오히려 더 크게 웃으며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흐음. 돌이켜보건대, 아마 이때는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으리라 생각된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또 제 3자의 입장으로 보는 만큼 담담할 수 있지만, 적어도 이때 어떤 감정으로, 어떤 일념으로 행동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찌 이때를 잊을 수 있을까. 내 1회 차 인생 중 몇 안 되는 통쾌한 기억인데. 이때 리리스는 정말 죽여줬지.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대 악마들 중에서도 특히 리리스 및 그 권속들과 악연을 맺었던 것 같다. 리리스가 창조한 벨페고르는 박다연을 비롯한 수많은 지인은 물론, 결과적으로 형을 죽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리고 리리스는 한소영의 미모를 질투해 권속들을 시켜 간살, 아니 그 이상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게 한 장본인이었다. 아마 내가 아는 한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은 사용자들 꼽으라면, 단연코 한소영을 첫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보지 마. 수현아…. 부탁해…. 제발…. 제발 나를 보지 마!’ …이런 씨발. 그때를 생각하니까 또 열이 받는군. 속으로 억지로 분을 삭히는 사이, 어느새 나와 리리스 사이로는 또 다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내가 검을 꺼내 들어 역수로 돌려 잡고 나서, 칼자루를 리리스의 항문으로 억지로 쑤셔 넣는 광경이었다. - 아아아아아아아악! 리리스는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지만, 곧 항문에 칼자루가 꼽힌 채 필사적으로 엉덩이를 흔들기 시작했다. 나는 엉덩이를 흔드는 방향에 따라 이동하는 검을 피하며 비열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면서 풀 스윙으로 드럼을 치듯이 리리스의 엉덩이를 교대로 후려갈긴다. 아, 저 광경 기억난다. 아마 나를 죽일 기회를 주겠다며 저랬던 것 같은데. 물론 실상은 조롱하려는 의도였고, 리리스가 힘이 빠져 검이 늘어질 때마다 엉덩이를 때리면서 응원했을 것이다. 그렇게 리리스를 다양한 방법으로 능욕하는 또 하나의 나를 보고 있자니, 절로 싱거운 웃음이 나온다. 여하튼 어느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 꿈을 보여주는 건지는 모른다. 그러나 설령 기우일지라도, 이 꿈으로 나를 흔들려는 목적이었다면 완전한 오산이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아니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오죽하면 이 꿈이 조금 더 길게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리리스. 안 그래도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 거의 잊고 있던 기억이었다. 사실 리리스와 관련된 일을 떠올리기 싫었다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어쨌든 이렇게 꿈을 꿈으로써 다시 명확하게 되새김질할 수 있지 않았는가. 그 결과 그동안 신경 쓰지 못했던 악마에 대한 적의를 더욱 확고히 다졌다는 기분이 든다. 그래. 현재 테라를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이기는 하지만, 그냥 얌전히 돌아가면 무언가 굉장히 억울할 것 같은 기분이다. 최소한 대 악마들에게 내가 받아야만 했던 느껴야만 했던 고통을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리리스를 암캐처럼 다루는 나를 보며 씩 미소 지었다. 그리고 이때의 기분을 조금 더 확실하게 느끼려는 일환으로 차분히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치지지지지직! 꿈의 의식에 동화되려는 순간, 느닷없이 눈앞에 커다란 노이즈 현상이 일었다. TV 신호에 잡음이 섞여 든 것처럼 무언가가 심하게 비틀리고, 이어서 흐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이 꿈의 현상에서 벗어나려는지,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른 듯 상황이 가속해서 돌아간다. 잠시 후. 불현듯 주변이 조용해졌다. 아까처럼 격한 시야의 흔들림도 나나 리리스의 말소리도 사라졌다. 결국 이상한 기분을 느껴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뜬 순간, 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뭐지?’ 홀연히 무언가가 변했다. 무엇이 변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저 희미해진 시야로 흐릿하기 그지없는 형체만이 보일 뿐. 꿈에서 깬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러고 보니 벌컥 몽롱함이 밀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에 머릿속에 혼란이 가득히 차오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야가 서서히 확보됨에 따라 시선을 내린 순간, 나는 내가 무릎을 꿇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약간이기는 하지만 환경이 변화했다는 사실도. 그뿐만이 아니다. 내 앞에는 여전히 알몸으로 엎드린 여인이 있었는데, 리리스가 아니었다. 명확히 보이지는 않으나 허여멀건 한 등에 흐트러진 용암과도 같은 머리카락은, 여인이 지옥 대공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의아함과 허탈함이 동시에 찾아왔다. 왜 리리스가 사라졌는지, 그리고 왜 갑자기 지옥 대공이 출현했는지는 모른다. 허나 그동안 무뎌진 칼날을 갈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겼는데, 막 의식을 동화하려는 순간 상황이 변했다. 그러나. ‘…오.’ 점차 시야의 초점이 잡힘에 따라 지옥 대공의 눈부신 속살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아쉬운 마음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바로 앞까지 불쑥 치솟은 토실토실한 엉덩이와, 달덩이 같은 둔부를 받치는 반듯하고 미끈한 허벅지. 그리고 둔부 깊숙한 곳에 알맞게 돋은 도톰한 계곡과, 찰싹 달라붙은 살갗의 금에 방울 진 투명한 이슬을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이어서 항문에 칼자루부터 틀어박힌 검을 확인한 순간에는, 반대로 의아한 기분을 느꼈다. 왜 검이 저기에…? ‘아, 꿈인가?’ 그 순간 지금 이 상황이 아까 리리스 이후 꿈의 연장선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시드 드림을 꾸다 보면 가끔씩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하다. 그래 그래. 나는 확신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내가 아는 지옥 대공이라면 이렇게 비참한 상황까지 오도록 놔둘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어느새 나도 똑같은 알몸인 상태였는데, 그냥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니까. 꿈이라고 생각하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여유를 되찾고서 태연히 지옥 대공의 엎드린 자세를 감상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솟구친 심한 갈등에 몸부림쳤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카락도, 완만한 경사를 그리며 떨어지는 매끈한 등도, 탄탄한 허벅지도, 탄력적인 엉덩이도. 진정으로 모든 게 완벽했다. 도대체 어찌해야 할지 어느 곳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잠깐만. 어차피 꿈이잖아?’ 그때 어지러운 마음속으로 어두운 욕망이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말 그대로 지금 이 상황이 꿈이라면 어떤 짓을 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돌연 여러 기억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겁화의 태양 속에서 느껴야 했던 고통과 나를 갖고 놀던 지옥 대공의 모습까지. 하나하나 음미해보니 주구장창 당한 것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분한 마음이 솟았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가 우선 불쑥 내밀어진 엉덩이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살살 문지르듯이 쓰다듬자 당장에라도 녹아 내릴 것만 같은 뜨거운 감촉이 전해졌다. 아, 부드러워. “어이, 지옥 대공.” 엉덩이를 희롱하면서 말을 걸었으나 지옥 대공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혹시나 싶어 했던 마지막 확인 절차도 끝났다. 나는 만족한 기분으로 머리를 끄덕인 후, 엉덩이를 주무르던 오른손을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그리고. “네가 그렇게 싸움을 잘해?!” 그동안 눌러 담은 울분을 터뜨리며 힘차게 손을 내려찍었다. 짝! 차진 소리에 지옥 대공의 엉덩이가 크게 들썩였다. 둔부가 살이 좀 있는지 미약한 파문이 출렁이며 물결을 이룬다. 이내 손바닥에 전해지는 살결의 감촉은, 무언가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것 같은 기분을 가져다 주었다. 아주 손에 착착 감겨오는 게 감동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니, 아니야.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 “싸움을 잘하면 잘했지, 뭐가 그렇게 건방진데?” 찰싹! “그래! 나 오해했다! 그런데 애초 네가 잘못한 것도 있는 거잖아?” 철썩! “그리고 말이야. 뭐, 한 번 대주면 된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그게 네가 할 말이야? 내가 무슨 정액 창고냐고! 그러고 보니 눈빛이나 말투도 건방져서는 말이야! 부끄러워하면서, 마지못한 척 공손하게 부탁해도 모자를 판에!” 찰싸닥! “와. 이거 봐 이거 봐. 엉덩이 몇 번 쳤다고 거기서 물 뚝뚝 흘리는 꼬락서니 하고는. 솔직히 말해봐. 왕은 그냥 핑계지? 그냥 한 번 하고 싶었던 거지? 지금껏 몇 명이랑 한 거야? 이 음란녀!” 철써덕! 리리스의 꿈을 먼저 겪어서 그런가? 사실 개소리에 불과한 말들이었으나 지금 따라 술술 나온다. 나는 그야말로 지옥 대공의 엉덩이를 단죄하는데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냥 나오는 대로 지껄이며 온 힘을 다해 있는 힘껏 엉덩이를 후려친다. 강하게 칠수록 이리저리 흔들리는 살결이나 뜨거운 감각에 중독될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보송보송하던 새하얀 엉덩이가 어느새 새빨갛게 달아올라 씩씩 화를 내고 있었다. 이따금 간헐적으로 움츠러드는 것 같기도 했다. “어디서 잘했다고 씩씩거려? 움찔거리지 마!” 그러자 거짓말처럼 엉덩이가 움찔거리는 동작을 멈췄다. 문득 아직도 항문에 꽂힌 은은한 빛을 흘리는 빅토리아의 영광이 눈에 밟혔다. 무언가 거슬린다는 생각에 칼날을 조심스럽게 잡은 후, 그대로 빼려는…. 아니, 잠깐만. ‘빅토리아의 영광?’ 퍼뜩 시선을 들었다. 정말로 빅토리아의 영광이다. 두 번 보고 세 번 봐도 빅토리아의 영광이다.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오른쪽 귓불을 만졌다. 그러자 언제나처럼 만져지던 귀걸이가…. ‘없어?’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그 순간이었다. “핑계는…. 아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서글픈 음성이 조용히 귓가로 흘러들었다. 거의 동시에 삽시간에 정신이 멍해지며 몸이 잔뜩 굳는 느낌이 엄습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 그래도….” 한순간 나는 아무런 생각도 못했다. 그저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억지로 옮길 뿐. 그곳에는. “나도…. 처음이라는 말이다….” 무에 그리 슬픈지. 아랫입술을 꼭 깨문 채, 간신히 고개만 돌려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보이는 지옥 대공이 있었다. ‘…….’ …어? 0668 / 0933 ---------------------------------------------- 2. 지옥 왕. 그 순간이었다. “…이제 정신을 차렸느냐?” 아까와는 다른, 자조 어린 음성이 귓가로 흘러들었다. 애써 시선을 들자 어딘가 힘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지옥 대공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온몸에 흐르던 나른함과 몽롱함이 흩어지고 긴장감과 당혹감이 대신해서 채워진다. 그리고 비로소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흡사 강아지와 같은 자세를 하고 있는 지옥 대공의 모습은 보는 내가 무안해질 정도였다. 누군가가 세게 잡고 흔들었는지 아름다운 용암 빛 머리카락은 봉두난발로 흐트러졌다. 낯을 비롯한 몸 곳곳에 남은 타격(打擊)의 흔적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능히 짐작을 가능케 했다. 그뿐일까. 터질 듯이 새빨갛게 변한 엉덩이나 항문에 틀어박힌 칼자루는…. ‘내가 그랬구나.’ 꿈이 아니었다. 아니, 리리스까지는 정말 꿈이었는지 몰라도 지옥 대공부터는 꿈이 아니었다. 어떠한 이유인지는 몰라도 꿈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나 있었다. “잠꼬대가 조금 심하더구나.” 내 심정을 알았는지 지옥 대공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나 무언가 억지로 참는 듯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억양으로 보면 내 잘못은 아닌 것 같았으나, 그래도 나는 참담한 기분을 금치 못했다. 지옥 대공은 여전히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무어라 말하고 싶어 입을 열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저 쉰 소리만 흘러나올 뿐. 결국 나는 조심스레 칼날을 쥔 후 천천히 뽑아냈다. 빅토리아의 영광이 물에 젖은 소음을 발하며 빠져 나온다. “…흑.” 갑자기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 순간 나는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돌연 파르르 경련한 지옥 대공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흘렀다. 그러니까 지옥 대공이 울고 있다. 문득 뺨을 타고 떨어지는 한 방울 눈물이 너무나 서럽게 느껴졌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고 말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설마 지옥 대공이 저런 약한 모습을 보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괜찮으니 계속 하거라. 이왕이면 속히 끝내주었으면 좋겠구나.” 지옥 대공은 곧 울음을 삼키고는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게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은 모양. 그러나 가볍게 떨리는 아담한 어깨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까 성관계를 거부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나를 사내로 보지 않고 목적이나 도구로 보는, 그냥 후딱 해치우고 끝내자는 태도에 화가 났기 때문이다. 허나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또한 지옥 대공을 여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으니 결국에는 나도 똑같은 입장이라는 소리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더욱 할 말이 없어졌다. 돌연 입안으로 들어오는 미미한 바람을 느꼈다. 완전히 얼이 빠져 나도 모르는 사이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나는 입을 닫고 침을 삼켰다. 지옥 대공은 계속 하라는 듯 여전히 강아지 자세를 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혼란이 가시질 않는다. 나는 여기서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결국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문득 아까 지옥 대공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자신도 이번이 처음이라고. 그러자 아까 지옥 대공이 흘린 눈물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갈 것 같았다. 수천 년 동안 바라왔던 목표가 이루어지기 직전에서 지옥 대공도 분명 모종의 기대는 했을 것이다. 특히나 첫 경험이라는 점에서 그 기대는 더욱 증폭해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고. 그런데 내가 그 첫 경험을 망칠뻔했다. 아니. 망쳤다. 지금 벌어진 상황은 이미 지옥 대공의 기대를 산산이 조각 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 엎질러진 물은 담을 수 없지만, 깨진 조각은 붙일 수 있다. 주변은 아까부터 조용했으나 공기는 묘하게 뜨거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더 이상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후끈하면서도 뜨끈뜨끈한 열풍이 나와 지옥 대공을 감싸고 있었다. 흡사 지금 이 자리에서 탄생될 새 생명을 기대라도 하듯이. “그대여…. 제발…!” 이 상태가 지속되는 게 수치스러운지 지옥 대공이 안타깝게 부르짖었다. 목소리는 아직도 살짝 젖어 있었다. 나는 숨이 가쁜걸 느끼고는 차분하게 고르며 가슴을 추슬렀다. “저기.” 결국 그 기류에 이끌려 나는 멍하니 입을 열었다. “그럼 계속 할게.” 지옥 대공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고개를 한 번 끄덕였을 뿐. 나는 여전히 같은 자세를 하고 있는 지옥 대공을 응시하다가 빨갛게 물든 엉덩이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 그러자 깜짝 놀랐는지 엉덩이가 움찔 움츠리는 게 보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엉덩이를 때리지 않았다. 그저 미안하다는 생각으로 느릿하게 부드러이 어루만졌다. 잠시 후. 나는 양손으로 골반을 잡아 억지로 강아지 자세를 흩트렸다. 그렇게 지옥 대공의 몸이 빙글 돌아 나를 마주하고, 뜻 모를 묘한 감정이 깃들어 있는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정신을 잃은 사이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전부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최소한,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를 지옥 대공의 첫 경험을 좋은 추억으로 남겨주고 싶었다. 그리고 정 성관계를 맺어야 한다면 행동으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지금은 그 생각뿐이었다. 나는 한 손으로 뺨에 자국 진 눈물을 닦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면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리해주었다. 그러자 불안하게 흔들리던 한 쌍의 눈동자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한다. 반대로 이번에는 내 시야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드러난 지옥 대공의 몸매는 진정 완벽하다고, 아니 완벽이라는 말이 모자랄 정도로 엄청났다. 아까 생각한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탐스럽다 생각될 정도의 아름다운 선을 그리는 쇄골과, 커다란 밥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먹음직스러운 흰 젖무덤. 그리고 언덕 중앙에 도도록이 솟은 연한 붉은색의 젖꼭지…. 그 아래로 잘록한 선을 그리는 아랫배와 군살을 찾아볼 수 없는 허리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그뿐일까. 감히 손을 대는 게 죄악이라 여겨질 정도의 미끈한 허벅지와, 가랑이 사이로 도톰하게 오른 살에 찰싹 붙은 붉은 솜털은 그야말로 고혹적이기 이를 데 없는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침이 넘어간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젖가슴으로 돌진해 얼굴을 비비고 싶었다. 그 따뜻함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간신히 참았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지금부터는 나는 최대한 내가 아닌 지옥 대공을 생각하며 행동해야 한다. ‘처음이라고 했으니까….’ 지옥 대공은 눈만 깜빡깜빡 움직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안심하라는 의미로 미미하게 웃어준 후, 살짝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머리를 이동했다. 이어서 양손으로 허벅지를 부여잡고 좌우로 천천히 벌렸다. “그, 그대?” 깜짝 놀란 음성이 들렸으나 두 허벅지는 무기력하게 양 방향으로 벌어지고 말았다. 이내 활짝 개방된 가랑이 사이로 붉은빛 솜털을 따라 깊숙하면서도 반듯하게 그어진 계곡선이 보였다. 그 어느 곳보다 열화와 같은 열기가 느껴지는 그곳은, 허벅지를 벌렸음에도 발그스름한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나는 허벅지에서 손을 떼고 외음부 주변으로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어진 살 틈을 최대한 조심스레 좌우로 벌렸다. 수줍게 닫힌 계곡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다. 그러자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걸까. “자, 잠깐! 지금 무얼 하려는…?” 지옥 대공이 이지러지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비틀었다. 그러나 이미 반 이상 열린 꽃봉오리는 흠뻑 젖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흡사 화려한 장미꽃이 활짝 피듯이 소중한 곳이 적나라하게 내부를 드러내면서, 깊은 구멍에서 지금껏 품고 있던 뜨거운 공기를 왈칵 토해냈다. 콧속을 가득 채우는 향기로운 살 내음에 취하며 나는 시선을 집중했다. 한껏 입을 벌린 동굴에는 날개를 연상케 하는 한 쌍의 주홍빛 꽃잎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더욱 안쪽에는 차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깊숙한 구멍이 나 있었는데, 가지런히 주름진 붉은 속살들이 연속돼 동굴처럼 뚫려 있는 곳이었다. “아….” 이내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속살이 선명한 붉은빛을 발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느덧 고른 숨도 상당히 거칠어진 상태였다. 당장에라도 이곳을 내 것으로 점령하고 싶다는 욕망이 불쑥 고개를 들었으나 겨우겨우 참을 수 있었다. 이제는 침을 삼키는 것만으로도 진정되지 않을 만큼 목이 바짝바짝 타올랐으나, 나는 억지로 참으며 입을 벌렸다. 그리고 입을 맞추는 기분으로 벌어진 꽃잎을 살그머니 머금었다. “그, 그곳은…!” 당황하는 음성이 연신 귓가를 때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미 입을 맞췄을 때부터 입가는 뜨거워지고 있어, 나는 망설임 없이 부드러이 흡입하듯이 빨아들였다. 그러자 후끈한 공기가 밀려들어옴과 동시에 묘한 맛을 내는 액체가 섞여 들어와, 나는 구멍을 더욱 크게 벌리며 혀를 비죽 밀어 넣었다. 다음 순간. “그, 그대는…! 어이하여 이 몸을 자꾸만 부끄럽게…. 흥아?” 혀가 내부를 파고든 순간, 지금껏 얌전히 있던 둔부가 펄떡 경련했다. 이어서 나를 밀어내려는 듯, 내 머리를 짓누르는 지옥 대공의 두 손이 느껴졌으나 어디까지나 겉 행동에 불과했다. 아마 정말로 밀어내려고 했으면 진작에 밀어냈을 것이다. 이렇게 힘이 빠진 행동을 보인다는 건 지옥 대공도 아까와는 다른 무언가를 느끼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 생각에 힘을 얻을 수 있어 나는 한층 현란하게 혀를 놀리기 시작했다. 음부에 맞춘 입으로는 계속해서 쭉쭉 빨아들이고, 혀는 속살을 하나도 빠짐없이 핥는다. “이, 이 못된…!” 지옥 대공의 음성이 들려올 때마다 나는 혀의 움직임에 변화를 주었다. 둥글게 말아 올려 음핵이 있는 곳을 건드리다가, 최대한 쭉 빼서 있는 대로 동굴 쪽으로 찔러 넣기도 했다. 그리고 혀끝으로 느껴지는 미끈미끈한 주름들을 세심하게 핥으며, 흘러나오는 뜨거운 액체를 들이켰다. 사실 액체라고 해봤자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무미(無味)한 맛이나, 이상하게 들이마실 때마다 목의 갈증이 더욱 심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윽…! 흑…!” 어느덧 나를 매도하는 지옥 대공의 음성을 뚝 끊긴 상태였다. 그 대신 야릇한 비음을 중간중간 흘려냈는데, 국부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억지로 참는 듯한 목소리였다. 어느덧 허벅지 부근은 투명한 액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시작부터 흡입을 멈추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 주름에 고이는 액체가 더욱 압도적으로 생성돼 홍수처럼 흘러 넘친다. ‘생각보다 많이 민감하네…. 아무튼 이 정도면 아픔이 덜 하겠지.’ 그렇게 이쯤이면 윤활유로는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혀를 뺐을 무렵, 돌연 조금 전부터 인중에 부드러이 비벼지는 작달막한 융기의 감촉이 느껴졌다. 살며시 낯을 떼자 눈앞으로 작고 동글동글한 무언가가 보였다. 상부 쪽 깊숙이 갈라진 살 틈을 뚫고 꼿꼿이 머리를 내민 그것은, 매우 자그마하면서도 어여쁜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부르르, 물기 젖은 채 애처롭게도 홀로 떨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돌연 나도 모르게 입을 오므리듯이 모으고 말았다. “이, 이제 끝났느냐?” 지옥 대공은 간신히 참아냈는지 숨을 헐떡헐떡 흘리며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다는 대답 대신, 처음 그랬던 것처럼 경련하는 음핵에 오므린 입을 맞추듯이 넣었다. 이어서 입안으로 들어온 공알의 존재를 느낀 찰나. “아, 아…?” 나는 지옥 대공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 기습적으로 “쪽!” 소리가 나도록 있는 힘껏 빨아들였다. 그 순간이었다. “흐아아앙!” 아까와 같은 미미한 신음이 아닌 처음으로 제대로 된 교성이 터졌다. 흡사 작살 맞은 물고기처럼 크게 펄떡거린 지옥 대공이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발작하듯이 몸부림쳤다. 이내 푸들푸들 떠는 허벅지가 좌우서 얼굴을 깊숙이 조여오는 동시에, 한껏 수축한 동굴에서 뜨거운 물을 흠씬 토해내었다. ============================ 작품 후기 ============================ 出師表 메모라이즈 글쟁이 로유진은 아뢰옵니다. 로유진은 시즌 4로 들어가기도 전에 잦은 휴재를 일삼고, 지금 외전을 연재하는데도 시간을 맞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현(現) 몸의 상태는 오랜 연재로 피폐해져 있으니, 이는 실로 소설이 흥하느냐, 망하느냐가 걸린 위급한 때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하되 독자를 곁에서 모시는 글쟁이가 악착같이 일일 연재를 잇고, 추석 조카들의 습격에도 스스로의 몸을 잊고 글을 적음은, 글쟁이가 독자의 남다른 사랑을 그리워하여 이를 보답하려 함인 줄 압니다. 글쟁이는 마땅히 독자의 읽으심을 두루 생각해, 저에게 주신 사랑으로 소설을 더욱 빛나게 하며, 뜻있는 독자들의 만족과 즐거움을 더욱 넓히고 키우려 노력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독자께서는 저에게 일일 연재를 이어가는 일을 맡겨 주시옵소서. 그리고 신이 만약 제대로 그 일을 해내지 못하면 그 죄를 다스리시고 선호작의 목록에서 삭제하옵소서. 만일 독자의 기대에 부응할 연재가 없다면 코멘트로 저를 꾸짖어 그 게으름을 밝히옵소서. 독자 또한 어여쁜 코멘트로 자주 의논하시어 스스로 그 길로 드시기를 꾀하소서. 욕설과 비꼼은 지양하시고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옛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겨 좇으시옵소서. 이 불민한 글쟁이는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이제 늦은 저녁으로 삼각 김밥을 먹고 힘을 내려니와, 편의점으로 떠남에 즈음하여 후기를 올리려 하니 눈물이 솟아 더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0669 / 0933 ---------------------------------------------- 2. 지옥 왕. 계속 들썩거리는 허벅지에서 눈을 떼자, 눈을 한껏 치뜬 채 온몸을 떨고 있는 지옥 대공이 보였다. 입을 앙 다물고 부르르 경련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음경이 한층 불끈 치솟는걸 느꼈다. 일견 웃는 것 같으면서도 우는 듯 보이는 표정은 신선하면서도 일종의 자신감을 가져다 주었다. 주르륵! 숫접게 벌려진 꽃잎 구멍이 한 번 더 상당량의 투명한 애액을 흘려냈다. 그게 마지막 절정이었는지 끊임없이 푸들거리던 지옥 대공의 몸이 살짝 가라앉는다. “후우…!” 이어서 무언가 대단히 만족한 듯한 신음이 새어 나와, 나는 안심하고 지옥 대공의 몸으로 올라탔다. 그러자 눈을 깜빡 뜬 지옥 대공이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 살그머니 얼굴을 붉히며 나를 노려본다. “그, 그대는…. 정말로 못됐구나.” “미안해. 많이 놀랐지?” “도대체 어디까지 이 몸을 욕보일 셈이냐? 얼마만큼 수치스럽게 만들어야 만족하려 하는가.” “하하하.” 나도 모르게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나는 웃고 있었다. 심히 부끄러워하면서 나를 흘기는 지옥 대공의 모습이 너무나 어여쁘다 느꼈기 때문이다. 이내 용암과도 같은 머리카락을 나는 천천히 쓸어 넘겨주었다. “치, 치우거라! 가, 갑자기 그윽하게 쳐다보고는….” “미안미안. 아무튼 이제 삽입할 거야.” “이 몸은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대가 멋대로…!” “네가 처음이라서 그랬어. 처음이면 많이 아플 수도 있거든? 그래서 어느 정도 물을 흘려 부드럽게 해놔야 그나마 덜 아플 거야.” 나는 애액이 해주는 윤활유 역할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지옥 대공은 할 말을 잃었다는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홱 옆으로 고개를 돌린다. “차, 참으로 쓸데없는 배려구나. 누가 필요하다고 했느냐?” 퉁명스럽기는 했으나 일부러 그렇게 말한 티가 팍팍 나는 어조였다. 마음 같아서는 저 발그레한 뺨에 입이라도 맞추고 싶었다. 허나 그랬다가는 또 한 소리 먹을 것 같으니 얌전히 할 일(?)이나 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도로 입을 닫은 꽃잎을 좌우로 벌리고, 그 입구에 내 음경의 끝을 갖다 대었다. 곧 하복부에 후끈후끈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동시에 심장이 두근두근 가슴을 울린다. 기대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지옥 대공이지 않은가. 어쩌면 홀 플레인 최강일지도 모르는 존재를 정복한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세찬 방망이질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그럼.” 흠뻑 젖어 물기를 발하는 작달막한 타원형의 동굴을 보며 가볍게 숨을 삼켰다. 나는 그대로 숨을 참은 채 남근을 귀두 부분을 구멍에 걸치듯 끼워 넣은 후, 천천히 밀어 넣었다. 길쭉한 살덩어리가 매몰되듯이 안으로 파고들어간다. 바야흐로 합일이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는 최대한 조심스레 집중해서 밀어 넣느라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저 뜨겁다는 기분만 들었을 뿐. 그러나 음경의 첨단부터 시작해 약 4분의 1 정도가 파고들었을 즈음. 무언가 뻑뻑한 감각과 약간의 저항이 느껴졌다. 나는 그것의 정체를 직감했다. 그리하여 단번에 뚫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더 힘을 주어 힘껏 누르듯이 남근을 찔러 넣었다. 그때였다. 우직, 우지직! 무언가 얇은 점막을 찢고 들어가는 감촉과 동시에. “어, 어헉?!” 나는 깜짝 놀라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도대체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지옥 대공의 동굴은 유난히 뜨거웠다. 정말로, 정말로 뜨거웠다. 처녀막을 찢고 깊숙한 곳까지 침범한 순간, 나는 흡사 펄펄 끓는 용광로에 남근은 넣은 듯한 감각을 느꼈다. 아니, 시뻘겋게 달구어진 쇳덩이로 쇠막대로 지져지는 듯한 기분. 마치 남근이 불타오르다 못해 그대로 용해돼, 지옥 대공의 자궁 속으로 살살 녹아 내리는 기분이었다. “흐아아아….” 그러자 고통을 가장한 희열이 물밀듯이 솟아올라 나도 모르게 앓는 듯한 신음을 내고 말았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뭐, 뭐야?’ 나로서는 분명 잠시 삽입을 멈출 생각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자극과 감촉에 잠깐 숨을 가다듬을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남근은 자신을 감싸듯 머금은 구멍 속으로 미끄러지듯이 빨려 들어가는 중이었다. 내 첨단이 찰싹 붙은 살갗을 가르고 파고드는 느낌이 여실히 전해졌다. 점차 정신이 멀어져 가는걸 느꼈다. 나는 어떻게든 멈추려 몸부림을 쳤지만, 지옥 대공의 동굴은 나를 절대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듯, 남근을 탐욕스럽게 꿀꺽꿀꺽 삼켜가고 있었다. 결국에는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내 사타구니가 지옥 대공의 허벅지에 부딪쳤다. 남근이 깊숙하게 들어간 것도 모자라, 아예 뿌리 끝까지 삼켜진 것이다. 나는 끝없는 늪지대로 빠져드는 기분을 느끼며 그대로 앞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풀썩! “그, 그대여? 갑자기 왜 그러느냐?” 뜻밖에도 지옥 대공의 음성은 약간 상기된 것 빼고는 이상함이 없었다. 시선을 들자 약간 의아해하는 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지옥 대공의 얼굴이 보였다. “너, 너, 너, 너는…?” 어느새 나도 모르는 사이 치아가 딱딱 부딪쳤지만, 간신히 말을 할 수 있었다. “나?” 지옥 대공이 반문한다. 이어서 돌연 내 등을 감싸 안고 토닥토닥 두드려주는 아늑한 손길이 느껴졌다. “글쎄. 조금 뻐근한 느낌이 들어 나도 모르게 그곳에 조금 힘을 주기는 했다만…. 아무튼 꽉 들어찬 느낌이 그리 나쁘지는 않구나. 생각보다 그리 아프지도 않고. 이게 모두 그대 덕분인가?” 미, 미친. 이게 조금 힘을 준 정도라고? “그나저나 그대는 갑자기 왜 그러지?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것이냐?” 아니. 아픈 게 아니야. “이, 이건….” “으응?” “네, 네 안이 너무 기분 좋아서….” “기, 기분이 너무 좋다?” 지옥 대공의 당황한 음성이 들려온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지옥 대공의 내부는 지금껏 내가 겪지 못한, 그야말로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물기에 젖어 촉촉하면서 끈끈한 살의 느낌은 물론, 한순간 강렬하게 죄어오는 듯 하면서도 미끄러지듯이 빠져들 때의 느낌은 진정 전율 그 자체였다. 그뿐일까. 완전히 삽입되고 나서는 남근에 질 주름이 모조리 달라붙어 감싸 안는데, 아까 혀로 조금 희롱했다고 심통이라도 부리듯 쭉쭉 빨아들이고 있다. “자, 잘은 모르겠으나…. 그, 그렇게 기분 나쁘게 들려오는 말은 아니구나.” 정말 생각 같아서는 이대로 허리를 흔들어 미친 듯이 쑤셔 박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도 숨이 막힐 정도로 꼭꼭 조여오고 있는데, 여기서 더 큰 자극을 받으면 당장에라도 사정할 것 같다. 어떻게든 참으려는 일환으로 이를 바드득 깨물었으나, 사이사이 앓는 듯한 신음이 새어 나온다. 아까 지옥 대공이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 알 것도 같다. 그때였다. “흐응~?” 이제 여유를 되찾은 걸까. 지옥 대공이 무언가 알겠다는 듯이 묘한 비음을 흘렸다. 이어서 내 등을 두드려주던 손으로 느닷없이 나를 세게 끌어안기까지. 영문을 모르는 행동이었으나 우선은 진정해야 한다는 생각에 속으로 애국가를 불렀다. 그 순간이었다. “흣…!” 문득 지옥 대공이 가벼운 기합을 발하는 동시에. “크흑?!” 갑자기 남근을 한껏 끌어당기는 무시무시한 흡인력이 느껴졌다. 마치 이대로 터뜨려버리겠다는 듯, 쭈욱 빨아들이는 압박감이 주는 고통에 나도 모르게 신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끊어질 것만 같은 고통은 잠시. 이내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쾌감으로 변해 정신을 놓을 듯한 황홀한 쾌락으로 변했다. 잠시 후. 시야가 새하얗게 물드는 착시가 일었다. 나는 저절로 눈앞의 유려한 상반신을 껴안고 말았다. 그리고 쾌락이 차올라 절정에 이를수록, 지옥 대공을 있는 힘껏 으스러져라 끌어안았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나는 지금껏 참고 참아왔던 정액이 요도를 통해 폭발적으로 분출하는걸 느꼈다. “으…! 아…!” 요도 끝으로 울걱울걱 토해지는 정액의 느낌. 그러고 보니 이제껏 정말 오랫동안 참아온 것 같다. 그동안 농축된 모든 것들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와, 나는 마치 오줌을 싸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당혹한 기분에 얼른 남근을 빼내려고 했지만, 그것조차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급하게 빼려는 기미를 느꼈는지, 동굴이 어딜 가냐는 듯 꼭 옥죄어오며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뿌리 끝에서부터 쥐어짜져 모든 정액을 토해내고 나서야, 나는 간신히 들러붙은 살을 떼고 벗어날 수 있었다. 내부가 어찌나 뜨거웠는지 세상으로 나온 남근은 빨갛게 익어 있었다. 오죽하면 스치는 공기가 시원하다 느낄 정도였다. “하아…! 하아…!” 어느덧 숨도 한껏 거칠어져 있었다. 그렇게 겨우 이성을 되찾고 나서 처음 느낀 감정은 바로 창피함이었다. 정말 어디 쥐구멍에 들어가 숨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건 거의 집어넣고 한 번 왕복하지도 못하고 싸버린 셈이 아닌가. 물론 그 정도로 기분이 좋기는 했지만…. ‘시, 실망한 게 아닐까?’ 혹시 모를 생각이 들어 시선을 들자 마침 주섬주섬 상반신을 일으키는 지옥 대공이 보였다. 다행히(?) 얼굴은 자신의 내부를 때린 정액을 느꼈는지 무언가 신기하다는 기색을 띠고 있었다. 이내 조금 더 허벅지를 벌린 지옥 대공이 고개를 내려 가랑이 사이를 들여다본 순간이었다. “아…!” 뜨거운 구멍을 뿜어내는 구멍 사이, 핏물 섞인 희끄무레한 액이 진득하게 흘러나와 지면으로 뚝 떨어졌다. 한순간 피를 보고 식겁했으나 지옥 대공이 처녀였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숨을 흘릴 수 있었다. “이, 이 아까운 것이….” 그러자 지옥 대공이 안타깝다는 음성으로 말하며 상반신을 굽혔다. 그리고 떨어진 액을 모아 담으려는 듯한 자세를 보여, 반사적으로 두 손을 잡아채 저지하고 말았다. 지옥 대공이 왜 그러냐는 낯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응? 흐른 것을 도로 넣으려고 하는 것이다만.” “아니, 그걸 왜 다시 넣어.” “그야 당연히…. 아깝지 않느냐. 어쩌면 왕이 될 수도 있는 것들인데.” 그냥 웃고 넘기기에는 지옥 대공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허벅지 사이 꽃잎은, 부드러이 벌어졌다가 오므라지기를 계속 반복하며 연거푸 혈과 액이 섞인 액체를 토해내는 중이었다. 새삼 내가 얼마나 많이 쏟아냈는지 알 수 있는 현상이었으나, 그보다 앞서 남근이 기지개를 피며 몸을 일으켰다. 자기는 아직 부족하다는 듯, 구멍을 벌름거리는 꽃잎의 움직임이 무척이나 도발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까 그 감촉을 다시 느껴보고 싶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조루의 오명을 씻고 싶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는 지옥 대공의 시선을 피한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 여기 아직 많이 있는데….” “……?” “구, 굳이 모아 담을 필요까지는 없는데….” “…….” 그러자 돌연 남근 끝으로 찌릿한 시선이 느껴졌다. 혹여 지옥 대공이 이제 끝났으니 볼 일이 없다거나, 아니면 화를 내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들었다. “흐, 흐흠!” 그때 갑자기 어색한 헛기침이 한두 번 들려오더니. “그, 그럼….” 손바닥으로 지옥 대공의 두 손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감촉이 들었다. “자, 자꾸 빠져나가는 게 아쉬우니까….” 바로 시선을 돌린 순간 나는 살짝 놀라고야 말았다. 어느새 지옥 대공이 양 다리를 대담하게도 벌린 채 아까처럼 등을 대고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의 것으로 대신 틀어막아 주겠느냐…?” 무언가 쑥스럽다는 듯 조용히 말하고는, 스스로 양손을 움직여 꽃잎을 활짝 벌렸다. ============================ 작품 후기 ============================ 1. Optolove : 어찌 어린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벌하게 하고, 단죄를 부탁함으로써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자 타의 억압을 받아들이는 것이냐. 실로 어리석다고 언하지 않을 수가 없으리. 첫째로 중요한 것은 성함이요, 둘째가 비로소 언약이 되는 것이거늘, 어찌 언약을 지키고자 자신의 굳건함에 칼집을 파내어 난도질하는 것이냐. 그대, 작가로써 독자와의 언약을 정행하고 타에게 솔선하며, 그 의와 무를 다하는 것은 실로 정하고 완한 자세가 아니라고는 하지 않으나. 다만 본인을 생각하여 타에게 자신을 벌해달라 부탁하지 말고, 그대 스스로 자신을 다그치고 관리하는 것이 더 좋은 발전을 위한 정도가 될 것이니라. 2. 그림자의은둔자 : 어찌 그대는 나의 마음을 아프데 하는 것이냐... 힘들면 힘들다고 말을 해야지, 어찌 속으로 품고만 있었던 게냐.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러니, 선호작 목록에서 그대를 삭제하라는 말 따위는 하지 말거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나의 마음을 속 썩이지 말고 어서 빨리 몸 상태를 회복하거라. 사랑한다. 로유진, 나의 사랑이자 인연이여. 3. 대형고철 : 신에게는 아직 타자를 칠 수 있는 10개의 손가락이 남아있나이다... 4. 들마로 : 들어보소 들어보소. 댓글 사이 들어보소. 글쟁이의 휴재사이 독자들의 일월원성. 일일연재 불야성원 휴재지일 첫코사수. 보신지체 일체무향 건원일성 일필휘지. 살으리랏다 살으리랏다. 조아라에 살으리랏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5. 땅ol : 조아라 소설들 중 남주들은 호구들이요 다른 것은 bl들이니 조아라를 들어와도 볼 것이 없어 게임만 하게 되네. 하지만 그 중 빼어난 소설이 하나 있으니 그 이름 메모라이즈이여라. 호구들과 게이들이 판칠 때 상남자가 보이니 어찌 이것을 아니 볼 수 있을까. 앞으로도 힘내어 좋은 소설 만들어가세. 무, 무언가 코멘트들이 더 대단해…. ;ㅇ; 0670 / 0933 ---------------------------------------------- 3. 한편, 같은 시각. - 1주일 전. 북 대륙. 남부 소 도시 모니카. 머셔너리 클랜 하우스. 강철 산맥 공략이 시작된 이후, 머셔너리 클랜 하우스는 한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주력 인원이 대거 공략에 참가해 사람이 없음은 물론, 임무를 수행할만한 사용자도 없어 용병 의뢰를 받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남은 사용자들은 공략이 끝날 때까지 무기한 휴가를 받은 상태로, 하루하루 잡무를 처리하거나 수련을 하는 등 소일거리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러나 오늘 1층 로비는 때아닌 발길들로 북적거렸다. 늦은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10명이 넘는 사용자들이 로비에 모여 앉아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평소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마주칠 시간이 없다는 걸 감안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어르신. 요즘 식사 때도 잘 보이지 않으신 것 같은데요. 그러다 몸 상하십니다.” “요즘 들어 입맛이 없어서…. 쿨럭쿨럭! 아무튼 괜찮네. 딱히….” “도도야아. 나는 먹는 게 아니야아.” “삐삐?!” 서로 적당한 곳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용자들. 박상남은 건강이 걱정된다는 말로 말을 붙이고, 이만성은 거센 기침을 토하면서도 머리를 가로젓는다. 아기 페가수스 도도는 누군가의 머리를 앙 깨물고 있었으며, 아름다운 은발을 찰랑이는 소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도도를 떼어내려 애쓰고 있다. 누가 봐도 한가로운 풍경. 그러나. 뚜벅뚜벅…. 뚜벅뚜벅….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사용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조용해졌다. 허나 예전 같았으면 신나서 달려왔을 걸음 소리는 오늘따라 왠지 모르게 힘이 없는 듯했다. 사용자들도 그걸 느꼈는지 하나같이 의아한 기색을 비췄다. 그렇게 로비에 뜻 모를 긴장이 감돌 즈음, 계단에서 내려온 누군가가 천천히 모습을 보였다. “…모두, 바쁜 와중 제 호출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사용자는 다름 아닌 조승우였다. 어딘가 멍해 보이는 낯에서 이상한 기색을 느낀 걸까. 망연한 얼굴로 로비 중앙으로 걸어 들어오는 조승우를 보며 사용자들은 서로만 번갈아 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 거 조승우씨? 가오 좀 작작 잡아요. 저번에도 비슷하게 장난쳤다가 그렇게 한 소리 들어놓고서는….” 이윽고 걸음을 멈춘 조승우를 보며 박상남의 옆에 앉은 노노가 투덜거렸다. 현재 북 대륙에 남은 사용자들은 강철 산맥 공략 경과를 꼬박꼬박 전해 듣는 입장이었다. 물론 실시간까지는 아니었고, 각각 지역 공략이 끝날 때마다 한 번씩 전해 듣는다. 이후 원정대가 공략 완료 보고를 올리면, 입구 전초 기지에서 그 보고를 받고 정리해 북 대륙 사용자들에 전하는 경로였다. 이렇게 계속해서 경과를 전해들은 만큼 남은 사용자들도 어느 정도 돌아가는 사정은 알고 있었다. 즉 머셔너리가 2 지역 공략을 무사히 마치고, 형을 도우러 3 지역 공략까지 참가했으며, 그 3 지역 공략 마저 완벽하게 완수했음을 들어 알고 있다. 그리고 3 지역을 떠나 이제 아틀란타로 돌입했다는 사실까지. 사실상 강철 산맥 공략은 이제 완전히 끝났다고 봐도 좋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방금 노노의 투덜거림은 이유 있는 투덜거림이었다. 이제 도시만 찾으면 된다는 걸 뻔히 알고 있는 상황에서, 저렇게 요상한 태도를 잡는 조승우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물론 아틀란타 돌입 후에도 괴물이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으나 조승우에게는 전력이 있다. 일전 3 지역 공략 결과를 발표할 때, 침통한 표정을 가장해 모두와 연락이 끊겼다는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다. 말인즉 양치기 소년이 됐다고나 할까. 마르가 곧바로 ‘거짓말쟁이!’ 라고 외쳐 장난임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그 당시 전멸이라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모든 사용자가 심장이 멎는 기분을 느꼈다. 이후 이만성이 드물게도 크게 화를 냈고, 조승우는 정중한 사과와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약속으로 넘어가기는 했지만…. “그럼 중앙 관리 기구가 전달한….” 이윽고 조승우가 나직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믿을 수 없다는 기색과 괴로운 기색이 절반씩 섞인 표정은, 누가 봐도 좋은 소식을 듣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아 승우씨.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어르신 또 화내시는 거 보고 싶어서 그러세요?” “그냥 빨리빨리 얘기해요~. 어차피 다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전과가 있어서 그런 걸까. 사용자들은 조승우의 말을 끊고 핀잔을 주었다. 오죽하면 옹기종기 모여 있던 아기들은 물론, 유미와 도도도 소리 내어 야유를 보낼 정도였다. “…….” 그러는 와중 홀로 차분함을 유지하는 이만성만이 복잡하고도 미묘한 얼굴로 조승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거짓말이기를 바라며 크게 혼낼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말하는 태도나 목소리가 이전과는 다르게 굉장히 심상치 않다. 무언가 이상한 촉을 느끼고 있었다. “제, 제 4 지역 공략 결과를 여러분께 전달하겠습니다.” 그리고 곧 조승우가 말을 이은 순간, 사용자들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4, 4 지역이라고?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아미를 한껏 찌푸린 노노가 왈칵 성을 내며 소리를 질렀다. “강철 산맥은 제 3 지역이 끝 아니었어? 그런데 왠 4 지역?” “그, 그러니까…. 아틀란타 돌입 이후….” “아 말 좀 제대로 해봐요! 아니 아니. 이 사람 또 장난치는 거….” “…도시 발견 직전에서! 새로운 괴물이 출현했다는 말입니다!” 그때, 결국 참지 못했는지 조승우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마주 고함을 질렀다. 이어서 찾아온 잠깐의 침묵. 이 정도면 이제 장난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조승우 또한 입을 닫은 채 씩씩 숨을 흘리다가, 노노를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약간의 불편한 시간이 흐르고, 조승우가 입을 열었다. “비록 강철 산맥은 아니지만…. 중앙 관리 기구에서는, 새로운 괴물이 출현한 장소를 제 4 지역이라 정의한다고 전해왔습니다.” “그, 그게….” 이제야 농담이 아님을 깨달았는지 노노가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 뜨며 되물으려 했다. 그러나 박상남이 “여보. 일단 앉아요.” 라고 말하며 달래자 자리에 앉고는 한층 복잡해진 얼굴로 조승우를 응시했다. 이내 원래의 근엄한 얼굴로 돌아간 박상남은 침착히 숨을 고른 후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우선 계속 말씀해주십시오.” “…예.” 그러자 간신히 머리를 끄덕인 조승우는 손에 들고 있던 기록을 느릿하게 들어올렸다. 자세히 보면 기록을 잡은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은 박상남은 혹시 모를 소식을 대비해 마음을 가다듬었다. “우선 경과를 듣기로는…. 도시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새로운 괴물이 출현했다고 합니다….” 이윽고 조승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을 잇는다. “새로운 괴물은…. 중앙 관리 기구에서는….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괴물이라 추정하고 있으며….” “……?” “그 괴물이 입힌 피해는…. 아직도 집계 중이며…. 현재 실종과 사망자 수를 합쳐, 약 2000명을 훨씬 상회하는 것으로 추정 중이라 합니다….” “……!” 그러자 여기저기서 예상치 못했다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제껏 총 3번의 공략 중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지역이 바로 3 지역 공략 때였다. 거기서도 사망과 실종을 모두 합쳐 2000명이 안될 정도였는데, 제 4 지역에서 2000명이 넘는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아직도 집계 중이다? 어느덧 사용자들은 다른 차원에서 괴물이 등장했다는 말도 까맣게 잊은 채 멍하니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머셔너리 클랜이 입은 피해는….” 왜냐하면 바로 이게 가장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에. “사망 5명에 실종 2명으로….” 그 말이 나온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사망자 5명에 실종자 2명. 머셔너리 클랜으로서는 강철 산맥 공략 중 처음으로 피해가 났다. 그것도 7명이나. 결국에는 설마 설마 하던 예상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물론 공략 도중 사망자나 실종자가 나오는 경우는 다반사였다. 그러나 이번 강철 산맥 공략의 머셔너리 클랜의 참가 인원은 약 30명. 그 중 7명이나 명단에 올랐다는 소리는 거의 2할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는 소리였다. 어느덧 로비를 감돌던 두근두근한 긴장감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불안한 기운이 한 가득 메워오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조승우가 말을 이었다. “사망자 명단은…. 사용자 엄백현…. 박효찬…. 서지훈…. 이우석…. 그리고 거주민 헬레나…. 이상 5명이며….” 그렇게 한 명 한 명의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사용자들의 낯에 안타까움의 빛이 스친다. 호명된 사람들은 모두 이름 높은 사용자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엄연한 한 명의 용병으로 제 몫을 해주던 이들이었다. “그리고 실종자 명단은…. 먼저 사용자 김한별과….” “무, 무어라고!” 그때였다. 김한별의 이름이 거론된 순간, 누군가 탕, 탁자를 세차게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린 이들은 눈을 찢어질 듯 크게 뜬 이만성을 볼 수 있었다. 사실 이만성은 뒷방 늙은이 처지까지는 아니었지만, 비 전투 사용자의 처지는 어디를 가도 비슷하다. 클랜 내 중심은커녕 큰 관심을 받을 수 없는 입장이다. 그런 이만성에게 지속적으로 꾸준한 관심을 보여온 사용자가 바로 김한별이었다. 보석에 관한 심도 깊은 지식을 전수 받은 이후, 김한별은 이만성을 거의 스승 그 이상으로 모시고 있었다. 의뢰를 수행할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하루걸러 방문해 안부를 물을 정도였다. 그래서 김한별이 실종됐다는 사실에 이만성이 이리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크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한별이가, 한별이가…!” “어, 어! 어르신! 우선 진정하시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박상남이 빠르게 일어나 이만성을 달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직 박상남뿐이었다. 다른 사용자들의 반응도 이만성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확실히 그럴 만도 했다. 김한별이 누구인가. 머셔너리 초창기 때부터 활동해온 여인이며, 시크릿 클래스까지 보유한, 클랜 내 나름대로 한 축을 담당하던 명성 있는 사용자였다. 아니. 그것을 떠나서라도, 오랫동안 활동해온 만큼 같은 클랜원으로서 친분을 맺은 이도 적지 않았다. 그런 만큼 앞서 호명된 사용자들 보다 더욱 커다란 충격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조승우가 처음 말을 할 때 실종은 2명이라고 했다. 그 말인즉 아직 1명이 남아 있다는 소리였다. “그, 그리고….” 망연히 자신을 바라보는 사용자들을 보며 조승우는 암담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평소의 세련된 필체가 아닌, 이리저리 휘갈긴 필체가 적힌 기록을 꾸기듯이 쥐었다. 잠시 동안 과연 말을 해야 할까 고민이 들었지만, 언젠가는 말을 해야 할 사항이었다. 결국 마음을 정한 조승우는 애써 입을 열었다. “크, 클랜 로드가….” 문득 ‘클랜 로드’ 라는 말이 나온 순간이었다. 이제 갓 6살은 되었을까. 마치 여신과도 같은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은발의 소녀가, 갑자기 푹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글썽였다. 모두가 충격에 빠진 가운데 느닷없이 조용한 정적이 찾아 들었다. 모두가 저도 모르게 호흡을 멈춘 탓에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심지어 이만성과 박상남까지도 행동을 멈춘 채, 한껏 놀란 눈으로 조승우를 보고 있었다. 클랜 로드. 머셔너리 클랜 로드. 이게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두 번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니까…. “사, 사망 및…. 실종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조승우가 간신히 경과 보고를 끝맺었을 때였다. “쿨럭, 쿨럭! 쿨럭쿨럭!” 돌연히 이만성이 거센 기침을 토하며 자리에 무너지듯이 주저앉고 말았다. “어, 어르신!” 그리고 크게 기함한 박상남이 얼른 일으켜주려는 순간. 우당탕! “마, 마르야!” 의자가 거세게 나동그라지는 소리와 동시에, 은발의 소녀가 등에 달린 13쌍의 날개를 움직이며 어딘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삽시간에 점이 돼 사라졌다. 그리고 사라진 소녀의 뒤를 유미가 급하게 뒤쫓기 시작한다. 잠시 후. “삐이이익!” 어느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온몸의 털과 꼬리를 빳빳이 세운 채 자신을 노려보는 아기 페가수스를 보며, 조승우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마치 거짓말하지 말라는, 빨리 다시 말하라는 듯 느껴지는 태도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야! 그럴 리 없네! 그럴 리 없어!” “이미 끝났습니다. 어르신. 이미 끝났다고요.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하, 한별이가! 크, 클랜 로드가!” “아직 실종이래잖아요. 우선 진정하시고 기다려봅시다. 어르신마저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예?” 이윽고 이만성의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박상남이 애원하는 음성도 들렸다. 분명 조승우의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죄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낀 조승우는 살그머니 머리를 떨궜다. 그리고. “…이상입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조승우가 쥐고 있던 기록이 너울너울 떨어져 바닥에 닿았다. 노노는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득달같이 달려가 기록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제 4지역 공략 경과 보고.』 (사망자 5명, 실종자 2명. 총 7명.) 1. 사망자 : 엄백현(5년 차, 궁수, 사용자), 박효찬(4년 차, 마법사, 사용자), 서지훈(5년 차, 사제, 사용자), 이우석(3년 차, 사제, 사용자), 헬레나(-, 마법사, 거주민). 2. 실종자 : 김한별(3년 차, 보석 마법사, 사용자), 김수현(3년 차, 검술 전문가, 사용자). ============================ 작품 후기 ============================ 오늘 코멘트 예상. 1. 씬은 더 안 나와요? Sol ) 더 나와요~. 그나저나 이번 씬은 평가가 갈리네요. 아직도 약하다! 고 말씀하시는 분과, 그래도 발전했네? 라고 말씀하시는 분으로요.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으니 우선 평가는 겸허히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예전에 이구동성으로 씬 별로에요! 라고 말씀하시던 때와는 달라졌네요. 하하하. :) 2. 외전 언제 끝나요? Sol) 외전은 4 파트까지 예정돼있습니다. 그러나 4 파트의 주제는 ‘**(스포 방지!)’ 로, 그렇게 긴 파트는 아닙니다. 사실상 이번 3 파트가 팔부능선을 넘는 단계라고 보심이 옳겠네요. :D 0671 / 0933 ---------------------------------------------- 3. 한편, 같은 시각. 아무것도 없는, 오직 잿빛 일색의 무간 지옥. 그러나 을씨년스러운 기운만이 감돌던 이 세상은, 어느 순간부터 뜨거운 열기로 가득히 메워지고 있었다. 열기의 근원은 세상의 중앙에서 서로 부둥키고 있는 사내와 여인으로, 바로 김수현과 지옥 대공이었다. 아까부터 육체 관계를 나누기 시작한 두 남녀는 어느새 형세가 역전된 상태였다. 등을 대고 드러누운 이는 더 이상 지옥 대공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옥 대공은 양 다리를 좌우로 벌리면서, 바닥에 누운 김수현은 배로 올라타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윽고 하늘을 꿰뚫을 듯 늠름하게 세워진 김수현의 남근을 보는 순간, 지옥 대공은 잠깐 멈칫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가느다란 목울대가 미미한 고저를 그리는가 싶더니, 지옥 대공이 스스로 음부를 한껏 벌렸다. 그리고 얌전히 무릎을 굽혀 내리며 자신의 구멍에 남근의 첨단을 맞춘다. 그러자 타원형으로 벌어진 구멍 안쪽, 붉은 살로 이루어진 깊고 깊은 속살과 가지런히 잡힌 질 주름이 김수현의 눈에 들어온다. 거기다 이미 계속해서 사정에 사정을 거듭한 탓에, 동굴에서 꿀렁꿀렁 흘러나오는 진득하고 희뿌연 한 액체까지. 그 광경은 일견 숨이 막힐 정도로 지극히 도발적이라, 안 그래도 우뚝 솟은 남근이 더욱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며 몸부림을 쳤다. 그러자 지옥 대공의 섬섬옥수가 흡사 달래는 듯한 손놀림으로 김수현의 남근을 살며시 움켜잡는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은 여전히 꽃잎을 벌린 채, 처음 조준한 그대로 둔부를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아…. 아….” 그렇게 조금씩 엉덩이가 내려가면서 지옥 대공의 입에서 심히 달뜬 신음이 터졌다. 잔뜩 상기된 지옥 대공의 표정은 어느새 완연한 흐트러짐을 보이고 있었다. 무에 그리 만족스러운지, 둔부가 짓눌리며 차츰차츰 남근을 삼켜갈 때마다 꽃잎에 달린 좌우 날개가 바르르 경련을 일으키며 기뻐할 정도였다. 그리고 잠시 후. 푹! 마침내 동굴에 남근이 뿌리 끝까지 파묻혀 들어간 순간, 지옥 대공의 엉덩이와 김수현의 사타구니가 맞닿았다. “아아…!” “어헉…!” 동시에 지옥 대공과 김수현의 입에서 터진 신음이 겹쳤다. 그 순간 지옥 대공은 자신도 모르게 낯을 찡그렸다. 열기로 달아오른 남근이 살을 갈라 파고들자, 예민한 속살이 활활 타들어 가는 듯한 감각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치 화로에 달군 굵직한 쇠막대기를 통째로 박아 넣은 듯한 기분. 그러나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표정은 곧 희열에 찬 환희로 변했다. 자신의 비좁은 동굴을 한 치의 틈도 없이 꽉 채우고, 그것도 모자라 지금 당장에라도 질을 터뜨릴 듯이 심히 부푼 남근은, 지옥 대공에게 무언가가 뻥 터질 듯한 만족감을 선사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언뜻언뜻 찾아오는 미묘한 쾌감에 몸서리치던 지옥 대공은, 두 손을 덜덜 떨면서도 김수현의 상체에 간신히 얹었다. 그리고 엉덩이를 힘겹게 살그머니 들어올렸다가, 흡사 내리치기라도 하듯이 있는 힘껏 둔부를 눌렀다. 찰싹! 그러자 이미 물기로 흥건해진 둔부가 살과 살이 맞부딪치는, 음란하기 짝이 없는 소음을 발했다. “흐윽!” “허억!” 또다시 겹치는 신음. 그러나 아까와 같은 애타는 소리가 아니었다. “하아…! 하아…!” “흐으…! 흐으…!” 완연히 거칠어진 서로의 숨소리가 허공에서 어울렸다. 결합 부분에서 물씬 흘러나오는 진한 살 내음은, 주변에 흐르는 열기를 힘차게 빨아들였다. 이내 휘몰아치는 열풍의 중앙으로 철썩철썩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연이어 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뜨거운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아무도 없는, 오직 둘만이 존재하는 세상이 후끈하게 달아오르는 가운데. 두 남녀는 머릿속을 깨끗하게 비운 채 서로를 탐하는 행동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러고 보니 둘만 있는 건 아니었다. 김수현의 내부에서, 마치 짐승과도 같이 헐떡거리는 둘을 지켜보는 존재가 하나 있었으니. - …하. 바로 화정이었다. - 야, 지금이 도대체 몇 번째야? 화정이 어이가 없다는 듯한 음성으로 투덜거렸다. 정확히 말해보면 지금이 6번째. 여기서 횟수의 기준은 절정에 오른 순간, 즉 사정 횟수로 계산했다. 처음 지옥 대공이 김수현의 애무에 절정에 오른 이후, 오직 김수현만 4번 연속 절정에 올라 사정한 상황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지옥 대공이 느끼지 못하는 석녀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처음 가볍게나마 절정을 맛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지금 행동만 봐도 알 수 있다. “아, 아…. 흑! 나, 나…. 흑!” 들썩들썩, 지옥 대공의 엉덩이가 흡사 엘리베이터라도 된 듯 올라갔다가 내려가기를 반복한다. 김수현의 가슴에 얹은 양손을 꼭 모은 채, 뜨거운 숨을 토하며 스스로 요분질을 하는 모습은 진정 요염 그 자체였다. 한 번 리듬을 탈 때마다 탄력 있는 둥근 젖가슴이 내리쳐졌다가 쳐들리는데, 그 출렁거림은 야하면서도 색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뿐일까. “아아…. 아아아아아앙…!” 아주 좋아 죽겠다는 간드러진 신음까지. 그저 김수현보다 느끼는 게 조금 늦었을 뿐이지, 이것이야말로 지옥 대공이 절정에 임박했다는 증거였다. 실제로 지옥 대공은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신선한 감각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건 김수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남근이 지옥 대공의 속살을 가르며 들락날락할 때마다, 연거푸 전율하며 헐떡헐떡 숨을 삼키고 있다. 정말 이보다 뜨거우며 부드럽고 촉촉한 감촉이 어디 또 있을까? 앞서 몇 번이고 경험한 구멍이었으나, 오히려 농염함과 완숙함이 깊어진 동굴은 이제 스스로 기교까지 부리고 있었다. 올라가며 뺄 때는 살짝 풀어줬다가, 내려오며 꿀꺽 삼킬 때는 도로 꼭꼭 조여오는데, 마치 남근이 쫄깃해지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감촉은 김수현의 정신을 한층 크게 흔들어놓고 있었다. 김수현은 어떻게든 참으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고 이까지 악 다물고 있었지만, 저절로 새어 나오는 앓는 듯한 신음을 막을 수 없었다. - 하이고, 아주 좋아 죽네. 죽어. 허나 무에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지옥 대공과 김수현을, 아니 정확히는 김수현을 바라보는 화정의 목소리는 결코 곱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 상당히 불만스러운 듯 비꼼이 가득한 어조였다. - 이거 봐. 아까는 싫어하는 척 하더니…. 하여간 사내 새끼가 다 똑같지. 화정도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스스로 모르고 있었다. 분명 처음 사정이 끝났을 때만 해도 이제 됐다는 생각에 안도했을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음부에서 아까운 정액이 흐르니 틀어막아야 한다.’ 라는, 정말 말 같잖은 이유로 성관계를 재개했을 때부터 불현듯 뜻 모를 감정이 울컥 솟아올랐다. - …나, 나쁜 새끼! 나, 나는 이렇게 가만히 놔두면서! 이윽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순간, 화정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방금 말은 100% 질투를 일컫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 아, 아니야! 내가 왜? 화정은 강하게 부정했다. 허나 안타깝게도 화정의 질투는 사실이었다. 물론 지금껏 김수현이 여러 여인들과 몸을 섞을 때마다 화정은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것은 가끔 김수현이 장난스레 던지는 부인이라는 말을 철썩 같이 믿고 있었거니와(물론 그때마다 새침하게(?) 반응하기는 했지만.), 애초 격이 다른 상대에게 질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였다. 그러나 지금 김수현의 상대는 여태껏 보아온 여인들과는 다르다. 달라도 한참이나 다르다. 화정과 동격으로 평가 받는 겁화의 힘을 품은 여인이다. 거기다 김수현의 애를 낳고 싶다고 했으니, 어쩌면 화정이 생소한 감정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렇게 화정이 전전긍긍하며 발을 동동 구를 즈음. 지옥 대공과 김수현은 착실히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아아…. 아아…! 더, 좀 더…. 어떡해…! 미, 미칠 것…!” 어느새 지옥 대공은 어쩔 줄 몰라 하는, 거의 울기 일보 직전의 얼굴로 연이어 도리질을 치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엉덩이의 들썩거림은 도를 더해가, 이제는 용암 빛의 풍성한 머리카락도 세차게 흩날린다. 그 탓에 머리카락 하나를 살짝 베어 문 채 그렁그렁하게 김수현을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는, 그야말로 사내의 애간장을 녹일만한 눈빛이었다. “나, 나…! 어, 어떻게…! 제, 제발…! 응앙…!” 이내 무언가가 오려는 것을 느꼈는지, 지옥 대공이 애타는 비음을 흘렸다. 아까 얌전하게 겹쳐 얹었던 양손은, 흡사 발정 난 고양이처럼 김수현의 가슴을 애처로이 긁는 중이었다.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을 못한다. 그저 행동으로 보이는 무언의 의사 표시였다. - 우하하하. 김수현. 저것 좀 봐. 꼭 발정 난 암캐 같잖아? 겁화의 힘을 지닌 존재가 보이는 꼬락서니하고는~.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화정은, 결국 초조함을 이기지 못해 과장해서 웃으며 지옥 대공을 매도했다. 그러나 김수현은 듣지 못했다. 아니. 아까부터 지옥 대공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탓에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 만큼 지옥 대공의 반응은 확실하게 잡아내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을 좀 어떻게 해달라는, 애타게 몸부림치는 지옥 대공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 ……. 곧, 오히려 힘차게 허리를 쳐올리는 김수현을 보며 화정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악!” 그와 반대로, 지옥 대공은 희열과 환희가 섞인 신음을 터뜨렸다. 지옥 대공의 애달픈 요청에 김수현이 가열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리를 강하게 몰아치자, 남근은 음부 내 속살을 찢어발길 듯한 기세로 투박하게 쑤셔 박혀 들어갔다. 퍽! 이제는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아닌, 살을 때리는 소리가 울렸다. “!” 한순간, 지옥 대공은 국부부터 머리 끝까지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짜릿한 격통을 느꼈다. 퍽! 퍽! 그러나 한 번 두 번 연이어 남근이 거센 해일처럼 밀고 들어오자, 고개와 사지를 허우적거리며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아아앙! 아아아앙!” 음부를 가득 채우는, 흡사 질이 부풀다 못해 터질 것만 같은 느낌. 자궁이 짓눌리는, 깊숙한 구석 끝까지 찔러오는 아찔한 느낌. 태어난 이래 처음 맛보는 강렬한 쾌감의 파도에, 지옥 대공의 등이 점차 활처럼 휘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미친 듯이 엉덩이를 흔들어 젖히며 김수현의 남근을 기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흑! 조, 좋아! 아앙, 이, 이건 너무우욱…!” “허억, 허억!” “어허어엉! 으하아으아앙!” “흐크으윽!” 어느새 지옥 대공은 체면도 잊고 있었다. 그저 횡설수설 나오는 대로, 교성에 가까운 비명을 마음껏 지른다. 김수현 또한 상상도 못한 지옥 대공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짐승과도 같은 헐떡거림으로 화답했다. 그렇게 두 남녀가 한없이 뒤엉킨 채 서로 절정을 향해 끝없이 달려간다. “나, 나…!” 그때, 지옥 대공이 돌연 흐느끼는 소리를 뱉고는 허우적거리던 사지로 김수현의 등을 휘감았다. 마치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흉부에 닿은 젖가슴이 뭉개질 정도로 달라붙는다. 그에 따라 주변에 휘몰아치던 열풍이 더욱 격렬하게 휘돌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히극…!” 문득, 지옥 대공의 온몸이 작살에 맞은 물고기마냥 크게 펄떡였다. 한껏 찡그려져 있던 고개가 갑자기 하늘로 치솟는다. 동시에 감고 있던 팔과 다리가 등을 으스러뜨릴 듯 억세게 옥죄며, 두 눈동자가 희번덕 한 빛을 발했다. 잠깐 교성이 멎으며 입이 크게 벌어졌다. 이어서. “흐아아아아아아앙!” 함성과도 같은 희열 찬 비명이 터져 나와, 무간 지옥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마침내 지옥 대공이 절정에 다다른 것이다. 그동안 꽉 막혀 있던 것이 한순간 뻥 뚫리는 기분. 무언가가 세차게 터지며 분출되는 기분. 머릿속의 사고가 정지하며 이대로 까무러치고 싶을 정도로 미칠 것만 같은 기분. 뇌리를 강타하는 아찔한 현기증에, 시야가 새하얗게 변하며 정신이 아득해진다. 이윽고 점점 웅크려 들던 지옥 대공의 전신이, 어느 순간 실 끊긴 인형처럼 덜그럭, 널브러지듯이 풀렸다. 실로 처음 맛보는 쾌감에 자신의 내부를 때리는 뜨거운 액체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하부에 박힌 묵직한 감촉만을 느낀 채, 벼락이라도 맞은 양 온몸을 움찔움찔 떨고 있을 뿐. 쪼르륵! 그동안 참고 참아온 꽃잎은 상당량의 투명한 액체를 터뜨린 것도 모자라, 결국 싯누런 색의 가는 물줄기까지 흘리고 말았다. “허거…. 어거…. 아극…. 흐극….” 김수현은 서서히 자신의 허벅지를 적셔오는 따뜻한 액체를 느끼며,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듯 보이는 지옥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똑같이 손으로 받치고 있던 등에 살며시 힘을 주었다. 그러자 넋 나간 얼굴을 한 지옥 대공이 간신히 김수현을 마주했다. 그리고 매달리듯이 얼굴을 가까이하더니, 아직도 무언가 부족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한층 풀린 눈은 어딘가 모르게 애원하는 빛을 품고 있었다. 한동안 지옥 대공을 바라보던 김수현은, 이내 천천히 얼굴을 들어 침이 흐르는 지옥 대공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아주 잠시 지옥 대공이 눈을 크게 떴으나, 곧 살금살금 밀고 들어오는 혀를 느꼈는지 지그시 눈을 감는다. 그렇게 서로의 혀가 얽히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야 지옥 대공의 낯에 만족한 빛이 자리잡는다. 그리고. - …씨이! 두 남녀가 절정 후의 여운을 즐기는걸 보며, 화정이 서글픈 울먹거림을 내뱉었다. ============================ 작품 후기 ============================ (집필 전.) 오늘은 인간 세상 이야기 1/4, 씬 3/4로 가야지~. 그럼 시작! (집필 후.) (온통 씬 으로 도배된 내용을 보며.) 0ㅁ0…? …저에게도 음란 마귀가 있었나 봅니다. ㅜ.ㅠ 내, 내일부터는 정말 진도 위주로 나갈게요…. ☞☜ 0672 / 0933 ---------------------------------------------- 3. 한편, 같은 시각. 죽은 세상에도 밤이 찾아오는가. 죽어버린 세상에, 밤이 찾아온다. 누가,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든 간에 여러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실지(實地)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현상을 경험하고 있었다. 지옥 대공과 관계를 맺는 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른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지옥 대공이 굉장히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반응을 보였고, 그에 따라 나 또한 어느새 진심이 돼버리고 말았다. 아무런 생각도 못한 채 오직 짐승처럼 서로를 탐하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몇 번이나 했더라? 한 여덟 번은 한 것 같은데.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서로가 서로를 갈구하며 어찌나 격렬하게 몸을 섞었는지…. 오죽하면 관계가 끝난 직후에는 마주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뭐, 사실 쳐다볼 힘도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쏟아 부었지마는. 아무튼. 여덟 번에 걸친 관계가 끝난 이후, 나는 탈진한 상태로 바닥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언가가 변한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잿빛 일색으로 이루어진 하늘은, 어느덧 종말을 고하듯 어둑어둑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니. 비단 하늘뿐만이 아니라, 이 무간 지옥이라는 모든 세상이 이제 막 땅거미가 내리는 저녁처럼 어둡게 변했다. 변화한 현상은 단순히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 넋을 놓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유는, 다름 아닌 하늘은 물론, 온 세상을 점점이 수놓는 붉은 빛무리 때문이었다. 마치 반딧불과 같이 말간 빛을 내뿜는 붉은 불똥은, 흡사 춤이라도 추듯 너울너울 움직이며 고요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과연 내가 기억하는 무간 지옥과 지금 보는 무간 지옥이 동일한 세상일까. 이런 의문이 들 정도로 현재의 무간 지옥은 매우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내는 중이었다.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이런 풍경은 어디 가서 돈 주고도 구경할 수 없거니와, 근 몇 달간은 항상 강철 산맥 공략에 쫓기지 않았는가. 그런데 정말 간만에 한가로우면서 신비한 기분을 느껴보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왜 갑자기 이런 현상이 벌어졌는지 궁금하기는 했다. 그래서 나와 똑같이 힘들어 보이는(?) 지옥 대공에게 물어봤지만, 그저 알 듯 말 듯한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뻗어 있는 내 옆으로 스리슬쩍 다가와 나를 빤히 쳐다보길래, 팔 한쪽을 펴주니 냉큼 머리를 베고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나와 지옥 대공은 서로 입을 닫은 채, 지금껏 조용히 하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진심으로 썩 기분이 나쁘지가 않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한가로움 때문인지, 아니면 관계 후의 여운 때문인지.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분명 마음이 넉넉해진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옥 대공이 더는 밉게…. 아니. 더 이상 공포스럽게 느껴지지가 않는다고나 할까. ‘처음부터 이야기를 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갑자기 아쉬운 마음이 들어 흘끗 옆을 쳐다보자, 눈을 꼭 감은 채 작고 고른 숨소리를 흘리는 지옥 대공이 보였다. 어두운 세상. 흐드러진 머리카락 틈으로 반딧불 같은 빛무리가 스며들어 발그스름한 빛을 흘려내는 자태는, 지옥 대공을 더욱 신비롭게 보이게 했다. “…….” 나도 모르게 팔베개를 해준 손을 살짝 움직여 지옥 대공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가락 사이로 흐르듯이 빠져나가는 보드라운 감촉은 내 정신을 한층 멍하게 만들었다. 그때였다. “으응….”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 것 때문일까. 지옥 대공이 자그마한 비음을 흘리며 살며시 눈을 뜬다. 이어서 드러난 흡사 홍옥을 연상케 하는 어여쁜 눈동자가 깜빡깜빡 움직이며 나를 응시한다. 그렇게 한동안 곁눈질로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 불현듯 지옥 대공이 낯을 발그레하게 붉히는 게 보였다. …아. 갑자기 빛무리가 내려앉아서 그런 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도로 눈을 감은 지옥 대공이 몸을 움직여 내 품으로 파고들어왔다. 조금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살과 살이 맞닿는 부드러운 감촉이 전해지자 전신이 나른해졌다. 편안하다. 나는 마치 작은 동물을 안는 것처럼 지옥 대공을 따뜻하게 안았다. 돌연 목 부근으로 가는 숨결이 느껴졌다. “그대는….” 관계가 끝난 이후, 지옥 대공이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나도 모르게 이어질 말에 집중했다. 과연 어떤 말을 하려는 걸까? 혹시…. “그대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겠지…?” 그러나 이어진 말을 들은 순간, ‘좋았다.’ 등의 칭찬을 기대하던 나는 반성하고 말았다. 허나 한편으로는 살짝 놀라기도 했다. 설령 그런 티는 조금 냈을지 몰라도, 먼저 말을 꺼낸 기억은 없다. 그럼에도 이런 말을 꺼냈다는 건 지옥 대공도 암암리에 눈치를 채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바로 내가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는 걸. 무어라 말을 해야 할까. 한순간 무수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고 싶겠지…?” 그 순간 지옥 대공이 한 번 더 되물었다. 강압적인 어투가 아닌, 무언가 조심스러워하는 어조에 힘입어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응.” 어차피 말을 해야 한다면 미리 말을 해두는 게 좋을 터.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약간은 힘없는 목소리로 긍정했다. 그리고 한 번 더 놀라고 말았다. 내가 왜 힘없이 말한 걸까? 이러면 마치 그러기 싫다는 것처럼 들리잖아. 잠시 후. “역시…. 그런가….” 아래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무언가 안타깝게 느껴졌다면 내 착각일까. 이윽고 조금은 어색한 침묵이 다가왔다. 말끝을 흐린 지옥 대공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표정을 보고 싶었지만 내 가슴에 고개를 묻은 탓에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빛무리를 품은 정수리를 바라보다가, 돌연히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지옥 대공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을 간질이는 기척으로 내 말을 듣고 있는 거라 확신할 수 있어, 나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혹시 네 이름을 알 수 있을까?” “…이름?” 이 말은 확실히 의외였는지 지옥 대공이 언뜻 고개를 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시선을 받아넘기며 나는 힘주어 머리를 끄덕였다. “응. 이름.” 생각해보면 그동안 막연히 지옥 대공으로만 알고 있었을 뿐이지, 진정한 이름은 모르고 있었다. 사실은 자세히 알 생각도 못한 거지만. 어쨌든 지옥 대공의 진명은 1회 차에서도 밝혀내지 못한 탓에 자못 호기심이 일었다. “글쎄. 이름은 나한테 큰 의미가 없는 터라.” 허나 이미 이름 따위는 초월했는지 지옥 대공은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쏘냐. “그래도. 어쨌든 이름이 없지는 않을 거 아냐.” “그렇기는 한데…. 이미 몇 천 년을 이름 없이 살아온 몸인데, 이리도 갑자기 물으면 당황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래도.” “…….” 지옥 대공이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짓는다. 너무 조르듯이 말했나? 그냥 제 3의 눈을 사용할까도 생각해봤으나 그만두기로 했다. 애초 지옥 대공 정도의 존재라면 읽지 못할 가능성이 크거니와, 이번만큼은 제 3의 눈으로 정보를 파악하기 싫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름.”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한 번 더 채근하자, 지옥 대공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싱겁게 웃는다. “…나.” 이내 무어라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제대로 듣지 못했으니 다시 말해달라는 의미였다. “흐흠.” 그러자 살짝 눈을 흘기며 한두 번 가볍게 헛기침을 한 지옥 대공은. “게헨나. 굳이 이름을 알고 싶다면 게헨나라고 부르면 되느니라.” 한층 또렷한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게헨나라…. 잘은 모르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이다. 그러니까 신약 성경에 나오는, 지옥을 묘사하는 단어로 알고 있는데. 아무튼 게헨나, 게헨나. “어울리는 이름이네.” “응? 평가 한 번 애매하구나.” “말 그대로야. 지옥이라는 세상에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해.” “…상관없나. 아무튼 그럼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지?” 그때 고개를 갸웃하던 지옥 대공이 내 이름을 되물었다.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달링…. 아니 아니. 자기. 아니면 자기야 라고 불러도 좋아.” 그러나 지옥 대공의 눈이 대번에 가늘어져, 결국에는 이실직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김수현.” “김수현?” “응.” “김수현, 김수현이라….” 지옥 대공, 아니 게헨나가 내 이름을 연거푸 중얼거린다. 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 차이가 있다면 속으로 하지 않고 직접 말로 되뇌고 있다. 이윽고 마치 소중한 것을 다루듯 자신의 배를 부드러이 쓰다듬는 게헨나를 보다가, 나는 가볍게 머리를 젖혔다. 어느새 무간의 하늘은 오로라와 비슷한 커튼 모양의 붉은 빛을 뿌리고 있었다. 아름답다. “흥…. 흐흥….” 문득, 내 이름을 되뇌던 소리가 미미한 음이 섞인 콧소리로 변했다. 그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계속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나는 내 이름은 어떻느냐 물어볼 생각을 접고서 자연스레 들려오는 음에 집중했다. “응…. 흐흐흐흥….” 소리는 여전히 내 이름을 되뇌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또는 콧노래로 들렸고, 한편으로는 그냥 숨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소리가 매우 나직하고 조용한 음을 품고 있다는 것. 그렇게 한참을 이어지는 음을 듣고 있자, 어느 순간 전신이 사르르 내려앉는걸 느꼈다. 서서히 눈이 감기고 머릿속에 점차 어둠이 찾아온다. 그것은 불가항력적인 수마. 나는 완전히 눈을 감았다. 이내 꿈결처럼 들려오는 음을 자장가 삼아, 나는 깊은 잠을 청했다. ============================ 작품 후기 ============================ 사실 저번 회는 제 필살기였습니다. 회심의 일격이었죠. 조금 욕을 먹더라도, 기필코 ‘아 씬 좀 그만 쓰세요. 지겨워 죽겠어 정말!’ 이나 ‘알았어요. 앞으로 씬 써달라고 안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그만 좀 쓰세요.’ 라는 코멘트로 도배가 된 인터넷 창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내일부터는 진도 나갈게요~.’ 라고 미리 아양을 떤 다음, 나름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업데이트를 눌렀죠. 그런데…. 1. 에이. 씬 위주도 좋은데요? 2. 아뇨 괜찮아요더쓰세요ㄲ 3. 아뇨 일주일간 이것만 쓰셔도..... 될지도? 4. 그냥떡신 몇편더써주새요 5. 부족합니다. 6. 좋기만 하구먼 왜?.,. 7. 좋지아니한가!!! 8.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9. 꼭 궂이 안그러셔도 됩니다만...? 10. 이보게 잠깐. 그러지말고 한편만 이대로 가보세 한편만 더..! 11.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진도나가야하나요 좋은데? 이씬만한세번더하죠 12. 좀만 더 갑시다. 대공이 귀여움 ……. ……. ……. ……. 0ㅁ0…. …사실 그 정도면 나름 만족하실 줄 알았는데, 제가 독자 분들을 조금 얕봤던 것 같네요. 우선은 패배를 인정하겠습니다. 일단은 깔끔하게 물러나겠습니다. 하지만 다음에 재도전을 할 때는, 저도 결코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_(__)_ 0673 / 0933 ---------------------------------------------- 3. 한편, 같은 시각. “오빠, 오빠!” 나를 부르는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그 음성에 이끌려 살그머니 눈을 떴을 때, 나는 상당히 깊은 잠에 빠졌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한순간 이마에 강한 현기증이 감돌며 전신에서 노곤함을 느꼈으니까. 이윽고 가물가물한 시야에 초점이 잡혔을 때, 눈에 들어온 건 잿빛 하늘도 어두운 하늘도 아니었다. 붉은 하늘이 보였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나는 화들짝 몸을 일으켰고, 동시에 옆에서 새된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지는 한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얼떨결에 시선을 돌리자 엉덩방아를 찧은 채 토끼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김한별이 보인다. “왜?” “…그건 오히려 제가 해야 하는 질문 아니에요?” 왜 그렇게 쳐다보냐는 뜻으로 물어보자 김한별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나는 세차게 머리를 저은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멍한 기색은 가시지 않았으나 그래도 두 가지 의문은 잡아낼 수 있었다. 우선 여기는 어디인가. 그리고 나는 왜 여기서 깨어났는가. 내가 기억하기로는 무간 세상의 변화를 보다가 스르르 잠이 든 것 같은데 말이지. - 흥. 네가 잠든 사이 고 계집이 수작을 부렸지. 그때 화정의 음성이 머리를 울렸다. - 옷도 차근차근 입혀주고. 혹여 깰까 봐 이동도 조심조심하고. 아주 푹 빠져서는 말이야. 흥! 어딘가 모르게 뾰족한 목소리가 뇌리를 찌르는 듯하다. 그래도 덕분에 의문 하나는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면 게헨나가 잠든 나를 들고 구간을 이동한 건가? 그리고 김한별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 준 거고? “오빠. 이제 좀 정신이 드세요?” 그렇게 하나하나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즈음, 성큼 몸을 일으킨 김한별이 다가와 물었다. 그러는 와중 화정이 계속해서 종알종알 쏘아붙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우선은 김한별에게 집중하기로 마음먹고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그러자 김한별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한다. “응? 괜찮으냐니?” “기억 안 나세요? 그분한테 업혀오셨잖아요. 완전히 푹 잠드신 상태로.” “아…. 어, 어. 그랬나? 그렇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어제 계속 기다리면서 걱정했는데.” 흠. 여기서는 화제를 돌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냥 여러 이야기 좀 했어. 힘들더라.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야?” “이야기가 힘들어요…? 아, 여기는 오빠가 기절해있는 동안 제가 생활하던 구역이에요.” “생활하던 구역?” “네. 다행히 그분이 구역을 임시로 할당해주셔서요. 아무것도 없다는 것 빼고는 나름 지낼만해요.” 나는 잠깐 김한별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아닌 게 아니라, 주변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지옥에서 처음 눈을 뜨고 봤을 때처럼, 그저 드넓은 붉은 황무지만 눈에 들어올 뿐. 그리고 구역 임시 할당은 또 무슨 말일까. “정말로 나름 지낼만하다니까요?” 내 표정을 읽었는지 김한별이 이해한다는 듯한 미소를 보이며 말을 잇는다. “생각해보세요. 오빠도 조금 전까지 한 번도 안 깨시고 푹 주무셨잖아요.” 흠. 생각해보면 확실히 잘 자기는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름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하는데. “말씀 드렸잖아요. 이 세상은 집이라는 개념이 없어요.” 어느덧 김한별은 내 옆에 은근슬쩍 앉은 채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나와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이 그렇게나 좋은 걸까. 아무튼 화제는 잘 돌린 것 같으나, 문득 내가 지금 아는 게 굉장히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직면한 상황을 정리하려면 조금 더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별아.” “네.” “조금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있을까?” “물론이죠. 어떤 게 궁금하신데요?” *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통과의례를 시작한 직후, 김한별은 나를 찾아와 예비 사용자들끼리 토의한 내용을 요약해서 들려준 적이 있다. 그때 이야기를 들으면서 애가 말을 참 잘한다고 느꼈는데, 김한별은 이번에도 비슷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정리해보면, 지옥은 총 여덟 개의 구간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각 구간은 하나의 세상이라 볼 수 있다. 여기까지는 나도 알고 있는 사실. 그러나 어탑에 관한 말이 나왔을 때부터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우선 어탑은 그냥 단순한 구조물이 아닌, 바로 구간을 이동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이동 수단이라고 한다. 어느 구간의 마수든 이 어탑을 사용하는데 제한은 없다. 하지만 구간의 출입에는 제한을 받는다. 말인즉 각 마수마다 출입할 수 있는 구간이 한정된다는 말이었다. 가령 예를 들면, 내가 지금 있는 ‘대 초열’ 이라는 구간은 현재 지옥 대공의 관할 하에 있는 구간으로, 다름 아닌 군단장 급에 해당하는 마수들만 출입할 수 있는 지역이라고 한다. 거기다 지옥 군단장은 총 66 개체가 존재하는데, 애초 대 초열 이하로는 출입하는 일이 드물다는 말까지.(66 개체라는 말을 듣고 나서, 나는 막연하게나마 직감하고 있던 지옥 군단장들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비비앙을 떠올리면 답이 나온다.) 여기서 김한별은 관할과 출입의 차이점을 강조했다. 게헨나가 7 구간을 관할하듯 1 구간부터 6 구간까지도 각각을 분할해서 관할하는 존재들이 있다. 즉 그 존재들이 바로 군단장이라는 소리였다. 여기까지 설명을 들은 나는, 어느 정도 지옥이라는 세상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에는 영토의 개념이었다. 설령 어느 마수가 출입할 수 있다고 해도 구간 내 모든 지역을 돌아다닐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지역을 돌아다니려면 관할하는 존재의 허락이 필요하다. 아까 김한별이 말한 구역 임시 할당은 이러한 의미에서 나온 말이었다. 한 마디로 마수들이 함부로 건들지 못하게 한, 게헨나의 호의라고나 할까. 잠시 후. “후유. 힘들다.” 그 어느 때보다 길게 말은 이은 김한별은 턱을 주무르며 힘들다는 말을 꺼냈다. 어느 정도 궁금증을 해소하기는 했지만, 사실 아직 궁금한 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만 질문을 멈추기로 했다. 나보다 조금 더 겪었을 뿐이지, 김한별도 모든 걸 알지는 못할 테니까. …그런데 대장간이나 도서관이 있다는 말은 진짜로 궁금한데. 도대체 어떻게 지옥에 그런 구조물들이 존재하는 걸까? “그런데요. 오빠.” 그렇게 질문을 하나 더 할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김한별이 턱을 주무르던 손을 떼고 말을 걸었다. “저도 궁금한 게 있는데요. 도대체 그분이랑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오래 하신 거예요? 그리고 왜 기절한 채로 업혀오신 거예요?” 그리고 이어진 질문에 나는 한층 곤란한 기분을 느꼈다. 아 그렇잖은가. 여기서 ‘응. 섹스 좀 했어.’ 라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으니까. “네? 도대체 얼마나 힘든 대화를 하셨길래 기절까지….” 김한별이 진정 궁금하다는 얼굴로 은근슬쩍 채근한다. 미치겠네 정말. 그렇다고 몸의 대화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때였다. 철그렁…. 김한별의 낯에 수상하다는 기색이 깔릴 즈음, 어디선가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시선을 돌린 나는, 지금 이 상황을 구원해줄 구원자, 아니 전신에 시꺼먼 갑옷을 입은 한 기사가 걸어오는걸 볼 수 있었다. “이야. 지금쯤이면 일어났을 거라 하시던데, 정말로 일어나 계셨군요.” 성큼성큼 다가와 거슬리는 음성으로 인사를 건네는 존재는, 얼마 전 어탑에서 게헨나와 함께 마주쳤던 해골 기사였다. “아가씨도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나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인 해골 기사는 김한별을 보며 두터운 금속 장갑을 들어 보였고, 김한별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받았다. 그러자 가만히 있기가 뭣해 나도 같이 일어선 후, 안도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또 만나네요. 그러니까 제 3 군단장 맞죠?” “네. 이곳에서 부여 받은 이름은 베, 히, 모, 스, 죠.” 왜인지 자신의 이름을 한 글자씩 끊어서 말하는 해골 기사, 아니 베히모스. …사실은, 잊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민망한 기분이 들어 나는 헛기침 후 말을 이었다. “그렇군요. 그나저나 게헨…. 지옥 대공의 명으로 이곳에 왔나요?” “어? 네.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지금쯤이면 일어났을 거라 하시던데. 이 말씀에서 유추했죠.” “이야, 역시나. 날카로우십니다. 그리고 말씀이라니요. 말씀 낮추셔야죠. 이제는….” 그 순간 무어라 말하려던 베히모스는 나를 보고서 말을 흐렸다. 나는 들키지 않게 최대한 김한별을 곁눈질하며 무언의 의사를 보내려 애썼다. 그러자 투구 안, 깜빡깜빡 안광을 점멸하던 베히모스가 갑자기 뼈만 남은 이를 딱딱 부딪친다. 웃는 건가? “이제는요…?” “…네. 이제는, 잠깐 어디를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돌연 김한별이 의아한 음성으로 반문하자, 베히모스가 구변 좋게 말을 잇는다. “그런데 왜 말씀을 낮추….” “대공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면서 얘기하시죠.” 베히모스는 의도적으로 김한별의 말을 끊으며 걸어온 방향을 가리켰다. 이윽고 빙글 몸을 돌리는 베히모스를 보며 나는 무언가 감동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이 사람, 아니 이 해골. 꽤나 수완이 좋다. 눈치도 상당하고 말이야. 어쨌든 이렇게나 도와주는데 외면할 수 없어, 나는 빠른 걸음으로 베히모스를 뒤쫓기 시작했다. 그러자 등 뒤로 김한별이 무어라 투덜거렸지만, 이내 얌전히 쫓아오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얘 혹시 알면서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니야?’ * 그렇게 해골 기사를 따라 잠에서 깨어난 자리를 떠난 이후, 약 5분 가량 흘렀을 무렵. “대공께서 계신 곳으로 가는 중입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냐는 내 질문에, 앞서 가던 베히모스가 스리슬쩍 걸음 속도를 줄이며 대답했다. 아니 이 해골아. 그건 아까도 말했잖아. 내 표정을 봤는지 베히모스가 또다시 이를 딱딱 부딪친다. “무얼 그리고 걱정하시는지요. 설마 우리가 고마운 분에게 해라도 끼치겠습니까? 하하하.” “고마운 분이라니요?” 그때 김한별이 냉큼 끼어들었다. 아까 따라나올 때부터 벼르고 있었는지, 이번만큼은 꼭 사정을 듣겠다는 기세였다. 그 기세에 약간 걱정이 들었지만, 베히모스는 되레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마운 분이지요. 이분께서는 저희 대공을 달래주셨는데요.” …응? 달래다니. 무언가 표현이 상당히 의미심장한데. 설마 이제 와서 나를 엿 먹이려는 건가? “다, 달래다니요? 제가 듣기로는 그저 대화를 했다고 들었는데요. 아주 힘든 대화요.” 역시나 어감이 이상함을 느꼈는지 김한별이 강력히 이의를 제기했다. “으음…. 힘든 대화라. 하기야 틀린 말은 아니군요.” 그렇게 말한 베히모스는 돌연 내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몸의 대화. 음음.” 이라고 속닥거렸다. …이 해골. 나와 생각하는 게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똑같다. 아마 같은 사용자였다면 매우 친해지지 않았을까. “그게 무슨….” “왜냐하면 저희 대공께서는 아주 오랜 시간을 외롭게 보내신 분이지요.” 김한별의 끈질김에 베히모스는 차분한 태도로 명료하게 받아쳤다. 그러자 김한별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런데요?” “간단합니다. 저분은 대공의 흥미를 이끄는 무언가를 갖고 있습니다. 그 무언가에 관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눔으로써 대공의 외로움을 달래주셨지요. 그래서 고마운 분이라는 겁니다.” “그, 그래도. 저는 아직도 이해가 안 가요. 고작 대화 한 번 했다고 고마운 분이라니…. 그것도 초대까지.” “하기야 인간의 관점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이해합니다. 하지만 아가씨가 여기 와서 느낀 지루한 감정을, 앞으로 수천 년 동안 겪어야 한다고 생각해보시죠.” 그 말이 나온 순간 김한별은 할 말을 잃을 듯한 얼굴을 보였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저 의심 덩어리를 말로 찍어 누르다니. 물론 엄밀히 파고들면 이의를 제기할 거리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것조차도 ‘인간의 관점’ 이라는 말로 연막을 쳐놨다. 그렇게 김한별을 K.O 시킨 베히모스가 어깨 갑주를 으쓱거리며 나에게 바싹 붙는다. 으음. 고마운데 부담스럽다. “아무튼 의심은 구석에 넣어두시고 마음 편하게 가지십쇼. 대공께서는 아마 감사 인사를 표하려고 이렇게 부르셨을 겁니다.” 속닥속닥 말을 건넨 베히모스가 안광 하나를 잠시 꺼지게 만들었다가 반짝 터뜨렸다. 이건 또 무슨 표정으로 해석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나를 머리를 갸웃했다. “감사 인사라니요?” “에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 대공 화끈하신 거는 알고 계시죠? 직접 겪어보셨으니…. 하하하. 아무튼 말로만 감사 인사를 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왜 갑자기 감사 인사를….” “어라, 모르시는 겁니까?” 그러자 베히모스는 입을 딱 벌리더니 피리 소리 같은 바람을 흘렸다. “허. 말씀을 듣지 못하신 건가? 지옥 수천 년의 염원을 이루어주신 분이 정작 이런 반응이라니….” “……?” “설마 무간 구간의 변화를 보지 못하신 겁니까?” “…아!” 그 순간 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염원. 무간 구간의 변화. “무간 구간은 왕의 탄생과 소멸을 함께하는 곳입니다.” 베히모스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지옥 대공도 비슷한 말을 한 것 같다. 나는 이제야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왕의 생명이 태동되기 시작할 때부터, 무간 구간의 변화도 시작된다. 잠들기 전 봤던 붉은 빛무리는 무간 세상의 새로운 탄생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였던 셈이다. 이 말인즉, 결국 내가 지옥 대공을 임신시키는데 성공했다는 소리였다. 그래. 그렇구나. …잠깐만. 그러면 지옥 대공은 왜 그 사실을 나한테 알려주지 않은 걸까? 갑자기 하나의 의문이 추가로 떠오를 즈음. “오. 도착했군요.” 불현듯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려와,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들었다. ============================ 작품 후기 ============================ 외전이요? 아마 다음 주에는 끝날 것 같아요. ㅎㅎ. :) 0674 / 0933 ---------------------------------------------- 3. 한편, 같은 시각. 그 순간 갑자기 살에 닿는 공기가 한층 후끈후끈해진걸 느꼈다. 마치 따뜻한 온탕에 있다가 뜨거운 사우나에 들어간 기분이랄까. 코가 탁 트이는 감각에 힘껏 숨을 들이키자 미미한 유황 냄새가 맡아졌다. 김한별은 이미 한 번 와본 적이 있는지 크게 놀란 얼굴은 아니었으나 손으로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조금 다른 세상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베히모스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금 다른 세상이라. 아직까지는 딱히 별다른 게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가 어느새 10 미터는 앞서나간 베히모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처음 맡았던 유황 냄새가 차차 짙어졌다. 나는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냄새의 근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유황 냄새는 발 아래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는데, 쩍쩍 쪼개진 황무지 틈으로 언뜻 붉은색이 비쳤다. 이따금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큼지막한 기포를 생성했다가 툭 터뜨리는 게, 흡사 용암을 연상케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황무지의 균열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틈으로만 보이던 균열은 점차 사방팔방으로 갈라졌고, 이내 아래 흐르는 용암이 완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드넓던 황무지는 시시각각 드러나는 용암에 잠겨 들어가, 종래에는 하나의 길처럼 변했을 정도였다. 그래. 베히모스의 말대로였다. 어느새 나는 좌우로 용암이 가득하게 들어찬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깡…! 어디선가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음이 은은하게 흘러들었다. 콰르르르! 바로 이어서 흡사 폭포가 쏟아지는 듯한 소리까지. 아직 거리가 있는지 명확하게 들려오지는 않았으나, 모종의 소리만은 분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이윽고 앞서가던 베히모스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이제 저곳만 지나치면 됩니다.” 거무튀튀한 금속 장갑이 정면 방향을 가리켰다. 앞쪽은 길은 점점 좁아지는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용암이 강을 이루는 듯한 풍경을 보이고 있었다. 거기다 용암에서 흘러나오는 연기가 자욱한 운무를 이루기까지.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수증기가 심해집니다. 발을 잘못 디뎠다가는 용암에 흔적도 없이 녹을 수 있으니, 저를 잘 따라와 주셔야 합니다.” “아.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베히모스가 약간 심각한 목소리로 충고해와 나는 안력을 돋우며 대답했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인 베히모스가 한쪽 팔을 살며시 내밀었다. 뭐지? 라는 생각을 하기도 전, 김한별이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다가가 베히모스의 팔을 붙잡았다. 이윽고 둘은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처음 아가씨를 데리고 왔을 때가 떠오르는 군요.” “나름 신기한 경험이었죠.” “저도 재미있었습니다. 설마 살짝 장난 좀 쳤다고 그렇게 애처롭게 울어 젖히실 줄은….” “닥쳐요.” “네? 닥치라고요? 아하. 그때 엉엉 우시면서 누구를 계속 부르시던데 말이죠. 수…? 수 무슨 오빠였는데. 누구더라?” “죄, 죄송해요. 제발 조용히 해주세요.” …저 베히모스라는 해골 기사, 왜 자꾸 탐이 나는 걸까? 그렇게 안개 속으로 들어온 이후, 나는 둘 사이 오고 가는 만담을 반주 삼아 길을 걸었다. 잠시 후. 콰르르르르르르르! 약 200 미터 가량 걸었다고 생각될 즈음, 돌연히 안개가 살그머니 가라앉아 시야가 탁 트였다. 이어서 드러난 풍경은 1, 2회 차를 통틀어도 몇 번 보지 못했던 비경(祕境)을 품고 있었다. 산의 절반을 뚝 꺾어 놓은 듯한 깎아 세운 낭떠러지와, 어디서부터 내려오는지도 모를 세차게 쏟아지는 용암 폭포. 그 아래로는 차마 헤아릴 수 없을 깊이를 보이는 용암이 바다처럼 흐르고 있다. 붉은 빛을 띤 각양각색의 기암괴석들이 용암에 절반 정도 몸을 담근 채 굳건히 박혀 있었다. 설마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다. 조금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을 거라는 베히모스의 말이 한층 와 닿는 걸 느꼈다. 그때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구경하던 김한별이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잠시 어디 좀 다녀올게요.” “응? 혼자서 어디를 가시려는 겁니까? 아가씨?” “저번에 눈 여겨봐둔 장소가 있거든요. 그때 자세히 보지 못했으니까 이번에는 제대로 구경할 거예요.” “흠. 상관없겠죠. 허나 조심하셔야 합니다. 저번처럼 길 잃은 두려움에 오줌 싸시는 것까지는 좋은데, 어지간하면 강에 대고 싸주세요.” 그러자 김한별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Shut The Fuck Up. Suck My Asshole.” 영어까지는 알아듣지 못했는지 베히모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응? 셔러퍼겁…? 석마애쏠…? 그건 또 무슨 뜻입니까?” “정말 고맙다. 하지만 걱정하지는 않아도 된다는 뜻이에요. 그럼 다녀올게요~.” 김한별은 입에 침을 바르며 밝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어딘가로 조심조심 걸어가기 시작했다. 베히모스는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며 김한별을 배웅하다가, 곧 빙글 몸을 돌려 다가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로 그런 뜻입니까?” “…아니요. 제발 닥치고 내 똥구멍이나 빨아 라는 뜻입니다.” 나는 쓰게 웃으며 진실을 말해주었다. 조금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진실을. “으음. 역시나. 그런데 조금 충격이네요. 설마하니 그런 분으로 보이지는 않으셨습니다만.” 그러자 작은 탄식을 내뱉은 베히모스는 꽤나 놀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가씨가 항문을 빨리는걸 좋아하셨다니…. 취향은 존중합니다만, 상상해보니 상당히 더럽군요.” 라고 중얼거렸다. 김한별이 졸지에 변태가 됐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어색한 헛기침을 한 베히모스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외쳤다. “아무튼, 대 초열의 야장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에 살짝 놀라고 말았다. 야장이라 함은 다름 아닌 대장간을 뜻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설마 이런 대장간이라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응? 반응이 왜 그렇습니까? 조금 더 놀라실 줄 알았는데.” “예. 이미 충분히 놀랐습니다.” “그렇기는 한데. 좋은 의미의 놀라움이 아니라, 무언가 탐탁잖아 보이는 놀라움 같습니다만.” “…뭐, 그냥.” “그냥?” “글쎄요. 그냥 이런 세상에 대장간이 있다는 사실이 조금 놀랍달 까요.” 말 그대로였다. 대장간이 있다 길래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조금 김이 새는 기분이랄까. 사실 대장간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게, 그냥 아름다운 풍경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다못해 용광로나 모루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이거 이거. 이런 세상이라니. 우리 지옥을 꽤나 무시하시는 발언이시군요.” 내 표정을 읽은 걸까. 베히모스가 내 속을 딱 짚어 말하더니 근엄하게 팔짱을 꼈다. 약간이지만 자존심 상한다는 기색이 깃든 음성이었다. “하지만 이해합니다. 하기야 인간의 관점에서는 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땀을 뻘뻘 흘리며 망치질을 하는 장소를 대장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실제로 지옥에 그런 장소가 없는 것도 아니고요.” “그건 또 어디 있습니까?” “…초열 구간에 있습니다.” “흠. 들으면 들을수록 신기하네요.” 비꼬려는 의도가 아니라 정말로 신기해서 한 말이었다. “하나도 신기하실 거 없습니다. 야장은 인간들의 전유물이 아니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왠지 모르게 발끈하는 것처럼 느껴진 탓에 나는 가볍게 수긍해주었다. 베히모스는 투박한 장갑으로 투구를 긁더니 피리 부는 소리를 흘렸다. “아무튼 지옥의 마수들도 밥만 먹고 똥만 싸는 놈들은 아닙니다. 각 구간마다 차이는 있어도, 나름대로 발전하는 세상이라고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혹시 다른 마수들도 자아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베히모스처럼요.” 베히모스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럼요. 물론이죠! 물론 많은 마수들이 이 지옥이란 세상에서 태어나 본능적으로 살아가지만 서도, 다들 기본적인 자아는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개중에는 외부에서 끌려들어와 구성원이 된 경우도 적잖게 있지요. 그럴 때는 과거의 인격을 유지한 채 구성원이 되는 경우도 있어, 조금 더 확실한 자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말을 할 수도 있어요. 저처럼요.” “오?” “또한 그걸 활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까 말씀 드렸던 초열 지옥의 야장도, 생전에 인간이었던 마수가 건축한 구조물이지요. 어때요. 이제 좀 이해가 되시나요?” “조금 더 봐야 알겠지만, 우선은 알겠습니다.” 조금 감탄하는 척을 하자 베히모스는 신이 나는지 굉장히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아직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이해는 가는 말이라 나는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깡! 어디선가 쇠와 쇠가 부딪치는 듯한 철성이 울렸다. 아까 미미하게나마 들었던 소리였다. 이번에는 더욱 확실하게 들려와,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아차. 거의 다 와놓고서는….” 베히모스는 나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더니 무언가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다. “잠시 가면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응? 도착한 거 아니었나요?” “그렇기는 한데. 대공께서는 조금 더 안쪽에 계십니다.” “아.” 그러고 보니 게헨나가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이윽고 바삐 걸음을 놀리는 베히모스를 따라가며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대 초열은 게헨나가 관할하는 구간이라고 했고, 이 지역은 대 초열 야장이라 불리는 장소다. 그리고 게헨나는 감사 인사를 하려고 나를 부른 거라고 한다.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고 하니 무언가를 줄 것 같기도 한데. 설마 만들어서 주려는 건가? 아니면 리본을 머리에 예쁘게 묶고 자신이 선물이라고…. 그렇게 나름 행복한(?) 상상에 빠져 있을 즈음. “들으셨는지는 모르지만, 이 대 초열은 군단장을 제외하면 들어올 수 없는 구간입니다.” 앞서 걸어가던 베히모스가 돌연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 입고 있는 시꺼먼 갑옷을 툭 건드렸다. “이 갑옷, 보이십니까?” “예. 잘 보입니다.” “그렇군요. 자랑하려는 건 아니지만, 이 갑옷은 여기서 만들어낸 작품, 아니 걸작입니다. 바로 대공께 하사 받은 갑옷이죠.” “걸작이라.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갑옷에 대한 애착심이 대단하시군요.” “네. 그럴 수밖에요. 오직 군단장들만이 받을 수 있는, 대공께서 직접 만들어주신 물건인데요.” “음?” 게헨나가 만들어줬다고? 이건 조금 의외였다. 망치질을 하는 지옥 대공이라니. 상상하기 조금 힘들지 않은가. 하기야 못할 이유도 없겠지마는. “혹시 야장에서 무언가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어라고 생각하십니까?” 또다시 뜬금없는 질문이 날라왔으나 나는 별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 “글쎄요. 물건을 만드는 재료?” “후후.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요.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 “저는 불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이요?” “네. 얼마나 좋은 불을 쓰는지. 또 얼마나 알맞게 온도를 조절하는지. 한 마디로 열처리가 관건이라는 거죠. 이에 따라 질 나쁜 철도 날카로운 명검으로 변할 수 있고, 고급 미스릴도 쓰레기로 변할 수 있습니다. 즉 재료도 중요하지만, 결국에는 부차적인 문제라는 거죠.”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 말을 하는 걸까? “그러니까, 생각해보십시오.” 문득 우뚝 걸음을 멈춘 베히모스가 갑자기 주변을 돌아본다. “이 최고의 재료들과.” 따라 시선을 돌리자, 여전히 용암이 흐르는 바다와, 반쯤은 고개를 내민 핏빛을 머금은 기암괴석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그 어느 것과도 비할 수 없는, 차원 최강의 불이 만난다면.” 다음 순간, 베히모스의 시선이 낭떠러지 방향 더욱 깊숙한 곳으로 향한다. “…과연, 어떤 걸작이 탄생하실 것 같습니까?” 이윽고 나를 힐끔 돌아본 베히모스는, 시뻘건 안광을 뿌리며 이를 딱딱 부딪쳤다. “저로서는…. 감히 예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 순간. 깡! 낭떠러지 안에서 들려온 맑은 소리가 한 번 더 귓가로 흘러들었다. ============================ 작품 후기 ============================ 다음 회에는 완결까지 가는 장비가 하나 나올 예정입니다. 다른 장비들보다 설정에 조금 더 공을 들였습니다. 부디 기대해주세요. :) 0675 / 0933 ---------------------------------------------- 3. 한편, 같은 시각. 장내 가장 깊숙한 장소까지 들어간 이후. 베히모스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본 순간, 나는 빛무리가 폭사하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누군가로부터 쏘아지는 붉은 빛 줄기는 용암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기암괴석을 곧바로 쳤고, 이내 둘레를 두르듯이 감싸며 환한 빛을 분사했다. 깡! 나는 확실히 볼 수 있었다. 붉은 빛 때문이 아닌, 기암괴석 자체가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맑은 철성을 내는 광경을. 이내 둘레를 감싸는 빛이 흡수되듯이 사그라지고, 동시에 우두둑 소리가 나며 기암괴석의 크기가 줄어들었다. 정말이지 굉장한 기세였다. 비단 보이는 부분에만 겁화를 방출하는 게 아닌지, 기암괴석 사방에 흐르는 용암이 선명한 빛을 발하며 물결을 일렁였다. 이 정도라면 해일이 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기세였으나, 이상하게도 주변은 조용하기만 했다. 빛무리로 일어나는 현상만 제외하면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몇 차례나 겁화가 작열하고 사그라질 때마다 맑은 철성이 울렸고, 그에 따라 기암괴석의 크기가 점차 줄어들어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됐을 무렵, 기암괴석이 가리고 있던 붉은 빛을 방출하는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찬연한 빛이 감도는 사이로 자태를 드러낸 여인은 당연히 게헨나였다. 겉모습은 이전과 거의 다를 바 없으나 딱 하나, 풍성하게 늘어트렸던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묶어 넘겼다. 고요하면서도 진지한 눈으로 기암괴석을 다루는 모습을 나는 넋을 잃고 응시했다. “허…. 설마….” 그때 바로 옆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베히모스는 나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 거듭 탄식을 터뜨렸다. 무에 그리 안타까운지 이따금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까지. “우선은 나갑시다. 아직 작업이 끝나지 않고 막바지에 이른 이상,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냥 조용히 구경만하면 안될까요?” “이미 우리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럼에도 저러시는 건, 지금 그 정도로 집중하고 있다는 겁니다.” “…….” 하기야 생각해보면 그렇다. 겁화의 파괴력은 화정도 한 수 접고 들어갈 정도로 어마어마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저 기암괴석은 도대체 어떤 물질인지, 겁화를 상대로 어느 정도 견뎌내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아무튼 그 말이 맞는다는 생각에 나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리고 베히모스의 손에 이끌려 약 50 미터 정도 걸음을 되돌렸다. 돌아가는 와중에도 베히모스는 탄식을 그치지 않았다. 무언가 굉장히 아깝다는 듯이 “어떻게 저런….” 이나 “정말 너무하시네….” 등등의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당최 왜 저러는지를 몰라 멍청한 기분으로 쳐다보고 있자, 돌연 베히모스가 쩝 입맛을 다시며 걸음을 멈췄다. “에….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설명을 드려야 할지….” 정말 곤란하다는 듯 인중 부분을 툭툭 건드리던(도저히 긁는다고 볼 수가 없었다.) 베히모스는, 갑자기 용암이 흐르는 강에 몸을 빠트렸다. 그리고 첨벙거리며 어딘가로 걸어가기까지. 나보고는 몸이 녹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면서 자기는 잘도 걸어간다. 그리 멀리 가지 않고 몸을 멈춘 베히모스는, 재차 몸을 돌려 나를 보며 팔을 뻗었다. 이내 베히모스가 손을 얹은 그 무언가는, 다름 아닌 피를 머금은 듯 시뻘겋기 그지없는 기암괴석이었다. “신열석, 활화석…. 지금 보시는 암석에는 많은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 암석을 일컫는 정확한 명칭은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이름없는 돌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느닷없이 베히모스의 음성이 진지해졌다. “이름없는 돌이요?” 조심스레 반문하자 고개를 크게 끄덕인 베히모스는, 곧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야장에 오시면서 보셨겠지만 이 일대는 용암과 황무지로 이루어졌습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해보면 거의 대부분이 용암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간단하게 생각해봅시다. 기본적으로 용암이라는 건 엄청나게 뜨겁지 않습니까? 흘러 지나치는 모든 것을 녹여버릴 정도로요. 그런데 이거 말입니다. 이거요.” 베히모스는 얹은 손을 움직여 툭툭 두들기며 기암괴석을 강조했다.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이 뜨거운 용암 속에서 이 암석이 이렇게나 굳건히 머무를 수 있다는 게요. 아. 물론 그렇게 따지면 지금 우리가 디디고 서 있는 지면도 말이 안 되는 것이지요. 계속해서 쏟아지는 용암 폭포의 특성상, 아마 끝없이 녹아내려 진작 구멍이 뚫리고도 남았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궁금하기는 했다. 잠깐 흐르다 마는 것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계속해서 용암이 쏟아지고 흐르는데, 여기 지면은 어떻게 견뎌내는 것일까? 고작 황무지에 불과한데. “그 비밀은 말입니다. 바로 이 대 초열이라는 구간에 있습니다. 즉 세상이 살아있음으로써 이 장소가 견딜 수 있도록 나름대로 조정을 한다는 말이죠.” 한순간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무간 구간을 떠올리자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게헨나의 표현을 빌려보면 무간은 왕의 탄생과 최후를 함께하는 세상이라고 한다. 즉 왕의 시작과 끝을 인지하는 일종의 의지 혹은 자아가 있다는 소리였다. 그러면 무간이 그렇듯이 다른 구간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대 초열이라는 세상은 용암을 받치는 이 장소가 무너지는걸 원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용암을 부정하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이 지역 일대로 모종의 기운을 집중시켰고, 그 기운은 지금도 흐르고 있습니다. 대공께서 이 장소를 괜히 야장으로 선택하신 게 아닙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조금씩 흥미가 돋는걸 느꼈다.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궁금한 부분이 생겨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허나 대 초열이라는 세상이 의지가 있다는 건 둘째치고서 라도, 이 장소가 무너지는걸 원하지 않는다는, 여기에 일대에 기운이 흐른다는 사실은 어떻게 밝혀내신 거죠?”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부왕(父王)께서는 지금 바로 그 증거를 보고 계십니다.” 그러자 이를 한 번 딱 부딪친 베히모스가 기암괴석을 크게 두드렸다. 그나저나 부왕이라. 그 말은 조금 낯간지러운데 말이지. “이건 저도 정말 가끔 보는 광경인데요. 어느 날 보면 용암이 흐르는 수면에서 지면이 불쑥 올라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크기를 더해가, 어느 순간 이와 같은 형태를 갖춥니다.” “지면이 스스로 융기한다는 말씀이로군요.” “그렇죠. 그 사실로 추정해보면, 저는 이 장소에 흐르는 기운의 정체를 흡수와 동화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즉 흐르는 용암을 흡수해서 동화 작용을 거친다는 뜻이죠. 그렇게 보면 이 암석은 일종의 결정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흡수와 동화? 결정체?” “네네. 생각해보세요. 수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용암이 흐르던 대지입니다. 그 인고의 시간 동안 언제까지고 용암을 흡수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동안 모은 용암의 정수를, 이렇게 외부로 발출함으로써 순환 작용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지요.” “흠.” 무언가 조금 복잡해지는 것 같아 나는 팔짱을 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도 보기는 했지만, 확실히 베히모스의 말대로 용암의 바다에는 기암괴석들이 드문드문 솟아나 있었다. “한 마디로 정리해보면, 이 암석은 인고의 세월 동안 결정화된 대 초열의 의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음음.” 기나긴 설명을 마치고 나와 같이 팔짱을 끼는 베히모스. 고개를 끄덕이며 매듭짓는 말을 듣고 나서 나는 싱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고작해야 돌덩이가 일종의 의지를 갖고 있다는 말이 자못 재미있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자 베히모스는 양손을 허리에 척하니 대고서 새초롬한(?) 안광을 빛냈다. “어라? 못 믿으시는 것 같은데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못 믿겠다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100% 믿겠다는 것도 아니고. 또한 개인적으로 직접 경험하지 못한 건 믿지 않거니와, 아직 이 세상에 관한 지식이 부족한 만큼 그냥 그러려니 받아들이는 거지. 이러나저러나, 나는 넙죽 받기만 하면 되는 입장이다. 말인즉 제일 중요한 건 재료에 얽힌 유래가 아닌 결과물의 성능이랄까. …이런, 너무 속물적인가? “아무래도 못 믿으시는 것 같은데, 이번에도 제가 증거를 보여드리죠.” “증거요?” “이 돌이 대 초열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하하하. 그게 가능합니까? 갑자기 입이 생겨 말이라도 하나요?” 그러자 “저는 가능합니다.” 라고 힘주어 말한 베히모스는, 갑자기 옆구리를 굽혀 기암괴석 쪽으로 귀를 가까이 했다. 그리고 장갑까지 동원해 무언가 자세히 듣는 자세를 잡더니 “으음.” 진중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이윽고 베히모스는 여전히 기암괴석에 귀를 기울인 채 입을 벌렸다. “허. 이 기암괴석이 부왕을 보며 이런 의지를 전달하고 있군요.” 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베히모스는 처음부터 시종일관 진지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탓에 혹시나 하는 애매한 기분이 들 즈음. “이 빌어먹을 인간 노오오옴.” 예의 거슬리는 음성이…. 뭐? “감히 우리 대공 님의 마음을 뺏어가다니이. 그것도 모자라 몸도, 그리고 처음도 뺏어가다니이. 제엔장, 부럽구나아아. 부럽단 말이다아아아.” 그때였다. “저주할 테다아아. 부러우니까 저주할 테다아아. 정말 미칠 정도로 부러워서 죽을 것 같으니, 너도 저주해서 죽여버릴 테다아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꽥!” 쾅! 차마 ‘다.’ 로 말을 끝내기도 전, 베히모스의 비명과 어디선가 흘러 든 커다란 굉음이 동시에 겹쳤다. 얼떨결에 눈을 한 번 감았다 뜨자, 베히모스는 어느새 자리에서 사라져 있었다. 내 눈은 그 사이 일어난 변화를 잡아낼 수 없었다. “누가 지금 네 속마음을 말하라고 했느냐” 이어서 귓가로 들려오는 고고하면서도 익숙한 목소리. 시선을 돌리자, 언제 나왔는지 게헨나가 오연히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언제 처박혔는지, 낭떠러지 절벽에 머리가 박힌 채 온몸을 바둥거리는 베히모스까지. 그러니까 게헨나가 힘을 쓴 건가? 이윽고 베히모스는 절벽에 처박혔던 머리를 간신히 빼내고서 투구를 쓱쓱 문질렀다. “대공. 정말 너무하십니다. 갑자기 기습이라니요.” “네가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기가 차서 그랬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입을 함부로 놀리느냐.” “그, 그렇군요. 그건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걸 떠나서라도 너무하십니다.” “또 무어가 너무하다는 것이냐.” “후후. 저는 봤지요.” “봤다?” 베히모스의 음성에 게헨나가 살그머니 두 눈을 치떴다. 그러자 얼른 몸을 일으킨 베히모스는 낭떠러지 방향을 가리켰다. 게헨나의 의문 어린 시선이 나와 베히모스를 번갈아 향한다. 베히모스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작업하신 거, 여기 일대 중에서 가장 큰 기암괴석으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까 그거 있잖습니까. 그거.” 게헨나는 그게 어쨌냐는 표정으로 가볍게 수긍했다. “그래. 헌데?” “하. 역시나.” 그러자 힘 빠지는 소리를 흘린 베히모스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게헨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낯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왜…?” “정말 너무하십니다. 그 기암괴석은 가히 수 천년 동안 융기해온, 말 그대로 대 초열의 산 증인인데…. 저뿐만이 아니라 모든 군단장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었는데….” “……?” “저희가 몇 번이나 달라고 애원했는데도 지금껏 철저하게 무시하시다가…. 갑자기 부왕이 나타나셨다고 그걸 홀랑 갖다 바치시는….” 그 순간. 휙! 첨벙! 또 한 번 눈을 감았다 뜨자, 베히모스가 사라짐과 동시에 무언가가 수면으로 세차게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안 봐도 뻔하다. 아마 게헨나가 용암으로 던져버렸을 테지. 그런데 아까 보니까 용암에 잘만 들어가던데. 입을 막기로는 부족하지 않나?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내 생각이 철저한 오산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문득 용암을 쳐다보는 게헨나의 두 눈이 붉은 빛을 발하더니. 치이이이이이이익! “후후. 이것쯤은…? 아악! 아아아악!” 용암이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소리와 베히모스의 비명이 겹쳐서 들려왔다. 한층 강렬한 열기가 피어오르는 용암의 바다 속에서, 베히모스는 낙지라도 빙의 된 듯 꿈틀꿈틀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흠, 흐흠.” 그러나 게헨나는 전혀 아랑곳 않은 표정으로 다가왔고, 강제로 내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저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나저나, 많이 기다렸느냐. 잠은 또 잘 잤고?” “아아아악! 대공! 잘못했어요! 잘못했습니다! 엄청 뜨겁다고요! 아아아악!” “어흠. 어디까지 들었는지는 모르겠다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우선….” “아흑! 알았어요! 앞으로 장난 안칠게요! 원래는 어제 무간에서 나오신 후, 부왕이 잠드신 내내 그 어느 때보다 열과 성을 다해 작업했다는 말도 하려고 했는데! 안 하겠습니다! 아흐흐흑!” …게헨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윽고 맵시 있게 머리를 쓸어 넘기자, 깔끔하게 묶었던 머리카락이 단번에 풀리며 예전처럼 풍성하게 흘러 넘친다. 잠시 후. “그대. 잠시 이것 좀 구경하고 있거라.” 게헨나가 싱긋 웃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오른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내 품에 억지로 안기고서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런 게헨나의 왼손에는 어느새 두 갈래로 나뉜 불의 채찍이 들려져 있었다. 그나저나 나한테 준 건 도대체 뭐지…? 나는 곧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 작품 후기 ============================ 집안에 경조사가 겹쳤네요. 이번 주 토요일이 작은 사촌 누나 결혼식이라서 하루 전날인 19일에 대전으로 내려가볼 예정이었는데…. 창원으로 먼저 갈 일이 생겼습니다. 마음이 심란해요. 0676 / 0933 ---------------------------------------------- 3. 한편, 같은 시각. 실로 오랜만에 사용해보는 제 3의 눈.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곧바로 정보가 출력되지 않는다. 부여된 설정을 읽어내는데 시간이 걸리는지 미적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나는 우선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설정을 읽는 게 늦는다는 소리는 그만큼 효과가 엄청나다는 방증일 테니까. 그러는 동안. 짝! 짝! “오늘따라 입을 상당히 재밌게 놀리는구나. 그렇게나 내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느냐?” “아악! 조, 좋습니다! 아악! 더 강하게 때려주세요!” 한쪽에서는 어느새 건져냈는지 베히모스가 지면에 엎드려 있고, 게헨나는 한쪽 발로 베히모스를 짓밟은 채 처벌을 가하는 중이었다. 아니. 처벌이라고 말하기에는 상당히 애매하다. 게헨나의 채찍이 한 번 후려칠 때마다 베히모스는 온몸을 비틀어 젖히며 교성(?)을 지르고 있었으니까. “이! 이 못된 것! 말하는 꼴이 음란한 암퇘지나 다름없구나! 처음에는 고결하기 그지없던 영혼이, 어이하여 이렇게나 타락했다는 말인가!” “좋아요! 좋다고요! 저를 더욱 비난하고, 더욱 매도하라는 말입니다! 하아아악!” …처, 처음에는 고결했던 영혼이라. 아무리 좋게 봐도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는데. 아무튼 계속 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기분이 서서히 더러워진다. 띠링! 더는 볼 수 없어 눈을 돌리려는 찰나, 때마침 익숙한 음이 들렸다. 이어서 허공으로 상당한 장문의 설명이 출력된다. 마침내 제 3의 눈이 정보를 읽어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허공에 떠오른 설명을 읽기 시작했다. 『게헨나의 수호 요새(Protected Fortress Of Gehenna).』 1. 설명. 수천 년의 세월을 간직한 용암의 정수와 최강의 염화인 지옥 겁화가 어우러져 탄생한 최고의 마력 갑옷. 원래 겁화는 파괴 성향이 짙은 속성이나, 보호 요새를 만들어낸 지고의 존재가 착용자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수호 속성을 띠게 됐다. 사용자의 마력으로 발현되는 마력 갑옷의 일종으로, 마력이 허락하는 이치상 외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행사를 무시한다. 이론상이기는 하나, 착용자의 마력만 무한하다면 전략 병기 급의 공격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사실상 이미 보통의 갑옷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거의 보호 요새를 구가하는 방어력을 구축하고 있다. 딱 하나 단점이 있다면 마력 소비가 무시무시하다는 것. 단순히 마력 갑옷을 발현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마력이 소비된다. 2. 효능. ① 기본적으로 사용자의 마력에 기반해 발동되는 만큼 착용한 보호구에 적용돼 형태가 드러난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모든 물리적, 마법적 행사에 의한 충격을 무시한다. 그러나 그만큼 사용자의 마력 소비는 가속화되며, 동격의 힘을 갖춘 공격은 무시하지 못한다. ② 의지가 깃든 정수로 만들어진 만큼 착용자를 맹목적으로 보호하려는 자아를 갖고 있다. 이제 갓 탄생한 터라 아직 어린 자아에 불과하나, 서로 지속적인 교감을 나누고 성장하며 호흡을 맞출 수 있다. 현재는 모든 공격 당하는 상황을 스스로 판단하고 방어하려고 한다. 그로 인해 사용자가 인지하지 못한 기습을 방어할 수도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사용자 스스로 방어가 가능한 상황에서도 마력 갑옷이 발현될 수 있다.(현재 성장 정도 : 0%) 모든 정보를 읽고 나서, 나도 모르게 눈을 비비고 말았다. 한 번 비비고 또 보고, 두 번 비비고 다시 보고. 그렇게 네 번이나 거듭해서 읽고 나서야 나는 정보를 완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와.” 절로 탄성이 나온다. 세상에. 모든 물리적, 마법적 행사를 무시한다니. 거기다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장비라니. 허겁지겁 정보를 지우고 아래를 쳐다보자, 내 품에 얌전히 안긴 채 은은한 붉은빛을 흘리는 둥글둥글한 정수가 보였다. 보석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크고, 구슬이라고 보기에는 약간 작다. 나는 넋을 잃은 채 발그스름한 빛을 띤 구슬을 응시했다. 이게 보호 요새라는 이름을 지닌 장비라는 말인가. 그리고 조금 전까지 그 기암괴석이었다는 말인가. 물론 가만히 보면 단점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정보에 명시돼있듯이, 마력 소비가 엄청나다는 점을 유일무이한 단점으로 꼽을 수 있다. 허나 그 점을 감안하고서라도 이 장비가 갖는 매력은 부인할 수 없다. 우선은 마력으로 발현되는 마력 갑옷의 일종이라는 것. 그리고 착용한 보호구에 적용돼 형태가 드러난다는 것. 이 말은 내가 또 하나의 보호 장비를 착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말인즉 현재를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기존 영광 세트에 더해서 이 요새 장비의 방어 효과를 추가할 수 있다는 소리. 그뿐일까. 자아를 갖고 있고 정신적으로 성장한다는 점 또한 굉장한 장점이다.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공격까지도 스스로 판단해 보호해준다고 한다. 이건 난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기습이나 암살을 당할 가능성이 0%로 줄어들었다는 소리였다. 그러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이 정도의 장비는 홀 플레인 전 대륙을 통틀어도 몇 개 없는, 아니 내 사용자로서 인생을 통틀어 처음 가져보는 최고의 장비였다. 마력 소비가 심하다고는 하지만 내 마력 능력치가 낮은 것도 아니고. 아마 강철 산맥 공략 전에 이걸 갖고 있었다면, 파더든 쿠샨 토르든 가볍게 결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정말 장난이 아닌데. 진짜 물건이네. 앞으로 한 번 잘해보자. 하하.” 그렇게 생각하자 절로 기쁜 마음이 들어, 나는 구슬을 들어올려 볼에 비볐다. 보물을 발견했다는 기쁨에 나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그때였다. 띠링! 『게헨나의 방어 요새가 사용자 김수현의 애정 표시에 부끄러워합니다. 성장 정도가 0.17% 상승합니다.』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뭘 부끄러워해? 띠링! 『자아를 지닌 채 태어난 장비는 탄생 목적에 따르는 고유한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성질에 부합되는 경험을 하고 착용자와 호흡을 맞추면서 성장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장비의 자아를 완전하게 각성시킬 수 없습니다. 게헨나의 수호 요새 경우 ‘보호’ 라는 사명을 갖고 태어난 만큼, 자신을 사용하는 주인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사용자 김수현도 그에 상응하는 관심을 보인다면, 장비의 자아 성장 또한 급격한 상승 곡선을 그리게 됩니다.』 나는 멍한 기분으로 새로 떠오른 메시지를 응시했다. ‘그러니까 수라 같은 경우는 내 나쁜 버릇을 자세하게 알고 있다고. 그걸 기억해두었다가 전투 때 나도 모르게 버릇이 나오게 되면, 스스로 움직여 궤도를 수정해주는 경우가 있거든.’ 그러자 문득 예전에 공찬호와 나눴던 대화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갈 즈음. “흐응. 보아하니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구나.” 고혹적인 목소리가 살금살금 귓가로 다가왔다. 게헨나가 흐뭇한 표정을 짓고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순간 처벌 결과가 궁금해 베히모스가 어찌됐는지 보려고 했지만, 시선을 돌릴 때마다 게헨나의 몸이 홀연히 이동해 시야를 방해했다. 마치 절대로 보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처럼. 결국 포기하겠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이자, 게헨나가 싱긋 웃으며 말을 잇는다. “그렇게 볼에 비빌 정도로 좋아하다니…. 만들어준 입장에서 흡족하기는 하다만, 이미 그 정수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눈치인데?” “응. 따로 정보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거든.” 어차피 게헨나 앞에서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나는 제 3의 눈의 존재를 순순히 인정하는 동시, 아직도 내가 정수를 볼에 비비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게헨나가 한 손에 입을 대고 쿡쿡 웃고서 고개를 끄덕거린다. “후후. 그렇다면 따로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아도 되겠지.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명심하거라. 분명 그 정수의 보호 능력은 쓸만하나, 어디까지나 그대의 마력을 기반으로 발현되는 능력이다. 그러니 항시 가용할 수 있는 마력을 점검해야 할 것이다.” “응. 알겠어. 그런데….” 어차피 메시지에도 적혀 있던 주의 사항. 그 정도야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허나 지금은 그보다 더욱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그런데?”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는 게헨나를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거…. 정말로 받아도 되는 거야?” “응?” 그랬다. 아까 베히모스의 말을 들어보면 거의 대 초열의 산 증인에 해당하는 보물을 받은 것 같은데…. 물론 받은 입장에서는 고맙기 한량없으나, 고작 임신(?) 한 번 시켰다고 이런 대우를 받는다는 건 사실 묘하게 신경 쓰인다. 한 마디로 정리해보면, 무언가 다른 속셈이 있는 게 아닐까라는 막연한 추측이 들었다. “그, 그런가? 너무 부담스럽느냐?” “그렇다기보다는…. 사실 내 입장에서는 감이 잘 안 와서. 왕의 잉태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그렇게나….” 그 순간이었다. “어, 어?” 뜻밖에도 게헨나는 예상외의 반응을 보였다. 왕의 잉태라는 말을 꺼낸 순간 느닷없이 몸을 움찔하며 탄식을 지른 것이다. 낯에 한껏 당혹한 빛을 역력히 드러낸 채 빠르게 눈을 깜박거린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와, 왕의 잉태에 성공했다니…. 그건 또 어디서…. 아, 아니. 그게 무슨….” “응? 성공한 거 아니었어?” “그, 그게….” “베히모스가 그러던데. 무간 구간의 변화를 보지 못했느냐면서….” 그 순간 게헨나가 아미를 와짝 찡그리더니 두 눈을 희번덕 빛내며 재빠르게 옆을 돌아보았다. 따라 시선을 돌리자 마침 온몸에 묶인 채찍을 풀며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는 베히모스를 볼 수 있었다. “응? 대공. 또 왜 저를 노려보시는 겁니까? 무섭게.” 이윽고 완전히 몸을 일으킨 베히모스는 귓가에 거슬리는, 그러나 까닭 없이 해맑게 느껴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게헨나는 부르르 몸을 떨더니 어디선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너, 너는 정말…. 도대체 무슨 말을….” “응? 아아. 네. 제가 말씀 드렸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부왕 대우도 해드렸고요. 어때요. 잘하지 않았습니까?” 양손을 허리에 척 얹으며 자랑스럽게 가슴을 내미는 베히모스. 그러나 베히모스를 보는 게헨나의 눈초리는 결코 곱지 않았다. 마치 일생에 도움이 안 된다는 듯한 눈빛을 빛내며 죽일 듯이 노려본다. 베히모스도 그 시선을 느꼈는지 얼른 손을 내리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아니 왜 그렇게…. 제가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고…. 사실…. 이잖아요….” “오빠. 다들 여기 계셨어요?” 그때, 마침 공교롭게도 김한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나와 베히모스가 걸어온 흔적을 보고 따라온 모양. 그러한 찰나, 나와 같이 김한별을 돌아본 베히모스의 행동은 굉장히 신속했다.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김한별을 확인한 순간, 매우 맹렬한 기세로 마주 달려가더니 달려오는 그대로 업어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그 상태로 앞으로 달려가기까지. 김한별의 낯에 멍한 기색이 서린다. “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빨리 내려주세요! 오, 오빠! 오빠!” “자자, 우리는 이만 갑시다. 제가 경치가 아주 좋~은 장소를 알고 있어요!” “됐으니까 놓으라…! 꺅! 어딜 만져! 어딜 만지냐고!” “응? 항문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이내 삽시간에 도로 멀어지는 김한별을 보며 나는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리고 도로 몸을 돌아보자, 여전히 낯을 찡그린 채 아랫입술을 질근질근 씹고 있는 게헨나를 볼 수 있었다. 무언가 계획이 틀어졌는지 상당히 고심하는 표정이다. “저기, 게헨나?” “후…. 베히모스…. 정말 도움이…. 이래서야 내가 할 말이….” “게헨나! 왜 그래?” “으, 응?” 약간 목소리를 높이며 다가가자 게헨나가 깜짝 놀라며 걸음을 물러섰다. 그러나 곧 자신의 행동을 깨달았는지 재빠르게 표정을 관리하며 어색하게 기침한다. 그러자 나 또한 덩달아 어색한 기분이 들어 가만히 정수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야장에는, 나와 게헨나 둘만 남았다. ============================ 작품 후기 ============================ 조금 애매한 느낌은 있으나 외전 3 챕터는 여기서 끝났습니다. 다음 회부터는 외전의 마지막은 4 챕터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일전에 말씀 드렸듯이 아마 이번 주 안으로는 끝날 예정입니다. 저도 이제 슬슬 머서녀리 클랜이 그립네요. 다음 회는 겸사겸사 머셔너리 이야기도 조금 넣어야겠어요. 하하. 그리고 아마 독자 분들께서 이번 외전 중 가장 궁금하신 부분이 ‘앞으로 게헨나는 어떻게 되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 부분은 4 챕터 안에서 확실하게 풀어드리겠습니다. 나름대로 얽힌 비밀은 하나 있어요. :) 마지막으로 어제 코멘트로 응원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집안에 결혼이라는 경사와 교통 사고라는 조사가 겹치다 보니 상황이 상당이 미묘하네요. 그래도 저는 괜찮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0677 / 0933 ---------------------------------------------- 4. 약속된 이별. 시간이 흐른다. 게헨나는 베히모스가 김한별을 보쌈(?)하고 사라진 이후로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왜 그러는지 이유라도 알려주면 좋으련만, 정작 게헨나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저 내 귀환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할 뿐, 나는 함부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현재 나름 괜찮은 대우를 받고 있다고는 하나, 현실은 지극히 냉정하다. 둘러싼 관계는, 여전히 게헨나가 갑의 입장에 서 있으며 나는 무언가를 요구할 처지가 아니다. 부탁이라면 모를까. “그러니까 말이다.” 결국 게헨나가 말문을 연 것은 약 5분이라는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자연스레 긴장감이 샘솟는걸 느끼며 나는 자세를 바로 했다. 과연 게헨나는 내가 돌아가는걸 허락해줄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문제라도 있는 걸까? 그렇게 오만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갈 무렵. “실은 베히모스의 말은 옳지 않다.” 비로소 들려온 첫마디는, 약간은 예상을 빗나간 말이었다. “으, 응?” “그, 그러니까! 그, 그 말이 아주 틀리지 않을 수도 있으나, 그렇다고 아예 맞지도 않는…?” 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다가 말끝을 흐린다. 그래. 듣는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너도 그렇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해달라는 뜻을 담아 지그시 응시했다. 그러나 한 번 당황하자 걷잡을 수가 없겠는지, 게헨나는 차마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결국 나는 게헨나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보았다. 게헨나는 베히모스의 말이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고 했다. 여기서 베히모스의 말은 게헨나의 임신을 의미한다. 정리하면 왕의 잉태가 불확실하다는 말인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게헨나의 말은 잉태가 확실하지 않다는 소리야?” “그래! 그렇지!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다!” 그 순간 게헨나가 반색하며 외쳤다. 어찌나 기꺼워하는지, 마치 목욕탕에서 넘치는 물을 보고 ‘Eureka!’ 를 외친 아르키메데스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면 있잖아. 무간 구간이 변화한 건 결국 어떻게 되는 거야?” 별 뜻이 있는 질문이라기보다는, 그냥 개념을 확실히 잡으려는 의도로 건넨 말이었다. 설령 게헨나의 말대로라고 해도, 관계 후 발생한 무간 구간의 변화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상하지 않은가. 왕의 잉태를 확신할 수 없다면, 수천 년 동안 죽은 상태로 단 한 번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던 세상이 왜 갑자기 그런 변화를 보인 걸까? 조금 깐깐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최소한 이 부분만큼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 정말 안타깝게도, 게헨나는 또다시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얼굴이 흡사 정곡을 찔렸다는 듯 삽시간에 굳어졌다. 달싹거리기만 하는 꽃봉오리 같은 입을 보고 있으려니, 이제는 나도 머리가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애초 예상하던 요지와 한참이나 빗나간 건 차치하고서라도, 게헨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감을 잡을 수조차 없다. - 아, 머리 아파…. 김수현. 쟤 지금 도대체 뭘 어떻게 해달라는 거야? 화정도 여태껏 듣고 있었는지 기나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낸들 알겠냐. 당혹스럽기는 나도 마찬가지라고.’ - 어휴. 저런 애가 나와 동격의 존재라니…. 창피하네 정말. 야, 야. 혹시 쟤 너랑 더 자고 싶어서 저러는 거 아니야? 응? 나랑 더 자고 싶어서 저러는 거라고? 그 지옥 대공, 아니 게헨나가? ‘…에이. 너는 말을 해도 참.’ 설마 그러겠냐는 생각에 나는 싱겁게 웃음을 터뜨렸다. - 하기야…. 그래도 지고의 존재인데, 그런 파렴치한 생각은 하지 않겠지? 화정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흐흠. 베히모스는 아무것도 모르느니라. 잘못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함부로 입을 놀렸다. 그래서 아까 죄를 다스린 것이다.” 문득 어색한 헛기침과 동시에 게헨나의 조용한 음성이 이어졌다. 시선을 들자 어느새 조금이나마 진정된 얼굴을 하고 있는 게헨나를 볼 수 있었다. 게헨나가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거라. 무간은커녕 대 초열도 이 몸이 허락해야만 출입이 가능한, 고작해야 군단장에 불과한 놈이다. 그러면서 무얼 그리 잘 알고 있겠느냐. 무간의 탄생과 소멸에 얽힌 비밀은 군단장들도 문외한이나 다름없느니라.” “아. 그래? 듣고 보니 그러네.” 이거는 그래도 말이 된다. 확실히 군단장들도 접근이 불가능한 영역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무엇보다 ‘비밀’ 이라고 한다면, 게헨나가 아까 함부로 말하지 못하고 망설이던 모습도 설명이 된다. “그러면 그 비밀이라는걸 좀 말해줄 수 있을까? 어쨌든 나도 협력하는 입장이니까.” 부왕의 자격이라고 말하려다가 갑자기 낯간지럽다는 생각이 들어 협력하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음. 좋다. 허나 지금부터 듣는 내용은 그 누구에게라도 발설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게헨나는 안될 것 없다는 듯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갑자기 숨을 크게 들이키더니 차분히 호흡을 고르기 시작한다. 저건 긴장된 마음을 추스를 때나 하는 행동인데…. 그 게헨나가 저럴 정도라면 진정 어마어마한 비밀일 것이다. 이후 게헨나는 절대로,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약조를 거듭 받고 나서도, 두어 번 나를 흘끗흘끗 살폈다. 그리고 처음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인 것과는 달리, 약간 마지못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지옥의 입구라 불리는 등활부터 시작해서, 왕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불리는 무간까지. 그대도 알고 있듯이 지옥은 총 8개의 구간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니까 등활부터 하나씩 넘어갈수록 상위 구간 개념으로 보면 되는 거지?” “정확하다. 그렇게 각 구간은 독립된 세상이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어탑으로 연결된 연속된 구간임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그렇겠지.” “그리 생각해보면 가장 중요한 구간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무간이다. 즉 왕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모든 구간을 아우르는 역할을 맡고 있는 셈이지.” “아우르는 역할이라…. 확실히 이해했다.” 말을 들어보니 게헨나가 왜 그렇게나 왕을 원했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기분이다. 현대적으로 생각해보면 지옥은 현재 무정부 상태라는 소리였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를 보던 게헨나의 두 눈이 살그머니 옆으로 이동한다. “그러면…. 그대도 기억할 것이다. 그때 무간에서 그대와 내가 치렀던 의식을.” 한순간 조금 쑥스러운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애써 떨쳤다. 애초 게헨나와의 관계는 왕의 탄생을 목적으로 한 일종의 협력이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게헨나도 굳이 의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테고. 나는 쓰게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 순간이었다. “그때 우리는…. 총 8번의 의식을 치렀지.” “음. 그랬지. …응?” “그리고 금방 말했듯이 무간 구간은 8번째 구간이고.” “……?”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 거지? 왜 갑자기 삼천포로 빠진 기분이 드는 걸까? “저기…. 게헨나? 무언가 조금 이상한….” “조, 조용히 하거라! 아직 이 몸이 말하는 중이지 않느냐!” 이상하다는 생각에 질문을 하려 했으나 게헨나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신경질을 부렸다. 그러고 보니 낯을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고, 시선은 여전히 나를 보고 있지 않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않느냐. 아까도 말했듯이 무간은 모든 구간을 아우르는 구간이다. 그러므로 그에 마땅하면서도 합리적인, 긴 의식을 치러야 한다.” “긴 의식?” “그래. 우선 말해보면, 나와 그대는…. 이, 이 대 초열에서도 무, 무간에서 치렀던 의식을 이어가야 한다는 소리다!” “…….” 그 순간 내 안에 있던 어이가 차곡차곡 짐을 정리하더니 싱긋 웃으며 가출하는 착시가 보였다. 떠나가려는 어이를 붙잡으며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러면 대 초열은 7번째 구간이니까, 여기서는 7번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소리야?” 게헨나가 몸을 움찔 움츠렸다. “초열에서는 6번?” 그러자 한 번 더 움찔했다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는 게헨나. 결국 어이는 기어코 내 손길을 뿌리치고 집을 나가버리고 말았다. 아니. 이게 당최…. - 미친! 그게 무슨 개 헛소리야! 애초 구간이랑 관계 횟수랑 서로 무슨 상관인데? 화정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줬다. 그냥 헛소리도 아니고 개 헛소리란다. - 이거 봐.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결국에는 내 말이 맞잖아! - 어쨌거나 너랑 떡 좀 더 치고 싶다는 소리잖아! - 고, 고작 몇 번 쳤다고 고새 맛 들려서 말이야! - 파, 파렴치해! 화정은 그야말로 길길이 날뛰었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화가 난다기 보다는 허탈하다고 해야 할까? 엄청 중요한 말을 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한다는 소리가…. 이건 완전 억지가 아닌가. 까닭 없이 긴 한숨이 나온다. 한숨 소리를 들은 걸까. 게헨나는 애써 오연한 표정을 보이고 있었으나, 얼굴 한 켠에 그늘진 시무룩한 기색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그래. 자신도 알고 있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결국 나는 정면 직구로 승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니까 게헨나의 말은…. 나와 조금 더 관계를 갖고 싶다는 소리지?” “그, 그게 무슨 말이냐? 허, 헛소리도 그 정도면 수준급이구나!” 역시나 게헨나는 강하게 부인했다. “이 몸을 고작 육체적 쾌락을 좇는 파렴치한이라고 생각하다니…. 실망이구나 그대여! 이건 우리 세상의 부흥을 목적으로 한 매우 정당한 요청이다!” 게헨나는 살짝 아미를 찌푸리고는 당당한 태도로 외쳤다. 그래. 말만 들으면 아주 숭고하지. 정말 드높은 목적이야. 그러나 불안하게 흔들리는 진홍색 눈동자나 낯 전체에 깔린 애타는 기색은, 게헨나의 속을 능히 짐작하게 해주고도 남는다. 입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 몸의 반응은 정직하기 그지없다. 사실 그렇게나 기분이 나쁜 건 아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게헨나가 나를 원하고 있다는 소리니까.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나는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거 하나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요청이다. 비록 ‘언젠가’ 라는 꼬리가 붙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지옥에 체류하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전혀 좋을 게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여러 방면에서 말이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마음을 강하게 먹고 게헨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게헨나. 네 마음은 알고 있고, 또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정말로 미안해. 나는 이제 그만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아. 말해버렸어. 말해버리고 말았어.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돼버려. - 아이고~. 속 시원해! 그래! 바로 이거지! 우리 김수현 아주 예뻐 죽~겠네? 잘했어 잘했어! 드물게도 화정이 나를 크게 칭찬했다. 화정의 응원에 힘을 입어 겨우 속을 추스르자, 뜻밖에도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헨나가 보였다. “…그, 그래? 그렇구나.” …아니. 뜻밖이 아니었다. 게헨나가 태연한 건 잠깐에 불과했다. 돌연 나를 마주하는 두 눈동자가 삽시간에 그렁그렁하게 변한 것이다. 부르르 떨면서 오물오물 움직이던 입은 아랫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이어서 게헨나가 애처로이 시선을 내리깔더니 하얗고 탐스러운 어깨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한다. 이런 반응은 예상치 못했다. 잠시 후.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것도 줬는데….” 게헨나로부터 살짝 젖은 음성이 흘러들었다. 나는 재빠르게 정수를 들어올렸다. “아. 이거? 도, 돌려줄까?” “다른 구간에도 좋은 것들이 많은데…. 그것들도 주고 싶은데….” “그, 그건 고마운데 말이지. 그, 그래도….” “그대는…. 정말 너무하다….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무하는구나….” 결국 게헨나의 목소리가 완연한 울먹거림으로 일변했다. “나로서는 처음으로 생긴 반려인데…. 그대의 마음은 얼마나 차갑길래 이렇게 매정하게 구는 것이냐….” “저 게헨나. 그게 아니라. 옛말에 이별은 빠를수록 좋다는 말이….” “되었다. 평생을 함께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일곱 밤만 같이 지내는 것도 싫다는 게 아니냐.” “…….” 계속 이어지는 호소력 짙은 목소리에 나는 굳건한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는걸 느꼈다. “이건 내 아이이기도 하나, 그대의 자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앞으로 아비 없이 키울 생각만 해도 서러운데…. 그래. 나는 차치하고서라도. 앞으로 태어날 아가가 안쓰럽고, 불쌍하지도 않더냐…?” 불현듯 게헨나가 두 손으로 자신의 배를 소중히 감싸 안고는 살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애절하게 마저 느껴지는 눈빛과 마주한 순간, 나는 느닷없이 머리를 강타하는 거센 충격을 느꼈다. 문득 예전 우정민이 원혜수에 관해 했던 말이 스치고 지나갔다. ‘스스로 몸 안에 아이가 있는걸 알고 있나 봐. 자신의 배를 감싸고 나를 애절히 쳐다보는데…. 그 순간 어떻게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들더군.’ 게헨나의 말이 이어졌다. “최소한. 최소한 앞으로 태어날 아가에게…. 네 아비는 어느 사람이었다. 어떠한 인간이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만한 시간을 주는 게, 그리도 어렵느냐…?” 그동안 나를 꽁꽁 옭아매던 내면의 무언가가, 스르륵, 풀려나가는걸 느꼈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한소영 표지가 나왔습니다. 이 표지를 제대로 감상하고 싶으시면 원본으로 보셔야 합니다. 정말로 디테일이 엄청나거든요. 저는 처음 그림을 보고 넋을 잃는다는 기분이 어떤 건지 제대로 느꼈습니다. 하하하. 원본은 PC에서 제 작품을 클릭하시면요. 우측 메뉴에 작품 설정이라는 칸이 보이실 겁니다. 그 중 맨 위에 글을 클릭하시면 사진이 하나 뜨는데, 그 사진을 한 번 더 클릭하시면 원본으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작은 표지로 보시는 것보다 훨씬 더 와 닿는 감정을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 0678 / 0933 ---------------------------------------------- 4. 약속된 이별. 아주 오래 전….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처음에는 그리 좋은 사용자는 아니었다. 실력이나 사용자 정보가 일천한걸 떠나, 사용자로서 정신적인 각성이 상당히 늦었다. 살아남을 적극적인 행동이나 궁리는커녕, 이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이 두렵고 힘들어 맞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도시 안에 틀어박힌 채 겁쟁이처럼 벌벌 떨면서 끝없이 외톨이가 되어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살아남으려면 언젠가는 세상으로 나가야 했다. ‘그래. 한 번 해보자.’ 라는 생각으로 용기 내서 나간 건 아니었다. 세상으로 나간 내 첫 번째 걸음은, 우습게도 돈이 없어서, 배가 고파 거의 떠밀리듯이 나간 경우였다. 그래도 초심자의 행운이 따랐는지, 가까스로 내디딘 첫걸음은 미약하게나마 그럭저럭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때 처음 배분 받은 돈으로 사먹은 고기 맛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하지만 언제나 성공만한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0년 차 사용자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이후 겪어야 했던 현실은 지극히 냉혹하기만 했다. ‘우리와 나간 게 첫 번째 탐험이었다고요?’ ‘어쩐지. 그래도 성장 가능성은 꽤 있어 보이더라. 괜찮으면 다음 탐험도 우리랑 같이 가도록 해요.’ 그렇게 두 번째로 나간 탐험에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미끼 역할을 맡고 있었다. 정말 천운으로 간신히 도망쳤을 때, 캐러밴의 리더를 맡은 여인은 겨우 살아 돌아온 나를 보며 표정을 찌푸렸다. 그리고 선심이라도 쓰듯이 아주 약간의 돈을 던져주기까지. 그때 나는 바보같이 아무런 말도 못하고 돈을 들고 돌아서야만 했다. 그저 도시 내 노숙하는 장소 구석에 웅크리듯이 누워, 억울함에 겨운 눈물 한 방울만 찔끔 흘렸을 뿐. 돌이켜보면 그 당시의 나는 무모했다. 무모하기만 한 게 아니라 멍청하기까지 했다. 그 사건을 경험 삼아 무언가 깨닫기라도 한 게 있어야 하는데, 이후로도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어쩌다 탐험을 나가면 항상 이용당하기 일쑤였고, 탐험을 나가지 못하는 날은 하루 종일 광장을 서성이다가 힘없이 걸음을 돌렸다. 잠잘 곳을 마련하기는커녕 하루 끼니를 잇는 것도 요원한 일이었다. 그뿐일까. 친구라고 믿었던 사용자에게 배신당해보기도 했고, 악착같이 모은 돈을 한순간 도둑맞아보기도 했다. 그러고도 하소연할 곳이 없어 속으로만 삼키며 울었다. 겉으로는 울지 않더라도 마음속으로 늘 울면서 지냈다. 그나마 한 가지 괜찮았던 건 적어도 미워할 상대는 있었다는 것. 나를 이용한 상대를 원망했고 부족한 나를 탓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볕 들 날이 올 거라 믿고 기다리면서. 아마 그때가 내가 마지막으로 순수했던 시절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기다려 마지않던 볕 들 날이 왔을 때부터였다. 정말 우연히 어느 사내의 주도로 새로운 캐러밴 창설에 참가하게 된 이후, 나는 항상 캐러밴 주변을 겉돌았다. 또 미끼가 되는 게 아닐까, 또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지는 게 아닐까 매일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그 캐러밴의 사용자들은 진심으로 나를 대했고, 사용자가 아닌 한 명의 사람으로 생각해주었다. 언젠가 리더를 맡은 사내에게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왜 저를, 이런 저를 캐러밴에 받아주신 겁니까?’ 그 말에 사내는 이렇게 말했다. ‘왜냐고? 그거야 간단하네. 확실히 수현 자네는 그렇게 매력 있는 사용자는 아니야.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말해주겠네. 비록 사용자 김수현은 조금 볼품없더라도, 사람으로서의 김수현은 매력이 넘치는 이라고. 적어도 나한테는 말이야.’ ‘이래봬도 사람 보는 눈은 좋다고 자부하거든. 자네는 배신을 당할지언정, 먼저 그것도 스스로 배신할 사람은 아니야. 그래서 자네를 내 캐러밴에 참가시킨 걸세. 나는 우리 캐러밴을 실력을 우선하는 집단이 아닌, 서로가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가족으로 만들고 싶어.’ 아마 그 말에 상처받은 내 마음이 열린 게 아니었을까. 이 각박한 세상에서 처음으로 믿을만한 사람을 만났다는 게 기뻐, 이후 나는 늘 사내를 믿고 따랐다. 그러면서 확실하게 캐러밴 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동료를 믿고 의지하자, 어느 순간부터 어엿한 동료로 각인될 수 있었다. 상처와 눈물로 얼룩진 내 사용자로서의 삶에 처음으로 행복이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우리는 단 한 번, 푸른 산맥에서 잘못된 탐험을 한 결과로 전멸이라는 피해를 낳고 말았다. 리더는 물론, 탐험 전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던 동료들이 모조리 몰살당했다. 살아남은 이라고는 겨우 도주에 성공한 나와 다른 한 명뿐. 가족처럼 생각하던 이들을 잃었다. 그 당시 받았던 충격은 진정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고, 나와 하나 남은 동료는 서로 아무런 말도 못하고 헤어지고 말았다. 결국에는 나는 또다시 외톨이가 되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과연 알고 있었을까. 그때 그 사건이 차후 이어질 기나긴 홀 플레인 인생의 전초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가끔 생각하듯 내 1회 차 기억은 항상 비슷한 경험으로 점철돼있었다. 동료를 잃고 울고. 친구를 잃고 울고. 친형을 잃고 울고. 여인을 잃고 울고. 상실하고 우는 것이 반복되는 일상. 지금은 회상해도 그저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아련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일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지금 그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어봐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계속 반복해서 경험하는 일상에 어느 순간 지쳐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잃고 상처받고 몸서리치고 울면서 지내며, 나는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는 동시에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말인즉,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방법이야 간단했다. 상대를 사람이 아닌 사용자로 생각하고 대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정으로서 대하는 게 아닌 필요로서 대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수단이나 도구로 생각되는 일이 많아졌다. 확실히 효과는 있었다. 단적인 예로 이번 공략에 헬레나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나, 그렇게나 격한 슬픔을 느낀 건 아니었다. 그저 내 시야가 넓지 못했음에 진한 아쉬움을 느꼈을 뿐. 애초 정을 붙이지 않았으니 미련이나 후회를 느낄 리가 없다. 그래서 나는 형과 한소영을 제외하고, 다른 사용자들에게는 어지간하면 정을 붙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그런데. “그대여….” 지금 내 정을 갈구하는, 자신에게 정을 붙여주기를 부탁하는 여인이 나타났다.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아버지라는 자격을 들먹이면서. 그 말은 내게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왜냐면 게헨나는 진정으로 나를 원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들은 말이 진심이라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까 생각했듯이 이 지옥에서 게헨나는 철저한 갑의 위치에 있는 존재다. 마음만 먹으면 나를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게헨나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애처롭게 눈을 빛내며 애절한 목소리로 나를 붙잡았다. 평생 붙잡지 않겠다고. 잠시만이라도 좋으니, 앞으로 태어날 우리의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옆에 있어달라고. 역지사지로 생각했을 때 나는 과연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제발….” 이윽고 한 번 더 애타는 음성이 들려왔을 때, 나는 조금씩 마음이 돌아서기 시작했음을 느꼈다. 찰나의 순간, 한시라도 빨리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엄습했지만. 그리고 형과 한소영을 비롯한 클랜원들이 얼굴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 지금 눈앞에서, 평생도 아닌 딱 일곱 밤만 같이 지내달라는 게헨나의 요청을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게헨나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게헨나. 정말로 미안해.” 그 순간 게헨나가 눈동자가 물결처럼 일렁였다가 눈을 질끈 감는다. “나는, 너와 평생을 같이 있어줄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래. 이게 정답이다.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면 내가 사과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게헨나의 말대로 지금 잉태한 아이는 내 아이이기도 했으니까. “아…?” 이윽고 무언가 예상치 못했는지, 화등잔만 하게 눈을 뜬 게헨나가 살며시 입을 벌렸다. “정말 일곱 밤만이라도 괜찮다면….” 그런 게헨나를 보며 나는 한 번 더 말을 잇는 동시에. “그, 그대?” 게헨나의 바로 앞에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당황해 하는 게헨나의 배를 양손으로 부여잡고서 차분히 귀를 밀착시켰다. 비록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으나, 무언가가 느껴지기를 기대하며 온 신경을 귀에 집중시켰다. 잠시 후. 나는 정수리를 감싸 안는 아늑한 손길을 느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 - 신 대륙, 아틀란타. 한 청년이 간이 침대에 누운 채 천막의 천장을 응시하고 있다. 일견 멍해 보이는 눈동자는 흡사 죽은 사람은 연상케 할 정도로 흐릿하게 풀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낯에는 물론, 침대 시트에도 물 자국이 얼룩져있는 게 눈물이 흐르다 마른 모양이다. 그러다 갑자기 눈물이 또 한 번 주르륵 흘러내리더니, 청년이 얼굴을 와짝 찌푸리며 한 차례 작게 떨었다. 잠깐 참아내는가 싶었지만, 결국에는 몸을 돌리며 소리 죽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찡그린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지금 간이 침대에 누워 우는 청년은 다름 아닌 안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3주 전, 정확히는 김수현이 지옥 대공에 의해 끌려들어간 이후, 안현은 며칠간 꼬박 밤을 새고 울었다. 음식은커녕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고 계속해서 흐느껴 울기만 했다. 이후 주변 지인들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정신을 차리기는 했으나, 언제나 밝고 쾌활한 모습을 보이던 안현은 더 이상 없었다. 거의 항상 천막에 틀어박힌 채, 간이 침대에 누워 지내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보다 못한 고연주나 정하연이 따끔하게 혼을 내려고 들어가보기도 했지만, 안현이 우는 모습을 보고 침통하게 고개만 젓고 말았다. 두 여인 또한 김수현의 죽음에 가까운 실종에 크게 상심하고 있었거니와, 안현이 평소 김수현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안현이 우는 소리는 진정으로 서글프기 그지없었다. 자신도 어떻게든 참으려 울음을 삼키려 노력은 하는데, 그럴수록 끅끅 거리는 신음 비슷한 흐느낌이 흘러나온다. 바로 지금처럼. 그때였다. - 달칵. 조심스레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단아한 인상의 여인이 사뿐사뿐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손에 음식 그릇을 담은 쟁반을 들고 들어오는 여인은 다름 아닌 임한나. 안현의 몸을 걱정해 손수 음식과 물을 가져온 것이다. “현아. 누나 왔어. 이것 좀 먹어봐. 응?” 사실 이 상황에서 임한나도 서글프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다른 클랜원들, 특히 김수현과 통과의례부터 함께 해온 애들을 보면 도저히 티를 낼 수가 없었다. 보는 사람의 슬픔을 잠시 잊게 만들 정도로, 안현은 온몸으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안현은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다물더니 임한나 몰래 주먹 쥔 손으로 눈을 훔치기 시작했다. “예. 누나 오셨어요?” 그렇게 한참을 눈물을 닦던 안현은 억지로 목소리를 가라앉힌 티가 역력한, 쉰 음성으로 말했다. 그리고 의외로 순순히 몸을 일으켜 임한나를 마주했다. 사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입맛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안현은 최소한 클랜원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는 주고 싶지 않았다. 얼마 전 자신처럼 똑같이 음식 그릇을 가져온 임한나에게, 괴성을 지르며 난리를 치는 이유정을 우연히 보았기 때문이다. 그때 안현은 이유정의 심정을 이해는 하면서도, 저렇게까지는 하지 말자고 다짐한 상태였다. 말마따나 임한나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으니까. 안현은 천천히 눈을 들어 임한나의 상냥한 눈빛과 마주하고는 꾸벅 머리를 숙였다. “누나…. 감사합니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먹어. 오히려 이렇게나마 먹어주니까 내가 다 감사하다 얘.” 그 말이 무슨 뜻이 알 것 같아, 안현은 속으로나마 쓰게 웃었다. 쟁반에는 안현의 쇠약해진 몸을 배려한 부드러운 수프 같은 것이 고소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힘겹게 수저를 들었으나 안현이 먹는 속도는 느릿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는다는 듯이. 하기야 입맛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서도. 그렇게 당장에라도 토할 것 같은 기분을 참으며 억지로 꾸역꾸역 넘기고 있을 즈음.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냐고오오!” 갑자기 천막 바깥에서 들려오는 고성이 안현과 임한나의 귓전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두 남녀의 낯빛이 교차했다. 안현은 의아한 기색을 비췄고, 임한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치 드디어 올게 왔구나 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다녀왔다며! 계약서만 있으면 알 수 있을 거라며! 그런데…!” 이윽고 한 번 더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안현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그리고 곧바로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임한나의 손길에 제지 당하고 말았다. “안 돼. 가려면 다 먹고 나가.” 나직이 뇌까린 임한나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안현을 직시했다.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죽어 있던 안현의 두 눈이 갑작스레 빛을 발했다. 그리고 깨작거리던 수프를 그릇째 들어 입안에 붓고는, 후닥닥 장막을 젖히고 천막 밖으로 나섰다. ============================ 작품 후기 ============================ 이 글이 올라갈 때 쯤이면, 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_ㅠ 0679 / 0933 ---------------------------------------------- 4. 약속된 이별. 황급히 달려나간 안현이 바라본 천막 밖은 이미 아수라장이 돼 있었다. 모여든 사람들은 누군가를 빙 둘러싼 채 웅성거리고 있었고, 중앙에서는 두 여인의 살벌한 고성이 한창 오고 가는 중이었다. “씨팔, 장난해? 존나게 기다리게 해놓고서는, 그딴 미적지근한 대답이 어디 있어!” 한껏 날 선 목소리로 고함치는 이유정의 음성이 인근을 왕왕 울렸다. “어쩌라고! 그럼 나보고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데!” 이어서 억울함이 깃든 어조로 맞고함 치는 비비앙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구경하는 사람을 헤집으며 안으로 들어간 안현은, 핏발 선 눈으로 양손을 미친 듯이 흔들어 젖히는 이유정과 멱살이 잡힌 채 두 눈을 치뜬 비비앙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여인이 서로를 노려보는 와중 진수현은 입을 헤 벌린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완전히 얼이 빠져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그리고 백한결은 한쪽에서 고개만 푹 숙인 채 눈물만 글썽거리고 있었다. “지금 결과 기다리는 사람들이 한두 명인 줄 알아? 그런데 그게 말이야? 다시 가서 알아와! 아니, 그냥 내놔. 그 계약서인지 뭔지 내놔! 내가 가서 알아낼 테니까!” 이유정이 잡아챈 멱살을 바짝 끌어당기며 으르렁거렸다. “네 마음대로 해!” 비비앙도 지지 않고 손에 쥔 계약서를 후리듯이 내던졌다. 반으로 접힌 기록이 이유정의 얼굴에 탁 소리가 날 정도로 부딪쳤다가 너울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탓일까. 잠깐 가려졌다가 도로 드러난 이유정의 눈동자가 분노의 불꽃이 튀겼다. 고성은 시시각각 높아지기만 했다. 마음 같아서는 누구라도 붙잡고 전후 사정을 묻고 싶었지만, 안현은 그러지 못했다. 두 여인 사이로 조금 더 있으면 주먹이 오고 갈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기운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한껏 독 오른 낯짝이 어찌나 살기등등한지 그 누구도 감히 나서서 말리지 못하고 있었다. 주변에 고연주나 신재룡 등이 없는 이상 자신이라도 나서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안현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마음 한 켠에 물밀듯 차오르는 불안을 억누르며 이유정을 잡아 끌었다. 마침 이유정의 손은 서서히 올라가고 있던 중이었다. “자자. 우선 멱살부터 놓고. 이게 무슨 짓이야. 왜 비비앙한테 이래. 얘한테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러나 이유정은 요지부동이었다. 그저 잠시 안현을 흘끗 흘기고는 무 감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을 뿐. “손 놔. 껴들지 말고 꺼져.” 안현은 잠깐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 한숨을 푹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말을 그딴 식으로 하냐. 아무튼 그만 좀 하라고.” “놔. 놓으라고 했어.” “적당히 하자니까.” “놔.” “이유정.” “놔…! 악?” 그 순간이었다. “야.” 자그마한 음성. 동시에 햇빛을 가리는 어두운 그림자가 크게 드리워진 찰나, 이유정은 자신도 모르게 옆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두 눈을 형형히 빛내는 안현을 바라본 순간, 더는 아까와 같은 태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얼굴을 찡그린 것도 노려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한층 우묵해진 안현의 눈과 마주하자 무언가 항거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더불어 손목에서 느껴지는 심한 격통까지. 그래도 잡고 있는 비비앙의 멱살을 놓지 않자 안현은 기어코 이유정의 손목을 강하게 비틀었다. 그리고 되레 이유정의 옷깃을 잡아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이유정은 채 비명을 지를 생각도 못한 채 안현과 가까이 마주하고 말았다. 속으로는 상당히 놀란 상태이기도 했다. 이유정이 기억하기로는 안현이 진정으로 화내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말로 할 때 좀 쳐들어라. 옛날 성깔 쳐 나오게 만들지 말고.” 낮디 낮은 음성이 끓는 듯이 흘러나온다. 이유정은 반사적으로 벗어나려고 애썼으나 작정한 안현에게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설령 초반에는 안현보다 조금 앞섰을지 몰라도, 이유정은 어느 순간부터 오랫동안 정체돼있는 상태였다. 그에 반해 안현은 이번 강철 산맥을 경험하면서 비약적인 성장을 겪었다. 이미 둘 사이로는 비슷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차이가 벌어져 있었다. “지금 너만 힘드냐? 왜 애꿎은 비비앙한테 화풀이야.” “…….” “힘들면 혼자 힘들어해. 나 궁상 떤다고 여기저기 광고하지 말고.” “…….” 눈을 치뜬 안현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자 이유정이 아랫입술을 세게 씹었다. 허나 그렇게나 분한 걸까. 낯이 서럽다는 듯이 일그러지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허나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 반박할 수 없는 듯 결국에는 서서히 시선을 내리깔고 말았다. 안현도 약간 지나쳤다는 사실을 인지했는지 잡은 옷깃을 놓아주었다. 이유정은 잠깐 비틀거렸다가 무너지듯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망연한 빛으로 주변에 모인 사람을 둘러보더니 결국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렸다. “어허어어어엉….” “유정 양? 이게 무슨 일입니까!” 공교롭게도 신재룡이 뒤늦게 달려와 무리를 헤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서럽게 우는 이유정과 씨근거리는 안현을 번갈아 보고는 차분히 이유정을 달래기 시작했다. “오빠가…. 오빠가….” “유정 양.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이윽고 정하연까지 달려와 이유정을 어르고 달래자 이유정은 부축 받으면서 천막으로 돌아갔다. 백한결은 곧바로 천막으로 따라 들어갔고, 진수현은 안현의 눈치를 살폈다가 주변에 모인 사람을 소리쳐 몰아냈다. 그제야 웅성거리던 주변에 가벼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유정은 계속해서 울었다. 가까운 천막에서 자꾸만 서러운 울음이 흘러나왔으나 누군가 수면 마법을 사용했는지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동안 숨을 고르며 억지로 호흡을 가라앉힌 안현은 흘끗 아래를 응시했다. 입을 삐쭉 내밀고 있는 비비앙이 아까 던진 계약서를 주섬주섬 줍고 있었다. 안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비비앙.” “…왜?” 기운 빠진 음성이기는 했으나 비비앙도 어느 정도 평정은 되찾은 듯했다. “어떻게…. 됐어?” 한순간 표정에 심한 갈등이 어렸으나 안현은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사실 이유정의 반응으로 미루어보아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했으나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버리지 못한 것이다. 그 기대란 다름 아닌 김수현과 비비앙이 맺은 계약서였다. 예전 부랑자의 습격으로 김수현이 뮬에서 실종됐을 때 계약서를 활용해 김수현의 생존을 확인한 바가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똑같은 방법을 사용해 김수현의 생사 여부를 확인해보려 한 것이고. “모르겠데.” 그러나 비비앙의 기운 없는 대답은 안현의 초조한 기대와는 한참이나 어긋난 소리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모르겠다니?” “말 그대로야. 그리고 나도 잘 몰라. 모든 신전을 돌아봤는데도 다 똑같은 말을 하는걸 어떡해.” “그러면 형이 정말 죽었다는 소리야?” “아니. 그걸 모르겠다고. 그쪽에서 한 말은 이거 하나야. 이 계약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만 효력이 발동한다. 다른 차원으로 넘어갔을 시 발동 여부는 아직 확인해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이 계약서로 김수현의 생사여부를 가늠하기란 불가능하다.” 안현을 보고 말하던 비비앙이 돌연 훌쩍 코를 들이켰다. 삐쭉 내민 입이 부르르 떨린다. 이유정과 다투느라 봉두난발이 된 머리카락은 그렇다 치더라도, 비비앙도 돌아오는 내내 울었는지 눈도 상당히 부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부터 목소리도 살짝 젖은 상태였다. “나쁜 년…. 나도 힘들어 죽겠는데….” 무언가 더 말하려던 비비앙은 목울대를 크게 움직이며 울먹거렸다. 그리고 더는 말하기 싫다는 듯 몸을 돌려 어딘가로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한다. 그 힘없는 모습에 안현은 불러 세울 생각도 못한 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현재 안현의 속은 그 정도로 매우 복잡하고도 미묘한 상태였다. 차라리 죽었다고 말해주면 실컷 슬퍼하고 울기라도 하지. 며칠을 기다린 대답은 너무나 애매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돌연 깊은 한숨을 흘린 안현이 비틀거리듯이 천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거의 입구에 다다랐을 즈음. “어떻게….” “그래서….” 문득 천막 왼쪽에서 두 여인의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한 명은 임한나. 그리고 다른 한 명은 고연주의 목소리였다. 안현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하, 하지만 언니…. 비, 비비앙이 계약이 파기됐다고 말했잖아요. 그렇다는 말은….” 계약 파기?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안현은 자연스레 청력을 돋우며 들려오는 말에 집중했다. “비비앙 말로는 정말로 알 수 있는지 없는지 시험해봤다고 하더라. 신전에서는 생사여부는 둘째치고서 라도, 적어도 이 세상에 수현씨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 같더라고. 그래야지 최소한 계약 파기가 가능하다면서.” “그러면…. 거, 거의 사망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흑!” “울지마. 아무튼 나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은 하는데. 비비앙이 워낙 강하게 부인하니까. 이 세상에만 없을 뿐이지, 다른 차원에서는 살아 있을 확률이 있다고 하더라.” “어떡해…. 어떡해요….” 이윽고 임한나가 작게 흐느끼는 소리와 고연주가 말없이 토닥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잠시 후. “이건…. 비밀로 하는 게 좋겠죠?” 조금은 진정했는지 나직한 음성이 이어졌다. “그래야지. 특히 아주버님한테는 더더욱. 그러고 보니 아주버님 상태는 어떠니?” “악화일로에요. 처음처럼 미친 듯이 날뛰시지는 않는데, 요즘에는 수면 마법과 진정 마법을 달고 사실 정도에요.” “…그 정도야?” “그게 없으면 아예 주무시지를 못하니까요. 충격이 엄청 크신가 봐요. 그분이 그렇게 되실 줄 누가 알았겠어요. 사제 말로는 이미 몇 번이나 자살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고….” 거기까지였다. 그 순간 안현의 다리가 힘없이 풀렸고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내 말소리가 멈추고 누군가 급히 달려 나오는 기척을 느꼈지만, 안현은 더 이상 아무것도 신경 쓰지 못했다. 그저 암담한 기분만을 느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냥 이대로 기절했다가 언제고 김수현이 돌아오는 날 깨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원래 저번 주 안에 외전을 끝낼 생각이었는데, 집안 사정이 겹치느라 진도가 늦어졌네요. 이 부분 독자 분들의 깊은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아마 2회 안에는 끝날 것 같네요. 작은 사촌 누나 결혼식은…. 잘 치렀습니다. 사실 결혼식 자체는 거의 보지 못했어요. 축의금 계산하고 찾아오신 하객 분들께 식권 지급하느라…. 하하. -_-a 조금 서운해도 다들 정신이 없었으니 그러려니 해야겠죠.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부터는 다시 정상 연재를 시작하겠습니다. :) PS. 고장난선풍기 님께서 새로운 팬 아트를 그려주셨습니다. 김수현, 한소영, 지옥 대공 등등 새로운 그림들은 보니 눈이 즐겁네요.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_(__)_ 제 뜰에 친히 올려주셨으니 독자 분들도 한 번 방문하셔서 구경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D 0680 / 0933 ---------------------------------------------- 4. 약속된 이별. “와. 오빠. 이것 좀 보세요.” 김한별이 작은 탄성을 지르며 손을 내밀었다. 가녀린 손에는 붉은색과 흑색이 어우러진 큼지막한 광석이 잡혀 있었다. 전체적으로 짙은 색조를 띠고 있어 예쁘다기 보다는 음침하다는 느낌이 강했지만, 김한별은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는 표정이다. 가만 보면 얘도 참 취향이 독특하다는 말이지. 하지만 이 생각을 그대로 겉으로 드러낼 수 없어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응. 보고 있어.” “엄청 예쁘죠? 빛깔도 되게 곱고….” “그런가? 의외네.” “응? 뭐가 의외에요?” 고개 돌린 김한별이 나를 보며 살짝 눈을 떴다. “그냥. 여자애들은 그래도 예뻐 보이거나 사랑스러운 색을 좋아하지 않나 싶어서. 예를 들면 분홍색이라던가.” “그건 오해에요. 여자라고 무조건 분홍색을 좋아한다는 건 사회가 만들어낸 일종의 편견이죠. 그래야지 여성스럽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요.” 김한별은 핀잔조로 말하고는 팔짱을 더욱 강하게 껴오며 몸을 밀착시켰다. 좋긴 좋은데 무언가 부담스럽다는 기분이 가시지를 않는다. 무언가 어색하다는 기분에 인중을 긁으며 스리슬쩍 팔을 빼려고 했을 때였다. “아. 여기 계셨군요. 조금 찾아 다녔습니다. 하하.” 어디선가 웅웅 울리는 듯한 걸걸한 음성이 들려왔다. 흘끗 시선을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두터운 장갑을 낀 두 손을 싹싹 비비며 걸어오는 베히모스가 보였다. “어떻게…. 우리 흑승 지옥의 명물인 흑열석은 마음에 드시는지요.” “네. 우선 겉보기로는 상당히 마음에 드네요. 하지만 겉모습만 예쁜 건 아니겠죠?” 김한별은 고개를 까닥이더니 자못 거만한 어조로 말했다. “암요. 그러믄요. 흑열석의 장점은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든 효능을 얻을 수 있다는데 있습죠.”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든 이라고요?” “예이 예이. 본디 광석이라 함은 제련을 거치고 물건으로 만드는데 의의가 있잖습니까. 허나 이 흑열석도 똑같느냐? 아니죠. 이 흑열석은 입에 넣어서 녹여 먹든, 가루로 빻아 타서 먹든, 여러 방식으로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물건으로 만드는 건데요. 이때도 흑열석이 상당히 경제적이거든요. 이 광석은 특히 장악하려는 성질이 강해서요. 예를 들어 검을 만든다고 가정해보면, 중앙에 요만큼만 박아 넣어도 통짜로 만들었을 때와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지요.” “비슷하다고요. 어쨌든 통짜로 만들었을 때보다는 성능이 떨어진다는 말씀이네요?” “에이. 그거야 아가씨께서 이해를 해주셔야죠. 그래도 최소 6할에서 최대 8할까지는 엇비슷하게 낼 수 있습니다.” “음. 그 정도면 괜찮네요. 아무튼 많이 챙겨주세요.” 김한별은 가볍게 콧숨을 흘리고는 새침한 얼굴로 종알거렸다. 그러자 베히모스는 “아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오늘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며 꾸벅 허리를 숙이기까지. 그렇게 하하 호호 웃는 둘을 보고 있으려니, 뭐랄까. 참 잘들 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어떻게든 물건을 파려는 약장수와 어떻게든 넘어가지 않으려 의연한 체하는 사모님을 보는 기분이다. “저 그런데 말입니다. 챙겨드리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데….” 그때 계속 손을 비비며 꾸벅거리던 베히모스가 갑자기 다가와 은근한 음성을 울렸다. “왜, 왜요? 문제가 되지 않으시면 가서 챙겨오시면 되잖아요.” “그렇기는 한데. 워낙 양이 많아서요.” “그래서요?” “좀 도와달라는 뜻이죠.” 한순간 김한별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나를 한 번 쳐다봤다가 베히모스가 누구를 바라보는지 깨닫고서는 번갈아 시선을 돌렸다. “저, 저보고 도와달라고요?” 살짝 떨리는 음성으로 묻자 베히모스는 그렇다는 듯 크게 투구(?)를 끄덕인다. “마, 말도 안 돼요. 그럼 오빠도 같이…!” “아. 도와주시는 건 한 분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 이상은 인력 낭비라고 생각해요.” “군단장이라면서요! 그럼 휘하 마수들을…!” “공교롭게도 지금 다들 목숨을 걸고 임무 수행 중이라서요. 차마 빼올 상황이 못됩니다.” 연이은 공격에도 구변 좋게 대꾸한 베히모스는 딱딱 이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성큼 다가왔다. 문득 김한별이 나를 꽉 붙잡는 감촉이 느껴졌다. “엇차. 자자.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마시고 좀 도와주십쇼. 다 누이 좋고 매부 좋자고 하자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히모스는 나를 붙잡은 김한별을 솜씨 좋게 빼내고는 한 번에 들쳐 업었다. “저는 아가씨와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부디….” 이윽고 베히모스는 음흉하게 말끝을 흐리며 어딘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뜻밖에도 김한별은 심하게 반항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냥 포기하기로 했는지 생각보다는 얌전히 베히모스의 어깨에 걸쳐진 채 서서히 멀어졌다. 그러나 업어진 모습으로 나를 보는 눈초리만큼은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마치 ‘저는 오빠가 이제부터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고 있어요.’ 라는 듯한 눈으로 나를 노려본다. 거기다 억지로 웃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시선을 홱 돌리기까지. 저런 태도로 미루어봐도 그렇고, 아마 김한별 정도면 충분히 눈치를 채고도 남았으리라. 잠시 후. “흠. 흑열석은 마음에 드느냐?” 역시나. 베히모스가 김한별을 데리고 사라지자 게헨나가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 어디선가 김한별이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있었겠지. 그러니까 언제나 똑같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해보면 대 초열 지옥부터 시작된 이 레퍼토리는 초열, 대 규환, 규환, 중합 그리고 흑승 구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각 구간의 명물을 소개해주고, 나와 김한별이 감탄하고, 그러면 베히모스가 어떤 이유를 붙여서든지 김한별을 데려가고(사실은 나와 떼어놓고.), 마지막으로 게헨나가 등장한다. 말인즉 나와 게헨나 둘만 남기려는 모종의 작전이랄까. 한두 번이면 모를까. 이런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는데 그 김한별이 눈치를 채지 못할 리가 없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아예 작정하고 내 옆에 남으려는 마음을 먹은 것 같은데…. 베히모스는 조금도 아랑곳 않고 되레 강제로 몰아붙여 김한별을 데려가 버렸다. 예를 들어 중합 구간에서는…. ‘저는 항문을 좋아하는 여자만 보면 호감을 가지는 버릇이 있어서요!’ ‘가, 갑자기 무슨 개소리에요!’ ‘자! 같이 놀러 갑시다!’ ‘놔! 놓으란 말이야!’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때는 조금 심했지. 하필이면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며 데이트를 신청하다니. 아무튼 아마 그때부터 김한별도 포기했을 것이다. 즉 절대 불변의 진리를 깨달았다고나 할까. 자신이 얼마나 논리적으로 베히모스의 행동을 논파해도, 결국 끌려가는 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 것이냐?” 뒷감당은 어떡하나 라는 생각에 무심코 쓴웃음을 짓고 있자, 돌연 나를 살짝 건드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바로 옆에 게한나가 미묘하게 달뜬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 나는 차분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것보다 흑열석 고맙다. 잘 사용할게.” “음? 아무튼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구나. 그럼 이제….” 게헨나가 은근히 말끝을 흐리며 눈을 슬쩍 내리깔았다. 전날 밤 그렇게나 뜨거운 밤을 보내고서도, 또 몸이 가만 있지를 못하겠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며칠간 겪어온 바로 느끼건대 게헨나는 색녀 기질이 다분한 것 같다. 항시 달아오른 눈초리로 나를 보는 것도 그렇고, 관계 시 반응도 180도 달라진다. 허나 항상 먼저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지, 게헨나는 아무 말도 않은 채 꼼지락꼼지락 손장난만 하고 있었다. 나는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아니. 싫다.” 그리고 게헨나는 아주 단호하게 거부했다. “왜? 나랑 이야기하는 게 싫어?” “그게 아니라…!”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게헨나가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 나를 곱게 흘겨본다. “이, 이제는 안 속는다.” “……?” “이야기하자는 핑계로 말을 이리저리 빙빙 돌리면서…. 또, 또 내가 애타는 모습을 보고 즐기려는 속셈이 아닌가.” “…이런.” 들켰나. 게헨나의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확실히 알아차린 모양이다. 아쉽다. 얼른 하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 한 번은 더 보고 싶었는데 말이지. “미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결국 양손을 들어올리는 항복 의사를 표시했다. “정말. 그대의 가학적인 성격에는 진정 맞추기 힘들구나.”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게헨나는 곧 팔짱을 풀고 두 손을 살그머니 내렸다. 그러자 온몸에서 빛나는 붉은빛이 사그라지고 천연절경을 보는 듯한 환상적인 나신이 수줍게 모습을 보였다. 이내 어색한 헛기침을 한 게헨나가 무언가 굉장히 기대하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본다. “그, 그래서. 오늘은 어떻게 나를 갖고 놀 생각이냐?” “갖고 놀다니. 너무하잖아.” 나는 실없이 대꾸하며 허리띠를 끌렀다. 사르륵, 태양의 영광이 풀리는 동시에 하늘의 영광도 하릴없이 아래로 흘러내린다. 게헨나가 저렇게 말하는 데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모두 내 탓이라고나 할까. 다른 게 아니라, 그냥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에서 관계를 맺을 때마다 여러 체위를 시도했는데, 게헨나가 거기에 맛을 들려버린 게 문제였다. 말로는 나보고 가학적인 성격이라고, 자기를 갖고 논다고 하면서도 게헨나 스스로도 즐기고 기대하는 게 훤히 보인다. 그렇잖은가. 지금도 ‘자기야. 오늘은 어떻게 즐겁게 해줄 거야?’ 라는 듯 반짝반짝 눈을 빛내고 있는데. ‘그러고 보니 오늘은 어떻게 하지.’ 안에 받쳐입은 셔츠와 바지를 벗으면서 나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사실 성에 관해서는 매우 빈약하고 빈약한 지식을 갖고 있는 터라, 이제는 서서히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정상위, 후배위, 측위, 굴곡위, 선녀강림, 69, 가위 치기, 돌려 치기, 펠라티오, 파이즈리, 부카케, 커닐링구스….’ 그동안 6개의 구간을 거치며 해왔던 체위들을 하나하나 생각하고 있자, 어느새 나 또한 알몸이 돼버렸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선은 나한테 와서 안겨볼래?” 잠시 고개를 갸웃하기는 했으나 게헨나는 스스럼없이 다가와 살며시 안겼다. 부드러우면서 따뜻한 살결이 찰싹 달라붙자 자연스레 잡생각이 가라앉고 집중력이 올라온다. 가늘고 탄력적인 허리를 어루만지다가, 나는 게헨나의 양 허벅지를 받치듯이 안고서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러자 엉덩이가 올라오는 동시에 게헨나의 다리가 뱀처럼 내 등허리를 살그머니 둘러 감는다. 이제는 서로 익숙한 만큼 더 이상 말이 필요하지 않다. 그렇게 게헨나의 허벅지를 든 자세로, 페니스의 끝부분을 음부의 중앙 부분으로 조준했다. 벌써 흥건하게 젖어 물을 뚝뚝 떨어트리는 하복부를 느끼며 나는 맞춘 구멍 안으로 조심스레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이내 뜨거운 살을 파고들어가는 감촉에 이어, 게헨나의 엉덩이와 내 허벅지가 무리 없이 맞닿는다. “아앙…!” 그 순간 게헨나가 입을 벌리며 작은 비음을 터뜨렸다. 어깨에 얹은 팔이 스르르 미끄러지듯이 흘러와 목을 감싸 안는다. 흘끗 시선을 내리자, 내 가슴에 맞닿아 부드러이 짓눌려진 젖가슴과 눈을 꼭 감은 채 파르르 떠는 속눈썹이 들어온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페니스에서도 미미한 진동을 느끼고 있었다. 진입이 그렇게나 기쁜지, 어디 샐 틈도 없이 단단하게 옥죄며 환영해준다. 이윽고 간신히 눈을 뜬 게헨나는 잔잔히 웃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만족한 모양. 나는 다행이라고 가슴 한 켠을 쓸어 내리며 녹아 내릴 듯한 끈적끈적한 게헨나의 나신에 온 신경을 몰입했다. 한 손으로는 여전히 엉덩이를 받치며 다른 한 손으로 등을 껴안자, 코끝으로 달콤한 살 내음이 물씬 풍겨왔다. 잠시 후. “으음…. 하악…!” 조금씩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한 찰나, 게헨나가 달뜬 신음을 뱉으며 한껏 고개를 젖혔다. 그에 따라 드러난 사슴 같은 목선을 바라본 순간 나도 모르게 불끈거리는 욕망이 치솟았다. 슬슬 시동을 걸어 허리를 더욱 강하게 올리자, 게헨나의 풍만한 젖무덤과 용암 빛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출렁인다. 숨 가쁜 열풍이 주변으로 삽시간에 몰아치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지옥은 총 8개의 구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8열 지옥이라고도 하는데요. 아래서부터 무간, 대 초열, 초열, 대 규환, 규환, 중합, 흑승, 등활 지옥으로 부른다고 하네요. 그리고 지금 김수현이 있는 장소가 흑승 지옥, 즉 2번째 구간입니다. 내일이면 최상층인 등활 지옥으로 올라가고, 김수현이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외전은 끝이 납니다. 그리고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혹시 여러분은 메모라이즈에서 보고 싶으신 외전이 있으신가요? 예전에 말씀드린대로 현재 비주얼 노벨을 작업 중인데요. 클리어 보상 격으로 외전에 관한 내용을 넣을까 논의 중에 있습니다. 어떤 내용이라도 좋아요. 1회 차 내용이든 2회 차 내용이든 좋으니, 혹시 이걸 보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_(__)_ 0681 / 0933 ---------------------------------------------- 4. 약속된 이별. 시간이 흘렀다. 막 게헨나와의 관계를 끝낸 직후 나는 몸을 일으켜 긴 숨을 흘렸다. ‘역시 민망하네.’ 몇 번을 생각해도 관계 시 게헨나는 굉장히 정열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에 맞추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경우가 많은데, 확실히 할 때는 좋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집중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하고 나서 정열이 가라앉고 이성이 찾아올 즈음에는, 조금은 민망한 기분이 든다. ‘하기야 남다은 정도는 아니지만.’ 잠시 쓴웃음을 지은 후 나는 시선을 내렸다. 한 차례 뜨거운 열풍이 지나간 아래는 게헨나가 물에 젖은 솜처럼 누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뇌쇄적인 나신에는 관계의 흔적이 여기저기 묻어 있다.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옅은 미소를 머금은 게 무척이나 만족한 표정이다. 살살 머리카락을 어루만져보았으나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는다. 잠이 든 건 아니고, 아마 관계 후의 여운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여태껏 계속 그래왔으니까. 그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나는 스르르 몸을 허물어 게헨나의 가슴 사이로 얌전히 얼굴을 묻었다. 곧 얼굴에 따뜻하면서 뭉클한 감촉이 느껴지는 동시에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도 느껴졌다. 한없이 안온하고 안락한 기분에 잠이 솔솔 오는걸 느꼈으나 억지로 참았다. 나는 마치 어린 아이라도 된 것처럼 게헨나의 젖가슴에 살짝살짝 얼굴을 비볐다. 시간은 조용하게 흘러갔다. 내가 어리광을 부리고 게헨나는 이따금 등을 토닥여주며 나를 보듬는 동안, 우리는 한 마디 입도 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날은 점점 깊어져 어느새 시야가 점차 어두워졌다. 흑승 구간에 밤이 찾아왔다. 이윽고 몸을 살짝 움직여 게헨나의 옆으로 굴러 나왔을 즈음. “왜. 잠들 때까지 계속 응석부리지 않고. 언제나처럼 말이다.” 드디어 게헨나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마치 네가 웬일이냐는 어조 같아 나는 싱겁게 웃었다. “그냥. 애기가 힘들까 봐.” 이번에는 게헨나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아이는 매우 기뻐하고 있느니라.” 기뻐하고 있다고? “그걸 어떻게 알아?” “느껴지니까.” “……?”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 아비의 사랑을 듬뿍 받았는데, 아이 된 입장에서 어찌 기뻐하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잔잔한 음성이 되묻듯이 말한다. 그리고 게헨나는 양손으로 배를 소중히 감쌌다. 정말로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다. 하지만 그런 게헨나를 보며 나는 웃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도 며칠 전이라면 모를까. 지옥 구간 최상층인 등활 구간을 앞둔 상황에서 이런 말을 들으니 무언가 뼈가 있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헨나도 말을 해놓고 아차 싶었는지 얼굴이 살짝 굳어 있었다. 잠시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게헨나는 나를 보지 않는 방향으로 살며시 몸을 돌아누웠다. 돌연 초조한 기분에 애꿎은 손가락만 움직이다가, 나는 살그머니 게헨나의 등에 붙어 배를 쓸 듯이 어루만졌다. 게헨나는 편안한 신음을 흘릴 뿐 딱히 거부하는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배를 쓸듯이 어루만지다가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있잖아…. 게헨나.” “응?” 정말 말해도 괜찮을까, 고민이 스쳤으나 간신히 용기 내어 말을 이었다. “나중에 아기가 태어나면…. 그리고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나서, 아버지에 관해서 물어보면…. 그때 어떻게 말해줄 거야?” 게헨나는 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더욱 지면에 묻더니 한동안 고른 숨소리를 흘렸다. “글쎄. 아마….” 그러나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왠지 모르게 조심스럽다 생각되는 게헨나의 음성이 귓가로 천천히 흘러들었다.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자는걸 좋아하고, 나이에 걸맞지 않은 어리광을 부리는 아비였다고 말하지 않을까.” “…응?” “또한 너를 임신시키자마자 도망치듯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간 아비라고도 하지 않을까 싶은데. 아.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은 있었다고 말해두도록 하마. 비록 그 사정이 무언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야. 그건 좀….” 정말 그렇게 말할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조금 너무하다는 생각에 가볍게 항의를 할 찰나였다. “그리고.” “너무….” “일견 겉보기에는 차가우나, 어미를 안아줄 때만큼은 애틋하게 해주는…. 속마음만큼은 따뜻한 사내였다고도 말해줄 생각이다.” “…….” 그러나 게헨나의 말이 이어진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게헨나도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결국에는 또다시 어색한 정적이 내려앉는다. 나는 살며시 손을 뗀 후 게헨나의 반대편으로 몸을 돌아누웠다. 별안간 뇌리로 오만 복잡한 생각이 스쳤다가 빠르게 사그라졌다. 무어라 말을 하고는 싶은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갑자기 가슴 한 켠이 아릿하게 아려올 뿐. ‘그러고 보니 다들 잘 지내고 있으려나….’ 문득. ‘가기 싫다.’ 라고 생각한 순간, 스스로 놀라버렸다. 방금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는 형도 한소영도 그리고 클랜원들의 생각이 주를 이루었다. 내가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아니. 차고도 넘친다. 지금껏 그 목적이 흔들린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런데 그런 내가 처음으로 돌아가기 싫다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비단 게헨나뿐만이 아닌, 내 핏줄을 품은, 나로 인해 새로운 생명이 탄생됐다는 사실은 상상 이상으로 나를 어마어마하게 짓누른다. 아버지라는 단어는 이제껏 내가 살아온 근간을 흔들어버릴 정도의 힘을 갖고 있었다. “…….” 나는 까닭 없이 머리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게헨나는 여전히 등을 보인 채로 돌아누워 있었다.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고 싶은데. 그리고 시선을 느꼈다면 한 번쯤은 돌아봐줄 법도 한데. 끝끝내 게헨나는 나를 돌아봐주지 않았다. 그렇게 네 번이나 머리를 돌렸다 되돌리기를 반복했을 때, 갑자기 무언가 견디기 힘들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결국 한 번 더 입을 열고 말았다. 지금껏 참고 참아왔던 말을 꺼내기 위해. “게헨나.” 자는 걸까. 대답은커녕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꼭, 여기서 낳아야 하는 거야?” “…그건 또 무슨 말이지?” 마침내 게헨나가 반응했다. 괜히 다급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이 말이야. 꼭 여기서 키울 필요는 없지 않을까? …무, 물론 너만 좋다면 말이지만.” 말을 하면서도 이렇게 말하는 내가 어딘가 모르게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이왕 말을 꺼냈으니 제대로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흐응. 확실히.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러나 게헨나가 곧바로 화답한 순간 눈이 저절로 크게 떠졌다. 그러니까 괜찮다는 건가? 게헨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러면…!” “허나, 감당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무언가 부정하는 어조가 들려왔을 때, 나는 서서히 고조되던 기분이 도로 가라앉는걸 느꼈다. “감당…. 할 수 있냐고?” “그래. 그대와 나는 애초 다른 존재이지 않느냐. 그대와는 다르게 나는 그쪽 세상에서 거주하는 게 허락되지 않은 몸이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간단하다. 그대와 나는 서로 갖는 무게가 다르다는 소리다.” “너도 그때는 우리 세상에 소환됐잖아? 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가면 되는 거잖아?” “억지를 부리는구나. 그대 정도라면 어떤 문제가 있을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하지만….” “그때도 그렇고, 설령 이번에도 소환해서 간다손 해도, 나는 그 세상에서 길게 머무를 수 없다. 결국에는 역 소환되는 과정을 거치고 자연스레 이 장소로 돌아올 뿐.” “…….” “물론 그때마다 또다시 소환 의식을 치를 수는 있겠지. 허나 방금 말했듯이, 일개 인간과 한 차원의 지배자가 갖는 무게는 다르다. 달라도 심히 다르다. 나를 한 번 소환하려면 실로 어마어마한 제물을 필요로 하는데…. 과연 그대나 나나, 계속 그 제물을 마련할 수 있을 지가 의문이구나.” 이렇게 그동안 주저하던 고민과 마주한 순간, 느닷없이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안 되는 건가….’ 괜스레 물어봤다는 때늦은 후회가 찾아 들었다. 물론 게헨나의 말로 미루어보면 아주 경우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없다. 듣기로는 얼마 전 쳐들어왔던 악마들도 가히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르고 나서야 게헨나를 강제로 차원 이동 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뿐일까. 비단 악마들뿐만이 아니라, 인간 세상에서도 1천 명이 넘는 인간이 희생됐다. 안솔의 기적이 있다고 한들 나한테는 매번 그 정도 제물을 준비할 여력은 없다. “…그렇구나.”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 그러는 사이 어느새 어둠은 완연하게 내려와 주변을 물들였다. 동시에 갑자기 심한 피로가 전신을 엄습했다. 머릿속으로 이대로 자고 싶다는 생각만이 떠올랐다. 나는 이제야 게헨나의 등에서 시선을 떼고 완전히 몸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무거워지는 눈꺼풀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몸에 닿은 지면이 유난히 차갑다. 그때. “그래도…. 그대의 억지가 과히 기분 나쁘게 들리지는 않는구나. 오히려 고마운 기분이다.” 꿈결과도 같은 아련한 음성이 흐르듯이 들어온다. 이어서 몸을 움직이는 소리와 등에 꽂히는 따뜻한 눈초리가 느껴졌다. 게헨나가 비로소 나를 돌아봐준 것이다. 그러나. “…자느냐?” 나는, 몸을 돌리지 않았다. 아니. 더 이상 게헨나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자꾸만 떠지려는 눈을 간신히 감은 채로 밀려오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왜냐하면…. “벌써 잠들었느냐….” 이대로 돌아봤다가는, 또 한 번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았기에. * 다음날. 잠에서 깨어난 이후 나와 게헨나, 김한별, 베히모스 4명은 등활 구간으로 이동했다. 최상층에 도착했다고 해서 딱히 별다른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어느 구간에서나 그랬듯이 등활 구간의 명물을 소개한 이후, 베히모스에게 일러 어탑을 이용한 귀환 준비를 하라 지시했다. 게헨나는 그렇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행동했다. …아니. 사실은 딱 하나 크게 변한 게 있었다. 그건 바로 분위기였다. 언제나와 같은 똑같은 레퍼토리가 아니었다. 항상 방정맞게 입을 놀리던 베히모스는 오늘따라 유독 침묵을 지켰다. 명물 소개가 끝난 이후 김한별은 스스로 베히모스를 따라 사라졌다. 모두가 오늘은 뭔가 다르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때부터는 게헨나도 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등활 구간에서 의식을 치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마지막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이전처럼 정열적이지도, 그렇다고 서글프지도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게헨나는 간간이 멍한 눈빛을 보이기까지 했다. 결국 그렇게 어설프기 그지없는 관계를 마친 후. “이쯤이면 준비가 끝났겠구나. 어서 가도록 하자.” 몸을 추스르고 의연하게 일어서는 게헨나를 보며 나는 복잡하고도 미묘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물론 그 감정은 전적으로 나만이 느끼는 감정이다. 그리고 게헨나를 탓할 이유가 못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게헨나는 애초의 약속을 한치의 가감 없이 그대로 이행해주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나를 강제로 잡아두지 않고 곱게 보내주는 것에 감사해야 할 입장이다. 하지만, 왜일까. 나를 대하는 태도가 딱히 차가워진 것도 아닌데, 왜 나는 저런 게헨나의 모습에 뜻 모를 서운함을 느끼고 있는 걸까. 왜 게헨나가 매정하다고, 야속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왜, 도대체 왜….’ 그때. “이제 조금 알 것 같구나.” 끝없이 차오르는 의문에 망연한 기분을 느끼는 와중, 문득 게헨나의 음성이 나를 일깨웠다. “옛말이라고 했던가? 그대가 말한 이별은 빠를수록 좋다는 말…. 처음 들을 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 이어지는 말에 시선을 들어올린 순간, 나는 볼 수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아 있는 어탑을.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 어느새 등활 구간의 중앙에 도착한 것이다. “음. 다들 기다리고 있군. 우리도 어서 가자.” 그러나 무어라 채 말할 틈도 없이 나는 게헨나의 손에 이끌려 어탑의 중앙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아. 오셨군요.” “오빠. 오셨어요?” 게헨나의 말대로, 어탑 주변에는 무언가 커다란 자루를 짊어진 김한별과 베히모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볼 생각도 못한 채 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준비는 모두 끝냈느냐?” “예. 이제 발동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베히모스는 투구를 꾸벅 숙이며 응답하더니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말을 흐렸다.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투구를 긁적이는 베히모스를 보며 게헨나가 반문했다. “아니. 문제라기보다는…. 그래도 이게 마지막인데…. 나름 작별이라도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되었다. 이별은 빠를수록 좋은 법이니까.” “네?” “가고 싶다는 이를 너무 오래 붙잡아두지 않았느냐. 이들도 한 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을 터…. 애초 약속한 것도 있으니 지키는 게 도리겠지. 아무튼 되었으니 발동 준비에 들어가자꾸나.” 그리고 게헨나는 나를 돌아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그대도 그러고 싶겠지?” “…응.” 모종의 반발 심리였을까. 한 박자 늦기는 했지만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수긍했다. 그럼에도 게헨나는 여전히 미소 띤 낯으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한 걸음 살짝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입을 열어 조용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흘러나오는 주문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머릿속은 한층 복잡하게 변했다. 마음속에서는 아직도 가야 한다는 생각과 조금 더 남아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싸우고 있었다. “허 참….” 그런 게헨나를 보며 탄식을 뱉은 베히모스는 이번에는 나를 보며 음성을 울렸다. “저…. 그럼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그러나 나는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안 그래도 복잡했거니와 별로 말하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 그러자 베히모스는 어깨 갑주를 한 번 크게 들먹이더니 딱딱 이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쩝. 그러면 저라도 하겠습니다. 어쨌든 두 분께 여러모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부왕과 아가씨가 계시는 동안 정말 오랜만에 인간 시절의 감정을 느껴본 것 같네요.” “잠시만요. 부왕…? 아니 아니. 맙소사. 인간 시절의 감정이라고요?” “응? 자자. 우리 막판에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맙시다. 웃으면서 헤어져야죠.” “그게 아니라…!” 그 순간이었다. 우웅! 김한별이 발칵 따지고 들려는 찰나, 갑작스레 웅혼한 소리가 귓전을 크게 울렸다. 이어서 차마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마력의 흐름까지. 얼른 시선을 돌리자 한껏 집중한 채 주문을 영창하는 게헨나의 모습이 시야로 들어온다. 풍성하게 흘러 넘치는 머리카락은 모조리 하늘로 치솟아 세차게 나부끼고 있었다. 우우우웅! 그러한 찰나, 고막에 거슬리는 마력 소리가 들려오는 동시, 어탑이 찬란한 붉은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흔들거리는 대지의 흙 조각들이 중력을 거슬러 하늘로 치솟기 시작하고, 마지막으로 나와 김한별 그리고 게헨나의 몸도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른다. 쿠르르르르르르릉! 바로 이어서, 하늘이 갈라졌다. 그 사이로 칠흑과도 같은 타원형 구멍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예전 내가 지옥으로 들어오기 직전 봤던 구멍과 흡사한 모양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는 말은 정말로 귀환이 가까워졌다는 소리였다. 확실히 존재 자체가 달라서 그런 걸까. 헬레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였다. “아, 아?” 김한별이 불안한 비명을 지르며 나를 붙잡는다. 하지만 이전에도 확인한 광경인 만큼 별로 놀랍지는 않다. 아니. 놀랐다기 보다는, 내 눈은 마주 떠오르는 게헨나에게 아까부터 고정돼있었다.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시종일관 진지한 얼굴로 주문을 외우는 게헨나의 얼굴에.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절로 주먹을 움키고 말았다. ‘정말로 이대로 헤어지는 건가? 이대로 허무하게?’ 처음에는 느릿하게 올라가던 속도는 이내 에스컬레이터를 탄 듯 점차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허나 그럴수록 내 마음은 더욱 다급해졌다. 한순간 마음속으로 무수한 생각과 심한 갈등이 교차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있고 싶어. 지금이라면 소환 의식을 멈출 수 있을지도 몰라.’ ‘김한별을 먼저 보내는 방법도 있잖아.’ ‘게헨나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그래도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홀 플레인이잖아?’ ‘생각해보니 이름을 지어주지 못했다고 할까? 그래서 조금 더 남는다고 할까?’ 그때였다. “후….” 구멍에 거의 다다른 순간, 돌연 게헨나가 가는 숨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벌써 주문을 마친 건가? “근 1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도저히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을 즈음, 살며시 눈을 뜬 게헨나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걸었다. “그대와 지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아마 내 생애를 통틀어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니었나 싶구나.” “게, 게헨나.” “어떻게, 그대는 내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느냐? 생각해보니 한 마디 정도라면 여유가 있을 것 같은데.” “어….” 한 마디. 고작 한 마디였다. “…없느냐?” 그러나 어느 순간, 게헨나의 낯에 서린 처연한 기색을 발견했을 때. 나는 갈등으로 점철된 마음이 한순간 백지장으로 변하는 현상을 경험했다. 시야가 하얗게 물들고 게헨나도 빛에 가려 희미해졌다. 허공에 떠오른 몸. 살을 스치는 거대한 마력의 흐름. 귓전을 울리는 웅혼한 소리. 천천히 다가오는 게헨나. 그 모든 것들이 정신을 멍하게 만들고 있다. “나를 구원해주고, 행복을 주어서 고맙다. 그대 덕분에 나도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수 있겠어. 이제 왕이 태어나고 1 군단이 부활하면…. 나 또한 본연의 직책인 1 군단장으로 돌아가야겠지.” 1 군단? 이건 또 무슨 말일까? “미련인가.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구나.” 그때, 아주 잠깐 게헨나의 얼굴이 눈앞으로 나타났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아무튼 그대가 나한테 행복을 준 만큼, 그대도 어디서든 행복하길.” 그것은 정말이지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뒤늦게 입에서 묘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러자 마침내 시야가 활짝 넓어졌다. “그럼…. 이제 정말 마지막인가….” 이윽고 마지막이라는, 여전히 가라앉은 음성이 귓가로 속삭이듯이 흘러 들자.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자느냐?’ ‘벌써 잠들었느냐….’ ‘어떻게, 그대는 내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느냐?’ ‘…없느냐?’ 그 순간. “게헨나, 잠깐ㅁ…!” 미처 말을 이을 틈도 없이 검은 구멍은 내 몸을 삼켜버렸다. 이내 배꼽이 훅 쏠리는 기분에 이어, 삽시간에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까지.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손을 내뻗고 말았다. 그리고 목이 터져라 외치며 시선을 내린 순간. 굉장히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면서도, 나는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서서히 닫혀가는 하늘 구멍 사이로 손을 흔들고 있는 베히모스와, 여전히 허공에 뜬 채로 나를 올려다보는 게헨나를. ============================ 작품 후기 ============================ 확실히 여러 독자 분의 의견을 구하니 좋은 아이디어가 많이 나오네요. 제가 미처 생각지 못한 것들도 많아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0682 / 0933 ---------------------------------------------- 왕의 귀환. 등활 지옥 하늘에 해일처럼 흐르던 마력은,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속력이 줄어들었다. 그에 따라 반으로 갈라졌던 하늘이 도로 닫히고, 중앙에 생성된 검은 공간도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차원을 잇는 구멍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어마어마한 마력을 아우르던 하늘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삽시간에 본래의 빛을 되찾았다. 그제야 처음부터 끝까지 하늘을 바라보던 베히모스의 고개가 떨어졌다. 동시에 붉은빛을 번쩍이던 투구 내 안광도 한순간 꺼져버렸다. “결국 가버렸네요.” “음.” 베히모스의 음성은 약간 아쉽다는 어조가 깔려있었으나 대답한 목소리는 의연하기 그지없었다. 힐끔 시선을 돌린 베히모스는 아직도 오연히 하늘을 올려다보는 게헨나를 보고서 투구를 긁적였다. “…괜찮으십니까?” “음?” “상당히 그리워하시는 것 같아서요. 벌써부터 말이죠.” “후후. 그리 보이느냐?” 게헨나는 확실하게 말하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받아넘기고 미미한 미소를 머금을 뿐. 그러자 피리 부는 소리를 흘린 베히모스가 한 번 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요. 대공. 혹시 부왕과 다투기라도 하셨습니까?” “응? 다투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이더냐.” “아 그렇잖습니까. 하루가 멀다 하고 깨를 볶으시다가 오늘 갑자기 서로 외면하시는데…. 부부 싸움이라면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하여간 네 헛소리는 여전히 수준급이구나.” 게헨나는 베히모스의 말을 헛소리라 일축했다. 그리고 빙글 몸을 돌려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이 유난히 외로워 보여서였을까. 베히모스는 곧바로 따라 나서려 했지만 이내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성큼성큼 거리를 벌리는 게헨나에게서 따라오지 말라는 무언의 의사를 느꼈기 때문이다. ‘부부 싸움이라. 꽤나 재미있는 표현이구나.’ 게헨나는 어딘가로 걸어가면서도 입가에 머금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한 차원의 지배자로서 수천 년을 고독하게 지내온 게헨나로서는 그 말이 그렇게나 신선하고 생경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 번쯤 시도해 보고픈 생각도 있었다. 물론 이제는 희망 사항에 불과할 뿐이지만.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게헨나의 정처 없던 발걸음이 우뚝 멈춘 곳은, 다름 아닌 김수현과 관계를 맺은 장소였다. 그랬다. 게헨나는 지금 발길 가는 데로 떠도는 게 아닌 명확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게헨나가 걸어온 동선은 김수현와 둘이서 거닐었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 걷고 있었다. 김수현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무언가 회상이라도 하는 걸까. 지면을 내려다보는 진홍빛 눈동자가 잠시나마 아련하게 젖어 들었다.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지만 게헨나의 눈동자는 분명 애틋한 감정을 빛내고 있었다. 이제는 휑하기만 한 땅을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게헨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또다시 걸음을 멈출 때는, 처음 그랬듯이 어딘가를 하염없이 응시했다. 가끔 지그시 눈을 감고 잔잔한 미소를 짓는 것이, 어찌 보면 쓸쓸해 보이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행복해 보이기도 했다. 걸음은 등활 지옥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한 구간에서 있었던 모든 추억을 회상하고 나면, 게헨나는 구간을 내려가 그곳에서 있었던 추억까지도 하나하나 모조리 되새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등활, 흑승, 중합, 규환, 대 규환, 초열을 내려간 후, 대 초열의 야장을 걸었다. 어느 구간에서는 김수현이 자장가를 불러주는 달콤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또 어느 구간에서는 침략한 악마에 관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일곱 밤을 보내는 동안 각 구간에 쌓인 추억은 적지 않으나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었다. 걸음은 단 한 곳도 빼놓지 않고 모든 추억의 길을 되짚었다. 이윽고 최하층인 무간 지옥까지 내려갔을 때, 게헨나의 발이 마지막으로 멈춘 곳은 바로 어탑이 있는 장소였다. 이제는 더 돌아보고 싶어도 돌아볼 곳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탑을 바라보는 게헨나의 낯에 조금이지만 쓸쓸한 기색이 서렸다. “…….” 한참 동안 망연한 눈으로 응시하던 게헨나가 어탑으로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언제나처럼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다리를 꼬아 앉으려는 찰나, 갑자기 멈칫 행동을 정지했다. 그리고 자신의 배를 지그시 내려다본 순간, 돌연 절반쯤 올라갔던 다리가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얌전히 어탑에 걸터앉은 게헨나는 허공에 노출된 복부를 살며시 감싸 안았다. 흡사 무척 소중한걸 다루기라도 하듯 정성스레 어루만진다. 게헨나의 얼굴은 여전했다. 알 듯 말 듯한, 차마 말로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여러 감정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었다. 허나 배를 쓰다듬는 게헨나를 보고 있다면 최소한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건 바로 더 이상 외로워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 ‘비록 마지막 말은 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게헨나는 괜찮았다. 떠나기 직전까지 김수현이 짓고 있던 표정은, 김수현이 하고자 하던 말이, 게헨나가 듣고자 하던 말이 모두 드러나 있었으니까. 굳이 직접 듣지 않아도 게헨나는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게헨나는 상념에 잠기려는지 어탑에 고개를 기대고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여전히 배를 부드러이 매만지며 살짝 입을 열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일전에 중합 지옥에서 김수현이 들려준 자장가였다.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아름다우면서 아늑한 미성. “잘도 잔다…. 우리 아가….” 살며시 허공으로 녹아 들어간 목소리는 따뜻한 바람을 따라 여운처럼 퍼져나갔다. 그 자장가에 반응한 걸까. 무간의 하늘을 수놓은 붉은 빛무리가 춤추듯 너울너울 움직였다. * 차원 이동. 직접적으로 차원을 이동하는 경험은 이번이 네 번째였다. 1회 차에 오며 가며 두 번, 2회 차에도 똑같이 두 번. 그러나 2회 차, 즉 현재 느끼는 차원 이동의 감각은 1회 차와 비교해보면 판이하게 다르다. 지옥으로 갈 때는 기절한 상태였으니 몰랐다손 쳐도, 지금은 확실히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훨씬 안정된 기분이랄까. 1회 차에서 돌아갈 때는 정신 없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만 느꼈는데, 지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물론 고막이 터뜨릴 듯 울리는 웅웅거리는 소음과 울렁거리는 속은 여전했지만, 흡사 플룸 라이드(Flume Ride)를 탄 것처럼 내 몸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김한별은 어떻게 되었나 궁금해 시선을 돌리려고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몸이 이동하는 속도는 점차 가속이 붙고 있어 이제는 시야가 흐릿하게 보일 정도였다. 조금 걱정은 됐지만 게헨나가 실수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어서 이동이 끝나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공간에 삼켜지기 직전, 끝까지 나를 바라보던 게헨나의 얼굴이 문득 떠오른다. 그 순간이었다. 화아아악! 눈을 감고 있음에도 무언가 환해진다는 기분을 받은 동시에 갑자기 몸이 세게 튕기는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쿵! “악!” 어딘가로 세게 부딪치는 감촉에 이어 여인의 새된 비명이 귓전을 때렸다. 그래도 비명 덕분에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눈을 뜨자 처음 시야에 들어온 건 짙은 어둠이 스며든 거친 흙 대지였다. 찰나의 순간 시야가 좌우로 나뉘기는 했으나 곧 정상으로 겹쳐졌다. 이마가 상당히 어지럽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참을만한 정도였다. 그냥 부딪쳤을 뿐이라 예상외의 타격도 없다. 몸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후, 나는 손으로 지면을 짚고 조심스레 일어섰다. 인근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그저 망망대해와 같은 황무지만 눈에 들어올 뿐,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일견 보기로는 어디로 왔는지 당최 가늠할 수 없을 정도. 이내 이마를 짚어 아직도 맴도는 남은 현기증을 가라앉히자 그나마 상황이 하나 둘 정확하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야…. 아파라….” 우선은 김한별. 가까이서 지면에 납작 엎드려 있는 걸 보니 역시나 무사히 돌아온 듯싶다. 낙하 때 상당히 세게 부딪쳤는지 얼굴을 한껏 찡그린 채 코를 문지르고 있다. 바로 옆으로는 큼지막한 자루 하나가 널브러져 있었다. 지옥에서 가져온 여러 물건들로, 차원 이동을 거치면서도 용케 가져온 모양이다. “아.” 그 순간 나는 비로소 근처에 홀로 우뚝 서 있는 거대한 탑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틀란타를 목전에 두고 동부가 발견한 이정표였다. 그러나 이제서 느끼건대 지옥에서 종종 보았던 어탑과 매우 흡사한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잠깐 까먹고 있었을 뿐이지 이미 경험한 일이었다. 우선은 이곳이 어디인지 감을 잡았다는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이건…. 이정표잖아요….” 마침 김한별도 탑을 발견했는지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핫.” 토끼 눈을 뜨며 숨을 들이키더니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오, 오빠!” “응?” “여, 여기 거기잖아요.” “응.” “돌아왔어요? 우리 정말로 돌아온 거예요?” “맞아. 돌아왔어.” 나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여 긍정했다. 이정표, 아니 탑…. 젠장. 아무래도 좋다. 아무튼 이걸 발견했을 때부터 나는 우리가 서 있는 장소가 아틀란타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언가 어색한 걸까. 김한별은 여전히 고개만 든 채 나를 보고 있었는데, 매우 복잡하고도 미묘한 빛을 품고 있었다. 보아하니 지금 느끼는 놀라움과 기쁨을 어떻게든 표출하고 싶은데, 나를 보고 있으니 그런 기분이 가라앉는 모양이다. …조금 놀라는 척이라도 보였어야 했나? “…정말로 돌아온 거 맞아요?” 이어진 물음에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응! 맞아! 드디어 우리가 돌아온 거야 한별아! 예에에에!’ 라고 오버하는 것 보다는, 그냥 담담하게 구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조금 늦은 감도 없잖아 있거니와 김한별이라면 오히려 더욱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붙잡아 일으켜주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걸음을 뗀 찰나였다. “아직도…. 그 여자를 생각하시는 거예요?” 걸음을 내디디는 동시 들려온 음성에 그대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 여자. 게헨나. 그러고 보니 게헨나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시선을 돌리자 탑이 반사하는 달빛의 반사광이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홀로 오연히 솟은 탑을 보고 있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게헨나도 지금 나처럼 자리를 떠나지 않고 탑을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그러면서 나와 함께한 추억을 되새기는 중이겠지. 추측에 불과하지만 내가 아는 게헨나라면 왠지 그럴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고작 일곱 밤밖에 같이 지내지 않았으면서….” 그렇게 한참 탑을 응시하자 돌연 조심스런, 그러나 투덜거림이 분명한 음성이 흘러들었다. 나는 짧게 숨을 흘리고서 김한별을 보며 손짓했다. “아무튼 그만 일어나. 설마 밤 내내 그러고 있을 생각은 아니겠지?” “네에. 안 그래도 일어날 생각이었거든요.” 김한별은 볼멘 목소리로 말하고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풀썩! “아?” “흠?” 나와 김한별의 탄성이 겹쳤다. 기껏 상반신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갑작스레 몸이 허물어졌다. 실수라고 보기에는 팔이 너무 자연스럽게 내려앉았다. “왜, 왜 이러지?” 김한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지 어쩔 줄 몰라 하는 태도로 재차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결과는 똑같았다. 두 번 세 번 일어나려 할 때마다, 김한별은 고작 상반신만 일으켰다가 도로 엎어지기 일쑤였다. “너 갑자기 왜 그래?”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멈췄던 다리를 다시 움직였다. 그때였다. 꼬르륵. 돌연히 어디선가 배 끓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아니! 이건…!” 소리의 주범은 굉장히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빠르게 흔들었다. 꼬르륵! 그러나 소리는 보기 좋게 주인을 배반했다. 그렇게 배신당한 김한별의 얼굴은 참으로 볼만했다. “많이 배고팠나 보구나. 하기야 그럴 만도…?” 어쨌든 앞으로 놀리는데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마저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아.’ 갑작스럽게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빛살처럼 뇌리를 스쳤다. 배고프냐고 말하려는 찰나, 느닷없이 1회 차에서 겪었던 경험이 떠오른 것이다. 그 기억은 내게 경고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절대로 안전한 상황이 아니라고. 주변에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위험하다. 문득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저는 이제 자…. 지는 못하고. 곧 나가봐야 할 것 같네요. 약속이 있어서요. 어제 저도 모르게 홀라당 자버리는 바람에…. ^_ㅠ 0683 / 0933 ---------------------------------------------- 왕의 귀환. 돌이켜보면. 현재의 사용자 정보를 갖추지 못했던 1회 차에서 나는 무수한 생명의 위기를 겪었다. 지금 회상해봐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억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건 그야말로 기적과 우연의 산물일 것이다. 아무튼 차마 셀 수 없을 정도의 사선을 넘은 만큼 겪은 상황 또한 다양한데, 그 중 가장 비참했던 상황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않고 ‘아사(餓死)할 뻔 했을 때.’ 라고 말할 수 있다. 굵어 죽기 직전까지 몰렸던 상황은 딱 두 번. 한 번은 요정의 숲에서였고 다른 한 번은 지옥에서 돌아왔을 때였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두 상황 중 조금 더 특별했던 상황을 고르라면 아무래도 후자일 것이다. 요정의 숲에는 그냥 식량이 부족했을 뿐이니까. 그러나 지옥에서 귀환했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아니. 조금이 아니라 완전히 다르다. 생각해보면 나와 김한별은 지옥에서 꼬박꼬박 잠은 잤어도, 식사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허나 그래도 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고, 그건 1회 차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 정작 이상함을 느낀 건, 어느 순간 몸 내부에서 일어난 변화를 인지했을 때였다. 인간 세상으로 돌아온 이후, 나는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심한 공복감과 탈력감을 느꼈다. 그 감각은 한순간 폭발적으로 찾아온 건 아니었지만, 특히 공복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끝없이 크기를 키워갔다. 당연하지만 그냥 ‘배고프다.’ 수준이 아니다. 공복감이 커질수록 자연스레 탈력감도 심해지고, 종래에는 하늘이 누렇게 보일 지경에 이른다. 그래서 지옥에서 깨어난 첫날 오래 있을수록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그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원리에 관해 말해보라면 정확하게 설명할 자신은 없다. 그저 차원 법칙과 관련 있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만 가능하지 나도 상세한 사정은 모르니까. 단, 만일 지옥이 식사가 필요 없는 세상이라 가정해보면, 몸이 잠깐 새로운 차원 법칙에 동화됐다가, 원래 차원으로 돌아오면서 동화가 풀렸다고 예상할 수는 있다. 아마 그 과정에서 반대급부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게 아닐까. 여하튼 모로 봐도 절대로 좋은 현상이 아니다. 그 당시 나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지만, 어그러진 몸의 균형을 맞추는데 거의 한 달이라는 시간을 소비해야만 했다. ‘그나마 공복감이 아직 덜 왔을 때.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생각대로였다. 지금 한가로이 귀환의 기쁨을 나눌 때가 아니었다. 지옥에 얼마나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절대 짧은 시간이 아닐 것이니만큼 한층 마음이 급해졌다. 우선 급한 대로 현지 조달이라도 할 생각에 주변을 둘러봤으나 역시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애초 황무지에 뭘 기대한 것 자체가 에러였다. “윽…!” 그 순간 돌연 괴로워하는 신음이 귓가로 흘러들었다. 김한별이 더욱 심하게 낯을 찡그리며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공복 현상의 전조가 찾아온 것이다. 아마 방금 복부가 찌릿찌릿 쑤시는 듯한 격통을 느꼈을 것이다. 조금 이른 감이 없잖아 있지만 김한별의 사용자 정보를 생각하면 납득이 간다. 애초 클래스가 마법사니 내구나 체력이 나와 비교해 현저하게 낮지 않은가. 그러니 현상이 빠르게 찾아오는 것도 당연지사. “이, 이상하다? 아직 그날은 아닐 텐데….”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는 김한별의 말을 들으며 나는 결심을 굳혔다. 현지 조달이 불가능한 이상 남은 방법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도시에 도착하는 수밖에 없다고. 우선은 그러고 나서 다른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망설임 없이 다가가 김한별을 잡아 일으켰다. “오, 오빠?” “괜찮으니까 우선 업혀.” “아니. 괜찮아요.” “어서 업히라니까.” “가, 갑자기 왜 그러세요. 조금 전까지는….” “빨리 도시로 들어가고 싶어서 그래.” 김한별은 처음에는 거부하는 반응을 보였으나 결국에는 못 이기는 척 등에 업혔다. 기본적으로 머리가 영리한 아이인 만큼, 지금 자신의 몸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내 말대로 얼른 도시에 들어가고 싶어서일 수도 있고. “오빠. 그럼 자루는 제가…. 아니 저 진짜 걸을 자신 있는데.” 김한별은 이렇게 등에 업혔으니 자신이 지옥에서 가져온 자루라도 들겠다고 했지만, 그 자루마저 내가 들어버렸다. 비단 김한별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마법사들의 신체 능력치는 상당히 낮다.(물론 형은 예외로 두자.) 나야 아직 버틸만하다고 해도, 김한별은 이제부터라도 최대한 체력을 보존해야 한다. 최대한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나서, 나는 방향도 가늠할 겸 잠시 하늘을 응시했다. 칠흑 같은 밤하늘에는 오직 달 하나만이 고고하게 떠올라 있었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가자.” 그렇게 달빛이 비추는 밤의 황무지서, 나는 한 손에는 자루를 다른 한 손으로는 배고픔에 굶주린 여인을 받친 채, 아틀란타가 있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력으로. 이윽고 주변 풍경이 물 흐르듯이 스치기 시작하자 내 목을 감고 있던 팔이 더욱 강하게 옥죄어온다. “꺅! 오, 오빠. 왜 이렇게 빠르게 달리시는 거예요?” “말했잖아. 한 시라도 빨리 도시로 들어가고 싶다고.” “그, 그래도요. 이건 너무 급하잖아요!” “네가 아프니까.” 별로 생각하고 꺼낸 말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도시를 발견하는데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건성으로 말했다. 지금 김한별의 투정을 받아줄 만한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이상하게도 김한별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그냥 등과 맞닿은 신체가 살짝 경직된 탓에 혹시 죽은 건가 걱정했지만, 목덜미에서 들려오는 색색거리는 숨소리는 김한별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잠시 후. 등에 깊숙이 고개를 파묻는 감촉이 전해진다. “그, 그래도 엉덩이가….” 이어서 귓가로 속삭여오는 무언가 창피해하는 음성까지.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응? 엉덩이?” “…지금 제 엉덩이에 손 대고 계시잖아요.” “아. 그런데 한 손에 이걸 들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남은 한 손으로 너를 받치려면.” “그렇기는 한데 너무 들썩거려서…. 조, 조금 천천히 가셔도 괜찮을 것 같은데….” 자루를 살짝 들어올리자 김한별이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을 더듬었다. ‘큰일날 소리.’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었으나 나는 달리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물론 김한별은 사정을 모른다. 허나 여기서 의도적으로 속도를 줄이는 건 거의 자살하는 것과 진배없는 행동이다. 지금이야 그럭저럭 견딜만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이제 곧 공복감은 기하급수적으로 크기를 불릴 것이다. 한 번 터지기 시작한 공복감은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타오른다. “걱정 마. 네 엉덩이에는 관심 없으니까. 정 그러면 네가 내 목에 매달린 채로 가던가.” “…열 받아.” 응? 방금 무슨 말을 들을 것 같은데. 스치는 바람 소리에 파묻혀 제대로 듣지 못했다. 이후 김한별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가끔 목을 살짝살짝 조르는 듯한 감촉을 느꼈으나 착각이라 치부하며 얼른 도시가 나오기를 빌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이건…?’ 나는 달리는 와중에도 주변을 살피는걸 늦추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황무지에 새겨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야영의 흔적이었다. 즉 원정대는 도시를 발견하고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야영지를 건설하고서 어느 정도 기다렸다는 소리였다. ‘좋다.’ 아틀란타. 아무리 마법적 처리가 가미되고 튼튼하게 지어진 도시라도, 못해도 수백 년간 방치된 상태였다. 거기다 도시 내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니, 정말 멍청한 총 사령관이 아니라면 곧바로 진입했을 리가 만무하다. 그러한 점들을 감안해보면 야영 흔적을 발견한 건 확실한 호재였다. 애초 내가 이 장소에서 길을 잃을 리는 없으나, 어쨌든 도시가 가까이 있다는 방증은 되니까. 이제는 정말로 거의 도착해가는 상태였다. 그러자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 이내 한결같이 이어지던 풍경이 약간이나마 변화를 보였다. 그냥 황무지에 불과하던 지면에 어느 순간부터 잡초 비슷해 보이는 것들이 드문드문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자연스레 내딛는 발걸음에 더욱 힘이 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잠시 후. “아…!” 나는, 작은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아직 거리가 있기는 했지만, 시야 정면 방향으로 하나의 거대한 도시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이라서 그런 걸까. 차마 가늠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좌우로 길게 이어진 드높은 성벽은, 새하얀 빛을 띠고 있어 더욱 두드러지게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드디어 아틀란타가 보이기 시작한다. “한별아. 아틀란타다. 아틀란타…!” 삽시간에 아틀란타가 가까워진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는 생각에 나는 김한별을 들쳐 업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별아?” 허나 아틀란타가 보임에도 불구하고, 김한별은 일말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2, 30분 전부터 갑자기 조용해진 것 같은데…. ‘혹시?’ 문득 이상한 기운이 전신을 엄습했다. 확실히 가끔 목을 죄어오던 팔은 어느새 느슨하게 풀려 있었고, 들려오는 호흡은 상당히 약해진 상태였다. 불안하다. 다급한 마음에 나는 손을 이리저리 더듬다가, 돌연 가운뎃손가락을 세워 받친 엉덩이 사이로 쿡 찔러 넣었다. 그러고 나서도, 아주 잠깐은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정확히 3초가 지났을 때. “…힉?!” 김한별이 몸을 펄떡거리며 반응했고. “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이내 등에서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아마 처음에는 제대로 몰랐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모양이다. “하, 한별아. 가만히 있어. 힘들다.” “제가 가만히 있게 생겼어요? 아까는 관심도 없다…. 아니.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 어디 말만한 처녀의…!” “…처녀의? 이어서 말해봐.” “의…. 이익! 오빠!” 김한별의 벌컥 소리를 질렀다. 등을 마구마구 두드리는 게 꽤나 화가 난 듯싶다. 나는 가슴 한 켠으로 안도하며 바로 사과했다. “알았어. 미안해. 그런데 네가 반응이 없으니까….” “힘드니까 반응을 못하는 거잖아요!” “걱정되니까 그렇지…. 아무튼 많이 힘들어?” “거, 걱정….” 그 순간 김한별은 또다시 갑자기 침묵했다. 그리고 앓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양 어깨를 꽉 쥐었다가, 곧 매달리듯 힘없이 몸을 무너트렸다. “아직은 견딜만해요. 그리고 힘들기는 오빠가 더 힘드실 테니까….” 이어서 맥이 풀린 듯한 음성으로 나직이 말하기까지. 나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김한별은 그냥저냥 견딜만하다고 했으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어느덧 나도 상당히 선명한 공복감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94의 내구 능력치와 101의 체력 능력치가 이 정도라면, 김한별이 느끼는 공복감과 탈력감은 굳이 듣지 않아도 뻔하다. 아마 걱정을 끼치기 싫어서 일부러 괜찮다 말한 것이리라. 그렇게 아옹다옹하는 사이, 아틀란타는 어느새 눈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운이 좋게도 따로 입구를 찾을 필요는 없었다. 지금 달리는 방향의 성벽 아래 뻥 뚫린 입구가 눈에 들어온다. 끙끙 신음을 참는 김한별에게 정신 단단히 잡으라고 격려한 후, 나는 그대로 터널과도 같은 입구를 지나쳤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꿈에나 그리던 아틀란타로 입성할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후후. 저는 이제 조금이라도 자야겠네요. 코멘트는 일어나서 읽을게요. :) 오늘은 금요일. 학생분들, 직장인분들 모두 즐거운 금요일을 기다리시며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0684 / 0933 ---------------------------------------------- 왕의 귀환. “여기가…. 아틀란타…?” 이윽고 아틀란타 안으로 들어간 순간 목 부근에서 힘겹게 둘러보는 소리가 들렸다. 원체 힘없는 목소리였으나 어딘가 모르게 실망스럽다는 기색도 깔려 있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입구를 통과한 후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도시의 밤거리는 그야말로 을씨년스러움이 극에 달한 풍경을 보이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여기저기 허물어진 건물의 잔해가 즐비하고 일부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심하게 낡아 있었다. “으응…. 오빠. 도시를 처음 발견하면 원래 이래요?” 김한별이 깊은 신음을 삼키며 속삭였다. “어쩔 수 없지 않을까. 그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니까.”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한편으로는 김한별의 심정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게, 사실 현재의 아틀란타는 거의 황폐화된 폐허와 엇비슷해 보일 정도였다. 아마 허탈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고작 이런 도시를 가지려 그 생고생을 한 건가 생각했으니까. 처음 발견했을 때는 드높은 성벽의 웅장함에 몸을 떨기도 했으나, 내부는 상상했던 것만큼 아름답지 않다. 내가 봐도 그렇다. 1회 차서 발전한 아틀란타는, 북 대륙 대 도시인 바바라조차도 소 도시 이하로 취급해버리는 어마어마한 위용을 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허나 현재로서는 그저 발전 가능성 높은 도시에 불과하다. 어찌 보면 이게 현실이기도 했고, 또 아틀란타의 현주소라고 봐야겠지만.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문득 공복감에 생각이 미쳐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곧 난감한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너무 애매한 시간대에 돌아온 걸까. 현재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어스레한 달빛이 스며든 더러운 거리뿐. 아무리 보아도 사용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런 도시에 식당이나 주점이 있기를 바라는 건 요원한 바람일 것이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머셔너리 클랜원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드넓은 도시에서 과연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모래서 바늘 찾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금방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결국에는 어느 방향으로든 들어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김한별을 고쳐 업으며 입을 열었다. “가자. 항별아.” “네 오빠. 제 걱정은…. 네?” “응? 왜?” “아, 아니에요.” 왜 그러냐는 듯 천연덕스레 말하니 김한별이 말을 더듬는다. 나는 속으로 키득거리며 빠르게 거리를 가로질렀다. 그렇게 약 서른 걸음 정도 걸었을 즈음. “……!” “……?” 돌연 어디선가 누군가가 약간 높은 목소리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청력을 높이자 한 두어 명 정도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방향은 정면. 그 소리는 우리 쪽으로 서서히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래도 아주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나는 안도의 숨을 흘리고서 바삐 걸음을 놀렸다. 북 대륙이라면 모를까. 이제 막 발견한 도시에서 이 시간에 돌아다니는 사용자를 찾았다는 건 그야말로 천운에 가까웠다. “…아. 그러니까 지금 어디를….” “오빠가 무슨 상관…!” 예상대로였다. 앞에서는 사용자로 보이는 듯한 두 인영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음성을 들어보니 이야기가 아닌 말다툼을 벌이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한 명은 사내고 다른 한 명은 여인인 듯싶었다. “아 상관 좀 하지 말라고! 오빠가 뭔데 자꾸만…!” 저쪽도 우리를 느낀 걸까. 오른쪽의 여인이 벌컥 화를 내다가 나를 흘끗 보고는 눈을 찌푸렸다. 여인치고는 훤칠한 키를 가진 호리호리한 여인이었으나, 굉장히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외모를 갖고 있었다. 안 그래도 살짝 찢어진 눈을 찡그리니 더욱 불량하게 보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귀티가 흐르는 것도 그렇고, 분명 예쁘장한 얼굴이기는 했다. “승윤아. 너무 화내지만 말고. 응? 오빠 말 좀….” 그리고 차분히 달래고 있는 왼쪽의 사내는 오른쪽 여인과 판이하게 다른 인상을 갖고 있었다. 외모나 체구는 평범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잔잔하게 가라앉은 눈동자와 약간 낮으면서도 차분한 음성은, 어딘가 모르게 사내의 침착한 기품을 드러내주고 있었다. 특히 첫눈에 보자마자 선하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안솔의 멍함과는 다른, 뜻 모를 당당함이 느껴졌다. 여하튼, 왠지 말을 걸기 어려운 상황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머셔너리는 인지도가 굉장히 높은 클랜이다. 그러니 어느 장소에 자리잡았는지 대충이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먹을 것도 얻을 수 있을 테고. 그렇게 생각한 나는 가볍게 헛기침을 한 후 두 사용자를 향해 다가갔다. “저….” “한푼 줄 생각 없으니까 꺼져.” 그리고 조용히 말을 걸려는 찰나, 그때까지 나를 흘끗흘끗 흘기던 오른 여인이 곧바로 내 말을 끊었다. 거기다 자못 불쾌한 어조로 중얼거리기까지. 그 말을 들은 순간 화가 난다기 보다는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설마 내 얼굴을 모르는 건가? 아니. 밤이니까 잘 안 보일 수도 있으려나? “하승윤!” 문득 왼쪽의 사내가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승윤이라. 이름은 예쁘네. 기억해야지. “왜!” “너 지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아 오빠는 척 보면 몰라? 지금 한 푼 달라고….” “또, 또! 너 정말로 말조심 안 할래?” “…….” “이 멍청한 녀석아. 지금 이 도시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갑갑하다는 듯이 말하던 사내는 갑자기 내 눈치를 살피더니 꾸벅 머리를 숙이며 다가왔다. “정말 죄송합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진심으로 사과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냥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나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안색이 환해진 사내가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다른 건 아니고, 혹시 머셔너리 클랜을 알고 계시나요?” “머셔너리 클랜이요? 예. 당연히 알고는 있지요. 모를 리가….” “그럼 혹시 머셔너리 클랜이 도시 어느 곳에 자리잡았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잠깐만. 그건 왜 물어보는데?” 대답은 사내가 아닌 여인에게서 나왔다. 무에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여인은 거만하게 팔짱을 낀 채 나를 깔아보고 있었다. 하승윤이라고 했던가? “머셔너리 클랜 관계자입니다.” 나는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정석적인 말을 꺼냈다. 그냥 앞서 정체를 밝힐까도 했으나 먼저 말을 꺼내는 건 좋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물론 들키는 경우는 어쩔 수 없어도 우선은 돌아가는 상황을 고려해야만 했다. 말인즉 내가 없는 동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를 모르니, 우선은 최대한 정체를 숨기는 게 유리하겠다는 판단이었다. “…관계자?” 하승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승윤아. 내가 이야기할 테니까….” 사내가 얼른 나섰으나 하승윤은 이번에는 밀려나지 않았다. 되레 사내를 물리치며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본다. “말도 안 돼. 머셔너리 관계자라면서 자기 클랜이 자리잡은 장소를 모른다고?” …이런. 그래도 아주 멍청하지는 않은가 보네? “승윤아 너 왜 그래. 그게 네가 무슨 상관이야.” “오빠는 가만히 좀 있어봐. 나 저 사람들 되게 수상해. 지금 이 시간에 돌아다니는 것도 그렇고…. 등에 업고 있는 건 또 뭐야?” “우리도 돌아다니고 있잖아. 그리고 관계자라고 꼭 클랜 사람이 아닐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처럼 오리 알 신세일지도….” “아니야. 저 사람들 오리 알은 아닐걸? 이번에 머셔너리 클랜은 외부 사용자들 참가 안 시켰잖아. 기억 안 나?” “그건….” “저놈들 혹시 몰래 들어온 새끼들 아니야? 아니면 부랑자 새끼들이던가.” 따따따따 말하는 하승윤의 논리에 할 말이 없는지 사내는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볼 일이 있어서 찾아가는 중입니다.” 사내와 하승윤의 시선에 내게로 향했다. “볼 일이 있다고? 이 시간에?” “예. 관계자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빙긋 웃으며 당당하게 말하자 하승윤이 약간 당혹한 기색을 비췄다. 그러나 곧 표독스런 표정으로 나를 째려보는 게, 아무래도 말장난으로 놀림 당했다는 사실을 알아챈 모양이다. “이…!” “아아아아! 그만 그만. 제가 말씀 드리죠. 머셔너리 클랜은 이 도시에는 없습니다. 서쪽 터널을 지나고 새 도시로 들어가셔야 나올 겁니다.” “오빠! 미쳤어? 저 사람들이 누군지 알고…!” “조용히 있어. 다 생각이 있으니까.” 그 생각이라는 게 궁금했지만, 그보다는 이 두 사용자가 나를 인지하지 못하는 동안 얼른 벗어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쪽 터널이요. 정확히 어느 지역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간단합니다. 터널을 따라 난 길을 그대로 따라가시다 보면 중앙 광장처럼 보이는 곳에 도착하실 겁니다. 그 주변에서 그나마 가장 괜찮아 보이는 건물을 찾으시면 됩니다.” 사내는 무언가 상세하면서도 애매하게 알려주었다. 그러나 더 자세하게 말해달라고 하기도 그렇고, 어쨌든 알고 싶었던 것도 알아냈다. “그렇군요.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인사를 건네고 바로 걸음을 돌리려는 찰나. 꼬르륵! 느닷없이 배 끓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주변이 적막한 탓에 확실하게 들었는지, 사내와 여인이 동시에 떫은 빛을 비췄다. 소리의 범인은 내 목을 살며시 죄며 등에 고개를 파묻었다. 나는 반쯤 돌린 몸을 되돌리고 사내를 보며 쓰게 웃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혹시, 먹을 것 가지고 계십니까?” “예, 예?” 사내가 한껏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빡인다. “간단한 요기거리라도 괜찮습니다.” “오, 오빠….” 김한별이 미안해 죽겠다는 듯한 가련한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사내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잠시 내 어깨 너머로 시선을 보내는가 싶더니 빗겨 메고 있던 가방을 열었다. 하승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푹 한숨을 흘렸다. “어휴. 나도 이제 몰라. 무슨 일 일어나면 다 오빠 책임이야! …쯧.” 그리고 한 번 거하게 혀를 차고는 휙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내는 잠깐 하승윤을 쳐다봤다가 황급히 가방에서 꺼낸 빵을 내밀었다. “죄, 죄송합니다. 저도 가진 게 이것밖에 없어서.” “감사합니다.” 한순간 사내의 낯에 일용할 양식을 빼앗겼다는 안타까운 빛이 스쳤지만, 나는 보따리를 내려놓고 얼른 받았다. 우선은 살고 봐야 하니까. “그, 그럼!” 이윽고 사내는 꾸벅 머리를 숙이고서 하승윤이 걸어간 방향으로 달려갔다. 점차 멀어지는 사내의 뒷모습을 보다가 나는 빵을 어깨 쪽으로 들어올렸다. “한별아. 이거 먹어.” “…….” “맛은 없어 보이는데. 그래도 먹어놔. 안 그러면 더 힘들다.” “…….” 김한별은 그제야 천천히 빵을 받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등에서 약한 떨림이 느껴졌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으나 왠지 모르게 김한별이 입을 꽉 깨물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꼭 씹어 먹어라. 배고프다고 급하게 먹지 말고.” 나는 아까 내려놓은 보따리를 도로 주웠다. 그리고 사내가 알려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내 이름도 못 물어봤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까 두 남녀와 헤어진 후 김한별은 한 마디 입도 열지 않고 있었다. 왜 그러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사내가 알려준 터널이라는 곳을 발견하고, 통과 후 새로운 도시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음에도 김한별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아마 예전이었다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진작에 물어봤을 텐데, 아마 심경에 변화가 생긴 모양이다. 물론 한때 아틀란타를 주로 활동했던 만큼 나는 사내의 말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내가 말한 터널이 어떤 뜻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한별을 의식해 ‘터널이 뭔가요?’ 라고 질문했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더욱 강한 의심을 받았을 것이다. 아무튼. 우물우물. “꿀꺽…. 아무래도 여기 같은데?” 입에 들어간 빵 조각을 정확히 50번 씹은 후, 나는 조심스레 삼키며 입을 열었다. “안 그래 한별아?” 재차 물었으나 김한별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냥 아무 말도 않고 작게 찢은 빵 조각을 또 하나 불쑥 내밀었을 뿐.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서 얌전히 빵 조각을 받아먹었다. 눈앞에는 여관 비슷해 보이는 건축물이 하나 있었다. 안쪽에서는 기척은커녕 정적만이 맴돌고 있었다. 시간대가 시간대라 그런지 다들 자고 있는 모양이다. 조용한 여관을 보며 나는 아까 사내의 말에 관한 생각을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왜냐면 정말 그 사내의 말대로였으니까. 터널을 통과하고 이어진 길을 따라 걸어 도착한 광장에는, 정말로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물이 딱 하나 있었다. 그게 바로 이 여관이었다. ‘조금 손을 본 것 같기는 한데…. 어쨌든 여기라는 말이지?’ 혹시 몰라 주변을 한 번 더 꼼꼼히 둘러보았다. ‘음. 확실해.’ 역시나 거의 다 쓰러져 가는 건축물밖에 없는 걸 확인하고서 나는 여관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흡족한 마음으로 문으로 보이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도시 내 중앙 부분에, 그것도 나름 괜찮은 건물에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은, 최소한 내가 없는 동안 겉으로 밀려나지는 않았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한별아. 우리 이제 안으로 들어가자?” 나는 마치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 역시나 김한별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빵이 아닌,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이는 것으로 반응을 대신했다. 이러니까 김한별이 정말 아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쨌든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초반 대응이 좋았다. 그래서 공복감이 기하급수로 커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1회 차서 처음 뭔지 모르고 계속 서 있었던 기억을 회상하면 진정 장족의 발전이리라. 그렇게 스스로 자화자찬한 후, 드디어 다 왔다는 생각에 조심조심 문을 밀어젖혔다. 문은 예상외로 헐렁거려 아무 저항 없이 스르르 열렸다. 잠시 후. 열린 문 안쪽으로 나는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살그머니 안을 들여다본 순간. “…응?” “…어?” 나는, 그대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 작품 후기 ============================ ^_ㅠ…. 0685 / 0933 ---------------------------------------------- 왕의 귀환. 사아아아…. 바람이 불었다. 펄럭! 무릎까지 내려온 코트가 바람결을 따라 힘차게 나부꼈다. “너….” “너….” 내 말과 사내의 목소리가 똑같이 겹쳤다. 그리고 동시에 말을 흐렸다. 나부꼈던 코트가 서서히 가라앉는 순간 나는 멍하니 시선을 들었다. 짙은 남청 빛이 흐르는 체스터필드(Chesterfield)형 가죽 코트. 어깨에 걸쳐 아래까지 흘러내리는 보라색 장발. 그리고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진한 보랏빛이 감도는, 한껏 놀란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사내는 바로 허준영이었다.(단언하건대, 허준영이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봤다.) 그 순간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설마 들어오자마자 만날 줄은 몰랐고, 한편으로는 허준영의 복장이 꽤나 이상했기 때문이다. 이 야심한 시간에 저런 차림을 하고 나오는 것도 이상하거니와 어깨에는 가방까지 메고 있었다. 마치 떠나려는 사람처럼. 결국에는 허준영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근래 스트레스를 너무 심하게 받았나…. 헛것이 다 보이는군. …아니. 또 그놈들인가?” 허준영은 미간을 지그시 누르더니 갑자기 등 뒤로 손을 넘겼다. 그리고 무언가를 움켜잡는 게 보여 나는 황급히 외쳤다. “검 뽑지 마!” 스릉, 사선 방향으로 흘러나오던 검이 멈칫 정지했다. “미리 말해두는데, 나는 김수현이고 등에 업힌 애는 김한별이야. 확실하게 맞으니까, 내가 정말 김수현이 맞는지 확인하려는 속셈으로 실력을 보겠다는 짓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꺼낸 후 나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최소한 이런 상황에서 매우 정연하게 말했다고 생각했으니까. “글쎄. 그렇게 말하니까 더욱 김수현 같지는 않은데.” 그러나 허준영은 머리를 갸웃했다. “왜.” “내가 아는 김수현이라면, 나 정도는 가볍게 쓰러트리고 이제 됐냐는 식으로 거만하게 깔아볼 테니까.” “…지금 힘들다. 쓰러지기 직전이야. 그렇게 안 보여?” “흠…. 그럼 네가 한 번 증명해봐라. 그 자리에서, 네가 김수현이라는 사실을.” 허준영은 여전히 검을 움킨 채로 차갑게 말했다.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좋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전히 나를 노려보는 허준영을 보며 침착히 입을 열었다. “기껏 이형환위를 가르쳐도 제대로 익히지도 못하는 멍청한 놈.” 그 순간 허준영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젠…. 장!” 탁! 이윽고 반쯤 뽑혔던 검이 신경질적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아차 한 순간 허준영이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빌어먹을! 이번에는 진짜로 김수현이잖아. 어이, 어이! 괜찮아? 정말로 너 맞는 건가?” 잠시 ‘이번에는 진짜로 김수현이잖아.’ 라는 말이 궁금했지만, 우선은 나중에 묻기로 했다. 허준영은 드물게도 호들갑스럽게 말하며 나를 붙들고 흔들었다. 평소 허준영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이례적인 반응이다. “정말 돌아온 건가? 이봐, 김수현! 어떻게 된 거야? 얘는 또 왜 다 죽어가는 거고?” “소리 지르지 마. 다른 클랜원이 깰 수도 있으니까. …아무튼, 우선 우리를 식당으로 안내해줄 수 있을까?” 식당으로 데려가 달라고 말하자 돌연 허준영의 낯에 떠름한 빛이 스쳤다. “…식당으로 가자고?” “배고파.” “하. 기껏 돌아와서 처음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냐?”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우선은 아무도 깨우지 말고 조용하게 식당으로 안내해주라. 적어도 나랑 김한별한테는 고작 그거가 아닌, 아주 중요한 문제니까.” “너…. 진정 태연함의 극치로군. 지금 네 클랜이, 클랜원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는 있는 건가?” “몰라. 그런데 거짓말이 아니라, 현재 나랑 한별이 몸 상태는 굉장히 심각한 수준이거든. 지금 우리한테 필요한 건 이 밤에 클랜원 모두 깨워서 정신 없이 둘러싸이는 게 아니라, 식사와 수면이야.” 장난이 아니라는 뜻으로 진지하게 말하는 동시, 나는 받친 손을 툭툭 치며 신호를 보냈다. 김한별은 잠시 고민했는지 조용했지만, 곧 어색하기 짝이 없는 앓는 소리를 흘리기 시작했다. 허준영은 여전히 복잡한 낯빛을 띠고 있었다. 허나 내가 괜히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건 느꼈는지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젠장…. 갑자기 어떻게 된 건지….” 이윽고 김한별을 흘끗 바라본 허준영은 무언가 꾹 참는다는 표정을 짓고서 빙글 몸을 돌렸다. “따라와라.” * 여관 내 식당은 다행스럽게도 1층에 있었다. 허준영의 안내로 식당에 도착한 후, 나는 곧바로 요리 재료를 요청했다. 허준영은 한숨을 푹푹 흘리면서도 잠깐 기다리라며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한참이나 모습을 보이지 않아 나를 근심(?)하게 만들었지만, 곧 음식 그릇을 들고 나타나 걱정을 깨끗이 씻어주었다. 기특하게도, 아예 수프를 만들어 갖다 준 것이다. 사실 대충 아무거나 쑤셔 넣을 생각을 하고 있던 나로서는 한없이 고마운 일이었다. 더구나 수프는 맛도 좋았다. 약간 싱거운 감이 있기는 했으나 잔뜩 굶은 상태에서는 오히려 이런 음식이 도움이 된다. 허준영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나는 그제야 정말로 돌아왔다는, 환영 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야. 오래 살고 볼 일이야. 허준영이 해준 음식을 다 먹고. 차원 이동도 한 번 할만하잖아?” “맞아요. 저도 준영이 오빠가 이렇게 음식을 잘하시는 꿈에도 몰랐어요.” 한창 먹는 도중 가볍게 너스레를 떨자 김한별도 숟가락을 쪽 빨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와 김한별은 걸신이라도 들린 듯 수프를 폭풍 흡입했고, 이내 전신으로 녹아 내리는 뜨끈뜨끈한 기운에 살겠다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는 동안. “…정말 엄청나게 먹는군. 도대체 며칠이나 굶은 거지?” 허준영은 살짝 질렸다는 표정으로 나와 김한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바닥을 보이는 수프를 보며 그릇까지 핥을까 고민했다가(김한별은 이미 그러고 있었다. 자기는 안 걸리게 핥는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얌전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 말해봐라.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냥…. 여러 일이 있었지.” 그러자 허준영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으나,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허준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불만을 표시했지만 나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야기가 길다. 그리고 몸도 얼른 안정해야 하고. 이제는 자야 해.” “밥 먹었으니까 이제는 잠이냐?” “그래야지. 이 수프를 먹지 못했다면 아마 2시간 내로 어딘가 쓰러져 죽었을 거다.” “…….” 조금 과장을 보태기는 했지만 김한별이라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죽는 것까지는 몰라도 쓰러졌으리라고는 100% 확신할 수 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돌겠군. 이거 진짜 현실이 맞기는 한 건가?” 허준영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까보다 상당히 가라앉기는 했지만, 낯에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그런 허준영을 보고 있으니 문득 아까 문 앞에서 봤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그런데 너야말로 아까 문 앞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설마 나를 기다린 건 아닐 테고.” 살그머니 화제를 돌리자 허준영이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설마 진짜 떠나려고 했던 건가? “왜?” 선수 쳐서 묻자 허준영은 두 눈을 치뜨며 움찔했다. 그러나 곧 가볍게 혀를 차더니 조용히 씨근거렸다. “…미리 말해두는데, 나는 너 때문에 머셔너리에 가입한 거다. 네가 없어졌으니 더 이상 여기 남아 있을 의리는 없다.” “사실이니까 애써 변명할 필요는 없어. 아무튼 그것 때문에 떠나려는 건 아니잖아.” 정곡을 찌른 걸까. 허준영은 갑자기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돌리더니 지그시 눈을 감는다.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클랜이?” “그래. 왜냐면 네가 사라진 이후 머셔너리는….” “는?” “그야말로, 개판 5분 전이었으니까. 물론 그림자 여왕을 비롯한 여러 사용자가 동분서주하기는 했는데. 날이 갈수록 꼴 보기 싫은 애새끼들이 늘어나더군. 서로 다툼도 잦아지고. 아마 계속 이대로 갔다면, 무너지는 건 시간 문제였을 거다.” “…….” 흠. 역시 그랬던가. 그래도 도시 중앙에 자리잡은걸 보고 나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마 고연주도 완벽하게 내부를 통제하고 추스르는 데는 실패한 모양이다. 하기야 나라는 중심이 없어진 이상 고연주의 공포 정치도 효과를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되레 반발하며 받아들이는 이들도 적지 않았을 테고. 이윽고 나는 품 안에서 연초를 한 대 꺼냈다. 연초를 태우며 계속 이어질 말을 기다렸지만, 허준영은 더 말하기조차 싫은지 도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수프 더 먹을 거냐?” 길게 이어진 침묵이 자못 불편했는지 결국 이번에도 허준영이 먼저 한 발 물러섰다. 김한별은 반색하는 반응을 보였으나 나는 괜찮다는 말로 완곡히 거절했다. 비록 아사할 가능성은 없어졌으나 현재 가장 급선무는 어그러진 몸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다. 그런데 잔뜩 굶은 상태서 갑자기 많이 먹으면,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몸의 균형을 해치게 된다. 김한별은 완연히 실망하는 기색을 비췄으나 그래도 내 말이 맞는다고 여겼는지 딱히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러면 이제는 어떻게 할 거지?” 허준영의 물음에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우리를 도와줬으면 좋겠다.” “그…. 몸의 균형을 맞추는 거 말인가?” “아니.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어쨌든 너나 클랜원들한테 그간의 사정은 설명해야 하니까. 또 듣기도 해야 하고.” “으음. 그럼?” 허준영은 당연하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그냥 내일 아침 이 식당으로 클랜원을 데려오면 돼. 물론 호출 대상은 전부.” “어려운 일은 아니군. 또 없나?” “그럼 하나 더. 오늘 나랑 한별이는 주방에서 잘 거거든. 웬만하면 다른 클랜원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으면 좋겠다.” “네가 왔다는 말은 하면 안 되는 건가?” “어지간하면. 생각해봐. 네가 그 정도로 반응했는데, 다른 애들은 어떻겠어.” “음…. 알겠다.” 이런 부탁을 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오늘 밤만큼은 방해 받지 않고 쉬고 싶었고, 다른 하나는 두 번 말하기 싫었으니까. 부탁한 것처럼 모두 모아놓고 한 번에 해결하는 게 깔끔할 것이다. 사실상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허준영도 시끄러운 건 질색하는 성격이라 끄덕끄덕 머리를 주억였다. 그렇게 더 할 말이 없어진 나는 간단하게 축객령을 내렸고, 허준영은 그럼 내일 보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식당을 나서기 직전 느닷없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건 궁금하지 않나?” “응?” “네 형. 아니면 이스탄텔 로우 로드.” “…….”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가 했더니. “…당연히 궁금하지. 하지만 그래서 일부러 안 물어보는 거야.” “……?” “혹시 잘못된 소식을 들으면 지금 바로 달려갈 것 같으니까.” “…그런가.” 허준영은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어깨를 들먹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나를 쳐다봤다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걸음을 돌려 식당을 나섰다. 발소리는 서서히 멀어져 갔다. 잠시 후. “코….” 어느새 탁자에 엎어진 김한별의 콧소리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기지개를 폈다. 별로 한 일은 없는 것 같은데 그냥 꽤나 지친 기분이다. ‘어쨌든 나도 이제 슬슬 자야겠군.’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공주님 안기로 김한별을 들고 주방 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자고 일어난 후, 클랜원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 다음날. 정말 오랜만에 숙면을 취한 나는 간만에 잠에서 깨기 싫다는 기분을 느꼈다. 비록 푹신한 침대는 없었지만, 그래도 한껏 고생한 후 자는 잠은 그야말로 꿀맛 같은 잠이었다. 진심으로 눈을 뜨기 싫어 그냥 다 포기하고 자버릴까 생각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마냥 그럴 수는 없어, 지속적으로 김한별을 깨우면서 간단하게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주방을 이용해 세안을 꼼꼼히 마치고 나서, 전체적인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검으로 머리카락도 치고, 면도도 하고, 복장도 단정하게 하는 등등. 정말 오랜만에 클랜원을 만나는데 추한 꼴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김한별은 처음 내가 깼을 때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오죽 일어나기 싫었으면 앙탈까지 부리며 기상을 거부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복부를 꾹꾹 누르며 클랜원이 모이고 있다고 속삭이자,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혼비백산했다. 그리고 잠깐 주방 문을 응시하더니 후다닥 일어나 나와 똑같은 행동을 보였다. 그러는 동안 나는 한 명 한 명씩 들어오던 클랜원이 어느새 상당수 모였음을 알 수 있었다. 주방 밖으로 여러 사용자의 기척이나 아주 가끔씩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예를 들면 ‘너도 왔어?’ 나 ‘허준영씨가 불러서요.’ 등등. 특히 ‘오늘 아주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겠다고 하던데.’ 와 ‘네. 절대로 주방으로 들어오지 말래요. 이 사람이 갑자기 미쳤나 봐요.’ 라는 말은 나를 웃게 만들었다. 그러나 확실히 이상하기는 했다. 예전 같았으면 난리 블루스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 활발했을 분위기가, 지금 따라 침중하기 그지없다. 말소리도 아주 간간이 들려올 뿐, 모인 수에 비해서 대화는 극히 적었다. 아니. 흐르는 기류 자체가 우울하기 짝이 없다. 어제 허준영에게 들었던 말이 조금은 체감되는 기분이다. 그렇게 밖의 기척에 집중하고 있자 어느새 김한별이 준비를 마치고 다가왔다. 아주 깔끔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어제에 비해서는 훨씬 낫다. 눈을 마주치자 김한별이 잔뜩 긴장해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무대로 나가기 직전 배우가 이런 기분일까. 아마 이렇게 클랜원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꽤나 두근거리는 모양이다. 나는 소리를 내지 말라는 뜻으로 검지를 입에 댔다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굳게 닫힌 주방 문고리에 살짝 손을 얹었을 무렵. “그런데 이렇게 모두 모이니까 옛날 생각이 나네요.” 문득 맑은 음성이 밖에서 흘러들었다. 정하연의 목소리였다. “옛날 생각이요?” 이건 고연주의 목소리. 되물음에 정하연이 말을 잇는다. “네. 꼭 회의라도 하는 것 같잖아요?” “그런가?” “클랜 로드가 언제 올까 문만 쳐다보며, 다들 이렇게 조용히 기다리는 거죠. 비슷하지 않나요?” “…….” 그 말에 식당에는 도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사실,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요. 지금도 이렇게 문을 보고 있으면…. 벌컥 열고 성큼성큼 들어오실 거 같은데….” 아련하게 중얼거리다가 말끝을 흐리는 정하연. “후. 맞네요. 그리고 상석에 앉은 다음, 이러겠죠. 그럼, 회의를 시작하죠.” 내 목소리를 흉내 내다가 싱겁게 웃어버리는 고연주. 그 말은 들은 순간. “그리고….” 나는 망설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걸어나갔다. 그러자 목소리가 뚝 끊기는 동시에 자연스레 시선이 쏠렸다. 그제야 클랜원의 앞으로 나설 수 있어, 들은 대로 성큼성큼 걸으며 입을 열었다. “다들 오랜만입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으나 나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태연하게. 언제나처럼. 그렇게 모종의 반응이 나오기 직전, 나는 싱긋 웃으며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럼, 회의를 시작해볼까요?” ============================ 작품 후기 ============================ 에…. 우선 어제 절단 마공에 내상을 입으신 독자 분이 계시다면 심심한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_(__)_ 설마 그렇게나 격하게 반응하실 줄 몰라서 조금 기뻤어요.(?) 아하하. 간단하게 해명을 해보자면…. 어제는 의도한 절단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글을 적다 보면 느끼는 게 있습니다. 제가 의도한 바와 독자 분들이 느끼는 건, 가끔 반비례 그래프를 보이는 경우가 있거든요. 어제가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진실이에요. 믿어주세요. 여기에 제가 로유진이라는 사실을 걸겠습니다. 이 말에 추호의 거짓이 있다면, 저는 무조건 로유미입니다. 그리고 전개 속도. 이건 조금 서운해요. ㅜ.ㅠ 무어라 말씀은 드리고 싶은데, 이건 그냥 차후 글로 보여드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분명 이번 챕터는 김수현의 귀환에 초점을 맞췄지만, 다음 챕터는 물론 전체적인 에피소드도 새롭게 시작해야 해요. 구상은 마쳐놨습니다. 새로운 에피소드는 이미 저번 회부터 시작된 상태입니다. 아. 또한 ^_ㅠ 이 표정은 독자 분들을 도발하는 표정이 아닙니다. 웃는 모습과 우는 모습이 겹쳐진, 한 마디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의미로 보시면 됩니다. 여담이지만, _(__)_ 이건 넙죽 입니다. 양해를 구할 때 자주 쓰지요. :), :D 이건 기분 좋을 때 쓰는 웃는 표정이에요. 부디 충분한 답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 /)!!!! 0686 / 0933 ---------------------------------------------- 왕의 귀환. 도대체 이 광경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주변을 둘러본 순간 나는 웃음이 터질 뻔한걸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장내의 시선이 모조리 내게 쏠렸다. 클랜원들은 도저히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갑자기 정지됐다는 표현이 옳지 않을까. 탁, 손에 잡고 있던 단검을 떨어트리는 고연주. 무언가 말을 하려다 서서히 입이 벌어지는 정하연. 피로한 얼굴로 미간을 주무르다가 그대로 굳어버린 신재룡. 숨이 멎은 듯, 망망해 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차소림. 눈에 보이는 모든 클랜원이 하나같이 멍하니 나를 응시한다. 흡사 이 공간에 흐르는 시간이 갑자기 멈추기라도 했는지 전원이 꽁꽁 얼어붙은 듯하다. 오직 허준영만이 한쪽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미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하하하.” 그러한 시선 속에서, 나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냥 괜스레 나온 웃음이었다. “아…. 아….” 이윽고 누군가 앓는 소리를 흘리는 동시, 서넛의 클랜원이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망연히 몸을 일으켰다. 그들의 낯에는 불신의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클랜 로드가 갑자기 아침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돌아온 건 오늘 새벽. 나와 문 앞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조용한 음성이 적막한 식당에 흘렀다. 몇 명의 클랜원이 느릿하게 옆을 돌아본다. 허준영은 여전히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몸이 안 좋으니 우선 밥 먹고 한숨 잔 다음, 오늘 아침에 모두 모여서 만나자고 하더군. …참고로, 저 사내가 김수현이라는 건 내가 보증하지.” 허준영이 보증이라는 말을 꺼낸 순간 무언가 짚이는 바가 생겼다. 가장 가까운 탁자로 한 걸음 한 걸음 이동하자, 아까부터 앓는 소리를 내던 누군가가 흠칫 의자 끄는 소음을 냈다. 정하연은 얼음에 갇힌 듯 하면서도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만큼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정하연을 보며 빙긋 웃어준 후 나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소리는 났으나 칼날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칼자루만 내 손에 잡힌 채 보이지 않는 검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자 허공을 바라보는 일부 클랜원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새벽에 대강은 들었습니다. 아마 제가 없는 동안 저를 사칭한 사기꾼들이 몇 놈 있는 것 같은데….” 몇몇 클랜원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무검을 높이 들어올린 후, 천천한 속도로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인근에 앉아 있던 클랜원이 무검을 한 번 쳐다봤다가 도로 나를 올려다본다. 그 야릇하고도 미묘한 시선을 받아넘기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직도 제가 여기 서 있는 게 믿기지 않으신다면…. 그 누구라도 좋습니다. 어느 질문을 하든 아니면 실력을 확인해보든. 어떤 방식으로든 확인 절차를 하셔도 좋으니, 저는 이 자리에서, 제가 여러분의 클랜 로드라는걸 확인시켜드리겠습니다.” 그러고서 주변을 쓱 둘러보았으나 확인하겠다 나서는 클랜원은 없었다. “흠. 아무래도 없는가 보군요. 그럼 이의 또한 없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러나 모종의 변화는 생겼다. 얼어붙은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무언가 끓는 듯한 소리를 내거나, 비척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등등. 이제 충격에서 깨어나는지 해빙된 클랜원이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음. 어떻게 하다 보니 이제 돌아왔네요. 여하튼….” 허나 그러한 반응에 개의치 않고 나는 다시 한 번 태연히 웃어 보였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예. 모두, 정말로 보고 싶었습니다.” “아, 아…. 아아아아아악!” 그렇게 보고 싶었다는 말로 매듭지으려는 찰나, 갑자기 누군가 큰 소리로 비명을 외쳤다. 이 특유의 뾰족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는 이유정이 분명하다. 그 순간이었다. “오빠…!” “수현…!” “클랜 로드…!” “형…!” 나는 채 시선을 돌릴 새도 없이 반사적으로 주춤 물러나고 말았다. 돌연 무언가 알아듣지 못할 소리가 연이어 귓가를 세차게 때렸기 때문이다. 어찌나 소리가 컸는지 흡사 여러 개의 음성이 부딪쳐 폭발한 착각마저 일 정도였다. 귓속이 멍멍해졌다. 그뿐일까. 클랜원은 목이 나갈 정도로 소리를 지르며 사방에서 돌진해오고 있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반응에 계속해서 걸음을 물렸으나 거리는 삽시간에 가까워졌다. 그때였다. 우웅! 돌연 짧은 마력 소리가 들려오더니 품에서 전개된 붉은빛이 흐르는 장막이 나를 둥글게 감싸 안았다. 이내 장막에 부딪쳐 떨어지거나 주저앉는 클랜원을 보며 나는 아차 한 기분을 느꼈다. 게헨나의 구슬이 멋대로 발동했다. 말인즉 달려오는 클랜원을 적으로 인식해 나를 보호하려 한 것이다. 클랜원이 하나같이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한다. 그리고 허공에 흐르는 붉은빛을 더듬거리며 만지기까지. 나는 얼른 해제하려다가 문득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행동을 정지했다. 지금 나는 클랜원에 둘러싸여 붉은 장막에 보호받고 있는 상황. 즉 내가 차원을 넘어갈 때와 엇비슷한 상황이다. 불현듯 재미난 생각이 떠올랐다. 잠시 후. 나는 품에 손을 넣은 채로 짐짓 서글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런…. 아무래도 여기까진가 보군요. 제게 허락된 시간이…. 하하.” 그 순간 장내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연이은 고함이 사그라지고 한껏 고조돼있던 클랜원의 얼굴도 시들해졌다. “가,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방금 돌아오셨다면서….” 들려오는 음성에 나는 시선을 45도 정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억지로 웃는 듯한 미소를 지으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미안합니다.” “오, 오빠?” “사실은…. 이렇게나마, 여러분과 마지막으로 만나고 싶었습니다. 아까 말했듯이 다들 정말로 보고 싶었으니까요.” “그, 그게 무슨 소리에요!” 쾅! 누군가 주먹으로 세게 쳤으나 붉은 장막은 꿈쩍도 않았다. 하기야 보호 요새라고까지 불리는 방어막인데 뚫리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나는 속으로 키득거리며 시선을 들었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본 순간, 나는 어딘가 굉장히 잘못됐음을 느꼈다. “혀, 형….” “말도…. 안 돼….” 아까 가장 선두로 달려왔던 안현과 이유정이 털썩 주저앉았다. 둘의 눈이 꺼멓게 죽어가고 있다. 안솔은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은 듯 얼굴이 새하얗다 못해 창백해졌다. 특히나 정하연이 가장 심했다. 양손으로 입을 꽉 틀어막은 채 온몸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찢어질 듯 커진 두 눈에서 투명한 이슬과도 같은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억지로 참는 듯한 흐느끼는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크, 큰일이다. 구슬아. 얼른 방어막 좀 해제해봐.’ 우웅? ‘괘, 괜찮으니까. 어서!’ 우웅…. 이윽고 붉은 장막이 서서히 사라진 순간, 클랜원은 나를 붙잡으려는 듯 손을 뻗으며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 있는 나를 확인하자 반응은 또다시 변했다. 나는 기괴한(?) 표정을 짓고 있는 클랜원을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시, 실은 뻥이었어요.” “…네?” 흐느끼는 소리가 갑자가 가라앉았음은 내 착각일까. “반응이 너무 예상외라서…. 잠시 진정들 좀 하시라고….”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살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럼….” “예. 정말로 돌아왔습니다.” “…사라진다는 건, 거짓말?” “흐흠. 그렇죠. 많이 놀라셨다면 미….” 그 순간. “이…! 나쁜 사람…!” 짝! 말을 끝마치기도 전 눈앞에 불꽃이 튀기며 시야가 세차게 돌아갔다. 이어서 잠깐 진정한 듯 보였던 클랜원이 다시금 폭발적으로 달려들었다. 정하연이 가슴 정면으로 파고들어오는 것을 시작으로, 안현과 이유정이 양팔에 매달렸다. 나는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지만, 덤비듯이 있는 힘껏 껴안아오는 클랜원에 의해 결국에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파묻혔음에도, 정하연은 바로 앞에서 여전히 내 멱살을 잡고 있었다.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자, 장난….” “장난? 그게 장난이라고요? 지금 장난해요? 제가, 아니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속앓이를 했는지…!” “그러니까 장난 맞는…. 미, 미안해요.” 정하연이 울컥한 음성으로 말끝을 흐려 나는 곧바로 사과했다. 그냥 진정하자는 뜻에서 장난 한 번 쳐봤는데 생각해보니 심한 것 같기도 하다. “이…. 이….” 정하연은 잠시 분노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돌연 슬픈 표정을 짓더니 선명한 푸른색 눈동자에 서서히 눈물이 괴이기 시작했다. 방금 뺨을 때린 게 그렇게나 마음에 걸리는지 천천히 내 볼을 만졌다가, 결국 내 가슴에 얼굴을 박고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아니. 비단 정하연뿐이 아니었다. “아아아아아앙….” “부뎨에에에에에에….” 여전히 주변에는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알아듣지 못할 괴성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가 우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꽉 묻힌 손을 간신히 움직여 빼낸 후, 정하연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수, 숨 막혀….’ ============================ 작품 후기 ============================ 에…. 많이 늦었습니다…. ^_ㅠ 아니 아니. _(__)_ 어제 집에 돌아오니까 19시 정도 됐습니다. 그런데 너무 힘들어서 누웠는데, 잠깐 잔다는 게 일어나니까 24시가 훌쩍 넘어있더군요. 끄아아앙 비명을 질렀다가 후다닥 일어나 늦는다고 코멘트 올리고 집필에 들어갔는데…. 구상 적어둔 노트를 펼치는데 글이 두 개로 보이더군요. -_-a(이건 머리를 긁적이는 표정입니다.) 띵한 머리를 정상으로 되돌리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현재 시간은 오전 07시 23분. 이제 30분 안으로 샤워하고 밥 먹고 또 나가봐야 합니다. 사실 더 적을 내용은 있는데, 결국 구상 내 아랫부분은 넘김 표시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내용이 조금 적습니다. 오늘은 그냥 쉬어가는 회 정도로 생각해주시기를 바라며, 부디 불민한 저를 매우 쳐주세요. ㅜ.ㅠ 더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아버지의 눈빛과 어머니의 등짝 스매싱이 두려우므로 얼른 씻으러 가보겠습니다. 독자 분들 모두 활기찬 아침 보내세요! |ㅇ3ㅇ/(이건 만세하며 노래를 부르는 표정입니다.) 0687 / 0933 ---------------------------------------------- 왕의 귀환. 클랜원 더미(?)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결국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였다. 나를 물샐틈없이 파묻은 이들은 정말로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조금은 진정된 듯했다. 물론 일부는 여전했지만. 간신히 더미에서 벗어나 탁자 의자에 앉은 이후, 나는 한숨을 흘리며 시선을 내렸다. “흑…! 으극…. 힉…! 으부….” 이유정이 여관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흐느낌과 딸꾹질을 번갈아 내뱉고 있었다. 그것도 내 다리를 꼭 부여잡은 채. 그 모습이 하도 가련해 보여 옅은 핏빛이 흐르는 머리카락을 부드러이 쓸어주었다. “유정아. 괜찮으니까. 이제 그만 뚝 그쳐.” 그러나 아담한 어깨는 경련을 멈추지 않았다. 또 한바탕 눈물을 쏟으려는 듯 눈을 찡그리듯이 감더니 “으부우욱.” 이상한 신음을 흘렸다. 이어서 내 다리를 더욱 옥죄어오기까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동안 유정양은 정말로 장난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니 클랜 로드가 이해하셔야지요.” 신재룡이 누군가를 깔아 엎은 채로 흐뭇하게 말했다. 나는 쓰게 웃고서 한쪽으로 턱을 젖혔다. “거기도 적당히 하세요. 환영해주는 마음은 고마운데, 그러다 애 죽겠습니다.” 그러자 신재룡은 멋쩍은 표정을 짓더니 하하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내 같이 깔아 엎고 있던 클랜원도 하나하나 일어서자, 비로소 누군가가 모습을 보였다. 맨 아래 바닥에는 힘없이 짜부라진 김한별이 있었다. 아침에 기껏 몸을 단정하게 정리했는데 삽시간에 산발이 돼버렸다. 아마 지금 내 꼴도 저렇겠지. 잠시 후 글썽글썽한 눈으로 일어나는 김한별을 확인하고 나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클랜원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모두 일어나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런 클랜원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한 후,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째, 이제 조금 진정되셨습니까?” 그러나 아직 진정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클랜원들. 나는 당황하여 얼른 말을 이었다. “아마 궁금한 것들이 무척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검은 구멍으로 들어간 이후 어떻게 됐는지, 또 어떻게 돌아왔는지 등등이요.” 이번에는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인다. “그건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없는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될 수 있으면 자세히 듣고 싶으니까요. 우선은 저와 한별이가 검은 구멍으로 사라진 이후, 며칠이나 지났는지 아시는 분 있습니까?” “3주하고도 조금 더 지났어요.” 내 물음에 정하연이 곧바로 말해주었다. ‘3주라…. 애매한 시간이네.’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두어 번 박수를 쳐 시선을 집중시켰다. “좋습니다. 그럼 저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죠. 아무데라도 좋으니 우선 모두 자리에 앉아주세요.” 이번에는 조금 멍해 보이는 빛으로 서로를 번갈아 쳐다본 클랜원은, 곧 한 명 한 명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유정은 어느새 조용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내 다리를 붙잡은 채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딱히 억지로 끌어 앉힐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사실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으니까.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클랜원이 모두 자리에 착석했다. 나는 옆에 앉은 김한별을 한 번 쳐다봤다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우선….” *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지만 설명은 상당히 길었다. 이야기가 거의 끝맺어 갈 즈음에는 어느새 해가 중천으로 떠올라 있었으니까. 아마 그만큼 서로 쌓인 말이 많다는 방증이리라. 이야기가 길어지는 동안 클랜원은 꽤나 각양각색의 모습을 보였다. 대다수가 당혹스럽다는 반응이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한 게 클랜원은 아직도 게헨나를 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그냥 적이 아니라 불구대천의 원수로 이를 가는 클랜원까지 있을 지경이었다. 그런 클랜원들 앞에서. 특히나 고연주와 여인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데, 나는 도저히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렇잖은가. ‘말을 들어보니 제가 설레발 친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화해하고, 섹스 했어요. 그뿐인 줄 아나요? 무려 임신까지 시켰다고요.’ 라고 곧이곧대로 말하면 과연 어떤 반응이 나올까? 결국에는 상당한 부분을 삭제하거나 각색한 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차원을 이동하고 나서도 내가 매우 오랜 시간 동안 기절해있었다는 점과, 게헨나가 거의 죽음 직전까지 이른 나를 구했다는 점을 어필했다. 그리고 그 차원에서는 도저히 게헨나를 상대할 수 없었으며 서로 모종의 거래를 통해 돌아올 수 있었다는 말로 이야기를 이끌었다. 물론 그 거래라는 말에 여러 의문을 제기한 클랜원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게헨나가 화정의 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말인즉 고작 인간 주제에 자신을 맞상대할 수 있었던 근원에 호기심을 품어, 이에 관한 모종의 연구 및 활용을 허락했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그러면 거래는 물론, 게헨나가 나를 구한 목적이나 지옥에 오래 있었던 이유도 같이 설명할 수 있으니까.(사실 중간중간 김한별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항….’ 이라는 말을 중얼거려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지옥에 의도치 않은 도움을 주게 되었고, 그에 관한 보답으로 돌아오는 건 물론, 소정의 보답까지 받았다고 이야기를 끝마쳤다. 이후 김한별을 시켜 보따리를 풀어주기까지 하니 클랜원은 어느 정도 수긍한 빛을 보였다. 그 다음으로는, 내가 이야기를 들을 차례였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달라고 하자 애들이 가장 먼저 달려들었다. 아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또 자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하소연을 하고 싶은 듯했다. 그러나 냉정히 말해서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게 아니었다. 정확히 말해보면 내가 없는 동안 홀 플레인, 즉 아틀란타를 둘러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를 듣고 싶었다. 환영해주는 건 고마우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다. 언제까지고 이런 기분에 젖어 살 수는 없으니까. 다행히 고연주와 정하연이 내 기대에 부응해주었다. 정리해보면 현재 아틀란타를 둘러싼 각 원정대의 상황은 꽤나 애매한 듯했다. 예상대로 원정대는 도시를 발견하고 나서 곧바로 들어가지 않았다. 도시 내에서 어느 정도 거주할 수 있도록 기본적으로 치우는 작업을 실시했다고 하는데, 그 청소가 여태껏 계속해서 이어지는 중이라고 한다. 3주가 넘는 시간 동안.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절대로 말이 안 되는 경우였다. 힘든 공략도 끝났겠다. 어느 사용자든 최대한 빠르게 주변 상황을 정리하고 활동하고 싶다는 보상 심리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기본적인 청소 작업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고 있다? 결국에는 어딘가 문제가 생겼다는 소리였다. 그 문제가 무얼까.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예전 북 대륙은 동부와 남부가 2강을, 북부는 1중을, 서부는 1약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강철 산맥 공략이 끝난 후 힘의 판도가 변했다. 아틀란타를 목전에 두고서 게헨나의 소환 의식으로 인해 동부가 엄청난 타격을 받은 것이다. 동부 총 사령관이던 조성호는 물론, 주요 클랜을 비롯해 거의 2000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나왔다고 한다.(이 부분에서 나는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1회 차 게헨나가 소환될 때, 제물로 사망한 사용자가 약 1800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동부가 10강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2강으로 불릴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두터운 사용자층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총 사령관을 비롯해 주력의 절반을 잃은 결과, 하루 아침에 1중 이하로 추락해버렸다. 마지막에 욕심을 부리다가 거하게 뒤통수를 맞은 꼴이다. 그뿐일까. 이번 공략의 첫 시작부터 해온 짓이 있어 이미 서부, 남부, 북부에 한참이나 밉보인 상황. 결국, 동부가 현재 처한 상황을 헤쳐나가려면 딱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 방법이란, 이번에 새로 발견한 아틀란타에서 어떻게든 자리 하나를 차지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모종의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해보면 아틀란타의 구조와 관련 있는 문제가. “…대충 그렇게 된 거군요.” 거기까지 듣고 나서 나는 길고 긴 한숨을 흘렸다. 조금 더 듣고 싶은 이야기는 있었으나 여기까지만 해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서서히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 보니 사흘 후에 3차 이스탄텔 로우 로드의 주관으로 회담이 개최해요. 참석 요청이 들어와서, 우선 그러겠다고 말은 해놨어요.” 그러한 찰나 고연주가 잊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3차? 회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뜻으로 반문하자 고연주가 씁쓸하게 웃었다. “네. 1차, 2차와 비교하면 훨씬 대대적으로 개최되는 회담이에요. 아마 이번 회담으로 현재 아틀란타 내 어지러운 상황을 완벽하게 정리할 듯싶어요. 그래서 사용자들도 많은 기대를 하고 있고요.” “완벽한 정리라…. 한소영의 주관으로…. 이스탄텔 로우 로드의 위치가 굉장히 높아졌나 봅니다?” “최고죠. 결과적으로 이번 공략에서 피해를 가장 적게 받았지만, 가장 성공적으로 공략했다는 명분도 챙겼으니까요. 거기다 동부까지 그 지경이 됐으니, 완전한 상승 가도를 달릴 수밖에 없지요.” “…흠.” 고연주의 어조에는 어딘가 모르게 자조 어린 기색이 깔려 있었다. 듣고 있는 클랜원도 조금은 가라앉은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말을 듣는 내내 왠지 모르게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딱히 콕 집어 말하지 않아도 현재 머셔너리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물론 내부적인 요인이 가장 크겠으나 외부적인 요인이 없으리라고는 장담할 수도 없다. 말인즉, 악의적인 목적을 가진 누군가가 일종의 ‘흔들기.’ 를 조장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다. 그제야 허준영의 ‘동분서주 뛰어다녔다.’ 는 말과 ‘꼴도 보기 싫은 애새끼들이 있어서.’ 라는 말이 조금이나마 와 닿았다. 외부적으로 돌아가는 상황도 좋지 않은데, 내부는 단합은커녕 분열만 일어나니 정말로 갑갑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클랜원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공략 때 가장 지대한 공헌을 세워놓고도 오히려 침체기를 보내야 했으니까. 고작 3주라고는 해도, 공략 직후이니만큼 우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 예측이 맞는다면, 누가 그랬을지는 대충 짐작은 가는데…. 아무튼 적당한 시기에 돌아왔군. 다행이야.’ 그렇게 생각하고서 있는 힘껏 기지개를 폈다. 양손을 깍지 껴 하늘 높이 쭉 들어올리자 시원한 감각이 전신을 엄습한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조금 더 들어야 할 이야기는 있을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얘기 잘 들었어요.” “수현. 그럼….” “예. 그럼 우선 식사부터 하죠.” “…네?” 밥 먹자는 말에 정하연이 떠름한 음성으로 반문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살살 배를 쓰다듬었다. “어느새 아침이 훨씬 지났는데요. 다들 밥 생각이 없나요?” “그렇기는 한데…. 앞으로 어떻게….” “앞으로? 아. 회담이요? 사흘 후라면서요?” “네, 네.” “그럼 무슨 문제라도? 저는 사흘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 나는 일부러 ‘저는’ 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 그러자 망연해 보이던 정하연의 낯에 묘한 빛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비단 정하연뿐만이 아닌, 모든 클랜원이 무언가 야릇한 눈길로 나를 응시한다. 조금 이상한 눈초리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분명한 건, 별로 기분 나쁜 시선은 아니라는 것. “그동안 다들 수고했습니다.” 아무튼 지금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 사실 클랜원이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는 알 것 같았으나, 나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굳이 말로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차후 행동으로 클랜원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줄 것이다. 그래. 내가 돌아온 이상 머셔너리의 침체기는 끝났다. 이 아틀란타에서 우리는 모니카에서 보였던 비상을 다시 한 번…. ‘아니.’ 그 이상의 날갯짓을 펼쳐 보일 것이다. ============================ 작품 후기 ============================ 왕의 귀환은 아직입니다. 후후. 0688 / 0933 ---------------------------------------------- 왕의 귀환. 각 대륙이나 도시에는 나름의 명칭이라는 게 있다. 가령 내가 활동해온 대륙의 경우 모두가 ‘북 대륙’ 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대륙 내 존재하는 여러 도시도 엄연히 각자의 이름이 있다. 예를 들어 바바라, 프린시카, 헤일로, 모니카, 파멜라 등등. 그러나 아틀란타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대륙이나 도시나 모두 ‘아틀란타’ 라는 이름으로 통칭해서 부른다. 사실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는 작은 차이이기는 하나, 그래도 도시 내 도서관에 보존된 사초(史草 : 공식적인 역사 편찬의 자료가 되는 기록)를 살펴보면 그 차이의 원인을 밝힐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나는 지금 그에 해당하는 사초를 갖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나는 오른 귀에 걸려 있는 귀걸이를 살짝 건드렸다. 『빅토리아의 영광(Victoria's Glory)』 1. 설명 : 아득한 고대 시절. 빅토리아 왕국을 상징하는 왕의 검입니다. 이래로 수많은 왕국들이 탄생하고 멸망했지만, 빅토리아는 홀 플레인 내 가장 오래 장수한 왕국들 중 하나입니다. 다른 왕국 사람들이 ‘전투 민족’ 이라 부를 만큼 빅토리아는 호전적인 국가였습니다. 비록 빅토리아 최후의 여왕 ‘증명의 여제’ 의 200년에 걸친 무리한 정복 전쟁으로 끝끝내 쇠락의 길을 걸었지만, 분명한 것은 빅토리아는 한때 홀 플레인의 통일을 노려볼 정도로 융성한 국가였다는 것입니다. ‘빅토리아의 영광’은 왕가에 전통적으로 내려온 유서 깊은 검으로…. 여기서 중요한 건 빅토리아라는 왕국이 한때 대륙 통일을 외치고 전쟁을 일으켰을 정도로 강력한 국가였다는 것. 물론 그때 그 시절에 어디까지 선을 그어놓고 통일을 정의했는지는 모른다. 여하튼 거두절미하고 말해보면, 현재 우리가 공략한 지역이 바로 고대 빅토리아 왕국의 본산이 있었던 대륙이라는 것이다. 즉 수도의 개념이라고 할까.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틀란타는 북 대륙과 다르다. 어떻게 다르냐면 북 대륙처럼 도시가 사방으로 배치된 구조가 아닌, 중앙 수도를 중심으로 모든 도시가 밀집돼 이어지는 구조를 갖고 있다. 즉 대 도시 바바라에 네 개의 일반 도시가 동서남북으로 합쳐진 형태랄까. 예전 아틀란타에 들어와 처음 만났던 사내의 ‘머셔너리는 이 도시에 없습니다.’ 나 ‘서쪽 터널을 통과하시면 나옵니다.’ 라는 말은 바로 그런 뜻이었다. 1회 차에서는 하나의 내(內) 도시와 네 개의 외(外) 도시라고 불렀던가. 물론 그렇다고 이 대륙에 도시나 마을이 아예 없다는 소리까지는 아니다. 분명히 흔적 정도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장소는 유적으로서의 가치만 남아 있지, 아틀란타처럼 거주 기능은 상실했다고 봐야 옳다.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즉 이러한 배경에서 생각해보면, 현재 아틀란타의 상황이 왜 이렇게 됐는지 어느 정도 추측은 가능하다. 하기야 갑자기 5개의 이어진 도시가 나타났으니 사용자들도 오만 생각이 다 들었으리라. 당연한 말이지만, 탐험이 끝나고 성과 분배는 가장 고생한 이에게 제일 먼저 보상이 돌아간다. 그런데 하물며 원정이라고 다를 게 있으랴. 그래서 더욱 난감했을 것이다. 차라리 도시 하나만 있었으면 깔끔하기라도 하지. 가장 큰 중앙의 내 도시는 중앙 관리 기구가 관리한다손 쳐도, 남은 4개의 도시를 놓고 각 원정대가 어마어마한 신경전을 벌였으리라는 것은 그야말로 명약관화(明若觀火)였다. ‘바로 여기서 우리 머셔너리가 견제를 받았다는 소린데….’ 잘 생각해보면 누가 그랬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아마 동부의 소행일 것이다. 결국에는 간단한 이야기였다. 단순 공적만 놓고 보면, 그 누가 봐도 머셔너리 클랜이 도시 하나를 차지하는 것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공적을 제외한 부분에서는 파고들 여지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식사가 끝나고 따로 들어보니 동부는 정말 목숨 걸고 머셔너리를 흔들었다고 한다. 특히 언론 플레이에 엄청난 공격을 당했다고 하던가. 예를 들어. ‘머셔너리는 남부 산하 클랜 자격으로 참가했다. 거기다 북 대륙 소속도 아닌데 대표 클랜이 되는 건 옳지 않다.’ ‘고작 50명을 겨우 넘는 클랜이 도시 하나를 관리할 수 있는지는 의문.’ ‘김수현은 사라진 이후 머셔너리는 정신을 차리지 못해.’ ‘머셔너리 내 김수현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암투가 발생했다.’ 등등. 정말이지 다양한 헛소리로 머셔너리를 흔들었다. 그리하여 동부가 노리는 건 단 하나. 바로 현 사용자들의 최대 관심사를 이용하려는 것이다. 고연주에게 듣기로는 동부는 지금껏 개최된 2차 회담을 스리슬쩍 지연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앞서 말한 지속적인 언론 플레이로 회담 지연의 원인을 머셔너리로 전가시켰다. 얼른 도시 상황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가고 싶은 사용자들의 마음을 교묘하게 파고든 것이다. 말인즉 민심을 얻는 방법이라고 해야 할까. 처음 말을 듣고 나서, 나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실 저렇게 한다고 해서 머셔너리의 공적을 덮을 수 있으리라 장담할 수는 없다. 허나 그 점이 더 대단하다. 어설프지도 않고 무모하지도 않다. 오히려 매우 적당하다. 당최 누구 머리에서 나온 생각인지는 몰라도, 현재 동부가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고서 나온 전략이다. 지금 자기네들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의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감탄할 뿐이지 양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마는. 아무튼. 이로써 3차 회담에 임하기 전 알아야 할 상황은 모두 정리했지만…. ‘…그런데 애초 왜 이렇게 된 걸까?’ 마음 한 켠에는 아직 가시지 않은 의문이 하나 남아 있다. 나는 침대에 누운 몸을 빙글 돌려 낡은 천장을 응시했다. 말 그대로였다. 애초 왜 상황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방관한 걸까? 이 의문은 당연히 한소영과 직결될 수밖에 없다. 현재 회담 자체가 이스탄텔 로우의 주관으로 성사되는 만큼, 지금의 한소영은 그야말로 언터처블(Untouchable)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남부가 머셔너리를 밀어주는 동시 동부를 억제했다면 이미 진작에 끝났을 일이다. 굳이 그게 아니라도 한소영의 성미가 어떤지는 잘 알고 있다.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일을 끌 성격이 아니다. 그럼에도 상황이 이 지경이 됐다는 건 결국 방관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왜?’ 가능성은 여러 가지다. 머셔너리를 계속 산하 클랜으로 두려고 했거나, 내가 없는 동안 합병하려는 밑밥을 깔려는 일환이거나, 견제하려는 의도이거나, 아예 관심이 없거나. 안타깝게도 어느 쪽으로 생각하든 좋은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물론 남부가 우리를 밀어줄 의무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여태껏 맺어온 관계를 생각해보면 서운한 감이 없잖아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니면 내가 예상치 못한 생각을 하고 계실지도…. 응?’ 그때였다. 극히 적은 가능성이라고 생각하려는 순간,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찰나의 순간이기는 했으나 천장에 검은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 생각을 정지한 후, 나는 지그시 천장을 응시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오지 그래요.” “이런. 들켰다.” 역시나. 이윽고 천장의 그늘진 부분에서 고연주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혀를 살짝 내미는 고연주를 보며 나는 싱겁게 웃었다. “문을 잠가놨더니 그림자로 들어옵니까?” 말 그대로 나는 방으로 들어간 후 문을 단단히 봉한 상태였다. 회담을 대비해 혼자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려는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애들 탓이 컸다. 이제 그만하라고 해도 어찌나 끈덕지게 달라붙는지, 정말이지 질릴 정도였다. 결국 한 번 화를 내고 방으로 들어온 후에야 간신히 사색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럼 저도 나갈까요?” 고연주가 나른하게 말하며 살짝 눈웃음을 쳤다. 나 또한 마주 웃으며 두어 번 침대를 두드렸다. “애처럼 굴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이리와도 좋아요.” “흥. 두고 봐요. 과연 누가 애처럼 구는지.” 그렇게 말한 고연주는 흡사 인어처럼 천장에서 흘러나와 침대로 낙하했다. 그리고 그대로 나를 안으려고 했지만 나는 되레 제압하며 품으로 끌어당겼다. 고연주가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살그머니 시선을 내리자 긴 속눈썹이 당황한 듯 깜빡깜빡 움직이고 있었다. 문득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가까이서 본다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고연주를 하나하나 천천히 뜯어보며,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렇게 오랜만에 보니까….” 그리고 간만에 맡는, 고연주 특유의 야릇한 살 내음을 마음껏 들이키며 속삭이듯이 말을 이었다. “고연주도 참 예쁘네요.” “…네?” 그 순간 고연주가 입을 떡 하니 벌렸다. 무언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듯, 나를 바라보는 잿빛 눈동자에 불신의 빛이 강하게 서려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머리를 숙여 고연주와 이마를 맞춘 후, “정말 고생했어요.” 라고 나직이 속삭였다. 이어서 은근한 입맞춤까지. 그럴수록 고연주는 여전히 무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잘못한 거라도 있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이이가 갑자기 왜 이러실까…. 나, 남사스럽게….” 고연주는 드물게도 말을 더듬더니 얼른 고개를 돌리며 내게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꼭 껴안고 놓아주지 않자 “으응! 아응!” 앓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거기다 꿈틀꿈틀 몸부림을 치기까지. 고연주가 이러는 모습을 보니까 정말로 신선하다. “자, 잠깐만요. 수현. 3차 회담 말인데요.” 결국 고연주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리는 방법을 선택했다. 조금 더 괴롭히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그냥 넘어가주기로 했다. “예. 3차 회담이 왜요?” “그게…. 아무래도 회담 전 이스탄텔 로우 로드를 한 번 찾아 뵙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약간은 기분이 가라앉는걸 느꼈다. 틀린 말이라서가 아니었다. 고연주 또한 현재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또한 가장 좋은 방법이기는 했다. 그러나 나는 회담 전까지 한소영을 찾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니. 내가 돌아왔다는 사실조차 알리지 않을 생각이다. 왜냐면 동부야 그렇다손 쳐도, 내가 없는 경우 한소영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으니까. 만일 내가 생각한 안타까운 가능성이 발생하는 경우. 그러면 한소영에게 조금이나마 실망을 금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한 번쯤은 보고 싶었다. 한소영의 진의를. “글쎄요….” 나는 일부러 말을 흐리며 얼버무렸다. 이번에는 내가 화제를 돌릴 차례였다. 마침 한소영 얘기가 나오니 뇌리를 스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말입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생겼는데요.” “네? 아아~. 수현을 사칭한 사람에 대해서요?” 고연주가 마침 잘됐다는 듯 반색하며 말했으나 나는 차분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물론 그것도 궁금하기는 했지만 먼저 물어야 할 일이 있었다. 상황만 이렇지 않았다면 도시에 도착하고 나서 가장 먼저 물었을지도 모른다. “형 말입니다. 제 형이요.” 그 순간이었다. 형의 근황을 물어보려는 찰나, 고연주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내 삽시간에 얼굴 곳곳 그늘지는 어두운 그림자를 보며 나는 왠지 모르게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표정이 마치 ‘드디어 올게 왔구나.’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기에. “왜…. 그럽니까?” “실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기분에 물어보자 한참을 주저하던 고연주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고연주에게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서. 쾅! 나는 그대로 문을 박차 달려나갔다. “수, 수현!” 고연주가 나를 붙잡는 음성이 들렸으나 이 순간만큼은 뇌리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회담 전까지 돌아온 사실을 숨기겠다는 사실 또한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지금은 그저 한시라도 빨리 형에게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완전히…. 미치셨어요. 거의 광인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예요.’ 설마 설마 했는데,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니. 나는 어쩌면 형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왜냐면 형은 강하니까. ‘수현이 사라진 이후 정말로 많이 힘들어하셨거든요.’ 그러나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결국 버티지 못해 무너지셨죠. 예전의 아주버님 모습은 더는 찾아볼 수 없을 거예요.’ 형도 결국에는 한 명의 인간이었다. 1회 차서 형을 잃고 내가 어떻게 됐는지를 생각해보면, 이렇게 여유를 부려서는 안됐다. ‘지금이요? 무얼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온종일 도서관에서 두문불출 하고 계시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외부와의 관계를 아예 단절하신 거죠.’ 그래. 나는 돌아오자마자 형을 찾아갔어야 했다. “젠장!” 거친 욕설을 뱉으며 여관을 빠져 나와 빠르게 거리를 달렸다. 형이 있는 곳으로. * 고연주의 말에 따르면 형은 지금도 ‘도서관’ 이라는 곳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한때 아틀란타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만큼 그 장소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고, 전력으로 달린 결과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목적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내 기억과는 조금 차이가 있는, 너무 헐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을씨년스러운 건물 안에서는 파르스름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왔다는 감회를 느낄 틈도 없이 나는 곧바로 계단을 올라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이 시간에 빛이 새어나온다는 것은 안에 사용자가 있다는 방증이었으니까. “…….” 안은 어두웠다. 밖에서 보았던 빛은 일렬로 나열된 책장 가장 안쪽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빛을 따라 빠른 걸음으로 안쪽으로 들어간 순간, 나는 절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빛의 근원은 퀴퀴한 먼지가 쌓인 낡은 탁자에 놓인 큼직한 수정구였다. 수정구가 밝혀주는 주변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탁자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지거나 겹겹이 쌓인 기록 더미는 그나마 양반. 쌓이다 못해 무너진 게 분명한 기록은 흡사 떨어진 낙엽처럼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어찌나 어지러운지 보는 내가 현기증이 일 정도였다. 그런 탁자의 중앙에는 두꺼운 로브를 껴입은 검은 인영이 앉아 있었다. “있을 거다…. 아니. 있어야 해…. 붉은 장막…. 검은 구멍…. 분명히…. 흐흐흐흐.” 시선은 탁자에 놓은 기록에 고정한 채, 두 눈을 시퍼렇게 불태우며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다. 누군지는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수현아…. 수현아…. 조금만 기다려…. 형이 곧….” 그 인영은 바로 형이었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예약해서 올립니다. 돌아온 김수현. 과연 한소영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지. 그리고 김유현은 어떤 상태가 됐는지. 기대해주세요. 감사합니다. 독자 분들의 응원 덕분에 점점 페이스를 찾아가는 느낌입니다. 새로운 10월이 다가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10월은 제게 터닝 포인트가 됐으면 합니다. 연재 시간도 정상으로 돌리고, 여유가 생기면 간간이 연참도 해보고 싶네요. 앞으로도 많은 응원 부탁 드릴게요. :D 0689 / 0933 ---------------------------------------------- 왕의 귀환. 형은 일말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빛에 번들거리는 눈동자만이 기록을 따라 끊임없이 움직였다. 그러나 원하는 내용을 찾지 못했는지 옆으로 치우고 새로운 기록을 찾아 읽는다. 그 행동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기록 하나를 조용히 주웠다. 그리고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기록에는 차원 이동에 관한 내용이 짤막하게나마 언급돼 있었다. 애초 차원 이동에 관한 자료는 상당히 적다. 그런데 주변이 이 지경이라는 건 정말 세세한 부분까지 찾았다는 소리였다. 이게 무슨 되도 않은 짓거리냐고 말하려다가 간신히 말을 삼켰다. 야박하게 말하기에는 형의 태도가 너무 진지했고 한편으로는 비참해 보였다. …추운 걸까. 두꺼운 로브를 둘둘 껴입고서도 듬성듬성 수염 난 턱이 덜덜 떨고 있다. 오직 빛에 의지한 채 두 눈을 빛내며 중얼거리는 모습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일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응시하다가 느릿하게 걸음을 옮긴 순간. “거기 두고 꺼져. 나중에 먹을 테니까.” 잔뜩 쉰 음성이 고요한 도서관을 울렸다. 어색했다. 정말 형이 맞는 건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이상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아마 나를 식사를 가져온 클랜원으로 착각하는 모양이다. 형은 여전히 기록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앉아 있었다. 고연주의 말이 맞았다. 언제나 깔끔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러나 오직 나한테는 항상 따뜻하게 웃어주는. 그런 형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는 그저 한없이 낯선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폐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형.” 목이 메는걸 참으며 간신히 형을 불렀다. 그러나 이제는 내 목소리도 잊은 듯했다. 형의 반응이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기록을 읽고 치우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흡사 기계라도 된 듯이. 탁자에서 흘러나오는 파르스름한 빛만이 담담하게 일렁일 뿐 정적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탁. 돌연히 어느 소리가 도서관의 정적을 깨트렸다. 기록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형은 갑자기 몸을 딱딱히 굳혔다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나를 보자마자 소리 없이 타오르던 시퍼런 안광이 한순간 꺼져버렸다. 한 번 감았다 뜬 눈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시꺼먼 눈동자에 믿을 수 없다는 동요가 물결처럼 번져나간다. “아…?” 쿵! 갈라진 신음이 새어 나오는 동시 형이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허나 굳은 몸을 가누지 못하겠는지 형은 의자와 같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놀란 눈초리는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어…. 우아….” 형은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눈을 세게 비볐다. 아무래도 내가 눈에 보인다는,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듯했다. 너무 놀라 말조차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수, 수현…?” 정말 간신히, 흡사 피리를 부는 듯한 음성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형이 내 이름을 말했을 때. 나는 그제야 안도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형을 향해 다가간다. 형도 허우적거림을 멈추더니 무언가 애탐이 느껴지는 손을 천천히 뻗어왔다. 그런 형의 모습에서 묘한 기시감이 전해졌다. 갑자기 1회 차의 기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도 그랬다. 형이 죽고 나서 정신이 돌아버렸고 한동안 살의에 젖어 살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항상 바라고 바랐다. 어느 날, 언젠가, 혹시라도 형이 눈앞에 나타나 웃으며 손을 내밀어주지 않을까 하고. 비록 그때는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고 다른 누군가가 나타나주었지만…. ‘지금은 현실이다.’ 가까이 다가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시선을 직선으로 맞춘 순간 형의 손이 금세 다가와 얼굴에 닿았다. 마치 정말 내가 맞는지 확인 절차라도 거치듯이 조심스레 어루만진다. 예전처럼 부드럽지만은 않은 거칠고 투박한 손길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형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꿈…?” “아니. 현실.” 나는 곧바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목에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내가 1회 차서도 지옥에 다녀왔다는 얘기는 해주지 않았었나? 기억이 잘 안 나네. 하하….” “아…?” “아무튼 돌아왔어. 돌아온 거야. 정말로.” “아, 아…!” 그 순간이었다. 바싹 말라붙은 입이 부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형의 얼굴이 서서히 이지러졌다. 그리고 갑자기 흑 울음을 터뜨리며 머리를 푹 숙였다. 어깨가 들썩들썩 움직이며 끅끅 거리는 무언가 삼키는 소리가 이어졌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한순간 오만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반쯤 열었던 입을 가만히 닫았다. 꺼내 말하지 않아도, 또 굳이 듣지 않아도 형의 생각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흐느끼는 소리만 이어지며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소리는 점차 잦아들었으나 형은 한동안 진정되지 않았다. 나는 말없이 형을 토닥이며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형은 조금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부축하며 걷는 것을 도와주자 깊숙이 몸을 기대왔다. 그 상태서 나는 형을 이끌고 갑갑한 도서관을 벗어났다. 퀴퀴한 공간을 벗어나 신선한 공기를 마시자 조금은 정신이 드는 듯했다. “정말로 다행이지? 무사히 돌아와서.” 하나하나 계단을 내려가는 와중 나는 조용히 말했다. “으응….” 형도 약간 작으면서 늘어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정말로, 정말로 다행이야….” 그리고 한 번 더 입을 열었을 때. 나는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뿌듯하다. 1회 차서 이루지 못해 가슴에 묻은 무언가를 오늘 풀어낸 기분이다. 지금은 이 기분을 조금 더 음미하고 싶었다. 마침 정면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 “후. 좋아라.” 양손으로 더운 물을 한 가득 담은 후 얼굴을 씻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몸을 담근 커다란 통에 등을 기대며 기분 좋은 신음을 흘렸다. 강철 산맥을 공략하러 출발한 이후 이 정도로 안락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던가? 아니. 없다. 공략 때는 항시 긴장을 늦추지 못했고 아틀란타에 들어와서도 똑같았다. 그나마 게헨나의 품에 안겼을 때 안온한 기분을 느끼기는 했지만, 가슴 한 켠에는 항상 돌아가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이렇게나 홀가분한 기분은 진정 오랜만이다. 살짝 숨을 들이키자 욕실에서만 맡을 수 있는 더운 공기가 물씬 흘러들었다. 사실 욕실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민망한 수준이기는 했다. 그래 봤자 방 하나에 창문 하나 그리고 커다란 통 하나가 전부였으니까. 그러나 뜨거운 물에 뼈가 녹고 몸이 풀리는 기분은 나를 흡족하게 만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좋아. 좋구나.” 무럭무럭 올라오는 수증기를 따라 시선을 올리자 천장에 하얗게 서린 김이 보였다. “수현아…. 잠깐만….” 몸도 풀 겸 더욱 머리를 젖히려고 찰나, 은은한 여인의 음성이 뿌연 수증기를 넘어 흘러들었다. 정면 방향을 바라보자 성숙한 향기를 흘리는 청초한 여인이 보였다. 허리까지 뻗을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은 칭칭 감아 깔끔하게 틀어 올렸다. 몸에 두른 하얀 천을 살금살금 따라가면 흡사 사슴과도 같은 깨끗한 목덜미가 눈에 들어온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늑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상냥한 눈동자를 가진 여인은 눈을 빛내며 무언가에 집중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이따금 앞머리서 사각사각 소리가 날 즈음이면 조심스레 깎은 듯한 머리카락이 조금씩 조금씩 떨어졌다. 문득 장난기가 일어 이리저리 흔들어보자 부드러이 어루만지던 손이 머리를 살며시 붙잡는다. “아이, 이제 다 끝났으니까…. 가만히 있어…. 응…?” 흡사 아이를 달래는 듯한 음성이 들려와 나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임한나의 상냥한 목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포근한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신비한 마력이 있었다. “간지러워. 언제 끝나?” “거의 다 끝났어. 누가 네 머리카락을 듬성듬성 잘라놔서….” 그 범인이 바로 나였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허나 이번에는 칭칭 감은 하얀 천이 드러내는 굴곡진 몸매에 시선이 쏠렸다. 수증기에 젖어 보일 듯 말 듯한 발그레한 속살도 그렇지만, 아주 살짝 동여맸음에도 툭 터질 것 같은 젖무덤은 정말로 대단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천을 뚫고 나와 출렁거릴 것만 같은 엄청난 볼륨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부드러웠지.’ 임한나와의 관계를 떠올리고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몇 번을 생각해도 임한나의 가슴은 최고다. 고연주의 가슴이 탱탱하고 탄력적이라면 임한나의 가슴은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러니까 말랑말랑함의 결정체라고나 할까. 내가 주무르는 데로 모양이 변하는 순한 성질(?)은 물론, 골 사이 맴도는 달콤한 우유 냄새와 흡입 시 살살 녹아 내리는 감촉은 정말이지…. “와. 끝났다.” 그 순간 끝났다는 말과 동시 임한나가 등을 찰싹 쳤다. 이어서 작은 통으로 욕탕의 물을 담아 부어주기까지. 정수리부터 시작해 흘러내리는 뜨거운 액체를 느끼며 나는 첨벙첨벙 몸을 일으켰다. “어, 어마!” 갑자기 임한나가 앙증맞은 비명을 질렀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왜 그런가 하고 봤더니 어느새 우뚝 솟은 페니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임한나의 몸을 보며 온갖 음란한 상상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잠에서 깨어난 모양이다. 에이. 이왕 이렇게 된 거. “빨리 나가야 할 것 같은데. 천은 어디 있어?” “저기….” 천연스레 물어보자 임한나는 여전히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몸은 안 닦아 줄 거야?” “어, 어린애니?” 나는 검지로 임한나의 젖가슴을 가리켰다. “아니. 그걸로 닦아달라는 말이었는데.” “……?” 임한나는 살그머니 손을 치우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몰라. 수현이 돌아오더니 완전 엉큼해졌어.” 임한나가 눈을 곱게 흘기며 입을 삐쭉 내밀었다. 나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린 후 가지런히 쌓인 천 하나를 집고서 욕실을 나섰다. 임한나는 “흥.” 소리를 내며 나를 휙 지나치더니 몸에 천을 두른 채 어딘가로 달렸다. 이윽고 천천히 몸을 닦고 나서 속옷과 셔츠 그리고 바지까지 입었을 즈음. 내 장비 어디 갔나 하며 시선을 돌리고 있자 아까 달려간 임한나가 되돌아오는걸 볼 수 있었다. 어느새 모든 복장을 갖춰 입은 건 물론, 내 도복과 검까지 들고 오고 있다. 그 신속한 속도에 놀라는 동시 새삼 여인의 변신은 무죄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 상황에 쓰기에는 조금 이상한 것 같지만. “그런데 정말 다행이다. 그렇지?” 임한나의 도움으로 하나하나 장비를 걸치고 있자 돌연 뜻 모를 질문이 들려왔다. “응?” “아주버님 말이야. 정신이 돌아오셨잖아?” “아…. 그렇지.” “하기야 수현이 때문에 그렇게 되셨으니까. 돌아왔으니까 당연한 일인가?” 하늘의 영광을 매만지던 임한나는 이번에는 태양의 영광을 허리에 둘러주었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아차 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해밀에서 찾아왔어. 순순히 아주버님을 돌려준다면 유혈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전해달래.” “재미있네. 항복할 테니까 얼른 데려가라고 그래.” 나와 임한나는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저번에 도서관에서 데려온 이후, 근 이틀간 형이 보인 행동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낯뜨겁다. 오죽하면 안솔과 이유정이 눈만 뜨면 나를 찾는걸 그만두고 스스로 반성했을 정도였다. 처음 내가 그만 좀 달라붙으라고 소리쳤을 때는 사실 서운했는데, 형이 하는 행동을 보니 이해가 간다며 미안해했다. “후후. 안 그래도 가셨어. 오늘 회담에는 참석하셔야 하니까.” “그래야지. 그런데 거기 좀 더 조여볼래? 꽉.” “응. 그…? 너, 너어. 이상하게 말하지 마.” “하하하.” 마지막으로 무검을 허리에 걸친 후 우리는 곧바로 문을 나섰다. 밖은 한산하지 않았다. 오늘 한소영이 주관하는 3차 회담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여관 인근은 사용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회담 장소는 이 주변이 아니다. “지, 진짜네. 진짜잖아.” “가짜라는 소문이 있던데 혹시….” “아냐 아냐. 확실해. 나 저번 2 지역 공략에서 옆에서 본 적 있어.” “이야. 대박이다. 오늘 회담 재미있겠네.” 나를 보며 웅성거리는 이들이 적지 않았으나 나는 조금도 아랑곳 않으며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어제 부로 소문이 쫙 퍼졌다는 말을 들었으니까. 길게 걷지 않아 클랜원이 도열해있는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미소 짓고 있는 것처럼 클랜원도 웃고 있었다. 더 이상 예전의 침체된 분위기는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하늘을 찌를 듯한 당당한 자신감을 뿜어내 주변을 아우르고 있었다. “오~. 형. 엄청 깔끔해지셨는데요?” 안현이 살갑게 웃으며 말을 걸어온다. 나는 대충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시선을 올렸다. 목욕을 하고 나와서 그런 걸까. 청명한 하늘을 보니 괜히 개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럴 때는 역시 연초지. “회담 장소가 어디랬지?” “안쪽 도시 광장이요. 아. 여기요.” 그때였다. 품에서 연초 한 대를 꺼낸 순간 안현이 재빠르게 손을 올렸다. 탁 소리에 이어 손에 쥔 점화석에 불이 타오른다.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싱거운 웃음을 흘리며 불을 붙였다. “네가 웬일이냐. 아니. 다들 오늘 왜 이래? 대접이 꽤나 괜찮잖아.” “에이. 좋으니까 그러죠.” “좋기는. …아무튼 좋아.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지만, 이런 칙사 대접도 썩 나쁘지는 않네.” “헤헤. 그렇죠? 저, 그런데….” 안현은 헤프게 웃다가 말을 흐리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 혹시 회담 장소가 어디 있는지는 아세요?” “안쪽 도시 광장이라며. 당연히….” 알고 있다고 말하려다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안현의 눈동자가 무언가 기이한 열망을 띠고 있기에. “모르지. 내가 도시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렇죠? 그럼…!” “선도해. 네가.” “예, 예!” 뛸 듯이 기뻐한 안현이 나는 듯 달려가는걸 보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왜 저러는지 내심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내 끝까지 태운 연초를 바닥으로 튕긴 후, 클랜원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따로 정렬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모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안현은 성큼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주변을 둘러보며 이를 악물었다. 마치 이날만을 기다려온 듯 혹은 그동안 참아왔던걸 터뜨리고 싶은 듯, 부르르 몸을 떨고 있다. “혀, 형.” “출발해.” 가볍게 머리를 끄덕인 순간.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안현의 우렁찬 외침이 인근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나를 구경하던 사용자들이 자동적으로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터주었다. 그 사이로 우리는 전진했다. 회담 장소를 향해서. 그래. 이제는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놓을 때였다. ============================ 작품 후기 ============================ 시. 제목 : 어헝헝 / 화자의 속내를 암시함. 어헝헝 어헝 잇힝 / 오늘 기필코 자정 연재를 하겠다는 결심을 드러냄. 잇힝 앗흥 어헝헛? / 그러나 오후 4시쯤 갑자기 연락이 와 당황하는 화자의 모습. 잇힝 어헝 어헝잇힝 어헷 잇흥 / 동생의 하소연에 결국 마지못해 나가는 화자의 심정이 담겨 있음. 어훙훙 잇힝 어헝헝 어헝엇흥 / 중요! 시험문제 출제 : 아까운 시간을 소비하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화자의 모습을 축약적으로 담아냄. 훙훙 잇힝 헝헉 / 집으로 바삐 달려오는 화자의 급한 태도. 엉엉 웃웃 힝힝 / 늦는다는 코멘트를 달 때의 근심. 으흣 힝힝 / 그러나 결국 연재에 성공한 후 기뻐하는 화자의 모습을 표현. 0690 / 0933 ---------------------------------------------- 3차 회담. 아틀란타의 내(內) 도시를 잇는 네 개의 외(外) 도시를 분배하는 안건을 다루는 3차 회담. 도시라는 거대한 보상이 걸려있는 만큼 여러 클랜의 이해 관계가 얽혀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다. 예상외로 빨리 끝날 수도 있고 생각보다 늦게 끝날 수도 있다. 어차피 앞선 2차 회담을 통해 문제는 하나로 좁혀졌으니까. 딱 하나 분명한 건 오늘 이 3차 회담으로 아틀란타를 둘러싼 상황이 일단락될 거라는 것. 머셔너리가 포기하느냐, 동부가 포기하느냐. 결국에는 이 문제였다. “형. 도착했어요.” 회담 장소까지 도착하는데 약 30분 정도가 걸렸다. 인근에 모인 사용자는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회담에 직접적으로 참가하는 사용자와 주변에서 구경하는 사용자. 당연한 말이지만 회의 진행에 도움을 주는 이를 제외하면 직접적으로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은 클랜 로드 급으로 제한돼있다. “클랜 로드. 건투를 빕니다.” “나중에 봅시다.” 신재룡의 응원을 받은 후 나는 광장 쪽으로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누가 봤는지 어디선가 “머셔너리 로드가 도착했습니다!”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한층 심해진 웅성거리는 소음 속에서 나는 천천히 계단을 밟았다. 내 도시 광장은 약간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다. 둥그런 무대가 설치된 중앙과 층이 난 계단이 주변을 둘러싸는 형식을 보이는데, 멀리서 보면 흡사 커다란 노천 극장을 연상케 하는 형태였다. 원래는 이곳 또한 낡고 더러워야 정상이지만, 그래도 앞선 회담을 거치면서 청소에 공을 들였는지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은 아니었다. 좋게 말하면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이윽고 계단이 끝나는 부분에서 걸음을 멈추자 비로소 회담의 중심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무대에는 각 원정대를 이끈 총 사령관과 소속 클랜 로드들이 모여 있었다. 조성호가 사망한 동부 원정대에서는 성현민과 선율, 그리고 김덕필이 참가한 상태였다. 다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랄까. 무대에는 약 100명 가량의 인원이 모여 있었으나 장내는 상당히 조용했다. 개중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이도 있었고, 눈을 감은 채 씨근거리는 이도 적지 않았다. 환영과 낭패가 섞인 시선을 받으며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정말로 오셨네요.” 무대의 상석, 한소영의 옆에 서 있는 박다연이 활짝 웃으며 말을 걸었다. 보아하니 오늘 회담의 진행 요원으로 뽑힌 모양이다. 쟤도 참 출세했다고 생각하며 나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소문은 어제 들었어요. 그럼 본 회담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머셔너리 로드의 생환을 진심으로 축하 드려요.” 박다연은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하면서도 발을 움직여 누군가를 툭툭 건드렸다. 한소영의 옆에 앉은 잘생긴 청년이 깜짝 놀라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박다연이 곧바로 험악한 기색을 보이자 떠름해 하면서도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저는 이쪽에 앉도록 하지요.”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지만 나는 괜찮다는 투로 말하며 거절했다. 마침 무대 왼쪽에 앉은 형이 자리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번쯤은 반응을 보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고. “아…. 그러실래요?” 이번에는 박다연이 떨떠름히 웃었다. 어느 사용자는 그냥 그렇구나 하는 표정이었으나 또 어느 사용자는 의외라는 낯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내가 옆자리를 거부한 것에 꽤나 놀란 모양이다. 사실 애초 자리를 비워놨다면 모를까. 소문을 들었음에도 다른 사용자를 앉혀놨다는 것은…. 글쎄. 정해진 자리야 없다손 치더라도 내가 항상 앉던 자리를 생각해보면 썩 기분이 좋은 건 아니다. “수현아. 어서 와. 조금 늦었네?” 조금 초췌한 모습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형은 그제보다는 훨씬 깔끔한 모습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그러는 형은 예상보다 일찍 왔고.” “그렇지? 하하하!” 적당히 대꾸하며 옆에 앉은 순간, 형은 갑자기 누가 들으라는 듯이 크게 웃고는 목을 빳빳이 세우며 상석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한소영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애초 내가 등장했을 때도 눈만 한 번 맞췄을 뿐,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한소영이 주변을 둘러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3차 회담의 개최를 선언하겠습니다~!” 한순간 한소영이 저렇게 말한 줄 알고 깜짝 놀랐지만, 앙증맞은 음성의 주인공은 다행히(?) 박다연이었다. 조금 전 한소영이 고개를 끄덕인 건 아마 모종의 신호인 듯싶다. 조금 긴장되는 듯 살짝 숨을 들이킨 박다연은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아. 머셔너리 로드. 혹시 앞선 2차 회담에 관한 이야기는 들으셨나요? 필요하시다면 간략하게 설명해드릴 수도 있는데.” 깜빡 잊은 듯 말하는 건 좋았지만 그렇게 목소리가 떨려서야. 왠지 그 속내를 알 것 같아 나는 속으로 웃었다. 그리고 차분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진행에 필요한 이야기는 어느 정도 듣고 왔으니까요.” “아! 그렇군요.” 박다연의 안색이 밝아졌다. 아마 거북할지도 모르는 말을 꺼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서 오는 안도감이리라. 박다연은 잠시 헛기침을 하고서 말을 이었다. “좋아요. 저는 돌려 말할 줄 모르니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머셔너리 클랜은 이번 공략에 세운 공에 대한 보답으로 도시를 관리하는 권한을 원하시나요?” “그거야 두 말하면 잔소리지요.” 나는 명료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방금 회답을 기점으로 회담 장소 전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그 속에서 박다연은 미묘하게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돌렸다. 동부 인사들이 앉아 있는 방향이었다. 나는 신중하게 생각에 잠겼다. 현재 남은 도시는 네 개. 거기서 남부는 이미 도시 하나를 가졌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 그럼 남은 세 개의 도시를 두고 동부, 서부, 북부 그리고 머셔너리가 경쟁해야 한다. 여기서 동부는 머셔너리를 견제 상대로 정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기도 했다. 서로 동맹 관계인 두 지역을 상대하는 것 보다는 클랜 하나를 상대하는 게 더 낫겠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머셔너리가 남부 소속으로 참가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여러모로 할 말도 있을 테고.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이리저리 턱을 움직였다. 오늘은 제대로 입 좀 털어야 할 것 같았기에. 잠시 후. “먼저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한 사내가 발언권을 요청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번 볼 것도 없이 역시나 동부 소속이었다. “우선은 개인적으로 머셔너리 로드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머셔너리 클랜은 이번 강철 산맥 공략에 최고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단순 공적으로만 따지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웬일로 인정하는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내는 단순 공적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나는 팔짱을 끼며 건너편을 응시했다. “허나 아무리 공이 높다고 해도, 도시라는 중대한 사안과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무조건 공적 순으로 따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 도시의 대표 클랜이 된다는 것은 그만한 역량이 있어야 된다는 뜻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감히 머셔너리 로드에게 묻겠습니다.” 이윽고 사내는 주변으로 돌리던 시선을 멈추고 나를 정면에서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만일 도시 하나를 맡게 된다는 가정하에. 머셔너리 로드가, 머셔너리 클랜에서 어떻게 도시를 발전시켜 나가실지. 그에 관한 장기적인 비전을 듣고 싶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장기적인 비전이라. 하하하. “그런 거 없습니다. 아직은요.” 나는 싱겁게 웃으며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예?” 사내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돌아온 지 고작 사흘밖에 안됐어요. 그동안 한 거라고는 고작 돌아가는 상황만 들었을 뿐이고요. 그런데 무슨 벌써부터 장기적인 비전입니까.” “아, 아니….” 설마 이런 말을 들을지는 예상치 못한 듯 사내는 연신 말을 더듬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얼굴처럼 보였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말씀을 하나 잘못하신 게, 비전의 사전적인 의미는 내다보이는 장래의 상황을 일컫는 말입니다. 지금 이 상황에는 맞지 않는 말이에요. 당장 급한 게 이 폐허나 다름없는 도시를 사용자가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일인데. 갑자기 무슨 장기적인 비전입니까. 그런 건 당면한 일부터 해결하면서 차차 세워나가는 겁니다.” “하, 하지만 그건 꼭 필요한…!” “아. 물론 필요하기는 해요. 장기적인 비전. 그러니까 정 듣고 싶으시면, 차후 상황이 정리되고 저를 한 번 찾아오세요. 같이 차라도 한 잔 하시면서 차분히 들려드리겠습니다.” “…….” 장내에 가벼운 웃음이 흘렀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사내는 무어라 우물우물 말하더니 입을 짓씹었다. 그래. 할 말이 없겠지. 그러니까 얼른 앉아.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때였다. 사내가 살그머니 자리에 앉는 동시 바로 왼쪽의 여인이 몸을 일으켰다. 여인은 뒤늦게 상석을 바라봐 발언권을 요청한 후, 도로 고개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우선 가장 급한 문제는 이 도시를 개축하는 것이다. 확실히 맞는 말씀이기는 해요. 말씀대로 그러면서 장기적인 비전도 세울 수 있겠고요. 하지만 원점으로 돌아와서. 애초부터 어느 클랜이 도시를 맡을만한 역량이 있는가. 거기에 관해서는 의문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겠네요.” “그 말씀은 우리 머셔너리가 자격이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자격이 없다? 저는 그렇게 극단적으로 말한 적 없는데요? 아! 물론 머셔너리가 전투적인 측면에서는 대단히 뛰어난 클랜이라는 건 인정할게요. 그러나 도시는 전투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아니에요. 사용자들의 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죠. 그에 따라 행정적인 업무가 굉장히 중요시되는데, 그러한 부분에서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이 말입니다.” “부족한 부분이라. 그거 재미있네요. 그 부분에 관해서 자세히 듣고 싶은데.” 그러자 싱긋 웃은 여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글쎄요. 우선은 경험이 적다는, 아니 아예 없다는 부분을 들 수 있겠네요. 제가 알기로는 머셔너리를 용병 업무를 위주로 운영된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죠. 또 애초 북 대륙 소속이 아닌 자유 신분이라는 것도 그렇고. 그리고 무엇보다, 인원수가 적다는 게 가장 큰 우려라고 할 수 있겠네요. 수천 명이 거주할지도 모르는 도시에 겨우 50명 남짓한 클랜이 한 도시를 대표하는 클랜이 된다는 건 좀….” 여인의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리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서. 대표 클랜이 되려면 인원수가 많아야 한다. 이 말씀인가요?” “통상적인 시선에서 보면 그렇다는 소리죠.” “동의하기 어렵네요. 인원수가 많다고 무조건 좋은 클랜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자고 했잖아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어디 하나 인원수가 적은 대표 클랜이 있었나요? 말인즉 도시를 관리하는 클랜은, 비록 한 방면에서 아주 뛰어난 부분은 없을지라도, 어느 것 하나 부족한 점이 없는 완전무결한 최고의 클랜이어야 한다. 이 말입니다.” 아주 대놓고 머셔너리를 저격하고 있군. “확실히. 최고의 클랜이 대표 클랜이 되야 한다는 부분은 저도 동의합니다. 그럼 저도 한 가지 묻겠습니다.” 나는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 인원수 많은 클랜 중에서, 우리 머셔너리 클랜보다 등급이 높은 클랜이 있습니까?” 그 순간 여인의 눈에 동요의 빛이 스쳤다. “그, 그건….” “참고로 말씀 드리면, 사용자 정보에 출력되는 등급은 소속 클랜이 어느 정도의 위치에 존재하는지 나타내주는 가장 객관적인 지표입니다. 100% 실적으로만 상승하는 시스템이니까요. 아무튼 이건 바보가 아닌 이상 알고 있으실 테고. …그래서, 있습니까?” 여인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였다. “그, 그러니까 제 말은…! 이, 인원수는…. 도, 도시 관리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행정적인 업무를 맡을 수 있는데…. 그…. 중요한 영향을 차지한다는 말로….” 그래도 여기서 물러나기는 싫은지, 여인은 횡설수설 말을 더듬으면서도 끝끝내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 앵무새처럼 계속 똑같은 말을 들먹여 나는 짧은 한숨을 흘렸다. “자꾸 인원수 인원수 그러시는데…. 그 부분은 우리도 곧 인원을 확충할 계획이 있다는 것으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멍하니 무대를 바라보는 사용자를 둘러보았다. “오늘 이곳에 모이신 분들에게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설마 내가 질문을 할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사용자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이 회담이 끝나고 우리 머셔너리에서 새로운 가족을 모집한다면, 혹시 가입하실 분들이 계십니까? 가입 의향이 있는 분께서는 가볍게 손을 들어주세요.” 사용자들은 처음에는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곧 한 명 두 명 손을 들기 시작하더니 종래에는 사방에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손을 들었다. 대충 둘러봐도 수천은 가볍게 넘을 정도였다. 그렇게 사방을 둘러본 후, 나는 다시 여인이 서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흠. 많네요.” “…….” 여인도 손을 든 사용자를 봤는지 얼굴을 흙빛으로 물들인 채 입을 딱 다물고 있었다. “몇 시간 후면 우리 머셔너리는 가장 많은 인원을 보유한 클랜이 되겠네요. 이제 좀 안심이 되시는지요?” 여인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애꿎은 땅만 노려보다가 돌연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스르르 자리에 앉았다. 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받친 후, 한껏 가라앉은 동부를 향해 턱을 까닥 움직였다. 앞선 두 명은 젖혔고, 이제 다음 타자 나오라는 의미였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머리가 아파서 일찍 자야 할 것 같아요. ;_; 0691 / 0933 ---------------------------------------------- 3차 회담. “머셔너리는 클랜원 전원이 자유 용병이라는 신분을 갖고 있지요. 즉 엄밀히 말해서 북 대륙 소속이라 볼 수 없습니다. 애초 이번 공략도 용병 자격으로 참가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요?” “예?” “그게 어떻느냐는 말입니다. 말 그대로 우리는 용병입니다. 용병 자격으로 참가해 그 어느 클랜보다 활약했다고 자부합니다. 다행히 공략은 성공으로 끝났고, 의뢰를 완료했으니 이제 보수를 받아야지요. 그러한 개념에서 대표 클랜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건데. 여기서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또 한 명의 사내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채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아직도 일어서는 사용자는 있었다. 이번이 몇 명째이던가? 6명째였나? “잠시만요. 머셔너리 로드는 자꾸 자 클랜의 공을 언급하시는데요. 확실히 앞장서신 건 맞으나 엄밀히 말하면 남부 원정대 전체의 공적으로 봐야 합니다. 그건 따로 볼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아 그러십니까? 그러면 저도 물어보죠. 이번 강철 산맥 공략에서 동부 원정대는 뭘 하셨습니까?” “그, 그건…. 에…. 우선 1 지역 공략을 성공하고 요새를 건설함으로써…. 후발 원정대의 안정적인 진입로 확보에….” “말씀하신 사항은 모든 원정대의 공통 사항 아닙니까?” 어이없는 기분에 말하자 사내는 떨떠름히 머리를 갸웃했다. “그, 그런가? 아아. 생각해보니 그렇겠네요. 아니 그렇네요. …아! 또한 아틀란타 진입 후 전 원정대를 선도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도시를 목전에 두고 누구도 예상 못한 사고를 당했지요. 정말로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머셔너리 로드께서는 이 점을 감안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하. 그런데 혹시 이건 아시는지요. 정확히 말씀 드리면 도시를 발견하기 전날까지 선도 원정대는 남부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서북부 원정대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고, 그 일을 빌미 삼아 동부 원정대가 선두로 가게 된 겁니다. 모든 총 사령관이 모인 자리에서 고려 로드가 직접 요청했지요. 스스로, 가겠다고요.” 나는 스스로라는 말을 강조했다. 말인즉 너희가 선택한 결정인데 누구를 원망하냐는 소리였다. 실제로 방금 말은 할 말이 없어 징징대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내 또한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측은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나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안 돼. 봐줄 생각 없어. 돌아가. 사내는 한동안 서 있었지만 결국 애꿎은 눈동자만 빙그르르 돌리며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번이 정확히 6명째인데 더는 내세울 카드는 없는 듯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보아하니 동부는 이번 회담을 대비해 상당히 공을 들인 것 같은데, 내가 하나하나 모조리 받아쳐 버리니 말문이 막혔을 터. 할 말이 없으니 말은 못하는데 나를 바라보는 표정 하나만큼은 참으로 볼만하다. “…이번에는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때. 소리 없이 아우성만 치던 동부 인사 속에서 한 사용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현명한 눈동자를 가진 말쑥한 사내를 바라본 순간 조금이지만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조용히 손을 들어 발언권을 요청하는 청년은 바로 한(韓) 로드 성현민이었다. ‘전에 듣기로는 조성호와의 싸움에서 밀려났다고 들었는데….’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고려 로드가 사망한 이후 동부는 서로 은근한 눈치 싸움을 벌였다. 아니. 정확히는 그럴 뻔했다. 그러나 눈치 빠른 조성호가 칼같이 나서 주변 상황을 깡그리 정리했는데, 그 중에 성현민의 한 클랜도 포함돼있었다. 허나 어쨌든 성현민은 정리 과정에서 살아남았다. 물론 그동안 꽤나 중용 받지 못한 건 사실이나, 정적은 무조건 쳐내고 보는 조성호의 성격 아래서 살아남았다는 건 성현민도 어느 정도 수완이 있다는 소리였다. 강철 산맥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기실 이번에 성현민이 살 수 있었던 것도, 원정대의 궂은일을 담당하는 후방 부대에 배치돼있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1회 차든 2회 차든, 여러모로 비추어봐도 성현민은 방심할 사용자는 아니었다. 나는 회담 후 처음으로 긴장감을 느끼며 속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성현민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대표 클랜은…. 아니. 말을 정정하겠습니다.” 성현민도 긴장을 하는 걸까. 잠시 머리를 젓고서 입에 침을 적신다. 그런 성현민의 눈동자는 뜻 모를 비장함을 띠고 있었다. “사실. 저는 머셔너리 클랜이 도시 선발 과정에 참여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름 기대를 한 사용자입니다. 용병 업무를 맡고 있는 클랜의 특성상 대표 클랜의 역할과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했으니까요.” 확실히 그랬다. 어디를 조사해달라 누구를 구해달라 등등 이런저런 요구를 하는 사용자들을 생각해보면, 머셔너리는 그동안 수많은 의뢰를 수행하며 경험을 쌓았다. 지금은 푹 찌그러진 여인의 말처럼 경험이 없는 게 아닌 것이다. “허나.” 여기서 성현민이 말을 반전시켰다. “머셔너리 로드께서 사라진 이후, 머셔너리 클랜이 보인 행보는 저를 많이 실망시켰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정이기는 합니다만….” 역시나 이 말이 나올 줄 알았다. 사실 북 대륙에 있을 때부터 지속해서 머셔너리의 약점으로 대두된 문제였다. 나는 미리 대응할 말을 생각하며 성현민의 말에 집중했다. “대표 클랜은 모름지기 굳건해야 합니다. 언제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공정하고 냉정하게 도시를 관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현민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니까…. 3년 전 전쟁 때를 예로 들 수 있겠네요. 고려 로드 사후, 사용자 조성호는 발 빠르게 주변을 안정시켰습니다. 그러나 이와 비교해보면 머셔너리 클랜은 계속해서 좋지 못한 소문만이 흘러나왔습니다.” 자신을 정리하려고 했던 인물을 띄우는 성현민. 나는 지금 이런 상황에서 재미를 느끼는 걸까? 어느새 나도 모르게 팔짱을 낀 채 미소를 짓고 있다. “비록 지금은 머셔너리 로드께서 돌아오셨지만….” 이윽고 말끝을 흐린 성현민은 차분한 눈길로 나를 응시했다. “만에 하나. 아. 가능성에 불과하니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마십시오. 정말 만에 하나 이와 같은 일이 또다시 발생했을 때. 머셔너리 로드는 그때의 머셔너리가 현재와 다를 거라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이어서 들려오는 말에 나는 신중히 생각에 잠겼다. 사실 정곡을 찔린 기분을 느꼈다. 회담에 들어서 처음으로 말문이 막힌 것이다. 그 정도로 성현민의 말은 정연했고 또 논리적이었다. 그렇잖은가. 확실히 내가 없는 동안 머셔너리는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아주 할 말이 없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고연주가 머셔너리를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한 이유는 외부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카운터를 칠 수는 있다. 단, 어느 정도 각오는 해야겠지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선 머셔너리가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는 건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왕 말이 나온 거, 저도 그 부분에 관해 할 말이 있는데요.” “…….” “확실히 내부에서 흔들림이 있었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누군가가 악의적인 목적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머셔너리를 흔들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 아.” 반문하려던 성현민은 불현듯 입을 벌렸다.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 모양. 나는 성현민의 표정을 기억했다. 어쨌든 물은 방금 엎질렀다. “말인즉 의도적으로 소문을 퍼트려, 이번 3차 회담에서 머셔너리가 불리한 상황을 맞이하도록 조장한 세력이….” “잠시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요!” 그 순간 중년의 사내가 벌떡 일어서며 고함쳤다. “아직 제 말 안 끝났습니다.” “정말 어이가 없어서…! 그래서. 우리가 그 악의적인 소문의 주동자라는 말이요?” “저는 아직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요?” “웃기지 마세요. 이런 상황에서, 누가 들어도 방금 말씀은 우리를 겨냥했다고 들었을 거예요.” 이제는 중년 사내 옆에 앉은 여인까지 일어나며 소리쳤다.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제 발이 저리겠지. “도대체 누가 그런 망발을…!” “그림자 여왕이 알려주더군요.” “아. 그래서 그림자 여왕의 말이 법인가요? 그분의 말이면 무조건 맞는 거예요? 아니잖아요! 증거 있어요?” “…….” 아주 쌍으로 돌아가면서 발악을 하는군. 나는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씩씩거리는 두 남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미 확신하고 있는 상태였다. “…자신 있으십니까?” “뭐, 뭐요? 자신?” “무얼 믿고 그렇게 큰소리를 치시는지 모르겠는데. 백서연 사건을 기억하면 그렇게 당당하실 수가 없을 텐데요?” “…….” 그러자 중년의 사내와 여인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동부 인사 중 일부도 딱딱한 낯빛을 드러냈다. 아마 다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머셔너리가 그 지독하다는 부랑자를, 그것도 대 간부에 해당하는 사용자의 정신을 박살낸 사건을. “우, 우리가 응해야 하는 의무라도 있나요?” 여인이 억지로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든 혐의를 벗어나려는 발버둥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악수였다. 회피한다는 건 무언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여태껏 조용하던 장내가 서서히 시끄러워지기 시작한 게 그 방증이었다. “정신 오염을 걱정하는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굳이 물약이나 능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진실의 수정이 있으니까요. 물론 부담은 우리 쪽에서 하지요. 어떻습니까?” 중년 사내는 당혹한 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불현듯 나를 돌아보며 으르렁거렸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어이, 머셔너리 로드.” “예.” “대답 잘 하시요. 지금 나를, 아니 우리를 협박하는 거요?” “협박이요?” 절로 가벼운 웃음이 흘러나온다. 나는 피식거리며 그렇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였다. “예. 맞네요. 제대로 들으셨습니다.” “…허?” 중년 사내는 어이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더니 진득한 조소를 날렸다. “그 말씀은…. 지금 우리 동부를 상대로 한 번 해보시겠다는 게요?” 그때였다. “그 말씀은…. 지금 우리 서부를 상대로 한 번 해보시겠다는 겁니까?” 바로 옆에서 살기 띤 음성이 차갑게 흘러나왔다. 형의 목소리였다. 조금 파리하기는 했지만, 아니 그래서 더 무섭다. 한껏 치뜬 채 날카롭게 노려보는 형의 눈동자는 당장에라도 뇌전을 뿜을 듯 번들거리고 있었다. 삽시간에 중년 사내의 낯이 굳었다. “해, 해밀 로드는 갑자기 왜….” “그쪽이 내 동생을 겁박하는데. 그럼 가만히 있을 줄 아셨습니까?” “아, 아니…. 협박은 머셔너리 로드가 먼저….” “으하하하! 그래! 이제야 조금 재미있네.” 그러나 중년 사내는 이번에도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누군가 우렁차게 웃어 젖히며 말을 끊었기 때문이다. “아까부터 계집애처럼 말로만 종알거리길래 따분했는데. 이제 좀 재미있어. 응?” 거구의 사용자가 불길한 기운을 흘리는 창을 붕붕 돌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내 동부를 향해 창을 겨냥하는 사내는 바로 공찬호였다. 이번에 북부 인사로 참여한 모양이다. “아아. 그렇게 이상하게 쳐다보지는 말라고. 북부는 서부와 동맹이니까. 그리고 저놈한테는 빚진 것도 있고 말이야.” “어, 어….” 공찬호가 나를 흘끗 바라보더니 이를 씩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자 중년의 사내는 도저히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는지 앓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서부에 이어서 북부까지 나섰다. 이제 동부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아연실색한 낯빛을 보이고 있었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여태껏 조용히 있던 서부와 북부가 갑자기 나를 지원하고 나섰으니까. 그러나 강철 산맥 공략 도중 두 지역이 동부의 행태에 분노한걸 생각해보면 확실히 납득이 가는 행동이다. “이렇게 갚을 기회가 왔는데 놓칠 수가 없잖아? 안 그래?” 공찬호 또한 동부의 시선을 느꼈는지 클클 웃어 젖혔다. 장내는 삽시간에 소란에 휩싸였다. 그 순간. 탕. 누군가 가볍게 무언가를 치는 소리와 동시 무대의 모든 사용자가 딱딱하게 굳었다. 이어서 어디선가 서릿발 같은 살기가 가지런하게 흘러나와 장내를 아우른다. 그러자 한껏 일었던 소란도 자연스레 가라앉기 시작했다. 상석에 앉은 한소영이 예의 감정 없는 눈으로 전신에서 엄청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의도적인 살기가 아니다. 절대적인 권위 ‘카리스마’ 에서 나오는, 모두 조용히 하라는 의지. 심지어 나조차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나는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언제 이 정도의…?’ 잠시 후.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무대는 물론 장내까지 한소영에 의해 장악됐다. 그 누구도 입을 열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듯 침 삼키는 소리만이 들렸다. 이내 좌우를 가볍게 훑은 한소영이 흘끗 공찬호를 흘겨본다. “진정하고, 앉으세요. 여기는 이야기하라고 만든 장소지, 싸우라고 만든 장소가 아니니까.” “…….” “앉아요.” “…쩝.” 공찬호는 무언가 상당히 마음에 안 드는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결국에는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어서, 한소영은 나를 보며 무어라 말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다음으로 시선이 이동한 곳은 동부 인사가 있는 방향이었다. “이와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클랜전은 찬성하는 입장이에요.” “예? 이, 이스탄텔 로우 로드!” 누군가 말도 안 된다는 어조로 부르짖었으나 한소영은 완고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 3차 회담의 의의는 현 상황의 정리 및 종결에 있으니까요. 이미 충분히 이야기는 나눴다고 봐요.” “허, 허나!” “여기까지 왔는데 어느 한쪽에서 인정하지 못한다면, 결국에는 다른 수단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겠죠. 물론 남부는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겠어요.” “…포기하겠습니다.” 그때였다. 한소영이 이 이상의 이의는 받지 않겠다는 어조로 말한 찰나, 한 청년이 힘없는 음성으로 포기를 선언했다. 성현민이 한 손을 들어올린 채 쓰게 웃고 있었다. “동부에서 포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언급된 문제는 머셔너리 로드와 따로 해결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소란을 일으킨 점 진심으로 사과 드립니다.” 한 번 더 말하는 성현민을 보며 나는 조금 아쉬운 한숨을 흘렸다. 이번 기회로 동부를 박살낼 기반을 마련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감을 인지한 걸까. 성현민이 재빠르게 포기를 선언했다. 과감하다면 과감한 결정이었다. 이윽고 한소영이 나를 바라봐 나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 “자, 잠시만…!” 그렇게 놀란 토끼 눈을 뜨고 있는 동부에서 무어라 말이 나오기 직전. “그럼, 이것으로 이야기는 끝났네요.” 흡사 회담의 종결을 알리듯 한소영의 음성이 무대를 고요하게 울렸다. 3차 회담이 끝난 것이다. * 이스탄텔 로우 클랜. 임시 거주 여관. “하여간 그 사내. 정말 대단해요.” 무에 그리 좋은지 박다연이 헤죽헤죽 웃으며 종알거렸다. “이 지겹게 끌어온 3차 회담을 한방에 끝내다니…. 안 그래요 언니?” “…….” “그리고 아까 동부 그 개새끼들이 좆 지랄하는 거, 하나하나 받아 치는 거 보셨어요?” “…….” 한 방에 둘만 있어서 그런 걸까. 박다연의 입담은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의자에 앉아 책상에 있는 기록을 보는 한소영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계속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그러자 박다연이 종종 걸음으로 달려가 한소영에게 매달렸다. “특히 특히, 차갑게 냉소할 때. 그때가 진짜 대~박. 저 김수현이 동부 대놓고 비웃는 거 보고 진짜 아랫도리에서 부왘 하는 줄 알았다니까요. 아이고. 생각만해도 속 시원하당.” 이번에는 한소영도 어쩔 수 없었는지 고운 아미를 찡그렸다. “부왘?” “아. 흥분해서 질질 싸는 줄 알았다고요.” “…상스러운 말이네.” “에헤이. 둘만 있는데 어때서.” 한소영을 팔꿈치로 살짝 건드린 박다연은 곧 콧노래를 부르며 어깨춤을 추기 시작했다. 한소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 다시 기록에 집중했다. “아. 그러고 보니 기분은 어때요?” 그러다 어느 순간 박다연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얼굴로 장난스레 말했다. 한소영은 무시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데이트를 거절당한 기분은? 자. 한 마디 말씀해주시죠.” 박다연이 흡사 마이크라도 잡은 듯 손을 들이댔으나 한소영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호. 이렇게 나오시겠다?’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박다연의 낯빛이 무표정하게 변했다. 마치 한소영을 흉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윽고 방안을 우아하게 살랑살랑 거닐던 박다연은 양손을 꼭 맞잡으며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머셔너리 로드. 우리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다음으로, 박다연은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하지만 선약이 있어서요.” 이번에는 차갑고 낮은 목소리였다. “그러지 마시고 시간을 내주셨으면 좋겠어요.” “어디 계신지 알려주시면, 제가 약속이 끝나고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왔다가 갔다가. 두 목소리를 번갈아 흉내 내며 포즈를 잡는 박다연의 모습은 흡사 연극을 보는 듯했다. “아이이잉~. 머셔너리 로드으응~. 너무 차가워용~. 오홍홍홍~!” 이윽고 박다연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과장하여 웃을 즈음. “적당히 해.” 결국 참지 못한 한소영이 한 마디 던졌다. 박다연이 깜짝 놀란 체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응? 나 혼자 놀고 있는데. 왜요?” “애초 데이트 신청한 적도 없고. 그렇게 애교 떨면서 방정맞게 말하지도 않았어.” “에헤. 어쨌든 거절당한 건 사실이잖아요?” “박다연!” 한소영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박다연은 아기 새처럼 어깨를 움츠리더니 종종 걸음으로 창문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먼산을 보기 시작했다. 한소영은 깊은 한숨을 흘린 후 기록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런데 언니. 아까 그 사내…. 정말로 머셔너리 로드가 맞아요?” 종아리를 건들거리며 밖을 바라보던 박다연이 돌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마도.” 한소영은 담담히 대꾸했다. “아마도? 그럼 혹시 저번처럼….” 박다연이 퍼뜩 시선을 돌렸다. “나도 잘 모르겠어. 그래서 따로 보자고 한 거고.” “초감각은 어떤데요?” “우선은 진실. 그런데 저번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 맹신할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렇기는 하네요. 설마 언니의 초감각마저 속이는 사칭이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요.” 박다연은 짐짓 심각한 어투로 말하고는 다시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무언가를 봤는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더니 한동안 창밖을 응시했다. 잠시 후 박다연이 여전히 진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가만히 있는 거예요?” “……?” “예전에요. 처음 머셔너리 로드가 나타났을 때. 그리고 사칭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 “나가.” “아 왜요. 그때 언니 머셔너리 로드 보고….” “나가, 나가, 나가, 나가!” 한소영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나갈게요, 나갈게요!” 황급히 외친 박다연이 재빠르게 문으로 달렸다. 그러나 문을 나서기 직전 기어코 한 마디 입을 열었다. “아. 참고로 머셔너리 로드 왔어요.” 한순간 한소영의 몸이 멈칫했다. 초감각이 박다연의 말이 진실이라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사실은 10분 전에 봤어요. 이상하게 바로 들어오지 않고 여관 인근에 앉아 있기만 하더라고요. 혼자서 식사하고 있던데.” “식사?” “네. 가서 데려올까요?” “…아니. 그냥 있어. 알아서 들어오겠지. 그리고 나가.” 한소영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별 관심 없다는 듯 차분히 의자에 앉아 기록을 들었다. 박다연은 눈을 한 번 빙글 돌리더니 알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탕. 이윽고 문이 닫히는 동시 한소영이 기껏 들었던 기록을 놓았다. 그리고 곧바로 일어나 창문을 열어 밖을 바라보았다. 박다연의 말대로 여관 인근에는 김수현이 있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손에 커다란 고기 꼬치를 든 채 한 입 크게 베어 물고 있다. “…하.” 그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지은 한소영은 세게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홱 몸을 돌려 책상에 앉고는 놓았던 기록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확히 10분이 지났을 때, 한소영은 다시 슬쩍 창문을 열어 밖을 응시했다. 김수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허나 이번에는 또 어디서 구했는지 따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스튜를 후룩후룩 먹고 있었다. “…….” 무언가 분한 걸까. 한소영은 콧김을 세게 내뿜더니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억지로 자리에 앉아 구겨진 기록을 읽기 시작. 20분이 흘렀다. ‘…아직도 안 들어와?’ 결국에는 또 한 번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그러나 창밖을 바라본 순간, 한소영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20분 전까지만 해도 보이던 김수현이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이다. 혹시 그 사이 들어온 건가 싶었지만, 초조함 속에 10분을 기다려도 노크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사방을 애타게 둘러보던 한소영의 눈이 불현듯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바라보는 방향에서는 잠깐 모습이 사라졌던 김수현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것도 양손에 아까 먹던 고기 꼬치를 든 채로, 무척이나 행복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서. 그 순간. “…진짜!” 한소영은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쾅!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어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복도를 잇따랐다. 그리고. “40분. 그래도 꽤 버티셨네.” 복도 한쪽에 몰래 서 있던 박다연이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작품 후기 ============================ 저도 몰랐는데 조회수가 3천만이 넘었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_(__)_ 오늘은 용량을 빵빵하게 넣었습니다. :) 0692 / 0933 ---------------------------------------------- 철혈의 여왕 Vs 지옥 대공. “……?”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어딘가로 끌려온 후였다. 먹음직스럽게 익은 고기 꼬치를 보며 침을 꿀꺽 삼키고 있을 때, 갑자기 한소영이 나타난 것까지는 기억한다. 그리고 콧김을 푹 내뿜으며 다짜고짜 팔을 붙잡힌 것까지. 그런데 당황해서 어어 하는 사이 장소가 바뀌었다. 양손에 들고 있던 고기 꼬치도 어느새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질질 끌려가는 와중 누군가 은근슬쩍 채간 것 같은데…. 복도 한쪽에 몰래 서 있던 박다연을 본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당최 어떻게 된 일인지. “배가 많이 고프셨나 보군요.” 머리를 갸웃거리고 있자 돌연 힐난하는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성숙한 내음을 물씬 흘리는 여인이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나를 이 장소까지 끌고 온 장본인. 한소영이었다. “예…. 좀 고팠습니다.” 복잡한 머리를 뒤로하며 사실대로 대답했다. 어차피 한소영 앞에서 거짓말은 통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예의 표정 없는 얼굴이 미약하게 이지러졌다. “실은 현재 몸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사정상 잦은 식사와 충분한 수면을 필요로 하지요.”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요?” 황급히 덧붙이자 한소영의 목소리가 약간은 누그러졌다. 그리고 대번에 걱정스러운 눈동자로 바뀌어 나를 바라본다. 동경하는 여인의 근심 어린 눈초리는 내게 뜻 모를 안도감을 가져다주었다. “그럼 같이 식사라도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앞에서 막 먹는 모습을 보여드리기 싫었으니까요.” “네?” “아닙니다. 어쨌든 몇 주 정양하면 충분히 나을 수 있는 수준이니 걱정은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딱히 별다른 건 없고 그냥 보통의 방 풍경에 불과했다. 상당히 낡기는 했지만, 청소를 잘해놨는지 을씨년스러운 기운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보기에 어딘가 예스러운 데가 없잖아 있었다. “우선은 앉으세요. 부디.” 얼른 의자 하나를 가져와 앉는 동시, 책상으로 걸어가는 한소영을 흘긋 살폈다. 조금 부드러워지기는 했으나 어딘가 모르게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그냥 쌀쌀맞다 여길지 몰라도, 나는 한소영의 미묘한 변화마저도 잡아낼 자신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돌아오고 나서 첫 번째 만남인가? 묘하게 긴장된다. 잠시 후, 한소영이 자리에 앉고서 첫 말문을 열었다. “사흘 전에 돌아오셨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정확합니다.” “그리고 저를 한 번쯤은 찾아오실 줄 알았고요. 적어도 한 번은요.” “…….” 한소영은 시작부터 꽉 찬 돌직구를 날렸다. 적어도 한 번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나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입을 다물었다. 초감각은 꽤나 까다로운 능력이다. 이번에도 몸 핑계를 대기에는 거짓말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일부러 한소영을 찾아가지 않았다. “서운하셨나요?” 내 표정을 읽은 걸까. 한소영은 망설임 없이 정답을 말했다. 아니. 어쩌면 정답일지도 모르는.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러니까 우리 이스탄텔 로우에서 머셔너리 클랜을….” “여러 가능성을 생각했습니다.” 한소영의 말을 끊으며 들어갔다. “오늘 회담을 보면서 느꼈습니다. 이 정도로 여러 이해 관계가 얽혀 있는 상황에서, 이스탄텔 로우가 머셔너리를 전폭적으로 지지할 의무는 없었다. 이게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내외적으로 도와줄 수도 있었겠죠. 동맹 클랜이니까요.” “그 선택은 어쩌면 남부에 악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걸 참작하고서라도.” 무언가 입장이 뒤바뀐 듯한 대화. 나는 종잡을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한소영이 무얼 원하는지 무얼 이야기하고 싶은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이 사안으로 무작정 들이대는 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왜냐면 애초 통제하지 못한 머셔너리와 악의적인 소문을 흘린 동부 둘만의 문제였으니까. 그래. 엄밀하게 말하면 그렇다. 그런데 한소영은 그 이상으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었다. “아니면 제가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나는 어깨를 으쓱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쳐다보는 한소영은 여전히 쌀쌀맞았다. 지금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잠깐 옷 좀 벗어보시겠어요?” 그때였다. 한창 상념에 잠겨 있는 와중 한소영이 갑자기 이상한 말을 꺼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옷…. 아니. 소매를 걷어보셔도 좋아요.” 한소영이 말을 정정했다. 나는 순순히 양 소매를 걷어주었다. 어차피 도복이라서 크게 거리낄 것도 없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으신다면 다른 부분도 보여주실 수 있으신가요? 피부가 드러나도록.” 연이은 요청에 갸웃하기는 했으나 도복마저 살짝 끌어 내렸다. 한소영은 흡사 관찰하는 듯한 눈으로 그윽이 살펴보더니 이제 됐다는 양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짧은 한숨을 흘렸다. “듣던 대로 몸에 상처가 많으시네요.” “예? 듣던 대로…?” “그림자 여왕이 말해주더군요.” “고연주가….” 그 순간 한 생각이 뇌리를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저를 사칭한 사용자 때문에 그러십니까?” 한소영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그래요. 혹시 들으셨나요?” “그냥 있었다는 정도로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스탄텔 로우 로드가 알고 계시다는 건….” “당연하죠. 그 사칭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바로 저였으니까요.” “예?” 예상치 못한 말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한소영의 앞에서 나로 속여 말했다고? 초감각이라는 그 사기적인 능력 앞에서? 이건 좀 말이 안 되는데.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양손을 깍지 끼며 진중히 물었다. 한소영은 안될 것 없다는 양 차분히 고개를 주억였다. 이윽고 한소영은 고요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야기를 듣고 나서 처음 느낀 기분은 기가 막힌다는 감정이었다. 정리해보면 우선 사칭범은 나와 거의 일치하는 외양을 가졌던 모양이다. 한소영의 말에 따르면 외모는 물론 버릇까지 나라고 생각할만한 모든 특징을 갖췄다고 했다. 그냥 비슷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똑같다는 소리였다. 특히 가장 압권이었던 건 그 사칭범이 기억 상실에 걸린 듯이 행동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그놈이 어떻게 한소영 앞에서 걸리지 않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무언가 기억 나냐고 물어보면 ‘아니요.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왜냐면 그 말 자체는 사실이니까. 그렇게 처음 발견한 이후, 사칭범은 기억 상실이라는 명분 아래 불안하다는 듯이 행동했고 보호해주기를 부탁했다. 한소영은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를 돌보면서 기억을 되찾을 수 있도록 성심껏 도와주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의도적인 접근이었을 거로 생각해요. 바로 머셔너리 클랜으로 들어가기는 그렇고, 해밀 로드에게 갔다면 들켰을 가능성이 높고. 그래서 저한테 접근해 머셔너리 로드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습득하려 했을 거라 생각해요.” “확실히. 아마 형이었다면 반나절도 안 돼서 알아챘을 겁니다.” “사실 저도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이상하다는 기분은 느끼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럴 즈음, 그는 갑자기 머셔너리 클랜으로 가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죠.” “그래서….” “네. 저는 사용자들의 시선을 피해 밤중에 몰래 머셔너리 클랜을 찾아갔지요. 그리고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한 후, 신병을 인도했어요. …그리고 이틀이 지나기도 전, 그림자 여왕의 연락을 받을 수 있었죠. 사칭이라고.” “…….” 그러면 고연주는 그놈의 몸에 상처가 없다는 사실로 사칭을 밝혀냈다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숨겨서 그렇지, 내 몸에 새겨진 상처 흔적은 상당히 많다. 그런데 그 상처가 갑자기 없어졌다면 확실히 이상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로군.’ 처음에는 그냥 어느 병신 같은 놈이 그런 거지라고만 생각했는데, 들어보니 가벼운 사안이 아니었다. 당최 어느 놈인지는 몰라도, 사칭범이 어떤 목적으로 그렇게 접근했는지 한 번쯤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어보였다. “굉장히 어이가 없으셨겠네요.” 결국,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어이가 없을 뿐인가요? 그 사실을 알고 나서 제가 얼마나 상심하고 또 얼마나 수치스러웠는지…. 알기나 하세요?” 그 순간 나는 머리를 번쩍 들었다. “예? 상심…. 수치스러우셨다고요?” “그래요. 처음 봤을 때 앞뒤 안 가리고 달려가 품에 안긴 것만 생각하면….” 아아. 안겼다고. 그 정도야 뭐. 수치심을 느꼈다기에 나는 또. 그놈이 저 도톰한 앵두 빛 입술을 빼앗고, 아름답고 풍만한 가슴을 탐하고, 건강하게 살 오른 색기가 뚝뚝 떨어지는 허벅지를 더듬고, 그러다 결국…. 아니 잠깐만.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에. 그렇군요. 안기셨다고….”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잖은가. 한소영이 달려가 안겼다고 한다. 그것도 스스로. 누군지는 몰라도 참 횡재했다. 물론 그때는 나로 알고 있었을 테니 왠지 모르게 뿌듯한 기분도 드는데…. “…뭘 기대하시는 거죠?” 한소영이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게슴츠레한 시선을 보냈다. 나는 하하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요. 그냥 누군지는 몰라도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하하하.” 그러나 그 순간 한소영이 두 눈을 치뜨며 불같이 화냈다. “웃어요? 지금 웃겨요? 제가 다른 사내한테 안겼다는데도?” 아니 또 왜 이러세요. “그, 그게 아니라요.” “그리고 부럽다고요? 왜요. 그럼 제가 또 그때처럼 질질 짜면서 달려가 안기기라도 할까요?” “…예? 질질…. 짜셨다…?” “!” 찰나의 순간, 한소영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이어서 탕 가볍게 책상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한소영이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 화제를 넘기려는 것 같은데 그냥 넘어가 주기로 하자. “말씀하시죠.” “그때…. 왜 저를 구하신 거예요?” “……?” “제가 알기에는, 그때 같이 끌려 들어간 여인이 머셔너리 클랜원이라고 알고 있어요.” 아아. 게헨나의 채찍에 감겼을 때를 말하는 것 같다. “예. 그렇죠.” “왜요?” “……?”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클랜원을 먼저 구하는 게 맞잖아요. 그런데 왜 저를 먼저 구해주신 거예요?” 음…. 이것 참. 답변하기 난감한 질문이다. 그렇다고 사실을 말할 수도 없고. 거기다 초감각까지 있잖아. “그냥요.” 결국에는 이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게 대답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당연히 한소영이 화를 냈다. …아니. 잠시만. 왜 당연하지? 당연하지 않아. 따지고 보면 나는 구해준 입장이잖아. 그런데 왜 죄인이 된 듯한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건데? 그렇게 생각한 나는 힐끔 앞을 응시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싫어요?” “…네?” 얼른 말하라는 듯 강렬한 안광을 내뿜던 눈동자가 느닷없이 흔들렸다. “그래서 싫으냐고요. 제가 구해드린 게 싫으냐 이 말입니다.” “누, 누가 싫대요? 고마워요. 당연히 감사하죠. 그런데 왜….” “그럼 그냥 고맙다고 말씀하시면 되잖아요. 왜 따지고 사람을 죄인 취급을 하십니까. 가뜩이나 서럽게.” “따, 따지고? 죄, 죄인 취급? 하. 어, 어이. 어이가.” 우와. 한소영이 양손을 으쓱 올리고 있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어. 시선도 좌우를 계속해서 번갈아 보고 있어. 저런 반응 처음 봐. “아무튼, 또다시 그때와 같은 상황이 벌어져도, 저는 똑같이 이스탄텔 로우 로드를 구할 겁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에요.” 나는 척 팔짱을 끼며 당당하게 말했다.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동시 문이 달칵 열렸다. 이윽고 누군가 조심스레 머리를 들이밀었다. 회담 때 한소영의 옆에 앉아 있던 잘생긴 사내였다. “저 말씀 중에 죄송한데….” “나가요.” 그러나 한소영은 가차 없었다. “예, 예?” “나가라고요. 안 들려요?” 사내는 멍한 낯빛을 보이더니 입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울먹울먹한 얼굴로 스르르 문을 닫았다. 잠시 후. 한소영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슬쩍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으며 한껏 고개를 젖히더니 기다란 한숨을 흘렸다. 그 모습이 마치 ‘도대체 이놈을 어떻게 해야 할까.’ 라고 고민하고 있는 듯하다. “도대체…. 당신이라는 사내는…. 어떻게 되먹은 게….” 아니. 진짜로 말했다. “또다시 똑같이 구하겠다고…. 그 말이 진실이라는 게 더 열 받아….” 계속해서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린다. 나는 그저 멀뚱멀뚱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한동안 무어라 중얼중얼 거리던 한소영이 두 눈을 번쩍 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기세에 나도 모르게 따라 일어선 찰나, 한소영은 갑자기 문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록.” 뜬금없는 주문 영창과 동시 문이 달칵거리는 소리를 냈다. 잠긴 것이다. 그러나 한소영의 주문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일런스 필드, 블록 필드, 프로젝트 이미지, 리플렉트 실드, 월 오브 마나, 안티 매직 쉘….” 우웅! 우웅! 우웅! 우웅! 우웅! 우웅! 한 번 주문을 말할 때마다 마력이 빠르게 흐르며 배치가 변화한다. 아니. 무슨 방어 요새라도 만들려고 이러시나? “후. 이 정도면 여태껏 항시 적재적소의 타이밍에 부단한 방해를 해온 제 3자의 불시 개입을 막을 수 있겠지.” 또다시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린 한소영은 나를 흘기듯이 쳐다봤다. 그리고 아주 잠시나마 갈등의 빛이 어리는가 싶더니.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무어라 말하기도 전, 아랫입술을 깨문 한소영이 갑자기 몸을 날렸다. 마치 그대로 내게 안기기라도 하려는 듯이. 어찌나 세게 들어오는지 가지런하던 머리카락이 크게 나부낄 정도였다. 그렇게 서로의 거리가 삽시간에 가까워진 찰나, 품에 넣어놨던 구슬이 미약한 진동을 흘렸다. 우웅! 이어서 게헨나의 보호 요새가 전개됐다. “정말 보고 싶었…!” 텅! ‘…….’ …어? ============================ 작품 후기 ============================ 오늘 많이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_(__)_ 0693 / 0933 ---------------------------------------------- 철혈의 여왕 Vs 지옥 대공. 갑자기 벌어진 상황을 인지한 건. 주르륵. 털썩! 양팔을 활짝 벌린 채 달려오던 한소영이 한순간 전개된 붉은 장막에 가로막혀 주저앉았을 때였다. ‘헉.’ 뒤늦게 아차 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한 번 이러지 않았나? 살그머니 시선을 내리자 망연한 얼굴을 한 한소영이 보였다. 혼란스러운 눈길로 붉은 장막을 보고 있다. 아마 나도 지금 저런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을까. 급작스럽게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는다. 그러나 정적은 잠시. “머셔너리…. 로드…?” 한 글자 한 글자 끊어서 말하는 흡사 북풍한설을 연상케 하는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을 때. 나는 지금 한가로이 있을 상황이 아님을 깨달았다. 쾅하고 터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 그에 반해 바닥에서 올려다보는 두 눈은 시퍼런 안광을 이글이글 토해내고 있다. 흡사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혹은 열을 터뜨릴 듯한 표정. 한소영은 그 정도로 부끄러움과 분노가 점철된 낯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역지사지로 생각해보자. 방금 상황은 나라도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울 것이다. 우웅! 이윽고 구슬이 청명한 진동을 울린 순간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활화산같이 타오르는 한소영을 보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잠시만요! 이스탄텔 로우 로드.” “…….” “이해합니다. 아마 많이 민망하시겠죠. 저라도 그럴 겁니다. 허나 저 또한 억울합니다.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제게 이 사태를 해명할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 필사의 외침이 먹힌 걸까. 부르르 떨고 있던 한소영이 조금은 진정된 모습을 보였다. 무언가 삼키기라도 하는 듯 목울대가 꿀꺽 움직인다. 무언의 허락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얼른 해명할 생각으로 품속에 손을 넣고 여보라는 듯 구슬을 척 들이밀었다. “얘, 얘가 그랬습니다.” 우, 우웅?! “얘는 얼마 전에 얻은 성과 중 하나인데요. 일종의 자아를 가진 장비입니다. 그런 만큼 아주 똑똑하죠. 그런데 저를 보호하려는 성향이 너무 강해서 시도 때도 없이 이런 붉은 장막을 펼치고는 합니다.” “…자아 장비?” “예, 예. 그렇죠. 실은 얼마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거든요. 그때도 제게 달려오던 클랜원들이 지금처럼 당했습니다. 아직 어려서 상황 판단을 못합니다. 얘가요.” “…후.” 말을 하면서 나는 괜히 구슬을 다그쳤다. 구슬은 시무룩이 진동을 흘리고는 스스로 보호 요새를 해제했다. 그러자 찰나의 순간이기는 했지만, 서서히 옅어지는 붉은 장막을 보며 한소영의 눈이 신기한 빛을 띠었다. 초감각이라는 능력이 있는 만큼 한소영은 내 말을 진실이라고 판단한 듯했다. 들썩거리던 어깨가 사그라지고 번쩍번쩍하던 안광이 정상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그 대신 이번에는 흑수정 같은 눈망울이 그렁그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는지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있다. 이윽고 거친 숨소리가 잦아드는 걸 마지막으로 한소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그런 사정이 있으셨어요….” “이해해주시는 겁니까?” “아니요.” “…….” 한소영은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머셔너리 로드도 말씀하셨지만 저는 현재 굉장히 복잡한 심경이에요. 굳이 되짚지 않아도 지금 무척 부끄럽고 충분히 창피하며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민망해요. 인정하시나요?” “예, 예. 그렇죠. 인정합니다.” “허나 머셔너리 로드의 말씀이 거짓말 같지는 않고. 나름 억울하신 부분도 있는 것 같기는 하네요.” “그럼요. 절대로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제 기분은 대단히 나빠요. 지금도 아무리 노력해도 가라앉혀 지지가 않거든요?” “…….” 그럼 어쩌라고! …라고 속으로 외친 찰나 한소영이 살그머니 두 눈을 치떴다. “그래서 이 모든 상황을 참작해 기회를 한 번 드리겠어요.” “기회요?” “네. 지금부터 머셔너리 로드에게 1분이라는 시간을 드리겠어요.” “1분…?” 의아히 반문하자 한소영이 숨을 크게 들이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1분의 기회. 어떤 짓을 해도 좋아요. 제가 드리는 1분이라는 시간 동안 스스로, 어떻게든 저를 달래서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예, 예?” “못 들은 척하시는 것도 이제 지겹네요. 아. 카운트는 조금 전부터 시작했어요.” “자, 잠시만요. 그런 게….” “57초. 참고로 실패는 물론 남은 시간 동안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으신다면….” “며, 면…?” 한소영은 무섭도록 나를 노려보며 말을 흐렸다. 나는 미처 항의할 생각도 못 한 채 침을 꿀꺽 삼켰다. “각오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소영은 입을 꼭 다물었다. 그리고 그대로 아예 주저앉아버렸다. 정말로 내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머릿속에 혼란의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와 반대로 방은 고요하다. 당장에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불편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얼마나 지났더라? 몇 초나 남았지? 결국, 빤히 쳐다보는 눈길을 이기지 못해 나는 허둥지둥 한소영을 잡아 일으켰다. 여전히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으나 한소영은 뜻밖에도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 어떻게 하지?’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간만 죽이다가 어느 순간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한소영이 점차 눈을 가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제 10초도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인지한 찰나, 나도 모르게 한소영을 와락 껴안고 말았다. “……!” 너무나 갑작스러운 포옹 때문일까. 껴안은 몸에서 미약한 경직 감이 전해졌다. 그러나 한소영은 곧 느릿하게 힘을 빼는가 싶더니 모든 걸 내게 맡기듯 그대로 몸을 기대왔다. 콧속을 물씬 찌르고 들어오는 야릇하면서도 은은한 색향. 이내 목덜미가 간질거리는 동시 느긋한 음성이 속닥속닥 흘러나온다. “4초. 어떤 짓을 해도 좋다고 했는데…. 그런데 껴안을 거면 조금 더 확실하게 껴안지 그래요? 무슨 고슴도치를 안는 것도 아니고.” 4초라는 말을 들은 순간 괜스레 오소소 소름이 돋아 더욱, 있는 힘껏 한소영을 껴안았다. 그러자 몸에 따뜻하면서도 뭉클한 육체의 감촉이 여실히 전해졌다. 그래. 이제야 내가 한소영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인지했다. 경황없는 정신을 여인 특유의 살 내음이 부드러이 감싸 안는다. “으응.” 이윽고 한소영은 내 등을 마주 안는 것과 동시 천천히 고개를 젖혔다. 살짝 도발적으로 느껴지는 눈동자가 나를 지그시 응시한다. “여기까지 오는 게 참 힘드네요.” “죄, 죄송….” “그래도 이번에는 잘했어요. 100% 정답까지는 아니지만, 머셔너리 로드치고는 나쁘지는 않아요.” “가, 감사….” 사실 뭐가 감사한 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저 황송하다는 기분에 머리를 끄덕였다. “아무튼, 저도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고…. 오늘 일은 이 정도로 덮어드릴게요.” “예, 예?” “눈치를 줘도 알아듣지를 못하시니, 이제는 직접 하나하나 가르치는 수밖에 없겠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말 나온 김에 하나 더. 앞으로 제가 뭘 말하면 못 알아들은 척하지 마세요. 다시는.” “…그럴게요.” 순간적으로 가슴이 뜨끔해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한소영은 입을 살짝 끌어올리더니 도로 고개를 기대오며 살며시 눈을 감는다. “우선은 우리 계속 이대로 있어요. 괜찮죠?” “예.” “아. 오른손은 움직여요. 그때 강철 산맥에서 빗질해주신 것처럼 제 머리카락을 감미롭게 쓸어주세요.” “알겠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씩, 명령조로 이어지는 요구에 나는 착실하게 고분고분 따랐다. 왼손으로 잘록한 허리를 부여잡은 채 오른손으로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을 섬세하게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한소영은 그제야 만족한 듯한 신음을 흘렸다. 달착지근하게 감겨오는 끈적한 향기에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진다. 잠시 후. “머셔너리 로드는…. 앞으로 부단히 노력하셔야 할 거예요…. 저를 기쁘게 해주시려면….” 한소영은 앓던 이가 빠진 듯, 무언가 후련해 보이는 표정으로 꿈결처럼 중얼거렸다. * 3차 회담이 끝나고 나서 아틀란타를 둘러싼 상황은 급박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동부 원정대가 공식적으로 포기 선언을 하고 머셔너리가 새로운 대표 클랜으로 선정됐다는 사실이 커다랗게 작용했다. 그 부분을 제외하면 이미 모든 것들이 정해져 있었던 만큼, 이후 배분을 마무리 짓는 과정은 일사천리였다. 우선 남부 원정대의 이스탄텔 로우 클랜은 동쪽에 있는 도시를 선택했다. 그 지역은 가장 황폐화가 덜 진행된 곳으로 여러 고대 시설이 빼곡하게 모인 도시였다. 네 개의 외 도시 중 그나마 가장 좋은 평가를 받는 도시였고, 사용자들은 이스탄텔 로우가 그 지역을 차지한 걸 당연하다 여겼다. 서쪽 외 도시는 북부가 맡기로 했다. 북부는 특이하게도 한 클랜이 대표 클랜을 담당하지 않았다. 예전 코란 연합이 한 도시를 관리했던 것처럼, 여러 클랜이 모여 연합을 창설한 형태로 운영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다만 그 연합의 초대 장(將)으로 공찬호가 선정됐다는 사실은 조금 놀라운 일이었다. 비록 얼굴 마담 신세는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북쪽 외 도시는 역시나 서부의 해밀 클랜이 맡았다. 북쪽 도시는 강철 산맥과 가장 밀접한 곳으로 내부적으로 모든 게 어중간한 도시였다. 그러나 해밀 로드 김유현의 ‘차후 강철 산맥을 대상으로 하고 싶은 게 있다.’ 는 강력한 희망으로 서부가 품에 안게 되었다. 결국 남쪽 외 도시는 머셔너리 클랜으로 돌아갔다. 사실상 남쪽 도시는 가장 낙후됐다는 말을 듣는 도시였다. 그나마 있는 거라고는 대규모 콜로세움 하나뿐, 나머지는 대부분이 군사 시설로 이루어져 있었다. 머셔너리가 이 도시를 맡게 되자 사용자들 사이로 이런저런 말이 많이 나왔는데 대다수가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왜냐면 다른 도시가 지역 단위로 맡은 것에 반해 머셔너리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반대로 생각하면 기회의 땅이 될 수도 있지만, 현실은 언제나 냉정한 법이다. 그러나 정작 남쪽 도시를 맡은 김수현은 별로 개의치 않는 반응을 보였다. 모두의 걱정 어린 시선 속에도 그저 미미한 미소를 지은 채 만족해하는 얼굴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런 와중 거리 으슥한 곳에서 김수현의 볼에 입을 맞추는 한소영을 목격했다는 사용자가 나와, 예전 사장됐던 염문설이 떠오르는 동시 이스탄텔 로우의 지원설이 강력하게 대두하는 일도 있었다. 아무튼 김수현이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식으로 도시를 만들어갈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껏 김수현이 걸어온, 이뤄낸 성과를 아는 사용자는 깊은 관심을 갖고 남쪽 도시를 주시했다. 이로써 아틀란타의 상황은 일단락됐다. 새로운 대륙에. 새로운 도시에. 새로운 건물에. 새로운 클랜이 자리 잡았다. 그에 따라, 산하 클랜을 제외한 클랜이나 무소속으로 돌아간 사용자들은 치열한 눈치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기존의 북 대륙은 더 이상 활동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이제는 이 아틀란타라는 새로운 무대를 중점으로, 차후 어떤 방향으로든 판이 새롭게 짜이리라는 사실을. ============================ 작품 후기 ============================ 0ㅁ0…. 0694 / 0933 ---------------------------------------------- 새로운 보금자리. 이전 회에 잘못된 부분이 있어 내용에 앞서 수정 사항을 말씀드립니다. 방향 설정에 착오가 있었습니다. 네 개의 외 도시 중 강철 산맥과 근접한 도시가 북쪽입니다. 그러므로 해밀 클랜이 차지한 도시가 북쪽 도시며 머셔너리 클랜은 남쪽 도시를 차지한 것으로 정정하겠습니다. 각 도시의 콘셉트도 그에 맞춰 따라갑니다. 혼동을 드려 죄송합니다. _(__)_ * 머셔너리는 원래 네 개의 외 도시 중 서쪽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에 걸친 회담이 끝난 이후 합의 과정에서 배분받은 남쪽으로 이사를 단행했다. 그곳이 우리 클랜이 새로운 시작을 준비할 도시였기에 모두가 들뜬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각 도시를 잇는 터널을 나와 남쪽 도시로 들어간 우리는 중앙 대로를 따라 일직선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미 이사할 장소는 정해두었다. 이 대로를 따라 쭉 걷다 보면 도시의 중심이라고 부를 수 있는 커다란 성 하나가 나온다. 그 성이 바로 머셔너리의 새로운 보금자리였다. 물론 입맛에 맞게 고를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 만큼 굳이 성을 고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성을 갖는다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도시 내 가장 중요한 장소를 차지한다는 건 우리가 이 도시를 대표한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행동이다. 말인즉 상징성을 챙기겠다는 뜻이라 봐도 무방하다. 또 이왕 대표 클랜이 됐으니 가장 괜찮은 곳에서 시작하는 게 모양새도 좋지 않을까. 도시의 성이라면 모름지기 고대 거주민 중에서도 최고 권력자가 거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위치만 봐도 답이 나온다. 성이 세워진 장소는 도시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중앙 부근에서 약간 위쪽에 있었다. 여하튼 여러모로 따져봐도 성을 차지하는 게 가장 나아 보였고 클랜원도 누구 하나 이견이 없었다. 아마 다들 딱딱한 건물이나 냄새나는 여관이 아닌 화려한 성에서의 궁전 같은 삶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뭐 아주 틀린 상상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글쎄. 과연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그때였다. 웅성웅성. 한창 상념에 젖어 걷던 와중 돌연 어수선한 소리가 흘러들었다. 주변을 가볍게 훑어보자 절로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중앙 대로를 걷다 보면 자연스레 광장을 거치게 되는데, 한산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상당한 수의 사용자가 모여 있었다. 한 가지 신기한 건 으레 떠들썩하면서 북적거리는 게 아닌, 중앙을 깨끗이 비워둔 채 좌우 방향으로 삼삼오오 무리 지어 있다. 마치 우리가 이곳을 지나갈 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흘긋흘긋 쳐다보는 시선을 헤치며 나는 담담히 중앙에 트인 길을 가로질렀다. 중간중간 사용자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머셔너리 클랜이다.” “가장 앞에서 걸어가는 사람이 머셔너리 로드지?” “우와아아. 그림자 여왕에 검후에…. 봐봐! 군단을 소환한다는 거주민까지 있어.” “어디어디? 잠깐만. 저기 두 명 섬광이랑 신궁 아니야?” 그러자 클랜원들도 이 많은 사용자가 광장에 모인 이유를 깨달은 듯했다. 처음에는 살짝 주눅 든 모습을 보이던 서너 명이 당장 허리를 곧게 피고 어깨를 넓게 벌렸다. 특히 애들이 가관이었다. 안현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우수에 찬 눈빛을 하고는 한껏 무게를 잡았다. 안솔은 눈을 반쯤 감아 초연해 보이는 표정을 짓더니 돌연 한 걸음 한 걸음 모델 워킹을 시작했다. 이유정 거만한 눈과는 다르게 입을 씰룩씰룩 움직이면서 자꾸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있었다. 직접 언급된 비비앙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미 콧대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져 있었으니까. 뒤를 따라오던 신재룡은 결국 창피함을 견딜 수 없었는지 스리슬쩍 내 옆으로 다가왔다. 흘끗 쳐다보자 쓰게 웃으며 머리를 절레절레 젓는다. “안솔양이 걱정이군요. 저렇게 걷다가 넘어지지는 않을지….” 콰당! “으갹!” 말이 씨가 된 걸까. 갑자기 지면에 콩 부딪치는 소리와 새된 비명이 광장을 울렸다. 장내에 킥킥거리는 웃음이 흐르자 신재룡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얼른 신재룡의 팔을 잡아끌었다. “갑시다.” “예? 하,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사람일 겁니다. 어차피 광장만 지나치면 돼요. 어서 갑시다.” “…….” 신재룡은 굉장히 심하게 갈등했지만 결국 내 손에 이끌려 걸음을 빠르게 놀렸다. 누군가 나를 부르는 듯했으나 잘못 들은 거로 생각하며 정면으로 난 길을 따라 계속 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빠르게 걸어 광장을 벗어나자 주변에는 훈련장처럼 보이는 건물이나 가지런히 나열된 병영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아직 거리가 있기는 하나, 오른 방향으로 도시의 명물이라 불리는(사실은 그나마 볼만한.) 둥그런 콜로세움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한 풍경은 이 도시가 어떤 목적을 갖고 건설됐는지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게 군사 시설을 가로질러 걸어가자 곧 돌담처럼 보이는 성벽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와…!” “도착했다!” 마침내 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는 여전하네.’ 절로 선웃음이 나왔다. 누군가 외친 탄성은 삽시간에 사그라졌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하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어지간하면 중세 시대 유럽에서나 볼 법한 성을 상상했을 것이다. 허나 지금 눈앞에 드러난 성은 그런 상상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우선 예상을 웃도는 규모는 차치하고. 성을 빙 둘러싼 마른 해자와 단단한 성벽. 그리고 모퉁이마다 보이는 드높은 첨탑과 정확한 좌우 대칭을 이루는 건물 배치는, 아름다운 성보다는 견고한 요새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니까 저런 건물이 도시에 있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고나 할까. 분명 돌이나 대리석 등등으로 이루어지기는 했는데, 차라리 험준한 산이나 계곡 지형에 더 어울릴 모습이다. 그래도 외관이 희끗희끗한 게 무조건 요새라는 생각을 조금이나마 죽여주고는 있었지만. 그러고 보니 어느새 클랜원들이 조용해졌다. 당최 왜 저렇게 건축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 시절에 살아보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묵묵히 아치형 정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면 그나마 성이라는 기분을 조금은 느낄 수는 있다. 입구 부근은 아마 뜰로 사용된 듯싶다. 중앙 성채까지 쭉 이어지는 길의 중앙에는 길고 넓은 수로가 트여 있고, 좌우로 난 붉은 길 옆으로 지금은 말라 비틀어진 정원이 나름대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음. 밖에서는 몰랐는데 안에서 보니까 꼭 인도의 타지마할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내가! 오빠 내가 가서 문 열어줄게!” 이윽고 수로를 지나 성채에 다다른 순간 이유정이 득달같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낡아 헐거워진 문을 벌컥 열어 허겁지겁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성 외관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만큼 내부가 상당히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퉤!” 이유정은 5초도 지나지 않아 문을 세게 닫으며 침을 탁 뱉었다. 빙글 몸을 돌려 무언가 대단히 역겹다는 얼굴로 터벅터벅 힘없이 걸어온다. 그 반응을 보자 딱히 눈으로 보지 않아도 내부가 어떨지 예상할 수 있었다. 나는 하나하나 살펴볼 요량으로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고대 융성하던 시절에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현재는 그저 세월의 흔적만이 남아 있는 낡아빠진 건물에 불과하다. 좋게 말해서 예스럽고 고풍스럽다고 할 수는 있겠으나 사실은 막막한 기분이 앞섰다. 이걸 언제 멋들어진 보금자리로 만들까. 크기가 작으면 말이라도 안 하지. 하지만 어쩌랴. 비록 기대와 조금 어긋났을지라도 이제 와서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웅장한 맛은 있으니 복원만 할 수 있다면 꽤 괜찮은 풍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럼.” 한숨을 쉬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클랜원들은 나처럼 한숨을 흘리거나 이리저리 몸을 푸는 모습을 보였다. 아마 내가 할 말을 예상한 모양이다. 나는 양팔을 걷어붙인 후 담담히 입을 열었다. “가볍게, 청소부터 시작합시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우리는 오전의 시간을 몽땅 투자한 결과 전혀 가볍지 않은 1차 청소를 끝낼 수 있었다.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1차에 불과하다. 방은 왜 이렇게 많고, 공간은 얼마나 넓고, 천장은 얼마나 높고, 층은 또 어디까지 있는지. …아니. 애초 이 정도 규모의 성을 하루 안에 청소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우선 1층을 중심으로 생활하는데 필수적인 공간을 먼저 청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예를 들어 잠을 잘 수 있는 곳이나 식당 등등. 허나 그 정도만 해도 청소해야 할 면적은 가히 어마어마했다. 그나마 몇 가지 다행인 건 한 번 청소를 해본 클랜원들이 알아서 클래스별로 조를 짜 효율적인 청소 작업을 실행했다는 것. 그리고 정하연의 고대 마법이 청소에 무척이나 쓸모 있었다는 것이다. 정작 자신은 상당히 자존심 상해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즈음 우리는 식당에 모여 휴식 겸 점심 시간을 가졌다. 식당은 처음 봤을 때와 비교해서 매우 다른 풍경으로 변해있었다. 오직 더럽다는 이유로 배치된 탁자나 의자를 깡그리 태우고 부순 탓에 이제는 휑뎅그렁한 공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게 서로 옹기종기 모여 임한나가 끓인 스튜로 배를 채우고 있었을 즈음. “젠장. 설마 도시 안에서 야영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건너편에 앉아 있던 우정민이 힘없는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푹신한 침대에서 자고 더러운 기분으로 일어나느니, 침낭에서 자고 상쾌한 아침을 맞는 게 좋겠지.” 마찬가지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선유운이 스튜를 한 숟갈 퍼먹으며 대꾸했다. 그런 둘의 얼굴에는 상당한 피곤함이 그늘지어 있었다. 육체적인 피로보다는 정신적인 피로가 더 큰 듯했다. 왜냐면 둘은 비비앙과 같은 조였으니까. 아까 슬쩍 보니 비비앙이 쉴 새 없이 재잘재잘 떠들어대던데 그 끊임없는 수다에 질려버린 모양이다. “으응? 다들 왜 그래? 왜 그렇게 음식을 깨작거리고 있어? 이거 이거, 이래서야 오후 청소에 힘을 쓸 수나 있겠어?” 그에 반해 비비앙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비비앙은 단순하다. 애초 새로운 것을 보고 경험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지금 매우 들뜬 기분일 것이다. 그 여파가 저 둘에게 미치고 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비비앙은 여전히 헤실헤실 웃더니 갑자기 짝 손을 마주쳤다. “아하. 알겠다. 너희 젖소의 음식이 맛이 없어서 그렇구나?” 그 순간 옆에 앉은 임한나가 움찔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음식 맛이 없다는 말 때문이라기보다는 아마 다른 이유에서 그런 듯하다. “어휴. 어쩔 수 없지. 오늘 인심 좀 썼다. 그거 먹기 싫으면 내가 너희만 따로 만들어줄까? 오직 연금술사만이 만들 수 있는 특제 체력 회복 음식!” 비비앙이 자랑스럽게 외쳤으나 우정민은 심드렁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숨을 길게 내쉬기까지. 그래. 무시가 상책이지. 하지만 선유운은 아니었다. “싫습니다.” 매우 단호한 음성으로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 축제 때 남다은과 비비앙이 만든 음식을 먹고 게거품을 물었던가. 그때의 일이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은 모양이다. “왜, 왜? 맛있을 텐데. 효과도 좋고.” “아니요. 효과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일단 당신 음식은 굉장히 맛이 없습니다.” 선유운은 초췌한 얼굴과는 다르게 또렷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생각만 해도 비위가 상하는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절레절레 머리를 흔든다. 화색 만연한 비비앙의 얼굴에 떨떠름한 빛이 스쳤다. “아니. 그냥 맛이 없는 정도면 괜찮습니다. 어쨌든 배만 채우면 그만이니까요. 그런데 당신이 만든 음식은…. 음식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결함이 많은 일종의 결함투성이 결과물입니다.” “뭐…. 야! 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아. 물론 그 음식을 섭취함으로 차후 치명적인 독을 먹었을 때를 대비해 체내 내성을 키울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런 있을지도 모를 일 때문에 지금 목숨을 거는 건 사양하겠습니다.” “…….” 말을 들은 비비앙은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곧 두 눈을 크게 치뜨더니 벌컥 화를 냈다. 이제야 이해한 모양이다. “킥.” 임한나는 한 손으로 입을 막고 소리죽여 웃다가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얼른 표정을 관리했다. 그리고 흠흠, 헛기침을 한 후 얌전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수현아.” “응?” “나 방금 생각났거든. 혹시 북 대륙에 연락 한 번 해봐야 되지 않아?” “아.” 아차. 말을 듣고 나서야 생각났다. 요새 하도 바쁘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다들 잘 지내고 있으려나. “걱정 마. 우선 생환했다는 사실은 말해놨으니까.” 임한나가 그럴 줄 알았다는 어조로 말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숟가락으로 스튜를 휘저으며 입을 열었다. “깜빡 잊고 있었네. 그래서, 다들 어떻게 지내고 있대?” “응?” “거기서 별다른 일은 없고?” “아. 으, 으음. 그게….” 그 순간 임한나가 묘하게 말끝을 흐렸다. ============================ 작품 후기 ============================ 설정에 혼동을 드려 죄송합니다. 앞 부분은 곧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_(__)_ 0695 / 0933 ---------------------------------------------- 새로운 보금자리. “한 번은 가보는 게 나을 것 같아.” 임한나는 한참을 주저하다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왜.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으응. 마르가 네 실종 소식을 듣고 자기가 찾겠다고 난리를 쳤나 봐. 그래도 다행히 잘 어르고 달랜 것 같아.” “마르가? 그건 다행이군.” “그렇지? 아무튼, 안쪽 도시에 워프 게이트도 발견했다고 하니까. 한 번은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모두 걱정 많이 했거든.” 임한나는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결국 한 번 가보라는 소리를 반복하며 말을 매듭지었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여하튼 시급을 다투는 일이라면 진작 말이 나왔을 것이다. 또 하등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머리를 끄덕거리는 찰나, 정하연이 돌연히 끼어들었다. “가시는 건 좋지만, 우선은 급한 일부터 해결하시는 게 옳지 않을까요?” 임한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급한 일이요? 잠깐 다녀오면 되는 일이잖아요.” “그렇기는 한데, 아직 워프 게이트를 막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잖아. 비비앙 때처럼 명분이 명확하다면 모를까. 혹시 누가 들어올까 봐 모두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이번에도 절차다 허가다 해서 며칠은 필요할 걸?” “아…. 그런가?” “응. 그리고 사용자들은 지금 대단히 안달 난 상황일 거야. 이제 회담도 끝났겠다. 대표로 선정된 클랜들이 얼른 무언가 보여주기를 바라고 있어. 그러니까 당분간은 통신용 구슬로 연락하면서 지내는 게 나아. 차라리 얼른 워프 게이트를 사용할 상황을 만드는 게 낫지.” 뉘 집 딸이길래 이렇게 똑소리를 내는 걸까. 정하연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지금은 황폐해진 도시를 복구하는 데 주력할 때라는 소리였다. 그러면 복구를 도와줄 거주민들의 이동이나 자재를 북 대륙에서 공수받아야 할 일이 생기니, 자연스레 워프 게이트도 활성화될 테고. “그런데 참 웃기다.” 문득 이유정이 콧방귀를 뀌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우리가 나눈 대화를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안달 났으면 자기들이 먼저 움직이면 되잖아. 꼭 우리가 앞장서서 이끌어주기를 바라나? 애새끼 심보도 아니고.” …심경은 알겠지만 저건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현 상황이 독점이라면 모를까. 우리는 이제부터 다른 세 도시와 경쟁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것도 가장 불리한 입장에서. 만일 이유정의 말대로 가만히만 있으면? 그때부터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이다. 사용자가 활동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안전한 도시를 원하는 것처럼 도시도 사용자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사용자들은 지극히 냉정하다. 별 볼일 없다고 판단하면 그대로 등을 돌린다. 기껏 대표 클랜이 됐는데 유령 도시를 만들 수는 없잖은가. 어쨌든 어느 사용자나 시설 좋고 활동에 용이한 도시에 자리를 잡고 싶을 것이고, 우리는 그 기대에 부응할 필요가 있었다. “나중에 돌아올 이익이 얼마나 어마어마한데,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 우리가 투자하는 건 당연한 거야. 초기 지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 “에? 그러면 언니 말은 우리가 이 도시 전체를 복구해야 한다는 소리야?” 정하연이 핀잔 조로 말했으나 이유정은 숟가락을 꼭 물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정하연은 무어라 더 말하려는 듯 보였으나 그냥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어.” 어이없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이유정이 저런 식으로 말한다는 건 사실 내 탓이 크다. 아카데미 수료 후 이제껏 내내 자유 용병이라는 신분으로 달콤한 특권만을 누려온 입장이다. 그 반대의 어두운 일면은 조금도 맛보지 못했다. 일반 사용자의 처지를 알 리가 없으니, 저렇게 말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에는 철없는 생각이랄까. “아무튼, 앞으로 엄청나게 바빠지겠네요. 청소만 해도 산더미인데 도시 복구도 신경 써야 하고. 차후 들어갈 돈은 또 어디서 조달할지….” 정하연이 걱정하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곳곳에서 떠들던 소음이 살그머니 가라앉았다. 아마 다들 앞으로의 일이 막막한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속으로 웃었다. 애초 자신이 없었다면 대표 클랜이 되겠다고 설치지도 않았고, 아니면 하다못해 다른 도시를 가져갔을 것이다. 가장 낙후됐다는 평을 받는 남쪽 도시를 가져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미 나름의 계획은 세워둔 상태였다. ‘유적이 꼭 밖에만 있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성 내부를 둘러보며 차분히 상념에 잠겼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스리슬쩍 드러내느냐는 건데….’ * 현재 사용자들이 최대 관심사는 무엇일까.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사용자들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행동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에 있다. 물론 권리 보장을 넘어서 구체적으로 바라는 것도 있겠지만, 어쨌든 요지는 보상 심리. 즉 죽을 고생을 다 해 아틀란타로 왔으니 이제 그 보상을 보장해달라는 것이다. 이건 매우 당연한 기대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여태껏 지지부진했던 회담으로 인해 논의되지 못했으니 이제는 확실하게 수면에 떠오를 때였다. 타 도시 대표 클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 관리 기구의 호출을 받게 되었다. 중앙 관리 기구의 실질적인 수장인 이효을은 통신용 구슬로 참석하기로 했다. 마음만 먹으면 워프 게이트를 사용해 직접 참석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무조건 조심해야할 때라며 스스로 거절했다. 그렇게 나와 형, 한소영, 공찬호가 참석한 회의는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현 쟁점을 잘 파악한 이효을이 이미 방안을 마련해왔거니와, 우리도 이효을의 의견에 큰 불만이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 사용자들의 권리 보장이 우리의 이득과 연결 되니만큼 불만이 있을 리가 없다. (아으으으. 그럼 회의는 이쯤에서 끝내기로 하고. 여기서 대충 정리해보면….) 탁탁, 구슬 안에 비치는 이효을이 기록을 가지런하게 정리하며 목을 좌우로 꺾었다. 피곤한 일이라도 있는 걸까. 얼굴 곳곳에 상당한 피로가 그늘지어 있다. (우선 권리 보장 기간은 3개월. 그 기간에는 오직 공략에 참가한 사용자만이 아틀란타를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워프 게이트가 아닌 직접 강철 산맥을 통과한 사용자에 한해서, 설령 공략에 참가하지 않았더라도 앞서 아틀란타를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이건 다들 동의하시죠?) 이효을은 사용자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다는 가정 하, 강철 산맥을 횡단하는데 약 2개월 정도가 걸릴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면 보장 기간이 끝날 때를 기다리는 사용자보다 최소에서 2주 최대 한 달까지 먼저 이용할 수 있다. 여기서 요지는 강철 산맥 내 중간중간 지어진 요새를 살리겠다는 것이다. 강철 산맥은 이제 길 하나가 트였을 뿐, 아직 완전히 공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금보다 길을 더욱 넓히고 요새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말에는 그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결국 이효을의 말인즉, 사용자들의 목숨을 담보로 안정화 작업을 실행하겠다는 소리였다. (에…. 그리고…. 이제 워프 게이트 활용에 관해서 정리해야 하는데에에에….) 다음 화제로 넘어간 이효을은 고개를 한껏 젖히며 말을 끌었다. 시원스레 드러난 목울대가 꼴깍꼴깍 움직인다. (후유. 사실 이 문제는 딱히 이렇다 할 방법이 없거든요. 거주민 지원이나 자재를 조달하려면 어쨌든 워프 게이트를 양방향으로 뚫어놔야 하는데, 그 틈을 몰래 이용하려는 사용자가 없다고 장담할 수가 없어요. 이건 그쪽도 마찬가지고요. 아는 사이라는 이유로 몰래 들어오도록 도와주는 경우도 있잖아요?) 다들 끄덕끄덕. (그러니까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상호 철저한 통제하에 서로 조심하는 수밖에 없어요. 만에 하나 그런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 무조건 엄하게 벌하도록 하세요.) 이효을의 말대로 이건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북 대륙에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는 이상, 사용자라면 누구든지 젖과 꿀이 흐르는 아틀란타를 탐내고 있을 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워프 게이트를 통해 살그머니 들어올 수도 있는 노릇이다. 당연히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거듭 말하지만, 현재는 아틀란타와 관련한 모든 게 보상이라 봐도 무방하다. 목숨 걸고 싸워 보상을 획득했는데 누가 슬쩍 숟가락을 얹으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다들 바쁘시죠? 그럼 회의는 이제 진짜 끝내도록 해요. 저분은 아주 입이 찢어지시겠네.) 입이 찢어져라 하품하던 공찬호는 눈을 크게 뜨며 떨떠름해 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의가 파하고 성으로 돌아가니 클랜원들은 여전히 청소 삼매경이었다. 나는 그 중 몇 명만 따로 호출해 회의를 소집했다. 며칠간 청소에 매진한 결과 회의를 할 만한 공간은 그럭저럭 확보한 상태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1층에 한해서였고, 2층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내일부터 우리 머셔너리는 크게 3가지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중앙 관리 기구와의 논의 결과를 알려준 이후, 나는 클랜원들을 보며 손가락 3개를 펼쳤다. “첫 번째. 성 청소. 두 번째. 차후 도시 복구 진행 및 감독. 세 번째. 북 대륙 정리 및 거주민 지원과 자재 조달.” “네? 북 대륙을 정리하신다고요?” 정하연은 내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반문했다. “예. 북 대륙으로 연락해서 타 도시로 진출한 지부는 물론, 모니카까지 포함해서 모조리 정리하라고 하세요. 앞으로 도시를 복구하는 데는 천문학적인 예산이 들어갈 겁니다. 최대한 여러 군데에서 돈을 조달해야 해요. 북 대륙에 있는 것들을 정리하면 어느 정도 예산을 확보할 수는 있을 겁니다.” “클랜 하우스 창고에 금화가 쌓여 있기는 하지만…. 확실히 그것 가지고는 부족할 테고. 그래도 쟁여놓은 장비나 보석을 정리하면….” “그 정도로는 절대로 부족합니다.” “그래도 너무 아까워요. 우리가 따로 세금을 내는 것도 아니고, 계속 두면 꼬박꼬박 이익이 나올 텐데….” 이 말도 일리는 있는 게 우리의 신분 특성상 들어오는 수입은 그대로 이득과 직결된다. 그러나 정하연이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게 있다면, 나는 언제까지고 이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에 머무를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 북 대륙에는 머셔너리 아카데미를 제외하면 더 이상 미련이 없다. 길어야 2년. 그 안으로 제로 코드를 쥐고 지구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아틀란타의 안정화가 최우선 과제였다. “어차피 지금도 많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아틀란타에 무게감이 실리는 만큼 들어오는 이득도 계속 줄어들 겁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리하기도 어려워질 거고요. 그러느니 차라리 지금 깔끔하게 정리하고, 더욱 이득을 볼 수 있는 곳에 집중하는 게 맞습니다.” 그러자 정하연도 딱히 할 말은 없는지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여전히 아쉬운 감은 남아 있지만, 내 의지가 확고함을 깨달은 듯하다. “다음으로…. 첫 번째는 계속 하던 대로하면 되겠고. 아. 청소는 애들 위주로 시키세요. 애들한테 감독 역할을 맡기는 건 아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말에는 이견이 없는지 모두가 수긍하는 빛을 드러냈다. 특히 정하연이 고개를 크게 끄덕거리며 깊은 공감을 표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두 번째. 차후 도시 복구 진행 및 감독.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하죠. 이건….” 쾅! “형! 형! 혀어어엉!” “오빠빠빠빠빠빠빠!” 그때였다. 이제 가장 중요한 안건을 말하려는 찰나, 갑자기 문이 열림과 동시 두 사용자가 호들갑을 떨며 뛰어 들어왔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득달같이 달려오는 두 명은 안현과 이유정이었다. “방금 누가 문 세게 찼어. 그리고 너희 청소하는 중 아니야?” “얘들아. 지금 회의 중인 거 안보이니?” 입을 벌린 채로 가만히 있자 고연주와 정하연이 호되게 야단쳤다. 이쯤이면 찔끔할 법도 한데, 안현과 이유정은 여전히 잔뜩 흥분한 채 꽥꽥 소리를 질렀다. “아니 형 누나들. 한 번만 들어보세요. 이거 진~짜! 정~말 대박 사건이라니까요?” “입 다물어. 조용히 해. 진짜든 정말이든, 지금 굉장히 중요한 얘기 중이야. 자꾸 시끄럽게 하면 화낼 거야.” “아 언니! 한 번만 들어보라니까? 방금 우리가 성 탐험을 하다가….” “뭐? 성을 탐험해? 이것들이 정말! 하라는 청소는 안 하고!” 결국에는 정하연이 크게 화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무언가 심상찮다는 걸 깨달았는지 이유정이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도와달라는 듯 눈을 빛냈다. 나는 숨을 길게 흘렸다. “뭔데. 말해봐.” “수현!” “한 번 들어봅시다. 들어보고 대박 사건이 아니면 그때 가서 혼내도록 하죠.” “…….” 정하연은 애들을 한 번 강하게 흘겨봤으나 결국에는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어디 한 번 말해보라는 듯 척 팔짱을 끼기까지. 어느새 조용해진 둘은 서로 눈치만 보더니 이유정이 팔꿈치로 안현을 툭 건드렸다. 그러자 깜짝 놀란 안현이 더듬거리며 말을 잇는다. “에…? 그러니까…. 저희가요. 바, 발견을 했거든요?” “발견?” “예. 그…. 정확히는 솔이가 발견한 건데요.” “……?” 안솔이? ‘아.’ 그 순간 한 생각이 번뜩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설마….’ 혹시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시선을 느낀 걸까. 안현은 곧 활짝 웃어 보이더니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예! 우리 복덩이가 한 건 해냈습니다!” ============================ 작품 후기 ============================ 1. HaraKiri : 독자 손은 약손. 우락부락 건장한 로유미 님이 되시기를 기원할게요. Sol ) 정말로 감사합니다. 얼른 나아서 본연의 야성적인…. 아니 잠깐만요. 저 배아플 때 누가 약손 해주는 거 되게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코멘트 보고 정말 감사하다고, 꼭 야성적인 모습을 되찾겠다고 적으려 했는데 뒤에 제 호칭을 보고 멈칫했네요. -_-+ 2. 골든보이84 : 생리통? 작가 진짜 여자였음? Sol ) 아니요. 어제의 배 아픔은 순수한 복통이었습니다. 제 염색체가 XY인데 달거리를 할 리가 있나요. 그건 여성분들이 하는 거랍니다. 저는 대단히 거칠고 야성적인 사내에요. 0696 / 0933 ---------------------------------------------- 시작이 늦었다고 앞서나가지 못하는 건 아니다. 때는 한 시간 전. 성으로 돌아온 김수현이 일부 클랜원과 한창 회의를 하고 있을 즈음. 회의에 참석하지 못해 청소를 하는 클랜원 중에서는 사실 알게 모르게 불만이 쌓인 이가 여럿 있었다. 그 불만이란 아주 간단한 것으로 ‘왜 우리가 청소해야 하나.’ 보다는, ‘지루해.’ ‘심심해.’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기야 청운의 꿈을 품고 강철 산맥을 넘어왔는데, 신 나는 모험은커녕 주야장천 청소만 하니 몸이 근질근질할 법도 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청소 감독을 하고 있던 고연주와 정하연이 자리를 비우자, 각 조에 속한 클랜원은 누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살금살금 모였다. 안현과 안솔은 물론이요. 당연히 이유정도 빠질 수 없었다. 심지어 차소림 조에 속해 있던 사샤까지 몰래 도망 나와 합류했다. 그렇게 모인 바보 쿼텟(Quartet)은 ‘회의는 오래 걸릴 것이다.’ ‘우리가 다른 층을 조사해 총 청소에 걸릴 시간을 가늠해보자.’ ‘혹시 아느냐. 성에 잠든 보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등 충분히 자기 합리화의 시간을 거친 후, 콧노래를 부르며 탐험을 떠났다. 그러나 그 누가 알았으랴. 저 말도 안 되는 자기 합리화가 실제로 일어날 줄은. 사건 발생 지역은 성의 복도 맨 끝 쪽의 방. 시간은 여태껏 들어가 보지 못했던 방을 하나씩 접수(?)하며 한창 떠들썩할 때였다. 무언가 촉을 느꼈는지 주변을 둘러보던 안솔은, 갑자기 어디론가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안솔을 따라 복도 끝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간 세 명은 중앙에 덩그러니 놓인 거대한 새 석상과 마주했다. 네 명은 방에 홀로 서 있는 석상을 바라보며 탄성을 질렀다. 세월이 흘러 낡은 건 어쩔 수 없지만, 아직 원형을 유지하는 새 석상은 굉장히 정교하게 조각돼 웅장한 자태를 뽐냈다. 마침 조금 쉴 생각을 하고 있던 안현은 신나게 떠들며 다가가 석상의 발톱 부분에 털썩 앉았다. 허나 그 순간 안현은 돌연 엉덩이가 움푹 꺼지는 감각을 느꼈고,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이변은 시간차를 두지 않고 발생했다. 안현이 일어나는 동시, 새 석상이 요란한 소리를 내더니 마치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양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리고 흡사 살아 있는 듯 우두둑 우두둑 움직이기까지. 안현은 물론, 모두 깜짝 놀라 후다닥 물러났지만, 석상은 전혀 아랑곳 않고 옆을 돌아보더니 꽉 막힌 벽을 주둥이 부분으로 세게 쪼았다. 쾅, 굉음과 동시 벽이 와르르 무너지며 자욱한 연기가 솟았다. 놀라는 것도 잠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안현은 벽 너머를 확인했고,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발견했다. 모두가 치솟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지겨운 청소에서 벗어나 기분 전환이나 하려고 했지, 실제로 무언가를 발견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비밀스런 공간이 나타났는데 어찌 내려가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이후 아래로, 아래로 한없이 계단을 걸어 내려간 네 명은 곧 어두운 통로에 진입했다. 그리고 한참을 걸어 통로 끝에 도달하자 찬란한 빛이 새어 나오는 석문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석문에는 고대어로 적힌 글씨가 자그맣게 각인돼 있었는데, 사샤가 ‘증명의 꿈은 아직 꺾이지 않았다.’ 라는 아리송한 해석을 들려주었다. 네 명은 하나같이 긴장된 마음을 삼키고서, 안현을 선두로 굳게 닫힌 석문을 밀어젖혔다. 이어서 한 걸음 안으로 들어간 순간, 갑자기 빛이 외부로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와 놀라운 광경을 드러냈다. * 안현의 설명을 들은 후. 우리는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안현의 안내를 받아 석상이 있다는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우연히 발견했다는 계단을 내려가, 차갑고 축축한 공기가 맴도는 지하로 들어갔다. 얼른 보여주고 싶은지 안현이 안달하는 낯으로 걸음을 재촉해,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시꺼먼 석문이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빛이 쏟아져 나왔다는 방으로 들어간 순간, 둥글고 너른 공간이 나오는 동시 누군가 탄성을 질렀다. “허!” 공간은 흡사 광장 같은 잿빛 공동(空洞)과도 같은 곳으로 기이한 향이 흐르고 있었다. 드높은 천장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는 아치 모양. 그러나 냄새나 모양이 중요한 게 아니다. 먼지 쌓인 바닥에는 들어온 통로를 따라 길이 세 갈래로 갈라졌는데, 길이 끝나는 약 80미터 앞 정면에는, 앞서 본 석문의 세 배는 될 법한 육중한 철문이 각각 활짝 열려 있다. 앞서 도착한 애들이 벌써 개방한 모양이다. 쏟아져 나왔다는 빛의 근원은 바로 그 내부에 있었다. 안현은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빙글 몸을 돌려 우리를 돌아보았다. “어때요? 정말 엄청나죠?” 그 물음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모두가 넋을 잃은 얼굴로 멍하니 바라만보고 있었으니까. 물론 나는 조금 다른 의미로 놀랐지만 서도. 이미 새 석상을 발견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직감은 하고 있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발견한 거지?’ 다른 한쪽에서는 사샤가 넙죽 엎드려 누군가를 경배하고 있었고, 앞에는 안솔이 목을 빳빳이 세운 채 고개를 한껏 젖히고 있었다. 아마 현재 자기가 콧대를 세웠다는 의사 표현인 듯싶다. “정말…. 정말 대단합니다!” “에헴!” “정말로 복덩이인 것입니까? 당신이 진정 이 세상의 복덩이인 것입니까?” “네! 맞아요! 제가 바로 그 복덩이에요!” 거만한 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안솔을 보고 있자 다들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다. 정하연은 흘러나오는 빛에 홀린 듯 미끄러지듯이 걸어갔고, 신재룡은 계속 “허어, 허어!” 를 외치면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속으로 웃으며 정면으로 시선을 들었다. 우선 가장 왼쪽 문에서는 반짝거리는 황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황금이 쌓여 있다. 직사각형 모양으로 깔끔하게 정제된 황금들이 층으로 쌓여 불그스름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천장 높이의 절반, 면적을 가득 채운 황금빛이 바다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다음으로 중앙 문은 조용했다. 왼쪽 문처럼 빛이 흘러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장 많은 클랜원이 모여 있었다. 내부 공간에는 무기, 방패, 갑옷, 신발 등 여러 장비가 벽에 가지런히 걸려 있었고 간간이 작은 장신구도 보였다. 세월이 흘러 빛이 조금 바래기는 했지만, 아직도 확실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 신이 한 마력을 품고 있다는 증거였다. 강해지고 싶은 사용자의 특성상 황금보다 장비에 먼저 눈이 간 모양이다. 벌써 안으로 들어간 몇 명은 눈에 보이는 장비를 들고 꼼꼼하게 살피고 있었다. “구즈 어프레이즐을 써야 확실해지겠지만, 이 검에는 커트 마법이 걸려 있는 것 같아요. 그것도 영구적으로요. 칼날에 흐르는 예기가 범상치 않네요.” “이 갑옷에는 경량화 마법이 각인된 것 같습니다. 상하 일체형 갑옷인데 손가락 하나로도 들어 올릴 수 있네요.” “잠시만요. 방금 그 갑옷 살짝 접히지 않았어요? 강철 아니에요?” “야! 안현! 잠깐 와서 이 장갑 좀 봐봐!” 마지막 외침에 안현은 곧바로 달려갔다. 그리고 이유정이 건네주는 장갑을 이모저모 살피는가 싶더니 갑자기 머리를 젖혀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와! 찾았다! 이거 감소의 장갑이잖아! 드디어 다른 한쪽을 찾았다고! 이제 세트 효과 발동이다! 으하하하!” 안현은 손에 쥔 장갑을 팔락팔락 흔들며 뛸 듯이 기뻐했다. 그 소리가 자못 부러웠던 걸까. 클랜원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삽시간에 사방으로 흩어져 장비를 살피기 시작했다. 나는 담담히 웃으며 이제 하나 남은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른쪽 문에서도 휘황찬란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황금빛은 물론, 다채로운 무지개 색 빛깔이 흘러나온다. 안에는 울퉁불퉁한 모양의 돌덩이들이 한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저것들의 실체는 아직 정제되지 않은 광석이다. 여러 신기한 효과를 지닌 것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예를 들면 노블 미스릴이던가. 1회 차 때도 노블 미스릴이 광석으로 발견된 건 여기가 처음이었지? “왜 여기 서 있어요? 혼자서만 담담한 얼굴을 하고 계시네.” 그때였다. 세 철문을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찰나, 어디선가 고아한 음성이 흘러들었다. “그렇게 있으니까, 마치 이게 여기 있을 것이다~. 나는 알고 있었다~. 라고 말하는 것 같잖아요.” 퉁, 소리와 동시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묘령의 여인이 홀연히 자태를 드러냈다. 묘한 미소를 머금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여인은 다름 아닌 제갈 해솔이었다. …그나저나 얘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지? 제갈 해솔은 내 옆으로 총총히 다가와 한쪽 눈을 찡긋했다. “너는 보자마자 헛소리냐?” “네. 헛소리죠. 여하튼 생환 축하해요.” “고마워. 축하 한 번 빠르네.” “비꼬지 말아요. 어쩔 수 없었으니까. 누구 덕분에 그동안 거의 감금당하다시피 살았걸랑요?” 적당히 대꾸하자 제갈 해솔이 으쓱 어깨를 들먹였다. 나는 킬킬 웃었다. 하기야 헬레나 사후 폴리모프 마법이 풀렸으니 모습을 숨기면서 지내야 했을 것이다. 누구 잘못이라기 보다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한 고연주를 칭찬해야 할 것이다. “고생했어.” “영혼 없는 대답하고는…. 아무튼, 그래서 이제 어쩔 거예요?” “……?” “저거요, 저거.” 제갈 해솔이 턱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보아하니 저걸 어떻게 처리할지를 묻는 것 같은데…. 고작 0년 차가 끼어들기에는 맹랑하다고 볼 수 있는 사안이지만, 상대가 제갈 해솔이라면 마냥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 1회 차를 기억해보면, 소규모 캐러밴이나 다름없던 너도밤나무가 차후 한 지역을 아우르는 대형 클랜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거의 8할 이상이 제갈 해솔의 수완이라 봐도 무방했다. 제갈 해솔은 고유한 마법 창조로 유명했지만, 행정 업무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정평이 난 사용자였다. “아직 계획 없어요? 그럼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는데.” 나는 자기 허벅지를 슬쩍 매만지며 유혹하는 제갈 해솔을 빤히 응시했다. 조금이지만 시험해보고 싶어졌다. “음. 우선 소문을 낼 거야. 우리 성에서 저런 성과를 발굴했다고.” “흐응. 자랑하고 싶거나 관심을 끌고 싶은 거라면, 예상외로 질투가 심할 수도 있어요? 또 그간 머셔너리가 보여온 행보에 덮인 의혹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역효과를 염두에 두셔야 할 걸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노력해서 성과를 가질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진다면? 그러면 그 질투가 어떤 감정으로 변할까?” “…호?” 그 순간 잠깐이기는 했지만, 생글생글 웃고 있던 제갈 해솔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그리고요?” “오늘 청소는 중지. 황금도 좀 옮기고. 장비 꺼내서 때 빼고 광 좀 내고. 그리고 광장도 치워놔야겠지. 아. 물론 우리가 써야 하는 장비도 따로 구분해야 하고.” 제갈 해솔의 미소가 짙어졌다. 전체적인 그림보다는 요체만 띄엄띄엄 단편적으로 말했는데, 제갈 해솔은 과연 내 계획을 알아차렸을까? “그래서. 네 생각은?” “세 마리 토끼까지는 잡으셨네요. 그런데 저라면 한 마리 더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번에는 내가 미소 지었다. “어떤 방법인데?” “듣고 싶어요?” “당연하지.” “그럼 오늘 밤 자지 말고 기다려요. 방에 촛불 하나 켜두시고, 맛 좋은 와인 하나 준비해두세요.” 또, 또 이런다. 나는 싱겁게 웃으며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 참. 그래. 그럼 나는 란제리 입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기다리고 있으면 되나?” “어머. 란제리는 제가 입어야죠. 왜 클랜 로드가 입어요? 그냥 씻고 기다리고 있어요.” “…….” “아. 다른 데는 씻으셔도 좋은데, 아래는 씻지 마세요. 나는 이상하게 거기서 냄새 풀풀 나는 게 좋더라.” 농담으로 받아 쳤는데 제갈 해솔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되받아 쳤다. 나는 듣고 반성하라는 의미로 길게 한숨을 흘렸다. 얘는 참…. 생긴 거는 신비로움의 극치인데, 말에는 스스럼이 없다. 이윽고 “아. 또 헛소리. 하지만 재밌는 걸 어떡해~.” 라며 스스로 입을 톡톡 때리던 제갈 해솔은, 돌연 어여쁘게 하품하며 시선을 돌렸다. 클랜원들은 여전히 탐색 삼매경이었다. “그나저나 궁금하네요. 왜 성에 저런 성과들이 잠들어 있는 걸까요? 그리고 밖에 적힌 증명의 꿈은 아직 꺾이지 않았다는 말은 또 무슨 뜻이고.” 글쎄. 그거야 나도 모른다. 아는 거라고는 아틀란타를 수도로 삼아 대륙 통일을 노렸던 빅토리아라는 왕국이 있었다는 사실 뿐. 그러고 보니 예전 빅토리아의 영광을 제 3의 눈으로 확인했을 때, 왕국 최후의 여왕이 ‘증명의 여제’ 라 불렸다는 정보를 읽은 것 같다. 혹시 이것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왜 하필 증명이라는 이름을 붙인 걸까? 여제라는걸 보면 여인인 것 같은데. ‘마수들은 이 지옥이란 세상에서 태어나 본능적으로 살아가지만 서도…. 또한 개중에는 외부에서 끌려들어와 구성원이 된 경우도 적잖게 있지요. 그럴 때는 과거의 인격을 유지한 채 구성원이 되는 경우도 있어, 조금 더 확실한 자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말을 할 수도 있어요. 저처럼요.”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부왕(父王)께서는 지금 바로 그 증거를 보고 계십니다.’ ‘아무래도 못 믿으시는 것 같은데, 이번에도 제가 증거를 보여드리죠.’ ‘이! 이 못된 것! 말하는 꼴이 음란한 암퇘지나 다름없구나! 처음에는 고결하기 그지없던 영혼이, 어이하여 이렇게나 타락했다는 말인가!’ 응? 왜 갑자기 베히모스가 떠오르는 거지? ============================ 작품 후기 ============================ 영지 발전이라는 소재는 메모라이즈의 주가 될 수 없습니다. 첫 구상 때부터 그렇게 기획했거든요. 그래서 이번 파트의 최우선 목적은 메모라이즈에 영지 발전의 향기를 최대한 덜 스며들게 만드는 것으로, 어지간하면 빠르게 넘어갈 예정입니다. 다만 이 파트부터는 깔아둔 복선을 회수할 준비를 해야겠지요. 하하하. 그나저나 이틀 연속 자정 연재네요. 깔끔하게 00시 00분에 올렸습니다. 어제는 잠시 서버에 문제가 생겨서 빛이 바랬지만, 오늘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어제 받지 못했던 칭찬을 오늘 받고 싶어요. 칭찬은 코멘트로 해주세요. 제가 예시를 들어드릴게요. :) 1. 아니? 이틀 연속 자정 연재군요? 칭찬합니다. 그 보상으로 다시는 로유미라 부르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2. 꺌꺄라꺙꺙낑뽕쀙꺙낑라꺄꺌이히히해해햏우호홓우홓까루루루쀠레레레뿌샤샤리빠빠룰라까루까루! 이 두 코멘트 중 하나를 골라 적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후후(?). 0697 / 0933 ---------------------------------------------- 시작이 늦었다고 앞서나가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늘의 한복판에 붉은 금색으로 이글거리는 해가 떠올랐다. 사방으로 뿌리는 눈부신 빛살은 공기를 타고 흐르듯이 내려가, 세상을 비추며 자신의 색으로 물들였다. 쨍쨍히 내리쬐는 햇살을 받아서 그런지, 도시 내 자옥하게 올라오는 모래 먼지도 반짝거리며 빛난다. 이어서 자옥한 흙 연기를 뚫고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어수선한 외침까지. 어제까지만 해도 조용하던 도시가 오늘 아침부터 복작거리기 시작한 이유는 하나였다. 드디어 워프 게이트가 활성화됐다. 즉 본격적인 도시 복구의 신호탄을 쏜 셈인데, 그 첫 시작을 이스탄텔 로우에서 끊었다. 무수한 사용자의 기대를 받고 있는 만큼, 이스탄텔 로우에서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고, 워프 게이트가 활성화되자마자 거주민 이동과 자재 조달을 시작했다. 지금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도 모두 복구 작업의 일환이었다. “흠….” 턱을 괸 채 멍하니 창문 너머를 바라보던 한소영은 가벼운 숨을 흘리며 시선을 내렸다. 긴 속눈썹 아래, 고즈넉한 빛을 품은 흑 수정 같은 눈동자가 책상에 놓인 기록을 응시한다. 이윽고 차분히 한 장 넘겼을 즈음. 달칵! “야! 한우야!” 문이 사정없이 열리는 소리에 이어 특유의 새침한 목소리가 방을 넘어 복도까지 울렸다. 한소영의 눈이 대번에 날카롭게 빛난다.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한우. 원래는 한국 고유의 소 품종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종의 애칭으로, 처음에는 한소영의 이름 중 앞 두 글자를 따와 ‘한소’ 라고 불렀으나 어느 순간부터 ‘한우’ 로 변했다. 한소영의 아름답고 풍요로운 가슴과,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이는 연혜림의 가슴을 비교해보면 왜 한우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을 터. 연혜림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책상에 세게 손을 얹었다. “이거 한 번 봐봐. 오늘 머셔너리 클랜에서 나온 거거든?” “성과 발굴했다는 소문은 이미 들었어.” “그거 아니야. 도시 복구에 관련한 내용 같은데, 광장에 게시해놓은 거 가져왔어. 지금 사람 엄청나게 많아.” “…사람이 많다고?” 한소영이 눈을 살짝 치뜨며 묻자 연혜림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손을 치웠다. 약간 구겨진 기록에는 총 세 가지 사항이 대충 휘갈긴 필체로 적혀 있었다. 보아하니 그 공지사항이라는 걸 베껴온 듯싶다. 한소영은 기록을 들고 자세하게 정독하기 시작했다. 1번과 2번은 그냥 넘겼다. 이미 저번에 논의된 사안으로 모든 도시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사항이니까. 그러나 3번으로 넘어갔을 때, 한소영의 눈동자에 돌연 요사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 3. 도시 복구를 지원해주실 사용자 분들을 모집합니다. 간단하게 적혀 있는 한 줄. 그러나 그 한 줄이 담고 있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도시 복구? 지원?” “응. 그거 때문에 다들 떠들썩하더라.” “이게 다야? 상세한 내용은?” “안 그래도 광장에서 문의를 받고 있는 중이야. 신궁이라는 놈이랑 그 누구지? 아. 임한나라는 애가 나와서 설명하던데.” 설명을 들은 한소영은 눈을 찡그렸다. 누가 나왔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내용을 말했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혜림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나도 몰라. 사람들 엄청 많았다니까? 이것도 겨우 베껴왔는데….” “분위기는 어땠는데.” “딱히 나쁘지는 않았어. 간간이 탄성도 들리고…. 아! 그러고 보니 광장에 장비 몇 개를 가지고 왔더라고.” “장비?” “응. 무기나 갑옷 등등. 장신구도 있는 것 같고. 아무튼 이번에 얻었다는 성과 중 일부인 것 같던데?” “…….” 연혜림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한소영이 갑자기 눈을 감더니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괜찮네. 아니 괜찮은 생각이야.”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상념에서 깨어난 한소영이 선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연혜림은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자기야 머리 쓰는 걸 싫어하니(죽어도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편적인 것밖에 보지 못해도, 한소영은 무언가 알아차렸으리라 기대한 것이다. “관심도 끌고, 생색도 내고, 탄력도 받겠고. 일거삼득이네. 얼마나 빠르게 작업에 들어가는지가 관건이겠지만.” “응? 하지만 다들 그러던데. 머셔너리가 상황이 급하니까 기껏 발견한 성과 출혈을 감수하고 있는 거라고.” “그럴 리가 없지. 머셔너리 장비는 북 대륙 최고 수준이야. 아마 쓸만한 것들은 따로 빼놓고, 떨어지는 것들만 내놓을걸? 그것만 해도 달려드는 사용자는 부지기수일 테니.” “헤…. 그럼 우리도 그러면 안 돼?” “응? 우리가 지원하자고?” “아니 아니. 사용자 모집. 어떤 면에서는 거주민보다 나을 거 아냐. 보니까 호응도 괜찮던데.” 직접 보고 와서 그런 걸까. 연혜림이 묘하게 부럽다는 투로 말했다. 확실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건물을 헐거나 잔해를 치우는 등, 정말 어떤 면에서는 거주민보다 사용자가 낫다. 가만히 자리에 서서 주문 한 번만 외워도 몇십 명이 달려들어야 할 일을 단번에 끝낼 수 있으니까. “안 돼.” 그러나 한소영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비 전투 사용자라면 몰라도, 전투 사용자는 고급 인력이다. 모험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이들이지 허드렛일을 하는 입장은 아니다. 그러니 전투 사용자에게 허드렛일을 시키려면 그만한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 결국에는 돈 문제랄까. 그러나 연혜림에게 들어보니 사용자들의 호응이 좋다고 한다. 그 말은 머셔너리에서 상당량의 금화를 약속했다는 소리였다. 거기다 새로운 도시에서 발견했다는 장비까지 내걸었다. 굳이 낙동강 오리 알 신세에 처한 사용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든지 혹할 법한 조건이지 않은가. ‘도대체 그동안 얼마나 쌓아놨길래….’ 한소영은 언뜻 웃음을 내비쳤다. 앞서 말했듯이 이스탄텔 로우는 회담 전부터 차곡차곡 준비해온 입장이다. 무조건 도시 하나를 가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북 대륙과 미리 수시로 연락해 거주민을 모으고 자재를 준비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워프 게이트가 활성화됐을 때 시작부터 발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와는 반대로 머셔너리는 모든 게 늦었다. 거주민도 자재도 이제 구해야 하는 입장이다. 사실 상황만 보면 아직도 늦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갑자기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추격을 시작했다. 설령 성과 발견이라는 예기치 못한 행운이 따랐다고는 해도, 모든 건 결과가 말해주는 법. 어쨌든 하나 분명한 건, 머셔너리가 아틀란타에 사활을 걸었다는 것. 그런 만큼 앞으로 어떤 방법으로든 무시무시한 속도로 추격을 시작할 것이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네.’ 한소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느닷없이 지기 싫다는 기분이 엄습했다. 이스탄텔 로우는 모든 걸 완벽히 준비한 상황인데, 이제 막 시작한 머셔너리에 추격을 허용하면 자존심이 크게 상할 것 같다. 허나 한편으로는 아주 조금,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차후 김수현이 그냥 클랜의 로드가 아닌, 한 지역의 수장으로 어떤 모습을 보일지 기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소영은 알고 있을까. 현재 김수현의 옆에는, 1회 차서 자신이 그토록 갖고 싶어하던 여인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 “시장을 만들어야 해요.” 후룩, 제갈 해솔이 양손으로 찻잔을 들이키더니 대단히 만족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흘끗 보니 조금 전까지 찻물로 가득하던 찻잔이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소문을 내서 관심을 끌겠다? 좋아요. 그저 그런 장비로 생색내서 이미지 개선을 하겠다? 좋아요. 금화를 퍼붓고 발견한 성과로 사용자들을 끌어들이겠다? 좋아요. 그런데요. 이 상황의 최종 종착지는 도시 내 시장 형성이라는 결과물을 도출해야 해요.” 조금 길게 말을 덧붙인 제갈 해솔은 탐욕 어린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앞에 놓인, 아직 한 모금밖에 마시지 않은 찻잔을 밀어주자 잡아채듯 냉큼 가져갔다. “시장 형성이라…. 나쁘게 들리지는 않는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어머. 시장 무시하세요? 도시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인데. 시장을 선점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과가 얼마나 대단한데요.” “필수 요소라는 것에는 동의해. 하지만 선점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나? 북 대륙이 있는데.” “거기는 북 대륙이죠. 아틀란타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지금이 아니라, 3개월 후를 보자는 말이에요.” 핀잔 조로 말한 제갈 해솔은 힘껏 찻잔을 들이켰다. 그득하던 찻물이 벌써 절반 가까이 사라졌다. “우선 광장의 호응은 높다고 해요. 좋은 현상이죠. 그러나 현재 시선이 집중됐다고는 해도, 금방 사그라질 관심이에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관심을 최대한 오랫동안 유지해야 해요. 그래서 시장이 필요한 거고요.” 꼴깍 목울대를 움직인 제갈 해솔이 말을 잇는다. “시장은 누가 만들자! 앞으로 여기가 시장이다! 라고 해서 생기는 게 아니에요. 서로 물물교환을 하는 것부터 자연스레 자생 및 진화 가능성이 생기기 시작해요. 홀 플레인이 완전한 게임은 아니잖아요? 마우스 클릭 한 번으로 시장이 건설 중입니다. 이런 메시지가 뜨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이 상황을 이용해 자연스럽게 시장의 생성을 유도해야죠.” “그러니까 네 말은, 도시 광장을 시장과 비슷한 상황으로 만들어 사용자들을 끌어들이겠다?” “그래요. 생각해봐요. 현재 아틀란타에 거주하는 사용자는 약 1만 5천 명. 그 중 대표 클랜과 산하 클랜 인원을 제외하면 약 8, 9천 명 정도가 남아요. 우리는 이들을 노려야 한다는 말이죠.” “흠.” 말을 듣는 와중 나는 잠깐 문을 응시했다. 계단으로부터 누군가 천천히 걸어오는 기척을 느꼈다. 잠시 후 제갈 해솔은 검지를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은 아마 보장 기간이 끝날 때까지 네 개의 외 도시를 빙글빙글 돌 거예요. 그리고 생각하겠죠. 아~. 이 도시는 조금 휑하네. 어? 이 도시는 왜 이렇게 사람이 바글바글해? 바로 거기서부터 인식의 변화를 꾀하는 거랍니다.” “그래서. 광장은 네 말대로 한다고 치고.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내가 흥미를 표하니 기분이 좋은 걸까. 아니면 고작 0년 차에 불과한 자신의 말을 들어주니 그냥 좋은 걸까. 제갈 해솔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때부터는 간단해요. 관심이 높아질수록 기대치는 커지고, 그 기대치를 충족시켜주면 자연스레 평가도 좋아지겠죠. 즉 이 도시가 얼마나 빠르게,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지 보여주면 돼요. 어차피 아틀란타에 몰빵 치기로 마음 먹으셨잖아요?” 그렇게 말한 제갈 해솔은 돌연 조금 아쉽다는 표정을 짓고서 쪽, 찻잔을 빨아들였다. 와. 벌써 다 마신 거야?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조금 아쉽기는 하네요. 들어보니 옆 동네는 진짜 준비 철저하게 했다던데. 우리도 미리 준비만 해놨다면, 아마 지금쯤….” “옆 동네?” “아. 이스탄텔 로우요. 오늘 아침에 못 보셨어요? 워프 게이트 활성화되자마자 거주민이랑 자재가 들어오는데….” “아아. 그거라면 걱정하지마.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우리도 곧 들어올 거거든. 그것도 공짜로.” “…네?” “곧 알게 될 거야.” 제갈 해솔이 의아한 기색을 비췄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실제로 머셔너리가 거주민을 모으거나 자재를 조달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이게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가장 큰 페널티였다. 하지만 믿는 구석은 있다. ‘그건 바로….’ 똑똑. “수현. 들어갈게요.” 때마침 노크 소리에 이어 문이 달칵 열렸다. 그리고 고연주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곧바로 입을 열었다. “예. 곧 가겠습니다.” “아래 개새끼들이 찾아…. 네?” “모두 개새끼라고 매도하기는 그렇지 않나요? 설마 동부만 찾아왔을 리는 없을 테고. 코란 연합 쪽에서도 찾아왔을 것 같은데.” “…….” 고연주는 흡사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을 짓더니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아요. 코란 연합에서 두 명. 그리고 동부에서는 리버스, 한, 마탑, 달밤 클랜이…. 그런데 알고 있었어요?” “뻔하죠. 이쯤이면 슬슬 기어들어오리라 예상했으니까. 그나저나 달밤에서 온 건 의외인데.” 제갈 해솔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곧 두 눈을 화들짝 뜨더니 입꼬리가 묘한 호선을 그린다. 이제야 아까 말의 의미를 알아들은 모양이다. 나는 선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얼마나 잘 짖는지, 어디 한 번 들어볼까?’ ============================ 작품 후기 ============================ 자정 연재 내용에 네 이름을 쓴다 로유진이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정체성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로유진이여 아직 동 트지 않은 조아라의 어딘가 타자 치는 소리 로유미 소리 레이드 모집하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작가의 한숨 소리 신음 소리 후회 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로유미 위에 네 이름의 흔들리는 성 정체성 위에 살아오는 로리 전쟁 살아오는 후기를 지운 기억 되살아오는 항복했던 작가의 침통한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 떨리는 부끄러움으로 하얀 화면에 키보드로 서툰 솜씨로 적는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로유진이여 만세 0698 / 0933 ---------------------------------------------- 시작이 늦었다고 앞서나가지 못하는 건 아니다. 리버스 클랜 ‘부랑자 도살자’ 김덕필. 마법의 탑 클랜 ‘타로 카드 마술사’ 선율. 달밤 클랜 ‘인형사’ 나승혜. 한(韓) 클랜 로드 성현민. 이상 동부. 신 코란 연합 대표 박환희. 산하 상인 조합의 서지환. 이상 남부. 이렇게, 동부와 남부가 찾아왔다. 그저 그런 사용자들이 아니다. 전투면 전투. 마법이면 마법. 명성이면 명성. 돈이면 돈. 어느 측면에서 보든 간에 한 명 한 명이 각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말 그대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어디 가서 행세깨나 할 수 있는 거물급 사용자들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물론 왜 찾아왔는지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다. 도시를 복구한다는 건 엄청난 투자와 매우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절대로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무리 머셔너리라고 하나, 홀로 감당하는 건 벅찰 수밖에 없다. 결국에는 도시 복구 작업은 여러 클랜이 힘을 합쳐야 하는데, 현재 서부, 남부의 경우는 산하 클랜의 도움을 받고 있고, 북부는 애초 코란을 능가하는 연합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러면 머셔너리는? 없다. 준비된 상황은 좋지 못하고 여태껏 산하 클랜도 두지 않은 입장이다. 어느 정도 머리가 돌아가는 사용자라면 이 정도 상황 파악은 해놨을 터. 허나 그렇다고 딱히 돌파구가 없는 건 아니다. 상황이 이렇다는 건, 반대로 그만큼 기회가 널렸다는 소리니까. 산하 클랜이 복구 작업에 참여하면 차후 도시 구역 일부를 약속 받는다. 그리고 해당 구역에서 나오는 수익 중 세금으로 내는 3할을 제외하고 나머지 7할을 가진다. 그 정도만 해도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다. 내 예상으로는 아마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도와달라는 말을 하는 시기를. 특히 우리와 대표 클랜을 경쟁했던 동부라면 더더욱. 그런데, 우리가 오늘 아침 광장에서 빵 터뜨렸다. 안 그래도 성과를 발견했다는 소문을 듣고 몸이 한껏 달아올랐을 텐데, 갑자기 자기들이 아닌 사용자들에게 도와달라고 하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여하튼 입장은 역전됐다. 동부의 경우 이제 남은 선택지 두 개. 하찮은 자존심으로 끝끝내 버티다 자멸의 길을 걷거나. 아니면 넙죽 굽히고 들어오거나. 이렇게 바로 찾아온 것만 봐도 어느 선택을 했는지는 알겠지마는. 그러나. 이야기를 끝내고 6명이 모여 있다는 장소에 도착한 순간, 나도 모르게 커다란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6명은 성의 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서로 옹기종기 모여 바닥에 주저앉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 앞으로, 오직 앞서 내려간 고연주만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섹시하게 꼰 다리를 까닥까닥 흔들고 있는 게, 흡사 학생을 혼내는 선생님 같은 모습이다. 세상에. 저 6명이 이런 대우를 받을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하기야 고연주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굳이 홀 플레인 내 배분(配分)을 따져보면, 현재 그림자 여왕의 서열은 가히 최고 수준이라 봐도 무방하다. 박현우나 조성호도 애처럼 취급하는데, 저 정도의 사용자들이 눈에 들어오겠는가. 그래서 지금 저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것일 테고. 잠시 후. “어머. 클랜 로드 오셨어요? 여기 앉으세요.” 나를 돌아본 고연주가 나른히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아니. 그러면서 왜 자꾸 단검을 빙글빙글 돌립니까. 사람들이 떨떠름해하잖아. 무언가 도움을 구하는 듯한 눈초리가 사방에서 쏟아진다. 나는 고연주가 앉았던 의자에 몸을 앉힌 후 6명을 천천히 훑었다. “조금 늦었네요. 미안합니다. 요즘 한창 청소 중인데, 의자가 마땅한 게 없어 거의 버렸거든요. 이 점 양해바랍니다.” “허허. 아, 아닙니다. 갑자기 찾아왔는데요. 미리 연락을 드리지 못한 점, 오히려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로 살살 눈치만 살피는가 싶더니 서지환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서지환. 신 코란 연합의 한 축을 담당하는 상인 조합의 클랜 로드. 저번 구 코란 연합을 무너뜨렸을 때 발 빠르게 움직여 살아남았다. 아니. 살려줬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려나? “에…. 우선…. 머셔너리 로드의 생환을 진심으로….” “아. 축하나 환영 인사는 괜찮습니다. 하도 많이 들었더니 딱지가 앉을 지경이라서요.” 서지환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으나 나는 바로 머리를 흔들었다. 새롭지 못한 말은 넘어가고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뜻이었다. 한편으로는 경고이기도 했다. 괜히 아는 사이를 들먹여 어줍잖게 인정에 호소하지 말라는. 물론 남부보다는 동부를 향한 경고지만. 문득 서지환 옆에 앉은 박환희가 눈에 밟혔다. 머쓱해 하는 서지환을 보며 서너 번 눈을 깜빡이더니 갑자기 활짝 웃는다. 그러고 보니 얘도 참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그 순간 박환희가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돌아본다. “오랜만이에요. 형님.” …이놈이? “누가….” “요즘 많이 바쁘시죠?” 그렇게 말한 박환희는 돌연 스리슬쩍 옆을 흘겼다. 따라 시선을 돌리자 살짝 놀란 빛을 띠고 있는 동부 인사들이 보였다. 오직 성현민만이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자 누구 멋대로 네 형님이냐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다가 도로 쑥 내려갔다. 그러니까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동부를 압박하고 싶다는 건가? 나를 통해서? ‘하기야 지역이 다르니 경쟁 관계라고 볼 수 있겠지.’ 그렇다면 이 상황에 한해서는 나한테도 나쁠 건 없다. 나는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청년을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뭐, 꽤 바쁘지. 그런데?” “에이. 모른 체하시기는. 어차피 도시 복구하는 데 도움이 필요하시잖아요. 그래서 우리 남부! 신 코란 연합에서 나름 준비를 해놨다는 말이죠.” 박환희는 특히 남부라는 말을 강조했다. 나는 싱겁게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읊어봐.” “예. 우선 우리 수에서는 800만 금화를 준비했습니다.” 흠. 800만 금화라. 적은 양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대치에는 미치지 못한다. 한 구역만 할당 받아도 차후 들어올 이득이 얼마인데, 고작 이 정도로 입을 씻겠다는 건 진정 도둑놈 심보였다. 허나 이놈이 그걸 모를 리가 없다. 또한 신 코란 연합은 총 세 개의 클랜으로 구성돼있고, 남은 두 곳은 거대한 상인 클랜이니 아직 잣대를 내리기에는 이르지 않을까. “그, 그리고! 우리 상인 조합과 백화에서는 자재를 조달해드리겠습니다! 그것도 무한정으로 말이죠!” 그러자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 서지환이 곧바로 외쳤다. 자재 조달이라.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자재 조달을 무한정으로 해주시겠다고요?” “예, 예! 그럼요! 우리 코란의 상인들이 이 도시 복구에 필요한 자재는 몽땅 책임지고 지원하겠습니다!” 자신 있다는 듯 가슴을 탕탕 치는 서지환. 어찌 보면 오버한다고 볼 수는 있지만, 그만큼 이번 기회를 놓치기 싫다는 소리였다. 서지환의 실상은 굉장히 수완이 좋은 사용자다. 비 전투 사용자에 해당하는 상인이 이 자리까지 올랐다는 사실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미 속에서 모든 계산이 끝났으리라. 아무튼 이 정도 조건이면 상당히 괜찮은 수준이다. 허세도 아니었다. 명색이 상인 클랜이니만큼 손쉽게 자재를 구할 수 있는 네트워크도 구축돼있을 것이고, 그동안 창고에 쌓아둔 양도 적잖이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가진 페널티 중 하나를 껴안아 준다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으랴. “좋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자세한 얘기는 우리 쪽 클랜원과 하시죠. 고연주가 안내해줄 겁니다.” 서지환이 머리를 번쩍 들었다. ‘벌써?’ 라고 말하는 듯한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어차피 신 코란 연합과는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이들 정도면 산하 클랜으로 들일만하지.’ 왜냐면 사실상 변하는 건 거의 없으니까. 저번에 내 압박으로 박환희를 대표로 세운 이후, 공식적으로 산하 클랜이 되겠다는 절차를 밟는 것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눈치 빠른 박환희는 내 의도를 알아차렸고, 그래서 이야기를 빠르게 진행시킨 것이다. 박환희는 한 번 싱긋 웃더니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서지환을 이끌고 고연주를 따라 사라졌다. 그렇게 홀에는 나와 네 명만이 남았다. 남부와 이야기하는 동안은 의도적으로 무시했지만, 나는 비로소 시선을 돌려 한 명 한 명 시선을 맞췄다. 눈에 들어오는 표정이 하나같이 좌불안석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감도나 싶었으나 김덕필이 턱을 긁으며 슬쩍 시선을 올렸다. “저…. 머셔너리 로드. 우선은 말이야. 우리가….” “잠시만요.” 그러한 찰나, 여태껏 조용히 있던 성현민이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자연스레 나를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성현민은 내가 아닌 다른 세 명을 보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다른 세 분은 잠시 자리를 비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뭐, 뭐라고?” 김덕필이 갑자기 무슨 말이냐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성현민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냥 저 혼자 이야기하겠습니다.” “왜, 왜? 왜 갑자기!” “그게 더 나을 것 같으니까요.” “어이, 성현민!” “어차피 여차하면 저 혼자 총대 매는 걸로 합의하고 온 거 아닙니까! 그냥 제가 이야기하겠습니다!” “야, 야!” 드물게도 성현민이 목소리를 높이는 동시 김덕필이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선율은 지그시 눈을 감았고, 나승혜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나와 성현민을 번갈아 쳐다본다. …총대라. 그렇다는 말이지? “그냥 그렇게 하시죠. 저도 중구난방으로 듣는 것 보다는, 총대 맨 한 명한테 듣는 게 더 편하니까요.” 나는 킬킬 웃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내분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고작 싸움 구경이나 하려고 여기 온 게 아니니까. 그러자 어쩔 수 없다고 여긴 걸까. 잠시 후 선율은 스르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숙이더니 씩씩 숨을 몰아 쉬는 김덕필을 억지로 잡아 끌었다. 나승혜는 여전히 고개만 번갈아 돌리다가, 후다닥 일어나 선율을 따라 나섰다. 이윽고 홀에는 이제 나와 성현민 둘만이 남게 되었다. “…….” 기껏 세 명이 나갔음에도 성현민은 애꿎은 바닥만 노려보고 있었다. 예전의 차분하고 현명한 빛은 온데간데없고, 굉장히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다. 좋은 표정이다. 은혜는 바다같이. 복수는 칼날같이. 우정민이 즐겨 사용하는 말로, 나 또한 좋아하는 격언이다. 지금이야 너무 바빠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그렇지, 나는 동부가 우리에게 한 행동을 절대로 좌시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 에둘러 경고를 날린 것이고. 아마 박환희처럼 친근하게 웃으며 은근슬쩍 덮으려 했다면, 그대로 뒤엎지 않았을까. …아무튼. 그나저나 성현민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일대일 상황을 만든 걸까? 서서히 엄습해오는 흥미로운 기분에 나는 연초를 하나 꺼내 물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 모금 한 모금 빨아들인 연초가 거의 끝까지 타들어 갈 즈음. “그럼 동부의 조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돌연 가라앉은 음성이 귓가로 흘러들었다. 성현민은 더 이상 머리를 숙이고 있지 않았다. 서서히 고개를 들어 비장한 기운이 감도는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본다. 나는 마음대로 하라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예. 어디 한 번 해보세요.” “머셔너리 로드도 아시다시피 동부는 대표 클랜의 자리를 노렸고, 그에 따른 준비를 어느 정도….” “사족 싫어합니다.” “2500명의 거주민을 모아놨습니다. 전원 도시 복구 작업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이들이며, 통신 한 번이면 바로 투입이 가능합니다.” 한 번 흔들어보려는 의도로 말을 끊었는데, 성현민은 낯빛도 변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나는 팔짱을 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현대에 건축과 관련한 일을 한 사용자들도 선별해놨습니다. 전문 인력입니다.” “그리고요?” “거주민은 물론, 복구에 투입되는 동부 측 사용자의 임금을 모두 부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요?” “동부의 각 클랜에서 자금을 차출했습니다. 약 6000만 금화 가량 됩니다.” “그리고요?” “이건 많지는 않지만, 미리 모아둔 자재들도 모조리 넘겨드리겠습니다.” “그리고요?” 빠르게 말이 오고 간다. 계속 이어지는 되물음에 성현민은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동부의 주요 인사들이 공식 석상에 서겠습니다. 머셔너리를 비방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사과하겠습니다. 원하신다면, 머셔너리 클랜원 한 명 한 명을 찾아가 고개를 숙이겠습니다.” “흠. 그리고요.” “피해 보상 또한 성심껏 준비하겠습니다.” “…….” 거기까지 들은 순간,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입장이 입장이니만큼 나름 발버둥을 치리라 생각했는데, 이건 또 의외였다. 심지어 나조차도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더 이상 굽히려야 굽힐 허리도 없다. 한때 2강이라 불리며 남부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동부가 모든 걸 내려놓았다. 나는 연초를 떨군 후,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와. 이건 좀 놀랍네요. 아니. 정말 놀랐습니다.” “…….” “한 번 들어나 봅시다. 이 정도까지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건.” 그 순간. “그건…. 말입니다.” 아주 잠깐이기는 했지만 성현민의 눈동자에 갈등의 빛이 서렸다.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듯한 표정. 그러나 이왕 내친 김이라고 생각한 걸까. “…….” 문득, 덜덜 떨리는 목울대가 꿀꺽 움직이는가 싶더니. “저는.” 마침내 성현민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우리 동부가….” 그리고. “…구 코란 연합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토해내기라도 하듯,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0699 / 0933 ---------------------------------------------- 시작이 늦었다고 앞서나가지 못하는 건 아니다. 성현민은 말을 하면서 속으로 아차 싶었다. 어찌 보면 오해의 여지가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거의 100% 확신하고는 있었지만…. 어쨌든 김수현이 자신을 의심하면 끝장이다. 그렇게 생각한 성현민은 문득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김수현이 흥미롭다는 듯 턱을 들자 성현민은 눈을 깔아 내렸다. “흥미로운 말씀을 하시는군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말. 성현민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사용자가 자존심을 세우는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알고 있고, 애초 그런 거 챙기는 성격도 아니었다. 필요할 때는 확실히 굽힌다. 김수현은 시작부터 확실하게 경고를 날렸고 성현민은 받아들였다. 고요한 홀에 킬킬 웃는 소리가 이어졌다. “보아하니 조성호의 빈 자리를 한 번 차지해보려고 한 것 같은데….” 김수현이 은근한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아쉽지 않습니까? 현재 이 상황이요.” 성현민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요. 2년 전에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으니까요.” 말을 뱉은 순간 성현민은 속이 뜨끔해지는 걸 느꼈다. 왠지 크나큰 실수를 저지른 것만 같았다. 허나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현재 동부는 협상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아니. 그냥 까놓고 말해서 구걸하러 온 입장이다. 살려만 달라고. 동부를 망가트리지 말아 달라고. 성현민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게 어렵다는 말을 새삼 실감하고 있었다. 그나마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은 하나. 무조건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거짓이 섞이는 순간 상대방이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돼버린다.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네요. 아까 총대라는 말은 뭡니까?” “사용자 김덕필은 흔들자는 계획에는 극렬히 반대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애초 참여도 하지 않았고, 머셔너리 로드가 나타났을 때는 오히려 고소해 했습니다. 마탑 로드의 경우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자신은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그냥 기회를 보면서 방관했다고 보시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호. 그러면 한 로드는?” “저는 두 사용자보다는 직접적으로 참여한 입장입니다. 계획을 발의하지는 않았으나 구체화하는 데 일조했고, 이후 여러 행동에도 가담했습니다.” 말을 마치고 나서 성현민은 김수현의 눈치를 살폈다. 김수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계획을 발의하지는 않았다…. 그러면 첫 발의는 누가 했습니까?” “직접적인 주동자들은 조성호의 측근들입니다. 원하신다면, 직간접적으로 참가한 전원의 명단을 넘기겠습니다. 물론 저를 포함해서요.” 성현민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사실 거의 반사적으로 나온 대답이었다. 김수현이 두 눈이 이채를 띠었다. “흠…. 흐음….”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가 반대쪽으로 살짝 갸웃한다. 마치 무언가 재는 듯한 표정. 그걸 보는 성현민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저 사내는 지금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잠시 후. 흡사 잠자기라도 하듯 가늘게 눈을 뜨고 있던 김수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실 머셔너리는 산하 클랜을 수십 개까지 둘 생각은 없거든요. 현재는 말이죠.” “…….” “물론 이건 우리 입장이고. 그러는 동부야말로 우리 산하로 들어오는 것에 거부감이 없겠습니까?” “그…!” ‘그렇습니다.’ 라고 말하려던 성현민은 간신히 입을 닫았다. 여기서 해야 하는 말은 무조건적인 ‘Yes.’ 가 아니다. 아까 묻지 않았는가. 아쉽지 않냐고. 말인즉 김수현은 성현민에게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상황이 이렇다고 해서 마냥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있듯이요. 어쩌면 예전보다 더 올라갈 수 있는, 제 가치를 입증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고 싶습니다.” 길게 돌려 말하기는 했으나 결국에는 이 소리였다. 나는 쓸모 있는 사용자다. 가치를 입증해 보이겠으니 기회를 달라. “그래요?” 히죽. 김수현은 슬쩍 웃어 보였다. 그리고 느릿하게 의자에서 일어섰다. “좋네요.” “예?” 성현민이 머리를 번쩍 들었다. 김수현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아. 말씀해주신 지원 사항들이 아주 마음에 들어요.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다행이네요. 받아주시기만 한다면,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래요. 이렇게까지 도와주신다는데 제가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안 그래도 도시 복구 작업에 난항이 많았는데, 정말로 고맙습니다. 이건 진심이에요.”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아무튼, 우선은 도시 복구에 집중하는 걸로 하고. 그리고 산하로 들어오는 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시죠. 분명히 기회가 있을 겁니다.” “예. 그러시죠.” 성현민은 그제야 속으로 안도했다. 확답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추후 기회가 있을 거라는 말에 비추어보면, 너희가 하는 걸 보고 결정하겠다. 이렇게 해석할 수는 있다. 어쨌든 여지를 남겼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방문은 성과가 있는 셈이다. 그렇게 생각한 성현민이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였다. “그런데 아까 말씀하신 명단 말입니다.” 갑자기 성현민의 온몸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느새 김수현이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윽고 김수현이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어 성현민과 눈높이를 맞췄다. “과연 누가 누가 적혀 있을지 참 궁금한데.” 문득 김수현이 성현민의 어깨를 짚었다. 이어서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얼굴이 더욱 가까워졌다. 김수현은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성현민의 속에서는 자연스레 긴장감이 샘솟았다. 그리고. “혹시 명단에 적을 사용자 중에….” 귓가를 간질이는 차갑게 흐리는 음성이 들려온 순간. “친한 사람, 많습니까?” 성현민은, 전신에 소름이 쫙 돋는 걸 느꼈다. * “응? 헐?” “승윤아 왜? 어서 광장으로 가자니까. 오늘부터 일하기로 했잖아.” “잠깐만. 오빠. 저거 봐봐.” “음?” 오빠라 불린 사내가 돌아보자 하승윤이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가리키는 방향에는 구멍 뚫린 터널 하나가 있었다. 두 남녀는 지금 외 도시 남쪽에 있고, 터널의 모양은 둥그런 사선이 아닌 번듯한 직선으로 나 있었다. 말인즉 다른 외 도시가 아닌, 내 도시와 이어지는 터널이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내 도시에는 워프 게이트가 있다. “어…. 어…?” 터널로 시선을 돌린 사내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통로에서 엄청난 인파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중구난방으로 나오는 게 아닌, 사용자의 감독하 질서 정연하게 나오고 있었다. 생김새도 그렇고, 등에 하나씩 커다란 짐을 짊어 맨 것으로 보아 거주민이 분명했다. 갑작스러운 인파에 놀랐는지 하승윤이 입을 뻐끔거렸다. “뭐, 뭐야? 갑자기?” “모, 몰라. 우리가 다른 도시에 와 있나?” 사내는 황급히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남쪽 맞는데.” 라고 중얼거리며 머리를 갸우뚱했다. 비단 두 명만 그러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인근 사용자 모두가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거주민들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계속해서 흘러나오던 인파도 서서히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수는 실로 어마어마해 거의 3000명을 넘을 수준이었다. 하승윤은 어디론가 걸어가는 거주민들을 유심히 보다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신음했다. “마, 맙소사! 저거 그거 아냐? 마력석이잖아!” “응? 마, 마력석?” “맞아. 확실해. 와~. 어떻게 마력석이 저렇게나 많이…. 저거 엄청 비쌀 텐데. 설마 자재로 쓰려는 건가?” “이쪽 분들은 저를 따라오십니다! 광장으로 가겠습니다!” 그때였다. 하승윤이 부럽다는 투로 끙끙 앓는 동시, 사용자로 보이는 사내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마력석을 짊어진 일부 거주민들이 사내를 따라 걸어갔다. 이윽고 인파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두 남녀는 무언가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당연히 광장이었다. 둘 다 오늘부터 도시 복구 작업에 지원할 예정이라 어차피 가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그렇게 광장에 도착한 순간 사내와 여인은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비록 낡기는 했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던 광장이 산산이 파헤쳐져 있다. 놀란 숨을 내쉬며 둘러본 하승윤은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수십 명의 사용자를 볼 수 있었다. 모두 로브를 걸친 것으로 보아 마법사인 모양인데, 각자가 들고 있는 지팡이에서는 형형색색의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력 냄새가 진한데. 폭격이라도 했나 봐.” 사내가 코를 쓱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거주민들이 도착하자 마법사들이 물러나고, 그 자리를 자재들이 대신하기 시작했다. 사내는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차곡차곡 쌓이는 자재들이 광장을 재건할 자재로 쓰인다는 사실을. 세상에. 그 귀하디 귀한 마력석이 한낱 자재로 쓰인다니! “아, 아까워…. 그런데 대단해….” 하승윤이 안타까움과 경이가 섞인 눈초리로 광장을 응시했다. 어느덧 광장의 중앙에는, 머리에 ‘안전 제일’ 이라 적힌 모자를 눌러쓴 사내가 작업을 시작한다는 말을 힘찬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흥. 0700 / 0933 ---------------------------------------------- 고맙네. 그리고 미안하네. 머셔너리 클랜의 약진! 남쪽 외 도시에 생겨난 변화는 입 소문을 타고 널리 퍼졌다. 시시콜콜한 사정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 사용자들의 입을 거쳤다. 애초 모든 도시가 통로로 이어져 있는 터라 아틀란타 구석구석까지 미치는데 며칠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특히 광장을 마력석으로 재건한다는 소문은 아틀란타 내 모든 마법사의 이목을 끌었다. 거듭 말하지만 마력석은 매우, 대단히 가치가 높은 물건이다. 다방면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건 둘째치고서 라도 흔하게 널린 게 아니었다. 매물도 없는 편이라 가격도 비싸다. 아마 1g당 최소 금화 두 개와 거래된다지? 특히 광장에 공지한 사용자 모집 사항은 머셔너리 클랜의 격을 한층 올려주었다. 첫 모집부터 상당한 금화와 성과 분배라는 어마어마한 공약을 걸었으나 너무 조건이 좋으면 되레 의구심을 가지기 마련이다. 사람, 아니 사용자라면 한 번쯤은 가질 법한 의심이었다. 그러나 복구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채 며칠도 지나지 않아, 그러한 의심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 조건은 정말로 좋은데, 정말 공약대로 이행될까? 정말로 이행됐다. 작업에 참여한 사용자는 약속한 임금은 물론, 각종 시간 외 수당까지 당일 기준으로 철저하게 지급받았다. - 이런저런 이유로 임금을 깎는 게 아닐까? 그런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개인 참여도에 따른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법사의 주문 한 소절까지도 상세하게 계산해 모조리 보수로 지급했다. - 돈을 많이 준다는 이유로 필요 이상의 노동을 시키는 건 아닐까? 그런 것도 없었다. 애초 합의한 근무 시간이 끝나면 계약은 확실하게 종료된다. 이후 근무를 끝낼지 연장을 할지는 전적으로 사용자의 선택에 달렸다. 이 모든 것들이 며칠도 지나지 않아 아틀란타 구석까지 퍼졌고, 사용자들의 호응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가장 고임금을 받는 마법사의 경우, 시간당 평균 금화 두 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니까 생각해보라. 오전에 탐험을 떠났다가 오후에 되돌아와서, 한 5시간만 일해도 번쩍거리는 금화 열 개가 손에 떨어진다. 그러면 한 달을 일 하면 300 금화. 권리 보장 기간이 끝날 때까지 일하면 900개의 금화가 굴러들어오는 것이다. 그 정도면 캐러밴 기준으로 소박, 개인을 기준으로 중박으로 볼 수 있는 금액이다. 세 달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면 중박의 성과를 올린 것과 진배없게 되는 셈인데, 과연 누가 마다할 수 있으랴. 이 정도면 어디서 구할래야 구할 수 없는 꿀 아르바이트인데. 사용자들의 호응이 폭발적으로 높아지자 머셔너리 클랜도 갑자기 분주해졌다. 누구 하나 예외 없이 하루하루 바쁘게 뛰어다녔다. 가끔 몇 명이 너무 피곤하다며 불만을 내비쳤으나 어디까지나 말뿐이었다. 힘들다 말하면서도 정작 얼굴은 웃고 있었다. 김수현의 생환 이후 모든 근심과 걱정이 해결됐고, 어렵던 일은 돛을 단 배처럼 순항에 순항을 거듭했다. 거기다 오며 가며 듣는 소속 클랜의 호평은 절로 어깨를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오죽하면 최근 클랜원들 사이로 ‘이걸 클랜 로드가?’ 라는 우스갯소리가 유행처럼 번질 정도였다. 남쪽 외 도시는 갑자기 불어온 새로운 바람에 흥분하며 연일 들끓었다. 그러나 막상 김수현은 차분했다. 필요 이상으로 들뜨지 않았다. 클랜원들처럼 바쁘게 뛰어다니는 건 아니었지만, 모든 일을 두루 살피며 도시 복구 작업에 오롯이 집중했다. 그렇게 도시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 “오빠! 빨리요! 우리 빨리 가요!” 화창한 아침. 주변서 분주한 외침과 시끄러운 공사 소음이 한창 들려오는 가운데, 거리로 달려나간 김한별이 빙글 몸을 돌려 외쳤다. 그러나 계속 느긋하게 걸어가자 자못 갑갑한지 양손을 모아 한 번 더 빨리 오라고 소리쳤다. 거참. 그냥 천천히 좀 가지. 가면서 복구 현황도 구경하고 말이야. 늦게 간다고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워프 게이트로 가면 금방이잖아. 허나 김한별은 마음이 급한지 발을 동동 구르며 빨리 오기를 종용했다. 평소의 성격에 비추어보면 보기 드문 행동이다. 하지만 나는 이해하기로 했다. 왜냐면 오늘은 북 대륙으로 가는 날이니까. 지옥에서 돌아온 이후, 임한나는 내게 북 대륙으로 가볼 것을 권했다. 물론 살아 돌아온 이상 한 번쯤 가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때 뉘앙스는 내가 없는 동안 모종의 사정이 있음을 암시했다. 그러니까 그냥 얼굴만 비추러 가는 게 아닌, 무언가 가봐야 할 일이 생겼다는 기분이랄까. 큰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화급을 다투는 일이라면 진작 보고를 받았을 테니까. 어쨌든 정하연의 말대로 나는 우선 도시 복구에 집중하는 걸 선택했다. 그리고 작업에 어느 정도 탄력이 붙은 지금, 잠깐의 짬을 내 북 대륙으로 가보는 것이다. 겸사겸사 마르도 보고 말이지. 혼자 가는 건 아니었다. 내가 북 대륙으로 간다는 사실은 또 어떻게 알았는지 김한별이 자기도 가고 싶다고 요청했다. 하기야 나와 같이 돌아온 처지인 만큼 거부할 이유는 없어 가볍게 허락해주기는 했다. 그러나 오늘 아침 성 앞에서 만났을 때는 조금 놀랐는데, 왜냐면 외모나 옷차림에 상당한 힘을 주고 나왔기 때문이다. 반짝거리는 예쁜 귀걸이는 애교라고 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상체는 부드럽고 얇은 천을 걸치고 붉은 허리끈을 꽉 묶어 늘씬한 허리를 강조했다. 하체는 검은빛 얇은 망사 스타킹을 신어 훤칠한 다리를 관능적으로 드러냈다. 특히 아주 살짝 노출된, 우윳빛 살결이 흐르는 허벅지 윗부분이 매력 포인트였다. 그뿐일까. 알게 모르게 은은한 사향도 풍기는데, 아무래도 꽤 신이 난 모양이다. 예전 허름한 로브 하나만 걸쳤을 적과 비교해보면 그야말로 파격적인 옷차림이다. “오빠! 빨리 가자니까요! 지금 일부러 늦게 오시는 거죠?” “알았어. 알았다고. 왜 이렇게 급해.” “정말. 자꾸 그러시면 저 먼저 갈 거예요?” “…….” …그래. 그렇게나 빨리 가고 싶다는 말이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빨리 오라고 손짓하던 김한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천천히 무릎을 굽히고 호흡을 추슬렀다. 이어서 급격히 마력을 일으키는 동시에 궁신탄영을 발동했다. 퉁, 몸이 뜨는 느낌에 이어 삽시간에 김한별을 지나칠 수 있었다. “가자. 빨리.” 옆을 지나치면서 한 마디 던진 후, 나는 전력으로 거리를 달렸다. 김한별은 멍한 빛으로 나를 돌아보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나는 민첩 능력치가 98 포인트인 근접 계열이고, 김한별은 마법사다. 하하하. 이윽고 탁탁탁탁! 죽자사자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 오빠! 같이 가요!” 채 10초도 지나지 않아 애절한 등 뒤로 외침이 터졌다. 왜? 빨리 가고 싶다며? 나는 들은 체 만 체 계속 달려 통로 안으로 쏙 들어갔다. “오빠, 오빠…! 야! 이 바보 멍청이 오빠야!” 응…? * 한바탕 소동이 있기는 했지만 나는 무사히 통로를 지나 내 도시 워프 게이트로 도달할 수 있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워프 게이트 앞에서 시침 뚝 떼고 기다리고 있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늦게 온 김한별을 보고 빙긋 웃으며 ‘왔어? 많이 늦었네.’ 까지 말했다면 완벽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렁그렁한 눈으로 비척비척 걸어오는 김한별을 발견한 순간, 계획을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나는 사용자와 거주민을 막론하고 엄청난 시선을 받아야 했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천하의 나쁜 놈이 돼버린 기분을 느꼈다. 결국에는 달려가 김한별의 손을 잡아준 후 황급히 워프 게이트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북 대륙으로 이동을 완료한 이후. 워프 게이트 인근 북적거리는 인파를 헤치고 나오고 나서, 나는 비로소 모니카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도시의 거리는 여전했다. 조금 한산한 것만 제외하면 딱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어차피 특별한 무언가를 기대한 것도 아니었고, 그냥 감회가 새롭다는 기분이 들었다. “…가자.” 잠시 도시를 구경하다가 클랜 하우스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조금 낯설기는 했지만 이미 수천 번은 들락거린 거리다. 머리는 여전히 길을 기억하고 있어 우리는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클랜 로드!” 클랜 하우스 정문에는 이미 여러 클랜원이 마중 나와 있었다. 어제 통신용 구슬로 연락할 때 환영 인사는 절대로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말 한 번 지지리도 안 듣는다. 물론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고, 사실 고맙기는 했다. 나는 활짝 웃으며 나를 맞이하는 조승우와 손을 맞잡았다. “정문까지 나오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이러면 정말로 부담스럽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 “어제 연락하지 않았나요?” “하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죠? 아무튼, 들어오시죠. 하하하.” 물음에 물음으로 받아친 조승우는 손수 정문을 열어 안내했다. 나는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머리를 갸웃했다. 무언가 허전하다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마르는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유미나 도도는요?” “아.” 조승우가 몸을 멈칫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안타깝지만, 지금 클랜 하우스에는 없습니다.” “흠. 없다? 어디 밖에 나가기라도 했나요?” “예. 아마 이르면 오늘 밤, 늦으면 내일 오전 중에는 돌아올 겁니다.” “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연락을 조금 일찍 주셨으면 좋았을 겁니다. 사실 연락도 어제 처음 주신 거 아닙니까?” 조승우가 설명해주겠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나는 멍하니 머리를 끄덕였다. “사실 어디로 가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물어보니 마르는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어디선가 기도를 하는 것 같더군요. 클랜 로드가 살아 돌아오기를 말이죠.”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제가 생환한 사실은 이미….” “예. 들었죠. 바로 말해주기도 했고요. 그런데 믿지를 않습니다.” “아니. 왜요?” “클랜 로드께서 직접 연락한 것도 아니거니와…. 보고 싶다고, 자신이 직접 가서 보겠다고 해도 우리가 가지 못하게 막았으니까요. 사실 현재 아틀란타로의 이동은 금지돼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건데, 그걸 어른들이 자신을 위해서 거짓말하는 거로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아니. 그런 사정이 있었다면 저한테 연락을….” 조심스레 말끝을 흐리자 조승우가 지그시 나를 응시했다. “그러려고 했는데 많이 바쁘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머셔너리를 둘러싼 아틀란타의 상황도 상당히 좋지 않다는 말도 들었고요. 괜한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았고, 또 상황이 정리되는 즉시 오시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말은 이렇게 하나 조승우의 음성에는 ‘정말 너무하십니다.’ 라고 말하는 듯한 어조가 깔려 있었다. 무언가 할 말이 없다는 기분에 나는 입맛을 쩝 다셨다. 조승우는 가볍게 숨을 흘렸다. “어쨌든, 너무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저도 처음에는 무척 걱정했는데, 항상 상처 하나 없이 돌아오니까요. 그러고 보니 마르도 정말 많이 변했습니다. 아마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그렇군요….” 나는 천천히 대꾸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클랜 하우스 또한 예전 그대로였다. 네모 반듯한 건물과 오른쪽에 지어진 별관, 그리고 입구부터 건물까지 이어지는 아름다운 정원…. 작은 돌 연못…. ‘…어?’ 그러나 왼쪽 끝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나는 눈동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는걸 느꼈다. “자~. 그럼 클랜 로드. 우선은….” 조승우는 무언가 모르게 어색한 몸놀림으로 내가 보는 방향을 가렸지만, 곧 멈칫했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유심히 나를 바라보던 조승우는 돌연 쓰게 웃었다. “…이런. 벌써 보셨군요.” 조승우가 몸을 비켰다. 그러자 다시 보이는 정원의 풍경에 덩그러니 놓인 두 개의 무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마르나 영수들은 그렇다고 치고.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또 한 명이 보이지 않는다. “할아버지는요…?” 김한별도 무덤을 본 걸까. 살짝 떨리는 음성이 조승우를 향한다. 갑자기 장내가 조용해졌다. “음….” 조승우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까만 해도 활기차던 눈동자가 아래로 가라앉고 입에서는 끓는 듯한 신음만이 흘러나온다. 무언가 심히 갈등하는 것 같은 기색이 역력했다. “실은….” 하지만 곧 결정을 내린 듯, 결연히 머리를 들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선 클랜 로드께서는 집무실로 가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조승우는 곧바로 내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한별 씨도요. 숙소로 가보세요. 어서.” * 조승우는 4층 집무실로 가보라고 말했다.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지만, 나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 4층에 도착했다. 그리고 잠깐의 심호흡을 거친 후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방 내부는 깨끗했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청소를 잘해놨는지 벽면에 먼지 하나 보이지 않는다. 서재고 소파고 모두 그대로였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자 문득 눈에 밟히는 게 있었다. 텅 빈 책상에는 창문을 투과해 들어온 빛이 한 가득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 빛의 중앙에는 빛 바랜 기록 하나가 쓸쓸하게 놓여 있었다. 나는 멍하니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기분으로 기록을 들고 조심스레 열었다. 잠시 후, 한 글자 한 글자 정성 들여 쓴 게 분명한 글자가 빼곡하게 눈에 들어왔다. …우선은 읽어볼까. 『김수현…. 클랜 로드…. 으음. 어떻게 적어야 할지 모르겠군. 자네. 자네에게. 그래. 이게 낫겠어. 자네에게. 자네가 지금 이걸 읽고 있다는 건, 내가 치밀어 오르는 창피함을 참고 이 기록을 찢지 않아서겠지. 한편으로는 자네가 무탈하게 돌아왔다는 소리기도 할 테고. 비록 직접 보면서 말 못하는 점은 아쉬우나, 그래도 여기 몇 자 남길 수는 있겠군. 우선은 축하하네. 자네가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야. 사실은 이 기록을 남겨야하나 말아야하나, 깃펜을 들기 전 며칠 동안 심사숙고를 했어. 그냥 조용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으나, 아무래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 말일세. 결국에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깃펜을 들게 됐으이. 아마 눈치 빠른 자네라면 오면서 봤을 거라 생각하네. 정원에 있는 두 개의 무덤을 말이야. 아니면 조승우가 벌써 말했을 수도 있고. 뭐, 우선 잘못 본 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군. 음…. 아. 여기서 어떻게 말을 할까 고민하다 보니, 갑자기 3년 전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르는군. 그러고 보니 참 신기했어. 복장은 이게 갓 아카데미를 수료한 복장인데, 왜 그렇게 관록이 느껴졌는지. 그때 조금 틱틱거렸던 건 미안하네. 사실 자네가 오기 전 찾아온 사용자와 대판 싸운 후였거든. 그래서 나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대했던 것 같아. 음? 왜 갑자기 고해성사를 하는 기분이 드는 겐가? 하하하. 아무튼, 사실 그때의 나는 원래 생에 큰 미련이 없는 상태였네. 그냥 도시 한구석에서 조용하게 여생을 마무리할 생각이었지.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자네라는 사용자에게 관심이 가더군. 아니나 다를까. 몇 달 후, 자네는 번듯한 한 클랜의 로드가 되어 돌아오더라고. 고작 몇 달 만에 말일세. 그리고 볼 것 없는 늙은이에게 클랜 가입 권유까지.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때 처음에 거절하고 후회 좀 했네. 흠흠. 그래서 그랬던 걸까? 자네가 내가 흘리듯이 한 말을 잊지 않고 정말 한별이를 데리고 와주었을 때, 나는 무척 기뻤어. 공교롭게도 덕분에 부랑자의 습격에서 살아남을 수도 있었지. 아마 그때부터 나한테도 새로운 인연이 찾아오고, 시작되었던 것 같아. 사실, 자네가 어떤 생각으로 나를 데려왔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네. 아마 자네는 서운하게 여겼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군. 기껏 데려왔는데, 하는 건 없고 밥이나 축내고 있으니 말이야. 허허. 물론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는 있었겠지. 허나 이해해주게. 나는 나날이 발전하는 머셔너리 클랜을 보면서, 그냥 한 걸음 물러난 채 지켜보는 늙은이로 남고 싶었네. 가진 거라고는 나이와 늙어버린 몸뚱이밖에 없는데, 그걸 이용해서 굳이 설자리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거든. 여하튼 자네 생각은 잘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자네는 내게 아주 잘해주었네. 일선에 나서기를 바라지도 않고, 그냥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게 해주었지. 어떤 이는 뒷방 늙은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아주 만족해. 원하는 대로 조용하게 보냈으니까. 으음…. 그리고 이건 아까 말하려던 건데. 뭐, 내 몸에 관한 사정은 따로 말하지 않겠네. 늙은이 가슴에 담은 이야기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어차피 추억은 진작 가슴에 새겼고, 이제는 천천히 갈무리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고 있거든. 그러니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면 좋겠어. 언젠가 세월은 가고, 백발은 오네.(자네도 50년, 아니 40년만 더 살아보게. 그럼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야.) 이미 가버린 청춘을 우수로 막지 못했는데, 오는 백발을 어찌 좌수로 막을 수 있겠나. 아무튼, 다른 이들한테는 내가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어. 안 그대로 바쁠 텐데, 괜히 이것저것 신경 써서 뭐하겠나. 아. 그리고 한별이한테 잘 좀 대해주게. 그런 눈치라고는 밥 말아 먹은 자네에게 무얼 기대하는 건 요원하겠지만…. 쩝. 아쉽지만 늙은이의 참견은 여기까지만 하겠네. 왜냐면 조금 전부터 자꾸만 눈이 감겨오거든. 후. 막상 적기 시작할 때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막상 적고 보니 횡설수설한 기분이 드는군. 여하튼 그냥 늙은이 하나 갔다고 여기고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이미 먼저 가버린 친구가 있으니 적어도 쓸쓸하지는 않을 것 같으이.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다면, 그냥 적당한 무덤 하나만 남겨주었으면 좋겠네. 그 친구 옆에 말이야. 그래도 눈비는 막아주고 몸 편히 누울 집 하나는 있어야지 않겠는가. 물론 조금 춥기야 하겠지만, 그 친구와 서로 등 비비며 견뎌볼 생각이네. 겨울 지나면 봄 오네. 그럼 그저 가끔 생각나면 둘러줄 정도의 관심만 남아 있기를 바라며, 이만 줄이겠네. 그동안…. 정말 고마웠네. 그리고 이렇게 말없이 가버려서 미안하네. 부디 자네가 홀 플레인에서 뜻한 바를 이루기를 바라며. 이만성.』 ============================ 작품 후기 ============================ 어느새 700회네요. 사실 700회는 00시 00분에 올리고 싶었는데, 보시다시피 내용이 조금 많습니다. 조금 특별한 의미를 두고 싶기도 했고, 또 어제 부족한 분량을 벌충하고도 싶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부득이하게 늦게 되었네요. 부디 이 점 독자 분들께 깊은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하하하. 코멘트 살짝 보고 왔습니다. 벌써 축하해주시는 코멘트가 많이 달렸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저 또한 완결까지 더욱 힘내서 달리겠습니다. :) 아. 그러고 보니 조아라에 웹툰이 생겼네요. 사실 저는 웹툰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네이버, 다음 모두 꼭꼭 챙겨보는 편이에요. 그래서 조아라에 웹툰이 생긴걸 격하게 환영하고 있습니다. 후후. 개인적으로 조아라 웹툰 중에서는 가장 재밌게 읽은 건 ‘제피가루’ 작가 님의 ‘나는 몹(I Am Mob).’ 이라는 작품이에요. 소재도 신선하고 이야기를 재미나게 잘 풀어나가 주시더라고요. 1편을 클릭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10편까지 읽었다는 비화가…. ㅋㅋㅋㅋ. 혹시 웹툰 좋아하시는 독자 분이라면 자신 있게 추천할게요! 0701 / 0933 ---------------------------------------------- 고맙네. 그리고 미안하네. 눈을 뜨자 상앗빛 천장이 흐릿하게 보였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창문을 투과해 비스듬히 꺾여 들어오고 있다. 숨을 한 번 들이키자 찬 공기가 맡아졌다. 몽롱하던 머리가 확 깼으나 아직은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현기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자 익숙한 방의 구조가 눈에 들어온다. 이어서 살에 닿는 아늑하고 푹신푹신한 감촉까지. 나는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일어난 장소가 집무실이라는 사실을. 그러고 보니 어제 마르를 기다리려고 했는데 그냥 잠들어버린 건가. 잠깐 쉬려는 생각에 침대에 누운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아마 그대로 깊이 잠든 듯싶다. 아무래도 요즘 알게 모르게 피로감이 쌓였던 모양이다. 흘끗 시선을 돌리자 책상에 반듯이 놓여 있는 기록과 이지러진 연초 꽁초들이 보였다. “…….” 아직은 이마가 띵하다. 나는 머리를 흔들면서 몸을 일으키려는 생각에 이불 아래로 손을 넣은 찰나였다. ‘응?’ 이불을 치우고 일어나려는 순간 손에 무언가 부드러운 감촉이 잡혔다. 자그맣고, 따뜻하고, 부드럽고, 말랑말랑하다. 이불 속에 무언가 정체 모를 것이 꼬물꼬물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별로 이상하다는 생각을 못 했다. 그 감촉이 하도 기분이 좋아, 그냥 멍한 채로 꼭꼭 찌르면서 계속 괴롭혔다. “이잉….” 그러나 그 순간, 나는 그대로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입을 더듬었으나 입은 깨어났을 때부터 꾹 닫혀 있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그머니 이불을 들쳤다. 그리고 이불 속에는…. “색…. 색….” 새근새근, 가쁜 숨을 흘리는 무언가가 내 가슴에 웅크리듯 누워 있었다. 나는 멍하니 아래를 응시했다. 아침 햇살을 반사하는 찬란한 은백색의 머리카락. 그 사이로 뾰족하게 돋아난 앙증맞은 귀. 아기처럼 뽀얗고 보들보들한 살결. 자그마하면서도 미끈한 곡선을 그리는 몸매는, 이 무언가가 약 초등학교 2학년 정도의 여아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등에서 보이는, 온몸을 덮듯이 감싸는 13쌍의 날개까지. 거기까지 인지한 순간이었다. “추….” 여아는 몸을 꼭 움츠리며 내 가슴에 고개를 더욱 묻었다. 그게 마치 얼른 이불을 내놓으라는 무언의 아우성 같았으나 나는 도로 덮어줄 생각도 못 했다. 그냥 갑자기 홀린 듯한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빛나는 머리카락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그러자 축 늘어져 있던 귀가 갑자기 쫑긋하게 세워졌다. 이윽고 부드러이 쓰다듬자, 기분이 좋은 걸까. 귀가 곧 팔락팔락 움직이기 시작했다. 휙 손을 떼면 축 늘어졌다가도, 또 쓰다듬어주면 도로 정신 없이 움직였다. 아. 사랑스럽다. “응…. 으응….” 몸을 꿈틀거리며 옹알이를 하던 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직 한참 졸린 듯 눈은 꼭 감은 상태였지만 눈 부근이 실룩실룩 움직이고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반짝 뜬 눈 사이로 드러난 올망졸망한 눈동자가 나를 어지럽게 응시한다.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신성한 기운이 감도는 아름다운 은색이었다. 잠깐 정적이 내려앉았다. “마르니?” 이미 거의 확신에 가깝게 예상하고 있는 터라, 나는 가볍게 침묵을 깨트렸다. “…아빠.” 여아, 아니 마르 역시 내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나는 빙긋 웃었다. “언제 왔어?” “오늘…. 새벽에….” 아직 잠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마르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려 애쓰고 있었다. 차분히 안아 올리자 천진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웃더니 안아달라는 듯 가녀린 팔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가 뜬 마르는 물끄럼말끄럼 한 눈초리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리고 배시시 웃으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쪽. “…아?” 갑자기 볼에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바로 정신을 차리자 살며시 떨어지는 꽃봉오리 같은 입술이 보였다. 그야말로 완벽하면서도 기습적인 입맞춤이었다. “마르야. 놀랐잖아.” 괜히 쑥스러운 기분에 나는 누운 채로 있는 힘껏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아빠아.” 그래도 무에 그리 좋은지 계속 안아달라는 어리광을 부리면서도 헤실헤실 웃는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였다. “후르르르…?” “삐?” 갑자기 발끝에서부터 이불이 들썩들썩 움직이더니 흡사 파도가 치는 것처럼 꾸불꾸불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은빛으로 번쩍이는 뿔 하나와, 그 옆으로 샛노란 주둥이가 이불 속에서 불쑥 솟아나왔다.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로 나와 마르를 올려다보는 두 쌍의 눈동자. 그 시선과 마주하자마자 무척이나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전보다 한층 성숙한 자태를 뽐내는 유니콘과 아직은 어린 페가수스였다. “너희도 있었구나. 하하하.” 유니콘은 주둥이를 크게 벌리더니 후르르르 울어 젖혔다. 아기 페가수스는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작게 코웃음 치고는 홱 고개를 돌렸다. 나 참, 도도는 여전히 도도하네. 나는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흔들며 허공으로 올렸던 마르를 내려 품에 안았다. 아이 특유의 신선한 내음이 코끝을 물씬 자극했다. 나는 마르의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 내렸다. “아빠…. 아….” 그 순간, 문득 가슴에서 부르르 떠는 감각이 전해졌다. 아래로 시선을 내리자 마르의 표정이 조금 변화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진난만하던 낯빛이었는데, 느닷없이 눈과 입이 미약하게 실그러졌다. 이제는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아…. 아….” 그 순간, 울 듯 말 듯하던 마르의 표정이 갑자기 한쪽으로 완연히 쏠렸다. “아, 아빠…. 아빠….” 서서히 흐트러지는 눈매. “보, 보고….” 부르르 떨리는 입. 잠깐 참으려고 애쓰는 것 같아 보이기는 했지만, 마르는 결국 참지 못했다. “보고 싶었어요….” 이윽고 벌어진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이 애처롭게 변하는 동시, 감은 눈에서는 투명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서러운 소리가 이어졌다. “어엉…. 어어어엉….” “미안해. 그동안 걱정 많이 했지?” 자그마한 등을 토닥이며 나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르의 울음은 한동안 계속해서 이어졌다. * 아침에 일어나 재회를 마친 후. 나는 마르 그리고 두 영수와 가벼운 세안을 마친 후 식당으로 내려갔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처지라 오늘 아침만 먹고 바로 아틀란타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애초 그렇게 말하고 오기도 했고. 식당에는 대부분이 클랜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단히 안부를 나누고 나서, 조승우와 어제 하지 못했던 도시 복구 지원 작업에 관하여 말을 나누었다. 정하연이 말을 잘 전했는지 사실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었다. 계속 자재와 거주민들을 모으면서, 3개월 후 북 대륙의 모든 걸 정리하고 넘어올 준비를 하라는 이야기가 전부였다. 그렇게 계속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 순간 주방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겨오는 동시, 상남 형님이 커다란 접시에 고기 요기를 한 아름 담아 가져왔다. 노릇하게 익은 겉면에 시뻘건 소스를 듬뿍 바른 게 굉장히 맛깔스러워 보이는 요리였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제대로 된 진수성찬이었다. 물론 고연주나 임한나의 음식 솜씨도 나무랄 데는 없지만, 그래도 스튜만 계속 먹다 보면 질리니까. 나는 곧바로 포크를 들고 덤벼들었다. “마르는 오늘 아빠 왔다고 어리광부리는 거니?” 한창 식사에 열중하고 있을 무렵, 상남 형님이 문득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인자하게 물었다. 마르는 내 무릎에 앉아 열심히 포크를 놀리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아, 아니에요….” 마르는 모기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클랜 로드. 마르가 참 착하고 의젓합니다. 우리가 걱정해도 괜찮다고 웃고, 그러면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클랜 로드의 무사 생환을 기도했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그랬는데, 이렇게 클랜 로드가 오시니 이제야 좀 아이답네요.” 상남 형님은 허허 웃으면서 인자하게 말했다. 나 또한 가볍게 웃고는 고기를 작게 잘라 마르의 입에 넣어주었다. 마르는 낯을 살짝 붉히면서도 받아먹고는 얌전히 입을 오물거렸다. 그 모습이 자못 귀여웠는지 식당에 한 차례 웃음이 흘렀다. 어제 침체한 공기가 조금씩 되살아나는 기분이다. 그러다 문득 한 명에게 생각이 미쳤다. 아직 식당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그러고 보니 한별이는….” “아까 다녀왔는데 안 먹겠다고 하더라.” 주변을 둘러보며 묻자 노노 누님이 날카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보니까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오늘 아침부터 영감님 무덤 앞에 계속 서 있던데…. 괜찮을지…. 어휴.” “거의 스승과 제자 관계 아니었습니까. 충격이 클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클랜 로드. 클랜 로드가 좀….” 노노 누님의 한숨에 공감하는지 조승우가 걱정 가득한 음성으로 말을 흐렸다. 나는 포크로 탁자를 두어 번 두드렸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야겠죠. 허나 지금은 그냥 울게 놔두고 싶네요.” “그래도.” “자기 앞가림은 잘하는 애입니다. 과한 걱정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 딱 잘라 말을 맺은 후 나는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조용히 상념에 잠겼다. 지옥에서도 눈물 한 번 보이지 않던 김한별은 어제 정말 엄청나게 울었다. 정말 부모님이 사망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몇 시간을 내내 울고 흐느꼈다. 도중에 혼절하지 않았다면 계속 그랬을지도 모를 정도로 서글프게 눈물을 흘렸다. 아마 조승우의 말대로 충격이 클 것이다. 클랜 안에서 애들한테 배척 받을 때 나를 제외하고 기댄 사용자가 영감님이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김한별을 믿는다. 아마 다른 애들이었으면 진작 어르고 달랬겠지만, 김한별은 공과 사는 확실하게 구별하는 성격이니까. 그러니 지금은 얼마든지 슬퍼해도 좋다. 중요한 건 이후 일상으로 돌아갈 때 극복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그리고 여태껏 보여온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김한별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나서 나는 미리 작별 인사를 마쳤다. 마르는 의연한 척하면서도 아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지만, 자주 연락하겠다고 하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니콘은 이제는 완연히 의젓해진 태도로 살짝 고개를 숙였고, 아기 페가수스는 내 발목을 깨물었다. 배웅은 나오지 말라고 했다. 조승우는 그럴 수는 없다고 완강히 거부했지만, 김한별과 둘이서만 말을 나누고 조용히 떠나겠다고 하자 곧바로 수긍했다. 그렇게 식당에서 작별을 마친 후 나는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식사 중에 들었던 대로 김한별은 무덤 앞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어제 실컷 울어놓고도 아직도 남았는지, 망연한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다. 김한별은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나도 어설픈 위로 따위 할 생각은 없어, 품에서 조용히 연초를 꺼내 들었다. ‘어디 보자…. 오른쪽이 신상용 씨였고. 그럼 왼쪽이 영감님 무덤이로군.’ 꺼내 든 세 개의 연초 중 나는 두 개에 불을 붙여 각 무덤에 하나씩 놓았다. 딱히 특별한 의미가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냥 나만의 애도하는 방법이랄까. 연초를 하나씩 놓고 김한별의 옆에 서자 “할아버지 연초 안 태우시는데….” 라는 혼잣말이 들려온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웃었다. 그리고 남은 연초 하나를 물고 불을 붙였다. “남고 싶으면 남아도 좋아. 추스를 시간 정도는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까.” 후욱, 연기를 뱉으며 말했다. “…전에도 느꼈지만.” 김한별이 말문을 열었다. 잔뜩 쉰 음성이었다. “오빠는 참, 의연하신 것 같아요. 마치 감정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많이 겪었으니까. 익숙하거든.” 나는 담담히 대꾸했다. 그러자 빤한 시선이 느껴졌으나 돌아보지는 않았다. 이윽고 연초를 끝까지 태우고 털어 내린 후, 마지막 인사도 할 겸 정중히 머리를 숙였을 때였다. “기록에…. 무슨 말이 적혀 있었어요?” 조금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김한별이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나는 품에 넣어둔 기록을 보여줄까 하다가 그냥 입을 열기로 했다. “고맙고 미안하다. 부디 홀 플레인에서 뜻한 바를 이루기 바란다.” “…….” “그리고 너한테 눈치 없이 굴지 말고, 잘 좀 대해주라신다. 너는?” “저는….” 바로 되묻자 김한별은 약간 놀라면서도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김한별이 입을 열었다. “고맙고 미안하다.” 여기까지는 똑같군. 김한별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알려준 보석에 관한 지식들이 도움이 됐기를 바라며….” “…….” “기회는, 기다리기만 해서는 오지 않는다.” “음. 진부하지만 좋은 말씀이네. …그런데 마지막 말씀은 틀리신 것 같은데.” 김한별의 낯에 의아한 기색이 서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기다리기만 한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그때….”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렸다. “아직 대답도 안 해주셨으면서….” 찰나의 순간, 김한별은 멍한 낯빛을 보이기는 했지만, 곧 손등으로 얼굴을 훔치며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그리고 크게 한숨을 흘렸다. 잠깐 김한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무튼 쉬어도 좋고 따라와도 좋아. 선택은 네 몫이야.”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는 몸을 돌려 정문으로 걸음을 향했다. 잠시 후. “…같이 가요. 오빠.” 김한별이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눈치도 없어. 이럴 때 손이라도 내밀어주지….” 이어서 나 들으라는 듯한 불만이 들려와, 나는 천천히 걸음을 늦춰주며 손을 내밀었다. 이내 차갑고 부드러운 감촉이 내 손을 살그머니 붙잡는다. 그렇게 우리는 손을 꼭 맞잡은 채로 같이 걸음을 옮겼다. 아틀란타를 향해서. ============================ 작품 후기 ============================ 네. 오늘 내용으로 이번 파트도 끝이 났네요. 실질적으로 한 에피소드의 종결이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도시 발전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이야기는 여기서 맺고, 이제는 그동안 뿌려놓은 복선을 발판으로 새로운 에피소드를 그려내야겠지요. 그리고…. 어제 이만성의 죽음에 애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캐릭터의 죽음을 감사하는 입장이 옳은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제가 만든 캐릭터니까요. 그냥 감사하다는 마음이 앞섰습니다. 하하하. 그럼 저는 내일 새로운 이야기를 들고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_(__)_ 0702 / 0933 ---------------------------------------------- 달라지는 현재, 그리고 미래. 웅웅웅웅! 새하얀 폭우가 사방으로 교차하고 쏟아진다. 빛의 폭우는 허공에 떠올라있는 6개의 수정 기둥을 성난 회오리처럼 휘감으려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기둥 안쪽 중앙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빗발치듯 쏟아지는 빛줄기는 나선형을 그리며 모이더니, 종래에는 눈 부신 빛을 발산하는 하나의 거대한 구체가 되었다. 구체가 커지면 커질수록 빛무리는 사방으로 파편을 흩날리며 점차 소멸해갔다. 이윽고 구체를 제외한 모든 빛이 사그라졌을 때, 파도처럼 물결치던 공간은 한순간 조용해졌다. 허나 그것은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다. 곧 기둥 중앙에 생성된 구체가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느닷없이 어마어마한 폭발을 일으켰다. 콰앙! 무시무시한 폭음과 동시, 구체에서 뻗어 나간 빛의 광선이 둘러싸듯이 서 있는 6개의 수정 기둥을 눈부시게 강타했다. 수정 기둥은 자신에게 쏘아진 빛을 흡수하고는 찬란한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각 기둥 꼭대기로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6개의 성화(聖火)가 동시에 불타오른다. 우우우우우웅. 부드러운 소리가 이어졌다. 각 성화에서 이어진 6개의 빛이 실처럼 교차하며 육망성을 그려낸다. 이윽고 완성된 육망성은 주변 공간을 일렁일 정도의 엄청난 마력을 뿜어내며 또 한 번 거대한 빛의 기둥을 토해냈다. 홀 플레인 내 모든 소환의 방과 연결되는 ‘천상’의 구현화가 이제 막바지 작업에 다다른 것이다. 그렇게 하늘 높이 솟구친 빛의 기둥은, 흡사 폭발적으로 물을 흩뿌리는 분수대처럼 사방팔방 빛줄기를 떨어트렸다.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낙하한 빛은 허공을 점점이 수놓으며 모종의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수는 물경 10만을 넘을 지경이라 차마 헤아리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잠시 후. - 읊어라. 창조주 된 빛에 대해서. 조용한 미성이 공간에 고고하게 울려 퍼졌다. - 은총을 가득히 받으니, 찬양하여라! 빛이 우리와 함께할 지어다! 이어서 소환이 끝난 천사들이 하나같이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과 고요히 넘실거리는 날개의 아름다운 향연은, 그야말로 장관이라 볼 수 있을 정도로 웅장했다. 거대한 공간을 빼곡히 메우고 있으면서도 누구 하나 함부로 입을 열지 않는 게, 무척이나 장엄한 분위기였다. - 모두 예를 거두어라. 가장 높은 곳, 가장 많은 날개를 보이는 천사가 허공에 앉는 자세를 보이며 말했다. 모든 천사를 아우르는 빛. 대 천사 가브리엘이었다. - 회의 건의자는 앞으로. - 제 9계급 천사 헤레이스. 빛의 명을 받듭니다. 가브리엘이 명하자 눈부신 금빛 머리카락이 흐르는, 자애로운 인상의 천사가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 바로 시작하도록. - 네. 그럼 건의자의 자격으로 감히 본 회의의 개최를 알리겠습니다. 그전에 우선 이 천상에 모여주신…. 사방을 둘러보며 말하던 헤레이스는 돌연 서서히 말끝을 흐렸다. 자신을 쳐다보는 천사들에게서 눈짓으로 신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공중에는 한 손으로 턱을 괸 가브리엘이 반쯤 눈을 감은 채 우아하게 손을 놀리고 있었다. 마치 그냥 넘어가라는 듯이. - 그럼 절차는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절차 생략. 고작 9계급에 불과한 천사가 할 말은 아니었으나 가브리엘이 시켰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장내의 모든 천사들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이어질 말에 집중했다. - 이미 오랫동안 논의된 안건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이미 제가 하려는 말을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러니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 보다는, 우선은 영상을 먼저 보여드리는 게 낫겠지요. 헤레이스가 오른팔을 내뻗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갑자기 환한 빛무리가 뿜어지며 반투명한 스크린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 이제 보여드릴 건 서 대륙의 일상을 담은 영상입니다. 여담입니다만, 본 영상은 이번 안건을 목적으로 특별히 허가를 받아 만들어졌습니다. 허나 아시다시피, 우리 도우미는 사용자의 사생활을 간섭할 수 없지요.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멋대로 훔쳐보는 건 엄격하게 금지돼 있으니, 이 점 특히 유념해주시기를 바라요. 여운처럼 울리는 말이 끝남과 동시, 어느새 거대하게 세워진 스크린에서 하나의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건 마치 폐허와도 같은 을씨년스러운 장소였다. 영상 중앙에는, 목을 포함 사지가 밧줄에 묶인 채 허공에 떠 있는 건장한 사내가 있었다. 그리고 각 밧줄 끝에 낄낄거리며 줄을 붙잡고 있는 사용자까지. 흡사 오체분시라도 할 것만 같은 상황. - 당겨라! 당겨라! - 한꺼번에 잡아당겨! 으하하하!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그랬다. 당기라는 구호가 나온 순간 밧줄을 잡고 있던 사용자들이 일제히 줄을 끌어당겼다. 뿌드득! 살이 찢어지고 사내가 처절한 고함을 지른다. 비명은 밧줄에 감긴 목이 땅을 구르고, 사지가 찢겨나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 다음 영상을 보시겠습니다. 헤레이스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새로운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무수한 구경꾼이 몰린, 야경이 흐르는 밤거리였다. - 크하! 더해라 더! 더 세게 해보란 말이야! - 그렇게나 고고하게 굴더니, 결국에는 헐떡대는 꼴 좀 보게나! 홀딱 벗겨놓고 보니까 수호자란 년도 별거 없잖아? 와하하하! 상스러운 비속어가 난무하는 중앙에는 언어도단의 만행이 자행되고 있었다. 2미터에 다다른 체구를 지닌 거한과, 상대적으로 가녀린 몸매를 보이는 여인이 서로 알몸인 채로 엉겨 붙어 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해보면 거한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중이었다. 여인은 그저 아이처럼 울부짖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 와아아아아아아아! 그때 갑자기 격한 환호와 박수가 이어졌다. 사내가 느닷없이 여인의 두 다리를 잡더니 가랑이부터 그대로 찢어버린 것이다. 여인은 낌새를 알아차리고 반항했지만, 결국 머리끝까지 절반으로 찢겨나가고 말았다. 거한이 양손에 쥔 시체를 번쩍 들어 올리자 또 한 번 함성이 일었다. 영상은 거기까지였다. - 처음 영상의 사내는 마이클 로건. 시몬에게 사망한 로렌스를 이은 수호자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영상의 여인은 비비안 크리스틴. 역시 로건를 이은 수호자였고요. 고심해서 선출한 서 대륙의 수호자가 연달아 살해당했습니다. 무법자들한테 말이죠. 조용한 장내에 헤레이스의 부연 설명이 울렸다. 무법자. 법을 무시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사용자를 일컫는 뜻으로, 북 대륙의 부랑자와 어느 정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 사실,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처음 말씀 드렸듯이 방금 영상은 서 대륙에서 자행되는 ‘일상’을 담아낸 것에 불과하니까요. 그럼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네요. 과연, 우리가 이 서 대륙에 더 이상 인과율을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헤레이스가 일상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말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3년 전 북 대륙과의 전쟁으로 시몬이 죽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서 대륙이 혼돈에서 벗어난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혼란은 더욱 가중됐다고 보는 게 옳다. 애초 악마의 손길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서 대륙은 무법 지대로 변모한 상태였다. 그런데 커다란 악당 한 명이 죽었다고 해서 깨끗해질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되레 그동안 시몬이 억압하고 있던 무법자들이 우르르 뛰쳐나와 제 세상인 듯 활개치니, 서 대륙은 삼삼오오 분열돼 어느새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 저는 조금 생각이 달라요. 헤레이스. 그때 어디선가 가라앉은 음성이 공간을 울렸다. 상당히 높은 곳에서 들려온 것으로 보아 건의자인 헤레이스보다 높은 계급의 천사인 듯했다. - 수호자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분명 안타까우나, 크게 보면 결국에는 인간의 비참한 죽음에 불과하지요. 그러한 어두운 면은 홀 플레인 어디에서나 비일비재하지 않나요? 이건 비단 서 대륙의 문제만이 아니랍니다. 그러나 헤레이스는 차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 현재 서 대륙의 사용자 수는 간신히 일만 명을 넘기는 수준입니다. 근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려 삼만 명이 넘는 사용자가 저런 비참한 상황을 맞았다는 말이죠. 이걸 정상적인 범주라고 보시는 건가요? - 부족한 사용자는 새로 소환하면 되요. 흉흉한 분위기는 정상으로 되돌리면 되고요. 비록 지금 상황이 어렵다고는 하나, 한 대륙의 폐쇄라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려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 도우미들이 조금 더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죠. - 정론이기는 하나, 결국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꼴이 될 겁니다. - 확신하시는 군요. 근거도 없이. 마지막으로 들려온 말은 약간은 차가운 비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헤레이스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확신에 찬 눈동자로 입을 열었다. - 근거라면 보여드리겠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멈췄던 스크린에 새로운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타난 영상은, 아비규환의 극치를 보이고 있었다. 푸른 장막을 두른 시작의 여관. 이윽고 예비 사용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오자, 한 무리의 사용자, 아니 무법자가 덮쳐온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강간, 방화, 살해, 식인…. 영상은 곧 비명으로 점철돼 한 폭의 지옥도를 그려냈다. - 보셨겠지요. 근 1년간 우리는 서 대륙에 집중적으로 예비 사용자를 공급했습니다. 그 수는 물경 8000명. 허나 현재 살아남은 인원은 채 30%도 되지 않는 실정이지요. 그마저도 대부분이 노예로 전락하거나, 무법자가 되었습니다. 헤레이스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영상을 지켜보고 있다. 아마 아는 천사도 있고, 모르는 천사도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소관하는 대륙이 다를 경우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관심을 두지 않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헤레이스는 돌연 조금 다른 화제를 꺼냈다. - 아마 모두가 알고 계실 겁니다. 그…. 아니. 세라프 님이 도우미로 있는 김수현이라는 사용자를 말입니다. 김수현. 그 이름이 나오자 여태껏 엄숙하던 장내에 미약한 술렁거림이 일었다. 별 관심 없다는 듯 턱만 괴고 있던 가브리엘도 살짝 눈을 치떴을 정도였다. - 사용자 김수현은 그동안 실로 어마어마한 업적을 세웠습니다. 그 간악한 악마 놈들의 계획을 모조리, 철저하게 분쇄했고, 그로 인해 우리는 서로가 점한 인과율에서 막대한 이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염된 서 대륙 정화를 목적으로 얻어낸 이득의 대다수를 투자했지요. …그 결과가, 방금 보신 영상입니다. 재주는 북 대륙이 부렸는데, 돈은 서 대륙이 챙겼지요. 아니요? 심지어 돈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습니다. 그 이득을 모조리, 그냥 절반이라도 북 대륙에 투자했다면. 과연 지금쯤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무언가 뼈 있는 음성이었다. 잠깐 숨을 고른 헤레이스는 또 한 번 손을 튕겼다. - 이번에 북 대륙에서 공략에 성공한 아틀란타. 그 중 남쪽 도시의 풍경을 담은 영상입니다. 그 순간 스크린에 갑자기 새로운 화면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앞선 영상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대단히 낡아 보이는 도시가 배경이기는 했으나 무수한 사용자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거주민과 힘을 합쳐 낡은 건물을 헐고 새롭게 터를 잡는다. 모두가 구슬땀을 흘리면서 성실하게 행동한다. - 차이가 심합니다. 심해도 너무 심합니다. 어느 대륙은 2, 3년은 더 걸릴 것이라 예상한 공략을 보란 듯이 성공시켰는데. 또 어느 대륙은 공략은커녕 욕망과 쾌락에만 이끌려 생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다른 음성은 들려오지 않는다. 딱히 부연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는 것이다. 앞선 두 대륙의 일상을 담은 영상이 각기 어떤 차이가 있는지 말이다. - 그에 반해 서 대륙은, 사흘 전, 최후의 보루였던 대 도시 길로틴이 무법자들에 의해 함락당했습니다. 덧붙여 무법자는 아예 호출에 응하지를 않으며, 그나마 정상적인 사용자를 호출하려 해도 이제는 목숨을 걸고 신전에 잠입해야 하는 상황. 과연 이게 구원이 가능한 상황이라고 보시는지요? 헤레이스가 날카롭게 꼬집었다. 이윽고 헤레이스는 팔을 내리며 가는 한숨을 흘렸다. 영상이 점차 희미해지고 스크린도 서서히 사라졌다. - 더 이상 길게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빛을 이루는 분이여. 부디. 결심을 굳힌 걸까. 헤레이스의 눈동자에 결연한 빛이 스쳤다. 그리고 정중히 몸을 돌려 가장 높은 곳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 건의하라. 까닥, 고개를 끄덕인 가브리엘이 무심한 음성으로 말했다. 헤레이스가 입을 열었다. - 제 9계급 천사 헤레이스. 이 이상 의미 없는 인과율의 낭비를 좌시할 수 없는 바. 동시에 서 대륙은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그리고. - 그러므로 서 대륙의 폐쇄를 정식으로 건의합니다. 마침내, 서 대륙 폐쇄를 논하는 안건이 정식으로 건의됐다. 홀 플레인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 올 폭풍이, 비로소 날갯짓을 시작한 것이다. ============================ 작품 후기 ============================ 요즘 일찍 업데이트할 수 있어서 좋네요. 독자 분들도 좋으신가요? 저는 너무 좋은데…. ☞☜ 0703 / 0933 ---------------------------------------------- 달라지는 현재, 그리고 미래. 시간은 화살같이 흘렀다. 그동안 너무 도시 복구 작업에만 열을 올렸던 걸까. 과장 약간 보태서, 눈 한 번 깜빡인 것 같은데 어느새 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러 있었다. 중앙 관리 기구에서 지정한 보장 기간이 어제 부로 끝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오늘 아침 도시는 유난히 시끄러웠다. 듣기로는 이른 새벽부터 활성화된 워프 게이트가 여태껏 한 번도 꺼지지 않고 계속 유지되는 중이라고 한다. 사용자들이 아틀란타에 가지는 관심이 그만큼 크다는 소리였다. 아무튼, 이제 보장 기간도 끝났으니 머셔너리도 새롭게 변화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근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도시는 정말 많은 게 변했지만, 여기서 그칠 생각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제부터가 진정한 시작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침 식사가 끝난 후, 나는 일부 클랜원을 1층 회의장으로 호출했다. 이제 곧 불어올 새로운 바람에, 새로운 변화를 꾀할 일환으로써. * “확실히 수현의 말대로예요. 이제 슬슬 우리 클랜원도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겠네요.” 나른한 어조의 고혹적인 음성이 조용한 회의장을 울렸다. 나는 다른 의자보다 조금 더 높은, 회의장 전체를 굽어볼 수 있는 권좌에 앉은 채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 명만 제외하고 모두 도시 복구 작업에서 빠지는 게 좋겠어요. 어차피 성이나 광장, 신전 등 필수적인 건물 요소는 이제 거의 완공에 가까워졌으니까요.” 선 채로 말을 잇는 고연주와 옆으로 주르르 앉은 남다은, 선유운, 차소림. 그 4명의 건너편에도 정하연, 신재룡, 임한나, 안현이 앉아 있다. 그리고 반들반들한 빛을 내는, 흡사 하얀 리무진을 연상케 할 정도의 길쭉한 테이블. 상석에 앉은 나를 중심으로 좌우 8명의 클랜원이 일렬횡대로 포진해 있었다. 바닥에는 금실로 수놓은 붉은 융단이 입구 끝까지 번듯하게 깔렸고, 조금 더 바깥쪽에는 바닥부터 드높은 천장까지 관통하는 흰 기둥이 탄탄하게 버티고 서 있다. 게다가 천장에 매달려 은은한 빛을 뿌리는 수정 샹들리에와, 대리석 벽을 치장하는 클랜 마크가 그려진 커다란 붉은 휘장까지. 일견 보기에도 화려함의 극치를 뽐내는 게, 마치 중세 시대 왕실의 회의장을 그대로 구현한 듯하다. 아니. 정말 그와 비슷한 콘셉트로 개축했다. 3개월 전 먼지만 켜켜이 쌓여 있던 공간이 이렇게 멋들어지게 변했을 줄, 과연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음~. 그리고 이제는 어느 정도 산하 클랜들의 몫도 남겨야겠죠? 사용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번화가나 거주민들을 들여놓을 주거 지역을…. 수현?” 잠시 딴 생각에 빠졌음을 알아챈 걸까. 마침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 나는 얼른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래요. 산하 클랜.” 듣고 있었다는 의미로 말했으나 고연주는 입꼬리를 올리며 곱게 눈을 흘겼다. 그러자 건너편에서 킥킥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정하연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무튼, 조만간 산하 클랜들과 한 번 얘기를 해보셔야 할 거예요. 구역 배분도 그렇고, 세금 같은 세세한 문제도 있으니까요.” “구역 배분이야 이미 저번에 이야기를 마쳤고. 세금도 딱히 따로 말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어차피 북 대륙과 똑같은 세율을 적용할 생각인데. 30%로.” “설령 그렇다고 해도, 한 번은 공식적인 모임을 가지시는 게 좋아요. 그들도 확실한 절차를 밟아놔야 마음이 놓일 테니까요. 또 산하 클랜들이 그동안 많이 수고해준 것도 사실이니, 이제는 어느 정도 다독일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어쨌든 좋은 관계를 맺어서 나쁠 건 없잖아요?” “음…. 알겠습니다. 그럼 조만간 자리를 마련하는 걸로.” 머리를 끄덕이자 정하연은 대단히 만족한 표정을 짓고는, 깃펜을 들어 기록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다른 클랜원은, 그냥 조용하게 앉아만 있다. 특히 차소림과 선유운이 압권이다. 회의 내내 계속 부동 자세로만 앉아 있는데…. 저러면 안 힘드나. “아차. 수현?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전령이 왔네요.” 그때 막 자리에 앉으려던 고연주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도로 몸을 일으켰다. 고연주는 바로 말을 잇지 않았다. 잠시 정하연을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내가 앉은 권좌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내 정하연이 조용히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중앙 관리 기구의 전령이에요.” 우웅! 이윽고 고연주가 계단을 밟아 권좌로 올라오는 동시, 주변으로 블록 필드가 전개됐다. 아무래도 다른 사용자가 들으면 안 되는 내용이 섞인 모양이다. “중앙 관리 기구라면…. 이효을?” “네.” “흠. 그럼 딱히 비밀스럽게 말할 게 있나요? 해봤자 안쪽 중앙 도시에 관한 문제나 주요 건물 이전에 관한 이야기일 것 같은데.” “맞아요. 그런데 또 하나, 아니 두 개가 있네요.” 고연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은 북 대륙 수호자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짧은 신음을 흘렸다. “신분 노출이라도 됐답니까?” “모르겠어요. 저도 더 자세히 캐물으려고 했는데, 거기까지는 저한테 공개할 수 없는 정보인가 봐요.” “…또 다른 하나는요?” “그것도 마찬가지예요. 아무튼, 곧 우리 쪽으로 방문할 테니 꼭 시간을 내달래요. 믿을 건 수현 씨밖에 없다고….”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무언가 좋지 못한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들어봐야 알겠지만, 수호자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은 확실히 가벼이 넘길 게 아니었다. 맡은 대륙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역할은 상당히 중요하다. 이효을만 봐도 알 수 있잖은가. 1회 차서 죽은 걸 살려놓으니 2회 차에서는 나름 괜찮게 해주고 있으니까. 물론 나도 적잖은 일을 해내기는 했지만. ‘아무튼…. 맹아라라고 했었나?’ 현재 수호자의 이름을 떠올리며 나는 블록 필드를 툭툭 건드렸다. 이어서 마법이 해제되는 동시 꽤 재미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입을 가린 채 까르르 웃는 임한나와 한심하다는 듯 차갑게 눈을 빛내는 남다은. 그 앞에는 안현이 바보 같은 표정을 반복해서 지으며 두 여인을 웃기려 애쓰고 있었다. 고연주가 쯧쯧 혀를 차며 내려가고 나는 가만히 안현을 구경했다. 안현도 바보는 아니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곧 표정을 딱딱히 굳히고는, 마치 로봇처럼 떨떠름히 머리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안현.” “예!” 안현이 크게 외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니. 나는 일어서라는 소리까지는 안 했는데. 나는 이마를 지긋이 누르며 입을 열었다. “너는 말이다. 내가 왜 너를 굳이 이 회의장까지 끌고 들어와서 앉혔는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봤니?” “예, 예? 에….” 직설적으로 물어보자 안현이 말을 더듬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푹푹 나온다. ‘이놈을 정말 대 간부로 키워도 괜찮을까….’ 안현은 정말 너무 아쉽다. 약간, 정말로 아주 약간 부족하다. 눈에 보이는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만 있다면 일 하나 정도는 능히 맡길 수 있겠는데, 아직은 불안한 감이 없잖아 있다. 왜 굳이 이 8명을 따로 모았는지 조금이라도 생각해봤다면, 조금은 진중해졌을 텐데. 차라리 김한별을 데려올걸 그랬어. 가볍게 손짓하자 안현은 머쓱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럼….” 여하튼 나올 이야기는 대충 다 나왔다는 생각에 이만 회의를 파하려는 순간이었다. “오라버니!” 갑자기 나를 부르는 소리와 동시에 누군가 입구로 불쑥 들어왔다. 양팔을 활짝 벌린 채 도도도도 달려오는 누군가는, 다름 아닌 안솔이었다. 이윽고 안솔은 달려오는 그대로 활짝 웃으며 외쳤다. “북 대륙 식구들이 도착했어요!” 반가운 소식이었다. * 머셔너리 클랜이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북 대륙에 남았던 클랜원들이 거의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마침내 아틀란타로 이사 온 것이다. 사실 조금 늦는다고 생각했는데, 조승우가 워프 게이트에 상상 이상으로 사용자가 몰렸다면서 넉살 좋게 양해를 구했다. 어차피 파할 생각이었던 회의를 끝내고 나는 바로 8층으로 올라갔다. 왜냐면 8층에 내 집무실 겸 숙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해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마르를 안은 채 계단을 올라 8층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깔끔하게 닦인 회랑을 지나 집무실 문을 열자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화려한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 마르가 탄성을 질렀다. 바닥 전체에 깔린 푹신푹신한 붉은 털 카펫은 물론, 벽과 천장에 걸린 화려한 장식물들은 환하게 빛나며 곱고 아름다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크기도 엄청나게 크다. 아마 100평도 넘지 않을까. “아빠아빠. 여기가 아빠 방이에요?” 마르는 무언가에 홀린 듯한 눈으로 뾰족이 돋은 귀를 정신 없이 팔락거리고 있었다. 얘는 기분이 좋으면 귀를 이렇게 움직이는 건가? 원래 요정들이 이러나? 나는 그렇다고 말해주며 꼼지락거리는 마르를 내려주었다. 마르는 한껏 들뜬 얼굴로 어딘가로 달려가더니 겹겹이 쳐진 하늘하늘한 커튼을 젖혔다. 그리고 건너편에 드러난, 너덧 명이 올라가도 남을 정도의 넓고 커다란 침대에 던지듯이 몸을 뉘었다. 까르르 웃으며 침대에 얼굴을 비비는 게 기분이 무척 좋은 모양이다. “우와. 여기가 클랜 로드의 방입니까?” 그렇게 흐뭇한 마음으로 마르를 보고 있자, 돌연 누군가 조심스레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조승우가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내디디며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그냥 편하게 들어와요.” “예, 예. 이야…. 이건 그냥 방이 아니라, 집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인데요.” 조승우가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 방에는 집무실, 숙소, 욕실, 서재, 발코니 등 방만 5개였으니까. 사실 그냥 여러 생활을 방 하나에서 해결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주문했는데, 상당히 마음에 들게 만들어졌다. 돈이 많이 들어갔다는 사실은 마음이 아프지만. “어디가 가장 마음에 듭니까?” “아…. 저는…. 저기가 가장 마음에 드네요.” 차분히 시선을 돌리던 조승우가 오른쪽을 가리켰다. 방 내부, 집무실을 연장해서 달아 만든 외부 발코니였다. “저 발코니가 정말 대박이네요. 사실 방이 화려하면서도 조금 갑갑한 느낌이 있는데, 저 발코니 덕분에 숨이 확 트이는 기분입니다. 잠깐 나가봐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같이 나가시죠.” 흔쾌히 머리를 끄덕이면서 나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사실 나는 발코니까지는 만들 생각이 없었다. 고연주를 비롯한 여러 여인의 강력한 요청에 억지로 만들게 되었는데, 그 이유가 참 가관이었다. 뭐라고 했더라? 이제는 야외 플레이도 슬슬 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었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성은 총 10개의 층과 옥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발코니에 서서 보면 도시가 한 눈에 들어온다. 바람을 느끼는 듯 먼 곳을 쳐다보던 조승우는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정문부터 성의 입구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수로에는 가득히 흐르는 물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중간중간 솟은 연꽃 모양의 분수대에서는 끊임없이 물이 뿜어져 나오고, 좌우로는 밝게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진다. 도시 중앙에 우뚝 솟은 새하얀 성은 그야말로 아름답고 화려함의 극치를 보였다. 처음 봤을 때는 사실 요새에 가까운 느낌이 있었는데, 집중적인 개축 공사를 거치면서 궁전에 가까운 웅장함을 드러냈다. “정말로 멋지군요. 꼭 인도의 타지마할에 온 기분이 듭니다.” “아. 저도 비슷하게 생각했어요.” “와. 정말…. 어떻게 3개월만에 이렇게…. 이 성만 해도 돈 무지하게 들었을 것 같은데요?” “1할이요. 총 예산의.” 그냥 솔직하게 이실직고했다. 잠시 후, 아래를 내려다보던 조승우가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나를 돌아보았다. “뭐? 1할? 아니! 1할이나 쓰셨다고요?” 나는 살그머니 시선을 회피했다. “에…. 무, 물론 도시의 중심 건물이 가지는 상징성은 중요합니다만….” 바로 말을 돌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슬쩍 쳐다보자 조승우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래도 받은 돈만 7천만 금화에…. 성과도 발견하셨고. 또 자재는 어지간하면 공짜 조달이라고 들었는데? 그런데 어떻게 1할이나….” 마치 자신이라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라는 목소리. 그만 좀 쳐다봐. 이 사람아. 나도 믿고 맡겨놨는데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어. “그게 작업 속도를 높이다 보니 인건비도 많이 들었고…. 그리고 말만 개축이지 사실 거의 새로 짓다시피 한 곳도 많거든요. 또 자재도 거의 최상급으로 도배하다시피 한 터라.” “자재는 공짜 아니었습니까?” “그랬는데, 양심에 걸립디다.” “하, 하기야. 마력석 같은 자재를 무한정으로 달라는 건 확실히 도둑놈 심보겠죠. 아이고….” 조승우는 떠름한 음성으로 동의하고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화제를 돌리는 게 낫겠지. “소식은 들었어요. 준비를 잘해오셨다고 들었는데.” “시간이 많았으니까요. 말씀하신 대로, 머셔너리 아카데미와 모니카 클랜 하우스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재산을 처분했습니다.” “거의?” “예. 장비는 지정해주신 것들 빼고 모두 제값을 받고 팔았는데, 보석은 시간을 두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수요가 높다고는 하지만, 한꺼번에 많이 풀리면 가격이 낮아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아무튼, 이래저래 해서 약 5500만 금화 정도 확보해놨습니다.” “흠. 그렇군요. 그럼 그 외에, 북 대륙에 별다른 일은 없나요?” 속으로 화제를 돌린 것을 자축하며 말을 이었다. 조승우는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더니 턱을 긁으며 머리를 젖혔다. “음. 별다른 일이요….” 사실 별다른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뮬에, 타 대륙 사용자들의 출현을 확인했다는 소문입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은, 예상외의 대답으로 되돌아왔다. “타 대륙 사용자들이 출현했다고요…?” ============================ 작품 후기 ============================ 머셔너리 클랜의 새로운 보금자리는 인도의 타지마할을 생각하고 구상했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에요. :) 0704 / 0933 ---------------------------------------------- 천사의 의뢰. 타 대륙 사용자들이 출현했다. 한두 명 정도라면 크게 상관없다. 조금 힘들기는 하겠지만, 대륙 횡단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니까. 그러나 조승우는 ‘사용자들’ 복수 형태로 말했다. 도대체 얼마나 넘어왔는지는 몰라도 뉘앙스가 묘하게 신경 쓰인다. 나는 더욱 상세한 설명을 해달라는 뜻으로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나 조승우는 가만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저도 소문으로만 들은 거라서…. 자세히 아는 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조승우는 괜한 심려를 끼쳤다며 머리를 숙였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차오르는 의문을 지우지 못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느냐는 말이 있듯이, 모종의 목적이 있지 않은 이상 소문은 괜히 돌지 않는다. 아니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소문을 냈다고 보기도 어렵고. 왜냐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없으니까. 어지간한 관심 종자가 아닌 이상 말이지. 그러면 이 소문이 사실이라는 가정 하, 과연 어느 대륙 사용자가 북 대륙에 모습을 보인 걸까? ‘…모르겠다.’ 알 턱이 없잖은가. 정보가 이리도 부족한데. 정작 소문도 방금 들었고. 물론 추측은 할 수 있겠지만 그러면 경우의 수를 상당히 크게 잡아야 한다.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혼자서 설레발 치는 건 이제 사양하고 싶다. “아무튼, 클랜 로드. 이제부터는….” 바람결에 흩날리는 조승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머리를 젖혔다. 그대로 시선을 올리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창창하던 하늘이 갑자기 붉은색으로 변했다. 잘못 본 건가 싶어 얼른 눈을 감았다가 뜨니 다시 맑은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예산을…. 예?” “아. 미안합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혼잣말이었습니다.” “이거 저만 너무 떠들었나 봅니다. 하하하.” 조승우가 넉살 좋게 웃었다. 나는 선웃음을 지으며 비흡연자라는 걸 알면서도 연초 하나를 꺼내 권했다. 조승우는 괜찮다고 말하며 내 눈치를 살피더니 스리슬쩍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눈치가 빠르다. “후우우우.” 한껏 내뿜은 연초 연기가 햇살 사이로 뭉게뭉게 뻗어 나갔다. 이윽고 춤추듯 흩날리는 연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문득. ‘변한다. 변하지 않는다.’ 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 북 대륙 인원이 아틀란타로 넘어온 후. 나는 변함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던 와중…. 사실은 집무실에 몰래 숨어든 마르를 발견하고 놀아주는 중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뜻밖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아니. 뜻밖은 아니려나? 잘 생각해보니 며칠 전 고연주가 회의 중간에 귀띔해준 것 같은데. 아무래도 깜빡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와…. 성 한 번 엄청 좋잖아?” 망연해 보이는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들어오는 여인은 바로 이효을이었다. “이렇게 직접 보는 건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머셔너리 로드.” 이효을은 간단한 인사를 건네고 나서 나를 그대로 지나쳤다. 그리고 겹겹이 쳐진 커튼을 젖히더니 그대로 침대에 푹 쓰러졌다. 잠시 후, “커….” 미약한 코 고는 소리가 이어졌다. “…정신병자?” 마르는 이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에 놀랐는지 토끼 눈을 뜬 채 바라보다가, 나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래서 나도 같이 머리를 흔들어주었다. 나도 이효을이 왜 저러는지 모르겠거든. 정말로 잠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번 어디까지 하나 볼 생각에 나는 가만히 침대를 응시했다. 그러자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효을이 부스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혀를 차며 내가 앉은 책상으로 걸어온다. “무슨 말이라도 하던가. 아니면 태클이라도 걸던가. 민망하잖아.” 이효을이 푹신한 소파에 꺼지듯이 앉으며 투덜거렸다. “그냥. 꽤 피곤해 보이길래.”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효을은 정말로 피곤해 보였다. 얼굴 곳곳에 더덕이 붙은 피로는 물론, 눈 그늘은 턱까지 내려와 있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흡사 죽기 직전의 사람처럼 보인다. “젠장…. 정말로 죽을 것 같아. 겨우 공략이 끝났다 싶더니. 무슨 사건 사고가 이렇게 끊이지 않는지….” 외부적 요인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뒀다. 당연한 말일뿐더러, 동부가 한 짓거리를 알고 있다면 또 한바탕 설교를 늘어놓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효을 입장에서는 코란 해체 사태와 같은 일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테니까. “사건 사고라. 그전에 네가 죽을 것 같은데.” “제기랄. 나도 마음 같아서는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다고! 그럼 적어도 마음껏 잘 수는 있을 테니까!” 돌연 이효을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마르는 흠칫 몸을 움츠리더니 내 품에 꼬물거리며 안겼다. “나보고 도대체 어쩌라는 건데? 나는 지금 내 도시 발전 계획만 해도 머릿속이 터질 것 같단 말이야! 아니. 그거 하나만 있는 게 아니지. 북 대륙도 계속 관리해야 하고!” 이효을이 화를 내며 외쳤다. 나한테 직접적으로 화낸다기보다는 서러움을 토로하는 것에 가까운 하소연이었다. 조금은 의외였다. 항상 이지적인 모습을 보이던 이효을이 갑자기 저런 태도를 보인다는 건…. 글쎄. “나는 이제 북 대륙의 수호자가 아니잖아? 그렇지? 그렇잖아! 그래! 원하는 대로 중앙 관리 기구까지 창설하고, 수장까지 맡았어! 사실 이것도 목숨 내놓고 하는 건데! 수호자 내려놓고 해밀 클랜에 들어가서 네 형이랑 연애하려는 계획은 아직 시작도 못했는데! 나도 다른 사용자처럼 아틀란타 탐험이나 해보고 싶은데!” 횡설수설. 이효을은 이제 침까지 튀겨가며 외치고 있었다. 나는 마르를 보듬으며 묵묵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너 고생하는 건 알아. “그런데, 염병. 맹아라 이 망할 것은 왜 갑자기 연락이 끊겨? 그리고 서 대륙이 잡것들은 또 왜 갑자기 기어들어와? 아니 씨발, 좋아. 좋다고. 다 좋은데, 우리가 왜 얘들을 구출해야 하냐고!” 이효을은 욕설까지 섞어가며 빽 소리를 질렀다. 나는 한 방 맞은 기분으로 이효을을 응시했다. 연락 두절? 구출? 잠깐만. 연락 두절은 그렇다 치고, 구출은 또 무슨 소리야? 아니 아니. 서 대륙? 어느 순간 갑자기 본론으로 넘어간 탓에 머릿속이 삽시간에 혼란해졌다. “후우우우….” 이효을은 조금은 후련해 보이는 얼굴로 길게 숨을 흘렸다. 그리고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양손을 모아 척 앞으로 내밀었다. “미안.” “…마음 고생이 심했나 보군.” “엉.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속이 펑 하고 터질 것 같았거든.” “사과는 됐고. 아무튼 속 좀 풀었으면 이제 말해봐. 수호자나 서 대륙이나. 갑자기 무슨 말이야?” 이효을은 또 한 번 한숨을 푹푹 흘렸다. 그리고 깍지 낀 손을 허벅지에 얹고는 소파에 얌전히 등을 기댔다. 이제야 예전의 모습이 되돌아온다. 피로한 기색은 여전했지만. 이윽고 이효을은 양손을 으쓱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머셔너리 로드. 정말 미안한데. 할 말은 이미 다했어.” “응?” “말 그대로야. 사흘 전까지 정확히 1127번을 호출했다는데 맹아라는 한 번도 응하지 않았어. 북 대륙에서도 종적을 감췄고. 그리고 북 대륙으로 오는 서 대륙 사용자를 구출하라는 계시가 내려왔어.” “계시? 야. 이효을.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무슨 밑도 끝도 없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제발. 그렇게 보지 말아주라. 나는 이제 북 대륙 수호자가 아니란 말이야. 갑갑한 건 나도 매한가지라고.” “…….” 참다 참다 화를 내려는 찰나 이효을이 매달리는 어조로 애원했다. 나는 목구멍 끝까지 치솟은 말을 간신히 삼켰다. 저렇게까지 하는 걸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마르야. 잠깐만 나가 있으렴.” 나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마르도 방에 흐르는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는지 군말 않고 문을 나섰다. 잠시, 불편한 침묵이 흐른다. “그래서.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건데.” “일단 맹아라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야 하는데…. 너도 알다시피 수호자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잖아? 아무튼 이건 내가 지금 알아보는 중이고. 우선은 서 대륙 사용자를 구출하라는 계시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아.” “전후 사정은 하나도 몰라?” “해당 정보는 사용자 이효을에게 공개할 수 없습니다. 이게 내가 받은 답변이야.” 입에 침을 적신 이효을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자 조금이지만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예전에 이효을과 첫 번째 만남을 가졌을 때 나는 그랬다. 너는 천사의 따까리라고. 아마 근래 그 말을 새삼 실감하고 있지 않을까. “그년들이 어떻게 말했는데.” 나는 속을 억누르며 입을 물었다. 그년들이란 당연히 천사를 일컫는 말이었다. “네 이름을 직접 언급해서 지목했어. 또 시급을 다투는 일이니 최대한 빠르게 해결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보상은 섭섭지 않게 주겠다면서.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가 이 문제로 소환의 방까지 오지 않기를 바라는 뉘앙스더라. 켕기는 게 있다는 소리겠지.” 이효을은 고자질하듯이 말했다.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지. 나는 곧바로 책상을 열고 호출석을 누르며 입을 열었다. “수호자 실종. 서 대륙 사용자 구출. 전후 사정은 생략하고, 그럼 너는 이 두 사건이 연관이 있다고 보는 건가?” “반반. 사실 아무리 생각해도 두 사건의 연관성은 찾을 수 없거든? 그런데 시기가 워낙 공교로우니 우선 염두에 두고는 있어.” 그때였다. 똑똑. “수현. 들어갈게요.” 이효을이 말을 맺는 동시, 간단한 노크에 이어 고연주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내 호출을 받고 들어온 것이다. “고연주. 얘한테 기력 회복에 좋은 차 한 잔 주고, 휴식할 수 있는 방 하나 내주세요.” 주섬주섬 무검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고연주는 의아한 음성으로 묻다가 이효을을 보더니 흠칫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그, 그래야겠네요. 그런데 어디 가시려고요?” “신전에 좀 다녀오려고 합니다.” 말을 하면서 나는 흘끗 소파를 흘겼다. 이효을은 생각도 못한 따뜻한 말에 깜짝 놀랐는지 복잡하고도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약간은 감동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너무 좋아하지는 말라고. 이렇게 빚 좀 지우면, 나중에 안쪽 도시 경합 때 어드밴티지 좀 주겠지? “급한 일이라니까 바로 가보는 게 나을 것 같네. 너는 적당히 머리 좀 식히고 있으라고. 그러다 몸 상한다.” 물론 속마음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으니 이 상황에서 가장 적당한 말을 꺼냈다. 이윽고 떠름히 고개를 끄덕이는 이효을을 확인한 후, 나는 곧바로 방을 나섰다. * ‘서 대륙 사용자를 구출하라.’ 사실 대단히 뜬금없을 뿐이지, 있는 그대로만 해석해보면 말이 안 되는 내용은 아니다. 허나 문제는 천사가 구출하라는 말을 직접 꺼냈다는데 있다. 천사들은 그냥 도우미로 있을 뿐이지, 어지간하면 홀 플레인에 간섭하지 않는다. 1회 차서 북 대륙이 한창 어지러울 때도 절대로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서 대륙 사용자가 죽든 말든 그대로 두는 게 맞는 일이다. 그런데 갑자기 계시를 내렸다고?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서 대륙에 무슨 사달이 났다는 소리였다. ‘해답은 천사들한테 있다.’ 신전을 완공하기는 했지만, 아직 제대로 된 이전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터라 아틀란타에서 소환의 방을 이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차피 워프 게이트가 있으니 큰 문제는 없었다. 나는 모니카로 이동한 후, 곧바로 신전을 찾아가 소환의 방으로 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잠시 후. 푸른빛이 잔잔히 흐르는 포탈이 실로 오랜만에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나는 한참 동안 정면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포탈에 몸을 묻었다. 0705 / 0933 ---------------------------------------------- 천사의 의뢰. 소환의 방으로 들어간 순간. “오랜만입니다. 사용자 김수현.”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예상한 그대로의 고요한 음성이 나를 반가이 맞이했다. 어두운 공간을 밝게 비추는, 은은한 빛이 흘러내리는 은색의 머리카락. 잔잔한 호수를 연상케 하는 연녹색 눈동자.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반투명한 날개. 중앙 제단에는 세라프가 앉아 나를 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잠시 그 시선과 마주하다가, 나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서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말로, 정말로 오랜만입니다. 이렇게 찾아와주시니 제 마음이 다 놓이는 것 같습니다.” 세라프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고요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애틋한 기색이 깔려 있다. 마치 자주 찾아와주기를 바랐던 것처럼. “그래. 오랜만이기는 하지.” 스스로 들어도 무뚝뚝한 음성이었다. 일부러 그런다기보다는 천사 앞에만 서면 자연스레 말이 곱게 나오지 않는다. 세라프의 표정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길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차분히 매만지면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왼쪽으로, 또 오른쪽으로. 마치 무언가 찾기라도 하듯이. “왜?” “아…. 혹시 그 아이는?” 그 아이? 마르를 말하는 건가? “마르? 마르는 왜?” “그냥….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잘 지내고 있어. 그런데 네가 관심 가질 일은 아니지 않나?” “…네?” “앞으로 여기 데려올 생각도 없으니까 신경 꺼도 돼.” “…그렇습니까.” 세라프의 눈동자에 언뜻 서운한 빛이 스쳤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이 살짝 굳은 것 같기도 했다. 딱히 별다른 기분은 들지 않는다. 품에서 연초를 꺼내 불을 붙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동안 여러 일을 겪으면서 궁금한 게 이래저래 쌓였거든. 여하튼 내가 왜 찾아왔는지는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네. 물어보십시오. 저 또한 도우미로서 최대한 성심껏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공개가 가능한 정보라면 말입니다.” 세라프의 음성은 무심했다. 태도가 조금 변한 것 같다면 내 착각일까. “우선은 칭호.” 허공에 사용자 정보를 띄웠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신살자(神殺者) - 김수현(3년 차) 2. 클래스(Class) : 검술 전문가(Secret, Sword Specialist,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S Zero) 세라프는 고개를 갸웃했다. “칭호 말입니까?” “응. 갑자기 칭호가 생겼다는 메시지가 뜨던데? 처음 보는 메시지야.” “맞습니다. 칭호는 이번에 새로 만들어낸 설정입니다.” “새로 만들었다고?” 되묻자, 세라프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Yes. 아시다시피, 사용자 김수현은 여태껏 무수한….” “업적을 이뤘습니다. 우리 모두는 크게 감탄하고 있습니다.” 말을 따라 하면서 끊어버리자 세라프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괜히 이상하게 말 돌릴 생각 말고 얼른 본론이나 말하라는 뜻이었다. “…그로 인해 얻어낸 이득으로, 사용자들에게 일종의 동기를 부여하려는 목적으로 새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칭호는 사용자의 업적과 연관돼 구현되는 시스템입니다. 아직 공식적으로 상용화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세라프는 간단하게 말하고 나서 입을 꾹 다물었다. “상용화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나한테는 생겼잖아. 신살자.” “아직,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용자 김수현의 경우는 시범 사례입니다. 가지고 있어서 나쁠 건 없습니다.” 나는 사용자 정보를 흘끗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무슨 효과가 있는데?” “칭호에 따라 다릅니다.” “그걸 누가 몰라. 신살자 물어보는 거잖아.” “…신살자는.” 세라프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반신의 경지에 오른 쿠샨 토르를 살해함으로써 생긴 칭호입니다. 말인즉 신격을 지닌 존재를 죽였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칭호를 가지고 있으면 어느 신역에든 마음껏 출입할 수 있고, 또 상황만 맞으면 신과 독대하는 이벤트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신역 출입. 신과 독대. 별로 장점은 느껴지지 않는데.” “신과 거인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딱히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아득한 신화 시절, 거신 전쟁에서 가장 크게 활약한 쿠샨 토르의 죽음은 신들의 입장에서는 환영할만한 일입니다. 혹여 만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면 무언가 보상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흠…. 보상이라.” 보상 얘기가 나오자 조금은 구미가 당겼다. 허나 신과의 만남은 흔한 일이 아니거니와, 지금 바로 받을 수 있는 보상도 아니다. 세라프의 말대로 가지고 있으면 나쁘지 않은 정도였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좋아. 그건 그렇고. 북 대륙 수호자가 실종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보아하니 사용자 이효을의 말을 듣고 오신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세라프가 내 말을 끊었다. 여전히 반응 없는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북 대륙 사용자가 실종된 건 맞습니다. 허나 우리도 알고 있는 건 그것뿐입니다. 사용자 이효을이 개인적으로 도움을 청했을 뿐이지, 사용자가 김수현이 크게 관심을 가질 일이 아닙니다.” 왠지 아까 했던 말이 그대로 되돌아오는 것 같은데. 그것도 가시가 잔뜩 돋쳐서. 여하튼 세라프의 말은 이해했다. 하기야 어지간하면 간섭하지 않는 천사의 특성상, 현재의 관심사는 ‘맹아라의 생사’가 아닌, ‘새로운 수호자를 선출할 것인가.’일 것이다. 그런데. “그럼 마지막으로….” 그래서 더욱 이상하다. 그러니까 일관성이 없다. 사용자를 실험실의 생쥐처럼 생각하고, 하물며 수호자의 안위에는 관심도 없는데. 갑자기 타 대륙 사용자의 안위에 관심을 가진다? “서 대륙 사용자를 구출하라. 이건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입니다. 현재 서 대륙 사용자는 무법자에 쫓기는 중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도망쳐오는 서 대륙 사용자를 구출하고 안전하게 데리고 와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무법자?” “서 대륙의 부랑자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나는 머리를 세게 헝클었다. 세라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아니. 세라프. 왜 게네들이 쫓고, 쫓기는 건데?” “그건 우리도 잘 모릅니다. 허나 아마 무법자는 탈출한 사용자가 다른 대륙에 도움을 요청하는걸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 즉 현재 서 대륙의 상황을 숨기려는 목적으로 쫓는 게 아닐까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상황을 숨긴다? 입막음 때문에 쫓는다는 소리야?” “Yes. 현재 서 대륙의 상황은 굉장히 좋지 못합니다. 북 대륙처럼 사용자가 정상적으로 활동하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그 순간 한 생각이 번뜩 뇌리를 스쳤다. “잠깐만. 그럼 설마….” “무슨 말씀을 하려는지 알 것 같으나, 구출은 합병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저 서 대륙은 자체 정화 작업이 힘들다고 판단, 무법자를 제외한 정상적인 사용자를 구원하려는 겁니다. 인간의 개념으로는 피난 또는 이민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 “그리고 여담입니다만. 현재 서 대륙 사용자는 대다수가 남 대륙 쪽으로 이주하고 있고, 그쪽 역시 훨씬 많은 무법자가 쫓고 있는 실정입니다.” 세라프의 말이 폭풍처럼 이어졌다. 나는 지끈거리기 시작한 이마를 누르며 하나씩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서 대륙의 상황이 안 좋다. 완전한 무법 지대로 변했고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하다. 결국 소수의 정상적인 사용자가 다른 대륙으로 이주하기로 했는데, 무법자가 입막음을 목적으로 쫓아오고 있다. 천사는 우리가 무법자에게서 서 대륙 사용자를 구출하고 안전하게 데려오기를 원하고 있다. 좋아. 여기까지는 이해했다. 그런데 아직 하나가 남았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우리가 원하는 건 하나. 누군가가 최대한 신속히 서 대륙 사용자를 구원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용자 김수현 정도면 충분히 우리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 “왜?”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 수호자의 안위는 생각도 않으면서, 왜 서 대륙 사용자의 구출은 이렇게 나서주는 거지?” 그때였다. 찰나의 순간이기는 했지만, 세라프의 두 눈에 동요하는 빛이 스쳤다.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무언가 사정이 있다. 그것도 매우 커다란 사정이. “그건….” 세라프가 조용히 운을 떼었다. “사용자 김수현에게는 밝힐 수 없는 정보입니다.” “뭐?” “이 의뢰를 받기 싫으신 겁니까? 보상은 섭섭지 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야. 너 지금….” “그러면 거부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북 대륙으로 쫓아오는 무법자의 수는 그리 많은 편도 아닙니다. 굳이 사용자 김수현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용자에게 충분히 의뢰할 수 있을 수준입니다.” “세라프!” 그 순간 눈동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금…. 장난해?” 으르렁거리며 묻자, 세라프가 가는 한숨을 흘렸다. “얼마 전 하나의 안건이 있었고, 그 안건은 조건부로 통과됐습니다.” “그런데.” “이 의뢰는 그 안건의 통과에 걸린 조건 중 하나입니다.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것뿐입니다.” “그 안건….”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왠지 썩 좋은 안건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 “너는 그 안건에 찬성했나?” “…그렇습니다.” 세라프가 눈을 질끈 감으며 간신히 말했다. 마치 말을 토해내기라도 하듯이. 나는 입을 싱겁게 터뜨렸다. 갑자기 몸에서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내가 천사한테서 무엇을 기대한 걸까. 원래 이런 존재들인데. “하려면 닥치고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 …하기야. 너희가 항상 그렇지. 잠깐 잊고 있었나 봐.” 세라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나는 선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사용자 김수현.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글쎄. 사정은 모르겠지만 오해는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의뢰? 받아들일게. 너희가 고생해서 무대를 만들었으니까, 이번에도 열심히 춤추면 되는 거 아냐?” “그게 아닙니다. 이건 사용자 김수현의 염…!” “시끄러워! 너는 예전에도…!” 나와 세라프의 목소리가 겹쳤다. 벌컥 말을 이으려는 찰나, 순간적으로 아차 하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져 1회 차 일을 들먹일 뻔한 것이다. 바로 입을 다물고 쳐다보자, 공교롭게도 세라프도 아차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염…? 이윽고 불편하고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 “…….” 우리는 한참을 서로 노려보았다. 세라프는 입을 꽉 다물었다. 여전히 고요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으나, 살짝 벌어진 입술이나 날개가 묘하게 떨고 있다. 나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이래서 신전, 아니 소환의 방에 오는 게 싫다. 올 때마다 싸우는 것도 싫고, 자신이 피해자라도 된 것 마냥 저렇게 애처로운 모습을 보는 것도 꼴 보기 싫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이미 끝까지 타버린 연초를 버리고 세게 밟아 비볐다.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사, 사용자 김수현….” 그러자 아련한 음성이 귓가로 흐르듯이 들어온다. 마치 이대로 가지 말라고 붙잡는 것처럼. 우뚝 걸음을 멈췄다. “고맙다. 세라프.” 이를 악물며 머리를 돌렸다. “네…?” 제단에서 몸을 반쯤 일으키던 세라프가 눈을 살짝 치떴다. 그렇게 포탈에 몸을 묻기 직전. “고맙다고.” 나는. “항상 역겨운 존재로 남아 있어줘서, 정말로 고맙다.” 나직한 목소리로 진심을 담아 말했다. ============================ 작품 후기 ============================ 1. Stacato / 로유진 님 할 말이 있어요…. 그건 바로…. 2. nonononame / 로유미 님. 메모라이즈에 대해 할 말이 있는데요…. 사실 이 소설 말이죠…. (다음 회에 계속) 0ㅁ0…. 안아ㅣ뭉궁금하다아아아니ㅏ로구ㅡㅜㅇㄱ음나궁금해어ㅏㅁ구궁금ㅈ야밎앙너ㄴ이ㅑㅇㅏ#*@(#ㅃ&@(#*$#)(*! 아니. 세상에. 독자 님들. 이러시는 게 어디 있습니까. 아무리 내용이 절단 마공이라고 느끼셔도 그렇지. 어떻게 코멘트를 절단할 수가 있나요? 네? 아니 정말로, 어떻게. 아니 지금 말이 잘 안 나와요. 아무튼 저도 어떻게 보면 독자인데, 코멘트로 절단하시는 독자 님은 처음 봅니다. 오늘 회 올렸으니까 얼른 코멘트 이어서 써주세요! 궁금해 죽겠어요. ㅜ.ㅠ 0706 / 0933 ---------------------------------------------- 천사의 의뢰. 소환의 방을 나온 후, 나는 바로 아틀란타로 돌아와 회의를 소집했다. 시급을 다투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어쨌든 의뢰를 받아들였으니 최대한 빠르게 임무 수행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조금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클랜원들은 군말 않고 호출에 응해주었다. 회의장은 고요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적막하다. 권좌에 앉아 천천히 둘러보니 클랜원들은 입을 꽉 다문 채 흘끗흘끗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세라프를 만난 후의 더러운 기분이 은연중에 표출된 모양이다. “의뢰가 하나 들어왔습니다.” 표정을 가다듬으려 애쓰며, 나는 조용히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의뢰인은 신전…. 정확히는 천사입니다.” 살짝, 회의장이 어수선해졌다. 거의 모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 번갈아 본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사용자라면 모를까, 천사가 의뢰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천사라면…. 도우미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신재룡이 손을 들며 물었다. 나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예. 의뢰인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 도우미가 맞습니다.” “허….” “시간이 많지 않으니 간단하게 말하도록 하죠. 의뢰 내용은 사용자 구출이고, 구출 대상은 서 대륙 사용자입니다.” “……?” 웅성웅성. 비로소 의뢰 내용을 꺼내자 소란스러움이 한층 심해졌다. 어차피 예상하고는 있던 터라, 두어 번 탁자를 두드려 조용히 시키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여러 사용자가 한꺼번에 손을 들었다. “클랜 로드. 서 대륙 사용자요? 그리고 구출이요?” 가장 먼저 질문을 던진 건 정하연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턱을 주억였다. “말 그대로입니다. 듣기로는 우리와의 전쟁 이후 서 대륙의 치안 상태가 굉장히 좋지 못하다고 하네요. 그래서 견디지 못한 사용자 중 일부가 북 대륙으로 이주를 시도했는데, 그들을 쫓고 있는 무리가 있는 모양입니다. 천사는 그 무리를 무법자라고 칭하더군요.” “아, 아니…. 그러니까 왜….” “모르겠습니다. 저 또한 의뢰 내용만 간단하게 들었지 전후 사정은 듣지 못했어요.” “…….” 나는 딱 잘라 말을 끊었다. 혼란스러운 건 이해하지만 그건 나 또한 매한가지였다. 아는 게 없는데 어떻게 설명을 해줄 수 있겠는가. …젠장. 생각하니까 또 열 받는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클랜원들은 계속 내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신재룡이 살그머니 손을 들었다. “저…. 클랜 로드. 죄송하지만 무법자가 누구를 일컫는 말입니까?” “부랑자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서 대륙의 부랑자.” “그렇군요. 그럼 우리가 구출을 해야 하는데. 현재 서 대륙 사용자를 쫓고 있는 무법자 무리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계십니까?” “정확히는 모릅니다. 그러나 현재 무법자 대다수는 남 대륙으로 도망간 서 대륙 사용자를 쫓고 있는 중이랍니다. 상대적으로 북 대륙으로 오는 수는 대단히 적다고 하니, 우리 수준에서 충분히 정리가 가능할 듯싶습니다.” 정확하게 듣지는 못했으나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면 세라프가 그랬으니까. 인정하기는 싫지만, 천사는 언제나 사용자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올바르게 조언하는 도우미로써 존재한다. 차라리 공개할 수 없는 정보라며 입을 닫고 말지, 의도적인 거짓말도 하지 않는다. 물론 그게 우리를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지만, 어쨌든 액면 그대로 보면 도우미 역할을 부인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액면으로만 보면 말이다. “그럼…. 의뢰에 관한 보상은….”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섭섭지 않게 주겠다고 확실하게 약속 받았습니다. 아마 이번에 참가하는 클랜원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보상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그만 넘어가기로 했다. “그럼 이제 이번 의뢰에 참가할 인선 발표를 해야 하는데….” 조금씩 말끝을 흐리며 정면을 응시했다. 뜻밖에도 클랜원들은 큰 불만은 없어 보였다. 아니. 몇 명은 오히려 가고 싶다는 듯 눈을 희번덕 빛내고 있었다. 아직 혼란스러운 기색은 남아 있어도, 의뢰에 관한 두려움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강철 산맥을 거치면서 변했는지 아니면 보상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다. 어차피 의뢰 특성상 최대한 속전속결로 끝낼 필요가 있어,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바로 시작하죠. 근접 계열은 저를 포함해 고연주, 남다은, 안현, 차소림, 허준영. 이상 6명. 궁수는 선유운. 이상 1명. 마법사는…. 잠시 넘어가고. 사제는 안솔, 신재룡. 이상 2명. 특수로 백한결. 이상 1명입니다.” 이미 오면서 어느 정도 생각은 해둔 터라, 인선 발표를 빠르게 마칠 수는 있었다. 단, 마법사만 빼고. ‘마법사는….’ 나는 팔짱을 낀 채 손가락을 놀리며 무거운 고민에 빠졌다. 데려갈 인원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아틀란타가 아직 한창 발전 중이라는 게 문제였다. 이제 슬슬 손을 뗄 시기는 됐지만, 어디까지나 일선에서 물러난다는 거지 완전히 내깔려 둔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말인즉 도시에 남아 이것저것 처리해줄 사용자가 필요한데, 현재 마법사 대다수가 행정 업무를 맡고 있었다. 언제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는데, 무작정 데리고 갈 수는 없잖은가. “마법사는…. 우선은 비비앙.” 간신히 한 명을 호명하자 비비앙의 콧대를 척 치켜세우며 거드름을 피웠다. 마치 자신이 뽑힐 줄 알았다는 것처럼. 비비앙은 있어봤자 도시 발전을 저해할 가능성이 높으니 데리고 가는 게 도움될 것이다. ‘딱 한 명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나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정하연은 무조건 도시에 있어야 하고…. 김한별은 영감님 일 때문에 아직 힘들 테고…. 사샤는 대군 전투에는 맞지 않고…. 원혜수나 표혜미는 조금 불안하고…. 헬레나는 죽었고…. 아.’ 그 순간 제갈 해솔에 생각이 미쳤다. 번쩍 눈을 들어 시선을 맞췄다. 그러나 제갈 해솔은 돌연 눈을 동그랗게 만들고는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가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되지는 않는다. 나 또한 썩 내키지는 않는 의뢰라 굳이 억지로 끌고 갈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우리 클랜에 이렇게나 믿고 쓸만한 마법사가 없었나?’ 여러 상황이 겹쳤다고는 하지만, 입맛이 쓰다. 뒤늦은 후회가 찾아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정령 소환사를 육성시켜놓는 건데. 대군 전투에서 마법사가 가지는 위력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그냥 이대로 가도 상관이 없을 것 같지만, 최소한 마법사만은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싶었다. “저…. 클랜 로드.” 그때였다. “혹시 마법사 때문에 고민하시는 거라면….” 내 고민을 알아차렸는지 정하연이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나는 어서 말해보라는 의미로 턱을 까닥였다. “아주버님께 도움을 구해보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정하연은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안을 내놓았다. “아주버님? 제 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아주버님이요. 클랜 로드가 받아온 의뢰이지만, 아주버님께서 용병으로 참가하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하지만 형도 지금 한창 도시 발전 문제로 바쁠 텐데.” “제가 알기로는 해밀 클랜에는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사용자가 많고, 또 산하 클랜의 도움도 상당히 많이 받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클랜 로드가 도와달라고 하면 바로 달려와주실 거예요. 저번 공략 때 진 빚도 갚을 겸.” “으음. 그래도….” “물론 그냥 도와달라고 하자는 게 아니에요. 의뢰를 도와주면 약속된 보상은 물론, 차후 도시를 발전시키는데 우리가 따로 도움을 주겠다고 말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산하 클랜으로 돌아갈 거주민들을 조금 빼거나, 아니면 금화를 무상으로 지원하는 조건으로요.” 정하연이 차근차근한 어조로 설명했다. 나는 깊은 상념에 잠겼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정하연의 말이 사실이라면 형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큰 부담은 아닐 터. 무엇보다 형의 능력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뇌제(雷帝). 대인 전은 말할 것도 없지만, 대군 전에 특히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하는 최고의 시크릿 클래스였다. 정말 이래도 될까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결국 한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꼭 형한테만 도움을 받으리라는 법은 없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나는 결국 조용히 입을 열고 말았다. “정하연. 통신용 구슬을.” “알겠습니다. 클랜 로드.” 정하연이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백한결이 눈을 뜬 건 한밤중이었다. 새벽으로 치면 아마 4시쯤 되지 않았을까. “으암….” 백한결은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상반신을 일으키다가 돌연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손이 천천히 자신의 몸을 더듬는다. 백한결은 흡사 탐험을 앞둔 사용자처럼 완전 무장을 하고 있었다. 잠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다. “아차!” 그 순간 갑자기 백한결이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뜻 내다본 창밖은 그저 어둡기만 했다. 그러나 무에 그리 급한지, 백한결은 빠른 손놀림으로 눈곱을 떼고 복장을 점검하더니, 곧 침대 한쪽에 비스듬히 세워둔 둥그런 방패 하나를 들고 서둘러 방을 나섰다. 이윽고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와 성의 입구를 나서, 아틀란타의 거리로 진입했다. 아직은 어둠이 스며든 동이 틀락말락 한 거리에는, 아직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바삐 움직이는 사용자가 간간이 보였다. 가끔 백한결을 보고 은근슬쩍 접근해오는 사용자도 있었지만, 백한결은 일부러 모른 체하며 거절하는 의사를 표시했다. 아마 아틀란타에서 일확천금을 꿈꾸는, 그래서 이른 새벽부터 탐험에 필요한 동료를 구하려는 이들이리라. 그렇게 생각한 백한결은 한층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탐험도 나쁘지는 않지만, 오늘은 더욱 중요한 일이 있었다. 어제 저녁. 긴급하게 소집한 회의가 끝난 이후, 김수현은 의뢰에 참가한 클랜원에게 하나를 추가적으로 주문했다. 그 주문이란, 다름 아닌 의뢰를 수행하기에 앞서 모이는 곳을 정해놓고 집결지에 따로따로 오라는 지시였다. 한꺼번에 우르르 움직여 괜한 소문이 나는 것 보다는, 최대한 은밀하고 신속하게 의뢰를 수행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아무튼, 김수현이 요구한 건 두 가지였다. 집결지까지 최대한 시선을 끌지 말고 도착할 것. 그리고 절대로 늦지 말 것.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백한결은 집결지가 있는 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간에 워프 게이트에서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여인을 보며 로브를 눌러쓰고 나오지 않은 걸 후회하기는 했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나름 성공적인(?) 도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뮬은 아틀란타와 달리 한산하기 이를 데 없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조신한 숙녀…. 조신한 숙녀….” 백한결은 집결지 건물 이름을 멍하니 되뇌며 상점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시 발전이 멈춰서 그런지 거리는 여러 상점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어제 몇 번이고 집결지 장소를 들어둔 터라, 자신 없는 얼굴을 하면서도 백한결의 다리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이쪽에서 꺾어서….” 이제는 완전히 망했는지, 이곳저곳이 헌 ‘영감님 보석상’이라는 건물을 돌은 후 백한결은 직선으로 5분 가량을 걸었다. 그러자 곧 치마 입은 여인이 다소곳이 서 있는 간판을 내건, ‘조신한 숙녀’라는 낡은 여관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후. 좋아.” 백한결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중얼거리면서 주변을 세심히 살폈다. 사실 들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분위기가 상황을 만든다고 하던가. 백한결은 왠지 모르게 자신이 비밀 결사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똑똑. “저 백한결이에요.” 그냥 들어가도 상관없지만 서도 예의 바르게 문을 노크했다. 그리고 살그머니 문을 열어 안을 들여다본 순간, 백한결에 어여쁜 얼굴에 어안이 벙벙한 기색이 서렸다. 주방, 카운터, 탁자 등등.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여관의 풍경이었다. 그러나 여관에 있는 사용자들은 전혀 흔하지 않았다. 우선 탁자 하나를 차지하고 고개를 박고 있는 여인은 머셔너리 클랜원이 아니다. 백한결이 들어오는 소리에 잠이 깼는지 부스스 고개를 들더니 실눈을 뜨며 노려본다. “…쟤는 또 누구야?” “신의 방패.” 대답은 옆에서 나왔다. 흔들거리는 의자에 몸을 묻은 채, 품에 검은색 창을 꼭 품고 있는 사내였다. 거의 2미터에 가까운 체구를 보이는 거한도 역시나 머셔너리 클랜원이 아니었다. 여인이 입을 열었다. “신의 방패?” “방어에 특화된 시크릿 클래스라고 하던데.” “흐응. 하여간 이 클랜은 신기한 애들 되게 많다니까….” “…….” 여인이 나직한 음성으로 말하고 사내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백한결은 당황했다. 분명 자신을 두고 얘기하는 것 같은데, 저 두 명이 누구인지 잘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한두 번 보기는 한 것 같은데…. 그렇게 얼굴만 빼꼼 들이민 채로 누군지 기억해내려 애쓰는 찰나였다. “이런…. 내가 가장 늦었나?” 문득, 등 뒤로 새벽 바람이 묻은 차가운 코트가 스쳤다. 이윽고 반사적으로 몸을 돌린 백한결은. “미안한데. 조금 비켜주지 않을래?” 멋들어진 칠흑 색 마법사 코트를 걸친, 황금빛 스치는 눈동자의 사내를 볼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암에 걸린다는 기분이 무슨 기분인지 알 것 같습니다. 진심으로,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미묘했습니다. 아니. 지금도 그래요. 하…. ㅇ<-<…. 0707 / 0933 ---------------------------------------------- 천사의 의뢰. 삐걱삐걱…. 조금은 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입구의 문이 헐거운 소음을 내며 흔들거렸다. 탁. 조심스레 문을 닫은 백한결은 몰래 심호흡하며 몸을 돌아보았다. 약 60평 정도 크기의 공간에 여러 개를 이어 붙여 20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탁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탁자를 따라 둥글게 앉아 있는 사용자들. 총 13명에 달하는 사용자를 면밀히 바라보자 백한결은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드는 기분을 느꼈다. 괜히 목을 움츠리며 살금살금 걸어가 빈 의자에 궁둥이를 붙였다. 여관에는 차가운 한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으면 조금이나마 더운 김이 나올 법도 한데, 그러기는커녕 서슬 퍼런 기운만이 감돌고 있다. 모두 입을 꾹 닫은 채 침묵하고 있으니 더욱 춥다는 기분이 들었다. 흡사 함부로 입을 열어서는 안 될 분위기랄까.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던 백한결은 이윽고 3명에 시선을 고정했다. 대다수 사용자가 가슴에 머셔너리를 상징하는 검과 방패 문양을 그려놓은 것에 반해, 오직 그 3명만이 다른 문양을 보이고 있었다. 우선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팔짱을 끼고 있는 김수현의 오른쪽에 앉은 사용자. 옷깃을 살짝 올린, 전신을 가릴 정도의 커다란 칠흑색 마법사 코트를 걸친 세련된 인상의 사내였다. 어깨에는 매를 연상케 하는 황금빛 새 한 마리가 걸터앉아 있다. 백한결은 사내의 정체를 알고 있다. 그동안 수십, 아니 수백 번을 넘게 보기도 했거니와 북 대륙 마법사를 통틀어 거의 첫손으로 꼽을 수 있는 사용자였기 때문이다. 특히 뇌전 계열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마법사. ‘뇌제(雷帝)’ 김유현. 그리고 김수현의 왼쪽으로는, 여관 내 그 누구보다 거대한 체구를 가진 거한이 한껏 무게를 잡고서 앉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가죽 갑옷은, 어쩌면 근육으로 만들어졌을 거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눈은 덥수룩하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이따금 으르렁거리듯 움직이는 상처 난 입은 거친 야성의 성질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흡사 사람이 아닌 한 마리 짐승을 보는 듯하다. 백한결은 이 거한의 정체도 알고 있다. 무엇보다 품에 꼭 안은 불길한 기운을 뿌리는 검은 창을 보면 확실하다. ‘수라마창의(修羅魔槍) 주인’ 공찬호. 마지막으로 오른쪽 건너편에는 왠 여인이 앉아 있었다. 특이하게도 이 여인은 앞선 두 사내처럼 무겁지만은 않았다. 누군가를 바라보며 새침하게 비웃거나, 죽일 듯이 노려보는 등 수시로 표정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대체 누구를 보고 저러나 의아해 했는데, 건너편의 고연주가 소리 없이 맞받아치는 모습을 확인한 순간 백한결은 비로소 여인의 정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처형의 공주(Princess Of Executions)’ 연혜림. 처음에는 당황해서 누구인지 몰랐는데, 잘 생각해보니 떠올릴 수 있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10강에 오른 사용자고, 사용자 아카데미에서도 한두 번 마주친 기억이 있다. 특히 고연주와 눈빛으로 싸우는걸 보면 거의 확실하다. 왜냐면 아주 가끔 고연주가 연혜림을 걸레의 공주라고 욕하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이윽고 고연주는 피식 웃으면서 손에 코를 쥐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냄새 난다는 뜻으로 연혜림을 걸레에 빗대어 표현한 행동이다. 이내 발끈한 연혜림이 이를 갈며 탁자를 짚고, 백한결이 어어 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찰나였다. 우웅! 문득 어디선가 일어난 미약한 마력의 흐름이 새벽의 정적을 깨트렸다. 그 순간 고연주와 연혜림은 동시에 행동을 정지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히 집중했다. 그 신속한 태도 변환에 놀라면서도 백한결은 얼른 탁자를 응시했다. 이리저리 갈라진 나무 탁자 중앙에는 연한 빛을 흘리는 푸른색 구슬 하나가 놓여 있다. 어느새 눈을 뜬 김수현이 조용히 구슬에 손을 얹었다. 번쩍! 빛이 터지며 구슬이 누군가를 비췄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조금 피곤해 보이는, 이지적인 여인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다. 백한결은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저 여인이 누군지 자세히는 모르나, 중앙 관리 기구에서 가장 높은 사용자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잠시 후, 이효을이 사방을 훑더니 휙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정말 장난이 아닌데. 어지간한 대형 클랜 한두 개는 가볍게 찜쪄먹겠어.) “흥. 하도 도와달라고 사정을 해서 말이야. 사실 이런 거 잘 나서는 성격은 않는데, 소영이도 도와주라고 하니까. 내키지는 않지만, 이 몸이 친히 나섰지.” 이효을의 감탄하자 연혜림이 새침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거드름을 피웠다. 김수현은 남몰래 싱겁게 웃었다. 이스탄텔 로우에 연락을 한 건 맞지만, 사실 연혜림이 아닌 한소영을 데려오려고 했다. 나름 용기를 내, 근래 여러 일로 머리가 아프지 않으냐며, 같이 무법자나 처리하면서 기분 전환이나 하자고 제의한 것이다. 그러나 한소영은 대단히 미안해하며 요즘 너무 바쁘다는 말로 완곡히 거절한 후, 연혜림을 데려가 주지 않겠느냐며 되레 부탁했다. ‘걔는 있어봤자 도시 발전에 손톱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애라, 이렇게라도 돌리고 싶네요. 그러니까, 부디.’라고 덧붙이면서. 물론 연혜림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겠지만. (좋아. 아주 좋아. 이 정도 전력이면 오히려 그 무법자 놈들을 애도해야겠어.) “준비에 만전을 기했을 뿐이야. 그나저나 정보는?” 김수현이 가볍게 말을 정리하며 되물었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거리던 이효을의 얼굴에 미안해하는 빛이 서렸다. (음…. 일단 무작정 신전으로 쳐들어가서 물어보기는 했는데…. 우선은 현재 ‘칠흑의 숲’에서 확인된 서 대륙 사용자는 총 1500명 정도. 쫓기는 사용자는 약 400명, 500명 정도고, 쫓아오는 무법자 수는 그 두 배 가량 되나 봐.) “두당 100명이라…. 실컷 날뛰어볼 생각 없느냐고 꾀더니, 이건 조금 실망인데. 흐흐….” 그 순간 여태껏 조용히 듣고만 있던 공찬호가 희뿌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김수현이 길게 숨을 흘렸다. “어쩔 수 없지. 대다수가 남 대륙으로 몰려갔다고 하니까. 아무튼, 칠흑의 숲에 있다고?” (응. 이건 내 예상인데 아마 저번 전쟁 때 부랑자들이 들어온 길을 이용하는 것 같아.) “그럼 미개척 지역을 거쳐서 왔다는 소린데.” (그렇겠지. 여하튼 알아낸 정보는 이게 다야. 미안.) 이효을은 미안하다고 말하며 쓰게 웃었다. 의뢰를 받은 입장인데 구걸하다시피 해 정보를 받아온 게 씁쓸했다. 그러나 김수현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야기를 들을 때부터 서 대륙 사용자를 꼭 구해야 한다기보다는, 의무적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세라프도 그러지 않았는가. 이 의뢰는 모종의 안건을 통과시키기 위한 하나의 조건에 불과하다고. 애초 천사가 사용자를 생각해 나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 정도면 충분해. 거리나 위치 파악은 이 녀석이 할 수 있으니까.” 김유현이 빙긋 웃으며 어깨에 앉은 황금새를 톡 건드렸다. 새는 날카로이 눈을 빛내며 나지막이 울어 젖혔다. (응. 이렇게 도와줘서 고맙고 또 미안해. 다들 건투를 빌겠어.) 이윽고 이효을이 깍듯이 인사하며 응원하는걸 마지막으로 구슬의 빛이 꺼졌다. “음….” 김수현은 담담히 구슬을 품에 넣은 후, 주변을 쭉 훑었다. “뭐…. 다들 알아서 잘해주겠죠.” 무언가 말하려고 하다가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각자의 수준을 따져보니 따로 지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홀 플레인에는 이런 말이 있다. 잘 키운 사용자 하나 열 사용자 부럽지 않다. 그런데 여기 모인 사용자 대다수는 잘 큰 정도가 아니라, 한 명 한 명이 극에 다다른 사용자다. 당장 김수현만 봐도 보통 사용자 100명 정도는 음주 후 해장으로 가볍게 처리 가능하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고, 김수현의 시선은 잠시 안현과 백한결 두 명에게 머물렀다. 허나 한 번 믿어보자고 생각했는지, 곧 탁자 아래서 커다란 회색 로브를 들어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다른 사용자들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똑같은 색의 로브를 몸에 둘렀다. 백한결은 혼자만 챙겨오지 않은 건가 싶어 당황하다가 허준영이 무심히 로브 하나를 건네자 반색하며 받아 입었다. 잠시 후, 김수현을 선두로 한 사용자들이 한 명 한 명 여관 밖으로 나섰다. “그럼, 갑시다.” 그렇게 회색 로브를 눌러쓴 14명의 사용자는, 바람처럼 성문을 벗어나 칠흑의 숲 안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 부스스, 부스스! 어스름한 새벽. 뿌연 안개가 깔린 어두운 숲은 새벽의 고요함과는 맞지 않은 때아닌 부산함을 보이고 있었다. “후욱…. 후욱….” 이윽고 흔들거리는 수풀을 헤치고 한 여인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여인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여인은 선두에 불과했고, 곧 수풀이 또 한 번 크게 흔들리며 무수한 사용자가 속속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수는 실로 상당해 4, 500명은 될 법했다. 여인을 포함한 사용자들의 모습은 척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산발이 된 머리카락은 애교로 보일 수준이다. 꼭 몇 달은 씻지 못한 사람처럼 몸 군데군데 먼지가 쌓여 있고, 입고 있는 갑옷이나 로브도 꺼멓게 변색돼 너덜거리고 있었다. 심한 경우는 아예 로브가 아닌 걸레로 보일 정도였다. “거의…. 이제 거의 다 왔어….” 그러나 여인은 무언가에 홀린 듯 맥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끊임없이 걸었다. 허나 끝없이 정면을 응시하는 두 눈동자만큼은 뜻 모를 비장함을 품고 있었다. 그때였다. “사라! 사라아아!” 돌연 후방에서 날아온 절박한 외침이 여인의 등을 때렸다. 사라라고 불린 여인은 여전히 걷는걸 멈추지 않으면서 흘끗 고개를 돌렸다. 한 사내가 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죽어라 달려오고 있었다. 사라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서렸다. “아놀드?” “사라, 사라! 큰일이에요! 큰일이…. 악!” 그 순간 아놀드라 불린 갈색 머리칼의 사내가 세차게 땅으로 고꾸라졌다. 아마 급하게 달려오다가 발이 꼬인 듯했다. 사라는 갑갑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걸음을 돌려 아놀드에게로 다가갔다. “아놀드?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그, 그게…. 큭!” 아놀드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고통이 심한지 이를 악물었다. 발목 부근이 새빨갛게 변해 퉁퉁 부어 있었다. 깜짝 놀란 사라가 무어라 외치려 했지만, 아놀드가 세게 머리를 흔들었다. “사, 사라! 큰일났어요! 낙오자, 낙오자가 생겼다고요!” “네?” 사라가 두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어서 재빠르게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흡사 누가 쫓아오지는 않는지 심히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아놀드가 고통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습격은 아니에요. 아무래도 연이은 강행군에 지쳐, 어디선가 낙오한 모양이에요. 길을 잃은 게 분명해요.” “아놀드.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어요. 지금 우리 상황이 그렇게 좋지가 못해요.” “사라.” “안 돼요. 설마 여기까지 쫓아올 줄은 몰랐지만, 우리는 이틀 전 거의 따라 잡힐 뻔 했잖아요.” “하, 하지만….” “운이 좋아서 간신히 도망칠 수는 있었지만, 또 그런 행운을 기대할 수는 없어요.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가는 이후의 상황을 장담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일어나요. 어서.” 사라는 아주 빠르게 말하면서도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형히 빛나는 아름다운 금빛 눈동자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자 아놀드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면서도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사라….” ============================ 작품 후기 ============================ 오늘 조금 슬픈 일이 있었네요. 사실 집필하면서 아주 가끔, 정말로 가끔 노래를 부르고는 합니다. 오늘처럼요. “믿을 수~. 있나요~. 나의 꾸움~. 속에서~. 너는 마법에 빠진 공주란 걸~!” 그래서 이렇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께서 저를 부르시더라고요. “유진아….” “언제나~. 너를~. 향한 몸짓에~. 수많은 어려움~~~~. 네?” “미안하다….” “네? 뭐가요?” “엄마가 미안해….” “????” “엄마가 미안해…….” “…….” 그리고 형이 갑자기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그래. 야. 나도 미안하다.” “아니. 갑자기 왜 그래. 노래 부르지 말라고? 작게 불렀는데.” “아니. 미안. 정말 미안. 미안하다고.” “…….” …살면서 형한테 미안하다는 말 들어본 게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어안이 벙벙하더라고요. 아무튼 오늘 좋은 걸 배웠네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형이 출근하기 전에 문 앞에서 뽀뽀뽀를 부를 예정입니다. 하하하. 0708 / 0933 ---------------------------------------------- 14 Vs 1000. “한 번만, 다시 한 번만 생각해봐요. 제발.” 그때였다. 망설임 없이 몸을 돌리려는 찰나, 아놀드의 애절한 음성이 사라의 귓전을 울렸다. “사라. 여태껏 같이 온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사라도, 나도 아는 사람들이라고요. 조이, 조나단, 레이첼, 테레사! 모두 친구잖아요.” “아놀드?” “이렇게 되기 훨씬 전부터, 서로 돕고 의지해온 동료들이잖아요. 정말로, 정말로 이대로 버리겠다는 건가요?” “…….” 아놀드의 목소리가 흡사 애원하듯이 이어졌다. “물론 사라의 말은 틀리지 않아요. 하지만 최고의 선택이 무조건 최선의 결과를 낳는 건 아니잖아요?” 사라는 말문이 막힌 것처럼 입을 닫았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놀드를 보니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저분히 흐트러진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두 눈이 선하게 드러났다. 뜨거운 열정을 품은 또렷한 눈동자와 마주하자 사라의 얼굴이 덩달아 화끈해졌다. “이틀 전에 잡힐 뻔했다고는 하지만, 그 후로 한 번도 보이지 않았잖아요. 방향을 잘못 잡았을 수도 있고 그대로 돌아갔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주변을 둘러봐요. 연이은 강행군으로 인해 모두가 지쳤어요. 그래서 낙오자가 생긴 거고요. 조금이라도 좋으니 우리는 휴식이 필요해요.” “아놀드….” 계속해서 이어지는 아놀드의 설득. 언뜻 주변을 둘러본 사라는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초췌한 얼굴로 아기를 들고 있는 젊은 부부. 허리를 굽힌 채 숨을 헐떡거리는 여아와 걱정하는 얼굴로 등을 두드려주는 앳된 소년.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모두가 힘들어 보인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도망치는 내내 항상 괴물이나 무법자의 습격에 떨어야 했으니까. “사라. 심정은 알겠으나 근래 너무 예민해진 것 같아요. 우리는 예전처럼 따뜻하면서 밝고 명랑한 사라가 돌아오기를 바라요. 그러니 제발…!” 아놀드가 거듭 부탁하고 있다. 이쯤 되자 단호하던 사라도 한 번은 다시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대다수 사용자가 남 대륙으로 도망치고 무법자가 황급히 쫓는 사이, 사라는 틈새를 찌를 요량으로 남은 사용자를 이끌고 북 대륙으로 가는 길을 잡았다. 확실히 의도는 좋았지만, 문제는 가는 길을 거의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다행히 2년 동안 동고동락해온 아놀드가 직접 나서 길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말인즉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아놀드의 공이 가장 컸다. 그동안 얼마나 헌신적으로 희생했는지 알고 있어, 사라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사라. 불과 30분 전만 해도 모두 있는 걸 확인했어요. 장담해요.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휴식하는 동안만이라도 찾아보면 안될까요?” 결국에는 이 말이 결정타였다. “…알았어요.” 사라는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휴식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고, 아놀드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놀드의 안색이 환해졌다. “사라!” “그래도 오래는 못 기다려요. 20분. 딱 20분만…?” 말을 잇던 사라는 돌연 몸이 격하게 흔들림을 느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을 힘껏 껴안은 아놀드를 볼 수 있었다. “고마워요. 정말로 고맙습니다.” 구릿한 냄새가 물씬 풍겨왔지만, 사라는 이상하게도 싫지 않았다. 오히려 지친 심신을 달래는 포근한 감각을 느꼈다. “…딱 20분만 기다릴 거예요.” 아놀드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사라의 얼굴을 부드러이 감싸며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요. 꼭 20분 안에 돌아올 테니까, 사라도 약속해요. 제가 돌아오기 전까지만이라도 푹 쉬고 있기로.” “아놀드?” “서로 약속한 거예요? 알겠죠?” “그, 그래요.” 어느새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서일까. 사라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아놀드는 곧바로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중간에 절뚝거리는 걸 보고 사라가 걱정스레 외쳤지만, 아놀드는 물약을 들어 올리며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아놀드는 숲 속으로 사라졌다. 사라는 한동안 아놀드가 사라진 숲을 바라보다가 두 손을 천천히 볼에 댔다. 아직 남아 있는 따뜻한 감촉이 몸을 아늑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한편으로는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근심이 들었지만, 이미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은 하나하나 자리에 앉고 있었다. 젊은 부부는 이제 좀 살겠다는 얼굴로 품에 안은 아기를 보며 미소 짓고, 어린 남매는 서로 꼭 껴안은 채 머리를 기댔다. 그 모습을 보자 딱히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어, 사라는 커다란 나무 하나를 찾아 몸을 기대앉았다. 갑자기 아놀드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우리는 예전처럼 따뜻하면서 밝고 명랑한 사라가 돌아오기를 바라요.’ 그 순간 여태껏 딱딱히 굳어 있던 사라의 얼굴에 봄바람 같은 미소가 살그머니 자리잡았다. “정말, 너무 정이 많다니까….” 사라는 빙그레 웃음 지은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문득, 어디선가 따뜻한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라의 얼굴은 여전히 발그레한 상태였다. 따뜻한 기운은 마치 이대로 잠을 자라고 부추기듯이 사라의 전신을 잠식했다.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이대로 자고 일어나면 왠지 굉장히 상쾌하게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으니까. 서서히 수마가 몰려온다. 깜빡깜빡, 눈꺼풀이 감겼다가 힘없이 뜨인다. 찰나의 순간, 이대로 자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파도처럼 밀려오는 잠의 기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윽고 머릿속에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은 순간, 사라는 그대로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졌다. * 동이 텄다. 해는 서서히 중천으로 올라가고 어두운 숲에 밝은 햇살이 비췄다. 새초롬히 돋아난 풀잎은 햇살을 받아 힘차게 기지개를 켜고 잎을 떨었다. 차가운 공기가 흐르던 칠흑의 숲은 어느새 이슬 빛 반짝이는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사박사박. 사박사박. 사박사박. 사박사박. 그리고 숲의 안으로 하염없이 걸어 들어가는, 머리 끝까지 회색 로브를 눌러쓴 14명의 사용자. “찾았다.” 이어서 나직한 음성이 울린 순간. 사박…! 14명의 사용자가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들어온 지 겨우 4시간이 지났는데…. 빠르군요. 어디인지 알려주시겠습니까?” 가장 오른쪽에 서 있던 사내가 얼른 후드를 벗어 젖혔다. 깔끔하게 깎은 스포츠 머리와 무심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선유운이었다. 이윽고 어딘가를 바라보는 황금빛 흐르는 두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마치 어느 정도 남았는지 가늠하기라도 하듯이. “북서 방향. 거리는 0.8 킬로미터 정도.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흔적이 많이 남았네요. 그것도 잔뜩.” “감사합니다. 그럼…. 클랜 로드.” “가보세요. 사람이 없다고는 하지만 혹시 모르니 조심하시고.” “예.” 가장 선두에 있던 김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 선유운은 가볍게 점프해 나무에 올랐다. 그리고 나무와 나무를 타고 김유현이 알려준 방향으로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김수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선유운이 먼저 가서 정찰하고 있을 겁니다. 그동안 우리는 적당한 속도로 접근하겠습니다.” 이윽고 13명의 사용자는 왼쪽으로 방향을 선회해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백한결은 가장 후방에서 걸어가면서 어색한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여태껏 겪은 탐험이나 원정과 비교해보니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전처럼 하나하나 세세하게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서로 긴 말이 오고 가지 않아도 눈빛만 교환하고 알아서 행동하고 있다. 마치 이러는 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아. 수시로 뜨거운 눈빛을 교환하는(?) 고연주와 연혜림은 제외하고. 아무튼, 아직은 수동적인 행동을 보이는 백한결로서는 확실히 어색하게 느낄 법한 일이었다. 잠시 후.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구조대는 김유현이 말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는 동안 딱히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새 선유운도 주변 정찰을 마치고 같은 결론을 내렸는지,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을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다. “발견한 정보라도 있습니까?” 김수현이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선유운은 조금 아쉽다는 듯 지면의 흙을 크게 쓸더니 입맛을 다시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한 발 늦은 것 같습니다.” “한 발 늦었다고요?” “예. 우선 도망친 사용자들이 여기까지 온 건 확실한데…. 주변을 돌아보니 포위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서 더 들어온 흔적은 없고 되돌아간 흔적은 있습니다.” “흠…. 최근 흔적은?” “약 4시간 정도 됩니다.” “이런.” 김수현이 혀를 찼다. 선유운의 말을 종합해보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 하나밖에 그려지지 않았다. 이윽고 고연주가 인근을 둘러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시체가 보이지 않는데요? 아니. 시체는커녕 반항한 흔적도 보이지 않아요.” “전력 차이가 두 배가 나는데, 순순히 끌려갔을 수도 있지. 너는 그런 생각도 못 하니?” 연혜림이 킥킥 비웃으며 핀잔을 놓았다. 고연주는 대번에 인상을 찡그리며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면 입 닥치고 있어. 할 줄 아는 건 전투밖에 없는 게.” 세차게 쏘아붙인 고연주는 이윽고 커다란 나무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얼굴을 가까이하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흐읍. 흠….” 이어서 마치 음미하기라도 하듯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더니 천천히 아래를 가리켰다. “여기서 이상하게 라타 냄새가 진하게 나네요.” “라타? 라타라면…. 수면 약초 아닙니까?” 무언가 짚이는 바가 있는지 신재룡이 말했다. 고연주가 맞는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네. 정확히는 체내에 따뜻한 기운이 감돌게 하고, 몸을 나른하게 풀어주는 효능이 있죠. 특히나 몸이 피곤하거나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했을 경우에는, 효과가 200% 직빵으로 들어가요.” “그렇군요. 허나 제가 알기로는 라타는 사시사철 따뜻한 곳에서만 자랄 수 있다고…. 여기는 칠흑의 숲이잖습니까.” “그래요. 라타는 유독 이 장소에서만 냄새가 나고 있어요. 그리고 이 나무 아래에는 누가 기대앉았던 흔적이 있고요.” “그러면….” 신재룡이 아리송하다는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고연주의 눈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다. “아무리 이로운 효능을 가진 약초라고 해도, 쓰임새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답니다. 쫓기는 상황에서, 어느 바보가 라타를 직접 사용하겠어요?” 뼈가 있는 말이었다. 신재룡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튼, 우리가 한 발 늦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네요.” 김수현이 얼른 상황을 정리했다. “괜히 하루 시간을 뒀나…. 4시간이면 조금 애매한데.” 말을 이으면서 김수현은 김유현을 흘끗 흘겼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추적할지 포기할지 결정을 내려야 한다. 우선은 추적 쪽에 마음이 기울고는 있었지만, 4시간이나 차이가 난다면 속도가 생명이다. 시작부터 방향을 잘 잡고 끈질기게 쫓아야 한다. “형. 혹시 쪼롱이랑 시야 동화 어느 정도까지 가능….” 그때였다. “생각보다 애매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김수현이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가만히 서 있던 김유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까 차분하던 것과는 다른 진득한 음성으로. “…형?” 김수현은 흠칫 놀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태연하던 김유현이 돌연 미약하게나마 살기를 뿌리고 있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무언가 더러운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이거…. 완전히 미친놈들이잖아?” 김유현이 이를 갈았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후드를 벗어 젖히고는 김수현을 돌아보았다. “무법자들이랬나?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김수현의 낯에 의아한 빛이 스쳤다. “그럴 리가? 4시간이라면 못해도….” “아니. 아니야.” 김유현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크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놈들, 아무래도 캠프를 차린 모양이다.” ============================ 작품 후기 ============================ 아이고. 그래요. 저 노래 못 부릅니다. 음치고, 박치에요. 아. 박치는 아닌가? 아무튼 노래 못 부르는 건 맞아요. 고등학생 때 친구 한 명이 저보고 진지한 목소리로 성인 남성의 목소리보다 한 두 음 정도 낮다고 말한 기억이 떠오르네요. 그래서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을 보면 속으로 엄청 부러워한답니다. 그리고…. 여전히 제 성별이 논란이네요.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저한테도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독자 분들이 저를 놀리려고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아무래도 제 말투나 태도에서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결정했습니다. 바꾸기로요. 이렇게 말이외다. 안녕하시료~. 본인은 로유진이라 하오. 몇몇 대협들이 소인을 여인으로 보시는 경우가 있는데, 아니외다. 본인은 절대로 여인이 아니며, 신체 건강한 매우 야성적인 사내요. 이 점, 특히 알아주시기를 바라오. 그럼 편안한 밤 보내시기를 바라겠소. _(__)_ 0709 / 0933 ---------------------------------------------- 14 Vs 1000. “……!” 어디선가 누군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아주 살짝 정신이 든 사라는 돌연 몸에서 뜻 모를 갑갑함을 느꼈다. 반사적으로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보았지만, 무언가에 꽁꽁 옭아매기라도 한 듯 사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사라는 서서히 눈을 떴다. 그러자 시야가 흐릿하게 열리는 동시, 덩달아 깨어난 청각에 가까운 곳에서 나누는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아 그러니까요. 그걸 왜 저한테 그러시냐고요. 애초에 저 아니었으면 이 연놈들 빠져나가는 것도 모르셨을 거잖아요. 아 좆 같네 진짜.” 조금 어수룩하면서도 밝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사라의 낯에는 불신의 기색이 스쳤다. 분명히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조와 비교하면 말의 내용은 천박하기 그지없었다. “허. 이 새끼 말하는 것 좀 보소. 야 이놈아. 네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 시간이 너무 걸렸다 이 말이잖아. 오죽하면 네가 우리 엿 먹이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라는 소리까지 나왔다고.” 걸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라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좀 전과 확연히 다르기는 했으나 이 또한 익숙한 음성이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사라의 입장에서는 철천지원수의 육성인데. 허나 사라의 머릿속에서는 원수에 대한 맹렬한 증오심보다는, 근본적인 의문이 앞섰다. 왜 갑자기 그놈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지? 아니. 여기는 어디고 나는 어떻게 된 거지? 등등. “거기서 조금만 더 갔으면 북 대륙 나오는 거 몰라서 그래? 너도 2년 전에 참가했으니까 알 거 아니냐. 거기는 괴물 같은 놈들이 흐드러지게 널린 곳이라고.” “아이고.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이렇게 캠프를 차리셨어요.” “야 인마!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쌓였는지 알아? 그래도 그동안 쌓인 거 풀 시간은.” “아 알았어요! 알겠는데. 난들 여기까지 오고 싶어서 왔습니까? 다 이년 때문이라고요. 어찌나 의심이 많고 눈치가 빠른지…. 에이!” 그 순간 사라는 정수리에 가해지는 거센 충격을 느꼈다. 격한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자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놀드가 보였다. 사라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지고, 아놀드도 놀란 기색으로 눈을 치떴다. “아, 아놀드?” “어? 깨어 있었어?” 두 목소리가 겹치는 동시, 사라와 아놀드가 서로를 빤히 응시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이윽고 아놀드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자리잡는다. 사라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는걸 느꼈다. 그러나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가 떠봐도 아놀드의 비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라는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지혜롭고 영리한 여인이다. 좀 전의 말을 들은 결과, 확신에 가까운 하나의 가능성을 추측했다. 그냥 인정하기가 싫을 뿐. “아, 아놀드. 어째서…?” “에이. 들었나 보네. 나중에 깨어났을 때 연기 좀 하려고 했는데. 아깝다~.” “저한테 그랬잖아요. 친구들을 찾으러 간다고 했잖아요!” “아! 그 친구들?” 아놀드가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가까이 다가와 사라의 머리카락을 잡아 끌었다. 그 우악스러운 손길에 신음을 흘리면서도 사라는 뜻 모를 불안을 느꼈다. 아놀드가 사라를 끌고 나간 곳은 천막 밖이었다. “걱정 마. 친구들은 확실하게 찾았으니까.” 능글맞게 말한 아놀드는 사라의 턱을 강제로 받쳐 올렸고, 귓가에 속삭였다. 잠시 후. 사라가 느낀 불안은. “그런데…. 살아 있다고 한 적은 없다?” “……!” 현실로 눈앞에 나타났다. 중천에 떠오른 해. 따사로운 햇살.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 이슬을 머금은 숲. 눈에 보이는 풍경은 평화로웠다. 그러나 숲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전혀 평화롭지 못했다. 가히 수백에 달하는 사람의 비명과 울음이 끊이지 않는, 한 폭의 지옥도를 그려내고 있었다. “아아아악! 아, 안 돼! 싫어어어! 살려주세요오오오!” “으하하하하하하하!” 한쪽에서는 네댓 명의 사내가 한 여인을 둘러싸고 있었다. 아까 아기를 안고 있던 젊은 부인이었다. 사내에 올라탄 여인은 눈물 범벅인 얼굴을 하면서도 스스로 허리를 놀리고 있었다. 그러다 속도가 조금 느려질 때쯤이면, 웬 사내가 아기를 높이 들어 올려 이리저리 흔들었다. 여인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 구슬픈 비명을 지르면서 도로 엉덩이를 열심히 놀렸다. 사내들의 낄낄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남편은 이미 차가운 시체가 된 지 오래였다. 아내와 아이에게 접근하는 무법자들에게 용감히 저항했지만, 결국에는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린 채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 옆으로는, 이제 갓 10살을 됐을 법한 앳된 소년이 온몸이 발가벗겨진 상태로 무법자 여인에게 깔려 있었다. 여인은 흡사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궁둥이를 내려찍는 중이었다. 소년은 반항도 하지 않고 찍히는 대로 몸을 움찔거렸다. 그냥 초점을 잃은 멍한 눈동자가 입이 찢겨 죽은 여동생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른 쪽의 상황도 매한가지였다. 무법자들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살인이나 욕정을 푸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아…. 아….” 사라는 고함을 지르려 했으나 소리는 목구멍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비로소 상황을 인지해서일까 희망이 사라져서일까. 아니면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그런 걸까. 파르르 떨리는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다. 그저 숨소리만 거칠어져 갈 뿐이었다. “후. 표정 한 번 좋네.” 그때 옆에서 누군가 비웃듯이 이죽거렸다. 고개를 돌린 사라는 단박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오랜만이야? 사라 제인.” 덥수룩한 턱수염의 살찐 사내가 킥킥 웃고 있었다. “조프리…!” 사라가 이를 갈았다. 그러나 조프리라 불린 사내는 건들거리며 다가오더니 끙 하고 허리를 굽혀 미소 띤 얼굴을 가까이했다. “내가 말했지? 너희가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내 손바닥 안이라고.” “…….” “그래서, 기분이 어때? 결국에는 이렇게 된 기분이 말이야.” “퉤!” 사라는 힘차게 침을 뱉었다. 침은 곧 인중에 맺혔으나 조프리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황홀해하며 혀를 내밀어 침을 핥고 빨아들였다. “하여간 너나 네 언니 비비안이나.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사냐.” 마치 소중한 것을 다루듯 사라를 조심스레 어루만진다. “죽일 거야…. 죽여버릴 거야…!” “죽이기는. 아 그러게 진작 내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좋잖아. 그냥 내가 원할 때마다 몸 좀 대주고. 그 대신에 내 첩으로 대접받으면서 편안하게 살고. 응?” 말을 하면서 조프리는 훌렁훌렁 하의를 벗어 젖히고 있었다. 그동안 욕정이 상당히 쌓였는지 행동은 대단히 급해 보였다. “개소리…! 읍?!” 무어라 외치려던 사라는 입안을 한 가득 틀어막는 감촉에 말을 삼켰다. 조프리가 벗은 속옷을 강제로 구겨 넣은 것이다. 가득히 흘러오는 구릿하고 역겨운 냄새에 토악질을 할 것 같으면서도, 사라는 서서히 다가오는 그림자에 몸을 떨었다. “나 참. 대장도 하려고요?” “어차피 이거 내일쯤 돼야 가라앉는다. 그리고 나도 좀 즐겨야지. 내가 그동안 얘를 얼마나 안고 싶었는데.” “어휴. 어련하시겠습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그런데 조심하십쇼. 저번에 비비안이 갑자기 깨물어서 고자 된 놈이 하나 있답디다.” “그래서 이렇게 틀어막았잖아. 흐흐흐흐흐흐흐흐!” 조프리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음침하게 웃으며 사라를 넘어트렸다. 구경거리가 생기자 주변에서도 여러 무법자가 시시덕거리며 몰려들었다. 거기에는 아놀드도 있었다. 사라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최대한 옆을 바라보았다. 크게 소리치고 싶었고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뭘 봐. 이 등신 같은 년아.” 그러나 아놀드는 차갑게 비웃으며 구경할 뿐이었다. 그 순간 사라가 마지막까지 놓지 못했던, 혹시나 하는 희망의 끈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찌직! 그와 동시에 거침없이 움직이던 조프리의 손이 사라의 하의를 찢었다. 한순간 하체가 시원해지고 소중한 곳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걸 느낀 순간, 사라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차오르는 수치심에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실망, 분노, 자책, 후회 등 여러 마이너스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곧 도착이었는데. 이제 거의 다 갔었는데. 계속 갔어야 했는데. 그런데, 그런데…. “햐…. 죽이는구먼.” 허나 조프리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사라의 몸에 급히 올라탔다. 사라의 눈동자가 텅 비워지며 허무하게 하늘을 바라본다. 그때였다. 문득, 사라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스쳤다. 아까까지만 해도 화창하던 하늘이 어느 순간 어둑하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늘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새 한 마리. 사라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새는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우르릉, 우르릉!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몰려든 먹구름은 파직 거리는 황금빛 전류를 폭발적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자~! 그럼 사라 제인의 처녀 개통식을…. 뭐, 뭐야?” 신 나게 외치던 조프리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의아해 하며 머리를 젖혔다. 그리고 이상 현상이 발생한 하늘을 확인했는지 흠칫 몸을 움찔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꽈르르릉, 꽈르르릉!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 소리가 재차 하늘을 울리고. 콰지지지지지지직! 숲 일대를 뒤덮을 정도의 무수한 벼락이, 노란빛을 분사하며 폭발적으로 내리 꽂혔다. 흡사 천벌을 내리듯, 지상으로 수직 하강하는 벼락의 폭우. 이어지는 벽력(霹靂)과 대지가 마찰하는 소름 끼치는 굉음. 낙뢰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리쳤다. 동시에 엄청난 정확도를 보여, 무법자 한 명 한 명에게 정확하게 내리 꽂혔다. “끄라라라라라라락!” “끼야아아아아아악!” 미처 대응할 틈도 없었다. 공간을 찢을 듯한 뇌성에 이어서 무법자들의 합창이 도처를 울렸다. “아…?” 온몸에 흐르는 짜릿한 감각에 사라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크게 놀라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위에 올라탔던 조프리가 눈 깜짝할 사이 시꺼멓게 그을려 재가 흩날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벼락을 맞은 게 분명했다. 그런데 사라는 그냥 짜릿짜릿한 감각만 느낄 뿐이지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 이윽고 황급히 주변을 둘러본 사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불타오른다. 신기하게도, 곳곳에 엎어진 무법자의 시체에서만 벼락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아직 서 있는 무법자가 있기는 했다. 허나 너무 갑작스러운 일을 당해서일까. 무법자는 하나같이 동작 정지에 걸린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물론, 그 틈을 놓칠 김수현이 아니었다. 그래. 마침내 천사의 의뢰를 받은 구조대가 도착한 것이다. “크하하하하하하하!” 어디선가 들려온 거친 웃음이 숲 일대를 떨어 울렸다. 수풀 너머로 여러 그림자가 비호처럼 달려온다. 그 속도는 처음 내리친 벼락과 비슷해, 재빠르게 수풀을 헤치고 넘어와 삽시간에 무법자들에게 들이닥쳤다. 첫 타로, 무법자 한복판으로 뛰어든 거한이 광소를 터뜨리며 있는 힘껏 창을 내리찍었다. 쿵! 대지마저 찢어버리는 무시무시한 파괴력이, 거센 흙먼지를 일으키며 망연히 서 있던 무법자 무리를 그대로 덮쳐 들었다. 푸확! 무언가 사정없이 터지는 소리. 무형의 기운에 받친 한 무리 무법자가 한꺼번에 터졌다. 점점이 쪼개진 살점과 핏물이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그냥 짓뭉개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몸 자체가 폭발해버린 것이다. 마치 폭탄에 직격당한 것처럼. “스, 습격!” 그나마 정신을 차린 어느 무법자가 얼른 경고하려고 했으나. 퍽! 그마저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어디선가 깊은 곡선을 그리며 날아온 화살이 그대로 입안을 꿰뚫어버렸으니까. 결국에는 머리 반대쪽까지 화살이 뚫린 채 힘없이 몸을 허물어트렸다. “다음은 누구냐~. 크흐흐흣!” 이윽고 처음 달려온 거한의 사내가 창을 붕붕 돌렸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붉은 눈동자가 먹잇감을 찾는 듯 주변을 둘러본다. 이제야 좀 상황이 파악됐는지, 무법자들은 당황하며 걸음을 물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법자들은 과연 알고 있을까. 무법자들이 물러나는 방향으로 회색 로브를 눌러쓴 사용자가 소리 죽여 걸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아니. 비단 후방뿐만 아니라, 동서남북 사방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이건….” 혼란한 와중, 인근을 둘러본 사라는 멍하니 말끝을 흐렸다. 지면에서는, 어느새 불길한 기운을 흘리는 검은 연기가 뭉클뭉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오라! 피에르!” 여인의 힘찬 목소리가. “제 4 군단을 지배하는 미친 불꽃의 어릿광대여!” 숲의 일대를 낭랑하게 울렸다. 마침내 일방적인 학살의 신호탄이 쏘아진 것이다. 0710 / 0933 ---------------------------------------------- 14 Vs 1000. 아비규환(阿鼻叫喚)! 아침까지만 해도 평화롭던 숲은 삽시간에 생지옥으로 변했다. 그것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참혹한 광경이었다. 서로가 죽고 죽이는, 아니 한쪽이 일방적으로 죽이는 학살의 극장이 막이 올랐다. “으, 으아아아아아아악!” 젊은 부인을 강간하던 무법자의 입에서 소스라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군단을 소환하는 비비앙의 낭랑한 외침이 들린 순간, 땅속에서 수백의 검은 인영이 불쑥 솟구쳤기 때문이다. 무법자가 벗은 바지를 추스르기도 전에, 소환된 마수들은 폭발적으로 내리 꽂히며 달려들었다. 서둘러 몸을 추스른 사라는 숲에 소환된 마수 군단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키는 약 2미터는 될까. 사방으로 물 흐르듯이 퍼지는 마수들 사이로, 웬 검은 인영 하나가 미친 듯이 웃어 젖히며 곡예와 같은 움직임을 보인다. 이윽고 쭉 찢어진 시뻘건 눈이 히죽 호선을 그리는 동시, 새빨간 입이 귓불 아래까지 활짝 찢어져 벌어졌다. “흐아아악! 흐아아악!”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오는 인영을 봤는지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검은 인영은 양손으로 무법자를 세게 붙잡고는, 그대로 들어 올려 입안으로 쏙 집어넣었다. 뿌드드드드드드득! 그리고 이어지는 무언가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 이내 와그작와그작 씹는 소리까지 들리자,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던 사내의 몸이 허무하리만치 축 늘어졌다. 목이 끊긴 시체가 하릴없이 땅으로 떨어지고, 작은 마수들이 득달같이 달려와 시체를 물어뜯기 시작한다. 그냥, 끔찍하다는 생각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군단 소환은 전조에 불과했다. 차마 더 볼 수 없어 고개 돌린 사라는, 곧 더욱 참혹한 광경을 보며 온몸을 떨었다. 웬 거한이 두 눈에서 시뻘건 안광을 뿜어내며 악마처럼 날뛰고 있다.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는 창에 무법자들은 그야말로 학살을 당하고 있었다. 한 번 내려 찍힐 때마다 머리통이 터지고, 푹 터져 나온 뇌수가 핏물을 흩뿌리며 저만치 멀리 뻗어 나간다. 심지어는 복부 아래가 찢어진 채 하늘로 너덜너덜 솟구치는 무법자도 있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파괴력이었다. 그뿐일까. “까아아악!” 어느 여인이 앞으로 우아하게 뛰어오르는가 싶더니 돌연 눈을 번뜩이며 손을 휘둘렀다. 흡사 칼날처럼 예리한 빛을 뿌리는 5개의 손가락이, 소년을 찍어 누르던 무법자 여인의 목젖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대로 목줄을 잡아 비틀었는지, “꺽.” 소리를 내는 입에서 핏물이 왈칵 쏟아진다. 주르륵 흘러내린 핏물은 곧 수풀에 맺힌 이슬에 섞여 들어가 흙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이윽고 씩 웃어 보인 여인은 곧장 이동해 보이는 족족 손으로 찌르고 자르기 시작했다. 익숙한 건 차치하고서라도, 너무 태연하게 사람을 죽이는 게, 장난을 치는지 ‘처형’을 하는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비명이 흐르기 시작했다. 단 한순간에 상황이 변했다. 불과 몇십 분 전까지만 해도 사용자의 절규가 메아리 치던 숲이, 어느 순간 무법자의 비명으로 가득히 메워졌다. 그러자 이성을 잃고 당황하던 무법자들도 한 명 두 명 행동을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무기를 집어 든 이도 있었지만, 소수에 불과했다. 공포에 떨어 저도 모르게 걸음을 물리는 이가 훨씬 많았고, 여전히 대다수가 제자리서 얼어붙은 채 허둥거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화륵, 화륵! 문득 어디선가 맑은 색의 붉은 화염이 이글거리며 치솟았다. 뜨거운 열기를 느낀 걸까. 주춤주춤 물러나던 무법자들이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타오르는 화염이 일직선으로 곧게 그어지며 기다란 잔상을 남겼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툭! 횡으로 그어오는 깔끔한 일격에 네 명의 무법자가 차례대로, 거의 동시에 목이 잘려 떨어졌다. 미처 말을 꺼낼 틈도 없었다. 몸은 아직 서 있기는 했지만, 잘린 목의 단면이 뻘겋게 타들어 가며 허연 연기만이 흘러나왔다. 피 분수가 점점이 솟구치는 흔들거리던 몸이 풀썩 허물어지고, 짙은 회색빛 로브를 눌러쓴 사내가 시체를 밟고 건너왔다. 특이하게도 오른손에 쥔 칼은 칼자루만 보일 뿐, 칼날은 보이지 않는다. 마치 허공에 동화되기라도 한 것처럼. 이윽고 인근의 무법자들이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 번개같이 휘둘러진 칼자루는 또다시 네 명의 목을 절단했다. 개중에는 목까지 덮는 상하 일체형의 두꺼운 갑옷을 입은 무법자도 있었으나, 보이지 않는 칼날은 마치 두부라도 자르는 것처럼 가볍게 베어 들어가 목을 잘라냈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기행. 깜짝 놀란 무법자 한 명이 후다닥 물러나더니 황급히 지팡이를 들어 주문을 외우려는 폼을 잡았다. 그러나 그 순간, 사내의 몸이 미끄러지듯이 앞으로 움직였다. 이어서 살짝 벌어진 무법자의 입안으로 물 흐르듯 부드러이 칼자루를 박아 넣는다. 끽 소리도 지르지 못한 무법자가 쓰러졌다. 그러나 사내의 걸음은 칼질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 처음 횡으로 칼을 긋고 시체를 밟고 건너올 때부터 사내의 칼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이내 칼자루를 한 번 고쳐 잡고서는 앞으로 걸어가며 좌우로 칼을 떨쳤다. 그러자 빛이 두어 번 번쩍이는 동시, 도처에 서 있던 무법자들의 목이 수수깡이라도 된 것 마냥 뚝뚝 부러지며 떨어진다. 이건 더 이상 전투가 아니었다. 그냥 일방적인 학살이다. 물론 김수현의 기습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는 했다. 처음 뇌신으로 벼락을 떨어트려 혼란을 일으키고, 공찬호의 난입과 선유운의 저격으로 시선을 끌었다. 이어서 비비앙의 군단이 기습적으로 들이닥쳐 혼란을 가중시킨 후, 남은 근접 계열이 사방에서 달려와 상황을 정리한다. 허나 차라리 무법자가 아닌 부랑자였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하다못해 2년 전 북 대륙으로 쳐들어왔던 시몬 휘하 정예 무법자였더라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실력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해도, 최소한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진을 구성해 나름 반항이라도 했을 터. 결국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근 2년이라는 시간 동안 강철 산맥 공략을 바라보고 착실히 실력을 쌓아온 북 대륙과, 그저 욕망에 이끌려 살아온 서 대륙의 차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 차이가 바로 이 전투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으, 으아아아아악! 씨발! 조져어어!” 그래도 곱게 죽기는 싫었는지 한 무법자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근처에 서 있던 무법자들은 멍하니 서 있다가 아차 한 표정을 짓고는, 앞서 달려나가는 무법자를 따라 우르르 움직였다. 수는 약 서른 가까이 될까. 어떠한 전술적 의미를 둔 행동이 아니었다. 그냥 서 대륙에서 구역 다툼을 할 때 의례 했던, 패싸움에서 발로한 버릇과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이대로 죽기 싫다는 의지가 깔려 있었지만. 문제는, 하필 달려들어도 김수현에게 달려들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무법자들을 보며 김수현은 가는 숨을 흘렸다. 갑자기 칼자루를 쥔 오른손을 내리더니 남은 한 손으로 귀걸이를 내렸다. 곧 왼손에서 하얀 빛이 흘러나오며 아름다운 칼이 생성됐다. 빅토리아의 영광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무법자들. 각기 무기를 꼬나 쥔 채 달려오는 모습을 보며 김수현은 느릿하게 왼손을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칼끝이 무법자들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 빅토리아의 영광이 눈부실 정도의 희멀건 빛을 토해냈다. 차르르르르르르릉! 눈 한 번 깜짝할 새, 칼에서 뿜어져 나온 수십 개의 빛무리가 무법자들을 해일처럼 덮치며 휩쓸었다. 그리고. 푸확! “아아아악!” “끄라라락!”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은 무법자들이 커다란 비명을 질렀다. 그냥 번쩍이는 빛무리가 한바탕 헤집었을 뿐이다. 그런데 빛에 휩싸인 무법자의 사지가 서걱서걱 잘려나가고, 목이 절반으로 크게 갈라지며 핏물을 울컥 뿜었다. 그러다 종래에는, 무려 서른의 무법자가 바람에 흩날리는 볏짚처럼 한꺼번에 우수수 쓰러진다. 빅토리아의 영광에 잠재된 능력, ‘검 빛’이 발동된 것이다. “맙…. 소사….” 일련의 전투, 아니 학살을 지켜본 사라가 두 눈을 치뜨며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까부터 사라의 눈은 김수현에게 고정돼 있었다. 그런데 직접 보고서도 믿어지지 가 않는 것이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눈 한 번 감았다가 떴을 뿐인데, 서른의 무법자가 동시에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으니까. 그나마 간신히 확인할 수 있었던 건, 칼의 발광(發光)에 이어 쏘아진 빛이 무법자들 사이로 스며들어 갔다는 것뿐이었다. “흠….” 허나 정작 당사자인 김수현은, 무심한 눈으로 주변을 가볍게 훑고는 천천히 왼팔을 내렸다. 그리고 또 어딘가로 차분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전투 한복판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걸음걸이는 침착하고 느긋하기 그지없다. 어떻게 보면 따분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문득 망연히 바라보던 사라의 머릿속으로 한 생각이 스쳤다. “이게…. 북 대륙 사용자…?” 사라도 들어본 적은 있다. 그러니까 2년 전, 서 대륙의 절반을 통일한 시몬이 전력을 이끌고 자신만만하게 북 대륙으로 쳐들어갔다가, 그야말로 개 박살이 난 사건을 말이다. 전쟁 이후 서 대륙은 북 대륙에 모종의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 당시도 서 대륙은 무법 지대였고, 그 누구도 군림할 수 없을 거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어지러웠다. 그런 서 대륙을 처음으로 통치할뻔한 무법자가 바로 시몬이었는데, 북 대륙이 보란 듯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시몬의 군대를 살해한 것이다. 한 번쯤 궁금하기는 했다. 도대체 어느 정도 수준까지 올랐길래 불패의 신화를 이룩하던 시몬을 깨트릴 수 있었는지. 그런데 직접 보니까 말이 나오지 않는다. 서 대륙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전투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북풍한설과도 같은 차가운 기운을 흘리는 여인이, 온몸에 빛나는 기운을 두른 채 무법자들을 매섭게 유린한다. 흡사 섬광과도 같은 움직임을 보이는 여인이 신묘하게 창을 놀리자, 구멍 뚫린 시체가 차근차근 쌓이기 시작한다. 도망치는 무법자들의 그림자가 꿈틀꿈틀 움직이더니 솟구치듯이 올라와 목을 꺾어버린다. 그렇게 학살은 계속됐다. 이제는 누가 무법자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크흐흐흣….” 그렇게 생각한 찰나, 바로 옆에서 음침한 웃음이 흘러들었다. 사라는 언뜻 고개를 돌렸다가 급히 숨을 삼켰다. 언제 다가왔는지, 불길한 기운을 뭉클뭉클 흘리는 거한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것도 창을 하늘 높이 치켜든 채로. “아….” 흡사 짐승과도 같은 시뻘건 눈동자와 마주하자 사라는 입은 물론, 온몸이 딱딱히 굳는 감각을 느꼈다. 아니라고 고개를 젓고 싶었지만, 머릿속으로는 죽는다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준비 시간도 없었다. 얼른 처리하고 다른 데로 가고 싶은지 창은 급하게도 일직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마법사로서는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일격. 정수리가 아릿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사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이었다. 우웅! 터엉!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주변을 왕왕 울렸다. 이윽고 살그머니 눈을 뜬 사라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된 걸까. 눈앞에 붉은 막이 덮인 칼이 수평으로 세워져 있다. 쪼갤 듯이 내려오던 창은, 칼에 흐르는 붉은색 장막에 가로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단 사라뿐만이 아니라, 창을 내리친 공찬호도 막아낸 김수현도 놀란 기색을 보였다. 공찬호가 창을 거두며 한 발짝 물러났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물어보자 김수현도 칼을 거뒀다. 그리고 차분히 표정을 가다듬은 후, 눌러쓴 후드를 젖혀 얼굴을 드러냈다. “얘는 아니야.” “…아니라고?” “그래. 무법자만 죽여. 무법자만. 괜히 엄한 사용자 죽이지 말고.” “이년이 무법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지?” 공찬호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김수현은 피식 웃더니 아예 로브를 벗어 땅으로 떨어트렸다. 사라는 흠칫 다리를 오므렸다. 흘러내린 로브가 자신의 하반신을 가려주자,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아까 조프리에게 찢긴 이후, 여태껏 사라의 하체는 계속해서 알몸인 채로 노출돼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입안에 강제로 넣어진 속옷도 그대로였다. 사라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속옷을 뱉은 후 웩웩거리며 속을 게워냈다. 하도 놀라운 광경을 보다 보니 깜빡 잊고 있었다. 침에 젖은 속옷과 연거푸 헛구역질을 하는 사라를 봤는지 공찬호가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자신의 일격을 막아낸 붉은 장막이 흐르는 검을 흘끗 응시했다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어느덧 숲의 비명은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무어라 후기를 쓸까 고민하다가…. _(__)_ 그냥 넙죽 하기로 했습니다. 항상 사랑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0711 / 0933 ---------------------------------------------- 14 Vs 1000. 사아아아. 가벼운 바람이 숲에 불었다. 역한 피비린내가 콧속으로 물씬 흘러 들어온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새 완연히 솟아오른 해는 칠흑의 숲을 밝게 비추었다. 대충 칼을 털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핏물과 살점으로 흠뻑 적셔진 일대가 눈에 들어온다. 가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시체가 사방에 널렸다. 무수한 핏물은 흐르고 흘러 아예 피 웅덩이가 고였을 정도였다. 둘러보다 보면 가끔 과한(?) 시체가 종종 눈에 밟혔다. 벼락에 시커멓게 그슬린 시체는 차라리 양반이다. 비비앙의 마수 군단이 휩쓸고 간 자리나 공찬호가 날뛴 자리는 나도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마수 군단에 뜯어 먹힌 시체는 다진 고기를 보는 듯했고, 공찬호에게 당한 시체는 꼭 어디 한두 군데가 심하게 터져 있었다. 눈이 번쩍 뜨일만한 강자가 있다면 또 모를까. 나야 애초 이 전투에 큰 감흥이 없다손 쳐도, 둘은 마치 누가 누가 더 잔인하게 죽이나 내기라도 한 것 같다. 흘끗 시선을 돌리자 일대 한복판에 털썩 주저앉은 공찬호가 보였다. 오른손에 수라마창을 부여잡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다. 왠지 공찬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다. 사실 아까 공찬호의 일격을 막을 때 정면으로 막으려는 게 아닌 최대한 비스듬히 흘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게헨나의 보호 요새가 전개되더니 칼에 붉은 장막이 덧씌워지며 공찬호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냈다. 말인즉 게헨나의 보호 요새를 갖고 있는 이상, 내 몸뿐만이 아닌 들고 있는 물건을 통해서도 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건 나조차도 모르고 있던 새로운 발견이었지만,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게헨나의 말마따나, 그 한 방을 막은 것치고는 어마어마한 마력이 소비됐으니까. 아무튼, 저번처럼 공격 한 번 막혔다고 난리는 치지 않으니 보기는 좋다. 저렇게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동안 공찬호의 내면이 어느 정도 성장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방증이었다. “시체가 952구…. 살아남은 사용자는 431명….” 문득 들려오는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 음성의 주인공은 형이었다. 전투가 끝나고 일대를 서너 번 둘러보는가 싶더니 인원을 계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윽고 내게 다가온 형은 엄지로 자신의 어깨너머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얼마나 왔는지는 모르지만, 우선 칠흑의 숲으로 들어온 무법자는 모두 처리한 것 같아. 그리고 사용자 피해는 정확히 47명. 우리가 오기 전에 무법자가 죽였나 보더군.” “혹시 우리가 실수한 건?” “없는 것 같아. 다행히 잘 골라 죽였다는 소리겠지.” “흠….” 형은 여전히 어깨 너머를 가리키고 있었다. 건너편에는 우리가 구해낸 서 대륙 사용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고, 안현과 신재룡이 사이사이 돌아다니는 게 부상자를 살피는 듯싶었다. 가끔 곁눈을 보이는 눈동자는 살았다는 안도와 뜻 모를 공포를 언뜻 비췄다. “고생했어. 이제 도시까지 무사히 데려가면 의뢰는 끝나겠네.” 어차피 의뢰 이상으로 의미를 두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전원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거의 구출하는 데는 성공했다. 이제 남은 일은 가까운 도시까지 같이 가주고, 차후 보상을 받으면 된다. 섭섭지 않게 주겠다고 했으니 보상이 정해지면 아마 거주민 전령으로 호출을 보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두어 번 가볍게 박수를 쳤다. “자. 그럼…. 응?” 이제 슬슬 돌아가자고 말하려는 찰나, 문득 안현이 웬 여인의 손을 잡고 일으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아까 내가 로브를 덮어준 여인임을 알 수 있었다. 로브로 하체를 둘둘 감아 질끈 묶고 있었으니까. 두 명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잠시만. 서 대륙 사용자와 이야기를 했다고? 안현이? 이윽고 안현과 같이 다가온 여인은 나를 보며 부드러이 웃고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먼지가 잔뜩 쌓이기는 했으나 빛을 잃지 않은 금발이 흘러내리고, 희고 고운 사슴 같은 목덜미가 언뜻 눈에 들어온다. 조금이지만, 방금 웃음을 보고 놀랐다. 여인은 다른 서 대륙 사용자처럼 마냥 불안해하지 않고 차분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여인이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리자 중천에 떠오른 햇살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얼굴이 드러났다. 밝은 금빛으로 빛나는 풍성한 머리카락은 부드러운 S자 웨이브를 그리며 어깨 아래까지 자연스레 흘러내렸다. 거기다 백인 특유의 육감적인 몸매와 흰 살결을 배경으로 두자 왠지 모르게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을 자아냈다. 이윽고 지혜롭고 영리해 보이는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안녕하세요. 나는 사라 제인입니다. 우선 우리 구해서 감사합니다.” 이어서 들려오는 약간은 어색한 우리말. 괜스레 흥미가 돋아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사라 제인Sarah Jane(4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마법사(Normal, Mage,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서 대륙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털빛이 흰 말 • 미국 6. 성별(Sex) : 여성(22) 7. 신장 • 체중 : 174.2cm • 57.8kg 8. 성향 : 선 • 총명(Good • Brightness) [근력 45] [내구 46] [민첩 48] [체력 52] [마력 92] [행운 86] < 업적(0) > < 특수 능력(1/1) > 1. 강화된 메모라이즈(Rank : EX) < 잠재 능력(4/4) > 1. 정통 마법(Rank : A Plus Plus Plus) 2. 마력 회로 응용(Rank : B Plus) 3. 질속 영창(Rank : A Zero) 4. – < 능력치 비교 > 1. 정하연 : Total 328 포인트.(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 포인트입니다.) [근력 36] [내구 40] [민첩 42] [체력 35] [마력 94(+1)] [행운 81] 2. 사라 제인Sarah Jane : Total 369 포인트.(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 포인트입니다.) [근력 45] [내구 46] [민첩 48] [체력 52] [마력 92] [행운 86] 사용자 정보를 읽은 순간 나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라 제인은 사용자 정보는 그야말로 마법사의 정석이었다. 능력치도 나쁘지 않고. 무엇보다 아직 잠재 능력 슬롯 하나를 개화하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 정도의 사용자가 개화하지 못했을 리는 없을 테고, 아마 모종의 목적을 갖고 일부러 개화하지 않은 듯싶다. 그냥 떨거지들만 있을 거라는 인식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반갑습니다. 김수현입니다. 한국어를 할 줄 압니까?” “네. 저. 한국 알고 좋아합니다. 대학 다닐 때 혼자 열심히 했습니다.” 가볍게 손을 내밀면서 말하자, 사라 제인은 조심스레 내 손을 맞잡았다. “우와~. 신기하다.” 그 순간이었다. 또 어디서 보고 있었는지, 안솔이 탄성을 지르며 냉큼 달려와 끼어들었다. 그리고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더니 호들갑스레 입을 열었다. “헤이 헤이! 두 유 노우 김치?” 야 인마. 상당히 뜬금없는, 어찌 보면 실례일 수도 있는 질문. 그러나 사라 제인은 곧 표정을 추스르며 포근히 웃었다. “아. 알고 있습니다. 나 김치 좋아합니다.” “우와아아~. 그럼 두 유 노우 불고기?” “네. 그거 정말 맛있습니다. 아주 잘 먹습니다.” “오오오오! 그럼 두 유 노우 백ㅁ…. 악!” 나는 얼른 주먹을 휘둘러 옆에서 불쑥 끼어든 머리통을 후려쳤다. 이게 무슨 소리를 하려고. “혀, 형…. 아, 아프잖아요….” 안현은 정수리를 부여잡고는 억울하다는 눈초리를 보냈지만, 한 번 험하게 바라보자 머리를 수그리며 걸음을 물렸다. 하여간 이것들은 오래간만에 전투 한 번 잘해놓고, 또 시작이다. “…킥.” 사라 제인은 잠깐 멍한 눈으로 둘러보다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얼굴에 화끈한 감각이 올라오는 걸 느끼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구조대입니다. 천사의 의뢰를 받아 당신들을 구출하러 왔습니다.” “천사?” “도우미라고도 하지요.” “아. 그 말을 압니다. 짚인 게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짚이는 게 있습니다 정도로 해석하면 되려나? 그 순간 문득 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고 보니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혹시 우리와 만나기 전, 다른 북 대륙 사용자와 만난 적이 있습니까?” “응? 아니. 없습니다.” 갑자기 맹아라 생각이 나서 물어본 건데, 사라 제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 서 대륙 이주 사건과 북 대륙 수호자 실종 사건은 서로 연관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였다. “그렇군요. 아무튼, 알겠습니다. 그럼 이대로 도시까지 데려다 드리도록 하죠.” “아.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의뢰니까요.” “형. 그러면 도시로 데려다 준 다음에는 어떡하실 거예요?” 여기서도 빠지기 싫었는지 또다시 안현이라는 감초가 끼어들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글쎄. 일단 신전, 아니 소환의 방으로 가야겠지. 천사가 의뢰했으니까.” “오….” 에둘러 말하자 안현이 알겠다는 듯 끄덕끄덕 머리를 주억였다. 알기는 뭘 알아. 그 후까지 책임져줄 수는 없다는 말을 돌려서 말한 건데.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 일에 의뢰 이상으로 의미를 둘 생각은 없다. 거기다 왜 이 사용자들이 북 대륙으로 왔는지도 모르겠고. 애초 2년 전 대륙 전쟁이 있고 나서, 북 대륙은 서 대륙에 관한 인식이 굉장히 좋지 않다. 물론 서 대륙도 사용자와 무법자가 있겠지만, 딱히 그걸 구별해서 생각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백마 열풍…. 그러니까 포로의 마력 회로를 파괴하고 노예로 판매한 이후, 북 대륙 내 서 대륙 사용자의 현실은 거주민보다 못한 위치에 있다. 우리가 그것까지 책임져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이 사라라는 사용자는….’ 나는 흘끗 정면을 응시했다. 안 그래도 조만간 클랜원을 대거 충원할 계획인데 눈앞에 괜찮은 인재가 하나 떨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돌아가면서 은근슬쩍 권유해보고 싶지만…. 아무래도 이 사용자가 도망자 무리의 책임자 같아서 말이지. 잘못하면 수백 명의 애물단지를 껴안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만큼은 절대로 사양하고 싶었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미리 말씀 드리지만, 도시에 도착해서도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2년 전 사건 이후, 북 대륙은 서 대륙에 대한 인식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음…. 네.” “괜한 시비는 물론, 그 이상의 일까지 당할 수도 있습니다.” “견딜 생각으로, 각오합니다. 경고 감사합니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왔는지 사라 제인은 결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왠지 점점 더 이 사용자가 마음에 드는걸 느꼈다. 도와달라고 무작정 달라붙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의지가 강한 여인인 듯싶다. “좋군요. 그래도 정 견디기 힘드시면, 아틀란타라는 도시에 머셔너리 클랜을 찾아주세요.” “아틀란타? 머셔너리?” “아틀란타는 북 대륙 내 도시 이름이고, 머셔너리는 제가 클랜 로드로 있는 클랜입니다.” “아.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단체는 몰라도, 몇 명 정도는 보호할 힘은 갖고 있습니다.” “……!” 그 순간 사라 제인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나는 이렇게 여지를 두기로 했다. 꽤 똑똑해 보이기도 하고, 바보가 아닌 이상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을 것이다. 아마 십중팔구 북 대륙에서의 활동은 힘들 것이다. 그래도 너 하나쯤은 얼마든지 보호해줄 수 있으니, 생각 있으면 오라는 소리였다. 굳이 ‘몇 명’이라 말한 것은 너와 비슷한 수준의 동료가 있으면 데리고 오라는 뜻이고. 잠시 후. 사라 제인이 살그머니 고개를 끄덕이는걸 확인한 후,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4시간 정도면 도시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럼 이만 출발하도록 하죠.” ============================ 작품 후기 ============================ 구출 파트 끝입니다. 코멘트를 보니 감이 좋으신 분들이 몇 분 보이시네요. ㅎㅎ. 0712 / 0933 ---------------------------------------------- 심하게 모난 돌은 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구출한 사용자 전원을 무사히 뮬로 인도한 이후, 나는 곧장 아틀란타로 돌아왔다. 전투가 끝났을 때 중천에 걸려 있던 해는, 어느새 서서히 서쪽으로 저물어가는 중이었다. 그래도 며칠은 소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의뢰가 예상을 벗어나 당일치기로 끝났다. 물론 이런 예상외의 일은 얼마든지 환영하지만. (설마 이렇게 빨리 끝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고생했어. 보상이 확정되면 신전에서 거주민 전령을 보낼 거야.) 이효을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흠. 왠지 보상 지급에 시일이 걸릴 것 같다고 들리는데.” (아마도? 음…. 사실 천사들 사이에서 지급할 보상에 관해 논란이 있는 것 같아.) “논란?” (응. 나도 자세하게는 모르지만…. 아무튼, 떼어먹지는 않을 테니 걱정은 안 해도 좋아.) 걱정은 하지 않는다. 차라리 말을 않거나 교묘하게 돌릴지언정, 천사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으니까. “어련히 알아서 주겠지. 그나저나 서 대륙 사용자한테 수호자 일을 물어봤는데….” (응? 너 설마 북 대륙 수호자를 아느냐고 물어본 건 아니겠지?) “장난하냐. 그냥 여기까지 오면서 다른 북 대륙 사용자와 접점이 있느냐 물어봤는데 없다고 하더라고. 만난 건 우리가 처음이래.” (으음. 역시 연관이 없었던 건가….)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야?” (…….) 그 순간 수정구에 비치는 이효을이 잠시 입을 닫았다. 침묵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우선은…. 어떻게든 찾아봐야지. 지금도 찾고는 있지만, 앞으로도 계속.) 이효을은 긴 숨을 흘렸다. (물론 안쪽 도시도 잊지는 않고 있어. 어쨌든 며칠 더 찾아보다가, 정 단서가 안 나온다 싶으면 아틀란타에 신경 쓸 생각이야.) “그럼 그때 또 연락할 일이 생기겠군.” (그렇겠지? 도시 발전 지원이나 주요 건물 이전 계획에 관해서 이것저것 논의해야 하니까. 그건 그때 가서 연락할게.) “그래. 알았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동시에 통신을 종료했다. 구슬을 원래 있던 자리에 놓아둔 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 밖으로 걸어나갔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처음 테라스가 있는 방으로 개축한다고 들었을 때는 ‘굳이?’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는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이용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렇게 바람을 맞고 있으면 복잡한 머리를 식히기도 좋고, 또 연초를 태우기에도 안성맞춤인 공간이니까. 연초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자 해 질 녘 도시의 풍경이 언뜻 눈에 들어온다. 상당히 큰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어디 한 군데 빈 공간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럽고 빼곡하다. 아마 눈에 보이는 태반이 오전에 탐험을 떠났다가 오후 즈음 돌아온 사용자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틀란타에서 탐험을 나간 적은 한 번도 없었나?’ 확실히 그런 것 같다. 귀찮아서 안 나갔다기 보다는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나가지 않았다. 물론 탐험을 나가는 것도 무조건 나쁘다고 보기는 어렵다. 북 대륙처럼 전부는 아니지만, 아틀란타에서도 여러 성과를 올릴 수 있는 장소를 알고 있다. 또 굳이 기억을 더듬지 않아도, 북 도시 내 비밀 도서관의 기록을 활용해 성과를 추적해서 찾을 수 있는 구조가 갖춰져 있고. 하지만, 나는 다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바라는 게 다르다. 다른 사용자들이 포화한 북 대륙을 벗어나 새로운 성과를 맛보려 강철 산맥을 공략했다면, 나는 조금 더 근본적인 목적에 초점을 두고 있다. 홀 플레인에서 잘 먹고 잘 살려는 게 목적이었다면 애초 돌아오지도 않았다. 내가 강철 산맥을 공략한 목적은, 테라 공략을 넘어, 다시 한 번 제로 코드를 내 손에 거머쥐기 위해서이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 나는 절대로 이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아틀란타는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교두보가 되어야 한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테라로 진군하고 싶다. 그러나 현재는 ‘약속의 신전’까지 도착할 역량이 안될뿐더러, 형의 말대로 급하게 해봤자 실패 가능성만 높아질 뿐이다. 한 걸음 한 걸음 차분하게 계획을 완성해나가야 한다. 최우선 과제인 도시 정착은 끝났다. 물론 앞으로 못해도 6개월 이상은 더 발전해야 하지만, 그건 우리 머셔너리가 아닌 산하 클랜들이 해결해줄 것이다. ‘그러면 이제는….’ 똑똑. 그때였다. “클랜 로드? 나 들어갈게요~?” 하나하나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 돌연 노크 소리에 이어 상큼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윽고 문이 열리는 동시 한 여인이 살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가지런하게 흘러내린 칠흑 빛 긴 생머리와 학을 연상케 하는 쭉 뻗은 다리. 생글생글한 눈매 속, 빨려 들어갈 듯한 심원한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제갈 해솔?” “응? 꽤 멋있잖아. 그렇게 석양을 등지고 서 있으니까.” “칭찬은 고맙네요. 그런데 무슨 일로?” “흥. 우리가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보는 사이에요? 서운하게.”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들어오라고 손짓한 후 책상으로 돌아가 의자에 앉았다. 제갈 해솔은 묘하게 눈웃음을 치더니 골반을 살랑~살랑 흔들면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별로 성적 매력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얘는 차라리 발랄한 게 낫지, 이런 건 별로 안 어울려. “…오늘은 또 무슨 약을 먹었습니까?”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으나 제갈 해솔은 멈추지 않았다. “바보 같기는. 생각해봐요. 이런 늦은 시간에 여인이 스스로 사내가 있는 방을 찾아왔다면….” 오히려 내가 앉은 안쪽까지 걸어 들어와 책상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며 다리를 꼬았다. 이어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는 한쪽 눈을 살며시 감았다가 뜨기까지. “…어떤 생각으로 찾아왔겠어요?” 감미로운 음성이 귓가를 간질였다. 속으로 절로 한숨이 나왔으나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하기야 당신 정도의 여인이라면 나쁘지 않겠죠. 그럼 바로 침대로?” 나는 제갈 해솔의 허리를 감아 내 쪽으로 살살 끌어당겼다. 그러면서 흘끗 시선을 올리자 무언가 떨떠름해 보이는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잠시 후. 퉁 소리와 동시에 왼팔에서 느껴지던 무게가 사라지고, 앞쪽 허공에 제갈 해솔이 나타났다. 이내 아래 소파로 가볍게 안착하는걸 보며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 공간 이동 능력은 정말 볼 때마다 신기한 기분이 든다. “기막혀. 너 정도의 여인이라면 나쁘지 않아? 원래 그러는 성격이에요? 아니잖아요.” 제갈 해솔이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저는 진심인데.” 입꼬리를 올리며 어깨를 들먹이자 이제는 숫제 나를 노려본다. “진심? 설령 그렇다고 해도 제 몸에 손댈 생각은 꿈도 꾸지 마요. 나는 바람기 있는 사내는 딱 질색이니까.” “그럼 앞으로 쭉 당신만 바라본다면?” “음~. 그럼 머리카락, 얼굴, 가슴, 팔, 배, 엉덩이까지는 손대도 좋아요. 아. 엉덩이는 그 부분까지 포함해서.” “…다리는?” 하나씩 꼽아보다가 무언가 하나 빠졌다는 생각에 물었다. 제갈 해솔은 별꼴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두 다리를 움츠렸다. “어머.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짐승이네. 실망이에요. 클랜 로드.” “……?” “그럼 다리까지 만지게 해달라고요? 미안하지만, 그건 결혼하고 나서 허락해줄게요. 저 이래 봬도 나름 혼전순결주의자거든요.” “…….” 이어지는 “다리는 제 프라이드에요.”라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얼굴을 감싸 쥘 수밖에 없었다. 문득 선율과 제갈 해솔을 서로 붙여놓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이 두 명이랑 대화하면 꼭 한 번씩은 삼천포로 빠지는 것 같다. “됐고. 무슨 일로 찾아온 겁니까?” “아. 저번에 거절한 거 미안해서요.”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강제도 아니었고, 나도 별로 내키지 않은 의뢰였으니까. 그래서, 사과하려고 찾아온 거?” “당연히 그것뿐만은 아니죠. 그런데 의뢰 보상은.” “아직 못 받았습니다. 그래서, 보상이 궁금해서 찾아온 거?” “…알았어요. 본론 꺼내면 되잖아요.” 아예 말을 끊어버리자 시무룩해 하는 음성이 들려온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뿐사뿐 걸어오는 기척까지. “다른 건 아니고, 이제 슬슬 머셔너리도 변화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서요.” 그 말에 나는 번쩍 손을 내렸다. 나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이란 도시 정착 다음 단계인 클랜 발전 계획으로, 예를 들어 클랜원 충원 등등. 제갈 해솔은 어느새 책상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다. 흡사 귀신이라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선 이거부터 읽어주시겠어요? 부디.” 이윽고 제갈 해솔은 품에서 A4 용지만 한 기록을 한 장 한 장 꺼내기 시작했다. 이내 쌓이는 양은 상당히 많…. 지는 않고, 네 장에 불과했다. “이건 뭔가요?” “머셔너리 클랜 발전 계획. 저자는 제, 갈, 해, 솔.” 제갈 해솔은 명료하게 대답했다. 나는 머리를 갸웃하면서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섬세하면서도 유려한 필체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차오르는 호기심을 억누르며 빼곡히 적인 기록을 차분히 읽기 시작했다. 첫 번째 장과 두 번째 장은 그냥 넘겼다. 현재 머셔너리 클랜의 장단점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있기는 하지만, 이건 나도 알고 있는 거니까. 그동안 쭉 지적 받아온 문제였다. 그러나 세 번째 장의 첫 줄을 읽은 순간, 나는 크게 눈을 찌푸리고 말았다. “클랜원별 등급제 시행?” “네. 참고로….” 나는 도로 시선을 올렸다. 제갈 해솔은 다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이 계획, 하루 아침 만에 생각한 거 아니에요. 처음 가입한 이후 강철 산맥을 거치고, 아틀란타에 도착해 클랜 로드가 사라진 머셔너리를 보고, 또 클랜 로드 생환 이후까지. 여태껏 쭉 보면서 생각을 정리했죠.” “음….” “이제는 머셔너리도 새 옷을 입을 때가 됐잖아요? 그러니까 몸에 꼭 맞는 옷.” “그럼 지금까지 머셔너리가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겁니까?” 날카롭게 물어보자 제갈 해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글쎄요.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고, 또 북 대륙에서의 상황은…. 에….” 제갈 해솔은 이리저리 말을 돌리다가 갑자기 빙긋 웃었다. “에이, 그냥 말할래. 클랜 로드?” “듣고 있습니다.” “이건 제 예상이지만, 이 상태 이대로 계~속 유지하면, 앞으로 머셔너리 절대 발전 못해요.” “무.” 예상이라는 말을 서두에 두기는 했지만, 한순간 욱하는 감정이 치솟았다. 아니꼽다는 기분도 없잖아 들었고. 하지만 나는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다른 누가 들었으면 꼴랑 0년 차의 헛소리라고 들을지 몰라도, 나는 제갈 해솔의 정체를 알고 있다. 사실상 차승현과 반다희만 있던 너도밤나무를 한소영의 이스탄텔 로우와 필적한 클랜으로 키워낸 장본인이 아닌가. 그래. 추스르고 한 번 들어보자. 괜히 이런 계획을 꺼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계획을 시행하면 머셔너리가 더 발전할 수 있다는 건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아니면 무슨 다른 좋은 생각이라도 있으세요?”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계획해둔 건 있었다. “클래스별로 조직을 나누고, 각 조직의 수장을 선출해 관리하게 할 생각입니다. 앞으로 들어올 신입을 포함해서요.” “음. 확실히 머셔너리에는 선장이 많으니까요. 항공모함에 모두 담을 수 없다면 구축함을 만들어야겠죠. 필요할 때마다 클랜원 간의 건설적인 교류도 겸사겸사 이루어질 수도 있겠고.” “…….” “좋네요. 용병 클랜의 취지를 잘 살린, 무언가 본격적으로 느껴지는 좋은 계획이에요.” 아직 상세한 설명을 하지도 않았는데 제갈 해솔은 곧장 내 의도를 알아차렸다. 말인즉 집중된 권력을 여러 군데로 분산하겠다는 요지를 대번에 짚어낸 것이다. “그런데요. 그래도 클랜원별 등급제는 시행하셔야 해요.” 그렇게 고개를 끄덕끄덕 주억거리던 제갈 해솔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나는 기록의 다음 장을 넘겼다. 친절하게도, 제갈 해솔은 직접 클랜원들의 등급까지 평가해서 적어놨다. 나는 EX 등급. 고연주 S 등급. 차소림 A 등급. 안현은 B 등급 등등. 이유정은 D라고 적었다가 찍찍 긋고 C로 적혀 있는 게, 의도적인 오타처럼 보였다. 마치 C도 주기 아깝다는 듯이. 아무튼, 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다른 건 몰라도 계획이 너무 갑작스럽다. 이걸 이대로 시행하면 반발은 물론, 분명이 문제가 터질 것이다. “제갈 해솔.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데요.” “뭐, 계획이 조금 센 건 인정해요. 그런데 좋은 약이 입에 쓰다는 말도 있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클랜 로드.” 그 순간 제갈 해솔이 말을 끊음과 동시에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처음 열 명 남짓한 소수 정예 시절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머셔너리는 어느 순간부터 맞지 않는 옷을 너무 오랫동안 입어왔어요. 그리고 그 결과,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거죠.” 서서히 장난기가 사라지고. “이제는 선택하셔야 해요. 옷을 조금 수선하는 선에서 그칠지, 아니면 아예 새 옷을 입을지.” 진지한 기색이 내려앉는다. “…그렇게 자신 있습니까?” “당연하죠. 왜냐면….” 제갈 해솔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이 계획을 실행하면, 현재 머셔너리에서 사라진 두 개의 분위기를 되살릴 수 있으니까요.” …두 개의 분위기? 머셔너리에서 사라진? 퉁! 그때였다. 또다시 마력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제갈 해솔이 홀연히 책상 앞으로 나타났다. “그래요. 이왕 말 나온 김에 궁금한 거 하나 물어볼게요.” 책상에 짚은 양손을 천천히 벌리며 등을 낮추더니 나와 정면으로 눈을 맞춘다. “클랜 로드는….” 말해보라는 의미로, 나는 호기심 가득한 눈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했다. 이윽고, 연분홍 빛 입술이 살며시 떼어졌다. “왜 클랜 내 갈등을 억누르고, 경쟁을 없애셨죠?” ============================ 작품 후기 ============================ 오늘 이상하게 조아라가 느린 것 같습니다. 하하. 음…. 그리고 어제 코멘트를 보니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있네요. 사라 제인의 진명으로 불쾌하셨던 독자 분들에게는 진심으로 사과의 말을 드립니다. 앞으로는 조금 더 숙고해서 적도록 할게요. _(__)_ 0713 / 0933 ---------------------------------------------- 심하게 모난 돌은 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두운 방에 홀로 앉아 있다. 문을 닫고, 라이트 스톤을 끄고, 커튼을 친 방에는 한 점의 빛도 스며들지 않았다. 흘끗 테라스 밖을 쳐다보자 완연한 어둠으로 물든 하늘이 보였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시끄럽던 도시가 잠잠해졌고, 거리에 설치된 마법 전등이 신비로운 빛을 밝혔다. 문득, 나도 모르게 몸을 반쯤 일으키고 있었다. 이대로 밖으로 나가 도시의 밤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억지로 엉덩이를 앉혔다. 왠지 도망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긴 한숨을 흘리고 시선을 내리자 책상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4장의 기록이 눈에 들어온다. ‘클랜 로드는….’ ‘왜 갈등을 억누르고, 경쟁을 없애셨죠?’ 나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제갈 해솔은 한 번 천천히 생각해보라며 바람처럼 사라졌지만, 이후 몇 시간 내내 생각만 거듭하고 있다. 아무런 결단도 내리지 못한 채. 기실 이렇게까지 고민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질문의 해답은 이미 알고 있다. 내가 갈등과 경쟁을 없앤 이유는, 딱히 깊은 의미나 거창한 의도가 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편하니까. 갈등이나 과도한 경쟁은 클랜을 병들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하나 돼 소수 정예로 움직인다. 이러한 명분 아래 강하게 억누르기는 했지만, 내심 꼭 그렇게 생각한 것만은 아니었다. 사실 갈등이 깊어질수록 경쟁이 심화할수록 내가 원하는 대로 클랜을 이끌어나가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좋은 말로 해서 이끌어나가는 것이고, 탁 까놓고 말하면 조종이다. 그래. 나는 머셔너리가 무조건 내 뜻 아래서 움직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갈등이나 과도한 경쟁의 낌새가 보이는 족족 직접 나서서 사라지게 했다. 확실히 성과는 있었다. 개개인의 속마음까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내가 있을 때는 모두가 웃으면서 같이 움직였다. 그러나 반대로 잃은 것도 있다. 표면적으로 갈등이 사라지자 자연스레 경쟁도 사그라졌다. 언젠가부터 안주하는 클랜원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개인이 해결하기 힘든 일이 나오면 클랜에 기대고, 클랜이 해결하기 힘든 일이 나오면 나한테 기댔다. 매한가지로, 나도 거의 모든 일을 앞장서서 해결했다. 그리하여 현재의 머셔너리가 탄생한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시크릿, 레어 클래스가 흐드러지게 많은 소수 정예 클랜. 그러나 실체는 김수현이라는 사용자가 없어지면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사상누각의 클랜. 이게 바로 머셔너리의 현주소였다. ‘이번 강철 산맥 공략을 보면서 참 느낀 게 많아요. 명성에 비해 활약이 걸맞지 않는다고나 할까….’ ‘아. 물론 전투는 잘했어요. 확실히 일반 전투에서는 발군의 위력을 발휘했죠. 그건 인정해요.’ ‘그런데 그런 전투 말고. 정말 위기 상황일 때는…. 클랜원들이 한 게 있나요?’ ‘구덩이 괴물을 상대할 때도, 각성한 거인 제왕을 상대할 때도. 그러니까 제 말은 클랜 로드가 없었어도 그 상황을 정리할만한 사용자가 있었느냐. 이 소리에요.’ 제갈 해솔이 남기고 간 말이 하나하나 반박할 수 없는 비수가 돼 돌아온다. 살이 강하게 꼬집히는 기분이다. “흠….” 또 한 번 긴 한숨을 흘리면서 책상에 놓인 기록을 흐트러트렸다. 그러자 4번째 장 클랜원들을 등급별로 평가한 내용이 눈에 들어온다. 사실 한두 명만 제외하면 상당히 정확하게 구분해놓기는 했다. 허나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라는 생각이 가시지를 않는다. 나는 한참 동안 기록을 빤히 응시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클랜 로드의 계획은 좋아요. 그런데 머셔너리는 그동안 맞지 않는 옷을 너무 오랫동안 입었어요.’ ‘이대로라면 머셔너리 클랜은 영영 발전하지 못해요.’ 결국, 나는 깃펜을 잡았다. 그리고 우선 안솔과 이유정의 등급에 V자 체크로 표시한 후, 한 명 한 명 신중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고연주는 S…. 신재룡은 A….’ *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아침 식사가 끝난 후, 나는 바로 모든 전투 사용자를 1층 회의장으로 호출했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이상 더 이상 망설일 생각은 없다. 예고 없는 회의였으나 심할 때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회의한 적도 있었다. 클랜원들은 별 의심 없는(?) 낯으로 회의장에 속속히 모였다. 그렇게 시작된 회의는 처음에는 언제나와 같이 흘러갔다. 클랜원 충원에 관해 종종 말을 꺼낸 적이 있는 터라, 서론으로 클랜의 변화 및 재편의 필요성을 이야기하자 모두가 동의하는 빛을 보였다. 그리고 변화의 첫걸음으로 ‘클랜원 등급제’에 관한 말을 꺼냈을 때만 해도, 클랜원들은 조용히 나를 응시했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습니다. 모두 수능에 대해서는 알고 계실 겁니다. 시험을 치르면 점수가 나오고, 그 점수에 따라 각 수험생의 등급이 구분되죠. 1등급부터 9등급까지.” 조용한 건, 딱 거기까지였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EX 등급부터 F 등급까지. 말인즉, 이 등급이 클랜 내 개인이 가지는 권한을 나타내주는 척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계획의 상세한 내용을 발표한 순간, 장내는 삽시간에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어느 때보다 어지러운 어수선함이 회의장을 휩쓸었다. 나는 두어 번 책상을 강하게 쳤다. “조용조용!” 그러자 곧바로 조용해지기는 했으나 소란의 여파는 가시지 않았다. 황당하다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초리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심지어 제갈 해솔도 놀란 토끼 눈을 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와 눈을 마주친 순간 킥 웃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리 나지 않는 박수를 보내면서. “궁금한 게 많을 거라 생각됩니다. 한 명씩 질문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오른쪽 열에서 번쩍 손이 올라오더니 누군가가 곧장 몸을 일으켰다. 조승우였다. “클랜 로드. 이, 이 계획은…. 저는 이 계획의 목적이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목적이요? 제가 서론 때 확실하게 밝혔는데요. 더 나은 클랜으로 발돋움하기 위함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러니까요. 변화는 좋습니다. 좋은데요. 그런데 왜 이런 방향으로 생각하셨는지…. 솔직히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하나도 갑작스러우실 거 없습니다. 그동안 말은 안 하고 있었는데, 제가 사라졌을 때 우리 머셔너리가 어땠는지를 듣고, 그때부터 쭉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클랜원들이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실 방금 말은 거짓말이었다. 제갈 해솔이 아니었다면 이 계획은 발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허나 내가 굳이 거짓말을 한 이유는 여기 있는 모두에게 그때의 일을 주지시키기 위해서였다. “이 문제는 우리 머셔너리가 몇 년 동안 쭉 지적 받아온 사안입니다. 그리고 아틀란타 공략 후 사실로 드러나기도 했고요. 그때 외부에서 흔들었다는 점을 참작하고서라도, 저는 더 이상 이 문제를 좌시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리고 미리 말씀 드리는데, 변화는 이 계획만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차후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될 때까지, 지속해서 근본적인 변화를 꾀할 생각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첫걸음에 불과합니다.” “…….”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결국 조승우는 눈동자를 빙그르르 돌리고는 자리에 앉았다. “클랜 로드. 질문이 있어요.” 이번에는 정하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 아까 등급이 클랜 내 개인이 가지는 권한을 나타내주는 척도라고 하셨잖아요.” 나는 그렇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그 권한의 정확한 범위를 알고 싶어요.” 말을 하는 정하연의 눈에서 파르스름한 빛이 스쳤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간단합니다. 권한이란, 우리 머셔너리를 기반으로 하는 모든 활동을 의미합니다.” 사실상 등급제 계획의 모든 내용을 요약한 말이었다. “모든…. 활동?” 그러나 너무 많이 축약했는지 정하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부연 설명이 필요할 듯싶었다. 더 강하게,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리하여. “예를 들어드리죠. 여태껏 성과를 발견하면 서로 정답게 논의하면서 하나씩 나눴죠? 이제는 그러지 않습니다. 설령 클래스에 맞든 아니든 간에, 등급이 높은 클랜원이 무조건 우선권을 가질 겁니다. 회의에서의 발언권. 이것도 똑같아요. 더 이상 동등하지 않을 겁니다. 등급이 높을수록 더욱 강력한 발언권을 가지게 됩니다. 사소한 거 하나까지, 모두 등급으로 평가하고 운영합니다.” 나는, 마침내 저지르고 말았다. 더 열심히 활동한 클랜원이 더욱 대우받는다. 여태껏 자유 용병이라는 미명 하 이어져온 안주를 철폐하고, 경쟁의 완전 개방을 선언한 것이다. 정하연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더니 숨을 길게 흘리며 자리에 앉았다. 미묘한 표정이었다. “…대신이라고 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그래도 몇 가지는 여러분에게 약속하겠습니다.” 차분히 덧붙이면서 좌중을 둘러보자, 멍한 빛을 띠고 있는 클랜원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어느새 회의장은 처음처럼 조용해졌다. 가끔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들려올 뿐, 그 누구도 더는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아니. 입을 열 생각조차 없어 보인다. 과연 이 계획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일지 걱정이 앞섰지만, 여기서 그만둘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미 물은 엎질렀으니까. “클랜 로드와 친하다고 해서, 초창기 멤버라는 점을 들먹이면서 거드름 피운다? 앞으로 그런 거 없습니다. 무조건, 오롯하게 등급으로 개인의 영향력이 결정됩니다.” 그 순간 김한별을 비롯한 서너 명의 클랜원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와는 반대로 안현, 안솔, 이유정은 몸을 흠칫 움츠렸다. 그래. 조금 직설적으로 말하기는 했지만, 안현이나 안솔은 몰라도 이유정은 살짝 찔리는 게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나는 왼쪽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클랜에서 오랫동안 교류한 클랜원끼리 모임을 결성하고, 은근하게 강력한 입김을 행사한다? 그런 거도 없습니다. B 등급 10명이 모여봤자 1명의 A 등급보다 아래입니다.” 그러자 정하연, 고연주, 임한나, 남다은 순으로 차례대로 찔끔하는 기색이 스친다. 강철 산맥에서 3 지역 지원 건으로 클랜원들을 설득할 때 눈여겨보았는데, 확실히 모임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 ‘그런데 저기는 S 등급만 2명에 A 등급도 1명인데.’ …뭐, 나 말고 EX 등급이 한 명 더 있으니까. 물론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만, 만일 저 4명이 이 계획을 악용한다면 그때는 내가 직접 나설 것이다. 설령 4명 모두가 내 여인이라도. 아무튼, 추가 질문이 나오지 않는다. 슬슬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품속에 고이 접어둔 기록을 꺼냈다. 클랜원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내 품에서 기록을 따라 이동한다. “이 기록에는 제가 고심해서 평가한 여러분의 등급이 적혀 있습니다.” 나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기록을 조금 높이 들어 올렸다. “우선은 사용자 정보를 기준으로 잡기는 했지만, 등급 결정이 클래스, 능력, 능력치에만 국한되지는 않아요. 여러분이 처리하는 업무 기록 한 장부터 한 소절의 주문까지. 모조리 실적으로 반영돼 한 달 기준으로 갱신됩니다.” 당연하지만 한 번 결정된 등급은 영원하지 않다. 한 달을 기준으로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따라 올라갈 수 있고, 또 나태하게 지낸다면 하락할 것이다. 나는 한 번 더 회의장을 둘러본 후, 고연주를 향해 눈짓했다. 신호를 받은 고연주는 조심스레 일어나 내가 앉은 권좌로 다가왔다. 나는 바로 기록을 넘겨주었다. “회의가 끝나면 여기 적힌 내용대로 1층 홀에 게시하세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아니. 지금 바로.” 어차피 곧 회의를 끝낼 생각이라 말을 정정했다. 고연주는 공손하게 기록을 받아 들고는 곧장 몸을 돌려 입구로 걸어갔다. 그러자 클랜원들의 시선이 점차 멀어져 가는 고연주의 등을 애타게 쫓는다. 가끔 눈에 보이는, 꼴깍꼴깍 움직이는 목울대가 현재 클랜원들의 심정을 알려준다. 아마 시험이 끝나고 성적표를 받기 직전 학생의 심정이지 않을까. 이윽고 고연주가 입구를 나가 완전히 사라졌을 즈음. “그럼 회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권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 작품 후기 ============================ 클랜원 등급제는 0년 차, 1년 차를 포함하지 않습니다. 즉 제갈 해솔이나 차희영은 제외된다는 뜻이에요. 2년 차가 되는 순간부터 등급제가 적용됩니다. :) 0714 / 0933 ---------------------------------------------- 심하게 모난 돌은 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갑자기 클랜원 등급제라니….” “변화하겠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건 너무….” 웅성웅성. 성 내부. 1층 광장과 회의장을 잇는 긴 회랑은 여느 때보다 소란스러웠다.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는 이들은 모두 머셔너리 클랜원으로, 회의가 끝났음에도 바로 돌아가지 않고 광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클랜원 등급’이 적힌 기록을 건네 받은 고연주가 게시가 끝나기 전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내심 그렇게 한 이유를 알 것 같았지만, 회랑에 서 있는 대다수는 하나같이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머릿속으로 방금 회의에서 들었던 말들이 자꾸만 떠오르고 있었다. 자유라는 이름 아래 이어져 온 안주를 깨트리고 경쟁의 완전 개방을 선언한다. 이 말이 시사하는 바는 무척이나 컸다. 사용자 정보 즉 ‘실력’보다는, 활동으로 쌓을 수 있는 ‘실적’을 중요시하겠다는 뜻이다. 실력 높은 사용자가 유리한 건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사용자 정보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지 못한다. 실력이 조금 떨어지는 사용자라도, 어느 분야에서 어떻게 활동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높은 등급으로 올라갈 수 있다. 아무튼,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제 더 이상 서로 웃으며 정답게 지내는 시절은 지났다. 실적을 쌓을 수 있는 일은 한정돼 있으니까. 아니. 앞으로 새로운 클랜원이 가입할수록 할 일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끼이이익. 그때였다. 근 30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천천히 개방되기 시작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클랜원들이 득달같이 시선을 돌렸다. 이내 좌우로 서서히 벌어지는 문 사이로 고연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 겨우 다 적었네. 이제 들어들 오세요.” 그 순간 가장 앞에 서 있던 클랜원들부터 우르르 몰려가기 시작했다. 어찌나 급하게 달려가는지 일부 성질 급한 클랜원은 머뭇머뭇 걸어가는 이를 세게 밀치고 가기까지 했다. “꺅! 어, 언니!” 발라당 나동그라진 안솔이 억울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이유정은 무시한 채 계속 앞으로 달렸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광장 중앙을 지나 게시판이 있는 장소까지 도착했다. 『구분 등급』 『순번 이름(연차)』 게시판 상단에 적힌 글자를 확인하자 목울대가 작달막한 고저를 그렸다. 수능 성적표를 받을 때보다 더한 긴장감이 샘솟는다. 이유정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추스르며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EX 등급』 1. 김수현(3년 차) 2. 안솔(3년 차) 그리고 가장 높은 EX 등급을 확인한 순간, 일말의 기대감이 감돌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주변에서도 숨을 크게 들이키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아마 모두가 공통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왜 안솔이 EX 등급?’ 김수현이 EX 등급이라는 건 이견을 제시할 거리가 없다. 클랜 로드라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이제껏 김수현이 쌓아온 실적은 그야말로 독보적인 수준이다. 그러나 안솔이 EX 등급을 받았다는 건 머리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물론 시크릿 클래스이기도 하거니와 ‘기적’은 확실히 엄청난 능력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좀…. 한창 생각을 이어가던 이유정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리고 우선 안솔의 등급은 젖혀두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등급이니까. 아래에는 S 등급으로 책정된 클랜원들의 이름이 있었다. 『S 등급』 1. 고연주(8년 차) 2. 남다은(7년 차) 3.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4. 선유운(3년 차) 5. 허준영(7년 차) 그림자 여왕, 검후, 키메라 연금술사, 신궁, 침묵의 집행자. 어디를 가도 알아주는 머셔너리 클랜의 최고 정예 사용자들이다. 오히려 고연주는 왜 EX 등급이 아닌지 이해가 가지 않았고, 허준영은 잘은 모르지만 비밀리에 치러진 차소림과의 대련에서 판정으로 이겼다는 말을 언뜻 들은 것 같다. 어쨌든 그래도 양심이 있지. S 등급은 애초 꿈도 꾸지 않았다. 이유정은 납득하고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A 등급』 1. 신재룡(7년 차) 2. 정하연(5년 차) 3. 차소림(6년 차) 이윽고 A 등급 명단을 확인한 순간 이유정은 기대가 살짝 꺾이는걸 느꼈다. 그래도 스스로 A 등급은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3명이 A 등급 명단에 오를만하고 생각보다 수가 적다는데 위안을 받았다. ‘에이 씨. 결국에는 B 등급이네.’ 아직 보지는 않았으나 이유정은 벌써부터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머셔너리 클랜을 창설하기 전부터 활동했고, 나름 레어 클래스 사용자인데. 아무리 못해도 B 등급은 될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B 등급』 1. 김한별(3년 차) 2. 백한결(2년 차) 3. 안현(3년 차) 4. 임한나(5년 차) 5. 조승우(5년 차) 6. 진수현(2년 차) B 등급 명단에는 기대한 이름이 없었다. 분명히 익숙한 이름은 많이 보이는데 ‘이유정’이라는 세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한순간 망연한 빛이 낯을 지나쳤다. “…….” 눈을 깜빡였다. 또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것도 모자라 세게 비비기까지 했다. 그러나 여전히 B 등급에 이유정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랬다. 『C 등급』 1. 우정민(3년 차) 2. 사샤 펠릭스(-) 3. 이유정(3년 차) 이유정은 C 등급 명단 끄트머리에 포함돼 있었다. 『D 등급』 1. 김동석(5년 차) 2. 박다솜(4년 차) 3. 박현우(7년 차) 4. 원혜수(3년 차) 5. ……. 『E 등급』 1. 강채린(4년 차) 2. 구예지(3년 차) 3. 백승훈(4년 차) 4. ……. 『F 등급』 1. 표혜미(2년 차) ……. * 등급은 0, 1년 차를 포함하지 않는다. 아래에는 D, E, F 등급 명단이 있었으나 빠르게 지나쳤다. 추신까지 다다른 시선은 신속하게 도로 올라가 B 등급과 C 등급에 고정됐다. 이내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번지는 동시, 게시판 인근에서 가벼운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클랜원이 자신의 등급 확인을 끝마친 것이다. “우와…. 우와아아….” 안솔은 멍한 탄성만 지르고 있었다. 두 눈은 아까부터 EX 등급 명단에 푹 꽂혀 있다. 스스로 봐도 믿기 지가 않는다. 그래도 설마 설마 했는데 김수현과 동일 선상에 놓일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S 등급이라…. 흥. 나름 괜찮네.” 겉으로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코웃음 치기는 했지만, 비비앙은 대단히 만족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수능인지 시험인지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자신이 높은 등급을 받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비비앙은 살랑살랑 걸어가 여전히 멍하니 서 있는 안솔을 툭 건드렸다. “그나저나 안솔 너 대단한데? 김수현과 같은 등급이라니!” 안솔은 흠칫 몸을 움츠렸다가 방실방실 웃었다. “아, 아이. 몰라요. 저도 믿기지가 않는다는 말이에요.” “조심해. 내가 곧 너를 떨어트리고 EX 등급으로 올라갈 거니까.” “에헤헤헤. 이히히히.” “우효효효효효효효.” 그리도 좋은 걸까. 서로 치근덕거리던 두 명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헤….” “효….” 그리고 동시에 웃음을 멈췄다. 안솔도 비비앙도 느낀 것이다. 주변을 둘러싼 기운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예전과는 다르다. 축하한다는 말은 어디서도 들려오지 않는다. 아니. 축하는커녕 이상한 눈으로 두 명을 바라본다. 확실한 건 절대로 고운 눈초리는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괜스레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안솔이 살그머니 눈을 내리깔고 비비앙의 미소가 시들해질 즈음. “이건 말도 안 돼. 내가 왜 D 등급…!” “이해가 안 가네요. 왜 안솔이 EX….” 결국 어디선가 불만이 터지려는 찰나, 갑자기 말이 끊어졌다. 벌컥 소리치려던 김동석과 박다솜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 순간 두 명의 앞으로 단검이 하나씩 날아와 박혔기 때문이다. 바닥에 꽂힌 단검은 함부로 입을 여는 걸 허용치 않겠다는 듯 파르스름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불만 있으면 올라가서 직접 얘기해요.” 정면 방향으로 고연주가 물끄러미 두 명을 응시하고 있었다. 양 손목을 절반으로 꺾은, 단검을 던진 자세 그대로 해서. “괜히 엄한 애 건드리지 마시고. 응?” 고연주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말했다. 비단 김동석 박다솜 두 명만이 아닌, 여기 있는 모두를 대상으로 한 경고였다. 감히 누가 고연주의 명을 거역할 수 있으랴. 김동석은 얌전히 입을 닫았다. 그러나 얼굴은 여전히 붉으락푸르락해 쿵쿵거리는 소리를 내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일부는 여전히 게시판을 확인하고 있었지만, 조용히 눈치를 살피던 네댓 명의 클랜원은 이내 김동석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허. 사용자 김동석은 저렇게 화낼 입장은 아니지 않나. 그리고 가봤자 좋은 소리는 전혀 듣지 못할 텐데….” “응?” 차분히 게시판을 확인하고 있던 안현이 몸을 돌렸다. 조승우가 계단을 오르는 클랜원을 보며 가볍게 혀를 차고 있었다. “좋은 소리를 못 들어요?” “응? 아아. 아마도. 그렇게 철저한 논리로 무장하고 나온 동부도 혼자서 깡그리 박살을 내셨잖아. 그리고 저 상태로 가면 100% 와장창 깨질걸? 내가 장담한다.” “…….” “그렇지 않아? 클랜 로드도 무언가 생각이 있으시니까 이렇게 하셨겠지. 그런데 저렇게 급해서야…. 쯧쯧.” 그런가. 형도 생각이 있었던가. 안현은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이다가 돌연 조승우를 흘끗 흘겼다. 두 눈은 걱정스러운 기색을 빛내고 있으나 입꼬리는 실룩샐룩 움직이고 있다. 안현은 싱겁게 웃었다. “그런데 승우 형은 반대하는 입장 아니었어요?” “내가? 그랬나?” “그러셨잖아요. 너무 갑작스럽다면서.” “기, 기억력이 좋네. 그게…. 나도 내가 B 등급을 받을 줄은 몰랐거든…. 하하하.” 조승우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물론 사용자 정보로만 보면 조승우는 B 등급이라 보기에 한참이나 부족하다. 그러나 김수현은 등급을 결정짓는 게 사용자 정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했다. ‘확실히 승우 형도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지….’ 조승우의 행정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안현의 가슴 한 켠에서는 걱정이 살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게시판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망연히 고개만 올리고 있는 이유정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충격이 큰 걸까. 가장 먼저 올라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이유정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렇다고 받아들인 모습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어깨는 축 늘어지고 몸은 딱딱하게 굳은 게 흡사 망부석을 보는 듯했다. 사실 안현은 이유정과 같은 등급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좋게 받으면 C 등급, 아니면 D 등급 정도로 예상했다. 그런데 자신은 생각지도 못한 B 등급을 받고, 이유정은 C 등급을 받았다. 그리고 안솔은 무려 EX 등급이다. 김수현과 첫 시작을 같이한 3명 중에서 이유정이 가장 떨어지는 등급을 받은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절대로 좋은 기분은 아닐 터. 그냥 가만히 있을까. 다가가서 어깨라도 두드려줄까. 두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려는 순간, 안현은 반사적으로 옆을 쳐다봤다. 언제 다가왔는지 김한별이 예의 쌀쌀맞은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다. “현이 오빠.” 안현의 입이 쩍 벌어졌다. 김한별이 먼저 말을 붙이는 경우도 굉장히 드문데, 거기서 한술 더 떠 현이 오빠라니.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오빠도 B, 등급이죠? 저도 B, 등급이에요.” “으응.” 그러자 빙긋 웃은 김한별이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우리 열심히 해서 같이 높은 등급으로 올라가요.” “어? 그, 그래. 하하하.” 얘가 오늘따라 왜 이럴까. 안현은 어색한 기분을 지우지 못하면서도 김한별의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아.’ 안현은 그제야 김한별의 입가에 자리 잡은 미소를 발견했다. 차갑고 차가운 웃음은 누군가를 비웃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보통 때보다 목소리가 조금 높아진 것 같기도 했다. 마치 누구보고 일부러 들으라는 것처럼. 아니나다를까. 자신도 모르게 스리슬쩍 곁눈질한 안현은 아차 한 기분을 느꼈다. 허리까지 흘러내린 붉은 머리카락이 올올이 곤두서 떨고 있다. 축 늘어진 양팔의 끝으로 두 손이 바스러지도록 오므려지고 있다. 살짝 닿아도 베일 듯한 날카로운 기운이 전신에서 물 흐르듯이 흘러나온다. 들은 게 확실하다. 뒷모습이 저런데 앞모습은 과연 어떠할까. 상상도 하기 싫다는 생각에 안현은 얼른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김한별은 그냥 선웃음을 한 번 짓고는, 몸을 돌려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독자 분들의 코멘트는 모두 읽었습니다. 이런 코멘트 분위기 정말 사랑합니다. 하하하. 궁금하신 부분은 차후 내용에서 드러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0715 / 0933 ---------------------------------------------- 심하게 모난 돌은 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상대로였다. 회의가 끝난 이후, 채 1시간도 지나지 않아 한 무리의 클랜원이 집무실로 쳐들어왔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한 터라, 나는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의외로 적은데?’ 그래도 최소한 절반을 몰려올 줄 알았는데 겨우 예닐곱 명이라. 무엇보다 이유정이 없다는 게 가장 놀랍다. 탕! “클랜 로드! 등급이 왜 이따위입니까?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등급을 나누신 겁니까?” 이윽고 선두로 달려온 김동석이 책상을 내리치듯이 짚으며 다짜고짜 외쳤다. 상당히 전투적인 태도였다. 들어올 때도 화끈하게 들어오더니 말하는 것도 화끈하다. “음. 클랜원 등급제가 싫으신 겁니까? 아니면 본인의 등급이 마음에 안 드시는 겁니까?” “둘 다 아닙니다!” 김동석은 약간 의외의 말을 하면서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사실 후자이기는 해요. 그런데요. 제가 D 등급이기는 해도, 등급을 공~정하게 구분하셨다면 납득했을 겁니다.” 김동석은 공정하게 라는 말을 특히 강조했다. 나는 잔잔히 웃으면서 팔짱을 꼈다. “그러면 등급 구분이 공정하지 않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왜요?” “아니. 정말 몰라서 물어보시는 겁니까? EX 등급만 봐도 납득이 안 갑니다. 납득이!” “EX 등급이라면…. 제 등급에 불만이?” “아 클랜 로드. 저 지금 장난칠 기분 아닙니다. 어느 누가, 감히 클랜 로드의 등급에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그건 당연한 거고요. 클랜 로드 말고 EX 등급이 한 명 더 있지 않습니까! 안솔이 EX 등급이요? 허! 안솔이 EX 등급인데 제가 D 등급입니까?” 김동석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침까지 튀겨가면서 말했다. “물론 안솔이 능력 좋은 사제라는 건 인정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EX 등급은 너무한 것 같습니다. 그냥 탁 까놓고 말해서, 확실치도 않은 예감과 기적만 빼면, 남는 거라도 있습니까? 그런데도 EX 등급이라고요?” “흠….” “특정한 클랜원을 편애해서 누구는 등급을 후하게 주신 거라면, 또 누구는 짜게 주셨다면! 우리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예 예.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나는 말을 끊으며 진정하라는 의미로 손짓했다. 옆에 있는 박다솜이 적당히 하라는 듯 검지로 살그머니 찌르는 게 보였지만, 어쨌든 들어온 모두가 김동석의 의견에 공감하는 기색을 보였다. 아무튼 안솔이 문젯거리가 될 것은 예상했고, 대충 생각하던 말도 나왔다. 그렇지마는 한편으로는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상 안솔의 능력은 정말로, 정말로 엄청난 수준인데, 어린이 같은 행동으로 평가가 절하되는 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안솔의 성격이 정하연과 비슷했다면 과연 반응이 이랬을까. 일말의 아쉬움을 삼키면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설명에 앞서 우선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EX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계십니까?” 그러자 씩씩 숨을 몰아 쉬던 김동석이 끔뻑끔뻑 눈을 움직였다. 보아하니 모르는 것 같다. “EX. ExtraOrdinary. 사용자 정보의 능력 랭크와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놀라운, 엄청난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죠. 그러나 등급제에서는 다릅니다. 일반적인 현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인 힘인 동시,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요.” 말하면서 화정의 힘을 일으키자, 화르륵 불타오르는 소리에 이어 왼손이 맑은 불꽃에 삼켜졌다. “…그러면 그런 힘을 가진 사용자만이 EX 등급에 오를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가만히 응시하던 김동성이 멍한 음성으로 말했다. 한층 누그러지기는 했으나 이제는 숫제 어이가 없다는 어조였다. 나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초월적인 힘을 가진 사용자가 유리한 건 맞습니다. 허나 힘만 가졌다 해서 무조건 오를 수 있다는 말이 아니에요.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오늘 발표한 등급은 사용자 정보를 기준으로 잡되, 여태껏 여러분이 클랜 발전에 이바지한 공헌도도 포함했다고요.” “아니. 그러니까요….” “그래도 이해를 못 하시겠으면 예를 들어드리죠. 2년 전의 전쟁에서 모든 아군을 회복시키고 전세 역전에 크게 기여한 사제가 누굽니까?” “그, 그건.” 조금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을까. 시종일관 전투적인 태도를 보이던 김동석이 처음으로 말을 더듬었다. 어떻게 말이라도 하고 싶은지 열심히 생각하는 모습이었으나 과연 할 말이 있을까? “용이 잠든 산맥에서 본 드래곤과 수천의 영혼에 둘러싸였을 때, 주문 하나로 그들을 정화하고 맹세의 검까지 얻어낸 사용자가 누구죠? 근래 지옥 대공이 출현했을 때도 마찬가집니다. 그 엄청난 일격을 한 번이나마 빗겨내고, 여러분을 살려내고, 돌려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용자가 누구냐 이 말입니다. …바로 안솔입니다.” “…….” “그럼 사용자 김동석은, 제가 방금 열거한 일을 해내실 수 있겠습니까?” “…….” 아니. 당연히 할 수 없다. 비단 김동석뿐만이 아니라 머셔너리의 누구도 안솔을 대신할 수 없다. 이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 불변의 사실이다. 어느새 김동석은 입을 헤 벌린 채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완전히 넋이 나가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그래. 그럴 테지. 차라리 S 등급 사용자라면 몰라도 김동석은 이렇게 나설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저…. 클랜 로드….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요….” 그 순간 조용히 서 있던 박다솜이 살그머니 손을 들었다. “확실히 솔이의 능력은 인정하지만…. 아시잖아요. 너무 어린애 같다는 거. 예전처럼 클랜 로드가 없을 때를 생각해보세요. 그럼 그때 우리가 안솔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건가요?” 음. 이건 그나마 건설적인 질문이로군.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 물론 등급이 높을수록 여러 사안에 보다 강한 영향은 미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 권한은 혜택과 대우가 중점이지 명령 체계의 완전한 장악을 의미하지는 않아요. 회의에서도 말씀 드렸듯, 머셔너리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계속 변화할 예정입니다. 그 변화에는 새로운 명령 체계의 정립도 포함돼 있습니다.” 하나하나 조곤조곤 설명해주자 박다솜은 작은 탄성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이쯤이면 대충 알아들었으려나. 이윽고 양손을 깍지 낀 후, 나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더 질문 있으신 분?” * 아틀란타 남쪽 외 도시. 중앙 성의 7층 숙소. “으음….” 창문을 뚫고 들어온 따뜻한 아침 햇살이 얼굴을 두드리자 안현은 작은 침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똑똑. 문득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으나 안현은 눈을 뜨지 않았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여운을 좀 더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강철 산맥 공략 당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노숙할 때와 비교하면, 현재 몸을 받치는 푹신한 침대는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그러나. 똑똑. 똑똑. “이러면 안 되지.” 돌연 혼잣말을 중얼거린 안현이 끙 몸을 일으켰다. 눈에는 아직 졸음이 가득했으나 히죽히죽 웃고 있다. 실제로 안현은 무척 기분이 좋았다. 아니. 오늘만이 아니라, 클랜원 등급제가 시행된 이후, 근 며칠 동안 계속해서 기분 좋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기껏해야 C, D 등급을 받을 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B 등급을 받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흡사 4등급인 줄 알았던 과목을 2등급을 받았을 때의 기분이랄까. B 등급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의 짜릿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런 안현의 마음에는 믿어주신 만큼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무감 비슷한 감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하여 곧장 침대에서 나와 창문을 활짝 열고,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며 힘껏 기지개를 켜는 찰나였다. 달칵. “…어머. 일어나 계셨어요?” “…….” 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 안현의 동작이 갑자기 정지했다. 삐걱삐걱 머리를 돌린 안현은 곧 문을 열고 들어온, 하녀 복장치고는 상당히 우아하게 차려 입은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예전에 밤의 꽃으로 일하던 여인으로 고연주의 소개 이후 머셔너리 클랜의 비 전투 사용자로 들어온 여인이기도 했다. 물론 현재 안현의 머릿속에는 이러한 사실이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누구?” “네. 저는 박해연이라고 합니다. 머셔너리 클랜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어요.” “…아니. 왜?” “아. 오늘부터 제가 사용자 안현 님의 전속 하녀를 맡게 됐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 드릴게요?” 자신을 박해연이라 밝힌 여인은, 차분히 웃으면서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러나 안현은 비명을 질렀다. 전속 하녀이고 뭐고, 속옷 한 장만 달랑 걸친 알몸 상태였기 때문이다. 평소 옷을 홀랑 벗고 자던 버릇으로 일어난 사달이었다. 하녀는 한동안 허리를 굽힌 채 땅만 바라보았다. 악악 비명만 지르던 안현은 그런 하녀를 간신히 바라보고는 허둥지둥 옷을 챙겨 입었다. 너무 오랫동안 허리를 굽히고 있어서일까. 이내 몸을 젖힌 하녀가 “끙.” 신음을 내며 허리를 두드리고는, 안현을 보며 살며시 눈웃음을 쳤다. 마치 귀여운 남동생을 보듯이. “그럼 제게 잠시 설명할 시간을 주시겠어요?” 밤의 꽃 출신이라서 그런지 묘하게 야하게 느껴지는 눈짓에, 안현은 떠름히 머리를 끄덕이며 시선을 피했다. 잠시 후. 하녀의 설명을 들은 안현은 비로소 이게 어찌 된 상황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우선 전투 사용자처럼 새로이 개편된 비 전투 사용자의 체계부터 시작해, 오늘부터 B 등급 이상의 클랜원에게는 수행 인원 역할을 해주는 전속 하녀가 한 명씩 붙는다는 것과, 일주일 후 더 나은 생활 공간과 개인 연구실이 포함된 6층의 B 등급 전용 숙소로 이동해야 하는 것까지. 마지막으로 오늘 점심 즈음 집무실로 찾아오라는 김수현의 전언을 전한 하녀는 품으로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오늘은 인사차 찾아뵀고, 내일 아침부터 본격적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호출석과 통신용 구슬을 두고 갈게요. 필요하실 때는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침대에 구슬 두 개를 얌전히 놓은 후, 하녀는 양손으로 치마를 집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이내 문이 조심스레 닫히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안현은 크게 숨을 쉴 수 있었다. 어찌어찌 설명을 듣기는 했으나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갑자기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허나 그러한 와중에도 안현은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황당하기는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다. 그것은 어색하면서도 신선한 일종의 체감이었다. 사실 클랜원 등급제가 시행된 이후 며칠 동안 별다른 변화를 느끼지 못했는데, 이제야 하나씩 서서히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동시에 호기심도 일었다. B 등급이 이 정도 대우를 받는데, 과연 A 등급은 어떤 대우를 받을까? S 등급은? EX 등급은? ‘아무튼…. 대접받으니까 기분은 좋네.’ 그렇게 생각한 안현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점심이랬나? 늦지 않게 가야겠다.’ 이윽고 가벼운 세안을 마친 안현은 웃음 가득한 얼굴로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발걸음도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 작품 후기 ============================ 네. 맞습니다. 이 파트는 특정 캐릭터를 죽이려는 파트가 아니라, 오히려 살리려는 파트입니다. 물론 되살아나는 데는 그만한 고난이 필요하겠지만요. 물론 김수현은 언제나 이 메모라이즈의 왕관이겠지만, 개인적으로 그 왕관을 구성하는 보석도 아름답게 반짝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0716 / 0933 ---------------------------------------------- 등잔 밑을 밝히는 눈. ‘왜?’ 우중충했다. 오후도 아니고 밤도 아니다. 오히려 이제 해가 중천에 떠오른 정오의 시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상쾌한 햇살은 아틀란타 전역을 아우른다. 그러나 모든 곳에 미치지는 못하는지, 성내 어느 방에서는 심히 어둡고 침침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20대 중반은 되었을까. 방 한구석에는 붉은색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여인이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앉아 있다. 여인의 양손은 축 늘어진 채 바닥을 향했는데, 한 손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짧은 카타나가 힘없이 걸려 있다. 머리카락 색과 마찬가지로, 여인의 붉은 눈동자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점이 없는 멍한 빛을 띠고 있다. 딱히 무언가를 바라보는 게 아닌, 모종의 생각에 잠긴 듯한 눈빛이다. “왜?” 이번에는 입에서 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잔뜩 쉰 음성. 그러나 아무도 없는,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방에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축하해요. 오빠도 B, 등급이죠? 저도 B, 등급이에요.’ 그때, 정지한 줄 알았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여인의 머릿속으로 그때의 일이 떠오른다. 차가운 어조. 일부러 B를 끊어 말하는 음성. 무엇보다 자신을 비웃는 듯한 목소리! 간신히 걸려 있던 카타나가 툭 소리를 내며 땅으로 떨어졌다. “좆 같은 년이!” 축 늘어져 있던 손이 신경질적으로 움직였다. 머리에 맨 걸 벗어서 세게 내팽개치자 은빛 머리띠가 땡그랑 튕기며 굴러간다. 김수현이 직접 건네준, 사용자의 정신을 강력하게 보호해주는 ‘순결의 머리띠’. 이제껏 김수현의 지시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착용해왔지만, 지금은 벗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씨근거리는 소리가 연달아 흘러나온다. “개 같은 년…. 찢어 죽일 년….” 이유정은 정말로 김한별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김한별은 잘못했다며 우는 얼굴로 용서를 구하고, 자신은 까르르 웃으면서 카타나로 무자비하게 헤집어버리는 그런 상상. 그러나 어디까지나 상상에 불과하다. 오히려 생각할수록 머리끝까지 피가 치솟아, 의자 등받이를 팔꿈치로 거세게 후려갈겼다. 허나 분노는 조금도 가라앉을 생각을 안 했다. 머리띠를 벗어 던진 이상, 이미 이유정의 마음에는 삽시간에 욕망이 드리우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악!” 결국 참다 못한 이유정이 높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미친 듯이 머리를 긁기 시작했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었음에도 벅벅 긁어 내리자 쓰린 고통에 이어서 핏물이 흘러내린다. 조금은 머리가 시원해졌다. 손톱 사이 핏물과 살점이 더덕이 끼어 있는 걸 보니 겨우 마음이 가라앉는다. “인정…. 못해!” 무언가 결심이 섰는지 바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이어졌다. 희번덕거리는 눈동자는 요사한 빛을 뿜고 있었다. 이윽고 이유정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오른손에 카타나를 꼭 쥔 채로. 가는 동안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짜증을 돋궜다. 벽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도, 서로 도란도란 웃으며 같이 복도를 쓸고 있는 하녀도, 햇빛 잘 드는 곳에 누워 일광욕하는 비비앙도, 그런 비비앙에게 시도 때도 없이 불려가는 울먹거리는 표정의 하녀까지 모조리 거슬렸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욕망을 간신히 참아내며 4층 집무실에 도착했을 즈음. - 그래서. B 등급 대우를 받아본 소감은 어때? 막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이유정이 우뚝 행동을 정지했다. - 그, 그냥…. 어색했어요. - 어색한데 웃네. 자식이, 좋으면서. - 헤헤…. 예. 확실히 좋기는 해요. - 하하. 그래. 환경이 달라지면 너도 무언가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거다. 방에서 들려오는 화목한 소리. 누군지는 안 봐도 뻔했다.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으니까. - 형. 그런데 저를 호출하셨다고 들었는데요. - 아. 다른 건 아니고. 너도 이제 슬슬 일 하나는 맡아봐야지? - 예? 일이요? 무슨 일이요? - 별것은 아니야. 그냥 이제 우리도 대표 클랜이니까 외부 사용자가 수시로 찾아올 거라 이 말이지. 예를 들어 탐험에서 잃어버린 동료를 찾아달라고 하던가, 아니면 유적을 발견했는데 같이 가달라고 하던가 등등. 그 순간 이유정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이제 슬슬 일 하나는 맡아보라는 말이 이상하게 가슴을 찌르는 듯했다. - 헤. 용병 클랜일 때랑 비슷하네요? …자, 잠시만요. 형. 그럼 설마…. - 그래 인마. 마침 어제 들어온 일이 하나 있거든? 웬 캐러밴에서 성과가 있는 장소를 발견했는데, 들어보니까 거리도 가깝고 난이도도 괜찮은 것 같아서. 이건 네가 해도 괜찮을 것 같다. - 어, 어떻게…. 어떻게 제가…. - 어떻게는. 그동안 많이 따라다녔잖아. 그냥 네가 리더가 되는 거야. 캐러밴의 이야기를 듣고, 필요하겠다 싶은 클랜원은 직접 돌아다니면서 부탁하고. 그러면서 탐험 준비를 총괄하는 거지. 나한테는 떠나기 3일 전에 보고만 하면 돼. - 하, 하지만…. 과연 저를 선뜻 도와줄 클랜원이…. - 웬 걱정. 임무만 성공하면 무조건 실적으로 쌓이는데. 오히려 서로 도와주겠다고 난리일걸? 거기까지였다. 참고 참은 숨을 푹 내쉰 이유정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그런가요? 그럼 저는…?” 안현은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리다가 갑자기 들어온 이유정을 보고 말을 흐렸다. 그러나 곧 주춤주춤 물러나고 말았다. 씩씩거리며 들어온 이유정이 안현을 세게 밀치고 김수현의 앞에 섰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타박하기에는 흘러나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김수현은 태연했다. 마치 밖에서 이유정이 엿듣던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오히려 ‘너는 또 왜 왔느냐.’는 눈초리로 쳐다보자 이유정이 아랫입술을 세게 씹었다. “그거. 내가 할래.” “안 돼.” 무슨 말을 할지 예상했던 걸까. 비장한 음성으로 말했으나 김수현은 단호한 음성으로 딱 잘라 거절했다. “왜?” “캐러밴을 꾸려서 나가야 하는 임무는 B 등급 이상한테만 허용돼 있으니까.” “상관없잖아. 내가 이거 성공할 테니까 B 등급으로 올려주면 되는 거 아니야?” “이유정. 딱 한 번만 더 말한다. 너는 현재 B 등급이 아니고, 설령 이걸 성공해봤자 B 등급으로 못 올라가.” 그 순간이었다. “그럼 내가 왜 B 등급이 아닌 건데!” 쾅! 콰직! 빽 지르는 고성과 책상이 부서지는 소리가 겹쳤다. 이유정이 두 손을 거칠게 내리친 것이다. 오른손에 쥔 카타나는 책상을 쪼갠 것도 모자라 깊숙이 박혀 들어간 상태였다. 안현은 물론, 장본인인 이유정도 흠칫 놀랐다. 대놓고 거절당하자 그동안 쌓인 분노가 한꺼번에 터지기는 했으나, 그래도, 그래도 여태껏 한 번도 반항한 적은 없는데…. 김수현은 담담히 이유정을 응시했다. “조용히 해. 너는 D 등급 주려다가 그나마 C 등급 준거니까.” “왜! 그러니까 왜! 사고도 안 치고 말도 잘 들었잖아!” “하. 말을 잘 듣는 게 실적이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아니. 나가. 그냥 나가.” “못 나가! 안현이나 그 쌍년은 B 등급인데! 그런데 왜 나는 C 등급인 건데!” 이왕 내친 김이었다. 이유정은 클랜원 등급제 이후 가슴에 쌓였던 서러움을 모조리 쏟아냈다. “이게…. 그동안 오냐 오냐 했더니만….” 낯빛을 딱딱히 굳힌 김수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를 가는 이유정의 멱살을 부여잡고 곧바로 끌어당겼다. “또…. 검 부러뜨리고 싶어?” “아이고! 형! 형! 참으세요 형!” 안현이 얼른 달라붙어 김수현을 말렸다. “야 이유정! 너 미쳤어? 다른 누구도 아니고 형한테 이래? 빨리 잘못했다고 안 해?” “…싫어! 못해! 아니 안 해!” “너….”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어떻게 오빠가 나한테 이래!” 이제는 숫제 울먹울먹한 음성으로 말하면서도 지지 않겠다는 듯 눈을 필사적으로 치떴다. “이 녀석이…. 정말….” 푹 숨을 흘린 김수현이 거칠게 손을 떨치자 이유정이 발라당 나동그라졌다. 이내 테라스 쪽으로 몸을 돌린 김수현은 분을 삭이려는 듯 숨을 골랐다. 안현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무겁고 불안한 침묵이 차츰차츰 방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러니까.” 한참 후 조금은 가라앉은 음성이 침묵을 깨트렸다. 김수현이 도로 몸을 돌려 바닥을 내려다본다. “너는 안현이나 김한별이 B 등급인데, 네가 C 등급인 걸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건가?” “…….” 조금 직설적인 말이기는 했지만, 이유정은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예?” 안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김수현은 일리 있다는 듯 머리를 끄덕끄덕 주억이고 있었다. “확실히. 내 평가가 절대적인 건 아니니까. 그러니까 틀릴 수도 있겠지.” “……!” 갑자기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이유정은 침을 꼴깍 삼켰다. 혹시, 설마….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그 순간 김수현이 무언가 좋은 생각이 있다는 듯 말을 꺼냈다. 이어서 안절부절못하는 안현과 아직도 바닥에 앉아 있는 이유정을 한 번씩 번갈아 바라본다. “둘이 싸워봐.” 폭탄 선언…. 까지는 아니지만, 호명 당한 두 명의 얼굴에 동시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싸우라고? “원래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이번 한 번만 허락해준다. 네가 안현과의 대련에서 이기면 바로 B 등급으로 올려주지. 그러면 적어도 사용자 정보는 증명할 수 있으니까.” 말을 덧붙이자 이유정은 곧장 알아들었다. 말인즉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보라는 소리였다. “다만.” 그러나 김수현은 갑자기 반전을 예고했다. “지면 D 등급이다.” “지면…. D 등급?” “그럼. 이기면 바로 등급 상승인데 이 정도 페널티는 있어야지. …아니면. 자신 없어?” “…….” 자신이 없느냐? 아니. 그 반대였다.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아직도 망연히 서 있는 안현을 바라본 이유정은 돌연 내부서 질박한 용기가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왜냐면 자신이 단 한 번도 안현보다 처진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니까. “…누가!” “좋아. 안현 너는?” 이유정이 벌떡 일어나는 걸 확인한 김수현이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안현은 눈을 두어 번 감았다가 떴다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이렇게 안현과 이유정의 대련이 성사됐다. 잠시 후. 성의 정원. 안현과 이유정은 서로 적당한 간격을 두고서 마주했다. 안현은 기공 창술사의 상징인 흑 창을 들고 서 있었다. 이유정은 복부에 찍힌 낙인에서 소환한 카타나와 섬백 두 개를 들고 자세를 잡았다. 입에는 아까는 보지 못한 옅은 미소를 띠고 있다. 손을 풀 듯 카타나 두 자루를 살랑살랑 흔드는 꼴이 벌써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모습이다. 전투는 이미 시작됐다. 딱히 ‘시작!’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서로 마주섰을 때부터 긴장된 기운이 두 명을 감싸고 있었다. “미안한데. 너를 밟고 B 등급으로 올라가야겠어.” 문득 이유정이 말을 걸었다. 그러나 안현은 입을 열지 않았다. 전투가 시작됐을 때부터 안현은 상대의 행동 하나하나를 분석하느라 여념이 없었으니까. 허나 그 모습을 긴장한 거라고 여긴 탓인지 이유정이 싱겁게 코웃음을 쳤다. 그러더니 갑작스럽게 땅을 힘껏 박차며 달려들었다. 상당한 속도의 기습이었지만 안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유정이 코웃음을 칠 때부터 발목에 힘을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 3초도 지나지 않아 눈앞으로 은빛 섬광이 번쩍 그어졌지만, 안현은 제자리에서 창을 돌려 침착히 공격을 흘렸다. 이윽고 카타나가 창대에 툭 걸렸다 느낀 순간, 있는 힘껏 근력을 높여 옆으로 밀어냈다. 확실히, 무언가 튕겨 나가는 느낌은 있었다. 그러나 이유정의 기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받은 힘을 이용해 공중에서 빙그르르 돌더니 내려오는 그대로 카타나를 내리쳤다. 카앙! 맑은 철성. 안현은 한 손으로 창을 들어 올린 채 무심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유정은 낯을 와짝 일그러뜨리며 삽시간에 벗어났다. ‘너는….’ 안현은 속으로 한숨을 흘렸다. 이제야 김수현이 왜 자신과 이유정을 붙였는지 알 것 같았다. 약하다. 약해도 너무 약하다. 전투 직전 살짝 긴장했던 게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그래도 나름 자존심을 걸고 임했는데, 이제는 실망을 넘어서 화가 날 지경이었다. “표정 한 번 좆 같네. 눈 그렇게 뜨지 말지?” 으르렁거린 이유정이 또 한 번 땅을 박찼다. 이번에는 왼쪽으로 갔다가 오른쪽으로 갔다가. 흡사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움직이며 안현의 시야를 어지럽힌다. ‘너는….’ 그러나 안현은 여전히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빠르기는 하다. 그런데 그뿐이다. 주현호와의 일전처럼 사방이 온통 정신 없을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수현과 대련했을 때를 떠올려보면 그야말로 하품이 나올 수준. 그때는 정말 어떻게 됐는지조차 모르고 당했는데. 그런데 이래서야 진심으로 하고 싶어도 진심이 되지 않는다. “하!” 돌연 왼쪽에서 힘찬 기합이 들려온다. 안현은 흘끗 옆을 응시했다.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만면에 화색 가득한 얼굴로,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면서 달려온다. ‘너는….’ 정석도 아니고, 변칙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냥 신체 조건을 이용한, 사용자 정보의 이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눈속임에 불과한 공격이다. 천천히 창을 겨누는 안현의 머릿속에서 문득 차소림과의 대련이 떠올랐다. ‘그동안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구나….’ 안현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왜냐면, 왜냐면…. “끝났어!” 지금 들어오는 공격은, 예전 안현이 차소림과의 대련에서 찔렀던 최초이자 최후의 일격. 딱 그 수준이었으니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윽고 삽시간에 창을 다잡은 안현이 힘차게 창을 찔렀다. ============================ 작품 후기 ============================ 밤의 꽃으로 고용된 하녀는 머셔너리와 정식 계약을 맺은 비 전투 사용자입니다. 월급을 받고 일하는 정식 계약을 맺었지요. 임한나를 영입할 때, 고연주의 소개로 밤의 꽃을 처음으로 고용하게 됩니다. 아마 그때 내용을 회상하시면 하녀가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아실 수 있으실 듯합니다. 그러니까 너무 다투지는 마세요. 내용에 관한 다른 의견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갈수록 말이 심해지면서 감정이 상하시는 것 같아요. 그러면 저도 속상하고, 독자 분들도 속상하고. 기분도 안 좋잖아요. 조금만 더 곱고 예쁜 말투를 쓰면 서로 기분이 상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자! 독자 분들 속상한 일은 훌훌 털고, 우리 모두 남자답게 쐬주나 한 잔 부딪치면서 풀어버립시다! 짠! 0717 / 0933 ---------------------------------------------- 등잔 밑을 밝히는 눈. 그리하여 안현과 이유정의 승부가 서서히 종착역을 향할 즈음. “쟤가 저렇게 강했나?” 성의 정원 중앙 수로에 발을 담그고 있던 남다은이 고개를 갸웃했다. 남다은은 안현과 이유정의 전투를 처음부터 보고 있었다. 딱히 관심이 있어서 보는 건 아니었고, 그냥 정원을 지나가던 와중 마침 대련하는 게 보여 구경하는 중이었다. 왜. 그런 말도 있잖은가. 구경에 한해서는 싸움도 X밥 싸움이 더 재미있다고.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생각을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유정은 딱 생각한 수준이었으나 안현은 다르다. 일견 현란해 보이는 발 재간에 휘둘리는 게 아닌, 조용히 자리를 지키면서 묵직하게 대응한다. 상대의 수를 모두 읽고 약점까지 파악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물론 ‘검후’가 보기에는 아직 어설픈 면이 없잖아 있으면서도. “사용자 안현은 확실히 성장했습니다.” 문득 강직하면서 차분한 음성이 말을 걸었다. “그리고 지금도 성장하고 있어요. 제가 알기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련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윽고 남다은의 옆으로 누군가 조심스레 주저앉았다. 탄탄하면서도 매끈한 살결의 종아리가 수로 속으로 빠져든다. 흘끗 눈을 흘긴 남다은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차소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금 더워서요. 괜찮을까요?” “…그러세요. 내가 전세 낸 건 아니니까.” 까닥, 두 여인이 서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같이 대련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련을 했다고요?” 이번에는 남다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북 대륙에서도, 강철 산맥에서도, 아틀란타에서도요. 열심히 하는 모습이 기특해서, 가끔 제가 알게 모르게 지도해준 적도 있지요.” “알게 모르게…. 아무리 그래도 저 움직임은 완전히 압도하는 수준인데요. 원래 저 정도로 차이가 났나요?” “사용자 안현은 아마 강철 산맥에서 하나 된 경지에 이른 것 같습니다.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아하. 그렇다면야. 그러고 보니 확실히….” 하나 된 경지. 일정 수준에 오른 근접 계열 사용자가 흔히 사용하는 은어로, 합일(合一)의 경지를 의미한다. 개나 소나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닌 만큼, 능력을 개화한 사용자와 그러지 못한 사용자의 차이는 갈릴 수밖에 없다. 남다은은 이제 의문이 해소됐는지 고개를 끄덕끄덕 주억였다. “사용자 안현이 올해 3년 차였나요? 제가 2년 차에 개화했으니까…. 나름 괜찮네요.” “후후. 저는 3년 차 초기에 개화했습니다. …음? 거의 끝났네요.” 잔잔히 웃으며 대꾸하던 차소림이 눈을 반짝였다. 두 여인은 동시에 시선을 집중했다. 차소림의 말대로 전투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안현이 행동을 개시한 이후로. “……!” 안현이 창을 내지른 순간, 신 나게 달려가던 이유정은 돌연 이상한 감각에 빠졌다. 그것은 무어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세상이 멈추고 귓속에는 윙윙거리는 이명이 울렸다. 그냥 창을 한 번 찔렀을 뿐인데, 전신이 사슬에 꽁꽁 묶여 옴짝달싹할 수 없는 듯했다. 아니.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는 말이 정확할까. 실제로 안현의 일격은 이유정의 모든 움직임을 깨트리고 침묵시키면서 직선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아차 한 사이 창 끝이 눈앞에 잡혔다. 찰나의 순간, 황급히 벗어나려는 이유정의 두 눈에 멍한 빛이 스쳤다. 자신이 물러나려는 곳에서도 안현이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방금 정면에서 달려오는 걸 확인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구덩이 전투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안현이 좌측, 정면, 우측에서 동시에 달려온다. ‘창술 사격’이 ‘신창합일’과 어우러져 발현된 능력. 폭발적인 가속을 기반으로 한 변화가 안현이 3명으로 나뉜 듯한 착시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나마 주현호는 3명을 모조리 해치우는 방법을 선택했으나 이유정은 그 정도 수준이 되지 못했다. 또한 무엇보다, 그때의 주현호도 허공에서 창을 내려치는 안현은 깨닫지 못했다. 물러나지도 못하고, 벗어날 수도 없다. 현재의 이유정이 할 수 있는 건, 어느새 걸음을 멈춘 채 눈을 크게 뜨는 것뿐이었다. 뻑. 마침내 공중에서 내려온 창이 둔탁한 소리를 내는 동시, 이유정의 오른 어깨가 푹 주저앉는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3 방향에서 달려온 환영이 가한 공격은 왼쪽 어깨, 복부, 허벅지를 차례대로 쳤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이어진 공격이라, 피격 당할 때마다 이유정의 몸이 크게 흔들리고 다리가 꺾인다. 그나마 손에 사정을 두어 망정이지, 안현이 전력으로 힘을 썼다면 첫 일격에 머리가 쪼개졌을 것이다. 풀썩! 결국에는 이유정이 허물어지듯 무너짐으로써 전투의 종료를 알렸다. 두 말할 여지도 없는 깨끗한 패배. 서로 라이벌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비해서 너무나 허무한 결과였다. 아픔을 견디면서 노력한 사용자와 어느 순간 안주한 사용자의 차이가 이 대련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이윽고 가볍게 숨을 흘린 안현이 아래를 응시했다. 바닥에 무너진 이유정이 온몸을 웅크려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다. 언뜻 눈에 들어온 파르르 떨리는 입이 간신히 비명을 참고 있는 것 같다. 그러자 조금은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으나 안현은 조금도 미안하지 않았다. 백 번을 생각해도 이유정이 한 짓거리는 용서할 수 없었다. 더구나 다른 누구도 아닌 형인데. 짝, 짝, 짝, 짝. 잠시 후, 가벼운 박수가 이어졌다. 한쪽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김수현이 손뼉을 치고 있었다. “끝났네. 안현.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아무튼, 이 정도면 승복했겠지. 그럼 약속한 대로 이유정은 한 단계 등급 하락이다.” “…….” “안현. 너는 가서 사제 불러오고 치료하라 해.” “…알겠습니다.” 애초 승부의 결과는 거의 확신했다. 별로 놀랄 것도 없다는 듯, 김수현은 무심한 음성으로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안현은 서서히 멀어지는 김수현의 등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중간에 흘끗 이유정을 쳐다보기는 했지만, 딱히 생색낸다거나 위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무리 안현이 무디다지만, 지금 어떤 식으로든 말을 하든 이유정의 자존심에 상처만 입힌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김수현과 안현이 떠나간 자리에는, 쓰러진 이유정만이 홀로 남게 됐다. 어느새 몸의 떨림은 잦아들었으나 망연한 눈빛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멀어지는 둘의 모습과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두 자루 카타나만이 눈에 들어올 뿐. 이후 안현이 사제를 불러올 때까지 이유정은 미동도 않은 채 계속해서 엎드려 있었다. 툭. 툭툭. 오늘 우중충하다고 느꼈던 게 단순 기분 탓만은 아니었던 걸까. 화창하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드리우고, 작은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불어온 매서운 바람이 성을 스치듯 지나가자, 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빗방울이 분분히 흩날린다. 그날. 이유정은 등급제 시행 이후, 처음으로 등급이 하락한 클랜원이 되었다. * 등급제 시행은 확실히 머셔너리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좋은 반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자신의 등급에 불만을 가진 클랜원이 적지 않고, 실제로 찾아와 따진 이도 여럿이니까. 이유정은 도를 넘어섰고 말이지. 물론 아직 속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이 변화가 정착하기까지 시간을 두고 긍정적으로 지켜볼 생각이었다. 왜냐면 실제로 변화의 움직임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소수이기는 하나 이 등급제를 받아들인 클랜원이 없는 게 아니었다. 몇 명은 직접 나를 찾아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꺼냈다. 더 이상 시켜서 움직이는 게 아닌,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에서 특히 우정민의 이야기는 나를 조금이나마 놀라게 했다. “부랑자 척살 조를 부활시키고 싶다고?” “아아. 네가 허락만 해준다면 말이지.” 우정민은 부랑자 척살 조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사용자라면 누구나 부랑자에 반감을 갖고 있고, 2년 전 전쟁 이후 증오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어디서 부랑자 한 명을 잡았다는 소문이라도 들리면 손뼉을 치고 기뻐할 정도였다. 우리 머셔너리도 부랑자 대 간부였던 백서연을 잡은 이후 명성이 크게 올라가지 않았는가. 만일 우정민이 비슷한 일을 해낸다면 그것은 머셔너리의 명성 상승과 직결되는 일이다. “음. 좋아. 허락하지. 아주 좋은 생각이야.” “또한…. 응? 그, 그래?” 너무 쉽게 허락을 받았다고 생각한 걸까. 한창 말을 잇던 우정민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나를 응시한다. “…정말인가?” “그럼. 생각해보니 강철 산맥 공략에 힘을 쏟는 동안 놈들이 힘을 키웠을 수도 있으니까. 이제 슬슬 토벌할 때도 됐지.” 그냥 허락해준 게 아니라,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다. ‘붉은 송곳니’ 우정민. 1회 차 시절 사용자와 부랑자의 악연을 끊어낸 장본인. 과거를 알고 있는 만큼, 부랑자 척살에 눈앞의 사내 이상의 적임자는 생각나지 않는다. “아무튼, 좋은 생각이야.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지?” “흐흐. 선유운이 워낙 자랑을 하니까 배알이 꼴리더군. S 등급 대우받는 거 보니까 조금 부럽기도 하고.” “이런. 네 등급이 너무 박했나?” “아니. 전혀. 그동안 안주한 건 사실이니까. 또 설령 네가 나를 F 등급 명단에 올렸다고 해도, 나는 조금도 불만을 갖지 않았을 거다. …이건 진심이야.” 허락 받은 것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우정민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나도 살며시 웃었다. 은혜는 바다같이, 복수는 칼날같이. 우정민은 현재 이 격언 그대로의 행동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이 안건은 선유운이 먼저 말을 꺼낸 거거든. 자신이 도와줄 테니까 한 번 얘기를 꺼내보라 하더군.” “음~. 사용자 선유운이 도와준다고. 그럼 이왕 하는 거 남다은한테도 한 번 얘기해봐. 부랑자에 대한 증오라면 남다은도 누구 못지 않으니까.” “오…. 검후께서 참가해주신다면 두려울 게 없겠지. 그리고….” “……?” 그때였다. 우정민의 낯에 갑자기 한 줄기 수심이 어렸다. 우정민이 이런 표정을 짓는 건 딱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원혜수는 잘 지내나?” “잘…. 지내고야 있지.” “들려오는 바로는 딱히 문제는 없는 것 같던데.” “…바로 그게 문제다.” 원혜수 이야기가 나오자 우정민의 음성이 침중해졌다. 잠깐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기색이 보였지만, 곧 입을 열었다. “무언가 가슴에 응어리가 있는 건 확실해. 그런데 풀지를 않아. 차라리 한 번 시원하게 터트렸으면 좋겠는데, 그러지를 않아. 겉으로는 정상적으로 생활하면서 계속 쌓아두는 것 같거든. 애 문제도 그래.” “…애 문제? 엄마 노릇이라도….” “하기는 해. 젖을 먹이거나 울면 잠깐 봐주거나 하는 등등 안 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누가 봐도 마지못해 한다고 생각할 거야.” “흠….” “사실 이것도 이만저만 스트레스가 아니야. 나는 정말 내 애라고 생각하면서 노력하는데, 애는 자꾸 엄마만 찾고. 아니. 이해는 해. 그래. 한창 크는 중인데 당연히 엄마가 보고 싶겠지. 그런데 혜수는….” “…….” 평소답지 않게 빠르게 말을 잇던 우정민은, 결국 말을 끝맺지 못하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미안하다. 어딘가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나 봐. 그냥 못들은 걸로 해줘.” “아니. 나야말로 괜히 물어본 것 같네.” 우정민은 쓰게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허락해줘서 고맙다. 그럼 조만간 제대로 준비해서 다시 찾아오도록 하지.” 그리고 바로 몸을 돌렸지만, 몇 걸음도 채 가지 않아 우뚝 걸음을 멈췄다. “아차. 이 말을 전하지 못했군. 신전에서 너를 호출했다고 한다.” “응? 신전에서?” “1층에서 올라오다가 거주민 전령이 찾아온 걸 봤거든. 내가 대신 전해주겠다고 했는데, 깜빡 잊고 있었어.” “아하….” 나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로 호출했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마 구출 의뢰를 완수한 보상이 이제 확정된 모양이다. 천사를 보는 건 내키지 않지만, 그래도 보상은 받아야 하니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우정민이 나간 이후, 간단하게 채비를 하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계단을 걸어 내려가려는 찰나, 아래 계단에서 아장아장 올라오는 한 여아와 작달막한 영수를 볼 수 있었다. 마르와 도도였다. “아빠!” 마르도 나를 발견했는지 힘차게 계단을 올라와 함박 웃음을 짓는다. 무에 그리 좋은 걸까? 팔락팔락 움직이는 뾰족한 귀를 보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응. 마르구나. 어디 가고 있었어?” “도도랑 같이 아빠 보러 가고 있었어요!” 마르는 아기 페가수스를 두 손으로 들어올리며 말했다. 도도는 나를 보자마자 주둥이를 크게 벌렸다가 이를 딱딱 부딪치기 시작했다. …이놈이? “그런데 아빠는 또 어디 가시는 거예요?” 아니. 또 어디 가시는 거냐니. 저렇게 해맑은 얼굴로 말하니까 왠지 모르게 가슴이 쿡쿡 찔리는 기분이다. “어? 아…. 하하. 잠깐 신전에 볼 일이 있어서. 어떡하지?” “신전이요?” 그러나 마르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되레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이제는 귀는 물론, 등의 날개까지 살랑살랑 움직이기 시작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아빠. 그러면요.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네가? 신전에는 왜?” “그냥…. 오랜만에 아빠랑 같이 외출하고 싶기도 하고….” “…하고?” “또 엄마도 오랜만에 보고 싶고…. 헤헤.” “…….” 방실방실 웃으면서 말하는 마르. 그러나 나는 돌연 기분이 착 가라앉는 걸 느꼈다. “엄마…? 아.” 그와 동시에, 아차 한 기분도 느꼈다. 아무래도 숨기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낸 모양이다. 찰나의 순간이기는 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마르의 얼굴이 떠름히 굳고, 두 눈에서 실망의 빛이 스쳤으니까. 이내 애써 미소를 보이기는 했으나 아까와는 다른 억지 웃음이다. 정신 없이 움직이던 귀도 어느새 축 늘어져 있었다. “죄, 죄송해요. 아빠. 제가 무리한 부탁을….” “아니, 아니야. 괜찮다. 그리고.” ‘그 천사는 네 엄마가 아니란다.’ 라고 말하려다가, 그냥 그만두기로 했다. 안 그래도 기대가 꺾인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렇게 잔인하게 말할 용기가 차마 나지 않는다. 폭풍처럼 성장하고 있다고는 하나, 마르는 아직 어린애에 불과했다. “…미안하다.” “아빠 정말 죄송해요.” “괜찮다니까. 그럼 아빠 다녀올게?” “네에….” 계속 죄송하다는 말만 연발하는 마르의 머리를 부드러이 쓰다듬어주고 나서, 나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는 와중 계속해서 뜻 모를 죄책감이 느껴졌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라프는 마르의 엄마가 아니다. 더구나 최근 방문에서 더는 데려올 일이 없으니 신경 끄라고까지 말하지 않았는가. 그래. 나는 정말로 더 이상 마르를 소환의 방에 데려갈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애는 자꾸 엄마만 찾고. 아니. 이해는 해. 그래. 한창 크는 중인데 당연히 엄마가 보고 싶겠지.’ 왜 하필 그 말이 마르의 주눅 든 얼굴과 겹쳐서 떠오르는 걸까. ‘젠장. 괜한 말을 들어서는….’ 결국, 나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최대한 빠른 속도로 내려온 계단을 오르자, 아직 복도를 걸어가는 마르의 시무룩한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르야…!” 조금 높은 목소리로 외치자, 터벅터벅 걸어가던 마르가 우뚝 멈추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같이…. 갈래?” 그러자 마르가 토끼 눈을 뜨는 동시. “응! 아니, 네!” 땅을 향하던 날개 끝이 활짝 하늘로 치솟는다. 마르는 득달같이 달려와 내 품에 안겼다. 그렇게 북 대륙으로 이동하는 내내, 나는 “아빠 최고.”, “아빠 사랑해요.”를 들을 수 있었다. 잠시 후. 연신 가슴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마르를 안은 채 신전으로 들어가고, 마침내 소환의 방으로 입장한 순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용자 김…?” 나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엄마아!” 마르를 확인한 세라프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어…. 아…!” 잔잔히 흐르던 날개가 사정없이 일렁인다. …어째 둘이 놀랄 때 보이는 반응이 똑같은 것 같은데 말이지. ============================ 작품 후기 ============================ 『본처의 기분이 상승했습니다!』 『고유 능력, 남편 내조의 랭크가 EX로 상승합니다!』 0718 / 0933 ---------------------------------------------- 등잔 밑을 밝히는 눈. “여기는 또 어떻게 오신 건가요?” “엄마 보고 싶어서요. 그래서 아빠한테 조르고 떼썼어요.” “이런. 요즘 아빠도 한창 바쁘실 텐데. 그러면 못써요. 조르고 생떼를 부리는 아이는 나쁜 아이랍니다.” “마르는 나쁜 아이예요?” “아니요. 꼭 그렇다는 말은 아니에요.” “그럼 아빠가 안 바쁘실 때는 조르고 떼써도 돼요?” 그러자 세라프는 “그래요. 그때는 괜찮아요. 조금이라면.” 이라고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황당한 기분을 느꼈다. 쪼르르 달려간 마르를 안고 타이르듯이 하나하나 말하는데, 나는 안중에도 없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도 아니고. 기껏 호출해서 왔는데 이게 무슨 꼴이람. 나는 일부러 목을 가다듬었다. “호출했다고 들었는데.” 낮은 소리로 말하자 그제야 세라프가 고개를 들었다. “네. 수현. 어서 오세요. 오늘도 고생 많이 하셨지요.” 잔잔한 미소를 짓고서 따뜻한 봄바람같이 말하는 세라프. 문득 무언가 살랑살랑 낯을 간질이는 감각이 느껴졌다. 말하는 모양새가 꼭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을 맞이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 왜 또 스리슬쩍 옆으로 비켜 앉는 건데. 그런다고 내가 제단에 가서 앉을 줄 알아? “아빠!” 그때였다. 언제나처럼 바닥에 주저앉으려는 찰나, 휙 고개 돌린 마르가 나를 부르며 손을 뻗었다.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무에 그리 좋은지. 입을 한 가득 벌린 채 방실방실 웃는 마르가 눈에 밟혔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이 마치 ‘아빠도 와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아 차마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느릿느릿 걸어갔지만 서도, 결국 나는 제단에 앉고 말았다. 그나마 최대한 왼쪽 끝에 걸터앉았으나 세라프가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붙여와, 결국에는 매우 가깝게, 서로의 몸이 닿을 정도로 밀착하고 말았다. 젠장. 닿은 부분이 썩어 들어가는…. 건 아니고, 부드러우면서 감미로운 향기가 물씬 풍겨온다. “까르르.” …그 정도로 좋은가. 저렇게 해맑게 웃는 마르는 나도 처음 보는 것 같다. “수현. 잠시만….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세라프는 빙긋 웃으면서 양해를 구하더니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마르를 어르고 달래기 시작했다. 쓰다듬어달라고 어리광부리는 걸 품에 꼭 안고서 등을 토닥토닥 두드린다. 괜스레 심술이 돋아 작고 하얀 발을 간질이자, 마르가 깔깔 웃으며 마구마구 몸부림을 쳤다. 이왕 내친 거 옆구리까지 찔러보려고 했지만 세라프가 난처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봐 그만두기로 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계속 난리를(?) 치던 마르는 제풀에 지쳤는지 서서히 눈꺼풀을 닫고 있었다. 세라프는 자장가를 부르듯 고요한 콧노래를 부르다가, 마르가 완전히 눈을 감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튼, 이제 겨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가. 마르가 잠든 사이 최대한 빠르게 보상을 받고 나가야겠다.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상관없어. 그나저나….” “네. 수현을 호출한 이유는 예전 의뢰에 대한 보상이 확정됐기 때문입니다.” “어…. 그래?” “우선 의뢰에 관한 기본 보상으로, 구출한 사용자 1인당 100 골드 포인트를 지급하겠습니다. 또 그와는 별개로, 현재까지 모인 골드 포인트를 확인하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그래?” 이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절로 떨떠름히 말하고 말았다. 세상에. 세라프가 말을 돌리지 않는다니. 아니. 그것도 모자라 스스로 말을 이끌어나가고 있다. 흡사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는 것처럼. 『‘서 대륙 사용자 구출’ 의뢰를 완수했습니다! 보상으로 43,100의 골드 포인트가 부여됩니다!』 『현재 사용자 김수현은 10,857,460의 골드 포인트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윽고 허공에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기본 보상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동안 쌓은 골드 포인트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아마 반신으로 각성한 쿠샨 토르 덕분일 것이다. 그때만 거의 6백만 가깝게 벌었으니까. 하기야 잘 생각해보면 많은 것도 아니지. 제로 코드를 얻었을 때는 억대가 넘는 골드 포인트를 벌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기, 갑옷, 장신구, 주문서 등등…. 보상으로 정말 많은 말이 나왔습니다. 허나 앞서 말한 것 중 어느 것도 수현이 만족하는데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득 들려오는 세라프의 조용한 음성.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나를 부르는 호칭이 거슬린다. “잠깐만. 세라프. 너 아까부터 자꾸만 내 이름을….” “그리하여 제가, 이미 소진되기는 했지만 한 번 더 사용자 비밀 상점을 열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게 어떻겠냐 발의했고, 이 안건이 통과됨으로써 수현을 호출한 것입니다.” 그 순간 나는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77,777 골드 포인트를 지급함으로써 개방할 수 있는 사용자 비밀 상점. 이 기능은 사용자당 한 번의 기회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1회 차에서는, 기껏 이 기능을 밝혀낸 사용자가 지급 후 남은 골드 포인트가 없어 구매하지 못한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 또한 2회 차 통과의례를 마치면서 소진하기도 했고. 그런데 그 권한을 되살려주겠다고? 이건 생각할 것도 없는 일이다. “음. 좋아! 그러면 체력을 올릴 수 있는 영약이랑, 아니. 그냥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영약은 모조리…!” 그러나 나는 도중에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세라프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있었다. 한껏 상승하던 기분이 조금은 시들해졌다. “…안 돼?” “안 되는 게 아니라, 수현이 원하는 체력을 올릴 수 있는 영약은 더 이상 항목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잊으셨습니까?” 나는 아차 탄식을 질렀다. 그러고 보니 체력 영약은 내가 냉큼 먹어버리지 않았는가.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영약은 각각 하나씩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한 번에 딱 하나밖에 구매할 수 없다. 그러면 천사의 눈물도 마찬가지일 터. “그러면 다른 건? 근력, 내구, 민첩, 마력, 행운 영약은 있을 거 아니야.” “그렇습니다. 각 영약은 해당 능력치를 2 포인트 올려주는 효능이 있으며, 이용 기능이 부활하는 동시 살 수 있는 권한도 되살아납니다. 하나밖에 사지 못한다는 제한은 여전히 존재합니다만.” 그렇구나. 나는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체력 능력치를 올리지 못한다는 점은 아쉬우나 이거라도 어디인가. 만족, 대만족이다. 보상은 섭섭지 않게 주겠다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순간이었다. “음…. 역시, 보상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겁니까.” 갑자기 세라프가 헛소리를 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왜 멋대로 보상이 내 마음에 들지 않을 거라 단정 짓는 거지? “하기야 단순히 권한만 부활할 뿐, 결국 직접적으로 골드 포인트를 소비해야 하니 완전한 보상으로 보기는 어렵겠지요. 이해합니다. 그러면 우선 사용자 비밀 상점의 품목을 천천히 둘러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보시면 마음이 달라지실 수도 있으니까요. 원래 이러면 안 되지만, 이번 한 번에 한해서 항목을 개방하겠습니다. 물론 구매는 하실 수 없습니다.” “어…. 어? 그, 그럴까?” 세라프가 상당히 길게 말을 이었다. 이상하다. 확실히 이상하다. 딱 꼬집지는 못하겠는데 말을 미리 준비한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내가 어떻게 행동해주기를 바라는 듯이. 이윽고 눈앞 허공으로 비밀 상점의 신속하게 떠오른다. 가만히 구경 좀 하려고 했으나 돌연 세라프가 손을 움직이더니 손수 항목 하나를 짚어주었다. 『통과의례 입장권(150,000 GP).』 설명 : 사용자의 신분으로 통과의례 지역에 입장할 수 있다. 입장 시 7일 동안 머무르는 게 가능하다. “이건 어떠십니까?” “통과의례 입장권? 글쎄. 딱히?” 세라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래의 항목을 짚었다. “그럼 이것도 한 번 봐주십시오. 이번에 신설한 항목인데….” 『괴물 소환 상자 1(1,000 GP)』 『괴물 소환 상자 2(10,000 GP)』 『괴물 소환 상자 3(100,000 GP)』 『괴물 소환 상자 4(1,000,000 GP)』 설명 : 홀 플레인 전역에 존재하는 괴물을 무작위로 소환할 수 있다. 상자에 각인된 숫자가 높을수록 더욱 강력한 괴물이 소환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길 수만 있다면, 사체나 괴물이 착용한 장비를 가질 수 있다. “동, 서, 남, 북 대륙뿐만이 아니라, 사용자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아주 먼 곳의 미개척 지역에 돌아다니는 괴물까지 소환할 수 있는 상자입니다.”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항목의 설명은 이해했다. 그러나 운만 좋으면 장비를 주렁주렁(?) 걸친 괴물을 소환한다손 쳐도, 확실성이 없다. 그나마 가능성을 높이려면 4번을 구매하면 되겠지만, 가격이 억 소리가 나올 정도로 비싸고. 굳이 투자할 이유가 없다고나 할까. “글쎄. 잘 모르겠네. 그런데 이건 너무 행운에 기대야 할 것 같은데…?” 그 순간 세라프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면 내 착각일까. “이런.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 보군요. 이것 참, 보상은 섭섭지 않게 드리겠다고 약속했는데…. 송구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세라프는 폭 한숨을 흘리면서 비밀 상점의 항목을 종료했다. 아니야. 나는 비밀 상점 이용 기능의 부활이면 충분히 만족해. 생각은 이렇게 했지만 서도, 나는 입을 닫았다. 그리고 세라프를 응시하며 차분히 상념에 잠겼다. 문득 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생각해보면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사용자 아카데미서 교관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세라프는 은근슬쩍 조언을 흘렸다. ‘Look Before You Leap. 사용자 김수현. 이 말을 잘 기억하십시오.’ 뛸 곳을 먼저 보고 뛰어라. 실행에 옮기기 전 모든 상황을 잘 고려해 판단하라는 뜻이다. 그 조언을 받아들인 결과, 나는 제갈 해솔이라는 굴지의 재능을 지닌 사용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그때와 똑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면, 수현은 추가적으로 원하는 보상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말씀해주신다면 최대한 고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윽고 세라프가 ‘추가적으로’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말한 순간, 나는 비로소 그동안의 의도를 깨달을 수 있었다. 동시에 왜 세라프가 이해 못할 말과 행동을 했는지도. 우선 보상은 확정된 상태,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천사에게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은 만들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현재 비밀 상점의 존재는 아직 나밖에 모르거니와, 밝혀지기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다. 말인즉 기본 보상의 기준을 골드 포인트가 아닌 비밀 상점 이용으로 맞추고, 그 이상을 요구하라는 소리였다. 그래. 세라프는 처음부터 내게 말하고 있었다. 급할 게 없다고. 추후 이런 상황이 다시 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으니, 지금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뽑아먹으라고. 이번 한 번에 한해서라면 조금 선을 넘는 추가 요구라도 먹힐 가능성이 높다. 세라프가 지원해주기만 한다면. 왜 갑자기 세라프가 나를 밀어주는지는 모르겠다. 허나 이렇게까지 멍석을 깔아주는데 거부할 도리는 없었다. “한 번….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하지.” 역시 정답이었을까. “Yes. 알겠습니다.” 세라프는 마르의 머리카락을 부드러이 쓰다듬으면서, 그 어느 때보다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 이런 말이 있다. 추억은 내일을 살아가는 양분이 된다고. 김수현이 떠난 후. 도로 제단 중앙으로 이동한 세라프는 홀로 빙그레 미소 지었다. 더 이상 고독해 보이지도, 쓸쓸해 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행복을 품은 따뜻한 기운이 소환의 방에 가득히 넘실거리고 있었다. ‘네. 수현. 어서 오세요. 오늘도 고생 많이 하셨지요.’ ‘수현은….’ 몇 번이나 연습했던 말과, 몇 번이나 꿈꿨던 상황. 조금 전을 떠올리자, 지그시 눈을 감은 세라프의 얼굴에 붉은 홍조가 피었다. 그러나 그 행복을 두고 보지만은 못하겠는 걸까. - 세라프. 지금 제정신인가요? - 미쳤군.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쳤어. 아까의 상황을 곱씹으려는 찰나, 돌연 여러 음성이 귓가를 강하게 때렸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러나 세라프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침착히 눈을 뜨고서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 그걸 몰라서 묻나요? - 비밀 상점 이용 기능의 부활도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지금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 혼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라프는 어깨를 으쓱 들먹였다. 마치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 어이가 없네요. 통과의례에 있는 레어, 시크릿 클래스는, 재능 있는 예비 사용자를 위한 안배에요. 그런데 그것마저 빼앗아갈 속셈인가요? “제가 그 안배의 장소를 가르쳐주기라도 했습니까?” - 그럼 상자는 왜 소개했지? “어차피 그 항목은 곧 정식으로 공개할 생각이 아니었습니까? 무슨 문제라도?” - 거짓말! 상자에서 등장하는 괴물이 사용자의 행운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노린 거잖아! 그러니까 사용자 김수현의 옆에 사용자 안솔이 있다는 걸 알고…! “저는 그에 관한 이야기는 조금도 꺼내지 않았습니다만?” 세라프가 천연덕스레 말하자 폭풍처럼 이어지던 두 음성이 뚝 끊겼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할 말이 없는 것이다. 확실히 세라프의 말이나 행동만 놓고 보면 딱히 문제 삼을 여지는 없었다. 김수현이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문제지만. - …아무튼, 방금 세라프의 행동은 확실히 도를 넘었어요. 오늘 일은 절대로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 내가 직접 안건을 올리도록 하지. 두고 보라고. 조용한, 그러나 협박하는 어조가 귓가를 울렸다. 그 순간 훈훈한 기운이 사라지고, 세라프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그러는 두 분은, 자신 있으십니까?” - 무, 무슨…?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한 것 같습니다.” - ……. 그러자 또 한 번 끊긴 음성. 확실히 오늘 세라프의 의도는 지나쳤다. 그러나 말이나 행동은 지나치지 않다. 항목을 소개한 것도 ‘사용자 김수현의 만족을 이끌어내려는 목적’이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여담이지만, 천사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계급제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도우미의 특성상, 맡고 있는 사용자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수록 계급에 가산점이 주어진다. 그에 따라 세라프의 권한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한 상태였다. 그런 만큼 천사들 중에서는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려는 수단으로, 어디까지나 도를 넘지 않는 선에서 알게 모르게 사용자를 챙겨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천사가 도우미 역할에 집중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는 명분으로 공공연히 행해지는 수작이랄까. 결국에는 간단한 이야기였다. ‘그러는 너희는 그런 적 없어?’ 세라프는 이러한 뜻으로 두 명에게 물은 것이다. “어쨌든 저도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지만, 굳이 안건을 올리시겠다면 막지는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세라프는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었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아 아까의 상황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한편, 같은 시각. “여기가…. 아틀란타…?” “대단하군요.” 워프 게이트에서 2명의 사용자가 걸어 나오고 있다. 두 명 모두 두꺼운 로브로 온몸을 가리고 있지만, 후드 아래로 흘러나온 금발의 머리카락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사라. 그럼 이곳에서….” “그래요. 남쪽이라고 들었으니 어서 가도록 해요.” 후드를 눌러쓴 두 사용자는 곧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씨잉! 오늘도 공고가 안 떴잖아!” “아하하하. 아마 많이 바빠서 그런 게 아닐까?” 아틀란타 남 도시 중앙 광장. 여러 사용자가 이용하는 게시판 앞에서는 사내가 투정을 부리는 여인을 한창 달래고 있었다. “분명히 회담에서 새로 모집하겠다는 말 들었다며!” “그, 그래. 맞아. 확실히 들었어.” “그럼 왜 아직까지 공고가 안 뜨는 건데?” “그, 그건…. 승윤아. 그게 그러니까….” 곤란해 하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던 사내는 한숨을 흘리며 게시판을 응시했다. 그러나 샅샅이 찾아봐도 머셔너리의 클랜원 모집 공고는 보이지 않는다. 하기야 그 공고가 뜨면 샅샅이 찾을 필요도 없겠지마는. 잠시 후. “아 짜증 나! 도대체 이게 며칠째야? 하여간 오빠 말만 믿었다가!” 풀썩 주저앉은 여인이 신경질적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음…. 승윤아.” “아 시끄러워!” “아니. 들어봐. 그러면 있잖아.” “…그러면?” 이윽고 쩝 입맛을 다신 사내는, 주저앉은 여인에게 손을 내밀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한 번 찾아가 보는 건 어때?” ============================ 작품 후기 ============================ 1. 부인과 싸운다. = 다음날 아침 상에 단무지가 오른다. 2. 부인과 잘 지낸다. = 다음날 아침 상에 진수성찬으로 장식된 수라상이 오른다. 김수현은 훌륭하게 2번을 해냈습니다. 박수 짝짝짝짝! 그나저나 앞으로 안솔은 도깨비 방망이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네요. 하하하. 0719 / 0933 ---------------------------------------------- 등잔 밑을 밝히는 눈. 화창한 아침. “소이이 바우해하후요?(손님이 방문했다고요?)” 아침 식사가 끝나고 따뜻한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기려는 찰나, 나는 뜻밖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예. 방문한 사용자는 두 명씩 두 팀으로 총 네 명인데. …하하.” 신재룡은 침착하게 말을 잇다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끝을 흐렸다. 왜 그런지 알 것 같아 나는 이리저리 머리를 돌렸다. 오른쪽에는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온 고연주가 손수 차를 올려주는 중이었고, 왼쪽에는 임한나가 부드러우면서 꼼꼼하게 이를 쑤셔주고 있었다. 중요한 건, 하녀 복장을 한 채로. 하기야 옷이 하녀 복장치고는 상당히 고급스럽고 우아해 잘 어울리기는 했지만, 아무튼 민망한 상황이란 건 부인할 수 없었다. 그나마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남아 있는지, 남다은은 등을 돌려 무심한 눈으로 테라스를 응시하는 중이었고(그러나 두 손은 훤히 노출된 어깨와 종아리를 감추려 필사적이었다.), 정하연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어머 어머 만 연발하며 구석에 서 있었다. “우선은 가면서….” “주인님. 가지 마세요.” 얼른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킨 순간, 고연주가 살그머니 잡으면서 아련하게도 말했다. “두 명씩 두 팀으로 왔다고요?” 무시하고 말하자 신재룡이 쓰게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예. 한 팀은 북 대륙 사용자고 제가 알고 있는….” “기어코 버리시겠다는 건가요? 이제 우리가 질리셨어요?” “…그런데 다른 팀을 서 대륙 사용자로 이루어진….” “흑흑. 그래요. 가요. 어서 가버리란 말이에요!” 결국 나는 팔을 세게 떨치고 말았다. 고연주는 꺅 비명을 지르며 무너지더니 버림받은 비련의 여주인공을 연기했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보면서도 입은 실룩샐룩 웃고 있었으니까. 나는 푹푹 한숨을 흘리면서 신재룡을 잡아 끌었다. “갑시다. 가면서 이야기합시다.” 그렇게 나오자마자 역시나 방안에서 깔깔 웃는 소리가 터졌다. “…부럽습니다. 클랜 로드.” “직접 겪어보시면 마냥 부럽지만은 않을 겁니다.” 신재룡이 담백이 속내를 밝혔으나 나는 절레절레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냥 내 잘못이다. 애초 말을 꺼내는 게 아니었다. 원래 EX 등급에는 네 명의 전속 하녀가 붙는데, 나도 있으면 편하겠다 싶어서 고연주에게 적당한 네 명을 골라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자신한테 맡기라면서 가슴을 탕탕 치더니, 조금 있다가 하녀 차림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혼자 들어온 게 아닌 다른 세 명과 같이. 아마 일종의 경고 의미인 듯싶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다. ‘나 참. 도대체 나를 어떻게 보는 거야?’ 하여간 이런 거 생각할 시간에 수련이나 열심히…. 아. 저 4명은 수련 많이 했지. 젠장. 아무튼, 나는 생각을 떨치고 원점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우선 한 팀은 누구인지 알 것 같다. 서 대륙 사용자라면 사라 제인일 가능성이 높다. 다른 한 명은 같이 데리고 온 동료일 테고. 그때 말한 대로, 같이 도망쳐온 동료를 정리하고 이제 찾아온 모양이다. 어쨌든 이건 그렇다고 치고. 또 한 팀은…. “신재룡과 아는 사이시라고요?” “아. 그냥 안면만 익힌 정도입니다. 예전에 도시 복구 작업 감독으로 나선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종종 보아온 사용자들이거든요. 아무래도 가입 문의를 하러 온 것 같습니다.” “오. 어떻습니까? 대충이라도.” “사람은 좋습니다. 두 명은 아마 남매 같은데, 여동생 쪽은 가끔 투덜거리는 걸 봐도, 일을 허투루 처리하지 않고 성격도 야무집니다. 그리고 오빠 되는 분은 반대로…. 음…?” 그때였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던 와중, 한창 말을 잇던 신재룡이 머리를 갸웃했다. “흠. 이상하네요. 갑자기 생각하려니까…. 아무튼, 성격이 차분하고 매우 성실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마법사인 것 같은데, 능력도 상당히 괜찮아 보였고요.” “그렇습니까?” “예. 특히 각 속성에 관한 이해도가 상당히 높아, 도시 복구 작업 때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음….” 사실 그 남매의 방문은 조금 의외이기는 했다. 머셔너리를 확실히 최고의 클랜으로 불리는 건 맞지만, 명성에 비해 가입 문의를 하는 사용자는 은근히 적다. 예전에 왜 그럴까고 생각해봤는데, 애초 ‘소수 정예’라는 이미지가 너무 강하게 각인돼있는 게 문제였다. 레어, 시크릿 클래스가 아니면 안 된다고 지레짐작해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허들이 높은 것도 한몫했겠지마는. 그래서 기대가 됐다. 물론 그냥 가입하고 싶다는 생각에 무작정 찾아왔을 수는 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실력이 있으니까 자신 있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신재룡의 말을 들어보면 후자에 가깝게 생각된다. “여하튼, 가서 이야기해보면 알겠죠. 응접실에 있다고 했나요?” 신재룡은 그렇다고 말했고, 나는 한층 빠른 속도로 계단을 내려갔다. 성의 응접실은 1층에 있으며 오기까지 정원, 성내 중앙 광장, 긴 회랑을 거쳐야 한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설계였다. 내가 이번에 성의 치장에 천문학적인 금화를 쏟아 부은 이유는, 이제 머셔너리도 대표 클랜으로서 가져야 할 격식을 차려야 한다는 말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말인즉 일종의 보여주기. 응접실까지 오면서 가장 많은 금화를 투자한 공간을 차례대로 보게 해, 기를 죽이는 동시에 경외심을 자아내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잠시 후. 문을 열고 응접실에 들어간 순간 잔뜩 굳어 있는 4명의 사용자가 눈에 들어왔다.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다가 화들짝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보니 역시나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특히 검은 머리칼의 여인은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다가 발이 걸려 넘어지기까지 했다. “이런. 괜찮으신가요?” “아, 아우…. 죄, 죄송….” “하하하. 괜찮습니다. 다른 분들도요. 그냥 앉아 있으셔도 됩니다.” “…….” 여인은 후닥닥 일어나 의자에 앉았다. 상석으로 걸어가 몸을 앉힌 후,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예상대로 왼쪽에는 사라와 동료로 보이는 여인이 앉아 있었다. 은회색 머리카락이 돋보이는 이국적인 용모의 여인이었다. 우선 남매 사용자에게 양해를 구한 후, 나는 사라와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아. 안녕하세요.” “그때 이후로 오랜만이네요.” “네. 맞습니다. 나 그때 말 기억합니다. 그래서 일 처리하고, 뻔뻔하게 찾아왔습니다.” “뻔뻔하기는요. 제가 오라고 했는데요. 아무튼, 그동안 북 대륙에서 많은 일이 있었을 것 같은데.” “확실히 그렇습니다. 각오하기는 했으나 우리는 상상 이상으로 환영 못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실 많이 피로합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사라는 아름다운 미소를 보이며 화답했다. 오는 동안 할 말을 연습한 걸까. 떠듬떠듬 말하는 게 조금 어색하지만 서도 딱히 거슬리지는 않는다. 이윽고 나는 옆의 여인에게 눈을 맞췄다. “아. 이 여성은 엘리자베스 예시카. 제 친구로 데려왔습니다.” 사라가 눈치 빠르게 소개하자 엘리자베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흠. 보아하니 딱히 특출한 사용자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친구라고 해서 또 무작정 받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부럽다…. 저 외국인은 이미 스카우트된 사용자인가 봐…. 세상에…. 머셔너리에서 스카우트라니….” “조용히…. 이야기하시는 중이잖니….” 문득 남매가 속닥속닥 거리는 소리가 흘러들었다. 나는 우선 사라 외 한 명은 넘어가기로 결심했다. 두 명이 낯에 상당한 피로가 그늘지기도 했지만, 그때 약식으로나마 이야기를 마친 이상 긴 말을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사라는 찾아왔고, 엘리자베스는 두고 보면 된다. 사라가 현명한 여인이라면 그리고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분명 무언가 쓰임새가 있기에 같이 왔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음. 알겠습니다.” “아. 그럼….” “조금 더 길게 말을 나누고는 싶은데 지금 다른 손님도 오셔서. 피로해 보이시기도 하니까, 우선은 쉬고 계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 그래도 되겠습니까?” 확실히 피곤하기는 했는지 사라가 반색하며 외쳤다. 무언가 잔뜩 기대라도 하듯이 두 눈을 반짝일 정도였다. 빼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하며 나는 신재룡을 불렀고, 이 두 명을 안내하라 지시했다. “그럼 곧 뵙겠습니다.” “…Thank You.” 사라는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신재룡을 따라 나섰다. 중간에 엘리자베스가 나를 한 번 흘끗 쳐다보기는 했지만, 이내 조용히 응접실 밖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비로소 남은 두 명에게로 관심을 돌릴 수 있었다. “미안합니다. 저분들과 먼저 선약을 잡아서….” “아,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약속도 없이 찾아왔는데요. 오히려 이렇게라도 만나주셔서 영광, 또 영광입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네요. 그나저나 우리 구면 아닌가요?” “아, 아하하….” 가만히 턱을 괴면서 말하자 서글서글한 눈매를 지닌 선한 인상의 사내가 멋쩍게 웃으면서 옆을 흘겼다. 아까 넘어졌던 여인은 잔뜩 얼굴을 붉힌 채 입을 질근질근 씹고 있었다. 부끄럽다기보다는, 그때 나를 보고 거지 취급한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주신 빵은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사실 그때 정말 배가 고픈 상태였거든요.” “가, 감사합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빵이었는데….” 딱히 트집 잡고 싶은 생각은 없다. 중요한 건 이 두 사용자의 수준이니까. 사내도 내 뜻을 알아들었는지 이마가 닿을 정도로 머리를 숙였다. 나는 빙긋 웃었다. “그럼 정식으로 소개하죠. 머셔너리의 클랜 로드 김수현입니다.” “예! 저는 하승우라고 하고, 얘는 하승윤이라고 합니다. 제 동생이죠. 둘 다 소속은 없습니다.” 하승우, 하승윤. 남매가 확실하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그렇군요. 그럼 사용자 하승우? 들어보니 가입 문의 때문에 오셨다고요?” “아. 예, 예. 그렇죠. 그런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 “예?” “아, 아니! 그러니까!” 그렇게나 긴장이 되는 걸까. 하승우라는 사용자는 말을 더듬거리면서 머리를 휙휙 흔들었다. 그럴수록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하승윤의 얼굴이 점차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렇게 보니까 꼭 신상용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결국 하승윤이 팔꿈치로 툭 건드리고 나서야 하승우는 진정했다. 이윽고 두어 번 숨을 고른 하승우는 비교적 차분히 이야기를 풀었다. 간단한 말이었다. 우선 두 명은 머셔너리에 가입하고 싶은데, 아무리 기다려도 모집 공고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왔다고. 이윽고 혹시 현재 가입을 받지 않으면 언제쯤 공고가 나올지 알 수 있겠냐는 말을 덧붙이면서 하승우가 말을 끝냈다. “음…. 모집 공고라….”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사실 당분간은 새로운 클랜원을 모집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충원의 필요성은 인지하고 있지만, 그건 현재 진행 중인 내부 개혁이 끝난 후로 생각하고 있었다. 변화의 바람이 확실하게 틀에 정착해야 새 인원을 받아들일 준비를 할 수 있을 테니까. “사실대로 말씀 드리면, 머셔너리는 당분간 모집 공고를 낼 계획이 없습니다. 현재 클랜을 전체적으로 새롭게 편성하는 중이라서, 이게 끝난 다음에야 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담담히 말하기는 했으나 진한 실망의 빛이 남매의 눈동자에 스쳤다. “있잖아요…. 그럼 언제쯤에…? 그러니까 대략적으로라도….” 그때 여태껏 고개만 푹 숙이고 있던 하승윤이 처음으로 우물우물 입을 열었다. 인상은 눈이 살짝 찢어진 신경질적인 고양이상인데, 저렇게 꼼지락거리니까 조금 귀엽기는 했다. 어쨌든 당연히 예외는 있다. 사라가 이렇게 찾아온 것처럼, 스카우트를 통해서라면 머셔너리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 물론 여기서는 사용자 정보가 좋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그러므로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우선은 하승윤부터.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하승윤(2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용병(Normal, Mercenary, Expert) 3. 소속 국가(Nation) : 아틀란타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신동(神童) • 여성 동성애자(Lesbian)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6) 7. 신장 • 체중 : 174.6cm • 58.8kg 8. 성향 : 첨예 • 세심한(Sharp • Meticulous) [근력 84] [내구 82] [민첩 90(+2)] [체력 88] [마력 92(+2)] [행운 78] < 업적(0) > < 특수 능력(1/1) > 1. 심안(心眼)(Rank : B Zero) < 잠재 능력(4/4) > 1. 양손 단검술(Rank : A Plus) 2. 백병전(Rank : A Minus) 3. 난전 발동(Rank : S Zero) 4. 신검합일(Rank : C Plus) < 능력치 비교 > 1. 하승윤 : Total 514 포인트.(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 포인트입니다.) [근력 84] [내구 82] [민첩 90(+2)] [체력 88] [마력 92(+2)] [행운 78] 2. 이유정 : Total 516 포인트.(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1 포인트입니다.) [근력 83] [내구 79] [민첩 92(+2)] [체력 84] [마력 90] [행운 88] ‘이것 봐라?’ 사용자 정보를 읽은 순간,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고 말았다. 2년 차 용병. 2년 차다. 그런데 능력치는 말할 것도 없고, 능력이 정말로 환상적이다. 특수 능력의 심안은 물론, 백병전이고 난전 발동이고 모두 초 근접 전투를 벌이는 용병에 적합한 능력이다. 거기다 신검합일까지? 2년 차가? 그래. 이거야말로 진정한 용병이다. 균형이 좋아도 너무 좋다. 나는 이유정이 이렇게 발전하기를 원했다. ‘어디서 이런 사용자가 나온 거지?’ 반쯤 기대하기는 했지만 이건 예상외였다.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속으로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거기다 더욱 무서운 건, 아직 Master가 아니라 Expert라는 점이었다. 결국에는 여기서 더 성장할 여지가 있는 사용자라는 소리다. “우…. 우….” 내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승윤은 이제는 숫제 눈에 눈물을 가득 괸 채 입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빨갛기 짝이 없다. “저 정말 열심히 노력했는데…. 정말로 열심히 할 자신 있는데….” 빤히 응시하자 삐죽한 입이 구시렁구시렁 움직인다. 아니. 누가 안 받아준대? 너 정도면 환영, 대 환영이야. 그동안 제대로 된 용병 클래스가 없었던 머셔너리에 새로운 옵션을 달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마다할 리가 있겠니? “하, 하하. 머, 머셔너리 로드.” 나는 그제야 간신히 눈을 떼고 시선을 돌렸다. “사실 지금껏 우리 승윤이가 머셔너리 클랜에 들어가려고 엄청 노력했습니다. 평소 존경하는 머셔너리 로드와 검후께서 있는 클랜에 꼭 가입하고 싶어했거든요. 그래서 그간 받았던 여러 클랜의 오퍼도 마다했고요.” 흡사 꼭 하승윤을 넣고 싶다는 듯이 열변을 토한다. 하승우. 신재룡은 하승윤보다 하승우를 더 높이 평가했다. 동생이 이 정도인데, 이 사내는 어느 정도의 사용자 정보를 가지고 있을까? 나는 곧바로 하승우를 응시했다. 제 3의 눈은 이미 활성화된 상태였다. 이윽고 허공으로 하승우의 사용자 정보가 주르륵 떠올랐다. 그리고. “에…. 그러니까….” “……!” “머셔너리 로드?” “…….” 잠깐만. 이…. 놈은…. ============================ 작품 후기 ============================ 어제 세라프와 관련한 보상은 그동안 뿌려놓은 복선을 매듭 짓고 실행할 예정입니다. 총 3개의 복선이 이번 파트와 이어진다고 보시면 되겠네요. 그렇게 오래 가지는 않습니다. 아니. 시작하자마자 끝났다는 말이 맞으려나요? 하하하. 왜냐면 김수현한테는 제 3의 눈이 있으니까요. 뭘 해보려고 해도 통하지가 않으니까, 이게 정말 사기 능력이네요. 하하하. 아무튼 상대에게 애도를. 그리고 오늘 후기에는 정말 죄송한 말씀을 드리게 됐습니다. 제가 11월 3, 4, 5, 6일 동안 연재 주기를 격일로 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비군 훈련이 나왔거든요. 제가 현재 비축분이 없는 상태라서요. 3, 4, 5일은 8시간씩 동미참 보충 훈련이고요, 6일은 6시간 전반기 작계 보충 훈련입니다. 이번이 2차 보충 훈련이라 나가지 않으면 고발된다고 하니, 필히 참석해야 할 것 같습니다.(다른 훈련은 저번 8월달에 받았습니다.) 훈련은 오전 9시부터 시작해서 오후 6시에 끝나는데, 집과 훈련장이 가깝지가 않습니다(왕복 3시간은 걸리는 거리입니다). 퇴소에 걸리는 시간과 돌아오는 시간을 계산해보면, 글을 적는 시간이 많이 늦어질 것 같아서요. 그리하여 우선 오늘 3일은 올렸고, 4일 하루 휴재하겠습니다. 그리고 5일에는 연재를 하고, 6일에는 6시간 작계 훈련이니만큼 한 번 시간을 보겠습니다. 정리해보면 11월 3일 연재, 11월 4일 휴재, 11월 5일 연재, 11월 6일 미정입니다. 혹시 11월 4일에 성적 우수자로 조기 퇴소하면, 그날도 연재는 하겠습니다. 제가 이번 훈련을 꼭 참가해야 하는 점, 부디 깊은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그럼 독자 분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 0720 / 0933 ---------------------------------------------- 마력(魔力) 숙녀 Vs 행운(幸運) 소녀. 한편, 같은 시각. “수현이 정말 화난 게 아닐까요? 장난이 너무 지나쳤나?” “걱정하지 마. 화를 냈으면 그 자리에서 냈겠지. 그이, 이런 거 은근히 좋아한다니까? 그나저나 아까 신재룡씨 표정 봤어? 나 완전히 웃겨 죽는 줄 알았어.” “나중에 사과 한 번 드려야겠어요…. 어. 그런데 하연이 언니는 어디 가셨지?” “부끄러웠나 봐. 수현이 나가자마자 도망치더라고.” 하하 호호. 4층 집무실에서는 네 명, 아니 정하연을 제외한 세 명의 여인이 한창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신재룡의 표정에 관한 말도 간간이 나오기는 했지만, 김수현의 반응에 관한 말이 주를 이루었다. 요즘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을 내심 이해는 하면서도, 근래 얼굴도 보기 힘들다 보니 억지로 상황을 만든 것이다. “아무튼, 이것도 두 번은 못하겠네요. 애들도 힘들겠어요. 이렇게 불편하고 갑갑한 옷을 입고 어떻게 매일….” 임한나가 눈을 찡그리며 상체를 크게 비틀었다. 한 번으로는 부족한지 두 번 세 번 비틀자, 상반신에 달린 두 개의 거대한 무덤이 몸부림치듯이 움직인다. “맞아. 설마 코르셋까지 입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니까? 옷은 예쁜데, 너무 껴. 이만 벗을래.” 고연주가 동의했다. 그리고 손을 뒤로 돌리더니 등을 더듬으면서 하나씩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옷은 조금씩 느슨해지면서 주름을 만들었지만, 무언가에 걸렸는지 아래로 흘러내리지는 않는다. 고연주의 상반신 역시, 무언가가 천을 뚫고 튀어나올 정도로 불룩하게 솟아 있다. “…하.” 한쪽에 가만히 앉아 있던 남다은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 눈에는 억울한 빛이 서려 있다. 자신은 들은 말처럼 딱히 갑갑하다고 느끼지 못한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 젖소들이! 그래! 가슴 크니까 좋겠다!’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자신은 아직 이 ‘S.F(Someday Foursome : 언젠가는 포섬.)’ 모임의 막내에 불과하니까. 그저 살짝 옷을 들추고 남몰래 안을 들여다볼 뿐. 물론 그래 봤자 나오는 건 한숨뿐이겠지만. 그때였다. 우웅! 세 여인이 슬슬 방을 나가려는 찰나, 돌연 책상에서 강한 진동이 울렸다. 깜짝 놀란 남다은이 얼른 고개를 올리는 동시, 막 자리에서 일어난 고연주가 느긋한 손놀림으로 구슬을 꺼냈다. 어지간한 클랜원이라도 김수현의 개인 용품에는 손도 대지 못하지만, 고연주는 예외였다. 가볍게 마력을 주입하자 구슬이 밝은 빛무리를 뿌렸다. 이윽고 흘러나오기 시작한 영상에는 이지적인 인상의 여인이 모습을 비쳤다. 과장 조금 보태 입까지 내려온 눈 그늘이 ‘나 피곤해요.’ 라고 광고하는 듯했다. (…응? 그림자 여왕?) 두 눈을 살짝 치뜨며 황당한 음성으로 말하는 여인은 이효을이었다. “어머. 중앙 관리 기구의 수장 님이 아니세요. 요즘 너무 자주 연락하신다. 신경 쓰이게.” (형수 될 사람한테 말이 험하시네. …그나저나 김수현 취향도 참….) 가벼운 농담이 오고 갔다. 그러다 하녀 복장을 봤는지 이효을이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본의 아니게 오해를 사버렸지만, 어쩌랴. 현재 이 자리에 없는걸. 이윽고 한숨을 폭 내쉰 이효을이 자세를 바로잡는다. (아무튼,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연락했겠지요?) “어쩌죠. 지금 잠깐 자리를 비웠는데.” (흠…. 혹시 주변에 누구 있나요?) “…잠시만요.” 무언가 심상찮은 기색을 느낀 걸까. 고연주가 살그머니 고개를 들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다은과 임한나는 서로 번갈아 보았다가 조용히 방을 떠났다. 이내 서서히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고연주가 구슬을 응시했다. “이제 말씀하셔도 돼요. 무슨 일이죠?” 고연주 또한 이효을의 과거를 알고 있는 만큼, 이렇게 대리 전달 역할을 맡아도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물론 앞으로 나올 말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겠지만. (바빠….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용건만 말하고 끊을게요. 두 마디만 머셔너리 로드한테 전해주시면 됩니다.) 침울한 음성. 고연주는 본능적으로 좋지 못한 일이 터졌음을 직감했다. 입가에 자리 잡은 나른한 미소가 사라지고, 자연스레 진중한 표정이 내려앉는다. “두 마디만 전하면 된다고요?” (그래요. 우선은 예전에 말한 사용자를 찾았다고 전해주세요.) “예전에 말한 사용자를 찾았다…? 알았어요. 그리고요?” (그리고…. 현재 북 대륙에 더 이상 수호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그 순간 급히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고연주도 알 만큼 아는 사용자다. 개인적으로 수호자와 깊은 인연은 맺지 못했으나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살해된 건가요?” (거기까지는 그림자 여왕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에요. 아무튼, 부탁했어요.) 이효을은 딱 잘라 말을 매듭짓고는 바로 통신을 끊었다. 구슬의 빛이 꺼지고 영상이 사라졌다. “음….” 수호자. 자신의 정체를 속인 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작게는 사용자를, 크게는 북 대륙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사용자가 사라졌다. 현존하는 대형 클랜 중 절반 이상이 알게 모르게 수호자의 도움을 받은 걸 생각해보면, 이 사건은 절대로 가벼이 넘길 게 아니었다. 고연주는 구슬을 서랍에 넣어놓은 후, 신속하게 방을 빠져나갔다. * 날은 아침 무렵부터 눅진했고, 하늘 역시 우중충한 빛을 띠고 있었다. 진한 잿빛 구름이 드문드문 눈에 들어오는 게 곧 비가 쏟아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날씨였다. 나는 워프 게이트에서 나오며 괜스레 한숨을 흘렸고, 하늘을 보던 시선을 떨궜다. “요즘 왜 이렇게 하늘이 흐릿하지….” “…….” 혼잣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회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흘끗 옆을 쳐다보자 낯이 딱딱히 굳어 있는 진수현이 보인다. 큰 충격을 받은 얼굴. 어떻게든 태연해 보이려 무진 애를 쓰는 것 같지만, 거친 숨소리나 파르르 떨리는 입은 현재 진수현의 심정을 드러내주고 있었다. 아직 죽음이 익숙지 않다는 방증이다. 하기야 가까운 지인이니까 이해는 하지만 서도. “…가자.” 조용히 말을 건넨 후 나는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틀란타 중앙(내) 도시는 아직 발전된 상태가 아닌 터라, 중앙 관리 기구의 근거지는 아직 북 대륙 바바라에 있었다. 워프 게이트에서 나온 이상 도착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미리 이야기가 돼 있었는지 우리는 별다른 신분 확인 절차 없이 바로 입장할 수 있었고, 사용자의 안내를 받아 이효을이 있는 최상층으로 향했다. 잠시 후. “…어서 와. 머셔너리 로드. 그쪽도 어서 오세요.”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우리를 맞이했다. 고풍스러운 기운이 흐르는 방의 중앙에는 이효을이 책상 의자에 앉아 나를 보고 있었다. 문득 느끼건대, 요새 볼 때마다 피로해 보이는 것 같다. “소식은 전해 들었는데…. 조금 늦게 왔나.” “아니. 괜찮아. 바쁘다고 들었으니까.” “그렇군. 그럼….” “아라는…. 아라는 어디 있나요.” 그때였다. 천천히 이야기를 해보려는 찰나, 진수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이효을은 지긋한 눈길로 진수현을 응시하다가 흘끗 나를 흘겼다. 나는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오늘 진수현을 중앙 관리 기구로 데려온 이유는 간단하다. 왜냐면 이 자리에 참석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이효을의 정면에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사용자 맹아라는 앞쪽 소파에 있어요.” 진수현은 곧장 걸음을 옮겼다. 이효을의 말대로 소파에는 누군가 누워 있었다. 전신이 하얀 천으로 덮여 있으나 굴곡만 보면 작달막한 체구의 여인을 연상케 했다. 이윽고 진수현이 급히 팔을 뻗은 순간. “하지만, 어지간하면 보지 않는 걸 권하고 싶네요.” 천을 잡은 손이 멈칫 정지했다. 아주 잠깐이기는 했으나 흔들리는 눈동자에 갈등의 빛이 스쳤다. 허나 그것은 잠시에 불과했다. 바로 마음을 정한 걸까. 진수현은 숨을 크게 들이키더니 있는 힘껏 천을 젖혔다. 그러자 비로소 하얀 천에 가려져 있던 시체가 두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아….” 한순간, 진수현의 눈과 입이 동시에 벌어지더니 털썩 무릎을 꿇는다. “…쯧.” 그렇게 시체를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여태껏 무수한 시체를 봐왔다고 생각했지만, 나조차도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맹아라의 상태는 처참했고, 또 비참했다. 칼끝으로 새긴 게 분명한, 살결 곳곳에 적힌 음란한 낙서는 오히려 애교로 볼 수 있는 수준이다. 젖가슴이나 생식기는 날카로운 것으로 도려진 상태였고, 특히 사지를 포함한 온몸이 기괴하게 비틀려 있었다. 마치 억지로 끼워 맞춘 것처럼. “…미안. 상태가 조금 이상할 거야. 봉합이 그게 한계였어.” 문득 조심스러운 음성이 들려온다. “…봉합?” “처음에…. 여덟 부분으로 발견했거든.” 그러면 처음 발견했을 때는 여덟 부분으로 분해돼 있었다는 말인가? 쿵! 그 순간 거센 타격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무릎 꿇은 진수현이 바닥에 주먹을 박은 채로 온몸을 떨고 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전신에서 가공할 정도의 광포한 기운이 줄기차게 흘러나온다. 이효을의 말을 들은 게 분명했다. “누, 누가…. 왜, 왜….” 진수현은 반듯하게 누운 맹아라를 쓰다듬으며 젖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미리 말을 해놓기는 했지만, 시체의 상태를 보자 또 한 번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누가…. 왜…!” 누가, 왜. 같은 말을 반복해서 말하더니 결국에는 눈물을 한 방울 흘리며 그대로 몸이 무너졌다. “미안하다…. 아라야…. 미안해….” 흐느끼듯 오열하는 진수현. 이효을은 긴 숨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조용히 내게로 다가왔다. “발견한 장소는?” “북쪽. 푸른 산맥.” “푸른 산맥이라…. 하.” “나도 상상도 하지 못했어. 설마 그런 장소에….” 말끝을 흐린 이효을이 입을 짓씹었다. 동감이다. 푸른 산맥은 언데드 괴물의 천국이라 불리는 지역으로 어지간한 사용자도 꺼리는 곳이다. 그 강력한 차소림도 푸른 산맥에서 시한부 인생을 달고 나오지 않았는가. 거기다 반시까지 돌아다니는 곳인데, 설마하니 푸른 산맥에 숨어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누가 했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웬 미친놈이 푸른 산맥까지 끌고 간 거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부랑자가 푸른 산맥 내부에 근거지를 마련했다고 보는 게 더 현실성이 높으리라. 애초 이런 정신 나간 짓을 저지를만한 놈들도 부랑자밖에 없고. 이쯤 되면 정말 끈질기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물론 강철 산맥의 공략으로 반 년 간의 공백기가 있기는 했다. 허나 말살 계획과 전쟁으로 세력을 두 번이나 꺾고, 그것도 모자라 지속해서 척살 조를 운영하기까지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런 활동을 한다는 소리는…. “이제 슬슬 활동을 개시하겠다는 건가.” “그렇다고 봐야겠지. 바퀴벌레 같은 놈들.” 이효을이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야기를 들은 걸까. 한참을 울고만 있던 진수현이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결국 그날 더 이상의 말은 하지 못했다. 아니. 할 필요도 없었다는 말이 정확할까. 부랑자는 무조건 뿌리를 뽑아야 하는 놈들이니까. 이대로 놔두면 지속적으로 해를 끼칠 것이고, 그것은 북 대륙은 물론 아틀란타의 안정화에 크나큰 장애 요소였다. 그나마 우정민이 부랑자 토벌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게 불행 중 다행이다. “복수할 겁니다.” 이효을과 헤어지고 아틀란타로 돌아가던 와중, 문득 진수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천천히 돌아보자 진득한 살기에 젖어 불타는,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눈에 들어온다. “똑같이…. 똑같이 해줄 겁니다. 그 부랑자라는 놈들, 모조리 잡아다가 아라가 당한 짓 그대로 되돌려줄 겁니다.” “…….” “칼로 쑤시고, 눈알을 파내고, 장기를 터트리고,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살을 씹어먹으렵니다. …절대로, 절대로 곱게 죽이지 않을 겁니다.” “…음.” 항상 형님 형님 거리면서 살갑게 굴던 진수현이 이러니 조금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허나 기분과는 별개로 별로 말리고 싶지는 않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을 뿐이야.’ 라고 말하기에는 낯이 간지럽다. “우정민한테 한 번 찾아가 봐라.” 나는 등을 돌린 후 천천히 걸어가면서 말했다. “…정민 형님한테요?”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 이윽고 진수현이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예전에 우리 클랜에서 부랑자 척살 조를 운영했다는 건 알고 있지?” “예.” “조만간 부랑자 척살 조가 부활하고, 우정민이 리더를 맡게 될 거다. 지금 클랜원을 모으고 있는 것 같은데…. 남다은과 선유운도 참가할 것 같으니까.” “검후 님이랑, 신궁 형님도요?” “그 두 명, 아니 세 명도 너 못지않게 부랑자를 증오하거든. 아무튼, 생각 있으면 가서 참가해도 좋아.” “…….” 말을 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워프 게이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진수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밤이 깊어지고 도시 전역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며칠 전 새로 들어온 클랜원으로 성에는 간만에 활기가 돌았지만, 밤이 되자 거짓말처럼 가라앉고 고요한 적막이 자리를 대신했다. 근래 마음이 심란해서일까. 슬슬 잠들 시간이기는 했으나 딱히 졸리지는 않는다. 한참을 책상에 앉아 있다가 결국에는 테라스 밖으로 걸어나가고 말았다. 그리고 잠시 머리를 비우려 연초를 하나 꺼내 물은 순간이었다. “역시. 아직 안 주무시고 계셨군요.” 돌연 방안에서 들려온 나른한 음성이 귓가로 흘러들었다. 흘끗 시선을 돌리자 어두운 바닥에서 누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보였다. 이내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묘하게 퇴폐적인 잿빛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연초에 불을 붙이며 입을 열었다. “늦었군요. 생각보다는.” “아. 그게 조금 이상해서요.” “이상하다?” “네. 여태껏 수현이 알아보라고 지시한 것들은, 어쨌든 무언가 이유가 있었는데….” 살금살금. 그림자가 미끄러지듯이 다가온다. “있었는데?” “글쎄요. 제가 알아내지 못한 걸지도 모르겠는데, 여하튼 이번에는 별로 이상한 게 없더라고요.” 테라스 입구까지 다가온 고연주가 으쓱 어깨를 들먹였다. “이름. 하승우. 6년 차. 마법사. 자신이 소개한 그대로예요.” “행적은 어떻습니까?” “딱히? 사용자 아카데미 기록도 확실하고. 수료 후 들어갔던 클랜은 첫 강철 산맥 원정 때 풍비박산. 이후 사용자를 모아 캐러밴을 이끌다가 한 번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사용자에요.” “…….” “아. 3년 늦게 들어온 친동생이랑 우연히 재회했다는 게 조금 걸리기는 하는데. 이건 수현의 경우도 있으니까 무조건 이상하게 볼 수는 없잖아요?” “…그렇군요.”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고연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언가 묻고 싶어 하는 기색. 그러나 눈치가 빨라서 그런지 달리 입을 열지는 않았다. “별일이네요. 수현이 이렇게 고민하는 경우도 드문데.” “복잡해서 그래요. 우선은 결정을 내리면 그때 가서 말하겠습니다.” “그래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좋은 밤?” “수고하셨습니다.” 고연주는 손을 살랑살랑 흔들고는 흡사 바닥에 꺼지듯이 사라졌다. 연초를 한 모금 빨아들이며 하늘을 응시했다. 그래도 고연주라면 무언가 알아낼 줄 알았는데, 별다른 정보는 얻지 못했다. 해답은 하나. 고연주가 알아내지 못할 정도로, 하승우가 철저하게 자신의 과거를 조작했다는 말이 된다. 그게 가능할까 의구심이 들면서도, 하승우라면 가능할 것 같은…. 아. 모르겠다. 아무튼. 기실 내가 하승우를 100% 의심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왜냐면.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하승우(11년 차) 2. 클래스(Class) : 복제술사(Secret, Copy Archimage,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도플갱어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32) 7. 신장 • 체중 : 182.4cm • 76.2kg 8. 성향 : 질서 • 악(Lawful • Devil) [근력 76] [내구 84] [민첩 92] [체력 88] [마력 98(+2)] [행운 92] < 업적(2) > < 고유 능력(1/1) > 1. 복제(Rank : EX) < 특수 능력(1/1) > 1. 조작(Rank : S Plus) < 잠재 능력(3/3) > 1. 기억(Rank : EX) 2. 대(大) 마법(Rank : A Plus) 3. 마력 회로 응용(Rank : S Zero) 제 3의 눈으로 정보를 봤으니까. 이게 6년 차 마법사의 사용자 정보라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비록 내가 기억하는 1회 차의 외양과는 조금 다르지만, 제 3의 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럼 여기서 나올 수 있는 문제 하나. 이놈은 왜 우리 클랜에 들어온 걸까. 과연 무엇을 위해서? 어떤 목적으로? 왜 1회 차에서 부랑자를 이끌었던 사용자가, 하승윤을 앞세워 머셔너리 클랜에 들어온 걸까? ============================ 작품 후기 ============================ 으어어어. 돌아왔습니다. 이제 오늘과 내일만 받으면 올해 예비군 훈련도 끝이네요. 참. 동미참 훈련은 이번이 처음인데, 왜 이렇게 힘들어졌나요? 세상에. 산을 30분 동안 오를지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틀 연속 팔자에도 없는 분대장을 맡으니까 너무 귀찮아요. ㅜ.ㅠ 그래도 어제는 조금 일찍 나올 수 있어서, 용량을 많이 넣었습니다. :) 그리고. 아이고. 제가 그 말씀 하실 줄 알았습니다. 뭐, 그래도 맞는 말씀이기는 해요. 여군도 예비군 훈련을 받기는 합니다. 저도 군 복무 시절 예비군 사단에서 근무해서, 아주 가끔 여성 예비군 분들을 뵈었거든요. 아. 그렇다고 제가 여성 예비군이라는 소리는 아니고요. 아무튼 받는 게 맞기는 한데, 그건 간부 훈련으로 포함됩니다. 말인즉 저는 병사로 근무했다 이런 뜻이외다. 어험. 이틀 남은 거 열심히 받고 오겠습니다. 남은 이틀 간 업데이트 시간이 조금 늦을 수 있는 점은 양해 부탁 드릴게요. 그럼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D 0721 / 0933 ---------------------------------------------- 마력(魔力) 숙녀 Vs 행운(幸運) 소녀. 하승우, 하승윤. 사라 제인, 엘리자베스 예시카. 이번에 새로 들어온 네 명의 사용자. 아니. 머셔너리 클랜으로 가입했다고 말하기에는 약간 이른 감이 있다. 들어온 지 며칠이라는 시간이 지나기는 했지만, 아직 공식적인 자리에서 받아들인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상황이 묘해졌다. 원래는 사라와 엘리자베스까지 받아들이고 클랜 정비를 마치려 했으나 하승우가 발목을 잡았다. 물론 애초 받지 않으면 될 일이기는 했다. 그러나 하승윤의 천재성은 차치하고서라도, 하승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겉으로는 여동생을 끔찍이도 아끼는 능력 좋은 마법사 사용자. 하지만 실체는 부랑자를 이끄는 거물 중의 거물급 사용자. 결국에는 아깝다고나 할까. 안 그래도 부랑자 문제로 마음이 심란했는데, 마침 어마어마한 먹잇감이 굴러들어왔다. 아마 제 3의 눈으로 사용자 정보를 확인했다고는 꿈에도 모르겠지. 말인즉 이건 기회였다. 여태껏 사용자를 부단히 괴롭혀온 부랑자를 일망타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안 그래도 도망 하나에는 도가 튼 놈들이라 골치가 아팠는데, 나로서는 이번 기회를 놓치기가 너무나 아까웠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하나 생겼다면 다름 아닌 하승우에 관한 클랜원들의 평가였다. 클랜에 새로운 인원이 들어오면 당연히 기성 인원이 관심을 가지기 마련이다. 특히 머셔너리처럼 폐쇄성이 짙은 클랜은 그런 경향이 더욱 강하다. 그래서 우선은 한 번 서서히 적응해보라는 명분으로 며칠 동안 조용히 지켜봤는데, 네 명 중 하승우의 평판이 가장 좋았다. 가령 예를 들어 누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게 아닌 먼저 다가가 살갑게 굴고, 근면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성격도 둥글둥글하고, 사용자로서 능력도 괜찮고 등등. 이 정도면 충분히 머셔너리 클랜원으로 인정할 만하다는 말이 주를 이루었다. 행동도 딱히 모나지 않아, 오죽하면 말버릇 고친 신상용이 온 게 아니냐는 말까지 들었다. 그 정도로 하승우는 머셔너리 클랜에 빠르게 녹아 들고 있었다. 드러난 부분만 본다면 클랜 로드 입장에서는 기뻐할 만한 일이다. 텃세가 강한 머셔너리 특성상, 여태껏 성공적으로 정착한 클랜원보다는 그러지 못한 클랜원이 많았으니까. 그러나 정체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기쁘다기보다는 오히려 초조감이 들었다. 하승우가 머셔너리 클랜원으로 인정받을수록 차후 쳐내기가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하승우도 이 점을 노리고 일부러 신상용을 연구해 연기하는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필요하다는 생각에 들이기는 했으나 이대로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결국 해답은 하나. 하승우가 더 녹아 들기 전에 얼른 이용하고 최대한 신속하게 처리해야 한다. “그럼 두 명 모두 준비는 됐고….” 고요하면서 엄숙한 기운이 흐르는 1층 회의장. 30명 이상의 전투 사용자가 소집된 공간에는 안현과 우정민이 중앙에 서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오늘 이렇게 모인 이유는 간단했다. 클랜원 등급제가 시행된 이후, 처음으로 실적을 올릴 수 있는 임무 수행 절차 보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아닌 클랜원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첫 임무인 만큼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기도 했다. “사용자 안현은 의뢰인과 맞춰서 가면 되겠고, 사용자 우정민은? 언제쯤 출발할 생각이시죠?” “방금 보고한 대로, 준비는 모두 끝마쳤습니다. 저를 포함한 14명의 클랜원은 내일 새벽 중으로 북 대륙으로 이동할 생각입니다.” “알겠습니다. 사용자 우정민도 아시다시피, 우리 머셔너리 척살 조는 굉장히 명성이 높습니다. 부랑자 놈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자자하다고 하죠. 사용자들은 반대로 많은 기대를 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부디 기대에 부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 클랜 로드께서 쌓아놓은 명성에 흠이 가지 않도록 반드시 성과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우정민은 낮은 음성으로 깍듯하게 말했다. 사석에서는 서로 허물없이 말을 놓고 지내는 사이나, 공석에서는 철저히 존대를 지킨다. …흠. 이러니까 갑자기 왕이 된 것 같은데. 꼭 전쟁을 나가는 장군을 격려하는 기분이다. 여하튼 성격만큼 일 처리도 확실하리라 기대하면서 나는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정민의 오른쪽에는 안현이 차려 자세로 서 있다. 일견 담담해 보이기는 하나, 살짝 굳은 기색은 숨길 수 없는 모양이다. 사실 우정민은 별로 걱정이 되지 않는다. 이번에 꾸려진 척살 조에는 남다은, 비비앙, 선유운, 신재룡 등등 어지간한 주력이 모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현은 예상외로 정예 클랜원을 끌어들이지 못했다. 듣기로는 안솔에게 같이 가자고 부탁했는데 거절당한 모양이다. 물론 우정민에 비하면 안현의 임무는 그렇게 어려운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두어 번 사고를 친 전례가 있으니까. “사용자 안현.” “예!” 안현은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임무의 성공만이 무조건 능사는 아닙니다.” “예?” “캐러밴이 전멸하고 간신히 성공한 임무보다는, 작전상 후퇴가 더욱 값진 결과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아…. 예.” “밀고 나아갈지, 지원을 요청할지, 아니면 그냥 물러날지. 사용자 안현은 언제나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어느 상황에서든 심사숙고해 현명한 판단을 내려야 할 겁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제야 알아들었는지 안현은 긴장한 낯빛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경고의 의미로 말을 한 후, 이제 슬슬 회의를 끝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흘끗 후방을 응시했다. 회의장 입구 부근에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네 명의 사용자가 앉아 있다. 아까 말했듯 천천히 적응하라는 의미로 참관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준 것이다. 사라는 무언가 설명이라도 하는 듯 속닥거리는 중이었고, 엘리자베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승윤은 회의장을 둘러보면서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하승우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회의를 경청하고 있는 듯했다. 사실 나름대로 노림수는 있었다. 이번 회의를 봤다면 머셔너리의 부랑자 척살 조가 부활했다는 사실도 인지했을 터. 어쨌든 시간이 흐르면 알려질 사실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공개적으로 드러낸 이유는 하나였다.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과연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승우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회의를 열심히 참관하는 사용자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기야 이 정도에 넘어올 정도로 어수룩한 놈도 아니고,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으면서도. “그럼 이만 회의를….” “저, 잠시만요.” 그때였다. 속으로 한숨을 흘리며 회의를 끝내려는 찰나, 누군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말하며 손을 들었다. 이내 장내 모두가 후방을 돌아보는 동시, 하승우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행동한 탓에 약간 놀라기는 했으나 나는 간신히 머리를 끄덕일 수 있었다. “사용자 하승우?” “아. 회의를 들어보니 부랑자 척살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요.” 걸렸다. 아니. 걸렸나? “맞습니다. 한데,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예. 외람되지만, 주제 넘는다고 생각하지 않으신다면 사용자 우정민 님께 조언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조언이요?” “에. 그러니까….” 나는 허락한다는 의미로 눈짓했다. 하승우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머리를 긁으면서 입을 열었다. “북 대륙으로 넘어가실 거라면, 우선 푸른 산맥으로 가보시는 걸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 순간, 절로 시야가 가늘어졌다. 우정민이 머리를 갸웃했다. “푸른 산맥? 거기는…. 물론 조심하면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조금 버거운데.” “그렇죠. 그런데 최근에 소문 하나를 들어서요.” “소문?” “예. 최근 부랑자의 짓으로 의심되는 사건이 푸른 산맥에서 발견됐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선 북쪽 도시로 가서 사건의 진상을 확인하신 후, 거기서부터 추적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서요.” 우정민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턱을 쓰다듬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나쁘지는 않겠지. 사실 어디서부터 조사해야 하나 고민하는 중이기도 했고. 아무튼,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감사하지.” “하하.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오히려 다행입니다.” 하승우는 빙긋 웃고는 자리에 앉았다. 나는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방금 하승우가 말한 소문은 엄연한 사실이고 우정민이 출발하기 전 몰래 건넬 생각이었던 정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의외였다. 차라리 아예 관계없는 장소를 말했다면 모를까. 하승우는 당최 무슨 의도로 확실한 정보를 흘린 걸까? 과연 어떤 의도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흐아아암.” “어머. 해솔 씨?” 입이 늘어지도록 하품하며 계단을 내려오던 제갈 해솔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게슴츠레 눈을 떴다. 계단 아래 1층에서 임한나가 상냥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큰 가슴?” “실례에요.” “그럼 왕 가슴.” “실례랍니다?” “출렁출렁?” “화낼 거예요?” 임한나가 살그머니 고개를 꺾으며 뜻 모를 미소를 날렸다. “와. 한나 씨.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걸까. 제갈 해솔은 경쾌한 어조로 말하면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임한나는 쓰게 웃었다. 좋은 아침이라고 말하기에는 해가 중천에 떠올라 밝은 햇살이 성내를 비췄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그동안 어디서 지내셨어요?” “아함…. 한 엿새 정도? 연구할 마법이 있어서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어요.” 제갈 해솔이 입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말하자 임한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 못써요. 건강도 상하고 보기에도 안 좋아요. 그리고 요즘 클랜 돌아가는 상황도 잘 모르시죠?” “왜요? 근래 큰 변화라도 있었나요?” 제갈 해솔이 묻자 임한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교롭게도 이제 회의가 끝난 터라 클랜원들이 입구로 우르르 몰려나오고 있었다. 임한나가 누군가를 가리켰다. 가리킨 방향에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하승우가 하승윤과 같이 걸어 나오는 중이었다. “그럼요. 서 대륙 사용자도 새로 두 명 들어왔고, 북 대륙 사용자도 두 명 들어왔는걸요. 설마 정말로 모르고 있었어요?” “…….” “…해솔 씨?” “흐~응?” 돌연 묘한 비음이 흘러나왔다. 옆을 돌아본 임한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제갈 해솔을 응시했다. 옆에 있는 사람은 확실히 제갈 해솔이었으나 갑자기 180도 다른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한쪽 눈을 살짝 치뜬 채 중앙 광장을 가로지르는 누군가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다. 눈동자에 언뜻 스친 황금빛이 마치 ‘이것 봐라?’ 라고 말하는 듯하다. 잠시 후. “…재미있네?” 나직이 뇌까린 제갈 해솔이 은근한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좀 더 지켜보더니 하승우가 가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임한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걸어가는 제갈 해솔을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작품 후기 ============================ 음. 원래는 조금 더 적을 내용이 있는데, 이번 회는 여기서 커트하겠습니다. 현재 비몽사몽 한 상태라서요. 하하. 또 오늘 마지막 예비군 훈련을 위해서 잠을 약간이라도 자야 할 것 같아서요. 이 점 양해 부탁 드리겠습니다. 그럼 독자 분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 0722 / 0933 ---------------------------------------------- 마력(魔力) 숙녀 Vs 행운(幸運) 소녀. 저녁 식사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성의 1층 식당은 한산했다. 예전에는 식사 시간이 되면 못해도 4, 50명이 정기적으로 모였는데, 오늘 탁자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인원은 약 20명 정도. 허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 아침 부로 안현과 우정민을 필두로 한 두 조에 해당하는 인원이 아틀란타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성에는 약간 휑한 기운이 돌았지만, 그렇다고 꼭 분위기가 나쁘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식당에는 근래 볼 수 없던 훈훈한 바람이 불고 있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떠들썩하지는 않지만, 식당에 있는 대다수가 미소 띤 얼굴로 누군가의 이야기를 즐거이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조금 멍청했던 거죠. 진작에 이렇게 찾아왔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식당의 중앙에는 한 사내가 차분하면서 또렷한 음성으로 말을 잇고 있다. 딱히 목소리가 높지 않음에도 음성은 식당의 구석까지 잔잔히 흘렀다. 옆으로는 하승윤이 손톱을 오독오독 씹으며 눈치를 보는데, 몇몇 클랜원은 그런 안절부절못하는 태도를 보며 피식 웃고 있다. “한데 어떻게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어요. 아까 말씀 드렸듯, 저와 여동생은 그날 만난 사내가 머셔너리 로드 님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거든요.” “오, 오빠.” “결국에는 말실수를 했어요. 사실 그때 승윤이가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은 상태였거든요. 그래서 우리한테 걸어오시자마자, 한 푼 줄 생각 없으니까 꺼져. 이렇게 말해버리고 말았죠.” “오, 오빠! 그만 좀….” “그래서 제가 그날 정말 크게 혼을 냈습니다. 그때 아틀란타는 어지간한 고년 차 사용자밖에 없었잖아요? 어쨌든 반성은 하더라고요. 그, 런, 데. 나중에 그 사내가 머셔너리 로드 님이라는 걸 알았을 때. 거기서 승윤이가 얼마나 실의에 빠졌는지 상상이 가시나요? 이제 머셔너리 클랜 가입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면서….” “아 그만 좀 하라니까!” 결국 빽 소리를 지른 하승윤이 거세게 주먹을 갈겼다. 갈빗대를 정통으로 맞은 하승우는 억 소리를 내더니 앞쪽으로 몸이 고부라졌다. 끙끙 앓는 신음이 흘러나온다. 씩씩거리며 입을 짓씹던 하승윤은 갑자기 아차 한 표정을 짓더니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흥미로운 눈초리를 느꼈는지 삽시간에 낯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아, 아니. 그러니까요. 오빠가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어이쿠. 숨이 막히네. 그런데 혹시 진실의 수정 가지고 계신 분 없나요?” 무언가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지 더듬더듬 말을 잇는 와중, 하승우가 죽겠다는 시늉을 하며 또 한 번 초를 쳤다. 이번에는 거친 발길질이 이어졌다. 하승우의 허리가 또다시 고붓하게 휘어지며 종아리를 부여잡는다. “씨잉!” 입을 삐쭉 내민 하승윤은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는지 그대로 탁자에 엎어지며 팔에 얼굴을 묻었다. 하하하하! 호호호호! 결국에는 사방에서 왁자한 웃음이 터졌다. 남매가 투닥투닥 싸우는 모습이 그리 웃길 수가 없다. 특히 이야기를 들은 모두는 하승우에게 강한 친밀감을 느꼈다. 자신이 잘못했다며 싹싹 비는 모습이 괜스레 여동생을 놀리는 짓궂은 오빠를 연상케 했기 때문이다. 마치 겉으로는 일부러 괴롭히면서 속으로는 무척 아끼는 자상한 오빠 같았다. 김수현과는 상반된, 익숙하면서도 신선한 매력이었다. 이윽고 간신히 하승윤을 달래는 데 성공한 하승우는 이번에는 다른 주제로 말을 시작했다. 클랜원은 중간중간 식사를 하면서 들려오는 말을 경청했고, 하승우는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이끌며 모두와 한 번씩 눈을 맞췄다. 클랜원은 바다처럼 깊숙하고 잔잔한 눈동자에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한창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형성되는 와중이었다. 쾅! “씨발…. 졸라 시끄럽네.” 누군가 탁자를 거칠게 내려치며 나직한 욕설을 뱉었다. 그 순간이었다. 문득 너덧 명의 클랜원이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이윽고 모두의 시선이 모인 곳에는 이유정이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잔뜩 취한 건지 얼굴은 시뻘겋게 물들었고, 몸을 가누지 못함에 붉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찰랑거린다. 그 찰나의 순간, 하승우의 낯에 아쉬운 기색이 스쳤다면 착각일까. 잠시 후. “언니. 말이 너무 심하시잖아요.” 탁자에 앉은 안솔이 조심스레 말을 건네자 이유정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간다. “하이고~. 그러셨어요? 우리 안솔이 언니 말이 그렇게나 시끄러웠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요….” “네네~. 무려 EX 등급께서 말씀하시는데, 이 천한 D 등급은 얌전히 입 닥쳐야죠. 미안! 몹시 미안하다?” “어, 언니.” “내가 잘못했네. D 등급이 주제도 모르고 까불었네. 이거 너~무 죄송해서 어쩌나?” “…….” 말로는 죄송하다고 하고 있으나 누가 들어도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조가 배배 꼬이다 못해 잔뜩 가시 돋쳐 있었으니까. 결국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여겼는지 안솔은 입을 닫고 고개를 돌렸다. 이유정의 입이 비틀렸다. “조용히 술이나 처마시려고 하니까…. 짜증 나게….” “유정 양. 많이 취하신 것 같네요.” 박상남이 얼른 상황 정리에 나섰다. “취하긴요…. 겨우 이 정도로….” “가시죠. 제가 숙소까지 부축하겠습니다.” 말을 끊은 박상남이 손을 닦으면서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 이유정은 가지 않겠다며 자신은 취하지 않았다고 반항했으나 곧 박상남에 의해 식당 밖으로 끌려나갔다. 그렇게 빠르게 처리되기는 했으나 이미 식당에는 찬물이 거하게 끼얹어진 상태였다. 이윽고 멀뚱히 서 있던 하승우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입을 열었다. “하하. 이것 참, 그러고 보니 제가 너무 떠든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워낙 말을 하는걸 좋아해서요.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그리고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사과하기까지. 그러자 갑자기 딱딱하게 굳은 기운이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풀렸다. 그와 동시에 식당에 있는 클랜원들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호의 어린 눈초리를 보냈다. 사과하면서도 정중하고 당당한 태도가 마음에 든 것이다. “아니야. 쟤가 조금, 아니 많이 특이한 거지 우리는 모두 재미있게 듣고 있었어. 다들 안 그래요?” 김동석이 너스레를 떨자 작은 호응이 일었다. “자자, 그러니까 빨리 얘기 좀 이어봐. 궁금해 죽겠다.” 그러자 하승우는 환한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 앉으면서 입을 열었다. * 식사가 끝난 후. “후.” 완연한 어둠이 드리운 성의 정원에는 한 사내가 구석진 장소에 서 있었다. “이 짓도 계속하려니 못 해먹겠군.” 무언가 어색한지, 턱을 좌우로 움직이며 입을 어루만지는 사내의 정체는 하승우였다. “지금쯤이면 푸른 산맥에는 도착했겠고…. 그나저나 정보를 조금 더 줄 걸 그랬나. 빨리 끝냈으면 좋겠는데.”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린 하승우는 조용히 한숨을 흘렸다. 그러나 곧 둥그런 수정을 꺼내 낯을 이리저리 비추더니 가볍게 얼굴을 매만졌다. 이윽고 수정을 도로 넣은 하승우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정원이 눈에 들어오자 하승우는 작은 감탄을 터뜨렸다. 그때. “정말, 대단해. 겨우 5년도 안 된 클랜이 어떻게 이런…?” 중얼중얼 이어지던 혼잣말의 말끝이 돌연 높아지고, 태연히 서 있던 하승우가 주춤 물러섰다. “…….”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하승우는 요 며칠 동안 어디선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적이 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닌 수시로. 차라리 은밀한 감시의 눈이라고 느꼈다면 웃기라도 했을 것이다. 허나 이건 완전히 대놓고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더욱 환장하는 건, 이렇게 대놓고 보는데도 어디서 누가 보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속으로 바짝 긴장하고 있는데 이런 늦은 시간까지 이어지자 이만저만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애초 스트레스로 끝날 문제도 아니었고. 그리고. “후후후.” 밤하늘이 보이는 성의 옥상에는 웬 여인이 성벽에 걸터앉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는 누군가를 지그시 응시하는 듯했다. 부드러이 불어온 바람에 단정히 흘러내린 긴 생머리가 한 차례 휘날렸다. “안 되지. 안 돼.” 제갈 해솔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어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당분간은 그냥 지켜보려고만 했는데…. 경고를 무시한 대가는 치러야지?” 그랬다. 제갈 해솔 또한 ‘하늘을 굽어보는 지혜의 눈’이라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제 3의 눈’만큼은 아니지만 하승우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직접 나서서 해결할 생각은 없었다. 아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면 모를까. 제갈 해솔은 김수현이 하승우의 정체를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게 가만히 놔두는 이유는 무언가 노림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자신도 나서지 않은 것이다. 허나 그와는 별개로 어쨌든 하승우의 존재는 제갈 해솔의 눈에 거슬렸다. 자신이 발의한 의견이 시행됨에 따라 머셔너리가 비로소 진정한 용병 클랜으로 재 탄생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데, 갑자기 웬 벌레(어디까지나 제갈 해솔의 시선으로.) 하나가 꼬여 들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그래서 근래 일부러 시선을 보내 일종의 경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오늘 식당에서의 하승우의 행동은 확실히 지나쳤다. 여전히 나설 생각은 없으나 이대로 두고 볼 생각도 없다. 경고를 무시했다면 더욱 강한 경고를 날리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한 제갈 해솔은 천천히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면 어디 한 번 실력 좀 보실까?”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은 제갈 해솔이 가볍게 손을 튕겼다. 그 순간 하승우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언제 시선이 사라질까 기다리고만 있었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어마어마한 마력의 흐름을 느꼈기 때문이다. 흡사 소용돌이처럼 몰아치는 마력은 하승우를 감옥처럼 가둔 채 점차 범위를 좁혀오고 있었다. 반듯한 이마에서 땀이 솟아나기 시작한다. 정원은 여전히 조용하고 고요했으나 오직 하승우만이 폭풍의 눈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 당할 생각은 없는지 곧 힘차게 마력을 끌어올리며 덮쳐오는 무형의 소용돌이에 저항했다. 그 모습을 보며 제갈 해솔이 생글생글 웃었다. 무척 즐겁다는 듯이. “괜찮네. 그럼 이건 어때?” 그렇게 말한 제갈 해솔은 이번에는 오른손을 꽉 움켰다. 그러자 곧바로 다가온 마력의 소용돌이는, 하승우 주변의 방어막을 깡그리 무시하고 다가와 압박을 시작했다. 허무한 기분을 느낄 새도 없었다. 하승우는 차마 저항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마력이 자신을 무섭게 쥐어짜는 걸 느꼈다. 어떻게든 버티려고 애썼으나 애초 마력 능력치가 102 포인트인 제갈 해솔의 상대가 될 리 없다. 결국 하승우는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여기 까진가? 아쉬운데. 가면이라도 살짝 벗겨볼까?” 제갈 해솔은 입맛을 쩝 다시면서 요리조리 손을 놀렸다. 흡사 ‘이놈을 어떻게 요리해볼까?’ 고민하듯이. 그때였다. “안젤루스여. 고통 받는 이에게 구원을.” 은은한 달빛 아래, 천진한 목소리가 정원을 고요하게 울렸다. 간신히 눈을 뜬 하승우의 눈앞으로 하얗게 작열하는 지팡이가 휘둘러졌다. 그 순간, 주변에서 휘몰아치던 마력의 소용돌이가 거짓말처럼 말끔하게 사라졌다. 그제야 압박에서 벗어난 하승우는 겨우 거센 기침을 토할 수 있었다. “쿨럭, 쿨럭!” “괜찮으세요?” 흡사 어린 아이와도 같은 맑고 깨끗한 음성. “누, 누구….” 저도 모르게 시선을 든 하승우는 흠칫 몸을 떨었다. 약간 허리를 굽힌 채 흰 사제 복장을 걸친 여인이 자신을 오롯이 응시하고 있다. 3년 차 사용자 안솔. 시크릿 클래스 광휘의 사제. 기적이라는 엄청난 능력이 있다. 나이에 비해 정신 연령이 상당히 낮다. 머릿속으로 여러 정보가 떠오른다. 그러나 하승우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자 안솔이 양손으로 지팡이를 꼭 잡으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괜찮으신가 보네요.” “그, 그러니까….” “일어나세요.” “…예?” 하승우는 황당하다는 듯이 안솔을 응시했다. 갑자기 공격받았고 갑자기 구해졌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당최 모르겠다. 그러나 생각과는 반대로 몸은 비틀거리면서도 바닥을 짚고 일어나는 중이었다. 강제라기보다는, 왠지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저절로 움직인 것이다. 안솔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성을 가리켰다. “일어나서 숙소로 돌아가세요. 오늘은 푹 주무시는 게 좋으실 것 같아요.” “하, 하지만….”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시고 들어가세요. 어서.” “…….” 하승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더 이상 여기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직감이라고 봐도 좋다. 사용자 안솔에 관한 정보를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하승우는 꾸벅 머리를 숙인 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승우가 무사히 성으로 들어가자 계속 바라보고 있던 안솔은 비로소 긴 숨을 흘렸다. 그리고 차분히 고개를 젖혀 밤하늘 아래 옥상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잠시 후, 누군가 옥상에서 가볍게 뛰었다. 이어서 천천한 속도로 둥실둥실 내려오기 시작한다. 설정된 마법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마법 ‘레비테이션(Levitation)’이 현세에 드러난 것이다. “엇~차.” 양팔을 좌우로 벌린 제갈 해솔이 가볍게 지상에 착지했다. 엄청난 마법을 목격했음에도 안솔은 딱히 놀라는 얼굴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느긋하게 걸어오는 제갈 해솔을 보더니 웃음기를 싹 지우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노려본다. 평소의 안솔과는 확실하게 차이가 있는 태도였다. 약 10미터 정도 거리를 남겼을 즈음, 제갈 해솔의 걸음이 정지했다. 자신을 노려보는 안솔을 보며 팔짱을 끼고 씩 웃는다. “우리 귀염둥이 공주님이 여기는 또 어쩐 일이실까?” “…….” “아니. 됐어. 어쨌든 너랑은 한 번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거든. 후후후.” “…….” 나직이 웃어 젖히는 제갈 해솔. 그러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 묵묵부답인 안솔. 그러나, 눈은 아까부터 노려보고 있다. 바야흐로, 두 여인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한편, 같은 시각. “헉…. 헉….” 숙소에 도착한 하승우는 문을 열자마자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쫓기는 듯한 기분에 달려와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물에 젖은 솜처럼 몸이 무겁고 심한 탈력감이 엄습했다. 불과 몇 분 사이에 일어난 일인데, 마치 격전이 벌어지는 아수라장을 헤치고 나온 기분이다.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우선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푹 잠들고 싶었다. 반쯤 몸을 돌리자 눈부신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상앗빛 천장에 달린 수정 크리스털을 바라보며 하승우는 가까스로 눈을 감았다. ‘여기는….’ 문득, 하승우는.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곳이지?’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 작품 후기 ============================ 어떻게 돼먹긴. 별거는 없어. 제 3의 눈을 가진 김수현이 있고, 마력 능력치 102인 제갈 해솔이 있고, 행운 능력치 103인 안솔이 있는 곳이야. ^^ 하승우 : (시무룩) 아. 오늘로, 아니 어제로 드디어 예비군 훈련이 끝났네요. 나흘 연속으로 받으려니 정말 고되더군요. 그래도 이렇게 끝냈으니 후련하기는 합니다. 하하하. 기분 좋아요. :D 0723 / 0933 ---------------------------------------------- 마력(魔力) 숙녀 Vs 행운(幸運) 소녀. 두 여인은 한참 동안 서로 말없이 응시했다. 날은 어두웠으나 정원에는 환한 월광이 부드러이 굽이치며 움직였고, 희뿌연 안개가 조용히 흐르고 있다. 게다가 새하얗게 작열하는 안솔의 지팡이와 황금빛을 뿌리는 제갈 해솔의 눈동자는, 고요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렇게 시간만 하염없이 흐르는 와중, 먼저 말문을 연 건 제갈 해솔이었다. “우선 설명부터 들어볼까? 왜 막은 거야?” “……?” “웬 물음표? 설마, 그냥 구한 거니? 너 그 사내가 누구인지 알아?” “몰라요.” 모른다는, 간단하기 짝이 없는 말이 돌아왔다. 제갈 해솔의 눈 하나가 살그머니 거들뜨며 상대를 응시한다. 농담이라고 말하기에는 안솔의 표정은 한치 흔들림도 없었다. 제갈 해솔의 눈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입가에 머금어진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아하~. 알겠다. 또 그거구나? 그러니까 감이라던가, 아니면 행운이라던가.” 흡사 조롱하는 어조로 말하면서 제갈 해솔은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느긋이 거리를 줄인다. 이윽고 두 명은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런데 이거 어쩌지?” 도로 걸음을 멈춘 제갈 해솔은 약간 허리를 굽혀 눈을 맞췄다. “있잖아. 언니는 굉장히 현실적인 사람이거든.” 한껏 낮아진 음성이 안솔의 귓가를 간질인다. “그래서 감이나 운이 좋다는 말을 믿지 않아요. 차라리 재능이라면 모를까. 그런데 너는…. 재능이라고 보기는 어렵잖니?” “…….” “아. 물론 인정해. 세상은 아주 넓고 아무리 나라도 모든 사람을 아는 건 아니지. 하기야 머리도 엄청 좋으면서 죽여주는 각선미를 겸비한 나 같은 사람도 있으니까. 아무튼, 다양하겠지. 조롱하는 게 아니야. 너는 그동안 많은 일을 해왔고 그건 나도 대단하다고 생각해. 그런 만큼 무조건 내 기준을,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을 거야.”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예요?” 비로소 안솔이 입을 열었다. 그러는 동시, 제갈 해솔의 눈을 피하지 않으면서 스리슬쩍 걸음을 물렸다. 어느새 두 여인의 거리는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였다. 제갈 해솔은 킥킥 웃고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냥 궁금할 뿐이야. 자신 있니?” 양팔을 꼬면서 묻자 안솔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자신 있어. 그 사내가 누구인지도 알겠고, 또 무슨 목적으로 들어왔는지 감을 잡았으니까. 그러니까 너도 자신 있느냐고. 나를 막은 행동을, 그 사내를 구한 행동을 자신할 수 있느냐는 소리야.” 말이 어려운 걸까. 안솔은 조용히 침묵을 지키면서 고개만 갸웃갸웃 기울였다. 그러다 천천히 지팡이를 내리면서 가벼운 한숨을 흘렸다. 이해했는지 못했는지 알 수 없는 애매한 태도였다.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말이 어려웠니?” “아니요. 제가 자신이 있든 없든 결과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뜻이죠. 왜냐면 선택은 어디까지나 오라버니 몫이니까.” “…….” 이번에는 제갈 해솔이 침묵했다. 생각해보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제갈 해솔도 김수현이 하승우의 정체를 모르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자신도 경고하는 것 이상으로는 나서지 않았다. “맞아. 선택은 확실히 클랜 로드의 몫이야. 그건 동의해. 그런데, 너는?” “저는 오라버니를 최대한 막을 뿐이에요. 애초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그 순간 눈동자에서 뿌려지던 황금빛이 툭 꺼졌다. “…막는다?” 말을 따라 한 제갈 해솔의 낯에 모호한 기색이 서렸다. 막는다는 말이 상당히 이상하게 들린 탓이다. 그러니까 마치 김수현이 하승우의 살해를 이미 확정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이윽고 정상으로 돌아온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일었다. “그럼 네 예언 능력은 어떤데?” 완곡히 돌려 말한 척했으나 사실상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안솔은 눈 한 번 깜짝 않고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는 그 사내를 살해하면 안 돼요.” 정말 꼭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또렷하고 분명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살해하면, 안 된다?” “그래요. 사용자 하승우는 살아야 해요.” 두 번이나 강조했다. 점점 더 재미있어진다. 제갈 해솔은 흥미로운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왜?” “왜냐면….” 끊임없이 이어지던 말소리가 돌연 약하게 흐려졌다. 이윽고 고개 돌린 안솔은 하승우가 들어간 성의 입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아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래야만….”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안솔이 실처럼 가늘게 눈을 떴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도 살 수 있으니까요.” * (아무래도 그 사내 말이 맞는 것 같다. 하승우라고 했던가?) “그래?” (어. 첫 행선지를 뮬로 잡았거든. 한데 이미 소문이 어느 정도 돌고 있더군. 푸른 산맥에서 꽤 처참하게 살해된 사용자가 발견된 모양이야.) “으음.” (아무튼, 현재 가는 중이기도 하지만 우선 들어가 볼 생각이야. 너도 알고 있잖아. 푸른 산맥에서 출몰하는 괴물은 사람을 뼈까지 씹어먹는 놈들이야. 그런데 시체가 나왔다는 건 확실히 이상하지. 한 번 조사해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된다.) “확실히 그렇겠네.” (알았다. 그럼 푸른 산맥에 도착하면 또 보고하도록 하지.) “우정민. 잠깐만.” 우정민이 통신을 끊으려는 기색이 보여 나는 급히 붙잡았다. 구슬에서 흘러나오는 우정민이 낯에 의아한 빛이 떠오른다. (왜?) “혹시 푸른 산맥 조사를 조금 천천히 할 수 있을까?” (천천히? 걱정은 괜찮은데.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추적은 충분히 조심하면서 진행할 테니까.) “그게 아니라….” 나는 깍지 낀 손으로 괜스레 엄지를 비볐다. 부랑자 척살 조가 푸른 산맥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 한다. 그 신속한 진행 속도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급한 기분이 들었다. 하승우는 왜 정확한 정보를 말한 걸까. 무언가 사정이 있어서? 아니면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려고? 사실 아직까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하승우가 들어온 이후, 그동안 계속해서 기회를 노렸으나 모두 실패했다. 정확히 말해서 하승우가 틈을 보이지 않았다. 고연주에게 밀착 감시를 지시했는데도 돌아오는 보고는 ‘이상 무.’ 라는 말뿐. 결국 하승우는 철저히 보통 사용자를 연기하면서 머셔너리 클랜으로 빠르게 녹아 들었다. 이제는 왜 정식 클랜원으로 승격하지 않느냐는 말도 나올 정도였다. 원래는 부랑자 척살 조가 도착하기 전에 어떻게든 상황을 만들어볼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이대로 무작정 지켜보기에는 감수해야 할 리스크가 너무 크다. 현 상황에 한정해서 시간은 하승우의 편이다. 이렇게 된 이상 남은 선택은 두 가지뿐. 거기서 내가 선택할 길은 하나였다. (김수현?) “아. 조만간 부랑자 근거지에 관한 단서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말했다. 이미 속으로는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실은 부랑자에 관해서 중앙 관리 기구와 꾸준히 논의를 해오고 있었거든. 자세한 사정을 말하기는 좀 그렇고, 아직 확정된 것도 없기는 하지만.” (그게 정말인가?) “그래. 확실한 정보를 입수하면 연락할 테니까 한 번 천천히 해보라는 거야. 서포터 해준다고 생각해.” (그럼 나야 고맙지. 여하튼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수고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통신을 끊었다. 이내 구슬의 빛이 꺼지는 것과 동시에 나는 입맛을 다셨다. 백서연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그때는 누구나 백서연이 부랑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거리낌 없이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승우는 아니잖은가. 아니. 아닌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정 반대의 상황이다. 물론 제 3의 눈이 틀릴 리는 없으나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어떻게 알아냈는지 과정을 만들어내는 것도 나한테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어차피 이제 남은 방법은 정면 돌파밖에 없지만 서도. 잠시 후. 나는 차분히 가슴을 추스른 후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가지런히 나열된 호출석 중 하나를 지그시 눌렀다. * 어두운 방 안. 문틈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어느새 오후가 지나가고 밤의 시간이 찾아왔다. 나는 의자에 앉은 채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결정을 내린 이상 행동은 언제나 신속하게. 1회 차 이스탄텔 로우 클랜원이었던 시절 한소영에게 배운 행동이다. 사실상 정면 승부인 이상 준비랄 것도 없지만, 그래도 만일을 대비한 준비는 마쳤다. 책상 서랍에는 사용자의 정신을 오염시키는 물약이 한 세트 들어있다. 오염된 위그드라실의 열매로 만든 물약으로 백서연을 심문할 때 많은 도움을 얻었다. 요정 여왕의 정신을 타락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니 이번에도 톡톡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리라. 고연주는 밖에서 몸을 숨긴 채로 기다리고 있다. 물론 나 혼자서도 하승우를 놓치지 않을 자신은 있지만, 그래도 변수가 생길 수도 있으니. 나와 고연주 두 명이면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하승우가 의심할만한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닌 밤중에 갑자기 부르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부랑자는 원래 그런 족속이니까. 그래서 나는 새로 들어온 네 명을 차례대로 한 명씩 호출했다. 마침 정식 클랜원으로 승격해야 한다는 말도 솔솔 나오고 있으니 이보다 좋은 명분이 어디 있겠는가. 결과적으로 이미 사라, 엘리자베스, 하승윤과의 면담은 끝났다. 하승윤과의 면담은 특히 신경 써서, 이제 정식으로 가입하지 않겠냐는 식으로 말을 해놓은 상태였다. 말을 할지 안 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로써는 하승우가 의심할만한 거리가 티끌만치도 없다. 그러므로 이제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괜스레 책상을 두드리며 문을 응시했다. 똑똑. “머셔너리 로드 님. 사용자 하승우입니다.” 이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하던가? “예. 들어오시죠.” 이윽고 문이 조심스레 열리면서 서글서글한 인상의 사내가 눈에 들어온다. 공손하게 들어온 하승우는 방안을 둘러보더니 입을 떡 벌렸다. “뭘 그리 놀랍니까?” “예? 아….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방이 너무 좋아서요.” “그런가요? 아무튼, 우선 이쪽에 앉으시죠.”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하승우는 연신 감탄하면서 깍듯한 자세로 소파에 앉았다. 이로써 거리는 약 5미터 내외. 우선은 절반의 성공이다. “이렇게 늦은 밤에 불러서 미안합니다. 원래는 조금 더 일찍 끝내려고 했는데 면담하는데 의외로 시간이 걸리네요.” “아니요. 정말로 괜찮습니다. 그러고 보니 승윤이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오더라고요. 아마 방에서 몸을 뒹굴 뒹굴 구르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하하.” 하승윤이? 그러면 이야기를 들었다는 소리군. “사실 조금 늦은 감은 있지요. 원래 머셔너리 클랜이 폐쇄성이 짙습니다. 아무튼, 편하게 앉으세요. 최종 면담이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니까요.” “형식적인 절차…. 에. 그, 그럼.” 조용히 말을 따라 한 하승우가 돌연 멍한 표정을 짓는다. 눈까지 두어 번 깜빡이면서. 혹시 현대에서 연기자가 아니었을까 생각될 정도로 훌륭한 표현력이다. 아마 제 3의 눈이 없었다면 나조차도 속아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근래 여기저기서 들어보니 사용자 하승우에 관한 말이 아주 좋습니다. 모두 하나같이 칭찬을 하더라고요.” “하하, 하하. 쑥스럽습니다. 비행기 타는 건 익숙지가 않아서.” “그래요. 그럼 정식 승인 전에 질문 좀 해도 될까요? 많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입니다!” 하승우는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는 책상에 얹은 오른손을 살금살금 오른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사용자 하승우가 머셔너리 클랜으로 들어온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예?” 이건 약간 예상외의 질문이었을까. 찰나의 순간, 하승우의 낯에 오묘한 기색이 스쳤다. 삽시간에 사라지기는 했으나 나는 확실하게 잡아낼 수 있었다. “그거야 머셔너리 클랜이 최고이니까요. 사용자라면 누구나 가입하고 싶어하는 클랜이 아니겠습니까?” “음. 조금 더 자세히요.” “어…. 실은 제 동생이 머셔너리 클랜에 무척 가입하고.” “그건 이미 들었습니다. 저는 누구나 생각하는 게 아닌, 여동생의 입장이 아닌, 사용자 하승우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일부러 말을 끊어버리자 하승우의 표정이 약간 가라앉는다. 여기서 나는 먼저 입을 열기로 했다. “클랜이 마음에 든다. 물론 크게 보면 사용자 하승우의 말도 틀리지는 않아요. 그러나 제가 듣고 싶은 말은 조금 더 상세한 부분입니다.” “상세한 부분이요?” “예. 그러니까 목적을 듣고 싶다는 말이죠. 가령 예를 들어 보호받으려는 도피 목적. 무언가 정보를 빼내려는 잠입 목적. 아니면 이용해 먹으려는 모종의 목적. …등등이라고나 할까요?” “목적이라면….” 하승우는 천연덕스러웠다. 아직도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수룩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목울대는 아주 미약한 고저를 그리는 중이었다. 이윽고 느릿하게 마력을 끌어올리는 동시. “그래서 듣고 싶은 겁니다. 머셔너리 클랜에 가입하려는 목적을.” 책상 한 쪽에 놓아둔 무검의 칼자루에 스리슬쩍 손을 얹은 후. “그것도….”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부랑자의 총 대장이나 되는 사용자가 말이지.” ============================ 작품 후기 ============================ 예고 시간보다 조금 늦었네요. 퇴고에 예상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집필 방식에 약간의 변화를 줬는데 괜찮은 것 같으면서도 익숙지는 않네요. 하하. 아무튼, 오늘도 떡밥 하나 던졌습니다. 이번 떡밥은 단시간 내에 회수할 수 있는 성질은 아닙니다. 제가 예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메모라이즈는 처음부터 결말을 구성하고 들어간 작품입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결말로 가는 하이라이트 부분이라고나 할까요. 그 부분에 관한 복선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예전 선율의 타로 카드 점을 떠올리시면 조금은 감을 잡으실 수 있겠네요. :) 0724 / 0933 ---------------------------------------------- 결정의 밤. 그 순간 나는 곧장 이형환위(移形換位)를 발동해 하승우의 후방을 점거했다. 삽시간에 시야가 변했다. 눈앞으로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책상과 칼자루에 손을 얹은 내가 보인다. 그 환영은 곧 허공으로 녹아내리 듯이 사라졌다. 이어서 하승우의 목덜미에 칼날을 비스듬히 겨누려다가, 방향을 바꿔 등의 중앙에 칼끝을 꽂았다. 아주 살짝 들어갈 정도로. 이렇게 완전한 후방 장악에 성공한 후,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미리 경고한다.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 입도 함부로 열지 말고 몸도 움직이지 마. 네가 무슨 생각이든 어떤 사정이 있든 조금도 관심 없으니까. 여기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질문에 말만 하면 되는 거야. 이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행동이 보일 시, 기대해도 좋다. 알아들었으면 머리 한 번 끄덕여.” 그리고 바로 바라보았으나 하승우는 무표정했다. 소파에 앉은 그대로 책상을 응시하고 있다. 무언가 넋이 나갔거나 조용히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문득 하승우 아래 드리운 그림자가 살그머니 일렁였다. 그 외에는 모든 것이 정지한, 오직 어둠만이 내려앉은 고요한 밤이었다. 이윽고 하승우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역시, 알고 있었나….” 조심스레 흘러나온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발을 크게 들어 소파에 얹은 오른손을 힘껏 찍어 내렸다. “그래도 설마…. 큭!” 쿵! 소파가 박살 나는 동시, 하승우의 몸이 크게 기울어지며 새된 비명이 터졌다. 나는 방해되는 소파를 발로 차버린 후 시선을 내렸다. 있는 힘껏 밟은 결과 오른손은 완전히 짓뭉개진 상태였다. 핏물이 왈칵 흘러나오고 짓이겨진 살점 사이로 흰 뼈가 보인다. 하승우는 오른 어깨를 약간 늘어트리면서 낯을 잔뜩 찡그린 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래도 이제 확실히 알아들었는지 입을 꾹 닫고서 정면을 응시한다. 어쨌든 이로써 하승우는 확실히 인정했다. 내가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게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그래.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 속삭이듯이 말하고 나서, 나는 하승우의 옷을 하나하나 벗기기 시작했다. 로브를 걷어내고 웃옷을 찢는다. 어떤 것을 숨기고 있을지 몰라서, 입고 있는 속옷까지 베어서 젖혀버렸다. 그러는 와중 작고 반짝이는 푸른 구슬 하나가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건…. 진실의 수정이잖아.” 말하면서 흘끗 눈을 흘겼으나 하승우는 여전히 입을 닫고 있었다.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한 번 더 입을 열면 왼손도 작살내려고 했는데. 아무튼, 마침 잘됐다. 나는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구슬을 바라보다가 발로 살짝 밀었다. 진실의 수정은 데굴데굴 굴러가 하승우의 앞에 정확히 안착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고 있지?” 하승우는 약간 주저하는 듯했지만, 곧 왼손을 얌전히 구슬에 얹었다. 잠시 후. 구슬 안으로 찬연한 불빛이 켜졌다. 진실의 수정이 발동된 것이다. 허나 발동 시간은 그리 길지 않으니 최대한 시간을 아껴야 한다. 나는 바로 질문을 시작하기로 했다. 정체는 이미 알고 있으니 집어치우고. “사용자 하승우가, 북 대륙의 강철 산맥 공략 이후 머셔너리 클랜에 들어온 목적은?” 진실의 수정은 만능이 아니다. 무조건 ‘진실’만을 가린다는 점에서 확실한 약점이 있다. 나도 그 점을 이용해 정하연의 질문 공세에서 벗어난 적이 있잖은가. 그러니 이 약점을 최소화하려면 최대한 질문을 자세하게 하는 게 좋다. “도피해서 보호받으려는 목적. 그리고 이용해 먹으려는 목적.” 이윽고 하승우의 낮은 음성이 들려온다. 도피 및 보호와 이용이라. 아까 내가 한 말을 따라 한 듯하다. “전부 다, 자세하게 말해.” 손아귀에 힘을 주면서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말 그대로야. 하나는 승윤이를 머셔너리 클랜의 보호 아래 두려고 했고. 또 하나는 머셔너리 클랜을 이용해 남은 부랑자를 청소하려고 했다.” 그 순간 나는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전자는 차치하고서라도 후자가 믿기 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부랑자가 부랑자를 쓸어버리려고 했다? 그것도 부랑자의 총 대장이? 얼른 진실의 수정을 확인했으나 구슬 안의 불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처음 켜졌을 때처럼 밝은 빛을 비추고 있다. “…내분이라도 있었던 건가?” “내분이라고? 하하하.” 문득 하승우가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면서 말을 잇는다. “이거 이거, 부랑자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부랑자는 애초 내분이 일어날 건더기가 없는 단체야. 왜냐고? 우리는, 아니 부랑자는 필요에 의해서만 모이니까. 그래. 명령 체계도 필요에 의해서 만들기는 했지만, 너희처럼 완벽한 상하 관계는 아니거든.” 이제 조금 안정을 찾았는지 하승우는 길게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목소리였다. “…그럼, 왜?” “말했잖아. 필요에 의해서.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승윤이가 내 친동생이라는 사실을 우연히 들켰다는 게 가장 큰 이유겠지.” “사용자 하승윤도 부랑자인가?” “아니, 아니야. 승윤이는 그냥 사용자다. 부랑자를 증오하는 그런 보통 사용자.” 하승우는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하고 싶었는지 되레 아래를 흘끗했다. 구슬 내 불빛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였다. 그때였다.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려는 순간, 하승우는 갑자기 머리를 돌려 나를 응시했다. 한껏 긴장하고 있던 터라, 나는 반사적으로 무검을 밀어 넣는 동시 미리 끌어올린 마력을 주입했다. 푹. 칼끝은 무리 없이 등을 파고들어 복부를 꿰뚫었다. 이대로 마력을 터뜨리면 확실하게 죽을 것이다. 그러나 하승우는 잠깐 움찔한 것을 제외하고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스멀스멀 배어 나온 핏물이 등을 따라 흘러내려 바닥을 적신다. 하승우는 미약한 침음을 흘리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강철 산맥이 공략된 이상,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미래가 없다고?”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 그건 아니었다. 확실히 1회 차와는 다르게 부랑자는 전쟁 이후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왜냐면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사용자가 도시를 점거하고 있는 이상, 부랑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야. 거기다 이제는 강철 산맥까지 공략했으니 차이는 더 벌어지겠지.” “하지만 너희는….” “아. 물론 부랑자도 가만히 있던 건 아니었어. 그래서 수많은 인원이 도시 안으로 들어가, 첩자로 활동하며 사용자 간 갈등을 조장하려는 계획을 세웠지. 실제로 어느 정도 성과도 얻었고. 그런데….” “흠.” 잠시 말끝을 흐린 하승우가 지그시 나를 응시한다. 나는 계속 말하라는 의미로 가볍게 턱짓했다. “부랑자 말살 계획, 첩자 색출, 전쟁의 패배…. 여기까지만 해도 이미 사지가 잘렸는데, 이후 지속적인 부랑자 척살 조 활동까지. 시간이 지날수록 세력은 기하급수로 줄어드는데, 여기서 뭘 어떡하라는 거지? 너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그래서 사용자로 새로운 출발을 하려고 했다는 건가?” “갑자기 생각한 건 아니야. 전쟁 후 오랫동안 생각하면서 몰래 준비했고, 강철 산맥 공략 이후 생각을 굳혔지. 그래서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호기가 찾아오더군.” “호기?” “그래. 네가 공략 직전 사라짐으로써 나한테 기회가 찾아왔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가.” “……?” 뜻 모를 말에 의아히 낯을 찌푸린 순간이었다. 갑자기 하승우의 얼굴이 흐물흐물해지더니 서서히 얼굴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변화를 완료한 얼굴을 확인한 찰나, 돌연 가슴이 크게 두근거렸다. 또 한 명의 내가 보인다. 어느새 하승우의 얼굴은 나로 변신한 상태였다. 그러나 가슴이 채 가라앉기도 전, 또 한 번 살이 흐늘거리듯 뭉그러지더니 다른 얼굴이 나타났다. 언뜻 보면 첫 번째 얼굴과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확연히 다른 인상이다. 세 번째로 나타난 얼굴은 중후한 빛이 흐르는, 그러나 날렵한 눈매의 은회색 머리카락을 지닌 사내였다. 차갑고 깨끗한 눈동자와 마주하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하승우는 그 정도로 강렬한 카리스마를 내뿜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게 하승우 본연의 얼굴이라고. 그와 동시에 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나를 사칭한 놈이 너였군.” “맞아. 가장 빠르면서 최고의 방법이 머셔너리 클랜을 차지하는 거였으니까. 보기 좋게 실패하기는 했지만.” 하승우는 순순히 수긍했다. 나는 이제야 자초지종을 알 수 있었다. 간단한 이야기였다. 하승우는 나를 사칭해 머셔너리 클랜을 차지하려고 했다. 그럼으로써 하승윤을 보호하고 부랑자를 확실하게 청소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머셔너리 로드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출발한다. 그게 틀어짐으로써 차선책으로 머셔너리 클랜에 들어온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자 하나의 의문이 추가로 생겼다. “그런데 나를 사칭하면 너는 어떻게 되는 거지? 하승윤이 이상하게 생각할 가능성도 있지 않나?” “아아….” 하승우는 싱긋 웃었다. “1인 2역에는 자신이 있어서. 내 능력을 사용하면 아주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흠….” 어느 정도 의문은 풀렸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구슬의 불빛은 상당히 약해진 상태였다. 진실의 수정 발동 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 이제 슬슬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좋아. 네 말이 진심이라면 부랑자가 있는 장소를 말해봐.” 하승우는 웃으면서 부랑자가 있는 장소를 실토했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지 모조리 일망타진할 수 있는지도 알려주었다. 사실 고작 여동생 하나 때문에 이렇게 순순히 말해준다는 게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역지사지로 생각해서 내가 하승윤의 입장이고 형이 하승우의 입장이었다면, 형도 똑같이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 정도로 여동생을 아낀다는 소리겠지. 한편으로는 부랑자의 특성이나 미래가 없다는 말이 공감이 가기도 하고. “그 외는?” “그건 나도 몰라. 있을 수도 있는데, 떨거지 수준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좋을 거야. 아니면 우선 내가 가르쳐준 장소에서 부랑자들을 잡고, 간부급에 해당하는 놈을 심문하면 실토하겠지.” 그 말을 끝으로 불빛이 꺼지며 진실의 수정이 조각조각 부서졌다. 의문도 풀었고 알아낼 사실도 알아냈다. 물론 개인적으로 궁금한 건 남았으나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길게 숨을 흘린 후, 등에 박힌 무검을 조심스레 빼냈다. 하승우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살려주는 건가?” “미쳤군. 살고 싶나?” 나는 코웃음을 치면서 무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원래는 최대한 고통스럽게, 마력 폭발로 내부를 터뜨려 죽이려 했는데….” “그런데?” “사실, 조금 놀랐어. 귀찮게 반항도 안 하고, 말도 꽤 성실하게 잘해줬다. 그 보답으로 깔끔하게, 고통 없이 보내주마.” “잠깐만. 고통스럽게 죽여도 되니까, 하나만 말해주면 안 될까?”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걸까. 잔잔히 가라앉은 은회색 눈동자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떻게 알았느냐는 거?” 하승우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승윤이는 어떻게 할 거지? 죽일 건가? 보통 사용자인데?” “응?” “내 동생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승윤이 걔, 천재다. 살려두면 분명….” “아니. 알아. 부랑자라면 모를까. 걔를 왜 죽여? 용병 클래스에 그 정도면 얼마나 써먹을 데가 많은데.” “써먹을 데라…. 아무튼, 살려준다는 말이겠지?” “그래. 네 계획은 착오 없이 진행될 거야. 하승윤은 앞으로 머셔너리 클랜원으로 활동할 거고, 부랑자도 모조리 척살할 거다.”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말이지. 뒷말은 속으로만 말했다. “다행이군.” 하승우는 쓰게 웃었다. 어쩌면 하승우도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로써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아무튼, 혼란은 감수하기로 하고 진행한 일이다.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나는 무검을 내리칠 지점을 조준했다. 하승우도 이제 끝났다고 여겼는지 지그시 눈을 감는다. 이미 죽이기로 결심한 이상 망설일 것은 없었다. ‘성스러운 여왕’을 보냈던 것처럼 똑같이 하면 된다. “그럼, 잘 가라.” 잘 가라는 말을 하면서 나는 그대로 무검을 내리쳤다. 그 순간이었다. “…이에요!” 퉁! 돌연 누군가 외치는 소리와 동시, 마력이 터지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그리고. 텅! 부드럽게 떨어지던 무검이 무언가에 세차게 가로막혔다. 눈 깜짝할 사이, 시야로 하얀 장막이 보였다. 이윽고 앞을 바라본 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너희는….” 공간 이동 능력을 사용한 걸까. 눈앞으로 안솔과 제갈 해솔이 서 있었다. ============================ 작품 후기 ============================ 아. 오늘 하루 정말 우울하네요. 1. 예비군 훈련의 여파인지 감기에 걸렸습니다. 2. 끙끙 앓고 있는데 병원에 입원한 친구한테 병문안을 오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오늘은 힘들어서 안되겠다고 하니까 갑자기 서운하다고 말하네요. 처음에는 참고 넘기려다가 자꾸 얄밉게 말하길래 결국 말다툼했어요. 3. 싱숭생숭한 기분에 자려고 누웠는데 이번에는 모기 출현. 1시간 사투를 벌였으나 겨우 한 마리 잡았어요. 4. 화를 삭이면서 글이나 써야지 하고 의자에 앉는데 책상이 조금 더러운 겁니다. 그래서 청소하는 와중, 왼쪽 소책자에 올려둔 컵을 툭 쳐버렸네요. 그리하여 안에 들은 식은 커피가 왈칵 쏟아졌습니다. 모니터, 키보드, 책자에 꽂혀 있던 책, 바닥, 그리고 형이 살면서 손에 꼽을 정도로 선물해준, 그래서 아까워서 쓰지도 않고 모셔둔 작은 노트가 갈색으로 흥건해졌습니다. 응아아아앙앙아아! 오늘은 정말 뭘 해도 안 되는 날인가 봐요. ㅜ.ㅠ 0725 / 0933 ---------------------------------------------- 공지사항. . ============================ 작품 후기 ============================ 며칠 동안 쉬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요, 오늘 새벽 전후로 몸이 많이 안 좋아져서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새벽 내내 앉아 있으면 1회 분량은 나오는데, 오늘은 오히려 감기 몸살만 심해졌네요. 사실 오늘도 16K 정도로 완성하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퇴고 시작하고 10분만에 휴재 결정을 내렸네요. 제가 적은 글을 제가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걸 독자 분들께 보여드리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리하여 일단은 건강 회복이 우선이라고 생각, 잠시 몸을 추스르고 돌아오겠습니다. 연재는 아무리 늦어도 이번 주 안으로는 재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려주신 분들께는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0726 / 0933 ---------------------------------------------- 결정의 밤. 꿈. 꿈을 꾸고 있다. 정면 방향에는, 꼭대기에 눈이 부실 정도의 태양이 걸린 새하얀 신전이 보였다. 신전은 흡사 지옥처럼 거칠게 불타오르고 있었고, 그 부근으로는 생전 처음 보는 괴물과 인간이 한창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거대한 회오리가 사방에서 몰아치고, 하늘에서 떨어진 무수한 벼락에 천지가 진동한다. 누가 울부짖는 모를 비명이 사방을 가득히 울리고, 붉은 핏물은 허공에 분수처럼 뿜어졌다. 안솔은 멍하니 정면을 응시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전장. 매캐한 연기가 공기 중에 흐르는 전장은 한 치 앞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이내 속이 타들어 갈 정도의 화끈한 바람이 내부를 메우는 순간, 갑자기 시야가 새하얀 빛으로 물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눈이 차츰차츰 적응하면서 눈앞으로 새로운 풍경이 그려졌다. - 메모라이즈! 문득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 음성이 들려온 곳에는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있었다.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여인은 전장을 가로지르며 누군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리고 바로 뒤에 또 한 명의 여인이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을 바짝 쫓고 있었다. 뒤쫓는 여인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안솔은 매우 놀라고 말았다. 어깨에 살짝 닿는 단발 머리. 그리고 낯설지 않은 새하얀 사제 로브. 누군가를 뒤쫓는 여인은 영락없는 안솔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안솔은 돌연 이상함을 느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분명 꿈을 꾸는 것도 보고 있는 것도 자신인데. 어떻게 자신이 자신을 볼 수 있는 걸까? 그러나 차오른 의문이 해결되기도 전, 돌연히 안솔 주변의 풍경이 스치듯 지나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엄청난 속도로 사투가 벌어지는 전장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눈 한 번 깜짝한 사이, 또 한 번 풍경이 갑작스럽게 변하는 동시, 안솔은 몸이 붕 떠오르는 걸 느꼈다. 문득 온몸으로 애가 타는 기분이 엄습한다. 그 기분에 이끌린 걸까. 안솔은 마치 누군가에게 닿으려는 듯, 한껏 고개를 젖히면서 필사적으로 팔을 뻗는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힘껏 팔을 뻗은 안솔이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건, 온몸이 포박된 채 꿇어 앉은 사내였다. 사내의 정체를 확인하기도 전, 갑자기 삽시간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사용자 안솔의 특수 능력, ‘성녀의 예언’은 거기서 끝이 났다. * 휭, 고요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테라스를 타고 불어와 방안을 가볍게 휩쓸었다. 정면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김수현의 머리카락이 작게 일어나고, 안솔의 로브가 살짝 나부꼈다가 가라앉는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방에는 숨 막힐 듯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이윽고 안솔을 데리고 온 제갈 해솔이 살그머니 걸음을 물렸다.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라는 듯, 팔짱을 끼고 흥미로운 눈초리로 구경하는 방관자적인 태도를 잡는다. 김수현은 옆을 흘끗 흘겼다가 도로 안솔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조용하면서도 차가운 목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 문득 침을 꼴깍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현재 안솔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하고 있었다. 칼자루를 쥔 김수현의 두 눈동자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듯 우묵이 가라앉아 있다. 안솔은 어떻게든 그 결정을 되돌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자연스레 떠오른 의문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안솔도 자신이 없었다. 왜냐면 여태껏 자신의 감이 발휘된 상황과 현재 직면한 상황은 상당히 판이하니까. “네가 여기 왔다는 건…. 이번에도 그건가.” 김수현은 ‘왜 막았느냐.’ 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여태껏 몇 번이고 함께 해온 이상, 안솔이 나타나 자신을 막은 상황을 곧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확인을 요구하는 듯한 눈초리에 안솔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아주 잠깐이기는 했지만, 김수현의 낯에 쓸쓸한 기색이 스쳤다. 마치 절대 오지 않기를 바라던 상황과 마주했을 때의 표정이랄까. 김수현이 입을 열었다. “안솔. 지금 네가 보호하려는 사용자는 부랑자다. 그것도 최고 악질이라고 볼 수 있는 놈이야. 알고 있니?” “…오라버니.” 안솔이 애절한 음성으로 불렀으나 김수현은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직 할 말이 남았다는 듯이. “가진바 능력도 좋고, 머리도 좋다. 무엇보다 자기 관리가 굉장히 철저한 놈이야. 나와 고연주가 밀착 감시를 했는데도 아주 작은 틈도 보이지 않는 놈이라고. 차라리 놓치면 놓쳤지, 나는 절대로 저놈을 우리 클랜에 들일 생각 없다.” “…….” “시간은 1분, 아니 3분을 주마. 단순히 살려야 한다는 말이 아닌, 그 이상의 말로 나를 설득해라.” “……!” 김수현이 선언하자 안솔은 당황하고 말았다. 이미 꿈을 꾼 지는 며칠이나 지났다. 중간중간 흐릿하게 기억나는 게 있을 뿐, 전체적인 꿈의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꿈의 느낌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고, 정작 내용은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는다고나 할까. 결국 믿고 있는 것은 ‘죽이면 안 된다.’ 는 직감뿐. 그런데 김수현은 그 이상의 말로 자신을 설득해보라고 한다. 안솔은 갑갑함을 이기지 못해 아랫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왜냐면 김수현이 요구하는, 그 이상으로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 같아서는 정수리를 반으로 쪼개 열어버리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모두 드러내 버리고 싶었다. 그러면 약간이라도 시원함을 느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3분이라는 시간이 의미 없이 흘러가고 말았다. “3분이 지났군.” 들려오는 음성에 안솔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카앙! 아차 한 사이, 안솔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비틀거리면서 물러났다. 천장을 향하던 김수현의 손은 어느새 아래로 내려온 상태였다. 칼자루 또한 바닥을 보고 있었다. 가볍게 휘두른 일격에 안솔이 밀려난 것이다. 김수현은 또 한 번 버텨낸 안솔을 보며 감탄했다. “두 번이나 버텨내다니…. 역시, 그때 막아낸 건 우연이 아니었어.” 결코 오만이나 자만이 아니었다. 김수현은 사용자 중 최강이다. 시크릿 클래스 ‘검술 전문가’의 권능 ‘결’은 그 어떤 것도 자르고 베어버린다. 그걸 두 번이나 버틸 수 있었던 건, 안솔도 보조 계열 사용자에 한해서 최강이라 부를만한 사용자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뿐이기는 했다. 안솔도 알고 있다. 앞선 두 번의 공격은 경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김수현이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보호막쯤은 단숨에 깨트릴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안솔은 그저 멍하니 김수현을 바라보았다. 전신으로 소름이 쭈뼛쭈뼛 돋아나고 의지와는 상관없이 팔이 덜덜 떨린다. 설마 이런 경험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렇게 무력한 상황도 처음이었고, 좋아하는 오라버니와 맞서게 될 줄도 몰랐다.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을 본 걸까. “안솔.” 문득 김수현이 안솔을 불렀다. “혹시 사용자 아카데미를 수료하면서 내가 한 말을 기억하니?” 이제까지와는 다른, 평소와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 혹시나 한 안솔이 조심스레 눈을 들어 김수현을 응시한다. “부랑자는 절대로 믿지 마라…. 요.” “잘 기억하고 있구나.” “하지만…!” “그래. 알고 있다.” 인정에라도 호소하려는 찰나, 김수현이 안솔의 말을 끊어버렸다. “너도 하고 싶은 말은 많겠지. 아니. 애초 너를 권유한 것도 나고, 그동안 네 덕을 본 것도 사실이고. 이걸 부인할 생각은 없어. 나는 너를 언제나 신뢰한다.” 안솔의 표정이 오묘하게 이지러졌다. 복합적인 감정이 어우러져 드러났지만, ‘그럼 왜?’ 라는 기색이 가장 강하게 드러났다. 김수현이 계속 말을 잇는다. “하지만 너를 신뢰하는 만큼, 나는 나를 신뢰하기도 해. 즉 나한테도 신념이라는 게 있다. 그간 홀 플레인을 경험하면서 세운 신념이. 그런데 너는 나보고 지금 이 신념을 깨트리라고 말하고 있어.” “…….” “그럼 너는 말하겠지. 나를 위해서라고. 그럼 나도 말하마. 나는 우리를 위해서다.” “…….” 안솔은 흡사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말 그대로 지금까지는 안솔의 말을, 아니 직감을 따라도 크게 상관없는 상황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현재는 다르다. 안솔의 말대로 하승우를 살리는 선택을 한다면 머셔너리는 어마어마한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김수현이 말한 우리라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였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하고는 있었어. 네 직감과 내 신념이 부딪치는…. 언젠가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라는….” 이윽고, 조금은 허탈한 음성으로 말한 김수현은. “그러나, 여기서 꼭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느닷없이, 강렬한 눈빛으로 안솔을 응시했다. “나는, 조금 더 확실해질 수 있는 길을 선택하고 싶구나.” 또 한 번 천천히 칼자루를 들어 올린다. 화르르륵! 그러자 갑자기 기세가 일변하는 동시, 허공에서 맑은 불꽃이 타오르며 보이지 않는 칼날을 감싸 안는다. “누가 옳고 그르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 않겠다. …이건 진심이야.” 그렇게 말한 김수현은 한 걸음씩 걸어오기 시작했다. 시시각각 거리를 줄여오는 김수현을 보며 안솔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이번에는 진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무엇보다 저 맑은 불꽃을 두른 일격을 막아낼 자신이 없다. 아니. 정확히는 더 이상 김수현의 결심을 돌려낼 자신이 없었다. “괜찮으니까, 이만 옆으로 비켜라. 고생했다.” 그 순간, 안솔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옮길 뻔했다. 갑자기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단지 고생했다는 말 한 마디에 불과했으나 근 며칠 동안 마음 고생했던 일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안솔은 간신히 고개를 가로저을 수 있었다. 납득의 끝에서, 안솔은 아직도 자신을 붙잡고 있는 오묘한 직감을 선택했다. “안솔…?” “메모라이즈…!” 이윽고 김수현이 낯을 찌푸리는 동시, 안솔은 눈을 꼭 감은 채 있는 대로 소리 질렀다. 사실상 아무 의미 없는 외침에 불과했다. 그저 아직 드문드문 남아 있는 꿈의 기억을,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에 나오는 대로 외친 것이다. 김수현은 머리를 갸웃하기는 했지만, 딱히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포박된 사내…!” 저벅저벅.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 저벅저벅. “비명! 검은 괴물…!” 저벅저벅. “또 한 명의 나…!” 저벅저벅. 여러 말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온다. 안솔은 그만큼 필사적이었으나 김수현은 여전히 걸음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갈 해솔은 조용히 팔짱을 낀 채로 이제 종국을 향해 치달리는 ‘결정의 밤’을 흥미로이 응시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김수현이 바로 앞까지 도착했다. 안솔은 눈을 감은 상태였으나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곧…. “아.” 이라고 느끼기도 전, 무검은 무서우리만치 담담하게 내려왔다. 콰지지직! 안솔의 보호막은 유리 깨지는 소리를 내며 너무나 간단하게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보호막을 깨트리고 들어온 무검이, 그대로 안솔을 넘어 아래로 내리쳐진다. 이윽고 칼끝이 하승우의 정수리를 쪼개기 직전. “꼬, 꼭대기에 태양이 걸린! 새하얀 신전…!” “……!” 그 찰나의 순간, 무검은 마치 거미줄에 걸리기라도 한 듯 우뚝 정지했다. 숨을 크게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김수현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두 눈에는 여태껏 볼 수 없었던 진한 당혹감이 드러나 있었다. 기실 김수현이 갑자기 행동을 멈춘 이유는 하나였다. ‘꼭대기에 태양이 걸린, 새하얀 신전…?’ 그냥 지른 거라고는 하나, 최후로 내뱉은 말은 행동에 제동을 거는 데 마침내 성공했다. 김수현의 머릿속에는 1회 차 시절, 테라로 진입했을 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중이었다. ‘그건…. 약속의 신전이잖아.’ 약속의 신전. 제로 코드가 잠들어 있는 장소. 해가 중천, 즉 신전 꼭대기에 걸렸을 때 문이 열리는 특이한 기운이 흐르는 신전이다. 물론 안솔이 그냥 한 말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표현이 너무 정확했다. 묘하게 신경이 쓰인다고나 할까. 현재 그 장소에 관한 지식은 자신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니까. “흐아아앙…. 흐아아앙….” 이윽고 누군가 털썩 꿇어앉는 동시, 서럽게 우는 소리가 이어졌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는지, 안솔이 무너지듯이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서러운 소리가 고요한 방안을 나직이 울렸다. 김수현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면서 칼자루를 쥔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때였다. “잠시만요.” 방으로 이동해온 이후, 여태껏 가만히 방관만 하고 있던 제갈 해솔이 갑자기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이봐요. 클랜 로드.” 제갈 해솔은 엉엉 우는 안솔의 정수리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그리고 실눈을 뜬 김수현을 돌아보며 당돌히 입을 열었다. “아니. 살다 보면 한 번쯤 막을 수도 있지. 왜 우리 애 기를 죽이고 그래요?” “…장난하나?” 김수현은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어흠, 헛기침한 제갈 해솔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아아. 너무 심각한 것 같아서. 어쨌든 농담이고요.” “농담? 방관하고 싶으면 조용히 구경이나 해. 아까처럼.” “그러려고 했는데…. 보니까 왜 서로 싸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요.” “뭐라고?” 이건 또 무슨 말일까. 김수현이 날카로이 반문했다. “결국에는 이 문제잖아요. 안솔은 이 사내를 살려야 한다. 클랜 로드는 이 사내를 믿지 못한다.” “그래서.” “그럼 이 두 의견을 적절히 조합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 사내를 살리면서 믿을 수 있게 만드는 거죠.” “그 방법이 없으니까 지금 이러는 거 아냐.” 김수현이 갑갑하다는 듯 말하자, 제갈 해솔은 “음~.” 신음을 흘리며 장난 반 고민 반 섞인 표정을 짓는다. 한쪽 눈을 살짝 뜬 채 턱을 만지작거리는 게,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러더니 곧 총총히 걸어가면서 가까이 오라는 듯 손을 까딱까딱. 그러나 김수현이 눈을 크게 부라리자 얼른 깨금발을 들어 속닥속닥 귓속말을 건넨다. 잠시 후. “너…?” 김수현이 두 눈을 치뜨며 옆을 돌아본다. “왠지…. 클랜 로드는 알고 있을 것 같아서요?” 제갈 해솔은 싱긋 웃으면서 스리슬쩍 걸음을 물렸다. 그리고 안솔의 팔을 붙잡으면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우리는 이만 돌아갈게요?” 기껏 물었으나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허나 김수현의 얼굴에는 어느새 당혹과 고민이 섞인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과연 무슨 말을 들었길래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안솔은 울음을 그치면서 의아히 두 명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제갈 해솔은 그저 싱긋 웃고서는 안솔의 팔을 잡은 채로 망설임 없이 공간 이동을 사용했다. 어쨌든 안솔이 결심을 돌리게 하는데 실패한 이상, 이제 남은 건 김수현의 선택뿐이었다. 결국 안솔과 제갈 해솔은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마력이 터지는 소리가 여운처럼 맴도는 방안에는 도로 두 명만이 남게 됐다. 하승우는 넋 나간 듯한 눈동자로 질렸다는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언뜻 시선을 올린 김수현이 지그시 하승우를 바라본다. 김수현은 한참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하승우.” “……?” “너한테 몇 가지 추가로 질문하고 싶은 게 있는데.” “…질문?” 하승우는 잠시 갸웃하기는 했지만, 곧 아무래도 좋다는 듯 어깨를 들먹였다. 반응을 확인한 김수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질문이 조금 의외인 걸까. 말을 들은 순간, 하승우의 담담한 낯에 의아한 빛이 서렸다. 그러나 여전히 기우뚱하면서도 김수현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했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는 없었고, 하승윤의 안전을 확보한 이상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였다. 그리하여 모든 질문을 끝마친 후, 김수현이 숨을 길게 흘리면서 끄덕끄덕 머리를 주억인다. 정작 하승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런가. 설마 거짓말은 아니겠지?” “거짓말은 무슨….” “방금 그 말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후회? 아니. 갑자기 그 질문은 왜….” “좋아. 살려주도록 하지.” “……!” 그 순간, 김수현은 강렬한 어조로 뱉어버리듯이 말했다. 뜬금없는 선언에 하승우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말았다.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물밀 듯이 차오른다. “나를…. 살려주겠다고? 정말로?” “그래. 단, 조건이 하나 있다.” 김수현은 확언 후 조건이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두어 발짝 걸음을 옮겨 하승우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너는 살 수 있어. 지금 이 순간부터 과거에서 벗어나고, 하승윤과 같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게 되는 거야.” “……?” “말해. 조건을 받아들이겠나?” “그게….” 무슨 조건이냐고 묻고 싶었으나 하승우는 반사적으로 입을 닫았다.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증오와 혐오가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차마 그 눈빛과 마주할 수 없어, 하승우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깔고 말았다. 어쨌든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데, 여동생과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는데. 하승우도 사람인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무슨 조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받아들이겠다.” “좋아. 그럼….” 그 순간이었다. 서걱. 김수현의 무검이 꿈틀 움직이더니 하승우의 목을 단칼에 잘라냈다. 목은 허무하리만치 몸과 분리됐고, 하승우는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대로 절명했다. ‘억.’ 소리도 나오지 않을 정도의 깔끔한 일격이었다. 김수현은 데굴데굴 구르는 머리를 확인한 후, 잘린 목의 단면에서 꼴꼴 흘러나오는 핏줄기를 무심한 눈으로 응시했다. 잠시 후. 하승우의 몸이 풀썩 허물어지는 걸 마지막으로, ‘결정의 밤’ 무대의 막이 내렸다. * 새벽, 해가 하늘에 떠오르고 햇살을 비추기 시작하자 도시 곳곳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바쁜 장소를 꼽으라면 아무래도 신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탐험 보고다, 소환의 방 호출이다 등등 아침 댓바람부터 볼 일이 있는 사용자가 부지기수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신전에 거주하는 ‘권한’을 부여 받은 거주민이나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사용자는 새벽부터 일어나 부지런히 준비해야만 했다. 그렇게 정신 없이 바쁜 와중, 아침 무렵 두 명의 사내가 뚜벅뚜벅 신전 내부로 걸어 들어왔다. 아직 거리가 멀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한 명은 칠흑색 머리카락에 도복을 입은 사내였고, 다른 한 명은 은회색 머리카락에 로브를 걸친 사내였다. 막 한 무리 사용자를 안내한 여인은 한숨을 흘리면서도 미소 띤 얼굴로 두 사내를 맞이했다. ‘권한’을 부여 받은 처지라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거주민일 뿐이다. 사용자와 척을 져서는 조금도 좋을 게 없었다. “어서 오세요. 무슨 일로 오셨나요?” “계약서를 작성하러 왔습니다.” 칠흑색 머리카락의 사내가 말했다. “계약서요?” “예. 계약서는 여기.” 미리 작성해왔는지 바로 계약서를 내민다. 빠른 일 처리는 환영하는 바이나, ‘권한’의 영향이 들어가는 신전을 통한 계약 공증은 가볍게 볼 수만은 없는 일이다. 애초 흔한 일도 아니었고. 여인은 한층 진지해진 얼굴로 조심스레 계약서를 받아 들었다. “권한을 부여 받은 거주민이신가요?” “네. 그렇기는 한데….” 여인은 건성으로 말하면서 계약서를 살폈다. 『계약서.』 1. 하승우는 무조건 김수현의 말에 복종한다.(이하 김수현을 A, 하승우를 B라 칭한다.) 2. B는 A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고, 무조건 진실만을 말한다. 3. B는 어떤 행동 및 방식으로든 A의 클랜의 누구에게든 해를 가할 수 없다. 4. B는 어떤 행동 및 방식으로든 A가 활동하는 대륙에 해를 가할 수 없다. 5. 그러나 A의 허락이 있을 경우, 3번과 4번의 조항은 예외로 한다. 간단히 적혀 있는 5개의 조항. 그러나 내용은 전혀 간단하지 않다. “이건….” 살그머니 시선을 올린 여인은 말을 건넨 사내의 옆을 응시했다. “…노예 계약이잖아요. 동의하신 거예요?” “…예.” 은회색 머리카락의 사내는 마지못해 말하는 티를 풀풀 풍기면서 쓰게 웃었다. 그러자 여인의 표정이 오묘하게 이지러지면서 어깨를 들먹인다. “에…. 뭐. 동의하신다니까 할 말은 없는데. 이거 제가 권한으로 공증해봤자 별로 효력은 없어요?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용자와 거주민 혹은 기타 등등이라면 몰라도, 사용자와 사용자 사이에는 제 권한보다 설정의 보호가 우선되기 때문에….” “아아. 알고 있습니다. 무얼 우려하시는 잘 알고 있어요.” 설명이 길어질 낌새를 느꼈는지 도복을 입은 사내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걸 알고 있으시면서 계약을 하시겠다고요?” 말이 끊긴 게 자못 불쾌했는지 여인의 조금은 뾰족해진 음성으로 반문했다. “예.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말하는 동시에 사내의 눈이 흘끗 옆을 흘겼다. 그리고 한쪽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사내는…. 오늘 새벽 부로 거주민이 됐으니까요.” ============================ 작품 후기 ============================ 여러분 모두 오랜만이에요~. ‘- ^* 0727 / 0933 ---------------------------------------------- 핏물 속에서 피는 꽃. “거주민이라고요?” 거주민은 하승우를 보면서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나 곧 입맛을 다시고는, “저는 분명히 말렸어요. 사용자 님이 요청하신 겁니다.” 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계약서를 똑바로 잡는다.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는 만큼, 여인은 아마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여긴 듯싶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좋다. 신전에 종사하는 거주민은 같은 거주민에 관련한 계약은 굉장히 까다롭게 처리하면서도, 사용자와 관련한 계약에서는 훨씬 관대하다. 더욱이 이런 소 도시의 신전은 항상 금화에 쪼들리는 터라, 오래간만에 굴러온 좋은 건수를 놓치기 싫을 것이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사실 이렇게 돌파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이 방법을 떠올릴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제갈 해솔 덕분이었다. 문득 어젯밤의 귓속말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니까…. 간단하잖아요. 클랜 로드와 비비앙의 관계를 생각해보세요.’ ‘주인과 노예의 관계. 이번에도 그렇게 하면 되잖아요?’ ‘아. 물론 하승우가 사용자이기는 하죠. 하지만….’ ‘클랜 로드라면 왠지 방법을 알고 있을 것 같은데?’ 그저 나와 안솔의 충돌을 수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을 뿐, 제갈 해솔이 완벽한 해답을 제시해준 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지막 말이 조금 의미심장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냥 던진 말일 수도 있고, 아니면 천사한테 질문을 잘해서 스스로 유추했을 가능성도 있다. 내가 2회 차에서 서약을 걸고 확인했듯이 말이다. 아무튼, 확실히 방법은 있었다. 사망한 사용자를 소원으로 되살려낼 시, 사용자는 더 이상 설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거주민으로 부활하게 된다. 나는 바로 이 점을 노려 어젯밤 하승우를 살해한 후 그 길로 소환의 방으로 이동해 소원을 사용했다. 100만 골드 포인트를 소비하기는 했으나 이상하게 손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잠시 후, 빛이 번쩍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여인이 계약서를 탈탈 털었다. 주변으로 환한 빛무리가 점점이 흩날린다. “이로써 계약의 공증은 완료됐어요. 그러나 기록된 내용이 너무 무거운 터라, 계약서의 값은 만만치…?” 품에서 보석을 한 움큼 꺼내자, 여인은 서서히 말끝을 흐리더니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렸다. 보석은 5개밖에 꺼내지 않았으나 하나같이 알이 굵으면서 진한 빛을 분사하고 있었다. 개당 못해도 4, 500 금화는 받을 수 있는 질 좋은 보석이다. 비비앙 때는 약 800 금화 정도가 들었으니 이 정도면 차고 넘칠 것이다. “거스름돈은 됐습니다. 기부하는 셈 치죠.” “어, 어흠.” 여인은 어색이 헛기침하면서도 얼른 손을 뻗어 보석을 휩쓸었다. 그리고 한층 얌전해진 태도로 계약서를 건네주기까지. 이래서 금화가 많으면 좋다니까. 아무튼, 그럼 계약서의 효력이나 한 번 시험해볼까? 히죽히죽 웃으면서 몸을 돌리자 나라 잃은 표정을 짓고 있는 하승우가 보였다. 눈을 마주치자 흠칫 몸을 움츠린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계약서의 이름으로 명하오니…. 웃어봐.” “하하, 하하.” 하승우는 정말로 웃었다. 계약서가 확실하게 발동됐다는 방증이기는 하나 억지로 웃는 것일 수도 있다. 무미건조하게 웃는 게 썩 재미있지는 않고. 조금 더 확인해볼 요량으로 나는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최대한 방정맞게 웃어봐.” “우헤헤헤, 우헤헤헤!” “매우 구슬프게 울어봐.” “어허허헝!” “음. 좋네. 현재 기분이 어때?” “…굉장히 좆 같다.” 복제 능력자라서 그런 걸까. 하승우는 내가 요구하는 대로 적합한 표정을 보여주더니, 종래에는 낯을 딱딱히 굳혔다. 하기야 애초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노예가 됐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만무할 것이다. 나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몸을 돌렸다. 볼 일을 마쳤으니 나가야지 않겠는가. 그나저나 조금은 아쉽다. 하승우가 여인이었으면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볼 텐데 말이지. 밖은 상쾌한 아침 햇살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 큰 고민을 해결해서인지는 몰라도 덩달아 기분이 상큼해진다. 흥얼흥얼 계단을 내려가면서 나는 조용히 말을 걸었다. “배고프지 않나?” “응?” “이왕 북 대륙까지 온 거, 식사라도 하고 가는 게 어때?” “…….” 나름 호의를 담아 건넨 말이었다. 그러나 죽상을 한 채 따라오던 하승우는 잠시 묘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아니, 아니다.” 하승우는 시선을 돌리며 말을 회피했다. 빙긋 웃은 후 일부러 소리가 나도록 계약서를 흔들자 대번에 표정이 일그러진다. “빌어먹을! 너라는 놈이 조금 무서워졌다!” 그리고 하승우는, 조금 의외의 말을 꺼냈다. “무섭다고?” “그래. 꼭 정신병자 같다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종잡을 수 없다고 느꼈으니까.” “……?” “처음에는 강력한 지도력의 클랜 로드. 어제는 냉혹한 살인마. 오늘은 친근한 친구. 내일은 또 무슨 모습을 보일까 궁금해져서 말이야. 도대체 어느 게 진짜 네 모습이지?” “…그건 너도 만만치 않잖아?” 아니. 사실은 알고 있다. 애초 하승우는 사용자 정보상 그렇게 할 수밖에 없거니와, 무슨 의도로 이처럼 말했는지도 알 것 같다. 그냥 갑자기 가슴이 쿡 찔리는 기분이 들어서 반사적으로 말을 돌렸을 뿐이다. 하승우는 한동안 나를 노려보더니 한숨을 흘리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 푸른 산맥. 부랑자 척살 조. “방금 클랜으로부터 통신이 왔다. 부랑자 놈들의 근거지를 정확히 알아냈다는 연락이야.” “근거지를 정확하게 알아냈다고요?” 우정민이 모두를 모아놓고 입을 열자 남다은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반문했다. “추정이라면 몰라도, 어떻게 정확히 알아냈다는 거죠?” “저도 자세한 사정은 모릅니다. 클랜 로드와 중앙 관리 기구 사이 계속해서 부랑자에 관한 처리가 논의됐다는 정도만….” 공적으로 말할 때는 편의상 말을 놓지만, 개인을 대상으로 말할 때는 말투가 달라진다. ‘검후’라는 명성은 우정민의 입장에서 함부로 대할 정도로 녹록하지가 않다. 여하튼 우정민도 그냥 들은 말을 전하는 입장이라 서서히 말끝을 흐렸다. 남다은의 차가운 얼굴에 이상하다는 기색이 떠오른다. “누구한테 말을 들으셨는데요?” “그림자 여왕 님이 연락하셨습니다.” “언니가? 언니 말씀이라면…. 흠. 우선은 알겠어요.” “예. 그럼….” ‘그림자 여왕’의 전언이라는 말은 확실히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 대단한 ‘검후’도 대번에 납득하고 물러났으니까. 이윽고 우정민은 모두에게 상세한 계획을 설명하고, 작전 지시까지 완료했다. “응. 좋아 좋아. 이 정도면 완전히 누워서 떡 치기지!” 어디서 주워들은 말은 잘못 말한 비비앙은 히히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야, 이거 완전히 꿀인데? 나 이러다 곧 EX 등급 되는 거 아니야? 우효효효!” 까르르 웃으면서 주변을 둘러보는 비비앙. 그러나 웃음은 곧 사그라졌다. 사실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추적 및 척살은 원래 상당히 까다로운 임무다. 특히 상대가 부랑자라면 더더욱. 물론 성공 보상은 어마어마하겠지만, 그만큼 실패 가능성도 높은 일이다. 그런데 의외의 도움으로 일이 쉽게 풀렸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확실히 척살 조원은 기뻐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명은 감정의 방향이 아주 약간 다르다. 특히 남다은, 우정민, 선유운, 원혜수, 진수현. 이 5명은 눈빛을 싸늘하게 번들거리면서 진득한 살기를 뭉클뭉클 흘려내는 중이었다. 일이 쉽게 풀리는걸 기뻐한다기보다는, 꼭 고대하던 살인을 앞둔 살인마의 모습과도 같다. 그 기세에 눌린 비비앙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 우정민은 담담히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출발 지시를 내리기 전, 칼자루를 쥔 손을 꼼지락거리는 진수현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진수현.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지.” * 신 대륙 아틀란타. 머셔너리 캐슬. “오빠오빠. 믿어져? 우리도 이제 머셔너리 클랜원이야. 응?” 하승윤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호들갑을 떨면서 붙잡은 어깨를 흔들었다. “내일 정식 가입 절차가 끝나면, 가슴에 붉은 문양을 그릴 수 있게 된다고! 듣고 있어?” “드, 듣고 있어.” 전후 방향으로 몸이 세차게 흔들리는 와중에도 하승우는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사실 듣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 하승우는 생글생글 웃는 여동생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흘렸다. 간밤에 험한 꼴을 겪은 처지로서, 친 오빠의 걱정은커녕 자신이 할 말만 줄줄 늘어놓는 태도를 보니 얄밉다는 생각이 가시지를 않는다. 그러나 신 나게 수다를 떠는 모습을 보니 하승우의 입가에도 알 듯 말 듯한 미소가 자리 잡는다. 그렇게 하승윤을 응시하는 하승우의 머릿속에서 돌연 어젯밤 일이 떠오른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김수현이 갑자기 던졌던 추가 질문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에 관해서 생각해봤나?’ ‘응?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처음에는 뜬금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죽이네 살리네 말이 많더니 갑자기 귀환에 관해서 생각해봤느냐고? ‘그러면, 만에 하나 집으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돌아가겠나?’ ‘음. 아니? 별로?’ ‘…왜지?’ ‘이 세상에 마음에 드니까. 왜냐고? 깔끔하잖아. 모든 것이 힘의 논리로 정리되는 세상. 별 볼 일 없던 현대와 비교하면 천국이지. 너는 안 그러나?’ 그러나 하승우는 성실하게 말했다. 아니. 사실 그때는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던 터라, 그냥 홀가분하게 나오는 대로 말했다고나 할까. ‘고작 그 이유로?’ ‘고작? 글쎄.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나는 지금 스스로를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한 명의 사용자로 변했다고 생각하거든.’ ‘…….’ ‘그런데 덜렁 돌아가 봤자 적응이나 할 수 있겠어? 그 딱딱한,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미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아.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야.’ 거기서 김수현은 돌연히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왜 그런 표정을 지었을까 고민하면서, 하승우는 그때의 기억을 천천히 곱씹었다. 회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럼 네 동생은?’ ‘동생? 승윤이?’ ‘친동생이잖아. 우연히 만났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지?’ ‘처음 만났을 때라….’ 문득 하승우는 정면을 응시했다. “그래서 공식 절차를 밟으면 다음에는 우리 등급을 결정하는 절차가 있거든? 거기서….” 하승윤은 여전히 화색 가득한 얼굴로 수다를 떨고 있다. 자신의 연기와는 다른,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때 묻지 않은 미소였다. 구르고 구른 사용자가 아니라, 항상 밝게 웃으면서 활기차게 생활한, 아직은 현대의 흔적이 남아 있는 모습이다. ‘사실, 엄청나게 큰 충격을 받았지. 머리를 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어. 나를 숨겨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허겁지겁 달려가서 외쳤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 네가 왜 여기 있느냐고. 하하….’ ‘…아까와는 말이 조금 다른데.’ ‘응? 아아. 아까는 내 입장이고, 승윤이 입장에서 말하라면 다를 수밖에 없지.’ ‘그러면, 기회가 오면 동생은 돌려보내겠다는 건가?’ ‘어지간하면 그러고 싶어. 나야 이 목숨을 내놓고 활동해야 하는 세상을 즐기겠지만, 승윤이는…. 아직은, 아직은 아니거든. 무엇보다 불안해 죽겠다고. 나는 친 오빠잖아? 물론 돌려보내면 그립기는 하겠지만, 하루하루 마음 졸이면서 사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애초 자기 앞가림은 잘하는 애니까.’ ‘…그런가.’ 그때였다. “아 오빠! 내 말 듣고 있어?” 탕, 책상을 세게 치는 소리에 이어서 하승윤이 얼굴이 가까워졌다. 반사적으로 상념에서 헤어나온 하승우는 눈동자를 빙그르르 돌리면서 머리를 회전했다. 중간중간 들었던 말이 뭐였더라? “아. 그러니까 등급 결정에 관해서였지?” “…듣고 있었네?” 하승우는 간신히 떠올리는 데 성공했고, 하승윤은 빙긋 웃으면서 도로 자리에 앉았다. “아무튼, 신입은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C 등급이 상한선이래.” “그래?” “응. 기여도 부분이 딸린다니까 어쩔 수 없지. 그러니까 조만간 등급을 결정하는 날이 오면, 전력을 다해서 C 등급을 받을 거야.” “어떻게?” 별생각 없는 물음이었으나 하승윤이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냈다. 하승우는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무언가 질문을 잘못한 것 같았다. “어떻게는? 설명 안 들었어? 클랜 로드가 실력을 증명하면 된다고 말씀하셨잖아. 한 명 골라잡아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면 그에 맞는 등급을 주겠다고. 그게 싫으면 그냥 F 등급부터 시작하라고.” …알 리가 없다. 간밤에 설명은커녕, 목이 한 번 달아난 처지인데 뭘 알겠는가. 그러나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하승윤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오빠는 조금 안됐다. 머셔너리 마법사들 수준이 장난 아니잖아.” “그러는 너는? 머셔너리는 근접 계열 수준도 얕볼 수준은 아닐걸.” “나는 괜찮아. 이미 정해둔 상대가 있거든.” “누구?” “이름은 모르고, 그때 식당에서 오빠한테 성질 부렸던 사용자.” “아. 그 붉은 머리카락? 이야, 복수해주는 거야?” 하승우는 잘 넘어갔다고 안도하면서 장난스레 맞장구를 쳤다. 하승윤은 싱겁게 웃었다. “복수보다는…. 상대로 딱 알맞아. 레어 클래스라고는 하지만 나랑 같은 용병 범주라고 하고. 또 양손 단검을 사용하고. 이래저래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아서.” 하승윤은 깍지 낀 손으로 기지개를 켜면서 눈을 날카로이 빛냈다. 자신감 넘치는 태도였다. ============================ 작품 후기 ============================ 으흠. 코멘트는 즐겁게 봤습니다. 이 상황을 미리 예견하신 분께는 박수를 보내고 싶네요. 사실 처음부터 이 점을 노리고 최대한 꼬았거든요. 그런데도 알아차리셨다면 정말 매의 눈을 가지신 것 같아요~. 그리고. 엘사이스 / 소설 제목이 나오기 시작한다는 건 끝이 오고 있다는 건가요? ㅜ ㅋ 네. 맞습니다. 예리하시네요. 사실 이번 회에도 하이라이트 이후 결말 부분에 관한 떡밥을 뿌렸지요. 하하. 아무튼, 정확히는 완결을 위한 준비라고 보시면 될 것 같네요. 이번 부랑자도 그렇고, 하나하나 정리해나가고 있는 게 느껴졌으면 좋겠습니다. :) 아차. 그리고 오늘이 수능이지요? 독자 분들 중에 수험생 분들이 많으시리라 생각됩니다. 특히 저와 쪽지를 주고받으신 분들 중에도 재수 종합만 학원에 다니시는 분, 기숙사 학원에 다니시는 분도 계시고요. 제 기도가 도움이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수능에서 좋은 결과를 얻으시기를 바라요. 부디 안솔의 행운이 깃드시기를! :D PS. 쪽지는 제가 차근차근 답신을 드리고 있습니다. 지금 너~무 많이 쌓여서 시간이 지체되고 있어요.(분명 저번 주에 한 자릿수로 떨어트렸는데, 왜 오늘 확인하니 또 20 통이 넘는 걸까요? ^_ㅠ) 아무튼, 늦어도 이번 주 안으로는 답신을 드릴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0728 / 0933 ---------------------------------------------- 핏물 속에서 피는 꽃. 어둠이 한층 옅어진 동녘 하늘에는 어느새 어스름한 동이 트고 있었다. 해는 눈치를 보듯 살금살금 올라오며 희미한 햇빛을 뿌렸고, 햇살을 받은 수풀도 살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조심스레 찾아오는 푸른 산맥의 아침 풍경은 고요하면서 아름다웠다. 사사사삭! 사사사삭! 그렇게 빛이 차츰차츰 산맥 전역을 아우를 즈음, 문득 들려오는 이상한 소음. 소리를 들은 걸까. 산맥 내, 수풀을 깔고 앉아 꾸벅꾸벅 머리를 꺼트리던 웬 사내가 흠칫 몸을 움츠렸다. 로브를 깊숙이 눌러쓴 터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드러난 턱 선에는 듬성듬성 자란 수염과 더러운 자국이 묻어 있는 걸 보면, 며칠 동안 씻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윽고 입이 늘어져라 하품한 사내는, 졸음 가득한 눈을 좌우로 천천히 돌렸다. 무언가를 찾는다기보다는 그냥 익숙함에서 나온 반사적인 행동처럼 보였다. 사사사삭! 사사사삭! 그러나 그 순간, 느릿하게 돌아가던 사내의 머리가 갑자기 정지했다. 눈동자에서 졸음이 사라지고 묘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마치 소리라도 날까 조용히 후드를 움켜 벗어 젖힌 사내는 신중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낯빛은, 곧 딱딱하게 굳었다. 사사사삭, 먼발치의 수풀이 빠르게 흔들리고 있다.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무언가 거뭇거뭇한 것들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다. 흡사 이대로 사내를 덮쳐 누르기라도 할 것처럼, 우거진 수풀을 일직선으로 헤치며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려온다. 웅웅웅웅웅웅웅웅! 그리고 들려오는 마력이 울리는 소리. 미리 설치한 마법 진이 누군가 침입했다는 경고를 보내는 소리였다. 진동은 사방에서 울려오고 있었다. “침입이다! 침입이다!” “이런 쌍!” 사내의 외침과 동굴 안 부랑자들이 욕설을 뱉으면서 잠에서 깨어난 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침입이라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경계조에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척살 조가 아니라 괴물의 습격이라고 합니다!” 누군가 황급히 외치자 두툼한 뱃살의 털북숭이 사내가 잔뜩 인상을 썼다. “옌장, 괴물의 습격? 엿 같구먼!” 척살 조가 아니라고는 하나, 절대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푸른 산맥에 출현하는 괴물은 대부분이 무리 지어 다니는 습성이 있다. 막말로 죽음의 기사와 리치로 이루어진 군단이나 반시 무리가 습격하는 날에는, 사내의 말대로 엿 같은 상황이 돼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기습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뜻밖에도 동굴 안은 난리까지는 아니었다. 모든 인원이 신속하게 움직이면서 동굴을 뜰 준비를 하고 있다. 매우 빠른 대응이었다. 이런 상황을 몇 번이나 겪어본 것처럼 익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느 쪽에서 오고 있지?” “북쪽에서 몰려오고 있습니다!” 이윽고 200명에 달하는 부랑자는 우르르 동굴을 벗어나 남하를 시작했다. 부랑자는 척살 조를 상대로 도망칠 때 각각 사방으로 도망친다는 철칙이 있다. 그러나 괴물이 습격했을 시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괴물의 습격은 우발적인 상황일 가능성이 높으니, 그냥 최대한 빠르게 장소에서 벗어나면 그만이니까. 미리 봐둔 도주로에 진입했을 때만 해도 부랑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 이상함을 느낀 건, 자신들이 가야 할 도주로에 웬 열댓 명의 사용자가 학익진의 형태로 넓게 포진한 광경을 확인했을 때였다. 그것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반사적으로 도주를 멈춘 부랑자 무리 사이로 심상찮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그리고 가장 선두에서 도망치던 ‘배신자’ 이강산은 와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동안 부랑자로 오래 굴러먹은 경험이 본능적으로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아직 자세한 전후 사정까지는 모르나 무언가 당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 미친….” “저, 저거…. 머셔너리 아니야?” 서서히 기겁하는 소리가 터지기 시작했다. 길을 가로막은 사용자들의 가슴에 그려진 붉은 문양을 확인한 것이다. 칼과 방패. 두 번 볼 것도 없다. 가장 악명 높다는 머셔너리 척살 조가 부랑자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소란이 한층 심해지자 이강산은 거대한 검을 치켜들며 악을 썼다. “빌어먹을, 정신 차려라! 끽해야 열댓 명밖에 안 되잖아!”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머셔너리 척살 조는 14명. 그에 반해 부랑자는 약 200명. 게다가 간부급 부랑자들이 포함된, 나름 정예라고 할 수 있다. 끊임없는 이어져 온 투쟁에서 살아남은 역전의 실력자들이다. 이강산의 외침에 조금은 해볼 만하다고 여겼는지, 어수선하던 부랑자들이 한 명 두 명 정신을 차리더니 각자 무기를 꺼내 들어 전방으로 겨눴다. 무법자보다는 부랑자의 수준이 높다는 걸 엿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기습적인 상황을 맞이하고도 우왕좌왕하지 않고, 자신들이 해야 할 행동을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간신히 진정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강산은 여전히 불안감을 지우지 못했다. 아니. 학익진의 중앙에 서 있는 여인을 보니 오히려 더욱 증폭되는 기분을 느꼈다. 이강산은 저 여인이 누군지 알고 있다. ‘검후’ 남다은. 아까부터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채 부랑자들을 느긋이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이.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후방에서는 아직도 괴물들이 몰려오고 있다. 작금의 상황에서 가장 좋은 경우는 사용자, 부랑자, 괴물이 섞여 혼전을 벌이는 것이다. 그 틈을 타면 몰래 도망칠 수 있는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리라. 그렇게 생각한 이강산은 칼끝으로 정면을 겨누며 괴성을 질렀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부랑자들도 앞다투어 고함을 지르며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랑자들은 과연 알고 있을까. 지금 후방에서 달려오는 괴물 무리는 푸른 산맥이 아닌, 비비앙이 소환한 마수 군단이라는 사실을. 현재 자신들이 앞뒤로 완벽하게 포위됐다는 사실을. 그리고 어느새 발아래 어두운 연기가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을. “오라! 피에르! 제 4 군단을 지배하는 미친 불꽃의 어릿광대여!” 이윽고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낭랑한 목소리가 사방을 쩌렁쩌렁 울렸다. 잠시 후. - 후헤헤헤, 후헤헤헤! - 히히히히, 히히히히! 기괴한 소음이 호응하는걸 시작으로, 푸른 산맥에 때아닌 사냥철이 도래했다. * 부랑자 섬멸! 머셔너리 클랜에서 대규모 부랑자를 섬멸하는 데 성공했다. 거기다 단 한 명의 전상자 없이, 주요 부랑자 수십 명을 포로로 잡는 데 성공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다. 근래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는 와중 갑자기 커다란 사건이 들이닥쳤는데, 어찌 들불처럼 번지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특히 부랑자와 관련한 소식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소문은 북 대륙을 넘어서 아틀란타까지 쫙 퍼졌다. 사용자들의 반응은 당연히 폭발적이었다. 어찌나 기뻐했는지, 척살 조가 아틀란타로 돌아온 날 워프 게이트 인근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정도였다. 모두가 정말로 부랑자 무리를 잡았는지 보려 아우성을 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몸이 꽁꽁 포박된 수십 명의 부랑자 무리를 확인했을 때, 도시에서는 크나큰 환성이 터졌다. 꼴 좋다고 손뼉을 치는 사람, 원수라도 봤는지 고래고래 욕설을 지르는 사람, 이제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 있겠다면서 안도하는 사람, 믿을 수 없다며 호들갑을 떠는 사람 등등. 실로 다양한 반응이었다. 물론 이것만으로 그동안 지긋지긋하게 이어져 온 악연의 고리가 완전히 끊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부랑자는 또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고, 혹은 사용자 틈에 섞여 있을 가능성도 있다. 말인즉 아주 완전하게 뿌리 뽑지는 못했다고나 할까. 그래도 대단하다. 수뇌부를 이렇게나 한꺼번에 잡은 사례는 여태껏 한 번도 없었다. ‘배신자’ 이강산을 비롯해 주요 간부를 깡그리 잡았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엄청난 성과였다. 그동안 여러 계획으로 하나하나 사지를 잘라냈다면, 이번에는 머리통을 부쉈다는 표현이 적절하리라. 이제 남은 부랑자를 솎아내는 작업은 시간 문제였다. 그리하여 도시가 갑자기 축제 분위기에 젖어들 즈음. 중앙 관리 기구에 부랑자 인도를 마친 척살 조는 머셔너리를 연호하는 사용자들을 헤치고 캐슬로 돌아왔다. 이미 지속해서 연락을 받고 있던 터라, 나는 1층 회의장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잠시 후. 14명의 클랜원은 하나같이 당당한 걸음으로 정연히 걸어 들어왔다. 좌우로 늘어선, 나와 같이 기다리고 있던 클랜원 모두가 박수를 보냈다. 심지어 고연주까지도 활짝 웃는 얼굴로 손뼉을 치고 있었다. 그 정도로 이번 성과가 대단하다는 소리였다. 이윽고 회의장 중앙에서 걸음을 멈춘 우정민이 살짝 머리를 숙였다. “사용자 우정민 외 13명,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귀환했습니다.” “연락은 이미 받았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바로 화답하며 척살 조원을 쓱 훑었다. 남다은, 우정민, 선유운, 진수현. 네 명은 예전보다 얼굴이 훨씬 밝아져 있었다. 누가 복수는 후회만을 남긴다고 했던가. 저리도 달콤한 기색에 취해 서 있는데. 나로서도 여러모로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번 사건으로 우정민을 비롯한 척살 조의 명성이 크게 올랐다. 당연하지만 거기에 내 이름은 없다. 즉 내가 없어도 머셔너리가 이 정도의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걸 증명해준 것이다. 개인에 한해서이기는 하지만, 내가 아는 사용자가 조금씩이나마 1회 차의 모습을 찾아간다는 사실은 분명한 희소식이었다. “그냥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연이은 축하에 우정민은 겸양하면서 흘끗 나를 쳐다봤다. 물론 이번에는 하승우라는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끼어들기는 했다. 엄밀히 말해서 어느 정도 받아먹었다는 느낌도 있고. 하지만 그걸 고려하고서라도 드러난 결과는 변함이 없다. 밥상을 차려주기는 했지만 잘 받아먹는 것도 능력 아니겠는가. 이러나저러나, 척살 조가 시작을 아주 잘 끊어줬다. 나는 위험을 감수하고 거센 변화를 일으켰고, 폭풍과도 같던 변화의 바람이 이번 성공을 기점으로 서서히 잦아드리라 확신했다. 그렇게 치하가 끝난 후, 나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임무 성공의 보상을 발표했다. C 등급 이하의 클랜원에게는 무조건 1등급 특진을, B 등급 이상의 클랜원에게는 만족할만한 실적을 쌓아주었다. 약간 파격적인 감은 없잖아 있었으나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이번 임무 성공이 지니는 값어치가 그 정도로 엄청났기 때문이다. 보통 임무 3, 40개를 달성하는 것보다 훨씬 값진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부랑자 사건이 처리된 다음날, 걱정했던 안현도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이후. 내게도 하나의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나와 함께 통과의례를 시작한 애들의 사용자 정보에 미약한 변화가 생겼다. 연차가 상승했다. 어느새 3년 차에서 벗어나 4년 차 사용자가 된 것이다. 나로서는 실질적으로 맞이하는 햇수로는 14년째였다. ============================ 작품 후기 ============================ 이제 서서히 안정기에 접어들어야죠. 물론 그 전에 큰 산을 하나 넘어야 합니다. 예상외로 많은 사랑을 받는 우리 이유정의 고난이 있겠죠. 하하하. 그리고 가끔 몇몇 분이 오해하시는데, 저는 이유정을 미워하지 않아요. 오히려 좋아합니다. 정말이에요. :) 이유정 : 그럼 나 좀 적당히 굴리지? 로유진 : 미안. 이유정 : 뭐가 미안한데? 로유진 : 너 앞으로 3번은 더 굴러야 해. 정확히 3번입니다. 예. 아주 나락까지…. 그래도 이번 고난을 잘 견뎌내면 이유정도 한층 성숙한 사용자가 되겠지요. 사실 성숙한 이유정을 얼른 그리고 싶네요. 아 좋잖아요. 빨간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예쁘장한 얼굴, 섹시한 몸매. 으흐흐(?) 그리고 이유정이 지금 이렇게 당하고는 있지만, 차후 김수현에게 모두 복수하게 만들 예정입니다. 아. 어떻게 복수하냐고요? 가령 예를 들어 집무실 책상 아래서나, 테라스에서…. 응? 아, 아닙니다. 흠흠. 0729 / 0933 ---------------------------------------------- 핏물 속에서 피는 꽃. 4년 차. 사람은 보통 숫자 4를 꺼림칙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그러나 아마 7을 행운(Lucky)의 숫자로 생각하는 것처럼, 4는 죽을 사(死)와 연관해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닐까. 아무튼, 일반적인 통념이 어떻든 개인적으로 4라는 숫자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안 씨 남매는 4년 차에 오르자 괜스레 불안하다면서 투덜거렸지만, 나는 오히려 기대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왜냐면 여태껏 1년을 주기로 좋고 나쁜 일이 번갈아 일어났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0년 차 때는 나름 즐거웠던 것 같다. 아니. 걱정이 없었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유적을 휩쓸고 클랜을 창설하는 등 폭풍처럼 비상하는 시기였으니까. 그러다 1년 차가 될 즈음 갑자기 전쟁을 겪었다. 2년 차 때 머셔너리를 중심으로 또 한 번 커다란 성장을 이뤘다면, 3년 차에서는 클랜 내부가 어지럽거나 강철 산맥 공략 등 여러 힘든 일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 4년 차가 기대된다. 매우 공교롭게도, 등급제라는 급격한 변화로 인한 어지러움도 서서히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과연 이 기세를 몰아 4년 차도 0년 차, 2년 차 때처럼 별다른 사고 없이 보낼 수 있을까? …물론 어디까지나 근거 없는 생각이지마는. 내가 4년 차로 올랐다는 사실은 그냥 혼자서만 조용히 알고 있었다. 애초 시간만 흐르면 누구나 될 수 있는 건데, 굉장한 일도 아니잖은가. 그러나 클랜원들은 어떻게 알고 나를 찾아오더니 가볍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아마 안현이나 안솔 중 한 명이 떠벌리고 다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러는 와중 고연주는 약간 의외의 말을 꺼냈다. “달링? 우리 오랜만에 축제나 한 번 해보는 게 어떨까요?” “달…. 아니, 축제요? 갑자기 웬 축제?” “갑자기는 아니죠. 그래도 우리 그동안 1년에 한 번씩은 꼭 축제를 해왔잖아요?” “흠.” “아이,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아요. 마침 분위기도 썩 괜찮잖아요? 그리고 요즘 너무 몰아붙이기만 하셨어요.” “…좋습니다.” 처음에는 머리를 갸웃했지만, 계속된 설득에 넘어가고 말았다. 마지못해 동의했다기보다는, 고연주의 말도 일리가 있다. 여태껏 모진 채찍질을 했으니 이제는 당근을 줄 때도 됐다는 소리였다. 따지고 보면 축하할 거리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고. 아니. 오히려 차고 넘치는 시기였다. 그렇게 허락해주자, 고연주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기뻐하더니 눈을 찡긋했다. “좋았어. 축제하면 이벤트죠. 그렇죠?” “적당한 선이라면 괜찮겠지요. 아무튼, 알아서 해주세요.” * 축제는 생각보다 빠르게 개최됐다. 큰 관심을 두지 않아서 어떻게 진행됐는지는 모르나, 클랜원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열렬히 호응했다는 말은 들을 수 있었다. 어느 클랜원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고 하니, 확실히 최근에 마음 놓고 쉴 거리가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고연주가 적절한 때에 좋은 조언을 해줬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오후가 됐을 즈음, 집무실로 전원 모였다는 말과 막 축제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윽고 1층으로 내려간 순간, 나는 무척 화려하게 변한 중앙 광장을 보고서 크게 놀라고 말았다. 중앙 광장은 애초 쉼터나 연결 통로 외에도 여러 용도로 사용되는 장소다. 둥근 원형의 거대한 공간에는 약 100명이 넘는 사람이 오고 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여유가 있을 정도로 넓었다. 벽에 붙은 아름다운 장식의 수정구는 휘황찬란한 빛을 번쩍였고, 한쪽에는 새하얀 천이 덮인 기다란 탁자에 먹음직스러운 음식이나 주류가 놓여 있었다. 클랜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편한 차림으로 참석해 사방팔방으로 퍼져 중앙 광장을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하녀들은 사이사이로 음식과 주류를 담은 카트를 밀고 지나가고 있다. 여태껏 해왔던 마을 축제가 아닌, 흡사 왕궁의 연회를 보는 듯한 광경이었다. 잠시 후. 내가 입장했음을 인지한 클랜원들이 하나하나 시선을 돌렸으나 나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이 좋은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즉 이대로 계속 신 나게 먹고 마시며 떠들라는 의미였다. 어차피 즐기라고 마련한 축제였고 괜히 낯 뜨거운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가령 예를 들어 ‘모두 힘냅시다!’ 라던가 ‘위하여!’ 라던가. 내 뜻을 알아들었는지, 내가 의자에 앉자마자 몇몇 클랜원은 신속히 행동을 개시했다. 비비앙은 아예 마수 군단까지 소환하는 전략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어리둥절해 하는 마수들에게 윽박질러 그릇을 하나씩 들게 한 후, 음식이 놓인 탁자 사이를 쏜살같이 누비기 시작한다. 나는 한심한 기분으로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관찰을 시작했다. 확실히 축제는 즐기는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나한테는 또 다른 기회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클랜의 상태를 살필 기회라고나 할까. 정확히 말하자면, 평소 각 클랜원이 맺은 인간 관계를 알 수 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한눈에 볼 수 있는 호기도 흔치 않다. 그리하여 우선은 새로 들어온 네 명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들은 이미 머셔너리 클랜원으로 인정받았다. 아직 등급 결정만 남았을 뿐, 일전에 회의장에서 공식적으로 승인한 상태였다. 먼저, 하승우는 굉장히 사교성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도 우정민 선유운과 잔을 부딪치면서 껄껄 웃고 있다. 저 둘은 성격상 친해지기 쉬운 타입은 아닌데, 확실히 연기 하나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기야 앞으로 계속 저렇게 연기하면서 살아야겠지만. 다음으로 하승윤은 조금 이상했다. 잔뜩 상기된 얼굴로, 숨을 하아하아 뱉으면서 누군가를 홀린 듯이 졸졸 쫓아다니고 있다. 그러니까 고연주를 따라다녔다가, 남다은을 따라다녔다가, 임한나를 따라다녔다가, 차소림을 따라다녔다가. 그러다 갑자기 두 손을 번쩍 치켜들더니 “여기는 천국이야!”라고 외치기까지. 갑자기 병신같이 보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크게 이상하지는 않다는 생각에 이만 관심을 끄기로 했다. 그럼 이번에는 사라나 한 번 볼까? 그때였다. “야!” 느긋이 관찰하던 와중, 돌연 거센 고함이 귓전을 왕왕 울렸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저절로 의아한 기분이 솟아올랐다. 뜻밖에도, 사라는 비비앙과 한창 말다툼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거 내가 먼저 찜 했다니까!” 무에 그리 억울한 걸까. 비비앙은 도끼눈을 뜬 채 흡사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중이었다. “내가 먼저 봤어! 그런데 네가 홀랑 뺏어간 거라고!” “왓?” 그러나 사라는 한 손에 음식 그릇을 든 채 한결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다. 비비앙과는 완전히 반대의 모습. “아 그냥 빨리 그릇이나 내놔! 내가 그거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아? 식당에서는 먹을 수도 없는 거라는 말이야!” “왓?”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으쓱 들먹이면서 연신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이 씨! 말이 안 통해! 그러니까 이걸 너네 말로 뭐라고 하지? 아, 새치기! 그래! 네가 새치기라는 아주 나쁜 짓을 한 거야! 새, 치, 기!” “버드 터치?” ……. …문득, 사라의 기색이 어딘가 천연덕스럽게 느껴졌다. “머셔너리 로드 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비비앙이 빽빽 소리를 지르는 동안, 웬 하녀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그리고 ‘주방장의 자신 작’이라고 소개한, 한눈에 봐도 맛깔스러운 음식이 담긴 그릇을 앞에 놓았다. 문득 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혹시, 저 두 명이 이 음식 때문에 싸우는 겁니까?” “네? 아…. 네.” 하녀는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원체 가진 재료도 적고, 또 워낙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라 많이 만들지 못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그제야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내가 먹을 건 따로 빼놓고 남은 음식을 탁자에 놓은 것 같은데, 그 양이 극히 적은 모양이다. 그래. 아까 왜 그렇게 후다닥 달려나가나 했다. “어? 먹어? 먹어어어? 어어어엉!” 고함은 시시각각 높아지고 있었다. 아니. 사라가 아예 작정하고 약을 올리려는 듯 손으로 날름날름 집어 먹자, 비비앙은 끝내 원통한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릇을 도로 내밀며 비비앙의 입을 닥치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하녀는 쿡쿡 웃으면서 몸을 돌렸다. 이윽고 채 5초도 지나지 않아, 비비앙의 울음 섞인 소리는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거, 검검아아….” “…입 좀 다물어라.” “고, 고마워…. 역시 너밖에….” “…….” 그릇을 받아 든 비비앙은,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나를 향해 무한 감동의 시선을 보냈다. …저 녀석. 식탐이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정말…. 그나저나 얼마나 환상적인 요리길래 저렇게 환장을 하는 걸까? 나는 한숨을 흘리면서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고, 이내 관찰을 재개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를 마지막으로 확인한 이후, 천천히 몸을 일으켜 광장으로 걸어갔다. 명색이 클랜 로드인데, 계속 앉아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물론 중간중간 말을 걸어오는 클랜원들에게 적당히 대꾸해주면서도, 관찰을 잊지는 않았다. 그렇게 개인적으로 축제를 즐기면서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면, 바로 이유정이었다. 축제에 참가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예전이라면 누구 못지 않게 떠들었을 텐데, 오늘은 고개 숙인 채로 한쪽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 그 모습이 자못 딱했는지 안 씨 남매나 임한나가 다가가기도 했지만, 이유정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0, 1년 차 병아리도 아니고, 딱히 다독여줄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나는 신경을 끄고 까르르 웃으면서 뛰어다니는 마르와 두 마리 영수를 구경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고즈넉하던 하늘은 어둑한 빛으로 서서히 물들어갔다. 시간이 흐르는 만큼 광장의 분위기도 차차 무르익어가는 게 느껴졌다. 모두 실컷 먹고 마셨으니 이제 재미난 구경거리가 등장할 때였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공교롭게도 고연주가 찾아와 슬슬 이벤트를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이벤트라 함은, 다름 아닌 새로 가입한 4명의 등급을 결정하는 것이다. 규칙은 간단하다. 중앙에 자리를 만들고, 신규 클랜원과 기존 클랜원이 가벼운 대련을 벌인다. 상대는 이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정해지며, 상대의 등급과 신규 클랜원의 전투 내용에 따라 등급이 결정된다. 물론 판단은 내가 한다. 처음에는 이걸 이벤트로 해도 되겠나 싶었지만, 생사를 건 전투가 아닌 이상 상관없지 않으냐는 말에 넘어가 승인해주었다. 겸사겸사 실력도 보고, 사실 싸움 구경만큼 흥미를 돋울만한 게 없기도 했고. 그리하여 이번 이벤트에 참가하는 인원은 두 명. 왜 두 명이냐면, 하승우는 포기를 선언했고(이런 경우는 자동으로 F 등급 명단에 올라간다.), 엘리자베스는 비 전투 사용자로 활동하는 것으로 이야기됐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사라와 하승윤만이 등급 결정전에 참가한다는 소리였다. 잠시 후. 돌연 광장 내 웅성거림이 잦아들며 클랜원들이 이동을 시작했다. 각자 벽 쪽으로 물러나며 공간을 확보해주자, 곧 금발의 여인이 천천히 중앙으로 걸어 나온다. 아마 사라가 첫 번째 타자로 나온 모양이다. - 자. 그럼 모두 조용히 해주시고. 클랜 로드의 허락도 떨어졌으니 바로 시작하도록 하죠. 이벤트 진행은 고연주가 맡기로 했다. 증폭된 음성으로 말하면서 주변을 둘러본다. 어차피 축제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맡긴(실은 떠넘긴) 터라, 나는 의자에 등을 편히 기댔다. 그리고 어디선가 비틀비틀 날아와 내 무릎에 발라당 드러누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아기 페가수스의 배를 부드러이 어루만졌다. 숨을 헐떡헐떡 내쉬는 게 이 녀석, 엄청나게 먹었나 보다. 살이 통통히 올랐어. - 마법사 클래스 중에서, 사용자 사라 제인과 대련을 희망하시는 분? “저요!”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 번쩍 손을 들었다. 누가 이렇게 패기가 좋은가 봤더니, 한 손에 잔을 쥔 제갈 해솔이 약간 붉어진 얼굴로 상큼한 미소를 짓고 있다. …아니, 잠깐만. 저게 미쳤나? - 응? 사용자 제갈 해솔…? “기각!” 나는 황급히 외쳤다. 제갈 해솔은 불만 가득한 기색을 비쳤지만, 눈을 한 번 크게 부라리자 얌전히 손을 내렸다. 얼마 만에 발견한 정통 마법사인데, 저게 아주 짓밟으려고 작정을 했나. - 그래요. 그래도 명색이 등급 결정전인데. 사용자 제갈 해솔은 아직 0년 차니까 조금 아닌 것 같고. 다른 분 없나요? “그럼 제가 해도 될까요?” 이번에는 다행히도 정하연이 나서주었다. 고연주가 돌아봐, 나는 허락한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였다. 주력으로 삼는 속성만 제외하면 서로 비슷한 성질의 마법사니 좋은 승부가 될 것이다. 이윽고 사방에서 쏟아지는 흥미로운 시선 속에서, 정하연과 사라가 마주 보며 섰다. 서로 간단한 인사를 건네고, 고연주가 카운트를 센다. - 3, 2, 1, 0! 그리고 시작된 대련은, 애초 실력 테스트가 목적이니만큼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과는 정하연의 우세한 승리. 예정된 결과였다. 확실히 사라도 강한 마법사이기는 하지만, 정하연 또한 정통 마법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사용자였다. 그뿐일까. 시크릿 클래스에 마력 능력치까지 높으니 질 리가 있겠는가. 거기다 적절한 마법 조합으로 모든 공격을 상쇄시키니 사라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래도 사라는 정하연을 상회하는 영창 능력과 화려한 불 계열 마법으로, 자신을 어필하는 데는 확실하게 성공했다. 정하연을 상대로 나름 선전한 것에 높은 점수를 매겨, 나는 최종적으로 C 등급을 부여했다. 신규로서는 받을 수 있는 최고 등급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박수를 보내는 가운데, 사라가 놀람 반 아쉬움 반으로 물러난 이후, 두 번째 타자인 하승윤이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듣기로는 오늘 이벤트를 상당히 기다리고 있었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별로 취한 얼굴도 아니었다. 아까 헬렐레하던 기색은 온데간데없고 눈동자에는 자신감이 넘치고 있다. 두 손을 벌써 허리춤에 얹어 꼼지락거리는 게, 얼른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고 싶어 안달 난 것 같은 태도였다. - 사용자 하승윤의 클래스는 용병이었죠? 그럼 용병 클래스 중에서…. 그 순간, 이제껏 익숙하게 이벤트를 진행하던 고연주가 돌연 말을 흐렸다. 무언가 실수라도 했는지 아차 한 표정을 짓는다. 용병 클래스라면 머셔너리 클랜에도 한 명밖에 없다. 그리고 그 한 명은 지금…. - 으흠. 정정할게요. 굳이 같은 용병이 아니더라도, 근접 계열 클래스라면…. 그리고 바로 말을 바꾸려고 했지만, 고연주는 이번에도 말을 끝까지 매듭짓지 못했다. 왜냐면. “…….” 여태껏 구석에서 가만히 앉아만 있던 이유정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으니까. 이윽고 푹 숙이고 있던 고개가 서서히 올라온다. ============================ 작품 후기 ============================ 후유. 간신히 아침이 넘어가기 전에 완성했네요. 조금은 자야 할 것 같아요. 그나마 주말이라서 다행이에요. 하하. 독자 분들 모두 기분 좋은 하루 시작하세요. :) 0730 / 0933 ---------------------------------------------- 핏물 속에서 피는 꽃. 이유정은 조용히 서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부스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수척한 얼굴이 드러났다. 연한 붉은빛이 감도는 눈동자가 눈앞의 상대를 지그시 응시한다. 이유정은 왼손은 허리춤으로, 오른손은 옷을 살짝 젖히더니 복부에 찍힌 주홍색 낙인에 가져다 댔다. 이윽고 형형한 빛무리가 뿜어지면서 약간 짧은 길이의 카타나가 솟아나온다. 하승윤도 스커트를 살짝 들추고는 양 허벅지에 손을 가져가 두 개의 단검을 뽑아 들었다. 연한 얼음 빛이 서려 있는, 시릴 듯한 냉기를 흘린다. 그렇게 두 여인은 흡사 약속이라도 한 듯 무기를 뽑고 서로 마주했다. 돌연 기이한 긴장감이 장내를 휩쓸었다. 나는 처음에는 무조건 말릴 생각이었다. 이유정이 전혀 득 볼 게 없는 전투였기 때문이다. ‘제 3의 눈’을 가진 나와 일반 사용자의 시선은 다르다. 클래스와 연차의 차이가 있는 이상, 누가 봐도 이유정이 우세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제 3의 눈’이 말해주는 사용자 정보는 전혀 다르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하승윤(2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용병(Normal, Mercenary, Expert) [근력 84] [내구 82] [민첩 90(+2)] [체력 88] [마력 92(+2)] [행운 78] < 특수 능력(1/1) > 1. 심안(心眼)(Rank : B Zero) < 잠재 능력(4/4) > 1. 양손 단검술(Rank : A Plus) 2. 백병전(Rank : A Minus) 3. 난전 발동(Rank : S Zero) 4. 신검합일(Rank : C Plus)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이유정(4년 차) 2. 클래스(Class) : 여명의 검투사(Rare, Gladiator Of the Dawn, Expert) [근력 83] [내구 79] [민첩 92(+2)] [체력 84] [마력 90] [행운 88] < 특수 능력(1/1) > 1. 피에 젖은 마음(Rank : A Zero) < 잠재 능력(3/4) > 1. 양손 단검술(Rank : B Plus) 2. 묘(猫) 족 체술(Rank : B Zero) 3. 백병전(Rank : C Plus) 4. – 행운을 제외하면 이유정이 우세한 건 오직 민첩 하나뿐. 근력, 내구, 체력, 마력. 그리고 특수, 잠재 능력까지 모두 하승윤이 압도하는 수준이다. ‘피에 젖은 마음’은 핏물이 난무하는 실제 상황이라면 모를까, 대련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능력이다. ‘묘 족 체술’이라는 상당히 좋은 능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심안’과 ‘신검합일’의 조합이면 충분히 대응하고도 남을 것이다. 애초 숙련도에서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단순한 호승심에서 나온 걸까, 아니면 약할 것이라 생각되는 하승윤을 상대로 분풀이하러 나온 걸까. 당최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유정의 패배는 그야말로 명약관화(明若觀火)였다. 그렇기에 나는 이번만큼은 절대로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안 그래도 자존심을 먹고 사는 이유정이 과연 패배를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더욱이 이렇게 한 명도 빠짐없이 모여 구경하는 상황에서? “잠….” 그때였다. 잠깐이라고 외치려는 찰나, 순간적으로 멈칫 입을 다물고 말았다. “…….” 잘은 모르겠다. 그냥 직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갑자기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상대를 바라보는 이유정의 눈동자는 뜻 모를 비장함을 품고 있었다. 깊은 고민을 하는 듯한 표정에는 차마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무언가가 서려 있었다. …아니. 어딘가 모르게 잔뜩 긴장한 기색이 오히려 망설이는 것 같다고나 할까? 아무튼, 하나 확실한 건 호승심이나 분풀이를 목적으로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이다. 방심하는 태도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걸 보자 한층 종잡을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고연주도 이대로 진행하는 건 무언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살그머니 나를 돌아본다. 그 순간 ‘정말 허락해도 될까.’ 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결국에는 지그시 눈을 감고 말았다. 속행하라는 신호였다. - …시작! 고연주의 신호를 기점으로, 한 여인이 폭발적으로 뛰쳐나갔다. 탁탁탁탁! 장내에 빠른 발소리가 울리고 붉은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이유정이 양팔을 크게 젖히면서 선공을 잡았다. 그러나 하승윤은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자세를 살짝 낮추면서 양손을 올렸다. 이내 푸르스름한 기운과 붉은 기운이 충돌하면서 본격적인 전투의 신호탄이 쏘아졌다. 이윽고 가벼운 폭음에 이어서 하승윤의 몸이 미끄러지듯이 밀려났다. 선공을 적절히 방어했는지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유정도 이 정도는 예상한 모양이다. 가라앉은 눈동자로 앞을 주시하면서 저돌적으로 돌격한다. 하승윤은 거리를 벌릴 생각인지 연신 걸음을 물리고, 이유정은 선공을 이어갈 생각인 듯 빠르게 따라붙는다. 물러나고 들어가는 만큼, 속도는 이유정이 더 빨랐다. 거리 안으로 들어간 순간 이유정은 갑자기 폭발적으로 가속했고, 안으로 접근하는 동시 허리를 크게 돌리면서 회전력에 카타나를 맡긴다. 바로 그 순간, 하승윤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퍽. 발차기. 이유정의 몸이 채 절반도 돌지 못하고 크게 흔들렸다. 하승윤이 기습적으로 발을 움직여 다리를 걸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대로 복부를 걷어차려고 했지만, 이유정은 비틀거리면서도 신속하게 후방으로 물러섰다. 이 움직임은 의외였는지 하승윤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하지만, 나는 혀를 찼다. 그나마 승부를 걸어볼 만한 게 저 움직임이었는데 벌써 간파 당하다니. 조금 더 확실하게 공격하겠다는 의도는 좋지만, 행동 반경이 너무 컸다. 아마 하승윤은 이유정이 갑자기 근접해올 때부터 오른쪽으로 돌아설 것을 알아챈 듯싶다. 그러니까 저렇게 여유롭게 반응하지. 결과적으로 불필요한 움직임이 돼버렸다. 이유정은 낯을 찌푸리면서도 간신히 자세를 회복했고, 그 즉시 재차 돌격해 들어갔다. 흡사 절대로 물러나지 않으려는 의지를 표출하려는 듯이. 하승윤도 이번에는 물러나지 않았다. 쌍 단검을 상단으로 세우면서 마주 짓쳐 들어갔고, 마주친 둘은 곧 화려한 난타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유정은 확실히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안현을 상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조금도 방심하지 않으면서 세찬 공격을 퍼붓는데, 하얀색과 붉은색이 검광이 삽시간에 수십 개로 불어나며 번쩍번쩍 춤을 춘다. 그러나 더욱 대단한 건 하승윤이었다.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앞쪽을 응시하는데,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춤추는 검광을 모조리 받아쳐 버린다. 상대의 공격이 훤히 보인다는 소리였다. 그러면서 살금살금 거리를 줄이는 게, 아까 이유정의 특이한 움직임을 눈여겨본 듯싶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하승윤의 허리가 차츰 앞으로 굽혀지고 이유정의 허리는 같은 방향으로 젖혀진다. 서서히 밀리는 형국. 방금 난전을 기점으로 주도권이 완벽하게 넘어갔다. 입을 질끈 깨무는 걸 보니 이유정도 스스로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그때. “히얏!” “하앗!” 하승윤과 이유정의 기합이 겹쳤다. 우직하면서 간결하게 찔러 들어가는 하승윤의 공격. 급격한 호선을 그리며 맞받아치는 이유정의 공격. 각자가 뻗어낸 회심의 일격이 중간에서 충돌한다. 이어서 동시에 나가떨어지는 둘을 보면서 나는 한숨을 흘렸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남다은이나 허준영도 비슷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방금 부분에서 승부가 완연히 갈렸음을 알아챈 것이다. 하승윤은 진정 정석의 극치였다. 물러나는 와중에도 똑바로 자세를 잡고 상대를 흔들림 없이 응시한다. 발은 벌써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 그에 반해 이유정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또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용병이 난전에서 밀렸다는 건 결국 총체적으로 부족하다는 소리였다. 이 기회를 놓치기 싫었는지, 하승윤은 빠르게 몸을 추스른 후, 바로 자세를 낮추며 비호처럼 달려들었다. 이유정의 눈을 크게 치뜨며 황급히 양손을 올렸다. 하승윤은 단검을 크게 내리치는, 처음으로 커다란 동작을 보였다. 자신이 거의 모든 부분을 웃돈다는 사실을 알아낸 이상, 더는 탐색전을 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시린 냉기를 뿜는 단검이 정수리를 쪼갤 듯한 기세로 일직선으로 내리 찍힌다. 이유정은 한순간 멍한 모습을 보였지만, 반사적으로 물러나면서 두 카타나를 교차시켰다. 카앙! 그리고 들려오는 맑은 철성. 하승윤의 단검과 이유정의 카타나가 마주 닿은 것과 동시, 세찬 불꽃이 튀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바른 자세에서 가한 공격과 간신히 성공한 방어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잠시 후, 하승윤은 힘껏 힘을 주며 이유정의 카타나를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이유정도 지지 않으려는 듯 끙 신음을 흘렸으나 상황은 여러모로 불리했다. 애초 키도 하승윤이 훨씬 큰 터라, 교착 지점이 서서히 하강하면서 이유정의 무릎도 속절없이 구부려지는 중이었다. 그렇게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 와중, 무릎이 절반을 넘게 굽혀진 순간, 갑자기 하승윤이 양팔을 크게 밀어내면서 기습적으로 앞차기를 했다. “……!” 깜짝 놀란 이유정이 튕기듯 몸을 물렸으나 하승윤은 그대로 치고 들어가 어깨로 강하게 들이받았다. 그 효율적인 육탄 공격에 이유정은 외마디 신음을 지르며 날아가, 등으로 바닥을 긁으면서 주르륵 밀려났다. 어지간히 지기 싫었는지 곧장 일어서기는 했지만, 그때는 이미 하승윤도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가볍게 움직인 단검의 끝으로 이유정의 카타나가 걸렸다. 땡그랑, 청아한 소리를 낸 카타나는 손에서 벗어나 튕기듯 허공으로 솟구친다. 찌르기는 푸르스름한 빛이 돼 정면으로 직진했고, 이유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단검은, 정확히 인중 앞에서 멈췄다. 이유정은 살며시 눈을 뜨더니 망연한 표정을 짓는다. 이렇게 승부가 끝났다. 하승윤이 압도적인 실력을 선보이며 승리했다. - 그만. 고연주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이벤트의 종료를 알렸다. 그러자 이유정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 언니! 잠….” “사용자 하승윤. C 등급입니다. 두 사람 모두 고생했습니다.” 나는 말을 끊으면서 곧바로 등급을 발표했다. 이유정이 애타는 낯으로 돌아보았으나 나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더 해봤자라는 의미였다. 그리 길지 않은 전투였음에도 이유정의 이마는 땀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에 반해 하승윤은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둘 사이에는 그 정도로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잠시 후, 사방에서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결과가 의외인지 약간의 웅성거림은 있었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한 두 사람에게 보내는 박수였다. 물론 승자와 패자가 받아들이는 입장을 다르겠지만. 하승윤은 빙긋 웃으면서 정중히 인사했다. 그리고 이유정은 돌연 풀썩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망연한 눈동자. 부르르 떨리는 눈매가 웃는지 우는지 모르게 이지러진다. 박수가 조금은 시들해졌다. “하…. 하하….” 거칠어지는 숨소리 사이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는지 흡사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정을 고소하다는 얼굴로 응시하는 일부 클랜원들. …공공연한 비밀이기는 하지만, 클랜 내 이유정의 평가는 상당히 좋지 않다. 탁 까놓고 말해서, ‘성격이나 행동이 제멋대로이면서 자신이 강한 줄 아는 철부지.’ 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싫어하는 클랜원도 많고. 안현과 비교해도 차이를 알 수 있다. 안현이 사고를 쳤을 때는 그나마 소수라도 옹호 여론이 있었지, 이유정은…. 여하튼 사정이 어쨌든, 전투의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4년 차 레어 클래스 사용자가 2년 차 일반 클래스 사용자에게 완패했다. 나는 가만히 중앙을 응시했다. 그 순간, 어쩌면 이유정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아니. 모를 리가 없다. 직접 전투를 치렀으니만큼 중간중간 자신이 상대보다 딸린다는 것쯤은 확실하게 느꼈을 것이다. ‘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찰나, 문득 아까 이유정이 지었던 표정이 뇌리를 스쳤다. 무언가 깊게 고민하는, 망설이는 것 같은 얼굴. 그러자 확신은 할 수 없지만, 나는 왠지 이유정이 이 자리에 나온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안현과의 전투에서 무언가 느낀 게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한 번 확인하려고, 정확하게 확인해보고 싶어서 나온 게 아닐까? 등급 하락 사건 이후 안 그래도 구설에 오른 상황이었다. 이기는 게 당연하고 지면 이상해지는 상황이었다. 진심으로 전력을 다했지만 시종일관 밀리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패배한다면, 자신이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자존심에 크게 금이 가버리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유정은 그 모든 상황을 감수하고 계속 싸우는 걸 선택했다. 현재 자신이 처한 모든 상황을 반전할, 최후의 방법으로써. 그래. 사용자 이유정은 자신을 확인해볼 요량으로 이 자리에 나섰다. 그리고 패배함으로써 현실을 절감했다. 자신이 강한 게 아니라, 머셔너리가 강하다는 현실을. 내 예상이 맞는 걸까. “이게…. 이게 뭐야….” 돌연 헛웃음을 그친 이유정이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정말 열심히 했는데…. 정말로, 정말로…. 그런데….”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어깨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결국, 이유정은 “흑.” 오열을 터뜨렸다. 목놓아 우는 게 아닌, 흐느끼는 듯한 작은 소리였다. 손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끅…. 흑….” 그러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은, 어느새 턱을 지나 아래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ㅇ<-<…. 0731 / 0933 ---------------------------------------------- 핏물 속에서 피는 꽃. 참으려는 듯, 그러나 자꾸만 새어 나오는 서러운 흐느낌이 이어졌다. 잠시 후, 이유정은 얼굴을 가린 그대로, 엉엉 울면서 달려나가 버렸다. 장내의 기류는 삽시간에 이상해졌다. 흡사 단체로 찬물이라도 맞은 듯, 즐거이 무르익은 분위기가 확 가라앉았다. 폴짝폴짝 기뻐하던 하승윤은 어색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누구 한 명 나서는 이 없이 서로 눈치만 보는 중이었다. 결국 나는 이만 자리를 뜨기로 결심했다. 이벤트도 끝난 이상 더 남아 있을 필요는 없다. 애초 시끄러운 장소에 오래 있는 걸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클랜원들은 당황해 하며 나를 돌아봤으나 나는 웃는 얼굴로 계속 축제를 즐길 것을 권했다. 그러자 내가 이유정에게 가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한결 안심한 얼굴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한순간 정말 한 번 가볼까 고민이 들었지만…. 그냥 그러지 않기로 했다. 딱히 위로를 잘하는 성격도 아니거니와, 지금 가봤자 별로 좋은 말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상투적인 말은 해봤자일 테고. 그리하여 나는 그대로 계단을 올라 4층 집무실로 들어갔다. 간이 탁자와 의자 하나를 끌고 테라스로 나섰지만, 그제야 음식이나 술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물론 호출석 한 번 누르면 해결될 일이기는 하나…. 에이, 그냥 적당히 바람 좀 쐬고 자는 게 나을 것 같다. 나는 의자에 앉아 머리를 젖혔다. 시린 밤하늘의 별은 수백, 수천의 보석이 흩뿌려진 것 같은 아름다운 빛깔을 뽐낸다. 서늘한 밤바람이 불어왔으나 썩 차갑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약간 달아오른 몸을 식혀주는 기분마저 들었다. 음…. 갑자기 아쉬운 기분이 드는데. 술 한 잔 마시면서 구경한다면 꽤 운치가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아쉬운 대로 연초나 한 대 물어볼까? 끼익…. “응?” 그렇게 생각하고 품속에 손을 넣은 찰나, 돌연 천천히 문을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한별아?” 누군가 싶어 돌아봤더니 어느새 방안으로 들어온 김한별이 쭈뼛쭈뼛 서 있다. 두 손에 술과 잔을 꼭 쥔 채로. 항상 보던 로브가 아닌, 단정하면서도 시원한 차림을 보니 무언가 오묘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문득 반쯤 열린 문이 눈에 밟혔다. “그냥…. 아까 보니까 맨손으로 올라가시는 것 같아서….” 쓱쓱, 애꿎은 카펫을 발로 긁으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한다. 문 좀 닫고 오라고 말하려다가, 갑자기 어색한 기분이 엄습해 괜스레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그거 때문에 일부러 올라온 거니?” 김한별은 도리도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 “대답…. 이제 듣고 싶어서….” “대답?” 반문한 순간, 김한별이 도끼눈을 떴다. “아, 아. 그 대답 말이지? 하하.” 나는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인간 세상으로 돌아오면 고백에 대한 대답을 해주겠다고 했는데,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너무 바빠서…. 아. 이건 말해봤자 변명이겠군. “우선 들어와.” 기껏 말하기는 했으나 김한별은 이미 그러고 있었다. 쿵쿵 발소리를 내면서 테라스로 오더니 주변을 둘러본다. 의자는 하나밖에 가져오지 않았다. 와서 앉으라는 의미로 허벅지를 두어 번 가볍게 치자, 쌀쌀맞은 눈동자가 화들짝 놀란다. “뭘 그렇게 놀라? 와서 앉으라는데. 아니면 계속 서 있을 거야?” “아, 아니…. 거기는….” “왜. 싫어?” “…….” 장난스레 말하자 김한별이 발끈한다. 아마 조롱한다고 여겼는지, ‘그런다고 내가 못할 것 같아요?’ 라는 듯 성큼성큼 다가와 헛기침을 하며 몸을 돌린다. 이내 주춤주춤 내려앉는 엉덩이를 보면서, 나는 검지를 빳빳하게 펴 허벅지 중앙에 곧추세웠다. 폭. “끼약!” 어딘가를 쿡 찌르고 들어가는 동시, 김한별이 펄쩍 뛴다. 나를 배를 잡고 웃었다. 비명이 평소 생각하던 것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이…! 이 나쁜! 변태! 저질!” 김한별은 병과 잔으로 나를 번갈아 치면서 온갖 말로 나를 저주했다. 그렇게 한동안 실랑이질을 당한 끝에, 간신히 진정한 김한별은 탕 소리가 날 만큼 병을 세게 내려놓았다. 덜컹 흔들리는 탁자를 부여잡는 사이, 낑낑거리며 소파를 끌어와 힘겹게 주저앉는다. “미안.” “흔 븐만 드 그르 브스요.(한 번만 더 그래 보세요.) 네?” 김한별은 이 갈리는 소리를 내며 나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폭 쉬고는 신경질적으로 병마개를 돌렸다. 탄산이 뿜어지는 소리에 이어, 꼴꼴 흘러나오는 액체가 잔에 따라진다. 옅은 푸른빛에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는 게 척 봐도 시원해 보인다. 김한별은 잔 하나를 내밀면서 또 한 번 한숨을 흘렸다. “어휴. 오늘도 대답 듣기는 글렀네.” 혼잣말처럼 말하기는 했지만, 분명 나 들으라고 한 소리다. 나는 가볍게 잔을 낚아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왜긴요? 아까 그런 일이 있었는데, 오빠 기분도 싱숭생숭하시겠죠. 솔직히 저 오기 전까지 유정이 언니 생각하고 있으셨잖아요.” …정답이다. 정확히는 생각하려는 찰나 김한별이 들어온 거지만. 나는 쓰게 웃었다. “오늘은 좀 봐주라. 머릿속이 많이 복잡하거든.” “이해해요. 그리고 됐어요. 이상한 짓거리로 분위기도 확 깨 놓고서는….” 김한별은 묘한 어조로 투덜거렸다. 그리고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면서 새침하게 입을 연다. “그런데, 유정이 언니는 왜 그런 거예요?” “응? 아아. 열심히 싸웠잖아. 그런데 졌으니까 분했겠지.” “으음….” “갑자기 왜?” 꼴꼴거리던 소리가 멈췄다. 이어서 병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고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질문을 바꿀게요. 유정이 언니, 왜 이렇게 된 거예요?” “…왜 이렇게?” 되물으며 시선을 돌리자 눈앞에 잔이 보였다. 나는 천천히 잔을 들어 올렸다. 챙, 수정과 수정이 부딪치는 소리와 궁금하다는 음성이 이어졌다. “그렇잖아요. 사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처음에 나름 잘 적응하던 거 아니었어요?” “음.” “뭐, 현이 오빠 말 들어보면, 극 초반에 가장 습득 속도가 빨랐다고도 하고. 은근히 경쟁 심리를 느꼈다고 하네요. 자신보다 항상 빠르게 익혔다면서.” “맞아. 그랬지.” 문득, 옛날 오순도순 여관에 모여 활동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그때의 이유정은 병아리치고는 확실히 배우는 게 빨랐다. 애초 통과의례에서 김한별과 같이 가장 먼저 적응하기도 했고. “그런데 지금은….” 김한별이 조심스레 말끝을 흐렸다. 나는 싱겁게 웃었다. “야, 너무 안 좋게 만은 보지 마라.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유정이 걔, 나름 괜찮은 사용자야. 물론 좋은 사람이기도 하고.” “유정이 언니가 괜찮은 사용자, 좋은 사람이라고요?” 김한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아마 좋은 사람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춘 듯싶은데. 하기야 얘는 이렇게 말할 자격은 있지. “내가 보기에 그렇다고. 너는 초반에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나는 가만히 잔을 만지작거리면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차분히 머릿속을 더듬자 3, 4년 전의 기억이 천천히 회상되기 시작한다. 그때의 이유정은…. 이유정은…. “그러니까…. 처음 도시를 나갈 때였나? 아. 던전에서 렌가 무리와 마주쳤을 때였다.” 돌연 킥, 웃음이 터졌다. 그때는 확실히 놀라웠다. 여러 의미로 말이지. “재능도 좋지만, 애가 겁이 없는 애였어. 고작 병아리 주제에 말이야. 내가 시켜서 그런 것도 있지만, 꼴랑 0년 차에 불과한 애가 괴물 사이로 그냥 막 들어가. 그리고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하지.” “…그게 무조건 좋은 건 아니잖아요.” “맞아. 그러면 분명 위험한 때가 찾아오거든. 그런데 그것도 웃겨. 내가 말하기도 전에 알아서 빠지거나, 아니면 다치는 걸 감수하고 끝장을 내버린다고. 믿어져? 아직 현대의 티를 벗지 못한, 그것도 여자애인데. 자신보다 큰 괴물을 상대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계산을 해. 아. 이건 그냥 빠져야겠다. 아. 이건 이렇게 하면 이길 수 있겠다. 확실히 막무가내이기는 하지만, 거기서 나오는 전투 감각이 장난이 아니야.” “…….” “그러면서도 애가 웃는다. 누구처럼 시키는 것도 못해서 울지도 않고, 알량한 자비심으로 손 속에 사정을 두지도 않아. 전투가 끝나면 가장 먼저 하는 게 부상 치료나, 전리품을 살피는 거야. 그러다 괜찮은 성과라도 발견하면 오빠 오빠 하면서 항상 활기차고 밝게 웃는다고. 그러니 이유정이야말로 진성 사용자지. 하하.” “그런데…. 지금은 왜….” 결국에는 똑같은 질문이었다. 그런 이유정이 왜 지금 이렇게 됐냐. 갑자기 목이 바싹 타는 것 같아 나는 잔을 힘껏 들이켰다. 폭포수처럼 흘러 들어온 액체가 식도를 톡톡 쏘며 하강한다. 이내 그간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뜨자,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김한별이 어슴푸레 시야에 들어온다. 나는 아까 꺼내놓은 연초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한숨을 토하듯 뱉어낸 연기가 밤하늘 속으로 천천히 사라진다. “이해가 안 가서 그래요. 이해가. 사실 오늘 이벤트는 정말 충격이었어요. 저만 이러는 게 아니라, 모두가 같은 기분이에요.” 김한별은 계속 내 눈치를 살피면서 무언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그렇게 재능도 있고, 적응도 잘하고, 그렇다고 오빠가 안 밀어준 것도 아니고. 그리고 어쨌든 여태껏 꾸준하게 따라오기는 했잖아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그랬지.” “그런데 오늘 전투는…. 물론 그 하승윤이라는 사용자가 상상 이상으로 강하기는 했지만…. 어떻게 그렇게 압도적으로….” “…….” 이어지는 침묵이 갑갑했던 걸까. 김한별은 잔을 살짝 들어 올려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액체 속에서 일어나는 회오리가 마치 내 기분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김한별이 손을 멈췄다. “아니면…. 무언가 다른 문제라도 있는 걸까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잔을 입가로 가져가면서 묻는다. 무언가 다른 문제라. 글쎄. 문제라기보다는…. “어쩌면….” 나는 잠깐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나 때문일지도 몰라.” 이제껏 가슴에 담아둔 말을, 조용한 입 밖으로 꺼냈다. * 그 순간이었다. 김한별이 두 눈을 치뜨며 눈살을 찌푸렸다. 막 기울이던 술잔이 도로 내려앉는다. 아직 입에서 떼지도 못한 채 약한 기침이 터져 나온다. 그만큼 김수현의 말이 의외였고, 또 놀란 것이다. 그러나 놀란 사람은 김한별만 있는 게 아니었다. “……!” 문밖에서, 붉은 머리카락이 여인이 똑같이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틀어막고 있다. 그랬다. 반쯤 열린 문밖에는 다름 아닌 이유정이 서 있었다. 딱히 목적이 있어 찾아온 건 아니었다. 그냥 광장에서 도망친 후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어지러운 마음에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을 뿐이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찾아온 곳이 바로 4층 집무실이었다. 그런 이유정이 도착한 시기는, 김수현과 김한별이 막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을 즈음. 처음 방안을 들여다봤을 때는 그대로 뛰쳐나갈 뻔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김한별이 있었고, 서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질투심에 불을 질러버렸으니까. 그러나 가만히 말을 들어보니 어느 순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여태껏,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몰래 이야기를 엿듣던 중이었다. 그리고 현재, 이유정은 혼란에 빠져버렸다. 하승윤 이야기가 나왔을 때만 해도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무슨 말을 듣든 간에, 비수가 돼 상처 입은 가슴에 박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이유정이 약해진 게 김수현 때문이다? 조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 말. 이유정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온몸을 덜덜 떨면서도 살그머니 고개를 들이밀어, 테라스 너머를 숨죽여 응시했다. “오빠…. 때문이라고요?” 마침 간신히 정신을 차린 김한별이 의아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 순간 김수현은 갑자기 피로한 기색을 비쳤다. 이어서 무언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얼굴은 여전히 같은 사람이었지만, 꼭 다른 사람을 보는 듯했다. 김수현 주변의 시간만 급격히 흐르기라도 한 것처럼, 흡사 최소 10년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듯했다. 처음 보는, 처음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잠시 후. “북 대륙에 있을 때, 이유정 별명이 뭐였는지 알아?” 김수현은 조금 뜬금없는 말로 말문을 열었다. 마주 앉은 김한별과 밖에 서 있는 이유정은 자연스레 집중했다. 김수현의 말이 이어졌다. “미친년이야. 피에 미친년. 광년으로 불렸다고.” 그렇게 말하고 나서 스스로 어이없는지 선웃음을 짓는다. “하하…. 그렇게 밝은 애가 피에 미친년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 “…그런데 웃긴 건, 그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는 거야.” “사실…. 이요?” 김한별이 조심스레 되물었다. 김수현은 짧게 숨을 흘리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언제였던가. 절규의 동굴이었나? 웬 핏덩어리 괴물이랑 싸우는데, 이유정이 아주 신 나서 싸우더라고. 무난하게 처치도 했어. 그리고 깔깔 웃으면서 무너지는 시체를 계속 찌르는데….” 이유정은 연신 침을 삼키면서 말을 듣고 있었다. 한 마디로 놓치지 않으려는 듯, 벽에 등을 기댄 채 청각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그런데 어떻게 됐는지 알아? 갑자기 왈칵 터져 나온 핏물을 보더니 지그시 눈을 감는 거야. …피할 생각도 없어 보였지. 거기서 나는 분명히 봤다. 쏟아지는 핏물 속에서, 이유정은 웃고 있었어.” 공교롭게도, 김한별의 목울대도 작달막한 고저를 그렸다. “살의에 물든 건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사용자 정보의 영향일 수도 있고.” 김수현은 완곡히 말을 돌렸다. 그러나 그때만 회상하면 입맛이 쓴지, 입을 쩝 다시면서 턱을 긁적거린다. 사실상 그때가 김수현이 이유정의 특수 능력을 인지했을 때였다. “그래서 관리를 시작했지. 마검을 부서뜨리고, 윽박질러 순결의 머리띠도 억지로 채우고. 그런데도 결과가 피에 미친년이라. 하하.” “오빠도 나름 걱정하신 거잖아요.” 김한별은 자신도 모르게 위로하는 어조로 말했다. 마지막 김수현의 웃음이 왠지 모르게 자조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김수현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더니 이리저리 목을 돌리기 시작했다. 얼굴은 여전히 지쳐 있었다. “그래. 바로 그게 문제였어.” 한껏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온다. 흡사 바닷속으로 끝없이 침잠해가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너도 알다시피 사용자가 강해지려면, 모름지기 여러 요소가 필요해. 클래스가 좋아야 하고, 클래스에 걸맞은 능력을 개화시켜야 하고, 특화 능력치도 신경 써야 하고. 아. 물론 경험 쌓는 것도 중요하지. 여하튼 이 모든 것들을 깊이 연구하고, 또 조화를 이뤄야만 진정한 강자로서의 반열에 들 수 있는 거야. 여기서 하나라도 빠지는 순간, 그건 반쪽 짜리에 불과해지지.” 그러니까, 이유정은 확실히 더 성장할, 강해질 방법이 있었다. 영리한 김한별은 곧바로 김수현의 말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말인즉, 김수현은 이유정이 성장할 수 있는 여지를 억지로 제한했다는 소리였다. 실제로도 그랬다. 분명 이유정의 정신을 보호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가장 중요한 특수 능력과 크게 어긋나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럼…. 만약에 오빠가 막지 않고 언니가 그대로 성장했다면….” 김수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최소한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겠지. 아니. 확실하게 강해졌을 거다. 비록 살인마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조금 주제넘은 말일지도 모르지만…. 오빠가 옆에 있으면 괜찮지 않았을까요? 설령 정말로 그런 성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오빠 말은 잘 듣잖아요. 예를 들어 오빠가 언니랑 딱 붙어 다니면서 조절만 할 수 있다면….” 그러자 김수현은 잠시 말을 멈추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더니 머리를 갸웃한다. 김한별이 까닭 없이 긴장된 기분으로 김수현을 응시했다. 그것은 이유정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동안 ‘왜 자신이 아닌 안현을 데리고 다녔느냐.’ 는 차원에서 궁금한 부분이기도 했고. 김수현은 곧 싱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안 돼. 걔는 나랑 너무 잘 맞아.” “잘 맞아서…? 그래서 안 된다고요?” “아니. 데리고 다녀봤자 걔가 나한테 뭘 배우겠냐. 끽해야 어떻게 하면 더 잔인하게 행동할까, 얼마나 더 효율적으로 살인할 수 있을까. 이 정도겠지.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절대로 나아지지는 않았을 거다.” “…….” 그렇게 말한 김수현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 나 같은 놈이 이유정을 작정하고 키워봤자…. 오히려 걔 망치는 길이야.” 한 번 더 확정하듯 말하고는,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받치며 의자에 몸을 묻는다. “하기야, 몇 번 쓰다 버릴 도구라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실제로 그냥 그대로 키워볼까 고민한 적도 많고. …그런데 근래 생각이 좀 확실하게 변해서 말이다.” “…….” “사실 나는 별로 상관이 없기는 해. 왜냐면 이미 한참이나 늦었다고 생각하거든. 그런데 이유정은 아직 아니잖아. 이상하게 변하는 걸 보고만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애야. 사람이든, 사용자로든.” “…….” 어느새 김한별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할 말이 없어서 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약간 이상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조금 전도 그랬다.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왜냐면 이미 한참이나 늦었다고 생각하거든.’ 이라는 말이 그렇게나 위화감이 느껴질 수가 없었다. 마치 자신의 미래를 예상하고 있다는 것처럼…. 잠시 후. 김수현이 천천히 머리를 젖혔다. 반쯤 감긴 두 눈이 칠흑색 밤하늘을 하염없이 응시한다. 김한별은 따라 시선을 올리려다가, 김수현의 눈을 유심히 살폈다. 무언가 공허해 보이는 눈동자였다. 이윽고 살짝 벌어진 입이 힘없이 움직인다. “…뭐, 모르겠다. 요새 들어서는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지도, 아니 잘해왔는지도 모르겠고.” 그때였다. 돌연 김수현이 흠칫 몸을 떨더니 갑자기 방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눈이 정확히 문밖을 바라본다. “거기, 누구야?” “……!” 그 순간, 이유정은 소리 없이 숨을 삼켰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빼기는 했지만,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천천히 올라간 양손이 봉긋한 가슴을 감싸듯이 눌렀다. 들키고 난 이후에야 자신의 심장이 쿵쾅쿵쾅 고동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김수현의 진심을 듣고 나자, 흡사 질식할 듯한 중압감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 작품 후기 ============================ 룰, 루 랄, 라 어디선가 들려오는 꿈, 만 같, 은 멜로디가 맘에 들어. 멈, 춰 버, 린 시곗바늘 사이로는 살, 금 살, 금 누군가 다가와. 어째서 이렇게도 가슴 뛰는 걸까? 다정한 말이라도 들, 은, 듯, 이. 달, 님까지 잠을 깨면 어떻게 Moon, Night, Moon Light Sweety! 0732 / 0933 ---------------------------------------------- 핏물 속에서 피는 꽃. 나는 지그시 어둠을 응시했다. 방안을 비추는 은은한 달빛과, 월광을 드리우는 검은 그림자가 눈에 들어온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짙은 보랏빛 머리카락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아아. 미안. 엿듣고 있었다.” 차갑고 고요한 음성의 주인공은 허준영이었다. 저벅저벅 걸어 들어온 허준영은 천천히 팔을 들었다. 손끝에는 길쭉한 병 하나가 들려 있다. 그걸 보자 절로 싱거운 웃음이 터졌다. 나랑 술 한 잔 하고 싶은 클랜원이 이렇게나 많았나? “그냥 들어와도 상관없는데. 왜 밖에 서 있어. 궁상맞게끔.” “혹시 좋은 시간을 방해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아이고, 의미 없다. 그러면 진작에 자리를 뜨던가.” “그러려고 했는데, 이야기가 너무 흥미로워서 말이야.” 구변 좋게 말한 허준영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흘끗 김한별을 흘겨본다. 무언가 허락을 구하는 듯한 눈초리. 김한별은 두어 번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뚱하니 어깨를 으쓱였다. 무언의 허락 같다. 허준영은 픽 웃더니 똑같이 소파 하나를 끌고 와 풀썩 앉았다. 음. 가기 전에 꼭 제자리에 돌려놓고 가라고 해야겠다. 허준영은 가볍게 병마개를 돌리고 빈 잔을 찾아 적정량을 부어주었다. “어이.” 잔을 절반쯤 채운 보랏빛 액체를 감상하려는 찰나, 건방진 음성이 들려온다. “원래 중간에 끼어드는 성격은 아닌데…. 이왕 들은 거, 나도 하나 물어봐도 될까?” 허준영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건방지게 말하면서도 머리를 돌려 문밖을 응시하고 있다. 쑥스러워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문은, 여전히 반쯤 열려 있는 상태였다. “그래. 엿들었다면서. 끼어들지 않은 셈 치지. 아무튼, 뭔데?” “…그래서, 어쩔 생각이지?” 허준영은 도로 나를 응시하고는 살짝 낯빛을 굳혔다.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뭘 어째?” “네 의도는 충분히 알겠는데….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유정은 그저 그런 사용자를 벗어나지 못했잖아.” “…….” “0, 1년 차도 아니고, 이제 4년 차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건 좀…. 사실, 이제 와서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말은 서서히 흐려졌다. 조금은 책망하는 어조처럼 들리기도 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 것 같다. 나는 아주 약간 남은 연초를 끝까지 흡입한 후, 천천히 길게 흘렸다. “물론 이유정은 앞으로 더 강해질 거야. 아니, 더 강해져야겠지.” “그 말은, 늦게라도 정신 보호를 해제하겠다는 소린가?” 그러려면 더 일찍 했겠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자 허준영이 의문을 표시했다. “그러면 현 상태를 유지하면서 강해져야 한다고? 무언가 모순됐다고 생각하지 않나? 아까 네 말대로라면….” “방법이 있으니까 하는 말이지.” “…방법?” “그래.” 반문하면서 허준영은 또 한 번 방 쪽을 돌아보았다. 말하면서 왜 자꾸 돌아보는 걸까. 문이 열려 있는 게 걸리는 건가? 그러면 닫고 오면 될 텐데. “무슨 방법?” “클래스 계승.” 나는 명료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클래스를 계승해서 사용자 정보의 변화를 꾀하는 거지.” 아주 간단한 일이라는 듯 덧붙이면서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언니는 이미…. 레어 클래스잖아요.” 문득 김한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레어 클래스가 다는 아니잖아. 시크릿 클래스도 있는데.” 나는 방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닫기 위해서였다. “너희도 시크릿 클래스이니만큼 알 거 아니냐. 클래스 계승 보상을 생각해봐.” “계승 보상이라면…. 특화 능력치 상승이랑, 클래스에 걸맞은 능력 변화…. 아.” 그제야 깨달았는지 김한별이 작은 탄성을 질렀다. 그래. 내가 클래스 계승을 통해 궁극적으로 노리는 건, 이유정의 특수 능력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면 듀얼 클래스로 만들겠다는 소린가? 그렇게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역시나 허준영이 날카롭게 지적했다. 나는 쓰게 웃으면서 문고리를 잡았다. “레어 클래스에서 시크릿 클래스로 가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 내가 아는 것만 해도 두 개나 있으니까.” 우선은 각성 시크릿 클래스. 물론 이건 굉장히 드문 경우이기는 하다. 그러니 각성 시크릿 클래스보다는, 레어 클래스의 조합으로 시크릿 클래스로의 진화를 생각하는 게 더 가능성 높은 일이었다. “…결국에는 클래스를 하나 더 구하겠다는 소리로밖에 안 들리는데.” “아니. 새로 구할 필요는 없지.” “응?” “수단은 이미 줬거든. 하지만 그걸 어떻게 발현하는가는 이유정이 직접 깨달아야 해.”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는 문을 닫기 전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그러나. “…….”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어둠만이 고요하게 앉아 있을 뿐. 나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 안개가 자욱한 날씨였다. 살을 엘 듯한 새벽 공기가 바람에 밀려 머셔너리 캐슬을 휘감듯 스쳤다. 사방이 흐릿하다. 스치고 지나간 새벽 바람은 아직 아침이 오려면 멀었다고 알려주는 듯 차디찬 내음을 품고 있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시간에 돌아다닐 사람이 있을까마는, 캐슬 안에서는 한 여인이 홀로 조용하게 걸어 나오고 있었다. 나름 그럴듯하게 차려 입은 폼이 꼭 어디 먼 길을 떠나는 여행자 같다. 여인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오연히 고개를 들어 웅장하게 솟은 새하얀 성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리고 흡사 회상이라도 하는 양, 연한 붉은색의 눈동자가 아련하게도 젖어 든다. 잠시 후. 자박자박 걸어가는, 무언가 망설이는 발소리가 긴 회랑을 울렸다. 흐릿한 안개가 사방에 깔린 탓인지, 방금 여인이 서 있던 자리에는 금세 뿌연 연기가 몰려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히 메워버렸다. 그렇게 입구를 나와 정문까지 이어지는 정원의 수로를 걸어갈 즈음. “……?” 걸음에 따라 힘없이 흔들리던 긴 머리카락이 돌연 서서히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갈 곳을 모르던 여인의 망연한 눈동자가 앞쪽 어느 지점에서 멎었다. 정면 방향 약 30미터 거리에는, 어두운 체스터 코트를 입은 사내가 서 있었다. 선명하지 못한 날씨 덕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인보다 더욱 길게 흘러내린 보랏빛 머리카락을 보면 누군지도 알 것 같다. 둘이 쳐다보는 것도 잠시. 사내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예상에서 빗나가지를 않는군.” 그러자 여인은 낯을 찌푸리는 것과 동시, 아까보다 확연히 빨라진 속도로 걸음을 놀리기 시작했다. 사내는 가만히 응시하는가 싶더니 마주 보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온다. 그리하여 두 남녀가 마주쳤을 때, 허준영은 걸음을 멈추고 옆을 돌아봤으나 여인은 그러지 않았다. “말도 안 하고 가는 건가? 김수현이 슬퍼하겠는데.” “기록에 써놓고 나왔어. 언젠가는 보겠지.” 여인은 퉁명스레 대꾸했다. 여전히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친다. 사내는 점점 멀어져 가는 이유정의 등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때. “퀭한 눈을 보니 밤새 고민하고 생각한 것 같은데…. 그래서, 네가 선택한 길이 그거냐?” 빈정거리는 듯한 음성이 들려온 순간, 이유정은 또 한 번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젯밤 들킬뻔한 걸 기껏 도와줬더니만…. 아무튼, 자신은 있어?”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린다. 그리고 분노 가득한 눈동자가 상대를 노려보려고 했으나, 이유정은 흠칫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허준영이 매우 가까이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무심한 보라색 눈동자가 자신을 바로 앞에서 내려다볼 정도로. “이대로 말도 안 하고 나가면, 네가 무언가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거야? 자신 있느냐고.” 무언가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눈초리에 이유정은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허준영은 무언가 알겠다는 표정을 짓더니 스리슬쩍 어깨를 들먹였다. “아. 물론 무조건 나쁘다고만은 볼 수 없겠지. 무사 수행. 확실히 괜찮아. 아니. 오늘이 최소 2년, 3년 전이었다면 나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거야. 너처럼 이 세상이 어떤지 모르고 날뛰는 천둥벌거숭이한테는 딱 좋은 수행이니까.” “무….” “그런데 이제는 늦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4년 차잖아. 외부에서는 그때부터 정예 사용자로 판단하거든. 그래서 궁금한 거야. 이렇게 나간다는 건 단순히 세상을 돌아보는 것 이상으로 노리는 게 있다는 뜻인데….” “…더 이상 오빠한테 짐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이유정은 힘없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 허준영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짐이 되고 싶지 않다라. 이건 조금 의외인데.” “그래. 이제 만족해?” “흠~. 뭐, 그냥저냥 이유는 되는군. 딱 너다운 이유야. 납득은 된다.” “…마음대로 생각해. 그리고 웬만하면 이만 꺼져주면 정말 고맙겠어. 오지랖은 적당히 하라고.” “아아, 잠깐만. 이대로 꺼지기 전에 하나만 물어보자. …그러면 너는, 결국 부담이 되기 싫어서 도망치는 건가?” “…….” 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허준영의 음성이 이유정을 붙잡았다. 도망이라는 말이 가슴을 쿡 찌르고 들어온다. 입이 찢길 정도로 짓씹던 이유정은 으르렁거리듯이 입을 열었다. “도망이 아니라, 강해지려고 나가는 거야.” “…하? 강해지려고 나간다고?” 그 순간, 허준영은 격한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 성격을 생각해보면 과장된 감도 없잖아 있었다. “강해지려고 나간다고? 이건 또 무슨 개소리지? 하하하.” 결국 참지 못한 이유정은, 뭐가 웃기냐는 듯 무섭게 허준영을 노려본다. “개소리? 말 다했어? 지금 이 상황에서 농담을 하고 싶어?” “아니. 농담은 네가 하고 있지. 무사 수행을 나가는 이유가 꼴랑 그거? 차라리 도망친다고 그래. 그러면 이해라도 되니까. 괜히 어설프게 변명 혹은 자기 합리화하지 말고.” “너 말….” “그러면 말을 해봐. 누가 지금 네가 나가는 이유가 궁금하대? 그래서 아까 물었잖아. 자신 있느냐고. 그러니까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강해질 거냐고.” “그…. 건….” “아니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로 궁금해서 그래. 무사 수행? 음. 말은 좋지. 그런데 나는 너의 구체적인 계획이 궁금한 거야. 골이 비지 않은 이상 설마 혼자 돌아다니지는 않을 테고. 그럼 수행이라고 해봤자 캐러밴을 짜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것뿐인데. …그런데, 그러면 굳이 나갈 필요는 없잖아? 현재 네가 몸을 담은 클랜이 이미 그런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으니까. 그 어느 곳보다, 훌륭하게.” “…….” “말을 못하는군. 거봐. 계획이 없네. 그러니까 도망친다는 말이 맞는 거지.” 어느새 이유정은 바스러지도록 손을 움키고 있었다. 그러나 심정과는 반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왜냐면 반박할 말이 없으니까. 허준영의 말이 구구절절 옳다. 어쩌면 누군가 잡아주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럼…. 나보고 도대체 어쩌라는 건데!” 결국에는 울먹울먹한 음성으로 빽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유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씩 차오르는, 서러움에서 발로한 눈물을 보이기 싫어서였다. “뭐가 그렇게 잘났듯이 말하는데! 네가 내 심정을 조금이라도 알아? 그래, 너는 강해서 좋겠네? S 등급 받아서 좋겠어!” “…나 참, 아직도 등급 타령이냐.” 허준영은 한숨을 푹 흘리면서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두 눈을 치뜨더니. “…그래. 좋다.” 한층 진중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네가 약한 게 싫다면, 진 게 분하다면. 그러면 네가 스스로 뭐라도 해야 할 거 아니냐.” “나도 나름…!” “나름? 네가 나름 노력했다고? 웃기지 마. 부딪치고 깨지더라도. 하다못해 안현처럼 사고를 치고 온갖 욕을 처먹으면서, 설령 클랜에서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절박하게 애라도 써야 최소한 노력이라도 했다고 말할 수 있고, 또 변명할 수 있는 여지도 생기는 거지. 그냥 기록 한 장만 남겨놓고 띡 나가면 끝이야? 이게 무슨 솔로 플레이로 몇 달 노가다 몰이 사냥하면 강해지는 세상이야? 그렇게 쉽게 강해질 수 있으면 온 세상 모든 사용자가 10강이 되겠네. 나는 뭐 좌절 한 번 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라온 걸 줄 알아?” “…….” “…아무도, 그 누구도 너보고 바로 당장 결과를 내라고 하지 않아. 어제 김수현의 말을 듣고도 이해가 안 되는 거냐. 네가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리고 있잖아. 그럼 너도 무언가를 보여주기에 앞서, 보여주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 어느새 허준영의 목소리는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마치 이유정이 어서 깨닫기를 바라는 듯이. 그러나 이유정은 여전히 묵묵부답. 이제는 숫제 고개를 숙인 채 땅을 응시하고 있었다. 허준영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래. 너는 내 말이 개소리로 들리겠지. 하기야, 무슨 상관이 있겠어? 괜한 오지랖이지. 네가 나가든지 말든지. 이대로 패배한 채 도망친 개로 기억되든지 말든지.” 그리고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미련 없이 몸을 돌린다. “마음대로 해. 그런데 만일 몇 달 몇 년 후, 네가 무사히 돌아온다고 해도…. 그때 네 자리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니, 혼자서 나대다가 죽지라도 않으면 다행이겠네.” 그렇게 냉소적으로 말을 끝마치고는 추호도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허준영은 안갯속으로 녹아 들기라도 한 듯 사라졌다. 이유정은 원망하는 눈동자로 허준영이 사라진 방향을 한참을 응시했다. 마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이 개…!” 그 순간이었다. 끼이이익…. 분명 이른 새벽 시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입구 정문이 서서히 열리는 소리가 고요한 정원을 울렸다. 반사적으로 고개 돌린 이유정은, 반쯤 열린 입구에 힘겹게 몸을 비집고 들어오는 두 명을 보고 깜짝 놀랐다. 뚝뚝, 핏물이 쉴 새 없이 떨어진다. 흡사 피의 바다에서 목욕이라도 하고 나왔는지, 아직 어린 소년의 몸에서 핏물이 철철 흘러 넘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런 소년을 낑낑거리면서 부축해 들어오는 거주민 경비병 한 명. 그렇게 겨우겨우 들어오더니 이유정을 보자마자 다급하던 얼굴에 일말의 안도감이 돌았다. “누구…?” “다, 다행이다! 마침 사용자 분께서 계셨군요! 머셔너리 클랜원이신가요?” 그 말에 이유정은 숨을 삼켰다. 급박한 일이 벌어진 건 확실한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모르겠는 것이다. 왜냐면, 왜냐면…. “젠장, 정말로 가버린 건가?” 그때였다. 갑자기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허준영이 자욱한 안개를 뚫고 달려 나왔다. …뭐야, 간 거 아니었어? 이유정이 의아해 하며 돌아보는 사이, 허준영 역시 눈앞의 광경을 목격했다. 물씬 풍겨오는 피 내음에, 곧바로 걸음이 멎고 분위기가 찌를 듯이 날카로워졌다. “경비병. 어떻게 된 거지?” “방금 도시로 돌아오신 분입니다. 습격을 받은 듯한데, 전후 사정은 잘은 모르겠습니다. 대표 클랜으로 가달라는 말씀만 간신히 하시고, 바로 기절하셨습니다.” 거주민 경비병은 빠르게 말하면서도 상당히 정확하게 상황을 전달했다. 허준영은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검지로 이유정을 가리켰다. “이유정. 나는 바로 클랜 로드한테 알리도록 하지. 너는 사제를 깨워서 저 소년을 치료해라.” “어, 어?” “어서!” “자, 잠깐만! 나는….” 이유정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허준영은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캐슬 쪽으로 뛰었기 때문이다. 남은 건 정신을 잃은 소년과 살았다는 얼굴의 경비병뿐. “에이 씨…!” 이윽고 “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소년을 부축한 채 비척비척 다가오는 경비병을 보면서 이유정은 작게 씨근거렸다. “허억…. 허억….” 척 봐도 심상치 않은 상처. 소년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껌뻑껌뻑 호흡하고 있다. 망설임은, 거기까지였다. 우선은 살려야 한다. “이리 줘요! 빨리!” 그렇게 생각한 이유정은 곧바로 소년을 받아 들고는 몸을 돌렸다. 그에 따라 정문으로 나가려던 발걸음도 방향을 바꿔, 도로 캐슬이 있는 쪽을 바라본다. 이윽고 소년을 단단히 안아 든 이유정이 바람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야아아아! 안소오오오오오올!” 마침내, 시작되었다. 훗날 ‘용병 (여)왕’을 계승함으로써 홀 플레인에 이름을 떨치게 될, 그 거대한 행보의 첫걸음이 이제 막 내디뎌진 것이다. ============================ 작품 후기 ============================ 음…. 후기를 길게 적었다가 그냥 지웠습니다. 죄송합니다. 오늘 새벽 2시쯤에 까무룩 자버렸습니다. 근래 계속 새벽 집필을 한 탓에 머리가 많이 아팠거든요. 이때 제가 자주 쓰는 방법이 15분 알람을 맞추고 잠깐 잡니다. 15분 가량 자고 일어나서 샤워를 해요. 그러면 상당히 개운해지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제가 푹 잠들어버렸네요. 알람을 들은 기억은 있는데, 잠에 상당히 취했던 것 같습니다. 일어나서 아차 한 기분은 들었는데…. 코멘트로 상황을 말씀 드리고 양해를 구하자는 생각도 했지만, 우선 워드를 먼저 키는 방향으로 선택을 잡았습니다. 아마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관한 부끄러움이 커서였던 것 같아요. 어찌어찌 집필을 마치고 퇴고도 마치고, 업데이트에 성공하기는 했네요. 하하.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코멘트 예고 시스템은 이제 그만두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오늘 같은 일의 재발을 방지하겠다고 제가 장담을 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한 번 천천히 생각해보겠습니다. 혹시 고견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다려주신 분들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_(__)_ PS. 유정아. 이제 한 번 날아보자. :) 0733 / 0933 ---------------------------------------------- 핏물 속에서 피는 꽃. 안개가 끼기는 했지만, 아침 하늘은 맑고 조용했다. 그러나 머셔너리 캐슬은 아침 댓바람부터 부산하기 그지없었다. 정신 없을 정도까지는 아니나, 이유정이 부상당한 소년을 인도하고 아래로 내려왔을 때는 이미 대부분의 클랜원이 중앙 광장에 모여 웅성거리는 중이었다. “그러게요. 갑자기 아침부터 무슨…. 어?”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던 남다은이 쭈뼛쭈뼛 내려오는 이유정을 보며 아는 체를 했다. 그러자 무수한 시선이 계단으로 쏠렸다. 어제 축제 때문일까. 이대로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던 이유정은, 시선을 받자마자 엉거주춤 계단을 내려왔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줄 수 있어?” 그러나 남다은은 어제 일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시원하게 물었다. “저도 잘은 모르는데….” 이유정은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남다은과 마찬가지로, 눈물 사건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표정이다. 그러자 오늘 새벽 내내 심각히 고민하던 일이 돌연히 허무해졌다. 갑자기 바보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도 네가 첫 발견자라며. 있는 그대로만 말해주면 돼.” 이어지는 채근에, 이유정은 마지못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새벽에 겪은 일을 설명했다. “응….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거리며 열심히 듣던 임한나는, 설명이 끝나자 빙긋 웃었다. 그리고 어색하게 서 있는 이유정을 살며시 끌어당겼다. 이유정은 깜짝 놀라 몸을 뺐지만, 부드러이 안아오는 손길을 이기지 못해 풍요로운 가슴에 고개를 묻고 말았다. “왜 그렇게 온몸에 피를 묻히고 있나 했더니. 우리 찡찡이, 아침부터 고생했네?” “찌, 찡찡이? …아. 그러고 보니 피.” “괜찮아 괜찮아. 그런데, 어쩐 일로 이른 새벽부터 정원에 있었던 거야?” “그, 그건.” 이유정이 말을 더듬었다. 사실대로 고하자니 창피하고, 딱히 마땅한 변명도 생각나지 않는다. 결국 아이처럼 고개만 파묻으며 어물쩍 지나가기만 기다릴 뿐. 그러나, 두근거리는 상황에서 의외의 구원자가 나타났다. “수련을 하고 있더군.” 허준영이 갑자기 끼어들어 불쑥 말을 꺼낸 것이다. 이유정은 멍한 눈으로 흘끗 옆을 흘겼다. 한순간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천천히 떠오른다. 임한나는 놀란 눈으로 이유정을 응시했다. “어머. 수련을? 그 이른 시간에? 정말이니?” “으, 응?” 이유정은 어설프게 반응했다. “흠. 그런 타입으로는 안 봤는데. 근본까지 바보는 아니었나.” “예.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처음 보고 저도 많이 놀랐지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죽어라 움직이고 있더군요.” 그렇게나 뜻밖인 걸까. 남다은이 팔짱을 끼면서 혼잣말하듯 중얼거리자 허준영은 한층 공손해진 어조로 말했다. 무서울 게 없는 ‘침묵의 집행자’이지만, ‘그림자 여왕’이나 ‘검후’ 앞에서는 적당히 사릴 줄도 안다. 왜냐면 그 두 명과 붙어서는 이길 자신이 없고, 거슬려봐야 좋을 게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허준영이 확언하자 사방에서 묘한 눈초리가 쏟아졌다. 시선을 느낀 이유정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계단에서는 또 한 명의 구원자가 내려오고 있었다. “흐아아암.” 하얀 사제 로브를 입은 단발 머리의 여인이 입을 앙증맞게 두드리며 계단을 내려온다. 광장의 관심은 곧장 안솔에게로 쏠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줄래?” “응? 저도 잘은 몰라요.” “그래도. 치료하러 다녀왔을 거 아냐. 본 그대로만 말해주면 돼.” “으응….” 아까와 똑같은 문답. 안솔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갸우뚱하며 입을 열었다. “우선 살리기는 했어요. 정신도 차렸고요. 현재 오라버니와 이야기하고 있을 거예요.” “우선, 살리기는 했다고?” “아아. 네. 상처가 엄청나게 심했거든요. 이미 몇 번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인데, 신기하게 어떻게 살았나 봐요. …어? 그러고 보니 여기까지는 또 어떻게 온 거지?” “…그리고?”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걸까. 남다은의 눈이 한껏 가늘어졌다. 사실 이렇게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비추어보면 사건이 터졌을 경우 무조건 전체 회의가 소집된다. 특히 시급을 다투는 상황일 경우 회의는 물론, 임무 자체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있기보다는, 이렇게 조금이라도 상황을 알아둠으로써 진행의 원활함을 도모하는 것이다. 원래는 고연주가 도맡아 하던 일이나, 오늘은 어쩐 일인지 모습이 보이지가 않아 남다은이 대신하고 있었다. “응~. 그리고~. 맞다. 오라버니가 그 소년을 정화하시는 걸 봤어요.” “정화?” “네. 그거 있잖아요. 맑은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거.” “혹시, 저번처럼 이상한 거에 씌어서 온 거 아니에요? 예를 들어 얼음의 숲에 들어갔을 때처럼….” “아. 그건 아니에요. 저도 이상해서 여쭤봤는데, 오라버니가 아니라고 하셨어요.” “그래? 그럼 어떻게 된 거지?” 안솔이 단호히 고개를 가로젓자 누군가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나 누구도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모르는 건 모두가 매한가지인 상황이었으니까. 그때였다. “클랜 로드께서 회의를 소집하셨습니다. 모두 1층 회의장으로 모여주세요.” 가녀리면서도 편안한 음성이 침묵이 내려앉은 광장을 조용히 울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하녀 복장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우습게 볼 여인은 아니었다. 왼쪽 가슴에 그려진 붉은 문양은, 여인이 하녀의 장임을 뜻하는 동시, 고연주의 직속 휘하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남다은이 앞으로 나서면서 물었다. “클랜 로드는 어떠신가요?” “안타깝지만, 많이 안 좋으신 것 같네요.” 갑작스러운 질문임에도 하녀 장은 익숙하게 말했다. 사실 중요한 회의가 있을 때마다 항상 고연주와 하던 문답이었다. “많이…. 안 좋으시다고요?” “네. 겉으로는 표출을 안 하려고 하시는데, 은연중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계세요. 무언가 상당히 마음에 안 드시는 것처럼…. 저번 용이 잠든 산맥 사건 때보다 더 심하신 것 같습니다.” 하녀 장은 매우 정확하게 김수현의 심리를 전달했다. 고연주가 괜히 하녀 장으로 배치해둔 게 아니었다. 허나 그건 차치하고서라도, 남다은은 쯧 혀를 차고 말았다. 용이 잠든 산맥보다 심하다는 말은, 거의 손꼽힐 정도의 사건이 터졌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우선은 회의장으로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서.” “모두 들으셨겠지만, 이번 회의는 특히 입을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럼 이만 들어가도록 하죠.” 고요한 음성으로 경고를 날린 후, 남다은은 앞장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상황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상석에 앉은 김수현이 연초를 줄줄이 피우고 있었다. 무덤덤한 기색이기는 하나, 하녀 장의 말대로 알게 모르게 기분 나쁜 심기를 흘리고 있다. 무언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동자. 그리고 정적이 흐르는 회의장. 무어라 말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김수현은 어떤 말도 하지 않으며 연초만 태운다. 그저 가끔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한 모습만을 보여줄 뿐. 각 등급에 맞는 자리에 앉은 클랜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조용히 눈치만 살피는 중이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늘어가던 꽁초가 네 개째에 이르렀을 즈음. 탁탁, 탁탁! 문득 바깥에서 정적을 깨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웬 여인이 황급히 입구로 달려들어 온다. 아까 모습이 보이지 않던 고연주였다. “수현! 없어요!” 고연주는 들어오자마자 뜬금없는 소리를 질렀다. 클랜원들이 시선이 자연스레 쏠렸다. 과연 어떤 게 없다는 말일까? “잘 찾아봤습니까?” “동, 서, 남, 북. 모든 외 도시를 돌아다녔어요. 그런데, 어느 곳에서도 말씀하신 거주민 경비병은 찾지 못했어요. 소년을 데려온 후, 새벽을 기점으로 사라진 것 같아요.” “이런 젠장.” “우선 그 소년을….” 고연주가 말을 흐리자, 김수현은 연초를 비벼 끄면서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 사용자는 현재 요양 중입니다. 들을 말은 전부 들었고, 굳이 회의에 참가할 필요도 없어요.” “하지만, 혹시 예전처럼….” “한패는 아닙니다. 그냥 이용당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선 앉으세요. 이제 회의를 진행해야 합니다.” “알겠어요.” 고연주는 얼른 자리에 앉았다. 김수현은 길게 숨을 흘렸다. 그리고 잠시 후. “여러분에게 조금 미안하지만….” 조용한 음성으로 운을 띄웠다. “상황이 아주, 매우 급합니다. 시급에 시급을 다투는 일이니만큼, 먼저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상황 설명은 가면서. 현재 이 자리에서는, 바로 인선을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순간, 회의장에 어수선한 소란이 일었다. “참고로 출발 예정 시간은 내일 새벽입니다.” 한 마디 더 덧붙이자 웅성거림은 더욱 심해졌다. 미리 연락하기는 했지만, 용이 잠든 산맥 때도 7일이라는 준비 시간을 가졌다. 아니. 애초 탐험이든 원정이든, 김수현은 못해도 준비 하나만큼은 무조건 철저하게 하는 성격이다. 그런데 바로 내일 새벽에 출발한다고? 무려 하루도 안 되는 시간. 여태껏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아직 놀라기에는 일렀다. 왜냐면 이어지는 인선 발표가, 모두의 예상을 벗어난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근접 클래스는 김수현, 남다은, 허준영. 궁수 클래스는 임한나. 마법사 클래스는 김한별, 정하연, 제갈 해솔, 사라 제인, 하승우. 사제 클래스는 안솔, 신재룡. 특수 클래스는 백한결.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인선 발표.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은 세 가지였다. 우선은 언제나 이름을 올리던 고연주, 비비앙이 제외됐다는 것. 궁수는 선유운이 아닌, 임한나가 선발됐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마법사 클래스의 인선이 굉장히 파격적이라는 것. 모두가 궁금해했다. 왜 김수현은 이렇게 인선을 짠 걸까? “여기까지입니다. 그리고 호명한 마법사 다섯 명은, 회의가 끝나고 한 명씩 집무실로 오세요. 이번 원정과 관련해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면담을 하겠다는 말로 궁금증을 일축한 김수현은, 고연주로 눈을 돌렸다. “사용자 고연주. 지금 바로 마법의 탑, 이스탄텔 로우, 해밀 클랜에 연락을 넣어 자리 좀 마련해보세요.” “네? 자리요?” “각 클랜 최고의 마법사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에….” 고연주는 볼을 긁적였다. 김수현의 말인즉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안 그래도 마법사가 가장 많은데, 또 마법사가 필요하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거기다 각 클랜 최고의 마법사라면…. “…알겠어요.” 허나 고연주는 이내 고민을 멈추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번에도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의도가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그래. 이제껏 해왔던 것처럼, 김수현은 단 한 번도 잘못된 결정을 내린 적이 없다. 그렇게 생각한 고연주가 곧장 자리를 떠나고, 회의장에는 도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윽고 김수현이 입을 열었다. “자세한 사정은 가면서, 또 돌아와서 말할 수 있겠지만…. 이거 하나만은 말씀드리겠습니다.” 낮고 차가운 음성이었으나 마력을 품은 목소리는 모두의 귓전에 똑똑히 박혔다. 클랜원들은 숨을 뱉을 생각도 못 한 채, 자신도 모르게 들려오는 말에 집중했다. “물론 설레발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전후 사정을 들어본 결과, 어쩌면 우리 아틀란타에 위험한 위기가 닥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현재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수현은 말을 이으면서 권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는 두 눈은 일견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곧, 무검을 자루 채 잡아들었다가 힘차게 내렸다.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번 원정은 제가 직접 진두지휘하겠으며, 절대로 실패는 없습니다. 무조건 성공하고, 또 성공해야 할 임무입니다.” 탕! 칼자루와 탁자가 부딪치는 철성이 고요한 회의장을 왕왕 울렸다. 이윽고 들려온 “이상입니다.” 라는 말이 비로소 회의의 끝을 알렸다. 실로 오랜만에 나가는 왕의 친정(親政)이었다. ============================ 작품 후기 ============================ 아. 입이 근질근질하네요. 독자 분들의 질문이 예상되고 저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후기에서 힌트를 드리면 재미가 없겠죠? 그리고 어제 내용상 스포일러가 있다고 혼나기도 했고요. 하하. 아. 예고 시스템은 현재 고민 중에 있습니다. 제가 그제와 같은 일이 재발될까 봐 두려워서 못하고 있어요. 독자 분들은 어떠신가요? 예고 시스템이 있는 게 편하신가요?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_(__)_ 0734 / 0933 ---------------------------------------------- 핏물 속에서 피는 꽃. 상황은 정신 없이 돌아갔다. 스스로 준비도 해야 하고, 전체적으로 점검도 해야 하고, 관련 기록도 읽어야 하고, 가는 길도 한 번쯤 숙지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할 일은 천지인데 시간이 부족하다. 누구한테 거들어달라고 말할 상황도 아니었다. 관련 기록 같은 경우는 북 도시 일반 도서관이 아닌 비밀 도서관에서 찾을 수 있거니와, 그게 아니더라도 현재 한 명도 빠짐없이 불침 맞은 멧돼지처럼 움직이는 중이었다. 하기야 바로 내일 새벽 출발이니 모두 준비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이 있던가. 이렇게 바쁜데, 상황은 자꾸만 어긋났다. 무엇보다 형의 불참 소식은 사실 뼈아플 정도로 예상외였다. 통신용 구슬로 연락했을 때, 형은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인 배경에 서 있었다. ‘아. 지금 강철 산맥에 있거든. 왜? 무슨 일 있어?’ 왜 거기 있느냐고 묻자 형은 해맑게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 강철 산맥에 있다고. 보아하니 무언가 용무가 있어서 들어간 것 같아서, 차마 도와달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왜냐면 형이 정말로 만사를 제치고 달려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시간도 맞지 않을뿐더러, 그런 부담까지 주기는 싫었다. 결국 그냥 안부가 궁금했다고 하고 끊고 말았다. 어쨌든 형의 부재는 확실한 비보였다. 그 정도의 마법사는 눈 씻고 봐도 찾기가 어렵고, 기껏 구상한 정하연과의 조합도 물거품이 돼버렸으니까. 입맛이 쓰다. “후유.” 한숨을 흘리며 시선을 내렸다. 책상에는 오늘 어설프게 그려낸, 지도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A4 용지 크기의 기록이 놓여 있다. 그리고 상단에 체크한, 붉은 동그라미로 표시된 포인트 하나. 바로 저 지역이 우리가 최대한 빠르게 도착해야 할 목표 지점인, ‘파리 지옥’ 혹은 ‘야만 왕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장소다. 가만히 기록…. 아니. 지도를 응시하고 있자 자꾸만 한숨이 푹푹 나온다. 사실, 이른 아침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는 웬 아닌 밤중에 홍두깨인가 싶었다. 그리고 전후 사정을 들은 후, 제 할 말만 하고 기절한 소년을 보며 살의가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사실대로 말하면 때려죽이고 싶을 정도였다. 왜냐면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장소가 절대로 만만하지 않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아니. 까다로운 걸 넘어서, 상당히 긴 기간 동안 공략 불가 판정을 받은 지역이다. 결과만 놓고 보면 어찌어찌 공략되기는 했으나 완전한 공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용이 잠든 산맥’과는 약간 다른 의미에서 힘든 지역이라, 당분간은 건드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랬는데 웬 캐러밴이 좋다고 들어갔다가 그대로 결딴난 것이다. 멍청한 자식들. 벌집을 들쑤신 것도 모르고. “그런데 정말로 어떻게 들어간 거지? 발견하기도 힘들고, 들어가는 건 더더욱 어려웠을 텐데.” 그때였다. 막막한 기분에 혼잣말을 중얼거릴 즈음, 책상 한구석에 놓인 구슬이 갑자기 빛을 발했다. 마력을 흘려 넣자 곧바로 영상이 흘러나오며 누군가의 모습을 비쳤다. 농염한 눈매와 건강해 보이는 연갈 빛 살결의 여인. 한창 무르익은 아름다움을 뽐내는 여인은 마법의 탑 로드 선율이었다. (하~이. 머셔너리 로드. 오랜만? 소식 듣고 연락했어요.) “아. 오랜만입니다.” (그래요. 그나저나 최고의 마법사를 구하고 계시다고요? 그럼 나잖아요?) “예, 예. 이번에 마법의 탑 로드의 도움을 구하고 싶은 일이 생겨서요.”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었으나 나는 얼른 맞장구를 쳐줬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몰라도, 선율이 웬일로 헛소리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 빠르게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말하는 와중 꼭 한 번씩은 삼천포에 빠지던 적을 생각해보면 이건 절호의 기회였다. (사정은 대충 들었네요. 뭐, 상관없죠. 도시 발전도 탄력이 붙었고, 나도 바람 좀 쐬고 싶고. 그런데, 나 꽤 값나가는 몸인 건 아시죠?) 선율이 엄지와 검지 끝을 동그랗게 말아 붙이며 배시시 웃는다. 나는 흔쾌히 머리를 끄덕였다.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게 차라리 좋다. 역지사지로 생각해봐도, 사용자가 보상을 바라는 건 지극히 온당한 일이니까. 더구나 선율 정도의 사용자라면 더더욱. “물론이죠. 원하시는 보상이 있다면 최대한 맞춰드리겠습니다. 발견 성과 배분은 물론, 금화나 장비까지 드릴 용의도 있고요.” (응~. 발견 성과 배분은 당연한 거고. 금화는 별로 필요가 없어요. 저도 돈 많거든요. 그리고 장비는…. 글쎄요? 딱히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서.) 사실상 현재 걸 수 있는 최대한의 보상을 늘어놓았으나 선율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약간 의외의 기분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갔다. 하기야 명색이 마법의 탑 수장인데 어지간한 조건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혹시 원하는 보상이라도?” (네. 실은 개인적으로 꼭 갖고 싶은 게 하나 있네요. 그걸 주신다면, 무상으로 봉사할 용의도 있답니다?)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나는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뭡니까 그게?” (머셔너리 로드의 자지요.) 선율은 매우 태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굉장히 뜬금없고, 또 너무 천연스레 말한 터라,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래. 오늘은 웬일이나 했다. (제 몸이 머셔너리 로드의 그것을 원해요.) “…여보세요.” (들어보니, 그렇게나 굵직하고 튼실하다면서요? 정말이에요?) “적당히 합시다.” (아 왜요~. 이래 봬도 저, 꽤 맛있다고요? 눈 한 번 딱 감고 잡숴보라니까?)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닙니다.” (저는 농담 아닌데요?) “…….” 그러나 선율은 장난스럽게 머리카락을 꼬면서 웃고 있었다. 아. 저 생글생글 웃는 낯짝에 싸대기 한 번만 후리면 소원이 없겠다. 나는 영상이 흘러나오는 구슬을 잡아 코앞까지 가져왔다. “설령 도움을 받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제가 그쪽과 동침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선율은 두 눈을 치뜨더니 표정을 싹 바꾸며 나를 노려본다. 그러나 찰나의 순간, 약간 놀란 기색으로 옆을 흘기는걸 놓치지 않았다. 시선을 피했다기보다는, 누군가를 흘겨본 것 같다. (…정말 자존심 상하게 하시네. 이봐요. 내가 이스탄텔 로우 로드보다 못한 게 뭔데요?) “그분 얘기는 갑자기 왜 꺼냅니까?” (그분? 하. 그래요. 만일 그분이 저처럼 말했다면 만사를 제치고 달려왔겠죠?) “웃기는 소리 마십시오. 그분은 애초 그렇게 말씀하실 리도 없고….” 말을 잇다가 나는 절레절레 머리를 가로저었다. 괜한 데 심력을 낭비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와. 이제 산하 클랜이라고 막 대하는 것 좀 봐.) “마법의 탑 로드.” (됐고, 직접 찾아오세요.) 선율은 화난 음성으로 말을 끊었다.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면서 지그시 입을 짓씹는다. (저, 마법의 탑 수장이에요. 물론 머셔너리 로드가 대단한 사용자인 건 인정해요. 그러나 이런 무시는 참을 수가 없네요. 도움을 받고 싶으면 직접 찾아와 사정을 설명하고, 적법한 절차를 밟으세요. 싫으면 이만 끊을게요.) 아까와는 다르게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적법한 절차를 밟으라. 하등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형도 아니고, 고작 통신용 구슬로 도우라 마라 말한 건 확실히 실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아무튼, 진작 이렇게 나올 것이지. “실례라고 느꼈다면 미안합니다. 이상한 말씀을 하시니 제가 과하게 반응했네요.” (…아이 씨. 말하는 것 좀 봐. 진심으로 탐나네.)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튼, 올 거면 빨리 와요. 식전이니까 제 집무실에서 같이 식사나 하자고요.) 선율은 얼버무리듯이 말하고는 호호 웃었다.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나는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도서관에도 가봐야 하니까. “그럼 곧 찾아 뵙도록 하죠.” * 같은 도시에 있는 만큼 도착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안내를 받아 건물로 들어가자, 마침 식사도 올라가는 중이었다. 그릇을 든 사용자는 나를 흘깃거리면서 조심스레 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에요! 정말로 일찍 오셨네?” 크고 넓은 책상에 앉은 선율이 활짝 웃으며 나를 맞이한다. 그러나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나는 갑자기 숨을 삼키는 동시에 몸이 딱딱히 굳는 현상을 경험했다. 전혀 예상치 못해서일까. 흡사 바인드 주문이 내 몸을 꽁꽁 묶고 있는 듯하다. 선율의 책상 앞에는 익숙한 형상의 여인이 허벅지를 꼰 채 앉아 있다. 반쯤 돌린 고개서, 흑 수정 같은 눈동자가 나를 빤히 응시한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오랜만이네요. 머셔너리 로드.” 고요한 미성이 귓전을 웅 울렸다. 잠시 후, 나와 같이 올라온 사용자가 정중히 탁자와 그릇을 놓기 시작한다. 나는 겨우 삼켰던 숨을 뱉을 수 있었다. “이, 이게….” “선객으로 오셨어요. 자주는 아니지만, 이렇게 가끔 찾아오실 때가 있거든요. 어때요? 온 거 후회하지 않으시죠?” 선율은 눈을 찡긋하며 말하고는 앞쪽 소파를 가리켰다. 멍하니 걸음을 옮기자, 한소영은 내가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해밀 로드는 도와주겠다고 하던가요?” “예, 예?” “연락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저와 마탑 로드한테 하셨다면, 당연히 해밀 로드한테도 하셨겠죠.” “아…. 아니요. 현재 강철 산맥에 있다고 해서요.” 한소영은 품속에서 푸른색 구슬을 꺼내 들었다. 더듬거리면서 말하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탁자에 놓인 그릇을 바라본다. …그런가. 한소영도 알고 있었나. “자~. 그럼 우리 식사하면서 얘기나 할래요?” 무에 그리 좋은지, 선율은 명랑한 목소리로 말하며 손뼉을 짝짝 쳤다. 이윽고 한소영이 수저를 드는 것을 기점으로, 나도 엉겁결에 수저를 들었다. 그야말로 뜻밖의 식사였다. …그런데, 나는 왜 이런 상황에서도 숟가락을 쥔 한소영의 손놀림에 시선을 빼앗기는 걸까? 정말이지 움직임 한 번 고아하고 기품이 넘친다. 그때였다. “어머. 머셔너리 로드 좀 봐. 아주 그냥 뚫어지겠네. 뚫어지겠어.” 선율이 조롱하는 음성이 들려온 순간, 한소영의 손이 멈칫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곧 스튜를 담은 숟갈이 올라가더니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온다. 숟가락은, 정확히 내 입 앞에서 멈췄다. 스튜가 풍기는 고소한 냄새와 손에서 흘러나오는 성숙한 여인의 내음이 동시에 콧속을 찌른다. 그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린 나는, 무표정한 빛으로 나를 응시하는 한소영을 볼 수 있었다. 색스러운 입술이 살며시 벌어진다. “아.” …응? 아? 나보고 입을 벌리라고? 직접 먹여주신다고?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한소영이 한 번 더 입을 연다. “아, 하세요.” “어머 어머! 어머 어머!” “상이에요. 그러니까, 아.” “사, 상이요? …아!” 상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이제야 자초지종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탄성을 지르는 사이, 한소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입안으로 숟가락을 밀어 넣었다. 본능에 따라 입을 다물자, 목적을 달성한 숟가락이 부드러이 비집어 빠져나간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 선율은 한소영이 선객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통신을 보고 듣고 있었다는 소리다. 말인즉, 만에 하나 말 한 마디 잘못했다면…. 한소영은 천천히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많이 급해 보이시네요.” “예, 예?”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흔들림이 보여요.” “…….” “상황이 급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흔들리시면 안 돼요. 머리는 항상 차갑게 식혀놓으세요. 클랜 로드가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이면, 자연스레 아래 클랜원들도 불안해하니까요.” “…새겨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아마 ‘초감각’으로 내 심리 상태를 간접적으로 알려준 듯하다. 차분히 숨을 고르자, 한소영은 알 듯 말 듯한 모나리자 미소를 짓더니 유유히 식사를 시작했다. 선율은 여전히 꺅꺅거리는 중이었다. “그럼 식사하세요. 그리고 사정을 말씀해주시겠어요?” “예. 알겠습니다.”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다. * 식사와 볼 일을 마치고 캐슬로 돌아오니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괜스레 짜증만 났는데, 지금은 상당히 가라앉았다. 준비도 마쳤고, 점검도 완료했고, 관련 기록도 수집했고, 가는 길도 숙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군요.’ 정말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 걸까. 식사가 끝난 후, 새하얀 천으로 우아하게 입술을 닦던 한소영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냥 단순히 외양 때문만은 아니었다. ‘좋아요. 도와드리죠.’ 단 두 마디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이래, 나는 스스로 변화를 인지할 정도로 침착함을 되찾았다. ‘왜 이게 지금 터졌느냐.’ 보다는, ‘그래. 언젠가는 해야겠지.’로 생각이 변화했다고나 할까. 물론 준비 시간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고, 아직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다. 흘끗 시선을 내리자 북 도시 ‘비밀 도서관’에서 가져온 두 장의 기록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하여 왕자는 자신과 동고동락한 14명의 동료를 친위대로 임명한 후….』 이 기록에서 주목할 부분은 ‘자신’과 ‘14명의 동료’. 즉 합하면 총 15명이다. 그리고 현재 원정대는 나를 포함해 14명으로, 아직 한 명이 부족한 상태였다. 1회 차의 경험으로 비추어, 나는 이번 원정에서 꼭 지켜야 할 철칙을 두 가지 세웠다. 하나는 원소 계열에 능통한 마법사를 최대한 많이 데려가는 것이고, 남은 하나는 원정대 총원이 15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조건 15명이다. 한 명이라도 많거나 부족할 시, 우리는 목적지 끝까지 도착할 수 없다. 그래서 원래 형을 포함하려고 한 건데 아쉽게 불발된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그냥 인원수 맞춤용으로 데려가는 거면 모를까. 누군가 형의 공백을 완전히 채워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건 요원한 일일 터. 아무리 찾아도 뇌제만한 사용자가 없으니…. 그러면 누구를 추가해야 할까? 사샤가 나으려나? 하다못해 헬레나라도 있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을 텐데. 그렇게 한창 심사숙고하고 있을 무렵. 달칵. 돌연, 문이 살짝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작품 후기 ============================ 아. 졸리네요. 조금이라도 자야겠어요. 독자 분들 모두 상쾌하고 활기찬 아침 맞이하세요. :D 0735 / 0933 ---------------------------------------------- 비명의 초원. …물론 ‘철혈 여왕’ 한소영의 선택이 무조건 잘못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용이 잠든 산맥’ 때도 그렇고, 공략이 어려운 지역에 접근 금지를 하는 것도 분명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허나 과연 누가 알았으랴. 그때 그 선택이 1년 후 현재, 이런 재앙으로 되돌아올 줄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조금 힘들더라도 어떻게든 공략을 하는 게 맞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번 사건은, 아마 경고인 듯싶다. 말인즉 구, 신 대륙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한 사용자들한테, 아틀란타가 일종의 경고를 한 게 아닐까? 필자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 아틀란타 내(內) 도시 중앙 도서관, ‘제 1차 도시 습격 사건 일지’ 中 발췌. * “오빠….” 문을 열고 들어온 여인은 이유정이었다. 약간 의외의 기분을 느꼈으나, 망설임 가득한 눈동자를 보자 왜 왔는지 알 것도 같다. 이유정은 주춤주춤 걸어와 책상 앞에서 멈췄다. “무슨 일이야? 오늘도 칼부림 좀 하려고 찾아왔니?” “어, 어? 아니야….” 가벼운 농담으로 건넨 말이었으나 이유정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흠칫 고개를 수그리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눈이 서글프게 가늘어지고 입을 우물거리는 게, 흡사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한 모양새였다. 이런, 울릴 의도는 없었는데. 아마 그때의 일을 상당히 마음에 두고 있는 듯하다. “농담이야. 아무튼, 왜?” “으응…. 많이 바빠 보이네?” “응? 그럼 정신 없지. 뭐, 어지간한 일은 처리했다만.” “아…. 근데 있잖아, 이거 꼭 해야 하는 일이야?” “……?” “오빠 기분이 많이 안 좋은 것 같고…. 왠지 되게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아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아, 아니. 그냥 하지 않으면 안되나 싶어서. 물론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없지만.” 말을 마친 이유정은 어설프게 웃었다. 속으로 절로 한숨이 나온다. 아까부터 말을 빙빙 돌리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꾸만 입이 달싹달싹 움직이는 게, 무언가 주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나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는 안 되지. 누누이 말하지만, 머셔너리는 이제 대표 클랜이잖아. 우리가 그동안 어떻게 해서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응?” “이제 더 이상 도시 한구석에서 운영하는 용병 클랜이 아니야. 완전히 양지로 올라섰다고. 그런데 입맛대로, 하고 싶은 일만 골라서 하면, 이 바닥에서 얼마나 살아남을 것 같아?” “글쎄? 아니, 그런가?” “그래. 만일 머셔너리, 대표 클랜이 되더니 변했다. 아니면 이제 머셔너리도 별거 없더라. 이런 소문이 도는 순간, 그동안 도시에 투자한 돈 깡그리 날리는 거야. 알아들어?” “그, 그렇구나~.” …그, 그렇구나~는 무슨.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여하튼 가다듬을(?) 시간은 충분히 줬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이유정은 여전히 주저하는 기색을 버리지 못했다. 결국에는 먼저 말을 꺼내기로 결심했다. “안 돼.” “어?” “원정에 끼어달라고 찾아온 거잖아.” “…헤헤. 들켰나?” 한순간 멍한 빛을 보였으나 어쨌든 한 박자 늦게 인정하기는 했다. 역시나 웃음은 어설프다. “오빠. 나 되게 잘할 자신….” “안 돼. 끼워줄 생각 없어. 돌아가.” “…왜?” “네가 감당할만한 데가 아니니까. …아니, 이번에도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가 않아.” “오빠.” “유정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바로 말을 끊어버리자, 이유정이 입을 잘근잘근 씹는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서 말을 이었다. “실적을 쌓으려는 욕심은 이해해. 하지만….” “그게 아니야!” 연초를 꺼내며 테라스로 나가려는 찰나, 돌연 약간 높아진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흘끗 몸을 돌리자, 호흡이 거칠어진 이유정이 보였다. 그러더니, 곧 떨리는 숨소리를 뱉는다. “그건 이제 상관없어. 실적? 주지 않아도 좋아.” “응?” “모르겠어, 모르겠어. 근데 요즘 가슴이 너무 갑갑해서, 그냥 팍 뚫어버리고 싶어. 스스로 무언가 확인해보고 싶어. 정말로 하나도 모르겠는데,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아.” “…….” 약간은 핀트가 어긋난 말이 연이어 들려온다. 자신도 똑 부러지게 말하고는 싶은데, 아마 생각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 듯하다. 그러니까 이렇게 나오는 대로 던지는 거겠지. 그러나 연한 붉은색의 눈동자는 뜻 모를 절박함을 띠고 있다. 마치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제발 알아달라는, 필사적으로 호소하는 듯한 느낌이 전해진다. “나, 안현처럼 멋대로 굴고 싶지는 않아. 오빠가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 예전처럼 한 번 해보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애잔한 음성에 나는 싱겁게 웃었다. “협박이냐?” “아니. 부탁이야. 어떤 일이라도 좋아. 하라는 대로 할게. 무조건 시키는 대로만 할게. 절대로 오빠 말에 복종할게. 밑바닥부터 시작해도 좋으니까…!” 무에 그리 서운한지, 이유정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코를 훌쩍 들이켰다. 나는 연초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테라스가 있는 쪽을 바라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밑바닥부터 시작해도 좋다고? 하하. 거, 말 한 번 괜찮게 하네. 이유정치고는. 사실 형의 자리가 빔으로써 한 명을 더 데려가야 할 상황이기는 했다. 여태 그 문제에 관해 고민하고 있기도 했고. 중요한 문제는, 아무나 데려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단순 능력으로만 뽑았다면 이렇게 고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고연주를 선발하지 않은 이유는 근접 계열은 더는 필요하지 않았거니와, 내가 없는 동안 클랜을 이끌만한 사용자가 한 명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비앙을 선발하지 않은 이유는 능력적인 면에서의 개성이 너무 강해서였고. 그러니까 능력도 좋고, 원소 마법에 능통해야 하고, 원정대의 조화를 해치지 않는 사용자를 선발해야 하는데, 그런 사용자가 없는 게 현실이었다. 대충 아무나 뽑아가느니 그냥 안 데려가는 게 나을 정도. 지금은 그나마 최소한의 조합이라도 맞춘 상태니까. 한데 그 장소의 특성상 무조건 15명 인원을 맞춰야 하니 뜻밖의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이유정의 말이 조금은 솔깃하다. “…정말이야?” “응?” “밑바닥부터 시작해도 좋다는 말. 정말이냐고.” “어…. 응!” 내 말에서 희망을 느낀 걸까. 이유정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만들며 외쳤다. 나는 길게 연기를 뱉으며 서서히 거리를 줄였다. “전투에 참가하지 못할 수도 있어. 온갖 허드렛일을 하게 될 거야. 그래도 상관없어?” “사, 상관없어!” 이제는 숫제 고개를 쉴 새 없이 움직이기까지 한다. “내가 정말 너를 믿어도 될까?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원정은 능력 우선 선발이 아니야. 조합을 우선해서 선발했다. 그런데 네가 견딜 수 있다고? 정말로?” “만일 내가 거슬리는 행동을 한다면, 오빠가 그 자리에서 나를 죽여도 좋아.” “이게 말하는 거 하고는. 내가 너를 왜 죽여.” “아니야. 정말이야. 오빠가 어디 가서 죽으라고 하면, 당장 가서 죽을게. 정말로.” 그럼 혹시 침대에서 죽어볼 생각은 없니?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농담을 던지기에는 이유정의 분위기가 굉장히 심각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좋다. 괜히 아무나 뽑아서 조화를 망치느니, 현 조합을 살리는 길이 백 배는 낫다. 나머지 사용자는 오롯이 원정에만 신경 쓰게 해 전투력을 보존하고, 이유정은 말한 대로 그 외의 일을 맡게 될 것이다. “좋아. 가서 준비해.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다.” “오, 오빠!” 마침내 허락해준 순간, 이유정은 비로소 환하게 웃었다. 저 미소가 며칠 후 어떻게 변할지는 앞으로 지켜볼 일이다. …과연, 잘한 일일까. * 안개가 조금 심하기는 했지만, 서늘하고 고요한 날이었다. 새벽 남 도시 정문에는 나를 포함한 14명의 사용자가 모였다. 한소영 같은 경우는 나보다 일찍 와 있었고, 선율은 정확한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정문의 경비병은 불안한 표정으로 우리를 흘깃거리고 있었다. 딱히 말도 안 했는데 모두 하나같이 두터운 로브를 걸치고 온 탓이다. 아마 질 나쁜 음모를 꾸미는 음험한 모임으로 보고 있지 않을까. “모두 모였습니까? 한 명이 부족한 것 같은데.” “저기 오고 있네요.” 경비병에게서 시선을 떼며 묻자 김한별이 묘하게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가리키는 방향을 응시하자, 몸에 총 세 개의 카오스 미믹을 두른 채로 헐레벌떡 달려오는 이유정이 보인다. 붉은 머리카락은 물론, 허리 부근의 카오스 미믹이 찰랑찰랑(?) 움직일 정도였다. 잠시 후, 멀미를 하는 듯 나직이 울어 젖히는 아기 카오스 미믹의 소리가 들리는 동시, 이유정이 도착했다. “어머, 꼴찌네? 나는 약속 시간에 늦는 사람이 가장 싫더라.” 선율은 미소 가득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배배 꼬면서 말했다. “…죄, 죄송해요. 준비한 물건들을 확인하느라.” 이유정은 잠깐 내 눈치를 살피더니 어색이 고개를 숙였다. 선율의 킬킬 웃는 소리가 이어졌다. “농담이에요. 농담~. 그나저나 여명의 검투사가 짐꾼 역할이라니, 이 원정대 정말로 기대되는데요?” 선율은 생글생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자기 딱 내 스타일이야.” 라고 말하며 이유정을 껴안기까지. 딱히 악의는 없어 보이나 손이 은근슬쩍 엄한 부분을 건드린다. 시선을 돌리자, 무언가 고소해 하는 김한별 옆으로 필사적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이유정이 보였다. 나를 애타게 쳐다보는 게, ‘마치 이런 것도 참아야 해요?’ 라고 묻는 듯하다. “자, 그럼….” 선율에게 적당히 눈치를 준 후, 조용히 운을 떼며 주변을 둘러본다. 그러자 문득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형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출발 직전인 이 순간에도 나는 형이 없음을 아쉬워하고 있다. 짙은 색 마법사 코트를 입고 오연히 서 있는, 그러나 나를 보면 살짝 웃음 짓는 형이 있다면 얼마나 든든했을까. 그 정도로 형의 부재가 아쉬운 원정이다. ‘아니지. 안 돼. 정신 차려라, 김수현!’ 이윽고 나는 세차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갑자기 한소영의 빤한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마 방금 내 심리를 읽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시간이 됐다. 현재 사용자 인원도 어디 가서 절대로 꿀리지 않는 수준이다. 사실 이번 원정을 성공할지 아직은 장담할 수는 없고, 또 이렇게 가는 게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대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분명 내 탓은 아니나,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다가올 재앙에서 벗어나려면, 어쩌면 지금이 ‘골든 타임’인지도 모른다. 그래.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 “출발하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출발을 알리며 몸을 돌렸다. 이미 준비는 마친 상태라, 지체 않고 정문을 나섰다. “사, 사용자 분들의 생환을 기원합니다!” 이윽고 후방에서 들려오는 거주민 경비병의 외침이, 비로소 본격적인 원정의 시작을 알렸다. * 첫날, 행군은 나름 괜찮은 분위기였다. 이유정을 중심으로 한 일반적인 방진의 형태로 우리는 거침없이 붉은 황무지를 가로질렀다. 황무지를 벗어나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별다른 괴물은 만나지 못했다. 오히려 간간이 탐험에서 돌아오는 캐러밴과 마주칠 뿐이었다. 엄청난 안정화 속도. 그동안 사용자들이 얼마나 아틀란타에 관심을 쏟았는지 보여주는 방증이다. 그러나, 도시를 떠나고 나흘째로 접어들던 날. 우리는 첫 번째로 통과해야 할 지역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넓고 푸른 초원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현아. 잠시만. 무언가 이상해.”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임한나가 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나를 불렀다. 사흘간 이어진, 무난한 행군의 끝을 알리는 목소리였다. ============================ 작품 후기 ============================ 아. 몇몇 독자 분들이 오해를 하고 계신 듯하네요. 예고 시스템은 스포일러가 아니라, 그날 연재가 언제 올라올지 제가 코멘트에 알리는 방식입니다. 자정 연재가 가장 좋기는 하지만, 요즘처럼 늦는 경우 언제쯤 올라올지 기약 없이 기다리는 분들이 계실 것 같아서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부담을 줄여드리고자 시작했는데, 제가 최근 예고 시간마저 맞추지 못하는 일이 발생해 잠시 끊어둔 상태입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고민 중입니다. 예고 시스템은 확실한 장점이 있지만, 제가 또 저번과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요. 혹시 원하는 분이 많으시다면, 다시 한 번 살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을게요. 물론 어지간하면 자정 연재를 할 수 있도록 지속해서 노력하겠습니다. _(__)_ 0736 / 0933 ---------------------------------------------- 비명의 초원. - 왕국의 인간이 감히 이곳을 함부로 돌아다니다니, 간덩이가 부은 게로구나. - 죽이려면 죽이시오. 어차피 더 이상 삶에 미련은 없으니. - 응? 하하! 용감한 척을 하는 것이냐, 아니면 정말로 포기한 것이냐. 재미있는 애송이로다. - 애송이라고 부르지 마시오! 나는…! - 그래. 그대는? - …됐소. 이제 곧 죽을 운명인데, 무에 그리 중요할까. 기왕이면 고통 없이 단번에 보내주면 고맙겠구려. 신 대륙 아틀란타(북 도시 비밀 도서관), ‘빅토리아 왕조 실록 - 18대 황제(147 ~ 147)’ 中 ‘폐(廢) 태자와 야만 전사 왕의 첫 만남.’ * 천천히 땅을 살펴보았으나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아니, 자세히 보면 조금씩 갈라진 부분이 보이기는 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분명 초원인데, 흡사 거친 황무지처럼 지면이 쩍쩍 갈라진 상태라고나 할까. 그러나 균열은 극히 미약한 수준이고, 그걸 제외하면 그냥 보통의 초원이다. “별거는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하네….” “걸리는 거라도 있어?” “으응…. 딱 꼬집어 말할 수가…. 그러니까 꼭 누가 일부러 땅을 덮은 것 같아. 아니, 땅이 가라앉은 건가? 여하튼 처음이면 모르겠는데, 아까도 비슷한 흔적을 봤거든.” 임한나는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봤으나 이거다! 싶은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이 초원에 자주 드나든 건 아니지만, 그래도 땅속 괴물의 정보는 없는 것 같은데…. 한 번 제대로 조사해볼까, 아니면 무시하고 행군을 지속할까. 머릿속에 무수한 생각이 스친다. 그 순간 진형 중앙에 멀뚱멀뚱 서 있는 안솔이 눈에 밟혔다. 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곧바로 안솔에게 다가가 두 손으로 허리를 붙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에?” 안솔은 흠칫 몸을 움츠렸다가, 멍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이어서 왜 그러냐는 듯이 두 눈을 깜빡깜빡. 귀엽네. 저 젖살 통통히 오른 볼을 꽉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야. 그럼 아마 어엉 울음을 터뜨리겠지? …속으로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나는 안솔을 임한나의 옆에 고이 안착시켰다. 그리고 아까 본 땅을 가리켰다. “자, 안솔. 저 땅을 봐라.” “에…?” “네 행운이 필요해. 보고 느껴지는 감을 얘기해줘.” “에~?” 안솔은 ‘뭐 어쩌라는 거냐.’ 라고 말하는 듯한 기색을 비쳤으나, 이내 순순히 땅을 쳐다봤다. 그리고 한참 동안 가만~히 응시하더니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자 임한나의 안색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과연 무언가 느낀 게 있는 걸까? 잠시 후. “?” 안솔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지는 동시, 정수리에 황금빛 물음표가 반짝 떠오른다. 심각해 보이는 눈은 여전히 땅을 대차게 노려보고 있었으나, 몸의 반응은 정직했다. “무, 물음표?” 한소영이 황당해 하는 음성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흘렸다. 자식이, 그냥 모르면 모른다고 하지. “우선은 가는 게 낫겠다.” “오, 오라버니. 잠시만요.” “괜찮아. 시간이 없어서 그래.” “아, 아니! 정말로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아니, 알아낼 수 있을 거라니. 이 무슨 어이없는 솔직함인가. 억지로 출발하려고 했지만, 안솔은 두더지가 되고 싶은지 어느새 바짝 엎드려 땅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리고 입을 오므려 “쉬~.”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기까지. 저런다고 감이 올 것 같지는 않은데. 문득 선율이 끅끅 숨죽여 웃는 소리가 들리자 낯이 화끈해진다. 나는 팔짱을 끼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였다. “삐아!” 땅을 관찰하던 안솔이, 갑작스럽게 새된 비명을 지르며 발라당 나동그라졌다. 임한나는 깜짝 놀라는 와중에도 신속히 안솔을 끌어내고, 나는 반사적으로 무검을 뽑아 땅을 겨눴다. 안솔을 제외한 전원이 삽시간에 각자의 무기를 겨눈 채 조심스레 물러난다. 그리고 한동안 기다려보았으나, 어떤 전조도 감지되지 않았다. 초원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안솔?” “에, 에?” “안솔?” “비, 비명! 따, 땅속에서 갑자기 비명이…!” 두 번에 걸쳐 이름을 부르자 안솔이 뜻 모를 소리를 했다. 나는 계속 검을 겨눈 채로, 눈을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 비명 비슷한 소리 들으신 분?” 그러나 모두가 고개를 젓는다. 물론 나 또한 듣지 못했고. 그럼 안솔이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 “디텍트(Detect )에는 이상이 없다고 나오는데요?” “마력 감지에도 걸리는 게 없습니다.” 선율과 신재룡이 차례대로 말했다. 안솔은 당황한 낯으로 고개만 번갈아 돌리다가,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보였다. 눈도 놀란 토끼 눈이고, 아직도 가슴을 들썩이는 걸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머셔너리 로드. 우선은 이 초원을 벗어나는 게 좋겠네요.” 그때 후드를 벗어 젖힌 한소영이 사방을 고요히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머리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무언가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무조건 내 기억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는 이제껏 뼈가 저리도록 겪었으니까. “행군에 특히 주의해주시고, 바로 출발하도록 하죠.” 우선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로 하고, 나는 바로 행군을 재개했다. * 초원 초입에서 벗어나 저녁 무렵이 될 때까지, 우리는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행군했다. 누구 한 명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고, 주변을 경계하면서 묵묵히 진군했다. 그러나 이후 이렇다 할 이상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고, 결국에는 적당한 장소에서 야영하기로 했다. 사실 사방이 트인 장소라 딱히 고를 필요도 없었지마는. 그렇게 모닥불을 피우고, 침낭을 정리하는 등 부지런히 야영 준비를 하는 동안, 저녁 식사가 준비됐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번 원정 내내 식사 준비는 이유정의 몫이었다. “응? 꽤 괜찮네요?” 제갈 해솔이 수저를 입에 물은 채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음식 그릇은 쳐다보지도 않던 허준영은, 반신반의하는 기색을 비치더니 스튜를 한 숟갈 떠 조심스레 입으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놀란 눈으로 이유정을 바라본다. “믿을 수 없군. 여전히 맛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눈 딱 감고 먹을만한 수준은 돼. 임한나가 도와줬나?” “아, 아하하.” 이유정은 그저 어설프게 웃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행군 첫날 이유정의 요리 솜씨는 도저히 눈뜨고는 못 볼 수준이었다. 그냥 굉장히, 엄청나게 맛이 없었다. 보다 못한 임한나가 식사는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나섰지만, 그건 내가 엄하게 단속했다. 약속을 물릴 수는 없으니까.(덕분에 그날 내내 원망 어린 눈초리를 받아야만 했다.) 그래도 나름 노력했는지, 오늘 저녁은 그럭저럭 먹을만했다. 적어도 첫날처럼 안솔이 대성통곡을 하면서 토악질을 하는 사태까지는 발생하지 않았다. 마치 정액을 음미하듯 야릇하게 입을 우물거리던 선율은, 목울대를 꼴깍 움직이며 미소 지었다. “확실히 많이 발전했네. 습득이 빠르네요?” “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렇게 이상했어요?” “네.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대접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는 음식이었어요.” “…….” 선율의 말은 신랄했고, 이유정은 힘없이 고개를 수그렸다. 그러한 찰나, 냠냠 소리 내어 먹던 선율이 갑자기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돌연 입을 크게 벌리며 혀를 살그머니 내밀었다. 혀에는 진득한 스튜 국물이 묻어 있다. 이내 양손으로 각각 브이(V)를 그리면서 동공이 풀린 눈을 연기한다. “아헤가오 더블 피스!” …미친년. 병신 같은 년. 알아듣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려고? 괜스레 민망한 기분에 시선을 돌리자, 마침 식사를 마친 한소영이 눈에 들어온다. 가만히 응시하자 눈이 정화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릇을 내려놓는 움직임 하나하나가 조신하면서 기품이 넘친다. “식사는 입에 맞으셨는지요.” 스리슬쩍 말을 걸었다. “…네. 확실히 첫날보다는 괜찮네요.” 한소영은 나를 흘끗 쳐다보고는 입을 혀로 살짝 핥으며 말했다. 괜찮다고만 했지 입에 맞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유정은 음식을 남기지 않고 먹어준 게 기뻤는지, “스튜 더 드릴까요? 아직 많이 있는데.” 라고 말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아차. 그러고 보니.” 한소영은 양손으로 침착히 그릇을 가리면서 새로운 말을 꺼냈다. 아주 자연스러운 화제 전환이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 기억나시나요?” “아침이요?” “사용자 안솔의 일이요.” “아, 예.”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 걸 들었는지, 임한나 옆에서 한창 음식 투정을 부리던 안솔이 귀를 쫑긋 세웠다. 아니, 모두가 한소영에게 주목하고 있다. 애초 행군 내내 거의 입을 열지 않아서, 과연 무슨 말을 할까 궁금했다. “가볍게 넘기기에는, 그 일이 계속 마음에 걸리네요.” “계속이요? 혹시.” “아니요. 저도 이상한 점은 느끼지 못했어요. 그런데 도시에 있을 때, 오늘 겪은 상황과 비슷한 말을 들은 기억이 있어서요.”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어차피 그러려고 했다는 듯, 한소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전이었나…. 산하 클랜에서 실종된 동료를 찾아달라고 부탁해왔어요. 실종 장소는 이 초원.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갑자기 동료 한 명이 사라졌다고 하더군요.”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사라졌다고요?” 이상하다는 생각에 반문하자 한소영의 아담한 어깨가 들먹여진다. “네. 그 누구도, 심지어 불침번도 인지하지 못했어요. 그냥 혼자서 홀연히 사라진 거죠. 다만….” “…다만?” “그날 잠들기 전까지, 간간이 이상한 비명을 들었다는 말을 했다고 하네요.” “이상한 비명이라면….” “땅속 비명이요. 아까와 똑같은 상황이죠.” “…실종된 사용자는 찾았습니까?” “아니요. 찾지 못했어요.” “…….” 한소영은 약간 잔인하게 느껴질 정도로 냉정하게 말했다. 그렇게 말이 끝난 순간, 야영지 주변에 갑자기 침묵이 내려앉았다. 분위기는 급속도로 냉각됐다. 한소영 목소리 자체가 차갑고 고요하다 보니, 왠지 모르게 소름이 끼치는 기분이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봤으나 떠오르는 기억은 없다.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흘깃 시선을 돌리자 덜덜 떨면서 임한나를 꼭 부여잡은 안솔이 보인다. “여러분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경계 인원을 두 배로 늘리겠습니다. 그리고 안솔?” “……?” “오늘 밤은 무조건 내 옆에 붙어 있어. 알겠지?” “으, 응!” 안솔은 아주 약간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싱숭생숭한 식사 시간이 끝난 이후, 초원에 완연한 밤이 찾아왔다. * 삼엄한 경계가 이어지던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침낭에서 꼬물꼬물 기어 나온 안솔은, 맑은 하늘에 뜬 찬란한 해를 보고 안도의 숨을 흘렸다. 혹시 누가 잡아갈까 벌벌 떨면서 새벽을 보냈는데, 이렇게 무사히 따뜻한 아침 햇살을 받으니 그렇게나 기분이 좋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식사가 여전히 형편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정말로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이윽고 김수현의 출발 신호를 기점으로 원정대의 행군이 시작됐다. 그리고 어제와 같이 주변을 경계하며 착실하게 나아갈 즈음, 갑자기 임한나가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전방에서 여아를 발견했다는 말이 이어졌다. ‘웬 여아?’ 그 순간 돌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도시 주변도 아니고, 초원에 여아 혼자 있다는 건 충분히 이상하게 생각될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나 안솔은 당황하지 않았다. 김수현과 임한나가 잠깐 자리를 비우더니 정말로 한 명의 여아를 데려온 것이다. 얼굴이나 옷이 조금 더러웠지만, 그래도 선한 눈에 귀여운 인상의 거주민 여아였다. “어떻게 된 거죠?” “캐러밴에서 짐꾼으로 데려온 것 같은데, 아마 버림받은 것 같습니다. 기억나는 대로 길을 되짚어서 오는 중이었다고 하더군요.” 들려오는 말소리에 안솔은 그렇구나 이해하는 동시에 안쓰러운 감정을 느꼈다. 확실히 실제로 벌어질 법한 일이기도 했거니와, 딱히 해를 끼칠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아니. 애초 김수현이 친히 데려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안솔은 일말의 의심을 거뒀다. 이후 이런저런 말이 오고 갔지만, 결국에는 데려가는 것으로 결론이 모였다. 여아가 요리에 자신 있다고 말한 탓에, 안솔은 망설임 없이 찬성표를 던졌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행군. 진형을 맞추며 걸어가면서 안솔은 신기한 기분을 느꼈다. 권한을 부여 받은 입장을 제외하면, 거주민은 태반이 사용자를 어려워한다. 한데 여아는 조금도 그런 기색 없이, 붙임성 있는 미소를 띤 채 한 명씩 붙들고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수현과 도란도란 말을 나눌 때는 질투심이 일었지만, 허준영이 곤란해 할 때는 웃기기도 했다. 그렇게 한 명씩 돌아가면서 어느새 후방까지 들어온 여아는, 다양한 보석을 보여주는 김한별에 질렸는지 안솔로 시선을 돌렸다. 안솔이 최대한 자상하게 웃어 보이자, 방실방실 웃으며 곧장 달려온다. 그리고 안아달라는 듯 두 팔을 내밀어, 안솔은 얼른 여아를 안아 들었다. 해맑은 미소와 마주하자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언니 언니!” “으응? 왜?” “언니는 누구야?” “나? 글쎄~.” 마침 슬슬 행군이 지루하게 느껴지던 터라, 안솔은 장난스레 말했다. 그러자 여아가 안솔을 빤히 응시한다. “언니는 누구야?” “누굴까? 한 번 알아맞혀 볼래?” “언니는 누구야?” “누구게~.” “언니는 누구야?” “누….” 별생각 없이 말을 잇던 안솔은 돌연히 말끝을 흐렸다. “언니는 누구야?” “…….” 뜻 모를 서늘한 기운이 갑자기 등골을 훑는다. 침을 꼴깍 삼킨 안솔은 살그머니 시선을 내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언니….” 여아가 한층 가라앉은 음성으로 안솔을 불렀다. “혹시, 죽고 싶어?” 안솔은 반사적으로 지르려던 비명을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글생글 웃고 있던 여아가, 어느 순간 표정이라고는 한치도 찾아볼 수 없는, 한껏 정색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아래로 축 늘어진 눈매가 까닭 없이 노려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안솔은 본능적으로 여아를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했는지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이제 자신이 걷고 있는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이 세상에 오직 자신과 여아만 남은 듯한 요상한 감각. 안솔의 표정이 마음에 든 걸까. 여아가 히죽 웃었다. 얼굴을 온통 일그러뜨리며 웃는다. 작달막한 입은 좌우로 길게 찢어져 괴물의 주둥이처럼 변하고, 눈은 핏줄이 터졌는지 시뻘겋게 변색한다. 이윽고 쫙 찢어진 입이 흐물흐물 움직인다. 안솔은 온 머리카락이 하늘로 서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니면…. 살고 싶어?” 살고 싶으냐는 한 마디. 안솔은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언니는 살고 싶구나.” 흐흐, 흐흐. 아이의 웃음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음침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있잖아, 있잖아. 언니야. 그럼….” 소곤소곤. 무언가 엄청난 비밀을 알려주려는 것처럼, 여아는 천천히 몸을 들어 안솔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그리고. “눈, 떠.” 그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 0737 / 0933 ---------------------------------------------- 비명의 초원. - 정말 믿어지지가 않는군. 왜 나를 살려주는 거요? - 죽고 싶나? - 죽고 싶다고는 안 했소. - 흐흐, 그럼 조용히 입을 닫는 게 좋을 거야. 보아하니 우리가 누군지 모르는…. - 알고 있소. 보아하니 왕국 외곽을 겉도는 야만 부족 같구려. 그대는 이 부족을 이끄는 왕이겠지. - …아는데 이러나? - 말했잖소. 죽고 싶지는 않으나 죽여도 상관은 없소. -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아는 왕국 놈들이 아닌 것 같아서. - 아, 내 태도를 말하는 거요? 이상할 것 없소. 왕국 내 모든 인간이 그대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오. - 그러니까, 너는 아니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 못 믿을 건 또 뭐 있겠소? 내가 목숨을 구걸하기라도 했소? 그리고, 빅토리아 왕국에서도 그대들을 배척하지 않은 역사는 있을 텐데. - …물론 없지는 않지. 선왕 되는 사람이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를 받아들였으니까. 허나 그 점을 빌미 삼아, 얼마 전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나? 알기로는 야만 부족과는 같은 지붕 아래 살 수 없다는 명분으로 선왕을 살해하고…. - 아아, 맞소. 왕국의 사정을 상당히 잘 알고 있군. 한데,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소만. - 그게 뭔데? - 그 되지도 않은 명분으로 살해당한 선왕이, 바로 내 친부라는 점이오. - …엉? 신 대륙 아틀란타(북 도시 비밀 도서관), ‘빅토리아 왕조 실록 - 18대 황제(147 ~ 147)’ 中 ‘폐(廢) 태자, 간신히 목숨을 건진 이후.’ * 푸확! 갑자기 사방에서 흙더미가 솟구치는 동시, “꺄아아악!” “아아아악!” 두 여인의 비명이 겹쳤다. 어떻게 된 걸까. 안솔이 사정없이 지면을 구르고, 사라의 몸이 삽시간에 허공으로 치솟는다. 이윽고 사라의 복부를 관통한 무언가 뾰족한 것을 발견한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무검을 뽑아 들고 있는 힘껏 외쳤다. “기습이다! 전투 준비!” “────. ────. 멀티플렉스 라이트(Multiplex Light)!” 거의 동시에 한소영의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예닐곱 개의 빛무리가 곧장 공중에 떠오르더니 환하게 타오르며 사방을 비췄다. 이내 야영지 일대의 시야를 확보한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건, 꼬챙이 같은 것에 꿰인 채 고통스러워하는 사라를 주둥이 안으로 밀어 넣는 웬 거대한 흙색 괴물이었다. 그때였다. 돌연히 빛나는 화살이 어둠을 가르며 날아간다.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주둥이에 명중했고, 괴물은 크게 비틀거리며 주춤 걸음을 물렸다. “아직 사라를 놓지 않았어요!” 임한나가 황급히 외친 찰나, 어질러진 침낭 속에서 누군가 벌떡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남다은이 얄따란 레이피어를 들고 비호처럼 몸을 날린다.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우선 땅에 나동그라진 안솔의 안전을 확보한 후, 곧장 시선을 돌렸다. 단칼에 처리할 것 같던 기세와는 달리 남다은은 의외로 고전하는 중이었다. 은빛 섬광이 연신 번쩍이는 걸로 보아 공격은 이어가는 것 같은데, 괴물은 당황해 물러나기만 할 뿐 외양은 여전히 굳건해 보였다. “────. ────.” 그때, 어디선가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승우의 음성이었다. 시선을 돌리자 괴물을 지팡이로 겨눈 채, 남은 왼손을 빠르게 놀리며 수인을 맺는 모습이 보였다. 이어서 너덧 개의 물방울이 지팡이 끝에서 피어오르더니 쭉 늘어지며 화살 모양으로 변했다. “워터 애로우(Water Arrow)!” 이윽고 시동 주문을 외친 순간, 물의 화살은 곧바로 쏘아져 괴물의 거대한 몸을 고루 적셨다. 별다른 타격은 없어 보인다. “물이 마르기 전에 끝장내셔야 합니다!” 그러나 하승우는 이때가 기회라는 듯 급한 음성으로 외쳤다. 남다은은 잠깐 주저하는가 싶더니, 곧 전신에서 찬연한 빛을 뿌렸다. 그리고 괴물이 주둥이를 들기도 전 훌쩍 공중으로 솟구쳤고, 양손으로 힘껏 검을 내리쳤다. 특수 능력 ‘직절(直切)’. 검날을 따라온 은빛 섬광이 세찬 호선을 그리며 떨어져, 그대로 괴물의 정수리를 쪼개버렸다.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결과였다. 이어지는 연속 공격에, 괴물은 끽소리도 내지 못한 채 여러 조각으로 분해돼 쓰러졌다. 남다은은 날렵한 몸놀림으로 사라를 빼내, 곧바로 후퇴했다. 좋은 선택이다. 아까 솟구친 흙더미는 하나가 아니었으니까. “복부를 완전히 관통 당했어요. 어서 치료를….” 사라를 구출해온 남다은은, 나를 보고 걸음을 멈칫했다. 왜냐면 안솔도 가히 좋은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라처럼 관통상을 입은 건 아니었으나 옆구리에서 핏물이 철철 흐르는 중이었다. 그러나 걱정은 들지 않는다. 방금 첫 격돌이 일어난 사이, 상황을 파악한 동료들이 서서히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허겁지겁 달려온 신재룡에게 두 부상자를 인계한 후, 나는 그제야 키퍼(Keeper)에서 벗어나 사방을 둘러볼 수 있었다. “…….” 역시나 한 놈이 아니었다. 전방에 한 놈, 좌측에 두 놈. 키가 2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괴물이 우리를 보고 눈을 부라리고 있다. 일견 사람과 비슷해 보이기는 하나, 흙빛 일색의 외양과 쭉 뻗은 주둥이, 그리고 촘촘히 박혀 있는 뾰족한 이빨이 날카로운 반사광을 번들거린다. 무언가 기억날 듯 말 듯하면서도, 나는 급히 외쳤다. “하승우!” “물로 적시면 방어력이 크게 떨어집니다! 다만 물이 흡수되는 속도가 상상 이상으로 빠르니, 그 전에 무조건 결딴내야 합니다!” 이름만 불렀는데 하승우는 곧장 필요한 정보를 뱉어냈다. 그 순간 묻어둔 기억이 뇌리를 스쳤으나 현재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하승우의 말을 듣자마자 정하연이 빠르게 주문을 영창 하기 시작했다. 물 계열 마법은 정하연의 장기였다. “────. ────. 필러 오브 워터(Pillar Of Water)!” 역시나 명불허전. 엄청난 속도로 영창을 마치더니 곧바로 주문을 외웠다. 쏴아아아! 이윽고 수십 개의 물 기둥이 세차게 쏟아졌다. 찬물이 정수리부터 흘러내려 와 줄줄 흐르기 시작한다. 얼마나 쏟아 부었는지, 비단 괴물뿐만이 아닌 우리까지 흠뻑 젖을 정도였다. 약간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여하튼 좋다. 그러는 동안에도 괴물들은 침을 질질 흘리면서 전진해오는 중이었으니까. 이윽고 물 기둥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남다은, 허준영은 한 놈씩!” 마법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나는 앞서 달려나가며 반격을 지시했다. 잠시 후, 거친 고함이 사방을 와르르 울리기 시작했다. * 새벽 내내 살벌하던 초원은, 아침 해가 뜨자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함을 되찾았다. “설마 이 정도로 단단한 줄은 몰랐어요.” 남다은이 쓰러진 괴물을 툭 걷어차며 투덜거렸다. “단단하다니?” “이놈이요. 우선 사라를 구할 생각에 가볍게 부딪쳤는데,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는데도 꿈쩍도 않더라고요.” “확실히 방어력이 높기는 했지. 그래도 사용자 하승우 덕에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잖아.” “그건 그래요.” 남다은은 즉시 동의했다. 그리고 끙차 무릎을 구부리더니 널브러진 괴물을 조사하려는 듯 이모저모 살펴본다. “흙덩어리로 이루어진 놈인데, 다량의 물을 스며들게 해서 방어력을 떨어트린 거죠?” “아마도.” “적절한 대응이기는 했는데…. 그런데, 그 사람은 어떻게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지? 나는 이런 괴물 본 적도 없는데.” “그건 제가 예전에 한 번 겪어봤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갑자기 나타난 하승우가 불쑥 끼어들면서 말했다. 남다은은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겪어보셨다고요?” “예. 미개척 지역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지요. 사실 이번에는 저도 조금 놀랐습니다. 그때는 딱 한 놈이랑 조우했는데, 습격하는 방법에 상당한 차이가 있네요.” “차이? 어떤?” “처음 솟구친 지형은 보고 오셨죠? 이놈들, 원래 지하에서 사는 놈들입니다. 굉장히 깊은 곳에서 활동하는 놈들이죠. 어지간한 마력 감지로는 잡기가 불가능할 정도예요. 그리고 무엇보다, 굉장히 교활합니다. 먹이가 깊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몰래 지면을 뚫고 나와 먹잇감을 낚아채 땅속으로 도망가거든요. 그런데 오늘 새벽에는….” 하승우의 말이 길게 이어졌다. 아마 부랑자로 활동하던 시절을 말하는 듯싶다. 그렇게 둘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가만히 상념에 잠겼다. …바른대로 말하면, 나는 괴물의 정체를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1회 차에 직접 조우한 적도 없거니와, 간간이 소문만 들은 터라 머릿속에 깊숙이 각인돼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 이 초원에서 출현한다는 말도 듣지 못했고. “그러고 보니 확실히 이상하네요. 미개척 지역에서 확인한 개체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중얼중얼 말하는 하승우의 말을 들으며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습당했던 새벽의 전투는, 반격 이후 그럭저럭 가볍게 마쳤다. 두 명의 부상자가 나오기는 했지만(사라의 경우 부상 정도가 상당히 심각했다.), 물약과 치료 주문을 아낌없이 사용한 결과 간신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안솔이었다. 이 이름 모를 괴물의 첫 타깃은, 안솔과 사라였다. 그리고 신재룡의 말에 따르면, 사라가 마법사치고는 내구 능력치가 높은 것 같아, 제대로 된 치료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말인즉, 만에 하나 안솔이 사라에 준하는 상처를 입었다면 요단 강을 건넜을 수도 있었다는 소리였다. 돌이켜보면 은근히 아찔한 상황이다. 그래서 아까 전투 초반에 안솔의 곁을 떠나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고. 그런데 안솔은 상황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오늘 아침 출발한 거 아녔느냐, 여아는 어디 갔느냐는 등 자꾸만 헛소리를 늘어놨다. 처음에는 충격으로 인한 부분 기억 상실을 의심했으나, 검사해보니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스리슬쩍 시선을 돌리자 물에 젖은 로브를 팡팡 털고 있는 임한나와, 몸에 침낭을 두른 채 힘없이 앉아 있는 안솔이 시야에 들어온다. 망연한 눈동자로 가끔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게, 아까 말한 거주민 여아를 찾는 듯싶다. 물론 안솔이 말하는 여아는 어디서도 만난 적이 없고, 하등 이해도 가지 않는다. 아마 추측건대, 꽤 현실적인 꿈을 꾼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꽤 혼란스러워 보이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는 게 낫겠다. 추후 기회가 닿으면 넌지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계획 변경이다. 원래는 적정한 행군 속도를 유지하면서 목적지까지 가려고 했는데, 이런 일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면 곤란하다. 한시라도 빨리 도착해야 하는 이상, 강행군은 물론 그 이상의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 아니, 굳이 강구할 필요까지는 없지. 수단은 이미 갖고 있으니까. “제갈 해솔?” 초원에 드러누운 채 흥얼흥얼 하늘을 바라보던 제갈 해솔은, 흘끗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까닥였다. 건방진 태도. 입에 아예 풀까지 물고 있는 게, 혼자서 아주 잘 놀고 있다. 그러나 마침 옆을 걸어가던 정하연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마지못해 일어서는 기색을 풀풀 날리면서. “어휴. 왜요?” “네 힘이 필요한 일이 생겼다.” “…응?” “도와달라는 말이야.” 이 말은 예상치 못한 걸까. 도와달라고 말하자 “흐~응?” 이상한 비음을 흘린다. 그리고 웬일이냐는 듯 눈을 반짝반짝. 이윽고 제갈 해솔이 팔짱을 끼면서 킥 웃는다. “별일이네요. 클랜 로드한테 도와달라는 말을 다 듣고.”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니까.” “후후. 인정받는 것만큼 기분 좋은 건 없죠. 특히나 당신한테라면 더더욱. 뭐, 좋아요. 말씀하세요. 허벅지 만지게 해달라는 것만 아니면, 어지간해서는 들어줄 용의가 생겼어요.” “걱정하지 마. 네 허벅지는 관심 없으니까.” 나는 조용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당분간, 수송 셔틀이 되어주지 않겠어?” 그리고 곧장 솔직한 마음을 밝혔다. “아~. 그래요. 수송 셔…. 뭐요?” 제갈 해솔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 작품 후기 ============================ 1. 그게 무슨 뜻이에요? 2. 실망이에요. 어떻게 그런 말을 사용하실 수 있나요? 0ㅁ0…. 에이, 독자님들. 아xxx 더x 피x. 이 말이 어때서 그러세요. 아. 물론 다분히 음란하고 변태적인 의미를 지닌 말이라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이런 말도 있잖아요? 사내가 변태면 또 어떠한가. 우리 같은 사내끼리, 이런 말 정도는 웃으면서 공유해요. 혹시 이런 말의 종류에 깊은 지식을 가진 분이 있다면, 기꺼이 가르침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어쩌면 도움이 될 수….(어디에?) 아, 아닙니다. ( --) 0738 / 0933 ---------------------------------------------- 비명의 초원. -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왜 자꾸 따라오는 거요? - 어이, 폐 태자. 지금 어디를 가는 중이지? - 내가 먼저 묻지 않았소. 살려준 거 아니었소? - 아닌데? - 허, 참. 명색이 야만 왕이라는 사람이 어지간히도 할 짓이 없나 보구려. …뭐, 됐소. 현재 꽃의 마녀를 만나러 가는 길이오. - 마녀? 마녀는 왜? - 만나서 도움을 구할 예정이오. 이대로…. 아, 마침 다 왔군. - 어디…. 응? 이 숲은 또 어떻게 된 거야? - 검은 안개가 흐르는 숲…. 신비로운 곳이군. 여하튼 제대로 찾아온 거 같은데. - 신비는 개뿔…. 이봐, 설마 여기로 들어갈 생각인가? 그냥 그 마녀보고 나오라고 하면 안 되나? - 좋은 생각임은 분명하나, 가능성은 현저히 낮을 거라 생각되오만. - 웬…. 믿어지지가 않는군. 이런 음침한 숲에 사람이 산다고? - 보통 사람이 아니라 마녀요. 아무튼, 그럼 나는 이만 들어가 보겠소. 굳이 말리지는 않겠으나, 여기서부터는 따라오지 않는 게 좋을 거요. - 왜? - 듣기로는, 마녀는 외부인을 심히 배척하고, 또 굉장히 장난이 심하다고 들었소. 숲으로 들어가는 순간, 어떤 일을 당할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소. - ……. 신 대륙 아틀란타(북 도시 비밀 도서관), ‘빅토리아 왕조 실록 - 18대 황제(147 ~ 147)’ 中 ‘폐(廢) 태자와 야만 왕, 검은 안개가 흐르는 숲을 앞두고.’ * 초원의 기습 사건 이후, 우리는 초고속 행군을 시작했다. 아니, 행군이 아닌 이동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행군하다가 수송 능력을 사용하고, 또 행군하다가 수송 능력을 사용하고. 약간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망설임 없이 제갈 해솔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면 제갈 해솔은 연신 한숨을 흘리면서도(사실 행군 내내 구시렁거리기는 했다.), 필요할 때마다 수송 능력을 발동해주었다. 아직 0년 차라 그런지 내가 기억하는 수준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으나, 그래도 이게 어딘가. 우리는 엄청난 속도로 초원을 벗어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못해도 35일은 걸릴 거리를 무려 20일로 단축하는 쾌거를 올렸다. 물론 아직 목적지에 다다른 건 아니나, 부지런히 행군하면 오늘 안에는 도착할 수 있다. 이런 엄청난 시간 단축을 선사한 제갈 해솔은 원정대 내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선율은 수송 능력을 배우고 싶어 안달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 한소영도 깊은 관심을 표했을 정도였다. 점심 즈음 한 번 더 수송 능력을 사용한 후, 부지런히 행군하자 우리는 비로소 목적지 부근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눈앞으로 거대하게 이어지는 산맥이 나타난 것이다. 이 산을 넘으면 길었던 여정이 일차적으로 끝난다. 물론 돌아가는 경우는 예외로 치면 말이지. 산은 상당한 크기를 자랑했지만, 두어 시간을 꼬박 오르니 산봉우리는 가볍게 넘을 수 있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간을 들여 완전히 넘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산에서 내려와 평탄한 지형으로 들어가자 광대한 들판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후 약 한 시간 정도 추가로 행군하고 나서, 나는 마침내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남쪽으로 끝없이 뻗어 나가는 들 이룬 벌판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숲이 자리를 잡고 있다. 오랜만이어서 그런 걸까. 애초 인연이 없는 곳이기는 하나, 이렇게 목전에서 보게 되자 까닭 없이 어색한 기분이 든다. 강철 산맥과는 비교할 수 없으나 숲은 그런대로 상당한 길이를 자랑했고, 특히 우거진 정도가 매우 심해 시야가 심히 제한 받을 정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슨 일이에요?” “도착했나요?” 그때였다. 행군이 정지되자 동료들이 하나하나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나는 말하는 대신 검지로 숲을 가리켰다. 아직 어느 정도 거리가 남아 있었으나, 육안으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또 오늘은 들어갈 생각이 없기도 했고. “연기…?” 누군가 넋을 잃은 듯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랬다. 무엇보다 숲에는, 희미한 빛을 띤 몽실몽실한 흰색 연기가 자욱이 깔려 있었다. 특이한 점은 연기가 가끔 하늘 높이 올라가도 결국에는 지상으로 되돌아올 뿐, 절대로 외부로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숲을 중심으로 고고하게 흐르는 게, 신비함을 넘어서 어딘가 모르게 경이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연기가 흐르는 숲…. 혹시 알고 있는 정보가 있나요?”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한소영이 고요한 음성으로 물었다. 나는 바짝 긴장하며 몸을 돌렸다. 왜냐면 이제부터는 한치의 말실수도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충 나오는 대로 막 던지다 보면 한소영의 ‘초감각’에 걸릴 가능성이 상당히 농후하다. 그러니 최대한 진실만을 말하면서, 나도 여기 처음 왔다는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품에서 기록 하나를 꺼내 들었다. 가지고 온 두 개의 기록 중, 실록이 아닌 후일담 격으로 쓰인 기록이었다. “우선 이 기록을 들려드리도록 하죠.” 이윽고 나는 기록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물론 사족은 적당히 제외했다. 『…그 장소의 이름이 오르기 시작한 건, 빅토리아 왕조의 유일한 폐(廢) 태자에 관한 사료가 발견됐을 때였다. 애초 워낙 즉위 기간이 짧았던 왕이라 고증할 수 있는 자료가 전무했는데, 이는 역사에 관심을 가진 자라면 충분히 관심을 가질만한 일이었다. …역시나 설화로만 전해지는 폐 태자, 야만 왕, 꽃의 마녀에 관한 논란은 크게 불거졌고, 모두가 사실 여부를 가리고 싶어 했다. 결국, 왕국의 주관 하 조사대가 결성돼 논란의 장소로 출발하게 됐는데, 이게 제 1차 원정대였다.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무수한 고난이 있었으나, 원정대는 굴하지 않고 끝끝내 연기가 흐르는 숲에 도착했다. 그러나 숲으로 들어간 원정대는 몇 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고, 왕국은 늦게나마 상황을 파악하기에 이른다. 실은 왕국도 일각에서 몰래 원정대를 파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용히 묵인한 것은, 들어가는 원정대마다 족족 소식이 끊기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숲으로 들어간 수많은 원정대는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돌아오지 않았고, 사람을 잡아먹는 흉흉한 장소라는 소문이 만연해졌다. 현재는 접근 금지 구역으로 지정됐으나, 혹시라도 훗날 이 숲으로 들어갈 이들에게 고한다. 단 한 명 살아나온 생존자의 자격으로 말하자면, 살고 싶으면 정확히 숲까지만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바란다. 감히 추측건대, 숲은 일종의 경고에 불과할 것이다. 만일 그 이상으로 들어간다면, 숲에서 겪은 경험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오직 원한 어린 마녀의 비웃음만이 그대를 반길 것이니. 경고하고, 또 경고한다. 숲의 안쪽은 우리가 궁금해하는 비밀이 묻혀 있는 장소이나, 절대로 열어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이기도 하다.』 읽기를 마친 후 나는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여기 부근에서 야영하도록 하죠. 정확히는 숲 바로 앞에서요.” 그러자 서너 명이 눈을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시간이 많이 흐르기는 했으나 해는 아직 중천에 걸려 있었다. 나는 기록을 톡 건드린 후, 도로 집어넣으면서 말을 이었다. “시험해볼 게 있거든요.” “시험이요?” 정하연이 반문했다. “예. 살아 돌아온 소년에게 들은 결과, 저 숲을 통과하면서 몇 가지 흥미로운 일을 겪었더군요.” “흥미로운 일이요?” “물론 제 기준에서요. 우선 들은 말만 정리해보면…. 저 연기는 사용자의 마력을 완벽하게 제한하는 효과가 있으며, 사람의 신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네?” 나는 기억하는 내용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며, 오롯이 소년에게 들었던 내용만 정리해 전달했다. 그리고 설명을 들은 동료들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모두 확인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할 수 있는 선까지 눈으로 직접 확인해볼 생각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확인이라면…. 설마?” 정하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휘휘 주변을 둘러본다. 나는 웃으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설마 같은 동료를 실험용으로 사용하겠나요. 그냥 여러분이 조금만 준비해주면 됩니다.” 이어지는 의아한 눈초리를 뒤로한 채 나는 흘끗 한소영을 흘겼다. 한소영은 예의 표정 없는 눈으로 조용히 숲을 응시하고 있었다. * 준비라고 해봤자 별거는 없었다. 그냥 주변을 돌아다니는 작은 짐승이나 적당한 크기의 괴물을 데리고 오라고 했을 뿐. 동료들은 궁금한 빛을 지우지 못했지만, 그래도 착실히 내 말을 따라주었다.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카오스 미믹에서 밧줄 서너 개를 꺼내 들었다. “머셔너리 로드! 구해왔어요!” 그럴 즈음, 선율의 명랑한 음성이 들렸다.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온 선율은 조심스레 바닥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삽시간에 모여든 동료들은 아래를 바라보며 탄성을 질렀다. 왜냐면 작달막한 들짐승 세 마리가 서로 꼭 붙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는 제각각 달랐으나 대강 여인의 팔뚝만 한 정도였다. 자그마한 눈과 앙증맞은 분홍빛 발바닥, 그리고 부드러운 하얀 털로 덮인 들짐승은 일견 상당히 귀여웠다. 꼭 토끼를 보는 듯하다고나 할까. 길쭉한 귀가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말이지. “끼잉….” 한 걸음 다가가자 흠칫 떨며 몸을 움츠린다. 가장 큰 짐승이 다른 두 짐승을 꼭 껴안고 있는 게, 아마 단란한 짐승 가족이 아닐까 싶다. “꽤 빨리 구해왔네요.” “운이 좋았죠. 열심히 찾고 있는데, 마침 오순도순 열매를 까먹는 짐승 가족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냉큼 잡아왔어요.” “고생하셨습니다.” “아아. 어찌나 가엾던지. 원래는 새끼만 잡아오려고 했는데, 남은 두 마리가 구슬프게 울면서 쫓아오더라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젠장. 괜히 기분 이상하게 만들고 있어. 이윽고 나는 우선 새끼로 보이는 짐승을 잡아 준비한 밧줄로 꽁꽁 묶었다. 물론 끌어당길 부분은 남겨뒀다. 그러자 부모 토끼가 난리를 쳤지만, 마찬가지로 한 놈씩 차분히 밧줄로 꽉 묶어버렸다. 그렇게 몸을 옴짝달싹 못 하게 된 짐승 가족은 낑낑 울면서 한없이 불안해했다. “오, 오라버니….” 안솔은 무언가 안타깝다는 얼굴로 손을 저었으나, 나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우르르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숲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짐승은 빽빽 울부짖으며 온몸을 비트는 등 심히 저항했지만, 이미 묶인 상태에서 무얼 하겠는가. 한 놈씩 손으로 잡아 휙휙 던지자, 세 짐승은 곧 물처럼 흐르는 연기 안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숲 내부로 이어진 밧줄을 조심조심 내려놓은 후, 나는 살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우우….” “흠.” 그리고 조금은 흥미로운 기분을 느꼈다. 일부는 걱정 가득한 낯빛으로 숲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특히 안솔 같은 경우는 대놓고 원망 어린 눈초리를 보낼 정도. 그에 반해, 다른 일부는 확연히 다른 반응을 보였다. 제갈 해솔이나 한소영은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로 숲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지금 고작 짐승을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속으로 쓰게 웃으며 나는 야영지를 설치할 것을 지시했다. 여하튼 여기까지 큰 사고 없이 도착했다고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한 켠에 남은 걱정이 가시지를 않는다. 왜냐면 아직 본격적인 공략은 시작하지도 않았으니까. 1회 차에 괜히 접근 금지 구역으로 지정된 게 아니다. 끝끝내 공략했다고는 하나, 그 누구도 성공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일 우리가 돌파해야 할 숲은 바로 그런 장소였다. 지금까지는 가진 사용자 정보를 바탕으로 어떻게든 성공할 자신은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나도 자세히 아는바 없는, 또한 자신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다. 그래서 조화를 중시했고 조합을 우선했다. 혼자서 어떻게 해보려는 것 보다는, 모두가 협동해 헤쳐나가는 것이 해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여기서부터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최대한 간접적으로나마 알려주고 확인시켜주어야 한다. …실은, 약간은 기대하는 것도 있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다 보면, 혹시 내가 생각지 못한 해결책을 누군가가 제시해주지 않을까. ‘너무 나약한 생각인가?’ 그렇게 생각을 끝낸 나는, 야영지 설치를 거들고 식사까지 마친 후 바로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 작품 후기 ============================ 아, 깜짝 놀랐네요. 업데이트 후 딜레이가 있었나 봐요. 바로 보이지 않아서 꽤 당황했습니다. 하하. 그럼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 0739 / 0933 ---------------------------------------------- 안개의 숲. - 후, 겨우 벗어났군. - 젠장! 빌어먹을! - 시끄럽소. 귀 아프구려. 야만의 왕이여. - 정말 개 같은 장난을 쳐놨군! 어느 개 같은 자식이 숲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거지? - 말했잖소. 마녀는 원래 장난이 심하다고. 그리고 스스로 보호해야 하니까. - 보호? - 마녀의 입장도 그대의 부족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아니, 오히려 더 심하면 심했지. 방금 벗어난 숲은 아마 일종의 경고였을 거요. 이 이상 들어오지 말라는…. - …쯧. - 흠. 그나저나 정말 기이한 숲이었소. 특히 그대의 근육 가슴이 여인의 젖가슴처럼 둥글게 부풀어 오른 현상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 크아아악! 닥쳐, 닥쳐, 닥쳐, 닥쳐! 마녀? 이 미친 호로 새끼, 아주 그냥 나오기만 해봐! 감히…! - 거기 신사 두 분~. - 이딴 굴욕을…? - 안녕하세요~? 우선은, 미친 호로 새끼의 숲에 오신 걸 환영해요! - 누, 누구요? - 그건 제가 해야 할 말이죠. 두 분은 도대체 누구 시길래 이 미친 호로 새끼의 숲까지 오신 건가요? - …어? 신 대륙 아틀란타(북 도시 비밀 도서관), ‘빅토리아 왕조 실록 - 18대 황제(147 ~ 147)’ 中 ‘안개의 숲을 벗어난 이후, 마녀와의 첫 만남.’ * “…….” “…….” 맑고 조용한 하늘 아래, 우리는 야영지에 옹기종기 모여 조용히 아래를 응시했다. 땅에는 오늘 눈을 뜨자마자 끌어온 짐승 가족 세 마리가 축 늘어져 있다. 죽은 것 같지는 않고 그냥 잠든 상태 같다. 그러나 문제는,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외양으로 드러누워 있다는 것이다. 동료들도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선 가장 큰 변화를 겪은 놈은 아비(?) 짐승이었다. 크기는 약 20 센티미터로 어제보다 절반 정도 작아지고, 온몸의 털은 숭숭 빠졌다. 눈도 뜨지 못하며 꼬물거리기만 하는 게, 흡사 이제 갓 태어난 새끼 짐승을 보는 듯했다. 그러나 새끼 짐승의 경우, 크기는 그대로였으나 반대로 전신의 털이 풍성해졌다. 둥글고 복슬복슬하게 오른 모양새가, 발로 뻥뻥 차주고 싶을 정도였다. 어미 짐승은 겉보기에는 변화가 없으나 아무도 모른다. 혹시 내부적으로 변화가 생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렇게 한동안 짐승 가족을 구경한 후, 나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볼 것도 다 봤고, 이제는 대비책을 강구해야 할 때였다. 물론 그전에 이놈들 처리는 해두고. 마침 식전이니…. “오늘은 뜨거운 국물이 당기는데. 아침 식사는 이 세 마리로 탕을 끓이는 게 어떨까?” 허준영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음, 맛있겠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좋다고 말하려는 찰나, 안솔이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심지어 임한나도 가늘어진 눈으로 흘기고 있었다. 허준영은 심드렁한 표정을 짓더니 조용히 시선을 회피했다. “그래. 괜히 먹었다가 탈이 날수도 있잖아? 그냥 풀어주는 게 낫겠다.” “오라버니…. 얘네들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얼른 나서서 상황을 정리하자 안솔이 짐승 가족을 조심조심 품에 안으며 묻는다. “걱정하지 마. 말을 들어보니까 숲을 벗어나는 즉시 변화가 서서히 풀린다고 하더라고. 지속되는 게 아니라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소리야.” “아, 정말요?” 안솔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아니. 비단 안솔만이 아니라 동료들의 낯에도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기쁘다기보다는 안도하는 기색이 강했다. 하기야 상태 이상에 걸리고 그 효과가 지속된다면 누구라도 싫을 것이다. 그건 거의 저주에 가깝다고 봐야 하니까. 여하튼 상태 이상 효과에 걸렸을 시, 해주(解呪)에 걸리는 시간은 정확히 숲에 체류한 기간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이런 상세한 사항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왜냐면 소년에게 말을 듣지 못했으니까. “정리해보죠. 저 숲에 흐르는 연기는 사용자의 마력을 제한하고, 신체에 상태 이상을 초래합니다. 또한 그 효과는 굉장히 다양한 현상으로 발생하지요. 이건 모두 확인하셨을 겁니다.” 모두가 끄덕끄덕. “물론 벗어난 이후 서서히 원래 상태로 돌아온다고는 하나, 이상 효과에 걸린 상태에서의 습격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효과에 걸리느냐에 따라, 굉장히 치명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요.” “…….” “참고로 숲을 통과하기까지 약 나흘 정도 걸렸다고 하더군요. 그러면 우리는 빠르면 이틀 정도로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말을 마친 후, 나는 지그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구는 멍한 빛을 띠고 있었고, 또 누구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조용히 이어지는 침묵. 이윽고 누군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김한별이었다. “제한을 받지 않는 외부에서 마력을 행사하는 건 어떨까요? 강철 산맥 공략 초기처럼, 숲을 불태우면서 전진하는 거예요.” “불가능합니다. 제가 아침에 워터 애로우로 시도해봤는데, 연기에 닿자마자 곧바로 흩어졌습니다.” 하승우가 바로 반박하자, 정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리고 설령 숲을 불태운다고 해도, 연기가 사라진다고는 장담할 수 없죠.” “저…. 그럼 미리 보호막을 두르고 들어가 보는 건 어떨까요? 예전에 섬망의 산에 들어갔을 때처럼요. 아시다시피 제 보호막에는 반사 능력이….” “한결아. 그건 안되지. 아무리 반사 능력이 있더라도, 결국에는 마력을 기반으로 하잖아?” “아. 맞다.” “그냥 이번에도 제갈 해솔의 능력에 기대면 안 되나? 이 숲을 통과하는 게 목적이라면, 아예 연기가 흐르는 장소를 패스하면 그만이잖아?” “안 돼요. 마력이 묶인 장소에 사용하라니, 제 수송 능력이 만능인 줄 알아요? 그리고 이 정도의 인원으로 사흘이나 걸리는 거리를 한 번에 패스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라고요.” “안솔의 기적을 사용하는 건 어떨까?” “그건 안 돼. 기적은 정말 최후의 수단이야. 여기서 사용하기는 아까워.” 한동안 여러 이야기가 오고 갔다. 개중에는 혹할 법한 말도 간간이 오고 갔으나, 실행 당사자의 반대로 모조리 무산되고 말았다. 기적은 내가 반대하기도 했고. 그렇게 한참 동안 이야기하다가, 결국에는 침묵이 도로 찾아왔다. 고요히 흐르는 정적 속에서 몰래 한소영을 훔쳐봤지만, 아까부터 간간이 언짢은 듯한 기색을 비칠 뿐이었다. 한소영도 딱히 이거다 싶은 방법은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다. ‘인재는 많은데…. 방법이 나오지 않는다.’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물밀 듯 차오르는 실망감을 지우려고 애썼다. 하기야 과거에 내로라하는 사용자들이 며칠 몇 주 동안 숙고해도 해결책을 내지 못했는데, 여기서 하루 만에 내라는 건 분명히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다. 애초 나 또한 똑같지 않은가. 물론 나는 상대적으로 걱정이 덜한 입장이기는 하다. 심장에 품은 화정의 힘은, 설령 마력이 묶이더라도 체내에서 자가 활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연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소리는 아니고, 화정이 활동함으로써 받는 부담은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아무튼, 이제는 들어가야 한다. 모든 의문은 진입 이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사합시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방법이 나오지 않으면, 우선은 이대로 들어가는 것으로 하죠. 여기서 계속 가만히 있을 수도 없으니까요.” *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예고했던 대로 행동했다. 바로 야영지를 정리하고 안개의 숲으로 진입했다. 동료들은 상당히 꺼리는 빛을 보였으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걸 인지했는지 군소리 않고 따라왔다. 그리하여 마침내 돌입한 숲에는, 오직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허연 연기만이 자욱하게 흐를 뿐, 어느 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연기를 제외하면 흡사 시간이 멈췄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렇게 으스스하고 괴괴한 숲길을 따라 우리는 그대로 직진했다. 사흘이 걸렸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는지 사방을 둘러봐도 숲의 풍경만이 가득했다. 사박사박 수풀을 밟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오고, 고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잔뜩 긴장한 기색이 느껴졌다. 돌연히 머리를 젖혀봤으나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피어오르는 연기와 우거진 나무들로 인해 완전하게 가려져 있었다. 평소라면 마력을 사용해 안력을 끌어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불가능하다. 예상한 일이기는 했지만, 숲에 들어와 연기와 마주한 순간 곧바로 마력이 제한됐기 때문이다. 제갈 해솔의 말처럼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에 마력이 꽉 묶인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숲을 걷다 보니 문득 의구심이 일었다. ‘이봐, 화정.’ 행군하는 가운데 나는 조용히, 그리고 오랜만에 말을 걸었다. - 왜. 깨어있었는지, 다행히 화정은 바로 화답했다. ‘너는 어떤 것도 불태울 수 있는 힘을 지녔잖아?’ - 그렇지. 그런데? ‘그러면 현재 내 마력을 제한하는 연기의 효과도 불태울 수 있는 거 아니야?’ - 당연하지. 화정의 태연한 음성이 머릿속을 울렸다.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해, 나는 혼란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혼란이 채 가라앉기도 전 화정의 음성이 이어졌다. -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관둬. 그냥 이대로 계속 가는 게 좋을 거야. ‘왜?’ - 이 멍청이,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 아까 이 숲을 벗어나는데 나흘 정도 걸린다고 했지? ‘평균으로는. 그런데 최대한 줄일 거야.’ - 그건 네 재량이고. 아무튼, 현재 네가 연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 ‘맞아. 네가 계속 움직이는 걸 느꼈으니까.’ - 그래. 말인즉, 내가 계속 활동하고 있다는 소리지. 그럼 만일 내가 나흘 내내 활동한다고 생각해봐. 어떻게 될 것 같아? ‘…….’ 나는 그제야 화정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 그동안 체력을 많이 올리기는 했지. 하지만 정도가 있다고, 정도가. 예전처럼 필요할 때만 잠깐 쓰는 식이라면 무리는 없겠지만, 1초도 쉬지 않고 며칠 내내 쓸 정도는 아니라고. ‘으음.’ - 그러나 이미 그러고 있다는 게 함정. 물론 상황상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여기만 통과한다고 끝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무조건 최소한으로 움직여야 해. 무슨 말인지 알아 들어? ‘아아. 이해했어.’ 화정의 말은 간단했고, 지극히 옳았다. 설명을 듣고 나자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소한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는 말이 있던가? 새삼 화정과 다른 성과들과의 차이가 느껴졌다. 따로 말도 하지 않았는데 알아서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 써주고 있었던 것이다. - 마력 제한을 푸는 건 금방이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하나 더 충고하겠는데, 저 보호 능력을 갖춘 예쁘장한 꼬마 애를 네 옆으로 데려와. ‘예쁘장한…. 백한결? 왜?’ - 돌겠네, 미치겠네, 갑갑해 죽겠네. 야. 만약에 아주 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너 혼자 싸울 거니? 마력이 풀리면, 내가 네 마력을 통해 다른 인간 놈에게도 흘러 들어갈 수 있겠지? 그럼 마력 제한도 풀어주고, 상태 이상 효과도 제거해주고. 뭘 걱정하고 있는 거야 지금? ‘아, 그렇군. 그럼 그때는 부담을 감수하라는 소리지?’ 나는 약하게 탄성을 질렀다. 그러나 고요한 숲이라 소리가 들렸는지 의아한 눈초리가 느껴졌다. 하지만 상관없다. 나는 곧바로 백한결을 불러 내 옆에 서게 했다. 그러니까 위급한 상황이 오면, 내 마력이 풀리는 동시에 나는 곧바로 백한결의 마력을 풀어준다. 신체를 접촉한 상태서, 화정의 힘이 이어지는 한 백한결은 마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기습 상황 시 아주 유용한 방어 수단이 생기는 것이다. - 쯧쯧…. 멀었어, 아직도 멀었어. 이런 놈이 14년 차 사용자라고? 헛바람만 잔뜩 들었지. 화정은 어휴 한숨을 흘리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미안해. 그리고 고맙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나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 고마우면 앞으로 자주 신경 좀 쓰라고. 요즘…. 말도 잘 안 걸어주고…. 들려오는 음성이 약간 쓸쓸하게 들린 탓일까. 나도 모르게 생각하고 말았다. ‘에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는 언제나 너를 내 첫 번째 부인으로….’ 펑! 그 순간, 눈앞에 불꽃이 번쩍 튀겼다. - 이놈! 말 한 번 잘했다! 뭐, 첫 번째 부인? - 그렇게 생각하는 놈이! 내가 보는 앞에서 그년이랑 그, 그, 그, 그걸 했다 이거지? - 물고, 빨고, 싸지르고, 임신까지 시키고! 겨우 잊고 있었는데! - 죽인다! 성난 음성이 폭풍처럼 이어지는 가운데, 크게 놀란 동료들이 고함을 지르며 나를 둘러쌌다. 나는 창피함에 머리를 숙였다. 입이 방정이지, 입이 방정이야. ============================ 작품 후기 ============================ 아직 많이 늦기는 하지만, 업데이트 시간이 조금씩 빨라지고 있는 것 같네요. 아마 2시 안으로 업데이트를 할 수 있다면, 그때부터 업데이트 예고 시간 시스템을 부활시킬 생각입니다. 하하. 그나저나 안개의 숲에 들어왔으니, 이 파트도 팔부능선은 넘었네요. 과연 안개의 숲에서 김수현의 동료들은 어떤 변화를 겪게 될까요? 돌아갈 때를 포함해 약간 힘든(?) 변화도, 예쁜 변화도, 귀여운 변화도, 야릇한 변화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많은 기대 부탁 드려요. :D 독자 분들 모두 우울하지 않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화요일 보내세요! 0740 / 0933 ---------------------------------------------- 안개의 숲. - 그래서, 이대로 왕위를 빼앗기기 싫으니 도와달라? - 맞소. 꽃의 마녀는 여러 마법에 능통하거니와, 마물을 부릴 줄 아는 일인 군단의 능력을…. - 마물이 아니라, 어지간한 생물의 통제권을 강제로 빼앗고 부리는 거예요. 인간 같은 고 지능의 생물은 어렵지만. - 그렇소? 흠. 옆 대륙의 대 마법사는 인간의 정신까지 잠식해 조종한다던데. - 아, 그 늙은 영감이요? 마지아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저도 한 번 가보기는 했어요. 근데 그건 마법 도시와의 합일로 억지로 이루어낸 경지잖아요. 그러니까 딱 그 도시에서만 가능한. -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하나도 모르겠소. - 괜찮아요. 이해하리라고는 생각도 안 했으니까. 그리고 그 요정 여왕에 미친 변태 영감 얘기는 더는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때 기억만 떠올리면 구토가 치솟아서. - …알겠소. -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제가 당신을 도와주면 저는 어떤 이득을 받을 수 있나요? 폐 태자? - 여태껏 이어져 온 마녀 사냥을 철폐하고, 마녀의 존재를 인정하겠소. 그리고…. - 아하~. 음지에서 양지에서 끌어올려 주시겠다. 좋아요. 도와드리죠. - …응? 아니 아니, 정말이오? - 네. 무슨 문제라도? - 그게, 너무 쉽게 허락을 받은 것 같아서. - 마녀는 개인의 입장보다는 일의 가능성을 우선시하죠. - 가능성이라. 자신감이 대단하군. 왠지 벌써 왕위를 되찾은 기분이구려. - 그럼요. 뭐가 문제에요? 폐 태자가 있으니 명분도 확실하고, 제 마법과 군단도 있고, 그리고 수인의 왕까지 있는데? - 응? 수인의 왕? 그게 누구…. - 어? 자, 잠깐…! - 저기, 혼자서 먼 산을 쳐다보는 사내요. 신 대륙 아틀란타(북 도시 비밀 도서관), ‘빅토리아 왕조 실록 - 18대 황제(147 ~ 147)’ 中 ‘드러나는 야만 왕의 정체.’ * 동료들의 호들갑과 화정의 폭풍 같은 잔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행군을 재개할 수 있었던 건 무려 20분이라는 시간을 소비한 후였다. - 너, 말조심해! 자꾸 수틀리게 하면 도와주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아니면 상태 이상 효과에 걸려보고 싶은 거야? 화정의 최후통첩에 나는 속으로 거듭 사과하며 행군에 속도를 붙였다. 이윽고 머릿속을 울리는 씩씩거림이 서서히 잦아들 즈음, 돌연 바로 옆에서 누군가 꼼지락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시선을 돌리니 한껏 긴장한 눈동자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백한결이 보였다. 문득 동그랗게 오므려진 앵두 빛 작은 입술이 눈에 밟혔다. 그리고 어여쁘게 솟은 콧날과 아담한 어깨, 흰 살결…. “응? 형님?” 형님이라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끈적한(?) 시선을 느낀 건지 백한결은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으로 머리를 세게 흔들자 살포시 미소 짓는다. 웃는 것도 예쁘네. “죄송해요. 자꾸 불안해서요. 어디서 괴물이 나올지 모르니까….” “으음.” 과거 안개가 흐르는 숲을 지날 때는 엄청나게 고생했다는 것으로 기억한다. 마력이 묶이고 상태 이상에 걸린 상황에서 전투를 치른다? 그때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여하튼 그렇게 생각해보면 현재의 상황은 확실히 의외였다. 허나 아주 납득 못할 일도 아니다. 왜냐면 그때와 현재는 ‘시기’가 다르니까. 과거처럼 첫 발견 후 몇 년이 지나고, 이후 몇 번이고 실패하면서 달성 조건을 알아내 공략한 게 아니었다. 이번 ‘야만 왕의 무덤’ 공략을 결정하면서, 나는 모든 조건을 맞춘 채 최대한 빠르게 달려왔다. 물론 아직 초입인 만큼 속단하기는 이르다. 그러나 만일 안개의 숲을 벗어날 때까지 습격을 받지 않는다면, 적어도 내 선택이 옳았다는 확신은 가질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백한결의 정수리를 부드러이 쓰다듬었다. 원래는 한 번만 어루만지려고 했는데, 워낙 머릿결이 좋다 보니 두 번 세 번 만지게 된다. “괜찮아. 혹시 나와도 옆에서 지켜줄 테니까.” “아….” 이상한 신음 내지 마. 이대로 살금살금 내려가 귓불도 건드려보고 싶어지잖아. 반응이 궁금해. “그러니까 너는 걱정하지 말고 방어막에만 집중하면 돼. 알겠지?” “네, 네!” 백한결은 흠칫 고개를 움츠리면서 얼굴을 다소곳이 붉혔다. 배시시 웃는 모습이 꼭 아기 강아지를 보는 듯했다. 그러자 자꾸만 울리고 싶다는, 못되기 짝이 없는 검은 욕망이 뭉클뭉클 치솟는다. …아무래도 나는 변태가 맞는 것 같아. * “…….” 눈에 흐르는 차가운 공기를 느낀 즉시 살며시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가 보이는 동시, 나는 가벼운 신음을 흘렸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뜻 모를 노곤함 때문이었다. 어제 강행군을 했다고는 하나, 원래 잠을 자고 일어나면 몸이 개운한 법이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피로가 느껴진다는 건…. ‘화정이 말이 맞았다는 건가.’ 침낭 속에서 천천히 몸을 푼 후, 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아직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이른 시간인지 살을 스치는 공기가 차다. 거기다 연기까지 흐르고 있으니 한층 더 춥다고 느껴졌다. 비단 나만 그런 게 아니었는지, 주변에 보이는 침낭은 하나같이 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안으로 쏙 집어넣고 잠든 모양이다. 나는 뻐근한 몸을 풀면서 걸어가다가, 한순간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야영지 중앙에는 총 5명의 동료가 서로 사이 좋게 꿈나라를 여행하는 중이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5명씩 3교대로 경계를 돌렸는데, 어떻게 모두가 잠들 수 있는 걸까. 심지어 신재룡도 나무에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흠, 흠!” “음…? 허, 헉!”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신재룡은 살짝 눈을 떴다가, 돌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건장한 체구와 어울리지 않게 허둥거리더니 나와 눈을 맞추자 벌떡 몸을 일으킨다. “크, 클랜 로드!” “많이 피곤하셨나 보네요.” “죄, 죄송합니다. 조, 조금 전까지는 깨 있었는데…!” “괜찮아요. 아직 거스름돈은 많이 남아 있으니, 앞으로 조심해주시면 됩니다.” 나는 싱긋 웃으며 신재룡의 어깨를 두드렸다. 잠깐이기는 했으나 신재룡의 낯이 딱딱히 굳었다. 그래. ‘거스름돈’의 의미를 깨달았다면, 방금 내 말이 위로가 아닌 경고라는 사실도 깨달았을 것이다. 왜, 이런 말도 있잖은가. 전투에 진 건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를 소홀히 한 건 용서할 수 없다고. “앞으로는 정말로 주의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나저나, 몸은 괜찮아요?” 신재룡은 아차 한 표정을 짓더니 얼른 머리를 숙였다. 한동안 몸을 두루 살피는가 싶더니 한결 안도한 기색을 보였다. “후, 별 이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좋네요. 그럼….” 우선 신재룡은 이상 무. 다음으로, 나는 주변에 널브러진 네 명을 응시했다. 신재룡은 멋쩍게 웃고는 얼른 다가가 한 명씩 깨우기 시작했다. “자자, 일어나세요. 어서!” 이유정과 김한별을 깨우는 걸 보다가, 나는 곤히 잠들어 있는 사라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사라의 허벅지를 베고 있는 선율을 발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부스스 눈을 뜬 선율은 자신을 건드리는 발을 보며 낯을 찌푸렸다. 그리고 찢어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몸을 일으켜 입을 크게 벌렸다. 마치 고함이라도 치려는 듯이. 그러나. “이이이이이이이익!” “……?” “으으? 으아아아아아?” “…….” 한순간 이건 또 무슨 장난인가 싶었다. 그런데 표정을 보니 장난이 아니다. 선율은 스스로 놀란 얼굴로 입을 더듬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혹시….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선율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첫 피해자가 발생했다. “아무래도, 침묵과 비슷한 상태 이상에 걸린 것 같은데요.” “나도 그런 것 같은데.” 갑자기 인근에서 누군가 불쑥 말을 걸었다. 허준영이 걸어오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딱히 이상해 보이지는 않는데…. 아니, 잠깐만. 왜 저렇게 비틀거리는 거지? 평소에 애용하는 긴 검은 흡사 지팡이처럼 앞을 두드리고 있었다. “허준영?” “실명했다. 눈이 보이지 않아.” 허준영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리고 용케도 내 옆을 찾아오더니 풀썩 주저앉는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괜찮나?” “어쩔 수 없지. 벗어나면 회복된다니 기다리는 수밖에. 아무튼, 당분간 도움이 되기는 어렵겠다.” 마지막 말을 하면서 허준영은 약간 언짢은 기색을 비쳤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근접 계열이 실명했다는 건, 그야말로 치명적인 상태 이상이니까. 그때였다. “한별양? 한별양!” 황급한 음성에 시선을 돌리니 신재룡이 호들갑을 떠는 모습이 보였다. 사라와 이유정은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로 옆을 쳐다보고 있었고. 보아하니 김한별도 상태 이상에 걸린 모양이다. “클랜 로드! 한별양이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고요?” “예, 예! 뺨을 쳤는데도 웃으면서 자고 있습니다!” “…수면 이상인가.” 나는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입맛이 쓰다. 침묵, 실명, 수면 등등. 시작부터 가장 좋지 않은 상태 이상이 찾아왔다. 미리 말을 해둔 덕에 큰 혼란까지는 번지지 않았으나, 원정대 전투력의 급감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아직 모두의 상태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방금 소란에 잠이 깼는지 어느새 한 명 한 명 침낭 속에서 기어 나오고 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야영지에 여러 비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머, 머리카락이? 머리카락이 왜 이래?” 남다은은 하얗게 탈색한 머리카락을 부여잡으며 혼란스러워했다. “내 다리가! 내 다리가아아아!” 제갈 해솔은 털이 숭숭 솟은 다리를 보며 절규하는 중이었다. “…….” 정하연은 말이 없었다. 눈은 뜬 걸 보니 의식은 있는데 전혀 움직이지를 못했다. 몸이 마비되는 상태 이상에 걸린 것이다. 눈물을 글썽거리는 정하연에게 나는 괜찮다고 속삭이며 다독였다. ‘그냥 여기서 한 번 해제하는 게 좋지 않을까?’ - 우선은 기다려. 아직 습격을 받은 건 아니잖아. 나로 인한 체력 소모가 그렇게 쉽게 회복되는 줄 알아? 지금 네 몸 상태 보면 몰라? ‘그래도….’ - 이렇게 한 번 걸린 이상, 다음에 걸리는 시간은 더욱 단축된다는 말이야. 그리고 아직 걸리지 않은 놈들도 어떻게 될지 모르고. 그냥 최대한 빠르게 벗어나는 게 정답이야. 예상은 했지만, 피해 정도가 너무 심각했다. 그냥 내가 한층 부담을 받더라도, 여기서 한 번 상태 이상 효과를 제거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화정의 반대로 우선은 지켜보는 것으로 결심했지만. 이윽고 뒤늦게 일어나 얌전하고 조신하게 하품하는 백한결을 보며, 혹시 여성화가 된 게 아닐까 기대…. 아니, 걱정하고 있을 즈음.(과거에 성별이 전환되는 상태 이상에 걸렸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러나 기록에는 야만 왕의 여성화에 관한 기록이 나와 있다.) “아.” 그 순간, 문득 한 여인의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고 보니 한소영은? 이른 시간이기는 하나, 이 정도의 소란에 일어나지 않을 리가 없을 텐데. 나는 주변을 둘러보기를 멈추고 한소영을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침낭을 발견했을 즈음, 살짝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침낭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은 거의 평평한데, 오직 중앙 부분만이 둥그렇고 볼록하게 솟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큰 소리로 불렀으나 반응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볼록이 솟은 부분만이 올라왔다가 내려가기를 규칙적으로 반복할 뿐. 실례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나는 천천히 침낭을 걷었다. 그러나 한소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사용자 정보로 확인한 키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윽고 의아한 생각에 더더욱 침낭을 아래로 걷은 순간이었다. “우웅….” 불룩 솟은 부분까지 걷어낸 순간, 갑자기 웬 꼬마가 보였다. 말 그대로, 정말로 꼬마였다. 한 8살 정도 돼 보이는 작달막한 여아가, 온몸을 둥글게 웅크린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돌연히 정신이 멍해졌다. 그, 그러니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머리를 힘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재차 쳐다봤으나, 여아는 여전히 꼬물거리며 침낭에 고개를 묻고 있다. 찬란한 윤기가 흐르는 칠흑색 머리카락과 가녀린 몸. 흡사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교하게 만든 인형을 보는 듯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톰하게 돋은 연한 붉은색 입술이 꼬마 주제에 은은한 색기를 흘린다. 갑자기 손이 덜덜 떨린다.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자꾸만 까닭 없이 머릿속이 새하얗게 칠해졌다. “웅?” 그때였다. 침낭 안으로 침투한 찬바람을 느꼈는지, 여아가 앳된 음성을 흘렸다. 그리고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뜨더니,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가 뜨며 어렵게 나를 응시한다. 이내 아등바등 몸을 일으킨 여아는 한 손으로 눈을 비비고, 남은 손으로 입가에 묻은 침을 닦는다. 잠시 후. 흑 수정을 연상케 하는 올망졸망한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여전히 눈을 비비는 여아의 입술이 천천히 열린다. 그 순간, 나는. “머쪄너리 로드…?” 쿵! 심장이 힘차게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 작품 후기 ============================ 아, 서서히 업데이트 시간이 빨라지고 있습니다. 역시 적고 싶은 내용을 적으니 좋네요. 손가락이 춤을 춘답니다. 하하. 이렇게 보면, 역시 저는 로리유…? 아, 아닙니다.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ㅌㅌ!) 0741 / 0933 ---------------------------------------------- Unpredictably. - 그런데요, 있잖아요. 그쪽은 왜 인간도 아니면서 인간인 척해요? - 계속 짖어라, 마녀. 그 여린 목이 비틀리고 싶으면 말이지. - 아니,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종족이 궁금해서 그래요. 호 족? 묘 족? 견 족? 랑 족? - 이익…! - 그만하시오. - 응? 폐 태자? 왜 저를 방해하시는 거죠? 혹시, 질투? - 야만 왕이 싫어하지 않소. 원래 마녀라는 족속은 그리 말이 많소? - 아니요. 느낌이 꽂힌 상대한테만 말이 많아져요. - 첫 눈에 반했다는 거요? - 뭐, 해석하기 나름이죠. 갖고 싶다고나 할까? - 그게 그거 아니겠소. 그나저나 참, 도둑놈 심보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 왜요? 저처럼 예쁘고, 똑똑하고, 몸매도 좋은 여인이 호감을 갖고 있다는데? - 그건 인정하는데, 나이도 고려해야 하지 않겠소? - …나이? - 내 듣기로, 본래 마녀는 수백…. - 당신, 죽고 싶나요? 신 대륙 아틀란타(북 도시 비밀 도서관), ‘빅토리아 왕조 실록 - 18대 황제(147 ~ 147)’ 中 ‘왕국으로 가는 길.’ * 들어오기 전, 앞서 말을 해둔 게 정답이었다.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상태 이상에 걸리니 동료들은 한참 동안 혼란스러워했다. 그나마 미리 경고해놨기에 망정이지, 그냥 바로 들어갔으면 사기가 바닥을 쳤을지도 모른다. 결국 수십 분을 진정하는 데 소비한 후, 우리는 겨우 야영지를 정리하고 행군을 시작할 수 있었다. 김한별, 정하연, 허준영 등 정상적인 행군이 불가능한 이는 동료들이 한 명씩 업고 가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혼란은 간신히 가라앉는 듯했다. …아니. 사실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 힐끔. “…….” 또 힐끔. 숲은 고요했고, 행군도 어제처럼 조용했다. 그러나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동료들은 몇 걸음 걷다가도 은근한 곁눈질로 누군가를 계속 흘깃거렸다. 시선이 모이는 중심에는 바로 한소영이 있었다.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로 은은한 색기를 흘리는 그런 차갑고 성숙한 여인이 아닌, 키가 50 센티미터는 줄어든 채 아장아장 걷는 여아가. 상태 이상, 시간 역전(逆轉) 현상. 사용자 입장에서 보면 절대로 좋은 일은 아니었다. 적당히 어려졌다면 모를까, 갓 초등학생 1학년 된 몸으로 무얼 하겠는가. 애초 입고 온 로브와 갑옷도 맞지 않아 벗어버린 상황. 허나 그럼에도 옷이 길다. 헐렁헐렁한 옷을 질질 끌면서 힘겹게 걸음을 내딛는데, 정말이지 무척 귀여웠다. 아니,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정말 너무 좋다. 나만 이런 게 아니라 동료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나같이 도와주고 싶어 안달 난 얼굴로 한소영을 보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사방에서 쏟아지는 눈초리 속에서, 한소영은 꿋꿋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어려졌다는 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은지 모조리 무시하며 정면만 응시한다. 하기야 오늘 새벽 자신의 상태 이상을 확인했을 때도, 한소영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썼다. 침낭도 척척 개고 밥도 냠냠 먹었다. 흡사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정작 나는 그 모습도 어여쁘다고 생각했지마는. 그래. 젖살이 통통히 오른 발그레한 볼과 앳된 인상의 한소영은…. 아, 정말 어떻게 저렇게 귀여운 걸까? 한 번 보면 귀엽고, 두 번 보면 사랑스럽고, 세 번 보면 깨물어주고 싶고, 네 번 보면 까닭 없이 감사하게 된다. 아마 한소영은 어렸을 때 표정이 풍부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저렇게 색다른 매력이 철철 흘러나오는 게 아닐까? 전, 후, 좌, 우, 360도 어디를 봐도 예쁨이 팡팡 터지잖아. “악.” 그때였다. 한창 망상에 사로잡혀 있을 즈음, 돌연 한소영이 앞으로 풀썩 넘어졌다. 길이 워낙 울퉁불퉁하다 보니 옷이 걸려 넘어진 모양이다. 금세 고개를 들었으나, 발갛게 변한 앙증맞은 코와 꼭 깨문 입술을 보자 안쓰러움이 해일처럼 밀려온다. “괘, 괜찮으세요?” 결국 참지 못했는지, 임한나가 선수를 치고 말았다. “혹시, 아니 그냥 저랑 같이….” 무언가에 홀린 듯이 다가가 손을 내밀었지만, 임한나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한소영이 주섬주섬 일어나면서 손을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쳐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존심이 상했다는 듯 지그시 노려보자, 임한나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이상한 신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애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 성격이었지. 이윽고 행군이 재개됐으나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멈췄다. 한소영이 또다시 넘어진 것이다. 이번에도 금세 고개를 들었으나 어느새 눈은 그렁그렁하게 변했다. 좋은 일은 아니었다. 냉정히 말해서 우리는 현재 숲의 한복판에 위치한 상태였다. 온갖 상태 이상에 걸려 있는데, 습격이라도 받으면 그야말로 끝장이다. 안 그래도 행군 속도가 한층 느려지지 않았는가. 화정의 말대로 최대한 빨리 벗어나는 게 해답인 상황에서, 이런 지체는 전혀 달갑지 않다. 한소영도 그걸 알고 있기에 갑갑해 하는 것일 테고. 이러한 자기 합리화(?)를 거치고 나서, 나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머, 머쪄너리 로드…? 합.” 한소영은 무언가 말하려다가 그대로 입을 닫았다. 아마 앳되디 앳된 자신의 음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부디 양해를.” 나는 한쪽 무릎을 꿇은 후, 허락도 받지 않고 몸을 덥석 잡아버렸다. 한소영은 눈을 왕방울만 하게 뜨더니 “으으으응.” 허리를 요염이 비틀기 시작했다. 그대로 천천히 들어올리자, 이제는 숫제 바동바동 용을 쓴다. 마치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듯이. “시, 싫어….” “……?” “이, 이런 머쪄너리 로드는 싫어요….” “으어어어어어어어!” 그때였다. 싫다는 말을 들었는지, 가만히 보고만 있던 선율이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상태 이상 침묵에 걸린 주제에, 얼른 내놓으라는 듯 눈에 핏발을 세운 채 달려온다. 그 무시무시한 기세와 음험한 욕망을 느낀 걸까. 한소영은 깜짝 놀라더니 “힉.” 소리를 지르며 곧장 내 목을 껴안았다. 아이 특유의 달콤한 내음이 콧속을 물씬 찌른다. “에….” 선율은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나를 선택한 한소영의 행동에 상처를 받았는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나는 뭇 동료들의 질투 어린 시선을 받으며 의기양양이 걸음을 옮겼다. 한소영은 무언가 상당히 언짢아하는 기색을 비쳤지만, 얌전히 내 품에 안긴 채 입술만 짓씹었다. 이내 긴 한숨을 흘리는 소리와 동시, 가슴에 고개를 묻는 감촉이 느껴졌다. 심장이 당장에라도 터질 것만 같다. 그리고 재개된 행군은, 그야말로 행복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중간에 갑갑해 하는 것 같아 소매를 걷어주자 고사리 같은 손이 드러났다. 나는 절로 거칠어지는 숨을 가다듬으며, 행여나 놀랄세라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한소영의 손을 살포시 감쌌다. 그러자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일부러 눈을 맞추지는 않았다. 왜냐면 나도 모르게 표정이 이상해질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가슴에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끼면서, 나는 안개가 흐르는 숲을 가로질렀다. * 사실 행군 와중 엄청나게 고민하기는 했다. 다름 아닌, 한소영을 안고 가는 시간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찾아든 것이다. 그러나 끝끝내 이긴 건, 감성이 아닌 이성이었다. 무엇보다 이틀 차에 접어들자, 화정의 말대로 체력이 저하되는 걸 점차 체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며 안개의 숲을 벗어나는 데 집중했고, 그 결과 해 질 녘 즈음에는 연기가 흐르는 지역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마력이 묶인 점을 고려하면 이것 또한 쾌거라 볼 수 있었다. 과거에 어렵게 통과했던 것과는 달리, 단 한 번도 습격을 받지 않고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처음 결심했을 때만 해도 긴가민가한 점이 없잖아 있었는데, 점점 내 결정에 확신이 서는 게 느껴졌다. 아무튼, 안개의 숲을 벗어난 이후 우리는 30분을 추가로 행군했다. 아직 주변 풍경이 변한 건 아니나, 안개가 사라졌다는 것만으로도 시야가 탁 트였다. 이내 자연적으로 형성된 적당한 공터를 발견한 후, 나는 손을 들어 정지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나부터 시작해, 화정의 힘을 이용해 동료들의 상태 이상 효과를 곧장 해제해주었다. 동료들은 약 며칠은 걸릴 것이라 생각했는지, 뛸 듯이 기뻐하며 환호했다. 심지어 한소영마저도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을 정도였다. 그렇게 원정대의 전투력을 회복시키자 극심한…. 정도까지는 아니나, 완연한 피로가 온몸을 엄습했다. 하기야 거의 이틀 동안 화정을 내내 돌렸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윽고 나는 잠깐 쉴 것을 지시한 후 가까운 나무에 등을 기대앉았다.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정상으로 돌아온 걸 기뻐하는 동료들을 응시하려는 찰나, 허준영의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응?” “그냥 궁금해서. 저 숲을 벗어나면 무언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 “더 가야 한다는 소리겠지. 애초 그렇게 듣기도 했고.”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안개가 변수이기는 했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너무 무난하다. 네가 회의에서 우리한테 겁을 준 것에 비해서 말이지.” “겁이라니….” “이상해, 정말 이상해…. 저 안개는 마치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한 느낌이 든단 말이지. 아, 이건 흘려 들어도 좋아.” 흘려 들으라고는 했으나, 허준영의 말은 내 정신을 일깨웠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이상하기는 했다. 혹시 나는, 그동안 너무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처음부터 되짚어보자. 처음 소년이 찾아왔을 때, 안솔은 이미 몇 번은 죽었어야 할 상처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년은 생존한 상태로 찾아왔고, 확인한 결과 몸이 장악된 상태였다. 그리고 소년을 데리고 온 거주민 경비병을 찾지 못했다. 이 점을 내가 알고 있는 기억과 합치면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하나. 바로 소년의 캐러밴이 숲 너머의 무언가를 깨웠다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깨어난 무언가는 왜 소년과 경비병을 굳이 아틀란타로 보낸 걸까? 이 부분은 확신할 수는 없으나, 가지고 온 ‘빅토리아 왕조 실록’을 보면 대강은 유추할 수 있다. 아마…. 바스락, 바스락. 한창 생각에 잠긴 찰나, 돌연히 수풀을 밟는 소음이 신경을 거슬렸다. 소리는 차차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머셔너리 로드.” 시선을 올리자, 성숙한 여인으로 돌아온 한소영이 바로 앞에 서 있다. “많이 피로해 보이시는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예? 아, 괜찮습니다.” 의외의 질문이기는 했으나 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한소영은 여전히 고요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럼 마력의 활성화는 어떠신가요?” “마력이요? 그거야….” 이상 없다고 말하려는 찰나, 나는 입을 닫았다. …마력의 활성화? 갑자기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한소영은 괜한 말을 꺼내는 성격이 아니다. 말인즉 마력 상태가 괜찮으냐고 물어본 게 아니라, 감지를 활성화했는지 안 했는지 물어본 것이다. 현재 마력은 체력 회복 겸 잠시 비활성화로 놔둔 상태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마력을 활성화했다. 그러나 사방으로 돌려봐도 딱히 감지되는 건 없었다. 아주 살짝 허준영을 건드려보았으나, 허준영은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살짝 머리를 흔들었다. 자신도 감지되는 게 없다는 의미 같다. 이윽고 숨을 삼킨 순간, 한소영이 천천히 허리를 굽히며 고개를 가까이했다. “좋은 상황이 아니에요. 그냥 듣기만 해요.” 그리고 한 손으로 어깨를 짚으면서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안개를 벗어났을 때부터, 누군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어요.” ============================ 작품 후기 ============================ 새벽에 차를 마시면서 생각해보니, 문득 옛날 일이 떠오르네요. 1차, 2차 로리 전쟁이 말이죠. 사실 그때 제가 너무 과하게 반응하지 않았나 반성했습니다. 후기에 적은 BL에 남성 독자 분들은 물론, 여성 독자 분들까지 상처를 입으셨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고요.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우리는 분명 합의점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독자 분들의 니드는 다양하거니와, 요즘 그 니드를 서서히 깨달아가는 것 같거든요. 그래요. 그건 BL이 아니었어요. 하하. 아무튼, 이제 이르면 2회, 3회 안으로 적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그 회를 기점으로, 메모라이즈의 새로운 파트이자 완결로 달리는 기나긴 신호탄이 쏘아질 것 같아요. 조금은 홀가분하기도 하고, 조금은 섭섭하기도 하네요. :) 아, 그리고 독자 님들. 죄송합니다. 다가오는 11월 28일(금요일)에 하루 쉽니다. 개인적인 일이 겹쳐서, 아침 일찍 나갔다가 밤 늦게 돌아올 것 같아요. 11월 29일(토요일)에 연재를 재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독자 분들의 너른 양해 부탁 드려요. _(__)_ 0742 / 0933 ---------------------------------------------- Unpredictably. - 정말 믿을 수가 없군. 이렇게나 쉽게…. - 흥, 이거 봐요. 제 말이 맞죠? 저랑 수인 군단만 있으면 쉽다고 했잖아요. - 흐흐, 나도 믿을 수가 없다. 왕국 놈들이 이리도 허약하다니…. 고작 이런 놈들한테 핍박을 받았다는 건가? - 아, 그건 틀려요. 왕국은 원래 강했어요. 그런데 왕권 다툼으로 제 살을 깎아 먹은 거죠. 아마 전성기 시절 때는~. - 뭐야? - 자자, 그만하시오. 어째 둘은 틈만 나면 싸우는 것 같구려. - 사이가 좋아서 그래요. 그러니까 부부 싸움? - 크아아아아아아앙! - 아앙, 거칠어~! - 허,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소. 그냥 같이 기뻐해 줄 수는 없는 거요? 신 대륙 아틀란타(북 도시 비밀 도서관), ‘빅토리아 왕조 실록 - 18대 황제(147 ~ 147)’ 中 ‘불타오르는 왕성 앞, 돌아온 폐 태자.’ * 그때였다. 스슥. 돌연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귓전에 잡혔다. 신기한 건, 청력을 제외한 그 어떤 기척도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나마 소리도 간신히 들었을 뿐. 아마 청력을 높이지 않았다면 듣지 못했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나와 한소영, 허준영은 동시에 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임한나가 우거진 수풀을 ‘라우라 필리스’로 겨누고 있었다. 활줄은 없으나 찬란한 섬광의 화살이 어른어른 불타오른다. 이윽고 3초가량 수풀을 노려보던 임한나는 천천히 활을 내렸다. “놓쳤어.” “모습은?” “빠르게 움직이는 그림자는 본 것 같은데, 확실치는 않아.” “방향은?” 임한나는 아무 말 없이 한쪽으로 난 길을 가리켰다. 울퉁불퉁 이어지는 길은, 우리가 가야 하는 남쪽 방향과 일치했다. 잠시 후, 동료들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속행해야 하나, 아니면 하루 동안 정비를 할까. 시간 해 질 녘이나, 거의 도착하기는 했다. 한참 고민하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한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갑시다. 모두 정렬하세요.” * 이어지는 행군은 조용했다. 딱히 말을 꺼내지는 않았으나, 동료들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대부분 침묵을 지켰다. 물론 어디까지나 ‘대부분’이고, 그러지 않은 이도 있기는 했다. 제갈 해솔. 아주 동네 마실 이라도 나온 마냥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더니, 갑자기 심심하다면서 가져온 기록을 건네달라고 요구했다. 아마 내가 이따금 기록을 읽는 걸 눈여겨본 듯했다. “아, 별로 재미는 없다.” 그렇게 계속 앞으로 나아가던 와중, 한껏 지루해하는 제갈 해솔의 음성이 들렸다. 이어서 크게 하품하는 소리까지. 그러자 옆에서 나란히 걷던 백한결이(안개를 벗어나고도 백한결은 내 옆에서 걷는 걸 고수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스리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혹시 내가 거슬려 하는 게 아닐까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한데, 속으로 절로 웃음이 나온다. “응? 한결 씨? 왜 갑자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거예요? 제가 어떤 잘못이라도 했나요?” “아? 아!” 백한결이 펄쩍 뛰었다. 나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린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기록을 읽어본 소감은?” “소감? 모르겠어요. 중간에 읽다가 말아서.” “어디까지 읽었죠?” “세 얼간이가 힘을 합쳐 왕위를 되찾는 부분까지요. 실록이라고 해서 조금은 기대했는데, 그냥 모험 소설 읽는 기분이네요.” 세 얼간이라. 주인공은 폐 태자, 야만의 왕, 마녀일 텐데. 제갈 해솔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나 보다. “좀 더 읽어보지 그래요. 후반부가 현재 원정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데.” “어떤 내용인데요?” “마녀의 배신.” “아, 뻔하네. 폐 태자가 약속을 안 지켜서 그런 거죠?” “아니요? 폐 태자는 오히려 약속을 지켰죠. 아니, 지키려고 했죠.” “흠?” “말했잖아요. 마녀의 배신이라고. 모든 일이 끝난 후, 마녀는 야만 왕에게 고백을 빙자한 무리한 요구를 하죠. 야만 왕은 일언지하에 요구를 거절했고, 마녀는 꼴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나 봅니다. 그래서….” “잠시만요. 더 말하지 마요.” 제갈 해솔은 급히 나를 제지했다. 그리고 팔락거리는 기록 넘기는 소리와 중얼중얼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대관식을 앞둔 폐 태자는, 이후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된다…. 하루아침 지도자를 잃어버린 야만 전사들은 폐 태자를 찾아간다…. 왕국의 새로운 군주시여. 이제는 약조를 지킬 때가 왔습니다. 약조? 예. 저희를 받아들여 주신다 했으니 이제 우리도 왕국의 신민이 아닙니까. 그렇지. 그러면 국왕 된 입장으로 우리의 부탁을 들어주소서. 정녕 그대가 왕국의 군주라면, 우리가 그대를 위해 흘린 핏물을 보답해주소서. 무슨 일인가. 말을 해보라. 마녀가 우리의 지도자를 납치하고 사라졌습니다. 무어라? 부디 우리의 왕을 구원해주소서. …그러나 신하 모두가 출정을 반대했다…. 두 세력 사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폐 태자는 결국 하나의 꾀를 내기에 이른다. 그건 바로 처음부터 자신을 따라온 부하와 수인을 합쳐, 수행 인원을 빙자한 14명의 용사를 선발한 것이다. 공식적인 대관식을 앞둔 상황에서, 모든 신하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그러나 폐 태자는, 산책을 하고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그대로 안개의 숲으로 떠났다….” 제갈 해솔의 혼잣말은 꽤 길게 이어졌다. 살짝 시선을 내리자 한없이 진지해진 백한결의 얼굴이 보였다. 침묵의 행군 속, 홀로 울리는 높은 톤 음성. 아마 모두 제갈 해솔의 말소리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 앞쪽을 바라본 나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잠시 정지.” “무, 무슨 일이에요?” 제갈 해솔의 음성이 뚝 끊기는 동시, 깜짝 놀란 백한결이 내 팔을 잡는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부터 갑자기 흔적이 진해지는데….” 말을 들었는지 임한나가 곧장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수풀 돋은 땅을 세심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본다. 방향은, 여전히 남쪽이었다. “아까 느낀 기척의 흔적은 아닌 것 같아. 오히려 앞서 들어왔다는 캐러밴의 흔적 같은데?” 앞은 수풀이 특히나 심하게 우거져 있었고, 흔적은 그 안으로 이어져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행군을 재개했다. 제갈 해솔의 말소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허리까지 올라오는 수풀을 억지로 헤치고 들어가자, 갑자기 너른 공터가 눈앞에 나타났다. 아까의 공터와는 확연히 다른 장소다. 훨씬 넓기도 했지만, 흡사 운동장을 연상케 할 정도로 잡초 하나 돋지 않은 맨땅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터의 중앙에는 직경 60 센티미터, 높이는 8 미터는 넘어 보이는 거대한 돌기둥 여러 개가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이윽고 한 걸음 안으로 들어간 찰나, 어디선가 일어난 바람이 갑자기 불어왔다. 자연적인 바람이 아닌, 돌기둥 중앙에서 인위적으로 생성된 마력을 품은 바람이었다. “조심!” 비단 나만 느낀 게 아닌지, 마력에 민감한 누군가가 외쳤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력의 바람은 그냥 스치듯이 지나갈 뿐,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 계속 걸음을 내딛자 사방을 조심스레 살피던 동료들도 천천히 따라오기 시작했다. 이내 공터의 중앙에 다다른 후, 나는 부드러이 돌기둥을 쓸어 내렸다. 돌기둥의 수는 총 열다섯 개. 겉면에는 전혀 알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문자가 빼곡히 새겨져 있다. “도착했네요.” “도착했다고요? 설마 여기가 끝은 아니겠죠?” 선율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묘한 음성으로 투덜거렸다. 동료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하기야 깊숙한 숲에 둥근 공터, 그리고 덩그러니 놓여 있는 15개의 돌기둥.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이상하다 여길 만도 하다. 나는 말없이 돌기둥을 매만지다가 중앙을 응시했다. 돌기둥은 무언가를 둘러싸듯 둥그런 둘레를 그리며 서 있었는데, 가운데에는 기둥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크기의 석판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석판의 존재를 발견했는지 정하연이 차분히 손으로 가리켰다. “여기, 석판이 있는데요?” 가장 먼저 반응한 이들은 마법사들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후닥닥 모이더니 석판을 보며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혹시 고어 해석 가능한 분 있나요?” “성공은 하지 못했다.” “응? 사용자 제갈 해솔? 갑자기 무슨….” “아, 저 해석할 줄 알아요. 첫 줄에 그렇게 적혀 있네요.” “설마…. 0년 차 아니었어요?” “곧 1년 차 돼요. 그리고 고어를 모르면, 아까 이건 어떻게 읽었을까요?” 정하연의 물음에, 제갈 해솔은 아까 받아간 ‘빅토리아 왕조 실록’ 기록을 휙휙 흔들었다. “대, 대단하시네요. 저는 절반쯤 익히다가 어려워서 중간에 포기했는데.” 옆에 있던 선율이 감탄하자, 제갈 해솔이 되레 이상하다는 듯이 눈을 흘겼다. “응? 어렵다고요?” “…네?” “이상하네. 나는 쉽던데. 한 2주 정도 맘먹고 파니까 숙달되던데요?” “…아.” 고개까지 갸웃하며 말하니 선율의 낯에 떠름한 빛이 스친다. 이어서 눈이 서서히 가늘어진다. “미안한데 막말 좀 할게요. 당신 원래 그렇게 재수가 없나요?” “괜찮아요. 이해해요. 그런 시기, 자주 받는 편이에요.” “…….” “아니면 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죠 뭐. 여하튼 계속 읽을게요?” 이윽고 어깨를 으쓱 들먹인 제갈 해솔이 지그시 석판을 응시하자, 돌연 한기가 몰아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은근슬쩍 걸음을 물렸다. 왠지 여기서 끼어들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제갈 해솔의 음성이 정적이 흐르는 공터를 울리기 시작했다. “성공은 하지 못했다. 실패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의 추는 실패로 기울었다. 할 수 있는 건 상황을 멈추고, 영원을 바라보는 것뿐이다. 비록 어리석다 말할지라도, 후회는 하지 않는다. 시험은 이미 시작됐다. 호기심에 찾아온 자,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여기서 걸음을 돌려라. 그게 아니라면, 모든 것은 그때와 똑같을지니. 열다섯 순수한 영혼에 과거의 결심이 스며들면, 빛이 떠오르며 길이 열리리라. …가장 위대한 야만 전사이자 수인의 왕이었던, 친구의 무덤 앞에서.” 말을 마친 제갈 해솔은 흘끗 고개를 돌렸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게 무슨 개소리야?’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머셔너리 로드. 혹시 그 찾아왔다는 소년에게서 다른 말은 듣지 못했나요?” 문득 한소영이 흘끗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예를 들면 이 기둥을 어떻게 이용했다던가.” 그 순간이었다. 나는 바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꿀꺽 삼켰다. 잘 생각해보면 소년은 그냥 들어갔다고 말했을 뿐, 상세한 방법까지는 얘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방법을 알고 있다. 한소영이라면 이 간극을 알아차릴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하다. 나는 간신히 머리를 가로저을 수 있었다. 한소영은 심드렁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흐음.” 숨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렇네요. 시간이 늦기는 했지만, 제가 한 번 클랜에 연락해보겠습니다.” 이어지는 신재룡의 음성에 나는 남몰래 가슴을 쓸어 내렸다. 아무튼, 석판의 내용은 그냥 난해한 말장난일 뿐이다. 실제 가동 방법은 허무하리만치 쉽다. 다만 통로를 열 조건을 맞추기가 약간 어이없을 뿐이지. 물론 나도 들어간 이후부터는 자세히 모른다. 알고 있는 거라고는 우리가 이미 조건을 만족했다는 것이다. 아까 느낀 마력의 바람은, 아마 길을 열 수 있는 자격을 충족하는지 일종의 시험이었을 것이다. 신재룡이 통신용 구슬을 꺼내는 동안 마법사들은 석판의 내용에 관한 열띤 토론을 재개했고, 머리 아픈 얘기를 싫어하는 이들은 돌기둥 주변을 어정어정 맴돌기 시작했다. 나는 한 발짝 물러난 상태서 조용히 관전했다. 우선은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영 정답이 나오지 않으면 그때 나설 생각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열려라 참깨.” 양팔을 활짝 펼치며 소심하게 외치는 안솔과, “으응….” 기둥에 코를 붙이고 자세히 들여다보는 백한결을 보고 웃을 무렵. “아! 알았다!” 갑자기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듯 외치며 한 손을 번쩍 들었다. 하늘을 향하는 손에는, 두툼한 기록이 쥐어져 있었다. ============================ 작품 후기 ============================ 독자 님들. 들어보세요. 제가 정말 억울합니다. 오늘 오랜만에 BGM 사이트에 들어갔거든요? 뉴 에이지가 많아서 평소 애용하는 사이트에요. 예전에 후기로 독자 분들께 노래 몇 개를 추천 드린 적도 있고요. 그래서 오늘도 자주 듣는 노래를 들으려 접속했는데, 제가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사이트 왼쪽에 노래를 재생하는 란이 있고, 그 옆에 그 노래에 관한 코멘트를 적는 칸이 있거든요? 그래서 대충 코멘트를 훑어보는데, 거기에 이런 코멘트가 있더군요. 그대로 복사해오겠습니다. 1. 로(리콘)유진 님의 추천을 받아서 온 메모라이즈 독자는 없나요? by 청x(예의상 뒷글자는 가렸습니다.) 2. 로(리콘)유진님의 소개 받아온 메모라이즈 독자입니다. 성지순례요 by 아xxx 제가 이렇게만 있으면 말을 안 합니다. 낯이 화끈해서 저도 모르게 다른 노래에 들어갔는데, 마침 그 노래도 제가 예전에 추천 드린 적 있는 노래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거기도 있더라고요. 1. (에)로유진 만세 by 손x 2. 로(리)유진 만세 by ㅇxx …0ㅁ0. …-_-. 아니, 독자 님들. 거기 이용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정말 많아요. 좋은 노래에는 코멘트도 많이 달리고요. 그분들이 그 코멘트를 보면 저를 어떻게 생각하겠나요. 사람 A : 응? 로유진? 로유진이 누구지? 로리콘에다가, 에로하고, 로리라고? 푸하하하! 이렇게 비웃으실 거 아닌가요. 아니, 괜찮습니다. 물론 그렇게 적으실 수도 있죠. 절대로 따지는 게 아니라요. 그냥, 아무튼 저 그거(?) 아니거든요. 아닙니다. 아 제발. 부탁 드립니다. 자꾸 신경이 쓰여서 그래요. 제발 삭제해주세요. 으어어어. ㅜ.ㅠ 0743 / 0933 ---------------------------------------------- 역사(歷史). - 어휴. 정말 바보인 건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 둘 다 싫구려. - 이봐요. 바보 멍청이 폐 태자 씨. 아니, 이제는 왕이라고 불러드려야 하나? - 어느 것도 상관없소. 계승은 끝났지만, 대관식을 앞둔 상황이라서. 아, 어서 돌아가야 할 텐데. - 닥쳐요. 그럼 돌아가면 되잖아요. 당신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 싫소. -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요? 당신은 원하는 것을 이뤘어요. 왕의 자리도 되찾았고, 저와의 계약도 끝났죠. 그리고 서비스로 야만 부족과의 약조를 깰 상황도 만들어줬잖아요? 나는 원하는 바를 이뤘고, 이후의 상황을 생각하면 폐 태자도 하등 나쁜 상황은 아닌데. 도대체…. - 그건 틀린 말이오. - 응? 그건 또 무슨 말이죠? - 확실히 그대와는 계약으로 맺은 관계지. 그러나 야만의 왕, 아니 친구와 약조한 기억은 없소만. - 뭐라고요? 치, 친구? - 그대가 납치해간 신체 건강한 사내 말이외다. - 깔깔깔깔! 아이고,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참 대단한 성인 납셨네요. 그래요~. 그래서, 친구를 구하려고 오셨다? - ……. - 아아, 이 가련하고 머저리 같은 폐 태자…. 뭐, 좋아요. 그런데 설마 그 정도 인원으로 저를 이길 생각인가요? 왕국 전 병력을 이끌고 왔다면 그나마 인정이라도 해줬을 텐데. - …확실히. 이 정도로는 어림없겠구려. 흐흐. - 기, 기분 나빠. 왜 웃는 거예요? - 그런데 말이오. - ……? - 그대야말로 설마,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왔을 것 같소? 신 대륙 아틀란타(북 도시 비밀 도서관), ‘빅토리아 왕조 실록 - 18대 황제(147 ~ 147)’ 中 ‘폐 태자, 기묘한 모래 시계를 꺼내며.’ * 잠시 후. 한동안 부산을 떨던 제갈 해솔은 각자 한 명씩 기둥 앞에 서달라는 지시를 내렸다. ‘꼭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순순히 가까운 기둥으로 걸음을 옮겼다. 군소리 않고 따르자, 서로 눈치를 보던 동료들도 이내 각각 기둥을 향해 움직였다. 제갈 해솔은 주변을 둘러보며 만족하는 기색을 보였다. “석판의 기록은 그냥 내용에 불과해요. 무슨 생각으로 적었는지는 모르나, 난해한 말장난일 뿐이죠. 아마 저도 이 실록을 읽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을 거예요.” 설명을 들은 순간 나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제갈 해솔은 내 생각과, 아니 과거 무수한 사용자가 몇 주에 걸쳐 해독한 내용과 똑같은 결론을 이끌어냈다. 고작 5분도 안 되는 시간으로. “통로를 여는 방법은 이미 마련돼 있었던 거죠. 여기서 중요한 건 조건. 그러니까 그때와 똑같은 15명의….” 그때였다. 돌연 말을 흐린 제갈 해솔이 갑자기 아차 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이어서 눈꼬리가 살며시 올라가는 게, 꽤 묘한 표정을 짓는다. “잠시만요. 클랜 로드? 혹시….” “됐으니까 우선 길부터 열어보겠어? 결과가 궁금하거든.” 무언가 낌새를 느낀 것 같아 말을 끊어버리자, 제갈 해솔의 입꼬리가 미미한 호선을 그린다. 이어서 킬킬 소리 죽여 웃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바로 시작하도록 하죠. ────. ────.” 찡긋 눈을 감은 제갈 해솔은 바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영창은 길지 않았다. 제갈 해솔의 눈동자가 갑자기 황금빛으로 물든 찰나, 빠르게 수인을 맺던 양손을 기둥에 붙인다. 우우우웅! 그 순간, 사방에서 탄성이 터졌다. 칙칙한 빛을 띠고 있던 기둥이, 제갈 해솔이 손을 짚은 지점으로부터 환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빛은 차츰차츰 번지며 기둥 전체를 물들였고, 곧 남다은이 서 있는 건너편 기둥을 향해 찬란한 빛무리를 토해냈다. 빛을 받은 기둥은 또다시 환히 타오르다가, 다른 기둥으로 빛무리를 방출한다. 이건 나도 처음 보는 광경. 제갈 해솔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일부는 넋을 잃은 표정으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응시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빛은 계속해서 기둥과 기둥으로 이어졌고, 종래 모든 기둥이 불타오르는 동시에 중앙에 15각형으로 이루어진 진이 생성된다. - 이건 아스트랄…. 그것도 강제 주문이잖아. 어떻게 이런 주문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거지? 문득 화정이 놀라워하는 음성이 머릿속을 울렸다. ‘아스트랄…. 뭐라고?’ - 마법의 근원, 초 정보 집합체, 신에게 다다를 수 있는 마법…. 그러니까 일종의 금주라고나 할까. ‘금주?’ - 금지된 주문. 그게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쿠르르르르르르릉! 별안간 무시무시한 굉음이 천지를 뒤흔드는 동시, 몸의 균형을 잃을 정도의 엄청난 진동이 전신을 엄습해왔기 때문이다. 겨우 기둥을 붙잡고 안력을 돋우자, 중앙의 진이 격렬하게 진동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생성된 진 주변 허공이 물결처럼 잔잔하게 일렁이면서, 좌우로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모든 진동과 굉음이 사라졌지만, 귓전은 아직도 웅웅 울리고 있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자, 멍하니 중앙을 응시하는 동료들이 보였다. 중앙에는, 공간이 벌어진 틈으로 적당한 통로 하나가 일렁거리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침내 길이 나타난 것이다. 이제부터는 나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였다. * 나를 선두로 통로로 들어온 후, 우리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아니. 생각해보면 통과할 때부터 이상했다. 마치 장막이 쳐진 듯한 공간은, 처음에는 나를 살그머니 밀어내는 듯했으나 억지로 밀고 들어가자 스치듯이 통과됐다. 꼭 비눗방울과 같은 느낌이랄까. 또한 앞으로 쭉 이어지는 통로의 좌우에는, 커다란 나무와 울창한 수풀이 가지런하면서도 촘촘하게 서 있다. 아주 약간의 공간도 보이지 않는 게, 무조건 앞으로만 가야 할 것 같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특히 시야가 이상했다. 사물을 구분하는 데는 무리가 없으나, 어딘가 모르게 흐릿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흡사 물감이 살짝 번진 듯한 풍경 수채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요.” 고요한 음성. 어느새 다가온 한소영은, 드물게도 약간 흥분한 눈동자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신화 속의 금주…. 모종의 염원을 갖고 만들어진, 그러나 생성이 허락되지 않은 마법의 공간….” 혼잣말인 걸까. 개인적으로 마법에 관한 지식이 얕다고 생각한 적은 없으나, 나는 머리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한소영은 돌연히 한숨을 흘렸다. 가녀린 손이 미미한 저항감이 느껴지는 허공을 움켰다가, 하릴없이 떨어진다. “우리는, 터무니없는 공간에 들어온 걸지도….” …터무니없는 공간이라. 확실히 쉽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들어오자마자 확인해본 결과, 제 3의 눈이 제대로 발동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아무튼, 여기서 알 수 있는 정보는 하나. 현재 우리가 들어온 공간이 최소한 ‘현세’는 아니라는 소리였다. 아마 그 이상의, 어쩌면 아득한 과거나 알 수 없는 미래까지 아우르는…. 아, 젠장. 모르겠다. 문득 아쉬움이 들었다. 만일 제 3의 눈의 랭크가 조금만 더 높았다면…. “정렬하겠습니다. 이제 그만 들어가 보도록 하죠.” 일말의 아쉬움을 삼키고 나서, 나는 두어 번 손뼉 치며 선두로 나섰다. 그리고 동료들을 이끌고 천천히 행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 이변은, 바로 그 순간 시작됐다. “정지!” 아직 10분도 채 걷지 않았으나, 나는 망설임 없이,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갑자기 주변 환경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아름답던 풍경이 점차 보기 싫을 정도로 심하게 번지더니, 종래에는 마구 뒤섞은 것처럼 흐물흐물해지고 있었다. 이내 가장 심한 변화가 일어나는 장소로 다가가자, 나는 살짝 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가까워질수록 앞서 봤던 풍경과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 눈에 언뜻 비쳤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 어느새 풍경은 한순간 변화해있었다. 주변은 더 이상 아름답고 푸른 숲이 아니었다. 음침하면서도 비릿한 공기가 감도는, 성의 어두운 회랑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아래를 바라보는 시야로, 시뻘건 바닥이 눈에 들어온다. 탁한 얼룩이 아닌, 마치 금방이라도 흩뿌린 듯한 새빨간 핏물. 심지어 냄새마저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머셔너리 로드. 여기는….” 비단 나만 이상한 게 아닌지, 눈을 가늘게 뜬 한소영이 다가온다. 그 순간. “우욱!” 나와 한소영은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우우우욱!” 안솔이 토악질을 하고 있다. 바닥에 엎어진 안솔은, 그렁그렁한 눈을 한 채 손으로 입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설마, 정신 공격을…? - 정신 공격이 아니야. 그냥 쟤가 첫 희생자였을 뿐이지. 그때, 화정이 내 생각을 정정하는 말을 꺼냈다. ‘희생자라고?’ - 그래. 어차피 곧 느끼게 될 거야. 너도 그렇고, 여기 있는 모두가. ‘화정.’ - 조용히. 내가 도와줄 테니까, 너도 느껴봐.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몸 내부로 화끈한 기운이 돌았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풍경이었다. 아니. 우리만 제외하면 아무도 없는 공간이다. 그런데, 그런데…. “오, 오라버니….” 신재룡의 부축으로 가까스로 일어난 안솔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비틀비틀 걸어와 내 옷자락을 꽉 붙잡고는, 조심스레 고개를 돌린다. “오라버니…. 저, 저기….” “…그래. 보인다.” 이어지는 음성에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안솔이 고개 돌린 곳에는 한 여인이 쓰러져 있었다. 하얀 로브를 입은 갈색 머리카락의 여인은 전신이 무자비하게 난자 당한 상태였다. 피 웅덩이 속에 쓰러진 여인을 보자, 갑자기 까닭없는 분노와 안타까움이 솟구쳤다. 그리고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 모를 감정까지. 심안의 영향으로 바로 가라앉기는 했으나, 확실하게 느꼈다. 방금 감정은 동료들이 아닌 이 길 너머의 누군가를 향했다는 것을. 이렇게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안솔을 부축한 후, 우리는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길은 끝없이 이어졌고, 가는 와중 풍경은 계속해서 변화했다. 기둥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 곳에는, 건장한 전사가 기둥에 기대앉은 채 핏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핏물이 질펀히 퍼진 벽면에는, 웬 기사가 얼음 꼬챙이에 심장이 꿰여 축 늘어져 있다. 복부를 감싸 안은 채 필사적으로 기어가다가 툭 머리를 떨구는 마법사도, 허공에서 떨어진 독물을 뒤집어써 흔적도 남지 않고 녹아 내리는 궁수도 보였다. 이상 현상은 안솔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걸음을 멈춘 허준영이 헛구역질을 하고, 남다은은 심장을 감싸며 낯을 찌푸렸다. 사라는 바닥에 머리를 박고 신음을 흘렸으며, 임한나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몸부림쳤다. 새로운 광경이 보이게 되면, 동료들은 한두 명씩 여지없이 몸을 고꾸라트리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럴 때마다 내 감정도 치솟았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억지로 전진하면 전진할수록, 풍경이 전해주는 감각은 점점 강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아악…!” 결국에는 간신히 버티는가 싶던 한소영마저도 무너지고 말았다. 외마디 비명을 지른 한소영은, 허물어지듯 무릎을 꿇으며 전신을 쥐어짜듯이 감쌌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아, 아….” 황급히 품에 안자, 한소영은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지 입만 뻐금거렸다. 작살이라도 맞았는지 온몸을 심하게 떨고 있다. 지금까지 중 가장 심한 반응. 한소영은 한동안 진정하지 못했다. 홀연히 시선을 들어 올리자, 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꺄아아아아아아악! 이제는 숫제 음성까지 들려온다. 전방의 허공에는, 갑옷을 입은 여인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칼날의 바람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분쇄였다. 들어가는 족족, 가루로 갈아진 핏물 섞인 살점이 사방팔방 흩뿌려진다. 나는 이제야 아까 화정이 말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기는….’ - 그래. 여기는…. 수백 년 전의 흔적이 남은 장소. 화정이 씁쓸한 음성으로 화답했다. -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정신과 육체를 연결하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아스트랄의 차원. - 너희는, 지금 과거의 흔적을 되짚고 있는 거야. - 그리고. - 그 끝에는…. ============================ 작품 후기 ============================ Hmph! 0744 / 0933 ---------------------------------------------- 역사(歷史). “우욱.” 갑자기 치솟는 구역질에 허리가 저절로 고붓이 휘어지며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그런다고 구토감이 사라질 리는 만무했으나, 이유정은 목구멍 끝까지 올라온 불쾌한 감각을 겨우 삼켰다. 하지만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 이상한 공간에 들어온 후, 어느 순간부터 느낀 감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 온몸을 거침없이 헤집는 것 같다. 강철 발리스타가 서너 대는 박힌 듯하다. 마치 복부가 퍽 터지는 것 같은, 끔찍하리만치 생생한 느낌. “우욱! 웨에에엑!” “유정아!” 결국 이유정은 참지 못했다. 간신히 허리를 펴는가 싶더니, 무너지듯이 주저앉는다. 그 와중 어떻게든 참으려 이를 악물어 봤으나 결국에는 토사물을 토해내고 말았다. 시큼한 냄새와 비릿한 피 내음이 섞여 들어오자 토악질은 계속 반복됐다. 그렇게 속을 게워내니 약간 괜찮아지기는 했지만, 이내 다른 감정이 찾아와 빈자리를 대신했다. 눈앞에 질펀히 흩어진 더러운 무언가를 보자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그것은 일종의 자괴감이었다. ‘안솔도 참아냈는데….’ 누군가는 등을 두드려주고, 또 누군가는 괜찮으냐고 말하면서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이유정은 손등으로 입을 닦으며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한 찰나, 또다시 복부에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고, 기껏 세운 팔이 절반으로 꺾였다. 갑자기 까닭없는 무력감이 전신을 엄습했다. 이유정은 남몰래 입을 깨물면서 양손을 바스러지도록 움켰다. “무슨 일이야. 괜찮나?” 그때 괜찮으냐고 물어오는 김수현의 음성이 들렸다. 이유정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거의 애걸하다시피 해 간신히 얻어낸 자리였다. 도움이 되지 못할망정, 아니 애초 도움을 주지도 못했으니 폐는 끼치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김수현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이유정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찮아!” “아닌 것 같은데. 너무….” “아니! 정말로 괜찮아!” “…….” 이유정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한동안 물끄러미 응시하던 김수현은, 무리하지 말라는 말을 내뱉고 몸을 돌렸다. 이유정은 필사적으로 호흡을 추스르며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낙인이 찍힌 부분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복부는 여전히 시리듯이 아팠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통에 젖은 동료들을 이끌고, 끝없이 이어지는 길에서 나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눈앞으로 세월의 흐름을 간직한 낡은 고성이 보였다. 거리는 약 50 미터 정도. 정면 방향, 시커먼 어둠이 드리운 입구를 보며 나는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심안의 영향으로 금세 가라앉기는 했지만, 이내 나도 모르게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입구를 통과했다. 풍경은 더 이상 변화하지 않고, 스치듯이 지나쳤다. 좌우로 늘어선 기둥을 지나 삽시간에 회랑을 통과하자 비로소 거대한 철문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각 모서리에 형이상학적인 문양이 각인된, 5 미터는 넘는 육중한 문이었다. 막 문을 밀고 들어가려는 찰나, 문득 거칠어진 숨이 느껴졌다. 안개를 통과하면서 체력이 하락해 만전의 상태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힘들다기보다는, 누군가 내 안에서 숨이 차 몰아 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가슴을 가라앉히며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쫓아온 동료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낯을 찌푸리고 있는 게, 이상한 눈으로 문을 응시하고 있다. 고통, 증오, 분노, 상실…. 심지어 원망까지. “들어가겠습니다.” 조용히 뇌까린 후, 나는 주저하지 않고 문을 밀어젖혔다. 그리고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둥글고 넓은 방이 나타났다. 주변을 둘러볼 필요는 없었다. 앞쪽으로 큼직한 제단이 있었고, 그 제단에 누군가가 걸터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바로 무검을 치켜들며 조심스레 전진하기 시작했다. 동료들도 모두 무기를 들어 나를 따라온다. 우리가 들어온 걸 모르는 걸까. 거리가 20 미터도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단의 인영은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올려다보니 형상이 또렷이 눈에 들어온다. 과연 잠자는 숲의 공주님이 이랬을까? 인영의 정체는 소름이 끼칠 만큼 신비롭고 매혹적인 여인이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젊은 미인. 푹 눌러쓴 마녀 모자 아래, 풍성하게 흘러내린 보라색 머리카락이 아름답다. 그러나 아래를 내려다보는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공허해 보이고, 눈은 꼭 감고 있었다. 마녀의 얼굴은 여전히 우리를 향하지 않고 있다. 그때였다. “이…!” 누군가 앞으로 달려나가려는 찰나, 나는 곧장 손을 뻗어 제지 신호를 보냈다. 주변에서 전해지는 기운이 심상치가 않은 게, 아무래도 여기까지 오면서 약간 흥분한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조금 전 마녀가 깨어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가만히 보면 조용히 잠을 자는 것 같으나 방금 아주 살짝 움직였다. 왼손에 쥔 모래 시계를 한 바퀴 돌린 걸 확실히 놓치지 않았다. 잠시 후. “…의외네.” 높은 톤의 여성스러운 미성(美聲)이 고요한 공간을 왕왕 울렸다. 흡사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듯한 음성. 이어서 마녀가 천천히 눈을 뜨자, 가는 속눈썹 아래 텅 빈 듯한 보랏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살짝 고개를 든 마녀가 차분히 우리를 훑는다. “여기까지 온 애들은 대부분 죽자사자 달려들던데…. 이렇다는 건 스스로 다스렸다는 소리겠지. 그래. 너희는, 아니 너는 조금 다를 수도 있겠어.” 그렇게 말한 마녀는 오연히 다리를 꼬았다. 짙은 색 로브가 아래로 펄럭이고, 눈부신 종아리가 훤히 모습을 드러낸다. 이윽고 양손을 제단에 짚은 마녀는 정확히 나를 응시했다. “그래서, 어때? 수백 년 전의 역사를 되짚어, 이렇게 또 한 번 내 앞에 선 기분은?” “……?” “너는 그때의 기분을,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겠니? 세 번째 폐 태자?” “…….” 세 번째 폐 태자라. 나는 곧바로 마녀의 말을 이해했다. 첫 번째는 폐 태자 본인, 두 번째는 앞서 들어온 캐러밴 중 한 명,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나. 말인즉, 현재 내 육체가 폐 태자의 영혼과 연결됐다는 소리였다. “앞서 들어온 15명은 어떻게 됐지?” 나는 대답 대신 무검을 곧추세웠다. “내가 먼저 물었어. 대답하지 않는다면, 나도 말해주지 않을 테야.” 그러나 마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기분, 감정 따위 몰라.” “대답이 부족해.” “모른다고 했잖아. 그냥 멍청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멍청하다고? 폐 태자가?” 침착히 머리를 끄덕이자 마녀의 눈이 살며시 커졌다. 찰나의 순간, 공허하기만 하던 보랏빛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잠시 후, 나를 빤히 바라보던 마녀의 흰 뺨이 돌연 “푸.” 부풀었다. “꺄하하하하하하하!” 흡사 비명을 지르는 듯한, 찢어지는 웃음이 허공을 가르며 장내에 가득히 울렸다. 무에 그리 웃긴지, 아까 느낀 느낌과는 다른 발랄하면서도 활기찬 소리였다. 이제는 숫제 허리까지 꺾어가며 박장대소한다.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발을 구르자, 마녀의 육감적인 몸매가 약간 작은 로브로 인해 심히 도드라진다. “모두 전투 준비!” 더 두고 볼 수만은 없어 나는 바로 지시를 내렸다. 동료들은 기다렸다는 듯 마녀를 향해 무기를 겨눴다. 공교롭게도, 마녀 또한 서서히 진정하고 있었다. “아아, 가련한 폐 태자…. 그렇게나 폼을 잡고 달려오더니, 정작 후세에 인정받지도 못했어. 그래, 멍청해. 정말로 멍청하지.” 마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다가, 문득 색정적인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눈에는 아직 닦지 못한 눈물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싸울 거야? 나는 너랑은 싸우기 싫은데. 어차피 소용없는 승부이기도 하고.” “무….” “그리고 아직 대답도 안 했고. 듣고 싶으면 무기를 내려.” “…….” 아마 혼자였으면 벌써 공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작정 달려들 수는 없다. 어쨌든 임무를 맡은 입장이니 앞서 들어온 15명의 행방은 알아야 했고, 한편으로는 마녀의 정보가 읽히지 않아서였다. 이곳은 현세가 아닌 마녀와 폐 태자의 공간이다. 홈 그라운드가 아닌 이상, 그리고 마녀가 전력을 알 수 없는 이상 바보 같은 짓은 지양해야 한다. 어쩌면 마녀는 마볼로는 가볍게 넘어서는 수준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이를 갈며 무검을 내렸다. 마녀는 꽃이 피는 것처럼 활짝 웃으며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응. 착해, 착하다. 착한 애는 좋아.” “15명.” “아이, 급하기는. 뭐 좋아. 걔들은 너희처럼 신사적이지가 않아서 말이지. 나를 보더니 발정 난 수캐처럼 달려들지 뭐야? 그래서~. 마침 준비하는 것도 있고 해서, 모조리 잡아다가 양분으로 썼지.” “양분…. 아니, 준비?”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무언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원래대로라면 마녀는 이 공간에 갇힌 채 봉인된 상태였을 터. 나는 앞서 들어온 캐러밴이 잠든 마녀의 영혼을 깨운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 마녀의 말은 초점이 맞지 않는다. “너는 최근에 깨어난 게 아니었나?” “깨어나…? 아~. 맞아. 폐 태자 놈, 설마 이런 성과를 가지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어.” 마녀는 무언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손에 쥔 모래 시계를 공중으로 던졌다가, 할퀴듯이 잡아챈다. “그런데 네가 말하는 놈들이 나를 깨운 건 아니야. 깨어난 건 훨씬 전, 그러니까 몇 달 전부터일걸?” “뭐라고? 어떻게?” “그건 나도 몰라. 설마 이런 아스트랄 차원까지 간섭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을 줄은 나도 몰랐으니까. 아무튼, 나한테는 고마운 존재지. 덕분에 복수를 할 수 있게 됐으니까.” “…….” 복수라는 말이 나왔다. 문득 과거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무언가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아직 소개를 안 했네. 얘, 일어나. 일어나렴. 손님이 오셨단다~.” 그렇게 말한 마녀는 자신의 심장을 톡톡 건드리더니 갑자기 제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바닥에 가볍게 안착한 후, 배시시 웃으며 모자를 벗는다. 주변에는 마녀와 우리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그럼 소개할게. 얘가 바로….” 그때. “으, 응?” 돌연히 마녀가 주춤했다. 고개를 숙이더니 볼록하게 도드라진 자신의 가슴을 응시한다. “깜짝이야! 왜 갑자기 소리를 질러?” “…으응? 지옥?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망쳐? 도망치라고? 내가 왜?” “저놈이 누군데?” 중얼중얼 혼잣말을 잇던 마녀는, 중간에 흘끗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는 도로 시선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 내 어깨를 살짝 치는 감촉이 느껴졌다. “머셔너리 로드. 이상해요. 어서…!” 속삭이듯 들려오는 한소영의 음성. 그 순간, 나는 망설임 없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 마녀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 흐아아아아아아악! “깜짝이야! 왜 갑자기 소리를 질러?” 기껏 친구를 깨웠더니, 깨어나자마자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 그놈이다! 그놈이잖아! 어떻게, 어떻게? 분명 그때 지옥으로 보내버렸을 텐데? “…으응? 지옥?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 아, 아니지. 도망쳐! 어서 빗자루를 꺼내서 도망치라고! “도망쳐? 도망치라고? 내가 왜?” - 빌어먹을! 설명할 시간이 없어! 저놈은 너도나도 감당할만한 놈이 아니라는 말이다! “저놈이 누군데?” 내면의 울림이 머릿속을 왕왕 울리는데도, 마녀는 태연히 고개를 갸웃했다. - 그게, 아니! 앞! 그러한 찰나, 울림이 황급히 경고했다. 천연스레 고개를 든 마녀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오는 김수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녀의 얼굴에서는 일말의 동요도, 약간의 당황도 보이지 않았다. “후유, 별로 싸우기는 싫은데….” 이윽고 몸이 두둥실 뜨는가 싶더니 삽시간에 공중으로 솟구친다. 김수현도 있는 힘껏 도약했으나, 마녀는 차분히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주문도 외우지 않았는데 손의 주변으로 영롱한 푸른 물방울들이 생성되더니, 이내 아래로 줄기줄기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작은 파동으로 변한 물줄기는, 여지없이 김수현의 몸을 꿰뚫었다. “거봐. 소용없다고 했잖아.” 그것을 확인한 후, 도로 제단에 올라온 마녀는 딱하다는 듯 싱거운 한숨을 흘렸다. “소용없다고?” 그러나, 돌연 등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흠칫 몸을 떨었다. 이어서 공중에서 허공에 녹아들 듯이 흩어지는 김수현의 모습이 보인다. “일루전? 아니!” “정말로?” 놀란 마녀의 음성과 김수현의 차가운 목소리가 겹쳤다. 그리고. 뿌드드드드득! “깍!” 차마 뒤돌아보기도 전에, 목 부근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지고 혀가 길게 빼어졌다. 그런 마녀가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었던 건, 크게 화내는 내면의 음성이었다. - 젠장! 이 멍청한 년! 여기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에에! - 메타몰포시스(Metamorphosis)! 그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독자 님들 정말 너배추하시네요! 저번 후기에 그렇게 목탁을 드렸는데, 아직도 그 사이트에 코멘트가 남아 있어요. 그런데 육히려 성지 순례라니요? 혹시 지워주시지 않을까 기대했던 제가 바가위였어요. 요즘 자정에 업데이트하려고 정히힝 노력하는데, 마음이 아프네요. 마지막으로, 목탁 드리겠습니다. 아니, 앞으로 계~속 그 코멘트가 남아 이상, 저 또한 앞으로 자정에 업데이트하려는 노력이나 간간이 연참을 하려는 노력을, 계~속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ㅌㅌ. PS. 독자 분들. 저는 괜찮으니 싸우지 마세요. :D 0745 / 0933 ---------------------------------------------- 역사(歷史). 찌지지직! 펄럭! 갑자기 로브가 찢어지며 무언가 거대한 것이 시야를 가렸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처음에는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 무언가는 곧 힘찬 날갯짓을 시작했고, 스스로 목을 뺀 마녀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깜짝 놀라 시야를 집중하자 활짝 펼친 날개가 눈에 들어왔다. 흡사 박쥐를 연상케 하는 날개는 굉장히 컸고, 짙은 검은빛을 띠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모양이라고 생각할 무렵, 마녀는 바람을 타듯이 활승(滑昇)해 삽시간에 멀어졌다. - 추격해! 화정의 음성이 머릿속을 울렸다. 그러나 발에 힘껏 힘을 준 찰나, 돌연히 몸이 크게 비틀거렸다. “큭?” 쿠르르릉! 쿠르르릉! 시선을 내리자 와르르 무너지는 제단이 보였다. 아니, 제단만이 아니라 우리가 들어온 방 전체가 무너지는 중이었다. 마치 세상이 멸망하는 것처럼, 온 공간이 퍼즐이라도 된 듯이 조각나 떨어진다. 그리고 그 후면으로 또 하나의 새로운 세상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수현아!” 번쩍! 한순간 가열찬 섬광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뜨자, 허공에서 높은 톤의 비명이 울렸다. 드물게도 화난 표정을 한 임한나가 ‘찬란한 섬광’을 든 자세로 누군가를 노려보고 있다. 공중에 떠오른 마녀의 등에는 빛나는 화살이 꽂혀 있었다. 비틀거리는 모습을 확인한 순간, 나는 망설임 없이 외쳤다. “용족화!” 『용족화를 발동합니다.』 그리고 바로 균형을 잡은 후, 돋아난 날개를 움직이며 있는 힘껏 솟구쳤다. - 방금 일격은 좋았어! 귀찮아지기 전에 최대한 빨리 끝내버려! 화르르륵! 화정의 음성이 이어지는 동시,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무검에 맑은 불꽃이 휘감아 올랐다. 필요한 보조는 자신이 할 테니 나는 무조건 마녀를 베는 데만 집중하라는 소리였다. 그 응원에 힘입어, 나는 점프, 궁신탄영, 이형환위로 이루어지는 3단 이동을 통해 단숨에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그렇게 지척까지 다가가자, 나를 확인한 마녀의 표정이 흡사 괴물이라도 본 듯 일그러졌다. “요, 용의 날개? 미친! 어떻게 인간이…!”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나는 전력으로 무검을 내리쳤다. 내리치는 방향에 맞서 마녀는 황급히 팔을 들었다. 어느새 소환한 건지, 오른손에는 빗자루 같은 기다란 지팡이가 쥐어져 있었다. 찰나의 순간, 빗자루가 푸른빛으로 물들며 둥그런 마법 진을 토해냈고, 그대로 무검과 부딪친다. 카앙! 카앙! 교착 지점에서 시퍼런 불꽃이 튀겼다. 나는 살짝 숨을 들이켰다. 놀랍게도, 마법 진은 내 전력이 담긴 공격을 두 번이나 방어했다. 비록 반으로 갈라지며 불타 녹아 내리기는 했으나, 날카로운 예기가 그 안쪽까지는 닿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여파는 남아 있는지 마녀가 긴 비명을 남기며 아래로 추락…. “……!” 아니. 추락하는가 싶었으나, 땅에 닿기 직전 간신히 날개를 펼쳐 재 활승했다. 그러나 마녀는 더 이상 도망가지 않았다. 도망쳐봤자 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두둥실 공중으로 떠올라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본다. 나는 무검을 고쳐 잡으며 마녀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등에 돋은 날개, 검게 변색한 손…. 그리고 정수리에 돋은 뿔을 발견한 순간, 나는 비로소 마녀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랬군. 악마였어.” 악마. ‘그런데 네가 말하는 놈들이 나를 깨운 건 아니야. 깨어난 건 훨씬 전, 그러니까 몇 달 전부터일걸?’ ‘그건 나도 몰라. 설마 이런 아스트랄 차원까지 간섭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을 줄은 나도 몰랐으니까.’ 그래. 악마라면 아까 마녀의 말을 설명할 수 있다. 말인즉 봉인된 마녀를 깨운 건 캐러밴이 아니라 악마라는 소리였다. 그것도 최근이 아닌 훨씬 전부터. 생각해보면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용이 잠든 산맥을 들어갔을 때도 악마들은 마그나카르타를 부활시키지 않았는가. ‘그럼 왜?’ 라는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으나, 짚이는 바는 있었다. 아마 계획을 세우는 족족 내가 모조리 분쇄하니, 아예 내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일을 꾸미려 한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만에 하나 과거처럼 신경 쓰지 않고 놔두었다면…. 1회 차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재앙이 몰아쳤을 것이다. 전투는 잠시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마녀는 더 이상 태연한 낯빛을 보이지 않았다. 아까 격돌 때 받은 충격이 아직도 남았는지, 오만상을 찌푸리며 오른손을 주무른다. 우선은 정체부터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가만히 팔짱을 꼈다. 제 3의 눈이 제한된 상황이라는 게 아쉽군. “어떻게 막은 건가 싶더니…. 설마, 악마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하하.” “…….” “어디 보자. 고작 마족이 내 공격을 방어할 수 있을 리는 없고…. 그럼 최소한 악마 14 군주 이상은 된다는 말인데.” “…….” 스리슬쩍 찔러보았으나 마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악마의 정체를 숨기려는 것 같은데, 행동이 상당히 조심스럽다. 이렇다는 건, 마녀의 몸에 심어진 악마는 내 정체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소리였다. 물론 그렇다고 알아낼 수단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대 악마 본인이 아닌 이상, 악마 14 군주나 마족을 도발하는 방법은 의외로 아주 간단하니까. 나는 아까 빗자루 주변에 생성된 푸른 마법 진을 떠올렸다. “마녀와의 궁합. 그리고 아까의 방어를 생각해보면…. 설마 발소르인가? 그 별볼일 없는 사탄의 휘하인?” 그 순간 마녀가 흠칫 몸을 떨었다. 나는 씩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연기하지 마. 플루톤. 그 샌님 같은 루시퍼가 연기 하나는 지지리도 못 가르쳤나 보군.” - 닥쳐라, 놈! 역시나. 곧바로 반응이 튀어나왔다. 마녀의 육성이 아닌, 내부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듯한 음성이었다. 아마 발소르인 척하고 넘어가려던 심산이었던 것 같은데, 악마들의 성향을 워낙 잘 알아서 말이지. “유언장은 써두고 왔나? 프로세르피나가 슬퍼하지 않을까?” 나는 낄낄 웃으며 무검을 고쳐 잡았다. 그러고 보니 플루톤 앞에서 프로세르피나를 단체로 유린하는 것도 참 재미있었지. 아무튼, 어쩌다 악마와 조우하게 됐는지는 모르나 오히려 기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야말로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격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플루톤을 쓰러트린다면 악마 진영은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다. 이렇게 정체도 알았으니,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 풍경은 어느새 또다시 변화한 상태였다. 둥글고 넓은 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흡사 세기말을 보는 듯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은 붉고, 땅은 거칠게 우거진 불그스름한 수풀로 덮인 풍경. ‘여기는….’ - 이 세상의 진짜 모습. 대답은, 화정에게서 들려왔다. ‘이 세상의 진짜 모습?’ - 그래. 아까 들어오면서 누가 그랬지? 이 세상은 마력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라고. 확실히 비슷한 말을 들은 것 같기는 하다. - 현재는 그 마력이 모조리 걷힌 상태야. ‘모조리 걷혔다고?’ - 그래.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마녀가 스스로 걷어냈어. 아마 그만큼 상황이 급했다는 소리겠지. ‘그런가….’ 그럼 이곳이 바로 진정한 ‘야만 왕의 무덤’이라는 소린가. - 아무튼, 우선은 물러나는 게 좋을 거야. 진정한 아스트랄 차원이 드러난 이상, 이제 어떤 현상이 발생할지 나조차도 감을 잡을 수 없어.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혼자 날뛸 생각은 넣어둬. ‘으음.’ 화정의 조언에 나는 곧바로 동의했다. 이제부터는 마녀만을 상대하는 게 아니다. 마녀의 마법과 플루톤의 능력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마녀 혼자 있다면 내 사용자 정보 특성상 쉽게 풀어갈 수 있으나, 플루톤이 가세한다면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플루톤(Pluton). 악마 14 군주 중 한 놈으로, 프로세르피나(Proserpina)와 부부의 연을 맺은 루시퍼 휘하의 명성 높은 악마 군주. 아주 예전에 처리한 마몬보다는 조금 떨어지기는 하지만, 근접 전투 능력도 상당하거니와 수준급의 악마 마법을 구사하는 실력자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씨앗이 개화한 지 몇 달의 시간이 흘렀으니 힘도 어느 정도 회복했을 터.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절대로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다. 잠시 후. 땅으로 착지하고 날개를 접자 쫓아온 동료들이 삽시간에 나를 에워쌌다. “머셔너리 로드. 어떻게 된 거죠?” “방심한 틈을 노려 처치하려고 했는데, 예상외의 상황이 발생했네요.” 한소영의 물음에 하늘을 가리키며 말하자, 모두 동시에 고개를 치켜든다. 마녀는 여전히 하늘에 떠 있는 상태였다. “악마가 출현했습니다. 저번에 상대한 마몬과 비슷한, 악마 14 군주 중 한 놈으로 추정됩니다. 절대로 방심할 상대가 아닙니다.” 말을 마치자 선율이나 한소영 등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일부 클랜원은 잔뜩 긴장한 낯빛으로 각자 무기를 치켜들었다. 마몬과의 힘겨운 전투를 기억하는 것이다. “아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아무튼, 쓰러트려야 하는 상대라는 소리죠?” 선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품속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때였다. “닥쳐어어어어!” 돌연 한층 높아진 음성이 붉은 하늘을 떠르르 울렸다. 이번에는 마녀의 목소리였다. “도망치라고? 나보고 이 공간을 버리고 도망치라고?” “그렇게는 못해! 내가 얼마나 공들여 준비했는데! 조금만 더 있으면 복수를 할 수 있는데!” 보아하니 플루톤은 계속해서 도망을 종용하는 듯했다. 좋은 선택이기는 했다. 물론 순순히 놓아줄 생각은 없지만. “닥쳐닥쳐닥쳐닥쳐! 내가 죽는다고? 저딴 인간 놈들한테 질 거라고? 일인 군단이라고 불리는, 이 내가?” “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찢어지는 웃음이 귓가를 웅웅 울린다. 그러나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려는,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느낌이 느껴졌다면 내 착각일까? 이윽고 미친 듯이 웃어 젖히던 마녀가 한순간 웃음을 그쳤다. “도와주지 않을 거면, 입 닥치고 있어.” 씹어먹듯이 내뱉고는, 한층 살벌해진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빗자루를 가로로 눕혀 궁둥이를 붙이더니, 활짝 핀 오른손을 아래로 내밀었다. 잠시 후, 무시무시한 마력이 소용돌이치듯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길게 늘어트린 보라색 머리카락이 사방팔방 펄럭이고, 엄청난 마력의 흐름이 지상을 아우른다. “애니메이트 플로라(Animate Flora)!” 그 순간이었다. 주문을 외우기가 무섭게 땅이 우지직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짙은 핏빛을 머금은 넝쿨이 사방에서 쑥쑥 솟구쳐 나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공간까지도. 우리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하승우가 재빠르게 주문을 외우며 양손을 모아 땅으로 갖다 붙였다. “────. ────. 체인지 샌드, 체인지 록(Change Sand, Change Rock)!”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서서히 갈라지던 지면이 딱딱히 굳기 시작하더니, 스멀스멀 잿빛으로 변색하며 바위처럼 딱딱해진 것이다. 이내 기운차게 올라오던 넝쿨이 갑자기 수그러들며 말라 비틀어졌고, 그대로 힘없이 쓰러졌다. 물론 모든 지면에 영향을 미친 건 아니었다. 직경 20 미터 밖에는, 약 2 미터 이상 되는 커다랗고 징그러운 촉수 식물들이 빽빽이 돋아나 꿈틀거리는 중이었다. “흐흐, 흐흐흐흐. 기뻐해도 좋아. 이건….” 흡사 실성한 듯한 마녀의 음성에 나는 싱겁게 웃었다. “무…. 웃어?” 내 웃음을 확인한 걸까. 마녀의 목소리가 곧바로 뾰족해졌다. 마볼로도 그렇지만, 이 마녀도 만만치 않게 미친 것 같다. 하기야 이러니까 악마가 타깃으로 삼았겠지. 아무튼, 악마의 등장은 확실히 예상을 벗어났다. 그러나 현재 사방에서 우글거리는 촉수 식물은 전혀 그렇지 않다. 과거에 도시가 습격 당했을 때 지겹게도 보지 않았는가. 그런 만큼 식물 군단의 등장은 예상 안에 있었고, 대비책도 마련해왔다. 괜히 이번 원정대를 조합을 우선으로 선발한 게 아니었다. “백한결, 김한별!” 지체 않고 외치자, 두 명은 똑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 하승우!” 바로 이어 외치니 그 두 명도 곧장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 ────.” “────. ────.” “────. ────.” “────. ────.” 이어서, 네 명의 사용자가 동시에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2차전의 시작이었다. ============================ 작품 후기 ============================ 아하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 파트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쓰러질 리가 있나요? 마녀와 플루톤은 제법 괜찮은 반항(?)을 할 예정입니다. …아. 그런데 반항이라고 하니까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드네요. 마치 김수현이 악의 축 같고, 열심히 분전하는 마녀와 악마가 오히려…. 흠흠. 그러므로 다음 회는 ‘특집! 힘내라! 마(법) (소)녀!’가 연재될 예정입….(퍽퍽!) 자, 그럼 저는 이만 쌓인 쪽지에 답변을 하러 가보겠습니다.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 0746 / 0933 ---------------------------------------------- 역사(歷史).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걸까. 실처럼 가늘어진 마녀의 눈이 아래를 응시한다. 중앙에 둥그렇게 모여 있는 15명. 그 중 4명 주변으로 마력이 파도치듯이 넘쳐 흐르고 있다. 심상찮은 마력의 흐름을 느낀 순간, 마녀는 곧장 아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먹어 치워! 플로라(Flora)!” 식물인 만큼 화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러나 지면에서 일어난 식물 군단은 마녀의 지시에 충분히 호응하고 있었다. 스르르륵. 수풀을 스치는 소리에 이어, 사방의 식물들이 촉수를 꿈틀거리며 거리를 좁혀가기 시작한다. 이윽고 암석으로 변한 영역을 침범한 순간, 가장 선두에 있던 식물들이 있는 힘껏 고개를 쳐들며 그대로 덮쳐 내려왔다. 스스로 세상을 무너뜨린 후, 시종일관 찌푸려져 있던 마녀의 얼굴에 비로소 웃음꽃이 피었다. 마녀는 자신이 소환한 식물 군단이, 이제 곧 저 인간 놈들을 내리눌러 집어삼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지스 시스템(Aegis System)!” 그 순간 백한결이 양손을 활짝 펼쳤다. 좌우로 뻗은 두 손에서 눈부신 빛무리가 터지듯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아래를 주시하던 마녀의 눈이 들썩였다. “주문 지정, 되비침(Glance Back). 사용 보석, 애주라이트 화이트(Azurite White). 보석 증폭(Jewel Amplification)!” 그때 영창을 마친 김한별이 손에 쥔 보석을 하늘로 흩뿌리며 주문을 외친다. 점점이 반짝이는 가루들이 흘러나오는 빛무리에 스며들자, 빛은 삽시간에 정육각형의 필드를 겹겹이 형성하며 동료들을 감쌌다. “저까짓 방어막…!” ‘따위.’ 라고 이으려던 마녀가 급히 말을 삼켰다. 사방을 둘러싸 공격하던 식물이, 돌연 퍽 소리와 함께 일거에 터져나간 것이다. 뒤에서 들어온 식물이 바로 자리를 메우기는 했으나, 방어막을 공격하는 족족 줄기가 폭발하며 힘없이 쓰러진다. 그러한 광경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마치 분쇄기에 잘게 잘리는 종잇조각을 보는 듯했다. “반사 능력…?” 마녀는 뜻 모를 초조감에 입을 짓씹었다. 이윽고 여전히 아래를 향하는 손의 주변으로, 샛노란 전류를 튀기는 뇌전의 창이 서너 개 떠오른다. 그 순간이었다. “거스트 필드(Gust Field)!” 하승우가 또 한 번 양손을 지상에 내리꽂자, 방어막을 중심으로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불어온 돌풍은 순식간에 멀리멀리 퍼져나가, 지면 전체를 아우른다. 펄럭이는 로브를 붙잡으며 마녀는 의아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윈드 커터라면 그나마 이해라도 했을 텐데, 그냥 바람이 불어온다고? 해답은, 그 다음에 있었다. “프로미넌스(Prominence)!” 사라의 육성에 이어 거대한 불길이 하늘로 솟구쳤다. 치솟은 불길은 태양처럼 둥글게 모이더니 짙은 적색을 띤 홍염을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사라의 특기는 화(火) 계열 마법과 특수 능력 ‘강화 메모라이즈’의 조화. 마법 연쇄를 통해 폭발력을 비약적으로 증강시킬 수 있다. 말인즉. “익스플로전(Explosion)!” 쾅! 거센 폭음이 허공을 왕왕 울렸다. 그 소리에 잠깐 눈을 찌푸렸던 마녀가 반사적으로 아래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대로 낯빛이 딱딱히 굳어졌다. 폭발의 여파로 찢겨진 수십 아니 수백 개의 타오르는 조각이, 흡사 파이어 레인처럼 사방팔방으로 뿌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바람이 흐르는 지면에. 후르르르르르르르! 돌풍이 낙하하는 불의 조각을 힘차게 빨아들인 순간, 또 한 번의 거대한 굉음이 도처를 떠르르 울린다. 이내 바람 속에서 피어난 새로운 불길은 전 방향으로 길게 늘어붙기 시작하더니,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지상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렸다. 마치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식물들 사이를 이곳저곳 옮겨 붙고 있다. 불의 파도에 휩쓸린 식물들은 미친 듯이 꿈틀거리며 아우성치다가, 종래에는 한 줌의 재로 변해 바스러진다. 마녀는 눈을 부릅떴다. “하찮은 짓을…! 정말로 해보자는 거야?” 이를 악물며 불타오르는 대지를 내려다본다. 발그스름한 불길이 스며든 보랏빛 눈동자가 한층 짙어졌다. 아래를 향하던 손이 이번에는 사방을 휘저었다. “물을 뿌려라! 플로라!” 식물 군단은 마녀의 지시를 즉시 이행했다. 넝쿨이 한 차례 거세게 요동치더니 줄기 전체에서 물을 뿌리기 시작한다. 불의 돌풍은 여전히 거셌으나,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개체가 한꺼번에 분사한 만큼, 불길은 곧 서서히 잦아들 기미를 보였다. 이윽고 약간의 시간이 흘러 불은 완전히 진화됐다. 남은 것은 무참히 타버린 식물의 잔해와 시꺼멓게 그을린 흙뿐. 물론 방금 연쇄 공격에 상당한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아직 많은 수의 식물이 남아 있기는 했다. 살아남은 식물은 꿈틀꿈틀 전진을 재개해, 물에 젖어 축축한 지면을 미끄러지듯이 달렸다. 그러나 마녀는 과연 알고 있을까. 연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한 차례 폭풍이 불어 닥친 후, 정적이 흐르는 공간. “월령(月齡), 12월의 그믐달.” 문득, 정하연의 청아한 음성이 울렸다. 이어서 푸르스름한 빛으로 물든 나무 지팡이가 가볍게 땅을 친다. “프로즌 필드(Frozen Field)!” 우직, 우지지직! 쩌저저저저저저적! 둥글게, 또 둥글게. 지면이 딱딱히 얼어붙는다. 굳건히 서 있는 방어막을 중심으로, 얼음이 원반 형태로 번지듯이 넓적하게 벌어졌다. 흥건히 젖은 대지는 순식간에 엉겨 붙어 뭉쳤으며, 종래에는 딱딱한 고체로 응고화됐다. 물을 묻히고 있던 식물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을 맞이했다. 더 이상의 전진이 불가해짐은 물론, 지면에서 줄기를 타고 올라온 얼음에 의해 순식간에 얼어붙은 것이다. 그렇게 얼음으로 뒤덮인 세상을 확인한 순간, 공중에 떠오른 마녀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하…. 하하…. 감히…. 잘도….” 멍하니 주변을 둘러본 마녀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마법을 걷어낼 때마다, 마치 자신이 어떻게 할지 알고 있다는 듯 새로운 대응이 나오는데, 여간 짜증 나지 않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현 상황이 믿어지지가 않기도 했다. 단순히 촉수 공격만 할 수 있는 식물들이 아니었다. 어떻게 재배하느냐에 따라, 침으로 마비시키거나 가루로 환각을 보게 하는 등 하나하나가 병기 수준의 살상력을 갖추고 있다. 그런 만큼 정말 끔찍이도 아끼며 키워왔다. 그런데 몇 달을 거쳐 준비해온 식물 군단이, 이렇게나 허무하게…. “인정 못 해!” 마녀는 발악하듯이 외쳤다. 마력을 전문으로 다루는 존재는 총 2 종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세상에 어긋나지 않는, 일정한 법칙을 따라 마력을 구사하는 마법사(魔法師). 설령 법칙을 거스르는 한이 있더라도, 강력한 마도를 추구하는 마도사(魔度師). 그러나 마녀(魔女)는 이 두 종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존재다. 굳이 법칙을 따르려고 하지 않고, 그렇다고 자신만의 마도를 추구하는 입장도 아니다. 오롯이 마법의 근원을 파헤치고 탐구하는, 마법 그 자체의 존재. 마법사를 멍청이라 비웃고, 마도사를 한심하게 바라본다. 실제로 현재 아스트랄 차원을 관장하는 마녀의 실력은, 도시와 합일한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보다 한 수 더 앞서는 수준. 그렇기에,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 못 해!” 눈동자가 전의에 불타오른다. 이윽고 공중에 떠 있던 마녀가 서서히 지상으로 안착했다. 맨발이 지상에 닿자 시릴 듯한 한기가 발바닥을 투과한다. “그래…. 누가 이기는지 한 번 해보자고.” 마녀는 몸을 떨면서도 빗자루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렇게나 마법 전투를 원한다면, 응해주겠어.” 으르렁거리듯 뱉은 마녀는 곧바로 주문을 외웠다. “디프로스트(defrost)!” 부스스, 딱딱히 굳은 촉수 식물이 힘겹게 고개를 들더니 줄기에 붙은 얼음이 서서히 녹아 내린다. “앱소브(absorb)! 다시 일어나라, 플로라!” 연달아 주문이 터져 나왔다. 해동된 얼음은 액체로 변해 흘렀고, 식물은 흡사 걸신들린 것처럼 흐르는 물을 빨아들였다. 잠깐 멈췄던 성장이 도로 재개된다. 이내 전보다 더 크게, 서서히 몸집을 불리는 식물들을 보며 마녀는 지그시 앞을 바라봤다. 그 순간이었다. 퍽. 찰나의 순간, 어디선가 날라온 진득한 액체가 뽀얀 뺨을 적셨다. 한순간 마녀의 표정이 망연해졌다. 1초 후, 마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볼을 쓰다듬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내리자, 손바닥에 묻은 초록빛 체액이 보였다. 마녀는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내 본능에 따라 눈을 돌리니, 바로 옆 줄기 채로 터져 쓰러진 거대한 촉수 식물이 보인다. 쓰러진 건 이 하나만이 아니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어느 정도 성장을 마친 식물이 갑작스럽게 퍽퍽 터지고 있다. 절대로 의도한 일이 아니었다.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들어오자, 마녀는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새 입은 자신도 모르게 벌어지는 중이었다. “이, 이게…. 어, 어떻게….” 잠시 후. 비로소 방어막이 해제되며 15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녀의 시선은 절로 정면을 향했다. 그곳에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눈을 한 여인이 오연히 서 있었다. 제갈 해솔이었다. 그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마녀의 몸이 흠칫 움츠러들었다. “너….”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눈빛에 제갈 해솔이 빙긋 웃었다. “아. 기껏 모두가 노력했는데, 그대로 놔두면 귀찮아질 것 같아서요. 그래서 그쪽이 구사하는 마법을 분석하고, 똑같이 따라 했죠. 그러니까~. 성분 변화라고나 할까?” 제갈 해솔의 말이 이어지자, 마녀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마, 말도 안 돼! 따라 했다고? 이 소산 마법을?” “응? 소산 마법?” “마법의 근원에서도 가장 나락에 있는…! 나도 꺼지지 않는 지혜의 빛을 얻고, 말년에서야 겨우 얻은 경지인데…!” “에~. 뭐 확실히 쉽지는 않더라고요. 좀 힘들기는 했어요. 아무튼, 좋은 마법 가르쳐줘서 고마워요.” 어깨를 으쓱인 제갈 해솔은 한숨을 흘리며 김수현에게 몸을 기댔다. 마녀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가 떠보았으나,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야심 차게 소환한 식물 군단 플로라는, 하나도 남김없이 잔해만 남은 상태였다. 잠시 후. 마녀의 눈동자에서, 마침내 끊임없이 이어지던 투지의 불길이 꺼졌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상황을 맞이해, 정신이 텅 비어버린 것이다. 결국 마녀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 모습을 확인한 김수현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천천히 거리를 좁히면서 설레설레 머리를 젓는다. “정말이지…. 이러면 약간이나마 긴장한 게 우습게 느껴지잖아.” “오, 오지 마!” 텅 빈 마녀의 눈동자에 공포가 찾아 들었다. 마치 아이처럼 울먹거리며 발을 구른다. 엉덩이를 질질 끌어 물러나며 어떻게든 빗자루를 들었지만, 기껏 발사한 마법은 김수현에게 닿지도 못하고 소멸해버렸다. “확실히 의도는 좋았다고 생각해. 마녀와 악마의 조합. 그런데….” “괴, 괴물! 오지 마!” “그렇게나 서로 꿍짝이 안 맞아서야. 그럼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지. 안 그래? 플루톤?” “프, 플루톤? 도와줘! 플루톤! 도와달라고! 플루토오오온!” 아까 계속 도망을 종용하던 플루톤을 무시한 건 생각도 안 나는지, 마녀는 울부짖듯이 플루톤을 불렀다. 그러나 내면의 울림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자, 그럼….” “오지 마아아아!” 그 순간 김수현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이죽거리는 얼굴로 차분히 손을 뻗었다. “우선 받을 거는 받고.” 그때였다. “아? 아!” 후방으로 쏠려 있던 마녀의 몸이 돌연히 앞으로 크게 쏠렸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으나, 손에 쥔 것을 놓음으로써 간신히 끌려가지는 않았다. 얼른 고개를 든 마녀는 빙그르르 날아간 자신의 빗자루가 김수현의 손에 잡히는 걸 볼 수 있었다. 허공섭물의 묘리로 빗자루를 강제로 빼앗은 것이다. “그, 그건! 돌려줘!” “싫어.” 가볍게 거절한 김수현이 또다시 손을 뻗자, 이번에는 머리에 쓰인 모자가 벗겨졌다. 마녀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짚었으나 어느새 모자는 휙 날아가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김수현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한 번 더 손을 놀리니, 약간 끼는 것 같던 로브마저도 강제로 벗겨지고 말았다. “꺄아아악!” 강제로 머리를 통과해 허공으로 솟구친 로브가, 결국 김수현의 손에 안착했다. 완전한 무장 해제. 그 후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름다운 순백의 나신을 드러낸 마녀는, 가슴과 성기를 가리며 필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수치스러운 걸까. 진한 보랏빛을 띠던 눈동자가 이지를 상실한 듯 망연하게 변하고,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다.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며 이마에는 띵한 현기증이 일었다. …아니. 이제는 그냥 어떻게 돼도 좋다는 생각이 엄습한다. 그렇게 마녀는 전투 의지를 완전하게 상실하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힘내라! 마(법) (소)녀! 마녀 : 그래서, 정말로 이대로 끝나는 건 아니지? 로유진 : ㅇㅇ. 걱정 ㄴㄴ. 마녀 : 정말이지? 로유진 : 그럼. 한소영도 남고 이유정도 남았는데. 마녀 : 후유, 다행…. 뭐? 로유진 : ㅌㅌ. 0747 / 0933 ---------------------------------------------- 근원(根源). 뺏은 장비를 대충 던져두고 쳐다보자, 가지런히 무릎을 꿇은 마녀가 보인다. 살짝 숙인 얼굴은 하염없이 땅을 응시하고 있다. 꼭 이지를 상실한 사람처럼 반응이 없는 게,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듯했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전의를 잃은 건 어디까지나 마녀일 뿐이니까. 그 증거로 마녀가 무릎을 꿇은 지면에서 검은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킬.” 그때, 마녀의 눈빛이 갑작스럽게 일변했다. 이윽고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더니, 시꺼멓게 변색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한다. 이제는 숫제 전신에서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올 정도였다. 역시나 내 생각이 맞았다. 악마 14 군주인 플루톤이 깨어난 것이다. “하…. 빌어먹을 마녀 년…. 이래서야, 참.” 길게 한숨을 흘린 마녀, 아니 플루톤은 힘껏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당당히 치부를 드러내는 게, 태도가 훨씬 여유로워졌다. 애초 기습이 통할 상대가 아닌지라, 나는 무검을 다잡으며 천천히 거리를 재기 시작했다. 동료들도 심상찮은 마기의 흐름을 느꼈는지 이리저리 움직이는 기척이 감지됐다. 이윽고 팔을 내린 플루톤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이, 김수현. 하나만 물어보자. 도대체 어떻게 여기로 올 생각을 한 거지?” “내 이름을 알고 있나?” “킬, 그럼 설마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그렇게나 깽판을 쳐놓고서?” “…운이 좋았지. 소년의 상태도 이상했고 경비병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혹여 정찰을 온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야.” 적당히 대답하자 플루톤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으나 자꾸 쩝쩝 입맛을 다시는 게, 무언가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은 듯하다. 뭐, 저놈 기분까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무검을 상단으로 세워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냥 얌전히 죽어주면 고맙겠는데…. 그래 줄 리는 없겠지?” “그냥 얌전히 도망치게 해주면 고맙겠는데…. 그래 줄 리는 없겠지?” 플루톤은 피식 웃더니 얄밉게 이죽거렸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아니? 무슨 농담을 해도. 마몬도 못 이긴 놈을 내가 어떻게 이기냐? 당연히 지겠지.” “뭐?” “하지만 좀 봐달라고. 그래도 명색이 악마 14 군주인데, 승산이 없다고 그냥 곱게 죽어줄 수는 없잖아?” “…….” “너무 서운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킬! 네 덕분에, 나는 몇 달 동안 준비한 걸 고스란히 날리게 생겼으니까. 아니. 이미 날린 거나 다름없지?” 그렇게 말한 플루톤은 마치 항복이라도 하듯 순순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거기다 어서 자신의 목을 치라는 듯 턱을 까닥까닥 움직이기까지. 그러자 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함정인가? 아니면?’ 머릿속으로 무수한 고민이 스쳤다. 이대로 돌격해 목을 치면 끝날 것 같은데, 무언가 이상하다. 악마 놈들이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놈들이던가? 아니, 단언컨대 절대로 아니다. 무릇 악마란, 설령 비참하게 죽을지언정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악독함의 대명사가 아니던가. 설마 자폭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아.” 문득, 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자폭.’ 그래, 만약에 죽어도 상관이 없다면? 그러니까 죽어도 무조건 발동되는 어떠한 상황을 만들어놓았다면? “흥. 알아차렸나? 그래도 상관없지만. 엇차!” 그렇게 생각한 찰나, 플루톤이 돌연 힘차게 위로 뛰었다. 날개를 활짝 펼치는 걸로 보아 하늘로 활공할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플루톤은 하늘로 올라가지도 않았으나 땅으로 내려오지도 않았다. 마치 홀드 마법에 걸린 것처럼 온몸이 딱딱하게 굳더니, 허공에 정착이라도 한 듯 우뚝 정지했다. “킬킬킬킬!” 이윽고 플루톤은 갑자기 힘차게 웃어 젖히며 양팔을 좌우로 벌렸다. “아까 네가 그랬지? 이러느니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 “그런데 말이야. 이런 생각은 안 해봤나? 내가 그걸 감수하고, 이런 거지 같은 공존을 선택한 이유를 말이야!” “무….” 그때였다. 쿵! 돌연히 하늘에서 빛의 기둥이 하강했다. 기둥은 허공에 묶인 듯한 플루톤을 그대로 덮쳤고, 사방으로 터지듯이 흐르며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었다. 시야가 멍해진다. 우우우웅! 이윽고 힘찬 공명이 고막을 떠르르 울리는 동시, 반사적으로 안력을 돋웠다. 그러자 플루톤의 몸에서 돌연 붉디붉은 마법 진 하나가 튀어나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아니, 하나가 아니었다. - 저건…! 화정의 놀란 음성. 하나, 둘, 셋, 넷…. 마법 진은 계속해서 튀어나와 플루톤의 주변을 빙그르르 돌기 시작했다. 예전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에서 마볼로가 일으켰던 수백의 마법 진과 흡사하다. 그러나 큰 차이가 있었다. 크기도 각양각색이었지만, 흘러 나온 붉은 마법 진은 천천히 공전을 멈추면서 하부 주변으로 다닥다닥 자리를 잡는다. 그렇게 하반신이 마법 진에 에워싸였을 즈음, 축 늘어져 있던 상반신이 서서히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응시하는 크게 떠진 눈매와 가라앉은 눈동자. 아까처럼 전의를 상실한 눈이 아니다. 그렇다고 투지에 불타오르는 눈도 아니었다. 오롯이 무심하면서 편안하다. 그러나 검붉은 색의 눈동자와 마주하자 뜻 모를 오한이 엄습했다. 이윽고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살그머니 열린다. - ‘아스트랄 차원’ 개방. 접근자…. 필리아 트리토리스. - 확인…. 액셉트. 꽃의 마녀, 필리아 트리토리스의 근원으로의 접근을 허가합니다. 허공을 고요히 울리는 음성. 마녀의 목소리도, 플루톤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처음 들어보는 깊고 웅혼한 음성이었다. 화아아악! 웅웅웅웅웅웅웅웅! 이어서 소환된 마법 진이 일거에 빛을 뿜어냈고, 시야가 또 한 번 새하얗게 물들었다. 심히 펄럭거리는 도복을 붙잡고 있자, 누군가 나를 힘껏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나는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나 또한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 필리아 트리토리스, 소멸 확인. - 플루톤, 소멸 확인. 그러는 동안에도 허공의 음성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 조건이 달성됐습니다. 제 1 결정권자의 선택권 상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므로 제 2 결정권자인 플루톤으로 사용 권한을 인계합니다. - 잔존한 플루톤의 염원에 따라, 아스트랄 차원에 침입한 15 개체의 격퇴를 개시. 전투 개시 전 요구 사항으로, 전장 분석을 시작합니다. 격퇴 개시? 전장 분석? - 벗어나! 무언가 소름이 돋으려는 순간, 화정이 급하게 외쳤다. - 전장 분석 완료. 분석 결과, 가장 위험 분자인 사용자 김수현의 처리를 최우선시합니다. 그러나 채 벗어나기도 전, 하부를 가린 마법 진이 우수수 빛을 발했다. - 영역 선포. 투쾅! 영역 선포라는 말을 들은 순간, 마법 진에서 쏟아진 반투명한 장막이 사방에 내리 꽂혔다. “……!” 한순간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오직 색깔만 다를 뿐이지, 내가 사용하는 능력과 완전히 똑같았기 때문이다. 허공을 쳐다보자, 마녀는 몸을 45도쯤 구부린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된 것 같다. 황급히 달려온 동료들이 무어라 외치며 장막을 두들겼으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 사용자 김수현과 14 개체를 구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우선은, 지체 않고 이형환위를 사용했다. “김수현!” “오, 오라버니!” 단숨에 밖으로 벗어나자 가까이 다가왔던 동료들이 삽시간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마녀, 아니 더 이상 마녀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쨌든 저것은 갑자기 말을 멈췄고, 이내 실 끊긴 인형처럼 천천히 몸을 기울여 나를 쳐다봤다. - …정정. 구분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나는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후, 빠르게 속으로 말을 걸었다. ‘화정, 저건 어떻게 된 거지?’ - …내가 여기 처음 들어왔을 때 했던 말 기억해? 화정은 약간 가라앉은 음성으로 화답했다. 나는 신속히 기억을 더듬었다. ‘마법의 근원. 초 정보 집합체. 그러니까 금주라고 했었나?’ - 그래, 금지된 주문. 저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법칙과 정보를 아우르는, ‘마법의 근원’. 즉 이 아스트랄 차원의 의식을 강제로 자신에게 끌어당긴 거야. ‘미친, 그게 가능해?’ - 당연히 안 되지. 애초 금주라고 했잖아. 근원에 다다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존재들조차 일부러 금지한 주문이야. 그리고 저 마녀는 그 자격도 없어. ‘꺼지지 않는 지혜의 빛’은 살짝 엿보는 수준밖에 안 돼. ‘그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저 마녀가…!’ - …제물을 바쳤을 거야. 아마도. 화정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나는 잠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제물을 바쳤다고? - 그래. ‘하늘을 굽어보는 마음의 눈’을 가진 존재조차도, 까딱 잘못하면 먹혀버리는 게 바로 ‘마법의 근원’이야. 그런데 고작 ‘꺼지지 않는 지혜의 빛’이 저렇게 버틴다는 소리는, 자신과 그 악마 놈까지 제물로 바쳤다는 소리겠지. 아니. 주체가 누구든, 말 그대로 시작부터 죽음을 각오한 거야. 화정의 말이 길게 이어졌다. 나는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화정의 말을 완전히 이해한 건 아니나, 적어도 플루톤이 자폭을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이뤘음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어쨌든 중요한 건, 우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 하여 가장 화급한 문제를 물었으나, 기다려도 화정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다. 잠든 게 아니라, 내 질문에 적절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다. 그렇다는 소리는…. 나 또한 섣불리 달려들 수 없는 상대라는 방증이다. “쯧.” 갑자기 일이 꼬이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일 자체는 잘 풀렸다. 그러나 이제는 달성의 문제가 아닌, 생사의 문제가 새롭게 튀어나왔다. 혀를 차며 시선을 올리자, 어느새 검게 물든 하늘과 아래로 붉은 마법 진에 휩싸인 마녀가 보였다. 여전히 어떤 감정도, 어떤 표정도 읽히지 않는다. 그냥, 더는 인간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뿐. - …확인 완료. 분석을 종료합니다. 이형환위가 있는 이상, 사용자 김수현을 따로 처리하는 건 힘들다고 판단. - 최우선 방법을 종료하고 차선책을 실행합니다. - 마녀의 능력 ‘애니메이트 플로라(Animate Flora)’와 악마 마법 ‘사령(死靈) 소환’을 조합해 새로운 마법을 창조합니다. - 애니메이트 미스트(Animate Mist). 음성이 끝난 찰나, 도처에 널린 식물의 잔해에서 자욱한 안개가 뭉클뭉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솟구친 안개는 주변을 유유히 감돌며 서로와 몸을 합쳤다. 그러자 그저 자욱하게 깔렸다는 사실만 인지할 뿐, 도저히 수를 가늠할 수 없다. 아니. 애초 어떤 형태의 마법인지 당최 감이 잡히지 않는다. ‘어떻게….’ 초조해지는 속을 추스르며, 나는 필사적으로 생각을 거듭했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백한결과 김한별의 조합이 언제까지 버텨줄지도 모르거니와, 하승우, 사라, 정하연은 마녀와의 일전으로 대부분의 마력을 쏟아 부었다. 거기다 제갈 해솔도 ‘소산 마법’이라는걸 따라 하느라 상당히 지친 상태. 결국 사제 두 명을 제외하면, 현재 최상의 상태로 가용할 수 있는 인원은 7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과연 7명으로 이 상황을 버틸 수 있을까? ‘안 돼. 어디서 분명 구멍이 생길 거야.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거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였다. “흐응~. 이제 밥값을 할 때가 왔나?” 들려오는 음성에 번뜩 정신을 차리니, 손에 두툼한 카드 뭉치를 쥔 채, 목을 좌우로 꺾으며 걸어 나오는 선율이 보인다. “머셔너리 로드.” 이어서 누군가 내 어깨를 살며시 짚었다. 흘끗 돌아보자, 바로 옆에서 나를 빤히 응시하는 여인이 눈에 들어온다. 한소영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네요.” 그렇게 말한 한소영은 살그머니 고개를 젖히며 말을 이었다. “혹시 저희가 시간을 끌면, 저것을 처리할 수 있으신가요?” “…예?”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이 안개를 상대로 시간을 끌어주겠다고? 준비도 덜 됐고, 대응 방법도 모르는데? “가능하시겠습니까?” 곧바로 되물었으나, 한소영은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다. 그냥 오연히 고개를 돌려 나를 지나치더니, 주변을 쓱 훑어보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간다. “이스탄텔 로우…!” 펄럭! 대답은, 로브로 되돌아왔다. 가볍게 로브를 벗어 젖힌 한소영은 본래의 경장갑과 망토를 걸친 차림을 드러냈고,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공중의 마녀를 응시했다가, 느릿하게 오른팔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로드.” 왜냐면, 그런 한소영의 얼굴에서 일말의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이윽고. “라운드 하우스(Round House).” 어두운 하늘을 향하는 가녀린 손등에서, 찬연한 보랏빛이 분사됐다. ============================ 작품 후기 ============================ 아니, 독자님들! 왜 벌써 마녀가 죽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설마 저를 그렇게 잔인한 사람으로 보셨는지요. 아닙니다. 저는 착한 사람이에요. 아, 물론 인정은 합니다. 확실히, 그동안 여러 캐릭터가 사망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겨우 유현아, 차승현, 반다희, 미샤 예시카, 마탄의 사수, 안소연, 백서연…. 어…. 세어보니 좀 많네요. 흠흠. 아무튼, 이번에는 하승우 때와 비슷한 수준의 반전을 마련해놨습니다. 이제 종반으로 접어들었으니, 결과를 기대해주세요. :) 0748 / 0933 ---------------------------------------------- 근원(根源). 검푸른 색으로 물든 하늘, 그리고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한소영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화스트 페이스(Fast Face).” 파직, 가열찬 정전기가 손등 주변으로 튀기는 동시에, 고요히 감겨 있던 두 눈이 천천히 떠진다. 드러난 짙은 동공 너머에는, 진한 보랏빛을 발하는 무언가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다. 그것은 평소와 같은 흑 수정이 아니다. 각 눈동자 속에는 둥그런 마법 진이 요요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우웅! 이윽고 깔끔한 공명 소리에 이어, 한소영의 눈에서 떠오른 두 개의 마법 진이 폭사하듯 외부로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 진은 순식간에 수십 배 이상으로 크기를 확장했고, 서서히 하나로 겹쳐지며 빙그르르 돌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천천히, 그러나 점차 빠르게. 한소영의 정수리를 중심으로 회전하던 마법 진은, 이윽고 차분히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소영은 알고 있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느끼고 있었다. 바로 ‘초감각’으로. 현재 어두운 하늘 아래 홀로 빛나는 저것은, 한소영도 처음 인지하는 존재였다. 물론 ‘제 3의 눈’이 읽지 못하는 것을, 초감각이라고 정체를 밝힐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초감각의 직감이, 마법사로서의 본능이 외치고 있다. 저 ‘근원’은 절대로 가까이하지 말라고. 너는, 아니 자신은 자격이 없다고. 호기심에 끌려 어설프게 다가가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거라고. 흡사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사를 한꺼번에 상대하는 느낌이었지만…. 그러나 포기한 건 아니다. 한소영의 사전에 포기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해야 할 일은 차고도 넘친다. 거기다 혼자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우연이든 기적이든 간에, 어떻게 상황을 만들 수만 있다면. 그 상황으로부터 역전의 찬스를 이끌어낼 수 있는 사용자가 동료 중에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게 생각한 한소영은 아주 약간 자세를 낮췄다. 마지막 삼 단계 주문을 외우기 전 최종 준비 자세. 한소영의 특수 능력 ‘칵 키드 피스톨(Cocked Pistol) - 여왕의 군대(Queen’s Army)’의 발동 현상은 총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생전에 영웅이었으며, 사후 무지개의 여신 ‘플라비우스’의 친위대로 거듭난 전투 처녀 ‘아르쿠스 발키리’들을 소환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칵 키드(Coked)….” 그때였다. 단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체내에 잠재된 마력이 갑작스럽게 증가했다. 찰나의 순간, 한소영의 마력은 방대하면서 촘촘하게 이어진 회로를 폭발적으로 메우는 것도 모자라, 미처 감당치 못한 몸 밖으로 흘러나오며 주변을 밝게 비췄다. “…피스톨(Pistol)!” 이윽고 비로소 최종 주문을 외친 한소영은, 거의 동시에 땅을 힘껏 박차 뛰어올랐다. 그러자 허공에 소환된 보랏빛 마법 진에 정수리부터 가볍게 통과한다. 그 순간이었다. 파지지지지지지직! 한순간, 눈부실 정도의 엄청난 방전 현상이 발생했다. 한소영의 몸이 중앙을 통과하는 순간, 겹쳐진 마법 진이 갑자기 빛나며 폭발한 것이다. 진의 회전에 순간적으로 가속이 붙어 폭풍처럼 휘돌기 시작하고, 사방으로 찬란한 스파크가 뻗어 나가며 주변의 공간을 이지러트린다. 잠시 후, 환하게 빛나는 마법 진 중앙으로, 완전히 변화한 한소영의 모습이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한다. 문득 마법 진 중심으로 감미로우면서 향기로운 냄새가 흘러나온다. 어느새 한소영은, 약간 처연하게 느껴지는 자태로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눈은 여전히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짙은 보랏빛이었고, 마법 진의 발광(發光)으로 살결은 더욱 희어 보였다. 새로이 생성된 마력의 갑옷은 찬란하게 빛나며 주변을 환히 비췄고, 곳곳에 형이상학적인 마력의 문양이 아로새겨져 있다. 저 새롭게 태어난 한소영의 형상을 과연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전투 처녀? 아니면 여신? 이어서, 마력 갑옷만큼이나 알 수 없는 무기가 드러난다. 아니. 무기의 형상은 완연히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주변 공간을 찢어버리는 균열과 심한 방전 현상으로 간신히 형체만 드러났을 뿐. 아무튼, 분명한 건 한소영의 오른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다는 것.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로 마력이 거칠게 날뛰고 있다. 공간을 일그러지게 만들 정도로 강대하고 가공한 마력이 한소영의 오른손에 소환된 것이다. ‘근원’도 이건 가볍게 보지 못한 걸까. 시종일관 김수현을 쫓던 무심한 시선이 처음으로 한소영을 향했다. 그러나 정작 상대는 근원을 보고 있지 않았다. 공중으로 활공하는 한소영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지상에서 슬금슬금 밀려오는 연기의 무리를 향해 있는 힘껏 오른팔을 휘둘렀다. 그리고, 꽈꽝! 빛이 잠깐 번쩍였다가 사라진 찰나, 엄청난 굉음을 동반한 마력이 허공을 가르고 내려가 지면을 부쉈다. 그 누구도 보지 못한 쾌속의 공격. 그러나, 결과는 명명백백(明明白白)히 드러났다. 어느새 지상에는 직경 5 미터 가량의 깊숙한 균열이 파인 상태였고, 여파를 이기지 못한 흙먼지가 휘말려 올라오는 중이다. 연기? 당연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애초 존재했던 것 자체가 거짓말이 아닐까 의심이 갈 만큼 터럭만치도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위력! 어느새 모두가 입을 벌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공중의 형상은 지금이 전투 상황임을 잊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웠고, 또한 강력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자태와는 다르게, 이어지는 한소영의 행동은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번쩍! 또 한 번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꽈앙! 추락하듯이 내리 꽂히는 보라색 마력은 마치 융단폭격처럼 지상을 두들기고 파헤쳤다. 흡사 천상에서 강림한 여신이 지상의 미물을 단죄하는 듯한 풍경. 그 광경은 눈을 떼지 못할 만큼 고혹적이고, 치가 떨릴 만큼 강렬하다. 무시무시한 마력이 휩쓸고 지나간 지점에는, 연기는 물론 씨 하나도 남지 않고 모조리 소멸한다. 그리하여 한소영의 오른팔이 휘둘러질 때마다, 애꿎은 땅은 섬광에 휩싸이며 연기와 함께 사라져 갔다. 어느새 자욱이 흐르던 연기는 온데간데없다. 마녀의 주술과 악마 마법의 조합으로 탄생한 ‘애니메이트 미스트’가 너무나 손쉽게 스러져간다. 그러자 한소영을 지그시 응시하던 ‘근원’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칵 키드 피스톨, 여왕의 군대’의 분석을 마쳤습니다. - 무지개의 여신 ‘플라비우스’의 강림과 마력 갑옷 ‘발키리 스커트’, 그리고 ‘멸살(滅殺)’의 권능을 품은 신기 ‘롱기누스의 창(Spear of Longinus)’의 소환을 확인…! 화륵, 화르르륵! 하지만 근원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어디선가 수십 개의 열화검이 사방을 에워싸며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대응하기는 했으나, 열화검은 삽시간에 일어난 수백의 방어 마법 진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기며 들어왔고, 근원의 몸체는 사정없이 흔들거리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 경고, 경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격입니다. 분석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됩니다. - 손상률 29%…! 자력 재생…. 실패. 마력 재생…. 실패. 아스트랄 차원을 끌어와 강제 복구를 시도합니다. 갑자기 짓쳐 들어온 정체 불명의 공격. 근원은 서둘러 복구를 시도하려고 했으나, 그것조차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돌연 홀연히 솟구친 한 줄기 섬광이 하늘을 밝히더니, 구름 일대가 환하게 변하며 섬광으로 이루어진 화살 수십 개를 떨어트린다. - ‘황혼의 무녀, 축문’의 분석을 마쳤습니다. - 손상률 33%…! 허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벌을 내리소서!” 안솔의 외침과 동시, 하늘에서 허연 벼락 서너 줄기가 근원으로 추락하듯이 내리 꽂혔다. 딱히 말한 건 아니었으나, 서로 본능적으로 교감한 것이다. 한소영이 홀로 연기 무리를 상대하는 동안, 남은 모두가 저 이상한 존재에게 화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 ‘광휘의 사제, 천벌’의 분석을 마쳤습니다. - 손상률 38%…! 물론 근원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 몸체 보호를 목적으로 방어 마법 진을 최우선적으로 재가동합니다. - 샛별 찌르기. 또 한 번 마법 진이 우수수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근원이 지상으로 눈부신 광선을 발출했다. 샛별 찌르기. 약간 이상한 이름이기는 하나, 근원에서 튀어나온 마법은 어느 것 하나 만만히 볼 수 없다. 보이는 그대로 표현해보면 직경 50 센티미터의 빛의 광선과도 같다. 여하튼 근원은 처음으로 김수현도 한소영도 아닌, 다른 13명을 공격 대상으로 잡았다. 어떻게 보면 합리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이윽고 비스듬히 하강하는 빛의 광선이 지상을 고스란히 덮치기 직전, 돌연 우윳빛을 띤 방어막이 둥글게 피어올라 광선과 맞부딪쳤다. 결과적으로, 빛의 광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무언가에 반사 당한 것처럼 강제로 방향이 비틀어지더니, 결국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하늘로 치솟고 말았다. 백한결과 김한별이 젖 먹던 힘까지 뽑아내 간신히 궤도를 비트는 데 성공한 것이다. 고오오오오오오오…. 근원의 눈동자는 여전히 무심하다. - ‘신의 방패, 이지스 시스템’의 분석을 마쳤습니다. - 이지스 시스템을 역으로 연산합니다…. 성공. 해당 능력에 최적화된 파훼 마법을 검색합니다…. 성공. - 연산 및 검색 결과에 의거, 대(對) 이지스 시스템용 마법을 개방합니다. - 하얀 용의 숨결. 담담히 말을 마친 근원은 또 하나의 거대한 광선을 발출했다. 아니. 이번에는 직경이 못해도 1 미터는 넘어 보이는 게, 거의 기둥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이건 본능적으로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백한결과 김한별의 눈에 암담한 빛이 스친다. 그 순간, 빛의 기둥이 하강하는 방향으로 날개를 지닌 누군가가 불쑥 끼어들었다. 쿠웅! 거대한 힘과 힘이 격돌하는 충돌음. 그러나 근원이 새롭게 이루어낸 공격은 이번에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기세 좋게 뿜어진 빛의 기둥은, 붉은 빛이 흐르는 장막에 가로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진은커녕, 하릴없이 물을 퍼트리는 분수대처럼 사방으로 빛무리를 흩트린다. “미친….” 잔뜩 찡그려진 얼굴에서 나직한 욕지기가 흘러나온다. 그랬다. 공격을 막아낸 장본인은, 누구도 아닌 김수현이었다. 하얀 용의 숨결은, 확실히 극한을 넘은 김수현의 마법 저항 능력조차 웃도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김수현의 방어 수단은 마법 저항 능력만 있는 게 아니다. 항마력이 돌파된 찰나 ‘게헨나의 보호 요새’가 전개된 것이다. 아무리 모든 정보와 법칙을 망라하는 ‘마법의 근원’이라도, 지옥 대공 앞에서는 갓난쟁이에 불과하다. 애초 게헨나가 옆에 있었다면, 10초가 지나기도 전에 차원 전체가 깡그리 작살났을 정도. - 정체를 알 수 없는 방어 능력입니다. 분석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됩니다. - 분석 실패. - 단, 전설상으로만 존재하는 ‘하늘 요새’와 비슷한 수준의 방어력을 지녔을 거라 추정합니다. - 만일 이 가설이 맞는 경우, 현재는 어떠한 수단으로도 사용자 김수현의 방어를 뚫을 수 없습니다. “화정!” 그 순간 근원의 음성과 김수현의 목소리가 겹쳤다. 그러자 또다시 수십 개의 열화검이 김수현의 주변으로 생성되고, 손짓 한 번에 근원을 향해 일제히 치달린다. 그 게헨나조차도 깜짝 놀라게 만든 열화검은, 현재 ‘염화(炎化)’ 능력을 제외하면 김수현이 지닌 최고의 절기라고 할 수 있는 어빌리티다. 물론 반대급부로 그만한 단점도 존재한다. 체력이 오른 이후 훨씬 나아지기는 했으나, 적잖은 체력의 소모는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현재 김수현의 체력은 안개의 숲을 통과한 이래로 지속해서 하락한 상태. 얼굴에 그늘진 피로감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열화검의 고집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저 무지막지한 방어진을 파괴하려면 화정의 힘은 물론, 연속적인 타격이 필요한데, 열화검만큼 제격인 능력이 없었으니까. 화륵, 화르르륵! 쏘아진 수십 발의 일격은 곧 붉은 진을 가열차게 두드렸다. 뚫리는 족족 새로이 생성된 마법 진이 자리를 메우기는 했으나, 열화검은 그 이상의 속도로 신속하게 녹여버리고 있었다. 종래에는 겹겹에 에워싸던 마법 진이 마치 펀칭기에 뚫린 것처럼 곳곳에 구멍이 뚫리고, 충격의 여파로 마녀의 가녀린 몸이 바람에 휩쓸리는 낙엽처럼 사정없이 흔들린다. - 경고, 경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격입니다! - 손상률이 50%를 넘었습니다! - 재생, 복구에 실패합니다! - 몸체 보호를 목적으로 방어 마법 진을 최우선적으로 재가동…. 그 순간. 푹! 구멍 난 마법 진 사이로, 보랏빛 전류를 튀기는 날카로운 것이 깊숙하게 파고들어 와, 근원의 등을 세차게 꿰뚫었다. 이내 그 무언가가 복부를 삐죽이 뚫고 나오는 동시에, 마녀의 등이 구부러진 활대처럼 휘었다. 흘끗 시선을 돌린 김수현은 오른팔을 힘차게 내뻗은, 투척 자세를 한 한소영을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마녀의 몸은 잠깐 실 끊긴 인형처럼 거슬리게 움직이더니, 결국 고개를 툭 떨어트렸다. - 롱기누스의 창에 의한 관통을 확인…. 치명상으로 판단합니다. - 손상률 73%…. 이어서, 마녀의 눈동자에서 새어 나오던 빛이 툭 꺼졌다. ============================ 작품 후기 ============================ 아, 어제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네요. 조아라의 많은 분들도 만났고, 아카네이아 작가 님도 만나 뵈었고요. 정말로 인상이 선하고 좋으셔서 즐겁고 편안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최강 동안 강xx 님의 당일치기 여행(?)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우선 오늘 업데이트 분은 올렸고, 말씀드렸던 대로 어제 올리지 못한 내용은 오늘 추가로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바로 업데이트하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고요, 오늘 중으로는 확실하게 업데이트하겠습니다. 그럼 독자 님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 0749 / 0933 ---------------------------------------------- 핏물 속에서 피어나는 꽃(2). ‘마법의 근원’의 몸이 축 늘어졌다. 폭풍처럼 이어지던 전투가 끝나고, 아니 아직 끝난 지는 알 수 없으나. 여하튼 상황은 잠시 소강 상태를 맞이했다. 이윽고 날개를 접은 김수현과 변신을 해제한 한소영이 동시에 지상으로 안착했다. “헉, 헉!” “후우, 후우….” 착지한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숨을 거칠게 몰아 쉬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강력한 힘에는 그만한 제한이 걸려 있기 마련이니까. 김수현은 체력이 하락한 상태서 연속해서 무리해버렸고, 한소영의 변화도 상당한 체력 소모를 요구하는 능력이다. 특히나 김수현의 경우는 조금 심각하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체력의 소모는 물론, 아까 근원의 ‘하얀 용의 숨결’을 막아냄으로써 만만치 않은 마력을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능력들을 바탕으로 근원을 그로기 상태까지 밀어붙인 건 사실이나…. 문득, 김수현의 뇌리로 ‘게헨나의 보호 요새’를 건네 받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 당시 게헨나는 구슬을 건네주면서 딱 하나 신신당부한 게 있다. 바로 언제나 남은 마력의 양을 계산하고 사용하라는 것. 김수현은 현재 그 말을 절절하게 체감하고 있었다. 사용자 정보상의 마력 능력치는 절대로 낮은 수준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실제 전투에서 사용해보니 정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그렇게나 힘든 걸까. 김수현이 호흡을 추스르며 간신히 머리를 들었다. 한소영의 활약으로 ‘애니메이트 미스트’는 사라지고, 이제 근원 홀로 남은 상태. 한소영이 변신을 해제함으로써 ‘롱기누스의 창’도 사라지기는 했으나, 그래도 복부에 뻥 뚫린 구멍은 여전히 남아 있다. 잠시 후, 사방으로 퍼져 있던 여러 동료들이 천천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 이유정은, 가장 후방에서 홀로 멍하니 서 있었다. 마치 할 말을 잃은 것 같은 망연한 표정으로. 고개는 우두커니 정지해 있었지만, 눈은 이미 모여드는 동료를 훑고 있었다. 하나같이 성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모두가 완연히 지쳐 있는 상태였다. 그에 반해 이유정은 조금도 지치지 않았고, 보이는 모습도 깨끗하다. 이번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방증인 것이다. 확실히 이렇게 마력이 주가 되는 전장에서 근접 계열이 참여할 여지가 적기는 했다. 애초 이런 상황을 예상한 김수현이 근접 계열을 적게 데려온 것이기도 했고. 허나 엄밀히 말하면, 이유정은 입장이 다르다. 남다은이나 허준영은 비록 크게 활약하지는 못했으나, 최소한 상황에 따른 필요한 행동은 해줬다. 한소영이 나서기 전, 연기가 몰려올 때 가장 먼저 사방을 경계한 것도, 방어막이 깨질 뻔했을 때 마법사들의 앞을 지켰던 것도 바로 그 두 명이었다. 그런데 이유정은? ‘한 게…. 없어.’ 이유정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키고 있었다. 스스로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공중에 떠 있는 상대할 수단은 없었으나, 화려한 마법이 오고 가는 전장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한소영처럼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기 보다는, 그냥 나서지 못한 게 전부였고 또한 사실이었다. ‘고작…!’ 이러려고 따라온 게 아니었다. 애초 철저한 짐꾼이 되겠다는 조건으로 참가할 수 있었으나,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든 진가를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이었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데…. ‘나는….’ 오히려, 이번 전투로 잔인하리만치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원래는 김수현이나 한소영처럼 전투를 열고 주도하지는 못해도, 다른 동료들처럼 어떤 역할이라도 맡고 싶었다. 어떻게든 한 손이라도 거들고 싶었다. 아니, 최소한 짐이 되기는 싫었다. 그러나 현재 전장에서 이유정은 확실한 짐이었다. 없어도 전혀 상관없는, 있으면 오히려 신경 쓰이는 짐짝. “아…!” 그 순간, 욱신거리는 아픔이 돌연히 복부를 엄습했다. 아까 길을 걸어올 때부터 느꼈던 통증으로, 낙인이 찍힌 부분을 칼로 찌르고 헤집는 듯한 고통이었다. 적당히 참다 보면 사그라질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강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아파….” 이유정은 입술을 깨물며 살그머니 복부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이런 고통보다 이유정이 더욱 아프게 느끼는 건, 누구도 이런 자신을 비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 앞에 모여 있는 동료들과 이렇게 홀로 피해 있는 자신의 상황을 인지하자, 갑자기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마치 끼어들지 않는 게 당연하다는 듯, 김수현을 포함해 그 누구도 따로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같은 공간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혼자만 따로 서 있는 느낌이랄까? 피식거리는 자조 섞인 웃음이 배어 나온다. 어쩌면 이런 생각 자체가 웃기는 일일지도 모른다. 분명 김수현은 도시를 떠나기 전부터 각자의 역할을 배정했으며, 이유정은 거기서 짐꾼 역할을 맡았다. 더욱이 실제 전투가 벌어지고 나서는, 대부분이 알아서 움직였다. 결국에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이유정 자신의 잘못이 가장 클 것이다. - 재확인…. 현재 손상률은 73% 입니다. - 가동률이 30% 이하로 하락했음을 확인합니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 허공에서 울려오는 음성에 이유정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 정착한 채 축 늘어져 있던 근원이, 기름칠이 덜된 로봇처럼 끼릭끼릭 움직이면서 겨우 몸을 일으킨다. 검붉은 빛이 꺼진 눈동자는 색을 잃기는 했으나, 여전히 무념의 극을 달리고 있다. 김수현이 침을 탁 뱉으며 무검을 다잡는다. - 새롭게 받아들인 정보를 바탕으로, 전장의 정보를 재구성합니다. - 액셉트. 분석 완료. - 사용자 김수현의 전투력을 정확히 계측할 수 없습니다. 현재 상태로 전투를 지속한다면 승리 가능성은 0%로 수렴합니다. - 그러므로 현 시점부터 사용자 김수현을 ‘대상’에서 제외. 그에 따라 최대로 상정 가능한 299,412가지 경우의 수 중 299,411가지가 폐기되며, 남은 한 가지 방법을 시행합니다. 담담한 음성이 끝난 순간, 허공에 걸려 있던 몸체가 갑자기 크게 들썩였다. 마치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몸을 크게 펄떡였다가 도로 늘어진다. 지켜보던 모두는 불현듯 을씨년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무언가 끝난 것 같은 느낌인데, 끝이 끝이 아닌 것 같은 기분. 오히려 종말을 고하는 동시, 이제 시작이라는 이상하고도 미묘한 느낌. “아악!” 그때, 조용히 있던 안솔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주변의 시선이 모아졌으나 안솔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털썩 주저앉는다. 당최 무엇을 보고 있는지, 두 눈이 황망하기 이를 데가 없다. “아아아악!” 이어서 또 한 번 비명이 터지자 모두가 흠칫했다. 가뜩이나 불안한데, 안솔까지 저러니 더더욱 불길해지는 것이다. 더구나 안솔의 능력을 알고 있는 이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안솔!” 김수현이 다가가자, 안솔은 호흡 곤란을 일으킬 정도로 경기를 일으키며 간신히 몸을 기댔다. 실제로, 안솔은 용이 잠든 산맥에서처럼 남들이 볼 수 없는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성녀의 예언’이 제멋대로 발동됐다. 말인즉 현재 안솔이 보고 느끼고 있는 건 바로 두 가지 선택지. 그래. 현재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다. 저 근원을 서둘러 처리한다 와, 가만히 놔두고 도망친다. 통상적으로는 선택지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진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결과는 같다. 어쩌면 그것은 이 공간을 발을 들였을 때부터 이미 예정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끝…! 끝이…!” “정신차려라, 안솔!” “세상이, 세상이…!” “…뭐?” 안솔의 어깨를 흔들던 김수현의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가라앉았다. - 기다렸으나 적의 공격이 이어지지 않습니다. 남은 가동률 27%를 강제로 0%로 변환합니다. - 변환된 가동률은 남은 계획의 발동으로 전환합니다. 이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예상 소요 시간이 비약적으로 줄어듭니다. 이어서 들려오는 음성에 김수현의 머리가 반사적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기다렸다고? 강제로 0%로 만들었다고?’ 사실상 처음부터 내키지 않은 원정이었다. 왜냐면 김수현 자신이 직접 참가하지 않아 잘 모르는 것도 있었지만, 과거에도 이 장소의 원정 결과는 상당히 이상했기 때문이다. 당시 석판 해독 후 야만 왕의 무덤으로 들어간 원정대는, 이후 해당 공간 자체가 사라짐과 동시에 도시와 소식이 끊겼다. 즉 안정화는 완료했으나 완전한 공략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결말을 맞이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현상이 발생했는지에 관해 의견이 분분했는데, 김수현은 플루톤의 반응을 확인했을 때 약간의 이상함을 느꼈다. 너무 여유로운 반응은 물론, 심지어 자신을 어서 죽이라는 제스처까지. 한 마디로 모종의 든든한 보험이 있는 태도? 그리고 만에 하나, 그 보험이라는 것이 과거의 결말과 연관이 있다면? - …완료. 최후의 경우의 수 시행이 승인됩니다. - 현 시점으로 자폭 모드, ‘멸망의 거울’이 발동됩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에는 이미 한참이나 늦은 상태였다. 아니, 이 공간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확정된 결과라고 봐도 좋다. 돌연히 근원의 몸체가 서서히 발광(發光)하며 빛무리를 줄기줄기 뿜어내기 시작한다. 이윽고 따스하게 뻗어 나간 빛줄기가 공간의 어느 지점에 닿은 순간이었다. 쩌저저저저저저정! “큭!” “꺄아아악!” 고막을 거슬리는 소음에 일부는 귀를 틀어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눈을 뜨고 있던 이들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빛이 뻗어 나가 닿은 공간에, 흡사 바닥에 떨어트려 깨트린 유리처럼 사방팔방 균열이 생겼다는 사실을. 우지지직, 우지지직! 이어서 발생한 균열이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한다. ‘멸망의 거울.’ 순간적으로 모두의 머리에 아까 들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빛무리들은 첫 균열을 생성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치 거울에 반사된 것처럼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더니, 여지없이 거센 소음이 들리며 또 다른 허공에 균열을 일으켰다. 하나에서 두 개, 두 개에서 네 개, 네 개에서 여덟 개, 여덟 개에서 열여섯 개…. 균열은 시시각각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그에 따라 빛은 점차 가속이 붙으며 빠르게 범위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이건….” 누군가 짧은 침음을 흘렸다. 어느새 김수현을 포함한 모든 사용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걸음을 물리며 서로 등을 맞대고 있었다. 모두가 암암리에 느끼고 있는 것이다. 교착 지점에서 반사돼 사방팔방 날아다니는 빛의 선. 그에 맞춰 발생하는 깨진 거울과도 같은 허공의 균열. 그래. 세상이 무너지고 있다. 15명은, 멸망을 앞둔 차원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기적 ‘따위’로는 구원이 불가능한 최악의 종말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 작품 후기 ============================ 아, 한소영은 현대에서 여군이 아닙니다. 오히려 잘 나가는 젊은 CEO였어요. 왜 이렇게 설정했느냐 하면, 돌아간 후 김수현을 돌보고 보살피며 먹여 살릴 생각이라…. 응? 하하. 농담입니다. :) 여하튼 정말 빠르면 다음 회에 끝나고…. 아마 늦어도 2회 안에는 끝나겠네요. 로유진 : 가라! 유정츄! 이유정 : 유정유정! 0750 / 0933 ---------------------------------------------- 핏물 속에서 피어나는 꽃(2). “어….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느냐고요! 누가 말 좀 해봐요! 네?” 불쑥 치솟은 뜻 모를 두려움에 선율이 소리를 질렀으나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임의로 만들어진 마력의 공간이라고는 하나, 엄연히 아스트랄 차원 아래 하나의 세상이다. 김수현을 포함한 15명이 제 아무리 대단한 사용자라도, 결국에는 일개 인간에 불과하다. 세상이 멸망하는 앞에서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설령 방법이 있을지라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멸망은 꾸준하고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근원이 발사한 빛무리는 마치 거미줄을 치듯이 사방팔방 활보하고 있었고, 빛의 선이 그어지는 곳마다 허공이 갈라지며 균열이 일어난다. 그리고 종래에는 공간이 조각조각 분해돼 우수수 떨어지고 있다. 이제는 숫제 하늘도, 허공도, 서 있는 지면조차도 떨어 울릴 지경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균열의 범위는 기하급수적으로 넓어지고, 반대로 온전한 공간은 점차 좁아진다. 어디서 울리는지도 모를 웅웅거리는 진동음과 사방을 가득히 메워오는 어마어마한 압박감.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이 현상의 종착역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큼은 모두가 암암리에 느끼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물리던 김수현은, 문득 누군가와 등을 맞부딪친 것을 깨닫고는 입을 깨물었다. ‘당했다.’ 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해답이라고는 털끝만치도 보이지 않는 현 상황에서 갑갑한 건 누구나 매한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의 모든 공간을 무너뜨린 빛의 선과 균열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공간으로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러자 본능적으로 위기감이 치솟은 걸까. 서로 등을 맞댄 상황에서 누군가 발악하듯이 주문을 외쳤다. 이윽고 정하연이 외운 황금빛 방어막이 빠르게 주변을 감쌌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마법사와 사제들도 서둘러 방어 주문을 펼쳤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아주 잠깐 막아내는가 싶었으나, 어느 것 하나 긴 시간을 버티지 못했다. 살짝 스치기만 했는데도 겹겹이 쳐진 방어막은 우그러지듯이 뭉개졌고, 순식간에 쩍쩍 갈라지며 사그라졌다. “이지스 시스템(Aegis System), 디펜시브 매트릭스(Defensive Matrix)!” 그러한 찰나 백한결이 황급한 음성으로 외쳤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기적 같은 힘이 발휘됐는지, 평소에는 엄두도 못 내던 두 보호막을 한꺼번에 생성한다. 이윽고 해일처럼 치고 들어온 빛의 선은 반투명한 장막에 아슬아슬하게 부딪쳐 꺾여 날아가고, 김한별과 선율이 곧바로 주문을 외워 각각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확실히 방어 전문 사용자는 무언가 다른 걸까. 두 여인이 보석과 카드를 통해 마력을 증강하자 불안스럽게 흔들리던 방어막이 눈에 띄게 안정된다. 그렇게 겨우 막아내기는 했지만, 아주 잠깐의 여유에 불과했다. 김한별과 선율은 물론, 백한결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필사적으로 방어막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이제는…. 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군가 덜덜 떠는 음성으로 말을 더듬었다. 어지간한 신재룡도 작금의 현상에 할 말을 잃었는지, 공포가 서린 낯빛을 보이고 있었다. 비단 신재룡만이 아니라 대부분이 비슷한 반응이었다. 하기야 세상이 멸망하는데, 그리고 직접 눈앞에서 보고 있는데 과연 누가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흡사 세기말 직전의 상황이 이랬을까? 누구도 모를 것이다.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한 세상이 파멸하는 과정은, 차마 말로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했고 참혹하기까지 했다. “유, 유정아!” 그때 임한나가 갑작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유정이가 보이지 않아요! 들어오지 못했나 봐요!” 곧바로 이어진 비명과도 같은 음성에 모두가 아차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랬다. 보호막 안에 있는 인원은 15명이 아니라 14명이었고, 이유정이 보이지 않는다. 애초 어느 정도 거리가 있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매우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챙길 생각을 못 한 것이다. 허나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저 모두가 이를 악문 채 발만 동동 구를 뿐. “혀, 형님…! 제…. 바…. 알…!” 그런 와중, 백한결이 앓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애타는 음성으로 김수현을 불렀다. 전신에서 비 오듯이 땀을 쏟아내고 있다. 그야말로 깨지기 일보 직전인, 정말로 간신히 버티는 모습. 김한별과 선율이 사력을 다해 보호막을 강화하고 있었으나, 그것도 이제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다. 우지지직! 아니. 한계에 다다른 게 아니라,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 한 번 구멍이 뚫리기 시작하자 보호막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한 백한결이 허물어지듯이 쓰러지고, 빛의 선과 균열이 와르르 덮쳐오기 시작하자, 대부분이 방어 자세를 취했다. 아직은 누구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방증이었다. 우웅! 그때, 김수현의 품에서 붉은 기운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게헨나의 보호 요새가 전개된 것이다. * 약간 시간을 돌려, 때는 약 5분 전. 넋을 놓고 있던 건 아니었다. 이상 현상,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근원의 최종 계획 ‘멸망의 거울’이 발생한 직후, 이유정은 본능적으로 앞으로 뛰쳐나갔다. 허나 그 순간, 공교롭게도 강렬한 통증이 또 한 번 복부를 엄습했고, 저도 모르게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만 것이다. 그리고 현재. 땡그랑! 넘어진 여파로 은빛 머리띠가 벗겨져 떨어지고, 흘러내린 붉은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흐트러졌다. 주변 허공에는 쉴 틈 없이 빛이 지그재그를 그어대고, 지상은 조각나는 것도 모자라 가루로 분해돼 사라진다. 심장이 떨릴 정도의 격렬한 공명 속에서, 이유정은 몸을 일으킬 생각도 못 한 채 웅크리듯이 나동그라졌다. ‘죽었다.’ 고 직감하는 동시에 오만 생각과 후회가 뇌리를 스쳤다. 괜히 따라왔다는 생각보다는, 한심함을 넘어 끝없는 자기 혐오를 느끼며 이유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아무리 기다려도 어떠한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 여전히 욱신거리는 복부의 통증을 제외하면 모든 게 그대로였다. 그러자 이상하다 여긴 이유정이 스리슬쩍 고개를 들었다. 살그머니 눈을 떠 시선을 내리니, 돌연 황금빛 기운이 어른거리는 자신의 몸이 보인다. 크게 놀라 주변을 둘러본 이유정은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하늘은 더 이상 보이지도 않고, 지상은 거의 가루로 변해 흡사 구덩이처럼 시커멓게만 보일 뿐이다. 그냥 아예 성한 공간을 찾기가 어려웠다. 한데 이런 와중에도 이유정의 주변은 그나마 제대로 된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기껏해야 2 미터 남짓한 공간이었지만, 이유정은 분명히 살아 있었다. 멸망하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된 거지?’ 그렇게 매우 현실적인 의문이 솟은 찰나, - 이런 이런…. 결국 이렇게 된 건가. 문득 낯선 음성이 이유정의 귓전을 울렸다. 약간 거치면서도 중후한 목소리는 흡사 바로 옆에서 말한 것처럼 또렷했다. 바로 시선을 돌린 이유정은 세 번째로 놀라며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왜냐면 자신보다 머리 두 개, 아니 적어도 네 개는 커 보이는 거한의 사내가 팔짱을 낀 채 혀를 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온몸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황금빛 기운을 두른 채로. - 폐 태자 녀석도 할 말은 없지만, 필리아도 만만치가 않군. 설마 이 정도로…. 응? 이유정의 시선을 느낀 걸까. 머리를 절레절레 젓던 거한이 흘끗 시선을 내렸다. - 뭘 봐. 시비를 거는 듯한 말투. 평소의 이유정이라면 발끈해서 받아 쳤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계속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처음 봤을 때는 웬 사람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엄청난 체구와 탄탄한 근육은 그렇다 치더라도, 양 팔뚝 부분에 짐승의 털처럼 보이는 것이 수북하게 덮여 있다. 거기다 얼굴 선이나 목덜미에는 흡사 사자의 갈기 같은 털이 길게 자라나 있고, 심지어 엉덩이 뒤로 꼬리까지 늘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꼭 사자와 인간을 절반씩 섞어놓은 형상이랄까? - 뭘 그렇게 보느냐고. 아니 설마, 수인은 처음 보는 거냐? 반(半) 묘? 하찮게 여기는 듯한 말투에 이유정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누, 누구….” - 누구냐고? 지금 내 무덤에 들어온 주제에 누구냐고 묻는 건가? “아, 아니. 어떻게….” - 어떻게? 아니 그럼 이 정도로 난리를 쳐대는데, 내가 안 깨어나고 배겨? …아. 뭐, 네 존재가 나를 자극한 것도 없잖아 있지만. 아마 역사를 알고 있는 김수현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유정은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거한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푹 한숨을 쉬었다. - 어이, 잠깐 가만히 있어봐라. 나도 네가 누군지 궁금하거든. 그렇게 말한 거한은 성큼 다가와 이유정의 옷을 젖혔고, 미끈한 복부에 코를 들이밀어 킁킁거렸다. 기함한 이유정이 손사래를 치며 걸음을 물렸으나, 거한은 이미 허리를 펴고 신기하다는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 헤, 이건 베가스 녀석의 낙인이잖아. 그리고 그 달빛 꼬맹이…. 누구였지? 아, 오브아나 알카트라츠의 섬백까지…. 그런데 너, 낭(狼) 족이냐 아니면 달 묘(猫) 족이냐? “…….” - …어이? “…….” 나름 기대를 품은 듯한 말투였으나, 이유정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 있기만 했다. 평소 자신의 사용자 정보나 무기에 얼마나 관심이 없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윽고 지그시 응시하던 거한은 또 한 번 한숨을 흘리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 어휴, 말년에 겨우 후인을 만났나 싶었는데, 웬 수인 같지도 않은 계집이…. 이건 반인반수도 아니잖아. 나도 참 운 없는 놈이군. 자꾸만 툴툴대며 무시하듯이 말하자 비로소 이유정의 낯에 발끈하는 기색이 서렸다. 영문은 모르겠으나 갑자기 화가 나는 기분이었다. “아까부터 자꾸 무슨 헛소리를…!” 벌컥 화를 냈으나, 이유정은 끝까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거한이 솥뚜껑만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으으으읍!” - 됐고, 너 저거는 어떻게 할 거냐? “으읍?” - 저거 말이다, 저거. 저 멍청한 마녀 있잖아. 거한이 저 멀리 허공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유정은 그제야 아까의 의문을 도로 떠올릴 수 있었다. 확실히 거한과 이유정이 서 있는 공간은 아직까지는 온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 미리 말해두지만, 나도 계속해서 보호해줄 수는 없다고?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거한이 어깨를 으쓱이며 재촉하듯이 말했다. “어, 어떻게 할 거냐니?” - 아니 그럼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죽을 거야? 아, 방법을 몰라서 그래? 그건 간단해. 저거 저거 보이지? 그 순간 이유정의 시야가 강제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마치 바로 앞에서 보는 것처럼, 허공에 떠 있는 마녀의 모습이 갑자기 가까이 다가온다. 그런 마녀의 가슴 앞으로 가운데가 잘록한 호리병 같은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 처음 둥근 방에서 조우했을 때 마녀가 손에 쥐고 있던 모래시계였다. 이윽고 놀랄 새도 없이, 시야는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 저걸 파괴하면 돼. 마치 어린 아이 손목을 비틀면 된다는 듯, 거한은 태연하게 말했다. - 참고로 말하자면, 모래가 모조리 떨어지는 순간 이 세상도 끝나는 거야. 여하튼 이번에는 거한이 말하는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오빠나 다른 강력한 사용자들도 맥을 못 추고 있을 텐데, 자신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잖은가. 이유정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뭐, 뭘….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건데…. 나, 나는 못해.” 억지로 눈을 돌리며 살그머니 말을 흐리자, 거한의 낯이 약간 찌푸려졌다. - 뭐야. 그럼 설마 이대로 도망치겠다는 거야? 그 순간 이유정은 퍼뜩 어깨를 떨었다. ‘…그러면 너는, 결국 부담이 되기 싫어서 도망치는 건가?’ 돌연히 허준영의 음성이 귓전을 스치는 듯했다. - 나 참. 기껏 만난 동족이 고작 이런 계집이었다니…. 베가스나 오브아나가 땅을 치고 울고 있겠군. 이거 괜한 기대를 했어. 거한은 설마 이럴 줄은 생각도 못 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마치 시간 낭비를 했다는 말투에 이유정은 억울함을 느꼈다. 갑자기 튀어나온 주제에 어떻게 할 거냐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고 도대체 어쩌라는 건데!” 시종일관 힘없던 음성이 처음으로 뾰족하게 높아졌다. - 그럼 하나만 물어보자. 거한은 흐음, 입맛을 다시고는 팔짱을 꼈다. - 너는 네 친구를, 네 동료를 구하고 싶지 않은 거냐? “…구하고 싶어.” - 그럼 왜? “나는….” 이유정은 살짝 숨을 들이켜고, “약하니까.” 솔직하게 말했다. “해봤자일 테니까.” 한 번 더 덧붙이자 거한의 눈이 뱀처럼 가늘어졌다. - 약하고, 해봤자라…. - 뭐, 틀린 말은 아니지. 확실히 너는 약해. 수인, 특히 달의 일족이라는 게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야. 뜻밖에도 거한은 순순히 인정했다. 이유정은 나는 수인이 아니라고 외치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부정해봐야 자신만 꼴사나울 테니까. - 하지만 이러면 어떨까? 그때 갑자기 말을 반전한 거한이 가까이 다가섰다. - 내가 네 진정한 힘을 끌어내 주마. 이유정의 낯에 떠름한 빛이 스쳤다. “끌어내준다고? 네가 누군데?” - 나? 하이고, 정말로 모르는 거냐? 야만 부족을 이끌고 모든 수인을 다스렸던 나를? 거한이 갑갑하다는 듯이 가슴을 치자, 이유정의 뇌리로 제갈 해솔이 기록을 소리 내 읽던 기억이 스쳤다. 아주 단편적은 기억일 뿐이나 이름 정도는 확실하게 떠올랐다. “맞아. 확실히 들었어. 야만 왕…. 아니 수인의 왕?” - 그래. 드디어 정체가 밝혀졌다. 묵직하게 머리를 끄덕인 거한, 아니 야만 왕은 갑자기 손을 들어 팔뚝을 할퀸 후, 왼팔을 불쑥 내밀었다. 이유정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내밀어진 왼팔에는 피는 흐르지 않는다. 그러나 황금의 기운이 마치 역류하듯이 꿀렁꿀렁 흘러나오고 있었다. - 마셔라. 명령하는 어조에 이유정이 의아한 눈동자를 들었다. “마시…. 라고?” - 너는 지금 네 안에 잠재된 힘을 반의반도 끌어내지 못하고 있어. 왜 그런지 아나? “…몰라.” - 그건 네가 완전한 수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한은 단언하듯이 말했다. 그리고 이유정은 계속 흘러나오는 황금의 기운을 무언가에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 그래. 이 기운을 받아들인 순간, 네 안에 잠재된 기운이 반응해 각성이 시작될 거다. 말인즉 완전한 수인으로 재탄생 하는 거야. “수인으로….” - 무릇 수인이란, 인간처럼 이성적이지 못해. 오히려 본능에 이끌리고 감정에 충실하지. 우리는 원래 그래. 싸우고, 전투하고, 침략하고, 짓밟고, 약탈하고, 살육에 환호한다. 그게 바로 수인이라는 종족이다. “…….” - 흐흐, 아직도 망설이는 것 같은데…. 돌연 야만 왕의 음성이 이상하게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팔을 더욱 들이미는 동시, 이유정의 복부에 지금까지와는 색다른 고통이 엄습했다. “윽…?” 저도 모르게 허리를 숙인 이유정은,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온 거한의 팔을 보며 눈을 크게 치떴다. 갑자기 향기로운 냄새가 콧속으로 물씬 풍겨오고, 입안에 군침이 마구 돌기 시작했다. 이마에 띵한 현기증이 느껴지고 시야가 흐물흐물하게 변한다. 왜 이러는지는 이유정도 모른다. 그저 불현듯 찾아온 변화에 몸을 맡길 뿐. - 약한 게 싫잖아? 강해지고 싶잖아? 야만 왕의 음성은 확실하게 변했다.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부드러우면서 달콤하기 그지없다. “나는….” -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너는 확실하게 강해질 수 있다. 간신히 입을 열자 야만 왕의 은근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그것은 절대로, 진정으로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나는…!” 힘.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토록 원하고 갈구하던 힘이 눈앞에 있다. 그래, 정말로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다. 뜻 모를 기대감과 설렘으로 호흡이 멈추고, 복부에 찍힌 낙인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불타오른다. 침은 자꾸만 꼴깍거리며 넘어간다. 혈관에 흐르는 핏물이 두근두근 요동치며 질주하는 게, 흡사 얼른 저 기운을 받아들이라고 날뛰는 듯하다. - 마셔라! 그리고 끓어오르는 힘에 미쳐봐라! 이어지는 외침에, 이유정은 있는 힘껏 눈을 뜨며 앞을 노려봤다. ‘그래, 어차피 이판사판이잖아…?’ 설령 이게 함정이라도 좋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정은 결국 참지 못하고 천천히 고개를 빼었다. 이어서 서서히 입술이 벌어지며 분홍빛 혀가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과연 무슨 탓이었을까. 이유정을 바라보는 야만 왕의 표정을 썩 좋지 않았다. 씁쓸해하는 것 같았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언가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었다. 잠시 후, 마치 강아지처럼 혀를 내민 이유정이 살짝 고개를 숙인 찰나였다. ============================ 작품 후기 ============================ 아마 모든 것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을지도…?(의미심장.) 후후. :) 0751 / 0933 ---------------------------------------------- 핏물 속에서 피어나는 꽃(2). 처음에는 혀로 살짝 핥기만 했다. 그러나 기운의 힘을 확실히 느낀 걸까. 몸을 부르르 떤 이유정은, 곧 흐르는 황금의 바다에 고개를 처박고 양껏 들이켰다. 그렇게 한 모금을 흡입하고 막 목구멍으로 넘기려는 찰나였다. ‘어쩌면….’ 그때. ‘나 때문일지도 몰라.’ 어디선가 들려온 음성이, 새하얗게 일색 된 머릿속을 스치듯이 지나쳤다. 이내 작은 고저를 그리려던 목울대가, 돌연 서서히 가라앉는다. ‘미친년이야. 피에 미친년. 광년으로 불렸다고.’ ‘하하…. 그렇게 밝은 애가 피에 미친년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거의 정신 줄을 놓은 상태에서, 이유정은 저도 모르게 손을 주먹 쥐었다. 왜일까, 왜일까. 이럴 리가 없을 텐데. 이제 입에 머금은 기운을 삼키기만 하면 되는데, 왜 망설여지는 걸까. 이런 상황에서 절대로 들릴 리가 없을 텐데, 왜 갑자기 오빠의 음성이 들려오는 걸까. 뇌가 혼란스럽다. 얼른 삼키라는 욕망과 아직 끊기지 않은 한 가닥 이성 사이로, 이유정은 이대로 주저앉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이어서 뜻 모를 눈물이 치솟아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자신조차 모르는 까닭없는 눈물이었다. 그냥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 시간이 없다! - 어서 삼키라니까! 이윽고 야만 왕의 음성이 재촉하듯이 윽박지른 찰나, ‘사실 나는 별로 상관이 없기는 해. 왜냐면 이미 한참이나 늦었다고 생각하거든. …그런데, 이유정은 아직 아니잖아.’ ‘이상하게 변하는 걸 보고만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애야. 사람이든, 사용자로든.’ 잔잔하고 웅혼하게 울려오는 음성이 또 한 번 이유정을 붙잡는다. 하지 말라는 듯이, 그만두라는 듯이. - 크릉…! 낯을 크게 찡그린 야만 왕이 나직한 울음을 흘렸다. 어느새 공간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까지 몰린 상태였다. 그러니까 시간이 없다. 한데 이제 마지막 의식을 남겨둔 상황에서,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유정이 망설이고 있다. 실제로 기운을 머금어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턱 부근이 느릿하게 풀어지는 중이다. 잠시 후. - …젠장! 용서해라! 야만 왕이 황급한 손놀림으로 이유정의 턱을 우악스럽게 부여잡는다. ‘…모르겠다. 요새 들어서는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지도, 아니 잘해왔는지도 모르겠고.’ ‘그 누구도 바로 결과를 내라고 하지 않아. 김수현의 말을 듣고도 모르는 거냐.’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리고 있잖아.’ ‘그럼 최소한 보여주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니냐.’ 그와 동시에 김수현과 허준영의 음성이 겹쳐, 기운에 취한 머리를 일깨웠다. 이유정은 두 눈을 힘껏 치떴다. 흐리멍덩하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정상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퉤!” 강제로 고개가 젖혀지려는 찰나, 이유정이 입안 가득히 머금은 것을 힘차게 뱉어버렸다. 이번에는 반대로 야만 왕의 눈이 황망해졌다. - 이, 이게 무슨 짓이야! “콜록! 콜록콜록!” 그러나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은 기운을 토해낸 이유정은, 마치 취한 사람처럼 몸을 비틀거렸다. 이마는 여전히 띵하고 복부도 욱신거렸지만, 어지럽던 머릿속으로 개운한 기분이 한 줄기 찾아 든다. 이윽고 몸을 가누지 못한 이유정이 발라당 나동그라졌다. - 어이! “쌍, 입 닥쳐!” 짝! 야만 왕은 급히 손을 내밀었으나, 돌아온 건 걸쭉한 욕설과 힘찬 따귀였다. 어안이 벙벙해진 야만 왕이 멍하니 팔을 쓰다듬고 있자, 이유정이 침을 퉤퉤 뱉으며 금세 몸을 일으킨다. 오른손에 은색으로 빛나는 무언가를 꼭 쥔 채로. - 너…. 설마 거부한 거냐? “거부는 개뿔. 뭐? 용서해라? 미친놈이 무슨 짓을 하려던 거야?” 이를 갈며 말한 이유정이 턱을 쓱 닦으며 콧김을 흘렸다. 뺨에는 선명한 눈물 자국이 남아 있고 두 눈은 아직도 그렁그렁한 주제에, 야만 왕을 흡사 죽일 듯이 노려본다. 야만 왕의 낯에 떠름한 기색이 스쳤다. - 이, 이봐. 이대로면 어차피 곧 죽는다고? “아가리 닫으라고 했지. 그리고 이미 뒈진 놈이 뭔 상관이야? 남이사 죽든 말든.” - 장난하지 말…! “나는 인간이야!” 돌연히 빽 소리를 지르는 이유정. 기세가 어찌나 거셌는지 그 야만 왕조차 흠칫하며 물러나게 할 정도였다. 이유정은 씩씩거리면서도 오른손에 쥔 것을 꾸기듯이 썼다. 은은히 빛나는 머리띠를 확인한 야만 왕이 호오, 놀라운 표정을 짓는다. “전투에 죽고 살고, 살육에 환호해? 그딴 게 수인이라면 되고 싶지도 않거든?” - 약한 게 싫다고 하지 않았나? 강해지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맞아. 싫어. 근데 그렇게 해서까지 강해지고 싶지는 않아. 스스로, 내 방식대로. …그래, 나는 최소한 인간으로서 강해질 거야.” - …각오는 좋은데, 현실을 직시하라고. 네가 내 도움 없이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알았으니까 이만 아가리 닫아. 도와줄 생각 없으면, 여기서 가만히 구경하면서 딸이나 치던가.” - ……. 대차게 쏘아붙인 이유정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러나 방법은 확실히 들었다. 그러면 해야 할 일은 하나. 이윽고 저 앞에 붉은 장막을 확인한 이유정이 바로 달려나가려는 찰나였다. - 흥, 합격이다. 갑자기 들려온 걸걸한 음성에 움직이려던 걸음이 우뚝 정지했다. 휙 고개를 돌리니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는 야만 왕이 보인다. - 애초에 진작 이러던가…. 하여간 묘 족은 애먹이는데 도가 튼 놈들이라니까. “갑자기 무슨 개소리야?” - 어이, 나는 개가 아니야. 웬만하면 사자 소리라고 해줘. 그리고…. 아까는 미안했다. 실은 나도 많이 급해서 말이지. “……?” 야만 왕이 쑥스럽다는 듯이 말하며 머리를 긁적이자 이유정이 의아한 눈빛을 보였다. - 그래도 거짓말은 아니었다고? 확실히 각성시켜줄 수는 있었어. 뭐, 그 후의 일은 장담 못 하지만…. 성큼 다가온 야만 왕은 천연덕스레 어깨를 으쓱거리자 이유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몸에 어른거리던 황금빛이 상당히 약해져 있다. - 그러니까 말을 바꾸도록 하지. 조금 부끄럽지만, 도와다오. 담담히 말한 야만 왕이 이유정을 똑바로 응시했다. - 너는 친구를 구하고 싶다고 했지? “그런데.” - 나도 친구를 구하고 싶거든. “응? 친구?” 이유정이 이상하다는 어조로 되물었다. 이미 죽은 이에게 친구가 있을 리가 없다고 여긴 탓이다. 그러자 쓰게 웃은 야만 왕이 길게 숨을 흘리며 허공을 응시한다. - 이곳은 내 무덤이기도 하지만, 나를 구하러 온 멍청한…. 친구, 놈들이 묻힌 곳이기도 하지. 놈들은 여전히 이 공간을 배회하고 있어. 나를 구하겠다는 일념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서. 야만 왕은 친구를 말할 때 약간 더듬었다가, 곧 힘주어 말을 이었다. 사실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유정은 조용히 경청했다. - 그것도 무려 수백 년 동안…. 이제는 해방될 때도 되었잖아. 그런데 이렇게 세상이 멸망해버리면 우리도 꼼짝없이 소멸할 수밖에 없거든. 수백 년간 기다림의 끝이 영혼의 소멸이라니, 그건 너무 잔인하잖아? 야만 왕은 문득 가볍게 주먹을 내밀어 이유정의 어깨를 툭 쳤다. - 그래서 너보고 도와달라는 말이야. 부디 우리가 자유롭게 해방될 수 있도록. 이유정은 가만히 있었다. 음성이 자못 진중하기도 했지만, 허공을 바라보는 야만 왕의 눈이 까닭 없이 아련하게 느껴진 탓이다. - 이렇게 계속해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도 지친다고…. 뭐, 비록 죽은 몸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정신은 살아 있다. 나도, 저 천하의 바보 멍청이 친구 놈들도. 이제는, 이제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자연으로 돌아가 편하게 쉬게 해주고 싶다. 그렇게 말한 야만 왕은, - 그게 내 최후의 바람이다. 비록 폐 태자가 후인에게 병신 같다는 욕을 먹을지언정…. 정말로 나를 구하러 왔었다는 걸 알았을 때, 사실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어.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가 친구를 구원할 차례다. - 그러니 부디 나와 내 친구를, 이 심연의 공간에서 해방시켜주지 않겠나! 묘 족 소녀! 씩 웃으며 이유정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미 죽은 영혼이라서 그런지 그림자가 드리워지지는 않는다. 그저 굉장히 희미해진 황금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를 뿐. 이유정은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른다. 단, 적어도 서로의 이해가 일치한다는 사실은 깨달았다. “…상관없는데, 수인이 되는 거라면 사양이야.” - 흐흐, 농담은. 걱정하지 마라. 이미 나는 너를 인정했으니까. 화아아악!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기도 전, 야만 황의 온몸이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꺼져가는 촛불이 최후의 불꽃을 불태우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빛을 내며 따뜻한 빛을 뿜어낸다. 그러자 강렬해진 빛에 가렸는지 더 이상 야만 왕의 형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환히 타오르는 황금의 형체만이 남아 이유정을 향해 손짓할 뿐. - 자, 어서! 이유정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가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아까처럼 요사스러운 기운이 아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지도 않고, 달콤한 냄새를 풍겨 유혹하지도 않는다. 꽤 거칠기는 하지만, 한없이 자유로우면서 따스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 자유를 갈망하는 기운에 이끌린 걸까.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유정이 차분히 손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빛 안에서, 무언가를 바스러지듯이 움켜잡았다. - 좋아! 그 순간. - 이제 슬슬 시작해보자고! 후계자! 이유정이 보는 시야가, 찬연하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 붉은 장막 안은 조용했다. 대부분이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모두 입을 다문 채 장막 내 선두에 있는 사내를 응시한다. 사내는, 아니 김수현은 굳건히 서 있는 채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언가 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동자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모두….” 그때 결심을 내렸는지 김수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김수현은 흘끗 뒤를 돌아봤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최강의 방어막을 준비합니다.” “…….” “제 마력도 서서히 바닥을 보이는 중입니다. 그러면 이 장막도 끝이에요. 그전에 승부를 보겠습니다.” “…….” 모두가 김수현의 말을 이해했다. 그래서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에는 또 기댈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이다. 말인즉 남은 인원이 온 힘을 다해 저항하는 동안, 김수현이 최대한 빠르게 근원을 처리하겠다는 소리였다. 당연하지만 처리와 별개로 발생한 현상을 해결할지는 미지수였다. “어….” 그때 허준영이 어딘가를 쳐다보며 이상한 신음을 흘렸다. 반사적으로 눈을 돌린 김수현은 살짝 눈을 찌푸렸다. 무언가가 흡사 바람처럼 장막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비단 두 명만 본 게 아닌지, 일부의 시선이 바깥을 향한다. 붕괴하는 공간 속에서, 황금의 빛무리가 몰아치듯이 달려가고 있다. 그래. 시냇물처럼 졸졸 흐르는 게 아닌, 거센 격류와도 같이 힘차게 몰아치고 있다. 그리고 춤이라도 추듯이 붉은 머리카락이 사방팔방 나부낀다. 흡사 폭풍이 지나치는 것 같은 달음박질에, 누군가 약한 침음을 흘렸다. “저건….” 우지지직, 우지지직! 그 순간, 일직선으로 직행하는 황금의 형상 앞으로 무너진 지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지면뿐만이 아니다. 빛의 선이 지나간 곳에는, 허공에도 균열이 발생하며 아예 지나갈 공간 자체를 부서트리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도 군데군데 성한 부분이 있기는 하다. 없는 건 아니었으나 매우, 극히 미약한 수준이다. 심지어 지금도 공간은 허물어지듯이 부서지며 더 이상의 전진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마치 지나가는 모든 것을 삼킬 듯한 망망대해를 보는 기분. 문제는, 저 황금의 빛무리가 도저히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붕괴하는 하늘과, 분열된 허공과, 무너진 대지. 이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이 부서져 없어지는 사이로, 단 하나, 모든 것을 비춰 밝히는 타오르는 형상이 있다. 그 형상은 아름다운 잔상을 수놓으며 금빛 질주를 이어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망망대해로 뛰어들었다. “하아!” 대찬 기합과 함께 붕괴된 지면 위로 형상이 공중을 활보한다. 이어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지켜보던 누군가의 추락할 것이라는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허공을 크게 젓는 발길질은, 마침 위에서 떨어진 작은 하늘 조각을 밟아 도로 튀어 올랐고, 갈라진 공간의 균열 사이를 귀신같이 빠져나갔다. 가속이 붙은 그대로 부드러운 S자를 그리는 게, 흡사 초고속 전투기의 곡예 비행을 보는 듯하다. 단 한 걸음만 삐끗해도 추락해버리는 세상. 손톱만 한 조각을 밟고 올라 그대로 뛰어넘고, 우그러진 공간의 틈새를 살아있는 화살처럼 통과한다. 한 걸음 한 걸음, 오직 그것만을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모두가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결국에는 형상의 발걸음이 그나마 온전한 지면을 밟는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근원의 바로 아래까지 도착했다. “이유정….” 형상의 정체를 알아챈 김수현이 나직이 뇌까렸다. 아주 잠시 ‘어떻게?’ 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삽시간에 지워졌다. 현재 저 인간 같지도 않은 신기에 가까운 움직임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것보다는 돌연히 속에서 무언가가 질박하게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김수현도 알고 있다. 스스로 세운 계획의 성공 가능성이 3할도 채 안 된다는 것을.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상황이 달라졌다. 아직 정확한 파악까지는 못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던가. 절망적인 상황의 끝에서, 김수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단 한 번의 역전의 기회가 도래했음을 직감했다. 바로 아래까지 도착한 이유정이 고개를 젖힌다. 아직 온전한 허공에는 축 늘어진 마녀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으나 무심한 눈동자는 흘끗 움직였다. 아직 살아 있다는 방증.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움직이는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이유정은 있는 힘껏 땅을 박찼다. “하앗!” 그 기합에 응하여, 발차기 한 번으로 이유정의 신형이 폭발적으로 솟구친다. 하늘을 나는 게 아니었다. 이유정에게도, 수인에게도 하늘을 나는 능력 따위는 없다. 그러나 도약은 가능하다. 인간과는 다른 신체 구조를 지닌 수인이라면, 그 중에서 수인의 왕이라면. 6 미터 정도 떠오른 허공의 적 따위 충분히 닿고도 남는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도약력! 그렇게 야만 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발판 삼아, 이유정은 전신을 불태우며 아름답고도 용맹하게 일직선으로 치솟는다. 혼신의 힘을 담은 최후의 질주가 공중을 미끄러지듯이 올라간다. 이유정에게는 더 이상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지고 복부도 더 이상 아프지 않다. 스치는 풍경도 보이지 않고, 귓가를 스치는 바람도 느껴지지 않고, 아까부터 떠오른 몇 개의 메시지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오직 하나. 마녀의 가슴 앞에 떠 있는, 멸망을 향해 치달리는 모래 시계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였을까. “위, 위험해!” 허준영이 외쳤다. 어느새 붕괴는 멈춘 상황이었다. 그러나 절대로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곳곳을 쭉쭉 긋고 다니던 빛의 선이 빙그르르 나선을 그리며 하늘 높이 올라가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그러니까 일종의 반응이라고 봐도 좋았다. 말인즉, 근원이 처음으로 이유정을 위험한 적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유정!” 들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허준영은 소리 질렀다. 그 찰나의 순간, 우뚝 멈춘 하얀 빛은 잠시 주춤하는가 싶더니, 이내 근원으로 다가오는 이유정을 노려 무시무시한 속도로 하강을 시작한다. 날개로 하늘을 나는 것과 일반적인 도약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중간에 선회할 수 있고 없고의 차이. 김수현처럼 허공에 임의로 마력을 생성시키는 수준이 아닌 이상, 이유정이 저 공격을 회피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몇 초 후, 빛의 선은 그대로 이유정을 후려갈겨 조각 내버릴 것이다. 여태껏 그래 왔던 것처럼. “……!” 역시나 회피는 무리였던 걸까. 직선으로 하강한 빛의 선은 여지없이 이유정을 꿰뚫었다. 동시에 장막에 있던 인원이 발악하듯이 외치고, 김수현의 눈에도 경악과 놀라움이 빛이 스쳤다. “아…!”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유정이 몸이 녹아내리 듯이 스르르 사라졌으니까. “이, 이형환위?” 뒤늦게 알아챈 허준영이 입을 쩍 벌리며 경악한 음성을 질렀다. 통상적인 사용자보다 몇 배는 더 빠른 마력 흐름을 요구하는 능력이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걸 이유정이 성공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는 것이다. 사실은 이형환위에 가까운 궁신탄영이라 말하고 싶었지만, 김수현은 꾹 참고서 무검을 고쳐 잡았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으니까. 아무튼, 말 그대로였다. 황금빛은 여전히 하늘로 올라가고, 하얀 빛의 선은 그대로 수직으로 추락한다. 두 개의 빛무리는 그렇게 교차했다. 그리고, 비로소 근원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오른손에 쥔 것이 닿기까지 3초, 2초, 아니 1초…! 왔다, 왔다, 마침내, 드디어 도착했다! 이제는 끝낼 수 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그렇게 생각한 이유정이 환희에 찬 함성을 지르며, 눈앞까지 다가온 모래시계를 향해 힘차게 손을 휘두른다. 거의 동시에, 정지해 있던 마녀의 팔 하나가 움직였다. 이윽고 금빛을 튀기는 거대한 기운이 가열차게 모래시계를 박살 내려는 찰나, 푹. 닿기 직전에, 가녀린 몸이 배터리가 다한 로봇처럼 덜커덕, 정지했다. 이유정은 작게 숨을 들이켰다. 가슴에서 심한 격통이 밀려온다. 본능적으로 무언가에 관통 당했다는 걸 느꼈다. 살짝 고개를 든 마녀의 눈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마치 이 정도도 예상하지 못할 줄 알았느냐는 듯 비웃는 것 같다. 그러나. 성공의 직전에서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유정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아니. 애초 빛의 선이 자신을 노릴 때부터 이유정은 성공을 확신한 상태였다. 왜냐면, 이 공간은 자신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잠시 후. “오빠아아!” 이유정이 참은 숨을 토해내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모래시계를 부수면 된데에에!” “알겠다.” 비명의 끝으로, 담담한 음성이 화답한다. 펄럭! 힘찬 날갯짓에 이어서 누군가가 근원의 옆으로 불쑥 솟구쳤다. 그리고 근원이 채 고개를 돌리기도 전, 힘차게 내리쳐진 보이지 않는 칼날은 얼마 남지 않은 모래 시계를 그대로 베어 갈랐다. ============================ 작품 후기 ============================ 이유정 : 야 이 작가 개XX 미친XX 기껏 다 해놨더니만 막타를 시X! 로유진 : 미, 미안. 이유정 : 왜 그랬는데! 로유진 : 업적 시스템에 막타가 계산되거든…. 그거 김수현한테 주려고…. 이유정 : 왜! 로유진 : 이 파트 끝나고 세라프랑 꽁냥꽁냥하면서 GP 써야 하는데. 이왕이면 많은 게 좋잖아? ‘- ^* 이유정 : *)(#&$(*@#$*(@#$&*(#@$&*(@#$&(! 죽여버리겠다! 로유진 : 잠깐만! 이유정 : 최후의 유언이냐? 로유진 : 너, 김수현이랑 꽁냥꽁냥하기 싫냐? 잤잤하기 싫어? 이유정 : ……! 로유진 : 후후후후. 이유정 : 나, 나쁜 놈…. 로유진 : 옆에서 손가락만 쪽쪽 빨기 싫으면, 가만히 있어라잉? 0752 / 0933 ---------------------------------------------- 핏물 속에서 피어나는 꽃(2). 찰나의 순간이기는 했지만,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아주 극소량만이 남은, 최후의 모래 한 줌이 잘록한 부분을 통과하는 것과 모래 시계가 박살 난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도처에 떠오른 동그란 빛의 입자들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듯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화아아아아아아악! 모래 시계 조각들은 흡사 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들이듯이 빛을 흡수했고, 이내 시야가 새하얗게 칠해지며 모든 것이 희미해졌다. 마녀도, 이유정도. 그렇게 모든 것이 어렴풋하게 변해가는 가운데, 콰콰콰쾅! 갑자기 빛이 폭발하며 눈앞으로 완연히 하얀 공간이 드러났다. 고막을 찢는 굉음과 정체 불명의 격렬한 충격에 몸이 기우뚱 기우는 것도 느꼈다. 이윽고 폭풍에 휩쓸려 아래로 추락하는 와중, 돌연히 시간이 정지한 것만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모든 게 느려지다 못해 서서히 동작을 멈추는 느낌. 비록 하얀 세상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현재 이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늘어지는 기분이다. 반사적으로 남은 마력을 돋우려다가, 그냥 전신의 힘을 풀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 문득 주변이 한없이 고요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살그머니 눈을 뜨자 잔잔히 흐르는 밤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시야가 정상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럼 아직은 살아 있는 건가? 아니, 살아난 건가? 체력이나 마력은 여전히 바닥을 치고 있었으나 그 외 별다른 이상은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상반신을 들고 주변을 둘러봤고, 그제야 어느 정도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조금 전의 현상은 시간이 멈췄던 게 아니라, 느낀 그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냥 나도 모르는 사이 바닥과 부딪쳤을 뿐. 차마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이상한 감각에 착각한 것이리라. 그러고 보니 아까와는 다르게 상당히 조용하고 어느새 풍경도 달라진 것 같은데…. 띠링! 『전설의 업적!』 그때였다. 멍하니 어두운 숲을 응시하고 있자, 불현듯 익숙한 소리가 들리고 메시지가 눈앞으로 출력된다. 『사용자 김수현 외 14명은 꽃의 마녀 ‘필리아 트리토리스’, 악마 14 군주 ‘플루톤’, ‘마법의 근원’을 처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일인 군단으로 불리던 공포의 마녀를 압도적으로 몰아붙이고, 사용자의 눈을 피해 몰래 이루어지던 악마의 계획을 분쇄했으며, 모든 법칙을 아우르는 초 정보 집합체 근원을 상대로 승리한 것은, 가히 인간이 이룩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난 금세기 최고의 성과입니다. 해당 업적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사용자 김수현 외 14명은 꽃의 마녀 2,000,000 Gold Point, 악마 14 군주 플루톤 4,500,000 Gold Point, 마법의 근원 10,000,000 Gold Point, 총 16,500,000 Gold Point를 부여합니다!』 『각 사용자당 1.100.000 Gold Point를 분배 받습니다.』 『캐러밴 시스템 확인! 각 사용자의 공헌도에 따라 추가 Gold Point를 지급합니다. 1. 김수현(52%) 2. 한소영(23%) 3. 이유정(11%). 4. 하승우(5%)…. 그러므로 사용자 김수현은, 총 보상 Gold Point의 52%인 8,580,000 Gold Point를 추가로 부여받습니다!』 『캐러밴 시스템 확인! ‘막타’를 친 사용자 김수현에게 150,000 Gold Point를 추가로 지급합니다!』 “헐.” 모든 메시지를 읽은 이후, 나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머리가 휙휙 돌아가기 시작한다. 보자, 내가 보유한 골드 포인트가 10,857,460 GP였지? 그리고 이번에 9,830,000 GP를 추가로 얻었으니까, 그럼 총 20,687,460 GP를 갖게 된 셈인가? 좋아, 아주 좋다. 안 그래도 이번 원정이 끝나면 비밀 상점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러니 이 정도로 퍼주면. …아니, 잠깐만. “이 메시지가 출력됐다는 건….” 나는 곧장 제 3의 눈을 일으켰다. 그리고 제대로 발동된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시선을 돌리니 약 20 미터 정도 떨어진 왼편서 멍하니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안솔이 보였다.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은데,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은 표정이다. 이윽고 안솔과 시선을 맞춘 순간, 갑자기 장난기가 일었다. “오, 오라버니?” 안솔의 부름에 나는 전혀 소리 내지 않고 입만 벙긋벙긋 움직였다. ‘안, 솔.’ 이라고. 그러자 안솔의 정수리로 물음표 하나가 동동 떠오른다. “에? 오, 오라버니? 잘 안 들려요!” 그 말에 나는 ‘잘, 있, 어.’ 라고 최대한 느릿하게 입을 움직였다. 이어서 최대한 초연한, 그리고 약간 미안해하는 기색을 보이려 애쓰며 스리슬쩍 물러나기 시작했다. 안솔은 한동안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갑자기 “앗!” 소리를 지르며 눈을 크게 치떴다. “오, 오라버니! 거짓말이죠? 마, 맞아. 오라버니가 죽었을 리가 없어.” 오, 성공한 모양이군. 나는 살짝 웃으며 스르르 미끄러지듯이 뒷걸음질 쳤다. “아, 안 돼요! 오라버니! 가지 말아요! 으앙!” 나를 쫓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안솔은 금세 몸을 일으켜 땅을 박찼다. 중간에 한 번 심하게 넘어지기는 했지만, 기어코 죽자사자 따라와 나를 꽉 붙잡는다. 그리고 그렁그렁한 눈을 들더니 기어코 울음을 터트렸다. “어엉…. 오라버니…. 잘못했어요…. 제발 가지 마세요…. 앞으로 컵도 안 훔치고 말도 잘 들을 테니까…. 어어어엉….” 조금 장난이 심했나. 펑펑 우는 안솔을 보니 약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것 같아 고맙기도 했고. 나는 안솔의 머리를 부드러이 쓰다듬어줬다. 그러자 또 무슨 오해를 했는지 더욱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한다. “안 돼요! 이대로 가시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아직 저랑 그것도 못했는데! 으아아앙!” “안…. 응?” “최소한 저랑 한 번은…! 아, 안 돼. 이럴 시간이 없어. 지금이라도 빠르게…!” “…….” 그렇게 말한 안솔은 왼손으로 내 바지를 끌어내리는 동시, 오른손으로 자신의 로브를 훌렁훌렁 벗어 젖히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응시하다가, 불현듯 깜짝 놀라 안솔의 정수리를 쥐어박았다. 퍽. “이 녀석이!” “아악!” 약간 힘을 담아 때리자 안솔이 머리를 감싸 안으며 철퍼덕 주저앉는다. “아, 아파라~. …에? 오, 오라버니?” 입을 삐쭉 내밀던 안솔이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바라본다. “주, 죽으신 거 아니셨어요?” “죽기는 누가 죽어. 아무튼, 방금 무슨 짓이야?” “아, 아니…. 오라버니가 그대로 가버리실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래서…. 사라지시기 전에…. 얼른 임신하려고….” “이, 임신? 너 인마.” …하. 이제 정말로 막 나가는구나. 어이없는 기분에 쳐다보자 안솔이 발끈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왜요! 그럼 적어도 애라도 보고 살 수 있을 거 아니에요! 그리고 애초에 장난치신 오라버니가 나빠요!” 나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머리를 젖혔다. 뭘 잘했다고 눈 동그랗게 뜨고 또박또박 대드는지. 정말이지 기가 막히는 기분이다. 이래서 자식 키워봤자 소용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 같다. “아이고…. 왜 이렇게 시끄러워요…. 머리 아파 죽겠는데.” 그때 선율의 힘겨워하는 음성이 들렸다. 선율은 나처럼 이마를 짚은 채 비틀거리며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사라, 하승우, 남다은, 임한나, 신재룡, 한소영…. 백한결은 기절한 듯이 뻗어 있었으나, 거의 모두가 정신을 차린 것 같다. 이윽고 스스로 뺨을 짝짝 때린 선율이 살그머니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우리 설마 죽은 건 아니겠죠?” 엄숙히 머리를 가로저으려다가, 선율의 눈이 게슴츠레 변한 것을 보고 그만두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 돌기둥 같은 것들이 있지 않았어요?” 가슴이 무거운지 임한나는 등을 두드리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말대로였다. 사방은 어두운 숲으로, 우리가 공간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풍경을 보이고 있었다. 확실히 기억하고는 있으나, 딱 하나 차이가 있다면 바로 기둥의 유무였다. 아스트랄 차원의 통로를 열어주었던 15개의 기둥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을씨년스러운 공터만이 휑하니 남아 있을 뿐. 이건 과거의 기억과 똑같네. 여하튼 최후의 순간, 이유정의 외침을 듣고 모래 시계를 베어버린 것까지는 기억한다. 한데 이후의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그냥 하얀 것밖에 보지 못했다는 표현이 옳으리라. 어찌어찌 빠져 나오기는 성공한 것 같은데, 과연 어떻게 된 걸까…. “유, 유정이가!” 그때 임한나가 갑자기 하늘을 가리키며 외쳤다. 바로 시선을 올리니 아직도 공중에 떠오른, 온몸이 어른어른 불타오르는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보인다. 전신을 휘감은 금빛의 불길은 이제 막 서서히 꺼져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유정은 아련해 보이는 얼굴로(나도 처음 보는 표정이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마치 누군가를 배웅이라도 하듯이. 하늘로 뻗은 손끝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가루가 밤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아니. 비단 이유정뿐만이 아니었다. 나도 그랬거니와, 다른 모든 동료의 몸에도 반짝이는 가루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허나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도 전, 빛나는 가루는 모조리 바람을 타고 올라 하늘로 사라졌다. 그 후에야 이유정이 천천히 하강을 시작했고, 황금빛 기운도 완전히 사그라졌다. 자세히는 모르나 비슷한 현상은 예전에 몇 번 본 적이 있다. 나는 곧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이유정(4년 차) 2. 클래스(Class) : 용병 여왕(Secret, Mercenary Queen, Expert)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S Zero) 5. 진명 • 국적 : 야만 왕의 후인(後人)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6) 7. 신장 • 체중 : 166.3cm • 54.5kg 8. 성향 : 호전 • 순정(Aggressive • Pure Love) [근력 87] [내구 84] [민첩 94(+2)] [체력 88] [마력 90] [행운 88] < 업적(1) > < 고유 능력(1/1) > 1. 야성(野性)(Rank : B Zero) * 사자 왕의 영향으로 특수 능력 ‘피에 젖은 마음’이 고유 능력 ‘야성(野性)’으로 진화합니다. < 특수 능력(1/1) > 1. 동체(胴體) 강화(Rank : D Zero) * 사자 왕의 영향으로 새롭게 생성된 능력입니다. < 잠재 능력(3/3) > 1. 달빛 단검술(Rank : B Zero) * 오브아나 알카트라츠의 영향으로 ‘양손 단검술’이 ‘달빛 단검술’로 진화합니다. 2. 묘(猫) 족 체술(Rank : B Zero) 3. 야수(野獸)의 이빨(Rank : C Plus) * 베가스의 영향으로 ‘백병전’이 ‘야수(野獸)의 이빨’로 진화합니다. < 최근 능력치 비교 > 전 : [근력 83] [내구 79] [민첩 92(+2)] [체력 84] [마력 90] [행운 88] 후 : [근력 87] [내구 84] [민첩 94(+2)] [체력 88] [마력 90] [행운 88] < 권능 : 사자후(獅子吼)> “허.” 이유정의 사용자 정보를 확인한 순간, 속으로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래도 아스트랄 차원에서 모종의 기연을 얻은 듯싶다. 레어 클래스에서 시크릿 클래스로 상승한 걸 보면 거의 100%일 것이다. 그나저나 여명의 검투사나 베가스 스티그마까지는 이해가 가는데, 사자 왕이라고? 아차. 그러고 보니 여기가 야만 왕의 무덤이던가? 그러면 이유정은…. “아…!” 그때였다. 한참 생각을 잇던 찰나, 비로소 땅에 안착한 이유정이 허물어지듯이 쓰러졌다. 나는 아까 마녀의 손에 관통 당한 기억을 떠올리고는, 이형환위를 사용해 곧바로 이유정을 받아냈다. 흡사 공주님을 안는 듯한 자세라 약간 민망했지만, 가슴에서 핏물을 철철 흘리는 이유정을 보니 민망함은 바로 사라졌다. “오빠….” 아직 의식을 잃지는 않았는지 이유정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나…. 잘했어?” 이어서 떨리는 음성으로 조심스레 묻는다. …나 잘했어 라고. 잠깐이지만 가슴이 살짝 찔리는 기분을 느꼈다. 상당한 중상을 입었음에도 아픔을 호소하는 게 아닌, 내 평가를 바라고 있다. 아마 근래 혼자서 꽤 속을 썩이고 있던 것 같다. 우선 궁금한 것은 나중으로 미뤄두기로 하고, 나는 차분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잘했다.” 이유정은 그제야 안심한 듯한 기색을 비치고는 끊어질 듯이 숨을 흘렸다. “조금만 참아. 사제를 부를 테니까.” 그리고 바로 시선을 돌렸으나, 곧 따로 부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솔과 신재룡은 호들갑을 떨며 지팡이를 찾고 있었고, 다른 동료들은 물약을 외치며 어딘가에 버려진 아기 미믹을 찾고 있었으니까. 나는 싱겁게 웃으며 상처 난 구멍에 손을 얹고 화정의 힘을 일으켰다. 상처 치료에 많은 도움은 못 돼도 몸이라도 따뜻하게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잠시 후. 치료에 들어간 두 사제와 하얀 빛에 휩싸인 이유정을 보며, 나는 비로소 이번 원정이 끝났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 나는…. 아니. 우리는, 성공했다. ============================ 작품 후기 ============================ 후후. 마녀의 몸(?)과 뺏은 마녀의 장비 이야기는 다음 회에 하도록 해요. :) 그리고 정말 감사하게도, 조아라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습니다. 드디어 제 누명, 아니 오명을 벗을 기회가 온 것이지요. 하하! 정말로 기쁘네요. :D 0753 / 0933 ---------------------------------------------- To Kill, Or Not To Kill? 각성 시크릿 클래스 ‘광휘의 사제(Brilliance Priest)’를 계승한 이후, 안솔은 항상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죽은 게 아니라면 누구든 살려낼 자신이 있다고. 그리고 안솔은 이번에도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유정은 상당한 중상을 입은 상태였으나, 덕분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안솔의 치료 주문을 필두로, 신재룡의 보조 주문과 가지고 온 물약을 완전히 쏟아 붓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유정이 물약 좀 그만 들이부으라고 양손을 휘젓는 동안, 나는 아까 마녀에게서 뺏어둔 성과를 하나하나 챙기기 시작했다. 꽃의 마녀 정도가 사용하던 장비라면 상당히 좋은 효과가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혼돈의 솜니움(Somnium Of Chaos)』 1. 일반 설명. Ⅰ. ‘일인 군단’으로 불린 꽃의 마녀 ‘필리아 트리토리스’를 상징하는 마력 빗자루입니다. 마녀의 독자적이고 신비한 주술이 영구히 간직된, 오직 마(魔)를 추구하는 자들을 위한 최고의 장비입니다. Ⅱ. 마법사, 마도사(Secret), 마녀 클래스 전용 장비입니다. Ⅲ. 주인을 가리는 장비입니다. 주인 의식에 성공할 경우, 혼돈의 솜니움은 해당 사용자가 사망할 때까지 귀속됩니다. * (주의) 남성은 손대는 것조차 싫어할 정도로 극도로 혐오하는 경향이 있으며, 오직 여성만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빗자루입니다. 남성이 주인 의식을 치를 경우 실패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거니와, 아예 호응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2. 상세 효능. Ⅰ. 파괴의 기원이 각인돼있습니다. 사용자가 영창 하는 모든 주문의 출력이 200%로 향상됩니다. Ⅱ. 가속의 기원이 각인돼있습니다. 사용자의 마력 흐름이 3배로 상승합니다. Ⅲ. (봉인) 상승의 기원이 각인돼있습니다.(마녀의 모자와 연동 시 봉인이 해제됩니다.) Ⅳ. 저장의 기원이 각인돼있습니다. 빗자루에 10개의 주문을 각인할 수 있으며, 하루를 기점으로 초기화됩니다. Ⅴ. 비행의 기원이 각인돼있습니다. 빗자루를 이용해 하늘을 비행하는 게 가능합니다. Ⅵ. (봉인) 보호의 기원이 각인돼있습니다.(마녀의 로브와 연동 시 봉인이 해제됩니다.) “와.” 우선 제 3의 눈으로 빗자루를 확인한 결과, 나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이건 비비앙이 가지고 있는 질서의 오르도와 비견될 정도로 좋지 않은가. 일반 설명은 그렇다 치고, 상세 효능은 정말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는 것들이다. 거기다 모자와 로브는 이미 획득했으니 남은 효능의 봉인 해제도 시간 문제였다. 안 그래도 돌아가면 마법사와 정령 소환사 육성에 힘을 쏟을 생각이었는데, 마침 아주 좋은 성과가 나와줬다. 아마 경매에 올리면, 북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사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거라 장담할 수 있을 정도의 성과였다. 원래 원정의 끝은 보상으로 매듭짓는 법. 좋은 성과를 얻자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이야, 마력 흐름이 세 배로 상승한다고….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효능인데. 아무튼, 빗자루는 챙겼고. 모자랑, 로브랑…?” 그때였다. 콧노래를 부르며 지면에 널브러진 것들을 주섬주섬 줍는 찰나, 어디선가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누군가 싶어 흘끗 시선을 돌리니 보랏빛 머리카락의 여인이 보인다. 길게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똑같은 색의 눈동자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 어딘가 낯설지 않은 눈이라고 생각한 순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 마녀?” - 호? 화정도 봤는지 가벼운 탄성이 머릿속을 울린다. 그랬다. 수풀에 주저앉은 채 나를 바라보는 성숙한 여인은 바로 마녀였다. 차원이 부서짐과 동시에 소멸했다고 생각했는데…. “젠장, 살아 있었나?” 나는 신속히 무검을 뽑아 마녀를 겨눴다. 그리고 힘껏 노려보았으나, 마녀는 별다른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까처럼 무심하디 무심한 눈으로 나를 응시할 뿐. 혹시나 싶어 곧바로 제 3의 눈도 사용해봤으나, 아예 읽히지 가 않는다. 다른 차원도 아닌 현세에서 읽어 들이지 못하는 경우는 정말로 많지 않다. 끽해야 통과의례에서 한 번, 그리고 지옥 대공과 조우했을 때 한 번 정도? 한참을 노려보자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경계를 풀지 않고 차근차근 거리를 줄였다. - 헤…. 제 3의 눈으로도 읽히지 않는다니. 신기하네. ‘화정? 어떻게 된 거지?’ - 흐응. 글쎄. 짚이는 게 없는 건 아닌데…. 우선 쟤한테 말 좀 걸어볼래? ‘말을 걸어보라고?’ 그 순간. “이상합니다.” 여인 특유의 높은 톤의, 그러나 흡사 로봇이 내는 듯한 차가운 기계음이 귓전으로 흘러들었다. 말을 걸기도 전에 마녀가 먼저 입을 연 것이다. “분석 결과, 그 빗자루는 사내의 손길을 허용하지 않는 일종의 마도.” “…….” “허나 당신이라는 사내는, 어떤 부작용 없이 빗자루를 만지고 있습니다.” “어? 그러고 보니….” 확실히 비슷한 정보를 읽은 것 같은데. 나는 얼른 빗자루를 살펴보려다가 아차 시선을 올렸다. 지금 이게 문제가 아니잖아. “너는 누구지?” “질문의 범위가 매우 광범위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인 질문이라면 회답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마녀는 여전히 주저앉은 채 딱딱하기 짝이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사실 저런 육성은 듣는 입장에서 상당히 거슬릴만한 목소리였으나, 마녀가 저렇게 말하니까 묘하게 어울린다.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너는 현재 어떤 존재지? 그리고 무슨 목적을 갖고 있지?” 마녀는 무뚝뚝이 눈을 깜빡깜빡 감았다가 뜨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 미처 돌아가지 못한 조각이며, 근원의 극소한 부분. 말인즉 불완전한 존재. 그리고 현재 목적은 죽음의 기다림입니다.” 돌아가지 못한 조각? 근원의 극소한 부분? 아니 아니,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고? - 아하. 역시 그랬군. 무슨 말인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화정은 무언가 알겠다는 듯이 또 한 번 감탄을 터뜨렸다. 나는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화정에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된 거야?’ - 응? 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꽤 복잡하게 얽힌 것 같은데. ‘괜찮으니까.’ - 음…. 그럼 처음부터 짚어보자고. 아까 부서진 공간의 정체는 알고 있지? ‘마법의 근원, 초 정보 집합체 등등. 총칭해서 아스트랄 차원.’ - 그래. 그리고 마녀와 악마는 너희의 소멸을 조건으로 스스로를 제물로 바쳤고, 결과적으로 차원의 의식을 몸으로 끌어당겼지.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 존재의 정체는 마녀도, 악마도 아니야. …확실히 그렇다. 아까 격전을 치르면서 두 존재의 소멸을 확인했다는 근원의 음성을 얼핏 들은 기억이 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한 생각이 번뜩 뇌리를 스쳤다. ‘그럼, 설마….’ - 맞아. 비록 육체는 마녀의 것일지라도, 육신 안에 담긴 것은 잔존한 근원의 의식 흐름이겠지. 물론 극히 일부에 불과하겠지만. ‘잔존한 근원의 의식 흐름?’ - 응. 이건 내 추측인데, 근원은 아마 ‘멸망의 거울’을 실행했을 때부터 돌아갈 준비를 했던 것 같아. 그대로 계속 있으면 자신마저 위험할 수 있으니까. 아니면 더 방법이 없다고 여겼을 수도 있고. 어쨌든 원래 자신이 있어야 할 근원(根源)으로 돌아가려고 했겠지. 그런데 바로 그 돌아가려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거야. ‘…….’ - 조금 더 정확하게 설명해줄까? 아까 말하기는 했지만, 근원은 결국 제물이 내건 조건을 이루지 못했어. 너희는 근원이 최후의 계획인 ‘멸망의 거울’ 꺼내 들게 만들 정도로 몰아붙였고. 그리고 결국 그 애송이와 네가 합작해서 모래시계를 부수기까지 했어. 즉 근원에게는 그 결과 자체가 상정 외의 계산이었던 거지. 설명은 어느 순간부터 난해해지고 있었다. 문득 이러나저러나 그냥 콱 죽이면 편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러나 열심히 설명하는 화정 앞에서 티를 낼 수는 없으니, 우선은 경청하는 게 나으리라. - 사실, 나도 아직 추측일 뿐이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어. 이런 경우는 굉장히 드물거든. 아무튼, 이건 나도 생각 좀 해볼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봐. 그러고 보니 쟤 연구할만한 가치는 있을 것 같은데? ‘그런가?’ 화정의 말에 나는 의문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신격에 달한 화정조차도 명확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는데, 감히 인간인 내가 끼어들 수 있으랴. 이렇게 자기 합리화를 거치고 나서, 나는 남은 질문 하나를 추가로 던졌다. ‘그럼 죽음을 기다린다는 말은 무슨 뜻이지?’ - 응? 아아. 현재 저 몸에 잔존한 근원이 갇혀 있다고 가정해보면, 어떻게든 돌아가려고 몸부림을 치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저 몸이 완전하게 죽어야 하거든. 나는 살그머니 낯을 찌푸리며 마녀, 아니 잔존한 근원을 응시했다. “근원으로 돌아가려고 죽는다고? 그럼 자살하면 되잖아?” “Negative. 불가합니다. 자살은 근원으로 가는 길이 차단되는 최악의 방법입니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꺼낸 찰나, 고요한 음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돌아온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살은 할 수 없다는 소리 같다. 이왕 밖으로 뱉은 김에 나는 계속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그럼 너는 현재 그 몸에 갇힌 상태인가?” “그렇습니다. 근원으로 회귀하던 와중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미 근원으로 돌아간 84.72% 흐름은 어쩔 수 없지만, 조건을 달성하지 못한 이상 남은 15.28%는 강제적인 원칙에 묶였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기다린다?” “그렇습니다. 이미 육신의 원래 영혼은 무로 돌아간 상태. 제가 머무름으로써 육체가 어느 정도 기능하고 있지만, 오랜 시간을 버티지는 못합니다. 앞으로 정확히 37분 24초 후 이 육신은 완전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너는 원래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거고.” “정확합니다.” 근원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가만히 응시하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내가 네 말을 어떻게 믿지? 이대로 그냥 버리고 갔다가, 네가 스스로 몸을 회복하고 덤벼올 수도 있을 텐데?”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현재 그 목적은 완전히 상실된 상황이며, 또한 제가 당신을 살해하는 건, 현재 전력으로는 100% 불가능합니다. 왜 그런지는 당신이 더 잘 알 것이라 생각합니다.” “음….” “정 불안하면, 지금 바로 저를 살해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근원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담담히 말을 이었다. 나는 한동안 정면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무검을 내리고 팔짱을 꼈다. “그럼 반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딱히 꼭 살리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저 근원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내 앞에 있는 존재는 이 세상 최고의 마법사일지도 모른다. 말인즉 이제 끝이 다가온 귀환 계획에 한층 탄력을 붙여줄 정도가 된다는 소리다. 저 근원이 보여준 능력은 그 정도로 상당히 인상 깊었다. 그리고 화정도 은근히 기대하는 것 같은 투로 말하기도 했고 말이지. 근원은 고개를 갸웃하기는 했으나, 곧 입을 열었다. “살고 싶다는 생각도, 죽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 적은 없습니다. 제가 죽으려는 이유는, 그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회귀하려는 본능적인 움직임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첨언하자면, 현재 제 상태는 죽음이 확정돼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소생은 불가합니다.” “응? 불가하다고? 엘릭서로도?” “그렇습니다. 설령 어떤 천고의 영약을 가지고 온다고 하더라도, 영혼 없는 육체는 삶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이 흘러가는 이치.” “…….” “혹여 이 이치조차도 비틀어버릴 수 있는, 좀처럼 있을 수 없는(Blue Dahlia) 기적이 존재한다면 몰라도….” “오라버니! 치료 끝났어요오오오!” 그때 안솔의 호들갑스러운 음성과 동시에 방정맞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아직, 기적이 남아 있던가? ============================ 작품 후기 ============================ 아니 잠시만요. 제가 다른 코멘트는 그냥 어깨만 축 늘어트리고 말겠는데, ‘압박 붕대?’ 는 보고 뿜었네요. 이건 정말 기상천외해요.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죠? 아니 제가 사내인데 왜 압박 붕대가 필요합니까! 저 가릴 가슴도 없어요. 아이고 정말. 아무튼, 인터뷰는 저번에 조아라에 방문했을 때 잠깐 이야기를 들었고요. 아쉽지만 제 사진은 올라가지 않습니다. 대신 캐리커쳐가 올라가지요. 하하. 그것도 수염도 붙여서 남성성을 잔뜩 강조할 생각입니다. :) 그리고 조아라에서 보내주신 추가 질문을, 제가 워드로 답변을 작성하고 있는데요. 거기서 재미있는 질문이 있더라고요. Q.5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 할 작가님의 성별은? 제가 아주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습니다. 이 질문에 관한 답변,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억울함을 토로하고 남성이라는 사실을 어필하겠습니다. 많은 기대 부탁 드립니다. _(__)_ 0754 / 0933 ---------------------------------------------- To Kill, Or Not To Kill? 코를 스치는 공기가 차갑다. 아무래도 아침이 찾아온 모양이다. 잠에서 깨어난 정신은 이마에 미약한 현기증을 일으켰고, 나는 눈을 감은 채로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어젯밤 근원에게 기적을 사용한 이후, 우리는 지친 몸을 이끌고 연기의 숲으로 향했다. 사실은 최대한 빠르게 도시로 돌아갈 요량이었는데, 전투 직후라 그런지 모두 체력이 심히 떨어진 상태라 긴 시간을 행군하지 못하고 야영 캠프를 차렸다. 그리고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침낭으로 직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튼, 이대로 계속 웅크리고픈 마음이 굴뚝이었으나 나는 억지로 침낭 밖으로 몸을 움직였다. 숲에는 여전히 연기가 흐르고 있었다. 모든 일이 끝났으니 걱정은 들지 않으나 어쨌든 연기의 효과는 적용된다는 뜻일 터. 나야 화정의 영향으로 걱정이 없으니 미리 일어나 변화를 구경하는 것도 일종의 재미이리라. “으응?” 이윽고 침낭에서 기어 나와 눈을 뜨니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동료들이 보인다. 약간은 정신이 멍해졌다. 경계를 서다가 잠들면 그나마 이해라도 하는데, 아예 침낭 속으로 들어와 잤다고? 미친 건가라고 생각할 무렵, 문득 야영지 중앙에 홀로 앉아 있는 가녀린 체구의 여아가 눈에 들어온다. 이제 갓 초등학생에서 중학생 정도 돼 보이는 체구와, 가끔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 행동이 흡사 경계를 보는 듯하다. 나는 한참을 멍하니 응시했다. 누구인지는 알고 있다. 어젯밤 안솔의 기적으로 새로운 삶을 얻은 마녀, 아니 근원의 조각이라고 해야 하나. 결과적으로 어젯밤 나는 기적의 사용을 허락했고, 그리하여 근원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 사실 예전 같았으면 오랫동안 두고 보고 결정을 내렸을 터인데, 생명의 끈이 30분 남짓 남은 상황은 빠른 결단을 요구했다. 물론 독단적으로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동료들을 불러 상황을 설명한 결과, 반응은 ‘살려도 나쁘지 않겠다.’ 는 의견으로 기울었다. 제갈 해솔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여러 마법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요?’ 라는 말로 설득을 주도했고, 원정대의 주를 이루는 마법사들의 호응을 얻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한 가지 신기한 일은, 그렇게 기적이 사용된 이후 마녀의 성숙한 육체가 갑자기 어려졌다는 것이다. 근원의 말에 의하면 ‘남은 근원의 흐름을 영혼 화하는 과정서, 그 극소한 양에 맞춰 육신이 최적의 형태로 구성된 것으로 추측합니다.’ 라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애초 근원도 정말로 기적이 실현될 줄은 예상치 못한 듯했고. 어쨌든 마법사인 만큼 능력이 보존된다면 큰 상관은 없다. 그냥 약간 아쉬울 뿐이다. 아군과 적을 떠나서 성숙한 마녀의 몸은 상당한 몸매를 자랑했다. 한데 저렇게 변했으니…. 에이, 맛만 아니 보기 좋으면 그만이지. “…….” 그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근원이 고개 돌려 나와 시선을 맞췄다. 내 시선을 느낀 모양이다.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은?” “제 설득에 의해 침낭으로 보냈습니다.” 근원의 회답은 약간 뜻밖이었다. 그나저나 약간 앳된 감은 있으나 여전히 딱딱하고 차가운 기계음이다. 한데 그게 또 잘 어울린다는 게 문제 아닌 문제다. “왜?” “경계 인원 모두가 피로를 호소했습니다. 그리하여 효율상 저 혼자 경계를 서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럼 너는?” “물론 저 또한 인간의 육체에 정착한 이상 생체 시스템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허나 어젯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치를 비트는 현상을 겪은 이후, 제 몸은 최상의 상태를….” 설명이 장황해지는 것 같아 손을 들자 근원은 곧장 말을 멈췄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앞으로 그럴 필요는 없어. 인간은 원래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는 존재거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 이건 새겨들어도 좋아.” “…액셉트.”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근원을 보니 약간은 불안이 덜어지는 기분이다. 어제 급하게 결정을 내린 감이 있어 살리고 나서 내내 잘한 짓일까 고민했는데, 잠든 사이 기습은커녕 홀로 경계를 서지 않았는가. “저도 하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근원이 진한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동시에 아침 연초 생각도 떠오른다. “뭔데? 왜 너를 살렸느냐는 거?” “Negative.” 근원은 아주 간단히 부정했다. “그럼 뭔데?” “왜 몸이 그렇게 변했습니까?”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그러나 연초를 꺼내려 품에 손을 넣은 순간, 나도 모르게 멈칫 행동을 정지하고 말았다. 왜. 왜 도복 밖으로 손이 보이지 않는 거지? 왜 옷소매 3분의 1 이상이 축 늘어져 있는 거지? 억지로 소매를 걷어 올리자 한껏 얇아진 팔과 고사리 같은 손이 눈에 들어온다. “뭐, 뭐야?” 잠깐만. 그러고 보니 내 목소리가 왜 이래? 무슨 어린애 목소리처럼…. “헉.” 그 순간 한 생각이 빛살처럼 뇌리를 스쳤다. 혹시나 싶어 시선을 내리자 아니나 다를까. 근원보다도 훨씬 어려진 내 몸을 볼 수 있었다. 안개의 영향으로 신체 나이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어허어헉!” 우선 예의상 비명을 한 번 지른 후, ‘화정, 화정!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곧바로 화정을 찾았으나 회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명색이 신이 까먹었을 리가 없다. 잠들었거나 이 상황을 의도하고 즐기는 게 확실하다. ‘야, 갑자기 왜 이래? 서운한 거라도 있었어? 화정!’ 몇 번이나 애타게 불렀으나 화정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러는 동안 비명에 깨어난 동료가 하나하나 침낭에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함…. 무슨 일이에요. 수….” 눈을 비비며 일어나던 정하연은 나를 보고 말을 멈췄다. “갑자기 웬 비명이…. 어머.” 무거운 가슴을 끌고 나오던 임한나도 화들짝 놀라며 입을 가린다. “…….” 한소영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허나 입술을 살짝 벌린 채 경악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으읍? 으으으읍?” 선율은…. 또 상태 이상 침묵에 걸린 모양이다. 잠시 후. “아….” 깨어난 여인들은 멍한 눈으로 야릇한 비음을 토하더니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 아침에 한바탕 커다란 폭풍이 야영지를 휩쓸고 지나갔지만, 어찌어찌 무사히 행군을 시작할 수는 있었다. …아니. 실은 조금도 무사하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야영 캠프를 정리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원정대의 여인네들은 중간중간 서로 모여 무언가를 수군거리더니(심지어 한소영도 그 모임에 동참했다.), 갑자기 한소영이 다가와 나를 불쑥 안아 들었다. 나는 이게 무슨 짓이냐며 최대한 바동거렸으나, 꺅꺅거리는 소리와 뜻 모를 뜨거운 눈초리, 그리고 ‘저한테도 똑같은 짓을 하셨잖아요?’ 라는 한소영의 속삭임에 몸을 축 늘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에는 얌전히 한소영의 품에 안긴 채로 행군이 시작됐다. 물론 한소영의 품에 안기는 건 무한한 영광이기는 하다. 가끔 내 정수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미칠 듯이 부드럽고, 은은히 풍겨오는 살 내음은 정신을 놓을 정도로 향기롭다. 허나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상황이 상당히 민망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나는 평소 신성한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한소영의 가슴에 닿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써야만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를 끌어당기니 이만저만 곤란한 게 아니었다. 그냥 눈 딱 감고 성역을 침범할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왠지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건지….’ - 하아…. 하아…. ‘화정? 화정!’ - 짜릿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니까? 너 나한테 섭섭한 거라도 있어?’ - 늘 새로워. ‘젠장,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정신 좀 차려!’ - 어린 게 최고야. …기껏 깨어난 화정도 이 모양이다. 이 망할 연기가 원정대 여인네들에게 단체로 쇼타 콤플렉스 효과를 걸었는지 모를 일이나, 어쨌든 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내게 없다. 그나마 하나 불행 중 다행은, 내게 모든 관심이 쏠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젯밤 기적을 사용한 이후, 근원은 어느 정도 동료들의 관심을 가져가 주고(?) 있었다. “헤, 근데요. 우리 근원이한테도 이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름?” “네. 계속 근원이라고 부르기도 그렇고, 야나 너로 부르기도 그렇잖아요.” “흠. 확실히 그렇기는 한데….” 허준영이 턱을 어루만지며 동의하자 안솔은 총총히 근원의 옆으로 걸어가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그래서 제가 심사숙고해봤는데요. 러브러브라는 이름이 어떨까요? 근원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안솔은 방실방실 웃으며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다. 허나 그 순간 나는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찰나의 순간, 근원이 굉장히 불쾌하다는 듯 오만상을 찌푸린 것을. 아마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인 게 아닐까. “응? 어때요? 좋죠?” “…미안하다.” 안솔이 천연스레 말을 잇자, 한숨을 흘린 허준영이 근원의 아담한 어깨를 짚으며 사과했다. 왜 사과하는지 이해가 갔다. “하나 가르쳐주지. 인간은 무시가 통하는 상대도 있지만, 이 사제처럼 통하지 않는 상대도 있거든. 그러니 이럴 때는 얼굴에 침을 뱉으면 돼.” “에엑?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말아요!” “액셉트.” “애, 액셉트? 아, 아니라니까요!” 흠. 항상 선두에서 길을 찾다가 이렇게 후방에서 구경하니 나름 신선한 재미가 있다. 그리고 현재 선두에는 당연히 궁수인 임한나가…. 응? 왜 갑자기 걸음을 멈춘 거지? 왜 이쪽으로 걸어오는 거야? “임한나?” “이스탄텔 로우 로드. 시간이 됐어요.” 의아히 물은 찰나, 임한나가 이상한 소리를 꺼냈다. 그리고 무언가 잔뜩 기대하는 낯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제 제 차례예요.” 이어지는 말을 듣자 어느 정도 상황이 파악된다. 아까 모여 수군대던 건, 아마 나를 안고 행군할 차례를 정한 게 분명하다. 젠장, 이렇게 돌려지는 건 싫다는 말이야. 그러나 나는 곧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사실 그간 몸을 과도하게 앞으로 빼느라 목이 슬슬 아파왔기 때문이다. 상대가 임한나라면 부담 없이 몸을 맡길 수 있거니와, 받쳐주는 쿠션(?)도 상당히 훌륭하지 않겠는가. “…….” 한소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약간 경계하는 눈빛으로 나를 끌어안을 뿐. “안 돼요. 독점은 옳지 못해요. 이미 협의한 사항이잖아요?” 그러나 임한나는 똑 부러지게 말하며 나를 냉큼 채가 버렸고, “아.” 한소영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으며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아련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꼭 아이를 강제로 빼앗긴 어미를 보는 듯하다. 한순간 ‘정말로 나를 버리는 거예요?’ 라는 표정을 지어볼까 고민이 들었지만, 왠지 아수라장이 될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반대로 임한나는 퍽이나 만족한 미소를 짓고는 나를 꼭 끌어안으며 볼을 비볐다. “수현아~. 여기서부터는 누나랑 같이 가자? 후후.” 누구 멋대로 누나냐고 태클을 걸고 싶었으나, 살에 닿는 말랑말랑하고 물컹한 감각에 말이 쑥 들어갔다. 음. 이제 좀 편안하게 갈 수 있겠어. 이윽고 길게 숨을 흘리며 몸을 누인 찰나, 문득 목덜미로 약간 따끈따끈하고 촉촉한 감촉이 느껴졌다. 왜 이렇게 젖어 있는 거지? “잠깐, 잠깐만.” “왜 그래 우리 수현이~?” “아니…. 축축해서. 왜 이렇게 젖은 거야?” “응? 젖었다고?” 시선을 돌리니, 역시나. 다른 부분은 멀쩡한데 유독 가슴 부근이 흥건하다. 특히 가장 솟아오른 부분(?)이 유백색(乳白色)의 액체로 푹 젖은 상태였다. 오죽하면 안이 살짝 비칠 정도였다. “왜, 왜 이러지?” 임한나도 이제야 이상함을 느꼈는지, 검지로 옷을 슬쩍 들추고는 고개를 내렸다. 이어서 상냥하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엄마야!” 임한나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거세게 나동그라졌다. 가볍게 안착한 후 바라보자, 가슴을 꼭 끌어안은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여인이 보인다. “마, 말도 안 돼…. 아직 출산도…. 아니 임신도…. 아니 결혼도 못 했는데….” 무언가 큰 충격을 받았는지 임한나는 살짝 떨기까지 했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 그러고 보니 어디서 달큰하면서도 고소한, 흡사 따뜻이 데운 우유 내음이 물씬 풍겨오는데…. 그때였다. 공기 중에 흐르는 냄새를 맡은 순간, 꿀꺽. 갑자기 나도 모르게 군침이 넘어갔다. ============================ 작품 후기 ============================ 많이 늦었네요. 어제 오후 갑자기 엄습한 피로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_(__)_ 이번 에피소드는 이번 회를 끝으로 완전히 매듭지었고요, 아마 다음 회 안으로 도시에 돌아갈 것 같습니다. 가서 김수현에게 휴식을 주는 동시, 이유정이나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의 복선 회수, 악마 등 여러 소소한 에피소드를 다룰 예정입니다. 그리고 새로 오신 독자 분들께서는 전혀 소외감을 느끼실 필요가 없어요. 코멘트는 언제나 환영하며 항상 읽고 있습니다. 저는 메모라이즈가 완결될 때까지, 그리고 차기 작품에서도 여러분과 친하게 친구처럼 지내고 싶어요. ☞☜ 듬직한 ‘형’도 좋고, 활기찬 동갑내기 동성 ‘남자’인 친구도 좋고, 장난꾸러기 ‘남’동생도 좋아요. 그러니 전혀 부담 없이 저와 친목을 다져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D PS. 그리고 미리 말씀 드리는데, 마녀의 육체 나이는 이미 수백 살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냥 그렇다고요. 험험. 0755 / 0933 ----------------------------------------------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의 열쇠. 돌아가는 행군 속도는 들어갈 때와는 다르게 현저하게 느렸다. 강행군을 하면 이틀, 통상적으로는 사나흘이면 벗어날 수 있는 거리를, 무려 엿새가 지나고 나서야 벗어났으니 말 다한 셈이다. 그리고 숲을 벗어나도 상태 이상 효과는 연기에 영향을 받은 일수만큼 지속된다. 그럼 최대한 빠르게 통과해야 정상이건만, 행군은 누구나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느리고 또 느렸다. 하승우나 허준영은 그 점을 매우 이상하게 여겼으나 딱히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주변머리가 없는 사내들도 아니고, 원정대 여인들이 일부러 행군 속도를 늦추는 낌새를 눈치챈 것이다. 여기서 ‘아 왜 이렇게 행군 속도가 느립니까? 어서 빨리 가도록 합시다!’ 라고 말했다가는, 무수한 여인의 눈총을 받게 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였다. 그러니까 차후 돌아가는 내내 눈빛을 견뎌낼 깜냥도 없고, 애초 총대를 메는 게 싫기도 했고. 물론 그 눈총조차 한 방에 잠재울 수 있는 사내가 없는 건 아니었다. 딱 한 명 있기는 있다. 허나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김수현조차 이 속도에 별다른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결국 사내들은 암묵적으로 입을 다물기로 했고, 그리하여 느릿하기 짝이 없는 행군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렇게 숲을 벗어나자 어느새 하늘은 저물다 못해 어둑해져 있었다. 원정대는 서둘러 야영 캠프를 세우고 식사를 마친 후, 일찍이 침낭 속으로 들어가거나 모닥불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였다. 특히 여인들은 각자 구슬을 몇 개씩 들고 까르르 웃으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이것 좀 보세요. 수현이 밥 먹는 장면을 찍었는데 꼭꼭 씹어먹는 게 너무 귀엽지 않아요?” “에이, 그건 흔하죠. 저는 무려 하품하는 순간을 찍었다고요? 이거 보세요.” “어디요? 어머나, 어떻게 찍었어요?” “어머 어머. 입 벌리는 것 좀 봐. 손으로 입 두드리는 것 좀 봐.” 시간이 흐르고 밤이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인들은 구슬이 재생하는 김수현의 일상 생활을 보며 호들갑을 감추지 못했다. 그랬다. 김수현은 상태 이상 효과로 어려진 이후, 모든 생활을 대놓고(?) 촬영 당하는 중이었다. 이 상황이 천년만년 지속되지 않으니, 여인들은 현재 김수현의 모습을 기록용 구슬에 담아 간직하기를 원한 것이다. 남다은은 어린 김수현이 하품하는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보다가, 간절한 눈으로 누군가를 응시했다. “언니. 이거 저 주시면 안 될까요? 하품하는 영상이요.” “아무리 검후의 부탁이라고는 하나, 이번에는 안 돼요. 이거 찍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아, 곤히 잠자는 영상이라면 교환할 용의는 있어요.” 정하연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누군가 얼른 나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그건 안 돼요. 저번에 몰래 찍으려다가 수현이 정색하고 화냈잖아요. 적당히 좀 하라고. 이제는 잠자는 것까지 건드느냐고.” “맞습니다. 그때 클랜 로드, 최소한 잠잘 때만이라도 가까이 오지도 말라고 확실하게 말했습니다. 조금 무섭게요.” 사라가 약간 어눌한 말투로 말을 받자 전원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알고 있다. 현재 김수현이 자신들의 행동을 엄청나게 봐주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아직 원정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었기에, 조금이라도 선을 넘는 즉시 불호령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촬영은 물 건너간 일이 돼버리는데, 그건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후유, 그래도 오라버니 잠자는 모습은 꼭 찍고 싶은데요….” “저는 먼저 일어날게요.” 안솔이 아쉬운 한숨을 흘린 찰나, 양팔로 가슴을 가린 여인이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모닥불을 쬐어서일까. 뺨에 발그스름한 빛이 스며든 임한나의 모습은 흡사 감기에 걸린 이를 보는 듯했다. 안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니? 벌써 일어나시게요?” “응? 으응. 그냥 좀 일찍 자고 싶어서.” “근데 어디 아프세요? 얼굴빛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아, 아니야. 괜찮아. 푹 자고 나면 거뜬해지겠지.” 현재 상태 이상에 걸렸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기에 임한나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침낭으로 조심조심 걸어가는 와중, 등 뒤로 정하연이 “혹시 그날인가? 가슴이 더 커진 것 같은데….” 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임한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그날은 아니었지만, 가슴이 부푼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모유가 샘솟기 시작한 이후 여태껏 짜내지도 못하고 계속 쌓아둔 상태라, 흡사 젖몸살에 걸린 듯이 퉁퉁 부었을 정도였다. 그렇게 젖이 쌓이자 부드럽고 말랑말랑하던 가슴은 딱딱하게 뭉쳤고, 자연스레 어깨도 몸도 무거워졌다. 이윽고 자신의 침낭 앞에 도착했을 즈음, 임한나는 길게 한숨을 흘렸다. 침낭 중앙이 볼록하게 솟아 있다. 누가 들어가 있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통증이 이는 가슴을 부여잡고 침낭을 살짝 들추자, 어린 김수현이 닌자처럼 엎드려 있다. 이내 고개를 흘끗 들더니 뜨거운 눈으로 임한나를 응시한다. “어휴. 또, 또. 또 이래. 정말 어쩌려고 자꾸 이러는 거야….” 임한나는 쓰게 웃었다. 그나마 엿새라는 시간이 지났으니까 이렇게나마 웃는 거지, 사실 처음에는 많이 서운했다. 딱히 말한 건 아니나 김수현은 임한나가 젖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임한나도 들켰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김수현이 이후 틈만 나면 임한나를 졸졸 쫓아다녔다는 것이다. 그것도 무언가 조르는 듯한 눈빛으로. 임한나는 기가 막혔다. 아무리 상태 이상에 의한 효과라고는 하나, 결혼도 안 한 여인이 ‘그렇구나.’ 받아들이기에는 창피하고 수치스럽다. 한데 김수현까지 저런 반응을 보이니 못내 섭섭했던 것이다. 허나 시간이 흐르자 약간은 생각이 변했다. 우선은 어린 김수현이 굉장히 귀엽다. 인상부터가 확연하게 달라졌다. 항상 차갑고 어두운 일면만 보아오다가, 갑자기 따뜻한 귀여움으로 똘똘 뭉친 김수현을 보니 새로운 매력이 넘쳐 흐른다. 김유현이 왜 동생에게 죽고 못 사는지 이해가 될 정도였다. 또한 임한나는 천성이 어린애한테 사족을 못 쓰는 성격이다.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던 김수현이 근래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꾸만 관심을 보이니, ‘오죽 먹고 싶으면 저럴까.’ 라는 생각도 든다. 게다가 어차피 한 번은 짜낼 필요도 있었거니와 애초 몸도 섞은 사이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 임한나는 한참을 고심하다가 스리슬쩍 입을 열었다. “…딱, 이번 한 번만이야?” 그러나 김수현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절대로 싫다는 의미였다. 임한나는 폭폭 한숨을 흘리면서도 조심스레 침낭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한편 아주 살짝 기대감이 드는 것은 과연 어떤 이유 때문일까. 이윽고 임한나가 침낭 속으로 안착하자 마침내 허락했다고 여긴 걸까. 김수현은 불침 맞음 망아지처럼 황급히 손을 뻗었다. “안 돼. 가만히 있어. 멋대로 하면 안 줄 거야.” 그러자 멈칫 행동을 정지한다. 그 모습에 킥킥 웃은 임한나는 차분히 앞섶을 풀었고, 이내 풀어헤쳐 진 옷깃 사이로 뽀얀 젖가슴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살결이 흐르는 두 개의 젖무덤과, 수줍게 돌출된 예쁜 분홍빛 젖꼭지. 그러나 예전의 풍요로운 빛이 아닌, 한껏 부풀어 딱딱해진 상태였다. 임한나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잔뜩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김수현은 멍하니 쳐다봤다. 꿈에 그리던 궁전이 눈앞에 있다. 잠시 후. 입을 헤 벌린 김수현이 마침내 덥석 젖가슴을 물었다. 입안 그득히 문 채로 힘껏 흡입함에 임한나가 살짝 몸을 떨었지만, 빡빡 살을 빠는 소리만 날 뿐 젖은 나오지 않는다. 그동안 하도 쌓이다 보니 아예 뭉쳐버린 것이다. 허나 여기서 굴할 김수현이 아니었다. 곧 마사지하듯 양손으로 젖을 움켜 비틀며 있는 힘껏, 말 그대로 젖 먹던 힘을 다해 쪽 소리가 날 정도로 빨아들였다. 그 순간. 푸슛! 그동안 막혔던 것이 한꺼번에 터지는 느낌과 동시, “악…!” 임한나는 비명을 지를 뻔한걸,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음으로써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임한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번쩍 떴다. 한 번 뚫리기 시작하자 유방에 잠재된 젖물이 한순간 터지듯이 팽창해 어딘가로 치달린다. 그리고 젖꼭지를 통해 폭발적으로 분출되는 걸 느꼈다. 겨우 시선을 내리자 젖가슴이 우그러질 정도로 힘껏 머금은, 탐욕스레 흡입하는 김수현이 눈에 들어온다. 쭉~. 쭉~. 쭉~. 쭉~. 꿀꺽! 쭉쭉 빨아들이는 소리. 그리고 맛있게 삼키는 소리. 임한나는 끅끅 숨 넘어가는 신음을 질렀다. 아프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시원하다. 유두를 바늘로 콕콕 쑤시는 듯한, 아니 툭툭 터지는 것 같은 기분 좋은 아픔. 동시에 하부에 전기가 짜르르 흐르며 뜨거운 열기가 음부에 차오른다. 이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 서서히 떠오른다. 얌전히 내린 손은 어느새 김수현의 등을 미친 듯이 두드리고 있었으나, 김수현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거침없이 솟구치는 모유를 남김없이 빨아들였다. 이윽고 김수현이 잠시 입을 떼고 숨을 고르자, 발갛게 변한 유두와 쭉 치솟는 모유의 분수가 드러난다. 유백색 액체 한 줄기가 젖꼭지를 타고 흘러내리는 광경이 무척이나 야하다. 살짝 벌어진 입에서 침이 흘러내린다. 임한나는 대략 정신이 멍해짐을 느꼈다. 무겁던 젖가슴이 가볍게 비워지는 과정이 그렇게나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허나 아직 한쪽이 무겁다. 그것을 생각하기도 전, 임한나는 스스로 김수현의 목을 받치고 젖을 물리고 있었다. “흑…!” 금세 재개된 흡입에 임한나는 조금 전과 똑같은 쾌감을 느꼈다. 김수현이 온 힘을 다해 꿀꺽거릴 때마다 임한나는 전신이 짜릿짜릿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감각의 강도는 곧 몇 배 이상으로 강해졌다. “……!” 한쪽으로는 양에 차지 않는다는 듯, 김수현이 아예 양 가슴을 그러모아 한 입에 넣어 빨기 시작한 것이다. 어찌나 강하게 빠는지, 마치 강으로 맞춰 튼 청소기에 젖가슴이 빨려 들어가 없어지는 기분이다. 그 갑작스러운 기습에 놀란 임한나가 눈을 크게 치뜨며 허리를 비틀었다. “자, 잠…! 수, 수…!” 쭈욱! 쭈욱! 쭈욱! 쭈욱! 그 반응에 호응해 음란한 소리도 점차 커져갔다. “윽…. 흑…. 엉…. 어엉…!” 이윽고 임한나는 차오르는 쾌감을 이기지 못해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김수현을 떼어내려 발버둥을 쳤으나, 요지부동이다. 김수현은 득달같이 달라붙어 양껏 모유를 들이켰고, 그에 맞춰 임한나의 상냥하던 눈동자가 음란하게 까뒤집히기 시작한다. 그러다 결국, 임한나는 김수현을 바스러지듯이 껴안으며 몸을 크게 떨었다. 힉힉거리는 소리와 동시, 음부에서 액체를 찍찍 뿜어내며 하부가 뜨뜻미지근해졌다. 그렇게 한바탕 절정에 오른 이후 임한나는 풀린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축 늘어진 모습이, ‘모니카의 꽃’으로 추앙 받으며 뭇 사내들의 흠모를 받던 기품 넘치는 자태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도 김수현은 여전히 찰싹 달라붙어 젖을 빠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제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이제는 그럴 힘도 없다. 그저 작살 맞은 물고기처럼 이따금 몸을 경련할 뿐. 그날, 결과적으로 임한나는 그동안 쌓은 모유를 모조리 분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새벽 내내 김수현에게 시달리고 말았고, 결국에는 무려 여섯 번의 연속 절정을 맞이하고 나서야 간신히 기절할 수 있었다. * 도시로 돌아가는 길은 평탄했다. 중간중간 습격을 받은 적도 있으나 원정대 수준을 상회하는 괴물은 출현하지 않았다. 거기다 상태 이상 효과가 제거돼 원래대로 돌아온 후에는 그야말로 탄탄대로였다. 그때부터는 굳이 걸어갈 필요를 느끼지 못해, 우리는 올 때처럼 제갈 해솔의 수송 능력을 이용해 엄청난 속도로 귀환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숲을 벗어나고 엿새 동안에는 나름 즐겁고 신선한 시간이었다. 임한나가 상태 이상에 걸려준 덕분에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임한나는 처음에는 건드리지도 못하게 했지만, 계속 쫄랑쫄랑 쫓아다니자 결국 허락해줬다.) 허락해준 날 밤 이후, 나는 틈만 나면 정찰을 핑계로 임한나를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네 가슴을 빨았으면 해.’ 라는 의미로 빤히 쳐다보면, 임한나는 마지못해 하면서도 젖을 물려주었고, 나는 마음껏 욕구를 채웠다. 그 풍요로운 가슴에서 샘솟는 모유는 거의 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 수준이라, 내 시도 때도 없는 요구에 충분히 응하고도 넘칠 정도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상태 이상이 풀리기 전날 임한나가 크게 삐쳤다는 것이다. 수유(?)하는 와중 자꾸만 ‘수현이 어려지더니 입맛도 어려졌구나?’ 라고 놀리길래, ‘그럼 너는 가슴으로만 절정에 오르는 임퇘지.’ 라고 받아 쳤다가, 단박에 등짝을 맞아버렸다. 정말로 명백하게 토라졌다. 아까도 그렇다. 거의 도착을 앞둔 상황서 스리슬쩍 말을 걸었다가, 임한나는 ‘흥.’ 이라는 사랑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우선은 머쓱하게 물러났으나, 사실 크게 걱정은 하지 않는다. 기분을 풀어줄 방법은 이미 마련해뒀으니까. 이유정이 시크릿 클래스로 올랐으니, 이제 임한나도 시크릿 클래스로 오를 때가 되지 않았겠는가. 대충 때를 봐서 강철 산맥에서 얻은 무녀의 증표를 살그머니 찔러줄 생각이다. …아무튼. 문득 생각이 미쳐 시선을 돌리자 중앙에서 조용히 따라오는 이유정이 보였다. 뜻밖에도 이유정은 귀환 내내 조용했다. 어디 여인네들처럼 호들갑을 떨며 나를 도촬하지도 않고, 그냥 쥐 죽은 듯이 따라왔을 뿐이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기죽은 모습은 아니었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는데, 아마 사용자 정보를 확인하는 듯했다. 나는 그런 이유정을 굳이 건들지 않았다. 누가 가르쳐주는 것보다는 스스로 깨닫는 게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알기 때문이다. 말인즉, 시크릿 클래스를 얻었다고 끝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뒤늦게나마 사용자 정보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면, 이유정은 앞으로 확실하게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180도 변신할 이유정을 기대하며 나는 도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100 미터 앞으로 붉은 황무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틀란타 도착까지는 반나절도 남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업데이트 확인을 눌렀는데 왜 이렇게 완료 표시가 안 뜨는지. 기다리다 못해 한 번 더 눌렀다가 두 편 올라간 거 보고 놀라서 얼른 하나 삭제했네요. 우선, 거듭 말씀 드리지만 저는 남성입니다. 당연히 이성을 좋아해요. 그런데 왜 어제 남성을 강조했느냐. 외로워서 그런 게 아니라, 제가 이성에게는 낯을 좀 심하게 가립니다. 엄청 부끄러워해요. 그래서 차마 여성분이라고 적지 못했습니다. 아니 좀 그렇잖아요. (__ )* 그리고 여러분. 오해는 거두어 주세요. 제 의도는 별 것 없습니다. 그저 여러분도 아기인 시절이 있었고, 저는 그 시절의 따뜻하고 아늑한 느낌을 되살려내려는 의도로…. ……. 네. 맞아요. 저 변태 맞습니다. 그래요, 저 가슴 좋아해요. 변태라고 불러주세요. 아니, 근데요. 솔직히 저와 같은 남성분들 중에서 가슴 싫어하는 분 없지 않아요? 그, 그리고 남자가 변태면 또 어떠합니까.(당당.) 0756 / 0933 ----------------------------------------------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의 열쇠. 붉은 황무지로 진입한 우리는 한 번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행군했다. 거기다 제갈 해솔의 수송 능력에 힘입어, 마침내 늦은 오후에는 도시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남쪽 정문으로 들어오기는 했으나 바로 헤어지지는 않았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클랜원들을 먼저 캐슬로 보낸 후, 나는 한소영을 배웅하기로 했다.(중간에 선율이 ‘아, 수지가 안 맞네~. 고생만 실컷 하고 얻은 게 없는 원정이었어.’ 라고 투덜댔지만, 그나마 양심은 있는지 곧 조용해졌다.) 잠시 후, 도시를 잇는 통로를 앞두고 나와 한소영은 굳게 손을 맞잡았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요. 고생은요. 나름 좋은 경험이었어요.” “그때 홀로 연기를 걷어내 주신 것, 그리고 치명상을 입히신 것 모두 잊지 못할 겁니다.” “금칠이 어색한 건 오랜만이네요. 저야 적절한 행동을 취했을 뿐, 상황을 만든 건 머셔너리 로드에요.” 진심으로 한 말이었으나 한소영은 겸손히 응수했다. “아무튼, 이번 일은 차후 꼭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보답이요…. 아니요. 괜찮아요.” “예?” “보답은 이미 받았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한소영은 품속에서 작은 구슬 하나를 꺼냈다. 기록용 구슬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눈이 즐거울 것 같다는 뜻이에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지? 그러나 한소영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고개를 느릿하게 가로저었다. 그때 찰나의 순간이기는 했지만,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간 것 같다. 아니, 잘못 본 건가? “배웅해주신 거 감사해요.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지요.” 이윽고 기록용 구슬이 말간 빛을 뿜는 동시, 한소영은 빠르게 나를 스쳤다. (머셔너리 로드.) (냠냠…. 응? 아니, 예?) 지나치는 찰나, 구슬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이 똑똑히 귓전으로 들어왔다. (누나라고 한 번 해보시겠어요?) (예? 누나라고요?) (네. 어서.) (아니. 갑자기 왜 이러….) (누, 나.) (누, 누, 누…. 누나.) 돌연 엄청난 부끄러움이 가슴으로 솟구친다. “이, 이스탄텔 로우 로드!” 어서 저 구슬을 부숴야 한다는 생각이 치솟았으나, 한소영은 이미 통로 안으로 사라진 후였다. 이어서 주변으로 웅성웅성 소음이 들려온다.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 얼굴 화끈거려. * 머셔너리 캐슬로 돌아간 후, 나는 바로 1층 회의장으로 향했다. 클랜원들은 예상대로 좌우로 가지런히 도열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저 간간이 생환을 축하한다는 인사만이 나올 뿐, 예전처럼 커다란 소란은 없었다. 아마 앞서 도착한 클랜원들이 어느 정도 상황을 설명했으리라. 이윽고 야릇한(?) 윙크를 보내는 고연주와 눈인사를 건넨 후, 나는 권좌로 걸어가 앉았다. 그러자 클랜원들도 동시에 몸을 앉힌다. “근 한 달. 아니 한 달은 좀 더 됐겠네요. 아무튼, 모두 오랜만입니다.” 나는 가벼운 인사로 서두를 시작하고서, 차분히 임무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길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하나씩 상세하게 이야기할 것도 없고, 어차피 어느 정도 들었을 테니까. 그리하여 안타깝지만 소년의 동료들은 사망했다는 사실과(정확히는 식물 군단의 양분으로 쓰인 모양이지만,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다.), 식물 군단과 악마 14 군주를 쓰러트린 일, 그리고 근원의 조각을 얻게 된 경위까지 간략하게 설명을 마쳤다. “이번 원정으로 얻어낸 성과는 창고에 보관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 축하할 일이 있는데요.” 고연주에게 마녀 세트를 넘겨주고 나서, 나는 왼편으로 눈을 돌렸다. D 등급 라인에 앉아 있는 이유정이 나를 보더니 황급히 눈을 피한다. 나오라고 손짓하자 모두의 고개가 쏠렸다. 이유정은 스리슬쩍 시선을 깔았다가, 곧 주저하는 걸음으로 중앙으로 나왔다. “사용자 이유정은….” 살그머니 운을 떼자 장내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이번 원정으로 시크릿 클래스를 계승했습니다.” “예?”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안현이었다. “형. 정말이에요?” “안현!” 고연주가 엄히 지적하자 안현은 아차 한 얼굴로 머리를 수그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인 후 중앙을 응시했다. 거의 모두가 경악한 눈을 하고 있다. 반응을 보니 아직 스스로 말을 꺼내지 않은 모양이다. 같이 원정을 다녀온 이들도 서로 입을 맞춘 듯했고. 이윽고 이유정은 수줍어하는 소녀처럼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평소와는 다르게 딱딱히 끊어 말하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음성. 그렇게 간신히 인정한 순간, “오오오오오오오오!” 안현이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갔다. 낯을 와짝 찌푸린 고연주가 얼른 일어서려고 했으나 나는 빠르게 손짓했다. 가만히 놔두라는 의미였다. 왜냐면 반응을 보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약간 의외였다. 원래 성격대로라면 얼른 자랑하고 싶어 안달 난 줄 알았는데, 이유정은 심히 창피해 하고 있었다. 아니. 부끄러워하는 동시, 달려오는 안현을 보는 게 무언가 미안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마 최대한 비밀로 하고 싶어 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이러면 괜히 미안해지는데. “야, 진짜야? 진짜 시크릿 클래스야?” “응? 어, 어….” 그러나 안현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어서 도처에서 가벼운 박수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이유정이 낯에 멍한 빛이 떠오른다. 마치 이건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이다. “클래스 이름은 뭔데?” “용병 여왕이라고….” “와, 개 쩌네. 꽤 있어 보이는 이름이잖아?” “…….” 연이어 칭찬하자 이유정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를 응시했다. 살짝 원망 섞인 눈길에 나는 느릿하게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장내가 다시금 조용해졌다. “그리고 하나 더.” 안현은 곧장 수다를 멈추고 B 등급 라인으로 돌아갔다. “들으셨는지는 모르나…. 사실 이번 원정은 용이 잠든 산맥 이상으로 어려웠고, 정말로 위험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 “멸망하는 세상을 우리는 하릴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요. 아마 그때 계속 가만히 있었다면, 이렇게 무사히 돌아올 수 없었을 겁니다. 최악에는 모두가 사망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 나는 도로 중앙을 응시했다. 이유정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사용자 이유정.” 이름을 부르니 흠칫 몸을 떤다. “누구도 나서지 못하던 상황에서, 홀로 돌격해 세상의 붕괴를 멈췄으므로, 그 공을 인정해 D에서 C로 등급을 재조정합니다.” 그러자 이유정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기뻐하기보다는 황망해 하는 게 흡사 ‘이게 아닌데.’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바로 입을 열었으나,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이어지자 눈을 질끈 감으며 입을 깨문다. 나는 빙긋 웃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상으로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 나는 어지간하면 홀 플레인의 어느 한구석이라도 ‘집’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왜냐면 여기는 언젠가는 떠날 세상이지 돌아갈 집이 아니니까. 허나 그걸 고려하고서라도 캐슬로 돌아오니 확실히 편하기는 편하다. 가히 헤아릴 수 없는 금화를 쏟아 부은 만큼, 캐슬의 시설은 간이로 세운 야영 캠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아늑함을 자랑한다. 여하튼 회의를 끝낸 이후,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뜨끈뜨끈한 물로 목욕을 즐기고 나오자 어느새 밤은 깊어져 있었다. 그러자 이대로 자기는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 계단을 올라가기 전 식당에 들러 좋은 술 한 병을 집었다. 그리고 니냐니뇨 콧노래를 부르며 집무실로 들어간 찰나, 걸음을 멈칫하고 말았다. “너희…?” 방안에는 3명의 선객이 있었다.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안현과, 한숨만 흘리는 허준영과, 담담히 앉아 있는 이유정. 3명은 소파에 앉아 있다가 내가 들어오니 동시에 고개 돌려 나를 쳐다봤다. 나는 본능적으로 모종의 사건이 발생했음을 직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좋다. 나는 침착히 소파로 걸었다. 그리고 우선 여유를 보여야겠다는 생각에, 피식 웃으며 ‘그래. 그토록 원하던 힘을 얻은 기분은 어때?’ 라고 말하려는 찰나, “오빠. 나 등급 조정 안 해줘도 돼.” 귓전으로 들어온 이유정의 음성은 목구멍 끝까지 치솟은 말은 쑥 들어가게 만들었다. “뭐라고?” “그리고 최하위로 떨어트려 주라. F 등급으로.” 이어지는 말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기껏 C 등급으로 복원시켜놨더니, F 등급으로 떨어트려 달라고? 제정신인 건가? “아 형. 얘 좀 어떻게 해봐요. 미쳤나 봐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안현과 허준영의 음성이 겹쳤다. 우선은 소파에 앉고 나서, 나는 바로 옆의 이유정을 가만히 응시했다. “아직도 삐쳤어?” “에이, 삐치기는.” “그럼 반항이냐?” “그런 거 아니야.” 이유정은 쓰게 웃었다. 반응을 보니 장난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오히려 진지한 기색을 띠고 있다. “왜.” “그냥….” 이유정은 살짝 말을 흐리며 고개를 수그렸다. 소파 아래 둔 두 종아리가 흔들흔들 움직인다. “궁금해졌거든.” “궁금해졌다고?” “응. 돌아오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어.” “생각이라….” 이유정은 천천히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손은 곧 황금빛으로 물들며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이번에 새로 얻은 힘인 모양이다. “이 힘…. 정말로 강력한 힘이야. 나한테는 과분하다 생각될 정도로.” “그런데.” “사실, 나 그때 더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선택을 약간만 바꿨으면, 아마 수인의 힘을 완벽하게 끌어냈을지도 몰라.” “…….” “근데, 그러지 않았어. 그래. 나는 그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더 강력한 힘을 얻을 방법이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소린가?” “응.” “왜?”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 나는 어이없는 기분을 버리고 경청하기로 했다. “왜냐면 그렇게 얻은 힘은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할 것 같았거든.” 이윽고 이유정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사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나는 이 힘을 온전한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다만 내 것으로 만들 자격을 얻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인간으로서.” 그리고 조용히 말을 잇는다. “오빠가 보기에도 그렇잖아. 시크릿 클래스를 얻었다고 해도 아직도 약해. 전혀 강하지 않아. 나는 여태껏 실력에 맞지 않는 위치에 있었고, 이번으로 분수에 맞지 않는 힘을 가지게 됐어.”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그게 등급 조정이랑 무슨 상관이고, 또 뭐가 궁금해졌다는 소린데. 그냥 앞으로 열심히 하면 되는 거잖아.” “아니. 나는 이제 더 이상 위만 바라보지 않을 거야.” “유정아.” “오빠.” “…….” 이유정은 번뜩 고개를 돌리며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많이 늦었다고는 생각하지만…. 나, 밑바닥부터 시작해볼래.” “뭐라고?” “홧김에 결정한 거 아니야. 돌아오면서 계속 생각했어. 정말로 내가 노력하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는 건 그런 의미였어.” “너….” 그래서 F 등급으로 떨어트려 달라는 거였나. 이해는 갔지만 갑자기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거니와, 핏빛 눈동자에 깃든 절박한 기색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게 만들었다. 최소한 이유정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흘끗 시선을 돌리자 안현과 허준영이 멍하니 이유정을 쳐다보고 있다. 어색하지? 나도 낯설어. 여하튼 이렇게 나오면 내가 할 말이 없어진다. 아니 하겠다는 애를 막을 수는 없잖아. 그리고 그 이유정이 이렇게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고. “그냥 허락해주지 그래. 김수현. 본인이 저렇게나 원하는데.” 그때 허준영의 음성이 들렸다. “아, 나도 처음에는 멍청하다고 생각했는데…. 들어보니 생각이 달라져서. 입만 살았음을 참작하고서라도, 의기는 장하잖아.” 허준영은 태연히 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 어느새 병은 절반이나 비워진 상태였다. 이 녀석, 누구 멋대로 마시는 거지? 기껏 좋은 술을 받아왔더니만. 허준영은 술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연거푸 잔을 채웠다. “적어도 무사 수행을 떠나겠다고 몰래 클랜을 떠나려 했던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본다.” “헤. 그런 일이 있었어요?” “어.” “그럼 이유정이 나가려는 걸 형이 막은 거예요?” 안현의 물음에 허준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잔을 쭉 들이킬 뿐.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살그머니 시선을 회피하는 이유정이 보인다. 쯧쯧. 나는 길게 숨을 흘린 후 이마를 짚었다. “정말로? 진심이야?” “응.” “나중에 울고불고 후회해도 소용없다?” “당연하지! 내가 나중에 딴소리하면, 그때는 오빠가 나를 죽여도 좋아.” 한순간 ‘침대에서?’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마음대로 해라.” 라고 말했다. 결국 허락해주자, 이유정이 그제야 활짝 미소 짓는다. 그렇게나 기쁜 걸까. 배시시 웃으며 내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대온다. 딱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안현은 흐뭇하게 나와 이유정을 보다가 슬쩍 허준영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그때가 기억나네요.” “……?” “저 쫓겨날 때요. 그때 형이 저 챙겨주셨잖아요. 배 곯지 말라고 용돈 쓰라면서.” “노잣돈으로 준건데. 오해하지 마라.” “에이, 노잣돈이라뇨. 형 마음이 그렇지 않은 건 이미 알고 있다고요.” “흥. 착각은 자유니까.” 허준영은 잔을 채우며 코웃음을 쳤다. 안현은 약간 상기된 얼굴을 하더니, 똑같이 배시시 웃으며 허준영의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댔다. 허준영은 막 잔을 꺾으려다가 느릿하게 탁자로 내려놓았다. 잠시 후. 스릉! “이 개 같은 자식! 죽여버리겠다!” “혀, 형? 가, 갑자기 왜!” “한창 기분 좋게 마시는데, 감히 술 맛을 떨어트려? 거기 안 서?” “수현이 형은 가만히 있는…. 잠깐, 잠깐만요! 그거 진짜 검이잖아요! 으아아악!” 도망치는 안현과 검을 휙휙 휘두르는 허준영. 둘은 삽시간에 방을 벗어나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계단을 쿵쿵 내려가는 소리가 울린다. 야밤에 뭐 하는 짓일까. “킥, 바보 같아.” 이유정은 킬킬 웃고는 사뿐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서너 걸음 걸어가 책상을 짚고 테라스를 바라본다. 은은히 흐르는 어둠과 휘황찬란한 월광. 밤의 마력 때문일까? 교교한 달빛이 비치는 이유정의 모습이 돌연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올해 25살이었던가? 가슴도 제법 봉긋하고, 엉덩이도 탱탱하니 탄력적인 게…. “근데 오빠. 나 궁금한 거 하나 있는데.” 그때 이유정이 갑자기 몸을 돌리며 나를 바라봤다. 한창 입맛을 다시던 와중이라 나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절반 정도 남은 병을 잡아 잔에 따랐다. 짧은 시간에 많이도 마셨네. “뭐가 궁금한데?” “김한별이랑 어디까지 갔어?” 오호라. 이건 상당히 의외의 질문이다. 하지만 내가 당황하리라 생각했다면 오산일 텐데. 나는 술잔을 빙그르르 돌리며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궁금해?” “아니. 그냥 안 들을래. 어차피 나는 나고, 걔랑 나는 다르니까.” 그러나 예상외로 이유정은 빠르게 포기했다. 절로 싱거운 웃음이 나온다. “호. 정말로?” “응. 상관없어. 아무튼, 우선 목표는 최대한 빠르게 B 등급에 다다르는 거야.” “B 등급이라. 우선 김한별을 따라잡겠다는 뜻인가?”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지?” “흐흐. 쉽지는 않을 텐데. 너도 알겠지만, 김한별은 상당한 노력가야.” “인정해. 근데 앞으로의 일은 누구도 모르잖아?” 그렇게 말한 이유정은 도로 몸을 돌려 테라스를 응시했다. 그리고 아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달빛에 물든 이유정의 자태를 안주 삼아, 느릿하게 술잔을 들어 올렸다. “오빠도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러한 찰나,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이유정이 툭 내뱉듯이 말했다.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무언가 분한 어조였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왜, EX 등급으로 올라서 클랜 로드라고 꿰차려고 그러나? 여하튼 맹랑하기는 하다만, 이 정도 패기는 나쁘지 않다. “내가 B 등급에 오르면….” 이윽고 하염없이 밖을 바라보던 이유정이 흘끗 나를 흘겼다. 그리고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는가 싶더니 돌연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휘며 씩 웃는다. 까닭 없이 요사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그래, 오르면?” 어쩔 거냐고 생각하며 나는 담담히 잔을 기울였다. 그 순간, “나도, 오빠한테 따먹히러 올 테니까.” “푸.” 나도 모르게 머금은 액체를 세차게 뿜고 말았다. 뭐, 뭐라고? 뭘 먹히러 와? “너 방금 무슨…!” 곧바로 쳐다봤으나 책상 앞에는 더 이상 이유정이 없었다. 황급히 시선을 돌리니, 까르르 웃는 소리와 후다닥 복도를 달리는 소음이 들렸다. 소리는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허, 참.” 절로 탄식이 나왔다. “아니, 같은 말을 해도….” 따먹히러 온다니. 그건 너무 야하잖아. ============================ 작품 후기 ============================ 밟아도 뿌리 뻗는 여성 설처럼, 시들어도 다시 피는 유미 설처럼. 끈질기게 지켜온 내 성정체성, 옛날옛적 독자들은 자꾸만 놀리지. 유진도 근육 키워 하나로 뭉쳐, 힘세고 튼튼한 사내 만드세. 유진 유진 로유진 유진 유진 로유진, 로유진 가슴에 붕댈 감으세. …죄송합니다. 잠시 정신을 놓았네요.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여러분께서는 그냥 제가 무슨 말을 하든 무조건 여인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로유진 : 저 여자 아닌데요. Reader : 말투가 아님. 거짓말 ㄴㄴ. 로유진 : 정말이외다. Reader : 엌ㅋㅋ. 딱 남장 여자 말투. 로유진 : 저 예비역이에요. 군대도 다녀왔습니다. Reader : ㅇㅋ. 여군. 로유진 : 그럼 인터뷰 할게요. Reader : 대리 ㄴㄴ. 압박 붕대 ㄴㄴ. 로유진 : 하체 인증? Reader : 어디 말만한 처녀가. 땍. 0ㅁ0…. 어휴.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0757 / 0933 ----------------------------------------------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의 열쇠. 외부로 탐험을 하든 원정을 나가든 두 행동은 비슷한 패턴을 갖고 있다. 우선은 정보 수집부터 시작해서 정비, 출발, 공략, 그리고 귀환. 이렇게 일정한 순환 구조가 반복된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정비라고 할 수 있다. 왜냐면 정비는 공략 지역에 관한 준비뿐만이 아니라, 원정을 나가는 사용자 개인의 상태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내 체력이 절반 이하인 상태서 ‘야만 왕의 무덤’ 원정을 시도했다면 아마 공략은 실패했을 것이다. 아니 실패는 무슨. 어쩌면 거기서 깡그리 죽었을지도 모르지. 여하튼 요점은 원정을 성공했다고 모든 일이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번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사건을 대비해 항시 만전의 상태로 정비하고, 또한 금번 원정을 거울삼아 부족하다고 느낀 점을 보강해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쉴 틈 없이 몰아붙일 생각은 없다. 한 번에 여러 일을 하는 것보다는, 하나씩 확실하게 처리해나가는 게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 정비는 휴식이라는 중요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이건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화정이라는 고출력 고부담 힘을 지녔으니까. 그리하여 반나절은 잔잔한 휴식으로 보낸 후, 오후부터 집무실로 들어가 업무를 시작했다. 사실 오늘 하루는 체력 회복을 명목으로 화정과 노닥거릴 생각이었으나, 점심때 조승우가 측은한(?) 표정으로 깨작거리길래 식사가 끝나고 집무실로 오라고 일러뒀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돌연 한껏 밝아진 낯으로 숟가락을 푹푹 놀리더니, 내가 올라가는 시간에 맞춰 후닥닥 따라 올라왔다. 그리고 책상에 무언가를 쿵 올려놓기까지. 산더미처럼 쌓인 기록을 보니 절로 이마가 지끈거린다. 하기야 40일은 짧다고 볼 수 없는 시간이니 그동안 여러 일이 있었으리라. …그래도 차마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아. “그래서, 최근 동향은 어떤가요? 중요한 변화라든가.” 기록 더미를 한쪽으로 치우며 묻자 씩 웃는 조승우가 보였다. “우선은 내(內) 도시 발전 현황을 보고하겠습니다.” “내 도시라. 중앙 관리 기구에서 꽤 열을 올리는 모양이군요.” “그렇죠. 외(外) 도시들은 어느 정도 발전한 상태니까요. 잔해는 이미 깨끗하게 청소한 상태고, 현재는 주요 건물들을 올리는 중입니다. 사실 시작의 여관이나 사용자 아카데미, 그리고 신전 등은 이미 완공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지요. 아마 구경 겸 한 번 가보시면 굉장히 놀라실 겁니다.” “응? 그렇게나 빠릅니까?”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동, 서, 남, 북에서는 물론, 북 대륙 전역에서 신경 써주고 있으니까요. 실은 우리 머셔너리 클랜에도 발전 기금이라는 명분으로 지원 요청이 들어왔거든요.” “발전 기금이라…. 그래서, 얼마 정도?” 얼마를 보냈느냐고 묻자 조승우는 갑자기 합죽이가 됐다. 자꾸만 흘깃거리는 게 눈치를 살피는 것 같다. “그게…. 알아본 결과 대형 클랜은 보통 500만 금화, 그리고 대표 클랜의 경우는 못해도 800만 금화를….” “괜찮으니까 말해봐요.” “1,000만 금화를 지원했습니다.” “1,000만 금화라…. 현재 우리 클랜 자금 현황이 어떻죠? 장비나 보석은 제외하고.” “순수 금화로만 정확히 3,782만 정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킥.” 말을 마친 조승우의 목울대가 작은 고저를 그렸고, 나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간 저 양반, 긴장하는 버릇은 여전하고만. 행정 처리는 어지간하면 터치하지 않겠다고 했는데도. 뭐,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니 나쁘지는 않다. 현재 내 눈앞에 있는 사내는 원래 굉장히 아끼고 절약하는 성격이다. 저번에 캐슬을 개축할 때도 뭐 이리 쓸데없이 자금을 썼냐며 징징대지 않았는가. 그런 조승우가 1,000만 금화라는 거대한 자금을 운용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요. 3,782만 금화. 아직 여유가 있네요.” “그,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1,000만 금화를 추가로 지원하도록 하세요. 물론 발전 기금이라는 명목으로.” “예. 알겠습니다. 그럼…. 예에에에?” 안도하던 조승우는 돌연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어차피 더 지원하고 싶었죠? 사용자 조승우도 말이죠.” “그, 그건….” “하세요. 그럼 우리가 독보적이겠죠.” “아무리 그래도 1,000만 금화는 너무 많습니다.” “많은 게 아닙니다. 소탐대실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 “우리가 아무리 도시를 잘 꾸며봤자 결국에는 외 도시에 불과하죠. 특수한 건물을 건설하지 못하는 이상…. 어쨌든 차후 아틀란타의 변화는 중앙 도시가 이끌어갈 수밖에 없어요. 이 정도는 알고 있잖아요?” “그럼….” “하세요.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2,000만 금화 정도를 메울 역량은 있으니까요. 그리고 생색은 낼 수 있을 때 내야지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클랜 로드!” 조승우는 그제야 활짝 웃었고 나도 빙긋 웃었다. 서로의 뜻이 통한 것이다. 차후 중앙 도시의 영향을 생각하면 2,000만 금화는 그야말로 껌 값에 불과하니까. 물론 조승우가 걱정하는 바는 알고 있으나 사실상 기우나 마찬가지였다. 이효을이 머리에 칼을 맞지 않은 이상, 우리 머셔너리 클랜을 상대로 입만 싹 닦을 리가 없다. 실제로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가만있을 생각은 없고. “다른 것들은요?” “아. 신 코란 연합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상인 조합 로드인 서지환이 한 번 꼭 만나 뵙고 싶다고 하네요. 무언가 긴히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합니다.” “자리를 마련해주세요. 그리고요?” “그리고…. 혹시, 저번에 말씀하신 추가 개혁은 어떻게 되는지….” 조승우는 살그머니 말끝을 흐리며 손을 비볐다. 무언가 잔뜩 기대하는 눈빛이다. “응? 아…. 예. 개혁은 계속 이어질 예정입니다. 급한 일부터 처리하고 나서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기대까지야. 그동안 많이 힘들었나 봅니다?” “하하. 행정이 너무 집중되는 경향이 있어서요.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만 있지요.” 조승우는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그리고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우선은 보고를 마치겠다며 문을 열고 나갔다. ‘우선은’ 이라는 말이 걸리기는 했으나 화급을 다투거나 까다로운 일은 없다. 하나씩 차분히 처리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나는 약간 식은 찻잔을 들었다. 그러나 문이 채 닫히기도 전, 복도서 다다다다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문을 발로 세게 차며 뛰어들어왔다. 나는 곧바로 통신용 구슬을 집어 던졌다. “어이, 검검이! 내가 엄청난 소식을…! 깍!” 퍽, 소리에 이어 누군가가 발라당 나동그라졌다. 나이스 샷. “으우…. 아파아아…. 힝.” 빨개진 이마를 쓱쓱 비비며 일어나는 누군가는, 바로 비비앙이었다. “이상하게 부르지 마라.” “그게 문제가 아니야! 너, 이번에 어떤 녀석을 데려왔는지 알기나 해?” 자못 엄히 말했으나, 비비앙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활했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와 양손으로 책상을 탕 내려친다. 아. 갑자기 머리가 아파져 오는 것 같아. “들어봐. 그러니까 내가 점심을 아주 맛있게 먹고 있는데 말이야.” “그래. 이렇게 호들갑을 떨 정도로 점심이 맛있었니?” “일단 들어보라니까! 아니, 우선 일어나. 나랑 같이 어디 좀 가자. 어서!” “그만, 그만!” 목소리를 높이자 나를 끌고 일어나려던 비비앙이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고 후닥닥 물러난다. 아이고, 귀엽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왜 이렇게 제멋대로야?” “아니…. 같이 가고 싶은 데가 있어서…. 근데 왜 화를 내?” “이거 안 보여?” “이거?” 수북이 쌓인 기록 더미를 가리키자 비비앙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게 왜? 갔다 와서 하던가, 아니면 아랫것들한테 시키면 되잖아?” 사실 약간은 그럴 생각이었다. 어느 정도는 말이지. 허나 이것 말고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창고에 들러 빛과 어둠, 물, 불의 결정도 살펴야 하고, 소환의 방에도 들러야 한다. 당최 무슨 일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척 봐도 이상한 냄새가 풀풀 나는 일에 시간을 빼앗기는 건 사양이다. “그게 말처럼 쉬우냐. 그리고 너랑 나는 애초 입장이 다르잖아. 나는 지금도 할 일이 태산이라고.” “그래서 같이 못 가주겠다는 거야?” “아니. 네 태도를 문제 삼는 거야. 볼 일이 있으면 적법한 절차를 밟거나, 사전 약속을 잡거나, 아니면 최소한 먼저 사정을 설명하고 허락을 구하는 게 맞지 않아?” “뭐, 뭐야. 갑자기 거드름을 피우고는.” “싫으면 밤에 오던가. 그때는 한가할 거 같으니까.” “체, 우리 사이에 무슨….” 비비앙은 실망이다, 윗공기를 마시더니 변했다며 쫑알거리며 투덜댔으나 곧 표정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어흠, 헛기침을 하며 잔잔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한결 차분해진 어조로 설명을 시작했다. “뭐, 좋아. 나는 네 입장을 이해해. 원정에서 돌아오자마자 업무에 시달리다니. 얼마나 힘들까.” “음.” “그리고 내가 성급했다는 것도 인정할게. 하지만 부디 이런 나를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왜냐! 현재의 나는 굉장히 중요한 기로에 서 있거든? 그러니까….” “그나저나 밥 먹었는데도 배고프네. 같이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갈래?” “그, 그럴까? 헤헤…. 가 아니라! 애초 들을 생각도 없잖아!” “후룩.” 비비앙은 빽 소리를 지르며 양손을 힘껏 추켰다. 휘날리는 기록 속에서 나는 태연히 차를 들이켜고 음미했다. 역시 비비앙은 놀리는 재미가 있어. 반응이 아주 톡톡 튄다는 말이야. “화내지 말고 이 차 좀 마셔봐. 맛있다?” “야!” “아차. 그나저나 설명은?” “너, 너…!” 비비앙은 기가 막힌다는 듯 입을 쩍 벌리더니 힘없이 소파에 주저앉았다. 이어서 노려보는 눈동자로 억울함과 분해하는 기색이 떠오른다. “설명은 제가 하고 싶습니다.” 그때 약간 앳되면서도 딱딱한 기계음이 문가에서 들려왔다. 시선을 돌리자 무심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꼬맹이, 아니 근원의 조각이 보였다. 얘가 여기는 웬일이지? “설명?” “그렇습니다.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는 사용자 김수현을 움직이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리하여 처참히 패배한 개가 됐으므로, 대타인 제가 나서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비비앙은 “누가 처참히 패배한 개야!” 라고 짖었으나, 나는 흥미로운 기분을 느끼며 턱을 괴었다. 다른 건 차치하고서라도, 근원이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좋아. 말해봐.” “그 전에. 설명은 짧은 게 좋습니까, 아니면 긴 게 좋습니까?” “짧고 간결하게. 요점만.” “알겠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근원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로 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약간은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거긴 왜?” “만일 제 계산이 맞는다면, 두 가지 막대한 이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세하게 말해봐.” “첫 번째. 현재 제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출력은 15.28%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마지아에 잠재된 마법 지식을 얻을 경우, 출력을 지금보다 비약적으로 상승시킬 수 있습니다.” “…아직 감이 잡히지가 않는데. 아무튼, 두 번째는?”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의 실력 증진을 꾀할 수 있습니다.” 근원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애초 비비앙이 무슨 상관인데?” “왜냐면 질서의 오르도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질서의 오르도는 마지아의 지식이 집약돼있는 일종의 정수. 즉 도시를 해방하는 열쇠 역할을….” “그건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아쉽게도 비비앙은 정통 마법사가 아니야. 오히려 마법 진으로 마수를 소환하는….” “그러니까 더욱 가야 합니다.” 마치 말을 끊긴 것을 복수라도 하듯, 근원은 곧바로 내 말을 끊고 들어왔다. “마지아의 지식은 모두 마법 진의 형태로 저장돼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불현듯 기분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그랬다. 확실히 근원의 말이 맞다. 전투 당시, 마볼로가 질서의 오르도를 해방하자 도시 전역을 뒤덮을 정도의 엄청난 마법 진이 떠오르지 않았는가. 그때를 회상하자 느닷없이 묘한 짜릿함이 치솟는다. “그럼…. 비비앙이 지금보다 상위 군단을 소환할 가능성이 있다는 소린가?” “그중에서는 분명히 소환 진도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100%까지는 아니더라도, 도움이 안 될 리가 없습니다.” 떨림을 숨기며 말하자 근원은 여전히 무심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 어느 때보다 든든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나를 구원해주고, 행복을 주어서 고맙다. 그대 덕분에 나도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수 있겠어.’ ‘이제 왕이 태어나고 1 군단이 부활하면…. 나 또한 본연의 직책인 1 군단장으로 돌아가야겠지.’ ‘그대가 나한테 행복을 준 만큼, 그대도 어디서든 행복하길.’ ‘그럼…. 이제 정말 마지막인가….’ 안될 거라는걸,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솟구친다. 하지만…. 정말로 가능할까? 괜히 기대하는 건 아닐까? 애초 마볼로가 지옥에 관한 마법 지식이 있다고 확신할 수도…. 아니, 잠깐만. 있다. 맞아, 있다. 당시 돌진하던 나를 막으려, 마볼로는 좌우로 두 개의 마법 진을 소환했고, ‘이 새끼 진짜 사람 열 받게 만드네. 깜짝 놀랐다 정말. 설마 지옥의 여섯 번째 불, 초열이랑 만년설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개 같은 새끼.’ 나는 간발의 차로 빠져나오며 그렇게 말했다. 분명히. 그래, 설령 일말의 가능성이라고 해도 좋다. 게헨나를 다시 볼 수 있다면, 아니 최소한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비비앙!” 거세게 몸을 일으키며 소리 지르자, 입을 삐쭉 내민 채 시무룩이 앉아 있던 비비앙이 화들짝 놀란다. “가자.” “어, 어?” “바로 가자. 어서.” “…바쁘다며?” 뚱한 음성이 들려왔으나 상대할 여유는 없다. 이내 대충 도복을 걸치고 몸을 돌리니 비비앙이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호오…. 태도가 아주 확 변하는데? 우리 클랜 로드께서,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으셨길래?” 저게 정말…. 아니 참자, 참아. 비비앙이 있어야만 모든 일이 성립된다. “됐으니까 가자고.” “싫은데?” 그러나 비비앙은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느릿하게 팔짱을 끼더니 천연한 표정을 짓는다. “정말 미안해. 나도 정말로 가고는 싶은데 절차도 안 밟았고, 약속도 안 잡았고, 허락도 구하지 않았거든. 그래서 못 갈 거 같아.” “너 인마.” “뭐, 지금부터 시작하면 밤에는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그대로 지나치는 동시, 있는 힘껏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게 진작에 잘하지. 전세 역전이다. 우히….” 찰싹! 토실토실한 엉덩이 감촉이 손에 착 감겨 들어온다. “히비빙비!” 비비앙은 웃으려다가 이상한 신음을 질렀다. “헛소리는 적당히 하고 따라와. 먼저 간다?” 나는 얼른 근원의 손을 잡아챈 후, 그대로 방문을 나섰다. 그리고 잠시 후. “어엉…. 이 나쁜 놈아….” 계단을 내려가려는 찰나, 비비앙의 구슬픈 울음이 복도를 타고 들려온다. “어어어엉…. 같이 가아….” ============================ 작품 후기 ============================ 마법 진에 관한 내용은, 265회에 간략하게 나와 있습니다. 혹시 궁금하신 분이 계실까 봐…. ☞☜ 0758 / 0933 ----------------------------------------------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의 열쇠. 가는 길은 매우 시끄러웠다. 근원이 상세한 설명을 하는 동안 비비앙이 큰 소리로 엉엉 울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무시하려 했으나, 비비앙은 시선을 돌리는 곳마다 달려와 서러이 울어 젖혔다. 결국 사과하는 뜻에서 차후 때린 부위를 조몰락조몰락 주물러주겠다고 하자, 그제야 겨우 울음을 그쳤다.(사실 더 놀릴 의도로 꺼낸 말이었는데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여서 놀랐다.) 여하튼 근원의 말은 간단했다. 자신의 출력을 보다 높이는 방법은 마법에 관련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다. 특히 누구나 사용 가능한 하위 마법보다는, 상승(上昇)의 지식을 얻을수록 올라가는 정도가 높다고 한다. 말인즉 비비앙의 ‘질서의 오르도’로 마지아에 잠들어 있는 마법 진을 드러나게 하고, 그 진을 해독해 지식을 얻겠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자신이 얻은 지식을 전수해 비비앙의 실력 상승을 꾀한다. 이게 바로 근원이 세운 계획의 요체였다. “좋군.” 조리 있는 설명에 감탄해 정수리에 손을 얹자 근원이 흘깃 나를 쳐다본다. 여전히 모든 것에 무관심한 낯빛이요 눈동자다. “왜 그렇게 쳐다봐?” “무슨 뜻입니까?” “응?” “제 숫구멍을 쓰다듬는 행동 말입니다.” “숫구멍…? 아, 기특해서.” “기특합니까?” “그렇지. 자신의 밥을 찾아 먹을 줄도 알고.” “이상한 말입니다. 현재 제가 하려는 행동은 생존을 위한 영양 섭취와 어떠한 상관 관계도 없습니다.” 근원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쓰게 웃었다. “그런 뜻이 아니야.” “그럼?” “말이라고 모두 똑같은 건 아니잖아. 밥은 네가 해야 할 일, 찾아 먹는 건 스스로 하는 일. 이렇게 해석해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스스로 할 줄도 알고.” “그래. 그런 의미였어. 아무튼, 너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말라고.” “…액셉트.” 근원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인간의 말은 어렵습니다….” 나는 또 한 번 속으로 웃었다. 인간으로 되살아난 근원은 상당히 특이하다. 마법에 관해서는 늙은 현자 같은 모습을 보이면서도,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어린 아이처럼 보인다. 그럼 애늙은이인가? 하하. “뭔데, 뭐가 그렇게 웃긴대? 같이 웃자. 혼자 웃지 말고.” 꽤 괜찮은 농담이었다고 자찬하고 있자 비비앙의 옆구리를 콕콕 찔러오며 덤볐다. 나는 가운뎃손가락을 세워 회음(會陰)을 찔러주며 응수했고, 그렇게 툭탁대는 동안 어느새 마지아로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도 오랜만이네.” 워프 게이트를 나오니 여전히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는 고대 마법 도시의 풍경이 우리를 반겼다. 그나마 저번 아카데미 공사로 어느 정도 청소해둔 상태라 황폐 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데?” “마지아는 일종의 마력 기관으로 봐도 무방한 시설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며 묻자 근원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온다. “그러므로 마력 기관을 가동할 수 있는 핵, 즉 마력의 흐름을 총괄하는 장소로 이동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그냥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것 같던데…. 공중으로 떠올라서 말이지.”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다만 그러려면, 이 도시와 완벽히 합일에 이르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마볼로처럼 이 도시에 영원히 묶여야 한다는 소린가?” “그렇습니다.” “그럴 수는 없지. 그럼 그 장소로 가자고.” 근원은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전장 분석(Battlefield Analysis), 개시(Initiation).” 퉁! 마력을 품은 무형의 기운이 거센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둥글게 뻗어 나갔다. 흡사 발사된 공기총이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간 느낌이다. 근원은 지그시 눈을 감아 웅얼웅얼 입속말을 시작했고, 비비앙은 질서의 오르도를 소환했다. 오기 전까지만 해도 울다가 웃다가 다채로운 표정 변화를 보이더니, 막상 도착하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근원은 감았던 눈을 떴다. “찾았습니다.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나는 머리를 끄덕였고 총총히 걸어가는 근원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약 10분쯤 흘렀을까. 하염없이 땅을 밟던 걸음이 멈춘 곳은 공교롭게도 새 건물이 있는 장소였다. 그러니까 고성을 개축해 머셔너리 아카데미를 세운 지점. 그러나 근원은 건물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주변을 맴돌기만 하다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아래를 응시했다. 건물 입구에서 약 20 미터 가량 떨어진 위치였다.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갑자기 불러서였을까. 질서의 오르도를 꼭 쥐고 있던 비비앙이 화들짝 놀라며 응시한다. 근원은 앙증맞은 발로 바닥을 톡톡 건드리고 있었다. “이곳에 질서의 오르도를.” “으, 응.” 비비앙은 근원이 가리키는 곳으로 질서의 오르도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근원은 살짝 자리를 비키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질서의 오르도는 스스로 주인을 정하는 자아를 가진 물건입니다. 현재 무리 없이 사용하는 걸 보면 어느 정도는 주인으로 인정한 것 같습니다.” “그, 그런가?” “그렇습니다. 그럼 이제 제 영창을 따라 해주십시오.” “그래? 그냥 따라 하기만 하면 돼?” “그렇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외울 주문은 일종의 해제 시동 주문입니다.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질서의 오르도의 주인은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입니다. 말에 마력을 담고 명령하듯이 자연스럽게 말하면 됩니다.” “아, 알겠어.” 비비앙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양손을 꼭 붙이며 “후~. 후~.” 숨을 골랐다. 아이고 귀엽네. 나는 적당한 자리에 주저앉아 둘을 구경했다.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만, 혹시라도 실패하면 실컷 놀릴 생각이다. 그럼 악에 받쳐서라도 성공하겠지? “Ordo De Ordine Magister, Vivien La Klacidus Et Ut Cum Imperio.” 이윽고 근원의 딱딱한 기계음과, “Ordo De Ordine Magister~? Vivien La Klacidus Et Ut Cum Imperio~!” 약간 방정맞게 느껴지는 비비앙의 음성이 연달아 들려온다. “…Vade Puer. Tuus Uero Et Liberabo Te Ipsum.” “Vade Puer! Tuus Uero Et Liberabo Te Ipsum!” 우웅! 그 순간이었다. 화아아악! 격한 진동음이 들린 찰나, 바닥에 놓인 질서의 오르도가 찬란한 빛무리를 뿜어냈다. 빛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흩어져 눈 한 번 깜빡이기도 전에 시야를 새하얗게 물들였다. 거기다 퍼지는 범위가 너무나 드넓어 무려 하늘을 가릴 정도였다. 고오오오오오오오. 이어서 들려오는 공기를 울리는 웅혼한 공명(共鳴) 소리. 잠깐 감았던 눈을 뜨고 주위를 돌아보자 바닥을 빛내는, 그리고 느릿하게 떠오르는 마법 진들이 보였다. 붉은색, 황금색, 초록색, 파란색…. 형형색색의 빛깔을 분사하는 마법 진들은 각양각색의 형태를 선보이며 하늘로 춤추듯이 떠오른다. 그때 봤던 기억과 똑같은 풍경이다. “이햐….” 정작 스스로 이루어낸 주제에 비비앙은 입을 벌리며 신기해했다. 그러다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갑자기 양손을 허리에 대며 하늘로 고개를 젖혔다.(아마 콧대를 세운다는 의미를 표현하려 한 것 같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근원이 오연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나는 에헴 에헴 헛기침을 하는 비비앙을 밀치고 근원에게로 다가갔다. “있어? 있나?” “…무엇이 말입니까?” 근원의 되물음에 나는 잠깐 반성했다. 질문이 너무 급했다. 게다가 척 봐도 마법 진 수가 수백, 아니 수천은 돼 보이는데 다짜고짜 찾으라 하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범위를 좁혀야 한다. “아니, 질문이 잘못됐군. 혹시 불에 관한 지식이 있나? 고등 소환 마법 진 중에서 말이야.” “불, 고등 소환 마법 진….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근원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왠지 아까 말한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 같아 건드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돌연 “액셉트.” 라는 소리와 동시에 허공에 떠 있던 마법 진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니. 허공에 녹아들 듯 한꺼번에 사그라졌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털썩 주저앉는 소리까지. 흘끗 뒤를 돌아보니 숨을 헐떡이는 지친 기색이 완연한 비비앙이 보였다. 아마 몸에 걸리는 부담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굉장하군요. 고작 일개 인간이 제 출력을 9.47%나 높일 정도의 마법 지식을 갖고 있다니….” 이윽고 근원의 음성이 들려왔다. 드물게도 감탄하는 음성이었다. “9.47%? 그렇게나 많았는데 겨우?” 그러자 근원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일개 인간이 온 차원에 존재하는 마법 지식 중 1할에 가깝게 알고 있습니다. 이게 겨우 입니까?” “그래?” “그리고 마법은 수학이 아닙니다. 기존 출력에 9.47%를 더한다고 해서 24.75%로 끝나는 게 아니라, 조합과 연구를 통해 그 이상의 출력을….” “알았어, 알았다고. 아무튼, 내가 부탁한 건?” 손사래를 치자 근원은 약간 불쾌한 기색을 비쳤다. 그러나 곧 표정을 거두고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지식의 습득은 완료했습니다. 검색 결과, 최고 상승 지식으로 초열(焦熱) 소환 진을 확인했습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움켰다. “아, 정정하겠습니다. 초열 소환 진보다 한 단계 상승 지식인 만년설(萬年雪) 소환 진을 방금….” 근원이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추가로 말하면, 여기서 만년설은 녹지 않는 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눈의 숙녀, 즉 영원히 불타오르는 얼음을….” “그래서 언제쯤 상용이 가능하지?” 근원은 말을 멈추고 나를 빤히 응시했다. “모릅니다.” “…….” “배움으로서의 습득, 소화 후의 활용, 그리고 전수. 이 세 행위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현재로써는 저장 및 습득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간이 걸린다는 말인가….” 예상한 바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입맛이 쓰다. 하기야 아직 어느 하나 확실한 것도 없는데 나도 어지간히 설레발 친 모양이다. 나는 억지로 아쉬움을 삼켰다. “김수현. 그래서 말인데….” 그때 비비앙이 스리슬쩍 말을 걸어왔다. “여기 당분간 나랑 쟤가 사용하면 안 될까?” “여기를?” “응. 앞으로 최대한 연구에 매진할 생각인데 아무래도 여기서 하는 게 낫잖아? 또 좋은 건물도 있고, 조용하기도 하고.” “으음.” 절로 고민이 들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기는 하나 문제는 이 건물이 아카데미 시설이라는 것이다. 평소에는 상관없으나 한 번 입학하면 졸업 때까지 사용해야 한다. “그게 여기가 원래 아카데미 시설이거든. 그러니 공용으로 사용하는 건 어때? 연구실은 최상층에 하나 마련해줄게. 거기는 보존해두라고 했으니 거의 건드리지 않았을 거야.” “에, 글쎄. 너도 알겠지만 나 되게 예민하거든. 같이 사용하는 건 좀….” 그건 처음 듣는 말이었으나 비비앙은 내키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럼 어찌해야 하나. “…안 돼?” “아.” 불현듯 한 방법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곧장 생각에서 깨어나 둘을 응시했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될 것 같다. “알겠어. 아직 확답은 못 하지만, 한 번 비벼볼 구석은 있는 것 같아.” “응? 비빈다고? 뭘 비벼?” “아무것도 아니야.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 “김수현…?” * 근원과 비비앙에게 먼저 돌아가라 일러둔 후, 나는 급히 바바라로 이동해 신전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아직 예전 임무에 관한 보상이 남아 있었다. 그때 세라프는 이번 기회를 최대한 살리라고 암시했고 나는 순순히 물러났다. 마침 악마 14 군주인 플루톤도 처리하고 왔으니 이보다 좋은 기회도 없으리라. “사용자 김수현?” 그렇게 소환의 방으로 입장하니 살짝 놀란 기색을 띤 세라프가 나를 맞이했다. “안녕, 세라프. 오랜만…. 은 아닌가? 아무튼, 잘 지냈어?” “어서…. 네, 네?” “응? 왜?” “아, 아, 아, 아니에요. 어, 어서 오세요. 아, 아닙니다. 오, 오십시오.” 대충 인사하며 들어가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세라프가 굉장히 당혹스러워했다. 말을 더듬는 건 둘째치고서 라도 나를 쳐다보는 눈이 쉴 새 없이 깜빡인다. 이 정도의 반응은 2회 차는 물론, 1회 차에서도 볼 수 없었는데. 내가 온 게 그렇게도 놀라운 건가? 머리를 갸웃하며 앉으려는 찰나 느닷없이 뜻 모를 허전함이 느껴졌다. 나는 그제야 마르를 데려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흐흠, 흐흠. 그럼 사용자 김수현. 오늘은 어쩐 일로….” “아. 오늘은 마르를 못 데려왔네.” “아….” “일부러 데려오지 않은 건 아니고 신전에 간다고 말을 못 했어. 마지아에서 바로 오는 길이거든. 여하튼 기대하고 있었다면 미안.” 그때였다. “아닙니다. 괜….” 말과는 반대로 실망한 기색이 완연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던 세라프는, “네에?” 돌연 화들짝 놀라며 눈을 크게 치떴다. 이어서 입을 살짝 벌리면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 아닙니다…. 어찌 제가 감히…. 아, 아니…. 이게 아니라….” “왜 그래 너? 어디 아파?” “갑자기 그렇게 상냥하게 좋게좋게 말씀을 해주시면…. 제, 제가….” “……?” 아닌 게 아니라, 세라프는 정말로 아파 보였다. 나와 눈을 마주치기는커녕 눈 둘 데를 몰라 하며 자꾸만 시선을 돌린다. 하얀 날개는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일렁이고 양손은 자꾸만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종래에는 눈을 질끈 감더니 아랫입술을 꼭 깨문다. “어, 어떡해…. 몰라….” 얼굴은 잔뜩 붉힌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세라프. 허 참, 이상하네. 오늘따라 대체 왜 저러는 거지? ============================ 작품 후기 ============================ 세라프의 혼란에 관한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예전의 내용을 잠깐 가져왔습니다. * “사용자 김수현.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할 말.” 나는 그녀의 안부 인사를 차가운 목소리로 단칼에 끊어 버렸다. 애초에 천사를 싫어하는 것도 있지만, 1회차의 세라프와 지금의 세라프를 동일하게 여길 수 없었다. “…평안히 지내셨습니까.” 매몰찬 대답에 잠시 입을 다문 듯했으나 그래도 끝끝내 말읏 잇는다. 그런 것도 마음에 안 들어 나는 한층 더 세라프를 쏘아붙였다. “그건 알 거 없고. 그리고 어차피 자세히는 몰라도 대충은 알고 있잖아.” “사용자 김수현.” “나 좀 바쁘거든. 할 말만 빨리하고 보내줬으면 좋겠다.” “…….” 세라프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보이는 얼굴은 언제나 조용하다. 지금도 언제나처럼 고고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나는 세라프가 내심 당황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없어?” “…….” 세라프는 여전히 묵묵부답. 나는 그 반응에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지금 이 장소에 계속 있다가는 약간이나마 좋은 방향으로 변해가는 내 성격이 또 이상하게 변할 것…. 아니, 원래대로 되돌아갈 것만 같았다. “할 말 없으면 이만 가겠어. 그리고 다음부터는 이렇게 시간 낭비는 하지 않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사용자 김수현….” 등 뒤로 세라프가 무어라 말을 하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의도적으로 무시해 버렸다. * 어때요. 예전과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 0759 / 0933 ---------------------------------------------- 발칙한 협상. 도대체 이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세라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 라는 감정을 몸소 느끼고 있었다. 흡사 부드러운 햇살이 비쳐드는 조용한 숲에서 선선한 바람을 맞는 듯한 편안함. 또는 고요한 강물을 떠다니는 듯한 잔잔함. 어찌 보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상 대화일 뿐인데, 건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상할 정도로 달콤하고 감미롭다. 냉한 가슴이 따뜻하게 데워지고, 기분 좋은 감각이 가슴에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세라프?” “…앗!” 그런 세라프가 정신을 차린 건 김수현의 빤한 시선을 느꼈을 때였다. “흠, 아흠! 사용자 김수현.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누가 봐도 어색하게 기침한 세라프는 자못 엄한 어조로 말했다. 왜 엄중히 말했는지는 자신도 모르지만. 그러나 김수현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선선히 승낙했다. “그러도록 해.” “좋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이 오늘 방문하신 건, 예전에 보류해둔 보상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거라고 생각됩니다만.” “맞아.” “그럼 적합한 보상은 생각하셨는지요?” “응. 확실히 생각해봤는데…. 혹시 제 3의 눈의 랭크를 올릴 수 있을까?” “…네?” 김수현은 가볍게 본론을 꺼냈고 세라프는 두 눈을 치뜨며 반문했다. 무리한 요구라는 생각에 앞서 뜻밖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EX 등급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그냥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 미안하지만, 그 조금도 안 되겠는걸? 갑자기 튀어나온 음성이 김수현의 말을 뚝 잘라먹었다. 이어서 웅혼이 울리는 목소리가 채 사그라지기도 전, 제단 뒤쪽으로 4개의 빛무리가 동시에 생성된다. 예상치도 못한 돌발 상황에 세라프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찬란한 빛에서 걸어 나오는 4개의 형상을 확인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가, 가브리엘 님…?” “세라프 안녕? 그리고 너도 안녕?” 바닥까지 흘러내리는 깨끗한 은백색 머리카락. 잔잔히 가라앉은 호수와도 같은 눈동자. 그랬다. 가장 선두에서 걸어 나오는 여인은 바로 대 천사장 가브리엘이었다. 무엇보다 오직 한 천사에게만 허락된, 소환의 방을 환하게 물들이는 찬연한 12쌍의 날개가 그것을 증명한다. 허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싱긋 웃는 가브리엘 뒤쪽으로 세 천사가 마치 호위하듯 일렬로 늘어서 있다. 멍한 눈으로 쭉 훑어본 세라프는 각 천사에게 달린 11쌍의 날개를 확인하고는 놀라움이 더욱 커지는 걸 느꼈다. “미카엘 님…. 라파엘 님…. 우리엘 님….” “오랜만이군. 세라프. 예고 없이 쳐들어온 점, 우선 사과하마.” 가장 왼쪽에 있던 여인이 살짝 고개를 숙이자 타오르는 듯한 붉은빛 머리카락이 가지런히 흘러내린다. 아름다운 외모와는 다르게 상당히 남성적인 말투였으나, 한편으로는 여인의 의젓한 인상이나 정열적인 눈동자와 묘하게 어울리기도 했다. “대, 대 천사 님들이 여기는 어쩐 일로….” “왜? 우리가 못 올 곳을 왔나? 아니면 찔리는 거라도 있는 건가?” 무언가 기분이 좋지 않은지, 나타날 때부터 도끼 눈을 뜨고 있던 우리엘이 날카롭게 외쳤다. “헤헤, 나는 심심해서 왔는데.” 우리엘의 노려보는 눈초리가 곧장 옆을 향했다. 짙은 푸른빛 머리카락을 어여쁘게 묶어 올린 천사가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 생글생글 웃고 있다. 우리엘은 이를 갈았다. “라파엘….” “자자, 싸움은 나중에 하고 우선 편안하게 앉자고. 아, 누워도 좋아.” 가브리엘은 가볍게 주의를 주고는 정말로 제단에 엎드려 누웠다. 그리고 몸을 반쯤 돌리더니 한 손으로 고개를 받치며 부드럽게 웃는다. 여인의 굴곡을 알 듯 말 듯 강조하는 요염한 자세였으나, 가브리엘이 그러니 흡사 여황(女皇) 같은 고고함이 물씬 풍겼다. 그렇게 소란은 일단락됐으나 세라프는 괜스레 초조함을 느꼈다. 아니, 이유는 있다. 그 당시 보상을 받으러 온 김수현을 돌려보낸 이후, 세라프는 무수한 비난을 받았다. ‘오늘 일은 절대로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내가 직접 안건을 올리도록 하지. 두고 보라고.’ 세라프도 나름 경고하기는 했으나 기어코 움직인 천사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오늘 대 천사들의 방문 목적은 명백하다. 아마 보상 지급 건에 관해 간섭하려고 왔으리라. 생각을 정리한 세라프는 남몰래 주먹을 움켰다. 자신의 행동이 무조건 옳다고 여기는 건 아니나 이래서야 김수현을 볼 낯이 없지 않은가. “흐응.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인가? 사용자 김수현?” 문득 들려오는 가브리엘의 여유로운 음성에 세라프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여태껏 대 천사들에게 신경 쓰느라 김수현을 잊고 있었다. 갑자기 까닭없는 불길함이 느껴졌다. 김수현은 악마를 사무치도록 증오하나 천사도 만만찮게 싫어하니까. 그러나 정면을 바라본 세라프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허, 4대 천사가 한 자리에. 이거 놀랄 노자로군.” 뜻밖에도 김수현의 반응은 매우 차분했다. 조금 놀란 빛을 보이기는 했으나 막 나가지도 않고 적의도 보이지 않는다. 예전과 비교하면 굉장히 순수한 반응이다. 세라프가 어찌 된 걸까 고민하고 있을 즈음, 김수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연초를 한 대 꺼냈다. “건방지구나 인간!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상관없다.” 이윽고 태연히 불을 붙이는 모습을 보며 우리엘이 발칵 성을 냈으나 곧바로 누군가에게 제지 당했다. “가브리엘 님이 편하게 있어도 된다고 하셨으니 저 정도는 괜찮겠지.” 한 걸음 천천히 앞으로 나서는 천사는 바로 미카엘이었다. “소식은 들었다. 그 증오스러운 마몬에 이어 플루톤까지 소멸시키다니. 정말로 믿을 수가 없을 정도다.” “응? 아아.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악마 14 군주를 두 놈이나 잡은 건가? 재미있는 농담이다. 아무튼, 모든 천사를 대표해 이 자리에서 감사하지.” “…응?” 그렇게 말한 미카엘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가브리엘을 잇는 2인자이자 대 천사 신분임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거짓 없는 찬사였다. 김수현은 피식 웃었다. “감사까지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호?” “뭐, 사실 조금 아쉽기는 해. 그렇게 쉽게 보내는 게 아니라, 최대한 고통을 주면서 괴롭히고 싶었거든. 비명이라도 한 번 들었어야 했는데….” “좋아, 아주 훌륭해. 마음에 든다. 정말 내가 도우미로 있고 싶을 정도야.” 정말로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김수현을 보며 미카엘은 흡족히 웃었다. 전투 천사로서 항상 선봉에 섰던 터라 악마를 증오하는 마음이 그 누구보다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도우미가 되고 싶다는 말 또한 진심이었으나 세라프는 불안해할 생각도 못 했다. 왜냐면…. “아무튼, 나도 만나서 반가워. 제단에는 가브리엘, 그리고 왼쪽부터 미카엘과 라파엘이 맞지?” “놈! 왜 나는 무시하는 거지?” “너? 너는 예쁜 짓 하기 전까지는 국물도 없을 줄 알아.” “무, 무어라?” “농담이야, 농담. 그러니까…. 우리엘? 고작 인간이 하는 말에 너무 발끈하지 말라고. 하하.” “크으으윽!” 저 웃고 있는 사내가 자신이 알고 있는 김수현이 맞는 건가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농담을 하는 척하며 스스로 대화의 주도권을 잡고 있다. 4대 천사의 등장으로 세라프가 보상에 관해 개입할 여지가 사라졌음을 고려해보면, 매우 부드럽고 유연한 대응이었다. “자, 분위기도 좋으니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까 하는데.” 이를 바득바득 가는 우리엘을 보며 웃던 가브리엘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김수현은 희뿌연 연기를 뱉어내며 그러라는 양 끄덕였다. 그리고 세라프는,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에 긴장을 삼켰다. 서로의 시선이 교차하는 가운데, 먼저 말문을 연 건 가브리엘이었다. “우선 네 요구인 제 3의 눈의 랭크 상승은 들어줄 수 없어.” “아예 랭크를 상승시켜 달라는 말은 아니야. S Plus 정도로도 족할 것 같은데.” “그것도 불가. 제 3의 눈은 굉장히 무서운 능력이거든.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렇게나 위험한가?” “응. S Plus가 되는 순간 상대방의 속마음을 읽을 수가 있게 돼. 그리고 EX로 오르면 과거까지 알 수 있고. 그러면 너무 재미없을 것 같지 않아?” “재미는 모르겠고…. 여하튼 균형에 영향을 준다는 소리지?” “그래. …생각보다 말이 통하네?” “그럼 어쩔 수 없지. 이 요구는 철회할게.” 첫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리고 결과는 김수현의 포기. 세라프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했다. 포기해도 너무 순순히 포기했다. 마치 안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혹시, 어쩌면…. 사용자 김수현은 일부러…. “그럼 새로운 요구 조건을 말하도록 하지.” 불현듯 한 생각이 세라프의 뇌리를 스치는 찰나, 이번에는 김수현이 입을 열었다. “머셔너리 아카데미 말이야. 혹시 장소를 이동할 수 있을까? 도시 안으로.” “…머셔너리 아카데미를?” 이건 조금 의외였을까? 가브리엘이 살짝 낮아진 음성으로 반문했다. “응. 마지아를 새롭게 활용할 거리가 생겼거든. 그렇다고 공용으로 사용하기도 그렇고. 또 아카데미는 도시 안에 있는 게 좋잖아?” 김수현이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그냥 도시 안에 새 건물을 지으면 거기로 권한을 옮겨주면 되는데. 어차피 곧 이전 작업도 있잖아? 겸사겸사 해달라는 소리야.” “곱게 보지 않는 사용자들이 있을 텐데.” “상관없어. 그건 내가 감수할게.” “…그게 네 요구인가?” 김수현은 그렇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그 정도 요구라면 충분히 수용할 수 있어.” 마침내 가브리엘의 허락이 떨어졌으나 목소리에는 반신반의하는 기색이 깃들어 있었다. 아무튼, 액면 그대로만 보면 대화는 잘 풀렸다. 김수현은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고 가브리엘은 받아들였다. 그 탓인지 미카엘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으나, 우리엘은 무언가 수상해 하는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헤, 엄청 억지 부릴 줄 알았더니 꽤 상식적이잖아? 정말 그 정도로 괜찮아?” 그리고 라파엘은 폭 한숨을 흘렸다. 잔뜩 김샜다는 어조가 흡사 기대한 선물을 받지 못한 어린 아이와도 같은 표정이다. 김수현은 스리슬쩍 시선을 올렸다. “그럼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아,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개인적인 호기심?” “응? 뭔데?” “현재 통과의례에 남아 있는 레어, 시크릿 클래스가 총 몇 개 정도 되는지 궁금해서.” “에이~. 뭐야, 고작 그거? 아마 지금은 한 열….” 그 순간, - 라파엘! 머릿속을 강타하는 외침에 라파엘이 흠칫 몸을 움츠렸다. 어찌나 소리가 컸는지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우리엘은 아니었다. 아까부터 끊임없이 김수현만 바라보고 있으니까. 외침의 정체는 여전히 제단에 편히 누워 있는 가브리엘이었다. - 너…. 미쳤어? - 왜, 왜요…. 개수 정도는…. - 입 조심해. 티 내지도 말고, 이제부터 아무것도 말하지 마. - …….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항변하던 라파엘은 주춤주춤 걸음을 물렸다. 가브리엘은 여전히 가볍고 유쾌한 웃음을 머금고 있으나 세라프도 3명의 대 천사들도 느낄 수 있었다. 김수현과 가브리엘을 중심으로, 한순간 소환의 방을 감싸던 공기가 일변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김수현은 여전히 태연했다. “그럼 이걸로 추가 보상은 협의됐고. 이제 원래 보상인 비밀 상점을 이용할까 하는데…. 세라프?” 갑자기 지목하자 놀랐지만 세라프는 신속히 비밀 상점을 개방했다. 『77,777 Gold Point를 사용해 사용자 전용 비밀 상점을 개방합니다.』 『남은 GP는 20,609,683 Gold Point입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골드 포인트. 이윽고 김수현의 눈앞으로 상점 목록이 떠오른다. “아, 계속 있을 거야? 협의는 끝났는데. 뭐, 나야 상관없지만.” 들려오는 음성에 천사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 무에 그리 즐거운 걸까? 김수현은 숫제 콧노래까지 부르며 목록을 휙휙 넘기고 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즐겁게 쇼핑을 하는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 그러나 김수현 또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머리를 팽팽히 회전시키는 중이었다. ‘이건 어떠십니까?’ ‘그럼 이것도 한 번 봐주십시오. 이번에 신설한 항목인데….’ 세라프는 그때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해답은 이미 나왔다. 방금 라파엘의 말이 어색하게 끊긴 순간, 김수현은 거의 확신에 가까운 가능성을 잡았다. 왜 오늘 4대 천사가 등장했는지 눈치챈 것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열…. 이라. 아직 꽤 남았네….” 이윽고 김수현은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살짝 말을 흘렸다. 그러나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공간서 방금 말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는 없다. 가브리엘이 얼굴이 미미하게 굳은 게 그 방증이리라. 그러나 무어라 말이 나오기도 전에 김수현은 목록 넘기기를 멈추고 시선을 들었다. “세라프. 이거 구매하는데 제한은 없지?” “네? 아.” 세라프는 반문하며 시선을 내렸다. 『통과의례 입장권(150,000 GP).』 설명 : 사용자의 신분으로 통과의례 지역에 입장할 수 있다. 입장 시 7일 동안 머무르는 게 가능하다. 그리고 속으로 환호했다. 김수현이 자신의 의도를 깨달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동시에 왜 등장부터 내내 이상한 태도를 보였는지,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네. 구매 제한이 걸린 품목은 아닙니다.” “좋아. 그럼….” 원하던 답변이 들려오자 김수현이 빙긋 웃으며 연초를 흡입한다. 그 찰나의 순간, 세라프는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연초를 태우는 척 가리기는 했으나 슬쩍 내밀어 진 혀가 입을 핥았다. 흡사 먹이를 노리기 직전의 맹수를 보는 듯한 모습. 실상은 김수현이 모종의 일을 벌이기 전, 일종의 버릇과도 같은 행동이었지만. 잠시 후. “첫 구매는, 이거 10장으로 하지. 70일이면 충분해.” 『통과의례 입장권을 구입합니다(x 10).』 『1,500,000 Gold Point가 차감됩니다. 남은 GP는 19,109,683 Gold Point입니다.』 구매 확인 메시지가 떠오르는 동시, 이제껏 편하게 누워 있던 가브리엘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층 가라앉은 얼굴로 김수현을 가만히 응시한다. 첫 등장 때 여유만만하던 모습은 어느새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다. 왜냐면 구매가 결정된 이상, 아니. 패(牌)가 넘어간 이상, 더 이상 부릴 여유 따위는 없으니까. “잠깐만.” 그래, 협상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응? 아직 안 갔어? 가브리엘?” 오히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 작품 후기 ============================ 예전에 생각해둔 게 두어 개 있기는 한데…. 사실 약간 유치한 것 같아서요. 그래서 괜찮으시다면, 검과 관련된 클래스 이름을 짓는데 독자 분들의 도움을 구하고 싶습니다. _(__)_ 0760 / 0933 ---------------------------------------------- 발칙한 협상. 아직 안 갔느냐고? 하, 가브리엘은 기막혀 한탄했다. 물론 들리지 않게 입속말로. 알면서 저러는 걸까?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걸까? 아마도 전자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 확실하게 알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을 리가 없다. 한순간 저 생글거리는 낯짝을 후려치고 싶다는 충동이 솟구쳤지만, 가브리엘은 가까스로 미소 지었다. 여기서 반응해버리면 쪼들리는 사실을 인정하는 셈밖에 더 되겠는가. “그러고 보니 그 건에 관해서도 이야기 좀 하고 싶어서.” 나긋하기 짝이 없는 어조. 허나 미미한 살기가 실린 걸 느꼈는지 김수현이 씩 웃는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많지. 아주, 많아.” “그래? 이상하네. 이렇게 목록에 있는 걸 보면 사라고 만들어둔 걸 테고, 구매 횟수 제한도 없고. 별다른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 “그게.” “아. 설마 그건 아니지? 가령 내가 통과의례에 있는 레어, 시크릿 클래스를 싹쓸이하면 안 된다든가. 그러니까 도의적인 차원에서 말이야.” “이.” 개 자식. 아주 자연스럽게 상스러운 욕설이 나왔다. 이번에도 입속말로 하기는 했지만, 하마터면 입 밖으로 뱉을 뻔했다. “욕심도 작작 부리지 그래? 이제 하다 하다 통과의례까지 손을 대려는 건가?” “사용자 김수현. 통과의례에 있는 것들은 재능 있는 예비 사용자들을 위해 마련한 안배다. 부디 그 점을 인지해줬으면 좋겠는데.” 보다 못한 우리엘과 미카엘이 나섰으나, “?” 되돌아온 반응은 ‘그래서 어쩌라고?’ 말하는 듯한 상(相)이었다. “잠시만. 너희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그러니까 나보고 그 사용자들을 위해서 양보하라는 말인가?” “억지 부리지 마! 너는 도대체 어디까지 균형을 어그러트려야 만족할.” “억지? 이게 억지라고?” “그.” “하하. 하나만 물어보자. 너 나오는 대로 막 내뱉는 거냐? 아니면 그냥 머리가 멍청한 거냐?” “무어라? 이게 아까도 억지를.” “아까? 제 3의 눈? 그건 추가 보상이었고. 이건 내가, 내 GP를 소비해서, 스스로 행동해 성과를 얻겠다는 건데. 이 두 개념에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 “…윽!” 우리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하찮게 여기는 인간한테 중간중간 말을 툭툭 잘린 것도 열 받는데, 할 말도 없으니 복장이 터지는 것이다. “나 참. 도대체 누가 억지를 부리는 건지. 그렇다고 내가 묻혀 있는 장소를 아는 것도 아니고….” 그런 우리엘의 속을 또 한 번 뒤집어놓은 김수현은 곧 태연히 목록을 넘기기 시작했다. “보자. 그러고 보니 한별이도 통과의례에서 보석 마법사를 얻었다고 했던가?” “…….” “그럼 트랩 포인트부터 뒤지는 게 낫겠고. 제 3의 눈도 있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조금 더 구매해둘까?” “…….” 물론 혼잣말을 살짝 흘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제는 아주 대놓고 도발하고 있다. 가브리엘은 속으로 한숨을 흘렸다. 어디 한 번 네 멋대로 해봐 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치솟았으나 어떻게든 삼켜야만 했다. 확실히 김수현이 통과의례에 묻힌 클래스를 싹쓸이할 수 있다고 100%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대로 내깔리기에는, ‘열…. 이라. 아직 꽤 남았네….’ ‘첫 구매는, 이거 10장으로 하지. 70일이면 충분해.’ 아까 들었던 말이 굉장히 거슬렸다. 또 설령 허세라고 해도 김수현이 혼자가 아니라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비밀 상점은 사용자라면 누구든지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머셔너리 클랜원들은 근 몇 년간 김수현을 쫓아다니며 착실히 GP를 쌓아왔다. 150,000 GP 정도는 충분히 부담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인즉 한 30명이 한 달간 통과의례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닌다면? 그때는 가브리엘도 장담할 수가 없는 것이다. 통과의례는 홀 플레인과 비교하면 무척이나 협소한 지역이니까. 사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수색해도 찾지 못할 정도로 클래스를 꼭꼭 숨기거나 아니면 아예 회수해버리는 수도 있기는 하다. 허나 이제는 그것조차도 불가능해졌다. 김수현이 통과의례 입장권을 구매하고 목적을 분명하게 밝힌 이상, ‘도우미는 사용자에게 의도적으로 해를 입힐 수 없다.’ 는 조약이 발목을 잡는다. 이 점을 자세히 알고 있는 김수현이 제대로 외통수를 둔 것이다. 게다가 제 3의 눈 랭크 상승 건에 관해서도 깔끔하게 포기를 했으니 억지를 부린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냥 안 된다고 밀어붙일수록 치졸해지는 건 오히려 천사들이다. 말 그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한참의 시간이 흘렀으나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는다. 결국 가브리엘은 한 발짝 물러서기로 결심했다. “…요구 조건을 말해.” “각성 시크릿 클래스.” 이미 충분히 가지고 논 터라, 김수현은 빼지 않고 망설임 없이 조건을 제시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레어, 시크릿…. 뭐, 뭐라고?” 이건 미처 예상치 못했는지 가브리엘이 새된 소리를 질렀다. 간신히 관리하던 표정이 무너졌다. “야 이 나쁜 놈아!” 대 천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각양각색의 동요가 흐르고 라파엘은 황망함을 이기지 못해 욕을 하고 말았다. 심지어 세라프도 놀라고 있었다. 오직 김수현만이 담담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을 뿐. “아무래도 너희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김수현이 상반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 그리고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연초가 아니었다. 금번 ‘야만 왕의 무덤’ 원정에 가져간 기록이다. “레어, 시크릿 클래스는 내 관심사가 아니야. 왜냐고? 필요하면 언제든지 얻을 자신이 있거든.” 천사들은 헛웃음을 흘렸다. 레어, 시크릿 클래스가 어디 애 이름도 아니고, 숫제 자신의 것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는 행태가 기막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 김수현이 손에 쥔 기록을 팔락팔락 흔들었다. 자연스레 시선이 쏠렸다. “이 기록…. 북 도시 비밀 도서관에서 발견했거든?” 그 순간 천사들은 동시에 숨을 멈췄다. 비밀 도서관이라는 말이 놀라운 게 아니다. 딱 두 마디에 불과했지만, 김수현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직감했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왕조 실록. 이거 읽어보니 재미있더라고. 북 대륙 기록처럼 뜬구름 잡는 내용도 아니고…. 오히려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기반으로 편찬한 기록이던데? 고대 문헌, 아니 고증된 역사 자료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야.”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금번 원정도 이 기록 덕을 톡톡히 봤지. 하하.” 천사들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여기서 꿀 먹은 벙어리가 돼버리면 김수현의 말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그리고 인정하는 순간 상황은 밑도 끝도 없이 불리해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우리엘이 날카롭게 외쳤다. “하! 웃기는군. 그러니까 네놈 말은, 비밀 도서관의 기록을 토대로 아틀란타의 성과를 쓸어 담을 수도 있다는 소린가?” “그렇지. 갑자기 똑똑해졌네?” “어쩌다 이번 한 번 맞췄다고 그렇게나 자신하는 건가? 타 자료도 똑같을 거라는 증거는? 그냥 운이 좋았다는 생각은 안 드나 보지?” “찾아보니까 거인에 관한 기록도 있던데?” 그렇게 말한 김수현은 씩 미소 지었다. “뭐, 두고 보면 알겠지.” 우리엘은 순간적으로 입을 닫았다. 슬쩍 웃는 것으로 그치기는 했으나, 김수현의 미소는 확신에 가까운 자신감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의 근원은 당연히 김수현이 1회 차를 겪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물론 대 천사들은 전혀 모르겠지만. 또한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결과적으로 김수현의 말은 사실이다. 북 도시 비밀 도서관에 비치된 기록은, 하나하나가 아틀란타에 잠든 성과를 찾을 수 있는 지표(指標) 역할을 한다. 얻을 수 있는 성과는 아틀란타 내 총 성과의 8할에 이르는 정도. 이건 천사들도 알고 있다. 자신들이 부여한 설정이니까. 물론 그 기록들이 완벽한 해답까지는 제시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김수현은 가장 어려운 임무 중 하나인 ‘야만 왕의 무덤’까지 보란 듯이 해결하고 돌아왔다. 차츰 올라오는 초조감에 가브리엘은 아랫입술을 질근질근 씹었다. 협상이 시작된 이후 단 한 번도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오히려 상대가 원하는 대로 이리저리 휘둘리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히 함정에 빠진 것이다. 기실(其實) 대 천사들이 이렇게까지 질질 끌려 다니는 데는 명확한 이유가 있다. 아까도 말했듯이 현재 천사 쪽에 남은 방법은 이대로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다. 김수현의 말을 거짓으로 치부한 후, 확정된 보상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되돌리면 된다. 즉 어디 한 번 네 마음대로 해보라고 배짱을 부리는 것이다. 그러나 마냥 그렇게 하기에는, 사실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굉장히 불안하다. 왜냐고? 간단하다. 지난 4년간 김수현의 행보가 자신의 말을 증명하고 있으니까. 생각해보면 Tanay가 걸린 특전을 받고 시작한 것부터가 이상하다. 이후 김수현은 머셔너리 클랜을 창설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북 대륙 성과를 깡그리 쓸어 담았다. 아니, 이스탄텔 로우와 해밀도 성과 발견은 했으나 이것도 의심스럽다. 차라리 김수현이 나눠줬다고 표현하는 게 옳으리라. 물론 그로 인해 머셔너리라는 강력한 클랜이 탄생했으나 어디나 반대급부는 존재하는 법. 문제가 생겼다. 그 문제는 강철 산맥 원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공략 당시 북 대륙 사용자들의 평균 수준이 천사들이 예상한 선에 한참이나 못 미쳤던 것이다. 1 지역은 그렇다 치더라도 2, 3, 4 지역의 공략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건 김수현이 있었기 때문이다. 파더를 처리한 것도, 반신으로 각성한 쿠샨 토르를 잡은 것도, 지옥 대공을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용자도 김수현이다. 바꾸어 말하면 김수현이 없었으면 강철 산맥 공략에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이렇게 한 사용자에 의해 한 대륙의 명운이 좌지우지되는 것은 천사들도 절대로, 절대로 바라지 않는 상황이다. 이뿐일까? 애초 현 상황도 김수현이 2천만을 넘는 무지막지한 GP를 조기에 쌓은 것에서 비롯되지 않았는가. 수백 수천 명이 힘을 합쳐야 해결할까 말까 한 임무를, 소수 인원으로 쓱싹 처리하고 다니니 가져가는 GP도 클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할래?” 문득 들려오는 김수현의 음성. 그러나 물음이 아닌 다분한 협박으로 느껴지는 어조였다. 그래. - 내가 원하는 걸 들어주면 너희가 원하는 선, 까짓거 지켜줄게. - 싫어? 그럼 나도 내 멋대로 하지 뭐. 김수현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후.” 가브리엘은 고개를 쳐들고 둥그런 잿빛 천장을 올려다봤다. 추가 보상 협의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통과의례를 거쳐 어느새 아틀란타까지 확대됐다. 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걸까, 자책감이 치솟는다. 허나 한편으로는 합리적인 행동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무수히 가지고 있는, 또 언제든지 얻을 수 있는 레어, 시크릿 클래스보다는, 각성 시크릿 클래스를 노리는 게 현명하지 않은가. 물론 그와는 별개로 속마음은 전혀 그러지 못했다. ‘악마보다 더한 새끼.’ 아마 현재 모든 대 천사들의 공통된 생각이 아닐까. “각성 시크릿 클래스라….” 잠시 후, 한숨과도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실상의 백기 선언. 김수현은 히죽 웃었다. “각성 시크릿 클래스는 총 몇 개가 있지?” “…원래 설정한 건 열두 개. 그리고 현재 남아 있는 건 열 개.” “그럼 그 열 개.” “안 돼. 각성 시크릿 클래스는 원래 정확히 사 등분 해서 각 대륙당 세 개씩 배정할 예정이었어.” “우리가 현재 두 개 가지고 있으니까…. 그럼 남은 하나만 먹고 떨어지라는 소리야? 장난해?” “어쩔 수 없어. 아무리 네가 대단한 공을 세웠다지만, 그렇게까지 몰아주지는 못하겠어.”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가브리엘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김수현은 잠깐 생각에 잠긴 듯싶더니 어깨를 으쓱 들먹였다. “그럼 서 대륙에 배정한 세 개를 북 대륙으로 돌려. 어차피 거기는 이제 필요 없잖아?” 거기까지 알고 있었나. 이제는 헛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가브리엘은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을 느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옅은 미소 띤 얼굴로 김수현을 직시했다.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지만. “좋아. 각성 시크릿 클래스 네 개. 하지만 우리도 추가 조건을 걸어야겠어.” “들어보고.” “첫 번째. 우선 우리와 서약을 맺어줘야겠어. 이제부터 말할 추가 조건을 지키겠다는 서약.” “어렵지 않지.” 김수현은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두 번째. 통과의례 입장은 완전히 포기하는 거겠지?” “물논.” “…세 번째. 각성 시크릿 클래스는 주겠지만…. 네가 누구를 주든지 간에, 클래스 계승으로 인한 능력치 상승 효과는 우리가 새롭게 조정할 거야. 특히 너는 더더욱.” “왜. 그냥 제거하겠다고 하지 그래.” “닥치고, 받아들일 거야 말 거야?” “어쩔 수 없네. 좋아.” 김수현은 얄밉게도 양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가브리엘은 이를 갈았다. “그리고 네 번째. 비밀 도서관의 기록도 당연히 포기하는 거겠지?” “당연은 무슨. 안 돼. 그건 포기 못 해.” “못한다고?” “양심 좀 있어라. 통과의례도 포기하고 계승 능력치 상승 조정까지 받아들였는데, 거기까지 완전하게 포기하라고? 꼴랑 네 개 주면서? 정 그렇게 하고 싶으면 남은 여섯 개 전부 내놔.” “너….” “단, 독점하지 않을 용의는 있어. 비치된 기록 중 딱 3할만 건드리도록 하지.” 가브리엘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3할만 건드리지 않는 게 아니라, 건드린다고 했다. 그 정도면 나쁘지 않다. 아니 이미 충분히 나쁜 상황이지만, 이제껏 보여온 도둑놈 심보에 비하면 그나마 양심적인 조건이었다. 원래는 7할‘만’ 가져가겠다는 말을 하고도 남을 놈이니까. 어느새 김수현의 인식은 그렇게 박혀 있었다. “3할이라…. 이거 참,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네?” 가브리엘은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고, “그 말은 받아들인다는 소리겠지?” 김수현은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물론 속으로는 제일 좋은 것만 가져가면 되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똑똑히 지켜볼 거야. 이 서약에 아주 약간이라도 어긋나는 경우, 가차 없이 회수할 거니까.” 가브리엘은 거의 저주에 가까운 원망을 쏟아내고서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소리에 이어 하얀 빛무리가 터졌다. 협상이 끝나는 동시에 서약이 공식적으로 맺어진 것이다. 그 신속한 속도에 김수현이 휙 휘파람을 불고는 앉은 채로 손을 내밀었다. “그럼 잘 부탁해?” 그런 김수현을 한 차례 노려본 가브리엘은 성난 기세로 몸을 돌렸다. 어차피 겁박, 아니 협상도 끝났으니 더 이상 볼 일은 없었다. “나머지는 세라프와 해결해.” 그 순간이었다. “아차. 아카데미 이전 허락해준 거, 고맙다.” 약간 뜬금없는 말이 이어진 찰나 가브리엘이 멈칫 걸음을 정지했다.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당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고 보니 김수현은 통과의례 입장을 포기하겠다고 했지, 신규 사용자까지 포기하겠다는 소리는 안 했다. 말인즉 새로 소환된 사용자가 운 좋게 클래스를 얻어 나오는 경우, 그 사용자를 영입하는 데는 아무런 제한도…. “아차차, 잠깐만. 가기 전에 부탁 하나만 더 들어주라.” 그러나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 김수현이 말이 한 번 더 이어졌다. 벌컥 몸을 돌린 가브리엘은 낯을 크게 찌푸렸다. “너….” 마치 여기 보라는 듯이, 김수현이 앞서 구매한 통과의례 입장권 10매를 팔랑팔랑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통과의례는 건드리지 않겠다고…!” “아, 물론 서약은 지킬 거야. 조건을 완화해달라는 소리가 아니라고.” 사자가 면전에서 으르렁거리는 듯한 살기에 김수현이 느릿하게 머리를 가로젓는다. “그냥,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까….” 약간 어색하게 말끝을 흐리더니 입장권을 만지작거리며 스리슬쩍 시선을 올린다. 그리고, “환불 좀.” 빙긋 웃어 보였다. ============================ 작품 후기 ============================ 많이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그냥 예고 시간에 올릴까 하다가, 오늘 안으로 협상 진도를 끝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만큼 용량을 빵빵하게 넣었으니 부디 양해를…. _(__)_ 그리고 어제 코멘트는 하나도 빠짐없이 읽었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보니까 좋은, 재미있는 의견이 많아요. 이름은 최대한 멋들어지면서 무난한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계속 읽으면서 조율해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예. 정말 좋은 의견이 많았는데요. 그런데요. 1. 로유미를 꿰뚫는 위대한 검 → 네? 2. 검의 무희 : 로유미 전용 직업 : 쌍검을 가지고 무희복을 입고 무흐흐흐무흐흐 흐ㅅ흐 춤 같은 검 놀림. → 무흐흐흐무흐흐 흐ㅅ흐 에 관한 정확한 의미가 궁금합니다. 3. 직업 이름만 짓기 ㅋㅋ 아 그리고 로유미의 신랑 ㅋㅋ 참고로 로유미의 신랑은 로유미의 가호를 받게 됨 → 가호의 내용이 궁금해지네요. 4. 클래스 명 : 로유미(변신 후 로리 거유 미미). 여성 전용 클래스로 남성이 전직 시 강제 성전환을 요구하는 자아(독자)확정 클래스. 직업전용 특기로는 남성이라 우기며 징징대지만 높은 현실의 벽에 좌절함. 특이 사항으로 여성이 전직 시 전직자의 청소년기로 강제 전환되며 어딘가의 부피가 매우 커짐. 남성이 전직 시 직업 스킬 등급 EX 이상 판정 보너스를 얻게 되며 어딘가의 부피가 매우 작아져 큰 여성들을 질투하게 만드는 상태 이상 확정에 걸림. → ㅡㅡ …이 외에도 수많은 공격이 있었습니다. 이러다 제가 정말로 진짜로 넣어버리면 어쩌시려고 이러세요. 아니, 물론 독자 분들의 코멘트는 하나하나 모두 소중해요. 그러니 분명 이런 코멘트들에도 제가 알 수 없는, 알지 못하는 깊은 의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 이 코멘트를 작성하신 독자 분들의 해석과 고견을 기대합니다. 0761 / 0933 ---------------------------------------------- 선택의 시간. 가브리엘과 대 천사들이 떠난 걸 확인한 후, 돌연히 몸의 긴장이 풀어졌다. 난데없이 왜 이렇게 힘든 기분이 드는 건지. 가만히 앉아만 있었는데 흡사 격한 전투를 치른 것처럼 몸이 노곤하다. 아니면 머리가 어지럽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제 끝난 건가? “후우.” 가볍게 숨을 흘리고 몸을 살짝 젖히니 멍하니 나를 쳐다보는 세라프와 눈을 마주쳤다. ‘뭘 봐.’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치솟았으나 피로한 관계로 그냥 얌전히 허공을 응시했다. 비밀 상점은 이미 활성화된 상태고 방해꾼들도 떠났고. 이제부터는 신 나고 재미있는 쇼핑 시간이다. “쿡.” 그러나 목록에 손을 올린 찰나, 이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흘깃 눈을 돌리니 눈을 살짝 치뜬 채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는 세라프가 보였다. 제 딴에는 조신하게 웃고 싶었던 것 같은데, 사실 약간 무서웠다. 웃는 입이 보이면 그나마 낫기라도 하지. 두 눈만 치켜 뜨고 있으니 이상하잖아. 아니, 애초 왜 웃는 거지? “이런, 실례했습니다.” 내가 쳐다보는 걸 인지했는지 세라프는 바로 얼굴을 회복했다. 허나 어딘가 모르게 잔잔함이 느껴지는 표정이다. “수현은….” 세라프가 살짝 운을 띄웠다. “정말…. 엄청난 것 같습니다.” “엄청나?” “네. 여느 천사는 함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가브리엘 님을 상대로 그런 모습을 보이셨으니…. 저로서는 그냥 엄청나다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가브리엘이 그렇게 굉장한가? 아. 물론 천사를 총괄하는 입장인 건 알고 있는데.” “네. 7대 악마의 수장인 사탄이 유일하게 기탄(忌憚)하는 천사니까요. 물론 가브리엘 님도 사탄을 꺼리는 건 매한가지입니다만.” “그런가.” 절로 심드렁한 소리가 나왔다. 처음 듣는 말이기는 했으나 별다른 흥미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보다 ‘수현은’이라고 부르는 게 상당히 거슬렸지만, 그냥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아직 부탁할 것이 남아 있으니까. 목록으로 시선을 돌리자 우측 상단으로 잔여 GP가 눈에 들어온다. 『현재 사용자 김수현의 Gold Point는 20,609,684 Gold Point입니다.』 후후. 정말 좋은 환불이었어…. 가 아니라. 아무리 GP가 많다고는 하나, 두어 개 필수적으로 사야 할 품목이 있는 터라 무작정 낭비할 수는 없다. 그러고 보니 엘릭서도 슬슬 떨어져 가던가? 우선 엘릭서 6병 정도와 능력치 상승 영약을 구매할 GP, 그리고 하승우 사건과 같은 경우를 대비해 약 600만 GP는 남겨두는 게 좋겠다. 그럼 정확히 14,609,684 GP가 남는데, 이 안에서라면 무엇을 사든지 상관없다. 이후 또다시 비밀 상점을 이용할 거라는 보장도 없고. 이번 기회에 모조리 사용하는 게 좋으리라. GP야 또 모으면 그만이니까. “아.”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니 불현듯 한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세라프. 그러고 보니 저번에 또 하나 소개해주지 않았어? 통과의례 입장권 말고.” “괴물 소환 상자 말씀이십니까?” 세라프의 말이 들려와 나는 곧장 항목을 검색했다. 『괴물 소환 상자 1(1,000 GP)』 『괴물 소환 상자 2(10,000 GP)』 『괴물 소환 상자 3(100,000 GP)』 『괴물 소환 상자 4(1,000,000 GP)』 (설명 : 홀 플레인 전역에 존재하는 괴물을 무작위로 소환할 수 있다. 상자에 각인된 숫자가 높을수록 더욱 강력한 괴물이 소환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길 수만 있다면, 사체나 괴물이 착용한 장비를 가질 수 있다.) “좋은 선택입니다. 이 상자는 최근에 신설된 품목으로, 동서남북 대륙뿐만이 아니라, 사용자의 발길이 닿지 못하는 먼 지역에 돌아다니는 괴물까지 소환할 수 있습니다.” 세라프의 부연 설명이 저번과 비슷하게 이어졌다. “그때 말씀하신 대로 사용자의 행운에 좌우되는 품목입니다만…. 그래도 운만 좋으면 쉬이 경험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오호.” “물론 어디까지나 행운이 굉장히 좋아야. …아, 상자는 꼭 구매자가 개봉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 그래.” 세라프가 연달아 행운을 강조하자 속으로 킥킥 웃음이 나왔다. 이 정도로 대놓고 말해주는데 못 알아듣는 게 병신이다. 그러니까 안솔을 시키면 된다는 소리지? 문득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안솔에게 행운의 영약을 먹인 후 이 상자를 개봉하게 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행운 능력치가 105 포인트면 나도 감히 상상할 수 없을 것 같은데. 하하. “괜찮네. 이거, 제일 좋은 걸 사는 게 낫겠지? 상자 4번으로.” “물론입니다.” “그런데 100만 GP…. 꽤 비싸잖아. 여기에 전부 쏟아 붓기는 좀 그렇지 않나.” “하기야 지정 소환이 아닌 무작위 소환이니까요. 그래도 차후 구매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참작해, 최소 여섯 개에서 최대 열 개 사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흠. 여섯 개에서 열 개 사이라. 얼마나 사야 할지 약간 고민되기는 했지만, 갈등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좋아. 6개 구입하겠어.” 『괴물 소환 상자 4를 구입합니다(x6).』 『6,000,000 Gold Point가 차감됩니다. 남은 GP는 14,609,684 Gold Point입니다.』 순식간에 GP가 팍팍 줄어들었으나 이상하게도 별로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세라프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를 인도할 리는 없고, 안솔을 떠올리면 오히려 기대감이 솟구친다. 여하튼 이렇게 괴물 소환 상자도 구입 완료했고, 어디 보자. [……. 『아르고스의 눈(1,400,000 GP)』 『모이라이의 기념품(55,000,000 GP)』 『앙칼라의 거울 방패(700,000 GP)』 『성흔의 증표(500,000 GP)』 …….] 흥미를 끄는 품목이 꽤 있는데, 뭘 구매해볼까? “…응?” 그때였다. 상념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니 문득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지런한 은발이 흘러 넘치는 고개가 열심히 품목을 들여다보고 있다. 흘끗 시선을 내리자 내 왼팔을 살며시 부여잡고 있는 섬섬옥수(纖纖玉手)가 보였다. 당연히 세라프였다. …언제 왔는지는 모르지만, 왜 멀쩡한 제단을 놔두고 내 옆으로 붙은 거지? 이러니까 기분이 이상해진다. 그러니까 마치 서로 사이 좋게 팔짱 낀 채 마트에서 장을 보는…. “수현.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장비도 업그레이드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때 세라프가 내 팔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 “어, 어? 글쎄?” “무기야 딱히 필요치 않다손 쳐도…. 제가 알기로는 2년 전 전쟁으로 노블 미스릴 셔츠와 푸른 용기사의 외투가 파손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아.” “그럼 이번 기회에 장갑(裝甲)을 전체적으로 새롭게 마련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최대한 물리 방어력을 고려하셔서요.” 틀린 말은 아니다. 현재 착용 중인 하늘, 태양의 영광에 큰 불만은 없지만, 내구력은 둘째치고서 라도 너무 오랫동안 사용해왔다. 물론 그래도 좋은 장비임은 분명하나, 아무래도 거미 실로 만들어진 도복이다 보니 갑옷보다 물리 방어력이 크게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찌르기 공격에는 상당히 취약한 면도 있고. 결국 세라프의 말인즉, 이미 충분한 마법 저항력보다는 물리 방어력에 신경을 쓰라는 소리였다. 현재 최고의 보호구인 『게헨나의 보호 요새』가 있기는 하지만, 이건 그야말로 최후의 보루로 사용해야 한다. 마력 소비량이 정말로 엄청나니까. 금번 원정에서 확실하게 느꼈다. “그것도 좋지. 쓸만한 게 있나 봐?” “물론입니다. 무검도 비밀 상점에서 구매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근데 너무 비싸지 않을까?” “GP는 이미 충분.” “아니. 아무리 그래도 장갑 전체는 투구, 갑옷, 건틀릿, 부츠 등등이잖아. 부담스럽다고.” “…….” 일리 있는 말이라 여겼는지 세라프는 잠시 입을 닫았다. “확실히…. 품목이 많기는 합니다.” “애초 건틀릿은 바꿀 생각도 없다고. 여하튼 꼭 전부 여기서 맞출 필요는 없잖아? 아까 상자도 있으니까.” 다른 좋은 건틀릿도 많겠지만, 현재 착용하고 있는 『TOPG』도 절대로 어디서 떨어지는 수준은 아니다. 근력 능력치를 무조건 올려주고, 액티브 어빌리티가 잠재된 건틀릿이 어디 흔한가? 비록 조건부 발동이기는 하지만 서도. 세라프는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정 그러하시다면, 알겠습니다. 그럼 전체가 아닌 일부만 여기서 보강하시는 건?” “일부?” “나머지는 외부 활동으로 장만하시고, 가장 중요한 갑옷이나 망토. 혹은 장신구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현재 수현의 사용자 정보를 고려해 가장 적합한 품목을 추천할 수도 있습니다.” “어…. 그러던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세라프가 상당히 적극적으로 느껴졌다. 도와주지 못해 안달 난 이를 보는 듯하달까? “갑옷은 무조건 저번에 봐둔 걸로…. 이 망토는 성능은 좋은데, 갑옷과는 심히 어울리지가…. 위엄도 중요하니…. 그리고….” “아니, 꼭….” “아, 찾았습니다. 수현? 이것들 좀 한 번 봐주시겠습니까?” “…….” …잠깐만. 방금 ‘당신한테는 이게 제일 어울릴 것 같아요.’ 라고 느꼈다면 내 착각이겠지? 허나 나를 보는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걸 보면 착각이 아닌 것 같다. 그래. 이건 마치 부인이 남편을 데리고 이것저것 골라주는 행동과 흡사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우리가 무슨 커플이나 부부도 아닌데, 저렇게 즐겁고 행복해하는 걸 보면 심히 부담스러워진다. “…수현?” 아차. 왠지 여기서 당황하면 지는 것 같아, 억지로 표정을 관리하며 눈앞에 집중했다. 『치우천왕의 갑옷(5,400,000 GP)』 『붉은 달의 망토(1,400,000 GP)』 『라실라스의 축복(900,000 GP)』 그러나 출력된 목록을 확인한 순간, 나는 뜨악 할 수밖에 없었다. 단단해 보이는, 멋들어진 칠흑색 상하 일체형 갑옷. 맑고 붉은 월광이 은은히 흐르는 고풍스러운 망토. 그리고 아름답게 세공된 브레이슬릿. 확실히 외견상 좋아 보이기는 한다. 허나 총 합해서 770만 GP는 무슨 개념이지. 갑옷도 엄청나게 비싸고, 망토도 만만치 않다. 그리고 작은 팔찌 주제에 무슨 90만 GP나 하는 거야? “겉으로 보기에는 작은 팔찌이기는 합니다만, 괜히 추천해 드린 건 아닙니다.” 이런, 들렸나?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은 모양이다. “수현 우선은 설명을.” 재촉처럼 느껴지는 권유에 나는 천천히 설명을 훑기 시작했다. “흠….” “어떻습니까?” “응, 괜찮네. 마음에 들어.” “다행입니다.” 솔직한 감정을 말하니 세라프는 부드러이 웃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심사숙고했으나 결국에는 모두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확실히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성능이 좋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아까와 비슷한 이유였다. 어차피 GP를 모두 소모하기로 마음먹었거니와,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성능의 장비 여러 개를 사느니, 하나라도 확실한걸 구매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치우천왕의 갑옷을 구입합니다.』 『붉은 달의 망토를 구입합니다.』 『라실라스의 축복을 구입합니다.』 『7,700,000 Gold Point가 차감됩니다. 남은 GP는 6,909,684 Gold Point입니다.』 이제 남은 GP는 약 690만. 그러나 필수 구매 품목에 사용할 600만을 남겨야 하는 걸 생각해보면 가용 가능한 GP는 90만 정도였다. 세라프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는지 더는 간섭하지 않았고, 나는 남는 GP도 소모할 겸 혹시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을까 자세히 목록을 훑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확실히 구매 범위가 좁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살만한 건 있었다. 나는 우선 여러모로 유용하겠다고 판단한 『속박의 볼라(750,000 GP)』를 구입했다. 이어서 요즘 겁 없이 덤벼오는 여인네들을 혼내주는데 매~우 도움이 될 것 같은, 『정(精)의 반지(100,000 GP)』를…. “수, 수현?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 반지는 왜….” 뒤늦게 저지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잽싸게 구입을 마쳤다. 그러자 세라프는 황당하다는 듯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자, 이제 남은 GP는 끽해야 5만 정도인가?” “수현?” “후, 겨우 다 썼네.” “사용자 김수현?” …젠장. 그래, 알고는 있다. 세라프의 성격상 분명 합리적인 구매가 아니라 생각했을 것이고, 나도 쑥스러운 마음이 없잖아 있다. 허나 한편으로는 억울한 마음도 있었다. 장비를 새롭게 맞추는데 얼마나 많이 투자했는데, 10만 GP 정도는 나를 위해서(?) 사용할 수도 있잖은가. 뭐, 아무튼. 그렇게 필수 구매 품목을 제외한 쇼핑을 마치니 비로소 미뤄뒀던 보상이 떠올랐다. 이제는 더 이상 신경 쓸 것도, 지체할 이유도 없어졌다. 가슴이 서서히 방망이질을 시작한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세라프.” “…….” “쇼핑도 일단락 지었고, 이제 각성 시크릿 클래스 목록을 보여주겠어?” “…….” “…세라프?” “네. 알겠습니다.” 쌩, 찬바람이 지나치는 듯한 목소리. 허나 별로 나쁘게 생각되지는 않는다. 적어도 지금부터는 방해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브리엘은 지금쯤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겠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나도 잃은 게 없지는 않다. 그저 피해를 최소화했을 뿐, 포기한 부분도 있으니까. 그런 만큼 이제부터는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한다. 단 한 번의 선택으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생각한 것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도 있다. 나는 두근두근 설레는 가슴과, 긴장으로 요동치는 심장을 느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심안 덕분일까. 마음은 곧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고요해졌다. 잠시 후. “각성 시크릿 클래스, 개방 완료했습니다.” 서서히 눈을 뜨자, 총 10개로 이루어진 항목이 눈앞에 출력돼 있다. 그리고 시선은, 『각성 시크릿 클래스(Arousal Secret Class) 목록』 1. [검의 군주(Sovereign Of Sword)] 2. [강철의 여황(女皇)(An Empress Of Iron)] 3. [위대한 개척자(Grand Pathfinder)] 4. [신성 투사(Sacred Champion)] 5. [천궁(天弓)] 6. [혼돈의 황녀(A Royal Princess Of Chaos)] 7. [복마전(伏魔殿)의 성인(聖人)(Saint Of Pandemonium)] 8. [마도 황제(魔道 皇帝)] 9.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0. [백야(白夜)의 무희(舞姬)] “이건….” 자연스레 한 곳으로 고정됐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후기 생각하다가 깜빡 졸 뻔했네요. 지금 조금 한계인 것 같아서, 우선 약간이라도 자고 오겠습니다. 기다리신 분들에게는 정말로 죄송합니다. _(__)_ 0762 / 0933 ---------------------------------------------- 선택의 시간. 보상 협의가 끝난 이후 며칠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선택한 보상, 정확히 ‘각성 시크릿 클래스’ 4개는 바로 지급받지 못했다. 왜냐면 여타 클래스처럼 형태를 갖춘 물건이 아니라, 스스로 각성하는 과정으로 계승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때 고른 모든 보상을 포함해 한꺼번에 받는 것으로 하고, 준비가 완료되면 전령을 보내기로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허나 보상이 올 때까지 멍하니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등급제가 시행된 이후 클랜원들은 서서히,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하루 간격으로 들어오는 외부 청원(請願)이 전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요청이 들어오는 족족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클랜원이 부지기수(不知其數)였다. 어떻게든 등급을 올려보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니, 오죽하면 청원하러 온 사용자가 ‘아니, 이렇게까지 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웃지 못할 사건도 있었다. 아무튼, 그중에서도 가장 약진이 두드러진 클랜원은 바로 이유정이었다. 스스로 요청해 F 등급으로 내려간 이후 여러 말이 많았으나, 소문은 단 사흘 만에 사그라졌다. 아마 남들이 보기에도 무언가가 변했다는 방증이리라. 실제로 이유정은 원정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두 개의 임무를 추가로 성공했다. 물론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분명 좋은 변화임은 틀림없어 마음이 흡족해졌다.(한편으로는 약간 불안하기도 했다. 이유정이 1차 목표는 B 등급에 올라가는 거라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기 때문이다.) 나도 가만히 있던 건 아니었다. 우선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에 건설된 시설을 사용해도 된다고 통보하자 비비앙은 뛸 듯이 기뻐했다. 꼭 성과를 내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 나는 새로운 머셔너리 아카데미를 짓는 일에 신경을 쏟았다. 도시 내 특수 건물이 들어서는 것 자체가 홍보 효과를 볼 수 있으므로 조승우는 바로 찬성했다. 또 이미 한 번 건설한 전력이 있는 만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그리하여 신속히 장소를 선정하고 공사에 착수했을 무렵, 마침 타이밍 좋게 보상 준비가 완료됐다는 전령을 받을 수 있었다. 사용자 전용 창고에 넣어놨으니 어서 가져가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얼씨구나 싶어 바로 나갈 채비를 했지만, 갑자기 전해온 소식을 듣고 잠깐 미루고 말았다. 나가기 직전 공교롭게도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중요한 일이 아니면 나중에 만나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방문한 사용자가 산하 클랜의 한 축을 맡고 있는 상인 조합 로드 서지환이었기 때문이다. “방문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머셔너리 로드.” “아닙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어이쿠, 감사합니다.” “…….” 서지환은 꾸벅 머리를 숙이고는 능글능글한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찻물을 후루룩 들이켜는 모습을 나는 가만히 응시했다. 겉보기로는 영락없는 인상 좋은 배불뚝이 아저씨나, 실상은 전혀 방심할 상대가 아니었다. 사용자로서 실력은 그다지 일지 모르나 상인으로서의 감은 타고난 인간이다. 예전 구 코란 연합을 무너트릴 때도 가장 먼저 행동한 사용자가 아닌가. “이야, 차 맛이 아주 좋은데요? 온몸에 뜨끈뜨끈한 기운이 쫙쫙 퍼지는 느낌입니다.” “고연주가 의외로 다도(茶道)에 일가견이 있더군요.” “오호! 그림자 여왕 님이 만들어주신 차라니, 이거 오늘 입이 호강하는군요?”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허허. …아, 그럼요. 실례가 되지 않으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은데요. 괜찮으십니까?” “물론입니다.” 방금도 그렇다. 차를 마시는 척하며 나와 방을 흘끗흘끗 살폈다. 나가기 직전 들이닥쳤으니 아마 채비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을 터. 그걸 발견하고서 의례적인 인사는 대충 끝내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으리라. 물론 내 입장에서도 이런 상대가 좋다. 귀찮게 빙그르르 돌려 말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남 도시에 밤의 거리를 구현하고 싶습니다.” “밤의 거리를 구현하고 싶다고요?” “예. 이제 아틀란타도 서서히 정착해가는 것 같고, 물량도 꽤 돌아다니는 시점입니다. 여기서 밤의 거리를 구현하게 되면 시중에 드러나지 않는 물량을 확실하게 끌어당길 수 있을 겁니다.” “흠. 밤의 거리라….”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밤의 거리, 즉 밤이 오면 열리는 일종의 상점가라고 직역할 수 있다. 허나 그렇다고 일반적인 상점가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실상은 사창가, 도박장, 암거래, 경매장은 물론 심지어 노예 시장이나 청부 살인 업체 등이 존재하는 장소다. 즉 낮에는 드러날 수 없는 추악하고도 어두운 욕망이 실제로 구현화돼 오가는 거리인 것이다. 그 등등한 살문도 밤의 거리에서 주로 활동하니 어찌 보면 상당히 위험한 장소라고도 할 수 있었다. “혹시 도시 품격에 훼손이 가지 않을까 우려하시는 거라면, 걱정 붙들어 매시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전혀 문제가 터지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여 관리하겠습니다.” 별로 내키지 않아 한다고 생각했는지 설득하는 어조의 음성이 들려온다. 시선을 올리니 여전히 벙글벙글 웃는 낯의 서지환이 보였다. 속으로는 능구렁이 수십, 아니 수백 마리는 키우고 있겠지. 여하튼 저렇게 자신하는 걸 보면 무언가 수가 있는 것 같은데…. “정 마음이 놓이지 않으신다면, 일부 품목에 제한을 두셔도 좋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밤의 거리를 만드는 것 자체니까요.” “제한이라…. 그래서야 진정한 밤의 거리를 형성할 수 있겠습니까?” “…예?” “밤의 거리의 장점은, 추악한 욕망을 직접 눈으로 보고 구매할 수 있다는 데 있지요. 그것이 이익 창출과 직결되기도 하고요.” 서지환의 웃음이 사라졌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고 하던가? 내가 아는 사실을 서지환이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굳이 말을 꺼낸 이유는 하나였다. 이윽고 시종일관 능글맞던 표정이 느릿한 속도로 진중해졌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서지환이 입을 열었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 “그리고 믿고 맡겨주신다면, 그 어느 도시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최고의 밤의 거리를 만들어보겠습니다.” “의기는 좋습니다만, 시장 특성상 문제는 터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어떤 방식으로든지요. 그 문제가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잘 관리하실 자신이 있으시면….” “밤의 거리는 제가 직접 관리할 예정입니다. 제대로 만들어지기만 한다면, 최대 수입 창출 지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은 시장이니까요. 그리고 만에 하나 문제가 새어나간다면, 모든 책임은 우리 신 코란 연합에서 지겠습니다.” “상인 조합이 아닌, 연합이라. 이미 내부에서도 얘기가 정리된 모양이군요.” 서지환이 슬쩍 웃었다. 그리고 나는 결정을 내렸다. 밤의 거리를 만들기로. 사실 돈이 많거나 추악한 광경에 익숙해질 수만 있다면 밤의 거리만큼 재미있고 흥미로운 곳도 찾기 어렵다. 사방 천지에서 온갖 욕망들이 유혹하는데, 아차 하는 사이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아무튼, 이렇게 허락은 해줬고. 흘끗 눈을 들자 서지환이 양손을 싹싹 비비고 있다. “저, 그럼….” “45%.” 나는 바로 선수를 쳤다. 서지환은 잠깐 멍한 낯빛을 보이더니 쓰게 웃었다. “아마 30% 선을 생각하시고 시작부터 높게 부르신 것 같은데…. 그냥 33%로 하시죠. 이 서지환, 그렇게 경우 없는 놈은 아닙니다. 더구나 머셔너리 로드 앞에서는요.” “33%. 그러시죠.” 애초 속으로 28%에서 33% 사이로 생각하고 있던 터라, 나는 바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지환과 굳게 손을 맞잡았다. 좋았어. 이렇게 고정 재원(財源)이 하나 추가로 생겼다. 이윽고 서지환은 앞으로 진행 보고는 직접 하러 오겠다는 말을 한 후, 기대해달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문을 열고 나갔다. 그 말대로 충분히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북 대륙 시절에도 코란 내 밤의 거리는 가장 성황을 이루는 곳이었으니까. “흐응, 밤의 거리라.” 그렇게 서지환이 나가자마자 고연주가 그늘진 곳에서 불쑥 솟아올랐다. 이미 엿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터라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고연주는 서지환이 나간 문을 쳐다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서지환 정도의 사용자라면 기대해도 좋겠죠. 수완 하나는 확실한 사람이니까요.” “그렇겠죠. 어차피 어중이떠중이가 어중간하게 하자고 했으면 허락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서지환이니까 허락한 겁니다.” 나는 머리를 주억인 후 책상 한쪽에 놓인 기록을 집었다. 전령을 받고 미리 작성해둔 기록이었다. 원래는 나가면서 시키려고 했는데 마침 좋은 때에 나타나 줬다. “어쨌든 이로써 어지간하면 금화가 마를 일은…. 응? 그건?” 가져가라는 의미로 두어 번 흔들자 고연주는 요염이 손을 놀려 기록을 낚아챘다. 그리고 유심히 읽는가 싶더니 곧 입가에 짓고 있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이건….”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한 2, 30분 정도 걸릴 것 같으니, 집무실로 가져다 놓으시면 됩니다.” 아까 가져온 아기 카오스 미믹을 잡고 의자에서 일어서니 고연주가 검지로 기록을 톡 건드렸다. “이 목록만요?” “예.” “이제 슬슬 시작하시려는 거예요?” “이제는 해야 합니다. 더는 미룰 거리도 없고, 오히려 늦은 감도 있어요.” “누굴 생각하시는지는 모르지만…. 어휴, 조만간 또 수군수군 말이 나오겠는데요.”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나는 싱겁게 웃은 후, 곧바로 방을 나섰다. * 사용자 창고에서 물건을 수령하고 돌아오니 집무실은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책상에는 아름다운 빛을 뿌리는 4개의 결정이 얌전히 놓여 있다. 『물(水)의 결정』 『불(火)의 결정』 『빛(光)과 어둠(暗)의 결정』 『고대 무녀의 증표』 정확히는 총 3개의 결정(結晶)과 하나의 증표. 여태껏 S 등급 이상의 클랜원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창고에 꼭꼭 숨겨둔 것들이다. 허나 이제는 사용해야 할 때가 왔다. 사실 진작 해야 할 일이었는데, 아까 말했던 것처럼 늦은 감이 없잖아 있었다. 잠시 그것들을 어루만지다가 나는 왼손에 쥔 묵직한 것을 들어 올렸다. “…삐잉?” 아기 카오스 미믹은 흠칫 몸을 움츠렸다가 곧 느슨히 입구를 풀었다. 만족한다는 뜻으로 살살 쓰다듬어주자 미약한 떨림이 사라졌다. 예전에는 뭘 좀 넣으려고만 하면 입구를 꼭 오므려 반항하더니, 근래 들어 꽤 순종적인 모습을 보인다. “자, 그럼 한 번 보실까?” 나는 아기 카오스 미믹의 주둥이 부분을 살며시 움켰다. 그리고 단 한 번에, 좌우로 있는 힘껏 찢어버렸다. “삐에에엑!” 쫙! 찢어지는 시원한 느낌과 함께 새된 비명이 터졌다. 그래, 바로 이 느낌이다. “삐, 삐에에에…. 삐에에엥….” 마치 자신이 뭘 잘못했느냐는 듯, 무척이나 억울해하는 울음이 들려온다. 킥킥 웃으며 거꾸로 잡고 아래로 탈탈 털자, 쿵쿵거리는 무언가 묵직한 소리가 연달아 들려온다. 이내 이 이상 나올 게 없다는 걸 확인한 후, 나는 삑삑 울어 젖히는 녀석을 휙 던지고 나서 물건 정리를 시작했다. 『치우천왕의 갑옷』 『붉은 달의 망토』 『라실라스의 축복』 『속박의 볼라』 『정(精)의 반지』 우선 세라프가 골라준 엄청난 가격의 보호구 장비와 내가 구매한 물품. 물론 아직 이 정도로는 완전한 장갑을 갖췄다고 볼 수는 없다. 갑옷은 상하 일체형이라고 하더라도, 받쳐 입는 옷이나 투구, 부츠도 새로 마련해야 하니까. 그리고 속박의 볼라(Bola)는 기습 전투나 포로 감금에 사용할 예정이고, 정의 반지는…. 으흐흐. 『근력 상승의 영약』 (설명 : 근력 능력치가 2 포인트만큼 상승합니다.) 『내구 상승의 영약』 (설명 : 내구 능력치가 2 포인트만큼 상승합니다.) 『민첩 상승의 영약』 (설명 : 민첩 능력치가 2 포인트만큼 상승합니다.) 『마력 상승의 영약』 (설명 : 마력 능력치가 2 포인트만큼 상승합니다.) 『행운 상승의 영약』 (설명 : 행운 능력치가 2 포인트만큼 상승합니다.) 능력치 상승 영약 5개. 남은 것을 깡그리 쓸어왔다. 원래 영약은 한 번에 하나밖에 구매할 수 없다. 허나 나는 그냥 이번 기회에 한꺼번에 살 수 없겠느냐고 세라프에게 부탁했다. 어차피 현재 비밀 상점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도 나밖에 없거니와, 내가 나가자마자 지인에게 비밀을 발설해 사게 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세라프는 일리 있다고 여겼는지 바로 상부(?)에 내 요청을 보고 했고, 되돌아온 가브리엘의 회답은 ‘네 멋대로 해!’였다. 당연히 조건은 붙었다. 내가 먹을 수 있는 건 오직 하나이며, 나머지는 4명의 사용자에게 하나씩 나눠줘야 한다. 이것까지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엘릭서(x 6)』 이어서 밝은 노란색 액체가 찰랑거리는 병 6개. 좋아, 구매한 물건이 거의 제대로 들어왔다. 그렇게 확인을 마친 후, 나는 이제 남은 4개의 물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첫 번째로 시야에 들어온 건, 『천궁(天弓)』 은은한 마력을 줄줄 흘리는 거대한 보랏빛 활 하나와, 『신성 투사(Sacred Champion)』 두 번째는 마찬가지로 새하얀 빛을 번쩍이는 길쭉하고 뭉툭한 메이스, 『백야(白夜)의 무희(舞姬)』 세 번째는 흡사 최고급 세공품을 보는 듯한, 청량한 기운을 은은히 흘리는 아름다운 부채, 『검의 군주(Sovereign Of Sword)』 그리고 네 번째로 낡고 수수해 보이는 보통의 장검까지. 각성 시크릿 클래스, 검의 군주를 확인하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앞선 3개의 물건은 척 봐도 범상치 않은 힘을 품은 장비들이었다. 그래서 서비스로 이런 것도 주는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헌 장검을 보니 약간은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래도 검이 부족한 것도 아니라, 나는 미련을 떨치고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검의 군주(Sovereign Of Sword)』 (설명 : 아주 먼 옛날 위대한 검사가 있어, 온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검의 우러름을 받고, 검의 사랑을 받은 이가 하나 있었네. 먼 시절, 아주 먼 시절….) 하나 특이한 건, 검의 군주에 관한 설명에 무슨 이상한 노래가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흡사 고대 음유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그 외의 정보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고, 그래서 엄청나게 갈등하고 또 고민했다. 선택 당시, 각성 시크릿 클래스는 모두가 굉장히 좋게 느껴졌다. 어느 것 하나 포기하기 힘들 정도였다. 결국에는 선택에 기준을 세울 수밖에 없었는데, 천궁이나 신성 투사의 경우는 ‘확신’을 가지고 고를 수 있었다. 백야의 가희는 ‘확신’과 ‘도박’ 두 경우의 수를 포함해 선택했다. 그러나 검의 군주는 처음에는 무조건 ‘도박’이었다. 매우 좋은 클래스임은 분명하나, 현재 사용하는 검술 전문가도 전혀 떨어지지 않으니까. 즉 욕심은 가지만, 이득을 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그러나 장고 끝에 검의 군주를 선택했을 때, ‘도박’은 곧 ‘확신’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확신’은 결국 검의 군주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말인즉…. 『검의 군주는 근접 계열의 정상(頂上)에 오른 클래스입니다. 특히 검을 익힌 사용자가 있다면 계승을 추천합니다.』 『현재 사용자 김수현 님의 클래스는 근접 계열 최상위 시크릿 클래스 검술 전문가(Sword Specialist)입니다. 해당 클래스를 계승할 경우, 효율의 감소는 없으나 본래의 힘을 온전히 이끌어낼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단, 정상에 오른 전력(前歷)이나 또는 검의 주인이 될 자격. 이 두 가지 중 하나가 판정될 경우, 해당 클래스의 숨겨진 힘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진명 ‘검의 주인’을 확인했습니다. 해당 클래스의 습득을 추천합니다. 계승하겠습니까?』 허공에 떠오른 4개의 메시지. 그 중 아래 2개의 메시지를 보니 무언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든다. 이 클래스는 1회 차에 등장한 적도 없고, 각성 시크릿 클래스 계승이 어떤 시스템으로 이루어지는지는 자세히 모른다. 그러나 나는 분명 정상의 진명을 가진 적이 있으며, 현재는 검의 주인이라는 진명을 갖고 있다. “…….” 그래, 어차피 선택은 그날 끝났다. 결국 치솟는 기분을 이기지 못해,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Yes’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잠시 후. 『각성 시크릿 클래스, ‘검의 군주(Sovereign Of Sword)’를 계승합니다.』 『진명 ‘검의 주인’을 확인했습니다.』 『축하합니다. ‘검의 군주(Sovereign Of Sword)’의 숨겨진 능력이 드러납니다.』 『사용자 정보의 진화(進化)를 시작합니다.』 ============================ 작품 후기 ============================ 원래는 자정에 올리고 싶었는데, 내용을 추가하다 보니 35분 정도 늦었네요. ㅜ.ㅠ 감사합니다. 그제는 하루 종일 머리를 식혔습니다. 덕분에 초조감이 사라지고 심신이 편안해지니 그제야 머리가 조금씩 돌아가더라고요. 하하. 여러 설명은 한꺼번에 다 밝힐까 하다가, 그럼 너무 지면을 할애하는 부분이 많아져 몇 회로 나누기로 했습니다. 내용을 이어가면서 조금씩, 확실하게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속박의 볼라는 SM 아이템이 아닙니다. 아, 물론 때에 따라 SM으로 사용은 가능합니다. 허나 볼라(Bola)는 기본적으로 줄 끝에 돌멩이가 매달린, 일종의 투척 무기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75만 GP나 하는데, 당연히 효용이 있어야겠지요. :) 그나저나 드디어 쪽지를 한 자릿수로 떨어트렸네요. 곧 남은 쪽지 모두 이번 주안에 답신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D 0763 / 0933 ---------------------------------------------- 선택의 시간. 그때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낡디낡은 장검이 갑자기 번쩍 빛을 뿜으며 두둥실 허공으로 떠오른 것이다. 마치 의지를 가진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 된 것처럼. 허나 그 현상도 잠시. 상태를 채 자세히 살피기도 전, 검은 맑은 빛을 뿌리며 가루로 흩날리더니 사르르 내 안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근력, 내구, 민첩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특수, 잠재 능력 중 1, 4번 슬롯이 새롭게 진화합니다!』 『숨겨진 권능, ‘Apud Migra Eego Gladium’이 개화합니다!』 『숨겨진 권능, ‘해류마(海驑馬), 가리온(加里溫) 소환’이 개화합니다!』 『숨겨진 권능, ‘군주여, 호령하여라.’ 가 개화합니다!』 『숨겨진 권능은 이벤트성 개화 능력으로, 원래 권능 슬롯에 포함합니다.』 6개의 메시지가 주르륵 출력된다. 『사용자 정보를 확인해주십시오.』 이어서 떠오르는 최후의 메시지. 나는 곧바로 사용자 정보를 로드 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수현(4년 차) 2. 클래스(Class) : 검의 군주(Arousal Secret, Sovereign Of Sword, Master) 3. 소속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S Zero) 5. 진명 • 국적 : 1. 검의 군주(君主) 2. 마성(魔性)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8) 7. 신장 • 체중 : 181.5cm • 75.5kg 8. 성향 : 중용 • 혼돈(Moderation • Chaos) [근력 99(+2)] [내구 95(+2)] [민첩 99] [체력 101(+2)] [마력 96] [행운 90(+2)]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 포인트입니다.) 1. 화정을 심장에 품었습니다.(현재 3차 각성이 진행된 상태입니다.) 2. 고대 무녀의 각인을 심장에 새겼습니다.(마력 회로가 크게 안정되며 효율이 상승합니다.) 3. 체내에 한 치의 노폐물을 찾을 수 없습니다.(마력이 흐르는 속도가 두 배로 상승합니다.) 4. ‘군주여, 호령하여라.’ 의 영향으로 상시 S Zero 급의 ‘카리스마(Charisma)’ 효과가 발생합니다. < 업적(9) > < 고유 능력(1/1) > 1. 제 3의 눈(Rank : S Zero) < 특수 능력(1/1) > 1. 심검(心劍)(Rank : A Plus) (설명 : 검과 한 몸이 된 걸 넘어서,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는 검과 혼연일체(渾然一體)를 이룬 경지. 신검합일(身劍合一)보다 위 단계의 능력으로, 오직 전설상으로만 전해지는 지고(至高)의 상승 검술이다. 검을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실천(實踐)에 긍정적인 효과가 발생한다. 이기어검술(以氣御劍術) ‘Apud Migra Eego Gladium’의 발동을 위해 필수적으로 필요한 능력.) < 잠재 능력(5/5) > 1. 백병지왕(百兵之王)(Rank : A Plus) (설명 : 이 세상 실존하는 모든 병장기의 왕은 검이다. 맹목적인 굴종을 맹세한 검은 더할 수 없이 높은 충성심을 갖추는 동시, 모시는 군주의 패배를 일절 용납지 않는다. 그러한 의지는 군주가 검(劍)을 드는 순간부터 적을 쓰러트릴 때까지 압도하게 만든다. 어지간한 신병이기(神兵利器)가 아닐 경우, 군주의 검이 내뿜는 강렬한 적의에 질려 위축 효과가 발생한다. 2. 쓰러질 수 없는(Rank : EX) (설명 : 전투를 포기할 줄 모른다. 패배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의지는 설령 죽음 직전에 이르는 부상을 입었더라도 전투를 가능케 한다. 허나 치명상을 입은 만큼 전투력은 크게 반감한다.) 3. 심안(정)(Rank : EX) (설명 : 있는 그대로의 외형을 보는 게 아닌, 대상의 내면을 직시할 수 있는 마음의 눈. 자신을 관조하고 만물을 살피거나 감지하는 능력, 혹은 이와 비슷한 작용을 하는 현상을 말한다. 극한으로 다스려진 심신은 S랭크 이하의 정신 오염 마법 아래서도 명경지수(明鏡止水)를 유지할 수 있다.) 4. 검신(劍神)의 가호(Rank : EX) (설명 : 검과 전쟁을 노래하는 신 티르(Tyr)의 축복. 신성 가호를 받은 사용자는 외부에서 전해지는 모든 마력 행사에 관해 드높은 내성을 갖게 된다. 또한 ‘심검’, ‘Apud Migra Eego Gladium’를 익힌 경우, 각 능력과 연동해 검으로 이루어진 자동 요격 시스템(Automatic Intercept System)을 구현할 수 있다. 단, 요격에 운용할 수 있는 검의 숫자와 전체적인 요격 수준은, 사용자 김수현의 마력, 행운 능력치에 기반한다.) 5. 염화(炎化)(Rank : ?) (설명 : 사용자 설정 상정 외의 능력입니다.) (잔여 능력 포인트는 0 포인트입니다.) < 검의 군주 권능(4/4) > 1. 결. 2. Apud Migra Eego Gladium. 3. 해류마(海驑馬), 가리온(加里溫) 소환. 4. 군주여, 호령하여라. < 용의 축복 :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의 권능(2/5) > 1. 폴리모프(제한) 2. 용족화(제한) 3. - 4. - 5. – “…….”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불현듯 정신을 차리니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을 알 수 있었다. 사용자 정보만 정신 없이 읽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고 눈앞을 응시하니 시야가 빽빽할 정도로 출력된 메시지가 보인다. 허나 아직도 믿기 지가 않는다. 이게 정말로 내 사용자 정보인가? 그때, - 아직 끝난 게 아닐 텐데? 돌연히 화정의 음성이 들려온다. 멍한 정신이 약간은 깨어나는 기분이다. - 멍하니 있는 것도 적당히 하라고. 칠칠치 못하게. 그리고 저건 안 먹을 거야? ‘저거?’ 반문한 찰나, 문득 화정이 무엇을 가리켜 말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 맞다.” 여러 물건으로 가득 찬 책상 한쪽에는 5개의 영약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왼쪽부터 근력, 내구, 민첩, 마력, 행운 상승의 영약. 이 중 내가 먹을 수 있는 건 하나. 무엇을 먹을지는 이미 정해놨다. 아니. 정확히는 클래스 계승으로 올라가는 능력치를 본 후에 결정하려고 했다. 그리고 계승이 끝난 결과, 근력은 3, 내구는 1, 민첩은 1 포인트만큼 상승했다. 이 정도면 엄청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감지덕지라고 볼 수 있는 수준이다. 열 받은 가브리엘이 아예 확 줄여버리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제나저제나 사적인 감정은 배제한 모양이다. 물론 능력치 상승에 체력이 포함되지 않은 건 매우 아쉽지만…. 어차피 이건 예상하던 바였고. 사실 처음에는 마력 영약을 노리고 있었다. 평소 가장 중요한 능력치를 체력과 마력으로 생각하는 것도 있고, 최소한 손해는 보지 않으리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생각이 변했다. 그동안 체력에 집중하느라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했던 능력치 101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어찌 놓칠 수 있으랴. 그리고 나는 마법사가 아니라 검사다. 물론 현 사용자 정보를 보면 마력도 대단히 중요하나, 어쨌든 근본은 몸을 움직이고 전투하는 검사가 아닌가. 그러니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영약을 택하는 게 효율이 높으리라. …뭐,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5개 전부 먹어버리고 싶지마는. 생각을 정리한 후, 나는 정 중앙 푸른 빛깔을 띠는 영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한 입에 털어 넣고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예전에 먹었을 때는 별다른 맛이 나지 않았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민첩 상승의 영약을 복용합니다.』 『2 능력치 포인트가 새롭게 생성됩니다.』 이윽고 두 개의 메시지가 출력됐다. 이미 사용자 정보 창은 켜둔 상태라, 나는 바로 능력치를 상승시켰다. < 최근 능력치 비교 > 1. 전 : [근력 96(+2)] [내구 94(+2)] [민첩 98] [체력 101(+2)] [마력 96] [행운 90(+2)](Total 575 Point) 2. 후 : [근력 99(+2)] [내구 95(+2)] [민첩 101] [체력 101(+2)] [마력 96] [행운 90(+2)](Total 582 Point) “…하.” 절로 탄성이 나왔다. 드디어 민첩 능력치를 101 포인트까지 올린 것이다. 아까도 그랬지만, 여전히 보고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지그시 눈을 감아보니 몸 안에서 가공할만한 힘이 느껴졌다. 도대체 이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모르겠다. 그냥 무언가가 빙그르르 도는, 아니 폭발적으로 소용돌이치는 것 같다. 상쾌하면서 개운한 기운이 회로 구석까지 흐르고, 그로 인해 온몸이 훨훨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다. 괜스레 숨이 가빠온다. 진정 이대로 테라스에서 뛰어내려 아무나 붙잡아 싸워보자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이상하게도 이 기분을 기운을 조절하기가 힘들었다. 확인해보고 싶다. 지금 느껴지는 이 강대한 힘을 마음껏 해방해보고 싶다. ‘화정.’ - 응? ‘나…. 강해진 거 맞지?’ - 흐응. 글쎄. 차오르는 쑥스러움을 참고 물었으나 화정의 어조는 시큰둥했다. - 강해지기는 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여기서 더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는 말이 옳겠지. ‘발전할 수 있는 여지.’ - 그래. 앞으로는 사용자 정보도 연구하고, 새로운 능력에도 익숙해져야 할 테니까. 즉 정체돼 있던 상태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생겼다는 소리지. 아무튼, 그렇다고 너무 자만하지는 말라고. 세상은 넓고 괴물은 많아. ‘그런가.’ 세상은 넓고 괴물은 많다. 화정의 일침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 그런가는 무슨. 아. 그리고 너, 그 천사의 말은 새겨두는 게 좋아. ‘천사? 세라프?’ - 응. 사실 그때…. 그 세라프라는 천사가 너랑 즐겁게 쇼핑하는 거 보면서 이만 바득바득 갈았는데,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걔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는 거야. 골라준 장비도 보면 그렇고. 아마 평소에 너를 많이 생각하는 것 같아. ‘그…. 응? 이를 갈았다고?’ - 응? 아아. 왠지 부인이 남편 옷 골라주는 것 같아서. 질투라고 해야 하나? 실은 그거 나도 되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 그때, 또렷하게 말하던 화정이 돌연 서서히 말을 흐리고, 갑자기 침묵이 찾아왔다. …자, 당황하지 말고. 이미 무수히 겪은 상황이잖아. 차분히 이후의 전개를 예상해보자. 내가 여기서 반문하거나 놀리면, 화정은 분명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가열찬 불꽃을 터뜨릴 터. 즉 본전도 못 찾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무조건, 절대로 조용히 해야 한다. 헛기침도 위험하다. 반대로,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는 것처럼 넘어가면 만사 Ok다. ‘맞아. 세라프가 그랬지. 주변을 챙기는 것도 좋지만, 스스로도 챙기라고. 그래. 네 말이 옳은 것 같다.’ 그리하여 담담히 읊조린 후, 나는 조용히 책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것은 이미 챙겨 먹었으니(?), 이제는 가져온 것들을 나눠줄 시간. 서랍을 열자 빼곡히 차 있는 호출석이 보인다. 보자, 우선은 선유운…. 신재룡…. 임한나…. 안솔….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때였다. 번쩍! 난데없이 눈앞으로 세찬 불꽃이 튀기고, “큭!” ‘무, 무시하는 거야? 나 무시 당했어?’ “야 이. 아, 아니 화정. 우선 진정….” ‘자, 자존심 상해!’ 화정이 빽 소리를 질렀다. 번쩍! 이어서 또 한 번 불꽃이 튀겼다. “그럼 도대체 어쩌라는 건데!” 결국에는 나도 맞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하늘이 붉은 빛으로 물들었을 즈음. “어휴, 짜증 나!” 웬 늘씬한 여인이 동쪽으로 난 긴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발을 내디딜 때마다 복도가 쿵쿵 울리며 자꾸만 신경질을 부리는 게, 상당히 화가 난 것처럼 보인다. 여인의 정체는 바로 제갈 해솔이었다. “마침 딱 좋았는데! 겨우 감 좀 잡나 싶었는데! 왜 이렇게 부르고 난리람? 귀찮게!” 기실 제갈 해솔이 이렇게 분노한 이유는 하나였다. 왜냐면 살면서 가장 질색하는 일을 당했으니까(?). 그러니까 정확히 말해보면, 제갈 해솔은 성격상 한 번 연구에 몰두할 시 방안에 그대로 틀어박혀 버린다. 아닌 게 아니라, 며칠이든 두문불출하고 아예 나오지를 않는 정도. 말인즉 연구 도중에는 성격이 굉장히 예민해지고 섬약해지는 터라 방해 받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는데, 갑자기 하녀가 들이닥치더니 클랜 로드가 저녁이나 같이 하자는 전령을 전한 것이다. 제갈 해솔도 원체 배짱 좋은 성격이라 처음에는 ‘현재 굉장히 중요한 연구를 하고 있으니 다음에 갈게요. 그리고 저 그렇게 쉬운 여인은 아니에요.’ 라고 거절했다. 그러나 되돌아온 말은 ‘까불지 말고. 네가 오지 않겠다면 직접 끌고 가겠다.’ 는 매우 강압적인 전령이었다. 결국에는 연구를 중단하고 몸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었다. “에이 씨, 두고 봐. 진짜 별것도 아닌 일로 불렀으면, 아주 그냥….” 물론 그런다고 제까짓 게 뭘 어쩌겠느냐마는, 여하튼 제갈 해솔은 씩씩거리며 집무실 문을 응시했다.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이내 거세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제갈 해솔은, 노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벌컥 문을 열었다. “이봐요! 클랜….” 그리고 기세 좋게 문을 열고 안을 바라본 순간, “로….” 우뚝, 갑작스럽게 걸음이 정지했다. 그리고 잠시 후. “…드.” 문득 낯을 살짝 붉힌 제갈 해솔이, 눈을 살그머니 내리깔며 자세를 바로 했다. ============================ 작품 후기 ============================ 아, 파치겠네요. 요새는 담배를 거의 한 갑, 두 갑 정도 밖에 안 파네요. 이거 참 은근히 불편합니다. 조금만 참으면 될 것 같기는 한데, 집에서는 이 기회에 끊으라고 은근한 눈치를 줍니다. ㅜ.ㅠ 0764 / 0933 ---------------------------------------------- 선택의 시간. 어스름한 테라스. 하늘을 물들인 옅은 어둠은 탁 트인 입구로 흘러 들어와 방안 깊숙한 곳으로 스몄다. 테라스 난간에 비치된 라이트 스톤이 말간 빛을 뿜는 가운데, 중앙에 마련된 둥근 식탁에서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조용히 흘러나온다. 여담이지만, 김수현의 집무실은 굉장히 넓다. 크기는 100평을 가볍게 넘는 정도. 애초 설계할 때 집무뿐이 아니라 숙소, 욕실, 야외 섹스(?) 등 여러 용도를 염두에 두고 개축했다. 그래서 테라스도 여느 방보다 널찍한 면적을 자랑한다. 생각해보라. 이 드넓은 테라스에서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저녁 식사를 한다. 맛 좋은 음식과 차갑게 식힌 술, 그리고 경치 좋은 풍경도 곁들였다. 정말 환상적인 분위기가 아닌가? “…….” “…….” …아무래도 아닌가 보다. 왜냐면 현재 김수현과 겸상을 하는 사용자들이 매우 어색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오늘 초대받은 5명은 왼쪽부터 선유운, 신재룡, 안솔, 임한나, 그리고 제갈 해솔. 사내 2명은 원래 과묵한 성격이라손 쳐도, 3명의 여인은 정말 난리도 아니었다. 안솔은 토끼 눈을 뜬 채 김수현을 훔쳐보기 바쁘고, 임한나는 낯을 잔뜩 붉힌 채 안절부절못하며, 제갈 해솔은 무언가 대단히 분한 눈을 하고 있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전혀 모를 정도였다. 탁. 식탁에 흐르는 거북한 공기를 감지한 걸까? 김수현이 수저를 내려놓자 5명은 흠칫 몸을 떨었다. “식사가 입에 안 맞으시나 들 봅니다?” 그러나 5명이 서로 눈치만 살피니 김수현이 머리를 갸웃했다. “허, 오늘은 약간 신경 좀 써달라고 했는데….” “아, 아닙니다. 아주 맛있습니다. 하하.” 결국에는 가장 연장자인 신재룡이 나섰다. 그리고 선웃음을 지으며 잘 익은 고기를 썩썩 잘라 먹는다. 이어서 4명이 억지로 수저를 들자 김수현은 흡족한 미소를 짓고는 식사를 재개했다. 동시에 껄끄러운 공기도 재차 흘렀다. 현재 5명이 서먹한 기분을 느끼는 이유는 두 개. 우선은 김수현의 부름이 굉장히 공교로운 일이다. 공적인 용무가 아닌, 이런 사적인 식사 제안이 드물다는 소리다. 그리고 백 번 양보해서 이해한다고 해도, 김수현을 감싸는 분위기가 변한 건 확실히 이상했다. 변해도 너무 변했다. 원래 차가운 얼굴인 건 알고 있었으나 오늘 보니 본(本) 인상에 뜻 모를 마력이 깃들었다. 무언가 서늘하면서 썩 찬 느낌. 그걸 위엄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엄숙함이라고 해야 할까. 5명 누구도 정확히 짚어내지는 못했으나 감히 항거할 수 없다는 기분 정도는 느끼고 있었다. 방금도 그렇다. 그냥 입에 안 맞느냐고 물어봤을 뿐인데, 황급히 수저를 놀리지 않았는가? 기실 이런 현상이 발생한 원인은 바로 김수현의 새로운 능력 ‘군주여, 호령하여라.’ 에 있었다. 저번 3차 회담 때 한소영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A Plus 랭크의 카리스마는 한 번 작정하고 내뿜으면 수백 명 정도는 가볍게 침묵시킬만한 위력을 갖고 있다. A Plus가 그 정도인데, 하물며 S Zero는 말할 필요가 있으랴. 거기다 효과가 상시 발동이라니 김수현을 어려워하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었다. 말인즉 현재로써는 방법이 없다는 소리였다. 그저 익숙해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그렇게 5명은 이래저래 속이 턱턱 얹히는 걸 느끼면서도 간신히 식사는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 환호하며 방으로 들어갔을 때, 책상과 탁자에 놓인, 허연 김을 모락모락 피어 올리는 찻잔을 보며 도로 절규했다. 누가 이랬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아마 식사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고연주가 몰래 갖다 놨을 것이다. 김수현은 역시 센스가 좋다며 칭찬했지만, 5명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잡았다. 이래저래 고난의 연속이었다. 결국 김수현이 본론으로 들어간 건, 찻잔을 깨끗이 비우고 연초를 끝까지 태운 이후였다. “오늘 여러분을 부른 이유는….” 살짝 운을 띄운 김수현은, “뭐, 우선 보시죠.” 곧 책상으로 무언가를 차곡차곡 올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보랏빛 장궁 하나, 길쭉하고 뭉툭한 빛이 흐르는 메이스 하나, 작은 돌 증표 하나. 호기심을 품은 시선이 모이자 김수현은 추가로 세 장의 구즈 어프레이즐(Goods Appraisal : 물품 감정서)을 꺼내 올렸다. “사용자 선유운은 장궁을, 사용자 신재룡은 메이스를, 사용자 임한나는 증표를 가져가시면 됩니다.” 호명 받은 두 사내와 한 여인은 반사적으로 일어나기는 했으나 서로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가져가시고 구즈 어프레이즐을 읽어보세요. 어서요.” 허나 김수현이 재촉하자 어슬렁어슬렁 걸어가 물건과 기록을 집었다. 선유운은 가라앉은 눈으로 장궁을 응시했다. 그리고 1 미터 80 센티미터에 달하는 긴 길이를 보며 작은 탄성을 흘렸다. 구불구불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지는 활대가 인상적이고, 중앙 부근에는 아름다운 장식이 박혀 있다. 홀린 듯이 엄지로 쓸어보니 무언가 요동치는 기운이 느껴졌다. 척 봐도 신이(神異)한 기운을 품은 장궁이다. 무심한 눈동자에 작은 불꽃이 일었다. 『천궁(天弓)』 (설명 : 아주 오랜 옛날, 용들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 용의 편에 선 인간 중, 일부 변절자는 마(魔)의 힘을 받아들여 한 단체를 조직했습니다. 그 단체의 구성원들은 스스로 ‘Der Freischütz’, 즉 마탄의 사수라고 칭했습니다. 마탄의 사수에 의한 피해가 날로 심각한 수준에 이르자 인간들은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원했고, 기원을 담은 하나의 화살을 하늘로 쏘아 올립니다. 그 화살을 바로 ‘천궁’이라고 부릅니다. 그 결과 인간을 가엽게 여긴 신 아폴론은, 무지개의 여신 플라비우스에게 부탁해 기원에 응답하기에 이릅니다. 그날 이후, 인간 진영 곳곳에서 활에 재능을 보이는 이들이 나타나고 태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재능은 실로 하늘이 내린 수준이라, 용의 힘을 받은 마탄의 사수조차도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늘이 허락한, 신에 의해 태어난 궁수를 ‘천궁’이라고 일컫습니다.) “…어.” 이윽고 구즈 어프레이즐을 읽은 순간, 선유운은 저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그것은 신재룡, 임한나도 마찬가지였다. 『신성 투사(Sacred Champion)』 (설명 : 역사적으로 성전(聖戰)은 수도 없이 일어났으나, 가장 의미 있는, 그리고 가장 거대했던 전쟁을 꼽으면 복마전(伏魔殿)을 상대로 한 그라치아(Gratia) 교단의 성전입니다. 이 성전은 종교적 이념에 의한 전쟁이라기보다는, 거룩한 사명을 띤 전쟁이었습니다. 그 당시 그라치아 교단은, 복마전의 일방적인 선전포고로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린 안젤루스 교단을 구원하기 위해….) “그러나 복마전의 힘은 강력했고…. 종래에는 대항할 수단을 강구하기에 이르는데…. 엄선한 팰러딘 중에서…. 금지된 주문인 강신을 풀어, 성인에 대항할 전사를 키워내기에 이르는데…. 그들을…. 신성 투사….” 신재룡은 길쭉한 메이스를 양손으로 고이 받쳐 든 채, 멍한 음성으로 띄엄띄엄 중얼거리고 있다. “사용자 신재룡은 신체 능력도 꽤 괜찮지 않습니까? 그래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하하.” 들려오는 목소리에 신재룡이 망연히 눈을 들었다. 그러나 김수현은 이미 다른 데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나 너는…. 말 안 해도 알고 있지?” 임한나 역시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그러나 김수현의 말은 들렸는지 증표를 양손으로 살며시 감싸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얼마나 기다렸는가? 황혼의 무녀로 한 조각, 용이 잠든 산맥에서 한 조각, 그리고 지금 한 조각. 이 세 조각이 모임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고대 무녀가 완성된 것이다. “좋습니다. 확인했으면 세 명은 이만 나가셔도 좋습니다.” 이윽고 축객령을 내리자 3명은 동시에 시선을 올렸다. 김수현은 미미한 웃음을 보였다. ‘그런 눈치라고는 밥 말아 먹은 자네에게….’. 예전 이만성이 말한 대로, 김수현은 연애를 제외한 부분에서는 눈치가 좋다.(물론 스스로는 연애에 관해서도 좋다고 생각, 아니 착각하고 있지만.) 5명이 ‘왕이여, 호령하여라.’ 의 효과로 어색해 한다는 사실은 이미 진작 눈치채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3명은, 특히 선유운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잠시만. 클랜 로드.” “응?” “이건 도대체 어디서….” “아…. 그냥 정당한 거래로 얻었습니다. 아무튼, 자세한 사정을 굳이 알 필요는 없을 텐데요.” 굳이 알 필요는 없다. 간단한 말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명백했다. 더 이상 묻지 말라는 소리였다. 그러자 선유운, 신재룡, 임한나는 갑자기 정말로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선유운은 말을 더듬었다. “하, 하지만…. 저희가, 어떻게 이걸.” “받겠느냐고요? 그래요? 받기 싫습니까?” 약간 장난스럽게 느껴지는 음성에 선유운은 본능적으로 활을 움켰다. 이상하게도 활대가 뜨거웠다. 받기 싫으냐고? 아니, 좋다. 좋지 않을 리가 없다. 좋은 걸 넘어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클래스 계승은 사용자라면 누구나 오매불망 꿈꾸는 일이 아닌가? 물론 한편으로는 ‘정말 받아도 될까?’ 라는 생각이 스쳤으나, 그보다 꼭 갖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 그만큼 3명의 감정은 한층 격앙돼 있었다. “단, 하나 조건이 있습니다.” 그때 김수현의 음성이 방안을 나직이 울렸다. “저는 여러분의 그동안 쌓아온 공적을 높이 사고 있습니다. 물론 실력도 인정하고요.” “…….” “하지만 여기서 안주하지 않고, 더욱 높이, 드높이 올라가기를 원합니다.” “…….” “그와 동시에 자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설령 그 클래스를 계승한다고 해도, 머셔너리에는 여러분보다 강력한 사용자가 있으니까요. …가령 고연주, 남다은, 허준영 등등.” “…….” 3명은 조용히 듣기만 했다. 왜냐면 말에 뼈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자 여왕(Queen Of Silhouette) 고연주, 검후(劍后) 남다은, 침묵의 집행자(Executor Of Silence) 허준영. 사실상 김수현을 제외하면 머셔너리 클랜 내 1, 2, 3위를 다투는 사용자들이다. “방금 말한 세 명을 넘어설 자신이 있다면. 그걸 갖고 방을 나서도 좋습니다.” 그리고 김수현은 넘어서라고 말했다. 3명의 사용자는 그러고도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갈등하는 낯빛을 숨기지 못한 채. 그러나 결국에는 먼저 정신을 차린 선유운을 시작으로, 흡사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홀연히 문을 나가는 이들을 확인한 후, 김수현은 남은 2명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솔.” 먼저 부른 건 안솔이었다. “네, 네! 오라버니!” 안솔은 차려 자세로 벌떡 일어섰다. 천연한 낯에는 기대감이 잔뜩 서려 있다. 무슨 일인지 잘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김수현이 무언가 굉장한 것을 줬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어쨌든 선물이, 그것도 오라버니가 준 선물이 기쁘지 않을 리가 없다. 안솔은 산타클로스를 보는 눈으로 양손을 척 내밀었다. “너도 나가도 좋아.” 그러나 김수현은 빙긋 웃는 낯으로 안솔의 기대를 배신했다. “에?” “나가도 좋다니까. 너한테 더 이상 볼 일은 없으니까.” “네, 네? 그, 그럼 왜….” “밥 맛있었지?” 그러자 안솔의 눈동자가 삽시간에 그렁그렁해졌다. ‘정말이요?’ 라는 눈초리로 쳐다봤으나 김수현은 어깨를 으쓱 들먹였다. 오히려 얼른 나가라고 검지로 문을 가리킨다. “…느에에에.” 심하게 놀림 당했다는 기분을 지우지 못했으나 안솔은 얌전히 몸을 일으켰다. 기분 같아서는 으앙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지만, 김수현을 보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니 오직 최소한의 반항으로 아직 반쯤 남은 식은 찻잔을 거칠게 들이킬 뿐. 그때였다. “응?” 질끈 눈을 감은 채 벌컥벌컥 들이켜던 안솔은 돌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언가 작고 동글동글한 것이 찻물과 함께 입안으로 쏙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완전히 쏟아 붓다시피 한 찻물을 타고 그대로 목구멍 안으로 골인했고, 『행운 상승의 영약을 복용합니다.』 『2 능력치 포인트가 새롭게 생성됩니다.』 이어서 눈앞으로 두 개의 메시지가 출력됐다. “푸우우우!” 안솔은 아직 입안에 남은 찻물을 세게 뿜었다. “…아.” 분사된 찻물벼락(?)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제갈 해솔은 고요히 눈을 감았다. “아, 아니! 캑캑! 죄, 죄송! 우캐캐캐캐캐캐캑!” 사레가 들린 걸까? 안솔은 한 마리 원숭이로 빙의해 방안 곳곳을 뛰어다녔다. 마치 자신 좀 어떻게 해달라는 듯 제갈 해솔의 등을 퍽퍽 때리고, 탁자에 이마를 쿵쿵 찧는다. 한숨을 푹 흘린 제갈 해솔이 가볍게 손을 튕기니, 이내 안솔의 몸이 푸른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이로써 방에는 한 여인이 남았다. 제갈 해솔은 정면에서 전해지는 흥미로운 시선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1층으로 보냈어요. 지나가던 누군가가 도와주겠죠.” “잘했습니다.” 김수현은 담담히 말하고는 책상으로 또 한 번 물건을 올려놓았다. 이번에는 빛과 어둠이 섞은 구슬과 은은한 푸른빛이 흐르는 부채였다. 제갈 해솔은 최대한 김수현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쓰며 두 물건을 심드렁히 응시했다. 쳐다보는 눈동자에는 어느새 황금빛이 흐르고 있었다. 잠시 후. “사용자 제갈 해솔은….” 김수현이 입을 연 순간이었다. “싫어요.” ============================ 작품 후기 ============================ 하하. 저도 몰랐는데, 오늘이 연재 2주년이네요. 독자 분들이 말씀해주셔서 저도 알게 됐습니다…. 는 실은 아니고요. 죄송합니다. 제가 진짜 하소연할 곳이 여기밖에 없네요. 그러니까 어떤 일이 있었느냐 면요. 아버지 : 유진아, 너 이제 곧 2주년 아니니? 로유진 : 네? 아 그런가요? 아버지 : 그럴걸? 로유진 : 잠시만 확인 좀…. 어, 그러네요. 곧 2주년이네요. 아버지 : 축하한다. 이왕 시작한 거, 꼭 완결까지 가렴. 로유진 : 헤헤, 감사합니다…. 가 아니라, 아버지? 잠시만요? 아버지 : ㅂㅂ. 출근함. 로유진 : 아버지! 아빠아아! …네. 이렇게 알게 됐습니다. 아 이해가 안 됩니다. 안 읽는다고는 하시는데, 그럼 어떻게 2주년인걸 정확히 알고 계시냐고요. 이 와중에 형은 또 “음. 그럼 슬~슬 밀린 부분을 읽어볼까?” 이러고 있습니다. 아오, 진짜. 내가 그렇게 사정사정했는데. 제발 놀리지 좀 말라고. 아오, 그냥. 아오오오오오오오! 0765 / 0933 ---------------------------------------------- 장비 나와라, 뚝딱! “응?” “안 봐도 뻔하죠. 그거 받고 클래스 계승하라는 소리 아니에요. 그러니까 싫어요.” 제갈 해솔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서 딱 잘라 거절했다. 무언가 기분이 나쁜 걸까? 볼은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고 눈은 실을 연상케 할 정도로 가늘다. 평소처럼 건방지다기보다는, 오히려 시선을 피하려는 느낌. 허나 싫다는 목소리만큼은 매우 단호했다. 나는 양손을 깍지 낀 채 놓고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 주려는 거 아닌데요?” “갑자기 반말…. 아니. 뭐, 뭐라고요?” 하하. 천하의 제갈 해솔도 이건 예상치 못한 건가? 화들짝 놀라는 얼굴이 꽤 웃기다. 그러나 킥킥 웃는 걸 봤는지 아랫입술을 와락 씹더니 이맛살을 몹시 찡그린다. 이런, 정말로 화난 건가. “농담입니다.” “당신, 정말….” 그러나 예상외로 제갈 해솔은 화내지 않았다. 그냥 삼키려는 듯 지그시 눈을 감더니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이러나저러나 분하기는 한지 끙끙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신음 한 번 야하네. 꼭 강아지 같아. “아무튼, 들어나 봅시다. 왜죠?” “후~우.” “사용자라면 누구나 클래스 계승을 꿈꾸고 원합니다. 그런데 사용자 제갈 해솔은 왜.” “잠깐만요. 말할게요, 말하는데.” 그때 말을 끊고 들어온 제갈 해솔이 심히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왼쪽을 가리키며 애원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저쪽으로 눈 좀 돌려주면 안 돼요?” “눈을 돌려달라고요?” “네. 그러니까 나랑 눈 좀 마주치지 말아달라고요.” “그게 무슨….”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클랜 로드, 제발. 사람 한 명 살리는 셈 치고요.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저는….” “…저는?” “아마 조만간, 아니 오늘 밤이라도 당신의 몸 아래 깔리게 되겠죠.” “예?” “그리고 그동안 소중히 지켜온 처녀막을 무참히 찢고 들어오는 흉물을 느끼고, 추접스러운 교성을 지르며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릴 거예요. 바로 저 침대에서.” “…….”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다. 동시에 할 말을 잃었다. 상상력이 뛰어난 건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건 완전 상상, 아니 망상에서 개헤엄 치는 수준이잖아. “그렇게 되기는 죽기보다 싫어요. 아직 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얼마나 많은데. 이대로 당신의 육체 노예가 되는 건 정말로 싫다는 말이에요.” “사용자.” “아 보지 말라고요, 좀! 사람 말이 말 같지가 않아요?” “사용.” “그럼 애초 이상한 기운을 풍기지나 말던가!” “사.” “왜!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 풀풀 풍기면서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하~아.” 결국에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말려드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됐습니까?” “네. 사실 여전한 것 같지만, 그나마 낫기는 해요.” 삽시간에 신비로운 음성으로 돌아온 제갈 해솔은 흠흠 헛기침을 했다. “그럼 말하기에 앞서, 그거 두 개 구경 좀 해도 돼요?” “얼마든지.” 가져가라는 의미로 손짓하니 성큼성큼 걸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윽고 구즈 어프레이즐을 읽기 시작했는지 정적이 서서히 내려앉는다. 『백야(白夜)의 무희(舞姬)』 (설명 : 무희란 본래 춤을 추는 여인을 뜻하며, 고대 홀 플레인에서는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제물로 인식되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백야의 무희가 출현한 이후 그 인식은 완전히 변하게 됩니다. 이 특출한 무희의 기원은 태양이 어둠에 먹힌 시절, 신녀곡(神女谷)에서 스스로 걸어 나온 한 여인에게서 시작됩니다. 여인은 전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흉(凶)과 화(禍)를 막고, 길(吉)과 복(福)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고아한 춤사위는 죽어버린 토지를 달래고, 단 한 번 선자(扇子)를 떨침으로써 하늘을 가리는 어둠을 물리쳐, 온 인간의 우러름을 받았습니다. 끝에는 강력한 악령에게 패배 당해 저속해지기는 했지만, 결국 스스로 악령에게 안겨 나락으로 타락하는 길을 선택한 비운의 여인입니다. 이처럼 비록 최후는 아름답지 못했다고는 하나, 세상을 구원한 아름다운 기적을 의심할 여지는 없습니다. 백야의 무희는 초자연적인 존재, 혹은 신비적인 힘을 비는 토속 주술에 근간을 두며, 특히 악(惡)을 상대로 절대적인 상극 관계를 가집니다.) 그나저나 큰일이다. 애초 백야의 무희를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악마와 절대적인 상극 관계라는 설명이 눈을 끌었고, 한편으로는 비밀 도서관에서 ‘신녀곡’에 관한 기록을 읽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제갈 해솔이 싫다고 해도 새로운 사용자를 키우면 그만이다. 딱히 제한은 없는 것 같으니까. 『빛(光)과 어둠(暗)의 결정(Crystals Of Light And Darkness)』 (설명 : 빛과 어둠이 절반씩 혼재돼 있는 ‘혼돈’의 결정입니다. 여태껏 단 한 번을 제외하면 세상에 드러난 전적이 없는, 매우 강력한 정령과 연결된 결정(結晶)입니다. 재능이 굉장히 뛰어난 사용자가 아니라면 섣불리 사용하지 않는 걸 권합니다.) 그러나 빛과 어둠의 결정은 얘기가 다르다. 비교적 간단한 설명은 차치하고서라도, 이처럼 주의 사항이 붙어 있는 경우는 절대로 만만하게 볼 수 없다. 말 그대로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진정한 재능 있는 사용자를 원하고 있다. 그래서 제갈 해솔을 생각했는데…. “클랜 로드. 궁금한 게 있는데, 시크릿 클래스와 각성 시크릿 클래스의 차이가 있나요?” 그때 호기심 가득한 제갈 해솔의 음성이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눈을 뜰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별로 차이는 없습니다. 있어봤자 발현 과정…. 그 정도일 겁니다.” “으응. 그렇군요. 아무튼, 구경 잘했어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네요.” 깔끔한 거절. 제갈 해솔은 아마 결심을 달리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사실 나로서는 당최 이해 가지 않는 말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내 입장이니까. 우선은 들어보기로 했다. “음~. 물론 이렇게 챙겨주신 건 고맙지만….” 조금 기다리니 약간 고민하는 듯한 음성이 이어졌다. “저는 제가 가고 싶은 길에 불순물이 끼어드는 걸 원하지 않아요.” “불순물?” “네. 저는 이 세상에 입장할 때 저한테 주어진 것들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거든요.”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럼 이런 것들이 걸리적거린다는 말입니까?” “그건 아니죠. 홀 플레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요. 당연히 도움이 되겠죠. 하지만 제가 가고 싶은 길에는 확실한 방해가 될 것 같네요.” “…….” 젠장, 표정이라도 보고 싶은데. 눈을 감고 있으니 엄청나게 갑갑하구나.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그러니까 순수성을 지키고 싶다고 해야 할까요?” “순수성.” “그렇죠. 오직 마법의, 마법에 의한, 마법을 위한 사용자 제갈 해솔. 즉 저는 마법사이고, 마법사로서 근원에 다다르고 싶으니까요. 금번 원정에서 확실하게 느꼈어요.” “근원이라….” 꽤 긴 문답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내 제갈 해솔의 높은 목소리에는 극히 미미한 불꽃이 맺혀 있었다. 헛소리고 아니고를 떠나서 최소한 진심이라는 소리다.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문득, ‘어렸을 때부터 피나는 노력을 거쳐 조금씩 마력을 쌓아나가고, 머리가 터져라 마법 책을 읽고, 손가락이 부서지도록 주문을 맺으며 연습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별 꼴같잖은, 수련 같지도 않은 수련을 하고 능력을 사용하는 주제에, 우리들의 이루어놓은 성과를 의심하지를 말았으면 좋겠구나.’ 마볼로의 비웃음과, ‘인간을 후계자로 두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제갈 해솔이라는 인간은 그렇습니다. 수천 년을 살면서 그 정도의 재능을 지닌 인간은 한 다섯, 여섯 명 정도 봤을까요? 아마 고대 시절의 홀 플레인에서 태어났다면, 틀림없이 한 시대를 주름잡았을 겁니다.’ 헬레나, 아니 마그나카르타의 감탄이 뇌리를 스쳤다. 무언가 알 듯 말 듯한 기분. 정확히 짚어내지는 못하겠지만, 여하튼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는 알 것 같다. 동시에 미약한 소름이 끼쳤다. 생각해보니 제갈 해솔은 1회 차에서도 일반 클래스였던 걸로 알고 있다. 말인즉 아무리 좋은 의도였다고는 하나, 어쩌면…. 나는, 제갈 해솔의 빛나는 미래를 망칠 뻔한 게 아니었을까?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결국에는 설득을 포기하기로 했다. 본인의 의지가 저리도 확고한데 강제로 계승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냥 인연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하리라. “후회요? 후후. 전혀 안 해요. 저는 최소한 마법에 관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생각이니까.” “열의는 좋습니다만, 가끔은 겸손한 모습도 보기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어떡해요 그럼? 자신 있는 걸 어떡하라는 말이에요~.” “하, 누가 말리겠나요.” 선웃음을 지은 후, 그간 계속 만지작거리던 마력 상승의 영약을 도로 집어넣었다. 이윽고 제갈 해솔은 한창 연구 중에 끌려왔다며 이만 가도 되느냐고 물었고,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곧 이제는 익숙한 마력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비로소 눈을 뜨니 제갈 해솔은 자리에 없었다. “힘드네.” 의자에 몸을 묻자 절로 긴 한숨이 새어 나온다. 어째 얻는 것보다 나눠주는 게 더 고된 기분이다. 어쨌든 이로써 남은 건 3개의 정령 결정과 백야의 무희. 그리고 근력, 내구, 마력의 영약. “그러고 보니 형의 마력 능력치가 얼마였더라?” * 결과적으로 그날 이후, 머셔너리 클랜에는 두 명의 각성 시크릿 클래스와 한 명의 시크릿 클래스가 새롭게 탄생했다. 그리고 소문은 무서운 속도로 퍼졌다. 하기야 그저 그런 소문도 아니고, 무려 클래스 계승에 관한 건데 가볍게 넘길만한 거리는 아닐 것이다. 나는 그 소문에 힘입어 회의장에서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아직 계승할 클래스는 네 개가 남았으며, 누구든지 좋으니(최소한으로 클래스 제한은 걸었다.) 자신만 있으면 찾아오라고 공지한 것이다. 그냥 ‘혹시나.’ 라는 생각에 온다면 단단히 깨질 줄 알라는 경고와 함께.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용자를 스카우트하거나, 앞으로 들어올 예비 사용자를 육성하는 방법도 있기는 했다. 허나 클랜원들을 우선하여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러는 게 옳기도 했고, 또 뒷말도 나오지 않을 테니까. 그러는 동안 여러 날이 흘러, 내(內) 도시 발전도 상당히 진척됐다는 보고와 특수 건물 이전 작업도 마쳤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물론 그에 발맞춰 우리도 머셔너리 아카데미 공사에 들어간 상황. 이렇게 큰 사건 사고 없는 나날이 지속되는 듯했으나, 사실 근심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죄송해요. 도련님? 정 급하시면 저희가 연락이라도….)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직 강철 산맥에 있다면서요?” (네….) “그럼 기다리는 게 낫겠네요. 돌아오면 바로 연락 좀 주시겠습니까?” (네. 꼭 전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확답을 받은 후 통신을 끊었다. 빛이 사라진 통신용 구슬을 보며 연초를 하나 물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형은 내가 원정을 출발할 때도 강철 산맥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강철 산맥에 있다. 그럼 약 두 달, 아니 이제는 거의 세 달에 가깝게 체류하고 있다는 소리 아닌가.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연기를 푹푹 내뱉은 후 책상으로 시선을 옮기니, 반짝이는 세 개의 결정과 푸른빛이 흐르는 부채가 눈에 들어온다. 보면 볼수록 얼른 처리하고 싶다는 기분이 강해진다. 기실 이렇게 안달이 나는 이유는 하나. 엄밀히 말하면 영약은 나중에 줘도 큰 상관이 없다. 능력치 포인트 상승은 몇 초면 끝낼 수 있으니까. 그러나 클래스의 경우는 확연히 다르다. 계승하고 나서도 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만큼, 지체할수록 손해 보는 기분이 가시지를 않는다. 그리고 여태껏 한다고 하면서 계속 미뤄왔으니, 이번만큼은 어떻게든 확실하게 처리하고 싶기도 했고. 달칵. 그때였다. “아~빠~!” 돌연히 문이 스르르 열리는가 싶더니, 누군가 앙증맞게 나를 부르며 달려온다. 황급히 연초를 끄고 몸을 돌리니 13쌍의 날개를 파닥거리는 마르가 덥석 안겨 들었다. 어이쿠, 무거워졌네. 그새 또 성장한 건가. “마르 왔어?” “응!” 무언가 신 나는 일이라도 있는 걸까. 등을 토닥이며 묻자 마르는 해맑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둘러보더니 반짝이는 눈으로 책상을 가리켰다. “아빠. 저건 뭐예요?” “응?” “저거요, 저거. 예쁜 상자요.” “예쁜 상자?” 결정이나 부채가 아니라? 뒷말은 속으로 꿀꺽 삼킨 후 시선을 돌렸다. 마르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아, 저거?” 6개의 상자가 반듯하게 쌓여 있었다. 무려 100만 GP나 주고 구입한 ‘괴물 소환 상자 4’였다. ============================ 작품 후기 ============================ * * * ┏┓ * * * 내 손 끝은 빛나고, * * * ┃┃ * * * 키보드는 심판을 내린다. *┏━┛┗━┓* 기꺼이 독자에게 응전하고, *┗━┓┏━┛* 놀림엔 인터뷰로 되갚으니. * * * ┃┃ * * * 오, 신이시여. * * * ┃┃ * * * 나를 남성 곁에 두시고, 사내들 중에 세우소서. * * * ┃┃ * * * 남의 성별을 매도하는 자, 이번 크리스마스에 솔로이리라. * * * ┗┛ * * * 그것이 신의 뜻이라. 0766 / 0933 ---------------------------------------------- 장비 나와라, 뚝딱! “후유.” 중앙 관리 기구의 수장, 이효을의 입에서 가벼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반쯤 감긴 눈은 손에 들고 있는 기록을 응시한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수첩 같은 기록 한 장. 실제로 적혀 있는 내용도 간단하기 그지없다. ‘머셔너리 클랜, 남 도시 내 아카데미 건설 확인.’ “어휴, 씨발.” 이지적인 인상의 여인에게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효을은 연신 구시렁거리면서 기록을 책상으로 튕겼다. 그리고 또 한 번 폭, 한숨을 흘린다. “나보고 도대체 어쩌라고….” 끓는 듯한 침음이 흘러나온다. 이마가 아픈지 그대로 쓰러지듯 엎드려 머리를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그렇게 온몸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주변 클랜들의 시기(猜忌)가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현재 내(內) 도시 발전 상황은 상당한 궤도에 올라 있다. 시작의 여관, 사용자 아카데미, 클랜 창설관, 신전 등등 특수 건물이 건설 완료됨은 물론, 북 대륙에서 권한 이전 작업까지 마친 상태. 거기다 얼마 전 천사에게서 새로운 예비 사용자가 들어온다는 소식까지 접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오는 인원은 정확히 2,897명으로, 근 10년을 통틀어 가장 많은 역대 최고급 규모였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아틀란타 발견 이후 첫 번째로 열리는 사용자 아카데미다. 즉 강철 산맥 공략으로 소실된 전력을 보충할 최고의 기회라는 소리다. 한데 개별 권한이 깃든 머셔너리 전용 아카데미를 여기 보라는 듯 뚝딱뚝딱 짓고 있으니 기분이 나쁘지 않을 리가 없다. 아무리 한 해 입학 인원에 제한이 있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김수현이 바보도 아니고, 경쟁을 통해 선발하겠다고 하면 인원 제한은 큰 의미가 없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머셔너리라는 이름값은 이미 차고도 넘치는 정도. “그럼 지들이 공식적으로 항의를 하던가…. 아니면 최소한 정체라도 밝히던가…. 꼴랑 보내는 게 익명으로 된 투서면서…. 배짱도 없는 것들이….” 허나 이해하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우선은 아카데미 건설을 제한할 명분이 없다. 천사가 직접 계시까지 내렸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거기다 머셔너리 아카데미는 이미 한참 전에 공식적으로 세워졌다. 아무리 상황이 이렇다고는 하나, 이제 와서 태클을 거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효을의 입장도 굉장히 애매했다. 개인적인 속내를 말해보라면, 이효을은 정말로 어지간하면 김수현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진심으로. 그 강력한 코란 연합도 결딴낸 사용자인데 중앙 관리 기구를 두려워하겠는가? 아니, 이뿐만이 아니다. 서 대륙 사용자 격퇴나 부랑자 완전 척살 등 이래저래 빚진 것도 많고, 이번 도시 발전 기금도 머셔너리 클랜이 가장 많이 냈다. 그런데 여기서 이효을이 나서기라도 했다가는 김수현의 심기를 거스를 건 불 보듯 뻔한 일. “그래도 이대로 가만히 있기에는…. 아, 소영 씨한테 부탁이라도 해볼까…? 공찬호는 아마 관심 없다고 할 게 뻔하고…. 김유현 고놈은 동생 편이나 들지 않으면 다행이고….” 이제는 숫제 머리를 쿵쿵 찧기까지 하는 이효을. “으어어어어어어어….” 오늘도 이효을의 시름은 깊어만 갔다. * 아틀란타(Atlanta). 머셔너리 캐슬(Mercenary Castle). “절대로 버릇없게 행동하면 안 돼.” 계단을 오르는 훈훈한 청년, 안현은 함께 계단을 오르는 여인에게 신중한 표정으로 주의를 주고 있었다. “특히 형은 거짓말하는 걸 굉장히 싫어하셔. 만약에 질문을 하시면 무조건 진실하게 말해야 해. 알겠지?” “네, 네….” 그리고 차희영은 안현이 말을 할 때마다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얼굴에는 ‘긴장’이라고 두 글자를 새긴 것이 정말로 알아듣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이렇게 같이 가주거나 네 옆에 있어줄 수는 있어. 그런데 그 이상은 못 해줘. 누가 부탁한다고 해서 해주시는 성격은 아니셔. 이건 이해하지?” “무, 물론이죠. 그, 그냥 혼자 가는 게 무서워서….” “에이, 너무 떨지 마라니까. 형도 사람이야. 괴물이 아니라고.” “그, 그래도…. 호, 혹시….” “응?” “감히 네까짓 게 각성 시크릿 클래스를 넘봐? 당장 꺼져! …이, 이러시지는 않을까요?” 파르르 떠는 차희영. 무에 그리 두려운지 사시 나무 떨 듯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안현은 쓰게 웃었다. 그리고 “그러시지는 않을 거야. 그건 장담할게.” 라고 다독이며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둘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4층, 집무실의 문이 눈앞에 있다. “히익?” 한데 무슨 마왕 성의 문이라도 봤는지, 차희영은 당장에라도 경기를 일으킬 듯했다. 안현은 그런 차희영을 살살 다독이며 한 차례 노크했고, 이내 들어오라는 말에 침착히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슬슬 뒷걸음질하는 차희영을 억지로 잡아 끌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형, 저희 왔습니다.” * “음…. 그러니까 사용자 차희영의 말인즉, 백야의 무희를 계승하고 싶다는 말이죠?” 그냥 확인 차 물어본 말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회답은 아주, 매우 큰 육성으로 돌아왔다. 고막이 지끈거릴 정도였다. 흘깃 눈을 돌리니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꼿꼿한 차려 자세를 하고 있는 차희영이…. 얼씨구, 또 언제 일어나셨어. “굳이 일어나실 필요는 없어요. 그냥 앉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러자 절도 있게 푹 주저앉는 차희영. 이제 갓 신병 교육대에 입소한 장정을 보는 느낌이다. 어이없는 기분에 물끄러미 응시하자 돌연 좌불안석, 안절부절못하더니 느닷없이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흡사 주인을 올려다보는 강아지 같은 촉촉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데, 속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아니, 왜 갑자기 울려고 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 사람아. 옆에는 안현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남몰래 한숨을 쉬고 있다. 혹시 내가 실수한 거 있느냐는 의미로 어깨를 들썩이자 머리를 설레설레 젓는다. 이대로는 정상적인 대화가 힘들 것 같은데. 여기서 연륜을 조금 보여볼까? “하나만 물어봅시다.” “네!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둘이 첫 키스는 언제 했나요?” “네…? 아, 첫 키스는 아직이고요. 현이 오빠 몰래 간접 키스는…. 히에에에에에에엑?” 펄쩍 뛰는 차희영. 아주 입을 쥐어뜯을 기세로 양손으로 틀어막는다. 얘도 반응이 꽤 흥미로운데? 아주 톡톡 튀어. “혀, 형.” “아차, 안현.” “예?” “둘이 잘 어울리기는 하는데, 너 차소림 씨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 “예? 예에에에?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면…. 설마 양다리?” 그러자 차희영의 눈이 순식간에 가늘어졌다. 안현은 굉장히 억울해 하는, 호소력 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고, 나는 가볍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이 정도면 차희영의 긴장도 풀렸겠지? “미안해요. 농담, 농담이었습니다. 하하. 이제 긴장 좀 풀리셨나요?” “네! 그렇습니다!” …그냥 관두자. 절로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차희영(1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마법사(Normal, Mage, Runn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S Zero) 5. 진명 • 국적 : 사랑하는 마녀(진)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2) 7. 신장 • 체중 : 167.4cm • 51.3kg 8. 성향 : 수줍음 • 순정(Shyness • Pure Love) [근력 34] [내구 41] [민첩 49] [체력 57] [마력 90] [행운 6]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6 포인트입니다.) < 업적(0) > < 특수 능력(1/1) > 1. 꺼지지 않는 지혜의 빛(Rank : C Plus) < 잠재 능력(1/4) > 1. 정통 마법(Rank : B Plus) 2. - 3. - 4. - <최근 능력치 비교> (변경 전) [근력 14] [내구 24] [민첩 34] [체력 44] [마력 84] [행운 4] (변경 후) [근력 34] [내구 41] [민첩 49] [체력 57] [마력 90] [행운 6] 흠, 그러고 보니 차희영이 곧 2년 차가 되던가? 사용자 정보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수준이다. 사실 지옥 대공이 출현한 이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 꽤 많은 것들이 변했다. 우선 진명도 증오하는 마녀에서 사랑하는 마녀로 변했고, 성향도 무기력과 증오에서 수줍음과 순정으로 변했다. 나쁘지 않은 변화다. 마력 능력치도 엄청나다. 그동안 워낙 괴물들만 봐와서 그렇지, 1년 차에 90 포인트면 상당한 수준이거니와, 6 포인트가 남아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고무적이다. 거기다 1회 차에서는 그 무시무시한 마녀이기도 했고. 정작 그때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지만. 특수 능력도 좋고, 잠재 능력도 정석이다. 빈 슬롯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클래스 계승으로 개화하면 그만이니까. 그리고 마그나카르타도 수재라고 평가할 만큼 재능도 있는 것 같다. 여하튼 여러모로 자격이 되기는 하는데…. “확실히 사용자 차희영이 계승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요.” “정말이요?” 긍정적으로 말을 꺼내자 차희영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서린 표정이다. “하지만 문제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닙니다.” “무, 문제요?” “그렇죠. 그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 차희영은 멍하니 나를 쳐다보더니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나는 얼른 물의 결정을 집어 들었다. “예를 들어드리죠. 사용자 정하연의 경우, 이 물의 결정을 계승하기를 원했습니다.” “네? 하지만 하연이 언니는….” “예, 맞아요. 이미 시크릿 클래스입니다. 허나 정하연은 자신의 능력인 고대 마법과 관련해, 자신이 이 결정을 계승함으로써 강해질 수 있다는 확신을 매우 조리 있게 설명했습니다.” “…….” 다음으로, 나는 불의 결정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 불의 결정은 사용자 사라 제인이 입후보했죠.” “사라 제인 씨라면….” “최근에 들어온 신입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사라 제인은 금번 원정에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고, 이후로도 꾸준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말을 들어봐도 행동을 문제 삼는 클랜원은 없더군요.” “마, 맞아요. 정말 좋으신 분이세요.” “그래요. 그리고 무엇보다, 화 계열 마법에 굉장히 조예가 깊은 마법사죠. …자, 이제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아시겠습니까?” “…….” 또다시 입을 다무는 차희영. 보아하니 스스로 이해하기보다는 누가 떠먹여 줘야 아는 타입인 모양이다. 이래서야 옛날 마녀가 그리워지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그럼 묻겠습니다. 사용자 차희영은 클랜원들에게 자신이 왜 이 클래스를 계승해야 하는지 납득시킬 수 있겠습니까?” 곧바로 던진 질문에 차희영은 멀거니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두어 번 눈을 깜빡깜빡 감았다가 뜨더니 곧 시무룩이 고개를 숙였다. “역시 안 되는 거군요….” “그게 아니라.” “죄송합니다…. 괜히 나서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 허허, 참으로 병신 같은 처자일세. 자꾸만 사과하는 차희영을 빤히 쳐다보다가 안현을 보며 까닥까닥 손짓했다. 씁쓸히 웃고 있던 안현은 성큼 다가와 얼굴을 가까이했다. “예 형.” “쟤 왜 저러냐.” “에, 그게요. 그러니까 형도 아시죠? 희영이가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어떤 일을 당했는지….” “그런데.” “그게 좀…. 그동안 오냐 오냐 하기도 했고…. 사실 저도 잘은 모르겠어요. 그동안 많이 나아지기는 했는데, 애가 아직 많이 소심해요. 그러니까 갑갑하셔도 형이 이해 좀 해줘요.” “흠.” 그때의 일이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는 건가. 그럼 다그치는 방향으로 키울 수는 없겠고. 어쨌든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아, 나는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럼 얘기는 내가 계속 해볼 테니까, 너는 지금 나가서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예? 부탁이요?” “응. 어려운 건 아니고, 오늘 저녁에 클랜원들 보고 정원으로 좀 모이라 그래.” “정원이요? 왜요?” “그런 일이 있어. 나중에 한꺼번에 설명해줄게. 아무튼, 강제 호출은 아니니까 오기 싫으면 굳이 올 필요는 없고. 그리고 올 때는 완전 무장하고 오고. …아, 다른 클랜원은 상관없는데, 안솔은 꼭 오라고 해야 한다.” “완전 무장까지…. 알겠습니다.” 안현은 머리를 갸웃했으나 곧 알아들었다는 표시를 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차희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천천히 방문을 나섰다. 안현이 떠난 이후, 차희영의 태도는 한층 불안해졌다.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안현이 나간 문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곧 있으면 시작의 여관이 활성화된다고 하던가? 그것도 근 10년을 통틀어 역대 최고급 규모라고 이효을이 말하던데. “사용자 차희영.” 조용히 부르자 차희영은 깜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지만, 더 이상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을 동시에 폈다. 2라는 의미였다. “좋습니다. 그럼 제가 여기서 두 개의 조건을 걸겠습니다.” “두 개의 조건이요?” “말을 정정하죠. 조건이 아닌, 시험. 즉 앞으로 제가 내는 두 개의 시험을 훌륭하게 통과하면, 사용자 차희영의 백야의 무희 계승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네?” 들려오는 반문에, 나는 살짝 몸을 내밀어 깍지 낀 손등에 턱을 얹었다. 그리고 살그머니 웃었다. “어때요. 한 번 해보시겠습니까?” * 차희영과의 면담을 끝마친 후. 시간이 흘러, 어느새 밤이 찾아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정원으로 나가니 벌써 무수한 클랜원이 모여 있었다. 강제로 올 필요는 없다고 했는데, 거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많다. 물론 전원이 모인 건 아니었다. 대충 둘러보니 근원과 비비앙, 그리고 제갈 해솔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니까. 그나저나 안솔은 어디 있지? “클랜 로드! 오늘은 무슨 일로 모이라고 하신 겁니까?” “가슴에 안으신 상자는 뭐예요?” 사방에서 쏟아지는 질문과 시선을 받으며 나는 탁 트인 중앙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기실 오늘 저녁 이렇게 모인 이유는 하나. 바로 마르 때문이었다. 마르는 일전 책상에 놓아둔 ‘괴물 소환 상자 4’를 발견한 이후, 상자에 비상할 정도의 관심을 보였다. 어찌나 상자를 열고 싶어 하던지, 그동안 하지도 않던 ‘으으으응. 아빠아아. 마르 이거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네?’ 라는 애교까지 부릴 정도. 차기 요정 여왕이 몸을 배배 꼬면서 떠는 애원(?) 애교는 실로 심장을 쿵쿵 떨어트리게 할 정도로 강력했고, 결국 참지 못해 이른 시일 안에 개봉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 아틀란타까지 와서 심장병으로 죽기는 싫었으니까. “아빠!” 문득 저 멀리서 앳된 음성이 들려온다. 언제 와 있었던 걸까? 마르는 임한나의 품에 안긴 채 나를 부르며 손을 흔들고 있다. 상자를 보니 좋은지 방실방실 웃는 얼굴이다. 나는 가볍게 손을 들어 화답한 후, 총 여섯 개의 ‘괴물 소환 상자 4’를 차곡차곡 쌓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솔은….” ============================ 작품 후기 ============================ 로유진 : 내 성별을 매도하는 자! 크리스마스를 솔로로 보내는 저주를 받으리라! 하하하하하하하하! 내xxxx : : 이 책 작가님이 그렇게 유명한 여자분이시라면서요?(지나가던 유부남) 불xxxx : 난 유부남이니까 로유미 양으로 불러도 되겠네요 ㅋ 이미 옆에 여자가 둘인데 ㅋ 정xxxxx : 로리유님아 유부남은 상관없네요.. 도발금지!? 단xxx : 뭐 유부녀니 후기와는 관련 없네요 아 솔로이고 싶다 ㅋㅋㅋ 0ㅁ0…. 이럴 수가 ㅠㅠ 유부남 독자 분이 계셨다니 ㅠㅠ 유부녀 독자 분도 계셨다니 ㅠㅠ 으어어어어어어어. 아 부럽네요. 정말로 부러워 죽겠네요. 아 진심으로요. 예전에도 말씀 드린 것 같지만, 제가 실은 결혼 생활에 굉장한 로망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거 있잖아요. 남편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현관문에서 부인이 따뜻한 봄바람 같은 미소를 지어주고, 토끼 같은 아이들이 쪼르르 달려 나와서 맞이해주는 겁니다. 으히힣해흫. 아흐, 생각만해도 행복할 것 같네요. 정말정말 부럽습니다. ㅜ.ㅠ 0767 / 0933 ---------------------------------------------- 장비 나와라, 뚝딱! ‘괴물 소환 상자 4’는 동서남북, 아니 온 대륙을 넘어서 사용자가 닿을 수 없는 미개척 장소에 돌아다니는 괴물을 소환할 수 있다. 그리고 처리할 수만 있다면 괴물이 가진 장비를 습득할 수 있다. 이 단순하고도 간략한 내용을 나는 한참을 설명해야 했다. 설명이 끝날 때마다 ‘클랜 로드! 방금 와서 그런데 한 번만 더 설명해주시면 안 될까요?’ 라는 요청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조교가 ‘마지막 구호는 생략한다.’ 고 말했는데 꼭 한 놈씩 걸리는 경우라고나 할까? 결국에는 무려 네 번을 되풀이하듯 말해서야 클랜원들은 간신히 알아들은 듯했다. “근데 저거 어디서 구하셨어요?” 살금살금 다가온 남다은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상자를 가리켰다. “사용자 상점에서 구했습니다.” “아하, 사용자 상점. 저도 조만간 한 번 들러봐야겠네요. 저 상자 얼마나 해요?” “100만 GP요.” “네? 100만 GP나 해요?” “상자가 총 네 종류가 있거든요. 1, 2, 3, 4 이렇게요. 4번으로 갈수록 강력한 괴물이 나오니 더 좋은 장비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죠. 그래서 가격이 비싸지는 겁니다.” “아하.” 알겠다는 양 고개를 끄덕이던 남다은의 얼굴에 돌연 작은 수심이 어렸다. 보아하니 ‘혹시나’ 싶은 경우를 생각하는 듯하다. 물론 정말 최악의 경우에는 누구도 상대 못 할 무시무시한 괴물이 소환될 수도 있다. 안솔이 개방하면 그럴 가능성은 매우 높아진다. 허나 상자의 특성과 제 3의 눈 그리고 화정이 있는 이상, 사실상 기우에 불과한 걱정이다. “괜찮습니다. 선택권은 우리한테 있으니까요.” “선택권이요?” “예. 무작위 소환이기는 하나, 나오는 놈을 보고 상대하기 힘들다 싶으면, 소환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상자를 닫으면 됩니다. 그럼 소환이 취소된다고 하더군요.” “아, 그래요? 하긴 그래야죠. 그럼 상자는요?” “안타깝지만 재사용은 안 된다고 하네요. 버려야죠.” “에이, 그건 별로네. 그냥 공중 분해된다는 소리잖아요? 100만 GP가 누구 애 이름도 아니고….” 또각, 또각…. 또각, 또각…. 그때였다. 남다은이 어여쁘게(?) 입맛을 다시는 가운데, 어디선가 총총한 발소리가 들렸다. 흘끗 눈을 돌리니 청순한 인상의 여인이 한껏 무게를 잡은 채 정원 수로를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반쯤 감은 눈과 초연한 눈빛을 뿌리며 까부는 여인의 정체는, 바로 안솔이었다. 잠깐만, 이 녀석 혹시….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안솔(4년 차) 2. 클래스(Class) : 광휘의 사제(Arousal Secret, Priest Of Brilliance,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S Zero) 5. 진명 • 국적 : Olfactophilia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4) 7. 신장 • 체중 : 160.2cm • 48.3kg 8. 성향 : 순수 • 변태 성욕자(Pure • Pervert) [근력 31] [내구 37] [민첩 35] [체력 41] [마력 99(+1)] [행운 105]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 포인트입니다.) * 행운 능력치 103 포인트의 영향으로 고유, 특수, 잠재 능력에 ‘Blue Dahlia’의 효과가 추가됩니다. * 행운 능력치 105 포인트의 영향으로 사용자 안솔에게 ‘바라는 대로’의 기운이 깃들었습니다. < 업적(3) > < 고유 능력(1/1) > 1. 기적(Rank : B Plus) < 특수 능력(1/1) > 1. 성녀의 예언(Rank : D Zero ) < 잠재 능력(3/3) > 1. 안젤루스 대 신성주문(Rank : EX) 2. 광휘의 축복(Rank : EX) 3. 속성 변환(Rank : B Plus) (잔여 능력 포인트는 0 포인트입니다.) < 최근 능력치 비교> 1. 변경 전 : [근력 31] [내구 37] [민첩 35] [체력 41] [마력 99(+1)] [행운 103](Total : 346 Point) 2. 변경 후 : [근력 31] [내구 37] [민첩 35] [체력 41] [마력 99(+1)] [행운 105](Total : 348 Point) < 권능 > 1. 천벌 2. Blue Dahlia 3. 바라는 대로 “설명은 잘 들었어요. 오라버니….” 문득 일부러 힘을 뺀 듯한 고고한 체하는 음성이 들렸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안솔은 이미 내 앞으로 도착해 있었다. 반쯤 감은 눈은 여전했고,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비스듬히 나를 올려다보는데, 보이는 눈동자가 자못 거만하기 짝이 없다. 이내 상자를 흘깃 쳐다본 안솔은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가느다란 웃음을 흘렸다. “괴물을 소환하는 상자라…. 재미있군요, 아주 재미있어요…. 후후.” “…….” “이거, 제가 열어도 상관없겠죠?” “뭐, 뭐야. 가, 갑자기 왜 이렇게 건방져? 안솔 주제에.” 그 태도가 고까웠는지 누군가 안솔을 비난했다. 그러나 안솔은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눈을 돌리고는, 쯧쯧 혀를 차며 눈을 오연히 빛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대는 무엇이죠?” “뭐, 뭐?” 뜬금없는 개소리. 서 있던 구예지는 당황했고, 안솔은 홱 고개를 돌리더니 또 다른 누군가를 응시했다. “그대는 무엇이죠?” “응? 흐, 흡혈귀인데….” 가만히 앉아 육포를 뜯고 있던 사사갸 멍하니 회답한다. 안솔은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주먹 쥔 왼손으로 자신의 심장 부근을 세게 치며 외쳤다. “그럼! 저는 무엇인가요!” 그때, “복덩이.” 누군가 기다렸다는 듯이 외쳤고, “그래요! 제가 바로 복덩이…. 아니야!” 중간에 화들짝 놀란 안솔이 빽 소리를 질렀다. 진정으로 절묘한 끼어들기. 잠깐의 침묵 후, 도처에서 와하하하 왁자한 웃음이 폭발적으로 터져 흘렀다. 이유정은 배를 잡고 땅을 데굴데굴 굴렀고, 심지어는 남다은도 내 어깨를 두드리며 까르르 허리를 꺾을 정도였다. “그, 그만 웃어요!” 와하하하! 까르르르! “누, 누구예요! 감히 누가 그랬어요!” “나다.” 사샤의 옆에 앉아 있던 허준영이 네까짓 게 어쩔 거냐는 듯 당당하게 몸을 일으켰다. 안솔은 흠칫 몸을 움츠렸다가 결국에는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어엉…. 오라버니…. 사람들이 막 나 놀리고…. 나만 괴롭히고…. 어어어엉….” “그래 그래. 괜찮으니까 얼른 상자나 열자꾸나.” 등을 토닥토닥 보듬으며 달래주니 안솔은 금방 울음을 그쳤다. 이어서 그렁그렁한 눈을 쓱쓱 비빈 안솔은, 반듯이 쌓인 여섯 개의 상자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제 시작한다고 여겼는지 사방의 웃음도 서서히 사그라졌다. 잠시 후, 안솔이 살짝 긴장한 기색으로 상자를 조심스레 열어젖혔다. 우웅! 그 순간 상자가 활짝 열리면서 직경 2미터 정도 되는 마법 진을 허공으로 토해냈다. 새하얀 빛을 흘리며 빙그르르 도는 진을 보니 상자가 어떤 식으로 괴물을 소환하는지 알 것 같다. 아마 허공의 진은 소환 진의 일종으로, 상자에 저장된 마법 행사를 통해 외부의 괴물을 불러오는 것이리라. “헤, 기대되네요. 과연 어떤 놈이 나올까?” 남다은은 가벼운 감탄을 흘리며 ‘설아’를 고쳐 잡았다. 사방을 점거한 클랜원들도 각자 무기를 겨눈 채 마법 진을 응시한다. 이미 말은 맞춰놨다. 괴물이 소환되는 즉시, 이곳으로 융단 폭격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마법 진에서는 허연 연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 히이이익! 꽤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한 찰나, 갑자기 화정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 야! 닫아! 닫으라고! 어서! 이어서 전혀 알아듣지 못할 고함이 머릿속을 왕왕 울린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저걸 왜 닫아?’ - 빨리 닫아! 이제 거의 소환 끝났다고! ‘야, 저 상자 하나에 100만 GP다.’ - 야 이 미친 새끼야! 네 목숨이 소중하냐 100만 GP가 소중하냐! 처음 듣는 욕설이었으나 화정의 음성은 그 어느 때보다 황급했다. 고민의 시간은 짧았다. 머리가 갸우뚱 기울어지기는 했으나, 얼른 달려가 내던져진 상자를 들고 닫아버렸다.(안솔은 상자를 개봉하자마자 멀찍이 도망갔다.) 그러자 문득 허공에서 “아쉽다….” 는 가련한 음성이 귓전을 울리고, 공중의 마법 진도 흐물흐물 사라졌다. 바로 눈을 올리니 작고 하얀 발이 잠깐 보인 것 같기는 한데, 금세 자취를 감춰 자세히 보지는 못했다. 이윽고 정적이 되돌아온 정원에는 모두가 나를 멍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 허억, 허억…. 주, 죽는 줄 알았네…. ‘화정? 어떻게 된 거야?’ - 시, 신…. 신이었어. ‘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세라프는 오직 중간 차원의 존재만 소환이 가능하며, 상급 혹은 하급 차원의 존재를 소환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으니까. 만약 가능했다면 나는 GP를 버는 족족 저 상자에 투자했을 것이다. - 아니, 중간 차원에 봉인 당한 신이야. 모종의 사정으로. 허나 내 생각을 읽었는지 화정은 바로 말을 정정했다. ‘중간 차원에 봉인 당한 신이라고? 그런데 그렇게 센가? 아무리 신이라도….’ -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나랑 동격인데? ‘뭐?’ - 나랑 동급인 신이라고. 죽음, 멸망을 관장하는 타나토스(Thanatos)의 꽃. 나나 게헨나가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가정 하, 간신히 5, 6할의 승률을 점칠 수 있어. 한데 그런 신을 이기겠다고? 꿈 깨셔. 그 말을 들은 순간, 느닷없이 소름이 쫙 끼쳤다. 흡사 서늘한 기운이 등골을 훑어내리 듯이. 화정의 말에 따르면, 모종의 사정으로 중간 차원에 봉인 당한 신이라고 했다. 아니, 그래도 이해가 안 된다. 아무리 상자의 힘을 빌렸다고 해도 그 정도의 신을 소환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 내 말이! 당최 쟤는 어떻게 되먹은 인간이야? 어떻게 한낱 인간이 신을 소환해? 엄청 깊숙한 장소에 꽁꽁 봉인해뒀는데, 정말 깜짝 놀랐잖아! “오, 오라버니?”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슬금슬금 다가온 안솔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그러고 보니 클랜원들도 사방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나마 개인 물품이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우선은 적당히 넘어가기로 결심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바로 두 번째 상자 시작하자.” “네?” “그리고 상자를 열면 아까처럼 바로 도망가. 알겠지?” “네, 네….” 말끝을 흐리기는 했으나 안솔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두 번째 상자 입구를 잡은 안솔이 살며시 열어젖히니 툭 튀어나온 마법 진이 요요히 솟구친다. 아까와 차이가 하나 있다면 새하얀 빛이 아닌, 누리끼리한 빛을 흘리고 있다는 것이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약 1 미터 50 센티미터 즈음 돼 보이는 인간형 난쟁이가 서서히 모습을 보였다. 험상궂은 얼굴과 울퉁불퉁한 근육 신체, 그리고 오른손에는 은은한 황금빛이 흐르는 거대한 망치를 들고 있다. - 오호, 미젯 스미스(Midget Smith)잖아? ‘미젯 스미스?’ - 응. 저기 오른손에 든 망치 보이지? 저거 엄청나게 좋은 거야. 원래 신화 시절에도 어지간하면 보이지 않던 놈들인데, 아직까지 남아 있었나 보구나…. 신기하다. 아무튼, 땡 잡았네? ‘잡아도 된다는 말이렷다.’ 이미 남다은과 안솔은 멀찍이 떨어진 상황. 이내 털썩 땅으로 떨어진 미젯 스미스를 향해 손을 꺾는 동시, 있는 힘껏 후방으로 뛰었다. 얼른 공격하라는 신호였다. 그러자 곧 사방에서 발사된 수십의 마법, 화살 등등이 이제 막 소환된 괴물에게 퍼붓듯이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콰앙, 꽤 커다란 폭발이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를 무자비하게 휩쓴다. 반사적으로 눈을 돌렸다가 도로 쳐다보자, 폭음이 가라앉은 자리로 이리저리 흩어진 살점과 흙에 흐르는 붉은 핏물, 그리고 파헤쳐진 구덩이 속에서 홀로 발광(發狂)하는 황금빛 망치를 볼 수 있었다. “좋았어.” 나는 주먹을 불끈 움켰다. 요체는 간단하다. 소환이 완료되는 순간 집중 사격으로 괴물을 처리한다. 우리 클랜이 약한 클랜도 아니고, 어지간한 괴물이 아니고서야 이 정도 화력을 지닌 집중 사격을 견딜 수는 없을 터. 결국에는 돈 놓고 돈 먹기라는 소리였다. 허공섭물(虛空攝物)의 묘리를 일으키니, 들썩들썩 일어난 황금 망치가 빙그르르 날아와 손으로 안착했다. 이윽고 안솔은 세 번째 상자를 집었다. 그리고 아까보다는 자신감 있는 손짓으로 상자를 열자, 이번에는 푸른빛의 마법 진이 생성되며 어두운 그림자가 땅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 흐으으으으으으으…. 마법 진에서 얼음 빛을 띤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 작품 후기 ============================ 혹한이 몰아치는 얼음의 대륙. 오늘도 아빠 괴물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지역으로 나섭니다. 바로 가족을 위해서요. ‘여보, 힘내세요!’ ‘아빠, 오늘은 맛있는 거 많이 잡아와!’ 많이 힘이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을 생각하면 저절로 힘이 납니다. ‘그래,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이곳에 없으면 다른 곳도 찾아보고, 오랜만에 애들 입에 고기나 넣어주자꾸나! 힘내자!’ 다짐한 아빠 괴물은 오늘도 기운차게 주변을 수색합니다. 자신의 머리 위로 환한 마법 진이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독자 분들,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 0768 / 0933 ---------------------------------------------- 장비 나와라, 뚝딱! 『소망의 망치(Hammer Of Wish)』 (설명 : 미젯 스미스(Midget Smitht)와 일생을 함께하며 성장한 신비로운 힘이 깃든 망치입니다. 충분한 광석만 있다면, 단 한 번의 망치질로 사용자가 강력히 소망하는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으며, 동시에 만들어진 물품에 망치에 잠재된 마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비록 공격력은 전혀 없으나, 미젯 스미스 일생의 경험과 노력이 녹아 든 이 망치는 그 어떤 신기(神器)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보물입니다. 한 번의 사용으로 소멸해버리니 신중한 사용을 권합니다.) “이야, 이것 좀 봐봐! 소망의 망치라는데?” “우와, 클랜 로드는 좋겠다.” 주변은 삽시간에 시끄러워졌다. 원거리 계열들이 괴물이 소환되는 족족 처리하니, 상대적으로 나설 일이 없는 근접 계열들은 살금살금 모여 성과 품평회를 시작한 것이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모여든 클랜원 중 일부는 시키지도 않은 의자나 음료를 갖다 주는 등 극상의 서비스 정신을 발휘했다. 여하튼 덕분에 편하게 앉아 구경할 수 있었다. 쾅! 세 번째 폭발한 굉음이 고막을 울리고 번쩍이는 빛무리가 어둠을 밝혔다. 남다은은 내 시야가 걱정됐는지 손수 눈을 가려줬다. 이내 차분히 손을 치우고 쳐다보니, 역시나. 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진수현은 연기 사이로 촐랑대며 뛰어들어가더니, 이윽고 얼음 빛을 뿜는 무언가를 품에 안은 채 뛰쳐나왔다. “형님! 나왔어요! 이번에도 나왔다고요!” 『프라가라흐(Fragarach) – Ver. Rapier』 (설명: 광명의 신 루(Lugh)의 축복이 깃든, 빙하의 전설이라 불린 기사가 사용하던 검입니다. 얼음 섞인 칼날은 무엇이든지 뚫을 수 있을 정도로 예리하며, 사용자가 원할 경우 저절로 칼집에서 빠져 나오거나 혹은 스스로 되돌아오는 등 귀속 기능이 있습니다. 이명으로는 앤서러(Answerer), 즉 ‘맞받아치는 검’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프라가라흐(Fragarach) – Ver. Armor』 (설명: 광명의 신 루(Lugh)의 축복이 깃든, 빙하의 전설이라 불린 기사가 착용한 갑옷입니다. B 랭크 이하의 적이 이 갑옷으로 접근할 경우 흡사 관능적인 여인을 본 것처럼 힘을 잃어버리며, 착용자는 유혹하듯이 적을 쓰러트릴 수 있습니다. 강력한 냉기를 품고 있는 갑옷은 얼음 계열 마법에도 강한 내성을 지닙니다.) 시릴 듯한 냉기를 풀풀 날리는 길고 가느다란 레이피어 한 자루와, 반투명한 얼음 빛을 띤 경(輕) 갑옷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빛깔이 이래서야 속살이 살짝 비칠 것 같지만, 외관상 보기에는 예쁘다. 빙하의 전설이라는 기사는 아마 여인이 아니었을까? “와….” 누군가 감탄 섞인 숨결을 토해냈다. 흘끗 눈을 돌리니 남다은이 입을 약간 벌린 채 정신 없이 쳐다보고 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남다은은 한 번도 챙겨주지 않았던가? 조금이지만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곧바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이 검이랑 갑옷은 우리 다은이한테 어울릴 것 같은데.” “네?” 조용히 운을 떼니 남다은이 화들짝 놀라 나를 쳐다본다. “받아주겠어?” “네…. 네? 정말이요?” “응. 나보다는 우리 다은이한테 걸맞은 장비 같아서. 어때?” “오, 오빠….” 남다은은 무척 감동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난데없이 자신의 품으로 와락 끌어안았다. 이 여인은 가슴이 빈약한 편이라 속으로 아쉬워하고 있을 즈음,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 힘없이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세, 세상에…. 우리 다은이라니….” 세상을 잃은 표정을 짓고 있는 여인은 고연주였다. “누구는 사용자 고연주…. 누구는 우리 다은이….” 그렇게 말한 고연주는 양 무릎을 모아 앉은 정하연의 허벅지로 쓰러지듯이 엎드렸다. 그리고 흑흑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그렇게 노력해도 죽어라 호칭을 고수하더니…. 하연 씨한테 밀린 것도 아니고, 한참 후배한테 밀렸어요….” “그래요, 그래요.” “하연 씨. 춥네요, 너무 추워요…. 꼭 패배한 개가 된 기분이에요….” “괜찮아요. 파트, 아니 연주라슈. 자, 이대로 저와 눈을 감고 잠들도록 해요. 그리고 아름답게 떠나는 거예요.” 등을 슬슬 쓰다듬어주는 정하연과, “끼잉…. 끼잉….” 강아지 앓는 소리를 내는 고연주. 그나저나 연주라슈라. 어느 사이 고연주 테리어에서 품종이 변경된 건지 당최 이해하기 어려우나, 나는 느릿하게 한 손을 뻗었다. 강아지 부르듯 혀를 차니 뚝 그친 고연주가 흘깃 나를 쳐다본다. “이리 오렴.” “끼잉?” “착하지? 우리 고연주 테리어.” “왕왕.” 그러자 휙 상반신을 일으킨 고연주는 엉금엉금 기어와 갖은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잘했다는 의미로 턱을 슬슬 간질여주니, 숫제 혀까지 내밀고 핥으며 재롱을 부린다. 그러자 이번에도 풀썩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또 누군가 싶어 시선을 돌리니, 두 눈을 한껏 치뜬 하승윤이 믿을 수 없다는 기색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마, 말도 안 돼….” “……?” “거, 검후 님과 그림자 여왕 님이…. 어떻게 저런 하찮은 모습을….” “응?” 아니, 하찮다니. 이렇게나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가볍게 어루만져주니 두 여인이 경쟁이라도 하듯이 한층 달라붙는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을 개의치 않고 여기 보라는 듯 계속 농락하자, 하승윤의 눈동자로 눈물이 넘칠 듯 그득하게 고이더니, 결국에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 그러고 보니 검후를 동경해서 우리 클랜에 들어오고 싶어 했다던가? 그런데 이렇게 장난치는 모습을 보니 충격을 받은 거고. 이거 참, 의도치 않게 동심(?)을 파괴한 기분이다. 쾅! 그 순간이었다. 잠깐 장난치는 사이 상자를 개봉했는지 네 번째 굉음이 귓전을 울렸다. 허나 반사적으로 중앙을 쳐다본 순간, 한껏 들떠 있던 기분이 갑작스럽게 가라앉았다. 흙먼지가 섞인 허연 연기가 올라오는 정원에는, 어스름한 그림자가 이리저리 크게 일렁이고 있었다. “수현!” 가장 먼저 대응한 사용자는 고연주였다. 언제 강아지 흉내를 냈느냐는 듯 한순간 자세를 바로잡고는 번개처럼 오른팔을 앞으로 내뻗었다. 쐑! 이윽고 공기를 가르며 쏘아진 번쩍이는 단검은, 탱강! 연기 속 존재까지 닿지 못하고 가볍게 퉁겨졌다. 그걸 확인한 순간 나는 바로 무검을 뽑아 들고 상단으로 세웠다. 시끌시끌하던 정원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지그시 정면을 노려보니 흔들리던 그림자가 천천히 연기를 헤치고 나오기 시작했다. 발소리가 고요하다. 마력 감지에 걸리는 기척은 한 놈. - 헤, 저 상자 재미있네. 오벨로 기사단도 소환하잖아? 이윽고 화정의 음성이 들린 찰나, 비로소 그림자가 제대로 된 모습을 보였다. 괴물치고는 썩 큰 덩치는 아니었으나, 두꺼운 흑색 갑옷과 거대한 대검을 들고 걸어 나오는 모습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온다.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모르지만, 살짝 트인 투구 중앙에는 끝없는 어둠 속 시뻘건 안광이 켜져 있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약한 놈은 아니구나. ‘오벨로 기사단?’ - 응. 사후에도 멸망한 왕국 주변을 배회하는 놈들이지. 그런데 말을 타지 않은 걸로 보아 기사 단장급은 아니야. 에이, 아쉽네. 기사 단장이 나왔으면 꽤 좋은 상대가 됐을 텐데. ‘그렇게나 강한가?’ - 그럼. 생전에는 한 명 한 명이 영웅이었는데. 너 정도는 아니더라도 확실히 강하지. 특히 영웅 중의 영웅인 기사 단장급은, 각성한 쿠샨 토르와도 겨룰 수 있을 정도니까. 기사 단장급이 각성한 쿠샨 토르와 겨룰 수 있다고 한다. 허나 눈앞의 놈은 오벨로의 기사 단장이 아닌 아래 급에 해당하는 놈. 그럼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정리한 생각을 낮은 음성으로 지시한 후, 나는 조금씩 앞으로 걸어나갔다.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지시를 받은 클랜원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기척이 잡혔다. 오벨로 기사는 처음에는 가만히 있었다. 차분히 주변을 돌아보는 게 아마 이렇게 소환된 것 자체가 어리둥절한 듯했다. 허나 내가 서서히 앞으로 나가는 순간, 곧장 나를 돌아보고는 천천히 무릎을 숙였다. 선공인가 아니면 방어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오벨로 기사가 가볍게 땅을 박찼다. 그리고, 카앙! 눈 한 번 깜짝하는 사이, 바로 내 눈앞까지 들이닥쳐 검을 휘둘렀다. 미리 무검을 뽑아둔 터라 반사적으로 방어는 성공했으나, 속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힘껏 박찬 것도 아니고 가볍게 뛰었는데, 한 번에 25 미터 거리를 줄였다고? 뒤늦은 바람이 귓가를 스친다. 그 정도로 쾌속한 속도였다. 그때. 웅웅웅웅웅웅! 문득 무검과 대검이 맞부딪친 지점으로 묘한 검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손으로 웅혼한 진동이 느껴지더니, 무검에서 강렬한 적의가 물씬 풍겼다. 내가 아닌 상대방을 향하는 적의. “Krrr?” 이윽고 대검을 부여잡은 오벨로 기사가 주춤주춤 물러난다. 어찌 보면 놀란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이게 어떻게 된 현상일까? “…Sovereign?” 놀랍게도 투구 안에서 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기회였다. 나는 곧장 허리를 숙이며 안쪽으로 파고들어 가 허벅지 부근을 베어 들어갔다. 깜짝 놀란 오벨로 기사가 대검을 한껏 치켜들어 그대로 내려찍는다. 빠른 반응이기는 했으나 이형환위로 가볍게 회피. 옆으로 이동한 후, 숙인 자세 그대로 힘껏 발차기해 정강이를 후려갈겼다. 퍽, 발목 부근으로 둔중한 충격이 느껴졌다. 오벨로 기사의 신체가 크게 휘청거렸다. 원래는 아예 눕혀버릴 생각이었으나 어쨌든 균형을 흩트리는 데는 성공했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왜냐면…. “흐읍!” “하앗!” 두 남녀가 좌우서 동시에 치고 들어왔으니까. 긴 검을 꼬나 쥔 허준영이 힘차게 내지르자 오벨로 기사의 몸이 우뚝 정지했고, 차소림의 창이 섬광처럼 갑판을 꿰뚫자 벼락에 감전된 것처럼 부르르 떨었다. 그 두 번의 공격에 이어, 홀연히 공중으로 솟은 남다은이 얼음 빛을 번들거리는 검을 하늘 높이 들었다. 눈부신 검광이 달빛에 번뜩였다. 콰드드득! 탄탄한 금속이 힘차게 갈라지는 소리. 그 결과, 오벨로 기사는 정수리에서 두 다리 사이까지 깨끗이 절반으로 갈라져 쓰러졌다. 깔끔한 합동 공격이었다. “후. 다행히 물리 저항은 높지 않았나 보네요. 마법 저항은 상당히 높은 것 같던데.” “그것보다는 네 분이 너무 세신 게 아닐까 싶은데.” 남다은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하니 정하연이 쓰게 웃으며 되받는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오벨로 기사가 쓰러진 자리를 탐색했다. 성과가 급하다기보다는, 아까 나한테 엄청난 속도로 돌진했던 능력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제 3의 눈을 활성화하자, 역시나 찾을 수 있었다. 『오벨로 기사 부츠(Obello Knight Boots)』 (설명 : 현재는 멸망한 오벨로 왕국은 한때 금속을 가공하는 기술로 이름 높은 국가였습니다. 오벨로 기사 부츠는 커다란 공을 세운 영웅에게만 지급되는 장비로, 왕국의 비술인 4중 금속 압축 기술이 총체적으로 집약된 부츠입니다. 4면에는 보호의 마법이, 3면에는 경량화 마법이, 2면에는 크기 자동 조절 마법이, 1면에는 고대 마법 ‘급 가속’이 새겨져 있습니다. 급 가속의 경우 발동 시 사용자의 돌진 속도를 1초 동안 비약적으로 상승시켜주며, 하루를 기점으로 충전됩니다.) 설명을 확인하자 하나 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로쓰로스 부츠에 ‘래피드(Rapid)’라는 패시브 마법이 걸려 있다고는 하나, 민첩 능력치가 101 포인트로 오른 이상 이제는 있으나 마나 한 능력이다. 이것보다는 속도를 ‘직접적으로’ 상승시켜주는, 액티브 마법이 내재된 오벨로 기사 부츠를 사용하는 게 훨씬 이득이리라. 마침 새 부츠가 필요한 참이기도 했고. “오라버니. 또 나왔어요?” 잠시 후, 쫄랑쫄랑 다가온 안솔이 살며시 고개를 빼며 묻는다. 정수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고 나서, 나는 두어 번 손뼉 쳐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제 장난은 그만하고. 이제 상자 두 개 남았으니까, 끝날 때까지 모두 집중합시다.” 그때였다. 느슨히 풀어진 분위기를 환기한 찰나, 느닷없이 품에서 미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소음의 근원을 꺼내보니 통신용 구슬이 말간 빛을 흘리는 게, 연락이 온 것 같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형일 가능성이 높다. 저번에 돌아오면 연락을 달라고 부탁했는데 방금 돌아온 모양이다. 그리하여 고연주에게 잘 지켜보라고 일러둔 후, 나는 정원의 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현재 연재하는 파트는 주인공 장비 획득 + 이야기 진행에 필요한 복선이 있으므로 휙 넘어가기는 어려운 부분입니다. 괴물 소환 상자 파트는 정확히는 다음 회 초반 ~ 중반에서 끝날 예정이오니, 이 부분 너른 양해 부탁 드립니다. 또 오늘 쪽지를 답신하면서 느꼈는데, 전에 4개까지 줄여서 좋아했던 게, 하루 지나고 20개 넘게 불었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7통이 장난 쪽지였네요. …이것도 부탁 드립니다. 장난 쪽지는 웬만하면 지양해주세요. 정상적인 쪽지를 보내시는 독자 분들은, 정말 날카롭고 깊이 있는 질문을 해오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개중에는 저도 가볍게 답변할 수 없는 것도 있어, 하루 날 잡고 답신해도 10개 ~ 14개 정도가 한계입니다. 가령 ‘로유미 사랑해요~. 하트 뿌잉뿌잉!’ 는 애교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인데, ‘로유미 임신시키고 싶다~. 데헷!’ 이런 쪽지는 저도 무척 당황스럽습니다. 어찌 답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또 한 번 부탁 드립니다. 그래도 손수 쪽지까지 작성해주셨는데, 보고 그냥 휙 넘기는 건 마음에 걸려서 어찌어찌 답변은 드리는 중입니다. 허나 계속 장난 쪽지가 쌓이면 다른 독자 분들의 정상적인 쪽지 답신에 차질이 생기니…. 이렇게 네 번째로 부탁 드립니다. ㅜ.ㅠ 아이 빌리브 독자 님입니다. 그리고 원하시는 사용자 정보는 곧 정리에 들어가겠습니다. 한 명씩 수정해서 올리든, 날 잡고 한꺼번에 올리든 우선은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단 현재 여러 사용자가 클래스나 능력치, 장비가 변화하는 중이니, 이러한 부분들이 전부 나온 후, 변화 사항을 기입해서 업데이트하겠습니다. 모바일로 보시는 분들의 접근성을 생각하면 어디에 올릴지는 또 고민이네요. 그럼 독자 분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 :) 0769 / 0933 ---------------------------------------------- 여왕의 혈통(血統). (수현아!) 반가움이 듬뿍 묻은 격한 음성이 흘렀다. 구슬에 비친 형상은 예상대로 형이었다. 아직 도시로 돌아온 건 아닌지 구슬이 보여주는 하늘 풍경이 훨훨 지나가고 있다. 형을 보니 저절로 미소가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간신히 표정을 관리했다. “그동안 뭘 하고 지낸 거야? 그것도 몇 달 동안이나.” (아, 꼭 하고 싶은 일이 생겼었거든. 성공하고 지금 돌아가는 길이야.) “하고 싶은 일? 뭘 성공했는데?” (아마 너도 들으면 깜짝 놀랄걸?) 형은 매력적인 미소를 짓고는 가벼운 윙크를 날렸다. 아마 지금 가르쳐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나 되게 많이 찾았다면서? 우리 수현이, 형이 그렇게 보고 싶었어?) “걱정되니까 그렇지! 아무 말도 없이 몇 달 동안….” (와, 그럼 형 걱정해준 거야? 정말로?) “호, 이렇게 나오시겠다.” 형의 장난은 나를 굉장히 부끄럽게 만들지만, 이럴 때는 특효 약이 있다. 이내 여기 보라는 듯 연초 한 대를 꼬나무니, 형은 능글맞은 웃음을 싹 지우고 엄한 기색을 비쳤다. 그리고 (어허, 수현아.) 라고 꾸중한다. “왜. 나도 작정하고 연락 없이 지내볼까?” (미안, 미안해. 형이 정말 잘못했다. 그러니까 제발 그러지는 말아주라.) 엄포 놓듯이 말하니 형이 곧바로 사과했다. “흥.” 연초를 품으로 되돌린 후, 구슬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형의 주변 풍경이 수풀이 아니라 하늘이잖아? 그리고 스치는 속도는 왜 이렇게 빠른 거야? “형. 혹시….” (응? 수현아, 잠깐만.) 형은 돌연히 양해를 구하며 머리를 뒤로 젖혔다. 이윽고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훤칠한 이마가 서서히 찌푸려졌다. (이상하다. 갑자기 왜 이렇게 어두워진 거지….) “어둡다고? 당연하잖아. 밤 시간인데.” (아니, 그게 아니라. 아까보다 훨씬….) “……?” 그때였다. 문득 후끈후끈한 바람이 어디선가 훅 밀려왔다. 기운을 느낀 순간 갑자기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기묘하고도 흉흉한 느낌. 흡사 꽁꽁 농축된 거대한 악의(惡意)와 마주한 듯한 기분. 어찌나 강력한지 EX 랭크에 오른 심안으로도 진정이 되지 않는다. 흐어어어어어어어…. 이어서 들려오는 기괴한 공명음(共鳴音). 흡사 죽음을 앞둔 병자가 내지르는 듯한 단말마의 울림은, 엄청난 증오와 원한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만 들은 건 아닌지, 정원으로 삽시간에 웅성거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간신히 턱을 젖히니 먹구름, 아니 먹구름도 아니다. 시꺼멓게 변색한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비로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다. “형, 나중에 연락할게.” 우선 통신을 끊은 후, - 닫아! “닫아!” 화정과 내 외침이 겹쳤다. 곧바로 중앙을 바라보니, 허공에 떠오른 칠흑 빛 마법 진에서 시커먼 연기가 뭉게뭉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통신 때문에 걸음을 옮긴 터라 나와는 상당한 거리가 떨어져 있다. 그나마 목소리는 닿았는지 곧 고연주, 하승우, 허준영이 동시에 치달리기 시작했다. 속도는 고연주가 가장 빨랐으나 거리는 하승우가 가장 가까웠다. - 안 돼, 이미 늦었어…! 그때였다. 한순간 고연주의 형상이 땅으로 꺼지듯이 사라지더니, 마법 진 바로 아래서 불쑥 솟아올랐다. 고연주는 솟아오르는 동시에 빛살처럼 손을 내뻗었고, 바닥에 놓인 상자의 입구를 힘차게 후렸다. 이어서 텅, 소리와 함께 상자가 도로 닫힌 순간, 내부를 가득 채우던 이상한 기운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턱 막혔던 숨이 이제야 흘러나간다. - 와, 됐다! 야, 김수현! 쟤 누구야? ‘고, 고연주. 그림자 여왕.’ - 아~. 그림자였구나. 쟤 센스 괜찮네. 거의 0.1초 차이였어. ‘0.1초?’ - 어. 그림자에서 완전히 솟아오른 후에 상자를 집고 닫았으면, 아마 100% 늦었을걸? 치솟는 동시에 입구를 쳐서 닫았으니 아슬아슬하게 맞춘 거지. 후유, 여하튼 십 년 감수했네. ‘젠장, 100만 GP가 또 날아갔잖아. 이번에는 또 누구였던 거야?’ 이로써 100만 GP나 주고 산 상자가 두 개나 날아갔다. 매우, 엄청나게 아까웠으나 한편으로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안도했다. 아까 세 번째 상자를 개봉했을 때는 어떤 것도 느끼지 못했다. 타나토스의 꽃이 약해서라기보다는, 힘의 격차가 너무나 큰 탓에 알아차리지 못했으리라. 게헨나가 차원 이동 진을 넘어 등장했을 때처럼.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본능적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인간이 상대할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하게 느꼈다. 아까 느낀 악의는 그 정도로 강렬하고 거대했다. - 고대 악신(惡神)…. 그 정도로 보면 돼. ‘고대 악신? 그놈은 또 얼마나 강한 거야? 이번에도 동급?’ - 아니, 동급까지는 아니고. 한 서너 단계 아래 급으로 봐야지. ‘서너 단계 아래라….’ - 그래도 얕보지 마. 창조신 계열을 기준으로 서너 단계 아래라는 소리는, 어지간한 신들은 명함도 못 내미는 수준이니까. ‘으음.’ - 만약 정상적으로 소환됐으면 이 도시는 하루도 안 돼서 소멸했을 거야. ‘알겠다.’ 화정의 말을 듣고, 나는 더 이상 아쉬워하지 않기로 했다. 아마 예전에 각성한 쿠샨 토르를 처리한 이후, 그동안 신이라는 존재를 우습게 본 감이 없잖아 있는 듯했다. 생각해보면 반신, 그것도 갓 각성한 존재에 불과했는데. 괜한 욕심을 부렸다가 허망하게 죽느니 그냥 미련 없이 포기하는 게 나으리라. - 그래, 잘 생각했어. 그리고 오늘은 이제 그만둬. 쟤 보니까, 오늘 더 하면 안 될 것 같다. 느낌이 너무 이상해. 화정의 말이 백 번 옳다. 무조건 안솔에게 맡기는 게 능사가 아니었다. 행운을 올려도 너무 올린 게 문제였다. 미젯 스미스나 오벨로 기사처럼 상대 가능한 괴물이라면 모를까, 타나토스의 꽃이나 고대 악신을 척척 소환해대는데, 이건 허용 범위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나는 상자 하나를 남겨두고 해산할 것을 지시했다. * 형은 빠르면 이틀, 늦어도 사나흘 안에는 도시로 도착한다고 했다. 강철 산맥에서 아틀란타까지 사나흘이라니 도저히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나 형은 ‘그래? 그럼 내기라도 할래?’ 라고 자신감을 내비쳤고, 나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어지간해서는 확신하지 않는 형의 성격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기다리겠다고 하자 형은 아쉬워하는 얼굴로 입맛을 다셨지만, 어쨌든 돌아오자마자 나와 만나기로 약속했다. 긴히 할 말도 있고, 뭘 저렇게 숨기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여하튼 형과의 만남을 제외하면, 현재 가장 급선무는 ‘강화’였다. 나를 강화하고, 클랜원들을 강화하고, 나아가 북 대륙 전체를 강화해야 한다. 현재 아틀란타를 중점으로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지고는 있으나, 단순히 자리를 잡은 것과 안정화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으니까. 그러나 아틀란타를 북 대륙 정도로 안정화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 정도로 안정화하려면 몇 년이나 걸릴지 예상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제로 코드를 발견하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리고 그 시간을 앞당기는 방법은 확실히 있다. 바로 내가 알고 있는 성과를 모조리 공개하는 것이다. 그러면 활동은 한층 활성화될 테고, 곳곳의 성과는 훨씬 빠르게 발견되며, 당연히 안정화 속도도 상승한다. 결과적으로 북 대륙 전체의 수준이 향상된다. 성과 습득은 물론, 탐험하는 것 자체로 얻을 수 있는 경험치도 무시 못 할 테니까. 그러다 적당하다 싶을 때를 노려, 최후의 대륙 ‘테라’를 공개하고 진군한다. 이게 바로 현재 내가 세운 계획이다. 그래서 가브리엘과 협상할 때 비밀 도서관 기록 중 3할만 건드리겠다고 한 것이다.(물론 이 3할은 온전한 머셔너리의 몫이며, 해밀이나 이스탄텔 로우는 따로 계산한다.) 애초 아틀란타에 잠든 성과는 북 대륙처럼 독식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물론 테라 공개는 아직까지 머나먼 계획이기는 하다. 현재로써는 아직 나와 클랜원들을 강화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으니까. 허나 이 단계도 이제 거의 끝났다고 봐도 좋다. 물, 불의 결정의 주인은 이미 내정했다. 백야의 무희는 지켜보면 된다. 근력, 내구, 마력 상승의 영약도 누구에게 줄지 정했다. 그리고, ‘아차, 빛과 어둠의 결정이….’ 똑똑, 똑똑. 달칵. 그때였다. 한창 상념에 잠겨 있을 즈음, 누군가 문을 살짝 열고 들어오는 기척이 잡혔다. 흘깃 눈을 돌리니 13쌍의 날개를 펄럭이는, 작은 은발의 소녀가 눈에 들어온다. “마르니?” “아빠~.” 부드러이 날아오는 비행체(?)를 안은 순간, 마르가 또 성장했다는 게 느껴졌다. 이제 아이 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앳된 소녀의 향기를 풍긴다. 아마 근원의 동생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성장 속도라, 한 번 볼 때마다 미묘한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빠 아빠, 있잖아요.” 무에 그리 궁금한 걸까. 마르는 총명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나를 쳐다봤다. 무언가 굉장히 기대하는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약간 급해 보이기도 했다. 나를 붙잡고 흔드는 마르를 어르고 달래며,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그러고 보니 근래 마르의 성장 정도를 확인하지 못했다. 저번에 봤을 때는 마르의 정보도 상당히 괜찮았던 것 같은데…. < 거주민 정보(Native Status) > 1. 이름(Name) : 마르 2. 클래스(Class) : -(미정) 3. 소속 국가(Nation) : -(미정)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S Zero) 5. 진명 • 국적 : 1. 하프 엘프(Half Elf) 2. 여왕의 혈통(血統) • 요정의 숲 6. 성별(Sex) : 여성(1) 7. 신장 • 체중 : 94.2cm • 18.1kg 8. 성향 : 질서 • 순수(Lawful • Pure) [근력 21] [내구 27] [민첩 43] [체력 41] [마력 100] [행운 100] * 1차 각성이 완료된 상태입니다. * 강제로 받아들인 날개이기는 하나, 기적의 영향으로 현재는 완전하게 정착했습니다. * 날개에 잠재된 지식을 저절로 습득합니다. 차후 성장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합니다. * 13쌍의 날개는 역사상 처음으로 출현했습니다. 최고라 불리는 요정 여왕의 날개도 12쌍입니다. 만일 이대로 3차 각성까지 완료할 경우, 규격 외의 존재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 업적(0) > < 고유 능력(1/1) > 1. 가네샤의 축복(Rank : EX) < 특수 능력(1/1) > 1. 진리를 꿰뚫는 요정의 눈(Rank : B Plus) < 잠재 능력(2/3) > 1. 하늘의 기적(Rank : S Plus) 2. 정령의 수호(Rank : EX) 3. – “헉?” 마르의 거주민 정보를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한심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무언가 상당히 많이 변화했다. 신장과 체중은 당연히…. 아니 이것도 너무 성장했는데. 이뿐만이 아니라 진명, 능력치, 능력도 변했다. 특히 특수 능력에 자꾸만 눈이 갔다. 진리를 꿰뚫는 요정의 눈? 원래 꺼지지 않는 지혜의 빛 아니었나? 내가 모르는 사이 엄청난 변화라도 겪은 건가? “아빠, 아빠~. 응?” “어, 어?” “빨리 가요. 네?” “어디를?” 이런, 딴 생각에 빠져 있느라 마르의 말을 듣지 못했다. 허나 마르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창고요.” “창고?” “어제 망치요.” “어제 망치? 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거?” “네!” “그게 왜?” “그거 얼른 사용해야 한다는 말이에요.” “……?” 갑자기 창고는 왜 가자고 하는 걸까. - 그냥 가주지 그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손해는 안 볼 것 같은데. 머리를 갸웃한 찰나, 화정의 음성이 머릿속을 울렸다. ‘손해는 안 본다고?’ - 그래. 저번에도 한 번 말하지 않았나? 요정 여왕이 말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으음.’ - 한 번 가봐. 어쩌면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하기야 가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그래, 가자꾸나.” 차분히 몸을 일으키며 말하니 마르가 뛸 듯이 기뻐했다. “와! 신 난다!” “왜 그렇게 신 나는데?” 그러자 마르는 양손을 앙증맞게 쥐어 올리더니, “내가 아빠한테 좋은 거 해줄게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 작품 후기 ============================ 복선 뿌리기가 끝났네요. 이제 서서히, 새로운 파트로 돌입하겠습니다. :) 0770 / 0933 ---------------------------------------------- 여왕의 혈통(血統). 마르가 나를 끌고 간 곳은 창고였다. 정확히 말하면 두 번째 창고. 캐슬로 이사 오면서 창고도 여러 개로 확장했는데, 그 중 두 번째는 성의 지하에서 발견했던 광석을 보관하는 용으로 사용하는 창고였다. 이윽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쌓인, 휘황찬란한 오색 빛깔을 뿌리는 광석을 바라본 순간, 나는 왜 마르가 ‘소망의 망치’ 얘기를 꺼냈는지 알 것 같았다. 『…충분한 광석만 있다면, 단 한 번의 망치질로 사용자가 강력히 소망하는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으며, 동시에 만들어진 물품에 망치에 잠재된 마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왜냐면 망치의 필요 조건이 ‘충분한 광석만 있다면’ 이니까. 그리고 충분 조건은 ‘단 한 번의 망치질’과 ‘강력히 소망하는’ 이다. 쟁여놓은 광석을 이렇게 사용하게 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아빠 아빠, 소망의 망치는요. 미젯 스미스 일생의 경험과 노력이 녹아 있는 신비로운 망치거든요? 그래서 이 망치는요, 살아 있는 미젯 스미스와 거의 동일하다고 보셔도 좋아요.” 소망의 망치를 들고 말하는 마르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또렷했다. 돌연히 ‘아유, 그랬쪄요?’ 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치솟았으나 간신히 삼키고 머리를 끄덕였다. 무언가 기특하다는 생각에 정수리를 쓰다듬어주니 마르가 방실방실 웃는다. 예쁘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인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아빠의 소망이 가장 중요해요.” “소망?” “네, 소망이요. 아빠는 어떤 장비가 가장 갖고 싶으세요?” “한 번 휘두르면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는 검.” “이이이잉. 그런 거 말고요. 그런 이상한 소망은 안 된다는 말이어요.” 가볍게 농담하니 마르가 앙탈을 부렸다. 으음, 생각해보자. 검은 이미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갑옷, 망토, 장신구는 저번에 마련했다. 부츠도 얼마 전 새로 생겼다. 그럼 남은 건…. “글쎄, 옷 하나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옷이요?” 투구도 괜찮겠지만, 그냥 옷을 선택하기로 했다. 물론 질 좋은 장비는 어느 것 하나 가리지 않고 구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래저래 비교해봤을 때, 10의 효과를 지닌 투구보다는 동일한 10의 효과를 지닌 옷이 더 구하기 어렵다. 끽해야 예전에 형한테서 받은 노블 미스릴 셔츠 정도가 최고 상등품일 것이다. 그것도 없어서 못 구하지. 마르는 아직 감을 잡지 못한 듯, 맹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저번에 아빠가 새로 가져온 갑옷 본 적 있지?” “아, 새까만 갑옷이요?” “응. 그 갑옷 안에 가볍게 받쳐입을 만한 옷이 있으면 좋겠다는 소리야.” “아하.” 이제야 알겠는지 고개를 크게 끄덕인 마르는 곧 망치를 양손으로 잡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흥미로운 기분으로 마르를 응시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이런 지식을 알고 있는지 놀라웠으나 거주민 정보를 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마르가 제대로 된 사용법을 알고 있다는 가정 하, 이제 저 망치를 어떻게 사용하려는 걸까? 이윽고 망치를 든 마르는 느릿한 속도로 나를 툭툭 때리기 시작했다. “미젯 스미스 님, 미젯 스미스 님. 이 분이 바로 우리 아빠예요.” 한순간 웃을 뻔했지만, 웃음은 곧 쑥 들어갔다. 왜냐면, “마르는요. 미젯 스미스 님이 우리 아빠를 위해 좋은 걸 만들어줬으면 좋겠어요.” 우웅. 마르의 말이 끝난 순간, 망치가 한 차례 진동하며 진한 황금빛을 흘렸기 때문이다. 마치 마르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으응, 안에 입는다고 하셨으니까. 갑옷도 있으면 좋겠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마르. 보아하니 갑옷을 찾는 것 같은데, 세 번째 창고에 걸려 있었다. 얼른 갑옷을 가지고 돌아오자 마르는 방긋 웃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갑옷을 통통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거는요 엄청나게 좋은 갑옷인데요, 우리 아빠가 이 갑옷에 받쳐입을 옷이 필요하셔요.” 우웅. 그러자 또 한 번 진동하는 소망의 망치. 아름다운 황금빛을 줄기줄기 뿌려내는 형상을 보니 절로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 공명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알아들었다는 뜻일까, 아니면 무언가를 받아들였다는 뜻일까? “됐다.” 마르는 퍽 만족한 얼굴로 망치질을 멈췄다. 그리고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라 말하더니, 내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창고 안으로 들어간 마르는 자신의 키보다 높이 쌓인 광석 더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잠깐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양손에 잡은 소망의 망치를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단 한 번의 망치질로 소망하는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했던가? 잠시 후. “이얍!” 앙증맞은 기합을 외친 마르가 광석 더미를 향해 망치를 힘차게 두들겨 박았다. 카앙! 그 순간이었다. 우우우웅! 퍽, 틀어박힌 소망의 망치가 거센 진동음을 토하더니, 황금빛을 찬란하게 분사(噴射)하며 사방으로 물결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광석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이윽고, 이어지는 현상은 전혀 앙증맞지 않았다. 오히려 무척이나 아름답고 신비한 광경이었다. * 『치우천왕(蚩尤天王)의 갑옷』 1. 일반 설명. 중간 계 최고 최강의 무사, 지고의 왕, 치우천을 상징하는 갑옷입니다. 갑옷을 입고 무수한 전투에 앞장선 치우천왕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불패 신화를 이룩한 진정한 왕입니다. 치우천왕의 갑옷은 군신(軍神)의 전설을 증명합니다 2. 상세 효능. Ⅰ. ‘타격 저항’ 효과가 각인돼 있습니다. 상대 공격의 관통 효과를 되레 무시해버립니다. 이 갑옷에 한해서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방어 무시’ 효과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매우 강력한 가호가 깃든 무기나 신병이기(神兵異器) 급이 아닌 이상, 보통의 무기로는 생채기도 내기 힘듭니다. Ⅱ. 군중 제어의 일종인 ‘공포’ 효과가 각인돼 있습니다. 무수한 전장을 누볐던 치우천왕의 전설은 적군을 공포에 떨게 만듭니다. Ⅲ. ‘마력 활성’ 효과가 각인돼 있습니다. 갑옷을 착용한 사용자는 마력 흐름을 최대 2.5배까지 활성화할 수 있습니다. Ⅳ. 최고 수준의 경량화 마법이 각인돼 있습니다. 사용자는 갑옷의 무게를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Ⅴ. 크기 자동 조절 마법이 각인돼 있습니다. 갑옷은 사용자의 신체에 맞춰 스스로 최적의 형태를 구성합니다. Ⅵ. ?(봉인된 상태입니다.) 『붉은 달의 망토(Cloak Of Blood Moon)』 1. 일반 설명. 사시사철 붉은 달이 비춘다는 ‘Red Place’의 홍월(紅月)석을 실로 뽑아내 만든 망토입니다. 일종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장비라 물리 방어력도 상당하지만, 마력 반응도도 매우 뛰어납니다. 2. 상세 효능. Ⅰ. ‘흡수’ 마법이 각인돼 있습니다. ‘저격’ 혹은 ‘원거리’에 의한 공격을 인지하고 피해를 흡수합니다. 단 흡수할 수 있는 양은 극히 적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회복됩니다.(어떤 공격을 흡수했느냐에 따라 충전 속도가 달라집니다.) 『라실라스의 축복(Bless Of La Silas)』 1. 일반 설명. 라실라스의 가호가 깃든 브레이슬릿(Bracelet)입니다. 미의 여신에게 헌상했던 만큼 굉장히 아름답게 세공 됐으며, 이에 흡족해한 라실라스는 마력 보호의 축복을 내렸습니다. 2. 상세 효능. Ⅰ. ‘항마력’ 효과가 각인돼 있습니다. B 랭크 이하의 마법에는 ‘완전 방어’ 판정을, A 랭크 이하의 마법에는 ‘감소 방어’ 판정을 이끌어냅니다. 『소망의 셔츠(Shirt Of Wish)』 1. 일반 설명. 여왕의 혈통을 지닌 고귀한 요정이 아버지의 안녕을 바라고 만들어진 걸작입니다. 사용된 광석은 흑열석과 수암석으로, 원래는 서로 상반 속성을 지녔으나 ‘소망의 망치’ 힘으로 일치 효과를 이루어냈습니다. 2. 상세 효능. Ⅰ. ‘흑열석’의 효과로, 사용자는 화 속성에 관해 깊은 내성을 갖습니다. Ⅱ. ‘수암석’의 효과로, 사용자는 물속에서 호흡과 행동에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Ⅲ. ‘소망’의 효과로, 셔츠를 갑옷 안에 받쳐입을 경우, 사용자는 셔츠와 연동해 갑옷과 ‘일체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무거운 갑옷이라도 전혀 거슬리지 않습니다. Ⅳ. ‘소망’의 효과로, 사용자의 신체는 언제 어디서나 쾌적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오벨로 기사 부츠(Obello Knight Boots)』 “후후.” 책상에 가지런히 놓인 다섯 개의 장비를 보니 괜스레 웃음이 나온다. 예전 ‘새로운 보호 장갑들이 필요하다.’ 는 세라프의 말에 공감하기는 했지만, 내심 막연한 기분도 없잖아 있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나, 언제 완벽히 맞출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하나씩 천천히 맞추려고 했는데, 뜻하지 않은 기연으로 보호구를 거의 완전하게 마련했다. 이 정도면 낡디낡은 영광 세트와 이별을 고해도 될 듯싶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자꾸만 실룩이려는 입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나는 소망의 셔츠를 집어 들었다. 마르가 며칠 전 만들어준 소중한 장비. 소망의 셔츠는 육안으로는 식별이 힘들 정도로 굉장히 얇다. 흡사 곤충의 미끈한 날개를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어차피 안으로 입을 거니 외양이 어떤지 상관 있겠느냐 마는, 여하튼 이 셔츠는 정말로 굉장하다. 그동안 갑옷을 마다하고 도복을 착용한 이유는, 내가 ‘민첩’에 특화된 검사이기 때문이다. 말인즉 검을 휘두르는 속도나 느낌 등 ‘감각’을 상당히 중요시 여기는데, 갑옷은 걸리적거리는 느낌이 강해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스스로 느낀 치우천왕 갑옷의 유일한 단점도 이것이었다. 무게는 경량화 마법으로 해결했다손 쳐도, 갑옷 특유의 거슬림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한데 이 소망의 셔츠는 그 문제를 한 방에 해결했다. 세상에, ‘일체감’ 효과라니. 아니. 이걸 떠나서도 셔츠 자체가 대박이다. 사실 셔츠는 보조적인 성향의 장비인데, 수요는 웬만큼 있지만, 공급이 굉장히 부족한 실정이다. 그래서 어지간한 정예 사용자도 그냥 평상복을 입거나 아니면 아주 얇은 가죽 갑옷을 입는 경우가 태반이다. 하지만 이건 상세 효능이 무려 네 개나 달린 셔츠다. 2년 전 파손된 노블 미스릴 셔츠의 효능이 아예 없었음을 생각하면, 내가 지금 들고 있는 셔츠의 가격은 그야말로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다. 물론 팔 생각은 없다. 당연히 입고 다닐 것이다. 무엇보다 마르가 준 것이 아닌가. 내가 기뻐하니 손뼉 치며 좋아하던 모습은 아직도 잊히지 가 않는다. 허나 그와는 별개로, 나는 마르의 가능성을 주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 3의 눈으로 확인한 결과 마르는 절대 무시 못 할 정보를 갖고 있었다. 이걸 써먹지 않는 건…. 아니 써먹는다는 말은 좀 그렇고. 하여튼 이대로 놀리기는 아까우니, 제대로 키워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클랜원들에게 마르의 재능을 여러 방면으로 테스트해보라고 지시해뒀다. 결과는 곧 나올 것이다. “루루, 루루루루.” 구경은 질리도록 했으니, 이제 콧노래를 부르며 장비를 차곡차곡 정리하기 시작. 기실 저번에 ‘검의 군주’를 계승했을 때부터 몸이 계속 근질거리는 것 같다. 얻은 장비를 얼른 사용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무럭무럭 치솟는다. 어디서 사건이 빵 터지거나 아니면 클랜 전쟁이라도 발발하면 좋을 텐데. 물론 춘추 전국 시대를 건너뛰기는 했지만, 그래도 클랜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은 아예 없지는…. 두두두두, 두두두두! 쾅! “클랜 로드!” 그때였다. 속으로 한창 가당찮은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누군가 우렁차게 달려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당최 누가 이리도 버릇없는지 궁금해 눈을 돌린 찰나,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신재룡이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른 채 숨을 헉헉 내뱉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용자 신재룡?” “큰일 났습니다!” 내 음성과 신재룡의 목소리가 겹쳤다. 무슨 일이냐는 의미로 눈을 찌푸리니 신재룡이 황급히 테라스를 가리켰다. “바, 밖에! 밖에 말입니다!” “밖이요?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우, 우선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도시가 완전히 난리 났습니다!” “……?” 무슨 일인지는 당최 모르겠으나, 신재룡의 음성은 황급함을 넘어서 간절함까지 품고 있었다. 나는 곧장 무검을 들고 테라스로 나섰다. 그리고 지체 않고 머리를 젖힌 순간, “저건…?” 문득, 몸이 딱딱히 굳는 감각을 느꼈다. * 오직 시커먼 어둠만이 존재하는 공간. 빛이라고는 한치도 허락하지 않는, 인간의 육안으로는 어떤 것도 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암흑이 드리운 공간. 찰칵. 화르르륵! 그러한 공간에서 불현듯 불 붙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희뿌연 연기가 가볍게 새어 나왔다. “후웁.” 이어서 들려오는 연초를 빨아들이는 소리. “후우.” 그리고 도로 내뱉는 소리. 그러한 소리가 두어 번 반복됐을 즈음. “이상하다, 이상해….” 마침내 검은 형상만 보이는 인영에게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부드러우면서 듣기 좋은 저음은, 음성의 정체가 사내임을 짐작하게 한다. “이거 참 이상하네요…. 왜, 왜 갑자기 이렇게….” 무엇이 그렇게 이상한 걸까? 검은 사내는 연신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의문을 쏟아내기를 멈추지 않았다. 흡사 무언가 바라보기라도 하듯이, 가끔 손을 움직여 허공을 이리 휘젓고, 저리 휘젓는다. “하아, 도저히 모르겠네요.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결국 알아내지 못했는지 한숨을 푹 흘리며 어둠에 몸을 묻는다. 중얼거리는 말은 언뜻 혼잣말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 같기도 했다. 아마 전자일 것이다. 이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공간에는 한 명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없었으니까. “그런가?” 아니, 아니었다. 아까는 분명히 아무도 없었는데, 조금 전을 기점으로 누군가 공간으로 침입했다. 왜냐면 ‘그런가?’ 라는 웅혼한 음성은, 연초를 물고 있던 검은 사내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으니까. “예, 그렇습니다. 이상 현상이 발생했어요. 그것도 정말로 갑자기요.” 그러나 검은 사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의 침입을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한 음성으로 회답하고는, 여전히 앞만 바라보고 있다. “설마, 이번에도 저번과 비슷한 경우인가?” 흡사 끅끅 거리는 듯한 이상한 소리. 침입자의 음성은 쇠를 긁는 것 같이 거칠고 불쾌했다. “아니요, 아닙니다.” 그러나 검은 사내는 조금도 개의치 않아 하며 머리를 느릿하게 흔들었고, “망한 게 아니라, 오히려 좋아졌네요.” “…좋아졌다?” 침입자의 반응은, 반 박자 늦게 돌아왔다. “예. 확실하게 좋아졌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정이 훨씬 앞당겨졌으니까요. 이거 참, 어떻게 된 건지….” 그렇게 말한 검은 사내는 비로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고, 이내 침입자가 있는 방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차분히 걸었다. “아무튼, 이런 적은 저도 처음이네요. …아.” 그때, 느닷없는 탄성과 함께 우뚝 걸음을 정지한 검은 사내는, “혹시 이 이해 못 할 상황에 관해, 저한테 친절한 설명이라도 해주시러 온 겁니까?” 한층 낮아진 음성으로 말했다. 그리고 매우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모든 악마의 왕, 사탄이여.” ============================ 작품 후기 ============================ 음. 실은 소망의 망치 이름을 지을 때 참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Hammer, Mallet 두 단어 중에서 고심했어요. 원래 미젯 스미스란 종족은 타고난 대장장이 종족이며, 아이가 태어남과 동시에 신비한 힘을 품은 나무를 심고, 자라서 성년이 됐을 때 성장한 나무를 잘라 망치를 만들고, 또 그 망치는 미젯 스미스와 함께 성장하면서 일종의 생명을 품었다는 등등. 여하튼 설정에 어울리는 이름은 Mallet 이었습니다. 나무 망치라는 뜻이 있거든요. 그런데 다 설정하고 나니 분량을 너무 많이 차지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삭제 결정을 내렸습니다. 어쨌든 스토리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설정이니까요. 결국에는 미련을 버리려는 일환으로 Hammer로 작성했네요. 하하. 중요한 건 아니고, 그냥 넋두리로 봐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후기를 빌어 루엘령 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_(__)_ 제 뜰에 오시면 루엘령 님이 깔끔하게 정리한 사용자 정보에 관한 엑셀 시트를 보실 수 있습니다. 한 번 보시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되네요. :) 그럼 독자 분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 :D 0771 / 0933 ---------------------------------------------- 최후의 전조는 조금씩 태동하고. “사실 조금 놀랐습니다. 아스타로트도 아니고, 설마 당신이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네요.” 어둠 속, 깔끔한 야회 예복을 입은 악마가 어둠에 몸을 묻는다. 말하는 목소리는 약한 비난 조가 섞여 있었으나, 이내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앉으시죠. 아쉽네요. 미리 기별을 주셨다면 좀 더 좋은 공간에서 맞이할 수 있었을 텐데요.” “함부로 침입한 건 사과하도록 하지. 루시퍼.” 사탄은 순순히 사과했다. 루시퍼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시답잖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다른 누가 그러면 철없는 행동처럼 보일지 몰라도, 말쑥한 인상의 루시퍼가 그러니 까닭 없이 품위 있어 보였다. 사탄은 느릿하게 걸어와 적당한 어둠에 몸을 묻었다. 그리고 흘깃 오른편을 흘겼다가 도로 앞을 응시했다. 방금 사탄이 쳐다본 곳은 루시퍼가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공간이었다. 그것을 의식했는지 루시퍼는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시는 겁니까?” “흠?” “아뇨. 이미 소문은 들으셨을 거라 생각되니까요.” “…플루톤 말인가.” 사탄은 낮은 침음을 흘렸다. 플루톤. 그저 그런 마족도 아니라, 무려 악마 14 군주 중 일 좌를 차지하는 악마. 그런 악마가 얼마 전 소멸했다. 소중한 전력임은 두 말할 것도 없으며, 아무리 대 악마라도 속이 쓰릴 일이다. 한데 플루톤을 예하로 두고 있던 루시퍼는 먼저 말을 꺼냈다. 흡사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사탄은 느긋이 다리를 꼬았다. “그래서, 어떻지?” “이야, 정말 큰 일이라니까요. 플루톤을 잃은 슬픔이 큰지, 프로세르피나도 필사적으로 장악에 힘쓰고 있어요.” 청승맞게 웃어 젖히는 루시퍼. 사탄은 문득 짜증을 느꼈다. 루시퍼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저렇게 실없는 얘기를 꺼내는 건, 여전히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무언의 의지를 전달한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한 사탄은 고민했다. 적당히 화제를 돌릴까, 아니면 툭 까놓고 직구를 던질까? 결국 선택한 건 후자였다. “상황이 썩 좋지가 않아.” 루시퍼는 또 한 번 눈을 크게 치떴다. 아까는 의례적인 표현에 불과했다면, 이번에는 확실한 감정이 드러났다. 비록 살짝 내비친 정도에 불과할지라도. “별일이네요.” 루시퍼는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소식은 간간이 듣고 있습니다. 남 대륙 일은 꽤 잘 돼 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얼마 전 오딘 클랜의 주도로 아르코느 오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라그나로크로 가는 길을 개척했다고….” “그랬지. 손을 좀 썼어.” “한데.” “하지만, 느려.” 사탄은 딱 잘라 말했다. 루시퍼는 머리를 갸웃하고는 부드러운 손길로 턱을 쓰다듬었다. 과연 어떤 의미로 느리다는 말을 한 걸까? 루시퍼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하면 저한테 강요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현재 북 대륙에 손을 대는 대 악마는 저 혼자로 알고 있거든요.” “손을 대는 게 아니라, 붙잡고 있는 건 아닌지.”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플루톤의 소멸을 말미암아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그러자 루시퍼는 조용히 웃기 시작했다. 적막한 공간에 끅끅거리는 웃음이 울리고, 사탄의 시뻘건 동공은 뱀처럼 가늘어졌다. 잠시 후, 간신히 웃음을 그친 루시퍼가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이거 참, 딜레마네요. 선택은 두 가지인데, 어느 걸 선택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니.” “그렇다고 의도적으로 악화할 필요는 없지 않나?” “제 실패를 확신하시는 겁니까?” “너는 성공을 확신하는가?” 되돌아온 물음에 루시퍼는 느긋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 그건 아니에요. 플루톤이 소멸한 마당에 확신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꼴불견이겠죠. 저는 그냥….” “그냥?” “…우리가 처한 상황이 재미있을 뿐입니다. 하하.” “…….” 잠깐의 침묵 후 돌아온 회답. 사탄은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틀렸다. 방금 말한 대로 루시퍼는 현 상황을 재미있어하고 있다. 무언가 의미심장한 뜻이 깃든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즐기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루시퍼의 이명은 ‘타락 천사’. 스스로 타락한 이유를 물어봤을 때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아스타로트의 말마따나 성격은 어찌나 외곬인지, 한 번 결심한 일은 정말 어지간해서는 바꾸지 않는다. 언뜻 보면 예의 바르고 유해 보일지 몰라도, 7명의 대 악마 중 가장 종잡을 수 없는 악마가 바로 루시퍼였다. 생각을 정리한 사탄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루시퍼는 의외라는 듯 뜻밖의 기색을 비쳤다. “어라? 벌써 가시는 겁니까?” “더 이야기해봤자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이런, 심기가 상하신 모양이군요.” “…별로.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지.” 짧게 작별을 고한 사탄은 서서히 몸을 돌렸다. 이윽고 천천히 공간을 벗어나는 사탄의 등을 루시퍼는 하염없는 눈으로 응시했다. 사탄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 머리를 젖힌 순간, 하늘을 가리는 거대한 그림자가 시야를 스쳤다. “저건….” 그림자가 아니었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새와 비슷했으나, 절대로 참새 따위로는 볼 수 없다. 가로 길이는 약 5 미터쯤 돼 보일까? 몸무게는 못해도 수백 킬로그램은 나갈 것 같다. 등에는 박쥐의 날개와 비슷한 모양의 날개가 쭉 뻗어 있고, 푸르게 빛나는 몸통은 만화에서 나오는 드레이크와 흡사하다. 그냥 괴조라는 말이 적당하지 않으려나. 아무튼,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말 어지간히 경계심이 없지 않고서야 괴물은 도시로 접근하지 않는다. 아니, 집단 습격이면 또 모를까? 그러나 허공에 나타난 괴조는 단 한 마리였다. 그렇게 무수한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어놓는 동안, 괴조는 하늘을 부드러이 선회하며 캐슬 가까이 다가온다. 공격하려는 건가? “용족…. 어?” 용족화를 사용하려는 찰나, 나도 모르게 눈을 찌푸리고 말았다. 쨍쨍한 햇살을 가르며 빙그르르 도는 괴조의 등에서, 무언가 익숙한 형상을 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곧바로 안력을 높이니 그 형상이 더욱 자세히 들어왔고, “수현아~!”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형을 보며 크게 기함하고 말았다. * “후유. 이제 좀 살겠네.” “형?” “아, 잠깐 잠깐. 우선 좀 앉자. …아이고, 이제 좀 살겠다.” “…….” 소파에 풀썩 앉는 형을 보니 절로 어이없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죽는 줄 알았네. 어때, 시간에 맞춰서 돌아왔지?” 그동안 고생깨나 하고 다녔는지 형의 몰골은 영 말이 아니었다. 허나 그것보다는 현 상황이 중요하다. 테라스 밖으로 나가 쳐다보자, 날개를 접은 채 정원에 얌전히 앉아 있는 괴조가 보였다. 클랜원들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잔뜩 경계하는 중이고, 정문 밖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인파가 웅성웅성 모여 있다. 그리고 아기 페가수스는 용감무쌍하게 덤비며 괴조의 긴 꼬리를 물어뜯고…. 아니 너는 또 왜 그러고 있는 건데. 무섭지도 않나 봐. 그 순간이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아기 페가수스를 지켜보던 괴조는, 느닷없이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 음, 그대가 그 인간이 말한 동생이라는 사람인가. …어? 화정이 말한 건가? 아니, 이건 화정의 고운 음성이 아닌데? - 고, 곱다니. 내 목소리가 그렇게 좋아? 헤헤…. - 흠. 듣던 것보다는 별로인 것 같은데. 화정이 부끄러워하는 음성에 이어, 이상한 목소리가 또 한 번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나는 그제야 이 거칠거칠한 음성이 저 괴조의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괴조는 아주 정확하게 나를 직시하고 있었으니까. …잠깐만. 강철 산맥에 영물이 있었던가? - 인간.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 그 인간한테서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멋지고, 잘생기고, 아름답고…. 여하튼 최고의 동생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기대 이하였을 뿐이니까. “?” - 아무튼, 앞으로 잘 부탁하도록 하지. “뭐, 뭐라고?” 무언가 굉장히 창피한 말을 들었는데, 머리가 혼미해지는 기분이다. 어질어질한 이마를 붙잡고 몸을 돌리니 빙긋 웃는 형이 보였다. 나는 곧장 득달같이 달려갔다. “그런데 수현아. 너 분위기 꽤 변한 것….” “설명해.” 탕, 탁자를 세게 내려치며 묻자 형이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곧 여유를 되찾고는 숨을 길게 흘렸다. “아…. 그냥 별것은 아니야.” “별것이 아닌데 저런 괴조를 타고 와? 아니, 도대체 어떻게 타고 온 거야? 괴물이잖아?” “수현아, 설명해줄 테니까 너도 앉지 않을래? 정신 사납다.” “윽….” 순순히 자리에 앉자 형은 흘끗 바깥을 쳐다보고는 소파에 묻었던 등을 들었다. “좋아. 우선 저 괴조는 확실히 괴물이지만, 지성을 갖고 있어. 즉 인간과 의사 소통이 가능하다는 소리지. 이건 너도 알고 있지?”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아예 말하는 괴물이 아예 없는 경우도 아니고, 조금 전 겪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대단한 건 없어. 그냥 강철 산맥으로 들어가서 저 괴물을 찾고, 이야기하고, 결과적으로 서로 협력 관계를 맺었을 뿐이야.” 형은 매우 간단하게 요약해서 설명했다. 허나 이 정도로 의문이 풀릴 리가 만무하다. “강철 산맥으로 들어가서 찾았다고? 그럼 일부러 그런 거야?” “응. 저 괴조와는 강철 산맥 공략 때 약간의 인연을 맺었거든. 너도 알고 있을걸? 거인들을 공략할 때…. 말이다.” 거인이라는 말을 꺼낼 때 형의 낯빛이 약간 어두워졌다. 그러고 보니 제 3 지역 공략 당시, 웬 괴조 무리가 거인들의 후면을 공략하던 광경이 떠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 “그럼 강철 산맥에서 꼭 하고 싶다는 일이 이거였어?” “그래, 맞아.” 그렇다는 듯 형은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까 서렸던 어두운 기색이 돌연 서서히 사라진다. 나는 멍하니 형을 응시했다. 그때였다. 문득, ‘…미안하다.’ ‘내 능력이 부족했다.’ ‘북 대륙에서는 무서운 게 없었는데…. 모든 게 생각대로 돌아갔는데….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알 것 같아. 그게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생각이었는지. 나는, 총 사령관의 자격이 없어.’ ‘…거인 같은 괴물들이 많은가 봐?’ ‘종족이라. 그럼 1회 차에서 말이다. 그 종족의 존재가 우리한테 밝혀지고 나서, 다들 어떻게 됐지?’ 제 3 지역 공략이 끝나고, 형이 내게 했던 말들이 우수수 뇌리를 스쳤다. “왜 이런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데?” “왜냐고…? 그야 쿠샨, 아니. 아니다.” 무언가 말하려던 형은 불현듯 머리를 흔들었다. 쿠샨이라. 혹시 형은 그때 거인과 모종의 관계를 맺었던 게 아닐까? 그냥 갑자기 스친 생각이었다. “왜? 너는 별로라고 생각해?” 별로라고?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니, 모르겠다. 그냥 당혹스러울 뿐이다. 세상에 괴물과 협력이라니. 노예라면 몰라도, 이렇게 요상한 관계를 맺은 전례는 1, 2회 차를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니까. “아니 별로라기보다는…. 그냥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했을 뿐이야. 어쨌든 목적은 있을 거 아니야.” 스스로 느껴도, 까닭 없이 버젓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말이었다. “목적? 그거야 당연히 있지.” 그러나 회답은 당연하다는 듯이 돌아왔다. 흘끗 눈을 올리니 형은 잔잔히 가라앉은 눈으로 테라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데?” “그러고 보니…. 흠. 뭐, 어차피 돌아오면 슬슬 말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 “수현아.” 나를 부르는 음성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이윽고 형은 테라스 너머를 보던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우리 말이다.” “응.” “이제 슬슬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준비?” 내 반문에, “그래, 준비.” 형은 힘주어 말하고는, 맑고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집으로 돌아갈 준비.” ============================ 작품 후기 ============================ 오늘은 조용한 후기를…. 0772 / 0933 ---------------------------------------------- 최후의 전조는 조금씩 태동하고. ‘왜 했느냐?’ 고 묻는다면 ‘필요에 의해서.’ 라고 말할 수 있다. ‘굳이 할 필요가 있느냐?’ 고 묻는다면 ‘언젠가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라고 말할 것이다. 김유현은 실제로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김수현의 생각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적어도 ‘강해지는 방법’에 관해서는, 이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에는 매우 명쾌한 해답이 있다. 수련을 하거나 아니면 사용자끼리 힘을 합쳐 캐러밴을 꾸린다. 탐험을 나가 괴물을 사냥하면서 사용자 정보 상승을 꾀한다. 획득한 전리품을 처분하고 더 좋은 무기를 장만한다. 그야말로 명확한 시스템이며 김유현도 딱히 이견을 제시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어느 일이든 예외는 있는 법이다. 그리고 김유현은 한 번쯤은 그 예외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괴물이라고 무조건 사냥만 하는 게 아니라, 공존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현재의 시스템을 최대한 해치지 않는 선에서. 왜냐고?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우와, 인간이다.’ ‘잘 먹겠습니다! 헤헤.’ 물론 쿠샨 토르와의 인연이 아주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부인할 수는 없다. 허나 ‘괴물도 하나의 생명’이라는 별 어쭙잖은 생각에서 발로한 계획은 절대로 아니었다.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동물이고, 김유현도 똑같은 인간이다. 김수현만 제외하면 누구에게 언제든지 냉혹해질 수 있으며, 모든 것을 인간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단, 서로가 상부상조함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강철 산맥으로 도로 들어갔고, 그래서 괴조를 찾아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모르겠네…. 아무튼, 알겠어. 형도 무슨 생각이 있겠지.’ 그래서 안타까웠다. 형과 여인을 살리고 같이 지구로 돌아가겠다. 김수현의 입장은 이해가 간다. 아니, 이해하는 것을 떠나서 사실 누구도 알 수 없는 차원이다. 예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기는 했으나 세세한 부분까지는 듣지 못했다. 김수현은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았고, 김유현은 눈치채고 넘어갔다. 그냥 굉장히 끔찍했으리라 추측할 뿐. 이 잔인하리만치 현실적인 세상에서 정점에 섰다는 건, 헤아릴 수 없는 시련을 이겨냈다는 방증이리라. 당연히 그만큼 상처도 입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일까? 가끔 보면, 김수현이 무언가에 꽉 얽매여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1회 차와 연관돼 있는 것 같지만,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다. 사로잡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맹목적으로 목을 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너무 변했다고 해야 하나. 한 번씩 비슷한 감정을 느낄 때마다, 까닭 없이 안쓰럽다는 기분이 강하게 치밀어 오른다. 물론 김유현이 어떻게 해결해줄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도와줄 수는 있다. 새로운 변화라는 걸 한 번 보여주고 싶었다. 1회 차는 1회 차일 뿐, 현재는 2회 차라는 사실을. 미래는 예정된 게 아닌 개척해나가는 거라는 사실을. 다가오는 미래를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훗.” 김유현은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옆으로는 괴조 우두머리가 터벅터벅 걷고 있다. 꽤 많은 사용자가 모였으나 자동으로 길을 터주는 탓에 걸음에 거리낌은 없다. 이미 괴조 우두머리와 이야기는 끝냈다. 인간은 강철 산맥 내 괴조가 살아갈 터전을 보호해줄 것이고, 괴조는 강철 산맥의 안정화를 돕는다. 이게 끝이 아니다. 나아가 개인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경우도 나올 수 있고, 더 나아가 새로운 이동 수단이 생길 수도 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서로 맹약을 맺고 약속이 지켜진다면, 충분히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아무튼, 이렇게 계획을 시작한 이상 허투루 처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긴 생각을 정리한 김유현은 살그머니 왼손을 폈다. 손바닥에는 따스한 온기가 서린 남빛 구슬이 놓여 있다. 실은 구슬이 아니라 영약이다. 복용 시 마력을 2 포인트 올려주는 영약. 방문을 마치고 가는 길에 김수현이 억지로 쥐여주었다. 마법사라면 누구나 침을 질질 흘릴만한 영약이나 김유현은 원래 받지 않으려고 했다. 동생이 고생해서 얻은 성과인데, 그걸 냉큼 받아먹는 파렴치한이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는 이미 하나 먹었다는 김수현의 설득과 이 영약은 한 사람이 두 개 이상 먹을 수 없다는 말, 그리고 ‘흐, 흥! 시, 싫으면 말던가! 이, 이스탄텔 로우 로드한테 주면 그만이니까!’ 라는 새침한 모습에 밀려, 결국에는 억지로 받아들이고 말았다.(사실 김수현은 전혀 새침하게 말하지 않았다. 그냥 김유현의 기억 형태가 심히 왜곡돼 있을 뿐.) ‘그리고….’ 받은 건 영약뿐만이 아니다. 오른손에는 큼직한 구슬이 또 하나 쥐어져 있었다. 기록용 구슬이었다. 김유현이 방문을 마치고 돌아갈 즈음, 웬 상냥한 인상의 여인이 ‘아주버님~. 잠시만요~.’ 살갑게 굴면서 건네줬다. 꼭 마음에 드실 거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도대체 뭐길래 그러지?’ 햇빛을 반사하는 기록용 구슬이 어서 자신을 보라는 듯 반짝거리는 빛을 흘렸다. 도통 모르겠으나 어쨌든 내용을 확인해보면 될 일. 김유현은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조심스레 마력을 흘려 넣었다. * 내(內) 도시 발전은 상당한 속도로 진척돼, 어느새 구 대륙에서 신 대륙으로 이전 작업을 마치는 건 물론, 이미 새로운 건물이 속속히 세워지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도시에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 이번에 새로 신설된 시작의 여관이 푸른 장막에 휩싸였다. 이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강철 산맥 공략 이후 비로소 첫 예비 사용자들이 들어온 것이다. 그에 따라 아틀란타의 사용자 아카데미도 첫 번째 개방을 눈앞에 두게 됐으며, 북 대륙도 자연스레 시끌시끌하게 변했다. 예비 사용자가 들어온다는 것 자체가 화젯거리이거니와, 한편으로는 전력을 보충할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2,000명을 웃도는 인원이 들어온다니 두 말할 필요도 없었다. 허나 그와는 별개로, 들어오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일에 몰두하는 사용자도 있었다. “더 세게, 더 빠르게! 기껏 강화까지 걸고 들어오면서, 왜 뒤를 생각하는 거지?” “하아아앗!” “이렇게 일직선으로 들어오면 누가 못 피해? 네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풋워크(FootWork)는 어디로 갔니?” “하악, 하악!” 늦은 저녁, 캐슬 정원의 한구석에는 두 여인의 고함으로 시끄러웠다. 우선 수로 왼쪽으로는 오늘 점심쯤만 해도 가지런히 정리돼 있던 수풀이 엉망진창으로 밟혀 있었다. 그렇게 짓밟힌 수풀 가운데에는 얼음 빛이 흐르는 갑옷을 걸친 여인이 오연히 서 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여인은, 온몸에서 황금빛을 흘리며 붉은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로 얼음 여인의 주변을 둥글게 질주하는 중이었다. “아아아아아아!” 쥐어짜는 듯한 기합이 힘차게 터졌다. 그러자 한순간 금빛 기운이 역류하는가 싶더니 이유정의 신형이 총알처럼 폭발적으로 쏘아졌다. 이번에는 일직선이 아니었다. 왼발과 오른발을 불규칙하게 놀리자 샛노란 잔상이 지그재그를 그리며 이어졌다. 그러나 지켜보는 남다은의 눈동자는 차갑기만 했다. 당황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여전히 가만히 서 있는 자세로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자세를 한껏 낮추고 달려드는 이유정을 발견한 즉시 손을 놀렸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손놀림이었다. 삭! 강력한 마력을 품은 손날이 이유정의 진로를 가볍게 훑었다. “푸헉!” 이어지는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거세게 돌격하던 이유정이 남다은을 눈앞에 두고 갑작스럽게 고꾸라진 것이다. 어떻게든 자세를 잡으려는 듯 몸을 크게 비틀어보았지만, 결국에는 관성의 힘을 이기지 못해 넘어지는 자세 그대로 정원을 힘차게 구른다. 곧바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어느새 목덜미에 겨누어진 싸늘한 칼날을 느꼈기 때문이다. 살며시 고개를 돌리니 냉기를 풀풀 날리는 얼음 칼이 언뜻 보였다. “…속도는 꽤 빨라진 것 같은데.” 남다은은 흙이 덕지덕지 묻은 이유정의 얼굴을 칼등으로 툭툭 털어주며 말했다. 그러나 자신의 칭찬에 입을 헤 벌리는 맹한 표정을 보고는 냉정히 말을 잇는다. “하지만 조절 능력은 여전히 수준 이하야. 내가 저번에 했던 말 기억해?” “네? 네, 네! 저는 하승윤이 아니니까….” “그래. 걔도 용병이지만 너와는 확연히 스타일이 달라. 또 어느 정도 완성된 부분도 있고. 아무튼, 그리고?” “그리고…. 그…. 아! 강화에 집착하기보다는, 우선 힘을 배분하는데 신경을 쏟으라고 하셨어요.” “그랬지. 한데 알고 있으면서 그래? 방금도 간신히 방향만 트는 게 고작이잖아?” “…죄송합니다.” 놀라운 일이었다. 항상 자신을 최고라고 여기던 이유정이 순순히 고개를 숙인 것이다. 그것도 김수현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남다은이 긴 숨을 흘리며 검을 거두자 이유정은 얼른 몸을 일으켜 자세를 잡았다. 몇 시간이나 쉴 틈 없이 뛰어다녔는지, 땀에 젖은 옷이 몸에 착 달라붙어 잘록한 굴곡을 드러내고 있다.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뜨거워진 몸을 식혀준다. “아니.” 그때 남다은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느릿하게 자세를 낮추던 이유정은 눈을 의아히 치떴다. “들었어. E 등급으로 상승했다며?” 그러나 이어지는 말을 듣고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남다은의 말대로였다. 이유정은 근래 극한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연달아 임무를 맡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맡은 임무가 끝나는 즉시 돌아와 새 임무를 물색한다. 거기다 일을 가리지도 않으니 심할 때는 하루에 세 개까지 맡아본 적도 있었다. 당장 내일도 새벽 일찍 나가야 하는 처지였다. “일 욕심도 좋지만, 제 몸 챙길 줄도 알아야지. 최소한 잠은 충분히 자는 게 좋을 거야.” “아, 네.” “그러니 오늘은 그만. 이제 돌아가.” “감사합니다!” 음성은 차가웠으나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유정은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곧장 단검을 거두고는 남다은이 턱을 까닥이는 걸 확인하고 몸을 돌렸다. 이내 서서히 멀어지는 이유정을 보며 남다은도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그때였다. “!” 그것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거리를 줄여왔다. 소리는 물론, 언제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아까 이유정의 움직임과는 차원이 다른, 그야말로 완벽한 기습. 그리하여 허무하게 접근을 허용한 남다은은, 허리가 휙 뒤로 젖혀져 강제로 하늘을 보고 말았다. 흡사 탱고를 추는 여인 같은 자세였다. “감히…!” 어느 무뢰한이 이런 짓거리를 저지른 걸까. 남다은은 단단히 혼쭐을 내주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자신의 등을 받친 채 지그시 내려다보는 사내와 눈이 마주친 순간, 한껏 치뜬 두 눈에 놀라움이 깃들며 자동적으로 내리떠진다. 이어서 낯에 어린 북풍한설이 살살 녹아 내리며 차가움이 해제 당한다. 과연 누가, 어떤 마법을 부렸길래 이 여인의 얼굴에 따뜻한 봄바람을 자아내는 걸까? “고생이 많네.” “노, 놀랐잖아요.” 낮은 음성이 들려오니 낯을 붉히며 살며시 시선을 회피했다. 그런 남다은을 김수현은 귀엽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유정이랑은 계속 대련해주는 거야?” “원래는 한두 번 두들겨 패주려고 한 건데…. 예상외로 가르칠 맛이 나네요. 그냥 적당히 두들겨주고 단점을 알려주는 정도지만요.” “그것만 해도 어디야. 무려 검후의 가르침인데. 앞으로도 잘 좀 부탁해.” “아, 알겠으니까 우선 이것 좀 놔주실…. 읍?” 살그머니 빠져 나오려던 남다은은 한순간 입을 닫았다. 김수현이 번개같이 손을 놀려 무언가를 입안에 쏙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남다은은 자신도 모르게 입안에 들어온 무언가를 꿀꺽 삼켰다. 이어서 눈앞에 출력되는 두 개의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크게 놀라며 털썩 주저앉았다. “내, 내구 능력치 상승…?” “응. 항상 내구가 약점이라고 고민했잖아? 그래서….” 말끝을 흐리며 씩 웃는 김수현. 한편, 같은 시각. “…헐.” 한껏 숨을 죽인 채 둘을 지켜보던 이유정이 작은 탄성을 흘렸다. 의도적으로 훔쳐보는 건 아니었다. 그냥 땀도 많이 흘렸고, 잠자기 전 목욕이나 하려 했을 뿐. 그러다 문득 남다은에 생각이 미쳤고, 친하게 지낼 겸 같이 목욕하러 갈 생각은 없느냐고 물어볼 생각으로 돌아왔는데, 뜻밖의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는 않는다. 애초 훔쳐 듣고 싶은 생각도 없다…. 가 아니라, 실은 굉장히 듣고 싶었다. 이유정은 콩닥거리는 심장을 추스르며 청력을 높였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아, 맛이 별로야? 하하.” “아, 아니요…. 마, 맛이 문제가 아니라…. 너, 너무 갑자기….” “그래도 삼켰지?” “네, 네…. 저도 모르게 삼켰는데….” “잘했어.” “아, 아이…. 몰라….” 그 순간 이유정은 어머를 연발하며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 굉장히 흡족해하는 김수현의 음성과, 어쩔 줄 몰라 하는 남다은의 음성. 아까 차갑기 짝이 없던 고함에 비해 맥이 탁 풀려 있는 목소리가 괜스레 야릇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여하튼 먼빛에 보이는 둘의 형상은 충분히 심상치 않다. 힘없이 주저앉은 남다은의 고개가 김수현의 중요한 부분을 앞두고 있다. 그것도 무척 가까이서 말이다. 거기다 김수현은 미미하게 웃는 얼굴로 남다은의 정수리를 부드러이 쓰다듬고 있다. 남다은의 등이 보이는 측면에서 보면, 충분히 오해하고도 남을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세상에…. 야외 펠라티오라니…. 쩐다….’ 입을 뻐끔뻐끔 벌리던 이유정은 이윽고 조용히, 매우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안간힘을 다해 발소리를 죽이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걸릴까 봐 무섭기도 했지만, 둘의 행복한 시간을 더 이상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게 크나큰 오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이유정은 천천히 자리를 떴다. 속으로 ‘B 등급, B 등급.’ 을 되뇌며. ============================ 작품 후기 ============================ (조용….) 0773 / 0933 ---------------------------------------------- 최후의 전조는 조금씩 태동하고. ‘오빠의 남근은 클까? 클 거 같은데.’ ‘하지만 다은이 언니 입술은 작잖아.’ ‘그럼 그 작고 예쁜 입술을 활짝 벌리고, 귀두를 살짝 머금고…. 꺅.’ ‘혀, 혀는 어떻게 굴리는 거지? 기둥을 휘감은 채 쪽쪽 빨아야 하나? 아니면 상하 반복하면서 부드럽게 핥는 건가?’ 온갖 망상의 나래를 펼치는 이유정이 걸어가는 곳은 바로 성의 지하였다. 이 늦은 시간에 지하로 가는 이유는 그곳에 공용 목욕탕이 있기 때문이다. 창고를 상층으로 옮긴 이후 지하는 텅 빈 공간이 됐는데, 공사 도중 지하 전체를 목욕탕으로 개축했다. 김수현은 어차피 숙소마다 샤워 시설이 있는데 왜 목욕탕까지 필요하냐고 탐탁지 않아 했지만, 고연주의 간절한 애원을 이기지 못해 허락해준 것이다. 물론 곱게 보지 않는 이도 없는 건 아니었다. 한 번은 목욕탕 공사 비용을 보고 깜짝 놀란 조승우가 단단히 벼르고(사실은 밉보일 걸 각오하고.) 고연주를 찾아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고연주의 안내로 목욕탕을 둘러보고 나서, 조승우는 ‘목욕탕 폐쇄 제안서’를 조용히 무로 돌렸다. 사치가 들어간 점은 부인할 수 없으나 클랜원 복지 개선 차원에서의 필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사실 사내 입장에서 목욕탕 내에서 오고 가는 여인들의 친교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탕에 들어가는 치료 약초나 피로를 빠르게 풀어주는 증기 목욕 시설 등 나름대로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었다. 그리하여 약간의 우여곡절을 거쳐 생긴 지하 목욕탕은, 특히 여인들 사이서 상당한 인기를 구가하는 중이었다. 이유정 역시 그 중 한 명이었다. “정액은 막 삼켜도 괜찮으려나…. 입안에서 올챙이처럼 움직이는…. 응?” 그때 여전히 망상하며 꺅꺅거리던 이유정이 우뚝 걸음을 정지했다. “어….” 선객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방금 도착했는지, 이제 막 로브를 벗으려던 김한별이 똑같이 행동을 정지한 채 이유정을 쳐다보고 있었다. 허나 서로 바라보는 것도 잠시. 이내 두 여인은 동시에 시선을 돌리며 각자 할 일을 시작했다. 안 그래도 조용하던 지하에 어색한 정적이 감돌기 시작했다. “…….” 휙휙, 땀에 전 옷을 거의 찢을 듯한 기세로 벗는 이유정. “…….” 사락사락, 조용히 그러나 신속히 로브를 벗어 젖히는 김한별. 이윽고 이유정이 다리에 걸린, 흠뻑 얼룩진 속옷을 탈탈 털어내는 걸 마지막으로 두 여인은 완전한 나신을 보였고, 동시에 몸을 돌렸다. 누구 하나 질세라 다투듯이 걸은 건 아니었으나 먼저 입구에 도착한 건 이유정이었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이유정을 보며 김한별은 살그머니 걸음을 멈췄다. 저 더러운 성격상 곱게 들어갈 리는 없고, 분명 자신이 들어가는 때에 맞춰 문을 세게 닫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예전의 이유정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지도 모른다. “뭐해?” “…네?” 그러나 현재의 이유정은 그러지 않았다. “안 들어올 거야?” 오히려 문을 크게 열어둔 채 들어오기를 기다려주고 있다. 한순간 ‘너는 누구냐.’ 라고 뱉을 뻔했으나 김한별은 간신히 참았다. 그리고 물씬 풍겨오는 더운 내음을 맡으며 뿌연 수증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물론 중간중간 이유정을 흘깃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풍덩! “아, 좋다.” 이유정이 뜨끈한 탕으로 다이빙하듯 몸을 던지자 김한별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척 봐도 온몸에 땀이 번들거리는데, 샤워도 하지 않고 들어가는 건 매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허나 괜히 말다툼하기는 싫어, 그냥 최대한 반대편으로 몸을 담그는 걸 선택했다. 잠시 후, 정적이 도로 찾아왔다. 우연한 만남부터 생성된 서먹함은 아직도 이어지는 중이었다. 이유정은 붉은 색조를 띤 약초 섞인 물로 연신 낯을 적시고, 김한별은 지그시 왼쪽을 응시한다. 그렇게 껄끄러운 시간이 이어지는 동안, 희디흰 두 여인의 살결도 발그스름한 빛으로 달아올랐다. 이유정의 봉긋한 젖가슴도 진한 살굿빛으로 물들어, 흡사 한 입 크게 베어먹고 싶은 잘 익은 복숭아를 보는 듯했다. “……?” 그때였다. 별 의미 없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이유정은, 김한별이 계속 한 방향만 쳐다보는 걸 보고 똑같은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찬기가 어른어른 피어오르는 탕에 웬 여인이 있다. 선객이 있었던 것이다. 푸른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여인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였고, 주변으로는 뜻 모를 엄숙한 기운이 흐르는 중이었다. “하연….” 이유정이 반가운 마음에 부르려는 찰나,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김한별이 얼른 제지했다. 깜짝 놀란 이유정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한층 낮아진 음성으로 말을 잇는다. “하연이 언니는 지금 수련 중이에요.” “수련? 무슨 수련?” “물의 결정을 받으셨으니까요.” “물의 결정…? 아, 그거. 근데 왜 수련을 해? 그냥 계승하면 끝 아냐?” “일반적인 경우랑은 약간 다른 것 같아요. 친화력이 필요하다고 말씀을 하시던데…. 사실 저도 잘은 모르겠네요.” “흐응. 그럼 사라 씨도 불의 결정을 받았으려나?” 김한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임무만 쫓아다니느라 상세한 사정까지는 알지 못한 이유정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양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 “…….” 30분 만에 재개된 대화도 30초 만에 끝을 맺었다. 또 한 번의 침묵이 둘 사이로 잠잠히 내려앉는다. 침묵, 정적, 고요, 적막…. 온갖 거북한 기분을 느끼며 이유정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생각해보면 통과의례 때는 김한별과 그렇게 나쁜 사이는 아니었다. 의견 충돌은 있었지만, 단순히 성격 차이 정도로 여겼다. 정작 제대로 틀어진 건, 사용자 아카데미를 수료한 이후였다. 처음에는 김한별을 제 살길만 찾는 배신자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황금 사자가 멸망하고 김한별이 김수현을 따라왔을 때는 속으로 오만 저주를 퍼부었다. 자기 좋을 대로 떠난 주제에 염치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한 번 배신한 이상 두 번 배신하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까. 그렇게 생겨난 갈등의 골은 점차 깊어졌고, 나중에서는 보기만 하면 으르렁거렸으며, 더 지나서는 서로 아예 무시하는 관계로 이어졌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지냈다. 허나 근래에 들어서 이유정은 생각이 변화한 걸 느꼈다. 그것은 사용자로서 성장하며 느끼는 변화였다. 말인즉 ‘사람’이 아닌 ‘사용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약간은 이해심이 생겼다고 해야 하나. 그냥 탁 까놓고 말해서, 이유정은 여전히 김한별이 싫다. 아니,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도 무조건 잘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황금 사자에서 돌아온 이후 김한별은 계속 남아 있지 않은가. “후유….” 무수한 생각과 감정이 얽히고설키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복잡한 생각은 딱 질색이다. 고민하는 것도 싫었다.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할 뿐. 그렇게 생각한 이유정은 힘껏 몸을 일으켰다. 첨벙거리며 탕을 가로지르자 고요히 눈을 감고 있던 김한별이 흠칫 몸을 움츠렸다. 웬일로 조용히 있는가 싶더니 또 무슨 해코지를 하려나 본능적으로 경계심이 일었다. “저기, 있잖아.” 그러나 이유정은 해코지하러 온 게 아니었다. “혹시….” 김한별은 의아히 시선을 올렸다. 눈앞에 바로 선 이유정은 무언가 굉장히 겸연쩍어하고 있었다. 기껏 불렀으면서 눈은 다른 데를 보고, 한 손은 의미 없이 턱을 매만진다. 홍조 띤 속살을 타고 뚝, 뚝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괜스레 크게 들렸다. 안 그래도 이상한 분위기가 갑작스레 미묘히 야릇해지는 기분. “왜, 왜요? 어, 언니?” 결국 이상한 기분을 참지 못한 김한별이 얼른 말을 받았다. 자신도 모르게 언니를 붙였다. 어험, 계면쩍게 헛기침한 이유정은 느릿하기 짝이 없게 입을 열었다. “소, 속 좀 털어놓을 생각 없어?” * 선유운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정확히는 앞쪽으로, 자신의 허리를 넘을까 말까 한 키의 여아를 보며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마르는 생떼를 부리지도 않거니와 되레 해맑게 웃는 얼굴로 얌전히 있을 뿐이다. 허나 그런 차분함이 선유운에게는 괜히 이상하게 느껴졌다. 무언가 아이 같지 않다고 해야 하나. 선유운은 곰곰이 상념에 잠겼다. 우선 클랜 로드가 아끼는 귀한 딸이 왜 여기 있는지는 이해했다. 그냥 언제나처럼 아침을 먹고 수련하려 나왔을 뿐인데, 갑자기 사용자 조승우가 찾아와 마르를 부탁했다. 궁수로서의 재능을 시험해달라는 뜬금없는 말과 함께. 처음에는 ‘저는 새 클래스에 익숙해지는 수련을 해야 하니 싫습니다.’ 라고 정중히 거절하려고 했다. 그러나 클랜 로드의 부탁이라는 말을 듣고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한데 그 이후가 문제였다. 어찌어찌 받아들이기는 했는데 어떻게 재능을 확인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 한참을 고민한 선유운은 조심스레 결론을 내렸다. 궁수는 잘 쏘고 잘 맞추면 된다고. 그러니까 서너 번 적당히 활을 내게 하고 시험을 끝맺으면 되리라. 그렇게 명료하게 생각을 정리한 후, 선유운은 손에 쥔 활 천궁을 불쑥 내밀었다. 그리고 바로 거두어들였다. 생각해보니 저 작달막한 요정 꼬마에게 성인 키만 한 활을 주는 건 어불성설이라 여긴 탓이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곧 돌아온 선유운은 마르에게 비교적 작은 활을 건넸다. 천궁을 받기 전 항상 갖고 다니던 활이었다. 냉큼 받아 들고 신기하다는 듯이 살피는 마르를 보며 선유운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럼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와아아…. 예쁘다….” “아, 조심하셔야 합니다. 외관상 장난감처럼 보일지 모르겠으나, 이 무기는.” “와아, 이게 파사의 활이구나.” 그 순간 마르는 방긋 웃으며 말했고, “?!” 선유운은 크게 기함했다. 그러나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은 마르는 마음에 든다는 듯 작은 팔로 파사의 활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것도 첫 번째 날개네요?” “아, 알고 계셨습니까?” “네! 총 일곱 개로 나뉜 파사의 조각, 그 중 첫 번째 날개인 파사의 활은요. 나쁘고 그릇된 기운을 깨트리는 신비한 힘이 있어요. 우웅, 좋은 활 가지고 계셔요.” “어헉.” 뉘 집 딸내미길래 저렇게나 똑 소리 나는 걸까? 아니 그전에 일곱 개의 조각이라고? 그래도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고자 기본적인 개념 정도는 알려주려고 했는데, 되레 자신도 모르는 사실을 마르가 말하니 선유운은 삽시간에 혼란에 빠졌다. 할 말을 잃은 선유운을 보며 마르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에, 혹시…. 모르셨어요? 그럼 제가 가르쳐 드릴까요?” “아, 아니. 그게!” “아까 말씀 드렸듯이, 파사의 조각은 총 일곱 개에요. 첫 번째부터 파사, 현명, 장사, 진천, 붕괴….” “…….” 무언가 가르친다는 사실이 그렇게나 즐거운 걸까? 마르는 활을 쥔 손을 뒷짐 진 채, 왼손으로는 하나씩 하나씩 손가락을 꼽으며 말을 잇는다. 어느새 선유운의 입은 더는 벌어지지 않을 정도로 턱이 내려가 있었다. 무언가 입장이 뒤바뀌었다는 생각이 가시지를 않았다. 한데 한 번 혼란에 빠진 머리는 쉽사리 회복되지 않는다. 그냥 팔락팔락 상하 운동을 하는 뾰족한 귀와, 그에 맞춰 움직이는 13쌍의 날개가 묘하게 눈이 밟힐 뿐. 한편, 같은 시각. “그럼 오전 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캐슬 4층 집무실에서는 말쑥한 인상의 사내가 바른 자세로 선 채 여러 장의 기록을 넘기고 있었다. 이내 책상에 앉은 청년이 머리를 까닥이자 사내, 아니 조승우는 곧바로 보고를 시작했다. “사용자 아카데미가 개방됐습니다. 곧 예비 사용자들이 나오면 본격적인 교육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교관 현황은요.” “전에 말씀드린 대로 이번에 머셔너리 클랜에 배정된 자리는 교육 교관 둘, 생활 교관 둘입니다.” “교육에는 박현우와 고연주. 생활에는 김동석과 표혜미. …였나요?” “정확하십니다. 추가로 사용자 박현우가 이번에 총 교관을 맡게 됐습니다.” “응? 고연주가 아니라요?” “예. 원래는 그림자 여왕 님께 먼저 제의가 갔었는데, 귀찮다고 하셔서….” “하기야 박현우가 오히려 적임일 수 있겠지요. 황금 사자 클랜의 대 간부까지 했던 사용자니까요.” 담담히 수긍한 김수현은 가볍게 손짓했다. 다음으로 넘어가라는 신호였다. “신 코란 연합의 소식입니다. 밤의 거리를 곧 개장한다고 하네요. 상인 조합 로드가 조만간 찾아 뵙겠다고 합니다.” “벌써요?” “예. 아마 도시 복구 때부터 준비해온 듯싶습니다. 즉 적당히 준비한 후에 허락을 맡은 거지요.” “도시 복구 때부터…. 그걸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김수현의 되물음에 조승우가 씩 웃었다. “그림자 여왕 님께서 귀띔해주셨습니다.” “고연주가 그랬다면 확실하겠네요. …나 참, 서지환도 어지간한 사용자군. 아무튼, 그리고요?” “사용자 아카데미 건이 나온 김에 머셔너리 아카데미 현황도 말씀 드리죠. 현재 한창 공사 중이기는 한데, 아마 5주차 교육 즈음에 완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럼 약 40일…. 괜찮군요. 아, 마르의 재능 테스트는 어떻게 돼 가고 있습니까?” “거의 끝났습니다. 아마 내일쯤 보고를 받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좋네요.” 무심히 말한 김수현은 더 보고할 게 있느냐는 눈빛으로 쳐다봤고, 조승우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이상으로 오전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만 나가보세요.”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사실 아직 하고 싶은 말은 남아 있었으나 조승우는 곧장 방을 나섰다. 조승우는 상대의 기분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용자다. 그리고 오늘, 김수현이 기분이 미묘하게 가라앉아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정확히 말하면 해밀 로드, 김유현이 방문한 이후부터. 둘이서 무슨 말을 나눴는지는 당최 알 수 없지만…. ‘갑자기 분위기가 변하시니까…. 행정 업무 분담이 언제쯤 이뤄지느냐고 징징거리기도 그렇고…. 쩝.’ 결국 오늘도 죽어보자고 으쌰으쌰 소리치며, 조승우는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아마 방으로 돌아가는 즉시 산더미처럼 쌓인 기록이 반겨주리라. 그리고. “…….” 조승우가 나간 4층 집무실에는, 김수현이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책상에 앉아 있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입은 꽉 다물려 있고, 미간에는 미미한 주름이 져 있다. 낯빛은 빈말로도 좋다고 하기 어려웠다. ‘이제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해야지?’ 문득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음성에 김수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깐 참았던 숨을 토해내듯 흘리며 천천히 머릿속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용이 잠든 산맥으로 들어갔던 기억을. ‘나는…. 이 세상에서.’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악마와 마족을, 지워버리고 싶다.’ 가네샤와의 대담을. ============================ 작품 후기 ============================ 저도 몰랐는데, 2차 어워드에서 최고 조회수 상에 선정됐네요. 조아라 전화를 받고 나서 알았습니다. 샤워 도중 콧노래 부르면서 면도하다가 살갗이 베인 게 위로 받는 느낌입니다. 하하. 올 한 해 동안 메모라이즈를 사랑해주신 독자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내년에도 여러분의 여가 시간에 잠깐이나마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소설이 되도록, 동시에 즐거움도 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추가로 약속 드리자면, 절대로 급격한 완결은 내지 않겠습니다. 애초 제가 구상했던 대로, 제대로 된 완결을 향해 느려도 꾸준하게 달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_(__)_ 0774 / 0933 ---------------------------------------------- 최후의 전조는 조금씩 태동하고. 차르르릉! 차르르릉! 캄캄한 어둠 속 사슬 소리가 울리는 동시, 누런빛을 띤 초록색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이내 사슬의 움직임이 정지한 걸 확인한 눈동자는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사슬이 반사광은 잠시나마 눈동자의 주변을 스쳤고, 희미한 밝힘 속 세련된 외모를 자랑하는 미남자를 드러냈다. 진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앞을 쳐다보는 청년은 바로 ‘타락 천사’ 루시퍼였다. “흠….” 한참 동안 물끄러미 응시하던 루시퍼는 의미 모를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팔짱을 끼며 머리를 갸웃했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루시퍼의 앞에는 수십, 아니 수백 개의 사슬이 복잡하게 뻗어 있다. 얽히고설킨 사슬의 중앙에는 웬 여인이 허공에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잿빛에 가깝게 탈색된 긴 흑발과 고요히 감은 눈, 그리고 흰 눈을 연상케 하는 새하얀 나신으로 감겨 있는 여인은, 뭇 사내들의 시선을 빼앗기에 부족함이 없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하지만 정수리에 원뿔꼴의 뿔이 한 쌍 돋아나 있는 걸 보면, 보통 여인이 아닌 악마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굉장히 고위급 악마라고. 허나 어째서일까? 꽁꽁 묶인 사슬 선을 따라 짓뭉개진 풍만한 젖가슴이나 탄탄한 허벅지는 야릇하고 색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나, 수척해진 여인의 얼굴에는 희미한 서글픔이 어려 있었다. 흡사 누군가의 죽음을 원통해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 얼굴로 수백의 사슬에 묶여 있으니 저속하기는커녕 되레 가련해 보일 정도였다. “원래는 천천히 깨우면서 완벽하게 장악해나가려고 했는데…. 어째서 각성의 시기가 앞당겨진 거지?” 루시퍼는 “왜?” 라는 의문을 연발하며 가만히 턱을 어루만졌다. “저번에 보니 사탄은 아닌 것 같고…. 그럼 현재 북 대륙에 관심을 두는 이는 없을 텐데….” 한동안 고심을 거듭했으나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느릿하게 머리를 가로저은 루시퍼는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어쨌든 장악은 물 건너갔으니…. 뭐 폭주도 나쁘지는 않겠지.” 루시퍼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어떻게 되든 좋아. 성공하면 그것대로 좋을 테고, 실패해도 얻을 건 있다.” 그리고 배시시 웃으며 어둠 속으로 몸을 감췄다. 그렇게 루시퍼가 떠난 공간에는 가여운 여인만이 홀로 남게 됐다. 잠시 후. 차르르릉! 차르르릉! 또 한 번 사슬 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악마 여인의 몸이 물결처럼 요동쳤다. * 하늘이 어두웠다. 물론 해가 뜨면 달도 뜨고, 해가 지면 달도 진다. 홀 플레인은 시간의 흐름에 의한 기상 변화가 매우 뚜렷하니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면 하지(夏至)나 동지(冬至)처럼 밤낮의 길이가 변화할 수도 있을 것이고. 허나 그 모든 변화를 참작하고서라도 이상하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기분이 가시지를 않는다. 분명 언제나와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아침 식사를 마치고, 점심을 보낼 때까지만 해도 하늘은 맑고 창창했다. 그런데 늦은 오후가 찾아왔을 즈음 하늘은 갑작스럽게 어두워졌다. 공기가 눅진하거나 먹구름이 몰려 있다면 이해라도 가지. 기온은 변화 없고 구름은 하얀색 일색인데, 하늘이 이렇게 어둡다고? 지금이 밤도 아니고, 확실히 이상하잖아. 물론 내가 괜스레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클랜원들은 별다른 이상 현상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아니. 정확히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하늘이 어둡다는 건 인지했으나 ‘어. 그러네요?’ 라고 말하는 정도? 혹시 몰라 안솔을 불러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건 건방진 ‘?’ 표시뿐이었다. 여하튼 안솔이 모르겠다고 하니 그냥 넘어갈 법도 하나, 그러기에는 계속 무언가가 거슬렸다. 가슴이 턱 막힌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무엇보다 안솔은 만능이 아니다. 안솔의 예언이 발동하지 않았을 경우도 염두에 둬야 하니까. 이렇게 불길의 전조인지 그냥 기우인지 모를 문제로 한층 고민하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클랜원들의 관심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쏠려 있었다. “무조건 궁수입니다. 이건 양보 못 합니다.” “무슨 말씀이시죠? 그리고 뭔 놈의 양보에요?” “아기씨가 활을 내는 걸 보지 못하셨으면 말을 마십시오. 왜 앞날이 창창한 궁수의 길을 막으시려는 겁니까.” “선유운 씨는 마르가 마력을 다루는 걸 보기라도 하신 듯 말씀하시네요?” 진풍경이다. 진정으로 보기 드문 광경이다. 과묵함의 대명사인 선유운과 절제와 자기 관리를 최고로 여기는 정하연이, 마르를 가운데에 두고 한창 싸우고 있다. 물론 머리끄덩이 잡고 툭탁거리는 게 아닌 말다툼에 불과하나, 그래도 이 두 명이 언성을 높이는 장면은 매우 신선하다. “들어보니 물의 결정을 받으셨다는데, 오지랖도 넓으십니다.” “어머. 그러는 선유운 씨는 천궁을 완전히 익히셨나 봐요?” 선유운이 우묵하게 공격하면 정하연은 웃으면서 비꼰다. 보는 입장에서는 재미있으나 점차 선을 넘으려는 낌새가 느껴졌다. 어쨌든 저 두 사람이 이렇게 욕심을 낼 정도라면, 과연 마르의 재능이 얼마나 대단하다는 걸까? 흘깃 눈을 돌리니 입을 헤 벌린 채 둘을 구경하는 마르가 보였다. “그만.” 조용히 입을 여니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언쟁을 멈췄다. 그리고 무언가 잔뜩 갈구하는 눈길로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마 자기 손을 들어달라고 저러는 것 같은데…. 곤란한 상황이지만,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나는 속으로 웃으며 마르를 쳐다봤다. “마르야.” “네?” “마르는 누가 더 좋아?” “우웅….” 마르는 또랑또랑한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양팔을 활짝 벌리며 아장아장 걸어와 내게 찰싹 달라붙었다. “아빠가 제일 좋아요!” 으음, 심장아. 가만히 좀 있으렴. 왜 떨어지려는 폼을 잡는 거니. 하기야 누구를 탓하랴. 중의적인 표현을 한 내 잘못이지. “그럼 저 두 명 중에서는 누가 제일 좋아?” “우웅?” “활을 배우고 싶어 아니면 마법을 배우고 싶어? 괜찮으니까 말해봐.” “아~. 저는 아빠가 하라는 거 할래요.” 낑낑거리며 품으로 파고든 마르는, 곧 내 가슴에 통통한 볼을 비비기 시작했다. 그러자 심장의 진동이 한층 격해졌으나, 선택권도 도로 넘어왔다. 하지만 이대로 순순히 밀려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아빠는 마르가 하고 싶어하는 걸 배우게 해주고 싶은걸?” “……?” “마르의 뜻을 존중해주고 싶다는 소리야.” “아….” 말뜻을 이해했는지 마르는 두 눈을 반짝였다. “와아!” 그리고 환성을 지르며 앙증맞게 솟은 귀를 움찔움찔, 등에 달린 날개는 팔랑팔랑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어지는 “아빠 사랑해요.” 와 “아빠랑 결혼할래.” 라는 말을 듣자, 간신히 버티던 심장은 기어코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말았다. 수전증이 찾아온 손으로 슬슬 쓰다듬어주며 시선을 올리니, 멍하니 서 있는 두 남녀가 눈에 들어온다. 질박하게 솟아오르는 정체 모를 자부심에 허리가 절로 곧게 펴졌다. “이렇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물음이 끝나는 순간, 선유운과 정하연이 동시에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클랜 로드. 아기씨는 정말로 엄청난 궁수가 될 수 있습니다.” “마르는 무조건 마법사로 키워야 해요. 마, 법, 사.” “제가 하늘로 쏜 화살을, 뒤늦게 쏜 화살로 정확하게 맞추셨습니다. 그 정확도, 그 동체 시력. 한 번 보시면 말이 나오지 않으실 겁니다.” “정말. 마르의 마력 재능은 수현도 알고 있잖아요? 어렸을 때부터 간간이 가르쳐왔잖아요? 네?” …결국, 언쟁은 도로 재개되고 말았다. * 한동안 여러 말이 오고 갔으나 결과적으로 마르의 진로 결정은 유보하기로 했다. 선유운과 정하연은 서로가 주장하는 재능의 우열을 확인할 겸 한 발짝 양보하되, 마르의 결정을 최우선으로 하기로 한 것이다. 상황이 약간 복잡해지기는 했으나 기분은 썩 나쁘지 않다. 마르가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데 기분 나쁠 이유가 없으니까. 아마 여왕의 혈통으로 인한 선천적인 재능도 좋겠지만, 규격 외라 표현된 13쌍 날개의 영향도 적잖으리라. 아무튼, 조금 기다리는 것도 괜찮겠지.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르니 서서히 허기짐이 찾아왔다. 그러고 보니 점심을 먹고 시간도 꽤 지난 터라, 나는 지체 않고 1층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내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뜻밖의 인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비비앙과 근원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특히 비비앙은 아예 탁자 하나를 떡 하니 차지한 채 신 나게 먹고 마시는 중이었다. “비비앙?” 느긋이 걸어가며 이름을 부르자 비비앙이 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여어.” 오른팔을 들어 올린다. “야아, 이게 누구 신가. 검검이 아니신가?” 나는 곧바로 걸음 속도를 세 배로 높여 다가갔고, “으아아악! 농담, 농담이야! 미안해! 괴롭히지 막!” 쿵. 비비앙은 화들짝 놀라며 괴성을 지르더니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넘어졌다. 나는 한껏 웅크린 비비앙을 간단히 뛰어넘은 후, 조용히 식사 중인 근원과 눈인사를 건네고 나서, 차분히 의자에 착석했다. “으, 응?” 끙 몸을 일으킨 비비앙은 잠시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으나, 곧 얌전히 앉은 나를 보고 이를 앙다물었다. 나는 뭐 어쩌라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최대한 유들유들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그러자 바드득 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비비앙은 의자에 세게 앉고는 식사를 재개했다. “꽤 오랜만인가?” “어.” “요즘 어떻게 지내?” “잘.” 툭툭 말을 끊어 내뱉는 비비앙. 그러나 양손을 깍지 끼며 지그시 쳐다보자 금세 흠칫하며 몸을 움츠린다. 그러게 왜 자꾸 까불어. “마지막 기회다. 연구는 좀 어때?” “아, 아. 그거? 뭐…. 그럭저럭.” 비비앙은 이번에는 까불지 않았다. 그냥 어물쩍 말을 넘기더니 살짝 고개를 숙이며 아무 말도 않고 음식을 퍼 넣기 시작한다. 한 입, 두 입, 세 입, 네 입…. 보아하니 아직 딱히 이뤄낸 성과는 없는 듯했다. 아주 조금이라도 발전한 게 있다면 비비앙의 성격상 배로 부풀려 자랑했을 테니까. 살짝 실망감이 들었으나 애써 털어냈다. 상위 군단, 특히 1, 2, 3 군단을 소환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알고 있다. 또 짧은 시간 안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그러니 지금은 독촉하기보다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비비앙의 열정을 알고 있는 만큼, 가장 갑갑한 사람도 비비앙일 테니까. “한데, 연구는 중단하고 돌아온 거야?” “으? 아이?(응? 아니?)” “그럼 여기는 왜 왔는데?” “바 머그러 와느네?(밥 먹으러 왔는데?)” 얼마나 퍼 넣은 건지, 비비앙은 양 뺨을 잔뜩 부풀린 채 우물거렸다. “…좀 먹고 말해라.” 핀잔을 주자 비비앙은 빵빵한 볼을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뭐 그럼, 나는, 밥도 먹지 말고, 연구해?” 라는 띄엄띄엄한 투덜거림이 들려왔지만, 무시하며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끅?” 그 순간 비비앙이 돌연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그러나 연초를 하나 꺼내자 표정이 이상하게 이지러졌고, 이어서 크게 사레 들린 듯 캑캑거리기까지. 얘는 또 왜 이러는 걸까? “꿀꺽꿀꺽, 푸하!” 잠시 후, 하녀가 급히 가져다 준 물을 들이켠 비비앙은 탕, 소리가 날 정도로 컵을 세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한 차례 세차게 흔들고는 나를 한껏 노려보기 시작했다. “야, 김수현.” 무언가 굉장히 도전적인 말투. 이게 미쳤나 싶어 쳐다보니 두 눈을 이글이글 불태우는 비비앙을 볼 수 있었다. “너 정말 왜 이렇게 못됐어? 이제 사람 밥 먹을 때까지도 건드리니?” “갑자기 무슨 소리야?” “시치미 떼지 마! 내가 투덜거리니까 협박하려고 계약서 꺼내는 척한 거잖아!” “아닌데? 연초 꺼내려고 한 건데?” 손가락 틈에 끼운 연초를 까닥거리자 비비앙은 입을 질끈 깨물었다. 아마 내가 모든 상황을 계산해 놀렸다고 생각하는 듯싶은데…. 억울하다. 나는 정말로 연초를 꺼내려고 한 거라고. “후…. 뭐, 좋아. 마침 잘됐네.” 이윽고 비비앙은 콧김을 푹 내뿜었다. 여전히 실눈을 뜨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기분이 단단히 상한 듯싶다. 그나저나 마침 잘됐다고? 그렇게 한동안 빤히 째려보던 비비앙은,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흡사 드라마 속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 선전포고를 받은 이후, 나는 비비앙과 함께 4층 집무실로 돌아왔다.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 같기도 했거니와, 식당 내 수군거리는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집무실에 도착하고 앉으라고 할 때까지 비비앙은 화난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러나 소파에 앉아 마주 본 찰나, 비비앙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인정해. 그리고 사과해.” “응?” “인정하고 사과하라고. 아까 계약서 꺼내는 척하면서 연초 꺼낸 거. 나 아까 음식 걸려서 숨 막혀 죽을 뻔한 거 알아?” “정말 아니라니까?” 곧바로 항변하자 비비앙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건방지게 팔짱을 끼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 좋아. 도저히 믿기 어렵지만, 정말 아니라고 치자. 하지만 그래도 사과는 받아야겠는데?” “너 오늘 왜 그래? 뭐 작정했어?” “그래! 작정했다!” “너….” 비비앙은 느닷없이 빽 소리 질렀다. 약간 놀라 멀거니 쳐다보자 씩씩거리면서도 말을 잇는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 왜. 내가 화를 내는 게 이상해? 나는 뭐 화도 못 내니?” “아니, 그게.” “인간적으로 생각 좀 해보자. 너 그동안 나 되게 막 대했지?” “…으, 으음.” 그, 그건…. 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군. “거봐. 아무 말도 못 하잖아. 그 천하의 김수현이 말이야.” 그러자 비비앙은 아주 조금 표정을 누그러트리더니 고개를 소파에 묻었다. 그리고 이때만 기다려왔다는 듯 기관총처럼 종알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이런다고 생각하지 마. 오랫동안 참고 참아온 거니까. 정말 엄청나게 참은 결과 쌓인 거니까.” “…….” “그래. 네 말대로 진짜 아닐 수도 있겠지. 정말로 연초 꺼내려 한걸 수도 있겠지. 한데 생각해봐. 내가 괜히 놀랐을까? 아니야. 네가 만날 그 엄청나게 불공정한 계약서를 내세워 내 자존심을 짓밟았잖아. 얼마나 당했으면 피해 의식이 생겼겠어?” “…….” “내가 많은 걸 바랬어? 저번에도 말했잖아? 그냥 남들 정도만 대접해달라고. 그게 그렇게 어려워? 왜 나만 보면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양심이 있으면 생각해봐!” “…….” “…아, 생각하니까 내가 더 화나네.” “…….” 말을 잇는 동안, 비비앙의 눈은 어느새 살짝 그렁그렁해져 있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가 없다. 나는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 작품 후기 ============================ 을미년 새해가 밝았네요. 새해 시작과 함께 어떻게든 정시에 올리고 싶었는데, 손가락이 따라주지 않으니 큰일입니다. 하하. 그래도 계속 노력하면 언젠가 새 출발(?)할 날이 오겠지요. 이제 2015년입니다. 독자 분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가내 두루 평안 하시기를 바랍니다. :) 로유진 올림. _(__)_ 0775 / 0933 ---------------------------------------------- 최후의 전조는 조금씩 태동하고. 김수현은 입을 약간 벌린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물끄러미 응시하는 멀건 눈동자가 마치 할 말을 잃은 듯 보였다. 한편 비비앙은 겉으로는 씩씩거리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 중이었다. 사실 비비앙은 김수현에게 이실직고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물론 이대로 계속 숨기는 방법도 있겠지만, 언젠가는 들킬 가능성이 높다. 결국에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항시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그래서 여태껏 쌓이고 쌓인 분노와 섭섭함을 한꺼번에 터뜨린 ‘척’ 연기한 것이다. 사실을 고한 후, 차후 전개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하여. 말인즉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이었다. 이윽고 김수현을 흘끗 훔쳐본 비비앙은 이제 슬슬 승부수를 던지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위험(?)을 감수하고 바락바락 악을 쓴 목적은 단순히 징징대려는 게 아니었다. 이번 기회를 살려 어떻게든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생각이었다. “아. 그리고 마침 생각나니까 말하는 건데.” “으음….” “그냥 탁 까놓고 말할게. 네가 나를 구속하던 계약서는 현재 효력을 상실한 상태야.” “…어?” 김수현은 반 박자 늦게 반응했다. 방금 들려온 음성은 예상을 벗어난 말이었기 때문이다. 기실 비비앙이 아무리 난리를 쳐도 별로 심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허나 계약서가 효력을 상실했다면 이야기는 확연히 달라진다. 비비앙을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 사라졌다는 뜻이니까. “그게 무슨….” 김수현은 얼른 품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그리고 정말로 효력이 상실됐다는 걸 확인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멍하니 계약서를 응시하는 김수현을 보며 비비앙은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을 느꼈다.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려 부단히 애썼지만, 결국 천성은 이기지 못했는지 양팔을 팔걸이에 걸치거나 거만히 다리를 꼬는 등 거드름을 피웠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아~. 별것은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은데. 부탁한다.” “부탁이라…. 우헤, 아, 아니지. 흠! 뭐, 어쩔 수 없네. 너~. 예전에 이상한 구멍으로 빨려 들어갔을 때 기억해?” “아틀란타를 앞두고?” “응! 그때 네가 없어지고 정말 난리가 났거든? 근데 아무리 찾아도 없으니까 우선 생사 확인이라도 해야 하잖아. 아. 미리 말하는데 이건 내가 하자고 한 게 아니라, 고연주가….” 비비앙은 신 나게 설명을 시작했다. 자기 딴에는 관리한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이미 목소리부터 한껏 들뜬 상태였다. 그리고 김수현은 조금도 기분 나빠하는 기색 없이 설명을 경청했다. 아마 비비앙의 심모원려(深謀遠慮)가 조금만 더 깊었으면, 현재 김수현에 일어난 미미한 변화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허나 비비앙은 한껏 건방을 떠느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고, 이것은 치명적인 실수로 이어졌다. “음. 그렇다는 말이지.” “그래. 이해했어?” “아, 확실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네. 인정한다.” “그렇지, 똑똑해. 아주 똑똑해. 역시 김수현, 굉장히 합리적이야. 이건 정말 마음에 들어.” 짝, 짝, 짝, 짝. 그동안 못 떤 건방을 오늘 다 떨겠다는 건지, 아니면 숫제 자신이 뭐라도 된 줄 아는 건지. 비비앙은 흡족한 미소를 지은 채 손뼉을 끊어 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대차게 까불고 있음에도 김수현은 전혀 화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실상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상황은 이해하고 있다. 계약서의 효력이 상실하는 경우는 두 가지. 상호 합의하 계약을 해제하거나 아니면 한 명 이상이 죽어야 한다. 그때 김수현은 죽지는 않았으나 중간 차원에서는 사라진 상태였다. 즉 계약 효과가 미치지 못하는 차원으로 넘어가 효력을 잃은 것인데, 머셔너리 클랜원들은 사망 통보로 받아들인 것이다. 물론 그 당시도 안현이나 이유정은 인정 못 한다고 난동을 부렸고, 결국 눈앞에서 계약서가 파기되는 걸 보고서야 입을 닫았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김수현의 머리는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할 말이 없으니 속만 부글부글 끓고 있을 거라 여긴 비비앙은, 몸을 바싹 내밀며 김수현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실컷 몰아붙였으니, 이제 슬슬 풀어줘야겠지?’ 속으로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키면서. “그래, 이해해.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그때 네 의견은 들어가지 않았지. 물론 나도 단독으로 결정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계약서? 네가 정 억울하면 새로 작성하러 가자고. 지금 당장에라도 좋아.” “…….” “단, 이번 계약 내용에는 내 의견도 들어가야겠어. 저번처럼 불공정의 극치를 달리는 계약은 사양이야. 너도 이해하지?” “…….” 마침내 본론을 꺼낸 비비앙은 이제 어쩔 거냐는 눈으로 앞을 쳐다봤다. 아까부터 조용히 침묵만 지키는 게 약간 불안하기는 했으나, 어차피 상황은 끝났다고 생각해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때였다. “글쎄.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 약간의 정적 후, 비로소 김수현이 침묵을 깨트렸다. “음! 그럼…. 어?” 한순간 비비앙은 귀를 의심했다. 최악의 경우 약간 양보할 용의는 있었는데,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휘둥그레진 비비앙의 눈동자로 미소 짓는 김수현이 비쳤다. 그 미소는 선웃음도 비웃음도 아니었다. 오히려 굉장히 어렴풋해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우리가 하루 이틀 지낸 것도 아니잖아. 또 이왕 이렇게 된 거, 계약서는 차라리 없는 게 낫지 않을까 싶네.” “기, 김수현?” “그래도 이렇게 말을 해주니까 고맙다.” “너….” 아주 잠깐, 혹시 허세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치기는 했다. 화륵! 그러나 다음 순간, 비비앙은 크게 기함했다. 김수현이 손에 쥔 계약서를 아예 불태워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청천벽력. 이내 분분히 흩날리는 잿가루를 보며, 비비앙은 뜻 모를 공허함과 아쉬움이 치솟는 걸 느꼈다. ‘이,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돈다. “뭐, 사실 진작에 이렇게 돼야 했는데 말이다. 하하.” “김수현…?” “하기야 나중에 닥쳐서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미리 해두는 게 좋겠지. 그래, 이게 오히려 잘된 거지….” “…어, 어?” 미묘히 말끝을 흐리는 김수현.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비비앙이 뒤늦게 반문했으나 김수현은 이미 테라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중에 닥쳐서…? 미리…?’ 갑작스레 심장이 아릿해졌다. 비비앙은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김수현을 응시했다. 심각한 목소리에 비해 낯은 무언가 사색에 잠긴 듯한 어슴푸레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는데, 무척이나 희미했다. 흡사 금방이라도 사라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오늘은 하늘이 유난히 어둡네….” “김수현!” “응?” “너 갑자기 왜 그래? 나 버리려는 거야?” 결국 참지 못한 비비앙이 자신도 모르는 말을 꺼냈다. 김수현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두어 번 눈을 깜박거리더니 돌연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을 비비앙은 넋 놓고 응시했다. 사람으로 돌아온 이후, 처음 보는 김수현의 따뜻한 미소였다. “뭘 버려. 이제 너랑 나는 그런 관계도 아니잖아.” “그, 그건.” “그리고…. 미안하다.” “?!” 이어지는 말소리에 비비앙은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김수현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네가 그 정도로 상처 입은 줄은 몰랐어. 그리고 들어보니 내가 정말로 잘못한 것 같다. 미안, 정말로 미안하다. 하지만 너를 싫어해서 그런 건 절대로 아니고, 그냥 귀여워서 그런 거야.” “귀, 귀여워서?” 퐁, 비비앙의 낯에 홍조가 피었다. “물론 이게 변명이란 건 알고 있어. 내 의도가 어떻든 네가 힘들었으니까. 너는 내 소중한 클랜원이야. 그러니까 약속할게. 오늘 이후로 계약 관계는 끝이다. 앞으로 계약서로 너를 놀리거나 협박하는 일은 없을 거다. 진심으로 약속하고, 사과하마.” “아, 아니.” 비비앙은 정신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네가 괴롭히는 거 사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어. 아니. 오히려 속으로 은근히 괴롭혀주기를 바라기도 했어. 악의가 없다는 걸 알고, 또 네가 아무한테나 그러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까. 그냥 가끔 너무 심할 때가 있으니, 괴롭힌 후에는 꼭 달래줄 것을 약속하는 조항만 넣을 생각이었어. “아…! 그…!” 목구멍 끝으로 오만 말이 치솟았다. 그러나 그 말들은 턱 걸린 듯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여태껏 해온 말이 있는데, 여기서 사실대로 말해버리면 처지가 어떻게 되겠는가? 게다가 김수현은 진정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하고 있었다. 차라리 어디서 건방지게 구냐고 엉덩이라도 뻥 차주면 더할 나위 없으련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반응을 하니 되레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비비앙. 아니.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그런 비비앙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수현은 씩 웃었다. 힘차게 몸을 일으키며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그리고 어느 때보다 따뜻하게 웃어 보였다. * 쾅! 김수현의 손을 잡는 둥 마는 둥 하고 집무실을 뛰쳐나온 비비앙은, 흡사 술에 취한 사람처럼 크게 비틀거렸다. 결국에는 열 걸음도 채 걷지 못한 채 무너지듯 벽을 짚더니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하앙…. 하앙….” 비비앙은 급히 숨을 들이켰다. ‘귀여워서 그런 거야.’ 야릇하면서 거친 호흡. ‘너는 내 소중한 클랜원이야.’ 잔뜩 붉어진 얼굴. 복도의 찬 기운이 닿자 비비앙은 그제야 몸이 이상할 정도로 뜨겁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심으로 약속하고, 사과하마.’ 머릿속이 멍멍하다. ‘앞으로 잘 부탁해?’ 허벅지는 걷지 못할 정도로 후들거린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는 비비앙도 모른다. 그야말로 알 수 없는 현상. 그저 풀린 눈을 간신히 치뜨며 비비앙은 왼쪽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쿵쾅, 쿵킹, 쿵캉, 쿵콩! 주인이 비비앙이라서 그런지, 심장은 방정맞게도 요동치고 있었다. “하, 하우우우….” “응? 비비앙 언니?” 그때 약간 어린 음성이 공허한 복도를 울렸다. 간신히 눈을 올린 비비앙은 복도를 달려오는 안솔을 볼 수 있었다. 마침 계단을 올라가던 안솔이 쓰러진 비비앙을 발견한 것이다. “언니 왜 그래요? 괜찮아요?” “아, 안솔.” “우선 일어나보세요. 못 걷겠어요?” “모, 모르겠어. 나 이상해….” 안솔은 황급히 신성 주문을 외웠다. 그러나 별 차도가 없는 듯하자 울상을 지었다. 비비앙의 상태는 척 봐도 심각해 보였기 때문이다. “안되겠어요. 어서 오라버니를…!” “그건 안 돼!” 몸을 돌리는 안솔을 보며 비비앙은 빽 소리 질렀고, 안솔은 흠칫 몸을 움츠렸다. 실수를 자각한 비비앙은 울먹이는 얼굴로 고개를 젓고는 푹 수그렸다. “그, 그냥….” “어디가 아픈데요. 말을 해봐요. 네?” 살살 달래는 음성에 비비앙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괜히 몸이 뜨겁고….” “네.” “머리가 어지럽고….” “네.” “심장이 터질 듯이 펑펑 고동치고….” “네. 그리고요?” “자꾸, 자꾸 누가 생각나….” “…네?” 마지막 말을 들은 순간 안솔의 음성이 의아히 높아졌다. 비비앙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김수현 목소리가…. 자꾸만 귓전에서 어른거려…. 어떡해…. 어엉….” * “후우우우.” 비비앙이 도망치듯 방을 나선 이후, 나는 크게 한숨을 흘렸다. 꽤 오랫동안 메소드 연기를 해서 그런지 이마가 어질어질하다. 마인드 트레이닝도 오래 사용하는 건 자제해야 할 듯싶다. 사실 계약이 해제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살짝 당황하기는 했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썩 나쁜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야 비비앙을 믿지 못했다손 쳐도, 이제는 어느 정도 믿을만해 졌으니까. 물론 비비앙의 배신 가능성이 낮다고 하더라도 계약서는 있는 게 좋기는 하다. 허나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윽박질러 새로 맺는 것보다는 ‘신뢰’를 보여주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비비앙은 하승우와는 선천적으로 다른 인간이고, 또 현 상황에 큰 불만도 없다. 여하튼 형이 자주 쓰는 방법을 따라 해봤는데 잘 먹혔는지는 모르겠다. …뭐, 겸사겸사 테라를 앞둔 상황에서 이렇게 미리 정리를 해두는 것도 괜찮지 않겠는가. 어차피 거주민과는 헤어질 수밖에 없는데, 나중 가서 한꺼번에 정리하느니 이렇게 새로 관계를 정립하는 게 좋을 것이다. 내게도, 비비앙에게도…. 똑똑. “응?” 그때 가벼운 노크가 들리더니 누군가 살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비비앙이 돌아온 건가? “실례하겠습니다.” 아니네. “오, 무슨 일이야?” 방으로 척척 걸어 들어오는 여아는 바로 근원이었다. 그나저나 고저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기계음은 여전하군. 어울리기는 하다만. “궁금한 게 있어서 굳이 찾아왔습니다.” “굳이 라는 말은 안 붙여도 좋아. 아무튼, 뭐가 궁금한데?” “하늘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려다가 입을 닫았다. 바로 본론을 꺼내 놀라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뒷말이 더 신경 쓰인다. “흠.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저라는 주체와 인간의 차이가 명확히 구분 지어져서 그렇습니다.” “……?” “근래 하늘이 생각보다 빠르게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한없이 이상하며, 현상의 발생 원인 또한 분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냥 조금 빨리 어두워졌다고만 생각할 뿐,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얘는 말을 조금 어렵게 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다. 하기야 육체는 인간이라도 정신은 근원이니 어쩔 수 없나. “그러니까 하늘이 평소 시간보다 빠르게 어두워지고 있다. 너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지?” “그렇습니다.” “그럼 이 현상이 자연스러운 게 아닌, 이상 징후라고 확신하는 거고?” “…….” 그 순간 대화 이후 처음으로 근원이 멈칫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그건 잠시에 불과했다. 근원은 곧, “그렇습니다.” 마치 판사가 선고를 내리는 것처럼,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 작품 후기 ============================ 안솔 : 언니, 알 것 같아요. 비비앙 : 응? 안솔 : 저도 그런 적이 있거든요. 비비앙 : 정말로? 안솔 : 네. 매일 괴로워하다가, 좋은 해소법을 찾아냈죠. 비비앙 : 어, 어떻게? 안솔 : 간단해요. 촙촙촙을…. 비비앙 : 촙촙촙…? 안솔 : 아니, 여기서 할 말은 아니네요. 비비앙 : 으, 응? 안솔 : 자, 저를 따라오세요. 우리, 여자 대 여자로 이야기해봐요. 비비앙 : (무언가 불안한데….) 0776 / 0933 ---------------------------------------------- 최후의 전조는 조금씩 태동하고. 나는 말을 마친 근원을 천천히 관찰했다. 확실히 특이한 녀석이다. 눈 씻고 봐도 감정을 찾을 수 없는 얼굴, 마치 의무라는 것처럼 주기적으로 깜박거리는 것 같은 눈. 겉으로 보면 작고 귀여운 초등학생에 지나지 않는데, 딱딱한 인형 같은 언행은 수백 년을 산 현자와도 같다.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고요히 바라본다. 그 눈에도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는다. 한소영이 초감각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생성된 무표정이라면, 근원은 흡사 감정이라는 걸 아예 알지 못하는 듯했다. 아니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의도적으로 학습하지 않았거나. “이상 징후일 가능성은 높은데 원인은 모르겠다는 뜻인가.” 근원은 유심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기온에 이상이 생겼거나 혹은 계절의 영향이거나…. 좌우간 이러한 현상이 원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어지간한 돌발 변수를 포함해서 말이다.” 근원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허나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질문했다. 근원의 회답에 따라, 그동안 기연가미연가(其然-未然-)하던 고민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비록 확신까지는 얻지 못하더라도. 이윽고 근원이 입을 열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기온은 근래 이상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고, 계절의 변화도 아직 이릅니다. 그 외 어떤 것도 균형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늘만이 어두워졌을 뿐입니다.” 근원은 ‘오직’ 이라는 말을 특히 강조했다. “그래, 그렇다는 말이지.” “단, 이 현상을 뒷받침할 수 있는 명확한 근거 자료는.” “아니. 괜찮아. 네 말은 확실하게 알아들었으니까.” “…….” 양손을 깍지 끼며 미소 짓자 근원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휙 몸을 돌려 문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근원의 옆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혹시 일부러 찾아온 건가? 경고 차원에서.” 근원은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거티브. 확신이 없는 이상 경고는 어불성설입니다.” “그럼?” “목적은 처음 방문 시 밝혔습니다. 그냥 이 현상에 관한 타인의 생각이 궁금했을 뿐입니다.” “그러면 말이다.” 잠깐 말을 끊자 근원이 문을 앞두고 우뚝 걸음을 정지했다. 고개 돌려 나를 쳐다보는 눈빛은 거북함과 어울림이 묘하게 공존하는 기운을 품고 있었다. “내가 이 현상의 원인을 밝히려는 목적으로 움직인다면, 너는 동참할 의도가 있나?” 근원은 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허나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왜?” “이상합니다.” “뭐가 이상한데?” “말을 듣고 이해한 순간….” 근원은 말을 흐리며 흘깃 나를 살폈다. “까닭 없이 몸이 고양되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래?” 나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 나가도 된다는 의미로 손짓했다. 근원은 계속 나를 바라보더니 곧 문을 열고 총총히 사라졌다. 확실한 답은 듣지 못했으나 굳이 되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참가 여부는, 방금 말로 충분했으니까. * 하루, 이틀 그리고 사흘이 지나도 현상은 여전했다. 클랜원들은 누구도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으나, 계속 하늘을 관찰한 결과, 하늘이 흐릿해지는 시점이 점차 빨라지는 듯했다.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은 중천에 떠오른 해도 약간 빛을 잃은 것 같아 보이기도 하다.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아주 천천히. 어쩌면…. 이러다 언젠가는 아침에도 어두운 해와 하늘을 맞이하는 게 아닐까. - 그렇게 걱정되면 한 번 나가보지 그래? 가만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자 돌연 화정의 음성이 머릿속을 울렸다. - 새 장비도 얻었고, 겸사겸사 시험도 해볼 겸 말이지. ‘그것도 나쁘지 않지.’ - 그래. 너 요즘 계속 고민하고 있잖니. 네가 그렇게 불안하면 나가야지 어쩌겠어. 그리고 예전에 이렇게 말도 한 적 있잖아? 작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를 소홀히 한 군인은 용서할 수 없다고. 이대로 하릴없이 기다리고만 있다가, 느닷없이 무슨 일 터지면 어쩌려고 그래? ‘음.’ - 한데 정말 봐도 봐도 좋은 말이네. 네가 했을 리는 없고, 누가 한 말이니? ‘있어. 실은 나도 몰라.’ 화정의 말은 옳다. 약 15년 전인가. 예전에 군대 선임이 그런 적이 있다.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 안 하면 된다고. 이걸 반대로 말하면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해야 할 때였다. 그러나 아직 행동하기에는 이르다. 행동을 할 때는 명확한 목적이 있어야 하며, 그 목적을 이루려면은 ‘어떻게?’ 라는 의문을 충족해야 한다. 이 두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는 행동은 의미 없는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근원의 말을 듣고 명확한 목적은 생겼지만, 아직 ‘어떻게?’ 라는 의문은 채우지 못했다. 막말로 이 현상의 발생 원인이 어디 있는지 알고 찾아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무작정 감으로 맞출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갑작스럽게 이런 상황을 맞이했다면 아마 한참을 헤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단서는 있다. 확실하다기보다는 짚이는 정도에 불과했으나, 왜 이상 현상이 발생했는지 추측할만한 거리가 딱 하나 있었다. ‘괴물 소환 상자 4.’ 그때 개봉한 상자 중 나는 두 개의 상자를 닫을 것을 지시했다. 하나는 타나토스의 꽃, 또 하나는 고대 악신. 그리고 고대 악신이 소환될 때 하늘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때는 형도 이상하다 느낄 정도로 하늘이 어둑해졌다가, 상자를 닫으니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니 그때의 현상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아니, 혹시…. 이번에도 악마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속단할 수는 없으나 염두에 두지 않을 수도 없다. ‘야만 왕의 무덤’ 원정 때도 악마가 관련돼 있을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으니까. 이미 미래는 변해도 너무나 변했고, 놈들이 어떤 짓을 벌일지는 나도 예측할 수는 없다. ‘화정. 궁금한 게 있는데.’ - 응? ‘접때 말한 타나토스의 꽃이라는 거. 혹시 상자로 소환될 뻔한 이후 깨어날 가능성은 없을까?’ - 이미 깨어났을걸? ‘뭐라고?’ - 뭘 놀라는 거야. 그 정도의 존재는 스스로 원하지 않는 한 언젠가는 깨어나. ‘그럼 봉인은?’ - 아, 뭐가 궁금한지 알겠네. 걱정하지 마. 그리고 신들을 얕보지 말라고. 봉인 과정에는 여러 신이 참여했고, 타나토스 꽃이 깨어나는 경우도 염두에 뒀으니까. 즉 깨어나든 말든 스스로 봉인을 풀고 나올 가능성은 0%라는 말이지. ‘그럼 안전하다는 뜻인가?’ - 외부에서 의도적으로 간섭하지 않는 한 100% 장담할 수 있어. 애초 신들이 그렇게 허투루 일을 처리하는 줄 알아? 그리고 혹시나 말하는데, 타나토스의 꽃을 어떻게 해볼 생각은 꿈도 꾸지 마. 그럴 생각은 없었다. 비교해볼 목적으로 물어봤을 뿐, 진정으로 궁금한 건 따로 있으니까. ‘그럼 고대 악신의 경우는 어때?’ - 응? ‘고대 악신도 너희가 봉인한 건가?’ - 걔? 걔는 아닐걸? 그 아이는…. 아. 화정은 순간적으로 말을 멈칫했다. 이제야 내가 묻고 싶은 의도를 깨달은 듯했다. - 으음, 그럴 가능성도…. 맞아, 그래…. ‘혼잣말하지 말고 설명 좀 부탁해.’ - 음…. 조금 뜬금없을지도 모르지만, 우선 들어봐. 인간은 매우 뛰어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거든? 개중에는 신의 반열에 오르는 인간도 있을 정도지. ‘흠.’ - 물론 그런 인간은 극히 드물어. 수천, 수만 년을 통틀어 손으로 꼽을 정도니까. ‘호, 누가 있지?’ - 가령 군신(軍神), 치우천왕을 예로 들 수 있겠지. ‘치우천왕이라면…. 내가 저번에 구입한 갑옷의…?’ 화정은 그렇다고 말하고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 여하튼 요점은, 역사를 토대로 봤을 때 특출한 인간이 간간이 등장했다는 거야. 그것도 신과 대적할 수 있을 정도로. 특히 세상이 어지럽거나 위험에 처했을 때는 꼭 나타났지. 마치 누가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아직 화정이 말하는 의도는 잘 모르겠다. 허나 우선은 계속 들어보기로 했다. 화정이 이렇게 설명하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 그렇기는 하지만, 사실 냉정히 말해서 인간은 신처럼 완벽한 존재는 아니야. 뛰어난 잠재성을 갖고 있으나 어쨌든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거든. 이건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사항이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 여기서 처음으로 돌아가자. 내가 알기로는, 고대 악신은 신이 아닌 인간에게 봉인됐다고 해. 신을 봉인할 정도면 강력한 결계임은 두 말할 것도 없겠지. 하지만…. ‘하지만?’ - 봉인을 건 게 인간이라는 게 문제야. 완전성은 절대로 장담할 수 없어. 아무리 그 인간이 대단하다고 해도, 무수한 신이 참여한 봉인 과정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잖아. 안 그래? ‘그럼….’ - 그래. 저번에 상자 사건으로 고대 악신이 깨어나고, 그로 인해 봉인이 약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어쩌면 외부서 누군가 개입했을 가능성도 있고. 아무튼, 이러한 결과 이상 현상이 생겼다고는 추측할 수 있어. …이 말이 듣고 싶었던 거지? ‘…….’ 듣고 싶기는 했지만, 실은 아니라고 해주기를 바랐다. 만일 화정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 추측이 맞는다면. 그럼 격 높은 신을 상대해야 한다는 소리였으니까. 비로소 실마리를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동시에 암담한 기분도 내려앉는다. “고대 악신이라….” 스스로 들어도 한숨과도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고대 악신, 고대 악신….” 어디서 들어본 거 같기는 하다. 한데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도 명확하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비밀 도서관을 모조리 뒤져봐야 하나? 그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은데. …잠깐, 잠깐만. “아.” 돌연히 한 기억이 빛살처럼 뇌리를 스쳤다. 그야말로 어떤 전조도 예고도 없는, 갑작스레 스친 생각이었다. 그래, 나는 이와 관련한 비슷한 내용을 최근에 ‘읽은’ 적이 있다. 1회 차가 아니라 2회 차에서. 드르륵. 곧장 서랍을 열자 푸른 빛으로 물든 부채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백야(白夜)의 무희(舞姬)』 (설명 : 무희란 본래 춤을 추는 여인을 뜻하며, 고대 홀 플레인에서는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제물로 인식되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백야의 무희가 출현한 이후 그 인식은 완전히 변하게 됩니다. 이 특출한 무희의 기원은 태양이 어둠에 먹힌 시절, 신녀곡(神女谷)에서 스스로 걸어 나온 한 여인에게서 시작됩니다. 여인은 전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흉(凶)과 화(禍)를 막고, 길(吉)과 복(福)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고아한 춤사위는 죽어버린 토지를 달래고, 단 한 번 선자(扇子)를 떨침으로써 하늘을 가리는 어둠을 물리쳐, 온 인간의 우러름을 받았습니다. 끝에는 강력한 악령에게 패배 당해 저속해지기는 했지만, 결국 스스로 악령에게 안겨 나락으로 타락하는 길을 선택한 비운의 여인입니다. 이처럼 비록 최후는 아름답지 못했다고는 하나, 세상을 구원한 아름다운 기적을 의심할 여지는 없습니다. 백야의 무희는 초자연적인 존재, 혹은 신비적인 힘을 비는 토속 주술에 근간을 두며, 특히 악(惡)을 상대로 절대적인 상극 관계를 가집니다.) 설명은 읽은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아니, 탄식인지도 모르겠다. “하….” 문득 온몸으로 오소소 소름이 끼쳤다. 장담할 수는 없다.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현상이 이상 징후라는 가정하에, 화정의 설명을 조합한다면? ‘이 특출한 무희의 기원은 태양이 어둠에 먹힌 시절….’ ‘하늘을 가리는 어둠을 물리쳐….’ 이 부분은 현재의 현상과 비슷하다. ‘스스로 걸어 나온 한 여인에게서 시작됩니다.’ ‘끝에는 강력한 악령에게 패배 당해 저속해지기는 했지만….’ 여인은 화정이 말한 특출한 인간. 강력한 악령은 고대 악신. ‘결국 스스로 악령에게 안겨 나락으로 타락하는 길을 선택한 비운의 여인입니다.’ ‘이처럼 비록 최후는 아름답지 못했다고는 하나, 세상을 구원한 아름다운 기적을 의심할 여지는 없습니다.’ 스스로 타락하는 길을 선택하고 세상을 구원했다.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고대 악신을 봉인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 호, 이건…. ‘어때?’ - 등잔 밑이 어두웠군. 우리 예측과 완전하게 일치하네. ‘젠장.’ - 갈 거야? ‘…가야지.’ 고민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예측이 사실이라면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내가 상자를 구입했고 안솔이 개봉하도록 지시했으니까. 허나 책임이 없다손 쳐도, 무조건 가야 한다. 생각하기도 싫은 경우지만, 고대 악신이 완전하게 깨어날 경우 어떤 거지 같은 상황이 발생할지 모른다. “후유.” 끝났다. 목적은 한층 명백해졌으며 방법도 찾아냈다. 물론 아직 부족하기는 하나, 최소한 어떻게 움직일지는 정해졌다. 이제는 정말로 행동만이 남았다. ‘화정. 고대 악신이라는 놈이 완전히 깨어날 경우, 내가 이길 수 있나?’ - 현재 상태로라면 100% 질걸? 단 염화 능력을 사용할 시, 5분에 한해서 7할의 확률로 압도할 수 있어. 염화 능력이라. 하기야 그렇겠지. 그 엄청난 게헨나와도 잠시나마 호각을 이루게 해줬으니까. ‘한데 그거 죽음이 확실한 경우가 아니면 절대로 사용하지 말라며?’ - 당연하지. 그건 네 생명력을 담보로 한 능력이야. 일종의 동귀어진(同歸於盡)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러니까 죽을 경우가 아니면 사용하지 말라는 거야. ‘결국에는 죽으라는 소리냐.’ - 어쩔 수 없어. 그냥 봉인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역시나 그런 수밖에 없나. 알아내는 건 여기까지. 나머지는 직접 가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힘차게 몸을 일으켰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얼른 자료를 모으고, 최대한 빠르게 준비를 마친 후 출발해야 한다. 장소는 신녀곡(神女谷). 이윽고 방을 나서기 직전, 나는 흘깃 눈을 돌려 테라스 너머를 응시했다. “…….”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 작품 후기 ============================ 조아라 인터뷰는 아마 일주일 후 조아라 블로그에 업데이트될 듯싶소. 인터뷰라고 딱딱하게 하기 보다는, 의례 후기에 적듯이 거칠고 야성적으로 적었소이다. 특히 어떠한(?) 질문에는 많은 공을 들였으니 많은 기대 부탁 드리외다. 꾸벅. 그럼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 0777 / 0933 ---------------------------------------------- 새로운 출격(出擊). “허, 여기는….” 두어 걸음 아래로 내려가자 형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발바닥에 평평한 지면이 느껴지는 동시에 약 20평 정도 돼 보이는 네모난 공간이 나타났다. 사방에 빛이 들어올 곳이 없는 터라 공간은 어두웠다. 안력을 높이니 시야가 한층 또렷해졌다. 들어가는 입구를 제외하면 벽면에 하나씩 총 세 개의 책장이 비치돼 있었고, 가운데는 낡은 탁자 하나가 놓여 있다. 형은 주변을 정신 없이 두리번거리며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여기가 바로 비밀 도서관?” “그래.” “흐음, 생각보다는 좀 작네. 그냥 오래된 서재를 보는 느낌이야.” “애초 도서관인데. 뭘 상상한 거야.” “하긴. 그나저나 이런 곳이 숨어 있을 줄은 전혀 몰랐거든.” “원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지.” 싱겁게 웃은 후 왼쪽 벽면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이렇게 비밀 도서관을 찾은 이유는 둘. 이번 원정에 필요한 기록을 찾으러 오기도 했지만, 형에게 부탁할 게 하나 있어서였다. 어쨌든 각성 시크릿 클래스는 잘 받아먹었으니 가브리엘과의 약속을 이행해야지 않겠는가. 그래도 우선은 기록부터. 어디 보자. 신녀곡(神女谷)에 관한 기록이 어디 있더라? “그러니까 여기 있는 기록이 아틀란타의 성과가 있는 장소를 가리키는 지표라고?” “그렇지. 그냥 헛소리만 찍찍 적힌 뜬구름 잡는 내용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 작성한 고증된 기록이니까.” 듬성듬성 비치된 기록을 뒤지며 대충 대꾸하자 형은 연신 감탄성을 흘리며 주변을 기웃거렸다. “그래서 이 기록을 공개적으로 개방해달라는 거야? 북 대륙 사용자들한테?” “응. 하지만 전부는 안 돼. 가운데 책장은 남겨놔.” “가운데? 왜?” “그건 형, 나, 이스탄텔 로우 로드 거야. 나눠주기는 하겠지만, 우리가 먹을 건 있어야지.” 그러자 “훗.” 웃은 형은, 돌연 내 어깨를 턱턱 가볍게 두드렸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기특해 하는 느낌이다. 괜스레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기록을 찾는데 더욱 열중하기로 했다. 허나 형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우리 수현이, 많이 성장했구나.” 초연한 음성이 귓가를 간질였다. 으악, 갑자기 오글거려. “그래, 그렇지. 아주 좋은 계획이야. 실은 나도 우리만 깡그리 독식하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나누는 게 여러모로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 그래?” “응. 그런데 먼저 이렇게 얘기를 해주니까 고맙네. 왠지 네가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으, 응.” 그만해, 제발. 팔뚝으로 쭈뼛쭈뼛 소름이 돋잖아. 속으로 ‘그냥 협상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나누는 거야.’ 라고 밝힐까 말까 한창 고민할 즈음, 문득 손으로 얇은 기록 더미가 잡혔다. 절반쯤 꺼내고 해석하니 ‘신녀곡’ 그리고 ‘무희’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드디어 찾았다. “그래도 괜히 미안해지네. 괴조 문제 처리하는 것도 바쁠 텐데….” “아니, 전혀. 그건 잘 돼 가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 그리고 이것도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으니까.” 잔뜩 묻은 먼지를 털 겸 손을 탈탈 흔들자 형은 씩 웃어 보였다. 자신감 넘치는 미소였다. “생각해둔 방법이라도 있는 거야?” “방법이야 많지.” “예를 들어 어떤?” “아니 아니. 공개하기로 결정한 이상, 방법은 문제가 되지 않아. 중요한 건 이 기록만 있으면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 안 그래?” 형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냥 시간이 좀 걸릴 뿐이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야. 적당한 상황만 만들면 되니까. 아무튼, 기대해도 좋아.” 하등 옳은 말이라 저절로 머리가 끄덕여졌다. 애초 귀찮은 일을 부탁하는 입장이니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도 아니고, 또 형의 수완은 알고 있으니까. 뭘 기대해도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기록도 찾았으니 이제 슬슬 돌아가 볼까? “아 참, 수현아.” 그때 형이 나를 불러 세웠다. 형은 나를 쳐다보지 않고 책장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행동이 상당히 어색하다. 으음, 그러니까…. 굉장히 중요한 거래를 앞두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 있잖아. 너희 클랜원 중에 임한나 씨라고 있지 않나?” “아, 한나?” “아아. 맞아. 그 사람 좀 괜찮더구나. 갈 때마다 아주버님, 아주버님 하면서 아주 살갑게 구는 게…. 참 좋은 여인 같아.” “뭐, 상냥하고 사려 깊으니까. 그런데 한나는 왜?” 형의 걸음이 미묘하게 빨라졌다. 오른쪽 벽면 책장을 왕복하더니 탁자 한 귀퉁이를 짚고 어설프게 주변을 돌아본다. 이해가 안 가는데. 왜 난데없이 임한나 칭찬을 하는 거지? 설마 관심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 그렇게 생각하기 어렵다. 왜냐면 내가 있는 이상 형은…. “아, 그게 말이다.” 툭. 데구루루…. 형이 입을 열은 찰나, 문득 소매에서 둥글둥글한 것이 툭 떨어졌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구슬은 은은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저건…. 기록용 구슬이잖아? “어헉.” 형은 크게 기함하더니 허둥지둥 구슬을 도로 주웠다. 평소의 형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이상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그건 뭔데?” “아, 아무것도 아니다.” 형은 활짝 미소 짓고는 황급히 계단을 밟았다. 후다닥 올라가는 모습을 보니 절로 머리가 기울어졌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 어두운 하늘 아래, 남 도시 내 드높이 솟은 머셔너리 캐슬은 부산스러웠다. 아니. 사실은 전혀 분주하지 않았다. 한 도시를 대표하는 클랜인 만큼 여러 사람이 드나들고 있으나, 성 내 거주하는 사용자들은 조용히 침묵하며 눈치만 살피는 중이었다. 흡사 폭풍전야처럼 고요하지만, 곧바로 무언가가 들이닥칠 것만 같은 느낌. 기실 머셔너리 클랜이 이렇게 된 데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김수현이 비밀 도서관 내 기록 개방 건을 위탁한 후, 곧장 캐슬로 돌아와 새로운 원정 계획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물론 원정 자체가 놀랍다고 보기는 어렵다. 허나 갑작스럽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계획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클랜원이 의문을 표시했다. 머셔너리 클랜이 완전히 자리 잡은 이후, 김수현은 어지간하면 나서지 않았다. 실은 나설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하루에도 무수한 청원이 들어온다고는 하나, 머셔너리가 그저 그런 클랜도 아니고, 클랜원 선에서 정리 가능한 일들이 태반이다. 거의 전부라고 봐도 좋을 정도. 여기서 김수현은 방향을 제시해줄 뿐, 세세한 부분까지는 간섭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김수현이 직접적으로 나서는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반드시 가로맡아야 할 상황이 발생할 경우, 나선다. 가령 원정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용이 잠든 산맥’을 가장 좋은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사건, 상황, 회의, 원정 순으로 과정이 이어진다. 한데 이번에는 사건 발생은커녕, 회의 소집도 거치지 않고 원정 계획이 발표된 것이다. 거의 모든 과정이 생략됐다. 그야말로 뜬금없는 원정이었다. 그러나 클랜원들은 하나같이 김수현의 행동을 예의 주시했다. 왜냐면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머셔너리 로드는 절대로 목적 없이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껏 진두 지휘한 원정 중,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게 없었다는 사실을. 궁금하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원정을 나간다는 사실 자체는 큰일도 잘못된 일도 아니니까. 실제로 김수현만이 아니라, B 등급 이상 클랜원은 스스로 캐러밴을 조직해 원정 보고를 올릴 수 있는 권한이 있다.(물론 허가 여부는 김수현이 관장한다.) 아무튼, 원정에 관심이 있든 실적 쌓기에 욕심이 있든 관심사는 개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실력 있는 클랜원들은 이번 원정과 관련해 클랜 로드의 부름이 있기를 원했다. 그건 당일치기 임무를 끝내고 이제 막 식당으로 들어서는 이유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휴, 배고파….” 이유정이 굶주린 배를 쓰다듬으며 주방으로 가려는 찰나, 쾅. 식당 문이 세차게 열리는 동시, 무수한 여인이 우르르 밀려들었다. 몹시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그러나 통일된 복장을 갖춘 무리의 정체는 바로 하녀들이었다. 마침 저녁 시간을 맞이해 옹기종기 식사하던 클랜원들은 의아한 눈빛을 빛냈다. 하녀들이 저렇게 한꺼번에 일사불란이 움직이는 건 드문 현상이었다. 식당을 유심히 둘러보던 하녀 중 한 명은, 곧 총총히 탁자 사이를 가로질렀다. 걸음을 멈춘 곳은 남다은이 앉아 있는 탁자였다. 하녀는 꾸벅 고개를 숙인 후, 품에서 기록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막 숟갈을 든 남다은이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이건 뭔가요?” “클랜 로드 님이 전하라셨습니다.” 흠칫, 찡그려진 이맛살이 순식간에 회복됐다. “…클랜 로드가요?” “네. 그리고 꼭 오늘 밤까지는 답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숟갈을 놓은 남다은은 얼른 전령을 받았다. 기록에 적힌 내용은 간단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읽어 내려가는 눈동자가 살며시 가늘어지고 낯빛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남다은을 살피던 클랜원들은 살금살금 모여들었다. “검후 님. 갑자기 전령이라니요. 무슨 내용입니까?” “원정 관련 내용이에요.” “예? 원정이라면…. 아, 혹시 저번에 발표하신….” “그래요. 그나저나 삼 개월짜리 원정이네요.” 웅성웅성. “사, 삼 개월이라고요?”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식당은 삽시간에 시끄럽게 변했다. 그러는 동안 하녀들은 평소 전담하는, 혹은 전령을 전할 사용자를 찾아 속속히 기록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하기야 집단으로 조직되는 원정인 만큼 남다은 혼자만 포함될 리 없었다. “행선지는…. 동쪽?” 우정민은 약간 의외라는 듯, “예상 인원은 11명, 아니면 12명이라고 적혀 있군요.” 차소림은 차분하게, “어, 나도 나도? 나도 받는 거야? 형님이 저도 부른 거예요?” 진수현은 호들갑을 떨며, “흠, 출발 시기는 사흘 후라. 삼 개월 원정이면 꽤 빠듯하겠는데.” 허준영은 담담히 전령을 받았다. “히익? 크, 큰일 났다! 오라버니한테 물어볼 거 있는데!” 헐레벌떡 식당을 뛰쳐나가는 안솔을 보며 이유정은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남은 이들의 얼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원정이 발표된 이후 몰래 기대감을 키워왔는데, 선택 받지 못했으니 기대가 꺾인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구성원 선발은 원정을 총괄하는 사용자의 고유한 권한이라, 그냥 아쉬움을 삼킬 뿐. ‘후유, 어쩔 수 없지. 아직은 E 등급인걸.’ 속으로 한숨을 흘린 이유정은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탁! 그때였다. “……!” 이유정의 코끝을 날카롭게 스친 무언가가 벽면에 박혀 들었다. 마력을 가득 머금은 얇고 뻣뻣한 기록 한 장이 벽에 박힌 채 파르르 떨고 있다. 크게 놀란 이유정이 고개를 돌리자, “우리 유정이, 운도 좋네? 나 대신 들어가다니.” 어느새 나타났는지 빙긋 웃고 있는 고연주를 볼 수 있었다. “네, 네?” “수현 씨가 잠깐 실수했나 봐. 나는 곧 사용자 아카데미로 들어가잖니. 그래서 정정 사항을 전하러 온 거야. 아무튼, 우선은 읽어보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는 대신, 이유정은 고연주의 손짓에 따라 살그머니 기록을 빼내 읽기 시작했다. “아…!” 잠시 후, 이유정의 눈동자는 황망한 빛으로 물들었다. 한편, 같은 시각. 4층 집무실 안에는 김수현이 책상 의자에 앉은 채 빙긋 미소 짓고 있다. 책상에는 푸른 구슬이 말간 빛을 흘리며 누군가의 얼굴을 비치고 있었다. 통신용 구슬이었다. (아, 그러면 되나요?) 구슬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흡사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듯이 깨끗하고 고왔다. 언뜻 보이는 형상은 하얗고 갸름한 턱에 머리카락이 가지런히 흘러내린,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다. 김수현은 과연 누구랑 통신하고 있는 걸까? (그럼~. 사흘 후라는 말씀이시죠?) “예. 꼭 좀 부탁 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김수현의 말을 마지막으로 구슬의 빛이 꺼졌다. 그렇게 통신을 끝낸 김수현은, 숨을 길게 토해내며 테라스 너머를 하염없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홀 플레인의 지도는 예전에 한 번 작성하다가 말았습니다. 그림판으로 시도했는데, 어느 정도 만들고 보니 동그라미, 세모, 네모의 집합체에 불과하더라고요. 도저히 보여드릴 만한 수준이 되지 않아 삭제했습니다. 현재 새 지도 제작은 예정에 없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사용자 정보는 캐릭터의 주요 무기까지 포함해 새로 준비하는 중입니다. 워낙 인원이 많아 시간이 상당히 소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완성되면 후기를 통해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웬만하면 독자 분들의 눈이 어지럽지 않도록 깔끔하게 작성할 예정입니다. 이 참에 아예 버전을 하나 올려놓고, 차후 갱신될 때마다 계속 업데이트해나가는 것도 괜찮을 듯싶네요. 단 모바일로 보시는 분들의 접근성은 고려하면 어디에 올릴지는 여전히 고민이네요. 우선은 완성에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독자 분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 _(__)_ 0778 / 0933 ---------------------------------------------- 새로운 출격(出擊). 이상 징후가 악령의 짓이라는 걸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한참이나 늦은 상태였다. 누구는 고대 악신의 재림이라 부르고, 또 누구는 누군가가 악령을 소환한 거라고 하나, 그건 전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악령의 해로운 기운이 삽시간에 하늘을 점령, 그 여파가 지상으로 미쳤다는 것이다. 전국(全國)은 악령을 토벌하려고 각각 토벌군을 조직, 이상 징후의 근원으로 파견하였다. 허나. 수십 번에 걸친 토벌 시도는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외려 아예 닿을 수조차 없는, 무익한 피해를 거듭할 뿐이었다. 뒤늦게 실책을 깨달은 왕들은 서로 힘을 모아 역사상 처음으로 전국 연합군을 결성, 인류 최후의 토벌대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확실히, 최후의 토벌대는 이상 징후의 근원까지는 다다랐을지 모른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보인 악령은 무자비하게 토벌대를 습격, 최후의 토벌대는 용감히 저항했으나 끝끝내 패주해 붕괴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인간의 마지막 희망의 끈도 사라졌다. 토지가 메마르고, 세상은 서서히 시들기 시작했다. 찬란하던 태양은 빛을 잃고, 하늘은 어둠에 가렸다. 어둠의 기운을 받은 동물은 인간을 찾아 물어 죽였다. 인간을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등을 돌리는 시절이었다. 그리하여.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사치였는지 비로소 뼈저리게 알아차렸을 때. 한 아름답고 성스러운 여인이 천천히 떠나가는 세상에 등장했다. 신녀곡(神女谷)에서 걸어 나온 여인은 스스로 무희라 불렀다. 여인의 고아한 춤사위는 죽은 지상을 되살렸고, 단 한 번 선자(扇子)를 떨침으로써 하늘을 가리는 어둠을 물리쳤다. 흉(凶)과 화(禍)를 물리쳐 길(吉)과 복(福)을 불러왔다. 여인은 등 돌린 세상을 붙잡아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그 어떤 왕국도 이루지 못했던, 따뜻한 희망의 바람을 불러와 잃어버린 빛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적을 기록은, 오직 홀로 어둠과 맞서 싸운 한 여인을 위한 비망록(備忘錄). 우리는 그 여인을 일컬어 백야(白夜)의 무희(舞姬)라 부른다. 『아틀란타(Atlanta) 남 도시 비밀 도서관 ‘무희 전설’ 中 서장.』 * “수현, 잠시만요.” “음.” 한창 기록을 읽던 와중 나른한 음성이 귓가를 간질였다. 나는 순순히 읽는 걸 멈추고 기록을 옆으로 내려놓았다. 아직 서장까지밖에 읽지 못했으나 나머지는 가면서 읽으면 되니까. 그리고 이 기록은 저번 ‘빅토리아 왕조 실록’처럼 양이 많지도 않고. 집중하면 한두 시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양이다. 이윽고 복부까지 차오른 뜨거운 물에 몸을 묻었다. 머리를 젖히니 욕실을 뿌옇게 채운 더운 수증기가 시야를 가득 채운다. 잠시 후, 가벼운 헛기침이 들리더니 누군가 물살을 가르고 가까이 온다. 나는 눈을 내려 그 누군가를 바라봤다. “…….” 사슴처럼 길고 가는 목선과 아담한 어깨의 쇄골이 무척이나 뇌살(惱殺)적이다. 도 넘은(?) 풍만한 젖가슴 아래로 잘록한 곡선이 매끈한 허리를 그린다. 물에 잠겨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건강한 허벅지나 탱탱한 엉덩이가 아른아른 떠오른다. “이제 거의 끝났어요. 씻기만 하면 되니까.” 이윽고 무언가 주섬주섬 정리하는 소리에 이어 욕조에 차오른 수면(水面)이 살그머니 낮아지기 시작했다. 조심스레 뻗어오는 손이 내 몸을 살며시 어루만진다. 수면이 낮아짐으로 서서히 드러나는 부분을 고연주는 구석구석 깨끗이 닦아주었다. 무척이나 정성스럽고 고운 손길이었다. 결국 더는 참을 수 없어, 나는 마주 손을 뻗어 양 젖무덤을 한 가득 움켰다. “어허.” 엄한 음성이 들렸으나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젖을 만지작거렸다. 열기를 잔뜩 머금어서 그런지 뜨끈한 살결의 촉감이 손에 착착 감겨 들어온다. 양손으로 쥔 채 좌우 진자 운동을 하다가, 둥글게 원을 그리듯 말아 올렸다가…. 그러나 고연주는 눈을 곱게 흘길 뿐, 딱히 행동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이래서 고연주가 좋다니까. 아마 임한나였다면 등짝이 남아나지 않았겠지. 후후. “어휴, 내가 못 살아.” 고연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들더니 내 머리를 받쳐주며 가슴을 가까이했다. 반사적으로 입을 벌리자 젖꼭지 부근이 자연스레 입안으로 도킹한다. 한껏 입을 오므리니 킥킥거리는 야릇한 비음 섞인 웃음이 이어졌다. 우물우물. “정말, 애도 아니고. 젖만 물리면 얌전해지네. 왜 이렇게 가슴을 좋아하는 거예요?” 잘근잘근. “잠깐. 깨물지는 말아줄래요?” 쪽쪽. 하아, 긴 한숨을 흘린 고연주가 옅은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마저 몸을 닦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용자 아카데미는 언제 들어가요?” 젖을 문 채 입을 요리조리 움직여 말하니 고연주가 나를 신기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봤다. “오늘 밤에 입장이 끝난다네요.” “그래요? 그럼 꽤 바쁠 것 같은데.” “큰 상관은 없어요. 총 교관도 아니고. 그리고 이건 수현이 불러서 해주는 거잖아요?” “으음.” 확실히 그렇기는 했다. 허나 굳이 고연주를 부른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이번 ‘신녀곡’ 원정은 갑작스레 잡혔고, 그 결과 사용자 아카데미에 참가한 클랜원은 선발에서 자동으로 제외됐다. 그리고 고연주는 저번 ‘야만 왕의 무덤’도 그렇고 이번에도 참가하지 못했다. 미리 언질이라도 줬으면 좋았으련만, 겉으로 내색을 안 할 뿐 속으로는 서운한 마음이 없잖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부른 것이다. 약간이라도 달래주고 싶었으니까. “자, 다 됐네요. 옷도 입혀줄까요?” “잠깐.” 젖에서 입을 떼며 몸을 일으키려는 고연주를 붙잡고, 왼손으로 옆을 더듬었다. 작고 동글동글한 것이 손에 잡혔다. 바로 입안으로 넣어주자 고연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기는 했지만, 별 반항 없이 받아먹었다. 우두둑, 우두둑. 잘 먹네. “이건 뭔가요? 별로 맛은 없네요.” “우선 삼켜봐요.” “뭔데 그래요. 혹시 발정제?” “왜 꼭.”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는 거냐 핀잔을 주려다가 그냥 입을 닫았다. 배시시 웃는 고연주의 목울대가 가벼운 고저를 그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1초 후, 미소는 삽시간에 사라졌다. 아마 지금쯤 메시지가 떴을 것이다. 고연주의 눈동자에 황망한 감정이 번지는 걸 확인한 후, 나는 스치듯 옆을 지나쳤다. 문을 열고 나서기 직전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절로 가벼운 미소가 지어진다. “그, 근력 2 포인트 상승…?” 그래. 놀랐겠지. 현재 고연주는 상당한 고년 차 사용자인 터라, 영약 또는 장비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능력치 상승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리고 능력치도 높아 장비 덕을 보기도 어렵고. 사실 엄밀히 말해서, 고연주가 근력 영약을 먹는 것은 공찬호가 복용하는 것 이상의 효율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비슷하다고 볼 수도 없다. 그냥 암살자 클래스인 만큼, 어쨌든 나쁜 선택은 아니라는 것 정도로 볼 수 있으려나? 그래도 나는 고연주한테 주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물론 챙겨주고 싶다는 사심이 가득한 건 부인할 수 없지만. 이미 안에서 깨끗이 털고 나와 더는 닦을 필요는 없었다. 아마 모두 1층에 모여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서둘러 장비를 걸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도복을 잡았다가 싱겁게 웃으며 손을 놓았다. 일단 속옷 먼저 입고, 우선은 소망의 셔츠부터 입어볼까? “오호.” 소망의 셔츠를 입으니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욕실에서 바로 나와 추운 기운이 없잖아 있었는데, 셔츠를 입은 순간 곧장 사그라졌다. 딱 적당한 온도가 전신을 흘러 기분 좋게 만들어준다. 확실히 보물은 보물이다. 아직 끝이 아니다. 라실라스의 축복을 팔목에 장착하고, 치우천왕의 갑옷을 걸치고, 오벨로 기사 부츠를 신는다. 붉은 달의 망토를 어깨에 두른 후 검을 챙겼다. 준비를 끝내고 돌아보니 선웃음이 나온다. 두꺼운 칠흑 빛 장갑(裝甲)에 은은한 붉은빛이 흐르는 망토라니. 어울리는지는 모르겠고, 너무 눈에 띄는 건 아닐까 걱정이 앞선다. “수, 수현!” 그때 이제 좀 진정됐는지 고연주가 서둘러 욕실 문을 나왔다. 그러나 나를 보며 또 한 번 멍한 표정을 짓더니 살며시 입을 벌렸다. 말은 기다려도 이어지지 않는다. 고연주임을 고려하면 상당히 보기 드문 얼굴이다. “그럼 다녀올게요. 수고해요.” 망연히 쳐다보는 고연주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서 느긋하게 방문을 나섰다. 물론 기록 그리고 빛과 어둠의 결정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확실히 갑옷 그리고 셔츠의 효능은 굉장했다. 정확히는 ‘경량화’와 ‘일체감’ 효과의 합작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갑옷은 정말 오랜만에 입는 거라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조금도 거슬리지 않는다. 흡사 내 몸의 일부라도 된 듯, 행동은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외려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울리는 철그렁거리는 쇳소리가 어색할 지경이었다. 1층에는 역시나 무수한 클랜원이 모여 있었다. 선발 인원은 물론, 선발되지 못한 이들까지. “모두 모였습니까?” 1층 로비를 가로지르며 차분히 주변을 둘러본다. 남다은, 우정민, 이유정, 진수현, 차소림, 허준영, 하승윤. 나를 포함해 근접 계열 8명. 김한별, 근원, 제갈 해솔, 하승우. 마법사 4명. 안솔. 사제 1명. 백한결. 특수 1명. 이로써 총원 14명. 원래는 11명 ~ 12명 사이로 생각했으나 어젯밤 잇따른 참가 요청을 받아 14명으로 늘어났다. 물론 아직 한 명 참가할 사용자가 있지만, 정문에서 만나기로 했고. 그나저나 왜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거지? 머리를 갸웃하는 와중, 아기 페가수스를 안은 채 멍하니 나를 쳐다보는 마르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오른쪽 무릎을 굽혔다. 오늘 내가 원정을 떠나는걸 알고 인사차 응원하러 온 것이다. 기특하기도 해라. “마르야.” 기껏 불러도 마르의 반응은 고연주와 비슷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계속 쳐다만 보고 있다. 토실한 볼을 콕콕 찔러도 반응은 여전했다. 계속 이대로라면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아, 나는 얼른 품에서 빛과 어둠의 결정을 꺼내 마르의 앞에 놓았다. “이건 선물이야.” “…….” “이걸 마르한테 맡길게. 어떤 식으로든 사용해도 좋아. 알겠지?” “…….” …아니, 선물 줬잖아. 예의상 한 번 쳐다보기라도 해야지. 아니면 혹시 시간이라도 멈춘 건가? “출발 준비는 끝났나요?” 몸을 일으켜 물었으나 묵묵부답인 건 여전했다. 결국에는 무검을 칼집 채 꺼내 세게 땅을 쳤다. 탕! “정신들 안 차립니까?” 『‘군주, 호령하여라.’ 가 발동됩니다.』 응? 문득 출력된 메시지 하나. 갑자기 왜 이런 메시지가 떴는지는 모르겠지만, 효과 하나는 확실했다. 전원이 화들짝 놀라며 물러났으나 어느 정도 정신은 차린 듯 보였으니까. “예, 예! 끄, 끝났어요. 형님. 이제 출발만 하면 됩니다.” “그렇군. 그럼, 사용자 제갈 해솔?” 진수현의 황급한 음성에 머리를 끄덕인 후, 나는 눈을 돌리며 최대한 엄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사실 제갈 해솔을 선발하는 데는 약간의 난항이 있었다. 아직 한창 연구 중이다, 얼마 전에도 다녀왔는데 왜 또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거느냐는 등 굉장히 싫어했기 때문이다. 허나 최대한 빠르기 도착하기 위해서는 제갈 해솔의 수송 능력이 꼭 필요해 거의 반 강제로 끌고 온 상태였다. “네, 네?” “우선 동문에서 용병과 합류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황무지를 벗어나는 즉시 빠르게 이동할 예정이니, 그 즈음에 맞춰서 수송 능력을 준비하세요.” “네, 네…. 준비하겠습니다….” “……?” 허나 예상외로 제갈 해솔은 상당히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였다. 자기가 무슨 셔틀이냐는 둥 입을 삐죽거릴 줄 알았는데, 외려 눈을 살짝 내리깐 채, 열 손가락 끝을 맞춰 꼼지락 꼼지락 손장난을 하고 있다. 뭘 부끄러워하는 건지. 약간은 허무함이 느껴질 정도로 평소의 모습과 거리가 있는 태도였다. “그럼 출발하죠.” 그렇게 마지막으로 인원을 확인한 후, 나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캐슬을 나서기 직전 흘끗 올려다본 하늘은, “…어둡네.” 여전히 어두웠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오늘 몸이 너무 무기력하네요. 비단 집필 활동만이 아니라, 생활 전반적인 측면에서 의욕이 없습니다. 산책이나 체조 등 별 짓거리를 다해도 그때만 잠깐 좋아지고, 곧 되돌아옵니다. 구상은 이미 다 끝내놨는데, 생각대로 글이 안 나오니 정말 환장하겠네요. 예전에도 비슷한 적이 두세 번 있었는데, 이번이 가장 심하게 찾아온 것 같습니다. 슬슬 고비가 오려는 듯합니다. 어떻게든 한 번 견뎌보겠습니다. 여태껏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극복할 수 있겠지요. 감사합니다. 독자 분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 0779 / 0933 ---------------------------------------------- 빙하(氷河)의 설원(雪原). 악령은 확실히 실재(實在)했다. 그 사악한 힘은 하늘을 가리고 지상을 죽일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은 건 아마 인간이 서서히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은데. 그러니까 신녀곡(神女谷)의 여인이 출현한 후 곳곳에서 벌어지는 기적은, 결국에는 악령의 노여움을 산 게 아닐까. 악령이 첫 모습을 보인 건 최후의 토벌대가 이상 징후의 근원에 근접했을 때였다. 즉 현상에 조금이라도 해가 될 일이 생기면 악령은 모습을 드러내는 듯했다. 말인즉 악령은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현상을 방해하는 경우가 생기면 직접 나선다는 것이다. 그 방해를 직접 처단하러. 결과적으로 여인이 노려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아틀란타(Atlanta) 남 도시 비밀 도서관 ‘무희 전설’ 中.』 * 만나기로 한 용병을 찾으러 이리저리 돌아다닐 필요는 없었다. 동(東) 도시 동문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찾을 수 있었으니까. 웬 거구의 사내가 성벽에 기대 쭈그려 앉아 있는데, 눈에 안 띄려야 안 띌 수가 없다. 그러니까…. “저 사용자는 왜 저러고 있는 거지?” “그러게요. 참 궁상맞아 보이네요.” 누군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줬다. 마침 공찬호도 나를 봤는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약 5 미터를 앞두고 걸음을 멈췄다. 나를 응시하는 억실억실한 눈동자가 의아히 치켜 떠졌다. “너…. 김수현이냐?” “이제는 내 얼굴도 잊은 건가?” 조금 어이없는 기분에 반문하자 공찬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나를 아래위로 쭉 훑더니 두어 번 머리를 끄덕끄덕. “흠. 안 본 새 꽤 볼만해졌군.” 오늘따라 다들 왜 이러는 걸까. 그냥 장갑(裝甲)만 바꿨을 뿐인데. “아무튼, 먼저 와 있을 줄은 몰랐어. 오래 기다렸나?” “별로. 한 두 시간 정도.” “그래. 두 시간…. 뭐?” “쩝.” 두, 두 시간이나 기다렸다고? 보아하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혹시 전달이 잘못된 건가? “성하얀 씨한테….” “아니. 전달은 확실하게 받았어. 그냥 내가 일찍 나온 거야.” “왜….” “아아아아, 됐고. 얼른 가기나 하자고. 어디라도 좋아. 이 빌어먹을 갑갑한 도시만 벗어날 수 있다면, 설령 지옥이라도 웃으면서 가겠어.” 공찬호는 입맛을 쩍쩍 다시더니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렇게 심정을 토로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이해가 가는 기분이다. 아마 그동안 상당히 심심하게 지내지 않았을까. “꼭 소풍이라도 가는 어린이를 보는 기분이군.” 그때 등 뒤로 누군가 느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 어찌 보면 매우 정확한 표현이기는 했다. 그러나 내가 들은 말을 공찬호가 못 들었을 리는 없고, 흘깃 눈을 돌리더니 숫제 몸을 돌아본다. 허준영은 팔짱을 낀 채 터벅터벅 걸어가는 공찬호를 오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해봐.” 허준영 바로 앞에서 멈춰선 공찬호는 으르렁거리는 음성을 뱉었다. 허준영도 작은 키는 아니지만, 공찬호와 비교하니 확실히 차이가 난다. 그러나 허준영은 한치도 밀리는 기색 없이, 외려 얄밉게 머리를 갸웃했다. “왜. 내가 못할 말이라도 했나?” “나는 말이다.” 푹, 콧김을 내뿜는 공찬호. “나보다 약한 녀석이, 나한테 함부로 말하는 걸 정말로 싫어하거든.” “호, 보기보다 친절한데.” “뭐야?” “그러니까 나는 해당 사항이 없다는 말이잖아. 고맙다. 앞으로 참고하지.” 그러자 공찬호는 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솥뚜껑만 한 손을 들어 올리더니 허준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앞으로 입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두 번째로 싫어하는 놈이 입만 산 놈이고, 세 번째로 싫어하는 놈은 기생 오라비처럼 생긴 놈이니까. 그런데 너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모두 해당하잖아?” “두 번째, 세 번째는 상관없는데. 적어도 첫 번째만이라도 착각에서 깨어나지 않겠어? 아, 뇌가 근육으로 차 있어서 무리려나?” 이거 참 장관이군. 공찬호와 허준영이라. 하기야 서로 상극의 성격이기는 한데…. “킥!” 그때 누군가 킥 웃음을 터뜨렸다. “푸킥! 기생 오라비…. 뇌 근육…. 푸키키킥!” 공찬호와 허준영은 동시에 머리를 돌렸다. 그러자 소리 죽여 웃던 진수현이 흠칫 놀라더니 얼른 먼 산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휘파람 소리를 들으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만. 공찬호. 너는 내 옆자리다.” “…흥.” 허준영을 한 번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기는 했지만, 공찬호는 순순히 몸을 돌렸다. 허준영에게는 눈으로 경고를 보낸 후, 나는 성문을 바라봤다. “이만 가자고. 갈 길이 급하니까.” “듣던 중 반가운 말이기는 하다만….” 공찬호는 말끝을 흐리며 흘깃 나를 쳐다봤다. “네놈, 이번에는 나를 만족하게 할 수 있겠지?” “…상당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인 것 같은데.” “저번 서 대륙 놈들은 좀 부족한 감이 있었거든.” “아하.”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절로 싱거운 웃음이 나왔다. 나는 아무런 말도 않고 어깨를 들먹였고, 성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깐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곧 나를 뒤따라오는 기척들이 느껴졌다. 우선은, 황무지를 벗어나는 게 급선무였다. * 시이이이이이이잉! 매서운 바람이 살갗을 날카롭게 스쳐 지나가고, 시린 한기가 온몸으로 침투한다. 가볍게 숨을 들이켜니 속이 주르륵 얼어붙는 느낌이다. 누가 그러지 않았는가. 같은 기온이라도 산속은 더 춥게 느껴진다고.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눈, 아니 얼음으로 덮인 이 산은 굉장히 춥다는 것이다. 아까부터 얼굴이 따끔따끔한 게, 흡사 살이 딱딱히 굳어 조각조각 찢어지는 느낌이다. 정말이지 지독한 추위였다. 시이이잉, 시이이잉! 또 한 번 불어오는 얼음 바람. 젠장,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부니 산이 얼지 않고 배겨?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리며 미끌미끌한 산길을 걷는다. 얼마나 올라왔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여덟 시간 전, 초입에서는 먼빛에 까마득하던 산봉우리가 서서히 크게 보이고 있으니 곧 정상에 오르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구름도 한층 가까워진 것 같고. “꺄악!” 그렇게 한참을 올라가는 와중, 돌연 후방에서 격한 비명이 터졌다. 황급히 몸을 돌리니 발라당 나동그라진 김한별과 옆에서 간신히 붙잡아주고 있는 우정민이 보였다. 얼음 덮인 길을 오르다가 발을 헛디딘 듯했다. “죄, 죄송합니다.” 김한별은 사과하며 곧바로 자세를 바로 했다. 나는 길이 미끄러우니 주의하라는, 매우 상투적인 말을 건네고 행군을 재개했다. 방금 본 동료들은 전부 실눈을 뜨고 있었다. 칼날 같은 바람 탓이기도 하겠지만, 하나같이 지친 기색이 완연하다. 특히 마법사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창백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흡사 동사(凍死)하기 직전의 사람처럼. “흐여어엉느이이임….” 문득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 ‘형님’이라고 이해하기까지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바람 소리에 섞여 귀곡성 비슷한 것인 줄 알았으니까. “으, 으얼므아느아 가아이야….” “곧.” “으, 으아까아드어….” “…….”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제, 젠장. 그냥 수송 능력으로 확 넘어버리면 안 되나?” “누, 누, 누, 누구는 그러고 싶지 않을 줄 알아요?” “그, 그럼 하면 되잖아.” “몇, 몇 번을 말해요! 이게 무슨 시도 때도 없이 쓸 수 있는…!” 한참 생각에 잠겨 있는 와중, 허준영과 제갈 해솔이 투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허나 이런 상황에서는 말다툼한다고 뭐라 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사실 길 자체가 엄청나게 나쁜 건 아니다. 오랫동안 올라오기는 했지만, 경사 자체는 급격하지 않고 외려 완만한 편이라 볼 수 있다. 단, 두 가지. 살이 에일 듯한 칼바람과 길이 꽝꽝 얼어 있다는 게 행군을 힘들게 만들고 있다. 이 두 악조건이 현재 큰 문제였다. 즉 행군의 가장 큰 적은 ‘지루함’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고난’이 겹쳐지면 굉장한 짜증이 치솟는다. 게다가 소망의 셔츠를 입고 있는 나조차도 지독한 추위를 느끼는데, 동료들은 체감하는 정도가 더욱 심할 것이다. 결국 남은 방법은 한 가지. 최대한 빠르게 이 산을 통과하는 것밖에는 없다. 산에서 내려가면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을 테니까. 나는 산봉우리를 향해 서둘러 걸음을 놀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해가 평소보다 약간 빠르게 지려는 느낌이 들 무렵. 꽝꽝 얼어붙어 엉킨 수풀을 걷어차 길을 만들고, 울퉁불퉁 굽이치는 산길을 힘들게 올랐을 때, 느닷없이 발바닥으로 덜커덕 걸리는 느낌이 들며 몸이 편해졌다. 그러니까 미약하게 뒤로 쏠리는 느낌이 사라졌다고 해야 하나.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자, 나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왜, 왜 그래요? 도착했나요?” 음성에 격한 떨림이 깃들어서 그런지 이제 누가 누구 목소리인지도 모르겠다. 허나 후방으로 낑낑 앓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와, 나는 멈췄던 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아갔다. 우선 산의 정상에 오른 건 알겠다. 한데 상당히 장소가 이상하다. 신녀곡이 있는 장소로 가려면 분명히 이 산을 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은 절반만 맞았다. 산의 너머에는 확실히 내가 기억하는 장소가 보였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절벽? 아니, 산을 정확히 이등분하면 이런 느낌이려나. 흘깃 아래를 쳐다보니 반듯하게 깎아지른 듯한 일직선이 보인다. 여기서 스키를 타면 무조건 사망이겠지. “여기는….” 어느새 왔는지, 안솔은 살그머니 아래로 고개를 들이밀었다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이마를 짚는 게 산의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현기증이 이는 모양이다. 옆에서 담담히 아래를 내려다보던 하승우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로브를 여몄다. “잘 안 보입니다. 꼭 설원, 아니 북극을 보는 것 같아요.” “거기도 여기보다는 심하지 않을 거예요.” 제갈 해솔은 뾰족한 음성으로 받아치더니 나를 쳐다봤다. “클랜 로드. 도로 내려갈 생각은 없죠?” 문득, 바람이 강해졌다. 펄럭이는 망토를 느끼며 지그시 동쪽을 응시한다. 안력을 높여도 자세히 보이지는 않는다. 날씨도 점차 추워지는 것 같고, 모두 지쳐 있으니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는 게 좋을 듯싶다. “물론. 대기 시간은 얼마나 남았지?” “내일 아침에는 사용할 수 있어요.” “딱 좋군. 마침 시간도 적당하니,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도록 하지.” “아, 오늘 잘 때 죽겠구나.” 제갈 해솔은 앓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가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아래가 얼음인 걸 잊은 모양이다. 울상을 짓는 제갈 해솔의 옆으로 하승윤이 두 손을 싹싹 비비며 다가왔다. “아, 춥다. 춥다. 정말 미치도록 춥다. 클랜 로드! 오늘 행군은 여기서 끝이죠?” 끄덕끄덕 머리를 주억이자 하승윤은 부산을 떨며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곧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야영을 하려면 우선 불을 피워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땔감이 없었다. 꽝꽝 얼어붙은 나무를 장작으로 쓸 수는 없잖은가. 마법사들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주문을 외우려 했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몰아치는 추위에 입이 덜덜 떨려 주문 영창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근원마저도.(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달달 떠는데, 사실 약간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어, 어떻게 하지?”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공찬호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묻는다.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왼쪽에 솟은 적당한 크기의 얼음 나무를 보며 입을 열었다. “공찬호. 저것 좀 잘라 오겠어?” “저거? 얼었잖아.” “녹일 방법이 있거든.” “정말이냐!” 개인적으로 물에 젖은 나무를 어떻게 장작으로 쓸 거냐 물어봐 주기를 바랐건만, 공찬호는 후다닥 달리기 시작했다. “아! 저도 도와…!” 차소림은 창을 잡고 도우려고 했지만, “도와리야!” 쿵! 콰직! 몸통 박치기로 나무를 박살 내는 공찬호를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얼음 나무 조각을 한 아름 들고 온 공찬호는 어서 불을 피우라는 듯 한꺼번에 지면으로 내던졌다. ‘화정. 부탁한다.’ 속으로 말을 건 후, 나는 얼음, 아니 나무 조각에 손을 대며 화정의 힘을 일으켰다. 화르르륵! 가열차게 일어나는 맑은 불꽃. 화정의 힘은 역시 굉장했다. 삽시간에 얼음을 녹이는 것도 모자라 젖은 물기를 태우더니, 이내 나무가 힘차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동료들은 환호하며 계속 장작을 가져왔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캠프 파이어 부럽지 않은 거대한 모닥불이 완성됐다. 음, 이제 좀 따뜻하네. “어휴, 초원을 건널 때가 좋았지.” “그때 심심하다고 징징거린 건 누구였더라?” “난들 이럴 줄 알았겠느냐고. 이게 무슨 꼴이람. 애초 나는 홀 플레인에 이런 지역이 있는지 조차도 몰랐다고!” “나도. 차라리 망자가 돌아다니는 산맥이나 저주받은 숲이 낫지, 여기는 완전 최악이야.” 진수현과 이유정이 한창 말을 주고받는 와중, 솜씨 좋은 차소림은 카오스 미믹에서 커다란 통과 컵을 꺼냈고, 우정민은 천지에 널린 얼음을 잘라 통에 넣었다. 잠시 후, 불 주변으로 올려놓은 통에서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양이 많지는 않아 한 컵씩 나눠 마셔야 했는데, 그냥 맹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흡사 생명수라도 된 것처럼 최대한 아껴 마셨다. 그렇게 조금이나마 속을 덥히니 비로소 약간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여전히 춥기는 했지만. “클랜 로드. 현재 우리가 어디쯤 왔는지 알 수 있나요? 목적지 기준으로.” 남다은의 물음에 나는 반사적으로 지도를 꺼내려다가 그만뒀다. 현재 우리가 있는 장소는 대외적으로 아직 미개척 지역에 불과하다. 한데 내가 정확한 거리를 말하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 대신에 나는 가지고 온 기록을 꺼내 팔락팔락 흔들었다. “목적지까지는 거의 도착한 것 같아. 내일 이 아래로 내려갈 수만 있다면 얼마 걸리지 않을 것 같은데.” “그 기록에 적힌 기후와 현 장소의 기후가 비슷한가 봐요?” “날씨도 그렇고,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지.” “그렇군요.” 남다은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작품 후기 ============================ 응원 감사합니다. 코멘트 모두 잘 읽었습니다. 저도 많은 생각을 했는데, 우선 휴재는 어지간하면 하지 않으려 합니다. 2, 3주에 한 번이나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으면 모를까, 지속적인 휴재는 연중에 이를 가능성이 크거든요. 꾸준히 적는 게 가장 낫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우선 새 파트를 시작한 만큼, 이 파트를 우선적으로 마무리 짓겠습니다. 그리고 이 파트를 끝내고 몸 상태가 계속 나아지지 않는다면, 외전 쪽으로 가닥을 잡을 예정입니다. 제가 적고 싶었지만, 진도상 삭제한 내용이 몇 개 있거든요. 정하연을 윤간하려 했던 구 황금 사자 클랜원에 관한 복수나, 백한결과 차유나의 뒷이야기, 김수현과 고연주, 김수현과 남다은 등등이요. 어째 적고 보니까 다 그런(?) 쪽에 관련돼 있는 것 같네요. 허 참. ㅡㅡ; 여하튼 최우선적으로 현재 에피소드를 마무리 짓는데 중점을 두도록 하겠습니다. 원래는 오늘 나오는 장소에 다다르는 과정을 약 4회에 걸쳐 구상했는데, 그냥 싹 다 삭제하고 바로 도착하게 했습니다. 약간 혼동이 있더라도 양해 부탁 드립니다. _(__)_ 0780 / 0933 ---------------------------------------------- 빙하(氷河)의 설원(雪原). 예상은 빗나갔다. 아니, 절반만 맞았다. 혹은 벗어났다고 해야 하나. 말인즉, 악령은 여인을 노리는 것 외에도 행동을 개시했다. 기적이 일어난 장소를 재 습격해 저주로 물들이고, 권속을 만들어 여인의 접근을 감시했다. 잠깐 되살아날 것 같던 세상은, 멸망을 향해 도로 나아갔다. 악령은 흡사 조롱이라도 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그 결과. 모든 상황이 최악의 결말로 치달리기 시작했다. 허나. 인간들은 그냥 무기력하게 보고만 있을 뿐, 딱히 어떤 행동을 취한 건 아니었다. 그냥 절망하고, 또 절망했다. 외려 예전보다 더욱 활기를 잃은 것 같기도 했다. 차라리 구원을 맛보지 않았다면 몰랐을까. 여인이 일으킨 기적은 확실히 희망을 선사했지만, 도로 찾아온 절망으로 인해 배의 고통을 삼켜야만 했다. 이미 종말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인 인간들은, 멍하니 최후의 날을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었다. 어떻게 보면 저항 의지를 잃은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여인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틀란타 남 도시 비밀 도서관 ‘무희 전설’ 中.』 * 어디선가 이 가는 소리가 귓전을 두드렸다. 간신히 눈을 뜨고 힘겹게 상반신을 일으킨다. 어렵사리 천막을 둘러보니 이를 가는 소리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리저리 널브러진 침낭 속에서 딱딱거리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울리고 있다. 아마 추워서 이가 떨려 부딪치는 소리겠지. 가벼운 침음을 흘리며 침낭에서 기어 나왔다. 몸이 약간 굳은 느낌은 있지만, 소망의 셔츠 덕분인지 크게 개의치 않아도 될 정도였다. 속으로 마르 만세라고 외치며 천막을 나서려는 찰나, 나는 크게 기함하고 말았다. 간밤에 눈이 내렸는지 얼어붙은 땅에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허나 중요한 건, 쌓인 눈 속으로 웬 침낭이 파묻혀 있다는 것이다. 왜 이 침낭 혼자 밖에서 자고 있는지는 둘째치고서 라도, 혹시 얼어 죽은 건 아닐까 걱정이 앞섰다. 눈을 걷어내고 발로 톡톡 걷어차 보았지만, 침낭은 미동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끙끙 앓는 신음이 흘러나올 뿐. 이런, 우선 상태부터 확인하는 게 낫겠다. 침낭을 쭉 빼고 안으로 손을 집어넣자 무언가 고슬고슬하면서 차갑고 딱딱한 것이 잡혔다. 차분히 더듬어보니 설 얼은 머리카락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깨로 추정되는 것을 잡고 조심스레 끌어내자 비로소 깡 좋은 사용자의 정체가 드러났다. “제갈 해솔?” 제갈 해솔은 반쯤 눈을 뜨고는 안쓰러운 신음을 흘렸다. 낯은 시퍼렇게 질렸고 꽃잎 같은 입술은 파르르 떨고 있다. 문득 이 몹시 가련해 보이는 모습이 제갈 해솔의 신비로운 외모와 무척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가만히 응시했다. 그나저나 죽지 않아서 요행이다만, 왜 이런 무모한 짓을 한 걸까. “괜찮아요? 왜 밖에서 잔 겁니까?” “어…. 제….” 제갈 해솔은 죽기 일보 직전의 사람처럼 끓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두어 번 뺨을 짝짝 때리니 이를 악물며 나를 쏘아본다. 음, 정신은 확실히 차린 모양이다. 제갈 해솔은 입을 좌우로 움직이는 매우 벅차 보이는 행동을 하고는 겨우 입을 열었다. “어제 클랜 로드가 큰 천막에 모여 자라고 했잖아요….” 확실히 그러기는 했다. 인간의 체온은 하나의 난로와도 같아, 같이 모여 자면 그나마 덜 추울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요?” “저는…. 남이랑 같이 못 자요….” “…예?” “잠자리 엄청나게 예민하다고요…. 그리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고작 그런 이유로라고 타박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제갈 해솔의 겉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무, 무슨 짓이에요…? 소리 지를 거예요…!” “그럼 한 번 움직여 보시죠.” 눈을 동그랗게 뜬 제갈 해솔은 용을 쓰기 시작했으나, 겨우 몸을 꿈틀거리는 데 그칠 뿐이었다. “거 봐요. 이렇게 추운 산에서 잤는데 몸이 안 얼고 배깁니까? 동상이 안 걸리는 게 이상하죠. 동사하지 않은걸 요행으로 여겨요.” “그, 그래도….” “이상한 짓 할 생각 없으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요. 오늘도 많이 걸어야 하니까. 그러게 누가 밖에서 자래요?” “…….” 제갈 해솔은 입을 세게 짓씹었으나 할 말은 없는지 침묵했다. 발을 감싼 천을 조심스레 벗기자 꼿꼿하게 굳은 발가락이 눈에 들어온다. 귀여운 발가락이다. “아, 안 돼…. 내 다리, 내 다리가….” 흡사 제발 만지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허나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발을 덥석 붙잡은 순간, “아악…!” 제갈 해솔은 마치 처녀를 잃은 여인처럼 애절한 교성을 흘렸다. 젠장, 왜 강제로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애써 기분을 떨치고 나는 제갈 해솔의 발을 천천히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화정의 힘을 일으키며 발에서 종아리로 그리고 허벅지까지 거침없이 유린, 아니 주무른다. 허리, 어깨, 팔까지 주무르자 제갈 해솔은 비로소 뜨거운 비음을 토해냈다. 낯빛이 발그레한 게 아까보다 훨씬 낫다. “어때요. 많이 괜찮아졌죠?” 제갈 해솔은 분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침낭을 여며 다리를 감쌌다. “흑. 어떡해. 결국에는 당해버리고 말았어.” 그리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 쇼를 해라. 쇼를 해. 나 참, 살을 만졌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맨 살은 발바닥밖에 만지지 않았는데, 뭐가 이리 불만인지 모르겠다. 어이없는 기분에 연초를 꺼내 물자 제갈 해솔이 힐끔 나를 쳐다봤다. “반응 좀 해봐요. 민망하니까.” “어떻게 반응하라는 말입니까.” “우선은 연초를 깊게 빨아들이면서 최대한 비열한 미소를 지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거죠.” “……?” “후, 그렇게 고고한 척하더니 결국 너도 똑같은 암컷이었군. 뭐, 그래도 꽤 괜찮은 육체였다. 앞으로 내가 책임지고 귀여워해 주지. 큭큭!” “…….” 누구 멋대로 내 성향을 정의하려는 건가. “사용자 제갈 해솔. 굉장히 걱정돼서 물어보는 건데, 혹시 마조히즘이라도 있는 겁니까?” “이런, 들켰네요. 네, 사실 피학 성애에 관심이 있기는 해요. 전문 용어로는 펨섭(Femsub)이라고도 하죠.” 제갈 해솔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야릇한 미소를 지었고, 나는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모아 가볍게 이마를 튕겨주었다. “아야. 왜 때려요?” “헛소리하는 거 보니까 완전히 회복된 것 같네요. 여하튼 적당히 하시고, 수송 준비하세요. 야영지 정리하고 바로 내려갈 거니까.” 핀잔하는 어조로 말하니 제갈 해솔은 입을 삐쭉 내밀었다. “흥. 셔틀 취급은 그만둬 줄래요?” 나는 더 이상 대꾸 않고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잠이 깼는지 천막에서 한 명 두 명 어기적거리며 기어 나오고 있다. “…고마워요.” 그 순간 등 뒤로 들려오는 자그마한 음성. 그래도 고맙다고는 하는군. * 기상 후, 동료들은 아침은 내려가서 먹자는 말에 전원 찬성했다. 아마 한시라도 빨리 이 산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듯싶다. 그리하여 우리는 제갈 해솔의 수송 능력을 빌어 아래로 이동했고, 적당한 장소에서 차가운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아쉽지만 산 아래서는 그 흔한 나무 한 그루조차도 없어, 우리는 카오스 미믹에 담아온 마른 고기로 식사를 해야만 했다. 그렇게 한창 건육을 찢어먹는 와중, 진수현이 입맛을 다시며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큰일이네요. 여기서는 나무는커녕 산짐승 한 마리 보이지 않으니…. 걱정 없는 건 식수뿐인가?” “그러게. 그래도 마른 고기는 꽤 있잖아? 여기까지 오면서 오빠가 계속 외부에서 식량을 조달했으니까.” 이유정이 고기를 쭉 찢으며 중얼거렸다. 가슴이 뜨끔했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 것이겠으나, 의외로 날카로웠다. 아마 고연주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확실히 의심했을 것이다. 변명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담담히 식사를 잇기로 가닥을 잡았다. 괜히 반응하기보다는 은근슬쩍 넘어가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으니까. “그런데 여기는 어떤 지역일까요? 추위가 사라지니까 좋기는 한데.” 좋아. 백한결이 화제를 돌려줬다. “그러게요. 확실히 얼음 바람이 사라지기는 했는데…. 여기는 꼭 눈 사막 같은 데요? 아니, 눈의 나라라고 해야 하나?” 하승윤이 고개를 휙휙 돌리며 말을 받는다. 그 말대로 산 아래는 사방 천지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빛이 흐르는 이 드넓은 설원(雪原)은, 곳곳에 눈의 언덕이 솟은 일종의 구릉 지형이라 볼 수 있다. 언덕의 수는 시야가 탁 트였다 보기 무리가 있을 정도로 많았는데, 크기 또한 천차만별이다. 과장 하나 안 보태서 거의 빌딩 크기로 쌓인 언덕도 여럿 있었고, 덕분에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곳도 상당수였다. 이유정이 어깨를 으쓱였다. “신비롭기도 하고, 을씨년스럽기도 하고…. 고요해도 너무 고요해. 그리고 산보다는 훨~씬 낫지만, 추운 건 여전하고. 또 먹을 것도 보이지 않잖아? 여기서 누가 살 수는 있으려나.” “헤. 그럼 괴물도 없지 않을까요?” “아마도요?” “그렇죠? 그렇죠!” 무에 그리 좋은지 하승윤은 물개처럼 손뼉 치며 도를 넘은 반응을 보였고, 이유정은 떨떠름한 눈으로 하승윤을 응시했다. “글쎄요. 꼭 그렇다고는 볼 수 없지 않을까요.” 그때 김한별이 서늘한 음성으로 초를 쳤다. 이유정의 오른쪽 눈이 살그머니 치켜 떠졌다. “그럼 너는 있다는 소리야?” “모르죠. 하지만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왜?” “인간도 그렇고 동물은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아직 전부를 돌아보지도 않았는데 속단하는 건 이르잖아요.” 똑 부러지는 설명에 이유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가?” “그럴걸요.” “그래. 뭐,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지. 그나저나 나 물 한별만.” “네. 잠시…. 뭐라고요?” 김한별은 손을 뻗다가 홱 고개 돌려 이유정을 노려봤다. “농담, 농담이야. 악의는 없다고 했잖아. 일일이 반응하지 마라니까?” 이유정은 까르르 웃으며 손사래를 쳤으나 아무도 웃지 않았다. 이내 머쓱해 하며 머리를 긁적이는 이유정을 전원 신기한 눈초리로 쳐다본다. 나도 그랬다. 서로 무시하면서 지내는 것 같더니 언제부터 저렇게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걸까? 딱히 친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래도 통과의례 시절의 수준까지는 회복한 것 같다. 어떻게 관계를 회복했는지 궁금했지만, 어쨌든 나쁜 일은 아니다. 오히려 환영이다. “항별.” 흐뭇한 기분에 스리슬쩍 끼어들려는 찰나, 김한별이 죽일 듯한 기세로 나를 쏘아본다. “…아, 아니다.” 나는 어색이 헛기침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냥 입을 닫는 게 좋겠다. 그때였다. “김수현.” 허준영이 돌연히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불렀다. 평소의 공허한 음성이 아닌, 약간 긴장한 어조였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문득 눈 덮인 땅으로 묘한 진동이 느껴졌다. 진동은 잠깐 느껴졌다가 곧 사라졌다. 마력 감지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다. 스르릉! 칼날이 시원스레 쓸리는 소리에 이어 침묵이 내려앉는다. 우정민이 카타나를 꺼내 들었다. 방금 진동을 나만 느낀 게 아니라는 방증이다. “가까워지고 있었나요?” “모르겠습니다. 단, 곧 약해지기는 했지요.” 남다은의 물음에 우정민이 오른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쳐다보는 방향에는 완만한 경사면이 끝없이 이어지는 설판(雪板)이 보였다. 뚝 꺾이는 장소에 선다면 현재 우리가 있는 장소가 바로 노출될 것이다. 조용히 몸을 일으키자 시선이 쏠렸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일어나라 손짓한 후 가까이 있는 두 개의 눈 언덕을 가리켰다. 커다란 언덕 두 개 사이로 몸을 숨길 수 있을 테니까. 간단히 식사한 터라 따로 챙길 건 없었다. 황급히 흔적을 지운 후, 우리는 발소리를 한껏 죽인 채 언덕 사이로 무사히 들어갔다. 그런데 한 명이 보이지 않는다. 하승우. 하승우는 방금 우리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아직도 쭈그려 앉아 있었다. “하승우…!” 약간 소리 높여 부르니 하승우는 왼손을 들어 올렸다. 이어서 오른쪽 경사면을 쳐다보고는 곧장 몸을 돌려 언덕으로 뛰어왔다. “뭘 하고 온 거지?” 하승우는 내 말에 답도 않고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 ────. 차단(Shut Out).” 후웅! 가벼운 바람이 언덕 사이를 휩쓸고 지나갔다. “차단 마법?” “아아. 클랜 로드. 잠시만.” 하승우는 한 번 더 경사면을 쳐다보더니 긴장한 눈빛을 빛냈다. 그리고 나를 잡아 끌어 목소리를 한껏 죽인 채 입을 열었다. “흔적을 지우고 오느라 조금 늦었다.” “흔적? 아까 지우지 않았나?” “하지만 온기는 지우지 않았지. 그래서 주변 온도랑 맞추려 냉기 바람 주문을 외웠는데, 이상하게 마법이 제대로 먹히지가 않더군.” “…….” 물끄러미 응시하자 하승우는 더욱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청력을 높이지 않으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그리고…. 접근 방식이 우리와 비슷하다.” “무슨 말이야?” “사냥감에 가까이 갔을 때, 의도적으로 기척을 죽였거든.” “은폐 목적으로?” “그것도 있지만, 혼란을 주기 위해서이기도 해. 어느 방향으로 오는지 알 수 없게 되니까. 여하튼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내 말이 뭘 뜻하는지 알겠나?” “설마….” 그러자 하승우는 살짝 끄덕이고는 세 번째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 접근하는 놈들이, 우리가 저기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오는 거라는 소리다.” 그때였다. 갑자기 경사면의 끝으로, 눈부신 은빛을 반사하는 큼직한 것들이 우수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건….” ============================ 작품 후기 ============================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독자 분들의 다정한 응원에, 그리고 따끔한 말씀에 힘입어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우울함도 많이 사라졌고, 약간이나마 활력을 되찾은 기분이네요. 아마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역시 계속 적는 게 정답이었던 것 같아요. 후기로 하소연하는 건 오늘까지만 할게요. 차 회부터는 내용이나 후기나 즐겁게 적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족한 저를 믿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럼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아니 상쾌하고 활기찬 아침을 맞이하시길! :D 0781 / 0933 ---------------------------------------------- 군신(軍神)의 전설. 여인은 긴 시간을 고민으로 보냈다. 여인의 힘은 위대한 기적 그 자체였지만, 자연을 뜻대로 조종하는 악령의 힘 또한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혼자서는 힘에 부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허나 사람들은 최후의 토벌대가 가랑잎처럼 쓸려나간 후, 몸소 악령의 힘을 체감한 상태였다. 그러한 무기력함 속에서, 여인은 오직 홀로 포기하지 않았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입버릇처럼 중얼거렸다. 모종의 수단이 있지 않을까, 무언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호전되는 즉시 악화하기를 반복했다. 여인이 일으킨 기적이 무의미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길고 긴 장고 끝에, 여인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잠깐 활동을 멈춘 여인은, 방법을 찾아오겠다며 그때까지 희망을 잃지 말고 버티고 있어달라며 신녀곡(神女谷)으로 걸음을 돌렸다. 긴긴 시간이 흐르고 저울의 추가 멸망으로 완연히 기울었을 즈음. 세상의 모든 인간이 절망의 바다에서 몸부림칠 때. 여인은 비로소 또 한 번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린 사람들도 포기한 사람들도 멍하니 주저앉은 사람들도 도망친 게 아녔느냐고 말하려던 사람들도 “찾아냈어요.” “방법을 찾아냈다고요.”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미소 짓는 여인을 보고, 모두 침묵했다. 왜냐면. 찾아낸 방법이라는 게, 정말로 말도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틀란타 남 도시 비밀 도서관 ‘무희 전설’ 中.』 * 놈들은 곧 경사면을 타고 어슬렁어슬렁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예리해 보이는 눈은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으나, 걸어오는 방향은 우리가 식사하던 지점과 정확히 일치했다. 하승우의 말이 맞은 것이다. “클랜 로드. 어떻습니까?” 우정민의 음성에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놈들의 정체는 물론, 강점과 약점은 알고 있다. 애초 놈들과의 전투를 염두에 두고 근접 계열을 주축으로 선발하기도 했고. 어떻게 하면 놈들의 특징을 들키지 않게 전달할 수 있을까? “우선 수는 열두 놈. 그리고 생김새는 사자와 늑대랑 비슷합니다.” “사자랑 늑대요?” “머리는 사자처럼 갈기가 있는데 몸은 전체적으로 날렵해 보이네요. 크기는 각양각색이지만, 가장 큰놈의 길이가 2.5 미터 정도. 특히 팔과 다리가 상당히 깁니다.” “으음.” 간략히 설명을 마칠 즈음, 놈들은 바드득 바드득 눈 밟는 소리를 내며 완전히 경사면을 내려와 식사 장소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코로 킁킁 냄새를 맡거나 날카로운 발톱으로 눈을 벅벅 긁는다. 개중에는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오다가 갸웃하고 돌아서는 놈도 있었다. 카우우우우우우우! 그때 한 놈이 벌떡 일어서더니 경사면 방향으로 길게 울부짖었다. 보통 늑대와는 상당히 다른 울음에 동료들의 낯빛이 미묘히 떠름해졌다. 떠르르 전해지는 이명(耳鳴)이 듣기 싫을 정도로 거슬린다. “사족 보행인 줄 알았더니 이족 보행도 가능하군. 라이칸스로프(Lycanthrope)라도 되는 건가?” 공찬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라이칸스로프라. 상당히 정확한 표현이다. “그냥 바로 조져버리면 안 되나? 열두 놈 정도면 나 혼자서도 가능할 것 같은데.” “잠깐만.” 나쁜 생각은 아니지만, 나는 공찬호의 팔을 잡아 끌며 오른 방향을 가리켰다. 잠시 후, 경사면 끝이 어슴푸레 새하얀 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햇살을 받아 반사하는 그것은 곧 설판(雪板) 전체를 화려한 은빛으로 물들였다. “미, 미친….” 진수현이 입을 쩍 벌렸다. 은빛 갈기를 수염처럼 늘어트린 놈들이 천천히 경사면을 내려온다. 새로운 놈들이 출현한 것이다. 그 수는 무려 기백을 훌쩍 넘어, 반사광으로 시야를 눈부시게 만들 정도였다. “몇, 몇 놈이나 되는 거죠?” 누군가 말을 더듬은 순간 차소림이 갑자기 옆으로 다가왔다. 목을 살짝 빼고 주변을 훑더니 5초도 되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스무 무리…. 약 이백사십 마리 가량 되는 것 같습니다.” 담담한 음성. 갑작스러운 출현에 놀라기도 했지만, 차소림의 빠른 계산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다. 이내 두어 걸음 물러난 차소림이 의젓한 얼굴로 나를 돌아본다. “저 괴물들은 아마 모종의 지휘 체계를 따르는 듯합니다.” “지휘 체계라고요?” 정답. 하지만 나는 일부러 반문했다. “네. 가만 보면 열두 마리씩 서로 한 무리를 짓고 있으니까요. 또 무리마다 역할이 정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가령 처음 내려온 놈들은 아마 정찰을 주로 담당하는 무리이겠지요. 우리가 있던 장소를 보고 이상하다는 생각에 동료를 부른 겁니다.” 그래서 빠르게 계산할 수 있었던 거로군. 즉 열두 마리가 한 무리로 묶여 있다면, 최소한 스무 무리는 내려왔다는 소리였다. “방금 나타난 무리도 일부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겠지요. 최악에는 가까운 곳에 본대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잠시만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곧 차단 마법이 풀려요.” 차소림이 말을 맺는 것과 동시에 하승우가 급하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얼마나 남았느냐 물어보니 하승우는 손가락 세 개를 세웠다. 3시간일 리는 없고, 3분 남았다는 뜻이리라. 잠깐의 침묵 후 김한별이 나를 쳐다본다. “이제 어떻게 하죠? 싸우실 건가요?”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산에서 내려온 이상, 그리고 저곳을 통과해야 하는 만큼 남은 길은 하나였다. 회피는 내키지 않는다. 어떻게 길을 돌아간다손 쳐도, 금방 알아차리고 귀신같이 따라붙을 테니까. 생각한 바를 이야기하자 동료들은 납득한 듯 끄덕거렸다. 그럼 이제 어떻게 싸우느냐가 문제인데. “흐흐. 이제 정면으로 한바탕 부딪치는 것만 남은 건가?” “그건 가장 하책이죠.” 공찬호가 수라마창을 꼬나 쥐며 비죽거린 찰나, 명랑한 음성이 끼어들었다. 내게 쏠려 있던 시선이 모조리 어딘가로 돌아간다. 제갈 해솔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검지를 스리슬쩍 까닥거리고 있었다. “무작정 달려드는 놈들이라면 모를까. 체계가 잡힌 놈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에요. 이대로 나가봤자 삽시간에 에워싸일 건 뻔하잖아요?” “이 분.” 하승우가 약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하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들렸다고 해야 하나. 멋쩍은 표정을 지은 제갈 해솔이 신속히 말을 잇는다. “상책은 간단해요. 어차피 싸울 거라면, 약간이라도 지형적 이득을 볼 수 있는 지점을 고르는 게 낫잖아요?” “그런 장소가 있나?” “왜 없어요? 언덕이라는 훌륭한 지형이 있는데.” “언덕?” 하승우의 반문에 제갈 해솔은 왼쪽을 가리켰다. 시선을 돌리니 거의 겹쳐졌다고 봐도 무방한 커다란 언덕 두 개가 눈에 들어온다. 올라갈수록 가팔라져 뾰족이 솟은 언덕은, 어지간한 빌딩 이상의 높이를 자랑했다. 아까 식사 때 눈여겨본 언덕이었다. “설마 저 언덕을 올라 싸우자는 건가?” “저 정도 높이를 빠르게 오를 수만 있다면 최상책이기는 하겠죠. 하지만 그럴 상황이 안 되니까. 저 두 언덕의 사이로 들어가자는 거예요.” “언덕 사이로 들어가자고? 그러다 퇴로가 차단당하면?” “어머. 여기서는 어디서 싸워도 에워싸일 텐데요. 차단이 기정 사실이라면 최대한 공격을 덜 받는 쪽. 말인즉 방어하기 수월한 곳으로 가는 게 좋지요. 저기라면 적들의 장점을 최소화할 수 있으며, 소수인 우리의 이점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어요.” 하승우는 딱히 할 말이 없는지 입맛을 다셨다. 허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제갈 해솔은 곧장 나를 돌아봤다. 거의 동시에 하승우가 가운뎃손가락을 접었다. 1분. “그리고 소림 씨가 말한 대로 최악의 상황도 염두에 둬야죠. 우리는 저놈들이 선발대에 불과할 수 있다는 추측을 잊으면 안 돼요. 막말로 저 너머에 배가 넘는 본대가 있으면 어쩔 거예요?” “그렇지. 그럼 그것도 무슨 생각이 있는 건가?” 나는 가만히 팔짱을 끼며 물었다. 제갈 해솔은 싱긋 웃어 보였다. * 작전 수립이 끝났다. 어느새 하승우는 팔을 내렸다.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뜻이다. “그럼.” 김수현은 두어 걸음 물러나며 동료들을 쭉 훑었다. 그리고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춘 후,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작전 개시를 알리는 신호였다. “바로 시작하도록 하죠.” 스르륵! “가셨나?” 우정민이 중얼거린 순간 김수현은 허공 속으로 녹아들 듯이 사라졌다. 이형환위(移形換位)를 사용한 것이다. 크릉? 동시에 몇 놈이 번쩍 고개를 들었으나, 그뿐이었다. 그저 경계하는 눈초리로 주변을 둘러볼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최고 상승 어빌리티를 사용했다고는 하나, 그야말로 극을 넘은 이동 속도였다. “…느끼지도 못했어.” 이유정이 허탈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자자. 이로써 일차 계획은 성공. 우리도 얼른 시작하자고요.” 제갈 해솔은 가볍게 손뼉 치고는 차소림의 품으로 냉큼 안겼다. 차소림은 딱히 거부하는 기색 없이 제갈 해솔은 안아 들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마법사, 사제가 근접 계열 사용자에게 안기거나 업히기 시작했다. 이 중 제갈 해솔의 연차가 가장 낮았으나 전원 암묵적으로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눈이 번쩍 뜨일만한 계획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입안자이기도 하거니와, 모두 제갈 해솔의 말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감 넘치는 눈동자에 끌리기도 했고. “곧 차단 마법이 풀릴 것 같은데.” 허준영에게 업힌 하승우가 자못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 “굳이 카운트를 셀 필요는 없겠죠. 저기 커다란 두 개의 언덕이 보이시죠? 그 안쪽으로 들어가 주세요. 자, 출발!” 조금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출발이라는 말을 기점으로, 남은 사용자들은 일제히 언덕을 벗어나 새로운 언덕으로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크릉? 크르르릉! 컹! 컹! 괴물들이 반응한 건 단 1초도 안 되는 순간이었다. 설원을 가로지르는 사용자들을 확인한 후, 두 발로 서 있던 놈들은 곧장 엎드렸다. 잠시 후, 가장 선두에 선 놈이 긴 울음을 토해냈다. 그 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240마리에 달하는 괴물이 일거에 땅을 박찬다. 공찬호가 라이칸스로프라고 표현한 괴물들은, 처음에는 나란히 줄지어 늘어선 횡렬 대형으로 추적하는 듯했다. 그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건만 이내 변화가 일어났다. 중앙 부근에서 달리던 무리가 갑자기 속도를 늦추는가 싶더니, 좌익과 양익의 무리가 서서히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양익 대열이 기다랗게 늘어지며 폭도 부채꼴처럼 넓어졌다. 말인즉, 괴물들은 저 침입자들을 붙잡기에 가장 적합한 포위 형태를 구성한 것이다. 바드드득, 바드드득! 두두두두, 두두두두! 수백의 괴물이 쌓인 눈을 헤치고 사방으로 얼음 가루를 튀기며 치달리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화르르륵! 그때 도망치던 침입자 쪽으로 무언가가 거대하게 불타올랐다. 둥근 불덩어리는 곧 세차게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누가 쏘았는지는 모르나, 중앙을 이끌며 달리던 괴물은 확실히 공격을 인지했다. 그러나 회피하기는커녕, 있는 힘껏 뛰어올라 일말의 망설임 없이 불덩어리 속으로 돌진했다. 콰앙! 흡사 바위와 바위가 부딪치는 듯한 폭음이 울렸다. 공중에서 폭발한 불길이 도처로 치솟고, 그 여파로 눈가루가 이리저리 휩쓸린다. 이내 푹 솟아난 허연 연기 속, 검은 그림자가 비호처럼 날쌔게 허공을 날았다. 그것은 놀랍게도 괴물이었다. 염화(炎火) 마법을 정통으로 맞고도 가볍게 빠져 나온 것이다! 갈기에 불이 옮겨 붙기는 했으나 삽시간에 사그라졌다. 그을음이 묻은 것과 달리는 속도가 약간 느려졌다는 점을 제외하면, 모든 게 그대로였다. 보이는 그대로 어떤 타격도 받지 않은 듯했다. 커허어어어어어헝! 잠시 후, 공중에서 땅으로 내려앉은 괴물이 우렁차게 포효하며 재차 치달린다. 하늘을 찌를 듯한 흉포한 울음은 괴물들이 추적에 박차를 가하게 만들었다. 네 발로 눈 덮인 설원을 전력 질주하는 속도는 실로 경이로울 정도라, 천천히, 그러나 착실하게 거리를 좁혀나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전투는 아마 2회 안으로 끝날 듯싶습니다. 아차 하는 사이 쪽지가 30통 이상 쌓였네요. 이번 주말을 이용해서 최대한 답신을 보내겠습니다. :) 근래 좋은 소식이 하나 있는데, 제가 담배가 많이 줄었습니다. 예전에 굉장히 심할 때는 한 보루가 5일만에 결딴났는데, 요즘에는 한 갑이 기본적으로 사흘은 가네요. 물론 끊는 게 가장 좋기는 하지만요. 하하. 0782 / 0933 ---------------------------------------------- 군신(軍神)의 전설. 안 된다고 했다. 말리고, 또 말렸다. 확신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뜻을 꺾지 않았다. 이것밖에는 방법이 없다며 부디 자신을 막지 말아 달라며 부드러이 고개를 가로젓고 몸을 돌렸다. 악령이 있는 곳으로. 필자는, 아니 나는 절망을 물리치고 세상을 지키려 한 걸음 한 걸음 멀어지는 여인을 보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로 그 방법밖에는 없는 것일까. 엎드려 좌절하는 나를 두고 불현듯 여인의 걸음이 정지했다. 그리고 고요한 음성으로 말을 흘렸다. 『아틀란타 남 도시 비밀 도서관 ‘무희 전설’ 中.』 * 정통으로 맞았음에도 계속 쫓아오는 놈을 보며 근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누군가에게 들려가는 와중 용케도 한 번 더 주문을 외웠지만, 결과는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성과라고 하면 아주 잠깐 속도를 느려지게 했을 뿐. 그것도 미약한 정도에 불과했지만. “플레어(Flare) 마법이 별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높은 수준의 마법 저항을 지녔을 거라 추측됩니다.” “알겠으니까! 우선은 들어가자고!” 진수현은 헉헉거리면서도 근원을 고쳐 안으며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쳤다. 근접 계열이 상대적으로 육체 능력치가 떨어지는 마법사와 사제를 안고 달리는 건 확실히 좋은 생각이었다. 라이칸(Lycan)들은 흡사 미끄러지듯이 설원을 질주하고 있었다. 아마 안고 달리지 않았다면 분명히 중간에 붙잡혔으리라. 이윽고 선두의 차소림을 시작으로 사용자들은 줄줄이 언덕 사이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멀리서 봤을 때는 겹쳐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가보니 직경 5미터 정도의 공간이 트여 있었다. 침입자들이 언덕 사이로 사라진 걸 본 라이칸들은 나직한 울음을 흘렸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은빛 눈동자와 예리한 빛을 뿌리는 송곳니. 어찌 보면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 다 잡았다고 여긴 것이다. 실제로 부채꼴 모양으로 달리던 라이칸들은 서서히 반으로 갈라지는 중이었다. 우익은 언덕 오른쪽 사이로, 좌익은 언덕 왼쪽 사이로 짓쳐 들어가 퇴로를 차단한다. 그리하여 중앙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침입자들을 확인한 후, 주둥이를 쩍 벌리며 좌우에서 한꺼번에 뛰어들었다. 그때였다. 거리가 크게 좁혀지기 직전, 난데없이 반투명한 우윳빛 막이 둥글게 부풀어 오르고, 파앙, 파앙! 캐애애애애애애앵! 공기 터지는 소리와 찢어지는 괴성이 겹쳐 울렸다. 힘차게 달려들었던 놈들이 모조리 나가떨어지며 바닥을 구른다. 그러자 뒤에서 달려오던 라이칸들이 주춤, 질주를 멈췄다. 그것은 허연 막이 돌진을 방해해서만은 아니었다. 본능이라고 해야 하나. 웅웅웅웅웅웅웅웅! 웅혼한 공명(共鳴). 한 여인이 들어 올린 양손이 희멀건 빛으로 가득히 물들어 있다. 기운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섭게 회전해 허공을 이지러트렸다.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공기가 억지로 구겨지는 것 같기도 했고, 서늘한 칼날에 스쳐 베이는 것 같기도 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한 곳으로 힘을 응축한 마력이 놀란 심장처럼 꿈틀 요동쳤다. 흡사 어서 나가고 싶다고 몸부림이라도 치는 것처럼. 이윽고 제갈 해솔이 좌우를 둘러보며 싱긋 미소 짓는다. “어서 와요.” 크릉? “낙빙(落氷)은, 처음이죠?” 그 순간이었다. 제갈 해솔이 양손을 힘차게 하늘로 떨치는 동시, 쐐애애애애애애액! 얇게 응축된 바람이 하늘로 쭉 뿜어졌다. 벼락처럼 쏘아진 바람은, 흡사 뱀이 몸을 휘감듯 두 언덕의 봉우리를 썩둑 휩쓸며 스쳐 지나쳤다. 다음 순간, 끄그그긍! 끄그그긍! 거대한 굉음이 울리더니, 양 언덕의 봉우리가 힘찬 눈 연기를 뿜어내며 굳건한 몸통과 비스듬히 어긋났다. 바로 이어, 봉우리는 점차 가속이 붙은 속도로 사선을 타고 내려와 그대로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아무도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언덕 내 모든 존재가 그저 하늘을 멍하니 응시한다. 제갈 해솔이 이루어낸 현상은, 인간이고 괴물이고를 떠나 진정으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봉우리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운 찰나, 비로소 라이칸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떠졌다. 허나 늦어도 이미 한참이나 늦었다. 굴러 떨어진 두 개의 봉우리는 무리 진 라이칸들을 찍어 누르듯 세차게 덮고 터뜨렸다. 꽈뜨찌찍! 콰앙! 마치 고막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굉음. 사용자들은 낯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 증상이 귓속이 왕왕 울렸다. 이내 간신히 진정됐을 때 사용자들의 눈에 들어온 건, 낙하에 의해 산산이 조각난 얼음 잔해와 곤죽 된 라이칸의 시체, 그리고 핏물과 살점으로 질퍽해진 눈의 대지뿐이었다. 찍소리도 단말마도 들리지 않았다. 사방으로 비산한 핏물이 스며들어 순결이 빛나던 설원이 차츰차츰 빨갛게 변해간다. 낙하의 여파는 당연히 사용자들에게도 미쳤다. 그러나 백한결이 젖 먹던 힘까지 뽑아내 보호막을 유지한 덕분에 사방팔방 사출된 잔해의 비속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도 제갈 해솔의 계산 내였다. “너…. 마력 능력치가 얼마나 높은 거지?” 얼마나 놀랐는지 하승우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놓고 말았다. “글쎄? 그건 실례 아니려나?” 반말에는 반말로. 상큼하게 웃은 제갈 해솔은 느닷없이 거한의 등을 찰싹 쳤다. 멀거니 앞을 바라보던 공찬호가 펄쩍 놀라며 뒤를 돌아본다. “무, 무슨…?” “뭐해요? 기껏 상황도 만들어줬건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거예요?” “어, 어?” “호기잖아요. 저렇게나 혼란해 있는데 어서 들이쳐야죠. 근접 계열들이 나설 때라고요!” 제갈 해솔의 말대로였다. 선두에 있던 놈들은 모조리 깔려 죽었고, 요행으로 살아난 놈들은 잔해의 후폭풍으로 심각한 상처를 입은 상태. 허나 후방에 있던 라이칸들은 비교적 건재했다. 크게 혼비백산해 이리저리 날뛰고 있기는 했지만. 공찬호는 생각을 깨끗이 비우기로 했다. 무언가 굉장한 걸 봤는데, 이해하기보다는 그냥 내키는 대로 날뛰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생각을 정리한 공찬호는 우렁찬 기합을 지르며 수라마창을 꼬나 쥐고 돌진한다. 가는 와중 수라마창이 요행이, 그러나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놈의 대가리를 힘차게 후려갈겼다. 캐앵! 퍽, 라이칸의 머리가 수박 깨지듯 가볍게 터지며 핏물이 비산했다. 그 소리에 다른 사용자들도 정신을 차렸다. 숨을 들이켜며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는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모든 것이 제갈 해솔의 말대로 이루어졌다. 게다가 적들이 혼란에 빠진 지금이 승기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잠시 후, 남다은을 선두로 한 머셔너리 클랜원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공찬호와는 반대 방향으로. 난전의 시작이었다. 한편, 같은 시각. “저건 또 뭐야.” 그 누구보다 빠르게, 그러나 은밀히 경사면을 올라온 김수현은 어이없는 탄성을 질렀다. 시선은 봉우리가 성둥 잘려나간 두 언덕에 꽂혀 있다. 어찌나 깔끔하게 잘렸는지 반질반질한 면이 피겨 스케이트라도 탈 수 있을 듯하다. “저 정도 두께를 자르다니…. 제갈 해솔의 작품인가?” 번쩍! 그때 새하얀 빛줄기가 서너 개가 내리꽂혀 안 그래도 흰 언덕을 더욱 밝게 물들였다. 김수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오호. 안솔의 천벌이군. 한데 마법 공격은 별 효용이 없을 텐데…. 아, 신성 주문은 좀 다르려나?” 그 누구도 없건만 김수현은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카우우우! 아니, 아무도 없는 게 아니었다. 아래쪽으로 느닷없이 기다란 울음이 들려온다. 아까 들었던 소리와 거의 비슷하지만, 무언가 황급해 하는 기색이 없잖아 있었다. 아래를 슬쩍 내려다보는 김수현의 입가에 싱거운 미소가 자리 잡는다. 차소림의 예측대로 앞서 모습을 드러낸 라이칸들은 전부가 아니었다. 오히려 일부에 불과했다. 경사면 너머 아래에는 무려 선발대의 세 배가 넘은 수가 무리를 짓고 있었다. 12마리가 한 무리씩, 총 52 무리가 사방을 경계하고 있다. 못해도 600마리는 넘으리라. 무엇보다 무리의 중앙에는 여타의 놈들보다 훨씬 큰 거대한 라이칸 한 마리가 있었다. 모두가 서서 돌아다니는 와중, 오직 홀로 앉아 있음에도 덩치가 두 배는 커 보인다. 뜻밖에도 라이칸 왕의 존재를 확인했지만, 김수현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외려 ‘설마 없지는 않겠지?’ 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왕이 있다는 건 물론, 얻을 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카우우우, 카우우우! 비명과도 같은 짧은 울음이 연달아 허공을 흔들었다. 그러자 라이칸 무리 사이로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주변을 서성이며 경계만 하던 놈들이 일제히 언덕이 있는 방향을 쳐다본다. 이어서 라이칸 왕이 거구의 몸을 서서히 일으킨다. 스릉! 그와 동시에 칼날이 시원스레 쓸리는 섬찟한 소리가 울렸다. 김수현이 라이칸들의 움직임에 맞춰 무검을 뽑아 든 것이다. 내심 언덕 전투 상황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김수현은 딱히 걱정은 하지 않았다. 저놈들이 제대로 진을 갖추고 사방에서 한꺼번에 덤벼들었을 때가 골이 아프지, 이렇게 각개 격파가 가능한 상황에서는 기우에 불과하다. 물론 현 상황도 맹점이 없는 건 아니다. 제갈 해솔이 세운 작전이 빛을 보려면, 김수현이 라이칸 본대를 완벽히 마크한다는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기실 제갈 해솔이 요청한 건 마크가 아닌 교란이었다. 본대가 있다는 가정 하, 치고 빠지는 게릴라 식으로 주의를 끌어주기 바랐다. 그리고 이걸 성공하려면 무력은 물론, 상황 판단이나 회피에 도가 튼 사용자가 나서야 하는데, 14명 중 김수현이 가장 제격이었다. 만일 본대가 없으면 돌아와 언덕 전투에 가세하고. 허나 본대를 발견한 이상, 김수현은 제갈 해솔의 요청대로 곧이곧대로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굳이 귀찮은 짓을 하지 않더라도 본대를 묶을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건 바로, 왕을 공격하는 것. 왕과 선발대의 가치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는, 굳이 저울질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크르르륵…? 또 한 번 짖으려는 찰나, 소리가 갑작스레 뚝 끊겼다. 동시에 막 눈판을 오르려 폼을 잡던 라이칸들이 일거에 동작을 멈췄다. 경사면을 올려다보는 라이칸 왕의 눈이 한껏 가늘어졌다. 김수현이 드디어 모습을 보였다. 무검을 뽑은 것도 모자라, 왼손으로 귀걸이를 꺼내 검으로 변화한 빅토리아의 영광을 쥔다. 김수현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치우천왕의 갑옷에 깃든 능력을 사용했다. 『사용자 김수현의 마력 흐름이 2.5배로 상승합니다!』 활성화된 마력이 둑 터진 강물처럼 흘러나와 전신의 회로를 질주한다. 화정을 얻은 이후, 김수현의 마력 흐름은 두 배로 상승했다. 즉 현재 김수현의 마력이 흐르는 속도는 보통 사용자의 4.5배라는 뜻이다. 이 현상은 단순히 흐르는 속도의 상승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더 강한 힘을, 더 빠른 속도로. 흐름을 제대로 제어할 수만 있다면, 김수현을 이길 수 있는 사용자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우우웅! 전신의 마력 회로를 채우는 기세가 몹시나 강렬해 외부로까지 그 힘이 표출된다. 마력을 잔뜩 머금은 검이 울음을 토하고, 김수현의 주변으로 묘한 진동이 덜덜거리며 일기 시작한다. 이 가공할만한 기운을 견디지 못해 공간마저도 반응하는 것이다. 허나 아직 끝이 아니라는 듯, 기세는 기하급수적으로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절정에 다다랐을 즈음. “화정.” 화르르륵! 마침내 김수현이 눈이 번쩍 떠졌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삽시간에 뜨거워져 벌건 불꽃을 튀겼다. 까마득한 고대 시절, 인간으로서 유일하게 신의 반열에 오른 무의 신 치우천왕(蚩尤天王). 불패의 신화를 이룩한 군신(軍神)의 전설이, 바야흐로 빙하의 설원에서 재현된다. 0783 / 0933 ---------------------------------------------- 군신(軍神)의 전설. 낙빙의 영향으로 라이칸들의 진형은 와르르 무너졌다. 깔려 죽은 놈들만 여럿이며 잔해의 후폭풍으로 상처 입은 놈들은 헤아릴 수 없다. 무엇보다 추적할 때부터 시종일관 유지해온 오와 열이 완전히 흐트러졌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물론 그 기회를 놓칠 사용자들이 아니었다. 라이칸들이 혼란해 하는 틈을 타 각자 무기를 휘두르며 짓쳐 들어갔고, 삽시간에 서로 뒤엉켜 난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선두로 달려간 사용자는 바로 거구의 사내였다. 훙훙훙훙! 공찬호는 수라마창을 풍차처럼 돌리며 라이칸들을 덮쳤다. 어떻게 싸울지 어떻게 움직일지는 이미 머릿속에 없다. 모든 것은 야성에 맡긴 채 본능이 시키는 대로 무차별적으로 창을 휘둘렀다. 불길(不吉)을 흘리는 수라마창이 사방으로 호쾌하게 뻗어 나간다. 뻐억, 뻐억! 단 일격에 머리통이 으깨어지고, 살짝 스쳤음에도 옆구리가 뻥 터졌다. 독사처럼 파고든 창 끝이 꼬챙이처럼 복부를 꿰뚫었다. 그것을 휙휙 돌려 힘껏 떨치니 핑그르르 날아가 부딪친 라이칸이 퍽 소리와 함께 핏물을 토해냈다. 한 군데 성한 부분은커녕 아예 곤죽이 돼버린 동료의 시체를 보며 주변의 라이칸들이 펄쩍 뛰었다. 낙빙으로 인한 혼란이 아직 가시지도 않았는데, 난데없이 웬 괴물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 난리가 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까 질서 정연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사자에 쫓기는 양의 모습만이 남았을 뿐이다. “크하하하하하하하!” 쉴 틈 없이 창을 휘두르던 공찬호가 돌연 광기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뭐 하는 거냐! 덤벼라! 죽을 각오로 덤비라는 말이다!” 우렁차게 외치는 공찬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언뜻 붉은빛도 스치는 게, 흡사 광인의 눈을 보는 듯했다. 그럴수록 수라마창이 내뿜는 마기(魔氣)는 한층 강렬해져, 라이칸들은 까닭 없이 온몸이 저릿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커허허헝!” 라이칸들이 계속해서 주춤거리자 공찬호는 마치 화를 내는 것처럼 광포하게 달려들었다. 근력 능력치 102 포인트라는 엄청난 괴력을 앞세워 상대를 압도적으로 짓이기고 터뜨렸다. 기합과 함께 휘두른 너덧 마리가 한꺼번에 걸려들어 모조리 피를 쏟아낸다. 손으로 전해지는 짜릿한 감각은 공찬호의 말초 신경을 계속 자극해, 상황은 곧 전투가 아닌 학살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변했다. 이제는 라이칸 쪽이 불쌍하다고 생각될 지경이었으나, 그렇다고 언덕 왼쪽의 상황도 별반 다른 건 아니었다. 아니. 아주 조금 다른 점은 있었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각개 전투는 분명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지만, 유독 한 곳만큼은 매우 고요했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침묵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크르르르…. 수십의 라이칸이 둘러싼 공간의 중앙으로, 한 여인이 오연히 서 있다. 차가운 빛이 흐르는 갑옷을 걸치고 시린 냉기를 뚝뚝 흘리는 얼음 칼을 거머쥐었다. 문득 여인의 고개가 한쪽으로 살며시 갸울어졌다. “더 안 올 거니?” 당연히 알아들을 리는 없다. 허나 여인, 아니 남다은 주변의 라이칸들이 옴짝달싹 못 하는 이유는 비단 저 기운 때문만은 아니었다. 왜냐면 이미 남다은 주변의 눈밭으로 약 스무 구에 달하는 동료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흘러나온 핏물이 풍기는 냄새가 후각을 강하게 자극한다. 라이칸은 학습 능력이 뛰어나다. 말인즉 복수보다는, 공포가 앞선다. 아까 도망치는 걸 추적할 때와는 상상도 못 한 상황이 발생했으니까. “덤비는 게 더 좋은데…. 어쩔 수 없나.” 조그맣게 투덜거린 남다은의 몸이 한순간 찬란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검후의 고유 능력 ‘여왕은 절대로 손에서 검을 놓지 않는다.’ 가 발동된다. 폭발적으로 흘러나오는 청량하고도 신이(神異)한 기운을 마주한 라이칸들은, 온몸이 딱딱히 굳는 듯한 기분을 맛봐야 했다. 동시에 시야가 빛으로 방해 받는 순간 남다은이 스르르 움직였다. 남다은은 빛살처럼 치고 들어가 곧장 검을 휘둘렀다. 깜짝 놀란 라이칸이 반사적으로 몸을 수그리며 뛰었지만, 남다은은 자연스럽게 궤도를 수정해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결국 라이칸은 스스로 자신을 헌납한 꼴이 돼버렸고, 그대로 머리통이 쪼개지고 말았다. 곧바로 검을 끌어올린 남다은은, 바로 옆 엉거주춤 서 있던 놈의 등을 깔끔하게 베며 지나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갑작스레 몸을 회전해 등 뒤로 살금살금 접근하는 놈을 향해 직선으로 찔러 넣는다. 푹, 틈을 노리던 라이칸의 미간에 일자 구멍이 뚫렸다. 3초 만에 세 명을 결딴냈지만, 공격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발악적으로 달려드는 라이칸들을 보며 경쾌히 발을 놀린다. 몸이 사선 방향으로 나는 듯 미끄러지는 동시, 꽃잎 같은 입술이 작게 움직였다. “직절(直切).” 특수 능력 ‘직절’. 쉬칵! 살짝 기울어진 얼음 칼이 스치듯, 그러나 북풍한설처럼 차갑게 허공을 가른다. 어른거리는 희미한 잔상이 눈을 박차고 오른 일단의 무리를 비스듬히 자르며 사라졌다. 이윽고 보랏빛 섞인 냉광(冷光)이 번뜩인 순간, 라이칸들의 몸 곳곳에 기다란 자상이 생겨나며 핏물을 왈칵 토했다. 캐앵, 캐앵! 고요하던 공간이 비명으로 달아오른다. 허나 남다은은 허공에서 떨어지는 라이칸을 가볍게 걷어내고 담담히 새 표적을 찾는다. 그리고 시선이 한 곳에 꽂힌 순간 몸은 또 한 번 미끄럼틀을 타듯 미끄러졌다. 한 번 휘두름에 라이칸이 나뒹굴고, 조금 모여 있다 싶으면 여지없이 냉광이 번쩍였다. 날카롭게 뻗어오는 발톱을 고개를 살짝 트는 것으로 피하며 검을 올려 친다. 종아리를 물려는 놈은 턱을 가볍게 걷어차며 검을 내리꽂는다. 남다은의 행동은 진정으로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공찬호처럼 요란하게 날뛰는 맛은 없지만,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의 효율을 추구한다. 그야말로 극한에 이른 몸놀림이요, 검의 여왕다운 모습이었다. 그리하여 좌우가 서서히 정리되고 있을 즈음, 중앙에서는 마법사들과 사제가 쉴 새 없이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현란한 공격 마법은 날아다니지 않는다. 그들이 현재 외우는 주문은 보조에 맞춰져 있었다. 근원은 김수현이 미처 말하지 못한 ‘상대는 높은 마법 저항을 지니고 있다.’ 는 점을 신속히 전달했고, 근접 계열들을 보조 주문으로 지원하기로 의견이 모인 것이다. 물론 근접 계열이 전부 나간 건 아니었다. 김수현이 항시 키퍼의 중요성을 강조한 만큼,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두 명의 근접 계열 사용자가 남았다. 그 중 한 명인 이유정은, 좌우로 정신 없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오른쪽에서는 백한결이 걸어준 반사 보호막 아래, 공찬호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고 있다. 왼쪽으로는 하승윤이 하승우의 보조를 받으며 착실하게 라이칸들을 상대한다. 특히 깔끔한 폼으로 차곡차곡 시체를 쌓아나가는 하승윤을 보며 이유정은 질근질근 입을 짓씹었다. 연이어 들려오는 비명에 몸이 근질근질한 듯 연신 숨이 거칠어진다. “너무 흥분하지 마라.” 그때 누군가 턱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흠칫 놀란 이유정은 마치 잘못을 들킨 어린 아이처럼 뺨을 붉혔다. “싸우고 싶은 기분은 알겠는데, 지금은 키퍼잖아. 네가 나가면 누가 마법사와 사제를 보호한다는 거냐.” “아, 알고 있어. 딱히 말하지 않아도.” “그럼 가만히 좀 있어라. 아무리 유리한 전투라도 키퍼는 있어야 한다. 김수현이 항상 하던 말이잖아.” “매, 맨날 오빠만 들먹이고는….” 이유정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아랫입술이 닭 부리처럼 툭 튀어나온 게, 여전히 불만 가득한 낯빛이다. 긴 한숨을 흘린 허준영은 차분히 왼쪽을 응시했다. 사실 허준영이라도 싸우고 싶지 않겠느냐마는, 적어도 나설 때와 지켜야 할 때를 구별할 분별력은 있었다. “정 그렇게 싸우고 싶으면…?” 그때 침착히 전황을 관찰하는 허준영의 시야로 무언가 빛나는 것이 반짝였다. 찰나의 순간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낙하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노리기라도 하듯이.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허준영은 지체 않고 고성을 터뜨렸다. “차소림! 저격!” “……!” 외침을 들은 걸까. 막 한 놈을 꿰어 올리던 차소림은 순간적으로 창을 던졌고,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며 힘껏 뒤쪽으로 뛰었다. 그 순간 차소림은 확실히 느꼈다. 굉장히 차갑고 예리한 것이 목덜미를 스쳤다는 사실을. 그리고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갑옷 이음새 부근을 파고들려는 것을. 푸욱! “아악!” 날을 잔뜩 세운 발톱 같은 것이 부드러운 살결을 찢고 틀어박혔다. 속살이 찢어지는 고통에 차소림의 움직임이 일시적으로 둔해졌다. 하나는 용케 피했다고는 하나, 설마 암기가 두 개였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기 때문이다. 그 기회를 놓칠 라이칸들이 아니었다. 마치 이때만 기다려왔다는 듯, 자세가 무너진 차소림을 향해 곳곳에서 뛰어들었다. 절절한 울음을 토하며. 도망칠 곳은, 없다. “엎드려!” 입을 질끈 깨문 찰나 호통 같은 외침이 터졌다. 차소림은 몸을 숙이는 대신, 그대로 드러눕는 걸 선택했다. 쐐애애액! 흡사 유성이 지나가는 소리가 이럴까? 워낙 급하기도 했고, 또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라 차소림은 자세히 보지 못했다. 그저 정수리가 따끔따끔한 게, 무언가가 살짝 닿아 지나갔다는 것만 인지할 뿐. 투둑, 투두두둑! 그러나 다음 순간, 주둥이를 쩍 벌린 채 공중으로 뛴 라이칸들이 모조리 이등분되며 조각나 떨어진다. 차소림이 신속히 창을 챙기며 뒤를 돌아보자, 오른팔과 오른발을 앞으로 크게 내뻗은 채 허리 숙인 허준영을 볼 수 있었다. 수평으로 베었다고 추정되는 기다란 칼날은, 언덕 벽을 베어 뚫고 깊숙이 박혀 있다. 이유정이 입을 멍하니 벌렸다. “그, 그건 무슨 능력이야?” “발검술. 유성 검.” 허준영은 시큰둥하게 말하며 검을 거뒀다. 그러나 한껏 가늘어진 눈은 매의 눈동자처럼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빠른 대응으로 차소림의 목숨은 구했지만, 저격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생각은 정답이었다. 왼쪽 언덕 위 잘린 면에 라이칸 한 마리가 서 있었으니까. 은빛 눈동자는 비틀거리는 차소림을, 정확히는 희고 가느다란 목에 꽂혀 있다. 그리고 뒤로 힘껏 당긴 무언가를 움킨 손은 이미 세 번째 저격 준비를 끝마쳤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고 있었다. 조금씩 좌우로 움직이는 게 신중히 거리를 재는 듯하기도 했다. 잠시 후, 비척거리는 차소림에게 안솔이 황급히 달려간다. 동시에 조준을 끝마친 라이칸이 씩 이를 드러냈다. 두 눈은 끊임없이 차소림을 직시하며 털로 덮인 길고 탄탄한 팔이 앞으로 쭉 뻗어진다. 그 순간이었다. 휘리리릭! 푸욱! 막 투척이 이루어지려는 찰나, 갑작스레 라이칸이 보던 시야의 절반이 사라졌다. 허나 불현듯 찾아온 통증에 비명을 지르기도 전, 또 한 번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리며 시야가 완전히 캄캄해졌다. 비로소 두 눈에 불타는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카아아악! 단말마의 비명을 지른 라이칸은 심히 비틀거리더니, 결국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퍼억, 낙하 충격으로 사지가 박살 난 라이칸에게 누군가가 담담히 걸어간다. “회수 걱정은 덜었군.” 양 눈에 틀어박힌 단검을 회수하며 키득거리는 사내는, 바로 우정민이었다. 차소림은 우정민이 자신을 저격한 괴물을 역 저격해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봉우리가 잘려나갔다고는 하지만, 저 높은 위치에 있는 상대를 정확히 맞췄다는 건 신기에 가까운 능력이었다. 절로 감탄이 일어나 차소림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응? 아아. 나보다는 허준영한테 하는 게 나을걸.” 차소림은 곧장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허준영은 무심한 눈으로 좌우를 둘러보고 있었다. “거의 끝난 것 같은데….” 어느새 언덕은 비릿한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차소림의 자리는 진수현이 재빠르게 달려와 채웠다. 그 말은 앞서 상대하던 괴물을 모두 처리했다는 뜻. 사실 시작부터 낙빙으로 절반에 달하는 수를 처리하기도 했거니와, 남은 놈들도 태반이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애초 멀쩡한 상태의 라이칸이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낙승은 예견된 일이었다. 홀로 오른쪽을 맡은 공찬호는 이미 씩씩거리며 두리번거리고 있었고, 왼쪽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쿠웅. 문득 먼 곳에서 터진 굉음이 언덕 틈으로 스몄다. 어찌나 강력한 힘인지 공기가 약하게 떨리는 착각마저 일 지경이었다. 쿠웅, 쿠웅. 연달아 굉음이 들려온다. 이쯤 되면 그냥 넘길 수만은 없는 현상이었다. 제갈 해솔은 엄지 손톱을 씹으며 약간 불안해하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이건 무슨 소리죠? 그냥 적당히 교란만 해달라고 했는데.” “오빠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니야?” 말 그대로 모종의 이변이 발생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 확실하다. 만일 본대가 없었다면 진작에 도우러 왔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김수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말인즉 경사면 너머로 무언가….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어차피 언덕 전투는 끝난 것과 다름없다. 잠깐 서로를 쳐다본 사용자들은 간단히 진형을 꾸리고 신속히 언덕을 벗어났다. 그리고 완만한 경사면을 올라 끝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 쿠웅! 한층 강렬해진 소음이 귓전을 울리는 동시, 세차게 불어온 바람에 모두의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잠시 후,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뜬 사용자들은 멍하니 아래를 응시했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전원 침묵했다. 경사면 아래에는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니, 일방적인 학살이라고 해야 하나. 아래는 언덕에서 보았던 것보다 몇 배나 돼 보이는 괴물들이 있었다. 못해도 수백에 달하는 라이칸들은 마치 누군가를 지키려는 듯, 한 지점을 에워싼 채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버티지 못하고 처참히 죽어간다. 정말로 결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지만, 저지선은 이제 거의 뚫려가는 중이었다. 그것도 단 한 명에 의해서. 콰콰콰쾅! 그저 검을 한 번 휘둘렀을 뿐이다. 칼날에 걸린 건 서넛 놈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할진대 주변에 있는 놈들까지 모조리 말려들어 뻥뻥 터져 나가지 않는가. 처참하게 찢긴 사체가 허공을 점점이 수놓는다. 보는 입장에서는 진정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윽고 김수현이 왼손에 든 검을 쭉 뻗었다. 검 끝은 발악하며 달려드는 라이칸들을 향한다. 이어서 빅토리아의 영광이 허연 빛으로 물들며 수십의 빛의 칼을 토해냈다. 채채채챙! 크라라락! 눈부신 빛무리가 무리로 스며든 순간, 스무 마리에 달하는 라이칸이 일거에 핏물을 뿜으며 나동그라졌다. 그러나 김수현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숨 쉴 틈도 없이 몰아친다. 그 광경은 흡사 소용돌이와 같았다. 에워싼 라이칸들이 악을 쓰고 있었지만, 달려드는 족족 폭풍처럼 몰아치는 풍압에 휘말려 해체되고 분쇄된다. 그것은 도저히 말로 형언할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미…. 친….” 공찬호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온다. 예전에 오만에 빠져 살았을 때는 몰랐다. 그러나 천외천(天外天)을 깨달은 후, 열등감을 버리고 순수한 강함을 추구했다. 그러한 결과, 이 자리에서 적어도 하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지금 김수현이 보여주는 돌진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생각해버렸다. 멋있다고. 김수현처럼 해보고 싶다고. 얄궂은 일이었다. 1회 차서 김수현이 공찬호를 보고 했던 생각을, 2회 차에 이르러 서로 처지가 바뀐 것이다. 물론 공찬호도 언덕 전투서 오른쪽을 홀로 도맡는 등 나름 준수하게 활약하기는 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제갈 해솔이 차려준 밥상을 손쉽게 먹었을 뿐, 현재 김수현의 상황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수백에 달하는 놈들이 도처를 둘러싸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는데, 성하게 뚫고 나갈 자신은 없는 것이다. 마침 김수현도 비슷한 생각을 한 걸까. “귀찮다!” 언짢아하는 목소리가 하늘을 뒤흔든다. 휘두른 손등으로 라이칸을 터뜨리는 동시, 하늘을 향하던 무검이 180도 돌아 지상을 향한다. 그리고 땅으로 힘차게 무검을 박아 넣었다. 꾸웅, 폭음이 울리며 인근의 땅이 크게 들썩였다. 한순간 라이칸들의 균형이 이지러졌다. 단순히 검을 꽂은 게 아니었다. 해답은, 1초 후에 나왔다. 불현듯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덜덜 떨리는가 싶더니, 꽈아아앙! 흡사 수십의 지뢰를 터뜨린 것처럼 일거에 땅이 쪼개지고 뒤집혔다. 노도처럼 치솟는 기운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라이칸들이 하릴없이 하늘로 솟구쳤다. 분수처럼 뿜어지는 핏물과 찢어발겨 진 팔다리는 덤이었다. 전투는 종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내용을 추가하느라 많이 늦었습니다. 7시에 올리는 건 또 오랜만이네요. 어서 생활 리듬이 정상으로 돌아와야 할 텐데요. 아, 인터뷰 올라왔습니다. 네이버에 조아라 블로그라고 치시면 블로그 두 개가 나오는데, 그 중 (주) 조아라 블로그 사이트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잠깐 덧글을 봤는데 기쁘네요. 아직 적기는 하지만, 드디어 저를 사내로 인식해주시는 분들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하하. 0784 / 0933 ---------------------------------------------- 군신(軍神)의 전설. 땅이 뒤집히고 눈보라가 일어난다. 휘말려 올라간 라이칸들이 마치 폭죽 터지듯 공중에서 폭발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겹겹이 에워싼 포위망이 한 번의 동작으로 깨끗이 소멸했다. 남은 건 후드득 떨어지는 잔해뿐. 김수현이 살점과 선혈로 이루어진 끈적한 빗속을 돌파한다. 처참히 흔들리는 하늘 아래, 간신히 살아남은 라이칸들은 또 한 번 모여들어 김수현을 에워싸려 발악했다. 동시에 약간 뒤쪽으로 웬 커다란 그림자가 비틀대며 몸을 일으킨다. 흘깃 눈을 돌린 공찬호는 그림자를 보고서 겨우 아래 상황을 이해했다. 정확히는 왜 라이칸들이 결사적으로 막으려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림자의 정체는 라이칸 왕이었다. 다른 놈들보다 두 배나 큰 몸집을 보면 알 수 있다. 한데 놀랍게도 성한 상태가 아니었다. 전신에 잔뜩 보이는 자상(刺傷)은 둘째치고서 라도, 복부에 주먹만 한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척 봐도 온몸이 핏물로 칠갑돼 있는 게 심각한 상처를 입은 게 분명하다. 누가 그랬는지는 불 보듯 뻔하다. 그랬다. 라이칸들은 왕을 지키기 위해, 저 침입자를 왕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고 필사적으로 항전하는 중이었다. 그 의기는 장하기 그지없으나 아쉽게도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김수현이 포위망이 다시 생성될 때까지 기다려줄 리가 없는 것이다. 마치 잡기 놀이라도 하듯 가볍게 벗어난 김수현은, 발을 한 번 놀려 사선으로 짓쳐 올라간다. 삽시간에 거리를 줄여오는 침입자를 라이칸 왕이 죽일 듯이 노려본다. 그리고 안간힘을 다해 그나마 성한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보이지 않는 검. 그러나 공간을 찌그러트릴 정도의 마력을 품은 검이 휘둘러지고, 햇빛을 반사하는 예리한 발톱이 위에서 아래로 날카롭게 내려온다. 콰앙! 격돌 지점이 세찬 폭음을 뿜었다. 엉터리 같은 일이다. 그냥 검을 베었을 뿐인데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리다니. 정확한 정황을 말해보면, 부딪친 순간 무검이 품은 마력을 한꺼번에 해방해 터뜨린 소리였다. 크허어헝! 결과는 곧 나타났다. 찢어지는 울음을 토한 왕이 두어 걸음 물러난다. 혼신의 힘을 짜내 내리친 오른팔은 어깨까지 너덜거린다. 허나 김수현이라는 사용자는 절대로 승기를 놓치는 법이 없다. 한 번 더 박차 오르며 양손의 검을 시간차를 두고 베고 찌른다. 콰앙, 콰앙! 눈 한 번 깜짝하기도 전 연달아 폭음이 터졌다. 이번에는 왼팔이 날아감은 물론, 고통에 벌어진 주둥이가 왈카닥 핏물을 토해냈다. 토혈 속에는 찌꺼기 같은 것이 섞여 있다. 단순한 절삭(切削)을 넘어 내부에도 타격을 받았다는 방증이다. 왕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 콰아아앙! 숨 쉴 틈도 없이 폭음이 이어진다. 그 순간 공찬호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복부가 쥐어짜듯이 비틀리는 동시, 엄청난 마력이 뿜어져 나와 가리가리 찢어발기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검의 폭풍우가 배는 물론, 허리 전체를 터뜨리며 폭발한다. 그것은 라이칸 왕의 숨통을 끊는 최후의 일격이었다. 쿠웅. 마침내 건장한, 아니 건장했던 육체가 둔중한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네 번째 폭음은 라이칸 왕의 숨통을 끊는 최후의 일격이었다. 걸레짝이 된 시체서 핏물이 꿀렁꿀렁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라이칸 왕이 쓰러지는 걸 기점으로 전투는 잠시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김수현이 질척해진 눈밭을 가로질러 왕의 사체를 밟고 오른다. 얼굴은 물론, 갑옷이고 망토고 전신이 피와 살점으로 점철돼 있었지만, “…흠.” 차분히 돌아보며 살며시 미소 짓는 김수현의 모습은 진정으로 군신(軍神)다웠다. * 비릿한 피 내음이 코를 푹 찌른다. 아침 식사 때 시작된 전투는 점심이 채 되기도 전에 종결됐다. 수적으로 굉장히 불리한 전투였으나, 왜 그런 말도 있잖은가. 전투는 숫자로 하는 게 아니라 사람으로 하는 거라고. 아마 14명과 1000마리 정도 됐으려나? 정확한 수는 모르지만, 여하튼 대승이라고 봐도 부족함 없는 전투였다. 차소림이 부상당한걸 제외하면 우리측 피해는 전무하니까. “괜찮습니까? 많이 다쳤어요?” “아. 크, 클랜 로드.” 가까이 다가가자 차소림이 화들짝 놀랐다. 한창 치료받던 중인지 갑옷은 옆으로 벗어놓고 복부는 훤히 드러나 있다. 얼마나 옷을 올렸는지 봉긋하게 부푼 가슴 아랫부분이 살짝 드러났을 정도. 약간 야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래도 빠끔히 노출된 배꼽은 의외로 귀여웠다. 차소림은 배꼽도 근엄하고 의젓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아무튼, 허준영이 언덕으로 올라간 라이칸이 발톱을 뽑아 저격한 거라고 말해줬다. 들어보니 꽤 위험한 상황도 연출됐다고 한다. 그래도 찰나의 순간 우정민이 역으로 저격하는데 성공했고,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고. “저, 저….” 안절부절못하는 차소림. 자꾸만 눈을 피하더니 살그머니 고개를 숙인다. 이해한다. 일신의 무력이 약한 것도 아니고, 한데 오직 홀로 다쳤으니 부끄러운 마음도 없잖아 있으리라. 특히 차소림 성격이라면 더더욱. “괜찮습니다. 항상 좋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잖아요?” 어깨를 짚으며 위로조로 말하니 차소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예?” “조, 좋은 모습이 아닙니까?” “……?” 차소림은 잠깐 고개 숙여 자신의 배를 쳐다보고는 도로 나를 바라봤다. “…….”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허나 낯을 잔뜩 붉히며 간절함이 깃든 눈동자를 보인다.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물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항상 믿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적당히 에둘러 말했다. 그러자 차소림이 안색에 화색이 돌았다. “가, 감사합니다! 예쁘게 봐주셔서….” “그래요. 그럼 치료하고 있어요.” 왜 감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두어 번 손뼉 쳐 이목을 집중시켰다. “자, 30분 안에 정리하도록 합시다. 여러분도 어서 이 장소에서 벗어나고 싶겠지요?” 그러자 동료 전원이 끄덕거리며 동의했다. 사체가 천지에 널려 있는데, 아무도 여기서 계속 있고 싶지는 않을 터. 차소림의 완벽하게 회복하는 즉시 떠나는 게 좋으리라. 하지만 그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눈을 돌려 라이칸 왕의 사체를 찾아낸 후, 나는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심히 훼손된 상태이기는 하나 그래도 얻어낼 것은 많다. 따뜻한 털가죽이나 맛 좋은 고기는 부수적인 수입에 불과하다. 반드시 얻어야 하는 건 바로 왕이 체내에 있는 ‘열쇠’. 그럼 오랜만에 도축이나 좀 해볼까? “응?” 잠시 후, 사체를 앞에 두고 무검을 뽑으려는 찰나였다. 돌연히 어디선가 이상한 눈초리가 느껴졌다. 공찬호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 왜 저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지? 부담스럽게. “왜? 가죽 좀 벗기고 고기 좀 발라내려고 하는데.” “…….” “도와주고 싶어서?” “…….” 연이어 말을 걸었으나 공찬호는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지그시 눈을 감더니 조용히 몸을 돌렸다. 서서히 멀어지는 공찬호를 보니 약간은 어이없는 기분이 든다. 저래 놓고 나중에 고기는 잔뜩 먹겠지. …양이 많으니 상관없으려나. * 설원으로 들어오자마자 대규모 전투를 치른 우리는, 이후 단 한 번의 전투도 치르지 않고 행군할 수 있었다. 그것도 무려 이틀이라는 시간 동안이나 말이다. 결국 이 설원은 라이칸 부족이 꽉 잡고 있었다는 뜻인데, 우리와의 전투로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으니 한동안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도망친 놈들도 여럿 있을 테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테고. 그렇게 끝없는 설원을 횡단한 우리는 입성한 지 나흘 만에 1차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췄다고 해야 하나. 왜냐면 더는 걸어서 갈 수 없는, 거대한 바다가 눈앞에 나타났으니까. 먹물 빛이 물든 하늘 아래, 구름 그림자가 드리운 어두운 바다가. 쏴아아아…. 쏴아아아…. 철썩…. 철썩…. 수면을 가르며 오는 물살이 우리가 서 있는 눈의 대지에 부딪혀 희게 부서진다. 진한 청 빛이 흐르는 차가운 설원 바다는 굉장히 드넓고 광활하다. 곳곳의 서 있는 빙하로 시야가 방해 받기는 하지만, 끝없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바다는, 평평한 수면과 하늘이 맞닿아 경계를 이루는 수평선이 보일 지경이었다. “오오….” “와아~.” 백한결과 안솔이 감탄하는 눈으로 바다를 응시한다. 비단 둘뿐만이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정신 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신기하겠지. 시냇물이나 강은 몇 번 봤어도 바다는 아마 처음 보는 것일 테니까. 물론 홀 플레인에서. “그러니까 이 바다 어딘가에 그 신녀곡이라는 장소가 있다는 거죠?” 한참 동안 바다를 바라보던 김한별이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리자 우정민이 머리를 주억였다. “나도 그렇게 읽었어. 그런데 이상하군. 곡이라는 건 골짜기나 깊은 굴을 뜻하는 말로 알고 있는데…. 산이라면 모를까, 어떻게 바다에서 찾으라는 거지?” “그러고 보니 확실히 이상하네요. 하지만 기록에는 분명 바다라고 나오지 않나요?” 도란도란 말을 나누는 김한별과 우정민을, 일부는 경청하고 일부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이상하게 쳐다본다. 이 두 그룹(?)의 차이는 하나. 비밀 도서관에서 가져온 기록을 읽고 안 읽고의 차이. 오면서 기록을 한 번이라도 정독했다면 둘의 대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저기 둥둥 떠 있는 것들이 뭐예요? 혹시 빙하인가요?” …아무래도 안솔은 ‘관심 없음.’ 이라는 그룹인 모양이다. 반짝반짝 눈을 빛나는 눈으로 나를 꾹꾹 잡아당기며 물어보는 모습이 선웃음만 나온다. 아무튼, 안솔의 말대로였다. 바다는 망망대해였으나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다. 육안으로 쳐다보면 저 멀리 허연 색의 무언가가 수면에 자리 잡고 있는 게 보인다. 비교적 작아 보이는 것들은 둥둥 떠다니나, 커다란 것들은 육중한 몸을 단단히 뿌리박고 서 있다. 그 수는 상당히 많아 흡사 바다에 수림이 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랬다. 우리는 이제부터 저 바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단, 여기서는 제갈 해솔의 수송 능력을 제한해야 한다. 사용이 불가능하다는 게 아니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즉 아껴놔야 한다는 소리였다. 수송이 사기성 짙은 편리한 어빌리티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대기 시간이 있다는 단점도 존재한다. 이 대기 시간이라는 것을 잘 계산해야 한다. 신녀곡이 있는 장소는 알고 있다. 내 예상에 따르면, 우리가 여기서부터 출발한 시점부터 목적지에 도달해 일을 처리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그 대기 시간 내에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수송 어빌리티는 일을 처리한 직후를 위해 남겨놔야 한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때 분명 필요한 상황이 올 테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매우 중요한 문제가 하나 발생한다. 그건 바로…. “히익!” 그 순간이었다. 마치 어린애처럼 계속 내 망토를 쥐고 있던 안솔이 불현듯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크게 움찔한 기척이 망토를 타고 전해졌다. “어, 어마?” 이어서 또 한 명의 누군가가 이상한 신음을 흘렸다. 제갈 해솔이 깜짝 놀란 낯으로 뒷걸음질 치다가 돌연히 발이 꼬여 주저앉는다. 사소한 소란이기는 했지만, 다른 동료들의 시선이 모조리 두 명에게로 쏠렸다. 그러나 안솔과 제갈 해솔은 한동안 멍하니 바다를 응시하다가 불현듯 서로를 쳐다봤다. “어, 언니도 들었어요?” “으응. 그럼 너도?” “마, 맞아요. 뭐, 뭐라고 들으셨는데요?” “그게….” 무언가를 말하려던 제갈 해솔이 입을 벌린 채 고개 돌렸다. 바다를 바라보는 망연한 눈이 한껏 가늘어졌다. 오호라…. 나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는 사용자들이라서 그런 걸까? 아무래도 벌써 알아차린 모양이다. 이 바다의 함정을. ============================ 작품 후기 ============================ 노우 노우. 아니에요. 저 사내라고, 로유진이라고 인정해주시는 덧글 엄청 많습니다. 거의 대부분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죠. 그러므로 저는 사내라고 인정받았습니다. 이제 로유미도 영원히 안녕이네요. 잘 가 로유미~. :D 0785 / 0933 ---------------------------------------------- 황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는다. “세이크리드 해안.” 무뚝뚝한 음성이 들렸다. 근원이 공허한 눈으로 바다를 보고 있었다. 살금살금 옆으로 다가가자 힐끗 나를 쳐다본다. 근원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나를 곁눈질하더니 눈을 한 번 깜박인 후 도로 바다를 응시했다. “아득한 과거…. 이 일대는 빙하가 아닌 해안가였습니다.” 더 설명해달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는지 기계처럼 말을 잇는다. “해안가였다고요?” 제갈 해솔이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근원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대 왕국 멤논. 이달칸 부족의 정복 전쟁으로 멸망하기는 했지만, 한때 이 해안가를 중심으로 번성한 부유한 해상 왕국이었습니다.” “멤논? 이달칸?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게 이 해안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 거예요?” “무덤입니다.” “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제갈 해솔이 의아히 반문했다. “이달칸은 멤논을 정복한 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든 인간을 처형해 이 바다에 수장했습니다.” 시이이이. 돌연히 차디찬 바람이 불었다. 바람치고는 이상한 소리였다. 흡사 원통한 비명처럼 들렸다고 해야 하나. 제갈 해솔은 얼빠진 얼굴로 근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제 존재가 이 일화를 기억하는 이유는.” 근원은 비로소 시선을 거두고 우리를 돌아봤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즈음. 바다가 급격히 차가워지는 동시, 이 세이크리드 해안을 중심으로 주변 일대가 서서히 변화했기 때문입니다.” “그 변화라는 게 이 해안가가 설원으로…. 이 말이에요?”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알겠습니다만, 이상 징후일 뿐입니다. 가장 가능성 높은 인과 관계를 언급했을 뿐, 정확한 원인까지는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아, 괜히 들었어. 갑자기 무서워지잖아.” 이유정은 어깨를 움츠리더니 하승윤을 와락 껴안았다.(하승윤은 졸도할 것만 같은 표정으로 행복해했다.) 이 바다에 얽힌 일화는 나도 알지 못한 터라 흥미롭게 들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빙하의 설원은 1회 차 때도 아틀란타의 관심사로 부상한 적이 있다. 유적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관심 받기는 충분하지만, 그것 말고도 바다를 탐색하면서 망령을 봤다는 사용자들이 속속히 등장했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연기 속으로 사라져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거나 유령선을 봤다는 등 이상한 소문이 여럿 돌았는데, 명확하게 확인된 사실은 하나도 없다. 실제로 바다를 탐험한 무수한 사용자 중 거의 8할에 가까운 인원이 무사히 생환했으니까. 허나 바꾸어 말하면 2할 정도는 저 바다에서 사라졌다는 소리다. 그것도 소리소문 없이. 어쨌든 실지로 망령이 존재한다손 쳐도, 우리와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다. 중요한 건 저 세이크리드라는 해안 어딘가에 있는 신녀곡을 찾는 것이니까. 물론 위치를 기억하는 만큼, 괜한데 신경 쓰기보다는 신속히 통과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리라. 그럼 이제 어떻게 저 바다를 건너느냐가 화두인데. 짝짝. 두어 번 손뼉 치자 이목이 쏠렸다. 모두 근원의 말을 들었는지 썩 좋은 낯빛은 아니었다. “얼굴들이 왜 그럽니까? 망령 만나는 게 처음도 아니고. 폐허의 연구소, 얼어붙은 숲, 용이 잠든 산맥…. 한 번씩은 겪어봤잖아요?” 그러자 누군가 “나는 처음인데.” 라고 종알거렸다. 제갈 해솔의 음성이다. 흘깃 쳐다보니 휙 고개 돌려 아련한 눈으로 바다를 쳐다본다. 반응 속도가 좋군. “그보다는 현재 당면한 문제를 하나 해결해야 해요.” “문제요?” 누군가의 반문에 나는 조용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예. 이제부터 저 바다를 건널 길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 동료들은 어리둥절한 낯을 보였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당연히 수송으로 이동할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길을 만든다니. 아마 사정을 모르는 처지였다면 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수송 어빌리티는 어떻게 해서든 아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동원해 설득했다. 이러니저러니 에둘러 말했지만, 결국 결론은 간단했다. 신녀곡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거니와, 수송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놔야 한다. 특히 수송 어빌리티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들먹인 점이 주효했다. 목소리에 너무 힘을 준 탓일까. 긴 설득을 마치니 제갈 해솔이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죠?” “아니. 이상해서요.” 제갈 해솔이 고개를 갸웃했다. “우선 무슨 말인지 이해는 했어요. 나름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기는 한데….” 스리슬쩍 말끝을 흐리더니 입가에 묘한 미소가 자리 잡는다. 갑자기 거북해지는 기분이다. “만날 셔틀 취급하시던 분이, 갑자기 그렇게 말씀해주니 조금 이상하잖아요?”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 가볍게 말했으나 그 말이 품은 저의는 결코 가볍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진한 호기심을 품은 눈초리가 가슴을 쿡 찌르고 들어오는 듯했다. 어쩌면 농담이 아니라, 일부러 농담조로 말한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아무튼, 그럼 어떻게 이 바다를 탐험하겠다는 소리지?” 다행히 허준영이 적기에 화제를 돌려줬다. 나는 제갈 해솔에게서 시선을 거둔 후, 바다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잠시 쭈뼛거리는 했지만, 곧 동료들이 뒤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약 5분 정도 걷자 바다가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바다는 그냥 넓다고 표현하기는 부족할 정도로 광대무변(廣大無邊)의 절정이었다. 나는 집게손가락으로 바다의 한 가운데를 가리켰다. “모두 빙하가 눈에 보이실 겁니다.” 광활한 크기에 못지 않게 바다에는 빙하도 굉장히 많이 떠 있다. 개중에는 거대한 빙산이 이어져 산맥을 이루는 것도 심심찮게 보이니, 거진 빙하의 숲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우리는 이 지점부터 가장 가까운 빙하까지 걸을 수 있는 길을 만들 겁니다.” 발로 물기 젖은 눈밭을 툭툭 건드린 후, 나는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바로 바다를 얼려서 말이지요.” 당연히 바다 전체를 얼리자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건 애초 불가능한 일이니까. 허나, “물론 전부가 아닌, 우리가 걸을 수 있는 정도로만 만들면 됩니다. 요컨대….” “빙 계열 마법을 이용해 얼음 길을 만들라는 뜻이군요?” 제갈 해솔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은 좋아하지만, 이상하게도 제갈 해솔은 그렇지 않다. 상정 외의 존재라고 해야 하나. 사실대로 말하면 약간 불안한 마음이 생긴 것 같다. 차소림이 물었다. “바닷물을 얼려서 길을 만든다니….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가능하기는 해요. 저번에 하연이 언니가 비슷한 마법을 구사한 적이 있으니까요.” 김한별의 말에 서너 명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아마 ‘야만 왕의 무덤’ 원정을 떠올린 것이리라. 그 당시 정하연은 사방을 에워싼 식물 군단을 한 번의 주문으로 모조리 얼려버리지 않았는가. “하지만….” 무언가 말하려던 김한별은 어색이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닫았다. “맞아요. 가능하기는 하죠. 하지만 그때와 현재의 상황은 달라요. 이걸 말하고 싶었던 거죠?” 또 제갈 해솔이 나섰다. 김한별은 살짝 눈을 치떴지만,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를 얼린다. 길을 만들려고 바닷물을 얼린다. 이 두 말의 공통점은 얼린다는 것만 있을 뿐, 목적은 판이하게 다르답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후자가 훨씬 더 어려워요.” “그렇지. 마력의 배분은 물론, 세심한 조절까지 필요로 하니까.” 이어지는 설명에 하승우가 부연해 받는다. “옳은 말씀이기는 한데, 왜 자꾸 은근슬쩍 반말이에요?” 제갈 해솔은 톡 쏘아붙이더니 두 손을 살며시 모으며 몸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아무튼, 그래서요. 물론 클랜 로드의 생각도 좋지만, 저한테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났거든요?” “…무슨 방법입니까?” “날개, 있죠?” “…….” 제갈 해솔은 싱긋 미소 지었다. “저번에 보니까 날개가 있는 것 같던데….” …젠장, 이럴 줄 알았다. 제갈 해솔의 말인즉 용족화를 사용하라는 뜻이다. 그래. 왜 이 말을 안 꺼내나 했다. “그 날개로 이 바다를 선회하시면서 신녀곡이라 추정되는 장소를 찾는 거예요. 물론 저를 데리고 말이죠. 그리고 장소를 찾으면 그 다음은…. 아시죠?” “아. 맞아. 그거 되게 좋다. 어쨌든 장소만 찾으면 만사 OK잖아?”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전원 수긍하는 낯빛을 보였다. 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단순한 촉인지 아니면 감을 잡은 건지는 몰라도, 적어도 하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즉 제갈 해솔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여태껏 실컷 멋대로 써왔으면서 왜 갑자기 여기서 아끼려고 하는 거예요?’ 곰곰이 생각에 잠겼으나 딱히 이거다 싶은 돌파구는 보이지 않는다. 아주 잠깐, 갑갑한 가슴을 이기지 못해 그냥 확 비밀을 밝혀버릴까 생각이 들기는 했다. 그러나 현재로써는 결단코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선웃음이 나왔다. 상황이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한시라도 빨리 도착해야 하는 처지인데 비밀을 숨기려는 일환으로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다니. 솔직히 짜증 난다. 여하튼 결국에는 말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건 썩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군요.” “어머. 왜요?” “확실히 날개는 있습니다만. 그렇게 형편 좋게 사용할만한 능력은 아닙니다.” “제한이 있다는 건가요?” “예. 완전한 게 아니라 애초 제한된 능력으로 습득했으니 어쩔 도리가 없지요.” “흐응.” 제갈 해솔이 팔짱을 끼며 숨을 흘렸다. 언뜻 보면 수긍한 체 보여도, 꼭 ‘이렇게 나오시겠다?’ 라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 제한된 조건 안에 신녀곡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느니 제 계획대로 탐색하면서 조금씩 사용하는 쪽이 더 낫겠지요.” “그러니까 어쨌든 수송 능력을 아껴보자는 말씀이시죠?” 제갈 해솔은 무언가 확증을 얻으려는 듯 물었고, “탐험 지역이 바다가 아닌 육지였다면 이렇게 고민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나는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말로 응수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제갈 해솔은 으쓱 어깨를 들먹였다. “아~. 뭐,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우리 마법사들이 고생하는 수밖에요.” 후유, 어떻게든 납득한 건가. 어쩌면 그냥 넘어간 걸지도. 속으로 가슴을 쓸어 내리며 나는 다시 바다를 응시했다. “그래요. 되든 안 되든 우선 한 번 해보기로 하죠. 가장 가까운 빙하로 첫 얼음 길을 잇는데 성공하면, 아마 그 후로는 쉬울 겁니다. 보면 알겠지만, 바다에 떠 있는 빙하의 거리가….” 그때였다. 『사용자 제갈 해솔의 고유 능력, ‘하늘을 굽어보는 마음의 눈’의 발동을 감지합니다!』 『사용자 김수현의 고유 능력, ‘제 3의 눈’이 반응합니다!』 『동 랭크 판정…. 격의 차이를 확인했습니다.』 『‘제 3의 눈’이 ‘하늘을 굽어보는 마음의 눈’을 간파하는 데 성공합니다!』 “…….” 허공에 주르르 출력된 메시지를 무심코 읽은 찰나, 어느새 시야는 한껏 가늘어져 있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제갈 해솔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늘을 굽어보는 마음의 눈. 제 3의 눈만큼은 아니지만, 사용 여하에 따라 어느 정도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럼 제갈 해솔은 도대체 뭘 보려고 했던 거지? …설마. “이크. 또 안 되네.” 잠시 후, 제갈 해솔은 장난치다 걸린 개구쟁이처럼 혀를 쏙 빼물었다. 그리고 배시시 미소 짓더니 바다를 향해 총총히 이동했다. “좋아요. 얼음 길이라고 했죠? 제가 먼저 한 번 해볼까요? 나름 재미있을 것 같은데.” 그 순간 나는 자동적으로, 느릿하게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사용자 제갈 해솔.” 목소리는, 스스로 들어도 놀랄 만큼 차가운 음성이었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상당히 엉터리 같은 실수를 저질렀네요. 그제 오늘 내용을 적다가 아차 하고 말았습니다. 적다 보니 설정 충돌이 생겼습니다. 하나는 세이크리드 해안에 관한 설정과, 또 하나는 신녀곡까지 가는 여정에 관련된 설정인데…. 전자의 설정대로 이야기를 진행하면 후자의 설정에 오류가 생기는 경우였습니다. 이게 톱니바퀴 하나가 어긋나니까 전체가 어긋나는 기분마저 들더군요. 그나마 미리 오류를 발견해서 다행이기는 했지만, 진짜 오만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열쇠…. 수송 능력을 아껴야 하는 상황…. 거기다 대기 시간…. 근데 이렇게 가면 해안 설정이랑 어긋나고.’ ‘수호의 보석을 가져왔다고 할까? 아, 근데 그건 마력 제한이 있으니까 안 되겠네.’ ‘이렇게 가면 되기는 하는데…. 그럼 이 캐릭터가 가만히 있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 아틀란타나 야만 왕의 무덤에서 드러낸 적도 있고.’ ‘아이 씨, 괜히 천재로 설정해놔서…. ㅜ.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방법을 찾아내기는 했습니다. 원래는 후반에 등장 예정인 떡밥인데, 이번 파트로 당겨 썼습니다. 아이고, 아까워 죽겠네요 정말. 그리하여 어떻게 끼워 맞추는 데는 성공했지만, 사실 애초 심사숙고해서 플롯을 작성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문제였겠지요. 앞으로는 조금 더 생각하고 적도록 하겠습니다. 심려를 끼쳐 드린 점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 드립니다. _(__)_ 0786 / 0933 ---------------------------------------------- 황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는다. 철썩, 얼음에 부딪힌 물결이 희게 부서져 면을 침범한다. 진한 청색과 남색이 뒤섞인 바닷물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어둡다. 그러나 잔잔한 수면은 거울과도 같아 덩그러니 솟아난 빙하를 거꾸로 비추고 있었다. 가끔 바다가 몸을 뒤척일 때마다 생기는 파문에 휩쓸려 일렁일 법도 한데, 수면에 보이는 빙하의 그림자는 이상할 정도로 깨끗했다. 흐릿해지기는커녕 미동도 보이지 않는다. 14명은 그 바다를 걷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바다를 일직선으로 가르는 얼음 길을. 비록 마법으로 만든 설판(雪板) 위에 서 있기는 했지만, 사용자들은 분명히 바다를 탐험하는 중이었다. 해안가부터 빙하까지 가로지르는 얼음의 길은 무척이나 깔끔했다. 윗면에는 반들반들한 윤기가 흐르고 옆면은 칼로 깎아낸 것처럼 네모나게 각이 졌다. 흡사 장인의 정성이 깃든 세공품을 보는 듯했다. 그러나 얼음 길 전체에 흐르는 은은한 푸른빛은 마력으로 만들어낸 길이라는 걸 시사하고 있었다. 말인즉 바닷물을 얼린 사용자의 마력 조절 실력이 굉장히 뛰어나다는 방증이다. 그냥 무작정 얼리는 거라면 모를까. 이렇게 신경 써서 모양을 만드는 건 어지간한 마법사에게는 힘든 일이다. 그래도 가끔 물결이 부딪칠 때마다 얼음의 길이 기우뚱 움직여 걸음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오, 오줌 쌀 것 같아.” 균형을 잡으려 양팔을 좌우로 쭉 뻗은 이유정이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중간중간 골반을 이리저리 비트는 게 괜히 하는 말은 아닌 듯하다. 바다는 잠잠히 흐르는 만큼 사방에 정적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고요가 지나치면 편안하다기보다는 외려 이상한 기분이 든다. 흡사 다른 세상, 다른 공간으로 들어온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게다가 근원이 말하지 않았는가. 세이크리드 해안은 무덤이라고. 그러니 이 을씨년스러움에 방광에 찡한 느낌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태생부터 둔감하거나 귀신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용자들은 얼음의 길을 잘만 걸어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달리 생각해보면 꽤 신선한 경험이기도 했다. 탐험 대부분이 육지에서 이뤄지는데, 얼음 길을 만들어 바다를 탐험하는 건 쉬이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니잖은가. “정 그러면 여기서 싸던가. 보는 게 괴롭다 야.”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몸을 꼬니 보다 못한 진수현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유정은 고양이처럼 눈을 흘겼다. “여기다 싸라고?” “뭐 어때서. 우리야 먼저 앞으로 가면 되고. 그리고 사방이 바다인데 슬쩍 실례해도 상관없잖아?” “그런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무덤인데….” “에이, 이미 죽은 사람들인데 별 신경을 다 쓰네. 또 그네들 입장에서도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닐걸?”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꺼낸 진수현이 넉살 좋게 말을 잇는다. “생각해봐. 오래간만에 보는 살아 있는 사람이잖아? 그것도 삼삼한, 탱탱한 아가씨가 희멀건 한 궁둥이를 까준다는데. 남자 망령들은 그 야릇한 눈요기에 분명 기뻐…. 악!” 이유정은 처음에만 경청하다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진수현을 때렸다. 낄낄대던 진수현은 그대로 바다에 빠질 뻔했고, 이내 투덕거리는 소리가 주변의 적막을 깨트렸다. 그러나 곧 소음은 황급히 사그라졌다. 이유정과 진수현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다툼을 멈추고 앞을 바라봤다. 고개 돌린 남다은이 지그시 노려봤기 때문이다. 흡사 북풍한설을 연상케 하는 눈빛은 둘을 충분히 침묵시킬 수 있을 만큼 차가웠다. 스리슬쩍 떨어지면서도 이유정은 흘깃 쳐다보는 걸 잊지 않았다. 정확히는 맨 앞에서 휘적휘적 걸어가는 김수현을. ‘사용자 제갈 해솔.’ 단 한 마디였다. 그러나 그 한 마디로 해안가의 분위기는 싸늘히 얼어붙었다. 얼음 산을 건너올 때와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 전신을 짓누르는 듯했다. 이내 기세를 갈무리한 김수현이 여느 때처럼 얼음 길을 만들 것을 명령했지만, 그 후 분위기가 묘해졌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두 명을 제외하면 김수현이 왜 그랬는지 정확히 아는 사용자는 없다. 그저 제갈 해솔이 어색한 미소로 사과한 걸로 보아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만 어렵사리 추측할 뿐. 물론 제갈 해솔이 감초처럼 나서기는 했지만, 그것 가지고 화낸 거라 보기는 어렵다. 서로 생각한 계획은 달랐으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설명하는 와중 느닷없이 말을 끊고 노려보지 않았는가. 어쨌든 이래저래 복잡한 기분이었지만, 결국 현재로써는 쥐 죽은 듯이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 잠시 후, 선두에서 걷던 김수현의 걸음이 멈췄다. 비로소 첫 빙하에 다다른 것이다. 이로써 우선 1차 목표는 달성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해안가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지만, 도착한 이상 주변 빙하는 상대적으로 가까이 있으니까. 거리가 짧아졌으니 길을 만들기도 훨씬 쉽지 않겠는가. 첫 번째 빙하의 크기는 10미터는 훌쩍 넘는 높이를 자랑했지만, 다른 빙하와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였다. 느긋이 구경하던 하승우는 가만히 빙하를 응시하는 김수현에게 다가갔다. “이제 어느 방향으로 길을 만드실 겁니까?” “음?” 김수현이 돌아보자 하승우는 씩 웃어 보였다. “이 빙하가 신녀곡이라고 보기 어려운데요. 서두르지 않으면 해가 져도 못 찾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군요.” 무성의한 음성이기는 했으나 김수현은 수긍했다. 그리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더니 집게손가락으로 왼쪽을 가리켰다. 약 15미터 가량 떨어진 거리에 눈앞의 빙하보다 조금 더 커 보이는 빙하가 떠 있다. “저기는…?” “곡, 이라는 말에 주목했습니다. 어중간한 크기의 빙하는 제외하는 게 낫겠지요.” “그럼 큰 빙하가 몰려 있는 곳으로 가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냥 큰 정도가 아니라, 거의 산만한 크기의 빙하 부근을 우선으로 수색할 생각입니다.” 하승우는 과연, 이라며 납득했다. 얘기를 엿듣던 제갈 해솔은 얼른 김수현이 가리킨 방향으로 길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곧 주춤할 수밖에 없었는데, 몸을 돌린 하승우가 제지했기 때문이다. “물러서. 이번에는 내가 해보지.” “네가 한다고?” 제갈 해솔이 의아한 낯빛을 보였다. 어느새 둘은 자연스럽게 말을 놓고 있었다. “그래. 한 번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거든.”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린 하승우는 곧바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제갈 해솔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김수현이 묵인하자 얌전히 물러섰다. 한 가지 특이한 건 지팡이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양손으로 수인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더블 캐스트였다. “────. ────. Et Confestim, Ice Via.”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하승우의 양손이 시퍼런 빛으로 둘러싸여 이글이글 불타오른다. 영창을 끝낸 후 하승우는 바닷물 속으로 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물에 잠긴 채로 가볍게 손뼉 쳤다. 그 순간이었다. 투웅! 쩌저저저저저저적! 손뼉 친 것치고는 둔중한 소음이 터졌다. 세차게 일어난 물보라가 얼음 길을 덮쳤다. 이어서 푸른 빛이 수면을 가르는 동시, 바다가 우두둑우두둑 얼어붙는다. 불시에 쏟아진 물세례에 난리를 피운 것도 잠시, 사용자들은 흥미로운 눈초리로 바다를 관찰했다. 푸른빛이 가로지르는 곳마다 바닷물이 얼어붙으며 새로운 형태의 길을 만들어낸다. 10미터를 전진할 즈음 약간 힘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하승우가 한층 마력을 불어넣자 무사히 목표한 빙하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이렇게 또 하나의 길이 만들어진 것이다. “에엑. 이번 길은 되게 거치네.” 그러나 길을 슬쩍 쳐다본 하승윤이 작은 목소리로 불평했다. 그랬다. 하승우가 만든 길은 제갈 해솔이 만든 길과 비교해 얼음이 상당히 울퉁불퉁했다. 걷는데 큰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고르지 않은 면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내 주고 있었다.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쳐다보던 제갈 해솔은 소리 죽여 웃었다. 사실은 보란 듯이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나 하승우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기색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외려 미소 지으며 제갈 해솔을 응시했다. “이로써 하나는 확실해졌군.” “응? 뭐가?” “네가 나보다 마력이 높다는 사실을. 아, 물론 조절 능력도. 너는 확실히 지켜볼 가치가 있겠어.” “어머. 싫다. 스토커라니. 하지만 어쩌지? 나는 사용자 정보를 알려줄 생각이 없는데. 그리고 너무 쉽게 확신하는 거 아니니?” 제갈 해솔은 깍지 낀 양손으로 기지개를 켜며 얄밉게 이죽거렸지만, 하승우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외려 눈을 날카롭게 번뜩였다. “아니. 전혀. 너비나 두께는 비슷하게 맞췄어. 하지만 속도는 확실하게 차이가 났거든. 너보다 내 거리가 더 짧았는데 말이지. 거기서 확신을 얻었다.” “그~래?” “글쎄. 우선은 그렇다고 해두지. 일 년 차 마법사 씨.” “…….” 후후 웃은 하승우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새로운 얼음 길을 걸었다. 이내 한 명 한 명 이동하는 걸 바라보는 제갈 해솔의 낯에 웃음이 사라졌다. 가늘어진 눈 틈으로 누군가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눈동자가, 돌연 흰자 부분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아, 당해보니까 알겠네. 기분 참 은근하게 더럽다 진짜.” 쯧 혀를 찬 제갈 해솔은 총총히 걸었다. 벌써 앞서가는 김수현을 향해서. *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몇 시간도 전에 시작된 바다 탐험은 하승우의 우려대로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됐다. 거대한 빙하들을 주로 탐사했으나 신녀곡이라 생각되는 장소는 나오지 않았다. 딱 한 번 자연적으로 생성된 얼음 동굴을 발견하기는 했다. 발견 직후 동료들은 호들갑을 떨며 동굴 안으로 쳐들어갔고, 안쪽 깊숙한 곳에서 손톱만 한 얼음 결정 몇 개를 얻을 수 있었다.(진수현은 이게 바로 천고의 영약이라며, 전설에 등장하는 공청 석유가 굳은 거라며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확인 결과 보통 얼음에 불과했다.) 그렇게 수십 개의 길을 잇고 어지간한 곳을 돌아보는 동안 동료들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좋은 의미로는 얼음 길을 걷는데 익숙해졌다는 뜻이고 나쁜 의미로는 질렸다는 뜻이다. 정확히는 신녀곡을 찾는 데 지쳤다고 해야 하나. 물론 못 찾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어디까지나 동료들의 처지였고, 나는 안 찾고 있다는 말이 옳으리라. 실은 일부러 길을 돌았다. 한 방에 찾으면 의심이 증폭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간중간 용족화로 주변을 둘러보거나 기록을 탐독하는 등, 찾으려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중점을 두고 탐색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어휴. 여기도 허탕이네.” 오른쪽 끝 부분 탐색이 끝난 후, 하승윤이 빙산에 살며시 몸을 기대며 입을 삐죽였다. 다른 동료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크게 힘들어 보이지는 않지만, 지루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하기야 웬만한 장소는 돌았다고 봐도 무방하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여기 없는 게 아닐까요?’ 라는 말이 나올 때도 됐는데. “혹시 우리가 장소를 잘못 짚은 건 아닐까요?” 생각하기가 무섭게 누군가 말을 꺼냈다. “안솔? 이럴 때 네 감 좀….” “모르겠어요.” 이유정은 마침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으나 안솔은 시무룩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위기가 조금씩 침체되는 게 느껴졌다. 사실 이미 신녀곡은 발견한 것과 진배 없다. 장소는 현재 서 있는 위치와 무진장 가깝다. 그냥 약간 비틀어져 보이지 않을 뿐. 제 3의 눈으로는 훤히 보인다. 이제 슬슬 드러낼까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러나 아직은 누군가 깨달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잖아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후, 나는 일부러 소리 나게 기록을 접고 연초를 털며 앞으로 나섰다. “조금 더 둘러보도록 하죠. 한 두어 시간 탐색해보고, 없으면 다른 수단을 강구해보겠습니다.” 어쨌든 끝이 보인다고 생각했는지 동료들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한 시간 정도 더 탐험해보고, 그래도 발견하지 못하면 돌아가는 길에 드러내는 게 낫겠다. “어이, 잠깐만.” 그때 공찬호가 갑자기 우리를 불러 세웠다. 공찬호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방금 탐험을 마친 빙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지?” “여기 좀 봐봐.” 공찬호가 수라마창으로 빙산을 가리켰다. “어디를 보라는 거야?” “여기 말이다. 여기.” 까닥까닥, 수라마창이 흔들린다. 창 끝을 따라가 보니 울퉁불퉁한 빙산의 한 부분이 심히 부서져 있는 게 보였다. 그 순간 혹시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남다은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왜요?” “이거 내가 아까 부순 자국이거든.” “…네?” “아니 아니. 이게 여기서 부순 게 아니라 저쪽에서 부쉈어. 그러니까 우리 지금 한 바퀴 쭉 돌아온 거 아닌가?” 그 말이 나온 찰나였다. 일부는 여전히 갸우뚱거렸지만, 일부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머리 회전이 빠른 이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것이다. 나는 불끈 주먹을 움켰다. 이걸 공찬호가? “혹시 착각하신 거 아니에요?” “절대로 아니야. 한 서너 시간 전쯤인가? 하도 허탕만 치길래 열 받아서 빙산을 뻥 걷어찼거든.” “…….” “그러다 넘어질 뻔해서 창을 박고 겨우 균형을 잡았는데, 그 자국도 확실하게 남아 있어.” 공찬호는 또 다른 방향을 가리켰고, 그곳에도 확실히 흔적이 남아 있었다. 걷어찬 흔적과 창을 박은 흔적이. “결계…. 인가.” 침음이 흘러나오기는 했지만, 노련한 하승우가 곧장 정답을 말했다. “그건 아닐걸요? 결계 흔적은 느끼지도 못했는데.” “그에 관해서는 이미 탐색을 마쳤습니다. 아닐 가능성이 82.8%에 육박합니다.” 제갈 해솔과 근원이 반론하며 나섰다. 그러나 하승우는 외려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너희가 말하는 건 대응 결계에 불과해. 설마 결계가 마력으로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러자 제갈 해솔한테서 큭 하는 소리가 들렸다. 쟤가 저런 소리 내는 건 처음 듣는다. “뭐, 아무래도 좋아. …클랜 로드?” 하승우는 시시하다는 듯 웃고는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 누구한테(?)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매우 정중히 입을 열었다. “혹시, 진로(進路) 결계라고 들어보셨습니까?” ============================ 작품 후기 ============================ 현명한 자는 자신의 임종에 어둠은 당연하다고 하지만, 그들의 말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순수히 저 멋진 밤을 받아들이지 마세요. 선량한 자들은 마지막 파도 곁에서 얼마나 아름다운지 울어요. 그들의 덧없는 물결이 푸른 강기슭에서 춤출 것처럼 분노하고, 분노 하세요. 사라져가는 빛에 대하여. 높이 떠 있는 태양을 찬양하며 붙들려 하는 거친 사람들은 너무 늦게 깨닫게 되죠. 그들의 방식대로 태양을 떠나간다는 것을. 순수히 저 멋진 밤을 받아들이지 마세요. 무덤지기들, 죽음과 가까운, 눈먼 눈으로 보는 자들. 먼눈에는 유성처럼 찬란하고 화려하게 보일지라도 분노하고, 분노 하세요. 사라져가는 빛에 대하여. 그리고 내 아버지, 슬픔 가득한 곳에 서 있는 당신. 당신이 격한 눈물로 지금 나를 저주하고 축복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 순수히 저 멋진 밤을 받아들이지 마세요. 분노하고, 분노 하세요. 사라져가는 빛에 대하여. 딜런 토마스 -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0787 / 0933 ---------------------------------------------- 최후의 기록. “아!” 하승우의 말이 끝나자 누군가 깜짝 탄성을 터뜨렸다. 안솔이 놀란 얼굴로 하승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저 알아요. 진로 결계.” “호. 알고 있다고요?” 하승우는 의외라는 어조로 반문했다. 안솔은 정신 없이 고개를 끄덕대며 나를 돌아봤다.(중간에 제갈 해솔이 “왜 쟤한테는 존댓말 해? 나한테는 반말하면서.” 라고 못마땅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예~전에요…. 에, 어디였더라?” 무언가 대단한 것이라도 말하듯 폼을 잡던 안솔은 갑자기 잊어버린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 칠흑의 숲!” 그때 공교롭게도 이유정도 기억해냈는지 소리를 질렀고, 안솔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그래요! 칠흑의 숲이었어요!” “맞아 맞아! 거기서 한 번 봤었어!” 손을 짝짝 맞부딪치며 좋아하는 두 여인을 하승우는 흥미롭다는 듯 바라봤다. “대단하군요. 결코 쉽게 구경할 수 있는 결계는 아닌데 말이죠. 그래서, 어땠나요?” “응~. 오라버니가 그랬어요. 한 발자국만 잘못 디뎌도 큰일 날 수 있으니 꼭 조심해서 따라오라고요.” “오호. 그래서요?” “그래서 집중하고 걷다 보니까 어느새 세상이….” 안솔은 억지로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끙끙 앓았다. 허나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는 듯 하승우는 선웃음을 지었다. “그래요. 물론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제가 아는 진로 결계도 비슷합니다. 단 한 걸음에 의해 세상이 바뀐다. 잘 아는 사용자가 그러더군요.” 잘 아는 사용자. 결계를 다루는 사용자는 상당히 찾기 어렵다. 그럼 설마 이스탄텔 로우의 정창민을 말하는 건가? 하지만 서로 접점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간단하게는 지형을 이용해 착시를 일으키는 것부터, 복잡하게는 아예 공간을 비틀어버리는 무서운 결계죠. 이것 참, 미아가 발생하지 않은 게 천운입니다. 하하.” 하승우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뚝 웃음을 멈추며 나를 돌아봤다. “그런데 문제네요. 제가 알기로 진로 결계는 굉장히 깨기 어렵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클랜 로드는….” 하승우는 안솔을 흘끗거렸다. 말끝을 흐리기는 했으나 저의는 충분히 알아들었다. 하승우는 이미 진로 결계가 있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그리고 내가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도. “확실히…. 설마 결계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우선 밑밥부터 깔아놓고. 이윽고 제 3의 눈을 활성화하며 주변을 천천히 둘러본다. 이미 장소는 봐놨다. 신녀곡은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이미 많은 시간을 허비한 만큼, 더 꾸물거릴 수는 없다. 나는 아까 이어놓은 얼음 다리로 이동해 중간 지점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일부러 웃었다. “사용자 하승우의 말이 맞았네요. 바로 이동하죠. 이제부터는 일자 진형으로 가겠습니다.” 세 명이 먼저 움직였다. 우선 하승우가 내 등을 붙잡고 그 뒤로 안솔, 이유정이 차례대로 붙었다. 그러자 남은 열한 명이 멍하니 우리를 쳐다본다.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진로 결계는 걸음이 중요합니다. 제가 클랜 로드의 걸음을 밟으면 사용자 안솔은 제가 내디딘 부분을 정확히 밟아야 하죠. 이런 식으로 이어서 걸어야 하니 일자 진형을 짜는 게 가장 좋습니다. 특히 발이 큰 사람이 앞에 서는 게 좋으며, 걸음을 내디딜 때는 되도록 발자국을 깊숙이 남겨주시는 게 좋습니다.” 내가 말하기도 전에 하승우가 자세하게 설명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 하승우는 확실히 유능한 것 같다. 연차 값을 한다고 해야 하나. 전투에서 가끔 보이는 센스도 대단히 노련하고. 하기야 이 정도는 되니 그 정신 나간 집단을 오랫동안 이끌었던 거겠지. 아쉽다. 부랑자 출신만 아니었다면 신재룡 급으로 신임했을 텐데 말이지. 동료들은 어느 정도 이해한 듯 움직이기 시작했고, 우리는 곧 기차 놀이를 하듯 일렬로 늘어섰다. 잠깐 칙칙폭폭 이라도 시켜볼까 생각이 들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여기서부터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중요하니까. 그만큼 집중해야 한다는 소리다. “이제부터는 어떤 이상한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시선은 땅으로 고정하겠습니다. 절대로 놀라지 말고, 무조건 걷는 데만 집중하시면 됩니다.” 낮은 음성으로 경고하니 갑작스레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지만, 낯빛만 봐도 알 수 있다. 긴장감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한 명씩 쭉 훑어본 후, 나는 천천히 오른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조금 기다렸다가 조심스레 왼발을 움직인 찰나였다. 갑자기 이질적인 공기가 느껴졌다. 감각을 차치하면 나쁜 현상은 아니다. 제대로 들어섰다는 방증이니까. 찰박! “어, 어? 바다를…!” “조용히!” 누군가 놀라는 소리가 들렸으나 바로 사그라졌다. 아마 제 3의 눈이 없는 사람이 보면 내가 수면을 걷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가기 전, 잠깐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시간이 늦은 터라 무의미한 일이었다. 하늘은 이미 노을 빛과 어둠이 절반씩 섞여 있었으니까. “후우….” 숨을 길게 흘리고 나서, 나는 느릿한 속도로, 그러나 꾸준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진로 결계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 그저 새하얗던 눈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백을 넘었을 때부터 걸음 수는 더 세지 않았다. 시선을 무조건 아래로 고정한 채 무조건 길을 밟는 데만 집중했다. 진로(進路)를 이루는 주체가 바닷물이라 그런지, 잠깐 눈을 떼고 주변을 볼라치면 길이 급격히 틀어지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처음 느꼈던 이질감이 점차 심해지는 중이었다. 오죽하면 호흡에 지장이 올 정도. 칠흑의 숲에서 깼던 것보다 최소 몇 수는 높은 고난도의 결계였다. 물론 나 혼자라면 더 빨리 갈 수는 있다. 내심 갑갑한 기분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13명이나 되는 동료를 생각하면 적당한 속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나저나 시간은 얼마나 흐른 걸까. 체감상 1, 20분은 지난 것 같은데. 바닥만 보고 걸으려니 여간 갑갑한 게 아니다. 아마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상당히 웃기지 않으려나. 14명이나 되는 인원이 전원 고개를 숙인 채 느긋한 기차 놀이를 하고 있으니까. “……?” 그때였다. 들어오는 내내 곤란 증세를 일으키던 호흡이 불현듯 탁 풀리며 몸이 편해졌다. 크게 숨을 들이켜자 신선한 공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사방이 한없이 조용하다는 것도. 제 3의 눈으로 보이는 길은 어느새 더 이상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올리자 무언가 거대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클랜 로드? 끝났습니까?” 그때 하승우가 망토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목소리는 애써 곤란함을 참는 듯 미약한 떨림을 품고 있었다. 아차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내가 이질감을 느꼈을 정도니 동료들의 상태는 불 보듯 뻔했다. “예. 끝난 것 같네요.” 나는 급히 안쪽으로 걸어가 동료들을 이끌었고, 몸을 돌려 인원수를 점검했다. 한 명 한 명 모습을 보일 때마다 참았던 호흡을 토해내듯 숨을 크게 내쉰다. 이윽고 하승윤을 마지막으로, 동료들은 다행히 한 명도 낙오하지 않고 진로 결계를 통과했다. “놀랍군요. 진로 결계가 이렇게 쉽게 통과할 수 있는 결계였습니까?” 숨을 헉헉거리는 하승우가 흘리듯이 물었다. 그만큼 제 3의 눈이 사기적인 능력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알려줄 의리는 없다. 딱히 말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고. 미미하게 웃으니 하승우는 흐음, 숨을 흘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잠시 후, 호흡을 고른 동료들은 비로소 주변을 돌아봤고, 하나같이 탄성을 질렀다. 이어서 모두 넋을 잃은 얼굴로 중앙을 바라본다. “여기는….” 그랬다. 바다 한복판을 탐험하던 우리는, 어느새 거대한 빙하의 눈밭에 서 있었다. 1회 차에서는 직접 참가하지 않고 말로 듣기만 한 터라, 실물로 보는 건 나도 처음이었다. “…….” 무어라 말로 형언하기에는 상당히 이상한 장소였다. 일단 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빙하가 산등성이처럼 사방을 둥글게 에워쌌고, 그 아래로 부드러운 호선을 타고 내려오면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장소가 있다. 즉 현재 디디고 있는 설판은 분지와 비슷한 형태였다. 이런 건 주변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건, 약 50미터 앞 분지의 중심으로 동굴이 나 있는 거대한 설산 하나가 조용하게 솟아 있다는 것. 당연히 눈으로 이루어지기는 했는데, 새하얀 빛이 아닌 은은한 푸른빛이 흐르는 게 까닭 없이 신비한 느낌을 자아낸다. “허, 정말 대단한데.” “정말 믿을 수가 없을 정도에요. 저희 조금 전까지 바다에 있던 거 아니었나요?” “진짜 다른 세상 같아…. 아, 혹시 저번 원정처럼 이상한 차원으로 들어온 건 아닐까요?” “그건 아닙니다.” 연달아 들려오는 탄성에 하승우는 웃으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 장소는 그저 공간을 비틀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 즉 공간 안의 공간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부연 설명에 안솔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빛을 100% 드러냈다. 하승우는 쓰게 웃었다. “차원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공간은,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뜻이지요. 비록 눈에 보이지도 않고, 이렇게 들어오기도 어렵지만요.” “에?” “그러니까….” “에?” 그렇게 하승우가 불가능한 일에 한창 심력을 쏟는 동안, 나는 비로소 관찰을 끝마치고 안도할 수 있었다. 확신할 수는 없으나 잠정적으로 결론이 나왔다. 우선 현재 눈앞에 보이는 건 신녀곡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렇게 깨끗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건, 아직 봉인이 깨지지 않았다는 소리가 아닐까? 그 고대 악신이라는 놈이 깨어났다면 분명 박살이 났을 테니까. 아니면 최소한 자국이라도 남아야 하는데, 그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 흠. ‘화정?’ - …아니, 아니야. 우선은 안으로 들어가 봐. 그리고 제 3의 눈 켜두는 거 잊지 말고. ‘당연하지.’ - …그런데 있잖아. 왠지 빨리 가는 게 좋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 화정의 한숨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나는 얼른 무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마력을 담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원 전투 준비. 방진으로.” 여기저기서 흠칫 놀라는 기척이 느껴졌으나,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신속히 동굴을 향해 걸었다. 급하게 보여도 어쩔 수 없다. 비밀을 숨기고 의심을 피하려는 의도이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여기 오기까지 시간을 너무 낭비했다. 물론 언뜻 안전해 보인다고는 해도, 아직 정확한 상황은 밝혀지지 않았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처리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다. 괜히 여유를 부리다가 1초 차이로 봉인이 풀리고 악신이 깨어나는 상황 따위, 절대로 사양하고 싶었다. 동굴 안의 통로는 지름이 2미터도 되지 않을 정도로 의외로 좁았다. 허나 걷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길이 점차 넓어지더니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비교적 너른 공간이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이곳은 마치 작은 방을 연상케 하는 곳으로, 직경 20미터 가량 돼 보이는 네모난 공간이었다. 외부에서 본 설산의 거대한 크기를 생각해보면 역시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면은 눈 벽으로 막혀 있고, 걸어온 통로를 제외하면 정면 방향으로 육중한 얼음 문 하나가 놓여 있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후, 한껏 안력을 높여 들여다보았으나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그냥 모든 것이 흐릿했다. 눈을 떼고 뒤를 돌아보자 모두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간간이 어리둥절해 하는 빛이 보였으나 아직 긴장은 버리지 않은 것 같다. 사실상 동굴 안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이미 전투 상황이라 봐도 무방했다. 나는 집게손가락을 세워 입에 댄 후에 조용히 얼음 문을 가리켰다. 그러자 동료들은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며 각자 무기를 세웠다. 신호는,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잠시 후. “…진입하겠습니다.” 한껏 낮춘 목소리로 말하는 동시, 나는 힘껏 얼음 문을 밀어젖혔다. 끼긱, 끼기기긱! 문은, 흡사 부서지는 것처럼 얼음 갈리는 소음을 내며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 ============================ 작품 후기 ============================ 적다가 피곤해서 깜빡 졸았는데, 일어나니 새벽 네 시였습니다. 죄송해요. ㅜ.ㅠ 0788 / 0933 ---------------------------------------------- 최후의 기록. 문을 연 순간 불현듯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내부에서 우리를 반긴 건 봉인 장치도 악신도 아니었다. 크고 둥근 얼음 공동(空洞)이 눈에 들어왔다. 있는 거라고는 정면 방향으로 보이는 작은 제단 하나. 그걸 제외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사방에 흐르는 한기를 헤치고 안으로 들어가니 허탈하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 장소가 정말로 신녀곡이라는 말인가? “우선 수색을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딘가 비밀 장치가 있을 가능성이….” 차소림이 무거운 침묵을 깨고 말했으나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다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서너 번 감지를 돌렸으나 수상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다못해 문도 보이지 않는다. 말인즉 이 장소가 신녀곡의 중심 지점인 것이다. 그래도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이제 남은 건 저 제단뿐. 저기서 단서를 얻지 못하면 차소림 말대로 비밀 장치를 수색해야 할 판이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냥 제단이 아니라, 관처럼 생긴 것이 제단에 올려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혀, 형님. 조심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괜히 열었다가 갑자기 툭 튀어나온다거나….” 진수현의 목소리에 잠깐 갈등이 일었지만, - 괜찮으니까 열어. 화정의 보증에 망설임 없이 한쪽 끄트머리를 손으로 잡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꽝꽝 엉겨 붙었는지 딱딱한 느낌이 전해졌으나, 힘껏 힘을 주자 얼음 갈리는 소리가 나며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상황은 똑같았다. 기껏 문을 뜯어냈음에도 관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간 갇혀 있던 냉기가 허연 김을 피우며 올라올 뿐, 텅 비어 있었다. “…….” 오묘한 침묵이 감싸 안는다. 동료들은 무언가 말하고 싶어하는 표정이었으나 내 눈치를 보는 듯했다. 서서히 막막한 기분이 엄습했다. 여기서 비밀 통로를 발견했다는 소문은 들은 기억이 없다. 무언가 단서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혹시…. 내가 잘못 짚은 건 아닐까? “세상의 구원과 안녕을 기원하여.” 그때 앞에서 들려온 차가운 음성에 나도 모르게 눈을 들었다. 근원은 내가 들어 올린 얼음 뚜껑의 안쪽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나를 쳐다보더니 하얀 김이 어른거리는 면을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안쪽에 장문의 글이 기록돼 있습니다.” “장문의 글이 기록돼 있다고?” “그렇습니다. 손상된 부분은 있으나, 읽는 데 크게 무리가 있는 수준은 아닙니다.” “무슨….” 반사적으로 손을 뻗자 확실히 느껴졌다. 손끝으로 툭툭 걸리는 느낌이 이어졌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으로 얼음에 새긴 듯했다. “계속 읽습니까?” “그, 그래 봐.” 얼떨결에 머리를 끄덕이자 다시 눈을 돌린 근원은 조용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신녀곡에서 피어난 꽃은 스스로 시들어 떨어졌네요. 꽃을 찾아온 이들이여. 현 세상은 과연 어떤가요. 안녕한가요. 다행이네요. 그러면 기억은 하시나요. 저를 말이죠. 그게 아니라면, 무슨 일로 이 외진 곳을 찾아오셨나요. 돌아가세요. 사실 원래는 남기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나 만에 하나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또다시 하늘이 어두워졌다면, 가장 높은 곳에 올라 바다를 보세요. 낮이라면, 아직 빛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밤이라면, 어둡게 드리운 그림자를 배제할 수 있다면. 선이 사라지고 악이 먹혀 잠든 장소는 그대의 눈앞에 나타날 거예요. 그곳에서 제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절대로 무언가 이루려고 하지 마세요. 그저 저를 깨워주시는 걸로 충분하답니다. 그럼, 부디 너무 늦지 않았기를 바라며.” 긴말을 마친 근원은 끝났다는 듯 입을 닫았다. 중간중간 연결이 조금 어색했으나 아마 손상된 부분인 듯싶다. 무슨 말인지 100%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모종의 가능성이 트였다는 직감이 들었다. 나는 가만히 서 있다가 홀연히 관을 도로 닫았다. “클랜 로드?” 누군가 붙잡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몸을 돌려 우리가 들어온 통로로 도로 걸음을 옮겼다. 아니, 뛰었다. “용족화.” 얼음 통로를 헤치고 나가 곧바로 날개를 펼쳤다. 노을 빛 허공을 가르며 주변을 둘러봤으나 수상한 건 보이지 않는다. 설산을 둘러싼 산등성이의 외부는, 잔잔한 물결이 흐르는 바다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까 잠깐 나약한 생각이 들었으나 더 이상은 아니었다. 비록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관 짝에 새겨진 기록을 보고 확신이 되살아났다. 그래. 간신히 알 것 같다. 1회 차의 기억은 틀렸던 것이다. 아니, 틀린 게 아니라 애초 전제 자체가 잘못됐다. 조금 전 들어간 설산은 신녀곡이 아니었다. 우리는 아직 신녀곡을 찾은 게 아니었다. 새삼 그 백야의 무희라는 여인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의 능력을 지녔는지는 몰라도, 아득한 미래를 예상하고 대비책을 남겨뒀다. 비록 기록 뿐이기는 했지만, 현재의 나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최소한 잘못 짚은 게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됐으니까. “…….” 그럼 이제는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관건인데. 우선은 하나씩 되새겨보자. 전부 되짚을 필요는 없고 중요한 부분만…. ‘또다시 하늘이 어두워졌다면, 가장 높은 곳에 올라 바다를 보세요.’ 가장 높은 곳. 이 부근에서 가장 높은 장소라고 하면 한 곳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곧바로 날개를 움직여 설산의 꼭대기로 이동했다. 여기서 바다를 보라는 뜻이겠지? ‘선이 사라지고 악이 먹혀 잠든 장소는….’ 그 장소가 바로 진정한 신녀곡일 것이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붉은 황혼 빛을 반짝이는 바다는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하기만 했다. 게다가 바닷물이 굉장히 투명하고 깨끗해, 수면에 설산을 거꾸로 비추는 게 인상적이다. 단, 그뿐이었다. 안력을 높이고 이리저리 둘러봐도 딱히 눈에 걸릴만한 건 보이지 않는다. ‘그곳에서 제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절대로 무언가 이루려고 하지 마세요. 그저 저를 깨워주시는 걸로 충분하답니다.’ 이건…. 그 여인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일까? 아니, 우선은 젖혀두자. 가보면 알 일이니까. 신녀곡을 찾는 게 급선무다. ‘그럼, 부디 너무 늦지 않았기를 바라며.’ …이게 끝이었나? 스멀스멀 올라오는 초조감을 삼키며 천천히 머릿속을 곱씹는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 바다를 보라…. 가장 높은 곳에 올라…. 가장 높은 곳…. ‘낮이라면, 아직 빛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바다. ‘밤이라면, 어둡게 드리운 그림자를 배제할 수만 있다면.’ 이 거대한 설산을 그대로 복사해 붙여넣기 한 듯 비추는, 맑은 수면. ‘…그대의 눈앞에 나타날 거예요.’ 그 순간. “……!” 바다에 비치는 설산을 바라본 찰나, 나도 모르게 끓는 듯한 신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레 찾아온 강렬한 충격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나는 한 번 더 주변을 돌아보고 다시 바다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가 있는 장소는 설산. 그러나 설산의 아랫부분은 분명히 산등성이 같은 것에 둘러싸여 있다. 만일 저 바다가 설산을 비춘다면, 왜 산등성이는 보이지 않는 걸까? 이제야, 이제야 겨우 깨달았다. - 그러네. 그림자를 배제할 수만 있다면…. 이게 가장 큰 핵심이었어. 그래. 화정의 말대로 어려운 말이 아니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되는 기록이었다. - 일단은 가보자고. 가면 나도 확실해질 것 같거든. 화정이 재촉했다. 어차피 더 미적거릴 이유도 없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공중으로 있는 힘껏 뛰었다. 미친 듯이 요동치는 가슴은 어느새 가득 차오른 긴장감 때문일까. 아니면 1회 차에서도 풀지 못했던 신녀곡의 비밀을 비로소 풀어냈다는 설렘 때문일까. 바다가 점차 가까워질수록, 수면 속으로 보이는 새하얀 산도 점차 선명해진다. 나는 그대로 바닷속으로 빠져들었다. * - 풍덩! 무언가 깊은 물에 빠지기라도 한 듯, 무거운 소리가 어두운 공간을 울렸다. 소리는 뚜렷하지 않았다. 마치 억지로 통신을 연결한 것처럼 노이즈가 섞인 소음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건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어둠에 몸을 묻은 청년은 외려 흥미로운 눈으로 허공의 영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일렁이던 파문이 서서히 잦아들 즈음. “아, 이런.” 청년은 앓는 소리를 내며 정수리에 돋은 두 개의 뿔을 부여잡았다.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로 들켰잖아.” 살짝 드러난 청년, 아니 루시퍼의 얼굴은 무척이나 묘했다. 낯에는 진한 낭패감이 서려 있었으나, “이야. 이것 참, 엉터리 같은 일이잖아? 벨제부브나 아스모데우스를 탓할 게 아니었어.” 두 눈만은 빙글거리며 웃고 있다. 마치 이 상황이 즐겁다는 듯 상기된 어조로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잠시 후, 루시퍼는 곧장 몸을 일으켰고, 황급히 영상을 지나쳐 어딘가로 걸었다. 그곳에는 예의 무수한 사슬과 허공에 묶여 매달린 악마 여인이 있었다. 걸음을 멈춘 루시퍼는, 슬픈 빛을 띤 상대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미안해. 프로세피나.” 프로세피나(Proserpina). 14 군주 중 일 좌를 차지하는 고위 악마이며 ‘저승의 여왕’이라는 이명을 갖고 있다. 또한 김수현에게 살해 당한 플루톤의 아내이기도 했다. ‘마족’이 아닌 ‘악마’라는 사실만으로도 저 여인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인즉, 저기 얽히고설킨 사슬에 묶여 떠 있는 여인이 바로 14 군주급 악마라는 소리였다. “웬만하면 네 바람을 들어주고 싶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잖아? 응?” 문득 말끝을 흐린 루시퍼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그러나 곧 신색을 회복하더니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프로세피나를 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약속할게. 이렇게 너를 제물로 바치지만, 네 바람은 무조건 이루어질 거야. …무조건.” 그렇게 말한 루시퍼는 엄지와 중지의 끝 마디를 붙였다가 잠깐 멈칫했다. 아무리 루시퍼라도 악마 14 군주를 마냥 제물로 사용하기에는 아까웠던 걸까. 그러나 잠깐 눈을 돌린 사이, 영상 내 잠잠해졌던 수면에 파문이 도로 이는 걸 보고는 입을 질근질근 짓씹었다. “자아, 김수현….” 이를 악물어서 그런지, 그르렁거리는 야수와 같은 음성이 흘러나온다. “어디 한 번 미친 악신을, 내가 만든 무대를! 이번에도 멋지게 평정해보라고…!” 딱! 마침내 루시퍼의 말이 끝나는 동시, 힘차게 손을 튕기는 소음이 공간을 왕왕 울렸다. 그 순간이었다. 차르르릉, 차르르릉! 차르르릉, 차르르릉! 불현듯 프로세피나를 꽁꽁 옭아매던 사슬이 일제히, 무서운 속도로 풀리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 철그렁, 철그렁! 그리고 루시퍼의 웃음과 사슬의 철성(鐵聲)이 동시에 겹쳐 울린 순간, 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심연 속에서 흘러나온 듯한 웅혼한 울음이, 황혼의 바다에 길게 메아리쳤다. 0789 / 0933 ---------------------------------------------- 조우(遭遇). 쩌정! 크게 금이 가는 소리가 울렸다. 소슬한 공간이었다. 둥근 호선을 그리는 원형 공간의 지름은 100미터는 넘어 보였고, 천장은 그보다 더 높다. 벽이나 바닥은 투명한 얼음으로 돼 있으나 이상하게도 따스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다. 워낙 고요해 쓸쓸하고 으스스한 분위기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사방이 밀폐돼 있음에도 내부는 외려 신선한 향기가 흐르고, 이따금 빛을 흘리는 얼음은 신성한 기운이 서린 듯하다. 어떤 장애물도 없음에도 접근을 불허하는 듯한 권위를 풍긴다. 흡사 신들이 거주하는 공간을 보는 듯했다. 공간의 중심에는 10미터 높이의 얼음 기둥이 여섯 개, 아니 네 개 솟아 있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누어 둔 기둥은 누군가를 감싸듯 둥글게 배치된 형태였다. 허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좌측의 두 개가 산산이 부서져 흩어져 있었다. 남은 얼음 기둥의 수는 네 개. 조각을 하다 만 듯 듬성듬성 깎인 기둥의 외면에는 형이상학적인 기호들이 빼곡히 아로새겨져 있다. 네 기둥의 구심점에는 바닥부터 천장을 잇는 거대한 크기의 얼음 기둥 하나가 우뚝 솟아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건, 기둥의 아랫부분에 웬 형상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랬다. 나무가 뿌리를 내린 듯 유난히 굵은 기둥의 아랫부분에는, 전라(全裸)의 여인이 얼음 속에 갇혀 있었다. 그것도 굉장한 미인이다. 언뜻 보면 훤칠하고 가녀린 몸이지만, 구석구석 늠름하면서 밝은 느낌을 풍겼다. 허리까지 가지런히 흘러내린 은발은 아직도 빛을 잃지 않았다. 아주 살짝 떠진 실눈 속 은백색 눈동자는, 잠에서 덜 깬 듯 몽롱함을 품어 몹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나. 딱 하나 이상해 보이는 게 있다면 여인의 표정이었다. 자세히 봐도 모를 정도로 오묘했지만, 언뜻 고운 아미가 좁혀져 있는 것 같고, 혹은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여인은 깨어나 있는 게 아닐까? 그때였다. 쩌저저정! 느닷없이 연달아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남은 네 개의 기둥이 한꺼번에 어긋나 비틀어지며 여지없이 깨져 조각났다. 이제 중심의 커다란 기둥만이 남았다. 문득, 여인의 몸이 꿈틀 움직인 찰나였다. 퍽! 짧고 강한 폭음과 함께 중앙 기둥의 아랫부분마저 폭발하듯 터졌다. 허공으로 비산하는 얼음 조각 사이로, 마침내 일부 해방된 여인의 상반신이 앞으로 꺾이듯 굽혀진다. 갇혀 있던 머리카락이 흔들거리며 흘러내리고, 오므려져 있던 입술이 살그머니 열렸다. 다음 순간, “우욱!” 헛구역질하는 소리와 동시, 입안에서 무언가가 꿀렁 튀어나왔다. 마치 토사물처럼 흘러나온 그것은 뭉클뭉클하면서 검은빛을 띠고 있었다. 연기 같기도 하고 진득한 젤리 같기도 하다. 이내 미끄러지듯이 바닥에 닿자마자 한데 뭉쳐 덩이 지더니 서서히 모종의 형태를 갖춰가기 시작한다. 그걸 바라본 여인의 얼굴이 애절하리만치 이지러졌다. “아, 안 돼….” 그러나 헛된 저항에 불과했다. 아니. 애초 저항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왜냐면…. “어, 어째서 이렇게 빠르게…? 우우우욱!” 또 한 번 헛구역질이 이어졌다. 늘씬한 허리가 고붓하게 휘어지며 검고 진득한 것이 계속 흘러나온다. 시커먼 것이 형체를 갖춰가는 속도는 점차 빨라졌고, 그럴수록 여인의 낯빛에 어두운 절망이 드리웠다. “아…. 아아아아아악!” * “어휴.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관 주변을 살펴보던 이유정이 볼멘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처음 볼 때부터 느낌이 별로였다니까? 이게 뭔 놈의 신녀곡이야? 이름만 거창….” 그러나 곧 찔끔 말을 흐릴 수밖에 없었는데 왼쪽 어디서 따가운 눈총을 느꼈기 때문이다. 누가 노려보는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라 일부러 고개 돌리지 않았다. 그저 얌전히 수색할 뿐. “후유, 그러게요. 저도 이번 원정은 엄청나게 준비했는데, 그냥 시간만 허비한 느낌이에요.” 그러나 눈치라고는 밥 말아 먹었는지 옆에서 수색하던 안솔이 종알종알 맞장구를 쳤다. 한층 따가워진 눈초리를 느낀 이유정은 얼른 말을 받아 넘겼다. “그, 그래? 무슨 준비를 그렇게 했는데?” “후후. 드디어 제 가치를 깨달았다고 할까요!” 양손을 척 허리에 얹은 안솔이 거드름을 피웠다. 잠깐 저 볼을 꼬집어 이리저리 늘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유정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니까 뭔데. 안달 나게 하지 말고 얼른 말해봐.” “헤헤. 실은 별것은 아니고요. 예전에 오라버니가 가지고 온 상자 기억하시죠?” “아~. 그 마법 진 나오는….” “네네. 개봉만 하면 괴물이 막막 튀어나오는 거 있잖아요.” “알아. 그거 사용자 상점에 있는 거 아니야?”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아니라고?” “네. 저도 하나 사려고 찾아봤는데 품목에 없더라고요? 그래서 오라버니한테 슬쩍 여쭤봤는데요. 비밀 상점이라는 게….” 그때였다. 둘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 불현듯 탁탁 뛰는 소리가 울렸다. 한 명 한 명 뒤를 돌아보자 곧 누군가가 조각난 얼음 잔해를 밟고 뛰어들어왔다. 상기된 얼굴로 숨을 몰아 쉬는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백한결이었다. “모, 모두 나오세요!” “으응?” 뜬금없는 외침에 이유정이 한쪽 눈을 치떴다. 실수를 인지했는지 백한결은 머리를 도리도리 젓고는 말을 정정했다. “클랜 로드 님이 모두 나오라고 하셨어요!” “오빠가?” “네! 신녀곡을 찾으셨대요!” “…뭐라고?” 뜻밖의 말이라 그런지 반응이 살짝 늦었다. 서로가 서로를 쳐다보고 웅성웅성 어수선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백한결이 급하다는 듯 나오라는 말을 반복하자 모두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통로를 빠져나갔다. 잠시 후, 13명의 사용자는 하나같이 떠름한 낯빛으로 바다를 내려다보게 됐다. 그들은 전원 산등성이 꼭대기에 올라 있었다. 동료들이 나오는걸 확인한 김수현이 곧바로 산등성이 꼭대기로 이동하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산등성이 높이가 작은 언덕만 하기도 했지만, 날개를 가진 김수현이 직접 옮긴 이도 여럿이라 이동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물론 이들이 떨떠름해 하는 건 산등성이로 이동해서는 아니었고, 물에 흠뻑 젖은 모습을 한 김수현 때문도 아니었다. “이 아래에…. 신녀곡이 있다고요?” 김한별이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갑자기 신녀곡을 찾았다며 산등성이로 끌고 오더니 난데없이 잠수해야 한단다. 그러나 아주 안 믿을 수도 없는 게 확실히 수면에 비친 그림자는 이상했다. 게다가 김수현이 직접 확인까지 했다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저…. 그럼요. 물속에서 호흡은….” 전전긍긍해 하던 안솔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안솔의 낯빛도 딱히 좋지는 않았으나 김수현은 단호히 입을 열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안쪽에서 강한 기운을 느꼈으니까.” “기운이요?” 제갈 해솔의 반문에 김수현이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다. “정확하게 알아낸 건 아닙니다만. 수중 동굴과 주변으로 강한 기운이 장막처럼 처져 있는 건 확인했습니다. 아마 그 안으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모종의 공간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확신은 아니다. 그러나 저번 야만 왕의 무덤 때 비슷한 현상을 겪은 만큼, 김수현이 말하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거기다 관 짝에 적혀 있던 기록도 있지 않은가. 이러니저러니 갈등이 일었지만, 이대로 허탕을 치기 싫다면 결국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아무래도 농담은 아니신 것 같은데요. 아무튼,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한 번 들어가 봅시다. 들어간다고 설마 죽기야 하겠습니까?” 하승우가 빙긋 웃으며 입고 있던 로브를 풀었다. 그러자 서너 명이 흠칫 몸을 떨었다. 안솔도 그렇지만, 특히 김한별은 의연한 척하려 애썼으나 불안해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 수영 못하는 사용자 있습니까?” 들어가려 폼을 잡던 김수현이 돌연 돌아보며 물었다. 두어 명이 웅얼거리기는 했으나 손을 든 사용자는 없었다. 김수현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럼.” 이라고 말하고는 앞장서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휙 낙하하는가 싶더니 풍덩 소리가 나며 세찬 물보라가 일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미약한 비명이 들렸지만, 이내 거리낌 없이 뛰어내리는 하승우를 시작으로, 곧 한 명 한 명 다이빙을 시도했다. 연달아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망설이는 사용자도 소수 있었다. 대부분이 뛰어들었음에도, 김한별과 안솔은 머뭇머뭇하며 섣불리 내려가지 못했다. 그러나 같이 남아 있던 이유정이 기습적으로 둘을 붙잡고 뛰어내리는 바람에 두 명은 강제로 다이빙하고 말았다. 꺄아아악, 긴 비명이 추락한다. 그리하여 14명 전원이 입수하는 데 성공했으나 부작용도 있었다. 몹시 놀란 안솔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김한별과 이유정이 투덕대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그러나 소란은 곧 사그라졌다. 김수현은 잠수 직전 서너 가지 주의 사항을 전달했다. 거리는 약 200미터, 길은 자신이 선도할 테니 따라올 것, 안력을 높여둘 것, 바닷속은 어두우니 마법사들은 라이트 마법을 활용할 것. 짧은 시간에 전달을 마친 후, 마법사들은 조용히 라이트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물이 차가운지 오들오들 떨며 영창 하기는 했지만, 간단한 마법이라 무리 없이 발현할 수 있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준비가 완료된 걸 확인한 김수현이 주변을 쓱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후, 김수현의 몸이 서서히 물속으로 잠겼다. * 바다는 확실히 추웠다. 뼛속까지 시릴 정도의 한기가 온몸을 엄습한다. 물론 화정이 있는 이상 크게 문제 될 건 없고, 소망의 셔츠로 행동도 자유롭다. 물속에 있음에도 어떤 중압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내 경우였다. 다른 이도 같을 거라는 보장이 없으니 최대한 빨리 도착하는 게 관건이다. 나는 아까 발견한 장소로 방향을 잡고 발을 움직여 비스듬히 내려갔다. 그나마 물살이 정지한 듯 잔잔한 덕분에 내려가는 데 크게 무리는 없어 마력까지 이용해 빠르게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방은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고요하다. 걱정과는 다르게 동료 대다수가 상당히 수영을 잘했다. 특히 제갈 해솔은 나를 따라오는 것도 모자라 아예 옆자리를 점거했는데, 아마 마력을 이용하는 방법을 체득한 듯싶다. 물살을 가르며 거침없이 내려가는 게 흡사 인어를 보는 듯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전방에 보이던 허연 얼음이 점차 가까워지는 동시, 약 20미터쯤 아래로 커다란 구멍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나는 헤엄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아래의 동굴을 손으로 가리켰다. 뒤따라오던 동료들은 잠깐 갸웃했으나 이내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급히 발을 놀리기 시작했다. 슬슬 호흡에 곤란이 오는 듯했다. 나는 아직 동굴로 들어가면 안 된다. 아직 여유가 남아 있거니와, 분명 낙오자가 생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제갈 해솔을 시작으로 열 명 넘게 동굴로 보냈지만, 아직 두 명이 오지 않았다. 시선을 올리자 역시나. 김한별과 안솔이 확연히 느려진 속도로 내려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꽤 따라오는가 했는데 내려올수록 힘이 부치는 모양이다. 우선은 기다려볼 생각에 지켜봤으나 곧 우려하던 상황이 발생했다. 두 명의 행동이 눈에 띄게 둔해지는가 싶더니 돌연 김한별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와 동시에 안솔이 대차게 하얀 거품을 발사하더니 그대로 몸이 뒤집혔다. 염두에 둔 상황이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날개까지 움직여 신속히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재빠르게 김한별의 손을 잡은 후, 안솔의 허리를 안고 최대한의 속력으로 동굴로 들어갔다. 중간중간 안솔이 미친 듯이 몸부림치는 게 느껴졌지만, 조금만 참으라는 의미로 꽉 안으며 속도에 가속을 붙였다. 아래로 잠수할수록 시야가 어두워지기는 했으나, 동굴 안은 훨씬 더 어두웠다. 그나마 김한별이 유지하는 라이트가 미미하게나마 앞을 밝혀주었고, 덕분에 동굴이 직선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비스듬히 위로 꺾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곧바로 방향을 틀고 위쪽으로 방향을 수정했다. 그렇게 5분 같은 5초가 지났다고 느꼈을 때, 별안간 위쪽으로 희미한 빛이 나타났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냥 본능적으로 저 빛으로 가야 한다는 게 느껴져 나는 온 힘을 기울여 위로 솟구쳤다. 안솔의 몸부림이 어느 순간부터 약해지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잠시 후, 빛은 흡사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이 우리를 강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 첨벙! “하아! 하아!” “푸후우우! 푸후우우우욱!” 밖으로 솟구쳐 신선한 공기가 닿은 순간, 좌우로 거친 신음이 터졌다. 흘끗 눈을 들자 앞서 도착해 있던 동료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전원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있었지만, 깜짝 놀라며 우리를 부축해 밖으로 끌어냈다. 여기서부터는 나도 처음 겪는 상황이다. 주변 풍경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을 보면 딱히 위험은 없을 터. 생각을 정리한 나는 곧장 두 명의 상태를 확인했다. “하악! 하아아악!” 거칠게 숨을 내뱉는 김한별. 몸을 한껏 웅크린 채 덜덜 떨고 있었으나, 어쨌든 크게 지장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안솔의 상태는 약간 심각해 보였다. 이유정이 등을 펑펑 두드려주는데, 아예 엎드린 자세로 연신 웩웩거리는 게 막판에 물을 엄청나게 들이켠 것 같았다. 얼른 다가가 등에 손을 대고 화정의 힘을 일으켰다. 화정도 이번에는 군소리 않고 힘을 빌려줬다. 안솔의 전신이 삽시간에 맑은 불꽃으로 휩싸인다. 치이이익! 화정의 힘은 역시 강력했다. 순식간에 수분이 증발되며 창백하던 낯에 혈색이 돌아오고 옷도 마르기 시작한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손을 떼지 않았다. 안솔이 진정될 때까지 쉬지 않고 기운을 불어넣었다. “후우우욱! 후욱, 후아아아….” 화정의 기운이 톡톡히 효과를 본 걸까. 곧 안솔의 떨림이 상당히 잦아들었다. “괜찮니?” 무수한 걱정하는 시선 속에서 안솔은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네, 네. 괜찮아요. 오라버니.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솔직히 말해서, 놀랐다. 사실 엉엉 울음을 터뜨리며 안기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외려 억지로 웃어 보이면서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정말로 안솔이 맞는 건가? “괘,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아요.” 여전히 호흡은 안정되지 않았지만, 내 시선을 느꼈는지 안솔은 괜찮다고 반복했다. 문득 조금은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랜 로드.” 그렇게 간신히 상황이 정리되자 하승우가 가까이 다가왔다. “아무래도 클랜 로드의 말씀이 맞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한 하승우는 정면을 가리켰다. 나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앞에는 얼음으로 된 복도처럼 보이는 길이 쭉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길의 끝으로는 좌우로 동물을 조각한 듯한 상(像)이 서 있었는데, 역시나 얼음으로 만들어져 있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신전을 연상케 하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적당한 크기의 얼음 신전을 보자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드디어 진짜 신녀곡을 찾아낸 것이다. “하우, 진짜 죽겠네. 그나저나 여기는…. 도대체 또 어떤 공간인 거예요?” 제갈 해솔이 흠뻑 젖은 로브를 비틀어 짜며 감탄했다. - 신역. 대답은 화정에게서 들려왔다. ‘신역이라고?’ - 아, 그래. 이제야 알겠네. 여기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악, 아악, 아아아악…! 불현듯. 시, 싫어어어어어어어…! 처절히 울부짖는 듯한 애처로운 절규가 온 사방에 메아리쳤다. ============================ 작품 후기 ============================ 다음 회에는 독자 분들의 눈살이 찌푸려질 수 있는, 상당히 잔인한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원치 않는 독자 분들은, 해당 내용이 나온다 싶으면 그냥 넘기시는 걸 권합니다. 감사합니다. _(__)_ 0790 / 0933 ---------------------------------------------- 조우(遭遇). 오늘 회에는 잔인한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원치 않으시는 독자 분들은 건너뛰시는걸 권합니다. * 전조(前兆) 없는 들려온 비명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사그라졌다. 마치 누군가 억지로 틀어막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잘못 들은 것도, 나만 들은 것도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시시덕거리며 물을 짜고 있던 동료들 낯빛이 딱딱히 굳었으니까. 진짜 신녀곡(神女谷)을 찾았다는 기쁨도 잠시. 들뜨던 분위기가 가라앉고 긴장감이 빈자리를 채운다. 스르릉. 칼날이 시원스레 쓸리는 소음. 긴말은 필요 없다. 방금 들려온 비명으로 상황은 충분히 인지했다. 기척을 최소화해 다리를 건너 얼음 신전으로 다가간다. 동료들도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는 게 느껴졌다. 똑, 똑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가슴을 쿵쿵 노크하는 듯했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잠시 후, 다리 끝에 이르렀을 즈음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이건….” 좌우 방향으로 높이는 약 2미터, 길이는 약 4미터 정도 돼 보이는 얼음 상(像)이 보인다. 동물을 조각한 것 같은데 익숙한 형상이다. 턱 아래 고드름처럼 흘러내린 갈기 형상을 보니 바로 연상되는 놈이 있었다. “그 괴물이 아닙니까? 저희가 설원에 들어오자마자 싸웠던….” 차소림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흐렸다. 아직 정확한 명칭이 붙지 않았다 보니 라이칸이 아니라 그 괴물이라고 말한 것 같다. 여하튼 왜 이 얼음 상이 여기 있는지는 모르나 짚이는 바는 있었다. 라이칸 왕을 처리하고 도축하는 과정에서 ‘열쇠’를 획득하지 않았는가. 아니, 잠깐만. 문득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의문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무어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다. 잘 맞물려 돌아가던 톱니바퀴가 갑자기 어그러졌다고 해야 하나. 과거와 현재의 간극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휘젓는다. 하지만 나는 전진을 선택했다. 우선은 일의 경중을 따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갈등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는 없다. 정적이 흐른다. 아까 들었던 비명이 환청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조용하다. 감지에 걸리는 것도 없고, 우리를 제외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 숨 막힐 듯한 고요함이 외려 불안을 일깨운다. 잠시 후, 다리 너머 십 층으로 나뉜 각진 얼음 계단을 올라 문 앞에 섰다. 신전의 문은 은은한 푸른빛이 흐르는 투명한 얼음 문이었다. 두께가 육중해서 그런지 안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는다. 한데 두 가지 특이한 점은, 문이 청량한 향기를 풍긴다는 것과 라이칸 모양이 양각(揚角)돼 있다는 것이다. 문양의 중앙에는 곡선을 그리는, 송곳니처럼 생긴 홈이 움푹 파여 있었다. 물끄러미 문을 응시하던 김한별이 홀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문에서 굉장히 강력한 마력이 느껴지네요.” “동의합니다. 이 문은 보통 문이 아니에요. 섣불리 손을 댈 수는 없고, 어딘가 해제 장치가 있을 것 같은데요.” 하승우의 음성이 들려온 찰나, 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하승우의 말이 정답이라서가 아니었다. 아니. 해답에 가까운 추론은 확실히 놀라웠지만, 방금 말을 들은 순간 아까 느꼈던 오묘한 간극이 조금 더 확실하게 와 닿았다. 나는 수면 아래 신녀곡을 우리가 처음 발견한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과거에 읽은 신녀곡의 탐험 기록에서 수중 동굴을 찾으라는 내용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이칸 왕을 잡고 체내에 있는 열쇠를 획득했다는 내용은 있었다. 한데 진로(進路) 결계 안 신녀곡이라 착각했던 장소에서는 열쇠를 사용할 거리가 없었다. 과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클랜 로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의 경중을 따지겠다 해놓고 나도 모르게 삼천포에 빠졌다. 얼른 옆을 돌아보니 제갈 해솔이 카오스 미믹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이거요.” 왼팔을 불쑥 내민다. 손에는 희멀건 빛을 반사하는 송곳니 하나가 잡혀 있다. 일전 라이칸 왕을 도축하다가 얻은 척했지만, 실체는 봉인된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였다. 찾는 수고는 덜었다만, 제갈 해솔은 이건 또 어떻게 알고 꺼낸 걸까? “문 중심에 패인 홈을 보니까 갑자기 이게 생각나서요. 모양도 크기도 비슷하지 않아요?” 제갈 해솔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부연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나는 간신히 머리를 끄덕일 수 있었다. “제가 한 번 맞춰봐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옆으로 걸음을 비켜주자 제갈 해솔이 문 앞으로 섰다. 손에 든 송곳니를 이리저리 돌리는가 싶더니 조심스레 홈으로 꽂아 넣는다. 그 순간이었다. 꽈앙! 땡, 땡, 땡, 땡그랑! “아악!” 갑작스러운 폭음과 동시, 굳건하던 문이 크게 떨어 울리며 세로금이 쩍 갈라졌다. 그 어떤 예고도 없는 폭격이었다. 제갈 해솔이 떨어지며 등 뒤가 이지러졌다. “어떻게 된 거야!” “모, 몰라요! 가, 갑자기 충격이…!” “그건 어디로 갔어?” “방금 튕겨서 아래로…!” 삽시간에 소란이 일었다. “조용!” 진정하라는 의미로 왼손을 들어 올리며 앞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깨끗하던 얼음 문은 어느새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물에 투하된 물감처럼 퍽 터지더니 차차 넓게 젖어 퍼지고 있다. 옅은 혈향(血香)이 코를 찌른다. 착시일지도 모르나, 찰나의 순간 은빛이 번쩍였다가 사라진 것 같기도 했다. 무검을 다잡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시 가져오세요.” 어수선한 와중, 잽싸게 몸을 놀린 우정민이 튕겨 나간 송곳니를 주워 건넸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홈으로 재차 송곳니를 꽂으며 외쳤다. “전원 전투 준비!” 웅웅웅웅웅웅! 끄릉, 끄르르릉! 웅혼한 공명(共鳴)에 이어 딱 붙어 있던 문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이 가서 그런지 얼음 갈리는 소음이 심했으나 틈은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결코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이렇게 문이 열린다는 건, 방금 폭음이 정상적인 발생이 아니었다는 방증이니까. 신전 내부에서 모종의 사건이 발생한 게 분명했다. 이윽고 30센티미터쯤 벌어진 틈으로 비로소 신전의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 나도 모르게 흠칫 숨을 들이켰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마치 실 끊긴 인형처럼 공중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전라(全裸)의 여인이었다. 찬란한 은발이 아래로 쏟아지듯이 흘러내린다. 힘없이 흔들리는 양팔 역시 바닥을 향하고 있다. 180도 뒤집어진 고개는 핏물과 고통으로 얼룩져 있다. 훤히 노출된 풍만한 젖가슴이 떨리듯 흔들거리고, 잘록한 복부는 쉼 없이 오르락내리락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아, 아, 아, 아…!” 여인의 두 다리는 발목이 붙잡히기라도 한 듯, 양방향으로 쭉 뻗다 못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수평을 이루고 있었다. 이미 팽팽하게 당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좌우로 찢어진다. 결국 잡아당기는 힘을 이기지 못했는지, 타원형으로 확장된 음부가 쭉 찢겨 갈라졌다. 다음 순간,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직감할 수 있었다. 차마 상상하기도 싫은 그것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 찌지지지지직! “아…. 아아아아아아아악!” 연한 살이 찢어지는 소리와 울음 섞인 처절한 비명이 겹쳐 울렸다. 가랑이부터 찢겨나간 갈래는 짧은 곡선을 그리며 양 넓적다리를 대차게 뜯어냈다. 찢긴 사타구니서 퍽, 핏물이 폭발하듯 터졌다. 상반신만 남은 여인의 몸이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갈 곳 잃은 소장과 창자가 어지러이 흩어진다. 쿵! 그와 동시에 비로소 문이 완전히 열렸다. 저 모든 상황이 채 5초도 되지 않아 일어난 것이다. - 킼캌캌캌! 킼캌캌캌! 킼캌캌캌캌캌캌캌! 난데없이 이어지는 기괴한 웃음 소리. 붉은 선혈이 낭자하다 못해, 끔찍하리만치 뜯긴 여인의 그로테스크한 모습에 무언가가 통쾌하다는 듯이 웃는다. 가슴이 철렁 흔들렸다. 정체 모를 기운이 물밀 듯 흘러나와 전신을 압박한다. 너무나 포악하고, 너무나 흉포하다. 악하디악한 기운이 발끝부터 스멀스멀 타고 올라와 심장을 옥죈다. 오금이 저릿하다. 그때와 똑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봉인은 이미 진작에 깨졌다는 것을. 고대 악신의 부활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을. - 젠장! 불현듯 화정이 크게 흥분했다. 나는 그제야 그 무언가, 아니 악신으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정확하게 보이지가 않는다. 까마득한 천장을 가득 채울 정도의 커다란 그림자가 꿈틀거리고 있다. 시커먼 액체가 형체를 이루는 것 같기도, 혹은 검은 연기가 흐르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흐물흐물하고 흐릿한 무언가를 보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거대해 형상을 명확하게 인지하기도 어려웠다. 팔이나 몸통, 다리가 보일라치면 순식간에 위치가 변화했다. 도저히,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최소한 악신이라는 사실은 절절하리만치 확신할 수 있었다. 저 기묘한 형체는 청량하고 신성한 공간을 자신의 기운으로 깡그리 잠식해나가고 있었으니까. 존재감 또한 무시무시해 우리 전부를 찍어 누르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때였다. - 캌! 뚝 웃음을 그친 악신이 돌연히 아가리로 추정되는 부분을 쩍 벌렸다. 그리고 상체만 남은 은발의 여인을 주워들었다. 이때까지 살아 있었는지 여인의 몸이 잠깐 흠칫했다. 그러나 악신은 마치 승리자라도 된 듯 느긋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여인을 들어 올렸고, 힘없이 꺾여 널브러진 고개 부분을 통째로 입안에 넣었다. 그리고 힘차게 씹는다. 콰그작! 무언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핏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동시에 미세하게 움찔거리던 여인의 몸이 덜커덕 정지하더니 축 늘어졌다. 악신의 행동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후루루루루루루룩! 으적, 으적, 으적, 으적! 여인의 남은 몸은 물론, 흡사 국수를 흡입하듯 대롱거리는 장기까지 빨아들이고는, 아까 찢은 두 다리까지 모조리 씹어 삼켰다. 이윽고 한껏 만족한 듯 입맛을 쩝쩝 다시고 나서야 악신은 몸을 돌려 우리를 바라봤다. 선혈을 잔뜩 묻힌 채, 벌건 빛을 번들거리는 주둥이 꼬리가 스리슬쩍 올라갔다. ============================ 작품 후기 ============================ 아…. 감사합니다. 설마 기억해주실 줄은 몰랐는데, 예상외로 많은 독자 분들께서 알고 계셨군요. 하하. 조금 울컥할 뻔했어요. ㅜ.ㅠ ㅋㅋ 생일 축하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 0791 / 0933 ---------------------------------------------- There May Be Blue And Better Blue. 신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고요해졌다. 처절한 울부짖음도, 살이 갈가리 찢기는 소리도, 기괴한 웃음도, 뼈까지 씹어 삼키는 소리도 모두 사라졌다. 그러나 변한 건 있었다. 더는 청량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고 향기로운 냄새도 나지 않는다. 악독한 기운이 뭉클뭉클 치솟고 눈이 찌푸려질 정도로 진한 피 냄새가 흐른다. 낭자한 선혈을 가운데에 두고 악신은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다. 소강 상태는 아니었다. 애초 전투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으니까. 그러나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우리를 관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탐색이 목적이 아닌, 어린 아이가 창 너머 장난감을 보는 듯한 호기심 어린 눈초리. 과히 좋은 시선은 아니었다. - 김수현. 불현듯 들려온 화정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이 정도로 가라앉은 음성은 예전 아틀란타를 앞뒀을 때 딱 한 번밖에 들어보지 못했다. - 최악의 상황이야. 그 정도야 알고 있다. 들어가자마자 웬 여인이 죽어 놀라기는 했지만, 우리가 꼼짝도 못 하는 이유는 잔혹하게 살해하는 광경을 봐서가 아니었다. 당장 심장을 쥐어짜 터뜨릴 것만 같은 저 무지막지한 존재감 때문이다. 몸이 너무나 무겁다. 숨을 삼키기조차 어렵다. 칼자루를 쥔 손이 미세하게 떨고 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똑같은 현상을 겪고 있을 것이다. 지금도 콸콸 쏟아지는 악기(惡氣)는, 우리 전부를 찍어 누르고도 남을 만큼 넘쳐 흐르고 있었으니까. 그러한 찰나, 화정의 말이 이어졌다. - 최선은 여인을 깨우는 거였고, 차선은 여인을 살리는 거였어. 하지만 지금 두 방법 모두가 원천 봉쇄당했지. 무슨 말인지 알아 들어? ‘누가 외부에서 개입했다는 말인가?’ - 그건 나중에 생각할 문제야. 지금은 무조건 사는…. ‘…….’ 화정은 끝까지 말을 잇지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사는 데만 집중해라. 그러나 말을 흐렸다는 건…. - …살고 싶어, 살리고 싶어? 결국에는 그때와 똑같은 선택지인가. ‘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는 형도 한소영도 없다고. 지금이라면 열세 명을 미끼로 사용해 충분히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비록 가슴은 아프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하는 게 옳지 않을까. 그러나, ‘살리고 싶다.’ 말은, 아니 대답은 나도 모르게 반대로 해버렸다. 왜, 왜…. 왜 이렇게 생각한 거지? - 염화(炎化) 능력 준비해. 뒤에 13명은 바로 도망치라고 하고. 화정은 간단하게 말했지만, 그만큼 확실하게 와 닿았다. 염화는 사용할 생각도 하지 말라고, 사용하는 순간 네 수명이 오 분으로 줄어든다고 언제나 말하지 않았는가. 말인즉 죽음은 이미 기정 사실이라는 소리였다. ‘도망치게 하라고?’ - 왜. 그럼 다 같이 힘을 합쳐 싸우기라도 할까? ‘하지만….’ - 꿈 깨. 현실적으로 생각하라고. 지금 누구를 상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 - 신이야. 그것도 어지간한 신들은 범접할 수조차 없는 고위급 신. 그 찬란한 영광을 이룩한 고대 홀 플레인 거주민들도 떼로 덤벼들어 떼죽음을 당했는데, 고작 이 열네 명으로 뭘 하겠다는 거야? 화정의 말은 신랄했지만, 반박할 수 없을 만큼 옳았다. - 이제부터는 싸우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너도 애초 나를 품고 있으니 발목이라도 붙잡을 수 있다는 거지, 쟤들 중에서 그나마 털끝이라도 건드릴 수 있는 애들은 두 명? 아니 세 명?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현재로써는 겨우 악신의 발목을 붙잡는 수준이라. 새 장비를 테스트하러 나온 것치고는 너무 가혹한 시험이 아닌가. - 설령 네가 오 분 만에 저놈을 쓰러트린다손 쳐도, 그 사이에 전멸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천운에 천운이 따른다고 해도 절반…. 김수현! 그때였다. 화정의 외침과 동시에 본능에 따라 몸이 방어 자세를 취했다. 찰나의 순간, 악신의 몸이 살짝 흔들리는 게 시야에 잡혔고, “이지스 시스템(Aegis System)!” 잔뜩 긴장한 백한결의 음성이 울렸다. 아차 한 순간, 소리소문 없이 짓쳐 들어온 검은 것과 정육각형의 흰 장막이 맞부딪친다. 꽈앙! 챙그랑! 고막을 찢는 굉음과 유리 깨지는 소리가 겹쳤다. 그리고, “까아아악!” 고통을 부르짖는 괴성이 이어졌다. 급히 몸을 돌렸다. 백한결은 허리가 절반으로 꺾인 채 공중을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백…!” 쾅, 벽에 금이 갈 정도로 강하게 부딪쳐 떨어진다. “우우우욱!” 왈칵 게워내는 핏물에는 찌꺼기가 섞여 있었다. 내부가 진탕이 됐다는 방증이다. 두어 차례 피를 더 토해낸 백한결은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죽지는 않았지만, 굉장히 위험한 상태처럼 보였다. 왜냐면 더 이상 미동도 보이지 않고 있으니까. 단 한 방에, 아니 일격 같지도 않은 일격에 백한결이 그로기 상태까지 몰린 것이다. “한결아…!” “뭐, 뭔…!”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고성과 괴성이 오고 갔다. 그러는 와중, 나는 황급히 달려가는 안솔을 나는 가만히 응시했다. 이상하다. 화가 나야 정상인데 이상할 정도로 머릿속이 급속히 냉각되는 기분이다. - 김수현. 어서…! 그래. 관찰을 끝냈는지 비로소 악신이 움직일 낌새를 보인 것이다. 방금 공격은 아마 가벼운 인사였는지도 모른다. 자꾸 흔들릴 것 같았지만, 나는 침착해지려 애쓰며 남다은의 견갑(肩甲)을 짚었다. “사용자 남다은.” 깜짝 놀란 남다은이 나를 쳐다봤다. 예의 차가운 표정을 가장하고는 있으나 입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한심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보통의 사용자였다면 이미 진작에 줄행랑을 쳤을 테니까. 게다가 나도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는데, 다른 사용자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지시를 하나 내리겠습니다. 지금부터 책임지고 남은 인원과 함께 전장을 이탈합니다.” “…네? 그게 무슨…!” “방해가 돼서 그렇습니다.” “……!” 남다은은 발칵 외치려고 했지만, 선수를 쳐 입을 닫게 만들었다. 동그란 눈으로 입을 뻐끔뻐끔 움직이는 게,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말문이 막힌 것 같다. 뜬금없는 말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한가로이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니었다. 왜냐면 마침내 악신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내가 아니더라도 분명 누군가 죽는 이가 나올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놈의 관심이 내게 쏠리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곧장 마력을 끌어올렸다. 체내의 흐름과 갑옷의 효과를 합산하면 마력 흐름 속도는 4.5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감각이 가시지를 않는다. 악신이 뿜는 압박감을 완전히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그때 심장을 중심으로 돌연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화정이 스스로 힘을 보내주기 시작했다. 게헨나를 상대할 때와 똑같은 상황. “그럼, 부탁합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앞을 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크, 클랜 로드!” 한 박자 늦게 남다은이 붙잡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상황은 극히 불리했다. 눈에 보이는 형상은 어렴풋하며 형체는 명확하지 않다. 어떤 식으로 공격해올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 겨우 알아낸 거라고는, 아까 백한결이 공격받았을 때 놈의 공격이 무척 빨랐으며 무음(無音)이었다는 것. 정보가 너무나 부족하다. 그래서 돌진하는 속도를 적당히 조절했다. 우선은, 알아야 한다. - 캌캌캌캌! 앞으로 느긋이 나오던 악신은 나를 보고 주춤하더니 갑작스레 기괴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이었다. - 왼쪽! 한순간 길고 검은 연기 같은 것이 뱀처럼 튀어나와 휩쓸 듯이 나를 후려친다. 소리는 역시나 무음. 방향은 화정의 말대로 왼쪽. 그럼 저걸 놈의 오른팔이라고 봐야 하는 건가? 아주 짧은 순간이기는 했지만, 게헨나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신속에 가까운 속도였으나 게헨나 정도로 빠르지도, 강렬하지도 않다. 지옥 대공과 일전을 벌인 경험이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붙잡아준다. 찰나의 순간, 나는 흐르듯 안쪽으로 파고들어 공격을 스치게 했고, 그대로 몸을 돌려 무검을 크게 베었다. 회전력이 가미된 칼날이, 그대로…? “뭐?” 어떻게 된 거지? 왜 어떤 감촉도 느껴지지 않는 거지? 무검은, 하릴없이 연기를 뚫고 나왔다. 너무 쉽게 빠져나오니 외려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다음 순간, - 왼쪽! 피해! 그 순간 무언가 스치는 느낌이 전해졌다. 반사적으로 이형환위를 사용하려는 찰나, 우웅! 꽈앙! 균형이 오른쪽으로 급격히 틀어지는 느낌과 함께 시야가 확 기울었다. 내가 인지하지 못한 사이 눈앞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몸은 미끄럼틀을 탄 것처럼 오른쪽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아…!” 콰쾅! 무언가에 부딪혔는지, 부서진 얼음 잔해가 와르르 쏟아진다. 그제야 내가 오른 벽에 부딪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주변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박살 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 어디 한 군데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건….” 절로 침음이 나온다. 눈앞을 물들이는 붉은 장막. 갑작스럽게 소비된 적잖은 마력. …우선, 게헨나의 보호 구슬이 지켜줬다는 건 알겠다. 얼떨떨하게 왼쪽을 돌아보니 마찬가지로 나를 보고 있는 악신이 보였다. 아까 스치게 한 공격은 여전히 쭉 뻗어 나가 있었다. 허나 오른쪽이나 발차기라면 모를까. 나는 분명히 왼쪽으로 공격받았다. 그러면…. 도대체 내가 어떻게 공격을 받았다는 거지? “…….” 갑자기 정신이 멍해졌다. * - 콰쾅! 지직거리는, 노이즈 섞인 굉음이 어둠을 왕왕 울렸다. “맙소사! 이거 정말 대단한데?” 어두운 공간, 영상을 구경하던 루시퍼가 화들짝 탄성을 터뜨렸다. 화등잔만 하게 떠진 눈동자는 몹시 놀라워하는 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예상치 못한 일을 겪은 것처럼, 루시퍼는 양손을 깍지 낀 채 흥미진진하게 영상을 응시했다. “공간을 저렇게 쉽게 비틀고 전이해서 공격한다고? 그것도 저게 가능한 일인가? 아니지, 저건 나도 못 막을 거 같은데.” 연신 의문과 감탄을 터뜨리던 루시퍼는, 이내 돌연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거 김수현은 문제도 아니겠어. 이 정도면 오히려 프로세르피나가 싸게 먹혔다고 봐야 해.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야.” 극찬에 극찬을 거듭한다. 이윽고 하하 웃은 루시퍼는 문득 옆을 돌아봤다. 아무것도 없는, 오직 어둠밖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었지만, 루시퍼는 기분 좋은 미소를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사탄.” ============================ 작품 후기 ============================ 악신은 아직 전력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냉정히 말하면 놀고 있는 상태지요. 물론 김수현이 염화를 사용하면 그러지는 못하겠지만, 현재 상황으로는 압도적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물론 악신은 게헨나보다는 약합니다만, 두 존재의 차이는 있습니다. 두 존재가 김수현을 대하는 방식을 생각해보시면 그 차이는 물론, 현재의 상황이 이해가 가실 듯합니다. :) 0792 / 0933 ---------------------------------------------- There May Be Blue And Better Blue. - 이 멍청이! 정신 차려! 그때 날카로운 음성이 머릿속을 흔들었다. - 상대는 악신이야! 게헨나가 아니라고. 지금이 훨씬 더 위험한 상황이라는 걸 모르겠어? 지금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 그래, 게헨나를 애초 너를 죽이고 싶어 하지 않았어. 오히려 살리고 싶어 했다고! 그런데 이 악신도 그럴 것 같아? ‘그건…!’ - 아니야! 이놈은 너를 원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아! ‘으음.’ 화정이 악을 쓰듯 소리 지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그 당시 게헨나는 엄청나게 봐주면서 나와 싸웠다. 아마 죽일 마음만 있었다면 단박에 쳐 죽였으리라. 결과적으로 염화 능력을 사용하고도 졌으니까. 말인즉, 악신을 게헨나와 동일시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악신이 나를 봐주며 싸울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게헨나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불현듯 아직은 막연하던 죽음이 성큼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나는 자세를 바로 잡았다. 호흡을 길게 잡으며 가슴을 추슬렀다. - 정면. 아니, 약간 왼쪽! 악신의 몸체서 푹 솟구친 연기가 물 흐르듯 뻗어온다. 여전히 소리는 들리지 않으나 몸을 꿰뚫을 듯한 예기(銳氣)는 더없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흡사 공간을 베어내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날카롭다. 나는 앞으로 돌진하며 무검을 횡으로 베어 들어갔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 멀건 불꽃으로 타오르고, 붉은 궤적을 그렸다. 써억! 이번에는 확실히 손맛이 전해졌다. 마치 썩은 통나무를 잘라내는 느낌이었다. 베어낸 부분이 갈라지고 불에 닿은 부분은 연소하며 소멸한다. 문득 화정이 왜 동료들을 도망치게 하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보통의 공격으로는 해를 입힐 수 없고, 신병이기(神兵異器) 급 정도는 돼야 타격 가능한 듯싶다. - 카앜? 이건 악신도 미처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을까. 물론 큰 타격을 줬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틈을 이용할 수는 있다. 놈이 주춤한 사이, 계속 치달리며 힘껏 바닥을 박찼다. 차가운 바람이 귓전을 스치고, 악신과의 거리가 삽시간에 가까워졌다. 몸이 큰 만큼 공격할 곳은 많다. 무검을 양손으로 쥐고 하늘 높이 들어 올려 몸체를 향해 힘차게 내리쳤다. 화르르륵! 불꽃의 잔상이 직선으로 낙하한다. 턱! 그 순간, 난데없이 수십 개의 구체가 독사처럼 뻗어 나와 무검을 감쌌다. 화정의 불꽃에 닿는 족족 활활 타오르며 소멸했으나, 검은 연기는 그 이상으로 줄기차게 나오며 메운다. 그 중 적잖은 숫자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 순간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큭!” 나는 황급히 몸을 틀며 전방으로 검을 뿌렸다. 그리고 이형환위로 바닥으로 이동해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비록 공격은 실패했으나 소정의 성과는 있었다. 아까 나를 후려친 공격의 정체를 밝혀냈다. 아마 스친 연기에서 갈래가 뻗어 나와 나를 후려쳤으리라. 게헨나의 채찍을 연상하면 된다. 그렇다면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나는 최대 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원을 그리듯 악신의 주변을 돌다가 한순간 안쪽으로 뛰어들어갔다. 악신은 나를 잡으려는 듯 기다란 연기를 줄기차게 뽑아내 휘둘렀지만, 나는 쉴 새 없이 발을 놀리며 일부러 방향을 복잡하게 틀었다. 풋워크로 지그재그로 가다가 중간중간 이형환위를 섞으며 최대한 어지럽게 한다. - 카앜! 그때 악신이 분노에 찬 괴성을 흘리며 몸부림치더니 느닷없이 번개같이 바닥을 내리쳤다. 꽈앙! 급히 발을 놀려 벗어난 찰나, - 크뢐뢐뢐뢐뢐뢐뢐! 느닷없이 수십, 아니 기백 개가 넘는 연기가 일제히 치솟아 시야를 가득히 메웠다. 아주 짧은 시간, 내리치기 직전의 채찍처럼 출렁인 그것들은 이내 마구잡이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미친!” 반사적으로 몸을 날린 순간, 갑작스레 옆에서 폭음이 솟았다. 꽈꽈꽈꽈꽈꽈꽈꽝! 땅이 울부짖었다. 거센 풍압에 몸이 날아가 바닥을 구르고, 터져 나간 얼음 파편이 다닥다닥 붙는다. 흡사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사방이 솟구치며 떠르르 흔들린다. 간신히 자세를 회복하자 터져 일어난 얼음 바닥이 나를 덮칠 듯이 무너진다. 나는 왼쪽으로 몸을 기울여 면을 박차 옆으로 빠졌다. 그리고 이형환위를 사용해 빗줄기처럼 처박히는 검은 연기를 피해 벗어났다. 콰쾅! 간신히 벗어나 몸을 돌리자 할 말을 잃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완전히 파헤쳐진 바닥과 사방을 나뒹구는 파편들. 악신의 주변은 융단 폭격이라도 맞은 듯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아름답던 신전이 순식간에 폐허로 변했다. “허억, 허억!” 어느새 호흡도 거칠어져 있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흐른다. 만약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게 늦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어쩌면 방금 한 번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걸지도 모른다. 원래는 회피를 중점으로 되는대로 돌려 깎을 작정이었는데, 설마 저런 식으로 접근을 차단할 줄 꿈에도 몰랐다. 모조리 받아 쳐낼 자신이 없는 이상, 가까이 가는 순간 죽는다. 상황은 최악을 넘어 멸망으로 치달리고 있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주변은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정적이 흐른다. 참을 수 없는 괴로움과 갑갑함이 동반된 침묵이었다.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기동력과 민첩함. 무음의 연기. 사각을 허용치 않으며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를 카운터. 무엇보다 눈으로만 보고 대응하려니 미칠 것 같았다. 기척은 겨우 잡힐까 말까 하는데 소리는 아예 들리지도 않는다. 마치 파더와 각성한 쿠샨 토르를 함께, 아니 수십 배는 업그레이드된 존재를 상대하는 기분이다. 더 큰 문제는, 여태껏 보고 느낀 것조차 악신의 본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놈이 점차 강해지는 느낌이다. 내 움직임이, 내 능력이 가면 갈수록 읽히는 것 같다. 화정의 말이 서서히 체감된다. 악신은 절대로 내가 버틸만한 수준의 상대가 아니었다. 현재 상황이 유지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분명히 당할 것이다. 방금도 제대로 된 공격은커녕 간신히 회피하는 게 고작 아니었는가. “…….” …결국, 염화 능력밖에 답이 없는 건가? “흐읍…!” 억지로 숨을 삼켰다.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죽을 만큼의 상처도 입지 않았고, 아직은 싸울 힘이 남아 있다. 아찔하리만치 까마득한 차이가 느껴졌지만, 온몸을 달구는 뜨거운 기운이 나를 지탱해주고 있다. - 크라라랔! 그때 악신이 괴성을 짖으며 몸을 움직여 내게 달려오기 시작했고, 세차게 터진 연기가 미사일처럼 날아온다. 거대한 것이 빠르게 다가오는 모습은 흡사 해일을 마주하는 듯했다. 빌어 처먹을. 정말 인정사정 보지 않는군. 나는 이를 악물고 마주 달렸다. 가까이 접근하면 아까와 같은 꼴이 날 테고,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피할 수만도 없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기회를 엿본다. 좌우로 짓쳐 오는 두 갈래 연기는 나를 잡으려는 듯 사정없이 요동쳤으나, 무검을 크게 휘두르며 안으로 들어갔다. 깔짝대는 게 불가능하다면, 한 번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놈의 공격을 유도한 후, 그 틈을 노려 한순간 치고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연기를 걷어내고 날개를 움직여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러자 역시나. 두 연기는 마치 호밍 기능이라도 달린 듯 곧바로 나를 쫓아 세차게 솟아올랐다. 이윽고 닿기 직전, 나는 급작스럽게 활공을 멈추고 있는 힘껏 몸을 뒤틀었다. 바람이 강하게 귓가를 스치고, 무언가 시커먼 것이 아슬아슬하게 눈앞을 지나쳤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피한 게 아니다. 갈래로 뻗어 나올 공격을 경계하며 나는 그대로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 이대로…! - 아…! 그때였다. 화정이 아차 한 듯 소리 지른 찰나, 불현듯 오른 발목에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 갑작스럽게, 눈앞이 빙글 돌았다. 보이는 세상이 180도 반전한다. 이 모든 사실을 인지했을 때. 몸은, 부웅!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수직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얼음 바닥을 향해서. 콰앙! 굉음과 함께 안면에 강한 충돌을 느꼈다. 몸이 크게 들썩거렸다. 전신이 짓이겨지는 느낌이다.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폭발해 터져 나간다. 그러나 억 소리가 나오기도 전, 바닥이 크게 멀어졌다가 삽시간에 또다시 가까워졌다. 웅웅웅웅! 동시에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꽈앙! 이번에는 아까와 같은 충돌은 없었다. 그 대신 엄청난 충격파가 느껴지며 나는 그대로 튕기듯이 굴렀다. 찡한 이명이 고막을 울리고 시야는 흐릿해지다 못해 TV의 노이즈 신호처럼 비틀렸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감각과 정신이 따로 노는 기분이다. 잠시 후, 핑그르르 돌던 세상이 우뚝 정지했다. 내부가 왠지 모르게 허전하다. 나는 그제야 마력이 크게 소비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헨나의 보호 구슬이 또 한 번 발동된 것이다. - 현…! 수현…! 화정의 애타는 음성에 나는 놓을 뻔한 정신 줄을 간신히 잡을 수 있었다. “끄으….” 안면이 찢어지는 것 같다. 이마가 깨질 듯이 아프다. 강한 현기증에 시야가 가물가물하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연기는 지나쳤는데. 갈래도 뻗어 나오지 않았는데. 아니, 그보다 어째서 타격을 입은 거지? 게헨나의 보호 구슬이 왜 뒤늦게 발동된 거야? 의문이 꼬리를 물고 떠올라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모든 게 복잡했지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겨우 눈을 뜨자 거대한 연기 덩어리를 힘차게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른 일어나려고 했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두 번째 충돌은 막았지만, 첫 번째 충돌에 의한 충격은 한치의 가감 없이 고스란히 떠안은 결과였다. 문득 뜨거운 것이 한 줄기 흘러내려 시야를 붉게 적셨다. - 김수현! 어서…! 마침내 화정의 음성이 완전하게 들리는 동시, 어두운 연기가 내게로 내리 꽂힌다. 절체절명의 순간, “도와리야!” 뻐엉! 막 염화 능력을 일으키려 했을 때, 괴상한 기합과 무언가 후려치는 소리가 겹쳤다. 그러자 놀랍게도 악신이 미세하게 휘청거렸고, 나를 노리던 연기가 궤도를 벗어나 처박혔다. “너…!” 어떻게 된 일이냐는 말이 나오기도 전, 공찬호의 손에 들린 수라마창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돌연히 허공을 활공하는 차소림이 나타났다. 나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은빛을 흘리는 발키리 스커트를 입은 차소림은 분명히 공중을 날고 있었다. 놀라움이 가라앉기도 전, 차소림의 손에 들린 은색 창이 나선으로 회전하며 형형색색의 빛깔을 뿌리기 시작했다. “채홍(彩虹).” 담담한 음성이 들린 순간, 차소림의 손을 떠난 창이 광선처럼 쏘아져 악신의 몸통을 섬광처럼 꿰뚫었다. - 크랔! 악신이 눈에 보일 정도로 움찔한 찰나, 차소림이 손이 다시금 살며시 움직였다. 마치 이리 오라 손짓하는 것처럼. “홍예(虹霓).” 그러자 꿰뚫어 지나친 창이 빙글 반전하더니 반원 모양으로 휘어졌다. 그리고 무지개 빛깔을 내뿜으며 돌아와, 처음보다 더한 기세로 악신의 몸통을 훑어 베어버린다. - 크라라랔! 분분히 흩날리는 검은 연기. 입을 다물지 못하겠다. 수라마창은 그렇다 쳐도, 아르쿠스 발키리 세트도 신기에 해당하는 무기였나? - 무지개 여신 플라비우스의 전투 처녀니까. 안될 것도 없지. 급박한 상황 속 들려온 화정의 차분한 음성은, 어지러운 머릿속을 가라앉혀줬다. 그때 잠깐 비틀거리는가 싶던 악신이 우뚝 몸을 가눴다. 어그로가 튀었다. 놈이 내게서 완전히 몸을 돌리고 다른 두 명을 쳐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피하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갑자기 배꼽이 훅 쏠리는 느낌과 함께 눈앞의 광경이 빠르게 멀어졌다. 누군가의 힘으로 어딘가로 끌려간다. 잠시 후, 나를 가볍게 받아내는 부드러운 육체가 느껴졌다. * “회수했어요!” 김수현을 끌어온 제갈 해솔의 낭랑한 음성이 울렸다. “────. ────. 안젤루스여!” 그러자 안솔이 득달같이 달려와 지팡이를 뻗었고, 곧 하얗고 따뜻한 빛이 김수현의 얼굴을 물들였다. “어, 어떡해…! 피 좀 봐…!” 이유정은 울먹거리는 낯으로, 핏물로 얼룩진 김수현의 얼굴을 훔치며 미리 준비한 물약을 입가로 꾹 밀어 넣는다. 우악스럽게 밀려드는 액체를 한 차례 마신 김수현은, 겨우 주변을 돌아보고 놀란 빛을 드러냈다. 도망치라고 기껏 시간을 끌었는데 전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김수현이 남다은을 향해 벌컥 외치려고 하자 갑자기 하승우가 앞을 가로막았다. “얘기는 들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남겠다고 했습니다.” “그게…!” “알고 있습니다. 저 악신은 일반 공격은 통하지 않고, 특수한 힘이 깃든 무기로만 타격할 수 있죠. 감안하고 남겠다는 겁니다.” “……!” 하승우는 아주 빠른 속도로 말을 이었다. 김수현은 입을 뻐금거렸다. 하승우가 흘깃 뒤를 쳐다봤다. 콰쾅! 신전을 울리는 굉음. 턱을 걷어차일 뻔한 공찬호가 간신히 몸을 빼는가 싶더니, 난데없이 옆구리를 얻어맞아 빙그르르 날아가 벽에 틀어박혔다. 그 순간 김수현이 눈을 찌푸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기는 했지만,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연기는 어떤 갈래도 뻗지 않았으나, 갑자기 옆 공간이 이지러지더니 연기가 치솟아 후려쳤다. 문득 하승우가 김수현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김수현. 내 제한을 풀어다오. 잠깐 시간 끄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 누구도 듣지 못할 목소리로 속닥거린다. “전투 가능한 사람들은 나가서 싸울 거예요. 마법사와 사제들은 맨투맨으로 지원하고, 불가능한 근접 계열들은 여기서 보호할 거고요.” 미처 반문하기도 전, 제갈 해솔이 설명을 잇는다. 김수현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가 세게 짓씹었다. “전부 다 죽을 겁니다.” 으르렁거리는 음성이 흘러나왔으나 그 누구도 미동도 보이지 않는다. 콧김을 세게 뿜은 김수현은 결국 머리를 끄덕였고, 그러자 하승우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곧바로 돌아보자 아슬아슬하게 날아다니는 차소림과 파리를 잡으려는 듯 연기를 크게 올린 악신이 보였다. 모종의 불안감을 느낀 걸까. 김수현의 눈이 큼지막하게 떠졌다. “오, 오라버니!” 아직 치료가 끝나지 않은 터라 안솔이 제지했지만, 김수현은 뿌리치며 몸을 바로 했다. 다음 순간, “급 가속!” 세찬 바람과 함께 김수현의 모습이 사라졌다. 머리카락이 나부낄 정도의 강렬한 풍압에 사용자들은 하나같이 눈을 찌푸리며 앞을 노려본다. 그리고, 확실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손바닥처럼 내리쳐진 연기가 이제 막 차소림에 닿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펄럭이는 붉은 망토가 빛살처럼 허공을 가른다. 시간은 이제 1초가 흘렀을 뿐이다. 바로 그 순간! 콰앙! 정말로 아슬아슬하게, 붉은 망토와 검은 연기가 교차했다. 간신히 빠져 나간 붉은빛이 하늘로 솟아오르고, 검은빛은 하릴없이 하강해 얼음 바닥을 쳐부쉈다. “아…!” 누군가 경악에 가까운 탄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때였다. - 카아아아아아아앜! 짜증에 가까운 괴성을 질러댄 악신의 몸이 돌연히 울룩불룩 솟았다. 이어서 펑펑 폭음이 터지며 검고 뾰족한 줄기들이 미쳐 날뛰듯 몸체를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도저히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어떤 소음도 일지 않았지만, 기백에 달하는 수가 줄기줄기 뽑아져 나와 벼락처럼 시야를 덮으며 하늘로 쏴졌다. 그 끝은, 차소림을 안고 공중을 선회하는 김수현을 향하고 있다. 그 찰나의 순간, 화르르르르르르륵! 김수현이 발이 힘차게 허공을 휘저었고, 이내 흑 줄기와 비슷한 수에 달하는 열화검이 이글거리며 맺혀가기 시작한다. 허공을 찢어발기며 줄기차게 올라가는 흑 빛 줄기들. 허공을 불태우며 넓고 둥글게 퍼지는 맑은 불꽃의 검들. 흡사 뚫으려는 창과 막으려는 방패를 보는 듯한 광경은 진정으로 장관이었다. 다음 순간, 두 기운이 사정없이 충돌하고 흩어지며 접합 지점으로부터 커다란 빛무리가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짓눌린 풍압이 돌풍으로 변해 사방으로 휘몰아치고, 동시에 기이한 진동이 아득히 울리며 모든 소리를 잡아먹는다. * - 쿠쿠쿠쿠쿠쿠쿠쿵! 번쩍 터진 빛이 영상을 가득히 메웠다. 어둠에 몸을 묻은 두 존재는 체면도 잊은 채 상체를 바싹 기울여 주시하고 있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빛이 사그라지고, 다시 영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빛이 사라졌을 뿐, 현상은 여전히 이어지는 중이었다. 마치 물결에 쓸려나가는 것처럼 얼음 신전이 와르르 무너진다. 그야말로 성대한 파괴 축제였다. 그리고 그 중앙으로 악신의 형체는 굳건히 서 있었다. “꽤 선전하는군요. 솔직히 손뼉이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숨을 토하듯 감탄을 터뜨린 루시퍼는, “하지만, 이제 끝났네요.” 옆을 돌아보며 빙긋 웃어 보였다. “끝났다고?” “거의 말입니다.” 사탄의 반문에 루시퍼가 말을 정정했다. 그러나 사탄은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글쎄. 오히려 이제부터가 시작일 수도.” “그래요? 제 눈에는 김수현이 거의 한계에 다다른 것으로 보이는데요?” 루시퍼가 영상을 가리켰다. 그 말대로 상황은 과히 좋지 않았다. 아직 서 있는 악신에 반해, 차소림을 끌어안은 김수현은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무언가 탐탁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예. 저기에 김수현만 있는 건 아니죠.” 사탄의 말을 끊고 루시퍼가 맞장구 쳤다. 마치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는 듯이. “하지만 대다수가 보통 인간에 불과해요. 물론 신기를 가진 인간도 있습니다만, 김수현만 한 무력을 보이지는 못합니다. 악신의 입장에서는 갓 송곳니 난 강아지 정도로 느낄 겁니다. 아니, 그냥 김수현이 쓰러지면 모두가 무너지게 돼 있어요.” “…너무 낙관적인데.” 확신하듯 말하는 루시퍼의 음성에 사탄은 여전히 영상을 바라보며 갸웃했다. 그러자 루시퍼의 입가에 오묘한 미소가 더해졌다. “아! 물론 주의해야 할 사용자가 한 명 더 있기는 합니다.” 마치 깜빡 잊기라도 한 듯 루시퍼는 과장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영상을 향해 손을 뻗더니 이리저리 조작하는 것처럼 손가락을 움직였다. 잠시 후, 크게 확대된 영상에 한 여인이 모습을 비쳤다. 손톱을 깨물며 불안한 낯으로 앞을 쳐다보는 여인은 바로 안솔이었다. 누군가를 찾으려는 듯 계속 시선을 돌리는 모습이 퍽이나 안쓰러워 보였다. “이름이 안솔…. 이었나? 재미있는 힘을 가진 인간이에요.” “너…. 알고 있었나?” 영상에서 눈을 뗀 사탄이 루시퍼를 흘끗 쳐다봤다. 영상을 보는 내내 무심하던 눈동자에 처음으로 놀랍다는 빛이 스쳤다. “그럼요. 그 이상한 힘 때문에 우리 계획이 몇 번이나 가로막혔습니까? 김수현만이 아니라 안솔도 요주의 인간이지요.” 루시퍼는 킥킥 웃으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아무튼, 저 귀여운 공주님의 출현은 이미 예상했습니다.” 가볍게 말하기는 했지만, 루시퍼의 목소리는 뜻 모를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탄. 사용자라는 존재는 폭주하는 악신을 절대로 쓰러트릴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기적이 일어나더라도 이건 절대 불변이에요. 그럼 저들이 현 상황을 자력으로 타개할 유일한 해결책이 뭔지 아십니까?” “재 봉인이겠지.” 깍지 낀 양손을 무릎에 놓은 사탄이 담담히 대답했다. “그렇죠. 하지만 현재 그 정도의 봉인을 걸 수 있는 인간은 저기에 없어요. 딱 하나 남은 방법은, 저 악신을 봉인한 여인을 깨우는 겁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죽었지요.” “…….” 청산유수처럼 이어지는 루시퍼의 설명에 사탄은 말문이 막히는 걸 느꼈다. 그러면서 이제야 루시퍼가 왜 저렇게 자신만만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덤덤하던 낯에 진한 흥미의 빛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말인즉, 루시퍼는 시작부터 전황을 뒤집을만한 거리를 원천적으로 봉쇄한 것이다. “그랬군. 그랬어. 너는 애초 저놈들이 올 걸 예상하고 계획을 진행한 건가.” “뭐, 그냥 염두에 뒀을 뿐입니다.” 루시퍼가 부드러이 웃으며 말하자 사탄이 아차 하며 되물었다. “혹시 되살아날 가능성은 없나?” “어떻게요? 이미 악신의 뱃속으로 들어가 영혼까지 갈가리 찢겼는데요? 그 불쌍한 여인은 이제 이 세상에 없는 존재입니다. 애초 소환도, 되살리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루시퍼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어깨까지 으쓱거리며 말하는 폼이 마치 흥분한 어린 아이를 보는 것 같아 사탄은 싱겁게 웃었다. “하하. 이제 좀 웃으시네요. 자아, 사탄. 이제 마무리를 구경하자고요. 일이 잘 풀리면 같이 축배나 들도록 합시다.” 그렇게 말한 루시퍼는 비로소 영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상은 아직 안솔을 비추고 있었다. 루시퍼는 또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안솔을 보는 것도 좋지만, 우선은 김수현이 어떻게 됐는지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응?” 그러한 찰나, 루시퍼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멈칫했다. 무언가가, 달라져 있었다. 정확히 말해보면 안솔의 모습이 달라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쩔 줄 몰라 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는데,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태도가 확 변했다. 치떠진 눈동자는 또렷하게 앞을 주시하고 있으며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흡사 긴 칼날 위에서 무섭게 집중하는 무당을 보는 듯했다. “…오호. 이제야 공주님께서 나서시는 건가?” 예상대로 안솔이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 투쾅! 이윽고 빛의 기둥이 광선처럼 내려오더니 영상 속 풍경이 덜컹 흔들릴 만큼 강한 힘을 뿜는 천사가 강림한다. 그럼에도 두 악마의 태도는 여유만만이었다. 특히 루시퍼는 이제 곧 저 공주님의 얼굴이 일그러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단, 루시퍼는 세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게 있었다. 첫 번째는 안솔의 행운이 103 포인트로 올라감으로써 있을 수 없는 일을 구현해주는 ‘Blue Dahlia’라는 권능이 깃들었다는 것. 두 번째는 행운이 105로 올라감으로써 의식적인 의도성을 한층 강화해주는 ‘바라는 대로’의 권능이 깃들었다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그때, 품에서 무언가를 꺼낸 안솔이 앞으로 힘껏 집어 던졌다. “저건…?” “상자?” 의아해 하는 두 악마의 음성이 겹쳤다. 루시퍼는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가 급히 화면을 전환했다. 그러자 허공을 힘차게 날아가는 적당한 크기의 상자가 영상에 잡혔다. - 천사 님! 부디, 오라버니가 더 이상 다치지 않고 이길 수 있도록…! 이미 개봉돼 입구를 덜렁거리는 상자는, 이미 허연 빛을 흘리며 공중에 새하얀 마법 진을 토해내고 있었다. - 기적…! 어디서 간절한 외침이 아스라이 들려오자, 소환된 마법 진은 한층 더 눈 부신 빛을 뿜어내며 엄청난 속도로 배열(配列) 변화를 일으켰다. 그리고. - 화아아악! 이어지는 광경을 바라본 순간, “무…!” 루시퍼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영상은 또 한 번 찬란한 빛으로 물들었다. ============================ 작품 후기 ============================ 2회로 나눌까 하다가, 그냥 1회로 합쳤습니다. 독자 분들 읽으시는데 그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하하. 그나저나 간만에 01시 00분 이전에 업데이트해보네요. :) 0793 / 0933 ---------------------------------------------- 내흉(內凶). “자, 잠깐!” 크게 당황한 루시퍼가 갑작스레 손을 들었다. 거의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다. 일순간 화면을 가득 채우며 흐르던 빛이 우뚝 멎었다. 영상이 정지된 것이다. “루시퍼.” “잠시, 사탄. 자, 잠시만요.” 루시퍼의 얼굴에는 당혹한 빛이 역력했다. 사정 조(調)로 말하는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후읍, 루시퍼는 일부러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조심스레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화면이 거꾸로 흐르며 되감기기 시작한다. 잠시 후, 영상이 도로 정지됐다. 되감긴 화면은 공중을 날아가는 상자를 비추고 있었다. 정확히는 허공에 생성된 하얀 마법 진을. “소환 진입니다.” 루시퍼는 애써 침착해 하며 말했다. 어느새 길게 찢어진 두 눈이 화면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다. “무작위 소환 진이군. 그것도 중간 세계로 한정된. 천사들의 작품인가?” 사탄도 담담히 긍정했다. 거의 정답에 가까운 수긍이었다. 루시퍼도 사탄도 진(陣)에 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갖춘 터라, 한눈에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허나 무언가 뒤숭숭한지 차분한 목소리에 희미한 불안이 묻어 나왔다. 이윽고 화면이 느릿하게 흐르고, 그에 따라 마법 진도 조금씩 변화를 보인다. 두 악마는 호흡도 잊은 채 집중해서 진의 변화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처음 상자가 토해낸 마법 진은 여러 기호(記號)가 일정한 법칙으로 나열된 형태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진을 구성하는 기호가 모조리 녹아 내리더니 새로운 문자가 쓰이기 시작했다. 마치 아메바처럼 분열한 빛의 글자는 전보다 절반 이상 작아진 크기로, 그러나 훨씬 복잡하게 진의 빈 공간을 채워나간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배열도 기호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새로이 완성된 마법 진은, 첫 형태와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아예 다른 마법 진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제 더는 소환 진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으음.” 루시퍼에게서 깊은 침음이 새어 나왔다. 새롭게 변화한 마법 진은 대 악마조차도 쉽게 읽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난해했다. 무언가 알 듯 말 듯한 기분이 드는데 해석을 시도하면 명확한 정의(定義)가 내려지지 않는다. 심지어 사탄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루시퍼가 다시 영상을 볼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즈음. “이건.” 무언가 알아차렸는지 사탄이 어둠에 묻은 몸을 일으켰다. 루시퍼의 눈에 비친 사탄은, 시뻘건 동공이 일렁이며 황당해 하는 빛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뭐, 뭡니까?” 사탄치고는 꽤 드문 반응이라 루시퍼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동시에 어렴풋하게 느끼던 불안이 점차 구체화하는 걸 느꼈다. “복합 진이다.” 영상으로 다가가는 사탄의 행동은 어딘가 모르게 황급함이 엿보였다. “복합 진이요?” 루시퍼가 반문한 찰나, 사탄은 영상에 손을 대고 비스듬하게 그어 내렸다. 그러자 핏빛 잔상이 화면 속 마법 진을 깔끔하게 이등분한다. “각자 역할은 구분돼 있지만, 서로 연동하는 형식이야. 연결 형식이 섞여 있어서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사탄이 빠르게 설명하며 마법 진의 오른쪽 아랫부분을 가리자 왼쪽 윗부분이 남는다. 두 쌍의 눈초리가 남은 부분을 유심히 바라본다. “아.” 그 순간 가늘게 노려보던 루시퍼의 두 눈이 치뜨듯이 커졌다. 마침내 깨달았다는 듯이. “차원 이동 진…!” “차원 이동 진이다.” 경악을 부르짖는 외침과 떨리는 음성이 겹쳤다. 루시퍼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말도 안 돼!’ 라는 소리가 목구멍 끝까지 치솟았으나 간신히 삼켰다. 눈앞의 영상이 조작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 남은 부분은…!” 사탄이 가린 손을 치웠다. 오른쪽 아랫부분이 드러나자 루시퍼가 멈칫했다. 마법 진 때문이 아니라 불현듯 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이미 영상을 정지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상황이었다. 그럼 과연 현재 상황은 어떻게 됐을까? *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전황을 정확히 보고 판단한 것도 아니었다. 상자도 반 장난으로 가져왔고 설마 쓸 일이 있으랴 싶었다. 애초 괴물 소환 상자 자체가 경우의 수를 따지는 게 아니라, 도박이요 모험이다. 그러나. 절망적인 상황에서 안솔은 단 하나를 바랐을 뿐이다. ‘오라버니가 더 다치지 않고 이길 수 있도록…!’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일으키는 ‘기적’. 있을 수 없는 일을 구현해주는 ‘Blue Dahlia’. 안솔이 의식하는 의도성을 한층 강화해주는 ‘바라는 대로’. 그리고 ‘괴물 소환 상자 4’. 이 네 힘이 어우러진 결과가 지금 막 나타났다. 툭, 떨어진 상자가 바닥을 굴렀다. 이어서 그 어떤 빛보다 눈 부신 광파(光波)를 뿌리는 마법 진이 공중으로 드높이 치솟는다. 진은 흡사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느릿하게, 그러나 가속하며 회전을 시작한다. 그야말로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절망을 느끼던 모두가 잠시 처한 상황을 잊고 고개를 젖힌다. 심지어 악신도 행동을 멈추고 몸을 돌렸을 정도였다. 느닷없이 발생한 징후(徵候)가 모든 존재의 시선을 빼앗는다. 어느새 진은 구성 기호를 보지 못할 만큼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동시에 점차 빛깔이 진해지며 크기를 키워간다. 마치 한계에 한계를 넘는 모터처럼 맹렬하게 돌아간다. 키이이잉! 문득 진이 철을 긁는 듯한 괴성을 토해냈다. 그러자 주변 공간이 꾸겨지듯 일그러지더니 종래 소라 껍데기처럼 둥근 나선을 그리며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 크어어엌! 돌연 악신의 거대한 몸체가 허둥대는가 싶더니 두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대로 날아가 공중에 떠 있는 진의 중앙에 처박혔다. - 까라라라라라라랔! 부활 이후 처음으로 악신이 비명을 터뜨렸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공간의 소용돌이가 악신의 몸체에 흡착해 있는 힘껏 빨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천장까지 닿았던 키가 서서히 줄어드는 게 그 방증이다. 악신은 안간힘을 쓰며 떼어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소용돌이는 더욱 끈덕지게 붙으며 기운을 흡수했다. 마치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벗어나고 달라붙는다. 그러나 악신도 이대로 당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난데없이 연기 두 갈래를 솟구치게 하더니 진은 물론, 인근의 소용돌이까지 마구잡이로 난타하기 시작했다. 물어뜯긴 연기가 빨아 먹혀도 줄기차게 뽑아내며 있는 힘을 다해 쾅쾅 후려갈겼다. 몸을 돌보지 않고 계속 치자 진이 덜덜 떨며 진동했고, 순간적으로 흡입이 약해진 틈을 타 악신은 겨우 소용돌이에서 벗어났다. 그리하여 겨우 바닥으로 추락했을 즈음, 악신의 몸집은 처음보다 십 분의 일 가량 줄어든 상태였다. - 크롸롸롸롸롸롸뢐! 무척 화가 났는지 악신이 아가리를 크게 벌려 흉악이 포효한다. 키이이이이이이잉! 그에 반응하듯 마법 진도 흉포한 맞울림을 떨어 울렸다. 얼음 신전이 무너지고 대지가 흔들린다. 단순히 소리와 소리가 부딪음에도 불구하고, 충돌의 여파는 지진을 일으킬 정도였다. 그렇게 악신이 혼신의 힘으로 저항하는 동안, 진이 비로소 응축한 힘을 일거에 해방하며 터뜨렸다. 폭발하는 격류(激流)처럼 사납고 빠르게 흘러 넘치는 마력은, 악신을 가볍게 지르밟을 만큼 살벌한 힘을 품고 있었다. 그때 휘몰아치던 소용돌이가 벌컥 멈췄다. 이윽고 마법 진이 한 번 더 찬란한 빛을 밝히며 모종의 기운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동시에 기묘한 공명(共鳴)이 이제 겨우 형체만 유지하는 신전에 망망하게 메아리쳤다. 홀연히 모든 소음이 차단됐다. 아니. 사라졌다는 표현이 옳으려나. 그저 잡음 섞인 이명(耳鳴)이 깜박대며 고막을 자극할 뿐, 공간은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하아, 하아. 안솔은 갑자기 호흡 곤란을 느꼈다. 외부 소음이 차단돼서 그런 걸까. 내부서 울리는 숨소리나 침 삼키는 소리가 한층 또렷하게 들린다. 문득 어디선가 불어온 강풍이 안솔의 머리카락을 세차게 흐트러트렸다.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풍압이 거세기도 했지만, 바람이 품은 기운이 굉장히 뜨거웠기 때문이다. 모든 걸 불태울 것 같은 뜨거운 열풍(烈風) 속, 안솔은 나부끼는 로브를 꾹 말아 쥐며 하늘을 노려봤다. 눈 부신 빛에 휩싸여 잘 보이지 않았으나, 붉은빛이 흐르는 부드러운 각선(脚線)이 언뜻 눈에 스친 것 같기도 했다. 잠시 후, 쉴 틈 없이 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마침내 무언가가 완전히 빠져 나왔다. 이윽고 사뿐히 내려앉는 그 무언가를, “……!” 안솔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 “흐음?” 여인이 가볍게 고개를 떨치자 부드럽게 웨이브 진 머리카락이 풍성하게 흘러내렸다. 콸콸 흐르는 용암을 연상케 하는 머리카락은 생동감이 넘치고, 두어 가닥 살며시 매만지는 손가락은 너무나 곱고 관능적이다. 그뿐일까. 몹시 선명한 선홍 빛을 담은 눈동자, 가지런히 잡힌 이목구비, 야무진 턱 선, 손을 대면 미끄러질 것만 같은 살결…. 모든 것이 대단했다. 도저히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매혹적인 자태였다. “허…. 이건 또 어떤 변고인가.” 탄식한 여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단순한 동작임에도 불구하고, 오연한 눈매로 느긋이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은 너무나도 권위적이다. 그러나 거슬리지 않는, 외려 당연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감미롭고 자연스럽다. 한 가지 특이한 건, 여인의 배가 한껏 부풀어 있다는 것이다. 만삭의 임산부처럼 남산만 하게 크고 둥글게 부르터 오른 상태였다. 그 모습조차도 무척이나 아름답다. “수나야, 수나야. 너무나 이상하구나. 이게 도대체…. 응?” 그 순간 노래 부르듯 말하며 부푼 복부를 쓰다듬던 여인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시선도 한 곳으로 고정됐다. 아직 빛이 사그라지지 않아 먼빛으로 커다랗고 거대한 형체가 시야로 들어왔다. 붉은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하? 타나토스의 아이가 왜 이곳에…?” - 케레레레레레레렠! 그때였다. 놀라워하는 여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악신이 쿵쿵거리며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흡사 미쳐 날뛰는 멧돼지처럼 진로에 걸리는 모든 걸 밟아 부수며 짓쳐온다. 아무리 좋게 봐도 환영하는 의미는 아니라, 그 흉악함을 느낀 여인의 눈매가 한껏 가늘어졌다. “미친놈이로군.” 여인이 담박한 목소리로 말을 뱉는다. 그러는 동안 악신은 완전히 근접해 있었다. 마치 한 방에 터뜨려 죽이겠다는 듯, 미끄러지듯이 거리를 줄인 악신이 한껏 몸을 비틀어 젖힌다. 그 어느 때보다 길고 두꺼운 연기가 용솟음치며 하늘로 올라갔다가 주먹처럼 내리 꽂힌다. “후유.” 그 찰나의 순간, 여인이 짧은 한숨을 흘리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왼손으로는 배를 살짝 움킨 채. 콰앙! 공간마저 떨어 울리는 굉음. 충돌의 여파로 허연 연기가 자욱이 치솟았다가 살그머니 가라앉았다. 잠시 후. “…참으로 서럽구나. 내 왕을 잉태했는데도 보호해줄 지아비가 없으니 이런 꼴을 당하는가.” 서글픈 목소리와 함께 드러난 광경은, 진정으로 신기에 가까웠다. 거대하게 뭉친 연기가 가녀린 한 손에 잡혀 있었다. 악신이 온 힘을 다한 일격을, 여인은 마치 어린애 손목 비틀듯 간단하게 막아낸 것이다. 여인은 잠시 누군가를 원망하는 듯 붉은 입술을 삐죽였지만, 곧 차분히 눈을 치떠 상대를 올려다봤다. “그나저나 네놈은 정녕 미친…. 아, 정말로 미쳤군.” 여인은 악신의 상태를 단박에 알아봤다. 그러더니 자극적으로 웃어 보였다. 입가에 머금은 미소는 분노라기보다는 비웃음에 가까웠다. “그래도….” 콰르르륵, 콰르르륵! 문득, 시뻘건 염화(炎火)가 접합 지점으로부터 콰르르르 일어나 연기를 살라먹으며 불타오른다. 꿈틀꿈틀 용틀임 치는 불꽃은, 이 세상 어느 기운보다 파괴적이다. 심지어 태고의 불이라 불리는 화정보다도. 그 순간, 여인의 눈이 번쩍 떠졌다. 진득하게 흘러나오는 살의가 차후 벌어질 일을 예고해주는 듯하다. “왕을 시해하려 한 죄는, 목숨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일대를 웅혼이 울리는 미성은,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사형 선고였다. ============================ 작품 후기 ============================ “삐아아아아아!” 투명 안솔이 울부짖었다. 0794 / 0933 ---------------------------------------------- 내흉(內凶). 콰르르르르르르륵! 게헨나의 몸에서 거대한 불꽃이 뿜어졌다. 그 순간 가녀린 손에 잡혀 옴짝달싹 못하는 악신을 보는 눈동자가 일변했다. 약간 귀찮은 듯한 느긋함도, 상대를 내려다보는 오연함도 사라졌다. 오직 맹목적인 살의만이 폭발적으로 치솟고 있다. 잠시 후, 크게 일어났던 불꽃이 점차 운무(雲霧)처럼 변하더니 게헨나의 오른팔을 휘감듯 모였다. 지고(至高)의 존재가 작정하고 뿜어내는 압박감은, 악신이 찍소리도 못할 만큼 압도적이다. 이윽고 주먹 쥔 게헨나가 마치 어퍼컷을 후리듯 가볍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꽈앙! 지뢰 백 개를 한꺼번에 터뜨린 듯한 폭음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지 악신의 거대한 몸체가 허공을 훨훨 날아 벽에 부딪혔다. 충돌에 벽을 박살 내고도 한참을 밀려나더니 바닥에 데구루루 나동그라졌다. 그렇게 겨우 멈췄을 때 악신의 몸체 중앙에는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시커먼 연기가 흡사 선혈처럼 주룩주룩 흘러나온다. “호오, 자가 회복이라. 그 연기는 내부에서 생성하는 것이냐. 참으로 가당치도 않은 놈이로다.” 경탄과 비웃음이 절묘하게 섞인 목소리였다. - 크라라랔! 분노한 악신이 울부짖었다. 그러나 잔해 속에서 몸을 일으킨 찰나, 악신은 눈앞에서 이글거리는 불꽃이 작렬하는 걸 마주해야만 했다. 찌직!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아닌, 찢기는 소리였다. 타오르는 빛무리는 검은 연기를 찢고 들어가 내부로 침투했다. 그리고 이제야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마음껏 자신을 터뜨렸다. 뻐엉! 폭음과 함께 악신의 머리가 힘껏 젖혔다. 문제는, 빛무리가 하나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선두를 시작으로 수십 개의 붉은 빛살이 혜성처럼 긴 꼬리를 늘어뜨리며 뻗어 나간다. 악신은 황급히 웅크려 방어하려 했지만, 겁화(劫火)의 불은 악신의 전신을 패도적으로 찢어발기며 모조리 폭발했다. 뻐엉, 뻐엉, 뻐엉, 뻐엉! 엄청난 폭음이 악신의 온몸에서 터져 나왔다. 연쇄 폭발로 인해 약간의 시간차는 있었으나 외려 그게 더 고통스러웠다. 곳곳이 터져 나가 걸레짝이 된 몸은 차치하고서라도, 내부서 사방팔방 옮겨 붙은 겁화는 계속, 끊임없이 타들어 가는 중이었다. 치이이이이이이익! - 커어어엉, 커어어엉! 시커먼 연기가 메말라가는 물처럼 연소한다. 흡사 독에 닿은 금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부식(腐蝕) 현상을 보는 듯했다. 얼마나 통증이 심한지 악신이 사방을 쾅쾅 내리치며 자해할 정도였다. 게헨나는 어느새 허공에 앉아 잔인한 미소로 악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응.” 문득 오른 다리가 쭉 뻗치며 하늘로 향하더니 반으로 접혀 왼쪽 허벅지에 얹혔다. 들어 올린 왼손은 얌전히 턱 끝을 받친다. 마치 자신의 작품을 찬찬히 감상하는 듯한 태도는 뇌쇄(惱殺)적이면서 역설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한동안 구경하던 게헨나는 흡사 교향악단의 마에스트로라도 된 듯 예술적인 손놀림을 보였다. 그러자 콰르르륵 일어난 겁화가 춤추듯 두 갈래로 뻗어 나가 둥근 호선을 그리며 쓰러진 악신을 감쌌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이 쩍 벌린 짐승 아가리를 보는 듯하다. “어때, 이제 좀 정신을 차렸느냐? 그럼 무릎 꿇고 머리라도 조아려 보지 그러느냐.” 염화(炎火)에 무참히 물어뜯기는 악신을 향해 게헨나가 선심 쓰듯 말했다. - 크르르릌, 크라라랔! 그러나 악신은 죽겠다고 몸부림치면서도 거친 괴성을 질렀다. 어쩌면 고통에 겨운 처절한 비명일지도 모른다. 물론 게헨나는 전혀 그렇게 받아들일 용의가 없었다. 외려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그런가. 그럼 싫다는 의미로 알겠다.” 딱! 게헨나는 가볍게 손을 튕겼고, 종미(終尾)의 불은 기다렸다는 듯 덮쳤다. 보호 본능인지 악신은 온몸에서 검은 연기를 뿜어냈지만, 무의미한 반항이었다. 겁화는 엄청난 속도로 연기를 불사르며 악신을 게걸스레 씹어 삼킨다. 끝났다고 여겼는지 게헨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돌연 몸을 움찔 움츠리더니 낯을 찡그린다. 허나 곧 표정을 회복하고는 사뿐히 허공에서 뛰어내렸다. 출산이 임박해 산통이라도 있었던 걸까. 게헨나의 왼손이 둥글게 부푼 배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진다. “그래 그래. 이 못난 어미가 못 볼 꼴을 보였구나. 그래도 너무 심하게 차지는 말아다오. 곧 끝낼 테니까.” 감미로운 음성으로, 살살 달래듯이 말한 게헨나는 미소 띤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부스럭! “!” 채 너덧 걸음도 옮기기 전,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게헨나의 걸음이 정지했다. 단박에 눈매가 날카로워지고 선홍 빛 눈동자는 소리의 근원을 노려본다. 소환의 여파는 미세하게나마 가라앉은 상태였다. 이어서 이글거리는 불길 사이로 거뭇한 그림자가 비척거리며 걸어 나왔다. 요격을 준비하고 있던 게헨나는, 비로소 정체를 드러낸 누군가를 보며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아….” 탄성치고는 무언가 오묘하게 애달다. 이윽고 오른손에 생성한 겁화가 구멍 난 풍선처럼 사그라지고, 살의로 번들대는 눈동자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물감처럼 번진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건, 이제 막 걸어 나온 그 누군가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게 어떻게…?” 핏물로 얼룩진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던 김수현은, 잔해 속 홀로 서 있는 게헨나를 보며 입을 벌렸다. 낯에 서린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이 사라지고, 오른 견갑에 얹은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서로의 멍한 눈초리가 허공에서 운명처럼 얽혔다. 두 남녀가 마침내 기적적으로 재회한 것이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게헨나?” 김수현이 간신히 쥐어짠 목소리로 게헨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름을 부른다. “당신….” 악신은 까맣게 잊은 듯, 망연한 음성이 회답한다.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는지 게헨나의 눈이 질끈 감겼다. “…….” 한참 동안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약간이 시간이 흐르고, 소리 날 정도로 급히 숨을 들이켠 게헨나가 천천히, 느릿하게 두 눈을 뜬다. 그리고 여전히 서 있는 김수현을 확인한 순간, 비로소 두 눈동자에 확신과 기쁨이라는 감정이 깃들었다. 탁탁! 다음 순간, 게헨나의 몸이 이끌리듯이 움직였다. 가볍게 놀린 발이 점차 빨라졌다. 게헨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는 듯 달려가 김수현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섰다. 눈 깜짝할 사이, 두 남녀의 거리가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그리고, “김수현…!” 게헨나는 쓰러지듯 허물어지며 김수현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비릿한 피 냄새와 뜨거운 열기가 섞인다. 아직 아득한 빛을 지우지 못한 김수현이 망부석처럼 서 있는 동안, 게헨나는 가슴에 고개를 묻고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스리슬쩍 위를 쳐다본 게헨나가 살그머니 손을 올렸다. “바보 같은 표정이로다. 정신차리거라.” 가볍게 뺨을 치니 찰싹 소리가 들렸다. “어헉.”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김수현은 깜짝 놀라며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게헨나의 양 어깨를 바스러지도록 움켰다. “게헨나? 게헨나!” 자신도 모르게 게헨나의 뒷목을 받친 김수현이 눈을 내리뜨며 반복해 묻는다. 그러자 촛불처럼 일렁이는, 처연하고도 그윽한 게헨나의 눈동자가 한 번 깜빡였다. “이게 꿈이라면.” 꿈결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여는 게헨나. “이 세상을 모조리 부숴버릴 것이다. 그러니 꿈이 아니라고 말해다오. 어서.” 밑도 끝도 없는 협박에 재촉까지 이어졌으나 김수현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정수리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오던 눈초리는, 한껏 부풀어 오른 복부에 고정됐다. 시선을 느낀 듯 게헨나는 목에서 얼른 손을 내리더니 부끄러워하며 손바닥으로 배꼽을 가렸다. 그러나 김수현이 손을 대니 곧 살며시 풀어졌다. “곧, 곧 산달이다.” “어, 엉?” “아, 아이 참. 두 번 말하게 하지 말아라. 쑥스럽지 않으냐. 곧, 곧 아이가…. 그, 그러니까 그대와 나의 결실이….” “…….” 낯을 잔뜩 붉힌 게헨나가 고개를 푹 숙이며 자그맣게 웅얼거렸다. 김수현의 입이 쩍 벌어졌다. 허나 이내 아차 하더니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왜 여기에…!” 드디어 본질적인 질문이 나왔다. 그러나 애초 질문하는 상대가 잘못됐다. 따지고 보면 게헨나도 소환 당한 처지지 소환한 처지는 아니니까.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구나. 갑자기 마법 진이 나를 삼켜 어딘가로 보내더니 웬 검둥이가….” “검둥이…? 아!” 그때였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두 남녀는 동시에 흠칫하며 어딘가를 돌아보았다. 뒤늦게 악신에 생각이 미쳤으나 앞을 바라본 김수현은 두 번째로 기함하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극강의 무력을 뽐내던 악신이었다. 당할 뻔한 차소림을 구해낸 후, 김수현은 내심 죽음을 결심한 상태였다. 왜냐면 마력이 전부 소진되기도 했거니와, 염화 능력 말고는 도저히 해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러할진대. 그런 악신이 벌레처럼 바닥을 기고 있다. 온몸이 구멍 뚫린 치즈처럼 너덜너덜한데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호, 그래도 타나토스의 아이라는 건가. 꽤 근성이 있지 않은가.” - 크르르릌, 크르르릌! 게헨나가 이죽거림과 동시, 겨우 몸을 일으킨 악신은 혼신의 힘을 다해 한 줄기 연기를 뽑아냈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었는지, 거뭇한 연기가 필사적으로 날아온다. 코웃음을 친 게헨나는 느긋이 손을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안 돼! 게헨나!” 김수현이 갑작스럽게 게헨나를 껴안았다. “무, 무슨?” 이번에는 게헨나가 당황할 차례였다. 삽시간은 둘째치고서 라도, 설마 이러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수현이 워낙 죽을 둥 살 둥 껴안으니 게헨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퍼엉! 결국 악신의 공격은 그대로 김수현의 등에 명중했고, 둘은 충격에 튕겨져 나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김수현은 게헨나의 보호에 온 신경을 쏟았다. “가, 갑자기 왜…?” 비교적 안전히 드러누운 게헨나가 의아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러나 곧 말을 흐리고 말았는데, 고통 받는 기색이 역력한 김수현의 낯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안면 전체가 핏물로 얼룩져 있다. 누가 그랬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저 죽일 놈이…!” 바드득, 이 갈리는 소리가 살벌하기 그지없다. 악신이 죽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왕을 시해하려 한 죄. 그리고 부왕(父王)을 죽이려 한 죄. “비켜다오! 내 당장 이놈을…!” “게헨나. 괜찮아?” 그러나 게헨나는 또 한 번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자신의 배를 소중히 감싸 안고 있는 김수현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찰나의 순간, 게헨나는 김수현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모성애도 있는데 부성애가 없을 리가 없잖은가. ‘그대도…. 우리 아이를….’ 그렇게 생각하자 여태껏 참았던 설움인지, 아니면 감동인지 모를 감정이 게헨나의 가슴에서 풍선처럼 부풀었다. 새삼스러운 사실이지만, 게헨나는 수천 년을 고독하게 살아온 존재다. 그간 사내라고는 겪어본 적이 없으며 당연히 김수현이 처음이었다. “저 빌어먹을 놈이…!” 몸을 일으켜 분노에 떠는 김수현의 모습이 너무나 신선하게 느껴졌다. 몸이 배배 꼬이면서도 굉장히 싫지 않은, 실로 오묘한 기분이다. 그래서 그런 걸까. 혹은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서러운 마음에서 그랬는지, 현재 기분을 좀 더 느끼고 싶었는지, 보호받고 싶다는 본능이 일었는지, 아니면 사내에게 기대고 싶다는 여인의 감정이 깨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게헨나는 김수현이 앞을 보는 사이 아주 살짝 자신의 배를 긁었다. 살갗이 약간 까지기는 했지만, 피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을 만큼 작은 생채기에 불과했다. “아~.” 이어서 들려오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신음. 그러나 김수현이 불안한 얼굴로 돌아보게 하는 데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왜 그래?” 게헨나가 45도로 고개를 꺾으며 복부에 손을 얹는다. 김수현이 배꼽 근처에 난 작은 상처를 발견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냥…. 잠깐 실수했을 뿐이다.” “실수?” “만, 만만치 않은 놈이더구나.” “……!” 그 순간 김수현의 두 눈이 불꽃을 튀겼다. 만약 악신이 조금이라도 이성이 있었다면 억울해 하며 땅을 쳤을 것이다. 갑작스레 튀어나와 가슴에 구멍을 뚫은 게 누군데. 내부에 겁화를 침투시켜 폭발하게 한 게 누군데. 지금도 전신이 불에 물어뜯기는 고통에 시달리는 게 누구 때문인데! 그러나. 화르르르르르르륵! 안타깝게도, 김수현은 게헨나의 바람에 120% 부응하고 말았다. 느닷없이 온몸에 맑은 불꽃이 분수처럼 솟구쳐 흐르기 시작한다. 심지어 날개까지도 불이 옮아 흡사 불사조의 날개를 보는 듯했다. 드디어 염화 능력이 발동된 것이다. 이 순간만큼은 김수현도 게헨나와 호각으로 싸울 수 있다. 설령 5분 한정이라 할지라도. 쿵! 땅을 강하게 밟는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공간이 이지러지듯 일렁이더니 수십, 아니 수백 개의 열화검이 엄청난 속도로 생성되며 불빛을 뿜기 시작했다. 잠시 후. “5분 안에 돌아올게.” 김수현이 열화검과 함께 쏜살같이 쏘아졌다. 이윽고 낯을 환히 밝히는 불의 향연 앞에서 게헨나가 자세를 바로 했다. 설레어 하는 소녀처럼 반짝이는 두 눈동자는, 김수현에게서 한시도 떼지지 않는다. 그저 황홀해 하며 입을 벌릴 뿐. “수나야, 수나야. 저 사내가 네 아비란다. 지금 똑똑히 봐두려무나.” 과연 태아(胎兒)는 어미의 말을 알아들었을까. 통, 통. 신기하게도, 게헨나는 두어 번 배를 차는 앙증맞은 발바닥을 느꼈다. ============================ 작품 후기 ============================ 로유진 : …그래서, 김수현을 몰아붙여주시면 됩니다. 물론 죽이는 건 안 되요. 어디까지나 적당히…. 악신 : 이야, 좋네요. 제가 처음으로, 아니 두 번째인가요? 여하튼 주인공을 마구 때릴 수 있는 거군요! 좋습니다! 신 나네요! 로유진 : 적당히 좀 부탁 드리겠습니다. 악신 : 하하! 어? 그나저나, 후반에 게헨나가 등장하고 염화 능력도 사용하는군요. 그러면 이후로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로유진 : 때린 이상으로 맞을 예정입니다. 게헨나가 너덜너덜하게 만들고, 김수현이 확실히 일격을 꽂는 거죠. GP도 생각해야 하니까요. 아무튼, 매우 심하게 찢길 테니 마음껏 힘내주세요. 악신 : 적당히 좀 부탁 드리겠습니다. (후기 패러디입니다.) 0795 / 0933 ---------------------------------------------- 본처(本妻) 강림(降臨). 가히 수백을 헤아리는 열화검(熱火劍)이 모조리 악신의 몸에 명중했다. 작렬하는 섬광은 신전을 환히 밝혔고, 이내 들끓는 소음을 내며 연기를 불사르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공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화마(火魔)는 기하급수적으로 강도를 더해 악신을 갈가리 찢어발긴다. 화아아아아아아악! 폭발적인 발광(發光)은 육안으로 감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라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마력으로 눈을 보호했음에도 부담이 느껴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는 무검을 바스러지도록 움켰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속으로 자꾸만 울분이 치밀어 오른다. 세상에. 임산부를, 만삭의 여인을 공격하다니. 그것도 내 아이라는데. 어쩌면 큰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악신이라는 놈을 오체분시하지 않고서는 이 끓는 속이 가라앉지 않으리라. 이윽고 조금이나마 빛이 사그라졌다. 나는 아주 결딴을 낼 요량으로 공중을 활공하며 무검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용솟음치는 화정의 힘이 외부로 드러나 무검을 나선으로 휘감는다. 빛무리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억지로 눈을 치뜨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응?” 아래에는 아직 잔존한 화정의 기운이 물결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중앙에는 주먹만 한 불씨가 사방팔방 널려 있다. “…….” 아주 잠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점차 사그라지는 불씨 안을 바라본 순간 나는 크게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조각조각 찢긴 검은 연기가 서서히 연소하고 있었으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황급히 주변을 둘러본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악신의 거대한 몸체는 보이지 않았다. “주, 죽었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물론 염화 능력을 사용했고, 필살기나 다름없는 열화검도 제대로 들어가기는 했다. 하지만 그래도 악신인데. 화정보다 서너 수 떨어진다고는 하나 무려 신이지 않은가. 전투가 시작된 이후, 시종일관 처맞기만 하던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다. - 에휴…. 그때 한심하다 느껴지는 한숨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문득 화정은 모종의 사정을 알고 있으리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으나, 나는 아래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정말로, 진정으로 믿어지지가 않는다. 혹시 어디로 도망친 건가. 아니면 죽은 척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오만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경계를 풀지 않고 바닥으로 내려갔을 즈음, 어느새 불씨는 좁쌀만 하게 작아진 상태였다. 불현듯 검은 연기를 사르르 흘리는 둥글게 뭉친 작은 덩이 하나가 눈에 밟혔다. 나는 홀린 듯한 기분으로 그것을 주워들었다. 말랑하면서 뭉클뭉클한 감촉이다. 어쩌면 이게 악신이 소멸한 흔적이 아닐까. - 김수현. ‘응?’ - 악신은 소멸했으니까.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그래?’ 내가 계속 갸웃하는 걸 알았는지 화정이 확실하게 말해줬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화정의 확언을 듣자 약간은 마음이 놓인다. - 그보다 이제 너를 걱정하는 건 어때? 이제 한 4분 정도 남은 거 같은데. 그러나 이어지는 말을 들은 순간, 나도 모르게 아차 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시시각각 몸 안의 기운이 사라져 가는 느낌이 엄습한다. 짝짝짝짝. 돌연히 손뼉 치는 소리가 들렸다. 게헨나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다. “역시 내 반려가 될만하구나. 그렇지? 수나야.” 게헨나가 배를 어루만지며 미소 짓는다. 수나라고…? 드드드드드드드드! 그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심히 떨리는 소음이 일더니 실제로 주변 공간이 덜덜거리며 떨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내가 서 있는 바닥까지도. “무….” 주변을 둘러보려는 찰나 쿵 소리와 함께 천장 한쪽이 무너졌고, 이어서 바닥이 갈라지고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계속 있다가는 난리가 날 건 명약관화(明若觀火)였다. 쩌저저저저저저적! 느닷없이 얼음 바닥에 커다란 금이 갔다. 금을 기점으로 수십, 수백의 균열이 일어나 사방이 위태하게 흔들린다. 그러나 얼른 속을 가라앉혔다. 놀라기는 했으나 예상한 일이었다. 의심까지 받아가며 수송 어빌리티를 아낀 건 바로 이때를 위해서가 아니었나. 일단은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다. “게헨나!” 그렇게 생각한 나는 게헨나의 손을 덥석 잡았다. “호오, 신역이 해제되는 건가. 이대로 있다가는…. 응?” 무어라 중얼거리던 게헨나는 깜짝 놀라 나를 돌아봤으나 설명할 틈은 없었다. “제갈 해솔!” 마력을 담아 외치며 뒤를 돌아봤다. 어디 있는지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입구 쪽에 모여 있는 대 여섯 명 사이로 제갈 해솔이 나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척하면 척이라고, 제갈 해솔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바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모두 입구로! 수송 어빌리티로 벗어납니다!” 한 번 더 외치고 나서, 나는 게헨나의 손을 이끌어 달렸다. 중간중간 좌우를 둘러보자 나와 마찬가지로 입구로 죽어라 달리는 이들이 보였다. 공찬호나 차소림이나 황망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우선 벗어나야 한다는 의견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윽고 제갈 해솔의 주변으로 푸른 물방울 같은 것들이 모이기 직전, 나는 잠깐 뒤를 쳐다봤다. 손은 꽉 잡고 있었으나 괜스레 뜻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혹시, 눈을 뗀 사이 게헨나가 사라지는 게 아닐까고. “…….” “…….” 그러나 고맙게도 게헨나는 그 자리에 있었다. 외려 잔잔한 얼굴로 나만을 바라보고 있다. 어여쁜 선홍 빛 눈동자서 까닭 없이 강한 신뢰감이 느껴졌다. 다시 앞으로 눈을 돌렸다. 백한결의 보호막이 있다면 금상첨화일 텐데, 아쉽게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양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제갈 해솔의 영창도 거의 끝나가는 듯 보였으니까. 이윽고 입구에 도착한 순간 영창을 마친 제갈 해솔이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인원을 점검하더니 망설임 없이 주문을 외쳤다. * 퉁! 흡사 공이 튀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눈앞의 시야가 달라졌다. 발 아래 단단한 설판이 밟혔다. 어디로 이동하나 궁금했는데 놀랍게도 우리는 바다를 앞두고 있었다. 제갈 해솔의 수송 어빌리티가 진로 결계마저 뛰어넘었다는 방증이다. 물론 정확한 좌표를 모르면 말짱 꽝이겠지만. 아무튼, 탈출은 성공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진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실제로 몸에서 힘이 사라지고 있었고, 지금으로써는 간신히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아무래도 벌써 시간이 다 된 모양이다. “으이? 으에에에에에에엑!” 누군가 괴성을 지르며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안솔의 비명인데. 설마 게헨나를 봐서 그러는 건가? 그나저나 나도 주저앉고 싶군. “뭐, 뭐야? 다, 당신은…!” “워워, 진정하거라. 시끄럽지 않느냐.”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응? 아아. 신역은 단 하나의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그리고 만들 수 있는 공간이지.” 제갈 해솔의 물음에 답한 건, 다름 아닌 게헨나의 목소리였다. 그걸 바라고 물어본 질문은 아닌 것 같은데. 하하. 일순간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으나 게헨나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목적을 다 했거나 공간이 존재하는 의의가 사라진 이상, 신역이 유지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애초 그리 형편 좋은 공간도 아니라서. 현재 눈에 보이지 않는 걸 보니 결계 안에 있는 모양인데…. 아마 지금쯤 한창 가라앉고 있을 테지.” “저, 저기요. 상세한 설명은 고마운데요. 그걸 물어본 게 아니거든요? 아까는 너무 급해서 보고 넘어갔는데, 그쪽은….” “후후. 날붙이들은 이만 거두지 그러느냐. 이제 너희와 적대할 이유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도 안 되니까.” “그래서도 안 되니까…? 그게 무슨 뜻이에요? 아니, 우리가 그쪽을 어떻게 믿죠?” 설명해야 한다. 얼른 몸을 돌리고 설명해야 한다. 게헨나는 적이 아니라고, 오히려 우리 목숨을 구해줬다고 말해야 한다. 자세히는 못 하더라도, 최소한 한 마디라도 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띠링! 돌연히 가벼운 알림음이 들렸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익숙한 소리였다. 『전설의 업적! 사용자 김수현 외 열네 명은 고대 악신과 악마 14 군주 ‘프로세르피나’을 처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고대 악신은 인간 세상에 뿌리 깊은 원한을 간직한 채 강제로 잠들었습니다. 그러나 악마 14 군주를 제물로 깨어난 이후, 백야의 무희를 살해하는 걸 시작으로 타나토스의 명령을 이행하려 했지만, 결국 영원한 소멸을 맞이했습니다. 비록 뜻하지 않은 행운이 따랐다고는 하나, 세상을 구원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용자 김수현 외 열네 명은 고대 악신 20,000,000 Gold Point, 악마 14 군주 프로세르피나 5,000,000 Gold Point, 총 25,000,000 Gold Point를 획득합니다!』 『각 사용자당 1.666.667 Gold Point를 분배 받습니다.』 『캐러밴 시스템 확인! 각 사용자의 공헌도에 따라 추가 Gold Point를 지급합니다. 1. 게헨나(80%) 2. 김수현(10%) 3. 안솔(5%). 4. 차소림(1%)…. 그러므로 사용자 김수현은, 총 보상 Gold Point의 10%인 2,500,000 Gold Point를 추가로 부여 받습니다!』 『캐러밴 시스템 확인! 막타를 친 사용자 김수현에게 250,000 Gold Point를 추가로 지급합니다!』 허공에 메시지 여러 개가 주르륵 출력되는 것 같다. 아니, 분명히 메시지가 떴을 것이다. 고대 악신 정도면 충분히 업적으로 인정받을 만하니까. 그러나 나는 하나도 읽지 못했다. 글자가 보이기는커녕, 메시지조차도 물에 번진 물감처럼 흐릿했기 때문이다. 툭. 손에 쥐고 있던 검은 덩이가 떨어졌다. 이어서 가물가물한 시야에 거뭇한 형상이 드리웠다. 누구지…? “…….” 아…. 이제 정말 한계인가…. 잠시 후. “젠장, 무슨 메시지가 이렇게…. 클랜 로드. 아무래도 저희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주셔야…. 클랜 로드?” 누군가 내 어깨를 건드린 순간, 나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느닷없이 시야가 핑그르르 돌더니 푸른 바다가 아닌 흰 것이 아른아른 눈에 들어온다. 내 의도와는 다르게 머리가 꺾여 숙여졌다. “클랜 로드? 클랜 로드!” “오빠? 오빠 왜 그래? 오빠아아!” “너, 무슨 짓을 한 거냐.” “아, 아니! 나는 아무것도…!” 주변은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문득 후회가 들었다. 괜한 짓을 한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게헨나한테 부탁할 걸 그랬나. 조금 더 냉정하게 생각했어야 했는데. 아이 씨, 그나저나 누가 이렇게 흔들어 젖히면서 빽빽 소리 지르는 거야? 안 그래도 어지러워 죽겠는데. “고생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한숨 푹 자두거라.” 그때 누군가가 따스한 음성으로 내 귓가에 속닥거렸다. 그러자 불현듯 온몸이 가라앉는 듯한 감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마치 고요한 수면에 서서히 침잠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조용…! 왜 이리들 호들갑을…. 정신이 하나도…. 해명하는 것도 좋지만…. 우선 내 부군부터 살려야…. …좀 그러니, 적당한 장소를 안내….” 아스라이 들려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잘 보이지 않는 눈을 완전히 감았다. 부디 눈을 뜨고 일어났을 때, 모든 것이 평화롭기를 바라며. ============================ 작품 후기 ============================ 캣 파이트…. 좋지요. 단, 비슷한 상대끼리 붙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한소영이라던가, 또 예를 들면 세라프라던가요. 하하. :) 0796 / 0933 ---------------------------------------------- 본처(本妻) 강림(降臨). 은은히 흐르는 달빛조차 살라 먹는 어두운 저녁, 밤공기는 상당히 차가웠다. 쉴 틈 없이 칼바람이 몰아치는 설산보다야 낫지만, 그렇다고 설원의 밤이 따뜻하다는 소리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뿐이지 사실 춥기는 매 한 가지였다. 타닥, 타닥타닥! 불똥이 튀기는 소리가 기분 좋게 귓가를 때렸다. 신기한 일이었다. 장작은커녕 주변에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데 눈밭에 불이 타오르고 있다. 세기도 생각보다 강렬해 설원에 고요히 쌓인 월광(月光)에 붉은빛이 섞여 일부나마 어둠을 밝힐 정도였다. 그렇게 불씨가 분분히 흩날리는 장소에는 여러 명이 둥글게 둘러싸 불을 쬐고 있다. 주변에는 천막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고, 약간 작아 보이는 왼쪽 천막은 안에서 미세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중간중간 움직이는 기척이 들리기도 했고 가끔 콧노래 부르는 소리도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불 주변에 기이할 정도의 침묵이 흐르는 건, 저 콧노래를 듣기 위함인가. 아니면 다른 까닭이라도 있는 건가. 숨 막힐 듯한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불 따라 나부끼듯 요동친다. 김수현이 쓰러진 이후, 게헨나를 제외한 열세 명은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다. 신전에서 느닷없이 도망치듯 벗어난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수현마저 갑자기 쓰러졌다. 거기다 악몽과도 다름없는 게헨나까지 툭 나타났으니 어찌 놀라지 않고 배기랴. 그러나 동료들은 간신히 짧은 시간에 진정할 수 있었다. 게헨나의 차분한 설명과 적의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업적 보상으로 출력된 메시지가 혼란을 가라앉히는 데 크게 일조했다. 또한 김수현이 소진한 생명력을 게헨나만이 채워줄 수 있다는데, 달리 선택할 길이 없기도 했다. 결국 서둘러 철수한 열네 명은 황급히 야영지를 건설했고, 현재 노심초사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물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한 건 아니었고, 갑작스럽게 맞이한 상황을 이해하려 나름 애를 쓰고 있었다. 우선 게헨나의 등장 배경은 이해했다. 안솔이 살그머니 손을 들어 죄(?)를 고백한 것이다. 소환 과정을 정확히 본 건 아니지만, ‘괴물 소환 상자 4’와 ‘기적’의 조합이 현재로써는 가장 가능성 높은 가설이었다. 게헨나가 악신을 물리쳤다는 것도 이해했다. 사실 이해할 것도 없는 게, 허공에 출력된 메시지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게헨나의 공헌은 그 누구보다 압도적으로 높았으니까. 심지어 김수현보다도. 여기까지라면 사용자들도 어찌어찌 드러난 사실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결과가 좋다고 해도 과정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는 없다. 특히 게헨나, 아니 지옥 대공의 공포는 사용자 대부분의 머릿속에 깊숙이 각인된 상태였다. 하기야 단신으로 일만의 사용자를 휘저은 존재를 어찌 잊겠느냐마는. 왜 우리를 도왔는가, 어째서 예전과 태도가 돌변했나, 무슨 까닭으로 클랜 로드를 살리는 건가, 클랜 로드와는 정확히 어떤 관계인가 등등. 비록 목숨을 구원받은 처지이기는 하나 짚고 넘어갈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특히 몇몇 여인은 게헨나가 김수현을 ‘부군(夫君)’이라고 부르는 것과 한껏 부푼 배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사용자 중에서는 그 의문에 어느 정도 답변할 수 있는 여인이 있었다. 이후 시선은 예전에 김수현과 함께 생환한 여인에게로 쏠렸고, 김한별은 자신이 아는 한도 안에서 차근차근 답변했다. 기본적으로 말을 아끼기는 했지만, 게헨나가 적이 아니라는 점과 돌아올 수 있었던 경위는 확실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길고 긴 침묵을 깨고 누군가 나직한 침음을 흘렸다. 남다은은 멍하니 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붉은빛이 스민 낯빛은 어딘가 모르게 망연해 보였고, 발그스름한 눈동자는 흔들리는 불꽃처럼 힘없이 춤을 춘다. 입을 연 채 한참을 가만히 있던 남다은은, 눈만 움직여 건너편을 바라봤다. “그 지옥의 왕이라는 존재를 잉태시켜주는 걸 조건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거니.” “제가 보고 들은 것만 말씀 드렸을 뿐이에요. 그 이상은 추측에 불과하겠죠.” 서릿발 같은 목소리에 쌀쌀맞은 음성이 돌아온다. 김한별은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이상은 오빠한테 듣는 게 정확할 거예요. 물론 깨어나시면요.” 그렇게 말하고는 침울한 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에….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요….” 안솔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아까부터 눈치를 살피고 있다. 마치 ‘내가 왜 이런 짓을 한 걸까.’ 자책하는 듯이.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요? 상대는 엄~청 강하고 목숨은 소중하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빌미로 협박했다면….” 동의를 구하려는 듯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반응은커녕 입도 열지 않았다. 몹시 경직된 분위기에 안솔의 양 어깨가 축 늘어졌다. “후….” 이유정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두 무릎을 모았다. 깍지 낀 손등에 얹은 얼굴은 온통 수심이 드리웠다. 속으로 오만 복잡한 감정이 몰아치고, 가슴 한 켠이 육중한 바위에 짓눌려 질식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내 입가로 우습지도 않은데 꾸며 웃는 억지 미소가 지어졌다. ‘뭐, 그러네. 어쩔 수 없었잖아? 그리고 따지고 보면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고. 어쨌든 원정도 성공적으로 끝났는데, 이렇게 있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아 왜 이렇게 짜증이 나지? 뭐야 그게. 잉태시켜주는 걸 조건으로 돌려보내 준다고? 이게 말로만 듣던 임신 공격인가? 어휴, 안솔 쟤는 왜 그런 짓을 해서는….” 안솔의 몸이 움찔 움츠려졌다. 1초 후, 이유정은 속내에 흐르는 생각과 입 밖으로 꺼내려던 말을 반대로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만큼 심경이 복잡하다는 방증이었다. “아, 아니! 미안! 그게 아니라….” “왜? 나는 형님이 부러운데.” 이유정이 한껏 당황한 낯으로 손사래를 친 찰나, 진수현이 두 손으로 머리 뒤를 받치며 어깨를 으쓱했다. 낙천적인 음성이었다. 전원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아니, 그렇잖아요. 그 무지막지한 괴물에게서 구해줬고, 안솔도 어떻게 못 하는걸 스스로 생명을 나눠주면서까지 살려주고. 이건 오히려 우리가 고마워해야 하는 입장 아닙니까?” 확실히 진수현의 말 그대로였다. 그래서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는 것도 있고. 그러나 간과한 점이 하나 있다면, 여인의 속내까지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령 그런 조건을 달았다고는 해도. 그리고 남녀의 육체 관계라는 게 원래 미묘해요. 왜 그런 말도 있잖아요. 오빠가 자기 되고, 자기가 여보 되고. 그러니까 형님이랑 그 누님은….” 그러나 아는 체하며 중얼거리던 진수현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쏠린 시선 중 서너 개의 눈초리가 진한 살의로 변했기 때문이다. 특히 백한결은 입을 질끈 깨문 채 분하다는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리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도, 할 때와 안 할 때를 가려야 한다. “왕이라는 존재는 중요합니다. 특히 이런 세상에서는 더더욱 이요.” 점점 안 좋은 방향으로 나가는 분위기를 환기하려는지 하승우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지옥이라는 차원이 어떤 세상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직접 겪어보지를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사용자 김한별의 말대로 몇천 년이나 왕이 없었다면, 또 왕의 탄생이 굉장히 절박한 숙원이었다면…. 어떻게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라 봅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생각입니다만.” 마지막 말은 한 박자 늦게 이어졌다. 여러 뜻이 맞물리고 내포돼 있는 만큼 상당히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단, 이것만큼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겠지요.” 문득 하승우가 목소리를 높였다. “상대가 꼭 클랜 로드, 그러니까 김수현이라는 사내여야만 했는가. 저는 오히려 이 점이 궁금합니다.” 그때였다. 바스락! 천막의 휘장을 젖히는 소리에 이어, 가볍게 눈을 밟는 소리가 울렸다. 마침내 이야기의 물꼬가 터진 가운데, 한 여인이 천막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불은 좀 괜찮느냐.” 피로한 낯으로 걸어 나오는 여인은, 바로 게헨나였다. 몇몇 사용자가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게헨나가 손을 젓자 주춤거렸다. “오늘 밤은 들어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네, 네? 혹시 잘못되기라도…!” “아니, 생명은 확실히 구했다. 그래도 타인의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시간은 필요하단다. 아마 며칠 안으로 깨어나겠지.” “아….” 게헨나는 흡사 어머니처럼 자상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짧은 탄성이 울리는 사이 적당한 자리에 몸을 앉혔다. 그러자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허준영이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입고 있던 트렌치(Trench) 코트를 벗어 게헨나에게 걸쳐줬다. “오해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군. 임산부에게 추위는 좋지 않으니까.” 게헨나가 묘한 눈으로 쳐다보자 흥, 콧소리를 내며 무심한 음성으로 말한다. “호오. 추위 따위야 나를 침범할 수 없지만, 그래도 호의는 고맙게 받아들이마.” 게헨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는 차분히 주변을 돌아봤다. 동시에 천천히 배를 어루만지자 자연스럽게 시선이 모였다. “저, 그 배는….” “응? 아, 임산부는 처음 보느냐.”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물론, 그이의 아이란다.” 게헨나가 천막을 흘깃거리며 말하자 곳곳에서 앓는 듯한 소리가 일었다. 사방에서 호기심 어린, 서글퍼하는, 애끓는, 애타는 시선이 쏟아졌다. 그런 눈초리를 느끼며 게헨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적어도 하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긴 밤이 될 것 같구나.’ 그렇게 생각한 게헨나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 강한 햇살이 눈을 두드렸다. 가볍게 숨을 들이켜니 따뜻한 공기와 달콤한 살 내음이 코끝을 간질였다. 햇살을 보면 새벽이거나 아침 시간이 분명한데, 찬 공기가 아니라고. 이 무슨 역설적인 현상인가. 그러고 보니 배에서 오묘한 압박감도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한데. 눈을 뜨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뜨고 싶지 않다. 전신이 따뜻하고 촉촉한 스펀지에 둘러싸인 것 같은 기분이다. 가끔 뺨을 살살 쓸어주는 감촉은 흡사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듯하다. 거기다 푹신한 침대가 몸을 받쳐주니 이보다 금상첨화가 어디 있겠는가. …아니. 잠깐만. 푹신한 침대라고? 거기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마치 언제나 잠을 자는 집무실의 침대에서 자는 것 같다. 정신은 이대로 자라고 강요하고 있었으나 나는 억지로, 간신히 눈을 떠 앞을 쳐다봤다. “…….”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용암을 연상케 하는, 풍성하게 흐르는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서서히 시선을 내리자 고요히 눈을 감은, 그리고 아늑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게헨나의 얼굴이 보였다. 몸을 찰싹 붙인 채 가슴에 고개를 묻고 얌전히 잠들어 있다. 색색 숨을 내쉴 때마다 입안으로 단맛이 퍼지는 느낌이다. 그랬구나. 게헨나였어. 게헨나는 아직 가지 않았어. 나를 기다려준 거야.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야.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물끄러미 게헨나를 응시했다. 한데 아까 내 볼을 매만지는 감촉을 느꼈는데. 그럼 자는 척을 하고 있는 건가? 한참을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러자 역시나. 다가오는 걸 느꼈는지 게헨나의 두 눈이 반짝 떠졌다. 이제 막 잠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선명한 선홍빛 눈동자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나는 접근을 멈추고 계속 게헨나를 바라봤다. 정말이지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얼굴이다.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그때 서너 번 눈을 깜빡인 게헨나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왜 계속 바라보는 것이냐.” “왜? 쳐다보면 안 돼?” 진심으로 궁금해 반문했으나 게헨나는 가벼운 한숨을 흘렸다.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심히 부담스러우니 말이다.” “싫어. 계속 봐도 보고 싶은 걸 어떻게 해?” 화끈. “무, 무….” 그렇게 말한 순간, 게헨나가 눈에 띄게 당황해 하며 낯을 붉혔다. 시선 둘 곳을 모르겠다는 듯 이리저리 눈을 돌리더니 갑자기 분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흘겨본다. 왜 저러지. 나는 그냥 솔직하게 속내를 말했을 뿐인데. 갸웃한 찰나, 게헨나의 손이 기습적으로 내 입을 살며시 거머쥐었다. 게, 게헨나? 그러나 말할 틈도 없이, 게헨나는 손을 요리조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 입이냐.” “즘끈(잠깐)!” “내가 어쩔 줄 몰라 하기를 바라는 밉살스러운 입이, 요 입이냐는 말이다.” “즈, 즘스믄(자, 잠시만.)…!” 0797 / 0933 ---------------------------------------------- 내조(內助)의 여왕. 게헨나의 뺨에 서린 홍조가 서서히 사라져 갈 즈음, 나는 간신히 벗어나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얼얼한 입을 문지르며 주변을 둘러보자, 눈에 들어온 광경은 나를 크게 놀라게 만들었다. 집무실, 서재, 테라스, 욕실, 침실을 아우르는 100평이 넘는 방대한 공간이 하나하나 시야로 들어온다. 잘 정돈된 커다란 책상. 둥근 탁자와 고풍스러운 소파. 황금색 테두리를 번쩍이는 푹신한 레드 카펫. 벽면을 치장하는 화려한 장식물 등등. 여기는…. “내 방이잖아?” 머셔너리 캐슬, 4층 집무실이지 않은가. 잠결에 익숙한 감촉을 느끼기는 했으나 설마 정말 집무실 침대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꽤 괜찮은 공간이더구나.” 천연덕스러운 음성이 들려온다. 어느새 침대에서 내려간 게헨나는, 오른손으로 왼 팔꿈치를 잡은 채 느긋이 몸을 피고 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화려히 기지개를 켜는 붉은 장미를 금빛으로 물들인다. 그냥 일상 생활이 화보구나. “…응?” 그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묶어 정리하던 게헨나가 흘깃 나를 쳐다보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살그머니 손을 오므렸다. 이런, 나도 모르는 사이 넋을 잃은 건가. 어색한 헛기침 후, 나는 간신히 원래의 놀라움(?)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게헨나.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으음? 이건 네 방이지 않느냐.” 왜 나한테 물어보느냐는 투로 말하기는 했지만, 게헨나의 낯에는 숨길 수 없는 장난기가 서려 있다. 아무래도 그냥 말해줄 것 같지는 않은데.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며칠이나 잠들어 있었지?” “쓰러진 직후, 나흘을 내리 잤으니. 오늘이 닷새째겠지.” “흠…. 그럼 또 목숨을 구원받은 건가?” “그렇기는 하다만, 낯간지러운 소리는 되었다. 인간에게 생명력을 나눠주는 일 따위, 대양(大洋)에서 바닷물 몇 바가지 푸는 것과 다름없으니.” 별것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으나 게헨나의 목소리는 굉장히 지엄했다. 이번 기회를 빌미로 또 부끄러운 말을 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처럼 들렸다. 왠지 이번에는 입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아, 그냥 조용히 있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우선 차곡차곡 쌓인 의문부터 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금번 ‘빙하의 설원’ 원정은 장장 왕복 삼 개월로 계획된 먼 길이었다. 이것도 제갈 해솔의 수송 어빌리티를 계산해 잡은 일정이다. 말인즉 가는 데 45일이 걸렸으니 오는 데 45일이 걸리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45일이라는 시간을 건너뛸 수 있었던 걸까? 공간을 도약하지 않고서야…. “아.” 문득 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내 탄성을 들었는지 게헨나는 싱겁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대가 쓰러져 있는 동안 이 세상에 대해 조금 알아봤다. …사실, 조금 놀랍더구나.” 그렇게 말한 게헨나는 돌연 입을 닫았다. 나를 빤히 응시하는 얼굴에서 말할까 말까 갈등하는 낯빛이 스치듯 지나쳤다. “어땠는데?” 궁금한 기분에 묻자, “모르겠다. 고작 수백 년이 지났을 뿐인데,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퇴보했어. 아니. 실로 퇴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야.” 게헨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발끈하지는 않았다. 왜냐면 사실이니까. 시간차가 있기는 하나, ‘용이 잠든 산맥’에서 조우했던 영웅들과 현재의 거주민들을 생각해보면 수긍할 수밖에 없다. 게헨나의 말대로 퇴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설마 설마 했지만, 공간 이동도 제대로 못 할 줄이야. 조금은 한심하다고 느꼈다.” “공간 이동은…. 그래도 제갈 해솔이.” “아, 그 아이 말인가. 보기는 봤는데, 상당히 야만스럽고 원시적인 방법이더구나. 효율적인 운용은커녕, 마력을 무작정 쏟아 붓는 방식이더군.” “그, 그래?”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종말의 용’ 마그나카르타도 천재라고 극찬한 제갈 해솔이, 게헨나 앞에서는 예외 없이 평가 절하된다. 뭐,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인가. “…뭐, 현 세태를 감안하면 나름 창의적이기는 하다만.” 게헨나는 쯧쯧 혀를 차다가 나를 흘끗거리며 말을 이었다. 조금 심했나, 눈치 보며 말을 정정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그래서, 공간 이동으로 바로 날아온 거야?” “그래. 좌표가 약간 문제였지만, 마침 그대의 거주 장소가 내가 아는 이정표와 가깝더구나.” “이정표?” “못났기는. 네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벌써 잊은 게냐.” 게헨나가 핀잔 주듯 말하자 그제야 어탑(御榻)의 존재를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어색이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정표는 아틀란타와 반나절 거리에 있다. 내가 닷새째에 일어났다고 하니까. 그럼 못해도 사흘 전에는 도시로 돌아왔다는 소리다. 문득 궁금함이 일었다. 게헨나가 도대체 어떻게 소환됐는지. 내가 잠든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게헨나는 어떻게 말했는지. 클랜원들은 어찌 반응했는지. 하지만, 무엇보다. 그 어떤 것보다 제일 중요한 질문이 있었다. 앞으로 게헨나는 어떻게 되는 건지, 즉 거주 여부가 가장 궁금했다. 그러나 선뜻 물어볼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왜냐면 너무 불안했으니까.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후후. 나쁘지는 않겠지.’ ‘허나.’ ‘…감당할 수 있겠느냐?’ 그때 게헨나는 그랬다. 자신은 중간 세계에 허락 받지 못한 존재라고. 설령 같이 간다고 해도 언젠가는 돌아와야 한다고. 게헨나가 계속 중간 세계에 있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그만한 제물을 모을 여력이 없다. ‘감당’이라는 말은, 그런 뜻을 포함하고 있었다. “…….” “…….” 어느새 살금살금 내려앉은 침묵이 나와 게헨나를 감돌고 있다. 나는 필사적으로 다른 화젯거리를 생각해내려 애썼다. 침착히 눈을 돌리자 마침 볼록이 부푼 배가 눈에 밟혔다. 그래. 저게 좋겠다. 이름이 수나라고 했었나…? “저….” “몸은 이제 괜찮느냐.” 입을 연 찰나, 게헨나는 스리슬쩍 한 걸음 물러나더니 단호히 내 말을 끊었다. 멍하니 머리를 주억이자 돌연 게헨나의 입가서 웃음이 사라졌다. “다행이구나. 그럼….” “……?” “이제 그대의 책무를 해야겠지.” “책무?” 반문하자 게헨나는 엄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보니 그대는 이 도시를 대표하는 클랜의 수장이라고 하던데.” “그, 그런데. 그건 누가 알려줬어?” “그건 조금도 중요치 않다. 여하튼 한 도시를 이끄는 왕이라면, 그대가 해야 할 일이 있을 터.” “게헨나. 그건….” 나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미처 한 걸음 내디디기도 전, “무릇 왕이라 함은.” 짧지만, 서슬 퍼런 호령이 내 접근을 불허했다. “다스리기 전, 모든 것을 아우를 줄 알아야 한다.” 추상(秋霜) 같은 눈동자가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고요히 타오르는 선홍 빛 눈동자가 나를 직시하며 말을 잇는다. “그대에게는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일의 경중을 따지라는 말이다. 내게 신경 쓰는 건, 현재 그대의 자리에 걸맞은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나서가 맞는다고 생각한다.” “게헨나.” “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하지 않겠다.” “그러니까….” “부디, 나를 실망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 게헨나의 목소리는 마치 엄히 꾸짖는 것처럼 엄하면서 정숙했다. 이어지는 말들은 흡사 비수처럼 날카로워 속을 할퀸다. 문득 머릿속에 한 줄기 맑은 기운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 게헨나의 말은 반박할 수 없을 만큼 옳다. 금번 원정도 되짚어야 하고, 업적 보상 메시지도 확인해야 한다. 또한 굳이 원정이 아니라도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간신히 자세를 바로 할 수 있었다. “그래, 게헨나.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러자 게헨나의 눈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더니 다시 잔잔한 미소를 보였다.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하다. 하지만, 이해해줄 줄 알았다.” “아니. 괜찮아. 하하.” “물론 나라고 사랑 받고 싶지 않겠느냐마는…. 후후. 그대가 여태껏 이뤄온 근간을 흔들면서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굴러갈 돌이지 않느냐.” “그건 우리 속담인데. 혹시 누가 그렇게 말하기라도 했어?” 게헨나는 아무 말도 않고 빙긋 웃기만 했다. “그리고 나는….” 무언가 말하려던 게헨나는 느닷없이 말을 흐렸다. 불현듯 게헨나의 걱정이 무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게헨나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굴러갈 돌이 아닌 굴러들어온 돌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의도적으로 굴러갈 돌이라고 했다면…. 그런가. 어차피 옆에 박히지 못하고 지나칠 돌이니, 이미 박힌 돌들을 돌아보라는 소린가. 게헨나는 그렇게 선을 그은 건가. 꼬르륵! 그 순간이었다. 가슴이 아릿해지려는 순간, 난데없이 배 끓는 소리가 채신머리 없이 울렸다. 이어서 심한 공복감이 찾아오는 동시, 낯에 화끈한 기운이 샘솟는다. “킥.” 게헨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손으로 황급히 입을 가렸다. 그러나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걸 보니 들은 게 분명했다. 젠장, 하필 이때…. “일이고 나발이고, 우선은 식사부터 해야 할 것 같구나.” “이건 어쩔 수 없어. 인간은 신체 구조상 밥을 먹어야 해서….” 왜인지 모르겠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궁색한 변명처럼 느껴졌다. * 어색함을 무릅쓰고 문을 열고 나온 찰나, 나는 그대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 “어머.” 복도에는 집무실 방향으로 걸어오던 여인이 걸음을 멈춘 채 서 있었다. 놀란 잿빛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수, 수현.” “고연주?” “일어…. 나신 거예요?” “예…. 방금 깨어났습니다.” 그러자 “하~아.”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 내린 고연주는, 침착히 낯을 추스르며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나를 마주 보며 처연히 웃어 보였다. “다행이네요. 괜찮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말 걱정 많이 했어요.” “아…. 미안합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전혀 이상은 없어요.” 잠깐만. 한데 고연주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분명 아직 사용자 아카데미 교관으로 들어갔을 텐데? 내 생각을 읽었는지 고연주는 배시시 미소 지었다. “걱정 마요. 확실하게 말해놓고 나왔으니까. 당분간 출퇴근으로 할 예정이에요.” “출퇴근이요? 이효을이 허락해줬습니까?” “수현의 상태를 살짝 흘렸어요. 그분도 꽤 놀랐는지 예외적으로 허락해주시더라고요.” “그런….” 그때였다. 고연주가 갑자기 옆으로 눈을 돌리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게헨나의 기척이 느껴졌다. 찰나의 순간, 아차 싶었다. 생각지도 못한 기습 상황이라고 해야 하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고 시야가 어지러이 이지러진다. 그러나. “아….” 놀랍게도, “언니도 같이 계셨어요?” 고연주는 활짝 웃으며 말을 건넸다. “음. 슬슬 깨어날 때라고 여겼으니까.” 게헨나 또한 익숙하다는 듯 회답했다. 한순간 다른 의미로 정신이 멍해졌다. 그러나 고연주는 그대로 나를 지나쳐 게헨나의 팔에 살며시 팔짱을 꼈다. 게헨나도 고연주의 행동을 딱히 거부하지 않는다. “너무해요. 미리 알려줬으면 같이 기다렸을 텐데.” “후후. 바빠 보이는 것 같아서 말이다.” “흥. 거짓말. 그나저나 두 분이 어디 가시는 중이셨나요?” “아, 그이가 꽤 굶주린 것 같아서. 식당으로 가려 했단다.” 살갑게 구는 고연주와 친언니처럼 자상히 말하는 게헨나. …당최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머릿속의 혼란이 가시지를 않는다. 물론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게헨나 나름대로 클랜원들과 관계를 정립했을 것이다. 허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예상을 벗어나도 너무 벗어났다. 찬밥 신세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리 좋은 처지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현재 눈에 보이는 모습은, 흡사 친한 자매처럼 보이지 않는가. 누군가 적극적으로 적응을 이끌고 도와줬다면 모를까. 기껏해야 사나흘이라는 시간으로는 보통 절대로 이룰 수 없는 관계다. “실컷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꼬르륵 소리를 내는데. 어찌나 웃기던지.” “정말, 이이도 못 말린다니까요. 그럼 저도 같이 가요. 부축해드릴게요.” “되었다. 노약자 취급은 그만두라 하지 않았느냐.” “노약자가 아니라 임, 산, 부.” 이윽고 두 여인은 나를 남겨둔 채 사이 좋게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자,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고연주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와 시선을 맞추더니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였다. 그 순간, 그 눈웃음은. “…….” 불안과 두려움투성이였던 내 가슴을 깨끗하게 씻어주었다. * 식당에 도착해서도 놀라움은 연속 행진을 이어갔다. 내가 어버버하며 클랜원들의 인사를 받는 사이, 두 여인은 아예 다른 테이블에 자리 잡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나갔다. 고연주를 시작으로 임한나, 정하연, 박다솜, 심지어 원혜수까지 차례대로 테이블에 모여 앉는다. 시끄러울 만큼 떠들썩하지는 않았지만,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는 게 오히려 보기 좋다. “이야~! 오늘도 왔네?” 그러한 찰나, 주방에서 유쾌한 외침이 식당을 쩌렁쩌렁 울렸다. 노노 누님이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밝은 얼굴로 국자를 흔들고 있었다. “각오하라고! 오늘은 기필코 맛있다는 말을 들을 테니까?” “흐음. 자신감 하나는 인정해주지. 기대하겠다.” 게헨나는 의자에 지그시 몸을 묻으며 여유롭게 대꾸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가벼운 환호와 웃음이 흘러나왔다. …진짜로 궁금하다.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니, 그전에 이렇게 밝은 분위기가 얼마 만이더라? 무언가 기쁘면서 심란한 마음에 나는 연초 한 대를 꺼내 물었다. 그러나 불을 채 붙이기도 전에 누군가 부드러이 낚아챘다. 망연히 시선을 올리니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은 상남 형님이 보였다. “이런, 클랜 로드. 임산부도 있는데요. 자제해주시죠.” “아…. 예. 그러죠.” “사나흘을 꼬박 굶으셨으니까요.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순한 음식으로 올리겠습니다.” “부, 부탁 드리겠습니다.” 상남 형님은 빙긋 웃으며 자리를 떠났고, 이어서 또 한 명의 사내가 불쑥 모습을 보였다. 훤칠한 인상의 청년은 바로 조승우였다. “사용자 조승우?” “클랜 로드. 생환을 축하 드립니다.” 조승우는 꾸벅 머리를 숙이고는 씩 웃어 보였다. 잠시 후,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고 나서 나는 조승우를 테이블로 인도했다. 좋아. 이로써 소외감 탈출이다.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에이, 아닙니다. 이제 익숙한데요. 뭘.” 조승우는 농담조로 말하며 엄살을 부렸지만, 왜인지 절반은 진심으로 느껴졌다. “제가 없는 동안 특별한 일이라도 있었나요?” 사실 특별한 일이야 있겠느냐는 뜻으로 던져봤는데, 뜻밖에도 조승우의 반응이 이상했다. 슬쩍 눈을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한다. 또 무슨 사건이라도 터진 건가? “뭔데요?” 한 번 더 재촉하자 비로소 조승우가 입을 열었다. “실은…. 산하 클랜과 관련해서 타 도시와 간접적으로 충돌이 생겼습니다.” 오호라. 충돌이라. 이건 정말 생각도 못 했는데. 오늘따라 예상치 못한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 것 같다. “어디입니까?” “동 도시 대표인 이스탄텔 로우 클랜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을 들은 순간 마냥 흥미롭다 여길 수만은 없음을 깨달았다. 저절로 침음이 흘러나오는 동시, 갑작스럽게 식당이 조용해졌다. 사방에서 수십 쌍의 눈초리가 쏟아진다. 이 정도로 모두 알고 있다는 소리는, 설령 간접적인 충돌이라도 심상치 않다는 방증이리라. “이스탄텔 로우라….”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다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회의를 소집할 필요가 있겠군요.”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조승우는 난데없이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음? 왜요?” “바로 일어나셔서 몸도 안 좋으실 텐데요. 제가 괜한 말씀을 드린 것 같습니다. 그러니 완전히 회복하신 이후에….”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나는 싱거운 미소를 날리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괜찮습니다. 지금 제 몸 상태는 어느 때보다 좋으니까요. 꼭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에요.” “아…. 하하.” “그 충돌 건 외에도 여러 일이 있겠죠?” “그…. 렇습니다.” “그럼 원정 관련해서도 정리해야 하니 회의를 소집하죠. 그나저나 점심은 드셨습니까?” “아, 아니요. 아직입니다.” 뜬금없는 물음이었는지 조승우는 말을 더듬었다. “그럼 같이 드시죠. 회의 전 어느 정도 상황은 들어야 하니까요.” “정말로 괜찮으신지 걱정됩니다. 사실 그것 말고도 한두 개가 아니라서요.” 이제야 이실직고를 하는군. 이 사람도 참 큰일이야. 나는 빙긋 웃었다. “일단 상황부터 들어야 제가 해결책을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순간 조승우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고 느꼈다면 내 착각일까. “…알겠습니다!” 착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번에는 허리까지 숙이며 외쳤으니까. 0798 / 0933 ---------------------------------------------- 내조(內助)의 여왕. 회의가 시작됐다. 교관, 연구 등 임무 수행 중인 이들을 제외하고 전원이 호출된 회의였다. ‘호오. 꽤 구색이 좋지 않은가.’ ‘부군의 일상 모습을 보고 싶다.’ 라는 이유로 따라 들어온 게헨나는 1층 회의장의 풍경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가슴을 탁 트이게 하는 광활한 면적과 천장과 바닥을 잇는 거대한 대리석 기둥들. 그리고 각 등급에 맞춰 가지런히 나열해 앉은 클랜원들과 최고 상석에 앉아 회의를 진행하는 김수현의 모습은, 흡사 중세 시대의 왕과 신하를 보는 듯했다. 회의의 첫 안건은 금번 원정을 정리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원정에 참가한 클랜원들이 호명되고 실적을 확인받는다. 정숙한 분위기 속에서 한쪽 구석에 앉은 게헨나는 흡족한 얼굴로 연신 배를 쓰다듬었다. 회의장에 들어온 이후 태아의 활동이 갑자기 활발해졌다. 왕의 운명을 타고나 이 풍경에 반응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아비를 봐서 좋아하는 건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움직임이 지옥에 있을 때보다 갑절이나 활기 차다는 것이다. 뱃속에서 신 나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데, 배를 뻥뻥 차는 아픔 따위 당연히 감내할 수 있었다. ‘그래그래 이것아. 저 사내가 네 아비란다. 지금이라도 실컷 보려무나.’ 게헨나가 얼른 나가고 싶다는 듯 마구마구 몸부림치는 태아를 살살 달랠 즈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신 코란 연합이 아직도 밤의 거리를 구현하지 못했다?” 어느새 새 안건으로 넘어갔는지 성난 목소리가 회의장을 짜르르 울렸다. 김수현의 음성은 낮았으나 ‘군주여, 호령하여라.’ 의 영향으로 회의장 구석까지 날카로이 전달됐다. 그 기운을 정면으로 받은 조승우는 어깨를 살짝 움츠렸을 정도였다. “이해가 안 가는군요. 이스탄텔 로우의 지침은 알고 있습니다. 허나 그건 동 도시 한정이고, 우리 남 도시는 해당 사항이 없지 않습니까. 제가 허락했는데요.” “예, 예. 그렇습니다만. 사정이 그리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이대로 속행하면 이스탄텔 로우에 상당한 손해가 발생합니다.” “손해라니요?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보세요.” “그게 말입니다. 이스탄텔 로우 산하 클랜에서 불만이 터졌습니다.” 흐응, 콧숨을 흘린 게헨나는 흥미로운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여러 말이 들려왔으나 귀담아듣지는 않는다. 어차피 들어봤자 소용없으니까. 게헨나는 그보다 김수현과 클랜원들의 반응을 유심히 관찰하는 중이었다. “불만이요?” “정확히는 밤의 거리를 금지하는 이스탄텔 로우의 법 때문입니다.” “그게 어째서 문제가 됩니까?” “신 코란 연합이 밤의 거리를 구현하기 직전, 동 도시에서 대대적인 성명(聲明)이 일었습니다. 밤의 거리를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이대로 산하 클랜을 탈퇴하고 모조리 남 도시로 넘어가겠다고요.” 살얼음 같은 말이 이어지는 가운데 게헨나는 턱을 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썩 나쁘지 않은 집합이로다.’ 근 사나흘 동안 게헨나는 놀고만 있던 건 아니었다. 아니. 일종의 ‘유희’라 명명해도 상관없겠지만, 여하튼 근래 인간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을 나름 알아본 상태였다. 물론 기본적인 것들에 불과하다고는 하나, 그중에는 머셔너리 클랜 시스템도 포함돼 있었다. 김수현이 ‘왕’으로서 어떤 체제를 확립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허나.’ 게헨나는 내리뜬 눈을 치뜨며 다시 앞을 바라봤다. “설마 그런 성명이…. 그래도 이스탄텔 로우 로드의 성격이라면 그러라고 했을 것 같은데요.” “여기서부터 사정이 복잡해집니다.” “……?” “주동자가 바람을 잘 넣었는지 넘어오겠다는 클랜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지분으로 따지면 동 도시 한정으로 2할, 모니카까지 합치면 4할입니다.” 낯을 찡그리고 있는 김수현과 차분히 말을 잇는 조승우. ‘일원화(一元化) 성향이 너무 강하구나. 지나칠 정도로.’ 게헨나는 그런 둘을 바라보며 살그머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정도로…. 으음. 그래도 밤의 거리 구현이 무기한 정지된 건 과하지 않습니까. 결국에는 이스탄텔 로우의 눈치를 봤다는 거잖아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터졌으니까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예. 클랜 로드. 잠시만….” 잠시 말을 끊은 조승우는 조심스레 김수현 옆으로 다가갔고, 이어서 블록 필드(Block Field)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두 사내 주변으로 뿌연 막이 일어나 둥글게 감쌌다. 오고 가던 말소리가 차단되자 회의장에 삽시간에 정적이 내려앉는다. 그러는 동안에도 게헨나는 끊임없이 상념을 잇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완전히 뿌리를 내린 건가. 제 뜻대로 움직이겠다는 생각은 알겠으나, 그만큼 약점도 극명히 드러난다.’ ‘그나마 뒤늦게 알아차린 것 같기는 한데…. 이미 늦었다. 등급제로 충격은 줬겠지만, 익숙해지는 순간 도로 정체될 터.’ ‘세분화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호전은 가능할지 몰라도 완치는 힘들다.’ ‘겉으로는 단단해 보일지 몰라도, 안은 사상누각이로다. 이럴 때 내부를 부드러이 보듬어줄 안주인이 있어야 하는데….’ 놀라운 일이었다. 고작 며칠이나 지났다고, 게헨나의 혜안(慧眼)은 머셔너리 클랜의 현황을 정확히 짚어냈다. ‘흐응. 이대로 신세만 지다 가기는…. 그리고 이런 웃기지도 않는 연극에 계속 어울리는 것도 그렇고.’ ‘조금은 진심으로 해볼까.’ 그렇게 생각한 게헨나는 살며시 눈을 들었다. 김수현 근처의 앞자리에는 여러 여인이 앉아 눈이 빠져라 블록 필드를 응시하고 있다. 게헨나는 킥킥 소리 죽여 웃었다. ‘나 원. 저렇게 부선장이 많으니…. 정말, 난봉꾼 같기는.’ 그때였다. “……?” “……!” 찰나의 순간, 게헨나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잠깐 구석을 돌아본 고연주와 눈을 마주친 것이다. 비록 바로 고개 돌리기는 했으나 분명히 느꼈다. 실제로 고연주만이 아니라, 몇몇 여인이 게헨나를 흘깃거리고 있다. 해코지라 보기는 어렵지만, 김수현과 함께 있던 식당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게헨나는 속으로 살그머니 웃었다. 저들이 왜 저러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면 게헨나는 김수현이 여인이 많다고 해서 조금도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왜냐면 대상이 인간이니까. 고대 악신도 아이 다루듯 하는데 일개 인간을 경쟁 상대라 여길 리 만무하다. 혹시 화정이 강림하거나 타나토스의 힘을 품은 여인이 나타난다면 모를까. 그게 아닌 이상, 게헨나가 인간을 보는 관점은 인간이 벌레를 보는 관점과 하등 다르지 않다. “…그럼 우선 그렇게 하는 걸로 하죠.” “예. 알겠습니다. 아마 부르면 바로 달려올 겁니다. 하하.” 그때 두 사내의 말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비밀 이야기가 끝났는지 조승우가 블록 필드를 해제하고 돌아 나오고 있다. 걱정을 떨쳐서 그런지 안색이 확 밝아졌다. “회의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김수현이 회의의 종료를 알리는 동시, 회의장 내 경직된 분위기도 풀어졌다. 이윽고 한 명 한 명 일어나는 클랜원들을 보며 게헨나도 느긋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입구를 나가기 직전,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는 김수현과 눈을 맞춘 후 가볍게 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게헨나는 과연 알고 있을까. 며칠 내로 폭발적인 질투를 느낄만한 인간 여인과 대면하게 된다는 사실을. * 회의가 끝난 후 고연주는 곧장 숙소로 이동했다. 명색이 교관인 이상 계속 자리를 비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연락을 하기도 또 떠나기 전 누군가와 만나야 한다. 시간에 맞추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그 괴물의 근황은 어떻습니까.) “괴, 괴물이 아니라 게헨나에요. 그리고 딱히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네요. 약속대로 조용히 지내는 중이에요.” 고연주는 통신용 수정을 마주 보며 쓰게 웃었다. (그렇군요. 그럼 수현이는요?) “깨어났고, 밥도 잘 먹고, 회의도 잘해요. 아, 회의가 끝나고 게헨나 씨와 같이 나가는 것 같던데요?” (으음. 그림자 여왕이 보기에 어떤가요. 수현이도 좋아하는 것 같나요?) “아…. 글쎄요.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후, 정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수현이 이 녀석, 이런 일을 벌여놓고 나한테는 연락도 없으니….) “호호. 정 걱정되시면 한 번 와보시는 건 어때요?” 수정에서 흘러나오는 저음의 음성이 한탄하듯 말하자 고연주가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억지가 다분히 묻어나는 선웃음이었다. 그 미소를 봤는지 상대는 잠시 침묵했다. (…미안합니다.) “네? 아니, 왜….” 갑작스러운 사과에 고연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정말 못할 부탁을 한 것 같습니다.) “에이, 아니에요. 아주버님. 이해하고 있어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거.” (…….) “그리고 이번 일이 끝나면 수현한테 톡톡히 보상받을 생각이에요. 우리 모두 단단히 벼르고 있다고요?” 자박자박. 그때 호젓한 발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잠깐 뒤를 돌아본 고연주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연 씨가 오는 모양이네요. 이만 끊을게요.” (알겠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 부탁합니다.) 이윽고 수정의 빛이 꺼지는 동시에 똑똑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살그머니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연한 낯빛을 빛내는 여인은 바로 정하연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방금 아주버님이랑 연락 끝냈는데.” “미, 미안해요. 잠시 구경 좀 하느라….” 고연주의 핀잔 아닌 핀잔에 정하연은 힘없이 미소 지었다. “구경?” 고연주가 의아히 눈을 치떴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일었어요?” “아니요. 괜찮아요. 그보다…. 이제 다시 가셔야 하죠?” 정하연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고연주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리 준비한 짐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네. 오늘 가면 한 이틀은 내리 있어야 할 것 같네요. 사용자 이효을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고요.” “그렇군요….” “아무튼, 제가 없는 동안 잘 좀 부탁해요. 상남 씨나 노노 언니가 잘해주고는 있지만, 아직 어색한 클랜원들이 보이더라고요. 아예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 애도 있는 것 같고.” “네….” 왜인지 정하연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하연 씨?” 짐을 들고 몸을 돌린 고연주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정하연의 상태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망연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게 흡사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인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이었다. 정하연의 잔잔한 바다 빛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투명한 눈물로 가득히 괴어가기 시작한다. “흑.” 문득 눈물이 한 줄기 주룩 흘러내렸다. 무언가 북받쳐 오르는 걸 참지 못한 듯, 정하연은 그대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흑, 흐흑, 으흑, 흑!” 결국에는 파르르 어깨를 떨며 뚝뚝 눈물을 떨구기 시작한다. “하, 하연?” 깜짝 놀란 고연주는 얼른 다가가 정하연의 양어깨를 부여잡았다. 상체를 비스듬히 숙이며 서러이 울어 젖히는 정하연의 얼굴을 살핀다. “왜 갑자기 울어요?” “부, 분해요. 흑!” “…네?” “으흑. 부, 분하다고요. 두, 둘이서 산책을 하는 모습을 봤는데….” “…….” “그, 그런 수현의 얼굴은 처음 봤어요. 너, 너무 부드럽고, 해, 행복해하고. 저, 저는 5년 동안 그런 모습, 하,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너, 너무 분해서….” 연신 말을 더듬으면서 정하연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고연주는 확연히 가라앉은 낯으로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팔을 내밀어 정하연을 안았다. 그리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며 달래기 시작했다. “알아요. 그 마음 왜 모르겠나요. 수현이 정말 나쁜 놈이에요.” “흑, 흐흑!” “조금만, 조금만 더 참도록 해요. 이제 며칠만 더 참으면….” “흐윽….” 고연주가 말끝을 흐리고, 정하연의 울음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과연 김수현이 잠든 사이, 머셔너리 클랜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 작품 후기 ============================ 게헨나양이 : 냥♡, 냥♡, 냥♡, 냥♡! 하연양이 : 냐앙~. 냐아아앙~. ㅠ 0799 / 0933 ---------------------------------------------- 수나의 탄생. < 회상(Reminiscence) 1/2 > 시간을 돌려, 사흘 전. 쾅! “뭐라고요?” 해도 떠오르지 않은 새벽, 하얀 서리가 내려앉은 건물에서 무언가를 강하게 내려치는 소리와 고성이 겹쳐 울렸다. 건물 최상층의 방 안에는 두 여인이 있었다. 한 여인은 조용히 서 있는 것에 반해, 다른 여인은 손톱을 깨물거나 책상 주변을 서성이는 등 온몸으로 불안을 표현한다. 그렇게 1분을 돌아다니던 이효을은 간신히 책상에 앉아 연초 한 대를 꺼내 들었다. 덜덜 떨리는 손 때문인지 불을 붙이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그런 이효을을 빤히 바라보던 여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잠시, 연주 씨 잠시만요.” 그러나 말이 채 나오기도 전, 이효을은 재빨리 손을 들어 제지했다. “저 이거 하나만 필게요. 지금 너무 놀라서 그래요. 네?” 흡사 애원처럼 느껴지는 음성에 고연주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필터 끝까지 연초가 타들어 갔다. 가까스로 진정한 이효을의 목울대가 작은 고저를 그렸다. “그럼 상황부터 되짚어볼게요.” “그러니까….” “아뇨. 제가 말할 테니까 듣기만 하세요. 혹시 틀린 게 있으면 끊어주시고요. 머셔너리에서 탐험을 갔고, 감당치 못할 괴물을 만났고, 죽기 직전 또 다른 괴물이 소환됐고, 첫 괴물을 처치하고 머셔너리 로드의 목숨을 구했다. 맞나요?” “맞아요.” 이효을은 이 모든 말을 아주 빠르게 쏟아냈다. 그리고 고연주가 수긍하자마자 강하게 팔걸이를 움켰다. “그리고 지금 여기로 오고 있다? 그것도 반나절 안에 도착한다?” “네.” “네? 네라고 했어요 지금?” “…….” 이효을은 기가 막힌다는 듯 반문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단신으로 최정예 1만 명을 상대한 괴물이다. 게헨나가 처음 출현했을 때 같은 자리에 없었지만, 이후 강철 산맥 피해 수준을 집계하며 얼마나 놀랐던가. “들어보면 그렇게 적대적이지는 않다고 해요.” “우리 지금 당장은 안 터질지도 모르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핵폭탄 껴안고 같이 잘래요?” 고함만 치지 않았을 뿐, 이효을의 목소리는 명백한 힐난 조였다. 힘껏 노려보는 눈초리에 고연주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눈을 내리떴다. “…미안해요. 따지고 보면 연주 씨 잘못도 아닌데, 제가 너무 흥분했네요.” 잠시 후, 이효을은 곧바로 사과했다. 말 그대로 고연주가 저지른 일도 아니거니와, 지금 화내봤자 무의미한 일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명석한 머리도 이번만큼은 쉬이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막말로 북 대륙 사용자 전원을 동원한다손 쳐도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이 없을뿐더러, 어마어마한 혼란을 감수할 자신도 없었다. “저는 도저히 모르겠어요. 연주 씨는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요?” “우선은 만나서 이야기해볼 예정이에요.” “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말씀드렸잖아요. 그 괴물이 직접 밝혔어요. 인간을 적대할 생각이 없다고. 실제로 우리 클랜원이 같이 있고, 무엇보다 수현의 목숨을 구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계속 있을 수는 없다고 하니까요. 돌아가기 전까지 수현의 옆에 있고 싶다고 하니까….” 고연주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이효을은 깊게 신음했다. 직접 들은 건 아니지만, 현 상황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말을 직감한 것이다. 이효을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 젠장. 결국, 김수현과 특별한 관계라는데 걸 수밖에 없잖아. 무슨 임신이라도 시킨 건가?” 혼잣말을 중얼거린 찰나, 고연주의 몸이 움찔했다. 그러나 보지 못한 이효을은 힘없는 눈으로 입을 열었다. “출퇴근만 허락해주면 되나요? 따로 도와줄 건 없어요?” “우선 이 이야기는 꼭 비밀로.” “그건 당연하죠.” “그리고 해밀 로드에게 연락해서 현 상황을 전하고, 머셔너리 캐슬로 와달라고 말씀해주세요. 저는 지금 바로 돌아가 클랜원들한테 상황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해야 할 것 같아서.” “해밀 로드? 해밀 로드는 왜요?” “수현의 친형이니까요. 이 일에 관해 알 권리가 있고, 어떻게 비벼볼 구석이 있을지도 모르죠.” 고연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효을은 한참을 쳐다보다가 긴 한숨과 함께 통신용 수정을 집어 들었다. 그걸 확인한 고연주는, 소리소문없이 그림자로 스며들어 모습을 감췄다. 그렇게, 반나절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머셔너리 캐슬은 고요했다. 해가 뜬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고, 뿌연 안개까지 감돌아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우선 동생의 목숨을 구해준 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머셔너리 캐슬 1층의 중앙 광장, 사방이 훤히 트인 쉼터에서 게헨나는 얌전히 의자에 몸을 묻고 있었다. 게헨나의 반대편에는 두 남녀가 앉아 있다. 잔뜩 긴장한 잿빛 눈동자의 고연주와 정중히 머리를 숙인 두꺼운 로브를 걸친 마법사. 김수현의 친형인 김유현이었다. 이윽고 김유현이 머리를 들자 게헨나의 눈매도 오연함을 되찾았다. “감사는 받아들이겠다만, 어째 낯은 불청객을 보는 듯한 표정이로다.”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어쨌든 당신으로 인해 인간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니까요. 거기다 당신이 지닌 무력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도 남습니다.” 김유현은 순순히 시인했다. 그러나 게헨나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엄청난 피해라고까지는…. 어지간하면 죽이지 않으려 노력했다만.” “그때 그쪽이 출현한 것만으로 이천 명이 넘는 인간이 깡그리 녹아내렸죠.” 날 선 음성으로 답한 건 고연주였다. “으응? 그건 내가 벌인 짓이 아니다만.” “뭐라고요? 설마 기억이 안 난다는.” 김유현은 손을 들어 고연주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침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상황은 어느 정도 전달받았습니다. 현재 인간을 적대할 생각은 없다고 들었는데요.” “흐음.” 게헨나가 고개를 까닥였다. 김유현은 잠시 쳐다보다가 품에서 작은 수정 하나를 꺼냈다. 진실의 수정이었다. 김유현이 느릿하게 수정을 밀어 넣자 게헨나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이건 뭐지?” “진실의 수정이라는 겁니다.” “호오. 진실의 수정이라.” “따지려는 건 아닙니다. 그냥 우리 내면의 불안을 해소하려는 장치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아무튼, 여태껏 하신 말씀이 진실이라면, 그 구슬에 마력을 흘리고 똑같은 말씀을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게헨나는 싱겁다는 듯 웃었으나 곧 차분히 진실의 수정에 손을 얹고 활성화했다. 이어서 방금 했던 말들을 그대로 되풀이했음에도 불꽃의 색은 변하지 않았다. “이제 됐느냐?” 게헨나는 멍하니 쳐다보는 두 남녀를 보고 놀리듯이 말했다. “아, 하나 더 추가로 말하자면….” 게헨나는 검지 끝으로 구슬을 굴리며 말을 이었다. “이런 구슬 따위로 내 진심을 가늠하는 건 어불성설이라 말하고 싶구나.” 김유현의 얼굴이 바짝 굳어졌다. “…방금 말씀은 하지 않는 게 더 유리하셨을 겁니다.” “뭐, 그것 또한 내 진심이라고 해두마.” 게헨나는 아무래도 좋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대체 그때의 일은….” “글쎄…? 이번에도 그랬듯이 나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소환된 거라서. 단, 정수리에 뿔이 돋아 있고 박쥐 같은 날개를 가진 놈들이라고 말해줄 수는 있겠군.” 그 순간 김유현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게헨나의 묘사가 김수현에게 들은 악마의 모습과 거의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1회 차에서 악마와 손을 잡은 마녀가 지옥 대공을 소환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도 떠올랐다. ‘이건…. 나중에 수현이한테 확인해봐야 한다.’ 김유현은 어지러운 머릿속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앞을 응시한 찰나, 고연주가 날카로이 눈을 빛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당신이 한 짓은 아직 남아 있어요.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학살이었죠. 그중에는 우리 동료도 있었고요.” “그래서?”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그러나 게헨나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했다. “…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말이지?” 게헨나 특유의 자세가 나왔다. 의자에 편히 몸을 기대고 다리를 꼰다. 한 손으로 턱을 괴어 상대를 지그시 응시한다.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스멀스멀 흘러나와 둘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그대에게 물으마. 나는 분명 그때 인간에게, 아니 그대의 동료에게 해를 입혔다. 그럼, 나는 적인가?” “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이번에는 네 동료를 구하고 게다가 김수현이라는 사내의 목숨까지 살렸지. 자, 이건 어떻게 생각하느냐? 나는 이제 아군인가?” “그, 그건.” 고연주의 얼굴에는 말문이 막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게헨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껏 비웃음을 띄웠다. 김유현은 마른 침을 삼켰다. 최대한 조심한다고 했는데 게헨나가 어떤 존재인지를 잠시 간과한 것이다. “왜 대답이 없지?” “…….” “후후. 그래, 그렇겠지. 너희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몸서리가 쳐질 만큼 똑같구나.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자기중심적인 사고는 여전해.” “…….” 어느새 고연주와 김유현은 옴짝달싹 못 하는 처지였다. 게헨나가 내뿜는 기세가 워낙 강렬해 몸을 찍어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연주는 속으로 자책했다. 김유현처럼 감정을 배제해야 했는데 은연중에 적의를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나 둘은 알고 있을까. 게헨나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사실을. “하기야 이해는 한다. 애초 이 세상도 나를 허락하지 않는데, 너희의 사고로 나를 이해하기 바라는 건 요원한 일일 터.” 그러한 찰나, 게헨나의 붉은 눈동자가 요사스러운 빛을 뿌렸다.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말이다.” 그와 동시에. “나도, 너희가 무척이나 밉다.” 부릅뜬 게헨나의 눈에서 진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 모든 일과를 마친 후, 나는 게헨나와 함께 집무실로 돌아왔다. “으음. 좋구나. 더 쓰다듬어다오.” 내 몸에 기댄 게헨나가 기분 좋은 신음을 흘린다. 나는 배를 쓰다듬는 손을 한층 부드럽게 놀리며 게헨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기분 좋아?” 그러자 게헨나는 흘깃 나를 쳐다보더니 낯을 붉히며 어흠,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내가 아니라, 배 속의 아기가 좋아하는구나.” “그래? 그걸 어떻게 아는데?” “원래 어미는 느낄 수 있는 법이다.” “오호.” 놀라워하니 게헨나는 빙긋 웃으며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배를 내려다봤다. “봐라. 지금도 배를 마구 발로 차지 않느냐.” 흠. 배를 마구 찬다고. 막 차는 건 좀 문제가 있지 않으려나. “한 번 들어보겠느냐?” “어? 아, 응.” 게헨나는 복부 아랫부분을 살며시 짚으며 나를 돌아봤고, 나는 냉큼 꿇어앉아 배에 귀를 갖다 붙였다. 아, 따뜻한 살결. 한껏 설레는 마음으로 청력을 집중했지만, 발차기는커녕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 “…안 들리는데?” “그럴 리가…. 아.” 귀를 떼고 위를 올려다보자 게헨나가 의아한 듯 눈을 깜빡이더니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방금, 다시 차기 시작했다.” “응?” “신기하구나. 그대가 귀를 댈 때 움직임을 멈추더니 떼자마자 다시 차는 건…. 후후.” “…….”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게헨나의 말이 무척이나 서운하게 느껴졌다. “뭐, 부끄러워하는 건가.” 우연한 일치라 애써 자위하며 천천히 무릎을 폈지만, 입맛이 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 문득 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차, 게헨나. 그러고 보니 출산 예정일은 언제야?” “아마 곧…. 이지 않으려나. 요새 움직임을 봐서는 당장에라도 나오고 싶어하는 것 같다만.” “증상은 어때.” “글쎄. 그나저나 슬슬 졸리구나.” 기껏 물었으나 게헨나는 묘한 미소로 말을 돌릴 뿐, 자세히 말해주지는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침대에서 한참 더 이야기를 나눴고, 나는 게헨나를 뒤에서 끌어안은 상태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윽! …현! …큭! …현!” 불현듯 들려오는 신음에 눈을 뜨자, 시커먼 어둠이 내려앉은 방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수현! 김수현!” 돌연히 애달픈 음성이 귓전으로 흘러들었다. 화들짝 옆을 바라본 순간 나는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옆으로 돌아누운 게헨나가 몸을 둥글게 만 채 몸을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 게헨나?” 반사적으로 부르자, 게헨나는 벅찬 고갯짓으로 겨우 눈을 돌렸다. 인중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과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카락이 유난히 눈에 밟힌다. 이윽고 게헨나는 무척 힘겨워하는 어조로 겨우 입을 열었다. “배, 배가….” 애끓는 듯한 목소리. 그 순간, 머릿속을 맴돌던 수마가 깡그리 걷혀나갔다. 나는 번개같이 몸을 일으켰다. ============================ 작품 후기 ============================ 얼마 전 약간 가슴 아픈 코멘트가 있었는데요. ‘수나’라는 이름이 참 성의 없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저는 이름 참 예쁘다, 부르기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독자 분들의 눈에 별로셨다는 생각이 드네요. 혹시 따로 좋은 이름이 있으시면 코멘트로 적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나는 태명으로 할 수 있으니까요. :) PS. 몰랐는데, 선작 4만이 넘었네요. 독자 분들의 사랑, 정말로 감사합니다.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지만, 완결까지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0800 / 0933 ---------------------------------------------- 수나의 탄생. < 회상(Reminiscence) 2/2 > 그 순간이었다. ‘밉다.’ 라고 말함과 동시에 게헨나의 전신에서 겁화(劫火)가 치솟았다. 샘솟듯 솟구친 염화(炎火)는 사방팔방 뻗어 나가 1층 광장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쉼터, 바닥, 계단, 난간을 가리지 않고 깡그리 불태운다. 눈 깜짝할 사이 주변 공간은 시뻘건 불길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고연주나 김유현도 예외가 아니었다. 무언가를 참아내듯 입을 짓씹는 둘을, 게헨나는 계속 손에 턱을 괸 채 고개를 삐딱이 기울여 응시했다. 선홍빛 눈에는 여전히 요사한 기운이 번들번들하다. “김수현을 돌려보내기 전, 그가 이런 말을 하더구나. 혹시 같이 갈 생각이 없느냐고.” “나는…. 거절했다. 아니. 거절이 아니라 그럴 수가 없었던 게지. 상황상, 법칙상 말이다.” “허나 그를 떠나 보내고 나서 참으로 감정이 미묘했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와 같이 잤던 자리를, 함께 거닐었던 길을 되새기고 있더구나. 그제야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알게 됐고, 이어서 후회라는 감정이 찾아오더군.” “그러자 문득 한 생각에 미쳤다. 같이 있고 싶다면 여기 남으면 될 텐데. 그는 왜 돌아가는 걸 선택했을까.”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게 나오더구나.” “그건 너희 때문이 아닌가.” 문득 게헨나가 눈을 부릅떴다. 한층 가중된 압박에 낯을 찡그리는 두 남녀를 매섭게 노려본다. “나와의 연(緣)보다, 너희와의 인연을 더 중요시해 돌아간 게 아니냐는 말이다.” “…….” “그래서, 너희가 밉다. 너무나 거슬린다.” “…….” “너희만, 너희만 아니었다면…!” “…….” 격정적으로 말을 맺은 게헨나의 음성은 야수의 으르렁거림과 흡사했다. 그에 호응하듯 도처에 타오르는 불길이 춤추듯 거칠게 흔들렸다. 여기서 게헨나가 조금이라고 살의를 품는다면, 그 순간으로 불이 옮아 붙은 곳은 모조리 파괴될 것이다. 고연주와 김유현은 시종일관 침묵했다. 말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해서였다. 게헨나가 넣는 압력은 입을 열기는커녕 호흡조차도 막아버릴 정도였으니까. 우웅! 그때 붉디붉은 눈동자에 미약한 황금빛이 스쳤다. 게헨나는 잠깐 놀랍다는 기색을 보였다. 의자에 짜부라뜨리듯 묻힌 몸에서 황금빛 기운이 폭사돼 줄기줄기 뻗어 나온다. 뇌신(雷神)의 힘이 발동된 것이다. 비록 나오는 족족 겁화에 살라 먹히기는 했지만, 꾹 짓눌려 있던 김유현의 입이 덜덜 떨리며 열린다. “꼭…. 수현이어야 했습니까.” “그가 나와 짝을 이룰만한 힘을 갖고 있으니까.” “그래서 임신이라는 선택을…?” “본디 나와 그의 힘은 극과 극의 상성이다. 서로 합치기는커녕 밀어내려는 성향이 강하지. 그러니 수태를 통하여 자연스러운 융합을 꾀하는 것이다.” 납득했다는 듯 김유현이 끄덕였다. 그러나 잠시 밀려났던 불길은 도로 턱 끝까지 차오른 상태. 완전히 뒤덮이기 전, 김유현은 겨우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질문하겠습니다….” “그 질문에 목숨을 걸 수 있다면, 허락하마.” “수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십니까…?” “……!” 김유현은 뜸들임 없이 직구를 던졌다. 이후 바로 불길에 덮인 걸 보면 옳은 선택이었다. 물론 ‘유효한 질문인가?’ 라는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예상치 못했다는 듯, 게헨나가 눈을 치뜨며 당황하고 있었으니. 잠시 후, 곳곳에서 이글거리던 불길이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마치 물을 끼얹은 것처럼 허연 김을 뿜으며 메말라 없어지고, 종래에는 풍경이 원래의 빛깔을 되찾는다. 인세(人世)에 구현된 지옥은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거짓말이라는 듯, 그야말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헉! 허억!” “학! 하악!” 두 남녀의 몸이 무너지듯이 축 늘어졌다. 몸을 압박하던 기운이 일거에 풀리니 갑작스레 되찾은 자유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게헨나는 조금은 가라앉은 눈으로 둘을 응시했다. 그리고 호흡이 정상이 될 즈음, 나직이 입을 열었다. “…모르겠다.” 마치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처럼, 목소리는 혼란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가까스로 추스른 김유현은 겨우 턱을 들어 게헨나를 바라봤다. 내리뜬 눈동자가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겠다는 듯 갈팡질팡하고 있다. 그러다 문득, 서로 눈이 마주쳤다. 게헨나가 가슴 왼쪽으로 살며시 손을 얹었다. 심장이 있는 부분이었다. “두근…. 거린다.” 멍한 눈초리에 게헨나는 “그를 생각하면.” 이라 덧붙였다. 그리고 쓸쓸해 보이는 눈을 들어 4층 층계 너머를 바라봤다. 정확히 김수현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가 옆에 있으면 심장이 요동치고, 없으면 공허하다. 허나 떠올리면 다시 설렌다. 기대고 싶다. 품에 안기면 아늑하다. 그는 내가 여인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에게서 걱정 어린 시선을 받고 싶고, 그가 나를 위해 분노하는 것이 기쁘다. 그래서 일부러 미물(微物)에게 당한 척도 했다. 마음 같아서는 너희를 깡그리 쓸어버리고 싶지만, 그가 슬퍼할 것을 떠올리니 망설여진다.” 게헨나의 말이 그 어느 때보다 길게 이어졌다. 횡설수설이라기보다는, 꼭꼭 숨겼던 속내를 한 치의 가감 없이 토해내는 듯한 절절한 음성이다. 한참을 아련히 바라보던 눈이 이내 김유현에게로 떨어졌다. 삭막하고 적적한 눈이지만, 무언가 애타게 갈구하는 빛이 서려 있다. “…그러나, 나는 수천 년을 홀로 살아온 존재. 사랑이라는 감정을 명확히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 자책하는 목소리가 이어, 게헨나의 눈이 한층 또렷해졌다. “그러니 그대에게 하문(下問)하겠다. 그대는 내가 느끼는 감정을 사랑이라 단언할 수 있는가.” “모릅니다.” 한 치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게헨나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아직 멍한 빛이 가시지 않았지만, 김유현은 확실하게 머리를 가로젓고 있었다. 그러나 곧 멈추고는 흔들림 없이 게헨나를 직시한다. “단,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 “당신이 수현이에게 느끼는 감정이, 제가 수현이에게 느끼는 감정과 엇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겁니다.” “무슨…?” “물론 저는 친형으로서, 즉 혈족 관계로서 수현이를 사랑한다는 뜻이지요. 이성으로는 사랑할 수도, 해본 적도 없으니 모릅니다.” “…….” 그 말에서 무언가를 깨달은 걸까. 내내 기울어 있던 게헨나의 고개가 바로 세워졌다. 꼰 다리를 풀고 묻었던 등을 뗀다. 양손은 부푼 배를 소중히 쓰다듬는다. 어느새 게헨나는 대공의 모습을 해제하고 따뜻한 어미로 돌아와 있었다. 입가에 걸린 알 듯 말 듯한 미소가 그 방증이다.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있던 게헨나가 돌연 킥킥 소리 죽여 웃었다. “조금은….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군. 좋아. 그럼 이만 가보겠다.” “잠…!” 김유현이 붙잡으려고 했으나 ‘좋아.’ 라고 말할 때부터 게헨나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아직 확신을 얻지 못한 두 쌍의 눈을 마주 보며 게헨나는 빙긋 미소 지었다.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너희에게 희소식을 말해주마. 나는 이 세상에, 아니. 그의 곁에 한계까지 머무를 생각은 없다.” “한계…. 말입니까?” “아까 말했잖느냐. 이 차원이 나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내가 있는 것만으로도 균형이 어그러지는 터라, 결국 돌아갈 수밖에 없는 제한이 걸려 있다. 그러니 어차피 돌아가야 하는 운명, 왕이 탄생하면 스스로 돌아가겠다는 소리다.” “차원이라는 건 또 무슨 뜻이죠?” “어렵게 생각할 거 없다. 너희가 나를 보고 느끼는 불안감, 그 정도로만 이해하면 된다.” “…….” 갑작스러운 말에 두 명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게헨나가 “말인즉 설령 한계까지 일자가 남아 있더라도…. 되었다. 그냥 더 빨리 돌아가겠다는 소리다.” 라고 부연하자 그제야 표정이 변했다. “아가한테 며칠만이라도 아비의 얼굴은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머무르는 동안, 그가 나로 인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이건 내 욕심이라고 봐도 좋다.” “그럼.” “조용히 있다가, 조용히 떠나겠다. 이게 내가 너희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요, 유일한 서약이다.” “…….” 이윽고 “적어도 너희는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라 말한 게헨나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휘적휘적 자리를 떴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계단을 올라, 서서히 멀어졌다. 거의 일방적인 통보에 불과했으나, 쉼터에 남은 두 명은 어떻게 잡을 힘도 없을뿐더러 움직일 생각도 못 했다. 한 번 지옥을 겪었다가 나오니 온몸이 물 젖은 솜처럼 노곤해진 탓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후우…. 사용자 고연주.” 고연주가 망연한 눈으로 빈자리를 바라보고 있을 즈음, 상념에서 깨어난 김유현이 말을 걸었다. 그 순간 잿빛 눈동자가 살짝 흔들린 것은 앞선 짧은 한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무언가 미안해하는 어조 때문일까. 고연주의 고개가 녹슨 로봇처럼 삐걱삐걱 돌았다. 차마 못 할 말이라는 걸 알고는 있는 걸까.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김유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 어두운 밤, 고요한 복도에 애끓는 신음이 간헐적으로 울린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앓는 소리, 허덕거리는 소리에 숨 쉬는 것조차 미안한 기분이다. “후우우우….” …벌써 몇 가치째일까. 바닥에는 연초가 벌써 한 무더기로 쌓여 있다. 가만히 있어 보려 해도 지금의 나로서는 서성거리지 않는 게 최선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문을 박차고 들어가 게헨나의 손을 잡아주고 싶다. 힘내라고 위로해주고 싶다. 실제로 그러려다가 방해된다고 두어 번 쫓겨나기는 했지만. 물밀듯 차오르는 불안을 억누를 길이 없어, 나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부모님이 나를 낳으실 때도 이런 기분이셨으려나. 게헨나의 진통이 시작된 직후, 침대에 고인 하얀 액체를 보며 나는 멍청하게도 혼란스러워하기만 했다. 전투라면 몰라도 출산에 관한 지식은 전무했기 때문이다. 그게 양수라는 걸 알지 못했을 정도로. 결국 한동안 허둥대다가 미친 듯이 호출석을 눌렀고, 기다리지 못해 뛰쳐나가 상남 형님과 노노 누님을 찾아 깨웠다. 출산 경험이 있는 만큼 나보다는 익숙하리라는 생각이었다. ‘뭐? 임산부를 혼자 두고 오면 어떡해! 이 멍청이!’ 라 대차게 욕을 먹은 후, 노노 누님은 신속하게 준비를 시작했다. 상남 형님의 도움을 받아 몇몇 클랜원과 하녀들을 부를 수 있었고, 그 이후에는 쭉 기다리기만 하는 신세였다. 중간중간 대야에 뜨거운 물을 받아 가져다주거나 깨끗한 천 등을 구해오기는 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복도 끝쪽에서 줄 연초만 태우는 신세였다. 사실 정신이 없었다는 표현이 정확하리라.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청력을 한껏 집중하는 것밖에 없다. 끙끙대는 소리가 귓전을 스칠 때마다 가슴이 쿡 찔리는 기분이다. “형. 저…. 들어가 보시면 어때요?” 눈을 들자 어색한 얼굴을 한 안현이 보였다. “이번에 쫓겨나면 세 번째입니다.” 대답은 벽에 기대 쭈그려 앉은 진수현에게서 나왔다. 두 명 모두 마구잡이 호출의 피해자(?)였다. 자다 헐레벌떡 나와서 그런지 눈에 졸음이 가득했다. “흐아아암. 이것 참, 몇 시간이나 지난 거지? 언제까지 이렇게….” “입 조심하지 그래.” 늘어지게 하품하는 찰나 건너편에서 날아온 날 선 음성이 귀를 찔렀다. 매섭게 노려보는 허준영의 눈초리에 진수현은 딸꾹거리며 입을 가렸다. 내가 그렇듯 모두가 신경이 예민해진 모양이다. 미안하기는 하지만, 솔직히 지금은 여러 군데 신경 쓸 여력이 없다. 푹푹 한숨을 흘리며 호젓한 복도를 가로지른다. 아으으윽! 그때였다. 근근이 이어진 신음이 갑작스레 복도를 반으로 찢는 비명으로 변했고,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모두의 움직임이 멈추고 동시에 문을 바라본다. 그러나 더 이상 게헨나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바로 이어지는 잠시간의 적막함에 뜻 모를 두려움이 온몸을 휘감는다. 왜, 왜 그래? 아, 아기가 이상해요! 안쪽에서 부산스러운 기척이 들리는 동시, 심장이 쿵 떨어졌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살그머니 고개를 치켰다. “김수현!” 허준영이 황급히 나를 떠밀었다. 시야가 새하얘지는 와중에도 나는 비틀비틀 달려가 금빛 문고리를 힘껏 돌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여러 냄새가 혼합된 이상한 내음이 물씬 풍겼다. 그리고 시야로…. “수, 수현아….” 처음 눈에 들어온 건, 무언가 작달막한 것을 팔로 안은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임한나였다. 멍하니 주저앉은 노노 누님, 마찬가지로 주춤주춤 물러나는 박다솜, 울먹이는 안솔, 이어서 침대에 기댄 채 숨을 헐떡이는 게헨나가 차례대로 눈에 들어온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옅은 미소를 짓고 있다. 어찌 보면 감격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애, 애가 울지 않아! 그, 그러니까….” “시, 신성 주문을…!” 상황은 다시 부산스러워졌다. 뭐가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눈앞이 핑핑 돈다. 그러나 나는 침착해지려 애쓰며 품에서 엘릭서를 꺼냈다. 일이 잘못 돌아가는 것 같으니 우선 먹이고 볼 작정이었다. “이리…!” “엉덩이! 엉덩이를 때려봐요!” 황급한 와중에도 그 말이 옳다고 여겼는지 임한나는 작은 것을 팔에 비스듬히 눕혔다. 곧바로 내리쳐진 손바닥이 작고 포동포동한 볼기를 힘차게 때렸다. 찰싹! 차진 소리가 울렸다. 그 순간이었다. “에!” 불현듯 작고 가냘픈 것이 화들짝 움찔하며 뾰족한 육성이 튀어나왔다. 나를 비롯한 모두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이윽고 작은 것의 정체를 바라본 순간 나는 매우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출산에 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갓 태어난 아기가 상상처럼 예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가령 예를 들어 시뻘겋게 주름진 피부나 적은 머리숱 등등. 그러나 눈앞의 아이는 내 상식을 완전히 깨부쉈다. 윤기가 찰찰 흐르는 시커먼 머리카락, 약간 얼룩졌으나 흰 살결, 앵두를 연상케 하는 도톰하고 빨간 입술, 맑으면서 강렬한 황혼빛 눈동자…. 그래. 이 정도는 백 번 양보해서 이해할 수 있다. 마르의 경우도 있거니와, 생각해보면 완전한 인간의 아이도 아니니까. 그러나 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건 정작 따로 있었다. 그러니까 아기가…. “…….” 굉장히, 근엄하다. 갓 태어난 주제에 표정이나 기색 같은 것이 너무 점잖고 엄숙하지 않은가. 당최 무어라 형언할지 모르겠다. 빽빽 울어 젖히는 것도 아니고. 꼬물거리는 고사리 같은 손이나 통통한 볼살에서는 귀여움이 뚝뚝 묻어나는데, 지긋한 눈동자나 굳게 다문 입술은 정말 근엄하기 그지없다. “이이이익~!” 게다가 무에 그리 심기가 거슬렸는지. 임한나에게 기를 쓰며 바락바락 성난 소리를 지른다. 마치 ‘감히 내 엉덩이를 쳐!’ 라고 지엄하게 호통치는 것 같다. 아니. 무슨 아기가 저렇지? 나는 응애응애 아기 울음이 들리고, 문을 박차고 들어가 안는 이런 감동적인 상황을 꿈꿨는데. 이건 좀 아니잖아. 끝없는 의문이 솟았으나 나는 주춤거리는 임한나에게서 얼른 아기를 받아 들었다. 그러자 아기는 힐끗 나를 보더니 앙증맞게 한쪽 눈을 치켜떴다. 거, 건방져. 건방진데 귀여워. “사내냐, 여인이냐?” 문득 게헨나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바로 아래를 확인했다. “여인…. 아, 아니. 딸이네.” “호오. 수나야, 수나야. 그 사내가 네 아비란다. 어서 인사해야지?” 게헨나는 달램 반, 기특함 반이 섞인 목소리로 말을 흘렸다. 이름이 수나인가. 과연 수나는 말을 알아들었을까? 나도 모르게 기대하며 수나를 꼭 안아 들었다. 그러나. 한동안 나를 빤히 응시하던 수나는. “…부우.” 폭, 한숨짓는 모양새와 함께 휙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 녀석이? ============================ 작품 후기 ============================ 수나야…. 네가 태어나던 날. 온 독자 분들이 네 이름을 속삭였단다…. * 그간 연재에 신경 쓰느라 쪽지를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쪽지 답신은 먼저 온 순서부터 차례대로 답신을 드리는 중입니다. 많이 쌓이기도 했지만, 하루에 많은 답신을 드리지 못하니 너른 양해 부탁 드립니다. 0801 / 0933 ---------------------------------------------- A Midnight Night's Dream(4/4). “사실, 그쪽이 빡칠 만도 해요.” 달빛이 비추는 밤. 탁탁, 기록묶음을 책상에 부딪쳐 가지런히 한 박다연이 종알거렸다. 고개를 흔들자 양 갈래로 땋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려 어깨를 쓸듯이 스쳤다. “어쨌든 도시 권한은 그쪽에 있고, 또 밤의 거리가 창출하는 시장 효과는 어마어마하거든요. 근데 우리 때문에 몇 주나 지체돼 있으니…. 저라면 쫌 짜증 날 듯?” “으음.” 옆에 앉은 연혜림이 수긍하는 신음을 흘렸다. 심각한 얼굴로 기록을 들여다보고 있지만, 사실 공백으로 점철된 기록에 불과했다. 흘끗 본 박다연이 하, 헛웃음을 흘리며 가당찮다는 표정을 짓는다. “으음, 은 뭔 놈의 으음, 이에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응? 아니야. 이번에는 알고 있어. 우리가 잘못했지. 빨리 사과하자.” “푸. 엄밀히 말하면 산하 쪽에서 지랄하는 거지 우리가 잘못한 건 아닌데요? 그리고 사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요.” “사, 산하 클랜 잘못도 우리 책임이니까.” “와, 끼워 맞추기 쩐다.” “…그래 이년아! 모른다! 가만히 있어 줘도 지랄이야!” 벌컥 고함친 연혜림이 신경질적으로 기록을 집어 던졌다. 그러나 박다연은 여유롭게 받아내고는 씩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모르면 그냥 모른다고 해요. 그래야 제가 언니한테 뭐라 하는 척하면서 소영이 언니한테 일침을 가하죠.” “나쁜 년. 못돼 처먹은 년. 고연주 다음으로 네가 제일 싫어!” 바드득, 이 가는 소리가 샜다. 더 놀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박다연은 이쯤 하기로 하고 눈을 돌렸다. 더 하면 진짜 맞을 것 같았으니까. “언니. 근데 상황이 썩 좋지는 않아요. 지금 진퇴양난인 건 아시죠?” 짐짓 목소리를 깔았으나 반응은 시원찮았다. 한소영은 기록에 사인하며 고개를 까닥였을 뿐, 아무런 말도 않았다. 박다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뭐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요?” “없어.” 상황의 심각성을 인정한 것치고는 간결한 대답이었다. “헤~에. 언니, 아니 클랜 로드. 지금 칼자루 쥔 건 우리가 아녜요. 머셔너리죠.” “그렇지.” “그렇지 라뇨. 이대로 얌전히 세력 뜯길 거예요? 그래도 항의할 구석이 아예 없지는 않잖아요. 하다못해 어필이라도 해야죠.” “…….” 물 흐르듯 움직이던 깃 펜이 우뚝 멈췄다. 한소영은 비로소 눈을 떼고 박다연을 응시했다. “다연아.” “네.” “벌써 호들갑 떨지 마. 그렇게 큰일도 아니니까.” “그럼 저한테 근자감이 아니라는 확신을 주세요. 저는 호구 취급받는 건 죽기보다 싫거든요?” “근자감?” “아,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는 뜻이야.” 눈치만 보던 연혜림이 감초처럼 끼어들었다. 한소영인 두어 번 깃 펜을 돌리더니 이해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꽤 까다로운 상황인 건 인정해. 하지만 머셔너리 로드가 간단히 휘둘릴 사내는 아니거든.” “휘둘려요?” “네 말대로 항의라도 하는 순간, 그건 최악의 악수가 될 거야. 그때부터는 간접 충돌이 아닌 직접 충돌이 공시화되는 거니까. 머셔너리가 쥐고 있는 칼자루가 우리를 향할 수도 있다는 걸 왜 모르는 거니.” “하지만….” “밤의 거리 허용, 견제, 이간질, 세력 격하. 어느 방향으로 가든 지뢰는 밟을 수밖에 없어. 하지만 기왕 밟을 거면 맨 마지막 게 낫겠지. 단, 피해는 최소한으로.” “……!” 무언가 상당히 생략된 말이었다. 그러나 명석한 두뇌를 가진 박다연은 돌연 놀란 얼굴로 눈썹을 이지러트렸다. 이해는 했지만,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네~.’ 라는 말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신나게 손장난을 하는 연혜림을 한심한 눈으로 보다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하지만, 그래도 불안해요. 혹시라도 머셔너리가….” “글쎄. 고작 산하 클랜 몇 개 먹자고 우리와의 관계를 틀지는 않을 텐데. 어쩌면 벌써 움직였을 수도 있고.” “쩝. 그럼 이대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거죠?” “그래. 지금은 가만히 있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야.” 한소영의 목소리는 묘한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나도 불안해할 거 없어. 이 사건은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 어차피 조만간 찾아가 볼 생각이었거든.” 한 번 더 확신하고는 다시 기록으로 시선을 돌린다. 박다연은 한동안 상념에 잠겼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슬쩍 웃어 보였다. “언니. 아무래도 너무 자신하시는 거 같은데. 혹시 이상한 생각하고 계신 건 아니죠?” “이상한 생각?” “예를 들면…. 이 사건을 잘 좀 해결해달라고 몸을 바친다든가~?” “…몸을 바쳐?” “섹스요. …아, 농담, 농담이에요.” “푸흐헤헤헤헤헤헤!” 뜬금없는 말이 그리 웃긴지 연혜림이 빵 터졌다. 황급히 몸을 일으킨 박다연은 “머셔너리 클랜하고 약속 잡을게요!” 라 외치고 후닥닥 도망쳤다. 계속 책상을 치며 웃던 연혜림은 곧 뚝 웃음을 그쳤다. 문을 향하던 매서운 눈초리가 자신을 향했기 때문이다. 쾅! 결국 연혜림도 세게 문을 닫고 나갔다. “맨날 나한테만 뭐라 그래!” 라는 되먹잖은 투덜거림을 남기고서. “하아….” 한소영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기나긴 한숨을 흘렸다. * 이른 아침, 나는 식사를 끝내고 바로 캐슬을 나섰다. 원래 수나를 보려고 했으나 ‘책무를 다하기 전까지는 보여줄 수 없다.’ 는 게헨나의 완강한 저항이 나를 저지했다. 산후조리(?)하는 여인한테 뭐라 할 수도 없는 터라, 결국 눈물을 머금고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신 코란 연합, 상인 조합에 도착하자 서지환은 크게 놀랐다. 애초 만나자는 약속은 잡았지만, 내가 가는 게 아닌 서지환이 오기로 이야기돼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얼른 밤의 거리를 보고 싶다는 명목으로 에둘러 말했고, 서지환은 굉장히 기뻐하며 나를 기꺼이 환영했다. “이거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설마 머셔너리 로드가 직접 찾아와주실 줄은, 이렇게까지 열의를 보여주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사실 밤의 거리가 무기한 연기되고 요 근래 우울했는데, 정말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입니다.” 아니. 나는 그냥 얼른 끝내고 수나를 보고 싶어서…. “자자, 이쪽으로 앉으시죠. 어떻게 식사라도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차라도? 혹은 여자….” “아니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단호히 거절하자 서지환은 더욱 감격해 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번쩍번쩍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게 심히 부담스럽다. “상황은 대충 듣고 왔습니다. 지금 문제가 되는 부분이 구 코란 연합 때문이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구 코란 연합을 해체하고 뿔뿔이 흩어진 이들이 여럿 있는데, 그중 이스탄텔 로우 아래로 들어간 사용자들이 꽤 있나 봅니다.” 정작 당사자 중 한 명이었으면서 서지환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야기 한다. “그래 봤자 큰 세력은 일구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4할이나 되는 전력을 움직이는 겁니까?” “선동을 잘한 것 같더군요. 즉 우리가 만들 밤의 거리를 견제하겠다는 겁니다. 물론 밤의 거리가 원래 공공연한 비밀이라고는 하나, 이렇게 수면 위로 떠오르니 요즘 참 꼴이 말이 아닙니다.” 서지환은 한숨을 쉬었다. 완곡히 말하기는 했으나 진의는 알 것 같다. 밤의 거리는 ‘한 번 만들어볼까?’ 라고 생각해서 만들 수 있는 시장이 아니다. 아주, 매우 어렵다. 검은 ‘욕망’이 오고 가는 시장인 만큼, 방문자들의 니드(Need)가 굉장히 까다롭고 광범위하거니와, 품목을 조달하는 것도 일이다. 게다가 본 의도에 벗어나는 역기능을 다분히 포함한 시장이라, 어설프게 하려면 차라리 손을 안 대는 게 좋은 방법이다. 말인즉 이것도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소린데, 이건 능력이 넘쳐도 너무 넘치는 게 문제였다. 앞으로 아틀란타가 주무대인 이상, 구 북 대륙 내 밤의 거리는 자연스레 사라질 수밖에 없다. 이때, 코란에서 손을 턴 서지환이 아틀란타 남 도시에 새로운 시장을 형성한다고 한다. 그리고 서지환의 능력은 이미 입증된 상황. 다른 도시, 다른 상인 클랜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틀란타에서 밤의 거리를 먼저 선점하게 되면 그만큼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질 테니까. 생각을 마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 이번 사건을 크게 키우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어지간하면 좋게 넘어가고 싶어요.” “그럼요. 이스탄텔 로우니까요. 이해합니다.” “그럼 하나 묻겠습니다.” “예. 얼마든지.” “현재 신 코란 연합은, 이스탄텔 로우 산하 성명을 발표했다는 클랜과…. 그냥 까놓고 말하죠. 구 코란 연합의 일원들과 어떤 관계도 없습니까?” “없지는 않습니다. 이번에 밤의 거리와 관련해서도 꽤 많은 거래를 텄으니까요. 하지만 이스탄텔 로우의 세력을 깎겠다는 모의 같은 건 결단코! 하지 않았습니다.” 말을 하고 반응을 살펴보려고 했는데, 서지환은 시원스레 대답했다. 마치 조금도 재고할 가치가 없다는 듯이. 그러자 약간은 허탈한 기분이 느껴졌다. 이스탄텔 로우가 ‘혹시 둘이 작당한 게 아니냐.’ 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만큼,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쉬워진다. “사실 이스탄텔 로우의 입장도 이해가 갑니다. 아 물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날 수도 있는 겁니다만. 애초 밤의 거리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운 클랜이니, 처음부터 알고 들어간 거 아니겠습니까? 한데 갑자기 4할에 가까운 클랜이 탈퇴하겠다고 하니 화도 나겠지요. 저라도 길길이 날뛰고 의심했을 겁니다.” “…….” “그래서 제가 정말 크게 마음먹고, 직접 만나서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지금 너희 때문에 내 처지가 곤란하다! 그러니 탈퇴하지 말고, 우리가 구역을 나눠줄 테니 같이 장사하자! 수익 중 33%는 머셔너리에 내고, 우리한테는 17%만 주고, 나머지 50%는 너희가 가져라!” “그런데요?” “싫답디다! 겉으로는 남는 게 있네 없네 하는데, 아니 그럼 우리는 땅 파서 장사합니까? 남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시장에 한 숟가락 얹게 해주겠다는데, 완전히 막무가내입니다! 떼쓰는 애새끼도 아니고 말이죠! 허, 참!” “흐음.” 그간 어지간히도 울분이 쌓였는지 서지환은 침까지 튀겨대며 가슴을 펑펑 쳤다. 그러나 반대로 나는 속으로 웃을 수 있었다. 방금 서지환이 한 말은 내가 들어도 꽤 괜찮은 제안이었다. 받아들이기만 했다면 좋게 해결될 수도 있었을 터. “자자, 진정하세요.” “그래서 말입죠…! 아, 죄, 죄송합니다. 제가 하도 열이 뻗쳐서….” “하하. 괜찮습니다. 이해해요. 저라도 화가 났을 겁니다.” “허, 허허…. 감사합니다.” 서지환은 어색이 웃었다. 나도 미소로 화답하며 의자에 편안히 등을 묻었다. “상인 조합 로드. 그럼 이렇게 합시다.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좋은 생각이요?” 서지환이 동그란 눈으로 반문했다. * 수나가 태어난 이후, 머셔너리 클랜에는 한바탕 안달의 바람의 찾아왔다. 어감이 조금 이상하기는 하나, 수나의 특성을 보면 아주 이해 못 할 말도 아니었다. 올망졸망한 황혼빛 눈동자, 발그레한 뺨, 젖살이 통통히 오른 볼살, 오목조목한 코…. 그야말로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아기였으나, 애가 하는 행동이 문제였다. 울지도 않고, 보채지도 않는다. 그저 온종일 근엄한 얼굴로 가만히 있는데, 혹시 영혼은 늙은이가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거기다 까다롭기는 또 얼마나 까다로운지. 무엇보다 사내의 손길이 닿는 걸 끔찍이도 싫어했다. 남자가 살짝 만져볼라치면, 악을 쓰며 으르렁거린다. 싫어하는 티를 내는 수준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김수현의 손길을 거부하느냐 안 하느냐는 주제로 내기까지 나올 정도. 물론 그렇다고 여인이 마음대로 만질 수 있다는 건 아니다. 황당하게도, 수나를 모시려면(?) 철저한 하녀가 돼야 했다. 가령 현재 수나를 안고 있는 임한나의 경우 진정 가관도 아니었다. 팔은 45도쯤 꺾어 등을 기대게 해주고, 손으로는 머리를 공손히 받쳐준다. 이뿐일까? 쭉 뻗은 두 다리는 임한나의 가슴에 턱 꼬아 걸쳐져 있는데, 상전도 이런 상전이 없었다. “흐흥, 흐흥~.” 그렇게 엄청나게 힘들고 불편한 자세였으나 임한나에게서는 연신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애초 아기에게 사족을 쓰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어쨌든 수나는 마르와 비견될 정도의 사랑스러움을 갖춘 아이였다. 마르가 순한 강아지라면 수나는 까칠한 새끼 고양이다. 그리고 데리고 다니는 곳마다 안달 난 눈초리가 쏟아지는데, 그걸 즐기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무언가 선택 받은 기분이랄까. “우리 여왕님~. 또 어디 가보고 싶으세요~?” “…….” 임한나가 상냥히 웃으며 물었으나 수나는 아무런 말도 않았다. 아니, 애초 아기가 말을 하는 게 어폐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확실히 알아듣기는 한 듯, 왼쪽을 쳐다보며 까닥, 턱짓한다. 그 건방진 모습에 미치도록 볼을 비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임한나는 간신히 자제했다. 왜냐면 오늘 아침 첫 시녀로 간택된 안솔이 볼 한 번 찔렀다고 단번에 잘렸으니까. “음?” 이윽고 로비를 가로지르려는 찰나, 임한나가 잠깐 걸음을 멈췄다. 시끄러운 정도는 아니나 무언가 소란스러웠기 때문이다. 하녀 몇 명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임한나는 살며시 한 명을 불러 세웠다. “바쁜데 미안해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아. 손님이 오셔서요.” “손님이요?” “네. 이스탄텔 로우 로드 님이세요.” 임한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분이…? 클랜 로드 님은 지금 안 계시잖아요.” “그렇기는 한데 어젯밤 약속을 잡았거든요. 이분이 조금 빨리 오셨네요.” “그럼 약속 시각 전까지는 오시려나….” “우선은 4층 집무실로 먼저 안내해드리고, 바로 연락 넣으려고요.” 별일은 아니구나, 라고 생각한 임한나는 상냥히 웃었다. 하녀는 잠깐 수나를 보고는 어딘가로 급히 달렸다. 잠시 후. 다시 콧노래를 부르며 걸음을 옮기던 임한나는, “아….” 불현듯 우뚝, 걸음을 정지했다. 화색이 가득하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사라진다. “4층…? 집무실…?” 무언가 모종의 불안감을 느낀 걸까. 임한나는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하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게헨나양이 : 지금 나보다 더 사랑 받는 애 누구야! (웅성웅성.) 게헨나양이 : 빨리 안 나와? 너지! 정하연양이 : 아, 아니요…. ㅠ 게헨나양이 : 너 아니야? 그럼 누구야! 빨리 안 나와? (와장창!) 한소영양이 : 어이, 거기 암고양이! 게헨나양이 : ! 한소영양이 : 네가 그렇게 사랑을 잘 받아? 게헨나양이 : 이, 이 암고양이가 돌았나. 한소영양이 : …옥상으로 올라와. 수나양이 : 응애응애! 한소영양이 : 꺄 귀여워! (와락!) 수나양이 : (깜짝!) 으, 응애?! 게헨나양이 : …놔둬. 한소영양이 : 나, 나와! 이 발정 난 암고양이! (잠시 후.) (복도를 나란히 걸으며.) 게헨나양이 : (흘끗 쳐다보며) 야. 쪽팔리게 하지 말고 빨리 끝내자. (효과음) 둥, 둥, 둥, 둥, 둥두둥두둥두둥두! 둥두둥두둥두둥두! 둥두둥두둥두둥두! * 게헨나 마지막 파트, 시작합니다. 0802 / 0933 ---------------------------------------------- A Midnight Night's Dream(4/4). 여인의 감이 모종의 불안감을 느낀 걸까. 임한나는 쉬이 발을 떼지 못했다. 황급히 달려나가기 전, 빤히 쳐다보는 수나를 보고 빠르게 주변을 둘러본다. 마침 두 영수(靈獸)를 끌고 다니는 마르를 발견하고, 나는 듯 달려가 수나를 맡긴다. 김수현과 한소영의 관계를 알고 있는 만큼 거의 본능에 가까운 판단이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도 한참이나 늦은 상황이었다. 하녀의 안내를 받아 집무실 문을 연 한소영은, 침대에 누운 게헨나를 보고 완전히 얼어 있었으니까. 상대가 누구인지는 당연히 알고 있다. 그나마 하나 다행인 점은 고연주가 하녀들에게도 상세한 내용까지 철저한 교육을 해놨다는 것이다. 물론 알고 실천하는 것과 조리 있게 전달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죄송하다, 몰랐다, 우연히 소환됐다, 적대적이지는 않다, 클랜 로드를 협박했다, 얼마 전에 애를 낳아 산후 조리 중이신데 등등. 한소영은 횡설수설 내뱉는 하녀를 한 번 흘끗 보고는 살그머니 움직임을 보였다. “여기서 기다릴게요.” 라는 말과 함께 문이 닫혔다. 복도에 남은 건, 머릿속이 엉망이 된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하녀뿐. 게헨나도 조금은 놀란 상태였다. 한 걸음 한 걸음 안으로 들어오는 한소영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흑단 같이 찰찰 한 머릿결, 끈적하면서도 예쁜 흑 수정 같은 눈동자, 기품 있으면서도 색스러운 분위기, 은은한 기운이 흐르는 흰 살결…. ‘필시 보통 계집은 아니로다.’ 게헨나가 관심을 가진 건 눈이 번쩍 뜨이는 외모 때문도, 신기를 품고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게헨나로서도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일종의 감과 같은 것이었다. ‘이 정도로 요사스러운 기운이라니…. 가히 한 국가를 기울일만한 계집이다.’ 한소영의 사용자 정보에 ‘경국지색(傾國之色)’이 적혀 있는 건, 과연 우연일까. 게헨나는 유심한 눈으로 한소영을 관찰했다. 한소영도 게헨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에서 무언가 감추고 경계하는 듯한 감정이 전해졌다. 마치 스스로 자신을 죽이고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는 느낌이다. ‘스스로 깨닫고 자제하는 건가. 허나….’ 게헨나의 속내로 갑작스레 불쾌감이 치솟았다. 정확히는 김수현을 향하는 걱정을 느꼈다. ‘요녀(妖女)란 본디 사내의 살과 뼈를 탐하고, 종래에는 심장까지 파먹는 악독하기 짝이 없는 존재. 한데 이 계집은 요녀라기보다는…. 이상하다. 정말로 이상해.’ 요녀보다 더한 존재가 김수현을 찾아왔다는 것도 그렇고, 특히 보금자리가 침범 당한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자연스레 기분이 상한다. 왜 김수현을 찾아왔을까, 어떤 관계일까 괜스레 신경 쓰인다. ‘아무래도 본 모습을 알아봐야겠다. 궁금하기도 하지만, 이대로 두고 보기에는 너무 위험하다.’ 함부로 손을 댈 수는 없지만, 적어도 경고는 할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한 게헨나는 곧바로 암시를 걸었다. 붉은 안광이 미미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예전 김수현에게 한 것처럼 작정하고 건 건 아니고, 극히 미미한 최면 수준이었다. 겉모습을 벗기고 내면을 드러내는 데는 이 정도가 적당하기 때문이다. 한소영은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짐을 느꼈다. 처음 게헨나를 보고 굉장히 놀랐지만, 하녀의 반응을 보고 예전과 같은 상황은 아니라는 결론까지는 어찌어찌 내릴 수 있었다. 내심 호기심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껏 머리까지 묶고 왔는데, 웬 여인이 김수현의 침대에 주인인양 누워 있다는 사실이 자못 거슬렸다. “당신이…. 어째서 여기 있는 건가요?” 한소영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고요하고 잔잔한 음성이었으나 어딘가 모르게 날카롭다. 게헨나는 정신을 차리고 반쯤 감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까 하녀의 말은 흘려 들었느냐?” 거만스러운 말이 흘러나왔다. 일부러 건드린 감도 없잖아 있었다. 한소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불편하셨다면 사과 드릴게요.” 그러나 기품 있게 사과하고는 조용히 자리에 앉는다. ‘이것 봐라?’ 재미있다는 표정을 한 게헨나가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빙긋 웃었다. “왜 여기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얌전히 나가줄 생각은 없느냐? 그대에게 들어와도 된다고 허락한 기억은 없다만.” “…조금 혼란스럽네요.” “아니. 손님으로 온 거라면 응접실도 있을 텐데.” “약속은 신뢰의 척도죠. 시간은 조금 이르지만, 만나기로 한 장소가 이 방이니까요.” 공손한 말이 오고 가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이 소리였다. 나가, 싫어 네가 나가. 두 여인이 서로를 응시한다. 시선이 부딪친 허공이 묘한 전운을 자아낸다. ‘흐음. 암시가 약한 건가. 이게 본 모습인지 아닌지 감이 잡히질 않는구나.’ 잠시 후, 게헨나가 특유의 자세를 취했다. 다리를 꼬고 한 손으로 턱을 괴어 고개를 삐딱이 기울인다. 복부가 도로 들어간 상태라 더욱 그럴 듯한 자세가 나왔다. 한소영도 지지 않았다. 살그머니 눈을 치뜨더니 똑같이 다리를 꼬고 깊숙이 팔짱을 낀다. 마치 야생의 두 공작새가 깃털을 활짝 펼쳐 서로 아름다움을 경쟁하는 듯한 풍경이었다. 도도도도, 도도도도! 그때였다. 복도에서 누군가 황급히 뛰는 소리가 들렸다. 두 여인은 동시에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이어서 들어온 이들은, 두 명과 두 마리로 이루어진 귀여운 파티였다. “아, 아?” 수나를 안고 들어온 마르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당연히 김수현이 있는 줄 알고 왔는데, 김수현은커녕 두 여인이 마주 앉아 있으니까. “응? 마르? 수나까지….” 한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아 김수현의 목소리가 복도를 타고 흘렀다. 마침 서지환과 얘기를 마친 김수현이 임한나의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온 것이다. “에, 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마르는, 근엄한 수나를 방패처럼 높이 들어 올렸다. “수, 수나가요. 엄마 아빠를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엄마, 아빠…?” 되받은 이는 다름 아닌 한소영이었다. 반사적으로 수나를 안던 김수현은, 멍하니 몸을 일으키는 한소영을 이제 봤는지 낯빛이 새하얘졌다. 아차 했다고나 할까. 그런 김수현을 보는 한소영의 뇌리에 아까 하녀의 횡설수설이 하나씩 스쳐 지나쳤다. 그 순간. 두근! 한소영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살금살금 고개를 치켰다. *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정문을 나서는 한소영의 옆에서 서지환과 나눈 이야기를 필사적으로 떠들고 있었다. 홀연히 빠져나간 한소영을 배웅한다고 정신없이 따라 나간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제의를 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원래는 총 수익의 50%를 내야 하는데, 그냥 33%로 똑같이 맞추기로요. 우선 33%를 받고, 조건부로 신 코란 연합에 17%를 보장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우스운 일이었다. 원래는 이런 데서 할 이야기가 아닌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그야말로 본말전도(本末顚倒)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이다. 나는 말을 하면서 계속 흘끗거렸다. 한소영은 항상 무표정하다. 과거에는 이 무감정한 낯빛이, 초감각으로 인한 자기 보호 본능에서 비롯된 후천적인 형색(形色)이라는걸 한참이 지나서 깨달았다. 그러나 오늘은 미묘히 다르다. 언뜻 포커페이스는 유지하는 것 같지만, 흰 볼에 흐르는 고운 빛은 정작 서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문득 짓씹듯 맞대어진 입술이 살며시 벌어졌다. “의외네요.” 흘러나온 목소리는, 침묵을 지킨 시간이 허탈이 여겨질 정도로 담백한 음성이었다. “저는 좀 더 심하게 하실 줄 알았거든요. 가령 산하들이 탈퇴해도 밤의 거리에 일체 관여하지 못하게 한다든가.” “하하. 그건 최후로 사용해야죠. 우선은 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관계를 모색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서로 도움? 전혀 아닌데요? 33%로 맞추고 신 코란 연합에 17%를 보장해준다는 건, 결국 머셔너리가 그만큼 손해 본다는 거잖아요.” “아, 아뇨. 꼭 그렇게 만은 볼 수 없습니다. 공개할 수는 없지만, 조건을 몇 가지 걸었으니까요. 그리고 추가로 5%의 수익을 이스탄텔 로우에 납부하게 할 예정입니다.” “어쨌든 머셔너리가 손해라는 건 변하지 않네요. 산하들은 50%를 62%까지 가져갈 수 있고, 이스탄텔 로우는 가만히 앉아서 5%의 수익을 얻을 수 있고.” “이, 이스탄텔 로우 로드.” 한소영의 목소리가 점차 공격적으로 변한다고 느낀 건 내 착각일까. 그렇게 생각한 찰나, 한소영이 돌연히 걸음을 멈췄다. “왜요?” 한순간 반문할 뻔 했으나 겨우 참았다. 예전에 한소영이 그랬으니까. 못들은 척하지 말라고. 한소영은 창백한 얼굴로 하염없이 앞을 응시하고 있다. 올 것이 왔다. 생각보다, 갑작스럽게. “어떤 방식으로든, 이스탄텔 로우에 해가 갈만한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속내를 털어놓자 한소영이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절반만 보이던 얼굴이 완연히 드러나 나를 직시한다. 뜻 모를 긴장감이 배로 치솟는다. “저인가요, 이스탄텔 로우인가요.” “한소영이 있는, 이스탄텔 로우 클랜을 위해섭니다.” “애매한 대답은 집어치워요.” “…사용자 한소영을 생각했습니다.” 빌어먹을. 절로 욕이 나왔다. 방금 한 말이 얼마나 병신 같은지 새삼 느꼈기 때문이다. 헛웃음이 들렸다. 한소영의 표정이 서서히 변화한다. 눈꺼풀은 파르르 떨리고 이를 악물고 있다. 그러나 고개를 휙휙 흔든 한소영은 애써 추스르며 말을 잇는다. “사실, 아까 대강이나마 사정을 듣기는 했어요. 너무 두서없이 들었는데 이제야 정리가 되네요. 그 여인은…. 우연히 소환된 거죠?” “……?” “임신은 돌아오기 위한 조건이었다고…. 그러니까 그 여인이 협박을 한 거라고….” “거기까지…. 도대체 누가?” 그러나 회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건 전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그저 물끄러미 응시한다. 꺼져가는 촛불처럼 메마르던 눈동자에 이상한 광채가 스쳤다. 무언가를 한껏 기대하는 눈빛. 한순간 유혹에 빠졌다. 어쩔 수 없었다고. 그리고 어차피 곧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그냥 그렇게 말해버릴까. 어떻게 모면할 수 있지는 않을까. “…….” …어차피 한소영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나는 간신히 결심할 수 있었다. 이 이상 추태를 부리지 말자고. 내 소중한 사람을 상처 입히지 말자고. 오늘 이 자리에서, 확실히 선을 긋는다. “시작은 확실히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후우, 숨을 흘렸다. 약간 굽은 허리를 바로 하고 정면을 응시한다. 결심한 이상, 더는 망설이지 않는다. “모릅니다…. 라고요?” “지금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순간이었다. 탁, 눈동자 속 촛불이 꺼졌다. 사정없이 일렁이는 흑 수정이 본래의 빛을 잃고 끝없이 아래로 침잠한다. “진심…. 이네요?” 목소리가 이상하게 높아졌다. 아랫입술은 짓씹다 못해 안쪽으로 찌그러들 정도였다. 나도, 한소영도. 잠시 후, 한소영의 입꼬리가 요상하게 이지러졌다. “여전히, 거짓말을 할 줄 모르시네요. 가끔은 거짓말이 좋을 상황도 있는데.” 불현듯 오늘따라 한소영이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으면서도 아닌 듯한 느낌. 특히 여전히 라는 말이 신경 쓰였지만,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끄덕였다. “그 둘을 생각하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 나는요!” 느닷없이 한소영이 폭발했다. 발을 한 번 세게 구르자 쾅, 땅이 신경질적으로 물결치며 흔들린다.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다. 숨이 막힐 듯한 정적. 흡사 온 세상이 우리를 쳐다보는 듯했다. 호흡을 억지로 가라앉히는 소리가 한참 동안 흘렀다. 문득 주먹 쥔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게 눈에 들어온다. 차라리 저 손으로 나를 후려쳐주었으면 좋겠다. 그럼 시원하기라도 할 텐데. “제가, 제가 나쁜 거예요?” “…….” “나를 위해주고, 보호해주고, 신경 써주고, 목숨까지 바쳐 구해주고. 항상 나를 진심으로 대해주는 사내인데. 착각한 제가 이상한 거예요?” “…….” “안 이상해요? 그럼 저도 이 남자 저 남자 만나고, 애라도 낳을까요? 그럼 지금 제 기분을 이해하실 수 있을까요?” “…….” 애원하는, 갈구하는, 떼쓰는 듯한 음성이 차례로 이어졌다. 원하는 말을 해달라고.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한소영이니까. “죄송합니다.” 결국 사과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사과하지…!” 더는 견딜 수가 없어 눈을 질끈 감은 찰나, 바람을 세차게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각오했으나 충격은 느껴지지 않았다. 날카롭게 날아온 무언가는, 바로 앞에서 멈췄다. 왼쪽 얼굴에서 덜덜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부드러운 감촉이 볼을 훑듯이 지나쳤다. “사과 말고,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요…. 제발….”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머셔너리 로드는…. 항상 저를 위해주시네요…?’ ‘저도 무언가 해드리고 싶은데….’ ‘웃겨요? 제가 다른 남자 품에 안겼다는데 화도 안 나요?’ ‘정말, 보고 싶었다는 말이에요…!’ 어느 순간부터 한소영은 항상 나한테 진심을 보였다. 그에 반해 나는 계속 애매모호한 태도를 고수했다. 속으로는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즐겼을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변명이라도 해보라는 말이에요…. 돌아오려면 어쩔 수 없었다. 여기는 홀 플레인이 아니냐. 이런….” 참았던 숨을 들이켰다. 목이 활활 타는 것만 같다. 다시 눈을 뜨자 한소영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잠깐 입을 열었다가 닫았지만, 안간힘을 다해 억지로 끄집어냈다. “은혜를 갚고 싶었고, 사모했고, 동경했으며, 사무치도록 그리워했습니다.” 한순간 한소영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모든 것이 차갑게 굳어버린다. “꼭….” 말을 하면서도 아찔한 기분이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까지 왔다. 그래, 그러니까…. “상대를 좋아하고 사랑해야만이, 위할 수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결국에는 뱉어버렸다. 이 말이 결정타였다. 한소영의 몸이 미세하게 비틀거렸다. 눈도, 입도 멍하니 벌어졌다. 흡사 넘어질 것처럼 서서히 고개가 젖혀지더니 하늘을 망연히 응시한다. 까닭 모를 숨이 찢겨 새어 나오는 공기처럼 가느다랗게 흘러나온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치 정신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에 현기증이 일 즈음. “하…. 하나만 물어볼게요.” 넋을 잃은 사람처럼 하늘을 올려다보던 한소영이 떨려 나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 번도 저를 여인으로, 이성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감히, 그렇게 생각하기 어려웠습니다.” “한 번도요? 단 한 번도요?” “…예.” 그 순간 한소영이 흠칫 몸을 떨었다. 순식간에 고개를 내려 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본다. 눈에 괸 눈물이 주르륵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우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 그런 거였구나. 그, 그렇군요.” 한소영이 어린 아이처럼 손등으로 눈물을 쓱쓱 닦는다. 웃는지 우는지 모를 오묘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한소영은, “그, 그런데요.” 흐느낌 섞인 목소리로, “그거…. 아세요?” 어딘가 환하면서도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 작품 후기 ============================ 게임으로 치면 한소영을 공략하기 위해 필수로 거쳐야 하는 루트 정도로 볼 수 있겠네요. 오늘 복선은 후반부에 풀릴 예정이지만, 그래도 주의 깊게 정독하시면 나쁘지는 않으실 겁니다. 왠지 이러니까 꼭 게임 공략집 같네요. 하하. 아, 가끔은 그런 것들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김수현이 지구에서와 홀 플레인에서의 모습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다른 캐릭터들의 지구 때 모습이 어땠는지 말이죠. :) 여하튼, 게헨나 파트도 이제 2회가 남았네요. 끝나면 바로 본 이야기로 진입하도록 하겠습니다.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0803 / 0933 ---------------------------------------------- A Midnight Night's Dream(4/4). < 회상(Reminiscence) > 이윽고 한소영은, “그, 그런데요.” 흐느낌 섞인 목소리로, “그거…. 아세요?” 어딘가 환하면서도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방금, 거짓말하셨어요.” 흡사 비련(悲戀)의 여주인공처럼 말한 후, 몸을 돌려 대로로 뛰쳐나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 게헨나는 교교(皎皎)한 월광이 스민 침대에 누워 테라스 너머를 응시했다. 밤이 흐르는 하늘에는 썩 희고 깨끗한 달이 아스라이 떠올라 있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것이, 이대로 테라스 밖으로 걸어나가 탁 트인 밤하늘을 만끽하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는 대신, 게헨나는 살짝 눈을 내렸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달을 보는 것보다 훨씬 기분이 좋아지는 풍경이 펼쳐져 있다. 곤히 자는 김수현의 가슴으로 수나가 낑낑대며 아등바등 기어오르고 있다. 혹여 깨기라도 할까 자꾸 흘끗거리는 모습이 꽤나 곰살맞다. 결국에는 완전히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수나는 몹시 만족한 얼굴로 김수현의 가슴에 살며시 고개를 묻었다. 아비의 품이 그리 좋은지 토실토실한 볼살이 미어터질 정도로 맞대어 문지른다. 그러나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게헨나를 보고는 움찔 몸을 떨었다. 눈이 가늘어지며 두 뺨에 홍조가 어린다. 게헨나는 소리 죽여 웃었다. 그러나 입에 걸린 미소가 마냥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조금씩 이별이 다가오고 있어서일까. 스스로 느끼는 진한 아쉬움과 수나에게 향하는 뜻 모를 미안함 등이 뒤섞여 흘러나온다. 게헨나는 현재 생활을 즐겁다 느끼고 있었다. 김수현과 같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하고, 딱히 거슬리는 것도 없다. 그러나 어쨌든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애초 약속한 것도 있거니와 이 세상은 수나가 있을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옥에는 ‘왕’이라는 존재가 필요하다. 한편으로는 이 이상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게헨나도 알고 있다. 자신이 곁에 있음으로써, 김수현이 여태껏 쌓아온 관계가 조금씩 어그러지고 있다는 걸. 당장 어제만 해도 그렇다. 멋대로 암시를 사용한 결과 사달이 일어났다. 한소영을 배웅하고 돌아온 김수현은 애써 괜찮다고 웃었지만, 축 처진 어깨나 간헐적으로 흘러나오는 침음은 게헨나의 가슴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결국,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점차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물론 게헨나도 이대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 떠나는 이에게 흔히 이렇게 말하고는 한다. 좋은 기억만 가져가고, 나쁜 기억은 두고 가라고. 그러나 게헨나는 웬만하면 좋은 기억을 가져가는 것만이 아니라 남기고도 싶었다. 이 바람의 범위는 굳이 김수현한테만 한정되지 않는다.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겸사겸사 그동안 신세 진 것도 갚을 겸, 어느 정도 베풀어줄 거리는 있을 터. ‘눈을 뜨면 조금씩 준비해야겠구나….’ 그렇게 생각한 게헨나는 차분히 눈을 감았다. 문득 옆구리가 허전해 스리슬쩍 김수현의 품에 안기려 했지만, 잠든 줄 알았던 수나가 희번덕 도끼눈을 뜨고 노려봐 포기하고 말았다. ‘…이 녀석, 꽤 까다로운 왕이 되겠군.’ 게헨나는 나직이 투덜대며 잠이 들었다. * 약간 늦은 아침, 게헨나는 한창 달게 자는 수나를 두고 방을 나섰다. 느긋이 계단을 밟아 내리는 걸음은 1층 식당을 향하고 있다. 새벽에 생각한 것을 실행하려는 것이다. 아직 해가 중천에 걸리지 않아서 그런지 식당은 약간 한산한 정도였다. 게헨나가 들어서자 잠깐 대화가 끊겼지만, 다시 부산스러워졌다. 그간의 행동으로 클랜원들도 어느 정도 불안감은 떨친 상태였다. 첫날처럼 극히 경계하는 모습은 사라졌다. 조금도 개의치 않고 주변을 둘러보던 게헨나는 곧 시선을 멈췄다. 오른쪽 구석진 곳에 늘씬한 각선미를 드러낸 여인이 탁자 하나를 차지해 앉아 있다. 몹시 집중하는 얼굴로 기록을 들여다보며 깃 펜을 끄적거린다. 가끔 성난 낯으로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게 무언가 되게 갑갑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잠깐 괜찮느냐.” “아이 씨. 누구야?!” “나다.” “…아~아! 아~아! 아이(I)~씨(See)~유(You)~!” 제갈 해솔은 신경질적으로 고함쳤다가, 말을 건 상대를 보고 바로 끝말을 노랫가락으로 전환했다. 매우 빠른 대응이었다.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좋다. 역시 갑갑할 때는 노래를 부르는 게 좋다니까?” “…참으로 이상한 노래로다.” “어! 게헨나 씨? 안녕하세요!” “으음. 우선 그대의 명칭이…?” 발랄하게 인사한 제갈 해솔이 꽃봉오리가 개화하듯 활짝 웃었다. “네!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방법으로 수송 능력을 사용하는 제갈 해솔이라고 해요. 하찮은 마법사죠.” “호오. 주제를 잘 알고 있다는 건 나쁘지 않지만, 너무 자학하는 것도 과히 보기 좋지는 않구나.” “…저기, 비꼰 건데요? 게헨나 씨가 제 수송 능력 보고 욕했다면서요.” “응? 욕은 무슨. 엄연한 사실을 어째서 욕설로 매도하는가.” 게헨나가 별꼴이라는 듯 코웃음 치자 서너 명이 키득거렸다. 어이없어하는 제갈 해솔의 모습이 그리 고소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기야 그동안 오죽 잘난 척을 했느냐마는. “이 개…. 헨나 씨.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우선 앉겠다.” “그러세요. 개, 헨나 씨.” “흠. 왠지 어감이 이상한데.” “아이, 기분 탓일 거예요.” “그런가.” 무심히 말한 게헨나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기록과 깃펜을 가져갔다. 기록에는 한글이 아닌 고어(古語)가 중구난방으로 휘갈겨져 있다. 그러나 게헨나는 아무 상관 없다는 양 하나하나 차분히 읽기 시작한다. 제갈 해솔의 눈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하도 연구가 진척되지 않아 코에 바람이라도 넣을 겸 밖으로 나왔는데, 방해받은 것도 모자라 침범당하기까지 했다. 그뿐일까. “후후. 재미있는 생각이로다.” 중간중간 비웃거나, “쯧.”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깃 펜으로 쭉쭉 긋고, 또는 무언가를 천천히 적어 내린다. 심지어는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다. ‘마법에 관해서는 누구에게도 질 자신이 없다.’ 자존(自尊) 의식이 하늘을 찌르는 제갈 해솔로서는 도를 넘었다고, 참을 수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할 법도 했다. …물론, 그냥 생각만 했다. “인간의 기준에 맞춰 최대한 쉽게 썼다. 그리고 거리를 잡든지 시간을 잡든지. 둘 중에 하나만 하거라. 발상은 좋다만, 능력도 안 되면서 왜 욕심을 부리는 것이냐.” 게헨나는 핀잔 조로 말하고는 기록과 깃 펜을 돌려줬다. 제갈 해솔은 소리 나지 않게 세심히 주의하며 이를 갈고, 도로 받아 들었다. 기록은 마치 논술 답안지가 첨삭된 것처럼 어지러웠다. 제갈 해솔의 두 눈이 불을 뿜었다. ‘그래! 네가 얼마나 잘났는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봐주겠어!’ 라는 기세로 게헨나가 삭제하고 고쳤거나 새로이 보탠 부분을 읽는다. 사실 어디 한 군데라도 물어뜯을 부분이 없을까 내심 바라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잠시 후. “…….” 제갈 해솔의 낯빛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네가 알고 있는 인간의 언어로 적었는데 당연히 알아볼 수 있겠지?” 물론이다. 애초 제갈 해솔은 고어를 익힌 사용자다. 허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어느새 제갈 해솔의 얼굴은 망치로 세게 맞으면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경악을 넘어 충격으로 물들어가는 중이었다.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야릇한 신음까지 흘리고 말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갈 해솔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어쨌든 인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도 거주민이 아닌 지구인이지 않은가. 그러할진대 인간은 물론, 한 세상의 정상에 오른 지고(至高)의 존재가 전수해주는 지식에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 “마, 말도 안 돼…. 이게 가능한 방법이에요?” 황홀해 하는 음성으로 말을 잇는다. “그거야 네가 직접 해보면 알겠지. 내가 알려주는 건 요체(要諦)뿐, 그 이상을 이루는 건 네 몫이다.” “그, 근데 이걸 왜 저한테….” “식사 중에도 진심으로 탐구하는 모습이 어여뻤을 뿐. 항상 정진하거라.” “…….” 실상은 김수현에게 도움이 되라는 의미였으나, 게헨나는 그럴 듯한 이유로 구변 좋게 말했다. 제갈 해솔이 정신을 차린 건 드르륵, 의자 끄는 소리가 작게 났을 때였다. 게헨나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순간 눈을 크게 뜬 제갈 해솔이 황급히 따라 몸을 일으켰다.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한데 꽤 똑똑하구나. 그런 말을 한다는 건 이해했다는….” “언니!” 소리까지 지르며 게헨나의 손을 덥석 붙잡는다. 식당의 시선이 모조리 쏠렸다. “으, 응?” “죄송해요. 실은, 저 거짓말한 게 하나 있어요. 진짜 이름을 숨겼어요. 정말 죄송해요. 용서해줘요.” “괘, 괜찮다. 네 이름 따위야….” “제 진명은 제갈 해솔이 아니라요. …게헨솔이에요.” “…하?”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저보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요. 다른 세상에서 건너온 걸 어쩔 수 주워 키우셨다고요. 그리고 저한테 언니가 한 명 있다는 말씀도 하셨죠. 확실히 기억나요. 29년 만에 처음으로 말하는 비밀이네요. 호호.” 제갈 해솔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말을 중얼거렸다. 아까와는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마치 눈앞에 천고의 보물 상자를 발견한 듯한 눈빛이다. “노, 놓거라.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언니. 게헨나 언니. 한 번 잘 생각해보세요. 어렸을 때 피치 못할 사정으로 다른 세상으로 보내야 했던, 게헨솔이라는 이름의 친동생이 분명히 있었을…. 언니? 어디 가세요? 언니? 언니이이!” * 게헨나가 첫날 타깃(?)을 제갈 해솔로 선택했다면, 이튿날 타깃은 정하연과 사라 제인이었다. 두 여인은 정령석을 건네받은 이후, 가끔 의견을 교환함으로써 어느 정도 친분을 쌓은 상태였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딱 하나 다른 게 있다면 둘이 이야기하는 자리에 게헨나가 은근슬쩍 끼었다는 것이다. 두 여인은 처음에는 굉장히 당황했지만, 이내 자신들도 모르게 게헨나의 말을 경청하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정령 소환사’ 클래스는 여태껏 북 대륙에 출현한 전례가 없다. 또한, 일반적인 시크릿 클래스와는 달리 계승만 한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말인즉 맨몸으로 불모의 땅을 개척해나가는 모험가와 비슷한 처지였다. 그런 만큼 게헨나가 전수해주는 정령에 관한 지식은 사막의 오아시스요, 가뭄의 단비였다. 게다가 사라 제인의 경우는 뜻밖에도 커다란 선물까지 받았다. 정령을 소환하기 위한 필요 충분 조건은 친화력(親和力)의 고하로 가늠할 수 있다. 정령석은 인간이 친화력을 쌓을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게 여간 쌓기가 어려운 게 아니다. 영약을 먹거나 기연이라도 얻지 않는 이상, 일상생활을 하면서 꾸준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라 제인의 경우 상황이 상당히 난감했다. 정하연이야 틈만 나면 물에 몸을 담근다손 쳐도, 사라도 똑같이 불 속으로 뛰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껏해야 불 계열 저항 망토를 덕지덕지 걸치고 최대한 가까이 가는 것뿐이었는데, 이 문제를 게헨나가 가볍게 해결했다. 겁화(劫火)의 힘을 사용해서. 신화계(神火計)급의 불은 주인의 의지에 따라 조종할 수 있다는 권능을 이용한 것이다. 그냥, 그저 그런 불이 아니다. 최강이라 불리는 ‘종미(終尾)의 불’ 지옥의 겁화가 아닌가. 보통의 불과는 비교하는 것조차 치욕이다. 이 정도의 불로 친화력을 올릴 수 있다는 건, 다른 의미로 천재일우의 기연이라 봐도 무방했다. 동시에 앞으로 사라의 정령사로서의 성장은 완전히 보장받았다. 게헨나가 조만간 떠난다고 해도, 최고라 불리는 ‘태고(太古)의 불’을 품은 김수현이 있으니까. 그렇게 사라는 온몸에 겁화를 뒤집어쓴 채로 온종일 생활했고, 이 현상은 머셔너리 클랜원들 사이로 커다란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사라의 머리에 꽃이 꽂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클랜원들이, 곧 어떤 사정이 있는지 알게 된 것이다. 적어도 전투 사용자라면 누구라도 강해지기를 오매불망 열망한다. 그리고 게헨나가 회자정리(會者定離) 겸 하는 행동은, 사용자들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찌르고 있었다. 뭣보다 그 오만불손한 제갈 해솔이 ‘언니 언니.’ 거리면서 따르고, 정하연은 학생으로 돌아갔다. 사라 제인은 말할 것도 없다. 이것만 봐도 상황은 확실하지 않은가. 그리하여 사흘째 되는 날. 머셔너리 캐슬에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클랜원이 나와 있었다. 탁 까놓고 말해서 혹시라도 게헨나의 눈에 띄지 않을까 기대해서 나왔으리라. 그러나 머셔너리 클랜에는, 그 누구보다 게헨나의 도움을 절실히 원하는 이가 있었으니. “우오오오오오오오!” 두두두두두두두두! 바로 뒤늦게 소식을 접하고 달려오는, 비비앙이었다. ============================ 작품 후기 ============================ 요동친다! 하트! 0804 / 0933 ---------------------------------------------- A Midnight Night's Dream(4/4). 웅성웅성. 한산한 오전, 캐슬 정문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등에 무거운 가방을 짊어진 누군가가 땀을 비오 듯 흘리며 달려오고 있다.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정원의 수로(水路)는 정문부터 본성(本城) 입구까지 이어져 있다. 반들반들한 표면을 넘칠 듯 말 듯 채워진 물은 아래로 비치는 햇살을 반사해 빛이 흐른다. “이, 이봐!” “…….” “거기 그쪽!” “후룩.” “수로에서 차 마시는 붉은 머리!” “…음?” 수로에 종아리를 반쯤 담근 채 느긋이 찻잔을 기울이던 게헨나는 움찔 몸을 떨었다. 분명 붉은 머리라고 했다. 너무나 무례하지 않은가. 누가 이리도 겁을 상실했나 궁금해진 게헨나는 선웃음과 함께 눈을 돌렸고, 이내 분노보다는 약간 의외라는 눈으로 상대를 쳐다봤다. “당신이…. 당신이 바로….”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숨이 차 말을 잇지 못하는 여인의 땀을 서서히 식혔다. 게헨나는 상대가 호흡을 고르기까지 기다렸다가 가볍게 수긍했다. 여인은 침을 꿀꺽 삼키고 숙였던 허리를 단번에 폈다. “역시! 아, 아니. 우선 내 소개부터 할게. 나는 이 세상 최고의 천재 미녀 연금술사인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소환사로군. 그것도 우리 애들과 계약을 맺었어.” 필요 이상으로 큰 목소리를 게헨나는 단박에 끊었다. 비비앙이 멍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게헨나는 한 번 쓱 보는 것만으로도 분석을 마쳤다. 눈앞의 상대가 지옥 마수와 인연이 있는 소환사라는 것도, 보통 인간이 아니라 미미한 괴물의 냄새를 풍긴다는 것도. 물론 천재 미녀 연금술사라는 말은 애초 믿지도 않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게헨나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비비앙이 지옥 마수과 연이 있다고 해도 하등 놀랄 이유는 없다. 그냥 ‘의외로구나.’ 라고 생각하는 정도? 아마 굳이 말해보면 냉랭하다는 쪽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왜냐면 비비앙이 찾아온 이유가 짐작 가능했으니까. “그, 그게….” 약 10미터 정도 남았을 뿐인데 비비앙은 꼼짝도 않고 서 있다. 황혼을 담은 듯한 두 눈과 마주하자 갑자기 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비비앙은 직감했다. 왜인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무언가 거하게 틀어지리라는 사실을. 비비앙은 흘끗거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도움을 조금 받았으면 해서.” “도움? 무슨 도움?” 회답은 곧바로 되돌아왔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깃들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무언가 가당찮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조금씩 치솟는 긴장감은 비비앙의 입을 닫게 하였다. 게헨나는 무심히 찻물을 들이켰다. “보아하니 마수 소환에 관한 어려움을 겪어 찾아온 것 같은데….” “어, 어. 맞아.” “마수와의 계약은, 무릇 상호의 의지를 존중하는 것이 기본일 터.” “으응.” “그대가 누구와 계약을 하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반대로 내가 그대의 계약에 끼어들 여지도 없는 셈이지.” “그건 알고 있어.” 흡사 당연하다는 듯한 음성에 게헨나가 싱겁게 웃는다. “그럼 되었다. 썩 물러나거라.” “하, 하지만….” “하지만은 뭔 놈의 하지만이냐. 그럼 내가, 네가 원하는 마수를 소환해 직접 연결이라도 시켜줘야 한다는 건가?” “그건 아니야!” 비비앙이 순간적으로 소리쳤다. 게헨나의 눈이 한껏 가늘어졌다. 은은한 노기를 비춘 눈은 이제 확연히 상대를 노려본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느냐.” “놀랐다면 사과할게.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어.” “무어라?” “정보가 부족해.”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지만, 완곡히 돌려 말하거나 미사여구로 포장하려는 생각 따위는 없다. 그래서 비비앙은, 그냥 있는 그대로 말했다. 부족하다고. 정확히는 상위 군단을 소환하는 데 필요한 정보가 부족하다는 소리였다. 근원 덕분에 일말의 단서를 찾기는 했지만, 애초 ‘힘을 빌려오는 것’과 ‘군단을 소환하는 것’은 판이한 문제다.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까마득한 벽을 앞두고 있는 상황. 아무리 노력해도 길이 열리지 않는다. 비비앙으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나는 인간임을 포기하면서까지 이 길에 일생을 바쳤어. 그런데,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아. 너무 막막해.” “당연한 소리를. 네 능력이 그거밖에 안 되는 걸 나보고 어쩌라는 말이냐.” “그렇겠지. 어쩌면 죽기 전까지 끝을 볼 수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본능적으로 느끼고는 있어.” “흠?”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나는 영영 정체하고 말 거야.” “그건 네 사정….” “제발, 부탁할게!” “…….” 쿵, 가방을 내려놓은 비비앙이 그대로 무릎을 꿇는다. 주먹 쥔 두 손을 양 무릎에 올려놓은 모습이 일견 비장해 보이기까지 한다. 게헨나는 여전히 실눈을 뜬 채 상대를 유심히 살폈다. 아직 땀에 젖은 몸과 퀭한 눈. 과장 조금 보태서 눈 그늘이 뺨까지 내려와 있다. 몇 날 며칠을 연구에만 몰두한 걸까. 씻지 않아 지저분한 모습이 몹시 꾀죄죄하고 궁상맞다. 그러나 스스로 염치없다는 걸 알면서도, 두 눈의 눈빛만큼은 갑갑함과 간절함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었다. 적어도 저 눈만큼은 진심이라고 게헨나는 느꼈다. 온몸으로 절실함을 호소하는 태도에 작지만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네 기분을 모르는 건 아니나, 아까 말을 인정했다면 내가 어떻게 해줄 여지는 없다. 설령 가능하다손 쳐도,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고.” “강제 계약 따위는 바라지도 않아. 그냥 조언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단 한 마디, 한 단어라도 좋아.”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에 비비앙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호오, 입속말로 탄성을 지른 게헨나의 고개가 아주 살짝 기울어졌다. 갸웃했다기보다는 다시 봤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실제로 게헨나는 근 사흘간 나아갈 길을 알려줬을 뿐, 직접 무언가 해주지는 않았다. 만약 비비앙이 ‘나와 계약하면 김수현이랑도 자주 만날 수 있을걸?’ 라는 등의 말을 지껄였다면, 필시 크게 노했을 것이다. 우선은 실력이 안 된다. 30만 원 들고 컴퓨터 전문점에 찾아가 ‘최신 게임 풀 옵션으로 돌릴 수 있는 컴퓨터로 맞춰주세요!’ 라고 하는 꼴이랄까. 게다가 가진 지식을 나눠주는 것과 부하에게 억지를 강요하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다. 그러나, 비비앙은 그러지 않았다. 그냥 현재의 심정과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냈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솔직함이 게헨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쳇. 그깟 마수 소환이 무슨 대수라고. 별로 강하지도 않더니만.” 누군가 살그머니 투덜거렸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비비앙이 자리를 꿰차니 배알이 꼴리는 것이다. “누구야! 뭐? 강하지가 않아? 멍청이! 여기로 소환되는 마수들은 본신이 아닌 아바타로 소환되는 거거든? 본체가 소환되기라도 하면 너 따위는 한 입 거리도 안 되니까!” 눈을 부릅뜬 비비앙이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게헨나는 흡족히 웃었다. 사실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자신이 걸어가는 길에 자부심을 드러내는 모습이 가히 나쁘지 않다. 이쯤 되면, 도와주지 못할 것도 없다. “현재 몇 군단까지 소환이 가능하지?” 잔잔한 음성에 비비앙이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4, 4 군단.” “4 군단이라. 6, 66 군단은 특수 조건을 만족해야 하니 예외로 치고. 그럼 1, 2, 3 군단이 문제인가?” “맞아! 몇 번 시험 삼아 소환해봤는데, 계약은커녕 반응조차도…!” “당연하지.” “다, 당연한 거야?” “그래. 같은 상위 군단이라도 1, 2, 3 군단은 왕의 직속 군단이다. 즉 왕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각자의 역할이 있다고 할까.” 비비앙의 멍한 표정이 우스운지 게헨나가 쿡쿡 웃는다. “가령 3 군단은 ‘토벌’의 역할을 맡는다. 왕의 명령이 떨어지면 선봉에 서 적을 쳐 없애버린다.” “그럼 2 군단은?” “2 군단의 역할은 ‘보호’. 왕의 신변을 지키는 친위 부대란다.” “1 군단은?” 문득 게헨나가 침묵했다. 그러나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살며시 웃어 보였다. “1 군단은…. 왕의 탄생을 이루어내고, 최후를 함께한다.” “응?” “뭐, 말이 그렇다는 거다. 분신 정도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분신….” 멍하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비비앙. “그렇구나…. 왕의 직속 부대…. 그래서….” 낯빛은 과히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이해하기는 했으나 진한 아쉬움이 흘러나온다. 왕의 명령만 따른다 함은, 일개 인간에게는 소환될 여지가 없다는 점을 시사하니까. “아예 방법이 없었던 거였어…. 나는 그것도 모르고….” “글쎄.” “……?” “나는, 방법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았다만.” 풀이 죽은 비비앙을 보며 게헨나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 잠시 볼 일이 있어 1층 회의장에 들른 김수현은, 시야에 들어오는 기묘한 풍경에 걸음을 멈칫했다. 항상 앉는 최고 상석에 수나가 앉아 있었다. 몸집도 작달막한 주제에 억지로 뻗어 팔걸이에 손을 걸치고, 자못 거만스럽게도 앉아 있다. 그뿐일까. 권좌 옆으로는 게헨나가 두 손을 모은 채 공손히 서 있고, “불초 소신 비비앙이 삼가 왕께 죄를 청합니다!” 쿵! “소신은 감히 허락도 없이 왕의 군대를 소환해 운용하는, 큰 죄를….” 그 앞으로는, 납작 엎드린 비비앙이 쿵 머리를 찧으며 뜻 모를 말을 지껄인다. “지금 뭐 하는 거야?” 헛웃음과 함께 회의장을 가로지른 김수현은 상석에 앉은 수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우리 수나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이, 이익!” 그러자 한창 근엄한 태도를 보이던 수나가 인중을 일그러뜨리며 으르렁댔다. 방해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이 녀석이? 어디 감히 아빠한테 눈을 부라려?” 김수현은 무척 화난 기색을 비쳤지만, 이내 꼭 다문 수나의 입에 쪽 소리 나도록 입을 맞췄다. 깜짝 놀라는 것도 잠시. 이윽고 수나는 이까지 보이며 싫은 티를 역력히 드러낸다. 숫제 몸을 바동바동 비틀며 두 팔까지 휘두를 정도였다. “이이이익! 이이이익!” “이것 봐라. 수나 정말 안 되겠네.” 쪽, 쪽. 이번에는 양 볼에 한 번씩 입을 맞춘다. 수나는 굉장히 황당하다는 얼굴로 김수현을 쳐다봤다. 그러더니 이 인간은 도저히 답이 없다는 듯, 고개를 느릿하게 저으며 한숨을 흘린다. 그 모습조차도 사랑스러운지 김수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수나를 품에 안아 토닥거렸다. 그래서, 보지 못했다. 수나가 누군가를 흘기며 씩 입꼬리를 끌어올린 것도. 게헨나가 조용히 한숨짓는 것도. “그대여. 여기 있는 건 상관없다만, 현재 굉장히 중요한 의식을 치르는 중이라서. 수나를 도로 앉혀주지 않겠느냐.” “응? 아아.” 김수현은 순순히 수나를 도로 앉혔다. 상황은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김수현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몇 걸음 물러나자, 비비앙의 말이 이어졌다. “허나 소신은 단 한 번도 사사로이 군단을 운용하지 않았으며, 외려 지옥 마수의 무력을 이 세상에 떨치고자….” “들어보니 이 세상에서 꽤 명성이 있다 합니다.” “왕의 성은이 망극하니 지옥의 위세가 사방에 떨치고자, 오로지 엎드려 감읍하나이다. 부디 제 청을 들어주시어….” “비록 인간이기는 하나, 그래도 기개는 있습니다. 여느 인간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소환 진도 꽤 독자적이며 독특하지요.” 비비앙은 줄줄 읊고, 게헨나는 중간중간 추임새를 넣는다. 긴말이 이어졌으나 요지는 간단했다. 여태껏 네 부하를 허락 없이 가져다 사용했다. 미안한데 그래도 좋은 일에 썼다. 앞으로 잘 모실 테니까, 네 직속 부대 좀 사용하게 해줘라. 한데 그걸 받아들이는 수나의 태도 또한 가관이었다. 처음에는 짐짓 눈썹을 치켰다가, 게헨나의 조언에 고고한 기색을 비쳤다가, 말이 끝나고 나서는 지그시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하는 체하고 있다. 아마 임한나가 봤다면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수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감히 허락도 없이 왕의 군대를 갖다 쓴 죄는 백 번, 천 번 죽어 마땅하다. 당장에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을 터! …허나, 진심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고 있다. 무엇보다 자신만 보면 꺅꺅 소리 지르며 볼을 찔러대는 여느 무뢰배들과는 다르게, 덜덜 떨면서 머리를 조아린다. 확실히 왕을 대접하며, 제대로 된 신하의 예를 보이지 않는가. 이쯤 되면, 응해주지 못할 것도 없다. 게헨나는 웃음을 참으며 속닥거렸다. “어차피 이곳에 소환되는 군단은 화신, 즉 아바타에 불과하지요. 즉 지옥만이 아닌, 타 차원에 왕의 위엄을 알릴 호기입니다. 여기서는 왕의 도량을 보여도 크게 나쁘지 않을 듯싶습니다.” 이 말이 결정타였다. 번쩍 눈을 수나는 흐음(실제로는 “우웅.” 이었다.), 침음을 흘리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제 어미가 하는 것처럼 젖살이 볼록이 들어갈 만큼 턱을 괴고, 낑낑대며 오른 다리를 쭉 내뻗는다. “진정으로 용서를 받고 싶다면, 성의를 보이거라.” 게헨나가 부연하자 비비앙이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살금살금 기어오더니 작고 흰 발을 공손히 받쳐 들고 조심스레 입을 맞춘다. 김수현이 신음했다. “응아.” 훗 웃은 수나는 이번에는 양팔을 뻗었다. 비비앙이 조심조심 안아 올리자 까닥 턱짓하며 바깥을 가리킨다. “축하한다. 왕께서는 네가 마음에 드신 모양이다.” “아….” “비록 짧은 시간이기는 하나, 그래도 한 번 잘 모셔 보아라. 이 순간 너는 신하로서 인정받았으니까.” “……!” 비비앙의 눈에 비장함이 깃들었다.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발짝 두 발짝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이윽고 수나를 안은 비비앙이 입구로 사라지자, 둘은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혹여 수나가 들을까 봐 끅끅 웃는다. “이, 이건 뭐야 게헨나?” “너무 웃지 말거라. 그래도 연극은 아니었으니.” “그럼 진짜였다고?” “그래. 상위 군단을 소환하기 위해서는 왕의 허락이 필요하니까. 그래서 신하가 되게 한 것이다.” “호. 그럼 이제 너를 소환할 수 있게 되는 건가?” “역시. 그대가 이야기했군.” 게헨나가 흘겨보자 김수현이 어색이 웃었다. 왕이 태어난 순간 게헨나는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 즉 공식적으로 1 군단장이 되는 것이다. 그럼 비비앙이 소환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니, 기실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게헨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이래 봤자 3 군단이 한계일 것 같은데.” “…그래?” 김수현의 음성이 확연히 낮아졌다. “하지만 너는….” “물론, 소환에 응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럼 왜.” “정녕 몰라서 물어보는 것이냐?” 날카로운 반문에 김수현은 입을 닫았다. 게헨나의 말대로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상위 군단 소환의 1차 조건이 왕의 허락이라면, 2차 조건은 소환사의 역량이 요구된다. 그런데 비비앙이 단독으로 게헨나를 소환할 수 있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 1,800명을 제물로 바치고도 고작 며칠이 허락됐을 뿐인데, 왕의 허락과 정확한 소환 진으로 모든 것을 대체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소환은 가능하다. 정확히는 소환하려는 시도‘만’ 가능하다. 설령 응하기라도 하는 순간, 비비앙은 절대로 게헨나를 감당치 못하고 폭사(暴死)할 것이다. 그야말로 최악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그래도 아주 의미 없는 짓거리는 아니었다. 왕이 태어났으니 마수들의 결속력은 한층 단단해질 터. 그러니 저 비비앙이라는 인간도 점차 강해지겠지.” 위로하는 듯한 어조에 김수현은 침묵했다. 비비앙이 소환하는 마수 군단이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진다고 한다. 확실히 좋은 일인 건 틀림없지만, 게헨나의 말은 ‘곧 돌아가야 한다.’ 는 저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마수들의 결속을 다지려면 어쨌든 지옥에 왕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니까. “그렇…. 구나.” 애써 웃는 김수현을 보며 게헨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기분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그런 표정 짓지 말거라.’ ‘그대가 그럴수록….’ 게헨나라고 왜 김수현의 곁에 머무르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개인의 행복을 바라고, 수천 년간 오롯하게 노력해온 숙원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김수현도 마찬가지였다. 제로 코드로 시간을 되돌린 것은 게헨나와 함께 있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서로의 목적이 다르다. 달라도 너무나 달라, 결코 부합될 수 없다. 잔인한 말일지도 모르나, 결국 이별은 빠를수록 서로에게 좋다. 적어도 게헨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목적한 것도 이뤘고, 약속한 것도 있으니….’ 김수현과 재회했고, 사랑받았고, 아이도 낳았고, 아비를 보여줬다. 이 이상의 여한은 없다. 게다가 애를 낳으면 떠나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이미 사흘 전부터 떠나겠다고 결심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도 끝난 상태였다. 그런 게헨나로서도 단 하나 두려운 게 있다면, 바로 김수현이 붙잡는 것이었다. 아무리 마음을 단단히 먹어도, 간절히 붙잡는 김수현을 매몰차게 뿌리칠 자신이 없었다. 결국, 그러한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일전에 말한 것처럼 조용히 있다가, 조용히 떠난다.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벌써 해가 중천인가…. 시간은 충분하려나.” 문득 혼잣말을 한 게헨나가 김수현을 보며 말을 잇는다. “그대여. 실은 부탁이 하나 있는데….” 무언가 화제를 돌리려는 느낌이 강했지만, 김수현은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응. 뭔데?” * 게헨나의 부탁은 의외로 간단했다. ‘바깥세상을 조금 둘러보고 싶구나. 조금 갑갑해서 말이다.’ 나는 기꺼이 안내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게헨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는 약간 특이한 조건을 덧붙였다. 나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인간을 안내역으로 붙여달라고.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용자라고 해봤자 통과의례를 기준으로 잡을 수밖에 없었다. 안현, 안솔, 김한별, 이유정. 그중에서 게헨나를 소환한 공을 인정받아 낙점된 안솔은, 대단히 기대하는 얼굴로 게헨나를 따라 나섰다.(최근 게헨나의 행동으로 미루어보아, 무언가 얻어먹을 게 있다고 여긴 듯싶다.) 그렇게 로브로 전신을 가리고 안솔과 함께 밖으로 나간 게헨나는, 밤이 무척이나 늦어서야 돌아왔다. 집무실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곯아떨어진 수나를 안고 있었다. 어디를 다녀왔는지 궁금해 물어봤으나 게헨나는 피곤하다며 말을 얼버무리고는 침대로 직행했다. 나는 이제 찬밥 신세냐고 구시렁거리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불을 끄고 게헨나의 옆에 누웠다. “…….” 그리하여 시시각각 밤이 깊어갔으나, 잠이 오지 않는다. 아니. 잠을 자고 싶지가 않았다. 게헨나는 등을 보인 채 옆으로 돌아누워 있고, 수나는 왜인지 한껏 만족한 얼굴로 새근거린다. 나는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참으려 애쓰며 둘을 또렷이 바라봤다. 이대로 잠들기에는, 아침에 회의장에서 나눈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비록 정확하게 말은 안 했더라도 게헨나는 분명히 암시했다. 떠나겠다고. 이제는, 이별이라고. 두렵다. 이대로 잠들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어느 날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 봐. 그 어느 날이 당장 오늘일지도 모른다. “그대여.” 그때였다. 잠든 줄 알았던 게헨나가 돌연히 입을 열었다. “혹시 내게 하고 싶은 말은 없느냐.” 문득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어디선가 비슷한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래. 지옥에서. 그때가 아마 돌아가기 전날이었나? 까닭 없이 불안감이 치솟는다. 그때는 자는 척하느라 아무런 말도 못했지만…. “많지. 아주 많아.” 이번에는 확실하게 말했다. 그러자 게헨나가 두어 번 몸을 뒤척이더니 조심스레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본다. 붉은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직시한다. “그럼 하면 되지 않느냐.” “앞으로 천천히 하려고. 하나씩, 천천히….” “…그런가.” “그렇지.” 게헨나는 과연 내 말뜻을 알아들었을까. 싱겁게 웃는 걸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조금 비겁하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그래도 상관없다. 이렇게 해서라도 하루 더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그때 갑자기 게헨나의 두 눈에 붉은빛이 스쳤다. 찰나의 순간이기는 했지만, 분명 붉고 진한 안광이 번쩍였다. 그 순간이었다. “…나. …길.” 게헨나가 무어라 말하는 듯 입을 움직이지만, 들리지 않는다.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것도 보였으나, 이상하게도 위를 쳐다볼 수가 없다. 왜일까…. 느닷없이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뇌리는 물론, 세상이 핑그르르 돈다. 시야로 서서히 어둠이 드리운다. 잠깐 누군가 고개를 숙이고,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쏟아져 눈앞을 가렸다. 그 이후로는, 완연한 어둠만이 보일 뿐이었다. 온몸에 퍼지는 나른함. 물먹은 솜처럼 몸이 축 늘어졌다. 피곤하다. 나는 결국 눈을 감고 말았다. …아니, 이미 감은 걸지도 모르겠다. “…….” …이런. 안 되지. 오늘은 잠을 자지 않기로 했잖아? 아직 수나 발을 간질이지도, 뽀뽀도 못 해봤는데. 나는 피식 웃고는 있는 힘을 다해 눈을 떴다. “게헨나. 너….” 갑자기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웃으며 따지려는 찰나, “!” 한순간,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졌다. 순간적으로 코를 찔러오는 차디찬 공기는, 늦은 밤이 아닌 새벽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수…. 나야?” 가지런히 정리된 침대의 옆이 휑하니 비어 있다. 그리고. “…게헨나?” 게헨나의 모습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 작품 후기 ============================ 네. 이로써 게헨나 파트를 일단락 지었습니다. 다음 회는 초반에서 중 후반에 걸쳐 회상 + 헤어지는 장면을 삽입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새로운 에피소드인 ‘새로운 시작’ 파트가 연재될 예정입니다. 언제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_)_ 0805 / 0933 ---------------------------------------------- 새로운 시작. < 회상(Reminiscence) > 어느새 해가 지고 밤이 깊었다. 한때 새로운 개척지로 조명받았던 도시는, 신 대륙 ‘아틀란타’가 공략된 이후 사용자의 발길이 거의 끊어졌다. 유령 도시까지는 아니지만,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 정체된 도시였다. 두 여인은 이런 소슬한 정적이 감도는 거리를 거닐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중이었다. “으응. 오랜만에 오니 당최 길이…. 여기서 꺾었던가?” “설마 길을 잃은 것이냐?” “아, 아니에요! 이 도시가 원래 복잡하고 어지러워서…. 아, 찾았다!” “흐응?” 안솔은 흰 로브가 펄럭일 정도로 달려가 굳게 닫힌 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그러나 구름처럼 폭 터져 나오는 먼지에 얼굴을 얻어맞고 발라당 나동그라졌다. 로브를 푹 눌러쓴 여인은 웩웩 토악질하는 안솔을 지나쳐 조용히 문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은 빈말로도 깔끔하다고 하기 어려웠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은 듯 먼지는 켜켜이 쌓여 있고, 간간이 보이는 탁자나 의자는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읔. 퀴퀴한 냄새…. 콜록콜록!” 몸을 추스르고 일어난 안솔이 따라 들어오며 기침했다. 낯빛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으나, 주변을 돌아보는 눈동자는 곧 아련함으로 젖었다. “이곳이….” “네, 네에. 우리가 사용자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본격적으로 이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장소죠. 여관이에요.” “여관?” “잠자고 먹고 하는 곳이요. 이름은 조신한 숙녀…. 였나?” 여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심히 곳곳을 살펴보고는, “그이가 자주 있던 장소는?” “에, 3층 오른쪽 끝 방이요. 거기가 오라버니가 사용하시던 특실인데요, 찻잔 훔치러 자주 들어가 봐서…. 으에에엑!”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계단을 올랐다. 한동안 입을 틀어막고 좌절하던 안솔은 어느새 여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긴 한숨을 흘렸다. “어휴. 이게 뭐야….” 오늘 아침, 김수현의 부탁으로 게헨나의 안내를 맡게 된 안솔은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게헨나가 좋아서는 당연히 아니었고, 혹시 뭐 하나 떡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고대한 것이다. 그러나 떡고물은커녕, 반나절 동안 팔자에도 없는 가이드 노릇을 하는 중이었다. ‘그이가 지금껏 거쳐왔던 곳을 구경하고 싶구나.’ 게헨나의 부탁은 간단하면서도 간단하지 않았다. 거쳐왔던 곳이란, 김수현이 여태껏 주로 활동한 장소를 가보고 싶다는 소리였다. 처음 말을 듣고 한참을 벙쪄 있었지만, 안솔은 결국 억지 춘향이 되고 말았다. 워프 게이트로 북 대륙으로 넘어간 후, 모니카의 클랜 하우스, 러브 하우스,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 바바라의 사용자 아카데미, 시작의 여관 등 별별 곳을 돌아다녀야만 했다. 그러고도 아직 남아 있어, 종래에는 뮬의 조신한 숙녀까지 이르렀다. “후유….” 끊이지 않는 한숨과 함께 안솔은 느릿느릿 계단을 올랐다. 여기까지 온 이상 떡고물은 바라지도 않고, 이제 그만 돌아갔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응?” 이윽고 안솔이 3층 끝 특실로 들어갔을 때, 여인은 더러운 탁자에 얌전히 앉아 방 안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느지막이 들어온 안솔을 봤는지 가볍게 손짓한다. “이제 왔느냐. 어서 앉거라.” 콰륵, 홀연히 샘솟은 불길이 어두운 방을 환히 밝혔다. 안솔이 쭈뼛쭈뼛 다가오자 여인은 얼굴을 가리던 후드를 벗고 싱긋 웃었다. 그리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는다. 깨끗한 기록 한 장과 깃 펜이었다. “이제 슬슬 시간도 됐고.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부탁하자꾸나.” ‘마지막’이라는 말에 안솔은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느꼈다. 혹여 칠흑의 숲으로 들어가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헨나는 의외의 부탁을 꺼냈다. “나 대신 글 좀 적어다오.” 검지 끝으로 탁자에 놓은 기록을 톡톡 두드린다. “그, 글이요?” “그래. 음…. 편지라고 하면 되려나?” “편지를 왜 제가….” “나는 너희 글자를 모르니까. 이왕 적는 거, 알아보기 쉬운 게 좋지 않느냐.” 안솔은 대번에 납득했다. 마지막 부탁이라는데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다. 안솔은 깃 펜을 잡고 기록을 끌어당기며 물었다. “어떻게 적어드릴까요?” “흠. 너희는 편지 첫머리에 보통 뭐라고 글을 적지?” “…아이 헤이트 유(I Hate You), 라고 적고는 해요.” “음?” “노, 농담이고요. 그냥 누구누구에게…. 이 정도?” “그래. 그럼 김수현에게. 이게 낫겠구나.” 조용히 들려오는 목소리. 안솔은 열심히 깃 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아마 그대가 이 편지를 볼 때쯤이면.” “아마…. 그대가…. 이 편지를…. 볼 때쯤이면….” “나는, 아마 돌아가고 난 이후겠지.” “나는…. 네?” 우뚝, 깃 펜이 정지했다. 안솔이 깜짝 놀라 고개 들자 게헨나가 잔잔히 미소 짓는다. “뭘 그리 보느냐.” “하,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오히려 너희는 좋아할 거라 생각된다만.” “…….” “되었다. 어서 적기나 하거라. 아, 방금 한 말들은 적지 말고.” “그, 그 정도는 알아요.” 잠시 후, 방 안에는 게헨나의 말소리와 사각거리는 깃 펜 소리만이 남았다. 그렇게 약 30분 가량 흘렀을 즈음, 비로소 3층 창문에서 새어 나오던 불빛이 꺼졌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헐거운 문이 열리고 두 여인이 걸어 나왔다. 게헨나는 볼 일을 다 봤다는 양 어두운 거리를 휘적휘적 가로질렀고, 안솔은 조금은 주춤한 채로 서서히 멀어지는 여인을 응시했다. 하지만 곧 뛰는 걸음으로 쫓아가 조심스레 입을 연다. “저….” “…….” “저기….” “…….” “저, 저기요!” “왜 그러느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키우니 비로소 반응이 돌아왔다. 그러고도 한참을 망설이던 안솔이 여전히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허락하마.” “오라버니는….” “음?” “게헨나 님을 사랑하셨어요?” “…….” 그 순간 거침없던 게헨나의 걸음이 멈칫 정지했다. 아마 김수현을 사랑하느냐고 물었다면, 쑥스러워할지언정 이리 주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안솔의 질문은 그 반대였다. “그건….” 게헨나는 풍성히 웨이브 진 용암 빛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쓸어 올리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모르겠구나.” 그러나 무언가를 털어내려는 것처럼, 후드를 강하게 눌러쓰며 말을 잇는다. “허나, 혹시….” 문득 흐린 말은, 반전을 예고했다. “혹시라도…. 정말 인연이 닿아 다시 만나게 되는 날이 오면….” 게헨나는 약간은 쓸쓸해 보이는 눈으로, 고개를 젖혀 밤하늘을 쳐다보며, “그때는, 꼭 물어봐야겠다.” …흘리듯이 말했다. 이윽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럼 지금 물어보시면 되잖아요.” “후후. 물론 그렇기는 하다만….” 조용히 들려오는 음성에 게헨나는 살그머니, 그러나 서글피 미소 지었다. “…그랬다가는 간신히 먹은 마음이 흔들릴 것 같구나.” * 어디를 찾아도 게헨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게헨나가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나 쫓아가야 했다. 게헨나가 갈만한 장소를 떠올려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곧바로 제갈 해솔의 숙소를 박차고 들어갔다. “어마! 깜짝이야!” 새벽에도 깨어 있었는지 제갈 해솔이 펄쩍 뛰었다. 공교롭게도 바지를 갈아입는 중이었다. 황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제갈 해솔의 인상이 서서히 구겨진다. “하. 그래. 내가 언젠가는 이럴 줄 알았어. 결국 못 참고 저를 취하러 오셨네요.” “사용자 제갈 해솔.” “닥쳐요. 처녀 사냥꾼.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저항할 거예요. 그리고 설령 당신에게 몸이 정복되더라도 이건 제가 이긴 거예요.” “제갈 해솔.” 제갈 해솔은 들은 채 만 체하고는, 대담하게도 바지를 훌렁 놓아버렸다. 나는 곧바로 달려들었다. “그래, 봐요. 보고 싶으면 보라고…? 엄마아아! 살려주세요오오오! 김수현이 나 강간한흡!” 제갈 해솔의 입을 틀어막고 얼굴을 가까이했다. 설마 정말로 이럴 줄은 몰랐다는 듯, 두려움에 물든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실수를 인지하고 손을 내리자 파르르 떠는 입술이 보였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까불지 않을 테니까, 제발 용서를…. 이, 이 말을 하기에는 아직 이른 스테이지 아닐까요?” 이런 와중에도 농담을 하는 건가.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만, 지금은 농담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수송 능력.” “…네?” “북문 방향 반나절 거리. 아틀란타를 가리키는 이정표. 좌표 알죠?” “아, 알기는 알죠.” “그곳으로 수송 능력을 사용해주세요. 부탁합니다.” “…….”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제갈 해솔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나 표정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곧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지는 입고 해도 되죠?” 나는 아무 말도 않고 기다렸다. 잠시 후, 주문을 외우는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둥글고 푸른 빛무리가 어른어른 모여들기 시작했다. 속으로 미칠 듯한 긴장감이 엄청난 속도로 쌓였다. 바라고 또 바란다. 제발, 제발 게헨나가 남아 있기를…! 퉁! 배꼽이 훅 쏠리는 느낌과 함께 익숙한 소음이 귀를 때렸다. 그와 동시에 한순간 시야가 변했다. 차가운 바람이 살을 스친다. 우리는 어느새 붉은 황무지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제갈 해솔의 수송 능력이 제대로 발동된 것이다. 긴장과 초조함에 가슴이 타는 것만 같다. 나는 곧장 눈을 돌려 어탑(御榻)을 찾았다. 왼쪽으로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검은 탑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 한순간 오만 생각이 머릿속을 교차했다. 혹시 게헨나가 나를 놀리려고 이러는 건 아닐까. 내가 찾지 못한 건 아닐까. 장소를 잘못 짚은 건 아닐까. 아직 도착하지 못한 건 아닐까. …아니면, 벌써 가버린 건…. 그러한 찰나, 번뜩 한 생각이 떠올랐다. 최소한 마지막 경우만 아니라면 아직 만날 여지는 있을 터. 말인즉 게헨나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면 된다. 방법은, 있다. 제 3의 눈. 제 3의 눈으로 과거를 본다. 아주 예전에 딱 한 번 사용한 전례가 있다. 통과의례에서 애들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능력을 사용했는데, 단 1초를 본 것만으로 눈이 파열될 뻔했다. 그 이후로 두 번 다시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그리고 덩그러니 서 있는 어탑을 보며 온 정신을 집중했다. 잠시 후, 돌연히 눈앞 시야로 하나의 장면이 비치듯 스며들어온다. - 웅웅웅웅웅웅웅웅! 처음 눈에 들어온 건, 방금 본 것처럼 흑 빛이 아닌, 하늘을 밝힐 정도로 발광(發光)하는 어탑이었다. 이어서 어탑 앞에 서 있는 여인을 바라본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 미안하구나…. 미안해…. 처연한 눈으로 품에 안은 누군가를 달래는 게헨나. - 으아아아아아아앙! 그리고 태어난 이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있는 힘을 다해 울어 젖히는 수나. - 제, 제발…. - 이익! 이이이익! 아바아아! - 수나야, 수나야. 이제 그만…. - 어엉! 어어어엉! 아부, 아바아아…! 수나가 안간힘을 쓰며 게헨나의 품에서 벗어나려 한다. 누군가를 찾듯이 손을 이리저리 휘젓기까지 한다. 게헨나는 너무나 곤란한 얼굴로, 그러나 수나를 꼭 붙든 채 어탑의 앞에 선다. 이윽고 휘황찬란한 빛이 게헨나와 수나를 감싸기 직전의 순간. - ……. “!” 게헨나는, 아주 잠깐 뒤를 돌아봤다. 찰나의 순간이기는 했지만, 빛에 가려 아스라이 보이는 애틋한 눈동자는 분명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게헨…!” 그 순간이었다. 파지지직! 시야가 고장 난 TV 화면처럼 어그러지더니 찌를 듯한 통증이 갑자기 눈을 강타했다. 일순간 잡신호가 스치고 불에 덴 듯 화끈한 기운이 오른다. 벌써 지속 시간이 끝난 것이다. 이어서 찾아오는 정체 모를 탈력감에 나는 눈을 부여잡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클랜 로드!” 제갈 해솔이 나를 부축하려 했지만, 그대로 벌렁 드러누웠다. 가장 생각하기 싫었던, 최악의 과거를 봐버렸다. 아무런,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하, 하하….” 그냥 허탈한 웃음만이 흘러나왔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크, 클랜 로드. 성이에요. 성으로 왔다고요.”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도시로 돌아와 있었다.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모르겠다. 제갈 해솔의 손에 끌려 어찌어찌 걷기는 했는데, 다른데 신경 쏟지 못할 만큼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말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회의장에서 말했을 때 게헨나가 돌아갈 건 알고 있었다. 명확하게 말만 안 했을 뿐, 그런 뉘앙스로 말했으니까. 그리고 나는, 어쨌든 보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잖은가. 적어도 말은 하고 갈 줄 알았다. 가기 전에 돌아가겠다고, 최소한 한 마디라도 할 줄 알았다. 이별을 준비할 시간 정도는 있을 줄 알았다. 그래도 설마 설마 했는데 강제로 암시까지 걸고 돌아갈 줄, 그 누가 예상이라도 했겠는가. 게헨나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 울면서 나를 찾는 수나를 떠올리니 또다시 마음이 무거워진다. 마지막 뒤를 돌아보던 게헨나의 눈이 사라지지 않고 자꾸만 아른거린다. 이건 전혀 내가 생각하던 이별이 아니었다. 4층 집무실로 돌아오자 비로소 현실이 체감됐다. 잠들기 전까지 서로 속삭이며 장난을 치던, 어젯밤만 해도 게헨나가 누워 있던 침대는, 지금 휑뎅그렁이 비어 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눈을 뜨면 이 모든 상황이 꿈이었으면 좋겠다. 그럼 편안히 자고 있거나, 수나를 안은 채 감미로운 웃음으로 나를 배웅하는 게헨나가 있을 텐데. 머리가 어지럽다. 이마에 띵한 현기증이 돈다. 흘끗 쳐다본 테라스 너머로, 나는 비틀비틀 걸어가 책상 의자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다가 불현듯 생각이 미쳐 서랍을 열었다. 서랍 속에는 금빛이 흐르는 목걸이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별의 선물로 주려고 했던 목걸이. 좋은 거는 아니나 그래도 몰래 주문 제작까지 하면서 숨겨둔 건데…. “그건, 게헨나한테 주려던 거야?” 느닷없이 몸이 얼어붙었다. 나도 모르게 옆을 돌아봤다. 형이 벽에 비스듬히 기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경을 쓰지 못한 나머지 미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다. 아니면 나보다 먼저 들어와 기다리고 있었거나. 어느 쪽이든, 알아차리지 못했다. “형?” 목소리는 스스로 들어도 살짝 쉬어 있었다. “보아하니 만나지는 못하고 온 것 같네.” 형은 한숨 쉬듯이 말하고는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휴가는 즐거웠냐.” “휴가?” “못된 녀석. 내 생각은 나지도 않았지?” “혀, 형?”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형을 까맣게 잊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형의 말투는 무언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어조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형이 어떻게…?” “네가 원정에서 귀환하고…. 기절해 있는 동안 잠깐 만났지. 그림자 여왕이 도와달라고 했거든.” “뭐라고?” “혹시 게헨나와 지내면서 이상한 거 느끼지 못했어? 예를 들면 분위기라던가.” 그렇게 말한 형은 잔잔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형의 설명이 끝나자 암담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럼 친해진 게 아니라, 친한 척을 했던 거라고?” “그래. 내가 부탁했거든. 돌아갈 때까지 너를 쉬게 해달라고.” “왜….”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만, 다들 너를 배려해준 거지. …뭐, 뒷감당은 각오해야겠지만.” 심란한 마음에 연초를 꺼내 물자 언제나처럼 쓱 빠져나갔다. 장난칠 기분 아니라고 말하려는 찰나, 형이 내게서 뺏은 걸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형이 연초를 태우는 모습은 처음 본다. “후우…. 뭐, 그래도 형은 이해한다.” “이해…?” 형은 연초를 깊게 빨아들이며 머리를 끄덕였다. “햇수로 따지면…. 십오 년째인가.” “십오 년?” “그동안 쭉 달려오기만 했잖아. 일이 년도 아니고, 무려 십오 년을 꼬박 달려왔는데. 며칠 쉴 수도 있는 거지. 안 그래?” “그건….” “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너를 비난 못할 거다.” “…….” 위로하는 듯한 음성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린다. “하나만 물어보자.” 갑작스럽게 질문하는 형의 목소리가 확 가라앉았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눈초리가 느껴졌으나 일부러 눈을 들지 않았다. “네 계획은…. 아직 유효한 건가?” “계획? …아.” 반사적으로 탄성을 터뜨렸다. 망연하기만 하던 머릿속에 차가운 이성 한 줄기가 고개를 든다. 계획이라 함은 귀환을 말하는 것일 터. 당연히 유효하다. 유효라는 말이 웃기기는 하지만,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확실하게 살아 있다. 나는 작게 주억였다. “그렇군. 그러면 말이다.” 문득. “수현아. 이제 그만….” 형이 뭘 말하려는지 알 것만 같았다. “…꿈에서 깨는 게 좋을 것 같다.” 낮은 속삭임이 날카롭게 귀를 찔렀다. 참았던 숨이 터져 나오고, 살짝 벌어진 입 틈으로 절반쯤 사라진 연초가 꽂혔다. 나는 비로소 눈을 들 수 있었다. 형의 얼굴은, “이제는, 현실로 돌아와야지?” 망망대해(茫茫大海)에서 풍랑(風浪)을 만난 배가 발견한 등대처럼, 환한 햇살로 물들어 있었다. ============================ 작품 후기 ============================ ㅇ<-< 0806 / 0933 ---------------------------------------------- 새로운 시작. 김수현이 돌아온 지 오래잖아 김유현은 집무실을 나왔다. 아직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아, 사용자 임한나?” 조용히 복도를 걷던 김유현은 계단에 서 있는 임한나를 보고 놀라 물었다. 임한나는 예의 상냥한 미소로, 한 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정중히 몸을 숙였다. 옆에 서 있던 안솔도 꾸벅 고개를 숙였다. “기다리셨던 겁니까?” “네. 배웅해드릴게요.” 그래도 한 도시를 대표하는 클랜의 로드인데 이렇게 홀로 돌아다니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 뜻을 알아들은 김유현은 어색이 볼을 긁적였다. 임한나는 민망하다는 낯빛을 보였다. 원래는 김수현이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그럼 부탁 드리겠습니다.” 두 남녀는 곧 차분히 계단을 밟아 내렸다. 안솔은 멍하니 쳐다보다가 서둘러 둘을 따랐다. 셋은 한동안 말없이 내려가기만 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안솔이 중간중간 입을 열려 했지만, 그때마다 임한나가 몰래 눈치를 주거나 기침을 해 말을 막았다. 이윽고 1층에 다다르고 성 입구를 벗어났을 즈음, 김유현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 여인이 돌아갔는데 아직 걱정이 많으신가 보군요.” “그렇죠. 아름다운 이별은 아니었으니까요. 아마 후회나 미련이 많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확실하게 말해놨으니까요.” “정말이요?” 임한나의 반문에 김유현은 지그시 미소 지었다. “조금 신경 써달라는 건…. 무리한 부탁이겠지요?” “후후. 그럼요. 상처받은 이가 한둘이 아니에요. 저희도 이날만 벼르고 있었다고요?” 정작 말은 그렇게 했으나 원망은커녕 온화한 목소리였다. 셋은 정원을 가로질러 정문에 도착했다. 배웅은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하다. “아무튼, 수현이가 못 알아듣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군요.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아닙니다. 오히려 머셔너리 클랜원분들이 고생 많으셨죠. 그리고….” “네. 바가지는 적당히 긁을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임한나가 해맑은 얼굴로 시원스레 호언했다. 김유현은 한 차례 쓰게 웃고는 목례를 마치고 성큼성큼 정문을 벗어났다. “끙….” 잠시 후, 서서히 멀어지는 김유현의 뒷모양을 안솔은 복잡한 눈으로 하염없이 응시했다. 북 도시로 돌아간 김유현은 클랜 하우스에 들어가자마자 백진하를 호출했다. “진하야. 그 일은 어떻게 됐지?” “그 일이요?” “비밀 도서관.” “아아~. 그거 거의 준비 끝났어요.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여기저기서 요청이 쇄도하고 있거든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요청이 쇄도한다고…. 좋아. 일단 입단속부터 단단히 시켜.” “네?” 백진하의 반문에 김유현은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괴고 미미하게 웃었다. “아직 수현이가 꿈에서 해롱거리고 있거든. 정신을 차릴 때까지 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처럼 두 눈이 날카로이 번들거린다. 백진하는 흠칫 물러났다. 김유현이 저런 눈을 보이는 건 속으로 무언가 꾸미는 게 있다는 소리였다. 음험하지는 않으나 위험한 느낌이다. 백진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평소에는 나무랄 데 없는 클랜 로드지만, 동생에 관련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게 유일한 단점이다. ‘수현아. 기대해라.’ 슬슬 물러나는 백진하를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김유현은 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이 계획만 성공하면, 우리는 돌아가는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거야.’ * 강렬한 햇살이 눈을 두드렸다. 눈을 뜨자마자 쫓기듯 침대에서 벗어나 욕실로 직행. 간단히 세안을 끝내고 식당으로 내려가 식사도 마쳤다. 그리고 바로 집무실로 돌아와 업무를 시작한다. 언제나와 같은 익숙한 일상이 이어진다. 성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항상 맑고 고요한 느낌이다. 그러나 근래 들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는 느낌을 종종 받고는 한다. 짚이는 바는 있다. 탁 까놓고 말해보면 게헨나가 돌아간 지 아직 며칠도 지나지 않았다. 그날 밤 사라진 게헨나를 찾는다고 아침 댓바람부터 들쑤셔놓았으니 아마 내 눈치를 보느라 침묵하는 게 아닐까 싶다. 게헨나와 지낸 나날을 후회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클랜원들의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잘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내가 마음 편히 기절했을 때 클랜원들은 과연 어떤 기분이었을까. 게헨나와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을 여인들은 과연 어떤 심정으로 지켜봤을까. 그냥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고 괜찮다고 여겼다. 형의 말을 듣고서야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백 번 잘못한 일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사과하는 것도 웃기는 일일 터. 결국,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나뿐이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오는 것. 게헨나와 같이 있는 동안은 꿈결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이제는 꿈에서 깨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형의 말대로 ‘귀환’에 온 신경을 쏟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서랍을 열고 조승우를 호출했다. 잠깐 목걸이가 눈에 밟히기는 했으나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용자 조승우. 보고서는 전부 읽었는데요. 몇 가지 눈에 띄는 게 있네요.” “혹시 사용자 아카데미 때문에 그러십니까?” “예. 제가 알기로는 아직 몇 주 남은 걸로 알고 있는데. 사용자 고연주가 계속 출퇴근을 하고 있는 모양이더군요.” “아 그건….” “제 건강 때문이라면 이미 회복한 지 오래니까요. 이효을이 허락했다손 쳐도, 자꾸 이렇게 왔다 갔다 해봤자 결코 곱게 보지는 않을 겁니다. 내일 안으로 돌려보내세요.”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조승우는 내 말이 맞는다는 양 끄덕거리며 깃 펜을 끄적거렸다. “그리고 요즘 클랜원들 임무 현황을 못 봤는데. 어떻습니까?”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해놨지요.” 조승우가 씩 웃으며 품에 손을 넣는다.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전공 책과 맞먹는 두께를 자랑하는 기록묶음이 꺼내지고 있다. “참고로 크게 놀라실 겁니다.” “그, 그래요.” 나는 미리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연초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주르륵 기록을 훑은 순간 그대로 연초를 뱉어버렸다. 첫 장부터 ‘이유정’이라는 이름이 도배돼 있다. 두 장, 세 장, 네 장, 다섯 장, 여섯 장, 일곱 장, 여덟 장…. 와 돌았다. 도대체 얼마나 임무를 한 거야? 내 표정을 봤는지 조승우가 웃는다. 나도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게 가능합니까?” “글쎄요. 개인적으로 자신은 없지만, 하루에 두 시간도 안 잔다고 합니다.” “아니 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고 물어도 어서 B 등급으로 올라야 한다고만 말하니…. 허 참.” 조승우가 질렸다는 듯 머리를 가로젓는 찰나, 찬물을 뒤집어쓴 듯 온몸의 감각이 살아났다. 귓속에 ‘어서 B 등급으로 올라야 한다고….’ 라는 말이 자꾸만 메아리친다. 갑자기 이유정의 호언장담이 뇌리를 스쳤다. ‘B 등급에 오르면 오빠한테 따먹히러 올 테니까!’ …에이, 설마. 농담이겠지? 나는 헛기침과 함께 기록을 덮었다. * 조승우와 이야기를 끝낸 후 나는 바로 집무실을 나섰다. 오늘 하루 일정이 눈코 뜰 새 없을 만큼 빡빡이 짜여 있었기 때문이다. 사용자 아카데미에도 한 번 방문해야 했고, 이효을과의 만남 약속도 잡혀 있었으며, 야간에는 밤의 거리에 가봐야 한다. 뭘 사러 가는 건 아니고, 오늘이 첫 개장이라 서지환의 방문 요청이 있었다. “응?” “오, 오라버니.” 그러나 밖으로 나갔을 때 안솔이 벽에 기대선 채 발을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마치 나를 기다리는 듯한 모양새로. 눈을 빠르게 깜빡이는 걸 보니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왜?” “저….” “……?” “그게….” “안솔. 오늘 오빠 좀 바쁘거든.” “자, 잠시만요! 괘, 괜찮으세요?” 안솔은 덥석 나를 붙잡으며 외쳤다. 무슨 말이냐는 뜻으로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가? 괜찮을 것도 안 괜찮을 것도 없는데.” “그, 그러니까요.” “그러니까?” “호, 혹시 있잖아요.” “한 번만 더 말 끌면 그냥 가버릴 거야.” “게헨나 님이 보고 싶으면 제가 또 소환해드릴게요!” 살짝 엄포를 놓자 안솔이 엄청난 속도로 말을 잇는다.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올망졸망한 눈을 내려다보며 나는 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안솔.” “네, 네?” 살며시 어깨를 짚자 안솔이 불안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그럴 필요는 없어. …아니. 다시는 그러지 마라.” “하지…. 말라고요?” “그래. 너도 이번에 깨달았을 거다. 네 힘이 얼마나 위험한지 말이야.” “그건….”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안솔의 힘은 이제 정말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 게헨나 다시 보겠다고 무차별로 상자를 열었다가는 어떤 재앙이 찾아올지 모른다. 금번 ‘빙하의 설원’ 원정으로 절절히 체감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네 마음은 고맙다.” 안솔의 어깨를 툭툭 치고 천천히 지나쳤다. 낯빛이나 꼼지락거리는 걸 보면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뭘 망설이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억지로 다그쳐 물을 생각은 추호도 없고, 생각을 정리하면 알아서 찾아오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바쁜 일정을 끝내고 돌아온 건, 이미 해가 저물다 못해 달이 완연히 떠올랐을 때였다. 밤의 거리 자체가 새벽에 열리는 시장이라 애초 늦을 수밖에 없었다. 터벅…. 터벅…. 터벅…. 터벅…. 새벽의 정적 때문일까.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올라가는 발소리가 묘하게 쓸쓸하고 힘이 없다. 나는 일부러 어깨를 펴고 걸음에 힘을 가했다. 가기 싫다 외치는 발을 억지로 끌었다. 어차피 혼자 자는 건 익숙하니까. 잠시 후. 집무실로 들어가 옷을 벗고 누우려는 찰나, 돌연히 시야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분명히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간 걸로 기억하는데 책상에 무언가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글씨가 빽빽이 적힌 B4 크기의 기록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 의외였다. 누가 이걸 갖다 놓은 걸까? “음….” 특이한 기록이다. 대충 훑어보니 앞면에는 한글이 뒷면에는 고어가 적혀 있다. 어디 먼저 볼까 하다가 우선은 뒷면부터 보기로 했다. 한글이 편하기는 하나, 단순히 읽기만 하는 거라면 고어도 7, 8할 정도는 알아볼 수 있으니까. 그럼 어디…. 『혹시 이것을 먼저 읽고 있다면, 앞부터 읽는 게 좋을 게다.』 흠. 누가 적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문체가 꽤 건방지다. 문장 자체는 자연스럽지만 서도. 어쩌면 비비앙이 장난치는 걸지도 모른다. 아무튼, 계속 읽어볼까. 『뭐, 굳이 먼저 읽겠다면 딱히 상관은 없다만.』 …놀리냐? 『사실, 뒷면을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한참을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그래도 남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뭐지? 갑자기 기록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은데. 장난 쪽지 정도로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잖아. 『여하튼 여기서부터는 조금 민감할 수도 있는 내용이라. 그래서 직접 적기로 했다. 보아하니 눈앞의 아이는 이 글자를 모르는 것 같거든. 허나 그대는 알아볼 수 있겠지?』 …잠깐만. 눈앞의 아이라고? 이 글자, 그러니까 고어를 모른다고? 『그대여. 부디 괜한 걱정이기를 바라면서도, 조언 겸 몇 가지 경고를 남기고자 한다.』 “그대여? 이 말투는….” 그때였다. 불현듯. 『우선은, 악마라는 놈들에 관해서다.』 오싹,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식은땀이 등 고랑을 타고 주룩 흐른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기록을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하하. 몇몇 독자 분들께서 김유현의 말이 심하다고 생각하셨군요. 글쎄요.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심한 말이 아니라, 일침(?)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항상 동생 바보처럼 굴다가, 오랜만에 형 노릇을 했다고 생각해요. 쉽게 말하면 이런 거예요. 이제 그만 정신 차리라는 소리죠. 물론 김유현도 말을 하기 전에 물었습니다. 아마 김수현이 귀환 생각을 버릴 정도로 게헨나를 좋아했다면, 김유현은 차원 이동에 온 힘을 쏟았겠지요. 그러나 김수현은 김유현의 ‘계획은 살아 있냐.’ 는 물음에 끄덕였고, 그래서 그렇게 말한 겁니다. 이제 그만 꿈을 깨고. 이제 그만 게헨나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 현실을 봐라. 네 주변(머셔너리)을 둘러보고, 귀환 계획에 힘을 쏟아라. 부디 김유현이 ‘흑화’됐다는 코멘트에 충분한 답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0807 / 0933 ---------------------------------------------- 새로운 시작. “이제 모두 모인 건가.” 자욱한 연기 너머로 차갑고 날카로운 음성이 들렸다. 어둠이 잔뜩 끼어 흐릿한 공간에는 겨우 윤곽만 드러나는 의자 7개가 놓여 있다. 거기에는 큰 인형을 껴안은 채 걸터앉거나 다리를 꼬고 기대앉는 등, 의자 수에 맞춘 형상(形象)이 각양각색의 태도로 앉아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둥근 원형을 그리는 의자의 곁으로 어두운 그림자들이 마치 도열한 병사처럼 시립해 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그림자들이 각 의자에 배치된 수가 고르지 않다는 것이다. 어느 의자에는 너덧 개의 그림자가 보이는 반면, 한둘 혹은 아예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의자도 있었다. “이야, 정말 휑하잖아.” 처음 목소리가 들린 의자를 기준으로, 왼쪽 두 번째. 침묵을 환기하려는 듯 과장된 음성이 터졌다. 흑염(黑炎)을 이글거리는 두 눈이 주변을 물끄러미 돌아본다. 정확히는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의자를 위주로. “마몬, 플루톤, 프로세르피나…. 에. 또 누가 있더라? 아무튼, 이래서야 악마 14 군주라는 이름이 무색하겠어.” “너. 메피스토펠레스.” 기준점에서 오른쪽, 인형을 꼭 껴안고 있는 형상이 맞받아쳤다. 딱딱 끊어 말하면서도 흡사 소녀를 연상케 하는 앳된 음성이다. 흑염의 악마는 순간 경직하더니 오른쪽으로 눈을 돌렸다. “뭐, 그러네. 나도 지옥에서 메피스토펠레스를 잃었으니까. 비난하려 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말할 처지가 아니기는 해.” 순순히 인정하는가 싶더니 돌연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좀 봐달라고. 적어도 지옥에서 목이 꺾여 뒈지지는 않았잖아? 내 소~중한 목숨은 아직 두 개라고?” 일부러 과장해서 말하는 게 상대를 비꼬는 의도가 명백하다. 비웃는 걸 느꼈는지 어둠 속 한 쌍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 떠졌다. 시린 냉기를 풀풀 흘리며 흑염의 악마를 노려본다. 꽈앙! 찰나의 순간, 거센 굉음이 어둠을 흔들었다. 어떤 전조도 없는 충돌. 무형의 기운이 부딪치는 여파에 그림자들이 심히 동요한다. 흑염의 악마가 몸을 일으키고 인형 소녀는 의자서 사뿐 뛰어내렸다. 조금도 개의치 않고 서로를 노려보는 것이 보이는 그대로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그 순간이었다. “그만.” 거슬리는 쇳소리가 둘을 저지했다. 그러고도 두 악마는 멈추지 않았으나 창백하고 길쭉한 손이 올라오자 주춤 행동을 멈췄다. 뱀의 눈과 같이 쭉 찢어진 시뻘건 눈동자가 좌우를 아우르는 동시, 거미 다리처럼 가늘고 긴 손가락이 느긋하게 구부려진다. 그게 어떤 의미를 뜻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윽고 손이 완전히 움켜쥐기 직전, 당장에라도 한 판 붙을 것 같던 두 악마가 곧장 대립을 멈추고 황급히 의자로 돌아갔다. 잠시 후, 들썩거리던 공기가 가라앉고 원래의 정적이 돌아올 즈음. “내가 오늘 회동을 개최한 이유는.” 처음의 목소리는, “오늘, 중요한 선택이 있기 때문이지.” 마침내 회동의 시작을 알렸다. “그래. 아주 중요한….” 의자에 앉은 이들의 시선이 쏠리자 기준점에 앉은 악마는 보일 듯 말 듯한 입을 한껏 비틀었다. “알고 있다. 어차피 다들 이 자리가 불편하겠지.” 방금 거슬렸던 철성(鐵聲)과는 다르게 살살 달래는 듯한 음성이 이어졌다. “회동에 앞서 정보는 이미 보냈다. 너희가 읽고 생각해왔다면 나도 길게 끌 생각은 없어. 그럼….” “사탄?” 그때 부드러우면서 또렷한 목소리가 말을 끊었다. 누군가 손을 들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반대입니다.” “루시퍼…. 네 의견은 그때 들었지. 여전히 속행의 반대인가.” “그렇지요. 대계(大界)의 말대로예요. 우리는 예언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흠.” 계속 말해보라는 듯 사탄이 나직한 침음을 흘렸다. “아니. 구구절절 말할 필요 있나요? 자랑은 아니지만, 두 악마 14 군주를 잃는 대가로 확실히 확인했습니다. 화정과 겁화가 인간 쪽에 붙었어요. 이건 사탄도 확인한 사실이잖아요?” “그랬지.” 사탄이 담담히 수긍했다. 즉 루시퍼는 이만 물러나자고 말하고 있었다. 사실 포기하자고 말한 것치고는 간단하게 말한 감이 없잖아 있다. 그러나 어느 악마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왜냐면 루시퍼의 말에 그만한 타당함과 무게를 느꼈으니까. “그리고,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문득 루시퍼가 말을 덧붙였다. 이상하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입가에는 재밌어 죽겠다는 미소가 걸렸다. “이상하다고?” “네. 한 번 생각해보시죠. 그동안 우리 계획이 저지된 게 몇 번이나 있었죠?” 사탄의 반문에 루시퍼가 크게 끄덕이며 되묻는다. “서 대륙, 마몬, 마그나카르타, 지옥 대공, 꽃의 마녀, 고대 악신…. 깡그리 망했습니다. 이 중에서 몇 개는 시작하기도 전에 분쇄된 것도 있지요. …이거,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사탄의 물음에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던 루시퍼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리고 빙긋 미소 지었다. “꼭 우리의 생각과 계획을 읽고…. 아니. 미래를 읽고 행동하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여기저기서 신음이 터졌다. 언뜻 들으면 허황한 말이기는 하나, 당한 입장에서는 무조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단순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얼마나 많은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는가. 게다가 극비로 진행한 계획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그냥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여기면서도 한 번쯤은 의심해볼 법도 했다. “운일 가능성도 있지 않나?”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는 사탄에 루시퍼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긍정했다. “그런데요. 사탄의 말대로 이 모든 것이 운이라면…. 더 무섭지 않습니까?” 이어지는 말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한껏 가라앉았다. “화정에 겁화에…. 거기다 운까지 돕고 있어요. 사실이라면, 저는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습니다. 그냥 여기서 깔끔하게 접고, 남은 전력을 보존해 후일을 도모하는 게 좋을 겁니다.” 머리를 절레절레 저은 루시퍼는 할 말을 다했다는 양 깊숙이 몸을 묻었다. 사탄은 지당하다는 듯 주억였다. 루시퍼의 의견은 확고한 명분이 있다. 사실상 ‘속행 반대’ 쪽에서 나올 수 있는 의견은 거의 나온 셈이다. 그러나 여기 있는 모두가 같은 의견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사탄은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루시퍼의 말은 충분히 들었다. 그럼 너희는 어떻지?” “…….” 사탄이 발언권을 돌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는다. 지그시 눈을 감거나 서로를 흘깃거리는 무의미한 행동만 반복할 뿐. 대 악마답다고 볼 수 없는 행동이었으나, 기실 이유 있는 침묵이었다. 첫째는 모두 암묵적으로나마 루시퍼의 말에 동의했으며 둘째는 전원 현 상황의 불리함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여기에 이르러서는 불리한 정도가 아니다. 아틀란타가 공략된 이상, 강철 산맥은 더 이상 방패 역할을 해주지 못한다. 북 대륙이 테라로 진군하기까지 남은 문제는 이제 ‘시간’밖에 없다. 말인즉 악마들의 앞날은 풍전등화(風前燈火)나 다름없는 것이다. “오, 이런. 이래서야 회동을 연 의미가 없지 않나.” 사탄은 조용히 웃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 이런 상황을 예견했던 걸까. 한참을 기다려도 반대 의견이 나오지 않자 사탄이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혹시 이런 말을 알고 있나? 다수결이라고.” ‘다수결’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 대 악마는 물론이고, 악마 14 군주들까지 의아한 빛을 비췄다. 뜻을 몰라서가 아니다. 마계는 본래 철저한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강한 자는 살아남고 약한 자는 도태된다. 강자가 지존인 세상에서 민주적인 방법은 생소할 수밖에 없다. “너무 이상하게는 생각하지 말라고. 너희가 말을 안 하니 이런 식으로라도 의견을 확인하고 싶거든.” 그러나 크게 7개의 세력으로 구분할 수 있는 만큼, 아주 통용될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쉽게 생각해. 이제부터 내가 숫자를 센다. 셋을 세는 순간 속행을 원하는 쪽은 손을 들고, 예언을 받아들이자는 쪽은 가만히 있는다. 단, 기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한 사탄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차분히 주변을 둘러봄에도 딱히 반대하는 의견은 나오지 않는다. 여전히 서로 눈치를 보고 있으나 호기심을 띤 눈도 몇 쌍 보였다. 뜻 모를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사탄이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하나.” 조금 갑작스럽게 카운트가 시작됐다. “둘.” 누군가 힘껏 숨을 들이켰다. “…셋.” 이렇게 카운트가 끝나고, 루시퍼는 손을 들지 않았다. 흘끗 옆을 쳐다보니 똑같이 손을 들지 않은 사탄이 보였다. 그리고. “하.” 주변을 쭉 훑은 순간. “하, 하하….” 루시퍼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건, 의외네요.” 사탄과 루시퍼를 제외한, 다섯의 대 악마가 손을 들고 있다. 바알, 아스타로트, 벨제부브, 아스모데우스, 리리스. 무려 다섯이나 되는 대 악마들이 ‘속행’을 선택했다. * 나는 정신없이 기록을 읽었다. 기록에는 굉장히 많은 내용이 간단하면서도 빽빽이 적혀 있었다. 지옥에 침입한 아스타로트를 박살 내고 메피스토펠레스를 소멸시킨 것, 악마들이 연합해 지옥을 2차 침공한 일 등등. 그리고…. 『…그때 나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을지언정, 결코 방심은 하지 않았다. 허나 놈들은 내가 미처 알지 못한 방법으로, 기어코 나를 강제로 차원 이동시켰다. 그것도 내 본진에서 말이다.』 게헨나가 말하는 건 아마 아틀란타를 목전에 뒀을 때를 말하는 듯싶다. 그래. 그때는 나도 깜짝 놀랐다. 차희영을 선점함으로써 바꿨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게헨나를 강제로 이동시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비틀었다 생각한 미래를 원래대로 맞추는 악마의 능력은 결코 얕볼 수준이 아니었다. 『보아하니 그놈들은 너희를, 인간들을 계속 노리는 것 같더구나. 한 가지 꼭 명심해야 할 건, 미래는 결코 생각대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아라. 고대 악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나조차도 놈들의 마수를 피하지 못하고 의도대로 움직이고 말았다. 즉 그만한 역량은 있는 놈들이라는 것인데, 차후 언제 어디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겠느냐. 다시 말하지만, 미래는 절대로 누군가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분명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전혀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일을 벌일 것이다. 단, 대비는 할 수 있겠지. 부디 조심하고 또 조심하거라.』 읽어 내려가는 와중 자꾸 침이 고여 삼켜야만 했다. 새삼 경각심이 새로이 일깨워지는 기분이다. 아까 느꼈던 싸한 느낌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 『그리고…. 이건 여담이지만, 실은 사과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응? 사과해야 할 일이라고? 게헨나가? 『그때 너를 찾아온 여인 말이다.』 한소영을 말하는 건가? 『그때 그대가 돌아오고 나서 한참을 풀이 죽어 있더구나. 그게 참 가슴에 걸리더구나. 아마 이상한 현상을 목격했겠지? …사실을 고하자면, 내가 그 여인에게 암시를 걸었다. 무언가 위험한 느낌을 받아, 그대에게 해가 될지 아닐지 알아볼 생각이었다.』 “아, 그래서…!” 나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확실히 그때, 한소영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내가 아는 한소영은 설령 분노했을지언정,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게헨나가 암시를 걸었다면 이해가 간다. 나도 제 3의 눈과 화정의 도움으로 간신히 벗어났는데, 한소영이라고 당해낼 재간이 있겠는가. 『후후. 결국 제대로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 말은 해주고 싶다. 그 여인은…. 글쎄. 도저히 인간으로 볼 수 없을 만큼 기이한 기운을 뿌리더구나. 스스로 조금은 자각하고 있는지 조심하는 것 같더군. 아마 발가벗겨놓고 태초의 모습을 보게 되면, 진정한 참모습이 드러날지도 모르지. 이것도 조심하거라. 그 여인을 품을지 안 품을지는 오롯이 네 선택에 달렸으나, 혹여 품는다면 각오해야 할 것이다. 요녀를 곁에 둔 사내의 말로는 거의 좋지 않았거든. 허나 그 여인은 요녀 따위와는 상대도 되지 않는 존재 같으니 말이다. 까닥 잘못하면 한평생 예속(隸屬)될지도 모른다. 아, 성(性)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예, 예속이라.” 하하 웃었다가 힘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어차피 한소영이랑은 더 이상 그렇고 그런(?) 관계로 발전할 수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때 확실히 선을 그었으니까. 『쓰면서 자꾸 궁금한 게 생기는구나. 미련 때문인가…. 그대는 과연 이 기록을 읽으며 무슨 기분일까. 아마 나를 원망하고 있겠지? 이해하지 못하는 여인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래. 이건 나도 궁금하다. 원망까지는 아니더라도, 왜 말도 없이 떠났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하구나. 하지만 이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왜. 『그대와 웃으며 이별을 나눌 자신이 없었거든.』 반문한 순간, 불현듯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못된 여인이다. 그대의 옆에 있을수록 계속 나쁜 생각이 들더구나. 같이 있어달라고 호소하는 눈을 볼 때마다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내가 여기 머무르지 못하는 건 기정 사실이지 않느냐. 그럼 그대가 지옥으로 건너오면 되는 일이었다.』 이건…. 부인할 수 없군. 『사실은 몇 번이고 마음먹었다. 그냥 적당히 눈 감고 그대 몰래 제물을 충원할까. 아니면 억지로 힘을 써서라도 그대를 지옥으로 데려갈까.』 으, 으음. 무서운 말이다. 『허나 그래서는 안 되겠지. 종래에는 어느 한쪽이 희생할 수밖에 없으니까. 또한 내가 지옥에서 이뤄야 할 숙원이 있는 만큼, 그대도 이 세상에 이룰 숙원이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욕심만 내세우는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중요한 건, 그러고도 욕심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지. 결국에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집중해서 읽다 보니 어느새 기록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추스르며 아래로 눈을 내렸다. 『수현, 수현, 수현, 수현. 나라고 그대의 곁에 있고 싶지 않았겠느냐. 나라고 한 사내의 여인이 되어 사랑받고 싶지 않았겠느냐. 하지만 진정으로 그대를 위하는 길은, 욕심을 좇는 게 아닌 하루라도 빨리 내가 떠나는 것이었다. 그대는 과연 이 말을 알아들을까?』 알아듣는다. 원래라면 몰랐겠지만, 형에게 이야기를 들으니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게헨나는 나 하나만이 아닌, 여태껏 내가 쌓아온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하고, 생각하고, 행동한 것이다. 『비겁하다고 여겨도 좋다. 지금 당장을 나를 원망하고 미워해도 좋다. 도망친 건 나이니, 달게 감내할 생각이다. 그러나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무수한 시간이 흐르고 언젠가 나를 기억할 즈음에. 부디, 이런 나를 이해해줬으면 좋겠구나. 수현. 그대는, 알아주겠지? 언젠가는 나를. 김수현이라는 인간을 사랑한 내 마음을 이해해주겠지…?』 기록에 적힌 고뇌를 느껴서일까. 게헨나의 절절한 고백에 참았던 숨이 새듯이 흘러나온다. 비로소 아래 여백이 보이는 순간, 나는 내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가슴은 슬픈데 얼굴은 웃고 있다. 하하, 하하. 무언가 참지 못하겠다는 기분에 나는 그대로 테라스로 나갔다. 시원스레 뻗은 밤하늘을 보니 절로 가슴이 트이는 기분이다. 신기한 일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온몸이 지쳐 있었는데 씻은 듯이 개운해졌다. 품에서 연초를 꺼내 물어 불을 붙였다. 이어서 한 모금 깊숙이 빨아들이며 기록을 들어 올렸다. 자작이 타들어 가는 부분을 기록 모서리에 갖다 대니, 검은 그을음이 서서히 번져가며 불이 붙기 시작했다. 잠시 후, 기록 귀퉁이가 활활 타오르는 걸 확인하고 나서, 나는 미련 없이 기록을 허공으로 던졌다. - 아직 읽지 못한 부분 있지 않아…? 화정의 조심스러운 음성이 귀를 울린다. 물론 앞면은 보지 않았지만, 굳이 읽지 않아도 괜찮다. 악마에 관한 경고, 나에 대한 걱정, 한소영에 관련된 고백, 게헨나 자신의 속내…. 여과 없이 드러낸 게헨나의 진심은 이미 차고 넘칠 만큼 느꼈다. 더 읽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계속 읽고 오묘한 기분을 받느니, 여기서 끊는 게 적당하지 않을까. 왠지 게헨나가 말없이 돌아갈 때의 기분을 조금은 알 것 같다. 하늘을 바라본다. 어느새 절반 이상 타들어 간 기록은 바람에 나부끼듯 느릿하게 굽이져 너울너울 떨어진다. 간간히 튀기는 불똥은 춤추듯 흔들리며 사라져 간다. 기록이 불에 타 없어질수록 가슴속에 응어리진 마음도 녹아내린다. 차디찬 밤공기를 들이켜니 가슴이 시원하면서 후련하다. 머릿속이 이대로 열어버리고 싶을 만큼 상쾌하다. 이대로 크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 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어, 작은 불씨가 수놓는 새벽의 밤하늘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밤 풍경이 근래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나는 비로소 선웃음이 아닌, 꾸밈없이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아마…. 이제야, 그날 밤의 꿈에서 깨어난 모양이다. ============================ 작품 후기 ============================ 한소영 >>>>>>>>>>>>>>>>>>>>>>>>> 다른 여인들. 과연 어떤 기준일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__ )* 0808 / 0933 ---------------------------------------------- 새로운 시작.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아침이었다. 그러나 사용자 아카데미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용자가 모여 수선스러웠다. 특히 어느 한 건물에 빽빽이 모여 있는 게 누군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모양새다. 그것은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 사이로 희미한 연기를 올리는 연초를 끼운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기실 현대고 홀 플레인이고 공공장소에서 연초를 태우는 건 딱히 환영받는 일이라 볼 수 없다. 되고 안 되고를 떠나 어느 정도 눈총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주변 사용자들은 눈총은커녕 외려 몰래 여인을 흘깃거리기 바빴다. 후우, 살짝 벌어진 입 틈으로 가늘게 새어 나온 흐릿한 연기는 뭉게뭉게 흩어지며 여인의 잿빛 머리카락을 가렸다. 여인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대단한 미모와 몸매의 소유자였다. 불룩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는 물론, 가죽을 꽉 조여 팽팽하다 못해 터질 듯한 둔부가 한껏 무르익은 아름다움을 뽐낸다. 건강히 살 오른 농염한 허벅지는 보일 듯 말 듯한 아슬아슬함을 뚝뚝 떨어트린다. 게다가 주변의 시선을 느끼는지 곱게 휜 초승달을 연상케 하는 눈웃음은 뭇 사내의 가슴에 욕정(欲情)을 들끓게 하고도 남았다. 일견 퇴폐적이면서도 무언가 깊숙한 맛이 있는 팜므 파탈(Femme Fatale)의 여인이다. 툭, 문득 여인이 손에 쥔 연초를 떨어트렸다. 동시에 간헐적으로 울리던 증폭된 음성이 끊겼다. 일종의 신호라고 볼 수 있는 행동이지만, 정신없이 쳐다보는 사내들은 조금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때였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리며 강당에서 사용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수는 어마어마해 물경 2천을 훌쩍 넘을 정도였다. 하나 특이한 점은 거의 대부분이 똑같은 의복을 걸쳤다는 것이다. 우르르 밀려나오는 물결을 보며 여인은 땅에 떨군 연초를 발로 비비고 지그시 눈을 떴다. 인파가 인파인 만큼 혼잡함은 삽시간에 절정을 치달렸다. 가끔 누군가를 찾는 고성이 오고 가기도 했다. 여인은 한동안 인파를 샅샅이 훑다가 활짝 개방된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혼란이 조금씩 시들해질 즈음, 누군가와 악수를 하며 나오는 사내를 발견하고 씩 웃었다. 악수를 끝낸 사내는 눈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곧 여인이 서 있는 쪽을 보고 마주 미소 지었다. 여인도 까닥 고개를 끄덕이고는 턱짓으로 정문을 가리켰다. 신호를 알아들었는지 사내는 바로 몸을 돌려 자신을 따라온 무리를 점검하는 모습을 보였다. 잠시 후. “이야, 드디어 끝났네요. 바깥 공기가 이렇게 상쾌한 줄 미처 몰랐습니다.” 건물 밖으로 나온 사내는 있는 힘껏 기지개를 켜며 너스레를 떨었다. 기다리고 있던 여인이 고혹적인 미소를 짓는다. “수고하셨네요. 박현우 총 교관님.” “에이, 이제 끝났는데요. 그리고 왜 애초 안 하겠다고 하셨는지 알겠습니다. 정말 두 번은 못할 일입니다.” 박현우는 진정 질렸다는 얼굴로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박현우의 뒤에는 총 스물두 명의 사용자가 서 있었다. 이미 완숙한 사용자인 표혜미는 별 감흥 없는 얼굴로, 이번 아카데미에 특별히 참가한 차희영은 상기된 얼굴로 여유로운 체하는 중이다. 그 둘을 제외한 스무 명은 이제 갓 신병 교육대를 벗어난 군인처럼 딱딱히 굳은 상태였다. 그때 갑자기 무리에 속해 있던 한 여인이 조심스레 걸음을 내디뎠다. “그래서 이제 돌아가면 어떻게 되는 거죠?” “저도 소식으로만 들었습니다. 이번에 또 한 번 내부가 개편된 건 들으셨습니까?” “듣기는 했죠. 클래스별로 단체를 나누고….” “저기요.” 잠시 서서 얘기를 나누던 고연주와 박현우는 동시에 눈을 돌렸다.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여인의 얼굴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숨을 크게 들이키더니 결연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순간 박현우가 눈살을 찌푸렸으나 고연주는 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지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될까 해서요.” “부탁?” “네. 실은 저희가 통과의례부터 같이 행동해온 동료들이 있거든요?” 고연주가 흘끗 눈을 치켜떴다. 그러나 여인은 묘한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총 여덟 명인데요. 그중 네 명이 오퍼를 받지 못했거든요.” “…그래서요?” “사실 저번에도 한 번 부탁을 드렸는데 안 된다고만 하셔서요.” “그러니까 그쪽 말인즉, 그 네 명을 같이 데려가 달라?” 여인은 그렇다는 듯 끄덕끄덕 주억였다. 고연주의 눈이 한껏 가늘어지고 박현우는 안절부절못한 낯빛을 보였다. “데려가지 못하겠다면요?” “그럼 죄송하지만, 저희 네 명도 여기 남을 생각이에요. 그래도 생사고락을 같이한 동료를….” “그러세요.” “네?” 단호한 음성에 여인이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으니까요. 본인 포함 네 명은 여기 남으셔야겠네요. 그럼 이만.” 그렇게 말한 고연주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대로를 걸었다. 박현우는 허둥지둥 고연주를 쫓았고, 무리도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카데미 정문 앞에 남은 인원은 정확히 네 명이었다. 설마 이럴 줄은 몰랐다는 듯 흔들리는 눈이 멀어지는 무리를 하염없이 응시한다. “죄송합니다. 저번에 분명히 얘기를 끝낸 줄로 알았는데….” 박현우는 한없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머리를 긁적였다. 고연주는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한테 죄송할 건 없죠. 근데 수현 앞에서 저 말이 나왔다면 아마 한 소리 거하게 먹었을걸요?” “그렇지요. 안 그래도 이번에는 성적보다 적응력을 우선시해 선발하라고 주문하셨는데요. 그런데 저런 말을 면전에서 했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아무튼, 아까 하던 얘기나 계속하죠. 설마 바로 머셔너리 아카데미로 넘어갈 리는 없고.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아. 그건 말입니다….” * “수현. 내부 개편이 완료됐다면서요?” 갑자기 그림자에서 솟구친 고연주가 사뿐히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오랜만에 만난 것치고는 상당히 뜬금없는 말이었다. 물론 이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오늘 사용자 아카데미 수료식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일을 끝내고 보고 겸 복귀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내가 기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쪽.” 책상 아래 무릎 꿇은, 정확히는 내 사타구니에 고개를 묻은 채 바짝 굳은 남다은 때문이 아닐까. 젠장. 그러니까 그냥 정상적으로 보고를 마치고 나가면 되잖아. 예전에 임한나가 첫 시작이었나? 괜히 몸으로 보고한다는 이상한 열풍이 불어서는…. 아니. 이럴 때가 아니다. 나는 안쪽으로 의자를 바짝 끌며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고연주가 제발 기척을 느끼지 못하길 기도하면서. “예. 오랜만입니다. 변화 사항에 관해서는 전달이 갔을 텐데요?” “자세한 부분은 못 받았어요. 직접 듣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간단합니다. 근접, 마법사, 궁수, 사제, 암살자. 이렇게 총 다섯 직군으로 역할을 구분하는 거지요. 말뿐이 아닌 실제 행정까지 포함해서입니다.” “흐응. 그것도 들었네요. 각 클래스를 관할하는 사무실도 건축하고. 거기다 단장과 부단장까지 선발하고.” 고연주의 말대로였다. 그러나 사실상 큰 변화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일부 권한을 이양하고(실은 내가 할 일을 좀 줄이고.), 행정 업무를 분담시키려는 게 주목적인 개혁이다. 앞서 등급제라는 커다란 충격을 겪어서 그런지 이번에 시행한 개혁은 생각보다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좋은 의미에서 말이다.(물론 조승우는 뛸 듯이 기뻐했다.) 여하튼 이번 변화의 중점은 ‘분업’이다. 가령 이번 사용자 아카데미 경우, 선발한 인원을 클래스별로 나누고 각 직군에 맞는 곳으로 데려간다. 그럼 각 단체에서 알아서 교관을 선발하고 머셔너리 아카데미로 데려가 가르친다. 그럼 나는 하나하나 신경 쓸 필요 없이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받으면 된다는 말이지. “그러고 보니 근접 계열은 누가 단장이에요? 인원이 가장 많은 만큼 선발도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아. 근접 계열 단장은….” 지금 책상 아래서 제 남근을 물고 있는 여인이지요. …라고 말하는 대신 차분히 목을 가다듬었다. “단장 부단장 순으로. 근접은 남다은, 차소림. 마법사는 정하연, 김한별. 궁수는 선유운, 임한나. 사제는 신재룡, 안솔. 암살자는….” “오? 준영 씨가 아니라, 소림이가 부단장이네요?” “예. 허준영이 하기 싫다고 하더군요. 아무튼, 그리고 암살자는….” “후유. 그래요. 이해해요. 귀찮을 만도 하죠. 명색이 전투 사용자인데 누가 행정 업무를 보고 싶겠어요.” “저 들으라고 하는 말인 건 알겠는데 이미 결정 난 사항입니다. 암살자는 고연주, 우정민입니다.” “…쳇.” 고연주는 여전히 나 들으라는 듯이 혀를 찼다. 문득 남근의 뿌리 부분을 오독오독 깨무는 감각이 느껴졌다. 페니스를 끝까지 머금은 남다은이 형형히 눈을 빛내고 있다. 아마 얼른 내보내기를 바라는 모양이다. 어서 보고를 마쳐야겠다. “그나저나 이번에 선발한 인원은 총 스무 명이라고 했나요?” “아…. 열여섯 명이요.” “들었던 것보다 네 명이 적은데요?” “사정이 있어서요. 수료식이 끝나고 제 임의로 잘랐어요.” 처음에는 의문이 솟았으나 고연주의 설명을 들으니 이해할 수 있었다. 애초 괜히 적응력을 우선시해서 뽑으라 한 게 아니다. 이제부터는 예비 사용자로 전력을 강화하는 일은 지양해야 한다. 키우는데 들어가는 시간보다, 합병이나 스카우트 혹은 기존 클랜원을 끌어올리는데 드는 시간이 훨씬 적기 때문이다. 물론 장기적으로 보면 예비 사용자의 존재는 필요하지만, 나는 귀환 시기를 이 년 안으로 잡고 있었다. 즉 지금이 딱 커트라인이라는 소리다. “혹시 제 독단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지금 바로….” “아니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잘했어요. 괜히 분위기를 망치느니 일찌감치 자르는 게 낫죠.” 어서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말을 빠르게 했다. 그러나 고연주는 조금도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의외라는 듯 동그란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따뜻한 미소를 짓는다. “그래도…. 의외네요? 아니. 다행인가?” “다행이요?” “네. 사실, 나 힘들어~. 그녀가 떠났어~. 버림받았어~. 나 좀 위로해줘~.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의외로 정상적이네요. 별로 척하는 것 같지도 않고.” “……?” 아하. 설마 게헨나를 말하는 건가. 조금이지만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알아듣는 게 늦은 걸 보니 불과 한 달 전 일을 어느새 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처음에는 그토록 서글펐는데 역시 시간이 약인 건가. 아마 기록을 읽지 못했다면 고연주의 말대로 지지리 궁상을 떨고 있었을지도. “하하….” “그래도 요새 밤은 좀 외롭지요?” 어색이 웃자 고연주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요. 딱히?” “흐응. 그럴 리가 없는데. 사실대로 말해봐요. 외롭잖아요.” 아니라고 했음에도 고연주는 그럴 리 없다는 듯 단언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실제로 외롭다고 느낀 적이 별로 없으니까. 마르나 두 영수를 품에 안고 잘 때도 있고, 종종 남다은이 밤중에 찾아와 몸을 섞기도 하고. 아차. 그러고 보니 고연주에게 줄 게 하나 있었다. 나는 서랍을 열며 입을 열었다. “고연주. 잠깐 가까이 와볼래요?” “왜요? 싫은데요?” “예?” “싫다고요. 앞으로 수현한테 제 몸 털끝도 못 만지게 할거거든요? 흥.” 팔짱을 끼며 홱 고개 돌리는 고연주. 또 왜 저러나 싶어 의아히 쳐다보려는 찰나, “헉.” 돌연히 남근에 가해지는 압박이 가일층 거세졌다. 왜, 왜 갑자기 이러는 거지? 황급히 아래를 쳐다보니 아미를 찡그린 남다은이 애원하는 눈으로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고 있다. 마치 절대로 안 된다는 듯이. 숨을 참고 있는 건지 볼도 잔뜩 부풀었다. 그, 그만 좀. 고개를 좌우로 흔들 때마다 뜨겁고 끈적끈적한 설육(舌肉)이 거침없이 기둥을 쓸고 핥는다. 안 그래도 걸릴까 봐 엄청나게 긴장하고 있는데 금세 사정감이 치솟는다. 으읔, 쌀 것 같아. 그 순간 불현듯 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확고한 자신감을 보이는 고연주의 음성. 그리고 노심초사하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드는 남다은. …어쩌면 이 두 여인이 무언가 말을 맞춘 게 아닐까? 아니지. 이렇게 생각하면 정하연과 임한나도 같이 말을 맞췄을 가능성이 높다. 어디까지나 추측이기는 하지만, 서로 동맹을 맺은 게 아닐까 싶다. 예를 들어 게헨나 사건(?)에 대해 복수하려는 일환으로 일부러 내 침실에 찾아오지 않는다거나? 만일 내 추측이 맞는다면 남다은은 일종의 배신자인 셈이다. “흐, 흐흠.” 우, 우선은 아무래도 좋다. 나는 얼른 손을 집어넣어 남다은의 정수리를 잡았다. 가만히 좀 있으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역효과였다. 남다은이 그대로 고개를 파묻어버리더니 숫제 입을 오므려버린 것이다. 남근 전체가 찌그러지는 압박감이 엄습한다. 결국에는 용솟음치는 사정감을 이기지 못해, 요도로 세차게 분출되는 감각이 느껴졌다. 젠장, 망했다. …아니. 아직! “어머? 뭘 그렇게 노려봐요. 수현. 사람이 염치가….” “끄흐흐흐으으으으으으으음!” 쾅! 나는 신음을 최대한 길게 끌며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고연주는 깜짝 놀라 나를 쳐다봤다. 순식간에 전신을 잠식하는 오르가슴에 저절로 눈이 치떠지고, 온몸이 푸들푸들 떨렸다. 안면에도 피가 몰린다. 잠시 후, 고연주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놀라움과 서운한 빛을 동시에 드러냈다. “크으으음….” “수, 수현….” “후우우우우우우우….” “미, 미안해요. 설마 그렇게 화낼 줄은 몰랐어요. 내가 너무 투정이 심했죠? 정말로 미안해요.” 뭘 어떻게 곡해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고연주는 얼른 소파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왔다. 가까워지기 전에 서둘러 검은 덩어리를 서랍에서 꺼내 던졌다. 가볍게 잡아챈 고연주는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금번 원정에서 얻은 성과인 고대 악신의 잔재입니다.” “고대 악신의 잔재요?” “예. 고연주가 다루는 그림자에 연기 능력이 더해지면 한층 강력해지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자세한 내용은 구즈 어프레이즐로.” “그럼 이걸 저한테…?” “자신만 있다면 가져가도 좋습니다. 사샤가 굉장히 갖고 싶어 했으니까요.” “…….” 고연주는 아무런 말도 않았으나 검은 덩어리를 살며시 움켰다. 서서히 오르가슴이 가라앉는다. 나는 침착히 전신을 추슬렀다. 이윽고 절정이 완전히 사라졌을 즈음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때요. 이제 속 좀 풀렸어요?” “응? 아, 글쎄요?” 고연주는 킥 웃더니 방문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애틋한 눈으로 나를 보고는 살포시 미소 지었다. “이런 선물도 좋지만….” “…….” “아까 못 만지게 하겠다고 했을 때, 수현이 안달하고 분노하던 모습이 더 기억에 남네요. 솔직히 조금 기뻤어요.” “?” 그렇게 말한 고연주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문을 열고 나갔다. 그래. 드디어 나간 것이다. 한숨을 내쉬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올려다보는 남다은이 보였다. 남근을 꼭 물고 있는 게 여전히 놓아주지 않고 있다. 이내 목울대가 꼴깍꼴깍 움직이는걸 보니 이제 막 정액을 삼키는 모양이다. “…갔어.” 그러자 남다은은 허물어트리듯이 고개를 숙였다. 나도 책상에 무너지듯 엎드렸다. 너무 긴장해서 그런지 탈력감이 심하다. …죽을 것 같아. ============================ 작품 후기 ============================ 후후. 김수현은 한 가지 모르는 게 있습니다. 이제 조승우만이 아닌, 여러 여인이 주기적으로 보고를 올리러 온다는 것이지요. :> 0809 / 0933 ---------------------------------------------- 단, 대비는 가능할 것이다. “으흐으응….” 흡사 꿈결에 새는 것처럼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온다. 그리 크지는 않으나 또렷한 교음(嬌音)이다. “아앙…. 기분 좋아….” 한 번 더 들려오는 여인의 간드러진 신음성. 나는 속으로 참을 인(忍)을 되뇌며 차분히 눈을 감았다. 잡념을 떨치고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나 외려 역효과였다. 감각이 예민해질수록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보들보들한 감촉이 확연히 선명해지는데, 이제는 숫제 ‘얼른 주물러보라니까? 야들야들할 거야~.’ 라는 환청이 들릴 정도. 결국 참지 못하고 눈을 뜨니 바로 앞 엎드려 누워 있는 사라의 모습이 보였다. 붉은 천으로 엉덩이만 살짝 덮은, 거의 알몸에 가까운 사라의 전신은 맑은 불꽃에 감싸여 있다. 허나 그것보다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이나, 금발과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는 희고 고운 목선이나, 한창 무르익은 젖가슴이 바닥에 짓뭉개진 풍경이,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눈에 밟힌다. 이뿐인가. 내가 손을 대고 있는 흰 사슴 같은 허리 아래, 급격히 부풀어 오르는 둔부의 선을 보고 있자니 내 분신도 덩달아 부푼다. 덜덜 떨리는 손이 마치 왜 N극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거냐며 절규하는 S극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럽다. “하아아아….” 불현듯 사라가 살며시 몸을 비틀었다. 오르가슴 후 여운을 즐기는 듯한 야릇한 소리가 애간장을 살살 녹인다. 이미 아랫도리는 불끈 치솟는 것도 모자라 성난 짐승처럼 발작하는 중이다. 천을 뚫고 나올 듯 불룩해진 바지를 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100% 오해할 상황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하등 억울하기 그지없다. 기실 내가 이러고 있는 이유는 그런 짓(?)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물론 사라를 구워먹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게헨나가 돌아간 후, 수련을 도와달라는 사라의 개인적인 요청이 있었다. 불(火)과 친화력을 높이려는 일환으로 신화계(神火計) 권능이 있는 화정의 조력을 받고 싶다는 것이다. 이러면 불에 타지 않으면서 불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는데, 게헨나가 고안한 수련 방법이라고 한다. 사라가 벗은 이유도 이와 비슷했다. 친화력을 높이려면 자연적인 상태와 가장 편한 자세로 있는 게 도움이 된다나. 게헨나처럼 불만 붙여주면 되기는 하나, 다행히도…. 아니. 아쉽게도 내가 그 정도 수준은 되지 않아서. 이렇게 손을 붙인 상태서 끊임없이 힘을 보내야 한다. 여하튼 여러 조건이 미묘히 맞물려 이렇게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혀 나쁜 상황은 아니다. 구구절절 말할 것도 없다. 정령 군단의 위력은 이미 1회 차에서 직접 체감하지 않았는가. 비비앙의 마수 군단과 비슷하거나 상회하는 전력이 가세한다는데, 면벽수련을 하는 고승의 기분쯤은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그래, 얼마든지…. 흠. 그나저나 마르에게 선물한 빛과 어둠의 결정은 어떻게 됐으려나? 정하연은 알아서 잘 하는 것 같은데. “후우우우…. 굿.” 그때 느닷없이 숨을 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엎드려 있던 사라가 천천히 일어서자 붉은 천이 사르르 흘러내린다. 수련이 끝났다는 신호다. “아주 좋습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클랜 로드.” 영차 몸을 일으킨 사라는 솜씨 좋게 천을 몸에 두르며 미소 지었다. 소싯적 노출 좀 해봤는지 나를 마주 보는 것도 거리낌이 없다. “우리 말이 꽤 늘었네요?” “예스. 애초 현대에서 많이 공부했고, 여기서도 계속 배웠습니다.”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은데요.” “후후. 저 칭찬 좋아합니다. 더 해주시면 너무 좋습니다.” 정말로 기분이 좋은지 얼굴에 화색이 만연하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사라가 아차 탄성을 질렀다. “그러고 보니 클랜 로드. 오늘 그날 아닙니까?” 그날이라. 다의어이기는 하나 아마 그걸 말하는 것 같다. 수련은 사라만 도와주는 게 아니니까. “그렇지요.” “그럼 제가 너무 오래 붙잡은 거 아닙니까?” “전혀 아닙니다. 시간 배분은 확실하게 해놨으니까요.” “다행입니다. 저만 욕심부린 줄 알고 걱정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사라는 주먹 쥔 손을 들어 올리며 “파이팅.” 이라고 말했다. 왠지 귀엽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려는 찰나, “……?” 문득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이 젖어있는 것이 눈에 밟혔다. …왜 카펫 털이 동글게 얼룩져 있는 거지? * 까앙! 따가운 쇳소리가 울렸다. 매서운 기운이 몰아치는 정원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귀를 찌르는 소음에 누군가는 낯을 찌푸렸다가, 무언가 부딪치는 둔탁한 폭음에 크게 놀란다. 그러나 조금의 시간차도 두지 않고, 웬 시커먼 형상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 꽂혔다. 콰앙! “크허어억!” 고통에 찬 신음이 터졌다. 형상은 한 번 부딪치는 것도 모자라 두어 번 더 튕기며 지면을 데굴데굴 굴렀다. 종래에는 나동그라진 형상을 향해 하얀 로브를 입은 사용자들이 빠르게 달려간다. 그러나 사제를 제외한 이들은 전원 눈앞의 광경에 집중을 잃지 않았다. 잠시 후, 자욱한 연기가 걷히는 가운데 한 사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칠흑색 일체형 갑옷을 입고 견갑(肩甲)에 붉은빛 망토를 두른 사내는, 정원의 중심에 오연히 서 있다. 약간의 미동도 보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한다. 그리고 사내의 주변에서 거리를 재고 있는 여인 하나. 주춤주춤 걸음을 물리는 게 약간은 겁을 집어먹은 모습이다. 하지만 물러나는 것도 잠시. 좌우를 빠르게 둘러본 여인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자세를 크게 낮춘다. 이내 시뻘건 눈동자와 머리카락에 금빛이 이글거리며 타오른다. 상대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지고 질박한 용기가 샘솟는다. 양손에 든 카타나를 고쳐 잡는 모습이 흡사 먹이를 노리는 짐승과도 같다. 이유정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눈앞의 사내. 즉 김수현에게는 어떤 기교도 통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남다은을 상대로도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는데 김수현에게는 더더욱 통할 리가 없다. 힘도, 속도도, 마력도, 기술도 어느 것 하나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비빌 구석은 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자신만 있는 게 아니라 두 명의 궁수가 더 있다.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나 분명 저격을 준비하고 있을 터. 그럼 궁수들이 더욱 정확하게 노릴 수 있는 확실한 기회를 만들어주면 된다. 이유정의 생각대로 정원에는 두 명의 궁수가 김수현을 노리고 있었다. “조준선 정렬….” 숨을 흘리듯 내뱉은 목소리가 유난히 고요하다. 이윽고 코에 찬 공기가 모조리 흘러나간 순간, 선유운은 그대로 숨을 참았다. 부릅뜬 두 눈은 모든 방해물을 뚫고 오롯이 김수현을 노려본다. 활줄은 이미 팽팽하다 못해 한계까지 당겨져 있다. 발사 준비는 진작에 마쳤다. 동시에 김수현을 건너뛴 반대편에서 너덧의 광채가 우수수 떠올랐다. 불상의 후면을 장식하듯 임한나의 뒤로 둥글게 올라와 눈부신 빛을 번쩍인다. 선유운과는 달리 대놓고 나섰지만, 떠오른 광채 하나하나가 무시 못할 기운을 뿜는다. 사방을 드리우는 빛무리를 신호로 여긴 걸까. 끊임없이 돌던 이유정의 몸이 한순간 반전했다. 이어서, “하아!” 기합과 함께 적색 머리카락이 펄럭, 나부꼈다. 지면을 박찬 이유정의 몸이 순식간에 정면으로 쇄도한다. 전신에서 뿜어지는 기운이 날렵한 호선을 그리며 금빛 질주를 잇는다. 그러나 김수현은 무심한 눈으로 몸을 돌렸다. 오른손에 들린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검이 정확히 이유정을 겨눈다. 그때 김수현이 손에 쥔 칼자루가 돌연히 물결치듯 흔들렸다. 거의 1미터 안으로 접근한 와중, ‘온다!’ 이유정의 야성이 반응했다. 살기를 느낀 이상 대비할 수는 있다. 숨을 크게 들이켜며 쌍 단검을 움켜잡는다. 그 순간이었다. 뻐억! 일순간 관자놀이에 거대한 충격이 느껴지며 고개가 홱 돌아갔다. 정신이 아찔해지고 귓속으로 이명이 울린다. 돌려진 시야가 사정없이 흔들린다. ‘뭐…?’ 라고 생각하기도 전, 이유정은 곧바로 턱을 걷어차는 발길질을 느꼈다. “픕!” 윗니와 아랫니가 세게 부딪치며 강제로 고개가 젖혀졌다. 눈에 보이는 하늘이 서서히 아득해진다. 웅웅웅웅웅웅웅웅! 그때였다. 임한나가 무어라 외치는 동시에 공중에 떠 있던 광채들이 웅혼히 울림을 남기며 김수현에게 돌진한다.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햇살마저 밝히는 빛무리가 정원을 드리운다. 나가떨어지는 이유정을 보던 김수현이 걷어차는 자세 그대로 흘끗 오른쪽을 돌아본다. 바로 그 순간. “!” 선유운도, 시위를 튕겼다. 화살 깃이 싱싱한 꼬리지느러미처럼 펄떡, 요동쳤다. 쐐애애애애애애액! 단 한 번의 기회를 노린 일격. 목표는 김수현의 목. 찰나의 순간, 장대 같은 화살은 빛살처럼 허공을 가르며 60미터의 거리를 좁혔다. 좌우로 날아온 저격이 이제 막 자세를 추스르는 김수현을 무자비하게 덮쳤다. 꽈앙! 단순히 화살을 발사했다고는 볼 수 없는 거센 굉음이 터졌다. 그 소리만치 어마어마한 충돌의 여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정원의 흙더미는 흡사 성난 바다라도 된 듯 세차게 출렁이고, 떨치듯 일어난 먼지 가루가 정원의 중심을 덮는다. 이 성대하고도 파괴적인 풍경에 모두가 호흡을 잊었다. 사방에서 구경하던 클랜원들도, 화살을 쏜 두 저격수도. 잠시 후, 자옥한 연기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일렁거리며 나타났다. 놀랍게도, 김수현은 두 발로 땅을 디딘 채 서 있었다. 처음 서 있던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 이윽고 조금씩 연기가 걷히자 누군가 전율에 찬 탄성을 질렀다. 임한나가 발사한 광채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다만 익숙한 검 네 자루가 허공에 꽂힌 듯 박혀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긴 화살 하나가 김수현의 왼손에 잡혀 있다는 게 진정 놀라운 일이었다. 눈 몇 번 깜빡이기도 전에 종료된 전투. 공방의 수준은 무척이나 높아 구경하러 모인 대다수의 클랜원들이 제대로 지켜보지 못했다. 그러나 고연주, 남다은, 차소림, 허준영 등등 몇 명만큼은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김수현이 손짓하자 주변에서 네 개의 검이 살아 있는 듯 움직이더니 광채를 쳐내 소멸시켰다. 이어서 반 박자 늦게 들어온 선유운의 화살을 왼손으로 가볍게 잡아챘다. 말인즉 단 두 번의 손짓으로 회심의 일격을 받아낸 것이다. 이유정의 희생을 바탕으로 노렸던 나무랄 데 없는 저격이다. 그러나 김수현의 대응이 완전히 상식을 벗어났다. 차라리 회피했다면 모를까. ‘절대 피하지 않고 받아낸다.’ 는 명제로 생각한다면? 그 누구도 자신할 수 없을 터. 툭, 김수현이 손에 쥔 화살을 떨어트렸다. 마침내 전투에 가까운 대련이 끝났다. “으아아아….” 집중해서 지켜보던 안현이 질렸다는 얼굴로 털썩 주저앉았다. 아마 여기 있는 대부분이 비슷한 심정이 아닐까. 그러나 정작 신기에 가까운 일을 이루어낸 장본인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인다. 무심한 눈이 실처럼 가늘어지고 주변을 둘러보는 눈동자는 은은한 분노를 흩뿌린다. 천천히 떼어진 김수현의 입이 고요한 정적을 깨트렸다. “아무 의미 없이 돌진했다가 곧장 나가떨어진 한 명.” 엄중한 음성에 한쪽 구석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신재룡이 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누구를 말하는지는 안 봐도 명백하다. 가장 첫째로 나가떨어진 사용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별 웃기지도 않은 능력 한 번 쓰고 지쳐 헉헉거리는 한 명.” 무릎을 짚고 허리를 숙인 채 숨을 고르던 임한나가 움찔 몸을 떨었다. “우왕좌왕하는 동료는 안중에도 없고, 어떻게든 한 발만 먹이겠다. 전장 조율은커녕 꽁꽁 숨어서 기회만 노리던 한 명.” 망연히 서 있던 선유운이 질끈 입을 짓씹었다. 이윽고 김수현의 눈이 주저앉아 있는 이유정을 향했다. 아직도 얼얼한지 턱을 매만지는 이유정이 흠칫 몸을 움츠렸다. 마치 야단맞을걸 아는 아이처럼. “뭘 계산하고 움직였는지는 알겠는데…. 의도는 나쁘지 않아. 그런데 실전에서는 그렇게 나서지 마라. 죽기 딱 좋은 움직임이니까.” 그러나 김수현의 입에서 처음으로 비꼼이 아닌 칭찬이 나왔다. 아니. 칭찬이라 볼 수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비난은 아니었다. 이유정은 환하게 웃으려다가 황급히 표정을 수습했다. 본인도 알고 있는 것이다. 1등급을 기대한 수험생이 3등급을 맞는 것과 6등급인 줄 알았던 수험생이 4등급을 맞는 건 엄연히 다른 일이니까. 시선을 거둔 김수현은 다시 세 명을 차례대로 노려봤다. “고작 이따위로 하려고, 클래스를 계승하겠다고 한 겁니까?” 이따위. 그 어느 때보다 강도 높은 비난이다. 그러나 신재룡, 임한나, 선유운은 살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차마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 당시 김수현은 이렇게 말했다. 고연주, 남다은, 허준영을 뛰어넘을 자신이 있으면 가져가도 좋다고. 한데 뛰어넘기는커녕 김수현을 한 발짝도 물러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변명할 여지도 없는 결과이지 않은가. 더 강해지기를 바랐는데 더 약해졌다. 입이 열 개라도 유구무언이다. 챙! 칼날이 시원스레 칼집에 꽂히는 소리가 울렸다. 잠시 후. “쯧…. 이래서야…. 그놈들을 어떻게 상대하려고….” 혼잣말을 중얼거린 김수현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입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선유운 : ㅅㅂ. 존나 지가 사기인 건 생각 안 하고. 김수현 개객끼. 임한나 : 그니까. 조연 버프가 어떻게 주인공 버프를 이겨? 말도 안 돼. 신재룡 : 에휴휴휴…. 이유정 : B 등급~! B 등그으읍~!(?) 0810 / 0933 ---------------------------------------------- 단, 대비는 가능할 것이다. 현재의 북 대륙은 과연 어느 정도 수준일까? ‘대륙’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구 북 대륙에서 얻어낼 수 있는 성과는 대부분 얻어냈다 봐도 무방하다. 대 도시 바바라는 물론, 일반 도시 프린시카, 헤일로, 모니카, 파멜라는 매우 높은 수준의 안정화를 이루어냈다. 북부 소 도시 뮬이 미진하기는 하나, 애초 미개척 지역과 맞닿아 있는 지역이니 어쩔 수 없다. 신 북 대륙 아틀란타의 상황도 엇비슷하다. 강철 산맥을 공략하고 워프 게이트를 뚫은 이후, 선발대는 물론, 구 북 대륙에서 활동하던 전투 사용자의 대다수가 넘어왔다. 북 대륙과 강철 산맥 공략 경험을 발판 삼아, 그 어느 시절보다 활발한 탐험 활동을 벌이고 있다. 아직 안정화라는 말을 꺼내기는 시기상조지만, 안정화됐다고 볼 수 있는 데까지 이르는 속도가 날로 가속이 붙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허면 ‘성’은 어떠한가. 중앙 도시를 관리하는 중앙 관리 기구를 기준으로, 동 도시는 이스탄텔 로우 클랜, 서 도시는 (구) 북부 연합, 남 도시는 머셔너리 클랜, 북 도시는 해밀 클랜이 관리하고 있다. 서로 감정의 골이 깊어 클랜 간 반목하는 현상은 옛날 일이 됐다. 머셔너리 클랜이 부상하고 중앙 관리 기구가 출범한 이후로, 각 도시의 관계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회복됐다. 천지가 뒤바뀌지 않은 이상 해밀과 머셔너리가 서로 등을 돌릴 일은 없다. 이스탄텔 로우는 머셔너리 출범 이후 시종일관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중이고, 구 북부 연합도 딱히 배타적인 행동은 취하지 않는다. 그럼 ‘내부 현황’은? 발전 상황은 썩 괜찮다. 네 개의 외(外) 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내(內) 도시도 발전을 마쳤다. 첫 발견 때 낡고 추레한 외관은 온데간데없고, 깔끔하게 정돈된 신 도시로 부활했다. 기본 베이스가 탄탄할수록 사용자들의 여타 활동이 편해지는 건 자명한 일이다. 이러한 관점들을 종합해보면 북 대륙은 현재 아틀란타를 안정화할 만한 역량이 충분하며, 나날이 강해지고 있다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좋게 보면, 여기까지다.’ 탕. 가볍게 책상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책상에 얹은 손가락이 마치 피아노 치듯 간헐적으로 책상을 두드린다. 일견 무의미해 보이는 행동이지만, 일종의 버릇이라 봐도 좋다. 깊은 생각에 잠겼을 때 종종 나오는 김유현의 습관이다. ‘단순히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라면 지금도 나쁘지 않겠지. 하지만….’ 그렇다. 천년만년 홀 플레인에서 살 것이라면 현 상황은 더할 나위 없다. 그러나 최종 목적이 ‘지구로의 귀환’이라면 얘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현재의 순항에 마냥 앞일을 자신하기에는, 과거의 사정을 들은 김유현으로서는 앞으로 맞이할 미래에 의문이 일었다. 탁 까놓고 말해서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냥 공략만 하면 되는 거라면 왜 김수현이 지금껏 원정 얘기를 꺼내지 않는 걸까. 조금 무리를 한다손 쳐도 제로 코드만 가지면 모든 게 끝나는데. 결국에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밖에는 없다. 이뿐인가. ‘악마’를 생각하면 다가올 앞날은 더 어둡다. 악마를 언급했을 때의 김수현은 그야말로 치가 떨린다는 듯이 말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만만한 놈들은 아닐 터. 이렇게 여러 방해물과 현 상황, 그리고 과거 1회 차의 사용자들을 맞물려 생각해보면 걱정이 아니 들 수가 없는 것이다. 쥐도 궁지에 몰렸을 때 고양이를 문다고 했다. 그러나 악마는 쥐가 아니다. 그래서 더 무섭다. 어떤 미친 짓을 꾸밀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데, 실제로 이룰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럼 과연 악마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고 맞부딪쳤을 때, 북 대륙은 1회 차 시절의 역량을 보일 수 있을까? 대답은 ‘아니오.’. 악마가 출현해 활동하면 ‘원정’이 아닌 ‘전쟁’이 될 가능성이 높다. 두 단어는 의미상 엄청난 차이가 있다. 북 대륙은 ‘단체’로 행동한 횟수가 극히 적다. 바바라 공략, 아틀란타 공략, 그리고 3년 전 연합군과의 전쟁을 예로 들기에는 경험이 너무 부족하다. 특히 강철 산맥을 공략하면서 문제점을 여실히 절감하지 않았는가. ‘이대로는 안 된다.’ 그래서 김유현은 변화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이대로 가만히 흘러가는 대로 놔두기에는 불안하고, 모든 걸 김수현한테 맡기기에는 동생이 안쓰럽다. 최소한 사정을 아는 자신이라도 도와야 한다고, 김유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춘추 전국 시대’의 재현을 계획하는 건 아니다. 그건 정말 멍청한 짓이니까. 여하튼 의도적으로 전쟁을 조장할 수 없는 이상, 다른 방향으로라도 최대한 전투 경험치를 높여야 한다. 그래서 비밀 도서관 내 기록의 3분의 2를 공개하겠다고 했을 때 내심 기뻤다. 혹여 독식한다 하면 어쩌지 심려했으니까.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한참 부족하다. 현재 북 대륙에 가장 필요한 건 사용자든 클랜이든 앞장서서 선도할 수 있는 존재다. 몇 년 전 바바라 공략을 이끌었던 황금 사자의 클랜 로드처럼. 말인즉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소리다. 물론 이에 관한 계획은 이미 어느 정도 세워둔 상태였다. 김수현은 그냥 조건 없이 비밀 도서관 내 기록을 공개하라고 했지만, 김유현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이용할 수 없을 기회였다. 더구나 북 대륙 수호자가 공석인 지금이 외려 최고의 호기가 아닐까. ‘수현이한테는 조금 미안하지만….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 김유현은 기나긴 한숨을 흘렸다. 돕겠다고 한 주제에 어쩌면 더 큰 짐을 지우는 건지도 모른다. 허나 아무리 고민하고 생각해도 대신할 수 있는 사용자가 떠오르지 않는다. 1회 차를 직접 겪고 정상에 오른 김수현이 최고의 적임자였다. 귀환의 첫걸음을 내디딜 준비는 이미 끝났다. 하지만 그전에…. ‘일단 운은 띄워놔야겠지.’ * 어쩌면 과거에 ‘빙하의 설원’은 공략됐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마 관 안쪽 기록을 발견하고, 조용히 여인을 깨우고, 그렇게 이후의 일을 처리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돌아와서는 혹여 누군가의 실수로 악신이 부활할 걸 염려해 일부러 탐험 기록을 적당히 조작했다던가. 이게 아니라면 내가 읽었던 탐험 기록과 실제로 겪었던 경험의 간극을 도저히 설명할 도리가 없다. 어쨌든 악신은 소멸했으니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정작 중요한 건 고대 악신이 부활한 과정이다. 처음에는 나와 안솔의 실수로 깨어난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후 업적 보상 메시지를 확인했을 때 ‘프로세르피나’ 라는 이름이 출력됐다. 물론 아주, 매우 잘 아는 이름이다. 루시퍼 휘하의 악마 14 군주인데 어찌 모르겠는가. 아마 프로세르피나를 제물로 고대 악신의 부활을 도모했으리라. 그래서 머리가 아프다. 악마 14 군주를 제물로 사용했다는 건 놈들도 벼랑 끝까지 몰렸다는 방증일 터. 허나 그렇다고 마냥 안심할 수만도 없다. ‘한 가지 꼭 명심해야 할 건, 미래는 결코 생각대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대 악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나조차도 놈들의 마수를 피하지 못하고 의도대로 움직이고 말았다.’ ‘차후 언제 어디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겠느냐.’ ‘단, 대비는 할 수 있겠지.’ 백 번 옳은 말이다. 안솔의 행운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상자를 열지 않았다면 진정 꿈에도 몰랐을 일이다. 게헨나의 말대로, 다음에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곳에서 일을 벌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미래를 비틀 수 없다는 말을 이런 뜻일 테고, 그래서 대비하라고 경고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대비하려니 막막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당장 며칠 전 종합 대련만 봐도 그렇다. 실력을 올리라고 각성 시크릿 클래스를 넘겼는데, 외려 실력이 떨어졌다. 지금 이 상태로 악마와 맞붙는다면? 아니. 악마는커녕 최상급 마족도 버겁다. 그나마 중급이나 상급 마족은 어찌어찌 잡으려나. “후우우우….” 사실 비단 우리 클랜원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객관적으로 말하면 ‘천하무쌍’ 공찬호도, ‘철혈의 여왕’ 한소영도, ‘뇌제’ 형도. 과거의 모습과 차이가 없다면 거짓말이리라. 얻은 게 있으면 잃은 것도 있는 법. 시간상 이득은 얻었다고 하나, 이래서야 춘추 전국 시대를 건너뛴 게 후회된다. 아무튼, 장비든 영약이든 클래스든 다 좋은데, 무엇보다 실전 경험이 절실하고 또 간절하다. 어디서 마족, 아니 비슷하기라도 한 괴물 수백 마리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 주지 않으려나. 그럼 좋은 전투 경험을 쌓을 수 있을 텐데. “그럴 리가 없지.” 픽 웃음을 터뜨린 나는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흘끗 밖을 쳐다보니 중천의 해가 슬슬 저물려는 폼을 잡는다. 계속 고민해봤자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약간 이른 시간이기는 하지만, 나는 문을 나서 지하 공중 목욕탕으로 걸음을 옮겼다. 근래 대련으로 몸을 많이 움직이기도 했고, 뜨거운 물에 땀을 빼고 나오면 복잡했던 머리가 상쾌하고 개운해지는 기분이 그만이다. 그러나. “…….” 옷을 벗고 목욕탕으로 입장한 찰나, 나는 멈칫 걸음을 정지하고 말았다. 선객이 있다. 희뿌연 수증기로 가득 차 있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탕 안에는 정하연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이 시간에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생각해보니 물(水)과 친화력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종종 이용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 “수현…?” 부르는 소리에 언뜻 정신이 돌아왔다. “어떻게…?” “미안합니다. 설마 선객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아, 아니에요. 제가 너무했죠. 요즘 너무 전용으로 사용해서….” “괜찮습니다. 수련의 일환인데요. 아무튼,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약간 아쉬운 마음으로 몸을 돌리려는 찰나, “아. 그, 그냥 들어오셔도 괜찮은데….” 정하연의 모기만 한 음성이 들렸다. “그래요?”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같은 탕으로 풍덩 몸을 빠트렸다. 정하연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걸 보니 아마도 예의상 꺼낸 말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볼 거 안 볼 거 다 본 사이니 괜찮지 않을까. “으, 으응….” …아무래도 안 괜찮은 모양이다. 한참의 침묵이 흐르는 동안, 정하연은 몸을 한층 깊숙하게 담그거나 손으로 가슴을 가리는 등, 내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였다. 목욕탕 열기 때문에 그런지 모르나 뺨에도 발그레한 홍조가 어렸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당연한 반응인데, 눈 둘 곳을 몰라 하며 부끄러워하는 정하연이 돌연 신선하다고 느껴졌다. 적어도 선율이나, 이유정이나, 제갈 해솔보다는 훨씬 정상적이잖아. 정하연을 봐서 그런 걸까. 아니면 뜨거운 물에 뼈를 녹이니 기분이 풀린 걸까. 불현듯 복잡하던 머릿속이 편안히 가라앉는다. 나도 모르게 말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정령 소환 수련의 진척은 어떤가요?” “…네? 아, 정령이요?” “예. 사라 씨한테 들어보니, 하연 씨가 한 발 앞서 하급 정령을 소환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던데. 꽤 분해하더라고요.” “아…. 벌써 들으셨네요.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닌걸요.” 정하연은 살포시 웃으면서도 겸손히 대답했다. “혹시 궁금하시면, 보여드릴까요?”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게 기쁜 걸까. 시종일관 흐르던 어색한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사그라졌다. 정하연의 태도도 약간 변화했다. 아름다운 푸른 눈을 반짝이며 무언가 기대하는 눈초리로 묻는다. 마주 웃으며 머리를 끄덕이자 정하연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주문을 영창 했다. 우웅! 잠시 후, 탕 물이 요요히 솟아오르며 모종의 형상을 이루기 시작한다. 성인 남성의 팔뚝만 한 그것은 이윽고 상반신은 여인의 형태로, 하반신은 물고기의 형태로 뭉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시퍼런 인어라고 해야 하나. 표면은 젤리처럼 말랑말랑해 보이나, 외관은 꽤 아름답다. 게다가 크기를 보니 중급 정도 되는 것 같고. 물의 정령이야 과거에 질리도록 봤지만, 하급이 아닌 중급을 소환했다는 사실을 나를 순수히 감탄하게 하였다. “대단하군요. 전혀 하급 정령처럼 보이지는 않는데요?” “후후. 실은 중급 정령이에요. 사라 씨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 정하연은 자신을 멀거니 쳐다보는 정령을 슬슬 쓰다듬으며 눈을 찡긋했다. 물의 정령은 계속 쳐다보기만 하더니 돌연 정하연의 품으로 폭 안겼다.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것이 서로 상당히 친해 보인다. 나는 혀를 내둘렀다. 정말로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다. 나름 불(火) 계열 마법에 조예가 깊으며, 게헨나와 나의 도움을 받은 사라도 아직 소환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한데 정하연은 홀로 중급 정령까지 소환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정하연이 물과 친숙하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지만, 그래도 도대체 얼마나 노력하고 또 노력한 걸까. 짐작이 가지 않는다. “하연은 정말…. 노력의 천재 같군요.” “천재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노력하는 건 당연하지요.” “음?” “첫 만남부터 저를 믿어준 수현인데, 제가 어떻게 안주할 수 있겠나요. 그건 배신이죠.” “배신이요…?” “아…. 말이 조금 그랬나.” 그때였다. “…수현. 있잖아요.” 무어라 말할까 고민하던 찰나, 문득 정하연이 힘껏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저는 한 번도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천재는 해솔 씨 같은 사용자에게나 어울리는 말이죠.” 흠. 확실히 제갈 해솔이 비상한 마법사이기는 하다. 나는 등을 기대며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언제부터일까요…. 문뜩 어느 순간부터 제가 정체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고대 마법에 관한 지식이 너무나 부족했죠. 보고 익힐 책이 없으니 그때부터 막막해지는 거 있죠?” “그게 왜….” “그런데 제갈 해솔 씨는 정말…. 글쎄 0년 차라는 사용자가, 스스로 마법을 창조하더라니까요? 그걸 보면서 얼마나 놀랐던지.” “으음.” “사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방황하는 동안, 저도 모르게 자괴감이 생긴 것 같아요. 푸른 달의 마도사는 내가 아니라 이런 사용자가 계승해야 했는데. 이런 생각마저 들었죠.” 갑자기 이야기가 깊어졌다. 그러나 나는 화제를 돌리지 않고 적당히 맞장구만 쳤다. 정하연의 고요한 목소리가 흡사 속내를 털어놓고 죄를 고하는 고해성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여태껏 하고 싶었던 얘기를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물의 결정을 달라고 한 겁니까?” “네. 한 번 정령 쪽으로 돌파구를 찾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솔직히 욕심이었죠. 세상에 시크릿으로 듀얼 클래스라니. 아마 좋은 소리는 못 들었을 거예요.” “…….” “하지만, 수현은 저를 믿고 제 요청을 허락해줬어요. 그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정하연이 잠시 말을 흐렸다. 나는 침잠한 분위기를 전환할 요량으로 일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좋았겠죠. 사용자가 새로운 클래스를 계승하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니까요. 하하.” “…아니요. 그것보다는, 아찔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죽기 살기로 파고들었던 것 같아요. 만일 이번에도 성과를 내지 못하면, 수현의 옆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순간, 돌아온 회답에 어째서 숨이 멈춘 걸까. 느닷없이 가슴이 뜨끔하기도 했다. “아니, 하연. 무슨 말을 그렇게….” “후후.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뭐, 그만큼 절박하기도 했지만요.” 너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가볍게 받아넘긴다. 목소리도 도로 청아해졌다. 정하연은 돌연히 정령을 번쩍 안아 올렸다. 무에 그리 기분이 좋은지, 정령은 꼬리지느러미를 팔락~팔락 흔들었다. “이러니저러니 말을 길게 했지만…. 그냥, 저를 믿어준 수현에게 어떤 식으로든 보답하고 싶었어요. 그 마음이 제일 컸던 것 같네요.” 보답…. 이라. “원래는 최상급 정령을 소환하고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살그머니 눈을 내리자 지혜로운 빛을 뿌리는 한 쌍의 눈이 시야로 들어온다. 자신감으로 가득 찬 눈동자는 예전의 영리함을 되찾았다. 예쁘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래도 흡족해하시는 모습을 보니 저도 기쁘네요.” 정하연은 근 1년간 본 기억이 없는 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작품 후기 ============================ 예. 다음 회부터 새로운 에피소드에 들어갑니다. 아마 남 대륙, 악마의 이야기가 나오기 전, 북 대륙의 마지막 에피소드로 보시면 되실 듯합니다. :) PS. 아래는 석양s 님이 요청하신 진수현의 사용자 정보입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진수현(3년 차) 2. 클래스(Class) : 주문 저격수(Secret, Spell Sniper, Master) 3. 소속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S Zero) 5. 진명 • 국적 :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7) 7. 신장 • 체중 : 181.2cm • 78.6kg 8. 성향 : 열혈 • 푼수(Hot Blood • Idiot) [근력 92(+2)] [내구 87] [민첩 96] [체력 89(+4)] [마력 93(+2)] [행운 88]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 포인트입니다.) < 업적(4) > < 고유 능력(1/1) > 1. 검기상인(劍氣傷人)(Rank : B Plus) < 특수 능력(1/1) > 1. 경기공(硬氣功)(Rank : S Zero) < 잠재 능력(3/3) > 1. 백병전(Rank : A Plus Plus Plus) 2. 검(劍)의 승리를 노래하는 칼(Rank : C Plus) 3. 마(魔)의 패주를 음영하는 칼(Rank : C Plus) < 최근 능력치 비교 > 1. 전 : [근력 91(+2)] [내구 85] [민첩 96] [체력 86(+4)] [마력 92(+2)] [행운 87](Total : 537 Point) 2. 후 : [근력 92(+2)] [내구 87] [민첩 96] [체력 89(+4)] [마력 93(+2)] [행운 88](Total : 545 Point) < 권능(1) > 1. 무효화(無效化) (항마 능력. 마법 공격에 관해서는 ‘무조건’ 발동하는 마법 저항 능력입니다. 마력 능력치 75 포인트 이하서 발생하는 마법 행사를 무조건 100% 방어합니다. 마력 능력치 85 포인트 이하서 발생하는 마법 행사를 무조건 80% 경감합니다. 마력 능력치 90 포인트 이하서 발생하는 마법 행사를 무조건 50% 경감합니다.) 0811 / 0933 ---------------------------------------------- 복수를 다짐한 밤. 그렇게 말한 정하연은 돌연히 정령이 칭얼거리자 “그래그래~.” 달래며 등을 토닥거렸다. 그 모습을 나도 모르게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오묘한 기분이다. 무언가 기껍다고 느끼면서도 볼 낯이 없는? 아니. 표현이 잘못됐다. 기쁘면서도 미안하다. 그러나 편안하다. 나는 그제야 내가 미소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그만 돌아갈까? 응? 싫어? 다시 높이 들어달라고?” 정하연이 도로 정령을 번쩍 들어 올리자 가려져 있던 앞모습이 활짝 개방됐다. 새삼 육체 요소요소가 새로이 눈에 들어온다. 우선은 얼굴. 백설(白雪)을 연상케 하는 흰 뺨에 살며시 스민 홍조가 몹시 곱다. 총명하게 빛나는 바다색 눈동자는 은은히 어른거리는 수증기 덕분인지 신비로운 기운을 뿌리고 있다. 또 탐스럽게 익은 붉은 입술은 어떠한가.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걸린 미소는, 일견 장난스러워 보이면서도 차분함을 잃지 않아, 흡사 대갓집 규수 같은 고아한 자태를 자아낸다. 이뿐일까. 혀로 핥아 침을 잔뜩 묻히고 싶어지는 청초한 목덜미. 난만하게 떨어지는 우아한 어깨선. 이윽고 수면에 절반쯤 잠긴, 먹음직스럽게 부푼 젖가슴까지 내려간 찰나, 나는 비로소 분신이 힘찬 기지개를 켰음을 인지했다. 탕의 열기와는 별개로 더운 기운이 치솟는다. 전신의 혈액이 신체의 한 부분으로 몰리는 것 같다. 식도가 바짝 타는 듯한 느낌. 살짝 숨을 토하자 한숨이 탄식처럼 흘러나왔다. 느닷없이 왜 이러는 걸까. 일전에 사라가 남긴 얼룩이 간간이 신경 쓰이기는 했는데. 설마 그게 기폭제가 된 건가? 모르겠다. 뺨, 입술, 쇄골, 가슴…. 그냥 어디 한 군데라도 좋다. 당장 한 입 베어 물지 않는다면 뻥 터져나갈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잇따라 고이는 침을 삼키며 살금살금 수면을 가로질렀다. “그래? 이렇게 들어주면 기분 좋은 거야? 그렇구나.” 정하연이 가까워질수록 상상은 점차 망상으로 돌변했다. 정하연의 저속한 모습을 보고 싶었다. 저 고상한 얼굴이 야하게 변하고, 정숙한 몸을 상스럽다 여길 만큼 허덕거리게 하고, 입은 천박한 교성을 지르다가 종래에는 나를 껴안고 엉엉 울부짖게 하고 싶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괜스레 기대하게 된다. “후후. 수현. 얘 좀 봐요. 너무 귀엽지 않아요?” “사랑스러워요.” “그렇죠? 들었니? 네가 사랑스럽대.” “아니요.” “…네?” “걔 말고. 하연이요.” 첨벙! 그 순간 정령이 갑작스럽게 떨어져 물에 부딪혔다. 정하연은 두 손을 들어 올린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리고 3초 후 눈동자만 움직여 나를 보더니 한 번 더 놀라는 빛이 번졌다. 어느새 정하연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하연.” 침착히 몸을 일으키자 정하연이 헉 기함했다. 꼿꼿이 발기한 남근을 봤는지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어, 엄마!” 차마 말을 잇지 못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그 모습은 외려 활활 불타는 짚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었다. 나는 정하연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양팔을 덥석 잡았다. 부드러이 잡아당기자 미미한 저항감이 느껴졌다. “수, 수, 수, 수현! 여기는….” “상관없잖아요. 아무도 없는데.” “하, 하지만….” “하연. 제발….” “아…. 안 돼!” “……!” 탁, 정하연이 세차게 나를 밀쳤다. 그리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저항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다. “하, 하연?” “저, 저 오늘은…!” 뭘 말하고 싶은지 입을 달싹였으나 결국에는 입을 짓씹는다. 너무나 미안해하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던 정하연은, 곧 정령을 끌어안고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찰박찰박 물 젖은 바닥을 밟는 소리가 들리자 간신히 이성이 돌아왔다. “하연! 미안….” 탕.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문 닫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 아마 실수한 게 있지 않을까.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조금은 망연한 기분에 휩싸일 즈음, 돌연 닫혔던 문이 도로 조심스레 열렸다. 떠난 줄로만 알았던 정하연이 살그머니 고개를 보였다. 낯을 잔뜩 붉힌 채 눈은 정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다. 한참을 고뇌하던 정하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 수현…. 그게…. 수현이 싫다는 게 아니라요….” “…….” “제가 요새 너무 수련에만 신경 쓰느라…. 지금 얼굴이나 몸이나 다 엉망이고….” “……?” “별로 예쁘지가 않아서…. 그, 그러니까….” “…….” “제가 최소한의 준비는 끝내고…!” “……?” 띄엄띄엄 말을 잇던 정하연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도망쳐버렸다. 기척은 빠른 속도로 후다닥 멀어졌다. 나는 머리를 갸웃하고 말았다. 최소한의 준비는 끝내고…? * “후유유유….”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웬 한숨 소리가 나를 반겼다. 흘끗 왼쪽을 쳐다보니 구석진 곳 탁자에 힘없이 앉아 있는 여인이 보였다. 비비앙이 깨작거리며 음식을 먹고 있다. 입맛이 없는데 억지로 먹는 것처럼.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은 차치하고서라도 돌연 걱정이 솟구쳤다. “세상에. 비비앙이….” “우와. 저녁 드시러 온 거예요?” 문득 낭랑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제갈 해솔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다. 비비앙과는 반대로 얼굴에 살맛 난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의자에 앉아 마주 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노래를 부른다. “유부유부유부유부~.” “남이라고만 해보시죠.” “…초밥!” “…….”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노래를 마치는 제갈 해솔. 참 한심하다. 애도 아닌데 저렇게 놀고 싶을까? 아니면 나이를 똥구멍으로 처먹은 건가. 겉보기에는 신비로움의 극치인데 가끔 하는 짓거리는 영락없는 어린이다.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물었다. “한데 쟤는 또 왜 저러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응? 아~. 비비앙 씨요? 저도 아까 물어봤는데 마력 문제인 것 같아요.” “마력?” “네네. 소환 진은 어느 정도 해결한 것 같은데 마력이 부족하다고 한숨을 계속 내쉬네요. 사실 바보 같은 걱정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힘내라고 조언 좀 해주고 왔어요.” “오. 어떤 조언을…?” “마력이 부족하면 마력을 올리면 되잖아? 이렇게요.” …비비앙이 죽상인 이유가 있었구나. 왜. 아주 그냥 ‘내 마력은 102 포인트인데~.’ 자랑이라도 하지그래. 그나저나 비비앙의 고민은 예삿일은 아닌 것 같다. 상위 군단을 부를수록 소환에 필요한 마력이 늘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특히 1, 2, 3 군단은 마력 증강(增強) 현상이 굉장히 심하다고 들었다. 아니면 게헨나 말대로, 수나의 영향으로 마수가 한층 강력해질 거라 하니 소환에 필요한 기초 마력이 늘어날 가능성도 있고. “비비앙의 마력 능력치가 어느 정도 되려나….” 웬만하면 도와주고 싶다. 비비앙이 더 강한 마수 군단을 소환할 수 있다면 그만큼 든든한 일도 없을 테니까. 시간을 투자할 가치는 충분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떻게 마력을 올리려나. 해봤자 영약이나 장비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그때였다. 한창 생각에 잠겨 있을 즈음, 식당 문이 벌컥 열렸다. 곱게 차려입은 하녀 한 명이 나를 보며 잰걸음으로 달려온다. 그리고는 뜻밖의 말을 전했다. 형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이른 저녁이기는 하지만, 왜 이 시간에 찾아왔는지 궁금했으나 어쨌든 4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집무실에는 형이 소파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잖아?” 형이 나를 보자마자 건넨 첫마디는 뜻 모를 말이었다. “괜찮아 보인다니?” 책상 의자에 앉으며 반문하자 형이 이상한 미소를 짓는다. “나는 또 네가 이별에 힘들어하고 있을 줄….” “그만, 그만!” 신경질적으로 손을 젓자 형이 웃음을 터뜨렸다. 젠장. 이제는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다. 정작 장본인은 가슴에 잘 묻고 살아가는 중인데. 왜 주변에서 못 물어봐서 안달인지. 나는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뭔 일인데.” “아니. 그냥 안부나 물으러 왔지.” “보다시피 잘 살고 있으니까….”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봐?” 흠. 가끔 생각하는 건데 형은 나를 너무 잘 아는 것 같다. 하기야 원체 날카롭기도 하지만. “고민까지는 아니고. 마력 영약을 구해볼까 해서.” “마력 영약이라….” 그 순간 형의 입에 미소가 스쳤다면 착각일까. 그러나 곧 생각에 잠긴 체하더니 느릿하게 머리를 젓는다. “일반적으로 쉽게 구할 수 없는 물품이기는 하지. 아니면 구할 방법이라도 있는 거야?” “우선 밤의 거리에 가보려고.” “밤의 거리? 아, 경매장?” “그렇지.” “글쎄. 정말 드물게 매물이 올라온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힘들지 않겠어? 그리고 설령 올라온다손 쳐도 경쟁도 해야 하잖아. 아주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텐데.” “으음.” 회의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사실 맞는 말이기도 했다. 애초 ‘능력치’와 관련된 영약은 거의 매물에 뜨지 않는다. 그나마 장비는 간간이 올라오기는 하지만 대다수가 귀속된 상태라서 별 쓸모도 없고. “내가 너라면 차라리 탐험으로 노려볼 것 같은데?” 물론 그 방법도 생각했다. 그때 갑자기 형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책상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품에서 기록 한 장을 꺼내놓았다. “이거 한 번 봐봐.” 뭔가 하고 봤더니 내용이 고어로 적혀 있었다. 비밀 도서관 내 기록이었다. “이걸 왜 나한테 줘?” “수현이 너. 요새 바깥세상에는 아예 관심도 없나 보네.” 응. 지금은 우리 클랜 앞가림하기도 힘든 상황이거든. 나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여하튼 형은 약간 놀리듯이 말하고는 한 번 더 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번에는 약간 두툼한 기록 더미였다. “이건 우리 클랜원이 작성한 보고서야. 조금 두껍기는 하다만 한 번 시간 날 때 읽어봐.” “이걸 내가 왜….” “일단 읽어봐. 읽어보면 알게 될 거야. 얘기는 그 후에….” “……?” 불현듯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부자연스럽다고 해야 하나. 시종일관 미소 짓고 있는 것도 거슬린다. 형이 나를 잘 아는 만큼 나도 형을 알고 있다. 저렇게 실실 웃고 있다는 건 속으로 꾸미는 게 있다는 소리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실눈을 뜨고 형을 노려봤다. 그러나 내 시선을 태연히 받아넘기며 외려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짓는데…. 솔직히 좀 얄밉다. 뭐, 좋다. 뭘 꾸미는지는 모르겠지만 응해주지 못할 것도 없다. 형의 속내를 낱낱이 파헤쳐주도록 하지. “어?” 그때 빙글빙글 웃던 형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수현아. 너 그거 뭐야?” “그거?” “오른손에 반지. 처음 보는 반지인 것 같은데.” “아….” 매, 매의 눈이로군. 설마 이걸 발견한 줄은 몰랐어. “하하. 그냥….” “그냥?” “상대의 최소한 준비를 대비한 카운터 공격이라고 할까….”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어색이 웃으며 오른손을 내렸다. 이번에는 형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본다. 그러나 사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그, 그렇잖아. 아무리 형이라도 차마 밤을 대비한 ‘정(精)의 반지’라고는 말 못해. * 머셔너리 캐슬 2층. 마법사 사무실에는 김한별이 당황한 얼굴로 정하연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건의 시작은 정하연이 돌아온 점심쯤일까. 갑자기 빨개진 얼굴로 자리에 앉더니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물론 업무를 보는 게 이상한 건 아니다. 정작 문제는 바로 업무를 대하는 태도였다. 호랑이에게 쫓기는 것도 아닌데 여느 때보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업무를 처리해버리는 것이다. 이것도 하면서 저것도 하고. 어찌나 손을 빠르게 놀리는지 아수라(阿修羅)가 강림한 거라 해도 김한별은 믿을 자신이 있었다. 이뿐인가. “언니. 이번에 머셔너리 아카데미로 들어가는 예비 사용자들….” “응. 거기 놔둬.” 이제는 숫제 쳐다보지도 않고 말한다. ‘바쁜 일이라도 있으신 건가?’ 조심스레 기록을 놓은 김한별이 연신 고개를 갸웃하며 몸을 돌릴 즈음. “아. 한별아.” 불현듯 정하연이 김한별을 붙잡았다. “네. 언니.” “혹시 옷 좀…. 아, 얘 거는 가슴이 좀 끼겠네.” “…네?” “아니. 혹시 보석 가루 좀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최대한 야한 빛깔, 아니 빨간빛으로.” 바로 말을 돌리기는 했지만, 김한별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정하연이 자신의 가슴을 슬쩍 보더니 아쉽다는 표정을 지은걸. “에…. 루비 가루 정도야 얼마든지요.” “고마워. 그럼 내 책상에다 놔줘?” 그렇게 말한 정하연은 기록을 탁탁 치며 가지런히 하고 곧바로 사무실을 나섰다. “언니….” 망연히 방문을 쳐다보던 김한별은 언뜻 눈을 내리뜨며 가슴 부분을 살폈다. 불룩하지 않고 밋밋한 옷자락이 눈에 들어온다. 이윽고 침착히 자리에 앉은 김한별은 책상에 조용히 고개를 묻었다. 잠시 후, 어깨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김한별을 울렸음에도 정하연의 기행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폭주라는 말이 옳으려나. “연주 씨! 저 옷 하나만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옷이요? 하지만 제 옷이래 봤자….” 고연주의 방에도, “한나야. 너 향유(香油) 가지고 있지? 그거 조금만 빌려 쓰면 안 되니?” “응? 향유요?” 임한나의 방에도, “다은아. 네 속옷을 구경하고 싶어.” “…언니?” “속옷 좀 보여줘. 승부할 수 있는 걸로.” “……언니?” 남다은의 방에도. 세 여인의 방을 고루고루 거쳐 옷과 향유는 물론, 기어코 승부 속옷까지 약탈(?)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날 밤. “이상해.” 고연주는 늦은 밤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하연이 자신에게 옷을 빌려 갔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그 모범생이? 그런 옷을 입는다고?” 보통 옷이라면 그냥 잊고 넘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하연이 빌려 간 옷은 안이 훤히 비치는 캐미솔(Camisole)이었다. 평소의 정하연이라면 입기는커녕 쳐다보지도 않았을 터. “아무래도…. 배신자의 냄새가 나는데.” 결국 고연주는 침대를 박차 몸을 일으켰다. 신속에 가까운 속도로 숙소를 벗어나 순식간에 4층으로 올랐다. 그리고 정적이 흐르는 고요한 복도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복도는 조용했지만 은근한 마력이 느껴졌다. 사일런스 필드(Silence Field) 마법이 집무실을 빈틈없이 감싸고 있었다. 이게 뜻하는 바는 명백하다. “호…. 호호….” 어둠 속 잿빛 눈동자가 번쩍 안광을 뿌렸다. “호호호호!” 사일런스 필드. 그런다고 고연주가 못 들어갈쏘냐. 고연주의 다음 행선지는 정원이었다. 김수현의 집무실에 테라스가 있다는 걸 기억해낸 것이다. 그러나. “…….” 정원에서 4층을 올려다본 순간 고연주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철썩…! 철썩…! 아스라이 들려오는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 “어엉…. 어어어엉….” 서글퍼 우는 게 아닌, 쾌감을 이기지 못해 흐느끼는 음란한 소리. 테라스에는 이미 두 남녀가 한창 정사(情事)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대담하게도 야외 노출 플레이를 하는 것이다. 캐미솔은 이미 절반 이상이 찢겨 있다. 정하연은 거의 알몸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가슴과 양팔은 겨우 난간에 걸치고, 엉덩이를 비스듬하게 돌린 채 개가 오줌 싸는 자세처럼 오른 다리를 하늘 높이 들었다. 정확히는 허벅지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 억지로 잡혀 올려져 있었다. 김수현이 힘차게 허리를 돌릴 때마다 난간 아래를 향하는 가슴이 덜렁덜렁 흔들린다.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젖가슴을 타고 젖꼭지에서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몹시 색정적이다. “어헝…? 어허어엉…? 어, 어, 어, 으아아아아아아앙!” 절정이 왔는지 정하연은 갑작스레 괴성을 지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미 성교가 시작된 지 꽤 시간이 흐른 모양이다. 도대체 얼마나 정액을 마신 걸까? 군살 없던 배는 동글게 부풀었고, 굵은 남근에 찢어질 듯 틀어 막힌 음부에서는 허연 액이 역류하다 못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리는 중이다. “아악…. 아하아악….” 초점 잃은 눈으로 밤하늘을 쳐다보던 정하연의 고개는, 이내 고장 난 인형처럼 아래로 꺾였다. 허나 그런 와중에도 하부에 힘을 주고는 스스로 엉덩이를 흔들고 있다. 마치 더 박아달라 애원하는 듯한 모습이 평소 정숙하던 태도는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수컷에 정복당한 암컷만이 남아 있을 뿐. “아아아앙!” 이윽고 남근이 힘차게 쑤셔 박히자 쾌감에 겨운 교성이 밤바람을 타고 멀리 퍼졌다. 그리고. “하연 씨가….” 한참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고연주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벼르고 벼르던 야외 노출 플레이를 선점당했으니 기운 빠질 법도 한데, 외려 두 눈은 시퍼런 불길을 이글거리고 있다. “호호…. 재밌네…. 그래도 설마 설마 했는데….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 정말 재밌어….” 그렇게 나직이 혼잣말을 중얼거린 고연주는 곧 서서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훗날의 복수를 다짐하며. 이로써 ‘Someday Fivesome’의 여인 동맹은 오늘 밤 완전하게 깨졌다. 그러나 고연주는 알고 있을까. ‘S.F’의 첫 배신자는 정하연이 아닌 남다은이라는 사실을. ============================ 작품 후기 ============================ 로유진 : 여기, 베드 신 입니다. 독자 A : 음…. 베드 신은 오랜만이군. 어디 한 번 볼까. 로유진 : 오늘 베드 신은…. 독자 A : 아아. 그래그래. 음…. 독자 A : 하, 말도 안 나오는 군. 독자 A :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오늘 베드 신엔 아주 큰 문제가 있어. 로유진 : (흠칫.) 독자 A : 바로 내가 이걸 이제야 비로소 볼 수 있었던 점이 그러하네. 로유진 : 감사합니다! 리더(Reader)! 독자 A : 일찍이 느끼기는 했지만 신 고자의 명성은 여전하군. 로유진 : 죄송합니다. 리더. 독자 A : 아니. 내 말은 너무 충격적이어서 고자가 될 뻔했다는 소리였어. 로유진 : (잠깐 갸웃한다.) 로유진 : 감사합니다. 리더. 독자 A : 물론 나 말고 너. 로유진 : 리, 리더. 죄송하지만. 제 베드 신이 마음에 드셨다는 건지 아닌지 잘 모르겠어요. 독자 A : 잘 모르겠다고?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독자 A : 당장 조아라를 떠나! 앞으로 여기서 연재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로유진 : (ㅜ.ㅠ)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리더. 독자 A : 왜냐면…. 독자 A : 넌 당장 세계 최고의 소설 사이트에서 베드 신을 연재할 실력이거든. 로유진 : (헤벌쭉) 감사합니다! 리더! 독자 A : 단, 그 사이트가 지구에는 존재하지 않겠지만 말이야. 로유진 : ……. (시무룩) 0812 / 0933 ---------------------------------------------- 공지사항입니다. .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오늘 공지를 적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오라 며칠간 연재를 쉴 예정입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2월 12일(목요일) ~ 2월 15일(일요일). 이렇게 총 나흘 동안만 쉬겠습니다. 현재 체력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새벽 집필과 아침 연재가 이어지다 보니 머리나 몸이 무거울 적이 많아요. 우선은 생활 리듬부터 바로잡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꽤 오랫동안 업데이트 시간이 이상해졌습니다. 조금 빨라졌다 싶으면 다시 느려지고. 그러다 일주일 간격으로 휴재. 근 한두 달 동안 이런 현상이 반복되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저 스스로 자정 업데이트를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현재는 아침 업데이트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코멘트로 하던 예고도 그만두게 됐고요. 문득 생각해봤는데 무언가 잘못됐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원래는 한 이틀만 쉴 생각이었으나 제가 2월 14일(토요일), 15일(일요일)에 걸쳐 마산에 내려갔다 와야 합니다. 설날에 가는 걸 주말로 당겨서 가는 건데, 제사 문제로 일찍 가게 됐습니다.(너무 힘들어서 이번에는 안 가면 안 되겠느냐고 슬쩍 말씀 드렸다가 아버지한테 혼났습니다. ㅜ.ㅠ) 쉬는 동안에는 뜰, 밀린 쪽지 답신, 그리고 어지러운 생활 등을 정리할 생각입니다.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고, 2월 16일(월요일)에 연재를 재개하겠습니다. 기다려주시는 분들에게는 정말로 죄송합니다. 부디 독자분들의 너른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_(__)_ 0813 / 0933 ---------------------------------------------- 거자필반(去者必返). 발칸 왕국의 수도를 점령한 지도 며칠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아침에 포로의 신음을 벗 삼아 일어나고, 밤에 발칸 국민들을 약탈하는 광경을 구경하자니 진정 통쾌하기 그지없다. 선대의 숙원을 이룬 지금, 하루하루가 꿈결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러나 아직 완벽한 복수를 했다고는 볼 수 없다. 수도를 샅샅이 뒤져도 간악한 발칸 가(家) 놈들의 모습이 도통 보이지가 않는다. 아마 우리가 도착하기 전 수도를 버리고 도망친 것 같은데. 그러나 추적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어젯밤, 기슭 부근에서 은신처로 보이는 입구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방향은 동쪽. 거리는 수도에서 이레 정도. 이제부터 남은 쓰레기를 완벽하게 청소해보고자 한다. 『아틀란타 비밀 도서관 ‘발칸(Balkan) 왕국 멸망사 - 진중일기(陣中日記)’ 中』 * 따뜻한 아침 햇살이 눈을 포근히 눌러 덮는다. 좀 더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습관처럼 눈이 떠졌다. 살짝 몸을 뒤척이자 고슬고슬한 감촉이 느껴졌다. 정하연이 내 가슴에 고개를 묻은 채 품에 안겨 곤히 잠들어 있었다. 고이 눈을 감고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은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 새하얀 나신은 산뜻한 햇살을 받아 눈 부신 빛이 흐른다. 그 빛에 이끌려 정하연의 배꼽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는 어젯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몰래 이불을 들치자 약한 지린내와 밤꽃 내음이 뒤섞인 냄새가 코를 찔렀다. 새하얗고 청결하던 침대 시트는 연속된 절정을 이기지 못한 정하연의 요실금(尿失禁)에 싯누렇게 얼룩졌다. 살며시 벌어진 둔부 사이로 흰 딱지가 덕지덕지 묻은 음부가 보인다. 사실 깨끗하다고 할 수는 없는 광경이나 이런 낭자(狼藉)한 모습도 몹시 사랑스럽다. 남근에 금세 신호가 왔지만, 가까스로 가라앉혔다. 새벽 동안 내 요구에 충분히 부응해줬는데 아침 댓바람부터 괴롭힐 수는 없으니까.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오른 약지에 낀 정(精)의 반지를 쓰다듬었다. 어젯밤에는 반지의 덕을 톡톡히 봤다. 무려 10만 GP라는 거금을 들였으나 하나도 아깝다 느끼지 않을 정도였다. 특히 사용자의 체력 능력치에 비례해 성능이 상승한다는 점이 만족스럽다. 이 반지만 있으면 앞으로 두려울 게(?) 없다. 아무튼, 오늘은 유난히 머리가 개운하고 몸도 거뜬하다. 나는 테라스로 걸어나가 상쾌한 아침을 만끽했다. 왠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다. 그때 문득 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아. 기록이 있었지.”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형이 놓고 간 기록 더미를 품에 챙겼다. 왜냐면 집무실 안에만 있기는 너무 아까운 날씨였으니까. 가끔은 정원에서 업무를 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좋아. 그럼 우선 정하연을 깨우고, 같이 씻고, 같이 내려가 식사부터 해야겠다. * “사멸 무저갱이라….” 기록을 읽은 후 무심코 중얼거렸다. 아마 현재는 정확한 명칭이 붙지 않았을 것이고 1회 차에서 기록에 적힌 유적을 그렇게 불렀다. 사멸 무저갱(死滅 無底坑). 쉽게 말하면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 같은 구렁텅이라 볼 수 있다. 일종의 지하 미궁으로 봐도 무방하다. 물론 이건 사용자들의 입장에서 평가한 유적이고 역사적으로 보면 조금 많이 다르다. 이 무저갱에 얽힌 설화는 꽤 살벌하다. 약 일천 년 전 두 왕국이 전쟁을 했고, 그 결과 한 왕국이 패배했다. 아니. 수도까지 함락당했으니 멸망이라고 봐야 하나. 좌우간 전쟁에 패배한 왕국 왕족들의 말로는 뻔하다. 참수 또는 노예. 이게 아니더라도 일생을 굴욕적으로 살아야 했을 것이다. 사멸 무저갱은 바로 그러한 경우를 대비해 건설된 일종의 지하 보호 기관이다. 말인즉 피난을 위한 은신처라고 할까. 내부로 들어가면 길은 엄청나게 복잡하고 온 사방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과장 하나 안 보태서 조금만 길을 잘못 들어도 바로 황천행이다. 아마 안전한 길은 왕족 중에서도 소수만이 알고 있었겠지. 그 당시 승리한 왕국의 지휘관은 은신처 입구까지는 용케 발견한 모양이다. 그리고 당연히 추적대를 구성해 무저갱으로 들여보냈고, 결과는 모두 전멸. 정확히는 소식이 끊어졌다고 나와 있으나 어차피 그게 그거. 그때 들어간 병사만 수천 명, 난 다 긴다 하는 전문가까지 합치면 거의 일 만에 가까운 인간이 무저갱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가히 무시무시한 유적이 아닌가. 실제로 사멸 무저갱은 ‘용이 잠든 산맥’이나 ‘야만 왕의 무덤’과 비슷한 악명을 자랑할 뻔한 곳이었다. ‘뻔했다.’ 는 건 결국에는 사용자들의 손에 공략됐다는 소리다. 그것도 상당히 어이없는 방법으로. 여하튼 약간 요행의 수라고는 해도 공략 방법은 알고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터. 그러나 형의 속내는 여전히 짐작이 가지 않는다. 뭘 원하는지는 알겠다. 형은 내가 이 유적을 공략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해밀 클랜원이 작성했다는 보고서를 읽어본 결과, 현재 사멸 무저갱 유적은 암암리에 드러난 상태였다. 아직 초기라 그런지 용이 잠든 산맥만큼 악명은 쌓이지 않은 듯하나, 알고 있는 사용자들이 소수 있기는 한 모양이다. “왜?” 객관적으로 보면 썩 나쁘지 않다. 공략 방법도 알고 있겠다. 왕족의 은신처니 보상도 패키지(Package)로 쌓여 있겠다. 거리도 무지하게 가깝다. 탁 까놓고 말해서 그냥 나들이 가는 기분으로 다녀오면 된다. 사실 형이 내게 좋지 못한 의미로 수작을 부린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아마 딴에는 내게 도움이 되려고 하는 거겠지. 한데 시원하게 말하지 않는 건…. 글쎄. 아마 극비로 진행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으려나. 결국에는 다녀와야 알 수 있다는 건가. “제갈 해솔이 있으면 이레 안에 가능할 것도 같은데….” 겸사겸사 비비앙의 마력 영약도 구하고 말이지. 좋아. 정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삐앙.” “응?” 한참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 갑자기 발목에 미세한 통증이 느껴졌다. 흘끗 아래를 내려다보자 내 발목을 꼭 물고 있는 날개 달린 작은 생명체가 보였다. 또, 또. 이 빌어먹을 아기 페가수스 녀석. “놔라. 인마.” “삐삨….” …이놈이? 문득 걱정이 들었다. 가끔 생각하건대 이놈은 스스로 페가수스라는 자각이 없는 듯하다. 그게 아니고서야 툭하면 살금살금 다가와 물어 재낄 리가 없잖은가. 발을 두어 번 흔들어봤으나 놈은 요지부동이었다. 결사적으로 항전하며 내 발목을 놓지 않았다. 어디 한 번 해보자는 뜻에서 팔을 내뻗자 이번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물었다. “…….” 가만히 손을 들어 올리자 놈은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나를 노려봤다. 배은망덕한 놈. 이럴 줄 알았으면 알에 있을 때 프라이를 해먹을 걸 그랬어. “클랜 로드!” 그렇게 한창 실랑이를 하는 와중 돌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운 채로 눈만 돌리니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조승우가 보였다. 기분이 편안해서 그런지 저런 모습을 봐도 딱히 걱정은 들지 않는다. “거기 계셨군요!” “무슨 일입니까?” “큰일입니다!” “오호. 큰일이라.” 나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큰일이 아니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으로 눈동자에 힘을 줬다. 그러자 조승우는 주춤 걸음을 멈추더니 떨떠름히 말을 정정했다. “아, 제 입장에서는 큰일이지만 클랜 로드 입장에서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요. 무슨 일입니까.” 조승우는 쓰게 웃고는 바로 용건을 꺼냈다. “신 코란 연합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 아틀란타 동 도시. “그걸 돌려보내시면 어떡해요! 저랑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언니! 진짜로 안 받으실 거예요? 네?” “5%라니까요? 5%!” “아 정말~!” 이스탄텔 로우 클랜 하우스에서는 때아닌 고성이 연달아 터져 나오고 있었다. 박다연은 양손을 꼭 쥔 채 필사적으로 외치고, 한소영은 책상에 앉아 ‘너는 짖으렴. 나는 일할래.’ 라는 말을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아주 가끔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게 딴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 제발. 쫌. 언니도 아시잖아요. 요즘 우리 재정 상황 엄청나게 별로인 거요. 근래 원정 장려 정책으로 한 달에 들어가는 돈만 지금….” 이제는 숫제 애걸하다시피 말하는 박다연이었으나 한소영은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언니!” 결국 참다못한 박다연이 두 손으로 책상을 쾅 치며 도끼눈을 떴다. 한소영의 눈에 빛이 번뜩였으나 물러서기는커녕 입에 거품을 물었다. “설명해주세요! 납득하기 전까지는 계속 빽빽 소리 지를 거예요!” “뭘?” “뭘? 뭘? 뭘 이라고 하셨어요 지금? 얼마나 많은 돈을 거절하신 건지 아세요? 밤의 거리에서 5%면 어느 정도인지 계산이 안 되세요?” “…다연아.” 박다연은 힘껏 숨을 들이켜고는 팔짱을 끼며 턱에 힘을 줬다. 씩씩거리는 모양새가 단단히 벼르고 찾아온 게 분명하다. 한소영은 눈을 감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 돈은 받을 수가 없어.” “왜요?” “남 도시 밤의 거리와 관련해서 생겼던 충돌은 기억하니?” “당연하죠.” “그게 어떻게 해결됐는지는?” “알아요. 형부가 해결해줬다면서요.” 한소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박다연은 볼을 불룩하게 부풀렸다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정정했다. “알았어요. 머셔너리 로드가.” “…그래. 머셔너리 로드가 우리 산하 클랜이 숟가락을 얹도록 배려해주셨단다. 즉 머셔너리 클랜으로서는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한 셈이지.” “그런데요?” “그런데요가 아니지. 그 사건만 해도 우리는 머셔너리 클랜에 빚을 진 것과 진배없어. 그런데 5% 이익까지 받자고?” “그게 어때서요. 우리가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쪽에서 주겠다는 건데. 그냥 고맙게 쓰면 되는 거 아녜요?” “준다고 어떻게 냉큼 받니. 사람이 염치라는 게 있는데.” “아니. 염치는 뭔 놈의 염치에요. 그리고 남편이 벌어온 돈을 마누라가 좀 쓸 수도 있지….” “박다연!” 탕, 성난 고성과 책상을 치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한소영으로서는 드문 감정 표현이다. 박다연은 어깨를 찔끔 움츠렸다가 아랫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죄송해요. 아무튼, 절대 받을 생각은 없다 이 말씀이시죠?” “그래. 나가.” “네. 나가죠. 근데 이거 하나는 알아두세요. 이스탄텔 로우의 재정을 담당하는 이상, 제게 허락된 권한 내에서 저도 제멋대로 행동할 거니까요.” “뭐?” “다른 클랜에 가서 구걸을 하든, 창관에 가서 몸을 팔든!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야 하니까! 상관도 하지 마시라고요!” “박….” 쾅, 한소영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 박다연은 문을 세게 닫고 나갔다. 한소영은 한껏 가늘어진 눈으로 문을 응시하다가 기나긴 한숨을 흘리며 책상에 고개를 묻었다. 서서히 힘이 풀리는 두 눈동자에는 착잡한 기색이 역력하다. 기실 현재 한소영의 심경이 복잡한 이유는 하나였다. ‘그럼…. 저는요!’ 일전에 한소영은 김수현 앞에서 한 번 제대로 성질을 냈다. 그냥 어쩔 수 없었다는, 홀 플레인인데 뭐 어떠냐는 등 구차한 변명 한 마디라도 좋았는데. 한데 변명은커녕 그 여인과 아이를 상처 입히기 싫다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울컥하고 말았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한소영은 그 당시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잘은 모르겠지만, 왠지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아.” 그때를 떠올리자 무언가 참을 수가 없는지 눈이 질끈 감기고 발은 의미 없이 허공을 휘젓는다. 내가 왜 그랬을까. 도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 그때였다. “아?” 이불 대신 책상 아래를 쿵쿵 발로 차던 와중, 불현듯 발목에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얼른 아래를 내려다본 한소영의 눈이 살짝 치떠졌다. 크기는 새끼 고양이 정도일까. 등에 날개를 붙인 노란 동물이 발목을 물고 있다. “너는…?” 언제 들어왔는지는 모른다. 삐쭉한 두 눈은 대차게 노려보고는 있지만, 딱히 악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위험한 동물은 아니라 판단했는지 한소영은 팔을 뻗었고, 그 동물은 덥석 손을 물었다. “…….” 약한 아픔이 느껴지기는 했으나 참을만한 수준이다. 한소영이 빤히 바라보며 손을 들어 올리자 그 작은 동물이 피식 웃는다. 마치 너 따위가 나를 어쩌겠느냐는 듯이. 그렇게 한참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한소영이 돌연히 입을 열었다. “그래.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삐?” 작은 동물이 눈을 찡그렸다. 알아듣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인간의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물론 한소영도 알고는 있다. 단 갑갑한 가슴을 털어놓을 상대가 필요했을 뿐. 마침 말 못하는 동물이니 제격이지 않은가. “내가 그때 화를 낸 게 잘못한 일이었을까?” “삐?” “머셔너리 로드는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삐?” “머셔너리 로드도 참 너무하시지. 내가 가는데 붙잡지도 않고. 이후로 한 번도 찾아오지 않더라. 아마 그 여인이랑 깨를 볶고 있겠지? 그렇겠지?” “삐?” “세상에. 그분이 나를 동경한데. 내가 뭘 그리 잘났다고.” “삐?” “혜림이가 그러는데 사내는 동경하는 여인을 한 번쯤은 정복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 나는 꽤 일리 있는 의견이라고 생각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삐?” “사실 5% 준다는 거 일부러 거절한 거야. 그럼 그분이 한 번쯤은 찾아오실 거 같았거든. 왜냐고? 몰라. 그냥 보고 싶어서. 그런데 먼저 연락하기에는 자존심 상해.” “어, 언니.” 그때였다. “그리고…?” 한창 혼잣말을 잇던 한소영이 흠칫 몸을 떨었다. 갑자기 ‘삐?’ 가 아닌 ‘언니.’ 라는 말소리가 나왔다. 그것도 익숙한 음성이었다. 설마 눈앞의 동물이 말을 했을 리는 없고. 잠시 후, 한소영의 고개가 삐걱삐걱 문 쪽을 돌아본다. 문은 어느새 한 뼘 정도 열려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벌어진 문틈에는, “우우우욱….”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미친 듯이 어깨를 떠는 박다연과, “…….” 김수현이 멍한 눈으로 한소영을 쳐다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우선은,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휴재를 하기 전에는, 로유진 : 요, 욕먹겠지? 욕먹을 거야. 미움 받을 거야! 어, 어떡하지? 이랬는데. 휴재 공지를 올린 후에는, 독자 A : 몸은 좀 괜찮으신지요. 독자 B : 아프시면 쉬셔야지요. 기다리겠습니다. 독자 C : 흥! 명색이 사내가 그리 골골대서나 말이야! 내, 내 코멘트나 보고 얼른 나으라고! 독자 D : 알겠습니다. 너무 걱정 마시고, 편히 쉬다 오시길. 로유진 : …처, 천사? 혹시 천사 님들이신가요? 이렇게 변했습니다. 너른 양해 보여주신 점 다시 한 번 깊이 감사 드립니다. 덕분에 사흘 동안 나름대로 정리하고 잘 쉬다 온 것 같습니다.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아요. 무엇보다 생활 리듬의 완화가 가장 큰 수확일 듯싶습니다. 이 상태 그대로 연재를 재개하도록 하겠습니다. VIVA! :) 0814 / 0933 ---------------------------------------------- 거자필반(去者必返). 믿을 수가 없는 일이 벌어졌다. 선발대로 보낸 오백의 병사가 모조리 소식이 끊겼다. 무려 열흘을 기다렸는데도 어떤 연락도 들려오지 않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아틀란타 비밀 도서관 ‘발칸(Balkan) 왕국 멸망사 - 진중일기(陣中日記)’ 中』 * 눈이 마주친 순간에도 한소영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감정은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예의 무표정한 얼굴. 그러나 잠시 후, 한소영의 낯빛이 갑자기 시시각각 변하기 시작했다. 한소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도도를 손에서 떼어내고는 아무도 없는 정면을 무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한소영의 낯은 붉어졌다가 창백해지기를 자꾸자꾸 반복했으며 동시에 무형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범람해 방 안을 휩쓸었다. 기운은 명백한 살기를 띠고 있었다. 나는 확실히 느꼈다.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은 한소영의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말하지 말라고, 어떤 말도 꺼내지 말라고. 무어라 입을 여는 순간 여기 있는 모두를 죽이고 자기도 죽어버릴 거라고. “머, 머셔너리 로드흐흐흐흐…. 어, 어서 안으로힠힠힠….” 한소영이 말은커녕 미동도 보이지 않자 박다연이 대신 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했다. 권해준 건 고맙다만 애가 눈치가 없다. 어떻게든 웃음을 참으려 하는 기색이 역력한데 말은 이미 웃고 있다. 머리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몸은 정직한 모양이다. 문득 박다연은 짝 소리가 날 정도로 양 뺨을 세게 쳤다. 그리고 순식간에 근엄한 표정을 짓더니 긴 숨을 흘리며 나를 안내했다. “후우우우…. 머셔너리 로드. 이쪽에 앉으시죠.” “예. 감사합니다.” 음. 이제 좀 진정된 건가. 내가 소파에 앉자 박다연은 몸을 돌려 다시 한소영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리고 언니느흐흐흐흐흐흐흫….” 다시 낄낄대기 시작했다. “아, 죄송합니다. 실례합니다.” “…….” “…클랜 로드? 오늘 머셔너리 로드는 총 두 안건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두 안건?” 마침내 한소영이 입을 열었다. 시침 뚝 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이다. 그러나 그걸 보는 박다연의 눈은 이미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네헤헤헤. 두 안건이요호오.” 목소리도 떨려 나왔다. 위험하다. 위험해. “뭔데?” “흐아느아느은(하나는)…. 우, 우리가 현재 준비 중인 실종 의뢰에 관한 일이고요.” “…….” “그리고 남은 하나는…. 언니도 아시다시피…. 밤의 거리와 관련한 5 퍼센트흐흐흐~! 히힣히힝~! 흐힝헹헹~!” 아, 망했다. 잘 참는가 싶더니 또 터졌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기는 했지만, 이제는 숫제 허리까지 꺾으며 숨넘어갈 듯이 끅끅거린다. 한소영의 안색은 어느새 핏기가 싹 가셔 살 색이 아닌 투명해 보일 지경이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사용자 박다연. 안내는 괜찮으니 이만 나가셔도 좋습니다.” 박다연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들썩이는 어깨춤과 함께 방을 나섰다. 이내 문이 닫힐 소리가 들릴 무렵, “푸흐히힝힝흐히힝!” 말 우는 소리와 비슷한 웃음이 복도를 왕왕 울렸다. 잠시 후, 한소영은 원망과 수치심이 뒤섞인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흑 수정 같은 눈동자가 그렁그렁하게 일렁이는 것이 꼭 눈물이라도 쏟을 듯한 모양새다. 날카로운 숨소리가 귓가로 선명하게 들려온다. 억울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으려 무진 애를 썼다. 빌어먹을 박다연. 수습할 자신이 없으면 조용히 나가던가. 이게 뭐야. …그나저나 어떻게 해야 하나. 곰곰이 생각해봐도 별다른 뾰족한 수는 생각나지 않는다. 결국, 지그시 눈을 감고 살짝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우선, 사과부터 하자. 다시 눈을 뜨니 한소영이 살짝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의외라는 눈빛. 무언가 의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해명을 요구하는 듯한 시선에 나는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그때 한소영이 찾아온 것부터 시작해 게헨나가 최면을 걸었던 일까지.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아….” 설명이 끝나자 한소영은 작은 탄식을 터뜨렸다. 내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가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초감각’이라는 능력이 있는 이상 한소영은 이야기 속 심정을 액면 그대로 느꼈을 테니까. “그런가요. 그래서….” 한소영은 서너 번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턱을 들어 한결 나아진 얼굴을 보였다. 한소영치고는 약간 과한 감정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경직된 분위기가 점차 풀려가는 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머셔너리 로드의 말인즉, 그때 제 행동이 이상했던 건 오롯이 최면의 영향이다. 이 말인가요?” “예. 저도 한 번 조종당할 뻔한 적이 있지요. 최면을 통해 일종의 강력한 암시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거죠. 굉장히 무서운 능력입니다. 저도 물론이고, 누구도 저항하지 못했을 겁니다.” “음. 그 정도로….” “그저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머셔너리 로드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한데 그 말씀대로라며 방금 말들도 최면의 영향을 받았다는 뜻이 되네요. 그럼 이해가 가네요.” “예? 아니요. 그건…. 아, 예 예. 맞습니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지요.” 한소영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가 황급히 말을 정정하니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팔짱을 끼며 고요한 눈으로 책상을 내려다봤다. 깊은 생각이 잠긴 모습을 보니 무언가 안심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저게 원래 한소영의 모습이다.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나, 겉으로 흔들리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나였다면 이불을 뻥뻥 차는 것도 모자라 당장 죽고 싶었을 텐데. 저 정도로 평정을 유지하는 걸 보니 손뼉이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다. “궁금하네요. 그분이 왜 저한테 최면을 거신 걸까요?” 오호. 반 억지로 말을 넘기고 바로 화제를 전환해 일을 묻으려는 건가. 이건 배울만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혹시 한 번 물어봐 주실 수는 있나요?” “그건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요?” “게헨나는 지금 이 차원에 없으니까요. 한 달도 더 전에 수나와 함께 원래의 차원으로 돌아갔습니다.” “……!” 그 말을 꺼낸 순간 한소영이 살짝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동시에 주먹을 꽉 쥐는 게 보였다. 그러나 눈을 한 번 깜빡이자 손은 책상에 곱게 얹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잘못 본 듯싶다. “어째서…?” “뭐, 여러 사정이 있었습니다. 원래 이 차원에 머무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거든요.” “…다시 소환될 가능성은요?” “글쎄요. 천운과 기적이 합쳐지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한소영은 잠시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더니 돌연히 손을 들어 하품을 하는 도도의 등을 손바닥으로 부드러이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섬섬옥수가 간드러지게 턱을 간질이고 날개를 살며시 어루만진다. 도도도 한소영도 기분이 좋아 보인다. 특히 도도는 콧노래라도 부를 기세였다. “좋네요.” “예?” “이 아이요. 페가수스는 처음 보거든요.” “아. 사실 저도 신기합니다. 원래는 제 몸에 손도 못 대게 하는 놈인데, 이스탄텔 로우 앞에서는 얌전하게 있네요.” 한소영은 새삼스런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페가수스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흘려 지나가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별로 아무렇지도 않으신가 봐요?” “……?” “그분이 떠났는데…. 마치 남 이야기하듯이 느껴져서요.” “하하.”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설마 한소영한테까지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남까지는 아니지만…. 그냥 서로 다름을 인정했을 뿐입니다.” “?” “게헨나는 자신의 차원에서 이뤄야 할 오랜 숙원이 있습니다. 저 또한 제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이루고자 하는 원대한 목표가 있고요. 게헨나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돌아갔으니 저 또한 그럴 예정입니다.” “음, 으음.” 여태껏 시종일관 고개를 끄덕이던 한소영은 느닷없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턱을 주억였다. 무언가 대단히 만족스럽다는 것처럼. 문득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한소영이 뛰어갔을 때는 앞으로 어떻게 얼굴을 보나 걱정했는데, 우리는 어느새 태연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예전처럼, 언제나 그래 왔듯이. 이제 어느 정도 기분도 풀린 것 같으니 슬슬 본론을 꺼내도 될 듯싶은데. “이스탄텔 로우 로드. 아까 사용자 박다연한테….” “산기슭 근처의 입구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우리도 원정을 준비하고 있어요.” “역시 그랬군요.” “네. 보아하니 머셔너리 클랜에서도 그곳의 원정을 준비하고 계신 것 같은데….” 그랬다. 암암리에 소문이 떠돈다는 건 ‘사멸 무저갱’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용자들이 소수나마 있다는 소리다. 설마 벌써 공략됐을 리는 만무하고, 아마 한창 어려움을 겪고 있을 터. 대표 클랜에 구출이나 실종 의뢰가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특히 유적과 가장 가까운 동 도시라면 더더욱. 현 상황인즉 서로 원정을 준비하는 장소가 겹치고 있다. 그래서 이스탄텔 로우를 찾아온 것이다. “잠시만요. 말을 하기 앞서, 한 가지 대답을 듣고 싶은 게 있어요.” 갑자기 한소영이 이야기에 제동을 걸었다. 자세를 바로 앉더니 지긋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당연히 머셔너리 로드도 아시겠지만…. 저희도 나름 정보를 수집해본 결과, 내부적으로 그 유적이 그리 쉽지는 않은 곳이라 결론을 내린 상태예요.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썩 가고 싶은 곳은 아니죠.”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 부분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시겠다는 건…. 저희를 위해서인가요? 아니면 머셔너리 클랜을 위해서인가요?” “당연히 후자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부탁을 드리러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나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사실 무슨 의미가 있는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순간, 착각이었을까. 불현듯 한소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한소영은 두 손으로 도도를 안아 들고는 감미로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 한소영과의 대화를 끝내고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아침에 오늘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기분대로 일이 잘 풀렸다. 원정도 양보받았고, 한소영은 5%의 이익을 주겠다는 제안을 뜻밖에도 선선히 받아들였다. 단, 완전히 받는 게 아니라 빌리는 조건이었다. 들어보니 근래 여러 정책으로 사용자들을 끌어당기느라 이스탄텔 로우의 재정이 상당히 어려워졌던 모양이다. 아무튼, 무엇보다 나락까지 떨어진 줄 알았던 한소영과의 관계가 정상으로 회복됐다는 게 가장 큰 수확이다. 머셔너리 캐슬로 돌아온 후, 나는 바로 광장 게시판을 이용해 원정 공지를 띄웠다. 이전과는 다른 게 하나 있다면 사건을 해결하러 가는 게 아닌, 말 그대로 탐험이 목적인 순수한 원정이다. 클랜원들도 그걸 느꼈는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9명으로 제한했던 인원을 전부 모을 수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 가볍게 원정을 클리어하고 형이 하는 일을 지켜보면 된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내일 있을 원정 준비를 차분히 점검하고 조용히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늦은 시간, 이번 원정에 관해 상담할 게 있다며 남다은과 정하연이 동시에 찾아온 일이 있었다. 허나 공교로이 마주친 두 여인은, 서로 어색한 눈으로 한참을 쳐다보고는 어색이 말을 흐리며 돌아갔다. 그런 해프닝만 제외하면 푹 잘 수 있었던 밤이었다. * 청명한 하늘에 구름이 잔잔히 흐르는 맑고 조용한 아침이었다. 머셔너리 캐슬은 원정 출발을 앞두고 조금 어수선했다. 김수현이 장비를 걸치고 1층으로 내려왔을 때는 이미 10명의 사용자가 한 곳에 모여 김수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정 공지를 띄웠을 때 누구보다 빠르게 지원한 클랜원들이었다. 아, 한 명은 빼고. 여하튼 몇 개월은커녕 길어야 열흘 안으로 정리되는 원정이라 그리 신경 써서 준비할 것도 없다. 김수현은 가벼운 차림으로 서 있는 클랜원들을 한 명 한 명 확인하고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모두 모였군요. 제갈 셔틀은?” “뭐요?” 김수현의 등 뒤에 서 있던 여인이 발끈한 음성으로 회답했다. 주변에서 킥킥대는 웃음이 터졌다. 김수현은 싱겁게 웃고는 몸을 돌렸다. “여기 있었네요. 바로 출발하고 싶은데, 좌표 계산은 끝내놨겠죠?” “정말, 그때 좀 놀렸다고 이러기에요? 사내가 좀스럽게.” 이번에도 강제로 끌려 나와서 그런지 제갈 해솔은 썩 달가운 표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연이은 재촉에 이를 박박 갈면서도 차분히 주문을 외웠고, 곧 영롱하고 푸른 마력이 사방에서 점점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잠시 후. 퉁! 세찬 폭음과 함께 푸른 마력에 둘러싸인 11명의 모습이 한순간 사라졌다. 수송 어빌리티. ‘사멸 무저갱’의 원정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와 동시에, 마침내 시작되었다. ‘그 사건’이 터지기 직전, 김수현 최후의 원정이. ============================ 작품 후기 ============================ 사실 마지막 말을 적는데 상당히 많은 고민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꽤 중의적인 표현이거든요. 조금 풀어서 말씀 드리자면, 차후 메모라이즈에서 이런 소소한 원정의 경우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원정의 공백은 다른 소재로 대체될 예정입니다. :) 0815 / 0933 ---------------------------------------------- 비비앙, 뜻밖의 활약. 이번 원정 인원을 김수현 포함 10명이 아닌, 11명으로 수정합니다. 혼동을 드려 죄송합니다. _(__)_ * 첫 선발대로 500명. 두 번째는 1,000명. 세 번째는 1,500명. 네 번째는 3,000명…. 근 두 달에 걸쳐 무려 6,000명의 병사가 저 빌어먹을 은신처에 잡아먹혔다. 승리의 환희도 잠시. 이제는 흉흉한 소문이 떠도는 것을 느낀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애꿎은 병사들을 소모하기보다 이런 건 전문가한테 맡기는 게 나을 테지. 두고 보자. 개 같은 놈들. 잡히기만 하면 갈아 마셔주마. 『아틀란타 비밀 도서관 ‘발칸(Balkan) 왕국 멸망사 - 진중일기(陣中日記)’ 中』 * 제갈 해솔의 수송 어빌리티로 우리는 단숨에 사흘 거리를 도약할 수 있었다. 능력을 최대한도로 사용한다면 조금 더 나아갈 수는 있겠지만 제갈 해솔은 이 정도가 딱 적당하다고 말했다. 동쪽으로 멀리 나가본 적이 없어 좌표에 자신이 없으니 가면서 계산해보겠다고. 여하튼 사흘이라도 충분하다. 우선 오늘 하루는 행군하면서 대기 시간(Cool Down Time)을 기다리고, 이후 한 번 더 도약하면 바로 부근까지 다다를 수 있을 터. 그렇게 생각한 나는 낙낙한 기분으로 앞을 바라봤다. 눈앞에는 맑은 빛을 반사하는 강을 낀 초원이 활짝 트여 있다. 먼빛으로 간간이 오고 가는 캐러밴도 한두 무리 보였다. 어느 무리는 탐험을 나가는지 한창 들뜬 분위기인 반면, 상당히 침체한 빛을 띤 돌아오는 무리도 하나 보였다. 아마 탐험에 실패했거나 동료를 잃었겠지.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현재 선두에서 우리를 선도하는 여인은 임한나였다. 원정으로 감각을 끌어올리고 싶으니 꼭 참가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나쁜 생각은 아니다. 주야장천 틀어박혀 수련만 하는 것보다는 실전 경험이 백 배 도움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아마 저번 대련 이후 나름 느낀 바가 있는 모양이다. 그때 누군가 옆으로 설렁설렁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형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진수현의 목소리였다. 깍지 낀 양손으로 머리 뒷부분을 받치고 팔자걸음으로 걷는 것이 아주 느긋한 모양새다. 예전이었다면 단박에 불호령을 내렸겠으나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애초 가벼운 마음으로 나온 원정이고 이 정도 거리에서 괴물이 나온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또 원체 실력 있는 놈이기도 하고. “뭔데.” “형님이 아까 그러셨잖아요. 내일쯤이면 도착할 거 같다고.” “그런데?” “그럼 수송 어빌리티를 빼고 생각해도 도시와 엄청 가깝게 있다는 소린데. 왜 지금까지 발견이 안 된 거예요? 아틀란타를 공략한 지도 꽤 지났잖아요.” 아하.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나는 다시 앞을 보며 입을 열었다. “간단해. 유적이라고 꼭 눈에 잘 보이라는 법은 없거든.” “예?” “말했지? 이번에 갈 곳은 은신처라고. 그저 그런 은신처가 아니라 고대 왕국이 건설한 은신처야. 왕족의 은신을 목적으로 만들었으니 꽤 심혈을 기울였겠지.” “흠. 그래도 잘 이해가 안 가는데요.” “그리고 발견이 안 된 게 아니라 발견됐어. 떠들썩하게 소문만 나지 않았을 뿐. 알고 있는 사용자들이 없는 건 아닐걸?” “그럼 왜 쉬쉬하는 건데요? 아, 괜스레 사용자들이 몰리는 게 싫어서 그런 건가?” 가끔 보면 얘도 꽤 재밌다. 혼자 묻고 혼자 답을 한다. 조금만 생각하면 스스로 답을 내릴 줄 안다는 소리다. 그 생각이란 걸 하기 싫어해서 그렇지. “그런 것도 있지만, 애초 아는 사람이 적은 이유도 있지.” “응? 또 뭐가 있는데요?” “그 유적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용자가 없거든. 그러니까 그 사용자들의 지인들이 추측만 할 뿐 확신까지는 하지 못한다는 소리야.” “…….” 그러자 진수현이 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을 내리고 깍지를 풀었다. 흘깃 보니 갑자기 낯빛이 진지해졌다.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이 없다…. 그럼 만만한 곳은 아니라는 소리네요.” 나는 소리 없이 긍정했다. 기실 사멸 무저갱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어쨌든 가능하기는 한 일이며 또한 굳이 정면으로 돌파할 필요는 없다. 과거 요행으로 사멸 무저갱을 공략한 사용자가 나왔으니 그 방법을 따라 하면 되지 않겠는가. “형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혹시 용이 잠든 산맥이나 야만 왕의 무덤 같은 곳이라면….” 나는 싱겁게 웃었다. “설마. 그런 곳과는 댈 수도 없지. 아마 빙하의 설원과 비교해도 훨씬 쉽지 않을까 싶다.” “아 그래요?” 그 순간 진수현의 경직된 표정이 탁 풀렸다. “에이 뭐야. 괜히 걱정했네. 그럼 이번에도 형님만 믿고 가면 되겠네요? 헤헤.” 이어지는 밝은 목소리를 들은 순간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걸까. “수현. 무슨 일이에요?” 후방을 보던 고연주가 곧장 다가와 물었다. 나는 간신히 머리를 가로저을 수 있었다. “…아니. 아무 일도 아닙니다.” 나는 입을 다문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떨어졌는지 등 뒤로 진수현과 이유정이 신 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도 형님만 믿고 가면 되겠네요?’ 라는 말이 갑자기 머릿속을 울렸다. 물론 어떤 뜻으로 말했는지는 알 것 같다. 그러나 그걸 당연하다고 여기는 말투가 까닭 없이 언짢다. 비단 진수현만이 아니라 나조차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거슬리는 것이다. 왜, 왜 그렇게 생각한 걸까. 그건 전혀 당연한 게 아닌데. 상념과 함께 동쪽으로 걷자 점차 초원이 사라지며 주변 풍경도 서서히 험난해졌다. 한층 길쭉해진 수풀은 어느새 무릎까지 닿았고, 드문드문 보이던 나무도 아름드리만 한 것들이 한곳에 붙어 출현하기 시작했다. 고요한 강줄기도 차차 굵어지더니 수림 곳곳에서 구부러지며 썩 세찬 물소리를 냈다. 한층 머릿속이 복잡해진 기분이 들었으나 나는 억지로 털어냈다. 우선은 원정에 집중하자. * 원정 계획에 미세한 착오가 생겼다. 다른 게 아니라 제갈 해솔의 수송 어빌리티에 기인한 오착(誤錯)이었다. 원래 대기 시간이 하루에서 이틀 사이인 줄 알았는데 그 시간이 전보다 줄어든 것이다. 게헨나가 알려준 방법을 적용하니 훨씬 부담이 덜해졌다고 하는데 아무튼 나쁜 착각은 아니었다. 외려 환영할만한 일이지 않을까. 어차피 해도 저물어 가겠다. 잠깐 고민하기는 했지만 나는 한 번 더 수송 어빌리티를 사용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오늘 부근까지 도착하고 야영한 후, 내일 바로 들어가는 게 깔끔할 테니까. 강행군을 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리하여 한 번 더 수송으로 도약하고 나서 우리는 적당한 장소를 찾아 야영지를 설치했다. 천막을 짓고 침낭을 펴고 나오니 고소한 음식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느새 완연해진 어둠을 밝히는 모닥불에 다가가 앉자 고연주가 사근사근한 태도로 술을 한 병 꺼내왔다. 약초로 담근 가벼운 술이라고, 식전에 입맛을 돋우는데 좋다고 말하니 도저히 사양할 수가 없었다. 가볍게 목을 넘어가는 느낌도 좋았지만, 혀에 달착지근하게 감기는 맛이 아주 그만이다. 그렇게 고연주가 손수 따라주는 술을 한 잔 두 잔 들이켤 즈음. “수현. 조승우 씨한테서 연락이 왔네요.” 별안간 정하연이 차분히 걸어와 오른쪽에 앉았다. 손에는 이제 막 빛이 꺼진 통신용 수정이 쥐어져 있었다. “오늘 우리가 가는 장소와 관련한 의뢰가 하나 들어왔다고 해요.” “실종 의뢰입니까?” “아니요. ‘미끼’를 조심하라고 하네요.” “미끼…?” 의외의 말이기는 했으나 곧 머리를 끄덕였다. 드물기는 하지만, 미공략된 유적이 있는 장소에 그런 놈들이 있다는 건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니까. “오빠. 미끼가 뭐야?” 그때 앞에서 침을 질질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건너편에는 목울대를 꼴깍꼴깍 움직이는 이유정이 나를, 아니 정확히는 내가 든 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질문한 주제에 저런 모습이라니. 염불은커녕 잿밥에 관심이 있는 게 틀림없다. 쯧쯧 혀를 차며 잔을 내밀자 이유정이 반색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갑자기 주춤하더니 자리에 도로 앉으며 시무룩이 어깨를 늘어트렸다. 옆을 돌아보자 고연주가 활짝 웃는 얼굴로 이유정을 쏘아보고(?) 있다. 이어서 손을 내밀어 내가 내밀었던 잔을 몸소 거두고는 나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나만 마시라는 뜻 같은데. 한 잔 정도는 줘도 괜찮지 않나. 이윽고 고연주는 자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유정아. 미끼라는 건 우리가 미끼가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뜻이야.” “언니 너무하다 진짜. 물론 언니가 담근 술이니 내가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오빠가 준 거잖아.” “발견된 유적에 사용자들이 몰려드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그럼 역으로 그 사용자를 노리는 무리도 생기거든.” “아니. 그게 아니라.” “아, 맞아. 물론 부랑자는 없어지기는 했지.” “아, 아니.” “하지만 정민이가 토벌한 건 뼛속까지 부랑자인 놈들이고. 여기서 말하는 놈들은 평소에는 사용자처럼 생활하다가 돌변하는 놈들을 뜻해. 살인멸구라는 말을 알고 있으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언니 미워.” 이유정은 아랫입술을 삐쭉 내밀고는 가지런히 모은 무릎 사이로 고개를 묻었다. 정하연이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튼, 오늘 밤은 경계를 강화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글쎄요. 놈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우리를 노릴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요.” 오른쪽에 앉은 정하연의 말에 답한 건 왼쪽에 앉은 고연주였다. “에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사자도 토끼를 사냥할 때는 최선을 다한다고요.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방심은 금물이에요.” “그러네. 하연 언니랑 다은이 말이 맞네. 방심, 은 금물이죠. 놈들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 거라 약속, 한 것도 아니니까요. 그렇죠? 연주 언니?” 정하연의 옆에 앉은 남다은의 말에 답한 건, 고연주의 옆에 앉은 임한나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방심’과 ‘약속’이라는 말을 강조하고, 어조 자체도 상당히 가시가 돋쳐 있다. “그런가? 하기야 약속을 철석같이 믿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지. 그러다 뒤통수를 거~하게 맞을 수도 있으니까?” “어머. 이 약주 조금 이상한데요? 어떤 약초를 넣은 거지?” 고연주가 묘하게 말끝을 올리며 옆을 흘기자 정하연은 술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말을 흐렸다. “어머. 설마 이거 그거 아닌가? 사내의 정력을 증진해주는….” “어머. 그게 무슨 상관이죠? 하연 씨가 언제부터 이런 것에 관심을 가졌다고?” “어머. 뭐, 그냥요. 찢어진 이파리를 보니 갑자기 똥 묻은 개와 겨 묻은 개가 생각나서요.” “어머. 그것참 이상한 상상력이네요. 혹시 찢어진 캐미솔처럼 보이지는 않나요?” 돌연히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왼쪽에는 고연주와 임한나가. 오른쪽에는 정하연과 남다은이. 네 여인이 두 편으로 나뉘어 빤히 쳐다보고 있다. 얼굴은 화사한데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다. 마치 서로 웃으며 총질을 하는 느낌이랄까. 그때였다. 담담히 술을 털어 넣는 와중 느닷없이 한 가지 궁금증이 일었다. 마침 약주 덕에 입맛도 돌겠다. 슬슬 배가 고프다. 아까 천막에서 나왔을 때 분명 음식 냄새를 맡았고, 지금도 맡아진다. 한데 항상 요리를 담당하던 고연주, 임한나는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럼 도대체 누가…? “아이고 힘들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 쿵, 돌연 무거운 것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낭랑한 음성이 꼭 누군가와 닮았다. 문득 몇 년 전 악몽이 뇌리를 스쳤다. 축제 때 이 누군가의 음식을 먹고 게거품을 물며 기절했던 선유운이 어른거리며 눈앞에 떠오른다. 나는 속으로 제발 아니기를 바라며 조금씩 눈을 돌렸다. 그러나. “…근원?” 천천히 돌리는 시야로, 땅에 죽은 듯 엎드려 누운 여아가 먼저 눈에 잡혔다. 요리를 준비하느라 더러워진 주변을 차치하고서라도, 미동도 보이지 않는 것이 기절한 게 분명하다. 하하. 초 정보 집합체인 근원도 견디지 못한 건가. “저녁 대령이요!” 이윽고 김이 펄펄 오르는 큰 통을 앞에 두고 생글생글 웃으며 이마를 닦는 비비앙을 확인한 순간, 땡그랑! 나도 모르게 잔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그 사건이라는 건 이번 원정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습니다. 그냥 일종의 분기점이라고 보셔도 무방하실 겁니다. :) 0816 / 0933 ---------------------------------------------- 비비앙, 뜻밖의 활약. 왕국의 지원을 받아 난다 긴다 하는 전문가들을 투입한 지도 어느새 이 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소식은…. 여전히 없다. 근래 수도는 이상스러울 정도로 조용하다. 병사들은 또 자신들이 들어가야 하는 게 아닐까 불안해하고 있으며, 가시적인 성과를 바라는 왕국 수뇌부는 내 지도력을 의심하는 상황이다. 혼란스럽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돼버렸다. 이제 어떻게 하지? 어떻게, 어떻게 해서든 수를 내야 하는데…. 『아틀란타 비밀 도서관 ‘발칸(Balkan) 왕국 멸망사 - 진중일기(陣中日記)’ 中』 * 부글부글! 비비앙이 철통을 들고 온 이후 야영지 일대로 무서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걸쭉한 액체가 잇따라 야단스럽게 끓는 소리뿐. “응? 왜 가만히 있는 거야? 어서 오라니까? 식으면 맛없어!” 탕탕, 국자로 철통을 두드린 비비앙이 생글생글 웃으며 외쳤다.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내심 ‘맛있다!’ 는 칭찬을 기대하는 듯하다. 그러나 과거 비비앙의 음식을 먹고 게거품을 물고 쓰러진 선유운을 생각하면 도저히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물론 괜한 기우일 수도 있다. 어쨌든 겉보기로 큰 문제는 없으며 맛있는 냄새를 풍기니까. 그러나 마냥 좋게 생각하기에는 한쪽에 죽은 듯 쓰러져 있는 근원이 걸린다. 비단 나만 본 건 아닌 듯하다. 몇몇 클랜원의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공포의 빛이 떠올랐으니. 그렇게 대부분이 침묵하고 있었지만, 선뜻 나서는 이가 없는 건 아니었다. “으음~. 스메에엘~.” 진수현이 눈을 감은 채로 코를 벌름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 상대적으로 늦게 가입했다 보니 그때 그 참사(?)를 알지 못하는 모양.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제갈 해솔은 확실히 영리했다. 재빠르게 주변의 반응을 살피더니 반쯤 뗀 궁둥이를 살그머니 도로 붙였으니까. “자. 어디 한 그릇 내놔봐. 내 친히 먹어주도록 하지.” “흥. 건방지기는. 영광인 줄 알라고. 내가 날이면 날마다 요리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야.” 새침하게 말한 주제에 비비앙은 한껏 기뻐하는 태도로 진수현이 내민 그릇에 한 국자 가득히 부어주었다. 문득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 그냥 스치기만 했다. 어쩌면 근원이 쓰러진 게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부질없는 희망이 남아 있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희생양, 아니 실험 대상이 한 명 필요했다. 그래. 어쩌면 한 국자 정도는 먹어도 견딜 수 있을지 모른다. “아 뭐야. 꼴랑 한 국자?” 그때 진수현이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볼멘소리를 뱉었다. “야. 겨우 이거 먹고 떨어지라는 거냐 지금? 배고파 죽겠는데?” 미친놈인가? “아이 참. 욕심부리기는. 더 많이 만들 걸 그랬나?” “보니까 많네. 인간적으로 좀 더 줘라.” “알았어. 알았다고. 많이 먹어~.” “그렇지. 특히 고기 좀 팍팍. 더, 더, 더, 더….” 결국 그릇이 넘칠 만큼 그득하게 받고서야 진수현은 만족한 얼굴로 돌아가 자리에 앉았다. 흐뭇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따끈따끈한 스튜를 응시하더니 은색 숟가락을 들어 푹 꽂는다. 치이이익, 그릇에서 돌연히 검은 연기가 올라왔다. 나는 물론 관찰하고 있던 전원이 몸을 움찔했다. 그러나 진수현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검게 변색한 숟가락을 흡족한 눈길로 응시했다. “이야. 고기가 큼직한 것이 아주 푹 익었구먼? 잘 먹겠습니다!” 큰소리로 외치더니 입을 크게 벌려 숟가락을 입으로 밀어 넣는다. “합.” 입이 닫히는 동시에 여기저기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아. 씨발.” 벙글벙글 한 얼굴이 단 일 초도 지나지 않아 와짝 구겨졌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안 먹는 게 옳은 선택이었다. 진수현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마치 자신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는 듯이. 그러나 다음 순간 갑자기 허리가 꺾이더니 입을 막은 채로 “우웨에엑.” 헛구역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두 손을 고이 모으고 있던 비비앙은 두 눈이 분노로 치떠졌다. “뭐? 씨발?” “아, 아니…. 그게….” “너 방금 씨발이라고 했어?” “자, 잠깐만. 내가 욕을 하려고 한 게 아니라…. 우욱.” 진수현은 아니라는 듯 머리를 흔들다가 또 한 번 허리를 숙였다. 그때였다. 쐐애애액! 전원 중앙에 신경을 집중하는 찰나 돌연 날카로운 파공음(破空音)이 귀를 찔렀다.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날아온 화살이 정확히 중앙으로 파고들었다. 저격이다. 그 찰나의 순간, 흘끗 머리를 든 진수현의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튕기듯 몸을 일으켜 번개같이 검을 뽑아 휘두른다. 카앙! 뻐엉! 진수현은 확실히 자신을 저격한 화살을 쳐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문제는 무언가 요란스럽게 터지는 소리가 이어졌다는 것이다. 둥글게 말려 올라가는 화살 끝에 매달린 터진 주머니서 분분한 분홍 가루가 흩날린다. 어찌나 퍼지는 속도가 빠른지 시야의 하늘이 순식간에 절반 이상 가려질 정도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숨을 멈췄다. “기습입니다. 모두 전투…?” 이윽고 칼자루를 잡으며 힘껏 일어난 순간 이번에는 세찬 열풍이 느껴졌다. 마치 공기가 그을리는 듯한 느낌. 하늘을 올려다보자 이글거리는 불덩이 여덟 개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낙하하고 있었다. 그 순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저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퍼붓는 공격이 아닌 철저하게 계산된 공격이다. 말인즉 저 마법은 우리가 아닌 가루를 노린 공격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곧바로 손을 들어 올렸다. “영역 선포(Area Declared).” 투쾅! 맑은 불빛이 미끄럼틀을 타듯이 내려와 대지로 세차게 내리꽂혔다. 반구형 그릇을 거꾸로 뒤집은 듯한 장막이 한순간 사방을 점거했다. 딱히 이 이상 뭘 하지는 않았다. 이미 내 의도를 알아차린 화정이 영역 안으로 들어온 모든 불(火)의 통제권을 빼앗았으니까. 여덟 개의 불덩이는 흡사 ‘홀드(Hold)’ 마법에 걸린 것처럼 허공에서 정지돼 있었다. 소강상태도 잠시. 옆을 돌아보자 이제 막 수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사용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수는 약 스물 남짓. 궁수나 마법사를 생각하면 더 있을 수도 있다. 이윽고 눈이 마주친 순간 놈들이 걸음을 주춤했다. 황당하다는 눈초리들이 느껴졌다. 그렇겠지. 무슨 가루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런 효용도 보지 못했고, 마법 공격은 허공에 멈춰 있으니까. 그 순간 불현듯 맨 앞에 선 놈이 신속히 우리를 훑더니 “…후퇴.” 짧고 차분한 한 마디와 함께 그대로 몸을 돌려 수림 안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남은 놈들 또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일제히 물러나기 시작한다. “호?” 저놈들 좀 보게나.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가루와 마법으로 우리를 혼란에 빠트리려고 했겠지만, 기습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거기다 언뜻 이해할 수 없는 광경까지. 즉 일순간 잘못 건드렸다고 판단하고 바로 후퇴를 결정했다. 앞선 공격도 그렇지만 상황 판단이 굉장히 빠르고 움직임도 일사불란하다. 좋게 말하면 이렇고 나쁘게 말하면 쥐새끼 같다. 아무튼, 이런 일을 한두 번 해본 놈들은 아닐 터. 실력도 제법 괜찮은 듯하고. “수현.” 고연주가 빠르게 나를 불렀다. 뭘 원하는지 알 것 같다. 나는 영역 선포를 해제하며 입을 열었다. “양동 작전일 가능성도 있으니 전부 추격하지는 않습니다. 고연주, 임한나, 이유정 그리고….” “형님. 저도 가겠습니다.” 그때 진수현이 갑자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숨이 약간 거칠어 보이지만 딱히 힘들어 보이지는 않는다. 헛구역질을 참느라 입을 막고 있던 것이 가루의 침입을 보호해준 것이다. 새옹지마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두 눈만큼은 아주 이상했다. 날카롭다 못해 분노를 뚝뚝 흘리는 게 광기(狂氣)까지 엿보일 정도였다. 온몸으로 ‘나는 지금 몹시 화가 나 있어.’ 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 분노를 풀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칼을 붕붕 휘두른다. “아니. 너까지 굳이….” “아 저도 가겠다고요. 닭 새끼 잡는데 소 잡는 칼 쓸 필요 없지 않습니까.” “그, 그래라.” “예. 저 개 같은 새끼들. 싹 다 죽여버려도 되죠?” 사실 고연주 한 명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만. 그러나 기세에 밀려 나도 모르게 허락하자 진수현은 이를 악물며 수림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고연주, 임한나, 이유정은 멍하니 서 있다가 내가 재촉하자 황급히 추적을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야 이 개 같은 새끼들아아아아아!”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흡사 짐승과도 같은 거센 노호성이 수림을 떠르르 울렸다. 들어보니 벌써 쫓아가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무언가 거칠게 휘두르고 퍽퍽 때리는 기척도 느껴졌다. 아마 자신을 저격한 것에 화가 난 것 같은데. “감히 나한테 그딴 걸 처먹여? 이 씨발 새끼!” “으, 으아아악!” 이번에는 집어 던지고, 세게 걷어차 버리고…. 응? 뭘 먹인다고? “욕을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저절로 욕이 나왔다 이 새끼야!” “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그건…. 아, 안 돼! 크아아악!” “입 닥쳐! 그냥 단순히 맛이 없으면 말도 안 해! 근데 그건 맛없는 수준이 아니잖아! 이 개새끼야!” “도, 도망치고 있는데 이건 너무 심하잖아! 우리와 무슨 원한을 졌다고…. 아아아악!” 연달아 들려오는 고성과 비명. 어찌나 난리법석인지 수림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른다.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자 문득 누군가 살금살금 다가왔다. 제갈 해솔이었다. “클랜 로드.” “……?” “저 스튜요.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모종의 버프 효과가 있을지도 몰라요.” “…….” 스리슬쩍 눈을 돌리니 철통을 앞에 두고 열렬히 응원하는 비비앙이 보였다. “저 나쁜 놈들! 잘한다 진수현! 아주 깡그리 죽여버려!” …설마 모르고 있는 건가? 나는 한숨과 함께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아직도 비명이 이어지는 수림을 보며 가볍게 애도했다. 놈들로서는 뜻하지 않게 진수현의 화풀이 상대가 됐으니까. 잠시 후. 약 30분 정도 기다린 끝에 마침내 수림의 소란이 사그라졌다. 추적에 들어갔던 네 명은 매우 훌륭히 임무를 수행했다. 아까 모습을 드러낸 스무 명은 물론, 어딘가에 숨어 있던 궁수와 마법사도 싹 다 잡아온 것이다. 그렇게 전신이 꽁꽁 묶인 채 야영지 중앙에 무릎 꿇린 놈들의 수는 총 스물여덟 명. 아니. 열두 명. 열여섯 명은 추적하는 과정에서 죽었는데 대부분이 진수현의 손에 사망했다. 개중에는 머리통이 으깨진 놈이나 복부가 터진 년 등등 끔찍한 시체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그러고도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진수현은 씩씩거리며 놈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중이었다. “이놈들이 아마 그놈들이려나….” “어머?” 미끼를 조심하라. 조승우의 연락을 떠올리고 곰곰이 생각에 잠긴 와중 돌연 깜짝 놀란 음성이 들렸다. 고연주가 토끼 눈을 한 채 딱딱히 굳어 있었다. 아까 놈들의 품을 한 명씩 뒤지는 것 같던데 무언가 발견한 듯싶다. “얘 좀 봐. 이거 완전히 웃긴 애들이네.” “…….” “너 이거 어디서 났니? 말 안 할 거야?” “…….” 고연주는 아까 선두에 섰던 사내의 멱살을 잡고 틀어 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을 꾹 닫고 있자 사내의 정수리에 오른손을 얹고 눈을 맞췄다. ‘유혹의 눈동자’를 사용하기 직전의 자세였다. 나는 얼른 입을 열었다. “고연주. 무슨 일입니까?” ============================ 작품 후기 ============================ ━■━ *-▥-* (^ㅡ^)♡(^ㅡ^) (>♣<) (>♣<) 설날이네요. 2015년 한해 평화와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독자님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_(__)_ 0817 / 0933 ---------------------------------------------- 사멸 무저갱(死滅 無底坑). 결국, 전문가들도 소식이 끊겼다고 결론이 나오고 말았다. 오늘 회의서 한 번 더, 마지막으로 병사들을 들여보내 보자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으나 아무래도 분위기가 좋지 않다. 병사들도 심상치가 않다. 이미 적국의 수도를 점령했는데 왜 이렇게 집착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한순간 발끈할 뻔했으나 나보고 들어가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을 듣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늦게까지 이어진 회의를 끝내고 침소로 돌아오니 침대에 죽은 짐승이 이불 안으로 놓여 있었다. …과연 어떤 놈이 한 짓일까. 『아틀란타 비밀 도서관 ‘발칸(Balkan) 왕국 멸망사 - 진중일기(陣中日記)’ 中』 * 눈을 찌푸린 고연주는 집어 던지듯 사내의 멱살을 놓고 걸어왔다. 오른손에는 쌈지 같은 것이 줄에 매달려 대롱거리고 있었다. 고연주는 주머니 입구를 살짝 벌리며 내밀었다. “이거요. 혹시 뭔지 아시나요?” 스리슬쩍 들여다보니 그득히 쌓인 분홍 가루가 보였다. 주머니의 약 삼 분의 이 정도 채워져 있었다. 아까 화살 끝에 달려 있던 건가. 뭔지 궁금해 살짝 냄새를 맡아보니 달콤한 향기가 순식간에 콧속을 찔렀다. 나는 진저리를 치며 신속히 머리를 멀찍이 떨어트렸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머릿속에서 까닭 없이 경종이 울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향은 코를 타고 들어와 빠르게 퍼지려 했으나 화정의 힘을 일으켜 곧바로 정화할 수 있었다. “콜록, 콜록!” 두어 번 기침하고 눈을 들자 고연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역시 수현에게는 통하지 않는군요.” “이건…?” “미약(媚藥)이에요.” “미약?” “네. 단 보통의 미약은 아니죠.” “……?” 그렇게 말한 고연주는 가는 눈으로 다시 놈들을 째려봤다. “수현. 혹시 아프로디지아라는 약초를 아세요?” 아프로디지아? 그런 약초는 1, 2회 차를 통틀어 나도 처음 들어보는데. 머리를 가로젓자 고연주가 말을 잇는다. “애초 아는 사용자가 별로 없기는 해요. 이 가루는 아프로디지아라는 약초로 조제한 약이에요. 구하기도 엄청나게 어렵지만, 조제 방법도 굉장히 까다롭거든요. 저도 한창때 이걸 사용해본 적은 한 번밖에 없어요. 위험해서 잘 안 쓴 것도 있고 없어서 못 쓰기도 했죠.” “효과가 좋나 봅니다?” “좋으냐고요? 끝내주죠. 살아 있는 가루라고 불릴 정도인데요. 아주 조금이라도 흡입하는 순간 10초 안으로 온몸으로 퍼지니까요. 그때부터는 이성이 사라지고 본능만이 남아 있게 되죠. 거기다 내외적으로 열기와 반응하면 퍼지는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져요.” “…….” 그래서 아까 불덩이를 무차별적으로 발사한 건가. 한창때의 고연주라면 아마 살문 시절을 말하는 듯싶다. 말인즉 우리를 습격한 놈들도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다는 소리다. 하기야 바보가 아닌 이상 그렇게 대놓고 저격했을 리가 없겠지. “더욱 무서운 건 현재까지 알려진 해독 방법이 없다는 거죠. 물약도 주문도 어떤 것도 소용 없어요. 오직 죽기 직전까지의 성교로 간신히 가라앉히는 방법뿐….”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그럼 만약 저 가루에 당했다면….” “글쎄요? 수현이 있으니 당할 리는 없지만, 만약 당했다면…. 가루가 흩어지기까지는 약 5분에서 10분 정도 걸리니까….” 중얼중얼하던 고연주는 돌연 불쾌한 표정을 짓더니 죽일 듯한 눈초리로 중앙에 묶인 놈들을 노려봤다. 그리고 “생각해보니까 열 받네.” 라며 나를 흘겼다. “듣고 싶어요?” “아니요. 됐습니다. 아무튼, 위험한 거라니 이건 제가 맡아두도록 하죠. 그렇게나 강력한 가루라면 분명 좋은 곳에 사용할 수 있겠지요.” 쌈지를 건네받고 품으로 밀어 넣자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연주, 남다은, 정하연, 임한나…. 네 여인이 낯을 살짝 붉힌 채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는 떨떠름한 기분을 이기지 못해 입을 열었다. “잠시만. 그런 식(?)으로는 사용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김한별과 이유정이 섭섭하다는 눈초리를 보내왔다. 아니. 너희는 또 뭐가 서운한 건데. 여하튼 부수입도 얻었겠다. 이제는 처분을 결정해야 한다. “우선은 좀 알아보는 게 낫겠죠? 워낙 꺼림칙해서리.” 얼른 유혹의 눈동자를 사용하고 싶은지 고연주는 오른손을 야릇하게 놀리면서 말했다. 나는 능력의 사용을 허락하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습격당한 이상 곱게 살려 보낼 생각은 없다. 어차피 대부분 죽일 생각이다. 물론 살릴 필요가 있으면 살려두겠으나 그것도 필요한 놈들에 한해서고. 그걸 알고 있기에 저놈들도 체념하고 침묵하는 것일 터. 그러나 고연주의 말을 듣고 나니 갑자기 열이 오른다. 왠지 곱게 죽여주고 싶지는 않은 기분이다. “응?” 그때 공교롭게 눈에 걸린 게 하나 있었다. 상황이 상황이라 그런지 비비앙이 여기저기 눈치를 살피며 손톱을 깨물고 있다. 그리고 그 앞에 놓인 아직까지 거품을 부글거리는 철통 하나. 그 순간. “오….”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꾸벅꾸벅 졸고 있는 불침번을 걷어차 깨웠고, 경계를 소홀한 죄로 야영지를 정리할 것을 지시했다. 이유정과 진수현은 어슬렁어슬렁 일어나면서도 나직이 투덜거렸다. 왜냐면 야영지 한쪽으로 총 스물여덟 구의 시신이 알몸인 채로 가지런히 쌓여 있었으니까. 아마 처리하려면 꽤나 고생할 것이다. 어젯밤 습격에 관한 별반 소득은 없었다. 늦게까지 심문했으나 결국 모두 처형하는 것으로 매듭짓고 말았다. 말을 걸어도 묵묵히 묵비권을 행사했고 유혹의 눈동자로도 딱히 이거다 싶은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제 3의 눈동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하나 건진 게 있다면 우리가 머셔너리 클랜인 걸 알고도 습격을 감행한 거라는 사실. 단, 중간에 한 번 담담히 죽음을 기다리던 태도가 변하기는 했다. 정확히는 비비앙이 만든 음식을 먹였을 때부터. 놈들은 처음에는 음식을 먹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억지로 입을 벌리고 강제로 집어넣자 곧바로 신호가 왔다. 글쎄. 그 표정을 도대체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려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두 그릇, 세 그릇을 계속 퍼 넣자 반응도 시시각각 변했다. 두 그릇째에는 욕을 했고(정확히 말하면 어디서 이런 개 좆 같은 음식을 먹이느냐고 했다.), 세 그릇째에는 울며불며 애걸했다. 잘못했다고, 제발 이러지 말라고, 차라리 죽여달라고, 적어도 인간답게 죽고 싶다고. 그러나 멈추지 않고 네 그릇째를 퍼 넣자 갑자기 조용해지는 놈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약물(?)을 과하게 남용한 나머지 정신 줄을 놓아버린 것이다. 아무리 건드려도 반응이 없어 결국에는 그 상태로 안식을 내렸다. 여하튼 어쩌면 부랑자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나, 우선 원정 중 일어난 소소한 해프닝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디까지나 우선은, 이지만. 시신을 소각하고 야영지까지 완벽하게 정리한 후 우리는 간단하게 식사를 마쳤다. 고연주와 임한나는 혹시 또 비비앙이 한다고 할까 봐 발 빠르게 끼니를 준비했고, 덕분에 정상적인 아침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는 조금의 시간 낭비 없이 바로 출발을 알렸다. 맑은 날씨와 쾌청한 하늘 아래, 우리는 수림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 수림은 갈수록 더 깊어졌다. 사방이 빽빽한 나무와 우거진 수풀로 뒤덮인 것이 초원에서 줄곧 보던 트인 풍경이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거기다 수풀이 허리까지 닿는 곳도 있어 행군 속도도 자연스레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수림은 점차 투박한 정도를 넘어서 살벌하다 느낄 만큼 꺼치러워졌다. 길은 희미해지다 못해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고, 이제는 동서남북 방향도 제대로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임한나는 처음에는 자신감 있게 우리를 이끌었지만, 조금씩 걸음이 느려지더니 종래에는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내디디기 시작했다. 신중한 건 좋으나 너무 속도가 느린 탓에 중간에 내가 선두로 나섰다. 어차피 두 번의 수송 어빌리티 이후 목적지에 거의 근접한 상태였다. 그리고 장소도 대충 알고 있겠다. 나는 무검을 휘둘러 억세게 성긴 수풀을 잘라내며 전진했다. 그러자 조용히 따라오던 클랜원들도 한 명 두 명 무기를 들어 보다 적극적으로 길을 열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렇게 계속 앞으로 나아가던 와중 돌연히 빼욱하던 숲이 일시에 사라지며 걸음이 편해졌다. 머리를 들자 눈앞으로 불현듯 약 100미터 정도 돼 보이는 너른 공터가 나타났다. 검게 그을린 수풀이나 비뚜름하게 베인 나무가 종종 보이는 것이 아마 앞서 들어간 사용자들이 벌인 짓인 듯싶다. “도착했어요?” 누군가 나직이 물었으나 나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아니고 조금 더 가야 하지만, 거의 도착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장애물도 사라졌겠다. 나는 약 5분을 느긋이 행군해 공터를 가로질렀고 다시 수림이 막아서기 직전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집게손가락을 펴 조용히 정면을 가리켰다. 다시 나타난 수림 속에는, 수풀과 나무에 가린 적당한 크기의 언덕 하나가 조용히 솟아 있었다. “응? 어디? 어디?” “저거 아니야? 언덕.” 등 뒤로 몇몇 어수선한 소리가 들렸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나조차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쳤을 정도로 언덕은 주변 풍경과 동화돼 있었으니까. 운 좋게 발견되기 전까지는 이 공터도 빽빽한 수림이었을 테니 이래서야 여태껏 드러나지 않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단순한 착시 현상이라기보다는 아마 마법적인 처리가 가미된 게 아닐까 싶다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주변을 경계하며 언덕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언덕의 둘레를 따라 돌자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갱도(坑道) 비슷해 보이는 입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는 행군을 멈추고 부근을 둘러싸 입구를 응시했다. 흙으로 된 입구는 높이가 약 5미터 정도 돼 보였으나 아래로 내려갈수록 조금씩 좁아지는 모양새였다. 아무리 안력을 높여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블랙홀처럼 막막한 어둠만이 아스라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마치 이대로 목구멍까지 넘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이. “확실히 들어간 흔적이 여럿 보이는데 나온 흔적은 거의 없네요.” 고연주는 어느새 입구 가까이 다가가 땅을 살피고 있었다. 김한별이 조금은 불안한 기색을 비쳤다. “나온 흔적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아니. 하나도 없지는 않고. 하지만….” “하지만…?” “글쎄. 어디까지 들어갔다가 나왔는지는 이제 우리가 들어가 보면 알겠지. 초입만 서성거리다가 나온 거면 별 의미 없는 흔적이니까.” 그렇게 말한 고연주는 어깨를 으쓱이며 쭈그린 몸을 일으켰다. 클랜원들은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서서히 긴장감이 올라오는 모양이다. 이윽고 나는 정비를 명목으로 잠시 휴식을 지시했다가 모든 준비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들어가겠습니다. 모두 진형을 잡아주세요.” 그러자 클랜원들도 한 명씩 주섬주섬 일어나 각자 적당한 위치를 잡기 시작했다. 나는 조용히 지켜보다가 뒤로 사뿐사뿐 걸어가는 여인을 보고 입을 열었다. “임한나. 교대하자.” “응?” “교대하자고. 선도를 부탁해.” “내가…? 아, 응. 그래야지.” 바로 납득하기는 했지만, 임한나의 낯빛에는 약간 떠름한 낯빛이 섞여 있었다. 마치 자신도 왜 뒤로 걸어갔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비단 임한나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어색한 눈초리들이 알게 모르게 느껴졌다. 그 시선들은 임한나가 아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머리가 복잡해지는 기분이 들었으나 억지로 떨쳐냈다. “…그럼 진입하겠습니다.” 나는 중앙에 키퍼로 자리를 잡고 나직이 출발을 알렸다. 잠시 후. 흙 계단을 내리밟는 발소리가 고요하고 어두운 갱도를 울리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예고 시간보다 16분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오늘 집필 거의 후반부에 조금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모두 진형을 잡아주세요.” 라고 타이핑을 하는데, ‘진형’을 치다가 갑자기 “들어가겠습니다. 모두 진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이렇게 ‘ㅎ’가 쭉 이어지더라고요. 깜짝 놀라서 엔터, 스페이스, 백 스페이스 바를 연타했는데 무려 9페이지까지 이어지고 나서야 겨우 멈췄습니다. 그 페이지는 모조리 ‘ㅎ’로 도배돼 있었고요. 사실 오류일 수도 있는데 쭉 내려보니까 왠지 모르게 섬뜩하더라고요. 막 히히히히 이렇게 웃는 것 같고…. 마침 그때 공기가 안 좋아서 환기할 생각에 창문을 열어뒀는데, 자꾸 신경이 쓰여 옆을 흘끔거리면서 집필하고 있었거든요. 예민한 걸 수도 있겠지만, 제가 무서운걸 보거나 읽는 건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짜 질색할 정도로 싫어해서요(?). 그래서 그런지 괜스레 신경이 쓰이네요. ㅜ.ㅠ 0818 / 0933 ---------------------------------------------- 사멸 무저갱(死滅 無底坑). 오늘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전쟁은 끝났다고. 그리고 도망친 발칸 놈들의 추적이나 병사들을 은신처로 들여보내는 것도 중지하겠다고. 부장들은 정말이냐고 계속 되물었으나 내심 기쁜 마음은 감추지 못한 것 같다. 물론 나는 아직 이대로 포기할 생각은 없다. 정확히는 ‘우리’가 직접 놈들을 추적해 잡는 건 포기했다. 하지만 꼭 우리가 직접 잡을 필요는 없잖아? 아니. 무조건 사람이 들어갈 필요는 없잖아? 그래서, 오늘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괴물들을 잡아오라고. 주로 ‘언데드’나 혹은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는…. 흐흐흐흐. 『아틀란타 비밀 도서관 ‘발칸(Balkan) 왕국 멸망사 - 진중일기(陣中日記)’ 中』 *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내려가고는 있었으나 계단은 상당히 길었다. 시간은 10분 정도, 거리는 250미터쯤 지난 것 같은데 아직 문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빛이라고는 한 톨도 들어오지 않아 주변은 침침하다 못해 새카만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 흡사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 홀로 서 있는 듯한 느낌. 마침 비슷한 기분을 느꼈는지 김한별이 조용히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렸다. “────. ────. 애주라이트 화이트(Azurite White). 라이트(Light).” 잠시 후, 캄캄하던 시야가 일시에 확 밝아졌다. 주먹만 한 구체가 눈 부신 빛을 비추며 위로 떠오른다. ‘보석 증폭(Jewel Amplification)’을 사용해서 그런지 구체는 보통 라이트 마법보다 갑절은 밝은 빛을 뿜었다. 김한별이 살짝 지팡이를 휘젓자 구체는 허공을 둥실둥실 유영해 앞으로 이동했다. 아래의 시야가 확보되자 임한나가 후, 숨을 흘리며 상냥히 웃었다. “고마워. 많이 긴장하고 있었는데 한결 나아.” “응? 긴장? 왜 긴장을 해?” 비비앙의 반문에 다시 흙 계단을 내리밟으려던 임한나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살그머니 돌아본 눈동자에는 어색하고 불안한 기색이 깃들어 있었다. “혹시, 나만 이상한가?” “이상해?” “응. 그러니까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계단이 있는 줄 알았는데, 계단이 아닌 부분을 밟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상당히 거슬려.” “…그게 무슨 소리야?” 비비앙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나는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고, 임한나의 감에 속으로 감탄했다. 그래. 명색이 궁수인데 이 정도도 예민하지 못해서야 말이 되지 않는다. 물론 왜 그런 기분을 느끼는지도 알고 있다. 왜냐면 이미 제 3의 눈을 활성화하고 있었으니까. “저는 별로 이상하지 않은데요? 밟는 느낌도 확실한데. 이거 보세요.” 그때 진수현이 앞으로 성큼성큼 나서더니 계단을 마구 밟기 시작했다. 퍽, 퍽! 발과 계단이 부딪을 때마다 딱딱한 흙가루가 사방으로 튀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네 번째로 부딪쳤을 때였다. 우지지직! 돌연히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계단에 종횡(縱橫) 방향으로 커다란 금이 생겼다. 크게 기함한 진수현이 황급히 발을 떼고 물러났다. 그러나 생성된 균열은 이미 천천히, 허나 가일층 가속을 붙이며 사방으로 번져가는 중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약관화(明若觀火). “야 이 미친놈아!” “아, 아니! 내가 하려고 한 게 아니라!” “됐으니까 어서 달려야…!” “너무 늦어! 한별아, 해솔 씨! 어서 보호막을…!” 곧 추락할 것을 예상했는지 클랜원들은 삽시간에 혼란에 휩싸였다. 그때였다. “────. ────.” 혼란한 와중 언뜻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애티는 벗지 못했으나 일말의 고저도 보이지 않는 기계적인 음성이었다. 근원이 머리에 비해 커다란 고깔모자를 살짝 든 채 빠르게 입속말로 웅얼거리고 있다. “피드백(FeedBack)!” 짧지만 강렬한 외침. 근원이 왼손에 든 혼돈의 솜니움으로 흙 계단을 살짝 쳤다. 그러자 신기한 현상이 벌어졌다.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이 위태위태하던 계단이 갑자기 멈췄다. 아니. 정지한 것도 모자라 사방의 금이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벌어진 틈이 도로 닫히고 사방팔방 번졌던 균열이 진원으로 되돌아온다. 흡사 시간을 되감기라도 한 것처럼. 눈 깜짝할 사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를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십 분입니다.” 근원은 고깔모자를 푹 눌러쓰며 입을 열었다. “십 분?” “이 계단은 마법으로 생성된 마력 계단입니다. 침입자가 중간을 건넜을 즈음 스스로 무너져 떨어트리게 하고, 이후 추락한 생물을 낙석으로 처리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말인즉 진수현의 발길질은 어쩌다 딱 맞아떨어진 우연에 불과하며 10분 후에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소리였다. 그 한 마디면 충분했다. 우리는 얼른 진형을 가다듬고 아래로 빠르게 내달렸다. 중간에 흙이 튀는 소리가 까닭 없이 불길하게 들렸으나 약 5분이 지났을 즈음 다행히 문으로 보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높이는 2미터 정도 될까. 온통 흙으로 이루어진 천지에서 홀로 퇴색된 철문은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잠시만….” 임한나도 그렇게 느꼈는지 철문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허나 별 이상한 건 발견 못 한 듯 곧 문에 살며시 손을 얹으며 고개를 돌렸고, 정하연이 보호 주문을 걸어주자 힘주어 문을 밀기 시작했다. 끄긍, 끄그그긍! 녹슨 소음이 고요한 갱도를 울렸다. 모두가 경계하는 가운데 마침내 문이 활짝 열렸다. 마침내 사멸 무저갱의 초입을 눈앞에 뒀다. 내부도 역시나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김한별은 앞서 생성한 구체를 안으로 들여보냈고, 정하연과 제갈 해솔도 이어서 라이트 주문을 외웠다. 시야를 확보한다손 쳐도, 원래는 주문 낭비라고 생각될 행동이었지만, 두 명 모두 더블 캐스트(Double Cast) 이상을 할 자신이 있다는 소리였다. 이윽고 내부가 환하게 밝아지자 임한나는 두리번거리며 느릿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두어 걸음 걷기도 전 또 한 번 걸음을 멈췄다. 왼쪽을 바라보는 임한나의 이맛살이 와짝 찌푸려지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맙소사….” “무슨 일이지?” 열린 문을 통과해 들어선 순간 문득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지하 특유의 습한 내음과 시체 썩은 내가 뒤섞인 굉장히 역겨운 냄새였다. 숨을 참으며 둘러보니 직경 400미터 가량 돼 보이는 크고 너른 공터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들어온 문을 포함해 사방으로 총 6개의 문이 이어지는 교차로 같은 공간이었다. 문제는, 중앙에 작은 광장처럼 보이는 장소였다. 그곳에는 빛바랜 허여멀건 한 것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특히 비탈진 부분에는 아직 살점이 붙은 너덜너덜한 것들도 눈에 밟혔다. 그 부분은 유독 붉게 얼룩져 있다. “저게….” “아마 앞서 들어온 사용자들이겠지.” 누군가의 물음에 대답하자 등 뒤로 약한 탄성이 연달아 들렸다. 아까 근원의 말을 이제야 이해한 듯싶다. 왜냐면 뼈와 시체의 언덕 위로 천장에 붙은 계단이 있었으니까. 이윽고 가까이 다가가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니 역시 예상이 맞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백 년, 혹은 일천 년 전에 사망한 해골은 차치하고서라도 외면에 적잖은 사용자들의 시신이 보였다. 길게는 한 달부터 짧게는 바로 닷새 전까지. 하나 특이한 게 있다면 장비나 옷이 벗겨진 시신들이 드문드문 보인다는 것이다. 설마 알몸으로 유적에 들어왔을 리는 없고 누군가 가져갔다고 보는 게 옳을 터. 하기야 이만큼이나 뼛조각이 쌓였는데 운 좋게 살아난 경우도 없지는 않겠지. 깊게 파묻혔다면 완충 역할을 해줬을 테니까. 이윽고 여러 문으로 들어간 흔적을 발견했다는 고연주의 소리가 들려와 내 생각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한 찰나. - 들어왔네? 또 들어왔어! - 정말이네? 이번에는 몇 명이지? 문득 어디선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귀를 웅웅 울렸다. “누구냐!” 진수현이 쩌렁쩌렁 외치며 자세를 잡았으나 소음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한층 시끄럽게 떠들며 사방에서 킬킬 비웃는 소리를 보냈다. 몹시 거슬리는 웃음이었다. - 끼끼, 끼끼끼끼! 또 죽을 놈들이 제 발로 기어들어 왔군. - 그런데 이놈들…. 조금 다른데? 그 계단을 통과했어! - 정말? 정말이네? - 진짜야! 참지 못한 진수현이 한 번 더 소리를 지르려고 하자 나는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진수현은 이를 악무니 소리 또한 갑자기 사라졌다. 그러나 요상한 시선은 여전히 느껴지고 있었다. 클랜원들을 한 곳으로 불러모은 후 나는 진수현을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우리는 우리가 할 일에만 집중하면 되니까.” “하지만…!” “명령이다. 지금부터 이 목소리들을 부랑자라고 생각한다. 이유정? 내가 부랑자를 보면 어떻게 하라고 했지?” “응? 네? 아. 절대 말을 섞지 말고 무시하라고….” 조금 더듬거리기는 했지만, 이유정은 훌륭히 대답했다. “그렇지. 그냥 무시하면 되는 거야. 전혀 휘둘릴 필요가 없어.” - 키키키키!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어차피 실체는 보이지도 않는 놈들이야. 직접적으로 해를 입힐 수도 없어. 이놈들이 원하는 건 우리의 정신을 어지럽히는 거지.” - 푸헤헤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정말로? 내가 말을 할 때마다 소음은 계속해서 대꾸했다. 클랜원들은 불편한 낯빛을 비췄으나 철저히 무시하자 마찬가지로 가만히 있었다. - 이놈들 보게나? 그래, 그렇다는 말이지? - 아무래도 조금 쓴 맛을 보여줘야겠군! 킬킬킬킬! 그 순간이었다. 끼이이잉! 철컹! 돌연히 귀를 긁는 시끄러운 철성(鐵聲)이 고막을 때렸다. 정확히는 정면에서 오른쪽 방향, 문 안쪽에서 들렸다. 마치 굳게 박힌 쇠창살이 억지로 뽑힌 듯한 불쾌한 소음이었다. 그러나 소음은 한 번만 들려오지 않았다. 끼이이잉! 철컹! 끼이이잉! 철컹! 끼이이잉! 철컹!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무려 세 번이나 연달아 도처를 울렸다. 그르르르르르르르…. 다각다각…. 다각다각…. 이어서 들려오는, 부글부글 끓는 듯한 긴 울부짖음과 말발굽 소리. - 죽음이다! 죽음의 기사가 오고 있다! 우히히히히히히히! - 도망쳐! 한쪽 문으로 도망치면 살 수 있다는 말이야! 물론! 어느 문인지는 가르쳐주지 않을 거지만~. “젠장. 이 새끼들 입 좀 닥치게 할 수는 없어요?” “나도 그러고는 싶다만.” 진수현이 귀를 틀어막으며 이를 갈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고연주와 임한나는 각자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두 여인은 무릎을 꿇은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아마 기척을 잡는 데 집중하는 것일 터. 나는 소란을 무시하며 기다렸다. 먼저 눈을 뜬 건 임한나였다. “놈들의 말이 맞아. 우리가 들어온 문 제외. 여기서 정면 방향의 문 제외. 나머지 네 개의 문에서 다가오고 있어.” “수는?” “각 문당 예닐곱 마리. 총 서른 마리 안팎. 죽음의 기사인지는 모르겠지만,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가능성은 높아.” “말을 탄 죽음의 기사라면…. 거, 거의 리치(Lich) 급이라는 소리잖아요.” 김한별이 망연히 덧붙이자 몇몇 클랜원의 안색이 핼쑥하게 변했다. 그 말대로 말을 탄 죽음의 기사나 리치는 결코 쉬이 볼 놈들은 아니었다. 언데드 무리를 상대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장 격 언데드는 무리에 아예 없거나 엄청나게 많아 봤자 서너 마리 섞여 있는 게 일반적이다. 한데 만일 서른 마리 전부가 죽음의 기사라면 쉽지 않은…. 흠. 아니. 나는 쉬우려나. - 어어? 얘네 뭐야? 어떻게 아는 거야? - 계단을 통과한 놈들이잖아. 음…. 장난 아닌데? 무시하자. 무시. 내가 고민하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정하연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수현. 요격도 좋지만 한나 말도 있고…. 한 번 앞쪽 문을 열어보기라도 하는 게….” 그때 불현듯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땅에 드리운 어둠이 연기처럼 자욱이 흐르더니 구불구불 움직여 땅으로 흡수된 것이다. 멍하니 눈을 들자 느릿하게 일어서는 여인이 보였다. 비로소 고연주가 몸을 일으킨 것이다. “수, 수현.”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으나 착각이 아니었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확연히 떨려 나왔다. 그런 고연주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미세하게 떨리는 검지가 정면의 문을 가리켰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늘 늦은 이유는…. 설마…. 아직도…. 아직도, 내가 로유진으로 보이니?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0819 / 0933 ---------------------------------------------- 사멸 무저갱(死滅 無底坑). “화, 확실하지는 않은데…. 바, 반시일 가능성이 높아요. 언데드라면 말이죠.” 떨려 나오는 목소리로 고연주가 말을 잇는다. “그것도 수십 마리…. 어쩌면 백을 넘을지도 몰라요. 어마어마한 숫자라고요.” 그 말이 끝난 순간 클랜원들의 얼굴에 핏기가 싹 사라졌다. 반시라면 상대하기 까다롭다는 언데드 중에서도 첫손으로 꼽히는 놈이 아닌가. 말을 탄 죽음의 기사나 리치보다도 훨씬 위험한 괴물이다. 조우하면 무조건 죽는다고 여기는 사용자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전혀 걱정할 필요는 없다. “괜찮습니다. 설령 반시라 해도 영체에 불과한 놈들이죠. 저렇게 문이 굳게 닫힌 이상 열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안심시키려 말을 꺼내자 임한나가 불안해하는 얼굴로 정면의 문을 바라본다. “하지만 목소리들이 문을 연다면….” “글쎄. 우리를 죽일 생각이었으면 진작 문을 열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럼 아까 그 쇳소리는?”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에 불과하겠지. 어쩌면 스스로 발동하는 함정이나 그냥 생명의 냄새를 맡고 몰려오는 걸지도 몰라.” 사실 둘 다 정답은 아니었다. 허나 여기서 구구절절 설명할 시간은 없어 나는 적당히 구변 좋게 말을 꺼냈다. 다행히 클랜원들은 납득했고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 스스로 자리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내가 키퍼로 중앙을 방어하고 고연주, 남다은, 이유정, 진수현은 소리가 들려온 네 개의 문을 각각 바라봤다. 궁수와 마법사들도 각자 근접 계열을 지원하는 쪽으로 이동하자 자연스레 원형에 가까운 방진이 형성됐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말발굽 소리는 문 바로 건너편까지 가까워져 있었다. 쿵, 쿵! 쿠쿠쿠쿵! 고요한 숨소리와 주문 외는 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네 개의 문이 일거에 부서졌다. 흐릿한 연기 사이로 마침내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을 거무튀튀한 갑옷으로 감싼 놈들은 전원 기이한 암흑에 휩싸인 말을 타고 있었다. 얼굴조차도 뿔 달린 투구로 가려졌건만 눈이 있어야 할 곳에는 붉은 안광이 번쩍였다. 양손에는 역시나 어둠으로 이루어진 길쭉한 랜스를 들고 있다. 높이도 4미터를 웃도는 것이 말을 탄걸 고려하고서라도 어마어마한 덩치였다. 더 볼 것도 없이 죽음의 기사다. “스트림 오브 아쿠아(Stream Of Aqua). 체인 라이트닝(Chain Lighting).” 선공은 정하연의 몫이었다. 세찬 물줄기가 일직선으로 날아가 오른쪽 문에서 나타난 죽음의 기사들을 흠뻑 적셨고, 금빛 번개가 지그재그 잔상을 남기며 이어서 덮쳤다. 아무리 물에 적셔 전도율을 높였다고 하나 애초 마법 저항이 높은 놈들이다. 잠시 주춤하게 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뿐이었다. 죽음의 기사들은 몸을 미세하게 떨면서도 조금씩 전진해오고 있었다. “대상 지정 체인 라이트닝! 골드 시트린(Gold Citrin)!” 그러나 김한별이 보석을 하나 튕기자 상황은 급속도로 일변했다. 한순간 눈에 보일 정도로 전류가 크게 일어나더니 죽음의 기사는 물론 말까지 전부 뒤덮은 것이다. 그에 따라 몸의 떨림이 한층 강해지며 두어 놈은 랜스를 떨어트리기까지 했다. “월령(月令). 26일의 그믐달.” 애초 마법 연쇄가 장기라 그런지 정하연의 주문은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파르스름한 빛을 띠는 그믐달 모양의 환(環)이 생성되더니 삽시간에 수십 개로 분열했다. 가볍게 지팡이를 떨치자 환은 총알처럼 우수수 쏘아졌고, 몸이 마비된 죽음의 기사들은 고스란히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귀를 긁는 서걱거리는 소리 끝에 비로소 정하연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짧은 시간에 마법을 연달아 펼쳐냈으니 어지러울 만도 했다. 결과는 나름대로 괜찮았다. 일곱의 죽음의 기사 중 총 두 놈이 바닥에 몸을 뉘였고 나머지도 거의 반파에 가까워 성한 상태는 아니었다. 가장 오른쪽 문을 맡고 있는 장갑이 약한 이유정을 배려해 부딪치기 전 수를 줄여준 것이다. 그르르르, 그르르르! “온다!” 그때 죽음의 기사들이 울부짖는 소리와 비비앙의 날카로운 외침이 겹쳤다. 나는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왼쪽부터 여섯, 일곱, 일곱, 일곱…. 아니 다섯. 총 스물다섯에 달하는 죽음의 기사들이 기병 돌격을 시작했다. 랜스를 앞으로 꼬나 쥐고 점차 가속을 붙여오는 것이 이대로 사방에서 덮치려는 모양이다. 이건 좀 위험한데. “오라! 임프리손! 49군단을 지배하는 강철의 구속자여!” 그렇게 생각한 순간 어두운 사슬 소리가 귀를 때렸다. 도처로 뻗어 나간 사슬은 각 벽에 틀어박혀 팽팽해졌다. 사슬은 순식간에 우리 주변에 얽히고설켜 복잡한 장애물로 변모했다. “비비앙! 나이…!” 이유정이 환호를 지르려 했지만, 놈들이 가볍게 뛰어넘는 걸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의도는 좋았으나 너무 낮게 설치했다. 그 순간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 이것들아! 임프리손!” 비비앙이 꾹 쥔 양손을 활짝 폈다. 그러자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사슬 양쪽 끝이 퉁 튀어 올라 허공으로 치솟았다가 급격한 호선을 그리며 쏜살같이 낙하한다. 이대로라면 죽음의 기사들은 둥글게 옥죄어오는 사슬에 모조리 묶여버릴 터. 나도 모르게 감탄했으나 놈들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건 못 피하겠다고 여겼는지 아예 말을 버리는 길을 선택했다. 사슬에 얽힌 말들은 억울한 비명을 토했으나 죽음의 기사들은 땅을 몇 번 굴렀을 뿐, 곧장 몸을 일으키고 재차 달려오기 시작했다. 비비앙은 땅을 치며 분해했지만, 기병 돌격을 저지한 것만으로도 성과는 충분했다. 이윽고 근접 계열들에 보호막이 덧씌워진 것과 죽음의 기사들과 맞닥트린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제는 바야흐로 근접전의 시작이었다. 주변에서 삽시간에 병장기 부딪치는 요란한 소음과 고함치는 소리가 어울렸다. 전황은 곧장 치열해졌으나 상황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죽음의 기사 예닐곱을 한 번에 상대할 수 있는 사용자는 많지 않다. 그러나 고연주와 남다은 수준이라면 무리만 하지 않으면 충분히 상대할만한 수준이었다. 고연주는 비비앙이 사용한 방법에서 영감을 얻었는지 쉴 새 없이 검은 그늘을 통해 움직이며 음영(陰影)을 뿌렸다. 그러다 한 놈이 걸려들면 곧장 그림자를 일으켜 에워싸 분쇄해버리는 방식이었다. 남다은에게 달려든 죽음의 기사들은 비틀거리며 힘 빠진 랜스를 휘두르고 있었다. 아마 갑옷의 효과 때문인 것 같은데 남다은은 그 점을 너무나 잘 이용했다. 물 흐르는 듯한 움직임으로 사이를 어지럽히더니 한 번 냉광(冷光)이 번뜩일 때마다 목 잘린 투구가 뚝뚝 떨어졌다. “젠장, 이 새끼들 뭐야 도대체!” 벌컥 소리치기는 했으나 진수현도 한 치도 밀리지 않고 있다. 임프리손을 거둔 비비앙이 사티로스를 소환해 지원하고, 에워싸일라치면 임한나가 휙휙 화살을 쏴 활로를 틔워줬다. 무엇보다 좋은 기회를 잡더라도 지나치려는 놈들이 보이면 얼른 빠져 나와 막아서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문제는, 이유정이었다. “흠.” 전신을 금빛으로 불태우는 이유정은 방금도 머리를 노린 랜스를 간신히 숙여 피했다가 복부를 걷어차여 나뒹구는 중이었다. 김한별이 아낌없이 보석을 날려 지원하고 반파된 5명을 상대하고 있었으나 아무래도 힘에 부쳐 보였다. 실력이 부족하다기보다는 기사와 용병의 전투 상성이 너무 안 좋다. 빠른 기동력을 앞세워 전장을 휘젓는 게 이유정의 스타일인데, 죽음의 기사들은 진을 짜고 이동 경로를 칼같이 차단하고 있었으니까. 외려 여태껏 치명상을 입지 않고 버티는 것이 칭찬할 만했다. 뭐, 뚫리는 건 시간 문제겠지만. 그렇게 생각한 찰나, 돌연 이유정이 왼쪽으로 크게 돌았다. 나는 혀를 차고 무검을 다잡았다. 고연주와 남다은은 벌써 절반 이상을 눕혔고, 진수현은 이제 막 두어 마리째 쓰러트리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땅을 박찼다. * “아차!” 이유정이 아뿔싸 소리를 질렀다. 오른쪽에서 일렬로 찔러오는 랜스를 피해 왼쪽으로 피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공간을 터주고 말았다. 중요한 순간마다 보석을 날려 방해하는 마법사가 거슬렸는지 한 놈이 빠져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얼른 막으려고 했지만, 나머지 네 놈이 금세 사방을 에워쌌다. “젠장…!” 이유정은 이를 갈았다. 두세 놈 정도라면 부상을 각오하고 결딴낼 자신이 있었다. 아니. 차라리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놈이라면 훨씬 낫지. 무려 다섯 놈이 차분히 진을 짜고 압박해 들어오자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눈 딱 감고 날뛰고 싶었으나 이유정은 간신히 억눌렀다. 이제는 눈에 보이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성질대로 날뛰었다가는 저 날카로운 랜스에 꼬챙이가 되기 딱 좋다는 걸. 어쨌든 결과적으로 네 마리로 줄었으나 여전히 버겁다. 그것보다는 결국 한 놈을 통과시켰다는 사실이 자못 괴로웠다. 그 순간이었다. 꽈앙! 후드득, 후드득! 문득 폭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수십의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가슴에 맞고 떨어진 거뭇한 파편을 바라본 이유정의 눈동자가 멍해졌다. 자신은 온 힘을 다해 겨우 찌그러트렸던 갑옷이 폭음 한 번에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그때. 뻐억, 후려 꽂히는 소리와 동시에 죽음의 기사들이 갑자기 어지러워졌다. 붉은 안광이 번쩍이는 투구 안으로 웬 보이지 않는 검 하나가 깊숙이 틀어박혀 있었다. 이윽고 안광이 사납게 타오르기 직전, 투구가 펑 소리와 함께 폭발했다. 이유정은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렸다. 지금껏 몇 번이나 봐온, 김수현이 즐겨 사용하는 마력 폭발이었다. 무검은 멈추지 않았다. 폭발한 투구를 뚫고 그대로 옆으로 흐르더니 멍하니 서 있는 죽음의 기사를 몸통째 잘라버렸다. 썩둑 썰린 상반신이 굴러떨어졌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놈이 크게 놀랐는지 뒤로 물러나며 랜스를 뻗어왔다. 그러나 김수현은 몸을 비스듬히 해 스치게 하고는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 가볍게 검을 꽂았다. 그리고 또 한 번 이어지는 마력 폭발. “남은 두 놈은 네가 처리해라.” 털썩 무릎 꿇는 놈을 확인한 김수현은 곧바로 어딘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진수현이 싸우는 곳을 향해서. 무언가 심상찮은 기운을 느낀 걸까. 막 사티로스를 역 소환시키는 데 성공한 죽음의 기사들은 동시에 몸을 돌렸다. 그러나 돌아본 순간에는 한참 늦은 상태였다. 상대는 이미 허공을 크게 도약해 내려오는 중이었다. 세 죽음의 기사가 곧장 하늘로 랜스를 찔렀으나 김수현의 왼손에는 일월신검이 쥐어져 있었다. 하강하는 와중 왼팔을 휘둘러 자신을 노리는 랜스를 일차적으로 걷어내고, 이차로 활짝 개방된 몸통들을 향해 오른팔을 횡 방향으로 길게 휘둘렀다. 써억, 써억, 써억! 마치 식칼로 무를 써는 듯한 소음이 날카롭게 울렸다. 흡사 쇠를 두부 베듯 한다는 전설의 청홍이 이럴까. 계승된 권능인 결은 이번에도 유감없이 성능을 발휘했다. 그 단단하던 죽음의 기사들이 제대로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가슴이 잘려나간 것이다. 지지부진하던 전투는 김수현이 가세한 순간부터 빠르게 변화했다. 진수현은 때는 이때다 싶었는지 등 돌린 놈들을 마음껏 두드렸고, 마침 맡은 전투를 정리한 고연주와 남다은도 곳곳에 합세했다. 결국,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죽음의 기사들은 한 놈도 남김없이 모조리 땅에 드러누웠다. 그리하여 전투가 끝난 후 원정대는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심각한 부상자도 없고, 어려울 거라 여긴 전투가 비교적 쉽게 끝나서 그런지 분위기는 꽤 괜찮았다. 이유정이 낯빛이 약간 안 좋기는 했으나 그 누구도 탓하지 않았다. 대장급 언데드 다수를 상대로 물러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을 일이었다. 그렇게 가벼운 휴식이 끝나자 다시금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얘네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 허, 허허. 죽음의 기사를…. - 저놈, 저놈이다! 저놈이라고! - 끄으으응…. 잠시 후. “자, 그럼 이동을 해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할까요?” “정면만 아니면 다 괜찮을 것 같네요.” 원정대가 슬슬 이동하려고 폼을 잡자 목소리들은 또다시 시끄러워졌다. 흡사 좋은 먹잇감을 잡았다는 듯이. - 왼쪽! 왼쪽에서 두 번째! - 아니! 거기로 가면 죽어! 오른쪽이야! 오른쪽! 다시 낄낄거리는 소리가 이어졌으나 김수현의 말대로 클랜원들은 철저히 무시했다. 그저 서로 의견을 나눌 뿐. “정면은 절대로 안 되고…. 윽. 나는 어디든 싫은데.” “갑자기 안솔이 그리워지네요.” 김수현이 뼈가 쌓인 소 광장을 흘끗거리며 문들을 앞에 두고 생각에 잠긴 체할 즈음, 불현듯 누군가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공간 분석. 개시.” 파앙,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세찬 연기가 일었다. 형형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근원은 돌연 뼛조각 쌓인 중앙을 물끄러미 바라보기 시작했다. 김수현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근원. 왜 그러지?” “일곱 개입니다.” “실은, 어려운 부탁이 하나 있어. 다음부터는 육하원칙에 의거해 설명해주지 않겠어?” “어렵지 않습니다.” 근원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곧 상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저는, 방금, 제가 서 있는 자리에서, 새로운 일곱 번째 문을, 공간 분석을 사용해 알아냈습니다.” “마지막 왜 가 빠졌잖아. 다시 설명해.” “…….” “…농담이야.” 근원이 빤히 쳐다보자 김수현이 바로 말을 정정했다. 여하튼 비밀 문이 있다는 소리에 클랜원들은 바로 광장으로 달려가 뼛조각들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그걸 바라보는 김수현의 입가에 남몰래 미소가 스쳤다. 비밀 문의 존재는 당연히 김수현도 알고 있었다. 다만 어떻게 드러낼지 고민하는 중이었는데 근원이 때마침 좋은 타이밍에 나서준 것이다. 만일 어쩔 수 없이 그냥 지나쳤다면 과거에 그랬듯 지하 1층을 계속 헤맸을지도 모른다. 돌아다니기도 어렵지만, 곳곳에 산재한 함정이나 괴물에 상당히 지쳤을 터. 그러나 어쨌든 이렇게 발견함으로써 시간상 엄청난 이득을 얻어냈다. - 아니, 아니야! 거기는 위험해! - 후후. 제 발로 죽음의 구렁텅이로 가는 건가. 실로 어리석다. - 젠장! 어떻게 알아낸 거지? 헤매는 거 구경하면서 실컷 놀려주려고 했는데! - 시끄러워! 그걸 얘기하면 어떡해! 소리는 제각기 떠들었으나 원정대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뼈를 치웠다. 그리고 약 30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광장의 평평한 바닥이 드러났고, 근원이 알려준 곳을 집중적으로 파내자 비밀의 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처음 입구로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계단으로 이어지는 갱도와 비슷했다. “저 다섯 개의 문보다는 여기가 더 나을 것 같은데.” 김수현의 말에 클랜원 전원이 동의했다. 이제껏 무시하고는 있었지만, 아까 들려온 목소리 덕에 확신한 상태였다. 이윽고 원정대는 다시 진형을 맞춘 후, 계단을 밟고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하 1층을 뛰어넘고 바로 2층으로 돌입한 것이다. 사실상 벌써 절반 이상은 공략한 것과 다름없었다. 결국에는 미래를 아는 사용자만의 특권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원정대가 사라진 1층 초입에는, - …씨발. - 닥쳐. 멍청한 놈. 서로를 탓하는 목소리들만이 고요히 감돌았다. ============================ 작품 후기 ============================ ㅠㅠ 0820 / 0933 ---------------------------------------------- 사멸 무저갱(死滅 無底坑). 계단을 내려간 후 원정대는 바로 탐험을 재개했다. 지하 2층은 개미집을 방불할 정도로 알기살기 얽혀 있었다. 통로는 좁은데 공간은 어찌나 요리조리 섞였는지 까닥 잘못하면 길을 잃을 판이었다. 초입을 벗어나자 함정도 본격적으로 발동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화살이 날아온다거나 돌이 굴러오는 등 조잡한 꾀 따위가 아니었다. 통로를 통과하는 도중 난데없이 벽이 맞닿을 정도로 길이 좁아지고, 어느 공간은 들어가자마자 방 전체에 뾰족한 창이 솟구치기도 했다. 한 번은 마법사들의 소모된 마력을 채우려 휴식 시간을 가졌는데, 앉자마자 바닥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일도 있었다. 김수현이 재빠르게 잡아주지 않았다면 김한별은 미아가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국에는 엉겁결에 겨우 도망치고 서서 쉬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이뿐일까. 걸을 때나 쉴 때나 사각거리는, 마치 다리 많은 벌레가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자꾸만 귀를 긁었다. 몇 번이나 행군을 멈추고 주변을 정밀하게 조사했으나 그럴 때는 귀신같이 기척이 사라졌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니 어느새 클랜원들의 신경도 한참 예민해졌다. 이미 자신들이 어디를 걷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유적 안으로 들어온 이상 낮과 밤을 구분하는 개념은 사라졌고, 어둠을 밝히는 서너 개 구체에 의지해 그저 걸어갈 뿐. 원정대를 선도(先導)하는 김수현의 등을 기계처럼 따라가는 중이었다. 그나마 하나, 아니 두 가지 위안거리가 있다면 우선 벽에서 울리던 이죽거림이 사라졌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활약으로 사방에 도사린 함정을 간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근원이었다. 점차 함정이 출현하는 빈도가 심해지자 지하 1층에서 선보인 ‘전장 분석(BattleField Analysis)’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전장 분석은 마법사의 ‘마법 진지 구축’과는 궤를 달리하는, ‘초 정보 집합체’에 기인한 능력이다. 말인즉 근원의 고유 능력이라 봐도 무방하다. 물론 만능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예전 아스트랄 차원에서처럼 100% 상태라면 모를까. 현재 근원이 최대한도로 낼 수 있는 출력은 40%도 채 되지 않는다.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의 지식을 흡수하고 꽃의 마녀 세트로 회복한 출력이 그 정도였다. 예외에 해당하는 60%에 관한 함정은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바꾸어 말하면 아득한 옛날 이 무저갱을 건설한 마법사들이 그만큼 뛰어난 지식의 소유자라는 방증이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발을 잇달아 내딛는 소리가 어두운 통로를 울린다. 발에 천근 추라도 매었는지 묵직하기 짝이 없는 걸음이다. 실제로 클랜원들의 어깨는 살짝 처져 있고 이따금 발을 끄는 소리도 들렸다. 하기야 먼지가 켜켜이 쌓이고 곳곳에 숭숭 구멍 뚫린 길을 반나절 넘게 걸었으니 슬슬 지칠 법도 했다. 게다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소음과 음산한 분위기는 알게 모르게 정신을 압박하고, 마법사들은 몇 시간이나 라이트 마법을 유지한 상태라 체력 소모가 훨씬 심했다.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는 와중 돌연 선두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이윽고 김수현의 발이 완전히 멈췄을 즈음 원정대의 앞에 거대한 철문이 나타났다. 표면에는 붉은색과 녹색이 섞인 녹이 잔뜩 슬었고,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열리지 않은 듯 굳게 닫혀 있다. 김수현은 철문을 꼼꼼히 살폈다. 별 이상한 건 발견 못 한 듯 곧 양손을 대고 힘껏 밀었다. 철문이 비명을 질렀다. 끼깅, 끼기기깅! 불쾌한 소음과 함께 철문이 열리자 웬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로 100미터 세로 200미터 정도 되는 공간은, 특이하게도 가운데를 제외한 양옆이 우묵하게 패여 있었다. 마치 볼링장의 레일 하나를 확대해 옮겨놓은 듯했다. 좌우 외벽과 천장은 흙이 아닌 커다란 벽으로 막혀 있는데 표면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 길이 끝나는 건너편에는 다음 통로로 갈 수 있는 문이 하나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결국에는 통과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물론 그 누구도 ‘좋아! 돌진이다!’ 라는 만행은 저지르지 않았다. 별 의심 없이 건너기에는 이미 당한 전적이 너무나 많으니까. 외려 탄식과도 같은 한숨을 토하며 지친 눈으로 쳐다볼 뿐. “여기는 또 어떤 방일까….” 누군가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김수현은 허리를 굽혔다. 바닥의 흙을 한 줌 쥐고 주물럭거려 단단하게 뭉쳤다. 그리고 앞을 바라보며 있는 힘껏 던졌다. 그 순간이었다. 우우우웅! 문득 천장에서 붉은빛이 새어 나오더니 화끈한 열기가 전해졌다. 다음 순간, 흙덩이는 채 5미터도 날아가지 못하고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김수현은 무심한 눈동자로, 나머지는 역시나 하며 눈살을 찌푸리거나 두 눈을 치뜨는 등 방 안을 응시했다. 잠시 후, 일부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근원은 언제나처럼 바로 전장 분석을 사용하는 대신 작은 입을 오물거렸다. “한 번입니다.” “…….” “저는, 이제, 여기서, 전장 분석을,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마력이 충분치 않기 때문입니다.” “으음.” 김수현이 머리를 끄덕였다. 허락의 뜻으로 받아들인 근원은 곧 입속말로 주문을 웅얼거렸다. 이윽고 세찬 바람에 로브가 펄럭이고 형형한 두 눈이 벽과 천장을 뚫어지라 응시한다. “…총 사십사 개의 영구 마법 진을 확인했습니다. 하나하나 빈틈없이 맞물린 구조를 갖추고 있고, 전 진(陣)이 침입자를 말살하려는 용으로 새겨진 듯합니다. 한 걸음이라도 들어가는 즉시 순차적으로 발동하며 개중에는 제가 알지 못하는 형식도 있습니다.” 긴 설명이 끝나자 클랜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했다. 근원의 말은 방 안에 44명의 마법사가 있다는 말과 동일했다. 그것도 대기 시간 없이 무한히 마법을 뿜어내는. 물론 ‘매직 미사일’ 정도의 마법이라면 해볼 만하겠으나 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 “…어떻게 하죠?” “으아, 한결이를 데려왔어야 했나.” “우선 있는 대로 보호막을 치고….” “모두, 제 주변으로.” 서로 망연히 의견을 주고받을 즈음, 문득 강한 목소리가 모두의 정신을 일깨웠다. 김수현은 차분한 눈길로 클랜원들을 훑고 입을 열었다. “마침 수가 딱 맞아떨어지네요. 우선 근접 계열이 마법사를 안도록 하지요.” “…아!” 머리 회전이 빠른 제갈 해솔이 탄성을 질렀다. ‘빙하의 설원’ 원정에 참여한 클랜원들도 곧바로 의도를 알아차렸다. 한동안 수군거리는 소리가 이어지는가 싶더니 돌연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김수현은 두 눈을 끔뻑끔뻑 움직였다. 그냥 한 명씩 안으면 되는데, 갑자기 여덟 여인이 원형으로 모여 서로 지그시 바라본다. 가볍게 손을 풀던 김한별은 문득 옆을 보고 왼쪽 눈을 찌푸렸다. “유정이 언니?” “응.” “언니 근접 계열 아니에요?” “응.” “이유정. 장난하지 마.” “…네.” 고연주는 짐짓 엄한 표정으로 눈에 힘을 줬다. 이건 무시하기 어려웠는지 이유정은 스리슬쩍 걸음을 물렸지만, 이내 억울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허나 고연주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 높이 손을 들었다. “자. 그럼 해볼까? 가위, 바위, 보!” 고연주가 힘차게 손을 내렸다. 가위였다. 그러나 고연주, 남다은, 임한나를 제외하면 아무도 손을 내지 않았다. 그저 물끄럼말끄럼 쳐다보고만 있을 뿐.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고연주는 호호 웃으며 다시 손을 들었다. “자, 그럼….” “고연주. 장난하지 마십쇼.” 그러한 찰나 서릿발 같은 불호령이 떨어졌다. 고연주는 칫 혀를 차며 물러났고 남다은과 임한나도 시무룩이 빠졌다. 이유정이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은 가운데, 마침내 남은 네 여인의 손이 하늘로 올라갔다. “가위, 바위, 보!” 그리고 동시에 손이 내려지고, “이겼다! 내가 이겼어!” 낭랑한 환호가 이어졌다. “우헤헤헤.” 비비앙이 펄쩍펄쩍 뛰며 기뻐하다가 김수현의 품으로 냉큼 안겼다. 마치 아이처럼 몸을 뒤척이더니 김수현의 왼손이 궁둥이를 받쳐주자 만족한 신음을 흘리며 활짝 웃는다. 이윽고 김수현이 가만히 비비앙의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는 동안, 어깨를 축 늘어트린 여인들이 한 명씩 짝을 찾기 시작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근원은 이유정에게, 정하연은 고연주에게, 김한별은 남다은에게, 제갈 해솔은 임한나에게 안겼다. 진수현은 침울한 얼굴로 홀로 서 있었다. 준비가 끝났음을 확인한 김수현은 조용히 앞을 바라봤다. “그럼.” 우웅! 김수현이 입을 여는 동시에 품에서 터져 나온 붉은 장막이 클랜원들을 둥글게 감쌌다. 게헨나의 보호 요새가 발동된 것이다. 확실히 어마어마한 방어력을 자랑하지만, 마력 소모가 극심하다는 단점이 있다. 단순히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기하급수로 마력이 사라진다. 외부 공격을 방어할 시에는 말할 것도 없다.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김수현이 무릎을 구부렸다. 누군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가겠습니다.” 이윽고 동시에 땅을 박차는 소리가 들렸다. 여섯 명이 비로소 문으로 들어갔다. 우웅우웅우웅우웅! 치이이이이이이익! 빨간빛이 번쩍였다.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방은 천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삽시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마 장막이 없었다면 금세 열기에 삼켜 녹아내렸을 터. 100미터를 지나쳤을 때 불현듯 푸른빛이 번쩍였다. 이번에는 시야에 흰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급속도로 뜨거워졌다가 냉각돼서 그런지 흙길이 쩍쩍 갈라졌다. 이어서 노란빛이 번쩍였다. 이제는 거진 빗발치는 수준이었다. 열기, 냉기, 뇌전이 뒤섞인 마법의 폭우가 붉은 장막을 가열차게 두들겼다. 그러나 구슬은 요새라는 말에 걸맞게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굳건히 방어해냈고, 그에 힘입은 원정대는 무조건 앞으로 달리는 데만 집중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길의 거의 끝 부분에 다다를 수 있었다. “제가 열게요!” 아무도 들지 않은 진수현이 장막 내 가장 선두로 이동했다. 그리고 끝에 도착하자마자 있는 힘껏 달려가 문을 밀었다. 그 순간 잠깐 멈칫하더니 도로 문을 세게 당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용을 써도 육중한 철문은 꿈쩍도하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 문의 상부에 빛이 스친 것 같기도 했다. 진수현이 당황한 얼굴로 돌아보며 외쳤다. “무, 문이 안 열려!” “그게 무슨 소리야!” 얼른 근원을 내려놓은 이유정이 나는 듯 달려가 발차기를 날렸다. 그러나. “꺄악!” 퉁, 소리와 함께 나가떨어진 이유정이 흙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고연주가 재빠르게 발로 막아주지 않았다면 밖으로 튕겨 나갔을지도 모른다. “문이 안 열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이유정이 얼떨떨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번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젖혔다. 방 안은 어느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마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일까. 덜덜덜덜, 붉은 장막이 떨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정하연이 이를 악물며 소리 질렀다. “문! 문에서 방금 진의 형상이 떠올랐어요!” “젠장, 문에도 마법이 걸려 있었던 거야?” 누군가 거친 욕설을 뱉은 찰나, ‘이번에도’ 김수현이 뚜벅뚜벅 앞으로 걸었다. 문에 댄 오른손에서 맑은 불꽃이 일었다. 불빛은 철문 안으로 살며시 스며들어 전체를 가볍게 훑었다. 이윽고 장막의 떨림이 한층 격해졌을 때 문을 밝히던 불빛도 툭 꺼졌다. 가볍게 밀어내자 철컹, 깔끔하게 반으로 갈라지며 다음 공간을 드러냈다. 그런 김수현의 모습은 너무나 침착하고 차분했다. 실제로 잠재 능력 중 ‘심안(心眼)’이 있기는 하나, 그 어떤 위기도 김수현을 흔들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흐음…. 아, 여긴가?” 김수현이 안으로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입속말이라 그 누구도 자세히 듣지 못했다. “안 들어옵니까?” 잠시 후, 어느새 안으로 들어가 들어오라 손짓하는 김수현은 모습은, “…….” 보는 이의 눈에 몹시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홀로 다른 세상에 있는 사용자를 보는 듯했다. 드디어, 머셔너리 클랜원들이 조금씩 자각(自覺)을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이로써 사멸 무저갱 공략도 팔부능선은 넘었네요. 사실 이번 에피소드의 목적은 유적 공략이 아닌, 다른 것에 맞춰져 있습니다. 원래는 빙하의 전설 원정과 비슷한 길이로 구상했다가, 싹 다 자르고 대폭 줄였습니다. 서로 목적이 다른 만큼, 원정보다는 다른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거든요. 아, 선도하다 라는 말은 먼저 선(導), 인도한 도(導)로 남의 앞에 서서 인도하다, 앞장서서 이끌고 인도하다. 이 정도로 해석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타는 아니랍니다. :) 긴 연휴가 끝났네요. 그럼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우울한 월요병 따위는 힘차게 날려버리세요! 0821 / 0933 ---------------------------------------------- “…인정 못 해.” 문을 통과하자 방금 지나친 방과 비슷한 크기의 공간이 나타났다. 공동(空洞)과 흡사한 곳이었다. 벽이나 천장은 돌이 아닌 흙으로 이루어졌고, 건너편에는 똑같은 철문이 있었다. 단, 문의 좌우로 장장 4미터를 넘어서는 거대한 사자 석상이 하나씩 놓여 있었는데, 클랜원들은 강박증에 걸렸는지 보자마자 달려가 석상을 부숴버렸다. 그것도 잘게 깨다 못해 아주 가루가 될 정도로. 움직이는 석물이 아닌 장식물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웃고 말았다. 이윽고 방을 한 차례 꼼꼼하게 탐사한 후. 나는 힘들다고, 한순간 마력을 큰 폭으로 소모해 피곤하다는 이유로 오늘 여기서 야영할 것을 지시했다. 클랜원들도 사양하지 않았다. 외려 드디어 쉰다고 좋아하며 잽싸게 야영지를 설치했다. 방에 여타의 함정도 보이지 않고, 구석이나 천장에 숭숭 뚫린 구멍이 보이기는 했으나 여기까지 오면서 수백 개나 봐왔던 것들이라 딱히 특별할 건 없었다. 우리는 가져온 음식으로 금세 식사를 마쳤고, 경계조를 제외한 인원은 모조리 침낭으로 들어가 단잠을 청했다. 나는 김한별, 근원, 이유정과 함께 초번으로 섰다. 주변에 나무는커녕 나뭇가지도 없었지만, 미리 준비해온 장작으로 모닥불을 피웠다. 타닥타닥, 불똥 튀기는 소리와 코 고는 소리만이 들리는 가운데, 일렁이는 불길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오늘 탐험을 하나씩 되짚는다. 클랜원들은 아마 내가 아무렇게나 길을 잡은 줄 알고 있겠지만 실은 아니었다. 2층으로 내려온 이후, 나는 가장 왼쪽 문으로 들어가 서서히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방향으로 행군했다. 그러면 마법 진 함정이 출현하는 공간이 나오는데, 그곳을 통과하고 나오는 방이 바로 진정한 1차 목적지였다. 왜냐면 이곳이 그 ‘요행’이라는걸 바랄 수 있는 장소였으니까. 물론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부분은 있다. 아니. 사실 될지 안 될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없다. 요행수라 함은 뜻밖에 얻어걸리는 경우를 뜻하니까. 오면서 들었던 사각거리는 소리나 여기저기 뚫린 구멍을 보면 가능성은 높겠다고 생각하지만. “흐아아암. 졸려 죽겠네. 이거 꼭 경계를 서야 하나?” 상념에 잠긴 동안 문득 하품하며 종알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건너편으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이제 막 숨을 들이켜는 김한별이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니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급히 젓는다. 보아하니 얘는 아닌 것 같고. 오른편으로 이유정이 입을 탁, 탁 두드리고 있었다. 하품은 전염된다는 설이 있던데 정말인 모양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응? 아, 그렇잖아. 일 층이라면 몰라도 이 층에서 괴물이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는걸?” “자신할 수는 없지?” “으응. 사실 이상한 소리를 몇 번 들었거든. 그런데 모습은 보이지 않고, 기척도 잡히지 않아. 과연 어떤 놈들일까?”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이던 이유정이 돌연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글쎄요. 저는 왠지 강철 산맥 이 지역을 공략할 때가 떠오르는데요.” 대답은, 김한별에게서 나왔다. “오. 그럴 수도 있겠네.” “심하기는 그놈들이 더 심했죠. 기척은커녕 소리도 안 들리고,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기까지 했으니까요.” “아쉽다. 그때 네 모습으로 변한 놈을 만났어야 했는데.” “그건 저도 그렇네요. 아니. 혹시 언니 그때 잡아먹힌 거 아녜요? 그럼….” 호기롭게 받아친 김한별은 돌연 보석을 꺼내 던졌다가 받기를 반복했다. 이유정도 지지 않았다. “들켰네. 그래서, 어쩔 건데?” 라고 말하고는 단검으로 묘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동시에 싱겁게 웃는 둘을 보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으르렁거리다 못해 무시하기 일쑤였는데, 언제 이만큼 관계가 호전된 걸까. 예전에는 날카로운 발톱을 꺼내 전심전력으로 할퀴는 고양이 같았다면, 지금은 서로 알면서 한 대씩 톡톡 주고받는 귀여운 새끼 고양이를 보는 듯하다. 그래. 이러니까 얼마나 보기 좋아. “…어쩌면 이 지역은 이미 점령당했을지도 모릅니다.” 흐뭇하게 지켜보는 와중 언뜻 누군가 속닥이듯이 말했다. “점령당해? 누구한테?” “모르겠습니다.” 이유정의 반문에 옆에 얌전히 앉아 있던 근원이 칼같이 말을 잇는다. 눈은 멍하니 모닥불을 응시하다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단 지능은 물론, 감각도 상당히 뛰어날 거라고 예상됩니다.” “왜?” “제가 전장 분석을 시도할 때마다 바로 알아채고 범위를 벗어났습니다.” “흐음. 그럼 그놈들이 이 함정 천지인 곳의 주인이라는 소린가?” “속단은 이르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면서 종종 보이는 굴의 형태와 위치를 분석 및 종합했는데, 곤충의 굴과 흡사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 잠깐 말을 흐린 근원은 작달막한 검지로 바닥의 흙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 흙장난은 아니고 무언가 그림을 그리는 것 같다. 이유정은 궁금하다는 얼굴로 스리슬쩍 들여다보더니 돌연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푸! 이게 뭐야! 근원 너 진짜 그림 못 그려! 푸하하하!” 한창 열중하던 근원이 흠칫 몸을 떨었다. “어디 나도 한 번.” 성큼 몸을 일으키자 근원이 재빠르게 손으로 그림을 가렸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찌나 잘 가렸는지 정말로 그림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번갈아 머리를 숙였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기울일 때마다 조금씩 손의 위치가 변하는 것이 아마 상대에게 보이는 각도를 계산해 가리는 듯싶다. 후후. 이렇게 나온다는 건가. 나는 왼쪽을 보는 척하다가, 오른쪽으로 숙였다가 순간적으로 다시 왼쪽으로 머리를 기울였다. 그런데도 근원은 용케 방어하더니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나를 빤히 응시했다. 무감정한 눈동자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니 왠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원이 입을 달싹였다. “…화가 납니다.” 아니. 왜 나한테 원망 어린 눈초리를 보내는 건데. 웃은 건 이유정이라고. “에이, 오빠가 잘못했네~.” “오빠 정말 너무하세요.” 얼씨구. 이럴 때는 또 쿵 짝이 맞는군. 나는 헛기침과 함께 자리에 앉고 품에서 기록을 꺼냈다. ‘사멸 무저갱’과 관련된 기록이었다. “이 기록에 아주 재밌는 내용이 적혀 있거든.” “와. 화제 전환하는 것 좀…. 응. 미안 오빠. 잘못했어. 계속 얘기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건 진중 기록이야. 적국의 수도를 점령한 장군이 적은 일기.” “그거 저도 중간까지 읽었어요. 그 장군, 성격이 조금 이상하던데요?” 김한별이 아는 체를 해와 나는 맞는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지. 결국에는 추적을 포기하지만, 사실상 포기가 아니었지. 주변에 있는 괴물을 깡그리 모아 강제로 이 안으로 처넣었거든.” 불현듯 김한별이 눈을 찌푸렸다. 아마 지하 1층에서 부딪친 죽음의 기사들을 생각하는 것 같은데, 또 의심병이 도진 모양이다. 뭐, 생각해보면 나름 합당한 의심이기는 하다만. 이유정이 입을 열었다. “성격 한 번 화끈하네. 그럼 그 괴물들이 은신처 안에 숨은 놈들을 죽여주기를 기대한 건가?” “아무래도 그렇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막 잡아다가 넣은 건 아니야. 이런 험악한 곳에서 오래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놈들로만 골랐지. 예를 들면 지하 1층에서 봤던 언데드나….” “…언데드나?” “뭐, 나머지는 나도 몰라. 거기서 기록이 끊겼으니까.” 나는 기록을 접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유정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김한별도 맥이 빠진 듯한 표정을 짓는다. 괴물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기대한 모양인데, 그렇다고 이야기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르는 건 아니지만, 기록에 없는 내용을 말하면 의심받을 수도 있으니까. “아무튼, 이곳은 더 이상 유적이 아닌, 괴물의 소굴로 변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항상 방심하지 말라는 소리야.” 결국,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다. 이윽고 돌연히 고요가 찾아왔다. 모두가 침묵하는 와중 오직 근원만이 살짝살짝 턱을 까닥였다. 아마 자신의 계산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는 모양이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세요?” 그때 등 뒤로 잠이 덜 깬 듯한 음성이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남다은이 새초롬히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다.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벌써 교대 시간인가.”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자 뒤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임한나도, 그리고 얼른 일어나라며 진수현을 흔드는 정하연도 보였다. 나는 눈매에 힘을 푸는 동시에 일부러 눈을 비볐다. 남다은이 활짝 미소 짓는다. “많이 졸리 신가 봐요?” “그냥…. 조금 피곤하네.” “먼저 주무시지….” “그러려고. 중간에 깨면 피곤하니까 일부러 초번을 선 거야.” “어머. 그거 직권 남용 아니에요?” “수현이는 직권 남용해도 돼. 오늘 앞에서 가장 고생했는걸?” 임한나가 갑자기 남다은의 옆에 붙으며 끼어들었다. “그런가? 하긴 오빠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야.” “맞아, 맞아.” 두 여인이 서로 주고받으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가만히 지켜보다가 아무 말도 않고 걸음을 돌렸다. 그러자 웃음이 뚝 그치며 “응?”이나 “혹시 내가 말실수라도…?” 등의 소리가 들려왔으나 조용히 침낭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소곤거리던 소리도 사라지고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바닥에 귀를 붙였다. 깊게 잠든 척하려 숨을 고르게 내쉬었지만 온 신경을 청력에 집중했다. 그리고,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각…. “……!” 나는 번쩍 눈을 뜨려다가 간신히 실눈에서 멈추고 땅을 흘겼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사각사각, 사각사각…! 아주, 몹시 미세하기는 하나 확실히 느껴졌다. 어둡고 축축한 땅을 긁는 무언가의 소리가. …온다. * 첫 경계조가 들어간 이후 두 번째 경계조가 모닥불 주변으로 앉았다. 벌써 교대한 지도 30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진수현은 꾸벅꾸벅 머리를 꺼트리고 있었고, 정하연은 천장이나 구석진 곳에 난 구멍을 살피며 마법 진을 설치했으며, 남다은과 임한나는 침낭이 있는 곳을 흘깃거리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한나야. 아까 수현이 표정 봤어?” “봤는데…. 표정은 별로 안 이상했어. 오히려 행동이 이상했지.” “내가 뭐 실수한 거라도 있나….” “모르지. 피곤하니 빨리 자고 싶었는지도. 그런데 다은이 너 왜 수현이한테 오빠라 그래? 나이는 똑같지 않나? 그리고 나한테는 반말하잖아.” 임한나의 가벼운 항의에 남다은이 킥 웃는다. “그건….” 그 순간이었다. 파악! 문득 무언가 퍽 터지는 소리와 함께 곳곳의 흙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흩날리는 흙가루가 얼굴을 두드리고, 두 여인이 황급히 몸을 일으킨 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1초도 지나지 않아 흙을 뚫고 나온 긴 형상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길이는 최소 4, 5미터는 넘을까. 전신은 번들거리는 칠흑 빛 갑각(甲殼)으로 덮여 있고, 몸체 좌우로 털인지 촉수인지 모를 가는 것들이 촘촘히 달려 있다. 발은 짧으면서도 얼마나 많은지 흡사 지네를 연상케 한다. 그것은, 진정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천장으로 솟구친 괴물 중, 두 마리는 올라온 기세 그대로 폭포처럼 쏟아져 모닥불 주변을 덮쳤다. 그리고 남은 세 마리는 천막 부근을 덮쳐 각각 침낭을 하나씩 휘감는다. “괴물…!” 남다은이 크게 고함치며 옆으로 몸을 피했다. 괴물이 몸을 스치는 동시에 검을 휘두르자 얼음 빛이 번뜩였다. 써억! 확실히 무언가 잘리는 느낌은 있었다. 그러나 남다은의 눈은 곧 휘둥그레 변하고 말았다. 약 2미터 남짓한 부분이 깨끗이 잘린 단면을 보이며 땅으로 떨어져 꿈틀거렸지만, 머리를 포함한 상부는 그대로 스쳐 지나가 지면을 뚫고 사라진 것이다. 처음 출현했을 때와 똑같이. 진수현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깨어났는지 검을 뽑은 채 왼쪽 무릎을 꿇고 있다. 옷에 흙이 묻어 있는 게 아마 반사적으로 바닥을 구른 모양이다. 그런 진수현의 주변에도 잘린 꼬리와 구멍 두 개가 새로이 뚫려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단 6초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침낭 인원도 후닥닥 일어나는 가운데, 정성 들여 마법 진을 설치하던 정하연이 황급히 달려왔다. 그러나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다. 멍하니 한 곳을 응시하는 임한나를 따라간 정하연의 눈이 곧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툭! 손에 쥔 지팡이가 떨어져 하릴없이 바닥을 구른다. 왜냐면, “마, 맙소사….” 천막 주변에는 아까 보지 못한 구멍이 6개나 새로 뚫려 있었으니까. 그리고 총 3개의 침낭이 사라졌으니까. “수…. 현…?” 그중에는 김수현의 침낭도 있었다. 0822 / 0933 ---------------------------------------------- “…인정 못 해.” 딱, 딱…. 딱, 딱…. 무언가 딱딱한 것을 물어 부딪치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공동을 울렸다. 찰나(時間)의 습격이 끝난 후, 야영지에는 을씨년스러운 침묵만이 맴돌았다. 고연주는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임한나와 정하연을 바라보고 있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가끔 빠드득빠드득 신경질적으로 이를 가는 소음이 들렸으나, 대부분이 망연한 얼굴로 하염없이 움푹 파인 구멍을 응시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어떤 여지도 없는 명명백백(明明白白)한 일이다. 불시의 습격을 막지 못한 원정대에 손해가 발생했다. 근접 계열 두 명과 마법사 한 명이 원정대서 이탈했다. 아니. 당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내용은 간단하나 현황은 결코 가볍지 않다. 김한별의 침낭이 사라지고, 이유정의 침낭도 사라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수현의 침낭이 사라졌다. 이 사실이 현재 클랜원들이 침묵하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김수현이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는 구구절절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특히 머셔너리 클랜원들에게는 더더욱. “살아…. 계시겠죠?” 문득, 누군가 홀연히 입을 열었다. 허나 목소리에 힘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 확신을 못 하는, 누군가가 그렇다고 해주기를 바라는 음성이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외려 딱딱거리는 소리만이 한층 심해졌을 뿐, 기대에 부응해주는 회답은 들리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상상을 한다. 상상력의 장점이자 단점은 무한한 비약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병적으로 생긴 잘못된 판단이나 확신이 끼어드는 순간, 상상은 망상으로 변한다. 말인즉 사고(思考)의 이상 현상이랄까. 그 결과 어떻게든 회복하려는 일환으로 평소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하고는 한다. 지금 정하연이 파르르 떨리는 입으로 연신 손톱을 깨무는 것처럼. 고요한 정적이 이어질수록 고연주의 표정도 조금씩 변했다. 처음에는 두 여인처럼 망연한 얼굴이었으나 점차 낯빛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고, 그때의 경험을 거울삼아 빠르게 속을 추스르는 중이었다. 이렇게 계속 망부석처럼 서 있는 건 그야말로 최악의 선택이었으니까. “우선 근원이는 들어가서 쉬어. 이런 분위기에 푹 자지는 못하겠지만, 어떻게든 마력이라도 회복해.” 그 순간 남은 인원의 눈이 모조리 쏠렸다. 언뜻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초리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시선을 느꼈는지 고연주는 곧장 말을 이었다. “물론, 구출…. 되찾을 거야. 클랜 로드는 물론, 한별이도 유정이도.” 아직 확신할 수 없는 일인 만큼 말을 아꼈다. 정확히 말하면 구출이 아닌, 되찾는다고 말을 바꿨다. ‘위험한 상태에서 구해낸다.’ 는 말과 ‘도로 찾는다.’ 는 의미는 같지 않다. 일견 비슷해 보여도 명백한 차이가 있다. “살아 계시겠죠? 그렇겠죠?” 누군가 또 한 번 같은 질문을 던졌다. “가능성은 높아. 다른 차원에 끌려갔는데도 나보란 듯이 살아 돌아온 이인걸.” 희망적인 말을 했지만 고연주는 그 누구보다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살아 있든 아니든, 이제 남은 클랜원만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김한별과 이유정도 그렇지만, 김수현의 공백은 두 말할 것도 없는 커다란 타격이다. 그래서 강제 휴식을 지시한 것이다. 김수현이 없는 원정대. 근원은 그나마 유적을 돌파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유일한 열쇠니까. “내 잘못이야…. 내 잘못….” 그렇게 고연주가 생각을 정리하는 도중에도 임한나는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중이었다. 경계조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자책하는 것이다. 남다은, 정하연, 진수현도 마찬가지였다. 고연주의 눈이 실처럼 가늘어졌다. “임한나. 허튼소리 그만하고 가서 천막이나 정리해. 사체를 분석하고 있을 테니까 정리하다 이상한 거 있으면 알려주고.” “어, 언니….” “정신 차려.” “…….” 짧지만 냉엄한 일갈. 이렇게 말은 했으나 고연주 역시도 막막한 기분은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막말로 이전에 통과한 함정이 또 한 번 출현한다면 그때는 장담할 수 없으며, 설령 어찌어찌 통과한다손 해도 괴물과의 사투도 염두에 둬야 한다. 특징도 모르고,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으며, 앞에 어떤 것이 도사리고 있는지 깜깜하다. 어깨는 시시각각 무거워져 가는데 아득하기는 매 한 가지였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 약간 뒤로 물러난 제갈 해솔은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가끔 김수현이 누워 있던 자리를 흘깃거리면서. * 드드드득, 드드드득! 흙을 스치는 되바라진 소리가 쉴 새 없이 귀를 때렸다.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가늠할 수 없고, 시간은 얼마나 흘렀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그냥 최종 보스 괴물이 있는 방으로 가는 게 아닐까, 시간은 꽤 흘렀구나 등 짐작만 할 뿐. 왜냐면 현재 현상이 내가 노린 ‘요행수’와 완전히 일치하니까. 딱 한 번, 중간에 가늘고 뾰족한 것이 목을 살짝 찔러오기는 했다. 내 내구를 뚫은 걸 보면 굉장히 날카로운 침인 듯싶은데, 별 효과는 없었다. 들어오자마자 화정의 힘으로 태웠기 때문이다. 잠깐 느껴진 뻣뻣함으로 보아 마비를 시키려 한 모양. 괜히 꿈틀거리면 일이 틀어질 것 같아 나는 얌전히 감긴 채 괴물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겼다. 놈도 내가 마비됐다고 생각하는지 이동에 박차를 가하기만 했다. 어쩌면 상당히 웃긴 상황이 아니려나. 괴물의 긴 몸체가 침낭 속 나를 단단히 감고 있고, 지하를 거침없이 유영한다. 물 흐르듯이 라고 말하기에는, 사실 상당히 거칠다. 시야는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를 반복하며 몸도 덜컹덜컹 흔들린다. 마치 놀이 공원 열차를 타는 기분 같다. 게다가 속력은 또 얼마나 빠른지. 체감되는 속도는 내 0년 차 시절 7할의 힘으로 달리는 수준과 맞먹는다. 계속 눈을 뜨고 있자니 속이 울렁거릴 정도라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나마 조금 전부터 흔들림이 조금씩 사라지는 느낌이다. 이따금 흙가루가 따갑게 튀겼으나 훨씬 나아졌다. 설마 직선일 리는 없고, 미리 파둔 구멍으로 이동하는 건가? 여하튼 지루하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럭저럭 참을만한 수준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니 그냥 눈을 감고 잠깐 쪽잠이라도 잘까 한창 고민하고 있을 즈음. “응?” 문득 몸이 길쭉하게 늘어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아니. 솟구쳤다고 해야 하나. 이어서 가볍게 내동댕이쳐지는 감각과 함께 갑자기 시야가 덜컥 고정됐다. 서너 번 눈을 깜빡이자 간신히 내가 쓰러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눈앞으로 황토색 빛깔을 띤 흙모래가 보였다. 어둡지 않은 건 의외라 생각하며 나는 주섬주섬 침낭에서 빠져나왔다. 힘껏 숨을 들이켜자 축축하고 습한 대기가 아닌 텁텁한 공기가 목젖을 두드렸다. 이윽고 차분히 몸을 일으킨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두 가지 이유에 의해서. 첫 번째는 보스 괴물의 방이라고 생각했던 공간이 아닌, 웬 끝없는 황무지가 보였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네…. 네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야! 나 말고 다른 누군가의 음성이 울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꽤나 절박한 목소리로 외치는. 눈을 돌리자 왼쪽 그리 멀지 않은 거리서 땅에 쓰러진 채 양팔을 허우적거리는 이유정이 보였다. 마치 누군가한테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려는 듯한 모습이다. 설마 이유정도 같이 딸려온 건가?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죽여버릴 거야! 박동걸! 아, 안 돼…. 오빠! 오빠아아! 아아, 아아, 아아아악! 이유정은 그야말로 쇼를 하는 중이었다. 허우적거리다가, 뺨을 맞는 것처럼 고개가 휙휙 돌아가다가, 미친 듯이 도리질 치더니 종래에는 전류에 감전된 듯 온몸을 부르르 떨며 축 늘어졌다. 한편으로는 들려오는 목소리도 꽤 이상했다. 선명하게 들리는 게 아니라 흡사 머리와 가슴을 울려 전달되는 느낌이다. 혹시 누군가 있나 싶어 주변을 면밀히 살폈지만 자욱한 안개만 보일 뿐 별다른 건 보이지…. 뭐? “……!” 그렇게 생각한 순간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여전히 방이 아닌 끝없는 황무지가 보였다. 연기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래. 그러할진대…. 으흑…. 으흐흐흑…. 또 다른 소리가 돌연히 귓전으로 흘렀다. 이번에는 김한별이었다. 오른쪽에서 몸을 웅크린 채 몹시 서럽게 눈물을 흘리고 있다. 무어라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는 것 같은데 입속말이라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런 김한별의 주변에도 자욱한 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빠르게 걸음을 옮겼으나 다가가자마자 홀연히 사라졌다. 김한별도, 안개도. “흠.” 나는 한숨과 함께 한숨을 흘렸다. 계획의 성공이 눈앞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 아마 환영을 보고 있을 가능성이 높겠지. 화정의 음성이 머릿속을 울렸다. ‘환영이라.’ 그건 알고 있다. 시야에 간극이 있다는 건 내게 모종의 이상함이 발생했다는 뜻일 터. 그중에서 화정의 말대로 환영을 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진정 의외인 건, 내가 이걸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있었다. 심안과 제 3의 눈의 조합이면 어지간한 환영은 얼씬도 못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 과연? 100% 자신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은데. ‘?’ - 생각해봐.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 때도 그랬잖아. ‘아…. 그때….’ 확실히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은 있다. 입구를 억지로 뚫으려는 순간 반전 현상이 일어나 결계의 모든 힘이 한 곳으로 집중됐고, 결과적으로 잠깐이나마 환영을 봐야만 했다. 벨페고르와 박다연 그리고 한소영의 목소리였나…? 여하튼 썩 유쾌한 기억은 아니다. - 그때가 반탄력으로 인해 벌어진 현상이라면, 지금은 고농축에 의한 잠식 현상 같은데? ‘고농축이라면…. 아까 연기를 말하는 건가?’ - 그렇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쌓인 향이나 연기는 절대로 무시 못 할 수준이니까. 그래도 완벽하게 걸린 건 아닐 거야. 비록 완전하게 막아내지는 못했지만, 네 능력은 확실히 신호를 보내주고 있으니까. ‘으음.’ -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걸. 아까 그 두 명은 거짓이 아니야. 서두르지 않으면 먼저 먹힐지도 몰라. ‘글쎄. 서두를 이유까지야….’ - …뭐? 그럼 게네가 당해도 좋다는 소리야? ‘그게 아니라. 굳이 찾으러 돌아다닐 필요는 없다는 소리야.’ 싱겁게 웃은 후, 품에서 연초를 꺼냈다. 불을 붙이며 턱을 젖히자 작열하는 태양과 먼지 가득한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나를 휩쓸고 지나갔다. 계획이 조금 어긋나기는 했다만 딱히 안달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나는 길게 연기를 흘리며 천천히 황무지를 걷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니 여러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당연히 클랜원들이었다. 과연 어떻게 반응하고 있을지가 가장 궁금하다. 설마 꼴사납게 질질 짜고 있지는 않겠지. 반대로, 무작정 쫓아오는 것도 곤란하다. 우선 냉정해져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일단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차근차근 남은 통로를 돌파하는 것이다. 근원이 있으니 함정은 걱정되지 않으나 여타의 부분은 100% 자신할 수 없다. …뭐, 고연주가 있으니 어련히 알아서 하겠느냐마는. 그때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황무지를 걷다가 나는 걸음을 멈추고 눈을 치켰다. “……!” 역시나. 내 생각이 맞았다. ‘놈’을 찾으러 구태여 여기저기 돌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왜냐면 곧 스스로 내 눈앞에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먼빛으로 누군가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이번 에피소드도 이제 두, 세 챕터 가량 남았는데, 끝이 다가올 때마다 생각도, 고민도 많아집니다. 예전에 소설에 관해 이런 말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시작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완결은 아무나 할 수 없다. 그때는 사실 크게 체감하지는 못했습니다. 완결이 어렵다는 건 알고 있고, 그래서 연재 전에 미리 구상을 해두고 들어갔거든요. 한데 요새 들어 조금씩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은 느낌입니다. 어찌 보면 이 말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해요. 공부가 쉬운 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먹고 살려면 공부하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다. 시놉에 기반한 플롯을 세워두기는 했는데, 왜 이렇게 미련이 생기는지요. 이건 괜찮을까, 아니 이렇게 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자꾸만 눈이 가고 생각하고 손을 대게 되네요. 어느 소설이든 간에, 요새 첫 구상대로, 본인의 의도대로 완결을 내신 작가 분이 참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하. :) 0823 / 0933 ---------------------------------------------- “…인정 못 해.” 지하로 들어온 이상 낮인지 밤인지 알 수는 없다. 쉬라는 말을 들었으나 클랜원 대부분이 좌불안석이었다. 침낭으로 들어갔다가 도로 나오기 일쑤였고, 괜스레 방을 서성거렸다. 아니면 주저앉아 멍하니 모닥불을 바라보거나. 이러한 일련의 행동은 무언의 항의였다. 그러나 ‘그림자 여왕’은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고연주도 얼른 구하러 가고 싶지 않겠느냐마는, ‘걱정돼서 못 참겠어! 모두 준비해!’ 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성공 확률은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진다 봐도 무방하다. 그렇게 되면 구출은커녕 돌파 자체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만전을 기해도 부족한 데 지친 몸으로 들어간다는 건 명백한 자살 행위였다. 김수현이 상시 체력을 강조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그간 무리한 행군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김수현은 안전이 확보됐거나 오래 머무를 이유가 없을 경우에만 강행군을 했다. 설령 만일의 사태가 벌어졌다 해도 충분히 해결할만한 무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와 같은 행동을 하기에는…. 고연주에게는, 자신이 없었다. 김수현의 역할을 100% 수행할 자신이. 결국, 할 수 있는 거라곤 제 살 깎아 먹는 짓만 안 할 뿐.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 흐르고 비로소 고연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레 사체를 짓밟으며 근처를 둘러보니 모두가 눈을 흘깃거리고 있다. 고연주가 입을 열었다. “하연 씨. 연락은 어떻게 됐나요?” “쉰 두 번을 했어요. 한 번도 받지 않아요.” 어느새 정하연의 얼굴은 예의 평정을 되찾았다. 통신 수정을 일그러뜨리려는 듯이 쥐고 있었지만. 고연주는 시선을 돌렸다. 임한나는 벌써 천막을 정리하고 있었다. “다른 특이 사항은?” “카오스 미믹 하나가 보이지 않아요. 구멍으로 같이 딸려 들어간 것 같아요.” “그건 아까 들었고.” “그 외에는 딱히….” “좋아. 그럼….” 이라 말한 고연주는 살짝 숨을 들이켰다. 이윽고 “준비해.” 라는 말이 나온 순간 클랜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행동했다. 눈 깜짝할 사이 야영지가 정리됐다. 꺼진 모닥불이 검고 흐릿한 아지랑이를 올리는 가운데, 원정대는 문을 마주 보고 섰다. 선두에는 임한나가 고연주, 남다은, 진수현은 삼각 진을 형성하고 마법사들은 근원을 둘러싸는 형태로 중앙에 포진했다. 임한나는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한 얼굴이었다. 잔뜩 긴장한 손으로 살그머니 문을 밀어젖혔다. 곧 입구가 짐승의 아가리처럼 쩍 벌어지는 걸 시작으로 마침내 8인의 원정이 재개됐다. 고연주의 우려와는 다르게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휴식을 취한 게 유효했다. 몸의 회복은 물론, 쉬는 동안 각자 속을 추스른 것이 좋은 결과로 나타났다. 마력을 가득 채운 근원은 적재적소에 전장 분석을 사용했고, 고연주도 절대로 무리하지 말고 길을 이끌 것을 지시했다. 그리하여 원정대는 짧은 시간에 적잖은 거리를 행군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나아갈수록 클랜원들의 안색도 처음보다 나아졌다. 꽉 조여 터질 것 같던 긴장이 부드러이 완화된다. 처음에는 은근히 자신 없어 했지만 직접 부딪침으로써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초조한 근심은 점차 사라지고 희망이 조금씩 움트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괜찮네요?” “계속 이렇게만 갈 수 있다면….” 조심스러운 어조이기는 했으나 이제는 이런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었다. 비록 가슴 한 켠의 무거움은 아직 가시지 않았지만, 클랜원들은 희망찬 얼굴로 행군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적어도 ‘그놈들’이 나오기 전까지는. * 걸음을 옮길수록, 아니 ‘그것’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풍경도 서서히 변화했다. 모래바람 흩날리던 황무지는 어느 순간 붉은빛과 어둠이 뒤섞인 공간으로 변모했다. 축축하면서 습한 내음이 코를 찔렀다. 누군가 막막히 지르는 울부짖음이 귀를 간질인다. 나는 어느새 어둑어둑한 감옥 통로를 걷고 있었다. 흡입한 연기를 길게 뿜으며 걸음을 멈췄다. 눈앞에 흐릿한 연기가 사라지고, 비로소 그것이 모습을 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연갈 빛 머리카락이었다. 칼에 썩둑 베여 떨어졌는지 사선으로 베인 결이 바닥에 흐트러져 있다. 천천히 눈을 들자 금세 주저앉을 듯 부르르 떨리는 종아리가, 붉은 핏물과 허연 진액으로 뒤범벅된 국부가, 채찍 자국이 가득 새겨진 불룩한 유방과, 그렁그렁한 갈색 눈동자가 차례대로 들어온다. 여인은 벽에 묶인 채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성스러운 여왕’ 유현아였다. “당신 때문이에요….” “흠?” “김수현, 너 때문이라고! 너만 아니었으면 내가 부랑자한테 이렇게…!” “아니. 부랑자가 아니지.” 나는 머리를 흔들며 단호히 말을 끊었다. “이 광경은…. 그렇지. 이스탄텔 로우에 패배한 이후의 기억이지. 부랑자한테 당한 건 네 입으로 듣기는 했는데 직접 본 적은 없거든.” “…….” “어때. 네가 들어도 이상하지 않아?” “……!” 찰나의 순간, 유현아의 두 눈이 샐쭉하게 가늘어졌다. 이어서 눈앞의 광경이 흐물흐물 녹아내려 소멸했다. 나는 절반쯤 탄 연초를 물고 걸었다. 그러나 얼마 걷지도 않아 다시 한 번 풍경이 변화했다. 싱그럽고 푸릇한 초원에 익숙한 사내가 털썩 쓰러져 있다. 가까이 다가가자 간신히 상반신을 일으키더니 나를 보며 힘겹게 손을 뻗는다. “수현아….” 이번에는 형인가. - 이번에도 더미(Dummy)네. 알고 있다. 복부에 구멍 뚫린 건 잘 구현했지만, 주변 풍경이 이래서야 웃음만 나온다. “너 왜 내 말을…?” 형이 애처로운 목소리로 나를 붙잡으려 했으나 나는 걷는 그대로 지나쳤다. 어차피 더미인 이상 볼 일은 없으니까. “어디 가는 거냐! 돌아와! 돌아와서 나를…!” “싫다 이놈아.” “뭐, 뭐라고? 네가 어떻게 나한테…!” “놀고 있네. 그 장소가 이렇게 싱싱하고 향기로운 줄 아냐? 제대로 읽고 구현하던가.” 코웃음 치며 대꾸하자 목소리도 뚝 끊겼다. 그놈도 이제 슬슬 열이 오르지 않으려나. - 야. 너 지금 뭐 해? ‘뭐가?’ - 아니 걸려든 척을 해도 모자랄 판에 조롱하면 어떡해? ‘더미라며?’ - 그러니까. 네가 걸린 척을 해야 본체가 기어 나올 거 아냐. ‘그것도 좋지만 도발해서 나오게 하는 방법도 있잖아. 더미로는 한계가 있을 테니까.’ 혀를 차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나 화정도 나름 일리 있다고 여겼는지 이 이상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 세 번째 환상은 어떤 전조도 보이지 않고 내 앞을 가로막았다. 하늘도 땅도, 모든 것이 갑작스레 캄캄해졌다. 이윽고 10미터 앞을 바라본 순간 우뚝, 걸음이 정지됐다. 본능적으로 끓는 듯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클랜 로드?” 거의 전라에 가까운 여인이었다. 어두운 공간에서 한소영이 기둥에 묶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의 갑옷은 온데간데없고, 넝마에 가깝게 찢어진 옷은 간신히 몸을 군데군데 가리고 있다. 동공이 풀린, 이지를 상실한 듯한 눈동자를 보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수현아….”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손에 쥔 연초를 떨구고 말았다. 아차 했으나 이미 늦었다. 한소영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으니까. 실수라면 실수였다. …라고 생각하겠지? - 진(眞). 네 말이 맞았네. 화정의 확인 사살. 이 한 마디면 충분하다. 나는 곧장 이형환위를 사용해 한소영의 뒷공간을 점거했다. “결국…. 와줬네…?” 한소영이 힘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물론 아직 남아 있는 내 잔상을 보면서. 나는 ‘예.’ 라고 말하는 대신, 희고 고운 목덜미를 향해 망설임 없이 팔을 뻗었다. 잔상이 스르르 사라지는 것과 한소영이 치뜬 눈으로 돌아보는 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수…! 키에에에에에에엑!” 세게 목을 움키자 한소영이라고는 상상도 못 할 짐승 멱따는 소리가 터졌다. 놈은 미친 듯이 꿈틀거리면서 빠른 속도로 희미해졌다. 아마 황급히 도주하려는 것 같았으나, - 어딜! 화륵, 화르르륵! 놈의 움직임을 알아챈 화정이 바로 불꽃을 뿜어 탈출을 저지했다. 이윽고 염화(炎火)에 살라 먹힌 한소영의 모습이 점차 사그라지고, 동시에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도 사라졌다. 그 대신 물컹물컹한 젤리 같은 것이 손아귀에 한가득 잡혔다. 어느새 손에는 표면이 일렁일렁 물결치는 허연 덩어리가 잡혀 있다. 이놈이 바로 사멸 무저갱을 총괄하는 ‘환상의 도플갱어(Vision's Doppelganger)’인가. 이윽고 놈은 별다른 비명도 지르지 못하며 잿가루로 변하기 시작했다. 사실 보통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상대하기 쉬운 놈은 아니다. 상대의 기억을 읽고 환상으로 비약하는 능력이나, 스스로 침투해 상대의 정신을 무너트리는 능력은 상당히 무서운 편에 속한다. 김한별과 이유정도 끽소리 못하고 무너지지 않았는가. 단. 나와 상성이 몹시, 굉장히 안 좋았다. 심안과 제 3의 눈의 조합을 뚫은 건 인정하지만 결국에는 그뿐. 내가 환상을 알아차렸을 때부터 이놈의 패배는 시간문제였다. 잠시 후. 키에에에에에…. 단말마의 비명치고는 작은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는 한 줌 재로 변해 분분히 흩날린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주변은 희멀건 한 연기가 자욱이 흐르고 있다. 비로소 진짜 은신처로 들어온 것이다. 좋아. 이로써 사멸 무저갱의 공략을 완료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차분히 인근을 둘러봤다. 하나 의외인 건 방이 생각보다 어둡지 않다는 것. 그러나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천장에서 은은한 빛무리가 내려오고는 있으나 연기 때문인지 시야가 상당히 제한된다. 연기를 걷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으나 우선 할 일이 있었다. 나는 강화한 안력으로 바닥을 면밀히 살폈다. 김한별과 이유정은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쓰러져 있었다. 허나 상태는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이유정은 눈이 까뒤집힌 채, 허리는 있는 대로 들어 올려 푸들푸들 떨고 있고, 김한별은 흡사 실 끊긴 인형처럼 온몸을 대자로 누워 벌려 있다. 죽은 생선 같은 눈동자가 유난히 눈에 밟힌다. 이 둘은 과연 어떤 환상을 보고 있으려나.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느긋한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나는 지체 않고 다가가 한 명씩 정화 작업을 시도했다. 화정의 힘을 흘려 넣으려 손을 대자, 그제야 애들의 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마 꽤 격한 환상을 보는 중인 것 같다. 그렇게 정화 작업을 마치고 나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부드러운 흙이 아닌 딱딱한 돌의 감촉이 느껴졌다. 어차피 본체를 쓰러트린 이상 각성(覺醒)은 기정사실이다. 그저 깨어나는 시간을 앞당겼을 뿐. 그러자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김한별과 이유정이 차례대로 정신을 차렸다. 아마 요리조리 비틀거리며 ‘여, 여기는…?’ 따위의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둘은 후닥닥 상반신을 일으키더니 몽롱하고도 서글픈 눈으로 고개를 휘휘 돌렸다. “그래. 몸은 좀 어때.” 이윽고 가볍게 말을 꺼낸 순간, 두 쌍의 눈동자가 번개처럼 내게 꽂혔다. 그리고, “…오, 오빠.” 망연히 나를 보던 김한별의 눈에서 돌연 눈물 한 줄기가 주룩 흘러내렸고, “…오빠?” 이유정도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 흐윽흐윽, 거칠어지는 숨소리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괴물도 처치해줬겠다. 기껏 깨워줬건만 왜 울어. “오빠하아아앙….” “오부으아어엉….” 그러나 속을 채 추스를 틈도 없이 김한별과 이유정은 엉금엉금 기어와 함께 내 품으로 안겼다. 그리고 쉰 목소리로 흐느끼고, 구슬프게 울어 젖히기 시작했다. 마치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나는 하염없이 눈만 끔뻑거리다가, 이내 양손으로 두 여인을 감싸 안으며 말없이 토닥였다. 아마 당치도 않은 악몽을 꿨을 거라 생각하면서. ============================ 작품 후기 ============================ Q 1. 1 + 1 = 2(X) Q 2. 1 + 1 = 3(O) Then, Q 3. 1 + 2 = ? 0824 / 0933 ---------------------------------------------- “…인정 못 해.” 지하 2층.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른다. 아니.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터벅터벅 내딛는 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워 보이고, 어깨는 축축 늘어졌다. 낯에는 지친 기색만이 가득하다. 꾸역꾸역 행군하는 원정대의 낯빛은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잠깐 움트던 희망의 씨앗은, 다시 고개를 꺼트렸다. 괴물의 출현이 본격화된 이후 원정대의 행군 속도는 현저히 느려졌다.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나 그 정도가 상당히 심하다. 100미터도 채 못 가서 괴물이 출현해 전투를 해야만 했다. 간신히 전투를 넘겨도 그다음에는 도처에 도사린 함정을 신경 써 건너야 한다. 그냥 매 순간순간이 전투의 연속이었고, 방심하는 순간에는 함정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뿐일까. 조금이라고 쉴라치면 귀신같이 알아챈 괴물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모두가 암암리에 느끼고 있었다. 괴물의 행동이 이상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당히 조심스러운 감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180도 달라졌다.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끊임없이 수색과 돌격을 반복할 뿐이다. 수는 또 어찌나 많은지. 여태껏 원정대가 썰어버린 놈들만 해도 사백 마리는 넘을 터. 이러니 지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연락은 좀 어때요?” “아직…. 응?”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전투 직후. 휴식 겸 가만히 수정을 만지작거리던 고연주가 화들짝 고개를 치켰다. 한껏 치뜬 눈이 곧 실처럼 가늘어졌다. 저 표정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후유….” 창백한 얼굴로 바라보던 정하연은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마력을 많이 사용해서일까. 지팡이를 쥔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다. “…또 포위됐어요.” 꼴깍꼴깍 물약을 마시던 임한나는 가슴에 흘린 액체를 훔치며 중얼거렸다. 말할 기운도 없어 보였으나 이를 악물며 활을 쥐었다. “망할!” 땡그랑! 마찬가지로 물약을 마시던 진수현은 병을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최전선에서 날뛴 근접 계열들의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심각한 상처는 보이지 않으나 온몸에 검붉은 체액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게다가 진수현의 의복은 검게 그을리거나 군데군데 찢어진 것이 유효타를 제법 허용한 듯싶다. 이미 방진을 유지한 채로 쉬고 있어 딱히 이동할 필요는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클랜원들은 각자의 무기를 거머쥔 채 사방을 경계했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사방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동시에 사각거리는, 무언가 쓰는 듯한 소리가 공간을 소슬히 울렸다. “…온다.” 이미 알고 있지만, 사용자들은 반사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임한나의 등 뒤로 서너 개의 구체가 떠오르고, 서너 명이 빠르게 주문을 외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윽고 트인 통로는 물론, 땅속에서도 무언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못해도 4미터 이상이 길이를 가진 그것들은, 마치 뱀처럼 땅을 유영하며 빠른 속도로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 ────. 아이스 랜스(Ice Lance)! 연발(Repeatedly)!” 십수 개의 얼음 창이 도처로 뻗어 나가는 것과 동시에 길쭉한 검은 파도가 원정대를 덮쳤다. 잠시 후, 미친 듯한 고함과 폭음이 어두운 지하 통로를 떠르르 울렸다. * ‘환상의 도플갱어’가 사라지니 연기도 서서히 희미해졌다. 차차 사그라지는 연무(煙霧) 사이로 가려져 있던 광경이 어슴푸레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사멸 무저갱’의 최 심층부는 확실히 여느 방과는 다른 공간이었다. 약 10미터 높이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아치(Arch)형 천장에는 아직도 빛을 뿜는 구슬이 절반이 넘는다. 각진 벽돌로 쌓인 회색빛 벽은 낡기는 했으나 한 군데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는다. 내부는 우리가 들어온 거실을 제외하고 총 여섯 개의 문이 더 있는데, 은신처임을 고려하면 다용도의 방을 만들어놓은 듯싶다. 지면에 더러 구멍이 있거나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기는 했지만, 방은 유수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하기야 왕족이 숨는 공간이니 허술히 설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열어보지 않으면 예의가 아니다. 이 중에는 분명 창고도 있을 테니까. “흠. 여기는 식량 창고였나? 텅 비었네.” “흐윽! 흐으으윽!” “오~. 여기는 침실인가보다. 얘들아 이거 좀 봐봐. 침대도 있고, 욕실도 있는 것 같은데?” “어엉…. 어어어엉….” 나는 하나씩 문을 열 때마다 일부러 과장해 감탄을 터뜨렸다. 여기 좀 보라는 의미로 살짝 문을 흔들었으나 곧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흑, 흐윽!” “으아아앙!” 인어 자세로 주저앉아 비련의 여인처럼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김한별. 이제는 숫제 엎드려 고개를 파묻고 엉엉 울어 젖히는 이유정. 울음보는 여전히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깨어난 이후로 계속 빽빽 울기만 하는데 나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멈추지 않았다. 결국에는 탐사를 중단하고 다시 앉고 말았다. “그만 좀 울어라. 응? 병아리도 아니고 4년 차씩이나 된 사용자가….” 하나 신기한 사실은 내가 이렇게 앉기만 하면 두 명이 같은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방금도 그렇다. 실컷 울어 젖히다가도 내가 있는 쪽으로 앙금앙금 기어오지 않는가. 이뿐인가. 중간에 길이 부딪치니 서로 어깨로 밀치거나 붙잡아 젖히는 등, 진정 이해 못 할 행동이다. 이윽고 두 여인은 내 품에 고개를 묻고 또 울기 시작했다. 혹시 나를 어미로 아는 건 아닐까. 아주 귀여운 새끼 고양이 납셨다. - 그냥 이해해. 얘들은 너랑 다르잖아. 아마 엄청나게 시달렸을걸? 오죽하면 저러겠어? 그건 알고 있다. 한데 무슨 환상을 봤느냐고 물어도 도통 말을 하지 않는다. 외려 말을 꺼낼 때마다 우는 소리만 더 커지니 역효과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또다시 조용히 토닥거려주고 말았다. 그때였다. 웅웅웅웅! 불현듯 품 안에서 진동 소리가 울렸다. 손을 넣어 꺼내자 통신용 수정이 번쩍번쩍한 푸른빛을 뿌리고 있었다. 조금만 마력을 넣으면 누가 연락했는지 알 수 있다. 아니. 누가 했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 아주 짧은 시간, 오만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으나 수정은 빛을 꺼트릴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나는 한동안 수정을 쳐다보다가 도로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러자 김한별과 이유정은 울면서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흐엉?” “…으앙?” 그래. 이제 울음을 언어로 삼기로 한 거냐. 연락을 받지 않고 집어넣자 둘은 서서히 눈물을 그쳤다. 이윽고 젖은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이 이제야 겨우 상황을 직시한 모양이다. 한참을 돌아보던 김한별이 살그머니 입을 열었다. “여기는….” “끝.” “…끝, 요?” “자다가 끌려들어 간 것까지는 기억해?” 둘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이 방은 아마 유적의 최 심층부가 아닐까 싶은데.” 이유정은 아까부터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김한별은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돌연 “아.” 탄성을 터뜨렸다. 경계 때 나와 근원에게 들은 말도 있으니 빠르게 알아들은 듯싶다. “설마…!” “걱정하지 마. 괴물의 식량 저장고는 아니니까.” “보스는요?” “이미 해치웠어. 그래서 너희가 깨어난 거고.” 김한별은 살며시 눈을 감고서 기나긴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그러나 곧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것이 아직 의문이 남은 듯하다. 아마 왜 연락을 받지 않았는지 궁금하겠지. “그럼….” 예측은 했다만 말문이 막혔다. 이 둘이 같이 딸려오는 건 예상치 못한 일이다. 그냥 혼자 끌려와 단독으로 처리할 생각이었다. 한데 상황이 꽤 오묘해졌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오빠. 연락하는 게 좋지 않아? 언니들이 엄청나게 걱정하고 있을 건데….” 이유정이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말했다. 김한별도 동의했다. “맞아요. 아니면 제가 할까요? 우리 살아 있다고. 괜찮으니까….” “글쎄.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 “…네?” “연락한다고 달라지는 게 있나. 어차피 우리는 길도 모르잖아. 차라리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는 게 낫지.”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 둘은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기야 스스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설명이다. “오빠. 혹시 누가 걱정해주는 거 즐기는 성향이야?” “내가 변태냐.” “그럼 왜요. 생각해보세요. 지금 남은 사람들은 얼마나….” “그래야, 더 필사적으로 찾을 테니까.” 결국에는 조금이나마 진심을 말하고 말았다. 일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일부러 둘을 보지 않았다. 연초를 꺼내 물며 턱을 젖히고 시선을 올렸다. 천장이 빛에 섞여 아스라이 눈에 들어온다. 지그시 눈을 감자 여러 음성이 뇌리를 스쳤다. ‘에이 뭐야. 괜히 걱정했네. 그럼 이번에도 형님만 믿고 가면 되겠네요? 헤헤.’ 왜 내게 기대려 하는 거지? 자신을 믿어도 될 텐데. 실력도 있잖아? 1회 차 때 단신으로 마법사 부대를 전멸시켰던, 내가 가장 닮고 싶었던 ‘마법사 사냥꾼’이잖아? ‘내가…? 아, 응. 그래야지.’ 왜? 나는 엄연히 근접 계열이고 너는 궁수인데. 원래 탐험은 궁수가 선두에서 선도하는 게 정상 아닌가? 한데 왜 그렇게 어색하게 쳐다보는 건데. ‘그런가? 하긴 오빠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해? 내가 아니었어도 충분히 올 수 있었을 거야. 특히 너는 무려 검후(劍后)인데. ‘맞아, 맞아.’ 왜, 왜, 왜, 왜. 왜 당연하게 여기는 건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인정 못 해.”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젠장, 인정 못 하겠다고.”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눈은 감고 있는데 눈동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간다. 아차 싶었으나 이왕 내친 김이었다. “여덟 명이잖아.” “…….” “그림자 여왕, 검후, 주문 저격수, 황혼의 무녀, 군단 소환사는 둘에, 초 정보 집합체, 거기다 제갈 해솔까지. 시크릿만 다섯, 레어 같지도 않은 레어 하나, 희귀한 마법사 둘. 이 인원으로 사멸 무저갱을 돌파 못 한다? 너희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 한 번 말이 트이니 둑 터진 물처럼 쏟아졌다. 이 유적을 돌파하는 게 쉽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한때는 용이 잠든 산맥과 비슷한 악명이 쌓일 뻔한 곳이니까. 하지만 어쨌든 결국 공략됐다. 사용자에 의해서. 김한별과 이유정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내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냥 살아 있다는 말 한 마디면 되는데. 아마 이런 나를 이해할 수 없겠지. 그러나 갑갑하기는 나도 매 한 가지였다. 문득 이런 상황이 조금은 우습다고 느껴졌다. 2회 차를 선택한 이후, 하나씩 준비한다고 생각한 것들이 어느 순간부터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무어라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끝이 다가올수록 확연히 체감했다. 정확히는 내가 지옥으로 끌려들어 갔을 때부터, 아니. 이렇게 생각했을 때부터 느꼈다. ‘춘추 전국 시대를 건너뛰지 않았어야 했나….’ 기실, 늦게 깨달은 감도 없잖아 있었다. 알아서 잘할 거라 생각하고, 스스로 해줄 수 있는 선에 선을 그었다. 한편으로는, 알면서도 외면해왔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후회한 순간부터 인정해버린 것과 진배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바라고 있었다. 클랜원들이 내 인정이, 내 생각이 틀렸다고 증명해주기를. 내가 없는 상황에서, 클랜원들은 과연 어디까지 보여줄 수 있을까? 여기서 한 번 확실하게 확인해보고 싶었다. 이 머셔너리 라는 클랜이 ‘계획’을 이루기에 적합한 집단인지…. 아니면, 실패한 집단인지를. 0825 / 0933 ---------------------------------------------- Magician Hunter, Returned. 김수현이 ‘연락하지 않겠다.’ 라고 선언한 후 방은 고요한 정적으로 빠져들었다. 사실 이렇게 있어 봤자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그냥 ‘기다리는’ 것만 가능할 뿐. 워낙 강력히 말한 것도 있지만, 애초 둘은 김수현의 말을 거역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나마 김한별이 김수현의 마음을 돌리려 애썼으나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느냐.’, ‘기다리는 동안 식사나 식수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라는 말에는 조금 반응을 보였지만 결국에는 쓸데없는 노력이었다. 원정에 챙겨온 두 개의 카오스 미믹 중 하나가 이유정의 침낭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두 남녀는 왜 이게 이유정의 침낭에 있는지 궁금해했으나 정작 당사자는 먼 산을 쳐다보며 모르겠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식(食) 문제를 해결한 후 세 명은 방을 돌아다녔다. 곳곳에서 찾아낸 편의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장치나, 총 두 방에 쌓인 성과들을 보고 잠시 떠들 수는 있었다. 그러나 효능을 모르는 이상 그림의 떡이었다. 카오스 미믹에 구즈 어프레이즐은 없었다. ‘저주가 걸려 있을지 모르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라는 말이 나오자 두 여인은 학을 떼며 물러났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니 정말로 할 일이 없었다. “야,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그럼 원정대가 우리를 찾기 전까지는, 오빠랑 데이트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입을 오물거리며 히히 웃는 이유정을, 김한별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오빠 속도 모르면서.’ 김한별은 카오스 미믹에서 꺼내온 말린 육포를 주워 먹으며 눈을 돌렸다. 방 안에는 일찍이 식사를 끝낸 김수현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갑옷을 벗고 등을 대고 누운 채 한 손에 쥔 통신용 수정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다. 이따금 눈을 감으며 탄식과도 같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낯빛은 담담하기 그지없으나 행동에서 알 수 있다. 적어도 김한별은 느낄 수 있었다. ‘그냥 연락 한 통만 하시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서도, 한편으로는 김수현의 마음이 이해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말을 듣는 내내 가슴이 뜨끔했다. ‘인정 못 한다.’ 는 말이 비단 원정대만을 향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과 이유정은 물론, 머셔너리 클랜 전체를 겨냥한 말이었다. 어쩌면 클랜원 중 유일한 ‘EX 등급’인 안솔은 제외일지도 모르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쉬울 게 없는 원정대다. 구성원 한 명 한 명이 내로라하는 사용자이며 어딜 가든 한 무리를 이끌만한 능력이 있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 보면 분명히 그렇다. 그러나 실제 원정 내용을 하나씩 되짚어 본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김한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을 동그랗게 뜬 이유정을 뒤로한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오빠.” 탕, 문이 닫히자 김수현이 휘둥그런 눈으로 바라본다. “또 왜….”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분명히 구하러 와줄 거예요.” “…응?” “한 명도 잃지 않고, 모두.” 멀뚱히 바라보던 눈동자가 멍해졌다. ‘뭔 헛소리냐.’ 가 아닌, 의외라는 기색이 강하다. 김한별은 까닭 없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추스르며 서서 기다렸다. 잠시 후, 김수현은 느릿하게 품속으로 구슬을 집어넣었다. 깍지 낀 양손으로 뒷머리를 받치며 싱겁게 입을 터뜨렸다. 하나 분명한 건, 미미하게나마 웃었다는 것. “그래…. 고맙다.” 고맙다, 는 말이 나왔다. 여러 의미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말이었다. 이 말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한 김한별은 여기 있는 동안에는 더 이상 조르지 않기로 했다. 물론 ‘이것만’. 잠시 후, 마주 미소 지은 김한별이 스리슬쩍 김수현의 옆으로 드러누웠다. 갑옷을 벗어서 그런지 진한 남성의 냄새가 콧속을 훅 찔렀다. 어차피 기다려야 한다면 이번 기회를 틈타 해결할 일이 하나 있었다. 이유정의 말대로, 아틀란타로 돌아가면 두 번 다시 이런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쯤 한창 고생하고 있을 원정대한테는 미안하지만, 김한별로서는 몹시 오랫동안 기다려온 회답이었다. 그렇기에 놓칠 수 없었다. “그런데요.” 쿵쾅쿵쾅, 미친 듯이 방망이질하는 가슴을 추스르며 김한별은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혹시 저한테 할 말 없어요?” “응? 무슨 말?” 역시 잊고 있었다. 김한별은 순간적으로 혀를 깨물었으나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냈다. ‘사랑해요.’ ‘오빠, 사랑해요.’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어떻게든 들어야 했다. 그래야 자신의 입장이 확실해진다. 받아들여 줄지, 아니면 이만 포기하고 새로운 인연을 찾을지. “그 차원으로 끌려갔을 때…. 이 세상으로 돌아오면, 말씀해주신다고 하셨잖아요.” “……?” “그때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 끔뻑끔뻑,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던 두 눈이 한순간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조용히 반응을 지켜보던 김한별은 예의 쌀쌀맞은 눈동자로 팔짱을 꼈다. 빤한 눈초리에 김수현은 한껏 당황한 얼굴로 허겁지겁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천하의 김수현도 지금만큼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때였다. “하, 한별아. 그게 말이다.” 쾅! 문이 세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김한별은 반사적으로 입을 짓씹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하?” 흡사 무법자와 같이 등장한 이유정은 가깝게 붙어 있는 두 남녀를 보며 새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대로 점프, 김수현의 남은 옆자리를 차지했다. “무슨 말인데? 나도 들어도 되지?” 그리고 김수현의 옆에 찰싹 붙으며 천연덕스레 종알거렸다. 김한별은 기나긴 한숨을 쉬었다. “…언니. 혹시 ‘넌씨눈’이라는 말 아세요?” “그럼 너는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말 알아?” “그럼…!” “그만, 제발 그만 해.” 파츠츠츳! 둘 사이로 무형의 전류가 흐르기 시작하니 김수현이 급히 중재에 나섰다. 둘을 한 번씩 쳐다본 후, 침착히 머리를 가로젓는다. “우선 너희 둘 다 자는 게 좋겠다. 너무 힘들어 보여.” 아닌 게 아니라, 각자 환상을 겪고 나온 두 여인의 낯은 피로가 가득히 그늘지어 있었다. * 정하연의 선공으로 원정대와 벌레의 전투가 서전(緖戰)을 알렸다. 근접 계열은 마법사를 중심으로 서서 방진을 갖추고 있었다. 진수현은 칼을 땅에 세게 부딪혀 묻은 체액을 털어냈고, 정하연은 지팡이를 겨눈 채 곧바로 주문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벌레들은 꿈틀꿈틀 물 흐르듯 다가오는 중이었다. 이윽고 놈들이 쩍 아가리를 벌리는 것을 시작으로, 마침내 본격적인 전투의 신호탄이 울렸다. “크윽!” 진수현은 자신이 맡은 쪽으로 흘러오는 놈들을 향해 쉬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 ‘왜…. 왜 이렇게 힘들지?’ 힘들다, 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단순한 체력 부담을 말하는 게 아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러나 전혀 반갑지 않은 낯선 감각이다. 분명 별것 아닌 놈들이다. 일대일로 붙으면 벌레보다 진수현의 능력이 훨씬 뛰어나다. 그러나 자고로 물량에는 장사 없다는 말이 있다. 이건 현재 원정대 전원에 통용되는 말이었다. 아무리 사용자 정보가 뛰어나도, 워낙 수적으로 밀리는 탓에 차차 밀려나는 수밖에 없었다. “모두! 눈 감고, 호흡 멈추고, 귀도 막아요!” 그때 제갈 해솔이 높은 목소리로 외쳤다. 직접 맞서 싸우는 근접 계열한테는 자살하라는 소리였으나 진수현은 빠르게 물러나며 순순히 말을 따랐다. 이렇게 급박한 전투 상황에서는 마법사의 지시를 따라도 하등 나쁠 게 없었다. 오히려 생명줄이 될 가능성이 높다. “────! ────!” 제갈 해솔이 무어라 크게 소리 질렀다. 대부분 귀를 막은 터라 자세히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 찡하고 이명이 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이윽고 번쩍 눈을 뜨자 눈앞으로 허둥지둥 갈피를 잡지 못하는 벌레들을 볼 수 있었다. 처음 보는 마법이었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시간 없어요! 어서!” 그 말이 들린 순간 진수현은 망설임 없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벌레들은 마치 누가 누구인지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덕분에 진수현은 마음껏 칼을 휘두를 수 있었다. 딱딱한 껍질을 자르는 게 약간 버거웠지만, 아직 여력은 남아 있던 터라 삽시간에 열 마리를 깡그리 눕힐 수 있었다. 그때였다. “끄어어어어어어엉!” 살짝 여유가 생기려는 찰나 구슬픈 비명이 귀를 때렸다. 비비앙이 소환한, 한쪽을 막고 있던 사티로스가 휘청휘청 무너지고 있었다. 막 정신을 차린 벌레들에 둘러싸인 채 온몸을 물어뜯기는 중이었다. 전신에서 흐릿한 연기를 줄줄 흘리는 것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으아아악! 야! 도대체 무슨 마법을 쓴 거야!” 비비앙이 방방 뛰었다. 진수현은 본능적으로 상황을 직감했다. 제갈 해솔의 말을 듣지 않은 사티로스도 마법의 영향에 들어간 것이다. 애초 마수는 소환사의 명령밖에 따르지 않으니 누구 잘못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진수현은 재빠르게 상황을 살폈다. 우선 맡고 있는 왼쪽은 가장 벌레가 적었다. 정면은 고연주가, 후방은 남다은이 막아내고 있다. 근처에는 스물이 넘는 사체가 굴러다니고 있었으나 벌레들은 아직도 밀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잠시 후, 검은 연기가 불처럼 타오르며 사티로스가 역 소환됐다. 진수현은 더 볼 것도 없이 땅을 박찼다. “닥치고 빨리 소환이나 해!” 이를 가는 비비앙을 세게 밀친 다음, 물밀듯 밀려오는 벌레들을 마주했다. 이내 맞부딪치지 직전, 곡선을 그리며 날아온 수 발의 불덩어리가 정확히 벌레 무리에 내리꽂혔다. 진수현의 지원을 인지한 근원이 타이밍 좋게 지원 사격을 날린 것이다. 콰콰콰쾅! 고막을 흔드는 폭음과 함께 두꺼운 불기둥이 치솟는다. 그러나 그런 불길을 뚫고 튀어나오는 놈들도 확실히 있었다. 특히 몇몇 놈은 전신이 노릇하게 익었으면서도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진수현도 이를 악물며 칼을 내리쳤으나 껍질을 반쯤 파고드는 선에서 멈췄다. 계속되는 전투 속에서 칼날이 날카로운 예기를 잃었다. 텅!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갑자기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약 50센티미터는 될까. 바로 옆에서 벌레가 미친 듯이 주둥이를 움직이며 무언가를 갉아먹고 있다. 누군가 때맞춰 보호막을 걸어주지 않았다면 아마 유효타를 허용했을지도 모른다. “젠장…!” 그러나 진수현은 당황하는 대신, 보호막이 유지되는 동안 적을 처리하는 길을 선택했다. 지금껏 아끼고 아껴둔 마력을 일거에 폭발시킨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진수현이 괴성을 지르며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렀다. 사방으로 검광이 번뜩이고, 곳곳에서 체액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야말로 기병 돌격을 방불케 하는 돌진에, 벌레 무리가 모세의 기적처럼 반으로 갈라진다. 진수현은 어느새 호흡도 잊은 채 사방팔방 검을 뿌리고 두드렸다. 한바탕 미친놈처럼 날뛰니 공격이 조금 시들해진 것 같기도 했다. 진수현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토해내며 주변을 둘러봤다. 전신이 갈라지고 터진 벌레의 사체가 그득했다.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형님만 있었다면….’ 전투 와중 한 번쯤 김수현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형님만 있었다면 이까짓 놈들쯤 모조리 쓸어버렸을 텐데. 이렇게 생각하니 현 상황을 낯설게 느끼는 것도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동안 김수현이 맞서왔던 놈들은 이런 하찮은 벌레 따위가 아니다. 악마 14 군주, 쿠샨 토르, 아스트랄 차원, 고대 악신…. 훨씬 더 강한 놈들 앞에서, 정말 이길 수 있느냐는 생각이 드는 놈들 앞에서, 한 치도 밀리지 않고 클랜원들을 이끌었고, 끝끝내 승리했다. ‘내가 그때 뭘 했더라?’ 스스로 자문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 한 게 없다는 소리다. 탁 까놓고 말하면, 그냥 구경만 했다. 끼어들 수준의 전투가 아니라는 같잖은 이유로, 김수현의 목숨을 건 전투를 손 놓고 지켜보기만 한 적도 있었다. “킥.” …그래서, 우스웠다. 형님은 그렇게나 강한데, 누구는 고작 이런 벌레 앞에서 헉헉대고 있는 꼴이라니. ‘형님도…. 이런 기분이셨나?’ 입이 벌어지고 허연 이가 드러났다. 숨이 차서 그런지 침이 자꾸 고여 뚝뚝 떨어졌다. 진수현은 합, 입을 닫으며 떨리는 숨을 추스르려 애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윽고 앞쪽에서 새로운 벌레 무리가 출현을 알렸다. 사각사각,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면서. “…빌어먹을!” 저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벌레들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계속 수를 불렸다. “비비앙! 도대체…!” 진수현은 황급히 뒤돌아보며 으르렁거렸으나 곧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마수는 이미 소환된 상태였다. 군단장뿐만 아니라 군단 전체가 소환됐다. 그러나 마수 군단은 어느새 자신이 비워둔 왼쪽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 이상함을 느낀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적고 싶은 파트가 나왔군요. 무엇이냐고요? 하하. 속ㄷㄷ내ㅡㄷ. 0826 / 0933 ---------------------------------------------- Magician Hunter, Returned. “으윽…!” 김한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호흡이 헐떡거리고 등은 땀으로 젖은 것이 흡사 악몽이라도 꾼 듯한 모양새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끊임없이 쓸어내린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김한별의 눈에 문득 이채가 스쳤다. 누군가를 찾는 걸까. 주변이나 침대 아래를 몇 번이나 두리번거리더니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김수현이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걸어 문을 열고, 이내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그 순간 김한별의 걸음이 멈칫했다. “…언니?” 문밖에는 선객이 있었다. 이유정이 한쪽 구석에 서 있었다. 하나 특이한 건, 어딘가 굉장히 아파 보인다는 것이다. 한 손으로 벽을 짚고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것이 금세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괜찮으세요?” 이유정이 흘끗 고개를 돌렸다. “마침…. 잘 나왔다.” 끓는 듯한 음성으로 말하고는 간신히 김한별을 돌아본다. 그리고 힘없는 손놀림으로 느닷없이 바지를 벗기 시작했다. 김한별이 주춤했다. 갑자기 옷을 벗어서이기도 했지만, “언니….” 투명하고 진득한 액체가 내려가는 바지를 따라 쭉 늘어졌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음부는 물론, 훤히 드러난 허벅지 안쪽도 흥건히 젖어 있다. 게다가 속옷의 중앙 부분은 숫제 샛노란 빛으로 흠뻑 얼룩진 상태였다. 은근히 풍겨오는 열기에는 미미한 지린내도 섞여 있었다. 김한별이 낯을 찡그렸다. “…쉬했어요?” “아니. 요실금.” “그게 그거죠.” “침대에서 싼 거 아니거든?” “그럼….” “닥치고 물 좀 내놔봐. 빨아야 할 것 같으니까. 찝찝해 죽겠어.” 이유정이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 김한별은 바지와 속옷을 벗고 쭈그려 앉는 이유정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잠깐 낯에 갈등의 빛이 스쳤다. 그러나 곧 자신의 어깨로 살그머니 손을 올렸다. “물 좀 달라니까…. 응?” 사르륵, 사르륵. 로브와 바지가 차례대로 흘러내렸다. 이유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줍은 듯 오므린 양 가랑이 사이, 새하얀 속옷이 푹 젖다 못해 축축해 보일 지경이었다. 속옷을 끌러내리니 꾹 닫힌 음부에서 투명한 액체가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점점이 적셨다. 이내 맞은편에 쭈그려 앉는 김한별을, 이유정은 묘한 눈초리로 응시했다. “…너도냐?” “…….” “무슨 환상이었는데?” “언니 먼저 말하면 나도 말해줄게요.” 그렇게 말한 김한별은 곧바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유정은 치사하다고 중얼거렸으나 손끝에서 물줄기가 나오기 시작하자 얼른 바지와 속옷을 가져왔다.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 김한별의 것까지. 얼마의 침묵이 흘렀다. 두 손으로 옷가지를 꾹꾹 짜내고 비틀던 이유정이 돌연 푹 고개를 숙였다. 이어서 모기만 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통과의례였어.” “통과의례요?” “그래, 통과의례. 거기서 박동걸이라는 새끼 기억해?” “당연히 기억하죠. 그 야비한 놈을 어떻게…. …언니, 설마.” 무언가 깨달은 듯한 목소리. 여전히 아래를 보는 채로 이유정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진짜 존나게 따먹혔어. 무려 일주일 내내.” 김한별이 남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씨발, 무슨 레스트 룸이 조교실이야?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거였는데. 그렇지?” 이유정은 찢어질 듯 옷가지를 비틀었다. 억지로 밝은 척하기는 했지만 떨려 나오는 목소리는 살짝 젖어 있었다. 어느새 어깨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그렇지?’ 라는 말이 김한별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굳이 말을 꺼낸 이유가 어쩌면 동질감을 느꼈거나 위로를 받고 싶었는지도….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쓱쓱, 손등으로 눈을 비빈 이유정이 코를 훌쩍 들이켰다. 김한별이 안쓰럽다는 듯이 쳐다봤다. “아까는 괜찮아 보였는데….” “그건 척한 거지. 괜찮은 척.” “왜요?” “생각해봐. 오빠가 그렇게나 괴로워하시는데…. 더 징징댈 분위기는 아니었잖아.” 김한별의 눈에 새삼스럽다는 빛이 돌았다. 그냥 아무 생각 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설마 알고 있는 줄은 몰랐다. 문득 이유정이 눈을 들었다. 발개진 눈으로 김한별을 응시한다. “그래서, 너는?” “네? 아. 저, 저는 뭐….” “뻥 칠 생각은 하지도 마. 자면서 끙끙대는 소리 다 들었으니까.” “…상납이요.” 김한별은 눈 딱 감고 실토했다. 이유정은 고개를 갸웃했다. “상납? 혹시 성 상납 말하는 거야?” “잘 아시네요.” “머셔너리에서 그런 일이 있었어? 누가.” “…머셔너리가 아니라, 그전이요.” 이유정이 아, 탄성을 터뜨렸다. 김한별의 전 클랜을 기억해낸 것이다. 흘끗 눈을 올린 김한별은 우울한 낯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언니보다는 낫네요. 저는 체감상 나흘이었으니까.” “이런 거에 낫고 말고가 어딨어. 아무튼, 나는 여기 나가면 박동걸 그 새끼 찾아내서 죽여버릴 거야. 기필코.” “그거야 언니 마음 이기는 한데…. 그런데 그때 왜 그렇게 처음부터 각을 세운 거예요?” “내가 현대에서 경찰대 준비하다 왔다고 말했지? 그 새끼가 자꾸 솔이 흘깃거리는 거 보니까 딱 촉이 오더라고. 모르긴 몰라도, 그 새끼 분명 범죄자 출신일 거야.” 이유정은 속옷을 탁탁 털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뒷담화를 곁들인 빨래가 끝난 후, 한쪽에 옷을 잘 펴놓은 두 여인은 함께 탁자에 걸터앉았다. 여분이 옷이 없어 의도치 않게 하의가 실종된 상태였다. 김한별은 부끄러운 듯 상의를 벗어 하반신을 감쌌지만, 이유정은 스스럼없이 가랑이를 벌리며 종아리를 흔들거렸다.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은 잘 있으려나…. 걱정되네.” “잘 있겠죠. 길은 근원이가 있고, 여차하면 비비앙 씨의 군단도 있고….” “그래도. 있잖아, 우리 오빠 몰래 연락할까?” “절대로 안 돼요.” 김한별은 딱 잘라 거절했다.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시계추처럼 앞뒤로 흔들리던 이유정의 다리가 우뚝 멈췄다. “왜?” “안 그래도 오빠 고민 많은 것 같던데…. 괜히 복잡하게 만들지 말아요. 오빠 화나면 무서운 거 몰라서 그래요?” “흠. 이번에는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됐어요. 그냥 얘기를 꺼내지 않는 게 최선이에요.” 이유정은 젖힌 고개를 도로 내렸다. 한동안 앞을 망연히 응시하더니 홀연히 입을 열었다. “글쎄.” “…글쎄요?” “아니. 과연 그게 최선일까 싶어서.”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불현듯 이유정이 킥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잖아. 나는 잊고 싶은 게 있고, 오빠도 그렇고. 아, 말이 좀 이상한가?” “엄청나게 이상해요.” “그, 러, 니, 까. 나나 오빠나 서로 상부상조하자는 거지.” “……?” “그리고 이게 제일 중요한 데…. 나 이번 원정만 끝나면 잘하면 B 등급으로 올라갈 것 같거든?” “그, 그래서요?” 무언가 불안함을 느낀 걸까. 김한별이 말을 더듬으며 반문했다. 그러자 이유정의 눈매가 오묘한 호선을 그리는 동시, 살며시 옆을 흘겼다. 이유정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야, 나 부탁 하나만 좀 하자.” * 한편, 같은 시각. “뭔, 뭔….” 간신히 정신을 차린 순간에는 사방, 아니 팔방(八方)이 벌레들로 빽빽이 에워싸여 있었다. 열, 스물, 마흔, 여든…. 가히 셀 수도 없을 물량으로 완벽하게 둘러싸였다. 퇴로는 모조리 차단됐다. 더욱 놀라운 건, 벌레 무리는 아직도 출현 중이라는 것. 어느새 기백(幾百)은커녕 갑절은 될 듯한 놈들이 동족의 시체를 덮고 끊임없이 꾸물꾸물 기어 나온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진수현이 머뭇거린 순간, 벌레 무리는 동시에 S자를 그리며 돌진을 시작했다. 콰르르륵, 콰르르륵! 일여덟 마리 수준이 아니다. 최소 서너 배에 달하는 놈들이 한꺼번에 몰아쳐 오는 광경은, 한껏 분노한 검은 해일이 덮쳐오는 장면과 흡사하다. 새로운, 더 많은 물결이 시시각각 다가온다. 이대로 집어삼키겠다는 듯 아가리를 쩍 벌리는 성난 파도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칠해졌다. ‘이건…. 도저히….’ 결국 기세에 압도당한 진수현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채 물러나기도 전, 벌레들은 신속히 진수현을 에워쌌다. 맹목적인 악의에 뒤통수가 시큰거린다. 좌우는 물론, 후방까지 점거당했다. 거의 끝났다고 여겼건만. 여태껏 상대한 놈들만 족히 천을 넘을지 모른다. 한데 아직도 이 정도나 남아 있을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터. 사방은 고함과 쇳소리로 가득했다. 곳곳이 아수라장이다. 어느 한 군데도 여유롭지 않다. 이미 중앙도 침범당한 지 오래였고, 비비앙와 임한나가 결사적으로 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저지조차 거의 끝나가는 중이다. 어디 하나 지원을 요청할 상황이 아니다. “…….” ‘끝’을 느낀 걸까. 멍하니 앞을 바라본 진수현은 순간 이를 악물며 칼을 휘둘렀다. 벌레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상반신을 일으켜 쏜살처럼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보호막을 번뜩이는 이빨로 갉아먹기 시작했다. 수가 좀 적었다면. 아니, 지쳐 있지 않았다면. 아니, 마력만 충분했다면. 하다못해 퇴로라도 트여 있었다면. 최소한, 버티기라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악조건을 끌어안은 진수현은 그야말로 그로기(Groggy)까지 몰린 상황이었다. 이러는 와중에도 대여섯 마리를 쓰러트리며 분전했지만, 최후의 보루였던 보호막은 ‘파각!’ 소리와 함께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이어지는 일까지 막을 도리는 없었다. 진수현은 미친 듯이 칼을 뿌렸으나 목부터 발끝까지 순식간에 여러 군데를 물어뜯겼다. 젖 먹던 힘까지 뽑아내 악착같이 달라붙는 놈을 내리찍었으나 상처는 기하급수로 늘어났다. 경기공(硬氣功)으로 버티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 갑작스레 천장이 시야로 들어왔다. 한 박자 늦게 몸이 기울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털썩, 고슬고슬한 감촉이 등과 맞닿았다. 체액으로 젖은 흙은 차갑고 축축했으나 진수현은 그 어느 침대보다 푹신하고 부드러운 감각을 느꼈다. 시커먼 무리가 이불처럼 몸을 덮어온다. 삽시간에 모든 것이 편안한 암흑으로 변했다. “진수혀언!” 비비앙이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방진이 무너져 버티느라 신경을 못 썼는데,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다. 누군가의 위로 겹겹이 쌓이는 벌레 무리를 보며 소리쳤다. “꺼내와! 꺼내오란 말이야!” 황급한 목소리에 군단장과 십수 마리 마수가 돌아섰다. 거대한 낫을 붕붕 돌리며 벌레를 걷어차고 베는 등 안간힘을 다해 혈로를 뚫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진수현은 외부의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뜨겁다….’ 온몸이 불타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힘없는 몸부림만 칠뿐이었다. ‘여기는….’ 눈앞은 암흑. 어디를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다. 잠시 후, 전신을 태우는 뜨거운 감각조차도 발목부터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죽는 건가….’ 진수현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자신이 죽는다는, 죽어간다는 사실을. ‘죽는다.’ 는 감각. 신기하게도 생각한 것처럼 그리 무섭지도, 아프지도 않다. 아니.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 진수현의 몸을 가득 채우는 감정은 두려움도, 통증도 아니었다. 오직 단 하나. 허탈함.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아등바등했으나 죽음은 정말로 한순간이었다. 이 간극에서 느껴지는 허무함은 여타의 감정을 깡그리 몰아낼 만큼 강렬했다. 한편으로는 가슴 터질 듯이 갑갑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냥 받아들이기로 한 걸까. 어쩌면 이미 감겼는지도 모르지만 진수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돌연히 누군가의 모습이 어른어른 떠올랐다. ‘아라?’ 아니. 맹아라는 아니었다. 차가운 눈동자, 건장한 몸, 칠흑색 갑옷, 붉은 망토…. 느닷없이 스친 회상은 분명 김수현의 모습이다. 진수현은 희미하게 자조적으로 웃었다. ‘형님만…. 형님만 있었다면….’ 후회의 순간, ‘이렇게 허무하게 죽지는 않았을…?’ 문득, ‘…왜?’ 최후의 의문이 찾아왔다. 그리고 미미하지만 ‘분노’라는 감정의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이 상황에 관한, 자신을 눕힌 벌레 대한 분노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화를 내는,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 오롯한 격분이다. 또한, 누구도 아닌 진수현이기에 느낄 수 있는 분노이기도 했다. 일찍이 진수현은 천사의 계획 아래 포스트 김수현으로 키워졌다. 도중에 중단되기는 했지만, 그때의 진수현은 분명히 리더였다. 따라다니는 처지가 아니라 중심적인 위치에서 동료를 이끌었다. 비록 만들어진 상황일지라도, 위기 때는 항상 선두로 나서 처리했다. 그래. 그랬던 진수현이다. 그러할진대. ‘언제부터….’ 비로소 깨달은 순간, ‘그것’은 서서히 느껴졌다. ‘내가, 언제부터…!’ 죽음 직전, 조금씩 심지를 좀먹던 불길이 일순간 크게 발화(發火)하며 미친 듯이 도화선을 불태웠다. 진수현의 얼굴이 분노한 짐승처럼 일그러졌다. ‘…인정 못 해.’ 그렇게 생각한 찰나. “진수혀어어어어언!” 애달픈 비명과 동시, 공교롭게도 눈앞을 가리던 어둠이 걷혔다. 트인 시야로 무언가 투박한 것이 뻗어온다. 갑자기 되찾은 시력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진수현은 순간적으로 마주 손을 뻗어 그것을 굳게 맞잡았다. 잠시 후, 파묻혀 있던 몸이 강제적인 힘에 의해 허공으로 딸려 올라갔다. 그리고. ============================ 작품 후기 ============================ 아니, 10회 후 각성이라니요…. OTL 어제 회 기준으로, 2회 후 각성입니다. ㅜ.ㅠ 여하튼 이 파트도 끝났고, 아마 다음 파트가 이번 에피소드의 마지막일 것 같습니다. 아, 그나저나 고민입니다. 고백하자면 좀 약해도 아름답게 느낄 수 있는 베드 신을 써보고 싶은데, 자꾸만 야하게, 야한 쪽으로만 쓰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아무래도 수련이 부족한 것 같아요. 요새 음란마귀가 끼어서 그런가요…. 어쨌든 마음을 다스려야겠습니다. :) 0827 / 0933 ---------------------------------------------- 우리는 열심히 돌파하고 있는데. “인정 못 해애애애!” 진수현이 소리를 질렀다. 아니, 포효라고 봐야 옳을까. 못 해애…! 못 해애애애…! 못 해애애애애애…! 못 해애애애애애애애…! 고함은 곳곳에 부딪쳐 도처에 메아리쳤다. 이어서, 꽈아아앙! 세찬 폭발음이 사방을 왕왕 울렸다. 격렬한 진동이 주변을 휩쓸고, 흐르던 공기가 짜릿하게 떨렸다. 이 무시무시한 기백(氣魄)에 치열하던 전투는 한순간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사용자는 물론, 심지어 벌레 무리조차도 하던 행동을 멈췄다. 눈동자가, 주둥아리가 모두 한곳으로 돌아간다. 그곳에는 진수현이 있었다.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두 다리는 무릎을 꿇은 채로, 머리를 땅에 처박고 있다. 이마와 지면이 맞닿은 부분에 점차 검붉은 빛이 번졌다. “인정….” 그러한 찰나, 진수현이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못하겠다고…. 새끼들아….” 반쯤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한 살기를 품은, 맹렬한 분노가 담긴 목소리였다.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찢어진 의복은 이미 옷의 기능을 상실해 넝마에 가까웠고, 군데군데에 시뻘건 액체가 그득했다. 깨진 이마에서는 핏물이 뚝뚝 떨어져 흘러, 얼굴은 선혈(鮮血)로 낭자하다. 그러나, 두 눈동자만큼은 형형한 빛을 뿌렸다. “그래…. 형님이 존나 센 건 인정해.” 휘청, 잠시 몸이 가느다랗게 흔들렸다. 그러나 바로 균형을 잡고 살며시 무릎을 굽힌다. 마치 상대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준비를 마친 육식 동물과도 같이. “하지만….” 으스러지도록 칼자루를 잡는다. “나도, 아니.” 진수현이 머리를 흔들었다. 울음을 참는 듯 목울대가 떨리고, 굳게 닫은 입 틈으로 거친 그르렁거림이 새어 나왔다. 잠시 후, 힘껏 숨을 들이켜며 한껏 턱을 치켰다. 그리고, “내가, 내가 진짜 사냥꾼이다! 이 개새끼들아아!” 여태껏 참고 참아온 화산이 꽝 폭발했다. 상처 입은 짐승의 최후의 울부짖음이 통로를, 방을, 공간을, 아니 지하 전체를 떠르르 울렸다. 동시에 어마어마한 기운이 폭발적으로 용솟음치며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최후의 촛불이 타오르며, 마침내 깨어났다. 1회 차 춘추 전국 시절. 단신으로 전장을 휩쓸었던, 김수현이 기억하는 진정한 ‘마법사 사냥꾼’이 지금 이 자리에서 부활한 것이다. 가만히 상황을 보고 있던 고연주는 아차 하며 몸을 돌렸다. 경험상, 전투 도중 ‘폭주’할 시 끝이 좋은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 다음 순간,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당장에라도 짐승처럼 달려들 것 같던 진수현이, 오른손에 쥔 검을 천장을 찌르듯이 들어 올린다. “검(劍)의 승리를 노래하는 칼.” 칼날이 찬연한 빛을 뿜었다. 그리고 지극히도 차갑고 냉정한 음성이었다. 떨려 나오는 목소리는, 흡사 설원의 늑대를 연상케 할 정도로 싸늘하다. “마(魔)의 패주를 음영하는 칼.” 스르르릉! 남은 손이 스치듯 움직였다.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검이 둘로 나뉘었다. 어느새 왼손에는 찬연한 빛을 분사하는 또 하나의 검이 움켜져 있었다. 하나 분명한 건, 지금 진수현은 양손에 검을 들었다는 것. 이윽고 어떤 예고도, 어떤 전조도 없이 진수현이 달렸다. 양손의 검을 풍차처럼 빙그르르 돌리며 바람처럼 질주한다. 그 바람은, 곧 하나의 거대한 폭풍으로 변해 벌레들을 세차게 강타했다. 씨잉! 첫 바람이 매서운 칼날처럼 스쳤다. 뒤늦게 검광(劍光)이 번뜩인 찰나, 한 놈의 머리통이 썩둑 베여 떨어졌다. 연이어 불어온 바람은 눈 깜짝할 새에 예닐곱 마리를 한꺼번에 갈가리 난자했다. 그리고 세 번째 바람이 흐른 순간, 진수현을 중심으로 사출된 수십 줄기의 검기(劍氣)가 사방팔방 뻗어 나가, 벌레 무리를 눈부시게 난도질한다. 수십의 벌레가 일거에 체액을 뿜으며 분리되는 광경은 그야말로 일대 장관이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그렇게 조금도 멈추지 않고 무섭게 밀고 나가자, 벌레 무리는 속절없이 좌우로 갈라졌다. 진수현은 호흡도 잊은 듯, 아니 멈추는 때가 자신이 죽는 순간이라는 듯, 쉴 틈 없이 동서로 번쩍였다. 빛나는 검으로 적을 시원스레 쓸어버리는 모습은, 흡사 2회 차 초, ‘빅토리아의 영광’을 들고 거침없이 전장을 누비던 김수현을 보는 듯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림자 여왕’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냉정히 상황을 분석한 결과, 객관적인 전황은 아직 벌레들에게 유리하다. 진수현의 힘은 분명히 폭발적이나, 일시적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노련한 고연주는 확실히 그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폭주’가 아닌 ‘각성’이라면, 그리고 조금 전부터 벌레의 충원이 끊어졌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길이 없는 것도 아니다. 말인즉, 비단 고연주만이 아닌 전원이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분명히 옵니다.’ ‘역전할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가….’ 불리함을 넘어 극한까지 치달리던 전투의 흐름이 파국(破局) 직전에 멈춰 섰다. 최후의 촛불을 불태우며 되살아난 투쟁심(鬪爭心)이, 결국에는 조금씩이나마 흐름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진수현이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다. 이 흐름이 다시 되돌아갈지, 아니면 완벽히 가져올 수 있을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들에게 달렸다. 그리하여. “일어나라, 심연의 무리(Abyss Crowd).” 전원 각자 남은 여력을 꺼내고, 쏟아내기 시작했다. 열, 스물, 서른, 마흔…. 고연주의 아래, 줄기줄기 뻗어 나가던 수십 가닥의 그림자가 하나씩 차례대로 몸을 일으킨다. “여왕은….” 남다은의 전신에 화사한 빛이 떠오른다. 어찌나 강렬한 기운인지 한 올 한 올 올라가는 머리카락이 시린 냉기를 뚝뚝 떨어트린다. “금이득지어(今已得地於)….” 임한나는 하늘을 향해 시위를 놓았다. 쏘아진 빛나는 화살은 천장으로 스며들 듯 사라지더니, 이내 거대한 원으로 변해 하나의 진을 그려낸다. “────! ────! 오라! 피에르!” 비비앙도 남은 마력을 박박 긁어모았다. 이미 한계치까지 마력을 사용했지만,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놓은 ‘질서의 오르도’를 사용하면 한 번 더 소환이 가능하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 전장 분석…. 완료. - 분석 결과, 사용자 진수현의 엄호를 최우선으로 설정, 이차적으로 전방위로 지원 사격을 설정합니다. 웅웅웅웅! 근원이 공중으로 느릿하게 부유했다. 허공에 은근한 빛이 감돌며 기이한 공명(共鳴)이 번져나갔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주변으로 익숙한 것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입체의 마법 진이 핑그르르 돌아가며 서서히 모습을 갖춰간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무려 수십 개나. - 고대 마법 도시를 소환…. 완료. - 마지아(Magia)와의 연결을 시도합니다. 근원의 음성이 공간에 잔잔히 흐른다. 이로써, 바야흐로 서로의 명운을 건 최후의 전투가 재개를 알렸다. 아까와 변한 게 하나 있다면, 전투에 임하면서 대부분이 웃고 있었다. 승리를 확신한다는 듯이. * 한편, 같은 시각. 사멸 무저갱 심층부. 서로 사이좋게 하의 실종으로 탁자에 걸터앉은 두 여인 사이에는 묘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김한별은 멍한 눈으로 입을 벌린 채 누군가를 쳐다보고, 이유정은 낯을 살짝 붉힌 채 눈웃음을 치고 있다. 한참을 응시하던 김한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오늘 하루만 다른 방에서 자면 안 되겠느냐고요?” 이유정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유가…. 오빠랑 그, 그 짓을 할 거라고요?” 또 한 번 말없이 끄덕끄덕. “그러니까…. 언니는 이 원정만 마치면 B 등급인데, B 등급으로 오르면 언니를 따먹겠다고 말씀하셨다고요? 오, 오빠가?” “아니. 사실 말을 꺼낸 건 나야. 내가 먼저 따먹히고 싶다고 했어.” 김한별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동시에 이채가 스쳤다. 하지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유정은 시선을 피한 채 엄한 머리카락만 배배 꼬며 말을 잇는다. “사실 등급에 별 의미는 없고…. 그냥 자격을 갖추고 싶었다고 해야 하나? 아, 몰라 몰라. 갑자기 말이 안 나오네.” “…….” “뭐, 한창 고생하고 있을 동료한테는 미안하지만….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이런 기회가 자주 오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이렇게 기약 없이 기다리기도 좀 그렇고.” “으음.” “뭣보다 악몽에 시달리면서 괴로워하는 게 너무 싫어. 환상인 건 알지만, 진짜 몸이 더럽혀진 기분이거든. 그래서 오빠한테 안기고 싶은 건가 봐. 히.” “그, 그건….” “아무튼, 한별이 너는 나 이해하지? 들어줄 거지? 응?” “자, 잠시만요.” 그렇게 말한 이유정은 돌연 품에 손을 넣어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정확히는 습격에서 얻은 전리품으로, 고연주가 극구 경계한 미약이었다. 워낙 위험한 가루라 김수현이 보관하고 있었는데, 자는 도중 스리슬쩍 가져온 것이다. 김한별의 의아한 눈빛을 빛내자 이유정이 씩 웃었다. “이게 아프로…. 뭐였더라? 여하튼 일단은 오빠한테 들이대 보고, 만약 안 먹히면 이걸 사용할 생각이야. 좋은 계획이지?” “────.” “물론, 알고 있어. 너도 오빠 좋아하잖아. 나 그렇게 경위 없는 년 아니다? 만약 네가 내 부탁을 들어주면, 이거 쓰고 남은 거 너한테 줄게. 어때?” “────.” 이유정은 주머니를 흔들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갑자기 김한별이 입을 딱 다물더니 지그시 쳐다보기만 한다. 아니, 무어라 웅얼거리는 소리는 들리는데 입속말이라 자세히 들리지 않는다. 마치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아.” 깨달은 순간에는, 이미 늦었다. 탁, 날카롭게 주머니를 가로챈 김한별은 그대로 몸을 돌려 침실로 달렸다. 이윽고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록 업(Lock Up).” 찰칵! 잠기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야말로 한순간에 벌어진 일. “…….” 한 손을 든 채 멍하니 있던 이유정은, 약 3초 후 상황을 이해했다. “야아아아!” “어헉.” 방이 떠나가라 지르는 소리에 김수현이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쾅쾅쾅쾅! “문 열어어어!” 뻥뻥뻥뻥! “문 열라고오오오!” 미친 듯이 두드리고 발로 차는 소리, 그리고 잡아먹을 듯한 비명. 아직 덜 깬 눈으로 들썩거리는 문을 쳐다보던 김수현은, 눈앞으로 황급히 다가오는 여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오, 오빠.” “김한벼어어얼!” “죄송한 데 지금 말씀해주세요. Yes에요 No에요?” “개소리하지 말고! 빨리 문 열어 이 개새끼야!” 쾅쾅쾅쾅쾅쾅쾅쾅! 김수현은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찌푸리면서도 의아히 쳐다보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러나 김한별은 한없이 급한 얼굴로 김수현의 어깨를 잡고 흔들 뿐이었다. “빨리요. 대답해주기로 하셨잖아요.” “아, 아니. 한별아.” “그냥 좋아, 싫어 이렇게 말씀하시면 되잖요. 이게 어려워요?” “그게 아니라….” 꽈앙! 결국에는 문이 부서졌다. 입을 짓씹은 김한별은 순간적으로 김수현의 옆으로 도망쳤다. 쿵쾅쿵쾅 들어온 이유정은 씩씩거리며 눈을 부라렸다. 일촉즉발의 상황. 푹 한숨을 내쉰 김수현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오른손을 꾹 주먹 쥔 채로. 잠시 후, 소란스럽던 방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해졌다. 두 여인은 허연 김이 피어오르는 정수리를 문지르며 김수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데, 두 명 모두 하의를 입지 않은 탓에 상황이 꽤 묘하게 됐다. 김한별은 옷을 벗어 가리기는 했으나 대신 드러난 가슴을 가리려 애썼고, 이유정은 이불을 끌어당겨 하반신을 덮었다. 어쨌든 상황 설명은 대충 끝났다. 팔짱을 낀 채로 상념에 잠겨 있던 김수현은, 기나긴 한숨을 끝내고 머리를 들었다. “그래. 순서를 정하다가 싸웠다고.” “…….” “그럼 하나만 물어보자. 너희가 뭔 얘기를 하든 크게 상관은 않겠다만…. 어째서 내 의지는 무시하는 거지?” “무슨 의지? 오빠 나랑 하기로 약속했잖아?” 뻔뻔함도 도를 넘으면 기가 막힌다. 김수현은 입을 쩍 벌렸다. 말을 들은 적은 있으나 약속한 기억은 없다. “저는 최소한, 대답이라도 듣고 싶었을 뿐이에요.” 김한별은 조용한 음성으로 최소한을 강조하며 말했다. 김수현은 침음을 흘렸다. 이 건에 관해서는 백 번 생각해도 할 말이 없었다. 역지사지로 생각해봐도 확실히 잘못한 일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생각을 정리한 김수현은 습관처럼 입에 침을 바른 후 두어 번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친여동생을 보는 듯한, ‘그래. 오빠는 다 이해한다.’ 라 말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으음. 우선 너희가 오빠를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도 정말 고맙다고 생각한다. 이건 진심이야. 하지만 얘들아? 너희는 아직 어려. 이 세상에는….” “아닌데? 나랑 한별이는 여기서 사 년이나 활동했고, 다른 남자한테는 손톱만큼도 관심 없는데? 오빠바라기라고 했잖아.” “하하. 그렇구나. 그런데 말이다. 너희는 모르겠지만….” “알고 있어요. 이스탄텔 로우 로드, 연주 언니, 한나 언니, 하연이 언니, 다은이 언니. 다섯 명이죠?” 콜록! 김수현이 크게 기침했다. 순간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둘을 쳐다봤지만, 이내 체념한 듯이 입을 깨물었다. “…알고 있었구나. 그래. 하지만 아무리 홀 플레인이라도….” “야, 아니지. 여섯 명이지. 게헨나는 왜 빼먹어? 임신시키고 애까지 낳았는데.” “아, 맞다. 그러고 보니 게헨나도 있었네요.” “…….” 김수현은 침묵했다. ============================ 작품 후기 ============================ 마법사 사냥꾼 각성 완료. 이제 보너스 스테이지로 돌입합시다. 0828 / 0933 ---------------------------------------------- 우리는 열심히 돌파하고 있는데. “────. ────.” 우우우우우우우웅! 영창을 끝낸 근원이 혼돈의 솜니움을 들어 올리자 허공의 마법 진들이 격렬히 공명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진의 회전이 멈추고, 진동도 멈췄다. 그리하여 모든 소음이 완전히 잦아들었을 즈음, 마침내 진의 중앙서 각양각색의 마법이 서서히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순간 한꺼번에 사출된 어마어마한 마법이 눈 깜짝할 새 벌레 무리를 뒤덮었다. 이상함을 느낀 벌레들은 급히 흩어졌으나 이미 한참 늦었다. 각각 형상과 빛깔이 다른 마법들은 흡사 빗발치듯이 쏟아져, 모조리 작렬했다. 세찬 폭음이 귀를 때리고 흙 연기가 자욱이 터졌다. 그러나 사용자들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분전했다. 임한나의 기원(祈願)은 후드득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빛의 화살을 떨어트렸고, 비비앙도 최후의 마력을 쥐어짜내 기어코 제 4군단을 소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윽고 마수들이 사방으로 달려들어 가는 것을 시작으로, 상황은 혼전으로 빠져들었다. 이것은 벌레들에게 커다란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제껏 압도적인 수를 바탕으로 쉴 틈 없이 적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깨질 듯 말 듯 위태위태하던 상대가 갑자기 거세게 반항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건 반항을 한참이나 넘어선, 상황이 반전될 정도의 무시무시한 반격이다. 화르르륵, 곳곳에서 화염이 치솟는다. 우왕좌왕하던 놈들은 시시각각 옮겨붙는 염화에 휩싸여 괴성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 사이로 제 4군단의 마수가 뛰어들어 헤집으니 당연히 흐트러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벌레들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자연스레 근접 계열들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그때였다. 천장에서 마구 쏟아지던 마법이 돌연 뚝, 끊겼다. 허공을 오색찬란한 색으로 밝히던 빛무리도 시들해졌다. 마지아(Magia)의 마법 진이 일시에 희미해지고, 공중을 부유하던 근원은 땅으로 추락해 하릴없이 쓰러졌다. 그로기(Groggy) 상태. 이제는 손 하나 움직이기도 어려울 만큼 온 기력을 소비한 것이다. 고개조차 들지 못하게 하던 폭격이 끊기자 벌레들도 조금씩 기세를 일으켰다. 그러나 원정대는 입을 열기는커녕 무서우리만치 집중했다. 왜냐면 전원 느끼고 있었으니까. 간신히 잡은 이 승기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지금 여기서 싸우는 모두가 남은 기력을 남김없이 쏟아붓고 있다는 것을. 결국에는 누가 더 오래 버티는가의 싸움이다. 이 최후의 여력이 다하는 순간, 패배는 기정사실이었다. 상황은 점차 난전을 넘어 아수라장으로 치달렸다. 진정으로 어지러움의 절정을 달리는 격전이었다. 사방에서 괴성이 난무하고 폭음, 굉음이 어우러졌다. 천장까지 치솟은 흙 연기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만들었고, 가끔은 통로의 벽이 와르르 무너져 벌레, 사용자를 구분하지 않고 덮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끝이 보이지 않던 전투도 서서히 끄트머리를 보이기 시작했다. 벌레의 사체가 산처럼 쌓였으나 무너지는 사용자도 하나둘 늘어났다. 마력을 한계까지 소비한 마법사들은 대부분 쓰러졌지만, 기절한 건 아니었다. 약간이라도 마력이 모이는 족족 주문을 외워 날리고 다시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남은 사용자들도 이를 악물며 악착같이 싸워나갔다. 임한나는 반쯤 주저앉은 자세에서도 쉬지 않고 화살을 날렸고, 남다은은 전신에 상처를 입고서도 벽에 기댄 채로 부단히 검을 움직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 끝끝내 버티던 비비앙이 허물어지자 제 4군단도 차차 소멸하기 시작했다. 이미 첫 소환에 비해 삼 분의 이 이상이 줄어들어 있었지만, 공간이 어느 정도 트이며 전황이 정리된다. 간신히 눈동자를 굴린 비비앙은 엎드린 채로 웃었다. 푹! 땅에서 꿈틀거리던 벌레를 내려찍은 진수현은 있는 힘껏 머리를 치켰다. 흠뻑 젖은 머리카락이 젖히며 검붉은 액체를 흩뿌리고, 닫혀 있던 입이 진득이 벌어졌다. “푸하아아!” 이윽고 칼자루를 잡은 채 한쪽 무릎을 꿇는 동시, 단내 섞인 숨이 거칠게 토해졌다. 일어난 이후,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움직인 진수현이 정지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과장 하나 안 보태고, 흙 바닥은 질척하다 못해 벌레가 뱉어낸 체액이 발등까지 차올라 있었다. 짧은 시간에 너무나 많은 액체가 쏟아져 미처 전부 흡수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 전투의 웅덩이 속에 떠오른 승리는 벌레가 아니라 원정대에게 돌아갔다. 그래, 이겼다. 비록 업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심지어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전투지만, 여덟 명의 사용자는 무려 일천이 넘는 벌레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말만이 아닌, 진정한 일당백(一當百)을 이루어냈다. “고생했어.” 꿇어앉아 호흡을 가다듬는 진수현에 문득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겨우 눈을 들자 손이 불쑥 내밀어 져 있다. 고연주가 옅은 미소 띤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축하해. 이제는 애송이라고 부르지도 못하겠네?” 진수현의 눈을 끔뻑거렸다. 고연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숨을 추스르던 남다은은 소리 없이 웃으며 살짝 끄덕였다. 방금 전투에서 진수현은 분명히 누군가의 역할을 해냈으니까. “감사합니다….” 진수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이어서 손을 잡고 힘겹게 일어나려는 찰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냐면 목만 남은 벌레가 오른손목을 물고 있었으니까. “어머.” 고연주는 깜짝 놀랐으나 정작 진수현은 멍한 눈으로 손목을 응시하다가 몇 번 흔들어 떨어트렸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이빨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지만, 다행히 살을 파고들지는 않았다. 경기공(硬氣功)으로 막아낸 것이다. “흐응. 고작 이 정도에 감각을 잃을 만큼 위태롭다면, 방금 한 말은 취소해야 할 것 같은데?” “에이, 설마요. 너무 약해서 몰랐어요.” “정말?” “그럼요. 아, 어디 벌레가 물었나?” 고연주가 장난스레 반문하자 진수현은 아니라는 듯 손목을 돌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한쪽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근원은 누운 채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 벌레 맞지 않습니까?” 그 순간 한껏 으스대던 진수현의 낯에 떨떠름함이 스쳤다. 그리고 한 5초가 지났을 즈음, 누군가 갑작스레 “푸.”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힘없는 웃음이 흘러나온다. “킥…. 그러네…. 벌레 맞네.” “흐하하하….” 누구도 이 웃음의 의미는 모른다. 그러나 부정적인 느낌이 아닌, 기분 좋은, 홀가분하다고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웃음은 곧 전염되듯이 번져, 고요한 통로에 한참 동안 흘렀다. * 어두운 방 안, 낡은 침대. 그리고 내 앞에 무릎 꿇고 앉은 두 여인. “…….” 우선은, 서글프고 안타깝다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이제 와서 유세를 부리겠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김한별과 이유정은 내가 통과의례 때부터 거둬 키워온 애들이다. 말인즉 금동이, 은동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어쨌든 나름 금이야 옥이야 키워왔건만, 좀 컸다고 하는 짓이 가관이다. 한 명은 눈 똑바로 뜨고 바락바락 대들지를 않나, 또 한 명은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또박또박 말대꾸까지 한다. 어쩌면 이렇게 안현이랑 차이가 날까? 이래서 딸내미 키워봤자 다 소용없다고 하는 것 같다. 나는 푹푹 한숨을 내쉬며 가만히 생각을 정리했다. 이것들이 지금 꽤 기세등등하게 쳐다보는데, 내가 어디 가서 말로 밀릴 사람은 아니니까(물론, 형은 제외한다). 조금 유치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설득에는 자신 있다. 좋아, 그럼 시작해볼까. “으음. 아까도 말했지만, 너희 마음은 정말 기쁘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한 말 또 하면서 시간 끌 생각하지 마요.” “…그게 아니라, 너무 갑작스럽다는 이야기야.” “갑작스럽다고요?” “그래. 자는데 갑자기 들어와서 이러는 건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자고로 남녀 관계는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가는 건 좀 아니잖아? 나도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갖고….” “그건 말도 안 되는 궤변이죠. 왜 스리슬쩍 현 상황에 초점을 맞추시려고 하세요? 제가 오빠한테 처음 고백한 건 아틀란타를 공략하기도 전이었고, 그 후로도 계~속 기다렸는데요. 그리고 오빠는 대답해주겠다고 확실히 말씀하셨고요. 설마 생각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어. “그러네. 한별이 말이 맞네. 나도 오빠한테 처음 말 꺼낸 게 F등급 되기도 전이었거든. 벌써 몇 개월도 전이잖아?” 그, 그런가? 그렇게 시간이 빨리 흘렀나? “…생각하니까 열 받네? 오빠. 혹시 밀당 즐기는 성향이야?” “무, 무슨.” “그럼 말을 해~. 좋아, 싫어. 이렇게 딱 말하면 되잖아. 그래야 우리도 어떻게 할 수 있을 거 아냐. 이게 어려워?” “…그럼, 싫다고 말하면 깔끔하게 포기하는 거냐?” 무언가 밀린다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강하게 나가자 둘은 흠칫했으나 곧 동시에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서글프겠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죠. 엉엉 울다가 자존심 상실하고, 결국에는 우울해져서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지 모르겠지만요.” “응. 나도 시원하게 포기할게. 만날 환상의 악몽에 시달리다가 미쳐서 돌아버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제는 숫제 으름장, 아니 협박을 한다. - 글쎄. 나는 쟤들의 말이 좀 걸리는데. 문득 화정의 음성이 머릿속을 울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 아니. 어쩌면 조금 위험한 상태일지도? ‘왜?’ - 악몽에 시달린다고 했잖아. 무슨 환상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감 잡히지 않아? 환상, 악몽? 그러고 보니 아까 박동걸 어쩌고 한 것 같은데. “……!” 나는 아차 하며 눈을 들었다. 두 명을 자세히 살피자 확실히 여러 흔적이 보였다. 눈동자는 울다 그친 것처럼 발개져 있고, 눈매나 뺨에는 눈물 자국이 선명하다. …설마, 그런 종류의 환상을 본 건가? 만일 내 예상이 맞는다면 100% 회복한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 가능성은 굉장히 높아. 특히 환상에 걸리면 그 세상은 놈의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거든? 심지어 시간조차도 말이지. ‘시간?’ - 그래. 너야 알고 있으니 금방 깨어났지만, 쟤들은 아니잖아? 막말로 며칠, 아니 몇 주, 아니 몇 달, 아닌 몇 년 동안 계속 주야장천 당했다고 생각해봐. 안 미치고 배겨? 오히려 저렇게 정신 줄 잡고 있는 게 용하지. ‘으음….’ 돌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정이 꼭 약장수로 변한 느낌이다. 마치 어떻게든 나와 이 둘을 붙이려는…. 얘는 본처라면서 질투도 안 하나. 나는 복잡한 기분으로 둘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 큭큭…. ‘?’ - 좋아. 게헨나…. 어디 한 번 NTR 당하는 기분을 느껴보라고…. 후후후후! ‘뭐?’ -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튼, 답 나왔네. 생각해봐. 쟤들이 약 먹은 것도 아니고, 갑자기 안아달라고 하겠어? 그 끔찍한 기억을 너를 통해서 잊고 싶어서 저러는 거잖아. ‘…….’ - 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걸? 너도 알다시피, 자연 발생으로 인한 정신병은….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좀 해라.’ 나는 속으로 화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빨빨거리며 따라오는 두 쌍의 눈초리가 느껴졌다. 나를 좋아해주는 건 고맙지만…. 정말 이게 맞는 건지, 최선인지는 모르겠다. 화정의 말을 듣고 행동하는 건 합리화에 불과하니까. 사실 아직 자신은 없다. 분명히 망설임은 남아 있다. 허나 나도 천성이 사내인 걸까. 스스로 더 가까이 다가오려는 애들이 그리 싫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적어도 먼저 나를 배신하지 않는 이상…. 같이 갈 자신은 있다. 그렇게 결심한 순간, 그렁그렁한 눈동자로 쳐다보는 이유정의 어깨를 붙잡았다. “오, 오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기뻐하는 목소리. 나는 그대로 이유정의 어깨를 질질 끌어 내가 자고 있던 자리에 살며시 눕혔다. 그러니까, 천장을 쳐다볼 수 있도록. “아, 아…. 정말로? 나 처음이지만, 그래도 기승위가 좋은데…. 아니야! 정상위도 괜찮아!” 처음치고는 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풀이 죽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김한별의 어깨를 잡고 살짝 일으켰다. 흠칫 움츠러들기는 했지만, 김한별은 놀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조용히 김한별을 엎드리게 했다. 정확히는, 이유정의 위로 포개어지도록. 잠깐, 어리둥절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잠시 후, 서로 마주 보던 두 여인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오빠?”” 오, 몸이 겹치니 목소리도 겹쳐서 나오는 건가. 나는 깊숙이 숲을 들이킨 후, “…잠시만 그렇게 있어 봐.”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Q 1. 다음 문장을 해석하고, 알맞은 단어를 적으시오. Bowl of rice served with toppings. 0829 / 0933 ---------------------------------------------- 우리는 열심히 돌파하고 있는데. 갑옷은 이미 진작 벗었고, ‘소망의 셔츠’까지 벗어 완전히 상의를 탈의했다. “…어?” “아….” 이어서 바지춤을 잡자 문득 작은 탄성이 들렸다. 그리고 꼴깍, 침을 삼키는 소리까지. 워낙 조용하고 밀폐된 방이라 그런지 유난히 크게 귀를 울린다. 두 여인이 토끼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정확히는 내 상반신을 보며 조금씩 입을 벌리고 있었다. “왜?” 왜 그러나 싶어 상체를 둘러보니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가슴에 길게 그어진 자상, 갈비뼈 부분의 십자 흉터, 복부 근육에 가득한 상흔(傷痕) 등등…. 아마 군데군데 아로새겨진 상처 자국 때문에 저러는 것 같다. 하기야 정하연도 처음 봤을 때 엄청나게 놀랐지. “아, 이 상처 때문에 그래?” “…….” “별것 아닌데…. 좀 징그럽나? 하하.” “우으으으….” “…이유정? 아니, 정말 별것 아니라니까?” “…흑.” 이유정은 입을 꼭 깨물더니 갑자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김한별의 눈동자도 돌연히 그렁그렁해졌다. 도대체 무슨 오해를 하는 거야. 너희 때문에 난 상처 아니라고. 나는 허탈이 웃으며 마저 벗어 내렸다. 발목을 툭툭 털어 한껏 짜부라진 바지를 치우고, 바로 속옷까지 끌어 내린 순간, “꺅!” “엄마!” 이유정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고 김한별은 숫제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조금 전까지 울먹거렸으면서, 반응이 아주 톡톡 튄다. “막상 하려니까 무섭나 보네?” 농담조로 던졌으나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저 스리슬쩍 실눈을 뜨거나, 아주 살짝 벌린 손가락 틈새로 쉴 새 없이 깜빡거리는 눈동자만 보일 뿐. 아이고, 귀엽다. …그런데 벌써 놀라면 어떡하지. 아직 발기는 하지도 않았는데. 아무튼, 혼자서만 알몸이 될 수는 없어 천천히 침대로 다가갔다. 이유정은 이미 하의를 벗은 상태였지만, 김한별은 상의를 벗어 하체에 두르고 있었다. 복잡하게 할 것 없이 그냥 쑥 매듭을 당기니 간단히 풀어졌고, 비로소 두 여인의 엉덩이가 자태를 드러냈다. “…….” 한껏 무르익었으면서도, 아직 사내의 손길을 타지 않은 풋풋한 티 때문일까. 돌연 조금씩 신호가 오는 걸 느꼈다.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다는 생각에, 나는 겹친 가랑이를 벌리고 털썩 쭈그려 앉아 얼굴을 들이밀었다. “부끄러워….” “시, 싫어요. 오빠….” 그러자 서로 밀착한 둔부가 싫어 싫어 들썩거리며 꾸물거렸다. 가만히 있으라는 의미로 찰싹 볼기를 때리자 두 엉덩이는 깜짝 놀라 잠잠해졌다. 나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같은 엉덩인데도 이렇게나 다를 수 있나? 아래는 토실토실하고 발그레한 색이 꼭 잘 익은 복숭아를 보는 듯했고, 위는 아담하면서도 눈부신 빛깔이 흐르는 것이 흰 달덩이와 흡사하다. “응?” 그러나 중앙을 바라본 순간 이번에는 내가 놀라고 말았다. 살금살금 좁아지는 양다리 사이, 수줍게 도드라진 불룩한 부분은 이미 투명한 액으로 젖어 미끄럽게 윤이 난다. 아니. 번들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허벅지까지 흥건하다. 아직 처녀라는 듯 입은 딱 다문 주제에 벌써 액을 뚝뚝 떨구고 있다. 특히 액이 금이 간 부분을 타고 흘러내려 이유정의 음부까지 젖어 번지는 광경은 꽤 야하다. 꿀꺽, 어느새 고인 침을 삼켰다. 마침 질질 흘러내리는 동그란 방울에 가볍게 검지를 댔다가 떼어보니, 끈끈한 실이 길고 가느다랗게 이어졌다. 살짝 핥자 찐득찐득한 것이 혀에 달라붙는다. 머릿속이 서서히 비어간다. 이성이 사라지고 본능만이 남게 된다. 하체에 급격히 피가 쏠리기 시작하고,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가 점차 크기를 키웠다. 모르겠다, 고 생각한 순간, “아, 아…? 아아아아?” “오오오빠! 자, 자, 자, 잠깐만요!” 나는 이미 두 여인의 음부를 넓히고 있었다. 중지와 엄지를 최대치로 늘리고 느릿하게 살을 넓힌다. 내 옆구리를 좌우로 압박하는 허벅지들이 느껴졌고, 바보라느니 변태라느니 필사적으로 애원하는(?) 소리도 들렸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러자 굳게 닫힌 살 틈이 조금씩 열리며, 외음부에 가려져 있던 안쪽의 연한 살과, 두 쌍으로 주름진 날개와, 바늘로 뚫은 것 같은 요도구와, 좁은 구멍 속 주름진 속살까지 훤히 모습을 드러냈다. “예쁘다….” 나도 모르게 꺼낸 말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예쁘다. 동시에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김한별은 음부 위쪽에 음모가 가지런히 난 것에 반해, 이유정의 음부는 털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설마 백…. 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어느 순간 더운 기운이 느껴졌다. 억지로 한계까지 벌린 두 동굴이 뜨거운 열기를 펑펑 토해내고 있다. 그럴수록 흘러나오는 액의 양도 점차 줄기를 이룬다. 그때였다. 한창 번갈아 감상하던 와중, 돌연 이상한 변화가 감지됐다. 두 음부의 상단을 덮은 표피가 부르르 부풀더니 무언가 작은 콩알만 한 것이 불쑥 모습을 보였다. 단순히 사내의 손길이 닿았다는 이유로 예쁜 분홍빛 클리토리스가 자신의 존재를 여과 없이 드러낸 것이다. 어떻게 처음 하는 애들이…. 아, 이것도 환상의 영향인가? “오빠는 바보, 변태, 치한, 저질…. 으아아앙…. 이제 몰라….” “제발…. 제발 그만 좀 보라고요….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데….” 나는 킥킥 웃으며 엉덩이 사이로 완전히 얼굴을 묻어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살짝 놀려줄 생각으로, 파르르 떨리는 두 공알을 입으로 살짝 물고, 쪽! 소리가 날 만큼 있는 힘껏 빨아들였다. “히이이잉!” “으헤이잉!” 두 여인이 펄쩍 뛰었다. 너무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는지 이상한 비명을 지르며 저리 가라는 듯이 둔부를 흔든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다. 시동은 이미 조금씩 걸리고 있었다. 나는 요동치는 엉덩이를 꽉 붙잡고 중지를 치켰다. 그리고 꽉 오므린 이유정의 음부를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 뜨거워진 구멍을 기습적으로 찔렀다. “히익!” 이유정이 다리가 일자로 쭉 펴졌다. 겨우 두 마디만 들어갔을 뿐인데 작살 맞은 물고기처럼 덜덜 떤다. 그 모습을 보다가 나는 남은 왼손으로 김한별의 달덩이 같은 엉덩이를 잡고 얼굴을 내밀었다. 크게 벌린 입으로 가슬가슬한 털과 부드러운 살이 차례대로 느껴졌다. 이대로 흡입하는 것도 좋겠지만, 혀를 쭉 내밀어 동굴 안으로 침투시켰다. “으으으윽!” 순간적으로 김한별의 둔부가 비틀렸다. 그러나 나는 양손으로 두 엉덩이를 꽉 잡은 채, 혀를 돌려 질 내 부드러운 주름을 맛보고, 중지는 살짝 꺾어 위를 살살 긁어주었다. 그럴수록 두 명은 거의 발광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지만, 나는 계속 강도를 높여 둘의 안쪽을 희롱했다. 잠시 후, 혀를 흠뻑 적셔오는 액체를 후룩 들이마시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얼굴을 떼고 손가락도 뺐다. 어느새 두 여인의 음부는 내 침과 애액으로 흠씬 얼룩져, 시큼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 이 강렬한 암컷의 내음은 내 남근을 아플 정도로 꼿꼿하게 세운다. 이제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한 찰나, 돌연 소리 죽여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차 정신을 차리자, 서로 꼭 껴안은 채 눈물을 줄줄 흘리는 김한별과 이유정이 보였다. 눈은 꼭 감고 어깨는 한껏 움츠린 채 정말 서럽게도 울어 젖히고 있었다. …장난이 너무 심했나? “얘, 얘들아.” 조용히 부르자 둘은 눈물 가득 고인 눈으로 매섭게 나를 노려봤다. 그러나 수치스러움이 섞인 째려보는 눈매는 곧 두려움과 공포의 빛으로 물들었다. 시선은 정확히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내 남근을 바라보고 있다. “어…. 에?” “아, 아까는 분명….” 이유정이 멍하니 입을 벌리고, 김한별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한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공포에 질린 얼굴을 보니 다른 감정보다는 감동이 물밀 듯이 차오른다. ‘아이, 늠름하기도 하지. 우리 똘똘이, 그동안 잘 있었어요?’ 나를 체력 보충제로 여기는 고연주. ‘아아아아! 더, 더 세게요! 좋아, 너무 좋아요! 오빠 자X 너무 좋아아악!’ 항상 변태적인 플레이를 강요하는 남다은. ‘우리 수현이, 젖 먹을까?’ 나를 젖먹이로 생각하는 임한나. ‘조금 더 천천히…. 옳지, 옳지….’ 침대에서만큼은 누나 노릇을 하는 정하연. ‘아헤가오 더블 피스!’ 선율…. 아, 이건 아니지. 아무튼, 관계 시 나를 애 취급할 적이 많아 곤란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저 둘은 다르다. 한껏 치켰던 눈매는 어느새 누그러졌다. 잔뜩 긴장한 눈으로 숨만 색색 내쉬는 모습이 확실히 색다르게 다가왔다. “많이 무섭니?” 목소리도 자연스레 부드럽게 나왔다. “그게 아니라…. 너무 두껍고, 또 길고….” “그, 그게 정말 들어오는 거예요?” 무서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감이 섞인 음성으로 물어오는 것이 몹시 사랑스럽다. 나도 모르게 김한별의 등에 엎드리듯이 누워, 둘을 한꺼번에 끌어안았다. “걱정하지 마. 충분히 들어가니까.” “그래도…. 혹시 찢어지는 건….” “으음. 그렇게 무서우면, 오늘은 여기까지…?” “……!”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둘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붉은색과 푸른색의 머리카락을 동시에 쓰다듬어주며 미소 띤 얼굴로 속닥였다. “그럼, 누구 먼저 할까?” “나, 나! 내가 먼저 할래!” “유정이가? 한별이는 괜찮아?” “네, 네. 그래요. 저는 나중에 할래요.” 먼저 하겠다고 싸우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의견이 갈렸다. 아마 신중한 성격인 만큼, 김한별은 우선 한 번 지켜보겠다는 생각인 것 같다. 더 이상 애태울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미 기다릴 만큼 기다린 애들이고, 나도 사실 거의 한계에 가까웠다. 남근의 인내심이 바닥났다고 해야 하나. 여동생이라 생각하던 애들이 갑자기 여인으로 돌변하니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 같다. 상반신을 일으키고 나서 기둥을 손으로 잡았다. 입구는 도로 닫혀 있었으나 금의 중앙을 정확히 조준해 맞췄다. 힘을 주기 직전 흘끗 눈을 들자, 눈을 질끈 감은 채 김한별을 껴안은 이유정이 보였다. “유정아.” “으응응응!” 그저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더 말을 거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아, 나는 이유정의 잘록한 허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조금씩 힘을 주며 첫 전진을 시작했다. 자꾸만 솟구치려는 남근을 아래로 누르며, 살며시, 조심스럽게 귀두부터 박아 넣는다. “으흐그으으으…! 아히이익…! 히이이익…! 흐그으으으으…!” “유정아. 너무 힘주면….” “드으으으, 드으으다 들어왔어?” “…….” 이유정은 끓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힘겹게 눈을 떠 물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것이 너무나 괴로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이제 겨우 귀두만 끼워 넣었을 뿐. 아직 기둥은 한참이나 남아 있다. “힘을 빼고, 천천히 호흡해봐. 그렇지….” 나는 최소한의 힘으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밀어 넣었다. 그러자 내 것을 감싸오는 따뜻한 살의 감촉이 점차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동시에 벌써 옥죄며 밀어내려는 반탄력도 느껴졌지만, 나는 꾸준히 전진을 거듭했다. 그 결과 남근이 푹 안으로 들어가 무언가에 부딪혔다. 탄력적이지만 얇은 점막의 느낌. “어, 언니. 등 긁지 마세요. 아프단 말이에요.” “아흐으흑! 아파…. 아파아아…. 질이 불타는 것 같다고…. 뭐, 뭐 이렇게 아픈 건데…. 아아아앙….” 확실히 처녀라서 그런 걸까. 그렇게나 윤활유를 흘렸는데 안은 더 이상의 진입이 어려울 정도로 빡빡했다. 하지만 본인들이 원한만큼, 그리고 나도 원하는 만큼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한 번 더 손아귀에 삼 분의 일쯤 들어간 남근에 한층 힘을 싣는다. 그러자, “히이이익?” 찌직, 점막을 찢는 감촉과 함께, “아, 아, 아, 아…. 아아아악!” 거센 저항을 뿌리친 남근이 음부의 안으로 뿌리 끝까지 잠겨 들었다. 이유정의 몸이 딱딱히 경직되고, 쫄깃한 속살이 내 기둥을 터뜨릴 듯이 죄어왔다. 아프면서도 황홀한 압력에 나는 길게 숨을 흘렸다. 마침내 삽입에 성공했다. “아…, 아아…, 하아…, 학….” 이유정은 턱을 한껏 젖힌 채 연신 헐떡임만 토해낸다. 어찌나 몸을 심히 움찔거리는지 김한별의 등까지 진동할 정도였다. 이 녹아 내릴 듯한 감촉을 좀 더 음미하고 싶었지만, 꺽꺽대는 이유정을 보니 그런 기분도 사라졌다. 나 혼자서만 즐기기는 싫고, 무엇보다 아직 한 명 더 남아 있으니까. 꺼내는 건 들어갈 때와는 다르게 한결 수월했다. 주름이 달라붙어 딸려 나오는 느낌은 있었지만, 워낙 매끈하고 부드러운 살이라 금세 빠져나왔다. 기둥은 물론, 귀두까지 선혈이 묻은 남근을 꺼내자 구멍에서도 진한 핏물이 주르륵 흘렀다. “하아아아….” 그제야 조금 살겠는지 이유정은 간신히 고개를 내렸다. 거친 숨을 내쉬면서, 훌쩍훌쩍 코를 들이키며 물 젖은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본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다시 양물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바로 김한별의 음부에 끝을 맞췄다. “오빠. 잠깐만요.” 피 묻은 귀두를 외음부에 문지르고 있자, 불현듯 김한별이 허리를 비틀며 고개를 돌렸다. “…한 번에 해주시면 안 될까요?” “한 번에?” “네, 네. 언니처럼 느리게 말고 한 번에 끝까지요.” “…….” 뭘 원하는지는 알겠다. 아마 이유정을 보고 겁을 먹은 것 같은데. “…할 수는 있는데, 더 아플 수도 있어.” “괘, 괜찮아요. 그냥 그렇게 해주세요.” 그렇게 말한 김한별은 앞으로 엎드려 이유정을 세게 끌어안았다. 해달라는데 어쩌랴. 나는 김한별의 엉덩이를 내리누르며 이미 조준한 남근에 힘을 넣었다. 우선 앞부분만 살짝 들어가게 한 다음, 단숨에 쳐올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곧,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워낙 긴장해서 그런지, 시작부터 저항이 너무 격렬하다. 억지로 비틀어 넣었는데도 고작 간신히 걸치는 수준이었다. 정말 필사적으로 침입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돌파는커녕 꾸겨 넣듯이 진입하게 될 건 자명한 일.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즈음, 문득 눈에 국화꽃 모양의 어여쁜 구멍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김한별의 항문이었다. 얼마나 힘을 줬는지 가장자리 구멍이 모이다 못해 옴폭 들어가 있었다. “…….” 나는 삽입할 생각도 잊은 채 멍하니 항문을 응시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꾸만 시선을 빼앗는다. 사실 항문이라면 조금 거뭇할 줄 알았는데, 외려 구멍으로 빠져들어 가는 잔줄 부분까지 새하얗다. “오빠…?” 나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마침 좋은 생각도 떠올랐다. 나는 양물을 재 조준하는 다시 한 번 중지를 치켰다. 그리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아니 애타는 마음으로 항문을 콕 건드렸다. “히야아앙!” 김한별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엉덩이가 힘껏 들리며 아주 잠시 음부가 느슨해졌다. 그 찰나의 순간, 나는 틈을 놓치지 않고 안간힘을 다해 남근을 찔러 넣었다. 그 순간이었다. 푹직! “흐가아악!” 점막을 쫙 찢는 감촉과, 남근이 돌파해 이 좁은 구멍을 가득 채운 것과, 김한별의 허리가 힘껏 튕긴 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으음….” 차차 찾아오는 포근한 기분에 거의 본능적으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김한별의 질은 그야말로 상상 이상이었다. 뜨겁고 질척질척한 살이 뿌리 끝까지 감싸주며 꼬옥 물어주는데, 찰싹 달라붙은 주름이 쭉 빨아들여 주기까지 하니 도저히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다. 이유정처럼 터질 듯이 옥죄는 압력도 좋지만, 이것 또한 색다른 감각임은 부인할 수 없다. “끄흐아아….” 살그머니 눈을 뜨자 아예 상반신을 쳐들고, 등허리는 휘어지고, 고개를 한껏 젖혀 천장을 쳐다보는 김한별의 뒷모습이 보였다. 마치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푸들푸들 떨더니 그대로 엎어지듯 쓰러져 작은 경련을 일으켰다. 이유정은 어떡해 어떡해를 연발하며 자신에게 쓰러진 김한별을 끌어안았다. 이로써 두 명 모두 무사히 삽입을 마쳤다. “후우우우….” 우선 고비는 넘겼다는 생각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흘리며 두어 걸음 물러났다. 끈덕지게 달라붙는 살을 물리치고 남근을 빼내자, 아주 살짝 벌어진 구멍에서 선명한 핏물이 흘러내렸다. 뚝, 뚝 방울져 떨어지는 파과(破瓜)의 흔적은, “하아…. 하아….” “흑, 흑….” 앞선 이유정의 선혈과 섞여 흘러, 이미 핏빛으로 얼룩진 시트를 한층 붉은빛으로 적셨다. ============================ 작품 후기 ============================ 이제…. 이제, 로유진인지요? 0830 / 0933 ---------------------------------------------- 우리는 열심히 돌파하고 있는데. “윽…. 으윽….” “흑…. 흑….” 방 안에는 처녀막이 찢어진 고통에 아픔을 호소하는 신음의 이중주가 흐른다. 서로 겹쳐져 있던 두 여인은 어느새 각기 침대에 나뒹굴고 있다. 새우처럼 몸을 구부린 채 복부를 감싼 모습이 몹시나 안쓰럽다. 잠시 후,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낸 김수현이 조용히 몸을 돌렸다. 입에 무언가를 머금은 모양새로 두 여인을 보더니 이유정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읏!” 외간 사내의 손길이 닿자 이유정이 흠칫 떨었다. 그러나 손은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외려 미안해하는 것 같은 손놀림으로 천천히 상의를 벗겨나갔다. 가죽 의복을 벗겨내고 칭칭 감긴 흉대(胸帶)까지 풀어내자 마치 밥그릇을 엎어놓은 것 같은, 어여쁜 모양의 봉긋한 가슴이 모습을 보였다. “유정아.” 낮은 음성에 비로소 이유정이 돌아본다. 그러나 천천히 덮어오는 어두운 그림자를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평소의 드센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잔뜩 긴장한 입이 파르르 떨고 있다. 그 입술에 김수현은 천천히 입을 맞췄다. 두려움에 떠는 여인을 부드러이 안아 달래며 포갠 입술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쿵쾅쿵쾅! 서로 몸을 밀착시켜서일까? 터질 듯이 요동치는 이유정의 심장 소리가 상대의 심장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김수현은 살며시 그리고 느긋하게 이유정의 입술을 흡입하며 입맞춤을 이어나갔다. 쪽, 쪽, 쪼옥…. “아아…!” 느닷없이 애타는 탄성이 흘렀다. 입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감촉. 그리고 동경하는 오빠의 품에 안겼다는 것에 굳은 몸이 살그머니 이완된다. 서서히 공포가 사그라지고, 살짝 입을 벌린 이유정이 김수현의 혀를 받아들인다. 이내 서로의 설육이 뒤얽힌 순간, 혀에서 녹아내리는 달콤한 가루는 이유정의 기분을 붕 뜨게 만들었다. “쪽, 쪼옥, 아아…. 쭙, 쭈웁, 하아….” 한쪽에서 입을 깨물고 있던 김한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을 만큼 아파하던 이유정의 태도가 갑자기 변했다. 불룩한 가슴이 짓뭉개질 정도로 세게 끌어안고 열정적으로 입맞춤에 반응한다. 김수현의 리드에 이끌려 나온 혀는 완전히 얽히고설켜 서로 격렬히 탐한다. 눈앞에서 풍겨오는 은은한 단내에 김한별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단순히 키스를 본 것치고는 갑작스레 흥분이 오른다. 해답은 바로 ‘아프로네지아’에 있었다. 생각 이상으로 아파하는 두 여인을 보며 시름에 잠긴 찰나, 김수현은 마침 이유정이 가져온 작은 주머니를 발견했다. 말인즉 주머니 속의 가루를 사용했다. 물론 굉장히 위험한 미약이기는 하나, 애초 성관계가 치료의 수단이며 조금만이라면 괜찮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이유정은 미약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위험천만한 약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효능도 상당하다. 어느새 달뜬 신음을 흘리며 갈구하는 눈빛을 빛내고 있지 않은가. 살짝 웃은 김수현이 넌지시 가슴을 그러쥐자 야릇한 신음이 터졌다. “아, 아앙…! 아아앙…! 몰라아…. 오빠아….” 젖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하니 신음도 차차 커지기 시작했다. 달아오르기 시작한 몸은 서서히 변화를 보였다. 경직된 음부가 느슨히 풀어져 열기를 토해내고, 구멍에서는 핏물 섞인 액이 줄줄 흘러 시트를 질펀하게 적셨다. 약 효과가 나타난다고 생각했는지 김수현은 손으로 음부를 마사지하듯 주물렀다. 입, 가슴, 국부 등 온몸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감각에 이유정은 간드러진 신음을 흘렸다. 완전히 몸을 맡긴 채 어떻게 좀 해달라고 이리저리 몸을 비트는 모습이 묘하게 선정적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는지 김수현은 이유정의 허벅지를 벌리고 벌떡 솟은 남근을 구멍에 조준했다. 그리고 가볍게 허리를 쳐올렸다. “하아아악!” 푹, 무언가 뚫리는 소리와 격하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겹쳤다. 이유정은 얼굴을 찡그렸으나 아까와 같은 앓는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외려 삼킨 숨을 바로 흘리는 것이 몹시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다. 음부 구멍 또한 양물을 뿌리 끝까지 삼킨 채 입을 꽉 오므렸다. 마치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으음….” 김수현은 침음을 흘렸다. 남근에 밀착한 질 주름 하나하나가 부르르 떨며 기쁨을 표시한다. 아까처럼 쥐어짜 터뜨릴 듯 저항하던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확실히 무서운 약이라고 생각하며 김수현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푹, 푹, 푹, 푸욱…. 성관계는 처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 갈수록 쉬워진다. 물론 스무 해가 넘도록 외간의 출입을 허용치 않은 곳이니만큼 여전히 빡빡한 감은 있다. 그러나 왕복 운동이 이어질수록, 질 내에는 김수현의 남근에 맞춘 하나의 길이 트이고 있었다. “아, 아아…. 오빠아아….” 그렇게 서른 번 가량을 움직이니 비로소 익숙해지며 흥분에 헐떡이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나, 나 이상해애…. 좋아…. 갑자기 너무 좋아아아…. 아아아앙…!” “그렇게 좋아?” “으응…. 막막 박히고 싶고…. 더 정복당하고 싶고…. 모, 모르겠어…. 흐으으응…!” “그래, 그래.” 너무나 황홀해하는 목소리가 귓가를 살랑살랑 간질인다. 말뜻을 깨달은 김수현은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그러자 조심스레 드나들며 길을 개척하던 남근은 곧 흉기로 돌변했다. 그리고 완전히 스퍼트를 올린 순간, 음부로 쑥쑥 꼽혔다가 뽑히며 이유정의 질을 마음껏 유린하기 시작한다. “아앙, 거, 거짓말! 아아아앙!” 퍽, 퍼억, 퍽, 퍼억! 남근이 한층 강도를 높여 투박하게 들쑤시자 이유정은 더는 참지 않았다. 신음, 아니 악을 쓰듯이 비명을 내질렀다. 어찌나 마찰이 강한지 이제는 살이 맞부딪칠 때마다 물이 튈 정도였다. “으으으응! 좋아아아! 나, 나 오빠한테! 드디어 오빠한테!” “오빠 사랑해! 오, 오빠! 으하아아아앙!” 그때였다. “…오, 오빠! 잠깐만! 나, 나 이상해!” 살이 부딪치는 음란한 소리와 침대가 삐걱대는 외설적인 소음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흥분에 겨운 비명을 지르던 이유정이 돌연 급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 나 오줌! 아, 아응! 아흐흐응!” 애원하는 눈초리로 소담한 어깨를 마구 들썩인다. 그러나 김수현은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허리 속도를 가일층 높였다. 그에 따라 붉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흐트러지고, 젖가슴은 위아래로 출렁출렁 물결치듯이 흔들린다. 문득 이유정의 눈과 입이 크게 벌어진다. 전신을 지배하는 감각이 부글부글 끓으며 모조리 하체로 집중되고, 얼른 폭발시키고 싶다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유정은 미친 듯이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양팔과 두 다리로 김수현의 등허리를 으스러지듯이 감싸 안았다. 이렇게 터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서, 공교롭게도 김수현도 절정에 치달았는지 “큭!” 소리 지르며 어느 때보다 강하게 남근을 쑤셔 박았다. “……!” 그렇게 끝까지 박힌 찰나, 김수현과 이유정의 몸이 우뚝 정지했다. 허나 딱딱히 굳은 것도 잠시. 이내 몸 안이 터져 나가는 기분과 함께 이유정의 머릿속에 번쩍 번개가 쳤다. 시야가 새하얗게 변한다. 그리고, “아흐흐흐흐흐흐흑!” 찌이이익! 세찬 비명과 함께 음부서 투명한 물줄기가 물총처럼 찍 솟구쳤다. 동시에 질 안 곳곳을 때리는 뜨거운 액체를 느낀 이유정은 그대로 정신을 놓아버렸다. “……! ……! ……! ……!” 그러나 김한별은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한껏 턱을 젖힌 채 푸들푸들 떨고 있는 이유정을. 틀어박힌 남근이 크게 움찔할 때마다, 몸 전체가 실 끊긴 인형처럼 덜컥덜컥 움직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음부는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셔버리겠다는 듯, 구멍을 오므렸다가 펴기를 반복하며 요도에서 토해지는 정액을 꿀꺽, 꿀꺽 들이킨다. 잠시 후 뽕, 남근이 뽑히는 소리와 함께 이유정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양을 사정한 걸까? 살짝 벌어진 붉은 동굴이 허연 정액을 주룩주룩 쏟아내는 광경이 몹시 색정적이라, 김한별은 저도 모르게 바짝 마른 입을 침으로 적셨다. “후~우.” 거사를 치른 김수현은 바로 몸을 돌려 김한별을 응시했다. 방금 사정을 마쳤음에도 양물은 여전히 꼿꼿이 세워져 있다. 외려 이제 몸 좀 풀었다는 듯 꺼덕꺼덕 움직이기까지 했다. 자신의 차례임을 인지한 순간, 김한별은 스스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어느새 복부를 쿡쿡 찌르는 통증이 사라지고, 화끈한 기운만이 남아 아래쪽을 맴돈다. 아프로네지아는 향기로도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아니 애초 김수현이 약을 사용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김한별로서는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앞선 정사를 보며 크게 흥분한 몸은 서둘러 움직이기를 요구했다. 김한별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엎드린 상태서 허리를 들고 엉덩이를 내밀고 있었다. 호, 김수현이 놀라워하며 다가오자 둔부를 살살 흔들며 어서 와달라고 유혹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인다. 하지만 자신이 그러는 것조차 알지 못한 김한별은, 절정의 여운에 잠겨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보는 이유정을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 오빠….” “우움?” “저…. 저도 키스….” “…….” 김수현은 아무 말도 않았다. 그저 빙긋 웃고는 날씬한 허리에 몸을 실으며 능숙하게 입을 맞췄다. 혀에서 녹아내리는 달콤한 맛에 김한별은 설육을 섞는 행위에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한동안 혀를 흡입하는 소리가 이어지는 찰나, 문득 김한별의 눈이 크게 치떠졌다. 어느새 조준을 마친 김수현이 남근을 힘껏 내리누른 것이다. “히이이익!” 질을 단숨에 관통한 기둥으로 배가 꽉 차는 느낌에 비명이 터졌다. 그러나 아픔은 잠시에 불과했고, 이미 질척하게 젖은 질은 남근을 끈적하게 감싸며 꼬옥 물었다. 침대를 디디던 김한별의 양팔이 반으로 꺾였다. 상체는 힘없이 무너졌으나 반대로 하체는 위로 올라와 결합이 더욱 단단해졌다. 김수현은 굼실거리는 흰 엉덩이를 세게 붙잡고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응아…. 으으으읏…. 아윽…, 흐아아앙….” “아프니?” 자상한 물음에 김한별은 시트에 고개를 묻은 채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신음이 부끄러운지 손으로 입을 막았으나 김수현이 치워주었다. 양물이 작디작은 구멍에 틀어박힐 때마다 가녀린 몸도 앞뒤로 흔들리고, 철썩거리는, 물이 가득 찬 가죽을 치는 난잡한 소리가 율동적으로 호응한다. 김한별은 처음에는 있는 대로 눈썹을 찌푸린 채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김수현이 남근을 안에 넣은 상태서 기습적으로 좌우로 흔들어버리자, 결국 참지 못해 소리 지르고 말았다. “어엉…. 어어어엉…. 아읏, 흑, 으, 으아아아아앙!” 마치 발정한 강아지처럼 우는 소리를 내더니, 종내 있는 대로 엉덩이를 쳐들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질 안을 따뜻하게 덮쳐오는 뜨거운 파도를 느끼며 정신을 잃어버렸다. * “여전히 받지 않네요….” 후우, 한숨을 흘린 정하연이 풀이 죽은 얼굴로 수정을 품으로 넣었다. “또, 또. 제가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했죠?” 고연주는 쾅쾅 들려오는 소음에 기분 좋게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전방에서는 시끄러운 소리가 연달아 이어지는 중이다. 혈투 후 꽤 긴 거리를 행군했지만, 통과하기 힘든 함정을 만나 난감해 하던 찰나 비비앙이 앞에 나섰다. 5군단의 특성인 ‘자폭’을 이용해 아예 깡그리 부숴보겠다는 것이다. 꽤 무식한 방법이기는 했으나, 여기까지 온 길을 되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폭발의 여파를 피해 물러나 있는 동안 통신을 건 것인데 연결은 여전히 요원하기만 하다. 이제 연락한 횟수만 세 자릿수를 넘었으니 힘이 빠질 만도 했다. “진수현을 보냈으니 곧 돌파 여부를 알 수 있겠죠. 어쨌든 너무 걱정하지 마요.” “하지만…. 그렇잖아요. 살아 있으면 연락이 안 올 리가….” “수정이 없을 수도 있고, 혹은 중간에 빠졌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아직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잖아요? 적어도 지금만큼은 좋은 쪽으로 가능성을 열어두자고요.” “…….” 근심의 빛은 아직 역력했으나 정하연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근원의 말에 따르면 곧 심층부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하니, 곧 결과가 나오겠죠.” “뭐, 저는 벌레나 더 출현하지 않는다면 좋겠는데요.” 고연주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호호 웃었다. 그러한 찰나, 두 여인이 동시에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냐면 황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통로를 울렸으니까. “누님! 찾았어요! 찾았다고요!” 잠시 후, 방방 뛰는 소리와 함께 진수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에 그리 급한지 헉헉 숨을 몰아 쉬면서도 두 눈은 기쁜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고연주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방을 뚫은 거야?” 그러나 진수현은 온몸으로 아니라는 의사를 표시하고는 두 손을 입에 모아 힘껏 외쳤다. “뚫은 게 아니라, 찾았다니까요!” “…뭘 찾아?” “지하로 가는…!” “……!”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두 여인은 동시에 반응했다. 서로 한 번 쳐다보고는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휴. 어째 베드 신 적는 게 제일 힘든 것 같네요. 그래도 어제 오늘 해서 이 정도면 만족하셨겠지요? :) 0831 / 0933 ---------------------------------------------- 우리는 열심히 돌파하고 있는데.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문득 정신을 차리니 후덥지근한 방의 열기가 느껴졌다. 멍한 기분에 머리를 흔들어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러 냄새가 섞여 콧속을 찔렀으나 익숙해져서 그런지 썩 나쁘지는 않다. 천천히 침대를 둘러보니 축 휘늘어진 두 여인이 눈에 들어온다. 사내를 모르던 눈부셨던 나신은 긴 시간 동안 맺은 광기의 흔적으로 잔뜩 더럽혀졌다. 몸이 간헐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상당히 지친 듯하다. 한 명씩 번갈아 가며 한 것은 기억나는데 얼마나 많이 했는지는 모르겠다. 열여섯 번부터는 횟수도 세지 않았으니까. 하기야 고참(?)도 힘겨워하는데 이제 갓 시작한 애들이 안 힘들까. “얘들아?” 약간 걱정되는 마음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행히 아직 정신은 깨 있었는지 둘은 약간 비틀거리며 상반신을 일으키고는 동시에 나를 돌아봤다. 초점 없는 멍한 눈동자로 보는 것도 잠시. 이내 엉금엉금 기어와 내 하반신으로 고개를 묻는다. 이유정은 아앙 입을 벌려 남근을 집어삼키고, 김한별은 더 아래로…. “오.” 이내 남근과 고환을 부드러이 자극하는 혀의 감촉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기교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그냥 물고 빨아들이는 것에 불과했으나 이렇게 반응하는 모습이 몹시 어여쁘다. 손을 뻗어 정수리를 살살 쓰다듬어주자 고개를 살살 비비면서 열심히 머금는 것도 사랑스럽다. 이윽고 한 차례 사정이 끝난 후, 둘은 정액을 절반씩 사이좋게 나누어 먹고 내 품으로 찰싹 안겼다. 마치 아기 새처럼 자꾸만 몸을 밀착해오는 행동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무언가 굉장히 만족스러운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앞선 여인들이 왜 그렇게 나를 품에 못 안아서 안달이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 이렇게 기대와야 나도…. 쾅…! 그때였다. 기분 좋게 한숨 자볼까 생각한 찰나, 돌연히 폭음이 울렸다. 그리고 삼 초 동안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청력을 높이니 웬 무리가 우르르 내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 순간이었다. “…아.” 문득 가슴 한 켠이 서늘해졌다. 그, 그러고 보니 그랬나? 그러니까 우리는 원정 중이었고, 원정대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아니, 이럴 때가 아니잖아? 우선 옷, 아니 애들부터…! “유, 유정아?” “새근~새근~.” “하, 한별아!” “코….” 젠장, 벌써 잠든 거야? 어깨를 흔들었으나 깨기는커녕 미동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에도 기척은 빠르게 아래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이 속도라면 아마 오 분도 지나지 않아 문을 발견하고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 문이잖아? - 봉인돼 있는 것 같은데요…. 그 순간, “아, 안 돼!” 나는 곧장 침대를 뛰쳐나왔다. * 철컥! 문이 열린 순간 임한나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직 한 걸음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이상한 공기가 확 덮쳐왔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독연이라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뜨끈뜨끈한 열기, 은은히 풍기는 달착지근한 향취, 진한 밤꽃 냄새가 공기 중에 섞여 콧속을 찔러온다. 가만히 음미해보자 익숙한 내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갸웃하며 안으로 두어 걸음 들어간 순간 임한나는 깜짝 놀라 소리 질렀다. “수, 수현아?!” “유정아! 한별아!” 등 뒤에서도 비명이 터졌다. 방은 문이 여러 개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평범했지만, 거실로 보이는 공간에 세 남녀가 쓰러져 있었다. 우선 김한별과 이유정은 각자 뭔가 어설픈(?) 자세로 바닥에 누워 있다. 그리고 김수현은 머리를 한쪽으로 돌려 벽에 기댄 채로 앉아 있었다. 아무튼, 겉으로만 보면 기절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클랜 로드!” “…….” “흐윽! 어서 물약을…!” “…….” 부산스럽게 달려간 클랜원들은 호들갑을 떨며 물약을 꺼냈고, 강제로 입을 벌려 들이붓기 시작했다. “수현, 수현! 눈 좀 떠봐요!” “꿀꺽…. 크업…! 쿨럭…! 꿀꺽….” “저, 정신이 좀 들어요? 수현!” “…….” 그러나 뺨을 치고 어깨를 흔드는 등 아무리 깨워도 김한별, 이유정은 실눈으로 힘없이 천장을 바라보고만 있다. 마치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그리고 김수현은 아예 일어날 생각조차 없는 듯 일말의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약 삼십 분간 난리를 치던 클랜원들은, 생명에 지장이 없는 것 같으니 그만하라며 말리는(?) 근원의 말을 듣고 간신히 진정했다. 잠시 후, 가장 지식이 풍부한 근원이 주변을 요모조모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 환상에 당한 것 같습니다.” “환상?” “공간을 심도 있게 분석한 결과, ‘환상의 도플갱어’의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됐습니다.” “환상의 도플갱어?” 고연주는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전원 머리를 가로저었다. 하기야 희귀한 괴물이니만큼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정작 문제는 이게 아니었지만.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상대에게 강제로 환상을 걸고, 약해진 틈을 타 좀먹어가는 무서운 괴물입니다.” “글쎄. 아무리 그래도 그냥 환상으로 이렇게 됐다고는…. 수현의 정신력이 얼마나 강한데.” “그래 봤자 인간입니다. 이 괴물의 무서운 점은 일단 성공한 순간, 구축한 환상을 멋대로 조정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정에는 시간도 포함돼 있습니다.” “…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고?” “그렇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년, 수십 년, 심지어 수백 년간 어떤 환상을 겪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 며칠도 아니고 수백 년일지도 모른단다. 가벼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모두의 낯빛에 심각한 빛이 서렸다. “잠깐만요. 듣고 보니 이상한 데? 그럼 그 환상의 도플갱어라는 괴물은 어디 있는 거죠? 이 세 명이 당했다면 아직 남아 있을 거 아녜요?”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제갈 해솔이 예리하게 반문했다. 근원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돌연 합, 닫았다. 그리고 갑작스레 먼 산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근원 씨?” “모르겠습니다.” “네?” “모르겠습니다.” 제갈 해솔이 계속 채근했으나 돌아오는 건 모르겠다는 말뿐이었다. 고연주는 여전히 근심이 가시지 않았으나 우선은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정신 쪽에 문제가 생겼든 아니든, 회복을 위해서라도 이 장소를 신속히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한 고연주는 근원에게 세 명을 봐주기를 부탁하고, 남은 클랜원과 함께 방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어쨌든 천신만고 끝에 심층부까지 들어왔으니 눈앞의 성과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침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간 고연주는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칫했다. 수심 어린 눈매가 살며시 찌푸려졌다. 처음 안으로 들어왔을 때 이상한 향을 맡기는 했다. 허나 조금씩 익숙해지려는 찰나, 느닷없이 냄새가 물씬 강렬해졌다. 정확히는 이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때였다. 냄새의 발생지를 찾아가던 한 쌍의 눈동자에 강렬한 이채가 스쳤다. 한껏 치떠진 두 눈의 시선이 오롯이 침대에 꽂혀 있다. 고연주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침대의 시트를 들췄다. 아니. 실은 들출 필요도 없었다. 고연주가 누구인가. 첩보 능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심지어 김수현조차도 한 수 접고 들어간다는 ‘그림자 여왕’이 아닌가. 침대를 집게손가락으로 푹 찔렀다가 빼니 질펀한 액이 실처럼 이어졌다. 시트에는 붉은 핏자국이 세계 지도처럼 얼룩져 있다. 그것도 두 개나. 여기까지만 봐도 충분하다. 이것만으로도 이 침대에서 어떤 일이, 아니 행위가 있었는지. 눈에 잡힐 듯이 훤하다. “누구는 어떻게든 구하려 갖은 애를 썼는데….” 살짝 내민 혀끝으로 검지에 묻은 액을 부드러이 핥는다. “누구는 침대에서….” 불현듯 고연주의 눈동자가 싸늘한 안광을 뿜었다. “호…, 호호…. 정말, 어이가 없네?” 이어서 요사스러우면서 차가운 웃음이 흐르기 시작했다. “언니. 여기 뭐 있어요…?” 공교롭게도 웃음을 듣고 찾아온 임한나가 조심스레 말끝을 흐렸다. 침대를 앞에 두고 웃고 있는 고연주의 모습이 몹시 이상해 보였기 때문이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침대로 다가간 임한나는, “후…, 후후….” 약 10초 후, 상냥한 낯으로 고연주와 똑같이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아…, 하하….” 이어서 들어온 남다은도, “하…, 하하….” 그리고 마지막으로 찾아온 정하연도. 모두 진한 미소를 머금은 채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잠시 후. “우와! 장난 아닌데?!” “누님들! 이것 보세요! 금은보화에, 영약에, 약초에, 장비에! 여기 진짜 무슨 보상이…!” 기쁨에 겨운 소리를 지르며 싱글벙글 방으로 찾아온 진수현은, “호호호호호호!” “후후후후후후!” “아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침대를 둘러싼 네 여인이 미친 듯이 웃어 젖히는 모습을 보며 입을 딱 다물었다. 그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지금 잘못 끼어들면 죽을 수도 있다는…. 그렇게 생각한 진수현은 얼른 조용히 물러나기로 했다. 실로 신속한 결정이었다. 이윽고 문은 살그머니 닫혔으나, 방에서 들려오는 한 맺힌 웃음들은 한동안 끊이지 않았다. * 한편, 같은 시각. 탕! “안 돼!” 갑자기 탁자를 세게 내리친 안솔이 벌떡 의자에서 일어섰다. “푸흡!” “콜록!” 그 여파로 옆에 앉은 허준영과 맞은편 의자에 앉은 김유현이 마시고 있던 음료를 푸 뿜고 말았다. 그러나 김유현은 곧 로브 안에서 천 조각 하나를 꺼내 차분히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 “음…. 사용자 안솔?” “…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왜 갑자기 소리를 질렀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오라버니가 위험해요!” 탕, 안솔이 또 한 번 탁자를 치며 외쳤다. 그야말로 뜬금없는 말이다. 하지만 김유현은 눈앞의 사용자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허투루 넘기지 않고 침착히 말을 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수현이가 위험하다니요?” “저, 저도 잘은 몰라요. 그냥….” 안솔이 입을 깨물었다. “오라버니를 원망하는 집단이…. 이제 막 본격적으로 움직이려는 느낌이….” “…원망하는 집단?” 김유현이 눈을 빛냈다. 안솔의 말에서 짚이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악마 놈들이…!’ 허준영은 또 시작이라며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으나 김유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집단이라면…. 어떤 느낌의?” “그 집단은…. 오라버니를 노리고 있어요…. 서로 힘을 합쳐 잡아먹겠다는…. 하나의 숙원을 가지고….” “혹시 그놈들이 누군지, 아니 어떻게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어, 없어요. 아무리 오라버니라도 이번만큼은 막을 수 없을 거예요.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어요.” 김유현의 표정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이윽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듯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불안에 떠는 안솔과 멀뚱멀뚱 쳐다보는 허준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계획을 조금 앞당길 필요가 있어 보이네요.” “뭐, 상관없습니다.” “오늘 만남은….” “물론, 원하시는 대로. 우선은 비밀로 해두죠.” 김유현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급히 몸을 돌렸다. “단.” 그러한 찰나, 허준영의 말소리가 김유현의 옷깃을 붙잡았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김수현의 선택을 지지하는 것뿐입니다.” “…….” “해밀 로드의 계획은…. 글쎄요. 언뜻 들으면 나쁜 얘기는 아닌 것 같으니 침묵은 하겠습니다. 그러나 해밀 로드가 모든 사정을 말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니, 그 이상 해드릴 수 있는 건 없을 겁니다. …그저, 김수현의 선택과 행동에 동조할 뿐.” “…제가 당신들에게 원하는 것도, 딱 그 정도입니다.” 그렇게 말한 김유현은 곧장 몸을 돌려 정문을 넘어 사라졌다. ============================ 작품 후기 ============================ 어디까지나 여담입니다만. 고연주, 남다은, 임한나, 정하연이 있는 모임의 이름은 ‘Someday Fivesome’ 입니다. :) 0832 / 0933 ---------------------------------------------- 우리는 열심히 돌파하고 있는데. 원정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돌아가는 발걸음은 응당 가벼워야 정상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멸 무저갱을 벗어난 이후, 아틀란타로 돌아가는 내내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을 느꼈다. 기절에서 깨어난 척을 해도 네 여인은 오롯이 내 건강을 걱정할 뿐, 가타부타 말을 꺼내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떤 변화도 없다. 하지만 이따금 뒤통수가 은근히 따갑다고 느껴지는 건 왜일까? 물론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다. 하기야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면 나라도 화가 나지 않았을까. 또 한편으로는, 눈을 뜬 척하고 클랜원들의 행색을 살폈을 때, 나는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왜냐면 의복이 찢어진 건 기본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먼지와 체액으로 범벅이 돼 있는데, 얼마나 고생해서 왔는지 안 봐도 훤했으니까. 그래서 더 낯이 뜨겁다. 특히 같이 불침번이라도 설라치면 아무 말도 않고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데, 이런 모습이 더 무서웠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사정을 알아낸 것이 틀림없다. 그럼 차라리 투정을 부리거나 실컷 욕이라도 하면 시원하련만. 아니, 최소한 그냥 조용히 기다리기만 했다면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았을 터. 그나마 비슷하게 깨어난 김한별과 이유정이 상황을 눈치채고 조용히 있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여하튼 네 여인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견디고는 있었지만, 기실 내가 놀란 건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아틀란타로 돌아가면서 종종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드드드드, 드드드드…. 행군을 멈추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와중, 문득 수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진동은 일정한 주기로 떨렸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이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나는 가만히 진동이 울리는 방향을 쳐다보며 몸을 일으켰다. “서….” “백미터. 서북쪽 45도 방향으로 접근 중.” 그리고 막 입을 열려는 찰나, 고운 음성이 먼저 선수를 쳤다. 임한나는 말린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망설임 없이 활을 잡았다. 이어서 고연주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른 정보는?” “땅을 울리는 소리가 강하기는 한데…. 생각보다 심하지는 않으니 네 발보다는 두 발 같네요.” “두 발로 이 정도 진동이 가능한가?” “흥분 상태라면 가능하겠죠. 아마 꽤 굶은 놈들일걸요?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정확하게 들어오고 있어요.” 나는 멀뚱히 임한나를 응시했다. 왜냐면 내가 하려던 말과 정확히 일치했으니까. 고연주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씹던 육포를 퉤 뱉었다. “아깝다. 뱉으면 어떡해요.” “육즙만 빨고 버린 거야. 전투 직전에는 예민해지니까.”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면서도 클랜원들은 어느새 한 명씩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각자 알아서 자리를 잡는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요?” 문득 고연주가 나를 돌아봤다. 지시를 바라는 건가?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이미 진동은 확연히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서쪽을 가리켰다. 사전에 알아차린 이상 요격이 최선이다.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두 여인은 동시에 뛰어 삽시간에 나무 위로 올라갔다. 고연주는 연기처럼 스르르 흩어져 몸을 숨기고, 임한나는 나뭇가지에 발을 디디며 전방을 유심히 관찰한다. “응? 처음 보는 괴물이네?” 잠시 후,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키는 이 미터…. 인간형…. 살은 거칠어 보이고…. 눈은 뻘겋고…. 무기는 들고 있지 않네요. 아, 수는 약 서른은 넘는 것 같아요.” 아직 준 안정화 지역이라 볼 수 있는 만큼, 새 괴물의 출현도 염두에 둬야 한다. 당황할 필요 없이, 궁수가 알려주는 정보를 토대로 각자 대응할 준비를 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분위기가 침착하지? 이쯤이면 적당한 호들갑이 나와야 정상인데, 원래 이런 원정대가 아니었잖아? “어디 한 번….” 그때였다. 문득 조심스러운 음성이 들려온 순간, 화살 모양의 빛무리가 번쩍하며 날아가 수림 속으로 스몄다. 잔뜩 높여둔 청력에 작은 비명이 걸렸다. 이제 한 오십 미터 정도 남았나? “한 마리~.” 현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상냥한 목소리가 울린 찰나, 또다시 빛이 번쩍였다. “두 마리~.” 번쩍! “세 마리~.” 그렇게 세 번의 빛이 연달아 시야를 번쩍이자, 비로소 눈앞의 수림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임한나가 알려준 정보와 정확히 일치하는 놈들이 우수수 모습을 드러냈다. 특이하게도 놈들은 괴물 특유의 괴성은 지르지 않았다. 시뻘건 눈으로 우리를 보자마자 세찬 콧김과 함께 무작정 달려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걸렸네?” 어디선가 고연주의 나른한 음성이 들려온 순간, 돌연 거뭇한 줄기들이 광범위하게 솟구쳤다. 놈들이 들어오는 지점을 정확히 계산해 그림자를 깔아둔 것이다. 치솟은 그림자 줄기들은 이내 뾰족한 창으로 변해 괴물의 몸을 사정없이 찔러 들어갔다. 이어서 구슬픈 비명과 함께 진형이 흐트러진 순간, 나는 곧장 앞으로 돌진했다. 그러한 찰나, “응?” …뭐지? 원래는 정면으로 들어가 혼란을 한층 가중시킨 후 빠져나오려고 했다. 말인즉 빠르게 쳐서 발을 묶고, 바로 빠질 생각이었다. 그러나 뛰쳐나간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왼쪽에서 비스듬히 달려들어 갔다면, 오른쪽에서는 진수현이, 그리고 언제 돌아갔는지 남다은이 후방에서 나는 듯 치고 들어오고 있다. 이윽고 눈앞에서 걸리는 놈들이 베며 중앙으로 파고들자, 나머지 두 명도 나와 비슷하게 안쪽에 도착했다. 최소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고, 내 움직임을 읽어 기회를 맞춰 노렸다는 방증이다. 저절로 이것 봐라? 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나와 연계를 하겠다고? 아니, 했다고? 그 순간 앞으로 무너지는 놈의 목을 찌르며 스치듯 옆을 지나쳤다. 후드득, 그림자에 찢긴 살점이 몸을 두드린다. 생각할 틈이 없다. 고통에 미쳐 날뛰는 놈들을 기계적으로 베어 넘긴 순간, 허공은 물론, 사방에서 무시무시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나는 크게 검을 휘두르며 내가 들어왔던 길로 도로 달려나갔다. 혼자만 있는 게 아닌, 세 명이 동시에 치고 나가자 빠지는 것도 훨씬 수월하다. 이내 흘끗 돌아보니 남다은과 진수현도 곧바로 빠져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순식간에 간격이 멀어졌을 때, 빛나는 화살과 여러 개의 마법이 놈들 사이로 작렬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광역 공격이 한바탕 제대로 휩쓸자, 이후의 전투는 일사천리였다. 나를 포함한 근접 계열은 다시 몸을 돌렸고, 쓰러져 신음하거나 운 좋게 벗어난 놈들을 처리해 금세 매듭지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불과 몇 분도 걸리지 않은 전투가 끝난 후, 나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클랜원들을 돌아봤다. 엄밀히 말하면 어려운 전투는 아니었다. 사실상 육탄 공격만 조심하면 되는 별 볼 일 없는 괴물이거니와, 어쨌든 이기는 게 당연한 전투다. 그러나 아무리 쉬운 경기라도 3:0으로 이기는 것과 1:0, 2:1로 이기는 건 엄연한 차이가 있다. 무조건 방진으로 차근히 물리치는 게 아닌, 각자 요격 상황에 걸맞은 역할을 해줬다. 사전에 공격을 알아차렸고, 도발하고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으며, 고연주의 함정부터 시작된 연계가 아주 괜찮았다. 개인적으로 비유해보면 5:0, 아니 10:0으로 이긴 경기라고 할까. 어찌 보면 이것도 당연하기는 하지만. “왜요?” 내 멍한 시선을 느낀 걸까.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살며시 팔짱 낀 고연주가 느긋한 미소와 함께 눈웃음을 쳤다. 마치 ‘그래서, 어때요?’ 라고 당돌하게 평가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하고 싶은 말이라. 사실, 있기는 있다. 모두 고생했다고. 구해줘서, 기대에 부응해줘서 고맙다고. 그러나 이미 말을 하기 늦었다는 것도, 그런 말을 할 자격도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 그래도. “…좋은.” 나는 살짝 웃으며,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정으로 입을 열었다. “좋은, 전투였습니다.” * 제갈 해솔의 수송 어빌리티에 힘입어, 우리는 닷새 만에 도시로 귀환할 수 있었다. 어차피 큰 의미 없이 나갔던 원정이라, 도시에 도착하고 나서도 엄청나게 떠들썩하지는 않았다. 그저 언제나처럼 각자의 공로를 바탕으로 실적을 발표하고, 가져온 보상을 하나씩 꺼내며 기뻐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중 이유정이 마침내 B등급으로 올라섰다는 사실은 확실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또한, 가장 중요한 보상 배분에서 나는 스스로 빠질 것을 선언했다. 사멸 무저갱에서 얻은 성과는, 금은보화나 영약, 약초 등을 제외하고서도 장비도 상당수 차지했다. 하지만 개중에 내가 쓸 건 거의 없었고, 설령 있다고 해도 딱히 욕심을 부리고픈 생각은 없었다. 등급제에 기인하면 내가 최우선으로 선점할 수 있겠지만, 이번만큼은 고생한 클랜원들에게 권리를 양보하고 싶었다. 보상을 포기한 것에 화가 풀린 걸까. 네 여인은 생각보다 나를 못살게(?) 굴지는 않았다. 가끔 은근한 시선을 던지기는 했으나 오직 그뿐, 심하게 티를 내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업무에 관해서는 공사(公私)를 구분하는 모습을 보였다.(실은 날이 갈수록 불안감이 심해졌다. 이렇게 조용히 지나갈 리가 없었고, 서로 모여 쑥덕거리는 광경을 번번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뭐 나야 그렇다손 쳐도, 김한별과 이유정도 걱정이었다. 워낙 네 여인의 입김이 막강하다 보니 내가 모르는 곳에서 등쌀이 있지는 않을까 근심이 들었다. 그러나 며칠 주의 깊게 살펴본 결과, 딱히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없었다. 하기야 그렇게 비겁한 짓을 벌일 여인들도 아니고, 정말로 그랬다면 나도 가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이것저것 우선하여 처리할 일을 끝내고 나서, 나는 나름 의뢰자격인 형에게 연락해 공략을 끝냈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반응은 무심했다. 그러냐고, 정말 수고했다는 등 영혼 없는 인사뿐이었다. 단, 끊기 직전 곧 한 번 보자는 말을 들어 뜻 모를 의구심이 일었는데, 무어라 묻기도 전에 통신이 끊어졌다. 요즘 꽤 바쁘게 지낸다는 말은 언뜻 들었지만, 내심 서운한 마음이 없잖아 들었다. 그러나 그런 기분은 내 결재를 기다리는 여러 일과 마주하자 곧 사라졌다. 우선은 조승우가 희소식을 가져왔다. 조만간 ‘밤의 거리’에 마력 영약이 경매 리스트로 올라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이미 신 코란 연합에서 물품 인수를 마쳤다고. 조승우는 거기서 더 나아가 즉시 구매를 목적으로 판매자와 물밑으로 접촉했다는데, 값을 무진장 비싸게 불러 포기했다는 말로 보고를 끝냈다. 즉시 구매를 못한 게 아쉽기는 하지만, 사실 이 정보만 해도 충분한 성과였다. 원래 경매 리스트든 뭐든, 밤의 거리에 관련된 물품은 일체 외부에 유출하지 않는 게 철칙이다. 한데 스스로 원칙을 깨고, 게다가 판매자와 앞서 접촉하게 해줬다는 건 아마 신 코란 연합에서 우리의 처지를 배려한 듯싶다. 사멸 무저갱 원정으로 마력 영약 하나를 새로 얻었으나, 나는 경매에 참가하기로 결심하고 충분한 자금을 확보해두라 지시했다. 어쨌든 능력치 관련 영약은 있으면 도움이 되는 물건이며, 제한 조건을 잘만 이용하면 두 개를 한 번에 먹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안 그대로 비비앙이 마력이 부족하다고 힘들어하는데, 개인적으로 후자를 노려 고민을 해결해주고 싶었다. 조승우도 내 의견을 듣고 일리 있다고 여겼는지, 마침 이번 원정 성과로 재정이 넉넉해졌으니 충분히 모을 수 있을 거라며 호언장담을 했다. 물론 당면한 일, 아니 희소식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원정에서 돌아온 후, 또 하나의 기쁜 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0833 / 0933 ---------------------------------------------- The Town At Night. 노을이 길게 누운 시간, 오후를 맞이한 캐슬 1층은 상당히 한산하다. 정오 즈음만 해도 꽤 북적였던 것 같은데, 이제는 간간이 돌아다니는 하녀를 제외하고는 거의 발길이 끊겼다. 하기야 이 시간대면 일과를 정리할 시간이니, 화급을 다투는 일만 아니면 찾아오는 게 이상한 일이다. “슬슬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중앙 쉼터를 둘러본 후, 오른쪽으로 눈을 돌렸다. 정원의 풍경을 담아내는 네모나고 커다란 수정이 붉은 황혼빛으로 물들어 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즈음, 달그락, 탁자에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밤엔 무슨 일을 할까~. 누구를 또 꾀려는 걸까~.” 이어서 들려오는 흥겨운 노랫가락. 언제 다가온 걸까? 고연주가 작은 쟁반을 옆구리에 낀 채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탁자에는 허연 김을 피우는 찻잔이 올려져 있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손을 뻗었다. “고맙습니다. 마침 입이 심심했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또 어떤 년이에요?” “사용자 차희영이요. 후루룩.” “희영이요? 걔는.” 무어라 말하려던 고연주는 돌연 입을 다물었다. 눈을 한껏 치뜨며 흘겨보는 것이 흡사 짐승을 보는 듯하다. 왜 저러는지 알 것 같아 잔잔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압니다. 안현을 좋아하잖아요.” “그래요. 설마, 뺏으려는 생각은 아니시겠죠?” 나는 대답 대신 품속에 넣어둔 물건을 꺼내 슬쩍 보여주었다. 그러자 고연주의 두 눈에 이채가 스치더니 삽시간에 장난기가 사라졌다. 아직 미심쩍은 빛은 남아 있었으나 어쨌든 오늘 만남의 목적을 이해한 듯싶다. “결국, 결정하셨네요.” “시간이 없으니까요.” “시간이 없어요?” “아, 정령석처럼 오래 쟁여두고 싶지 않아서요. 성장하는 시간도 염두에 둬야 하니까요.” 순간 아차 싶어 말을 바꿨다. 기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나, 속내를 곧이곧대로 드러낸 말은 아니었다. 저번에 받은 예비 사용자는 열여섯 명. 그러나 탁 까놓고 말하면 딱히 눈여겨본 사용자는 한 명도 없다. 정확히는 방패 혹은 집 지키는 용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무리 늦어도 5년 차에는 테라로 진군할 예정인데, 이제 와서 키운다는 건 어불성설이니까. 그러나 차희영의 경우는 다르다. 기초를 다시 다져오라는 명분으로 아카데미에 집어넣기는 했지만, 연차로 따지면 이제 곧 2년 차로 오르지 않는가. 즉 현재가 딱 좋은 시기라고 볼 수 있으니, 예비 사용자들과 동일 선상으로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뭐, 예비 인원 중 제갈 해솔 급의 사용자가 출현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으니까. “아깝다. 간만에 바가지 좀 긁으려고 했더니만.”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 문득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목소리기는 했으나 나 들으라고 말한 게 분명하다. “바가지라면 얼마든지 긁어도 됩니다. 그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겠죠.” “흐응. 말투가 의미심장한데요?” “적당히 좀 하면 안 될까요. 서로 모여 쑥덕거리는 걸 볼 때마다 불안해서 잠이 안 올 지경입니다.” “푸.” 고연주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지은 죄가 있으니 불안해하는 거죠. 아니면, 우리가 애들한테 해코지할까 봐?” “…둘 다요.” “뭐, 최소한 후자는 기우겠네요. 사실 생각해보면, 저도 한별이나 유정이한테 할 말은 없거든요. 걔들 처지에서 보면 우리가 선수 친 입장이겠죠.” “하, 하하.” “…그래요, 그건 그렇다 쳐요.” “…….” 나는 찻잔을 기울이는 걸 멈추고 고연주의 말에 집중했다. 말이 이어질수록 웃음기가 가시고 진지한 기색이 감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요.” 어느새 고연주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비스듬히 몸을 돌린 채, 붉게 타오르는 저녁놀에 둘러싸여 말을 잇는다. “이거 하나만, 진심으로 대답해줘요.” “…할 수 있는 거라면요.” “그때…. 왜 연락을 받지 않은 거예요?” “그건.” “몰랐다고는 하지 말아줘요. 통신 수정을 갖고 있었다는 것도 확인했고, 하연 씨가 시도한 횟수는 세 자릿수가 넘어가니까.” “…….” 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쉬이 말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이 조금 의외이기는 했다. 물론 질문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진심’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래야 더 필사적이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여러 변명이 뇌리를 스쳤으나 결국에는 처음 생각한 그대로 말했다.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고연주가 원하는 진심이었다. 또한, 돌아오는 내내 오묘한 뉘앙스를 풍겼으니 속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한동안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나도 시선을 돌린 터라 지금 고연주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식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무슨 말을 할지 고민에 잠겼다. 그러나 먼저 말문을 꺼낸 건 고연주였다. “그러니까 우리를 필사적으로 만들려고 일부러 연락을 받지 않았다. 이런 말인가요?” “액면 그대로의 뜻이라면, 맞습니다.” “그러다 만에 하나 우리가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아마.” 나는 가볍게 숨을 들이켠 후, “좌절했을 것 같습니다.” 또 한 번 진심을 내뱉었다. 그 순간 비로소 나를 쳐다보는 눈초리가 느껴졌다. 나는 살짝 식은 찻물을 한입에 마신 후, 다시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원래는 두근거려야 정상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하다. 차의 영향인가? 기분이 잔잔하니 말도 술술 나온다. 이건 조금 주의해야겠군. “불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쨌든 믿고…. 아니, 아니죠.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고요.” “…조금 더 자세히 말해줘요.” “내가 머셔너리 클랜을 창설한 게 잘못된 선택이 아니구나. 내가 잘못 이끌어온 게 아니구나. 아직 가능성이 있구나. …대충 이런 뜻입니다.” “…….” 아무튼, 머셔너리 클랜 창설이 분기점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냥 아는 미래를 따라 춘추 전국 시대를 겪어야 했는지, 아니면 미래를 바꾼 게 잘한 일인지. 나는 이 문제로 한참을 후회하고, 고민했었다. 이번에는 고연주가 침묵했다. 서서히 눈을 돌리자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심원한 눈동자가 보였다. “이게 제 진심이자, 대답입니다.” 어떠냐는 의미로 물어보자, 고연주의 고개가 살며시 기울여졌다. “글쎄요….” 그리고 잠시 후,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사실 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수현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지만요.” 조용히 말을 흐리더니 돌연 반전을 예고한다. “정말 몰랐다, 아니면 우리를 믿었다, 혹은 몹시 슬퍼했을 거다…. 적어도 이런 말보다는, 훨씬 기분이 괜찮네요. 최소한 진심인 건 느꼈으니까.” 그렇게 말한 고연주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때, 우리는 동시에 한쪽으로 눈을 돌렸다. 탁탁, 탁탁…! 누군가 급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홀을 울렸다. 고연주는 짧은 한숨을 뱉고는 텅 빈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소리가 울리는 반대쪽으로 바로 몸을 돌렸다. “당분간 두 애한테 잘해주세요. 겉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속으로는 아직 많이 힘들 거예요. 정신은 육체와는 달리 그리 쉽게 나아지지 않는답니다?” 응? 그것도 알고 있었나? 아니면 애들이 말한 걸까? “고….”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순간, 고연주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신경 쓰지 말라는 듯, 한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순식간에 멀어졌다. 단숨에 점이 돼버린 뒷모습을 하염없이 응시하다가,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 순간이었다. - 부르지 마. 문득 화정의 목소리가 내 행동에 제동을 걸었다. - 불러서 어쩌게. 미안하다고 하게? ‘그게 아니라….’ - 겉으로는 웃어도 속으로는 이 악물고 말했을 거야. 네가 어설프게 행동할수록, 오히려 쟤 자존심만 더 상처받는다고. ‘…….’ 화정의 음성은 조용했으나 날카로운 비수처럼 가슴에 틀어박혔다. 탁탁탁탁! “늦어서 죄송합니다!” 동시에 홀을 울리던 발소리가 멈추며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목구멍 끝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키고, 나는 간신히 의자에 몸을 앉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입안에 쓰디쓴 감각이 진한 여운처럼 맴돌았다. * 차희영은 교육이 늦게 끝났다고, 그래서 늦었다며 여러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변명은 아니다. 아카데미 교관들한테 있는 대로 굴리고 최대한 괴롭히라고 일러뒀으니까. 그리하여 도가 지나칠 정도로 사죄하는 차희영을 간신히 진정시킨 후에야, 겨우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야기에 앞서…. 박현우 교관이 뭘 전해주라고 하지 않던가요?” 손을 내밀자 차희영은 쭈뼛쭈뼛하면서도 품에서 다소곳이 기록 더미를 꺼내놓았다. 별것은 아니고 차희영의 아카데미 성적표였다.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는 차희영을 보고 웃어준 후, 나는 천천히 기록을 읽어 내렸다. “호.” 유심히 검토한 결과, 작은 탄성이 터졌다. 예전 차희영이 예비 사용자였던 시절에는 아카데미 성적이 그리 좋지 못했다. 끔찍한 사건을 겪고 나서 한동안 방황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것이 점수에 고스란히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년이 지난 지금, 그때와는 180도 다른 성적이 나왔다. 특히 마법과 관련한 부문에서 모조리 만점을 받은 것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물론 이게 굉장히, 엄청나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냉정히 말해서 차희영은 현재 예비 사용자가 아니니 이 정도 해주지 않고서는 곤란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내건 조건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사실은 좋게 생각된다. “성적이 꽤 괜찮네요?” 칭찬해주자 차희영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깜빡거리는 것이 꼭 간식을 달라고 조르는 강아지를 보는 듯하다. 그 기대에 부응해 품에 손을 넣어 물건을 꺼냈다. 은은한 푸른빛이 흐르는 부채. 드디어 마지막 각성 시크릿 클래스인 ‘백야의 무희’를 계승할 때가 왔다. “사용자 차희영?” “네, 네!” “저번에 제가 한 얘기는 기억하고 있나요?” “…기억하고 있어요.” 말을 꺼낸 순간, 불현듯 차희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니. 변한 건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자신 있습니까?” 그 순간 탁자에 꽂혀 있던 시선이 서서히 위로 올라왔다. 언뜻 멍해 보이지만, 어딘가 요사스러운 빛이 흐르는 눈동자와 마주하자 돌연히 오소소 소름이 끼쳤다. 올려놓은 부채를 바스러지듯이 움켰다. “앞으로 엄청나게 힘들 겁니다.”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각오하고 있어요. 아니, 각오했어요.” “정말로요?” “…….” “각성 시크릿 클래스. 가벼운 이름이 아닙니다. 무거운 이름값을 갖고 있는 만큼, 그만한 활약이 요구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단순히 수련이 힘들다고 겁주는 게 아닙니다. 앞으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가시밭길을 걷게 될 겁니다. 와중에 어쩌면 죽음과 직면하게 될지도 모르죠. 이뿐일까요? 장담하죠. 분명 클랜 안에서도 여러 말이 나올 겁니다. 이 귀한걸 ‘그런 사용자’에게 줘도 되느냐. 차라리 제갈 해솔이나 주지.” “…….” 말이 없다. 은근슬쩍 신경을 긁어도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더 이상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사실상 부채를 꺼냈을 때부터 맹목적으로 쳐다만 보고 있다. 아무래도 이 이상 얘기를 끄는 건 무의미할 것 같다. “그러한 것들을 극복할 자신이 있다면….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말을 마침과 함께 나는 부채를 탁자 중앙으로 밀었다. 그리고 차희영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덥석 부채를 잡았다. 그렇게 손에 물건을 움키자 그제야 토끼 눈을 뜨며 가벼운 탄식을 터뜨린다. “아, 아…?” 조금 의외이기는 했다. 하지만, 좋다.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면 외려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왜냐면 나는 차희영이 단시간에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바로 저 ‘맹목’에 걸고 있었으니까. 과거 ‘마녀’ 차희영은 확실히 대단했다. 어쨌든 안솔도 두 번 성공할 자신은 없다는 게헨나의 소환을 한 번이나마 실현하지 않았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걸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마 맹목적인 ‘분노’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해답은 간단하다. 1회 차의 ‘분노’를 2회 차에서는 ‘안현’으로 대체하면 된다. 안현에게는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래서 나는 접때 은근히 안현과의 관계를 들먹였다. 만약 차희영이 마녀로 각성한다손 쳐도 충분히 위험을 감수할만한 일이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1회 차서 우리를 노린 마녀의 칼끝을 현재 악마에게 돌릴 수 있다면, 강력한 무기를 하나 쥐게 되는 셈이니까. 생각을 끝내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에, 네?” 미련 없이 몸을 돌리자 차희영이 바보처럼 허둥댔다. “왜요? 그 부채는 이제 사용자 차희영의 소유물인데.” “하, 하지만요….” “자신 있게 가져갔잖아요?” “그, 그건! 아, 죄, 죄송, 그러니까요. 방금 제가 잠시….” “저는 개인적으로 좋게 봤습니다. 이런 모습보다, 자신감 있는 모습이 훨씬 보기 좋아요.” “…히끅!” 참, 딸꾹질도 참 귀엽게 하네. “조금 더 자신감을 가져봐요. 아까 말을 조금 심하게 하기는 했지만, 내심 사용자 차희영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으니까요. 이건 진심이에요.” 오늘따라 진심이라는 말을 많이 써먹는군. 하지만 이건 1회 차서도 호기심을 가졌던 부분이었다. ‘천재’와 ‘마녀’. 둘 중 과연 누가 더 뛰어날까? 차희영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우물쭈물 낯을 붉혔다. 괴롭히는 건 이쯤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정원을 응시했다. 능글맞게 입을 열었다. “아마 지금쯤 안현의 수련이 거의 끝난 시간일 것 같은데….” 이번에는 확실히 내 말을 알아들은 듯했다. 화들짝 고개를 들더니 곧장 몸을 일으켰으니까. 반은 때려 맞추기는 했지만, 아마 안현의 앞에서 가장 먼저 계승하고 싶겠지. 둘만의 특별한 시간을 보내도록 배려해주는 것쯤, 어려운 일은 아니다. 사용자 정보야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으니까. 겸사겸사 ‘맹목’도 한층 더 강화할 수 있을 테고. 이윽고 차희영은 정확히 여덟 번 허리를 굽혔다가 편 후, 후다닥 정원으로 뛰어 나갔다. 하나 궁금한 건, 나가는 도중 고개를 미친 듯이 저으며 ‘안 돼! 넘어가면 안 돼!’나 ‘현이 오빠! 흔들려서 미안해요!’ 라는 등, 뜻 모를 남겼다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웃으며 천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늘 새벽 내내 거리를 돌아다녀야 할 것 같으니, 시간이 있을 때 약간이라도 자두는 게 좋을 터. “…후우.” 계단을 오르면서 무언가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끝이 다가오는 걸 느껴서일까. 이로써 끝까지 쥐고 있던 백야의 무희도 드디어 떠나 보냈다. 곧 백야의 무희를 계승했다는 소문이 돌면, 이제 중간 단계인 머셔너리의 강화도 일단락 짓게 되는 셈이다. “…아.” 아니, 아니지. 아직 할 일이 하나 남아 있다. 오늘 새벽 일이 무사히 끝나야 귀환 계획의 두 번째 단계를 끝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오늘 밤의 거리를 마지막으로…. * 눈을 뜨자 방 안에는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테라스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은 아직 희끗희끗한 불빛이 곳곳을 비추고 있다. 밤의 거리가 열리기에는 이른 시간이지만, 딱 적당한 때에 일어났다. 느긋하게 준비하고 나가면 얼추 시간이 맞겠지. 침대에서 나와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자금이었다. 어느새 갖다 놨는지 책상에는 두 개의 카오스 미믹과, 작은 주머니 하나가 놓여 있다. 이윽고 하나하나 열어 확인해본 찰나, 숨이 멎을 뻔했다. 아빠 카오스 미믹에는 불그스름하게 빛나는 백금화가, 엄마 카오스 미믹에는 다채로운 빛을 반짝이는 보석이 그득하게 들어 있었다. 거기다 중간중간 입장료로 사용할 금화를 작은 주머니에 따로 담아놓기까지. 조승우의 센스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도시에서 발생하는 수입이나 금번 원정 등으로 재정이 넉넉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절약을 중시하는 조승우의 성격상 이렇게 많이 넣을 리가 없는데…. “응?” 머리를 갸웃하며 미믹들을 챙기는 순간, 문득 아래 깔린 작은 기록 하나가 눈에 밟혔다. 쪽지였다. 『아마 클랜 로드가 이 쪽지를 읽으실 때쯤이면…. 저는, 이미 한창 꿈나라를 여행하고 있겠지요.』 …참 쓸데없이 거창한 서두군. 『하하. 농담 한 번 해봤습니다. 다름이 아니고, 오늘 오후 늦게 입수한 정보가 하나 있습니다. 원래는 바로 알려드리려고 했는데, 오래간만에 곤히 주무시는 것 같아 차마 말씀 드리지 못했습니다. 사실, 이것도 그림자 여왕님께 몰래 부탁 드린 거라서요. 제 어설픈 실력으로 들어가면 단박에 알아채 깨실 것 같아서 말이죠.』 또 한 번 쓸데없는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차분히 아래를 읽어 내렸다. 『아무튼, 신 코란 연합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바로 본론을 말씀드리면, 오늘 경매가 꽤 가열될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제가 물밑 접촉을 했다는 사실이 어느 루트로 퍼졌습니다. 그러니까 ‘머셔너리 클랜’이 이번 경매에 참가한다, 이 정도 수준으로요. 신 코란 연합의 소행은 아니고, 아마 영약 판매자가 수작을 부렸다고 생각됩니다. 아마 경쟁을 유도해 최대한 비싼 값을 받으려는 목적이라고 생각됩니다만.』 호, 꽤 깜찍한 짓을 했군. 아마 이쪽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적당한 선에서 이용하려는 것 같은데. 안타깝지만 현 상황으로서는 딱히 뭐라 할 건더기는 없다. 크게 보면 원칙을 어겼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먼저 선을 넘은 건 신 코란 연합과 우리니까. 아마 그 점을 인지하고 야료를 부렸을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잡아 족치고…. 아, 죄송합니다. 어쨌든 당장 급한 건 우리고, 경매가 눈앞이니까요. 그리고 이 건에 관해서, 상인 조합 로드인 서지환이 필요하시면 최대한 협조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글쎄, 협조라. 서지환이라면 아마….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도리어 이번 기회를 이용해 판을 크게 키우고 싶어하는 눈치더군요.』 그래, 그러고 싶겠지. 『들어보니 직전에 이번 경매 물품 리스트를 새로 업데이트한 것 같습니다만…. 아마 여느 때보다 큰손들이 참가할 가능성이 높으니, 그간 아껴둔 물품이 꽤 나올 수도 있겠습니다. 혹시 몰라, 모든 추측을 고려해 자금을 넉넉하게 준비했습니다. 선택은 클랜 로드에게 맡기겠습니다. 이 정도면 누구한테도 지지 않으리라 생각되지만, 그래도 그놈을 생각하니 괘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군요. 여하튼 부디 클랜 로드의 현명한 결단을 기대합니다.』 하기야 상황이 이렇다면, 처치 곤란한 물품이 블라인드 경매로 나와도 크게 이상할 건 없다. 후후. 그럼 나야 좋지. 『PS. 아차, 아기 카오스 미믹이 조금 이상합니다. 처음에는 얌전히 있더니, 클랜 로드의 방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경기를 일으키며 심히 울어 젖히더군요. 그래서 부모 카오스 미믹으로 대체했습니다만, 혹시 왜 이러는지 알 수 있을까요?』 나는 피식 웃으며 쪽지를 품 안에 넣었다. 그냥, 조금 우스웠다. 밤의 거리는 대표적인 음지라 볼 수 있는데, 그런 만큼 돌아가는 생리가 훤히 보여서 말이지. 어떻게든 비싼 값을 받고 싶은 마음은 이해한다만, 사실 괘씸하다 느끼는 건 매 한 가지였다. 주섬주섬 작은 주머니를 챙긴 후, 미리 준비한 잿빛 로브를 눌러쓰는 것으로 채비를 마쳤다. 이윽고 콧노래를 부르며 계단을 내려가, 입구를 넘어 정문을 벗어나려는 찰나. “…….” 우뚝, 걸음을 멈췄다. “잠깐만….” 돌연히 허전한 감정이 온몸을 엄습한다. 무언가 중요한 걸 잊은 듯한 기분. 잠시 후, 나는 품에 넣었던 쪽지를 도로 꺼내 펼쳤다. ============================ 작품 후기 ============================ 많은 걸 느낀 하루였습니다. 기다려주시고, 응원해주신 독자 분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_(__)_ 0834 / 0933 ---------------------------------------------- The Town At Night. 쪽지를 거듭 읽고 내린 결론은, 성으로 걸음을 돌리는 것이었다. 서지환이 협조하겠다고는 했으나 무작정 믿고 있을 수만은 없거니와, 같잖은 수작을 엿 먹이려면 혼자서는 힘들 것 같아서였다. 한편으로는 홀몸으로 가는 게 적적하기도 했고. 공교롭게도 가장 적합한 사용자가 떠올랐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오 층의 복도는 고요했다. 어두운 통로에는 어슴푸레한 흰색 문이 좌우를 아울러 두 열로 늘어서 있다. 나는 최대한 발소리를 죽인 채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숙소가 어디였더라? 무려 10분이나 어둠 속에서 헤맨 후에야 겨우 기억해낼 수 있었다. 애초 잘못된 곳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반성하며 반대쪽으로 이동했다. 계단을 등지는 방향으로 바라보고, 왼쪽 가장 끝 방이었지? 똑, 똑. 가볍게 눈을 노크하자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니? 이 야심한 시간에….” 이런, 잠든 걸 깨운 건가. 힘없는 목소리가 안에서 들렸다. 살짝 쉰 거 같기도 했다. 이내 서서히 문이 열리며 부스스한 얼굴의 고연주가 얼굴을 내밀었다. 나를 보고 몹시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어머, 웬일이에요?” “같이 밤의 거리에 가지 않을래요?” 나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러자 반듯한 이마가 살며시 좁혀지더니 왼쪽 눈이 찡그려졌다. “밤의 거리에 같이 가자고요?” “예.” “저랑? 단둘이서?” “그렇지요.” “왜요?” “응? 싫어요?” 돌연히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하기야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갑작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고연주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비뚜름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표정도 어느새 샐쭉해졌다. “싫은 건 아닌데, 너무 갑작스럽잖아요.” “아, 그건.” “수현이야말로 갑자기 왜 이러는데요? 오늘 제가 그렇게 말하고 돌아가니까, 안쓰럽기라도 하셨나요?” “…아니요?” “그럼요.” “도움받고 싶은 일이 생겨서요.” 실쭉하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사전 설명이 부족해 오해를 부른 것 같아, 나는 쪽지를 꺼내 차분히 설명했다. 오늘 올라올 영약을 꼭 갖고 싶다는 말과 이걸 이용해 야료를 부리려는 놈들이 있다는 것 등등. 짧은 설명을 끝내자 고연주는 킬킬거리며 한참을 소리 죽여 웃었다. 무언가 이상한 기분에 나는 괜스레 볼을 긁적였다. “저, 고연주?” “나는 또. 그래, 이래야 수현답지.” “예?” “아니, 아녜요. 오해해서 미안해요.” “…….” “아무튼, 좋아요. 같이 갈 테니까 삼사십 분만 기다리고 있어요.” 그렇게 말한 고연주는 빙긋 미소 짓고 문을 닫았다. 한 삼 초 정도 멍하니 있다가 나는 벌컥 문을 열었다. 바로 준비에 들어갔는지 상의를 목까지 끌어올린 고연주는 의아히 나를 돌아봤다. 우선 옷자락에 걸려 끌려 올라간 가슴 실루엣을 한 번 쳐다본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꿀꺽.” 잠시만. 이걸 말하려는 게, 아니 침 삼키는 소리를 내려는 건 아니었어. “혹시, 옷 갈아입는 거 보는 거 좋아해요?” “험, 그게 아니라요. 준비 시간 때문에.” “응? 그게 왜요?” “무슨 삼십 분이나 걸립니까. 그냥 로브 하나 걸치고 얼른 나와요.” 그렇게 말한 순간 고연주는 진정으로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진심이에요?” “아니, 진심이고 자시고….” “이제 막 잠에서 깼는데, 이런 꼴로 나오라고요?” “그게 무슨 상관….” “나 참. 말을 말지. 됐고, 나가서 조용히 기다리고나 있어요?” “고…!” 쾅,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문은 세찬 소리와 함께 닫혔다. 이어서 “진짜 별꼴이야. 예의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불쑥 찾아온 것도 괘씸한데….” 라는 말소리가 안에서 들려와 나도 똑같이 투덜거렸다. “거참, 이해가 안 가네. 뭘 삼사십 분이나 준비한다고. 씻는 시간 포함해도 십 분이면 될걸.” “뭐라고요? 다 들리거든요?” “들으라고 한 겁니다?” “…기막혀. 남자랑 여자랑 똑같은 줄 알아요? 이것도 최소한으로 잡은 준비 시간이라고요.” 나는 일부러 힘차게 코웃음 쳤다. 그리고 한층 목소리를 낮추며 비꼬는 투로 입을 열었다. “예, 예. 그러시겠죠. 아주 그냥 제가 씻겨주고 싶네요. 그럼 오 분이면 될 텐데.” 그러나. “책임져줄 자신 있으면 그러시던가?” 짓궂은 음성에 조용히 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다시 정문으로 걸어가면서 스스로 생각해도 뜻 모를 한숨이 계속 나왔다. 결국에는 홀로 쓸쓸히 기다려야 하는 건가. 그저 고연주가 빨리 나오기를 바라는 수밖에. 결과적으로 고연주는 내 간절한 기도를 배신했다. 애초 말한 것보다 십 분이나 늦게 나온 것이다. 그러나 나를 보며 바쁘게 달려오는 모습을 바라본 순간, 나도 모르게 넋을 잃고 말았다. 가슴 윗부분이 직선으로 트여 있는, 몸에 찰싹 달라붙는 터틀넥(TurtleNeck) 같은 옷과, 안이 비칠 듯 말 듯한 고급스러운 면사(綿絲)로 아래를 아슬아슬하게 가린 모습은, 몹시 색정적이면서 아름다웠다. 오른손목에는 금빛 브레이슬릿이 찰랑거리고, 왼쪽 어깨에는 은빛 끈으로 연결한 아기 카오스 미믹을 걸었다. 또 어디서 본 건 있는지, 망사 천으로 얼굴을 가리니 어딘가 모르게 몽환적인 미(美)를 자아낸다. 거기다 긴 잿빛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틀어 올려 깔끔하게 묶은 자태는, 실로…. “정말, 못살아. 자꾸 어디를 보는 거예요?” 킥킥대는 소리를 들은 순간 겨우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시선은 반 이상이 훤히 드러난 가슴에 머물러 있었다. 와, 아예 노출한 것보다는 살짝 가린 게 더 야할 때도 있구나. “으음, 이만 가도록 하죠. 출발이 너무 늦었습니다.” 나는 어색이 헛기침하며 몸을 돌렸다. 사실 늦은 건 아니었다. 애초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으니 지금 가면 오히려 경매 시간에 딱 맞을 것이다. 원래는 오랜만에 가는 것이니만큼 이곳저곳 돌아보며 눈요기나 할 예정이었는데, 이쪽이 더 남는 장사다. “네, 좋아요~.” 고연주는 생글생글한 음성으로 말하고는 팔짱을 껴오며 몸을 비비듯이 밀착해왔다.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의 향기로운 냄새가 물씬 흘렀다. 나는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의심하더니, 웃더니, 화내더니, 이제는 기분이 좋아 보인다. 여자는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밤의 거리로 이동했다. 어디 보자. 머셔너리 캐슬을 기준으로 남서쪽 구석이던가? “삐아….” “응? 얘가 왜 갑자기 안솔처럼 울지?” “삐에에에….” “얘, 왜 그러니? 왜 우는 거야, 응?” 밤의 거리로 가는 와중 구슬프게 울어 젖히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입구를 쫙! 시원스레 찢어 조용히 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냥 참기로 했다. 왜냐면 ‘제발 아기 카오스 미믹 좀 그만 괴롭혀라.’ 라는 익명의 투서가 가끔 결재에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20분 정도 느긋하게 걷자 마침내 서서히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색찬란한 불빛이 거리 곳곳을 밝히고, 대로에는 수많은 사용자가 소리 없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아무 생각 없이 걸음을 옮긴 찰나, 문득 사방의 사용자들이 머리를 돌렸다. 그 현상은 순식간에 전염돼 종내 어수선함이 잦아들며 모든 사용자가 우리를 쳐다봤다. 흡사 ‘홀드(Hold)’ 주문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약간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뜻 모를 정적이 흐른다. “…….” 로브도 눌러쓰고 왔는데 갑자기 왜 이러나 생각할 즈음, 시선이 내 옆의 여인에게 꽂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얼굴을 가렸음에도 불구하고, 옷차림에서 흘러나오는 분위기만으로 주변의 관심을 완벽하게 끌었다. 어찌나 색기가 강한지, 과장 하나 안 보태고 눈에 보일 정도로 아랫도리가 부풀어 오르는 사내가 한두 명이 아닐 지경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입구에 밀집해 있던 사용자들이 양쪽으로 주춤주춤 물러나 길이 트였다. 덕분에 혼잡한 틈을 헤집거나 순서를 기다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이내 생각지도 못한 곤란이 찾아왔다. 사내, 심지어 여인조차도 고연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지만, 나를 쳐다보는 눈초리도 적잖았다. 시선 중에는 무언가 굉장히 억울해 하거나, 칼로 몸을 콱 쑤시는 듯한 무시무시한 살기도 섞여 있었다. 그러나 정작 고연주는 현 상황을 무척 즐기고 있었다. 아니, 즐기는 정도가 아니었다. 고혹적인 미소를 던지거나 찡긋 눈웃음치는 건 애교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덥다면서, 검지를 갈고리처럼 구부려 가슴 트임 부분을 살그머니 끄집어내리는 행동은….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꼭 ‘먹고 싶니? 먹고 싶어?’ 라고 희롱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으음. 세상에서 가장 치사한 짓이 먹을 거로(?) 놀리는 거라던데. 자꾸만 걸음이 느려지는 고연주를 억지로 잡아 이끌며 겨우 입구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비싼 입장료로 금화 서른 개를 낸 후, 우리는 겨우 밤의 거리에 들어올 수 있었다. “흐응, 이건 에히토 향…. 아니, 카마리나 인가?” 고연주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킁킁거렸다. 힘껏 숨을 들이켜자 시야가 점차 선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흐음. 해로운 향은 아닌 것 같은데요.” “네. 아니죠. 살짝 맛만 느낄 수 있는 정도로 뿌리기는 했는데…. 서서히 활성화하는 오감을 바탕으로, 인간이 인지하는 것에 한층 강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약이에요.” “호오.” “…단, 그 반응이 원초적인 감정에 기인한다는 것이 문제지요.” “…….” “서지환이라고 했죠? 상인으로서 대단한 수완가라고 들었는데, 조금은 알 것 같네요. 이 거리의 특성을 상당한 수준으로 이해하고, 아니 이용하고 있어요.” 고연주의 설명에 공감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 눈에 보인 건 홍등가처럼 은은한 붉은빛을 밝히는 조명등과, 가지런하게 늘어선 건물 벽에 알알이 매달린 반짝이는 수정들이었다. 거기서 조금 더 지나자, 탁 트인 거리의 가장자리로 사용자들이 한두 명씩 짝지어 좌판(坐板)을 깐 광경이 들어왔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흔한 시장의 풍경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밤의 거리의 모토는 ‘욕망’을 구현하고, 실제로 사고파는 것에 있다. 이러한 관점으로 생각하면 일 인당 금화 열다섯 개를 받는 이유도 답이 나온다. 말인즉 입장료에 관전 값을 포함한 것이다. 구매자가 즉석에서 욕망의 발현을 원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는 맛도 쏠쏠하니까. 여하튼 이 추악한 거리를 이용하는 사용자들이 무조건 지켜야 할 단 하나의 철칙. ‘어디서, 어떤 광경을 봐도, 절대로 간섭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걷는 거리는 첫 번째 거리, 초입에 불과하다. 밤의 거리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욕망의 강도가 심해지는, 일종의 단계형 상승 구조로 돼 있다. 즉 절대로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되는 욕망은, 더 은밀하고 으슥한 곳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일례로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경매장의 경우, 가장 마지막 단계나 혹은 바로 그 아래 단계라고 볼 수 있을 터. 그만큼 위험하지만, 그만큼 유혹도 강렬하다. 잠시 후. 첫 번째 거리를 통과한 후에는 상점이 밀집한 두 번째 거리가 나타났다. 겉으로 내건 간판을 보니 어떤 상점인지 짐작이 갔으나, 아직은 정상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이곳도 지나쳐 세 번째 거리로 들어서니 이번에는 예상대로 창관의 거리가 나왔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거리를 합친 것보다 많은 사용자가 돌아다니고 있었으며, 갑절은 떠들썩한 거리는 호황(好況)을 증명하고 있다. 물론 여기도 극심한 거부감이 들 만큼 비정상이라고는 볼 수 없다. 어쨌든 성(性)을 합법적으로 상품화하는 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니. …바꾸어 말하면, 이 세 번째 거리까지는 최소한 ‘정상인’ 혹은 ‘사람’이 이용하는 거리라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밤의 거리’가 본격적으로 본색을 드러낸 건, “……?” “……!” 상위 단계의 첫 시작이라 볼 수 있는, 네 번째 거리로 들어섰을 때였다. 0835 / 0933 ---------------------------------------------- The Town At Night. 세 번째 거리까지만 해도 길은 호화로웠다. 곳곳에 설치된 등이 빛을 밝히고, 건물 창문이나 입구서 흘러나오는 다채로운 빛깔은 화려한 번화가 같은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나 다음 거리로 들어선 순간부터 길은 점차 어두워졌고, 활기도 눈에 띄게 사그라졌다. 단순히 이용하는 사용자가 적어져서가 아니었다. 우선 시야가 스리슬쩍 어두워졌다. 자주 보이던 등이 모조리 사라지고, 간간이 건물에 걸린 횃불만이 눈앞을 밝혀주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처럼 길을 거니는 사용자보다는, 도처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용자의 수가 태반이다. 왜 멈춰서 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왜냐면 개인의 ‘욕망’을 하나로 정의할 수는 없는 만큼, 장사 내용도 날마다 달라지니까. 단 하나 확실한 건, 이 네 번째 거리부터가 진짜 밤의 거리라는 것이다. 그래. 사람이 아닌 ‘짐승’이, 정상인이 아닌 어딘가 망가진 ‘비정상인’들의 향연이 이루어지는 공간. 웅성웅성. 문득 앞에서 작게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더 걷자 큰 거리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약 스물 남짓한 사용자가 무언가를 둥글게 둘러싸 구경하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하나 특이한 건, 모여 있는 사용자가 거의 여인이었다. 사내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겨우 서너 명에 불과했다. 그냥 빠르게 지나치려는 찰나, 사용자 사이사이 보이는 광경이 돌연히 시야를 스쳤다. 그 순간 알고 있으면서도 순간적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쭉…. 쭈우우욱….” “윽, 흑…! 으윽…!” 웬 거한의 사내가 무릎을 꿇은 채 누군가의 사타구니에 머리를 묻고 있다. 무언가를 힘차게 빨아들이는 소리가 울렸다.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당하는 처지에 있는 이의 성별이 동성이었다. 사지는 단단한 밧줄로 결박돼 있고, 입에는 가느다란 막대를 문 채 소리 죽여 흐느낀다. 백한결 급은 아니지만, 얼굴도 희고 외모도 꽤 곱상하다. 아직 앳된 남아가 건장한 털북숭이한테 당하는 장면은 몹시나 거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광경을 뜨거운 눈으로 관람하는 구경꾼들과, 의자에 편히 앉아 있는 여성 사용자 한 명. 흥미로운 눈으로 응시하면서 한 손에 든 와인 잔을 입가로 기울인다. 아마 저 광경은 저 여인의 욕망을 구현화한 것이리라. 그때 여인이 두 손을 입에 모아 교태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지루해지는 것 같은데…. 동걸이 아저씨~. 이제 슬슬 본 게임으로 들어가는 건 어때요?” “예, 예. 알겠습니다.” 거한은 허리를 굽실거리더니 곧바로 상대를 바닥에 눕혔다. 그 순간 더 이상은 보고 싶지 않아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익숙한 이름을 들은 것 같은데. 기분 탓이려나? 잠시 후. “끄으으윽? 끄르르륵!” 처절하리만치 서글픈 절규가 귀를 세게 때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깔깔 웃는 소리와 가볍게 손뼉 치는 소리. 고연주는 허탈이 코웃음을 치고 입속으로 혀를 찼고, 나는 입맛을 다시며 걷는 속도를 가일층 높였다. “어서 갑시다. 마지막 거리까지 가는 것도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그렇게 삽시간에 길을 벗어났으나, 다음 거리라고 상황이 다른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하다고 볼 수 있을까. 아까는 사내보다 여인의 비율이 압도적이었다면, 이번에는 정반대였다. 다섯 번째 거리로 접어든 순간, 여인이 울부짖는 소리와 욕설 섞인 환호가 우리를 맞이했다. “꺄아아악!” “잘한다! 아주 그냥 찢어 죽여버려! 저 개 같은 부랑자 년!” “여, 열어! 문 열라고! 아, 아아아악!” “싸워! 일어나서 싸우라는 말이야! 아, 못 일어나나? 킬킬킬킬!” 네 방향으로 길이 트인 광장은 한창 떠들썩했다. 중앙에는 가로세로 오륙 미터 정도 돼 보이는 사각형 모양의 철창이 세워져 있었고, 주변에는 쉰 명 남짓한 사용자가 고함을 지르고 있다. 귀를 기울이니 태반이 여인을 조롱하거나 상대를 응원하는 소리였다. 가까워질수록 점차 심해지는 비릿한 내음이 코를 자극한다. 마침내 광장에 도착했을 때, 상황은 이미 거의 끝나가는 중이었다. 철창 안쪽에는 늑대처럼 보이는 괴물 두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누군가를 조여가고 있다. 시뻘건 안광과 침을 뚝뚝 떨어트리는 걸 보면 흥분 상태가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안쪽에는, 몸을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낡은 천 쪼가리만 걸친 여인이 땅에 쓰러져 있었다. 두 다리는 밧줄에 칭칭 감겨 묶였고, 오른손목은 쇠고랑과 함께 밧줄에 걸려 있다. 자유로운 건 머리와 왼팔뿐. 문득 한쪽에 부서져 쪼개진 목검이 눈에 밟혔다. 이 정도로 제한을 걸었다는 소리는 여인도 어느 정도 실력은 있는 모양이다. 이윽고 늑대가 천천히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무척 지쳐 보이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살고 싶은 걸까. 여인은 눈물 맺힌 눈으로 필사적으로 기었다. 벌레처럼 꿈틀거리면서 소리 질렀다. “시, 싫어! 싫어어어! 이건 너무하잖아! 살려줘, 살려달라고!” 비명이 커지자 덩달아 응원도 커졌다. 여인은 있는 힘을 다해 저항했으나 왼팔만으로, 그것도 맨손으로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이내 괴물이 아가리를 쩍 벌리며 여인의 머리를 주둥이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허무하리만치, 힘껏 씹었다. 뿌드드득! “깍…!”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여인의 몸이 세차게 펄떡였다. 주변에 흐르던 소리가 뚝 끊겼다. 괴물이 우물우물 주둥이를 움직일 때마다 핏물 섞인 으스러진 뇌수가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덜덜 떨던 여인의 몸은 점차 간헐적으로 경련하더니 곧 힘없이 축 늘어졌다. 이윽고 광장을 완전히 지나쳤을 즈음, 거대한 함성이 터졌다. “…참 재밌는 투기장이네요.” 고연주는 기어코 한 마디를 던졌다. “투기장이 아니죠. 그냥 일방적인 농락입니다.” “하기야, 저도 일본의 이지메 방송이 생각나더라고요.” 그렇게 말한 고연주는 살그머니 뒤를 돌아봤다. “수현. 그거 알아요? 서 대륙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상이라는 거.” “누가 그럽니까?” “사라한테 들었어요. 거기가 더 심하기는 하지만….” “…….” 고연주의 음성은 담담했다. 그러나 낯빛은 썩 탐탁잖은 빛이 조금이나마 드러나 있었다. 이 거리를 걸으며 모종의 기분을 느끼는 걸까? 나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 왜냐면 이런 전투는 그나마 깔끔하게 죽기라도 하니까. 사실 오늘 밤의 거리는 생각한 것보다 상당히 약한 수준이다. 일 회차 때 겪은 밤의 거리 중 가장 심한 기억은, ‘Endure’라는 이름의 경기였다. 여인을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강제로 발정시킨 괴물을 수십, 수백 마리 풀어 섹스 배틀을 벌이는 것이다. 끝까지 살아만 있으면 여인의 승리지만, 이기는 건 당연히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대부분 잔뜩 흥분한 괴물에게 목숨을 잃었고, 쏟아 붓는 정액을 견디지 못해 배가 터져 죽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반다희가 포로로 잡히고 나서 그렇게 죽었던가? 뭐, 아직 그 정도로 타락하지 않았다는 방증이겠지.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다음 거리로 이동했다. 여섯 번째 거리는 그 어느 길보다 조용했다. 사용자 수는 확실히 줄어들어 한산하기 그지없고, 간간이 두런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길거리에는 여태껏 지나온 곳보다 가장 심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어머?” 그때였다. 이제 곧 도착한다는 생각을 할 즈음, 고연주가 약한 소리를 냈다. 왜 그러나 싶어 앞을 바라보자 너덧 명의 사용자가 보였다. 주변에는 사람 키만 한 장대 하나가 땅에 박혀 있고, 진열대 위에는 검은 봉투 같은 것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자세히 보니, 장대에 한 사용자가 양손이 묶인 채 끝에 매달려 있었다. 흡사 푸줏간에 주렁주렁 걸린 고기를 보는 듯했다. 아직 몸 성히 살아 있었지만, 두 눈은 초점을 잃고 흐릿하게 풀려 있다. 아마 약을 먹였겠지. “다른 데로 갈 줄 알았는데, 잡혔나 보네?” “예?” “아니, 아무것도 아녜요. 어서 가요.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 이번에는 고연주가 나를 잡고 이끌었다. “그냥 좀 달라니까…. 쓸 데가 있으니까 이러는 거 아닌가….” “아 말했잖수…. 살려서는 반출 못 한다고…. 못 믿겠다는 것이 아니라, 원래 법칙이 그래요…. 알만한 분이 이래….” “정 그러면 저기 봉투나 좀 집어가시던가. 내 싸게 드릴 테니….” “저건 양놈들이잖아. 내가 원하는 건 북 대륙 사용자라고….” 지나치는 와중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문제라도 있는 걸까? “나도 어지간하면 원하는 대로 해드리고 싶은데, 얘는 안 돼요. 양놈들이야 합법적으로 노예로 부릴 수 있다지만….” “언제 노예로 부리겠다고 말이나 했나? 싱싱하게 데려가는 게 더….” “내가 불안해서 그래요, 내가. 생각해보슈. 이제 갓 수료한 애를 잡았다는 말이 새어나가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요? 그때는 장사 접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죽는다고!” “거참, 이 사람….” “자자, 그러지 마시고. 어차피 실험 재료로 쓸 거 아뇨. 내 최대한 신경 써 토막 쳐 드리리다.” “에이, 그럼….” 걸음에 속도를 붙일수록 소리도 빠르게 멀어졌다. 우리는 침묵을 지키며 거리를 통과했고, 약 10분 후 양 갈래로 갈라지는 길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나는 조용히 걸음을 멈추고 좌우를 살폈다. 왼쪽은 서서히 길이 좁아지는 형태로, 어딘가의 입구로 들어가는 길을 보는 듯했다. 꼭 뭘 은밀하게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반대로 오른쪽은 드문드문 건물이 보였고, 길도 제대로 트여 있었다. 그러나 사용자는 한 명도 보이지 않고, 오직 고요한 정적과 어둠만 흐르고 있다. 여기는 몹시 위험한 공기가 흐른다. 마치 이대로 들어가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것 같은…. “그래서, 어떻습니까?” “네?”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는지 고연주는 흠칫 상념에서 깬 얼굴로 반문했다. “한때 이 거리에 군림했던 여왕의 평가를 듣고 싶은데요.” “…킥.” 고연주는 싱겁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다 옛말이죠. 그리고 구 북 대륙 밤의 거리는 이만큼 크지도 않았네요.” 그러더니 흘긋 눈을 치켜 나를 흘겼다. “그것보다는, 현재 군림하는 왕의 의견을 듣고 싶은데요?” “예? 저 말입니까? 저는 별로….” “왜요? 제가 물러났으니 현재는 아마 살문이 장악하고 있겠죠. 그런데 살문은 누구만 보면 벌벌 떨던데…?” “…신 코란 연합을 무시하는군요.” “그들은 관리자일 뿐,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군림할 수는 없어요. 그리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누구 한 마디면 이 밤의 거리도 당장 접어야 하지 않나요?” “…….” 그런가? 나는 어깨를 으쓱인 후 걸음을 돌렸다. 오른쪽이 아닌, 왼쪽으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금씩 좁아지던 거리는 어느새 서너 명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협소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길의 끝으로 이제껏 지나쳐온 어느 건물보다 커다란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건물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지 모른다. 외관이 검은색 장막으로 빈틈없이 둘러쳐져 있었으니까. 어쨌든 저곳이 목적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들어가는 통로에는 천막의 입구처럼 휘장이 처져 있었고, 앞에는 두 명의 사용자가 경호원처럼 서 있다. 우리를 보자마자 서로 한 번 쳐다보더니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손님. 죄송하지만 로브는….” 한 사내가 말을 꺼낸 찰나, 옆의 여인이 가만히 팔을 뻗어 제지했다. 여인은 잠시 고연주를 지그시 응시하고는 나를 보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니요. 그나저나 조금 늦은 것 같은데요.” “전혀 아니에요. 이제 곧 시작하니 마침 딱 맞춰 오셨네요.” “다행이군요.” 그러자 영업용 미소를 지은 여인은 손으로 어두운 입구를 가리켰다. “그럼, 여기서부터는 제가 직접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머리를 끄덕이자 여인은 몸을 돌려 사뿐사뿐 안으로 자취를 감췄다. 나와 고연주도 차분한 걸음으로 따라 들어갔다. 베일에 싸인 일곱 번째 거리, 이제 곧 ‘금(金)의 전쟁’이 벌어질 경매장으로. 0836 / 0933 ---------------------------------------------- The Town At Night. 건물 내부는 확실히 특이했다. 아니, 건물이 아니라 위장 구조물이라는 생각이 맞았다. 안에는 로비나 라운지 등 넓은 공간은커녕, 사방을 시커먼 천으로 가려놨다. 보이는 거라고는 직선으로 트인 어두컴컴한 통로뿐이었다. 문지기의 안내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길이 서서히 아래로 기울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즈음, 문득 눈앞에 접수대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어깨를 훤히 노출한, 살짝 야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오른손을 가슴에 대며 허리를 숙이고는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그나저나 기다리고 있었다고…. “곧 경매가 시작될 예정이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괜찮으신가요?” “그러시죠.” “우선, 오늘 경매는 블라인드 형식으로 진행되고요. 올라오는 경매 물품 리스트는 총 열 개입니다.” “예.” “그럼 자리를 드려야 하는데…. 저희는 귀빈석과 일반석으로 구분해서 운영하거든요. 아, 자릿값을 새로 내셔야 하는 건 알고 계시죠?” “물론입니다.” 나는 미리 꺼내둔 보석 하나를 튕겼다. 맵시 있는 손놀림으로 잡아챈 여인은 이모저모 살펴보더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우와, 예쁜 묘안석(猫眼石)이네요. 일반석으로 받기에는 과하고, 귀빈석으로 계산하면 딱 맞아떨어지겠어요.” “귀빈석으로.” “감사합니다! 그럼 이 층 왼쪽에서 제일 끝, 자리로 드리겠습니다. 지금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왼쪽 제일 끝…. 알겠습니다.” 미세한 차이였으나 ‘끝’이라고 말할 때 툭 끊어 말했다. 이걸 못 알아들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이윽고 접수대가 반으로 갈라지더니 여인이 옆으로 살그머니 비켜섰다. 그 뒤에는 직경 이 미터 가량의 네모난 구멍이 통로 바닥에 뚫려 있고,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오호, 지하에서 경매장을 운영하는 건가. “참석에 감사드리며, 부디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의례적인 인사를 들으며 차분히 접수대 안으로 들어섰다. 이내 계단을 내려가기 직전, 문득 고요한 음성이 귓가에 흘렀다. “…잊지 말아 주세요. 왼쪽에서 제일 끝자리입니다. 뭐, 보시면 아실 거예요. 후후.” 알아, 알아들었다고. 머리를 끄덕거리며 계단을 내리밟았다. 물론, 귀빈석으로 들어가는 건 나 혼자였다. “응? 저, 안 들어가시나요?” “저는 일반석으로 주실래요?” “…네?” “일반석으로 달라고요. 최대한 구석진 곳으로요. 아! 그리고 방금 저랑 그이랑 같이 묶어서 계산하신 것 같은데, 그 묘안석 약 육백 금화는 하거든요. 딱 맞아떨어진다고 하셨으니 귀빈석 자릿값은 개당 삼백 금화라는 소리고. 그럼 남은 삼백 금화 중 일반석 자릿값을 빼고 남은 건 도로 주셔야겠네?” “소, 손님?” “미안해요. 그냥 웬만하면 팁으로 주려고 했는데, 내 남자한테 살살 꼬리 치는 꼬락서니 보니까 속이 좀 상해서. 같은 여자니까, 내 기분 이해하죠?” 나는 속으로 웃었다. * 지하 경매장은 극장과 흡사한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아니, 현대의 영화 상영관이라고 해야 하나. 일 층에는 붉은 커튼으로 가려진 타원형의 무대와, 약 오십 미터 떨어진 지점에 백여 개는 돼 보이는 일반석이 십 열로 가지런히 배치돼 있다. 객석은 거의 절반 가까이 채워져 있었다.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들은 대로 왼쪽에서 가장 끝 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귀빈석과 일반석의 차이는 크지 않다. 우선 층이 나뉘어 있으며, 훤히 개방된 객석과는 다르게 좌우, 후방으로 칸막이가 처져 있다. 그 외에도 요청하면 여러 편의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크게 보면 이 정도가 전부였다. 비행기로 생각해보면 퍼스트와 이코노미 클래스의 차이랄까. 칸막이 안에는 예상대로 여러 편의 시설이 비치돼 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호출석이나, 입찰할 때 필요한 통신 수정도 보였다. 침대 소파는 약간 높아 보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아래가 훤히 보이겠지. 그러나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게 아니다. 소파에 앉기 전, 나는 몸을 푸는 척하며 곳곳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러나 천장, 바닥, 구석진 곳 등등 여러 곳을 살폈지만, 딱히 이상한 건 발견하지 못했다. 하기야 이 장소에 참가했다는 건 나름 한 가락 하는 놈일 테니 허투루 일을 처리하지는 않았을 터. ‘화정.’ - 응? ‘혹시 이 주변으로 이질감 좀 느껴지지 않아?’ - 이질감? 무슨 이질감? ‘예를 들어 미세한 마력의 흐름이라거나.’ - 그거야 아래에 엄청나게…. ‘아래 말고. 지금 내가 있는 공간을 기준으로 사방 이 미터 안에서.’ - 음~. 너를 제외하면 여섯 개 정도 느껴지는데? 인간의 마력이라 보기에는 어렵고…. 그건 갑자기 왜 물어? 왜 묻기는. 오늘의 성패는 ‘얼마나 의심하지 않게 하느냐.’ 에 달려 있거든. 내가 이곳저곳 살피는 모습을 보이면 여러모로 좋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니. 속으로 중얼거리자 화정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말 좀 똑바로 하라고 잔소리했다. 아무튼, 여섯 개라. ‘생각보다 많군.’ 그때였다. 천연히 통신용 수정을 집은 찰나, 불현듯 장내의 불빛이 꺼졌다. 갑작스레 시야가 캄캄해졌다. 그러나 어두워진 것도 잠시. 곧 사르르, 사르르 커튼이 빠르게 걷히는 소리가 들리며 천장의 등이 무대를 집중적으로 비췄다. 이윽고 고요한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갑자기 시끄러운 소음이 귀를 긁었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잠시 후, 무언가 구르는 소리가 뚝 멎음과 함께 아까 접수대에서 봤던 여인이 무대 오른쪽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얼굴이 딱딱히 굳어 있었으나, 곧 살며시 풀고는 예쁘게 미소 짓는다. 왼쪽 귀에는 작은 통신 수정를 헤드폰처럼 걸었고, 오른손에는 새하얀 천으로 덮어둔 수동 카트 같은 것을 끌고 나왔다. 이제 시작인가.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우선은 오늘 이 장소를 찾아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나는 안력을 한껏 높이며 침대 소파에 털썩 누웠다. 그리고 금화를 튕겼다가 받기를 반복하며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보자, 오늘 총 열 개가 나온다 그랬나. 자금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킥.” 뭐, 굳이 다 쓸 필요는 없겠지. 그럼, 어디 한 번 시작해볼까? 나는 입에 살짝 침을 적셨다. * “…인사가 길었네요. 심심한 사죄의 말씀을 드리며, 이제 경매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외침과 동시에 수동 카트에 덮인 흰색 천이 활짝 젖혀졌다. 삽시간에 수십 쌍의 눈초리가 꽂혔으나 여인은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 시선들이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까. 여하튼 비로소 첫선을 보인 첫 물품은 십오 센티미터쯤 돼 보이는, 중앙에 굵직한 보석이 박힌 십자 모양의 아름다운 기념품이었다. 꽤 오래전에 만들어진 듯 전체적으로 투색(渝色)한 빛깔을 띠고 있었지만, 장인이 정성스레 세공했는지 외려 고풍스러운 기운이 감돌았다. “어라, 이건 예쁜 십자가네요?” 여인이 토끼 눈을 뜨며 과장해서 놀란 척을 했다. “흠~. 겉보기에는 예쁘지만, 그래도 실속이 중요하겠죠? 효능은…. 아, 말할 뻔했네. …사실은! 이건 일급비밀인데요. 저도 경매 물품의 자세한 효능은 모른답니다?” 희롱하듯이 말한 여인은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흥을 돋우려고 해도 반응은 아주, 매우 싸늘하다. 간혹 ‘흠. 여기 진행자는, 혹시 미친년만 뽑는 건가?’나 ‘왜요. 나름 귀여운데요.’ 라는 말 등이 오고 갔으나, 경매에 참가한 사용자 대다수는 조금도 관심 없다는 양 오직 물품만 주시한다. 물론 이렇게 눈이 빠지라 집중하는 이유는 있다. 원래는 입찰자 전원이 동시에 가격을 공개하고,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한 사람이 물품을 낙찰받는 형식을 블라인드 경매라 일컫는다. 그러나 밤의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블라인드 경매는 총 네 가지 원칙에 따라 진행된다. 1. 가격은 공개하나, 동시 공개가 아닌, 기존의 경매 방식을 따라간다. 2. 어느 물품이든 시작 가(價)를 설정하지 않는다. 3. 물품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4. 단, 경매가 끝나기 전까지 구즈 어프레이즐(관련 마법 포함)은 공개하지 않고, 사용할 수도 없다. 이렇기는 하나, 그래도 복불복(福不福)으로 볼 수는 없다. 왜냐면 블라인드 경매에는 어느 정도 성능이 보장된 것들을 올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일종의 안전장치라고 해야 하나. 말인즉 운만 좋으면 좋은 물건을 비교적 싼 값에 살 수 있다. 반대로 경쟁이 과열될 시에는 수십 배나 비싼 가격을 치르는 경우도 생긴다. 결국에는 이러나저러나 믿을 건 사용자 개인의 눈썰미뿐이었다. 그때였다. 객석을 바라보던 여인이 통신 수정에 가만히 손을 얹더니 돌연 빙긋 웃었다. “네~. 오백 금화로 시작합니다.” “아, 바로 일천 금화로 올랐네요? 오백 금화 님! 열 받지 않아요? 이대로 질 거예요?” “헐~. 말하기가 무섭게 일천오백 금화 나왔습니다. 근데 방금 어느 언니예요? 목소리 질투 날 정도로 좋으시네.” “오, 삼천 금화? 정말요? 정말이죠? 사랑해요!” 삼천 금화. 분명 적은 금액은 아니다. 그러나 이 경매의 고객층이 호기심에 참가한 개인이 아닌, 최소 중견 클랜 이상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금액은 서서히 올라가 어느새 육천 금화마저 넘겼다. 가격이 높아질수록 지하 경매장이 조금씩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참가한 인원 대부분이 안력을 최대한으로 높여 물품을 분석한다. 물론 그렇다고 전원이 경매에 집중하는 건 아니었다. 와중에 예닐곱 명 정도는 경매가 아닌 다른 곳에 신경을 쏟고 있었다. 언뜻 보면 경매를 보는 척하고는 있어도, 눈동자는 아래를 흘깃거리고 있다. 정확히는, 품속에 은은한 빛을 뿌리는 수정을 숨기고 몰래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그러는 동안 첫 번째 물품은 어느새 육천이백 금화까지 올라가 낙찰이 이루어졌다. “육천이백 금화! 오늘 마수걸이 장난 아닌데요?” “…네? 뭐라고요?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고요? 방금 누구야!” “농담~. 반말 죄송합니다.” “자, 그럼 이 기세를 몰아 바로 두 번째 물품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블라인드 경매 초반은 순탄하게 이어졌다. 두 번째로 나온 보랏빛 물약은 사천오백 금화에 낙찰됐지만, 세 번째 물품인 검붉은 빛을 번쩍이는 화살 일백 개는 무려 일만 이천 금화에 낙찰되는 기염(氣焰)을 토했다. 오늘 장(場)이 좋다며 호들갑을 떨던 여인은, 겉 드레스를 훌렁 벗어젖히는 서비스를 보인 후(여전히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듯 달려가 네 번째 수동 카트를 끌고 나왔다. “언니 오빠들~.” 애교를 듬뿍 섞어 말한 여인은, “얏!” 앙증맞은 기합과 함께 힘차게 천을 젖혔다. “이번에는…. 어머?” 그리고 바로 말을 잇는가 싶더니 갑자기 탄성을 지르며 눈을 깜빡였다. 멍하니 입을 벌린 여인의 두 눈동자에 강한 이채가 스쳤다. “어…………. 이건?” 느릿하게 손을 뻗던 여인은 순간 흠칫 행동을 멈췄다. 참가자의 특별 요청이 없는 이상, 물품에 멋대로 손을 대는 건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그때, 객석 곳곳에서 미세한 움찔거림이 움트기 시작했다. 무대와 아래를 번갈아 보기 바쁘던 몇몇 사용자가, 돌연 아래로 시선을 고정했다. 아주 살짝 들춘 품속에서는 통신 수정구가 은은한 빛을 뿜고 있다. 그 안으로 보이는 장면에는, 이제껏 가만히 누워만 있던 사내가 느긋하게 몸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그리고 오른손에 쥔 수정구를 입가로 가져간다. 그 순간이었다. “아…!” ============================ 작품 후기 ============================ Hallowin / 인어 먹는 거 보고 싶었는데. 아…. 그 내용은 적으려다가 안 적었어요. 경매장 바로 전 거리에서 인어를 산 채로…. 음. 아무튼, 그러한 내용을 적으려 했는데, 구상해놓고 보니 도를 넘는 잔인한 묘사가 나올 것 같아서요. 그래도 별로 몇 줄 언급돼지도 않은 내용 기억해주시니 감사하고,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하셨다니 조금 신기하네요. ㅎㅎ 0837 / 0933 ---------------------------------------------- Master Of Performance. “시, 십만 금화.” 여인이 더듬거리며 말을 꺼낸 순간, 수십 쌍의 시선이 순식간에 무대로 쏠렸다. 하얀 천이 젖혀진 수동 카트에는 황금빛을 번쩍이는 도끼가 놓여 있다. 그러나 사용자들은 물품이 아닌 여인을 쳐다보고 있다.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십만 금화로, 시작합니다.” 시선을 느낀 여인은 바로 낯빛을 추스르고 거듭 확언했다. 장난기가 싹 가신 진지한 음성이었다. 그러자 비로소 장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어느 중견 클랜이 십만 금화도 없겠느냐마는, 엄밀히 말하면 적은 돈도 아니다. 설령 구매하려 해도 어떻게든 견제를 최소화하려고 애쓰지, 정말 어지간한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시작부터 십만을 부를 가능성은 0에 수렴하는 것이다. 단, 대형 클랜이 나섰다면 이야기는 180도 달라진다. 그것도 한 도시의 대표 클랜이라면 더더욱. ‘그래. 꼭 물품 하나에만 초점을 맞췄을 리가 없지. 한 번 찔러봐야겠군.’ 그렇게 생각한 사내는 조용히 통신 수정구를 입으로 가져갔다. 일 층, 그것도 구석진 곳에 있는 터라 아무도 사내의 말소리를 듣지 못했다. “시, 십오만 금화! 십오만 금화 나왔습니다!” 잠시 후, 여인의 깜짝 놀란 외침과 함께, - 허? 품속 구슬에서 작은 탄성이 흘렀다. 사내는 재빨리 구슬 내 영상을 응시했다. 태연히 누워 있던 김수현이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켜 팔짱을 끼고 있다. - 흠, 누구지. 한 번 찔러보는 건가? 이십만. “이십오만.” 김수현의 말이 끝난 찰나, 사내는 연이어 입찰했다. “이십만! 아니, 바로 이십오만 금화입니다!” 여인의 목소리가 점차 고조된다. 김수현도 서서히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 허 참, 어떻게 된 거지. - 저건 삼십만 이상은 좀 그렇지 않으려나…. 그 순간 사내의 머리가 번쩍 들렸다. 참가자 대부분이 새 입찰가를 떠드는 여인을 바라보고 있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정확히 다섯 명. 아니, 사내를 포함해 총 여섯 명의 사용자가 남몰래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사내도, 다른 다섯 명도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 으음. 싸게 사는 건 물 건너갔고, 진행자님? 이십육만으로 올리죠. “네, 이십육만…! 아니, 이십구만 오천! 이십구만 오천 금화까지 나왔습니다!” 또 한 번 금액이 거듭 상승했다. 허나 이번 입찰의 주인공은 구석 자리에 앉은 사내가 아니었다. 아마도 아까 두리번거리던 다섯 명 중 한 명이 말한 것이리라. ‘삼십만’에서 오천 금화만 적게 올린 걸 보면 거의 확실하다. “더, 더 없나요…? 이걸로 끝낼까요?” 여인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중이었다. 한껏 상기된 얼굴로 고개만 휙휙 돌리더니 종래에는 떨리는 목소리로 낙찰을 선언했다. 동시에 사내는 살그머니 웃었다. ‘머셔너리 클랜이 경매에 올라올 물품을 선점하려 판매자와 물밑 접촉을 했다.’ 라는 말을 들은 건, 거의 우연이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두 개. 우선 물밑 접촉을 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신 코란 연합이 머셔너리의 청탁을 들어줬을 가능성이 높다. 하나 더 있다. 머셔너리가 어떤 클랜인가. 근 몇 년간, 유적이라는 유적은 모조리 쓸어 담은 곳이 아닌가. 그런 클랜에서 가지려고 안달하는 성과라면 필시 보통의 물품은 아닐 터. 그렇게 생각한 모(某) 클랜의 수뇌부는 사내를 블라인드 경매에 참가시켰다. 아마 다른 다섯 명의 사정도 대체로 비슷할 것이다. 상황은 아직 머셔너리 클랜이 유리하다. 어쨌든 경매는 돈 많은 놈이 장땡이거니와, 정보가 부족하기도 했다. 머셔너리가 어떤 물품을 노리는지 정확히 아는 건 아니니까. 또한, 이건 그렇다손 쳐도, 무엇보다 가용할 수 있는 자금이 몹시 불리하다. 머셔너리는 애초 자금이 풍부한 곳으로 알려졌으며, 대표 클랜이 된 이후 더욱 넉넉해졌다. 즉 정면으로 붙으면 승산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서, 암묵적인 동맹을 맺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예상에 불과하나, 거의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었다. 예로 방금 황금 도끼의 경우, 장비 성능만 보장된다면 누구든 적절한 가격을 지급할 용의는 얼마든지 있다. 그럼 ‘저 도끼의 성능은 어떨까?’ 혹은 ‘얼마의 가격이 적당할까?’ 가 관건이다. 그런데 머셔너리의 산하 클랜이자, 주최 측인 신 코란 연합이 협력하는 김수현이 입찰했다는 것만으로도 투자할 가치는 충분하지 않겠는가. 특히 자금을 많이 가져오지 못한 작전 세력이라면, 보다 확실한 떡고물이라도 가져가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른 작전 세력도 이득이라 볼 수 있다. 머셔너리가 진짜 노리는 물품이 나올 때까지 최대한 자금을 아낄 수 있으니까. 일대일은 상대도 안 되지만, 육대일이라면 해볼 만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손을 맞잡았다. - 쩝…. 뭐, 어쩔 수 없나. 그냥 돈 아꼈다고 생각해야겠군. 혼잣말을 들은 순간 사내의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구슬이 보여주는 김수현은 너무 아쉽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는 중이었다. ‘돈 아꼈다고 생각한다고….’ 김수현의 반응을 빠짐없이 관찰하던 사내는, 드르륵 수동 카트를 끌고 나오는 소리에 언뜻 정신을 차렸다. “바로 다섯 번째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여인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천을 힘껏 걷어 젖혔다. 이번 물품은 오색찬란한 빛깔을 뿌리는 예쁜 귀걸이 한 쌍이었다. 그때였다. - 오, 벌써 다섯 번째인가? 그렇게 말한 김수현은 돌연 품속에서 기록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두어 번 머리를 끄덕이고는 바로 입을 열었다. - 으음. 저건…. 일단 십오만. “시~작! 십오만 나왔습니다!” 물품이 공개된 지 몇 초도 지나지 않았는데, 김수현이 또다시 바로 입찰했다. 상세하게 관찰한 후 조심스레 입찰했다면 모를까. 맨눈으로밖에 볼 수 없는 블라인드 경매의 특성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 가지 경우만 제외한다면. ‘후, 좋아….’ 점차 추측이 확신으로 변하자 사내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잠시 후. “이십만! 이십오만 나왔어요!” “앗, 바로 삼십만 금화!” “아~! 지지 않아요! 사십만 금화!” “네? 사, 사십이만이요?!” 몇 번의 가격 경쟁이 이어진 끝에, 귀걸이는 사십이만 금화에 최종 낙찰됐다. 낙찰자는 김수현이 아닌 일 층의 누군가. 역시나 작전 세력 중 한 명이었다. - ……. 어느새 김수현의 반응은 처음과 180도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누워 있지도 않고, 벌떡 몸을 일으켜 무대를 주시하고 있다. 태도는 담담해 보이나, 낯빛은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사내는 초 단위로 품속의 구슬을 체크하며 무대를 바라봤다. 어느새 여섯 번째 수동 카트가 나와 있었다. 여세를 몰아가려는지 곧바로 천이 흘러내렸다. 이번에 나온 물품도 장신구로, 블랙 다이아몬드에 얇은 칠흑 빛깔 사슬이 이어진 우아한 목걸이였다. “…에, 갑자기 조용해지셨네요?” 그러나 공개한 지 일 분이 흘러도 입찰자가 나타나지 않자 여인이 어색하게 웃었다. - …십만, 아니 아니. 으음. 육만. 그러한 찰나, 김수현이 중간에 한 번 가격을 정정하며 입찰했다. 조금 전까지 여유롭던 태도는 갑자기 상당히 조심스러워졌다. 두 눈이 실처럼 가늘어진 게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역시, 알아차렸나.’ 사내는 빙긋 웃으며 서너 번 머리를 느릿하게 흔들었다. 이번에는 입찰하지 말자는 신호였다. 하기야 두 번이나 낙찰에 실패했는데 계속 같은 태도만 보였다면, 외려 이상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어쩌면 함정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머셔너리 로드 정도의 사용자라면 직감으로나마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알아차렸을 테니까. ‘미안하지만 당신 반응은 계속 보고 있거든. 아마 꽤 혼란스러울걸?’ 그렇게 생각한 사내는 태연히 경매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결국에는 더 이상 입찰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목걸이는 육만 금화에 김수현이 가져갔다. - …쯧.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그리 기쁜 표정은 아니었다. 원하는 물품을 얻었다면 응당 좋아할 법도 한데, 연신 머리를 갸웃하는 것이 생각대로 일이 안 풀린다는 빛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러는 동안, 어느 틈에 새 수동 카트가 세워졌다. 일곱 번째로 공개된 물품은 작고 둥근 자줏빛 환(丸)이었다. 고급스러운 천에 싸여 기이한 기운을 뿌리는 것이, 척 봐도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다. 특히 환은 하나가 아니라 무려 네 개였다. 장내에 순간 긴장감이 돌았다. 왜냐면 환이라는 물품 자체가 영약과 연관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저 네 환이 전부 ‘능력치 상승’과 관련한 영약이라면, 머셔너리에서 갖고 싶어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아니, 사용자든 클랜이든 누구라도 환장할 물품이다. - ……. 김수현은 조용히 침묵하는 중이었다. 통신 수정구를 꽉 쥔 채 담담한 얼굴로 무대를 바라본다. 형형한 빛을 내는 눈동자는 한 군데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은근히 일 층 객석을 둘러본다. ‘우리를 찾으려는 건가.’ “네! 일만 금화로 시작합니다!” 누군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살그머니 입찰을 걸었다. 사실상 반응을 보려는 찔러보기였다. 현재 경매 진행의 척도를 반응 하나에 의지할 수 없는 만큼, 사내는 뚫어지라 구슬에 집중했다. 김수현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으나 왼손을 자꾸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사내는 그 광경을 놓치지 않았다. “이만 금화!” “삼만 금화!” “사만 금화!” “오만 금화!” 가격은 빠르게 올라갔으나 이것 또한 일종의 척이었다. 김수현이 가만히 있으니 작전 세력도 안전하게 나갈 수밖에 없다. 그러한 찰나, 비로소 김수현이 입찰을 시도했다. - 오만 오천. 사내도 신속히 수정구를 입가로 붙였다. “육만.” - 육만 오천. “칠만.” - 칠만 오천. 기이한 일이었다. 어느 물품보다 가격이 빠르게 올라가는데 아직(?) 칠만 오천 금화밖에 되지 않는다. “육만, 육만 오천, 칠만, 칠만 오천! 요! 나는 금화를 말하는 무대 위의 나그네…!” 눈을 질끈 감은 여인이 열심히 랩을 하는 가운데, 사내는 살며시 숨을 들이켰다. ‘반응은 자제하는 것 같고, 아마 장기전으로 가시려는 모양인데….’ ‘후후. 그쪽 계획대로 움직여줄 생각은 없소.’ 그리고 입찰가와 함께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오십만!” “…네? 오, 오십만이요?” 그와 동시에, - 뭐라고! 구슬에서도 격한 반응이 터졌다. 김수현이 침대 소파를 박차고 나온 것이다. 입을 쩍 벌린 채 멍한 눈으로 무대를 응시하는 게 굉장히 놀란 얼굴이다. ‘역시, 이거로군.’ 사내가 주먹을 불끈 움켰다. 그러나 방심하지는 않았다. - …일백, 아니! 육십만! 왜냐면 오히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으니까. “칠십만.” “유, 육십만 나…! 아, 아니 칠십만 금화 나왔습니다!” 바드득, 구슬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 젠장, 어떻게 된 거야? 저건 분명…! 영상이 재생하는 김수현은 입을 질근질근 씹으며 초조해 하고 있지만, 사내 또한 목이 바짝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노리는 물품을 알아내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나 아직 끝이 아니다. 이제부터는 순수하게 돈으로만 싸워야 한다. “일, 일백만! 꺄아아악!” 여인이 갑작스레 비명을 질렀다. 일백만을 넘겼다는 사실에 객석도 느닷없이 어수선해졌다. 더욱 놀라운 건, 가격이 계속 올라가는 중이라는 것. 다른 작전 세력도 눈치채고 경쟁에 참가한 것이다. “또, 또! 일백십만! 일백십만 나왔습니다!” “더 없습니까? 더 없어요? 정말로?” “그렇죠! 일백이십만!” “아니이이이이! 일백오십마아아안! 일백오십만 나왔습니다아아아!” 이윽고 사내가 입찰한 일백오십만을 마지막으로 끝없이 치솟던 입찰가도 잠시 멈췄다. 그러나. 간신히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즈음, 무언가를 결심한 듯 김수현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 삼백만. 그 순간, 이번에는 사내가 흠칫했다. “…네, 네?” - 아니, 사백만. 이어지는 음성을 들은 찰나, 시야가 새하얗게 변했다. 망치로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 맞는다면 이럴까. 아니면 거의 다 잡은 사냥감이 홀연히 눈앞에서 사라진다면 이런 기분일까. 사백만 금화. 한순간 가격이 갑절로 뛰었다. 이에 비해 사내가 준비해온 경매 자금은 고작 이백만 금화가 전부였다. “…….” 끝났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사내는 힘없이 구슬을 응시했다. 오연히 서 있는 김수현 또한 썩 좋은 낯빛은 아니었다. 하지만 두 눈은 승리를 확신하듯 결연히 빛나고 있다. 적어도 이것만큼은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 것처럼. ‘저 영약 하나에…. 일백만 금화의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 정말로?’ 자금이 많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상황. 그때였다. 어디선가 느껴지는 눈초리에 사내는 언뜻 눈을 들었다. 아까 눈을 맞춘 사용자 중 서너 명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 이상 가격이 올라가지 않는 걸 보니 이미 가져온 자금이 떨어진 모양. “……?” 그 순간 사내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세 명의 사용자가 자신을 바라보며 은밀하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엄지만 접은 채 남은 손가락 네 개를 폈다가, 살짝 무대를 손가락질하더니, 이어서 서로 한 번씩 가리켰다. 말인즉 무대에 올라온 환은 총 네 개였고, 현재 신호를 주고받는 작전 세력도 총 네 명이다. “아…!” 사내가 이 의미를 알아차리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백만! 현재 사백만입니다! 없나요? 이제 더 없나요?” 사내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삼사백만 금화가 나오기 전, 김수현이 말한 최종 금액은 육십만 금화였다. 그리고 이후에 나온 금액은…. ‘우선 내가 부른 일백오십만은 제외하고. 그전에는 차례대로 일백만, 일백십만, 일백이십만이었던가? 여기서 내가 가진 이백만을 합치면….’ “더 없으면, 일곱 번째 물품은 사백만 금화에 낙찰하는…!” 고민한 시간도, 생각할 틈도 없었다. 계산을 끝낸 순간, 사내는 최후로 구슬을 살폈다. 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김수현을 확인한 순간, “오백삼십만 금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육성으로 힘껏 외쳤다. ============================ 작품 후기 ============================ 라셸티 / 로 작가님 한 가지 여쭤볼게 있는데요. 이전 화에 갓 수료한 사용자 대체 왜 저기에 잡혀서 장기 적출되기 직전 상태로 매달려 있는 건가요? EndOfChaos / 갓 수료한 사용자가 잡힌 건 마법사들이나 연금술사들 실험 재료로 쓰여지려고 납치당한 거 같은데…. 이건 EndOfChaos 님이 설명을 잘해주셨네요…. 조금 덧붙여서 말씀드리면, 저 여인은 원래 머셔너리 아카데미로 들어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수료 후, 고연주에게 오퍼를 받지 못한 통과의례 동료들도 같이 데려가 달라고, 그러지 않으면 따라가지 않겠다고 말했다가, 그대로 버려졌습니다.(여기까지는 예전 내용에 나와 있습니다.) 그 이후로 모종의 세력에 속아넘어가 붙잡히게 된 것이지요. 이제 갓 수료한 병아리만큼 좋은 먹잇감도 드무니까요. 여담으로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예전에 ‘저주술사’ 강태욱이라는 사용자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김수현은 강태욱을 보고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강태욱을 흘끗 살폈다. 과거 나와 강태욱은 어느 정도의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물론 아주 친하다고 보기는 어렵고, 한때 '부랑자 사냥꾼'으로 함께 활동했다. 그 당시, 포로로 잡은 부랑자로 생체 실험이나 이종 교배를 진행하는 등, 굉장히 잔혹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0838 / 0933 ---------------------------------------------- Master Of Performance. 쾅! 사내가 입찰한 순간 거센 소음이 장내를 울렸다. 삽시간에 객석이 어수선해졌다. 몇 명은 깜짝 놀란 얼굴로 이 층을 돌아보기도 했다. 사내는 천천히 숨을 흘리며 구슬을 흘끗거렸다. 김수현의 안면은 경악과 분노로 일그러졌고, 움켜쥔 주먹은 호출석을 내리찍었다. 이윽고 관리자로 보이는 이들이 황급히 달려오는 장면이 잡혔다. - 스톱을 요청합니다. 삼십 분, 아니 이십 분이면 됩니다. 같은 도시 아닙니까? 연락하면 바로 가져올 겁니다. - 머셔너리 로드. 그건 중단 사유가…. - 아니, 돈이 없는 게 아니라. - 경매장에 들어오신 이상 가져오신 자금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서로 실랑이를 하는 광경을 보며 사내는 빙긋 웃었다. 다른 세 명도 구슬을 봤는지 만면에 득의의 미소를 띠고 있다. 그중 한 명이 몰래 신호를 보냈다. 사내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아직 경매가 끝난 건 아니었으니. “오백삼십만! 진행 안 할 거요?” “아…!” 여인이 탄성 비스름한 신음을 질렀다. 한껏 당황한 얼굴로 이 층을 흘깃거리는 게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사내가 거듭 재촉하자 결국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낙찰을 선언했다. “오, 오백삼십만 금화로…. 하겠습니다….” 그제야 사내는 의자에 편히 기댈 수 있었다. 팔걸이에 비치된 잔을 잡으며 살그머니 웃었다. 한순간 벼랑 끝으로 몰리나 싶었는데 막판에 역전에 성공했다. 작전 세력이 이례적으로 힘을 합친 결과 머셔너리라는 거함을 무너트린 것이다. 잔에 담긴 액체는 약간 밍밍했으나 바싹 마른 목을 부드럽게 적셔주는 것이 몹시 달게 느껴졌다. 남은 물품은 무척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여덟 번째 물품인 깃털 같은 풍성한 무녀 의상은 삼천오백 금화로, 아홉 번째 물품인 세련된 칠흑색 부츠는 이천팔백 금화로 각각 낙찰됐다. 작전 세력은 가져온 자금을 깡그리 소모했고, 개인으로 참여한 사용자들은 눈치를 보며 침묵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방금 어떤 일이 있었는지 깨달았을 터.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최소 십만 단위로 이루어지는 금의 전쟁에 참여하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마지막 열 번째 물품으로 환이 한 번 더 나오기는 했다. 작고 둥글지만 은은한 기운이 흐르는 신비로운 흰색의 환이었다. 사내는 혹시나 싶어 구슬을 살폈으나 이내 안심할 수 있었다. 김수현은 분노한 얼굴로 이를 갈고만 있을 뿐 끝끝내 입찰하지 않았다. 작전 세력이 잠잠하니 개인 참가자들도 지레짐작으로 관심을 두지 않았고, 결국에는 첫 입찰가인 오백 금화에 낙찰됐다. 그리하여 치열했던 블라인드 경매도 마침내 종료를 알렸다. 경매가 끝나자마자 김수현은 돌아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입구를 나섰다. 사내는 비릿하게 웃었다. 어차피 이 바닥이 이런 세상이다. 뭘 하던 필사적인 놈이 살아남는다. 구슬을 통해 반응 보기를 했지만 알아차리지 못한 김수현의 잘못이다. 사실 미안한 감정보다는 머셔너리라는 최고의 클랜을 이겼다는 후련함이 더 컸다. ‘머셔너리 로드. 너무 언짢게 생각 마시오. 우리도 이기기 위해서 최소 운영 자금만 빼고 모조리 끌어왔으니.’ 이렇게 생각한 사내는 콧노래를 부르며 걸음을 놀렸다. 몰래 설치한 구슬도 회수해야 하고, 무엇보다 자줏빛 환의 효능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입찰가를 내고 낙찰 물품을 받는 과정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백삼십만이라는 거금을 건넬 때 손이 약간 떨리기는 했지만, 고급스러운 나무 상자에 담긴 자줏빛 환을 보자 절로 입이 벌어졌다. 주최 측에서는 물품을 건넬 때 서비스로 구즈 어프레이즐을 동봉했다. 사내도 직접 확인하는 편이 마음이 놓이는 터라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그렇게 홀가분한 걸음으로 경매장을 나오니 세 명의 사용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주변으로 모였다. 아까 같이 힘을 합쳤던 이들이다. 사내는 구즈 어프레이즐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먹고 튈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건네기 전에 할 말이 있소만.” “네. 그쪽이 가장 많은 금액을 냈다는 건 알고 있어요. 차액은 차후 보내드리도록 하죠.” 로브를 눌러쓴 여인이 재빠르게 말했다. 알겠으니 어서 구즈 어프레이즐이나 사용하라는 투였다. 사내는 남은 두 명에게도 똑같은 확답을 받은 후 구즈 어프레이즐 사용 준비를 시작했다. 입속으로 주문을 외는 사내를 전원 흥분과 설렘이 섞인 눈길로 응시한다. 모두의 머릿속으로 오만 생각이 스쳤으나 현재 공통된 기대는 아마 이게 아닐까. 왜 머셔너리는 이걸 사백만 이상의 금화를 내고서라도 사려고 한 걸까? 도대체 어느 정도의 효능을 지녔길래? 이윽고 사내의 주문이 끝나는 동시에 구즈 어프레이즐이 빛을 발했다. 텅 빈 기록에 글자가 빼곡하게 채워졌다. 사내는 물론, 세 명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기록을 잡고 침착하게 들여다본다. 잠시 후. “…….” 순간적으로 사내의 얼굴이 망연해졌다. 빠르게 눈을 깜빡이더니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정독한다. 그러나 눈을 부릅떠서 읽는다고 해도 구즈 어프레이즐의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읽어도 똑같다. 이 사실을 인지한 순간 사내는 돌연 눈앞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오백삼십만 금화가 뇌리를 스치는 순간,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거미줄처럼 번지며 힘이 쭉 빠졌다. 결국에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 이게…?” “어때요? 네? 아 빨리 말 좀 해봐요.” “어, 어, 어, 어…?” “가, 갑자기 왜 그래요?” 여인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쳐다보더니 얼른 기록을 낚아챘다. 구즈 어프레이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활성(活性)의 영약』 자칭 홀 플레인 최고의 천재라는 여성 연금술사가 만든 영약입니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함을 한탄해 마력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만들었으나 원래 의도와 살짝 다른 결과물로 나왔습니다. 이렇다고는 해도 실패작은 아닙니다. 복용 시 신체의 감각이 한층 예민해지며 마력 흐름이 0.5배 빨라집니다. 향상된 능력은 열두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활성의 영약. 복용 시 열두 시간 동안 신체 감각이 한층 예민해지고 마력 흐름이 0.5배만큼 상승한다. 일단 영약은 맞다. 드러난 사실을 봐도 썩 나쁜 효능은 아니다. 추적이나 전투를 앞둔 상황에서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으아…?” “뭐, 뭐야 이거? 이거 뭐냐고!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오백삼십만 금화를 낼만한 가치가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글쎄? “으아아아…?” “꺄아아아아아아악!” 많이 쳐줘도 아마 일천 골드 이하로 거래되지 않으려나? * 『마력 상승의 영약』 여러 희귀한 약초를 배합해 조제한 고대의 영약입니다. 유수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비전서는 소실됐으며, 제조에 필요한 약초 중 일부가 멸종해 다시 만드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마력 능력치 95포인트 이하의 사용자(거주민)가 복용한다면 2포인트~4포인트만큼의 능력치 상승을 이룰 수 있습니다. “후후.” 허공에 출력된 설명을 보니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이 정도의 영약을 오백 금화에 사다니. 이 정도 수준이면 부르는 게 값이니 완전히 거저 얻은 것과 진배없다. 오죽하면 수작을 부린 판매자나 헛돈을 쓴 작전 세력에게 미안해질 지경이다. 어쨌든 이로써 비비앙의 고민도 해결된 셈인가? ‘사멸 무저갱’ 원정으로 얻은 마력 영약이 하나 더 있으니 분명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삼 군단은 물론, 이 군단, 아니 어쩌면 일 군단을 소환해 게헨나와 수나를 볼 수 있을지도…. 아, 이건 김칫국인가? 나는 새하얀 영약을 나무 상자에 넣고 소중히 품속에 보관했다. 어떻게든 참으려 애썼으나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온다. 옆을 보니 고연주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면사 안에서 듣기 좋은 허밍(Humming)이 흘러나오며 구즈 어프레이즐을 읽는다. 품에 물품을 한 아름 들고 있는 것이 꼭 쇼핑이라도 마치고 나온 모양새다. “뭘 그렇게 많이 샀습니까?” “응? 아, 선물이요.” 고연주는 보란 듯이 몸을 돌리며 싱글벙글한 목소리를 냈다. 품에는 검붉은 화살 세트와 하얀색의 무녀 의상이 안겨 있었다. “화살은 임한나 주려고요?” “아니요? 걔는 화살 필요 없잖아요. 선유운 씨가 좋아하겠죠.” “흠. 그 옷은요?” “이건 희영이 꺼. 각성 시크릿 클래스를 계승했는데 축하 선물로 줄 거예요.” 고연주의 설명에 머리를 끄덕였다. 하기야 그림자 여왕의 눈썰미도 대단하니 나름 괜찮은 성능을 지녔을 것이다. “아, 영약 구매 축하해요.” “축하는요.” “처음에는 왜 도와달라고 하는지 몰랐는데…. 정말, 수현의 수완은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그 수작 부렸다는 사용자, 내일 대금을 받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지네요.” “밤길에 칼 안 맞으면 다행이겠죠.” 나는 쓰게 웃으며 오른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던 고연주는 문득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그건 뭐예요?” “예?” “오른손에 쥔 거요. 수현도 뭐 산 거 있어요?” “…….” 조금 망설여지기는 했으나 헛기침하며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얇은 칠흑색 사슬로 이어진 블랙 다이아몬드가 요요한 빛을 뿌렸다. “포스커스 아드마스…. 라는 목걸이인데요.” “포스커스 아드마스? 뭐 좋은 능력이라도 붙었나 봐요?” “그게…. 제가 방금 이 보석에 제 마력을 흘렸는데….” “아~. 수현이 쓸 거예요? 성능은 모르겠지만, 남자가 목에 걸기에는 너무 예쁜 것 같은데요? 호호.” “으음. 이 보석은 흡수한 마력을 영구히 보존해주는 것으로….” “응? 네, 네.” “말인즉 보존된 마력이 소멸하는 경우는 딱 하나밖에 없는데…. 그러니까 처음 마력을 흘린 사용자가 사망했을 때만….” “저, 수현? 말 끊어서 미안한데 갑자기 왜 그래요? 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줄게요.” “…네?” 에라 모르겠다. 결국에는 눈을 반대쪽으로 돌리며 목걸이를 내밀고 말았다. 젠장, 왜 갑자기 말이 제대로 안 나오는 거지? “…….” 그렇게 십 초를 기다렸으나 손에 걸린 목걸이 감촉은 사라지지 않았다. 흘끗 눈을 돌리자 어느새 걸음이 멎은 고연주가 보였다. 물론 내 발도 멈춰 있었다. 고연주는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어찌 보면 충격을 추스르는 것처럼 보였다. 왠지 민망한 기분이 들어, 살그머니 다가가 손수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가늘고 고운 목선을 타고 흘러내린 블랙 다이아몬드는 고연주와 아주 잘 어울렸다. 색정적인 분위기에 우아함이 곁들여졌다고 해야 하나. 그러나 고연주는 여전히 미동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면사를 걷어 얼굴을 확인했다. “헉.” 비로소 얼굴을 확인한 순간 깜짝 놀랐다. 고연주는 그야말로 완벽한 얼음 상태였다. 눈동자는 아득해 보이고 입을 벌린 것이 넋이 살짝 나간 듯하다. 이윽고 서로 눈이 마주친 찰나 돌연 고연주의 몸이 스르르 품으로 무너졌다. “고, 고연주?” “…요.” “예?” “…만요.” “뭐라고요?” “자, 잠시만요. 잠시만 이대로 가만히 있어줘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부탁할게요.” 문득 나를 껴안은 양팔이 부드러이 등을 압박했다. 고연주는 내 가슴에 고개를 묻은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호흡이 거칠고 어깨도 떨고 있다. 무언가 쑥스럽다는 기분에 먼 산만 응시했다. 그때였다. “삐에….” 허리 부근에서 진동이 느껴지더니 미약한 울음이 흘렀다. “삐앙삐앙….” 처음에는 무시하려고 했지만, 진동과 소음은 점차 커져만 갔다. “아 진짜.” 고연주도 느낀 걸까. 입을 짓씹으며 살짝 떨어지더니 신경질적으로 허리를 내려다본다. 아래에는 어깨끈으로 건 아기 카오스 미믹이 징징거리는 중이었다. “왜, 왜 또 우는 건데.” “삐무룩….” “정말, 백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인데. 이렇게 방해하면 어떡하니.” “삐아아아….” “어휴, 못살아 정말…. 수현. 솔이 좀 어떻게 해봐요.” “…예?” 나는 떨떠름히 안솔, 아니 아기 카오스 미믹을 받아 들었다. 내 손이 닿자 진동이 한층 심해지며 더욱 크게 울어 젖힌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왜 이러는지 알 도리는 없지만 우선 고연주가 버린 것들을 주워담는 게 좋을 것 같다. “삐, 삐엑?!” 양손으로 세게 움키자 아기 카오스 미믹이 흠칫 떨었다. 입 부분이 꼭 오므려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나는, “삐…………?” 최대한 힘을 빼며 살며시 좌우로 열어젖혔다. “잠깐, 가만히 좀 있어봐.” “?” “옳지…. 착하다….” “?” 무언가 물음표가 눈앞을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았으나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흐트러진 화살을 모아 담고 무녀 의상까지 차곡차곡 접어 넣은 후, 부드러이 입을 닫아주었다. 진동이나 울음은 어느새 상당히 사그라졌다. “이건 제가 들고 가도록 하죠.” “네? 아니 그럴 필요는….” “제가 아빠, 엄마 카오스 미믹을 갖고 있거든요. 부모와 같이 있으니 안정을 찾는 것 같습니다.” “아, 그렇다면야.” 그렇게 말한 고연주는 도로 내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무에 그리 좋은지. 발그스름한 눈동자는 나를 뚫어지라 응시하고, 입가에는 행복해하는 미소가 걸려 있다. 잠시 후. “목걸이…. 고마워요. 평생 간직할 거예요.”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군요.” “근데, 하나 더 부탁해도 될까요?” “뭔데요?” “천천히 걸어줄래요? 최대한 느리게….” “…그럽시다.”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어두운 거리를 거닐었다. 들어올 때는 이삼십 분 정도 걸렸던 것 같은데, 나갈 때는 약 한 시간이 걸렸다. 0839 / 0933 ---------------------------------------------- The First Step Toward Return, Eight. 아틀란타(Atlanta). 북 도시, 해밀 클랜 하우스. “그럼 다녀올게.” “괜찮으시겠어요?” 백진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막 문을 나가려던 김유현이 뒤를 돌아봤다. “뭐가?” “아무리 동생이라도 연락도 없이 찾아가는 건….” “뭐, 상관없지 않을까. 수현이는 화내는 모습도 좋은데.” “클랜 로드. 제발.” 능글맞게 말하던 김유현은 백진하의 표정을 봤는지 싱겁게 웃었다. “진담이고. 일부러 안 하고 가는 거야.” “…일부러 안 하고 가는 거라고요?” “응. 확인하고 싶은 게 있거든.” “정말….” 폭 한숨을 내쉰 백진하는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유현은 로브를 단단히 여민 후 다시 앞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 그리고 그건….” “네. 동서남북, 전부 끝내놨어요. 이제 연락만 넣으면….” “아니. 아직 연락은 하지 마.” “네?” “말했잖아.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할 게 있다고.” “……?” 아까와 똑같은 말에 백진하의 고개가 또 한 번 기울어졌다. 그러나 김유현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앞을 응시하고는 뚜벅뚜벅 걸었다. 그대로 방을 벗어나 삽시간에 자취를 감췄다. * 눈을 뜨자 눈부신 아침 햇살이 방 안을 힘차게 흐르고 있었다. 양팔을 쭉 뻗으며 상반신을 일으키자 어깻죽지가 개운해졌다. 평소보다 몸이 훨씬 가벼운 기분이다. 특히 간밤에 묵은 액을 뽑아낸 하반신에서는 상쾌한 느낌마저 들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침대 시트를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새벽녘까지 조금도 쉬지 않고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눴으면서, 고연주는 벌써 정리하고 나간 듯싶다. “엇차.”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옷을 벗었다. 세안하며 테라스 너머를 바라보니 해는 서서히 중천으로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맑고 조용한, 기분 좋은 아침이다. 무언가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나는 산뜻한 기분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일 층으로 내려가 식당으로 가는 와중 어수선한 소음이 느껴졌다. 통로에는 왁자지껄한 소란과 맛있는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흠. 일찍 일어나는 클랜원은 벌써 아침 먹고 나갔을 테고, 원래 이 시간대는 한산해야 정상인데? 갸웃하며 문을 열고 들어가니 탁자에 삼삼오오 모여 앉은 수십의 클랜원이 보였다. 오늘 무슨 축제라도 있는 건가? “어, 클랜 로드 왔네?” 인기척을 느꼈는지 노노 누님이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의문이 뇌리를 스쳤다. 아니, 어째서 식당의 총 책임자가 나와 있는 거지? 왜 식사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앉아 있는 거야? 이렇게나 식사를 기다리는 인원이 많은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곳곳에서 쏟아지는 인사를 받으며 묻자 해맑은 미소를 짓는다. “응? 아~. 쫓겨났어.” “하하. 쫓겨난 건 아니고요. 고연주 씨가 오늘 아침을 만들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기다리는 중입니다.” 옆에 앉은 상남 형님이 부연하니 사방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으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에헤, 어쨌든 기대돼요. 연주 언니가 만든 음식은 오랜만이라서….” “그럴걸. 오늘 기분도 굉장히 좋아 보이시고. 근래 누님이 그렇게 활짝 웃는 거 처음 봤어.” “맞아.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를 않던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여기저기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어제 목걸이를 선물한 영향인가? 하기야 새벽 때도 예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최상의 서비스를 맛보지 않았는가. 인상 깊은 기교로 내게 극치의 쾌감을 안겨준, 정성스러웠던 유방 성교(Mammary Intercourse)를 회상하며 탁자 사이를 가로질렀다. 마침 김한별이 은근슬쩍 빈 의자를 발로 미는 것이 보여 그 자리에 앉았다. 그러한 찰나, 두어 개의 그림자가 주변에 나타났다. 눈을 돌린 곳에는 담담한 얼굴의 선유운과 우물쭈물 서 있는 차희영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 선유운이 돌연 허리를 깍듯하게 숙였다. 차희영은 흠칫 토끼 눈을 뜨더니 황급히 따라 고개 숙였다. 갑자기 식당이 조용해졌다. 이들이 왜 이러나 곰곰이 생각할 즈음, 불현듯 선유운의 오른손에 들린 통이 눈에 들어왔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통에는 검붉은 화살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그리고 차희영은 풍성하고 새하얀 무녀 의상을 입고 있었다. 그제야 사정을 깨달았다. “화살은 마음에 드나요?”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네요. 하지만 그건 제가 산 게 아니라 고연주가 산 겁니다.” “그림자 여왕님은 클랜 로드 덕분에 살 수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선유운의 음성은 무뚝뚝했으나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괜히 과장해서 호들갑 떠는 것보다는 백 배 나으니까. 나는 싱겁게 웃으며 차희영을 바라봤다. 동시에 제 3의 눈을 활성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차희영(1년 차) 2. 클래스(Class) : 백야(白夜)의 무희(舞姬)(Arousal Secret, Sorcerer, Beginn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S Zero) 5. 진명 • 국적 : 운명에 춤추는 마녀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2) 7. 신장 • 체중 : 167.4cm • 51.3kg 8. 성향 : 수줍음 • 순정(Shyness • Pure Love) [근력 38] [내구 45] [민첩 52] [체력 58] [마력 97] [행운 11]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 업적(0) > < 특수 능력(1/1) > 1. 꺼지지 않는 지혜의 빛(Rank : B Minus) < 잠재 능력(2/4) > 1. 대(對) 마(魔) 주술(呪術)(Rank : F Zero) 2. 기원 악가(祈願 樂歌)(Rank : E Plus) 3. - 4. – < 권능 > 1. 마녀 유희(魔女 遊戲) < 최근 능력치 비교 > 1. (변경 전) [근력 34] [내구 41] [민첩 49] [체력 57] [마력 90] [행운 6](Total : 277 Point) 2. (변경 후) [근력 38] [내구 45] [민첩 52] [체력 58] [마력 97] [행운 11](Total : 301 Point) “허?”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혹시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감았다가 떴으나 눈앞의 수치는 변하지 않았다. 차희영의 마력 능력치가 97포인트로 출력돼 있다. 삼 초 정도 멍하니 보다가 아래 잔여 능력치를 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 보아하니 백야의 무희를 계승한 이후 남은 6포인트를 모조리 마력에 투자한 것 같다. 이래서야 애송이라 생각할 수 없는 사용자 정보가 아닌가. 물론 아직 경험 측면에서는 한참 부족하겠지만. “잘 어울리네요.” “가, 감사…. 합니다….” 웃으며 말하자 차희영은 낯을 잔뜩 붉히며 입속말로 웅얼거렸다. “희영아~. 그러면 안 돼요. 적어도 고맙습니다는 제대로 말해야지.” 그때 어디선가 몹시 너그러운 목소리가 차희영을 꾸짖었다. 주방 쪽에서 들려온 음성이었다. 어느새 문을 열고 나온 고연주는 양손에 커다란 냄비를 든 채 이쪽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다. 정적이 흐르던 식당은 이내 아까처럼 시끄러워졌다. 물씬 흐르는 고소한 냄새가 침샘을 자극한다. 가끔 탁자를 쾅쾅 두드리는 소음도 들리는 것이 배고픈 클랜원이 한두 명이 아닌 듯싶다. 맛있겠다거나, 빨리 달라는 등의 환호 속에서, 고연주는 시종일관 웃는 낯으로 차례대로 음식을 들고 나왔다. 가끔 천연스레 뛰는 걸음으로 나올 때마다 가슴에 얹힌 블랙 다이아몬드가 찰랑거리며 사방으로 광채를 뿌렸다. “우와, 언니! 그 보석 목걸이는 뭐예요? 정말 아름다워요!” “고마워~.” “그러게. 진짜 예쁘다. 어디서 산 거예요?” “사기는. 선물 받은 거야.” “선물이요? 누가 사줬는데요?” “후후. 글쎄?” 고연주는 모호한 빛을 비췄다. 그러면서 쉴 새 없이 손을 놀리더니, 곧 푸짐하게 쌓인 음식 그릇을 들고 걸어오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내가 있는 방향으로. 잠시 후, 고연주는 내 앞으로 살짝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목걸이 고마워요. 쪽.” 속삭이듯 말하는 동시, 볼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 순간이었다. “……!” 갑자기 귀가 먹먹해졌다. 엄청난 함성이 터졌다. 꽥꽥 소리 지르거나 탁자를 쾅쾅 두드리는 등, 전보다 배는 시끄럽고 요란한 소음이 식당을 가득 채웠다. 고연주는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몸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그렇게 사뿐사뿐 걸어가는 뒤태를 하염없이 바라볼 즈음. 시이이잉…. 문득 차디찬 바람이 온몸을 스쳤다. 한두 군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아니었다. “하….” 왼손 약지의 반지를 쳐다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김한별. “후후….” 상냥하게 웃고는 있지만, 실눈으로 노려보는 임한나. 그 외에도 사방에서 한기가 몰아쳤고, 이유정의 “나는? 나느으은?” 이라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내가 대단히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에는 머리를 푹 숙인 채 수저를 들고 말았다. 다음부터 선물을 살 때는, 모두의 것을 같이 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 가시방석 같던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서, 나는 도망치듯이 집무실로 돌아왔다. 혹시 득달같이 쫓아오는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 다들 업무가 있는 것 같아, 크게 안도하며 비비앙을 호출했다. 책상에는 미리 준비한 마력 영약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근래 고민이 많은 것 같던데 이걸 보면 굉장히 기뻐하지 않을까. 어차피 주기로 작정한 거, 나는 호출석을 누른 채 여유롭게 기다렸다. 어쩌면 마지아에 있을지도 모르니 오는 데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뚜벅뚜벅…. 그렇게 생각한 찰나, 예상이 빗나갔다. 문밖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소리가 울렸다. 설마 벌써 도착한 건가? 이상하네. 아까 식당에서는 보지 못한 것 같은데. 똑똑. “클랜 로드. 손님이….” “손님? 들어와.” 달칵, 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커다란 칠흑색 로브를 걸친 훤칠한 키의 사내였다. 누군지는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형?” “그래, 오랜만이다.” 형은 살짝 웃고는 안내인에게 가볍게 머리 숙여 묵례했다. 어떤 연락도 받지 못한, 말 그대로 의외의 방문이다. 잠시 후,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형이 의자를 향해 눈짓했다. “어, 앉아.” “고맙다. 혹시 문전 박대당하는 거 아니냐고 진하가 많이 걱정했거든.” 피식 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형을 유심히 살폈다. 별것 아닌 일이라면 안부나 물으러 왔다면서 싱글싱글 웃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형의 얼굴은 미소는커녕, 잔잔히 가라앉은 빛이 가득했다. 적어도 놀러 온 건 아니구나, 그렇게 직감했다. “그래서, 무슨….” “좋아 보인다?” “……?” “얼굴이 좋아 보인다고. 네가 그렇게 밝아 보이는 거, 되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형의 말에 나는 의미 없이 얼굴을 쓰다듬었다. 혹시 키스 자국을 보고 저러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형은 차분히 머리를 저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칭찬이니까.” “왜 갑자기 그런 말을….” “그게 너다운 것 같으니까.” “나답다고?” “그래.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처음 너를 보고 내가 아는 동생이 맞나 의심했거든. 아, 나중에 얘기를 듣고 이해는 했지만 말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이런 데서 쉬이 꺼낼 얘기는 아니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바로 본론을 요청했다. 형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냥…. 뭐,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응?” “으음…. 뭐라고 해야 하나. 일 회차 이 회차를 떠나, 현재의 너에게? 그러니까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김수현이라는 사용자의 의견을 물어보는 거야. 그런 만큼 정말 가감 없이,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뭔데.” “그전에,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해.” “화 안 낼게. 말해봐.” 바로 약속하자, 형은 잠깐 입을 닫았다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순간, “…수현아.” 느닷없이 음성이 가라앉았다. 형은 나를 지그시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말이다….” 0840 / 0933 ---------------------------------------------- The First Step Toward Return, Eight. “혹시, 여기서 계속 살 생각은 없어?” 말이 나온 순간, “…뭐라고?” 반사적으로 반문하는 동시, 귀를 의심했다. 방금…. 내가 잘못들은 건가? “여기서 계속 살 생각 없느냐고. 집…. 아니, 예전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고, 홀 플레인에 눌러앉을 생각은 없느냐. 이 말이야. 사용자로서 말이지.” 그러나 형은 덤덤히 말을 이었다. 잘못들은 게 아니었다. ‘예전 세상’이라는 말소리가 상당히 거슬린다. 형은 느닷없이 왜 이런 말을 꺼낸 걸까? 도대체 어떤 의도로?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머리가 혼란스럽다. 이러는 와중에도 형은 소름 끼칠 만큼 태연한 얼굴이었다.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것이 내 반응을 관찰하는 것 같기도 하다. “화내지 않는구나.” “갑자기 무슨…. 뭐?” “이 말을 꺼내면 네가 펄쩍 뛸 줄 알았거든. 조금은 욕먹을 각오도 했고. 그런데 의외이기는 하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러자 형이 살며시 두 눈을 치떴다. “나쁠 건 없지 않나?” 그렇지 않으냐는 듯이 말을 잇는다. “나쁠 게 없다고?” “안 그런가? 생각해봐. 나나 너나 지금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 자리도 잡았고. 아니, 자리 잡은 정도가 아니지.” “고작 그것 때문에.” “물론 가족이나 친구가 그리울 수는 있겠지. 하지만 네가 그랬잖아? 내가 너보다 이 년이나 먼저 들어왔음에도 지구의 나는 사라지지 않았다고. 또 제대로 형 노릇도 했다고 하니, 너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최소한 부모님은 모르시겠지.” “형.” “그리고 탁 까놓고 말해서…. 그래, 일이 잘 풀려서 돌아간다고 치자. 그럼 그때 네 처지는 더 심하지 않을까?” “심하다고?” “그렇잖아. 지구에는 또 하나의 네가 있기라도 하지, 여기서는 네가 아예 사라져버리는 건데. 이렇게 말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이제 너는 홑몸도 아니잖아.” 문득, 갑갑한 기분이 들었다. 뱃속의 끓는 기운이 올라오다 명치에 턱 걸린 듯한 느낌. 무어라 말하고 싶은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지위, 재산, 명예, 그리고 인연….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지구로 돌아가겠다…. 감당할 수 있겠어?” “…….” “이것뿐만이 아니지. 지구는 이곳과는 다르게 아주 평화로운 세상인데, 십사 년 넘게 홀 플레인에서 살아온 네가.” “형이.” 결국에는 말을 끊어버렸다. 더 이상 듣다가는 가슴이 퍽 터질 것 같았다. 숨을 크게 들이켰다. 형은 어디 한 번 말해보라는 듯 왼손으로 턱을 괸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형이…. 어떻게 이래.” 말을 꺼낸 찰나, 나를 쳐다보던 두 눈이 잠시 가늘어졌다. “형은 알고 있잖아.” 겨우 말을 이었지만, 목소리는 떨려 나왔다. 아니 시야도, 숨소리도, 내가 인지하는 모든 감각이 공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추스르려 애썼으나 외려 점점 더 심해지는 느낌이다. “그럼 형은, 아니 형이 이러면 안 되잖아. 형만은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잖아.” 그때였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어떤 심정으로 돌아왔는지…!” “내 핑계 대지 마.” 낯설다 생각될 만큼 예리한 음성이 들려온 순간, “내가 너한테 살려달라고, 이렇게 해달라고 했어?” 완전히 말문이 막혔다. 질끈 눈을 감았다. 형은…. ‘혹시 내가 죽으면 다시 살리지는 말아줘.’ ‘왜냐고? 이상하잖아. 죽어도 다시 살리면 된다니. 내 목숨은 그렇게 싸구려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수현아….’ ‘도망쳐…. 너라도 살아남아….’ …그러지 않았다. 떠올린 순간, 돌연 전신에서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동시에 형의 말이 이어졌다. “확실하게 말하는 게 낫겠지. 나는 여기서 살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너를 설득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럼….” “아까도 말했지만 네 진정한 속내를 알고 싶은 거야. 그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는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변했는지.” “그걸 왜 나한테….” 스스로 들어도 잔뜩 쉰 음성. “네가 모든 것을 되돌린 장본인이니까.” 형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말하고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리고 한참을 가만히 있는 것이 내가 어떤 말이라도 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말할 기분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탈력감에 삼켜져 아직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왜냐면…. “…미안하다.” 그때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 느껴졌다. 조금 늦게 눈을 들자 형은 이미 소파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그제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형.” “내일 정오에 공식 발표를 잡아놨다.” 문고리를 잡으며 우뚝, 걸음이 정지했다. “발표?” “이미 말은 맞춰놨어. 중앙은 물론, 동서남북 도시 모두…. 정말 많은 사용자가 모일 거야. 아마도 말이지.” “나는 전혀 듣지 못했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야?” “별것 아닌 일이야. 그리고 계획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그렇게 말한 형은 얼굴을 반쯤 돌려 나를 바라봤다. “중요한 건 너지.” “내가…?” “복잡해 보이는 것 같으니 긴말은 안 하마. 내일 공식 석상에는 당연히 네 자리도 있다. 내일 참가할지 안 할지는 네 자유고.” “안 가도 된다는 거야?” “네가 오면 계획대로 일을 진행할 거고, 아니면 그냥 간단하게 발표하는 걸로 끝낼 거야. 그러니 오늘 대답은 내일 참가 여부로 듣는 걸로 하자. 지금 바로 말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잠깐만.” “그리고 여기서 미리 말할게.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무조건 네 결정을 존중하고 받아들일 생각이다. …이건 진심이야.” “형!” 철컥,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형은 바람처럼 모습을 감췄다. “…….” 나는 한동안 형이 있던 자리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의자에 몸을 묻었다. 머리를 젖혀 천장을 쳐다봤다. 시야에 보이는 상앗빛 문양이 움직이는 것 같기도,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마를 맴도는 강한 현기증에 눈을 감았다.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으나 감은 눈을 뜨지는 않았다. 차분히 호흡을 고르자 머릿속도 조금은 가라앉은 듯했다. 그러나 하나만큼은 아무리 애를 써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뿐만이 아니지. 지구는 이곳과는 다르게 아주 평화로운 세상인데, 십사 년 넘게 홀 플레인에서 살아온 네가….’ 가장 듣기 싫었던 말. 아니, 정말로 듣기 두려웠던 말. 그래서 생각지도 않고 말을 끊었다. 설마 형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야!” 그때 날카로운 외침이 면전을 때렸다. 황급히 눈을 뜨고 고쳐 앉자 눈앞으로 허여멀건 한 것이 가물거렸다. 그제야 누군가 들어왔다는 걸 깨달았다. “뭐야. 왜 불러도 말이 없어? 노크도 몇 번이나 했는데.” 비비앙이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책상 바로 앞에서 투덜거리고 있었다. 세차게 머리를 흔들자 조금이나마 시야의 초점이 돌아왔다. 비비앙은 어디 아프냐는 듯 의아히 눈썹을 치켰다. “호출이 와서 기껏 달려왔더니 팔자 좋게 자고 있네~.” 그러나 곧 흥, 콧소리를 내며 양손에 쥔 것을 책상에 텅 내려놓았다. 축구공 크기만 한 두 주머니에서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이건…?” “금화. 아마 삼백칠십일만 금화 정도 될 거야. 클랜 자금에 보태 써.” “삼백, 뭐? 이걸 어디서 난 거야?” “에, 실은 연구 성과물 중에서 경매장에 올린 게 있거든? 그냥 장난삼아 올린 건데, 이렇게 비싸게 팔릴 줄은 몰랐어.” 비비앙은 아랫입술을 내밀며 어깨를 들먹였다. 경매장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낙찰된 물품의 대금은 칠십 퍼센트 판매자가, 삼십 퍼센트는 주최 측이 가져간다. 즉 비비앙이 말한 액수를 역산해보면 원금은 정확히 오백삼십만 금화가 나온다. “…대단한데.” 헛웃음을 흘리며 칭찬하자 비비앙은 가슴을 쭉 펴며 콧대를 들었다. “뭐 내가 대단한 게 하루 이틀은 아니니까. 그나저나 왜 부른 거야?” 맞다. 그러고 보니 줄 게 있었지. 원래는 살짝 으스대면서 줄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서랍에서 검은색과 흰색 영약 두 개를 동시에 꺼내며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 거주민 정보(Native Status) > 1. 이름(Name) :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근력 51] [내구 52] [민첩 58] [체력 47] [마력 94] [행운 74] ‘사멸 무저갱’ 원정으로 얻은 영약은 제한 조건 마력 95포인트 이하로, 복용 시 마력 상승 수치는 1포인트. 그리고 경매장에서 구매한 영약은 동일 제한 조건이며, 복용 시 마력 상승 수치는 2포인트에서 4포인트 사이. 즉 원정, 경매장 영약 순으로 먹으면 두 개 모두 효과를 볼 수 있다. 못해도 97포인트까지는 올라가고, 최대 99포인트까지 노릴 수도 있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봐? 왜 불렀냐니까?” “아, 주고 싶은 게 있어서.” 채근하는 듯한 말투에 영약 두 개를 얼른 앞으로 밀었다. 비비앙은 눈을 홉뜨더니 호기심 어린 기색으로 손을 뻗었다. 잠시 후. “어…!” 역시나. 천성이 연금술사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예전에 영약을 만든 경험이 있으니 바로 알아봤을 수도 있겠다. 두 영약을 번갈아 살피던 두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이거 설마…?” “그래, 마력 영약이야. 근래 마력 부족으로 소환에 고민이 많다는 소리를 들었거든.” “진짜로? 거짓말이 아니라? 나 놀리는 거 아니지?” “원한다면 구즈 어프레이즐을 사용해도 좋고.” “기, 김수현!” “단, 복용 전에 꼭 주의해야 할 게 있어.” 나는 영약을 복용하는 순서에 관해 설명했다. 무조건 검은색 영약을 먼저, 흰색 영약을 두 번째로 먹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비비앙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쁨과 감동이 섞인 낯빛을 비췄다. “야~. 너 뭐야 진짜~.” “……?” “미리 언질이라도 주던가. 나 진짜 깜짝 놀란 거 알아? 지금도 심장이 막 벌렁거린다고!” “하하….” 양손에 영약을 꼭 쥔 채 방방 뛰는 등, 비비앙은 온몸으로 환희를 표현했다. 원래는 같이 기뻐해야겠지만, 나도 모르게 살그머니 눈을 돌리고 말았다. 왜인지 돌연히 불편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까닭 없이 거북한, 그런 기분. 그러자 소란스럽던 기척이 이내 시들해지는 걸 느꼈다. “저, 김수현?” “응?” “너…. 괜찮은 거야?” “뭐가? 이상한 건 없는데.” “그래? 그럼 다행이고. 실은 아까부터 조금 이상해 보였거든.” “아…. 별것 아니야.” 무언가 견디기 힘들다. 나는 머리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응? 어디 나가?” 주섬주섬 옷을 입자 비비앙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미안. 약속이 있어서. 바로 나가봐야 해.” 거짓말이다. 약속도 없고 바로 나갈 필요도 없다. 사실 이대로 문을 나가면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 여전히 바쁜가 보네.” 그대로 지나치려는 찰나, 비비앙의 눈동자에 서운해하는 빛이 스쳤으나, 이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복용 순서를 거듭 강조한 후, 바쁜 체 걸음을 놀렸다. 그때였다. “김수현!”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낭랑한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흘끗 눈을 돌리니 비비앙이 양팔을 번쩍 올리고 있었다. 천장으로 뻗은 두 손은, 곧 정수리 쪽으로 둥글게 휘어지며 하트 모양을 그렸다. “사랑해! 정말 정말 고마워!” 비비앙이 활짝 웃는다. 그러나 나는, 한 번 선웃음 짓는 걸로 화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문을 닫고 나서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도망치듯이 걸어서인지는 몰라도, 무의식적으로 걸음에 속도가 붙는다. 중간중간 나를 부르는 여러 음성을 들었으나 그냥 걷는 것에만 집중했다. 통로에서 계단으로, 계단에서 일 층으로, 일 층에서 입구로, 입구에서 정원으로…. …그럼, 이제는 어디로? 어디론가 가고 싶은데, 갈 곳을 모르겠다. 우스운 방황이라 생각하면서도, 결국에는 정문을 벗어나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염없이 걷던 와중, 갑작스레 툭 걸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자, 발끝이 길고 네모나게 다듬어진 단단한 벽돌과 맞닿아 있었다. 그 벽돌이 올라가는 계단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나는 멍하니 눈을 들었다. 그곳에는. “…….” 새하얀 신전이 우두커니 솟아 있었다. ============================ 작품 후기 ============================ 죄송해요…. 설마 그렇게 싫어하실지는 몰랐어요…. 앞으로는 절단 안 할게요…. ㅜ.ㅠ 0841 / 0933 ---------------------------------------------- The First Step Toward Return, Eight. 소환의 방은 빛이라고는 한 줄기도 들어오지 않는 사방이 밀폐된 일종의 공동(空洞)이다. 그럼 응당 어두컴컴해야 정상이건만, 특이하게도 사물을 식별할 수 있을 만큼의 빛은 흐르고 있다. 이 휑뎅그렁한 잿빛 일색의 공간을 밝히는 근원을 따라가 보면, 아마 중앙 제단에 홀로 앉은 한 천사를 볼 수 있을 터.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 속, 고요히 눈을 감은 천사는 신비로우면서 아름답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쓸쓸해 보이기도 한다. 혹시 이 공간은 시간이 정지한 게 아닐까, 이런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오직 날개만이 처연히 흔들릴 뿐, 가만히 앉아만 있는 모습은 꼭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남편을 기다리는 망부석 여인을 보는 듯하다. 그때였다. 물결처럼 흐른 날개가 빛을 점점이 뿌려낸 순간, 공허한 공간이 어른거리더니 진한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이윽고 한 사내가 빛을 뚫고 나타난 것과 천사의 고요가 깨진 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마침내 눈을 뜬 천사가 느릿하게 감았다가 뜨며 앞을 응시한다. 잠시 후, 고운 눈매가 순식간에 치떠졌다. “사용….” 말이 나오려는 찰나, 끊어졌다. 사내, 아니 김수현은 언제나처럼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딱딱히 굳은 얼굴도, 예전처럼 경멸하는 눈빛도 빛내지 않는다. 오히려 낯빛은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하고, 지친 걸음걸이는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 어지럽기 짝이 없다. 축 처진 어깨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비 맞은 생쥐 꼴처럼 우스우나, 웃을 수가 없었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니까. 결국, 정처 없이 방황하던 걸음이 멈춘 곳은 소환의 방, 언제나 서던 그 자리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김수현은 아무런 말도 않고 조용히 서 있기만 했다. 세라프의 입도 몇 번이나 달싹였으나 결국에는 다물어졌다. 보는 듯 보지 않는 듯. 초점 잃은 눈동자로 멍하니 허공만 응시하는 모습을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서로가 말없이 쳐다보는 동안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그러나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모습 때문이었을까? 길고 어색한 침묵 속에서 먼저 행동한 건 세라프였다. 제단을 짚고 몸을 일으킨 순간, 등 뒤의 날개가 선연히 일어나 눈 부신 빛을 뿜었다. 그대로 공중으로 올라, 김수현이 있는 곳으로 헤엄치듯이 향한다. 망설이는 것도 잠시. 눈앞에서 멈춘 세라프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상대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토록 증오하던 천사였건만, 놀랍게도 김수현은 거부하지 않았다. 차갑고 부드러운 감촉이 펄펄 끓는 볼을 식혀주자, 비로소 긴 한숨을 토해냈다. 흐릿하던 눈동자가 조금이나마 또렷해진 걸 확인한 세라프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속삭거리는 음성이 귀를 간질였다. 그냥 의례적인 인사말이었지만 이 한 마디면 충분했다. 갈 곳을 찾지 못하던 이에게는 충분하고도 남는 말이었다. 김수현은 안도한 얼굴로 눈을 감고는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 딸려 들어가듯 사뿐 내려앉은 세라프는, 활짝 펼쳤던 날개를 둥글게 모아 감싸며 김수현을 끌어안았다. 잠시 후, 세라프의 어깨에 기댄 김수현의 얼굴에서 고른 숨소리가 흐르기 시작했다. * 어른어른 정신을 차렸을 때 김수현은 머릿속이 흐리멍덩하다고 느꼈다. 사실 도망치듯 방을 나간 이후로는 무엇 하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나간 것 자체가 꿈인지도 모른다. 비비앙을 보낸 후 까무룩 잠이 들었고, 누군가 몰래 침대로 옮겨주었을 것이다. 김수현은 폭신하고 말랑말랑한 침대에 얼굴을 비비며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일어나면 상황을 알 수 있겠지만 계속 눈을 감았다. 꿈결 때문인지는 몰라도, 몸을 받쳐주는 침대나 머리까지 덮인 이불의 감촉이 너무나 따스하다. 심지어 혼란스럽던 정신이 편안히 치료되는 기분이었다. “아니, 안 되지.” 문득 끓는 듯한 쉰 음성이 흘러나왔다. 김수현은 두어 번 머리를 털었다. 막 깨어난 머리는 가물가물한 와중에도 용케 형의 공식 발표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이 마약 같은 감촉에서 깨어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우선 시간을 확인하고 향후 행동을 정할 셈이었다. 그때였다. “이제 정신이 드셨습니까?” 잔잔한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목소리는 바로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매우 선명했다. 김수현은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처음 시야에 들어온 건, 희디흰 젖무덤과 일자로 그어진 가슴골이었다. 멍하니 눈을 올리니 담담히 아래를 내려다보는 연록 빛깔 눈동자가 보였다. 그리고 은은히 빛나는 은백색 머리카락과 몸을 두르고 있는 은은한 날개 한 쌍까지 확인한 순간, 김수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세…?” “괜찮습니다.” 세라프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몹시 당황한 김수현을 응시하며 차분한 태도로 말을 잇는다. “소환의 방으로 들어왔을 때, 사용자 김수현의 정신은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소환의 방으로 들어왔을 때…?” “그렇습니다. 이유는 모르나 수치상 심신이 극한까지 몰린 상태였고, 바로 수면에 들었습니다.” “…….” “그런 눈으로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담당 사용자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 또한 도우미의 의무니까요. 어제보다는 상당히 호전됐지만…. 괜찮으시다면 완전히 안정될 때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망연한 두 눈이 빠르게 깜빡거렸다. 말을 마친 세라프가 다시 한 번 살그머니 품에 안았기 때문이다. 꿈결에 느꼈던 감촉이 도로 찾아와 전신을 부드럽게 풀어준다. 내심 당황과 부끄러움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 감각에 취하고 싶다는 마음이 훨씬 컸다. 이내 갈등의 빛이 사라지며 김수현은 아이처럼 품에 묻혔고, 그래서 보지 못했다. 세라프가 기쁘게 미소 짓는 모습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얌전히 안긴 채 차곡차곡 기억을 정리하던 김수현은, 문득 홀연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세라프.” “말씀하십시오.” “어디까지나 만약인데.” “네.” “내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서 계속 산다면…. 어떻게 생각해?” “…….” 김수현은 세라프의 표정을 보지 못한다. 아니. 볼 수는 있지만, 일부러 보지 않는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그저 등을 쓸어주던 손길에 살며시 힘이 들어간 것으로 반응을 짐작할 뿐. 사실 속으로는 창피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토록 소망하던 제로 코드를 얻었습니다.’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겁니다.’ ‘사용자 김수현은, 진심으로 홀 플레인의 시간을 되돌리는 걸 원하는 겁니까?’ ‘그 십 년간의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다시 반복하겠다는 겁니까?’ 물론 현재의 세라프는 모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쨌든 수차례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빡빡 우겨 돌아온 게 누군가. 그렇게 한 주제에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 스스로 절감하는 중이었다. 그때 세라프가 입을 열었다. “개인의 선택에 왈가왈부할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하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데?”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겁니까?” “응?”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홀 플레인에서 계속 살고 싶다. 이 두 조건 중 하나를 선택하는 행동에는, 각각에 걸맞은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럼 그 이유를 서로 비교하고, 더 끌리는 것으로 선택하는 게 합리적이지 않겠습니까?” “합리적이라….” 김수현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아직도 쑥스러운 기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세라프를 등지고 허리를 웅크렸다. “있잖아, 끌리는 게 없으면?” “네?” “어느 한쪽으로 기우는 게 아닌, 둘 다 똑같이 오십 대 오십이면? 그럼 어떡해?” “후후….” 세라프는 가볍게 웃으며 몸을 움직였다. 등 돌린 김수현의 어깨를 살짝 붙잡고 스리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는 경험에 근거합니다.” “생각이 변했다면, 그 이유는 경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수현은 이미 이유를 알고 있을 겁니다. 모종의 감정을 느꼈을 수도 있고, 어떤 차이를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선택하기 어렵다면 굳이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앞으로 겪을 경험도 결정에 영향을 미칠 테니, 조금 미뤄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단, 한 생각에 강박 관념처럼 얽매일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겪은 경험입니다.” “수현이 스스로 느끼기에 그 경험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면….” 그리고 김수현이 반응을 보인 건, “변한다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라프가 ‘변화’를 언급했을 때였다. 돌연히 상반신을 벌떡 일으킨 김수현의 낯에 한껏 놀란 빛이 스쳤다. 몽롱하던 머리에 비로소 한 줄기 이성이 고개를 들었다. 생각이 변했다, 어떤 차이를 느꼈을 수도 있다, 강박 관념처럼 얽매일 건 없다, 변한다는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이 네 문장이 이어지는 순간, 한 생각이 뇌리를 강타했다. 김수현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세라프를 바라봤다. 아직 확정된 건 아니다. 그냥 단순한 추측일 수도 있다. 세라프도 만약으로 말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경험’이라는 살을 붙여 생각하면 너무 딱 맞아떨어진다. 그래, 꼭…. “세라프, 너 설마….” “그냥 제 생각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담담히 말한 세라프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물 흐르듯 허공을 날아 제단에 안착한 후,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나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뭐?” “이미 정오가 지났습니다.” “…응?” 김수현이 미간을 좁히자 세라프는 가볍게 손을 튕겼다. 그러자 허공으로 반투명한 영사막(映寫幕) 같은 것이 생성되더니 커다란 광장의 풍경을 드러냈다. 그곳에는 익숙한 사내가 단상에서 누군가와 말을 주고받고 있었으며, 주변은 사용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공식 발표!” 김유현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김수현이 소리 질렀다.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분명…!” “어제 쓰러진 이후, 정신 안정이 최우선이라 판단, 제 권한으로 강제로 수면시켰습니다. 클랜에 전령을 보내기는 했습니다만….” “그럼 내가 여기 하루 넘게 있었다는 소리야?” “공식 발표는 시작한 지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았으니, 아직 늦지는 않았습니다.” 그 말에 김수현은 황급히 몸을 돌렸다. “가시렵니까?” 그러한 찰나, 세라프의 음성이 소환의 방을 울렸다. 김수현은 포탈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흘끗 뒤를 돌아봤다. “가시겠다면 막지는 않겠지만….” “……?” “아마 곧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 뜻 모를 말이었다. 김수현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꿀꺽 삼켰다. 사실 차오르는 의문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자신이 모르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우선. “…그래. 곧 다시 올 거야.” 조용한 목소리와 함께 포탈로 몸을 묻었다. 이제 곧 알게 될 테니까. * 한편, 같은 시각. “…말이 길었군요. 여하튼 이 건에 관하여 해밀 로드의 명확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질문을 끝낸 사내가 자리에 앉고, 김유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수십, 수백 수준이 아니었다. 수천, 어쩌면 일만 쌍이 넘을지도 모르는 눈초리가 모조리 쏠려 있다. 이러한 상황치고 낯은 꽤 담담해 보였으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김유현은 스리슬쩍 옆을 쳐다봤다. 단상에는 또 하나의 자리가 마련돼 있었으나 앉아 있는 사용자는 없다. 누구를 위한 자리인지는 말할 것도 없다. 머셔너리 클랜원은 참석했지만, 머셔너리 로드는 참석하지 않았다. ‘이게 네 선택인가….’ 조금이라도 의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뿐, 씁쓸하거나 실망하지는 않았다. 이미 김수현이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하고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하고, 약속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김유현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답변하겠습니다.” 그 순간이었다. “사실…?” 불현듯 김유현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높아졌다. ============================ 작품 후기 ============================ 사실 무어라 말씀드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인데…. 그렇잖아요. 저번 후기에 ‘내가 아직도 로유진으로 보이니?’ 이때처럼…. 또 제가 제 무덤을 팔까 봐, 이제 무슨 말을 하는 게 무섭고 두려워요…. ;ㅅ; 0842 / 0933 ---------------------------------------------- The First Step Toward Return, Eight. 처음에는 킥킥거리는 등의 가벼운 웃음이 흘렀다. 김유현은 겉으로 보면 절대 실수를 용납지 않을 매우 차갑고 이지적인 인상의 미남이다. 그런 사내가 소위 삑사리를 낸 상황이 자못 웃기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눈을 조금 치뜬 채 먼빛을 응시하고 있었다. 웅성웅성. 이윽고 웃음이 서서히 사그라질 즈음, 돌연 곳곳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후방이 소란스럽던 것이, 점차 앞쪽으로 술렁술렁 전염되어 앞줄에 있던 공찬호나 한소영도 고개를 돌렸다. 곧 빽빽이 모인 인파가 반으로 갈라지며 한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성큼성큼 걸어오는 김수현을 확인한 김유현의 낯빛이 확연히 밝아졌다. “수현아!” 반가움에 소리 지르자, 무수한 시선이 우르르 꽂혔다. 실수를 인지한 김유현은 바로 말을 정정했다. “아, 조금 늦었군요.” “죄송합니다. 소환의 방에 좀 다녀오느라.” 꾸벅 머리 숙인 김수현은 얼른 단상으로 올라와 김유현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두 형제는 서로 한 번 시선을 맞췄다. 긴말은 나누지 않았다. 참가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잠시 후, 김유현이 머리를 주억이는 걸 기점으로 공식 발표가 재개되었다. “그럼 마저 답변하도록 하겠습니다. 방금 질문하신 분?” 김유현이 비치된 기록을 집어 들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예, 예.” 질문한 사내가 수긍했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떨떠름한 음성이었다. 정확히는 김유현의 말에 대답하면서도, 무심히 주변을 돌아보는 김수현을 보고 있었다. 이 광장에 모인 군중만 족히 일만은 넘을 터인데, 부담은커녕 외려 주변을 압도하는 기운마저 느껴졌다. “제가 이걸 공개하는 이유는….” 김유현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이 기록의 소유 권한은, 제가 아닌 머셔너리 로드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즉 저는 대리인에 불과하며, 이걸 발견하고 공개하자고 발의한 장본인은 바로 머셔너리 로드입니다.” 그 순간 김유현을 쳐다보던 눈동자들이 모조리 왼쪽으로 이동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김수현이 흘끗 옆을 흘겼으나 형이라는 작자는 천연덕스레 미소만 짓고 있다. 결국에는 짧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제가 방금 와서 상황을 잘 모릅니다. 왜 비밀 도서관의 기록을 공개하는지 궁금하다는 겁니까?” 그냥 단순한 물음이었다. 그러나 질문한 사내는 순간 ‘괜히 물었다.’ 고 후회했다. 실상은 ‘군주여, 호령하여라.’ 의 영향이었지만, 어쨌든 겨우 긍정할 수 있었다. “에, 그러니까 나쁜 뜻이 아니라요. 해밀 로드의 말이 사실이라면 기록들의 가치는 실로 어마어마할 겁니다.” “그렇지요.” “그럼 이러나저러나 개인이 발견한 이상, 그 성과는 찾아낸 사용자에게 귀속된다고 봐야 합니다. 탁 까놓고 말해서 배는 좀 아프겠지만, 이건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불문율이죠. …한데, 그 권리를 포기하시면서까지 이렇게 공개하고, 공동으로 나누겠다는 진의가 궁금합니다. 사실 불안한 마음도 없잖아 있고요.” “아, 그건 간단합니다. 그럴 수가 없었으니까요.” 장황한 설명에 반해, 답변은 말 그대로 매우 간단했다. 사내의 낯빛에 당혹감이 번졌다. “예?” “조금 더 상세히 말씀드리면, 제가 독식하는걸 바라지 않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세력…. 이라고요?” “천사입니다.” 천사라는 말이 나온 순간, 군중의 낯빛에 의아함이 스쳤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제껏 철저한 도우미 입장을 지키던 천사들이 직접 간섭했다는 소리였으니까. 그렇게 차차 술렁거림이 커지는 동안, 누군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한소영이었다. “설마 천사가 억지로 제한했다는 말씀인가요?” “아니요. 강제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요?” “음…. 그냥 천사는 제안을 했고 저는 받아들였다, 이 정도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김수현은 ‘초감각’에 걸리지 않도록 완곡히 말했다. 그러자 한소영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질문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제안이라고요? 어떤 제안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아니요. 그건 자세히 밝힐 수 없습니다.” “잠시만요. 천사가 그렇게 말했다는 건, 그 기록들이 정말 성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건가요?” “아마 그렇겠지요?” 왜 이런 자리를 만들었는지, 김수현은 아직 정확한 의도는 알지 못한다. 그냥 가브리엘과의 서약을 이행하는 과정 정도로만 알고 있다. 말인즉, 이렇게 엄청난 군중이 모인 자리서 말하는 한 마디가 얼마만큼의 무게를 지녔는지. 그리고 자신의 말 한 마디를 일반 사용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잠시만요. 어쨌든 머셔너리 로드가 첫 발견자라는 말씀 아닙니까.” “맞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성과를 아무 조건 없이 무료로 개방하시겠다는 겁니까? 정말로요?” “그건 제가 답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조용히 지켜보던 김유현이 스리슬쩍 나섰다. 기회를 노리다가 원하던 질문이 나오자 바로 나온 것이다. “뭐, 여러분을 위해서라느니,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느니…. 이런 낯부끄러운 소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저와 머셔너리 로드의 진정한 의도도 아니거니와.” “우리는, 사용자입니다.” 우리는 사람이기 이전 사용자다.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가장 처음으로 교육받는 말이거니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말이었다.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만, 저는 분명 아무 조건 없이 무료로 공개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을 바꾸겠다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는 건 저 또한 이득을 얻으려는 행동이지, 선의에서 우러난 행동은 아닙니다.” “물론 저도 처음에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욕심이 안 날 리가 없죠. 이 정도 기록이라면….” “그러나 머셔너리 로드의 설득에 따라, 더 커다란 성공을 위해 한 발짝 물러나기로 했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김유현은 잠시 숨을 골랐다. 아직 말이 끝난 건 아니었다. “왜냐면….”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며 몇 초간 뜸을 들이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신 대륙으로 갈 수 있는 통로를 알아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이었다. “……!” “……!” 신 대륙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 광장은 단숨에 어수선해졌다. 군중 사이로 순식간에 소란이 흘러 하나의 커다란 웅성거림을 만들었다. 워낙 많은 사용자의 말이 섞여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정도였다. 득달같이 입을 여는 사용자들을 보며 김유현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조용히 좀…! 현재 저도 아는 게 많이 없거니와, 아직 추측에 불과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설령 정보를 알려드린다고 해도, 공략이라도 하시렵니까?” 큰소리로 외치자 장내가 점차 조용해졌다. 따지고 보면 김유현의 말이 맞기 때문이다. 당장 강철 산맥만 봐도 알 수 있다. 최고 정예 일만오천 명으로도 간신히 넘지 않았는가. 대형 클랜 몇 곳이 연합한다고 해서 공략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다. 그렇게 간신히 잠잠해지기는 했으나 광장은 이미 한껏 달아올랐다. 여기저기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바람을 가득 넣은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바늘을 톡 갖다 대기만 해도 폭발할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분위기. 이 또한 김유현이 의도한 분위기였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저희는 여러분에게 투자할 생각입니다.” “투자자의 입장으로써 이 기록들을 무상으로 나누겠습니다. 그럼 여러분은 이 기록을 바탕으로 탐험하고, 성과를 얻으십시오. 그리고 훗날 신 대륙에 관한 정보가 완전히 밝혀졌을 때, 정규 원정에서 강해진 실력을 유감없이 뽐내주십시오. 이게 바로 저와 머셔너리 로드가 원하는 것입니다.” 쥐 죽은 듯 조용해진 장내를 돌아보며 김유현이 입을 열었다. “물론, 여러분 중에는 아직 의구심이 남은 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믿기 싫으면 하지 마라, 유치하게 이런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단, 얼마 전 머셔너리 클랜에서 사멸 무저갱이라는 유적을 공략한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그에 관한 기록도 바로 이 기록 안에서 나온 거라면…. 믿으시겠습니까?” 어디선가 “정말입니까?” 라는 말이 나왔다. 김유현은 직접 물어보라는 듯이 옆을 돌아봤고, 김수현은 눈을 감은 채 머리를 끄덕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잠시 후, 김유현은 몇몇 사용자를 호명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이효을을 시작으로 공찬호, 김덕필, 선율, 성현민 등등 이름 있는 사용자가 열 명 남짓하게 일어섰다. 그리고 그들 또한 비밀 도서관의 기록을 바탕으로 성과를 얻었다고 증언했다. 오늘, 바로 이 순간을 위해 김유현이 미리 안배해놓은 것이다. 이렇게 열 개가 넘는 기록 모두 성과를 얻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이제 더는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그러자 때가 무르익었다고 여긴 걸까. 또 한 번 소란이 끓으려는 기미가 보이자 문득 김유현이 손을 들었다. 신호를 받은 두 명의 해밀 클랜원이 약 사 미터 높이의 낡은 서재 하나를 들고 와 단상 앞에 내려놓았다. 물 샐 틈 없이 빽빽하게 있는 건 아니었지만, 총 스무 칸으로 나뉜 서재에는 가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기록이 꽂혀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김유현은 단상 앞으로 걸어가 서재를 잡았다. “어느 기록에서 어느 성과를 얻을 수 있는지. 그것까지는 모릅니다.” 서재를 살짝 흔들자 우수수 떨어진 기록들이 바닥에 툭 부딪쳐 흐트러졌다. 꿰뚫을 듯한 눈초리들이 단박에 아래로 향한다. “하지만 금은보화는 물론, 장비도, 영약도, 클래스도…. 이렇게나 많은데 몇 개 정도는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하물며 머셔너리 로드도 얼마 전 원정에서 마력 영약을 얻었다는데.” 순간 사용자들의 눈에 불이 켜졌다. 조건도 없고, 돈을 낼 필요도 없다. 여러 클랜에서 보증도 했다. 그냥 원하면 가서 가져가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성과를 얻어 강해지고, 훗날 신 대륙 원정에서 활약해달란다. 이보다 좋은 조건이 있을까. “사용자도, 캐러밴도, 클랜도, 연합도 좋습니다. 약속드리건대 누구도 차별을 두지 않겠습니다.” 그러한 생각이 스친 찰나, 단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한 명 한 명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이끌리는 대로, 목을 쭉 빼어 서재를 응시한다. 군중은 이미 대부분 제정신이 아니었다. “강해지고 싶다는 열정만 있다면.” 그렇게 말한 김유현은 살짝 웃었다. 그리고 마력을 드높여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여기에 있는 모든 기록과 성과는, 바로 여러분의 것이 될 겁니다.” 마력이 충만한 음성이 장내에 흐른 순간, 와아아아아아아아! 거대한 함성이 터져 장내가 떠르르 울렸다. 사용자들은 주먹을 번쩍 들어 올리며 광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어찌나 소리가 큰지 청명한 하늘이 흔들려 보일 정도였다. “수현아.” 그러는 와중, 김유현이 작은 음성으로 이름을 불렀다. 김수현은 흘끗 앞을 바라보고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함성은 사그라지기는커녕, 오히려 껑충 뛰어올라 하늘마저 들어 올렸다. 이어서 환호 속에 박수가 섞이기 시작했다. 흡사 영웅을 환영하는 주민처럼 여기저기서 박수를 보냈다. 심지어 한소영도, 그리고 분위기에 휩쓸린 공찬호도 어정쩡한 자세로 손뼉을 치고 있었다.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갈채 속에서, 김수현은 담담한 얼굴로 손을 들어 흔들었다. 이리하여. 김수현이 사용자가 된 지 십사 년 차하고 어느 날. 마침내 최후의 선택으로 가는 첫 번째 발걸음이 내디뎌졌다. ============================ 작품 후기 ============================ (코멘트를 읽다가.) 라셸티 / 작가님 질문이요 수현이가 2회차 플레이인 현 시점에서 만약 죽어서 유현이가 제로코드로 과거를 돌려서 다시 시작하면 수현이의 기억은 1회차 플레이한 상태의 기억으로 돌아갈까요? 로유‘진’ : 음, 이건 말이죠…. 라셸티 / 왜 또 끊으세요...ㅠ 근데 후기의 내용은 무슨뜻인가요 ?ㅅ? 어차피 인간은 여성성과 남성성의 이데아를 모두 갖고 있죠. 로유미가 로유진이고 로유진이 로유미이니 그게 그거죠. 로유진+로유미=로유진미 로유‘진’ : …네? 0843 / 0933 ---------------------------------------------- The First Step Toward Return, Eight. 형의 말은 ‘사용자’라는 존재가 바라는 것을 정확히 짚어냈다. 상대가 뭘 원하는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고 해야 하나. 여기서 한술 더 떠, 형은 말만이 아닌 직접 행동으로 보여줬다. 해밀은 어디까지나 머셔너리의 대리라는 점을 내세우며, 준비만 제대로 갖췄다면 지금 바로 클랜 하우스로 찾아와도 좋다는 말을 끝으로 단상에서 내려왔다. 이렇게 해밀 클랜의 공식 발표는 엄청난 환호 속에서 성황리에 마쳐졌다. 그리하여 흥분한 군중을 뚫고 간신히 성으로 돌아온 후. “그래서.” 집무실 의자에 앉으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이제 계획을 속 시원하게 말해줄 때도 되지 않았어? 이렇게나 장단에 맞춰줬는데.” 쭉 기지개를 켜던 형은 소파에 몸을 묻으며 미소 지었다. 한 차례 시원스레 웃더니 천천히 머리를 가로젓는다. “이건 계획이라고 볼 수도 없어. 그냥…. 일종의 쇼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일부에 불과해.” 그렇게 말한 형은 품에 손을 넣어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스스로 ‘쇼’라고, 아직 일부에 불과하다고 했다. 나는 지그시 형을 응시했다. 강철 산맥 때도 한 번 느꼈지만, 형의 장점은 느리다는 것에 있다. 한소영이 과단성 있는 판단과 과감한 행동으로 신속하게 진행하는 스타일이라면, 형은 세세한 안배로 미리 판을 짜놓고, 하나씩 주워담으면서 천천히 나아가는 게 특징이다. 말인즉 이제 막 시작했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려나. “우선은 이것부터.” 잠시 후, 형이 책상으로 두툼한 봉투 두 개를 올려놓았다. 하나 살짝 열어보니 빼곡히 들어찬 낡은 기록 더미가 보였다. “그때 비밀 도서관에 서재가 총 세 개 있었잖아?” “응.” “네가 남기라고 한 중앙 서재에서 가져온 거야. 맹세코 기록은 읽어보지도 않았고, 모조리 꺼내서 섞은 다음 삼등분한 거다.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더라.” “갖고 싶은 거 가져도 상관없는데.” 피식피식 웃으며 봉투 두 개를 간수했다. 해밀은 이미 자기 몫을 챙겼을 테고, 여기서 하나는 우리가 갖고 남은 하나는 이스탄텔 로우 것이다. “그리고…. 다음은 이거.” 형은 잠시 눈치를 보더니 아까보다 커다란 봉투를 추가로 올려놓았다. 쿵 소리가 울리는 것이 척 봐도 방금 봉투보다 갑절은 두꺼워 보였다. “이건 뭔데?” “서재 하나를 통째로 가져왔지.” “그런 것 같은데. 이걸 왜 나한테 주느냐고.” “이건 네가 나눠줘야 하니까.” 형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혼자서 나눠주는 건 힘드니 너도 같이하라는 말은 아닐 테고. 계속 말해보라는 의미로 턱짓하자 형은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괴었다. “혹시 스무고개 좋아해?” “굉장히 싫어해.” “하하, 그래도 이것만 말해봐. 내일부터 우리 해밀은 굉장히 바빠질 거야. 아마 기록을 받으러 온 사용자로 인산인해를 이루겠지?” “당연하지.” “일단 찾아온 이들을 크게 묶어 사용자라는 집합으로 보고. 그럼 이 집단을 단위로 구분해본다면?” “단위? 단위래 봤자 대형 클랜, 중견 클랜, 소형 클랜, 캐러밴, 개인…. 이 정도?” “좋아. 그럼 여기서 질문 하나. 중견 클랜 이상은 그렇다 치고, 소형 클랜이나 그 이하는 과연 기록을 받을만한 역량이 있다고 생각해?” “…….” 그 순간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방금 형의 질문에는 뼈가 있었다. 사실 아까 공식 발표를 들으며 유일하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했다. 형은 ‘차별을 두지 않고 공평하게 나누겠다.’ 라는 슬로건으로 커다란 환호를 받았다. 확실히 겉보기에는 좋으나, 잘 생각해보면 상당한 손해를 감수하는 일이다. 가령 우리 머셔너리조차도 간신히 공략한 ‘야만 왕의 무덤’ 같은 원정을, 과연 소형 클랜 이하의 원정대가 감당할 여력이나 있을까? “흠. 확실히 어려운 경우도 발생할 것 같기는 한데….” “그렇지. 물론 이 기록 하나하나가 갖는 가치는 알고 있어. 그래서 지금도 우리 클랜원이 열심히 필사하는 중이고, 또 거리가 가까우면서 쉬워 보이는 것들로 구성하기도 했고. 여하튼 그냥 버리는 짓은 최대한 지양할 생각이다.” “필사라. 그것참 힘든…. 뭐라고? 손을 댔다는 거야?” “나눠줄 것들은.” 깜짝 놀라 물어보자 형은 담백이 긍정했다.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차라리 중견 클랜 이상을 타깃으로 잡았다면 적어도 왜 그랬는지 이해라도 했을 터. 그러나 거리가 가깝고 최대한 쉬워 보이는 기록들을 끼워 넣었다는 건…. “형?” “맞아. 중견 클랜 이상이 아닌, 소형 클랜 이하의 집단에 주로 나눠줄 생각이야.” 젠장. 나름 각오하기는 했다만, 형은 상상 이상으로 일을 복잡하게 계획한 듯하다. 일단 차분하게 정리해보자. “왜 그랬는데?” “생각해봐. 기록이 무한정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이런 거 저런 거 다 따져서 나누면, 결국에는 기득권으로 볼 수 있는 세력이 다 가져갈 수밖에 없잖아. 모르긴 몰라도, 좋은 소리는 나오지 않을걸? 딱 나눠주고도 욕먹는 꼴이지.” “그럼 애초에 그렇게 발표하지 말던가. 그리고 형 말대로 한다고 해도, 중견 클랜 이상의 반발은 어떡할 건데?” “그걸 달래는 게 바로 네 역할이야.” 반문한 순간, 형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며 아까 꺼낸 두툼한 봉투에 손을 얹었다. “물론 나도 매몰차게 거절하지는 않을 거야. 적당히 완곡하게 말하면서 머셔너리 클랜을 슬쩍 들먹이는 거지.” “그래서 이걸 나한테 넘긴 거야? 찾아오면 나보고 주라고?” “그래도 되고, 아니면 네가 직접 찾아가는 방법도 있고.” “형. 미안하지만 이해가 안 돼. 왜 일을 까다롭게 만드는 거야? 그냥 나눠주면 끝나는 일이잖아.” 형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침묵을 지키더니 담담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이것저것 생각 않고 그냥 아무렇게나 뿌리면 편하기는 해. 그런데 말이다. 나라고 좋아서 이렇게 복잡하게 하는 건 아니다.” “그,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수현아. 나는 이번 일을 하면서 최대한 너를 들먹일 생각이다.” “……?” 이건 또 무슨 말일까.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이건 머셔너리 클랜이 여러분에게 베푸는 겁니다. 그러니까 고마워하세요. …이런 단순하고 멍청한 뜻이 아니야. 어떻게든, 어떤 이유를 들어서든. 앞으로 발생하는 모든 상황을 머셔너리와 연관 지을 거라고.” 그렇게 말한 형은 살며시 몸을 돌렸다. 테라스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더니 느릿하게 걸으며 말을 잇는다. “나는 왕이 되려면 최소한 세 가지 조건은 갖춰야 한다고 생각해. 첫 번째는 무력, 두 번째는 명분, 그리고 세 번째는 민심.” “왕?” 왕이라. 굉장히 뜬금없는 말이다. 그러나 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마. 물론 좋아하는 사용자도 있겠지만, 어쨌든 머셔너리 클랜을 보는 시선이 마냥 곱지만은 않은 거, 너도 인정하지?” 그렇기는 하다. 강철 산맥의 활약으로 많이 완화되기는 했지만, 북 대륙 시절부터 뿌려진 뿌리 깊은 선입견은 아직도 이어져 오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지만 않을 뿐이지. “하지만 내가 네 이름을 걸고 소형 클랜 이하의 집단을 전폭적으로 지원한다면? 머셔너리 클랜의 인식을 바꾸는 데 상당히 도움되지 않을까?” “그래. 좋아.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럼 다른 건?” “들어봐. 서 대륙과의 전쟁이나 강철 산맥 공략 등등…. 이제껏 홀 플레인에서 일어난 대사(大事)는, 최소 중견 클랜 이상의 참가와 대형 클랜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잖아?” “그런데?” “그런데? 가 아니지. 앞으로 악마와 싸울 때 그 집단의 힘은 필수 불가분해. 너 혼자 싸울 게 아니라면, 이번 기회를 이용하는 게 좋을 텐데?”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그 집단과 직접 만나면서 친분 관계를 쌓으라는 거야?” “그렇지. 사용자라면 응당 이익을 좇기 마련이니까. 현재 홀 플레인의 특성상 장악은 불가능하겠지만, 최소한 필요할 때 너를 지지해줄 수는 있을 거야.” “하.”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형이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자신은 민심을 얻을 테니, 나보고는 명분을 만들어놓으라는 소리였다. 하기야 사용자가 이익을 좇는다는 말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형이 잘못 생각했다. “글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같은데.” “응?” 아까 공식 발표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냥 공짜로 준다고 해도 계속 의심하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는가. 대형 클랜은 특히 더욱 그렇다. 손익 계산에 굉장히 민감하거니와, 한편으로는 딱히 아쉬울 게 없는 이들이다. 고작 기록 몇 개 던져준다고 과연 ‘아이고, 이렇게 챙겨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앞으로 머셔너리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이렇게 반응할까? 아니.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절대로. 이건 단언할 수 있다. 생각한 바를 얘기하자 형은 씩 웃었다. 나름 맹점을 찔렀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태연한 반응이었다. 마치 그렇게 얘기할 줄 알았다는 듯이. “방법이 있다면?” “뭐?” “내가 말한 방법으로, 확실하게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떡할래? 머셔너리 로드.” “가, 갑자기 뭔….” 머셔너리 로드라는 말이 왜 이렇게 낯설게 들리는 걸까. 형은 더 이상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입구에 걸치듯이 서서는 잔잔한 눈으로 테라스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왜인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느낌이었다. “수현아.” 그렇게 한동안 밖을 응시하더니 문득 한층 낮아진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지금…. 북 대륙에 수호자가 없다는 건 알고 있지?” “그거야….”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저번에 맹아라가 부랑자에게 살해당한 이후, 현재 북 대륙은…? 잠깐, 잠깐만. 왜 느닷없이 이 얘기를 하는 거지? “설마….” “그래.” 형은 천천히 머리를 주억였다. “네가, 북 대륙의 수호자가 되면 된다.” 너무나 충격적인 말을, 너무나 담담하게 뱉었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핑 돌았다. 나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어떻게든 형의 말을 이해하려 애썼으나 자꾸만 멍한 기분이 엄습한다. 아니.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현재 중앙 관리 기구 수장만 봐도 알 수 있다. 알고 있는 사용자에 한해서, ‘수호자’는 기본적으로 대접받는 존재이다. 홀 플레인의 주요한 흐름이 대부분 전대 수호자의 손을 거쳤고, ‘북 대륙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끈다.’ 라는 목적도 있으니 명분에도 부합한다. 실제로 이효을의 덕을 본 클랜도 적잖고. 그래. 이보다 훌륭한 대안은 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다. “나보고…. 북 대륙의 수호자가 되라고…?” “으음.”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진심이다마다.” 돌연히 바람이 불었다. 방 안까지 침투한 바람은 구석구석을 시원스레 휩쓸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 속에서, 차분한 빛을 띤 한 쌍의 눈동자가 마침내 나를 돌아봤다. “왜?” 순간 멍청하다는 생각이 스쳤으나 반사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왜냐고….” 문득 형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더니 정말로 미안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는, 이 방법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춘추 전국 시대를 건너뛴 의미가 없어져 버릴 것 같으니까.” ============================ 작품 후기 ============================ 아, 드디어 이번 에피소드도 거의 끝나가네요. 사실 워낙 심도 있게 다룰 부분이 많아서 굉장히 고민이 많았는데, 어찌어찌 여기까지 온 게 참 기특해요.(쓰담쓰담) 아무튼, 아마 다음 회, 혹은 다 다음 회를 마지막으로 에피소드 ‘Eight’이 끝나며, 동시에 북 대륙 이야기도 잠시 막이 내릴 예정입니다. 그리고 에피소드 ‘Seven’부터 에피소드 ‘Five’까지는 악마 + 남 대륙 이야기가 주로 진행될 예정이고요. 사실 에피소드 7에서 5까지는 주인공이 출현 빈도가 극도로 떨어지는 부분이라 걱정이 많습니다만, 우선 중요한 사건 위주로 빠르게 전개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일단 에피소드 8 먼저 마무리 짓고, 에피소드 7에 돌입하면 자세히 말씀 드릴게요. 독자 분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 :) 0844 / 0933 ---------------------------------------------- The First Step Toward Return, Eight. 그 순간이었다. ‘…미안하다.’ 문득, 한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내 능력이 부족했다.’ ‘모든 게 생각대로 돌아갔는데….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알 것 같다. 그게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생각이었는지….’ ‘나는…. 총사령관의 자격이 없어.’ 강철 산맥 공략 중이었던가. 쿠샨 토르와의 일전이 끝난 후, 형은 내 앞에서 스스로 책망했다. 나무에 기대앉은 채 힘없이 자책하던 모습이 눈앞에 선명히 떠오른다. 왜 갑자기 그때의 기억과 겹쳐 보이는 걸까. 갑작스레 정적이 내려앉았다.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지는 침묵 속에서, 나는 침착히 머릿속을 정리했다. 우선 내가 밖으로 돌아다니는 동안 형이 많은 생각을 했다는 건 알겠다. 그러니 나도 감정적으로 이끌리기보다는,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는 게 낫겠다. 북 대륙의 수호자. 확실히 좋은 생각이다. 물론 수호자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8할은 넘지만, 어디까지나 일반 사용자의 경우에 불과하다. 현재 북 대륙에 터를 잡은 대형 클랜 중 상당수가 수호자의 덕을 봤고, 그 존재를 알고 있다. 즉 내가 지적한 부분이 깔끔하게 해결되는 것이다. 사용자는 기본적으로 이익을 좇는 존재지만, 이제껏 서로 남남으로 지내다, 갑자기 기록 몇 개 주며 친하게 지내자면 당연히 의심을 품는다. 그러나 여기서 내 신분을 은근슬쩍 밝히면 만사가 OK다. 왜냐면 역사적으로 봐도 수호자가 조건 없이 클랜을 도운 전례는 무수히 많으니까. 결국에는 모든 것이 형의 말대로였다. 과거의 수호자들이 여러 클랜을 전전하며 ‘명분’만 쥐었던 것에 반해, 나는 이미 머셔너리 클랜을, 그리고 이스탄텔 로우, 해밀과 동맹이라는 ‘무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형의 행동으로 ‘민심’까지 잡게 된다면? 역대 어느 수호자보다 강력한 권한을 쥐는 것도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닐 터. 단,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다. 마냥 장밋빛 미래만 생각하기에는 크게 두 가지 걸림돌이 있었다. 우선은 나와 천사들의 사이가 상당히 좋지 않다.(물론 일방적으로 적대하는 내 탓이 크지만 서도.) 그리고 또 하나는 내가 수호자 역할까지 병행할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항상 피로에 절은 이효을을 보며 안쓰럽다 여겼는데, 머셔너리 클랜과 중앙 관리 기구를 겸임하는 건 현실적으로 애로사항이 많다. 한동안 이리저리 저울질한 결과, 결국 한쪽으로 추가 기울었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글쎄. 형도 알고 있겠지만, 수호자라는 역할 자체가 천사의 따까리 성향이 짙어서….” “그래서 네가 하라는 거야. 천사도 너한테는 함부로 못 하는 것 같고, 수현이 너라면 따까리가 아닌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누구보다 말이지.” “으음. 그래도 수호자는 좀….” “흠…. 왜?” “일단 나나 천사나 서로 싫어해서….” “그건 이유가 안 돼.” 형은 차분한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히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서는 안 되기도 하고.” “응?” 잠시 고민하는 낯빛을 보였으나 곧 침착히 말을 잇는다. “이왕 말 나온 김에 덧붙이마. 거두절미하고 말해서, 우리가 악마라는 공통의 적을 두고 있는 이상, 나는 네가 천사와 좋은 관계를 맺었으면 한다.” “…그러니까 어쨌든 천사의 따까리가 되라는 소리 아냐.” “그게 아니지. 내 말을 조금도 이해 못 하는구나.” “…….” 형은 갑갑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달래듯이 말을 이었다. “네가 천사를 적대하는 이유는 이해해. 그리고 싫어하지 말라는 말도 안 했고. 하지만 이런 말도 있잖아?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 상황이 이런 이상, 우리는 천사와 협조하면서 최대한 이용할 필요가 있거든. 물론 속으로는 절대로 믿지 말아야겠지만, 최소한 겉으로나마 ‘척’이라도 하라는 거야. 아마 내가 너였다면, 나는 그랬을 거다.” 긴 설명을 들은 순간, 갑자기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젠장. 이래서 형이랑 말로 싸우기가 싫다. 오늘 단단히 작정하고 찾아온 것 같은데, 내가 빠져나갈 구멍을 논리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워낙 구구절절 옳으니 할 말이 없다고 해야 하나. “그렇기는 한데. 지금 나로서 수호자를 겸임하기가….” “아, 그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응?” “이미 말해놨거든. 네가 수호자가 돼도 기본적인 업무는 이효을이 처리하기로 했고, 중앙 관리 기구 수장 직도 계속 유지할 거다. 물론 대사를 결정하는 일에는 네가 나서야겠지만, 자잘한 일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거야.” 벌써 거기까지 해놓은 건가.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이쯤 되면 형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잖은가. “…너한테는 정말 많이 미안하다고 생각해.” 내 표정을 봤는지 형이 쓰게 웃었다. “안 그래도 복잡할 텐데, 너무 많은 부담을 지우는 것 같아서.” “아니, 그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귀환 계획을 세웠다고는 하나 알고 있는 사람은 전무하고, 어디 기댈 대도 없는 게 현실이었다. 한데 앞가림에 급급해 하는 동안, 형은 알아서 움직여주고 있었다. 실제로 막연하던 계획이 조금씩 구체화하는 기분을 느끼니 외려 고맙다는 생각이 더 컸다. 그러한 찰나, 돌연 미세한 진동 소리가 들리더니 형이 품에서 작은 수정구를 꺼냈다. - 클랜 로드…. 지금…. “음, 음. 그래?” - 네…. 벌써….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 짧게 연락을 끝낸 형은 아쉽다는 얼굴로 푹 한숨을 쉬었다. “수현아. 미안한데….” “아니, 가봐. 괜찮으니까.” 전혀 미안해할 이유가 없다. 오늘 그런 발표를 했으니 바쁘지 않은 게 비정상이다. 형도 한 클랜의 로드이니만큼 꼭 필요한 자리가 있으리라. 어찌 보면 이것도 내 탓이지. 내가 형한테 부탁한 일이니까. “그래, 고맙다. 그럼 한 번 생각해봐.” 형은 두툼한 봉투를 툭 건드리고는 몸을 돌렸다. “아.” 그러나 문을 열기 직전, 우뚝 멈춰서 나를 돌아봤다. “그러고 보니…. 참석했으니까 대답은 들은 거로 해도 되려나?” “대답?” “양자택일.” “아~. 아니, 아직.” 싱겁게 웃으며 머리를 가로젓자 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직도 결정을 못 내린 거냐?” “글쎄. 굳이 지금 선택할 필요가 있나?” “뭐?” “그렇잖아. 아직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온 것도 아니고, 해야 할 일도 천지인데. 김칫국 들이켜는 것도 아니고.” 세라프는 말했다. 경험의 차이로 인한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내 상황과 오묘하게 맞물리는 말이다. 그렇잖은가. 고통과 슬픔으로만 얼룩진 일 회차와는 달리, 지금 내가 있는 이 회차는 확실히 다르니까. “아무튼, 모르겠어. 조금 더 겪어보면 내 생각도 달라질지 모르지. 그때까지 꾸준하게 고민할 생각이야. 왜, 이러면 안 돼?” 형은 살짝 턱을 들더니 무언가 생각하는 듯 느릿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잠시 후. “안 될 건 없지.” 달칵, 문 열리는 소리와 잔잔한 목소리가 겹쳤다. “아니, 차라리 그런 말이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문을 나서기 전, 형은 나를 보며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 형이 떠난 이후, 나도 곧바로 나갈 채비를 했다. 생각은 길었지만, 결정을 내린 이상 굼뜨게 행동할 생각은 없다. 괜히 어물쩍거리다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신전으로 가면서도 오만 생각이 스치기는 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는 하나, 십 년 넘게 이어져 온 선입견이 한순간 씻은 듯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건 요원한 일이다. 여전히 ‘수호자’라는 것 자체가 곱게 생각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형의 뜻은 이해했다. 형은 내가 진정한 의미의 왕이 되기를 바라는 게 아니었다. 한 마디로 정리해보면 구심점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초점을 ‘나’로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여하튼 이렇게까지 멍석을 깔아주는데, 까짓거 못할 것도 없다. 그나저나 수호자는 어떻게 하면 되는 걸까? 이효을한테 연락하기는 좀 그렇고. 어차피 공석이기도 하니 우선은 직접 만나 얘기를 꺼내보면 되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마침내 소환의 방으로 입장한 순간,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칫했다. 왜냐면 중앙 제단에 앉아, 아니 엎드려 누워 있는 천사는 세라프가 아니었으니까. 정작 세라프는 제단 뒤에 다소곳이 서 있었다. 다른 세 명의 대 천사와 함께. ‘곧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문득 아까 들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진짜 왔네?” 그때 생생한 음성이 공간을 웅혼하게 울렸다. 제단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천사는 바로 가브리엘이었다. 나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살짝 미소 띤 얼굴로 꼼꼼히 손톱을 다듬고 있다. “이렇게 왔다는 건…. 수호자가 될 생각이 있다는 건가?” 이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건가. “아니면…. 세라프랑 또 얼레리 꼴레리 하고 싶어서?” 그렇게 생각한 찰나, 흘끗 나를 올려다본 가브리엘이 장난기 가득한 음성으로 물었다. “가, 가브리엘 님.” 세라프가 당황해 하는 동안, 나는 정지한 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잿빛 바닥에 주저앉으며 차분히 앞을 응시했다. 미카엘은 의젓이 눈을 감고 있었고, 쭈그려 앉은 라파엘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으며, 우리엘은 팔짱을 낀 채 나를 노려보고 있다. 세라프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나와 눈을 마주치자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가브리엘은 한 차례 까르르 웃고는 다시 손톱을 다듬는 데 열중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후자라면 자리를 피해 줄 용의는 있는데.” 관심 없는 듯한 말투. 그러나 두 눈동자는 착 가라앉아 있다. “우선…. 내 형과 만난 건가?” “아, 전자인가.” 가브리엘은 피식 웃더니 천연스레 고개를 까닥였다. 두 다리도 연신 까닥거리는 것이 이상하게 거슬린다. “응, 맞아. 사실 그때 좀 놀라기는 했어. 뇌제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우리를 보자 했는지 궁금했거든.” “…….” “근데 지금이 더 놀랍다. 반신반의하기는 했는데, 설마 진짜로 올 줄은 몰랐거든? 너야말로 어떻게 된 거야?” “뭐….” 간신히 말끝을 흐렸다. 차마 말이 나오지가 않는다. 이렇게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뭉클뭉클 치솟는다. 가증스러운 년들. …하지만. “조금….” 참아야 한다. 적어도 지금은 억눌러야 한다. 무조건적인 감정 소모는 좋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고, 형의 말을 기억하자. “생각이 변했다고 할까.” 그 순간 어수선하게 움직이던 가브리엘의 종아리가 멈칫 정지했다. 미카엘이 눈을 뜨고 라파엘은 눈을 반짝였다. 그 순간 겨우 알아차릴 수 있었다. 즉 여기는 시험의 자리라고나 할까. 나는 아직 수호자가 된 게 아니니까. 아마 지금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나를 면밀히 관찰하고 있으리라. “흐~응.” 비로소 가브리엘이 반응을 보였다.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키더니 제단에 사뿐 걸터앉았다.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 상대는 대 천사장. 어설픈 연기나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거의 완벽한 사실 속에 아주 조금의 거짓을 섞으면 되니까. “뭘 듣고 싶은 거야? 나는 여전히 너희가 싫어.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야.” “뭐라고…!” 역시나. 말하자마자 우리엘이 발끈하는군. 이건 끊는 게 낫겠다. “단, 너희를 조금 오해하고 있었다는 건 인정하마.” “오해? 하, 오해라고?” “그래. 오해.” “우리엘, 닥쳐. 아니, 잠깐 조용히 하고 있어봐.” 우리엘이 성난 짐승처럼 노발대발하자 가브리엘이 날카롭게 끊었다. “건방진 놈! 가브리엘 님!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엘?” “저놈이 잠에서 깨어난 순간, 세라프는 장막을 쳤습니다! 대화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보호 마법을 걸었다고요! 심지어 지금도요! 무언가 꿍꿍이가…!” “우~리~엘~?”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으르렁거린 순간, “…내가, 닥치라고, 하지, 않았나?” 살짝 고개 돌린 가브리엘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일 초도 지나지 않아 우리엘의 몸이 얼음처럼 굳었다.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으니, 아마 한 대상에게만 살기를 집중시킨 듯싶다. 눈빛만으로 우리엘을 제압한 가브리엘은, 곧 도로 나를 돌아보며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어디 한 번 계속 말해보라는 듯이.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 자학하는 취미는 없는데, 사실 그동안 맹목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아. 생각해보니까 간단한 일이었는데 말이야. 나는 너희를 싫어하는 것 이상으로, 악마를 싫어해.” “음~. 얼마나 더 싫어하는데?” “눈앞에만 있으면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사실상 증오한다는 말이 옳겠지.” “음, 음.” 가브리엘의 질문에 이어, 미카엘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항상 선봉에서 전투를 이끄는 천사인 만큼 내 말이 마음에 드는 듯하다. “그런데, 이건 너희도 마찬가지 아닌가?” “두말하면 잔소리!” 되물은 순간, 미카엘은 당연하다는 듯이 외쳤다. 그때 불현듯 빤한 눈초리가 느껴졌다. 왜인지 세라프는 대 천사들보다 약간 뒤로 물러난 채, 한껏 긴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친 순간,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 우리엘이 순간적으로 세라프를 돌아본 찰나, “좋아. 그럼 얘기는 끝났네.” 얼른 시선을 거두며 품으로 손을 넣었다. “악마 소멸. 이 목적이 부합하는 이상….” 꺼낸 연초를 입에 물고 씩 웃었다. 선웃음이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물은 완전히 엎질러졌다. 여기까지 온 이상 돌이킬 수는 없다. 그래, 나는…. “수호자로서 너희와 협력할 수도 있겠지.” ============================ 작품 후기 ============================ 김유현의 입장은 사실 이미 한 번 나왔습니다. 810화 초반부를 보면 나오기는 하는데, 아마 귀찮으신 분들이 많으실 거라 사료됩니다. 그러니 후기에 해당 부분을 직접 복사, 붙여넣기를 하겠습니다. 후기는 연재 용량에 포함되지 않으니, 이 부분 너른 양해 부탁 드립니다. * 현재의 북 대륙은 과연 어느 정도 수준일까? ‘대륙’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구 북 대륙에서 얻어낼 수 있는 성과는 대부분 얻어냈다 봐도 무방하다. 대 도시 바바라는 물론, 일반 도시 프린시카, 헤일로, 모니카, 파멜라는 매우 높은 수준의 안정화를 이루어냈다. 북부 소 도시 뮬이 미진하기는 하나, 애초 미개척 지역과 맞닿아 있는 지역이니 어쩔 수 없다. 신 북 대륙 아틀란타의 상황도 엇비슷하다. 강철 산맥을 공략하고 워프 게이트를 뚫은 이후, 선발대는 물론, 구 북 대륙에서 활동하던 전투 사용자의 대다수가 넘어왔다. 북 대륙과 강철 산맥 공략 경험을 발판 삼아, 그 어느 시절보다 활발한 탐험 활동을 벌이고 있다. 아직 안정화라는 말을 꺼내기는 시기상조지만, 안정화됐다고 볼 수 있는 데까지 이르는 속도가 날로 가속이 붙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허면 ‘성’은 어떠한가. 중앙 도시를 관리하는 중앙 관리 기구를 기준으로, 동 도시는 이스탄텔 로우 클랜, 서 도시는 (구) 북부 연합, 남 도시는 머셔너리 클랜, 북 도시는 해밀 클랜이 관리하고 있다. 서로 감정의 골이 깊어 클랜 간 반목하는 현상은 옛날 일이 됐다. 머셔너리 클랜이 부상하고 중앙 관리 기구가 출범한 이후로, 각 도시의 관계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회복됐다. 천지가 뒤바뀌지 않은 이상 해밀과 머셔너리가 서로 등을 돌릴 일은 없다. 이스탄텔 로우는 머셔너리 출범 이후 시종일관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중이고, 구 북부 연합도 딱히 배타적인 행동은 취하지 않는다. 그럼 ‘내부 현황’은? 발전 상황은 썩 괜찮다. 네 개의 외(外) 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내(內) 도시도 발전을 마쳤다. 첫 발견 때 낡고 추레한 외관은 온데간데없고, 깔끔하게 정돈된 신 도시로 부활했다. 기본 베이스가 탄탄할수록 사용자들의 여타 활동이 편해지는 건 자명한 일이다. 이러한 관점들을 종합해보면 북 대륙은 현재 아틀란타를 안정화할 만한 역량이 충분하며, 나날이 강해지고 있다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좋게 보면, 여기까지다.’ 탕. 가볍게 책상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책상에 얹은 손가락이 마치 피아노 치듯 간헐적으로 책상을 두드린다. 일견 무의미해 보이는 행동이지만, 일종의 버릇이라 봐도 좋다. 깊은 생각에 잠겼을 때 종종 나오는 김유현의 습관이다. ‘단순히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라면 지금도 나쁘지 않겠지. 하지만….’ 그렇다. 천년만년 홀 플레인에서 살 것이라면 현 상황은 더할 나위 없다. 그러나 최종 목적이 ‘지구로의 귀환’이라면 얘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현재의 순항에 마냥 앞일을 자신하기에는, 과거의 사정을 들은 김유현으로서는 앞으로 맞이할 미래에 의문이 일었다. 탁 까놓고 말해서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냥 공략만 하면 되는 거라면 왜 김수현이 지금껏 원정 얘기를 꺼내지 않는 걸까. 조금 무리를 한다손 쳐도 제로 코드만 가지면 모든 게 끝나는데. 결국에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밖에는 없다. 이뿐인가. ‘악마’를 생각하면 다가올 앞날은 더 어둡다. 악마를 언급했을 때의 김수현은 그야말로 치가 떨린다는 듯이 말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만만한 놈들은 아닐 터. 이렇게 여러 방해물과 현 상황, 그리고 과거 1회 차의 사용자들을 맞물려 생각해보면 걱정이 아니 들 수가 없는 것이다. 쥐도 궁지에 몰렸을 때 고양이를 문다고 했다. 그러나 악마는 쥐가 아니다. 그래서 더 무섭다. 어떤 미친 짓을 꾸밀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데, 실제로 이룰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럼 과연 악마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고 맞부딪쳤을 때, 북 대륙은 1회 차 시절의 역량을 보일 수 있을까? 대답은 ‘아니오.’. 악마가 출현해 활동하면 ‘원정’이 아닌 ‘전쟁’이 될 가능성이 높다. 두 단어는 의미상 엄청난 차이가 있다. 북 대륙은 ‘단체’로 행동한 횟수가 극히 적다. 바바라 공략, 아틀란타 공략, 그리고 3년 전 연합군과의 전쟁을 예로 들기에는 경험이 너무 부족하다. 특히 강철 산맥을 공략하면서 문제점을 여실히 절감하지 않았는가. ‘이대로는 안 된다.’ 그래서 김유현은 변화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이대로 가만히 흘러가는 대로 놔두기에는 불안하고, 모든 걸 김수현한테 맡기기에는 동생이 안쓰럽다. 최소한 사정을 아는 자신이라도 도와야 한다고, 김유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춘추 전국 시대’의 재현을 계획하는 건 아니다. 그건 정말 멍청한 짓이니까. 여하튼 의도적으로 전쟁을 조장할 수 없는 이상, 다른 방향으로라도 최대한 전투 경험치를 높여야 한다. 그래서 비밀 도서관 내 기록의 3분의 2를 공개하겠다고 했을 때 내심 기뻤다. 혹여 독식한다 하면 어쩌지 심려했으니까.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한참 부족하다. 현재 북 대륙에 가장 필요한 건 사용자든 클랜이든 앞장서서 선도할 수 있는 존재다. 몇 년 전 바바라 공략을 이끌었던 황금 사자의 클랜 로드처럼. 말인즉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소리다. 물론 이에 관한 계획은 이미 어느 정도 세워둔 상태였다. 김수현은 그냥 조건 없이 비밀 도서관 내 기록을 공개하라고 했지만, 김유현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이용할 수 없을 기회였다. 더구나 북 대륙 수호자가 공석인 지금이 외려 최고의 호기가 아닐까. ‘수현이한테는 조금 미안하지만….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 김유현은 기나긴 한숨을 흘렸다. 돕겠다고 한 주제에 어쩌면 더 큰 짐을 지우는 건지도 모른다. 허나 아무리 고민하고 생각해도 대신할 수 있는 사용자가 떠오르지 않는다. 1회 차를 직접 겪고 정상에 오른 김수현이 최고의 적임자였다. 귀환의 첫걸음을 내디딜 준비는 이미 끝났다. 하지만 그전에…. ‘일단 운은 띄워놔야겠지.’ 0845 / 0933 ---------------------------------------------- The First Step Toward Return, Eight. 짝, 짝, 짝, 짝…. 그때 일부러 그러는 듯한, 간헐적으로 끊어치는 손뼉 소리가 소환의 방을 울렸다. “좋아, 아주 좋아….” 가브리엘은 몹시 만족한 낯빛이었다. 아니. 정말로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암암리에 흐르던 예리한 기운이 사라지고, 예의 푼수 같은 기색이 돌아왔으니까. 흡사 전통 가면극을 방불하는 낯짝 변화에 속이 메스꺼웠지만, 간신히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가브리엘은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휘둘렀다. “있잖아 있잖아, 너희는 어떻게 생각해?” “저는 찬성입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건 타오르는 듯한 붉은 단발머리의 대 천사였다. 나를 두루 살핀 미카엘이 점잖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는다. “저희를 싫어하는 점이 걸리기는 하지만, 그 이상으로 악마를 증오한다는 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실제로 이뤄낸 성과도 독보적이지 않습니까?” “응응. 그렇지? 그리고 맹아라 때처럼 불안해하느니, 차라리 얘한테 맡기는 게 깔끔하지 않겠어?” “오, 그렇네요. 사용자 김수현이라면 누구도 함부로 건들 수 없을 테니까요.” “저는 반대입니다!” 훈훈한 말이 오고 가는 와중, 느닷없이 고성이 몰아쳤다. 가브리엘이 눈을 질끈 감으며 귀를 틀어막고, 미카엘은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누군지는 안 봐도 뻔하다. “가브리엘 님! 제가 전에 말씀드린 걸…!” “응~. 글쎄? 상관없지 않으려나?” 무어라 외치려는 찰나, 싱글벙글한 목소리가 스리슬쩍 끼어들었다. “나는 재밌을…. 아니, 괜찮을 것 같아. 히히.” 라파엘은 양손으로 턱을 괸 채 시종일관 쭈그려 앉은 자세로, 천진난만하게 웃어 보였다. 우리엘은 기막히다는 눈으로 입을 뻐끔거렸다. “너무 그러지 마라.” 은근히 말을 건네니 단박에 나를 쳐다봤다. “네 담당 사용자를 죽인 건 미안한 데, 내가 유현아를 괜히 죽였겠느냐고. 죽일만하니까 죽였지. 안 그래?” “무, 무어라고?” “어차피 이미 결정 난 것 같은데, 앞으로 서로 잘해보자는 소리야. 케케묵은 옛 감정은 시원하게 털자고. 너무 인상 구기지 말고. 후.” “이놈!” 허공에 흐르는 연초 연기 사이로 서슬 푸른 빛이 스쳤다. 앙칼진 눈으로 무섭게 노려보는 것이 당장에라도 때려죽일 기세다. …그래, 부디 계속 그런 태도를 보여달라고. 내가 혹시나 하는 기분이 들지 않도록. 지금이야 악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지만, 제로 코드를 얻고 최후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오면…. “보자 보자 하니까…!” “그만, 그만해. 우리엘도 진정하고, 김수현 너도 적당히 긁고.” 가브리엘은 느긋한 태도로 우리를 중재했다. 우리엘은 잡아먹을 듯 씩씩거렸으나 그 이상 나서지는 않았다. 나는 으쓱 어깨를 들췄다. 다음 순간, 선명한 빛무리가 갑작스레 시야를 가렸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뜨니 우리엘이 홀연히 사라져 있었다. 아무 말도 않고 돌아간 건가. “쟤도 참.” 가브리엘은 한 번 쓰게 웃고는 자세를 고쳐 앉고 나를 바라봤다. “그럼 우리도 너를 수호자로 인정은 하겠는데.” 그렇게 말하더니 검지로 턱을 받치며 눈알을 이리저리 굴린다. “음~. 고민이네.” “고민?” “응. 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수호자 클래스 때문에. 이게 나쁘다고는 할 수는 없는데, 사실 지금 네 클래스랑 비교하면 굉장히 떨어지거든?” “어차피 활성화, 비활성화로 선택할 수 있으니까 상관없지 않나?” “그것도 알고 있었어? 맞아. 그런데 좀 아까워서. 무력 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차이점이라고 해봤자 제 3의 눈으로 모조리 커버할 수 있고. 들어보니 당분간 전 전대 수호자가 많은 부분에서 보조해주겠다는 것 같은데, 차라리 걔한테 주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흠….” 확실히 그렇기는 하다. 수호자는 나쁜 클래스는 아니지만, 기타 권능을 제외하면 별로 좋을 것도 없다. 특히 각성 시크릿 클래스인 ‘검의 군주’와는 비교하기조차 미안할 정도였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 “응?” “내가 그 특권을 포기하는 대신, 각성 시크릿 클래스 하나 더….” “아니. 그건 더는 안 돼. 그러느니 그냥 너한테 수호자 권능을 주고 말겠어.” 혹시나 싶어 찔러봤는데 역시나 단호히 거절했다.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는 마. 이제는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으니까.” “…줄 수가 없다고?” “그래. 그때 너한테 네 개 넘기고 나서, 동 대륙과 남 대륙에 세 개씩 뿌렸거든. 너희와 똑같은 방식으로.” “그게 말이…?” “알아. 말 안 되는 거.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 그렇게 해서라도 최소한의 균형은 맞춰야 했으니까. 물론 그냥 무상으로 준 건 아니고, 대륙마다 상응하는 대가는 받았으니 너무 억울해 할 필요는 없을 거야.” “…….” 치밀어 오르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강철의 여황, 마도 황제, 복마전의 성인, 혼돈의 황녀 등등. 장고 끝에 포기했던 것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정말 아쉽지만 이미 뿌렸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그냥 포기하기는 좀 그러네.” “정말, 욕심쟁이라니까. 어차피 쓸모도 없잖아?” “그래도 적당한 보상을 받았으면 하는데.” “뭐, 그게 합리적이기는 하지.” 예상외로 가볍게 수긍한 가브리엘은 문득 제단에서 일어섰다. “그럼….” 눈웃음치며 사뿐사뿐 걸어오더니 살며시 허리 굽혀 얼굴을 들이민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뽀뽀는 어때?” “뭐?” “끌리지 않아? 무려 대 천사장의 입맞춤인데.” “축복 효과라도 있나?” 가브리엘이 눈을 찡긋하려다가 떠름히 맥 풀린 기색을 비쳤다. “아, 재미없어. 그냥 확 기습 키스를 해버릴 걸 그…?” 그때였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가브리엘이 느닷없이 흠칫 몸을 떨었다. 부지불식간에 허리를 펴고는 굉장히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이윽고 떫은 감이라도 씹은 양 움츠러들며 뒤돌아보는 모습을, 나는 멀뚱히 응시했다. 혹시 남근에 키스해줄 생각은 없느냐고 받아칠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미카엘과 라파엘도 갸우뚱하고 있고, 세라프도 시종일관 고요한 얼굴로 서 있는데…. 그 순간이었다. “……!” 순간적으로 본능에 따라 몸이 떨렸다. 언뜻 스치기는 했지만, 분명히 느꼈다. 아니, 확실하게 봤다. “세….” 조용히 서 있는 세라프의 오른손이, “…….” 꽈악 주먹 쥐어진 채, 부르르 떨고 있는 것을. *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신살자(神殺者)’ 김수현(4년 차) 2. 클래스(Class) ① 검의 군주(Arousal Secret, Sovereign Of Sword, Master) – 활성화 ② 북 대륙의 수호자(정)(Guardian Of The Northern Continent) – 비활성화 3. 소속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S Zero) 5. 진명 • 국적 : 1. 검의 군주(君主) 2. 마성(魔性)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8) 7. 신장 • 체중 : 181.5cm • 75.5kg 8. 성향 : 중용 • 혼돈(Moderation • Chaos) [근력 99(+2)] [내구 95(+2)] [민첩 101] [체력 101(+2)] [마력 96] [행운 90(+2)] (잔여 능력치는 0포인트입니다.) ‘결국에는….’ 받고 말았다. 북 대륙의 수호자. 사용자 정보를 보니 한숨과 함께 뜻 모를 어색함이 느껴졌다. 안도하는지, 씁쓸한지 스스로 모를 모호한 기분이다. 하지만 아까 마음먹었듯 이미 일은 벌여놨다. 그런 이상 지나간 일을 후회하기보다는, 선택한 길에 최선을 다하는 게 옳으리라. 이도 저도 아닌 건 사양하고 싶으니까. 그리하여 도망치듯(?) 소환의 방을 벗어나자마자 공교롭게도 머셔너리에서 연락이 왔다. 서 도시의 대형 클랜 하나가 나와의 면담을 요청하며, 성을 방문하는 사용자들이 서서히 늘어날 추세가 보인다는 소식이었다. 예상보다 빠르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아무튼, 일단 면담 요청은 들어오는 족족 내일로 미뤄두고, 늦어도 저녁 즈음에는 돌아갈 테니 간부 회의를 준비하라는 말로 통신을 끝냈다. 바로 가면 좋겠지만, 지금은 어떤 것보다 우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바삐 걸음을 놀렸다. 목적지는 남 도시 머셔너리 캐슬이 아닌, 동 도시 이스탄텔 로우 클랜 하우스. 사실 미리 약속을 잡은 게 아닌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조금 불안하기는 했다. 그리고 안 좋은 예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윽. 어떡하죠. 지금 클랜 로드 님이 안 계시는데….” 염두에 두기는 했지만, 손을 꼼지락거리며 곤란해 하는 박다연을 보니 아차 싶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던가. 하기야 워낙 바쁜 분이니 탓할 거리도 못 된다. 애초 연락도 않고 방문한 내 잘못이지. “저 그럼….” “혹시 바쁘지 않으시면 들어와서 기다리실래요?” “아, 곧 오십니까?” “네. 아마 그럴 것 같은데. 일단 제가 연락해볼게요.” 이렇게 박다연의 손에 이끌린 결과, 나는 응접실도 집무실도 아닌, 무려 한소영의 개인 숙소에 입성하는 영광을 누렸다. 사실 왜 여기로 안내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괜스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박다연이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라며 문을 닫고 나간 후, 나는 실례란 걸 알면서도 살금살금 방을 돌아다녔다. 숙소는 한소영의 성격을 대변하듯 하나하나 각 잡혀 정리돼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예리하게 벼린 칼날처럼 서늘한 느낌이었다. 화려하게 치장한 내 집무실과는 다르게 딱 있을 것만 있다고 해야 하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청결한 냄새를 물씬 풍기는 새하얀 침대 시트를 보며 코를 묻어볼까 고민하고 있을 즈음, 문득 창문 너머로 모종의 기척이 느껴졌다. 스리슬쩍 들여다보니, 눈에 확 띄는 긴 생머리의 여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부리나케 거리를 가로질러 오는 것이 보였다. 거의 뛰는 걸음으로 입구에 도착한 한소영은 잠시 두세 마디를 주고받고는, 곧장 클랜 하우스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곧 올 것 같아 얼른 자리에 앉고 뚝 시치미를 뗐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예상대로 문밖으로 여러 기척이 느껴졌다. 발소리는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다가 문 앞에서 돌연히 정지했다. 이어서 소리 죽여 승강이 벌이는 소리가 들려, 살그머니 청력을 높였다. - 이 안에…. 기다리고…? - 네…. - 왜…? - 왜긴요…. 무릇 남자란 여인의 방에서…. …할 때 정복감을…. …도 몰라요? 워낙 소곤소곤 말하는 터라 자세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한소영이 몹시 당혹해 하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하기야 어느 여인이라도 외간 사내를 숙소에 들이는 건 썩 달갑잖을 터. 좋다고 들어온 나도 문제지만, 박다연도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크게 혼날 것…. - …그래? “?” …………내가, 잘못 들었나? - 하지만 숙소에 준비물이…. - 그건 제가 빌려드릴 테니까…. 잠시 후. 두 인기척은 바람과 함께 사라졌고, 나는 멍하니 방문을 응시했다. 사실 이러나저러나 어쨌든 십 분 안에는 올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방문이 엇갈렸듯 예상도 어긋났다. 십 분은커녕, 이삼십 분을 넘어, 장장 사십 분이 지나서야 겨우 문 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침내 들어온 한소영의 자태는, 아까 창밖에서 봤을 때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우선, 긴 머리카락을 뒷머리로 맵시 있게 올려 묶어 정갈하게 늘어트렸고. 숫제 몸을 가렸던 칙칙한 색의 로브는, 착 달라붙는 깊게 파인 브이넥 원피스로 교체해 폭발적인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어서 오세요.” 한소영은 의례적으로 인사하며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물기를 말끔하게 말리기는 했지만, 코끝을 간질이는 싱그러운 살 내음은 방금 씻고 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촉촉해 보이는 살결이 자아내는 색정적인 분위기에 취한 걸까. 불현듯 목이 바짝 타는 듯한 느낌에 침이 살그머니 넘어간다. “방문하셨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조금 놀랐네요. 많이 기다리셨나요?” “한 사십 분 정도….” “미안해요. 하지만 미리 연락을 주고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렇지요. 제가 무례하게 찾아온 것이니 너무 신경 쓰실 건 없습니다.” 순순히 인정하자 한소영은 새초롬히 턱을 까닥거렸다. “그래요. 저도 외근이 끝나자마자 바로 돌아온 거라서…. 방금 도착하자마자 온 거거든요. 그러니 양해 부탁 드려요.” “예?” “네?” “…아, 아닙니다.” 방금 왔다고…? 그럼 아까 창밖으로 본 여인은 누구지? 설마 숨겨둔 쌍둥이 자매라던가…. “아무튼, 무슨 일로 오신 거죠?” 차갑고 무감정한 음성이 시답잖은 생각 말라는 듯 상념을 일깨웠다. 나는 헛기침과 함께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한소영의 성격을 알고 있는 만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낫겠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네. 거짓말이라고는 하실 줄 모르는 분인데…. “이것을 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애써 찜찜함을 털며 꺼낸 것을 탁자에 놓고 쭉 밀었다. 형이 가져온 비밀 도서관의 기록을 담은 종이봉투였다. 한소영은 손만 움직여 입구를 살짝 열어보고는 흘끗 눈을 치켰다. “이건….” “예. 비밀 도서관이 기록이죠. 이스탄텔 로우 클랜의 몫으로 가져왔습니다.” 한소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상당히 많은데요.” “원래 발견한 서재는 총 세 개였습니다. 그중 두 개는 공개하고, 남은 한 개는 머셔너리, 이스탄텔 로우, 해밀 클랜 이렇게 세 몫으로 나눴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많아요.” “원하신다면 산하 클랜에 조금 베푸셔도 상관없습니다.” 문득 한소영이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려 하다가, 올려 묶은 걸 깨달았는지 멈칫하며 금세 손을 내린다. 포커페이스의 달인인 만큼 쉽사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과거 오랜 시간을 지내온 나는 한소영의 감정 변화를 어느 정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터득했다. 바로 행동으로 말이다. 가령 화낼 때는 눈썹이 움직이거나 미간이 좁아진다. 기쁠 때는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리거나, 몸을 편히 묻으며 다리를 꼬거나, 눈을 깜빡이며 상대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등의 행동을 한다. 방금 같은 경우는 조금 갑갑해하고 있다는 행동으로 볼 수 있겠다. “저도 그 자리에 참석했어요. 제가 알기에는 발견자는 머셔너리 로드로 알고 있는데요.” “그렇습니다.” “비밀 도서관은 북 도시의 관할 하에 있으니 해밀 클랜은 그렇다 쳐요. 혈연관계기도 하고. 하지만 저는….” “음…. 받을 이유가 없다는 말씀인가요.” 한소영은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다. 결국에는 이런 특혜를 받는 게 부담스럽다는 이야기다. 아마 예전 같았으면 또 의좋은 남매로 변신해 볏단을 놓네 마네 한참을 옥신각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제부터는 다르다. “간단합니다. 이스탄텔 로우가 더 성장하기를 바라며, 그럴만한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이게 제가 따로 챙겨드리는 이유입니다.” 같은 대표 클랜인 만큼, 어찌 보면 실례라고 볼 수도 있는 말이다. 여기서 나오는 통상적인 반응은 총 세 개로 볼 수 있다. 발끈하는 사람, 숨기는 사람, 그리고 생각하고 알아차리는 사람. “꼭….” 그리고 한소영은, “수호자처럼 말씀하시네요.” 후자였다. 여기서 숨길 이유는 없겠지. “예. 맞습니다.” 가볍게 긍정하자 나를 바라보던 두 눈이 살짝 치떠졌다. “확실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현재 북 대륙의 수호자입니다.” 그때였다. 정확히 ‘수호자’까지 말을 꺼낸 순간, 딱! 한소영이 곧장 손을 튕기는 동시에 무형의 기운이 삽시간에 방을 감쌌다. 사일런스 필드. 좋은 무영창이다. “…거짓말처럼 들리지는 않는군요.” 엄청나게 빠른 대응에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는 찰나, 한소영이 주변을 훑으며 말했다. 아마 내 말이 거짓이 아닌 진심이라고 느꼈을 터. ‘초감각’을 가진 이상, 진실의 가부를 논할 필요는 없다. “언제부터…. 되신 건가요?” 한소영의 목소리가 조금은 조심스러워졌다. “한 한 시간…? 그 정도 된 것 같습니다.” “…네?” “오늘, 방금 계승했습니다. 사실상 받고 바로 온 거니 이스탄텔 로우 로드에게 가장 먼저 밝힌 셈이네요.” “가장 먼저…?” 한소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침묵하더니 돌연 무심히 눈을 돌려 창밖을 쳐다봤다. 음…. 왜 기뻐하는 거지? “왜요?” “그야 도움을 얻고 싶은 것도 있고, 이스탄텔 로우를 누구보다 믿고 있으니까요. 겸사겸사 찾아온 것도 있습니다만.” “그럼 해밀 로드는요?” “형이요? 글쎄요. 뭐, 형에게도 곧 말해야겠죠.” 나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사실 형은 이미 알고 있는 것과 진배없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그런데 한소영은 조금 다르게 받아들인 것 같다. “그래요.” 돌연히 의자에 등을 기대며 살며시 다리를 꼰다. 이어서 눈을 두어 번 감았다가 뜨며 나를 빤히 응시한다. 이상하네. 왜 아까부터 계속 기쁘다는 신호를, 그것도 연달아 보내는 걸까? 아, 그러고 보니 하나 더 있었다. 정말 어지간한 상대가 아니고서는 나오지 않는 겸상 권유…. “도움을 받고 싶다고 하셨죠.” 한소영의 목소리가 일변했다. 차가운 얼음이 봄바람을 만나 살살 녹아내리듯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후, 어렵군요. 요즘 정말 바쁘지만, 수호자의 요청은 가벼운 사안은 아니니까요. 이 건에 관해서, 좀 더 심도 깊은 말을 나눌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예? 아니 바쁘시면 그냥 이 봉투만 받아주시면….” 찰나의 순간, 한소영의 아미가 꿈틀거렸다. “아, 물론 그렇지요.” 나는 황급히 말을 바꿨다. “혹시, 식사는 하셨나요?” “아, 아뇨. 아직.” “저도 마침 식전이라서. 우선 같이 식사라도 하시며 얘기를 나누는 게 좋겠어요.” “저….” “괜찮아요. 식당으로 갈 생각은 없으니까. 제가 내려가서 가지고 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고 계세요.” “그게….” 그렇게 말한 한소영은 바로 몸을 일으켜 순식간에 문을 열고 나갔다. “…….”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한소영의 기분이 상당히 좋은 듯하다. ============================ 작품 후기 ============================ 원래는 여기서 이어지는 내용이 하나 더 있기는 한데…. 사실 어제 조금 강박 관념(?)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북 대륙의 무대를 잠시 내리는 만큼, 임팩트 있는 내용을 적고 싶었거든요. 나름 생각한 구상도 있었고요. 문제는 집필을 끝내고, 습작에 올리고, 다시 읽는 과정에서 생겨났습니다. 솔직히 지금도 생각하면 창피한데요. 저는 제가 소위 말하는 ‘오글거림’에 좀 면역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어제 마무리 내용은 제가 읽어도 진짜 미치겠더라고요. 하나 말씀드리면, 이것저것 끝내고, 김수현이 폼을 잡고 먼 곳을 쳐다보며 홀로 생각하는 내용이 나와요. 이렇게요. ‘이제 진정한 시작인 건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자동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고, 미친 듯이 방을 돌아다니고, 벽에 머리 쿵쿵 찧고, 괜히 이불을 발로 걷어차는 등등. 여하튼 별별 짓을 다한 것 같습니다. 아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아직 결말이 아니니 그냥 이어지는 내용으로 놔두고, 무난하게 가는 게 좋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아, 후기 적는 지금도 얼굴이 화끈하네요. 0846 / 0933 ---------------------------------------------- Meanwhile, Same Time : Seven 아침만 해도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함을 뽐내던 하늘은, 시간이 흐를수록 붉어져 짙은 황혼을 드리웠다. 노을빛으로 물든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하늘을 뚫어지라 바라보다가, 아래서 나는 소리에 이끌리듯이 시선을 내렸다. 석양이 조금씩 저물어가는 무렵인데도 성의 정원은 어수선한 발걸음으로 가득하다. 이 시간대면 응당 한가로워야 정상이건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번잡함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나흘 전부터라고 해야 하나. 문득 테라스 아래서 남다은이 한 사내와 한창 이야기를 나누는 광경이 보였다. 정확히는 남다은이 쌀쌀맞게 입을 열 때마다 사내가 무척 황공해 하는 얼굴로 꾸벅꾸벅 허리를 굽히고 있다. 청력을 조금 높여볼까. “시간.” “예, 예. 집결 시간은 새벽쯤에….” “장소.” “예, 예. 집결 장소는 서 도시 정문에서….” 아마 해밀에서 비밀 도서관의 기록을 받고 우리 쪽으로 용병을 요청하러 온 사용자 같은데. 남다은의 태도가 건방지기는 하나 개인의 성격이나 스타일에서 비롯된 것까지 간섭할 생각은 없다. 아이러니하기는 하지만 사내도 그런 모습을 보며 믿음직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은가. 하기야 무려 검후니까. 개인이 느끼는 풍모(風貌)는 차치하고서라도, 반투명한 색의 관능적인 얼음 갑옷을 걸친 남다은에 비해 사내의 행색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좋게 봐도 하루 먹고 사는 캐러밴의 리더쯤 되려나? 여하튼 머셔너리 근접 클래스의 수장이자 S등급 클랜원을 용병으로 구매할 여력은 없어 보인다. 원래대로라면 말이다. 말인즉 이제는 가능하다. 내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힌트는 이유정에게서 얻을 수 있었다. 이유정은 단기간에 엄청난 의뢰를 수행함으로써 초고속 등급 상승을 이뤘다. 그렇게 많은 의뢰를 맡을 수 있었던 원인은, 원래 B등급 정도 되는 사용자가 F등급으로 내려가니 가격 대 성능비를 중시하는 사용자들이 몰린 것에 있을 터. 그 점에 착안해 나는 전 클랜원의 등급을 최소 F등급, 최대 C등급으로 맞추라 지시했다. 물론 실제로 등급이 내려간 건 아니고, 용병 대금에 한해서였다. 형은 이번 일의 초점을 무조건 머셔너리에 맞추겠다고 했으며, 실제로 나흘 동안 무수한 사용자가 찾아왔다. 그러나 대금 가격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 더 확실하게 끌어당기기 위하여 특별히 조처한 것이다. 클랜원들도 큰 불만은 없었다. 원래 받아야 할 가격에서 받지 못한 금액은 클랜 재정에서 메워주겠다고 했으니까. 아무튼, 결과적으로 요금 인하 정책의 효과는 확실했다. 당장 지금만 봐도 성 구석구석 바쁜 기색이 느껴졌다. 비단 남다은뿐이 아니라, 의뢰인을 정중히 배웅하는 차소림이나 묵묵히 설명을 듣고 있는 우정민, 자신만 믿으라며 가슴을 탕탕 치는 하승우 하승윤 남매 등 클랜원들도 활발하게 움직이는 중이다. 나로서도 최고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의뢰를 많이 맡을수록 성공 시 떨어지는 보상도 기대할 수 있는데, 그중에는 장비 품목도 포함돼 있을 터. 즉 북 대륙의 수준을 높이는 동시에 머셔너리 클랜도 한층 강화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셈이니까.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누가 듣지도 않건만 혼잣말하며 다시 하늘로 시선을 올렸다. 이 현상에 관해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어찌 보면 지금 밟아가는 단계는 일종의 당겨쓰기라고 볼 수 있겠다. 원래는 몇 년 후 밝혀질 비밀 도서관을 미리 발견하고 공개해, 아틀란타의 유적을 빠르게 공략한다. 그리고 머지않아 아틀란타가 구 북 대륙처럼 포화 상태에 이르게 되면…. “그때는….”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뉘엿뉘엿 넘어가던 해는 어느새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환하게 불타올라 온 세상을 자줏빛으로 물들였다. 설마 밤까지 있고 싶지는 않은 모양인지, 조금 전 수선하던 정원이 조금씩 잦아드는 느낌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성내가 완전히 잠잠해지기 전까지, 점차 어둑한 땅거미가 깔리는 정원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서 있었다. * Meanwhile, Same Time : Seven 한편, 같은 시간. “그래서….” 루시퍼는 자신의 앞에 부복한 덩치 큰 마족을 응시하며 심드렁히 입을 열었다. “성공했다는 건가?” 대 악마의 물음. 어떤 질문이든 간에 바로 아랫급의 악마 14 군주도 아닌,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면 마족이라면 즉각 입을 열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마족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 잠깐 머리를 들기는 했으나 갈등이 역력한 낯빛으로 우물쭈물하는 중이다. 루시퍼는 갑갑하다는 기색을 비쳤지만 이런 일로 화를 내는 성격은 아니었다. 대 악마로서는 드물게 말이다. “성공했으니까 모이라는 거겠지?” “그, 그게….” 마족이 살짝 눈을 치떴다가 곧바로 내리뜨며 말을 잇는다. “아시다시피 워낙 봉인이 심한 터라….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고…. 그냥 겉으로만 확인하기에….” “정보가 차단됐다는 소리군. 그럼 실패 아닌가?” “그, 그렇지는 않습니다. 실패 시 발생하는 특유의 현상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벨리알 님과 같이 굉장히 안정된 상황입니다.” “…….” 이도 저도 아닌, 뭐 하나 확실하지 않은 말이다. 루시퍼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니 마족은 금세 머리를 수그렸다. 기실 루시퍼도 이 소식을 기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좋은 의미에서의 기다림이 아니었다. 두려운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한없이 불안하고 조마조마하다. 마치 안 될걸, 실패할 걸 알면서도 복권을 들고 당첨을 기다리는 그런 기분. 그냥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결국 루시퍼는 권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모두, 모였다고.” “예, 예! 루시퍼 님을 제외한 다섯 분 모두가….” “안내해라.” “알겠습니다!” 혹여 마음이 바뀔세라 마족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 이윽고 조심스레 선도하는 마족을 따라가며 루시퍼는 긴 한숨을 흘렸다. 가는 동안, 어둠이 그늘진 눈을 지그시 감아 서서히 상념에 잠겨 들었다. ‘그때 회동이 끝나고….’ * < Reminiscence > “사탄! 사탄!” 악마 14 군주, 혹은 이하의 마족들이 봤다면 놀라 자빠졌을 법한 광경이 벌어졌다. 언제나 차분하고 느긋한 태도를 보이는 걸로 유명한 루시퍼가, 헐레벌떡 계단을 뛰어 내려가고 있었으니까. 아마 직속 휘하의 마족들이 목격했다면 정말 조물주가 맞는지 감히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다는 양, 루시퍼는 그저 계단을 내려가는 데만 집중했다. 흡사 막 이별을 통보한 연인을 쫓기라도 하는 것처럼. 잠시 후, 루시퍼는 간신히 계단 끄트머리에서 사탄을 붙잡을 수 있었다. 터덜터덜 걸어가던 사탄도 기척을 느꼈는지 잠시 걸음이 느려졌다. “사타아안!” 루시퍼가 벼락같이 소리 지르자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본다. “흠. 주인이 있는 공간에서는 함부로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게 네 원칙 아니었나. 루시퍼?” 사탄이 차분히 말을 걸었으나 루시퍼의 기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외려 무시무시한 눈으로 쏘아보며 속을 추스른다.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게 아니라, 너무 많아 어떤 것부터 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결국에는 가장 함축적인 질문을 하나 정하고 말을 잇는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으음?” “방금 회동 말입니다. 어째서 속행 결정을 내렸느냐는 말입니다!” “……?” 끝에 가서 다시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사탄은 진정으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루시퍼가 더는 말을 않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상하군. 우리는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해 회동을 개최했고, 투표 결과 이 대 오로 속행하자는 쪽의 의견이 많았지. 철수는 루시퍼 그대와 나밖에 없었어.” “사탄도 속행해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투표 결과에 상관없이, 결정권은 사탄한테 있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 그럼 내 결정에 불만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루시퍼가 파르스름한 안광을 뿜었다. 말투도 상당히 도전적인 투였다. 그러나 사탄은 재밌다는 듯이 씩 미소 지었다. “나쁠 것 없지. 타락 천사의 도전이라면 분명 즐거울 것 같으니.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세력 다툼은 조금 참아줬으면 하는데.” 소름 끼칠 만큼 평온한 대답에 루시퍼는 얼이 빠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사탄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농담이다.” “사탄. 오, 제발….” 루시퍼는 입을 달싹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색함을 느꼈다. 항상 어둡고 은밀하던 사탄에게서 갑자기 까닭 모를 활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유심히 관찰한 루시퍼는 이내 몸을 흠칫 떨었다. 어디까지나 짐작에 불과하지만…. 비슷하다고 느꼈다. 대계의 예언이 내려온 이후, 루시퍼는 딱히 신경 쓰지 말자는 입장이었다. 정확히는 중립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상황이 차차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스스로 입장을 명확히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냉철한 이성은 무조건 속행보다는 좀 더 확실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판단을 요구했다. 그래서 악마 14 군주라는 귀한 자원을 낭비하면서까지 사건을 만들었고, 보기 좋게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여러 정보를 얻고 철수 쪽으로 입장을 정리하기는 했지만, 플루톤과 프로세르피나의 소멸이 어마어마한 타격임은 부인할 수 없다. 단, 루시퍼는 그때의 일을 일종의 투자로 생각했으며, 안배하는 과정 자체서는 즐겁다는 감정을 느꼈다. 한데 그때의 자신과 지금 사탄이 모습이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그래, 사탄은 분명 즐거워하고 있다. 그렇게 느낀 순간 루시퍼의 뇌리에 ‘막아야 한다.’ 는 생각이 스쳤다. 한 번 작정한 사탄이 무슨 일을 벌일지는 누구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탄. 냉정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저들은 현 상황을 손톱만큼도 모르고 있어요. 하지만 사탄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와 같이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화정과 겁화가 붙었습니다. 하나만 붙어도 기겁할 판에, 둘이나 붙었다는 말입니다. 그 강력한 바알도 끽소리도 못하고 귀중한 목숨 하나를 헌납했다고요.” “맞아.” “이뿐만이 아닙니다. 추측이라고는 하지만, 저는 확신하고 있어요.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나, 김수현 그놈은 분명 우리를 알고 있습니다. 이제 왜 대계가 패배할 거라고 예언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자만심에 젖어 여유를 부리는 동안, 놈은 착실하게 우리의 안배를 제거하며 세력을 키웠습니다. 마계라면 모를까, 홀 플레인에서는 이제 우리도 장담할 수 없을 거라는 말입니다.” “음.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탁 까놓고 말해서 우리 편이 없습니다. 심지어 시간조차도 놈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막말로 아틀란타에서 충분한 힘을 비축하고 테라로 진군한다면, 그때는 어쩌실 작정입니까?” “후후.” 장황히 말을 잇던 루시퍼는 당황한 얼굴로 사탄을 응시했다. 조목조목 설명함에도 반문은커녕, 모조리 인정하고 있다. 그 당당한 태도는 들끓던 머리를 차갑게 식혀주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루시퍼가 한층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옥 대공 소환 이후, 저를 제외한 모든 대 악마가 북 대륙을 포기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이 남 대륙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도요.” “주시가 아니라, 이미 손을 댔지.” 사탄은 시종일관 미소를 머금은 채 스리슬쩍 말을 정정했다. “아무튼, 좋습니다. 그럼 무언가 수라도 있는 겁니까?” “수?” “수든 생각이든, 뭐든 좋습니다. 사탄에게는 이 상황을 타개할, 그러니까 이길 자신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음….” 사탄은 침음을 흘리며 느릿하게 턱을 쓰다듬었다. “실례인 건 알지만 듣고 싶습니다. 아니, 꼭 들어야겠습니다.” 루시퍼는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듯 굳은 얼굴로 상대를 응시했다. 이윽고 사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숨을 깊숙이 들이켜며 천천히 머리를 젖힌다. “아니.” 루시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예?” “글쎄…. 나도 영 생각이 나지 않아서.” “사탄.” “설령 남 대륙을 손아귀에 넣는다고 해도…. 사실 별로 승산이 보이는 건 아니야. 동 대륙보다야 훨씬 낫지만, 역시나 차이가 있어. 혹시 북 대륙 놈들이 우리처럼 성공에 자만해 아틀란타에 몇 년간 안주 해주지 않으려나…. 이런 생각밖에는 안 들더군.” “지금 무슨…?” “뭐, 어쨌든 대계의 예언이 맞았다는 소리겠지.” 그렇게 말한 사탄은 돌연 단숨에 머리 숙여 상대를 직시했다. “그래…. 루시퍼.” 갑작스러운 시선에 루시퍼가 흠칫한 찰나, 사탄의 시뻘건 동공이 쭉 찢어지며 요요한 빛을 발했다. “우리는 이미 패배했지. 안 그래?” ============================ 작품 후기 ============================ 사건의 시작. 에피소드 7 시작하겠습니다. 0847 / 0933 ---------------------------------------------- Meanwhile, Same Time : Seven < Reminiscence(2/2) > 완전히 말문이 막혔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나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사탄은 현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또 인정하기도 했다. 심지어 패배했다는 대계의 예언까지 받아들였다. 그런데도 속행을 하겠다? 왜? 루시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설마…. 그런 겁니까?” “그런 거?” “졌지만 이대로 물러나기에는 아쉬우니까, 자존심이 상하니까. 그래서 몸부림이라도 쳐보겠다는 거 아닙니까.” “…흐흐흐흐.” 그러자 사탄의 동공이 가늘어지며 소슬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루시퍼는 차가운 눈으로 상대를 응시했다. 물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고, 아직 사탄을 의심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정말로 그런 생각입니까?” 아주 조금이라도 긍정 비슷한 대답이 나오면, 결사적으로 저지할 것이다. 그래도 속행한다면 최소한 자신만이라도 철수할 생각이었다. 소리는 곧 멎었으나 사탄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루시퍼. 상당히 재밌는 말도 할 줄 아는군. 설마 내가 그럴 거라 생각한 건가?” “애매한 대답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루시퍼는 사탄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원하는 건 하나. 사탄이 어떤 의도로 속행 결정을 내렸는지 알고 싶을 뿐이다. 단순히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주먹구구식으로 이끌려가는 건 사양하고 싶었으니까. “후후. 뭐 떠나기 전 발악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때 사탄이 앞을 돌아보며 느긋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어라 말하려던 루시퍼는 반쯤 열린 입을 닫았다. 이대로 떠나려는 게 아닌, 걸으면서 얘기하자는 무언의 신호를 느꼈다. 잠시 후. “가능성….” 말문이 다시 열린 건, 계단을 완전히 내려갔을 즈음이었다. “아직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가능성…. 이요?” 루시퍼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어떤 점에서?” “흠. 혹시 인간의 속담 중 역지사지라는 말을 아나?” “알고 있습니다.” “생각을 한 번 해봤거든. 네 추측이 맞는다고 가정하고, 내가 김수현이라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 이렇게 말이야.” “…….” “아마 나라면 지금처럼은 하지는 않았을 것 같더군.” 사탄이 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말을 잇는다. “철저히 의도를 숨기고, 어지간하면 원래대로 흘러가게 놔두었을 것 같아. 물론 비밀리에 나름의 준비는 해야겠지.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때가 왔을 때, 그때 쾅하고 한 번에 터뜨렸을 거야.” “음….” “그렇게 됐으면 아마 정말로 답이 없었을걸? 모르는 상태에서 얻어맞는 일격은 꽤 뼈아프니까. …어때, 루시퍼. 이 두 상황의 차이점을 알겠나?”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차이점은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 감이 잡히지 않는군요.” 아리송해 하는 음성에 사탄은 씩 미소 지었다. “요지는 이거야. 늦기는 했지만, 우리가 지금이나마 알아차렸다는 거.” 루시퍼는 계속 입을 닫은 채 말을 경청했다. 여전히 머릿속은 어두웠지만, 사탄의 말은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 “알아차린 이상, 대책을 세울 수 있다. 대책을 실행할 수만 있다면,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 간단한 일 아닌가.” “말로는 간단하지요. 그래서, 그 대책이라는 게 도대체 뭡니까?” “글쎄.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어.” “…예?” “지옥 대공 소환 이후, 약속한 대로 북 대륙은 포기했잖아?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남 대륙만으로는 부족하고.” “확실히,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렇지. 어쨌든 우리가 아쉬운 처지이니만큼 상황을 하나로 국한할 수가 없어. 이용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 우리는 물론, 동 대륙, 서 대륙, 남 대륙…. 전부를 말이지.” “으음, 동남 대륙은 잘 모르지만…. 서 대륙은 이미 저희 손에 떨어지기는 했습니다만, 이미 효용 가치가 다하지 않았습니까.” 루시퍼가 갸웃하며 묻자 사탄이 설레설레 머리를 젓는다. “말하지 않았나. 쓸 수만 있다면 모조리 사용한다. 비루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라서.” 그 말은 루시퍼도 공감하는 바였다. 단 쓸데없는 일에 심력을 낭비할까 걱정했을 뿐. “중요한 건, 여기서 하나라도 어긋나면 안 된다는 거야. 모든 것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갈 때, 그제야 간신히 만들 수 있다. 예언마저 날려버릴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를.” 사탄의 말이 이어질수록 의문이 시원스레 해결되기는커녕, 외려 의구심이 한층 커져만 간다. 그러나 루시퍼는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점차 낮아지는 사탄의 목소리에서 무언가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부족하다는 생각은 여전해. 동 대륙은 발전 상황이 굉장히 낮고, 서 대륙은 이미 폐쇄됐지. 그나마 남 대륙이 비슷하기는 해도 역시 차이가 있어. 사실 조금 궁금하기도 해. 같은 종족이면서, 왜 유독 북 대륙만 이렇게 독보적인 건지….” 안타깝다는 듯이 말한 사탄은 돌연 킬킬거리는 소리를 흘렸다. “그러니까 급기야 이런 생각이 들더군.” “……?” “일반적인 방법으로 이 상황을 어찌할 수 없다면…. 결국에는 우리도 어느 정도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고.” “리스크, 말입니까?” 루시퍼가 순간적으로 반문했다. 가만히 듣고만 있으려 했지만, 도저히 흘려 들을 수 없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사탄의 말은 간단하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현재의 불리함을 역전할 수 없다.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만한 새로운 카드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카드를 얻기 위해서는….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베일에 싸인 속행 결정의 진의가 드러난다는 생각에 루시퍼는 뜻 모를 긴장감마저 느꼈다. 사탄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방법 자체는 간단해. 우리로만 예언을 바꿀 수 없다면, 그 예언마저 뒤집을 수 있는 존재를 끌어들이면 돼. 말인즉 외부의 힘을 빌리자는 거야.” “외부의 힘이요?” “그래…. 설령, 우리가 나서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야.” “우리가 나서는 한이 있더라도요…?” “흐흐. 꼭 피조물이나 악마 십사 군주만 씨앗이 되라는 법은 없으니까. 안 그런가?” “!” 그 순간이었다. 끊임없이 사탄을 뒤따라가던 걸음이 갑작스레 정지했다. 한껏 가늘어졌던 눈이 순식간에 화등잔만 하게 떠지고, 두 눈동자로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완연히 떠올랐다. 아직 말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머리 회전이 빠른 루시퍼는 마지막 말로 인해 사탄의 진의를 조금이나마 알아차린 것이다. 흘끗 눈을 올리며 놀란 숨을 들이켰다. 하염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사탄의 근거지에 도착한 상태였다. 아스라이 멀어지는 한 악마의 뒷모습을 보며 루시퍼가 멍하니 손을 뻗는다. “사…!” “루시퍼. 이걸 기억해라.” 그러한 찰나, 무거운 음성과 함께 사탄의 걸음 또한 멈춰졌다. “지옥 대공 소환은 실패가 아니었다는 걸.” 그렇게 말한 사탄은 느릿하게 루시퍼를 돌아봤다. “…나는, 그 과정에서 가능성을 봤다.”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이 까닥 앞을 가리키고는,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 “저….” 한창 상념에 잠겨 있던 루시퍼는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도착했습니다.” 이미 몇 개월도 더 된 일을 회상하는 동안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다. 루시퍼의 눈앞으로 어둠에 휩싸인 입구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곳에서는 하찮은 마족과는 비할 수조차 없는 짙은 마의 기운이 물씬 흘러나오고 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무려 다섯 개나. ‘이미 모여 있다고 했던가….’ 루시퍼는 걸음을 재촉하며 입구를 통과했다. 안쪽 공간에는 마족에게 들었던 대로 다섯의 존재가 모여 있었다. 하나 특이한 건,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리리스, 바알, 벨제부브, 아스모데우스, 아스타로트…. 회동만 열면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지 못해 안달하던 대 악마들이, 오늘따라 웬일로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어둠이 흐르는 허공을 하나같이 망연한 눈으로 응시하는 중이었다. 기척을 느낀 걸까. 잠시 어수선한 소음과 함께 몇몇 대 악마가 입구 방향을 돌아봤다. 루시퍼는 정중히 머리를 숙이며 담담히 다가갔다. “…어떻습니까?” 루시퍼의 음성은 낮았지만, 워낙 조용한 공간이라 모두의 귀를 미세하게 울렸다. 하지만 할 말을 잃은 듯이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는다. 오직 리리스만이 어색하게 볼을 긁으며 살짝 자리를 비켜줬다. 루시퍼는 리리스가 내어준 자리로 걸어가며 계속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곳에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심히 요동쳤지만, 결국 자리에 서서 가만히 어둠을 응시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여섯이나 되는 개체가 사슬에 얽히고설켜 허공에 매달려 있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이 여섯 존재는 모두 ‘마족’이 아닌 ‘악마’였다. 여담이지만, 사탄은 모든 악마의 왕이라는 칭호답게 악마 14 군주 중 다섯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다. 한데 그 전원이 허공에 걸려 있는 것이다. 한둘이 아닌, 무려 다섯이다. 기실 사탄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넌 것과 진배없었다. 루시퍼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추스르려 애쓰며, 왼쪽부터 한 명씩 차례대로 확인하기 시작했다. 가프, 사브나크, 아몬, 포르네우스…. 그때였다. 다섯 번째로 벨리알까지 확인한 찰나, 루시퍼의 이마가 와짝 찌그러졌다. 악마를 휘감은 사슬은 사지는 물론 전신을 가리고 있었으나, 사이사이 틈으로 보이는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벨리알의 경우, 앞선 악마 14 군주의 상태와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네 악마가 씨앗 이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에 반해, 벨리알은 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특히 가슴에 일직선으로 그어진 선명한 자상과, 복부에는 아로새겨진 수십의 흉터가 유독 눈에 띄었다. 흘러내린 핏물을 머금은 사슬은 검붉은 빛으로 변색했을 정도였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제가 듣기로 벨리알은 분명…!” “저항했다는 거겠지. 선 성향의 힘을 가진 인간이었나 봐.”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누군가 덤덤히 뇌까렸다. 아스타로트가 연초를 입에 문 채 망연히 앞을 바라보고 있다. 루시퍼는 단호히 머리를 흔들었다. “말도 안 됩니다. 고대 악신을 잠식할 때도….” “그놈은 잠들어 있었다며. 이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지 않나.” 힘없이 말한 아스타로트는, “그리고….” 문득 말을 흐리며 스리슬쩍 왼쪽을 쳐다봤다. 붉은 눈동자는 언제나 뿜어내던 이글거리는 분노가 아닌, 뜻 모를 씁쓸함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벨리알은…. 그나마 양호한 거야.” 이어지는 말을 들은 순간, 루시퍼의 머리가 멈칫 떨렸다. 반사적으로 옆을 돌아보려다가 자신도 모르게 흠칫한 것이다. 처음 들어왔을 때 눈대중으로 확인한 사슬에 얽힌 형상은 총 여섯이었다. 그러나 아직 다섯까지밖에 확인하지 못했다.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것이 누군지는 루시퍼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순간 오만 생각이 스쳤다. 루시퍼의 낯에는 그 어느 때보다 갈등의 빛이 또렷이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곧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덜덜거리면서도 왼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 순간이었다. 빠득!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힘주어 마주 문 입에서 이 갈리는 소리가 흘렀다. 그뿐만 아니라, 꽉 쥔 양 주먹에서도 우두둑 소리가 요란하게 터졌다. 사정없이 떨리던 눈동자는 진정되기는커녕, 더욱 심하게 흔들리며 강한 불신의 빛을 뿜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스타로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용히 연초를 우물거렸다. 왜냐면, 그곳에는…. “…사탄?” 차마 사탄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웬 걸레와 같은 형상이 걸려 있었으니까. ============================ 작품 후기 ============================ 전 회 게헨나에서 지옥 대공으로 수정했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독자 분들 말씀이 맞았네요.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_(__)_ 음. 꽁냥꽁냥도 좋지만, 지금은 진도에 집중할 때인 것 같아요. 하하. 이렇게라도 뽑지 않고 계속 북 대륙 이야기만 다루다 보면, 정말로 완결이 나지 않을 것 같거든요. 이제는 정말로 가야 할 때인 것 같아서요. 나중에 중요 사건이 끝나면 또 나올 기회가 있으니, 지금은 너른 양해를 부탁 드릴게요. :) 악마 이야기는 다음 회 초 중반에 끝날 계획이고, 이후 바로 남 대륙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피소드 7에서 5로 갈수록 점차 빠르게 진행될 예정이에요. 정확히 에피소드 4부터 주인공의 시점이 돌아옵니다. 물론, 그때는 이미 여러 사건이 벌어져 있겠지요. PS. 청섬백 / 그래도 최종적 들인데... 앞으로 분발하길. 사탄 : 감사합니다…. 0848 / 0933 ---------------------------------------------- Meanwhile, Same Time : Seven 가슴은 날카로운 손톱이 훑고 지나간 것처럼 서너 개의 줄이 고랑처럼 길게 패여 있다. 상흔은 상당히 깊어 희멀건 한 뼈까지 언뜻 비쳤다. 게다가 사슬이 상처 안쪽까지 들어가 헤집었는지, 철쇄 고리는 살점이 덕지덕지 붙은 채 깊숙이 틀어박혀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한쪽 팔은 죄어드는 사슬을 견디지 못한 듯 아예 몸에서 분리된 상태였다. 사지가 그렇게 갈가리 뜯긴 채 찢겨 늘어난 근육으로 간신히 이어진 형상은 몹시 끔찍했다. 바닥에 얼룩지다 못해 질척거리는 검붉은 웅덩이는 당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러내렸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이래서야 아까 마족이 우물쭈물하던 걸 탓할 수도 없다. 사슬의 움직임이 멈췄다는 건 씨앗의 발아가 성공했다는 현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금 사탄의 모습은 보이는 그대로 걸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도저히 살아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쩌면 목숨 하나, 아니 두 개 모두 잃었을지도 모른다. 불안이 확신으로 변한 순간 루시퍼의 얼굴에 급격히 어둠이 그늘졌다. 이제껏 줄곧 걱정해왔으나 애써 외면해왔던 사실과 마주하자 갑작스레 가슴이 무거워졌다. 왜인지 뜻 모를 부담감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 루시퍼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리리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살아 있는 걸까?” “살아는 있지.” 퉤, 우물거리던 연초를 뱉어낸 아스타로트가 묵묵히 대답했다. 어찌 보면 예사로운 대화는 아니었다. 서로만 보면 불꽃을 튀기던 두 악마가 선선히 말을 나누는 건 확실히 놀라운 광경이다. 다만 지금은 그보다 더 큰 놀라움에 묻혀 있을 뿐. 천천히 입맛을 다시던 아스타로트는 흘끗 옆을 흘겼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지?” 사실상 현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안건이었다. 다섯 쌍의 눈초리가 한곳으로 쏠렸다. 그러나 루시퍼는 미동도 않은 채 계속 허공만 바라보고 있다. “루시퍼?” “…….” “루시퍼!” “…….” 몇 번을 불러도 반응이 없다. 마침내 아스타로트의 눈동자에 분노가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하나하나가 올올이 곤두서더니 인중을 우직 일그러뜨린다. “꼴이 참 우습지도 않군. 그렇지 않나?” 문득 높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홀 플레인에 내려올 때만 해도 유리하던 상황은 어느 순간 뒤집혔고, 지금 어쩔 줄 몰라 하는 우리 모습이 우습지도 않느냐는 말이야. 응? 그리고 사탄은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된 거지? 뭘 기대하고?” “아스타로트.” 바알이 입을 열었다. “나는 최소한 루시퍼가 자신의 역할을 잘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러나 한 번 열린 말문은 터진 물꼬처럼 물 흐르듯이 이어졌다. “그런데 저 반응은 뭐지? 왜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따지듯이 말하는 아스타로트를 보고 있자니 리리스도 서서히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적당히 해. 너도 처음 봤을 때 놀랐잖아? 그리고 사탄은 분명 나한테, 우리한테 말했어. 앞으로….” “내가 들은 건 루시퍼의 말을 따르라는 것밖에 없었다고!” 아스타로트가 벌컥 고함을 질렀다. 어두운 공간이 분노에 찬 음성으로 떠르르 울렸다. “웃기지도 않아? 그래, 사탄은 그렇다고 쳐. 한데 속행을 반대한 루시퍼가 후임을 맡는다고? 젠장, 그래 놓고서 왜 저따위로 서 있는 거냐고!” “아스타로트!” 바알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이번에는 아스타로트도 못 들은 척하지 않았다. 휙 머리 돌려 검게 타오르는 눈으로 노려봤다. 바알도 지지 않고 서슬 퍼런 안광을 뿜으며 맞대응하자 순식간에 긴장감이 치솟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시커먼 불똥이 튀기는 동시에 아스타로트가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사탄은 그랬습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갑자기 낮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러자 바알도, 아스타로트도. 또 한 번 다섯 쌍의 눈동자가 돌아갔다. 시선이 몰린 곳에는 루시퍼가 한결 침착해진 얼굴로 두 악마를 돌아보고 있었다. “알고 있는 이상, 대책을 세울 수 있다고.” 그 순간 솟구친 긴장감이 삽시간에 사그라졌다. 아스타로트는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으나 살그머니 손을 내렸다. 루시퍼의 음성은 어딘가 공허하고 무기력하게 느껴졌지만, 한편으로 굉장히 침착했다. 다시 고요를 되찾은 공간에서 루시퍼가 나직이 말을 잇는다. “대책을 세울 수 있는 이상, 기회를 만들 수 있고.” “우리는 물론, 동, 서, 남 대륙. 그리고 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힘까지. 사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해야 한다고.” “단 하나라도 어긋나면 기회는 만들 수 없다고.” “지옥 대공의 소환 계획은 실패가 아니었다.” 거기까지 말한 루시퍼는 돌연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오히려 거기서 가능성을 봤다고.” 말이 끝남과 동시, 천천히 이동하던 시선도 어느 한 곳에서 우뚝 멎었다. “아스타로트.” 이름이 불린 순간 아스타로트가 움찔했다. 무어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 속에서 루시퍼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하겠습니까?” “뭐?” “사탄의 생각은 제가 알고 있습니다. 계획도 전부 알려드리겠습니다. 제가 맡는 게 불안하다면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 무척이나 태연하고 평온한 목소리다. 실제로 루시퍼는 화를 내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터럭만치의 비꼼 없이 진심으로 물어보고 있었다. 왜냐면 아스타로트를 이해하니까. 모든 악마의 왕이라는 사탄이 저 꼴이 됐으니 초조하고 불안한 것도 이해가 간다. 아무리 대 악마라도 말이다. 무엇보다 회동 직후의 자신도 딱 저 모습이었다. 그 감정을 조금이라도 느낀 걸까. 한동안 루시퍼를 응시하던 아스타로트는 살그머니 눈을 돌렸다. 이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리리스는 남몰래 안도의 숨을 흘렸다. “그래서. 어떻게.” 차분히 숨을 돌린 바알도 물었다. 사탄 다음가는 이인자가 인정했으니 더 이상 왈가왈부할 필요도 없었다. “사탄이 그랬습니다.” 또 한 번 같은 소리가 이어졌다. “남은 기회는 한 번이며, 자신이 그 기회를 만들어주겠다…. 아니, 만들어보겠다고요.” 만들어주겠다, 만들어보겠다. 언뜻 들으면 비슷한 어감이나 두 말은 확실한 차이를 갖고 있다. “발아에 실패했을 때는 두 번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철수하라고 했지만….” 씁쓸히 허공을 응시하던 루시퍼는 문득 눈빛을 번쩍였다. “…속행, 하겠습니다.” 이 한순간, 루시퍼의 기세가 일변했다. 낯빛 자체는 담담해 보이지만 두 눈동자는 순간적으로 형형한 빛으로 물들었다. 흡사 광인의 그것처럼. “기회를 만드는 게 사탄의 역할이라면, 기회를 잡는 건 우리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그 기회가 오기까지, 각자에게 부여된 역할이 있습니다.” 루시퍼는 역할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항상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악마에게는 생소한 단어였다. “저는 지금 이 순간 바로 사탄의 안배를 위해 행동할 생각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건, 이번 계획은 우리 일곱 세력의 힘을 하나로 모으지 못한다면 무조건 실패할 거라는 겁니다. 지금부터는 단 한 치의 오차도 용납지 않습니다. 정교히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모든 것이 사탄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차라리 여기서 포기하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장황히 이어지던 말이 끝났다. 길기는 했으나 루시퍼가 말한 의미는 간단하다. 믿고 따라올 수 없다면 이만 끝내자는 소리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속행에 찬성한 다섯 악마는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침묵은 긍정이라는 말이 있다. 한참을 기다린 루시퍼는 이내 느릿하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이날.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마계의 역사상, 처음으로 대 악마들이 손을 잡았다.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 신화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라그나로크는 ‘신들의 황혼’이라는 뜻으로, 아득한 신화 시절 신들에 의해 벌어졌던 최후의 전투를 일컫는다. 그러나 지리학적 관점에서 말해보면 남 대륙에서 북진하면 등장하는, 정확히는 험난한 여러 산봉우리와 그곳에 자리 잡은 ‘오크 성’을 넘었을 때 나오는 일종의 신 대륙이라 볼 수 있다. 오크 성에서 약 일주일 정도 북진하면 드넓은 초원이 나오는데, 그 초원의 남쪽에 치우친 거대한 도시를 바로 신 대륙의 이름과 똑같은 라그나로크라고 부른다. 세워진 지 오랜 시간이 지난 만큼 도시의 외관은 긴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군데군데 새 단장을 했는지 낡았다기보다는 고풍스러운 기색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비록 아직 완전한 위용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도시의 거리는 곳곳이 떠들썩한 활기로 넘쳐났고, 무수한 사람이 오가는 풍경이 매우 번성한 듯했다. 이 도시에도 명물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하나를 꼽을 것이다. 바로 중앙 도시에 있는 ‘푸른 궁전’이라는 건물을. 실제로 푸른 궁전은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며 호화로움의 극치를 이루는, 도시 내에서 가장 커다란 건물이었다. 누구든 그 앞을 한 번이라도 지나간다면 자연스레 시선을 빼앗기고, 보기만 해도 괜스레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을 느낀다. 실은 지면에 설치된 거대한 마법 진의 효과였지만, 겉보기에는 보기 좋은 푸른빛이 은은하게 흐르는 것이 특수한 돌로 만들었구나, 라는 정도로만 생각할 뿐. 이러한 궁전의 높은 층에 있는 발코니에는, 한 여인이 나와서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원래 뒤에 내용이 더 있는데, 제가 오늘 아침 일찍, 06시에는 나가봐야 합니다. 빨리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 부득이하게 끊었습니다. 이 점 양해를 부탁 드리며, 오늘 못 쓴 부분만큼 다음 회에 벌충하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_(__)_ 0849 / 0933 ---------------------------------------------- Meanwhile, Same Time : Seven 아니. 발코니의 여성은 여인이라기보다는 소녀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용모였다. 우선 터럭 한 올도 삐져나오지 않게 야무지게 틀어 묶은 머리카락은, 마치 황금을 녹여 실로 뽑아낸 것처럼 눈 부신 빛을 발한다. 키는 160 중반 즈음으로 아담하며 이목구비는 단정하지만 약간 앳된 끼가 남아 있다. 그리고 따뜻한 날씨라 그런지, 가볍게 차려입은 옷차림 새로 보이는 근육도 보기 좋게 발달해 있었다. 우락부락하게 부푼 근육이 아니라,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만큼 오밀조밀하게 잡혀 있다. 가령 매끄럽고 탄력적으로 보이는 탄탄한 허벅지처럼. 여하튼 여인이든 소녀이든 간에, 상당한 미인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단순히 외모뿐만이 아닌,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분위기가 여성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소녀는 발코니에 서서 발밑으로 보이는 풍경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곱게 세공된 황옥을 박아 넣은 듯한 아름다운 눈동자는 당당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흡사 무언가 이뤄냈다는 성취감, 혹은 자부심처럼 보인달까. 실제로 소녀는 몇 달 전 있었던 전쟁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거대한 산맥을 지배하던 아르코느 오크와의 대 전쟁을. 오크를 상대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용자가 죽었는지는 가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갓 태어났을 때부터 전투 교육을 받은 오크는 하나하나가 강인한 전사였다. 그뿐만 아니라 요상한 술수를 부리던 오크 주술과, 대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오크 로드와의 최후의 일전을 생각하면 지금도 섬찟 소름이 돋는다. 돌이켜보면 전혀 쉽지만은 않은 전투였지만, 어쨌든 승리는 남 대륙으로 돌아갔다. 공포의 대명사라 불리던 오크 성을 함락하고 끝내 라그나로크에 이르는 길을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중 하나가 바로 이 도시요, 이 웅장하고 호화찬란한 궁전이었다. 남 대륙의 모든 사용자는 푸른 궁전을 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칭찬은 자연스레 이 궁전을 차지한, 아르코느 오크와의 전쟁을 이끌었던 클랜의 칭송으로 이어졌다. 그 이름은 바로 오딘(Odin). 아르코느 오크와의 전쟁 이후, 남 대륙 사용자들은 오딘 클랜이 대륙 최고라고 추켜세웠다. 물론 그 내면에는 남 대륙이 제일이라는 심리가 깔려 있었다. 어쩌면 서 대륙이 폐쇄되고 사용자가 대거 유입됐을 때 그런 생각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냉정히 말하면 남 대륙 한정이라는 말이 덧붙어야겠으나, 오딘 클랜의 수장은 사용자들이 그렇게 말하는 걸 굳이 막지 않았다. 왜냐면 소녀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이미 도시 복구 작업은 거의 끝나가는 상황이었고, 사용자들은 라그나로크를 기점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중이었다. 이렇게 도시가 하루가 멀다고 흥에 겨울수록 소녀의 자신감도 굳건해졌다. 비록 많은 손해를 보기는 했으나 라그나로크 자체로도 손실을 만회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 그때였다. 한창 상념에 잠겼던 소녀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발코니 입구 안쪽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걸 보며 물끄러미 시선을 집중했다. 그렇게 몇 초간을 쳐다보고 있으니 문득 결 좋은 보랏빛 머리카락이 흔들거리며 튀어나왔다. “엘도라!” 발랄한 목소리와 동시에 누군가 짠하고 등장했다. 소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늘씬한 키에 밝은 연갈색의 가죽 갑옷을 입은 여인이다. 엘도라라 불린 소녀는 몸을 돌려 여인을 빤히 응시했다. 또각또각, 모델처럼 가늘고 긴 다리맵시를 내세워 걸어오는 여인은 상큼한 눈웃음과 함께 활짝 웃었다. “여기 있었네? 우리 엘도라. 한참 찾아다녔잖아.” “제가 그렇게 부르지 말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탈리.” 엘도라가 짐짓 엄한 음성으로 말하자 여인, 아니 나탈리는 눈을 살짝 뜨며 고개를 기울였다. “응? 그럼 뭐라고 해? 코르넬리우스? 이건 예쁘지 않아.” “뭐가 됐든 좋습니다만….” 낮은 음성으로 말을 잇던 엘도라는 싱글벙글 웃는 나탈리를 보고 가벼운 한숨을 흘렸다. “아무튼, 한참 찾아다녔다는 말씀은…?” “아, 우리 선지자님께서 엘도라를 찾으시더라고. 그것도 아~주 애타게 말이야.” 나탈리는 ‘우리’라는 말을 계속 강조해서 붙이며 히히 웃었다. 그러자 시종일관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엘도라의 얼굴에도 미세한 변화가 생겼다. “멜리누스가요?” “응! 그리고….” 그 순간 엘도라는 곧장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언가 더 말하려던 나탈리는 동그래진 눈으로 소녀를 좇았다. 그러나 엘도라는 이미 입구로 들어가 성큼성큼 멀어지는 중이었다. “엘도라, 엘도라! 아직 말이…!” 등 뒤로 나탈리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엘도라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 급하다 느껴질 만큼 걸음을 빠르게 놀렸다. 그런 엘도라의 얼굴은 흡사 오랜 친우를 만나러 가는 것처럼 화색이 돌았다. 잠시 후, 방을 나서 긴 회랑을 지난 엘도라는 다른 건물로 이어지는 구름다리를 건너, 그 너머로 나무로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나타난 건 아래로 끝없이 이어지는 나선 계단이었다. 소라 껍데기처럼 빙빙 도는 계단을 내려갈수록 아래로 가지런히 배치된 탁자와 여러 기록이 빽빽이 꼽힌 서재가 보였다. 보이는 그대로 지식의 보고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커다란 도서관이었다. 이윽고 끝없이 이어지던 계단도 서서히 끝나갈 무렵, 문득 조용한 도서관을 울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귀에 흘렀다. “혼자서 할 수 있을…?” “글쎄. 한 번 봐야겠지만 아마도….” 엘도라는 계단 끄트머리에서 멈추고 살며시 안을 들여다봤다. 그곳에는 잿빛 로브를 걸친 백발의 노인이 커다란 책상에 앉아 있었다. 비스듬히 놓인 흰 지팡이와 책상에서 홀로 불빛을 비추는 호롱불, 그리고 정갈히 허리를 편 채 부드러운 눈매로 기록을 탐독하는 모습은 흡사 현자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이따금 아래까지 늘어진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끄덕이거나, 손에 침 묻혀 기록을 넘기는 모습을 보며 엘도라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까 나탈리를 대할 때와는 다르게 호의 가득한 낯빛이다. 신뢰에 찬 눈길을 보내던 엘도라는 살짝 헛기침했다. “응?” “어머?” 목소리는 두 곳에서 들렸다. 노인은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며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한 삼십 대 중반은 되었을까. 풍성한 흰색 로브를 걸친 우아한 여인이 기록을 한 아름 든 채 걸어오다가, 은근슬쩍 나타난 엘도라를 보고 깜짝 놀라 서 있었다. 설마 한 명이 더 있을 줄 몰랐던 엘도라도 약간 놀란 빛을 보였다. 그 반응을 본 여인은 곧 표정을 추스르고는 스리슬쩍 미소 지었다. “나탈리가 제가 왔다는 말은 안 해줬나 보네요?” “아니요. 제가 듣지 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올리비아.” 엘도라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올리비아는 어머, 라고 말하며 한 손을 볼에 대고 빙긋 웃었다.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요. 오딘 로드는 여전하네요.” 라그나로크의 아틀란타처럼 중앙 도시를 중점으로 네 개의 외성이 이어진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올리비아는 그중 한 도시를 맡고 있는 클랜의 로드였다. 물론 오딘과는 매우 우호적인 관계다. 엘도라가 미소로 화답하자 노인이 껄껄 웃으며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탁자에 들어가 있던 의자가 쓱 나오더니 저절로 움직여 엘도라의 앞에 놓였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 엘도라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채 의자에 얌전히 앉았다.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멜리누스.” “그렇지요. 상의할 일이 하나 생겨서 말입니다.” “상의할 일이요?” “음, 그게.” 엘도라가 궁금하다는 듯이 묻자 멜리누스는 흘긋 옆을 쳐다봤다. 흰 로브의 여인은 기록 더미를 책상에 내려놓은 후,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가 고요히 입을 열었다. “오딘 로드. 제가 듣기로는 아직 칼집을 찾는 중이라 들었는데, 맞나요?” 엘도라는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가 의아한 빛으로 수긍했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근래에는 큰 신경을 못 썼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올리비아가 꽤 재밌는 정보를 들고 왔더군요.” 보이는 것과 다르게 걸걸한 목소리를 낸 멜리누스가 곧장 끼어들었다. 어느새 이야기는 자연스레 본론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클랜 로드는 혹시 이 라크나로크 대륙에 얽힌 신화를 알고 계시는지요.” “그렇게 자세히는…. 그냥 먼 옛날 신들 간에 거대한 전투가 있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라고 말한 멜리누스는, 치렁치렁한 수염을 부드러이 쓸어내리며 기록을 뒤적였다. “라그나로크…. 직역해보면 신들의 황혼이라는 말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다르게는 신들의 운명 혹은 신들의 몰락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몰락이라…. 썩 좋게 들리지는 않는군요.” “크게 신경 쓸 건 없습니다. 전투의 끝은 응당 승자와 패자로 나뉘는 법이니까요. 이 경우 패자를 몰락과 연결할 수 있겠지요. 물론 그 몰락이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는 다른 문제입니다만.” “네. 하지만 그 신화가 제가 찾는 칼집과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겁니까?” 그때 올리비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얼마 전 세상의 끝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발견했어요. 다른 말로는 최후의 전쟁이라고도 하죠. 신들이 마지막 전투를 벌인 장소라고 이해하시면 돼요.” 그 순간 엘도라의 눈이 살며시 반짝였다. 아직 자세한 내막은 듣지 못했지만, 왠지 모험의 냄새가 풀풀 풍겼다. 안 그래도 오크 성 공략 이후 줄곧 라그나로크에만 있어 몸이 근질거렸는데, 무언가 느낌이 왔다. 아르코느 오크와의 전쟁 때 보인 활약으로 전신(戰神)이라는 칭호가 붙은 만큼, 엘도라도 천성이 전투에 인색하지 않은 사용자였다. “어째서 그 유적을 그 장소라고 추정하는 겁니까?” “벽화가 있었거든요.” 엘도라가 묻자 여인은 물어볼 줄 알았다는 듯이 바로 답변했다. “정확히 말하면 유적 외곽에 긴 벽을 따라 그려진 그림이 있었어요. 우리는 근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고대 지식 전문가들을 동원해 벽화를 해석했고, 나름의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죠.” “가장 큰 성과는 아까 말한 몰락의 의미를 찾아냈다는 거지요. 마지막 그림은 아마 신을 봉인하는 과정을 그린 게 아니겠느냐고 말하더군요. 아주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올리비아는 멜리너스를 스리슬쩍 흘겼다. 이제 중요한 얘기를 하려는데 왜 당신이 빼앗느냐는 눈초리였다. “아무튼, 사실 저도 확신은 못 해요. 그곳이 어떤 장소인지는 직접 들어가 봐야 알 수 있겠죠. 하지만 최소한 단서는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거기까지 말한 올리비아는 잠시 숨을 돌리려 했지만, 엘도라는 고개를 갸웃하는 걸 보며 아차 탄성을 질렀다. “아, 미안해요. 제일 중요한 얘기를 빼먹었네. 방금 멜리너스가 말한 봉인 과정을 그린 그림에서, 우리는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바로 칼집이죠.” “칼집?” “칼집이 그려져 있었다고요. 생각해봐요. 오딘 로드의 엑스칼리버는 신화 속에 등장하는 일종의 성물이잖아요? 그리고 역사상 절대자를 봉인할 때 성물이 사용된 경우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요. …어때요. 이 두 사실의 연관성을 알겠나요?” “…험험.” 올리비아는 혹여 또 멜리너스가 끼어들까 봐 굉장히 빠른 속도로 말했고, 노인은 멋쩍게 헛기침을 했다. 이제나저제나 영리한 엘도라는 금세 올리비아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담담하던 두 눈이 약간 치떠진 게 그 방증이었다. “…설마.” “그래요, 엘도라. 그 벽화가 진정 신화 시절에 그려졌다면, 그 칼집도 성물일 가능성이 높아요. 음~. 여기까지만 말해도 아시겠죠?” “엘핀 로드. 저희가…!” “물론, 저 또한 오딘의 힘을 빌리고 싶어 찾아온 거랍니다.” 그렇게 말한 올리비아는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엘도라는 열망에 찬 눈동자로 멜리너스를 응시했다. “으음. 클랜 로드의 마음은 이해합니다. 그동안 오매불망 찾아온 칼집이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겠지요.” “그 말씀은 제가 가져온 정보가 지푸라기라는 건가요?” 올리비아가 뾰족한 음성으로 쏘아붙이자 멜리너스는 긴 수염을 어루만지며 점잔을 뺐다. “그게 아니라, 급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엘핀 클랜이 어려워하는 곳이니만큼, 저희도 마냥 쉽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후유, 알겠습니다.” 그러나 엘도라를 한 번 본 멜리너스는 이미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고 느꼈는지 긴 한숨을 흘렸다. 이어서 명치 부근을 슬슬 쓰다듬더니 인자한 미소를 짓는다. “클랜 로드. 방심은 금물이니 기사단 전원을 소집하십시오.” “물론입니다. 알겠습니다.” 이미 발동이 걸렸는지 엘도라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바로 몸을 돌리려는 찰나, 돌연 우뚝 멈춰서 빤히 바라봤다. 아까는 명치를 만지더니 이번에는 복부를 은근히 쓸어 내리는 중이다. “아.” 엘도라의 시선을 느꼈는지 손은 금세 헐렁한 소매 안으로 사라졌다. “…그래도, 이 늙은이가 식사할 시간 정도는 주시겠지요?” 구변 좋게 말한 멜리너스는 허허롭게 웃어 보였다. 0850 / 0933 ---------------------------------------------- Meanwhile, Same Time : Seven 뜨거운 물로 씻고 나온 엘도라는 마른 천을 집어 몸을 닦았다. 가볍게 머리를 털자 풍성하게 흘러내린 굴곡진 금발이 눈부신 반짝임을 분사한다. 이윽고 흠뻑 얼룩진 천을 침대에 걸어놓은 엘도라는 맑은 빛이 내리쬐는 창가로 다가갔다. 따스한 햇볕은 방금 닦아낸 머리카락에 고스란히 안착했고, 이내 넘치듯이 흘러 흰 살결에 스몄다. 나신을 다습게 덥혀주는 햇볕이 기분 좋은지 두 눈이 살며시 감기고, 이어서 오른손이 서서히 움켜졌다. ‘이번에는 꼭….’ 잠시 후, 엘도라는 실눈을 뜬 채 살짝 턱을 젖혀 허공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오직 홀로만이 볼 수 있는 정보가 출력되고 있었다. < Player Status > 1. 이름(Name) : Eldora Cornelius(6년 차) 2. 클래스(Class) : 금빛의 기사(Secret, The Golden Knight,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라그나로크(Ragnarok) 4. 소속 단체(Clan) : 오딘(Odin)(Clan Rank : AA) 5. 진명 • 국적 : 엘도라도의 주인(Owner Of The El Dorado) • 영국(England) 6. 성별(Sex) : 여성(20) 7. 신장 • 체중 : 164.2cm • 52.2kg 8. 성향 : 질서 • 선(Lawful • Good) [근력 100(+6)] [내구 94(+2)] [민첩 90(+2)] [체력 92] [마력 95(+4)] [행운 100] (잔여 능력치는 0포인트입니다.) < 능력치 비교 > 1. 김수현 [근력 99(+2)] [내구 95(+2)] [민첩 101] [체력 101(+2)] [마력 96] [행운 90(+2)] (잔여 능력치는 0포인트입니다.) Total : 582 Point 2. 엘도라 코르넬리우스 [근력 100(+6)] [내구 94(+2)] [민첩 90(+2)] [체력 92] [마력 95(+4)] [행운 100] (잔여 능력치는 0포인트입니다.) Total : 571 Point 외부 영향에 기인한 상승 폭을 제외한 엘도라 본연의 사용자 정보는, 엄밀히 말하면 으뜸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손색이 있다.(물론, 어디까지나 북 대륙을 기준으로 잡는다.) 하지만 여러 좋은 장비를 가졌고, 영약도 심심찮게 복용했으며, 시크릿 클래스까지 가진 것을 고려하면 분명 탑 클래스로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그러나 여느 사용자가 그렇듯이, 엘도라 또한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단순히 느낌으로 가늠하는 게 아닌, 실제로 체감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지기를 원한다. 그럴 수 있는 방법도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엘도라가 목숨 걸고 칼집을 찾아다니는 이유였다. ‘이번에는 기필코…. 아니, 최소한 단서라도 잡을 수 있다면.’ 엘도라는 결 좋은 머리카락을 질끈 묶으며 이를 물었다. 칼집이 눈앞에 어른거리기라도 하는지 무언가 주체할 수가 없는 것처럼 행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신속히 옷을 입고 장갑을 갖추고는, 깨끗한 천으로 동여맨 대검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 “그럼,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시게.” 막 설명을 끝낸 멜리너스가 지긋한 눈으로 돌아보며 물었다. 홀로 서 있는 멜리너스를 제외하면, 주변에는 열두 명의 사용자가 상앗빛 탁자에 앉아 있다. 탁자는 상하 구별이 없는 둥근 모양의 원탁으로써, 총 열세 개의 의자에 자리마다 검의 문양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칼끝이 모이는 중앙으로 지름 십오 센티미터 정도의 홈이 동그랗게 패여 있었는데, 그곳에는 커다란 잔에 꽂힌 횃불이 성화(聖火)처럼 불타오르고 있다. “신이 있는 곳이라. 왜 엘핀 로드가 찾아왔는지 궁금했는데, 꽤 재밌는 정보를 들고 왔네요?” 의자에 등을 기댄 나탈리는 목에 걸린 뿔 나팔을 만지작거리며 해맑게 웃었다. “정확히는 신들이 최후의 전투를 벌였던 장소네. 신이 있는 장소가 아니라.” “봉인했다면서요? 어쨌든 그게 그거 아니에요?” 멜리너스가 말을 정정해주자 나탈리는 갸웃하고는 좌우로 고개를 돌렸다. “맞아.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잖아?” “맞아. 혹시 잘못 건드려서 신이 깨어나면 어떡해?” 그러자 나탈리에 동의하는 두 앳된 음성이 동시에 겹쳐서 들렸다. 나이는 각각 십 대 중후반쯤 되었을까? 방금 목소리를 낸 두 여인은 특이하게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김새가 거의 비슷했다. 각자 줄로 묶어 올린 머리가 반대 방향인 걸 빼면, 일란성 쌍둥이 자매라고 봐도 믿을 정도였다. 어쩌면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 “으음, 확실히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요.” 그때 한 사용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안경을 낀 사내는 순하면서도 유약한 인상이었으나, 총명한 눈동자가 매력적인 청년이었다. “성물로 봉인 의식을 치렀다면, 반대의 경우, 즉 성물을 가져감으로써 봉인이 해제되는 상황도 염두에 둬야 하니까요. 어쩌면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좋은 기회라고?” 이번에는 낮고 굵직한 목소리가 반문했다. 맞은편에는 머리를 빡빡 민 거한이 울퉁불퉁한 근육으로 덮인 팔로 팔짱 낀 채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커먼 피부인데 양 소매가 없는 흰 사제 로브를 걸치고 있는 것이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지는 복장이다. “별 뜻은 아닙니다. 만일 정말로 봉인이 해제된다면, 신을 잡아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르니까요.” “…너무 낙관적으로 말하는데. 혹시 위험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당연히 위험하겠지요. 하지만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타 대륙 이야기이기는 합니다만, 신을 상대로 이겨낸 사례가 있거든요. 우리도 못할 건 없잖아요?” “오, 그건 조금 흥미로운데. 계속해봐, 이안.” 거한이 반짝 흥미를 보이자, 이안이라 불린 청년은 안경을 치키며 침을 꼴깍 삼켰다. “에, 혹시 북 대륙에 있는 강철 산맥을 아십니까?” “강철 산맥…? 아니.” “우리가 오크 성을 넘어 라그나로크를 발견했듯이 북 대륙도 비슷합니다. 강철 산맥을 공략해 아틀란타라는 신 대륙을 발견했지요.” “아, 그런 의미로군. 이해했다.” “예. 아무튼, 우리가 전진 기지를 거치며 최종적으로 오크 성을 점령했다면, 북 대륙은 강철 산맥을 총 네 지역으로 구분해 통과했다고 합니다. 그중, 세 번째 지역에서 신이라는 괴물이 출현했습니다.” “신이라는 괴물?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으음. 그러니까, 그곳에서는 거인들의 제왕이라고 하더군요. 거신 전쟁에서 저주를 받아 괴물로 격하됐으나, 원래는 신의 반열에 오른….” “거신 전쟁?” 의문이 끝없이 이어지자 이안은 입을 닫고 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가 워낙 기반 지식이 부족하니,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는 낯빛이었다. 사내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는지 민머리를 쓰다듬으며 멋쩍게 미소 지었다. 그때였다. “관둬.” 잠시 조용해진 원탁 사이로 차가운 음성이 끼어들었다. “너처럼 타 대륙 일까지 신경 쓰는 사람 따위, 여기 아무도 없으니까. 혼자서만 알고 있으라고.” 이어지는 오연한 목소리는 듣는 것만으로 기분이 불쾌해지는 아주 신비한 능력이 있었다. 조용히 침묵을 지키던 몇몇 사용자가 살짝 인상을 찌푸린 게 그 방증이다. 실제로 음성의 주인공은 의자에 한껏 몸을 묻은 채 다리를 꼬거나 머리 젖혀 천장을 올려다보는 등, 썩 보기 좋지 않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이안이 멍하니 눈만 깜빡이자 아까 물어본 검은 피부의 거한이 얼른 입을 열었다. “아키로프. 말이 조금 심한데. 그리고 물어본 건 나라고.” “하.” 그 순간 짧은 코웃음이 들렸다. 이윽고 붉은 머리카락이 서서히 기울어지더니 비로소 아키로프라 불린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언뜻 보면 귀티가 서린 게 꽤 잘생긴 미남자였지만, 불쑥 치켜진 눈썹이나 약간 찢어진 눈매를 보면 날카로운 인상이 강하다. 좋은 말로는 도도하고, 보이는 그대로 말하면 거만해 보인다. “나 참, 별걸 다 궁금해하는군.” “뭐라고?” “그렇잖아? 노란 원숭이들이 성공했다는데, 우리가 실패할 리가 있겠어? 응?” “…그 말은, 나도 모욕하는 거야.” 거한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졌다. 확실히 누구를 대상으로 삼았든, 방금 말은 지나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러나 아키로프의 행동은 진정 가관을 달렸다. 웬 개가 짖느냐는 듯 한쪽 눈만 슬쩍 뜨더니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기까지. 그나마 따가운 시선은 느꼈는지, 곧 “후.” 숨을 불어 털어내고는 어깨를 으쓱 들먹였다. “아니 왜 그래. 양키 대륙에 털린 놈들인데,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추켜세우는 거야? 꼭 우리가 뒤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추켜세운 적 없고, 이안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네 언행을 문제 삼는 것뿐이다. 아키로프.” “아, 그래? 그럼 나도 너한테 말한 게 아니거든. 확대해서 해석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는데. 에드워드.” “저, 저….” 점차 언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이안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도움을 구하는 눈초리로 원탁을 둘러봤다. 그러한 찰나. “이안의 말은 조금 믿기 어렵군요.” 문득 고요한 미성이 둘 사이로 흘렀다. 이안의 요청에 화답한 이는 인간이라 보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초록빛 나뭇잎으로 감싼 가녀린 신체나, 가냘픈 몸에서 홀로 불룩 솟아 탁자에 얹힌 풍만한 가슴도 뭇 시선을 끌지만, 틈새로 뻗어 나온 나긋나긋한 팔다리는 무언가 선연하면서도 오묘한 느낌이다. 잔잔한 바다를 연상케 하는 푸른빛 눈동자는 보는 것만으로도 청량하고 시원한 기분이 스친다. 확실히 인간과는 묘하게 다른 구석이 있는 느낌. 무엇보다, 두 귀가 인간처럼 둥글지 않고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에, 에르윈…!” 화답 받은 게 자못 기뻤는지 이안은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입을 열었다. “무엇이 믿기 어렵다는 겁니까?” “신은…. 말 그대로 신이에요. 요정은 물론, 인간과는 다른 차원의 존재죠.” “그 말인즉, 이기는 게 불가능하다는 겁니까?” “일반적으로는 그렇다는 거예요.” 에르윈의 차분한 음성에 영향을 받았는지 시끄러운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아키로프와 에드워드는 말다툼을 멈추고 에르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이안의 말이 사실이라면…. 완전한 신이 아닌 경우, 가령 반신을 예로 들 수 있겠네요. 아니면 신을 살해할만한 수단을 가졌을 수도 있고요.” 에르윈의 말이 끝나자 원탁에 다시 조용해졌다. 대부분이 곰곰이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는다. 요정이라는 종족은 말을 허투루 하지 않는 만큼, 한 마디 한 마디가 가볍게 듣고 넘길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최소한 그냥 단순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구나고 깨닫는 것이다. “자자, 이만하지. 아키로프와 에드워드도 그만하고. 그리고 어차피 가봐야 아는 걸세. 아직 하나 확실하게 밝혀진 것도 없는데, 여기서 왈가왈부해봤자 탁상공론에 불과해.” 멜리너스는 마침 좋은 때라 여겼는지 손을 휘휘 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키로프와 에드워드는 서로 다시 쳐다봤으나 이내 눈을 돌릴 뿐, 아까처럼 언성이 높아지지는 않았다. 특히 아키로프는 쓸데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지만, 많은 이의 존경을 받는 선지자의 말까지 무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잠시 후, 멜리너스는 에르윈을 향해 몰래 눈인사를 건넨 다음 앞쪽의 방문을 응시했다. 공교롭게도, 문 너머로는 어느새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그렇게 기척이 들린 순간, 원탁에 둘러앉아 있던 열두 명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주군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출발할 채비를 하는 것이기도 했다. 어차피 멜리너스의 설명으로 기본적인 정보는 들었고, 그 이상은 직접 가봐야 아는 일이다. 물론 엘도라가 호출한 이상 기본적인 소집 과정은 거치겠지만, 어디까지나 의례적인 절차에 불과하다. 이 원탁에서 엘도라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앞에서 이끄는 것이다. 정보를 모으거나 앞서 상황 정리를 해놓는 등, 오늘처럼 엘도라의 뒤를 받치는 일은 언제나 멜리너스의 몫이었다. 이것은 오딘 클랜이 창설됐을 때부터 이어져 온 전통으로, 그 누구도 멜리너스의 역할을 도를 넘은 간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면 엘도라와 멜리너스가 서로 얼마나 신뢰하는지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작품 후기 ============================ * 엘도라의 근력을 101에서 100으로 수정했습니다.(08시 17분) 0851 / 0933 ---------------------------------------------- Meanwhile, Same Time : Seven 오딘이 남 대륙을 주도하는 최고의 클랜으로 발돋움한 데는 어떤 배경이 있을까. 대부분이 오딘의 수장인 엘도라와 선지자(先知者)라 불리며 존경받는 멜리너스의 만남을 중심으로 말하기는 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것만이 전부라고 볼 수는 없다. 가령 북 대륙이 특별한 사용자 열 명을 일컬어 십 강이라고 부르듯이 남 대륙에도 그와 비슷한 집단이 있다. 엘도라가 처음 홀 플레인에 소환됐을 때는 약 육 년 전으로, 당시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아무리 높은 잠재성을 가진 사용자라 해도, 고작 열네 살의 아이가 이 척박한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때 구원자로 등장한 게 바로 남 대륙에서 이미 명성을 얻은 멜리너스였다. 공교롭게도 예비 사용자를 돌보는 역할을 하고 있던 멜리너스는 갓 들어온 엘도라를 목격, 단박에 잠재성을 알아보고 보호자를 자처했다. 즉 직접 데려다 키우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엘도라는 선지자의 비호 아래 자신의 잠재성을 유감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기실 엘도라가 하는 일은 하나. 멜리너스가 가라는 대로 가고, 하라는 대로한 게 전부였다. 하지만 이렇다고 꼭두각시처럼 움직였다는 건 아니었다. 엘도라가 그런 느낌을 받지 않도록 멜리너스가 항상 조심했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무슨 일을 해야 할 때는 당위성을 부여하는 설명을 충분히 곁들였다. 영특한 엘도라는 그 뜻을 알아채고 충실히 기대에 부응했다. 오히려 잘되면 잘됐지, 멜리너스의 말은 따라도 하등 나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을 때, 엘도라는 어느새 남 대륙의 폭풍의 눈에 서 있었다. 사용자들 사이로 서서히 금발 소녀의 이름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엘도라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들이 늘어났다. 물론 이 또한 멜리너스가 의도한 바였다. 멜리너스는 자칫 잘못하면 질투로 이어질 수도 있는 사용자들의 관심을, 두 가지 방법을 통해 현명하게 대처했다. 첫 번째는 사익을 좇는 게 아닌, 철저하게 공익을 위해서만 움직였다. 소사부터 대사까지, 남 대륙이 곤란에 처했을 때는 언제나 엘도라가 앞장서서 해결했다. 가령 폐쇄적인 요정과 동맹을 맺고 요정의 숲을 개방한 일이나, 가깝게는 오크 성을 공략하고 발견한 일 등을 예로 들 수 있을 터. 그러자 남 대륙 사용자들도 엘도라의 행보에 조금씩 열광하기 시작했다. 사실 자신들에게 떨어지는 이득은 둘째치고서 라도, 가냘프고 어여쁜 소녀가 늙은 현자와 만나 낭만적인 모험을 하고, 하나의 세력을 일구는 과정에서 일종의 환상 문학과도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엘도라는 어느새 공인과 비슷한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독불장군식으로만 활동하는 게 아닌, 명망 높은 사용자를 동료로 모았다. 여느 대륙이 그렇듯 남 대륙도 유명한 사용자가 여럿 있었고, 멜리너스는 면식이 있는 이를 부르거나, 혹은 직접 찾아가서 설득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적극적으로 영입했다. 심지어 엘도라와 결투를 치르고 동료로 들어온 극적인 사건도 있었다. 어쨌든 개인이던 세력이든, 한 지역에서 이름을 날리던 이들이 하나로 모이자 그것 또한 커다란 관심거리가 되었다. 엘도라는 그들을 부하가 아닌, 동등한 동료로 대우했다. 무언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항상 원탁에 둘러앉아 상하 구별 없이 논의했으며, 언제나 옳은 결정으로 대사를 이끌었다. 남 대륙의 사용자들은 그 집단을 가리켜 Knights Of The Round Table, 즉 원탁의 기사단이라고 부른다. * 올리비아가 말한 장소는 라그나로크에서 결코 짧은 거리는 아니었지만, 원정대의 행군은 나름 순조롭다고 할 수 있었다. 안정화 지역은 진즉 벗어났고, 준 안정화 지역에 들어서도 딱히 위협 거리는 찾을 수 없었다. 하기야 안내자인 올리비아를 제외하더라도, 엘도라를 포함한 열세 명의 기사와 멜리너스까지 대부분 시크릿 클래스로 구성돼 있으니 어지간한 괴물이 아니고서야 눈 한 번 깜짝할 턱도 없다. 게다가 엘도라가 얼른 칼집을 찾고 싶다는 열망 아래 계속 강행군을 하는 바람에 원정대는 예정보다 이른 날짜에 목적지 인근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그래도 연이어 휴식을 호소하는 이안의 부탁을 무시하지는 못하겠는지, 엘도라는 산 중턱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사실 근접 계열들이야 큰 상관은 없었지만, 이안은 원탁의 기사 중 유일하게 비전투 사용자라 어느 정도의 배려는 필요했다. 아키로프는 비교적 여유로워 보이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큰 바위에 기대앉아 쉬는 올리비아를 향해 다가갔다. “엘핀 로드. 아까 거의 도착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네, 저곳만 넘으면 돼요.” 숨을 꿀꺽 삼킨 올리비아는 쳐다보지도 않고 산의 정상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예리한 칼로 비스듬히 쳐낸 듯한 가파른 산길과, 허연 구름이 걸린 산등성이 풍경이 완곡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아키로프는 두어 번 머리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군, 그런데 말이야. 마중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용자는 왜 안 보이는 거지? 저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가?” “…마중? 누가요?” “누구긴. 엘핀 클랜원들이지.” “다 철수시켰는데요?” “뭐라고? 왜? 그럼 안내자는?” “초입에서 피해를 심하게 입었거든요. 그래서 돌아가라고 했죠. 안내는 제가 하면 되고요.” 그러자 아키로프는 갑자기 팔짱을 끼더니 특유의 거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흠….” “왜요?” “아니. 발견한 공은 인정하지만, 너무 날로 먹는 느낌이 들어서.” “어머. 맹화의 기사치고는 상당히 인색한 말씀이네요.” 아키로프가 날 선 어조로 쏘아붙였으나 올리비아도 구변 좋게 받아쳤다. 그러자 발끈한 아키로프가 더 강도 높은 말을 쏟아내려는 찰나, 갑작스레 눈을 돌렸다. 이내 누군가가 조용히 수풀을 헤치며 등장했다. 흡사 산속 풍경과 동화된 듯 나뭇잎을 두른 몸과, 한 주먹 가득 쥐어도 살이 빠져나올 듯한 그득한 젖가슴. 그리고 머리카락 틈새로 삐죽 돋아난 귀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여인은, 바로 요정 에르윈이었다. “쯧.” 아키로프는 곧장 눈을 찌푸렸다. 대놓고 훼방꾼을 보는 눈초리였다. 그러나 에르윈이 계속 걸어오자 혀를 차더니 더 상대하기 싫다는 듯 몸을 돌렸다. 이내 나무 사이로 모습을 감추자, 올리비아는 키득키득 웃었다. 에르윈이 미안해하는 낯빛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빙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걱정 마요. 저 인간이 저러는 거 한두 번도 아니잖아요? 뭐, 사실 틀린 말도 아니고.” “아뇨.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엘도라도 올리비아에게 마음 깊이 감사하고 있어요.”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죠. 후후. 그나저나 정말 나이스 타이밍이었어요. 보고 있었던 거예요?” “그게….” 쾌활히 말을 잇던 올리비아는 우물쭈물하는 에르윈을 보며 놀란 빛을 보였다. “혹시 저한테 볼 일이…?” 정답이었는지 에르윈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차분히 주변을 살피고는 한층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혹시?” “최근에 멜리너스가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 올리비아는 약 삼 초 동안 에르윈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기울임으로써 무언의 감정을 표현했다. “글쎄요. 딱히?” “그렇군요….” “왜요?” “아니 그냥…. 근래 초조해 하는 모습이 종종 보이고, 조금 긴장한 것 같기도 하고….” “에, 멜리너스가요?” “네. 또 가끔 이상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도 들었어요.” 올리비아는 그건 예전부터 그래온 버릇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에르윈의 얼굴에 드리운 수심이 사라지지 않자, 머쓱해 하며 볼을 긁적였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 정 마음에 걸리면, 저보다 엘도라한테 물어보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가까이 있는 시선보다는 먼빛의 시선이 더 나을 때도 있으니까요.” 올리비아는 어렴풋이 에르윈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래요. 사실 저는 별로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지만, 에르윈이 그렇다면 한 번 주의 깊게 살펴볼게요.” 그제야 조금 마음을 놓았는지 에르윈은 꾸벅 고개 숙이고는 부드러이 몸을 돌렸다. 마침 곧 출발하겠다는 엘도라의 외침이 들려와, 올리비아도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그러나 올리비아는 바로 이동하지 않았다. 잠깐 가만히 멈춰 서서, 사뿐사뿐 걸어가는 에르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 행군 재개 후, 가뿐히 정상에 오른 원정대는 옹기종기 모여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산등성이 너머는 산맥으로 둘러싸인 넓은 분지 지형이었는데, 곳곳에 고대 건축물이라 추정되는 건물들이 부서진 채로 남아 있었다. 그나마 온전한 건축물이라고는 중앙에 홀로 우뚝 솟은 거대한 탑뿐. 하지만 탑조차도 시간의 힘을 이기지 못했는지 세월이 흐른 기색이 역력하다. 게다가 간간이 모래바람이 스치는 것이 사실상 폐허나 다름없는 장소였다. “생각보다 초라한데.” 에드워드가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올리비아는 검지를 까닥까닥 흔들었다. “얕보면 큰일 날 걸요? 저래 봬도 상당히 위험하거든요. 설마 탑으로 가는 길에 함정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죠.” “그럼 여기서부터는 제가 앞장서도 되죠?” 나탈리가 반색하며 냉큼 뛰어 내려가려고 하자 올리비아가 황급히 제지했다. “잠깐. 그냥 여기도 내가 안내할게. 우리 클랜원들이 뚫은 길로 가면 되니까. 괜히 다른 길로 갔다가 또….” 나탈리는 입을 삐쭉 내밀며 불만을 표시했지만, 엘도라가 빤히 쳐다보자 곧 납득한 얼굴로 물러났다. 하기야 이미 길을 뚫었다는데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진형을 정돈한 원정대는 올리비아를 선두로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래에 도착하니 분지는 위에서 쳐다봤을 때보다 훨씬 크고 복잡했다. 반파된 건물의 잔해가 도처의 길을 가로막아 꼭 미로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경험자인 올리비아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능숙하게 건물 사이를 헤치더니,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탑을 60미터쯤 남겨둔 거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전방에는 탑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2미터 높이의 벽이 하나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바로 앞까지 걸어간 올리비아는 벽을 몇 번 쓰다듬더니 툭툭, 손등으로 두드리며 원정대를 돌아보았다. “이게 바로 제가 말한 벽화….” 그 순간,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이안이 앞으로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누군가 “또 발동 걸렸군.” 이라는 말을 중얼거렸으나 따로 제지하지는 않았다. 비 전투 사용자인 이안이 원탁의 기사 중 하나로 선발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대 홀 플레인에 관련된 지식을 그 누구보다 방대하게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나도 한 번 좀 볼까?” 이윽고 원정대도 느긋한 걸음으로 벽화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벽에는 흡사 갑골 문자를 연상케 하는 형이상학적인 글자나, 무어라 형언키 어려운 이상한 그림들로 가득했다. 대부분이 보자마자 머리를 흔들며 포기했지만, 역시나 이안은 달랐다. 처음에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벽을 스치는가 싶었는데, 가면 갈수록 점차 느려지더니 거의 끝에 다다라서는 살짝 놀란 기색을 비쳤다. “어라. 이건…?” 잠시 후, 이안이 심각한 낯빛으로 말을 흐렸다. “왜? 뭔가 좀 알아낸 거라도 있니?” 흰색 십자 방패를 든, 백치미가 느껴지는 성숙한 여인이 스리슬쩍 다가와 물었다. “아니, 뭐….” 이안은 얼버무리려고 하다가, 원정대가 슬금슬금 모여드는 것을 보고는 곤란하다는 듯이 눈을 찡그렸다. “저는 고명한 이안 학자님의 해석이 궁금한데요?” 올리비아가 호기심 묻은 목소리로 묻자, 이안이 쓰게 웃으며 말을 잇는다. “아뇨. 엘핀 로드의 해석도 정확합니다. 아니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와 거의 일치해요. 이 벽화는 신의 봉인을 다룬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성물이 그려진 것도 확인했고요.” 그렇게 말했으면서도 이안은 찜찜한 눈길로 구석을 바라봤다. 쳐다보는 곳은 벽화의 끝 부분으로, 그곳에는 어떤 그림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아아. 저기는 여백인 것 같아서….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올리비아의 말에 이안은 차분히 머리를 흔들었다. “고대 벽화는 어느 곳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굳이 이곳만 여백으로 남겨뒀다면, 이 자체에 모종의 의미를 부여했을 가능성이 있지요. 그래요. 어디까지나 해석하기 나름이기는 합니다만. 공백…. 아무것도 없는 공간…. 허공…. 공허…. 허무….” 약간은 불안한 눈으로 이안을 응시하던 에르윈은, 무언가에 홀린 듯 흘러나오는 단어를 듣고 고요히 입을 열었다. “꼭 죽음을 말하는 것 같은 단어군요.” “바로 그겁니다.” 그 순간, 짝! 강한 손뼉 소리가 울렸다. 멍하니 듣고만 있던 사용자들은 흠칫 놀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렇죠. 만약 이 여백이 죽음을 표현한 거라면…?” “아, 맞아. 그러고 보니 읽은 기억이 있어. 굉장히 오래된 사료였는데….” 연달아 혼잣말한 이안은 문득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러니까 저와 에르윈 양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이 여백은 죽음의 의인화, 아니 아니. 죽음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네요.” “그게 무슨 소리에요?” 이안이 몸을 돌렸다. “저도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아마.”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금빛이 스친 안경을 살며시 추어올리며 말을 잇는다. “이곳 용어로, 타나토스(Thanatos)를 뜻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0852 / 0933 ---------------------------------------------- Meanwhile, Same Time : Seven 이안의 말투는 의미심장했으나 원정대는 별로 이상한 기분은 느끼지 못했다. 심각히 와 닿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사실 애초 고대 문양은 해석하기 나름일뿐더러, 이안도 어렴풋이 기억한 단편적인 기록을 읊었을 뿐, 정확히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여하튼 벽화 해석에서는 별반 소득을 얻지 못했으나, 엘도라는 일단 들어가 보자며 동료를 탑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낡은 석문을 밀고 들어간 원정대는 드러난 안쪽 풍경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본 탑의 크기도 높고 거대했지만, 내부는 상상 이상으로 훨씬 드넓은 공간이었다. “가요. 이 층으로 올라가는 길까지는 저희가 알아놨어요.” 올리비아는 가볍게 한 마디를 남기고는 어둠이 휩싸인 공간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방금 한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어지러운 갈림길을 거침없이 걸어가더니, 채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올라가는 계단이 원정대 앞으로 나타났다. 올리비아는 여기까지라는 듯 조용히 뒤로 물러났고, 나탈리는 후다닥 선두로 달려나갔다. 이제 할 일이 생겨서 그런지 낯에 화색이 만연하다. “히히. 드디어 모험이다, 모험.” “나탈리. 너무 들뜨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첫째도….” “조심이고, 둘째도 조심이다.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 나탈리가 잽싸게 할 말을 가로채며 흥청거렸다. 순간 엘도라의 아미가 꿈틀거렸으나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왜냐면 나탈리는 진정으로 모험을 즐기는 사용자이며, 상황을 즐길수록 본연의 실력을 잘 드러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 그럼 들어갑니다!” 나탈리는 활기차게 외치며 올라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 층은 일 층보다 한층 어두워, 앞으로 뻗어 나가는 길은 금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탈리는 목에 건 뿔 나팔을 입에 물고는 차분히 길을 찾기 시작했다. 뒤따라가는 이들 또한 약간 긴장한 얼굴로 무기를 고쳐 잡았다. 어찌 보면 본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까. …라고 생각했지만, 탑 내부 현황은 원정대의 예상과 완전히 빗나갔다. 안은 음침하고 먼지가 켜켜이 쌓이기 했으나 그뿐, 딱히 괴물이나 함정이 출현하는 일은 없었다. 나탈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세심히 주의를 기울였으나 안 나타나는 걸 어쩌랴. 결국에는 일 층을 통과한 것과 비슷한 시간에 삼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을 수 있었다. 원정대는 어리둥절해 하며 계단을 올랐으나 삼 층, 심지어 사 층의 상황도 비슷했다. 층마다 그저 구조만 약간 변했을 뿐, 기분 나쁠 정도의 침묵은 여전했다. 그리하여 계속, 아무런 방해 없이 공략이 이어지자 원정대의 분위기는 점차 긴장감이 고조됐다. 낙승이라며 기뻐하기에는 워낙 잔뼈가 굵은 사용자들이라, 되려 정적에서 오는 불안함을 이상하게 여긴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엘핀 로드!” 결국, 오 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앞두고, 참지 못한 아키로프가 버럭 소리 질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각나는 경우는 딱 한 가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뻔하군! 클랜원들이 철수하자 승냥이 같은 놈들이 바로 달려들었겠지! 정보 관리를 도대체 어떻게 한 거요!” “꼭 이미 청소가 돼 있다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아 지금 상황이…!” “아키로프, 그만.” 분위기가 험악해질 기미가 보이자 엘도라라 얼른 아키로프의 말을 끊었다. 눈짓으로 주의를 시키고는 계단 앞에 서 있는 나탈리를 바라봤다. “혹시 침입 흔적을 발견하지는 못했습니까?” 나탈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응? 아니. 못 본 것 같아. 봤으면 진작 말했을 거야.” 아키로프는 그 말에 한풀 꺾이기는 했으나 씨근거리는 기색은 역력했다. 조금은 어색해진 기류 속에서 멜리너스가 부드럽게 달래듯이 격려하자 나탈리가 다시 앞을 돌아봤다. 잠시 후, 전원 입을 굳게 다문 채 오 층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오 층의 문을 조심스레 열어젖힌 순간, 아래층과는 조금 다른 광경이 원정대 앞에 펼쳐졌다. 일단은 길이 하나밖에 없었다. 지름이 이 미터쯤 되는 통로 말고는 온통 어둠으로 가득 차 있어, 흡사 허공에 걸린 구름다리처럼 보였다. 좌우를 내려다본 나탈리는 살짝 눈을 치떴다. 이 구름다리가 허공에 떠 있는 거라면 응당 아래가 보여야 정상이다. 그러나 아무리 안력을 높여도 보이는 건 어둠뿐이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스치자 행군 속도도 자연스레 느릿해졌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행군한 결과, 약 한 시간이 지나서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다리도 점차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통로 끝에서는 갑자기 길이 둥글게 퍼지듯이 넓어져 광장과 같은 공간을 이루고 있었다. 이내 다리를 벗어나 광장에 첫걸음을 내디딘 순간, 앞을 바라본 나탈리가 돌연 짧은 탄성을 터뜨렸다. “아….” “왜 그러지?” 나탈리가 걸음을 멈추자 사자 문양이 그려진 은빛 필드 아머(Field Armor)를 걸친 준수한 미남자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나 그 사내 또한 앞의 광경을 보더니 할 말을 잃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천천히 걸어가는 원정대의 발치로 낡은 금속이 툭툭 걸리는 요란한 쇳소리가 이어졌다. 광장은 약 지름 이백 미터 즈음 되는 넓은 공간이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금속 잔해들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수북이 쌓여 있었다. 개중에는 깨진 무기 조각이나 반파된 갑옷 파편처럼 보이는 것도 있었는데, 하나 특이한 점은 대부분이 중앙 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지키려다가 실패한 것처럼. “뭐 엄청나게 치열한 전투라도 있었나? 꼭 전쟁 직후의 풍경을 보는 기분이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걸어가던 에드워드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글쎄. 나는 쥐새끼가 몰래 훔쳐먹고 간 밥상을 보는 기분인데.” 아까의 일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지 아키로프는 스리슬쩍 투덜거렸다. 그 말을 들은 올리비아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주먹을 움켜쥔 찰나, 앞서가던 나탈리가 문득 앞을 가리켰다. “어, 저기!” 원정대 전원은 반사적으로 나탈리가 가리킨 전방을 응시했다. 그러나 몇 명은 곧 실망스러운 기색을 비쳤다. 잔해가 쌓인 중앙의 가장자리에는 총 여덟 개의 기둥이 원을 그리듯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돼 있었다. 일반적인 원형 기둥이 아닌 케이크를 팔 등분한 듯 부채꼴 모양이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성물은커녕 칼집 비슷한 건 보이지도 않고, 기둥도 신비하다기보다는 초라하고 보잘것없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래, 이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누군가 약간 힘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잠시만요.” 불현듯 이안의 음성이 들렸다. 발로 잔해를 치웠는지 쭈그려 앉은 이안은 바닥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손으로 지면을 싹싹 쓸거나 숨을 세게 부는 모습을 보며 멜리너스가 수염을 더듬었다. “흠. 그렇지. 잔해로 가려진 마법 진이 있을 수도….” “아니요. 마법 진은 아닙니다. 오면서 계속 살펴봤어요. 문양 같은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응? 그럼?” “줄, 입니다.” 이안이 이것 좀 보라는 듯 잿빛 바닥을 손가락질했다. 원정대가 모여서 보자 그곳에는 확실히 새끼손가락 마디만큼 패여 있는 줄이 직선으로 쭉 그어져 있었다. 이안은 앞과 뒤를 한 번씩 돌아보고는 이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이 줄 말입니다. 이어져 있는 것 같은데요?” “응? 이어져 있다니?” “보세요. 기둥의 모가 진 부분과 방향이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리고 또 중앙을 향하고 있잖아요?” “……!”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사용자들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이안의 말이 뭘 뜻하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원정대는 곧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사방을 돌아다니며 잔해를 치우기 시작했다. 기둥과 이어지는 부분을 중점적으로 치운 터라,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똑같은 줄을 발견했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잠시 후, 기둥 수와 정확히 일치하는 여덟 개의 줄을 발견하자 원정대의 시선은 자연스레 중앙으로 쏠렸다. 그곳에는 여전히 정체 모를 잔해가 쌓여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아까는 별로 이상하다 생각지 못했는데, 유독 저곳만 두텁게 포개져 있는 걸 보니 갑작스레 감이 왔다. 덮여 있는 게 아닐까, 무언가 감춰져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느낌. “…치울까?” 이윽고 누가 낮은 음성으로 말하는 동시, 꿀꺽. 고인 침을 삼키는 소리가, 불안한 침묵이 맴도는 오 층을 고요히 울렸다. * 북 대륙. 아틀란타. 남 도시에 우뚝 솟은 머셔너리 캐슬은 뜻 모를 열기로 한창 뜨거워져 있었다. 기실 성은 이미 한참 전부터 소란스러웠다. 단순히 여러 사람이 떠드는 수준이 아니라, 굉음과 폭음이 연달아 울리며 사방을 들썩인다. 아마 지나가는 사람이 들었으면 폭탄이 터진 거라 생각할 정도였다. 쾅! 바로 지금처럼. 소음의 근원은, 정확히 말해서 머셔너리 캐슬의 정원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금 전 폭발 소리를 마지막으로 갑자기 잠잠해졌다. 더 이상 들썩거리지도 않고, 열기도 서서히 식어가는 느낌이다. 이어서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자욱한 연기 사이로 칠흑색 갑옷을 입은 청년의 모습이 드러났다. 청년은 잔뜩 그은 얼굴로 주변을 차분히 돌아봤다. 이어서 느릿하게 왼손을 들어 뒤집어 응시했다. 놀랍게도, 손등에는 검붉은 화살 한 대가 박혀 손바닥을 뚫고 나온 상태였다. 줄줄 흐르는 핏줄기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무심한 눈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이었다. “이 화살은…. 선유운입니까?” 청년, 아니 김수현이 왼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제야 상처를 봤는지 사방에서 놀란 탄성이 우수수 터졌다. 사제 로브를 입은 몇 명이 바로 달려가려고 했지만, 김수현은 손을 저어 물리치고는 보랏빛 활을 든 사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선유운은 예의 무뚝뚝한 얼굴이 아닌, 상당히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정말 맞출 줄은 몰랐다는 듯 믿을 수 없다는 낯빛이다. 김수현은 피식 웃으며 화살을 잡아 뺐다. 선유운이 정신을 차린 건, 김수현이 도로 던져준 화살이 핏방울을 뿌리며 완곡히 날아왔을 때였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사멸 무저갱 일 층을 완전하게 청소했다고 들었는데.” “예? 예.” 선유운은 황급히 화살을 받으며 연달아 턱을 끄덕거렸다. “솔직히 처음 도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러면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정말 완벽한 노림수였습니다.” “아, 아닙니다. 나름 봐주신 거 알고 있고, 어디까지나 동료들 덕분에….” 이번에는 빠르게 머리를 가로저으며 횡설수설한다. 비록 한 발, 그것도 손등에 입힌 상처에 불과했지만, 선유운으로서는 김수현을 맞췄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질 정도로 말이다. “흐음.” 김수현은 만족스러운 신음을 뱉고는 한 번 더 정원을 훑었다. 가볍게 손을 젓자 어디선가 날아온 검 두 자루가 허리춤에 척척 꼽혔다. “다들 열심히 하는 것 같네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본성으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이내 김수현의 모습이 사라지자, 정원 곳곳에서 깊은 탄식이 흘렀다. “푸부부부!” 땅바닥에 거꾸로 처박혀 있던 안현은 간신히 머리를 빼서 세게 흔들었다. 입안까지 침투한 흙을 퉤퉤 뱉다 보니 털썩 널브러진 진수현이 헤헤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왜 웃어?” “야, 방금 형님 얼굴 봤어?” 정원에 꽂혀 있던 안현으로서는 당연히 보지 못했다. 진수현은 그야말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더니 미친놈처럼 소리 죽여 킬킬거렸다. “아깝다. 봤어야 했는데.” “어떠셨는데?” “완전 한 방 먹은 얼굴이었다니까? 드디어 우리가 공격에 성공했다는 거 아니겠느냐.” “…….” 엄지로 어깨너머를 가리키는 곳에는 선유운이 김수현이 건네준 화살을 꼭 쥔 채 멍하니 서 있다. 진수현은 낄낄 웃으며 신 나게 말을 이었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까지 말씀하셨다 이 말이지.” “글쎄다.” 진수현은 꼭 자신이 공격을 성공한 것처럼 거들먹거렸으나 안현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뭐? 왜? 좀 더 기뻐하라고. 이게 얼마만의 공격 성공….” “주변 좀 둘러보지그래.” 안현이 핀잔 주듯이 말하자 진수현은 의아히 정원을 돌아봤다. 이윽고 눈이 서너 번 깜빡였을 때, 흥 오른 얼굴이 서서히 가라앉더니 어색해 하는 기색이 대신 자리 잡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방금 대련에는 선유운, 안현, 진수현 셋만 참여한 게 아니었다. 신재룡은 꽃밭에 대(大)자로 뻗은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고, 임한나는 커다란 나무의 나뭇가지에 걸려 절반으로 접혀 있다. 차희영은 복부를 부여잡은 채 웅크려 낑낑 울고 있었으며, 이유정은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안솔과 제갈 해솔은 돛단배라도 되려는지, 서로 사이좋게 기절한 채 수로를 둥실둥실 떠다니는 중이었다. 풍덩! “아, 진짜.” 아니, 제갈 해솔은 깨어 있었던 모양이다. 수로 가장자리를 간신히 붙잡고 올라오더니 김수현이 사라진 방향으로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이게 말이 돼? 저 인간 저거 사기라니까요?” “클랜 로드야. 저거라고 하지 말라고.” 어디서 왔는지 절뚝거리며 나타난 이유정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유정도 상당히 처참한 몰골이었다. “아니, 어떻게 마법이 들어가는 족족 다 잘려 터져요? 내 마력 능력치가 몇인데!” “…….” “그리고 그 검들은 도대체 뭐예요? 하도 막히니까 일반적으로는 안 될 것 같아서, 그래서 무형무색무취무음 마법을 날렸는데, 어머나 씨발? 검 새끼가 스스로 요격을 하네? 요망하기도 해라. 뭐 이런 음경 같은 경우가 다 있어요?” “…….” 분노에 찬 음성을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제갈 해솔을 보며 안현은 남몰래 한숨을 흘렸다. 하지만 곧 싱겁게 웃고 말았다. 오늘이 제갈 해솔이 첫 번째로 공식 대련에 참가한 날이던가? 그러면 이해가 간다. 왜냐면 안현도 강철 산맥에서 김수현과 붙었을 때 비슷한 감정을 느꼈으니까. * “아야야야.” 물약을 들이붓자 정전기가 오르는 것처럼 손등이 따끔거린다. 아무래도 경매장에서 화살은 괜히 사다 준 듯싶다. 저주가 걸려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당해보니…. 아, 화정이 바로 치료해줬던가? 나는 시답잖게 웃으며 물약의 반은 골고루 펴 바르고, 남은 반을 단숨에 들이킨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테라스로 나가보니 곳곳이 파헤쳐지고 부서진 정원이 눈에 들어온다.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뿌듯한 기분이다. 이제는 대련이 거의 공식 일정으로 자리 잡은 만큼, 클랜원들의 실력 향상이 눈에 보일 정도니까. 나를 계속 상대하다 보면 아마 어지간한 마족을 봐도 별로 놀라지 않을 테니까. 물론 나도 얻는 건 있다. 그러니까 일종의 수련이라고 해야 하나. 돌이켜보면 이 회차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생각보다 수련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다. 뭐 굳이 할 필요가 없기는 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검의 군주를 계승함으로써 얻은 능력은 확실히 좋으나 그만큼 고수준의 컨트롤을 요구한다. 능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에 불과하니, 하루빨리 내 것으로 만들어 익숙하게 사용해야 한다. “음….” 그래도 정원을 보고 있자니 아주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다. 예상하건대 아마 오 분 안에 조승우가 찾아오지 않을까. 당장 어제만 해도 이제 정원에서 대련은 제발 그만두라며, 복구에 얼마나 돈이 들어가는지 아느냐며, 차라리 연무장을 새로 만들자고 울고불고…. 똑똑. 아, 벌써 찾아온 건가? 이건 조금 빠른데. “들어오세요.” 만약 뭐라고 할 낌새가 보이면 손등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얼른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달칵 문이 열린 후 들어온 사용자는 조승우가 아니었다. “김한별?” “네, 네. 안녕하세요.” 김한별은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왜인지 쭈뼛쭈뼛 들어왔다. 품에는 양팔로 기록 더미를 꼭 품고 있다. 얘가 어쩐 일로 찾아온 거지? “무슨 일이야?” “보고 때문에….” 보고라. 사실 현시점에서는 썩 달갑잖은 방문이기는 했다. 막 대련을 마친 터라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는데, 얼른 씻고 싶었기 때문이다. “혹시 급한 거?” “네? 아 뭐…. 바쁘세요?” “아니. 보다시피 땀을 많이 흘려서. 냄새가 좀 나거든.” “아. 저, 저는 괜찮은데요.” 괜찮다고…?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김한별의 태도가 전과 같지 않다. 쌀쌀맞던 눈동자도 오늘따라 잔뜩 긴장한 것 같고, 자꾸 말을 더듬거나 흐리는 것이…. “죄송해요. 생각 없으시면 밤에 다시….” 그때 김한별이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하, 이제야 알겠다. 근래 내 일정이 상당히 살인적인 스케줄이라, 아마 잠깐의 휴식을 방해하는 것에 미안해하는 모양이다. 마음이 예쁘네. “괜찮아. 필요한 보고니까 왔겠지. 그런데 왜 정하연이 안 오고?” “많이 바쁘셔서요.” “아 그래?” “네. 그리고 이제 저도 슬슬 배울 때가 됐다고….” 그렇군. 나는 끄덕끄덕 머리를 주억였다. 하기야 요새 머셔너리 자체가 엄청나게 바쁘거니와, 현재 정하연 개인이 맡은 일만 해도 네 개가 넘는 걸로 알고 있다. 그리고 김한별은 마법사 클래스의 부단장을 맡고 있으니 보고하러 오는 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미소가 지어졌다. “왜 웃으세요?” “그냥. 기대돼서.” “기, 기대요?” “후후.” 그렇잖은가. 조금은 신선한 기분이다. 통과의례 때만 해도 아무것도 모르던 병아리가, 이렇게 훌륭히(?) 커서 보고까지 하러 오다니. 심지어 격세지감마저 느껴졌다. 아마 김한별도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좋아. 그럼 보고해봐.” 나는 의자에 한껏 몸을 묻으며 턱을 까닥였다. “후유, 네.” 김한별은 숨을 들이켜며 자세를 고쳐 잡고는 조심스레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냥 그 자리에서 해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얘도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니까. 약간의 실수쯤은 너그러이 눈감자고 생각하며, 나는 천천히 가까워지는 김한별을 응시했다. 그러나. “……?” 김한별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별안간 방향을 틀어 옆으로 돌아오더니, 느닷없이 허리를 굽혀 엎드렸다. 그리고 엉금엉금 기어 책상 안으로 홀연히 모습을 감췄다. 잠시 후. “그럼….” 땀 젖은 바지가 살며시 끌러내러 가는 감촉이 느껴지는 동시, “보, 보고 시작할게요.” 책상 아래서 김한별의 얼굴이 쏙 내밀어 졌다. “…….” …어? ============================ 작품 후기 ============================ 휴, 간신히 올리고 가네요. 에피소드 7은 아마 다음 회로 끝날 것 같습니다. 김수현의 시점이 완전히 돌아오는 건 에피소드 4부터인데, 에피소드 6에서 5까지는 최대한 빠르게 빼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제 코멘트에 간략히 남겼는데, 제가 오늘 예비군 동원 훈련에 입소합니다. 2박 3일 입영 훈련이며 3월 31일(화요일)부터 4월 2일(목요일)까지 총 28시간을 받습니다. 아마 10시간, 10시간, 8시간 이렇게 받을 것 같은데, 퇴소하고 돌아오면 아마 밤 늦게 집에 들어올 것 같아요. 사실 어지간하면 이때 가고 싶지는 않았는데…. 병무청에 전화해보니 동원 훈련은 특별한 사유 없이 한 번만 불참해도 고발이라고 하더라고요. -_-a 벌금도 50정도 나온다고 해서 그냥 항복했습니다.(?) 뭐 독자 분들 중에서는 이미 끝난 분들도 계실 테고(개인적으로 무지무지 부럽습니다. ㅜ.ㅠ), 예비군이면 누구든 예외 없이 받는 거니 즐거운 마음으로 받고 오려고요. 또 올해로 4년 차가 끝나니, 이걸로 입영 훈련도 끝나는 셈이네요. 하하. 어쨌든 업데이트하고 2박 3일 동안 필요한 생필품을 챙겨야겠네요. 그럼 저는 4월 4일(토요일)에 에피소드 7 마지막 편을 들고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독자 분들 모두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_(__)_ 0853 / 0933 ---------------------------------------------- Meanwhile, Same Time : Seven 원정대는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중앙에 쌓인 잔해를 전부 걷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입이 쩍 벌어질 만한 놀라운 것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돌로 만들어진 적당한 크기의 둥근 탁자가 하나 있었는데, 광장 바닥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줄이 그어져 있고, 가장자리마다 둥그스름한 돌멩이가 놓여 있는 것이 전부였다. “꼭 피자를 보는 것 같군.” “에드워드, 제발. 분위기 좀 깨지 마.” 흰 방패를 든 여인이 눈을 흘기니 에드워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잠시 후, 자연스레 이안이 앞으로 나섰다. 탁자를 이모저모 살피는가 싶더니 멜리너스를 불러 한참을 서로 속삭였다. 이내 둘은 동시에 끄덕이고는, 이안이 가장 가까운 돌에 손을 얹고 탁자 중앙으로 조심스레 끌어왔다. 그때였다. 크스스스스스스스! 불현듯 맷돌을 가는 듯한 소리가 고요한 장내를 울렸다. 멍하니 옆을 돌아본 나탈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왼쪽에 있던 부채꼴 모양의 기둥 중 하나가 느린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둥은 바닥에 그어진 줄을 따라 서서히 가까워져 오더니 중앙 지점에 이르러서야 우뚝 멈춰 섰다. “멜리너스. 혹시 그 돌멩이가 이 기둥과 연동되는 겁니까?” 화르르륵! 누군가의 질문은, 느닷없이 어둠을 밝히는 환한 불빛에 묻혔다. 반사적으로 허공을 올려다본 원정대의 사이로 가벼운 신음이 흘렀다. 중앙으로 이동한 기둥의 꼭대기에 진한 초록색 불빛이 성화(聖火)처럼 타오르고 있었으니.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던 이안은 곧 두 번째 돌을 향해 멍하니 손을 움직였다. 크스스스스스스스! 크스스스스스스스! 소슬한 소음이 광장을 조금씩 떨게 하였다. 이안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둘레에 서 있던 기둥들이 차례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허공을 밝히는 녹색 횃불은 어느새 일곱 개로 늘어나 있었다. 중앙으로 모여든 기둥들은, 원래 하나였다는 것처럼 서로 딱딱 맞물려 거대한 원형 기둥으로의 재탄생을 앞둔 상황. 이제 남은 기둥은 단 하나에 불과하다. 이윽고 버릇처럼 안경을 고쳐 쓴 이안이 최후의 돌멩이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찰나, “잠시만요.” 고운 목소리가 그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그만두면…. 안 될까요?” 원정대의 시선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한 명한테 쏠렸다. 나뭇잎으로 짠 옷을 걸친 고결한 요정이 기둥을 보며 한없이 불안한 빛을 띠고 있다. “에르윈?” “엘도라, 그러니까…. 미, 미안해요.” 에르윈은 무어라 말하려다가, 갑자기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러더니 황급히 나탈리를 응시한다. “나탈리. 아까 정말 아무런 흔적도 보지 못했나요?” “응? 어, 어.” “정말로요? 아무것도요?” “모, 못 봤다니까? 갑자기 왜 그래. 무섭잖아….” 나탈리는 소름 끼친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에르윈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털썩 주저앉더니 이번에는 아키로프를 바라봤다. “아키로프! 아까 차려진 밥상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왜 그렇게 느꼈죠?” “그,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는데. 그리고 그건 그냥…. 농담이었다고.” 갑자기 지목당한 아키로프는 떨떠름히 대꾸했다. “하지만 이상해…. 너무 이상해…. 꼭 누군가가….” 그러자 연신 입을 달싹거리며 곤란해 하는 것이,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했다. 계속 혼란스러워하는 에르윈의 호흡이 거칠어지자 멜리너스가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에르윈. 일단 진정하는 게 좋겠소.” “저는 그냥…. 아, 아…!” “에르윈? 에르윈!” “…아니. 저, 저는 괜찮아요. 죄송해요. 그냥, 왠지 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간신히 진정한 에르윈은 짜낸 듯한 목소리로 말을 잇고는 입을 질끈 깨물었다. 엘도라는 ‘어떻게 하지?’ 라는 눈초리로 주변을 돌아봤지만, 전원 비슷한 반응이었다. 모두 엘도라처럼 어색한 얼굴만 하고 있다. 한껏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기는 했으나, 심지어 아키로프마저도 조용히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사실 현재 에르윈을 제외한 이들의 속마음은 거의 비슷했다. 이제 원정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인데, 누가 여기서 관두고 돌아가고 싶겠는가. 또 굳이 성과 때문이 아니더라도, 원정을 그만두고 돌아가려면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광휘의 사제’ 안솔의 말이라면 모를까. 단순히 감이 이상하다는 까닭으로 돌아가기에는 아쉽다는 마음이 더 크다. 그럼에도 원정대가 갈등하는 것은, 평소 에르윈이 보여온 행실과 종족의 특수성에 기인한다. 증명된 사실은 아니지만, 에르윈이 행동에는 항상 이유가 있으며, 요정은 언제나 이치에 맞게 행동한다. 사리(事理)에 거스르는 일을 할 때는 본능적으로 굉장히 불편해한다. 물론 이렇다고 맹신할 정도로 믿고 따르는 건 아니나, 그래도 한 번쯤은 고민해볼 법한 일이었다. …그래, 엘도라가 칼집에 눈이 멀어 있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분명 탑 밖으로 물러나는 길을 택했을 미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한 번 작동이라도 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엘도라…!” “어차피 고려하고 온 일이고, 철저히 준비해 왔습니다. 이상한 일이 생길 것 같으면 바로 취소하거나, 아니면 우리가 처리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 엘도라가 조리 있게 말하자 다수가 수긍하는 빛을 보였다. 애초 자신들의 실력에 자신 있는 사용자들이었고, 라그나로크를 발견한 이후 자신감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게다가 이안이 말한 북 대륙의 사례도 있으니 아주 불가능하다고는 생각지 않는 것이다. 에르윈은 잠시 애타는 눈빛을 빛내며 사방을 둘러봤으나 곧 체념한 듯 눈을 감는다. 그러나 이안은 바로 일을 진행하지 않고 멜리너스의 눈치를 살폈다. 원탁의 기사 중 절대다수가 암암리에 속행에 손들었지만, 항상 앞장서 일을 주도해온 멜리너스의 확답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다. “으음….” 멜리너스는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침음을 흘렸다. 엘도라는 선택을 맡기겠다는 듯 한 발 물러나는 자세를 취했지만, 두 눈동자에는 은근한 불빛이 스며 있다.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엘도라와 에르윈을 번갈아 보던 멜리너스는 곧 깊은 한숨을 내쉬며 살짝 끄덕였다. 그 모습은 마치 썩 내키지 않으나 어쩔 수 없이 수락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멜리너스마저도 동의하자 이안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크스스스스스스스! 마지막 남은 하나가 중앙으로 이동하자, 비로소 여덟 개가 모두 결합해 하나의 거대한 원형 기둥 형상이 만들어졌다. 화르르륵, 초록 불빛이 켜지며 기둥 인근이 한층 밝아졌다. 웅웅웅웅웅웅웅웅! 그 순간, 기둥이 눈 부신 빛을 비췄다. 웅혼한 진동음과 함께 표면에 유형의 기운이 물결처럼 흐르더니, 광장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우우우웅! 이어서 기둥 위 불빛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그것은 진정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로, 여덟 개의 불꽃이 하나로 모여 천장을 뚫을 듯 치솟는 광경은 진정 장관에 가까웠다. 그러나 다음 순간, 더욱 놀라운 현상이 발생했다. - Quid Enim…. - Do Recludere…. - Revertere, Si Non Est Per Se Paratum…. - Unum Tantum Quatuor Reges Ac…. 사방에서 조금도 알아듣지 못할 소리가 공간을 어지럽게 겹쳐 울리는 동시에, 화아아아아아아악! 녹색 불빛이 비치는 천장에서 원진(圓陣)이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한다. 그것은 시야가 멀어버릴 정도의 빛을 분사하는 터라, 누구도 자세하게 볼 수 없었다. 그저 둥근 고리 같은 형태가 기둥 중앙을 미끄러지듯이 통과하더니, 이내 빛무리가 선연히 발광하며 불빛의 한가운데로 무언가가 서서히 떠오른다. 마치 내부서부터 억지로 밀려나오는 것처럼. 이 모든 현상이, 어떻게 하기도 전에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번쩍! 갑작스레 시야가 황금빛으로 점멸했다. 눈을 빠르게 감았다가 뜬 엘도라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시야는 여전히 빛으로 물들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신경을 흐트러트리던 여러 소리가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주문을 노래하는 것 같은 소리도, 고막을 긁던 불쾌한 소음도, 모두 한순간 사라졌다. 엘도라는 흡사 꿈을 꾸는 기분을 느끼며 눈에 온 힘을 집중했다. 잠시 후. 장내를 가득 메우던 빛이 홀연히 가라앉았을 즈음, 돌연히 여태까지와는 사뭇 다른 아주 미세한 소음이 이어졌다. 그때는 원정대도 어느 정도 시야를 회복한 상태였다. 이윽고 기둥을 쳐다본 엘도라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기둥 표면이 그그그긍, 소리와 함께 좌우로 천천히 열리고 있다. 마침내 활짝 개방된 기둥의 내부에는, 마치 관처럼 보이는 구조물이 내장돼 있었다. 정확히는 성인 남성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갈 만한 크기의 석문이었다. “오….” “잠깐! 기다리게!” 이안은 몹시 황홀해 하며 그곳으로 다가가려는 찰나, 멜리너스가 벼락같은 음성으로 제지했다. “메, 멜리너스?” “진정해, 진정하라고. 아마 이 단계가 최종 단계인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한 멜리너스는 엘도라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섣불리 움직이는 것보다는, 잠시 상황을 조사해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 말은 일리 있다고 여긴 걸까. 엘도라가 고개를 주억이는걸 보며 에르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 찰나, 쿵! 문득, 무거운 것이 떨어져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크게 기함한 원정대는 순간적으로 무기를 겨냥하며 기둥을 쳐다봤다. 막 몸을 일으키려던 에르윈이 입이 살짝 벌어졌다. “아….” 아무도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는데, 석문은 어느새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기둥 안에서는 흐릿한 연기가 뭉클뭉클 뿜어져 나오는 중이다. “어어, 저, 저는 아무것도….” 이안은 물밀 듯 덮쳐오는 연기를 피해 황급히 물러나다가, 다리가 꼬였는지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그러나 연기는 이안을 스치듯 지나쳐 어느 한 명에게 스리슬쩍 집중됐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현상을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다. 왜냐면 흘러나오는 연기보다는, 무언가 짙은 형체가 떨어져 나오는 게 시야에 잡혔기 때문이다. 마치 춤추듯 너울너울 가까워지던 그림자는, 순식간에 원정대가 있는 곳으로 가까워졌다. 엘도라는 점차 요동치는 심장을 추스르며 양손에 든 엑스칼리버를 바스러질 만큼 세게 움켰다. 그때. “……?” 매우 작고 앳된 음성이 문득 귀를 간질였다. 혹시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엘도라의 아미가 의아히 찌푸려졌다. 그 순간이었다. 찰나의 순간, 작고 하얀 발이 자욱한 안개를 헤치고 드러난 것과, “고마워.” 앳된 음성과 함께 누군가 엘도라의 어깨에 톡 부딪쳐 쓰러진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 작품 후기 ============================ 1. 에피소드 7 끝났습니다. 다음 회부터는 에피소드 6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_(__)_ 2. 동원 훈련은 무난하게 잘 받고 왔습니다.(어느 분이 물어보셨는데, 저는 52사단 211연대 강남 서초 예비군 훈련장에서 받았습니다.) 확실히 훈련 강도는 작년보다 높아진 것 같지만, 충분히 받을만한 수준이었습니다. 오히려 예비군 분들이 교관, 조교 분들의 통제에 잘 따라주니 훈련이 전체적으로 수월하게 진행된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이번 훈련은 정말 잘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두 밤 자고 올해 훈련을 깔끔하게 끝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신체 리듬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점호, 아침 식사, 오전 훈련, 점심 식사, 오후 훈련, 저녁 식사, 야간 정신 교육, 취침. 이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강제적으로 맞춰졌네요. 하하. 3. 저 여군 아닙니다. ㅡㅡ; 남자 맞아요. 여자 아닙니다. 이와는 별개로, 여성 예비군이 있기는 합니다. 제가 퇴소하는 날이 예비군의 날이라 부대 내 행사가 있었는데, 그중에 여성 예비군 분들도 많이 보였거든요.(미리 말씀 드리는데, 제가 여성 예비군이라 이렇게 말씀드리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제발 이상한 소문 만들지 말아주세요. 저는 그냥 독자 분들이 재밌어서 놀리는 거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제가 여성인 줄 아는 독자 분이 계신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로유진은 남성입니다. 4.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부로 연재 재개하겠으며,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완결을 향해 꾸준히 달리겠습니다.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 0854 / 0933 ---------------------------------------------- Be Infected, Six. 붉은 빛깔 구름이 하늘을 가로지른다. 하루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듯, 도시 전역(全域)을 물들인 저녁놀은 푸른 궁전을 벌건빛으로 불타오르게 하고 있었다. “멜리너스 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나선 계단 아래에 위치한 대 도서관에도 불그스름한 빛깔이 깔렸다. 일과를 마친 후, 언제나처럼 한가로이 기록을 읽고 있던 멜리너스는 두 눈을 끔뻑거리며 머리를 들었다. “들어오시게.” 그러자 뚜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노을이 그늘진 난간 아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계단을 내려온 훤칠한 청년이 공손히 허리를 숙여 예의 바르게 인사하자, 멜리너스의 눈동자에 놀라워하는 빛이 서렸다. “허, 이게 누구 신가. 라이언 윈터스 경이 아닌가.” “늦은 시간에 찾아와 미안합니다.” 정중한 목소리로 말한 라이언 윈터스라 불린 잘생긴 청년은, 특이하게도 머리카락이 백발이었다. 흰 눈을 연상케 하는 머릿결은 마치 사자 갈기처럼 내려와 목을 부드럽게 덮고 있다. 천천히 다가오는 윈터스를 보는 멜리너스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별말씀을. 원탁의 기사 중 최고라는 사자의 기사가 찾아왔는데, 외려 몸 둘 바를 모르겠네.” “하하. 그 호칭은 그만둬주시면 안 될까요.” 윈터스가 쓰게 웃자 멜리너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왜? 개인적으로 무척 마음에 드는 칭호이네만.” “워낙 낯간지러워서 말이죠. 그냥 윈터스로도 충분합니다.” “싫다고 하면 어쩔 텐가?” “그럼 저도 똑같이 하겠습니다. 멜리너스 님은 아마, 별을 추구하는….” 윈터스가 장난스레 말하자 멜리너스는 두 손을 번쩍 들어 항복 의사를 표시했다. 두 사용자는 서로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윈터스는 상대가 손짓으로 권한 의자에 편안히 몸을 앉혔다. 멜리너스는 책상에 놓여 있던 기록을 덮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온 겐가?” “이미 짐작하고 있으실 거로 생각합니다.” “흠.” 짧은 숨을 내쉰 멜리너스의 얼굴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선 문답하는 취미는 없지만, 그래도 맞춰보도록 하지. 얼마 전 원정 때문인가?” “그것도 그렇지만…. 엘도라가 요새 묘하게 기운이 없어 보이더군요.” 윈터스는 담담히 말했다. “사실, 처음에는 저번 원정 때 칼집을 찾지 못해 실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렇게 말하고는 운을 떼듯이 스리슬쩍 말을 흐렸다. 멜리너스는 싱겁게 웃었다. “아마 자네는, 내게서 그렇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 같은데.” 그러자 윈터스는 멋쩍은 표정을 보였다. 마치 정곡을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멜리너스는 차분히 수염을 어루만지며 살짝 끄덕였다. “뭐, 계속해보게.” 윈터스는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 땅을 바라보며 차분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근래 분위기가 확실히 이상해진 것 같습니다. 조금 침체했다고나 할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이상한 건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달라요. 예전과는 무언가가 다릅니다.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거기까지 말한 윈터스는 문득 눈을 들어 상대를 응시했다. “멜리너스도 그 여인은 보셨겠죠?” “최근 원정에서 데려온 여인이라면, 봤네. 오늘도 보고 왔지.” “어떻습니까?” “글쎄. 여전히 깨어나지 않고 있던걸?” 윈터스는 그게 아니라는 듯 조용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바로 입을 열지 않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제 말은.” 그러다 마침내, 윈터스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그 여인을 보고 있으면…. 까닭 없이 불안해지는 감정을 말하는 겁니다.” * 어느새 황혼이 최고조로 붉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방 안에는 이상하다 생각될 정도의 냉기와 을씨년스러움이 감돌고 있었다. 단순히 춥다고 느끼기보다는, 유독 이 방만 음침하고 스산한 분위기가 강하다. 엘도라는 조금 긴장한 낯으로 색색 숨소리가 흐르는 침대를 응시하고 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여인은 흰 이불이 가슴께까지 덮여 있었으나, 굴곡진 부분만 봐도 가녀린 체형이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키는 150센티미터를 간신히 넘는 듯하나, 왜인지 어리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갸름한 턱선은 약간 야위어 보이나, 연약하다기보다는 바싹 메마른 느낌이다. 고운 눈썹과 가냘픈 어깨를 보고 있으면, 무언가 위험하면서도 야한 기분이 괜스레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즉, 이렇게 눈앞에서 보고 있어도 모든 것이 불분명하게 느껴지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엘도라가 굳어 있는 건 겉으로 보이는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질감. 이것은 엘도라 자신도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요요한 빛이 흐르는 칠흑색 머리카락과 유령 같은 여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왜인지 인간처럼 느껴 지지가 않는다. 사람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혹시 인형이 아닐까 싶어 손을 대봐도, 따뜻한 체온을 확인하면 이율배반적인 기분만 강해진다. 모순된 감정이 시시각각 혼란스러움을 키우자, 엘도라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고마워.’ 그때 석문이 열리고 나서 들었던 첫마디. 라그나로크로 돌아오면서 그 이상의 말은 한 마디도 듣지 못했다. 왜냐면 엘도라의 어깨에 쓰러지듯이 기댄 이후, 여인은 계속 잠들어 있었으니까. 결과적으로 말하면 원정은 성공도, 실패도 아니었다. 공략에는 성공했지만 바라던 칼집은커녕 얻은 성과는 전무하다. 그냥 헛수고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그럼 그냥 그렇구나 넘기면 되는 것을, 이상하게도 엘도라는 그러지 못했다. 돌아오는 내내 후회에 후회를 거듭하고, 까닭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원인이라도 알면 속이 시원 하련만, 스스로 이유를 모르니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으로만 끙끙거릴 뿐. 게다가 이 모순에 기인한 불안감은 여인을 가까이서 볼 때마다 더욱 심해졌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그때였다. “……?” 끼익, 문득 문이 살짝 열리는 소리가 방 안의 고요를 살그머니 깨트렸다. 이어서 사뿐사뿐 걷는 기척은 엘도라의 바로 뒤에서 멈춰 섰다. 흘끗 뒤를 돌아본 엘도라는 조금 놀란 듯 황금빛 눈동자를 깜빡거렸다. “에르윈?”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바로 요정 에르윈이었다. 항상 나뭇잎으로 짠 옷을 걸치고 있는 건 똑같지만, 오늘은 어깨에 펑퍼짐한 가죽 가방과 등에 활을 메고 있다. 마치 금방이라도 긴 여행을 떠날 것 같은 차림새였다. “떠나기 전 인사하려 했는데…. 여기 계셨군요.” 에르윈의 말에 엘도라는 속으로 아차 탄성을 질렀다. “오늘 요정의 숲으로 돌아간다고….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네, 미안해요. 일족의 명운이 걸린 일이 생겨서. 제가 꼭 참석해야 할 것 같네요.” “음. 그러고 보니 여왕 선출 건으로 한창 시끄럽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맞아요. 우리는 오랫동안 여왕이 없었으니까요. 이야기는 꽤 오래전부터 나왔지요.” 에르윈은 가볍게 수긍했으나 별로 기뻐하는 낯빛은 아니었다. 오히려 낯 한구석에 미묘한 수심이 그늘져 있다. 그 기색을 알아챈 엘도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몇 년 전 여왕이 태어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분명 그렇게 들은 기억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기억이 잘 안 난다는 듯 물어봤으나 엘도라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왜냐면 그날 에르윈으로서는 드물게도, 온종일 방방 뛰어다니며 기뻐하던 모습이 인상 깊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 죠.” 살짝 말을 끈 에르윈은 씁쓸히 미소 지었다. “확실히 위그드라실의 꽃은 피었지만…. 그뿐이니까요.” 그러나 더 말하기 싫다는 듯 고개 돌려, 엘도라는 이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누구나 사정은 있는 법이니까. “그렇군요. 그럼….” 이왕 다녀오는 거 편히 쉬고 오라는 말을 하려던 엘도라는,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슬을 머금은 풀처럼 싱그럽던 에르윈의 자태는, 예전과 비교하면 완연히 수척해져 병자와 흡사한 기색을 풍기고 있다. 요정의 숲에서 동료로 맞이한 이후, 오 년을 넘게 같이 활동하는 동안 항상 건강한 모습을 보였으니 향수병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조금 갑작스럽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확히 말해 최근 원정을 다녀온 직후 눈에 띄게 시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에는…. “…….” 무언가, 싫다는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인지 사정은 모르지만, 요정 여왕 선출로 인해 걱정이 많구나, 결국 엘도라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엘도라?” “아, 배웅해드리겠습니다.” 엘도라는 얼른 구변 좋게 말을 꺼냈다. “네? 아, 아니. 괜찮아요. 혼자서 가는 게 편해요.” “아니요. 당분간 보지 못할 텐데, 가면서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군요. 그러니 부디.” 연이은 청을 거절하지 못하겠는지, 에르윈은 가벼운 미소로 화답했다. 달칵, 다시 한 번 문이 조심스레 닫히며 두 여인이 방을 나섰다. 그리고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점차 멀어지더니, 이내 완전히 잦아들었다. 그렇게 엘도라와 에르윈이 사라진 공간에는 오직 여인만이 누워 있을 뿐. 방은 다시금 끝없는 고요로 침잠했다. * 이안은 서고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는 기록 더미를 바라봤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주변도 어두컴컴했으나, 이안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하나하나 기록을 뒤져나갔다. 그러기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기록을 훑고 다시 꽂기를 반복하던 이안은, 느닷없이 손에 든 기록을 내팽개치며 서재를 주먹으로 강하게 쳤다. 쿵! “젠장, 전부 쓸모 없는 기록들이군.” 아마 원탁의 기사 중 한 명이라도 봤다면 크게 놀랐을 광경이었다. 왜냐면 이안이 얼마나 이 세상의 기록을 아끼고 좋아하는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라그나로크를 발견했을 때 장비나 영약보다는 새로운 기록을 읽을 수 있다고 좋아하던 사용자가 바로 이안이었다. 업무가 끝나면 언제나 대 도서관을 찾아 늦은 시간까지 기록에 파묻혀 지낸다. 애초 비전투 사용자 신분으로 원탁의 기사단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선지자 멜리너스가 한 수 접고 들어갈 만큼 방대한 고대 지식을 지녔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 만큼, 방금 보였던 모습은 확실히 어색하고 느껴질 법한 행동이었다. “도대체 누구를 깨운 거지? 왜 깨어나지를 않는 거지?” 몹시 초조한 듯 입을 질근질근 씹더니 갑자기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이안의 발길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여인이 잠든 침실이었다. 방을 지키고 있던 고용인에게 잠시 쉬라는 말로 내보낸 후, 이안은 침대에 딱 붙어서 여인을 내려다봤다. 아직 딱히 깨어난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 동안 여인을 내려다보다가, 돌연 갑갑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회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인은 이렇다 할 표정 없이, 시종일관 눈을 감은 채 고른 숨만 내쉬는 중이었다. 그런 여인을 바라보는 이안의 얼굴도 엘도라처럼 뜻 모를 후회나 자책감을 띠고 있다. 물론, 그 감정에 담긴 의미는 오직 본인만이 알고 있겠지만. 이안은 한동안 여인의 몸을 살피거나 손대는 등 유심히 관찰했지만, 그런다고 정체를 밝혀낼 수 있을 턱이 없다. 결국에는 깊은 한숨과 함께 황급히 몸을 돌리고 말았다. “안 되겠어. 일단 벨…. 리너스 님에게.” 이안은 말을 살짝 더듬으며 조심이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좌우를 한 번씩 둘러본 후, 바로 방을 나서려는 찰나였다. “그 말은.” 문득, 조용하면서 깨끗한 미성이 나가려는 이안의 옷깃을 붙잡았다. “!” 그 순간, 이안의 몸은 건전지가 떨어진 로봇처럼 한순간 정지했다. 깜짝 놀라 방을 돌아봤으나 변한 것은 거의 없었다. 여인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않고 침대에 누워 있다. 단 하나 변한 게 있다면,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지어져 있다는 것. “이 몸을 차지한 게 누구인지, 궁금하다는 건가?” 작고 예쁜 입술이 열리는 걸 똑똑히 확인한 순간, 이안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커지고 입은 쩍 벌어졌다. 그러나 곧 힘껏 숨을 삼키고는 조용히 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그와 동시에, 마침내 눈을 뜬 여인이 선연한 검정 눈동자로 이안을 또렷이 응시했다. 잠시 후. “그리고 벨리너스가 아니라 멜리너스겠지. 벨리알과 혼동한 것 같지만, 꽤 괜찮은 임기응변이었어.” 이어지는 말을 들은 찰나, 이안이 갑작스레 주저앉아 무릎 꿇었다. “아….” 떨리는 눈동자로, 떨리는 입으로. 그러나 환희가 깃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사탄?” ============================ 작품 후기 ============================ 사탄 : 자, 이제 나를 TS한 이유를 말해봐. 로유진 : ㅎ. * …아, 죄송합니다. 며칠간 22시에 자 버릇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깜빡 졸았습니다. 일어나서 새벽 두 시인걸 보고 멘붕을…. ^^; 이전 회에서 봉인이 너무 쉽게 풀린 거 아니냐고 질문하신 독자 분들이 몇 분 계셨습니다. 현시점에서는 당연한 의문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건 에피소드 2까지 가야 완전히 풀리는 부분이니, 그때 본문에서 해답을 드러내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자서 간신히 맞춘 신체 리듬을 유지해야겠네요. 독자 분들도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PS. 에피소드 6,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에피소드 뒤 숫자는 일부러 역순으로 가는 중입니다. 말인즉 에피소드 0(Zero)이 메모라이즈가 완결되는 에피소드라 보시면 됩니다. 0855 / 0933 ---------------------------------------------- Be Infected, Six. 멜리너스가 여인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건, 상담을 끝내고 윈터스를 돌려보낸 직후였다. 이안의 개인 연락을 받고 나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은밀히 방으로 향한 멜리너스는, 곧 의자에 앉은 이안과 침대에 등을 기대 누운 여인을 볼 수 있었다. “호, 벨리알…. 아니. 여기서는 멜리너스인가.” “…사탄.” 문을 열자마자 소슬한 어투가 멜리너스를 맞이했다. 들리는 목소리는 여성 특유의 앳되고 고운 음성이었지만, 진명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눈앞의 여인이 사탄임은 부인할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여인의 몸속에 들어앉은 영혼이. “깨어나셨군요.” 멜리너스는 한층 소리를 낮추며, 그러나 기쁨과 안도가 섞인 얼굴로 씨앗의 각성을 축하했다. 여인은 천천히 방을 돌아보더니, 돌연 목을 좌우로 꺾거나 손을 움켰다가 펴는 등의 행동을 했다. 왜인지 그러는 행동이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무언가 느낀 걸까. 멜리너스가 완곡히 돌린 말로 물었다. “글쎄. 어때 보이나?” 그러자 여인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는 스리슬쩍 눈짓했다. 비록 안은 대 악마의 수장이라고 하나, 겉 생김새가 워낙 미인이라서 그런지 무척 귀여워 보였다. 물론, 이안과 멜리너스는 엄청나게 어색해 했지만 서도. “모, 모르겠습니다. 단,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와 사브나크가 간신히….” “그랬더군. 상당히 힘들었겠어.” “확실히 신화시대의 봉인이라 만만치는 않더군요. 그래도 주변을 지키던 수호자나 외부에 걸려 있던 봉인은 어찌어찌 처리했습니다만, 그 이상은….” “흠.” 멜리너스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한 채 눈치를 살폈다. “그렇군. 그나저나 사브나크는 어떻지?” 그러나 다음 순간, 살며시 입을 짓씹었다. 여인이 은근히 화제를 돌리려는 낌새를 느낀 것이다. 왜 몸 상태를 명확히 말해주지 않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불 보듯 뻔하다. 사정은 잘 모르지만, 아마 사탄의 씨앗이 발아하는 과정에서 모종의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감히 물어볼 생각은 못 한 채, 멜리너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브나크의 씨앗은 정상적으로 발아했습니다. 현재 올리비아란 이름의, 엘핀 클랜의 로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여인은 살짝 고개를 들었다. “네 번째로 가능성이 낮을 거로 생각했는데, 용케 성공했군. 잘 됐어. 가프는 잘하고 있나?” “가프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사히 성공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마 지금쯤 서 대륙에 남아 있는 세력을 규합하는데 한창 힘을 쏟고 있을 겁니다.” “포르세우스는?” “포르세우스는…. 처음에는 예상외로 진행이 굉장히 더뎠으나, 타나토스의 봉인을 해제했을 때 흘러나온 연기의 영향을 확실히 받았습니다. 일단은 에르윈의 심장에 자리 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직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초반과 비교하면 나름 순조롭습니다.” 멜리너스의 설명이 끝나자 여인의 코에서 긴 숨이 흘러나왔다. “사브나크, 가프, 포르세우스…. 그렇다는 말이지. 좋아. 그럼 너희는 어땠지?” 그동안 봉인지에 갇혀 있던 만큼, 사탄으로서는 계획이 잘 진행되는 중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단 세 악마 군주가 무사하고, 큰 변수가 생기지 않았다는 소식에 안도했는지 조금은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이안이 씩 웃으며 손을 들었다. “저는 별로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럴 테지. 아무리 성향이 선하다고 해도, 사용자가 지녀야 할 능력이 부족할수록 발아가 쉬워지지 않나.” “그런 주제에 여기에서 입지는 나름 괜찮더군요. 워낙 이것저것 아는 걸 좋아하다 보니, 가끔 북 대륙 정보를 흘려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을 모두 고려해서 선정했으니까. 멜리너스는? 꽤 어려웠을 것 같은데.” 여인이 고개를 돌리자 멜리너스가 쓰게 미소 짓는다. “거의 실패할 뻔했습니다.” “…뭐라고?” 그 순간 여인의 두 눈이 의아히 치떠졌다. 사탄이 구상한 대계(大計)의 첫걸음은 사탄 자신과 휘하의 다섯 악마 군주가, 심혈을 기울여 고른 남 대륙 사용자에 원활히 발아하는 것. 그리고 이 계획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탄이 봉인된 타나토스에 무사히 자리 잡는 것과, 엘도라와 멜리너스 중 최소한 한 명이라도 완전히 차지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그냥 도박이라손 쳐도, 후자는 무조건 이루어야 하는 터라 사탄으로서도 고민이 많았다. 결국, 여러 신물로 보호받는 엘도라보다는 멜리너스가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타깃으로 잡았고,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만큼 악마 14 군주 중 하나인 벨리알을 씨앗으로 사용했다. 어쨌든 일개 인간에 불과한 존재이니 설마 실패하랴 싶었는데, 거의 그르치기 직전까지 갔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실패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습니다. 진정으로 위험했지요. 인간, 그것도 노인치고는 정신력이 대단히 강했거든요. …하지만.” “하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일그러진 부분이 있었지요. 후후.” “…….” 멜리너스는 돌연히 킬킬거리며 입김을 뿜었다. 평소 현자와 같은 이미지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몹시 야비하고 비열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이 인간, 엘도라한테 욕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호?” “솔직히 좀 웃겼습니다. 거의 딸처럼 키워왔는데, 극히 추악하고 변태적인 상상을 품고 있더군요. 느낀 제가 놀랄 정도로 말입니다. 물론 덕분에 간신히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만.” “그런가. 사실 별로 놀랄 것도 없지.” 여인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아무리 선지자다, 현자다 추켜세워도 결국에는 이 세상의 거주민이 아니거든. 원래 세상에서는 어떤 인간이었을지 궁금하군.” 그렇게 말한 여인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과정이야 어떻게 됐든, 일단 계획의 첫걸음은 성공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아직 첫발에 불과하며, 남은 길은 구만 리 장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예언의 반전을 위해 타나토스의 발아 시도라는 하이 리스크를 감수했지만, 전황이 지극히 불리하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에는 시간이 문제였다. 한참 동안 생각을 정리하던 여인은 문득 이안을 응시했다. “아몬, 아니 이안. 현재 북 대륙의 상황은 어떻지?” “으음. 그게….” 이안은 말하기 좀 그렇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여인의 지긋한 눈초리에 조용히 말을 이었다. “…상황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사탄께서 원하시는 안주라는 건, 놈들의 머릿속에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반대라고?” “예. 북 대륙 전체의 활동이 갑작스레 갑절은 활발해진 것이…. 아마 본격적인 힘 모으기에 들어갔다는 생각이….” “…….” 이안이 말을 채 잇지 못하자, 여인의 낯빛도 조금은 어두워졌다. 몇 번을 강조하지만, 현재 악마 진영에 절실히 필요한 건 첫째도 시간이요, 둘째도 시간이다. 계획의 성패를 결정짓는 요소요소가 뚝딱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그만한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해서 그렇다. 그래서 혹시 당분간 아틀란타에 안주하지는 않을까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외려 그 반대의 상황이란다. 이렇게 되면 영원한 소멸을 각오하고 나온 것도 도로아미타불이 돼 버린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멜리너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찌 보면 현재 악마 진영이 직면한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나온 것까지는 좋다. 화정과 겁화에 대항할 힘까지는 손에 넣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인정해야겠지.” 여인이 침대 시트를 걷으며 말했다. 그러자 아담하면서 눈부실 만큼 새하얀 나신이 드러났으나, 멜리너스와 이안의 눈이 휘둥그레진 건 그 때문이 아니리라. 하지만 무어라 말하기도 전, 여인이 비로소 침대에서 걸어 나온다. “인간을 대리인으로 내세운다…. 그래, 천사 쪽이 옳았어.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가브리엘의 선택이 옳았던…?” “사, 사탄!” 그때였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멜리너스는 호칭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사탄이 돌연 춤추듯 두어 번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털썩 쓰러졌다. 곧바로 다가가 앉은 멜리너스는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몸을 둥글게 웅크린 여인의 왼팔이 사시나무 떨듯 마구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괘, 괜찮으십니까?” 멜리너스가 황급히 묻자, “빌어먹을….” 여인은 아미를 찡그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오른손을 왼팔에 대고 지그시 누르자, 이내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걸 보는 멜리너스의 미간도 사정없이 좁혀졌다. 아까 느꼈던 모종의 불안감이 한층 강해졌다. “역시 실패한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야.” 여인은 그건 아니라는 듯,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럼…?” “깨어 있더군.” “…예?” “타나토스 말이야. 육체는 봉인된 상태였지만, 정신은 어느 정도 각성한 상황이었어. 설마 그렇게 깨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여인은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키고는,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부족해. 지금 바로 두 번째 계획을 실행하겠다.” * 어두운 밤. ‘화정.’ 나는 테라스 밖에 서서 속으로 말을 걸었다. “자, 그럼 연다?” “야, 야! 진수현! 잠깐만, 잠깐만 멈춰봐. 이번에는 내가 열면 안 돼?” “뭔 이번에야? 방금 열었으면서.” “맞아요. 일단 유정이 언니는 빠지고, 오빠. 그냥 제가 열게요. 어때요?” “너도 안 돼. 형님이 너는 절대로 열지 말라고 했잖아. 잊었어?” “히잉….”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난간 아래 정원은 무척 시끄러웠다. 한 소리 듣고 시무룩이 물러나는 안솔과, ‘괴물 소환 상자 4’ 하나를 두고 이유정과 진수현이 옥신각신 싸우고 있다. 어디서 샀는지 말해달라고 하도 조르길래 알려줬는데, 설마 저렇게 바로 사올 줄은 몰랐다. 뭐, 개인의 GP를 어디다 쓰는지 알 바는 아니니 큰 상관은 없고, 전투 경험을 쌓거나 운이 좋으면 괜찮은 장비를 얻을 수도 있으니 결국 허락해주기는 했다. 하지만 조건을 하나 걸었다. 바로 절대로 안솔은 상자를 개봉하지 말라는 것. 왜냐면 저번처럼 고대 악신을 깨우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그리고…. - 왜? 문득, 약간 늦은 화정의 회답이 머릿속을 울렸다. 원래는 잠이 안 와 심심해서 말을 걸었는데, 상자를 보니 마침 궁금한 점이 하나 생겼다. ‘저번에 그…. 누구였더라? 도리토스의 꽃?’ - 푸. 타나토스의 꽃이겠지. ‘아, 그렇지. 타나토스의 꽃. 아무튼, 걔가 너나 게헨나와 동급이라고 했었지?’ - 응. 그런데 걔 얘기는 갑자기 왜 꺼내? 갑자기 화정의 음성이 날카로워졌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계속 생각을 이었다. ‘다른 건 아니고. 저번에 안솔이 걔를 소환할 뻔했잖아?’ - 젠장, 그 얘기는 꺼내지도 마.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니까. 진짜, 바로 닫아서 다행이었지. ‘혹시 봉인이 풀릴 가능성은 없나?’ - …나는 또, 뭔 말을 하나 했더니. 그건 내가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니? ‘하지만 고대 악신이 깨어난 경우처럼….’ - 그건 인간이 봉인한 거였잖아. 애초 필멸자가 불멸자를 영원히 봉인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하지만 타나토스는 상황이 달라. 신들의 전쟁인 라그나로크에서 패배한 만큼, 봉인 과정에 여러 신이 직접 참여했다고. 즉 영구적으로 봉인했다는 소리지. 라그나로크? 무언가 낯설지 않은 단어가 나왔지만, 일단 질문을 잇기로 했다. ‘하지만 저번에 그랬잖아. 스스로 풀고 나오기는 어렵지만, 외부 간섭이 있다면 봉인을 푸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라고.’ - ……. 이 말에는 화정도 바로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조금은 진지해진 음성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 그러네. 확실히 불가능하지는 않지. ‘어떻게?’ - 너. ‘나?’ - 응. 정확히는 나를 품은 너. 그리고 게헨나의 겁화 역시 봉인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을 테고, 그리고 마지막은 쟤. ‘응?’ 순간 ‘쟤’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궁금했지만, 곧 안솔을 가리켜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안솔이?’ - 뭘 놀래? 저번에 한 번 풀릴 뻔했잖아. 직접 눈앞에서 봤으면서. 으음. 그런가? 하기야 어느 능력치든 101포인트만 돼도 인간을 초월했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그런데 안솔의 행운은 무려 105나 되지 않는가. 실제로 게헨나를 소환한 전력(前歷)도 있고. 103부터는 나도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이니, 안솔이라면 정말로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나나 안솔이나 타나토스의 봉인을 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왜인지 근래 기분이 찜찜해서 말이지. ‘그래도 너무 자신하는 것 같은데. 어쨌든 타나토스의 봉인이 풀릴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만에 하나의 경우라도 말이야.’ - 아이고, 그래. 만에, 억에, 조에, 경에 하나 정도는 경우의 수가 있을 수도 있겠지. 실제로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봉인 해제 과정서 내가 특정한 경우를 포함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풀려봤자 일걸?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그러니까 신을 봉인할 때는 서로 격이 맞는…. 에이 씨, 이건 좀 설명하기 복잡한데. 어쨌든!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그냥 기우라고. 설마 봉인이 해제되고 타나토스가 풀렸으니 세상이 멸망한다, 이따위 생각은 집어치워. 신들이 그렇게 허투루 일을 처리한 줄 알아? 화정의 핀잔 어린 어조에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 쓸데없는 걱정은 접어두고, 저거나 잘 감시해. 혹시 저번과 같은 일이 벌어지면, 그때는 진짜 네 생각대로 될 수도 있으니까. ‘그래, 그래.’ 화정의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은 가벼워진 기분으로 다시 테라스 너머를 응시했다. 그러나. “뭐….”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웃음이 싹 달아났다. 망을 보고 있었는지, 나와 눈을 마주치자 당황해 하는 진수현. 한껏 긴장한 얼굴로 무언가를 주시하며, 목울대를 꼴깍꼴깍 움직이는 이유정. 그리고 테라스를 흘끗거리며 상자를 향해 살그머니 손을 뻗는 안솔을 확인한 순간. 나는, “안소오오오오오올!” 목청껏 소리 질렀다. ============================ 작품 후기 ============================ 사탄 : 시간이…. 시간이 없다! 어서, 어서 계획을…! 안솔 : 이얍! 상자 개봉! 웅웅웅웅! 사탄 : 자, 다음 계획은…. 응? 이건 또 무슨 마법 진이지? 우우우웅! System Message : 타나토스의 꽃(사탄)이 머셔너리 캐슬로 소환되었습니다. 사탄 : …어? 0856 / 0933 ---------------------------------------------- Be Infected, Six. 남 대륙이 돌아가는 체계는, 언뜻 북 대륙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몇 부분에서는 차이점을 보인다. 가령 아틀란타의 경우, 가장 큰 내(內) 도시는 여러 클랜에서 공정히 차출한 사용자들로 구성된 중앙 관리 기구가 관리하고 있으며, 수장은 전 수호자 신분인 이효을이 맡고 있다. 그러나 라그나로크에서는, 하나의 클랜인 오딘이 중앙 관리 기구와 유사한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오딘의 중심인 원탁의 기사단이 남 대륙의 주요한 흐름을 선도하며, 보통 영주 클랜(한 도시를 관리 하는 사용자들의 모임. 북 대륙의 ‘대표 클랜’과 같은 개념이다.)과 대형, 중견, 소형 클랜, 그리고 이하 사용자들이 그들의 결정을 따라가는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중앙 집권 체제가 가능한 근거는 약 네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공인처럼 관심받는 엘도라와 선지자로서 평판 높은 멜리너스가 있다는 것. 두 번째는 오딘 클랜이 창설된 이래 항상 공익을 위해 움직였다는 것. 세 번째는 다른 영주 클랜은 물론, 필요하면 여러 일반 클랜의 의견도 수용하는 등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가장 큰 이유인 네 번째로, 남 대륙 최대 무력 단체인 원탁의 기사단을 갖췄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원탁의 기사단이 열세 명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최고 권력을 지닌 개개인을 편의상 일컫는 것에 불과하다. 원래 한 사람 한 사람이 내로라하는 사용자인 만큼 각자 일가(一家)를 이룰만한 능력이 충분하며, 이안처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개인보다는 단체로 영입된 경우가 훨씬 많다. 말인즉 원탁의 기사단은, 여러 명성 있는 집단이 모여 탄생한 사상 초유의 강력한 기사단인 것이다. 정리해보면 무력, 명분, 민심. 이렇게 삼박자를 고루 갖춘 오딘 클랜이지만, 그렇다고 싫어하는 클랜이 전혀 없지는 않다. 아니. 정확히는 비협조적이라고 해야 하나. 올리비아가 이끄는 엘핀처럼 우호적인 영주 클랜도 있지만, 반대로 오딘이 이끌어가는 방식에 불만을 품은 이도 없지는 않을 테니까. “아틀란타처럼, 라그나로크의 외 도시도 네 개로 나뉘어 있습니다. 동서남북 순으로 엘핀, 팍스, 카르페디엠, 녹스. 이렇게 네 영주 클랜이 관리하고 있죠.” 탁, 탁. 손으로 하나씩 짚으며 설명하던 이안이 눈을 들어 건너편 의자를 바라봤다. 맞은편에는 검은 머리칼의 여인이 탁상에 깔린 지도에 조용히 집중하고 있다. “우선 가장 협조적인 엘핀 클랜의 로드는 아시다시피 사브나크가….” “팍스, 카르페디엠, 녹스는 어떻지?” 여인은 그건 됐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말을 끊었다. 이안은 금색 뿔테 안경을 손등으로 추켜올리며 말을 이었다. “세 영주 클랜 모두 예상대로입니다. 특히 카르페디엠과 녹스는 확실히 오딘에 불만을 품고 있지만, 현 정권의 전복(顚覆)을 꿈꾸는 만큼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즉 서로 어긋나 있다는 게 아니라,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고나 할까요.” “좀 더 자세히 말해봐.” “좋은 말로 하면 호전성이 강하고, 있는 그대로 말하면 욕망에 충실한 자들입니다. 오크 성 공략 때 서로 불협화음 없이 협력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가진 힘을 마음껏 휘두르고 싶지만, 그걸 제한하는 오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군.” 여인이 맞느냐는 듯이 눈을 들자 이안은 바로 끄덕였다. “정확합니다. 아마 사탄의…. 아, 죄송합니다. 어쨌든 의도대로 오딘의 노선이 변경된다면, 카르페디엠과 녹스는 이후의 계획을 지지해줄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세력입니다. 서 대륙에서 그랬듯이 적당히 구슬리고, 적당한 명분만 쥐여주면 그만이니까요.” “서 대륙이라. 그러고 보니 남 대륙에 새로 전입해온 서 대륙 사용자들이 있지 않나? 대부분 북 대륙보다는 남 대륙으로 전입한 것 같은데.” “예. 천사 쪽이 말을 잘했는지 위화감이 심하지는 않고, 배척하지도 않습니다. 왜 서 대륙을 버리고 왔는지 궁금해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불쌍하니까 받아준다는 식의 인식이 강하지요.” “자부심이 높다는 건가…. 뭐, 조금이라도 비벼볼 구석은 있겠지. 아무튼, 그 두 세력의 수장과는 만나봤나?” 여인의 질문에 돌연 이안이 슬쩍 웃었다.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없지만, 몇 번 보기는 했습니다. 완전 미친놈이더군요.” “미친놈이라고?” “카르페디엠 로드 말입니다. 얼마 전 복마전의 성인이라는 각성 시크릿 클래스를 얻었다고 자랑하던데…. 그때 이런 말을 하더군요. 소돔과 고모라 같은 타락한 도시를 구현하는 게 꿈이라고요.” “재밌는 놈이군. 녹스의 수장은?” 여인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반대로 이안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녹스의 수장은…. 으음. 나중에 기회가 되면 직접 한 번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클랜 성향이야 구성원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글쎄요. 그놈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할까요.” “그런가.” 잠시 여인의 눈동자에 흥미의 빛이 떠올랐지만, 곧 사라졌다. 조금 흥미가 동하기는 했으나 우선하여 실행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고, 무엇보다 오딘 클랜 내부의 일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아차, 팍스의 수장은 어떻지?”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는 놈입니다. 겉으로는 평화를 표방하기는 하지만, 그냥 기회주의자에 불과합니다.” 이안이 거기까지 말한 순간, 둘은 갑자기 동시에 고개를 젖혔다. 끝없이 이어지는 나선 계단 위로, 급하게 내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고요한 대 도서관을 울리기 시작했다. 한두 개가 아닌, 여러 기척이었다. “이제 오는 모양이군요.” 이안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탁상으로 손을 뻗었다. 얼른 책상을 치운 다음, 고대 존재에 흥미가 동해 가장 먼저 도착한 학자를 연기해야 하니까. 그러한 찰나, “후” 한숨을 뱉은 여인이 문득 기지개를 켰다. “…어색하군.” 지도를 접어 품속으로 집어넣던 이안이 흘끗 눈을 들었다. “무엇이…. 아, 혹시 몸 때문에 그러시는?” “아니.” 여인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그리고 점점이 모습을 드러내는 사용자들을 슬쩍 흘기며 쓰게 미소 지었다. “이렇게 쫓기듯이 움직이는 상황이 어색하다는 거야.” * 여인이 정신을 차렸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원탁의 기사 전원에게 퍼졌다. 멜리너스의 소식을 받은 이들은 각자 호기심을 품고 모였지만, 그중 가장 급한 건 바로 엘도라였다. 엘도라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급하게 달려가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 그동안 왜 불안해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동요라는 감정이었다. 여태껏 대부분 멜리너스의 의견에 따랐다고는 하나, 엘도라는 공익을 위해 움직이는 존재였다. 어떤 일을 할 때는 항상 그래야 하는 당위성이 있었고, 남 대륙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언제나 떳떳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원정은 조금 다르다. 단순히 칼집을 찾으려 했던 것이, 어느 순간 도를 넘어 정체 모를 존재를 해방하고 말았다. 즉 공공의 목적이 아닌 개인의 욕망을 위해 움직인 것이다. 물론 그 행동의 결과가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다면, 그냥 잊고 넘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 대충대충 합리화하고 넘어가는 성격도 아닐뿐더러, 벽화를 보며 이안이 했던 말이나 에르윈이 극렬히 거부했던 일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한편으로는 원정 이후 조금 혼란스러워진 클랜 분위기도 묘하게 신경 쓰였고. 내가 왜 그랬을까라는 자책감. 혹시 그 존재가 남 대륙에 혼란을 초래하지 않을까라는 불안감. 결국에는 엘도라가 느끼는 혼란은, 합리적이지 못한 자신의 행동에서 기인한 일종의 공포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그 여인이 별것 아닌, 정확히는 남 대륙에 해악을 끼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이 감당 못 할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러면 조마조마한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으니까. 기실 어린이처럼 느껴질 법한 생각이었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왜냐면 엘도라는 홀 플레인에 소환됐을 때부터 그런 사용자로 키워져 왔고, 또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아무튼, 만약 원정 이후 느꼈던 불안감이 적중한다면…. ‘그때는….’ 엘도라는 천으로 감싼 칼을 바스러지듯이 쥐며 빠르게 계단을 밟았다. 그러자 곧 앞서 도착한 모인 예닐곱 명의 기사와, 큰 책상에 홀로 앉아 있는 여인이 서서히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계단을 모두 내려간 엘도라는, 곧장 책상 근처까지 다가가 여인을 뚫어지라 노려보기 시작했다. 검은 머리카락을 등허리까지 가지런히 늘어트린 여인은, 어른 여성이라기보다는, 소녀라는 용모가 어울리는 십 대 중후반쯤의 나이로 보였다. 하지만 초점 없는 눈동자로 가만히 앉아만 있는 모습은 어딘가 공허해 보인다. 나탈리나 이안이 스리슬쩍 말을 걸어도 일절 입을 열지 않고, 그저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고 있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냥 표홀히 떠다니는 공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건, 인간이라면 으레 가지고 있는 생기를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 쿵! 그 순간, 돌연히 커다란 소음이 대 도서관의 정적을 깨트렸다. 한 발 앞서 모인 기사들은 하나같이 놀란 얼굴로 책상을 주시했다. 그곳에는 엘도라가 엑스칼리버를 꺼내놓은 채 여인을 뚫어지라 노려보고 있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반응했는지, 심지어 여인조차도 탁상과 부딪친 대검을 응시하고 있었다. “단도직입으로 묻겠다.” 상대를 경계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100포인트에 다다른 행운 능력치가 앞으로 불어올 폭풍을 감지하고 모종의 신호를 보내서일까. 엘도라는 쏘아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으며, 적의마저 느껴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지? 어떤 존재지?” 그 순간이었다. 물끄러미 엑스칼리버를 쳐다보던 한 쌍의 칠흑빛 눈동자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한다. 시선은 엘도라의 복부에서부터 가슴을 훑고 올라와, 이내 아름답게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와 마주했다. 이렇게 두 여인의 시선이 허공에 얽히고설킨 순간, 여인의 작은 입술이 비로소 살며시 벌어진다. “…그건.” 그와 동시에. 마침내 사탄의 두 번째 계획인, ‘사용자 빼앗기’가 시작되었다. ============================ 작품 후기 ============================ 어제 후기는 조크라고 코멘트에 남겼는데…. 하하. 코멘트를 읽어보니 의외로 재밌어들 하셔서 조금 놀랐습니다. 물론 저렇게 가면야 완결까지 가는 여정이 상당히 편해질 것 같습니다만, 정말로 그렇게 해버리면…. ^^; 아마 굉장히 급격한 완결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무엇보다 머리를 쥐어짜내서 간신히 에피소드 8개로 구상을 마쳤는데, 전면 수정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ㅜ.ㅠ 오늘 새벽 한 시쯤에가 갑자기 복통이 찾아왔습니다. 저녁에 매운걸 먹어서 그런가 봐요. 거진 한 시간 동안 뒹구니 조금 가라앉기는 했지만, 아직 쌀쌀하고 아릿한 감이 있습니다. 얼른 잠자리에 들어야겠어요. 독자 분들도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 0857 / 0933 ---------------------------------------------- Be Infected, Six. 그때였다. “그거.” 엘도라가 한 번 더 으르렁거리려는 순간, “엑스칼리버?” 고요한 음성이 둘 사이로 흘렀다. 듣는 이의 귀가 솔깃해질 정도의 매혹적인 미성(美聲). 목소리는 전투적인 태도를 보이던 엘도라조차도 누그러지게 할 만큼 매우 아름다웠다. “그대가 그 검의 주인인가요?” 비로소 공허에서 깨어난 듯한 여인이 흥미가 동한 눈으로 상대를 응시한다. 찰나의 순간, 엘도라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물렸다. 두어 걸음 물러나고 나서야 본인의 행동을 깨달았는지, 흠칫 놀란 기색을 비쳤다. 어떤 기운도, 어떤 압박도 감지되지 않는다. 존대도 예상외기는 했지만, 꼭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이가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어본 느낌이었다. 눈앞의 상대는 사람이 아닌, 무한한 불안감을 느끼게 하는 미지의 존재다. 이렇게 단정 짓고 온 엘도라로서는, 생각한 것보다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여인의 태도에 혼란을 느꼈다. 물론 어색하게 느끼는 건 원탁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앉도록 하세.” 침묵을 깬 멜리너스가 자못 엄숙하게 말했다. 어느새 원탁의 기사는 열세 명 전원이 모여 있었다. 이윽고 기사 몇 명이 주변에서 의자를 끌어와, 여인을 포함해 총 열다섯 명이 커다란 책상 하나를 둘러싸고 앉게 되었다. 조금이나마 관심을 나타내는 여인에 반해, 엘도라를 비롯한 열네 명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크게 긴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탁상에는 한동안 정적만이 감돌았다. 결국, 여인을 제외한 열두 쌍의 시선은 멜리너스와 이안으로 향했다. 이런 일에는 저 두 명이 그나마 제격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혼란스럽군요.” 그때 여인이 불현듯 말문을 열었다. 설마 먼저 말을 꺼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곳곳에서 당황한 빛이 스친다. 금세 정신을 차린 듯한 이안이 입을 열었다. “혼란스럽다니요?” 여인은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설마 깨어나자마자 보게 된 존재가 인간일 줄은….” “…인간일 줄은?” 이안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잠시.” 그러한 찰나, 누군가 걸걸한 목소리를 내며 손을 들었다. 이야기를 정지시킨 멜리너스는, 문득 품속에서 조막만 한 푸른 구슬을 꺼내더니 여인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이야기에 앞서, 부탁이 하나 있소만.” 구슬, 정확히는 진실의 수정을 알아본 몇몇 기사가 작은 탄성을 터뜨렸다. 동시에 안심했다는 듯이 몰래 숨을 흘렸다. 막막하던 상황에서 누군가 나름의 대비를 해왔다는 것에서 느낀 안도감이었다. “그 구슬에 손을 얹고, 본인의 기운을 조금 흘려주셨으면 하는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오.” 여인은 고개를 갸웃했으나 재밌다는 표정을 짓더니 순순히 진실의 수정에 손을 올렸다. 잠시 후, 구슬이 선연한 빛을 분사하며 파르스름한 불꽃을 일으켰다. 멜리너스는 이안을 한 번 바라보고는 슬쩍 끄덕였다. “에….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저희는 인간입니다.” “알고 있어요.” 여인이 잔잔히 미소 지으며 화답했다. 너무나 예의 바른 태도에 이안이 한층 어색해 하며 말을 잇는다. “아까 말씀하셨죠. 혼란스럽다. 그리고 인간일 줄은, 이라고.” “네.” “그 말의 정확한 의미를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 여인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질문의 답은 하나로 할 수 있겠네요. 말 그대로예요. 저는 오랜 세월 동안 잠들어 있었던 만큼, 언젠가는 깨어나기를 바랐죠. 하지만 저를 해방한 존재가 인간일 줄은 몰랐다는 뜻이었어요.” “왜 인간일 줄 몰랐다는 것이오?” 말이 끝나자마자 멜리너스가 곧바로 받아쳤다. 그 순간 여인의 낯에서 웃음기가 싹 걷히며 조금 낮아진 음성이 흘러나왔다. “당연하죠. 먼 옛날 전투에서 패배하고 봉인됐을 때, 그 과정에 인간도 참여했으니까요. 물론, 제 반대편으로요. 제 추종 세력에 인간은 없었으니까요.” “흐흠. 궁금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일단 말씀을 들어보니 꼭 나는 인간이 아니다, 라는 것처럼 들리오만.” 멜리너스가 침착히 말을 잇자, 여인은 천천히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의아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가장 궁금한 건 하나요.” 멜리너스의 얼굴도 한층 진지해졌다. “현재 우리의 눈앞에 있는 당신이 누구인지, 어떤 존재로 정의해야 하는지.” “그건 조금 의외군요. 정확히 어떤 대답을 원하는 건가요?” “간단하지요. 인간이 아니라면, 가령 신이라던가….” “네.” 여인은 멜리너스의 말을 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리고 한 번 더 수긍한 순간, 원탁의 기사 전원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너무나 간단히 수긍했다. 몇몇은 귀를 의심하는 걸 넘어 비현실적인 기분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은 분명히 신이라는 말에 반응했고, 확실히 긍정했다. 무엇보다. 진실의 수정 불빛이 시종일관 파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다. 심지어 조금 전까지도. 그 순간이었다.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가 갑작스럽게 대 도서관을 울렸다. 자연스레 시선이 쏠린 곳에는 이안이 의자 채로 넘어진 채 나동그라져 있었다. 찢어질 듯 치뜬 두 눈동자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 있다. 이안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바닥을 짚으며 상반신을 바로 했다. “마, 말도 안 돼…. 이건, 이건….” “이안, 진정하게.” 멜리너스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일어서는 이안을, 여인은 신기하다는 눈초리로 응시했다. 그러더니 머리카락을 부드러이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신기한 일인가요?” “아니…. 그건, 그건 아닙니다.” 이안은 겨우 머리를 흔들어 부정하고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여인을 노려봤다. “당신이 누군지, 아니 어떤 신인지 알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게 제가 놀란 이유입니다.” 여인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벽화를 봤을 때 설마 설마 했는데…. 굉장히 오래된 기록이기는 하지만, 읽은 기억이 있어요. 죽음의 의인화…. 멸망의 강림….” “호.” “그래요, 타나토스. 타나토스의 꽃. 분명히 그렇게 적혀 있었어요.” “…이건 놀랍네요. 설마 제 진명을 기억하는 인간이 아직 남아 있다니.” 여전히 변하지 않는 불빛의 색깔과, 여인의 시원스러운 인정. 그 순간 이안은 힘이 쭉 빠졌는지 돌연히 의자에 허물어졌다. 그리고 갑자기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맙소사…. 우리는, 우리는 도대체 어떤 존재를 해방한 거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만히 듣고만 있던 원탁의 기사들은 긴장한 눈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죽음의 의인화, 멸망의 강림. 듣기만 해도 좋은 쪽으로는 생각되지 않는 말이다. 띄엄띄엄 혼잣말하며 괴로워하고 있지만, 눈앞의 여인이 심상찮은 존재라는 것 정도는 느낌상 직감할 수 있었다. 여인의 예의 바른 태도에 조금씩 느슨해지던 긴장이, 조금 전을 기점으로 다시금 팽팽해졌다. 일부는 이미 슬금슬금 무기를 움켜쥐기까지 하고 있다. 되살아난 긴장의 줄은, 곧 끊어지기 일보 직전처럼 순식간에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는다. “그럼.” 그때, 느긋이 주변을 돌아보던 여인이 문득 팔짱을 꼈다. “이제, 제가 질문 좀 해도 될까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죠.” 여인, 아니 타나토스가 살포시 미소 짓자 전원 움찔하면서도 아리송한 낯빛을 보였다. 스스로 신이라고 인정했으면서 전혀 신처럼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요, 행동이다. 그러나 한 번 물살을 탄 긴장은, 외려 더욱더 가속화되고 있었다. 엘도라가 움켜쥔 칼자루에서는 땀방울마저 배어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모두가 신호만 기다리는 가운데, 타나토스가 말을 이었다. “당신들은 누구죠?” “…뭐라고?” 예상치 못한 질문에 엘도라의 아미가 찌푸려졌다.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아, 질문이 잘못됐네요. 물론 당신들은 인간이죠.” 모종의 낌새를 느꼈는지 타나토스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음, 뭐라고 해야 할까요. 가만히 느껴보니…. 이질감? 아니 이물질? 그런 기운이 느껴져요.”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부드러이 손을 마주 잡는다. “아. 그러니까 원래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마치 이방인 같은 느낌이에요.” 긴장이 쌓이던 대 도서관에 순간적으로 술렁거렸다. 사용자들은 하나같이 당혹한 낯으로 서로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타나토스는 느낌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정확히 맞는 말이었다. 그러는 와중 이안이 황급히 끄덕거렸다. “마, 맞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희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원래 살던 세상은 따로 있고, 이 홀 플레인에는 강제로 소환된 처지입니다.” “역시 그랬군요. …뭐라고요? 강제로?” 덤덤히 받아들이는 것 같던 타나토스는, 이어지는 말에 느닷없이 의아히 반문했다. 그리고 돌연 엘도라를 정확히 직시하며,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요? 왜 강제로 소환된 거죠? 어떤 목적으로?” “그건.” 이윽고 반사적으로 입을 연 엘도라는, “그….” 순간, “…건.” 말문이 막힌 듯한 표정을 보였다. 비단 엘도라뿐만이 아니었다. 멜리너스는 물론, 원탁의 기사 전원이 똑같이 망연한 얼굴이다. 기실 타나토스의 질문은 지극히 간단한 것이었다. 또한,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본 질문이었다. 왜. …그러나. “…….” 한편으로는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면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용자로서의 진정한 존재 의의를. * 목청껏 고함친 결과, 안솔의 상자 개봉은 간신히 막아낼 수 있었다. 크게 놀란 속을 추스른 후 단단히 혼내려고 부르려는 찰나, 세 명은 상자를 내팽개치고 쏜살같이 줄행랑을 쳤다. 사실 못 잡을 것도 없지만, 같이 도망치던 안솔에게 좌우서 동시에 발을 걸어 미끼로 삼은 두 명의 잔혹함에 감탄해, 그냥 상자만 압수하는 선에서 그치기로 했다.(사실 배신당했다고 꺼이꺼이 대성통곡하는 안솔이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상자를 회수하고 돌아온 후, 나는 한참 동안 생각을 정리하다가 화정에게 말을 걸었다. ‘화정.’ - 왜? 아직 자고 있지 않았군. 다행이다. ‘타나토스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해봐.’ - 야. 내가 걔 얘기 꺼내지 말랬잖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하다고! ‘제발, 부탁해. 믿을 건 너밖에 없어서 그래.’ - …뭐가 궁금해서 그러는데. 간절한 체하며 부탁하자 역시나 목소리가 한풀 꺾였다. 후후. 화정도 의외로 마음이 약해. ‘네가 아는 정보라면 아무거라도 좋아. 관계된 기록이나, 사용하는 힘이나, 성격이나, 생김새나….’ - 뭐? 이게 듣자 듣자 하니까! 신을 얘기하는데 생김새는 왜 나와? 왜! 걔도 게헨나처럼 자빠뜨리고 싶어서 그러냐? 정말 기도 안 차서.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리고 생김새를 묻는 게 어때서? 게헨나도 그렇고, 화정 너도 그렇고. 타나토스도 꽤 예쁘지 않을까 싶은데.’ - 뭐, 뭐라고? 유들유들하게 말하며 살살 구슬리자 불같이 화내던 화정이 주춤 말을 더듬는다. 아마 ‘화정 너도 그렇고.’ 라는 말을 강조한 게 유효했던 듯싶다. ‘뭘 민감하게 반응해. 그냥 느낌상 그렇다는 거야.’ - 시끄러워. 닥쳐. 그리고 타나토스 걔가 나처럼 고상하고 우아한 신인 줄 알아? 한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 전혀 아니거든. 너희 기준으로 말하면 성격 파탄, 아니. 천재지변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재앙이야. ‘너무 안 좋게만 말하는 것 같은데. 그래도 신이니만큼….’ - 신도 신 나름이지. 나야 착하니까 이렇게 대접해주는 거지, 게헨나 봤지? 걔가 처음 인간을 봤을 때 어떻게 취급했는지 기억 안 나? ‘그럼 타나토스는 그보다 더 심하다는 거야?’ - 두말하면 잔소리. ‘오호.’ 일부러 추임새를 넣자 화정은 코웃음 치며 빈정거렸다. - 오호, 는 뭔 놈의 오호. 아무튼, 네가 뭘 기대하는지는 알겠는데, 꿈 깨셔. 이건 진심으로 충고하는 거야. ‘아니, 뭐….’ - 쳇. 하여간 누가 색마 아니랄까 봐. …아. 그리고 뭐? 화정 너도 그렇고? 웃기지도 않아. 내 본체는 본 적도 없으면서.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네.’ - 그러시겠지. 다시는 그런 말 하지도 마. 인간 주제에, 같잖으니까. ‘그래. 알겠다.’ 평소보다 갑절은 예리해진 화정의 말투에 백기를 들었다. 그래도 소정의 정보는 얻었으니 오늘은 여기서 만족하기로 할까. 여하튼 화정의 우려처럼 타나토스를 어떻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애초 사서 고생할 이유도 없고,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다. 다만…. - 흠, 흠. 그때였다. 한창 상념에 잠기려는 찰나, 문득 어색한 헛기침 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 좀 뭐라 했다고 갑자기 조용해지네. 신 민망하게. ‘그야 네가 싫어하는 것 같으니까.’ - …돼, 됐고. 어, 어떨 것 같은데? ‘뭐가?’ - 예, 예쁠 것 같다며. 어, 어떻게 예쁠 것 같으냐고. ‘…….’ 순간 휙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끌어내리려고 무진 애를 쓰며, 나는 테라스 너머 밤하늘을 응시했다. 일 회차와 이 회차를 겪으면서 얻은 게 하나 있다면, 바로 ‘감’의 차이다. 말인즉 조금 이상하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단단히 일렀는데도 안솔이 상자를 개봉하려고 한 일이나, 뜬금없이 타나토스가 생각난 것까지 모조리 석연치 않다. 단순히 장난으로 치부하기에는…. 특히나 안솔의 행운은 말할 것도 없지만, 내 행운 능력치도 결코 낮은 편은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 무언가 묘하게 신경 쓰인다는 건, 일종의 신호라고 해석해도 좋지 않을까. 그래, 설령 기우라고 해도 좋다. 전쟁에 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있을지언정, 경계에 소홀히 한 군인은 용서할 수 없다는 말도 있으니. 악마가 이대로 물러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우선은 염두에 둬볼까. 정말로 맞닥뜨리게 됐을 때, 최소한 놀라지 않을 정도로 말이지. - 가슴은 큰 게 좋으려나? 야, 김수현. 듣고 있는 거야? ‘응?’ - 너…. 큰 가슴 좋아하잖아. ‘아니?’ - …아니야? ‘너라면 다 좋아. 어떤 모습이든지.’ ============================ 작품 후기 ============================ 『김수현 회고록』 …그렇게 빙긋 웃으며 말했을 때만 해도, 나는 스스로 꽤 괜찮은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약 오 초 후 깡그리 사라졌다. 이후 화정의 폭주로, 머셔너리 캐슬을 넘어, 도시 전체를 밝힐 만큼의 거대한 불꽃 놀이로 이어질 것을 알았다면…. 절대로,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0858 / 0933 ---------------------------------------------- Be Infected, Six. “잘못된 질문이었나요?” 한참 동안 침묵만 흐르자 타나토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잘못된 질문은 아닙니다. 그냥…. 말하는 게 어렵다고 해야 하나.” 이안이 손을 휘휘 저으며 주변을 둘러본다. 스리슬쩍 도와달라는 눈빛을 뿌렸으나 돌아오는 건 ‘알아서 해결하라.’ 는 외면뿐. 결국에는 한숨과 함께 조심스레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게…. 사실 왜 이곳에 있는지는, 저희도 잘 모르는 상황입니다.” “모른다고요?” “예. 어느 날 눈떠보니 이 세상에…. 그러니까 강제로 소환당한 처지거든요. 엄밀히 말하면 저희도 피해자입니다.” “강제로 소환?” 드문드문 말을 잇자 타나토스의 고개가 더더욱 비뚤어졌다. 점차 높아지는 목소리로 반문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럴수록 이안은 ‘우리는 당신의 적이 아니다.’ 라고 호소하듯이 열심히 말을 이었고, 타나토스는 눈썹을 추키며 손을 들었다. “잠시만요. 그러니까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소환됐고, 아무런 목적도 없이 이 세상에 살아간다는 말씀인가요?” “그, 그런가요. 아니, 그렇죠.” “이해가 안 가는군요. 혹시 당신들과 비슷한 처지의 인간이 많나요?” “에…. 글쎄요. 정확한 수는 모르지만, 못해도 수만 명은 넘지 않을까 싶은데….” “하.” “…….” 이안이 간신히 동의하자, 타나토스는 숫제 기가 막힌다는 듯 짧은 탄식을 흘렸다. 그러자 원탁의 기사들도 하나같이 거북한 낯빛을 숨기지 못했다. 사용자로 살아오면서 암묵적으로 현 상황을 받아들였는데, 꼭 억지로 치부가 드러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더욱 거슬리는 건, 타나토스가 꼬집는 문제에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잠들어 있기는 했지만…. 모르겠네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어요. 누구죠?” “예?” “이곳에 강제로 오게 됐다면, 소환한 주체가 있을 텐데요?” “아, 예. 그렇죠. 있습니다. 천사라고….” “천, 사?” “예, 예. 일종의 도우미 역할이라고 할까요. 그러니까 등에 흰 날개 한 쌍이 달린….” 양손까지 동원해 우스꽝스럽게 표현하던 이안은, 타나토스를 보고 돌연히 입을 닫았다. “…아하.” 그리고 곧, 타나토스의 입에서 미약한 탄성이 이어졌다. 동시에 가만히 앉아 있던 원탁의 기사들이 순간적으로 숨을 삼켰다. 천사라는 말이 나온 순간 타나토스의 반응이 갑작스럽게 일변했다. 물론 그래 봤자 여전히 인간이라 생각되는 수준의 감정 변화로, 두 눈을 크게 치뜨거나 음성이 약간 높아진 정도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언가 깊숙한 비밀을 깨달았다는 듯한 얼굴처럼 보여, 가슴 한 켠으로 살며시 호기심이 일었다. “설마 아직도 끝나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건가….” “하기야 천사들이라면…. 예전에도 그랬으니, 이번에도 똑같이….” 타나토스는 팔짱을 낀 채로 끊임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워낙 조용한 공간이라 그런지, 청력을 높이지 않아도 흐르는 음성은 전원의 귓속에 똑똑히 들렸다. 원탁의 기사들은 조금은 멍청해 보이는 얼굴로 타나토스를 바라봤다. 그때였다. 불현듯 고개를 든 타나토스는, “안타깝네요.” 딱하다는 눈빛을 빛내며 탁상을 천천히 돌아봤다.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지만,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이 있죠. 인간은 여전히 천사의 앞잡이 노릇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군요.” “그건 틀린 말이외다.” 멜리너스는 흰 수염을 쓸어내리다가, 돌연 살그머니 움키며 반박했다. “타나토스라고 했던가…. 진실의 수정이 인정한 만큼, 그대가 신이라는 건 알겠소. 그러나 우리가 확인한 건 단지 이것뿐. 당신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건지 모르겠소만, 그 말은 부적절한 것 같구려.” “무엇이 그르다는 거죠?” “앞잡이라는 말 말이오. 확실히, 나 또한 왜 이 세상으로 불려 왔는지는 모르오, 그러나 끄나풀은커녕, 우리는 천사의 사주를 받고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오. 왜냐면 지금 이 순간도 스스로 의지를 갖고 움직이고 있으니. 즉, 협력 관계라는 말이 옳을 것 같군.” “…그래서 안타깝다는 말이에요.” 멜리너스의 말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큼 조리 있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타나토스는 상대가 무안하리만치 단호히, 단칼에 부정했다. “걸어가는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고 있으니까요. 그럼 결국 속고, 이용당하는 것밖에 되지 않아요. 하지만 정작 인간은 그걸 깨닫지 못해요. 과거에도 그랬듯이 말이죠.” 거기까지 말한 순간, 문득 진실의 수정이 선연한 빛을 분사하며 잿더미로 바스러졌다. 멜리너스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조용히 침묵했다. 씁쓸히 웃은 타나토스는 느릿하게 손을 거뒀다. “너무 놀라운 말을 들어서 그런지…. 아니면 너무 오랜만에 일어나서일까요. 어지러워요.” 그리고 차분히 몸을 일으켜 의자를 밀어 넣는다. “오늘은 이만 쉬어도 되겠지요?” 그렇게 미묘한 말로 여지를 둔 타나토스는, 곧 사뿐사뿐 걸음을 옮겨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던 일촉즉발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부서질 듯 쥐고 있던 칼자루는 어느새 힘없이 풀려 칼끝이 바닥에 닿아 있었다. 그리하여 엘도라는 물론, 원탁의 기사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서서히 멀어지는 타나토스를 하염없이 응시하기만 했다. * “후우.” 방으로 돌아온 엘도라는, 문을 열자마자 한숨과 함께 쓰러지듯이 침대에 엎어졌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침대에 푹 퍼졌다. 그저 이야기만 하고 왔을 뿐인데 전신으로 심한 피로감이 엄습한다. 엘도라는 스스로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자문하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금 전의 만남을 천천히 되새겼다. 일단 걱정 하나는 덜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니.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타나토스라는 여인은 생각보다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신이라는 게 거짓말처럼 생각될 만큼 예의 바르고,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엘도라는 입을 살짝 짓씹었다. ‘이상해.’ 찝찝하다. 혼란스럽다. 여인의 정체는 확인했지만, 무언가 개운치 않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머리를 비우려고 해도, 안쓰럽다는 듯이 쳐다보던 눈빛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른다. ‘왜?’ 간단한 질문이었으나 쉬이 말이 나오지 않는다. 단 한 번도 깊게 생각해본 적 없다. 당장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잊고 있던 문제였다. 혹은 익숙해진 순간부터 체념하고 받아들였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잠시만요. 그러니까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소환됐고, 아무런 목적도 없이 이 세상에 살아간다는 말씀인가요?’ 생각해보면 그렇다. 당연한 말이지만, 처음 느닷없이 소환됐을 때만 해도 누구나 한 번쯤 비슷한 의문을 품었을 터. 그러나 몇 번이고 물어도, 아무리 난리 치고 발광해도 변하는 건 없다. 오히려 쫓기듯이 통과의례라는 잔인한 생존 시험을 강제로 치르며, 이후 간단한 설정을 마치고 홀 플레인이라는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입장하자마자 기존의 사용자들에게 듣게 되는, 어디서나 비슷한 첫마디. ‘현재 이 자리에 서 있는 저희 역시 한때 지구에 살았던 인간이었습니다.’ ‘저희와 여러분의 차이점은 단 하나, 순서밖에 없습니다.’ ‘이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에 먼저 들어왔는지, 아니면 후발로 들어왔는지.’ ‘즉 우리는, 당신들을 집으로 돌려보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누가 그러던가.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아마 그 말을 들었을 때부터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을 것이다. 무슨 짓을 해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포기하는 순간 도태되고, 도태되는 순간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다. 결국, 남은 길은 하나. 삶에 대한 욕구가 손톱만치라도 남아 있는 사람은 조금씩 현실을 직시하고, 단념하고, 순응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비로소 사람이 아닌, 사용자로서 활동을 시작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엘도라도 똑같다고 볼 수 있다. 지구에서는 평범한 소녀였으나, 홀 플레인으로 소환된 이후 추앙받는 사용자로 재탄생했으니까. 아니. 비단 엘도라뿐만 아니라, 원탁의 기사 전원이 비슷한 입장일 것이다. 그런 만큼, 누구도 이 근본적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망치로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 맞는 정도는 아니지만, 어쨌든 할 말이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달칵. 그때였다.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은 채 상념에 잠겨 있던 찰나, 돌연 조용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흘끗 돌아본 엘도라의 낯에 조금이나마 화색이 서렸다. “멜리너스!” “후후. 이 늙은이가 실례해도 괜찮겠지요?” 문을 열고 들어온 사용자는 바로 멜리너스였다. 엘도라는 반쯤 일으켰던 상반신을 도로 뉘었다. 멜리너스가 괜찮다는 듯 손을 저으며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잡해 보이는구려. 클랜 로드.” 그 말대로였지만, “그냥…. 갑자기 큰 이야기를 들은 느낌이라서. 왜인지 머리가 멍합니다.” 멋쩍게 웃는 엘도라의 얼굴은 방금 보다 한층 안정돼 있었다. “그렇군요. 그럼 잠시 이야기 좀 할까요?” 이내 침대 끝에 앉아 부드러이 웃음 짓는 멜리너스를, 신뢰 가득한 눈길로 응시한다. 비록 갈피를 잡지 못할 만큼 머릿속이 복잡하지만…. 그래도 엘도라는 여태껏 문제가 발생했을 때마다, 항상 합리적인 답을 찾아온 ‘선지자’ 멜리너스를 굳게 믿고 있었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한편, 같은 시각. 타나토스, 엘도라, 멜리너스. 이 세 명이 떠난 자리에는, 아직 열두 명의 원탁의 기사가 탁상을 떠나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아 있다. 전원 심각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속닥거리듯 말을 나누는 것이, 심상찮은 기운마저 흐르고 있었다. “우리가…. 속고 있다고?” “그렇게 단정 짓기에는 아직 시기상조 아닌가? 사실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어.” “당황스럽군. 나는 그냥 일종의 유희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거든.” “어느 쪽이건 기분 나쁜 건 마찬가지잖아. …이안,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나탈리가 돌발적으로 물어오자, 망연히 앉아 있던 이안이 언뜻 정신을 차렸다. “예? 그, 글쎄요.” 버릇처럼 쫙 핀 손으로 안경을 추켜올린다. …그래서, 아무도 보지 못했다. 은근슬쩍 계단을 흘겨본 이안의 눈매가 오묘한 호선을 그렸다는 것과, 입이 비뚜름한 미소를 그렸다는 것을. ‘설마 첫 만남에 이렇게나 흔들어버릴 줄은…. 이 속도라면 디데이도 머지 않았나.’ 오늘 타나토스는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신이라는 사실을 공고히 함과 동시에 천사의 정체에 관해 운을 띄우고, 불신의 씨앗을 뿌렸다. 진실 속에 거짓을 섞는다고 했던가. 천사가 인간을 대리인으로 내세운 만큼, 이용하고 있다는 건 불변의 사실이다. 말인즉, 확실한 것만 진실로 말하면 된다. 그럼 과거이든 역사이든, 나머지는 어떻게 끼워 맞추든지 알게 뭐냐. 아마 지금쯤 멜리너스가 엘도라에게 접근했을 터. 그럼 남은 원탁의 기사는…. 여기까지 생각한 이안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표정은 어느새 원래 이안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잠시 후, 이안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 작품 후기 ============================ 흠…. 그렇네요. 완결도 다가오는데, 일러스트도 하나 새로 하는 게 좋겠지요. 완결 전에 주인공 일러스트를 그리겠다고 말씀드린 적도 있으니까요. 그럼 김수현 + a로 가야 하는데, 파트너가 고민이네요.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게헨나, 고연주, 임한나, 화정, 한소영(새로운 버전으로.) 중 한 명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이 다섯 명이냐고 물어보신다면, 아시잖아요. *-_-* 아, 물론 화정은 아직 드러난 적이 없지만요. 어쨌든 이 외에 다른 좋은 파트너가 생각나신다면 기탄없이 말씀해주세요. 조만간 코멘트를 정리해, 상위 네댓 명을 선발해 투표로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0859 / 0933 ---------------------------------------------- Be Infected, Six. “제 짧은 소견으로는, 타나토스 님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는 것 같습니다.” “뭐?” 아키로프가 날카롭게 반문했다. 이안은 어설프게 웃었다. “에, 일단은 신이니까요. 진실의 수정도 그렇다고 했고….” “아니. 어떻게 부르는지 내 알 바는 아니고. 너는 그 말을 믿는다는 건가?” “백 퍼센트 신뢰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천사의 의도가 명백하지 않은 이상, 한 번쯤 생각해볼 여지는 있지 않겠습니까? 뭐, 나는 이대로 꼭두각시처럼 살아도 상관없다, 이런 입장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 이안이 조목조목 설명하자, 아키로프는 복잡한 얼굴로 침묵했다. 그러자 두 명을 번갈아 보던 나탈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 네 말대로 그렇다고 쳐. 하지만 이제 와서 천사가 속 시원하게 말해줄까?” “없겠죠. 아마 직접 따져도 두리뭉실하게 넘어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직접 알아내야 합니다. 그 여인에게 듣든지, 아니면 추측을 하든지 해서요.” “뭔가 짚이는 게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으음. 실은….” 문득 품으로 손을 넣은 이안은 꽤 커다란 지도를 꺼내 책상에 펼쳐놓았다. 시선은 자연스레 탁상으로 쏠렸다. “대륙 지도입니다. 물론 제멋대로 상상해서 그린 거니 정확성을 기대하시면 곤란합니다.” 그렇게 말한 이안은 차분히 지도의 하단을 짚었다. “이곳이 바로 남 대륙. 즉 우리가 처음 시작한 지점입니다.” 그리고 검지를 천천히 위로 올리며 말을 잇는다. “여기서 오크 성을 넘어 북진한 결과, 현재 우리가 있는 라그나로크를 발견했지요. 북 대륙은 강철 산맥을 남진해 아틀란타에 이르렀고요. …물론, 타 대륙의 상황도 비슷합니다. 가령 동 대륙은 서진 시 불모의 황야가, 서 대륙은 동진 시 서리 협곡이 가로막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건 우리도 알아. 저번에 한 번 말한 거잖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그럼,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응? 이후?” “생각해보세요. 지금이야 갓 발견했으니 활동할 거리가 차고 넘치지만, 라그나로크도 언젠가는 포화 상태에 이를 겁니다. 그럼 그때가 오면, 또 신 대륙을 발견해야 한다는 소린데….” “……?” 스리슬쩍 말을 흐린 이안은 돌연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검지는 지도의 중심을 정확히 짚고 있었다. 이윽고 멍하니 지도를 바라보던 원탁의 기사 중 서너 명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머리 회전이 빠른 이들은, 이안이 하고자 하는 말을 비로소 알아챘다. “설마.” “그렇습니다.” 이안은 머리를 무겁게 끄덕였다. “동 대륙의 서진, 서 대륙의 동진, 남 대륙의 북진, 북 대륙의 남진…. 물론 아직 공략에 성공한 대륙은 우리와 북 대륙, 이 두 지역뿐이죠. 그러나 하나 확실한 건, 서로 간의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겁니다. 즉 중앙으로 말이지요.” “잠깐, 잠깐만.” 그때 흰 백발의 미남자, 라이언 윈터스가 당황한 듯 손을 들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다음 신 대륙은 동서남북 이 네 대륙이 둘러싸고 경쟁한다는 건가?” “그렇지요. 뭐, 현실적으로는 우리와 북 대륙의 겨룸이 될 가능성이 높지만요.” “이안, 너무 앞서 나가는 거 아니야? 아직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잖아. 가령 서로 협력해서 공략하는 방향일 수도….” “이런, 이런.” 이안은 지도를 짚던 검지를 위로 세우더니 까닥까닥 흔들었다.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상황을 굉장히 낙관적으로 보시는 겁니다.” 윈터스는 어색한 낯빛을 비췄다. 소슬히 웃는 이안의 얼굴이 괜스레 거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 서로 협력하는 방향이었다면, 이미 조금이나마 언질을 줬겠지요.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북 대륙에서 전쟁이 벌어지지 않도록 조정하지 않았을까요?” “북 대륙? 전쟁? …아.” 의아히 반문하던 윈터스는 순간 탄식과 같은 침음을 흘렸다. 이년 전, 서 대륙이 북 대륙을 침략한 사건을 떠올린 것이다. 실상은 악마 세력이 씨앗을 이용해 조종한 것이지만, 풍파에서 비켜서 있던 남 대륙은 자세한 사정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어떻게 말의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느낌이다. 헛소리라 치부하고 싶어도 반박할 말은 떠오르지 않는다. 외려 생각의 추가 점차 한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그럼, 이 앞에 기다리고 있는 건 전쟁이라는 건가.” 침묵을 깨트린 건, 에드워드의 무거운 음성이었다. “하하.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건 제 추측에 불과합니다. 벌써 사실로 받아들이시면 곤란한데요.” 문득 표정을 푼 이안이 사람 좋게 웃으며 지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조금 엇나갔지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 여인이에요. 아, 타나토스 님이요.” “중요하다고?” “예. 현재 거주민들은, 계시라는 이름 아래 우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달라요. 믿을 수 없지만, 신이라는 지위를 가졌으며 천사의 통제도 벗어나 있지요. 어쩌면 앞으로 닥쳐올 폭풍에 앞서, 우리는 막강한 무기를 쥐게 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천사조차 뛰어넘는….” “이거, 엘도라한테도 말해야 하지 않을까?” 무언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 나탈리가 불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안은 느긋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거라면, 멜리너스 님도 알고 계실 테니까요. 아마 지금쯤 비슷한 이야기 중일 겁니다.” 그렇게 말한 이안은 차곡차곡 접은 지도를 품으로 넣으며 싱긋 미소 지었다. “우선은, 두 분의 행동을 기다려보죠.” * 엘도라는 숙소 침대에 누워 하염없어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눈을 깜빡이는 것 말고는 조금의 변화도 보이지 않는 얼굴은,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다. 실제로 엘도라의 머릿속은 여러 생각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중이었다. 여인이 깨어난 지 며칠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타나토스가 보인 행동은 주로 멜리너스, 이안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다며 밖으로 외출한 일 등, 지극히 정상으로 볼 수 있는 범주였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럼 걱정을 덜었으니 이제 여인의 처우를 결정해야 정상이건만, 현재 엘도라의 속내는 그렇지 못했다. 타나토스가 신이라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현재 자신의 눈앞에 놓인 의제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의문이 너무 갑작스럽게 다가온 것도 있지만. 물론, 이 복잡한 상황을 간단하게 만드는 방법은 있다. 천사가 생각나지 않은 건 아니다. 상황의 특수성만 아니었다면, 남 대륙의 수호자라는 신분을 가진 만큼 사용자가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판단, 곧바로 신전으로 달려가 도움을 요청했을 터. 그리고 이제껏 그래 왔던 것처럼 하라는 대로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천사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군요. 과거에도 그랬듯이.’ ‘그래서 안타깝다는 거예요. 목적과 의도를 모른다면 결국 이용당하는 것밖에 되지 않아요.’ 마냥 그렇게 하기에는, 타나토스가 흘리듯이 한 말이 마음에 걸린다. 비단 이뿐만은 아니었다. 멜리너스와의 대화도 엘도라가 주저하게 하는데 한몫했다. ‘그럼 멜리너스는, 그 여인의 말을 믿는다는 겁니까?’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스스로 신이라고 밝혔으나, 결과적으로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 ‘천사 또한 믿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도우미를 자처하고 있으나, 그 속내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 ‘클랜 로드. 믿을 건 자신, 그리고 우리밖에 없습니다. 이 점을 유념하십시오.’ 그래. 믿을 건 우리, 즉 인간뿐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다. 결국, 지금 가장 필요한 건 정보였다.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그렇게 생각한 엘도라는 바로 몸을 일으켜 호출석을 눌렀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흰 로브를 걸친 노인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멜리너스. 그 여인과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마음의 결정이 서신 겝니까.” 온화한 물음에, 엘도라는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단지, 이대로 그냥 편하게 넘어갈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 “이안이 그러더군요. 어쩌면, 잘만 이용하면 이번이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좋은 기회라 함은?” “진상을 밝혀보겠습니다. 우선 여인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천사의 말도 들어보겠습니다. 그런 다음 스스로 판단할 겁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지요.” “그렇군요.” 멜리너스는 만면에 웃음 띤 얼굴로 부드러이 끄덕였다. 엘도라도 희미한 미소로 화답했다. 멜리너스의 모습이 마치 잘하고 있다고 기특해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지요.” 잠시 후. 엘도라는 가벼운 옷차림의 타나토스와 응접실에서 마주앉았다. “저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요?” “그렇습니다.” 엘도라의 말투는 여전히 딱딱했으나 이전과는 달리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타나토스의 예의 바른 모습과 그간 보인 행동으로, 첫 만남 때 느꼈던 적의는 상당히 사그라진 상태였다. “어려울 것 없죠. 어차피 저도 그쪽과 이야기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럼, 또 수정에 손이라도 얹을까요?” 엘도라는 그럴 필요 없다는 의미로 차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구에 의지하기보다는,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으니까. “저번에 이렇게 들었습니다. 우리가 천사의 앞잡이라고.” “그래요. 그리고 며칠 동안 이야기를 들어본 결과, 안타깝게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어요. 지금은 거의 확신하고 있어요.” “과거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흠. 라그나로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요?” “신들의 전쟁을 말하는 거라면, 다소나마 들어보기는 했습니다.” “그럼 간단히 말할게요. 아주 오래전, 여러 신이 이 세상을 둘러싸고 전쟁을 벌였지요. 물론 그중에는 저도 있었고요. 그런데 그 끝없이 이어지는 전쟁 속에서, 어느 순간 서로 우위를 점할 목적으로 각자 추종 세력을 끌어들이기 시작했죠.” “그럼 거기서 인간이 천사의 꾐에 빠져 당신을 적대하는 세력에 섰다는 겁니까?” “천사야 애초 반대 진영이었지만, 인간은 중립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안타까웠다는 거예요. 저는 인간이, 어떤 식으로든 끝나지 않을 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그 순간, 엘도라의 두 눈에 강한 금빛이 스쳤다. “끝나지 않는 전쟁이라면…. 설마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타나토스는 잠시 말을 않고, 엘도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설마? 하, 그건 굉장히 무의미한 질문이군요.” “……?” “인간은 애초 이 전쟁을 제대로 알지도 못해요. 얼마나 치열한지, 오랫동안 이어져 왔는지. 실제로 겪지 못하고 직접 보지 못했으니 모를 수밖에 없죠. 하기야 길게 살아야 일백 년을 사는 인간이, 수천수만 년간 이어져 온 전쟁을 이해하는 건 어불성설이죠.” “그럼.” “그저 한 시대, 소속 세력의 유리함을 위해 장기 말로 활용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말이에요.” “…….” 엘도라는 순간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타나토스가 말한 ‘이용당하고 있다.’ 는 말이 불현듯 조금씩 와 닿는 기분을 느꼈다. “그렇다면, 아마 당신이 궁금한 건 이거겠죠. 도대체 어떤 이유로 서로…. 아니. 정확히는 아무 관계도 없는 자신들이,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소환돼 사용자로서 활용되는지. 아닌가요?” 거기까지 말한 타나토스는 잠깐 엘도라의 반응을 살폈다. 이어서 무섭도록 집중하고 있는 얼굴을 확인한 후, “맞는 것 같군요.” 조용히, “그럼 혹시.” 그리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로 코드…. 라는 걸 알고 있나요?” ============================ 작품 후기 ============================ 하루 동안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네요. 코멘트를 읽으며 조금 안타까웠던 건, 독자 분들의 의견 중 제가 차마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는 겁니다. 확실히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방향이 있었거든요. 그러나, 이제 와서 그렇게 하기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이켜보면 800회를 넘게 연재하면서 이와 비슷한 경우가 두어 번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 번은 김수현이 교관으로 들어갔을 때, 한 번은 강철 산맥 제 3지역 공략 때. 그때와 지금이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현재 연재되는 내용의 무게가 훨씬 무겁다는 점입니다. 정말 어지간하면 뛰어넘겠지만, 함부로 생략하기 어려운 내용이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남 대륙 에피소드는 여기서 일단락 짓고 바로 김수현의 시점으로 돌릴까, 아니면 중간중간 북 대륙 이야기를 삽입해 최대한 지루함을 덜어볼까….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결국에는 정석대로 밀고 나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현재 메모라이즈는 완결까지 가는 여정이 세세한 부분까지 구상돼 있으며, 한 단계씩 차근차근 밟아나가는 중입니다. 한데 여기서 뭉뚱그려 에피소드를 마무리해버리면, 이후 제가 단계를 수정하며 글을 이끌어나갈 자신이 없을 것 같습니다. 단, 줄여보겠습니다. 김수현의 시점은 에피소드 4부터 돌아옵니다. 원래 남은 에피소드는 최소 8화, 최대 12화 ~ 14화 정도로 기획돼 있었습니다만, 현재 연재 중인 에피소드 6과 5는 최대한 쳐내고 압축해보겠습니다. 물론 생략하기 어려운 내용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요. 이게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택인 것 같습니다. 완결이 났다면 모를까, 리메이크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건 조금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정 견디기 어려우시다면, 잠시 묵혀두셨다가, 소제목에 에피소드 4가 걸리면 몰아서 읽으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800회 넘게 읽어왔으니 그냥 계속 읽어라.’ 라는 생각으로 연재하지는 않습니다. 집필할 때는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미 넘치는 사랑을 받은 만큼,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건 급격한 완결이 아닌, 원래 구상한 제대로 된 완결을 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긴 후기를 적었는데, 자꾸만 죄송하다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네요.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_(__)_ 0860 / 0933 ---------------------------------------------- Be Infected, Six.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왜,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異) 세계 인간들을 소환한 걸까….” 그게 뭐냐고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 타나토스의 말이 이어졌다. “아시다시피 저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고, 그런 만큼 천사의 자세한 속사정까지는 몰라요. 하지만 이안이라는 인간이 현재 대륙의 역사를 꽤 상세히 말해주더군요.” “이안이….” “그 결과 가능성 높은 추측을 할 수 있었죠.” “그 추측이라는 게 방금 말한 제로 코드라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겁니까?” “그래요.” “그게 도대체 뭐길래?” 엘도라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반문했다. “탄생 비화부터 풀어서 설명하면 며칠 밤낮을 새도 부족할 거예요.” 타나토스는 여전히 아름다운, 그러나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단순히 말하면 만능의 힘이 담긴 물건이라고 볼 수 있지만…. 현 상황에 맞춰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네요. 천사 입장에서는 무조건 지켜야 하는 것. 그러나 적대 세력 입장에서는 꼭 필요한 것.” 만능의 힘, 무조건 지켜야 하는, 꼭 필요한…. 상세한 설명이 이어졌으나 의구심은 한층 깊어져만 갔다. 마치 밖으로 나가려 길을 찾는데, 외려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를 헤매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넘어갈 거였다면 애초 시작도 하지 않았다. 그냥 좋게좋게 넘어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이 자리를 마련한 게 아닌가. 여태껏 그래 왔듯 ‘그렇구나.’ 하고 물 흐르듯이 넘어가는 건 사양이다. 엘도라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갑니다. 왜 천사는 그 제로 코드란 걸 지켜야 하며, 적대 세력은 필요하다는 겁니까?” “간단해요. 제로 코드는 만능의 힘이 담긴 물건이라고 말했잖아요?” 턱을 까닥인 타나토스가 평온히 말을 잇는다. “이 만능이라는 단어를 구분해보면, 제로 코드에는 일종의 열쇠 역할이 포함돼 있어요.” “열쇠?” “그래요. 열쇠. 엘도라 당신에게도 돌아갈 고향은 있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엘도라는 자신도 모르게 뒤늦게 반응했다. 왜인지 ‘돌아갈 고향’이라는 말이 가슴을 살짝 건드렸다. “어느 존재든 고향은 있죠. 이건 저도, 천사도 마찬가지예요. 이 홀 플레인이 아닌, 훨씬 높은 차원에 실재해요. 가령 천사의 경우 천계라고 부를 수 있겠네요. 인간들의 언어로.” 타나토스의 어조는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을 차근차근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시종일관 차분했지만, “바로 이 천계에 한해서 제로 코드가 열쇠 역할을 한다는 거죠. 적대 세력을 침공할 수 있게 하는, 말인즉 천계를 보호하는 자물쇠를 해제할 수 있는 열쇠.” 여기까지 말한 순간 돌연 상대를 빤히 직시했다. 이제 결론을 내리겠다는 듯이. 아니. 이미 본론은 나왔다. “천사로서는 어떻게든 지켜야 할 고향을 수호해주는 장치. 그러나 반대 세력은 반드시 획득해야 할 천계로 통하는 열쇠. 이게 바로 홀 플레인 각축전의 중심인 제로 코드의 현주소라는 거죠. 이제 좀 이해가 되나요?” 엘도라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해가 가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득하기만 하던 머릿속이 차차 정리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응시하는 눈길에 타나토스는 더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살짝 코웃음 쳤다. “그러니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어느 순간 미세하게나마 덜덜거리고 있었다. “그 엄청난 물건이 이 홀 플레인에 실재하고.” “…우리는, 천사와 적대 세력 전투의 연장 선상에 서 있다는 겁니까? 그 제로 코드라는 물건 때문에?” 말은 끊겼다가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타나토스는 안타깝다는 얼굴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엘도라 자신은 모르겠지만, 어느새 눈꼬리는 파르르 떨리고, 허벅지에 얹은 주먹은 손톱이 살을 파고들만큼 세게 움켜져 있다. 머릿속을 부유하던 퍼즐 조각이 하나로 맞춰진 순간 가슴이 들끓기 시작했다. 문득 육 년 전 기억이 뇌리를 무작위로 스쳤다. 눈을 뜨고 일어나니 이상한 공간에 널브러져 있던 기억. 잘못했다고, 돌려보내 달라고 애걸했지만, 강제로 통과의례로 내쫓겼던 기억.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같이 소환됐던 친구의 끔찍한 살해 광경. 무엇보다 필사적으로 울부짖는 자신을, 흡사 실험용 생쥐를 보듯 차갑게 응시하던 천사의 눈초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불현듯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분노가 꿈틀꿈틀 치솟는다. “어째서?” 비로소 토해진 당연한, 그러나 의도된 의문. “저도 그게 이해가 안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타나토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차라리 이 세상 거주민이라면 모를까. 왜 아무 관련도 없는 이방인까지 끌어들이면서….” “아무튼, 글쎄요. 이것 또한 추측에 불과하지만, 아마 천사 진영이 극도로 불리한 게 아닐까 싶은데.” 타나토스의 말은 지극히 간단했다. 홀 플레인에는 제로 코드라는 적대 세력에서 군침을 흘리는 물건이 있다. 여기서 천사는 제로 코드를, 자신들의 고향인 천계를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인간을 소환했다. 즉 사용자는 천사를 위해 간접적으로 전투에 참여하는 일종의 대리 역할을 수행 중이다. 여기까지 깨달은 엘도라는 느닷없이 힘껏 숨을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그러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자 용암처럼 들끓던 속이 서서히 식는다. ‘믿을 건 우리, 인간뿐입니다.’ 폭발 직전 스친 멜리너스의 조언은 한 가닥 이성을 되찾게 했다. ‘그래.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 원하던 정보는 얻었다. 이제는 천사 쪽의 입장도 확인해봐야 한다. 판단은 그 다음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인간이 한다. 그렇게 생각한 엘도라는 돌연 떨떠름한 낯빛을 비췄다. 어느새 고개 돌린 타나토스는 방문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이내 의아히 눈을 돌린 순간,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이야기 중에 죄송합니다. 전령입니다. 클랜 로드.” 문밖의 사내는 정중히 몸을 숙인 후, 바로 용건을 꺼냈다. “천사의 호출입니다.” * 찬란한 푸른 궁전에도 황혼빛 노을이 드리우더니 완연한 어둠이 찾아왔다. 이내 인근을 밝히던 불빛이 촛불 꺼트리듯 사라지고, 창가에는 푸른 달빛이 내려앉았을 때. 밤 풍경을 구경하는 걸까. 타나토스는 홀로 침대에 누워 창밖의 달을 흘기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흡사 죽은 사람처럼 한동안 바라보기만 하던 타나토스는, 문득 입꼬리를 올렸다. “어째서라고….” 그것은, 명백한 비웃음. 그러나 업신여기는 듯한 웃음은 곧 사라졌다. 오늘 엘도라와의 만남은 충분한 소득이 있었다. 천사에 대한 불신의 씨앗을 확실히 뿌렸으니까.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했으니 거리낄 것도 없다. 하지만 아직이다. 계획은 예상보다 순항하고 있지만 이제 겨우 한 걸음 내디딘 것에 불과했다. 씨앗을 뿌린 것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하다. 물과 양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진정한 문제는 씨앗이 발아하고,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기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상황은 여전히 딜레마에 빠져 있다. 엘도라가 호출된 것만으로도 불안해지는데, 열매를 기다리며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물론 하라면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위험이 너무 크다. 서 대륙 때처럼 완벽하게 잠식하고 뜻대로 조종하는 상황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 설령 완벽하지 못하더라도 최대한 빠르게, 속전속결로 몰아쳐야 한다. 결국, 필연적으로 발생할 혼란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 “까닥 잘못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터. 결국에는 시간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이윽고 깊은 한숨을 내쉰 타나토스는 갑자기 고요히 입을 열었다. “멜리너스인가.” “타나토스.” 갑작스러운 부름에 방구석 어둠에서 낮은 음성이 응답한다. “죄송합니다. 깊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엘도라는 어떻게 됐지?” “아, 큰일은 아니더군요. 그냥 안부 겸 호출한 것 같습니다. …다만.” “다만?” “저와 이안을 언급했다고 합니다.” “뭐라고?” 타나토스의 눈이 한껏 가늘어졌다. 말투에서 낌새를 느꼈는지 멜리너스는 얼른 말을 이었다. “이것도 큰일은 아닙니다. 저희 말고도 언급된 인간이 여럿 있으니까요. 아마 요즘 호출에 응하지 않아 엘도라를 통해 말을 전달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 그렇게 말한 타나토스는 느릿하게 멜리너스를 돌아봤다. “아무튼, 알맞게 잘 왔군. 마침 일정을 변경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예?” “세 번째 계획을 앞으로 끌어당길 필요가 있겠어.” “세 번째 계획이라면, 동 대륙 정…?” 거기까지 말한 찰나, 멜리너스는 황급히 말을 멈췄다. 사탄이 갑작스레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문밖으로 복도를 소리 죽여 걷는 기척이 잡혔다.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 이윽고 기척은 정확히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한참 동안 인근을 서성거리다가, 걸어온 방향으로 살금살금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도 약 십 분이 흘렀을 무렵. “멜리너스. 이안, 올리비아에게 전하도록.” 어둠 속에 파묻힌 타나토스가 한층 낮춘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디데이에 맞춰, …을 시작하겠다고.” ============================ 작품 후기 ============================ 심사 숙고해서 검토한 결과, 에피소드 6은 이번 회로 매듭짓기로 했습니다. 원래는 두 내용 정도 추가로 들어갈 분량이 있기는 했어요. 하지만 하루 동안 노트를 정리한 결과, 하나는 가지를 쳐낸 에피소드 5로 들어갈 여지가 보였고, 나머지 하나는 이후 에피소드에 끼워 넣어도 괜찮겠다는 판단이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에피소드 6은 이걸로 끝입니다. 다음 회부터는 남 대륙 + 악마 시점 진행의 마지막인 에피소드 5가 시작됩니다. 주인공의 시점은 에피소드 4부터 돌아옵니다. 독자 분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 0861 / 0933 ---------------------------------------------- D-Day, Five. 아침을 알리는 바람이 숲을 시원스레 휩쓸었다. 날은 아직 어스름했지만, 청명한 하늘 아래 맴도는 옅은 안개와 풀잎에 맺힌 이슬은, 이제 새벽녘을 지나 곧 아침이 온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둥글게 트인 구멍을 통해 들어온 상쾌한 바람을 느낀 걸까. 나뭇잎이 소복이 쌓인 침대에 누워 있던 에르윈의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이윽고 손가락부터 살며시 꼼지락거릴 무렵, 문득 밖에서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에르윈. 일어나세요.”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요히 감겨 있던 눈이 반짝 떠졌다. 에르윈은 느긋이 기지개를 켜며 상반신을 일으키더니 문을 응시했다. “에르윈?” “네.” 에르윈은 가슴을 한 번 지그시 누른 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모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문을 나서자, 한 성숙한 여인과 귀여운 남아가 꾸벅 인사했다. 두 명 모두 귀가 뾰족하다. “좋은 아침이에요.” “안녕히 주무셨어요?” 에르윈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따라 기분이 편안하네요. 바오도 잘 잤니?” 젖살이 통통한 발그스름한 색의 뺨을 콕 찌르자, 바오라고 불린 아이는 큼직한 눈망울을 깜빡거렸다. 그러더니 호기심 가득한 낯으로 에르윈의 종아리에 찰싹 달라붙는다. 여인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지만, 에르윈이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자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몸을 돌렸다. 잠시 후. 에르윈이 사뿐사뿐 걸어 탁자에 앉은 순간, 바오는 붙잡고 있던 종아리를 앙증맞은 손으로 흔들기 시작했다. “에르윈 님, 에르윈 님.” “왜 그러니? 바오?” “있잖아요. 곧 그날이죠?” “…….” 찰나의 순간, 에르윈의 얼굴에 경직이 스쳤다. “바오!” 그러나 주방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오자, 곧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그렇지. 왜? 궁금한 거라도 있니?” “에, 에르윈.” “괜찮아요. 이미 공공연한 일일 텐데요.” “하지만….” 한껏 높아졌던 목소리가 조심스레 흐려졌다. 바오는 한층 안심한 얼굴로 질문 공세를 시작했다. “이제 정말 새 여왕님이 생기는 거예요?” “후후. 글쎄. 아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단다.” “으응. 하지만 이미 결정이 났다고….” “바오야. 설령 그렇다고 해도 바로 여왕님이 선출되는 건 아니야. 아직 최종회의도 남았고, 하이들이 주관하는 여러 엄격한 심사도 거쳐야 하고, 위그드라실 앞에서 의식도 치러야 하는걸? 이 모든 걸 근시일 안에 할 수 있을까?” 에르윈의 설명이 길게 이어졌고, 바오는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순진무구한 낯에 서린 궁금함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정말 궁금한 건 그게 아니라는 듯이. “왜요?” “응?” 질문을 던진 바오는 돌연 창밖을 응시했다. 순진무구한 눈동자는 창문 너머 우거진 푸르스름한 나무를 가로질러, 멀리서 우뚝 솟은 커다란 나무에 꽂혔다. 과장 조금 보태서 숲 어디서 봐도 보일 것 같은 거대한 고목은, 가지마다 꽃이 화려하게 만개해 아름답고 수려한 자태를 뽐냈다. “꽃이 피었잖아요.” 조금은 시무룩해진 음성. 에르윈은 반사적으로 입을 꼭 맞댔다. “위그드라실의 꽃이 피었다는 건.” “가시나무 관이 인정하는, 진정한 여왕님이 탄생했을 때뿐이지. 그러고 보니 바오는 요정 신화를 좋아하지? 잠자기 전마다 꼬박꼬박 읽을 정도로. 요즘도 그러니?” 에르윈이 묻자, 바오의 낯에 화색이 돌며 방긋 웃는다. “네. 세상을 구한 마르가르타 님의 이야기는 이제 완전히 외울 수도 있어요. 아, 나쁜 인간 마법사한테 잡혀가는 내용은 빼고요. 그 부분은 읽기 싫으니까요.” “맞아. 그 부분은 정말 안타까웠어. 아무튼, 오늘 새 여왕님 선출이 결정될지도 모르는데, 바오는 그게 싫은 거야?” 바오는 다시금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뾰족이 솟은 귀도 축 늘어졌다. 즉각 반응하는 풍부한 표정 변화가 웃긴지 에르윈은 쿡쿡 웃었다. “사실, 알고는 있었어요. 어떤 이유인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지금 우리에게 새로운 여왕님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요. 실제로 예전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돌았으니까요.” 그러나 한동안 입만 달싹거리던 바오가 말을 꺼낸 순간, 조용히 웃음을 멈추고 경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뭔가 아닌 것 같아요.” “뭐가 아닌데?” 바오가 흘깃흘깃 눈치를 살피자 에르윈은 괜찮다는 듯 상냥히 반문했다. “니뮤에 님은 분명 좋은 분이 맞지만, 그래도 엄밀히 말하면 여왕님은 아니잖아요. 그분이 훨씬 전에 있을 때는 꽃도 피지 않았고, 가시나무 관도 인정하지 않을 테니까요.” “응.” “그냥 여태껏 기다려온 만큼, 조금 더 기다리더라도 진짜 여왕님이 여왕 자리에 앉았으면 좋겠어요.” “…….” 아직 어려서 그런지 표현은 어수룩했지만 어쨌든 의미는 충분히 전달됐다. 어찌 보면 불경한 말이라고 할 수 있으나 에르윈은 꾸짖지 않았다. 외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기특하다는 눈길로 바오를 응시했다. “그렇구나. 그럼 바오가 생각하는 진짜 여왕님은, 어떤 여왕님이야?” 그러자 바오는 다시 화색이 만연한 얼굴로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신화에서 본 대로요!” “그렇구나. 예를 들면?” “으응~. 그러니까 우선 모든 정령의 우러름을 받고, 지금은 소멸한 빛과 어둠의 정령도 다스리는!” “아니. 그건 안 돼.” 그때 주방에서 나온 요정 여인이 그릇을 탁자에 놓으며 말을 끊었다. “오 대 정령들의 우러름이야 날 때부터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빛과 어둠의 정령은 불가능해.” “에?” “바보. 뭘 혼동하는 거야? 빛과 어둠의 정령은 초대 여왕님 이후로 등장한 적이 있었니?” “…아!” 바오는 이제 깨달았다는 듯 뒤늦게 탄성을 질렀다. “마, 맞아요. 그러고 보니 위험성을 인지한 초대 여왕님이 스스로 혼돈의 결정(結晶)에 봉인하셨다고….” “정확히는 감당하지 못하셨던 거겠지. 가시나무 관을 오염시키는 걸 넘어, 여왕님조차 침식당할 정도셨다니까. 뭐, 그만큼 강력한 정령들이었다고는 하지만.” “하지만 진짜 새 여왕님은 다루실 수 있을지도….” “역대 여왕님 중 가장 강력하셨던 분이 초대 여왕이었던 알체스테 님인데, 아마 힘들지 않을까?” 자꾸만 부정적인 말을 해서 그런지 바오는 뾰로통한 얼굴로 입을 삐쭉 내밀었다. 요정 여인은 피식 웃었다. “글쎄. 여왕님을 뛰어넘는 존재가 나온다면 또 모르겠네.” 바오가 머리를 갸우뚱 기울이자, “예를 들면 날개가 열두 쌍이 아니라거나?” 어깨를 으쓱거리며 농담처럼 말한 후, 탁자의 그릇을 톡톡 두드렸다. 에르윈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는 바오를 번쩍 안아 들고 무릎에 앉혔다. 그리고 달래듯이 말했다. “자, 질문은 여기까지. 아침을 맛있게 먹으면 다시 받아줄지도?” “네!” 바오는 힘차게 외치며 고소한 냄새를 흘리는 그릇으로 손을 뻗었다. 한편, 같은 시각. “우와아아아아아아.” “오오오오오오오오.” 북 대륙, 머셔너리 캐슬에서는 때아닌 탄성이 곳곳에서 터지는 중이었다. 아니. 탄성이 문제가 아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정원에 펼쳐진, 바다 빛과 용암 빛이 대치하는 대조적인 광경 때문이었다. “정말 엄청나군요.” 김수현이 감탄을 금치 못하며 미소 지었다. “설마 정령 군단을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그렇게 말하는 김수현의 주변에는, 인어 형상을 한 정령 기백 마리가 부드럽게 굽이쳐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같이 진한 물빛을 띤 것이, 흡사 잔잔히 넘실거리는 파도를 보는 듯하다. “아직 부족해요. 정령 왕 소환은 엄두도 못 내고 있는 걸요.” 옆에 서 있던 정하연이 겸손히 대답했다. “부족하긴요. 짧은 시간 안에 이만큼이나 성장했는데요.” “후후. 사라 씨가 들으면 섭섭하겠어요. 같이 열심히 노력했는데.” 정하연이 부끄러워하며 말을 끊자, 김수현은 흘끗 옆을 응시했다. 하지만 곧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확실히 사라가 소환한 독수리를 닮은 불의 정령 군단도 거의 장관에 가까웠다. 그러나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끼요오오! “오 마이 갓! 갑자기 왜!” 끼요오오! “그, 그만! 그만 좀 하라는 말입니다!” 몹시, 발광하고 있다. 꼭 폭발하는 화산처럼 자꾸만 날개를 움직이며 날아오르는 중이었고, 사라는 통제를 벗어나려는 정령들을 진정시키려 무진 애를 쓰는 중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기백에 이르는 시선이 하나같이 김수현만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화정으로 친화력 상승에 도움을 준 과정서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였다. 김수현은 헛기침과 함께 눈을 돌렸다. “아무튼, 정말로 대단합니다. 정말 수고했어요.” “아, 아이 참. 칭찬은 그 정도만 하세요. 별것도 아닌데….” 그래도 내심 기쁜지 정하연은 살포시 미소 지었다. “흥. 맞아. 정령 군단이래 봤자 마수 군단에 패배했는데 뭐. 정말 별것도 아니지.” 그때였다. 김수현의 칭찬이 거슬렸는지, 누군가 한쪽에서 배배 꼬인 음성으로 빈정거렸다. 그 순간 정하연은 웃는 낯 그대로 휙 고개 돌렸고, 짝 다리 짚고 서 있던 비비앙은 흠칫 놀라며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먼 산을 응시했다. 그리고 짐짓 근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흐흠. 날 높이 평가해주는 건 고마워.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아? 백한결.” “…네?” 비비앙의 옆에서 조용히 감탄하고 있던 백한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내가 이제껏 여러 군단을 소환하면서 한 번도 김수현의 칭찬을 들은 기억은 없지만, 그래도 일개 인간이 차원을 넘어 소환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라고. 자, 그러니 어서 사과하도록 해.” “네, 네? 아, 아니에요! 제가 말한 게…!” 별꼴이라는 듯 쏘아붙이는 비비앙과, 억울함에 겨워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백한결. “뭐라고? 그럼 사과 못 하겠다는 거야? 너 정말 못된 아이구나? 안 그래? 김수현?” “으음. 비비앙? 아무래도 좋으니까, 일단 거기 가만히 있어봐.” 김수현은 담담히 끄덕이더니 머리를 좌우로 꺾으며 위협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비앙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한참 동안 한심하다는 눈빛을 빛내던 김수현은, 이내 깊은 한숨을 흘리며 물의 정령들을 응시했다. 잠시 후. “흠….” 낯에 근심하는 기색이 확연히 드러나자, 정하연이 눈을 깜빡이며 가까이 다가왔다. “수현? 왜 갑자기…. 아.” 그러나 김수현이 보는 곳을 같이 쳐다본 정하연은, 곧 짧은 탄식을 흘렸다. 두 남녀가 바라보는 곳에는 실로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언제 왔는지 마르가 유니콘, 아기 페가수스와 함께 방방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고, 고요히 서 있던 물의 정령들은 그런 마르의 주변으로 겹겹이 모여 모시듯이 이동하고 있다. 위협하는 움직임이 아니라 전원 호감, 아니 거의 경외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정령이 소환자의 통제를 벗어나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기에 정하연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단,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짚이는 바는 있었다. “마르는 아직 딱히 변화가 없습니까?” 가만히 응시하던 김수현이 문득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네. 수현이 빙하의 설원으로 나가 있는 동안, 체내에 결정을 결합했다고는 들었어요. 하지만….” 정하연은 조심스레 말했으나 그 이상은 모르겠다는 듯 말을 마쳤다. “저런 반응을 보면 뭔가 있는 것 같기도 한데…. 혹시 그때 금기의 영향 때문일까요?” 그 순간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김수현이 뇌리를 스쳤고, 동시에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 현재로써는 정의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원래 실재할 수 없는 존재이나, 본인의 의지와 기이한 현상이 합쳐 이루어진 기적의 현존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전대 요정 여왕의 힘과 지식은 대부분 받아들였으나, 아직 완전히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요정들이 공통으로 겪는 각성 과정을 거치게 되면, 그때는 정의 가능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김수현은 곧 거주민 정보 창을 닫았지만, 시선은 한동안 마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마르의 등에 달린 아름다운 열세 쌍의 날개에 꽂혀 있었다. 요정에게 허락된 최대한도의 날개 숫자는 열두 쌍. 역사상 모든 요정 여왕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열두 쌍의 날개를 가졌다고 한다. 초대 여왕인 알체스테도 그렇고, 최후의 여왕인 마르가리타도 똑같다. 하지만. ‘그럼 마르는…. 대체 어떤 존재지?’ ============================ 작품 후기 ============================ 최근 연재가 늦어진 점 사과 드립니다. 오늘부터 다시 일일 연재로 복귀하겠습니다. _(__)_ 0862 / 0933 ---------------------------------------------- D-Day, Five. 식사가 끝나고 시작된 바오의 질문 공세는 해가 중천에 올라서야 간신히 멎었다. 겨우 벗어난 에르윈은 통나무 집을 나와 요정의 숲 중심부를 거닐었다. 날이 맑아서 그런지 여러 어린 요정이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연록 빛 녹음을 마음껏 뛰놀고 있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아.” 그때 녹색 벨벳처럼 고운 풀밭을 밟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잠시 후, 가만히 서 있던 에르윈이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는다. 아침에 깨어날 때만 해도 괜찮았건만, 갑자기 격통이 찾아왔는지 아미가 심히 이지러져 있다. 이윽고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는 “후우, 후우.” 호흡을 추슬렀다. “…….” 싱그러운 공기를 들이마시자 조금 진정된 걸까.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에르윈은 돌연 숨을 세차게 토해내며 수풀에 드러누웠다.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는 얼굴에 미처 숨기지 못한 수심이 그늘진다. 오른손은 아직 왼쪽 가슴에 얹어져 있다. 문득 심장의 고통이 시작된 날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유적의 봉인을 해제하고, 타나토스와 처음 마주했을 때의 기억이었다. 비록 라그나로크로 돌아오자마자 연락을 받고 바로 요정의 숲으로 떠나기는 했지만, 에르윈은 그 당시 봉인 해제에 가장 반대했던 입장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자신도 모른다. 근거도 없는, 그냥 일종의 감에 불과했다. 그저 석문을 앞두고 뜻 모를 조마조마함을 느꼈을 뿐. 그러나 그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을 동반해 기하급수로 커졌다. 심할 때는 석문이 열리고 검은 연기에 휘감겼던 그때의 기억이 끔찍한 악몽으로 재현되는 날도 있었다. 꼭 무언가 보이지 않는 것이 서서히 옥죄는 기분이었다. ‘왜, 왜….’ 심장을 아릿하게 덮쳐오는 가슴을 짓누르며 끊임없이 자문했으나, 답이 있었다면 진작 나왔을 터. 마치 출구 없는 미궁을 헤매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에르윈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선선한 바람에 실려오는 수마에 조용히 몸을 맡겼다. 오후가 되기 전에는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금은 가슴이 편해졌다고 느끼면서 에르윈은 살짝 눈을 떴다. 그리고 가물가물한 시야로 물에 탄 물감처럼 느릿하게 퍼지는 붉은 색채를 발견했을 때, 두 눈이 화들짝 떠졌다. 생각보다 깊게 잠에 빠져서이기도 했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늘을 붉게 물들인 색과 대비되는 한 쌍의 연두색 눈동자가 바로 위에서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일어났군요. 내 오랜 친구.” 감미로운 음성이 들려온 순간, 에르윈은 황급히 일어나 자세를 바로 했다. 이윽고 한쪽 무릎까지 꿇으려 했으나, “괜찮아요. 편하게 있어요.” 흡사 간절히 부탁하는 어조에 움직임을 멈췄다. 양 무릎을 모아 앉은 은발의 요정이 에르윈을 보며 생긋 미소 지었다. 에르윈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니뮤에 님.” “어때요. 몸은 좀 괜찮나요?” 에르윈은 입을 닫았다. 당연히 괜찮다고 하고 싶었지만, 그럼 거짓말을 하게 되는 셈이니까. 에르윈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돌리자, 니뮤에의 낯에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해졌다. 요정. 요정으로 태어난 아이는 각성 전까지 성장하는 동안 스스로 걸맞은 역할을 찾고, 성인이 되면 역할에 따라 소속이 변한다. 소속이라 함은 역할에 맞는 임무를 수행하는 단체로써, 전투, 정찰, 암살, 지원, 지킴이, 생활. 이렇게 총 여섯 개로 구분 지어져 있으며, 각 단체의 수장을 맡은 요정은 특별히 ‘하이’라는 칭호를 부여받는다. 여기서 더 나아가, 여섯 단체를 총괄하는 요정 한 명, 이 요정을 전문적으로 지키는 요정 한 명. 그리고 지금은 공석인 여왕을 대리하는 장로가 한 명 있다. 이것이 현재 요정의 숲을 이끌어나가는 종족의 현 조직 체계이며, 현재 에르윈의 눈앞에 있는 요정이 바로 단체를 총할하는 임무를 맡은 하이, 니뮤에였다. “큰일이군요. 원인을 찾을 수 없는 병이라니…. 그렇게 고향에 돌아오는 게 싫었던 건가요?” “니, 니뮤에 님.” 에르윈이 살짝 눈을 흘기자, 니뮤에는 후후 웃으며 눈을 돌렸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갑갑해서 잠시 나와봤어요. 그런데 마침 잠들어 있는 에르윈을 발견했어요.” “가슴이 갑갑해서….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알고 있으면서 물어보는 건 나쁜 버릇이에요. 에르윈.” “…아.” 핀잔하듯 말하자, 에르윈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니뮤에는 또 한 번 기나긴 숨을 흘렸다. “이렇게 하루하루 고민으로 살아가는 건, 근 백 년간 겪어보지 못한 일이에요. 에르윈을 어쩔 수 없이 인간 세상으로 보내야 했을 때보다, 훨씬 더….” “여왕 자리에 앉기 싫으신 건가요?” 에르윈은 비로소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다. “장로는, 걱정하고 있어요.” 니뮤에는 씁쓸히 말했다. “아르코느 오크가 멸망한 건 우리로서는 분명 기뻐할 일이죠. 하지만, 그걸 실제로 이뤄낸 인간의 저력에 한층 경계심이 깊어진 것 같네요.” “인간은 우리와 동맹 관계일 텐데요. 그런데 왜 그렇게.” “그래요, 동맹이죠. 정확히는 불가침에 가까운. 물론 장로는 이 동맹을 깨트릴 생각도, 인간을 적대할 생각도 추호도 없어요.” “그럼….” “단, 하루가 다르게 세를 불려가는 인간이 두려운 거겠죠. 아마 어떤 식으로든 예속될만한 상황을 경계하는 게 아닐까 싶네요.” “…….” 불현듯 피식, 힘없이 웃는 소리가 흘렀다. “뭐, 한 번 사그라졌던 여왕 선발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건, 아마 그런 이유겠죠. 지금 우리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지도자가 필요하니까.” 이윽고 말을 끝낸 순간, 잠시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가끔 비슷한 꿈을 꿔요.” 그때 조금 뜬금없다 느껴지는 말소리가 고요히 흘러나왔다. 그러나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에르윈은 침착히 되물었다. “꿈? 어떤 꿈인지요?” “조금 웃기기는 하지만…. 꿈에서 저는 하얀 말에 탄, 그리고 누런 덩어리를 안은 작은 아이를 보고 있죠. 아, 얼굴도 봤어요. 어여쁘면서도 고결한 은발이, 어릴 적 마르가리타를 닮았네요.” “네?” “그러니까 꼭 마르가리타의 아이를 보는 것 같다니까요.” 그렇게 말한 니뮤에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놀란 빛을 비췄던 에르윈은, 덩달아 웃으며 니뮤에의 옆에 살며시 붙어 앉았다. 더 듣고 싶다는 듯이. “가만히 꿈을 더듬어보면, 아이는 굉장히 행복해하고 있던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둘러싸여 항상 웃고 있죠. 그 미소를 보면 저도 행복해지는 느낌이에요.” “그리고요?” “저는, 그 아이에게 다가가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리고 손에 든 가시나무 관을 아이의 작은 머리에 씌워주죠.” “후후. 듣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이야기네요.” 에르윈이 눈을 반짝였다. “아, 어쩌면 예지몽이 아닐까요? 가령 니뮤에 님이 마르가리타 님의 아이를 찾게 된다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때였다. “…그런데, 거기서.” 갑작스레, 니뮤에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가시나무 관을 씌우고, 기뻐하며 뒤를 돌아보면….” 느닷없이 드문드문 이어지는 말소리. 아무 생각 없이 돌아본 에르윈은, “!” 순간적으로 몹시 기함했다. 조금 전까지 연둣빛으로 빛나던 니뮤에의 두 눈이, 어느 순간 무채색으로 변해 자신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으니. 에르윈은 반사적으로 눈을 깜빡였다가 고개를 빠르게 털었다. 그리고 다시 바라보자, 니뮤에는 무언가 말할 듯 말 듯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돌아보면….” 그러나 끝내 말을 잇지 못하겠는지, 결국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에르윈.” 두 요정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잠깐의 정적. 그러나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하나만, 하나만 약속해줘요.” 어떤 전조도 없이 니뮤에의 말문이 봇물처럼 터졌다. “장로의 의지는 확고해요. 물론 다른 하이들도 마찬가지고요. 조만간 새로운 여왕 선발이 공식적으로 발표될 거예요. 저로서는 이 이상 거부하기 힘들어요.” “그래요, 알고 있어요. 썩 달갑잖게 여기는 이들이 많다는 걸. 그리고 필요성에 공감해 가만히 있다는 것도.” 에르윈이 멍한 얼굴로 입만 뻐금거릴 즈음, 니뮤에는 이 모든 말을 아주 빠른 속도로 말했다. 미처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저.” 갑자기 심상찮아 진 분위기에 에르윈은 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니뮤에가 두 손을 내밀어 양어깨를 눌렀다. 힘이라고는 손톱만치도 들어가지 않은 부드러운 손놀림이기는 했지만, 그 행동에는 감히 항거할 수 없는 오묘한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결국에는 엉거주춤 수풀에 앉고 말았다. “그러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약속해요. 내 오랜 친구이자, 나만의 검이여.” 귓가에 속삭이는 소슬한 음성에 가냘픈 몸이 흠칫 떨린다. “제가 어떤 선택을 내리든 간에, 에르윈만은 저를 믿고 도와주겠지요?” “네, 네.” “제가 어떻게 되더라도, 저한테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그, 그럼요. 그건 언제나 당연한 일인걸요.” 에르윈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정말인가요?” 이윽고 세 번째로 같은 질문이 이어진 찰나, 에르윈은 마침내 이상함을 깨달았다. 평소 니뮤에의 언행과도 엄청난 차이가 있거니와, 무엇보다 아까 중간에 끊긴 꿈의 내용이 괜스레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르윈은 계속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지금으로써는. “…그래요.” 그렇게 몇 번이나 다짐받고 나서, 니뮤에는 뜻 모를 숨결과 침음을 실어 흘렸다. 잠시 에르윈을 지그시 응시하더니, 왠지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짓고는 처연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 자리에 계속 있기 힘들다는 듯, 은발의 요정은 숲 사이로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한참 동안 니뮤에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만 보던 에르윈은, 흡사 홀린 듯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젖혔다. 어느새 노을로 물든 하늘은 황혼이 최고조로 달해, 요정의 숲에 짙은 자줏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냥 아름답다기보다는, 무언가 흉흉하다고 생각되는 빛깔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 왜인지 불길하다고 생각한 순간, 엘도라 생각이 에르윈의 뇌리를 까닭 없이 스쳤다. 한편, 같은 시각. 쾅! “뭐라고요?” 라그나로크, 푸른 궁전에서는 때아닌 고성이 장내를 떠르르 울리고 있었다. 0863 / 0933 ---------------------------------------------- D-Day, Five. 에르윈이 요정의 숲으로 떠난 지, 그리고 타나토스가 깨어난 지 어언 두 달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원탁의 기사들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그동안 여러 번 자리를 가지며 타나토스의 입장을 꼼꼼히 확인했다. 그러면서 각자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했다. 하지만 계획은 누군가 바라는 대로 순탄하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현재 악마 진영의 유일한 장점은 홀 플레인에 직접 나와 있다는 것이다. 소환의 방이라는 이(異) 차원에 머무르며 필요할 때마다 인간을 호출하는 천사보다, 훨씬 많은 접촉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꼭두각시가 아니다.’ 라는 명제로 행동권을 넘긴 것이 걸림돌로 작용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타나토스는 천사의 목적을 최대한 실감 나게 토로했고, 인간은 어느 정도 그럴듯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래서 어쩌라고?’ 라고 반응한 건 아니었으나 상황은 지지부진했다. 선동까지는 성공했지만, 행동으로 이어지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소리였다. 천사의 장기 말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분노해도, 어쨌든 그 부분만 제외하면 이후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왔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남 대륙은 서 대륙이 아니다. 스스로 최고라는 자부심이 가득하기는 해도, 약탈과 살육보다는 질서 아래 평화를 좋아하고, 호전적으로 움직이기보다는 합리적으로 행동한다. 말인즉 이 세상에 적응하고 안주한 인간의 수가 악마의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멜리너스는 물론, 엘도라 포함 원탁의 기사단이 존중받는 집단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이들이 남 대륙 전부도 아니라는 점이다. 기실, 비슷한 원인에 기인한 같은 문제였다. 천사가 순수한 도우미라는 인식을 지우고 이제껏 뿌린 불신의 씨앗을 싹트게 하려면, 좀 더 광범(廣範)하게, 좀 더 확실하게 천사의 목적을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엘도라를 들여보내 무턱대고 진실을 밝히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이건 현재 악마가 선택할 수 있는 최악의 악수였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으니 가장 극대화할 수 있는 시점을 노려야 하니까. 아무튼, 시간이 부족한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나마 남은 천금 같은 시간이 하루하루 의미 없이 흘러가는 가운데, 사탄은 결국 장고 끝에 선택을 내렸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좋지 못한 결과가 예상되는 상황이라면, 천사에게 들켜 기회를 날려버리는 게 아닌, 인간 세상에서 발생할 혼란을 감수하겠다는 길을 선택했다. 그래서 D-Day와 세 번째 계획을 앞당겼고, 쾅!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래서 회의가 개최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탈리는 황망하다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오늘 푸른 궁전에는 총 열여덟 명의 사용자가 모였다. 열네 명은 원탁의 기사와 멜리너스였고, 나머지는 네 개의 외(外) 도시를 이끄는 영주 클랜의 수장이었다. 동 도시의 엘핀 클랜, 서 도시의 팍스 클랜, 남 도시의 카르페디엠 클랜, 북 도시의 녹스 클랜. 사실상 남 대륙을 대표하는 사용자들이 전부 한 자리에 모인 셈이다. “동 대륙 정벌? 지금 제가 잘못들은 건가요?” “워워, 진정하시오. 수색의 기사. 나도 충분히 놀랐으니까.” 그때 다소 오만한 표정과 거만한 느낌을 물씬 풍기는, 약간 마른 체구의 사내가 손을 휘휘 저었다. 이 사용자가 바로 각성 시크릿 클래스 ‘복마전의 성인’의 주인이자, 소돔과 고모라의 구현을 꿈꾼다는 카르페디엠 로드였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가 싶더니…. 설마 동 대륙을 점령하자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어요. 그것도 언제나 정의 구현에 앞장서는 오딘 클랜이 말이요.”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넉살 좋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나저나 우리에게 말을 꺼내기 전, 내부서 어느 정도 이야기가 정리됐을 줄 알았는데?” 두 손으로 이마를 쓸어 올리며 나탈리를 흘끗거렸다. “전부 모르는 건 아니지만,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첫 반응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어쨌거나 여러분도 우리 남 대륙에 중요한 분들이니까요.” 안경을 올리며 구변 좋게 말하는 이안. 카르페디엠 로드는 피식 웃었다. “뭐, 좋소. 하지만….” 그리고 의자에 기댄 등을 천천히 떼더니, 탁상에 몸을 바싹 붙이며 잿빛 눈동자를 날카롭게 번뜩였다. “누구나 납득할 수 있도록, 아~주 상세하게 설명해야 할 거요. 우리를 놀리는 게 아니라면 말이지.” “하하. 여부가 있겠나요. 일단 뜬금없는 말로 혼란스럽게 한 점, 진심으로 사과 드립니다.” 이안은 잔잔히 말하며 깍듯하게 머리 숙였다. 이렇게까지 나오자 조금은 안심했는지, 카르페디엠 로드는 킬킬 웃으며 끄덕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몇몇 기사가 눈살을 찌푸렸으나 별다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눈앞의 사내가 감정 기복이 심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아니, 사과할 필요까지는 없어요. 그냥 좀 놀랐을 뿐이니까. 그리고 미리 말씀드리건대, 나는 기본적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 아니요. 인간의 역사만 봐도 전쟁으로 점철돼 있는데, 필요하면 해야지요. 그럼요!” “예, 예. 물론입니다.” “아, 사설이 길었군. 그럼 어디 한 번 이야기해보시오. 내 경청하리다.” “예, 그럼.” 이안은 잠깐 헛기침한 후, 탁상에 깔린 지도의 중앙을 짚었다. “우선, 아까 말씀드린 것들은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하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천사의 목적에 관해서라면 확실히 이해했지요. 동서남북. 이 네 대륙이 중앙을 둘러싸고 서로 각축전을 벌인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일리 있다고는 생각해요.” “그럼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죠. 우리가 동 대륙을 공격하고 점령에 성공할 시, 총 네 가지 막대한 이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네 가지?” 이안은 엄지를 접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첫 번째. 차후 중앙 대륙을 둘러싼 각축전에서 경쟁자를 미리 떨어트릴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경험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일을 생각하면 우리는 괴물이 아닌 같은 인간과 집단으로 싸워야 할 텐데, 동 대륙과의 전쟁은 분명 소중한 전투 경험을 쌓게 해줄 겁니다. 세 번째. 사용자든 성과든, 동 대륙에 있는 물자를 우리가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건…. 더 말할 필요도 없겠죠? 그리고.” “잠시만요. 그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였다. 이안이 빠른 속도로 말을 맺은 찰나, 이제껏 가만히 앉아 있던 사내가 갑자기 말을 끊었다. 특징이라고는 그다지 말할 것 없는 평범한 사내였지만, 어쨌든 이 회의에 참가한 만큼 그저 그런 사용자는 아닐 터. 이 사용자는 겉으로는 중립과 평화를 표방하지만, 사실은 기회주의자로 평가받는 서 도시의 영주, 팍스 로드였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놀라기도 했지만, 상황을 너무 낙관하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제가 아는 체하며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전쟁이라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잖습니까. 막말로 싸움을 걸었다가 서로 공멸하는 상황은 생각해보지 않으신 겁니까? 설령 승리한다손 쳐도, 우리가 입을 피해는요?” “아하. 물론이죠. 그러고 보니 제가 이 말씀을 드리지 않았군요.” 흡사 공격하는 듯한 말투였으나 이안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팍스 로드께서는 현재 동 대륙의 상황을 알고 계십니까?”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사뭇 당당한 태도로 말하자, 팍스 로드가 한풀 꺾인 기세로 말했다. “제가 승리를 낙관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현재 동 대륙의 발전 상황은 네 대륙 중에 가장 낮거든요. 완전히 최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죠. 신 대륙은커녕, 이제 겨우 대 도시를 차지한 정도라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런데 과연 우리와 상대할 수 있을까요?” “아니 그러니까, 알아서 잘살고 있는 동 대륙을 굳이 공격할 필요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정 그러면 차라리 서 대륙을 상대로 전쟁을 거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거죠. 쫓겨온 이들을 위한다는 명분도 있고, 천사들에게 할 말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상한 말씀이군요. 서 대륙은 이미 버림받은 것과 진배없는 곳인데 뭐하러 차지합니까? 우리가 자선 사업가도 아닌데요.” “뭐요?” 팍스 로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득에 초점을 맞추면, 팍스 로드야말로 단단히 착각하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안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더 이상 예비 사용자가 들어오지 않을 뿐이지, 서 대륙은 강합니다. 들어보니 아직 약 일만 명 가깝게 남아 있는 것 같던데, 한 명 한 명이 베테랑이라고 하더군요. 살육과 약탈이 일상인 곳에서 살아남은 정예라는 거죠. 그러니 동 대륙과 비할 바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더 약한 동 대륙을 먹이로 삼으시겠다.”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좋아.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드르륵! 콧김을 세게 뿜은 팍스 로드는 곧장 의자를 끌어 몸을 일으켰다. “정녕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할 말은 없으나,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사실 지금 제 앞에 있는 분들이 정말 오딘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군요.” “팍스 로드.” “아니요. 그만하죠. 오늘 이야기는 못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이만 가보겠습니다.” “…….” 이윽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엘도라를 한 번 흘깃거리고는, 쿵쿵거리는 걸음으로 회의장을 떠나버렸다. 잠시 어색한 적막함이 흘렀다. 이러한 고요한 침묵 속에서, 이안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꺼낸 이야기는 끝내겠습니다. 네 번째로, 우리는 또 하나의 신 대륙을 공략할 수 있는 권한이 생깁니다.”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요?” 턱을 괸 채 입맛을 다시던 카르페디엠 로드가 반문했다. “무슨 소리긴요. 우리가 오크 성을 공략하고 라그나로크를 발견했듯이, 동 대륙도 같지 않겠습니까? 이제 겨우 대 도시를 개척하는 상황인데, 신 대륙은 현재 언감생심 꿈도 못 꾸겠죠.” “잠깐만요. 그럼 우리가 그걸 공략한다면?” “그렇지요. 정확히는 불모의 황야라는 지역만 통과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호오.” 라그나로크를 발견했을 때 받은 보상이 생각났는지 감탄이 터졌다. 하기야 사용자라면 누구나 능력치에 민감한 만큼, 구미가 당길 만도 했다. “아니. 나는 반대야.” 그러나 전원이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은 듯, 예리한 음성이 이안을 찔렀다. 나탈리는 아까부터 서 있는 채로 시종일관 이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안은 안타깝다는 듯이 깊은 한숨을 흘렸다. “이유를 듣고 싶네요.” “이유라고 할 것도 없어. 아까 팍스 로드와 동일한 의견이니까.” “왜죠. 서 대륙과 북 대륙도 전쟁을 했습니다. 우리라고 못할 게 있습니까?” “아, 그래서 똑같이 하시겠다고? “비꼬시는 건가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번 전쟁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미래의 경쟁자를 떨어트리는 데 있어요. 그 외에는 전부 따라오는 것들에 불과합니다.” “그만. 듣기 싫어.” “나탈리. 제가 여기 앉은 열여덟 명만 보고 이런 말을 꺼낸 게 아니잖아요. 멀리 보고, 남 대륙 전체를 생각해서 꺼낸 말입니다.” “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 좀 해!” 그때 더는 듣기 싫다는 듯, 나탈리가 고함치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도의(道義)를 말하는 거라고!” “…도의…. 요?” 이안은 한 방 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도의! 동 대륙이 우리한테 무슨 나쁜 짓이라도 했어? 아니잖아. 그럼 우리가 동물이야? 약하다고 잡아먹게? 도대체 왜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 거야?” 이어지는 고함에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돌연 킥 웃음을 터뜨렸다. “도의, 도의라…. 하하, 하하하하!” 미친 듯이 터뜨리는 웃음에 나탈리는 주춤 물러났다. 아미가 사정없이 찌푸려지고, 두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히 떠올랐다. “너…. 이안 맞니?” 그 말에 이안은 웃음을 뚝 그쳤다. 그리고 안경을 들어 손등으로 눈을 훔친 후, 머리를 흔들었다. “아,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런데 너무 웃겨서요.” “웃기다고?” “도의. 좋은 말이죠. 좋습니다. 그럼 하나 묻고 싶은 게 생겼는데요.” “…뭔데.” “그렇게 도의를 따지시는 분이, 왜 오크 성 공략 때는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사실 우리가 쳐들어가기 전까지는, 서로 크게 마주칠 일도 없었는데요.” “장난해? 오크랑 인간이랑 같아?” 나탈리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한 순간, 이안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뭐가 다르죠?” “뭐, 뭐?” “예. 물론 종족이 다르기는 해요. 하지만 그 외에는 전부 똑같아요. 제가 겪은 오크는 확실히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있었어요. 오크 로드라는 족장도 있었고, 주술사라는 부족장도 있었죠. 그럼 분명 아비도, 어미도, 새끼도 분명 있었겠죠? …그런데, 그걸 씨 하나 남기지 않고 무참히 짓밟은 게 바로 우리예요. 우리가, 인간이 북진하지만 않았다면, 지금도 알아서 잘살고 있었을 거라는 말입니다.” “너!” “아니면, 인간이 아닌 괴물이니까 괜찮다. 이겁니까? 그러고 보니 그때, 아키로프와 누가 더 많이 죽이나 내기도 하셨잖아요?” “…….” 나탈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입은 뻐끔거리고 있었으나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듯 보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이안은 벗은 안경을 느긋이 고쳐 썼다. “이 세상에서만큼은,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고요. …아니, 적어도 사람이기 이전에.” 그리고 상대를 지그시 바라보며, “우리는, 사용자입니다.” 조용히 말을 맺었다. 침묵이 흘렀다. 나탈리는 한동안 충격받은 얼굴로 멍하니 이안을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건….” 망연하던 낯에 쓸쓸한 빛이 스쳤다. “…궤변이야.” 그 한 마디만 남겨두고서, 나탈리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누군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 바람처럼 회의장에서 사라졌다. ============================ 작품 후기 ============================ 오늘 내용을 적다 보니, 쿠샨이 떠오르네요…. 0864 / 0933 ---------------------------------------------- D-Day, Five. “흠…. 이거, 멜리너스 님도 같은 의견인지요?” 한동안 입속으로 혀만 차던 카르페디엠 로드가 눈을 돌렸다. 상대가 명성 높은 선지자라 그런지, 아니면 험악해진 분위기를 느꼈는지, 아까보다 훨씬 점잖아진 말투였다. 잠시 후, 나탈리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멜리너스가 천천히 시선을 거뒀다. “처음 밝혔듯이, 이 자리는 우리는 물론, 영주들의 반응을 보고 의견을 들으려는 자리일세.” “그래요? 저는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바인데요.” “왜지?” “사용자 이안의 설명에 공감했으니까요. 사실 그동안 오딘의 행보를 보며 답답할 적이 한두 번이…. 아,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그냥 불만이 있었다뿐이지, 틀렸다는 말은 아니니까요.” 황급히 말을 정정한 카르페디엠 로드는, “크흠.”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저는 말입니다. 방금 들었던 말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기 이전, 사용자다. …그래요. 우리는 사용자입니다. 홀 플레인에서 활동하는 플레이어.” “아, 물론 인간이기를 포기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안이 그러지 않았나요. 우리만 좋자고 하자는 게 아니라, 멀리 보고, 끝에는 남 대륙 전체를 위한 일이라고요.” “도의요? 물론 좋지요, 좋아요!”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죠. 이안의 말대로, 만약 중앙을 둘러싼 경쟁이 필연이라면? 몇 년 후, 오늘의 추측이 현실로 다가와 사 대륙 전쟁이 발발한다면? 그래서 결국에는 서로 죽고 죽여야 한다면, 그때는 어떡하시렵니까? 이 좋은 기회를 놓친걸, 누구를 원망해야 하나요?” 카르페디엠 로드는 이 모든 이야기를 아주 빠른 속도로 말했다. “뭐, 꺼림칙해 하시는 것도 이해는 갑니다. 워낙 정의로우신 분들이니만큼.” “저도 카르페디엠 로드의 의견에 일부 공감해요.” 그때였다. 갑자기 끼어든 음성에 한창 열변을 토하던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하는 중간에 끊겨서가 아니라, 아마 다른 이유 때문인 듯했다. “…예?” “왜요?” 망연히 반문하자, 느슨한 보랏빛 가운을 걸친 여인이 우아한 미소를 짓는다. “올리비아…. 아니, 엘핀 로드?” “네?” “방금 제 말에 동의한다고 하셨어요?” “아니요? 완전 동의는 아니고, 일부 공감한다고 했는데요?” 능청스럽게까지 느껴지는 말에, 카르페디엠 로드는 어색이 주변을 둘러봤다. 원탁의 기사들도 거의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녹스나 카르페디엠은 애초 호전성이 강한 클랜이니 찬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마 엘핀 로드까지 동의할 줄은 예상 못 했다는 반응이었다. “그 말대로예요. 앞으로의 전쟁이 필연이라면, 경쟁자가 강해지기를 기다려주는 것보다 지금 공격하는 게 가장 나은 선택이겠죠. 논리적으로 문제는 없어요. 단.” 조용히 말을 잇던 올리비아는, 돌연 끝에서 반전을 예고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아직 추측에 불과하다는 거죠.” 그랬다. 아무리 가능성 높은 예상이라고 해도 확실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전쟁이라는 커다란 사안에서는 특히 그렇다. 아마 살인과 약탈에 젖은 서 대륙이었다면 이 정도만 해도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 대륙은 감정보다는 합리를 중요시한다. 그냥 ‘사용자니까.’ 라는 말로는 부족하다는 소리다. 내심 구미는 당길지 모르나, 억측으로 받아들일 소지가 다분하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가 나온 걸까. 그랬더니 회의 서두에 들었던 말이 유독 걸리더라고요.” “서두에 들었던 말이라면….” “천사가 우리를 소환한 목적과 서로와의 관계요. 저는 오히려 그 점에 주목하고 싶네요.” “…….” 그러자 이안이 굳었던 얼굴을 풀더니 오묘한 미소를 짓는다. “그러니까.” 올리비아는 시종일관 눈을 감고 있는 엘도라를 흘깃거린 후, 멜리너스를 돌아봤다. “오딘의 진정한 목적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 “예를 들어…. 떠보기, 라고 하면 되려나?” “허허….” 그때 멜리너스가 입을 둥글게 벌리며 허허롭게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장난을 들킨 아이처럼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머금는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이거 참, 엘핀 로드한테는 못 당하겠군.” 그렇게 두어 번 머리를 흔들더니 천천히 수염을 쓸어내린다. “역시 그랬군요.” “잠시만요. 그럼 그냥 한 번 해본 말이라는 겁니까? 왜 갑자기 분위기가 이렇게 흐르는데요.” 올리비아가 조용히 끄덕이자, 카르페디엠 로드가 냉큼 끼어들었다.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어느새 평소의 온화한 얼굴을 되찾은 이안은, 차분히 자리에 앉으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 자리의 목적은 아까 몇 번이고 말하지 않았는가.” 멜리너스도 타이르듯이 말하며 이안의 말에 동조했다. 그리고 올리비아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실로 잘 보셨네.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지만, 핵심 중 하나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지. 오늘 회의의 주된 목적이 천사의 속내를 밝히는 것이니.” “좋은 생각이에요. 우리를 꼭두각시로 활용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천사의 입장도 들어봐야 하니까요.” “그렇지. 잘못된 명제를 반대로 뒤집는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참이라는 법은 없으니까.” “잠깐, 잠깐만요. 지금 저만 못 따라가고 있는 겁니까?” 이야기가 오고 가는 와중, 카르페디엠 로드가 멍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아까와는 달리, 머리 회전이 빠른 이들은 ‘아.’ 하는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이해 못 한 이들이 있음을 알았는지,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아까 그랬죠?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다고. 말인즉 확신을 얻겠다는 거예요. 해답은 천사들이 갖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걸 구하는 과정으로 모종의 방법을 사용하겠다는 거고요. 개인적으로 직접 묻는 것보다는, 이렇게 의표를 찌르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이 보이자, 혀를 차며 말을 잇는다. “그냥, 천사의 반응이나 태도를 보고 결정하겠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허, 참.” “아직도 모르겠어요?” “아니. 그래서 하자는 거요, 말자는 거요. 우리더러 뭘 어쩌라는 겁니까?” 그러자 도저히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몇 명이 쓴웃음을 짓는다. 그때였다. “…이안.” 불현듯 들려온 침잠한 음성. 그 목소리에 탁상 전원의 눈동자가 한 곳으로 쏠렸다. 조금 전까지 계속 침묵하고 있던 엘도라가, 어느새 눈을 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빛을 모은 듯한 눈동자는, 흡사 가열한 것처럼 형형히 빛나고 있다. 시선이 탁상을 쭉 훑자, 잠시 꿈틀거리던 소란이 금세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그럼 회의는 여기서 끝내기로 하고…. 돌아가시기 전, 가장 중요한 내용을 전달하겠습니다.” 엘도라에게 호명된 사내가 입을 열었다. “가장 중요한 내용?” “그러니까, 부탁이 있다는 말이죠.” 조심스러운 반문에, 이안은 씩 웃었다. “이 계획이 성공하려면,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으나 주변이 워낙 고요하니 확실히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방 안에서는 어떤 반응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러자 문밖에 선 이는 좀 더 기다리다가, 한 번 더 노크한 후 조심스레 문을 열어젖혔다. “들어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들어온 노인은 멜리너스였다. 항상 소중히 하던 흰 수염을, 흔들거리는 것이 귀찮다는 양 틀어쥔 채로 걸음을 옮긴다. 방 안에는 한 사람이 더 있다. 아니. 사람치고는 심한 이질감이 느껴졌으나, 어쨌든 외양은 긴 흑발의 여인이었다. “타나토스 님. 방금 회의가 끝났습니다.” 어지러운 책상에 앉은 타나토스는 손으로 뭔가를 만지작거리는 등, 무언가에 한창 열중하는 중이었다. 잠깐 눈을 들기는 했지만, 곧 도로 손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한 마디 말은 덧붙였다. “어땠지.” “반응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몹시 좋지 않습니다.” 흘끔, 눈치를 살핀다. 그러나 타나토스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팍스 로드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며 자리를 박차고 떠났고, 나탈리도 회의 도중 나가버렸지요.” “…….” “딱히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원탁의 기사도 과반수가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습니다. 올리비아가 적절히 끼어들어 간신히 밀어붙이기는 했지만….” “…….” 차분히 이어지던 설명이 갑자기 흐려졌다. 멜리너스는 순간적으로 눈을 돌렸다. 창밖의 풍경은 서서히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지만, 아직 붉은빛은 남아 있다. 그러나 방 안은 이상할 정도로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사방에 내려앉는 어두운 침묵에 압박을 느낀 걸까. 멜리너스는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타나토스의 말을 가만히 기다리기만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적막한 공기가 온몸을 살금살금 옥죄는 가운데, “그랬군.” 마침내 무심한 음성이 흘렀다. “그, 그러니까.” 멜리너스는 입을 열자마자, 그간 자신이 숨을 참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 급합니다.” 숨결을 토해내며 힘겹게 말을 맺는다. “그래서?” “…예?”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 “그, 그냥 시간을 좀 더 들여서….” 멜리너스의 음성은 큰 잘못이라도 저질렀다는 듯 덜덜 떨려 나왔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둘은 멜리너스와 타나토스가 아닌, 벨리알과 사탄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나마 평소 신뢰받고 악마 14 군주 정도 되니 이렇게나마 말하는 거지, 피조물 처지였다면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이미 끝난 지시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내가 이 몸을 얻고 두 번 말하는 취미가 생겼다고 말한 적이 있나?” “아, 아닙니다. 단지 아까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세상에 나왔을 때부터 주사위는 던져진 거야. 혼란은, 감수하겠다고 했다.” “…….” “아니면 시간만 바라다가, 어느 날 갑자기 들켜서 척살 당하는 상황을 바라는 건가? 그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을 것 같은데.” “상황은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심하면 됩니다. 들키지 않으면 됩니다. 서 대륙 때처럼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냥 조금만 더….” 여기까지 말한 멜리너스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사실 나도 좀 아쉽기는 해.” 동시에 앞에서 들려온 말소리는 예상외로 수긍하는 어조였다. 그러나 반신반의하며 눈을 뜬 순간, 차가운 미소를 목격한 멜리너스는 황급히 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명백한 비웃음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때쯤이면 북 대륙이 약속의 신전에 도착할 것 같아서 말이지. 그럼 우리는 늦게나마 노선 변경에 성공한 남 대륙에서, 손가락 빨며 구경만 하면 되는 건가?” “그, 그건.” “그것도 아니면. 혼란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허둥지둥 쫓아가서, 개박살 나면 되겠군.” “사, 사탄!” 그 순간, 쿵! 크게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멜리너스는 흠칫 몸을 떨며 반사적으로 눈을 내리떴다. “타나토스다.” 조용하던 방 안에, 차갑고 소슬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숨이 막힐 듯한 정적. 그 속에서 잠시 동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소음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계획은 변경하지 않는다. D-Day도, 동 대륙 정벌도. 모두 예정대로 진행한다.” 이윽고 호되고 냉정한 음성으로 질책한 타나토스는, 문득 손에 든 무언가를 휙 던졌다. 작고 흔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가방이었다. 가까스로 받아낸 멜리너스는, 한껏 놀란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여러 물건으로 흐트러져 있던 주변이 조금은 깨끗해져 있다. 아마 조금 전까지 책상을 어지럽히던 것들이 이 가방 안에 들어간 듯싶다. “이건….” “저번에 루시퍼와 같이 보기는 했지만, 확실히 천사가 재밌는 물건을 만들었어. D-Day 때 엘도라한테 전하면 된다. 말은 알아서 잘하리라 믿는다.” 그러자 멜리너스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설마, 성공하신 겁니까? 그래서 계획을 앞당기신 겁니까?” “이놈의 힘으로는 힘들더군. 그래서 내 힘을 좀 썼지. 조금만 진심으로 하면 천사의 감지 따위….” 그 순간이었다. 말하는 와중, 느닷없이 타나토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상대가 가방을 들여다보며 정신이 팔린 것을 보고는, 몰래 손을 내렸다. 그래서, 멜리너스는 볼 수 없었다. 책상 아래, 수전증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미친 듯이 진동하는 가냘픈 팔뚝을. “예? 타나토스의 힘을 이용하셨다고요?” 잠시 후, 멜리너스가 반문했다. 가방 안 내용물을 확인해서 그런지, 약간 늦은 반응이었다. “으음. 아, 그나저나 에르윈은 어떻지? 꽤 오랫동안 안 돌아오는 것 같은데.” “아마 그럴 겁니다. 대충 들어보니 요정 여왕 선발에 얽혀서 길게 체류하는 것 같습니다.” “요정 여왕이라…. 그렇게나 중요한가?” “예.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정이라는 종족은 여왕을 굉장히 신성하게 여기는 것 같더군요.” “그런가. 그러고 보니 남 대륙과 요정은 동맹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맞습니다. 오크 성 공략 때 간접적으로 지원도 받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타나토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흠…. 요정 여왕이라. 왠지 일말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가시나무 관의 인정을 받은 순간, 모든 정령이 고개를 조아린다. …전설에 따르면, 초대 여왕이었던 알체스테의 일격은 바다를 반으로 쪼갤 정도였다고 합니다.” “흐흐. 과장이 심한데.” “애초 전설이 그러니까요. 그래도 일인 군단 이상이라는 기록도 있는 만큼, 동맹 관계를 이용하는 것도 고려해보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겠지. 지금은 하나가 아쉬우니. 뭐, 우선은 D-Day에 신경 써야겠지만.” “그럼….” 그리하여 화제는 자연스레 요정을 끌어들이자는 쪽으로 넘어갔다. …당연한 소리지만, 훗날 이 계획이, 이 선택이 어떻게 돌아올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적다 보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 아. 에피소드 5도 이제 2, 3회 정도 남았습니다. 최대한 2회 안으로 끝내보겠습니다. _(__)_ 0865 / 0933 ---------------------------------------------- D-Day, Five. 새삼 느끼건대, 악마 진영이 보였던 저력의 근원은, 아마 철저한 상명하복 관계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악마 14 군주도 대 악마 앞에서는 벌벌 떤다는데, 마족은 말할 것도 없다. 사실 그 정도가 심한 감이 있어, 나조차도 조금 지나치다고 여길 정도다. 뭐, 사로잡은 철혈 여왕을 서로 차지하겠다고 잠시 내전을 벌인 경우도 있지만, 그건 세력이 다르니 넘어가고. 한데, 그런 악마와 거의 비견될 만큼의 시스템을 갖춘 종족이 딱 하나 더 있다. 바로 요정이다. 듣기로는, 요정 여왕은 선발되는 순간 거의 성역화 수준으로 존경받으며, 절대적으로 숭배받는다고 한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악마보다도 더 심한 면도 있다. 생각해보자. 요정 여왕이 일반 요정과 차별화되는 점은 무엇이 있을까?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은 ‘각성’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일반 요정은 살면서 단 한 번, 성인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각성한다. 거기서 스스로 힘을 깨닫고, 그에 맞춘 역할 집단에 소속된다. 하지만 차기 여왕으로 간택 받은 요정은 다르다. 첫 각성까지는 똑같지만, 이후에 한 번 더 각성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총 두 번의 각성을 거치는 셈이다. 이 두 번째 각성이야말로, 여왕의 자질을 시험받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그럼 그 두 번째 각성이라는 건 도대체 무엇이며, 또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여기서 필자는 하나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요정의 첫 번째 각성은 나이를 먹고 성장하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여왕에게만 허락된 두 번째 각성은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바로 요정의 신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신물이라 함은, 현재는 사용자 김수현에 의해 소실된 세계수(世界樹), 즉 위그드라실에 기원을 두는 ‘가시나무 관’이라는 일종의 왕관으로써…. 『북 대륙의 고명한 탐험가, 사용자 양기덕의 ‘약속의 신전을 앞두고….’ 中』 * ‘신장개업 효과’라는 말이 있다. 가령 식당이 새로 개장했을 때, 맛이 궁금하다는 호기심에 사람들이 몰리는 현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입에 맞는 사람들은 계속 찾고 맞지 않는 사람들은 더는 찾지 않는다. 모든 사람의 입맛을 맞출 수 없다면 손님이 줄어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상황이 다르기는 해도, 신 대륙에도 ‘신장개업 효과’와 비슷한 원리가 일부 적용된다. 처음에는 사용자들이 엄청나게 몰린다. 누구나 일확천금의 꿈에 젖어 하루가 멀다고 탐험을 나가고, 원정을 떠난다. 그러나 이런 관심이 영원히 이어지지는 않는다. 끝없이 공급되는 사용자에 비해 성과라는 자원은 상당히 한정돼 있고, 그조차도 쉬이 발견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물론, 북 대륙처럼 비밀 도서관을 이용하는 경우는 예외로 친다.) 결국에는 이 현상도 시간이 지날수록 시들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그 ‘소문’이 흐르기 시작한 시기는 나름 괜찮았다. 아마 사용자들의 신 대륙에 관한 열기가 약간 식고, 조금씩 익숙하게 받아들일 즈음일까. 정확히는 오크 성을 공략하고 라그나로크를 발견한 지 약 반년이 지나갈 무렵이었다. 어디서 시작됐는지, 누가 퍼뜨렸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알 수도 없다. 그냥 어느 순간 스리슬쩍, 여러 곳에서 흘렀다.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소문의 주된 내용은 바로 전쟁이었다. 내(內) 도시 영주 클랜인 오딘에서 동 대륙 정벌을 계획하고 있다는 풍문이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사용자들도 금세 관심을 가졌다. 처음 소문을 접했을 때는 대다수가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같은 홀 플레인에서 활동한다고 해도 이제껏 서로 남남으로 지내왔거니와, 가만히 있는 동 대륙을 왜 건드리느냐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러자 또 하나 새로운 소문이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네 대륙이 각각 개척지 공략에 성공하면, 미래에는 중앙을 둘러싸고 경쟁해야 한다는 소문이었다. 동시에 왜 꼭 ‘지금’ 공격해야 하는지 당위성을 알리는 말이나, 현재 동 대륙의 발전 상황에 관련된 말도 돌았다. 이뿐일까. 점령에 성공할 경우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대해서도 은밀하게 곁들여졌다. 원래 소문이라는 건 와전되기 마련이다. 입을 통해 전해질수록 그런 경향이 심하다. 이번에도 그랬다. 소문에 점차 살이 붙기 시작하자 날이 갈수록 갑론을박도 심해졌다. 게다가 두 번째 소문이 돌기 시작한 이후, 소수지만 전쟁에 찬성하는 이도 하나둘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 결과 ‘동 대륙 정벌론’은 더 이상 유언비어나 가십 거리로 치부되지 않았다. 누군가 일부러 부추기기라도 하는 듯, 소문은 바람 만난 불처럼 무시무시한 속도로, 라그나로크 전역에 파다하게 퍼졌다. 부채질이 성공하자, 세간의 관심과 이목은 자연스레 오딘 클랜으로 쏠렸다. 이 소문이 사실인지, 정말 동 대륙 정벌을 생각하고 있는지 등등. 물론 어지러운 와중에도, 적잖은 사용자가 참 거짓을 확인하러 신전을 방문하는 일도 있었다. 결국, 천사들이 상황을 알게 되는 것도 당연한 절차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딘은 공식 발표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섣불리 나서지 않고, 우선 반응을 지켜보겠다는 듯 조용히 기다리기만 했다.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정세가 변화하는 가운데, 마침내 D-Day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 맑고 조용한 아침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 아래,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벅차게 하는 푸른 궁전이 호화롭게 세워져 있다. 그리고 상층에서 뻗쳐 나온 테라스에 서 있는 금발 여인은, 주변 풍경과 섞여 그림 같은 선연함을 자아낸다. 물론, 어디까지는 보는 시선에서만 그렇다. 테라스에 서 있는 여인의 심정이 풍경처럼 잔잔하고 아름다울지, 아니면 복잡할지는 오직 본인만 알고 있을 터. ‘어쩌다….’ 문득 불어온 선선한 바람에 빛나는 금발이 나부꼈다. ‘어쩌다….’ 불과 두세 달 전의 일이다. ‘어쩌다….’ 예전 도시를 내려다보던 자신감 넘치던 눈동자는, 오늘은 몹시 공허해 보이는 무채색으로 물들어 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걸까?’ 간신히 생각을 맺은 엘도라는 살며시 입을 짓씹었다. 시작은 사소했다. 그냥 칼집을 찾으러 갔을 뿐이고, 그 도중에 봉인돼 있던 여인이 해방됐을 뿐이다. …그래. 그냥, 단지 그랬을 뿐인데. 문제는 그 여인이 타나토스라는, 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난 이후부터였다. 커져도 너무 커졌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작금의 상황과 직면하고 말았다. 이제 더는 오딘 클랜만의 일이 아니었다. ‘정말로….’ 처음 들었을 때는 그럴듯하다 여겼다. 타나토스의 말은 사실과 상당히 맞아떨어졌으며, 그동안 잊고 있었던 의문을 일깨우고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래서 격분했다. 당연한 분노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그러나 막상 일이 닥치자, 공포라는 이름의 압박감이 전신을 짓누른다. 흡사 감당할 수 없는 성난 파도에 휩쓸린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두려워.’ 가감 없이 속내를 밝혀보라면, 이런 극단적인 상황까지 바란 건 절대 아니었다. 그냥 누군가에게 은근슬쩍 등을 떠밀린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이제 남은 길은 하나였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지, 아쉽게도 엘도라가 정할 수는 없다. 아니. 판단 자체는 인간이 하지만,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천사의 진의에 달렸다. “후….” 엘도라는 긴 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돌연 걸음이 멈칫했다. 이윽고 시선은 테라스 문 너머, 탁자에 덩그러니 놓인 흰 가방에 닿았다. 어젯밤 찾아온 멜리너스가 건네준 가방이었다. 한참 동안 가방을 응시하던 두 눈이 이내 지그시 감긴다. ‘이건 무엇입니까?’ ‘글쎄요. 엘도라를 지켜줄 최후의 보루라고나 할까요.’ 멜리너스는 그랬다. 타나토스를 믿지 말라고. 그러나 천사도 무조건 맹신해서는 안 된다고. 두 편의 말을 모두 들어봐야 하며 판단은 인간이 해야 한다고. ‘사실…. 저는 두렵습니다.’ ‘멜리너스?’ ‘과연 우리의 추측이 맞았을 때, 그리고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천사가 어떻게 나올는지요.’ ‘그건.’ 그건 엘도라도 궁금한 바였다. 당황할까, 돌변할까. 아니면 이제껏 그래 왔던 것처럼 감언이설로 스리슬쩍 넘길까, 혹은 턱도 없는 소리라는 양 코웃음 칠까. 어느 쪽이든 예측할 수는 없으나, 엘도라는 후자를 바라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엘도라. 엘도라는, 남 대륙의 수호자지요?’ ‘맞습니다.’ ‘그럼 수호자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남 대륙 전체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바로 올바른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과, 그 결단을 실행할 수 있는 용기.’ ‘…….’ 아직, 아직 방법은 있다. 정말 많이 걸어오기는 했지만, 적어도 아직은 돌이킬 수 있는 시점이다. 그냥 이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면 된다. 천사에게 전쟁은 뜬소문에 불과하다고 설명하고, 여인의 정체를 밝히며 처우에 관해서 묻는다. 그럼 모든 것이 원만하게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게 올바른 방향일까?’ 아무것도 모르는 꼭두각시로, 천사의 장기 말로 활용되는 인생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문득 환몽이 엘도를 사로잡았다. 살그머니 눈을 뜨자, 시야가 흐릿하다. 분명 방을 앞두고 있을 터인데, 사방이 허연 안개로 자욱했다. 조심스레 걸어봤지만, 안개 말고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 “!” 그때,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생각한 찰나였다. 불현듯 두 손이 안개를 느릿하게 뚫고 나오더니 엘도라 바로 앞에서 멈췄다. 손바닥에는, 서로 대비되는 색을 띤 알약이 각각 하나씩 놓여 있다. 어느 영화의 한 장면과 흡사한 풍경이다. 홀 플레인이 아닌, 현대에서 몇 번 본 듯하다. ‘진실을 알고 싶다면 빨간 약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면 파란 약을.’ 망연히 바라보던 낯에 갈등의 빛이 역력히 드러났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한참을 고민하고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빨간 약을 선택했다. 그러면, 엘도라는…? 그때였다. 똑똑. “아!” 노크 소리와 동시, 흐릿하던 시야가 갑자기 맑아졌다. 한 번 눈을 감았다가 뜨니 방 안의 풍경이 돌아왔다. 엘도라는, 그제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스스로 팔을 뻗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손은 빨간 약도 파란 약도 아닌, 가방에 닿아 있다. ‘엘도라. 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십시오.’ ‘이 가방에 들어있는 물건은….’ 공교롭게도, 멜리너스의 음성이 그 어느 때보다 선명히 머릿속을 울렸다. 똑똑. “들어오십시오.” 막힌 숨을 토해내듯 겨우 말을 맺었다. 그러자 문이 달칵 열리며 신관 복장을 한 사내가 안으로 들어온다. 엘도라는 처음 보는 얼굴로, 적어도 오딘 클랜원은 아니었다. 신관이 입을 열었다. “사용자, 엘도라 코르넬리우스.” 예의 바르기는 하나, 딱딱하고 사무적인 목소리. “천사의 호출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을 듣자마자, 쿵! 심장이 요동쳤다. “수호자 신분으로서, 회동에 참석하십시오.” 손은, 어느새 빛바랜 흰 가방을 쥐어짜듯이 움켜쥐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후, 이제 1회 남았네요. 걱정했던 에피소드 7, 6, 5의 기나긴 장정도 끝이 보입니다. 제 욕심 때문에, 그동안 지루함을 참아주셨던 독자 분들께 깊이 고개 숙입니다.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0866 / 0933 ---------------------------------------------- D-Day, Five. 푸른 궁전을 나와, 거리를 걷는다. 결국에는 결단을, 아니. 선택을 내리지 못한 채 엘도라는 신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의식이 또렷한 만큼 혼란은 가일층 크게 느껴졌고, 덕분에 길거리의 웅성거림은 사색에 아무런 방해도 주지 못한다. 이것이 정말로 옳은지 그른지는 아직도 모르고 있다. 여전히 확신은 서지 않는다. 이것과는 별개로, 걸어가는 이유는 확고하다. 개인을 위해, 인간을 위해, 더 나아가 남 대륙 전체를 위해서라고. 명분만큼은 흠잡을 데 없을 정도로 확실하다. 그래. 지금 하는 행동이 합리적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자꾸 잘못된 길로 빠져드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확신하지 못하는 건, 스스로 해답을 구하지 못해 누군가에게 기대고, 또 바라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물론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할 수는 있으나, 이러한 과정 자체서 뜻 모를 불안감이 발생한다. 어디서부터인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불현듯 바람이 불었다. 이 흐름을 느끼려는 듯 엘도라는 턱을 젖히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바람은 쌀쌀했지만, 들끓는 머릿속을 차갑게 식혀준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눈앞에 하얀 신전이 웅장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고 계단을 올라가기 직전, 엘도라의 두 눈이 아래를 향했다. 오른쪽 어깨서부터 비스듬히 내려오는 끈 끝으로 흰 가방이 메어져 있다. 그 순간 잠깐, 갈등의 빛이 스치기는 했다. 그러나 고민은 잠시. 엘도라는 곧 결연한 눈빛을 빛내며 한 손을 가방 속으로 찔러 넣는다. 무언가 찾는 듯 한참을 뒤적이다가, 이내 꼭 말아 쥔 주먹을 빼 머리꼭지로 올린다. 손에 움키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머리 장식이었다. 검푸른 빛을 띤 손톱만 한 구슬 장식이 알알이 박혀 있다. 그 수는 정확히 열 개. 엘도라는 비장하다 생각될 정도의 손놀림으로 금발을 질끈 묶었고, 그제야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계단을 오르고 신전으로 들어간 끝에 비로소 포탈이 보였다. 바로 앞에 선 후, 몇 번의 심호흡으로 쿵쾅거리는 심장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잔잔히 물결치는 빛의 바다로 조용히 몸을 묻었다. 이어서 다다른 곳은, “어서 와요. 엘도라.” 잿빛 일색으로 된, 몹시 무겁고 괴괴한 공간이었다. “조금 늦었군요. 이미 모두 모여 있는데.” 아름답지만, 한편으로는 소름 끼칠 만큼 무감정한 목소리다. 엘도라가 담담히 고개를 숙이자, 천사는 느릿하게 제단에서 일어섰다. “뭐 많이 늦은 건 아니니 상관없겠죠. 그럼 바로 회동 장소로 안내….” 그때였다. 막 손을 저으려던 천사가 돌연 눈을 살짝 치떴다. 이제야 엘도라의 행색을 확인한 모양이다. 마치 스캔하는 것처럼 천천히 위아래를 훑더니 살짝, 미소 짓는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머리 묶은 건 처음 보네요. 회동이라고 특히 신경 써서 온 건가요? 후후.” “네?” “긴장 풀라는 말이에요. 얼굴이 너무 굳어 있어서.” “…그렇습니까.” 엘도라는 머리 장식을 만지려다가, 얼른 손을 내려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몰래 안도의 숨을 흘린 찰나. “가방은 왜 메고 왔어요?” 천사가 기습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순간 숨이 멎었으나 엘도라는 반사적으로, 그리고 준비해왔던 대로 입을 열었다. “괴물 소환 상자입니다.” “네. 그런 것 같네요. 한데 이 자리에 왜…?” 역시 알고 있었나, 라는 생각이 스쳤으나 표정 관리에 애쓰며 말을 잇는다. “클랜원들과 나가기 직전 호출을 받았습니다.” “나가요?” “어느 괴물이 소환될지 모른다는 말을 들어서.” “아~. 그럼 얼른 돌아가고 싶겠네요?” 천사는 이해했다는 듯 끄덕이더니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마요. 금방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이윽고 천사가 손을 젓자, 찬란한 빛이 흐물흐물 일렁이며 새로운 포탈 하나가 생성된다. “엘도라는, 현명하니까요.” 한 마디 남기고 따라오라는 듯 들어가는 천사를, 엘도라는 조용히 바라봤다. 그리고 빛 속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췄을 즈음, 현명하다는 말을 입속으로 되뇐 후, 천천히 포탈로 향했다. 한편, 엘도라가 또 하나의 포탈로 걸어가고 있을 무렵. “엘도라는?” “입구 앞에서 머리 묶는 걸 확인했습니다.” 신전 외곽 구석진 곳에서는 두 사용자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좋아. 그럼….” “마침내 D-Day의 시작이군요. 끝나고 뵙죠.” 후드를 푹 눌러쓰고, 몸을 돌려 떠나는 사용자는 바로 이안이었다. 그리고 홀로 남은 멜리너스는, 왜인지 잔뜩 긴장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파팟! 이윽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문득 플래시 터지는 소리와 터졌다. “응?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 “들었는데. 어, 저건 뭐야?” “뭔데? 뭐가?” “하, 하늘에….” 결코 작은 소리가 아니었던 터라, 거리를 거닐던 사용자들이 하나둘 고개를 젖힌다. 올려다본 곳에는, 어느새 연한 푸른빛이 청명한 하늘에 물감을 섞은 듯 서서히 번져가는 중이다. 차츰차츰 형체를 갖춰가는 그것은, 바로 영상이었다. 흡사 통신 구슬로 보는 것처럼, 반투명한 풍경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중요한 건, 하늘에 펼쳐진 빛무리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영상은 도시 곳곳에서 떠올라, 얼추 어림잡아도 열 개는 돼 보인다. - 그럼, 엘도라? 미처 의문을 가지기도 전, 웅혼한 음성이 허공을 울렸다. - 오늘 왜 이 자리를 마련했는지는, 스스로 알고 있으리라 믿어요. 언뜻 봐도, 영상을 한가득 채울 만큼 천사가 집결해 있는 장면은 진정으로 장관에 가까웠다. 그 신비로운 광경에 홀리기라도 한 듯, 사용자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하늘로 쏠렸다. 그리고. - ……. 오직 홀로 지상에 서 있는 엘도라의 정수리서, 가무스름한 기운이 요요히 피어오른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몹시 희미하고 어렴풋한 기운이었다. * 각 대륙 내 전(全) 소환의 방과 연결된 독립 공간, ‘천상’. “요 며칠간 상당한 수의 사용자가 소환의 방을 드나들었어요. 근 몇 년간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말이죠.” 차마 보이지도 않는 아득한 꼭대기서, 선연한 음성이 내려와 귓전을 울렸다.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수십 수백 명에게 같은 이야기를 들었네요.” “…….” “그리고 이 소문의 근원이 오딘 클랜이라는 말이 있던데…. 맞나요?” “…….” 묵묵부답. 상대가 물었으나, 엘도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허공만 바라보고 있다. “…맞나 보군요.” 가벼운 한숨이 흐른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는 듯 질책하는 어조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처음 들어올 때와 비교해 엘도라의 가슴은 완전히 가라앉은 상태였다. 이 정도의 숫자가 사방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면 주눅이 들 법도 한데, 담담한 얼굴로 오연히 서 있었다. 외려 고요하지만, 절대 호의라고 보기 어려운 눈초리들과 마주하니 차갑게 식는 듯한 기분마저 느끼고 있었다. “왜 그랬나요?” 비로소 시작된 질문에 엘도라는 느릿느릿 고개를 젖혔다. 이윽고 끝이 보이지 않는 천상이 시야에 절반쯤 담길 즈음. “왜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질문은 제가 하지 않았나요? 사용자 엘도라.” 천사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면, 과연 착각일까. 아니. 착각이 아니다. 흡사 주변 기온이 내려가기라도 한 듯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엘도라의 목에는 조금씩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우선 인정하겠습니다. 동 대륙 정벌을 계획한 건, 오딘이.” “역시 그랬군요. 그래서, 왜 그런 되지도 않는 계획을 세웠느냐는 말이에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끊기자, 절로 이가 악물어졌다. “그래서 묻지 않았습니까. 안 됩니까?” “…네?” “동 대륙을 공격하면 안 되느냐는 말입니다.” “…….” 그 순간, 사뭇 도전적인 어투를 느낀 걸까. 공간이 갑작스레 적막해진다. 물론, 정적은 길게 가지 않았다. “네. 안 돼요.” 단호하리만치 냉정한 통보에 엘도라의 눈이 한껏 가늘어진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계획을 세운 건가요?” “소문은 이미 접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게 제 입장입니다.” “흐응. 중앙을 둘러싼 경쟁 구도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천사는 바로 핵심을 꺼냈다. “뭐, 상당히 흥미로운 설이었어요. …그런데, 확신하나요?” “……?” “그냥 심증만으로는, 제대로 된 근거라 할 수 없잖아요? 정말 그럴 거라는 증거는요?” “없습니다.” 엘도라가 고개를 가로젓고, 천사가 싱겁게 웃으려는 찰나, “하지만, 그러지 않을 거라는 증거도 없으니까요.” 엘도라가 침착히 말을 잇는다. 천사의 얼굴도 자연스레 굳어졌다. “제가, 방금 잘못들은 건가요?” “…….” “설마 이런 기본적인 것까지 꺼내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엘도라? 엘도라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아야 해요.” “처지?” “그래요, 처지. 엘도라가 그냥 보통 사용자였다면, 그래요.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이해했을 거예요. 하지만 엘도라는 수호자 아닌가요? 무릇 수호자라는 건.” “저는 동 대륙의 수호자가 아닌, 남 대륙의 수호자입니다.” 그 순간 이번에는 천사의 말이 끊겼고, 낯에 불쾌하다는 기색이 서렸다. 그러나 지상에 서 있는 엘도라의 눈에는 그 반응이 보이지 않는다. “이번 계획의 요지는 미래에 경쟁할 수도 있는 대륙을 앞서 제거한다. 즉 남 대륙 전체를 위한 길입니다. 한데 어째서 수호자 직무에 어긋난다는 듯이 말씀하시는 겁니까.” “엘도라 코르넬리우스!” 그때, 처음으로 천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왜인지, 심지어 은은한 노기마저 섞인 음성이었다. “지금 이 회동이, 감히 말장난할 자리처럼 보이나요?” “어디가 말장난입니까?” “뭐, 뭐라고요?” “제 말 중 어느 부분이 말장난입니까?” 돌연 엘도라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확실하게 밝히겠습니다. 저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합니다. 이 회동의 중요성도 알고 있고, 말장난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니 제 주장을 단순 말장난으로 치부해 은근슬쩍 넘기려는 거라면, 이번만큼은 절대로 싫습니다.” 엘도라는 이 모든 말을 아주 강인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만큼은 절대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결연한 의지마저 엿보였다. 그런 엘도라의 의지를 느꼈는지 아니면 말문이 막혔는지. ‘천상’에는 또 한 번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몹시.” 긴 침묵 끝에 천사가 입을 열었다. “놀랍군요.” 엘도라의 눈이 살짝 떠졌다. 천상의 가장 높은 곳에 있던 천사가 어느 순간 하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맨눈으로 얼굴이 확인 가능할 정도로 아래로 내려왔을 즈음. “정말 제가 아는 엘도라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예요.” 공중에서 멈춘 천사의 입가에는, 놀랍게도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엘도라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천사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해해요. 아니. 이해하기로 했어요. 엘도라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그렇게 여겼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옳고 그른 걸 떠나서 말이죠.” 공간에 흐르는 목소리는, 무척 감미롭고 황홀하다. 살살 달래는 듯한 어조에 절로 귀가 기울여진다. “하지만 엘도라. 살면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이분법적 사고나 흑백 논리로 해결하려는 건 아주 잘못된 거예요. 누가, 어떤 목적으로 바람을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동 대륙을 공격하는 일이 그렇게나 중요한가요? 꼭 필요하다면 모를까, 아직 라그나로크도 안정화되지 않은 시점이잖아요?” 그러나 천사는 알고 있었을까. “그러니까, 인간의 언어로 매너리즘이라고 하나요?” 엘도라의 가슴에 붙은 불덩어리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걸. “그래요. 엘도라는 언제나 합리적으로 행동했고, 맡은 임무에 항상 앞장섰지요. 그건 우리 천사도 잘 알고 있고, 높이 사고 있는 바예요. 그리고 오랜 숙원이었던 오크 성 공략을 이룬 결과….” 문득, 천사의 말이 서서히 흐려졌다. 그건 아마 현재 엘도라가 짓고 있는 표정을 봤기 때문이리라. 언뜻 괴로워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차가운 비웃음을 띤 얼굴을.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원하는 건 감언이설로 스리슬쩍 넘어가는 게 아니라, 명확한 해답입니다. 말장난하자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자 천사의 낯에 서려 있던 봄바람 같은 나긋나긋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서 대체 어쩌자는 거예요? 생각을 바꾸지 않겠다는 건가요?” “아니요. 제 질문에 진실하게 말씀해주신다면 그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대답 여하에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요.” 주변을 감싸는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자존심이 상하는지 천사의 얼굴이 서서히 찌푸려졌다. 이윽고 굉장히 언짢아하는 얼굴로 엘도라를 노려본다. “좋아요. 어떤 질문이죠?” “간단합니다. 이 계획을 취소시키고 싶다면, 이렇게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그게.” “우리 인간은, 아니 사용자는. 미래에 중앙을 둘러싸고 경쟁할 필요가 없습니까?” 그 순간 천사의 얼굴에 떨떠름한 빛이 스쳤다. 그러나 엘도라는 여기서 끝내지 않고, 한 번 더 말을 이었다. “긍정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떠나는 즉시 계획을 취소하겠습니다.” “그, 그걸 제가 어떻게 장담하나요? 우리는 그저 도우미에 불과할.” “물론 서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겠지요. 그러나 우발적인 사고가 아닌, 필연적으로 예정된 전쟁이 없느냐는 뜻입니다.” “그, 그건.” 엘도라가 강하게 말하자, 천사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리고 잠시 입을 달싹거리더니 헛기침하며 말을 잇는다. “흐흠. 아쉽지만 그건 말할 수 없는 확답할 수 없는 질문이네요. 신 대륙에 관한 정보는 사용자 스스로 알아내야죠. 상식적으로 남 대륙에만 특혜를 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위치를 알고 싶다는 게 아닙니다. 대륙 경쟁이 필연인지 아닌지. 이 부분에 관해서만 확실하게 말해달라는 겁니다. 이것도 안 됩니까?” “…….” “하.” 천사가 침묵하자 우습다는 탄식이 터졌다. “그럼 결국 이 말이군요. 어떤 말도 해줄 수는 없다. 그냥 하지 마라.” “에, 엘도라.” “이건, 이 회동은…. 저를 통제하기 위한 자리입니까? 당신들의 뜻대로?” “아니, 그러니까.” “그러니까?” “…….” 침묵, 침묵, 침묵, 침묵. 아무리 기다려도 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러나 주변을 감싸는 분위기는 무언의 긍정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결국, 레미엘은 눈을 돌렸다. “그렇게 느꼈다면 사과하지요.”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아니요. 어쨌든 원하는 정보를 말해줄 수는 없어요. 우리도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사정?” “그만. 이 이상의 발언은 허락하지 않겠어요.” “……!” 그 말을 들은 순간이었다. 엘도라는 여태껏 간신히 이어지던 무언가가 뚝 끊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엘도라의 얼굴이 와짝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왜….”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그럼 왜 우리 사정은 생각하지 않는 건데…?” 꾹 움켜쥔 주먹이 파르르 떨리는 가운데,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어째서 말해주지 않는 건데…. 왜 계속 숨기려고만 그러는 건데….” “그냥 하라는 대로 해라…. 그게 당신이 말하는 사정이야…?” 혼잣말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워낙 원통하게 말하는 터라 천사 전원이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 생각해보니 예전에도 그랬어….” “처음 만났을 때도…. 왜 소환했느냐고 울며불며 매달렸을 때도….” 옛일이 떠올랐는지, 목소리는 흡사 분노한 짐승이 우는 듯이 변해간다. “왜! 왜 말을 못 해주는 건데!” 이제는, 숫제 울먹거림에 가까운 외침. “이럼…. 결국 그런 거잖아…. 그 여인이 말이 맞는 거잖아….”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허탈함. “엘도라. 지금 무슨 말을…?” 그때였다. 반문한 순간 숙여 있던 고개가 번쩍 들렸고, 천사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처음 소환된 그 날처럼,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그렁그렁한 눈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어느새 여기 서 있는 엘도라는 더 이상 사용자가 아닌, 그저 한 명의 나약한 소녀에 불과했다. “진짜야? 그래서 말 못 해주는, 아니 안 해주는 거야?” 엘도라는 아이처럼 손등으로 눈을 쓱 닦고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천사를 노려봤다. “뭐, 뭐가….” 말을 더듬는 천사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거미줄처럼 번진다. 그러나 참고 참았던 엘도라의 브레이크는 이미 한참 전에 풀려버렸다. “앞잡이…. 라며.” “앞잡이…?” “무언가 목적이 있어서 소환한 거라며.” “모, 목적이요? 그게 무슨!” 그 순간이었다. “제로 코드 때문이라며!” 드디어 폭발한 엘도라의 외침은 천상을 왕왕 울리는 것은 물론, - 제로 코드 때문이라며! 영상이 재생되는 도시 전역을 떠르르 울렸다. 동시에 천사는, “…아?” 두 눈을 찢어지라 뜬 채로 경악하고 말았다. 할 말을 잃은 듯 완전히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잠시 후. 이제껏 어떤 일에도 고요하던 천상이, 천사들의 술렁거림으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의 반응을 확인한 순간, 엘도라의 내면에 하나의 확신이 생겼다. “들었어, 들었다고. 천계를 지키기 위한 수호 장치, 제로 코드….” “에, 엘도라? 자, 잠시만요.” “그걸 지키려고 우리를 소환한 거라며. 사용자라는 웃기지도 않는 설정을 집어넣고, 그 적대 세력과의 전쟁에 활용하려고 그런 거라며! 아니야?” “…….” 침묵은 이어졌지만, 천사의 반응이 빠르게 변했다. 놀라는 것도 잠시. 가볍게 손을 저어 소란을 사그라지게 하더니, 소슬한 눈으로 지상을 내려다본다. “왜! 왜 아무 연관도 없는 우리가 너희 싸움에 말려들어야 하는데! 도대체 왜!” “…그건, 누구한테 들었죠?” “지금, 지금 그게 중요해?” “네. 중요해요. 굉장히 중요하죠. 그러니 실토하세요. 누구한테 들었나요?” 감정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을 수 없는, 고저 없는 음성이다. 엘도라는 진정으로 슬프다는 듯이 입을 일그러뜨린다. 사과까지 바란 건 아니었다. 그냥 아니기를 바랐다. 아니. 설령 맞더라도, 진실하게 말해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런데…. “흐으으으….” 탄식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뱉고서, 엘도라는 힘껏 숨을 들이켰다. 쿵쾅거리는 가슴이 가라앉을 때까지, 어깨의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몇 번이고 호흡한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엘도라는 소녀에서 다시 사용자로 돌아와 있었다. “…돌아, 가겠습니다.” 힘겹게 열린 입에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확답이 없는 이상, 동 대륙 정벌 계획의 취소는 없습니다. 옳고 그름의 판단은 저희가 합니다.” “아, 그건 됐어요. 그나저나 아까 그 말, 누구한테 들었죠?” “…그리고, 오늘부로 남 대륙 수호자를 그만두겠습니다. 그럼.” “엘, 도, 라?”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엘도라는 개의치 않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일렁거리는 포탈을 향해 몸을 묻는다. …아니. 정확히는 그러려는 순간이었다. 핑! 한순간 공기를 찢는 파공음이 울리더니, 파사사사…. 단단히 틀어 올린 금발이 허무하리만치 아래로 흘러내린다. 단순히 무언가 스쳤을 뿐인데, 머리 장식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당연히, 엘도라의 걸음도 우뚝 정지했다. “…레미엘.” 믿을 수 없다는 듯, 엘도라가 망연히 뒤를 돌아본다. 천사, 아니 레미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 “미안하지만, 오늘 외출 약속은 미루는 게 좋겠네요.”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아니요? 돌아갈 수 없어요. 제가 허락하지 않았으니까요.” “…허락?” 빠뜨뜨뜩! 이 갈리는 소음이 섬뜩하다. 그러나 레미엘은 피식 웃더니 혀를 차며 기지개를 켠다. “후유, 이래서야 가브리엘 님을 탓할 수가 없네. 사 대 천사가 관리하는 북 대륙이, 왜 그렇게 김수현한테 휘둘리는가 싶었는데…. 후후.” “김수현?” “아, 있어요. 북 대륙에서 활동하는 사용자인데 조금 웃긴 인간이죠. 그럭저럭 강하고 실적 좀 냈다고, 우리를 아주 우습게 여긴다니까요?” “…….” 생긋 웃은 천사는, 곧 실눈을 뜨며 상대를 가리켰다. “바로, 당신처럼 말이죠.” “…뭐?” 엘도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윽고 꽁꽁 매어져 있던 하얀 천이 사르륵 풀리더니,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엑스칼리버의 위용이 드러난다. 그러나 레미엘은 가당찮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칼 넣어요. 원칙상 우리가 당신을 해할 수는 없지만, 이건 상황이 조금 다르거든요.” “돌아가겠다고 했습니다.” 딱! 불현듯 레미엘이 손을 튕겼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생성돼 있던 포탈이 한순간 흔적도 없이 소멸한다. 소환의 방으로 가는 통로가 사라진 것이다. “계속 똑같은 말을 하게 하는군요. 사용자, 엘도라 코르넬리우스? 당신은 돌아갈 수 없어요.” “저를 어쩌실 생각입니까?” 엘도라는 약간 서글픈 듯, 그러나 적의 섞인 말투로 물었다. 레미엘은 어깨를 으쓱 들먹였다. “걱정하지 마요. 그냥 긴히 말을 나눌 필요가 있을 뿐이니까. 원칙상 우리는 당신을 의도적으로 해할 수 없다고 했잖아요? 일이 끝나면 무사히 돌아갈 수는 있을…. 아.” 그리고 아까 들었던 말을 떠올린 듯, 싸늘하게 입을 연다. “물론, 당신의 대답 여하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지만요.” 문득 엘도라는 왈칵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러나 간신히 삼키며 꽉 쥔 엑스칼리버로 상대를 겨냥한다. 레미엘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칼 넣으라고 하지 않았나요? 참고로, 이게 마지막 경고예요.” “저도, 마지막으로 말하겠습니다.” “이런, 네 번 말할 생각은 없는데.” “지금 당장 포탈을…!” 그때 레미엘이 갑자기 공중에서 일어섰고, 엘도라는 어마어마한 힘이 사방에서 덮쳐오는 걸 느꼈다. 아니. 그걸 느꼈을 때 엑스칼리버는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나 있었고, 몸은 크게 휘청거리는 중이었다. 결국에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세차게 구르고 말았다. 간신히 상반신만 올리자, 엑스칼리버를 잡은 채 허공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레미엘이 보였다. “경고는 마지막이라고 했죠?” 건방지다는 듯 조롱 어린 음성에 엘도라는 핏물이 나올 정도로 입을 짓씹었다. 끝났다. 여기까지 온 이상, 더는 기대할 건 없다. 정말 장기 말이었고, 꼭두각시였다. 우리는 이들에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 엘도라는, “저는.” 흡사 드라마 속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주저앉은 채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소름 끼치도록 싫습니다.” 찰나의 순간, 아주 잠시 팔이 멈칫하기는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엘도라는 별안간 메고 있던 가방을 휙 집어 던졌다. 전력으로 집어 던진 만큼, 가방 속 내용물이 깨질 듯이 퉁겨져 나와 지면을 구른다. 퉁, 퉁, 퉁, 퉁!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몇 개의 상자가 입구를 덜렁거리며 바닥을 튕겨 다니고 있었다. 즉, 충격에 입구가 열린 채로 말이다. 그때였다. “응? 이건….” 아까 확인했을 때는, 그냥 보통 괴물 소환 상자였다. 어떤 이상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보잘것없는 물건에 불과했다. 그래. 분명히 그랬을진대. 레미엘이 고개를 갸웃하며 손을 내뻗으려 하자, 느닷없이 각 상자서 어두운 기운이 푹 뿜어져 나온다. 웅웅웅웅웅웅웅웅! 이어서 어떻게 할 틈도 없이, 심상치 않은 흐름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진동은 삽시간에 천상을 점령하며 공간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거기다 상자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자, 느닷없이 강풍이 일어나 사방을 휩쓸기 시작한다. “이, 이건! 어, 어떻게 된 거죠?” “이게…! 일단 막아야…!” “…아? 왜 통하지가…?” “잠시만. 이 힘은….” 천사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무언가를 직감한 레미엘이 노호성을 터뜨렸다. “감히! 허튼짓을!” 그러나 레미엘의 행동을 취하기도 전, 돌연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막대한 기운이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천사의 힘 따위는 가볍게 짓눌러 밟을만한, 엄청난 어둠. 그걸 느낀 순간 레미엘은 물론, 누구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총 세 가지 일이 순차적으로, 그러나 거의 틈을 두지 않고 이루어졌다. 웅웅웅웅웅웅웅웅! 진동이 한층 심해지며, 어디선가 거대한 흑색 마법 진이 우수수 떠오르고, “꺄아아아아아아악!” 천사들이 사방팔방 떠올라 강제로 마법 진으로 이끌려 들어가며, 화아아아아아아악! 천사를 흡수한 흑색 진이 폭주하듯 한 번 더 어둠을 토해낸다. “우욱!” 그 불길한 힘에 레미엘은 본능적으로 헛구역질을 했다가, 자신도 모르게 기함해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어둠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스멀스멀 합쳐지며 형체를 갖춰간다. - 여기. - 글쎄요. 사탄이 말한 소환의 방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들려오는, 음험하고 어두운 대화. - 그래도 힘은 완전히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그럼 소환의 방과 연결된 공간이라는 뜻이겠죠. 아무튼, 정말 잘도 해줬군요. 마지막 대화를 들은 순간, 레미엘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여전히 주저앉은 엘도라는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다.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하기는 싫었지만,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렇게 서로 시선이 마주친 순간, 하나의 가정이 번뜩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엘도라, 설마!” 천사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진다. “악마와 손을…!” 그 말이 레미엘의 최후였다. 왜냐면. 콰앙! 어디선가 빛살처럼 날아온 검은 손이, 날개를 찢는 것도 모자라, 머리통을 산산이 박살 내버렸으니까. 한편, 같은 시각. “이히히히! 이히히힉!” 푸른 궁전의 어느 방 안에서는, 흡사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괴이한 웃음이 연신 터져 나오는 중이었다. “으힉, 으히히힉!” 누군가 방을 본다면 아마 크게 놀라지 않을까. “으흑, 으흐흐흑? 흐하하하!” 엉망진창으로 파괴된 풍경은 둘째치고서 라도, 어지러운 바닥을 미친 듯이 뒹구는 흑발 여인을 본다면, 누구나 무서우리만치 섬뜩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때. “키히히히…. 됐다, 됐다고!” 땅이 움푹해질 만큼 주먹으로 쾅쾅 두드리던 여인이, 갑자기 킬킬 웃으며 벌렁 드러눕는다. 천장을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광기로 희번덕거리고 있다. “이걸, 이걸 원한 거니? 이게 네가 원한 거야? 응?” 분명 아무도 없는 방이다. “이야, 재밌네. 응. 네 말대로 확실히 아주 재밌어. 키킥, 키키키킥!” 그러나 여인은, 아니 타나토스는 마치 누군가 옆에 있는 것처럼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시건방진 놈. 뭐, 네 동료는…. 아니. 이제 내 군대라고 불러야 하나? 이히히힉!” 조롱하듯 말한 찰나, 한순간 여인의 낯빛이 돌변했다. 순간적으로 씁쓸해하는 기색이 역력해졌다가, 곧바로 입꼬리가 씩 올라간다. 귓불 아래까지 닿을 정도로 찢어져 주변이 떠나가라 웃는다. “아하하하하하하하!” 숨넘어갈 듯 웃어 젖히는 모습이, 언뜻 경박해 보이면서도 기괴한 느낌이 물씬 흐른다. …더 이상, 사탄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 작품 후기 ============================ 해냈다…. 정말 오랜만에 하얗게 불태운 기분입니다. 아무튼, 드디어 에피소드 5가 끝났네요. ㅜ.ㅠ 수현아. 진짜 보고 싶었어…. 0867 / 0933 ---------------------------------------------- Battle Of The East Continent, Four. 살다 보면 한 번쯤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다. ‘놀라 기절할 뻔했어!’ 말인즉 졸도 상태에 이를 만큼 혼비백산했다는 건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웃긴 이야기다. 일순 꽥 소리 지르거나 난리 치는 정도라면 모를까, 단순히 놀라서 정신을 잃는 지경까지 이른다는 게 말이 되나? 뭐, 모르겠다. 겪어본 적이 없으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속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말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라고 생각했던 게 불과 십 초 전인데. “…….” 외출을 끝내고 집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조금이지만 생각을 수정할 필요성을 느꼈다. 물론 정말 놀라 자빠질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할 말을 잊었다.’ 라는 말이 어떤 기분인지는 충분히 실감했고, 하고 있다. 침착하게 생각해보자. 현재 정적만이 흐르는 방에는 총 세 명이 내 허락도 없이 들어와 있다. 조금 더 정확히 인지해볼까? 우선 침대에 대(大)자로 누워 코를 묻은 안솔과, 고개를 갸웃하는 마르. 그리고 책상 구석에 놔둔 ‘괴물 소환 상자 4’로 손을 뻗은 채 딱딱히 굳어 있는 제갈 해솔까지. 상당히 보기 드문 조합이기는 한데…. 좋아. 상황은 이해했다. 아마 전에 압수한 상자를 몰래 가져가려다가 딱 걸린 듯싶다. 그래서 저렇게 전원 동작 정지 상태로 있는 거겠지. 이 예측이 맞는다면 남은 건 단죄뿐인가? 그때였다. “잠깐!” 느긋이 들어선 찰나, 주동자로 추정되는 여인이 손을 번쩍 들었다. 이내 상자를 주섬주섬 옷 속으로 집어넣은 제갈 해솔은, 볼록해진 배를 내세우며 나를 돌아본다. 뭐지. 변명이라도 하려는 건가. “알아요. 이해해요. 멋대로 방을 뒤졌는데 당연히 화나겠죠. 저라도 화났을 거예요.” “잘 아네요. 그럼 뭡니까. 그 사뭇 의연한 태도는.” 바로 되묻자, 훗 웃는다. 배, 아니 상자를 토닥거리며 여유 부리는 모습이 좀 얄밉다. “더 들어봐요. 우리는 당신이 곧 도착한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 “안솔이 그러더라고요. 곧 오라버니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빠져나가자고.” “힉.” 그 순간 죽은 듯 누워 있던 안솔의 몸이 움찔했다. 아, 그런 애가 침대에서 저 지랄을 하고 있었군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일단 참고 들어볼까. “그래서 혹시 몰라 대비책을 세워놨다는 거죠. 후후.” “그거 정말 기대되는군요.”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우선 저희 쪽 요구 조건을 말하겠어요.” “예. 유언이라면 얼마든지.” “이 상자와 함께 우리를 무사히 보내준다면…. 어? 이, 이봐요. 더 다가오지 않는 게 좋을걸요? 마법 트랩 뿌려놨는데?” “호.” 무시하며 걸어가자, 정말 트랩을 설치했는지 바닥에서 시끄러운 소음이 일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클랜 로드 시해 죄 추가.” 라고 통보한 후, 하나씩 차례대로 꾹꾹 지르밟아줬다. 결과적으로 트랩은 채 꽃을 피우지도 못한 채 무력하게 부서졌다. “…미친.” 뭘 그리 놀란 표정을 짓나. 내 마법 저항력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간단히 트랩을 통과하자, 제갈 해솔이 흠칫 물러서며 고개를 흔든다. 또 무슨 흉내를 내려고 저러시나. “오, 오지 마! 싫어, 싫어!” “…….” “나더러 어떡하라는 건데!” “…….” “어떻게 해야 좋았던 거냐고!” “아, 저도 그 만화 봤어요. 참 재밌었는데.” 그때 여태껏 자는 척하며 누워 있던 변태가 반응했고, 제갈 해솔은 살며시 입을 짓씹었다. 도와주지 않을 거면 가만히나 있으라는 얼굴로 안솔을 노려보더니, 돌연 눈을 앙칼지게 뜨며 나를 매섭게 쏘아본다. 꼭 악당에게 패배하고 위기에 몰린 여주인공을 보는 듯하다. “졌네요. 좋아요. 마음대로 해요. 당신이 이겼으니까.” “뭘 이겨요. 그냥 사과 한 마디면 될 것을.” “싫어! 마음대로 하라고 했잖아! 애초 당신이 원하는 것도 그거 아냐? 그 추잡스러운 흉물로 나를 엉망진창으로…!” “…….” 참는 건 여기까지. 저렇게나 맞고 싶다는데 기대에 부응해주는 게 도리겠지. 나는 주먹을 높이 들어 힘껏 내리찍었다. 잠시 후. 약간의 폭력을 사용한 결과, 상황은 어느 정도 정리된 듯했다. 상자도 다시 뺏었고, 두 여인은 나란히 무릎 꿇은 채 허연 김이 나는 정수리를 쓱쓱 문지르는 중이다. 누가 왜 안솔도 쥐어박았느냐 묻는다면, ‘갈 때 가더라도 상자 하나 정도는 괜찮잖아?’ 라고 까불어서라고 하겠다. “그래서.” 우물쭈물하는 마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은 후, 조용히 둘을 돌아봤다. “연구 때문에 상자를 가져가려고 했다.” 사정을 들어보니 제갈 해솔은 평소 안솔의 행운에 상당한 의문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여 그 비밀을 밝혀낼 목적으로 접근했다고 하는데, 여기까지는 좋다. 화정과 동격의 신마저 소환하는 저 능력을 임의대로 조절할 수만 있다면 그만한 무기도 없을 테니까. 문제는 제갈 해솔이 접근하자, 안솔이 저번 상자 사건(?)을 털어놨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상자를 되찾을 겸, 그리고 안솔의 행운과 상자의 상관관계를 실험할 겸 집무실로 잠입했다는 소리다. “그럼 미리 양해를 구하던가…. 그나저나 마르는 왜 끼운 겁니까?” 이마를 꾹 누르며 묻자, 제갈 해솔이 휙 고개를 젖혔다. “일종의 보험이죠.” “보험?” “어, 언니! 말하지 마요!” “네. 걸렸을 때를 대비해 마르를 방패로…. 죄송합니다.”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군. 그나마 잘못한 건 아는지 빤히 노려보자 금세 고개를 숙인다. “아빠….” 그때 아까부터 눈치만 보던 마르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울먹거렸다. 두 언니만 혼나는 게 마음이 아픈 걸까. 평소라면 뾰족했을 귀가 축 늘어져 있다. 시무룩해 하는 게 분명하다. 잘못한 건 맞지만 애가 뭘 알겠어. 저 두 명이 감언이설로 꾀었겠지. “아니야. 마르는 잘못한 거 없어.” “죄송해요…. 저요, 상자를 너무 열어보고 싶어서….” “그래? 이거?” “네…. 정말 잘못했어요….” 입을 꼭 문 채 목소리가 늘어지는 것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굴 듯하다. 물끄러미 보고 있자 조금은 가슴이 짠해졌다. 안 그래도 요즘 하루 얼굴 보는 게 힘든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이미 상자를 건네고 있었다. “그럼 말을 하지 그랬어. 자.” “에?” 억지로 쥐여주자 마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두어 번 깜빡이더니 놀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귀엽네. “아, 아빠?” “열고 싶으면 열어야지. 열어봐.” “그래도 돼요?” “그럼. 하지만 다시는 이러면 안 돼?” “…으, 응!” “에에에엑!” 그 순간, 그러니까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진 마르가 감동한 얼굴로 안기려는 찰나, 누군가 시끄럽게 소리 질렀다. 흘끗 옆을 흘기니 제갈 해솔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안솔은 입을 쩍 벌린 채 자리에서 일어서 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상자, 안솔 거라고 했나? “오라버니…. 그거 제건데요….” “미안. 이번에는 네가 양보 좀 해줘.” “하지만 백만 GP나 주고 산 건데….” “보상은 당연히 해주지. 단, 상자는 절대로 안 된다.” 짐짓 엄하게 말하자 입이 삐쭉 내밀어 졌다.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된다. 애초 저 상자를 압수한 것도 안솔이 내 지시를 어겨서가 아닌가. “저, 언니.” 그때 상자를 소중히 끌어안은 마르가 안솔을 돌아봤다. “…왜.” “그럼요. 이거 저랑 같이 열면 안 돼요?” “어? 같이 열어? …그, 그럴까?” “네. 우리 같이 열어요.” 마르가 방실방실 웃는 얼굴로 다가가자 안솔이 혹한 낯으로 나를 바라본다. 꽤 애처로이 쳐다보기는 하지만 안. - 잠깐, 놔둬 봐. 그때였다. 머리를 가로저으려는 순간 갑자기 화정의 음성이 들렸다. ‘놔두라고?’ - 응.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바로 닫을 준비는 하고. ‘뭐야. 저번에는 아예 열지도 못하게 하라면서.’ - 흠…. 그렇기는 한데…. 화정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곧 말을 이었다. - 내가 예전에도 한 번 말한 적 있었지? 요정 여왕이 말이나 행동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요정들이 괜히 여왕을 신성시하는 게 아니거든. 그러고 보니 몇 번 들은 기억이 있다. 총 세 번이었나? 비아트리스 스텔라를 나한테 먹였을 때 한 번, 강철 산맥 공략 전에 한 번, 그리고 소망의 망치를 얻었을 때 한 번. ‘좀 애매한데. 그리고 마르는 아직 요정 여왕도 아니잖아?’ - 엄밀히 말하면 그렇기는 해. 아무튼, 가만히 보고 있어봐. 밑져야 본전 아니니. 조금 꺼림칙하지만, 계속되는 설득에 결국 허락해주고 말았다. 뭐 여태껏 화정의 말을 들어 손해 본 기억은 없으니 우선 지켜보는 게 낫겠다. 여차하면 닫으면 되겠지. “그럼 하나, 둘, 셋 하면 여는 거야?” “응!” 상자를 둘러싸고 꺅꺅거리는 두 아이를 보고 있자, 문득 누군가 살금살금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적당히 좀 합시다.” 미리 선수를 치자 킥, 웃는 소리가 들렸다. “뭘 적당히 해요?” “몰라서 묻는.” 탁!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제갈 해솔은 왼쪽 다리를 책상에 걸쳐놓는 도발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런 거?” “안 부끄러워요?” “당연히 부끄럽죠. 더구나 다리는 제 성감대이자 매력 포인트인데.” “…제가 우습습니까?” 연초를 한 대 꺼낸 후, 목소리를 한층 낮추며 말했다. 앞에 두 명은 상자에 한창 정신이 팔렸으니 들리지 않을 것이다. “에이, 괜히 무게 잡지 마요. 저도 상처받으니까.” “그게 아니라, 가끔 행동이 지나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다리를 도로 접어 내린 제갈 해솔은, 스리슬쩍 얼굴을 가까이하며 속살거렸다. “클랜 로드. 혹시 이런 말 들어봤어요?” “또 헛소리라면 듣고 싶지 않군요.” “그래도 들어봐요.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알아채지 못하는 멍청한 놈은요. 가끔 딱 짚어서 말해줘야 알아듣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저는요.” “……?” “저보다 못난 놈들한테는 손톱만큼도 관심 없지만, 반대로 저보다 잘난 놈한테는 한 번쯤 깔려보고 싶기도 하거든요? 아무렴, 저도 한 명의 여인인데요.” “그게 무슨?” 그 순간이었다. “하나, 둘, 셋!” “셋!” 우우우웅! 무어라 반응할 새도 없이 두 외침이 겹쳐서 울리고, 상자는 곧장 눈부신 빛을 토해냈다. 화아아아아아아악! 아차 하는 동안, 찬란한 빛무리가 화려하게 폭발하며 순식간에 시야를 점령했다. ‘괴물 소환 상자 4’가 발동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 아?” 누군가 몹시 당혹해 하는, 그러나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돌연히 시원한 향기가 물씬 풍겼다. 머릿속이 개운해질 만큼 싱싱하고 청량한 이 냄새는, 흡사 맑은 숲의 공기를 들이마시는 듯했다. * 한편, 같은 시각.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니뮤에 님은? 니뮤에 님은 어딨어!” “모, 모르겠어요! 가시나무 관을 쓰시자마자…!” “흰색 마법 진! 마법 진이 갑자기 나타나서 니뮤에 님을 삼키셨어요!” 항상 고요하고 평화롭던 요정의 숲은, 오늘따라 어마어마한 혼란으로 뒤흔들리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왜 사라진 거냐고!” “가, 가시나무 관도 보이지 않아요!”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요정들을 보던 에르윈은, “아….” 문득 가슴을 부여잡으며 털썩 꿇어앉았다. 니뮤에의 실종. 무려 팔백 년을 넘게 기다렸던, 요정 여왕 대관식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 작품 후기 ============================ 이로써 가시나무 관은 김수현의 품으로…. 0868 / 0933 ---------------------------------------------- Battle Of The East Continent, Four. 방 안을 꽉 채웠던 빛무리가 차차 가라앉을 즈음, 이윽고 빛 속에서 나타난 것은 호리호리한 여인이었다. 잎과 뿌리를 엮은 경장(輕裝)으로 감싼 몸은 여성치고도 가녀리나, 상체서 홀로 돋아난 불룩한 가슴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어! 마르처럼 귀가 뾰족해.” 그때 일찌감치 도망간 안솔이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고, 그제야 여인의 외모가 자세히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숲의 종족답게 살결이 희고 깨끗하며, 뻗어 나온 팔다리는 나긋나긋하면서도 매끄럽다. 엉덩이 아래까지 정갈히 늘어트린 은발은 빛을 머금어서 그런지 눈부신 광채를 분사한다. 고운 속눈썹 아래 살짝 놀란 듯한 맑은 은빛 눈동자는, 고요하고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툭, 툭…. 문득 요정의 머리서 떨어진 가시 돋친 관(冠)이 눈에 밟혔다.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게 썩 볼품없는 모양새였다. 관은 데구루루 굴러가다가 정확히 마르 주변서 멈췄다. “아.” 동시에 요정이 짧은 탄성을 터뜨렸다. “아, 아….”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이어지는 행동은 조금 이상했다. 돌연히 털썩 무릎 꿇더니 두 손을 천천히 모아 입을 가린다. 흡사 금세라도 눈물을 뚝뚝 떨굴 듯하다. 선연히 떨리는 눈동자가 바라보는 방향은 안솔이 안고 있는 마르가 있는 쪽이었다. 갑자기 왜 저러는…. 아. 설마 알아보는 건가? 요정 간에 서로 반응하는 생체 커넥션이 있던가? 쾅! 그 순간. “형!” “형님!” 문이 시끄럽게 열리더니 멋대로 쳐들어온 덤 앤드 더머가 소리 질렀다. “형 방금…. 헉?” “우, 우와아아?” 창과 검을 꼬나 쥔 채 침입한 안현과 진수현은 동시에 걸음을 멈추고, 동시에 감탄했다. 역시 이 두 명은 형제가 분명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제갈 해솔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그러자 가만히 보고 있던 제갈 해솔은, “…에이 씨. 지금도 버거운데.” 짜증 섞인,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소환한 주문을 해제했다. 마법은 또 언제 준비한 거지. * 아직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일 층 광장은 삼삼오오 모인 클랜원들로 북적거렸다. 아마 심상찮은 기운을 감지하고 오다가 웬 요정을 보고 놀란 듯싶다. < 거주민 정보(Native Status) > 1. 이름(Name) : 니뮤에(Nimue) 2. 클래스(Class) : 요정(Tribe, Elf,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요정의 숲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호수의 귀부인 • 위그드라실(Yggdrasil) 6. 성별(Sex) : 여성(565) 7. 신장 • 체중 : 168.4cm • 48.6kg 8. 성향 : 질서 • 선(Lawful • Good) [근력 86] [내구 74] [민첩 98] [체력 92] [마력 96] [행운 96] < 특수 능력(1/1) > 1. 진리를 좇는 요정의 눈(Rank : D Zero) < 잠재 능력(4/4) > 1. 궁술(Rank : A Plus) 2. 요정 마법(Rank : A Zero) 3. 정령 소환(水)(Rank : EX) 4. 호수의 요정(Rank : EX) < 능력치 비교 > 1. 마르가리타(Total 554 Point) [근력 90] [내구 78] [민첩 100] [체력 92] [마력 96] [행운 98] (잔여 능력치는 0포인트입니다.) 2. 니뮤에(Total 542 Point) [근력 86] [내구 74] [민첩 98] [체력 92] [마력 96] [행운 96] (잔여 능력치는 0포인트입니다.) 3. 마르(Total 332 Point) [근력 21] [내구 27] [민첩 43] [체력 41] [마력 100] [행운 100] (잔여 능력치는 0포인트입니다.) 니뮤에. 이름은 몇 번 들어본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팔방미인이라 봐도 무방한 거주민 정보를 보면, 아마 종족 내서도 명성 높은 요정일 가능성이 높다. 사실 아까 상자를 줄 때만 해도 요정이 소환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니 안 될 것도 없는 일이다. 신도 척척(?) 소환하는 마당에 요정이라고 소환 못 할 리가 없으니까. 그러니 사용자를 제외한 전 생물이 소환 가능하다고 보는 게 맞지 않으려나? 확률은 차치하고서라도. 여하튼 상당히 갑작스러운 감은 있지만, 왠지 느낌이 좋다. 꼭 원정을 끝내고 보상을 발견했을 때와 같이 가슴이 괜스레 설렌다. 요정 여왕의 말과 행동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하던가? 어쨌든 화정의 말도 있으니 조금은 기대할 만하지 않을까…. 수군수군, 수군수군! 속닥속닥, 속닥속닥! …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주변을 둘러보니 상황이 그리 녹록하지가 않다. “와 좋겠다. 좋겠다, 좋겠다. 형은 정말 좋겠다아.” “아니 개새끼야. 너는 차희영 있잖아.” “그냥 형이 부럽다고. 진짜 와….” “그건 그래. 실은 나도 은발 여신이 이상형이거든…. 젠장, 역시 될 놈 될, 안 될 놈 안인가.” 우선 요정을 지나치게 힐끔거리며 울분을 터뜨리는 덤과 더머. “아 정말 너무한 거 아녜요? 또 야 또. 대체 몇 명이 있어야 만족하실는지….” “저는 좀 안쓰럽네요. 왜 하필 수현을…. 이렇게나 경쟁자가 많은데요.” “후유. 큰일이네. 다리도 잘 빠졌고…. 무엇보다 가냘픈 몸매이면서 가슴이 크고 형태도 예뻐. 수현이 딱 좋아하는 스타일이야.” “언니들. 기선 제압이 중요해. 우선 한나 언니 내세워서 기 좀 죽이자.” 그리고 서로 이마를 맞댄 채 속닥거리는 여인네들. 고연주, 정하연, 임한나, 남다은, 김한별, 이유정 이렇게 여섯 명. 억울하다. 아니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건데. 방금 소환했다고. 그리고 내가 소환한 것도 아니라고. 구경하는 건 이해하지만 건설적인 말 좀 할 수 없나? 가령 ‘저 요정은 누구입니까?’ 등 많잖아.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인간들에게 둘러싸였음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는 요정이 고마울 지경이다. 당황해 날뛰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했을 테니까. 뭐, 마르를 본 이후부터 끊임없이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지만. 아까 떨어트렸던 관을 한 손에 꼭 쥔 채로. 조용히 떨리는 눈동자는 왜인지 설움과 환희가 섞인 눈빛을 빛낸다. 무언가 사정이 있는 것 같지만 일단 반응부터 볼까. 나는 품에 꼭 안긴 마르의 볼에 스리슬쩍 손을 갖다 댔다. “아!?” 토실토실한 볼을 쭉 늘리자 역시나 반응한다. “이이이잉. 아빠아아.”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까르르 웃는 마르를 화등잔만 한 눈으로 응시한다. 이윽고 요정의 시선이 비로소 나를 향했고,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르를 알고 계십니까?” “마르?” “이 아이의 이름이 마르입니다.” “그분의 존함이 마르였군요. 그럼 혹시 마르가리타의…?” 요정은 반신반의하다가, 문득 아차 한 표정을 짓더니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한 손을 가슴에 얹고 정중히 허리를 숙인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요정의 숲에서 온, 총할 역할을 맡은 호수의 요정. 니뮤에입니다.” 간단하지만, 참으로 의젓하고 기품 있는 인사였다. 이러니까 살짝 끌리는데. 꼭 ‘성스러운 여왕’으로 각성한 유현아를 보는 것 같거든. “…….” 어, 잠깐만. 총할 요정? 순간 억 소리를 뱉을 뻔한 걸 간신히 참아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아직 여왕 자리는 공석일 터. 그럼 현재 총할 역할을 맡은 요정은 사실상 종족 전체를 돌보는 수장 격이 아닌가. 어느 정도 직위는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예상을 한참 뛰어넘은 거물이 소환됐다. 후, 우선 진정하자. “김수현입니다. 인간이고요. 아, 앉으세요. 부디.” “호의,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나저나 꽤 혼란스러울 법도 한데,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는군요.” “그야 꿈을 꿨으니까요. 그것도 몇 번이나 똑같은 꿈을.” “꿈?” “네.” 온화한 미소로 회답한 니뮤에는 또 한 번 고개를 깊이 숙였다. “꿈에서나 그리던 만남을, 그리고 온 요정의 염원을 이루어주신 당신에게, 진심으로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니.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고마워하지 말아요. 마르 아니었으면 소환되자마자 죽었을지도…. “아빠, 아빠.” 그때 무릎에 앉아 있던 마르가 칭얼거리며 나를 돌아봤고, 그 순간 무언가 말하려던 니뮤에는 갑작스레 눈을 찡그렸다. 마치 이제 발견했다는 듯이. “여, 열세 쌍?” “응?” “어떻게 날개가 열세 쌍이…. 마, 말도 안 돼요.” “우웅….” 조금 전까지 차분하던 태도가 순식간에 돌변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마르를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일 회차 때 읽은 기억이 있다. 요정은 절대로 열세 쌍 이상의 날개를 가질 수 없다고. 그나마도 오직 여왕만이 열두 쌍의 날개가 허락됐다고. 그러면 저 반응도 이해가 간다. “어, 어떻게 된 일이죠? 어째서….” “말씀드리죠. 예상하셨겠지만 마르는 마볼로 아일라이트, 그리고 마르가리타 달란트 비트라이스 사이서 태어난 아이입니다.” “마볼로, 아일라이트?” “예. 현재 제가 아비 노릇은 하고 있지만, 혈통으로 이어진 관계는 아닙니다.” 바득, 이 갈리는 소음이 들렸다. 아마 마볼로에 대한 감정이 상당히 좋지 않은 듯하다. “자세한 설명 감사드려요. 그럼 날개는…?” “총 열세 쌍의 날개 중, 열두 쌍은 전대 여왕 마르가리타의 날개입니다.” “…네?” “우연한 사고로 강제 이식됐습니다.” 나름 궁금해하는 바를 성실히 설명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니뮤에의 반응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렇게나 충격적인지 핏기가 싹 가신 얼굴이 완전히 아연실색한 표정이다. 아무튼, 바로 회복될 것 같지는 않아 계속 말을 잇기로 했다. “날개 이식…. 요정 세상에서는 일종의 금기라고 들었는데요.” 니뮤에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잘 알고 계시네요. 하지만 요정 말고는 자세히 아는 인간이 없을 텐데…?” “상세하게 아는 건 아니지만, 여러모로 알아봤으니까요.” 그러자 고개를 무겁게 주억거리더니 긴 한숨을 흘린다. “그렇군요…. 맞아요. 우리 요정은 날개 이식을 굉장히 엄중하게 금하고 있어요. 절대로 저질러서는 안 되는, 말 그대로 금기 중의 금기죠. 심지어 혈연관계라도 예외를 두지 않아요.” “이렇게 심히 금지하는 이유는, 요정 힘의 근원이 날개에 담겨 있기 때문이에요.” “날개는 요정의 성장과 발맞춰 같이 개화하는 특징이 있답니다. 즉 날개는 요정이 성장하면서 겪은 모든 것이 축적된 일종의 결과물이거든요.” “그리고 우리는 그걸 본(本)이라고 불러요.” 어느새 클랜원 전원은 한 명도 빠짐없이 니뮤에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당연히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마르의 정확한 상태가 궁금할 것이다. 물론 나도 그렇고. “그래서 이해가 가지 않아요.” 여기까지 말한 니뮤에는 고개를 꾸벅꾸벅 꺼트리는 마르를 한층 복잡한 눈으로 응시했다. “마르 님의 현재 상태는, 마르가리타 님의 힘과 지식은 물론, 생전에 겪은 경험까지 모조리 섞여 있을 거예요. 말인즉 아직 아이 단계에 불과한 근본에 어른의 근본이 강제로 첨가된 거죠. 한데 살아 계신 건 둘째치고서 라도, 도대체 어떻게 인격이 유지되는 건지….” 니뮤에는 말하는 내내 서글픈 빛을 보였고, 끝내 말을 맺지 못한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0869 / 0933 ---------------------------------------------- Battle Of The East Continent, Four. 한편, 북 대륙 소환의 방에는…. “응? 조항 일시 해제 허락 요청이 들어왔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제단에 누워 있던 가브리엘이 아닌 밤중에 웬 홍두깨냐는 투로 반문했다. 그러자 앞에 서 있던 천사도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네. 레미엘 님이 직접 요청하셨다고 하는데….” “레미엘이라면 남 대륙 총괄하는 애잖아. 아니 잠깐만. 직접? 레미엘이 직접 요청했다고?” “네. 확실합니다.” “와, 별일이네. 서 대륙이라면 또 몰라. 남 대륙은 대체로 말 잘 듣는다며? 뭐, 자부심에 절어 있다는 게 문제지만.” 어쨌든 천사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가브리엘은 혀를 차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승인 요청을 허락할까요?” “절대로 안 되지. 레미엘 걔, 은근히 인간을 깔보는 성향이 있거든. 뭐, 우리엘 정도는 아니지만.” 가브리엘은 키득거리자, 천사가 쓰게 미소 짓는다. “그래도 레미엘 님이 이러실 정도면…. 한 번 검토라도 해보시는 게.” “흠. 남 대륙에 뭔 일이라도 있는 거야?” “듣기로는 전 천사를 호출하고, 천상으로 수호자를 호출했다고 합니다.” “천상? 그리고 수호자라면…. 아, 엘도라인가.” “아마 아직 진행 중일 겁니다.” “그럼 틀어봐. 일단 보고 얘기하자.” 순식간에 대화가 끝나고, 천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능숙하게 손을 놀렸다. 그러나. “어, 어?”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하는 등, 아무리 기다려도 연결에 성공했다는 말이 들려오지 않는다. “뭐해? 연결하라니까.” 기다리다 지친 가브리엘이 살짝 짜증 섞인 얼굴로 다가가자, “가, 가브리엘 님.” 천사가 한껏 당황해 말을 더듬는다. “여,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뭐? 설마, 간섭인가?” “아니요. 간섭이나 방해가 아니라, 아예 연결이 닿지가 않습니다.” “뭐라고?” 잠시 후. 천사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으로 황급히 보고를 올렸고, “…….” 가브리엘의 낯에 싸늘한 빛이 서렸다. * “그럼 큰일 아닌가?” 무심한 음성이 흘렀다. 오른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고대 마법 도시였나…. 아무튼, 마르가리타의 최후는 상당히 끔찍했던 걸로 아는데.” 눈을 돌리자, 허준영이 나를 흘끗거리고 있다. “마지아? 그게 왜?” “방금 저 요정이 그러지 않았나. 날개 이식은 본(本)의 힘과 지식만이 아닌, 실제로 겪은 경험까지 포함한다고.” “……?” “그럼 마지아에서 겪었던 일도….” 허준영은 조심스레 말을 흐렸지만, 순간 아차 싶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고,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흥. 괜찮네? 그런 생각도 할 줄 알고 말이야.” 그때 낭랑한 말소리가 허준영의 주장을 받아쳤다. “뭐, 우선 칭찬해주겠어. 하지만 네 걱정은 기우에 불과해.” 다리를 꼰 채 자못 느긋하게 말하는 여인은 바로 비비앙이었다. 뭐 하나 아는 게 나왔는지 손으로 턱을 괴며 건방을 떨더니, 허준영이 장검으로 손을 가져가자 황급히 자세를 바로 한다. 그리고 나는 살그머니 니뮤에를 흘겼다. 왜냐면…. “수, 수백 년에 걸친 조교로 마르가리타의 정신이 붕괴한 건 맞아. 하지만 그 경험이 날개에 포함돼 있다고 보기는 어려워. 왜냐면, 아 칼은 또 왜 뽑는데! 마볼로의 일기에 적혀 있었다고! 마르가르타 포획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날개를 찢은….” 우당탕탕! 비비앙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탁상이 세차게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뭐라고요?” 이어서 크게 분노한 니뮤에가 벌컥 소리 지른 순간, 스르릉 칼이 뽑혀 나오는 소리와 동시, 보랏빛 코트가 눈앞에서 펄럭였다. 이윽고 코트 자락이 서서히 가라앉자, 살벌한 광경이 시야에 잡혔다. 장검은 니뮤에의 목젖에 닿아 서슬 퍼런빛을 뿜고 있었다. “까불지 말고, 앉지 그래.” 허준영이 강압적으로 말하자, 니뮤에가 입을 질끈 씹는다. “아니, 저는!” “앉아.” 결국, 니뮤에는 얌전히 앉았지만, 곧 애타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한숨을 내쉬며 손을 젓자, 허준영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검을 거둔다. 노려보는 눈초리는 여전했지만. “왜 이렇게 예민해.” “마음에 안 드니까.” 아주 들으라는 듯이 말하는군. “말하는 꼬락서니가, 꼭 마르를 데려가겠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느냐 물어보려는 찰나, 순간적으로 입을 닫았다. 이건 조금 예민한 사안 아닌가. 비단 나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닌지 주변 분위기도 냉랭해졌다. 맹목적인 적의까지는 아니었지만, 결코 호의적인 반응도 아니었다. 오직 마르만이 깜짝 놀란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릴 뿐. 확실히 민감한 문제이나, 어쨌든 강제로 소환당한 처지일 테니 약간 미안한 감도 있다. “자리를 옮기는 게 낫겠네요. 서로 긴히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네. 조금 전에는 실례했습니다.” 니뮤에는 조금 슬픈 얼굴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결국에는 마르와 비비앙을 대동한 채 다시 집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부터 시작해, 마르가리타의 날개가 강제로 이식됐을 때의 상황까지 전부 이야기했다. 단 하나도 숨기지 않고, 최대한 자세히 말하려 노력했다. 만약 정말 마르의 상태가 위험하다면, 눈앞의 요정만이 해결 방법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아했던 첫인상과는 다르게, 말하는 내내 니뮤에는 상당히 다양하고, 또 격렬하게 반응했다. 마르가리타 발견 당시 상황에는 분노를, 마볼로를 처리했다고 하니 감사를, 갓 태어난 마르를 봤을 때 느낀 거룩함을 표현하자 감동을, 그리고 날개 이식 상황 설명에서는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기나긴 이야기를 마쳤을 즈음, 중천에 떴던 해는 어느새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기적으로…. 그렇게 된 거군요.” “혹시 뭔가 짚이는 거라도 있습니까?” 니뮤에는 고개를 가로젓다가 갑자기 끄덕였다. “아니요. 그 기적이라는 힘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해요. 하지만 김수현 님과 비비앙 님의 말씀에서 진실함을 느꼈으니 거짓말은 아니겠죠.” 음. 목소리가 나긋나긋하니 참 듣기 좋군. …이 아니라, 그래서? “하지만 그래도 마르 님이 위험하다는 상황은 변하지 않아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똑같은 의견이다. 하지만 마르의 생명이 걸린 문제이니만큼, 무조건 믿을 수만도 없다. “왜죠. 그 사건 이후 마르는 완전히 회복했고, 정상으로 생활했습니다.” “겉보기에만 그럴 뿐, 적어도 현 상태를 정상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절대로.” 절대로. 거의 확신에 가까운 또렷한 목소리를 듣자, 불안감이 한층 커져만 간다. “아주 먼 옛날 일이기는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날개를 이식한 예가 있기는 있어요. 그리고 총 두 번, 그것도 혈연관계에 한해 일시적으로 성공한 사례도 있죠.” “그럼 마르도.” “물론 마르 님도 혈연관계로 이어져 있는 건 맞아요. 덕분에 그날 목숨을 건지셨을 가능성도 있겠죠. 하지만 딱 그뿐이에요.” “잠깐만. 일시적인 성공이라는 말은, 차후 부작용이 생겼다는 거야?” 그때 옆에 있던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질문을 던졌다. “…네.” “허, 성공했는데도 부작용이 생겼다고…. 정확히 어떤 현상인지 말해줄 수 있어?” 비비앙이 눈을 반짝였으나 니뮤에는 말하기 싫다는 듯 살며시 눈을 감았다. 아마 마르 앞에서 할 이야기가 아닌 듯싶다. 그래도 눈치는 있는지 비비앙도 더는 조르지…. “아 속 시원하게 하나하나 상세하게 좀 말해봐. 나도 아까 다 말해줬잖아? 궁금하다고!” “나가라 인마.” 실룩거리는 엉덩이를 발로 뻥 차서 내쫓은 후,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문밖으로 비비앙이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그런 사례가 있다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과거에 그랬다고 해서, 현 상황에 완전히 대입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 마르는…. 특별한 아이인데요.” 그러자 난처하게 웃음 짓던 니뮤에가 돌연 얼굴을 굳혔다. “네.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 “모르고 계시니까요.” “…예?” “마르 님은 현재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모르고 계세요. 아니. 요정 여왕으로서의 자각이 거의 없으시죠. 이게 제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고, 가장 확실한 근거예요.” “아빠….” 자꾸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마르가 내 옷자락을 꾹 움켜쥔다. 그런 마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니뮤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더 자세히 설명하라는 의미였다. “생각해보세요. 그날 기적이라는 힘으로 모든 것이 회복됐다면, 이후 마르가리타 님의 날개에 힘과 지식 또한 정상으로 흡수됐지 않았을까요?” “그건….” “그럼 지금쯤 어느 정도 힘을 사용법을 익히시거나, 최소한 일말의 지식이라도 갖고 계셔야 정상이잖아요. 하지만 그러기는커녕….” “…….” 그 순간 갑자기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니뮤에는 말을 흐렸지만, 하고자 하는 말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잠시, 연초 한 대만 피겠습니다.” 니뮤에는 눈을 동그랗게 떴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심란해서 그런지 손은 이미 연초를 꺼내고 있었다. 점화석으로 불을 붙이며 가만히 상념에 잠겼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어쨌든 마르가리타도 전대 여왕이었던 만큼 날개에 축적된 본은 실로 어마어마했을 터. 그런데 어째서 마르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걸까? 그 사건 이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는데? 아니. 본의 흡수는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접때 제 3의 눈으로 읽었을 때 그렇게 확인한 기억이 있다. “후우….” …그럼 흡수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으리라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 결국에는 니뮤에의 말이 맞았다는 소리다. 마르는 정상으로 돌아온 게 아니었다. 잠시 목숨을 건졌을 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였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하지만, 방법은 있어요.” 자괴감이 고개 들려는 찰나, 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니뮤에는 언뜻 비장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방법이 있다고요?” “네. 사실상 마르 님의 문제를 해결해줄 유일한 방법…. 이라고 생각해요.” 니뮤에는 문득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아까 한 번 봤던 가시로 만들어진 관이었다. 여전히 볼품없는 모양새였지만,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다는 생각에 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그 순간이었다. 『가시나무 관(Thorns Crown)』 허공에 출력되는 이름을 확인한 순간, - 오직 여왕의 자질을 지닌 요정만이 두 번의 각성을 거치는데, 두 번째 각성에는 신물이 필요…. - 그러나 각성을 거쳐 힘을 다스릴 수 있는 날이 오면, 그때는 정의 가능한 존재로 탈바꿈할…. 일 회차 때 읽었던 기록과, 예전 제 3의 눈으로 확인한 정보가 동시에 뇌리를 스쳤다. “아.” 눈이 절로 크게 떠졌다. “설마.” “그래요. 말인즉 본이 문제라면 그 본을 다스리면 돼요. 새로운 각성을 통해 무질서하게 흩어진 본을 통제하는 거죠.” “그럼 그 관이 바로….” “가시나무 관. 오직 여왕의, 여왕에 의한, 여왕만을 위한 신물이자 왕관. 이 가시나무 관으로 오직 여왕에게만 허락된 이 차 각성을 이룰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한 니뮤에는, “그러네요. 제가 왜 계속 같은 꿈을 꿨는지….” 이윽고 차분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야, 이제야 알 것 같아요.” 그리고 양손으로 가시나무 관을 고이 받쳐 들고,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온다. ============================ 작품 후기 ============================ 감기 몸살이라네요. 하루 쉬었는데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병원 가서 주사 맞고, 처방전 받았습니다. 주사와 약의 힘인지 오전까지는 괜찮았는데, 저녁이 되니까 조금씩 으슬으슬함이 몰려옵니다. 아마 몸의 긴장이 풀어져서 그런가 봅니다. 어쨌든 아주 심한 정도는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 PS. 3차 로리 전쟁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아직은…. 0870 / 0933 ---------------------------------------------- Battle Of The East Continent, Four. 탕. 우르르르르르르르! 문을 닫고 일 층으로 내려가자, 클랜원들이 여기저기서 우르르 몰려들었다. 가히 십 면 매복(十 面 埋伏)의 계를 방불케 하는 전술 행동에 삽시간에 에워싸이고 말았다. 후, 훌륭해. “마르는요?” “어떻게 됐어요? 그ㄴ, 아니 요정은 뭐래요?” 포로를 붙잡았으니 이제 심문을 하려는 건가. 어쩔 수 없다. 성실하게 응해주는 수밖에. “아직 방에 있습니다.” “그럼 둘만 있는 거예요?” “마르와 둘이서 얘기하고 싶다고 했거든요.” “어머. 그렇다고 애를 혼자 두고 와요? 홀랑 납치해서 도망치면 어쩌시려고요!” 그럴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데, 고연주는 펄펄 뛰며 화를 냈다. 왜인지 다른 여인도 필요 이상으로 초조해 하고 있다. 심지어 손톱까지 물어뜯으면서. “어쩌지? 혹시 엄마라 부르라고 세뇌한다거나….” “그럼 또 손가락만 빨아야 하는 거예요?” 아니, 납치 걱정하는 거 아니었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저은 후, 나는 겹겹이 구축된 포위망(?)을 뚫고 겨우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우르르르르르르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왜.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내가 뭘 잘못했다고. 혼자 쉬면서 차분히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굶주린 승냥이 떼가 먹잇감 쳐다보듯 바라보는데 어찌 무시할 수 있으랴. 결국에는 적잖은 시간을 들여 니뮤에와 나눴던 이야기를 모조리 털어놓고 말았다. “그럼 그 가시나무 관이라는 걸 사용해도 마르의 상태는 장담할 수 없다는 거네요?” “그런가 봐.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마르는 특이하고, 또 특별한 존재잖아? 그래서 그 요정도 함부로 정의를 내리지 못하는 것 같네.” 니뮤에는 그랬다. 마르가 어떻게 될지는 자신도 감히 알 수 없다고. 단 하나 확실한 건, 가시나무 관으로 이 차 각성에 성공 시 직면한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질서하게 흐트러진 본(本)을 통제하고, 정상으로 돌려놓는다. 그러나 확실한 건 이것뿐이다. 본을 새로이 흡수하고 다스리는 과정이 마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 결과 마르가 어떻게 변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이건 니뮤에를 탓할 수도 없는 문제다. 제 3의 눈으로 봐도 ‘역사상 최초로 출현한….’ 이라고 명시돼 있으니까. 그때 조용히 눈치만 살피던 김한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그냥 안 하면 안 돼요?” “한별아. 그건.” “알아요. 현재 상태도 결코 안전하다고 볼 수 없다는 거. 하지만…. 마르는 아직 애잖아요.” “…….” “너무, 너무 가혹해요. 성장은 빠르지만, 햇수로 치면 아직 갓난쟁이에 불과한데….” “음….” 걱정을 모르는 건 아니다. 아마 각성은 일단 보류하고, 더 무난한 방법을 찾아보자는 말일 터. 실제로 상태 유지 시, 당분간 안전하다는 보장만 있다면 어느 정도 일리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는 당장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시한폭탄과 같은 상태다. 말인즉 어쩔 수 없는 상황이요, 선택이다. …그래. 선택은 내가 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럴 수는 있겠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마르가 스스로 생각해 결정하기를 원했고, 그래서 자리를 비켜줬다. “우선은 기다려보자고….” 결국 현재로써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살며시 눈을 뜨니 눈 부신 햇살이 시야를 가득히 물들였다. “벌써 아침인가.”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키자, 말끔하게 정리된 침대가 보였다. 임한나가 평소 사용해서 그런지, 시트에는 따뜻하고 고소한 우유 냄새가 감돈다. 어젯밤 두 요정은 새벽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눈 듯했고, 덕분에 집무실을 비워줬다. 셋이서 같이 자자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니 나름의 배려라면 배려였다. 뭐, 딱히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나도 오랜만에 임한나의 젖을 실컷 빨면서 잠들 수 있었으니. 그나저나 벌써 나간 건가? 깨워주고 씻겨줬으면 좋았을 텐데. 세안을 마치고 내려가는 길에 고용인이 두 요정이 깼다는 말을 전했다. 둘은 이미 세안과 식사를 마쳤다고 한다. 지금은 정원에서 놀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이 말인즉 마르가 결정을 내렸다는 말이리라. 가슴이 조금씩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정원으로 나가자, 이미 나 말고도 여러 명의 클랜원이 나와 있었다. 어제만큼은 아니었으나 전원 조용히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르는 수로 부근서 두 영물과 깔깔거리는 중이었고, 니뮤에는 근처에 앉아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헛기침하며 걸어가자 귀를 쫑긋 세우며 나를 돌아보더니, 얼른 몸을 일으킨다. “좋은 아침입니다. 많이 낯서셨을 것 같은데요.” “아니, 전혀 아니에요. 생각해주신 덕분에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김수현 님.” 요정의 인사인지, 또 가슴에 손을 얹고 정중히 허리를 숙인다. 참으로 조신하면서 기품 넘치는 태도였다. 말도 참 예쁘게 하네. “수현 씨면 됩니다.” “네?” “김수현 님은 제가 좀 낯간지러워서.” “아…. 네. 그럼 수현 씨.” 니뮤에는 쑥스럽다는 듯 머리카락을 귀로 쓸어 넘기더니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 모습을 보니 정말 마르의 엄마가 돼도 괜찮겠다 싶었다. 내가 어떤 심한 짓을 해도 상냥하고 포근하게 받아들여 줄 것 같은….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음…. 왜 뒤통수가 따가운 걸까? 오해를 살 수 있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다. “저를 기다리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로 이야기는 끝난 겁니까?” “네. 마르 님은….” 그때였다. “아빠!” 이제 막 이야기하려는 찰나, 누군가 앙증맞게 외치며 앞으로 세차게 달려들었다. 누군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래, 잘 잤니? 라고 말하려는 찰나, “저 할래요!” 갑자기 입이 다물어졌다. 잽을 예상했는데 어퍼컷을 후려 맞은 기분이다. “저요. 각성 할래요.” “…어?” “가시나무 관 쓸래요. 쓰고 싶어요.” “마르야?” 무언가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좋다고 생각해서 하는 거라면 무조건 말릴 것이다. 흘끗 눈을 흘기자, 니뮤에가 침착히 고개를 흔든다. “절대로 구슬리지도, 종용하지도 않았어요.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말씀드렸으며, 선택은 마르 님이 하셨습니다.” “아빠. 저 전부 들었어요. 그래도 하고 싶어요.”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마르는 얼른 덧붙였다. 나는 잠깐 침묵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알면서도 하겠다는 거니?” “네!” 이제는 숫제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한 번 막힌 말문은 쉽사리 트이지 않았다. 왜? 어째서? 라는 말이 목젖까지 차올랐으나 계속 맴돌기만 한다. 그 기색을 느낀 걸까.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마르는 정원을 발로 살짝 긁었다. “저요. 계속 생각해왔어요.” “생각?” “네. 저도, 저도 이제 아빠한테….” “…….” 그리고 스리슬쩍 눈치를 살피더니, “아빠한테, 도움이 되고 싶어요.” 한층 힘을 준 목소리로 말을 맺는다. 그러니까, 내게 도움이 되고 싶으니 각성을 하겠다고. “마르야. 그건 말이다.” 물론 장하고 기특한 생각이기는 하다. 게다가 성공한다면 즉시 전력으로 도약할 가능성도 굉장히 높다. 이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무어라 말하고 싶었다. 무언가 아니라고, 정확히는 짚을 수는 없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 “그건 조금….” 그러한 찰나, 갑자기 먼빛으로 클랜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고연주는 어딘가 씁쓰레한 기색이 느껴지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고 있다. 그녀뿐만 아니라, 거의 전원이 비슷한 반응이다. 그러자 문득, 클랜원들이 왜 저렇게 물러나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저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마르만큼은 참가하게 하고 싶지가 않다는…. 그래도 결국 물러난 것은. “…안 돼요?” 시무룩해 하는 음성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 …그래도 물러난 건, 마르의 결심이 그만큼 확실히 섰기 때문이리라. 화정이 그랬다. 요정 여왕이 하려는 행동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마르는 각성을 하고 싶어 한다.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지 않았는가. 이것 하나만 해도 내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복잡하던 머릿속이 말끔히 정리됐다. “좋아.” 허락해주자 마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존중할게.” “아빠!” “그래도 무섭기는 하지?” “…조금요.” 마르는 어슴푸레하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꼭 구해줄 테니까.” 조금 창피하기는 했으나 이 말만큼은 꼭 하고 싶었다. 마르는 몸을 배배 꼬면서도 수줍게 미소 지었고, 그 다음 순간, 누가 말하는지도 모를 격려의 말이 시끄럽게 터졌다. 힘내라는, 꼭 성공하라는 등 상투적인 말이 주를 이루었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응원이었다. 그렇게 마르를 향하는 환호 속에서, 니뮤에는 글썽거리면서도 맑고 하얀 미소를 짓는다. “수현 님, 아니 씨.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너무 감사하시는 것 같은데요. 부담스러울 정도입니다.” “행복해서요. 어제 이야기하면서 느꼈지만, 마르 님이 그동안 얼마나 좋은 분들한테 아낌을 받으셨는지 알 것 같아서….” “…….” 결국 참지 못했는지 니뮤에는 살며시 눈시울을 붉혔다. 나름 감동적인 광경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약간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평소 얼마나 여왕을 생각하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총할 요정이 이 정도라면 일반 요정은 과연 어느 정도일지 궁금해졌다. 물론 호기심은 나중으로 미뤄두고. “각성에는 얼마나 시간이 필요합니까?”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길지는 않아요. 가장 빠른 분은 관을 쓰자마자, 가장 늦었던 분도 오 분 이상은 걸리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마르 님은.” “장담할 수 없다는 거군요.” “…네.” 그럼 아마 사용자가 장비의 주인 의식을 치르는 것과 비슷하리라 생각되는데. 아무튼, 좋다. 환호가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나는 마르와 눈을 한 번 맞춘 후, 천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클랜원들이 있는 곳까지 물러섰을 때는 어느새 사방이 조용해져 있었다. 이윽고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 니뮤에는, 어제처럼 두 손으로 가시나무 관을 고이 받쳐 들었다. 그러고도 한동안 숨을 고르다가,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내딛는다. 오직 마르만을 바라보는 두 눈동자는 조용히 떨리면서도 한없이 비장하다. 흡사 이날만을 위해 살아왔다는 듯, 몹시 정숙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내려앉는다. 갑작스러운 정적. 햇살이 드리운 정원에는 사박사박, 풀을 밟는 소리만이 난다. 서서히 치솟는 모종의 감정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눈에 힘이 들어간다. 돌연 시야가 흔들려, 마력을 한껏 높였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 전 감각을 한계까지 끌어올리자, 주변 상황이 더욱 확실하게 느껴진다. 마르는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반듯이 서 있다. 니뮤에는 눈에 띌 정도로 떨면서 꾸준히 전진한다. 별것 없는 일이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투 상황도, 누군가 죽어가는 상황도 아니다. 그냥 가시나무 관을 쓰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도 주변에서는 무거운 긴장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더는 못 보겠다는 듯 고개 돌리는 임한나.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짓씹고 있는 진수현. 양손을 맞잡고서 기도하는 안솔. 여기 모인 전원이 각자의 방식으로 마르를 생각한다. 이윽고 느닷없이 마르와 눈이 맞았다. 그리고 마르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그 미소와 마주하자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흡사 처음 마르를 봤을 때 느꼈던 기분이 전신을 엄습한다. 그 순간이었다. 사르르르…. 문득,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동시에 약간의 거리를 남겨둔 채, 니뮤에의 걸음도 멈췄다. 그리고 두 팔을 하늘로 느릿하게 뻗더니, 그대로, 손을 놓았다. “……!” 순간적으로 소리 없는 탄성이 터졌다. 분명 가벼운 바람이었다. 머리카락을 살짝 스칠만한 한 줄기 미풍에 불과했다. 그래, 그러할진대. “말도 안 돼….” 떨어지기는커녕, 가시나무 관이 바람에 몸을 실어 부드러이 날아간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지만, 확실히 마르를 향해 훨훨 날고 있다. 맑고 조용한 어느 날의 아침. 팔백 년간 바라왔던 요정의 염원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별안간 가시나무 관이 빙그르르 회전하며 활공을 멈춘다. 멈춘 지점 아래에는 정확히 마르가 서 있다. 이윽고 춤을 추듯 서너 번 빙글빙글 돌더니, 회전하는 그대로 하강을 시작한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리고 잠시 후. 일 초가 십 초처럼 느껴지는 시간 흐름 속에서, 가시나무 관은, 가벼운 깃털과도 같이, 사뿐히 안착했다. ============================ 작품 후기 ============================ 사월 연재 주기를 보니 확실히 제가 못났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오월은 좀 더 성실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0871 / 0933 ---------------------------------------------- Battle Of The East Continent, Four. 바람이 차서 그런지 창문에 서리가 잔뜩 꼈다. 하필 이럴 때 찬바람이…. 라고 원망하는 마음을 가져봐도, 자연 현상이니 어쩔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도 가슴 한 켠의 걱정은 가시지 않아, 결국 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가고 만다. 한밤중의 바람은 상당히 차갑다. 게다가 몹시 날카롭기까지 해 얇고 느슨한 가운을 사정없이 침투해 들어온다. 뭐 ‘소망의 셔츠’를 걸친 이상, 딱 알맞게 시원하다고 느끼지만 말이다. 셔츠 자락을 살짝 움키며 탁 트인 시야를 바라본다. 깊은 밤의 정원은 짙푸른 달빛으로 물들어 있다. 건물도, 나무도, 수로도, 풀도 한없이 고요하기만 하다. 천연 한껏 숨을 죽인 채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모두 조용히 주시하고만 있는 느낌이다. 그런 정원의 한가운데에는, “…….” 가시 돋친 넝쿨 수백 개가 둥글게 뭉쳐 있다. 얽히고설킨 넝쿨은 무언가를 보호하려는 듯 겹겹이 에워싼 채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크기 또한 어마어마해, 높이만 봐도 물경 육 미터를 넘는다. 아마 저 정체 모를 물체의 중심부에 마르가 있을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저런 건 아니었다. 처음 가시나무 관을 썼을 때는, 갑자기 튀어나온 넝쿨이 마르를 휘감아 매우 놀랐다. 그러나 곧 각성의 한 과정이라 이해했고, 그때부터 내내 기다리는 중이다. 하루하루 오늘은, 오늘은 하며 얼른 끝나기를 노심초사 기다렸으나, 이레가 지났음에도 소식이 없다. 그러는 동안 넝쿨은 서서히 몸을 키워, 어느새 정원의 중앙을 차지할 정도로 불거진 상태였다. “언제 끝날는지….” 멍하니 보고만 있으려니 속이 갑갑하다. 걱정 말고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제 3의 눈으로 봐도 어떤 정보도 출력되지 않고, 그냥 이렇게 가만히 기다리기만 한다. 결국, 쓸쓸히 방으로 돌아가려는 즈음, 문득 어슴푸레한 형체가 눈에 밟혔다. 누군가 넝쿨 앞에 꿇어앉은 채 양손을 꼭 맞잡고 있다. 시야 한구석에 비치는 요요한 반사광에 나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조용히 기도를 올리는 여인은 바로 니뮤에였다. 소환한 당시, 클랜원들은 니뮤에를 썩 좋은 눈으로 보지는 않았다. 아마 허준영이 했던 말이 그럴듯하다 여겼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마르의 각성이 시작된 이후, 니뮤에가 한 시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극 정성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자, 적의는 어느 순간 동정으로 변했다. 아직 호의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안쓰럽게 여기는 클랜원이 몇 명 있는 듯하다. “흠, 흠!” 그때였다. 한창 니뮤에를 보는 동안, 등 뒤서 갑자기 어색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마르 생각에 정신이 팔린 사이 누군가 몰래 들어온 듯싶다. 이 늦은 시간에 누가 예의 없게…. 무심코 언짢은 눈으로 몸을 돌아보자, 테라스 문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있는 비비앙이 보였다. “역시, 아직 잠들지 않았나.” “비비앙?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의아히 묻자, 비비앙은 훗 건방지게 웃더니 느긋이 테라스로 걸어 나왔다. 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다. 마침 잠도 안 오고 심심했는데 얘나 좀 가지고 놀아야겠다. “뭐…. 네가 이러고 있을 거라는 걸 예상했다고나 할까?” “아, 그렇구나.” 나는 납득했다는 뜻으로 끄덕인 후, 그대로 비비앙을 지나쳤다. 그리고 이제 슬슬 자야겠다고 중얼거리며 방으로 돌아가 침대로 몸을 누였다. “…저, 저기?” 반응은, 생각보다 늦게 돌아왔다. “김수현?” “…왜? 아, 응. 괜찮아.” “응? 뭐, 뭐가 괜찮아?” “바람 쐬러 온 거지? 꽤 쌀쌀하지만, 경치가 좋으니 즐길만할 거야.”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적당히 쐬고 돌아가라. 나는 이만 잘 거니까 절대로 깨우지 말고. 아주 깨우기만 해봐.” 위협하듯 말을 끝내고 곧장 이불을 덮었다. “야, 야아~. 나 왔잖아. 장난치지 말고 일어나. 우리 얘기 좀 하자. 응?” “…….” “자려고? 진짜 잘 거야?” “…….” 침묵하고, 못 들은 척한다. 이 상황이 매우 어이없는지 기막혀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무시하며 눈을 감았다. 자자, 자자…. 그리하여,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약 오 분 동안 끊임없이 나를 부르짖던 비비앙이 갑작스레 조용해졌다. 그 대신, 한동안 씩씩대는 분해하는 숨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그 소리마저 끊겼다. 잠시 후. “흐아아앙….” 결국에는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어엉, 어어어엉….” 흘끗 눈을 흘기자, 비비앙은 테라스 난간에 쭈그려 기댄 채 목놓아 울고 있었다. 양 무릎을 꼭 붙인 채, 뺨에 줄줄 흐르는 눈물이 몹시 서럽다. 그래, 울어라 울어. 흐르는 강물처럼 울어라, 비비앙이여. “이 나브 노므아아…. 빠리 다래저어….” 낄낄대는 걸 들었는지 비비앙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웅얼거렸다. 엉엉 울며 몸을 일으키더니, 흡사 엄마 찾는 아이처럼 어정어정 걸어와 침대에 쓰러지듯 엎어진다. 순간 매몰차게 밀치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고 품으로 끌어들였다. 너무 불쌍하잖아. “나브, 나브 노옴….” “그래, 그래.” “너 저아 그어는 거 아이야아….” “미안, 미안해. 그러니 너도 다음부터 그렇게 건방 떨며 말하면 안 된다? 알았지?” 귀에 속삭이며 등을 토닥거려주자, 비비앙은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울음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훌쩍훌쩍 흐느끼는 소리를 반주 삼아, 나는 웅크린 비비앙을 꼭 끌어안았다. 조금 미안한 마음은 있지만, 그래도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덕분에 우울한 기분이 한결 나아졌으니까. * 스슥, 스슥…. 살살 귀를 긁는 거슬리는 소음에 절로 정신이 들었다. 방 안이 어슴푸레한 걸 보니 어느새 까무룩 잠들어버린 듯싶다. 아마 비비앙이 잠꼬대하는 거라 생각해 끌어안으려 했다. 그러나 손에 걸리는 감촉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의미 없이 허공을 휘저을 뿐. 찡그리며 눈에 힘을 주니 가물가물한 시야로 비비앙이 보였다. 문제는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침대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다. 하기야 잠버릇이 험할 수는 있다만,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스스로 저기까지 갔는데, 저렇게 반듯하고 예쁘게 누워 있을 수가 있나? 그것도 이불까지 곱게 덮고서. 그 순간, 은빛 광채가 번뜩였다.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무언가가 흔들거리고 있다. 누군가 있다. 그 사실을 인지한 찰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반사적으로 마력을 한껏 뿜으며 안력도 최대로 높였다. 어두운 방 내부가 일시에 환해졌다. 그 순간이었다. “누.” “…으응?” 초점이 완전히 돌아온 순간 눈앞의 것이 갸우뚱 기울어졌다. 동시에 나도 모르게 멍한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투명한 눈망울이 바로 앞에서 나를 물끄럼말끄럼 바라보고 있다.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어딘가 낯설지 않은 얼굴. 왜인지 잘 숙성된 향기로운 브랜디 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조금 뜬금없기는 하지만, 문득 토끼가 떠올랐다. 그냥 토끼가 아니라, 바니 복장을 걸친 야한 토끼. 나와 마주하는 눈동자는 분명 맑고 순수하나, 잔잔한 호수처럼 가라앉은 것이 충분히 무르익은 느낌이다. 언뜻 순결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색스러운 야한 기운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머리를 휘휘 흔들고 다시 쳐다보자, 그제야 확실히 눈에 들어왔다. 이제 갓 고등학생, 아니 발육 좋은 중학생 정도 되려나? 얼굴 곳곳에 애티가 있어 앳돼 보이건만, 분위기는 단아하고 정숙한 대갓집 규수와 흡사하다. 갸름하고 부드러운 턱선은 아직 덜 여문 것 같아 보이지만, 소복이 부푼 불룩한 가슴께에 흘러넘치는 은빛 머릿결은 화려하고 우아한 품격을 자아낸다. 그래, 그러니까…. “아빠.” 그때, 처음 보는 여인이 살포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니, 아빠라고 불렀다. “저 때문에 깨셨네요.” 소녀 같지만, 예의 바르고 고상한 아가씨 말투. “죄송해요. 곤히 주무시는 건 봤지만, 각성하는 동안 너무 외로워서요. 아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담담히 이어지는 나긋나긋한 음성을 들은 순간, “…음.” 우선은, 소리부터 지르기로 했다. * 아직 새벽 찬 기운이 가시지는 않았지만, 여느 날처럼 맑고 조용한 아침이었다. “으아아아아악!” 그러나 성의 일 층은, “히이이이이익?” 오늘따라 굉장히 시끄럽고 어수선하다. 아직 식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클랜원 전원이 광장에 모여 있었다. 무려 단 한 명도 빠지지 않았다. 이렇게 모두 모이는 건 꽤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그럴만한 이유는 있었다. 각성이 끝났다. 그러니까, 마르가 돌아왔다. 한데 클랜원들은 그 사실을 대체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내심 이해는 간다. 우선 외양이 아주, 매우 달라졌거니와(예전의 마르는 정말 잘 쳐줘야 초등학생 일 학년 정도였다.), 나조차도 새벽녘에 봤을 때 한참을 믿지 못했으니까. 갓난아기 때부터 키우고 돌봐왔으니, 이 폭풍 성장을 어색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지. “세상에…. 정말, 정말 마르 맞니? 엄마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네. 그럼요. 연주 언니잖아요.” “이야, 이거 놀라울 정도로 엄청나게 변했네.” “저도 조금 어색하기는 해요. 후후. …아, 오늘 새벽에 침대 끝으로 옮겨놓은 건 사과 드릴게요. 순간 질투가 나서요.” “하하. 그럼 이제 마르 여왕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하나요?” “아이, 놀리시면 싫어요.” 그래. 이 정도 반응은 일반적이라고 치고. “안 돼애애! 돌려줘! 순수하고 귀여운 마르를 돌려줘어어어!” 안현의 절규는 조금은 이해가 갈 듯 말 듯했고, “헉헉, 여고생 만세! 여고생 다이스키!” 두 팔 벌려 외치는 진수현이라는 미친놈도 있었다. “형님! 앞으로 장인어른으로 모셔도 될, 컥!” 이성을 잃고 폭주하는 진수현을 걷어차 준 찰나, 안현이 눈물 맺힌 얼굴로 다가왔다. “형, 정말 마르 맞아요? 아니죠? 혹시 마르의 탈을 쓴…!” “…적당히 좀 해라. 그리고 정원 보면 되잖아.” 안현은 어떻게든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현재 겹겹이 둘러싸여 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은 마르가 틀림없다. 반신반의하며 데리고 나오면서 확인한 결과, 정원을 점령하던 넝쿨 덩이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있었으니까. 단 하룻밤 새에 송두리째 사라졌다. 아마 마르 정수리에 고이 얹혀진 가시나무 관으로 돌아간 게 아닐까 싶다. “아무튼, 몸은 괜찮아진 건가요?” 아차, 그러고 보니 마르의 상태를 확인하는 걸 잊고 있었나. 워낙 놀라고 있다 보니 미처 볼 생각도 못 했다. “네, 재룡 아저씨. 일단은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아요.” “일단은, 이라고요?” “네. 무질서하던 본의 흡수와 통제는 완전하게 이루어냈어요. 하지만 각성이 끝나는 동시에, 그동안 제 불완전한 몸의 구성을 맞춰주던 하늘의 기적도 같이 사라져서….” “그, 그런가요?” 마르는 두 손을 왼쪽 무릎에 얌전히 얹은 채,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다. 새로이 탄생한 여왕을 보며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 작품 후기 ============================ 마르 각성도 거진 끝냈고, 아마 다음 회부터 시작할 듯싶네요. :) 0872 / 0933 ---------------------------------------------- Battle Of The East Continent, Four. < 거주민 정보(Native Status) > 1. 이름(Name) : 마르 달란트 비트라이스 2. 클래스(Class) : 하늘 여황(Heaven's Empress) 3. 소속 국가(Nation) : -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S Zero) 5. 진명 • 국적 : 가시나무 관의 주인 • 요정의 숲 6. 성별(Sex) : 여성(2) 7. 신장 • 체중 : 160.4cm • 42.6kg 8. 성향 : 질서 • 중용(Lawful • Moderation) [근력 78] [내구 85] [민첩 92] [체력 90] [마력 102] [행운 100] * 역대 최고의 마력 재능과 요정 여왕의 혈통을 이어받고, 금기, 기적, 그리고 두 번의 각성까지. 이 모든 현상이 어우러져, 역사상 최초로 탄생한 후천성 신격 존재입니다. * 가시나무 관의 인정을 받았습니다.(2차 각성 완료.) * 전대 여왕 마르가리타의 본(本)을 완전히 흡수했습니다. * 신체 능력은 물론, 정신적인 측면도 폭발적으로 상승했습니다. * 억압돼 있던 언어와 지혜의 신 ‘가네샤의 축복’이 정상으로 기능합니다. 축복의 영향으로 전 능력이 더 높은 수준으로 승화합니다. * 요정의 성장 속도는 선천적으로 매우 느리지만, 진정한 ‘하늘 여황’으로서의 성장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 업적(0) > < 고유 능력(1/1) > 1. 가네샤의 축복(Rank : EX) < 특수 능력(1/1) > 1. 참된 이치를 밝히는 진리의 눈(Rank : B Zero) * ‘가네샤의 축복’에 의해 ‘진리를 꿰뚫는 요정의 눈’이 진화한 능력입니다. 근원에 기반을 두는 ‘꺼지지 않는 지혜의 빛’도, 그리고 ‘하늘을 굽어보는 마음의 눈’도 하늘의 섭리에는 거스를 수 없습니다. 통상적인 범주를 벗어난 비상식 개념인 ‘제 3의 눈’을 제외하면, 사실상 가장 드높은 ‘눈’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 잠재 능력(3/3) > 1. 신격(神格) - 루미너스의 절대자(Absolutes Of Luminous)(Rank : B Plus) 2. 일체화(一體化)(Rank : EX) 3. 하늘의 문(Heaven’s Gate)(Rank : EX) < 최근 능력치 비교 > 1. 전 : [근력 21] [내구 27] [민첩 43] [체력 41] [마력 100] [행운 100](Total : 332 Point) 2. 후 : [근력 78] [내구 85] [민첩 92] [체력 90] [마력 102] [행운 100](Total : 547 Point) < 능력치 비교 > 1. 김수현 [근력 99(+2)] [내구 95(+2)] [민첩 101] [체력 101(+2)] [마력 96] [행운 90(+2)] (잔여 능력치는 0포인트입니다.) Total : 582 Point 2. 마르 [근력 78] [내구 85] [민첩 92] [체력 90] [마력 102] [행운 100] (잔여 능력치는 0포인트입니다.) Total : 547 Point - 제 3의 눈은 과거 현재 미래는 물론, 실체와 현상까지 모조리 통찰해버리지. 이건 설령 자연의 섭리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거든. ‘응?’ - 네가 현재 저 아이의 정보를 읽을 수 있는 이유라고. 즉 꽤 괜찮은 눈인 건 맞지만, 어쨌든 제 3의 눈보다는 격이 좀 떨어진다는 거지. ‘…….’ 화정의 말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탄식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가 바람 빠지듯 새어 나온다. “허….” 허공에 출력된 메시지를 읽는 내내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특히 능력 부문을 읽을 때는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아무리 전대 여왕의 모든 걸 흡수했다고는 하나, 정말 마르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아무튼, 하늘 여황이라. 역사상 첫 출현이라는 말이 헛된 건 아닌지, 메시지 하나하나가 생소하게 느껴진다. 싸우면 질 것 같지는 않으나, 결코 쉬운 상대라고도 할 수 없다. 뭐, 애초에 서로 맞설 일도 없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계획의 완성을 앞두고, 강력한 전력이 가세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상하다. ‘왜 기쁘지가 않지…?’ 외양이 정말 많이 변하기는 했다. 그러나 약간 어색할 뿐 크게 개의치는 않는다. 겉모습이 어떻든 마르는 마르니까. 단지 이것과는 별개로, 기껍다기보다는 외려 기분이 복잡하다. 왜인지는 나도 정확히 모르겠다. 만약 마르가 일면식도 없는 사용자였다면 과연 기분이 이랬을까? “수현? 수현!” 아차. 어느새 고연주가 가까이와 있었다. “예, 예.” “왜 그래요. 혼자 멍하니 있고. 아무튼, 우리 오랜만에 축제 안 할래요?” “축제요?” “네.” “갑자기 웬 축제…?” “어머. 갑자기라뇨. 마르 들으면 섭섭하겠다.” 그러자 마르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나를 쳐다봤으나 고연주가 얼른 손을 들었다. “당연히 마르의 무사 각성을 축하하는 축제죠. 사실 요즈음 축하할 거리도 별로 없었잖아요?” 빠르게 말을 끝내자, 쑥스러운지 어쩔 줄 몰라 하며 난처한 웃음만 짓는다. 그런 마르를 나는 물끄러미 응시했다. ‘정말 이걸로 좋은 걸까…?’ * 그날 밤, 성에서는 성대한 축제가 열렸다. 사방이 탁 트인 경치 좋은 정원을 무대로 한 터라, 분위기는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정말 오랜만에 열리는 축제인 터라, 누구도 사양하지 않고 흥겹게 먹고 마신다. 물론 오늘 축제의 주인공은 마르였다. 클랜원들은 대부분 간소한 선물을 들고 찾아가 축하 인사를 건넸는데, 일부 그렇지 않은 이도 몇 명 있었다. 숫제 마르 옆자리를 차지해 끈질기게 치근거리기도 했다. 예를 들면 덤이라거나, 혹은 더머라거나. 탁. “마르도 이제 슬슬 히로인으로써 자각을 해야 해.” 잔을 내려놓은 진수현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히로인…. 이요?” “아, 마르는 처음 듣는 말인가? 여주인공이라는 뜻이야.” “여주인공…?” “그렇지. 왜냐면 마르는 형님, 아니 아빠를 좋아하잖아?” 김수현 이야기가 나오자 마르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건 맞아요.” “후후.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그리고 더 자세히 말해달라는 태도를 보이자, 진수현은 우쭐해 하며 무게를 잡는다.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닌데, 어여쁜 소녀가 관심을 보이니 좋아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진수현? 애한테 쓸데없는 말 좀 하지 마.” “아니요. 절대 쓸데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흥미로운걸요.” 그 기색을 눈치챈 정하연이 짐짓 엄한 목소리로 경고했으나, 마르는 예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편까지 들어주니 마냥 좋은지 한층 득의양양이 말을 잇는다. “중요한 건 포지션. 우선 포지션을 제대로 잡는 거다!” “포지션?” “그래. 예를 들어 왠지 첫 여인일 것 같은 느낌이지만, 쟁쟁한 경쟁자들한테 밀려 어느 순간 잊히는 포지션은 조금 슬프지 않을까?” “!” 그 순간, 혀를 쯧쯧 차고 있던 정하연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나 진수현은 계속, 신 나게 말을 떠벌렸다. 누군가의 가슴에 비수를 박은 것도 모르는 채로. “뭐 이런 캐릭터도 있지. 누가 봐도 섹시하고 음란한, 거기다 능력까지 좋은 누님 포지션. 이건 나름 꽤 잘 먹히기도 한다고?” “흐응.” 어디선가 보고 있던, 흥미로운 얼굴을 한 고연주가 비음을 흘리며 술잔을 기울인다. 그리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쌍하기도 해. 실제로는 아무리 들이대도 남주인공이 눈치를 못 채게 돼 있거든. 결국에는 겉절이, 즉 한계가 있는 포지션이라는 소리지.” 푸우, 머금었던 액체를 조용히 분사했다. “반대로 이것도 있어. 상냥하고 온화한 엄마 같은 부드러운 포지션. 한 마디로 폭신한 베개라고나 할까?” “와. 참 멋지게 들리는데, 왜 하필 베개인가요?” “아이고, 멋지기는. 머리에 괴든 얼굴로 비비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경쟁력이 있을 것 같아? 이 포지션도 절대로 피해야 해.” “…….” 그러자 근처에서 즐겁게 음식을 만들고 있던 베개…. 아니 임한나의 손이 우뚝 정지했다. 좀 전까지 사분사분 미소 짓던 얼굴이, 왜인지 한순간 정색한다. 잠시 후. “하하! 그러니까…. 으, 응?” 진수현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세 여인이 주변을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었다. “…누님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어리둥절해 하는 진수현을 꼬옥 붙잡고, 질질 끌며 어디론가 사라진다. 목청껏 소리 질러도 들리지 않을, 몹시 어둡고 으슥한 곳으로….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세 여인에 이끌린 진수현이 어둠 속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 마르는 ‘갑자기 무슨 일이지?’ 라는 얼굴로 갸우뚱거렸다. 동시에 이제껏 눈치만 보던 안현이 한껏 반색하며 말을 붙이려는 찰나, “마르!” 쾅! 불현듯 세찬 소음이 정원을 울렸다. “응?” “뭐, 뭐지?” 워낙 큰 소리가 그런지 흥겹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는다. 클랜원들이 웅성거리며 돌아본 곳에는, 정문이 활짝 개방돼 있었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그리고 잠시 후, 정문으로부터 황급한 걸음걸이를 보이는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전원 신관 복장을 걸치고 있었는데, 땀으로 흠뻑 젖은 것이 급하게 왔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뭐야? 너희 누구야?” ‘외팔이’ 김동석이 앞으로 나서자, 불청객들의 걸음도 서서히 멎는다. “머셔너리 로드 계십니까?” “아니. 누구시냐고요.” 걸걸하게 받아치는 어조에는 숨길 수 없는 짜증이 묻어 있다. 하기야 한창 즐거울 때 방해받았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말투가 험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신전에서 왔습니다. 혹시.” “아니 신전이고 나발이고, 이게 뭔 짓이야? 지금 상황 안 보여? 앙?”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굉장히 급한 일입니다.” “아아. 알았어. 잘 전해드릴 테니까, 이만 가봐. 분위기 더 망치지 말고.” 흡사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젓는다. 그러나 신전에서 왔다는 사내들은 걸음을 돌리지 않았다. 그저 당혹한 얼굴로 우물쭈물할 뿐. 계속 서 있기만 하자, 김동석의 낯도 와짝 일그러졌다. “이 싸람들이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그때였다. “그만.” 낮고 차가운 음성이 둘 사이로 흘렀다. 김동석의 눈이 돌아간 곳에는, 한 사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마침 모습을 확인했는지 신관의 안색이 확 밝아진다. “머, 머셔너리 로드!” “예.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신관은 동아줄을 발견한 사람처럼 황급히 다가가, 무언가 빠르게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귀 기울여 듣던 김수현의 낯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천상?” “예, 예. 그러니까….” 전령을 전달은 금세 끝났다. 아직 감을 잡지는 못했는지 한 차례 갸웃했지만, 이윽고 김수현은 주변을 돌아보며 외쳤다. “잠시 급한 일이 생긴 것 같네요. 아무튼,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니요.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축제는 계속 즐기시길. 그럼….” “…….” 클랜 로드가 가겠다는데 더 붙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김수현의 신분을 알고 있는 이들은 내심 무언가 사건이 터졌으리라 직감하고도 있었다. 결국, 김수현은 신관들의 안내를 받으며 빠른 걸음으로 정문을 나섰다. “허 참.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뭐 큰일은 아니겠지요. 일단은 즐깁시다.” 고개를 끄덕인 클랜원들은 김수현이 당부한 대로 다시 축제를 즐기기 시작했다. 음식을 집어 먹거나, 술잔을 부딪치며 껄껄 웃는다. 잠시 어수선하기는 했지만, 분위기는 다시금 서서히 흥겨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들은 과연 알고 있었을까. 바로 이 순간이, 머셔너리가 즐기는 최후의 축제라는 사실을. 0873 / 0933 ---------------------------------------------- Battle Of The East Continent, Four. 전달받은 내용은 간단했다. 천사가 나를 불렀단다. 호출이야 수십, 수백 번을 받아봤으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머셔너리 로드로서가 아닌 북 대륙의 수호자로서 나를 소환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떨칠 수 없었다. 왜 이 늦은 시간에 무조건 빨리 오라는 계시를 내렸을까? 그리고 왜 소환의 방이 아닌 천상이라는 독립 공간으로 오라는 걸까? 심지어 모든 천사가 모여 있다는데. 여러 가정이 뇌리를 스쳤으나 확실한 건 없다. 그저 귀찮은 일이 일어났구나 직감할 뿐. 그냥 성가신 일만 아니기를 바라며 바삐 걸음을 놀렸다. 그러나. 불현듯 심상찮다고 느낀 건, “사용자 김수현.” 소환의 방으로 입장했을 때였다. “오셨습니까….” 언제나처럼 고요하고 편안한 음성도 아니었고, 제단에 앉아 있는 것도 아니다. 세라프는 처음 보는, 빛이 흐르는 포탈 옆에 선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를 바라보는 두 눈동자가 심히 흔들리고 있다. “수, 수현….” 긴히 말하고 싶은 게 있는지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한다. 평소와는 확실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태도다. 게다가 낯빛에 그늘진 초조함은 어느 때보다 뚜렷해, 나조차도 까닭 없이 조마조마해질 정도였다. 그러자,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 있던 예감이 차츰차츰 고개를 치킨다. 무언가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졌다는, 그런 느낌. “수현….” 좀 전부터 부르는 목소리는 한없이 애처롭기만 하다. 왜인지 간곡히 부탁하는 어조처럼 느꼈다면 내 착각일까. …모르겠다. 아마 들어가 보면 알 수 있을 터. “저 포탈로 들어가면 돼?” 물결치는 포탈을 가리키자, 세라프가 흠칫 턱을 젖혔다. 왜 놀라는 거지? “천상에서 기다리고 있다며.” “네? 아, 네.” “그럼 어서 들어가야겠네. 아, 너도 오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약간 늦게 반응한 세라프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가슴 속 불안감이 한층 불거졌지만, 일단 마음을 단단히 다잡기로 하고, 나는 천천히 포탈에 몸을 묻었다. 잠시 후. 시야 전체를 물들였던 빛이 사그라지며 천천히 시력이 회복된다. 이윽고 완전히 달라진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지면은 여전히 잿빛 일색이었으나, 우선 너비부터가 굉장히 넓어졌다. 흡사 천장 없는 소환의 방 확장판을 보는 듯하다. “…응?” 이어서 느낀 건, 사방팔방에서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시선이었다. 가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천사가 허공에 줄지어 떠 있는 광경은, 거의 장관에 가까울 정도로 압권이다. 이곳이 바로 천상이라는 독립 공간인가. “어서 와. 사용자 김수현. 아니, 북 대륙의 수호자.” 그때였다. 조금 놀라는 사이, 듣기 좋은 미성이, 그러나 외려 속이 거북해지는 음성이 귓전을 울린다. 흘끗 천장을 올려다보자, 한 무리의 천사가 천천히 내려오는 중이었다. 굳이 자세히 보지 않아도 가브리엘을 위시한 사 대 천사임을 알 수 있었다. 하강이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급한 일이 있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이지?” “…….” “말해봐. 설마 또 서 대륙 일인가?” “…….” 왜 이러지? 왜 이러는 거지? 숨이 막힐 듯한 무거운 정적이 이어진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 물었는데, 왜 한 명도 입을 열지 않는 거지. 대관절 어떤 일이 일어났길래. 세라프를 봤을 때도 느꼈지만, 가브리엘의 태도도 상당히 어색하다. 장난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가브리엘은 예의 히죽거리는 미소는커녕, 딱딱히 굳은 얼음처럼 차갑고 냉랭한 얼굴이었으니. 한편으로는, 굉장히 분노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때 문득, 주변 상황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두 입을 닫고 있는 만큼, 이 천상이라는 공간은 을씨년스러울 만큼 적막하다. 그러할진대, 어째서 술렁술렁한 기운이 느껴지는 걸까.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수선한 흐름이 은근히 감지된다. “…아니. 아니야.” 한 번 더 물어보려는 찰나, 가브리엘이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후우우우….” 그리고 지면이 꺼질 듯이 한숨을 쉬더니, 자세를 바로 하며 말을 잇는다. “이번에는 남 대륙 일이야.” “남 대륙?” “그래. …아니, 일단 보고 얘기하자. 그래, 그게 낫겠다.” “……?” 딱! 손을 튕기는 소리가 들리고, 눈앞으로 반투명한 스크린이 생성됐다. 미처 의문을 꺼내기도 전, 직사각형의 은막(銀幕)은 불선명한 영상을 재생하기 시작한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흰 신전을 둘러싼 어마어마한 인파. 그리고 한 소녀가 흰색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오는 장면이었다. 소녀의 행색은 초라하다. 눈부신 반사광이 흐르는 금발은 어지러이 헝클어져 있고, 액체가 덕지덕지 묻은 더러운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특히 금색 눈동자는 왜인지 공허해…. 어? 잠깐만, 낯설지 않은 얼굴이다. 금발, 금색 눈동자, 그리고 흰 천으로 싼 대검. 이 사용자는…? 그 순간이었다. “에ㄹ…?” 순간 엘도라, 라고 말할 뻔한걸,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돌연 빤한 시선이 느껴져 일부러 영상에 몰두했다. 아니.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된 지 영문은 모르겠지만, 영상 속의 여인은 엘도라가 분명하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남 대륙의 수호자이며 오딘의 클랜 로드인데. 그나저나 이 사용자가 왜…? 의문을 가진 찰나, 불현듯 정체 모를 거뭇한 그림자가 영상 내 드리워졌다. 그리고 잠시 후, 누군가가 엘도라의 뒤에서 스리슬쩍 모습을 드러내, 옆에서 나란히 걷는다. 얘는 또 누군가 싶어 얼굴을 확인한 순간, “!” 시야가 와짝 찌그러졌다. 한순간, 머릿속이 멍해진다. “무….” 지금…. 내가…. “…슨?” …잘못 보고 있는 건가? “옆에서 걷는 놈은…. 뭐, 보면 알겠지만 악마야.” “가, 가브리엘?” “진명은 루시퍼. 이명은 타락 천사로, 칠 대 악마 중 한 놈이지. 상당한 거물이기도 하고.” “아, 아니. 아니, 잠깐만.” 안다. 저놈이 루시퍼인 건 당연히 알고 있다. 모를 리가 없고, 모를 수가 없다. 문제는, 왜 저놈이 엘도라 옆에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홀 플레인에 버젓이 돌아다니는데.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가 떠봐도, 영상의 장면은 변하지 않는다. 그때였다. - 여러분. 영상 속 엘도라의 걸음이 멈췄다. -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파츳! 그 말을 끝으로, 영상은 뚝 끊겼다. 스크린은 삽시간에 노이즈로 가득 찼다. 온몸이 텅, 빈 것 같은 기분. 치직치직, 잡신호만 흘리는 영상을 나는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오늘로부터 여드레 전의 일이야.” 망연한 와중, 가브리엘의 음성이 꿈결처럼 흐른다. 이어지는 설명은 간단했지만, 지독한 장난이라 생각될 만큼 믿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남 대륙이, 악마의 손으로 넘어간 것 같단다. 남 대륙 사용자들이 악마와 손을 잡고, 천사에게 반란을 일으켰단다. 설명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이해하는 데만 해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어지럽다. 혼란스럽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장난….”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목구멍 끝까지 치솟았을 뿐, 차마 쏟아내지는 못했다. 이 자리가, 저 태도가. 그리고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장난이 아니라는 방증이니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겨우, 간신히 받아들였을 때는, 호흡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시야도, 손도 그랬다. 내가 느끼는 전 감각이 흔들리고 있다. 단지, 충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화자찬은 아니지만, 여태껏 잘 끊어왔다고 생각했다. 미리 알고 노린 것도 있었고, 아니면 운이 좋은 경우도 있었다. 여하튼 결과적으로 악마의 계획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분쇄했다. 그럴 가능성은 적다고 여겼지만, 어쩌면 악마가 제로 코드를 포기할지도 모른다고 기대할 정도로. 그런데, 그런데. 끝에 와서, 웬 개 같은 변수가 생겼다는 말인가. “…그래서.” 하지만 참았다. 아니, 참아야만 한다. 어떻게 된 건지,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남 대륙 놈들이 바보도 아니고, 저렇게 넘어갔다는 것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래도 어쨌든 일은 터졌고, 이제 와서 탓해봤자 무의미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남 대륙으로 가줬으면 좋겠어.” 가브리엘은 낯짝 하나 변하지 않고 뇌까렸고, 순간 이성이 날아갈 뻔한 걸 가까스로 붙잡았다. 젠장, 왜 아까부터 시야가 어그러지는 거지? “남 대륙은…. 왜…?” 이를 악물며 물었으나 가브리엘은 침묵했다.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악마가 나왔으니 쓸어버리라는 소리겠지. 물론, 남 대륙도 같이. 후…. 진정, 우선 진정하자. 일단은 정보가 필요하다. “현재, 남 대륙의 상황은 어떻지?” “…몰라.” “몰라?” “사건 발생 직후, 남 대륙과의 연결이 모조리 차단됐어. 아까 영상도 겨우 입수한 거야.” …제기랄, 참아야 하는데.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꼭 폭발 직전의 화산을 삼킨 듯한 기분이다. 저 담담한 낯짝을 당장에라도 짓뭉개버리고 싶다. “어쩔 수 없잖아.” “뭐라고?” “물론 당한 건 뼈아프지만…. 어쩌면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좋은, 기회?” 이게 지금 쳐 할 말인가. 아니면 뚫린 입이라고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건가. “아, 그러네. 좋은 기회네.” “…김수현?”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너희도 홀 플레인으로 나오는 게 어때? 응? 악마도 나왔는데.” “…….” 홧김에 한 말이었다. 절대로 나오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대응이기도 했다. 사용자의 입장에서. “그게 무슨 말이지?” 가브리엘이 눈을 치뜨며 묻는다. “못 들어먹은 척하지 말고. 악마가 나왔으니까 너희도 나오라고. 그럼 되잖아?” 상대를 뚫어지라 응시한다. 그러나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왜 말이 없어? 너희가 나와서 남 대륙으로 가면 되겠네. 천사가 악마를 막는 사이, 우리 인간은 신 대륙으로 진군한다. 이게 가장 합리적인 대응이 아닌가?” “…….” “아, 싫으면 서로 바꿀 수도 있고. 어때?” “…….” 주변을 둘러보며 묻는다. 그러나 반응은 거의 비슷했다. 살그머니 눈을 내리뜨거나,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 친다. “…하.” 이 개 좆 같은 반응에, 절로 탄식이 샜다. “하하. 차마 그렇게는 못하시겠다. 막지도 못하고 싸지르기만 해놓고. 그리고 우리보고 치우라. 하하하하.” “인간. 적당히 좀 하지 그래?” 기막혀 웃어 젖히자, 우리엘이 싸늘히 경고한다.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지만, 설마 비꼬는 건가?” “응. 잘 아네.” 그 순간, “무어라?” “비꼬는 거 맞는다고. 이 개 병신 같은 년아.” 애써 이어오던 무언가가, “이놈이 감히!” 툭, 끊어졌다. “감히는 씨발!” 나도 모르게 발을 세차게 구른다. 쾅! 참고, 삭이고, 억누르고, 짓눌렀던 울분이 단숨에 폭발했다. 한 번 더 마력을 담아 짓밟자, 지면이 파도처럼 거세게 요동친다. 말하는 게 가관을 넘어섰다. 원래 이런 새끼들인 줄 알고는 있었지만, 도저히 이성을 유지할 수가 없다. 실로 눈이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너흰, 너흰 대체 뭐냐?” 울컥 터진 고함이 공간을 왕왕 울린다. “악마 새끼들도 나와서 저러는데, 너희는 왜 못 나오겠다는 건데! 도대체 왜!” 0874 / 0933 ---------------------------------------------- Battle Of The East Continent, Four. 하아, 하아…. 목청껏 소리 질러서일까. 어느새 호흡은 급격히 거칠어져 있었다. 어찌어찌 숨은 추스를 수 있어도, 속은 전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한 번 터져서인지 머릿속은 묘하게 차가워졌다. 뜨거운데, 차갑다. 들끓는 목으로, 한층 낮게 말했다. “누가 말이라도 해보라고….” 그러나 여전히,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한참 후. “우리와 악마의 입장은 달라.” 앞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와, 흘끗 눈을 들었다. “악마가 이렇게까지 나오는 건, 그럴 수가 있기 때문이야. 반대로, 우리가 나가지 못하는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고.” 가브리엘의 목소리는 한결같다. 처음 나를 맞이했을 때부터 시종일관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글쎄…. 어떨까. 우리 속사정을 밝힌다고 해도, 과연 네가 이해해줄 수 있을까?” 결국에는 말해줄 수도, 알 필요도 없다는 소리였다. 설령 정말 어쩔 수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더라도, 이 지독한 현실은, 그리고 사용자의 입장은 변하지 않는다. 가브리엘은 그 점을 찔러 말하고 있었다. 그때 불현듯 한 천사와 눈이 마주쳤다. 세라프는 서서히 눈매를 늘어뜨리더니, 이내 일그러진 눈을 감는다. 입을 꼭 깨문 채로. “흐으으으….” 끓는 신음을 흘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손바닥에 얼굴을 식히면서 한참 동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후으으으…. 후우우우….” “…아무래도 더 이야기하기는 힘들 것 같네.” “…….”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 좋아. 우리도 좀 더 정보를 모을 테니까, 그때 다시 호출할게.” 완곡한 축객령. 확실히 더 이야기할 상태가 아니기는 했다. 이해하고 받아들였으나,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기실 아무 천사나 붙잡고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스스로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에는 몸을 돌렸다. 이윽고 돌아가기 직전, 일렁이는 포탈을 앞에 두고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앞을 쳐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하나는 알겠네.” “……?” “왜 남 대륙이 악마와 손을 잡았는지, 그거 하나는 알겠다.” “…….” * 정신없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두 가지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하나는 날이 아직 어둡다는 것이고, 하나는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는 것이다. 서늘한 바람을 맞자 조금은 이성이 돌아오는 기분이다. 머셔너리 캐슬로 돌아갈까 하다가, 북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축제를 즐길 때도 아니었거니와, 더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나는 해밀 클랜 하우스로 향했다. 사실 상당히 늦은 시간이기는 했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방문하자, 해밀 클랜원들은 몹시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동생이 형을 만나겠다는데 굳이 막을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렇게 형이 있다는 숙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응? 누구….” 침대에 누운 채 돌아보는 형이 보였다. 다행히 아직 잠들기 전인 듯싶다. “어. 수, 수현아?” 그런데 나를 보자마자, 헤 웃고 있던 형의 얼굴이 순식간에 당황으로 물들었다. 심지어 입가에는 침방울마저 뚝뚝 떨어지고 있다. “형.” 단지 불렀을 뿐인데, 후다닥 몸을 일으키며 스리슬쩍 손을 숨긴다. 흘끗 시선을 던지자, 손가락 틈으로 푸른빛이 은은히 새어 나오고 있다. 저건 아마 수정구 같은데. 기록 수정이라도 보고 있었던 건가? 굳이 숨길 이유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아니지, 잘 왔어. 자자, 앉아.”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형이 권하는 대로 순순히 앉았다. 형은 잠시 침대 아래로 몸을 숙이더니, 금세 내 쪽으로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천연덕스레 눈을 뜬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응?” “아니. 얼굴빛이 안 좋아 보여서.” “…그래?” 형은 역시 내 상태를 귀신같이 알아챈다. “말해봐. 그것 때문에 찾아온 거잖아?” 부드러이 달래는 듯한 음성. 그 목소리에 힘입어 나는 가브리엘에게 들었던 사건을 차분히 털어놨다. 사용자들의 반란부터 시작해서, 우리보고 남 대륙으로 가줬으면 한다는 것까지. 진지한 얼굴로 경청하는 형을 보니 가슴이 차차 안정된다. “흠…. 남 대륙이 악마와 손을 잡았다고.” 이윽고 이야기를 끝냈을 즈음, 뜻밖에도 형의 반응은 담담했다. 물론 살짝 놀란 빛을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나처럼 심하지도 않고, 금세 낯빛을 회복했다. “허 참. 근래 좀 잠잠하다 싶더니, 기어코 남 대륙에….” “별로 놀라지 않네?” 그러자 형은 기나긴 숨을 흘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포기했으면야 좋았겠지만, 어떻게든 수작을 부릴 것 같았거든. …뭐, 설마 남 대륙이 넘어갈 줄은 몰랐지만.” “마찬가지야. 도대체….” “그런데, 너는?” “응? 나?” “그 얘기 듣고 너는 어떻게 했느냐고. 아까 보니 문을 박차고 나온 것 같기는 한데.” “…그럼 잘못한 거야?” 설마 몰래 지켜보고 있었나? 속이 뜨끔해 묻자, 형은 손등에 턱을 괴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 잘했어.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은 상황인데,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으니까.” 어찌 보면 가장 형다운 말이었다. 형은 절대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여유로워 보이지만, 아마 머리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잘 찾아왔다. 감정에 이끌리기보다는, 이렇게 한숨 돌리는 게 훨씬 낫지.” 한편으로는 저럴 수 있다는 게 부럽기도 했다. 일 회차도 이 회차도, 형은 어떤 위기에서도 냉정했고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형은 어떻게 생각하는데?” “일단 생각해봐야 할 것 같은데. 물론 너도 그렇고.” “…모르겠어.” “당연한 거야. 아무튼, 너무 걱정하지 말고 서로 생각 좀 정리해보자고. …아, 그리고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려무나.” “자고 가라고?” “그래 이 녀석아. 너희 클랜 지금 한창 축제 중일 거 아니냐.” 나는 멍하니 형을 바라봤다. 오늘 축제는 형한테 알리지 않았는데, 이제는 꺼림칙한 기분마저 느낄 정도였다. 정말로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건가? 무섭다. “그런데 네가 씩씩거리면서 돌아가면 분명 파투 나겠지. 상황이 상황이다만, 그래도 오늘은 놀게 놔둬. 왜냐면 앞으로는….” 형은 약간 씁쓸해하며 입맛을 다셨다. 어쨌든 듣고 보니 옳은 말 같아 머리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미 사건은 벌어졌고, 남 대륙이라면 바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리기도 하니. 우선 한숨 잔 후, 냉정을 찾는 게 좋겠다. 대응책을 마련하는 건 그 후에 해야 한다. “배고프지는 않고?” “아니. 밥맛도 없네.” “그래. 그럼 내 방 비워줄 테니까 푹 자. 그리고 내일 아침에 다시 얘기하자.” “…응.” 형은 피식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수현아.”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무언가 잊은 게 있다는 듯 나를 돌아봤다. “침대 아래는 절대로 보면 안 된다. 알겠지?” …뭐가 있길래? *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김유현은 실로 오랜만에 동생 앞에서 제대로 된 형 노릇을 할 수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일단 기다려보자는 등의 말로 다독였고, 아침까지 든든히 먹여 보냈다. 그렇게 동생을 보내고 나서, 점심 즈음 옷을 단단히 차려입고 외출했다. 주문을 점검하고 두꺼운 코트를 걸친 것이, 흡사 전투라도 치르러 가는 모양새다. 걸음은 신전을 향하고 있었지만. 잠시 후. “오랜만이야. 뇌제.” 김유현은 소환의 방에서 가브리엘과 맞닥뜨렸다. 담당 도우미는 아니고, 따로 자리를 마련해달라 부탁했다. 물론 천사의 수장이니만큼 요청한다고 무조건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게 두 번째 만남인가?” “아마도. 수호자 사건 때 처음 만났지.” 그러나 김유현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김수현의 형이라는 점에서. “그러네. 네 덕분에 김수현을 수호자로 세울 수 있었지…. 아무튼, 오늘은 무슨 일로 보자고 한 거야?” “너는 예상하고 있을 것 같은데.” “음~. 귀여운 동생이 홀랑 찾아가 하소연했나?” “응. 그러더라. 화장실에 도착해서 변기를 열었는데, 누가 똥을 싸놨나 봐. 그것도 아주 질펀하게 말이지.” 가브리엘이 웃는 낯으로 비아냥거리자, 김유현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빈정거렸다. 가브리엘은 혀를 찼다. “칫. 할 말은 없네.” “탓하려고 보자고 한 건 아니니까.” “김수현은? 화 많이 났니?” “응. 당분간은 호출하지 않는 게 좋을걸.”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서로 편안하게 이야기 나누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김유현은 목적이 있어 보자고 했고, 그걸 알고 있는 가브리엘은 한창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헤에. 그 정도로….” “좋은 기회라 생각하라고 했다면서? 아마 그 말에 폭발한 것 같던데.” “아이. 오해야, 오해.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 순간 가브리엘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그전에 확실히 짚고 넘어갈 게 있는데. 남 대륙은 악마와 손을 잡은 건가? 잠식된 게 아니라?” “응.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아니. 맞아.” “그런가…. 그럼 정말로 좋은 기회일 수도 있겠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한 번 더 긍정하자, 가브리엘이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서 대륙처럼 잠식이 아닌, 공존을 선택했다…. 얼마나 시간을 들였는지는 몰라도, 남 대륙 인간들이 그렇게 멍청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아서.” “후후. 다 알고 있네. 그것도 들은 거야?” “글쎄. 아무튼, 성공했다는 점에서 손뼉 쳐줄 수는 있지만, 경과나 사후 처리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즉 꽤 억지로 밀어붙인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재밌네. 더 자세하게 말해봐.” “그냥 역지사지로 생각해봤을 뿐. 나라면 절대로 그렇게 급하게 진행하지는 않았을 것 같거든.” “호오.” “물론 그쪽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면…. 뭐, 장고 끝에 악수를 둘 수밖에 없었던 심정도 이해는 해.” “후후. 뇌제, 혹시 그거 알아?” 가브리엘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기분 좋게 웃는다. “수호자 자리가 공석일 때 있잖아. 원래 김수현이 아니라, 네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어. 우리 내부에서 말이야.” “왜. 나를 통해서 수현이를 조종하려고?” 너스레를 떨자, 고개 젖힌 가브리엘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그 찰나의 순간, 김유현의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실은, 예전에 수현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거든.” “응? 무슨 말?” “이 홀 플레인이 마음에 든다고. 아직 고민하고는 있지만, 계속 살 생각도 약간은 생긴 것 같더라고.” “…그래?” 뚝, 웃음이 멎었다. 사실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가브리엘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김유현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그러나 어느 순간 냉랭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둘 사이로 흐르던 공기 온도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그것참 괜찮은 생각.” “거기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가브리엘의 말을 끊고, 김유현이 말을 잇는다. “여기서 계속 살 거라면, 굳이 제로 코드가 필요할까?” 제로 코드라는 말이 나오자, 가브리엘의 낯이 딱딱히 경직됐다. 김수현에게 들었다고 생각할 수는 있으나, 반사적인 반응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아, 물론 있으면 좋기야 하겠지. 그런데, 어쨌든 나나 수현이나 썩 부족한 상황은 아니라서…. 그게 꼭 필요한 처지는 아니거든?” “너.” “그러니 굳이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이대로 평화롭게 사는 게 나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안 그래?” “…….” 무언가 말하려던 가브리엘은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두 눈은 어느새 한껏 가늘어져 상대를 노려보고 있다. 그 날카로운 눈초리를 받으며 김유현은 빙긋 미소 지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뭘 말하고 싶은 거지?” 서슬 퍼런 엄포에도 불구하고, 김유현은 느긋이 팔을 움직였다. 남성치고는 가늘고 긴 손가락이 턱밑에 살짝 닿는다. 잠시 후. “남 대륙이 악마와 손을 잡았다…. 그래. 좋아.” 김유현은 깊이 생각하는 체하며 턱을 어루만지더니, “그런데 말이야.” 갑자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우리도 악마와 손을 잡으면…. 어떻게 될까?” ============================ 작품 후기 ============================ 어제 내용을 절단으로 생각하셨다면 Song9(?) 합니다. 예전에 절단을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독자 분들의 심기를 상하게 했으니 면목이 없네요. 사실 개인적으로는 절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아마 제가 생각하는 절단과 독자 분들이 생각하는 절단의 초점이 조금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절단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으니, 부디 느긋하게 즐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_(__)_ 0875 / 0933 ---------------------------------------------- Battle Of The East Continent, Four. 악마와 마족이 세상에 출현했을 때, 가장 쉽게 처리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나오자마자’ 혹은 ‘소환되자마자’ 처리하는 것이다. 중간 세상에서는 ‘인과율’이라는 법칙에 의해 이(異) 차원의 힘이 상당 부분 제한된다. 그리고 갓 소환된 당시에는, 놈들의 힘이 극도로 미약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놈들이 그때 그런 선택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회고록 中』 * 눈을 뜨니 따사로운 햇살이 나른한 몸을 두드렸다. 해는 벌써 중천에 올라 방 안 곳곳에 햇빛이 스며 있다. 형의 말대로, 일단 젖혀두고 잘 먹고 잘 자는 데 주력해서 그런가. 이틀이 지나니 속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기분이다. 어쨌든 오늘 늦잠을 잔 건 부인할 수 없지만. 침대에서 걸어 나와 찌뿌듯한 몸을 풀었다. 바깥 공기를 들이마시자 머리가 한결 상쾌해진다. 그래. 확실히 괜찮아진 듯싶다. 이 정도면 다시 천사와 대면해도 저번처럼 날뛰지 않을 것 같다. 그럼 우선 세안을 마치고 가볍게 식사부터 해볼까? 쿵쿵쿵쿵, 쿵쿵쿵쿵! 라고 생각하자마자 문밖 복도가 시끄러워졌다. 아침 댓바람…. 은 아니어도 또 누가, 어떤 문제를 일으킨 걸까. 이제는 아예 걱정부터 앞선다. 들어보니 한 명도 아닌 것 같은데. 쾅! 잠시 후, 문이 뻥 터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예상대로 침입한 동물은 두 명. 씩씩대는 암컷 하나, 그리고 분노에 몸을 떠는 수컷 하나. 이유정과 진수현이다. “오빠!” “형님!” 귀가 따가워지려는 찰나, 황급히 검지로 둘을 가리켰다. 그래도 눈치는 있는지 바로 합! 동시에 입을 닫는다. “쉿.” 신호를 보내고 나서 가까이 오라 까닥까닥 손짓했다. 둘은 서로 한 번 번갈아 보더니 조용히 끄덕끄덕. 이어서 조용조용 걸어오기 시작했다. 좋아. 그럼 이제…. “오빠아아!” “형니이임!” …아무래도 좀 얕본 듯싶다. 학습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어. “오빠 이 새끼 존나 욕심쟁이야! 이거 내가 받은 건데…!” “뭐가 욕심쟁이냐? 나도 같이 임무 수행했잖아! 그리고 일은 내가 훨씬…!” “어쩌라고? 어쨌든 내가 받은 건데? 나한테 준건데?” “와. B급 주제에 개기는 것 좀 보소. 나 A급으로 오른 거 모르나 봐?” 그러고 보니 둘은 각자 손으로 옷같이 생긴 걸 움키고 있었다. 아마 저 장비를 두고 싸움이 난 듯싶다. 우선 이마까지 맞대며 으르렁대는 둘을 떼어놓은 후, 문제가 되는 물건을 압수했다. 언뜻 보니 가죽으로 된 상당히 멋들어진 경장 갑옷이다. “흠….” 아닌 게 아니라, 한눈에 봐도 성능이 좋으리라는 걸 직감했다. 표면에 은은히 흐르는 붉은빛은, 추가 효과가 하나 이상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제 3의 눈으로 확인한 결과, 역시 내 생각이 맞음을 알 수 있었다. “썩 괜찮은데?” 물리 방어력이나 마법 저항력도 상당한 수준이고, 마법으로 유연성을 높여 활동성도 한층 높였다. 그리고 외양이 괜찮은 것도 한 몫 했을 터. “이것 때문에 싸우는 거야?” “응! 그러니까 오빠가 정해줘. 이거 내가 가져야 하지? 맞지?” “에이~. 아니죠. 형님. 저죠? 그렇죠?” “글쎄…. 그나저나 이거 어디서 얻었어? 최근 원정 보고는 받은 적 없고, 임무 수행 보상은 웬만하면 대금으로 받기로 돼 있잖아?” 그때였다. “어….” “에….” 좀 전까지만 해도 침까지 튀기며 말하더니, 갑자기 방 안이 적막해졌다. 어느새 합죽이가 된 둘은 꺼림칙한 표정을 짓더니 서로 눈치만 살핀다. 잠시만. 설마…. “너희.” “아, 아니야! 오빠! 우리 로비 같은 거 안 받았어!” 이유정이 펄쩍 뛰었다. “그럼 왜.” “타, 탐낸 건 맞아요. 그쪽에서 눈치챘을 수도 있겠죠.” “야 인마.” “하, 하지만 그뿐이에요! 실제로 우리 아니었으면 원정도 성공 못 했을 거고, 대금도 따로 받지 않았으니까요. 즉 추가 보상 개념이라고요.” “정말로? 다은이한테 확인해봐도 돼?” “에이, 형님! 설마 우리가 와이로를 받았겠습니까? 억울합니다!” 진수현은 가슴을 탕탕 치며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만일 문제 생기면 알아서 해.” 결국에는 엄포를 놓은 후, 입맛을 다시며 물건을 집어 들었다. 둘은 후유 숨을 내쉬더니 이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나를 바라봤다. 부담스럽다. 사실 두 명 중 누가 입어도 어울리는 물건이기는 하다. “이건….” 잠깐 고민하기는 했지만, 이내 결정할 수 있었다. “유정이가 입으면 좋겠다.” 그 순간 나는 아주 극명하게 갈리는 두 개의 반응을 볼 수 있었다. 이유정은 굉장히 사랑스러운 소녀와도 같은 표정을 지었고, 진수현은…. 차마 말로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다. 꼭 살면서 쓴맛만 보고 살아온 사람이 인생의 황혼기로 접어드는 듯한…. “꺄하하하! 꺄하하하!” 그리도 좋은 걸까. 이유정은 방방 뛰며 기뻐했다. 내 볼에 입을 맞추며 “오빠 사랑해.” 라고 속삭인다. 이윽고 주섬주섬 장비를 챙기더니 콧대를 척 세우며 여유롭게 걸어나갔다. 누구 들으라는 듯한 코웃음은 덤이려나. “흑….” 진수현은 가관도 아니었다. 시무룩한 걸 넘어 숫제 울먹거리기까지 하고 있다. 입이 삐죽하니 솟은 게 한바탕 눈물이라도 쏟을 듯한 모양새였다. “형님은 맨날 여자만 편애하고….” 나 참. 애도 아니고. 나는 피식피식 웃으며 서랍을 열었다. 안 그래도 계속 처박아두기 그랬는데 진수현한테 주면 딱 맞겠다. “옜다. 받아라.” 펄럭! 손을 던지자, 펄럭이며 날아간 도복과 허리띠가 정확히 바로 앞에 떨어졌다. 진수현은 힘없이 머리를 떨궜다가, 돌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가 준 게 뭔지 바로 알아본 듯싶다. “혀, 형님….” “왜.” “이건…. 형님이 소식적에….” “소싯적은 무슨. 나 아직 젊다. 아무튼, 가져가. 나는 더 좋은 게 있고, 어차피 너 줄까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때 진수현이 갑자기 넙죽 엎드렸다. “형님! 방금 제 실언을 용서해주십시오! 이 우둔한 놈이 형님의 깊은 뜻도 모르고….” 평소 감정적인 놈인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슬슬 귀찮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됐다. 곧 긴히 쓰일 일이 있을 테니….” “예?” “아니, 아니야. 이만 나가도 좋아. 그리고 너무 자랑하지는….” “야아아아! 이유정! 봤어? 봤지! 으하하하!” 우당탕탕, 쿵쾅! 진수현은 괴성을 지르며 달려나갔다. * 어스름한 오후. 나는 테라스에 서서 먼빛의 도시를 내려다봤다. 서서히 땅거미가 깔려서 그런지 곳곳에 불빛이 흐르고 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소란스럽더니 밤이 다가오자 겨우 잠잠해지고 있다. 한참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자, 나도 모르는 사이 도시의 풍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리고 문득 느꼈다. 서서히, 끝이 다가오고 있다고. 천사의 호출은 아직이다. 사실 처음 불렸을 때는 상의 차 만나려 했던 감도 없잖아 있었다. 물론 남 대륙으로 갈 수는 있겠지만, 형의 말대로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함부로 움직이는 건 악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좀 더 정보를 모아본다고 했으니 기다려보면 알 수 있을 터. 악마가 남 대륙으로 타깃을 변경했고, 계획은 성공했다. 확실히 예상외의 일이기는 하다. 천사가 잘 막아줬으면 하는 아쉬움은 아직도 남아 있다. 입맛이 쓰지 않으면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이제 와서 탓하고 후회해봤자 뭐하나. 한편으로는 ‘아, 완전히 망했어.’ 고 울상을 지을 필요도 없다. 분명 사탄의 수완은 놀랍지만, 하나씩 따져보면 왜 이 시기에, 왜 이런 초강수를 뒀는지 생각하게 된다. 아니. 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고? 급하니까.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자기들도 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테니까. 우리 북부는 구 대륙부터 신 대륙까지 착실하게 힘을 쌓았다. 내전은커녕 춘추 전국 시대를 뛰어넘었고, 비밀 도서관을 개방해 성과 흡수를 앞당기기까지 했다. 이와 반대로, 악마는 계속해서 세력이 깎여오지 않았는가. 악마 14 군주는 물론, 바알마저 목숨 하나를 잃었다. 몇 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흐름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말인즉, 이것만 막아내면 악마는 완전히 끝난다. 이리저리 휘둘리고 내전으로 점철된 일 회차 때도, 끝내 이긴 건 인간이었다. 거기다 현재 이 회차는, 일 회차와는 비할 수 없을 만큼 좋은 상황이다. 물론 이렇다고 100% 이길 거라고 자신하지는 않는다. 과거 인간이 벼랑 끝에서 역전을 이뤄냈던 만큼, 방심은 절대로 금물이다. 악마의 발악은 분명히 무서울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최후의 몸부림마저도 가뿐히 짓밟을 수 있을 정도로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전쟁은, 이미 시작된 것과 다름없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고연주.” “네.” 방 안에는, 어둠 속에서 다소곳이 무릎 꿇고 있는 여인이 보였다. ‘검은 그늘’을 사용하고 있는지 형체가 그늘에 가려 희미하다. “대표 클랜을 위주로 소문을 흘려주십시오.” “소문이요?” “네. 곧 남 대륙을 상대로 전쟁할지도 모른다는….” “……!” 불현듯 고연주의 모습이 선명해졌다가, 노이즈를 보이며 어렴풋해졌다. 그림자가 심히 진동하는 게, 아마 상당히 동요한 듯싶다. “확실하나요?” “확실합니다.” “아, 설마 축제 때 갔던 게….” “예. 한데 아직 정보가 부족합니다. 천사 쪽에서 노력하고 있다지만, 함부로 노출할 상황은 아니에요. 그러니 제 신분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만 전하되….” 나는 적당히 말을 흐렸다. 굳이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었을 테니까. 한두 번 해본 일도 아니고. 고연주는 이해했다는 듯 주억이더니 스르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도로 앞을 바라봤다. “…….” 그런데, 고연주의 기척이 사라지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이번 일과 관련된 건 아니지만요.” 흡사 말해도 돼요? 허락을 구하는 것 같은 어조에 머리를 끄덕였다. “뭡니까?” “이제 결단을 내리셔야 할 때도 되지 않았나요?” “결단?” “네. 상대는 몹~시 기다리고 있는 것 같던데 말이죠.” 말이 너무 포괄적이다. 다시 몸을 돌렸으나 방에는 누구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웅덩이처럼 괸 그림자만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을 뿐. 잠시 후. “이대로 계속 외면하신다면…. 그래서 결국 늦어버리면….” 아무도 없는 방에서 나른한 음성이 울린다. “후회하실지도 몰라요?” 후훗, 웃는 소리를 끝으로 기척은 귀신같이 사라졌다. ============================ 작품 후기 ============================ 으아, 부끄러워 죽겠네요. 아니 독자님들. 제가 오늘 글을 적다가 갑자기 몸이 좀 뻐근했거든요. 그래서 두 팔 쭉 올리고 있는 힘껏 기지개를 켜는데, 진짜 엄청 시원했지요. 거의 쾌감이 느껴질 정도? 그래서 기분이 좋아서, 켜는 도중에 좀 이상한 소리를 냈습니다. 아니 그리 이상한 소리도 아니에요. 그냥 비명에 가까운 신음? 그런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형이 들어와서 하는 소리가 가관입니다. 밤중에 웬 야생의 곰 새끼가 포효하는 줄 알았다네요. 그리고 조용히 좀 하래요. 옆집 보기 창피하다고. 괜히 쪽팔려서 등짝이라도 때리려고 쫓아갔는데, 지그시 쳐다보길래 무서워서 그냥 돌아왔습니다. 아니 내 방에서 기지개도 못 켭니까. 좀 서러운 밤이네요. ㅜ.ㅠ 0876 / 0933 ---------------------------------------------- Battle Of The East Continent, Four. 이른 아침의 성은 조용하고 차가웠다. 동이 튼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아직 새벽 서리가 가시지 않은 탓이다. 게다가 정원은 안개로 뽀얗게 가려져 있어 으슥한 기운마저 감돌고 있다. 며칠 전 가시나무 관 덕분에 진화(?)한 마르는 성내 회랑을 사뿐사뿐 걷고 있었다. 아니. 숫제 뛰는 걸음으로 걷는 것이, 더 이상 아장거리는 아기가 아닌, 어여쁜 소녀라 봐도 무방할 듯싶다. 그런 마르의 얼굴빛은 흡사 갓 피어난 꽃처럼 화색이 만연하다. 선물 포장을 하나씩 벗기는 아이처럼 잔뜩 기대하는 얼굴 하며,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걸을수록 걸음도 빨라진다. “아빠! 들어갈게요.”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한 마르는 노크도 않고 문을 열어젖혔다. 여왕이라면 응당 지녀야 할 기품과 거리가 먼 행동이나, 니뮤에는 그저 잔잔히 웃으며 뒤따를 뿐이었다. 마르가 이날을, 정확히는 아빠의 호출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마르는 금실로 장식된 붉은 카펫을 밝으며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음.” 양손을 꼭 모으며 말하니 앞쪽에서 담담히 수긍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김수현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단지 의자를 돌린 채 테라스 쪽을 보고 있어 앞모습이 보이지 않을 뿐. 마르가 고개를 갸웃하자, 김수현이 말문을 열었다. “들었다. 제대로 된 클랜원으로 활동하고 싶다고.” 김수현은 살짝 의자를 돌렸다. 팔을 뻗어 책상에 놓인 기록을 집고 소리 내 읽는다. “클랜원 등급 등록, 장비 반출 허가 요청, 호출석 마련 등등…. 너에 관해서 여러 요청 건이 올라와 있더구나.” 마르는 낯을 붉히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김수현은 아직 테라스 쪽으로 몸을 둔 터라, 어떤 얼굴인지 자세히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니뮤에는 암암리에 느꼈다. 상대의 말투나 태도가, 썩 탐탁잖아 하고 있다는 걸. “네…. 허락받고 싶어요.” “글쎄.” 마르가 간곡한 음성으로 말했으나 김수현의 반응은 모호하다. 기실 최근 마르의 입장이 애매해진 건 맞다. 원래는 보살펴야 할, 시쳇말로 ‘비전투 사용자’에서 순식간에 ‘전투 사용자’로 상승했다. 말인즉 햇수로 겨우 이 년을 넘은 아기라는 사실과, 각성을 통해 한 명의 어엿한 클랜원으로 성장했다는 사실 사이의 괴리였다. 어쨌든 한 번쯤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기는 하다. 단순히 탐험, 원정만 나가는 거라면 문젯거리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거대한 대륙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서, 김수현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고연주는 그 점을 꼬집어 말한 것이다. 이제껏 그래 왔던 것처럼 계속 보호할 것인가, 아니면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참가하게 할 것인가. 물론 마르 본인은 사용자로서의 활동을 원하고 있고, 그럴만한 힘도 충분히 있다. 아니. 차고 넘치는 수준이다. 그러나 어디에나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고, 그게 바로 김수현이라는 점이 가장 문제였다. “네 생각은 장하다만, 이 아비는 아직 이르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일러요?” 마르가 약간 늦게 반문한 순간, “니뮤에.” 김수현은 갑작스레 화살을 돌렸다. “현재 마르의 힘은 어느 정도 수준입니까?” 갑작스러운 질문. 왜인지 상대가 알면서 묻는다는 기분을 느꼈지만, 니뮤에는 성실하게 설명했다. “저는 전대 여왕님을 한 분, 그것도 짧은 기간밖에 모시지 못했으나…. 제가 겪었던 어느 요정들보다 강한 기운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가요.” 김수현은 간단히 끄덕이더니 재차 되묻는다. “그럼 경험 면에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니뮤에는 문득 알아차렸다. 김수현이 왜 탐탁잖아 하는지, 그리고 어느 부분을 걱정하는지 깨달은 것이다. 이윽고 안절부절못하는 마르를 보며 조용히 말을 잇는다. “그 점에 관해서는 저번 날개 이식 설명 때 말씀드렸습니다.” “날개에는 힘과 지식만이 아니라 경험까지 녹아 있다. 거기에는 전투 경험까지 포함한다. 이렇게 말씀하고 싶으신지요.” “…네. 물론 익숙해질 시간은 필요.” “그걸 못 믿겠다는 겁니다.” 부연하려는 찰나, 김수현은 니뮤에의 말을 단호히 끊었다. 동시에 마르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태어난 지 두 살밖에 안 된 애가, 사용자로 활동하겠다?” 마르는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영리하고 똑똑해, 왜 김수현이 저런 태도를 보이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있는 그대로만 보면, 머셔너리 클랜원들은 정예 중의 정예. 홀 플레인에서도 머셔너리는 소수 정예의 대명사로 불리는 클랜이다. 머셔너리 일반 클랜원이 타 클랜의 대 간부 이상이라는 우스갯소리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실적이 증명한다. 당장 굵직한 것만 봐도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 용이 잠든 산맥, 강철 산맥 2, 3, 4 지역, 야만 왕의 무덤, 빙하의 설원 등등. 김수현 휘하의 전투 사용자들은 산전수전, 공중전, 시가전을 헤치며 사선과 너나들이한 사용자들이다. 거기다 임무 수행으로 경험치를 꾸준히 쌓아왔고, 지금도 쌓고 있다. 이러할진대, 마르가 갑자기 이들과 동등한 선상에 놓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령 각성을 통해 강해졌다고 해도. 단, ‘증명’을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누구나 납득할 수 있도록 실력을 입증한다면 말이다. “그럼 어떡해야 믿어주실 건데요…?” 자못 서운함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였다. “증명해봐.” 순간 서늘한 기운이 집무실에 흘렀다. “증명…?” “그래. 정말 힘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지. 아니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에 불과한지.” 낮고 차가운 음성. 그러나 왜인지 폭풍전야의 느낌이 맴도는 말투였다. 한데, 뜻밖에도 마르의 얼굴은 태연하다. 오히려 다소곳이 선 채, 김수현의 기운을 예사롭게 받아넘기는 것이다. 이윽고 마르는, “네. 좋아요.” 그럼 좋다는 듯이 아주 간단하게 수락했다. “대신 납득하신다면, 꼭 허락해주시는 거예요?” “호오.” 탄성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가 터졌다. 김수현의 입장에서는 맹랑하다고 느낄 법도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세상의 먹이 사슬의 정점을 찍은 사내니까. 이윽고 의자가 빙그르르 돌더니 김수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그럼….” 그 순간, 마르와 니뮤에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 걸음을 물렸다. “그 반대의 경우도 납득하겠다는 거겠지?” 비로소 드러난 김수현의 얼굴은 소름 끼칠 만큼 무표정하다. 마르 앞에서는 언제나 따뜻한 미소를 보였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붉은빛을 뿌리며 뚫어지라 응시하는 두 눈은 일견 두렵기까지 하다. 허나, 두 요정이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친 건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선 보이는 건, 귀걸이와 허리춤에 걸린 네 자루의 검. 이어서 소망의 셔츠와 치우천왕의 갑옷, TOPG, 오벨로 기사 부츠, 붉은 달의 망토, 라실라시의 축복, 행운의 네 잎 클로버…. “아, 아빠….” 김수현은 그야말로 완전 무장을 하고 있었다. 시커먼 갑옷과 핏물을 연상케 하는 붉은 망토를 걸친 모습은 실로 무시무시하다. 거기다 은연중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군주여, 호령하여라.’ 의 기운은, 두 요정을 무섭게 압박한다. 최근 원정을 나간 적이 없는 만큼, 한층 어색하게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이게 바로….’ 간신히 진정한 니뮤에는 긴장한 눈으로 상대를 훑었다. ‘저 사내의 진정한 모습…?’ 불현듯 니뮤에의 뇌리로 각성 전의 마르와 나눴던 대화가 스쳤다. ‘아빠를 돕고 싶어요.’ ‘네. 아빠는 정말 좋은 분이세요.’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굉장히, 무서울 때가 있어서….’ ‘제가 느끼는 ‘거짓된 실체’에서, 아빠를 구해드리고 싶어요.’ * 한편. ‘남 대륙으로 가라고? 아니, 아니지. 아직은 갈 이유가 없지.’ “젠장.” 독립 공간 ‘천상’의 가장 드높은 곳에서는, 가브리엘이 신경질적으로 손을 놀리는 중이었다. 아마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머리에 꽃 꽂은 여인이 손을 마구 휘젓는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조금 순화하면, 허공을 키보드 삼아 피아노 치는 중이라고 볼 수 있을까? ‘우선, 너희는 정보부터 모으도록 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제기랄.” 그러는 동안, 고운 입에서는 험한 욕설이 연달아 튀어나온다. ‘거듭 말하지만, 정확한 정보부터 모아. 동, 서, 남 대륙 전부 포함해서.’ “빌어먹을.” 실제로 가브리엘은 눈썹을 한껏 치킨 채 험악한 인상을 쓰고 있었다. 두 눈에서 뿜는 살기는 활활 타오르다 못해, 끝이 보이지 않는 천상의 천장까지 뻗는다. 그 탓에 주변의 천사들까지 한 명도 예외 없이 어깨를 움츠리고 있다. ‘그전까지는 수현이 부를 생각 꿈에도 하지 말고. 어떻게 할지는 우리가 정할 테니까.’ “아아아아! 왜애애애애애!” 결국에는 가브리엘이 폭발했다. 양팔을 휙 떨쳤다가 그대로 힘차게 내리꽂는다. 무언가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일이라도 있는 걸까. 흡사 마음대로 되지 않자, 어린이가 생떼를 부리는 듯한 광경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후….”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가브리엘이 피로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한다. “왜 연결 복구가 안 되는 거지?” 힘없는 목소리였지만, 어느새 얼굴은 진지해졌다. 진심으로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 허공을 노려보고, 또 노려본다. “아무리 대 악마, 아니 설령 사탄이라도…. 이 정도로 광범위하게 간섭을 한다고?” 물론, 노려본다고 뾰족한 수가 생길 턱이 없다. “아 몰라.” 결국, 자조 어린 말을 뱉고서 공중에서 드러눕는다. 하아아아, 기나긴 숨이 연이어 흘러나온다. 그때였다. “저…. 가브리엘 님.” 망연한 얼굴을 한 가브리엘의 옆으로 한 천사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왜.” “긴히 보셔야 할 것이.” “뭔데.” “서 대륙의 현황입니다.” 그러자 가브리엘은 그건 또 무슨 소리냐며 휘둥그레 쳐다본다. “거기는 이미 점검했잖아? 예전에 조금 시끄럽다가, 최근에는 조용해졌다며?” “그게….” “그게?” “…….” 계속 우물쭈물하는 태도가 갑갑했는지, 가브리엘은 성을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사가 가져온 자료를 바로 확인한 순간, “…….” 가브리엘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까맣게 침잠했다. “이건…?” 이 의문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어떻게 된 거야?” 마침내 천사와 악마.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잖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전쟁이, 그 서막을 알렸다. ============================ 작품 후기 ============================ 독자 님들. 제가 오늘(5월 7일)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내일(5월 8일) 연재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가족 행사인데 아마 집에 몹시 늦게 들어올 것 같네요. 하루 건너고, 5월 9일(토요일)에 연재를 재개하겠사오니, 부디 너른 양해 부탁 드릴게요. _(__)_ 그리고…. 어제 저보고 웅녀라고 부르신 분들. 제가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s( ̄へ ̄ )z 3차 전쟁에서 뵙도록 해요. 후후.(?) 0877 / 0933 ---------------------------------------------- Battle Of The East Continent, Four. 정원은 조용하다. 아니. 일부러 이른 시간을 골랐으나 서너 명 인기척은 느껴졌다. 아마 아침 일찍 일어났다가 심상찮은 기운을 느끼고 밖으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구경하는 중인지 확인할 틈은 없다. 왜냐면 눈앞의 마르가 오롯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으니까. 상대가 내게 집중해주는 만큼, 나도 상대에게 집중한다. “…시작할게요.” 문득 들려오는 무겁게 침잠한 음성. 이어서 양팔을 아래로 늘어트리더니 조용히, 그러나 알아듣지 못할 주문을 영창 한다. 마르의 태도는 몹시 서글프다. 겉으로는 담담해 보여도 귀를 보면 알 수 있다. 평소처럼 꼿꼿하게 솟은 게 아닌, 아래로 축 늘어져 있으니. 물론 그 마음은 알고 있다. 어찌 모를 수 있으랴. 마르 입장에서는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이해 못 할 수도 있다. 단지 돕고 싶다 했을 뿐이며, 내심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나를 돕겠다는 말을, 내가 기쁘게 받아주는 모습을 말이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었다. …한데, 그랬다면 과연 괜찮았을까? 그때였다. 웅웅웅웅! 상념에 잠긴 동안, 시야에 흰빛으로 살며시 비추기 시작한다. 근원지는 마르의 바로 앞. 빛이 둥글게 엉기며 눈 부신 빛 덩이가 만들어지고, 탄생한 구체는 점점 크기를 키워간다. 이윽고 우웅, 작은 소음을 내며 위로 상승함과 동시, 마르의 팔도 같이 올라와 나를 겨냥한다. 구체에 살짝 닿은 손가락은, 방아쇠를 당길까 말까 고민하는 듯이 떨리고 있다. 십사 년을 통틀어 처음 보는 능력이건만, 사방으로 뿜는 기이한 진동은 섬뜩하리만치 폭발적인 기운을 품고 있었다. 잠시 후, 서운함을 듬뿍 드러내는 그렁그렁한 눈망울이 나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아마 왜 계속 가만히 있느냐는 거겠지. 당장에라도 눈물을 흘릴 듯한, 그러나 간신히 참고 있는 얼굴을 보니 그냥 속내를 시원하게 털어놓고 싶었다. 얼른 달려가 괜히 분위기 잡아서 미안하다고, 울지 말라고 쓰다듬어주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힘내라고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애초 진심으로 할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실력을 확인한다고 마르와 실전을 방불케 하는 전투로 시험을 친다? 누가 들어도 오버한다고 꼴같잖다며 웃을 것이다. 무엇보다 마르는 내 딸이거니와, 거주민 정보는 이미 제 3의 눈으로 확인한 상태였다. 단지, 증명해주기를 원했을 뿐이다. 이 증명은 강함의 척도를 가늠하자는 것도 아니고, 얼마나 힘을 능숙하게 사용하는지를 보자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마르 나름이겠지만, 내가 정말로 확인하고 싶은 건 오직 하나였다. “오지 않을 거냐.” “!” 말을 건 순간, 마르의 눈이 살짝 치떠졌다. 나는 숫제 팔짱을 끼며 가만히 기다리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도발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행동이었건만, 발끈한 기색은 찾아볼 수조차 없다. 외려 차분한 체하던 낯에 점차 갈등의 빛이 역력해진다. 그래, 혼란스럽겠지.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직 새벽 한기가 남아 있어서인지 날씨는 쌀쌀하기 그지없다. 한데, 숨 막힐 듯한 차가운 공기가 몇 번이나 스쳤음에도 공격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생각에 잠긴 걸까, 아니면 여전히 갈등하고 있는 걸까. 저럴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으나 마냥 기다릴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그냥 이대로 끝낼까도 싶었지만,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제대로 확인하는 게 좋겠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팔짱을 풀고 무검을 뽑았다. 이어서 있는 힘껏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횡으로 검을 휘둘렀다. 정확히는 힘만 잔뜩 줬을 뿐, 제자리에서 세게 휘둘렀을 뿐. 그리고, 그 효과는 확실했다. 썩둑! 공기가 잘리는 예리한 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란 마르가 뒷걸음질을 쳤다. 그와 동시에. 탕! 세찬 총성이 울렸다. 둥둥 떠 있기만 하던 구체가, 눈부신 광채를 폭사하며 순간적으로 짓쳐온다. 갑자기 행동하자 반사적으로 방출한 것이다. “아!” 뒤늦은 탄식이 터졌으나,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나는 곧장 양팔을 늘어트렸다. 회피는커녕, 마법 저항을 억제하기 위해 마력을 동결하고, 자세도 온몸에서 힘을 뺀다. 이렇게 일체의 방어를 포기한 채, 미끄러지듯 다가오는 구체의 정면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눈에 힘을 주며 마르의 반응을 확인했다. “아, 아빠!”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 그러나 시야는 순식간에 흰 빛무리로 물들었다. 그 찰나의 순간. “안…!” 나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단 일 초에 불과한 굉장히 짧은 순간에 불과했으나, 마르는 분명히 구체를 거두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정하고 달려든 만큼, 구체는 이미 가슴과 맞닥뜨리고 있었다. 빛살처럼 파고든 구체가 번쩍 폭발하니 시야가 멀 정도의 강렬한 빛이 작렬한다. 안 그래도 무방비 상태였던 터라, 몸은 아주 간단하게 기울어 허공을 날았다. …그러나. 정원을 데구루루 구르면서도, 나는 안도할 수 있었다. “아빠아아!” 왜냐면 몸이 멈추자마자, 황급히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으니까. 가볍게 상반신을 드니 걱정과 혼란이 반반씩 섞인 얼굴을 한 마르가 달려오고 있다. 나는 몸을 일으키며 빙긋 웃었다. “합격이다.” “왜! …네?” “울면 취소할 거야.” “히끅!” 그러자 울음을 터뜨리려 폼을 잡던 마르의 얼굴이 돌연 이상하게 이지러졌다. 나는 킥킥 웃으며 가슴을 쓰다듬었다. 약간의 충격은 느꼈지만, 뭐 이 정도쯤이야. 내 내구도 얕볼만한 수준은 아니거든. 전력을 담은 일격도 아니었고 말이지. 무엇보다 최후의 순간, 마르가 가까스로 기운을 거둬들였다. 극히 일부이기는 했지만. 말인즉, 내가 심하게 다치지 않을 거라는 것 정도는 마르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단지…. “힘은 완전히 거두지 못했지만, 그래도 어떻게 방향은 틀었네. 머리에서 가슴으로.” “네, 네?” “나와 구체가 부딪치기 직전에 말이다.” “그건….” 마르는 눈을 수차례 깜빡이며 우물쭈물하다가, 곧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면 됐다.” 굳이 ‘왜?’ 라고 묻지는 않았다.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니까. 하지만 아까부터 황당하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터라, 약간의 부연 설명은 필요하겠다. “…….” …그런데, 막상 말을 하려니 말문이 턱 막혔다. 원론적이거나 진부한 말은 하기 싫었다. 가령 ‘강한 힘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혹은 ‘진정한 사용자란 말이다.’ 등등. 한편으로는 낯부끄러운 기분도 없잖아 있었다. 내가 마르에게 원하는 건, 몇 년 전 애들한테 가르쳤던 것과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르야.” 그러나 이제 와서 웃고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라, 결국에는 말해주기로 했다. “내가 살아보니까 말이다.” “네.” “이 세상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더구나. 아무리 강한 힘을 지녔더라도 말이지.” “……?” 흠. 말하고 보니 이 말도 별로 새롭지는 않은 것 같은데. 아무튼, 나와 마르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한순간, 그것도 갑작스럽게 강해졌다는 것이다. 이 회차 초반, 나는 강해진 힘을 바탕으로 모든 일을 내 입맛대로 휘둘렀다. 그때는 스스로 맹목적으로 목적을 추구했고, 또 그게 옳은 줄 알았다. 허나 돌이켜보면, 그건 아마 남용이 아니었을까? 정말 심할 때는 상대를 보자마자 ‘죽여버릴까?’ 라고 생각한 적도 있으니 말 다한 셈이다. 부인할 생각은 없다. 나는 분명히 그렇게 생각될 만한 일을 했고, 후회한 적도 있다. 지금 이렇게 생각하는 것까지만 해도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 만큼 비록 내가 처했던 상황과는 다를지라도, 마르만큼은 내 그릇됐던 전철을 밟고 싶게 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늦었다손 쳐도, 마르는 갓 시작하는 처지이지 않은가. 물론 평소 마르의 행실을 생각하면 기우일 수도 있을 터. 하지만 각성 후, 제 3의 눈으로 확인했을 때 몰래 생각을 굳혔다. 왜냐면 마르의 성향 중 하나가, 나와 같은 중용이었기 때문이다. …뭐, 어쩌면 그것도 내 탓일지도. “저는…. 잘 모르겠어요….” 마르는 여전히 복잡 미묘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고, 나는 멋쩍게 웃고 말았다. 하기야 워낙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으니 당장 이해를 바라는 건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마르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찰나. “응?” 나와 마르의 눈이 동시에 돌아갔다. 정문이 있는 방향으로. 장내는 고요하기 그지없는데 문밖으로 수상한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잠시 후, 역시나 정문이 활짝 열리며 서너 명이 뛰어들어왔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저번 축제 때 봤던 신관들임을 알 수 있었다. “머셔너리 로드! 머셔너리 로드 계십니까!” …설마, 또 호출인가? * 소환의 방으로 입장한 순간, 나는 살짝 놀라고 말았다. 수호자 호출이라길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막상 들어가니 언제나와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천상으로 향하는 포탈은커녕, 사 대 천사도 보이지 않는다. “어서 오십시오. 수현.” 오직 세라프만이 언제나처럼 제단에 앉아 있을 뿐. 잠시만. 세라프가 언제부터 내 이름을 스스럼없이 부르게 된 거지? “어떻게 된 거야? 수호자 호출이라고 들었는데.” “예. 맞습니다.” “…가브리엘은?” “일하고 계십니다.” 뭐? “정정하겠습니다. 현재 가브리엘 님을 포함한 사 대 천사님은 물론, 북 대륙에 소속된 천사 전원이 현 사태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 중입니다.” 잘못 들었나 싶어 쳐다보자, 바로 말을 정정한다. “그리고 현 시간부로, 저 세라프는 금번에 발생한 사태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았습니다. 수호자를 보조하는 측면에서 사 대 천사와 동등한 권한을 지니며, 차후 수집하는 모든 정보 또한 저한테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멍하니 있는 사이, 세라프는 이 모든 말을 몹시 빠르고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고도 부족한지 계속 말을 잇는다. “그리고…. 우선 악마의 농간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점. 그리고 후속 대처가 미흡했던 점. 이 두 사실에 대해서 진심으로 고개 숙여 사과 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 “현재 저를 비롯한 모든 천사가 일련의 사태에 대하여 연대적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 “그래서 내부 회의를 한 결과, 하나의 결론을 도출했습니다. 우리 천사는, 이번 사태 해결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 북 대륙을 돕겠습니다.” “?”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이라면, 어떤 일이든 전폭적으로 지원할 생각입니다. 또한, 의사 결정에는 조언을 초과하는 수준으로는 일체 간섭 및 강제하지 않겠으며, 무조건 수현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 …뭐지? 이러면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잖아. 이것들 혹시, 히로뽕이라도 한 사발씩 들이킨 건가? 아니면 단체로 그날의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건지.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세라프. 막 궁금한 게 생겼는데.” “네. 질문하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혹시 천사도…. 그…. 생리 현상 같은 걸 겪나?” “네?” “아니. 여성은 유독 그날에 감정 변화가 심하다는 말을 들었거든.” “…아니요.” 세라프는 약간 화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털썩 앉았다. 내심 매우 당황스러웠지만…. 우선은 좋은 현상으로 생각하는 게 낫겠다. 어차피 악마를 섬멸할 때까지는 공동 전선을 유지할 생각이었으니까. 타깃을 돌리는 건, 제로 코드를 얻은 후에 해도 늦지 않을 테니. “아무튼, 나를 불렀다는 건 확실한 정보를 잡았다는 거겠지?” “Yes. 물론입니다. 일단 이 영상부터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딱! 세라프는 말이 끝나자마자 가볍게 손을 퉁겼고, 이윽고 눈앞으로 반투명한 스크린이 생성되기 시작한다. 확실히 세라프와 있으니 편하기는 하다. 서로 오랫동안 알고 지낸 만큼, 내가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스크린이 무언가를 비추기 시작했다. 나는 연초를 꺼내며 영상을 유심히 응시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불을 붙이려는 순간, “응?” 나도 모르게 손이 움츠러들었다. ============================ 작품 후기 ============================ 독자 님들. 신나는 불금은 즐기셨는지요. 어제 하루 기다려주셔서 감사드려요. 오늘부터 다시 열심히 연재하겠습니다. :) 0878 / 0933 ---------------------------------------------- Battle Of The East Continent, Four. 처음 눈에 들어온 건 나무가 심히 우거진 삼림이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빛을 띤 수림이 영상을 가득 채웠는데, 왜인지 낯설지가 않다. 그러나 정작 시선을 빼앗는 건 풍경이 아니었다. 어두침침한 숲 속, 울창한 수풀을 줄지어 헤치고 나오는 이들이 있었다. 중요한 건 한두 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얼마나 수가 많은지, 하늘 높이서 영상을 비추는 것 같음에도 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못해도 수천 명은 넘어 보인다. 그때 문득 영상이 사용자 무리를 확대해 비췄다. 아는 얼굴은 없으나,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영상 속의 인간들은 북 대륙 사용자가 아니었다. 이놈들은….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서 대륙 놈들이잖아.” “맞습니다. 영상 속 인간은 전원 서 대륙 사용자들이며.” “장소는 칠흑의 숲…. 이라는 건가?” 혹시나 싶어 넘겨짚자, 세라프는 살짝 끄덕였다. “정확히는 칠흑의 숲 최외곽 지역입니다. 평균 행군 속도로 계산해봤을 때, 여드레 후면 뮬에 도착합니다.” 세라프의 말인즉, 서 대륙 놈들이 곧 이 차 침공을 해온다는 소리였다. 이 년 전, 뮬을 기습 공격으로 점령했을 때와 똑같은 루트로. 순간 가슴이 쿵쾅 요동쳤으나, 심안 덕분인지 가까스로 가라앉았다. 적어도 남 대륙이 넘어갔다는 소식보다는 덜 충격적이니. 아니, 서 대륙 침략은 그나마 이해 가는 점은 있다. 부랑자와 연합해 침범해온 전력도 있거니와, 애초 악마의 뜻대로 돌아가는 식민지와 같은 곳이니까. 오죽 회생 가능성이 없었으면 천사가 폐쇄라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했을까. 단지 이해와는 별개로, 석연찮은 구석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반드시 아셔야 할 정보가 있습니다.” 의문을 가진 찰나, 공교롭게 세라프가 입을 열었다. “수현도 아시겠지만, 서 대륙은 저번 사건 이후 저희 손을 떠났습니다.” “손을 떠난 게 아니라 뗀 거겠지. 그나마 정상적인 사용자는 저번에 데려오게 했고, 나머지는 버렸잖아?” “…그 이후로, 서 대륙 인구는 일만 명이 채 안 되는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예비 사용자의 보충은 일절 없었습니다. 한데, 현재 칠흑의 숲에서 확인되는 인원은 약 오륙천 명에 가깝습니다.” “오륙천 명?” 세라프의 말을 듣자 의문이 점차 증폭되는 기분이다. 수가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갑절의 인원으로 왔을 때도 박살이 나서 도망가지 않았는가. 게다가 그때와 현재는 상황이 판이하다. 서 대륙은 아마 아이리스 공략도 못 했을 텐데. 물론 서 대륙이 약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약육강식의 극을 달리는 곳이니만큼 살아남은 놈들은 그럭저럭 무력을 갖췄을 터. 허나, 그렇다고 해도 북 대륙과는 비교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인구, 전투 사용자의 수, 장비의 질, 사용자의 수준 등등. 전 부문에서 우리가 훨씬 앞서는데, 고작 그 병력으로 왔다고? 전체를 끌고 와도 한참 모자랄 판에? 놈들이 죽고 싶어 안달 나지 않은 이상, 믿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혹시 끊임없는 내전으로 인구가 감소한 건가?” “사실.” 세라프는 잠시 뜸을 들였다. 살그머니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말을 잇는다. “서 대륙에는 현재 이천 명에 가까운 사용자가 남았습니다.” “이천 명이나?” “근 몇 달간, 저희는 서 대륙에 특별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가끔 확인할 적은 있었으나, 간간이 도시를 확인하는 선에서 그쳤을 뿐이지요.” “……?” “이러한 결과, 서 대륙의 움직임을 사전에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즉 속임수라고, 저희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속임수?” “그게 아니라면, 굳이 이천 명이나 되는 사용자를 남길 필요가 있을까요?” “잠깐, 잠깐만.” 갑자기 얘기가 치고 나갔다. 일단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해보자. 현재 확인한 사실은 두 개. 우선 남 대륙이 악마와 손을 잡았다는 것. 그리고 서 대륙이 우리를 공격하러 오고 있다는 것.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건 서 대륙의 입장이다. 세라프의 말은, 도시가 갑자기 휑하니 비어버리면 의심할 수도 있으니 일부러 이천 명을 남겼다는 소리였다. 말인즉 천사의 눈을 최대한 피하려 했다는 건데…. 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시기도 묘하다. 왜인지 두 사태가 연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엄습한다. 톱니바퀴가 하나씩 맞물려 돌아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여기까지 정리해보면, 서 대륙이 움직인 것에는 모종의 목적이 있는 게 분명하다. 최악의 경우 시몬이 부활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니면 비슷한 놈이 나타났거나. “여기서 가브리엘 님이 가능성 높은 가설을 제기하셨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세라프의 말이 이어졌다. “수현도 느끼셨을 겁니다. 뒤늦게 알아차리기는 했지만, 어떤 수를 써도 서 대륙이 북 대륙을 이길 수 없다는 건 명약관화입니다. 전력 차이가 어마어마하니까요. …그럼에도 굳이 왔다는 건.” “건?” “아마 미끼가 아닐까 싶습니다.” “미끼?” “네. 북 대륙의 관심이 서 대륙에 쏠려 있는 동안, 남 대륙을 이용해 무언가를 이루려는 게 아닐까….” “…….” 세라프가 흐린 말이 여운처럼 남아 뇌리를 스친다. 그 순간, 얽히고설켜 헝클어졌던 생각이 일시에 정리되는 듯했다. 동시에 내가 수호자를 맡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불현듯 들었다. 아마 다른 사용자가 맡았다면 그게 뭔 소리냐며, 일단 서 대륙부터 막겠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나만큼은 세라프의 말을 이해한다. 천사는 말할 것도 없고, 나도 악마와 싸워본 경험이 있으니까. 그래서 사탄이 어떤 식으로 일을 벌이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 사탄이라면 말이다. 이로써 현 사태의 전말이 어느 정도 확실해졌다. “그럼 남 대륙의 움직임이 중요해지잖아.” 그러자 세라프가 살며시 아미를 찡그리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송구합니다. 갖은 수를 동원하고 있으나, 상황이 심히 여의치 않습니다.” 결국에는 알 수 없다는 뜻인가. “단, 짐작 가는 것은 있습니다.” “오. 뭔데?” “동 대륙입니다.” “동 대륙?” 이건 또 의외인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왜 동 대륙을…? “들은 바로는, 연결이 끊기기 전, 남 대륙에 갑자기 동 대륙을 정벌하겠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합니다.” “이해가 안 가는데. 중앙 대륙으로 가는 거라면 모를까. 왜 악마가 동 대륙을 노린다는 거지? 그럴 이유가 없잖아.” “이유라면, 있습니다.” “있다고?” 강한 확신을 담은 음성에 나도 모르게 반문했다. “동 대륙 점령에 성공할 경우, 악마는 총 두 가지 막대한 이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아닌, 악마의 입장에서.” 되묻듯이 말하니 세라프는 조용히 긍정했다. “그런데, 그전에.” 그게 어떤 이득이냐고 물으려는 찰나, 세라프가 먼저 말을 잇는다. “바로 이 시점에서, 수현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말한 세라프는 주먹 쥔 손을 앞으로 내밀어, 둘째 손가락과 셋째 손가락을 동시에 폈다. 그리고 말했다. “수현은, 두 갈림길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이었다. ‘갈림길’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언제였더라. 비슷한 말을 들은 기억이 있는 것 같다. 아마 용이 잠든 산맥 공략이 끝나고, 가네샤한테서였나? ‘악마와 마족을, 지워버리고 싶다.’ 맞아. 비석 안에서 그렇게 물어봤었다. 그리고 가네샤는…. ‘아쉽다만, 그 질문은 내가 정확히 답변할 수 없는 성질이구나.’ ‘단, 예언 하나 정도는 해줄 수 있겠어.’ ‘후후. 뭘 그리 놀라느냐. 그러니까….’ ‘그대가 걸어가는 길의 끝은, 두 갈래로 나뉘어 있단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업데이트 시간도 늦었는데, 용량도 평소보다 적네요. 오늘 집필 시작 시간에 제가 까무룩 잠들었습니다. 일어나니 새벽 3시가 넘어서, 그때부터 허둥지둥 적기 시작했습니다. 어지간하면 용량이라도 맞추고 싶었는데, 변명의 여지가 없네요.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_(__)_ 0879 / 0933 ---------------------------------------------- Battle Of The East Continent, Four. ‘갈림길이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바로 지금이 가네샤가 말했던 ‘중요한 선택을 할 때’가 아닌가 하는. “결국, 양자택일이라는 건가. 동 대륙을 버리고 중앙 대륙을 공략하거나.” “아니면 동 대륙을 구원하고, 악마를 격멸시키거나.” 세라프가 수긍하는 어조로 말을 받는다. 나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천사 내부 여론은 어떻지?” “…만장일치로 후자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주십시오. 저희는 수현이 인도적인 차원에서 동 대륙을 구원해주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말하는 중간에 손을 들자, 세라프가 의아히 말끝을 흐린다. “몇 가지 궁금한 게 생겼으니 그거나 좀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설득은 됐으니까.” 이미 결심은 내렸다. 아니. 확신이 섰다고 해야 하나. 현재 가장 중요한 건 서로 간의 감정 싸움이 아닌, 직면한 사태를 최선의 방향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천사는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고, 선택해야 할 것은 명백해졌다. 이제 남은 건 가야 할 길로 가는 것뿐. 그러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하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말도 있으니까. “먼저 악마가 동 대륙을 정벌하면 얻을 수 있는 이득부터 말해봐.” “알겠습니다. 첫 번째는, 차후 각 대륙이 중앙 대륙을 둘러싼 경쟁 구도와 연관하여, 남 대륙 사용자들을 효과적으로 선동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럴듯한 명분을 부여해주는 동시에 서로의 결속을 강화하는 것이지요.” “그건 선동이 아니라 맞는 말…. 아니, 그리고?” “두 번째가 가장 중요합니다만. 혹시 수현은 이 차원의 존재가 중간 세계로 내려갔을 때, 사용할 수 있는 힘의 총량을 제한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어느 정도는.”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가령 이번 사태의 경우, 악마와 마족은 소환이 방을 나온 순간부터 법칙의 적용을 받았을 겁니다.” “설마 그 법칙을 깨는 방법이 있다는 말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그 어떤 수를 쓰더라도 인과율의 법칙은 절대 불변입니다. …단.” 혹시나 싶어 물어보자, 세라프는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말끝에 불안한 반전을 덧붙였다. “그들이 중간 세계에서 가용 가능한 힘. 그 힘이 회복되는 속도를 인공적으로 상승시킬 수는 있습니다.” 세라프의 말은 간단하다. 하나, 악마 본래의 힘이 100이라고 가정하면, 중간 세상에서는 20밖에는 사용할 수 없다. 둘, 인과율의 법칙의 작동하는 즉시 악마의 힘은 1로 떨어진다. 말인즉 바로 20을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갓 소환됐을 당시에는 극도로 약해진 상태라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한데, 1에서 20까지 회복되는 속도를 인위적으로 높이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물끄러미 응시하니 세라프가 바로 말을 잇는다. “수현. 혹시 지옥 대공이 출현했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아.” 그 순간, 나는 비로소 세라프가 하고자 하는 말을 깨달았다. 동시에 왜 악마가 동 대륙 정벌을 하려는 지도. “설마, 인간을 양분으로 삼겠다는….” “Yes. 그것 말고는 굳이 동 대륙으로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인간, 특히 사용자는 힘을 회복시키는데 최고의 양분이니까요.” “잠깐만. 그럼 굳이 동 대륙으로 갈 필요는 없지 않나? 사용자는 남 대륙에 더 많을 텐데.” “그럼 서로 손을 잡은 이유가 없어집니다. 오히려 역으로 당할 가능성도 없잖아 있을 겁니다.” 아, 잠식이 아니라 공존이라고 했나. 아무튼, 우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자. 세라프도 말했듯이 이미 동 대륙으로 진군하는 중이라고 보는 게 좋겠다. 쫓기는 입장인 만큼, 아직 남 대륙에 유유자적하게 있을 가능성은 적을 테니까. ‘이건 시간 싸움이다.’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현시점에서 시간은 우리 손을 들어주고 있고, 반대로 악마는 시간에 쫓기는 처지다. 그런 만큼 사탄은 간절히 원하고 있을 것이다. 북 대륙이 동 대륙을 버리고 약속의 신전으로 진군하는 상황을 말이다. 왜냐고? 그래야 아무 방해받지 않고 원하는 만큼 시간을 벌 수 있으니까. ‘돌아오는 길을 노려, 단판 승부를 노리시겠다.’ 그렇게는 안 되지. 알아차린 이상 뜻대로 움직여줄 생각은 없다. 선택권은 아직 북 대륙이 쥐고 있으니. “아, 그러고 보니 동 대륙은 아직 너희 관할 안에 있지 않아?” “서 대륙 때처럼 편입을 생각하고 계신다면, 상당히 위험하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째서? 성공만 한다면, 제대로 카운터 치는 건데.” “그렇기는 합니다만, 현재 동 대륙의 상황이….”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니 절로 입이 벌어졌다. 아니. 신 대륙은커녕, 이제 겨우 대 도시를 공략한 수준이라고? 우리가 몇 년 전 바바라를 점령했더라? 이럼 이야기가 달라진다. 서 대륙처럼 첫 침략 당시 개척한 루트라도 있다면 모를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이상, 오면서 지리멸렬 전멸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동안 딱히 교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대륙을 횡단하는 것 자체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결국에는 구하러 갈 수밖에 없잖아. 무언가 입이 쓰다는 생각에 한동안 입맛만 다셨다. 하지만, 곧 몸을 일으켰다. “그래, 알겠다.” 필요한 정보는 전부 들었다. 남은 건 행동만이 있을 뿐. “수, 수현?” “이만 돌아갈게. 서 대륙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동 대륙으로 가려면 서둘러야 할 것 같거든.” “네?” “…왜?”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몸을 돌리자, 제단에서 일어난 세라프가 보였다. 몹시 놀란 눈으로 나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벌써 결정을 내리신 겁니까?” “응.” “저, 정말로 저희의 의견을…?” “착각하지 마. 너희 의견을 무조건 따른다는 게 아니야. 그저 내 생각과 우연히 일치했을 뿐이니까.” 나는 가볍게 어깨를 들먹인 후 도로 몸을 돌렸다. 생각하는 시간은 충분히 길어도 되지만, 결정을 내린 이상 신속하게 움직인다. 그렇게 생각하며 포탈로 들어가려는 찰나, 돌연히 급히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수현.” 거의 동시에 걸음이 덜컥 정지하고 말았다. 왜냐면 부드러우면서도 애절한 손길이 내 옷깃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한껏 기함해 돌아보니 세라프는 어느새 등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이대로, 가시렵니까…?” “뭐?” 뭐, 뭐야. 가시렵니까 라니. 그러니까 꼭 전쟁터에 나가는 남편을 배웅하는 아내 같잖아. 갑자기 돌변한 태도에 나는 당황을 금치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아니. 열흘 후에 도착한다며. 그리고 동 대륙 구원군도 편성하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응?”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할 수 있는 선이라면 최대한 도와드리겠다고요.” “…….” “십 분, 아니 오 분이면 됩니다. 시간을 비약적으로 단축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세라프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신뢰의 빛을 빛내고 있었다. * 아틀란타. 이스탄텔 로우 클랜 하우스. 탁, 탁…. 한소영은 방 안에 홀로, 왼손으로 턱을 비스듬히 괸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두 눈이 책상에 놓인 기록을 멍하니 응시하는 것이, 골똘히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혹은 별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탁, 탁…. 검지와 중지 틈에 낀 깃 펜을 좌우로 흔들 때마다, 작게 부딪치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울린다. 그러다 문뜩, 하염없이 흔들리던 깃 펜이 우뚝 바로잡혔다. 동시에 눈을 살짝 치뜬 한소영이 차분히 손을 놀리기 시작한다. 도대체 뭘 저렇게 열심히 써내려 가고 있는 걸까? 아마 클랜 행정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싶은데. 어디 보자. 우선 기록 상단부터…. 1. 상황 설정 : 나와 그의 극적인 재회. 그 : 어라, 왜 모른 척하시는 거죠. 설마 저를 잊으셨던 겁니까? 나 : 몰라요. 머셔너리 로드야말로 까맣게 잊고 있으셨으면서…. 그 : 하하. 잊기는요. 정말 보고 싶었다고요. …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제부터 소영이라고 불러도 될까? 나 : 뭐, 뭐라고요? 그게 무슨! 으읍!(여기서 거세게 입을 부딪쳐온다.) ……. …………어? “후유.” 한소영이 긴 한숨을 내쉬며 깃 펜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황혼 때 드리우는 붉은 노을처럼 아주 살짝 얼굴을 붉혔다. 아래에는 또 뭘 썼길래? 2. 상황 설정 : 침대 위의 그와 나. 그리고 문틈에서 경악한 눈으로 서 있는 그 여인. 그 : 그런데 옷을 꽤 야하게 입었네? 일부러 그런 거야? 나 : 그, 그건 또 무슨 버릇없는 말인가요. 말조심하세요. 그 : 뭐? 말투가 건방지네? 안 되겠다. 소영이 너, 교육 좀 받아야겠어. 지금 당장 바지 벗고 속옷 내려. 그리고 뒤돌아서 엎드려. 나 : 뭐라고요? 어떻게 그런 말을! 정말 제가 아는 머셔너리 로드가…! 그 : 조용히 해! 이건 다 소영이 탓이니까. 네가 너무 야하고 음란하니까 내가 참지 못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잘못한 건 너야. 나 : 말도 안 되는 궤변을…! 아, 안 돼요! 이러지 마요, 제발! 문밖에 게헨나 씨가 있다는 말이에요! 그 : 상관없어! 이제 나한테는 오직 너밖에…! 나 : 아, 아아…! 아아아아…! 아아아아몰라몰라퍄퍄퍄퍄뿅뿅…. …이건 과연 무슨 내용일까? 아니. 현실에서 가능한 일이기는 할까? 쿵! 그때, 기록의 위로 반듯한 이마가 세게 맞부딪쳤다. 고개를 처박은 상태서 스리슬쩍 드러난 입가가 실룩, 실그러진다. 책상 위에 올려둔 양손은, 꽉 쥐다 못해 부르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스스로 써놓고도 아주 부끄러워 죽겠는 모양이다. 그때였다. “!” 연달아 이마를 찧고 있던 한소영이 느닷없이 휙 고개를 치켰다. 타다다다, 타다다다! 그리고 문밖에서 모종의 기척이 들린 그 찰나의 순간, 무려 세 가지 행동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먼저 기록을 무영창 주문으로 태워버렸고, 자세는 칼같이 바로 잡으며,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 기록을 꺼내 유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마치자, “언니! 언니이이!” 발로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함께 박다연이 호들갑을 떨며 등장했다. “또 웬 호들갑이니.” 후우, 숨을 흘린 한소영이 짐짓 엄한 음성으로 말한다. 흡사 중요한 일을 방해받아 자못 짜증이 난다는 투였다. 뭐, 망상을 중요한 일에 포함할 수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어쨌든 박다연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얼굴로 쉴 새 없이 떠벌렸다. “떴어요? 언니도 떴어요?” “응? 떠?” “아니, 뜨셨느냐고요!” “아까부터 무슨 말이니. 뭐가 떴다는 건데.” 이번에는 연기가 아닌, 정말로 눈썹이 찌푸려졌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러나 박다연은 갑갑하다는 듯이 가슴만 탕탕 치더니 불쑥 창문을 가리켰다.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밖에 안 봤어요? 완전 난리가 났는데!” “…난리?” “해밀, 마법의 탑, 리버스, 한, 신 코란, 심지어 북부 연합까지. 대표 클랜은 물론, 대형 클랜까지 모조리 머셔너리 캐슬로 모이는 중이라는 말이에요…!” “…….” 말이 끝난 순간, 한소영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창문을 향해 느릿하게 걸어가며 고개를 갸웃 기울인다. 뭐가 떴다는 지는 아직도 모르고 있지만, 적어도 박다연의 태도는 장난이라 치부하기는 어려웠다. 그 순간이었다. 정확히는 의아히 창문 너머를 내다보려는 순간, 띠링! 익숙한 신호음이 갑작스레 귓전을 울린다. 이윽고 한소영이 놀란 얼굴로 턱을 젖히자, 허공에 서서히 글자가 출력되기 시작한다. 오직 한소영만이 볼 수 있는 메시지가. 0880 / 0933 ---------------------------------------------- Battle Of The East Continent, Four. 세라프가 말한 ‘방법’이라는 건 생각보다 간단했다. 북 대륙 사용자 중 일부에게 ‘임무 메시지’를 보내겠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중견 클랜 이상의 간부급 사용자를 호출해, 현 상황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겠다는 소리였다. 물론 천사의 속내는 짐작이 간다. 남 대륙이 악마에게 넘어간 이상, 천사의 입장에서 북 대륙은 반드시 잡아야 할 카드다. 서 대륙은 이미 악마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었고, 동 대륙은 있으나 마나 한 상황이니까. 여기서 우리마저 악마와 동맹을 맺으면 정말로 답이 없어지니, 그걸 방지하려는 차원에서 도와주려는 것이리라. 결과적으로는 단합하는 과정을 대신 맡아주겠다는 것인데, 나로서는 하등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늘부터 전쟁이다!’ 라는 가당찮은 한 마디로 사용자들이 움직여줄 리가 없거니와, 안 그래도 일 분 일 초가 아까운 상황이었다. 천사가 전면적으로 나서준다면, 명분 부여 및 설득에 들어가는 시간도 훨씬 절약될 터. 한편, 정작 내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현재 북 대륙이 해결해야 할 상황은 두 개. 하나는 곧 침공해올 서 대륙을 격퇴하는 것. 그리고 남은 하나는 동 대륙을 구원하는 것. 여기서 나는 또 두 갈림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모두 힘을 합쳐 최대한 빠르게 서 대륙을 분쇄한 후 동 대륙으로 떠나거나, 아니면 적절히 힘을 나눠 두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거나. 전자는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자칫 잘못하면 사탄의 의도대로 놀아날 가능성이 높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서 대륙이 미끼라는 걸 알고 있는 이상, 버리는 패를 좇는 건 어불성설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세라프와 이야기를 끝내고 소환의 방을 나온 후, 나는 신속히 머셔너리 캐슬로 향했다. 돌아가는 와중, 한산하던 도시가 서서히 어수선해지기 시작해 걸음을 더욱 바삐 놀렸다. 그렇게 정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문득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정원에는 마르가 시커먼 두 놈 앞에서 사뿐사뿐 거닐고 있다. 안현과 진수현은 그런 마르를 보며 입을 헤 벌리고 있었고. “저 어때요?” “예뻐.” “응? 예뻐요?” “잘 어울린다는 소리야.” 흠. 뭘 하고 있던 거지? “마르?” 이름을 부르자, 한 바퀴 빙그르르 회전하던 마르가 몸을 기우뚱하며 멈춰 섰다. 그리고 내가 있는 방향을 돌아보더니 “아빠!” 반갑게 외치며 화사하게 웃는다. 허나 나는 마르를 보며 머리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그 복장은….” 아닌 게 아니라, 마르는 평소 전혀 볼 수 없었던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머리띠, 가죽 갑옷, 장갑, 롱 부츠…. 얼씨구? 목걸이도 걸었잖아? “아, 형 오셨어요.” “형님! 저희가 창고에서 장비 좀 꺼냈습니다. 허락하셨다고 들어서요!” 빤히 쳐다보고 있자, 덤과 더머가 으스대며 걸어 나왔다. 왜 우쭐대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말은 사실은 듯싶다. 마르는 뺨을 살짝 붉히며 머리에 낀 은색 머리띠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네. 장비를 고르는데 오빠들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그리고 이 머리띠는 유정이 언니가 선물해주셨고요.” “이유정이? 아….” 그러고 보니 저거, 순결의 머리띠였지? 원래는 마르가리타가 갖고 있던 것이니 일종의 유품인 셈이다.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마르가 양팔을 활짝 펼쳐 보였다. “아빠아빠. 저 어때요? 잘 맞는 것 같아요?” “어? 어, 그러네.” 담담히 수긍하기는 했지만, 사실 넝마를 걸쳐놓아도 어울릴 것 같았다. 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말도 있잖아.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마침 잘됐다. 너희 둘, 시킬 게 좀 있거든.” “예 형?” “어라? 저 사람 누구였더라?” “……?” 그때였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진수현이 갑자기 정문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배가 불룩 튀어나온 덥수룩한 사내가 성큼성큼 들어오는 중이었다. ‘전투 명가’ 리버스 클랜의 김덕필이다. 벌써 도착한 건가. “어이, 머셔너리 로드!” 나를 보자마자 허둥지둥 뛰어오는 걸 보니 아마 그 메시지를 본 듯싶다. 아마 굉장히 혼란스러울 테니 일단 진정시키는 게 좋겠다. “오랜만입니다.” “여~. 오랜만….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김덕필은 손을 들어 화답했다가, 벌컥 소리 지르며 달려왔다. 그리고 말했다. “연초 좀.” 불쑥, 손을 내밀면서. …이 인간이 정말. 순간 저 솥뚜껑만 한 손바닥에 침을 탁 뱉고 싶었으나, 주섬주섬 연초를 꺼내 세게 튕겼다. 김덕필은 솜씨 좋게 잡아챘고, 싱글벙글 웃으며 점화석을 꺼내 들었다. 젠장, 괜히 아니꼽다. “메시지는 확인하셨습니까?” “천사가 보낸 거? 응, 봤지. 봤으니까 왔지.” 퉁명스레 말하니 씨익, 멋쩍게도 웃는다. 예상보다 상당히 담담한 반응이다. 이건 좀 의외인걸. “그런데 말이야, 나 말고도 메시지 받은 놈이 없지는 않더라고?” “아마 그랬을 겁니다.” “역시 너는 알고 있었나…. 한데, 그놈들은 신전으로 오라고 했다던데? 나야 메시지 하단에 너를 찾아가라고 적혀 있어서 여기로 왔다만.” “음….” 그렇게 말한 김덕필은 연기를 푹 뿜으며 나직이 투덜거렸다. “옌장, 당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그거 알아? 지금 완전 난리 난 거.” “뭐, 대충은요.” “서 대륙의 공격, 남 대륙의 반란, 동 대륙의 구원…. 뭔 말인지 이해가 가야지. 너무 갑작스럽기도 하고. …한데, 머셔너리 로드. 이거 정말이야?” “저도 믿기는 어렵지만, 그렇게 듣고 왔습니다.” 김덕필이 은근한 말투로 물어, 나는 은근슬쩍 천사에게 책임을 돌렸다. 애초 이렇게 하기로 세라프와 이야기했으니까. 설득은 천사에게 맡긴다. 내가 하는 건 현상에 대한 집중뿐. 그 순간, 누군가가 또 정문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게 보였다. 이번에는 공찬호였다. “허, 저놈도 왔군.” 김덕필도 봤는지 짧은 탄성을 터뜨렸다. “우선 안으로 들어가시죠. 아직 올 사람들이 꽤 있으니까요.” “후우우웁! 그러자고.” 김덕필은 연초를 필터 끝까지 빨아들이며 동의했다. * 조금이지만 정신이 지친 듯하다. 과장 조금 보태서 뇌가 찌릿찌릿 떨리는 것 같다. 나는 상석에 깊숙이 등을 기대며 주변을 살폈다. 머셔너리 캐슬, 일 층 회의장에는 어느새 아홉 명의 사용자가 도착해 앉아 있었다. 중앙 관리 기구 수장 이효을. 동 도시, 이스탄텔 로우 클랜 로드 한소영, 아사신 클랜 로드 이찬희. 서 도시, 북부 연합의 공찬호. 남 도시, 리버스 클랜의 김덕필, 마법의 탑 클랜 로드 선율, 신 코란 연합의 박환희, 한 클랜 로드 성현민. 북 도시, 해밀 클랜 로드 김유현. 그리고 머셔너리 클랜 로드인 나까지. 총 열 명이 모였다. 이제 올 사람은 다 온 셈이다. 회의장의 분위기는 무겁다. 여기 앉은 한 명 한 명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클랜 소속이나, 오늘따라 얼굴들이 딱딱히 경직돼 있다. 전원 메시지를 보고 왔을 것이고, 그만큼 충격이 크다는 방증이리라. 뚫어지라 쳐다보는 시선을 이기지 못해, 나는 이마를 짓누르던 손을 떼며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그럼…. 메시지는 다들 보고 오셨으리라고 생각하고, 시작하겠습니다.” “네. 보고 왔는데, 질문 있어요.” 입을 열자마자 선율이 손을 들었다. 예의 장난기 가득한 낯빛이 아닌, 처음 보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이러면 약간 부담스러워지는데. 워낙 직설적인 성격이기도 하고. “메시지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거잖아요. 현재 서 대륙이 쳐들어오고 있다. 남 대륙은 웬 이상한 놈들과 손을 잡고 천사를 적으로 돌렸다. 그리고 동 대륙을 공격하러 가고 있는데, 우리는 서 대륙 침공을 방어하는 동시, 동 대륙을 구원하러 가야 한다. 맞나요?” 선율은 이 모든 말을 굉장히 빠른 속도로 말했다. 확실히 마법사라서 그런가. 무언가 상당히 생략된 것 같았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긍정했다. “맞습니다.” “왜요?” 눈살을 살짝 찌푸린 선율이 이번에도 곧장 반문한다. 살짝 공격적으로 느껴지는 어투. “생각해봐요. 먼저 서 대륙은, 글쎄요? 솔직히 뭔 자신감으로 또 오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예전의 패배를 복수하러 온다는 셈 치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죠. 그리고 우리 터전을 방어한다는 명분도 있으니 기꺼이 참가할 생각도 있고요. …하지만 동 대륙은 좀 아니잖아요?” “…….” “왜냐면, 아니. 됐어요. 구구절절 말할 필요도 없이 머셔너리 로드라면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아시겠죠. 아무튼, 제가 알고 싶은 건 딱 두 가지에요. 남 대륙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왜 우리가 그 싸움에 끼어들어야 하는지. 머셔너리 로드는 현 북 대륙 수호자 입장에서, 이 두 사안에 대해서 납득할 수 있는 답변을 해주기를 바라요.” “잠깐. 그건 내가 얘기해도 될까?” 그때였다. 미리 준비해둔 답변을 하려는 찰나, 이효을이 손을 들며 끼어들었다. 선율은 조금 불쾌해 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간신히 참는 듯했다. 일종의 전관 예우라고 해야 하나. “거두절미하고 바로 말할게. 선율? 네가 뭘 궁금해하는지는 알겠는데, 그건 아마 김수현도 자세하게 말할 수는 없을 거야.” “뭐라고요?” 선율이 낯을 와짝 찡그리자, 이효을이 손을 휘휘 젓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도와주려는 것 같다. “진정해. 나도 수호자를 해봐서 알 거든. 뭔 일이 터졌을 때, 사전에 설명을 듣는 경우도 있지만, 듣지 못하는 경우도 꽤 있었어.” “그래서, 이번이 그 듣지 못한 경우다?” “그렇지. 왜냐면 이런 경우는 대체로….” “아~. 그럼 우리는 그냥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된다는 건가요?” “아니, 얘.” “이봐요. 지금 장난해요? 전쟁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별 같잖지도 않은 메시지 하나 툭 던져놓고, 그냥 까라면 까라?” 한껏 비꼬며 말하는 걸 보자, 왜인지 좋지 않다는 생각이 스쳤다. 혼란스러울 거라고 생각은 했으나 예상외로 강도가 심하다. 심지어 천사를 적대하는 프레임이 생성될 기미조차 보이고 있다. 무언가 위험하다고 생각한 찰나. 쾅! “어이, 거 입 좀 다물지 그래.” 흡사 책상이 부서지는 소리와 동시에 순간적으로 뭉클뭉클한 악기가 몰아쳤다. 선율은 흠칫 몸을 떨더니 떨떠름한 빛을 비췄다. 선율의 맞은편, 의자에 고개를 기댄 공찬호가 상대를 지그시 깔아보고 있었다. “조잘~조잘, 말만 많아서 말이야. 역시 종자가 마법사라서 그런가?” “뭐, 뭐라고요?” “너만 혼란스러운 거 아니니까, 좀 닥치고 있으라고. 혼자서만 씨부렁거리지 말고.” “…지금, 말 다하셨어요?” 선율의 눈매가 한껏 가늘어진다. 그러나 공찬호는 피식 비웃으며 소리 죽여 웃었다. 마치 네까짓 게 어쩔 거냐는 듯이.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죄송하지만, 저도 사용자 공찬호와 같은 의견입니다.” 그러나 그때, 조용히 침묵을 지키던 말쑥한 사내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이번에는 끝 쪽에 앉은 성현민으로 시선들이 돌아간다. 성현민은 가볍게 혀를 차더니 한숨을 길게 흘렸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사용자 선율의 의문 제기는 이해하고, 또 온당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요. 일단 가만히 좀 계셨으면 좋겠습니다만.” “가만히 있으라고요?” “무조건 껴 듣지 마시고 상황 좀 보시라는 말입니다. 왜 이례적으로 이런 메시지가 뜨고, 왜 다른 사용자는 신전으로 가는데 우리만 이 자리에 급하게 모였을까요? 제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어느 분 한 명 만만한 클랜이 없는데요. 이래도 모르시겠습니까?” “그, 그건.” “사용자 선율만 궁금한 거 아닙니다. 우리도 궁금합니다. 그런데 우선은 듣고 판단해보자는 겁니다. 의문 제기는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을 텐데…. 혼란스러운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사실 왜 머셔너리 로드에게 화를 내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 비판의 날이 날카로울수록 언어는 부드러워야 한다고 했던가. 성현민의 논리 정연한 말에, 선율은 할 말을 잃은 얼굴을 보였다. 이어서 나를 스리슬쩍 흘겨보더니,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풀이 죽은 표정을 짓는다. “말이 심했다면 사과 드리겠습니다.” “…됐어요. 아니, 아니에요.” 성현민은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가, 문득 나를 보며 몰래 신호를 보냈다. …겨우, 이야기할 분위기가 조성된 듯하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원래 두 편 분량을 올려야 하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요즘 상당히 집중력이 떨어졌습니다. 어제 같은 경우는 단단히 벼르고 일찍 자리에 앉았는데, 4시간 동안 겨우 6줄을 적었습니다. 그나마도 지우려다가 간신히 참았네요. 사실 오늘 내용도 뭔가 마음에 차지 않고 자꾸만 부끄러운데, 왜 이러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휴식은 문제가 아닌 것 같고,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그냥 눈 딱 감고 하루 더 쉴까 하다가, 여기서 손을 놓으면 상황이 더 악화될 것 같아서, 억지로라도 이어보자고 결심했습니다. 갑자기 사정이 생기지 않는 이상 일일 연재는 최대한 이어보겠습니다.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__) 0881 / 0933 ---------------------------------------------- Battle Of The East Continent, Four. 선율의 태도는 확실히 과했으나, 내가 가만히 있었던 건 그녀의 심정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임무 메시지’로 시간을 절약하겠다는 생각은 좋지만, 받아들이는 처지에서는 어수선할 수밖에 없다. 물론 천사도 혼란은 예상했고, 그래서 이례적으로 직접 나서겠다고 했다. …그나마 고연주한테 미리 소문을 흘려두라 한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우선 서 대륙에 초점을 맞춰 세라프한테 들은 정보를 하나씩 털어놨다. 현재 뮬을 기준으로 열흘 거리서 오고 있다는 것과 병력은 육천 명이 채 안 된다는 것 등등. “예? 오륙천 명으로 오고 있다고요? 겨우?” “미친놈들이군.” 선율은 설마 설마 했으나 더욱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반문했고, 공찬호는 낮게 코웃음쳤다. “그럼 이렇게 모일 필요도 없지 않나? 고작 그 정도라면 우리 북부 연합만으로도 아작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별것 아니라는 말투로 말하기는 했으나 관심이 없을 리가 없다. 애초 김덕필 다음인 두 번째로 도착하지 않았는가. 돌아가는 사정이야 어쨌든 좋으니, 전쟁한다는 사실 자체에 흥분하고 있을 것이다. 공찬호는 그런 사용자였다. “그렇기는 한데, 너는 안 돼.” “뭐가 안 돼?” “설령 북부 연합 전부가 서 대륙을 상대하더라도, 너는 동 대륙 구원 임무에 참가해야 한다.” “왜?” “필요하니까. 그곳이 더 힘들 거 같거든.” “으음….” 공찬호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갑자기 침묵했다. 아마 열심히 따져보고 있겠지. ‘어느 곳에서 더 신 나게 날뛸 수 있을까.’ 하고. 그때 한소영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럼 머셔너리 로드는 서 대륙을 격퇴하는 동시에 동 대륙을 구원하러 가겠다는 건가요?” “예.” “서 대륙 병력이 생각보다 많지 않으니 가능은 하겠어요. 단, 구원군에 얼마만큼의 병력을 편성할지가 관건이겠네요.” “…….” 귓전을 또렷이 울리는 고요한 음성에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역시 한소영이라고 해야 하나. 단지 메시지만 봤을 뿐인데 현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짚어냈다. “구원군은 약 오천 명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엑? 겨우 오천 명?” 생각했던 인원을 말하자마자 누군가 의아히 반문했다. 한소영도 모호한 표정을 짓는 게 보여, 나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단, 조건이 붙습니다. 바로 말씀드리면, 구원군은 북 대륙 최고의 정예로 꾸릴 겁니다.” “그 조건이라는 게…?” “최소 사 년 차 이상일 것, 사 년 전 전쟁에 참가했던 사용자일 것, 강철 산맥 공략에 참가했던 사용자일 것. …그리고 여기 앉아 있는 분들의 클랜이나, 또는 산하 클랜 소속일 것. 물론 네 번째 조건에는 어느 정도 예외를 두겠습니다.” “흠…. 글쎄. 그래도 오천 명은….” 김덕필은 듬성듬성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입맛을 다셨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이 탐탁잖은 반응을 보인다.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고 있자, 문득 이효을과 눈을 마주쳤다. “어떤 생각인지 알 것 같네. 오천 명. 정확하지는 않지만, 현시점에서 네가 말한 조건에 부합하는 사용자가 아마 그쯤 될 것 같거든. 즉 단순히 사용자 정보만이 아닌, 경험 있는 사용자를 데려가겠다는 거지?” “그런 이유도 있고. 인원이 많으면 그만큼 행군 속도도 느려지니까.” “그래도 조금 재고해줬으면 하는데. 아무리 최고 정예를 데려간다고 해도, 그 숫자는 너무 적지 않을까? 여기 있는 클랜들만 모조리 끌어모아도 일만 명은 가볍게 넘을 거야.” “그래서 최소라고 말한 거야. 더 있으면 당연히 데려갈 거고.” 틀린 말은 아니다. 각 클랜의 산하 클랜까지 계산하면 족히 넘고도 남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과거와는 달리, 현재의 나는 전군을 지휘하는 입장에 놓여 있다. 아마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한데, 일 회차를 겪으면서 하나 깨달은 게 있다면, 홀 플레인의 전쟁은 숫자가 아닌 사용자로 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고대 시절 전쟁과는 궤를 상당히 달리한다. 한 명의 사용자가 백 명을 죽일 수도, 그 이상을 쓸어버릴 수도 있다. 가장 좋은 예로 군단 소환사가 있지 않은가. 물론 수가 많으면야 좋겠지만, 어중이떠중이를 데려가 봤자 방해만 될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최소 오천 명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최적의 병력이었다. 이번에는 형이 입을 열었다. “수현아. 남 대륙에 관한 정보는?” “아쉽지만 듣지 못했어. 완전히 베일에 싸여있나 봐.” “그럼 현재 동 대륙으로 진군하고 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고 하네.” 그러자 형은 차분히 팔짱을 끼더니 턱을 조금 숙였다. 깊은 생각에 잠길 때의 버릇이었다. 어느 정도 사정을 알고 있는 만큼, 낙낙한 때가 아니라는 걸 그 누구보다 심히 체감할 터. 아무튼, 해야 할 말은 끝났다. 남은 건 천사의 협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신속히 구원군을 편성해 동 대륙으로 떠나는 것뿐.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마침 들려온 질문에 나는 앞을 바라봤다. “우선은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해합니다. 갑자기 메시지가 떨어진 것도 모자라, 서 대륙이 공격해온다느니 동 대륙을 구원하러 가라느니, 굉장히 혼란스러우셨을 겁니다.” “허나 상황이 그만큼 긴급합니다. 방금도 말씀드렸지만, 현재 남 대륙이 어디까지 갔는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우리는 최대한 빠르게 행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회의는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즉시 담당 천사에게 가셔서 전후 사정을 들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납득하셨을 경우, 아까 제가 말한 조건에 부합하는 인원을 선별한 후 바로 연락을 주시면 됩니다.” “단, 강제하지는 않겠습니다. 북 대륙에 남아 방어에 전념하시겠다면 그 의견 또한 존중하겠습니다. 다만 그 경우도 저한테 연락을 주셔야 할 겁니다. 새로 참가할 클랜을 선별해야 하니까요.” 길었던 말이 끝나자, 선율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일언반구도 없이 몸을 돌리더니 잰걸음으로 회의장을 나가버렸다. 이내 남은 이들도 주춤주춤 일어나려는 찰나, 문득 누군가 입을 열었다. “저, 형님.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있는데요.” 박환희가 나를 쳐다보며 해맑은 미소를 짓는다. 순간 누가 네 형님이느냐고 말하고 싶었으나,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간신히 참았다. “뭔데.” “아, 다른 건 아니고요. 서 대륙 방어전이 의무라면, 동 대륙은 구원은 일종의 임무라고 볼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참가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데, 우리는 특별히 우선권을 받았다. 이렇게요.” “그렇지. 그런데?” “그럼 이 특별 임무에 성공했을 시, 받을 수 있는 보상도 있나요?”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나는 싱겁게 웃었다. 처음 볼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상인 클랜에서 활동하다 보니 상당히 이해 타산적으로 변한 듯싶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해야 하나. 각 선택이 갖는 무게가 다르니 말이다. “편성이 끝나면 새 메시지가 뜰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오, 혹시 그것도 천사가 말해줍니까?” “물론. 아마 섭섭지는 않을 거다.” “예. 알겠습니다.” 크게 끄덕인 박환희는 활짝 웃었다. 그거면 충분하다는 듯이. 잠시 후, 사용자들은 한 명씩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한 명 한 명 줄지어 입구로 빠져나가는 모습을, 나는 하염없이 응시하기만 했다. * 급히 소집했던 임시 회의가 끝난 후. 머셔너리 캐슬에 모였던 사용자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신전으로 향했다. 그러나 단 한 명만은 예외였다. 해밀 클랜 로드, 김유현은 자신의 근거지인 북 도시로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왜냐면 굳이 갈 필요가 없었으니까. ‘긴장한 건가.’ 불현듯 김유현은 피식 웃었다. 회의 때 봤던 동생의 모습을 떠올리니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김수현은 평소처럼 카리스마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게 아닌, 시종일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예상 편성 병력을 말할 때는 사뭇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스스로 마음을 졸이고 긴장하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나쁘지 않아.’ 그러나 김유현은 나름 동생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실상은 모르는 이들은 불안하고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지만, 가브리엘과의 만남 후 김유현은 하나의 확신을 가졌다. 그리고 이 확신은 당연히 김수현도 알고, 또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 오천 명’이라는 말이 나왔을 리가 없다. 허나, 그럼에도 긴장하고 있다는 것은…. 일련의 사태는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복잡하다. 그러나 속사정을 아는 이의 특권이라고나 할까. 김유현은 현 사태에 깔린 의도를 어렴풋하게나마 직감할 수 있었다. 사탄은 자신들이 극히 불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선택권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여러 상황을 동시에 발생시키고, 자신의 진영에 유리한 쪽으로 선택을 유도하려고 했다. 말인즉 시간을 벌어 충분한 힘을 쌓은 뒤, 단 한 번의 기회를 노려 승부를 보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김수현이 정면에서 받아쳐 버렸다. 어지러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본진 방어에 매달리지도, 중앙 대륙 진군이라는 모험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어영부영 있는 것도 아니고, 짧은 시간에 최고의 선택을 내렸다. 무엇보다 상황이 유리하다고 상대를 경시하지 않고, 외려 긴장하고 있다는 점이 가슴이 든든하다. 물론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 온 수완은 칭찬해줄 만하지만, 사탄의 계획은 이미 분쇄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럼 남은 건 상대의 방심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는데, 김수현은 그것조차도 경계하고 있다. 결국, 현 상황에 한해서 북 대륙이 패배할 구석은 모조리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쯤 되면 상대가 숫제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 아마 자신이 사탄의 입장이었다면, 이 숨 쉴 틈도 없이 죄어오는 탈수기 같은 상황에 숨이 턱턱 막혀 왔을 것이다. ‘사탄….’ 그렇게 생각한 김유현은 스리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소리 없이 흐르는 옅은 미소는, 앞으로의 일이 기대된다는 듯 설레어 보이면서도 몹시 차가웠다. ‘이제 어떻게 나오시려나?’ ============================ 작품 후기 ============================ 1. 이번 회로 에피소드 4가 끝났습니다. 다음 회부터는 에피소드 3으로 돌입하겠습니다. 이야, 어느새 8에서 시작했던 게, 3까지 왔네요. 이제 정말로 끝이 보이는 기분입니다. 2. …그런데 다음 회는 5월 16일(토요일)에 올라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오늘 오후에 조아라와 방문 약속이 있거든요. 다른 건 아니고, 조아라 + 타 협업 회사 분들과 미팅이 잡혔습니다. 잠시 중단됐었던 비주얼 노벨과 관련한 일이에요.(원래 1월 ~ 2월에 나왔어야 정상인데, 죄송합니다. ㅜ.ㅠ) 언제 끝나고 집에 돌아올지 모르니, 15일에 업데이트가 안 되면 하루 휴재한다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비주얼 노벨에 관련해서는 다녀오면 자세히 말씀 드릴게요. 3. 에피소드 3부터는 전개 속도가 굉장히 빨라질 예정입니다. 아마 이제껏 이어 왔던 느린 속도에 익숙해지신 분이라면,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습니다. 후후. 독자 A : 풉. 웅남 로유진 : ? 독자 B : 빠르게 쓴뎈ㅋㅋㅋㅋ 엌ㅋㅋㅋㅋㅋㅋㅋㅋ 얘 언제는 600회에 완결 내겠다고 하지 않았음? 웅남 로유진 : ;; 독자 C : 난 최소 800회라고 예상했어. 그런데 그것도 넘겼지. 한참이나. 웅남 로유진 : ;;;; 어, 어쨌든 그 간극을 줄일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4. 어느새 아침이네요. 어제 코멘트로 따뜻이 응원해주신 분들 덕분에, 근래 까닭 없이 우울하던 기분이 한결 좋아졌습니다. 아침에 아버지가 저보고 뭐 좋은 일 있느냐고 물으셨을 정도네요. 하하. 출근하신 분들, 학교에 가신 분들 모두 활기찬 목요일 보내세요! :D 0882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우선 북부 연합에서 구백 명 지원하겠다고 연락 왔어요.” “구백 명? 흠. 북부 전체로 보면 조금 적은 듯한데.” “네. 그래서 물어봤는데 조건에 맞는 사용자가 천오백 명은 된데요.” “남는 육백 명은 북 대륙 방어전에 지원하겠다는 건가.” 탁. 김한별은 조심스레 문을 닫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쭈뼛쭈뼛 걸어와 바로 앞에서 잠시 멈칫. 이내 책상 옆으로 돌아오며 시선을 피한다. 설마 설마 하는 와중 은근슬쩍 무릎을 굽히더니 결국에는 책상 아래로 엉금엉금 기어들어 왔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한별아….” 애타게 불러봐도 전혀 개의치 않고 내 바짓자락을 움켜잡는다. 하의가 스르륵 흘러내려 잠깐 시원해졌다가, 곧바로 중심부를 휘감는 끈적하고 부드러운 살의 감촉이 느껴졌다. 흘끗 아래를 흘기니 분홍빛 혀를 간드러지게 놀리는 김한별이 보였다. 핥핥, 핥핥…. 혀끝으로 잇따라 요도를 할짝거리니 별수 있나. 서서히 부푸는 남근을 느끼며 나는 가렸던 손을 내렸다. “왜 이래 정말. 너 원래 안 이랬잖아.” “이스탄텔 로우와 해밀은…. 할짝할짝…. 산하 클랜 포함해서 육백 명씩…. 하아, 남자 냄새….” “아니, 한별아? 내 말 듣고는 있는 거니?” “한(韓)은 오백 명 지원하기로…. 아, 전 십 강이었던 서진우와 죽음의 기사인 유지태도 참가한다고….” 이미 내 말은 귀에 들리지도 않는 건가. 너는 보고를 빙자한 욕구 충족에 집중하겠다 이거냐. 하는 짓이 참으로 맹랑하기가 이를 데 없구나. 이왕 이렇게 된 거 확 이라마치오(Deep Throat)나 해버릴까? “아사신에서는 이백 명을…. 조건에 부합하는 전문 암살자만 선별해서 보내겠다고….” 한껏 성이 난 남근은 꼿꼿이 발기해 타액을 번들거린다. 취한 눈으로 바라보던 김한별이 살며시 입을 벌린다. 딱딱한 기둥을 차츰차츰 삼키더니 끝내 완전히 고개를 묻는다. 저 작은 입으로 뿌리 끝까지 삼켰다는 게 자못 신기하다. “시 코아 여아에어으 파배 여….(신 코란 연합에서는 팔백 명….) 에이 시아오 후이하에하오….(예비 식량도 준비하겠다고….)” 신 코란 연합에서 팔백 명. 이것도 그나마 간신히 알아들었다. “…그냥 먹고 해.” 애초 펠라티오 하며 보고하겠다는 게 웃기기도 하지만, 사실 나도 들을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기둥에 닿은 목젖의 감촉이나, 귀두가 목구멍을 쑥 뚫고 들어간 감각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자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약간의 부담은 있는지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그 대신, 양물을 입안 가득 머금은 채 우물거리다가 아이스크림 빨 듯 흡입하기 시작한다. 조금 힘겨워 보이기는 해도 정성스레 빠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불끈불끈 해진다. 그렇게 맛있나? 문득 김한별이 입술을 힘 있게 오므리며 고개를 빼기 시작했다. 혀를 포개듯 잇댄 채 쭉 당기자, 흡사 남근이 뿌리째 뽑히는 감각에 절로 신음이 샌다. 이윽고 입술은 쪽! 소리를 내며 귀두를 놓아줬다. 아직도 입이 살짝 벌어져 있는 것이 안에 침이 잔뜩 괸 모양이다. 김한별은 그렁그렁한 눈을 치뜨며 고인 타액을 삼키기 시작했다. 꼴깍꼴깍, 한 모금씩 음미하듯 들이킬 때마다, 작은 고저를 그리는 흰 목울대가 몹시도 음란하다. “푸하!” 그렇게 완전히 들이마시고 나서야 땅이 꺼지라 숨을 토해낸다. 그리고 잠시 호흡을 고른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리버스에서는요.” …그래. 너는 어디까지나 보고만 할 뿐이라는 거냐. 얘도 이렇게 천연덕스러워질 때가 있구나. “천백 명 지원한다고 했어요.” “응? 천백 명이라고?” “네. 동 대륙 구원에 참가하는 열 클랜 중에서 가장 많은 숫자예요. 사실상 거의 전원이 참가하는 거죠. 물론 산하까지 포함해서.” “그래도 그렇게 많을 리가 없을 텐데. 아무나 막 집어넣은 거 아니야?” “저도 그렇게 의심했는데 아니었어요. 혹시 예전에 무사 클랜이라고 기억하세요?” “무사 클랜이라면….” 글쎄. 기억이 날 듯 말 듯한데. “아, 강철 산맥 때 제 이 지역 원정대에 포함된 클랜이었나?” “알아보니 강철 산맥 공략 때 클랜 로드가 사망했다고 해요. 그래서 공중분해 될 뻔했는데, 누군가의 소개로 리버스 클랜과 합병했다고 하네요.” “아 그래서…. 그런데 너 그건 어떻게 알았어?” “재룡 아저씨가 말씀해주셨어요.” “사용자 신재룡이?” “그 누군가의 정체가 재룡 아저씨거든요. 인연이 좀 있나 봐요.” 그러고 보니 언제 비슷한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정리해보면 현재 응답한 클랜은 우리까지 포함해서 총 여덟 곳이다. 그리고 병력은 총 사천칠백…. 응? “잠깐만. 열 클랜 중에서라고?” “네? 네.” “잘못 계산한 거 아닌가? 중앙 관리 기구는 빼라고 했잖아. 거기는 방어전 지휘를 맡는다고.” “알아요. 그런데 라이트 클랜이 구원군에 편성되고 싶다고 새로 연락해왔어요. 인원은 이백 명.” “라이트 클랜? 거기는 또 어디야?” “강철 산맥 공략 때 같은 조였잖아요. 그리고 나중에 편성 현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현재 구원군 내 사제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거든요? 그런데 라이트 클랜은 사제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니, 괜찮겠다 싶어서 일단 말씀드리겠다 했어요.” 그런가. 사실이라면 한 번 고려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다. 그럼 라이트 클랜도 참가한다손 치면, 총 병력은 사천구백 명. 십 이하로 버림 한 수까지 더하면 어찌어찌 오천 명은 넘을 듯싶다. 딱 맞추기는 했으나 약간 부족한 감도 없잖아 있다. “마법의 탑은?” “아직 연락은 없어요.” 김한별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고 내 사타구니를 향해 고개를 도로 숙였다. 나는 엘리베이터처럼 올라왔다가 내려가기를 반복하는 정수리를 부드러이 쓰다듬었다. 성난 남근을 달래주는 능동적인 혀의 움직임을 느끼며 조용히 상념에 잠기려는 찰나였다. 쾅! “오빠오빠!” “헉, 큭!” 이유정이 갑자기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동시에 순간적으로 입을 짓씹었다. 놀란 건 둘째치고서 라도, 김한별도 순간 놀랐는지 이로 꽉 깨물어버렸기 때문이다. 아, 아파라. “노크는 하고 들어와야지.” “아, 미안.” 히히 웃는 이유정을 보며 나는 스리슬쩍 의자를 안으로 들이밀었다. 그리고 입을 열려고 하다가 반사적으로 숨을 떨 듯 흘렸다. 가만히 있을 줄 알았건만,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김한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숫제 입으로 꼭꼭 물어주기까지 한다. “그, 그래서? 왜?” “아~. 다른 건 아니고. 오빠 혹시 남는 GP 좀 있어?” “GP?” “응. 있으면 좀 빌려주라.” “없지는 않은데…. GP는 거래가 안 돼. 그러니까 빌려줄 수도, 갚을 수도 없어.” “아는데, 상황이 상황인 만큼 말이라도 해보려고. 즉 오빠는 그냥 빌려준다고 말만 해주면 돼. 갚는 건 몸으로 갚을게.” 쪽! 젠장, 소리 내서 빨지 마. 들킨다고. 나는 헛기침하며 약간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 “헛소리하지 말고. 왜 빌려달라는 건데?” 그러자 이유정이 씩 웃으며 허리에 양손을 붙인다. “그건 비~밀!” 쪽! “후후. 오빠도 알다시피 요즘 전쟁 준비로 꽤 바쁘잖아.” 쪽! “그래서 우리끼리 준비하는 게 좀 있거든? 일종의 비밀 병기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 준비에 GP가 필요해. 엄~청 많이!” 쪽! “그런데 워낙 비싼 상품이기도 하고, 많이 사둘수록?” 그때 신 나게 말하던 이유정은 불현듯 눈을 찌푸렸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걸까. 눈을 깜빡깜빡하며 좌우를 한 번씩 번갈아 본다. 나는 황급히 발로 건드려 신호를 보냈다. 이유정은 한참 동안 고개를 갸웃하다가, 떨떠름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아무튼, 뭐 투자 개념으로.” 쪽~. 뭐냐 김한별. 너 설마 일부러 이러는 거냐. 아니면 이렇게 딱딱 박자 맞출 리가 없잖아. 살금살금 눈을 들자 실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이유정이 보였다. 이어서 방 안으로 순식간에 흐르는 마력 감지를 느낀 순간 걸렸다고 직감했다. 얘는 꼭 이럴 때만 촉이 좋더라. 쪽, 쪽, 쪽, 쪽? 그래. 너도 이제는 아주 들으라는 듯이 빠는구나. 한데, 상대를 놀리는 것 같다고 느꼈다면 내 착각일까? 그렇게 생각한 찰나, 이유정이 득달같이 달려와 허리를 굽혔다. 책상 안을 확인하더니 놀람 반 분노 반인 얼굴로 낯을 일그러뜨린다. “기, 김한별? 너 미쳤어?” “네? 왜요?” “거, 거기서 뭐 하는데?” “오빠하고 섹스하는 중인데요?” “뭐뭐뭐, 뭐?” “뭐, 구강성교기는 하지만요.” 이미 다 봤으면서 뭘 묻느냐는 듯한 말투. 이유정은 기가 막힌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하기야 저렇게 태연하게 말하는 걸 보니 나도 놀랍다. 그냥 헛웃음만 나온다. 이유정은 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리다가 느닷없이 빽 고함쳤다. “처, 처, 처, 철면피!” “네.” “파렴치해!” “그래요.” “몰염치해!” “알았으니까.” “뻔뻔해!” “저 계속할게요?” 김한별은 별꼴이라는 듯 코웃음 치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나는 빨고 있을 테니 너는 볼 일 보라는 듯한 낯으로 펠라티오를 재개한다. 그것도 아주 맛나 죽겠다는 얼굴로 말이다. 문제는,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이유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 하!” 이상한 소리를 지르던 이유정은 문득 겉옷을 신경질적으로 벗어 던졌다. 심지어 속옷까지 벗어 봉긋한 가슴을 드러내더니,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 책상 안쪽으로 쏙 쳐들어왔다. 설마 외세의 침략은 생각지 못했는지 김한별도 놀란 얼굴로 쳐다본다. “뭐 하시는 거예요?” “그럼 너는 뭐 하는데? 가슴도 작은 게.” “이건 도리가 아니죠. 제가 먼저…. 뭐라고요?” “아아아아~. 안 들려~.” 이유정은 들은 체도 않으며 어깨로 김한별을 세게 밀쳤다. 그리고 입을 아앙 벌려 귀두를 덥석 물었다. 김한별도 지지 않았다. 있는 대로 눈에 힘을 주더니 이유정과 볼을 맞붙이며 서둘러 지분 확보에 들어갔다. 잠시 후. “이익! 후룹~! 이이이익! 후루루룹~!” “으응! 쪼옥~! 으으으응! 쪼옥쪼옥~!” 두 혀가 얽히고설키며 살벌하게 남근을 탐한다. 사타구니에서 경쟁적으로 꿈지럭거리는 붉고 푸른 두 머리카락을 보며 나는 힘없이 책상에 엎어졌다. 이제 곧 출발인데, 얘들은 긴장도 안 하는 건가? * 마법의 탑에서 연락이 온 건 늦은 오후쯤이었다. (연락이 많이 늦었죠?) “괜찮습니다. 일정만 어기지 않는다면요.” 완곡히 돌려 말하자, 통신 수정 속 선율이 까르르 웃는다. (걱정하지 마요. 진군이 늦어질 일은 없을 테니. 단지 내부 설득에 시간이 걸렸을 뿐, 준비는 금방이에요. 원래 마법사라는 족속이 좀 그렇잖아요?) “뭐가 됐든 날짜와 맞출 수만 있다면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미안해요.) “?” (천사한테 전부 들었네요. 왜 그렇게 급하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했어요. 제가 그때 좀 날카로웠죠?) “아니요. 당연한 반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순간 정말로 천사가 전부 말해줬을 거라고 생각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의례적으로 말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떻게 구슬렸는지 모르겠으나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 누구 말마따나 좋은 게 좋은 거니까. 혹시라도 예전처럼 적대적인 프레임이 생긴다면 그것대로 귀찮아진다. 생각해보니 아이러니하다.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지만 천사의 수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게.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요. 어쨌든 설득도 끝났겠다. 조건에 맞는 실력 좋은 마법사가 무려 사백 명! 구원군에 정식으로 참가할게요.) “환영합니다. 아, 혹시 그 사용자도 참가합니까?” (저주 술사 강태욱이라면, 물론이죠. 아까 보니까 흥흥 콧노래 부르고 있던데요? 으, 소름 끼쳐.) “오. 희소식이군요.” (오는 뭔 놈의 오예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데. 말로만 미안하다고 하기는 좀 그러니.) “예, 예. 그럼.” 뚝. 나는 바로 통신을 끊었다. 뒤의 말은 듣지 않아도 뻔하다. 아마 입으로 하는 사과는 진정성이 없으니 몸으로 갚겠다 이런 말이겠지. 이렇게 열 클랜으로 이루어진 병력 편성이 완료됐다. 마법의 탑 소속 마법사들이 참가한 이상, 구원군의 전력이 한층 상승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특히 검증된 마법사는 한 명 한 명이 귀중한 전력이니까. 아무튼, 이로써 약 오천삼백 명인가? 버림 한 수까지 합하면 한 오천오백 명은 넘지 싶은데. 방어전은 이효을이 맡기로 했으니 신경 쓸 필요는 없겠고. 차후 현황이 올라오면 자세히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가장 급한 일을 끝냈으니 잠시 바람이라도 쐴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띠링! 문득 익숙한 신호음이 귓전을 울렸다. 바로 이어서 허공에 짧은 메시지 두 개가 출력되기 시작한다. 뭐지? 임무에 변경사항이라도 생겼나? 『사용자 이유정이 대리인의 자격으로 GP를 사용합니다.』 『사용자 김수현의 Gold Point 중 1,000,000 GP가 차감됩니다.』 그 순간 나는 크게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배, 백만이나?” 요청을 허락해주기는 했지만 끽해야 삼사십만 정도로 생각했는데. 어떻게 백만 GP나 사용한 거지? 도대체 뭘 샀길래? ============================ 작품 후기 ============================ 정글을 휘젓던 사납고 거친 야생의 수컷 곰은, 밤샘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에는 기절하고 맙니다. 쿠오오오…. ㅇ<-< 0883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느지막한 오후. “이제 좀 조용해졌나.” 나는 테라스에서 도시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해는 이미 넘어갔고, 황혼빛 하늘은 검은 물감에 젖어 차차 섞여 퍼지고 있다. 곳곳에 설치된 가로등이 하나씩 켜지며 어둠이 드리운 도시를 밝힌다. 잠자리에 들기 아직 한참 이른 시간인데 먼빛의 도시는 번잡하기는커녕 한산하다. 간혹 들리는 소음은 잔잔히 물결치는 파문처럼 금세 사라진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시끄러웠건만, 조금은 진정됐다고 봐야 하나. 천사가 그만큼 설득을 잘해냈다는 방증이겠지. 하지만 단지 가라앉았을 뿐, 평온한 분위기라고 볼 수는 없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서서히 희미해지던 소음이 뚝 멎을 때가 있다. 그 순간만큼은 사방의 적막함이 한없이 스산하고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 흡사 공기마저 숨을 죽이고 있는 기분. 하지만 낯설지 않다. 몇 번이고 겪어본 만큼 오히려 익숙한 기운이다. 그래, 도시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다. 돌이켜보면 며칠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정신없이 준비하다 보니 어느새 출발 일자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나마 저녁 식사 때 간소한 축제를 한 게 용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천사 덕분에 빠르게 준비할 수는 있었으나 모든 것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내부 인선을 발표할 때 사소한 문제가 생기기는 했다. 제갈 해솔과 차희영은 참가 조건을 불만족하지만, 선도 클랜 권한으로 편성시킬 수 있었다. 일종의 융통성이라고 해야 하나. 정작 걸린 건 마르였다. 거주민은 따로 제한을 두지 않았으나 그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실력은 둘째치고서 라도, 전쟁은커녕 원정 경험도 없는 애를 데리고 가는 건 어폐가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반대했다. 그러나 본인이 워낙 강하게 참가 의사를 밝혔고, 니뮤에도 따라가겠다고 나선 탓에 결국에는 허락해주고 말았다. 정말 많은 고민을 했으나 마르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사실 내심 기대하는 부분도 없잖아 있었고. 실제로 어떨지 모르지만, 두 요정의 참가는 뜻밖의 수확이었으니까. 아무튼, 완벽한지는 모르겠으나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준비한 것 같다. 이제 남은 건 내일 모여 출발하는 것뿐. 클랜원들은 뭘 하고 있으려나. 생각이 있다면 일찍 휴식에 들어갔거나, 싱숭생숭하면 장비를 손질하고 있겠지. 그리고 나는…. 가슴은 묘하게 고요하다. 막상 최후의 전쟁을 앞두니 이상할 정도로 담담하다. 그토록 기다려왔을 텐데 어째서일까. 아직 자기에는 이른 시간. 이렇게 멍하니 서 있는 것도 그러니 형을 찾아갈까, 세라프를 찾아갈까, 일 층으로 내려가 볼까, 아니면 방어전 준비는 잘 돼 가느냐고 이효을한테 연락해볼까. 여러 생각이 순식간에 뇌리를 스친다. 그러나 곧 머리를 흔들어 털고 연초를 한 대 꺼냈다. 각자 할 일이 있을 텐데 괜히 방해할 필요는 없잖은가. 그러니 오늘만큼은 혼자서 전운을 즐기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리라. * 조용한 새벽이 지나고 마침내 진군의 날이 밝았다. 흰 구름이 넘실넘실 흐르는 맑고 청명한 아침이었다. 그러나 성은 출발 준비로 몹시 소란스러웠다. 어젯밤 손질한 장비를 걸치고 내려오니 클랜원들은 이미 전원 정원에 모여 있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정하연이 서너 명을 앞에 세워두고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못 살아 정말. 너희 멋대로 하면 어떡하니?” 야단맞는 서너 명은 안현, 안솔, 진수현, 이유정이었다. 또 뭔 사고를 쳤는지 하나같이 고개 숙인 채 우물거리고 있다. “무슨 일입니까?” “어머. 수현?” 정하연이 깜짝 놀라 나를 돌아봤다. 좀 전까지 뾰족하던 음성이 단번에 가라앉는다. “후유.” 정하연은 네 명을 찌릿 흘기며 한숨을 내쉬었고, 천천히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이거 때문이에요.” 손에는 보석이 알알이 박혀 있는 작고 예쁜 가방이 들려 있다. 아기 카오스 미믹이다. “수현도 알다시피 카오스 미믹의 저장 공간은 굉장히 방대하잖아요?” “예. 그런데요?” “그래서 야영 장비를 깔끔하게 정리해 넣어놨는데 자기들 멋대로 빼고 뭘 집어넣었다네요.” “그럼 야영 장비는요?” “다른 배낭에 넣은 건 확인했어요. 그런데 왜 짐을 늘리느냐 이거죠. 이거 하나면 될 걸 세 개나 더 메고 가야 하잖아요.” “…정말이야?” 눈을 돌리니 넷도 동시에 눈을 돌렸다. 사실이군. 내려오는 즉시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라 일렀는데 이것 때문에 지지부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현재 집결 상황은 어떻습니까?” “방금 연락 왔어요~. 이스탄텔 로우는 이미 다나에 도착했다고 하고, 해밀은 잠시 헤일로에 들렀다 오겠다네요. 나머지도 워프 게이트로 가는 중인 것 같고요.” 주변을 돌아보며 묻자 어디선가 고연주의 나른한 음성이 회답해온다. 일 차 집결 지역은 구 북 대륙 소 도시 다나. 동남 방향에 자리 잡은 도시니 동 대륙으로 가는데 최적의 출발 지점이다. 여하튼 한소영의 신속함에 혀를 내둘렀으나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까딱 잘못해 늦으면 그게 뭔 망신인가. 짐 정리는 나중에 시간 날 때 할 수 있으니 일단 바로 가는 게 좋겠다. “너희 넷.” 조용히 입을 열자 넷은 흠칫 몸을 떨었다. 공포에 질린 네 쌍의 눈동자가 마지못해 나를 쳐다본다. 정하연을 팔짱을 끼기는 했으나 얼굴은 복잡해 보였다. “너희 멋대로 한 거니까 배낭도 너희가 들어야겠지?” 그 순간 네 명은 안색이 확 밝아졌다. “네!” “당연하죠!” 이어서 터지는 우렁찬 외침. 이 정도로 하는 게 낫겠지. 이미 한 차례 크게 혼나기도 했거니와 출발도 안 했는데 괜히 사기 꺾을 필요도 없으니. 턱을 까닥 젖히니 넷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하나씩 배낭을 잡는다. 문제의 아기 카오스 미믹은 안솔이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헤헤. 어서 적이랑 만났으면 좋겠다.” 혼잣말이기는 했으나 순간 귀를 의심했다. 내가 아는 안솔이 맞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솔은 이미 몸을 돌려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결국에는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뭘 준비했길래 저러는 걸까. …뭐, 가면서 물어보자. 우선 늦지 않는 게 중요하니까. “준비가 끝나는 대로 정문으로 모이세요. 바로 가야 할 것 같네요.” 기실 이번에는 공략이나 원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임무 메시지가 떴다고는 하나 어쨌든 전쟁하러 간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건 클랜원들도 알고 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여느 때와 비슷했다. 원정을 떠나는 것처럼 하나같이 밝은 얼굴로 준비하며 움직인다. 일부러인지는 몰라도 왜인지 고마운 감정을 느꼈다. 그래서, 나도 똑같이 행동했다. 언제 나와 같이. 이윽고 출발하기 직전 누군가가 천천히 가까워졌다. “사용자 조승우?” “클랜 로드.” 조승우는 약간 어눌하게 말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눈동자는 조용히 떨리고, 입은 달싹거리기를 반복한다. 편성 인원은 아니지만, 애초 비전투 사용자로 가입했으니 별로 어색해 할 필요는 없을 텐데. 물끄러미 응시하자, 돌연 숨을 힘껏 들이켜더니 멋쩍게 웃는다. “클랜은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예. 알아서 잘 하시리라 믿습니다.” “아, 그리고!” “……?” 몸을 돌리려는 찰나 황급한 목소리가 나를 붙잡는다. “이번에는 안심하고 다시 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번에는?” “저번에는 한 번 사망하신 줄 알았으니까요. 그러니 이번 임무는 깔끔하게 돌아오시라는 말입니다. 하하.” “아, 예. 그러죠.” 뭔 말을 하려는가 궁금했는데 그냥 싱겁게 웃으며 끄덕였다.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인사는 어제 축제 때 나눈 걸로 충분하니까. 나는 활짝 개방된 정문을 보며 말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그렇게 남는 클랜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바로 정문을 통과했다. 거의 강행군과 비슷한 속도로 걸어서인지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웅성웅성. 남 도시 워프 게이트에는 이미 여러 사용자가 모여 구름 같은 인파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주변만 빼곡히 차 있을 뿐, 정작 워프 게이트로 가는 길은 탁 트여 있다. 서 대륙 방어전으로 바쁠 텐데 잠깐 짬을 내 구경하러 온 듯싶다. 수군거리는 소리는 물론, 응원도 간간이 들렸으나 나는 빠른 걸음으로 길을 가로질렀다. 거침없이 회색 계단을 올라 푸른빛 포탈을 앞두고 멈춰 섰다. 그때였다. “!”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가려는 찰나,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칫. 곧바로 몸을 돌렸다.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불현듯 어디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찾을 수 없었다. 오직 클랜원들만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 “분명….” 이상하다. 왜 갑자기 허전한 기분이 드는 걸까? 무언가 중요한 걸 하나 잊은 것 같은 기분이…. “수현? 왜 그래요?” 바로 뒤에 있던 고연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 “수현?” 나는 한 번 더 사방을 꼼꼼히 확인한 후 턱을 흔들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 괜찮은 거예요?” 걱정스레 말한 고연주는 문득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행동이었으나 왜인지 눈에 밟힌다. 자세히 보니 몇 달 전이었나? 밤의 거리에 갔을 때 내가 선물한 목걸이였다. 그런데 왜 가져 온 거지? 굳이 거추장스러운 걸 달고 다니는 성격도 아니고, 전투와 관련된 효능은 아예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나는 잠시 요요한 빛을 반사하는 블랙 다이아몬드를 보다가, 도로 정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빛이 물결치는 포탈로 천천히 몸을 묻었다. 잠시 후, 시야는 흰빛으로 한가득히 칠해졌다. ============================ 작품 후기 ============================ 어제 코멘트 읽다가 간만에 빵 터졌네요. 저번 회 이유정의 행동은 애인이 자신의 카드를 멋대로 긁은 것과 다름없다. 개인적으로 멋진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하하. :) 그런데 왠지 몇몇 분은 경험담 같은 느낌이 나서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는…. ;ㅅ; PS. 그분에게. 하루 늦어서 죄송합니다. 생일 진심으로 축하 드려요. :D 0884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어느새 해는 완전히 저물고 어둑한 밤이 내려앉았다. 차츰차츰 깔리는 땅거미나 조금씩 차가워지는 공기는, 이제 곧 새벽으로 넘어간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우두두두, 우두두두! 땅이 흔들린다. 흡사 지축이 울부짖고 있는, 지진의 진원을 달리는 것 같은 기분. 그러나 가슴은 묘하게 고요하다. 지면을 흔드는 수천의 진동음도, 곳곳에 튀기듯 흐르는 흙 연기도, 이상하리만치 서서히 희미해져 간다. 감각이 아스라이 멀어지는 듯한 이상 현상 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오직 뺨을 스치는 찬바람. 그리고 빠른 되감기를 누른 듯이 시야를 지나치는 주변 풍경뿐. 그래, 그저 드넓은 초원을 달릴 뿐이다. 온종일 달린 탓에 심신은 천근만근 무거운데, 발이 땅을 박찰 때마다 몸은 깃털처럼 날아오르는 것 같다. 이대로 이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을 주파해버리고 싶을 만큼 가벼운 느낌이다. 이에 응하기라도 하듯이, 등 뒤로 뜨거운 공기와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섞여 전해진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얼마나 나를 필사적으로 쫓아오는지 알 수 있다. 간혹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으나 나는 일절 무시하고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이렇게 몇 날 며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린 결과, 성과는 꽤 혁혁히 거뒀다고 볼 수 있겠다. 원래 두 대륙을 횡단하려면 두 달, 즉 팔 주 정도 걸리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우리는 약 이 주라는 시간 동안 그야말로 전속력으로 행군했고, 현재 사 주는 족히 걸려야 도착할 지점을 돌파했다. 결과적으로 시간을 절반이나 줄인 셈이다. 아니, 어쩌면 중간 지점도 이미 넘었을지 모르겠다. 물론 아직 가야 할 길은 남았지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망연한 와중 천천히 위를 올려다보자, 반짝이는 별 무리가 시야를 가득히 수놓는다. 밤하늘에 홀로 떠오른 반달은 은은한 월광을 드리우기 시작하고, 차디찬 바람이 또 한 번 귓가를 스쳤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바람 소리에 무심코 의식이 멀어질 것 같다가, 황급히 붙잡았다. 나도 모르게 느려지는 속도를 인지한 건 추가로 사오백 미터를 전력 질주한 후였다. 기실 오늘 새벽 내내 달려 초원을 벗어나고 싶었으나, 이쯤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바로 뒤에서 느껴지던 기척이 어느 사이 상당히 떨어졌다. 그것은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으니. 먼저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고 있자, 곧 헐떡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가장 먼저 도착한 사용자는 정하연을 안은 채 얼굴이 퍼렇게 질린 고연주였다. 이윽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클랜원들도 속속히 도착하기 시작했다. 제갈 해솔을 안은 차소림은 언제나처럼 근엄한 표정이었지만, 얼굴빛은 핏기가 싹 가신 상태였다. 입술을 몇 번이나 깨문 자국도 눈에 밟혔다. 비척비척 걸어온 안현은 업고 있던 안솔을 내팽개치듯 떨어트렸고, 동시에 자신도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한참 동안 숨을 고른 후 입을 열었다. “혀, 형….” “응?” “왜, 마지막에, 전력, 질주를….” “아, 나도 모르게…. 미안.” 안현은 입을 크게 벌리더니 그대로 머리를 떨궜다. 비단 안현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허리를 꺾은 채 기침하거나 숫제 발라당 드러눕는 이까지 있었다. 마법사와 사제의 상태는 그나마 나았다. 애초 신체 능력치가 낮은 클래스니 강행군을 따라오지 못할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업고 오던지 안고 오던지, 낙오할 것 같으면 신체 능력이 좋은 사용자가 도우라고 일러뒀다. 아마 그만큼 근접 계열의 부담은 가중됐겠지. 흘끗 먼빛을 바라보자, 이미 대열 자체가 흐트러지다 못해 몹시 어지러워져 있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를 시간을 준 후, 혀를 쭉 내민 채 침을 뚝뚝 흘리는 하승윤의 등을 두드리고 있는 하승우에게 다가갔다. “하승우.” “응? 아아, 불사신인가.” “?” “욕을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잖아. 얘가 달리는 내내 얼마나 네 욕을 하던, 커헉!” 하승우는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헐떡이던 하승윤이 돌연 주먹을 꽉 쥐더니 하승우의 명치를 정확히 때렸기 때문이다. 소리 없이 풀밭을 뒹구는 하승우에게서 몸을 돌린 후, 나는 미안한 눈으로 안현을 바라보고 있는 안솔을 불렀다. “안솔.” “네? 네!” “오늘은 여기서 야영할 거야. 그리고 아침이 되자마자 바로 행군할 거고. 준비해.” “아, 알겠어요.” 행군 종료를 알리자 여기저기서 안도의 숨이 터진다. 안솔은 떨떠름히 끄덕였다. 그래도 일단 쉰다는 사실에 안심한 듯 눈을 반짝이며 어딘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곳곳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근접 계열은 여전히 드러누워 있고, 그 외의 클래스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궁수는 최소한의 방비를 위한 울타리를 만들고, 마법사는 모닥불을 지피거나 천막을 친다. 사제는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회복 주문을 외우고 저녁을 준비한다. 그렇게 진지가 완성돼가는 걸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즈음. “저, 수현아.” 문득 상냥한 목소리의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옆을 돌아본 순간, 웬 커다란 무덤 두 개가 물결치며 다가와 나도 모르게 기함…. 아, 임한나였구나. 나는 살짝 휘늘어진 거유를 보며 인사했다. “오, 안녕. 많이 힘들어 보이는구나.” “어, 어디 보고 말하는 거야.” 임한나는 팔짱 끼듯 가슴을 가리더니 눈을 살짝 흘겼다. 그러나 곧 표정을 고치더니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혹시 내일도 이 속도로 행군할 거니?” “…아마도?” “오늘 달리면서 보니까 대부분 체력이 상당히 떨어진 것 같아. 이러다 남 대륙보다 먼저 도착하겠다는 우스갯소리도 꽤 나오고 있고….” “…….” 임한나는 조심스레 말을 흐렸으나 하고자 하는 말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나는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불만을 가질 법도 했다. 천사를 제외하고, 이번 일의 전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알고 있는 건 나뿐이다. 그러니 출정식 등을 모조리 생략하고 무조건 행군하고 행군하는, 주야장천 죽어라 달리기만 하는 나를 이해 못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 그러나 사탄 덕분에 생긴 버릇이 하나 있다면, 중대한 사건이 터졌을 때 나도 모르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다는 것이다. 왜냐면 그때는 항상 그랬으니까. 일 회차 시절 ‘에이~. 설마 그러겠어?’ 라는 생각으로 안일하게 일을 진행하면, 사탄은 어김없이 그 허점을 파고들어 왔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당해보니 저절로 몸에 체득되더라.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최악의 상황을 전제했다. ‘남 대륙은 우리보다 먼저 동 대륙에 도착한다.’ 는 가정을. 조금이라도 안일에 빠지는 즉시 사탄은 그만큼의 기회를 얻게 된다. 홀 플레인으로 직접 나오는 강수까지 뒀는데 뭘 못하겠나. 애초 구원군을 최고 정예로, 그리고 오천 명 내외로 편성한 것도 행군 속도를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한 명도 낙오하지 않고 잘 따라오고 있잖은가. 비록 투덜거리고는 있지만 서도. 아무튼, 당장 힘들다고 속도를 줄여버리면 왜인지 사탄이 이 허점을 찔러올 것만 같았다. 이게 바로 내가 도 넘은 강행군을 유지하는 이유였다. “뭘 원하는지 알겠는데, 아직은 더 달려야 해.” “그럼 도착하기도 전에 지칠지도….” “물론 체력 안배는 염두에 둘 거야. 단, 도착 직전에.” “…그래?” “그래. 그나저나 북 대륙 상황은 좀 어때?” “…….” 갑작스레 화제를 돌린 이유는 더는 토 달지 말라는 의미였다. 뜻을 알아들었는지 임한나는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어제 연락 왔더라. 여전히 똑같아.” “똑같다고?” “응.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다가가면 후퇴하고, 가만히 있으면 살금살금 전진해오고. 이 상황의 반복이라는데?” “전진, 후퇴….” 역시 그랬나. 임한나는 어깨를 으쓱 들먹였으나 나는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다. 서 대륙은 현재 미끼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원래는 저번처럼 기습으로 뮬을 점령하고 수성하려 했겠지만, 천사가 미리 알아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니 그 대신, 어떻게 해서든 최대한 주의를 끌려는 거겠지. 부디 구원군이 이미 출발한 지 한참 됐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면 좋으련만. 그때 마침 식사가 준비됐다는 소리가 들려와, 나와 임한나는 동시에 걸음을 옮겼다. 사제들은 어기적어기적 걸어오는 근접 계열을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뜨거운 스튜를 듬뿍 덜어주었다. 잠시 후, 배부르게 먹은 근접 계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전원 천막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내일은 또 어떤 지옥 행군이 펼쳐질까 토론하다가, 소리 죽여 흐느끼며 잠들었다. 마법사와 사제는 뒷정리를 끝내고 곳곳에서 사 교대로 불침번을 선다. 행군 때 근접 계열 사용자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고 있는 만큼, 누구도 궂은일을 도맡는 데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나는 바로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물론 나도 근접 계열에 속하지만, 다나에서 출발한 이후 불침번만큼은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이는 나름 보여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혹시 모를 괴물 무리의 야습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주변에 적당히 앉은 후, 연초와 지도를 동시에 꺼냈다. 사실 동 대륙으로 가는 길을 자세히 아는 건 아니다. 가끔 방향을 가늠할 때 꺼내보기는 하지만, 사실 이 지도도 별로 믿음직스럽지는 못하다. 워낙 교류가 없었으니 정확할 턱이 있나. 뭐, 그래도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점과 점 사이의 최단거리가 직선임을 생각해보면, 어쨌든 방향만 잘 잡으면 되니까. 적어도 여기까지는 제대로 온 것 같으니, 다음에 나올 지역을 알아둘 필요는 있겠다. “어디 보자.” 일단 이 장소를 동 대륙과 북 대륙 사이 걸친 교집합 지점이라 치고. 그럼 초원을 벗어나는 즉시 동 대륙 지역으로 접어들게 된다는…. 사박사박. 사박사박. 그때였다. 한창 지도를 짚으며 길을 잡고 있는 동안, 불현듯 기척 하나가 천천히 가까워져 오는 걸 느꼈다. 또 행군 속도 좀 줄이자고 말하러 오는 거라면 별로 달갑지 않은데.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바로 눈을 돌려 입을 열었다. “누구시죠.” 그 순간 마른 검불을 밟는 소리가 뚝 멎었다. 바라보는 방향서 흐릿한 그림자가 주춤거린다. 그러나 곧 조심조심 걸어오더니 모닥불이 밝혀주는 공간으로 성큼 들어섰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건강히 살 오른 허벅지를 터질 듯이 감싼 반투명한 검정 밴드 스타킹이었다. 꿀꺽. 어디까지나 생리적인 현상으로 고인 침을 삼키며 점점 시선을 올린다. 이윽고 이 야심한 시간에 찾아온 누군가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어.” 나는 예상이 철저히 빗나갔음을 깨달았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어제 공지(코멘트) 없이 휴재한 불초 로유진입니다. 우선 죄송하다는 말씀을…. _(__)_ 다름이 아니고 개인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 가정사와 관련된 사정인데, 몸이 아픈 건 아니고, 경조사도 아닙니다. 에…. 사실 말씀드리기 좀 창피한데…. 사실 집에서 쫓겨날 뻔했습니다. ㅋㅋㅋㅋ; 실은 일요일 오전 11시에 가족 약속이 있었거든요. 말 자체는 토요일에 나왔고, 저는 그때 참석하겠다고 했고요. 아버지나 어머니나 형이나 전부 직장을 다니시다 보니 평소 시간 맞추기가 어려웠는데, 간만에 서로 시간이 맞아 아버지께서 기대를 좀 하신 것 같아요. 한데 그날 제가 밤샘 집필을 끝내고 너무 졸려서 아침에 잠들었거든요. 한 9시쯤? 그러니 11시에는 잠에 취해 일어나지 못했지요. 아버지께서 저를 억지로 깨우시기는 했는데, 저도 모르게 좀 심하게 짜증을 부렸네요. 못 갈 거 같으니 나 빼고 가시라고요. 그런데 그때 갑자기 무섭게 폭발하셔서…. 다행히 어머니와 형이 감싸줘서 살아남았지만(?), 사실 그때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왜 그렇게 화를 내고 심하게 말씀하시는지. 그 따위로 살 거면 글이고 뭐고 당장 때려치워라. 네 멋대로 하려면 나가 살아라. 이 두 마디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네요. 조용히 고개 숙이고 있다가 저도 순간 울컥해서 네, 나가 살게요 라고 한 마디 대꾸했는데 컴퓨터 부서질 뻔…. ;; 나중에 어머니한테 들어보니 평소 제 생활을 상당히 탐탁지 않아하신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몇 번 지나가는 말로 들은 것 같기는 한데, 참고 참으시다가 이번에 터지신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저라고 늦게까지 쓰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닌데…. 왜 이해를 못해주시는지. 쩝. 오늘 퇴근하실 때 인사는커녕 아는 척도 안 했는데 그게 또 마음에 걸리네요. 좀 슬프기는 한데, 뭐,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휴휴휴휴. 아. 그리고 이것과는 별개로 평소 제 태도에 관해 독자 분들의 비판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저를 감싸주실 필요는 없어요. 단, 그래도 적정선은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모니터, 폰 액정 뒤에 사람 있잖아요. 서로 얼굴 맞대고 이 새끼야, 이 쓰레기야 이렇게 말하면 듣는 상대가 얼마나 상처 입겠나요. 그러니 말씀은 하시되 비꼼, 욕설, 인신공격 등을 포함한 비난은 지양해주세요. 이번에는 저도 잘못한 게 있고, 가끔 보고 정신 차릴 용도로 코멘트는 남겨두겠습니다. 그러나 차후 도를 넘은 코멘트가 보일 경우, 삭제 + 블랙리스트로 등록하겠으니, 코멘트 작성시 부디 다시 한 번 생각해주시기를 바라요. 벌써 오전 5시 26분이네요. 독자 분들 모두 활기찬 화요일 맞이하시길. 로유진 올림. 0885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저예요.” 목소리를 쫓아 눈 돌린 김수현은 작은 탄성을 터뜨렸다. 마침 가벼운 바람이 불었다. 활활 타오르던 모닥불은 바람의 움직임에 이끌려 춤추듯 흔들린다. 그에 따라 점점이 흩뿌려진 불씨도 느릿하게 굽이지다가, 몇 개는 여인에게 떨어져 그늘진 달빛을 밝힌다. 의연히 걸어온 한소영은 김수현의 맞은편에 사뿐 앉았다. 그리고 차가운 빛을 발하는, 가느다랗고 매끈한 손가락을 펴 불을 쬐기 시작한다. 앉아도 되냐는 등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채로. 실례라면 실례라고 볼 수 있는 태도였지만, 이상하게도 한소영이 그러니 몹시 어울려 보였다. 심지어 김수현조차 말할 기회를 놓치고 한순간 시선을 빼앗기지 않았는가. 확실히 경국지색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여인이다. 만으로 스물아홉을 맞이한 한소영의 육체는 한창 원숙한 어른의 내음을 선연히 뿜어낸다. 선선한 바람이 불 때마다 실려오는 그윽한 색향은, 가슴 속 깊숙이 짓누른 욕정에 불을 지를 만큼 치명적이다. 게다가 긴 다리나 보기 좋게 살집 오른 허벅지가 농익은 색기를 뽐내는데, 사내가 어떻게 견딜 수 있으랴. 김수현이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었다. 물론 한소영도 알고 있다. 아니, 느끼고 있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상시 발동하는 초감각은 탄탄한 허벅지에 꽂힌 시선은 물론, 눈초리에 담긴 음탕한 욕정도 모조리 잡아내 전달한다. 스멀스멀 기어가는 듯한 원초적인 욕망. 원래대로라면 치 떨리게 싫어했을 감정일 터였다. ‘관심은 있어 보이는데….’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한소영은 안도하고 있었다. 원래 여인의 심리라는 게 참으로 오묘하다. 잘나고 못나고를 떠나서, 싫어하는 사람은 예쁜 짓을 해도 삐뚜름하게 생각한다. 반대로 좋아하는 사람일 경우, 눈앞에서 미운 짓을 해도 미소 짓고 응시한다. 아마 한소영도 이와 같은 사례가 아니려나. 한소영은 턱을 괸 채 후자에 해당하는 상대를 구경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김수현이 헤어나올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시선을 양 허벅지 사이 깊숙한 곳으로 차츰차츰 옮기는 중이었다. 한소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M자로 돼 있던 가랑이를 순간 좌우로 활짝 벌렸다. 검은 레이스로 장식된 지 스트링(G String) 속옷이 보일 정도로. “푸!” 불시에 공격받은 김수현은 힘차게 기침했다.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되는지 한껏 당황해 하며 상대를 응시한다. 그러나 한소영은 여전히 두 다리를 대담하게 벌리고 있었다. 물끄러미 응시하는 것이 흡사 ‘그렇게 보고 싶었니? 그럼 어디 한 번 네 마음대로 봐!’ 라고 엄히 꾸짖는 듯하다. “아, 아, 아, 안녕하세요.” 김수현은 가까스로 인사를 건넸다. 기실 한참 늦은 인사였으나 한소영은 차분히 무릎을 모으며 끄덕였다. “네.” “여기는 어쩐 일로….” “보고 싶어서요.” “예?” 김수현이 반문한 순간 한소영이 눈이 실쭉해졌다. 가장 싫어하는, 들었으면서 못 들은 척하는 버릇이 나왔기 때문이다. “아, 예. 아니, 들었습니다.” 실수를 인지한 김수현은 황급히 말을 정정했다. 이미 페이스는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저 눈만 깜빡이더니 멍청하게 입을 열었다. “혹시 행군 속도 문제 때문이십니까?” “후우우우….” 한소영은 얼굴을 감싸며 기나긴 한숨을 흘렸다. 흡사 너 들으라는 듯한 세찬 숨소리에 김수현은 난처한 얼굴로 눈치만 살핀다. “때리고 싶어….” “예?” “못 들은 척하지 마. 이 멍청이.” “예, 예?” “아니, 됐어요.” “…….” 결국에는 한소영이 백기를 들었다. 그러나 김수현은 전혀 이겼다는 기분은커녕 어색이 볼만 긁을 뿐이었다. 두 명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침묵했다. 모닥불이 탁탁 튀기는 동안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정적은 한소영의 분노를 서서히 사그라트렸고, 김수현을 진정하게 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가라앉자 한소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출발 때부터 궁금한 게 있었어요.” “……?” “왜 그렇게 불안해하시는 거예요?” “불안해…. 한다고요?” 김수현은 갸웃했다. ‘왜 이렇게 행군 속도가 빠르냐.’ 와는 궤가 다른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불안해한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글쎄요. 긴장이라면 몰라도, 불안은….” “원래 긴장과 불안은 한 끗 차이죠.”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마음을 졸이고 정신을 바짝 차리느냐. 아니면 확신하지 못하고 조마조마해 하느냐.” 그렇게 말한 한소영은 김수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느끼기에는, 머셔너리 로드는 긴장이 아니라 불안해하는 것처럼 보이네요.” 기실 긴장이든 불안이든, 각자 해석하기 나름이니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기면 그만이다. 그러나 김수현은 한소영의 말을 흘려 듣지 않았다. 왜냐면 넘겨짚어 말하는 게 아닌, 초감각을 바탕으로 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 사태는 복잡한 것 같아 보여도 사실만 놓고 보면 간단하죠. 남 대륙이 천사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동 대륙이 위기에 처했다. 북 대륙은 구원한다. …그래서 궁금했어요.” 한소영치고는 드물게도 말이 길다. “이 단순한 사실 관계에서 머셔너리 로드가 무엇 때문에 불안해하시는지. 제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게 있는 건 아닌지.” 어느새 김수현의 얼굴빛은 완전히 담담해졌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것이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하다. 잘 생각해보면 처음 선율이 그랬듯 한소영이 의문을 가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천사가 직접 나서 설득하기는 했으나 사실대로 밝히지 못한 사정도 있을 것이다. 그럼 어쩔 수 없이 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말했다손 쳐도, 북 대륙 사용자 중 한 명이 그 간극을 못 알아챘을까. 한소영은 할 말은 전부 했다는 듯 무릎에 턱을 살짝 묻었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 상대가 계속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실제로 김수현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 말을 꺼내는 것도 좋지 않을까고. 잠시 후, 김수현은 빙긋 웃으며 눈을 떴다. “아마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순간 한소영은 두 눈을 살며시 치떴다. 김수현은 한소영의 예상을 인정했고, 그것은 진실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하지만 지금 전부 말씀드리는 건 좀 그러네요.” 김수현이 머리를 가로젓는다. “그래요. 아직은….” 망설이는 듯 말을 흐리더니 천천히 턱을 젖힌다. 반쯤 감긴 두 눈이 칠흑 일색의 밤하늘을 공허하게 응시한다. 왜인지 그 모습은 너무나 외롭고 쓸쓸해 보였고, 한편으로는 뜻 모를 위화감도 느껴졌다. “아마 이번 전쟁이 끝나면, 그때는.” 그 순간이었다. “지금 듣고 싶다면요?” 사용자가 된 이래, 한소영은 처음으로 생각 않고 말을 뱉었다. 아차 한 찰나, 김수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보고 있었다. “음…. 꼭 지금 들어야겠다는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그 말에 한소영은 침묵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불현듯 느낀 위화감에 점차 사로잡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도 그랬다. 힘없는 얼굴, 허무하기 그지없는 눈동자. 육체가 아닌, 정신이 지칠 대로 지쳤다는 방증이다. 기실 한소영이 진정으로 궁금했던 것은 단 하나였다. 너덜너덜하다 못해, 갈기갈기 찢겨 스러지기 직전인 것 같은 김수현을 끈질기게 지탱해주는 무언가. 굳이 비유해보면, 한소영의 눈에는 김수현이 마치 촛불처럼 보였다. 김수현이라는 촛불은, 현재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불타오르고 있다. 보고 있는 이가 눈부실 정도로 환한 불빛을 뿜어낸다. 그러나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기는커녕, 오히려 속이 타고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이것만큼은 한소영도 정확히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어떤 근거도 없는 일종의 감에 불과하다. 그냥 아까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까닭 없이 불안했다. 그런 만큼, 이걸 알 수만 있다면. 어쩌면 조금이나마 부담을 덜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랬는데…. “없으면, 다음으로 미뤄도 괜찮겠지요? 하하.” 속없이 웃는 김수현을 한소영은 야속하다는 눈길로 응시했다. 왜냐면. “…….” 이따금 위태롭게 깜빡거리는 것이, 어느 순간 영영 사라져 없어질 것 같았으니까. 꺼지기 직전, 한 차례 크게 불꽃을 일으키는 촛불처럼. 밤은, 가없이 흘러가기만 한다. ============================ 작품 후기 ============================ 네. 사실 완결에 필요한 복선을 까는 건 맞습니다. 아니, 플래그라고 해야 옳으려나요. 하지만 우로부치 겐이라는 말씀은 좀; 뭔가 싶어 검색해봤는데 보고 식겁했네요. 차라리 나이트 런 같다면 모를까요.(?) 독자 분들께 궁금한 게 있는데, 제가 정말 그렇게 괜찮다 싶은 등장 인물을 자주 죽이나요? ㅜ.ㅠ 아무튼, 아무리 그래도 제가 무차별로 죽이겠나요. 고연주는 저도 애정하는 캐릭터입니다. 고연주가 죽을 일은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 0886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동 대륙 남서 방향의 소 도시는 네 성벽의 길이가 엇비슷한 마름모 형태로 구성돼 있다. 어쨌든 소 도시인 만큼 큰 규모라고 볼 수 없으나, 동 대륙의 발전 상황을 생각하면 ‘나름 튼튼해 보이는 것이 그럭저럭 성 구실은 하겠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있는 그대로 말하면 이곳은 시작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대륙이든 홀 플레인에 첫발을 내디딘 사용자가 있을 것이고, 긴 세월 동안 차근차근 세력을 확장해왔다. 말인즉 일종의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셈인데, 성에는 유독 오늘따라 긴장된 기조가 팽배해져 있었다. 아직 어스름한 새벽, 서리 낀 성벽 위에는 물경 수백을 헤아리는 그림자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동 대륙 사용자들이다. 천사를 통해 남 대륙 진군 소식을 접하고 서둘러 방비에 들어간 것이다. 서쪽 성벽에 서 있는 숫자만 해도 수백 명, 게다가 성벽 아래에는 갑절이 넘는 인원이 대기하는 중이다. 전원 눈에 잔뜩 힘을 준 채 도열해 있는 것이, 흡사 최후의 전쟁을 앞두고 있는 병사와도 같다. 그러나 비장해 보이기는커녕 두려워하고 있다는 표현이 옳지 않을까. 왜냐면 대다수가 떨면서 다가오는 공포를 이겨내려 애쓰는 분위기였으니. 그중, 성벽에 몸을 기댄 채 바깥을 바라보던 사내가 푹 한숨을 흘렸다. 서글서글한 눈매가 돋보이는 미남이었다. “정말 오는 건지….” 혼잣말을 중얼거린 사내는 좌우로 목을 꺾으면서도 계속 성벽 너머를 흘끗거렸다. 그리고 옆에서는 흑발을 가지런히 늘어트린 훤칠한 여인이 성벽에 걸터앉은 채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주변 상황과 대조하면, 약간 특이하게 느껴지는 여인이었다. 수려한 외모는 둘째치고서 라도, 흰 상의와 소매에 끈을 동여맨 풍성한 붉은 치마는 흡사 무녀를 연상케 한다. 무엇보다 사용자 대다수가 굳은 얼굴로 서 있는 것에 반해, 여인은 홀로 천연한 낯으로 먼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한동안 같은 곳을 바라보던 사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만 내려가지 그래.” 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옆을 돌아봤다. 사내는 여전히 눈을 돌리지 않은 채 말을 잇는다. “여기는 내가 있을 테니까. 내려가서 워프 게이트나 통제해. 여차하면 도망쳐야 하잖아.” 잠시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차곡차곡 다리를 접더니 성벽 안쪽으로 사뿐 뛰어내렸다. 그러나 계단으로 내려가지 않고, 천천히 팔을 들어 전방을 가리켰다. “와요.” 고요한 새벽 같은 음성. 여인이 지목한 곳은 하늘과 지평선이 맞닿을 만큼 머나먼 지점이었다. 반사적으로 여인의 손을 따라가던 사내는 순간 눈을 치떴다. “뭐라고?” “오고 있어요.” 흡사 뜬구름이라도 잡는 듯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게 거슬린 걸까. 사내는 눈을 찡그리며 앞을 응시했다. 두 손으로 싸늘히 식은 벽돌에 손을 짚더니 유심히 주변을 둘러본다. 그러나 딱히 시야에 걸리는 건 없었다. 오직 햇빛을 뿌리며 중천으로 오르는 태양과 따스한 빛을 분사하는 허허벌판만이 들어올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하나 이상한 건 있었다. 기연가미연가하기는 했으나 아주 작은 흙 연기가 어렴풋하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한참을 주시하던 사내는 결국에는 갸웃했다. 여인은 천천히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더니 졸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죽음…. 네, 죽음이 오고 있네요.” “아키노. 네 클래스는 알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좀 더 정확히 말해주지 않겠어?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결국에는 참지 못했는지 강한 불만을 쏟아냈으나, 여인, 아니 아키노는 변함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내는 언짢은 얼굴로 입맛만 다시더니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우우우웅! 바람치고는 거센 소리가 순간적으로 성을 한 바퀴 휩쓸었고, 청명하던 하늘이 돌연히 먹구름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하늘이 어두워지는 건 그리 빠르지는 않았지만, 성벽에 서 있던 사용자들을 당황케 하는 데는 충분한 속도였다. 웅성거림은 날개 돋친 듯 퍼져나가 성 전체가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다음 순간, 끄르르르르르르릉! 하늘이 찢겨 울리는 거대한 포효 소리가 사용자들의 고막을 세차게 때렸다. 아니. 실제로 하늘이 찢어지고 있었다. 몰려든 먹구름은 짐승이 아가리를 벌리듯 쩍 갈라졌고, 벌어진 구름 사이로 시커먼 구체가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흡사 태양조차 삼킬 듯한 거대한 크기였다. 그뿐일까. 볼수록 빨려 들어갈 듯한 기이한 뭉클거림과, 온몸을 짓눌러 압박하는 악의 가득한 기운…. 이윽고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검은 구체는 점차 가속하며 하강하기 시작한다. 꼭 이대로 성을 부숴버리겠다는 것처럼. “으아아아아아!” “꺄아아아아악!” 무시무시한 기운을 이기지 못했는지 결국 어디선가 비명이 터졌다. 하기야 이제 갓 대 도시를 공략한 수준인데 어디서 이런 공격을 본 적이나 있을까. 그러니 처음 보는 광경에 겁에 질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고, 사용자들은 자연스레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 즈음, 검은 구체는 이미 충분한 속력이 붙은 상태였다. “흩어져어어어!” 이 말도 안 되는 현상을 눈앞에 두고 사내는 절규하듯이 외쳤다. 그러나 늦어도 한참 늦었다. 이미 구체는 살벌한 연기를 푹푹 뿜으며 성벽으로 떨어지는 중이었고, 사용자들은 살이 터질 듯한 압력 때문에 몸조차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포탄처럼 강하하는 구체를 그늘진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을 뿐. 잠시 후. 번쩍! 무언가 크게 폭발하는 소리와 동시에 엄청난 굉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 해가 살금살금 올라가 동쪽 하늘이 훤히 밝아올 무렵, 우리는 밤을 새우고 행군한 성과를 맞이할 수 있었다. 끝없던 초원과 질척했던 늪지대, 그리고 임한나 가슴 같은(허준영의 말에 따르면.) 굴곡진 언덕 지대를 벗어난 지도 어언 삼 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장장 오 주 동안 직진에 직진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눈앞에 메마른 황야가 펼쳐졌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몇 번을 자랑해도 부족할 정도다. 보통 팔 주는 걸린다는 대륙 횡단을 거의 절반 가깝게 줄인 셈이니. 물론 그만한 대가를 치르기는 했다만. 아무튼, 황야로 돌입하자 확실히 달라졌다. 단순히 풍경의 변화를 말하는 게 아니다. 늪지대까지 미개척 지역을 공략하는 느낌이었다면, 임한나 가슴부터는, 아니 언덕 지대부터는 흔적을 드문드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메마른 황야는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완연히 드러나 있었다. 한 마디로 도시에 가까워졌다는 방증이다. 어쩌면 인근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 기쁜 소식을 전하려 뒤를 돌아봤다가 나도 모르게 주춤하고 말았다. 터벅터벅 쫓아오는 클랜원들의 모습이 좀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퀭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것이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기세였다. 워낙 행렬이 길어 자세히 볼 수 없지만, 구원군 전체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하기야 밤새도록 달렸으니 피곤할 법도 하다. 심지어 신재룡은 졸음 행군(?)을 하면서도 용케 대열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품에 안겨 있는 차희영은 온몸이 축 늘어진 채 자고 있었으니. 원래는 도시를 발견하고 안에서 휴식하려 했지만, 잠시 쉬는 게 좋겠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입이 찢어지라 하품하는 안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정지. 여기서 한 시간 휴식하겠습니다.” 다들 고생한 만큼 아예 대 휴식을 하기로 했다. 그러자 클랜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멈춰 섰다. 이어서 마법사와 사제를 안고 있던 근접 계열들이 한꺼번에 손을 놓는다. 쿵쿵쿵쿵. 악악악악. 엉덩방아를 찧는 소리와 작은 비명이 연달아 들린다. 마치 인간 도미노를 보는 것 같군. 잠시 후, 근접 계열들은 벌렁 드러누우며 다 죽어가는 침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나를 원망하는 소리가 섞여 들렸으나 너그러이 넘어가 주기로 했다. 마법사는 통신 수정을 꺼내 중군과 후군에 상황을 전파하고, 사제는 눈을 비비며 가방에서 생수와 씹을 거리를 꺼내 나눠준다. 그나마 체력을 보존한 궁수는 주변을 경계하거나 지형을 살피러 쏜살같이 흩어졌다. 삼십오일 내내 같은 상황을 겪어온 만큼, 이제 다들 알아서 움직인다. 나는 적당한 곳에 앉고 안솔이 가져다준 마른 고기를 씹고 생수를 들이켰다. 바싹 마른 몸에 시원한 액체가 스미니 정신이 한층 맑아진다. “크하아아!” “사, 살 것 같아.” 그렇게나 힘들었던 걸까. 게걸스레 물을 마신 진수현이 괴성을 토하고, 이유정은 캑캑거리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짓는다. 안현은 힘없이 앉아 있었다. 어깨를 늘어트린 채 머리를 푹 숙이고 있는 것이 혹시 죽은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형.” 그때 누군가 나를 불렀다. 그것이 안현이라는걸 깨달은 건 약 이 초가 지난 후였다. 나를 보지도 않고 낮게 말하니 바로 알 턱이 있나. “이 행군 언제 끝나요?” “곧.” “그 곧 이라는 말, 몇 번 더 들어야 해요?” “거짓말 아닌데. 너도 오면서 봤을 거 아니냐. 주변 보면 모르겠어?” 그러자 안현은 머리를 번쩍 들었고, 나는 절반쯤 남은 수통을 휙 던져줬다. 놀랍게도 안현은 입으로 정확히 받아내더니 그대로 턱을 젖혀 꿀꺽꿀꺽 들이켰다. 주변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이윽고 병나발을 불던 안현은 수통을 퉤 뱉으며 말을 이었다. 시꺼멓게 죽어 있던 눈이 미세하게나마 생기가 돈다. “후우우우. 그럼 이제 진짜로 도착하는 거예요?” “아마도?” “…어? 잠시만요. 그럼 설마 도착하자마자 전쟁을.” “그건 아니야.” 뭘 걱정하는지 알 것 같았지만 나는 싱겁게 머리를 흔들었다. “생각해봐. 우리는 동남 도시 다나에서 출발했지. 그럼 동 대륙 기준으로, 가장 가까운 도시는 어디일까?” 그리고 인근을 돌아보니 안현이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진수현은 멍하니 먼 산을 보고 있었고.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유정은 몹시 정색하고 있었다. …전혀 어려운 질문이 아닌데. 설마 정신이 나간 건가? 조금 슬퍼질 무렵, 신재룡이 쓰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동북쪽 도시겠지요.” “그렇죠. 그럼 남 대륙은?” 신재룡은 차분히 턱을 쓰다듬더니 약간 아리송해 하며 말을 이었다. “글쎄요. 이건 몇 가지 경우의 수를 계산해야겠지만, 그네들은 아마 남서쪽 도시로 가는 게 최단 거리로 생각됩니다만.” 신재룡의 추측은 내 생각과 일치했다. 아니. 사실 누구나 예측 가능한 사안이다. 그런데, 너희는 왜 아직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늦어도 내일부터는 행군 속도를 정상화할 거야. 휴식도 충분히 취할 거고. 운이 좋아 도시를 빠르게 발견하면 하루 정도 푹 쉴 수 있을지도 몰라. 동 대륙도 우리가 구원하러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적어도 박대하지는 않겠지.” 결국에는 딱 수준에 맞는 설명을 해주고 말았다. 효과는 확실했다. 유체 이탈을 시전하던 세 명의 안색이 순간 살아났으니까. “형님! 정말이죠? 곧 도시에 도착할 수 있는 거죠?” “만일 거짓말이시면 마르는 제가 데려갈 겁니다.” 안현은 마른 고기를 쭉 찢으며 낄낄거렸다. 저 대꾸할 가치도 없는 헛소리에 대답해주는 대신, 나는 스리슬쩍 옆을 흘끗거렸다. 그곳에는 수통을 들고 오던 차희영이 충격받은 얼굴로 멈춰서 있었다. 다시 앞으로 눈을 돌렸을 때, 안현은 이미 소리 없이 도망치는 중이었다. 그리고 다소곳이 웃은 차희영은 한 손을 뺨에 댄 채 성큼성큼 쫓아가기 시작한다. 곧 사방을 떠르르 울릴 안현의 비명을 기대하며 나는 연초를 한 대 꺼내 물었다. 그때 등 뒤로 황급히 달려오는 소리와 함께 선유운의 외침이 들렸다. ============================ 작품 후기 ============================ 컴퓨터 앞에서 담배 물고 꾸벅꾸벅하다가, 갑자기 불씨 섞인 재가 가슴에 떨어져 낭패를…. ㅜ.ㅠ 그것도 하필 나시 안으로 쏙 들어가서 살갗이 데이다 못해 까졌네요. 보니까 명치 위쪽에 발그스름하게 얼룩도 졌는데, 쓰라려 죽겠습니다. ㅠㅠㅠㅠ 0887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도시가 있습니다!” 단, 두 마디에 불과한 외침이었다. “예?” “에에에엑?” 그러나 선유운이 가져온 소식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아마 긴 휴식 시간을 이용해 정찰 겸 먼 곳까지 돌아본 것 같은데…. 가까이 있을 수도 있다 생각하기는 했으나, 왜인지 황당한 기분을 감출 수 없다. 그냥 운이 좋은 거라고 봐야 하나? 잠깐만. 도시가 근방에 있는데 왜 동 대륙 사용자 한 명이 보이지 않는 거지? 문득 불길한 예감이 스쳤으나 애써 털어냈다. 도시 안에 꽁꽁 틀어박혀 있을 수도 있으니. 우선 서둘러 가보는 게 좋겠다. 생각을 마쳤을 때, 클랜원, 아니 전 병력이 주섬주섬 짐을 챙기며 일어서는 중이었다. 이미 상황을 전달한 걸까. 한 명 한 명이 베테랑이라 그런지 확실히 상황 파악이 빠르다. 삽시간에 분위기가 가라앉더니 다 죽어가던 눈빛이 예리하게 번들거리기 시작한다. 잠시 후, 나는 행군 준비가 끝난 걸 확인하자마자 바로 출발을 알렸다. 그리고 선유운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적당한 속도로 걸음을 옮겼다. 약 이십 분 동안은 하늘과 마른 땅의 끝이 맞닿는 경계선만이 보일 뿐이었다. 뭉툭한 돌덩이들만이 간간이 밟힐 뿐, 이 거대한 황야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좀 더 걸어가자, 불현듯 먼빛으로 한 줌 티끌만 한 것이 조금씩 시야에 걸리기 시작했다. 꾸준히 걸을수록 점차 크기가 커지는 그것은 선유운의 말대로 도시였다. 이 버려둔 거친 들판에 정말로 도시가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눈앞 전경이 한층 선명하게 잡혔다. 도시 규모는 생각보다 작았다. 성벽은 보수 공사도 안 한 듯 몹시 낡았고, 곳곳에 모래바람이 묻어 흘러내리고 있다. 색깔도 누리끼리한 것이 과장 조금 보태 모래성이라 봐도 좋을 정도였다. “이야, 이건 뮬보다 심하잖아.” 안현은 한탄하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김한별은 가볍게 기침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콜록, 콜록. 아마 갓 개척한 도시가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건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작 중요한 건 따로 있다. 거리가 줄어들수록 긴장이라는 놈은 서서히 고개를 치키건만, 저 도시는 어째서 이렇게 조용한 걸까. 맞이하러 나오는 사용자는커녕, 오히려 쥐 죽은 듯 고요하다. 오죽하면 이 넓은 황야서 저곳만 시간이 정지한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뿐이다. “클랜 로드. 하늘입니다.” 이윽고 일백 미터 안쪽까지 좁혔을 즈음, 선유운의 음성이 나를 일깨웠다. 살며시 턱을 젖히자, 햇살을 눈부시게 반사하는 새 한 마리가 하늘을 선회하고 있다. 정체는 금세 알 수 있었다. 형이 항상 데리고 다니는 영물, 쪼롱이였다. 쪼롱이는 내가 보자마자 날갯짓을 멈췄다가, 서서히 기동을 재개했다. 첫 번째는 왼쪽서 오른쪽 아래로 비스듬히 비행하더니, 두 번째는 오른쪽으로 올라가 왼쪽 아래로 엇갈리듯이 내려왔다. 그러자 흘러나온 금빛 잔상이 하늘에 X자를 수놓고 있었다. “엑스?” “도시에 아무도 없다, 혹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뜻으로 보입니다.” 차소림이 담담히 말했다. 나도 비슷하게 생각했다. 확인한 이상 더 거리낄 건 없다. 우리는 도시를 향해 신속히 걸음을 놀렸고, 거침없이 성문으로 들어섰다. 가루가 툭툭 떨어지는 터널과도 같은 입구를 지나자, 비로소 도시 내부의 풍경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실례합니다아….” 마침내 도시로 들어가는 와중 누군가 조심스레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솔의 목소리였다. 때에 맞지 않는 말이었지만 그 누구도 웃지 않는다. 왜냐면 도시에는 정말로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도시를 발견했을 때부터 이상했다. 성벽은 몹시 낡았지만, 타격 입은 흔적 같은 건 딱히 찾을 수 없었다. 그건 내부도 마찬가지. 생쥐 한 마리 돌아다니는 기척도 느껴지지 않으나, 당장 눈에 보이는 구조물 중 반파된 것조차 찾기 힘들다. 도시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온전히 서 있다. “누구 없습니까!” 있는 힘껏 소리 질렀으나 왕왕 메아리만 칠뿐, 회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자 설마 했던 예상이 점차 현실로 다가오는 걸 느꼈다. 잠시 후. “수현. 리버스 클랜이 통신을 요청했어요.” “클랜 로드. 마법의 탑 클랜에서….” 비단 나만 이상함을 느낀 게 아닌지 여러 클랜에서 통신이 쇄도하기 시작한다. 갑자기 가슴이 갑갑해졌다. 나는 결국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 오천오백 명, 총 열 클랜으로 이루어진 구원군은 선봉, 중군, 후군 이렇게 세 개 군(軍)으로 구성돼 있다. 도시로 입성한 후, 나는 간단히 상황 설명을 끝내고 새로운 오더를 내렸다. 혹시 모르니 후군은 외부를 경계하고, 선봉과 중군은 도시 내부를 조사하라 지시한 것이다.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워프 게이트를 찾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찾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별다른 성과는 얻지 못했다. 그나마 알아낼 수 있었던 건 고작 두 가지. 우선 워프 게이트 자체는 건재하다. 그러나 발동에 반드시 필요한 메모리아 스톤이 사라졌다. 아무리 주변을 샅샅이 뒤져도 발견할 수 없었다. 다음으로 시도해본 건 북 대륙과의 통신이었다. 천사와 연결된다면 상황을 알 수 있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그 생각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연결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근거리에 있는 클랜과는 영상이 정상으로 송출됐다. 그런데 북 대륙과 연결하려고 할 시 잡신호가 굉장히 심하게 일었다. 무언가에 방해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쯤 되자 머릿속이 몹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워프 게이트 하나만 믿고 몇 날 며칠을 달렸는데, 기껏 도착해보니 도시는 텅 비었고 워프 게이트는 작동하지 않는다. 도시 조사에 일말의 기대는 걸고 있지만, 고연주조차 아직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젠장,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후우우우.” 아니, 생각 좀 차분히 정리해보자. 우선 현재 정확한 사실은 우리가 도착한 곳이 동 대륙 기준으로 북서 방향에 있는 도시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남 대륙과 악마의 행방. 역시 동 대륙 기준으로, 나는 가장 가까운 남서 도시를 첫 타깃으로 삼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이 빗나갔다. 딱 하나, 상정할 수 있는 그나마 가능성 높은 상황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건 가장 생각하기 싫은 경우의 수였다. 바로 동 대륙이 이미 점령당했다는 것. 물론 북서와 남서 도시의 거리는 멀지만, 사실상 대륙 내 도시 간의 거리를 따지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왜냐고? 워프 게이트가 있으니까. 전쟁 속에서 워프 게이트는 양날의 검이나 다름없다. 예전 서 대륙 부랑자 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만 봐도 알 수 있다. 북 대륙은 최우선으로 워프 게이트를 확보한 후, 아예 끊어버리지 않았는가. 설마 그럴 거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만에 하나 동 대륙이 워프 게이트를 통제하지 못했다면…. “수현.” 나도 모르게 얼굴을 감싸 쥐었을 즈음 문득 고연주의 음성이 들렸다. 이내 손을 내리고 바라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고연주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 있다. 무언가 알아낸 게 있다면 저런 표정을 짓지 않을 텐데. “어떻습니까?” “…미안해요.”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만 역시나. 탓할 생각은 없다. 고연주도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자책하는 얼굴을 하고 있으니. 갑자기 끝없는 늪지대로 침잠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억지로 표정을 가라앉혔다. 총지휘관의 자리에 있는 만큼 흔들리는 모습은 금물이다. 기실 이것 말고도 사방이 이해가 안 가는 일 투성이였다. 사용자는 보이지 않고, 흔적도 없으며, 장거리 통신이 방해받고, 메모리아 스톤이 사라졌다. 일련의 사정이 얽히고설켜 있지만, 분명 그만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복잡한 사정이. 그래, 일단은 조사를 끝내자. 나오는 정보가 있으면 좋고, 없으면 어쩔 수 없다. 중간중간 북 대륙과 통신을 시도하며 최대한 빠르게 다른 도시로 떠나는 수밖에. “그림자 여왕님도…. 흠. 그럼 이제 한 가지 방법밖에 없는 건가.” 그렇게 결론을 내렸을 때, 돌연 낮은 음성이 귀를 찔렀다. 흘끗 눈을 돌리니 허준영이 느릿하게 턱을 쓰다듬고 있다. “응. 그러네.” 그러자 인근에 있던 이유정도 심각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방법? 뭐지? 살금살금 걷던 이유정이 멈춘 곳에는 다름 아닌 안솔이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뒤돌아선 채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이유정은 안솔의 뒤에 서서 어깨를 툭 건드렸다. “안솔. 잘 들어.” “……?” “이제 믿을 건 너밖에 없어. 그러니 네가 뭐라도 좀 해봐.” “…….” “자, 한 번 보여주는 거야! 가라, 안솔츄!” “…하아.”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으려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무언가 내가 모르는 방법이 있는가 기대했는데, 참 놀고 있다. 이제는 숫제 어이없는 걸 넘어서 화까지 날 지경이었다. “너희는 지금.” 그때였다. ‘이 상황에서 장난할 생각이 드는 거냐?’ 라고 말하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입을 닫고 말았다. 왜냐면 이유정의 말이 끝나는 걸 기점으로, “안솔안솔….” 안솔이 정말로 이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으, 응?” 심지어 이유정도 정말 이럴 줄 몰랐다는 듯이 엉거주춤 팔을 뻗는다. “안, 읍!” “닥쳐.” 그러한 찰나, 허준영은 번개처럼 달려와 이유정의 입을 틀어막는다. “읍, 으읍!” “조용히 하라고. 진짜로 작두 탄 거 같으니까.” 허준영은 조용히 속삭이며 턱짓하자, 흘끗 눈을 흘긴 이유정은 발광을 멈추고 서서히 얌전해졌다. 아닌 게 아니라, 안솔은 아까부터 한 곳만을 바라보며 홀연히 걸음을 놀리고 있었다. 한데, 걸어가는 뒷모습이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느꼈다면 내 착각일까? “김수현.” 허준영은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나를 돌아봤다. 나도 바로 머리를 끄덕여 화답했다.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내심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게다가 행운 능력치 105포인트의 감이라면 한 번 걸어볼 만하지 않을까. 그렇게 사방이 조사로 분주한 가운데, 우리는 총총히 멀어지는 안솔의 뒤를 쫓았다. ============================ 작품 후기 ============================ 후, 세이프으으으! 진짜 간신히 세이프했네요. 11시 58분에 집필을 마쳤습니다. 오늘 집필 내내 진심으로 죽을 맛이었습니다. 후회를 수십 번도 넘게 한 것 같아요. 내가 왜 그런 코멘트를 남겼을까, 내가 왜 코멘트에 그런 약속을 했을까 등등. 독자 분들은 오늘 제가 어떤 심정으로 글을 적었는지 정말 모르실 겁니다. 진짜 시계만 한 일백 번은 넘게 본 것 같아요 ㅋㅋㅋㅋ 심장이 막 두근거리고 그러는데, 아후. 다시는 못할 짓 같습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자정에 업데이트하니 기분은 정말 좋네요. :D 자, 칭찬해주시고 싶으시면 오랜만에 머리나 한 번 쓰담쓰담해주시지요.(거만거만) 0888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라는 말이 있다. 이 라틴어는 ‘신의 기계적 출현’을 뜻하는데, 도저히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사건을 신의 힘을 빌려 기적적으로 해결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거듭 인지하지만 안솔의 행운 능력치는 105포인트다. 어느 능력치든 101포인트만 찍어도 인간을 초월했다고 볼 수 있는데, 105포인트는 어느 정도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런 만큼 이번에도 마음속으로 막연히 기대하는 게 없잖아 있었다. 통과의례서부터 보여줬던 것처럼, 이번에도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지 않을까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꼬이다 못해 비틀린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장소로 안내해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안솔의 걸음이 처음 멈춘 곳은 장소가 아닌 사람이었다. 느릿하게 집게손가락을 뻗더니 느닷없이 상대의 옆구리를 꼬옥 찔렀다. “으, 응?” 그러자 한창 조사에 열중하고 있던 차희영이 깜짝 놀라며 돌아본다. “왜?” 당연한 질문이었으나 안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 있는 채로 물끄럼말끄럼 쳐다보기만 할 뿐. 눈을 깜빡깜빡하던 차희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우리를 바라봤다. 그 표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얘 갑자기 왜 이래요? 순간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 고민이 들었다. 그러나 언제 따라왔는지, 제갈 해솔이 “쉿.” 신호를 보내더니 돌연 조용히 캉캉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저 춤이 뭘 의미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차희영은 사정없이 아미를 찡그렸지만, 어쨌든 떨떠름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안솔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우리도 침묵하며 뒤를 쫓았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우리는 이번에야말로 장소라 부를 수 있는 곳에 도착했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계단 너머에는 잿빛으로 된 돔형 구조물 하나가 서 있었다. 곳곳에 금이 가 있는 게 초라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으나, 나름대로 규모는 있는 것이 아마 신전인 듯싶다. 신전도 주요 건물 중 하나인 만큼, 계단을 올라가자 한창 조사 중인 사용자가 여럿 보였다. 그중 한 명이 우리를 돌아보더니 아는 체를 해왔다. “아, 수?” 그 순간 형은 흠칫 놀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안솔이 막 손을 들던 형의 앞을 그대로 지나쳤기 때문이다. 형은 건물 안으로 모습을 감추는 안솔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갑자기 은근한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무언가 직감하기라도 한 것처럼. 역시 눈치가 빠르다. 조용히 눈짓하니 형이 스리슬쩍 무리에 합류했다. 그리고 우리는 앞서 들어간 안솔을 황급히 쫓아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 풍경은 딱히 별다른 것 없이 평범했다. 단지 빛이 드는 곳이 적고, 라이트 스톤도 작동하지 않아 조금 어두운 편이기는 했다. 한편으로는 밖에서 봤을 때보다 안이 꽤 깊었는데, 불현듯 멀리서 커다란 석상이 눈에 들어왔다. 석상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 안솔은 그 주변에 멈춰서 있었다. 석상의 높이는 약 오륙 미터는 넘을 만큼 큼직했다. 근육이 두드러지는 몸과 날렵해 보이는 네 개의 다리, 그리고 갈기까지 있는 것이 한 눈에 봐도 사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다. 아무튼, 석상은 석상이고. 바로 제 3의 눈으로 석상을 바라봤으나 딱히 이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럼 그냥 보통 장식물이라는 건데, 안솔은 왜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온 걸까? “혹시 장치가 있는 건 아닐까? 가령 발톱을 누르면 무언가 나타난다든지.” “어쩌면 비밀 통로와 이어져 있을 수도 있겠네요.” 클랜원들은 각자 의견을 내놓으면 석상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방금 확인했다시피 장치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보다 차희영을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아니면 괜히 데려왔을 리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안솔을 쳐다보자, 문득 이상한 기분이 느껴졌다. 가만히 보니 안솔은 석상을 보고 있지 않았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졌음에도 미동도 보이지 않은 채 석상 왼쪽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심원한 눈동자를 보고 있으려니 스산한 기분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였다. “응?” 마침 주변을 돌아보던 차희영이 갸웃 고개를 기울였다. 안솔이 바라보는 곳을 굽어보더니 숫제 무릎까지 꿇으며 가까이 들여다본다. 그곳에는 석상서 떨어진 것 같은 아주 작은 깨진 돌덩이가 일여덟 개 흐트러져 있었다. 그때 차희영이 갑자기 “후우우우!” 힘차게 입바람을 불었고, 무언가 알아차렸다는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하나 신기한 건, 돌덩이들이 세찬 입바람에도 일 밀리미터도 쓸려나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시 표식이었네.” “표식?” “네? 아, 네. 이거는 무녀가 자주 사용하는 일종의 고유 언어라고 보시면 돼요. 한 마디로 무언가 나타내거나 알려주는 일종의 방식…? 아무튼 그런데, 저도 무희다 보니 무녀에 관해서 어느 정도 공부했거든요. 그래서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어떤 뜻인데?” 바로 물었으나, 차희영은 우물쭈물하더니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짓는다. “에, 표식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런데?” “어떻게 할 수 없는 건 아닌데…. 그러니까 이 표식이 뭘 뜻하는지 알아야 뭐라도 좀 할 수 있는데, 제가 지식이 부족해서…. 아! 아마 한나 언니라면 아실지도 몰라요.” “임한나가?” 그러고 보니 임한나도 고대 무녀의 진전을 이어받은 클래스였던가? 임한나는 따라오지 않았지만, 오 분도 지나지 않아 신전에 도착했다. 대화를 듣고 있던 허준영이 신속히 찾아 데려온 것이다. 차희영의 말대로, 임한나는 표식을 보자마자 대번에 알아차렸다. “어머. 이건 초혼 표식이잖아.” “초혼 표식?” “응. 내가 이용하는 힘 중에 강신이라는 게 있거든?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거의 비슷하다고 봐도 좋아. 그런데 이게 왜 여기 있는 거니?” “아~. 초혼이었구나.” 조용히 듣고 있던 차희영이 혼잣말로 탄성을 터뜨렸다. 그리고 풍성한 소매 속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푸른빛이 흐르는 부채를 꺼내 들었다. 임한나는 상냥히 웃으며 두어 걸음 물러나더니 내 귀에 속삭였다. “한 번 봐봐. 초혼은 일종의 주술이라 볼 수 있어서…. 아마 신을 기원하는 나보다 희영이가 더 나을 거야.” 사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으나 그냥 끄덕이고 말았다. 어쨌든 중요한 일은 따로 있으니까. “────. ────.” 가만히 보고 있는 동안, 주문을 빠른 속도로 웅얼거리던 차희영이 문득 쫘르륵! 소리 날 정도로 부채를 세게 펼쳤다. 부채 든 손은 그림 그리듯 우아한 동선을 그리다가, 돌연 표식을 가리키며 뚝 멈췄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돌 조각 하나하나가 멀건 빛을 뿜기 시작하더니, 곧 시퍼런 빛을 띤 아지랑이 같은 것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왜인지 차가운 느낌을 주는 연기는 허공으로 올라오며 뭉쳤고, 점차 하나의 형체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그 형상이 인간 같다고 느끼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잠시 후. - 危ない逃げて! 갑자기 웅혼한 외침이 귀를 찔렀다. 순간 놀라 쳐다보자, 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푸른빛으로 이루어진 형상은 반투명한 빛을 띠고 있어 약간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나마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선이나 가냘픈 몸의 윤곽으로 여인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하나 이상한 점은 형체가 온몸을 덜덜 떨고 있다는 것이다. 흡사 공포에 질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혹시 일본어 좀 하는 사용자 있습니까?” 형이 주변을 돌아보더니 품속에서 구슬 두 개를 꺼냈다. “꼭 마법사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이 구슬에 마력을 주입하면 자동으로 번역돼서 들을 수 있거든요.” 그러자 잠시 웅성웅성하더니 진수현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엄청나게 잘 아는 건 아닌데…. 그냥 혼자서 독학한 수준이라서…. 조금이라면 알아들을 수 있어요.” “한 명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형은 흔쾌히 끄덕이며 두 개의 구슬을 건넸다. 굉장하네. 마력만 넣으면 자동으로 번역해준다니. “언제 저런 거 만들었어?” “내가 발명한 거 아니야.” 형은 쓰게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있어. 사용자 양기덕이라고. 예전 강철 산맥 때 덕을 좀 봤는데, 공략 이후 한 번 더 찾아온 적이 있거든. 그때보다 더 업그레이드했으니 한 번 시험 좀 해달라고 샘플 몇 개 주더라고. 깜빡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네.” 형의 말은 끊임없이 무어라 외치는 여인의 고성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때 진수현이 손으로 넘어간 구슬이 번쩍 빛을 뿜었고, 때마침 여인의 외침과 겹쳐서 울렸다. - 도망쳐! 민나아아! “푸!” 찰나의 순간, 누군가 웃음을 터뜨렸다가 바로 조용해졌다. 흘끗 눈을 흘기니 제갈 해솔이 두 손으로 입을 꽉 틀어막고 있었다. 그나저나 민나는 무슨 말이지? 아마 번역이 정상이 아닌 것 같은데. 여하튼 진수현도 엄청나게 잘 아는 건 아니라고 했으니 일단 계속 보기로 했다. 애초 번역 마법은 본인이 아는 만큼 전달 수준이 달라지니 감수하고 보는 수밖에.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 팥고물! 응? 팥고물? “킥!” 여인은 또 이상한 말을 뱉는 동시, 폭발에 휩쓸리기라도 한 듯 갑자기 허공을 날아 바닥에 쓰러졌다. 왜 저러는지 모르겠지만, 제갈 해솔은 숫제 허리까지 꺾는 중이었다. “어이. 너 일본어 알고 있는 거 맞아?” 나만 이상한 게 아닌지 허준영도 핀잔 조로 말했다. “조, 조금밖에 모른다고 했잖아요….” 진수현은 당장 폭발할 것 같은 시뻘게진 얼굴로 조용히 우물거렸다. 그러는 동안 야구공처럼 통통 바운드하던 여인이 간신히 고개 들어 중얼거렸다. - 진한개…. 진한개 응 있고…. “꺄하하하하하하하!” 이번에도 이상한 말이 들리자, 제갈 해솔이 갑자기 주변이 떠나가라 웃어 젖혔다. 한참을 정신없이 웃더니 시선이 쏠린 걸 알았는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다. “후에, 후에에에…. 이, 이게 번역이 잘못된 건 맞는데요.” “…….” “팥고물의 일본말이 앙꼬인데…. 그러니까 이게 아앙이라는 말을 오역하면 앙꼬로, 그래서 우리말인 팥고물로….” “…….” 조금 횡설수설하는 것 같지만, 어쨌든 팥고물이 아니라 아앙, 즉 신음이라는 건가? 폭발의 여파에 휩쓸렸던 것 같은 상황과 연관 지으면 얼추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당최 어떻게 공부했길래 팥고물이라는 말이 나오는 거지. “그럼 진한개는?” “그것도 오역이에요. 정상으로 번역하면 이 녀석이라는 뜻이죠. 평소 일본어를 어떻게 독학했는지 알 것 같네요. 아, 존나 웃기네.” 제갈 해솔은 한 번 더 까르르 웃더니 살며시 윙크했다. 진수현은 푹 머리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도로 앞에 집중했다. 여인의 형상은 한동안 쓰러진 채로 망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입을 살짝 벌린 채로 절망한 표정만 짓고 있다가, - 아, 안 돼! 느닷없이 외치며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다음 순간, 땅을 박차 어딘가로 뛰어가는가 싶더니 필사적으로 손을 뻗는다. 계속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갑갑해졌다. 초혼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주변 풍경도 같이 나오면 좋으련만. 여인 혼자서 말하며 움직이니 연극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 어딘가로 내뻗은 듯한 팔이 돌아온 찰나, 나도 모르게 눈에 힘이 들어갔다. 왜냐면 여인의 손아귀에 좀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조막만 한 것이 잡혀 있었으니까. 메모리아 스톤이다. ============================ 작품 후기 ============================ 어제보다 조금 늦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빠르게 업데이트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어제는 진짜…. 하…. 덜덜 떨면서 적다 보니 트라우마가…. ㅜ.ㅠ 계속 정진해서 시간을 앞당겨보겠습니다. 노력하면 자정 연재도, 일일 연재도 무리는 아니겠지요. 적어도 에피소드 1 전에는 꼭 처음 연재하던 때처럼 돌아가고 싶네요. :) 0889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잠깐 웃음이 터지기는 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분위기는 금세 가라앉았다. 클랜원들도 여인의 손에 쥐어진 메모리아 스톤을 확인한 듯싶다. 정보가 제한된 만큼 나는 형상이 움직이는 걸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여인은 메모리아 스톤을 꼭 안은 채 황급히 이동하고 있었다. 가끔 흠칫 몸을 웅크리거나, 사방을 면밀히 살피며 덜덜거리는 모습은 하나의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도시에 문제가 터졌다. 아니. 터졌을 것이다. 현 상황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 그 문제가 무슨 일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때 여인의 정신 없던 달음박질이 돌연 뚝 멎는다. 목적지에 도착한 걸까. - なに? “나니? 뭐야? 라는 뜻이에요. 아마 뭘 본 것 같은데.” 어느새 진수현은 스리슬쩍 물러나 있었고, 그 대신 제갈 해솔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될 거면 진작 나섰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튼, 확실히 제갈 해솔의 말대로였다. 여인은 몇 초 동안 멍하니 서 있더니 털썩 힘없이 주저앉는다. 이어서 공포에 질린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なぜ…. どうして…. “나제…. 도우시테…. 왜…. 어째서….” 겹친 두 음성이 공간을 고요히 울렸다. 흡사 믿을 수 없는 걸 본 듯한 반응. “뭘 봤길래 저러는 거지?” 그때였다. 누군가 중얼거린 순간, 망연히 앉아 있던 여인이 화들짝 고개 돌렸다. 곧장 몸을 일으키더니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흡사 무언가에 쫓기듯 도망치는 것처럼. 잠시 후, 여인은 지친 듯이 비틀거리더니 석상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그리고 좌우를 한 번 둘러보고 메모리아 스톤을 꺼냈다. 그럼 아까 여인이 주저앉았던 곳이 신전 앞 광장이라는 건데. 설마 흔적을 일부러 지웠다는 건가? 생각이 끝나기도 전 애달픈 기합 소리가 들렸다. 여인은 신전 바닥을 향해 서너 번 주먹질을 했고, 메모리아 스톤을 꺼내 묻는 듯 손바닥으로 몇 번이나 두드렸다. 그렇게 계속해서 손을 놀리더니, 문득 형상이 투명해지면서 격렬하게 물결치기 시작한다. 영상은 여기까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인의 형상이 완전히 사라졌으니까. 빛이 사그라진 후 나는 홀린 기분으로 걸어가 허리를 굽혔다. 여인이 최후에 있었던 자리에는 여전히 일여덟 개의 돌덩이가 놓여 있다. 단지 이제는 바닥에 금이 가 있는 것이 눈에 밟혔다. 꽤 급해 보였건만 참 정성스럽게도 붙여놨다. 워낙 낡은 건물이다 보니 지나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살며시 힘을 주니 바닥은 쉽게 갈라졌다. 손을 집어넣자 푹 파인 구덩이로 빨려 들어갔고, 몇 번 휘젓기도 전 딱딱한 돌덩이 같은 것이 걸렸다. 나는 그것을 꽉 쥐고 천천히 허리를 폈다. 찾았다. 메모리아 스톤. “이게 끝이에요?” 안현이 뒤늦게 중얼거렸다. 허탈한 목소리였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좀 알겠네. 이 초혼 표식이라는 건 우리에게 남기는 메시지였군요.” 머리 회전이 빠른 클랜원 몇 명은 이미 감을 잡은 것 같다. 말 그대로 이 여인이 남긴 메시지는 현 상황에서 천금의 값어치를 하는 정보였다. 이 메시지 덕분에 두 가지 정보를 추가로 얻었다. 우선 설마 설마 했지만, 남 대륙과 악마는 일부나마 워프 게이트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 것 같다. 그리고 동 대륙은 우리가 이 도시로 구원하러 온다는 걸 알고 모종의 행동을 취했다. “허 참. 믿기 지가 않는데.” 허준영은 집게손가락으로 턱을 긁다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어지간한 개 병신 새끼들이 아니고서야 워프 게이트를 점령당할 리가….” “그만큼 경험이 부족하거나 상대가 압도적이었다는 거겠지.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고. 아무튼, 그래도 똑똑한 사용자가 있었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네.” 그렇게 말한 고연주는 입맛을 다시며 나를 쳐다봤다. “수현.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지요.”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답했다. 고연주는 고개를 끄덕거렸으나 아직 아리송해 하는 이들이 보였다. 말인즉 처음 침략당한 도시의 워프 게이트가 점거당했다면, 지금쯤 동 대륙 대부분이 연합군의 손에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까지는 내가 조심스레 예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동 대륙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고연주 말마따나, 그나마 머리가 돌아가는 사용자가 발 빠르게 후속 조치를 취했다. 도시가 한두 개도 아니고 열세 곳이나 되는 만큼, 가까스로 지킨 최후의 보루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진성 바보가 아닌 이상, 현재 워프 게이트 연결 고리는 모조리 끊어놨을 터. 그럼 우리는 그 도시를 찾으면 된다. 아니. 찾을 필요도 없다. 우리가 이 도시의 워프 게이트를 활성화하면 그쪽에서도 알 수 있을 테니까. 상대가 연결을 살리는 순간 바로 넘어간다.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건 이런 의미였다. “하지만 그쪽에서 어떻게 알 수 있을지….” “바~보. 워프 게이트가 일방통행이 아니라 양방향이라는 사실도 몰라?” 이유정이 핀잔 조로 말하자, 차희영은 그제야 아차 탄성을 질렀다. 이유정이 이해했다면 거의 알아들었다고 봐도 좋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새로 상황 전파하겠습니다. 현 시간부로 전 병력 조사를 중지하고 워프 게이트 앞으로 집결합니다.” 구구절절 말할 것도 없이 이 두 마디면 충분했다. 마법사들은 얼른 통신 수정을 꺼내 들어 마력을 불어넣었다. 이내 곳곳에서 흐르는 말소리를 들으며 나는 워프 게이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전장은 코앞에 있다. * 김수현의 예상대로, 현재 동 대륙은 대부분 남 대륙과 악마의 손에 넘어간 상황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동 대륙에 다다른 시기는 약 삼 주 전. 북 대륙보다 한 발 앞서 도착하기는 했지만, 연합군은 최대한 빠르게 동 대륙을 점령해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첫 공격 때부터 타나토스의 막강한 힘을 앞세워 있는 대로 화력을 퍼부었고, 상대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성 내부로 노도와 같이 침략했다. 물론 동 대륙이 네 대륙 중 가장 수준이 떨어지고 경험도 적었지만, 가만히 앉아서 당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동 대륙 지휘관 중 한 명인 아키노는 첫 공격이 깨졌을 때부터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 믿을 수 있는 부하를 시켜 북 대륙이 올 곳으로 예상되는 도시의 워프 게이트를 확보하라 일렀다. 동시에 자신은 워프 게이트로 달려가 사용자들을 피신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애초 전부 피신시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연합군이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로 물밀 듯 달려오는 통에, 아키노는 간발의 차이로 포탈에 몸을 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대 도시로 이동하자마자 바로 연결을 끊어버렸다. 혹자는 잔인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상대가 우르르 밀고 들어왔을 테니까. 연합군은 가장 방어력이 높은 대 도시와의 연결이 끊긴 걸 아쉬워했지만, 발 빠르게 움직였다. 악마는 연결된 도시 곳곳으로 퍼져나가 무차별적으로 사용자를 잡아들였고, 남 대륙은 일반 도시로 이동, 소 도시를 점령한 날 바로 대 도시로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그야말로 신속에 가까운 진군이었다. 그런 만큼, 동 대륙 최후의 보루인 대 도시는 현재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아비규환의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오, 온다! 또 온다아아!” 누군가의 절규와 동시에 사방을 환히 밝히는 수천 개의 마법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올랐다. 성벽에 서 있던 마법사와 사제가 악을 쓰며 주문을 외워 방어 마법을 펼쳤으나 무용(無用)한 일이었다. 잠시 후, 하늘을 가득 채워 뒤덮은 수백 수천의 공격 마법이 급격한 곡선을 그리며 한꺼번에 하강을 시도한다. 눈 깜짝할 새 성큼 다가오더니, 흰 장막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기며 해일처럼 들이닥쳤다. 쐐애애액! 다음 순간, 동 대륙 사용자들이 볼 수 있었던 건, 서로 어울려 난무하는 오색찬란한 빛무리였다. 번쩍! 흡사 핵탄두가 떨어지면 이럴까. 일거에 폭발한 여파는 사용자 개인이 감당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시야가 아득해지고 귀도 먹었다. 그저 희미하게 들려오는, 무언가 와르르 무너지는 굉음에 반사적으로 웅크려 고개를 처박을 뿐. 이윽고 한 가득 머물렀던 빛이 사라졌을 즈음. “…….” 겨우 몸을 일으킨 아키노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좀 전까지 버텨주던 굳건한 성벽 일부가, 한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루로 흩날리고 있다. “끄륵, 끄르르륵!” “흐어어어! 흐아아아!” 그러나 어이없어할 틈도 없었다. 왜냐면 도처에서 끔찍한 비명이 우후죽순으로 터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피폭 범위에 있던 아군 중 간신히 살아남은 일부가 지르는 소리였다. 그나마도 팔다리가 찢어졌거나 몸이 터져나간 이가 대다수라 곧 사망할 것 같았지만. 와아아아아아아아! 두두두두두두두두! 이어서 들려오는 함성, 그리고 땅이 울리는 소음. 그 소리를 듣자마자, 혼란스러웠던 성의 분위기는 차츰차츰 절망과 체념으로 변했다. 성벽이 무너진 이상 침입해 올 것은 명약관화였다. 아키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몹시 어려운 상황이기는 했으나 아직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하여 입가에 묻은 그을음을 닦으며 힘차게 외쳤다. “사제는 어서 부상병을 치료하세요! 그리고 남은…?” 그러나. “분들은….” 주변을 돌아보던 아키노는, “…….” 자신도 모르게 말을 흐리고 말았다. 아니.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급박한 상황 속 서둘러 성벽을 보수하고 사수해야 했지만…. ‘없어….’ 남은 사용자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거라고는 부상에 신음하며 서서히 죽어가는 동료뿐이었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아키노의 두 팔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우욱….” 입에서 서글픈 침음이 터져 나온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남은 전력을 모조리 끌어모으며 죽으라 방어했건만, 개전한 지 고작 하루도 되지 않아 성벽이 깨졌으니. ‘방어할 수 있는 인원이…. 더 없어….’ 그러는 동안에도 함성은 빠르게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결국에는 아키노도 포기했는지 풀썩 엉덩방아를 찧는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우리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걸까. 머릿속으로 온갖 마이너스한 감정이 복잡하게 휘몰아친다. 그럴수록 지혜롭게 빛나던 두 눈동자는 이지를 상실한 것처럼 천천히 흐릿해졌다. 그때였다. “아키노!” 멀리서 달려온 누군가가, 주저앉은 아키노의 어깨를 잡고 뒤흔들었다. “왔어, 왔다고! 스페스 도시, 흡!” 무에 그리 급한 걸까? 사내는 순간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주저앉아 있을 때가 아니다! 스페스와의 연결이 활성화됐다고!” 단숨에 토해내며 고함 질렀다. “스페스…?” 그 순간이었다. “그래! 북 대륙 원군이 도착했다는 말이다!” 까맣게 죽었던 아키노의 눈동자에 강렬한 이채가 스쳤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시가 함락되기 직전. 마침내 북 대륙이 도착했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02시 00분 안에 세이프! 후후. 사실 어제 팥고물이나 진한개는 넣을까 말까 상당히 고민했습니다. 설마 아는 분이 많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아는 분이 꽤 계시더라고요. 하하. 아, 물론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D 그나저나 내일은 석가탄신일이네요. 비나이다, 비나이다. 저를 로유미로 놀리는 독자 분은 내일 갑자기 회사에 일이 생기거나, 학교에서 정상 수업을 하게 해주시고, 저를 로유진이라 생각해주시는 분은 편히 쉴 수 있는 휴일이 될 수 있도록…. 응? 아, 아닙니다.(ㅌㅌ) 0890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메모리아 스톤을 장착한 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기다리는 것. 물론 그냥 가만히 앉아 놀고 있는 건 아니고 대기라는 표현이 옳으려나. 내 예상이 맞는다면 동 대륙은 최소한 도시 하나쯤은 지켜냈을 것이다. 현재 상황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 연합군을 기다리며 방어선을 구축하는 중일 수도, 아니면 함락 직전일지도 모른다. 아마 후자의 상황에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하지마는. 어쨌든, 그럼 포탈이 열리는 순간 얼마나 빠르고 신속하게 넘어가느냐가 관건이다. 그러나 아무리 압축하고 껴 넣어도, 워프 게이트로 한 번에 입장할 수 있는 인원은 서른 명도 채 되지 않는다. 인위적으로 수를 늘릴 수 없는 이상, 결국 스무 명 단위로 병력을 편제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렇게 군을 새로 편성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흐르고 흘러,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는 중이었다. 편성을 끝내고 휴식을 취하려 앉았을 때, 도시는 이미 석양의 황혼에 물들어 사방으로 붉은빛을 반사한다. 워프 게이트 연결은 한참 전에 맞춰놨으나 아직 작동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조바심내지 않으려 애쓰며 느릿하게 주변을 돌아봤다. 내가 앉은 곳은 일 열의 중앙. 열 클랜 중 머셔너리는 선두로 들어가는 임무를 맡았다. 기실 굉장히 위험한 자리였으나 클랜원들의 얼굴빛은 담담함 그 자체였다. 아니. 구원군 전체가 조용하다. 간간이 이야기 나누는 소리만 들려올 뿐, 차분하고 침착한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아마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물론 죽고 죽이는 전쟁을 앞두고 일말의 두려움이 없겠느냐마는, 적어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갈무리할 줄 안다는 소리다. 천천히 한 명씩 둘러보고 있자 문득 한 여인이 눈에 밟혔다. 좀 전까지 니뮤에와 옥신각신하던 마르는, 고개 젖혀 붉게 저물어가는 노을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살며시 눈을 감는다. 왜인지 그 모습이 애달프다고 느껴 나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두렵니?” 마르는 반짝 눈을 떴다. 이윽고 선한 눈동자 한 쌍이 나를 응시하더니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아니요. 아빠. 오히려….” “…….” “익숙한걸요.” “…그래?” 기실 어폐가 있는 말이었으나 왜 익숙하다 말했는지 알 것 같다. 아마 날개의 영향을 받아서일 것이다. 하기야 전대 여왕이었던 마르가리타는 세상을 구한 영웅 중 한 명이라는데, 이까짓 전쟁쯤 수없이 겪었겠지. 한데 이 상황에서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로 짐이 되지 않을게요.” 계속 쳐다보고 있자, 마르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배시시 웃는다. 순간 무어라 말할까 하다가, 그냥 한 번 끄덕이고 앞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파츳! 정적이 흐르는 와중, 갑자기 전기 오르는 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파츠츠츳, 파츠츠츳! 바로 앞을 쳐다보자, 놀랍게도 워프 게이트 제단 위의 허공이 물결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이어서 바다 빛이 미세하게나마 드문드문 새어 나오더니, 돌연 소용돌이처럼 중심을 향해 나선을 그리며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수현!” “클랜 로드!” 그래. 왔다. “전원.” 나는 반사적으로 말하며 땅을 짚은 두 손에 힘을 줬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며 나직이 말했다. “전투 준비.” * 남 대륙이 동 대륙 대 도시로 진군한 것은 성벽이 무너진 이후였다. 엘도라는 오딘 휘하의 중앙군은 네 성문을 점거하는 데 집중하고, 녹스와 카르페디엠 클랜은 시가지 전투를 치르라 지시했다. 기실 홀 플레인의 공성전은 현대와 판이한 양상으로 흐른다. 굳이 공성 무기를 제작 및 동원할 필요가 없는 것이, 마법사가 공성 병기 역할을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수천 명이 일거에 내뿜는 화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마어마하니까. 화력을 집중해 성벽을 무너트리고, 그곳으로 침입해 도시를 함락한다. 이것이 바로 남 대륙이 동 대륙을 상대로 고수해온 공성전이었다. 물론 상대의 마법사 전력이 비슷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아쉽게도 두 대륙의 전력 차이는 상당하다. 게다가 첫 도시가 허무하게 함락당한 이후, 하늘과 땅만치 벌어졌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말인즉 현 상황에 이르러서는 남 대륙이 닥치고 돌격했어도 손쉽게 함락했을 것이다. 단지 소 도시라면 모를까. 대 도시의 성벽은 마냥 만만하지는 않은 터라, 가장 안전한 방법을 선택했을 뿐. 아무튼, 쉴 틈 없이 마법을 쏟아 부었으니 상대는 분명 심각한 손해를 입었을 터. 승리는 눈앞에 있다. 엘도라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화르르륵, 화르르륵!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시뻘건 염화가 춤추듯 꿈틀거리며 시커먼 연기를 뭉게뭉게 토해냈다. 사방에서 이글거리는 열기를 느끼며 반 백발의 사내, 카르페디엠 로드는 휙 휘파람을 불었다. 사실 성벽이 무너졌을 때만 해도 카르페디엠 로드는 일부러 늦장을 부렸다. 처음에는 동 대륙이 최후의 보루로 선택한 도시인 만큼 나름 치열한 전투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상대의 저항은 생각보다 미미했고, 성벽은 보는 이가 허탈하리만치 쉽게 무너졌다. 그래도 혹시 몰라, 우선 녹스 클랜을 들여보내고 천천히 상황을 볼 생각이었다. 상대가 가미카제를 불사하는 함정을 준비했을 수도 있으니까. 한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늘그막이 성으로 들어간 카르페디엠 로드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상대는 최후의 저항은커녕, 오히려 도망치는 데 급급했다. 게다가 시선이 닿는 곳마다 폭사 된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터라, 짧은 시간에 상황을 이해하고 의심을 깨끗이 지웠다. 앞서 들어간 녹스와 휘하 클랜이 신명 나게 날뛰고 있는 이상, 상황은 종료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크, 클랜 로드.” 그때 옆에서 따라 걷고 있던 사내가 안달 난 목소리로 말하며 침을 삼켰다. 카르페디엠 로드는 싱겁게 웃었다. 이래서야 일부러 꾸물거렸던 게 미안해질 정도였다. 왜냐면 자신도 그렇거니와, 부하들이 뭘 원하는지 아주, 매우 잘 알고 있으니까. “뭘 물어봐?” 킬킬거리며 웃자, 부하의 낯에 화색이 돌았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다. 혹시 자살 공격이라도 해오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웠건만, 시가지 전투는 무슨, 원초적인 축제를 즐길 일만 남았으니. “오딘은 성문을 지킨다고 하니 눈치 볼 필요도 없잖아? 오늘이 마지막 전투인 만큼, 섭섭하게 보내고 싶지는 않잖아?” 카르페디엠 로드는 흡사 마에스트로라도 된 듯이 양팔을 쫙 펼쳤다. 그러자 등 뒤로 시끄러운 웃음과 환호가 터졌다. 그 호응에 응답해 사내는 목이 터지라 외쳤다. “자, 가라! 마음대로, 어디 마음대로 해보라고!” 오오오오! 카르페디엠과 휘하 클랜들은 괴성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노도와 같이 시가지 사이로 달렸다. 잠시 후, 끊임없이 이어지던 비명이 한층 커지기 시작했다. 원래 전쟁이라는 상황은 선량한 사용자라도 쉽게 타성에 젖게 만든다. 거기다 애초 선함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소돔과 고모라의 구현을 꿈꾸는 카르페디엠 클랜원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압도적으로 승리해오며 상대를 복종시키는 즐거움을 알게 된 이상, 남은 일은 하나였다. 녹스와 카르페디엠의 깃발 아래, 침략자 입장에 선 자들은 신 나게 날뛰었다. 약탈, 방화, 강도, 살인 등등. 상대가 도망치든 저항하든 항복하든 가리지 않고 행동한다. 그 결과 도시는 순식간에 비명과 절규로 가득 찼다. 성내는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그뿐일까. “아, 안 돼! 시, 싫어!” 심지어 어느 곳에서는 한 무리가 여인의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고 가기까지 했다. 강간까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선발대에 불과한 만큼, 시가지 한복판에서 대놓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미 전쟁의 열기에 취할 대로 취했는데 거리낌이 있으랴. 이내 으슥한 곳을 찾아낸 무리는 여인을 내동댕이치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히야, 앙탈이 좀 심한데? 역시 사무라이 소녀라서 그런가? 키히히히!”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뭐라는 거지? 가만히 좀 있어보라니까? AV 찍어주겠다는데 왜 반항이야?” “하, 하지 마! 아악!” 두 사내가 억지로 가랑이를 잡아 벌리자, 거칠게 반항하던 여인이 돌연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한 사내가 있는 힘껏 허리를 들이박았기 때문이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여인은 얼굴을 가리며 구슬프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가끔 그 광경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사용자도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혀를 쯧쯧 차며 다른 곳으로 이동할 뿐. “음! 이게 바로 전쟁이지.” 그때, 흐뭇하게 웃으며 구경하고 있던 침략자의 눈에 돌연 이채가 스쳤다. 방금 시작한 곳이 아닌 다른 능욕의 현장에서, 웬 거한이 동성을 상대로 한창 허리를 흔드는 데 열중하고 있다. 그것도 혼자서. “허? 녹스 로드!” 헛웃음을 터뜨리며 부르자 녹스 로드의 허리 움직임이 뚝 멎었다. 그러자 아래 깔려 덩달아 펄떡거리던 앳된 사내도 격한 숨을 토해냈다. 그러나 이미 체념한 듯 미동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잔뜩 흐려진 눈으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다. 한동안 두 클랜 로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아서일까. 녹스 로드는 무안해하는 얼굴로 살금살금 몸을 일으켰지만, 카르페디엠 로드는 괜찮다는 듯 빙긋 웃었다. 그리고 엄지를 척 들었다. 그러자 눈을 끔뻑거리던 녹스 로드도 음험하게 웃더니, 자신의 흉한 양물을 허리 높여 척 치켜세웠다. “미친놈.” 피식 웃은 카르페디엠 로드는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인근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반주 삼아, 지휘자처럼 손을 휘저으며 시가지를 거닐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호?” 광장으로 들어선 순간 낄낄거리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냐면 이제 막 가동을 시작한 워프 게이트의 주변에 동 대륙 사용자가 상당수 모여 있었으니까. 그러나 아군도 이미 넓고 둥글게 퍼져 광장을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다. 카르페디엠 로드는 킥킥 웃었다. “이것도 좋지~. 그래도 저항은 좀 해줘야지 재밌잖아?” 또한, 설령 워프 게이트를 가동하더라도 도망칠 곳은 없다. “그나저나 소용없을 텐데? 그놈들이 이미 전 도시를…. 응?” 느물거리며 앞으로 나서려던 찰나, 카르페디엠 로드는 한순간 입을 다물었다. 파츠츠츳, 파츠츠츳! 어른어른 모여들던 푸른 빛무리가 중앙부터 쩍 퍼져나가더니, 커다란 타원형의 포탈을 생성한다. 그래. 여기까지는 좋다. 문제는 동 대륙 사용자들이 태도였다. 포탈이 생성됐음에도 앞다투어 도망치지 않고, 원형 방진을 구성해 경계하고 있다. 그 순간이었다. “뭐, 뭐야?” 미처 의문을 풀기도 전. 화아아아아아아악! 포탈이 눈부실 정도의 밝은 빛을 뿜었다. 그리고 그 빛 너머로 어스름한 그림자가 너울너울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나긴 거리를 뛰어넘어, 마침내 이 전장의 한복판에 누군가가 도착한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시꺼먼 칠흑색 갑옷과 붉은 망토를 걸친 건장한 청년이었다. 포탈을 쑥 뚫고 나오자마자 계단을 천천히 내려온다. 뚜벅…. 뚜벅…. 이어서 울리는 뚜렷한 발소리. 갑자기 난입한 누군가를 향해 도처에서 시선이 쏟아졌다. “흠….”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무관심 일색이다. 그저 무심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두어 번 끄덕이고 천천히 걷는다. 사방팔방 창칼이 번뜩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긋하기 그지없는 걸음걸이였다. “뭐, 뭐…!” 무어라 외치려던 카르페디엠 로드는 불현듯 입을 쩍 벌렸다. 놀란 이유는 세 가지. 첫 번째는 왜인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요, 두 번째는 청년이 걸어가는 방향에 서 있던 아군이 주춤주춤 물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 자신도 모르는 사이, 두 발이 슬슬 뒷걸음질 치고 있었으니까. ============================ 작품 후기 ============================ 김수현이 장비한 치우천왕의 갑옷에는 군중 제어 효과 중 하나인 공포가 있지요. 그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나저나 어제 학교에 가시거나 출근하신 분들이 상당히 많군요! 하하. 독자 님들. 어제 후기는 농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조크에 불과했어요. 에이, 제가 설마 정말 그런 기도를 했겠나요. 우리 모두 서로 놀리는 것 없이, 친하게 지내요. :D 0891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처음에는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갑자기 난입한 건 차치하고서라도, 김수현의 태도가 몹시 기이했기 때문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폭풍이 몰아치던 전장이 한순간 가라앉았다. 최소한 광장에 있던 사용자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전원 동작을 멈췄다. 단지 등장만 했을 뿐이건만, 주변의 시선을 모조리 끌어당긴 것이다. 물론 워프 게이트로 넘어온 건 김수현만이 아니었다. 검은 보석 목걸이를 건 폭발적인 몸매의 여인, 그리고 얼음처럼 시린 냉기를 풀풀 풍기는 갑옷을 걸친 여인이 약간의 거리를 두고 따라가고 있다. ‘그림자 여왕’ 고연주와 ‘검후’ 남다은. 그 뒤로는 자신의 키만 한 장검을 어깨 옆으로 느긋하게 빗겨 든 장발의 사내와, 천진난만한 얼굴로 빛나는 구체를 붕붕 휘두르는 여인이 나오고 있다. ‘침묵의 집행자’ 허준영과 ‘키메라 소환 술사’ 비비앙이다. 어디 그뿐일까. 은빛을 뿌리는 창과 근엄한 얼굴을 한 ‘아르쿠스 발키리’ 차소림, 입은 꾹 다물었지만 꿰뚫을 듯한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는 ‘천궁’ 선유운…. “저.” 정신없이 쳐다보고 있던 아키노는 김수현이 다가오자 반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그러나 어깨를 건들려던 손은 순간 멈칫,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상대가 아무 말도 않고 그냥 지나쳐버렸기 때문이다. 얼떨떨해하는 아키노를 뒤로한 채, 김수현은 계속 걷고, 걸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용자는 카르페디엠 로드였다. “핫!” 탄식을 뱉더니 성큼성큼 걸어오는 김수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뭐, 뭣들 하는 거냐! 적이다! 적이라고! 딱 보면 몰라?” 웅성웅성. 그제야 광장을 에워싸고 있던 포위망 사이로 수군거리는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흡사 앞동산 소풍이라도 나온 듯, 느긋하기 그지없던 김수현의 걸음이 멈춘 것도 그즈음이었다. 남 대륙 사용자들은 서로 한 번씩 쳐다보더니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무기를 꼬나 쥐고 무차별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야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 삽시간에 사방에서 수십 명이나 되는 인원이 튀어나왔다. 각자 검이나 창을 치켜들고, 하나같이 김수현을 겨냥하며 돌진한다. “위험!” 아키노는 기함해 소리 질렀으나, 정작 당사자는 담담했다. 아니. 살짝 한숨 쉬더니 가볍게 손을 떨쳤을 뿐. 그때였다. 휘리리릭, 바람 가르는 소리와 동시에 김수현의 허리서 세 자루 검이 날아올랐다. 스스로 칼집을 풀고 비스듬하게 세워지더니, 흡사 호위라도 하듯 원을 그리며 유영하기 시작한다. 한껏 근접한 이들이 모종의 이상함을 느낀 건, 거의 근접해 한꺼번에 무기를 내지르던 순간이었다. “어, 어?” “어어어어!” 카앙! 어어 하는 사이, 거친 철성과 함께 시뻘건 불꽃이 튀겼다. 달려든 수십 명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치떠졌다. 분명 조금 전까지 전후좌우로 빈틈없이 쇄도했을 터. 한데 어느 순간 강제로 쭉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더니, 칼끝이 모조리 검 세 자루에 막혀버렸다. 마치 누군가 유도하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아직 놀라기에는 이르다. “크윽! 크으으윽!” “왜, 왜 이래?” 갑자기 막혔다는 것까지는 알겠다. 한데 아무리 힘을 주고 용을 써도, 각자가 내뻗은 무기가 거둬지지 않는다. 칼날에 딱 붙기라도 한 것처럼 미동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진정으로 기묘한 현상이었다. 무려 서른을 넘는 사용자가 칼자루나 창대를 쥔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광경이라니…. 그러는 동안, 김수현은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귀에 걸린 귀걸이를 빼 손에 쥐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왜냐면 귀걸이는 곧 순백의 칼날을 뽐내는 아름다운 검으로 변했으니까. 김수현은 지체 않고 검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고, 제자리에 선 채로 조용히 말했다. “검 빛.” 차르르릉, 차르르릉! 그 순간, 맑은 공명과 함께 빅토리아의 영광이 새하얀 빛을 토해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빛이 터졌을 뿐. 그러나 실상은 일 초도 채 지나지 않아, 분사된 빛무리가 포위망 사이로 휩쓸 듯이 스며들었다. 잠시 후. 피피피핏! 사방팔방 치솟은 핏물이 거미줄처럼 갈라지며 허공을 수놓는다. 목, 복부, 겨드랑이, 허벅지 등 사지 곳곳에서 선혈이 뿜어졌다. 심지어 목이 절반 이상 갈라지는 사용자도 있었다. 시야가 이상하게 기울어지자, 사내는 멍하니 목을 짚었다. 그리고 울컥 터져 흐르는 핏물을 느끼고 그제야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흐, 흐아아아!” “크아아악!” 털썩, 털썩, 털썩, 털썩! 뒤늦게 비명이 터졌다.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무려 서른에 달하는 이가 한꺼번에, 그것도 수수깡처럼 썩둑썩둑 잘려 쓰러진다. “무, 무슨?” “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카르페디엠 로드도, 아키노도 같은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흩뿌려졌던 핏물이 땅을 점점이 찍어댈 즈음, 김수현은 이미 두 번째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웅웅웅웅웅웅웅웅! 하늘에서 왕왕 울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깜짝 놀라 쳐다보자, 빅토리아의 영광이 하얗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니. 검의 모습을 한 불꽃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 어찌나 기운이 강렬한지 주변 공간까지 불사르며 이지러지게 하자,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듯 남 대륙 사용자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물론 이미 늦어도 한참이나 늦었지만. 김수현은 차분히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옆쪽을 흘끗 흘겨본 뒤 있는 힘껏 오른팔을 휘두르자, 붉은 잔상이 반원 모양의 궤적을 그리며 허공에 남는다. 이윽고 김수현이 살짝 검을 떨치니, 짜르르 떨어 울리며 쏜살처럼 뿜어졌다. 쐐애애액! 그 기운이 뿜어내는 흉포함을 알아챈 걸까? 사용자들은 공포에 질려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어떻게든 거리를 벌리려 애썼으나, 붉은 검기는 단 이 초 만에 가장 선두에 있던 사용자를 폭풍처럼 강타했다. 그리고 복부를 예리하게 찢고 들어가는 순간, 두건을 눌러쓴 여인의 눈동자에 절망이 어린다. “악!” 꽝!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갈기갈기 찢긴 사지가 사방으로 흩날린다. 몸속에 폭탄을 넣고 터뜨린 듯 무시무시한 폭음이 터졌다. 그러고도 열기는 한층 강렬해져 폭발로 퍼진 핏물이 물에 탄 소금처럼 녹아 내일 정도였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붉은 검기는 여인을 폭사시킨 것도 모자라, 그 뒤에 있던 무리까지 무자비하게 덮쳐들었다. 꽈앙, 꽈앙, 꽈앙, 꽈앙! 연거푸 들려오는 어마어마한 굉음. 도미노처럼 차곡차곡 무너지는 사용자들. 지뢰가 연속으로 폭발하면 이렇게 될까? 천지가 진동하며 흔들릴 때마다, 무리 중 서너 명이 여지없이 수직으로 솟구친다. 공중으로 튕긴 신체는 그로테스크하게 폭렬했고, 후드득후드득 떨어져 지면을 뜨끈하게 적셨다. 그렇게 일련의 밀어내기가 끝나자, 붉은 검기가 휩쓸고 지나간 장소에는 온전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 사람이었던 형체는 핏물 섞인 떡으로 화했고, 바닥은 깨지다 못해 숫제 뒤집힐 정도였으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아키노를 데려왔던 사내는 황급히 눈을 비볐다. 그러고도 모자라 두 번 세 번 계속 문지른다. 두 번, 단 두 번에 불과했다. 격렬하게 움직인 것도 아니고, 손짓 한 번, 팔 한 번 움직였을 뿐이다. 한데 아차 한 사이 기백 명에 가까운 적이 땅을 나뒹굴고 있다. “흠.” 그러나 김수현이 이 정도면 됐다는 듯 턱을 까닥인 후 뒤를 돌아보았다. “이야~. 이거 벌써 신나게 한바탕 하고 계시구먼?” 그곳에는 김덕필이 워프 게이트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오고 있었다. 이미 머셔너리 클랜은 오래전에 넘어왔고, 리버스 클랜도 이제 막 넘어오는 걸 마친 참이었다. 김수현에 시선이 쏠린 사이, 거의 오분의 일에 해당하는 인원이 넘어왔다. “히이이익!” “도, 도망쳐! 괴물이다아아!” 순식간에 인원이 불어나자 광장을 에워쌌던 이들은 하나같이 몸을 돌려 줄행랑치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 그것보다는 김수현의 인간 같지도 않은 신위에 놀라 도망친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김수현~. 쟤네 다 죽여도 되지?” 비비앙은 있는 힘을 다해 도망치는 놈들을 보더니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김수현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끄덕였다. “물론이지.” “좋아. 그럼….” 비비앙은 싱글벙글 웃으며 질서의 오르도를 높이 들었다. “오라! 피에르! 제 사 군단을 지배하는 미친 불꽃의 어릿광대여!” - 후헤헤헤, 후헤헤헤!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내놨는지 곧바로 마법 진이 그려지며 어두운 운무가 흐르기 시작한다. 그 사이로 서서히 솟아 나오는 사 군단장을 보며, 비비앙은 자신만만한 미소로 외쳤다. “피에르! 오랜만에 파티다!” - 히히? “마음껏 뛰놀아도 좋으니까! 싹, 모조리, 깡그리 먹어 치워!” - 흐히, 흐히히히! 그 말 한 번 마음에 든다는 듯 피에르는 소리 높여 웃으며 아앙 입을 벌렸다. 그리고 같이 깔깔 웃고 있는 비비앙의 머리를 덥석 물었다. “후비베베바비보베!” 비비앙은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미친 낙지처럼 발광했다. 간신히 벗어나더니 침에 질척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털며 펄펄 뛴다. “이 멍청이가! 나 말고 쟤네 먹으라고!” - 후헤? 피에르가 갸웃하며 눈을 돌리자, 멍하니 서 있던 동 대륙 사용자 무리가 주춤 물러섰다. 비비앙은 기함해 손을 저었다. “아니! 얘네 말고! 저기 도망가는 애들 있잖아! 이 바보야!” 피에르는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킬킬 웃어 젖혔다. 그러다 돌연 뚝 웃음을 멈추더니 무서운 얼굴로 쇄도하기 시작한다. 그 뒤를 쫄랑쫄랑 따라가는 마수 군단을 보며 비비앙은 조용히 투덜거렸다. “저 김수현 같은 놈. 알고 있으면서도 저랬을 거야.” “뭐?” “아니, 아니야! 여기는 나한테 맡기라고 그랬어!” “…….” 비비앙은 히 웃으며 시치미를 뗐다. 김수현은 한숨과 함께 머리를 흔든 후, 배 잡고 폭소하는 김덕필을 향해 말했다. “여기는 저희가 정리할 테니, 리버스는 어서.” “큭! 아, 알았어. 일단 성안부터 정리하면 되는 거지?” 그렇게 말한 김덕필은 등허리에서 거대한 검을 꺼내 꼬나 쥐었다. "이놈들아!" 쩌렁쩌렁한 외침. “가자! 머리 까만 놈만 빼고 모두 죽여라!” 우오오오오오오오! 그에 호응하는 함성이 도시를 어지럽게 뒤흔들었다. 참 간단한 피아 식별 방법이지 않은가.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늘 집필을 늦게 시작해서…. 8ㅅ8 0892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김수현 덕분에 북 대륙 구원군은 아무 방해 없이 넘어올 수 있었다. 머셔너리와 리버스를 시작으로 어느새 삼천 명 가깝게 건너왔다. 넘어가는 즉시 전쟁터를 볼 수 있으니 단단히 준비해두라 일러둔 탓에, 북 대륙 사용자들은 당황하지 않고 바로 전장으로 나설 수 있었다. 바야흐로 반격의 때가 온 것이다. “우리는 동쪽으로 간다! 오십 명씩 한 조로! 시가지로 들어가서 깡그리 족쳐버려!” “예!” 김덕필의 외침에 리버스 클랜원들은 우렁차게 화답했다. 미리 짜둔 조원끼리 모이고, 확인이 끝나는 대로 사방팔방 흩어졌다. 그야말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임! 그리고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 한, 곳곳을 돌아다니는 남 대륙 사용자를 향해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미 승리했다고 생각하고 있던 남 대륙 사용자들은 즉각 반응하지 못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돌아본 순간, 거침없이 휘둘러진 창칼에 목이 달아나고 배가 뚫렸다. 그렇게 삼사십 명이 손도 쓰지 못하고 속절없이 쓰러지자, 그제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누구냐!” “뭐, 뭐야?” 곳곳에 퍼져 있던 남 대륙 사용자들은 사태를 파악하고 떼 지어 군집하기 시작했다. 선발대에 불과하다고 하나, 워낙 많은 인원이 들어와 있던 터라 순식간에 오륙십 명이 모였다. 난전 상황임을 고려하면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숫자. 그러나 북 대륙 사용자들은 주춤하기는커녕,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그저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무리에 소속돼 있던 마법사들이 일제히 지팡이를 뻗는다. “────! ────!” 번쩍! 쏘아진 수 개의 화염 마법이 정확히 주변 건물을 강타한다. 와르르, 와르르! 다음 순간, 충격 지점을 중심으로 커다란 구멍이 뚫리더니, 거대한 돌덩이들이 경사를 따라 쿵쿵 굴러 내려가기 시작한다. 물론, 그 아래 남 대륙 사용자들이 모여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힘차게 낙하하는 건물 파편들의 좋은 먹잇감으로 전락한 것이다. 쿵! “끄악!” 쿠쿵! “꺄아아악!” 육중한 돌덩이가 정수리를 때리자, 여지없이 핏물이 푹 터져 나왔다. 낙하지점서 정통으로 얻어맞은 이들은 덧없이 즉사했다. 그나마 몇 명은 반사적으로 몸을 날리거나 방패를 들어 방어했지만, 무의미한 몸부림이었다. 왜냐면 낙하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근접 계열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으니까. 혼란에 빠진 적들을 발로 차고 창으로 목을 찍는다. 적어도 이 도시에 등장한 북 대륙 사용자들은 적을 살인한다는 것에 있어서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약간의 자비를 보이는 순간,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때였다. 핑! 또 한 번 단숨에 수십 명을 처리하는 사이, 돌연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새 주문을 외던 마법사가 가슴에 피를 뿜으며 나동그라지자, 리버스 클랜원들이 퍼뜩 눈을 돌렸다. 근접 계열들은 서둘러 공격이 들어온 지점을 막아서고, 사제는 회복 주문을 외우며 쓰러진 사용자에게 붙는다. 그렇게 신속히 방진을 구성하자마자, 자욱한 연기 너머 무수한 그림자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김덕필의 눈이 찌푸려지더니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시벌. 뭐 저리 많아?” 그곳에는 척 봐도 기백 명은 넘어 보이는 적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좀 전 지형지물을 이용해 멋진 연계를 펼쳤지만, 워낙 눈에 띄는 공격이라 근처에 있던 적들이 몰려온 것이다. “이거 잘못하면 전멸하겠는데요. 다른 조에 지원 요청할까요?” 등 뒤에 서 있던 부하가 뇌까리자 김덕필은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그보다 마법의 탑은 넘어왔나?” “아마 그럴 겁니다. 저희 다음 순번이니까요.” “연락해.” “알겠습니다.” 사내는 바로 끄덕이며 품에서 수정을 꺼냈다. 다른 마법사와 사제는 곧장 방어막을 겹겹이 펼쳤고, 부하는 통신이 연결되자마자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는 동안 몇 발의 마법과 수십 발의 화살이 무작위로 날아왔으나, 장막에 막혀 추가 부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예, 예…. 집중 사격 요청을…. 아니요. 오폭 위험도 있으니 화염 마법 말고…. 적 지점은…. 그럼 부탁 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후우우우우우우웅! 어디서 시원한 소리와 함께 큼직한 물 덩어리가 무더기로 하늘을 활공한다. 이어서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가 싶더니, 사내가 말한 지점으로 정확하게 강하한다. “으, 응?” “저, 저거는 또 뭐야?” 하늘을 뒤덮으며 날아오는 광경에 남 대륙 사용자들은 입을 쩍 벌렸다. 설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마법이 날아올 줄은 몰랐는지, 미처 대응도 못 하고 뭉쳐진 물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일부는 땅을 때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이 강하게 후려쳐 균형을 흐트러트렸다. 그 순간이었다. 물에 흠뻑 젖은 채 추적추적 일어나던 적들은 순간 얼굴이 핼쑥해졌다. 왜냐면 상대 무리의 마법사들이 어느새 지팡이를 겨누고 있었으니까. “────. ────. 라이트닝!” 그 순간 노란 번갯불이 지그재그를 그리며 정면으로 뻗어 나갔다. 이윽고 긴 꼬리를 남기던 번개가 선두에 있던 사용자에 닿은 순간, 하나의 진풍경을 그려냈다. 파지지직, 파지지직! 번개가 짜르르 흘러들어 간 순간, 곧장 연쇄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끄르르르르륵!” “키에에엑, 키에에엑!” 삽시간에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구르는 사용자가 속출한다. 전류는 눈 깜짝할 새 몸을 점령해 살을 태우고, 아니. 살이 뻘겋게 타다 못해 시꺼멓게 죽어버렸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물에 묻은 이는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그을린 숯 더미로 화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은 비척거리며 기어 나왔지만, 그조차도 이 차로 이어진 화살 공격에 깡그리 꼬치 신세가 되고 말았다. “쯧쯧…. 뭐야 이거? 차라리 부랑자 놈들이 더 낫구먼.” 김덕필이 혀를 차며 머리를 젓자, 옆의 부하도 담담히 수긍했다. “그러네요. 사실 긴장 좀 했는데 이거야 원…. 어, 클랜 로드? 쟤들 중에 검은 머리가 한 명 보이는데요?” “어? 그러네?” “그렇죠?” “어! 내 옆에도 한 명 보이잖아?” 부하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으르렁거리던 김덕필은 눈을 번뜩이며 새 먹잇감을 찾아 무리를 이끌었다. 어느새 전황은 서서히 반전돼 가고 있었다. 아니. 북 대륙이 도착한 지 삼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거의 학살 수준으로 남 대륙을 사냥하는 중이었다. 물론 남 대륙 사용자들도 바보도 아니고 약하지도 않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는 이유는, 현 상황과 북 대륙 특성이 맞물려서였다. 우선은 난전. 현재 성내는 큰 그림 아래 전략이나 전술적인 움직임이 아닌, 아군과 적군이 마구 뒤섞여 어지럽게 싸우는 중이다. 여태껏 압도적인 전력을 바탕으로, 성벽을 부수고 침입해 점령하는 과정만 겪어온 남 대륙으로서는 익숙하지 못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 반해 북 대륙 사용자들은 난전의 달인들이다. 조금 아이러니하기는 하지만, 부랑자 덕분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이야 씨를 말렸다고는 해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부랑자들은 암세포처럼 북 대륙을 부단히 괴롭혔다. 산세가 험한 곳만 골라 숨어 도망 다녔고, 북 대륙은 그런 부랑자를 추적하며 수천, 수만의 전투를 치렀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기습은 물론, 소규모 단위의 교란과 파괴 활동에 능숙하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라. 꼭꼭 숨어서 게릴라로 치고 빠지는 부랑자 무리를 상대하는 게 쉬울까? 아니면 ‘나 잡아 잡수쇼!’ 하고 훤히 돌아다니는 남 대륙 무리를 상대하는 게 쉬울까? 이게 바로 북 대륙이 현재 극강의 전투력을 발휘하는 이유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조직력에서 밀린다면, 남 대륙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강력한 사용자가 등장해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 단, 개개인 전력으로 따지면 더 크게 밀린다는 게 문제였지만. 한편, 같은 시각. 북 대륙이 넘어왔음에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이들도 몇 명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일부러 구석진 곳으로 가 윤간 행위에 열중하는 놈들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여인의 고통은 계속 지속됐으나, 이제 포기한 듯 몸을 축 늘어트리고 있다. 그저 흐릿한 눈으로 하늘만 올려다볼 뿐. 그때였다. 잿빛 일색이던 건물 위로 문득 어두운 그림자가 솟았다.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자, 한 사내가 잔뜩 찡그린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본다. 살그머니 펄럭이는 푸른 도복과 빨간 허리띠. 이내 서로의 시선이 얽히고, 여인의 눈이 살짝 치떠진 찰나였다. “후.” 돌연 그 사내가 건물 아래로 훌쩍 뛰어내리더니, 무섭게 검을 휘두르며 쇄도해온다. 서걱서걱! 툭, 데구루루…. 그때, 하염없이 앞뒤로 흔들리던 몸이 갑자기 덜커덕 멈췄다. 잠시 후, 멍하니 시선을 내리는 여인의 눈동자에 순간 당황이 스쳤다. 조금 전까지 짐승처럼 웃으며 범하던 사내의 머리 대신, 시뻘건 선혈을 뿜는 단면만이 보였기 때문이다. “토마스? 토마스!” “뭐, 뭐야?” 낄낄거리며 구경하던 너덧 명의 사내들이 혼비백산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열심히 허리를 흔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목이 달아났으니. 그러나 당황을 추스르기도 전, 서슬 퍼런 검날이 또 한 번 번뜩였다. 시이이잉! 툭, 툭! 서늘한 바람이 스친 순간, 두 개의 목이 추가로 떨어졌다. 끽소리도 못하고 하릴없이 몸이 무너진다. 뜨듯한 핏물을 뒤집어쓴 여인은 비명을 질렀고, 남은 이들은 그제야 눈을 돌려 상대를 바라봤다. 한 손에 칼을 든 청년이 무섭게 노려보며 걸어오고 있다. 한껏 분노한 얼굴로 다가오는 사용자는, 다름 아닌 ‘주문 저격수’ 진수현이었다. “이 개 같은 새끼들….” 진수현은 치 떨리는 음성을 뱉으며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흡사 당장에라도 쳐 죽여버리고 싶다는 듯, 전신에서 뿌려지는 살기가 둑 터진 강물처럼 범람한다. 그 흉포한 기운에 짓눌린 사내들은 저항할 생각조차 못 하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하기야 머셔너리에서도 등급 A 판정을 받은 사용자인데, 한낱 쓰레기 떨거지들이 감당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씨, 씨발. 왜 저렇게 화를 내는 거야? 아무리 적이라고 하지만…!” “호, 혹시 이년 애인이 아닐까?” 그렇게 멋대로 생각한 사내들은 얼른 무기를 버리고 두 손을 들었다. “스톱! 스톱!” “Surren, Ah, Hey? GG! GG! Good Game!” 온갖 신체 언어를 구사하며 뒷걸음질 친다. 나름 현명하다면 현명한 선택. 그러나 진수현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단지 남 대륙 사내들이 하나 착각하는 게 있다면, 진수현은 여인과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애초 윤간 현장을 보고 분노한 것도 아니었다. “너희 때문이야….” 문득 머리 숙인 진수현이 끓는 듯한 음성을 흘렸다.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무는 것이 몹시 울분에 찬 얼굴이다. “너희 때문이라고….” 그런 진수현의 뇌리로 불과 몇 시간 전의 기억이 하나하나 스치고 지나갔다. ‘언니. 아까 왜 웃으신 거예요?’ 천진하게 물어보던 안솔과, ‘응? 아. 팥고물이랑 진한개 때문에.’ 차분히 웃으며 설명해주던 제갈 해솔.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진수현은 자신을 고고한 ‘마법사 사냥꾼’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기실 누가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몰라도, 여하튼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데…. ‘두 단어는 원래 아앙, 그리고 이 녀석이라는 일본어가 오역된 거거든?’ ‘네.’ ‘그런데 주로 야한 게임에서 주로 등장하는 오역이야.’ ‘호에에에?’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줄여서 미연시. 그러니까…. 어떻게 독학했는지 알겠지?’ ‘히익. 오따꾸!’ 그 이후로, 등만 돌리면 사방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고, 이상한 눈초리를 느꼈다. “너희만 아니었으면….” 바드득! 진수현의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이런 말이 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 가서 화풀이한다고. “너희가 여기로 쳐들어오지만 않았다면…!” 어쨌든 간접적인 원인 제공자를 앞두고, 미칠 듯한 격분이 터져 나왔다. “내 이미지 돌려줘! 이 개새끼들아아아아!” 그렇게 외친 진수현은, 칼을 꼬나 쥔 채 비호처럼 몸을 날렸다. 이제껏 쌓여온 모든 수치심과 울분을 담아. 결국에는 목에 칼이 쑤셔 박히는 순간까지도, 사내들은 진수현이 분노한 진의를 알지 못했다. ============================ 작품 후기 ============================ 에,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GG는 한때 스타크래프트에 쓰인 채팅으로, 게임이 끝나 나가기 직전 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 항복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러니까 GG를 외친 남 대륙 사내의 경우, 현대에서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를 꿈꾸던 전도유망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래서 스타 강국인 아시아 서버에 자주 접속했었고, 그래서 GG라는 단어를 알고 있다는…. 아무튼, 이렇게 생각해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0893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니, 이걸로 몇십 명째더라? 모르겠다. 하늘은 이제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전투 중 적을 죽인 숫자를 세는 것만큼 우스운 일은 없을 테니까. 사실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는다. 계속 휘두르다 보면 언젠가는 끝나 있겠지. 마침 눈앞에 허둥지둥 도망치는 놈들이 보여, 나는 서슴없이 땅을 박차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눈에 걸리는 대로 무차별로 빅토리아의 영광을 휘두르자, 붉은 기운이 섞인 잔상이 길쭉하게 늘어나더니, 도망치는 놈들의 목덜미로 예리하게 스민다. 써걱써걱, 육질과 뼈를 자르는 감촉이 섬뜩하다. 이내 오른 방향으로 그었던 손을 힘 있게 떨치자, 등을 보이던 놈들의 머리가 동시에 굴러떨어졌다. 차례대로 무릎을 꿇고 힘없이 쓰러진다. 잠시 참았던 숨을 내쉬자, 사방에서 약한 비명과 웅성거림이 귀를 때렸다. 뭐라 지껄이는지 모르겠으나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그냥 얼른 처리할 생각으로 이기어검술을 발동하니 무검, 일월 신검, 칼리고 아브락사스가 긴 검음을 터뜨리며 휘날리듯 하늘로 오른다. ‘검의 군주’를 계승함으로 얻은 이득 중 하나가, 내가 사용하는 검들과의 연결 고리가 한층 강해졌다는 데 있다. 몸의 일부로 여겨지는 신검합일을 넘어서 내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 잘 사용하기만 하면 어마어마한 위력을 낼 수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웅웅웅웅! 있는 힘껏 마력을 불어넣자, 세 자루 검은 구멍으로 빙글빙글 돌아 흘러가는 물처럼 사납게 회전하며 사방을 강타했다.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가 몹시 차다. 흡사 가로막는 모든 걸 부숴버리는 폭풍과도 같이, 칼날이 스치기만 해도 깨지고 조각조각 부스러진다. 가슴에 닿으면 가슴째로 잘려나가고, 허벅지에 닿으면 믹서기에 갈려 나가듯 다리가 뚝 떨어진다. 그 와중에도 방패를 들거나 방어막을 세운 놈들은 있었지만, 덧없는 일이다. 칼날의 돌풍에 휩쓸리는 두꺼운 쇳덩어리는 순식간에 금이 쩍쩍 갈라져 깨지고, 흰 장막은 일 초도 버티지 못하고 세절기에 넣은 종이처럼 분쇄된다. 단순히 회전력만 계산해도 막을까 말까인데, 검술 전문가의 권능인 결까지 곁들였으니 막을 리가 만무하다. 잠시 후, 수십 명이 뿜어낸 핏물이 공중으로 치솟으며 교차하고, 시끄럽게 귀를 긁던 철성 섞인 고함도 점차 잦아드는 찰나. 쐑! 갑자기 허공을 가르는 예리한 소음. 목을 노려오는 날 선 살기가 상당히 매섭다. 순간 검으로 후려칠까 하다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망토를 쥐어 끌어당겼다. 허연 김이 어른거리는 길쭉한 강철의 창이 짓쳐 들어온 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아니, 잠깐만. 강철로 된 창이라고? 『붉은 달 망토의 능력 ‘흡수’를 발동합니다.』 『아이론 랜스를 흡수합니다.』 아이론 랜스? 아이스 랜스가 아니라? 아무튼, 기세 좋게 쳐들어오던 강철 창은, 오는 속도 그대로 망토 안으로 쑥 사라졌다. 잠깐 몸에 받치는 듯한 감각은 느꼈으나 금세 사라졌다. 붉은 달 망토의 성능이 발동된 것이다. 강철의 창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자, 후드를 푹 눌러쓴 여인이 주춤 물러나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발을 굴러 튕기듯 돌진했다. 강철을 사용하는 마법을 보니 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궁신탄영으로 들어가자 거리는 삽시간에 가까워졌다. 여인은 깜짝 놀란 몸짓을 보였으나 순간적인 대응은 훌륭했다. 균형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뒷걸음질 치며 침착히 손을 내뻗는다. 그 순간 나는 조금이지만 속으로 기함하고 말았다. 쩡, 쩡, 쩡, 쩡, 쩡, 쩡! 딱히 주문을 외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돌연 여섯 번의 철성이 귀를 찔렀다. 흘끗 아래를 흘기니 새로운 강철의 창 여섯 개가 땅을 뚫고 솟구치고 있다. 흡사 살아 있는 생물처럼 한 바퀴 돌더니 빙그르르 회전하며 육방에서 찔러왔다. 확실히 의외의 공격이기는 했다. 그러나 나는 바로 마력을 끌어올렸고, 이형환위를 발동해 단숨에 여인의 후방을 점거했다. 앞을 응시하자 강철의 창들이 남은 잔상을 무자비하게 헤집는다. 여인은 큰소리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가, 상이 차차 흐려지기 시작하자 돌연 발을 헛디뎠고, 그대로 내 품으로 무너졌다. 가슴에 닿는 어깨가 가녀린 걸로 보아 여인임이 분명하다. 흠칫 어깨를 움츠린 여인은 곧 천천히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몸을 떠는 감각이 온몸으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후드 아래 살짝 비친 두 눈동자는 공포에 질려 한껏 치떠져 있었다. 왜인지 목에 걸린 강철 빛깔이 흐르는 검푸른 장미 목걸이가 유난히 눈에 밟힌다. 제 3의 눈으로 빠르게 정보를 훑어보자, 나도 모르게 끄덕이고 말았다. “과연. 그러고 보니 남 대륙에도 세 개 뿌렸다고 했던가?” 이미 상대는 무력화된 것이나 다름없다. 왼손을 뻗어 가냘픈 목을 움키고, 나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시끄럽던 도시는, 어느새 서서히 조용해져 가는 중이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돼 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혹시나 악마가 있지 않을까고 곳곳을 돌아다녔건만, 악마는커녕 남 대륙 주력 부대도 볼 수 없었다. 기껏 본 거라고는 약탈에 정신 놓은 떨거지뿐. 물론 승리한 건 응당 기뻐해야겠지만…. 뭐, 일단 이 정도로 만족해둘까. 구원군이 도착했다는 걸 알면 어떻게든 행동하겠지. 일련의 생각을 정리한 후, 나는 딱딱히 굳은 여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 화르르륵, 화르르륵! 밖에서 보는 성은 완전한 난장판이 돼 있었다. 부서진 성벽과 곳곳에서 오르는 불길, 게다가 시커먼 연기는 성 외부까지 흘러나와 매캐한 냄새를 물씬 풍긴다. 짙은 황혼이 드리운 도시에 불이 오르니, 성이 타는지 하늘이 타는지 모를 정도였다. 엘도라는 쓰디쓴 얼굴로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명은 좀 전부터 사그라졌지만,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능히 짐작이 가는 만큼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동 대륙을 침공한 남 대륙의 병력은 순수 이만 명도 채 되지 않는다. 엘도라의 명성이나 남 대륙의 인구를 생각해보면 상당히 적은 숫자임은 부인할 수 없다.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현재 이곳에 있는 인원이 엘도라의 명분에 공감한 사용자들 전부였다. 말인즉 따라오지 않은 이들은 엘도라의 행동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기야 천사의 속내를 만천하에 밝혔다손 쳐도, 모든 사용자가 그렇구나 하고 바로 받아들이는 건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다. 결국에는, 혼란에 빠진 남 대륙을 뒤로한 채 도망치듯이 동 대륙으로 오고 말았다. 물론 적극적으로 찬성해준 세력도 없는 건 아니었다. 가령 녹스나 카르페디엠을 들 수 있을 터. 그러나 그들은 애초 명분에는 일말의 관심조차 없는, 전쟁 두 글자에만 초점을 맞춘 이들이다.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라 참가를 허락했지만, 그런 만큼 어느 정도 행동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왜 전쟁에 열광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제한하면 등을 돌릴 것은 명약관화였으니까. 즉 일종의 거래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이리하여 엘도라에게 남은 건, 인간을 위한다는 합리성, 그리고 성과를 내고 자신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면 다시 지지해줄 거라는 믿음. 이 두 가지뿐이다. 이 두 명분을 원동력 삼아 엘도라는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쓰라린 전쟁도 오늘로 끝이다. 남 대륙은 경쟁 대륙을 떨어트렸고, 이곳을 발판 삼아 한층 세력을 키울 것이다. 그리고 이제 천사 대신 남 대륙의 뒤를 봐주는 소위 악마라는 자들의 힘도 커지게 된다. 그래, 그러니 오늘만 지나면…? 그때, 한참 상념을 정리하던 엘도라의 아미가 살며시 찌푸려졌다. 이제 거의 다 끝났다고 여겼건만, 갑자기 비명이 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부서진 성벽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그림자가 속출한다.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에드워드도 신속히 몸을 날렸다. 잠시 후. “반격이라고요?” “예, 예. 갑자기 워프 게이트에서 우르르 넘어왔다고….” 황급히 돌아온 에드워드에 보고에 진영이 살그머니 술렁인다. 엘도라는 두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가, 곧 표정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 북 대륙 구원군이 도착한 것 같습니다.” “북 대륙? 구원군?” 아키로프가 건들거리며 반문하자, 엘도라는 조용히 끄덕였다. “그자들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천사 쪽에서도 발 빠르게 행동을 취할 테니, 최대한 빠르게 동 대륙을 점령해야 한다고.” “허…. 그럼 얼마나 빨리 왔다는 거야?” “저도 놀랍기는 하지만, 그건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기는 하지. 그래서 어쩔 건데?” 잠깐 어수선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엘도라가 당황하지 않고 중심을 잘 지켜서기도 했지만, 애초 원탁의 기사들은 북 대륙 출현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기조였다. “우선 부대를 넷으로 나누겠습니다. 각자 성문으로 가서 아군의 도주로를 확보해주십시오.” “그리고?” “지금 바로 멜리너스 님에게 연락하겠습니다. 혹시 이상 현상이 생기면 바로 통신하라 하셨으니, 무언가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글쎄. 그놈들하고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부를 필요가 있을까? 우리만 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말이야. 큭큭.” 그렇게 말한 아키로프는 휙 몸을 돌려 부대를 소집했다. 그리고 간다는 말도 없이 빠르게 황혼 속으로 사라졌다. 심지어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기실 아키로프가 여유로운 것도, 아니 원탁의 기사들이 어깨를 으쓱이는 것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남 대륙 사용자들은 기본적으로 자부심이 상당히 강하다. 간단히 말해 자신이 속한 대륙 수준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다. 게다가 동 대륙을 상대해오며 자부심에 확신이 더해졌으니, 북 대륙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접해도 딱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자신감의 발로. 아키로프가 즐겁다는 듯이 달려나간 것에는, 이러한 바탕이 깔려 있었다. 아키로프는 소집한 부하들과 함께 가장 가까운 문을 향해 나는 듯 달리는 중이었다. 성이 가까워질수록 입가에 걸린 미소도 진해진다. 실제로 아키로프는 전쟁을 치르는 동안 가끔 불평하고는 했다. 왜냐면 엘도라가 오딘 클랜은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엄히 통제했기 때문이다. 시가지 전투에 참가해 욕망을 채우고 싶은 마음은 굴뚝인데, 약탈은커녕 아예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니 날로 불만이 쌓였었다. 그래서, 북 대륙이 시기 적절하게 등장해준 걸 오히려 고맙게 느끼고 있었다. 마지막 대 도시를 앞두고 거의 포기하고 있었건만, 막판에 유흥 거리를 만들어줬으니까. 이윽고 성문이 눈앞까지 다가온 순간, 공교롭게도 아키로프는 도망쳐 나오는 아군과 맞닥뜨렸다. “아, 아키로프 님!” 허겁지겁 뛰쳐나오던 무리는, 아키로프를 보자마자 쓰러지듯 엎어졌다. 잠시 안도의 한숨을 짓더니 아차 하며 뒤를 가리킨다. “서, 성안에!” “아아, 들었다. 새 원숭이들이 출현했다면서?” “예, 예?” “한데 참, 꼬락서니 하고는…. 쯧쯧. 고작 털 노란 원숭이도 못 당해내고 도망쳐? 창피하지도 않나?” 조롱하듯이 꾸짖자, 엎드린 사내들이 멍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곧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 그게 아닙니다! 그놈들은 정말로 괴물 같은!” “괴물이라.” 또다시 말을 끊은 아키로프가 낄낄 웃는다. 그러다 뚝 웃음을 그치더니, 스산한 눈빛을 빛냈다. “이야, 거참 무섭네. …그런데, 그놈들이 괴물일까? 아니면 내가 더 괴물 같을까?” 그 말에 사내들은 입을 다물었다. 상대를 깔아보는 몹시 거만한 태도에 절로 주눅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한편으로는 묘한 안도감도 느꼈다. 왜냐면 눈앞의 사용자는 남 대륙 중에서도 손꼽히는 기사니까. 무엇보다 그 오딘 클랜의 한 축을 담당하는 기둥이 아닌가. 경외의 시선을 느낀 걸까.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기야 명색이 한 대륙인데, 유별난 원숭이 한두 마리야 없겠어?” 천천히 눈빛을 거두며 오만하게 웃음 짓는 아키로프. “그러니 너희 같은 보통 놈들은, 보통 원숭이나 상대하고 있으라고.” 그리고 돌연 사내의 어깨를 탁 짚더니, “특출난 원숭이는, 이 몸이 맡아줄 테니.” 불길이 흐르는 성 내부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그래요. 죽고 싶으면 뭘 못하겠나요. 0894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성내 전황도 서서히 정리되어 가는 것 같아, 나는 성벽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을 올랐다. 첫 전투서 대승을 거두기는 했지만, 겨우 떨거지에 불과한 놈들이다. 악마든 오딘이든, 연합군의 중심은 성 바깥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주력 부대의 움직임을 주시할 필요가 있었다. 어느새 해는 서쪽으로 완전히 넘어갔고, 어스레한 석음(夕陰)이 도시로 그윽이 스며드는 중이다. 나는 성벽으로 올라선 후, 시력을 높여 성 너머를 응시했다. 그러자, 역시나. 어둑해져 가는 황혼 사이로, 떼로 움직이는 무수한 형상이 한눈에 시야로 잡힌다. 아마 우리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한 듯싶다. 생각보다 움직임이 빠르다. 그나저나 악마는…. “수현아.” 상념에 잠긴 와중, 문득 나를 나직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벽 계단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천천히 올라오고 있다. 형이다. “넘어온 거야?” “방금. 거의 끝나가는 것 같기는 하다만.” 어깨를 으쓱인 형은 성큼성큼 다가와 성벽을 짚었다. 나는 차분히 끄덕였다. “간발의 차이였어. 한 시간, 아니 삼십 분만 늦었어도 돌이킬 수 없었을지도.” “흠. 아군의 도주로를 확보하려는 건가? 아니면 네 방향에서 몰아치려고 저러나.” “응?” “상대 주력 말이다. 총 넷으로 나뉘어 움직이는 중이다. 아마 사 방향 정문을 점거할 속셈인 것 같은데.” 그건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어보려는 찰나였다. 어두운 석양에 가려 몰랐는데, 형의 두 눈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그제야 하늘을 빙글빙글 선회하는 노을빛 매 한 마리를 볼 수 있었다. 왜 멍하니 먼 곳만 바라보나 싶었건만, 쪼롱이의 눈과 동화해 도시 주변을 확인한 듯싶다. “혹시 악마가 어디 있는지 보여?” 형이 한 바퀴 몸을 돌리더니 천천히 머리를 가로젓는다. “아니. 안 보이네.” “안 보인다고?” “물론 쪼롱이 시야도 한계는 있지만…. 글쎄. 적어도 인근에는 없는 것 같다.” “…….” 단언하는 음성에 나는 조용히 침묵했다. 약간 의외이기는 했지만,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우선 예전 가브리엘의 입수한 영상으로 악마가 나왔다는 사실은 확인했다. 그리고 악마는 모종의 목적을 갖고 동 대륙을 침공했다. 그럼 그 목적이라는 것 때문에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도시를 점령한 이상, 메모리아 스톤도 얻었을 테니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을 거고. 이렇게 하나씩 생각을 정리하니 불현듯 짐작 가는 바가 하나 생겼다. 아니, 거의 확신에 가까운 예측이었다. 웅웅웅웅, 웅웅웅웅! 그때, 느닷없이 거칠게 날뛰기 시작하는 흉포한 마력 흐름이 느껴졌다. 그것도 바로 옆에서. 나도 모르게 턱을 젖히니, 어느 순간 잔뜩 밀려든 먹구름들이 하늘을 먹먹히 가리는 중이었다. “형?” 깜짝 놀라 옆을 돌아보자, 형은 어느새 온몸서 샛노란 번갯불을 튀기고 있었다. 춤을 추듯 지그재그로 들썩대던 금빛 전류는, 이내 짜르르 흘러 오른손으로 둥글게 뭉치기 시작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살이 저릿해지는 게, 당장에라도 천지를 진동시킬 듯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는다. 그러할진대, 전방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형의 얼굴은 담담하기 그지없다. “뭐 하는 거야? 왜 뇌신을…?” “응? 아, 이상한 행동을 하는 놈들이 보여서.” “이상한 행동?” “보아하니 세 부대는 정문에서 도주로를 확보하려는 것 같은데, 한 부대는 계속 안으로 들어오네.” 쿠르르릉, 쿠르르릉! 뒷마디는, 갑자기 치는 뇌성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형이 팔을 앞으로 천천히 뻗는다. “그러니까.” 그리고 싱겁게 미소 짓더니, “가벼운 환영 인사 정도로 해둘까.” 딱. 가볍게 손을 튕겼다. * 꽈르르릉, 꽈르르릉! ‘자, 이제 시작이야.’ 를 외치려던 아키로프는, 갑자기 귀를 후리는 뇌음(雷音)에 걸음을 멈췄다. 반사적으로 사방을 둘러봤으나, 어떤 이상 현상도 보이지 않는다. “방금 무슨 소리…. 응?” 아니. 하나 있기는 했다. 좀 전까지 차츰차츰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건만, 소리 이후 갑자기 땅바닥이 환해졌다. 흡사 조명을 비추기라도 하는 것처럼. 짧은 시간, 아키로프는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허나 곧 아차 소리 지르더니 황급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 하늘이 끓고 있었다. 방대한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는 먹구름. 서로 부딪치는 구름 사이로 환한 빛이 드리우고, 흑운은 뇌운으로 돌변한다. 찰나의 순간, 아키로프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치떠졌다. 그 순간이었다. 콰르르르르르르릉! 거대한 천둥소리가 고막이 찢어지라 강타한 순간, 짜자자자자자자작! 갈지자(之)를 그리는 수백 발의 빛줄기가 폭우처럼 퍼부어졌다. * 한편, 같은 시각. 동 대륙 어느 곳에서는, 차마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괴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광활한 광장에는 수천, 아니 일만을 넘는 인간들이 곳곳에 차곡차곡 쌓였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포개져 있는데, 기실 거의 동 대륙 사용자였으나 거주민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핏물 범벅인 채 눈을 감고 있는 사용자가 많았지만, 간혹 신음을 흘리거나 공포에 질려 눈을 떠는 이들도 종종 보인다. “흐흥, 흐흐흐흥.” 그런 인간 더미로 향하는 여인이 한 명 있었다. 심지어 콧노래까지 부르며 걷는 것이 몹시 기분이 좋아 보인다. 앙칼지게 올라간 눈썹이나 반듯한 이마는 겉보기에 미인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 그래서 외려 어색했다.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처절하다 못해 끔찍한 배경을 기분 좋게 걷고 있으니. 그러거나 말거나, 사뿐사뿐 걷던 여인은 더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빙긋 웃었다. “어디 보자~.” 기이하게도 걸음이 멈춘 곳에는 커다란 마법 진이 그려져 있었다. 애초 인간 더미가 가리고 있고 진도 붉은색이라 선명하지는 않지만, 하나 분명한 건 쌓인 인간 아래로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꼭 인간들을 진의 제물로 바칠 것 같은 풍경이라고 해야 하나. 여인은 손을 뻗어 먹잇감을 가리켰다. 그리고 조용히 주문을 외우자, 신기한 현상이 벌어졌다. 붉은 진이 돌연 빛을 띠기 시작하더니 올려진 인간들이 스르르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그 속도는 굉장히 빨라, 흡사 용광로에 섞이는 아이스크림을 보는 듯하다. 아무리 비위가 좋은 인간이라도 눈을 찡그릴 수밖에 없을 터.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용해된 인간은 곧 한 줄기 액체로 변해 여인의 체내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더미가 줄어들수록, 진의 빛이 강렬해질수록, 실처럼 가늘던 줄기가 서서히 두께를 키워간다. “하~아.” 여인은 희열 어린 탄성을 터뜨렸다. 양분으로 화한 사용자의 기운이 들어올 때마다, 텅 빈 것 같던 몸이 조금씩 채워지는 기분이다. 물론 본래 낼 수 있는 힘에 비하면 극히 미약한 수준이나, 어쨌든 이거라도 어딘가. 마력이 증강되고 권능이 돌아오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짜릿하다. “좋아, 아주 좋아!” 힘이 돌아오는 것이 그리 기쁜지, 까르르 웃으며 한층 거세게 기운을 빨아들인다. “사, 사탄!” 그러나 그때, 급한 음성이 옆으로부터 끼어들었다. “흐응? 나 지금은 사탄 아닌데?” 한창 좋을 때 방해받아서인지 여인은 짜증 섞인 얼굴로 눈을 흘겼다. 그러자 긴 수염을 날리며 달려오던 노인이 주춤하더니 공손히 허리 숙인다. 멜리너스였다. 아니, 벨리알이라고 해야 하나. “죄, 죄송합니다. 타나토스 님.” “뭐, 됐어.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니. 아무튼, 왜?” “방금 통신을 받았습니다. 북 대륙 구원군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응?” 타나토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두어 번 눈을 깜빡깜빡하더니 픽 웃음을 터뜨렸다. “와, 진짜? 너희도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정말 빨리도 왔네?” “예, 예.” “아, 그럼 도시는?” “함락 직전에 넘어왔다고 하더군요. 우선 후퇴하고, 저희가 넘어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 했습니다.” “헤…. 그건 좀 아쉽다. 거기도 양분 꽤 있다고 하지 않았나?” “…….” 천연한 음성에 멜리너스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중요한 계획 하나가 성공해 한숨 돌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상황이 급변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계획은 아직 끝나지 않고 한창 진행 중이다. 사탄이 구상한 심계는 놀랍도록 촘촘하다. 그러나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다. 하나라도 틀어지는 즉시 사상누각처럼 무너질 것이다. 말인즉 변수가 발생하면 신속히 대응해야 하는데, 눈앞 여인의 태도는 느긋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무언의 시선을 느꼈는지 타나토스는 입맛을 다시며 끄덕거렸다. “아아, 알았어. 그러니까~.” “우선 타나토스 님과 저, 그리고 이안은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그리고 다른 놈들은?” “육 대 악마와 그 권속들은….” 멜리너스는 말을 흐리더니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길을 뚫을 겁니다.” ============================ 작품 후기 ============================ 으악, 업데이트 시간이 다시 늦어지고 있네요. 이러면 안 되는데. ;ㅅ; 마음이 급해서 우선 완성되자마자 올립니다. 바로 줄 조정 수정하고 문맥 확인 작업 들어갈게요. ㅜ.ㅠ * 완료했습니다. :) 0895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아니. 그건 안 돼.” 그때였다. 타나토스가 귀찮다는 얼굴로 끄덕거리는 와중, 감미로우면서 점잖은 음성이 둘 사이를 가로지른다. 멜리너스가 바라본 곳에는 준수한 외모의 악마가 걸어오고 있었다. 타나토스의 앞에 선 루시퍼는 정중히 머리 숙였다. “우선 혼란스럽게 한 점 사과 드리겠습니다.” “흐응?” “저희 육 대 악마도 대 도시로 가겠습니다. 물론 악마 십사 군주는 물론, 최상급 마족도 여럿 데려갈 생각입니다.” “루시퍼 님!” 큰소리를 냈던 멜리너스는 서슬 같은 눈이 돌아보자 얼른 목소리를 낮췄다. 벨리알이 사탄의 최측근이라고는 하나, 어쨌든 공식 지위는 악마 십사 군주. 대 악마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타락 천사’와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이윽고 루시퍼가 눈빛을 거두니 멜리너스도 두어 걸음 물러섰다. “죄송합니다.” “벨리알, 아니 멜리너스. 사탄의 계획은 어긋나지 않았어.” “…예?” “북 대륙이 예상보다 빠르게 도착하기는 했지. 확실히 변수는 맞아. 그러나 네 말대로 하게 되면, 그때야말로 계획이 틀어져 버릴지도 몰라.” “하, 하지만.” “약속의 신전까지 길을 뚫는 건, 남은 마족으로도 충분해.” 이 이상의 이견은 받지 않겠다는 듯 루시퍼는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멜리너스는 조용히 침묵하기로 했다. 현재 모든 악마는 사탄이 구상한 틀에서 움직이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는 단 한 번밖에 없어.’ 그러나 이 말은 단순한 결과에 불과할 뿐, 과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즉 뭘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에 관해서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아니. 단 한 명 있기는 하다. 루시퍼는 사탄이 씨앗이 되기 직전 만난 유일한 악마다. 그러니 사탄의 심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적어도 자신보다는 말이다. 이게 바로 멜리너스가 입을 닫은 이유였다. “같이 가든 말든 너희 멋대로 하는 건 좋은데….” 입술을 살짝 핥은 타나토스는 다른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또 한 무더기의 인간이 살살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괜찮겠어?” “예?” “뭐….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나도 사탄의 지식은 상당 부분 받아들였거든.” “아, 그렇습니까?” “응. 탁 까놓고 말해서, 너희 이대로라면 질지도 몰라?” “아마 그렇겠지요.” 말을 마친 타나토스는 살며시 눈을 흘겼다. 그러나 루시퍼는 발끈하기는커녕 바로 긍정했다. 흡사 왜 당연한 말을 하느냐는 것처럼. 타나토스의 실쭉해진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잠시 후, 한껏 들떴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우리는 이미 졌어. 그렇지? 루시퍼.’ 어색한 정적이 흐르는 동안, 타나토스는 시꺼멓게 침잠한 눈동자로 상대를 뚫어지라 응시한다. 속내를 단숨에 꿰뚫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러나 루시퍼는 담담히 미소 짓고 있을 뿐, 그 이상의 반응은 않는다. 결국, 먼저 반응한 건 타나토스였다. 싱겁다는 듯이 코웃음 치더니 아담한 어깨를 들먹거렸다. “하여간 웃기는 놈들이야. 뭔 일을 이렇게 어렵게 하는지.” “실제로 어렵습니다. 우리가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잖아요? 뭐, 상황이 많이 복잡해졌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만.” “헤~. 인간이라면 이미 수중에 얻었을 텐데? 꼭 이럴 필요까지 있을까?” “말씀처럼 쉬웠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요. 그리고 주력은 이미 동 대륙으로 돌렸으니, 남은 떨거지들은 데려가 봤자 일 겁니다.” 루시퍼는 속삭이듯 중얼거리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리고 떠나가기 직전, 타나토스를 등진 채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타나토스 님이 이 사실을 모르실 리가 없을 텐데요.” “으응?” “약속의 신전, 아니 제로 코드 말입니다.” “…….” 아까부터 뜻 모를 이야기가 오고 가고 있다. 타나토스는 킥킥 소리 내서 웃더니 뻗었던 팔을 거두어들였다. “그냥? 내가 모르는 만큼, 뒤통수 맞을 일도 염두에 둬야 하잖아?” “그건.” “오해하지는 마. 배신하지 말라는 소리는 아니란다.” “……?” “우선은 너희 뜻대로 움직여줄게. 재밌으니까.” “…설마요.” 루시퍼는 약간 늦게 회답했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미소 띤 낯으로 말을 잇는다. “배신이라니요. 또, 이미 인질은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긴, 그렇기는 해.” 타나토스는 순순히 수긍했다. “너희가 그렇게 믿어 마지않는 사탄이 돌아오려면, 아직은 내가 필요하겠지?” “그런 것도 있지만, 요정의 참전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요정?” “아, 별건 아니에요. 단지 타나토스 님을 해방할 때, 약간의 안배를 해뒀을 뿐입니다.” 그러자 타나토스는 절레절레 고개 저으며 힘껏 기지개 켰다. “아~. 싫네. 자꾸 뜬구름 잡는 소리만 찍찍 내뱉는 거.” “하하….” “아무튼, 가는 건 가는 거고. 그래도 얘네는 먹고 가도 되겠지?” “그럼요.” 타나토스가 인간 더미를 가리키자, 루시퍼는 안 될 게 뭐 있겠느냐는 듯 빙긋 미소 지었다. 이어서 한 손을 가슴에 대고 느긋이 허리 숙이며 말했다. “부디 마음껏 즐겨주시길.” * 밤이 지나고, 동녘 하늘이 밝아왔다. 어젯밤 전투가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맑고 조용한 아침이었지만, 성내는 아직도 살짝 부산스럽다. 시가지로 들어온 적을 쫓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전후 처리가 문제였다. 워낙 동 대륙이 일방적으로 압살당한 탓에, 우리가 도착하기 전까지 발생한 부상자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사제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라, 결국에는 북 대륙 사제까지 총출동하고 말았다. 보아하니 새벽 내내 치료 활동을 한 것 같은데, 이제 어느 정도 잦아든 듯싶다. 아무튼, 그건 그렇다 치고. 황혼의 전투는 우리가 압승했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어제 추가로 돌진해 온 부대 중 세 곳은 도주로를 확보한 후 바로 돌아섰고, 한 부대는 형의 뇌신에 당해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우리 쪽 사상사도 없지는 않으나 극히 적은 수준이거니와, 남 대륙은 사용자 이삼천 명이 사망했으니. 물론 적의 주력 부대는 고스란히 살아 있고, 남은 인원도 우리보다 갑절은 많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직 악마가 등장하지 않았다. 즉 전투는 이제 겨우 서장을 넘겼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이윽고 성을 돌아보려 나선 찰나, 공교롭게도 형이 나를 찾아왔다. 상념에 잠겨 잠을 이루지 못했는지 얼굴빛이 약간 피로해 보인다. “수현아. 잠깐 이야기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회의라도 잡혔어?” “아니. 개인적으로.” “……?” 그렇게 말한 형은 몸을 돌려 어딘가로 걷기 시작했다. 성 내부는 곳곳이 부서져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지만, 어제보다는 훨씬 낫다. 어제 흐드러지게 널려 있던 부상에 신음하는 사용자나 흉측한 시체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형이 걸음이 멎은 곳은, 사용자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거리를 가로질러, 상당히 구석지고 한산한 장소였다. 걸음을 멈추자마자 바로 나를 돌아본다. “내가…. 아, 말은 들었지? 남 대륙이 상당히 거리를 벌렸다는 거.” 나는 천천히 끄덕였다. 정찰 인원을 풀 것도 없이 형의 능력만 있으면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 남 대륙은 어제 아군의 도주를 도운 후, 신속히 거리를 벌렸다. 아주 도망쳤다는 건 아니고, 약 이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새로 진을 쳤다. 그리고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동 대륙 부상자를 회복시키고, 한편으로는 급하게 달려온 만큼 체력을 회복할 필요도 있으니까. “그리고 악마는 아직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고.” 뭘 말하고 싶으냐는 의미로 쳐다보자, “그래서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말이다.” 형이 돌연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혹시 저 남 대륙도 미끼가 아닐까?” “미끼?” “그래. 미끼. 서 대륙으로 그랬던 것처럼, 남 대륙을 이용해 우리를 잡아두고, 그 사이 악마들은 약속의 신전으로 간다는….” “하하.” 자못 중대하게 말했지만, 순간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형은 내가 웃을 줄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을걸. 사탄이 바보도 아니고.” “왜?” “간단해. 약속의 신전은 천사나 악마는 들어갈 수 없거든.” “뭐라고?” “들어봐. 편의상 약속의 신전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제로 코드가 있는 곳은 일종의 보호 지역이라고 해도 좋아. 천사와 악마는 물론, 신, 괴물, 짐승 등은 얼씬도 못 하는 곳이야. 애초 출입이 허락된 존재는 소수 인간뿐이고, 손을 댈 수 있는 것도 오직 인간뿐. 즉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법칙이 작용하는 법역(法域)이라고 해야 하나.” “법역…?” 형은 멍하니 내 말을 따라 하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빛을 보였다. 조금 쉽게 설명해볼까. “생각해봐. 그게 가능했다면 악마는 왜 애초 약속의 신전으로 가지 않았을까? 천사야 그 당시 불리한 상황에 부닥쳤기는 했다만, 왜 굳이 우리를 데려왔고?” 그러자 간신히 알아들었는지 형의 얼굴이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한다. “잠깐만. 그럼 이럴 가능성은?” 금세 도로 심각해지기는 했지만. “악마가 남 대륙 사용자를 데리고 가는 수도 있잖아? 지금 우리와 대치하는 놈들을 미끼로 쓰고.” 으음. 이건 확실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글쎄. 사탄이 그런 선택을 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그러나 나는 망설임 없이 부정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오히려 고맙지.” “어째서?” “아까도 말했지만, 그곳은 법역이야. 워낙 법칙이 강하게 작용하는 곳이다 보니 보통 사용자는 어떻게 할 수도 없어.” “인간은 출입 가능하다며? 아까 그랬잖아.” “그러니까 소수라고 했잖아. 애초 일 회차에서는 출입 허락이 떨어진 사용자도 없었고, 외부에서부터 차근차근 공략해나갔다고.” “공략?” 형의 질문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무에 그리 궁금한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심정으로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일차적으로 법역을 깨트려야 하는 건 맞지만, 그걸 해제했다고 다 끝나는 게 아니거든. 그림자 지대, 검의 지대, 피와 철의 지대, 신성 지대, 거기다 시험의 지대까지…. 가는 도중에 얼마나 많은 함정을 지나고, 또 어떤 수호자가 등장했는지 알기나 해?” “그래?” “그래. 최정예 일만 명이 열여덟 번이나 원정해서 겨우 약속의 신전을 발견했다고. 그 안에도 무시무시했지. 아마 거기까지만 해도, 가는 기간까지 포함해서 반년은 걸렸을걸?” “그럼….” “정 형의 말이 맞는다고 치면, 우리는 이러면 돼. 최대한 빨리 남 대륙 주력 부대를 전멸시키고, 바로 북 대륙으로 돌아가서 약속의 신전으로 가는 거지. 그리고 손가락만 빠는 악마 놈들을 처치한 후, 안에서 한참 고생하고 있을 남 대륙 잔여 인원을 처치한다. 아무리 늦어도, 넉 달이면 가능할 것 같은데?” “아하! 각개격파를 하면 된다.” 그제야 형은 탄성을 질렀고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 “결국에는 기우라는 거지. 차라리 우리를 꾀어내려고 거리를 벌렸다는 게 더 신빙성 있겠다.” “Ok. 알겠다.” 이렇게까지 말하자 겨우 안심했는지 형이 씩 웃는다. 그러나 곧 눈을 깜빡거리며 머리를 갸우뚱 기울인다. 이런, 설명이 부족했던 건가. “그런데 아까, 소수지만 출입이 허락된 존재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응? 응.” “그럼 아무 무리 없이 들어가려면 어떤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는 거야?” “그건….” 나는 말을 흐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나도 잘은 모른다. 그때는 관심이 오롯이 제로 코드에만 쏠려 있었거니와, 겉으로 밝혀진 사실만 알뿐. 자세한 속사정까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한 명의 왕…. 아니 네 여왕이라고 했었나?”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때 어떤 말을 들었더라? ============================ 작품 후기 ============================ 이번 회를 보고 아차 하신 독자 분들이 계실 거라 사료됩니다. 아마 예전 내용을 찾아보실 수도 있다고 생각하온데, 찾기 귀찮으실 까봐 오늘 후기를 빌려 제가 복붙을 하겠사옵니다. _(__)_ - 죽은 마군(魔軍)의 지대를 피와 철의 지대로 수정합니다.(01시 51분) * 똑같이 주변을 둘러보던 마르는 곧 두 눈을 반짝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너무나 심심했는데, 갑자기 신기해 보이는 것들이 우수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삭막하기 짝이 없는 김수현의 집무실에 비해 이곳은 아마 신천지나 다름없으리라. 결국 조용히 구경하는 건 잠시. “웅아!” 마르는 입을 헤 벌린 채 한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한다. “보자…. 저번에 들어온 게 빛과 어둠의 결정이고. 다른 결정 두 개는 어디 있지?” 이유정은 이런 마르의 이동을 전혀 모르는 중이다. 그저 이번 임무를 잘 마치면 김수현이 또 이마에 뽀뽀해줄지도 모른다는 덧없는 상상을 하며, 한창 창고 정리 삼매경에 빠져있을 뿐. 그러나 이유정은 알까? 오늘 마르를 이 창고에 데리고 옴으로써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그일 때문에, 지금 이유정으로서는 알지 못하는 어딘가가 발칵 뒤집혔다는 사실을. 그리고. 예전 두 번이나 품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유현아를 처단한, 돌이킬 수 없던 김수현의 선택을 극적으로 되돌렸다는 것을. 아마, 영원히 모를 것이다. 0896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아침이 지나고, 해가 중천에 오를 즈음에도 남 대륙은 딱히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여태껏 거침없이 진군해온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이상하기는 하다. 생각할 수 있는 경우는 두 가지. 첫 번째는 형의 말대로 여기서 최대한 시간을 끄는, 이른바 미끼 임무를 수행하는 것. 두 번째는 함정을 설치할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우리를 성 밖으로 꾀어내는 것. 전자보다는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어느 쪽이든 큰 상관은 없다. 전자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무조건 승리하는 길이고, 설령 후자라도 질 거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왜냐고? 간단하다.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봤자 불시에 악마가 등장하는 장면일 텐데, 그건 이미 대비를 해뒀으니까. 그 방법을 사용하면…. 글쎄. 그들이 악마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도움이 될 것이라는 건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신화 시절 최강의 용을 상대로 이겨낸 고대 영웅들인데, 약화한 악마를 상대로 어느 정도 시간은 끌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돌연 미미한 마력 흐름이 느껴졌다. 옆으로 눈을 돌리니 어느새 두 여인이 다가와 있었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제갈 해솔과 동 대륙 사용자로 보이는 여인. 어제 넘어왔을 때 언뜻 본 기억이 있다. - 저. 음성이 울려 나오는 걸 보니 번역 마법을 사용한 듯싶다. 아, 그래서 제갈 해솔이 같이 온 건가. 수송 셔틀에 이어서 번역 셔틀이라니. 너도 고생이 많구나. - 아키노라고 합니다. 구원군을 보내주신 점 정말 감사합니다. 아키노라고 밝힌 여인은 진심이라는 듯 깍듯이 허리 숙였다. “괜찮습니다. 임무 수행의 일환이니까요. 그나저나 현재 동 대륙 상황은 어떻습니까?” 어차피 이번 일만 끝나면 더 볼 사이도 아니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아키노는 곧장 허리를 폈다. - 송구합니다. 침공 소식은 일찍 접했으나. “송구할 필요도 없고, 구구절절한 사연은 사양하겠습니다.” -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흠.” 짐짓 세게 말했건만, 의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당황한 기색은 아니다. 아마 그만큼 자신들이 처한 처지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일 터. 좋아. 아마 수호자 정도 되는 사용자인 것 같은데, 태도를 보니 한시름 놔도 될 것 같다. 보자마자 징징거렸으면 상당히 짜증 났을 테지만, 적어도 발목은 잡지 않을 것 같거든. - 우선 지켜낸 도시는 이곳뿐입니다. “생존자는?” - 칠팔천 명 정도 됩니다. “칠팔천 명.” 알기로 동 대륙 인구는 약 이만 명. 그럼 일만 이천 명 정도가 연합군에 넘어갔다는 소리다. 아니, 악마의 양분으로 화했다 봐야 옳으려나. 아무튼, 중요한 건 이 칠팔천 명을 전력으로 사용할 수 있느냐인데. “당장 가용할 수 있는 수는 어느 정도나 됩니까? 부상자 제외하고.” - 한 사천 명…. “거기서 거주민을 제외하면요?” - …삼천 명입니다. 아키노는 뺨을 살짝 붉히며 말을 흐렸다. 뭘 부끄러워하는지 짐작은 가는데, 상관없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을 뿐, 애초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조용히 성안에 있으라 하는 게 낫겠다. “클랜 로드!” 그때 누군가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먼 곳에서 신재룡이 조깅하듯 성큼성큼 뛰어오고 있다. 이윽고 내 앞으로 도착한 신재룡은 숨을 힘껏 들이켜며 입을 열었다. “그림자, 후! 그림자 여왕님의 전언입니다. 심문이 끝났습니다.” “아, 그래요?” 나는 반색하며 몸을 돌렸다. 어젯밤 강철을 부리던 마법사를 잡은 후, 죽이지 않고 포로로 넘겼다. 금방 정보를 캐낼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이제야 성공한 모양이다. “예. 정신 오염이 성공했고, 정보를 토해냈습니다. 방금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고연주의 고유 능력, 유혹의 눈동자를 상대로 오래 저항했다는 건 정신력이 뛰어난 사용자라는 방증이다. 실력 좋은 사용자는 높은 위치에 있을 가능성이 높고, 그만큼 아는 것도 많지 않겠는가. 과연 어떤 정보를 뱉었으려나? “뭐라고 합니까?” “제가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가면서 겸사겸사 듣죠.” “예. 우선 남 대륙 병력은 약 이만 명 가깝게 된다고 합니다.” 말을 들은 순간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칫했다. 이만 명? 겨우? 그곳 인구는 우리와 비슷하지 않나? “저도 좀 적다고 생각했는데….” 내 표정을 읽었는지 신재룡이 빠르게 말을 잇는다. “반란이 성공하고 악마가 나타나자 오딘에 대한 신뢰가 엄청나게 추락했다고…. 아, 오딘은 남 대륙을 선도하는 클랜이라고 하네요. 중앙 관리 기구와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요?” “오딘이 주도한 반란에 상당한 갑론을박이 있었나 봅니다. 결국, 오딘은 혼란에 빠진 라그나로크를 놔둔 채 지지하는 세력만 이끌고 나왔다고 합니다.” “오호.” 그 말을 들은 순간 반사적으로 무릎을 탁 쳤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소식이었고, 동시에 형의 걱정이 기우였다는 게 증명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때였다. 바로 회의를 소집하려는 찰나, 또 누군가가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머, 머셔너리 로드 님!” 처음 보는 사내가 헐레벌떡 달려와 급격히 숨을 몰아 쉰다. 그리고 놀랄만한 소식을 전했다. “남 대륙이 진군해오기 시작했다고요?” “예, 예! 해밀 로드 님이 어서 모셔오라고…!” 사내는 헐떡거리면서도 서둘러 남문을 쳐다봤다. 나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성벽으로 올라가자, 이미 나를 제외한 상당수의 클랜원, 사용자가 올라와 있었다. 고연주는 성벽에 올라앉아 느긋이 다리 꼬고 있었지만, 선유운처럼 반파된 망루로 올라가 저격을 준비하는 이도 보였다. 그리고 형은 나를 돌아보며 빙긋 웃더니 아무 말도 않고 성벽 너머를 가리켰다. 마침 클랜원들도 좌우로 길을 터줘, 나는 바로 전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두두두두두두두두! 어마어마한 진동 소리와 함께 흙 연기가 뽀얗게 일어나는 중이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한 그림자가 황야를 검게 물들이며 돌격해오고 있었다. 흡사 그대로 이 성을 밀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이만 명…. 아니다. 어제 좀 죽였으니 약 일만 팔천 명 가량 되지 않으려나. 우리보다 세 배를 넘은 인원임은 분명하지만, 이상하게 부담은 느껴지지 않는다. 주변에 있는 사용자들도 마찬가지로 담담한 얼굴이었다. 어젯밤 전투로 자신감을 얻었는지 아니면 워낙 잔뼈가 굵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동, 서, 북쪽은?” “안 보여. 아마 성벽이 부서진 곳이라 집중적으로 공략할 속셈인 것 같은데.” 형의 답변에 끄덕거린 후, 다시 앞을 바라봤다. 그러자 문득, 한 여인이 눈에 밟힌다. 머리카락서 황금빛을 반사하는 여인은, 누구보다 가장 앞으로 나와 질주해오고 있었다.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게 있어,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 Player Status > 1. 이름(Name) : Eldora Cornelius(6년 차) 2. 클래스(Class) : 금빛의 기사(Secret, The Golden Knight,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라그나로크(Ragnarok) 4. 소속 단체(Clan) : 오딘(Odin)(Clan Rank : AA) 5. 진명 • 국적 : 엘도라도의 주인(Owner Of The El Dorado) • 영국(England) 6. 성별(Sex) : 여성(20) 7. 신장 • 체중 : 164.2cm • 52.2kg 8. 성향 : 질서 • 선(Lawful • Good) [근력 100(+6)] [내구 94(+2)] [민첩 90(+2)] [체력 92] [마력 95(+4)] [행운 100] (잔여 능력치는 0포인트입니다.) < 능력치 비교 > 1. 김수현 [근력 99(+2)] [내구 95(+2)] [민첩 101] [체력 101(+2)] [마력 96] [행운 90(+2)] (잔여 능력치는 0포인트입니다.) Total : 582 Point 2. 엘도라 코르넬리우스 [근력 100(+6)] [내구 94(+2)] [민첩 90(+2)] [체력 92] [마력 95(+4)] [행운 100] (잔여 능력치는 0포인트입니다.) Total : 571 Point 그렇게 출력된 정보를 확인한 순간, “응?” 절로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엘도라, 엘도라 코르넬리우스. 오딘 클랜의 수장인 만큼 확실히 굉장한 사용자 정보를 갖고 있다. 그러나 내 관심은 엘도라의 사용자 정보 따위가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체력에 관심이 있었다. 일 회차 기억에 따르면 엘도라는 분명 체력을 올려주는 장비를 갖고 있었다. 사용자의 근력을 무조건 육 포인트 올려주는 엑스칼리버. 그리고 엑스칼리버를 가졌다는 가정하에 사용자의 체력을 무조건 사 포인트 올려주는 엑스칼리버의 칼집. 검의 군주라는 클래스와 검의 주인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는 이상, 엑스칼리버의 주인으로 인정받는 건 일도 아니다. 말인즉 두 장비만 뺐을 수 있다면, 내 근력과 체력은 각각 자동으로 105포인트를 찍게 되는 것이다. 그럼 그때부터는 남 대륙이고 악마 놈 들이고 일절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데…. 젠장, 멍청한 년. 여태까지 칼집도 안 찾아놓고 뭘 한 거야? - 와, 씨! 105? 그 정도면 강신, 아니 강신이 뭐야! 아예 강림, 현신도 가능한 수치잖아! 화정도 내 생각을 읽었는지 아쉽다는 어투로 중얼거린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남 대륙은 한껏 가까워져 있었다. 서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하더니, 약 오백 미터를 앞두는 지점서 진군을 정지한다. 그러자 하염없이 일던 흙 연기가 뭉게구름처럼 흩어지고, 햇빛을 반사하는 남 대륙 군대의 위용이 차츰차츰 드러나기 시작한다. 적잖은 수에도 불구하고 오와 열을 맞춰 정연히 서 있는 것이 나름 장관이라면 장관이다. 주변을 쭉 둘러보고 나서, 나는 도로 시선을 고정했다. 가장 선두로 나온 엘도라 또한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시선을 맞춘 찰나, 엘도라는 돌연 가볍게 손을 젓더니 혼자서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어서 마법사 한 명이 뒤따라 나와 신속히 수인을 맺는다. 잠깐, 사방이 적막해진다. - 아, 아…. 그러나 잠시 후, 아직 앳된 소녀가 마이크 테스트하듯, 증폭된 미성이 허공을 고요히 울렸다. 걸음을 멈춘 엘도라는 무심한 눈으로 우리를 올려다보며 말을 잇는다. - 그대들에게 고한다. 이어지는 음성은, 몹시 쌀쌀맞다고 느껴질 만큼 차갑고 고저도 없는 목소리였다. 이야기하러 온 게 아닌, 일방적인 통보라고 느꼈다면 내 착각일까. - 물론 그대들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때. - 또 당연한 말일 수도 있지만. 엘도라는. - 이 시간 이후, 그대들에게 항복 의사는 없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굉장히 갑작스럽게 최후통첩을 날렸다. “…….” 병신인가? 0897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비단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닌 듯하다. 성벽에 올라앉은 고연주는 순간 휘청거리더니 거의 떨어질 뻔했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두 눈을 깜빡거리며 나를 돌아본다. “쟤 뭐라는 거예요?” “미친년인가?” 누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군. “허 참! 항복? 허허, 허허허허!” 그 정도로 어이없는지 김덕필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 우렁차게 비웃는다. 확실히 들렸는지 오연히 서 있던 엘도라의 눈매가 살며시 가늘어진다. - 그대는 누구지. 한 번 더 증폭된 음성이 울린다. 목소리는 적의는 물론, 싸늘한 살기마저 품고 있다. 그러나 픽 코웃음 친 김덕필은 성큼성큼 걸어가 한 발을 성벽 사이로 걸쳤다. 그리고 외쳤다. “네 아비다!” “푸흐히헤후하하하!” 진수현이 뻥 터진 것을 시작으로 주변으로 삽시간에 웃음이 전염된다. 차소림은 예의 근엄한 얼굴이나 어깨를 가늘게 떠는 것이 무언가 필사적인 느낌이다. 사실 나도 살짝 웃기는 했다. 방금 김덕필의 언행은 나쁘지 않았다. 무릇 전투 직전 가장 중요한 건 사기라고 볼 수 있다. 엘도라도 그걸 알고 있어 저렇게 까부는 것일 터. - …상종 못 할 자들이군. 일그러진 입술에서 흘러나와서인지 음성이 심히 진동한다. 그래. 화나겠지. 아마 어제의 패전을 기세로 만회하려는 것 같은데 김덕필이 정면에서 받아쳐 버렸다. 패륜성 짙은 모욕을 들어서인지 효과는 예상외로 컸다. 이윽고 차차 웃음이 잦아들 즈음. - 입 닥치지 못해! 갑자기 거친 욕설이 허공을 왕왕 울렸다. - 이 찢어 죽일 노란 원숭이 새끼들! 엘도라의 목소리는 아니고, 웬 시커먼 사내놈이 튀어나와 바락바락 소리 지르고 있었다. 한데 하나 특이한 건, 얼굴의 절반을 붕대로 감고 있다는 것. 보아하니 오딘 클랜인 것 같고, 알 듯 말 듯한 안면인데. 맞다. ‘맹화의 기사’ 아키로프였나? - 그리고 어제 번개 부른 마법사 놈! 네놈은 특히 각오해라! 이 몸이 친히 사지를 잘라줄 테니까! 번개 부른 마법사 놈? 아. “흠.” 형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차분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아이, 괜히 힘쓰실 필요 없으세요. 아주버님.” 그러한 찰나, 나른하면서 간드러진 음성이 형의 행동을 가로막는다. “견문발검이라고, 사소한 일에 뇌신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요?” 고혹적인 웃음을 머금은 채 사근사근하게 구는 고연주. 형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일리 있다는 듯이 끄덕였다. 그러자 고연주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진해진다. 그녀는 여전히 성벽에 올라앉은 상태로 나를 돌아봤다. “수현? 쟤네 주둥아리 좀 닥치게 하고 싶은, 아니. 잠깐 몸을 좀 풀고 싶어요.” 형의 앞이라 급히 바꾼 듯싶은데, 아마 전자가 본심일 것이다. 주둥아리 좀 닥치게 하고 싶다는 말인즉, 기세 좀 단단히 꺾어놓고 오겠다는 뜻일 터. 물론 저 요청을 거부할 이유는 하등 없다. “죽지 않고 돌아올 자신이 있다면요.” “어머, 버프 걸어주시는 거예요?” 걱정해주는 말이 기쁜지 고연주는 활짝 미소 지었다. 그 순간이었다. “……!” 찰나의 순간, 고연주의 신형이 사라졌다. 아니. 눈 깜짝할 사이, 성벽에 드리운 그림자로 쭈르륵 녹아내렸다. 이어서 상대 진영으로 무섭게 쇄도하는 은밀한 그림자 하나. 잠시 후. “끄악!” 어디선가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바로 눈을 돌리니, 밀집한 병력 사이로 솟구친 핏물이 분수를 이루고 있다. 보이는 거라고는 이제 막 놀라는 주변 사용자와 흐릿하게 스치는 그림자뿐. “꺄아아악!” 처음 당한 사용자가 쓰러지기도 전, 또 한 번 비명이 터졌다. 무려 이십 미터나 떨어진 거리서 가운을 걸친 여인이 엉덩방아를 찧는다. 두 발목이 완전히 찢겨나간 채로. “커허어억!” 숨을 들이켜기도 전 세 번째 비명이 폭발했다. 이번에는 흰 로브를 입은 사내가 주저앉았다. 곧바로 네 번째 비명까지 흐르자 비로소 적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엘도라도 상당히 당황한 듯싶었다. 어느새 빛나는 검을 들고 계속 고개만 돌리고 있으니. 결국, 한 여인이 보랏빛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쏜살같이 뛰어 나갔다. 목에 걸린 뿔피리가 덜렁거리는…. 어, 뿔피리? 뿔피리라면 ‘수색의 기사’ 나탈리일 텐데? 오딘의 무력 부대인 원탁의 기사 중 수위에 드는 사용자인 만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확실히 방심할 사용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크윽!” “으아아악!” 아무래도 그림자 여왕의 상대로는 한 수 아래인 듯싶다. 일단 방향 잡는 걸 보니 고연주의 움직임을 가까스로 읽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워낙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다 보니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왼쪽으로 가려다가 오른쪽으로 가려다가, 다시 왼쪽으로 몸을 돌리는 웃지 못할 행동을 하고 있다. 그에 반해 고연주는 상대를 놀리듯 벌써 열 번째 비명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고연주의 신위는 진심으로 놀라웠다. 적 대다수가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익!” 결국에는 참지 못했는지 나탈리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갑자기 목의 뿔피리를 채듯이 잡고, 숨을 힘껏 들이켜며 물었다. 뿌우우우우우우우! 아마 고연주가 있는 방향으로 모종의 능력을 사용한 것 같다만. 잠시 후, 끊임없이 이어지던 비명이 뚝 멎었다. 나탈리는 찡그린 눈으로 두리번거리다가, 돌연 이를 갈며 성을 돌아봤다.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면 고연주는 이미 돌아와 성벽에 요염이 앉아 있었으니까. 처음 다리 꼰 자세 그대로. 그러니까 헛짓했다는 말이다. 손에 묻은 핏물을 툭툭 털던 고연주는, 나탈리와 눈이 마주치자 한 눈을 찡긋한다. 더 나아가 손바닥에 살며시 입을 맞추고 후~ 불어주기까지. 일 분도 지나지 않아 사용자 열 명이 불귀의 객이 돼버렸다. 그야말로 상대를 완전히 가지고 논 것이다. 이렇게 당하면 나라도 흥분하지 않을까. “크으으윽!” 역시 그런지 나탈리는 앙칼진 눈으로 고연주를 노려봤다. 주먹 쥔 두 손을 바들바들 떠는 것이 심히 분노한 게 분명하다. 여하튼 기선 제압은 대성공인가. “좋은….” 좋은 활약이었다고 말하려는 찰나, 문득 묘한 살기가 느껴졌다. 선두에 있는 원탁의 기사 중, 누군가 석궁을 들어 위를 겨눈다.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여인의 눈동자는, 흡사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처럼 독하고 예리한 눈빛을 뿜는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여인의 몸이 살짝 들썩였다. 쐐애애액! 거의 동시에 햇빛을 반사하는 볼트(Bolt) 하나가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짓쳐 들었다. 볼트 끝은 정확히 고연주를 노리고 날아왔지만, “이지스 시스템!” 까앙! 백한결이 생성한 정육각형의 방패가 직전에 가로막았다. 아니, 가로막는 걸 넘어, 여인을 향해 그대로 되돌려 보낸다. ‘신의 방패’의 고유 능력 되비침. 설마 반사할 줄은 생각도 못 했는지 볼트를 발사한 여인의 눈이 한껏 치떠졌다. 그러나 그 여인 앞으로 백발을 휘날리는 사용자가 뛰어들어 흰색 방패를 앞세우며 막아선다. 이윽고 방패 주변으로 불거진 희멀건 한 막이 볼트를 튕겨낸 순간, 느닷없이 나타난 검붉은 섬광이 세게 강타한다. 파지지지지직! “아악!” 외마디 고함이 터졌다. 방패는 처음에는 막아내는가 싶었지만, 검붉은 화살은 송곳처럼 찌르고 들어가 장막을 달걀 껍데기 깨듯 박살 내며 들어갔다. 백발의 여인은 발라당 나동그라지더니 복부에 화살을 맞은 것도 모자라 땅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데굴데굴 구르는 여인을 보다가, 나는 불현듯 저 화살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흘끗 옆을 흘기자, 선유운이 망루에 엎드린 채 입맛을 다시고 있다. 좋아. 이로써 이 승인가. 어느새 성 아래 남 대륙 진영은 한창 어수선해진 상태였다. 공수성 전 기세 싸움에 밀린 영향이다. 처음에는 자신만만하게 달려왔건만, 연달아 당하기만 하니 당혹스러울 것이다. 오딘, 그것도 원탁의 기사가 줄줄이 밀리지 않았는가. 엘도라의 무심하던 눈동자도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한 거한이 성큼 걸어 나왔다. 두 팔에 붙은 울퉁불퉁한 근육은 전사를 연상케 하지만, 흰 로브를 정갈히 차려입은 걸 보니 사제인 듯하다. “어, 재룡이 아저씨가 왜 저기 있지?” 고개를 쭉 내민 안솔이 천연한 얼굴로 갸웃한다. 진짜 신재룡은 쓰게 웃었다. 그러는 동안, 우뚝 선 거한은 장대 같은 메이스를 꺼내 하늘 높이 들었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심판의 기사’ 에드워드도 기억나는데. “심판을 받으라!” 그때, 준엄한 고함과 함께 빛이 번쩍였고, 쾅! 와르르! 빛무리가 폭사한 지점의 성벽이 부서져 무너진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백한결은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도 반사할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주문을 외는 동시에 발동했으니 막지 못한 것이다. “심판을 받으라!” 쾅! 또 한 번 빛이 어딘가를 강타하고, 성벽서 끔찍한 절규가 터졌다. 반대로 아래에서는 소란이 가라앉고 서서히 호응이 일기 시작한다. 거한은 흡사 도발하듯 메이스를 좌우로 흔들더니 입을 크게 벌렸다. 그때였다. “천벌을 내리소서!” 번쩍! 누군가 기습적으로 소리 지르는 동시, 맑은 하늘에 흰 번개가 서너 가닥 내리쳤다. 벼락에 직격당한 이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허연 김을 뿜으며 쓰러진다. 멍하니 보고 있는 찰나, 앞으로 한 걸음 나서는 안솔이 눈에 밟혔다. “후우우우.” 숨을 길게 내쉰 안솔은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도로 들이키더니, 눈을 질끈 감으며 빽 소리 질렀다. “천벌을 내리소서!” 번쩍! 그러자 아까와 비슷한 벼락이 재차 진영을 강타한다. 당황한 얼굴로 돌아보고 있던 거한은 얼른 메이스를 다잡았다. 그와 동시에 우리고 남 대륙이고 서둘러 방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심판을 받으라!” 쾅! “천벌을 내리소서!” 번쩍! “심판을 받으라!” “천벌을 내리소서!” “심판을 받으…!” “천벌을 내리소서!” “심판을 받…!” “천벌을 내리소서!” “시, 심판을…!” “천벌을 내리소서!” 쾅, 쾅, 쾅, 쾅! 번쩍, 번쩍, 번쩍, 번쩍! - 우하, 우하하하! 아이고 웃겨 죽겠다! 심판과 천벌. 이 치열한 싸움이 그리도 웃기는지 화정이 정신없이 웃는다. 어쨌든 승리의 여신은 끝내 심판이 아닌 천벌에 미소 지었다. 천벌은 발동하는 족족 상대의 방어막을 종잇장처럼 찢고 들어가 피해를 줬지만, 상대의 심판은 네 번에 세 번은 가로막혔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두 능력은 확실히 비슷한 구석이 있지만, 결국 발동 주체는 사용자다. 그럼 사용자 정보에 따라 위력이 달라지는데, 제 3의 눈으로 확인한 결과 저 거한의 마력 능력치는 88포인트. 그러나 안솔은 무려 100포인트다. 즉 애초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삼 승, 삼 승이다. 나는 흐뭇한 기분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어느새 남 대륙 진영은 곳곳이 난장판으로 변해 있었고, 거한은 주문을 멈추고 질린 낯으로 주춤주춤 물러나는 중이었다. 그리고 안솔은,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짜자자자자자자작! 흡사 아웃사이더에 빙의된 듯, 아, 아니. 이건 좀 심하잖아? 무슨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꽝! “꺅!” 그때 갑자기 뻥 폭발하는 소음과 함께 안솔이 갑자기 자빠져 굴렀다. 머리카락을 올올이 곤두세운 엘도라가 이를 악문 채 엑스칼리버로 겨냥하고 있었다. 아마 상황을 보다 못해 검기로 직접 안솔을 저격한 것 같다. “저 싸람이 진짜!” 눈을 돌리자, 바닥에 널브러진 안솔이 씩씩 숨을 몰아쉬고 있다. 무에 그리 분한지 두 눈동자는 불꽃마저 튀기고 있었다. “아, 안솔 양! 괜찮으십니까?” “놔요! 놓으란 말이에요!” 신재룡이 급히 달려갔으나 안솔은 거칠게 뿌리쳤다. “일대일 싸움에 끼어들다니! 비겁해요!” “두고 봐! 후회하게 해줄 테야!” 그렇게 외치며 벌떡 일어서더니, 어깨에 멘 아기 카오스 미믹으로 손을 쑥 집어넣는다. 그리고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이거나 먹으라는 듯, 꺼낸 무언가를 있는 힘껏 집어 던졌다. 마력을 불어넣어서인지, 그것은 허공에 긴 곡선을 그리며 힘차게 날아간다. 불현듯 이유정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움켜쥐더니 뒤늦게 두 손을 뻗었다. “아, 안 돼! 백만 골드 포인트가…!” 왜인지 아깝다는 투였으나 그것은 이미 진영 한가운데로 툭 떨어진 뒤였다. 흠, 백만 골드 포인트? 뭘 던진 건데? 그러고 보니 괴물 소환 상자처럼 보인 것 같기도…. “…….” …어? - 어? ============================ 작품 후기 ============================ 어? 0898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화아아악! 멍한 사이, 공중으로 치솟은 빛무리가 시야를 하얗게 물들였다. 그리고 서서히 진의 형태를 갖춰가는 걸 확인한 순간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로 괴물 소환 상자였다. 게다가 백만 GP라고 했으니 가장 비싼 ‘4’임이 분명하다. “────. ────.” 저건 또 언제 샀는지가 가장 궁금했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안솔이 여전히 분에 겨운 얼굴로 입속말을 웅얼거리고 있다. 인근에 요동치는 심상찮은 마력 흐름을 보니 아마 기적을 사용할 듯싶다. 불현듯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언젠가 한 번 겪어본 듯한 광경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 그때도 그랬다. 부활한 고대 악신에 당하기 직전, 안솔은 똑같이 상자를 던지고 기적을 사용했다. 그리고 게헨나를 소환하는 믿을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럼 가만히 놔둘까? 아니면 막아야 하나. 심한 갈등이 일었다. 그때처럼만 된다는 보장만 있다면 분명 더할 나위 없기는 하다. 사용자도 이만 명 가까이 있으니 제물로도 충분할 테고.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번에도 똑같은 상황을 기대할 수 있을까? 게헨나도 그러지 않았는가. 자신이 소환된 건 엄청난 우연과 기적이 거듭돼 이루어진 전무후무한 이변이었다고. 게다가 삼 개월이라는 대기 시간이 있는 이상, 기적은 함부로 사용할 능력이 아니다. …무엇보다, 나 좋자고 게헨나를 끌어들이는 건 왜인지 싫게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안솔!” 나는 황급히 안솔의 어깨를 잡아챘다. “기ㅈ…! 네, 네?” 막 주문을 외치려던 안솔이 깜짝 놀라 말을 얼버무렸다. 다행히 타이밍은 잘 맞췄다. “거기까지. 기적은 안 돼.” “하, 하지만!” “진정해. 전투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그래. 애초 던진 것도 오버야. 그리고 아직 많이 남기도 했잖아?” 짐짓 힘주어 말하자, 이유정도 카오스 미믹을 툭 치며 거들었다. 그러자 활화산 같던 안솔의 기세가 점차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아쉬워하는 기색은 역력했지만, 결국에는 입맛을 다시며 앞을 바라본다. 그렇게 안솔을 다독이는 동안, 밖에서는 이미 흑 빛으로 변색한 마법 진이 어스름한 그림자 하나를 토해내고 있었다. “저건….” 처음 눈에 들어온 건 흑색 마갑(馬甲)을 걸친 건장한 말 한 마리였다. 전신에서 어두운 연기를 뿜어내고 있으며 두 눈은 핏빛을 번들거린다. 그리고 말의 위에는 성인 남성 체구만 한 기사 한 명이 올라앉아 있다. 겉모습은 인간과 거의 비슷하나, 붉게 녹슨 갑옷이나 투구 안으로 보이는 퀭한 눈을 보니 살아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설마 죽음의 기사를 소환한 건가? - 어? 오벨로 기사네? ‘오벨로 기사?’ 화정의 말을 들은 순간 실망감과 안도감이 교차했다. 오벨로 기사라면 나도 한 번 상대한 전력이 있고, 꽤 쉬운 상대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쿠샨 토르 정도의 괴물이 나와 깽판 쳐주기를 기대했지만, 어쨌든 타나토스가 소환되지 않은 게 어딘가. -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쟤를 언제 상대했어? ‘응? 상대했잖아. 지금 내가 장비한 부츠가 오벨로 기사가 신고 있던 건데.’ - 그건 그냥 보통 오벨로 기사고. 쟤는 단장이잖아. ‘단장?’ - 그래 이 바보야. 오벨로 기사 단장. 말 타고 있는 거 보면 딱 몰라? ‘…….’ 자세히 보니 확실히 다르다. 예전에 상대한 오벨로 기사는 말을 타고 있지도 않았고, 갑옷도 흑색이었다. ‘사후에도 멸망한 왕국 주변을 배회하는 놈들이지. 그런데 말을 타지 않은 걸로 보아 기사 단장은 아니야. 에이, 아쉽네. 기사 단장이 나왔으면 꽤 좋은 상대가 됐을 텐데.’ ‘그럼. 생전에는 한 명 한 명이 영웅이었는데. 너 정도는 아니더라도 확실히 강하지. 특히 영웅 중의 영웅인 기사 단장은, 각성한 쿠샨 토르와도 겨룰 수 있을걸?’ 그러고 보니 화정이 그때 그런 말을…. - Khaaaaaa! 간신히 화정의 말을 떠올린 순간, 분노에 찬 괴성이 사방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어느새 소환을 마친 오벨로 기사 단장이 자신의 키만 한 대검을 뽑아들고 있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 없이 말을 몰아 대검을 무차별로 휘젓기 시작한다. 애초 화정이 말했던 대로, 오벨로 기사 단장은 무시무시한 무력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한 번 검을 휘두르자, 궤적에 걸린 사용자 전원이 썩둑 잘려 흩어진다. 이어서 칼등으로 반대편을 세게 강타하니, 후려 맞은 상대들이 전신에서 핏물을 뿜으며 공중으로 날아간다. 단 두 번 휘둘렀을 뿐인데, 동서남북 이 미터가 깔끔하게 청소됐다. “으, 으아아악!” “뭐, 뭐야 이놈은!”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주변에 있던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난다. 달아나는 건 아니었으나,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고 주춤거린다. 원형으로 에워싸인 오벨로 기사 단장은 차분히 좌우를 번갈아 보더니 힘차게 말고삐를 잡았다. 그때,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던 엘도라가 그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아아아아아아아!” 앳된 기합과 함께 아래를 쓸 듯이 엑스칼리버를 휘둘렀으나, 말은 앞다리를 높이 들어 가볍게 회피했다. 이어서 그대로 찍어버리려는 것처럼 보였으나, 엘도라가 용수철 튕기듯 빠져 나와 헛된 발길질을 하고 말았다. 엘도라는 곧장 옆으로 돌아 회전 공격을 걸었고, 동시에 원탁의 기사들도 가세해 협공을 시도한다. “심판을 받으라!” ‘심판의 기사’ 에드워드가 외치자 예의 폭발 소리와 함께 말이 주춤했다. 그 사이 엘도라와 백발의 사내가 좌우로 뛰어들어 검을 찔러 들어가자, 서둘러 걷어내며 사방을 경계한다. 그러나 원탁의 기사는 열 명이 넘었고, 서로 손발도 잘 맞는 듯했다. 게다가 시간을 벌어준 사이 사방에서 복합 주문이 밀물처럼 밀려드니, 방어에 급급해지는 것도 당연할 터. 하지만 약간 머리가 기울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이야 검의 군주 클래스를 계승했고, 또 게헨나의 수호 요새가 있으니 저런 놈은 손쉽게 처리할 수 있겠지만, 검술 전문가 시절일 때만 해도 상당히 힘들게 상대했다. 한데, 저 정도로 각성한 쿠샨 토르와 맞먹는다고? 물론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기도 하고, 적진에서 홀로 버티는 건 굉장하지만…. “별로 쿠샨 토르 급으로는 안 보이는데.” “Negative. 주관적으로는 쿠샨 토르의 승률이 육 할 정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객관적으로는 거의 비슷하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순간, 딱딱한 기계음이 귓전으로 흘렀다. “그리고 하나 조언하자면, 어지간하면 오벨로 기사 단장의 눈에 띄지 않는 걸 권하겠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나는 더 설명해달라는 뜻으로 옆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무채색 눈으로 아래를 구경하고 있던 근원은, 나를 흘깃거리며 말을 이었다. “왜냐면 검의 군주와 오벨로 기사단은 서로 깊은 인연을 맺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설명하자니 말이 길어지고, 결과부터 말하자면 검의 군주는 수뇌부와의 마찰로 오벨로 왕국을 떠났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외세는 군대를 일으켜 왕국을 침공했고, 오벨로 기사단은 멸망 직전까지 싸우며 검의 군주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검의 군주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래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인가?” “정확히는 왕국이 위기에 처하면 돌아오겠다는 맹약을 지키지 않아서입니다. 물론 검의 군주 또한 나름의 사정은 있었지만, 오벨로 기사단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하여 그들은 아직도 그때 맺은 맹약에 묶여 왕국을 배회하고 있으며, 검의 군주를 무인으로서는 진심으로 존경하지만, 한편으로는 맹약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해서 가슴 깊이 증오하고 있습니다. 아마 당신을 보자마자 모든 걸 버리고 달려들지도 모릅니다.” “…뭐야 그거. 그나저나 아까 비슷하다는 말은?” “말 그대로입니다. 물론 힘을 기준에 두면 선천적인 신력을 타고난 쿠샨 토르가 압도하겠지만, 기사 단장은 인간입니다. 즉 마법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마법?” 그때였다. - Ahaaaaaaaaaa! 귀가 솔깃해지려는 찰나, 돌연 또 한 번의 포효가 성을 뒤흔들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느새 말이 사라졌다. 그리고 땅에 선 오벨로 기사 단장은 머리를 한껏 젖힌 채 하늘을 향해 길게 소리 지르고 있었다. “…시작됐습니다.” 근원은 눈을 가늘게 뜨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건 또 뭐냐고 물으려는 찰나, 우우우우우우우웅! 갑자기 엄청난 마력이 오벨로 기사 단장의 주변으로 뿜어졌다. 그리고 대검을 높인 들어 올린 순간, 무려 수십에 해당하는 어두운 빛무리가 곳곳에서 어른어른 나타난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거의 기백에 해당하는 무언가가 삽시간에 형체를 갖춰간다. 저놈들이 무언지는 딱히 물을 필요도 없다. 덩치는 각양각색이었으나, 투구 안으로 흐르는 흉흉한 안광이나 거무튀튀한 갑옷만 봐도 알 수 있다. 저 외양이야말로 내가 예전에 상대한 오벨로 기사와 판박이가 아닌가. 문제는 왜 갑자기 저놈들이 나타났느냐는 것. “인간 시절에 익힌 마법은 아니겠지만, 기사 단장이 휘하의 기사들을 소환했습니다. 생전 오벨로 기사단은 일백 명으로 이루어졌으니, 아마 구십구 명일 겁니다.” 내 속을 읽었는지 근원이 빠르게 설명을 부연했다. 그러나 나는 아래 광경에 눈을 떼지 못했다. 왜냐면 소환이 끝난 오벨로 기사들은 기사 단장을 중심으로 삽시간에 진형을 짰고, - Ahaaaaaa! - Ahaaaaaa! 함성을 지르며 한꺼번에 돌진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세찬 기세로 나아가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에 가까웠다. 흡사 성난 파도가 해변을 집어삼키듯, 거침없는 기세로 밀어붙인다. “이, 이건 또 뭐냐고!” “살려줘어어어!” 그와 반대로, 점차 안정을 찾던 남 대륙 진영은 다시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거의 다 잡았다고 생각한 괴물이 갑자기 부하를 소환하자, 엘도라는 무어라 크게 고함치며 악을 썼다. 그러나 오벨로 기사단은 유능하게도 원탁의 기사들을 상대하지 않고, 원뿔 진형으로 후방을 들이치는 방법을 선택했다. 말인즉 상대적으로 후방에 배치돼 있던 마법사, 사제 클래스 사용자들을 먹잇감으로 삼은 것이다. 우르르르, 우르르르! 그에 따라 혼비백산한 사용자들이 사방팔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이내 처음 질서 정연하던 줄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수현아.” 멍하니 보고 있던 찰나, 누군가 등 뒤서 내 어깨를 짚었다. 아차 하고 돌아보니 형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두 눈을 황금빛으로 물들인 채로.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회다. 절호의 기회야.” 그 순간, “나가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 작품 후기 ============================ 이렇게나 유리한데, 게헨나나 수나는 아직 등장할 때가 아니지 않을까요? :) 물론, 신상용도요. 하하. * 아래는 예전 내용 중 김수현과 오벨로 기사가 전투했을 때입니다. 문득 무검과 대검이 맞부딪친 지점으로 묘한 검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손으로 웅혼한 진동이 느껴지더니, 무검에서 강렬한 적의가 물씬 풍겼다. 내가 아닌 상대방을 향하는 적의. “Krrr!” 이윽고 대검을 부여잡은 오벨로 기사가 주춤주춤 물러난다. 어찌 보면 놀란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이게 어떻게 된 현상일까? “…Sovereign?” 놀랍게도, 투구 안에서 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0899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남 대륙 진영은 불시에 소환된 오벨로 기사단의 돌진에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한 놈만 상대하면 될 줄 알았을 텐데, 돌연 부하 기사들이 나타나 송곳처럼 찌르니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는 안간힘을 쓰며 대열을 추스르려 했으나, 오벨로 기사단의 힘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똘똘 뭉친 일백 명이 한꺼번에 대검을 앞세워 돌격하니, 남 대륙 사용자들은 제대로 저항 한 번 못하며 꿰뚫리고 짓밟혔다. 그렇게 후미를 일직선으로 돌파한 오벨로 기사단은, 곧바로 뒤돌아 다시 들이치기 시작했다. 엘도라는 무어라 고함치며 애는 쓰고 있었지만, 진영은 이미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중이었다. 고작 일백 명에 불과한 기사단이 이만 명에 가까운 적진을 종횡무진 휘젓고 있다. 아무리 기습적이었다고는 하나, 진정으로 엄청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 형의 말대로 기회였다. 사실 이 정도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건만, 이건 깽판을 넘어서는 수준이 아닌가. 한 눈에 봐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이 타이밍에 같이 몰아친다면 분명 어마어마한 피해를 줄 수 있을 터. 쿵! 생각을 끝낸 찰나, 하늘에서 빛의 기둥이 갑자기 강하했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옆을 돌아보자, 희멀건 한 빛이 근원의 온몸에 물들어 흐르고 있다. 웅웅웅웅! 이어서 들려오는 심상찮은 진동음. – 접속 중…. 일반 출력 24.75%…. 최대 출력 51.24%…. 액셉트. 근원은 더는 딱딱한 기계음이 아닌, 왕왕 울리는 웅혼한 음성으로 말했다. – 접속이 완료됐습니다. 현 시간부로, 근원의 이름으로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를 소환합니다. 동시에 빛이 흐르던 몸에서 각양각색의 마법 진이 우수수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하나, 둘, 넷, 여덟, 열여섯, 서른둘…. 수십, 아니 기백을 넘는 진은 서서히 공전을 멈추며 서로 겹치지 않게 가지런히 자리 잡는다. 잠시 후, 허공을 가득 메운 진들이 오색찬란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흡사 당장에 마법을 퍼붓겠다는 듯, 공기를 통해 전해지는 진동이 살 떨리게 느껴진다. 이윽고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르던 근원은 문득 나를 돌아봤다. 무언가 허락을 구하는 듯한 무언의 눈초리. 그 눈과 마주한 순간, “근접 계열들은 모두 성문으로!” 나는 반사적으로 외치며 성벽 아래로 내달렸다. 그러자 사방에서 외침을 전달하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등 뒤로 우르르 몰려 내려오는 기척을 느꼈다. 나 말고도 전원이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안솔이 만들어준 이 상황이, 지금 이 순간이 절호의 기회라는 사실을. 조금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어쩌면 끝이 될지도 모르는 최후의 전투를 앞두고, 최고의 무대가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성벽으로 내려가고 성문으로 모이는 동안, 돌연 천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형이 발동한 뇌신의 뇌성이 고막을 때리고, 불을 뿜는 열기나 소낙비가 내리는 것 같은 어지러운 화살 소리가 중구난방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하나하나 확인할 틈이 없어, 나는 통신 수정을 꺼내 들고 성문으로 달리면서 외쳤다. “성문이 열리는 순간, 성벽 근처의 사격은 절대로 금지합니다!” “저희가 전방에서 부딪치는 즉시 최대한 후미에 집중하여 사격하고, 돌파가 끝나고 적진이 붕괴하면 바로 퇴로를 차단해주면 됩니다!” 그렇게 약 오 분 여가 흐르자, 궁수, 마법사, 사제를 제외한 클래스는 어느 정도 성문 앞으로 집결한 듯싶었다. 어지간하면 클랜별로 진형이라도 짜고 싶었지만, 그냥 이대로 섞인 채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다. 이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거니와, 상대가 혼란에 빠졌다면 마구잡이로 몰아치는 것도 좋은 계책이다. 무엇보다 북 대륙 사용자들은 오벨로 기사단 같은 전투보다는, 개인 능력에 기대는 난전에 훨씬 익숙한 이들이니까. 잠시 후, 끊임없이 이어질 것 같던 섬광과 폭발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성문을 열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서너 명의 사용자가 달려가 성문을 힘껏 끌어당겼다. 서서히, 조금씩 열리는 성문을 보고 있으니 심장이 두근두근 요동친다. 그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 등 뒤에는 나를 가장 먼저 따라온 클랜원들이 긴장한 눈으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고연주, 남다은, 안현, 이유정, 차소림, 신재룡…. 끼이이익, 쿵!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고 있자, 성문이 완전히 개방된 소리가 귀를 때렸다. 무언가 말하려 입을 열었다가 나도 모르게 도로 닫고 말았다. 딱히 할 말도 없었고, 이제 와서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저, “갑시다.” 이 한 마디와 함께 무검을 뽑고 가장 선두로 훤히 개방된 성문을 통과할 뿐. 와아아아아아아아! 귀를 아스라이 울리는 함성이 들리는 동시, 마침내 성 아래 황야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단지 성벽 위에 있다가 아래로 내려왔을 뿐인데, 그 시간 동안 바깥 풍경은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참사, 아니 천재지변 급 재앙이 휩쓸고 지나갔다고 해야 하나. 당장 눈에 보이는 시체만 해도 수백 구. 시꺼멓게 탔거나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박힌 시신이 지천으로 즐비하게 널렸고, 곳곳에서 새는 핏물이 땅으로 흘러 내를 이루고 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탄내와 피비린내가 뒤섞인 악취가 코를 찌른다. “으아, 으아아아!” “북 대륙 놈들이다! 북 대륙 놈들이 나왔다!” 그리고 우리를 보자마자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리는 남 대륙 사용자들. 안 그래도 어지럽던 대열이 더더욱 난장판으로 변한다. 그때, 문득 한 사내가 눈에 밟혔다. 아까 형을 찢어 죽이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아, 아키로프인가? 좀 전에 있었던 집중 사격의 영향권에 있었는지 몸을 비틀거리고 있다. 마침 잘됐다. 원탁의 기사 중 한 명이라면 손수 죽일 가치가 있으니. “이노오오오오오옴!” 그렇게나 화가 나는지 아키로프는 우리가 오는 방향을 쳐다보며 분노에 찬 노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핏물이 묻은 손으로 칼을 빼더니 정면으로 맞서왔다. 시뻘건 불길이 칼등을 맹렬하게 휘감아 오르고, 칼끝을 겨냥해 신속히 짓쳐 들어온다. 심한 상처를 입었을 터인데, 그 기세만큼은 칭찬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맹화(猛火), 즉 불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이상 아쉽게도 내 상대는 아니었다. 달려가는 와중, 화정의 두 번째 권능인 염안(炎眼)을 사용해 검에 오른 불길을 꺼트리자, 아키로프는 순간 놀란 얼굴로 움찔 걸음을 멈췄다. 실수라면 실수였다. 찰나의 순간, 나는 그 틈을 노려 이형환위로 후방을 점거했고, 훤히 노출된 목덜미로 무검을 쭉 밀어 넣었다. “커헉!” 칼끝이 목젖을 뚫고 나오는 것과 함께 외마디 탄식이 터졌다. 손을 세게 털며 등을 걷어차니 아키로프는 혀를 길게 빼문 채 나자빠졌다. 그 와중에도 살고 싶었는지 덜덜 떨리는 팔을 내뻗었으나, 나는 손등을 칼로 찍어 내리는 동시에 발로 있는 힘껏 얼굴을 걷어차 버렸다. 퍽! 머리통을 박살 내자, 그제야 놈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한 번 세차게 몸을 경련하더니 축 힘없이 늘어진다. 일 회차서 명성을 떨쳤던 ‘맹화의 기사’ 아키로프 치고는 너무나 허망하고 허무한 죽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 회차가 아닌 이 회차였다. 물론 상황 덕을 본 것도 있지만. 그렇게 한 호흡 돌리고 눈을 돌리니, 성난 짐승처럼 덮쳐가는 아군들 사이로 입을 뻐끔거리고 있는 적들이 보였다. 아마 믿었던 원탁의 기사가 찍소리도 못하고 죽자 꽤 놀란 듯싶은데. 어쨌든 서둘러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에 무검을 비스듬히 세우며 무릎을 굽혔다. 그 순간이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 S, Sovereign? 갑자기 귓전에 천둥 치는 소리가 울리더니 코앞에 있던 적들이 붉게 녹슨 대검에 꿰이며 우수수 흩어진다. 구슬픈 울음이 터지며 등장한 그림자는 다름 아닌 오벨로 기사 단장과 휘하 기사들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앞에서 돌진을 멈추고, - Sovereign? Sovereign! 격분에 찬 포효를 터뜨린다. 아니.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대검을 쥔 손을 부르르 떨리고 있고, 투구 안에서는 흉흉한 안광이 폭발 직전의 화산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물씬 느껴지는 적의는 흡사 철천지원수를 만난 것 같은 태도와 진배없다. 심지어 뒤에 있는 기사들까지 모조리 살기를 뿜어대는 터라, 절로 신경이 곤두서고 살이 따끔거린다. - Cur! Exiguæ dereliquit nos! 어둡고 칙칙한 음성. 그러나 워낙 크게 소리 지르는 터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무슨 말인지는 모른다. 단지 어딘가 정중하면서도 사무칠 정도의 서글픔이 느껴지기는 했다. 애초 왜 이렇게 나를 적대하는지…. “아.” 그러고 보니, 근원이 절대로 마주치지 말라고 했던 것 같기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한참이나 늦었다. 기사 단장은 물론, 기사 전원이 나를 향해 대검을 겨냥하고 있었다. 젠장, 실수다. 그냥 빠르게 나오는 데만 집중하다 보니 근원의 경고를 깜빡 잊고 말았다. – Sovereignnnnnnnnnnnnnn! …결국에는 싸워야 하는 건가? 막 발을 내디딘 오벨로 기사 단장을 보며 나는 칼자루를 바스러지듯이 쥐었다. 그때였다. - Hooh, articulorum colonia! Diu nulli videre! 느닷없이 화정이 음성이 머릿속을 울렸다. ‘화정?’ – 시끄럽고! 빨리 따라 해! ‘어, 어?’ – 따라 하라고! 이 멍청이! 빨리! “Ho, oh. articulorum, colonia? Diu, nulli, videre?(호오, 기사 단장인가. 오랜만이군.)” 화정의 기세가 몹시 거센 터라, 나도 모르게 떠듬떠듬 따라 하고 말았다. – 바보! 말투가 그러면 어떡해? 좀 거만하게 말하라고! ‘뭔 말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억울한 기분에 항변하며 시선을 올린 순간, 문득 눈동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곧장 달려올 것 같던 기사단이 움직임을 멈췄다. 적의는 여전하나 나를 가만히 노려보는 상태라고 할까. – 계속 따라 해. Est inligatas oneribus pignus…. 이건 좀 희미하게. 어떻게 희미하게 말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지만, 일단은 따라 하자. “Est inligatas oneribus pignus….(아직 맹약에 묶여 있는 건가….)” - Culpa tua est!(당신 탓이지 않습니까!) 응? 왜 격한 반응을 보이는 거지? - Cur, quid tu lost in ohbel! Nos ohgiman te!(왜, 어째서 오벨로를 버린 겁니까! 우리는 당신이 돌아오기만을!) 심지어 먼저 입을 열고 원망처럼 느껴지는 말을 토해낸다. 에라, 모르겠다. 보아하니 대화를 시도하는 것 같은데, 우선 조용히 따라 하는 게 낫겠다. “딱히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버린 것만큼은 절대로 아니다. 나도 사정이 있었으니.” - 사정? 사정이라고요? “물론 변명은 하지 않겠다. 그대가 검으로 대화하기를 원한다면 기쁘게 받아줄 생각이다.” - …….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갑자기 이 상황이 웃기게 느껴졌다. 분명 전장의 한복판일지 언데, 나와 오벨로 기사단이 있는 곳만 유독 조용하다. 그때, 기사 단장이 천천히 대검을 내렸다. - 여전하시군요…. 뭐지. 왜 갑자기 목소리가 아련해지는 거냐. - 하기야 군주께서는 언제나 그러셨지요. 입이 아닌 몸으로, 말이 아닌 검으로. “그때의 말을 아직도 기억하는 건가.” - 그만큼 존경하고, 또 존경했기 때문입니다. 영웅 중의 영웅이자 감히 닿을 수 없는 지고의 존재. 우리 오벨로 기사단은 항상 당신을 향해 충성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그러니 말씀해주십시오. 왜 오벨로 기사단을 버리신 겁니까. 설령 왕국이 멸망했다고 해도, 군주께서 돌아오셨다면 우리는 목숨 바쳐 따랐을 겁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하지만 지금 상황이 좀 그렇지 않나?” 계속 화정의 말하는 대로 뱉고 있자, 기사 단장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먼빛으로 허준영이 적에게 칼을 꽂으면서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해 죽겠다. - 으음. 확실히…. “옛 기분도 낼 겸, 우선 서로 손을 잡고 같이 적을 처리하자. 대화는 그 후에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 하지만! “부탁한다. 너희의 힘이 필요하다.” 여기서 화정은 아주 살짝 고개 숙이라 했고, 나는 멍한 기분으로 머리를 굽혔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 부, 부탁? 거, 검의 군주 시여! 어, 어째서 저희 같은 것들에게 고개를 숙이시는 겁니까! 아까까지만 해도 살기를 풀풀 날리던 기사 단장이 펄쩍 뛴 것이다. 게다가 굉장히 당황한 듯 투구를 도리도리 흔들기까지. 몹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처럼 느꼈다면 내 착각일까? - 거, 검의 군주님이 부탁을…? - 그것도 우리 단장님한테…? 오오오오오오오오! 이어서 들려오는 기사들이 울리는 탄성의 합창. 사실 거친 소음에 가깝다 보니 저주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문제는 기사 단장의 태도였다. - 크, 크흠! 뭐…. 군주님의 부탁이라면…. 알겠습니다. 왜인지 투구 표면을 긁적긁적하더니 쑥스럽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힘찬 기합을 내지르며 대검을 치켜들자, 기사들도 똑같이 대검을 올리며 환호로 호응한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대체 내가 무슨 말을 했길래 저러냐고. - 응? 아아. 별말은 안 했어. 그냥 이 전장 좀 정리하고, 끝나고 얘기하자고 했지. ‘그런데 반응이 왜 저래?’ - 그거야 당연하지. 아, 너는 검의 군주가 얼마나 영향력이 컸는지 모르나? ‘?’ - 생각해봐. 항상 선망해 마지않던 대상이 무려 고개까지 숙이면서 부탁하는데, 당연히 으쓱해 하지 않겠어? 물론 너를 증오하지만, 어쨌든 존경하는 마음도 크니까. ‘…….’ ============================ 작품 후기 ============================ 오벨로 기사 1 : 우와아아! 그 검의 군주님이 우리 단장님에게 부탁하셨어! 오벨로 기사 2 : 고개까지 숙이셨어! 오벨로 기사 3 : 대단해! 오벨로 기사 4 : 정말로 대단해! 0900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두두두두두두두두! 세찬 돌풍이 휘몰아쳤다. 지축을 흔드는 진동을 동반한,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만한 무서운 폭풍이었다. 흡사 지나치는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듯한 시커먼 소용돌이. 그 중심에 위치한 오벨로 기사 단장이 검을 번쩍 들어 올렸다. 우오오오오오오오! 그러자 하늘을 떠르르 울리는 함성이 호응하듯 터진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기세였다. 아니, 한층 흉포해졌다고 해야 하나. 아득한 과거, 한 명 한 명이 영웅 반열에 오른 기사 일백 명이 죽자사자 달려들자, 일대 혼전이 벌어졌다. 물론 중간중간 거꾸러지는 기사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손해는 남 대륙이 훨씬 막심했다. 오벨로 기사단이 갑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덤벼드니, 교전이 일어나는 곳마다 사지와 핏물이 튀고 처절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삽시간에 수십 명이 쓰러지고 흙먼지를 튀기는 땅에 선혈을 뿌렸다. 결국, 매섭게 돌격해오는 오벨로 기사단의 기세를 이겨내지 못한 남 대륙 사용자들이 가일층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오벨로 기사단의 힘이 놀랍다고는 하나, 원탁의 기사와 휘하 부대가 힘을 합치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나 북 대륙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성벽서 어마어마한 마법과 화살을 퍼붓더니, 끝내 성문을 열고 나와 난전을 시도했다. 그 결과, 이제는 숫제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라 부대를 가다듬는 것조차 요원해 보일 지경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망연히 서 있던 나탈리는 주먹을 바스러지듯이 쥐었다. 눈치 빠른 그녀는 온몸에 스멀스멀 오르는 불길함에 이를 악물었다. 아차 한 순간, 전장은 순식간에 손 쓸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 중이었다. 무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으나, 사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도 못 잡고 있었다. 그러나 나탈리는 과연 알고 있었을까. 북 대륙 중 자신을 노리는 사용자가 있다는 사실을. 쐑! “아?” 갑자기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나탈리는 황급히 고개를 틀었다. 거의 동시에 날카로운 것이 귓불을 스치고 지나가, 잘려나간 머리카락 서너 가닥이 나풀거린다. 놀란 속을 추스르며 눈을 치뜬 나탈리는, 곧 눈살을 도로 찌푸렸다. 왜냐면 바라본 곳에 고혹적인 미소를 머금은 여인이 있었으니. “감이 꽤 좋네?”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장과 어울리지 않는, 나른한 음성으로 말한 여인은 바로 ‘그림자 여왕’ 고연주였다. “보아하니 어중이떠중이는 아닌 것 같고…. 죽이면 수현이 좋아하려나?” 그렇게 말하며 오른팔을 뻗자, 어디선가 날아온 검붉은 검 한 자루가 손에 착 잡혔다. 이윽고 고연주의 두 눈동자가 어둠을 번뜩였다. 키이이잉! 마검 티르빙이 살이 떨려올 만큼 거칠게 울부짖는다. 전신을 압박해오는 무시무시한 마력에 나탈리도 얼른 단검을 뽑고 응전 태세를 취했다. 쉬운 상대가 아닌 것은 직감했지만, 어쨌든 그녀도 ‘수색의 기사’. 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 물론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그 무렵. “허….” 짧은 탄식을 뱉은 백발의 사내, 라이언 윈터스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둥근 원형을 그리며 쌓여 있는 시체, 그리고 원 가운데서 긴 생머리를 흩날리는 여인.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핏빛이 번진 얼음 갑옷을 걸친 여인이 홀로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흡사 시체 속에서 피어난 한 떨기 꽃처럼. 윈터스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혀를 차다가, 눈을 빛냈다. 한 손에 얼음 칼을 든 여인이 천천히 몸을 돌리고 있었다. 이내 차갑게 가라앉은 두 눈과 마주하자, 코앞을 스치는 냉기 어린 살기에 괜스레 오한이 느껴졌다. 다음 순간, 두 남녀는 서로 검을 들어 상대를 겨누었다. 이윽고 사내의 검이 그르렁 울음을 토하는 것이, 백수의 왕 사자와 흡사할 정도로 기세가 맹렬하다. 실제로 ‘사자의 기사’라는 클래스를 가진 윈터스는, 엘도라를 제외하면 원탁의 기사 중 최고로 꼽히는 사용자였다. 하지만 여인도 만만치 않다. 왜냐면 여인 또한 ‘검후’로 불리는, 김수현을 제하고 머셔너리 클랜 중 첫손으로 꼽히는 사용자였으니까. 잠시 후, 계속 보고만 있던 윈터스가 갑자기 상체를 굽히고 질척이는 대지를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단숨에 거리를 좁혀 들어가 사선으로 크게 베어 내렸다. 언뜻 봐도 무시무시한 힘이 서려 있었으나, 남다은은 가볍게 몸을 틀어, 되려 검을 날카롭게 찌른다. “!” 그때였다. 검을 거둬 쳐내려던 윈터스는, 갑자기 반대편에서 빛이 번쩍이자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다. 시린 냉기가 가슴을 스쳤다. 분명 공격로는 읽었을 터인데, 두 방향에서 반격이 들어온 것이다. 야수의 감각이 아니었다면 막는 순간 크게 다쳤으리라. 한데,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상하다.’ 서둘러 물러난 윈터스는 고고하게 서 있는 남다은을 노려봤다. 예상치 못한 반격도 그렇지만, 왜인지 무감정한 눈으로 쳐다보는 여인의 자태가 몹시 아름답다고 느꼈다. 단순히 감정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팔다리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알게 모르게 힘이 빠지는 듯한…. ‘알 수 없는 능력을 사용하는 것 같은데.’ 윈터스의 추측은 정확했다. 현재 남다은이 들고 있는 얼음 칼 프라가라흐(Fragarach)는 앤서러(Answerer), 즉 맞받아치는 검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며, 갑옷 또한 상대를 유혹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나마 윈터스 정도 되니까 어느 정도 저항하는 거지, 보통 사용자였으면 초저녁에 힘이 빠져 칼날 앞에 목을 바쳤으리라. ‘젠장, 뭐 이런 괴물들이 있는 거지?’ ‘…아무튼, 길게 끌면 불리하겠어.’ 그렇게 생각한 윈터스는 신속히 땅을 박찼고, 남다은도 사양하지 않고 검을 어울렸다. 두 개의 칼등이 공중서 사선으로 얽히고, 맑은 철성이 허공을 챙 하니 울렸다. 서로 떨어지는 것도 잠시. 이내 백광과 냉광이 춤추듯 어울리며 허공에 검광을 수놓기 시작한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이어질수록 두 남녀의 공세는 점차 격렬함을 더해갔다. 윈터스가 짐승처럼 파고들어 강한 일격을 날리면, 남다은은 귀신처럼 피해내며 반격한다. 그럼 윈터스가 다시 반격을 쳐내고 쫓아가는 광경의 연속이다. 하지만 막 삼 분이 지났을 즈음, 차차 손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하는 건 윈터스였다. 확실히 검술은 비슷하고, 힘은 윈터스가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남다은은 우월한 민첩으로 근력을 앞세운 공격을 흘리는 동시, 가슴 서늘한 카운터를 꼬박꼬박 넣고 있다. 지금이야 야수와 같은 감각으로 받아 치고 있다고는 하나, 시간을 끌수록 당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건 명약관화. 결국, 이를 악문 윈터스가 승부를 걸었다. 여태껏 반격을 생각하고 받아칠 힘은 남겨뒀지만, 순간 상대를 세게 밀치는 동시에 몸을 한껏 웅크렸다. 그리고 적이 균형을 찾기 전, 일거에 마력을 폭발시켜 전방으로 튕기듯 쇄도한다. 크르르릉! 백광을 뿌리는 검이 한 차례 커다란 울음을 토해냈다. 그리고 사자가 앞발을 휘두르듯, 갑절로 증폭한 힘을 앞세워 위에서 아래로 가열차게 내려온다. 피하는 건 글렀다 싶었는지, 남다은은 물러나는 와중에도 얼른 검을 눕혀 충격을 대비했다. 카앙! 그러나 불꽃이 튀긴 순간, 고요하던 두 눈이 처음으로 치떠졌다. 손아귀가 찢어질 것 같은 충격. 그리고 받아내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나, 상대의 검이 자신을 향해 쭉 밀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마치 이대로 두 동강을 내주겠다는 듯이. 찰나의 순간, 맞대어진 칼날이 남다은의 가슴팍까지 근접하자 윈터스는 승리를 직감했다. 우우우웅! 그러나 돌연히 상대의 몸이 신이 한 빛으로 물드는 것과 함께, 윈터스의 검은 톱니에 걸린 것처럼 덜컥 멈췄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여인이 차디찬 미소로 비웃고 있다. 검후의 고유 능력 ‘여왕은 절대로 손에서 검을 놓지 않는다.’ 가 발동된 것이다. 남다은은 얼른 승부를 내려는 사내의 속셈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신체 능력을 상승시켜주는 능력을 아끼고 있었다. 더 확실한 기회를 잡기 위해서. 이윽고 검을 반대로 밀쳐낸 남다은은, 눈앞에서 칼날을 바로 세워 예리하게 찔렀다. 윈터스는 순간적인 기지로 얼굴을 꼬아 피하며 급한 대로 상대의 다리를 향해 발을 날렸다. 그러나 남다은은 새처럼 날아올라 유려하게 손을 놀리는 동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직절(直切).” 그 순간, 윈터스의 전신으로 망연한 감각이 엄습했다. 감각으로 느낀 공격은 두 개. 좀 전에 뿌린, 정면으로 가슴을 노리고 들어오는 공격 하나. 알 수 없는 반격 능력을 이용한, 옆에서 머리를 베어 들어오는 공격 하나. 그러나 세 번째 공격은 느끼지 못했다. 그저 눈앞에 순간적으로 보랏빛이 번뜩였을 뿐. 그 사실을 인지했을 때. 정확히는 앞선 두 공격을 걷어냈을 때, 윈터스는 죽음을 직감했다. 왜냐면 어른어른한 희미한 궤적이 허리춤을 스치듯 지나갔으니. “…….” 잔상이 사라지자마자 기다란 자상이 비스듬히 그어지고, 스칵! 뒤늦은 소리와 함께 핏물이 왈칵 치솟는다. 남다은이 사뿐 발을 디뎠을 때는, 윈터스는 검을 놓치며 털썩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어떻게든 일어서려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아니, 이미 시야가 기우뚱 기울어지며 천천히 흐려져 간다. 힘겹게 숨을 뱉어낸 윈터스의 뇌리로 문득 이안의 경고가 떠올랐다. ‘강해요. 강합니다. 북 대륙은 결코 얕볼 수준이 아닙니다.’ “하하…. 좀 더…. 귀를 기울일 걸 그랬나….” 그 말이 라이언 윈터스의 최후였다. 힘없이 상체를 대지에 눕히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원탁의 기사 중 두 번째 사망자가 나온 순간이었다. 한편, 같은 시각. “아아아악!” 전장의 다른 곳에서 높은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 개새끼!” 내동댕이쳐진 이유정이 땅을 데구루루 구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반대로 눈앞의 거한, 아니 녹스 로드는 가만히 선 채로 비웃듯이 히죽거리고 있었다. 이유정은 살점이 한 움큼이나 뜯겨나간 왼팔을 짚으며 끙 몸을 일으켰다. 척 봐도 가벼운 부상은 아니지만, 당하고만 있었던 건 아닌 듯 거한의 복부에도 구멍 두 개가 숭숭 뚫려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구멍 난 상처는 스스로 살을 메우더니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 마치 트롤이 살을 재생하는 것처럼 말이다. “흐으으으…. 킥킥!” 이유정을 굽어 응시하던 녹스 로드는 원숭이처럼 두 팔을 축 늘어트린 채 다가오다가, 무언가 못 참겠다는 듯이 킬킬 웃는다. 발끈한 이유정이 콧김을 푹 뿜으며 돌진하려는 찰나, 갑자기 헉 숨을 들이켰다. 걸음을 디딘 순간, 느닷없이 녹스 로드의 신형이 연기처럼 흩어졌다가, 코앞으로 솟구쳐 입을 쩍 벌렸기 때문이다. “미, 미친놈!” 이유정은 욕설을 뱉으며 두 단검을 교차해 그었다. 부욱, 피가 튀기며 녹스 로드의 낯짝에 깊숙한 자상 두 개가 새겨졌다. 그러나 그뿐. 삽시간에 흘러나오는 피가 줄어들더니, 이가 촘촘히 박힌 아가리를 가는 목덜미로 들이민다. 이유정은 서둘러 이형환위를 사용하려 했으나, 마력이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애초 성공률이 극히 낮기도 했거니와, 붙잡힌 채로 있자 마음만 앞서는 것이다. “힉!” 곧 목에 촘촘한 이빨이 닿자, 발버둥 치던 두 다리가 꼿꼿이 세워졌다. 온몸이 딱딱히 굳는 것 같으면서도, 하복부가 심히 아릿해진다. 이내 이대로 물어뜯겠다는 듯 이빨에 힘이 들어가니 악기를 느낀 이유정의 붉은 입술이 일그러진다. 그 순간이었다. 콰악! “커헉!” 한순간, 콱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녹스 로드가 우당탕 나가떨어졌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아래로 떨어진 이유정은 풀썩 주저앉으며 눈을 돌렸다. 그리고 뚜벅뚜벅 옆을 지나치는, 핏물을 뚝뚝 떨구는 통나무 같은 허벅지를 보고 멍한 빛을 보였다. 한 사내가 검은 낫을 어깨에 걸친 채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이유정이 황급히 소리 질렀다. “조, 조심해! 저놈 재생 능력이 장난 아니야!” “크르르르!” 그러자 그 말이 맞는다는 듯, 얼굴 절반이 날아간 채 쓰러져 있던 녹스 로드가 벌떡 일어나 으르렁거린다. 하기야 식사 직전 방해를 받았으니 화날 법도 하지만…. “크, 크륵?” 성큼성큼 다가오는 상대를 확인한 순간, 곧바로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주춤주춤 물러난다. “호오, 정말이잖아?” 눈앞에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사내가 흥미로워하는 얼굴로 씩 웃고 있다. “크하, 머리통을 박살 냈는데도 일어나?” 그것도 온몸이 선혈로 범벅된 채로. 자고로 괴물은 괴물을, 미친놈은 미친놈을 알아본다는 말이 있다. “크흐흐흐….” 핏물로 떡 진 머리카락은 차치하고서라도, 두 눈은 자신과 비교할 수조차 없는 핏빛 광기를 희번덕거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길한 기운을 뭉클뭉클 뿜어내는 낫이 몸을 절로 움츠러들게 한다. “크하하하하하하하!” ‘수라마창의 주인’ 공찬호가 광소를 터뜨렸다. ============================ 작품 후기 ============================ 하하. 어느새 900회에 다다랐네요…. 특집을 적을까 하다가, 그냥 평소처럼 진도를 빼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그게 더 나을 것 같아서요. 특별히 쉬는 날이 없다면 완결은 한 7, 8월 중에 날 것 같습니다. 미리 축하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독자 분들 모두 즐거운 토요일 보내세요. :) 0901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그 시각. ‘이게…. 정녕….’ 엘도라는 꿈을 꾸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가 무어라 목청껏 외치는 소리는 들렸으나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크게 뜬 눈으로 어지러이 흩어지는 전장을 응시한다. 흑색 기사단이 전장을 종횡무진 휘젓고 있다. 고작 기백에 불과한 인원이지만 가는 곳마다 아군을 무너뜨리고 무참히 짓밟는다. 그리고 성문을 열고 나온 적들은 무너진 틈을 노리고 몰아쳐 와 난전으로 진영을 붕괴시킨다. 아주 간단한 공식이지만 문제는 어떻게 손을 쓸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애초 갑자기 흑색 기사단이 나타났을 때부터 일이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졌다. 그뿐일까? 성벽에 서 있는 적들은 지속해서 마법과 화살을 쏴 후미를 두들기니 멋대로 후퇴할 수도 없다. 말 그대로 앞으로, 뒤로 갈 수도 없는 상황. 이대로 가면 곧 전 진영이 와해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멜리너스 님이라도 있었다면….’ 도대체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걸까. 혼란스러운 와중 엘도라는 치밀어 오르는 후회를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무력감. 자신감으로 빛나던 두 눈이 어두워지고, 깨문 입술서 긴 탄식이 새어 나온다. 오죽하면 괜히 앞장서 싸움을 걸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냥 오늘 안으로 넘어온다는 멜리너스와 타나토스를 기다릴걸. 아니, 차라리 처음부터 제대로 맞붙고 밀렸다면 받아들이기라도 하지. 아차 한 순간 전황이 순식간에 기울었는데 약간은 억울한 기분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은 억울해 할 틈도 없었다. 꿈이라면 그냥 질 나쁜 악몽으로 치부하면 그만이지만, 몇 번이나 볼을 꼬집어도 눈앞의 풍경은 변하지 않는다. 엘도라가 보고 있는 광경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꺄아아악!” 그때 찢어지는 비명이 전장의 사이사이로 흘러 엘도라의 귀에 꽂혔다. 워낙 큰소리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익숙한 목소리라 저절로 눈이 떠졌다. 곧장 올려다본 하늘에는 시커먼 그림자에 머리끄덩이를 잡힌 여인이 공중으로 끌려 올라가고 있었다. 사지 또한 어스름한 음영에 휘감긴 채로. 이윽고 허공에 매달린 여인을 확인한 엘도라의 입이 놀라 벌어졌다. “나, 나탈리?” ‘수색의 기사’ 나탈리. 원탁의 기사 중 한 명이자, 활짝 웃는 얼굴이 매력인 엘도라의 소중한 친구.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낯을 잔뜩 찡그린 채였다. 기세 좋게 응전했지만 아마 그림자 여왕을 감당치 못하고 붙잡혀버린 듯싶다. 잠시 후, 음영에 붙잡혀 실 끊긴 인형처럼 흔들리던 나탈리의 팔다리가, 돌연 대(大)자로 쭉 뻗어졌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힘주어 잡아당기니 목은 물론, 사지가 부르르 떨리며 엿가락처럼 늘어난다. 곧 벌어질 거열형(車裂刑)을 예상이라도 한 걸까. “아…! 아…!” 한껏 이지러진 나탈리의 눈동자는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처럼 공포에 질려 떨고 있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싫다는 듯 고개를 미친 듯이 가로젓는다. “아, 안 돼….” 패배는커녕, 동료의 죽음을 생각조차 안 해본 엘도라는 허공에 펼쳐진 광경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탈리!” 뒤늦게 머릿속 경종이 울리고 온몸이 심한 불안감에 휩싸인다. 헐레벌떡 나탈리가 떠오른 곳으로 달려보지만 늦어도 한참 늦었다. 문득 나탈리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지는가 싶더니. 뿌지지직, 뿌지지직! 꽈자자작! 쭉 늘어졌던 살이 퍽! 터지며 죄다 뜯겨나갔다. “끼아아아아아아악!” 처절한 절규가 온 사방을 쩌렁쩌렁 울렸다. 한꺼번에 뜯긴 오체(五體), 폭발하듯 퍼져나가는 핏물, 주렁주렁 흘러내리는 시뻘건 장기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허공에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머리만이 남아 대롱거렸다. 주변으로 소슬하리만치 서늘한 정적이 내려앉는다. 특히 남 대륙 사용자들이 받은 충격은 훨씬 컸고, 엘도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몹시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목격한 후 얼굴을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망연하다. 왜냐면 믿을 수 없었으니까. 오랫동안 함께 해왔던, 항상 옆에서 웃어줬던, 그랬던 친구가 끔찍하게 죽었다. 그동안 성공과 승리로 점철된 길만을 걸어온 엘도라로서는 처음 겪어보는 상황. 그러니 시야가 하얗게 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탈리…. 나탈리….” 어깨를 가늘게 떨며 한참 동안 같은 말만 되뇌던 엘도라는 느닷없이 번쩍 고개 들었다. “나탈리이이이이이!” 분노에 찬 고함이 길게 이어져 메아리쳤다. 동시에 부글부글 끓던 마력이 화산 터지듯 폭발적으로 용솟음쳤다. 영향권에 있던 대지가 흔들리다 못해 쩍쩍 갈라지고, 엘도라의 주변으로 주먹만 한 광채 수십 개가 우수수 떠오른다. “아아아아아악!” 비명에 가까운 울부짖음. 꽈꽈꽈꽈꽈꽈꽈꽝! 노란 빛무리들이 전후좌우를 가리지 않고 총알처럼 퍼져나가 눈 부신 빛을 일으키며 폭렬한다. 황금빛으로 가득히 메워진 땅이 크게 들썩거릴 정도였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아니,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엘도라가 퍼붓는 마력을 양껏 머금은 엑스칼리버의 칼등이 웅웅 울었다. 그대로 한 번 크게 휘두르자, 강제로 밀려난 공기가 삽시간에 칼바람으로 변해 전방에 있던 적들을 휘감듯이 쓸어버린다. 칼이 폭풍이 지나간 곳에는 잔해조차 휘날려 날아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과연 전신(戰神)이라는 칭호가 부족하지 않은 무력. 그러나 아직, 아직도 부족하다. 부지불식간에 수십 명이 유명을 달리했으나 엘도라의 가슴은 더욱 심하게 들끓었다. 나탈리를 저렇게 죽인 놈은 물론, 이 전장에 존재하는 적을 전부 갈아 마시지 않으면 이 타는 듯한 갈증을 식히지 못할 것 같았다. “다 죽어어어!” 엘도라는 목이 터지라 외치며 일인 돌진을 시작했다. “포위 진형으로!” 가장 가까이 있던 사내가 황급히 외쳤다. 주변에 있던 북 대륙 사용자들이 둥글게 퍼지며 쇄도해오는 엘도라를 에워싸려 했지만, 이내 깜짝 놀라며 주춤거렸다. 포위망을 봤을 텐데 망설임 없이 달려오는 엘도라의 기세가 굉장히 무시무시했기 때문이다. “하아아아!” 엘도라는 피하기는커녕 스스로 포위망 안으로 뛰어들었고, 땅에 착지하는 순간 힘찬 기합을 지르며 한 바퀴 돌았다. 새하얗게 백열한 엑스칼리버가 길쭉하게 늘어나며 빙그르르 선회하자, 검이 돌아가는 곳마다 칼끝에는 어김없이 무언가가 툭툭 걸렸다. 이윽고 회전이 끝났을 때, 무려 십수 명의 사용자가 목과 몸이 분리돼 동시에 선혈을 터뜨렸다. 한 걸음 물러나 있던 이들은 너무나 놀라운 신위에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엘도라는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 무어라 소리 지르기 무섭게 나는 듯 달려가 가슴을 꿰뚫었다. 그리고 옆에 서 있던 두어 명의 목까지 무참히 쳐버린 후 쓰러진 시체를 밟고 지나친다. 엘도라의 감정은 오롯이 분노로 점철돼 있었다. 누구든지 상관없다. 그저 달리고 달리고 달리며, 눈에 보이는 대로 죽여버릴 뿐. 그때였다. 풍신처럼 전장을 강타하는 엘도라의 눈앞에 돌연 검은색과 붉은색이 섞여들었다. 한 박자 늦게 불어온 바람은 옆구리가 아릿해질 만치 날카로운 예기를 품고 있었다. 찰나의 시간, 엘도라는 달리는 기세 그대로 검을 쭉 뻗었다. 다음 순간, 까앙! “커흑!” 배꼽이 확 잡아당기는 듯한 감각과 함께 엘도라의 입에서 헉 소리가 터졌다. 온 힘을 다해 찔렀을 터인데, 되려 아찔한 충격이 전해져 몸을 뒤흔들었다. 곧바로 땅에 칼을 박고 주르륵 밀려나는 몸을 멈춘다. 황급히 균형을 잡은 엘도라는 방금 시야를 어지럽혔던 색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칠흑빛 일색인 갑옷과 사르르 휘날리는 붉은 망토. 그리고 칼의 몸체가 보이지 않는 기묘한 검을 든 사내가 오연히 서 있다. 김수현이었다. “아야야야….” 같이 충격을 받았는지 왼손을 살짝 흔들고 있지만, 얼굴빛은 담담하기 그지없다. 엘도라는 반사적으로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가 흠칫 몸을 떨었다. 방금까지 자신의 기운을 받아 미쳐 날뛰던 엑스칼리버가 한순간 기세가 크게 위축됐다. 심지어 칼 전체가 덜덜 떨리고 있는 것이 모종의 불안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기실 ‘검의 군주’의 능력 중 하나인 백병지왕(百兵之王)의 영향이었으나 엘도라가 알 턱은 없다. 단지 어느새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고 서둘러 기운을 돋우기 시작한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까의 충격으로 분노가 조금이나마 가라앉고, 한 줄기 이성이 경각심을 일깨웠으니. 이윽고 새 마력을 받은 엑스칼리버가 다시 백금색 빛으로 물들고 예의 위용을 되찾는다. 김수현은 피식 웃더니 가볍게 손을 떨쳤다. 그러자 세 자루 검이 홀연히 솟구쳐 김수현의 주변을 호위하듯 돌기 시작하고, “나와라. 절멸자의 검.” 웅웅웅웅! 투명하던 칼의 몸체가 휘황찬란하게 빛나며 엄청난 마력이 맺혀가기 시작했다. 아직 칼날 자체는 흐릿했지만, 주변 공간이 이지러질 정도로 가공할만한 기운이었다. 그러나 엘도라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김수현을 뚫어지라 노려봤다. 물론 김수현도 여전히 차분한 얼굴로 엘도라를 응시한다. 오딘 클랜 로드이자 전신이라 불리는 여인. “나탈리….” ‘금빛의 기사’ 엘도라 코르넬리우스. 머셔너리 클랜 로드이자 군신의 진전을 이어받은 사내. “흠.” ‘검의 군주’ 김수현. 남북 대륙을 대표하는 두 사용자가 마침내 얽히고설킨 전장에서 조우했다. 그렇게 쳐다보기만 하던 남녀는 이내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이 땅을 박찼다. 눈 깜짝할 사이 거리를 좁혀 서로 엇갈리는 동시에 검을 휘두른다. 아슬아슬하게 교차하는 금빛과 붉은빛. 그것은 진정으로 찰나라고 부를만한 순간이었다. 꽈앙! 이윽고 검과 검이 부딪쳤다고는 믿을 수 없는 폭음이 터진 순간, “!” 한 명의 눈매가 화들짝 치떠진 건 왜일까. 일 초 후, 엘도라는 감각으로 느꼈다. 잠시 인지하지 못한 사이 시야가 한쪽으로 갸우뚱 기울어졌다고.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몸은 미끄럼틀을 탄 것처럼 이미 땅을 향해 처박히는 중이었다. ============================ 작품 후기 ============================ 다시 업데이트 시간이 늦어지기 시작했네요. 6월 8일(월요일) 하루 쉽니다. 다름이 아니고 오늘 새벽에 아버지가 또 한숨을 쉬셔서…. ㅋㅋㅋㅋ; 냉전은 끝내고 화해는 했는데,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하고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죄송하네요. 그리고 오늘 시간 좀 낼 수 있느냐고 물어보셔서 알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다녀와야 이번 주 면죄부(?)가 생길 듯하네요. :) 6월 9일(화요일)에 뵙겠습니다. _(__)_ 부디 너른 양해 부탁 드립니다. 아, 독자님들. 제가 재밌는 개그 하나 알아왔습니다. 혹시 다운로드의 반대말이 뭔지 아세요? 업로드? 아니죠. 바로 다웃은로드입니다. 아니면 다울지않은로드일 수도 있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도주) 0902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구르던 엘도라는 의외로 곧장 몸을 일으켜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한 눈이 잔뜩 찡그려져 있는 게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하다. 그래, 놀랐겠지. 제 3의 눈으로 확인하기는 했으나 처음 격돌했을 때 정확히 체감했다. 가속이 붙었음을 고려하더라도 근력은 나보다 엘도라가 근소한 우위에 있었다. 나는 그 점을 이용해 일 회차 때 애용했던 이화접목(移花接木)을 사용했고, 엘도라는 결과적으로 내가 가한 충격은 물론, 자신이 가했던 충격까지 더해 받았을 터. 전부가 아닌 일부를 되돌린 것에 불과하나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실제로 저렇게 튕겨 나가지 않았는가. 그래도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렸는지, 아까까지만 해도 폭풍 같은 질주로 전장을 가로지르더니 이제는 기세가 가라앉았다. 여전히 전신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있으나 두 눈은 나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다. 아쉽네. 격분해 이성을 잃었으면 한결 상대하기 쉬웠을 텐데. 그래도 이 정도는 해줘야 상대하는 맛도 있겠지. 그럼 슬슬 그 대단한 오딘 로드의 실력을 제대로 구경해볼까? 공교롭게도 엘도라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쿵 소리가 날 정도로 발을 세게 굴렀다. 땅이 푹 파이는 것과 함께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그리고 사뿐 뛰더니, 빠르게 풋워크(FootWork)를 밟으며 지그재그로 거리를 좁혀온다. 흠. 방향을 흔들어 충격을 분산할 셈인가? 그렇게 생각한 나는 가볍게 발을 놀리며 똑같이 갈지자(之)형을 밟아 다가갔다. 그리고 서로 사선으로 근접한 순간, 힘차게 오른발을 내디디는 동시에 무검을 비스듬히 세워 찌르는 것으로 선공을 가했다. 엘도라는 예상했다는 듯 허리를 뒤로 젖혀 피했지만, 내 검은 하나가 아니거든. 마침 앞을 돌아가던 빅토리아의 영광은 상대의 젖혀진 머리를 향해 그어내리 듯이 날아갔고, 기함한 엘도라가 황급히 칼을 올려 쳐낸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빅토리아의 영광은 궤도를 이탈했지만, 예상치 못했던 공격이었는지 엘도라의 몸이 중심을 잃고 흔들려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땅을 박차 올라, 왼쪽 발을 디디는 엘도라의 어깨로 있는 힘껏 무검을 내리찍었다. 카앙! “으윽!”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엘도라는 신음을 뱉으며 또 한 번 뒤로 쓰러지듯이 밀려났다. 무게까지 실은 도약 공격이었으나, 엑스칼리버가 워낙 검신이 넓어 방어에 성공했다. 그대로 뛰듯이 물러난 엘도라는 한층 긴장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살짝 앞으로 나가자, 검을 힘주어 바로 잡으며 어깨를 끌어올린다. 일 차로 간단한 탐색전을 한 결과, 우선 기선 제압에는 성공한 것 같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하다. 검이 보이지 않으니 함부로 거리 재는 것도 힘들고, 아까 충격이 되돌아왔던 현상도 염두에 두고 있을 터. 물론 상대가 복잡한 건 내 알 바가 아니라, 곧바로 나는 듯 돌진해 정면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깡! 칼끝이 닿기 직전, 갑자기 팔이 불가항력으로 아래 방향으로 곤두박질쳤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엘도라가 순간 엑스칼리버를 내리쳐 내 검을 땅으로 처박은 것이다. 이어서 칼을 기울여 양팔을 크게 돌리는 게 아마 무검을 그대로 날려보내려는 듯싶지만, 이기어검술을 사용해 검 세 자루를 날리니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워낙 신속히 물러난 탓에 빅토리아의 영광과 칼리고 아브락사스는 닿지 않았다. 그러나 카운터로 들어간 일월신검까지는 어쩔 수 없었는지 이를 악물며 왼쪽으로 상체를 꼬더니, “이이이익!” 돌연 반대로 몸을 전환하며 횡으로 크게 베어와, 이번에는 내가 옆구리를 굽혔다. 후웅! 아예 허리를 양분할 생각이었는지 가슴께로 칼날 같은 예리한 기운이 스쳤다. 지나치기를 기다렸다가, 일순 허리를 튕긴 반탄력으로 검을 감듯이 내리찍었으나, 꾸웅! 엘도라가 재빠르게 다리를 드는 바람에 애꿎은 땅만 치고 말았다. 그때였다. “……!” 대지가 들썩거리는 가운데, 느닷없이 서늘한 풍성(風聲)이 들리며 쇄골이 아릿해진다. 시선을 돌릴 새도 없이, 어깨를 뒤로 비트는 동시에 무검을 밀어 넣었다. 그러나 그때는 엘도라가 이미 충분한 거리를 확보한 상태라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았고, 반대로 엑스칼리버는 내 어깨에 확실하게 닿아 지나갔다. 이윽고 암암리에 날린 검들까지 능숙하게 피해낸 엘도라는, 양손으로 거둔 칼을 바로 어깨까지 끌어올려 나를 겨냥한다. 나 또한 두어 걸음 물러나 칼자루를 고쳐 잡고 숨을 추슬렀다. 흘끗 눈을 흘기자, 견갑 쪽에 기다랗게 그어진 선이 보였다. 허. 타격 저항, 특히 관통 공격은 무시해버리는 치우천왕의 갑옷이…. 엑스칼리버가 좋다고 해야 하나. 아니, 엘도라도 대단하다. 근력은 말할 것도 없고, 저 작고 소담한 체구서 뿜어지는 탄력은 진심으로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벌써 이기어검술에 익숙해져 나를 상대하는 걸 보니, 그냥 무작정 힘만 앞세워 공격하는 게 아니라 나름의 유연함도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근력만 우위에 있는 줄 알았는데, 검술, 즉 검을 가지고 싸우는 기술도 나와 비슷하거나 약간 웃도는 수준인 것 같다. 확실히 나기는 난 사용자구나. 좋아. 이건 인정. 생각을 정리한 나는 세 자루 검 중 빅토리아의 영광과 일월신검을 수거했다. 상대가 익숙해진 이상 여러 개에 신경을 분산하기보다는 하나에 집중하는 게 낫다. 한편으로는 마력 소비도 무시할 수 없었고. 어쨌든 꽤 한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딱히 질 것 같지는 않다. 왜냐고? 검술만 아는 공주님한테 굳이 검술로만 승부를 볼 이유는 없잖아? 『사용자 김수현의 마력 흐름이 2.5배로 상승합니다!』 마력 활성을 발동하자 가일층 빨라진 마력이 전 회로를 미친 듯이 질주한다. 현재 내 마력 흐름 속도는 평소의 4.5배. 제대로 제어할 수 있다면, 사용자 중 나를 압도할 수 있는 이는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엘도라라도. 웅웅웅웅웅웅웅웅! 이윽고 흐름이 최고조로 달했을 때, 기이한 진동이 주변을 흔들며 사방을 가득히 메워가기 시작한다. 삽시간에 몸이 뜨거워지고 시야로 시뻘건 불꽃이 튀기는 것 같다. 엘도라도 무언가 느낀 걸까. 목울대가 꼴깍 움직인 찰나, 갑자기 뜀뛰듯이 들어오며 공격을 시도했다. 정면으로 찔러오는가 싶더니 돌연 검을 반 바퀴 회전시키며 왼쪽으로 힘차게 베어 들어온다. 서둘러 반대 방향으로 쳐내니 신속에 가까운 속도로 거두어들였다가 곧장 찔러온다. 문득 엘도라가 나를 상대하는데 어떤 방법을 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엑스칼리버의 길고 넓은 검신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칼을 마치 창처럼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우선 발을 놀려 엑스칼리버가 팔과 갈비뼈 사이를 지나가게 한 뒤, 팔꿈치를 힘껏 내려 검신과 밀착시켰다. 그렇게 옆구리에 단단히 낀 다음 칼리고 아브락사스를 날려보내자, 엘도라는 얼른 몸을 웅크렸다. 그 틈을 타 나는 몸을 전진, 있는 힘을 다해 육탄으로 부딪쳤다. 쿵, 바위 부딪치는 소리가 나더니 엘도라가 양팔을 활짝 벌리며 엉거주춤 물러난다. 두 눈을 크게 치뜬 건 덤인가. 훙, 훙! 그 와중에도 검을 연달아 휘두른 건 칭찬하고 싶었지만, 너무 어중간하게 공격했다. 처음 공격은 회피한 후, 두 번째 공격은 아까 엘도라가 그랬듯 무검으로 강하게 내려쳐 땅으로 처박았다. 그리고 그 옆으로 다리를 굽히며 들어가, 무릎으로 균형을 잃은 엘도라의 종아리를 강하게 때렸다. “아악!” 육중한 감각이 느껴지는 동시에 앳된 비명이 터졌다. 다음 순간, 나는 굽혔던 무릎을 펴는 동시, 아담한 턱을 향해 무검을 어퍼컷처럼 찔러 올렸다. 그러나. “큭!” 무언가 걸리는 느낌은커녕, 칼끝은 하염없이 수직으로 치솟는다. 올라가는 팔 옆으로, 턱을 한껏 젖힌 채 나를 고요히 응시하는 두 눈동자가 밟혔다. …뭘 담담해 하는지 모르겠는데, 네가 피할 거라고 예상했거든? 곧장 팔꿈치로 엘도라의 얼굴을 강하게 찍어버리자, 또 한 번 칠칠치 못한 비명을 내지르며 형편없이 떨어진다. 아직 끝이 아니다. 후퇴하는 지점을 노려 칼리고 아브락사스가 가열차게 그어 내려가는 중이었다. 엘도라는 얼른 칼을 들어 방어하려고 했으나 코앞까지 근접한 순간, “부서진 파편(Broken Fragments).” 꽝! 칼리고 아브락사스가 거친 폭발을 일으켰다. 흡사 수류탄이 터진 듯 잘게 깨진 칠흑색 파편이 확 퍼지며 엘도라를 삼켰다. “아아아아아아아악!” 이것만큼은 견디기 힘들었는지 엘도라는 조용한 전장이 떠나가라 소리 질렀다. 응? 조용해? 그러고 보니, 어느새 전장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어 있었다. 모두 전투를 멈추고 나와 엘도라가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다. “…….” 그 정도로 격전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건, 남 대륙 사용자들의 얼굴빛이 과히 좋지 않다는 것. 아니, 좋지 않은 걸 넘어서 거의 절망에 가까운, 믿을 수 없다는 수준이었다. 잠시 후. 파편의 폭풍이 휩쓸어 지나가고, 뭉게뭉게 일어난 흙 연기가 걷히기 시작한다. 차츰차츰 드러난 엘도라의 모습은 몹시 처참하다. 빨갛게 익은 살과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허연 아지랑이. 아름답던 경장 갑옷은 온통 파편에 긁혀 추레해졌고, 자신감 가득하던 두 눈동자는 빛을 잃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윽고 두 다리가 힘없이 꺾이는 찰나, “아….” 미약한 침음이 새어나오며 반쯤 굽혀진 무릎이 빳빳해졌다. 그리고 이빨 가는 소리를 내며 칼을 땅에 박더니 끝내 다시 자세를 잡는다. 그럴 줄 알았다. 왜냐면 감지에 걸리는 상대의 기운이 아직 여력이 남은 듯했으니까. 뭐, 처음에 비하면 많이 무뎌지기는 했지만. “크으으으…!” 입을 열기도 힘든지 흡사 짐승이 우는 소리를 낸다. 그러다 문득, 상대의 마력이 심상찮게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엘도라의 주변으로 영롱한 황금빛 구체가 무수하게 떠오른다. 새삼 느껴지는 성스러우면서도 파괴적인 기세에 저절로 눈에 힘이 들어갔다. “호오.” 나는 비웃듯이 감탄하며 발을 굴렀다. 그러자 회로의 마력이 순식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화르르륵, 화르르륵! 그 결과는, 곧 이글거리며 생성되는 수십 개의 열화 검으로 나타났다. 저 능력이 얼마나 강할지는 모르지만, 글쎄. 이 열화 검은 게헨나조차도 인정한 능력인데…. 과연 어떨까? 흘끗 쳐다본 엘도라의 얼굴에는 황망하다는 감정이 거미줄처럼 번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끝을 낼 때가 온 것 같아, 나는 속으로 외쳤다. ‘부인!’ - 응! 맡겨둬! 화정은 신 나는 음성으로 화답했다. ============================ 작품 후기 ============================ 독자 님들. 죄송합니다. 오늘은 잠시 후기를 빌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 헤이, 브라더? 모르는 척 하지 말고, 다 알고 있거든? 지금은 자고 있고, 아마 내일 회사 가서 이 후기를 읽고 있던가 하겠지. 어떻게 알았냐고? 님이 어제 차에서 대놓고 말했잖아요. 곧 완결 나겠다고? 아니, 이건 좋아. 뭐? 근데 왜 주인공 이름이 김수현이냐고? 또 왜 십 년 이나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반복하는 거냐고? 내가 말하지 말라고 하니까 캬캬캬캬 웃더라? 하하하하. 후. 내가 그렇게 읽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는데, 아니 아니. 백 번 양보해서 좋다고 쳐. 굳이 읽으시겠다는데 어떻게 막겠어. 그런데 내가 말했잖아. 티 좀 내지 말아달라고. 놀리지 말아달라고. 근데 내가 계속 가만히 있으니까 가마니로 보이나배? 아, 맞다. 혹시 이거 알아? 나도 님 비밀 세 개 알고 있다는 거. 1. 님의 방에서 발견한 자줏빛 네모난 비닐 포장. D…. 여기까지만 하자. 2. 저번에 님 여행 끝내고 돌아왔을 때, 님의 가방에서 발견한 XX. 내가 이건 독자 분들한테도 창피해서 더 못 말하겠다. 세상에 어쩜 그러냐? 이건 진짜 반성해. 3. 님 출근 전 샤워할 때 님 전화기에 누구한테 전화 와서 살짝 봤는데, 와, 이름 저장한 거 대박이더라? 뭐 말하는지 알겠지? ㅋㅋㅋㅋ 자, 브라더? 제가 이 1, 2, 3번을 싹 다 까발리면 님은 어떻게 될까요? 3번은 그냥 놀리고 마는데, 1, 2번은 진짜 빼박캔트인 거 알고 있지? 우리 엄마 아주, 매우, 굉장히, 엄~~~~청나게 보수적인 거 알잖아. 협박이냐고? 응. 맞아. 기분 나쁘지? 나도 기분 나빴어. 그러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제발 서로 그만두자. 응? * …독자 님들 죄송합니다. 한 번쯤은 경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후기 보고 뜨끔하겠지요. 부득이하게 빌린 점,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죄 드립니다. _(__)_ 0903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오늘 내용은 중반, 후반 내용에 성적으로 불쾌한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원치 않으시는 독자분께서는 넘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엘도라의 낯빛은 ‘저놈은 정말 뭐 하는 놈이지?’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앙칼진 얼굴로 눈을 질끈 감자, 구체들이 한층 환한 빛을 발하며 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기운이 고여가기 시작한다. 낯의 핏기가 눈에 띌 정도로 빠지는 것이 상당히 무리하는 것 같으나, 점차 밝아지는 구체는 숫제 심상찮은 진동마저 뿜어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나와 엘도라의 사이는 빛과 진동 그리고 이글거리는 소리만이 남은 기이한 공간으로 변했다. 어느새 엘도라의 모습은 구체가 발하는 빛에 가려 희미하다. 어떤 말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떤 형상도 보이지 않는다. 꼭 우리 둘만 다른 차원에 있는 느낌이다. “Ostende Te!” 그렇게 생각한 찰나, 문득 한 외침이 공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귀를 찔렀다.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중구난방 떠 있던 구체 수십 개가 갑자기 춤을 추듯 움직이다가, 소라 껍데기처럼 빙그르르 나선을 그리며 끌어당기듯 모이기 시작한다. 이동 속도가 그다지 빠른 건 아니었다. 그러나 한 점으로 차곡차곡 집중되더니, 곧 하나의 커다란 원으로 군집해 아까보다 몇 배는 밝은, 흡사 태양처럼 눈 부신 빛을 터뜨렸다. 이쯤 되니 나도 마냥 넉넉하게 있을 수가 없다. 좀 더 싸울 줄 알았건만, 엘도라는 이번 공격에 남은 여력 전부를 쏟아붓고 있는 듯하다. 현명하다면 나름 현명한 판단. 하여 나도 그에 발맞춰 화정의 기운을 가일층 끌어올렸다. 공간을 흔드는 소용돌이 속 지그시 감긴 두 눈동자. 거세게 펄펄 나부끼는 황금빛 머리카락. 잠시 후, 엘도라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 눈빛은 더없이 강한 승리의 확신이 서려 있다. 그러더니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은 힘껏 말아 쥔 채, “El Doradooooooooooooo!” 악에 받친 듯 목이 터지라 소리 지른다. 그 순간, 나는 확실히 볼 수 있었다. 황금의 구체와 땅이 맞닿은 부분서 한 차례 세찬 불꽃이 튀기더니, 꾸우우웅! 빙그르르 회전하는 동시, 천지를 떠르르 울리는 소음을 토해내며 잠력(潛力)을 폭발시킨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압도당하는 것 같은 광대무변(廣大無邊)한 기운. 이내 가로막는 모든 걸 아우르며 서서히 전진해오는 장면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고 장대하다. 한편, - 꽤 하잖아! 화정이 외치며 열화 검들이 발사된 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화르르륵, 화르르륵! 화정 본연의 기운에 4.5배로 증가한 마력 흐름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섬광처럼 쏴진 열화 검들은 그 어느 때보다 짙은 잔상을 흘리며 남김없이 구체의 전면과 격돌한다. 콰콰콰콰콰콰콰콰! 온 세상을 뒤흔들며 다가오는 빛의 태양, 그리고 모든 것을 불사르며 막아서는 붉은 검 줄기들. 나는 물론, 엘도라도 그곳에서 터져 나오는 기세를 이기지 못해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친다. 그러나 두 기운은 서로 한 치도 밀리기는커녕, 오히려 기하급수로 기세를 더해간다. 수십의 칼끝이 꽂힌 표면으로, 황금빛 파문이 연신 물결치며 넓적하게 벌어지는 광경은 진정으로 장관, 아니 화려한 절경이었다. 다음 순간, 화르르륵! 정 중앙에 꽂힌 열화 검 하나가 거세게 타오르며 작은 구멍을 뚫었다. 아니, 녹여냈다는 표현이 옳으려나. 그 순간을 기점으로 구체는 순식간에 치즈처럼 구멍이 뻥뻥 뚫리더니, 끝내 침입을 허용하고 말았다. 온 세상을 밝히던 빛무리가 점차 사그라지며 구체의 형상이 일그러져 붕괴하기 시작한다. 살아남은 열화 검들은 해를 산산이 무너뜨리며 혜성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그리고 엘도라는, “아아아아아아아아!” 흡사 절규하듯 고함을 내지르며 화르르르, 무수한 불줄기에 뒤덮인다. 그리하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온몸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지고 돌풍도 잦아들었다. 끝났다. “후.” 나는 비로소 참았던 숨을 내쉬며 기운을 추슬렀다. 그리고 빠르게 몸을 점검했다. 속이 조금 허전하기는 하나, 역류 현상이나 상처 입은 곳은 없다. 쉬운 상대는 아니었으나 고대 악신처럼 어렵지도 않았다. 그냥 딱 생각했던 정도인 것 같다. 하기야 한낱 사용자인데 화정도 인정하는 고위 신과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앞을 바라보자, 온몸을 덮은 불길이 서서히 연소해 가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엘도라는 용케도 땅에 두 발을 디디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화정이 사그라지고 드러난 모습은, 선 채로 죽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처참하기 짝이 없다. 아름답던 금발은 시꺼멓게 그을렸고, 작고 단단하던 체구는 여기저기 찢겨 버리기 직전의 걸레를 보는 듯하다. 놀라운 일이었다. 아무리 힘이 꺾였다고 하나, 열화 검을 정통으로 먹고도 저 상태라니. 아마 그만큼 보호 장갑이 좋을 것 같은데. 뭐, 잘됐네. 보아하니 장갑이나 장신구 덕을 좀 본 것 같으니 같이 가져가면 되겠다. 물론 어디까지나 엑스칼리버가 우선이지만. 한데, 설마 이때 누가 짠하고 등장해서 칼을 훔쳐가는 건 아니겠지? 혹시 몰라 서둘러 걸음을 옮기자, 엘도라가 힘겹게 눈을 떴다. 시뻘게진 두 눈동자는 조용히 떨리고 있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간신히 입을 열었다가, 콜록 기침하며 선홍빛 핏물을 주르륵 쏟아낸다. 결국에는 엑스칼리버를 툭 놓치고, 끓는 침음을 흘리며 힘없이 앞으로 쓰러졌다. “흠.” 확실히 신검은 신검인가. 그 난리 통을 겪었음에도 엑스칼리버는 햇빛을 반사하며 고고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하기야 홀 플레인에 현존하는 칼 중 첫손으로 꼽혀도 무방할 정도니 이 정도로 반항할 수 있었던 거겠지. 그나저나 생각할수록 칼집이 아쉽네. 아아, 아쉽다. 정말로 아쉬워. “안 돼….” “응?” 그때, 정확히는 막 엑스칼리버를 집어 든 찰나, 아련한 음성이 귓전을 흐른다. 바들바들 떨리는 팔이 나를 향해 뻗어져 있다. 엘도라는 호흡조차 곤란한 듯 꺽꺽거리면서도, 애처롭기 그지없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돌려줘….” 뭔 말을 하는가 했더니. 설마 돌려달라는 뜻인가? “싫어. 아니, No.” “돌려줘…!” “미쳤냐. 여기로 온 이유 중 하나가 이 칼 때문인데.” “아, 아…?” 나는 싱겁게 웃으며 엘도라가 올린 손등을 지그시 내리밟았다. “히아아악!” 뿌드득, 뼈를 밟아 부수니 고개를 한껏 쳐들며 울부짖는다. 그러나 곧장 발로 턱을 걷어차 버리자 비명이 뚝 끊기며 날아가 땅을 구른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새우처럼 웅크려 신음하는 엘도라를 잡아 올렸다. 핏물로 범벅된 얼굴은 상당히 초라하다. 이윽고 제 3의 눈으로 빠르게 훑자, 역시나. 시엘라스의 수호 갑옷, 아이렌의 순결한 처녀 장갑, 뷔에르의 숙녀 부츠, 귀여운 곰돌이 속옷…. 아니, 이건 됐고. 걸친 갑옷과 장비나 장신구 등 하나하나가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굉장한 보물들이다. 어쩌지. 아직 전쟁 중이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소강상태기도 하고. 그리고 이 정도 성능의 장비라면 잠깐 시간 들여 회수할 가치가 차고도 넘친다. 괜히 놔뒀다가, 누가 몰래 훔쳐가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렇게 생각한 나는 갑옷부터 천천히 벗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망연하던 엘도라의 눈매가 갑자기 치떠졌다. “가만히 있어라.” “무, 무슨!” “루루, 루루루루….” “시, 싫어! 하, 하지 마!” 이런. 기력을 잃은 줄 알았는데 갑자기 심하게 발버둥 치며 저항한다. “도와줘! 누가 제발 도와줘!” “이노오옴! 당장 손 떼지 못해!” 연거푸 Help라는 말을 외치는가 싶더니 어디서 분노에 찬 음성이 터졌다. 흘끗 눈을 돌리니 가짜 신재룡, 아니 흑형이 달려오고 있다. 전투 전 안솔과 일기토를 벌인 사내였다. 심판의 기사라고 했나? “천벌을 받으라!” 얼마나 급하면 오면서 메이스를 들었으나,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애초 이런 번개 따위가 내 항마력을 뚫을 리가 없다. 두 번 세 번 거듭 내리쳐도 끄떡도 하지 않는다. 아무튼, 오는 건 좋은데 저렇게 막무가내로 달려와서는…. 쐐애애액! 찰나의 순간, 공기를 가르며 날아온 검붉은 살은 상대를 아주 정확히 노려 머리통을 관통했다. 화살을 보니 선유운이 쏜 것 같다. 거한은 달려오는 그대로 우당탕 쓰러졌고, 엘도라는 악을 썼다. “에드워드으으!” 그래, 더 와라. 오면서 계속 저격당하면 더할 나위 없고, 대장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사기를 상실하면 그것대로 좋고. “으윽, 으으으윽!” 장비를 하나씩 벗길수록 엘도라의 저항도 더욱 심해졌다. 나중 가서는 약간 거슬릴 정도도 심해져, 주먹으로 있는 힘껏 복부를 세게 후려갈겼다. 그제야 몸이 축 늘어져 겨우 갑옷을 벗길 수 있었다. 이왕 시작한 거, 나는 거침없이 손을 놀렸다. 목걸이와 반지를 회수한 후, 받쳐입은 옷까지 빼앗았다. 최후로 속옷까지 딱딱 긁어내 홀딱 벗겨내자, 희디흰 나신이 여과 없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가늘게 떨리는 아담한 어깨, 도도록이 솟은 분홍색 가슴, 부끄러운 듯 꼬아 움츠리는 탄탄한 허벅지, 심지어 아직 덜 여문 음부까지 전부 노출한 것이다. 그러자, 그렇게나 충격이 큰 걸까. 아니면 이런 비참한 상황은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걸까. “윽…. 흐흑….” 엘도라는 어느새 완전히 겁에 질려 작게 흐느끼는 중이었다. 첫 대면 때 자신감은 온데간데없고, 빛 잃은 눈동자는 보통 소녀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차올라 있다. “이제 그만…. 제발, 제발….”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수치심 때문인지 울먹임 섞인 소리를 횡설수설 웅얼거리더니, “어엉…. 멜리너스…. 으아아앙….” 결국에는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나는 아이처럼 우는 엘도라의 머리채를 세게 휘어잡았다. 그리고 남 대륙 사용자들이 있는 방향으로 여 보라는 듯 최대한 높이 들어 올렸다. 반응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과연 미쳐 날뛰며 달려들어 올까?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칠까? “어어어엉….” 목놓아 우는 소리가 경악한 전장에 구슬프게 울려 퍼진다. 그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에피소드 3도 팔부능선을 넘었네요. 전쟁은 아직 두 번 남아 있습니다. 2에 한 번, 1에 한 번 남아 있지요. 스케일로 따지면 1 > 2 > 3으로 볼 수 있겠네요. 내용 길이(?)로는 3 > 1 > 2로 될 것 같습니다.(물론 완결은 7, 8월 중으로 납니다.) 아마 에피소드 1까지 전쟁을 제외한 부분은 진도가 빨라질 것 같사오니,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벌써 새벽 5시가 다 되가네요. 독자님들 모두 활기찬 수요일 맞이하시길. :) 0904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꽈앙! - 어? 갑자기 고막이 찡해질 정도의 굉음이 터지더니 화정이 놀란 음성을 터뜨렸다. - 이 힘은…. 반신반의하는 소리에 이어 폭음이 들려온 곳을 쳐다봤다가, 순간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전장을 거침없이 휘젓고 다니던 오벨로 기사단이 허공에 우수수 흩날리고 있다. 방금 소음의 근원에 당한 듯 전신이 걸레짝이 된 채로. - 김수현! 화정의 목소리가 급해졌다. 나는 왼손에는 엘도라를 잡은 채 오른손으로 엑스칼리버를 땅속 깊숙이 박아 넣었다. 그리고 재빨리 무검을 꺼내 자세를 잡았다. 엑스칼리버가 주인으로 인정한다는 메시지가 왜 안 뜨는지 모르겠으나, 깊게 생각할 틈이 없다. 신속에 가까운 속도로 다가오는 기운은 총 열댓 개. 동서남북 사 방향서 내가 있는 곳으로 나는 듯 접근해오고 있다. 언뜻 무시무시하지만, 한편으로는 낯설지 않은 기운, 아니 악의였다. 잠시 후. 훌훌 솟구친 십수 개의 그림자가 에워싸듯 느닷없이 난입해 들어온다. “이런 이런. 뭔 짓거리 중이었던 거야?” 처음 시야로 들어온 건, 느물거리는 말을 뱉으며 뛰어내리는 아스타로트였다. “어머? 저 무슨 파렴치한 짓이래?” 두 번째로 내려앉은 리리스는 박쥐 날개를 팔락거리더니 몸을 살짝 꼬며 교태를 부린다. 이윽고 바알, 루시퍼, 벨제부브, 아스모데우스, 게다가 악마 14 군주와 두세 명의 사용자까지. …아니, 사용자가 아니잖아? “메, 멜리너스….” 내 손에 잡혀 있던 엘도라가 눈물 젖은 음성으로 웅얼거렸다. 멜리너스라. 겉모습은 늙은 노인이지만 제 3의 눈은 벨리알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문득, 남 대륙이 넘어간 정황을 아주 조금 알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하나하나 확인한 후 가볍게 숨을 추슬렀다. 마침내 대 악마 놈들이 등장했다. “…….” …하지만, 어째서일까? 무언가 대단한 등장 같은 걸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가슴은 단 한 번의 두근거림조차 없이 몹시 조용하다. 그냥 올 것이 왔다는 담담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머리가 시리도록 차갑다. 심안의 영향일까. 아니면 어쨌든 나올 거라고 예측했기 때문일까. 아니, 둘 다 아니다. 이토록 고요한 심신의 근원은 자신감이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 말이다. 실제로 일 회차 때 엄청난 명성을 떨쳤던 엘도라도 방금 압도적으로 패배시키지 않았는가. 예외는 없다. 설령 상대가 대 악마라고 해도, 아니, 악마라면 더더욱 자신이 있다. 왜냐고? 이놈들만 바라보고 이 홀 플레인에서 십사 년을 살아왔으니까. “사용자 김수현.” 그때,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우선 삼가 인사 드리겠습니다.” 누군가 차분히 걸어 나오는 기척을 느꼈다. “저는 타락 천사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루시퍼…. 아, 이미 알고 계시려나요?” 루시퍼는 한 손을 가슴에 대고 정중히 허리 숙이며 말했다. 그리고 살짝 고개 들더니 부드러이 웃는다. “아무튼,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싶습니다만.” “이야기?” “예. 이 무의미한 전쟁을 이어나가는 것보다는, 대화로 풀어나가는 게 훨씬 좋지 않을까요?” “호오.” 순간 코웃음이 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태도도 예의 바르고, 목소리도 여전히 달콤하고 유혹적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과거의 나였다면 아마 솔깃했을지도 모르겠다. “대화라…. 좋지. 아니, 못할 것도 없지.” “예?” “두 가지 조건만 받아들인다면 말이야.” “뭐라고?” 아스타로트가 고함쳤다. 그러나 루시퍼는 얼른 손을 들더니 천천히 허리를 폈다. “예. 경청하겠습니다.” “첫 번째. 현 시간부로 남 대륙 사용자 전원이 전장을 이탈할 것.” “어렵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요?” “이것도 간단해. 첫 조건을 이행한 후, 너희가 저 성 안으로 얌전히 들어오는 거야. 거기서 느긋이 이야기 나누자는 거지. 어때?” 말을 끝낸 순간 리리스가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루시퍼는 웃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뚫어지라 나를 응시하다가, 돌연 눈매를 가늘게 찢으며 쓰게 미소 짓는다. “애초 대화할 생각이 없으셨군요.” “오, 협상은 결렬인가.” “아니요, 아직입니다. 생각해보시죠. 왜 이 많은 사용자가 천사들한테서 돌아섰는지. 한 번쯤 들어볼 가치는 있지 않겠습니까?” “아, 천사의 이중성을 말하는 거라면 걱정하지 마.” “…예?” “일단 너희 먼저 처리하고, 걔들은 다음에….” 일부러 말을 흐리자, 루시퍼의 얼굴빛에 처음으로 동요가 번졌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기분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 거만하던 놈들이 자세를 낮추고 이런 제의까지 하다니. 나름 대우해준다는 건가? “그걸 알고 계신다면 우리가 굳이 싸울 필요가 없을 텐데요?” “확실히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이 있지. 그런데 너희는 아니야.” “무언가 오해가….” “아니. 천사는 제로 코드를 지키려는 입장이지만, 너희는 필요로 하잖아?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그 말에 루시퍼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킥킥 웃고 나서 엘도라의 등으로 무검을 찔러 넣었다. 그러자 미끈한 살이 좌우로 갈라지더니 전신이 펄떡 들썩였고, “아악!” 단말마의 비명이 터졌다. 원래는 고기 방패로 사용할 생각이었지만, 별로 먹힐 것 같지도 않고…. 확실히 악마들의 반응은 담담했다. 잠깐 주춤하기는 했으나 그뿐,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다. 하기야 저놈들에게 있어서 엘도라는 도구에 불과할 터. 죽든 말든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혹시 몰라 내부로 커다란 마력 폭발을 일으킨 후, 축 늘어진 엘도라를 쓰레기 던지듯 내버렸다. 요요한 침묵이 흐른다. 자유로워진 왼손으로 엑스칼리버를 드는 동안 상대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 짙어지는 적의는 곧 벌어질 상황을 예고하고도 남는다. 나는 서서히 마력을 끌어올리며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우선 이곳에 나타난 대 악마는 일곱 중 여섯으로, 사탄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악마 14 군주는 씨앗으로 개화한 사용자 세 명까지 포함해 총 아홉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두 사실로 나오는 의문은 두 가지. 하나는 사탄은 어디 있느냐는 것. 다른 하나는 남은 악마 14 군주 중 한 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내가 알기로 이제껏 소멸한 악마 14 군주는 메피스토펠레스, 마몬, 플루톤, 프로세르피나 이렇게 총 넷으로 알고 있다. 그럼 열 놈이 있어야 하건만, 보이는 건 아홉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전장에 등장한 건 악마뿐, 마족의 존재는 한 놈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기실 남 대륙과 처음 맞닥뜨렸을 때부터 이상하기는 했다. 이번 전쟁에 사활을 걸 생각이었다면 왜 처음부터 같이 싸우지 않았을까. 어째서 남 대륙이 패배하기 직전 공교롭게 등장한 걸까. 뭘 꾸미고 있는지 모르겠다. 단지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다면, “흥~. 흥~.” 몸집에 비해 커다란 로브를 걸친 채 조용히 콧노래를 부르는 여인. 심지어 제 3의 눈으로도 정보가 읽히지 않는다. - 타나토스야. 그 순간, “타나토스?”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밖으로 말을 뱉고 말았다. “앗?” 거의 동시에 상대도 약한 탄성을 질렀다. “알고 있었어?” 푹 눌러쓴 후드를 젖히자, 눈을 동그랗게 뜬 긴 흑발의 미인이 드러났다. 그렇게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갑자기 짝 손뼉 치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아! 그렇구나~. 그러네. 격이 같으면 감지할 수도 있겠네. 그래도 숨긴다고 숨겼는데, 아까 웬 이상한 놈들을 처리할 때 힘을 너무 썼나 봐. 히히!” 혼자 말하고 혼자 끄덕거리더니 천진난만하게 웃는다. 흡사 구김살 없는 밝은 아이 같은 모습이었으나, 나는 방심의 끈을 풀지는 않았다. 한껏 기함하기는 했으나 속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예전에. 예전에 한 번 그런 적이 있다. 그 당시에 왜인지 계속 타나토스가 신경 쓰여 끈덕지게 캐물었고, 화정은 위험한 미친년이라는 말로 일축했었다. 모르긴 몰라도 절대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닐 터. 하긴, 악마를 상대하면서 언제 한 번 쉬운 적이 있었던가. 사탄이 바보가 아닌 이상 악마 진영의 불리함은 인지했을 테고, 그래서 타나토스의 봉인을 풀었다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말인즉 일종의 비밀 병기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자 절로 싱거운 웃음이 터졌다. 아무래도 그때 타나토스의 출현을 염두에 두겠다고 마음먹었던 게 도움이 된 것 같다. “어, 웃어?” 그 순간 타나토스가 뾰족한 소리를 질렀다. 두 눈을 앙증맞게 깜빡거리더니 갑자기 흉신악살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정말 미친년이구나. “왜 웃는 거야? 별로 웃을 상황은.” “생각해보면.” 타나토스의 말을 끊으며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너희는 항상 그랬지.” “……?” “그래, 언제나 그랬어. 일이 좀 잘 풀리는가 싶으면 꼭 나타나서 어떻게든 훼방을 놓더라고. 그것도 치 떨릴 정도로 말이야.” “그건 오히려 저희 쪽이 할 말 같습니다만.” 약간 뜬금없는 말이었는지 루시퍼가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왠지 이런 상황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고 들렸다면 제 착각입니까?” 나는 빙긋 웃었다. 그럼 몇 번을 당하고 또 당했는데, 당연히 했지. “설마 안 했겠냐.” 조롱하듯이 말한 후 두 검을 교차시켜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말했다. “영역 선포(Area Declared).” ============================ 작품 후기 ============================ 허허…. 어, 음. 우선은 죄송합니다. 제가 어제 경고 문구를 넣은 건 독자분들의 항마력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예전 나탈리가 거열형을 당하는 장면 때 어느 독자분께서 작성해주신 코멘트 때문이었습니다. ‘요즘에는 경고 문구를 넣어주지 않으시네요.’ 이런 말씀을 해주셨고, 보자마자 아차 싶었습니다. 노블레스에는 많은 독자분들이 계십니다. 거열형이나 어제의 내용 정도는 당연히 무리 없이 읽으실 수 있는 독자분들도 계시겠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아니, 사실 알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까맣게 잊었고, 이건 제가 반성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어제의 스킵 권유는 소수의 독자분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해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_(__)_ 그리고 천XX혈XX 님에게. Q1 ) 작가야, 작가야. 공찬호랑 다른 사용자랑 맞짱을 떴을 때도 사용하지 않은 열화 검을 사용하고, Sol ) 김수현이 그때 열화 검을 사용한 건 큰 의미는 없습니다. 물론 다른 방법으로 싸울 수도 있었겠지만, 엘도라가 사용한 능력인 ‘모습을 보여라, 엘도라도.’에 대응해 사용한 것뿐이지요. 단지 이번 전투에 있어서 김수현의 목적은 엘도라를 단순히 끔살시키는 게 아닌, 압도적으로 패배당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남 대륙 진영에 충격을 주는 것에 우선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말인즉 여러 전투 방법 중 하나를 선택했을 뿐이지, 전력을 다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Q2 ) 또 왜 그게 예상한 수치 값의 엘도라의 무력이었는지 설명 좀. 간단해요. 김수현이 추측한 엘도라의 예상 무력은 1. 제 3의 눈 2. 현재가 사 년차에서 오 년차로 넘어가는 시점. 이 두 사실에 기인해 계산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예전에 ‘이 회차의 사용자들이 일 회차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를 주제로 한 파트가 나온 적이 있는데, 엘도라도 예외는 아니겠지요. 더군다나 칼집도 없는데, 일 회차 때보다 약할 거라고 예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충분한 답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0905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크흐흐흐흐흐흐흐!” 쿵, 쾅, 쿵, 쾅! 무자비하게 창이 찍히는 굉음과 함께 광기에 찬 웃음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아무리 전장이 잠잠해졌다고 하나, 특이하게도 소리의 근원지는 직경 오십 미터 안으로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아군은 질렸다는 얼굴로, 적군은 두려움에 찬 얼굴로 떨고 있었다. “뭐 하는 거냐! 겨우 이게 끝이냐? 끝이야? 크하하하!” 꽝, 또 한 번 창을 메어친 공찬호는 입이 찢어지라 광소(狂笑)했다. 형형히 빛나는 눈이나 침을 뚝뚝 떨구는 어금니는 흡사 발광하는 광인을 보는 듯하다. 그런 공찬호의 앞에는 뭉개지다 못해 완전히 으깨어진 시체 하나가 놓여 있다. 아까까지만 해도 이유정을 몰아붙이던 녹스 로드는, 어느 순간 저민 고기라 해도 믿을 만큼 곤죽이 돼 있었다. 얼마나 누르고 밟아 쳤으면 뇌수나 살점이 부스러기로 변해 핏물에 섞여 녹는다. 아주 가끔, 부르르 떨며 얼기설기 이어 붙는 부분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공찬호가 귀신같이 창으로 후리니, 결국에는 무참히 찢겨 움직임이 멎는다. 투쾅! 그 순간 적막한 전장에 돌연 거센 소리가 휩쓸었다. 귓전이 저릿해질 정도의 소음이라 공찬호조차도 흘끗 눈을 돌렸다. 돌아본 곳에는 먼빛으로 밥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붉은색 막이 내려와 있다. “오호.” 공찬호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무언가 재미난 걸 발견한 것처럼 입꼬리가 씩 올라간다. “이제 본 무대인가.” 기쁜 어조로 말한 공찬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뛰어가기 시작했다. * 그 무렵. “어! 신호 온 거 아녜요?” 성벽에 서 있던 선율이 호들갑을 떨며 한 곳을 가리켰다. 붉은 장막이 처져 있는 곳이었다. “자~! 머셔너리 로드의 시그널도 왔으니 어서…?” 고개 돌려 말한 순간 생글생글 웃던 얼굴이 돌연 멍해졌다. 왜냐면 좀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던 김유현이 어느 순간 사라졌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 성벽 계단을 후다닥 뛰어 내려가는 중이었다. “참, 누가 동생 바보 아니랄까 봐….” 낮게 뇌까린 선율은 곧 살그머니 옆을 흘겼다. 그곳에는 아직 한소영이 남아 있었다. “그나저나 이스탄텔 로우 로드는 안 가봐도 괜찮겠어요? 사랑하는 그이가.” “라운드 하우스(Round House).” 웅웅웅웅! “아, 뭐라고 하셨죠?” 손등으로 은은한 보랏빛을 비추는 한소영이 갸웃하며 물었다. “…아니, 아니에요.” 선율은 쓰게 웃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전장 지휘는 제가 잘~ 하고 있을 테니 잘~ 다녀오시라고요.” * 그 시각. “왔다!” 마찬가지로 성벽서, 그러나 약간 떨어진 곳에 있던 제갈 해솔이 총총 뛰었다. “흠. 이제 우리가 나설 차례인가.” 하승우도 발 하나를 벽돌에 얹은 채 한껏 무게를 잡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갑니다. 저의 발로 가겠습니다. 그러니 이만 놓아주십시오.” “아이참, 같이 가면 좋잖아?” “으에에에! 가, 갈게요! 간다니까요? 그래도 가슴의 준비는…!” “응? 뭔 가슴의 준비? 혹시 찌찌?” 제갈 해솔은 금세 근원과 차희영을 끌 듯이 데려왔고, 이내 근원의 빗자루인 ‘혼돈의 솜니움’에 사뿐 궁둥이를 붙였다. “그럼 출발!” 흡사 청룡 열차라도 탄 것처럼 양팔을 활짝 벌리는 제갈 해솔. 근원의 낯에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딱히 내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조용히 주문을 외우니 세 여인을 태운 빗자루는 용케도 날아올랐다. 한편, 졸지에 홀로 남게 된 하승우는 훨훨 멀어지는 빗자루를 멍하니 바라봤다. “후.” 이윽고 뜻 모를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혼자서 쓸쓸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렇게 하승우마저 내려가자, 성벽에는 또 다른 세 여인이 남게 되었다. “저희도 슬슬 준비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정하연이 지팡이를 꺼내며 묻자 사라가 빙긋 미소 짓는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우선 소환하고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이 옳다 여긴 정하연은 바로 끄덕였고, 사라는 정신 집중에 들어가려는 듯 지그시 눈을 감는다. 정하연도 서둘러 마력을 모으려는 찰나, 갑자기 아차 한 얼굴로 눈을 돌렸다. “비비앙?” “응?” 몰래 성벽 계단 쪽으로 가던 비비앙이 어색하게 웃는다. “어디 가요?” “에, 잠깐 아래 좀. 성벽은 너무 좁아.” “아래?” “으응. 실은 이번에 소환하려는 군단이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거든.” 쑥스럽게 웃으며 질서의 오르도를 흔들던 비비앙은, 돌연 화난 표정을 짓더니 황급히 모습을 감췄다. 그러자 정하연의 고운 입술이 아주 살짝 비뚜름해졌다. “이번에 소환하려는 군단?” * 한동안 소강상태로 있던 전장은 어느 순간 서서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그 변화의 중심은 김수현이었다. 영역 선포를 사용한 이후, 타나토스와 악마들은 발 빠르게 물러나 영역서 벗어났다. 상대가 화정을 가진 건 물론, 얼마나 위험한 힘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같은 불 계열인 흑염(黑炎)을 사용하는 아스타로트로서는 상성이 최악이라 할 수 있다. 까닥 잘못하면 한순간 불길에 휩싸여 소멸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김수현은 겉으로는 침착해 보이나 속으로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왜냐면 악마들의 태도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일 회차 때 홀 플레인을 쥐고 흔들었던 악마를 상대로 인간이 이길 수 있었던 건, 지나치게 독립성이 짙었던 악마의 특성에 기인한다. 오죽하면 포로로 잡은 철혈 여왕을 서로 가지겠다고 싸울 정도니 말 다하지 않았는가. 한데, 다르다. 예전 같았으면 혼자로도 충분하다고 거들먹거렸을 놈들이, 잔뜩 긴장한 채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다. 꼭 서로 협력이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아무리 과거와 현재가 달라졌다고 하지만, 김수현으로서는 생소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후르르르, 후르르르! 갑자기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방으로 심상찮은 흐름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악마들도 모종의 전조를 느꼈는지 곧바로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찰나의 순간, 물기 담뿍 젖은 바람이 스쳤다. 무심코 시선을 돌린 악마들은 뜻밖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공기 중에 포함돼 있던 물들이 청소기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엄청난 속도로 모이고 있었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군집하더니 각각 균등한 형체를 갖춰나간다. 잠시 후, 속속히 모여든 푸른 빛들이 넘실넘실 아름답게 물결치기 시작했다. 라라라라…. 라라라라…. 라라라라…. 라라라라…. 이어서 흘러오는 아스라한 노랫가락.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수백의 물의 정령으로 이루어진 ‘정화의 군단(The Legion Of Purification)’이 부르는 합창이었다. 그 노래를 들은 김수현의 안색이 한층 밝아졌다. 아무리 김수현이 독보적으로 강하다고 하나, 타나토스와 모든 악마를 한꺼번에 상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영역 선포로 준비한 신호를 보냈는데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답이 돌아왔다. 게다가 정화의 군단 맞은편으로는 시뻘건 불길이 이글거리며 올라올 조짐까지 보이고 있었다. 아직이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오라!” 문득, 낭랑한 외침이 고요한 전장을 짱짱하게 울렸다. “오라! 베히모스! 제 3군단을 지배하는, 적을 정토(征討)하는 최후의 왕이여!” 그 순간이었다. - 딱딱딱딱…. 딱딱딱딱…. 어디선가 이를 연속으로 부딪치는 소슬한 소음이 흘렀다. - 하하…. 정말, 이제야 불러주시는 겝니까. 거의 동시에 깊숙한 구렁텅이서 기어 나오는 듯한 어스름한 악성이 들리더니, 두두두두…. 두두두두…. 느닷없이 땅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차마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진동이었다. 언뜻 지진 난 것처럼 들리나, 한편으로는 수백 수천의 말발굽이 대지를 짓밟으며 올라오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으음.” 상황을 지켜보던 멜리너스는 침음을 흘렸다. 김수현을 에워싸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어느 순간 되려 포위당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두 정령 군단은 그렇다손 쳐도, 멀리서 느껴지는 악기는 자신조차도 거슬릴 정도의 기운이다. 김수현 하나만도 만만치 않건만 이대로라면 여기서 영원한 소멸을 당할지도 모른다. ‘최소한 저 마수 소환만큼은 막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멜리너스가 조용히 주문을 외우려는 찰나였다. “짜짜짜잔~!” 돌연 상큼한 음성과 함께 갑자기 무시할 수 없는 마력이 송곳처럼 짓쳐 들었다. 기함한 멜리너스가 황급히 물러서는 동시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기운이 코앞을 살짝 스치듯 지나쳤다. “아이 아깝네. 아무튼! 제갈 해솔 여기 등장이오!” 그렇게 외친 제갈 해솔은 부드러이 하강하는 빗자루서 촐랑촐랑 뛰어내렸다. 멜리너스는 찡그리는 와중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고, 순간 무시무시한 열기가 뿜어졌다. - 분석 종료. 그때 무심한 음성이 들리는 동시, 시린 냉기를 뿜는 마법 진 하나가 정면으로 생성된다. 진은 가볍게 공격을 받아냈고, 열기는 허무하리만치 먹혀 들어가 짙은 수증기를 피웠다. “…누구냐, 네 년들은?” 본능적으로 경시할 상대가 아님을 직감한 멜리너스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상대는 제갈 해솔, 아니. 오늘따라 몹시, 이상할 정도로 텐션이 높은 제갈 해솔이었다. 위협적으로 말하는 멜리너스를 보더니 척 팔짱 끼며 앵두 같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느그냐, 네 넌드른?” 그리고 입을 요리조리 놀리며 괴상한 목소리로 말을 따라 한다. 그 잔망스럽기 짝이 없는 짓거리에 멜리너스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미, 미친년인가?” “에베베베?” “이년! 정녕 처발려 봐야 그 요망한 주둥아리를 닥치겠나!” “바르긴 뭘 발라요? 아, 배고프니 식빵에 잼이나 발라주시던가?” 오늘 말발이 좀 오른 걸까. 제갈 해솔은 천연덕스레 입맛을 다시며 배를 쓱쓱 문지르기까지 했다. 멜리너스는 머릿속서 무언가 뚝 끊어지는 걸 느꼈다. 몹시 경망스럽기는 하지만, 기실 자존심으로 먹고 사는 악마를 도발하는데 이만한 것도 없었다. 한데, 분노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이것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가만히 지켜보던 아스타로트가 분노해 고함치며 몸을 날렸다. 김수현과 상성이 나쁜 만큼 지원군을 끊는 것도 좋은 방법이기는 했다. 문제는. 파지지직! “당장 아가리를 찢어, 헉!” 접근하기도 전, 보랏빛 전류를 튀기는 거대한 창이 순간적으로 예리하게 파고들었다는 것이다. 황급히 몸을 비튼 아스타로트는,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는 한 명의 마법 숙녀(?)와, “내 동생 건드리지 마라. 이 개새끼들아.” 잇따라 짓쳐 들어오는 뇌신의 번개를 볼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으어어어. 오늘 오후에 너무 피곤해서 잠깐 잤는데, 그 대가가 참혹하네요. 세상에, 일어나니까 21시가 넘어 있어서…. OTL PS. 어느 독자 분이 질문해 주셨는데, 제 다른 소설인 현대 마법사는 차기 작품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 방향에서 고민하는 중이에요. :) 0906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상황이 오묘해졌다. 갑자기 기습한 악마들은 김수현을 에워싸는 건 성공했으나, 곧바로 달려온 사용자들에 의해 도리어 둘러싸이고 말았다. 거기다 그들은 한 명 한 명이 에이스라 봐도 좋은 이들이다. 당장 아스타로트를 맞상대하는 두 명만 봐도 알 수 있다. 김유현은 뇌신을, 한소영은 멸살(滅殺)을 상징하는 롱기누스의 창을 사용하지 않는가. 사용자 정보도 내로라하는 수준인데 신을 해할 수 있는 권능까지 더해졌다. 아무리 대 악마라도 결코 얕볼 상황은 아니었다. “메타몰포시스(Metamorphosis)!” 우지지직, 우지지직! 위기감을 느낀 아스모데우스의 형태가 빠르게 변화한다. 시커먼 살가죽이 쩍쩍 갈라지며 온몸이 물풍선처럼 불어나기 시작한다. 이 미터에 불과하던 덩치가 삽시간에 사 미터를 넘어서더니, 종래에는 팔뚝 하나가 성인 남성만 한 거대한 괴물로 변태했다. “후.” 갑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는 아스모데우스를 보며 하승우는 혀를 내둘렀다. 방금 막 도착해서인지 호흡이 약간은 거칠다. 서둘러 숨을 고르던 하승우는 문득 어깨에 나긋한 손길이 닿자 눈을 깜빡거렸다. “안녕? 비밀 병기 씨?” 나른한 목소리를 내는 여인이 쳐다보고 있었다. 하승우가 무어라 말할지 몰라 말문이 막힐 무렵, 고연주는 씩 웃으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보아하니 곧 시작할 것 같은데 슬슬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 “예?” “꽤 기대하고 있다고? 전 부랑자 로드의 진짜 실력을 말이야.” “……!” 하승우의 눈이 순간적으로 치떠졌다. 그러나 곧 표정을 가라앉히더니 한층 목소리를 낮춘다. “알고 계셨습니까?” “내가 모르는 게 어디 있다고?” “그럼 어째서.” “왜 이래. 죽이려면 진작 죽였겠지?” 이 한 마디면 충분했다. 하승우는 쓰게 웃으며 머리를 도리도리 저었다. “적당히 좀 하시죠. 살기 풀풀 날리면서 말씀하시면 참 잘도 믿겠습니다.” “어머. 악명 높은 복제술사치고는 너무 약한 소리 아닐까?” “상대가 당신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요. 부랑자 시절 살문과의 충돌은 최대한 피하고, 그림자 여왕이 나타나면 무조건 후퇴하라고 경고한 적도 있으니까요.” “됐고, 어서 실력이나 보이도록 해. 그이가 살려준 값은 해야 하잖아?” “예, 예. 아무렴요.” 빈정대듯 말한 하승우는 먹잇감을 찾아 눈을 돌리는 아스모데우스를 바라봤다. 흡사 첫 해부 실습에 들어간 의대생처럼 온 정신을 집중해 상대를 똑바로 직시한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두 눈에 번쩍 빛이 돌았다가 사라졌다. “좋아. 기억 완료.” 그렇게 말한 하승우는 두 팔을 아래로 편하게 늘어트렸다. 잠시 후. 전신이 은은한 초록빛을 띠는 동시에 하승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메타몰포시스!” 우지지직, 우지지직! “저, 저건 또 뭐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리리스가 한껏 놀라 소리 질렀다. 왜냐면 하승우의 몸이 아까 발생했던 변화와 똑같은 변형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살구색 살이 부풀고 몸뚱이는 삽시간에 거인만 해지더니, 끝내 시커멓게 변색하며 또 하나의 아스모데우스가 탄생했다. 수우우웅! “무슨, 악!” 그렇게 두 아스모데우스가 맞닥뜨리려는 찰나, 갑작스레 쇄도해온 물빛 광선들이 리리스의 전신을 타격했다. 바로 눈을 치뜨며 돌아보자, 푸른 인어 형상을 한 물의 정령들이 사방에서 삼지창을 겨냥하고 있다. 리리스는 “감히!” 라고 외치며 분노하면서도 가슴 한 켠으로는 초조함을 느꼈다. 혹시 몰라 눈을 이리저리 굴려봐도 어느 곳이나 비슷하다. 특히 벨제부브의 경우는 자신과 완전히 판박이였다. 붉은 새의 모습을 한 불의 정령들에 둘러싸여 격전을 벌이는 중이다. 한 번의 손짓에 무려 열댓 마리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꺼졌지만, 금세 재생성하는 광경을 보니 절로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어쨌든 불행 중 다행으로 정령 왕은 보이지 않으나, 아니 설령 있어도 상대하는데 큰 상관은 없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혼자 있다는 것이다. 불의 정령 군단이 벨제부브를 전담하듯 정화의 군단은 리리스를 마크하기로 한 것 같은데, 리리스로서는 썩 달갑잖은 상황이다. 안 그래도 힘이 제한됐고, 또 완벽히 회복한 것도 아닌데. 지지 않을 자신은 있지만, 적잖은 시간 동안 발목 잡힐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크으으으!” 결국, 연달아 들어오는 광선을 보고 욕설과 함께 날아오른 리리스는 양 날개를 우산처럼 쫙 펼쳤다. 그러자 검은 리본 끈 같은 것들이 푹 터져 나와 땅으로 세차게 내리꽂힌다. 그리고. “쯧.” 침착히 전황을 살피던 루시퍼는 나직이 혀를 찼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찰나의 순간, 대 악마 다섯이 붙잡혔다. 리리스와 벨제부브는 각각 정령 군단에, 아스모데우스는 웬 이상한 복제판에, 아스타로트는 두 마법사에게, 그리고 바알은 좀 전 ‘도와리야!’ 를 외치며 달려온 거한에게 습격당해 한창 전투를 치르고 있다. 게다가 멜리너스와 올리비아조차도 까불던 여인이 이끌고 온 무리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는 중이고. 결국, 가용할 수 있는 인원은 자신과 남은 악마 군주 일곱.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방금까지만 해도 땅에 자욱이 흐르던 연기가 어느 순간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대신, 철그렁, 철그렁! - 딱딱딱딱, 딱딱딱딱…. 기분 나쁜 쇳소리와 함께 이 부딪치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온다. 먼빛으로 검푸른 빛으로 된, 반투명한 말을 탄 해골 기사들이 서서히 거리를 줄여오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선두에 있는, 흑색 갑옷을 걸치고 뿔 투구를 쓴 해골은 유난히 신경 쓰일 정도였다. 건장한 체구는 물론,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악마 14 군주를 웃도는 수준이었다. 진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쉽게 이길 수 없는 정도라고 해야 하나. 원래의 힘으로 붙으면 압도할 자신이 있는 루시퍼로서는 굉장히 억울하지만, 기실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왜냐면 악마들은 중간 세계로 억지로 뚫고 나온 입장이거니와, 그나마 사용할 수 있는 힘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그에 반해 베히모스는 계약을 통한 정당한 소환이 이루어져 상대적으로 힘의 손실이 적고, 게다가 비비앙의 마력을 듬뿍 먹은 상태였으니. 잠시 후, 끊임없이 이어지던 쇳소리가 뚝 멎었다. ‘…어쩔 수 없나.’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루시퍼는 남은 악마 군주 중 일곱을 전부 불렀다. 지원군 중 가장 위험한 마수 군단을 우선하여 처리해야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렇게나 환영해주시다니…. 우리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러자 어느새 도착했는지 근거리서 소슬한 음성이 흐른다. 루시퍼는 아무 말도 않고 전투를 준비했다. 그때, 두두두두, 두두두두! 느닷없이 지축은 흔드는 소음이 전장의 중심을 강타했다. 소리는 몹시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타락 천사가 있는 곳으로. 루시퍼의 낯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분명 마수 군단은 진군을 멈췄는데, 왜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걸까? 해답은 오벨로 기사단이었다. 타나토스로 인해 큰 타격을 입기는 했지만, 아직 살아남은 기사들도 있었다. 김수현이 위기에 처하자 기사 단장을 필두로 우르르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 광경을 확인한 루시퍼의 미간이 좁혀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젠장, 악마 군주들은 저놈들을 맡아라!” 결국에는 악마 군주들을 시켜 오벨로 기사단을 처리하러 보내자, 또 한 번 딱딱한 소음이 흘렀다. “이야, 우리를 너무 얕보시는 거 아닙니까?” 이제는 혼자 남은 루시퍼를 조롱하는 말투였다. “조용히 처박혀 있을 것이지, 왜 여기까지 기어올라왔는지 모르겠군요.”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항상 정중한 루시퍼도 험한 말을 쏟아내고 말았다. 하기야 정신이 없을 만도 하다.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으니까. 오죽하면 김수현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며 외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적당히 좀 하면 안 되느냐고.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이렇게까지 준비했냐고. 그 순간 킬킬 웃던 베히모스는 투구 속 퀭한 눈구멍을 붉은 안광으로 희번덕거렸다. 이어서 허리춤에 걸린 칼을 뽑자, 섬뜩하게 빛나는 검신이 햇볕을 반사한다. “뭐, 잘됐지요. 마침 당신네한테는 빚도 있고 하니.” 예전 악마가 지옥을 침공한 사건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윽고 조용히 침묵하던 해골 기사들이, 아니 로열 나이트라고 해야 하나. 아득한 옛날, 빅토리아 왕국의 통일 전쟁을 이끌었던 기사들이 각자 검을 꺼내 왕의 명령을 기다린다. 겉보기에는 갑옷 입은 해골 기사처럼 보이나 실상은 전혀 다르다. 죽어서도 마수로 변해 충정을 바치는 기사들은 하나하나가 죽음의 기사 이상 가는 무력을 갖추고 있다. 괜히 지옥 정규 토벌대로 활약하는 게 아닌 만큼, 왕의 명령이 떨어지는 즉시 거센 폭풍으로 변해 적을 토벌할 터. 루시퍼는 신속히 뒤를 살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김수현과 타나토스는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버티자…. 어떻게든 최대한 버텨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기는 했으나, 루시퍼는 계속 엄습하는 불길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지만. 설령 계획이 성공한다손 쳐도, 최악에는 데려온 전력의 절반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 “헤에.” 주변을 돌아보던 타나토스가 얼빠진 탄성을 터뜨렸다. “정령은 그렇다 치고. 오벨로 기사단은 아까 봤고. 어, 빅토리아 로열 기사단이잖아? 세상에, 어떻게 저 두 기사단이 협동을…. 우와? 세계의 근원도 있어? 와, 진짜 장난 아니네?” 그렇게 한동안 중얼중얼하다가, 불현듯 나를 흘끗 흘겼다. “얘, 얘. 있잖아, 이건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 너 혹시 쟤네한테 깊은 원한이라도 있는 거니? 미래를 아는 것도 아닐 텐데, 아주 작정하고 준비했네?” 순간 가슴이 뜨끔하기는 했으나 애써 무시했다. 왜냐면 화정이 타나토스가 하는 말은 모조리 무시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 이상하네, 이상해…. 그러더니 지금은 연신 이상하다는 말만 되뇌고 있다. 무언가 굉장히 석연치 않다는 듯이. 죽음을 관장하는 타나토스는 게헨나와 화정과 동급의 신이라고 한다. 아무리 중간 세계라도 원래대로라면 나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을 터. 하여 여차하면 염화를 발동할 생각마저 있던 나로서는 상당히 신경 쓰이는 말이었다. ‘뭐가 그렇게 이상해?’ - 응? 아니 아니. ‘흠? 아무튼, 어떻게 해? 염화를 발동해야 하나?’ - 미쳤어? 쟤 죽이고 너도 죽게? ‘아니, 하지만.’ - 기다려봐. 끙…. 단호히 말을 끊은 화정은 한참을 뜸을 들였다. 그러나 타나토스가 슬슬 주변 상황서 관심을 거두는 것 같아 마음이 급해졌다. 그때였다. - 후유, 글쎄다. 사실 아직 딱 짚이는 건 없는데, 어쨌든 염화까지 사용할 필요는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응?’ - 그러니까, 네가 더 강하다는 소리야. ‘…뭐라고?’ ============================ 작품 후기 ============================ 예전에 ‘화정이 그렇게나 호언장담을 했는데, 아무리 악마가 손을 썼다지만 타나토스의 봉인이 이렇게 쉽게 풀립니까?’ 라고 질문해주셨던 독자분께서 계셨지요. 개인적으로 좋은 질문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때는 에피소드 2에서 답변을 드리겠다고 했는데, 정정해서 이번 파트 안으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아마 3회 ~ 5회 안으로 끝날 것 같네요. :) 0907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 아무튼, 한 번 붙어봐. 염화는 아직 생각하지 말고. 아니, 그 능력 발동하면 죽는다는 거 알고는 있는 거야? 화정이 핀잔 조로 말했으나 반신반의하는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여태껏 내가 화정 급의 상대와 붙어본 건 딱 한 번에 불과하다. 검술 전문가 시절이기는 했으나 게헨나의 털끝도 건드리지 못했다. 그나마 염화를 발동해서 비슷한 수준까지는 올라갔지만 결국에는 패배했다. 심지어 아랫급으로 볼 수 있는 악신도 못 당해내지 않았는가. 그러할진대 화정과 동급으로 평가되는 타나토스를 과연 맞상대할 수 있을까? 아무리 그때보다 강해졌다고 하지만 염화를 발동하지 않고서? “후유유유~. 구경도 슬슬 질리네.” 그때 약간 흥분한 듯한 타나토스의 음성이 흘렀다. “그럼~. 네가 먼저 올래? 내가 먼저 갈까? 아니면, 우리 같이?” 속닥이듯 말하더니 혀로 윗입술을 살짝 핥으며 가랑이를 벌린다. 이제 보니 광(狂)뿐만 아니라 변태 속성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 조심해. 그러나 화정의 경고와 동시에 치솟은 강대한 마력은 가히 경시할 수 없을 만큼 위력적이다. 포악하고 흉흉한 기운이 물씬 흐르는 게 누가 죽음의 신 아니랄까 봐 불길하기 짝이 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 타나토스는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저 맑은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나를 주시할 뿐. 뭘 기대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실력부터 볼까? 가볍게 발을 구르니 사위로 화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삽시간에 생성된 열화 검들은 화르르르 불길을 남기며 타나토스를 향해 쏘아졌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단아한 미소를 짓고 있던 타나토스가 갑자기 얼굴을 찡그렸다. “씨발.” 거추장스러웠던지 로브를 휙 찢어 던지자 거의 나신에 가까운 순백의 신체가 드러났다. “좆 같은 능력이네.” 게헨나는 열화 검을 보고 짜증 난다고 했던 것 같은데 타나토스는 좆 같단다. 표현은 이쪽이 더 적나라하다. 어쨌든 타나토스는 나는 듯 물러나며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가, 이대로 지나치게 하려는 듯 훌쩍 뛰어올랐다. 아담한 체구치고는 탄력적인 도약이었으나 나는 곧장 손을 놀렸다. 그러자 스쳤던 열화 검들이 급격한 곡선을 그리며 돌아와 상대의 등을 습격한다. “개새끼.” 타나토스의 여유가 사라졌다. 황급히 허리 돌려 잘빠진 오른 다리를 몸과 일자가 될 정도로 수직으로 치킨다. 그 상태로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미끄러지듯이 하강한다. 흡사 발레리나처럼 그림 같은 몸놀림을 보이더니 내려오는 그대로 오른발로 힘껏 땅을 내리쳤다. “야~호!” 쾅! 귀를 때리는 폭음과 함께 대지가 쩍 금이 갔다. 부서진 땅의 파편들이 부채꼴 형으로 와르르 일어나고, 열화 검들이 그 영향권으로 들어간 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나는 흙 연기와 불길이 섞이는 틈을 타 즉시 땅을 박찼고, 아까 등을 보였던 곳으로 힘차게 검을 찔렀다. 그러나 일 초도 지나지 않아 칼끝으로 덜컥 걸리는 감각이 전해졌다. 한 박자 늦게 불어온 바람에 자욱하던 연기가 흩어진다. 그리고 몸을 반쯤 돌린 채 한 손으로 검을 쥐고 있는 타나토스가 드러났다. 싱글싱글 눈웃음을 치며 말한다. “어머나. 뒤치기가 취향이었니?” “좀 닥치고 싸울 수 없나?” “싫은데? 듣기 싫으면 네가 귀를 막던가?” “명색이 신이라는…!” 나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타나토스가 돌연 검을 부러뜨릴 듯이 틀어쥐며 왼쪽으로 돌려차기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단순한 공격이면서도 공기가 쫙 찢기는 게 느껴질 만큼 파괴적인 기세라, 순간적으로 마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엑스칼리버로 마주 후려쳤다. 꿍! 충돌한 순간, 종아리와 부딪쳤다고 믿을 수 없는 소리가 터졌다. 힘과 힘이 일으키는 반발력에 몸이 자동으로 주르륵 밀려난다. 곧장 균형을 잡고 눈을 드니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타나토스의 신체는 밀려나면서도 상당히 흔들리고 있었다. 게다가 나보다 대여섯 걸음이나 더 물러나더니 겨우 자세를 잡는다. 이상하다. 분명 내가 방어하는 입장이었는데. 물론 고작 이것 가지고 이겼다고 보기는 어렵고, 승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 그러나 어쨌든 방금 공방에서는 내가 우세했다. 이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문득 아까 화정이 계속 이상하다고 되뇌던 게 뇌리를 스쳤다. - 일단 여러 방향으로 상대해봐. 절대 무리해서 들어가지 말고. 내 생각을 읽었는지 화정의 음성이 조용히 울렸다. - 그리고 할 수 있으면 상황을 만들어서 도발도 한 번 해봐. 그 말에 나는 살며시 물러서며 두 검을 상단으로 세웠다. 왜인지 정수리가 간질간질하지만 일단 화정의 말에 따르는 게 낫겠다. 마침 타나토스도 무릎 굽혀 자세를 낮추더니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하!” 짧은 기합과 함께 힘껏 땅을 박차 폭발적으로 쇄도해온다. 나는 칼자루를 바스러지듯이 쥐며 마력을 불어넣었다. 절대 무리해서 들어가지 말되, 상황을 만들어서 도발하라. 한 번 더 곱씹은 찰나, 바람처럼 날아온 타나토스가 오른팔을 뒤로 한껏 젖혔다가 일직선으로 뻗는다. 나는 코앞까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바로 이형환위를 발동했다. “!” 타나토스는 깜짝 놀란 얼굴로 좌우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후방을 점거하자마자 허리를 쭉 굽히더니, 내가 나타난 방향으로 힘차게 뒷발을 차올린다. 그 찰나의 순간, 나는 한 번 더 마력을 회전시켰다. 파아아앙! 깔끔하게 차올린 발이 허공을 후려치자 어마어마한 돌풍이 일어나 공기를 뒤흔든다. 가히 무시무시한 위력. 타나토스는 독수리 슛을 차기 직전의 자세로 싱긋 미소 짓는다. “순간 이동이니? 꽤 재밌기는 했는데…?” 그러나 뒤를 돌아보고 안색이 변한다. 왜냐면 발에 뚫린 내 잔상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으니까. 이윽고 멍하니 고개 젖히는 걸 보며 정수리로 무검을 내리그었고, 엑스칼리버는 마력을 잔뜩 먹여 칼등으로 옆구리를 힘껏 후려갈겼다. 그제야 타나토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다. “이 망할 새끼가!” 콰앙! 전투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깔끔한 클린 히트를 넣었다. 퍽 튕겨진 타나토스는 시커먼 액체를 흩뿌리며 훨훨 날아, 땅을 거세게 나뒹굴었다. 예전 게헨나를 상대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면 신을 상대로 이형환위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때도 보자마자 코웃음을 치더니 똑같이 따라 하기까지 했다. 이번에도 통상적으로 하면 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발동할 때부터 바로 연달아 사용할 준비를 했고, 타나토스는 보기 좋게 걸려든 것이다. 말인즉 카운터라고 할까. 단지 차이점이 하나 있다면 타나토스는 발동 후 알아차렸다. 게헨나는 발동하기 전부터 알아차렸었고. “…….” 나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며 호흡을 추슬렀다. 타나토스는 아직 땅에 엎드려 쓰러져 있다. 흡사 개구리처럼 뻗어 미동도 보이지 않는다. 혹시 몰라 돌멩이를 걷어차 맞춰봤으나 반응은 전무. 뭘 꾸미고 있는지 몰라 함부로 다가가기도 힘들다. “후.” 그때 숨을 크게 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타나토스는 두 손으로 땅을 짚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세히 보니 정수리가 아니라 희멀건 한 어깨서 시커먼 액체가 줄줄 흘러내리는 중이다. 죽음의 신은 핏물도 검은색인가. 신기하다. “이야, 진짜 센데?” 뜻밖에도 타나토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인정해. 우리는 김수현은 이길 수 없다…. 뭐, 확실히 그렇게 말할만하네.” “그러고 보니 치우천 새끼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아, 생각하니까 열 받잖아.” 무어라 혼잣말을 중얼중얼하는 소리가 들리는 와중, 불현듯 화정의 말이 떠올랐다. “궁금한 게 있는데.” 최대한 담담한 체하며 말을 걸자, 타나토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갸우뚱. “응? 뭔데?” “너 방금 전력으로 싸운 건가?” “……?” “전력으로 싸운 거냐고.” “무슨 뜻이야?” “에, 생각보다 약한 것 같아서.” 그러자 타나토스가 푸 실소를 머금는다. “킥! 그, 그러니? 아하하하!” 같잖아 죽겠다는 표정을 짓더니 결국에는 까르르 웃는다. “생각보다 약해? 꺄하하하, 꺄하하하!” 괜스레 뻘쭘한 기분이 엄습한다. 하기야 얼마나 가소로울까. 원래대로라면 까마득한,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존재가 아닌가. 그때 화정의 음성이 머릿속을 울렸고, 나는 들은 그대로 입을 열었다. “그런가…. 글쎄. 아무리 봐도 게헨나보다는 약한 것 같은데.” 그리고 천연덕스레 입맛을 다시자, 돌연 웃음이 뚝 멎는다. “어디서 도발을…. 뭐?” 한순간 중구난방이던 기세가 착 가라앉는다. 두 눈도 갑작스레 실쭉해졌다. 아까와는 다르게 완전히 침잠한, 흡사 블랙홀을 연상케 하는 눈동자로 나를 뚫어지라 노려본다. “그년, 아니 지옥의 겁화와 싸워봤다고?” “응. 그렇지.” 머리를 끄덕이니 살쾡이 같은 눈은 내 전신을 관찰하듯 구석구석이 훑는다. 돌연 목이 바짝 타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네가?” 의심스럽다는 어조. 게헨나의 수호 요새를 꺼낼까 생각했으나 그만두기로 했다. 보아하니 타나토스는 무언가 노림수가 있는 것 같다. 그 수를 모르는 이상 괜히 카드는 숨기는 편이 좋겠다. “그렇다니까. 그때 정말로 죽을 뻔했다고.” 왜인지 진실의 수정 수백 개와 마주한 기분이나 딱히 꿀릴 이유는 없다. 왜냐면 정말로 그렇게 느끼고 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게헨나는 정말로 강하다. 처음 마주쳤을 때는 무조건 도망치겠다는 생각밖에 못 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나를 상대했을 때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한데, 타나토스는 다르다. 게헨나 때처럼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꽤 강한 건 부인할 수 없으나 충분히 해볼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수준이다. 탁 까놓고 말해서, 악신과 싸웠을 때보다도 긴장감이 덜하다. 아, 그러고 보니 악신이 타나토스의 수하라고 했던가? 그럼 이것도 말하는 게 좋으려나. “그런데 너는…. 예전에 악신이라는 놈도 상대해본 적이 있는데, 딱 그 정도? 아니. 좀 떨어지려나?” 절대 도발하려는 게 아닌,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봤다는 투로 말을 잇는다. “뭐, 모르겠다. 하기야 게헨나는 이천 명에 가까운 인간을 제물로 삼았었는데, 너는 그러지 못했을 수도 있겠고. 그랬다면 차이가 날 수밖에 없겠네.” 어느새 타나토스는 고개를 푹 숙인 상태였다. 땅을 바라보고 있어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내 입장에서는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계속 하자고?” 말을 마친 후 어깨를 으쓱이며 두 검을 들어 올린 찰나, “야.” 갑자기 타나토스가 퍼뜩 턱을 치켰다. 그 순간이었다. 쿠쿠쿠쿠, 쿠쿠쿠쿠! “너….” 갑작스러운 진동과 함께 스산한 음성이 흐르고, - 아! 화정이 약한 탄성을 터뜨렸다. - 김수현, 김수현! ============================ 작품 후기 ============================ 6시 넘어서 업데이트하면 괜스레 가슴이 불안해집니다. 일요일 아침부터 비 내리고 천둥도 치니 괜히 기분이 싱숭생숭해지는…. 그리고 6월 15일(월요일)은 쉴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아침에도 업데이트가 되지 않으면 하루 휴재한다고 생각해주세요. 죄송해요. 몸이 너무 피곤해서…. 안경을 바꾼 이후로 눈이 자주 건조해지네요. @_@ 6월 16일(화요일)에는 정상 분량 + 자정에 올릴 수 있도록 해볼게요. 부디 너른 양해 부탁 드립니다. _(__)_ 0908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타나토스가 터뜨린 웃음이 허공을 진동시키며 멀리, 먼 곳까지 울려 퍼졌다. 끄저저적, 끄저저적! 동시에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각이 전신을 엄습한다. 타나토스가 개방한 기운은 전보다 갑절은 자극적이면서도 어마어마한 압력으로 나를 짓눌러왔다. 그 섬뜩하고 맹목적인 살기에 나도 모르게 모골이 송연해졌다. 진정하려고 해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 자꾸만 몸이 떨린다. 이게, 이게 바로 죽음의 신이라는 타나토스의 참모습인가? - 하찮은 인간이…. 감히 내 역린(逆鱗)을 건드리느냐? 고요하지만 무시무시한 음성이 허공을 웅혼이 울렸다. 처음에는 화정이 말한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타나토스는 목소리조차도 마력을 담아 압박을 선사한다. 어느 순간 흰자위는 사라지고, 검은자위로만 채색된 두 눈이 흉측하게 일그러져 나를 노려본다. 젠장, 괜히 도발한 건가? - 그래. 그렇게 죽고 싶다고 애걸하는데 내 어찌 지나칠까? 네게는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죽음을 선사해주겠다. 휘리리릭! 한순간 타나토스의 사지로 시커먼 기체가 흘러나왔다.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연기는 곧 두 팔목과 두 발목으로 칭칭 감겨들었다. 이어서 꿈틀꿈틀 굽이치며 회전하는 게 흡사 혀를 날름거리는 독사를 보는 듯하다. 그때였다. 찰나의 순간, 허리는 비스듬히 숙인 채 머리카락이 나부낄 정도로 빛살처럼 쇄도해온다. 침을 삼키며 무게 중심을 뒤로 옮겼다. 득달같이 쇄도해오는 모습이 흡사 검은 해일이 몰려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 막지 말고 피해! 그때 화정이 음성이 짜르르 울렸고,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날렸다. 그러나. “!” 눈앞까지 짓쳐 들었다고 생각한 순간, 타나토스가 사라졌다. 보이는 거라고는 내 정수리를 쪼갤 듯이 내려치는 하얀 발꿈치뿐이었다. 황급히 턱을 젖히자 칼날 같은 바람이 콧등을 쓸었다. 간신히 머리가 박살 나는 일은 피했으나, 흉갑을 때리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꽝! “커헉!” 가슴이 폭발하는 충격을 느꼈다. 그게 전부였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내 몸은 이미 훨훨 날았다가,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중이었다. 기억의 필름 중간이 뚝 끊어졌다고 해야 하나. - 정신 차려! 정신은 차렸는데, 문제는 타나토스가 나 이상의 속도로 따라붙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껏 싸웠던 게 봐준 거라고 생각될 만큼 엄청난 속도다. 나는 할 수 있는 선에서 균형을 추스르며 검 빛을 발동했다. 빅토리아의 영광이 청명한 검음을 토해내자, 수십의 검광이 순간적으로 상대의 주변으로 번쩍였다. 그러나 타나토스의 돌진은 멈추지 않았다. 빛무리를 흘끗 흘기더니 귀찮다는 듯이 손을 떨치자, 검 빛은 거짓말처럼 한꺼번에 사르르 녹아내렸다. 놀랄 틈도 없었다. 왜냐면 타나토스가 한 번 더 허공을 차며 뚫고 나와 번개 같은 찌르기를 넣었으니까. - 절대로 막을 생각하지 마! 무조건, 무조건 피해! “큭!” 왜 아까부터 계속 피하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를 악물며 있는 대로 몸을 회전시켰다. 주먹이 아슬아슬하게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이어서 숨 한 번 내쉬기도 전 기괴하게 꺾이며 들어오는 발차기를 맞이해야 했다. 그 공격마저도 천운으로 흘려낸 순간, 타나토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어깨로 몸을 부딪쳐왔다. 퍽! 숨이 턱 막혔다. 단순한 공격이지만 그만큼 강렬하다. 어떻게 호흡 먼저 가다듬어야 하는데 시야가 온통 어지럽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 돌연 볼을 아릿하게 하는 따가운 바람이 느껴졌다. 살이 따끔따끔하다. 무언가 위험하다는 생각에 신속히 칼리고 아브락사스를 날렸다. - 킥. 가볍게 코웃음 치는 소리. 몸이 중심을 잃고 무너지는 바람에 저절로 눈이 들렸다. 그리고 내가 볼 수 있었던 건, 수직으로 치솟는 칼리고 아브락사스, 그리고 맞은편에서 하강하며 손을 뻗는 타나토스였다. 다음 순간, 콰지지직! 칼등이 종이처럼 와짝 꾸겨지더니 쨍하는 소음을 내며 터졌다. 하염없이 흩날리는 철의 파편을 보니 갑자기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칼이 부서진 건 차치하고서라도, 도발한 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순식간에 상황이 반전됐다. 아니. 원래 이게 정상이기는 하나, 막상 이렇게 되니 허탈한 기분을 숨길 수가 없다. 더 무서운 건 아직 타나토스의 공격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차 한 순간 타나토스는 바로 앞까지 내려와 있었다. 입꼬리가 귀밑까지 찢겨 올라간 기괴한 미소. 이번 공격으로 끝내주겠다는 듯 양손을 모아 잡고 홀연히 하늘로 치킨다. 급한 대로 이형환위로 벗어나려고 했으나 타나토스는 이미 힘껏 내려치고 있었다. 빠르다. 막을 수 없다. 이번에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어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이었다. 웅웅웅웅! 갑자기 회로의 마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가 싶더니, 꽝! 귀가 멍해지는 폭음과 함께 상당한 진동이 전신을 휩쌌다. 안 그래도 흐트러졌던 균형은 생각지도 못한 충격파로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치지지지지지지직! 등이 땅을 쭉 긁으며 미끄러지듯이 밀려났다. 지면을 구르고 황급히 눈을 쳐들자 시야로 붉은 장막이 흐르고 있다가 곧 사라졌다. 그리고 타나토스는 공격을 멈춘 채 뜻밖이라는 얼굴로 나를 응시한다. 나는 그제야 턱 끝까지 차올랐던 숨을 토해낼 수 있었다. 그런가. 게헨나의 수호 요새가 발동된 건가. 좀 전까지만 해도 마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고작 일이 초 사용했다고 속이 허하다. 목숨은 건져서 다행이지만 진작 발동했으면 좋았을 텐데. - 어쩔 수 없지. 타나토스의 공격을 읽지 못했으니까. ‘읽지 못했다고?’ - 그래. 단순히 속도로만 치면 네 최대 속력의 두 배 이상으로 들어오는데 어떻게 막아? 계속 켜둔다면 모를까. ‘…….’ 그렇기는 하다. 그리고 화정의 말대로 계속 켜뒀다면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마력이 떨어졌을 테니까. 그나저나 돌겠군. 내 최대 속력의 두 배 이상이라고? 그럼 민첩 능력치가 얼마나 된다는 소리야? - 겁화의 힘이 깃든. “방어막?” 칼을 땅에 박고 몸을 일으키니 타나토스가 이죽거리듯 말한다. - 진짜. “만난 적이 있나 보네?” - 거짓말이. “아니었잖아?” 어, 뭐지? 타나토스의 목소리가 이상하다. 힘을 개방한 후 웅혼하던 음성이 갑자기 육성으로 변했다가 다시 돌아간다. 흡사 마이크가 꺼졌다가 켜지기를 반복하는 것 같다. - 잘 들어. 지금 잘하고 있으니까,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그냥 무조건 버티고 피하는 것만 집중해. 알아들어? ‘잘하고 있다고?’ 뭐가 잘하고 있다는 거냐. 괜히 도발했다고 후회하고 있었는데. ‘야. 이제 어쩌라는 거야? 화났잖아.’ - 이 바보가! 상대 모습도 안 보여? 화정의 고함에 무심코 타나토스를 바라본 순간, 문득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왜냐면 아까 연기가 감겼던 팔다리가 어느새 반투명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무언가 알 수 없는 액체를 뚝뚝 떨구는 것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타, 타나토스 님!” 불현듯 루시퍼의 당황한 외침이 날아왔으나, - 닥치지. “못해!” 타나토스는 날카롭게 받아쳤다. 그리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쾅 소리가 날 정도로 땅을 박찼다. 나는 잔뜩 긴장하면서도 사지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으나, - 온다. 준비해. 적어도 하나는 알겠다. 타나토스는 승부를 서두르고 있다. * 타나토스가 쏜살처럼 들어가는 것과 함께 두 명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난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타나토스의 주먹과 발을 뻗칠 때마다 어마어마한 돌풍이 일어나고, 김수현 역시 두 검을 폭풍처럼 휘두르며 대응한다. 그렇게 검은색과 붉은색 엇갈리는 동시, 허공으로 수십 개의 잔상이 우수수 수놓아진다. 보통 사람은 물론, 정예 사용자라도 따라가지 못할 무시무시한 속도전이다. 잠시 후, 또 한 번 거센 폭음이 울렸다. 충돌 지점에서 터져 나온 열풍은 사방으로 휘몰아쳐 성벽까지 닿을 지경이었다. 멍하니 보고 있던 마르는 약간 금이 가 있던 벽돌이 덜컥 떨어지는 걸 보고 눈을 치떴다. - 쥐새끼처럼! “잘도 피하는구나!” 그때 타나토스의 외침이 전장을 쩌렁쩌렁하게 흔들었다. 마르가 볼 수 있었던 건 최대한 뒤쪽으로 물러나는 김수현, 아니. 이미 안쪽까지 파고들어 김수현의 복부를 걷어차는 타나토스였다. 김수현은 온통 얼굴을 찡그리며 검을 교차시켰으나, 결국에는 힘에서 밀려 또 한 번 미끄러지듯이 허공을 날았고, 땅으로 처박힌다. 그 틈을 이용해 타나토스는 공중으로 훌쩍 도약했다. 그리고 두 손을 활짝 펼쳤다가, 김수현이 떨어진 지점으로 힘차게 휘둘렀다. 그러자 둥글게 감겨 있던 시커먼 기체가 직선으로 쭉 늘어나더니, 땅을 무자비하게 폭격한다. 꽈앙! 대 폭발. 김수현이 떨어진 지점은 물론, 근방의 십 미터 지면이 크게 떠들렸다. 지면은 달걀 껍데기처럼 쩍쩍 갈라져 부서지고, 흙먼지는 대 전자 지뢰를 연달아 터뜨린 것처럼 하늘 높이 치솟는다. “안 돼!” 마르는 어른어른 흩날리는 잔해를 보며 다급히 소리쳤다. 최악의 경우는 상정하기 싫었으나 계속 설마 하는 생각이 엄습한다. “아빠!” 결국, 참지 못한 마르가 몸을 돌린다. 그러면서 모종의 불안한 기분을 느꼈지만 깊게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자신의 감보다는 아빠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이었으니. 그리하여 성벽 아래로 발 빠르게 뛰어 내려가려는 순간, “아?” 턱, 어깨가 붙잡혔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한 여인이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한없이 가라앉은 눈으로. “아, 안솔 언니?”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더듬거리자, 안솔이 묵직하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나가지 마.” “네?” “너는 아직 눈에 띄면 안 되니까.” “…뭐라고요?” 마르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타나토스를 상대할 수 있다고 장담은 못 해도, 김수현을 돕는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전장은 상대의 연극이야. 그런데, 이 무대에 네 자리는 마련되지 않았어.”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왜 나가지 말라는 건데요?” “너를 모르고 있으니까. 알면 분명히 대응할 거야.”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상황이 급한 걸 알고 있는 마르가 벌컥 화를 냈다. 그리고 어떻게든 손을 쳐내고 지나치려는 찰나, “가면 죽을 거야.” 싸늘한 음성이 귀를 찌른다. “네가 무대에 올라 눈에 띄는 순간, 네가 사랑하는 아빠는 죽을걸. 아마, 거의.” 들을 가치가 없는 말이라 생각하면서도, 마르는 자신도 모르게 발을 멈췄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안솔의 말은 함부로 무시하기가 힘들 정도의 무게를 갖고 있었다. 어찌 보면 얄궂은 일이었다. 아마 화정이 봤으면 꽤 흥미로워하지 않았을까. 모든 언행에 이유가 있다는 요정 여왕과, 105포인트라는 전무후무한 행운으로 미래를 예지하는 안솔. “언니….” 마르는 서글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안솔을 바라봤다. 그러나 어깨서 느껴지는 악력은 안솔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마치 너는 절대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듯이. “저, 잠시만요.” 침묵이 흐르는 동안, 느닷없이 은발의 여인이 조심스레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마르를 호위하고 있던 니뮤에였다. “여왕님이 안 된다면 제가 나가는 건 어떨까요?” “니뮤에!” 뜻밖의 제안에 마르의 낯이 이상하게 이지러졌다. 하지만 안솔은 조용히 눈을 감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습을 보이는 정도라면.” 그때. - 뭐 하는. “거야!” 타나토스의 상반된 음성이 세 여인의 귀를 왕왕 울렸다. 얼른 아래를 내려다보자, 자욱하던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그리고 타나토스는 여전히 공중에 떠오른 채 이를 갈고 있었다. - 시간 끌 생각하지 말고! “빨리 안 튀어나와?” 펑! 그러자 그에 호응하듯, 한 형체가 흐릿한 흙 연기를 헤쳐 뚫고 하늘로 솟구쳤다. 용의 날개를 꺼내 든 김수현이었다. ============================ 작품 후기 ============================ 확실히 하루 쉬니까 힐링이 되는 기분입니다. 한데 자정 연재는 어렵네요. -_-; 평소보다 두 시간 일찍 앞당겨서 집필을 시작했는데 자정보다 한 시간 늦다니…. OTL 죄송합니다. 저를 매우 치세요.(?) 아, 어느 독자분이 질문하셨는데, 중간 세계에서 타나토스와 악신이 붙으면, 당연히 타나토스가 압도적으로 이깁니다. 예전에 게헨나가 악신을 마구 때리는(?) 장면 보셨지요? 타나토스도 똑같이 할 수 있습니다. 단지 타나토스가 현재 이러고 있는 건…. 읍읍! 아무튼, 갓솔 만세! 0909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이상해.’ 한소영은 하늘을 빙그르르 선회하는 악마를 주시했다. 김유현이 뽑아낸 전광(電光)을 동반한 뇌전의 다발이 상대를 추격하고 있다. 어떻게든 떨치려는 듯, 한참을 정신없이 날아다니던 아스타로트는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끈덕지게 쫓아오는 번갯불들을 향해 양손을 교차한다. 쿠르르르! 아스타로트의 앞으로 검붉게 타오르는 둥근 막이 생성된다. 그러나 부딪치기 직전, 쏜살같이 들어가던 번갯불들이 돌연 폭죽 터지듯 원형으로 터졌다. 수십 가닥으로 나뉜 벼락은 사방으로 쏘아졌다가, 막을 지나친 순간 도로 모이며 아스타로트를 전후좌우로 압박해 들어갔다. 결국에는 아스타로트의 비행이 멈췄다. 가히 극에 다다른 제어 능력을 보며 놀라더니 전신으로 기운을 뿜는다. 흑염(黑炎)도 결코 낮은 급의 힘은 아닌 터라 번개 대부분이 불살라지거나 튕겨져나갔다. 그러나 중요한 건 한 번도 쉬지 않고 날아다니던 아스타로트가 처음으로 멈췄다는 점이다. “후유. 뭔 인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아스타로트는 순간 기함했다. 어떻게 막았나 싶었건만, 커다란 장대 같은 창 하나가 보랏빛 전류를 폭사하며 짓쳐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십으로 분할한 번개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위력이었다. 빠지지직, 빠지지직! 아스타로트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는 동시에 저릿한 소음이 주변을 짜르르 휩쓸었다. 시간차 공격을 날렸던 한소영은 곧 아쉬워하는 얼굴로 혀를 찼다. 점차 사그라지는 전류 속으로 약간 그을린 아스타로트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 손으로 복부를 짚고 있는 게 타격이 없지는 않아 보이나, 그리 심한 상처를 입은 것 같지도 않다. 잠시 후, 아스타로트는 도로 공중을 선회하기 시작하고, 김유현은 발 빠르게 번개를 소환한다. 차츰차츰 먹구름이 밀려오는 하늘을 보며 한소영은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껏 이어진 전투는 썩 불리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딱히 유리하지도 않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지지부진하다는 표현이 옳으려나. ‘어째서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는 거지?’ 제삼자가 보고 있었다면 한소영처럼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김유현은 뇌신의 번개로 아스타로트를 쉴 틈 없이 몰아붙이고, 아까와 같은 기회가 오면 한소영이 롱기누스의 창을 꽂는다. 아스타로트는 간간이 반격만 날릴 뿐, 끊임없이 날아다니며 방어에 전념하는 게 주된 형국이었다. 그러나 한소영은 자기 생각에 확신이 있었다. 왜냐면 ‘초감각’으로 아스타로트의 속내를 조금이나마 느끼고 있으니까. 꼭 집어서 말하기는 너무 오묘하지만, 하나 확실한 점은 상대가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한데, 봐준다고 볼 수도 없는 게 아주 가끔 초조해 하는 감정이 전해졌다. 자신과 해밀 로드에게 집중하는 게 아니라, 어딘가로 신경을 쏟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아스타로트는 전투 중 몇 번이고 다른 곳을 확인하기까지 했다. ‘확실해. 무언가 노리고 있는 게 있어.’ 한소영이 생각을 끝낸 찰나, 노란빛 번개를 쳐낸 아스타로트가 공교롭게 눈을 흘깃거렸다. 한소영은 본능에 따라 아스타로트가 보는 방향을 잡아낸 후 신속히 눈을 돌렸다. 그때였다. 먼빛으로 두 형상이 아스라이 시야로 들어온 순간, 꽈아아앙! 느닷없이 엄청난 굉음이 폭발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맑은, 아니 먹구름 낀 어두운 하늘이 보인다. 유유히 흐르는 구름을 멍하니 보고 있으려니 전신의 감각이 한층 진해진다. 등에 닿은 땅의 감촉이 오늘따라 유독 부드럽고 폭신하다. 이대로 눈을 감고 잠들고 싶을 정도였다.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눈을 떴을 때 얼마나 기분이 상쾌할까. 물론 염원은 어디나 염원일 뿐.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다. 어떻게 넘고 버텨서 여기까지 왔는데, 고작 노곤하다고 포기하면 그만큼 웃긴 일도 없을 터. 시간이 얼마만큼 흘렀는지 모르겠다. 단지 내가 쓰러진 횟수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열한 번, 아니 방금 가슴을 얻어맞고 넘어진 것까지 합하면 열두 번인가. 살그머니 명치 부근을 쓰다듬자 잔뜩 찌그러진 흉갑이 느껴졌다. 그렇게나 피한다고 피했건만…. 이형환위, 치우천왕의 갑옷, 게헨나의 수호 요새, 그리고 위기 때마다 외쳐준 화정의 조언이 없었다면 죽어도 이미 몇 번이고 죽었을 터. 죽겠다. 진짜로. 버티면 된다는 말에 죽을 힘을 다하고는 있는데, 어째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 - 투덜거릴 시간이 있으면 얼른 일어나기나 하지 그래? ‘그래야지.’ 화정의 뾰족한 음성에 검을 지지대 삼아 끙 몸을 일으킨다. 그러고 보니 조금 의아하네. 방금은 타나토스로서 절호의 기회였을 텐데 왜 공격하지 않은 걸까? 해답은 앞에 있었다. “하아, 콜록! 하아, 콜록!” 왼손은 입을 막은 채, 그리고 오른손은 무릎을 짚은 채 숨을 힘겹게 몰아쉬고 있다. 타나토스의 상태는 빈말로도 좋다고 하기 어려웠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호흡 곤란으로 괴로워하는 얼굴이 감기로 고생하는 앳된 소녀를 보는 것 같다. 무엇보다 아까처럼 이상한 말을 찍찍 뱉지 않고 침묵하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방증이다. 하지만 아직, 아직이다. 조금 더 버텨야 한다.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상대는 여전히 흉측한 눈으로 나를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타나토스도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암담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나는 차분히 자세를 잡았다. 그러자 타나토스도 검은 액체를 탁 뱉더니 굽혔던 허리를 폈다. “후!” 그리고 한 번 세차게 숨을 토하더니, “하!” 짧은 기합과 함께 표범처럼 뛰어들었다. 힘 있게 뻗은 주먹으로부터 시커먼 연기가 줄기줄기 쏟아졌다. 곧바로 이형환위로 이동한 순간, 연기는 빙그르르 돌아 다시 나를 노렸다. 이번에는 서로 촘촘히 엮이며 그물을 형성하더니, 순간적으로 활짝 펼쳐져 내게로 날아온다. 투망에 잡히는 물고기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군. 웅웅웅웅! 내키지는 않았지만, 전후좌우가 모조리 점거당한 터라 수호 요새를 발동하고 말았다. 이번이 네 번째인가. 한순간 절반 이상으로 있던 마력이 뚝 떨어졌으나 효과는 확실했다. 나를 중심으로 조여오던 검은 그물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살짝 튕겨 나간 것이다. 나는 검으로 두어 번 쑤신 후 헐거워진 틈으로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그러자 등 뒤로 이를 가는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크으으으!” 전력을 날아올라서 그런지 땅에 있는 타나토스가 순식간에 점으로 변했다. 그러나 저 정도의 상대에게는 거리라는 게 사실상 무의미하다. 발을 한 번 구르는 것만으로도 로켓처럼 솟구쳐 단숨에 거리를 좁힌다. “응?” 그때 시야로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타나토스의 활공 속도가 느려졌다. 나와의 거리가 줄어들수록 속력이 기하급수로 떨어지는 중이다. 방금까지 뒤도 안 보고 달려들던 걸 생각하면 확실히 이상한 현상이었다. 왜인지 몹시 힘겨워하는 타나토스의 얼굴이 눈에 밟힌다. 후우우웅! 그러한 찰나 돌연 지상으로부터 두꺼운 물기둥 하나가 엄청난 속도로 솟구쳤다. 그리고 나를 쫓아오는 타나토스의 발에 착 감겨 파도처럼 출렁인다. “아악?” 불시의 기습이어서인지 타나토스의 균형이 크게 흐트러졌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자, 팔 하나를 길게 뻗은 거대한 물의 거인과 은발의 여인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참가한 니뮤에가 물의 정령 왕을 소환했다. “귀찮게!” - 김수현! 화정의 음성이 뇌리를 강타했다. 동시에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온몸으로 전율이 스쳤다. 추격을 멈춘 타나토스가 신경질적으로 발을 걷어차자 영롱한 빛을 반사하는 푸른 물방울들이 우수수 흩뿌려진다. 그러나 곧바로 새로운 물기둥이 치솟더니 걷어찬 발목에 칭칭 감긴다. 기회였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는 이미 반사적으로 열화 검을 날려보낸 뒤였다. 혜성처럼 긴 꼬리를 늘어트리는 열화 검들은 타나토스를 향해 전방위로 쏘아졌다. 그 순간 나는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찰나의 순간, 타나토스의 낯으로 갈등의 빛이 역력하게 나타났다. 화르르르! 그러나 일 초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열화 검들은 타나토스의 얼굴부터 발끝까지 깡그리 훑고 지나갔다. “아아아아아아아악!” 기나긴 비명을 지르며 수직으로 추락하는 타나토스. 이어서 땅이 쿵 소리를 내며 약하게 울렸다. 황급히 아래로 내려가니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린 여인이 보였다. 아니, 덜덜 떨면서 애는 쓰고 있으나 간신히 상반신을 일으키는 게 고작이었다. 열화 검에 직격당한 타나토스의 형상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아까부터 저러기는 했다만 더욱 심해졌다고 해야 하나. 팔다리는 어렴풋하다 못해 시력을 높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였거니와, 이제는 몸조차도 선명하다가 희미해지는 현상을 반복하고 있다. 흡사 수명이 다한 형광등이 깜빡거리는 것처럼. 그에 따라 자연스레 기운도 약화해 처음 기운을 개방했을 때 보였던 기세는 온데간데없다. 기실 나는 한 대도 제대로 때리지 못했건만, 스스로 자멸하는 중인 듯하다. 힘이 떨어져 가는 게 실시간으로 보일 지경이었으니. - 끝났네. 멍청하기는. 자꾸 미끄러지는 타나토스를 보고 있자 화정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한다. ‘무슨 뜻이지?’ - 말할 것도 없어. 본래의 힘으로 잠깐 힘은 회복했을지 몰라도, 아직 엄연히 봉인이 존재하는데 자기 멋대로 폭주한 대가야. ‘봉인, 뭐라고?’ - 내가 말하지 않았나? 타나토스의 봉인은 다수의 신이 참여한 만큼 절대로 풀 수 없을 거라고. 역시 예상대로였어. 후후. 화정은 득의양양한 목소리로 말했으나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타나토스의 봉인이 풀리지 않았다고? 그럼 지금 눈앞의 여인은 타나토스가 아니라는 뜻인가? - 타나토스 맞아. 그리고 풀리지 않은 게 아니라, 아직 걸려 있다고 했잖아. 내 생각을 읽었는지 화정이 핀잔 조로 말을 잇는다. - 사실 나도 처음에 꽤 놀라기는 했어.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 세상에 나올 줄은 몰랐거든. 말인즉 누군가 외부 봉인을 푸는 데 성공했다는 건데…. 야, 신들이 그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 같아? 그것도 타나토스라는 미친 신을 봉인하면서? ‘그럼 외부 봉인이 아닌, 내부 봉인도 있었다는 건가?’ - 내부 봉인이라기보다는 타나토스에게 직접 봉인을 건 거야. 만에 하나 외부 봉인이 뚫리더라도 마음껏 활개 칠 수 없도록 말이지. 그럼 생각해보자고. 죽음의 신이라는 격을 지닌 타나토스의 힘을 직접 제한하려면, 봉인을 거는 신은 그 이상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동격의 힘은 가지고 있어야지? ‘그렇지.’ - 그래서 누구도 풀지 못할 거라고 한 거야. 너와 게헨나, 즉 나와 겁화를 제외하면 누구도 타나토스의 힘을 제한하는 봉인을 해제할만한 힘이 없거든. 그리고 설령 건드린다손 쳐도, 게헨나라면 모를까. 너와 나라도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야 겨우 풀 수 있는 수준일걸? ‘아.’ 나는 그제야 일련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왜 타나토스가 생각보다 강하지 않았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졌는지, 그리고 저렇게 소멸 직전까지 몰렸는지도. - 헤, 폭주가 멈춘 걸 보니 꼴에 살고 싶기는 하나 보네? 김수현. 가서 끝내. 화정의 말투는 이대로 두면 타나토스가 예전 수준으로 회복할 거라는 뉘앙스를 품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뚜벅뚜벅 걸어가 간신히 무릎 꿇고 앉은 여인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타나토스는 끓는 신음을 흘리며 가까스로 나를 올려다봤다. 힘에 부쳐 하는 얼굴 구석구석에는 여전히 흉포한 증오가 역력하게 서려 있다. 어떻게든 나를 죽이고 말겠다는 의지. 오싹 소름이 끼칠 정도라 나는 서둘러 무검을 겨눴다. “저기….” 그때 약하면서도 애절한 음성이 나를 부른다. “잠시만….” 타나토스의 낯에서 흉흉한 빛이 걷힌다. 그 대신 따뜻한 봄바람 같은 부드러운 기색이 자리 잡는다. 살짝 젖은 눈동자로 무언가 애걸하는 듯한 모습은 죽음의 신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가련하다. - 볼 것도 없어. 끝내! “사, 살려줘.” 화정의 강한 음성과 타나토스의 애달픈 목소리가 겹쳤다. “…살려달라고?” 뜻밖의 말에 반문하자 타나토스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으, 응! 너도 봤잖아? 나 꽤 쓸만하지 않아?” “뭐?” “아까 그러지 않았나? 천사는 악마를 처리한 다음이라고. 어때? 나와 손잡을 생각은 없니?” “무슨.” 말도 안 된다는 생각에 코웃음 치차 타나토스가 한층 애타는 태도로 말을 잇는다. “생각해봐. 화정과 타나토스가 손을 잡는다? 그럼 천사든 악마든 누가 문제가 될까? 응?” “나보고 너를 믿으라는 건가?”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도 있잖아. 나도 천사한테 원한이 있으니까.” “그럼 저놈들은?” “악마? 버리면 돼. 아니, 네가 원하면 내가 죽여줄게. 저런 놈들보다 네가 훨씬 나아. 살려만 준다면 무조건 네가 하라는 대로 할 거야.” “…….”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 말을 듣자 아주 살짝 구미가 당겼다. 솔직히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특히 천사를 상대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는 말은 함부로 거절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그 웃기지도 않은 계약서로 타나토스를 묶을 생각은 아니겠지? 정신 차려! 그러나 화정의 말이 왕왕 울린 순간 나는 바스러지듯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그 기색을 느꼈는지 타나토스는 숫제 그렁그렁한 눈을 하며 서글픈 표정을 짓는다. “제발….” 그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다음 회에는 드디어 소제목을 달 수 있겠네요. 그동안 일부러 소제목을 적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워낙 매의 눈을 가지신 독자분들이 많으시다 보니, 소제목만으로 차후 내용을 예측하는 경우가…. OTL 그래서 한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소제목을 같이 넣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뭐, 사실 어제 안솔과 마르의 대화로 어느 정도 키워드는 나왔지만…. 그래도 아직 모르고 계실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0910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순간적으로 전신이 기이한 감각에 휩싸이는 걸 느꼈다. 무어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그저 배꼽 아랫부분이 찡한 느낌이었다. 이윽고 시야 구석에 있던 풍경이 환한 빛으로 칠해지고 무기력한 타나토스만이 눈에 들어온다. 그 외에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타나토스를 죽인다. 또는 죽이지 않는다.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묘하다. 하나 확실한 건, 망설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 회차를 시작하고 단 한 번도 손에 사정을 두지 않았던 나인데, 끝을 앞두고 머뭇거리는 중이다. 어째서일까. 타나토스가 아깝다고 여겨서이려나? 그러고 보니 무조건 죽인다고 능사는 아니라고 후회한 적도 있잖아? 아니, 정말 이걸로 끝나는 걸까? 이렇게 쉽게? 어쩌면 이 또한 사탄이 의도한 계획이 아닐까? 별의별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한 번 시작된 의혹은 기하급수로 증폭하고 증폭해 끊임없이 꼬리를 잇는다. 끝없이 몰아치는 의문의 폭풍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복잡하던 머릿속이 한순간 가라앉는다. “…….” …그래. 형의 시체를 놔두고 도망쳤던 나다. 타살에 가까웠던 한소영의 자살을 눈앞에서 보고만 있었던 나다. 그러할진대. 이제 와서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갈등할까. 시간을 되돌리면서 맹세하지 않았는가. 그 누구도 다시는 믿지 않겠다고. 생각을 끝내고 눈을 떴을 때, 갈등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고, 나는 흔들렸던 신념을 잡을 수 있었다. 타나토스를 죽인다. 죽이고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그래, 그러면 될 것이다. “오ㄹ…! 버니…!” 문득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린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어느 순간 내렸던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있는 힘을 다해, 전력으로 마력을 일으켰다. 오늘, 이곳에서 확실히 끝낸다. 화르르르르르르르! 화정도 내 의지를 느꼈는지 생애 처음으로 미증유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투명한 칼날이 삽시간에 시뻘겋게 예열되고, 강도를 이기지 못한 칼이 웅웅 검음을 토한다. 타나토스는 아무 말도 없었다. 여전히 무릎 꿇은 채로 애원하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그 얼굴에 한껏 집중하며 무검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잘 가라.”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상대를 조준한다. “자, 잠깐만 기다려! 내 말 좀 들어보라니까?” 타나토스는 당황한 기색으로 주저앉은 채 서서히 뒷걸음질을 쳤다. “안…! ㄷ요…!” 그때, 또 한 번 들려오는 아스라한 외침. 불현듯 누군가 이곳으로 황급하게 달려오는 기척을 느꼈다. 혹시 타나토스를 구하러 오는 악마라던가? 아무튼, 이 이상 늦추거나 질질 끌 시간도, 필요도 없을 터. 시이이잉! 그렇게 생각했을 때, 나는 이미 있는 힘껏 칼을 내리치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 갑자기 눈앞의 광경이 느릿하게 흐르기 시작한다. 영상 속도를 최소 배속으로 감아놓은 듯, 활활 타오르는 무검이 내리그어지는 과정이 완만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왜 이러는지 원인을 알아차리기도 전, 총 세 가지 현상이 차례대로 발생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타나토스의 표정 변화였다. 일 초 전까지만 해도 절망하던 얼굴이 칼날을 앞에 두고 갑작스럽게 변했다. 흡사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는 것처럼 입꼬리가 귀까지 찢겨 환희에 찬 미소를 짓고 있다. 이어서 희미하던 몸이 돌연 환한 빛과 검은 연기를 일으키더니, 그 사이로 검붉은 빛이 언뜻 스쳤다. - 아? 최후는, 화정이 깜짝 놀라 탄식을 터뜨렸다. - 자, 잠깐…! 황급히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동시, 나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본능에 따라 힘을 뺐으나 무검은 이미 아래로 내려가 타나토스를 가르기 직전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 돌연히 시야가 새하얀 색으로 불쑥 칠해졌고, 썩둑. 연한 살을 베는 느낌이 전해졌다. “아하하하…! 아, 아?” 그와 동시에 깔깔 웃음을 터뜨리던 타나토스가 느닷없이 끝말을 올렸다. 다음 순간, 눈앞으로 분수처럼 솟구친 무언가가 철썩하고 부딪쳐 얼굴을 뜨끈하게 적신다. 나도 모르게 눈을 훔치자, 손등에는 검은 액체가 아닌, 시뻘건 핏물이 묻은 게 보였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분명히 타나토스를 벤 것 같았는데? - 좋아! 으아, 정말 잘했어! 그때 화정이 몹시 기뻐하는 음성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워낙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응시했다. 흰 로브를 입은 누군가가 타나토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나는 망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 안솔?” “오라버니.” 안솔이 힘겨운 목소리로 말하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왼팔은 어디로 갔는지, 어깨째 뜯겨나간 채 단면서 피가 철철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타나토스를 베려는 찰나 안솔이 끼어들어 막았다는 건가? “너, 너….” “괘, 괜찮아요. 팔쯤이야 얼마든지 다시 붙일 수 있어요. 그리고 죄송해요.” “아, 아니….” “하아, 그러니까….” 무언가 말하려던 안솔은 흠칫 얼굴을 찡그리더니 무릎을 털썩 꿇었다. 아프지 않을 리가 없다. 마력도 있는 대로 퍼붓고 화정도 최대로 끌어올렸으니. 아마 단순히 살이 베이는 게 아닌, 뼈 자체가 찢기고, 부서지고, 불타오르는 고통을 맛봤으리라. 하지만, 왜? 어째서? 상황을 살필수록 혼란만 가중되는 느낌이었다. 어느새 주변 전투도 모조리 멈췄다. 동료도 악마도 모두 우리가 있는 곳을 쳐다보고 있다. 특히 악마는 한 놈도 예외 없이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흡사 믿을 수 없다는, 끝났다는 듯한 멍하기 그지없는 얼굴…. - 후우우우…. 맙소사, 저건 진짜 어떻게 된 거지? 화정의 긴 한숨이 흐른다. 타나토스는 여전히 주저앉은 채였다. 아득한 눈하며 약간 벌린 입 등, 정신이라도 나간 것처럼 반응 없는 얼굴이다. 흡사 골인 직전 추월당한 듯한 표정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자세히 보니 전체적인 모습이 또 한 번 변해 있었다. 전신이 희미한 것까지는 같았으나, 반투명한 몸속으로 악기를 풀풀 날리는 연기가 뭉게뭉게 모여 있었고, 그 사이로 복잡한 형식이 얽히고설킨 붉디붉은 진 하나가 드문드문 비치고 있었다. 설마 아까 잠시 스쳤던 빛이 저거였나? - 천신사법(天神四法)의 구역. 해계 금진(解界 禁陣). 화정이 약간 힘 빠진 음성으로 말했다. ‘봉인 진?’ - 그래. 아까 타나토스의 몸 안에 걸어둔 봉인이 하나 있다고 했지? ‘저게 그거라고?’ - 왜냐는 말투로 묻지 마. 나도 지금 혼란스러우니까. 톡 쏘듯 말한 화정은 거듭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 돌겠네. 어떻게 저 진을 떠오르게 한 거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잖아. ‘큰일 날 뻔했다고?’ - 큰일 정도가 아니라 십 년 감수한 거지. 왜냐면 저 진은 타나토스의 힘을 제한하는 요체, 즉 중심 중에서도 중추거든. ‘뭐?’ - 그래. 그대로 내려쳤다면 당연히 저 진도 타격을 입었을 테고, 그 결과 자연스레…. ‘……!’ 화정은 더 말하기도 싫다는 듯 말을 흐렸고, 동시에 나도 몸서리쳐질 정도의 소름을 느꼈다. ‘잠깐만. 그럼 내가 저 봉인을 풀 뻔했다는 소리야? 그게 가능해?’ - 아 몰라! 나도 모른다니까? 애초 누가 안에서 도와준다면 모를까, 애초 타나토스는 털끝도 건드릴 수 없는 진이라니까! ‘젠장, 그럼.’ - 맞아. 전부 저 망할 년의 연기였어. 열화 검으로는 부족할 것 같고, 기회는 한 번밖에 없으니 가장 확실한 순간을 노린 거야. 빌어먹을 자식. 그렇게 화정이 계속 험한 말을 쏟아내는 동안, “하, 하하….” 조용히 침묵하고 있던 타나토스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럴 리 없어…. 거의 다 됐는데…. 끝이 보였는데…. 어떻게….” 얼마나 정신이 없는지 한동안 말을 더듬거리더니, “어떻게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두 손으로 땅을 쾅 치며 원통함에 찬 비명을 길게 질렀다. 중간에 핏물처럼 보이는 거뭇한 액체를 왈칵 토하기도 했다. 아니, 입뿐만이 아니라 숫제 눈, 코, 귀에서도 검은 물이 줄줄 흘러나온다. 그러나 소리는 멈추지 않고 한참 이어졌다. 잠시 후, 타나토스는 어렴풋해진 형상과 시커먼 액체로 범벅된 기괴한 모습으로 일어났고, 곧 미친년처럼 까르르 웃어 젖혔다. “아하하하하하하하! 저년, 저년 때문에 망했어. 저 개 같은 안젤루스 사제 때문에 망했다고!” “이제 어떡하지? 사탄! 네 계획이 틀어졌는데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그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히 사탄이라는 말이 나왔다. “어떡할 거냐고! 이 개새끼야!” 그때였다. 앙칼지게 고함친 찰나, 갑자기 가래 끓는 신음 같은 소리가 나며 타나토스 안에 흐르던 기체가 밖으로 쑥 흘러나왔다. 시커먼 연기는 곧 악마처럼 보이는 모양을 이뤘는데, 왜인지 낯설지 않은 형상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우우우우, 우우우우…. 더 살피기도 전 연기는 탄식처럼 느껴지는 어두운 음성을 울리더니, 먹구름과 같이 하늘로 치솟는다. 그리고 어딘가로 날아가는 듯,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 작품 후기 ============================ 재밌는 코멘트가 많네요. 아니요. 사실 가슴 뜨끔한 코멘트가 좀 있었습니다. ㅡㅡ; 소제목을 나중에 달기로 한 건 확실히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항상 ‘이번에는 들키면 안 돼!’ 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에피소드든 꼭 한두 분씩 제 머릿속에 들어갔다가 나오시는 분이 계신 듯싶어요. ^_ㅠ 0911 / 0933 ----------------------------------------------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타나토스의 몸에서 연기가 흘러나간 후, 시간이 멈춘 듯한 전장에 미세한 변화의 조짐이 생겼다. 전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보고 있을 즈음, 루시퍼가 누군가를 향해 눈짓했다. “멜리너스.” 조용한 음성이었으나 늙은 현자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이윽고 멜리너스가 어딘가로 은밀하게 이동하고, 여섯의 대 악마는 순간적으로 공중을 선회해 타나토스의 곁으로 모였다. 안솔을 부축하고 있던 김수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암만 강하더라도 저 정도의 전력을 한 번에 상대하는 건 무리였기 때문이다. 물론 악마의 의도를 알아챈 김수현의 아군도 발 빠르게 사방을 에워쌌지만. 그러나 루시퍼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둘러 손을 놀리고 있었다. 여인처럼 고운 손이 타나토스의 전신을 쓸 듯이 훑는다. 타나토스는 예의 울분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딱히 거부하는 기색은 아니었고, 이내 온몸이 희미한 빛을 발하며 모종의 기운에 휩싸였다. 이윽고 루시퍼가 결연히 몸을 돌렸을 때, 김수현은 눈을 의심했다. 어느 순간 타나토스가 여섯으로 나뉘어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원인을 인지하기도 전에 루시퍼가 무어라 길게 소리쳤다. 왕왕 메아리치는 소리가 채 멎기도 전, 대 악마들은 여섯으로 나뉜 타나토스를 하나씩 들고 박쥐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제야 루시퍼의 의도를 알아챈 김수현이 얼른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뭐?” 그러나 곧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여섯의 형상 중 다섯이 가짜고 하나가 진짜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것도 정보가 읽히지 않는다. 말인즉 여섯 전부 진짜라는 소리였다. 다음 순간, 루시퍼, 바알, 아스모데우스, 벨제부브, 아스타로트, 리리스. 이 여섯의 대 악마는 한꺼번에 공중으로 솟구쳤고, 각각 다른 방향으로 쏜살처럼 날아가기 시작했다. 설마 도주할 거라고 생각도 못 하고 있던 김수현의 눈이 확 떠졌다. “모두 잡아아아!” 귀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음성이 천지를 떠르르 울렸다. 거의 동시에 김수현은 물론, 전원이 한 방향씩 추격을 시도한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전장은 빠르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웅성웅성. 성을 기준으로 가장자리에서 한창 저항하고 있던 남 대륙 사용자들이 어수선해졌다. 자신들의 위를 빠른 속도로 퍼져 날아가는 대 악마들을 봤기 때문이다. 성으로 향하는 게 아닌, 반대 방향으로. 갑작스러운 후퇴 상황에 사용자들은 한동안 머뭇거렸다. 그러나 기실 전황이 나쁘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북 대륙은 갑자기 한층 기세 올려 해일처럼 몰아쳐 오니, 결국에는 순식간에 등을 돌려 썰물 때와 같이 빠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북 대륙은 그 이상의 속도로 밀물처럼 밀고 들어가고 있었다. 지휘권을 인계받은 선율이 발 빠르게 추격하라는 지시를 전파한 것이다. 본능적으로 승리를 직감한 건지, 북 대륙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아 적을 악착같이 뒤쫓는다. 물론 가만히 있는 사용자도 없는 건 아니었다. 본디 전쟁이라 함은 서로 총력을 기울여 맞부딪치는 대 회전보다는, 쫓고 쫓기는 상황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 한데, 김유현은 이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음에도 땅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악마 추격 조에 참가하지도 않았다. “하, 도망이라.” 단지 전신으로 노란 전류를 튀기고 있을 뿐. “누구 마음대로?” 쿠르르릉, 쿠르르릉! 안 그래도 흐릿하던 하늘이 한층 어두워졌다. 그러나 김유현은 권능을 바로 발동하지 않고 기다렸다. 아까 아스타로트를 상대하면서 하나 깨달은 게 있다면, 설령 뇌신의 힘이라도 여러 개로 분할하면 큰 타격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방에 죽일 수 있다면 좋겠으나 애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고, 또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현 상황에서는 발목을 잡는 걸로도 족하다. 그렇다면 해답은 하나였다. 우레와 같은 소리가 온 세상을 흔들었다. 동시에 굉장히 두꺼운 기둥이, 아니 기둥처럼 보이는 거대한 뇌전 한 줄기가 샛노란 빛으로 물든 먹구름 사이로 존재를 드러냈다. 흡사 용이 목을 빼듯 비죽이 솟아나오며 땅을 드리운다. 잠시 후, 먼빛을 응시하던 김유현의 두 눈동자가 투명한 황금빛을 터뜨렸다. 쪼롱이와 시야를 동화했을 때의 특징이었다. 이어서 두 팔을 들어 하늘로 올렸다가, 무언가 포착한 듯 힘차게 양손을 내리쳤다. 하늘이 한 차례 출렁거렸다. 그 순간 가까이 있던 사용자들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수백 수천 발이 합쳐진 거대한 뇌전의 기둥이 갈지자(之)를 그리며 강하해 엄청난 속력으로 비행하는 바알의 앞으로 떨어지는걸. 상대의 속도까지 계산한 매우 정확한 공격이었다. 실제로 벼락이 떨어지기까지 일 초도 걸리지 않은 터라, 바알은 아차 할 새도 없이 노란 기둥에 뛰어들듯이 삼켜지고 말았다. 꽈앙! “아아아악!” 긴 비명은 낙하지점을 순식간에 메우는 굉음에 묻혔다. 땅은 푹 파이다 못해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전류 섞인 흙더미가 하늘로 폭발한다. 바알은 잠시 기둥 속으로 사라지더니, 다시 모습을 보였을 때는 공중에 분분히 흩날리고 있었다. 이윽고 땅으로 통통 튕기는 와중에도 날개를 추스르는 게 살아는 있는 듯 보였으나, 이미 비행은 완전히 멈춘 상태였다. 그리고 그곳으로 한 무리의 기사단이 나는 듯 달려가 단숨에 에워싸는 데 성공했다. 제 3군단이었다. 바알이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베히모스는 이미 코앞에서 검을 겨누고 있었다. “훗훗훗훗! 이야, 그때 우리 일 군단장님께 한 번 목숨을 잃으신 분 아닙니까? 정말로,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결국에는 추격을 허용한 바알의 표독한 낯에 암담한 기색이 그늘지었다. 같은 시각. 추격에 잡힌 건 바알뿐만이 아니었다. 벨제부브 또한 허공에 붙잡힌 채 포위당한 상황이었다. 아스모데우스를 복제한 하승우와 약 마흔 명이 넘는 은빛 갑옷을 걸친 발키리에게 원을 그리듯 둘러싸였다. 한소영이 마법 숙녀 모드를 거두고 여왕의 군대를 소환했다. “크으으으!” 분에 겨운 신음을 흘린 벨제부브는 재차 날갯짓했다. 사실 대 악마 정도의 수준이면 전투 처녀쯤이야 쉽게 상대할 수 있다. 진짜가 아닌 가짜 악마는 말할 필요도 없고. 그러나 그건 상대가 붙어줄 때 이야기다. 벨제부브가 앞으로 날아가자, 발키리들은 사방팔방 뿔뿔이 흩어지더니 창을 겨누고 빛살을 줄기줄기 발사했다. 난무하는 은색 광선이 모조리 날개를 노리고 소낙비처럼 쏟아진다. 어찌어찌 벗어날라치면 하승우가 틈을 노리고 몸을 부딪쳐오니 자연스레 비행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모기처럼 끊임없이 괴롭혀오는 탓에 벨제부브는 이를 갈았다. 생각 같아서는 계획이고 뭐고 전부 떼고 한 판 붙고 싶었지만, 그거야말로 상대가 원하는 바였다. 애초 각오하고 왔으니 최대한 상황에 맞춰 움직여야 한다. 왜냐면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으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벨제부브는 과연 알고 있으려나. 자신의 숨통을 끊을 지원군이 이미 지척까지 도착했다는 걸. 한편, 루시퍼는 두 악마 군주와 같이 공중을 직선으로 날아가는 중이었다. 타락 천사가 선택한 방향은 정면. 최고 속도를 내는 만큼 전장은 거의 벗어났지만, 주변은 여전히 불빛이 쉴 새 없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뒤를 쳐다볼 생각도 못 한 채 있는 힘을 다해 허공을 통과한다. “야, 엄청나게 죽어라 쫓아오는데?” 문득 품에서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렸다. 루시퍼는 흘끗 시선을 내렸다. 아이처럼 안긴 타나토스가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로 키득거리고 있다. 아까 땅을 치고 분노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하기야 이상하기는 하다. 타나토스가 노렸던 회심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후, 대 악마들은 너무나 빠르고 신속하게 대처했다. 흡사 그 상황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별로 아쉬워하시는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안간힘을 쓰고 있는 터라 루시퍼는 목청껏 소리쳤다. “뭐, 아쉽기는 해. 아까는 연기가 아니라 정~말 화났었거든. 그래도 사탄은 이 상황도 염두에 둔 것 같은데?” “성공하면 좋았겠지만, 실패 가능성이 더 컸으니까요!” “나 참. 아무튼, 진짜 이해할 수 없는 놈들이라니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그 대계의 예언이라는 게 뭐길래…. 뒤!” “!” 그때 타나토스가 악을 썼다. 깜짝 놀란 루시퍼가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무언가 날카로운 기운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등 뒤로 일련의 무리가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게 느껴졌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무언지 알 수 있었다. 잠깐 눈살을 찌푸렸지만, 루시퍼는 얼른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계속 비행하며 소리쳤다. “악마 군주는 추격대를 막아라!” 그러자 좌우로 있던 두 존재가 순식간에 몸을 돌려 떨어진다. 마족도 아니고 악마 군주를 시간 벌기로 쓰다니. 평소였다면 생각지도 못했을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추격대가 예상보다 빠르게 따라왔거니와, 이후의 일을 생각해서라도 악마 군주보다는 대 악마가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호위대를 남긴 만큼 루시퍼는 후퇴에 필요한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왜냐면 추격대 또한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문득 루시퍼 사위의 공기가 덜덜거리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한 사내가 큰소리로 험악이 고함 지르는 것과 함께 맑은 불꽃들이 전방위로 펑펑 뿜어졌다. 뜨거운 바람이 몰아쳤다. 귀가 먹을 정도의 격렬한 폭음의 축제가 열리고, 루시퍼는 등이 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직격당한 건 없었으나 폭발의 여파에 휩쓸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놓치지 않는다!”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악에 받친 목소리가 루시퍼의 귀를 때렸다. 그 순간 흘끗 뒤를 돌아본 루시퍼는 총 두 가지 이유로 기함했다. 먼빛으로 두 악마 군주와 한 무리와 격렬한 전투를 치르는 중이었는데, 그 사이를 뚫고 익숙한 사내가 똑같이 공중을 날며 쫓아오는 중이었다. 용의 날개를 쫙 펼친 김수현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을 한 채 바짝 뒤따라오고 있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은 악귀와도 같으며 전신으로 뿜는 위협적인 기세는 수천 개의 바늘로 살을 찌르는 듯하다.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아니 기필코 죽여버리겠다는 적의가 물씬 풍겨오고 있었다. 루시퍼는 안도하며 쓰게 웃었다. ‘모두 같은 방향으로 도주했다면 진짜 일 날 뻔했군.’ 그 찰나의 순간, 루시퍼의 얼굴빛에 갈등의 빛이 역력해졌다. 두 악마 군주가 다른 추격대를 막는 동안 홀로 김수현을 상대해 떨구겠느냐고 고민한 것이다. 하지만 곧 포기하고 말았다. 그 강력한 타나토스도 이기지 못했는데 자기라고 이길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위험도 크다. 무엇보다 현재는 무사 도주가 최우선 순위였다. ‘이 순간만, 지금 이 순간만 어떻게든 넘길 수 있다면!’ 도주에 집중하기로 한 찰나, 또 한 번 주변이 염화에 휩싸였다. 루시퍼는 곧장 직선 비행을 포기하고 요리조리 선회하기 시작했다. 펑, 펑, 펑, 펑! 허공이 쾅쾅 떨어 울리며 진동한다. 점점이 수놓는 불꽃 사이로 루시퍼는 곡예에 가까운 S자 곡선을 그리며 폭발을 회피한다. 중간에 한 번 자세가 흐트러질 뻔했으나, 용케 뚫고 나와 도로 직선으로 날아간다. “젠장, 나와라! 해류마(海驑馬)!” 이후, 갑자기 김수현의 기척이 사라졌다. 그러나 루시퍼는 안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디선가 당장에라도 나타날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대 악마도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이상 당연히 공포도 느낀다. 제발 자신을 추격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하필 김수현이 쫓아왔으니 입맛이 쓸 법도 하다. 결국, 참지 못한 루시퍼가 흘깃 눈을 돌렸다. 그리고 멍한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끈질기게 쫓아오던 김수현이 어느 순간 사라져 있었다. 쐑! 바로 그때, 아래서 날아온 칼 한 자루가 왼쪽 날개를 아슬아슬하게 훑고 지나갔다. 반사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본 루시퍼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두두두두두두두두! 땅으로 내려간 김수현은 처음 보는 말을 타고 루시퍼를 쫓아오고 있었다. 몸은 백옥처럼 희나 갈기는 흑진주처럼 검은 아름다운 말이었다. 문제는, 그 말이 달리는 속도가 그야말로 엄청나다는 것이다. 흡사 빙판에 미끄러지듯이 대지를 박차며 나는 듯 돌진하고 있다. 게다가 달리면 달릴수록 속력은 한없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 고작 말이 날개 달린 존재보다 빠르다? 원래대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현상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아차 한 순간 루시퍼와 비슷한 선까지 다가가더니, 끝내 앞지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순간 루시퍼는 김수현의 눈이 번뜩이는 걸 봤다. 이윽고 수십 개의 열화 검이 순식간에 생성돼, 붉은 카펫을 펼치듯 수직으로 화르르르 솟구쳤다. 이어지는 불길은 그대로 불의 바다로 변해 루시퍼의 앞을 가로막는다. “으아아아!” 루시퍼는 악 소리 지르며 황급히 몸을 날렸다. 천만다행으로 열화 검의 장막에 닿기 직전 가까스로 방향을 틀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자기 눈앞으로 꽝 불꽃이 터지더니 아슬아슬하게 유지해온 균형이 와르르 무너졌다. 타나토스가 허탈한 표정을 짓는다. “아, 이건 끝났네.” 그와 동시에 루시퍼가 춤을 추듯 공중에서 너울너울 회전한다. 그런 루시퍼의 뇌리로, ‘그래. 상대는 확실히 강하다.’ ‘무력도 강하고, 세력도 갖췄고, 운도 따라주고, 무엇보다 우리를 잘 알고 있지.’ ‘게다가 대계도 우리의 패배를 예언하고 있고.’ ‘그런데 루시퍼. 혹시 예언의 정확한 내용을 알고 있나?’ 문득 사탄과의 기억이 떠올랐다. ‘한 명의 왕과 네 명의 여왕이 출현했다. 우리의 다변화 패배 일 차 조건이 만족했다.’ ‘해석하기 나름이기는 하지만, 주목해야 할 건 다변화라는 말이 붙었다는 거지.’ ‘여기서 다변화라 함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쾌해져. 우리보다 강한 적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시야가 점차 넘어간다. 서서히 들어오는 하늘이 루시퍼의 눈에 파노라마처럼 흐른다. ‘간단해. 지면 된다. 한 발 앞서서 패배 조건을 만족하는 거야.’ ‘그럼 아까 예언에서 패배를 빼고 말해보겠나?’ ‘한 명의 왕과 네 명의 여왕이 출현한다. 우리의 다변화 일 차 조건 만족한다.’ ‘패배를 미끼 삼아 기회를 유도한다.’ 순간 서서히 낙하하는 루시퍼의 정면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불쑥 솟았다. 어느새 품에서 떠난 타나토스는 목이 잡아 뜯기고 있었다. ‘응? 그러다 전멸이라도 해버리면? 하, 그럼 어쩔 수 없지. 애초 모험이야. 중요한 건 적을 기만하느냐 못하느냐. 거기에 달려 있다.’ ‘인정해. 우리는 김수현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북 대륙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그 패배를 견딜 수만 있다면…. 아니, 견딜 수 있는 패배라면.’ ‘기회는, 단 한 번 반드시 온다.’ 그렇게 타나토스의 조각을 처리한 후, 김수현이 싸늘한 눈으로 아래를 노려본다. 최후의 순간, ‘응?’ ‘가능성이 있겠냐고?’ ‘지옥 계획 때 우리 악마들은 처음으로 협력이라는 걸 했지.’ ‘나는 거기서 가능성을 봤다.’ 몹시 느릿하게 흐르던 상념이 뚝 끊겼다. “사탄….” 이윽고 보이지 않는 검이 맑은 불꽃을 분출하며 내리꽂히는 동시에 루시퍼는 짧게 읊조렸다. “부탁합니다.”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목덜미에 닿은 뜨거운 기운을 느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대신 용량을 빵빵하게 넣어왔으니 부디 용서를….(굽신굽신) 아, 그리고 어제 코멘트를 읽었는데요. 안솔은 김수현의 공격을 막은 게 아닙니다. 김수현은 찰나의 순간 힘을 뺐고, 타나토스 대신 안솔의 팔이 뜯기고 잘라진 것이지요. 첫 번째 코멘트를 보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 같아 서술을 조금 변화했습니다. :) 아으, 드디어 에피소드 3이 끝났네요. 제일 고비가 7~5, 그리고 3이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어찌어찌 마무리는 지은 듯싶습니다. 내일부터는 에피소드 2로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독자 분들 모두 활기찬 하루 보내세요! 0912 / 0933 ---------------------------------------------- A Poisoned Chalice, Two. 정신 차리고 하늘을 바라봤을 때, 구름에 걸린 해는 하늘과 땅의 경계선으로 서서히 넘어가는 중이었다. 땅으로 떨어지는 붉은 황혼은 어느새 짙은 석음(夕陰)이 섞여, 검정 물감을 부은 듯 어스레한 빛을 띠기 시작한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어둠이 올 듯 말 듯한 하늘 아래 엄청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수천의 사용자가 주먹을 번쩍 올린 채 밤이 떠나가라 환호하고 있었다. 전장은 이미 완벽하게 끝난 상태였다. 성으로 돌아가는 걸음마다 발끝이 툭툭 걸리는 게, 내가 루시퍼를 죽어라고 쫓은 것처럼 북 대륙도 악착같이 남 대륙을 추격한 듯싶었다. 전투가 종료된 땅에는 못해도 사오천은 넘을 듯한 시체로 가득 차, 땅이 핏빛 진흙으로 변해 질척거릴 정도였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함성은 천천히 잦아들었다. 전투 직후 승리의 기쁨을 충분히 만끽한 사용자들은 전장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누구는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고, 또 누구는 부상자를 돌봤다. 간혹 신 나는 얼굴로 시체를 뒤지는 이들도 있었다. 유유히 흐르는 선혈의 강을 가로지르는 동안, 문득 기이한 기분이 전신을 엄습한다. 이겼다. 그냥 이긴 게 아니라 압도적으로 이겼다. 북 대륙의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아직 모르고 있지만, 동 대륙 대첩(大捷)이라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우선 남 대륙은 총 병력 중 거의 절반에 가까운 사망자를 남겼다. 첫날 시가지 전투 때 발생한 사상자를 합치면 그쯤 될 것이다. 게다가 남 대륙 최고의 무력 부대라는 원탁의 기사를 상당수 꺾었고, 엘도라를 살해한 건 확실한 성과였다. 악마 쪽도 만만치 않다. 자세한 건 보고를 받아야 알겠으나 상대는 ‘타락 천사’ 루시퍼라는 엄청난 전력을 헌납했다. 대 악마라는 타이틀을 생각해보면 거의 공으로 잡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루시퍼를 따라갔던 악마 군주 두 놈까지 덤으로 죽일 수 있었다. 사실상 이번 전쟁은 몹시 험난할 것이라 각오하고 왔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예상과 정반대로 흘렀다. 물론 오벨로 기사가 등장한 뜻밖의 행운도 있었고, 위험하고 아찔한 순간도 없는 건 아니었으나 풀려도 너무 잘 풀렸다. 그래서 이상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이렇게 쉽게 승리했다는 게 도저히 믿기 지가 않는다. 가슴 한 켠으로는 모종의 불안감이 있었지만,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려는 건 막을 수 없었다. “하.” 아무튼, 기쁘다. 이 회차를 시작할 때부터 악마를 염두에 두고 만반의 준비를 하려 노력했다. 알고 있던 안배를 하나씩 차근차근 파괴하고, 춘추 전국 시대를 넘겼으며, 힘을 최대한 모으고 보존했다. 그리하여 할 수 있는 선에서 전력을 기울여 맞부딪친 결과, 이렇게 엄청난 성과로 이어지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으랴. 지난 십사 년의 고생이 헛되지 않고 보상받은 기분이다. “하하.” 상황은 일 회차와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제는 인간이 궁지에 몰린 게 아닌, 악마가 벼랑 끝에 놓였다. 할 수만 있다면 사탄을 앞에 두고 묻고 싶을 지경이다. 딱 한 마디. 이렇게 되어보니 기분이 어떠냐고. “하하하하!” “기분 좋게 웃는 걸 보니 추격에 성공했나 봐?” 한껏 웃어 젖힌 찰나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앞쪽으로 형과 한 무리가 어스레한 석양을 받으며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특히 형의 옆에서 “오! 부왕의 형님이셨군요. 헤헤.” 라고 말하며 손을 싹싹 비비다가, 내가 있는 곳을 돌아보는 해골 기사도 낯설지 않다. “베히모스?” - 이야, 이거 정말 오랜만입니다? 딱딱, 베히모스는 특유의 이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멋들어진 장검을 들어 올렸다. 칼끝에는 백금발 머리카락의 작고 어린 소녀가 목이 꿰인 채 걸려 있다. 전체적으로 귀여운 인상이었으나 얼굴은 지독하리만치 일그러져 있었다. “바알!” 낯짝을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두 번 세 번 확인해도 ‘동쪽의 왕’ 바알이 맞다. 게헨나에게 이미 목숨을 한 번 잃은 터라 놓치면 아까웠을 건데 용케 추격에 성공한 모양이다. “형도?” “나는 발목만 잡았고, 직접 처리한 건 이 친구지.” 형이 옆을 흘끗 쳐다보자 베히모스가 가슴을 쫙 폈다. - 훗훗훗훗.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년을 따르던 악마 두 놈, 그리고 타나토스의 조각을 처리한 것도 추가해주시죠. “원래는 여섯 모두 저격하려고 했는데…. 그랬다가는 전부 놓칠 것 같아서 한 놈한테 집중했지. 뭐, 애초 그렇게 도망칠 거라고 상상도 못 했지만 말이다.” 형은 싱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순간 나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형의 목에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어, 어헉? 수, 수현아?” 형이 당황한 기색을 느꼈으나 나는 감정에 이끌려 행동했다. 눈앞에서 보고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아니, 그냥 고마웠다. 이로써 대 악마 둘, 악마 군주 넷이다. 순식간에 성과가 두 배로 늘었다. “머셔너리 로드.” 고요한 음성이 귀에 흘렀다. 바로 뒤를 돌아본 나는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소영과 하승우가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하승우는 씩 미소 짓더니 손으로 끌고 온 걸 털썩 내려놨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긴 채 추레하게 늘어져 있는 것은 바로 벨제부브였다. 눈동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설마.” “네. 보시는 그대로.” 한소영은 설명을 간단하게 일축했다. ‘폭식’ 벨제부브 또한 전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또 한 번 성과가 세 배로 뛰었다. 이제는 숫제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어쨌든 저도 추격은 성공했네요.” 한소영은 유독 ‘저도’ 라는 말을 강조했다. 문득 나와 형을 번갈아 보더니 어색하게 헛기침하며 살며시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뺨을 붉히며 어깨를 살짝 웅크렸다. 혹시 어디 아프시냐고 물으려는 순간, 돌연 또 한 무리가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선유운과 차소림과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자연스레 기대가 솟았지만 씁쓸해하는 얼굴을 보니 아마 허탕을 친 것 같다. “죄송합니다. 잡으라는 말씀을 듣고 바로 추격에 나섰는데…. 놓치고 말았습니다.” 역시나. 차소림은 허리를 직각으로 꺾으며 사죄했다.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다. “좀 아깝게 놓쳤습니다. 저격이 성공하기 직전 호위하던 놈이 대신 맞는 바람에….” 선유운은 담담히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다. “그럼 저격한 놈은 어떻게 됐습니까?” “물론 처리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선유운의 목에도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어…. 크, 클랜 로드.” 선유운은 당황하는 것도 담담하게 했다.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더니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라는 기색을 여실히 드러냈다. 평소의 나답지 않다는 건 알고 있으나 왜인지 주체할 수가 없었다. 대 악마를 놓친 건 아쉬우나 악마 군주를 처리한 것도 매우 혁혁한 성과였다. “저, 머셔너리 로드.” 그때 한소영이 내 옆으로 다가와 톡톡 건드렸다. “그러고 보니 저도 하나, 아니 둘을 추가로 처리한 것 같은데….” “아, 그렇습니까?” 과연, 철혈 여왕이라는 한소영이 놓칠 리가 없지. 아마 악마 군주 한 놈과 타나토스의 조각 중 하나를 말하는 듯싶다. 그럼 대 악마 셋, 악마 군주 여섯, 그리고 타나토스의 여섯 조각 중 세 조각을 처리한 건가? 하하, 하하하하. “정말 잘하셨습니다.” 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러자 한소영은 스리슬쩍 눈을 내리뜨더니 또 어깨를 웅크렸다. 응? 아까부터 왜 저러시는 거지? 어깨에 상처라도 입으신 건가?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혹시 다치셨습니까?” “…네?” “어깨가 좀 불편하신 것 같아서….” “…….” 그 순간 한소영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굳었다. 이어서 어느 때보다 완연히 토라진 표정을 짓더니 나를 싸늘하게 노려본다. 나는 반사적으로 내가 뭘 잘못했는지 더듬었다. 그러나 꽉 안아주며 같이 기뻐하기만 했을 뿐,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잠시 후. “아, 네. 괜찮으니까 걱정은 하지도 마세요.” 한소영은 가시 돋친 말투로 쏘아붙이더니 휙 소리가 날 정도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시린 냉기를 풀풀 날리며 쿵쿵 걸어갔다. 나는 느릿하게 멀어지는 한소영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 쯧쯧. 누군가 느닷없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 부왕도 참…. 베히모스는 한숨을 폭 내쉬더니 해골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왜? 내가 뭘 잘못했길래? * 황혼이 진 후 땅거미가 깔릴 무렵에는 아군의 사망자를 확인하는 등, 기본적인 전장 정리는 끝낼 수 있었다. 물론 뒤처리까지 깔끔하게 끝낸 건 아니었다. 땅에는 여전히 시체가 흐드러지게 널려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정리는 내일로 미룬 후 우선 성으로 돌아가 쉬기로 했다. 바짝 조였던 긴장이 풀리기도 했고, 넘어오자마자 쉴 틈 없이 격렬한 전투를 치른 만큼 휴식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성으로 돌아오자 우리는 동 대륙의 환영 인사를 받을 수 있었다. 아키노라는 동 대륙 대표는 확실히 자신들의 처지를 인식하고 있었다. 약간 부담스럽게 느껴질 만큼 과하게 감사해 하더니, 잠자리 제공과 더불어 간소한 축제까지 열어준 것이다. 그래 봤자 약간의 주류와 음식을 내놓은 정도였지만, 나는 사양하지 않고 기껍게 받았다. 내가 기뻐하는 만큼 아군도 승리에 즐거워하고 있었고, 클랜끼리 간단히 먹고 마시며 피로를 푸는 것도 좋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딱 하나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오벨로 기사단이었다. 목격자의 증언을 따르면 오벨로 기사단도 추격 조에 참가한 것 같다. 사실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면 추격을 중지할 법도 한데, 오벨로 기사단장은 무어라 바락바락 소리 지르며 끝까지 쫓아, 끝끝내 먼 곳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기실 돌아오면 한 판 붙어야 할 처지나, 그 말을 들으니 왜인지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엄밀히 말하면 전쟁이 끝난 건 아니었으나, 너무 조이기만 하면 터질 염려가 있으니. 오늘 하루쯤은 전부 내려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 아이고 맛 좋다! 라고 여겼건만, 나는 곧 생각을 수정할 필요를 느꼈다. - 이게 얼마만의 고기요! 술이냐! 우헤헤헤! 축제에 은근슬쩍 낀 베히모스는 이제는 매우 흥겨워하며 덩실거리고 있었다. 솔직히 곧 돌아갈 줄 알았는데 아직 왜 저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해골 주제에 맛을 느낀다는 게 말이나 돼? 워낙 붙임성이 좋다 보니 금세 어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서너 명은 어색한 얼굴로 비비앙을 흘깃거리고 있었다. 정작 소환한 장본인은 음식을 흡입하는데 여념이 없었지만. 결국, 내가 총대를 메기로 했다. “베히모스.” - 예? 왜요? “너 안 돌아가?” - 엥? 뭡니까. 부왕. 꼭 서둘러 꺼지라는 것처럼 들리잖아요. “맞아.” - 와, 서운합니다. 보시죠. 방금 부왕~하고 울 뻔했습니다. 미친놈. “헛소리 말고. 맛도 느끼지 못하면서.” - 무슨 말씀입니까. 축제는 분위기입니다. 무시하지 마시죠. 이래봬도 일국의 왕이었던 해골입니다. 그게 뭔 상관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술잔을 맛있게 들이키는 걸 보니 아주 거짓말 같지도 않고. 예전에도 느꼈지만 얘도 참 종잡을 수 없는 놈이다. “그래도 어서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 싫습니다. 부탁입니다. 절대로 빨리 돌아가기 싫습니다. 한 번 더 권했으나 베히모스는 한 마디로 거절했다. “왜?” - 후유, 그게 말입니다. 갑자기 진지해지지 마라. - 요새 분위기가 엄청나게 살벌합니다. 진짜로 생지옥이라고요. 아니, 거기 지옥 맞잖아. - 그러니까 게헨나 님이 왕을 출산하시고 돌아오셨을 때까지는 좋았는데요. 문제는 왕께서 굉장히 진노하셔서….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왕이라면 내 딸인 수나를 말하는 것일 터. 수나가 진노했다고? “왜?” - 아이 씨, 그걸 알면 제가 이러겠습니다. 이유는 말해주지도 않고, 게헨나 님만 보면 이를 박박 갈면서 할퀴려고만 들고. 애새끼 주제에 말입니다. “함부로 말하지 마. 내 딸이야.” - 알아요. 그런데 제가 오죽하면 이럴까요. 그것 말고도 여러 사건이 있었다니까요. 심지어 지옥 마수 군단이 재편성되는 일까지 있었다고요. 아, 이건 말해주는 게 좋으려나. 베히모스는 속사포처럼 쏟아내더니 문득 비비앙을 흘깃거렸다. 그러나 비비앙은 접시째 음식을 들이마시는 중이었다. - 아무튼, 이번에 나름 공도 세웠는데 같이 좀 즐깁시다. 돌아가기 전에 다 말씀드릴 테니까요. 돌아가는 순간부터 또 모녀 전쟁에 시달려야 합니다. 그렇게 말한 베히모스는 퀭한 눈구멍을 간절히 빛냈다.(사실 붉은 안광이 희번덕거려 좀 소름 끼쳤다.) 뭔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결국에는 떨떠름히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자 베히모스는 기쁜 듯이 딱딱거린 후,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 자자, 한 잔 더! 여기 빨리 좀 따라주십쇼! 아이고 팔 떨어진다! 으아아아! ============================ 작품 후기 ============================ 잠시 쉬어가는 회…. 입니다. 아, 일러스트에 관해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현재 일러스트레이터께 두 장의 일러스트를 요청한 상황입니다. 한 장은 제 개인 욕심으로 예전에 보여드렸던 일러스트 중 하나를 새로운 이미지로 보여드리기로 했고, 한 장은 김수현 + 화정이 될 예정입니다. 우선 전자는 늦어도 6월 30일 안에는 완료될 듯싶습니다. :) 0913 / 0933 ---------------------------------------------- A Poisoned Chalice, Two. 늦은 밤까지 적당히 축제를 즐겼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까무룩 잠들어버린 모양이다. 깜빡 눈을 뜨니 찬 공기가 콧속을 물씬 찔렀다. 아직 아침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새벽 중인 듯싶다. 한 네 시쯤 됐으려나. 흐릿한 눈을 문지르고 한 차례 기지개를 켜며 주변을 둘러보자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안솔이 모포와 침낭에 몸을 푹 묻은 채 한창 달게 자고 있었다. 어제 추격을 끝내고 돌아오니 알아서 잘렸던 팔을 붙였던데, 이렇게 혼자서 잘 견뎌내는 걸 보니 기특하게 느껴졌다. 정말 아팠을 텐데. 생각해보니 안솔도 상당히 달라진 것 같다. 처음 통과의례에서 봤을 때는 약간 모자라 보이던 애가, 오 년 가깝게 지나자 한 명의 훌륭한 사용자로 성장했다. 안솔이 곁에 없었다면 어제와 같은 승리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참 안솔의 덕을 많이 봤다. “음냐음냐…. 오라버니…. 더 격렬하게…. 저를 엉망진창으로….” 무슨 꿈을 꾸는지 모르겠으나 기분은 좋아 보인다. 잠이 깨지 않게 조심조심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히죽 웃는다. 나는 한동안 안솔을 응시하다가 조용히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아직 동트기 전이어서인지 밖은 어두컴컴하다. 거리에는 축제의 흔적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술 내음이 살짝 섞인 바람을 맞자 정신이 한층 맑아졌다.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니 문득 미세한 기척이 느껴졌다. 어제 축제를 즐겼던 자리에서 어슴푸레한 형상 두어 개가 보였다. 살금살금 다가가 보자, 혼자서 신 나게 고기를 구워 먹고 있는 비비앙이 보였고, 맞은편에는 근원이 놀란 눈으로 비비앙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약간 떨어진 곳으로 베히모스가 발라당 드러누워 있었다. 비비앙의 식탐과 인간 위장의 신비로움에 관한 고찰은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걸음을 멈추고 베히모스를 응시했다. 방금 몸을 빙그르르 돌아누운 걸 보니 잠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응시하는 동안 베히모스는 실로 변화무쌍한 뒤척거림을 보여줬다. 좌로 뒹굴 우로 뒹굴은 기본이요, 땅에 이마를 쿵쿵 찧다가, 앉은 자세로 한숨을 푹 내쉬더니 종래에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안광을 촉촉하게(?) 빛낸다.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문득 낯설지 않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비슷한 기억이 있다. 아마 일병 휴가 나왔을 때였나. 복귀 전날에 잠이 안 와서 미칠 것 같았었는데 그때 딱 저랬던 것 같다. 그러자 갑자기 울컥한 감정이 들었다. 이 자식, 정말 돌아가기 싫었던 거구나. “베히모스.” 조심스레 옆에 앉으니 베히모스가 나를 흘깃거렸다. - 아, 오셨습니까. 딱딱딱딱, 이 부딪치는 소리마저도 아련하다. - 마침 잘 오셨습니다. 슬슬 깨우러 갈까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그렇게 돌아가기 싫은 거야?” - 저라고 돌아가기 싫겠습니까…. “왜 그러냐. 우리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베히모스는 코가 있었으리라 추정되는 부분을 쓱 훔쳤다. 그리고 힘없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 뭐, 상황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잘 좀 달래보지 그랬어. 어쨌든 애잖아.” - 해봤죠, 해봤습니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취하고 동원했습니다. 가능한 선에서 진심으로 최선을 다했다고요. “…….” - 솔직히 말해드릴까요? 제가 말입니다. 수나 님 좋으시라고 부하들 앞에서 말 흉내까지 냈는데요.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개 빡돕니다. 한데 뭔 짓을 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으니 대체 어쩌라는 겁니까. “아니, 일단 진정하고. 애가 화났다면 우선 원인부터 찾아야지. 무턱대고 달래면 쓰나.” 이렇게 말은 해도 막연한 건 매 한 가지였다. 수나가 특이한 아이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태어나자마자 나를 보고 ‘이런 게 내 아버지라니.’ 라는 낯으로 한숨을 쉬었으니, 아마 나라도 방법이 없지 않았을까. - 그래서 묻고 싶은데요. 혹시 뭔가 짚이는 거 없으십니까? 가끔 수나 님과 게헨나 님이 싸우시는 걸 보면 부왕님 이야기가 꽤 나오거든요. 내 이야기라. 사실 짚이는 게 아주 없지는 않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게헨나가 나를 몰래 떠났을 때 강한 불만이 생겼을 수도 있겠다. 제 3의 눈으로 과거를 봤을 때 수나는 울고 있었으니까. 나를 찾으려는 듯 양손을 휘저으면서.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해주자 베히모스는 일리 있다는 듯이 끄덕거렸다. -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군요. 거참, 그냥 좋게좋게 오시면 될 걸 왜 그렇게 헤어지셔서는…. 나직이 투덜거리더니 돌연 퀭한 눈구멍을 휙 돌렸다. - 아, 이걸 말씀 안 드렸네요. 혹시 헬레나, 그리고 마그나카르타를 알고 계십니까? 생각지도 않은 이름이 나온 탓에 약간 놀라고 말았다. 물론 알고는 있다. 신화시대의 대 영웅 헬레나와 최후의 용 마그나카르타. 이 둘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 두 존재는 현재 지옥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뭐?” -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게헨나 님이 다시 꺼내셨습니다. 아니, 소생이라는 표현이 옳으려나요? “꺼냈다고? 소생?” 이해 못 할 말들이 이어졌다. 아니, 애초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 당시 둘은 게헨나를 강제로 돌려보내려는 일환으로 스스로 희생하는 길을 선택했다. 말인즉 차원 이동진 발동을 대가로 소멸한 것이다. - 응? 왜 그러십니까? 내 표정을 읽었는지 베히모스가 말을 잇는다. “그건 좀 말이 안 되는데. 어떻게 살아났다는 거지? 영혼까지 깡그리 소실됐을 텐데.” - 모르셨나요. 저희 쪽에서 발동됐던 진은 분명히 정식 차원 이동진이었습니다만, 부왕님 쪽에서 발동됐던 진은 소환하는 대상의 힘을 보충해주는 기능도 섞여 있었습니다. 순간 아차 싶었다. 확실히 그랬다. 게헨나가 소환됐을 때도 이천 명에 가까운 동부 사용자가 양분으로 화하지 않았던가. - 물론 진을 발동하는 데 존재의 힘 대부분을 썼겠지만, 양분화한 부분도 적게나마 있었겠죠. 단 한 톨이라도 게헨나 님에게 흘러들었다면 마수로 살려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애초 저도 그렇게 마수가 됐는데요. 어느새 근원은 스리슬쩍 옆으로 다가와 열심히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가능하냐는 뜻으로 근원을 돌아봤다. “Negative.” 뭐냐. 뭐가 보자마자 부정적이라는 거냐. “모릅니다. 애초 그 정도의 존재는 제가 감히,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대상입니다. 말하는 것조차 조심스럽습니다.” 근원은 더는 묻지 말라는 투로 단호하게 말했다. 여하튼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하나 더 궁금한 게 있었다. “한데 왜 둘을 소생시킨 거야? 꼭 살릴 이유가 있나?” - 있습니다. 부왕님과 관계가 있는 자들이거든요. “응?” -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할 수 있는 선에서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고요. 게헨나 님은 그 둘이 부왕님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면 수나 님이 조금이라도 진정해주지 않을까 기대하셨습니다. …수나의 장난감용도라고 들렸다면 내 착각일까? “효, 효과는?” - 모르겠습니다. 돌아가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쩝. 글쎄. 말하면서 입맛을 다시는 걸 보니 별로 효과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 듯싶다. - 아무튼, 그래서 말입니다. 부왕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혹시 수나 님 좀 달래주지 않으시렵니까? “내가? 어떻게? 나는 지옥으로 가지도 못하는데.” - 알고 있습니다. 단지 부왕님이 무언가 선물을 주시거나 한다면 제가 전달해드릴 수도 있겠지요. 그럼 수나 님의 기분도 풀리시지 않을까요? “선물이라.” 그 말을 듣자마자 예전에 게헨나와 수나에게 주려고 쟁여놓은 장신구가 떠올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틀란타에 있는 터라 지금 바로 주지는 못할 것 같다. 그렇다고 돌아갈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하기도 뭐하고. 어쨌든 나쁜 생각은 아니지만, 그 까다로운 아가씨의 입맛에 맞추려면 어떤 선물이 좋으려나? “아, 기록 구슬은 어때?” - 예? “내 영상을 기록한 구슬을 수나에게 보내는 거야. 당연히 내 얼굴도 나오고, 목소리도 나오고.” - 오오, 오오오오! 베히모스의 아가리가 쩍 벌어졌다. 한동안 기괴한 소리를 지르더니 갑자기 납작 엎드려 오체투지를 보였다. - 역시 우리 부왕님!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부왕! 하고 쌀 뻔했다고요! 진정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다른 인간 여인네와 하하 호호 웃으며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였다고 일러바치지도 않겠습니다! 호오. 설마 했건만, 그런 말을 할 생각이 있었다는 거냐. 아니, 이 고자질쟁이라면 분명히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나라고 호락호락 당해줄 생각은 없다. “좋아.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봐.” 나는 구슬을 가져온다는 구실로 잠자던 곳으로 돌아와, 약간의 시간을 들여 영상을 기록했다. 그리고 다시 베히모스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구슬을 건넸다. 물론 입에 침을 바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 그런데 수나에게 꼭 먼저 보이는 게 좋을 거야.” - 응? 왜요? 제가 보면 안 됩니까? 설마 이상하게 녹음하신 거 아녜요? “아쉽게도 일회용이거든. 같이 보는 건 상관없지만, 뭐, 보고 싶으면 먼저 보던가?” - 아, 아닙니다. 그렇군요. 목숨을 걸고 지켜서 반드시 전달하겠습니다. 싱긋 미소 짓자 베히모스는 바로 깐족거리는 걸 멈췄다. 그래도 이 선물이 효과가 있으리라 확신한 걸까. 느닷없이 전역을 하루 앞둔 말년 병장처럼 태도가 변하더니, 고맙다고, 살려줘서 감사하다고 연신 뇌까리며 소환 진으로 서둘러 모습을 감췄다. 흠. 그나저나 아까 베히모스가 수나보고 뭐라고 했더라? 애새끼 주제라고 했던가? 베히모스가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후, 나는 조용히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아침이 밝자마자, 나는 전 인원에게 전장을 정리할 것을 지시했다. 아직 전쟁이 완전히 끝났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만큼, 마냥 퍼져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쉬는 건 하루로 충분했다. 기실 북 대륙 사용자들도 큰 불만은 없었다. 시신을 버리고 소각하는 일이 좀 귀찮을 뿐, 시체의 장비를 벗기는 일은 성과 획득과 직결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원 즐겁게 전장 정리에 참여하는 가운데, 나는 홀로 성벽 주변을 거닐었다. 그리고 전쟁을 하나씩 천천히 곱씹었다. 하나씩 정리해보니 석연치 않은 구석이 하나씩 속속히 드러났다. 첫 번째. 대 악마 여섯 중 셋은 잡았으나 셋은 도주에 성공했다. 이 말은 타나토스가 아직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타나토스도 똑같이 여섯 조각으로 나뉘었지만, 세 조각이 남아 있으니. 화정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조각을 잃은 만큼 예전과 같은 힘은 내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위험한 존재니 주의하라고. 두 번째. 마족이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이게 가장 불안한 부분이었다. 남 대륙을 관장하던 천사 수만이 희생됐으니 마족도 상당수 넘어왔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결과만 보면 악마만 나타났고 마족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한꺼번에 전력을 드러내지 않은 걸까? 어떤 의도가 있길래? 세 번째. 없다. 엘도라의 시체가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아군 중 누가 선점했을 수도 있으나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왜냐면 엑스칼리버는 물론, 내가 직접 벗겼던 장비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으니까. 그럼 결국 적들이 도주 중에 가져갔을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살아 있는 상태도 아니고, 굳이 가져갈 이유가 없잖은가. 이렇게 세 가지 이유로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어느 것 하나 단정 짓기 어려운 문제들이었다. 딱 하나 확실한 건, 우리는 전쟁에서 크게 이겼고, 남 대륙과 악마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아직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에는 일단 염두에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아틀란타로 돌아갈 때까지 일의 추이를 지켜보고 행동하면 될 터. 어쨌든 현재는 아틀란타로 돌아가는 게 우선이었다. 그러나 돌아가기에 앞서, 나는 클랜 로드들과 의견을 나눠 동 대륙을 북 대륙으로 데리고 가기로 했다. 만에 하나의 경우이기는 하지만, 적들이 어딘가 숨어 우리가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동 대륙 대표인 아키노는 처음에는 이주 계획에 난색을 보였으나, 다시 쳐들어왔을 때는 지켜줄 수 없다고 말하니 군말 않고 동의했다. 그리하여 동 대륙의 일을 일단락 지은 후, 우리는 동 대륙 생존자들을 호위하며 성을 떠났다. 올 때는 하루가 멀다고 달렸으나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동 대륙 외곽 소 도시까지 오 주에 걸려 도착했다면, 북 대륙으로 돌아가는 데는 정확히 오십육 일, 팔 주라는 시간이 걸렸다. ============================ 작품 후기 ============================ 김수현이 떠난 후, 성으로 돌아온 오벨로 기사단장 : 큭…. 검의 군주여, 죄송합니다! 적을 놓치고 말…. 응? 어, 어디 가셨지? * 원래 김수현의 기록 구슬을 받은 수나, 게헨나, 베히모스의 내용도 적고 싶었는데…. 너무 졸리네요. ^_ㅠ 0914 / 0933 ---------------------------------------------- A Poisoned Chalice, Two. 늪지대를 거쳐 초원으로 들어온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 순간 초원도 서서히 벗어날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하늘과 초원이 맞닿아 있다. 턱을 젖혀 시선을 올리자 하늘 바다를 부드러이 헤엄치는 구름이 보였다. 흡사 우리를 이끌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같은 방향으로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 속도라면 아마 곧 도시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에~.” 조용히 행군하는 와중 등 뒤로 무의미한 음성이 들렸다. 가장 선두에 있는 터라 누가 말했는지 볼 수 없으나, 목소리로 보아 이유정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보아하니 거의 다 온 것 같네.” “네?” “응? 왜?” “아니요. 아까 오라버니가 똑같은 말씀 하셨잖아요.” “그래서?” “알고 있는 사실을 왜 또 굳이 꺼내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요.” 오호. 안솔치고는 상당히 날카로운 공격이다. 이유정도 비슷하게 느꼈는지 “하?” 탄성을 질렀다. “하지만 이런 말도 있지. 우리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고.” “뭐, 그렇기는 해요. 인정하죠.” “인정? 이야, 언제부터 그렇게 맹랑해졌어?” “오, 오지 마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제 용병 등급은 EX…. 으에에에에에에에!” 계속 앞만 보고 걷는 터라, 등 뒤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새된 비명으로 미루어보아 안솔의 통통한 볼살이 양옆으로 쭉 늘어나고 있을 것 같다. 잠시 후, 안솔이 훌쩍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유정의 상쾌한 외침이 터졌다. “후~. 그나저나 연주 언니는 어디로 가신 거지? 생각해보니 행군 내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어. 알간?” “흑흑…. 네…. 그런데 저는 몇 번 뵌 것 같은데….” “나도 가끔 보기는 했지. 그러니까 행군 내내라고 했잖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이윽고 누군가 내 쪽으로 탁탁 뛰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일부러 모른 체하며 걸음을 놀렸다. 그러나 그 누군가는 기어코 가까이 다가와 옆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오빠오빠. 연주 언니 어디로 간 거야? 오빠가 뭐 시켰어?” 얘는 왜 이런 때만 눈치가 빠른 걸까. 그냥 좋게좋게 넘어가 주면 좋으련만. “응? 응?” 이유정은 숫제 옆구리를 콕콕 찔러오기까지 했다. 그러나 곧이곧대로 말하기 약간 곤란한 질문이라 나는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어떻게 말해야 하나. 그때 나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줄 무언가가 공교롭게도 시야로 들어왔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조용히 전방을 가리켰다. “어?” 그러자 앞을 돌아본 이유정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곧 환하게 미소 짓는다. “도시다!” 초원의 가운데 서 있는 소 도시가 보였다. * 뜻밖이었다. 도시로 들어가자마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건 작은 도시에 우글우글 모인 성대한 인파였다. 오늘 오전 중으로 도착할 거라는 소식을 접했는지 정문을 통과한 순간 사방에서 박수와 함성이 쏟아졌다. 흡사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북 대륙에 남았던 이들도 서 대륙과 전쟁을 치렀지만, 엄밀히 말하면 동 대륙 구원에 참가한 이들이 더 고생한 처지이기는 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나, 이것 가지고 유세 떨 기분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서로 처한 상황이 다르기도 했고, 보상의 여부도 차이가 있으니까. 그러니 그냥 기분 좋게 받아들이면 되는 일이었다. 한 차례 환영이 끝나고 나서 이어지는 일은 일사천리였다. 애초 출발할 때 식(式)을 생략한 만큼 끝났을 때도 거창한 인사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동 대륙 생존자를 데려온 배경 설명과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만 강조한 후, 바로 해산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수천 명이 뿔뿔이 흩어지는 가운데, 나는 우리를 마중하러 나온 머셔너리 클랜원들과 간단한 해후를 나눴다. 특히 조승우는 약속을 지켰다며 사람 좋게 웃더니 내 손을 부드러이 이끌었다. 머셔너리 성에 풍성한 축제를 준비해놨다고. 기실 아무리 전쟁이 생각보다 쉬웠고, 또 돌아오는 길이 평화로웠다 하나, 어쨌든 밖보다는 집이 편한 법이다. 근 넉 달 동안 노숙과 야외 취식과 가까이했는데, 푹신한 침대와 따뜻한 음식이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말인즉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윽고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워프 게이트로 향하는 클랜원들을 보며 나는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가 정말로 악마를 이겼고, 또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을. * 돌아온 다음 날, 나는 잠에서 깨자마자 제 3의 눈으로 엑스칼리버를 관찰했다. 『엑스칼리버(Excalibur)』 1. 일반 설명. Ⅰ. 엑스칼리버는 아득한 옛 시절부터 등장한 전설의 성물입니다. ‘황금의 시대 때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상징하는 절대 선이요, 암흑의 시대 때는 어둠을 밝히는 한 줄기 찬란한 빛이었다.’ 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여러 시대를 풍미한 절대 성검(聖劍)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Ⅱ. 주인을 가리는 장비입니다. 주인 의식에 성공할 시 사용자가 사망할 때까지 귀속됩니다. 단, 엑스칼리버는 사용자가 자격을 상실했다고 판단했을 때 스스로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Ⅲ. 엑스칼리버는 선의 상징입니다. 세상에 출현한 이래 단 한 번도 악인의 손에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자격이 충분하더라도, 성향이 악에 가까울수록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2. 상세 효능. Ⅰ. 주인에게 무한한 힘을 부여합니다. 사용자의 근력이 무조건 6포인트 상승합니다. Ⅱ. 주인에게 더 높은 체력을 부여합니다. 사용자의 체력이 무조건 4포인트 상승합니다.(봉인 : 엑스칼리버의 칼집과 연동 시 봉인이 해제됩니다.) Ⅲ. 주인에게 더 신속한 민첩을 부여합니다. 사용자의 민첩이 무조건 2포인트 상승합니다.(봉인 : 니벨룽겐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와 연동 시 봉인이 해제됩니다.) Ⅳ. 엑스칼리버에 축적된 방대한 경험은 주인의 경지를 강제로 끌어올립니다. 사용자의 모든 고유, 특수, 잠재 능력이 무조건 2등급씩 상승합니다. Ⅴ. 엑스칼리버에 깃든 마력은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술 만큼 강대합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무시무시한 마력을 동반한 일격이 가능해집니다. Ⅵ. 엑스칼리버의 기운이 사용자의 마력 회로와 자동으로 연동됩니다. 사용자의 마력 흐름이 2.5배로 상승합니다. “후유.” 출력된 메시지를 읽고 있자 나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일 회차 때는 단편적으로 알려진 정보만 들었는데, 막상 실제로 보게 되니 정말이지 숨이 막힐 정도로 엄청나다. 그러나 읽을수록 갖고 싶다는 욕심보다는 안타까움만 커지는 기분이다. 사실 행군 내내 몇 번이고 읽었던 터라, 엑스칼리버가 왜 나를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지 짐작은 하고 있었다. 아마 일반 설명의 세 번째 조건 때문이리라. 내 성향은 질서, 선이 아닌 중용, 혼돈이니까. 혼돈은 악의 전 단계인 만큼 나를 싫어하는 것도 응당 무리는 아니다. 하기야 엑스칼리버가 보는 앞에서 원래 주인인 엘도라한테 심한 짓까지 했으니. 어쨌든 이해는 가지만 안타까운 심정이 가시는 건 아니다. 엑스칼리버가 나를 주인으로 인정하는 순간, 내 사용자 정보는 어마어마한 성장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근력이 105포인트로 상승하고, 제 3의 눈은 EX 등급을 찍게 되며, 마력 흐름은 최대 7배까지 상승할 것이다. 이쯤 되면 상세 효능 5번 조건이 덤이라고 생각될 지경이다. 이뿐인가? 현재 봉인된 효과까지 개방할 경우…. “젠장.” 에이, 이런 거 하나하나 생각해서 뭐하나. 척 봐도 나를 싫어하는 감정이 와 닿고 있다. 지금으로써는 손을 대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어쩔 수 없다. 당분간은 엑스칼리버가 스스로 진정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그때였다. 꼴깍꼴깍 입맛만 다시는 와중, 돌연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통신 구슬의 표면에 빛이 흐르고 있다. 바로 마력을 흘려 넣자, 영상이 나오기도 전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야!) 날카로운 고함이 터졌다. 누군가 하고 영상을 봤더니 이지적인 이목구비의 여인이 서서히 드러났다. 잔뜩 화난 얼굴을 한 이효을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오. 오랜만이다.” (오랜만은 개뿔이! 너 정말 죽을래? 아니, 나 죽으라는 거니?) “뭔 소리야? 왜 보자마자 화를 내는 건데.” (몰라서 물어? 동 대륙 생존자! 이래도 기억 안 나?) 아. “아차, 마침 연락 잘했네. 서 대륙과의 전쟁은 어떻게 된 거야?” (응? 어, 못 들었어? 돌아오면서 들었을 거로 생각했는데.) “이겼다는 말은 들었지. 그런데 자세한 이야기는 못 들어서.” (아…. 진짜?) 아니. 뻥이야. 이효을은 낯을 찡그리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뭐…. 그냥 말 그대로야. 너희가 떠나고 나서, 우리는 뮬에 틀어박혀 수성에 신경 썼지.) “별로 부딪치지는 않았다는 말이 있던데?” (맞아. 사실 막무가내로 달려들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정반대였어. 짜증 날 정도로 조심스럽더라? 오죽하면 우리가 성에서 나와 에워싸면서 공격도 해봤거든? 막상 그러니까 돌아보지도 않고 바로 후퇴하고.) “허….” 여기서 잠깐 추임새 한 번 넣어주고. (공격하려고 하면 후퇴하고, 성으로 돌아오면 살금살금 다가오고. 결국에는 계속 전진 후퇴만 반복하다가, 너희 전쟁이 끝난 날 갑자기 사라졌잖아. 좀 이상하지 않아?) “그러네. 이상하네.” (그렇지? 그리고 너희도 그래. 두어 번 크게 이기기는 했지만, 도망친 인원도 꽤 된다며?) “호. 정확하게 알고 있잖아?” (뭐 이 정도야. 하여튼 승리는 승리지만, 천사도 탐탁잖은 게 좀 있나 봐. 논의가 끝나면 너를 호출할 것 같으니까 준비하고 있는 게 좋을걸.) “그래. 알겠다. 어쩌면 내가 먼저 찾아가는 것도 좋겠지.” 나는 이만 끊겠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구슬로 스리슬쩍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효을은 갑자기 정색했다. 화제 전환에 성공했다고 생각했건만, 확실히 비비앙이랑은 다르구나. 결국에는 백기를 들고 말았다. “그냥 네가 좀 해주면 안 돼?” (싫어어어!) 빽 소리 지르는 이효을. 몹시 단호하다. 순간 단 호박인 줄 알았다. “나 바쁘다. 또 네 말마따나 천사가 호출 오는 즉시 급하게 움직여야 할지도 몰라.” (누구는 안 바빠? 그럼 애초 데려오지를 말던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 (아 몰라! 일이백 명도 아니고, 수천 명을 어떻게 받아들여?)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너 나 도와주기로 한 거 아니었어?” (웃기시네. 착각하지 마. 현재 수호자는 내가 아니라 너야, 너! 네가 데려왔으니까 네가 알아서 해!) 이효을은 어림도 없다는 듯 팔짱을 척 끼더니 콧방귀까지 탕탕 뀌었다. 호오. 이렇게 나오시겠다. “알았다…. 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조용히 중얼거리자 이효을이 흠칫했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불안해하는 음성이 들렸으나,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새 통신 구슬에 마력을 흘렸다. 그러자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어! 수현아?) 형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흠. 이건 일 회차 이후로 써먹은 기억은 없지만. 오랜만에 좀 해볼까? 우선은 시선은 사십오도 정도 내리고, 힘에 겨운 듯한 미소를 짓는다. 말은 약간 더듬으면서 질질 흘리는 게 잘 먹히더라. “어, 형…. 나야….” (그래. 네가 웬일로 통신을. 뭐야? 왜 그래?) “으, 응…?” (얼굴도 그렇고 목소리도 이상하잖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역시나. 형의 반응은 언제나 똑같구나. 그럼 이쯤에서 표정을 한 번 변화하자. ‘무슨 일 있니? 친구랑 싸웠어?’ 라고 걱정스레 물어보는 어머니께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라고 마지못해 웃는 아들의 느낌으로. “아니, 아니야…. 그냥….” (그냥?) “하하. 좀 바쁘네. 미안. 끝나면 다시 통신할게.” (끝나면? 뭐 하는데?) “아…. 동 대륙 생존자 데려왔잖아. 그 일을 좀 맡아야 할 거 같아서.” (응? 그걸 왜 네가 해? 중앙 관리 기구는 뭐하고?) “후유. 그게 아까 통신이 왔더라고. 자기네는 못 맡겠다면서 나보고 알아서 하라네.” (뭐!) 예상대로 형의 반응은 격했다. 은근슬쩍 한쪽으로 치워둔 구슬을 흘깃거리자 이효을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꼭 못 볼 걸 봤다는 모양새였다. (이효을이 그렇게 말했다고? 와, 그렇게 안 봤는데 상당히 웃긴 사람이네?) “아, 아니야.” (아니기는 뭐가 아니야? 수현이 너, 그냥 가만히 있어. 네가 갈 필요 없다.) “하, 하지만….” (됐고, 꼼짝도 하지 마. 형이 알아서 할 테니까.) “혀, 형?”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 형은 통신을 바로 끊어버렸다. 끝난 건가. 나는 바로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턱을 좌우로 움직인 후, 의자에 몸을 한껏 묻으며 구슬 안의 이효을을 응시했다. 이제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구경하기만 하면 된다. 잠시 후. (예. 중앙 관리 기구 수장. 접니다.) (어, 어. 김유현….) (실례군요. 함부로 이름 부르지 마시죠. 해밀 클랜 로드입니다.) (…….) 나는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효을과, 시린 냉기를 풀풀 날리는 형의 목소리를 실시간으로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긴말 않겠습니다. 방금 수현이한테 들었어요. 사실입니까?) (잠깐만. 일단 내 말도 좀 들어봐. 응?) (반말은 하지 않으셨으면 하는데. 아무튼, 그 일을 왜 수호자한테 떠넘깁니까? 사용자 이효을, 알 만큼 아는 사람 아닙니까? 심지어 수현이보고 알아서 하라고 했다면서요? 중앙 관리 기구가 존재하는 의의가 뭡니까 도대체?) (야! 그래!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누가 떠넘겼다는 거야? 어제 걔들 거두고, 먹이고, 재운 게 누구인 줄 알아? 나야! 떠넘긴 건 내가 아니라 김수현이라고!) (뭐라고요? 아니! 막 전쟁을 끝내고 돌아왔는데 일 좀 넘길 수도 있지! 왜 내 동생 기를 죽이고 그래요?) (하, 하!) ‘수현이가 네 목숨 살려준 건 기억도 안 나는 거냐.’, ‘당신이 이럴 거면 애초 수호자 맡게 하지도 않았다.’ 는 등, 한참 동안 서로 미주알고주알 여러 말이 오갔다. 그러나 결국 승리한 건 형이었다. 형이 작정하면 나도 말로 이길 수 없다. 그러니 이효을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알았어! 알았다고! 할게! 하면 되잖아!) 끝내 ‘중앙 관리 기구가 알아서 하겠다.’ 라는 답변을 얻어낸 형은, ‘앞으로 똑바로 하라.’ 는 말을 마지막으로 통신을 끝냈다. 나는 연초를 뻐끔뻐끔 태우고 있다가, 질렸다는 얼굴로 돌아보는 이효을을 향해 어깨를 으쓱 들먹였다. 그러자 이효을은 (개새끼.) 울분에 찬 한 마디만 남긴 채 통신을 뚝 끊어버렸다. ============================ 작품 후기 ============================ 네, 알겠습니다. 독자분들이 말씀해주신 부분은 조만간 적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일러스트 중 한 장이 6월 30일이 아닌, 더 빠르게 완성될 것 같은데요. 일러스트레이터 분께서 상당히 즐겁게 작업해주셔서 저도 기분이 좋네요. 우선 이번에 나오는 일러스트는,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예전에 그린 일러스트 중 하나를 새롭게 리메이크하는 겁니다. 즉 세라프, 고연주, 안솔, 한소영 중 한 명이 새로운 이미지로 나오는 것이죠. 김수현 + 화정은 그 후에 나올 예정입니다. :) 0915 / 0933 ---------------------------------------------- A Poisoned Chalice, Two. 전쟁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을 때는 몹시 기뻤지만, 무사히 돌아오고 시간이 지날수록 알 수 없는 불안심에 휩싸였다. 가슴 한 켠이 무겁다고 해야 하나. 이효을과 통신한 이후, 현실을 직시하게 됐다. 그냥 막연히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여기고 있었을 뿐, 하나씩 흐름을 맞춰보니 확실히 찜찜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악마가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거라는, 여전히 무언가 꾸미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한 놈도 남김없이 소멸시키지 않고서는 발 뻗고 잘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어서 뭐라도 해야지 않겠느냐는 강박 관념까지 생겼을 즈음, 공교롭게도 신전에서 거주민 전령이 찾아왔다. 천사의 호출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사용자 김수현.” 나는 듯 달려가 포탈을 통과하자, 고요한 음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소환의 방을 울렸다. 상당히 오랜만에 만나는 세라프였으나, 마음이 급했던 터라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서둘러 바닥에 주저앉았다. “회의는 끝난 건가?” “이번 두 곳에서 발발한 전쟁과 악마의 의도에 관한 논의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어제 종료됐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제단에 앉아 있는 세라프는 차분한 목소리로 회답했다. 은은한 은발을 양손으로 번갈아 가며 완만히 쓸어내리는 게, ‘진정 좀 하세요.’ 라고 부드러이 달래는 것처럼 느껴졌다. 숨을 살짝 들이켜 호흡을 추스르자, 한 쌍의 연록 빛 눈동자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우선 동 대륙 구원 임무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천사의 숙적인 바알과 벨제부브를 소멸시켜주신 점. 이번 일의 전권을 위임받은 대리인으로서, 모든 천사를 대표해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말한 세라프는 정말로 고개 숙였다. 어찌나 깊숙하게 굽히는지 제단에 이마가 닿을 듯 말 듯할 정도였다. 솔직히 가증스럽다. 천사가 나오지 않으려는 이유가 아마 이것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생각될 정도였다. 지금이야 인간을 깔아볼 힘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홀 플레인으로 나오는 순간 목숨, 아니 존재 자체가 위험해지니까. 중간 세계의 법칙은 천사라고 예외를 두지 않는다. “됐어. 그렇게까지 감사받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나저나 일의 추이는 어떻지?” “혹시 상황은 어느 정도로 알고 계십니까?” 세라프는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설명을 해주겠다는 듯이 운을 띄웠다. 그러나 이미 이효을에게 들은 터라 굳이 또 들을 필요는 없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남 대륙과 악마, 그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는 서 대륙의 움직임이었다. 세라프는 알겠다는 듯 끄덕이고 얌전히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까.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구원군이 돌아오는 동안, 몇 가지 경시할 수 없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경시할 수 없는 변화?” “Yes. 우선 우리 천사는 남 대륙 통제권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럼 남 대륙을 다시 관할하게 됐다는 건가?”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천사를 불신하는 경향이 여전히 남아 있었으니까요. 어쨌든 남 대륙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으나, 악마가 없는 틈을 타 일을 진행하는 건 쉬웠습니다. 결과적으로 심한 간섭으로 끊겼던 연결을 이었고, 빼앗겼던 천상도 복구했습니다.” “하지만 악마가 돌아올 가능성은, 아니. 이미 돌아오지 않았나?” 우리가 두 달에 걸쳐 북 대륙에 도착했으니 상대도 돌아가는 시간은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세라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희도 그렇게 생각하고 끊임없이 관찰했으나, 여태껏 악마는 볼 수 없었습니다.” “볼 수 없었다? 악마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한데, 비단 악마뿐만이 아니라 남 대륙 사용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부에 불과한 수백 명만이 따로따로 돌아왔을 뿐, 대부분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 의외라면 의외였다. 그렇게나 크게 졌음에도 본거지로 돌아가지 않았다? 게다가 꽤 공을 들여 가로챈 남 대륙도 너무 손쉽게 내줬다. “그 돌아왔다는 수백 명은 어때?” “예의주시한 결과, 딱히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패배의 충격으로 몰래 이탈한 무리가 아닐까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탈이라. 곰곰이 따져보면 별로 거슬릴 일은 아니다. 특히 일부 사용자의 이탈 소식은 연합군이 그만큼 흔들리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봐도 무방할 터. 하지만 과연 그럴까? 예전에도 한 번 생각한 적 있지만, 사탄의 무서운 이유는 여러 안배의 씨앗을 차근차근 뿌렸다가, 때가 되면 한꺼번에 정신없이 몰아치는 점에 있다. ‘설마?’ 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함정에 걸리는 순간이다. 그러니 ‘상대가 흔들리고 있다.’ 고 단순하게 여기는 것보다는, 모종의 노림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설령 기우라 할지라도. …문제는, 그렇게 생각해도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점이다. 아무튼, 하나가 아니라 몇 가지 있다고 했으니 계속 물어볼까. “서 대륙은? 들어보니 주야장천 미끼 짓만 하다가, 동 대륙 전투가 끝난 날 갑자기 사라졌다고 하던데.” “아.” 문득 세라프가 약한 탄성을 터뜨렸다. “사용자 이효을이 추적한 결과, 칠흑의 숲까지는 후퇴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지점 이후로 모든 흔적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그게 말이 되나? 공중으로 날아간 것도 아닐 테고.” “워프.” “응?” “워프 게이트를 활성화했다면 가능합니다. 주요 관건은 메모리아 스톤의 유무와 워프를 활성화할만한 지식뿐. 수현은 이 사건에 관해서 짚이는 게 없으십니까?” “!”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아차 하고 말았다. 동시에 하나의 가능성이 뇌리를 스쳤다. 세라프의 말대로 메모리아 스톤과 관련 지식만 있다면 워프 게이트 활성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헬레나도 비슷하게 말했고, 실제로 엘도라를 죽이기 직전 타나토스와 악마들도 어느 순간 넘어오지 않았는가. 또한, 우리가 도착하기 전까지 도시 대부분을 점령한 상태였으니 메모리아 스톤도 충분히 확보했을 터. 단지, 워프 게이트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양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말인즉 세라프의 추측이 성립되려면 서 대륙에도 메모리아 스톤과 관련 지식 보유자가 있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악마 군주 중 보이지 않은 놈이 있었어.” “악마 군주 말씀이십니까?” “그래. 딱 한 놈. 세라프. 악마 군주 정도면 워프 게이트를 활성화할 능력이 있나?” “…저희가 할 줄 아는 거라면 악마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세라프는 처음으로 근심 어린 기색을 보였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서 대륙과 악마가 연관이 있다고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후. 놈들의 움직임을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푹 한숨을 내쉬며 흘깃거렸으나, 세라프는 송구하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움직임을 찾지 못했다는 소리다. 하기야 악마가 바보가 아닌 이상, 당연히 차단해놨을 것이다. “그리고 타나토스 님 말입니다만….” 그때 세라프가 조심스레 말을 흐렸다. 아마 내 눈치를 살피는 것 같은데, 상관없으니 계속 말하라는 뜻으로 턱을 까닥였다. “실은 타나토스 님의 생존이 가장 걱정입니다. 죽음의 신의 출현은 저희도 미처 예상치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물론 너희 불찰이기는 하지만…. 뭐, 됐어. 이제 타나토스도 큰 문제는 안 되니까.” “아닙니다.” “?” “타나토스 님을 끌어들인 것만으로도 악마는 무수한 변수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수현은 이 점을 항상 경계하고 주의해야 합니다.” “글쎄다. 하지만 너희도 들었으면 알 텐데?” 물론 타나토스는 강했지만, 결국 이긴 건 나였다. 게다가 여섯 개의 조각 중 세 조각을 소멸시켰으니 예전과 같은 힘은 내지 못할 거고. 또 나타나면 그때는 확실하게 이길 자신이 있다. - 이 멍청이가? 그냥 조용히 새겨들어. 라고 생각했을 때, 화정이 엄정한 음성으로 경고했다. - 아무리 힘이 떨어졌다고 해도 타나토스는 타나토스야. 나와 같은 격으로 취급받는 악명 높은 죽음의 신이라고. 걔가 나도 너도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힘을 회복하면 어쩔래? ‘그, 그건.’ - 물론 네 생각대로 예전과 같은 수준으로 회복하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너를 기준으로 잡지 마. 막말로 너도 내가 없으면 현 상태의 타나토스도 상대하기 쉽지 않을걸? ‘…….’ 부, 부인할 수 없구나. 기실 타나토스에게 일격을 먹일 수 있었던 것도 화정을 기반으로 한 열화 검 때문이었으니까. - 방심하지 말라는 소리야. 하여간 너는 이상하게 신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니까? 정작 서너 급이나 떨어지는 악신한테 신 나게 털렸으면서. ‘알았어. 주의할게.’ 가만히 생각해보니 화정의 말도 일부 맞는 것 같아 반성하기로 했다. 아니,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방심은 금물이라고 생각했던 주제에 나도 모르게 느슨해진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수현은 모릅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힘인지…. 그래서 처음에도 그렇게 말렸는데….” 세라프는 살짝 눈을 깐 채로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흠. 네가 그렇게나 말하는 것 같으면…. 뭐, 확실히 경계하기는 해야겠네.” 그러나 태도를 고치니 금세 입을 집어넣고 눈을 치떴다. 꼭 ‘네가 웬일입니까?’ 라고 놀라는 것 같아서 기분 나쁘다. “맞습니다. 수현은 평소는 몰라도, 가끔 이상할 정도로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그래?”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저번에 한 번 말씀하신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수현은 제로 코드에 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제로, 코드?” 갑자기 느닷없는 단어가 나왔지만, 어쨌든 잘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천계의 보호 장치, 그리고 작은 구슬이라는 것 정도? “제로 코드는 사용자가 바라는 모든 걸 이루어주는 만능의 결정체.” 글쎄. 뭐가 만능이라는 건지 모르겠다. 거주민을 지구로 데려갈 수 있게 못 하는 건 좀 우습잖아? 뭐, 한계가 있다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그러나 화정 님이나 타나토스 님 정도 되는 신은, 마음만 진심으로 먹는다면 제로 코드의 명령에도 일부나마 저항할 수 있습니다.” “뭐?” 귀가 번쩍 뜨였다. “가령 수현이 제로 코드로 보통 인간의 죽음을 소망할 경우, 그 인간은 즉시 사망할 겁니다.” “잠깐. 그럼 타나토스는 설마 제로 코드의 명령이 듣지 않는다는 거야?” “그건 아닙니다. 일부나마 저항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항….” “결과는 똑같지만, 그 결과에 이르는 시간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 그러니까 명령의 결과는 똑같이 나오나, 걸리는 시간은 차이가 난다는 건가. 그래서 저항이라고 말한 거고. 사실 제로 코드가 얼마나 굉장한지 모르니 확 와 닿지는 않지만, 세라프가 하고자 하는 말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신은 결코 얕볼 존재가 아니다. 애초 처음 말하기도 했다. 타나토스로 인한 변수를 조심하라고. 결국에는 몇 분에 걸친 설교를 들은 후, 간신히 초점을 본론으로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이야기는 끝난 상태였다. 아니, 더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옳으려나.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는 이상, 남은 일도, 해야 할 일도 하나였다.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세라프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나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이제야 중앙 대륙인가.” “더 늦기 전에 중앙 대륙을 공략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서로의 목소리가 겹친 찰나, 세라프의 말이 더 길게 이어졌다. “상황이 상당히 애매합니다. 악마가 현재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 중앙 대륙을 선점하려 하거나, 아니면 그러는 척하면서 북 대륙을 기습할 수도 있겠지요.” “알고 있어. 염두에 두고 진행할 거야.” “그렇습니까. 그럼 저희가 따로 도와드릴 일은 있습니까? 저번처럼 메시지를 띄운다거나….” “아니. 이번에는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저번에 천사의 힘을 빌린 건 명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아무 상관 없는 동 대륙을 구원하러 가는 게 아닌, 또 한 번 새로운 대륙을 개척하러 가는 거니까. 안 그래도 비밀 도서관 개방 이후 성과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을 텐데, 유적에 목말라하는 사용자라면 원정 발표에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다. 게다가 두 전쟁의 승리로 사기도 한껏 높아져 있으니 나름 적절하다면 적절한 시기였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바로 자리를 털고 돌아섰다가, 걸음을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온 이유가 또 하나 있었지. “세라프. 현재 내 GP가 얼마나 되지?” “아,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꽤 될 것 같은데.” “Y, Yes. 76,315,964 GP…. 어마어마합니다.” 세라프는 감탄했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악마는 말할 것도 없고, 임무 성공 보상에서 총대장 역할로 받은 GP도 상당하다. 무엇보다 타나토스를 홀로 상대했다는 점에서 큰 역할 점수(%)를 받아 GP를 쓸어 담을 수 있었다. 이렇게 칠천만이 넘는 GP가 모였으나 별로 놀랄 이유는 없다. 제로 코드를 획득했을 때 받은 GP는 억 소리가 나왔으니. “사용자 상점 좀 열어주겠어?” “알겠습니다.” 잠시 후, 눈앞으로 익숙한 창이 출력됐다. [……. 『아르고스의 눈(1,400,000 GP)』 『모이라이의 기념품(45,000,000 GP)』 『앙칼라의 거울 방패(700,000 GP)』 『라크리마의 화살표(35,000,000 GP)』 『성흔의 증표(500,000 GP)』 『시두스의 예언(66,666,666 GP)』 …….] “흠….” 흥미를 끄는 것은 많지만 정작 내가 필요한 건 보이지 않는다. “있잖아, 세라프.” “말씀하십시오. 특별히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사용자의 성향을 질서 쪽으로 바꿀 수 있는 물건은 없나?” “잘못 들었습니다?” “아니면 심하게 삐친 건방진 칼을 강제로 굴복시킬 수…. 아니. 기분을 달래줄 수 있는 거라던가.” “…네?” 세라프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 작품 후기 ============================ 게헨나, 수나의 기록 영상 반응 외전은 이번 주 안에 외전 형식으로 적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6월 27일(토요일)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왜냐면 원래 오는 6월 26일(금요일)에 조아라, 그리고 다른 회사 분들과 비주얼 노벨 2차 미팅이 잡혀 있어서 하루 휴재할 예정이었거든요. 그러나 해당 외전은 정상 연재보다 분량이 적고, 또 저도 편하게 적을 수 있을 것 같으니 비교적 빠른 시간에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휴재하는 것보다 외전이라도 올리는 게 낫다는 생각이…. ^_ㅠ 아, 일러스트는 현재 채색 단계에 있습니다. 어제 말씀드렸듯이 세라프, 고연주, 안솔, 한소영 중 한 명입니다. 저도 중간중간 그림을 보고 있는데, 여태껏 나온 일러스트 중 가장 예쁜 것 같아요. :) 0916 / 0933 ---------------------------------------------- A Poisoned Chalice, Two. “자, 여기요.” 사용자 상점에서 구입한 물건을 뭉텅이로 건네자, 고연주는 냉큼 채가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속박의 볼라 입니다. 저번에 하나 주지 않았던가요?” “네. 알아요. 그런데 뭐 이렇게 많이 사셨어요? 싼 맛에?” “싼 맛이라니요. 그거 하나당 들어간 GP만 칠십오만입니다.” 그러자 나른하던 고연주의 두 눈이 단박에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그럼 총 얼마예요? 하나, 둘, 셋…. 열. 칠백오십만 GP?” “하나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요. 그리고 지금이야 저와 고연주가 주기적으로 관리하고 있지만, 곧 중앙 대륙 공략 발표가 있지 않습니까?” “아~. 그러네요. 원정에 나가면 관리가 힘들어지니까, 애초 이것들로 꽁꽁 묶어두시겠다?” “그렇지요.” 고연주는 이해했다는 듯이 끄덕거리며 싱겁게 미소 지었다. 세 가닥 긴 끈의 끝에 달린 추를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두 젖무덤 한가운데 오목하게 패인 선 사이로 쏙 집어넣는다. 저 여인은 심심하면 가슴골을 주머니로 쓰는 듯싶다. 이윽고 고연주는 문을 나가기 직전, 아차 하며 반쯤 몸을 돌렸다. “아, 수현? 천사의 반응은 어떻던가요?” “썩 신경 쓰일만한 말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흐응?” “바알과 벨제부브를 처리해줘서 고맙다…. 이렇게만 말하더군요.” 고연주는 오묘하게 웃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지 입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그저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끝내 아무 말도 않고 방을 나섰다. 이윽고 조심스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 나는 한숨과 함께 책상 한 켠에 놓인 엑스칼리버를 바라봤다. 햇빛을 반사하는 검신은 눈부시게 아름다우나, 여전하다. 곧 죽어도 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 살이 따가울 만치 무형의 날을 잔뜩 세우고 있다. 흡사 몸을 웅크려 가시를 빳빳이 세운 고슴도치를 보는 것 같다. 결과적으로 사용자 상점에는 자아를 가진 장비의 마음을 돌릴만한 물건은 없었다. 물론 내 성향을 바꿀 수 있는 품목도 찾지 못했다. 딱 하나 가능성을 본 게 있다면 엑스칼리버를 강제로 타락시키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조차 사정을 들은 세라프가 반대했다. 뭐라더라? 그 정도로 선 성향이 강한 장비는 스스로 타락을 받아들이지 못할 거라던가? 어설프게 시도했다가는 백이면 백 파괴될 거라고.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꾸준하게 선행을 쌓고 성향을 변경하는 게 그나마 가능성 있을 거라고. 하지만 말을 하면서 계속 나를 흘깃거렸던 걸 보면 아마 ‘그냥 포기하세요.’ 라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제 그만 인정하지 그래? 너도 알잖아. 엘도라보다 내가 더 주인에 적합하다는 걸.” 기껏 말을 걸었으나 엑스칼리버는 아무 반응도 않는다. 아니, 날카로운 기운만 더 심해졌다. 스리슬쩍 손을 뻗으려니 물길을 거스르는 듯한 저항이 느껴질 정도였다. 순간 한 달 동안 똥통에 처박아 놓을까 고민했지만, 간신히 참고 손끝으로 순백의 몸을 느긋이 쓸었다. 흡사 여인의 허리선을 내리훑듯 부드럽게. 훑을수록 바늘에 찔리는 것 같은 통증이 손바닥에 올올이 전해졌으나, 개의치 않고 칼자루를 잡고 올려 엑스칼리버를 가까이했다. 웅웅! 그렇게나 싫은지 칼날이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가히 논개와 비견될 정도의 절개로다. 실로 감탄을 금치 못하겠구나. “뭐, 좋아.” 이렇게 된 이상, 끙끙 싸매기보다는 그냥 즐기는 게 낫겠다. 빅토리아의 영광처럼 온순한 칼도 좋지만, 엑스칼리버도 나름 괜찮지 않으려나. 반항을 보는 맛도 있고, 강제로 함락하는 재미도 있고 말이지. 사실 고작 칼 하나한테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좀 웃기기는 하지만, 어쨌든 좋다. “기대하겠어. 과연 네가 언제까지 버틸지 말이야.” 나는 후후 웃으며 눈앞의 새하얀 나신을 살짝 핥았다. 우웅…. 우우, 우웅…. 엑스칼리버는 철천지원수이자 악당한테 당해버린 여주인공이 흐느끼듯 처연한 검음을 흘렸다. * 예상대로였다. 중앙 관리 기구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결과, 북 대륙의 반응은 뜨거웠다. 안 그래도 약간 찜찜했던 전쟁으로 입맛만 다시고 있었는데, 적절한 시기에 중앙 대륙 공략 계획이 발표되니 쌍수를 들고 환영한 것이다. 거기다 이번에는 여느 원정과는 다르게 참가 조건을 대폭 확대한 것도 단단히 한 몫 했다. 아틀란타에서 양껏 꿀을 빨았던 만큼, 장밋빛 꿈에 젖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여러 클랜 로드가 모인 정식 회의도 순풍에 돛단배처럼 순조롭게, 화기애애하게 풀려나갔다. 애초 이 년 차 이상의 사용자는 무조건 참가하게 하겠다고 약속한 만큼, ‘우리도 참가하겠다.’ 나 ‘너희가 양보해라.’ 같은 건 문젯거리도 되지 않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현재 아틀란타를 이끌어가는 클랜은 전부 강철 산맥 공략 경험이 있는 곳이다. 이러쿵저러쿵할 것도 없이 ‘공략 방침은 강철 산맥 때와 똑같이 하겠다.’ 라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악마, 서 대륙, 남 대륙을 염두에 둬야 하는 만큼 아주 똑같지는 않았다. “하나하나 따져보니 저희가 썩 유리한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한 로드, 성현민이 이제껏 열심히 필기한 기록을 가지런히 정리하며 말했다. “괴물은 그렇다 치더라도…. 본거지인 북 대륙과 아틀란타는 말할 것도 없고, 공략 루트를 이어주는 보급 요새의 방비도 신경 써야 하니까요. 이렇게 되면 우리 전력은 자연스레 분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적은 마음만 먹으면 한 곳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을 겁니다.” 성현민의 의견은 구구절절 옳다. 사실 처음 회의가 시작됐을 때 ‘전 인원이 한꺼번에 같이 가자.’ 는 의견도 있기는 했다. 장점은 하나. 돌발 상황 때 즉시 전력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이번 원정은 그 어느 때보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왜냐면 중앙 대륙을 돌파하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약속의 신전이 있는 지역에 도착하고 나서가 더 문제였기 때문이다. 법역을 깨트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림자 지대, 검의 지대, 철혈의 지대, 신성 지대, 시험의 지대…. 일 회차 때도, 최정예 사용자 일만 명이 열여덟 번이나 시도해서야 간신히 약속의 신전 바로 앞까지 공략하지 않았는가. 단순하게 발견하는 것만 해도 반년이 걸린 곳이니. 말인즉 단기전이 아닌 장기전이 될 것이 자명하니 이번 원정만큼은 중간 보급이 필수였다. 그래서 강철 산맥 공략 때처럼 요새를 세우자는 말이 나온 거고. “그래요. 강철 산맥 때와 상황이 다르니 확실히 약점이 될 수 있겠죠. 하지만 그래서 머셔너리 로드가 그러셨잖아요? 워프 게이트를 이용하자고.” 선율이 검지로 턱을 톡톡 튕기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성현민의 의견에 내가 내놓은 보완책은 우리도 워프 게이트를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세라프에게 이야기 들었을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적들이 워프를 활용하고 있다면, 우리도 똑같이 활용해주면 된다. 물론 현재 헬레나가 없기는 하지만, 근원이 있으니까. 확인한 결과 ‘할 수 있습니다.’ 라는 아주 명료한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이 계획이 실현되면 상황은 우리에게 상당히 유리해진다. 기실 누가 먼저 중앙 대륙에 도착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적은 이번 전쟁의 여파로 전력상 열세에 놓였으니 행동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 북 대륙이 공략을 완료하고, 제로 코드를 획득한 후 돌아갈 때를 노려 기습하지 않을까.(제로 코드는 움켜쥐었다고 끝이 아닌, 소환의 방에서 천사를 통해서만 발동할 수 있다.) 약속의 신전쯤 되는 유적이면 우리 쪽 피해도 만만찮을 테니까. 그러나. 가까운 곳에 워프 게이트를 설치하고, 공략이 끝나자마자 그곳으로 쏙 들어가버리면 어떻게 될까? 아마 닭 쫓던 개 신세가 될 것 같은데. “정말 거리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면 저는 머셔너리 로드 의견에 손을 들고 싶네요. 왜냐면 인원이 많으면 통제하는 것도 짜증 나고, 무엇보다 먹고 자는 것도 일이거든요?” 선율이 어깨를 으쓱거리자 성현민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러나 무어라 채 말하기도 전, “아, 돌발 상황이요? 뭐가 문제예요? 워프 게이트 설치는 몇 분이면 충분하다고 하셨고, 그럼 적이 나타나는 즉시 통신만 때리면 될 텐데. 말인즉 포탈만 있으면 바로 지원할 수 있잖아요? 경계만 잘하면 된다는 거죠.” 선율의 말이 길게 이어졌다. “또 맡은 지역 공략만 끝내면 다른 원정대가 공략하는 동안 쉴 수도 있잖아요. 원정 중에 체력 안배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그럼 돌발 상황 때 더 쌩쌩하게 대처할 수도 있겠죠?”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니 그러네. 한꺼번에 간다? 그럼 모두 지쳐 있을 때 불시에 기습당하는 상황이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겠네.” “지금 마법의 탑 로드는 너무 극단적인 예시만.” “아무튼, 저는 이 무수한 장점을 포기하기가 싫네요.” “…뭐, 알겠습니다.” 결국에는 선율의 속사포 공격을 이기지 못한 성현민이 쓰게 웃었다. 사실상 백기 선언이었다. 기실 참석한 클랜 로드 중 과반수가 선율의 의견에 공감하고 있는 터라, 더 끌어봤자 회의만 지루해질 뿐이었다. 이리하여 성현민이 뜻을 꺾는 순간을 기점으로, 회의는 잠정적으로 끝을 알렸다. 잠시 후, 자리가 파하는 분위기를 느낀 듯 곳곳에서 여러 말이 나오기 시작한다. “정리하면 강철 산맥 때 계획을 기본 골자로…. 아, 그러고 보니 메모리아 스톤이 문제네요. 머셔너리 클랜이 가지고 있다는 하나로는 부족하지 않을까요.” “아마 구 북 대륙 소 도시에서 공수할 것 같습니다.” “참가하지 못하는 사용자들이 반발할 수도 있어요.” “어쩔 수 없죠. 양해를 구하는 수밖에. 사실 이건 중앙 관리 기구가 직접 나서주는 게 모양새가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왼쪽에 앉은 한소영과 형이 서로 쳐다보며 끄덕거리는 가운데, 조용히 눈치만 보고 있던 이효을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흠.” 그러나 기침 소리가 워낙 작아서일까. 누구 한 명도 돌아보지 않고…. “흠흠!” 아닌데? 방금은 분명히 들렸는데? 일부러 무시하는 거라고 느꼈다면 내 착각인가? “후유. 그나저나 준비도 걱정입니다. 접때 보니 요새 건설도 쉬운 일이 아니던데요.” “자재 확보도 그렇지만, 건축 관련 기술자를 확보하는 것도 문제지. 강철 산맥 때는 이 문제로 경쟁까지 했고, 암암리에 갈등도 있었잖수.” “그럼 차라리 이것도 일임하는 게 어떨까요? 중앙 관리 기구가 대표로 자재와 기술자를 확보한 후, 각 원정대에 공평하게 배분하는 겁니다.” “오? 캬, 그럼 우리는 자금만 보내면…. 아니, 그것참 공평한데. 정말 좋은 생각이네. 그렇게 합시다!” 이어서 오른쪽에 앉은 서지환과 김덕필이 활짝 웃으며 끄덕거렸다. …와, 이건 좀 너무 한다. 특히 서지환은 자기가 상인 조합 클랜 로드라고…. 아니, 그전에 멍한 얼굴로 엿듣고 있던 이효을의 얼굴빛이 핼쑥해졌다. “저…. 잠시만요?” 숫제 손까지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놀라울 만치 그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번 원정만큼은 불필요한 갈등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저기요?” “백 번 천 번 옳으신 말씀이요. 시작하기도 전에 삐거덕거리면 될 일도 안 될 테니.”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중앙 관리 기구는 현재 동 대륙 사용자들을 받아들이는 일 때문에….” 이효을은 필사적으로 말을 꺼내고 있었지만, 왜인지 어느 순간 웅성거림이 높아진 탓에 자연스레 묻히고 있는 듯했다. 잠시 후, 알아서(?) 협의를 끝냈는지 장내의 모든 시선이 내게로 슬쩍 쏠렸다. 신기한 건, 나를 흘깃거리면서도 여전히 어수선한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기세에 밀려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에…. 뭐…. 혹시 이번 계획에 더 궁금하신 게 있으신 분 계십니까?” 아니요! 뭐냐. 왜 갑자기 입을 모으는 거냐.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회의를 끝내…. 도 될까요?” 네! 그렇게 동시에 합창하더니 이내 전원 한 마음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누가 잡을세라, 약속이라도 한 듯이 우르르 문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기백 명 가까이 차 있던 회의장은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아 텅 비어버렸다. 이효을은 울음을 터뜨렸다. ============================ 작품 후기 ============================ 약속의 신전에 도착할 때까지 최대한 빠르게 진도를 뽑겠습니다. 아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 0917 / 0933 ---------------------------------------------- A Poisoned Chalice, Two. 시간을 돌려, 동 대륙 전투가 끝나고 사흘 후. 엘도라가 눈을 떴을 때, 가물가물한 시야로 들어온 건 초록색 숲의 풍경이었다. 물속에 있는 것처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흐릿하지만, 본능에 따라 눈을 깜빡일 때마다 일렁거리던 초점이 조금씩 잡힌다. 깨어난 귀는 사위로 수군거리는 소음을 들었고, 동시에 머리가 부서질 듯한 강렬한 현기증이 찾아왔다. “윽….” 엘도라는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 애썼다. 그러나 메마른 신음만이 흘러나올 뿐, 온몸에 힘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감각이 없다고 해야 하나. 어찌어찌 뒤척거리는 것 같기는 한데, 자기가 몸을 움직이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결국에는 눈을 도로 질끈 감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마가 찢어질 것 같던 현기증이 잠잠해지고, 몸의 감각도 조금이나마 돌아왔을 때. 그 시간 동안, 엘도라는 응당 가져야 할 의문을 차례대로 떠올렸다. 이곳은 어디인지. 동료는 어디 있는지. 전쟁은 어찌 됐는지. 또, 자기는 어떻게 살아났는지.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다. 엘도라는 살며시 눈을 뜨며 습관처럼 땅을 더듬었다. 그러나 엑스칼리버가 잡히지 않아 힘겹게 상반신을 일으켜 두리번거렸다. 사방이 온통 숲인데도 주변은 후덥지근했다. 게다가 비린내 섞인 악취가 코를 찌를 정도로 진동하고 있었다. 엘도라는 그제야 여기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어둑한 하늘 아래, 곳곳에 흩어져 신음하는 사용자들이 한 명씩 차츰차츰 밟히기 시작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죽은 듯 누워 미동도 않는 사내였다. 특이한 건, 복부가 살덩이째 뭉텅 베어져 있다는 것이다. 치료는 받은 듯 출혈은 멈췄으나, 장기가 훤히 보일 정도였다. 그 옆에는 한 여인이 한 손으로 눈을 감싼 채 소리 없이 오열하는 중이었다. 남은 손으로는 허공을 마냥 휘젓는 게 꼭 맹인을 보는 듯하다. 멍하니 보고 있던 엘도라는 순간 숨이 턱 막혀옴을 느꼈다. 그러나 비로소 직시한 현실은 아직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왜냐면 저 한 곳만이 아니라, 인근 전체가 비슷한 상황이었으니까. 부상당한 사용자는 연신 앓는 침음을 흘리는 중이고, 그나마 몸은 건사한 사용자는 침통한 얼굴로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잠시 후, 망연히 눈을 돌리던 엘도라의 두 눈이 갑자기 화들짝 치떠졌다. 요요한 달빛이 드리운 숲의 한쪽에 익숙한 거한이 폐인처럼 주저앉아 있다. 몇 년을 봐왔는데 누구인지 모를 리가 없다. ‘심판의 기사’ 에드워드였다. 한데, 두 팔 중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왼쪽 어깨서부터 깔끔하게 절단돼 있다. “에드…?” 엘도라는 목이 메어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눈앞의 광경을 꿈이라고 믿고 싶은 걸까. 눈을 꾹 감았다가 뜨고, 또 한 번 감았다가 떴다. 그러나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직 잘 모르나, 그래도 눈치라는 게 있다. 굳이 듣지 않아도, 축 처진 음울한 분위기로 미루어보아 전쟁의 끝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졌다. 남 대륙은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엘도라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절망과 사무칠 정도의 죄책감을 통감했다. 사지가 무참히 찢겨나갔던 나탈리, 갑자기 나타난 기사 무리에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장면 등등. 생각하기 싫은 기억들이 뇌리에 아스라이 스쳤다. 울 힘만 있다면 목놓아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 깨어났나?” 그때 약간 먼 곳에서 건들거리는 소리가 흘렀다. 정수리에 뿔이 돋은 건장한 체격의 악마가 걸어오고 있었다. 아스타로트였다. “설마 했는데, 정말 살았어? 이야, 그 양반 진짜 괜히 죽음의 신은 아닌가 봐?”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스타로트가 다가올수록, 엘도라는 돌연히 분노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치미는 걸 느꼈다. 껄렁하게 걸어오며 씩 웃는 게 흡사 조롱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난 기분은 어때…. 컥! 무슨 짓이야?” 느긋하던 음성이 금세 탁해졌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가만히 있던 엘도라가 득달같이 달려와 멱살을 틀어쥔 것이다. “감히 벌레 새끼가….” 찰나의 순간, 아스타로트의 눈동자가 진한 불꽃을 튀겼다. “어째서야!” 그러나 엘도라는 더욱 힘주어 상대를 들어 올렸고, “어째서냐고!” 한 번 더 빽 소리 지른 순간, 아스타로트의 눈매가 천천히 누그러졌다. “너희도 병사가 있었잖아! 일만을 넘는 마족 전사가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어째서 도와주지 않은 거야!” 엘도라는 숫제 눈물까지 글썽거리고 있었다. “허, 참….” 아스타로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숨을 흘렸다. “그놈들은 따로 할 일이 있었으니까. 아무튼, 우선 정신 좀 차리지 그래?” “뭐?” “눈 부라리지 마라. 너희만 당한 게 아니니까. 거의 죽었던 널 데리고 도망치는데 우리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기나 해?” “거의…? 죽었던…?” 그 순간이었다. “!” 자기도 모르게 말을 따라 했던 엘도라는 갑자기 깜짝 놀라며 “힉!” 딸꾹질을 했다. 풀썩! 이어서 다리 힘이 풀린 듯이 털썩 엉덩방아를 찧는다. “어이? 어이! 왜 그래?” 아스타로트의 외침이 이어졌다. 그러나 엘도라는 반응은커녕, 두 손을 엇갈려 팔을 꽉 움켜쥐었고, 곧 사시나무 떨 듯 덜덜거리기 시작한다. 혼란해 하던 얼굴빛은 어느 순간 공포에 질린 기색이 역력하다. 왜냐면, 비로소 떠올렸으니까. 자신이 기억하는 전장 최후의 순간을.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를 시종일관 갖고 놀던 북 대륙의 사내를.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상대였다. 힘도 엇비슷하고, 검술은 밀리지 않으며, 속도는 자신보다 훨씬 빠르다. 특히 한 번 칼을 부딪칠 때마다 엑스칼리버가 위축되는 느낌은 지금 생각해도 오싹 소름 끼친다. 그래, 그야말로 완벽하게 꺾였다. 처음에는 나탈리의 죽음으로 이성을 잃어 달려들었지만, 이후 단 한 번도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그때그때 맞춰서 검을 휘둘렀을 뿐, 전투 내내 압도적으로 밀리기만 했다. ‘El Doradooooooooo!’ 그뿐일까. 자신이 필생의 힘을 들인 능력을 불타는 검으로 가볍게 깨트리더니, 기어코 장난감 취급까지 당했다. 장비가 하나씩 강제로 벗겨지며 엉엉 울면서 잘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빌던 치욕은 떠올린 순간부터 잊히지 가 않는다. 결국에는 복수도 못 하고 쫓겨 도망치고 말았다. 사용자가 된 이후, 항상 승승장구만 하던 엘도라로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굴욕이요, 상처였다. 게다가 앞서 느꼈던 책임과 죄악감까지 더해지니, 삽시간에 미치기 직전까지 내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겉은 강해 보일지 몰라도, 속은 영락없는 소녀였으니. “힉…! 힉…!” 기억이 선명해질수록 눈알은 급격히 충혈되고, 딸꾹질도 점차 강도가 심해진다. 눈매는 더 이상 확대할 수 없을 만큼 커졌으며, 쩍 벌어진 입은 고인 침을 뚝뚝 떨구는 중이다. 온몸을 웅크린 채 무섭게 떠는 모습은 흡사 병동에 갇힌 정신병자를 보는 듯하다. 그렇게 홀딱 발가벗겨진 채 희롱당하다가, 끝내 등에 칼이 꽂히고 내부가 쾅 폭발할 때의 끔찍한 느낌까지 기억해낸 순간, “끄으으으으으으으!” 엘도라는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찢어지라 잡아당겼다. 그때였다. “엘도라?” 급하게 달려오는 소리와 잔잔한 음성이 겹쳤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폭발 직전까지 갔던 엘도라의 상태가 덜컥 멈추더니, 떨림이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멜…. 멜리너스…?” 엘도라가 한껏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잠시 후, 흰 수염을 늘어트린 노인이 가까이 다가와 후유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깨어나셨군요. 정말로, 정말로 다행입니다.” “멜리너스…. 멜리너스…!” 엘도라가 부모 찾는 아이처럼 팔을 뻗자, 멜리너스는 부드러이 달래듯이 그 손을 마주 쥐었다. 이윽고 차가운 뺨에 거무스름한 눈물이 조용히 흐르기 시작한다. 정작 자기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지만. “저, 저 때문에….” “아니요, 아닙니다. 절대로 엘도라의 잘못이 아닙니다. 잘못이 있다면 우리 모두의 잘못이겠지요.” “하지만…. 제가, 제가….” “괜찮습니다. 엘도라?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시지요. 자, 이쪽으로….” 멜리너스는 흐느끼는 엘도라를 부축하며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이내 조금씩 멀어지는 여인에게서 아스타로트는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물론 대 악마가 안타깝다는 감정을 느낄 리는 추호도 없다. 단지 아까 흘렀던 거뭇한 눈물과 시꺼멓게 죽은 눈동자를 보고 흥미로워하고 있을 뿐. “인간은 볼수록 참 신기하다는 말이야.” 그때 누군가가 맑은 목소리로 싱글거렸다. 아스타로트는 흠칫 옆을 돌아봤다가, 어느새 나와 있는 타나토스를 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렇지…. 요. 고작 한 번 졌다고 저렇게까지 망가졌으니까, 요. 한심하죠.” “어설픈 존대는 집어치우자고. …어쨌든, 맞아. 너희 동맹 상대 잘못 고른 거 아니니? 차라리 걔로 하지 그랬어. 그, 누구라고 했지?” “김수현. 우리도 할 수만 있다면 그놈과 손을 잡았을걸? 한데 그놈도 좀 웃기는 게, 우리를 처치하고 천사까지 상대하려는 것 같아서. 쯧.” “킥!” 아스타로트가 바로 말을 놓으며 혀를 차자, 타나토스는 소리 내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킥킥거리더니 힘껏 기지개 켜며 말을 잇는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응?” “응? 이 아니지. 지금 굉장히 심각한 상황인 거 알고는 있니?” “…….” “그 대계의 예언…. 아 몰라. 아무튼, 나는 여섯 조각 중 세 조각밖에 못 찾았고. 너희도 여섯 중에 절반이 결딴났고. 악마 군주는 말할 것도 없네. 그리고 남 대륙은~. …보다시피 저렇고.” “글쎄. 모르겠는데.” 간단하고 담담한 음성에 타나토스가 옆을 흘끗 흘겼다. 아스타로트는 양팔을 늘어트린 채 머리를 푹 숙인 상태였다.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여유로워 보이네. 그냥 털어놓지 그래?” “모른다고 했잖아. 애초 계획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건 루시퍼였으니까. 설마 당할 줄은 몰랐지만, 놈이 없는 이상 어쩔 수 없어. 그냥 기다려야지.” “헤에~. 아! 저번에 들어보니 무슨 길을 뚫으라고 하던데. 혹시 그걸 기다리겠다는 거야?” “아아…. 그건 그거고, 정작 기다리는 건 따로 있거든. 아마 지금쯤….” 그렇게 말한 아스타로트는 살짝 머리를 들어 하늘을 살폈다. “아니, 곧.” 잠시 말을 끊더니 한쪽 입꼬리가 느긋하게 올라간다. 시이이잉! 불현듯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이윽고 ‘분노의 악마’의 동공이 가로로 쭉 찢기며, 시꺼먼 눈동자가 흉포한 빛을 발한다. 그 상태로 아스타로트가 말을 이었다. “사탄이 강림할 거거든.”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우선 일러스트는 오늘 새벽 중에 완성됐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독자분들께 가장 접근성이 좋은 공간이 공지사항에 올리는 건데, 이상하게 공지사항에 올릴 때마다 일러스트가 깨지거나, 상당히 흐릿해집니다. 일러스트레이터 분께서 여러 번 파일을 바꾸고 크기도 변화해보셨건만, 원본의 선명함이 살아나지가 않네요. 혹시 문제 해결 방법 아시는 분께서는 코멘트로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_(__)_ 아 이번 일러스트 진짜 예쁘게 나왔는데요…. ㅜ.ㅠ 0918 / 0933 ---------------------------------------------- A Poisoned Chalice, Two. 붉은 해가 서편으로 저물자, 요정의 숲에도 밤이 찾아왔다. 비죽비죽 우거진 수풀과 땅에 빽빽하게 박힌 무성한 나무. 게다가 늦은 시간, 각처에 낀 밤의 안개는 음침하고 스산하며, 왜인지 앙상하게 느껴지는 분위기마저 자아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언뜻 보면 여느 수림과 다름없는 풍경이지만, 저 숲의 특성을 아는 사용자라면 물씬 느껴지는 을씨년스러움에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본디 요정이 생활 터전으로 삼는 숲은 사시사철, 주야장천 아름다운 곳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요정 때문이 아니라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영향으로, 아침에는 따뜻하고, 점심에는 선선하며, 저녁에는 고요하면서 고즈넉한 분위기가 연출된다는 게 특징이라 볼 수 있다. 말인즉 현재 요정의 숲이 저렇게 된 건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는 소리였다. 아니면 위그드라실과 연관된 모종의 사건이 발생했거나. 한편, 같은 시각. “흑!” 어두컴컴한 숲 깊숙한 곳에서 누군가 몰래 수음이라도 하는 걸까. 입을 꽉 틀어막았으나, 손가락 틈을 비집고 새는 듯한 신음이 간헐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야릇하게 들린다기보다, 고통에 겨워 앓는다는 느낌이 좀 더 강하다. “으으으윽!” 그때 목소리가 갑자기 한층 커졌다. 동시에 신음의 주기도 점차 짧아져 작은 방은 삽시간에 자극적인 소리로 가득 차버렸다. “하아…. 하아….” 한 차례 고통이 가셨는지 에르윈은 숨을 약하게 몰아쉬었다. 소복이 쌓인 풀잎에 누운 가녀린 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땀에 전 머리카락이 뺨에 찰싹 달라붙은 것이 흡사 산고를 겪는 임산부를 보는 듯하다. 잠시 후, 힘겹게 옮겨진 손 하나가 봉긋한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에르윈은 지금 가슴에서 휘몰아치는 미지의 기운에 안간힘을 쓰며 버티는 중이었다. 최근 들어 갑작스럽게 발현된 현상은 아니다. 요정의 숲에 오기 훨씬 전부터, 정확히는 엘도라와 엑스칼리버의 칼집을 찾으러 갔을 때부터 느꼈던 기운이었다. 단지, 처음에는 가슴이 갑갑하거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강도가 점점 심해지더니, 니뮤에가 까닭 없이 사라진 이후, 이 기운의 활동이 갑작스럽게 활발해졌다. 에르윈이 오랜 친우를 잃은 절망, 상실감에 몸부림칠 때마다, 그 기운은 마이너스한 감정을 양분 삼아 서서히 몸집을 불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 완전히 이빨을 드러낸 것이고. 기실 씨앗의 발아 성공 여부는 주변 환경이 첫 번째 조건이라 볼 수 있다. 비옥한 토지에서는 무리 없이 과실을 맺지만, 척박한 땅에서는 싹을 틔우기도 어렵다. 이렇게 보면 아무리 질 좋은 ‘악마의 씨앗’이라도 에르윈의 심신은 발아하기 최악의 환경이었다. 그러나 토지가 아무리 거칠어도 개간을 거치면 쓸모 있는 땅으로 변하듯, 에르윈의 몸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에르윈은 거의 확신에 가깝게 직감하고 있었다. 이 기운이 조금만 더 커지면 자신의 몸과 정신을 지배하려 들 거라는 걸. 불현듯 에르윈의 뇌리로 과거 석관의 봉인을 해제하고, 거기서 흘러나온 검은 연기에 휩싸였던 기억이 아스라이 스쳤다. “후우우우….” 이제는 숨소리조차 떨려 나왔다. ‘안 되겠어…. 이대로는….’ 간신히 숨을 추스른 에르윈은 견딜 수 없는 수마가 밀려오는 와중에도 용케 기억을 더듬었다. ‘더 늦기 전에 그곳으로 가봐야….’ 그렇게 생각한 순간, 에르윈의 고개가 툭 젖혀졌다. 지칠 대로 지쳐 기절하듯이 잠들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몸의 진동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약하게나마 계속 떨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스르르르, 스르르르! 에르윈이 잠들자마자, 무언가가 꼭 닫힌 문틈으로 홀연히 흘러들어 왔다. 그것은 일견 기체, 즉 연기처럼 보였다. 검붉은 빛이 언뜻 비치는 연기. 물론 이 연기의 정체는 아무도 정확하게 모르지만, 만약 김수현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리고 저 연기를 목격했다면. 아마 안솔에게 가로막힌 직후의 타나토스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잠시 후. 찰나의 순간, 흡사 구렁이 똬리 틀 듯 풀잎 주변을 휘감던 연기가, 돌연 에르윈의 몸으로 쭉 흘러들어 간다. 눈, 코, 입, 귀 등 구멍이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도 예외는 없었다. 요정의 육신은 꼭 가뭄이 찌든 땅에 비가 내리는 것처럼 한없이 연기를 빨아들였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검붉은 연기는 한 톨도 남김없이 흡수돼 사라졌고, 끊임없이 전율하던 몸 또한 돌연히 떨림이 멎더니 안정을 찾는다. 그와 동시에 에르윈이 쓰러져 누운 그 상태로 공중으로 느릿하게 부상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일 미터가 훌쩍 넘게 떠올랐을 즈음. 이번에는 천천히, 몹시 천천한 속도로 앞으로 빙그르르 회전한다. 그렇게 절반쯤 회전해 두 발바닥이 바닥에 살짝 닿은 순간이었다. 어떤 전조도 없었다. 그냥, 감겨 있던 에르윈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화아아악! 동시에 시뻘건 안광을 폭발하듯이 터뜨려 작은 방을 확 밝힌다. 예의 잔잔한 물색 눈동자라고 생각할 수조차 없을 만큼 섬뜩하고 불길한 빛깔이었다. “흠. 끝났나.” 이어서 들려온 음성은 짧지만 분명히 에르윈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담담하면서도 메마른 게 어딘가 묘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설령 수백 년간 가까이 지낸 친우라도, 한 번쯤 돌아보게 할 법할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음성이다. “흐으으으….” 참았던 숨이 기다랗게 토해졌다. 그리고 목을 좌우로 꺾거나 팔을 빙글빙글 돌리는 등, 뜬금없는 행동이 이어진다. 그렇게 한참이나 몸을 푸는 듯한 행동을 하더니, 에르윈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괜찮군. 포르세우스가 꽤 잘 만들어줬어.” * 평소와 같이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맑은 아침이었다. 그러나 머셔너리 캐슬은, 아니 성뿐만이 아니라 도시 전체가 실로 부산한 분위기였다. 오늘이 바로 중앙 대륙 첫 공략을 시작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첫 타자는 아틀란타 외 도시 중 서쪽을 차지한 구 북부 연합이었다. 공찬호를 위시한 원정대는 자그마치 육천 명에 가까운 인원을 편성했고, 기대와 환호 속에 이른 아침 남 도시 정문을 떠났다. 워프 게이트를 활용하는 만큼 굳이 따라가거나 배웅할 필요는 없으나, 머셔너리 클랜은 대부분이 원정대가 출발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왜냐면 머셔너리 클랜원 중 근원이 홀로 북부 연합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혼자서 두 번이나 고생하는 것이지만, 워프 게이트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근원은 언제나처럼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 명의 작별 인사를 받은 근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원정대와 떠났고, 구경을 끝낸 머셔너리 클랜원들은 다시 성으로 돌아왔다. 이제 겨우 원정 첫날이니 벌써 설레발 칠 구석은 없으나, 북부 연합이 전초 기지를 건설하고 워프 게이트를 활성화하면, 그 시점부터 매 순간순간 대기해야 하기에 미리 준비하는 게 옳다. 비비앙은 습관적으로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로 향하려다가, 워프 게이트 앞에 이르러서야 아차 하고 걸음을 돌렸다. 마지아에 있던 메모리아 스톤을 가장 먼저 가져간 만큼, 중앙 대륙 공략이 끝날 때까지는 갈 수 없을 터. 중간에 중앙 관리 기구 수장이라는 여인이 미친 듯이 뛰어다니던 광경을 제외하면, 성으로 돌아오는 길은 여느 때와 같이 평화로웠다. 그러나 성의 정문으로 들어오자마자 갑작스레 호출석이 반응했다. 김수현의 호출이었다. 서둘러 엉덩이를 깨끗이 씻은 비비앙은 나는 듯 계단을 올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달려가는 기세처럼 집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지는 못했다. 물론 그럴만한 이유는 있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몰래 들여다보는 비비앙. 이내 두 눈이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본 것처럼 황당함으로 물든다. ‘쟤…. 지금 뭐 하는 거야? 칼 가지고 왜 저래?’ 방 안에는 김수현이 흰 천으로 곱게 싸인 엑스칼리버를 든 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찌이이익! 이상한 건, 그 천을 옷 찢듯이 단숨에 쫙 찢어발겼다는 것이다. 그냥 얌전히 벗기면 될 걸 말이다. 웅웅! 한데 칼은 더 이상하다. 아무리 자아가 강하다지만, 검신이 노출된 순간 왕왕 울어버리기 시작한다. 호의라고 보기 어려운 기운이었다. 문밖의 비비앙조차 살이 바늘로 콕콕 찔리는 듯했으니. “흥.” 그뿐만이 아니었다. 싸늘하게 웃은 김수현이 검신을 거침없이 만져나간다. 손끝으로 쓱 훑는 건 양반이요, 심지어 양손으로 꽉꽉 주물럭거리기까지. 여인을 희롱하는 것처럼 참으로 요사스러운 손놀림이다. 이윽고 손을 멈춘 김수현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엑스칼리버를 톡 건드렸다. “후. 이거 정말 웃기는 검이군. 그렇게나 고고한 척하더니, 몇 번 만져줬다고 이렇게 기뻐해? 성(聖)스러운 검이 아니라, 그냥 야한 성(性)검이었잖아? 하하.” 그러자 수치심이라도 느낀 걸까. 큼지막한 보석이 박힌 엑스칼리버의 힐트(Hilt)가 파르르 떨린다. 김수현은 씩 웃었다. “아니라고? 글쎄…. 아무리 자아로는 싫다고 해도!” 그리고 자아가 깃든 보석을 기습적으로 핥은 순간, 우, 우우우우우웅! 엑스칼리버는 전례 없는 힘찬 검음을 토해내며 눈 부신 빛을 터뜨렸다. 검신을 폭발적으로 물들이며 올라간 빛의 물결은, 끝내 칼끝으로부터 찍 뿜어졌다. “네 몸은 정직하군.” 그 말과 동시에 빛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푸들푸들 경련하는 블레이드(Blade)를 따라 점점이 흩어진다. 이윽고 김수현은 엑스칼리버를 아무렇게나 던져버린 후, 문으로 눈을 돌렸다. “끝났다. 들어와도 돼.” 비비앙은 순간적으로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그러나 간신히 균형을 잡고 살그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김수현은 손을 탁탁 털더니 책상 안으로 돌아가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저, 김수현?” 가만히 보고 있던 비비앙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방금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아…. 능욕, 아니지. 조교라고나 할까.” “능욕? 조교?” “그래. 칼을 좀 길들여야 하거든.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마.” 김수현은 담담히 대답했다. 비비앙은 반사적으로 입맛을 다셨다. “쩝…. 그래. 뭐, 너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그런데 왜 나한테는 그런 거 안 해줘?” “뭐?” “아니! 왜 불렀어어!” “……?” 비비앙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 질러버렸다. 김수현은 잠깐 갸웃했으나, 곧 서랍을 닫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오늘 구 북부 연합 원정대가 떠난 거, 너도 알고 있지?” “어, 응. 방금 떠나는 거 보고 돌아오는 길인데?” “그래. 너도 알다시피 이제부터는 좀 정신이 없을 것 같은데…. 그 전에 급히 해결해야 할 일이 하나 있어서. 거기에 네 힘이 필요하다.” “응? 우리 차례는 네 번째 아니야? 북부 연합의 서 도시, 이스탄텔 로우 클랜의 동 도시, 해밀 클랜의 북 도시, 그리고 우리 머셔너리 클랜의 남 도시. 시간이라면 꽤 있을 텐데.” 그러나 김수현은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번 계획의 요체는 워프 게이트야. 물론 당장 그럴 일은 없겠지만, 사실상 떠난 순간부터 빈틈없이 기다려야지. 뭔 일이 생기는 순간 곧바로 넘어가야 하니까.” “그런가…. 아무튼, 뭘 도와주면 되는데?” 비비앙이 턱을 주억거리자, 김수현은 손에 쥔 것을 살짝 주머니로 숨겼다. “제 삼 군단 좀 소환해줘.” “제 삼 군단?” 반문하기는 했지만, 한 번 소환한 전적이 있는 만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단지 다른 군단과는 다르게 마법 진을 그려야 한다는 게 귀찮을 뿐이지. 잠시 후, 질서의 오르도를 소환한 비비앙은 차분히 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간중간 조용히 흐느끼는(?) 검음 때문일까. 집중하면 할수록, 아까 엑스칼리버를 농락하던 장면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생각은 곧 김수현의 손바닥에 펑펑 맞아, 빨개진 엉덩이를 부여잡고 우는 자신을 상상하는 망상으로 발전했다. 더불어 선율이라는 여인이 가르쳐준, 아헤가오 더블피스라는…. “어, 어어어어!”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저 잠깐 진을 잘못 그려서….” “거참…. 오늘 안에만 하면 되니까, 천천히 해.” 김수현은 끌끌거리며 혀를 찼다. 비비앙은 고개를 휘휘 흔들다가, 다시 한쪽 구석에 처박힌 엑스칼리버를 흘깃거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좋겠다….’ ============================ 작품 후기 ============================ 저번에 말씀드린대로, 오늘 제가 정오에 약속이 있습니다.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6월 27일(토요일) 하루는 외전이 연재됩니다. 게헨나, 수나, 베히모스 등이 등장할 예정이며, 정상 연재 때보다는 분량이 적을 것 같습니다. 이 부분 너른 양해 부탁드리며, 6월 28일(일요일)부터 다시 정상 연재를 시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PS. 새 표지 올렸습니다. 새 일러스트의 주인공은 한소영이었습니다. 참 어여쁘지 않나요? 하하.(표지, 공지사항, 뜰에 업로드 했습니다.) 0919 / 0933 ---------------------------------------------- 아빠는 수나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한때, 그런 세상이 있었다. 회색 어탑 하나만이 남아 있는, 아무것도 없는 세상. 하늘은 온통 잿빛 일색이며, 땅은 황폐해져 죽은 척박한 세상. 모든 것이 정지한, 흡사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은 칙칙한 세상. 생기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오랜 옛날 죽어버린 세상. 그런 세상이 있었다. 그래, 무간지옥(無間地獄)은 그런 세상이었다. 하지만, 이런 말도 있다. - 죽은 세상에도 밤이 찾아오는가. 밤이 찾아오면, 넘어갈 듯 말 듯 멈춰버린 세상은 비로소 완전한 종말을 고한다. 이후 춥고 쓸쓸한 기나긴 새벽이 지나고, 수천 년을 기다린 새로운 아침이 떠오를 때. 세상은, 마침내 새롭게 태어난다. 왕의 탄생과 최후를 함께하는 곳. 이게 바로 무간지옥이라는 구간의 본질이다. …그런 만큼, 김수현이 지옥으로 올 수만 있다면, 그래서 무간을 한 번 더 볼 수 있다면. 아마, 굉장히 놀라지 않을까? 과거 잿빛 일색이던 하늘은, 지금은 연한 황혼빛으로 채색돼 세상을 아스라이 밝힌다. 풀 한 포기 없던 밋밋한 땅 곳곳에 웅장한 기암이 세워졌고, 쩍쩍 금이 가 있던 딱딱한 대지는 붉게 기름져 보기 좋은 빛깔이 흐르고 있다. 그뿐일까? 뚝 깎아지른 듯한 가파른 절벽에는 용암 폭포가 콸콸 쏟아지고 있으며, 그 아래는 광활한 붉은 바다가 이루어져 힘 있게 물결치는 중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아무리 돌이켜도 과거의 풍경과는 한 톨도 매치가 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정리해서, 지금의 무간 구간은 가히 낙원이라 봐도 아깝지 않을 경치를 그려내고 있었다. “흐음~.” 이렇게 새롭게 변화한 무간 구간의 중심에서 게헨나는 한 차례 숨을 들이켰다. 맑고 따뜻한 공기가 몸속으로 녹아내리듯이 퍼지자, 절로 흡족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잠시 후, 게헨나가 고인 용암에 살짝 두 다리를 넣더니 가볍게 물장구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은 한 폭의 그림 같다고 생각될 정도로 사뭇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은은한 불빛이 스민 살결은 잡티 하나 없이 매끄럽고, 머리카락은 전과 같이 용암 폭포가 쏟아지듯 풍성하게 흘러내렸다. 게다가 이제는 유부녀 속성까지 추가, 아니. 아이를 출산한 이후, 게헨나는 가슴이 약간 더 커지는 등 몸도 한층 무르익어, 농염한 매력을 마음껏 발산하는 중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참 좋구나, 수나야.” 한동안 발등으로 헤엄치던 게헨나는, 이내 천천히 발을 빼며 뒤를 돌아봤다. 돌아본 곳에는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어탑 아래, 무언가 작달막한 것 하나가 덩그러니 앉아 있다. “어떠냐. 이 어미가 있는 곳으로 들어와 보지 않으려느냐? 기분이 한결 괜찮아지는구나.” 말을 거는 대상은 일견 몹시 사랑스러운 여아였다. 외양도 게헨나와 닮은 구석이 많다. 어미처럼 풍성하지는 않지만, 윤이 흐르는 용암 빛 머리카락은 좌우로 예쁘게 묶어 정리해, 트윈테일(Twintail)처럼 양어깨에 살짝 닿을 정도로 늘어트렸다. 눈동자 또한 맑고 투명하면서도 강렬한 루비 색을 발하며, 통통히 살 오른 포동포동한 젖살은 살짝 꼬집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엽기 짝이 없다. 단지, 표정이 좀 걸릴 뿐이다. 애 주제에 한없이 근엄한 얼굴은 일단 차치하고서라도, 작고 도톰한 아랫입술을 꼬옥 씹고 있는 건 마치 작정하고 이를 악문 듯하다. 이뿐이랴? 고사리 같은 손도 힘껏 주먹 쥐고 있는 게, 꼭 당장에라도 상대를 한 대 칠 듯한 기세였다. 그러니까, 보이는 그대로다. 왜인지 수나는 게헨나를 향해 온몸으로 공격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후유.” 게헨나는 익숙한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실 왜 수나가 저렇게까지 가시를 세우는지, 짐작 가는 게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인간 세상에 있을 때는 하루도 쉬지 않고 새침했지만, 어쨌든 수나는 아비라는 작자를 좋아한다. 김수현이 잠들었을 때 몰래 낑낑대며 올라가, 가슴에 살포시 얼굴을 묻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평소에는 누가 아주 살짝 건드리는 것조차 혐오하지만, 김수현의 손길이나 뽀뽀는 싫은 척 받아들인다. 그래, 애초 그랬던 수나다. 여기까지였다면 게헨나도 수나를 이해하고 미안해했을 것이다. 아이가 아비를 따르는 건 잘못된 일이 아니거니와, 얼마 보지도 못했는데 도망치듯 억지로 데려왔으니 응당 화가 날 법도 하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수나가 품은 감정이 상당히 엇나갔다는 것이다. 게헨나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한밤중 김수현의 가슴에 볼이 미어터지라 비비는 와중, 자기를 계속 흘겼던 수나를. 그리고 품에 안긴 채로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던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를. 착각이 아니다. 실제로 수나는, 게헨나가 자기를 데리고 몰래 도망친 행동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었다. ‘자기한테 아빠를 뺏길까 봐, 불안함을 견디지 못하고 몰래 도망쳤다.’ 고. 즉 게헨나는 어미가 아니라 ‘비겁한 연적’ 개념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저렇게 게헨나를 앙칼지게 노려보는 것이다. 정리해보면, 수나의 현재 상태는 엘렉트라 콤플렉스(Electra Complex)로 발전할 여지가 몹시 다분하다. 딸이 아비에게 애정을 품고 어미를 경쟁자로 인식한다. 이게 엄청나게 심해지는 경우 잘못하면 살해 욕망이 생길 수도 있다.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이미 저번의 모녀 전쟁으로 구간 하나가 아예 박살 난 전적도 있잖은가.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건 어찌 보면 김수현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다. 출산 이후, 게헨나는 김수현더러 수나를 평범한 아이로 생각지 말라고 누누이 일렀다. 왜냐면 날 때부터 왕의 숙명을 짊어지고 태어난 수나는, 인간의 아이와는 태생부터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이지만 애가 아니다. 수나의 탄생을 봤던 사용자라면 아주 약간이라도 이상한 점을 느꼈을 터. 한데, 김수현은 조금도 주의하지 않았다. 그런 수나를, 그런 왕을. 볼 때마다 예쁘다 예쁘다 하고, 사랑스레 어루만져주고, 틈만 나면 쪽쪽 물고 빨았다. 이러니 수나가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쩌면 그 가당치도 않은 악신 놈한테서 보호받았을 때부터, 유일한 반려로 점 찍었는지도 모르겠구나.’ 그렇게 생각한 게헨나는 손으로 이마를 꾹 누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운 아미가 살짝 이지러졌으나, 게헨나가 그러니 무척 기품 있는 행동처럼 보였다. 비록 낯에 그늘진 고뇌까지는 숨기지 못했지만. 그렇게 한참을 서로 바라보는 동안, 돌연 무슨 장난기가 일은 걸까. 게헨나는 갑자기 두 손을 모아 용암을 떠올렸고, 수나를 향해 휙 뿌렸다. 철썩, 가볍게 부딪친 용암이 수나의 머리카락 사이로 줄기줄기 스몄다. 앙칼진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걸 보며 게헨나는 소리 죽여 킥킥 웃었다. “후후. 방금 모습 꽤 귀여.” 뻑. 그러나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 게헨나의 고개가 갑작스러운 충격에 강제로 돌아가 버렸다. 대공의 낯빛이 황망해졌다. 얼얼한 볼을 쓰다듬자, 뒤늦게 무언가 툭툭 떨어져 구르는 소리가 이어졌다. 무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붉디붉은 작은 조약돌이었다. 뻑 소리가 날 정도면 전력으로 던졌다는 뜻이다. “아, 아프구나. 설마 죽일 생각으로 던졌느냐?” “부우.” “이 녀석! 무려 왕이라는 자가 어이하여!” “부으으으!” 그때. “…어? 수, 수현? 그대여! 그대가 어떻게 이곳에…!” 무섭게 호통치던 게헨나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 그러자 ‘수현’이라는 말을 들은 수나도 깜짝 놀라더니 황급히 옆을 돌아봤다. 톡. 그렇게 고개 돌린 순간, 아까 던졌던 돌멩이가 돌연히 수나의 정수리에 톡 떨어졌다. “에?” 수나는 반사적으로 정수리를 감싸 쥐며 멍하니 깜빡거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김수현의 모습은 어디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앞을 바라보자, 게헨나가 무언가 던진 듯한 자세로 씩 웃고 있었다. 수나가 바득바득 이를 갈기 시작한다. “뭐, 뭐. 네가 그렇게 이 갈아서 뭘 어쩔 것이냐. 그러게 누가 까불라고 했느냐?” “이익…. …아? 빠, 빠?” 그때, 분노를 터뜨리던 수나가 뭔가 발견한 것처럼 놀란 표정을 짓는다. 물론 게헨나는 풋 웃었다. 자기가 사용한 방법인데 넘어갈 리가 있겠는가. “학습 능력은 좋지만, 안타깝구나. 내가 속아 넘어갈…?” 그러한 찰나, 먼 곳으로 철그렁거리는 소음이 들렸다. 누군가 정말로 이곳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빠, 빠아!” 그러자 수나가 그곳으로 팔을 뻗으며 애타게 부르짖는다. 거기다 어탑에서 털썩 굴러떨어져 엉금엉금 기어가기까지. 표정도 애절하기 그지없다. 평소라면 절대로 볼 수 없는 반응이었다. “허, 허?” 게헨나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본능에 따라, 설마 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시선을 슬쩍 돌리고 말았다. 뻑! “큭!” 동시에 게헨나의 얼굴이 앞으로 푹 숙어졌다. 아까보다 갑절은 큰 돌멩이가 뒤통수를 강타한 것이다. 게헨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다가, 비틀비틀하며 겨우 균형을 잡는 데 성공한다. 그 상태로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게헨나가 굽혀졌던 고개를 천천히, 느긋하게 젖혔다. “…너 말이다.” 이윽고 수나를 돌아본 게헨나의 얼굴은 은은한 노기를 띠고 있었다. 거기다 지옥 대공 특유의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암암리에 수나를 압박한다. 그러나 수나는 피식 웃었다. 무려 겁화의 힘을 지닌 지고의 존재가 압력을 가하는데, 밀리는 기색조차 없다. 그저 가소롭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갑작스럽게 정색했다. 꾸웅! 그 순간 무간지옥 전체가 심상찮은 진동을 울렸다. 애초 왕의 탄생과 최후를 함께하는 곳이니만큼, 수나의 기분을, 의지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자 게헨나는 또 한 번 긴 한숨과 함께 수나를 응시한다. 수나는 예의 삐쭉한 눈으로 게헨나를 노려보고 있다. 그렇게 상황이 일촉즉발로 치달리는 찰나, 서둘러 달려온 베히모스가 돌연히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어어어어! 그만 그만! 이거 또 왜 이러십니까? 예? 기껏 돌아오니 왜 또 싸우고 계시느냐고요! 훠이, 훠이!” “비키거라. 좋은 말로 할 때.” “그만 좀 하시지요. 저번에도 사소한 문제로 다투시다가 초열 구간 작살난 거 기억 안 나십니까? 그리고! 애초 왕께 취하는 태도가 뭡니까 이게! 부끄러운 줄 아십시요!” “무어라?” 신랄한 비판에 게헨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조금 지나친 듯싶었는지 베히모스는 살그머니 헛기침했다. “어흠! 뭐, 틀린 말도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들어보니 대공께서 별로 잘한 것도 없으시던데….” “…들었다고?” “예! 들었습죠. 이번에 소환돼서 전~부 듣고 왔습죠! 또 저도 좀 얘기해드렸는데, 부왕께서 이러시더군요. 아니! 애초 왕께서 진노하셨으면 그 원인부터 찾고 달랠 생각을 해야지! 무작정 이래서야 쓰겠느냐! …고요. 안 그렇습니까?” “응아!” 그 말이 맞는다는 듯 수나가 크게 소리 지르며 척 삿대질을 했다. 실로 그 말이 옳다! 스스로 어미라 부르는 저 비겁한 연적은, 감히 아비를 이용해 이 몸을 속이고 능멸했다! 거기다 돌을 던져 이 몸을 맞춘 죄는 천 번, 만 번 죽어 마땅하다! 당장에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도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마음속으로 외친 말이었고, “웅아아우앙우아웅아아앙!” 실제로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튼. 베히모스는 해골을 절레절레 움직이더니 수나의 앞에 조심스레 무릎 꿇었다. “흠흠. 왕이시여. 제 삼 군단장 정토의 베히모스, 이렇게 복귀를 고합니다.” 베히모스로서는 실로 보기 드문 정중한 태도. 그러나 수나는 별 관심 없다는 듯 턱을 괴며 콧방귀를 끼었다. 베히모스가 품에서 푸른 구슬을 꺼낼 때까지만 해도 눈은 게슴츠레했다. 그러나. “아, 왕이시여. 이거 말입니다. 선물입니다. 기록 영상이라고 하더군요?” “…….” “부왕이 왕께 보내는 전언이 영상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제가 강력하게 부탁하니 하나 해주시더군요.” “앙?” 말이 끝나자마자 수나의 눈을 번쩍 떠졌다. 채가듯이 구슬을 가져간다. “그게 정말이냐?” 게헨나도 뜻밖이라는 얼굴로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으나, 베히모스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어어? 게헨나 님은 안 됩니다?” “안 된다?” “부왕께서 그러셨거든요. 무조건 수나 님한테 먼저 보이시라고요. 그리고 말입니다. 저거 일회용입니다?” “하?” “즉 오로지 수나 님만 보실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해가 안 가는 구나.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사실 수나에게 잘 보이려는 베히모스가 살짝 살을 붙여 말한 것이나(하지만 수나는 이미 모든 정신이 구슬에 팔린 상태였다.), 게헨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일회용은 뭔 놈의 일회용이냐. 보아하니 반영구적인 기록 구슬 같은데.” “…예?” 베히모스가 새된 소리로 반문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작동 원리를 알아낸 수나가 구슬을 톡 건드린 후였다. 이윽고 구슬이 말간 빛을 흘리며 사내의 얼굴을 재생한다. (수나야.) 영상 속 김수현이 수나를 보고 빙긋 웃는다. (수나야~. 아빠에요. 까꿍?) 흘러나오는 음성은, 평소의 김수현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굉장히 부드러웠다. (우리 수나, 지옥에서 잘 지내고 있니?) 김수현은 종교인이 들으면 오해할 소지가 있는 말로 첫인사를 건넸다. 어쨌든, 아비임을 알아본 수나의 눈이 금세 그렁그렁해졌다. (그래그래, 우리 예쁜 수나. 거기서는 어떻게 지내고 있어? 몸은 건강하니? 밥은 잘 먹고 있고? 이 아빠는 너무너무 궁금하구나.) “빠아, 빠아.” (정말 걱정스럽지만…. 아, 게헨나와 사이는 별로 안 좋다며?) “아?” (베히모스한테 들었어. 네가 진노하고, 게헨나는 힘들어한다고. 정말이니 수나야? 정말로 그랬어?) “우우우웅….” 시무룩해 하는 수나를 보며 베히모스는 흡족하게 웃었다. 아까 반영구라는 말을 듣고 갸웃했으나, 보아하니 별로 이상한 점은 없었다. “역시! 이렇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정말, 힘만 세면 답니까? 상황에 따라서는 마수가 머리를 써야지요.” “으, 으음.” “뭐, 이해합니다. 대공이야 오죽 오랜 세월 동안 독불장군으로 살아오셨으니까요. 하하하하!” “…….” 심지어 게헨나의 어깨를 턱턱 짚으며 거들먹거리는 베히모스. 그러나 워낙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고, 또 저렇게 해결책까지 갖고 왔으니 게헨나도 딱히 할 말은 없었다. 그저 소리 없이 이를 갈 뿐. (정말 수나가 그랬다면….) 그때였다. (이 아비는 참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구나.) 김수현의 말이 이어진 찰나, “웅?” “에?” “하?” 수나, 베히모스, 게헨나. 이 셋의 의문 가득한 탄성이 차례로 터졌다. (그래. 더 떼쓰고, 더 힘들게 하렴. 아빠는 수나를 응원한단다. 게헨나는 고생 좀 해도 돼. 세상에, 어떻게 사람이 그래? 아니, 사람은 아니지만. 어쨌든 내가 가기 전에 꼭 말해달라고 그렇게 부탁했는데, 잠자는 틈을 타 휙 도망가? 아, 생각하니까 또 화가 나네.) “응아!” (야, 게헨나. 듣고 있지? 정말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가 많은 걸 바랬어? 최소한 수나랑 작별한 시간은 줘야 했을 거 아니냐. 네가 그렇게 수나 데리고 사라지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기나 해? 나 살면서 형한테 혼난 적 한 번도 없는데, 그때 정신 차리라는 소리까지 들었어. 또 수나가 받을 충격은 어떻고. 그러고도 잘도 무간 구간을 재건하겠다. 응?) “아응응응!” 극히 공감하는지 수나가 고개를 마구 끄덕거렸다. 그리고 게헨나보고 이것 좀 보라는 듯, 눈을 부라리며 어탑을 탕탕 치기까지. 한편, 베히모스는 해골 기사로 변한 후 처음으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물론 정말로 그럴 리는 없으나, 등골이 오싹한 기분이었다. “호오.” “대, 대공.” “호오….” “이, 이게 말입니다.” “호오…!” “…….” 말끝이 묘하게 올라갔다. 뼈가 갈리는 듯한 서늘한 음성이었다. 베히모스는 일부러 옆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 정신 차리자! 아직 살 길은 남았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왕의 노선으로 갈아타는….’ (아, 수나야. 베히모스도 특히 조심하렴. 너보고 애새끼 주제라고 욕하더라?) ‘이, 이 쉐이가!’ 베히모스가 기함했다. “호에…?” 수나는 베히모스를 흘끗 흘기더니 같잖다는 듯이 눈꼬리를 올렸다. 쿠아아아아아아아! 동시에 아까보다 갑절은 될 듯한 기운이 전신의 뼈를 쑤셔오는 걸 느꼈다. 우선 이것부터 다 보고, 그 다음 이야기하자는 의미였다. 베히모스는 혼이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는 동안에도 김수현의 음성은 계속 이어졌다. (아무튼, 수나야.) (비록 작별을 나누지 못해 아쉽지만, 아빠는 수나를 항상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 수나가 이것만은 꼭 알아줬으면 좋겠어.) (있잖아, 수나야? 아빠는….) 그 순간이었다. (아빠는 수나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꽈앙! 느닷없이 화산이 폭발하는 듯한 굉음이 사방을 쩌렁쩌렁 울렸다. 아니, 정말로 화산이 폭발했다. 먼빛으로 거대한 불의 기둥이 하늘을 뚫을 듯이 솟구치고 있었으니. “가, 갑자기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 글쎄다. 수나의 감정 상태가 폭발한 것 같다만…. 아!” 조용히 중얼거리던 게헨나는 순간 아차 했다. 스리슬쩍 어탑을 바라보자, 어탑에 앉은 수나의 몸이 바짝 굳어 있는 게 보였다. 깜짝 놀란 듯한 표정. 기습 고백을 받은 순수한 소녀와도 같이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이윽고 구슬의 빛이 사라지려 하자,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구슬을 또 건드렸다. (아빠는 수나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꽈앙! (아빠는 수나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꽈앙! (아빠는 수나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꽈앙! (아빠는 수나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꽈앙! 폭발하고, 폭발하고, 폭발하고, 폭발한다. 그야말로 난리였다. 영상을 반복할 때마다 무간 구간의 화산이 펑펑 폭발한다. 그렇게 불기둥의 축제 속에서, (아빠는 수나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꺄아~. 모야아아~.” 게헨나는 순간 자기 눈을 의심했다. 수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감더니, 양손을 꼭 말아 쥐며 몰라 몰라 도리질까지 하고 있다. (아빠는 수나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그렇게나 이 말이 듣기 좋은 걸까. “이잉~. 에헤헤헤~.” 수나의 입가로 꽃송이 같은 미소가 활짝 피어났다. 지옥에 들어온 이후,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진심 어린 미소였다. 이윽고 수나가 뻐기는 얼굴로 팔짱을 끼자, 게헨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보다 딸이 우선이라니 서운하기는 하다만…. 뭐, 이건 이거대로 해결인가. 정말 예상치도 못했다.’ ‘나 원, 참으로 밉살맞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한 게헨나는 싱겁게 웃었다. 물론 몰래 도망가려는 베히모스를 붙잡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잠시 후. 폭발한 화산으로부터 흩뿌려진 불씨들이 온 세상을 점점이 수놓기 시작한다. 반딧불처럼 선연한 빛을 뿌리는 불똥은, 춤추듯 너울너울 떨어지며 사뿐히 내려앉는다. 좀 전까지 활화산처럼 부글거리던 세상이 ‘제일’ 사랑한다는 한 마디에 확 가라앉았다. 그뿐일까. 펄펄 끓던 대기가 뜨듯 말랑해지고, 무겁던 공기는 솜사탕처럼 달콤한 내음을 풍기며 흐른다. 세상 전체가 이대로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은 분위기에 휩싸인다. 말인즉. (아빠는 수나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겨울밤이 지나간 무간지옥에 비로소 완연한 봄이 찾아온 것이다. ============================ 작품 후기 ============================ …분명히 가볍게 쓰려고 했는데. 한 6K ~ 10K 정도로 잡고 있었건만, 어째서 적고 보니 이렇게 된 걸까요? 사실 워낙 이것저것 적고 싶다 보니, 저도 모르게…. 예. 페이스를 잃었습니다. 제 불찰이지요. ^_ㅠ 죄송합니다. 독자님들. 6월 28일(일요일) 하루만 쉬겠습니다. 사실 어지간하면 한 달에 두 번 초과해서 휴재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제가 근 이틀 밤을 샌 터라 너무 피곤해서요. 오늘은 마음껏 자보고 싶습니다.(?) 부디 너른 양해 부탁 드려요. _(__)_ 0920 / 0933 ---------------------------------------------- A Poisoned Chalice, Two. “뭐라고요?” 이른 아침, 에르윈의 방문을 받은 요정 장로가 깜짝 놀라 외쳤다. “에, 에르윈? 방금 뭐라고 했나요? 제가 잘못들은 게 아닌가요?” 숫제 이맛살까지 잡힌 얼굴은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에르윈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니뮤에 님의 행방을 확인했습니다.” “정말인가요?” 장로는 체통도 잊고 경악하는 얼굴로 소리 질렀다. “그럴 리가! 니뮤에는 분명히 그때 사라졌을 텐데? 가시나무 관을 계승하기 직전…. 아니, 사라지기는 했지만 죽었다고 보기는….” 한동안 중얼중얼하던 장로는 에르윈을 흘끗 쳐다봤다. 니뮤에의 생존을 확인했다는 말은 명백히 희소식이다. 그러나 요정이라는 종족과 장로 신분의 특성상, 마냥 기뻐하기보다는 일의 전후를 따지는 게 우선이었다. “한데, 에르윈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건가요? 제가 알기로 근래 방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지 않았나요? 그렇다고 니뮤에처럼 예지몽을 꾸는 것도 아니잖아요.” 절대 의심하거나 책망하는 어조는 아니었다. 에르윈도 응당 당연한 질문이라 여겼는지 침착히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장로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건….” “통신 구슬이라는 겁니다. 바깥세상에서 널리 사용되는 물건이죠.” “몇 번 본 기억이 있네요. 꽤 신기한 물건이죠. 아무튼, 그래서요?” “어젯밤 이 구슬로 멜리너스의 연락이 닿았습니다.” 살며시 운을 띄운 에르윈은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현재 네 대륙이 전쟁에 휩싸였다는 말을 시작으로, 북 대륙 진영에 있던 니뮤에를 발견했다는 것까지. 기실 니뮤에가 잠깐이나마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건 사실이거니와, 그 외는 누가 어떻게 말하든 말하는 이의 마음대로였다. 잠시 후, 남 대륙이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부분까지 이야기가 일단락됐을 즈음. “…….” 장로의 얼굴빛은 상당히 심각해져 있었다. 바깥의 전쟁 소식은 예전에 들었던 터라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만, 니뮤에가 전장에서 발견됐다는 게 문제였다. 장로가 고민하고 있는 동안 에르윈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이렇게 니뮤에 님 일도 섞였다는 점에서, 남 대륙은 우리 요정의 원호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나온 지원 요청에 장로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총할 요정의 종적을 찾아 기쁘지만, 인간을 돕는다는 점은 썩 석연치 않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대륙 전쟁에 휘말리는 것 자체가 내키지 않은 일이었다. “글쎄요….” 한참 동안 고민하던 장로는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네요. 어째서 사라진 니뮤에가 그곳에 있는지…. 아무튼, 그 구슬은 놓고 가세요. 제가 직접 알아보겠어요.” 단호한 음성으로 말하자, 에르윈은 순순히 구슬을 건넸다. 장로가 알아본다고 했으나 딱히 걱정할 일은 없었다. 머리가 영특한 멜리너스라면, 아니 벨리알이라면 알아서 말을 잘 맞춰줄 테니까. 물론 좀 더 건드릴 필요는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에르윈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장로님. 상황이 급합니다. 우리와 공식적으로 동맹을 맺은 남 대륙의 요청을 진지하게 고려하셔야 합니다. 게다가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엘도라는 니뮤에 님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고 직접 구출 작전까지 실행했다고 들었습니다.” “에르윈? 원탁의 기사단에 적을 둔 당신의 처지는 이해해요. 그리고 남 대륙의 요청이 잘못됐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요.”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단지 이 요청을 거절했을 때, 이후의 일이 걱정돼서….” “이후의 일?” 장로의 눈이 가늘어졌다. 말을 흐리기는 했으나 뒤에 하고자 하는 말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기실 남 대륙 사용자들이 여태껏 요정의 숲을 건드리지 않은 이유는, 첫 번째가 엘도라가 체결한 동맹 때문이요, 두 번째는 오크 성을 공략하는 데 있어서 후방의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크 성이 공략된 이상, 이제 내세울 건 과거에 맺은 동맹 관계뿐이다. 한데 이 요청을 거절할 시, 전쟁에서 진 남 대륙이 돌아온 후 동맹의 필요성에 의문을 품을 가능성이 높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굳이 가만히 놔둘 이유가 없으니까. 오크 성을 향했던 칼끝이 요정의 숲으로 향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인간은, 특히 사용자는 그러고도 남을 존재다. 에르윈은 그 점을 꼬집어 말하고 있었다. 장로가 지그시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자, 에르윈은 한 번 더 말을 흘렸다. “그리고 일이야 어떻게 됐든, 니뮤에 님은 우리의 여왕으로 추대하려던 분입니다.” “게다가 가시나무 관도 같이 사라졌고요.” “장로님은 그동안 총할 요정으로 애쓰셨던 니뮤에 님과 유일무이한 성물을 버리시렵니까?” “이대로라면 요정의 미래는….” 이 네 마디 말이 결정타였다. 무엇보다 요정에게 있어서 가시나무 관만큼은 어떤 대가를 치러도 되찾아야 하는 성물이다. 여왕의 자질을 지닌 요정이야 언제고 태어날 가능성이 있지만, 가시나무 관이 없으면 여왕의 탄생이 원천적으로 막히기 때문이다. 이 말인즉 종족의 미래를 포기한다는 말과 동일했다. “저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에르윈은 제가 그 요청을 거절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렇게 말한 장로가 통신 구슬을 꽉 쥐자, 곧 은은한 푸른빛이 흐르기 시작한다. “회의를 소집하겠어요. 제가 연락하고 상황을 알아보는 동안, 에르윈은 각 단체의 수장을 호출해주시기 바라요. 지금 바로.” 기다리던 말이 나오자, 에르윈은 곧장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발 빠르게 나가려는 찰나, “그런데, 에르윈?” 장로의 한 마디가 옷깃을 붙잡았다.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건데…. 몸은 좀 괜찮나요?” “네?” “눈동자가 좀 빨간 것 같아서…. 잠을 못 잔 건가요?” “…….” 에르윈은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 말도 않고, 그저 부드러운 미소만 지으며 문을 나설 뿐. 그렇게 천천히 걸어나가는 에르윈을 장로는 한참 동안 어색한 눈으로 쳐다봤다. * 오 년 차.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수현(5년 차) 문득 사용자 정보를 열어보니 이름 옆의 숫자가 사에서 오로 바뀌어 있었다. 원정 순서를 기다리는 와중 연차가 하나 추가된 것이다. 누구나 으레 겪는 일이지기는 하나, 내게는 나름 특별한 일이었다. 언제였나. 집무실 테라스서 오 년 차 안에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는데, 정말로 비슷한 시기에 중앙 대륙 공략이 시작됐다. 공교롭다면 공교로운 일이다. 물론 신기하다고 생각만 할 뿐, 이 이상의 의미는 두지 않지만 말이다. 첫 공략이 시작된 지 한 달이 훌쩍 넘어, 어느새 육 주 가깝게 흘렀다. 그동안 중앙 대륙 공략에도 상당히 많은 진척이 있었다. 아니. 약속의 신전이 있는 지역까지 가지 않는 이상, 사실상 진전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으려나. 왜냐면 법역에 들어가기 전과 후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전자나 후자나 괴물을 물리치고 길을 개척한다는 점은 같으나, 난이도 측면에서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이번 공략은 북 대륙 전체를 통틀어 이만 명에 가까운, 유례없는 대규모 원정대가 편성됐지만, 여전히 안심할 수 없을 정도니 굳이 설명이 필요할까. 그저 지대를 통과하면서 인원 손실이 최대한 적기를 바랄 뿐. 아무튼, 중앙 대륙 공략 육 주차로 접어들면서 우리 차례도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각 원정대당 할당된 공략 기간은 이 주일. 처음 출발을 끊은 구 북부 연합 원정대는 공략 기간을 채우고, 보급 요새 건설과 워프 게이트 활성화까지 무사 성공했다. 이후 두 번째로 들어간 이스탄텔 로우 원정대도 바로 공략을 재개, 같은 이 주 동안 특별한 사건이나 사고 없이 무사히 공략을 마쳤다. 세 번째 타자인 해밀 원정대도 마찬가지였다. 형과는 하루에 한 번 이상 꼭 통신했는데, 간간이 괴물이 출현하는 걸 제외하면 적습은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거의 사십 일이 넘게 잠잠한 적들을 보니 내 생각에 점점 확신이 더해졌다. 하기야 내가 사탄의 처지였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다. 내가 있는 이상 타나토스는 소용이 없으니 전면전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겠지. 결국에는 약속의 신전 공략에서 우리 전력이 크게 깎이기를 기대하고 있을 터. 그리고 원정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우리를 향해 최후의 공격을 시도할 것이다. 뭐, 제로 코드를 쥐자마자 워프 게이트로 들어가면 그만이지만, 실로 짜증 나는 수작임은 분명하다. 원정이 끝날 때까지 공격해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공략하면서도 항상 방어에 신경 써야 한다. 그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고, 이미 모든 준비는 마쳤다. 현재 해밀 원정대는 공략을 멈추고 보급 요새를 건설하고 있으며, 워프 게이트 활성도 끝낸 상태였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아마 이틀 후, 신 코란 연합, 마법의 탑, 리버스, 한, 그리고 우리 머셔너리를 위시한 원정대와 교대하게 된다. 우선 첫 목표는 법역이 쳐진 지역까지 도착하는 것. 그리고 발견하게 되면 바로 각 원정대의 주력을 부르고, 새롭게 정예 원정대를 편성해 공략을 시작한다. 경계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일단은 이게 주된 방침이었다. 그리하여 대기 명령을 내리고 형의 통신을 기다리는 도중, 나는 조금 갑작스럽게 뜻밖의 기별을 받았다. 니뮤에가 작별 인사를 하러 찾아왔다. “떠나시겠다고요?” “네. 이만 요정의 숲으로 돌아가 볼까 해요.” “으음…. 혼자서는 가는 길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그냥 계속 계셔도 상관없습니다만.” “아니요. 걱정은 감사하지만 제 실력에 자신 있고, 방향도 문제 되지 않아요. 무엇보다 저 혼자서만 여왕님 곁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하기야 정령을 소환할 수 있으니 혼자라 보기도 어렵고, 총할 요정인 이상 실력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떠나겠다는 이유도 타당하다. 원래 요정이라는 종족 자체가 여왕에 죽고 사는 만큼, 아마 지금쯤 한바탕 난리가 났을 터. 그래도 좀 아쉽기는 하다. 니뮤에 정도면 원정에 적잖은 활약을 기대할 수 있을 텐데 말이지. “아, 그리고…. 바쁘신 와중 죄송하지만, 어려운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그러나. “마르 님이 함께 가주시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별로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으신 것 같아서요. 또 보내주실 것 같지도 않고요.” “그거야 당연하지요.” “그래서 한 번 이주를 건의해볼 생각이에요. 여왕님께서 꼭 이곳에 계시겠다면, 저희가 여기로 오는 게 응당 당연한 도리이니까요.” “…예? 그럼 요정의 숲을 버리고 오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될지 안 될지는 장담할 수 없어요. 위그드라실의 씨앗도 새로 받아야 하고, 종족 전체 의견도 물어봐야 해서…. 하지만 수현 씨가 저희의 이주 계획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실 수만 있다면.” “좋습니다.” 니뮤에의 부탁을 들은 순간, 나는 곧바로 아쉬움을 털어낼 수 있었다. “회의 때 그 점을 적극적으로…. …네?” “제가 할 수 있는 선, 아니. 그 이상으로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니뮤에는 염치없다는 얼굴로 양해를 구했지만, 나로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요정이 얼마나 강한지는 일 회차 때 겪어봐서 잘 알고 있다. 정말 니뮤에의 말대로 된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강력한 아군이 생기는 거니까. 그렇게 발 벗고 나서서 도와준다고 하자, 니뮤에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그날로 짐을 챙겨 요정의 숲으로 향하는 여정에 올랐다. 물론 니뮤에는 장담할 수 없다고 했고, 설령 성공해도 내가 원하는 데까지 이르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하지만 안 그래도 사방이 적인데, 남 대륙이 요정까지 끌어들일까 불안하던 찰나였다. 그러니 이 시기에 니뮤에의 부탁은, 북 대륙에 확실한 호재라 볼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메모라이즈 채팅 방』 사탄 : 그래! 당연히 이래야지. 로유진 : ? 사탄 : 너 임마, 솔직히 그동안 좀 너무했다. 그래도 악마 가오가 있는데, 이길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놓고 발버둥만 치라는 건지 알았거든. 로유진 : 아니…. 그거야 애초 콘셉트가 일 회차와 이 회차의 반대니까…. 사탄 : 아니 개새끼야. 이 소설 배경이 이 회차지 일 회차냐고. 로유진 : ……. 사탄 : 그래도 이번에는 뭐, 잘했다. 그렇지. 요정까지 가세하면 좀 할만해지지. 그래도 명색이 소설인데, 주인공한테 위기가 한 번도 없으면 말이 돼? 그럼 재미없잖아. 로유진 : ; 사탄 : 응? 왜 갑자기 땀을 흘려? 로유진 : 아니…. 뭐…. 그래…. 한 번 정도는…. 사탄 : 아무튼, 우리도 이제 좀 할 맛 나겠다! 우헤헤헤. 로유진 : 아, 음;;;;;;;; (로유진 님이 퇴실했습니다.) 0921 / 0933 ---------------------------------------------- A Poisoned Chalice, Two. 내 어렸을 적 꿈은 ‘신의 약속’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건 지금도 그렇다. 어렸을 때는 주변 사람들이 그냥 웃고 넘겼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꿈에 매달리니 악을 쓰더라. 적당히 좀 하라고. 아직도 그 허무맹랑한 소리에 끌려다니고 있느냐고. 하기야. 신화도 전설로도 내려오지 않는 어딘가에서 알음알음 전해져 온 근본 없는 소문이었으니 꽤 속이 터졌을 법도 하다. 나 또한 무려 십 년을 넘게 찾아 헤매면서 중간중간 포기하고 싶은 적이 한두 번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끝끝내 포기하지 않은 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볼 법한, 이 세상 모든 것을 약속한다는 말의 매력에 헤어나오지 못해서가 아닐까.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한다고 하던가. 십 년을 넘어 십오 년, 그리고 이십 년째가 되던 날, 나는 마침내 단서 하나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기실 단서래 봤자 비록 비석에 새겨진 글귀 몇 줄에 불과했지만 그동안의 노력이 헛수고가 아니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기뻤다. 그러나. 그 단서가 그간의 고생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나를 안쓰럽게 여긴 하늘이 이만 포기하라는 전언을 보낸 거라는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비석의 글귀를 해석했을 때의 기분은 ‘돌아가라.’ 는 첫마디를 소리 내 읽었을 때의 심정은 유수의 세월이 흐른 지금 떠올려도 이루 말로 형언할 수가 없다. 정말, 정말로 충격적이었지만 이후로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 ‘자격’이라는걸 충족하기 위하여 그때까지 인내해온 시절의 갑절을 투자했다. 그로부터 오십 년 후. 나는 왕국의 대 마법사이자 대 현자라는 과분한 직책과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신의 약속’에 관해서는 전혀 진척이 없었다. 아니, 하나 깨달은 게 있기는 하다. 근래 들어 생각이 바뀌었다고 해야 하나. 어쩌면 나는, 아니 나로서는 애초 불가능한 일을 이루려 했던 게 아닐까? 수십 년 동안 ‘신의 약속’이 나를 거부해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1. ‘신의 약속’이라는 건 이 세상에 확실하게 실재한다고. 2. 인간이 넘보지 못할 영역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닿을 수 있는 곳이라고. 이 두 명제가 틀리지 않았다면. 그 약속은 내가 아닌 더 간절하고, 더 절실한 먼 미래, 이미 약속된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는. 말인즉 무작정 물리치는 게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약속만이 알고 있는 이유 있는 거절이 아니겠느냐고…. 『라그나로크 중앙 도서관 ‘약속을 잊어버린 날’ 中』 * 우우우웅! 마력이 힘차게 물결치는 소리가 들리자, 어수선하던 장내가 금세 가라앉았다. 광장 중앙, 하얀 계단 너머 있는 공간이 출렁출렁하더니, 곧 바다색 빛무리가 터지며 둥글게 크기를 키워나간다. 나는 반쯤 태웠던 연초를 꺼트리고 정면을 주시했다. 오늘 아침, 형으로부터 워프 게이트의 위치를 이전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중요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접근성이 좀 더 좋은 곳으로 옮기고 싶다고. 어차피 긴 시간이 걸리는 일도 아니고, 해밀 원정대의 수장은 형이니만큼 내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방금 포탈이 새로 생성됐다는 건, 워프 게이트 이전 작업이 끝났으며 연결도 무사히 완료됐다는 신호였다. 나는 거의 형태를 갖춰가는 포탈을 바라보다가, 잠시 주변을 천천히 돌아봤다. 광장은 원정에 참가하는 수천의 사용자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차 있었다. 남 도시 원정대는 네 원정대 중 가장 적은 숫자인 사천오백 명에 불과하지만, 결코 전력이 떨어진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 머셔너리는 말할 것도 없고, 리버스나 마법의 탑 등 여러 쟁쟁한 클랜이 포진해 있으니. 보는 곳마다 자신감 가득한 낯빛이 밟히는 것도 이와 비슷한 이유이리라. “완료됐습니다!” 그때 계단 위에 서 있던 사용자 한 명이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그 순간 심장이 갑작스럽게 펄떡 고동쳤다가 홀연히 가라앉는다. 잠시 후. 나는 가볍게 손을 드는 것으로 화답하고 나서, “들어가겠습니다.” 나직이 말하며 가장 먼저 계단을 올랐다. 이제껏 항상 그래 왔듯이 이번 원정도 우리 머셔너리가 선봉이었다. 그렇게 계단을 전부 오르자, 오 미터쯤 앞으로 일렁이는 푸른빛이 시야를 한가득 물들여온다. 여기까지 와서 어떤 말이 필요하겠느냐마는,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그리고 빛이 가까워질수록 뜻 모를 설렘이 강해졌다. 아니, 아까처럼 크게는 아니지만, 심장이 계속 두근거리는 중이다. 글쎄, 왜일까? 물론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당연히 염두에 두고 있다. 또한, 공략 루트나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앞으로 벌어질 일도 전부 알고 있으며, 그렇다고 무언가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탈에 몸을 묻을 때는 심지어 홀가분한 기분마저 느껴졌다. 결국에는 이 감정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나는 연거푸 두드려오는 빛살을 이기지 못해 지그시 눈을 감았다. * 빛이 사라지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맑게 갰던 아틀란타의 하늘과 정 반대의 날씨였다. 우리가 처음 맞이하는 장소는, 하늘을 가릴 정도로 기다랗게 뻗은 나뭇가지가 그물처럼 우거져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수풀의 빛깔은 강철과 같은 검푸른 빛과, 언뜻언뜻 붉은빛도 섞여 있어서인지 불길하고 음침한 기운이 강하다. “오? 여기는 또 어디야?” “아, 뭐야. 적응 안 돼.” 문득 등 뒤로 안현의 탄성과 이유정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순간 확 달라진 경치에 자못 어색함이 앞섰지만, 나는 서둘러 앞쪽으로 빠져나왔다. 바로 지금도 사용자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머뭇거리다가는 혼잡해져 버릴 것이다.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공간은 충분했다. 워프 게이트를 이전한다는 게 우리가 나올 장소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는지, 몇 걸음 채 걷지도 않아 너른 공터가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그제야 공터를 빙그르르 둘러싸고 있는 수십, 수백 쌍의 눈동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오른 견갑이 흉하게 찌그러진 사내, 핏물로 범벅된 더러운 흰색 가운을 걸친 여인, 털썩 주저앉은 채 우리를 구경하고 있는 외눈박이 사내, 그 사내를 붙잡고 어서 부상자 관리소로 돌아가라고 소리 지리는 여인 등등. 그래도 쉽지만은 않은 길이었는지 대부분 몰골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처참한 기색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넉넉한 분위기였다. 어느 여인은 꽤 심한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우리를 보며 방긋방긋 웃고 있기까지 했다. 할 일을 끝냈으니 이제 쉴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약간 과하게 환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쳇. 자기들 끝났다고 좋아하는 거 봐. 아주 노났네, 노났어!” “야 이…! 부탁이니까 제발 조용히 좀 해라. 아니면 좀 알고 쓰던가. 진짜 창피해 죽겠네.” “왜? 그 말이 뭐가 어때서? 나 중학생 때부터 자주 쓰던 말인데?” “유정아. 언니가 진지하게 물어보는 건데. 혹시 학생 때부터 노름 같은 거 자주 하고 다녔니?” 진수현과 정하연이 번갈아 가며 핀잔을 줬으나, 이유정은 무에 그리 아니꼬운지 자꾸만 흥흥거렸다. 그러나 해밀 원정대의 태도를 탓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실제로 할당받은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고, 애초 원정대를 나눈 것도 교대함으로써 얻는 효과를 누리기 위함이 아닌가. “와, 워프 게이트를 활성화하자마자 바로 넘어온 건가?” 그렇게 생각한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형이 무성한 수풀을 헤치고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씩 웃었다. “많이 힘들어 보이는 것 같아서. 얼른 교대해주려고 바로 넘어왔지.” “과연. 왜 갑자기 분위기가 붕 떴는지 궁금했는데, 이것 때문이었나.” 스슥, 스스스슥! 그때였다. 형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수풀이 낑낑거리며 거세게 몸부림치더니, 이내 누군가 약간 찡그린 얼굴로 떨치듯 빠져나왔다. 작달막한 여아를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근원?” 이름을 부르자, 근원은 금세 표정없는 얼굴로 돌아가 꾸벅 고개 숙였다. 사실 근원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크다. 워프 게이트를 활성화할 줄 안다고 혼자서 모든 원정에 따라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고생했다. 많이 힘들지?” “Negative.” “응?” “임무 수행 과정은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재밌었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나름의 진심을 담아 건넨 말이었는데 근원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부정했다. 게다가 재미까지 있었다니 뜻밖의 답변이다. 아니, 예전에도 이런 말을 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얘는 그냥 느끼는 대로 내뱉는 녀석이잖아. “재미…. 있었다고?” “그렇습니다. 특히 이스탄텔 로우 원정대에 참가했을 때 제일, 아.” 그러나 말을 하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갑자기 형을 돌아봤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죠.’ 라는 얼굴로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리다가, 다시 나를 돌아봤다. “생각해보니 해밀 원정대와 함께했을 때가 가장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이스탄텔 로우도 나름 괜찮았습니다만.” “즐거워?” “그렇습니다. 확실합니다. 특히 해밀 로드이자 머셔너리 로드의 친형인 사용자 김유현은 저 근원에게 무척 잘해줬습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이자 한소영이라는 사용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 그래?” 무언가 대본을 급히 수정해서 읽는 무명의 배우라는 느낌이 들지만, 그냥 기분 탓이라고 하자. 형은 몹시 만족한 얼굴로 끄덕거리고 있다가, 내가 보자마자 자연스럽게 표정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천연스레 말했다. “아, 그럼 이제 어떡할 거지? 오늘 바로 떠날 건가?” 예전에도 느꼈지만, 화제를 은근슬쩍 넘기는 건 형이 나보다 한 수 위인 것 같다. “물론. 우선 넘어오는 것부터 끝내고, 인원 점검까지 마치면 바로 출발할 거야.” “그래도 하루 정도 있다 가지 그래? 도시에 있다가 갑자기 공략 지역에 왔으니 어색할 법도 할 텐데. 이곳 분위기도 익힐 겸.” “안 돼. 오늘을 목표로 최대한 기세를 날카롭게 만들었는데, 쉬면 사기가 무뎌져. 그냥 바로 가는 게 나을걸.” “…뭐,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느냐마는. 그래도 너무 급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애초 내가 말을 들을 거라 생각지 않은 듯 형은 순순히 포기하고 물러났다. 이후 형과 원정에 관해 몇 마디 더 나눴으나, 딱히 특기할만한 사항은 없었다. 웬만한 내용은 앞선 수십 번의 통신으로 이미 전부 들었거니와, 악마에 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기 때문이다. 대화를 끝내고 돌아보니 주변이 상당히 시끄러워져 있었다. 대충 눈어림으로 세어보자 원정대 인원도 약 오분의 일쯤 넘어온 듯싶다. 나는 인원 점검과 주변 풍경을 번갈아 확인하면서 날짜를 계산했다. 물론 직접 가봐야 알겠지만, 아마 하루 이틀 안으로 이 기분 나쁜 숲을 나갈 수 있지 않으려나. 이 숲을 벗어나게 되면, 또 하나의 지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터. 그곳이 바로 머셔너리 원정대가 통과해야 하는 지대다. 그리고 그 지역도 벗어났을 때, ‘약속의 신전’을 보호하는 법역은 코앞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열 장입니다.” “응? 여, 열 장이나?” 사실 좀 의외였다. 형의 신중한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길을 많이 뚫지는 못할 거라고 여겼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진도가 상당하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는 저를 이용하는 대가로 제가 알지 못하는 마법 기록 다섯 장을 제시했습니다. 해밀 로드는 무조건 그 두 배를 주겠다고 했으니 정확히 열 장입니다.” “그래도 열 장은 너무 과한데.” “약속을 불이행하겠다는 것입니까?” “그게 아니라. 애초 조건을 완벽하게 이행하지 않은 건 너잖아.” 그렇게 속으로 계산을 마치는 동안, 근원과 형은 아까부터 스스럼없이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나는 한소영이라는 사용자는 저한테 못되게 굴어 힘들었지만, 김유현이라는 사용자는 정말 잘해줬다. 이렇게 말해주기를 원했다고.” “선 계약금으로 두 장을 받은 터라, 차마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형은 참 신기하다. 근원의 무심한 성격상 친해지기가 어려웠을 텐데. “뭐, 이해해. 하지만 이제 왜 열 장이 과한지 알겠지? 그냥 깔끔하게 여섯 장은 어때?” “…액셉트.”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거래 개념도 가르친 것 같고 말이지. ============================ 작품 후기 ============================ 아마 다음 회 끝자락에 약속의 신전이 있는 지역으로 도착할 것 같네요. 현재 원정 과정(괴물과의 전투, 야영 등)은 일부러 최소한으로 줄이는 중입니다. 예전에 더 이상 던전 탐험에 가까운 내용은 나오지 않을 거라 말씀드린 것도 있고, 원정 동안 겪는 과정이 에피소드 2의 주된 구성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죠. …라고 생각하며 글을 적고는 있지만, 약간 신경 쓰이는 부분도 없잖아 있기는 해요. 근래 진도가 빠른 건지, 느린 건지, 아니면 적정한지. 독자분들께서 느끼시는 바를 말씀해주신다면, 차후 집필에 참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 무리한 부탁이 아니었기를 바라며, 새벽을 종횡무진 휘젓던 이 사나운 야생의 수컷 곰은 이만 동면에 들겠습니다. 독자분들 모두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쿠오오오오오오오! 0922 / 0933 ---------------------------------------------- A Poisoned Chalice, Two. 해밀 원정대가 공략한 지역을 벗어나자마자 주변 경치는 완전히 달라졌다. 경계선 전이 흉흉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삼림이었다면, 지금 우리가 행군하는 곳은 맑고 깨끗한 공기가 가득한 계곡이었다. 게다가 심신이 저절로 경건해질 만큼 거룩한 기운마저 흐르는 지역이어서인지, 마르는 행군 내내 밝은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오죽하면 그 얌전한 애가 휴식 시간에 다가와 ‘아버지. 저 이 장소가 무척 마음에 드는데 잠깐 뛰어놀면 안 돼요?’ 라고 천연스레 물어보기까지 할 정도였다.(당연히 허락해주지는 않았다. 이런 대규모 원정에서 개별 행동은 절대로 금해야 했기 때문이다.) 안 된다고 하자, 귀를 축 늘어트리며 시무룩하게 돌아서는 마르를 보고 있으니 문득 한 생각이 스쳤다. 어쩌면 우리가 이제껏 지나쳐온 지역은 법역 안에 존재하는 지대를 일부나마 표현한 게 아니겠느냐는. 그렇잖은가. 검푸른 강철 빛과 핏빛을 띤 수림과, 세 번째 통과의례인 철혈(鐵血)의 지대. 그리고 신성한 계곡과, 네 번째 통과의례인 성스러운 지대. 예전에는 잘 몰랐지만, 가만히 따져보니 정말 하나씩 연결되는 것 같다. 여하튼 아무리 고결하다고 해도 차후 공략해야 할 지대임은 변하지 않으며, 이 지역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옛날의 기억을 살려 일 회차 때와는 다른 선택을 했다. 계곡을 통과하는 길은 총 두 개가 있는데, 내 기억이 맞는다면 큰길은 이 심협(深峽)의 터줏대감인 괴물의 군락지로 막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 이곳을 완전히 공략한 결과, 군락지를 빙 돌아가는 옆길 하나를 뒤늦게 찾아낼 수 있었다. 나는 이번 원정에서 그 샛길로 가는 걸 선택했다. 길도 좁고 좀 돌아가야 한다는 단점은 있지만, 괴물과 마주칠 가능성이 상당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약속의 신전을 공략하기까지 최대한 전력을 보존해야 하니 그나마 제일 나은 선택이었다. 물론 오래전부터 이 계곡에 자리를 잡고 있는 놈들이니, 아예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는 건 많은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다. 확실히 잦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괴물은 잊을만하면 한 번씩 모습을 드러냈다. 수천 명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만큼 아마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정찰 겸 다가온 것이리라. 그때마다 나는 선유운을 불러 가까이 오는 괴물을 조용히 저격하라 지시했고, 성공하면 사체를 회수해 소각한 후 신속히 그 자리를 떠났다. 만에 하나 놓치기라도 한다? 그러면 돌아간 놈이 군락지에 있는 무리를 이끌고 나타날 건 명약관화였다. 나중에는 우정민의 조언을 받아, 여러 마리가 출현할 걸 대비해 열 명 남짓한 저격수 그룹까지 운영했다. 기실 원정대 자체가 정예만 모인 집단이고, 거기서 또 가리고 추린 결과 활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궁수들이 모였다. 그래서인지 저격수들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 대부분 내 기대에 부응하는 실력을 뽐냈지만, 위험한 순간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딱 한 번 있었다. 약간 험한 지형의 사잇길을 통과할 때였나. 완만한 협곡 위로 스무 마리가 넘는 놈들이 갑자기 우수수 나타났다. 절반은 우리를 보자마자 ‘캭! 캭!’ 거리며 뛰어 내려와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지만, 남은 절반이 문제였다. 무자비하게 난자당하는 동료를 보고 꽤 놀랐는지 곧바로 줄행랑을 놓은 것이다. 저격수들이 발 빠르게 쫓아가 대부분 처치할 수 있었으나, 워낙 지세가 불리했던 탓에 아깝게 두 놈을 놓치고 말았다. 그중 한 마리는 고연주가 능력을 발휘해 가까스로 잡는 데 성공했지만, 남은 한 마리가 문제였다. 애초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기 때문에 그림자 여왕이라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때 해결사로 나선 게 바로 ‘천궁(天弓)’ 선유운이었다.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치는 먼빛의 괴물을 겨냥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고 여겼는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보랏빛 장궁을 거뒀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며 느닷없이 하늘로 화살을 쏴 올렸다. 처음에는 페널티 킥에 실패한 선수가 화가 나서 공을 뻥 차버리는 식의 행동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생각을 수정하기까지는 오 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하늘로 멀리멀리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화살이 돌연히 구름을 헤치며 등장하더니, 급격한 곡선을 그리며 떨어져 점으로 변한 괴물의 정수리에 정확하게 내리꽂혔다. 마치 독수리가 단숨에 먹잇감을 채는 듯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운 저격이요, 꼼짝없이 한바탕 싸워야겠구나고 씁쓸해하던 나로서는 십 년 감수한 일이었다. 원정대의 작은 환호 속에서 선유운은 담담한 얼굴로 사체를 회수해오고 불태웠다. 무언가 신기하다는 기분에 어떤 능력이냐고 물어봤지만, 살짝 웃을 뿐 말해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제 3의 눈으로 봤다. 그렇게 위험천만한 고비를 넘기고 나서 우리는 행군을 재개했다. 여전히 매 순간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적어도 일 회차 때보다 갑절은 순조로운 진군이었다. ‘괴물 무리와 충돌을 피하고 최대한 빠르게 벗어난다.’ 는 목표가 더 이상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 처음 일 주차를 넘었을 때는 기연미연했으나, 행군 이 주차가 가까워질수록 확신이 생겼다. 근 나흘 동안 괴물은 단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 잦으면 아침저녁으로, 늦어도 하루걸러 꼬박꼬박 나타나던 놈들을 생각하면 확실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풍광도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갑자기 확 변한 건 아니지만, 어느 순간 발밑을 맴도는 물안개가 보였고, 밟는 곳마다 물렁물렁하고 축축한 감각이 전해졌다. 시야가 약간 묵직해지기는 했으나 행군에 큰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차츰 긴장이 풀리면서 원정대의 분위기도 살짝 느슨해졌다. “우와~. 근원아 근원아. 이거 뭐야? 조준선 정렬 투(Two)? 이거 궁수 능력 아니었어? 마법사가 어떻게 이걸 쓸 수 있는 건데?” “…….” “어라? 이건 응용 마법…. 앗, 왜 숨기는 거야. 나도 좀 보자~. 같이 보자~. 응?” “…….” 제갈 해솔은 근원이 탐독하는 기록을 몰래 훔쳐보려다가, 근원이 보여주지 않으려 하자 귓가에 숨을 후 불어넣거나 옆구리를 꼭 찌르는 등 이상한 짓거리를 했다. 그러나 허준영이 화난 얼굴로 한 마디 하니 울상을 지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근원은 무심한 눈으로 허준영을 빤히 응시하다가, 쥐고 있던 기록 한 장을 스리슬쩍 내밀었다. 그러나 허준영은 본체만체하더니 예의 못마땅한 눈초리를 사방으로 뿌렸다. 그러자 수군거리거나 킥킥대는 소리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그렇게 요요한 침묵이 흐르는 동안,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조용히 걷기만 했다. 가끔 바람결에 실려오는 아스라한 소리만이 귀를 간질일 뿐이다. 그러나 정체 모를 꿈결 같은 소리가 계속 이어지자, 나도 모르게 청력을 돋워 집중한다. 화난 듯 몰아쉬는 숨소리, 짧은 탄식 소리, 보스락보스락 자갈 밟는 소리, 지저귀는 산새 소리, 물 흐르는 소리, 그리고 어디선가 훌쩍거리는 소리….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앞선 소리는 금세 사라졌다가 다시 들리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끅끅거리는, 누군가 우는 듯한 소리만은 끊임없이 들리고 있었다. 주위도 아까보다 한층 적막해졌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껴 근처를 둘러봤을 때, 발목 부근에 흐르던 안개가 어느 순간 가슴까지 올라와 있었다. 나는 그제야 환몽에 사로잡혔음을 깨달았다. 기이한 일이었다. 안개 때문인지 시야가 잔뜩 흐려졌으나 딱히 환상 공간에 들어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여전히 계곡을 걷고 있었고, 조금 어렴풋해지기는 했지만, 동료들의 기척도 느껴졌다. 「끅…. 끅….」 단지, 눈앞으로 땅에 웅크려 누워 있는 앳된 청년이 불현듯 나타났을 뿐. 「너무해…. 정말 너무하잖아…. 나쁜 년…. 나쁜 년….」 “하.” 순간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쪼그려 누운 채 궁상맞게 눈물을 훔치고 있는 청년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아니, 저건 일 회차의 나잖아. 언제였더라…. 아, 기억났다. 광장에서 쭈뼛쭈뼛하다가, 탐험에 끼워준다는 말을 듣고 덥석 참가했을 때였나? 처음에는 잘 대해줘서 으쓱거렸지만, 애초 미끼로 쓰기 위한 포석이었지. 간신히 목숨만 건져 돌아오니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듯 소량의 은화만 받고 쫓겨났고. 생각해보니 그때는 참 원망했던 것 같다. 탐험을 이끌었던 리더가 나를 벌레 보듯 쳐다봤던 눈초리는 아직도 잊히지 가 않는다. 그 사제 여인, 지금은 뭐 하고 지내려나. 그때 또 한 명의 내가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그리고 일 초도 지나지 않아 새로운 환몽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등장인물이 좀 많다. 「왜 못 도와주겠다는 건데!」 「형이 방금 말했잖아. 아직도 모르겠어? 벨페고르의 계략이 확실하다니까.」 「아 됐어! 나 혼자라도 갈 거야! 말리지나 마!」 「수현아? 수현아! 제발 형 말 좀….」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며 빽빽 소리 지르는 나와, 곤란한 얼굴로 나를 붙잡는 형. 그리고 나를 보며 한숨만 내쉬고 있는 과거의 해밀 클랜원들. 음…. 으음…. 보고 있으려니 몹시 부끄럽다. 이때 참았으면 그 강력했던 해밀 클랜이 풍비박산 나는 일도 없었을 텐데. 민폐도 저런 민폐가 없었지. 형도 참 보살이야. 그래도 약간 신기하기는 하다. 아니, 그립다고 해야 하나. 혹은 부러운 걸까. 두 환몽에 등장한 나는 하나같이 울고 있었다. 어리석고 멍청한걸 떠나서, 저렇게 분노하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참으로 인간다웠다. 적어도 지금의 나보다는 훨씬. …그러고 보니 내가 마지막으로 울어본 게 언제였더라. 지금은 울고 싶어도 못 울 것 같은데 말이지. 모든 일이 끝나면 한 번쯤 시원하게 울어볼 수 있으려나. 뭐, 모르겠다. 불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 사실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는 방법, 아니 운다는 행동 자체를 잊어먹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 세 번째 환몽이 나타났다. 「수현아…. 수현아….」 이윽고 흑단 같은 머릿결과 깊은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 나타난 순간, “이런 씨발….” 나직이 욕설을 뱉으며 있는 힘껏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마력을 끌어올리고 화정의 힘도 일으켰다. 다른 건 몰라도 저 기억만큼은 절대로 다시 보기 싫었다. 효과가 있었던 걸까. 잠시 후, 백치처럼 헤 웃는 여인의 형상이 차츰차츰 흐려지기 시작한다. 가슴까지 차오른 안개는 여전했지만 말이다. 이래서야 아직 꿈을 꾸는지 아닌지 구분이 가지 않을 지경이다. 어떻게 내 항마력을 뚫었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우선 걸음을 멈췄다. 모종의 이유가 있지 않고서야 방금 환몽이 괜히 나타났을 리는 없을 터. 분명히 무언가가 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가일층 시력을 올려 가볍게 주변을 훑었다. 그때였다. ============================ 작품 후기 ============================ 코멘트 많이 달아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_(__)_ 의견이 여러 개인 만큼 서로 갈리기도 하고, 그에 따라 많은 고민도 들었지만, 그래도 가능한 한 최대한 많은 니드를 아우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 독자님들이 만족하실 수 있는 방향으로 가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벌써 7월이네요. 독자분들 모두 기분 좋은 스타트를 끊으시기를 바라요. :D PS. 저는 명백한 사납고 거칠고 흉포한 야생의 수컷 곰입니다. 암컷 곰 아니라니까요. 특히 웅녀라는 별명은 정중히 사양하고 싶네요. …뭐, 제 3차 로리 전쟁을 감수하실 수 있다면, 저도 기쁘게 응수하겠습니다.(?) 0923 / 0933 ---------------------------------------------- A Poisoned Chalice, Two. “오빠?” “클랜 로드?” 갑자기 멈춰 서자, 나를 따라오던 클랜원들이 주춤하는 게 느껴졌다. 이어서 등 뒤가 순식간에 어수선해지더니, 칼을 뽑는 소리나 주문을 외는 소리 등이 들렸다. 아마 어딘가 괴물이 나타났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무슨 일입니까?” 그렇게 갑자기 긴장이 치솟은 가운데, 누군가 조용히 다가와 물었다. 신재룡의 목소리였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그리고 검지가 하늘을 향하도록 천천히,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눈에 보이는 건 자욱하게 흐르는 연기와 흐릿한 색으로 칠해진 구름 하늘뿐. 그러나. “하늘? 아무것도 안 보이는…. 응?” “어? 방금 뭔가 반짝이지 않았나요? 허공에서요.” 그 외에 존재하는 것도 분명히 있었다. “무언가가 펼쳐져 있는 것 같습니다…. 투명한 장막 같은….” 차소림이 가장 정답에 근접하게 말했다. 아직 상당한 거리가 있어 아스라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또렷하게 보였다. 아니, 느껴졌다. 좌우로 끝까지 눈을 돌려도,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하고 투명한 장막이. 말인즉.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행군을 재개를 알리고 있었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걷는 동안, 비로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다름 아닌 머셔너리 원정대는 어느 순간 계곡 지역을 벗어났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잠시 후.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우리는 목표 지역에 근접해서 행군을 멈췄다. 좀 더 확실하게 말하면 더 이상 진군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원정대도 한바탕 난리가 났다. 왜냐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허공에서 은은한 빛을 반짝이는 가루들이 점차 선명해지더니, 종래에는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 더 나아갈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밀고 발로 차봐도 무형의 막은 두꺼운 철벽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차례 길었던 소란이 지나간 후, 클랜원들은 하나같이 다닥다닥 달라붙어 장막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후아아아, 신기해….” 안솔은 숫제 얼굴을 딱 붙여 살살 문질러보는 중이었다. “이야, 이거 조금만 떼어다가 팬터마임(Pantomime)용으로 사용하면 돈 좀 벌겠는데?” 진수현은 두 손을 댄 채 이런저런 몸짓을 취하더니 혼자서 낄낄거렸다. “…….” 그리고 나는 넋을 잃은 기분으로 정면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여전히 애애(靄靄)한 안개로 언뜻 보면 아무 이상 없어 보이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어긋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깨진 거울 속 광경을 보는 듯, 혹은 물에 비친 세상을 보는 듯.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경계선 너머는 이 세상과 미세하게 엇갈려 있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으나, 가까이서 보니 불균형한 분위기가 확 와 닿는다. 과거에 봤던 그대로였다. 펑! 그때, 인근에서 작은 폭발 소리가 느닷없이 터졌다. 흘끗 시선을 돌리자 김한별이 찡그린 얼굴로 두어 걸음 물러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특급 보석을 사용했는데도 흠집도 안 나…?” 그러더니 손을 툭툭 털며 나를 바라봤다. “오빠. 이제 어떡하실 거예요? 부수기는 힘들 것 같고….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녜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아차 함과 동시에 정신이 확 맑아졌다. 그래, 이제 겨우 외곽에 도착했을 뿐.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정신 차리려는 요량으로 스스로 뺨을 때리고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이어서 차분히 숨을 고르니 김한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멍하니 구경하는 클랜원들을 보며 천천히 발을 들었다. 쿵. 그리고 가볍게 땅을 내리찍자, 전원 깜짝 놀라며 나를 돌아봤다. “행군은 이곳에서 멈추겠습니다.” 진군 종료를 선언하니 하나같이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러나 가타부타할 건 없어 계속 말을 이었다. “신재룡.” “예.” “이 근방에 요새를 건설하겠습니다.” “이, 이곳에 말입니까?” “자재나 건축 재료는 신 코란 연합이 관리하고 있을 겁니다. 최대한 넓게, 못해도 일만 명은 수용할 수 있도록 건설하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지시였던 걸까. 신재룡은 갸우뚱하기는 했지만, 군말 않고 몸을 돌렸다. “고연주.” “네?” “궁수와 암살자를 소집하세요. 요새를 건설하는 동안 사방을 철통같이 경계해야 할 겁니다.” “음…. 그런데 워낙 안개가 짙어서….” 살짝 말을 흐리기는 했으나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고연주는 이내 선유운을 데리고 어딘가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근원.” “…….” “한 번 더 수고해 줘.” “액셉트.” 근원은 보랏빛 고깔모자를 푹 눌러쓰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미 몇 번이고 워프 게이트를 활성화한 만큼 알아서 넓은 장소를 찾는 것 같다. “정하연.” “중앙, 후방으로 상황을 전파하면 되나요?” 정하연은 이미 통신 구슬을 꺼내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하나 더 해야 하는 게 있다. “예. 그리고 근원이 워프 게이트 활성화하기를 기다렸다가, 이스탄텔 로우, 북부 연합, 해밀 클랜에 통신을 넣으세요.” “네? 아! 그러고 보니….” “우리가 진군을 종료하는 즉시 각 원정대에서 주력이 넘어오기로 했습니다. 이미 얘기가 된 사항이니 간단하게 상황만 전달하시면 될 겁니다.” “네. 저도 언뜻 들은 것 같은데 깜빡 잊고 있었네요.” 요새 건설, 경계, 워프 게이트 활성화, 그리고 상황 전달까지. 정하연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릴 즈음, 남은 클랜원도 하나둘 정신을 차린 듯했다. 처음 보는 이상 현상에 잠깐 정신이 팔렸지만, 이제부터는 정신을 정말 바짝 차려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비단 눈앞의 법역을 공략하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건, 간간이 출현하는 괴물만 있는 것도 아니다. 아직 가장 큰 적이 남아 있다. 현재 악마가 보이는 건 아니지만, 안개가 심한 터라 속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는 며칠 후 이곳에 도착할 수 있고, 지금 이 순간 반대편에 있을 수도 있으며, 어쩌면 우리보다 앞서 도착하고 숨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을 가능성도 다분하다. 단 한순간의 방심도 용납되지 않는다. 잠시 후, 뿔뿔이 흩어지는 클랜원과 등 뒤가 소란스러워지는 걸 느끼며 나는 연초를 하나 꺼내 물었다. 그리고 다시 전방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법역. 생각보다 순조롭게 도착하기는 했다. 그러나 발견했다고 끝이 아니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 진군을 멈췄을 때 중천에 걸려 있던 해는, 시간이 흘러 서편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사용자 대다수가 근방을 경계하고 정찰하는 동안, 요새 건설도 조금씩 진척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터를 잡거나 얼기설기 울타리를 친 정도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걱정은 한 시름 덜었다. 왜냐면 한 시간 전을 기점으로 다른 원정대의 주력이 무사히 넘어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사천오백 명이던 인원도 단숨에 일만 명 이상으로 늘었다. 이 정도 병력이면 설령 적이 공격해온다손 쳐도, 지원군이 넘어오기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네 개의 보급 요새를 짓고, 워프 게이트로 요새 간 통로를 잇는다.’ 는 일 차 목표는 달성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즉 이번 계획의 크나큰 약점으로 꼽혔던 ‘길을 개척하는 도중 습격당할 가능성이 높다.’ 는 위험은 사라졌다. 한편, 소식을 듣고 넘어온 클랜 로드들은 ‘길이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혔다.’ 라는 이상한 상황을 직접 확인한 후, 전원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하기야 한 번도 겪지 못했던 현상이니만큼 어리둥절하기도 할 터. 이후 임시로 설치된 막사에 모여 갑론을박을 벌였지만, 사실상 전부 탁상공론에 불과한 헛된 가설이었다. “안 될 거라도 있나? 까짓거 두들기다 보면 언젠가는 깨지겠지.” “공찬호 씨는 그게 문제예요. 왜 항상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거예요? 머리를 쓰자고요, 머리를.” 선율은 자기 관자놀이를 톡톡 치며 핀잔을 줬으나, 이번만큼은 공찬호 말이 옳다. 법역을 깨트리는 방법은 오직 하나.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 외부에서 꾸준히 차곡차곡 손상을 입히는 수밖에 없다. 저 벽을 좀 더 효율적으로 해제할 수단이 있었다면, 애초 일 회차 때 그 고생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기대할만한 거라고는 화정뿐인가? 그때였다. 미주알고주알 이야기가 오고 가던 와중, 문득 한 사내가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라고 외치며 후다닥 들이닥쳤다. 길이 막힌 부분의 둘레를 따라 걸으며 경계선을 긋다가, 이상한 장소를 발견했다는 보고였다. 안 그래도 열띤 토론으로 분위기가 한층 달아오른 상태였다. 사내의 말이 끝나자마자, 클랜 로드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동시에 몸을 일으켰고, 우르르 몰려나갔다. 한 명만 빼고. “후유, 이제 좀 얘기할 수 있겠다.” 형은 휑한 막사를 둘러보며 쭉 기지개를 켰다. 워프 게이트를 열자마자 가장 먼저 넘어왔는데, 나와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은 눈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형이 말문을 열었다. “흠…. 걱정이네.” “응?” “악마 말이다. 사실 이 근방에서 맞닥뜨릴 줄 알았거든. …너무 조용한 것 같아서.” “…….” “수현이 네 생각은 어떻지? 놈들이 어떤 수작을 부려올 것 같아?” “글쎄.”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잘 모르겠다는 의미였다. 물론 형의 걱정에는 십분 공감한다. 동 대륙 임무를 끝내고 돌아오는데 이 개월, 정비하고 이것저것 준비하는데 약 한 달, 그리고 이곳까지 도착하는데 이 개월. 총합 오 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시간은 기본적으로 공평하게 흐르니 어느 쪽이든 무언가 이루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무엇보다 사탄이 신경 쓰였다. 그 당시, 타나토스의 몸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연기가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그때는 추격에 정신이 팔려 그냥 넘겼지만, 잘 생각해보니 그 연기는 사탄의 형상과 상당히 닮아 있었다. 실제로 타나토스가 사탄을 부르기도 했고. 만약 내 추측이 맞는다면, 사탄은 과연 백오십일 동안 어떤 계획을 세웠을까? 되려 내가 궁금한 기분에 형을 쳐다보자, 형은 쓰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뭐, 몰라도 어쩔 수 없나. 일단 할 수 있는 방법은 전부 취했으니…. 그나저나 기분이 어때?” “?” “여기까지 잘 왔잖아. 끝을 앞둔 기분이 어떠냐고.” “흐흐.”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나는 싱겁게 웃었다. 그리고 솔직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막연하네. 막막하기도 하고.” “막연하고 막막해?” “동 대륙에서 말해주지 않았나? 저 안이 얼마나 거지 같은 곳인지.” “수현아? 말투.” “미안. 어쨌든 보면 알 거야. 미리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는 게 좋을지도.” “…그렇게 힘드냐?” 형은 약간 못 믿는 눈치였지만,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힘든 정도가 아니었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은 비교적 순조로웠다손 쳐도, 법역을 부수는 과정부터는 몹시 지루해진다. HP 표시가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언제 깨질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법역을 안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된다. 정예 사용자 일만 명으로 열여덟 번 공략해서 겨우 약속의 신전 앞까지 공략했다. 이 말로는 감이 오지 않는 건가? 게다가 일 회차 때의 북 대륙 사용자 수준은 지금보다 훨씬 높았는데. “글쎄. 안쪽의 지대와 비교하면 동 대륙 전쟁은 애들 장난인 수준일걸.” “뭐?” “아니. 어쩌면 그 전쟁은 천국이었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허….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급 궁금해지는데. 우리도 한 번 가볼까?” 놀라는 반응이 재밌어서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 형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나도 따라서 일어서기는 했지만 사실 썩 기대는 하지 않는다. “가는 건 상관없지만, 별것 아닐 텐데. 그냥 넓은 제단이랑 이상한 글귀가 새겨진 비석이 있는 정도?” “뭐가 적혀 있는데?” “몰라. 한 명의 왕과 네 명의 여왕…? 또 뭐라더라. 자격이 있으면 길은 자연스레 열린다? 아무튼, 그래. 쓸데없는 기록이야.” “그래도 한 번 가보자. 과거와 현재가 다른데, 무언가 달라지지 말라는 법도 없잖아? 어쩌면 일 회차 때 찾아내지 못한 걸 발견할 수도 있는 거고.” 하. 형의 말대로만 된다면 오죽 좋을까? 기실 법역이나 지대를 빼고 계산하면 약속의 신전은 순수하게 대여섯 시간 거리에 있다. 그러면 늦어도 여섯 시간 후, 나는 홀 플레인 역사상 두 번째로 제로 코드를 쥘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십오 년간의 고생도 끝날 테지. …뭐, 그럴 일은 전혀 없겠지만. ============================ 작품 후기 ============================ 허…. 허허…. 허허허…. 허허허허…. 어제 코멘트를 보고 깜짝 놀랐네요. 제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요? 정말이지 작금의 현실에 개탄을 금치 못하는 하루였습니다. 후…. 제 3차 로리 전쟁. 예. 좋지요. 하지만 제가 설마 정말 독자분들과 전쟁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어이하여 이리도 제 뜻을 몰라주시는지요. 독자님들. 정녕 전쟁을 원하신다면, 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우선 대화로 좋게좋게 풀어봐요. 저부터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거두절미하고, 곧 완결이잖아요. 완결 전에 로유미, 로유진미, 웅녀 등등의 망측한 꼬리표는 떼고 싶습니다. 진심입니다. 그리고 부탁 드립니다. 한 번만 도와주십시yo. _(__)_ 저는 독자분들을 믿습니다. 아니, 제 기대에 부응해주시리라 믿겠습니다. :) 0924 / 0933 ---------------------------------------------- A Poisoned Chalice, Two. < Reminiscence > 불현듯 어디선가 무음으로 터진 빛이 우거진 그늘을 환하게 밝혔다. 높이는 삼사 미터, 지름은 일 미터 가량 될까. 약간 길쭉하고 둥근 꼴로 생성되는 빛무리는 연한 푸른빛을 띠고 있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시원해지는 잔잔한 바다 빛깔. 그때, 둥근 표면 전체가 거듭 환한 빛을 발한다. 이어서 잔물결이 일 듯 서너 번 가볍게 출렁거리더니, 늘씬한 종아리 하나가 빛을 불쑥 뚫고 나왔다. 탄탄한 허벅지, 버들가지 같은 가는 허리, 도도록이 솟은 가슴, 길고 뾰족한 귀…. 이윽고 포탈을 완전히 뚫고 등장한 여인은 소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요정처럼 무척 아름다웠다. 잠시 후, 여인이 인근이 경치를 천천히 돌아보며 사뿐사뿐 걷는다. 그러나 걸음은 오래지 않아 멎었다. 가는 방향으로 한 늙은 노인이 머리를 정중히 숙인 채 서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드디어 돌아오셨습니까. 나의 주군이시여.” 그러자 물끄러미 응시하던 여인, 사탄…. 아니. 에르윈이 소리 없이 살짝 웃음 짓는다. 어여쁘기 그지없는 미소였지만, 한편으로는 숨길 수 없는 섬뜩한 기색도 서려 있다. “탈주 인원에 올리비아를 끼워 넣었더군. 덕분에 라그나로크에서 편하게 올 수 있었어. 수고했다. 멜리너스.” “누구나 생각할 수 있었던 방법입니다. 오히려 사브나크…. 아니, 올리비아가 고생했지요.” 기특하다는 듯한 말에 멜리너스는 겸손히 대답했다. 에르윈은 곧장 웃음을 거뒀다. 그리고 빠르게 옆을 지나치자, 멜리너스도 얼른 머리를 들고 뒤를 따랐다. 사탄과 벨리알. 실로 오랜만의 재회였으나 둘의 태도는 딱딱하기 짝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선이 명백하게 그어져 있다고 해야 하나. 하기야 원래 악마라는 종족이 그렇다. 주군이 부하를 치하할 수는 있어도 서로 얼싸안으며 회포를 푸는 정은 없는 종이니. 잠시 후, 에르윈과 멜리너스는 너른 공터로 들어섰다. “휑하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에르윈의 말에 멜리너스는 또다시 머리 숙였다. “송구합니다. 그때 패배의 여파가 아직….” “마족은?” “…바알 님과 벨제부브 님의 권속은 완전히 소멸했습니다.” “바알, 벨제부브….” 에르윈의 곧은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멜리너스의 말인즉, 천사라는 격 높은 제물로 애써 소환한 마족 전사가 모조리 사라졌다는 걸 뜻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애초 마족을 피조물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악마로부터 파생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조물주가 소멸했으니 피조물이 사라지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그래서 김수현이 기를 쓰고 대 악마를 잡으려던 것이고. 그러나 에르윈이 아미를 찡그린 건 약간 다른 이유였다. “이상하군. 듣기로는 루시퍼도 잡혔다고 들었는데. 설마 타락 천사의 권속은 남아 있다는 건가?” “대부분 소멸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살아남은 권속도 있습니다. 고작 열 남짓한 정도지만요.” “열 남짓…. 그럼 거의 소멸 직전까지 몰려 있지만, 어쨌든 살아는 있다는 건데.” “…….” 멜리너스는 돌연 입을 닫았다.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지만, 함부로 말할 사안이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흐으으음….” 석연치 않은지 긴 한숨을 내쉰 에르윈은, “됐다. 아, 다른 일은 어떻게 돼 가고 있지? 오 개월이면 충분히 결과가 나올만한 시간 아닌가.” 문득 화제를 돌렸다. 목소리는 아까와 비슷했지만 약간 책망하는 투도 섞여 있었다. 멜리너스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곳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길을 개척하는 단계는 완료됐습니다. 사용자, 거주민을 양분 삼아 힘을 회복한 후 라그나로크 인근으로 이동. 그리고 바로.” “결론만 말하라. 포탈은 어떻게 된 거냐.” “마찬가지입니다. 동 대륙에서 메모리아 스톤을 다수 획득하는 데 성공, 현재는 법역과 십오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멜리너스. 오늘따라 말이 많아. 너답지 않게.” 서늘한 음성과 동시에 에르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두 번이나 말을 끊긴 멜리너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정곡을 찔린 탓이다. “다시 말해라. 왜 내가 나온 곳이 중앙 대륙이 아닌 거지? 왜 너희는 아직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거고?” “…….” “문제가 생겼군.” “…….” 끊임없이 침묵하던 멜리너스는 결국 조심스레 끄덕였다. “실은…. 남 대륙을 이끌어야 할 엘도라의 상태가….” 스리슬쩍 말을 흐린 멜리너스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짧은 시간이 흐르고, 갸웃하며 따라가던 에르윈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두 명이 보는 방향에는 금발의 여인이 홀로 동떨어진 채 힘없이 앉아 있었다. 거기다 고개까지 푹 꺼트린 것이 삶의 의미를 잃은 폐인을 보는 듯하다. “왜 저러고 있는 거지?” “타나토스의 힘을 빌려 살아난 이후로 죽 저렇습니다. 전쟁 패배의 충격이 꽤 큰 듯합니다.” “뭐라고?” “사실 이해는 안 가지만, 저 인간 처지에서 생각해보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그동안 성공 가도만 계속 달리다가, 처음으로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났으니까요.” “…….” “물론 이뿐만은 아닙니다. 분신처럼 생각하던 엑스칼리버도 빼앗겼고, 김수현한테는 장난감 취급을 당했으며, 게다가 동료를 잃은 슬픔까지 겹쳐서…. 뭐, 처음보다 많이 나아지기는 했습니다.” 에르윈은 입속으로 혀를 찼다. 그리고 한참 동안 빤히 바라보다가, 차분히 목을 가다듬고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서로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음에도 엘도라는 미동도 보이지 않는다. “엘도라.” 그러나 고운 미성이 들린 순간 움츠러든 엘도라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엘도라. 저예요.” 한 번 더 부르니 딱딱히 경직돼 있던 몸이 꾸물꾸물 움직이기 시작한다. 힘겹게 고개 드는 엘도라의 몰골은 아무리 좋게 봐도 노숙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결 곱던 금발은 빛을 잃다 못해 심하게 탈색된 것처럼 보였고, 얼굴에는 곳곳에 더러운 자국이 그늘져 있다. 무엇보다 흐릿하기 짝이 없는 두 눈동자는, 예전 푸른 궁전의 테라스에서 자신감을 빛내던 엘도라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에…. 에르윈…?” 목소리도 잔뜩 쉬었다. 잠시 후,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에르윈을 확인하자, 무력하던 눈동자에 조금이나마 빛이 켜졌다. “에르윈…?” “네. 엘도라.” “에…. 에…. 에…. 에르윈…!” “그래요, 엘도라. 그래요….” 에르윈은 엄마 찾는 아이와도 같은 소녀를 상냥히 감싸 안았다. 그러자 엘도라의 눈동자에 서서히 검은 물이 괴더니, 종래에는 시커먼 액체를 줄기줄기 흘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으앙…. 으아아앙….” “엘도라. 울지 마요.” “나 때문에…. 나만 아니었으면….” “아니에요. 저도 전부 들었어요. 절대로, 절대로 엘도라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에르윈이 한참을 다독이고, 구슬프던 울음이 흐느낌으로 잦아들 즈음. 품에 안겨 있던 엘도라가 문득 멍한 얼굴로 에르윈을 올려다봤다. “그런데…. 어떻게…?” “엘도라가 힘들다는 소식을 들어서.” 에르윈은 엘도라의 더러운 금발을 살그머니 쓸어내렸다. “요정들과 함께 왔어요. 미안해요. 너무 늦게 와서.” “요정…?” 원군을 데려왔다는 소리였다. 엘도라의 얼굴빛은 결코 희망차지 않았다. 기쁘다기보다, 오히려 두려워하고 공포에 질린 기색이 역력하다. ‘이만큼이나 심하게 당한 건가.’ 드러난 빛을 눈치챈 에르윈은 짐짓 힘주어 목소리를 냈다. “엘도라?” “……?” “엘도라는 이만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은 건가요?” “그건…!” 그 순간, “아니야!” 처음으로 목소리가 커졌다. 한껏 치떠진 눈동자로 전에 볼 수 없던 사납고 독살스러운 악의가 스쳤다. 순간적으로 소리 지르기는 했지만, 적어도 아니라는 말만큼은 진심이라는 방증이다. 단지, 힘이 부족할 뿐.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죽은 동료의 원한을 갚고 싶었다. …그래. 할 수만 있다면. “아니야…. 아닌데….” 무섭다는 본능과 복수하고 싶다는 감정의 괴리 속에서 엘도라의 낯이 재차 이지러지려는 찰나, “그럼 엘도라는 왜 이 전쟁을 시작했지요?” 갑작스러운 질문이 날아들었다. “어째서 그 무수한 반대를 무릅쓰고, 천사와 반목할 생각을 하게 된 건가요?” 에르윈은 한 번 더 힌트를 줬다. “왜?” 엘도라는 앵무새처럼 말을 따라 했다. “왜…. 왜….” 그리고 나직이 되뇌기 시작한다. “인간을 위해….” 그렇다. 여태껏 엘도라를 지탱해온 단 한 마디. 천사의 꼭두각시를 벗어나 자주성을 확립하겠다는 합리적인 신념. 기실 지독한 자기 합리화이기도 했지만, 현재 그것까지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에르윈은 방금 말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요. 엘도라.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그 말에 엘도라는 언뜻 눈을 들어 천천히 돌아봤다. 주변에는 어느새 여러 존재가 모여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엘도라를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이도, 익숙한 동료도 보였다. 팔짱 끼고 보고 있는 악마도, 어색한 낯으로 쳐다보는 요정도 있다. 엘도라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아직 당신을 믿고 따르며, 이렇게나 힘을 보태주는 이들이 있잖아요?” 에르윈은 떨리는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그 순간이었다. 안개가 잔뜩 낀 것 같던 엘도라의 눈동자가 돌연 번쩍 빛을 발했다. 그러더니 일 초도 지나지 않아, 꺼질 듯 말 듯 살아 있던 눈빛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완전히 꺼트려 졌다. 어두운 바다로 침잠하듯 삽시간에 까만색 일색으로 채색된다. “나는….” 그와 동시에 엘도라의 목덜미에 검은 반점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지만, 말 그대로 찰나의 순간이라 대부분이 보지 못했다. “나는…!” 그리고. “호오~?” 나뭇가지에 드러누워 상황을 구경하던 타나토스가 작은 탄성을 울렸다. 비틀비틀 일어서는 엘도라를 보며 손을 슬쩍 들었다. 손등에는 방금 엘도라의 목에 나타났던 것과 똑같은 반점이 떠올라 요요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타나토스는 검은 문양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나 원. 각성 한 번 참~ 늦기도 하다.” 한편, 같은 시각. “응?” 철혈의 숲을 막 벗어난 김수현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의아한 얼굴로 엑스칼리버를 들어 올리더니, 톡톡 건드리거나 크게 휘둘러보기까지 했다. “허…. 뭐지?” “오라버니? 왜 그래요?” “방금 무언가 툭 끊긴 것 같은 느낌이…. 뭐야. 갑자기 반응도 사라졌네.” “?” 안솔이 갸우뚱하며 물었으나 김수현은 혼잣말만 계속 중얼거리며 엑스칼리버를 건드렸다. 그러나 아직 진군 중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걸까. “아니, 아니다.” 칼을 도로 집어넣은 후, 짧은 한숨을 내쉬며 행군을 재개했다. ============================ 작품 후기 ============================ ……. 0925 / 0933 ---------------------------------------------- A Poisoned Chalice, Two. < Reminiscence > 바람이 불었다. 마냥 시원하다고 볼 수 없는, 금속을 실로 뽑아 짠 푸른 스커트가 펄럭거릴 정도로 강한 바람. 엘도라는 눈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멍하니 앞을 주시했다. 어둠이 들어찬 눈동자는 비록 예전의 빛깔은 잃었지만, 더는 무기력해 보이지 않는다. 단지 끝을 알 수 없는 블랙홀 같아 보는 이로 하여금 뜻 모를 소슬한 기분을 느끼게 할 뿐. “여기는….” “중앙 대륙의 중심부를 지키고 있는 공간이에요.” 조용히 입을 연 엘도라의 등 뒤로 에르윈이 살며시 다가섰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기 보이지 않는 막은 법역(法域)이라고 하죠.” “법역?” 엘도라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되물었다. “네. 신이 선언한 법령으로 보호받는 영역의 줄임말이에요. 줄여서 법역.” “그 신은 어떤 신이고, 법령은 어떤 내용입니까?” 호기심이 동한 어조였으나 에르윈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것까지는 모르겠다는 듯이. 그러자 엘도라는 다시 앞으로 눈을 돌렸고, 닿을 수 있는 곳까지 걸어가 차분히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런 엘도라를 에르윈은 한참 동안 물끄러미 관찰했다. 한데 시간이 흐를수록 두 눈동자로 까닭 모를 실망감이 또렷해지는 듯하다. “설마 기대하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그때 에르윈의 옆으로 누군가가 천진하게 말을 걸었다. 성큼성큼 걸어온 타나토스는 멀리서 가만히 서 있는 엘도라를 보며 쯧쯧 혀를 찼다. “그렇다면 꿈 깨는 게 좋을걸? 저 아이는 아마 깨어났을 때부터 자격을 상실했을 거야. 내 조각을 받아들여서가 아니라, 더는 인간이라 보기 어려우니까.”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에르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끄덕거렸다. “그리고 엘도라가 설령 왕이라손 쳐도…. 안타깝게도 여왕이 보이지 않는걸요. 그냥 혹시나 싶었네요.” 사근사근 웃으며 말하는 요정을 보며 타나토스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한때 한 몸을 공유한 전적이 있는데, 저렇게 어여쁘게 말하는 걸 보니 속이 자못 거북한 탓이다. 하지만 그래도 주변 시선도 신경 써야 하니 어쩔 수 없겠지 라고 생각하며 어깨를 들먹였다. “그나저나 이제 어떡할 거야?” “네?” “힘을 결집한 것도 좋고, 먼저 도착한 것도 좋은데…. 미리 말하지만 지금 내 상태로는 김수현 절대 못 이겨. 아니, 정말 잘 버텨봤자 수십 분?” “…….” 에르윈은 침묵했다. 타나토스의 말은 엄살이 아니었다. 애초 죽음의 신이라는 까마득한 타이틀을 걸고 있는 신이 엄살을 부린다고 보기도 어렵다. 말인즉 타나토스가 스스로 자존심을 접고 말할 만큼 김수현이 대단한 상대라는 뜻이다. “차라리 한 번이라도 공략을 시도해보는 건 어때? 너희는 힘들겠지만, 저~기 인간들은 건드리는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어?” 타나토스가 주변을 돌아보며 싱글거렸다. 사방은 고요했으나 가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기척이 어슬렁거리는 터라 이상하게 시끄럽게 느껴졌다. “나쁜 방법은 아니겠죠.” 진지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을 수 없는 태도였지만, 에르윈은 바로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낱 인간 따위보다는, 저 법령과 맞설 수 있는 존재에 기대보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은데….” 그리고 되려 은근한 눈빛을 보내자, 타나토스는 킥 실소를 터뜨렸다. “싫어. 아무리 나라도 저 정도로 강하게 작용하는 법령을 단시간에 어쩌지는 못해.” “그런가요?” “애초 제로 코드는 십천(十千)에서 탄생한 또 하나의 신이야. 그런데, 그 힘으로 유지되는 영역을 나보고 강제로 침범하라고? 농담하지 마. 힘과 권능이 돌아온다면 모를까. 그전에는 어불성설이지.” “그럼 완전히 회복한 상태라면?” 에르윈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반문했다. 타나토스는 잠깐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살그머니 입맛을 다셨다. “글쎄? 그래도 제로 코드는 장담 못 할걸? 사실 나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막연한 건 매 한 가지지. 뭐, 어느 정도 저항은 가능할지 몰라도…. 결국에는 견디지 못할지도?” “그렇군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원래 계획대로 진행하는 수밖에.” 그렇게 말한 에르윈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기다려.” 그러나 몇 걸음 채 걷기도 전, “아직 내 질문에 대한 답은 듣지 못했는데.” 타나토스의 목소리가 걸음을 붙잡았다. “설마 아직도 그 대계의 예언이라는 말장난을 믿고 있는 건가?” “…….” “아니면 상대의 전력이 녹록해지기를 기다려 숨어 있는다던가?” “…….” 등을 돌린 터라 에르윈은 타나토스가 어떤 얼굴인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지 못한다. “정말 그런 꼴같잖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러나. “각오하는 게 좋을걸? 김수현보다 내가 너희를 먼저 박살 낼 테니까.” 등 뒤로 들려오는 음성은 아까까지와는 다르게 푹 가라앉아 있다.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다. 타나토스의 저의를 느낀 에르윈이 느긋이 뒤를 돌아봤다. “걱정하지 마세요. 말씀처럼 되지는 않을 테니까.” 뜻밖의 시원한 대답에 타나토스의 눈꼬리가 휘둥그레 휘어졌다. 에르윈은 반달 모양을 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재미있으실 거예요. 분명히.” * “오호?” 사내가 보고한 장소에 도착한 순간 형은 약한 탄성을 질렀다. 그냥 단순히 비석과 제단이 있는 곳이라고 말했지만, 그 크기가 생각보다 방대했기 때문이리라. 하기야 잿빛 돌로 이루어진 정사각형 공간만 해도 지름이 이백 미터는 넘고, 각 모서리에 설치된 각양각색의 거대한 기둥도 가히 압권이니. 하기야 나도 처음 봤을 때 꽤 놀랐었지. 형은 연신 탄성을 지르며 감탄을 숨기지 못했으나, 사실 지금의 나로서는 썩 감흥은 없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웅성웅성 모여 있던 사용자들이 자연스레 길을 터줬다. 나는 자꾸만 어디로 가려고 하는 형을 억지로 끌며 걸었다. 그렇게 약간 너른 공간으로 빠져나오니 정면 방향으로 아까 말했던 비석이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유수의 세월을 이기지 못했는지 곳곳에 풍파를 겪은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다. 선율은 비석에 딱 달라붙어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으나, 와짝 찡그린 얼굴을 보니 해석이 힘든 듯싶다. 좋아. 그럼 우선 저 비석부터 해석해볼까. 여기서는 나보다…. …응? 이상하다. 왜 갑자기 기억이 안 나는 거지? “누가 걔 좀 불러와 봐.” “응? 누구?” “걔 있잖아, 걔.” “그러니까 누구. 말을 해야 알 거 아냐.” “그 누구였더라. 좀 멍청하고 바보 같은 애.” “킥! 그런 애가 어디 한둘이야?” “아 맞다. 마수 소환하는 애였지. 이름이 뭐더라?” “…뭐?” 약간 화난 듯한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옆을 돌아보자, 비비앙이 똥그래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두어 번 눈을 깜빡거리더니, 턱이 파르르 떨리고 숨이 거칠어진다. “너, 너…. 방금 나보고…. 아니, 내 이름도….” 화를 벌컥 내며 펄펄 뛰는 비비앙을 달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 때는 이때다 싶었는지 계속 깐족깐족 뻗대길래, ‘얼른 저 비석을 해석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네 엉덩이에 일절 관심을 두지 않겠다.’ 고 선언하니, 입을 삐쭉거리면서도 마지못해 걸어가더라. 잠시 후. “오. 왔다 왔다.” “응? 누군데요?” “거주민이잖아. 그 머셔너리 클랜의….” “아아. 그러네요.” 시끄럽던 주변이 조용해지더니, 기대에 찬 시선이 비석으로 다가가는 비비앙을 향해 와르르 쏠렸다. 고어 해석에 관해서는 사용자보다 거주민이 훨씬 낫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으, 응?” 끊임없이 구시렁거리던 비비앙은 뜻밖의 관심에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곧 상황을 이해했는지 목과 허리가 곧게 펴졌다. 그리고 한껏 무게를 잡으며 뻣뻣하게 비석을 응시한다. “어험 어험…. 아, 되게 오래된 문자군.” “…….” “어디 한 번 볼까…. 신의 약속을 찾아 다다른 이들이여?” “좀 크게 말해. 전부 들을 수 있게.” 그러자 비비앙이 산통이 깨졌다는 얼굴로 빽 소리 질렀다. “아 거 되게 바라는 것도 많네!” “뭐?” “알았다고! 그, 이건 또 뭔 단어야? 십천? 십천의 이름으로 명한다!” “…….” 그렇게 외친 비비앙은 갑자기 양팔을 활짝 펼쳤다. “돌아가라!” …저 퍼포먼스는 대체 뭘까? 또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일까? “분명히 이곳에 너희가 갈구하며 찾았던 것이 있을지 모르나, 신의 약속이 기다리는 건 너희가 아니다!” 술렁술렁! 웅성웅성! 흠. 비비앙의 행동도 문제지만, 그에 호응하는 군중도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오직 자격을 갖춘 이들만이 약속의 반김을 받을 수 있을지니.” “무한의 힘이 기다리는 건 넷과 하나.” “그러므로, 찾아라!” “이건 또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광신도 집회 현장을 보는 것 같네.” 마지막 말은 비비앙이 아니라 고연주의 목소리였다. 언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한 후 황급히 입을 가렸다. 하품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빨리 좀 끝났으면. “그늘에 숨어 사는 자!” “칼을 노래하는 자!” “강철과 선혈을 넘어서는 자!” “거룩하고 고결한 축복에서 탄생한 즈아아아!” 저 비석을 누가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 보고 있다면 아마 굉장히 부끄러워하지 않으려나. 저렇게 방정맞게 읽으라고 세워둔 게 아닐 텐데. “그리고 이 네 존재를 아우르는 하나의 왕!” “이 다섯의 존재가 발을 들여놓는 날,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자연스레 열릴 것이다아아아!” 그렇게 말한 비비앙은 숫제 고개를 한껏 젖혔고, 악마 소환을 앞둔 마녀와 같이 깔깔깔깔 웃어 젖히는 걸로 최후를 장식했다. 이제 끝났다. 물론 이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끝이야? 저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래서 이제 어쩌라는 거지?” 여기저기서 어서 결과를 보이라는 듯 압박을 가했지만, 비비앙이라고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그냥 모른다고 하면 될걸, 한참을 우물쭈물하더니, 끝내 “아! 화장실! 배 아파!” 라는 되지도 않은 이유로 후다닥 도망치고 말았다. 결국에는 다시 시끄러워졌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마음 같아서는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외치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워낙 많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제단을 뒤져봤자 아무것도 안 나오니, 어서 법역이나 깨부숩시다!’ 라고 말할 거리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 하루 정도는 공들여 조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나을지도. 형도 어느새 기둥을 조사하고 있고, 또 한소영의 초감각도 생각해야 하니까. 까딱 잘못했다가는 의심받기에 십상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비석이 있는 곳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요즘 항상 가슴 한 켠이 아릿하다. 대체 이 거칠고 흉포한 야생의 곰과 같은 로유진이라는 사내를 독자는 어떤 이유로 여성이라 조롱하고 우롱하여 이렇게까지 힘에 겹게 하는가? 실로 가슴이 서글프구나. 에피소드는 2도 이제 팔부능선에 접어들었고, 메모라이즈의 완결도 목전으로 다가왔건만, 독자가 작가의 성별을 잘못 알고 있으니 크나큰 문제로다. 독자는 하루라도 빨리 작가의 성별을 제대로 인지하고 그동안의 조롱을 사과하는 것만이 그간의 실수를 씻는 유일한 방법이다. 계속 망측한 별명을 붙인다고 해서 작가가 언젠가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크나큰 오산일 터. 이런 현상이 계속 이어지다 보면 어느 순간 본문에 BL, 퀴어와 관련된 내용이 범람할 것이니. 이 격문을 읽은 독자 개인이 아직도 로유진이 아닌 로유(진)미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리고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사과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다면 저번 1, 2차 전쟁 때 하루도 못 견디고 굴욕적으로 항복한 작가가 도대체 얼마나 억울했으면 스스로 3차 전쟁에 임했는지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한다. 독자는 현재의 코멘트가 과연 정당한지 심사숙고하고 서둘러 생각을 고쳐 작가와의 친분을 돈독히 다지며 예전과 같이 오순도순한 분위기의 코멘트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독자님들을 항상 존중하는 로유‘진’이…. 『2015. 7. 14 반(反) 로유(진)미 동맹 창설 격문 中』 0926 / 0933 ---------------------------------------------- A Poisoned Chalice, Two. 웅. “……?” 뭐지? 어디서 떨리는 소리가 난 것 같은데. 아니, 마력이 흐를 때 나는 울림이었나? 분명히 고막이 살짝 진동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전후좌우를 돌아봐도 별로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사방에는 여전히 짙은 안개가 흐르고 있고, 사용자들도 딱히 유별난 기색 없이 이야기만 나누는 중이었다. 이상하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허 참….” 그 순간이었다. 갸웃하며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웅웅! 아까보다 한층 웅혼해진 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이번에는 확실히 들었다. “응? 뭐지?” “어디서 난 소리야?” 비단 나만 들은 것도 아닌 듯싶다. 방금까지 수군거리던 이들이 하나같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으니. “기둥! 이쪽 기둥이 이상해요!” 그때, 누군가가 뾰족하게 소리 지르며 네 개의 기둥 중 하나를 가리켰다. 우우우웅! 그와 동시에 좌측 상단에 세워져 있던 기둥이 느닷없이 웅장한 굉음을 울렸다. 그야말로 갑작스럽게 발생한 현상. 그리고 미처 무어라 말하기도 전, 기둥이 시커먼 불빛을 깜빡깜빡 터뜨리기 시작한다. 삽시간에 사위가 어두워졌다가 밝아지기를 수차례 반복하더니, 웅, 웅웅! 웅, 웅웅! 무려 두 개의 기둥이 추가로 흔들리며 소음을 힘차게 퍼트린다. 마치 첫 번째 기둥과 공명이라도 하듯, 빛이 켜졌다가 꺼지기를 반복하면서. “어? 어어어어, 어어어어!” 그 순간 아까 소리 질렀던 여인이 돌연히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는다. 두 눈은 찢어질 듯 커져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곳에는 아까 봤던 낡디낡은 기둥이 아니라, 검정 물감을 끼얹은 듯 온통 시꺼멓게 칠해진 기둥이 서 있었다. 그늘인지 그림자인지 모를 시커먼 기운을 뭉클뭉클 흘리는 채로 말이다. 게다가 우측 상단에 있는 기둥은 윙윙거리며 서슬 퍼런빛을 뿜더니, 이내 살이 에일 정도로 날카로운 기운을 곳곳으로 분사한다. 흡사 잘 벼려낸 한 자루의 칼처럼 몹시 예리하기 짝이 없다. 그뿐일까. 정신없는 와중, 문득 철 냄새와 피비린내가 섞인 차가운 내음이 코를 훅 찔렀다. “이게….”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자, 좌측 하단 모서리에 있던 기둥 또한 어느새 검푸른 색과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는 게 보였다. “무슨….” 찰나의 순간, 무수한 변화가 발생했다. 사용자들이 깜짝 놀라 우르르 뒷걸음질 치는 가운데, 나는 심안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침착히 현상을 관찰했다. 상황부터 정리하자.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현재 갑자기 반응한 기둥은 세 개. 즉 총 네 개 중에서 오직 우측 하단에 있는 기둥만이. 웅, 웅웅! 생각하기가 무섭게 네 번째 기둥마저도 변화를 일으켰다. 우우우웅! 처음에는 앞선 세 개의 기둥처럼 깜빡거리며 빛을 비췄다. 그러나 표면으로부터 각중에 눈부시리만치 희멀건 한 빛을 발한다. 각양각색의 변화를 보이는 네 개의 기둥을 나는 멍하니 응시하기만 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일 회차와 똑같을 줄 알았는데. 그때처럼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는데. 이런 사태는 머릿속에 입력돼 있지 않다. 아니, 애초 이런 일이 발생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꽈앙! 최후는 빛의 화려한 폭발. 네 기둥이 꼭대기로부터 형형색색의 광선을 방출한다. 발사된 빛줄기는 처음에는 하늘을 관통할 기세로 수직으로 쭉 상승했다. 그러나 돌연 소라 껍데기의 나선무늬처럼 빙그르르 회전하며 모이더니, 종래에는 엄청난 속도로 한 점으로 뭉쳐 어마어마한 빛을 터뜨렸다. 화아아악! 온 세상이 환하게 밝혀졌다. 마침내 완성된 광경은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공존하는 걸 보는 듯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퉁! 그 어떤 예고도 없었고, 아무 전조도 느끼지 못했다. 그만큼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을 때는, 하늘로부터 이어지는 검은빛 기둥이 이미 내려와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 떨어진 게 아니라, 누군가의 정수리로 정확하게 꽂혔다. 그 누구도 아닌, 고연주를 향해서. “아?” 심지어 그림자 여왕조차 인지 못 한 공격이었던 걸까. “수, 수현!” 뒤늦게 비명이 터졌다. “고연주!”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으나 늦어도 너무 늦었다. 아차 한 순간, 고연주는 순식간에 검은빛에 삼켜졌다. 그리고 어떻게 할 틈도 없이 법역 안쪽으로 쑥 빨려 들어가버렸다. 방금 눈앞에서 봤지만, 그러고도 믿지 못할 장면이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퉁! “아악!” 그러한 찰나, 반대편에서 또 한 번 높은 비명이 터졌다. 황급히 시선을 돌리자, 막 제단에 한 걸음 걸친 남다은이 시퍼런 빛에 직격당한 상태였다. 그리고 내가 몸을 돌리기도 전 빛에 우수수 휩싸이더니, 조금 전과 같이 법역으로 미끄러지듯이 쭉 빨려 들어간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다. 오 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무려 두 명이 사라졌다. 이대로는…! “영역 선포(Area Declared)!” 영역 선포를 외치자마자 또다시 하늘에서 기둥이 추락했다. 이번에는 검푸른 빛과 검붉은 빛이 뒤섞인 빛깔이었다. 그러나. 우직, 우지지직! “!” 이어지는 광경은 진정 현실이 아닌,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일 초. 단 일 초도 버티지 못했다. 화정의 힘을 기반으로 한 영역이 종잇장처럼 쫙 찢어발겨 졌다. 그리고 세 번째 광선은 마치 이러는 게 당연하다는 듯, 막을 유유히 깨트리면서 가열차게 안으로 밀고 들어온다. 그 아래에는 멍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한소영이 서 있었다. 더는 생각할 틈도 없다. 나는 구슬에 마력을 있는 대로 불어넣으며, “이스탄텔 로우 로드!” 곧장 이형환위를 발동, 한소영 곁으로 이동해 와락 끌어안았다. “엄…! 머, 머셔너리 로드?” “가만히…!” 광선이 코앞까지 다가온 것과 내가 한소영을 부둥켜안은 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우우우우우웅! 키이이이이잉! 밀고 밀리는 소음이 귀를 괴롭힌다. 흘끗 눈을 뜨자, 눈앞의 시야가 잔잔한 물에 바위를 던진 듯 출렁거리는 파문을 그리는 중이다. 확실히 하늘 요새 급의 방어력을 지니고 있어서인지, 게헨나의 수호 요새는 광선을 어느 정도 막아내는 듯했다. 하지만, 그게 착각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왜냐면 품에 넣어둔 구슬이 돌연 덜덜 떨리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말인즉 구슬이 저 광선의 힘을 버티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할까? 마력은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하게 소비돼 벌써 바닥을 보이는…? 쩌적, 쩌저저적!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간신히 버티고 있던 붉은 막마저도 쩍쩍 금이 가기 시작한다. 설마 방어에 집중한 겁화조차 견디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러는 동안 기둥이 네 번째로 강림하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렸다. “아, 아버지…!” 이어서 흰빛이 번쩍 폭발하며 누군가 나를 아련한 목소리로 부르기까지. 또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미처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계란 껍질처럼 갈라진 틈으로 광선이 줄줄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호막은 거의 깨질락 말락…. 아니. 콰자자작! 깨졌다. “아, 안 돼…!” 다음 순간, 빛줄기는 해일처럼 밀려와 우리를 왈칵 덮쳤다. 나는 한소영을 힘껏 끌어안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마력도 전부 떨어졌거니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 뜻밖에도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혹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는 표현이 정확하려나. 그저 귀가 먹먹해지면서, 어딘가로 끝없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만이 전신을 순식간에 잠식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한동안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위가 적막해졌다고 느꼈을 때,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목을 간질였다. 내 호흡은 아닐 테고, 그럼 한소영의 숨소리인가? 차분히 양손을 움직이니 왼손에서는 탄탄한 등의 감촉이, 오른손에서는 찰찰 한 머릿결이 만져졌다. 무엇보다 내 가슴을 압박하는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적인 가슴이…. 아니, 아니지. 어쨌든 품에서 한소영이 느껴졌다. 나는 조심스레 눈을 뜨고 천천히 눈을 돌렸다. 그리고 어안이 벙벙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왜냐면. “고연주?” “…바득!” “남다은.” “…흥.” “마르야?” “…흑.” 앞서 사라진 두 여인이 두 방향에서 나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르는 왜 내 눈에 보이고 있으며, 또 어째서 서운하다는 얼굴로 눈물짓고 있는 걸까? “그래서.”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 고연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가시가 잔뜩 돋친 말투였다. “언제까지 껴안고 있을 건데요?” 응? 시선을 아래로 향하자, 내 쇄골에 얼굴을 묻고 있는 한소영이 보였다. 흡사 어린 소녀처럼 두 손을 꼭 모은 채 오돌오돌 떨고 있다. 게다가 얼굴빛 또한 빨갛다 못해 잘 익은 홍시를 보는 듯하다. “아!” 나는 이제 생각난 척하며 서둘러 물러섰다. 사실 아까부터 알고 있었지만, 워낙 감촉이 좋아서….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오히려….” “예?” “또, 또 지켜주셔서 감사하고…. 또, 또 제 몸을 좋아해 주셔서….” 왜인지 평소의 한소영답지 않게 말을 심히 더듬는다. 잠깐, 방금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하이고…. 아주 뜨뜻하네요? 왜요? 잠시 자리라도 비켜줄까요?” 고연주의 화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일부러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가슴이 뜨끔했기 때문이다. “정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다은아. 언니 진짜 서운해.” “저도요. 정말 너무 섭섭해요.” “어떻게 사람이 그래? 누구는 껴안으면서까지 필사적으로 보호하고, 누구는 손만 뻗으면 끝이야?” “언니. 저는 아예 손도 뻗어주지 않았는걸요. …생각하니까 화나네.” 두 여인이 번갈아 가며 나를 공격한다. “오빠. 우리 얘기 좀 해.” 남다은은 숫제 풀썩 주저앉아 맞은편 땅을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쳤다. “아버지…. 저는 봐주지도 않으셨으면서….” 거기다 마르는 한술 더 떠,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흡사 당장에라도 눈물을 흘릴 듯하다. 아까 누가 어렴풋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았는데, 그게 마르였던 모양이다. “마르까지…. 그래요. 어디 한 번 얘기나 들어보죠.”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왜? 안 앉을 거야? 오빠 진짜 이럴 거야? 나 화나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 그래, 아주 죽여라. 죽여. “그만 좀 하세요!” 그때. “상황이 얼마나 급했는지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갑작스레 날 선 목소리가 들리더니 한소영이 나와 세 여인 사이로 불쑥 끼어들었다. 이럴 수가. “하? 말씀하시는 것 좀 봐. 외부인은 빠져요?” “외부인이고 아니고가 중요한가요? 무슨 억하심정으로 머셔너리 로드를 이렇게 몰아붙이시는지,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네요.” “어머. 우리 철혈 여왕이라는 분께서, 듬직한 사내가 안아주니 기분 좀 좋으셨나 봐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그냥 적당히 하시라는 말이었는데.” 한소영이, 그 한소영이 나를 보호해주고 있다. 나를 가려주고 대신 받아쳐 주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감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사람이라는 게, 원래 극한 상황에 몰리다 보면 자연스레 본성이….” 아니. 그렇다고 불 난 집에 기름 끼얹지는 말아주셨으면. 그때였다. 한소영의 뒤에 숨어 상황을 관망하던 찰나, 문득 주변 광경이 눈에 밟혔다. 사방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그리고 내 기억 속에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첫 번째 관문, 그림자 지대. 생각해보니 이상하다. 일 회차 때는 법역을 깨자마자 이 장소가 드러났고, 동시에 어마어마한 그림자가 터져 나와 사방팔방을 휩쓸었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이렇게 조용한 걸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이곳으로 들어온 거고? “!” 그 순간, 어디서 웅성웅성하는 울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먼빛으로 무언가가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도 눈에 잡혔다. 잘못 본 게 아니다. 흐릿한 실루엣 같은 형상이 사방에서 우리를 에워싸며 몰려오고 있었다. 허허벌판이 검게 물들여지며 살금살금 밀려오는 광경은 진정 공포에 가까웠다. “그마아안!” 나는 힘껏 고함치며 뒤를 돌아봤다. 불행 중 다행일까. 밖에서 봤을 때처럼 빛나는 가루를 떨어트리는 법역이 있었지만, 쾅! 있는 힘을 다해 후려쳐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칼로 베어도, 화정의 힘을 사용해도 마찬가지였다. 퇴로는커녕, 전 방향이 모조리 막힌 것이다. 그러는 동안 실루엣은 오십 미터 안까지 접근한 상태였다. 상황이 이쯤 되자 네 여인도 상황을 인지한 듯싶다. 어느새 말다툼을 멈추고 당황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각자 무기를 꺼내거나 주문을 외운다. 그리고 서서히 뒷걸음질을 치며 서로 등을 맞댄다. “모두 제 곁으로!” 나는 남은 마력을 박박 긁어모아 한 번 더 보호 요새를 발동했다.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으며,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애초 이 상황 자체가 계산 밖이었다. 이윽고 정면 방향으로 침범해오던 실루엣이 돌연 소리 없이 솟구쳤다. 그리고 서로 덕지덕지 들러붙어 군집하더니,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손처럼 보이는 하나의 큼직한 형상을 이루어냈다. 저것도 본 기억이 있다. 일 지대에서 가장 악명을 떨쳤던, 아마 그림자 거인의 일부를 형상화한 것이리라. 잠시 후, 그림자는 손을 꽉 말아 쥐며 우리가 있는 곳으로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도착하는 대로 후려갈기려는지, 손목이 뒤로 살짝 젖혀지기까지 한다. 나는 이를 악물며 충격에 대비했다. 이렇게 된 상황은 차치하고서라도,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일단은 버틴다. 버티면서 기회를 본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 “왔어요!” 이 미터가 넘는 그림자 손이 마침내 지척까지 다가왔다. “모두 조심…!” 그리고. 똑똑. “…….” 똑똑~? “……?” ============================ 작품 후기 ============================ 사탄의 안배가 무너진 건 아닙니다. 오히려 위험한 건 사탄 쪽이 아니지요. 물론 김수현도 아니고요. 전전 회와 전회의 Reminiscence를 읽으시면, 아마 감을 잡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편안한 밤 보내세요. _(__)_ 0927 / 0933 ---------------------------------------------- A Poisoned Chalice, Two. …뭐냐. 이 예의 바르고 정중하기 그지없는 노크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싶었다. 똑똑. 그러나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떠봐도 현실은 똑같다. 저 큼지막한 그림자 주먹은 보호막을 힘껏 후려치기는커녕, 외려 점잖게 기척을 냈다. - 열어봐. ‘응?’ - 괜찮으니까 열어보라고. 들어오고 싶다잖아. 주변 좀 둘러봐. ‘들어오고 싶다고?’ 심지어 화정마저도 이상한 소리를 했다. 주변을 돌아보자 눈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허허벌판을 가득히 물들인 실루엣은 어느새 다가오는 걸 멈춘 상태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친 보호막을 중심으로 둥글게 에워싸고 있었다. 하물며 약간의 거리를 둔 채로 말이다. 포위라기보다는 얌전히 기다리는 감이라면 내 착각일까? 그때였다. 긴가민가하고 있는 동안 고연주가 돌연히 몸을 움직였다. 무언가 홀린 듯한 얼굴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고연주!” 어떻게든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결국에는 보호막 밖으로 걸어나가고 말았다. 그런데 고연주가 빠져나가자마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가 머릿속의 그림자 지대는 아주, 몹시 끔찍했던 공략 지역으로 기억한다. 물론 제로 코드를 지키는 지대치고 어디 하나 어렵지 않은 곳이 있겠느냐마는, 그림자 지대는 개중에서도 유별나게 잔인한 곳이었다. 눈에 보이는 그림자 형상뿐만이 아니라, 발을 디디는 땅도 항상 신경 써야 했기 때문이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스치는 음영에 발목이 뚝 떨어지기 일쑤였다. “옳지 옳지. 착하다.” 한데, 눈앞의 저 광경은 도대체 무어라는 말인가? 있는 그대로 보면, 고연주가 손으로 살살 쓸어 어루만져주자, 그림자 손은 간지럽다는 듯이 좌우로 배배 꼬는 중이다. 꼭 주인이 쓰다듬어주니 좋다고 꼬리를 흔드는 고양이를 보는 것 같다. 저 그림자가 얼마나 무자비한지 알고 있는 나로서는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잠깐만. 그림자? “고연주. 괜찮습니까?” “네? 네. 오히려 귀여운데요?” 아니.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지 말라고. 혼자서만 너무 여유 낙낙하잖아. 내 간절한 속마음이 전해졌는지 고연주가 아차 하며 말을 잇는다. “아…. 그냥 친숙한 기운이라고 해야 할까요?” “친숙한 기운?” “네. 이상하게 끌리는 기분이 들어서요. 굉장히 강렬하게요. 아무튼, 수현도 이만 나와보지 그래요? 별로 위험한 애들도 아닌 것 같은데.” “…….” 그 말과 동시에 붉게 흐르던 보호막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한 게 아니라, 공교롭게도 마력이 바닥나 불가항력으로 해제되는 것이다. 그렇게 수호 요새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근처로 몰려온 그림자는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 우리에게는 관심도 없는 듯하다. 오직 고연주 주위만 따라다니며 춤추듯 물결치고 있을 뿐. “기뻐하고 있어요.” 그때 물끄러미 보고 있던 한소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기뻐하고 있다고. 약간 뜬금없다고 생각되는 말이었다. “기쁨, 반가움, 환영, 환희. 여러 긍정적인 감정이 그림자 여왕으로 쏠리는 게 느껴져요.” 그러나 이어지는 말을 들은 순간 방금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초감각으로 받아들인 객관적인 정보를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 그림자 여왕을 강조해서 말하는 걸로 보아 한소영도 아마 나와 비슷한 추측을 한 것 같다. 나는 비비앙이 해석한 비석의 글귀를 떠올렸다. ‘오직 자격을 갖춘 이들만이 약속의 반김을 받을 수 있을지니.’ ‘무한의 힘이 기다리는 건 넷과 하나.’ ‘그늘에 숨어 사는 자.’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자연스레 열릴 것이다.’ 혹시. 어쩌면, 비석이 일컫는 자격을 갖춘 사용자가 고연주가 아닐까? 속 편한 끼워 맞추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서로 그림자라는 공통점이 있지 않은가. 게다가 고연주는 일 회차 시절 약속의 신전을 공략하기 한참 전에 사망했다. 그러니 과거와 현재를 동일 선상에 놓고 견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으나 정황상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남다은과 한소영. 검의 여왕과 철혈의 여왕. 생각해보니 저 두 명도 마찬가지였다. 진명이나 호칭이 두세 번째 지대와 오묘하게 얽히는 구석이 있다. 그리고 두 여인 역시 약속의 신전을 밟지 못한 이들이다. 남다은은 어느 순간 소리소문없이 사라졌고, 한소영은…. 에이, 이거는 생각하지 말자. 괜히 트라우마 들쑤시기는 싫으니까. 단지 하나 걸리는 게 있다면 마르였다. 네 번째 공략 지역의 이름은 성스러운 지대. 문득 성스러운 여왕이라 불렸던 여인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 추측이 맞는다면 여기서 자격을 갖춘 이 중 하나가 유현아가 아닐까 싶은데…. 지금은 없지 않나. 내가 직접 목 잘라서 죽였잖아. 그때였다. 복잡해진 생각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있을 무렵, 무언가 묵직한 것이 엉덩이를 편하게 받쳐주는 감촉이 느껴졌다. 그러더니 배꼽을 확 잡아당기는 감각이 창졸간에 엄습했다. 깜짝 놀라는 동시에 짧은 비명이 들려 눈을 돌리려는 찰나, 보고 있던 풍경이 돌연 쏜살처럼 공중으로 치솟기 시작한다. 잠시 후, 몸이 덜컥 흔들리며 멈췄을 즈음, 나는 두 다리가 허공을 휘젓고 있음을 인지했다. 시야 또한 평소 보던 높이보다 훨씬 드높은 고도에 위치해 있다. 어찌 된 일인가 싶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키가 무려 십 미터가 넘는 그림자 거인이 땅에서 올라와 있었다. 비단 나만 이렇게 된 게 아니었다. 남다은도, 한소영도, 마르도 각각 그림자 거인의 어깨에 놓인 채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고연주는 새로 생겨난 형상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림자 거인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깜짝이야. 갑자기 왜 이래~. 하늘 구경이라도 시켜주려고 이러니? 아니면 어디로 데려다 주려고?” 응? 데려간다니? “!” 라고 생각한 순간, 나를 들어 올린 그림자 거인이 예고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덩치에 걸맞게 성큼성큼 걷는 게 아니라, 미끄럼틀 탈 때처럼 스르르 미끄러지듯이 이동한다. 밀려나는 공기에 얼굴이 시원해질 만큼 속도도 상당히 빠르다. 설마 여기서 청룡 열차를 타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여전히 쿵덕거리는 가슴을 추스르려 애쓰며 앞을 바라봤다. 사실 아직도 믿기 지가 않는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어느 정도 피해는 감수해야 한다고 각오하고 있던 터라, 어리둥절한 기분은 여전하다. 으음. 그러고 보니 길이 자연스레 열린다고 했던가? “아.” 그러자 불현듯 우리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약속의 신전이 있는 방향이었다. * 한편, 같은 시각. 김수현과 네 여인이 사라지자 북 대륙 원정대는 한바탕 야단이 났다. 특히 머셔너리와 이스탄텔 로우 클랜의 난리 정도가 굉장히 심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클랜 로드는 물론, 명성 높은 사용자 셋을 잃었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으랴. 성질 급한 이유정은 이까짓 장막 당장 부숴버리겠다고 한 차례 난동까지 피웠다. 하지만 김수현의 전력을 다한 공격에도 꿈쩍도 않은 법역이다. 한데 이유정이 무슨 수로 깨트리겠는가.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원정에 잔뼈가 굵은 이들도 여럿이라, 한 번 기다려보자거나 아직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 않느냐는 등등 달래는 사용자도 상당수 있었다. 그리하여 폭풍 같던 소란이 서서히 가라앉는 가운데, 오직 해밀 로드만이 냉정하게 상황을 읽고 있었다. 물론 김유현도 김수현이 사라졌을 때 크게 기함하기는 했다. 그러나 앞서 들은 말이 있는 터라, 마냥 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는 중이었다. ‘이상하다. 왜 다섯 명만 사라진 거지?’ 무언가 석연치 않다고 여긴 걸까. 김유현은 비비앙을 찾아 비석에 적힌 내용을 한 번 더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들리는 구절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림자 여왕, 검의 여왕, 철혈의 여왕, 그리고….’ 실제로 ‘다섯 명이 사라졌다.’ 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 추측은 정답에 거의 근접한 상태였다.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 비석의 글귀, 갑작스러웠던 기둥의 출현, 그리고 다섯의 사용자가 차례대로 사라지는 과정. 말인즉 이 일련의 흐름이 상호 연관되는 구석이 있다는 걸 금세 알아차린 것이다. 김수현은 일 회차 때 경험에 강하게 얽매여 있어 늦게 깨달았지만, 김유현은 비교적 객관적인 처지에서 볼 수 있어 보다 빠르게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응? 주변이 좀 밝아진 것 같지 않아?” “어…. 그런가? 아니, 진짜네? 갑자기 안개가….” 그때 언뜻 들려온 이야기가 김유현의 귀를 때렸다. 무심코 인근을 돌아본 김유현의 눈동자로 순간적으로 이채가 스쳤다. 아닌 게 아니라, 잔뜩 끼어 있던 안개가 점차 옅어지며 주변 시야가 선명해지는 중이었다. ‘이것도 방금 현상의 원인인가? 돌아보니 이곳도 상당히 너른 초원, 아니 황무지에 가까워 보이는데…. 아니?’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김유현은 돌연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흠칫 떨었다. 그리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좌우를 휙휙 둘러보더니 품으로 급히 손을 쑤셔 넣었다. 필요 이상으로 꽉 말아 쥔 손에는 푸르게 빛나는 통신 구슬이 잡혀 있었다. “…하.” 그러나 다음 순간, 김유현은 자기도 모르게 탄식하고 말았다. 아무리 마력을 흘려 넣어도 구슬이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요지부동이다. 이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저 법역이라는 막이 김수현이 가지고 있는 통신 구슬과의 연결을 원천 차단하는 게 분명했다. 물론 고작 이것 가지고 김수현이 죽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으니. 누가 뭐라 해도 현재 북 대륙 원정대의 제일 전력은 머셔너리 클랜이다. 몇 년 전 강철 산맥의 이, 삼, 사 지역 공략부터 근래 있었던 동 대륙 전투까지. 어디 하나 머셔너리가 활약하지 않은 곳이 없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사용자가 바로 김수현이다. 그러할진대.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사용자 김수현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김수현뿐만 아니라 고연주, 남다은, 마르, 한소영까지 이탈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렇구나. 다섯 명이 사라졌구나.’ 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특히 다른 누구도 아닌, 김수현이라면 더더욱. 기실 좀 전까지만 해도 김유현은 걱정하면서도 속으로는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었다. 어쩌면 험난하기 짝이 없을 약속의 신전 원정을 생략할 수 있지 않을까고. 그러나 가만히 따져보니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설령 추측대로 된다손 쳐도, 김수현이 제로 코드를 가지고 돌아오는 데 얼마나 걸릴지 누가 안다는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한 찰나, 김유현은 순간적으로 무서운 공포에 사로잡혔다. ‘어쩌면….’ 왜냐면 김수현이 그랬으니까. ‘우리 지금….’ 적은 우리보다 늦게 올 수도 있지만, 비슷하게 도착했을 수도 있다. ‘굉장히 위험한 상황에 처한 건가?’ …혹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고. ============================ 작품 후기 ============================ 에피소드 2의 마무리. 이제 곧 시작하겠습니다. :) 0928 / 0933 ---------------------------------------------- A Poisoned Chalice, Two. 시간을 조금 돌려, 기둥의 각성이 막 시작됐을 즈음. 법역의 영향이 미치는 곳이 전부 그렇듯이, 제단이 있는 장소로부터 약 십 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지점에도 희멀건 한 공기가 흐르고 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어느 곳이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안개가 꼈다지만, 유독 이 부근에 지나가는 기류는 소름 돋을 만치로 오싹한 냉기를 품고 있다. 그렇게 까닭 모를 을씨년스러운 적막이 이어지던 찰나, 불현듯 부옇게 뜬 대기가 장작불의 그림자처럼 흔들흔들 춤을 춘다. 그러자 한들대는 아지랑이 사이, 옅은 빛을 띤 청연(靑煙)이 살며시 드러났다가 이내 사라진다. 해가 중천에 오른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날은 차갑다. 게다가 간간이 부는 바람은, 곧 뻥 터져나가기라도 할 듯 꽉 찬 살기를 암암리에 드러내는 중이다. “후.” 그때 문득 작은 숨소리가 새더니, 자욱한 안갯속에 숨은 실체가 서서히 나타났다. 언뜻언뜻 비치던 빛의 정체는 다름 아닌 눈동자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귀가 뾰족한 여인이 눈을 몹시 가늘게 뜬 채 서슬 퍼런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 ‘시작됐나.’ 에르윈은 찡그린 눈에 한층 힘을 줬다. 가일층 강렬해진 눈빛이 향하는 허공에는, 인근에 흐르는 안개가 유별나게 둥근 둘레를 따라 돌고 있다. 그 가장자리 안쪽에는, 놀랍게도 한 영상이 생성돼 있었다. 안개로 흐릿한 부분은 있지만, 하늘에서 내려다보기라도 하는 듯 제단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 웅웅웅웅! 잠시 후, 영상 속 기둥이 차례대로 반응하는 걸 보며 에르윈은 살짝 눈을 깔았다. ‘역시 예언은 틀리지 않았어.’ 예언. 새로운 여왕이 출현했다. 그리고 왕의 곁에 비로소 네 여왕이 자리 잡았다. 하나 재밌는 사실은 대계의 예언은 여태껏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방금도 예언 일부가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여하튼 상황은 무척 빠르게 돌아가는 중이다. 어느새 하늘에는 거대한 빛 덩이가 떠올라, 다채로운 광선을 지상으로 연달아 떨어트리고 있었다. 여기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예언은 하나. 악마는 다변화 패배의 일 차 조건을 만족했다. 여기서 사탄이 주목한 단어는 다변화라는 말이었다. 사전적인 의미로 보면 예언이 상황에 따라 여러 갈래로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탄은 동 대륙에서 북 대륙과 부딪쳤을 때 의도적으로 패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말인즉, 동 대륙 전쟁의 패배는 ‘액땜’의 개념이 아니다. 바로 ‘제물’이었다. - 화아아악! 그때였다. 영상이 빛으로 가득해지더니 김수현의 모습이 사라졌다. 비로소 한 명의 왕과 네 명의 여왕이 제로 코드의 시험에 들었다. 이제 상황이 어떻게 흐를지는 사탄도 장담할 수 없다. 물론 괜한 짓이었을 수도 있다. 고작 말장난에 사활을 걸었다고 비난해도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그때의 패배가 허튼짓에 불과했는지, 아니면 거대한 나비 효과를 일으킬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사탄은 그저 한 번도 엇나간 적 없는 예언을 신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을 뿐. 행동의 결과는 곧 두고 볼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 에르윈은 약간 숙였던 허리를 느릿하게 폈다. 이로써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동 대륙의 패배로 김수현에게 하나의 확신을 심어주려 애썼고, 뒤로는 몰래 힘을 모아 하나로 결집했다. 이제 남은 건 하나. 제물이 먹혔는지 안 먹혔는지, 몸소 확인할 시기가 도래했다. “그래서.” 그러한 찰나, 등 뒤로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왕과 여왕들이 사라졌으니 이제 전군 진격만 남은 건가?” 타나토스가 팔짱을 낀 채 요요한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에르윈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김수현이 사라진 지금이 공격하기 가장 적기인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애초 노리고 있었던 만큼, 에르윈도 이 골든 타임을 놓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김수현이 사라졌다고 해서 무작정 공격하는 건, 간신히 잡은 기회를 고스란히 헌납하는 것과 같은 그야말로 바보 같은 짓이었다. 실제로 북 대륙은 아직 적의 위치는커녕, 도착 여부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안개가 옅어지기 시작했다고 하나,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터. 에르윈은 우선 이 상황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태 공들여 배치했던 여러 안배가 셀 수도 없이 파훼 되는걸 보며 얻은 게 하나 있다면, 다름 아닌 정보였다. 아니, 경각심이라고 해야 하나. 특히 사탄은 두 눈으로 직접 보기까지 했다. 루시퍼가 안배한 고대 악신 계획이 누구한테, 어떤 식으로 깨졌는지. “설마 워프 게이트 먼저 파괴할 생각이야?” 리리스가 혹시나 하는 투로 말을 꺼냈으나 에르윈은 또 한 번 고개를 흔들었다.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는 태도였다. 괜찮은 의견이라며 끄덕거리던 아스모데우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탄, 아니 에르윈!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그럼 빨리 말을 하라고. 보니까 한 놈 행동이 이상해지는데, 빨리 움직여야…!” 계속 영상을 흘깃거리고 있던 아스타로트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에르윈은 손으로 영상을 살짝 훑더니 뒤를 돌아봤다. “리리스, 아스모데우스, 아스타로트.” 기실. 하나 있기는 하다. 최적 시간을 놓치지 않는 것보다, 워프 게이트를 저격하는 것보다 더 우선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경중을 말하라면 앞선 두 개보다 훨씬 중요하다. 왜냐고? 간단하다. 지금껏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당했으니까. “명령이다.” 그 순간 호명된 악마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원래 말투로 돌아왔다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말 자체가 다소 강압적이다. 애초 ‘모든 악마의 왕’이라는 칭호로 불리는 만큼, 대 악마들도 암묵적으로 사탄을 선도자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니 강압적으로 느꼈다고 해도 별로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다. 한데, 그 누구보다 독립성을 존중하는 사탄이 드물게도 명령이라는 말을 꺼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앞으로 나올 지시가 아주,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다. “악마 군주들한테도 전하라. 지금부터 우리는 무조건,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 여인을 최우선으로 처리한다.” 그렇게 말한 에르윈이 영상을 가리키자, 대 악마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오묘해졌다. 한편으로는 방금 지시에 누구도 가타부타 입을 열지 않는다. 이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이. “타나토스 님도 같이 부탁하겠습니다.” 그러자 마침 영상을 보고 있던 타나토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흐으으음…. 글쎄? 부탁은 어렵지 않지만, 얘가 그렇게 중요해?” “중요합니다. 굉장히.” “워프 게이트보다도? 아니. 기습으로 얻을 수 있는 이점을, 쟤 하나 처리하는데 모조리 쏟아 붓겠다는 거니? 정말로?” “저 여인을 첫 기습 때 죽이지 못한다면, 김수현이 없는 전투에서조차 패배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 말에 타나토스는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이해 못 하겠다는 기색이 역력하나, 사탄의 말은 누가 들어도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다. 결국에는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뭐, 그렇다면야. 한 년 정도 저격하는 거야 쉽지.” 그렇게 타나토스까지 동의한 순간, 에르윈은 허공을 흘끗 흘겼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김수현이 언제 나올지도 모르거니와, 이 이상 시간을 주는 건 미련한 짓이었으니. 잠시 후. 한 쌍의 박쥐 날개가 에르윈의 등을 찢으며 활짝 펼쳐졌다. 그리고 조용히 공중으로 날아오르자, 타나토스도, 대 악마도, 악마 군주들도 모조리 에르윈을 따라 날았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하늘에 흐르는 구름 사이로 살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 잔뜩 끼어 있던 안개가 조금씩. 스스스스, 스스스스! 그러나 광범위하게 헤쳐지기 시작했다. * 지금 내가 겪는 일이 현실일까, 꿈일까? 볼을 꼬집어봐도 그대로니 꿈은 아닌 것 같은데. 그림자 거인의 어깨에 탔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절반쯤은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 일 회차 때 경험이 워낙 강하게 남아 있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반신반의하던 마음은 점차 믿음으로 기울었다. 아니, 기울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는 그림자 지대를 고속으로 벗어난 후, 다음 지역으로 들어섰을 때부터.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칼의 지대로 들어가자마자 볼 수 있었던 건, 가히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각양각색의 검이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광경이었다. 동시에 설마 설마 하던 추측이 확신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처음에 마르는 우리를 향해 쇄도해오는 수천의 칼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기우에 불과한 걱정이었다. 왜냐면 칼끝에 꿰이는 꼬치 신세는커녕, 그림자 지대에서 겪었던 현상과 똑같은 일이 벌어졌으니까. “우와….” ‘검의 여왕’ 남다은은 자기를 둘러싸 회전하는 칼을 보며 연신 감탄을 터뜨리는 중이다. 사실 상당히 웃기는 장면이다. 남다은이 가끔 살그머니 손이라도 뻗을라치면, 검은 행여 다칠세라 스스로 휙 멀어졌다가, 이내 살그머니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남다은의 사위를 빙그르르 돌기 시작하고. 꼭 여왕을 수호하는 추종자를 보는 기분이다. 단, 그림자 지대와 하나 차이점이 있다면, 내게도 관심을 보이는 칼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것이다. 지금 봐도 그렇다.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은, 은장도처럼 보이는 검 하나가 내 주변을 자꾸 어정거리는 중이다. 왜 저러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 검의 주인이라는 호칭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한 번 시험해볼까? 나는 칼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넌지시 손을 뻗어 덥석 잡아챘다. 뜻밖에도 은장도는 달아나는 척하더니 순순히 잡혔다. 이내 조용히 입속으로 집어넣은 순간 칼날이 부르르 떨리는 걸 느꼈으나, 혀를 살살 굴리며 흡입하니 곧 축 늘어진 듯한 감각이 전해졌다. 하도 반응이 신기해 이로 꽉 깨물어보고도 싶었지만, 한소영이 아까부터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봐 그만두기로 했다. 어쨌든 적대적이지 않다는 건 확인했으니까. 이윽고 환영 의식이 끝나고 나자, 그림자 지대 때처럼 인도(引導)가 이어졌다. 거두절미하고, 우리는 하늘에서 착륙한 거대한 대검에 올라타(흡사 슈퍼 보드를 타는 기분이었다.), 편하고 빠르게 지대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이어지는 철혈의 지대는,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신속하게 지나쳤다. 그림자나 칼은 보기에 따라서 귀여운 구석이라도 있었지만, 핏물을 묻힌 강철로 된 병사는 상당히 그로테스크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병사를 지휘하는 장군이 아양 떠는 성격은 아니어서, 우리는 침묵과 정중함이 공존하는 호위를 받으며 말을 타고 지대를 가로지를 수 있었다. 네 번째인 성스러운 지대에 이르러서는 약간 시간을 지체했다. 들어가는 순간 찬란한 빛을 발하는 빛무리가 곳곳에서 생기더니, 종래에는 마르를 둘러싸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유심히 관찰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왜 저러는지 나름대로 짐작 가는 바가 있던 터라, 실로 법역 안으로 들어온 이후 가장 긴장되는 시간이었다. 만에 하나 마르가 여왕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려하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던 빛무리가 어느 순간 선명한 빛 가루를 뿌리는 걸 보니, 마르도 결국에는 여왕으로 인정받은 듯했다. 하기야 이 법역에 강제로 소환됐을 때부터 정해져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충 계산해본 결과,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어림잡아 세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자 문득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일 회차 시절, 네 지대 공략이 끝났을 때 양기덕이라는 사용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원정대는 약속의 신전까지 도착하는데 반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을 들였다. 그러나 실제 간격은 뛰는 걸음으로 여섯 시간쯤 걸리는 거리에 있다고. 그 당시로는 상당히 충격적인 발표였다고 기억한다. 한데, 이번에는 여섯 시간은커녕, 무려 절반도 되지 않는 시간으로 전 지대를 패스했다. 그것도 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 어떤 수고도 들이지 않은 채로. 그렇게 빛무리가 전해주는 무언의 축복 속에서, 우리는 성스러운 지대마저도 논스톱으로 통과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성스러운 지대를 빠져나온 우리의 눈앞으로, 대망의 최후 관문이 나타났다. ============================ 작품 후기 ============================ ㅇ<-< 0929 / 0933 ---------------------------------------------- A Poisoned Chalice, Two. 최후의 관문. 최후의 관문이라 함은, 성스러운 지대와 다음 지역의 경계를 긋는 기나긴 산성을 일컫는다. 말인즉 그 경계만 넘으면 약속의 신전이 장소가 나오므로 최후의 관문이라 부르는 것이다. “와…. 진짜 길다.” “높이도 높이지만 길이가 장난이 아니네. 과연 어디까지 뻗어 있으려나?” 남다은과 고연주가 차례대로 탄성을 터뜨렸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최후의 관문은 볼 때마다 감탄을 자아내는 구조물이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표면은 큼직한 회색 벽돌로 차곡차곡 쌓여 반듯하게 맞물려 있다. 높이는 못 해도 십 미터 이상이고, 두께도 장장 사 미터가 넘는다. 무엇보다 고연주의 말대로, 망망대해 같은 벌판에 혼자서 한도 끝도 없이 일(一)자로 펼쳐져 있는 광경은 장관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 꼭 만리장성을 보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하늘을 날지 못하는 이상 저 관문을 넘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걸어서 통과할 수 있는 곳이 한 군데 있다. 산성 전체로 보면 작달막한 구멍에 불과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문 없는 통로라고 보는 게 옳을 터. 여하튼 이 장소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만큼, 머릿속을 더듬으며 걷자 이른 시간에 길을 찾아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렇게 최후의 관문을 통과하자마자 성큼 다가온 광경은, 이제껏 지나쳐온 지역과 상당히 판이했다. 네 지대가 경치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던 허허벌판이었다면, 이곳은 눈을 돌리는 곳마다 흰색 건물이 걸리는 몹시 넓은 공간으로, 흡사 흰 눈에 덮인 외로운 고대 유적을 보는 듯했다. 단지 대부분의 건축물이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해 낡아 부스러졌고, 또 워낙 고요하고 적막한 터라 약간 세기말다운 황량한 느낌도 없잖아 있었다. 이쯤 되면 ‘여기는 어떤 곳이지?’ 라는 말이 응당 나와야 할 터. 아니면 ‘이제 어디로 가야지?’ 라거나. 그러나 네 여인은 아까부터 침묵하는 중이었다. 살짝 뒤를 돌아보자 전원 입을 약간 벌린 채 넋을 잃은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한소영이 나와 눈을 맞추더니 아차 하며 “합.” 입을 닫는다. 그리고 까닭 없이 화난 표정을 지었다. 뭘 잘못했는지 전혀 모르겠지만, 본능에 따라 얼른 다시 앞을 응시했다. 정면을 바라보며 천천히 시선을 올리자, 그라운드 제로 같은 풍경 속에서, 언뜻 전각(殿閣)과 흡사한 거대한 건축물 하나가 홀로 두드러지게 솟은 게 보였다. 거리가 어느 정도 있는지 먼빛이기는 했으나, 규모가 얼마나 어마어마하면 여기서도 또렷하게 보일 지경이다. 게다가 희디흰 겉면에 흐르는 빛에서는 거룩하고 신비로운 아름다움마저 느껴졌다. “…….” 그래. 약속의 신전이다. 약 이십 분에 걸쳐 걸어간 결과, 우리는 약속의 신전 바로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멀리서 볼 때도 대단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한층 놀라웠다. 가장 아래에서 받쳐주는 직사각형 단상의 두께는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만큼 큼직하고 웅장하다. 그 위로는 파르테논 신전을 연상케 하는 기둥이 가지런히 세워져 있으며, 상부에는 바로크 양식의 교회와 똑같은 구조물이 기둥과 연결돼 있다. 거기다 꼭대기는 고풍스러운 아치를 그리는 지붕으로 멋지게 마무리했다. 이렇게 삼단으로 결합한 신전이다 보니, 새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높다. “후유!” 누군가 갑자기 숨을 토하자, 참았던 숨을 내쉬는 소리가 두 번 더 이어졌다. 아마 자기도 모르게 건물의 위세에 압도당했던 거겠지. 처음 봤을 때 나도 저러지 않았으려나. 나는 속으로 웃으며 좌우를 번갈아 봤다. 정면으로는 길이 없고, 좌우로 돌아가면 단상을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기야 이곳까지 왔는데 뭘 더 고민하고 주저하랴. 그렇게 생각하며 더 가까운 쪽으로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길고 드넓은 계단을 밟은 우리는 마침내 거대한 단상에 올라 신전 앞에 섰다. “…하.” 무어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다. 알 수 없는 문양이 그려진 흰색 문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 꼭대기 층까지 올라가는 순간, 나는 두 번째로 제로 코드를 쥐게 되는 것이다.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눈앞의 문을 젖히려 손을 뻗었다. “머셔너리 로드는.” 그때였다. “별로 놀랍지 않으신가 봐요.” 문득 들리는 잔잔한 음성에 나도 모르게 손이 멈췄다. “꼭 이곳에 온 적이 있는 사람 같아요.” “…예?” 간신히 반문하기는 했으나 순간 가슴이 철렁거렸다. 멍하니 몸을 돌리자, 한소영이 깊고 그윽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아니.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그러고 보니…. 너무 길 잘 아는 거 아녜요? 이렇게 넓으니 좀 헤맬 법도 한데?” 고연주도 생각하는 체하더니 검지로 턱을 받치며 물었다. 살살 눈웃음치는 걸 보니 장난스레 물은 것 같지만, 두 눈동자만큼은 나를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표정을 관리했다. 왜 갑자기 저런 말을 꺼냈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스리슬쩍 넘기는 게 낫겠다. “그럴 리가요. 그냥 운이 좋은 거겠죠. 하하.”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자, 고연주는 눈을 홉뜨며 아랫입술을 약간 내밀었다. 그러나 그 순간 한소영의 고개가 아주 살짝 앞으로 기울어졌다. 순간 아차 싶었다. 한소영의 초감각을 염두에 두지 못한 것이다. 실수라면 실수였다. 다음 순간, 옆에서 빤한 눈초리가 느껴졌으나 억지로 헛기침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서둘러 문을 젖혀 등 떠밀리듯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무려 오 년 만에 입성하는 약속의 신전이었으나, 더는 감회 같은 속 편한 감정을 음미할 상황도 아니었다. 무언의 압박이 자꾸만 등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길은 알고 있으니 반사적으로 걷고는 있지만, 사실 땀이 솟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등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지금껏 잘 숨겨왔는데…. 그러나 한참을 정신없이 걸으면서 생각해보니 불현듯 이제 무슨 상관이랴 싶었다. 어차피 제로 코드를 얻고 돌아가면 상황 종료 아닌가? 물론 쉽게 꺼낼 이야기는 아니지만, 끝을 앞둔 만큼 굳이 숨길 필요도 없잖아. 얼핏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어두운 계단을 오르는 중이었다. 어느새 여기까지 온 걸까. 한동안 정신이 팔렸다 보니 내부는커녕, 기관 장치도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여기까지 무사히 온 걸 보니 무언가 달라진 것 같기도 한데. 흘깃 뒤를 돌아보니 남다은과 마르는 계단 옆 벽을 연신 두리번거리는 중이다. 그리고 다른 두 여인은 심각한 얼굴로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고연주가 주로 말을 하고 한소영은 가끔 끄덕거리는 게 왜인지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생각해보니 그이는 항상 은근슬쩍…. 응?” “!” 그러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이야기를 중단하며 동시에 나를 쳐다봤다. 이어서 둘 다 어여쁘게 눈을 흘기더니, 숫제 둘이 딱 붙어서 더욱 열심히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흡사 나 보라는 듯이 말이다. 뭐. 어쩌라고. 공교롭게도 마침 계단 끝자락에 다다라, 나는 입맛을 다시며 위층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다. 그 찰나의 순간, 심한 갈등이 일었다. 현재 약속의 신전은 모종의 이유로 수호자가 출현하지 않으며 함정도 발동하지 않고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지대에서처럼 우리를 통과시켜주는 느낌이었다. 그럼 가는 길이 문제인데, 위층부터는 꽤 복잡한 미로가 나타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헤매는 모습을 보일까, 아니면 아는 길로 갈까. 결정은 생각보다 금세 내릴 수 있었다. 숨기지 않기로. 그렇게 마음 먹고 문을 열자마자, 역시나. 길쭉한 벽이 구불구불 얽힌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언뜻 보면 어디가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굉장히 어지럽게 헝클어졌다. 그러나 나는 미로 속으로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가는 내내 예상대로 수호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함정이나 길이 바뀌는 기관 장치 또한 단 한 번도 발동하지 않았다. 나는 순식간에 미로를 빠져나가 곧바로 계단을 올라, 다음 층도 단숨에 돌파했다. 한 층을 공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십 분. 초고속으로 신전을 오른 결과, 들어온 지 한 시간도 안 돼서 가장 위층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최상층은 은은한 푸른빛으로 둘러싸인 터널과도 같은 복도였다. 그리고 이 복도의 끝에는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통행로 나 있다. 오직 어둠만이 꽉 들어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통로가. 내가 걸음을 멈춘 것도 복도 끝에 다다라서였다. 통로를 목전에 둔 채, 방망이질하는 가슴을 추스르려 힘껏 숨을 들이켰다. 나는, 이 안에서 제로 코드를 얻었다. “수현~. 이 안은 어떤 공간이에요~?” 고연주는 통로 안을 가리키며 몹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내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지 약간 깐족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추후 저 까부는 가슴을 꽉꽉 주물러주리라 다짐하며 심술궂게 입을 열었다. “글쎄요.” “흐으으응~?” “안이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러니 이스탄텔 로우 로드. 라이트를 켜주지 않겠습니까?” “…….”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한소영의 반응은 없었다. 그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만 한 번 깜빡였을 뿐. “…….” 도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자 괜스레 오기가 솟구쳐, 나도 침묵하며 눈만 깜빡거려보기로 했다. 어디 한 번 해보자고. 깜빡! …깜빡? 깜빡깜빡! …깜빡깜빡? 이윽고 눈을 세 번 깜빡거리려는 찰나, “…후. ────. ────.” 한소영이 작게 한숨짓더니 조용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다. 순간 이겨도 이긴 것 같지 않은 기분이 엄습했으나,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앞을 바라봤다. 그리고 후회했다. 그냥 들어갈걸. “라이트.” 그러나 한소영은 이미 주문을 끝냈고, 환한 빛을 발하는 구체가 생성됐다. 통로로 전진하는 빛의 구체를 따라, 나는 침착히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흠. 이제 왔나.” …응? 방금 누가 말한 거지? “뭐, 아무튼.” 아니, 앞에서 들리지 않았나? “두 번째로 정상에 오른 기분은 어떤가? 과거의 정상(頂上)이여.” 그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정상(頂上)이라는 진명에는 김수현이 알지 못하는 특별한 효과가 있답니다. 0930 / 0933 ---------------------------------------------- A Poisoned Chalice, Two. 막 문턱을 넘어간 찰나, 퉁! 갑자기 부딪쳐 울리는 소리가 나더니, 안쪽으로 시퍼런 불길이 확하고 솟아올랐다. 나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앞을 주시했다. 자세히 보니 긴 막대기 끝으로 얹힌 화로 그릇에 청색 화톳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퉁, 퉁, 퉁, 퉁! 이윽고 새로운 푸른 불길이 정면 방향으로 또 한 번 생겨났다. 망연히 보고 있자, 불꽃은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가며 하나씩 타오르더니, 종래에는 지그재그로 나열된 화로 사이의 길목을 밝히며 장내의 어둠이 걷혔다. 그리하여 드러난 중심부는, 생각보다 작고 둥근 공간이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소환의 방과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지름은 약 사십 미터도 안 되는 것 같은데, 천장까지의 높이는 무려 이십 미터가 넘으며, 위로 올라갈수록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한 점으로 모이는 형태였다. 밖에서 봤던 아치 모양의 지붕이 바로 이곳인 듯싶다. 단지 길 앞에서 타오르는 화롯불이 곳곳으로 불빛을 퍼트려, 방에는 은은한 푸른빛이 돌아 괜스레 신기하고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까지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을 거지?” 그때 좀 전의 음성이 한 번 더 귀에 들렸다. 공간을 웅혼하게 울리는 게 아니라,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육성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나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가, 맞은편 길목 끝자락에 있는 적당한 크기의 제단을 발견했다. 제단은 화려하기는커녕, 어떤 장식이나 꾸밈없이 간소했으며, 오직 성인 남성 손바닥 크기만 한 잔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설마, 저기서 들린 거?” “…벌써 잊은 건가. 아무리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나, 실로 멍청하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렇다는 듯이 말하는 투에 나는 어색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왜냐면 처음에는 새침한 소녀 같은 음성이었다가, 방금은 늙은 노파가 말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또 어떻게 생각하면 굵고 시원시원한 남성의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소리였다. 화로 사이를 가로지를 때까지만 해도 음성은 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제단을 올라 큰 잔 앞에 섰을 때, 불현듯 기이한 감각에 휩싸이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였다. “흠. 그래도 좀 달라졌나.” “?” “왜 모르겠다는 얼굴이지. 시간을 돌리겠다고 난리 칠 때는 그렇게 독기 찼던 얼굴이, 읍?” “자, 잠깐.” 너무 갑작스러운 폭로에 나도 모르게 잔을 손으로 덮어버리고 말았다. - 야, 야 임마! 그러나 화정이 깜짝 놀란 음성으로 외치고, “무엄하다. 이놈.” 잔도 약간 화난 듯한 목소리로 말해 서둘러 손을 뗐다. “…뒤를 신경 쓰는 것이라면 걱정 말거라. 지금 너와 나와 대화는 들리지 않을 테니.” 아, 설마 아까 느꼈던 감각 때문인가. 그럼 다행이기는 하지만, 아직 어리둥절하기는 매 한 가지다. 나는 침착해지려 애쓰며 제단에 놓인 잔을 천천히 살폈다. 언뜻 보면 아무 특색 없는 약간 넓적한 잔에 불과하다. 물론 일 회차 때 이 제단에서 제로 코드를 얻기는 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눈앞의 잔에 담겨 있더라. 그러나 지금은 어떤 이유인지 제로 코드가 보이지 않고, 또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당시에 목소리는 듣지 못한 것 같다. 그저 보자마자 제로 코드를 쥐고, 쫓기듯 빠져나왔던 것만…. “확실히 그랬지. 내가 말도 붙이기 전에 참 잘도 도망치더구나. 그렇게 무례한 짓을 당한 건 처음이었어.” 허? 설마 내 속마음을 읽은 건가? “그 정도야. 아무튼, 또다시 정상에 오르니 어떤가? 오래지 않은 과거에 정상에 올랐던 이여.” 흠칫한 찰나, 아까와 같은 물음이 이어졌다. 동시에 느닷없이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 엄습했다. 어떠냐니. 글쎄. 질문의 의도조차 모르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좋은데. 좀 놀랍기도 하고.” 무언가 있는 체하며 말하기보다는, 그냥 사실대로 말해버렸다. 이렇게 쉽게 제로 코드가 있는 곳까지 올 줄을 정말 상상도 못 했으니까. “네 감정을 물은 게 아니란다. 다시 말하거라.” 하지만 역시나 초점을 잘못 짚은 듯하다. - 네 현재 감정이 아니라, 회귀 이후 이곳까지 이른 것에 관해서 말하라는 거야. ‘으, 응?’ - 우선은 아무것도 생각지 말고 질문에 집중해. 또 괜히 말 빙빙 돌리지도 말고. 지금도 충분히 불순하니까. ‘…그래. 알았다.’ 뭐가 불순하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나는 알겠다. 화정이 이러는 걸 보니 함부로 대할 대상은 아닌 듯하다. 어쩌면 제로 코드와 연관된 신일지도. 아니면 제로 코드가 신 자체거나. 어쨌든 화정의 조언을 받아 나는 다시 상념에 잠겼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한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변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았다.” “모호한 말은 집어치우거라.” 나름 느껴온 바를 말했으나 잔의 회답은 여전히 단호했다. 묻는 주제에 뭐가 이리 강압적인지 몰라 불만이 솟았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약속의 신전 내 지대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시험의 지대가 남아 있었다. 말인즉 현재 시험받는 처지일 수도 있으니. “아무렇게나 말한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말한 거야.” “아무렇게 말했다고 한 적은 없는데. 모호하게 말하지 말라고 했을 뿐.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하라는 뜻이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가 없다. “풀어서 말해보면, 이 회차는 확실히 일 회차와는 달랐어. 과정도 달라졌고, 결과도 달라졌지.” “그건 변했다겠군. 허나 그럼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 “어째서? 실제로 이 장소에서 겪은 것만 비교해도 많은 것이 달라지지 않았나.” “뭐, 그렇기는 해.” “흠?” “하지만 뭐랄까…. 잔가지는 달라졌지만, 나무 자체는 똑같다고 해야 하나? 아, 물론 완전히 같지는 않아. 하지만 일 회차에 겪었던 일 중 커다랬던 것들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비슷하게라도 일어나는 것 같더라고. 내가 아무리 발악해도, 결국에는 원점으로 돌려놓듯이…. 이런 뜻으로 말한 거였어.” “…….” 생각보다 말이 길어졌다. 잔은 짧은 침음을 흘린 후, 조용히 침묵했다. 흡사 내가 한 말은 곱씹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렇다면, 후회하는가?” “…뭐?” “후회하느냐고 물었다. 네 말에서 회한이 느껴져서 그렇다.” “…….” 이번에는 반대로 내가 입을 다물었다. 처음에는 뜬금없다고 느꼈지만, 잘 생각해보니 전의 질문과 이어지는 느낌도 없잖아 있었다. 후회라. “후회….”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이라, 나는 천천히 턱을 젖혀 위를 올려다봤다. 돌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나긴 한숨이 새나왔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투박하던 천장이 갑자기 빙글빙글 도는 것 같다. “글쎄.” 엄밀히 말하면 후회는 하지 않는다. 어쨌든 형과 한소영을 죽게 놔두지 않겠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단지, 단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어.”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왜인지 잔의 말이 심장 깊숙이 꽂히는 기분이었다. “내가 말해볼까. 오 년 전의 너는 무조건 하나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아마 그때의 너였다면 생각조차 않고 아니라고 했겠지.” “…….” “허나 네가 말한 잔가지라는 것들은 너를, 그리고 네 목적에도 영향을 미쳤어. 언제나 민폐만 끼치는 존재에서 가장 사용자다운 존재로. 배신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던 주변은 믿음직한 동료들로 채워졌다. 이 외에도 여러 변화로 인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을 터. 즉 어느 순간부터 이런 생각이 들었을 거다.” “…….” “돌아가기가, 싫다.” “…….” “하지만 가슴 한 켠으로는 받아들이기 싫었겠지? 왜냐면 인정해버리는 순간, 회귀하겠다는 네 선택이 헛수고가 돼 버리니까. 차라리 세라프의 조언을 듣는 게 더 나았을 테니까. 너를 지금껏 지탱해온 단 하나의 뜻이, 신념이, 목적이, 목표가 모조리 무너져버릴 것 같았으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급기야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소리 질러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잠시 말이 끊겼지만,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묻겠다. 사용자 김수현.” 잠깐만. 내 이름을 알고 있었어? “그 변화를 거치고 거쳐서, 지금 이 자리에 서니 어떤가?” 그 순간, 무심결에 탄식이 나와버렸다. …과연. 아까의 질문은 이런 뜻이었나. 애초 맥락을 잘못 짚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나는 여전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니, 하고 싶은, 아니 아니. 젠장. 할 수 있는 말은 많다. 일 회차였다면 지금 주변에 있는 동료도 없었을 거고, 게헨나와 수나도 만나지 못했을 거라는 등등. 여러 말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목구멍 끝까지 치솟았다. “그…!” 그러나, 끝내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왜냐면 말하는 순간, 내가 제로 코드에 빌었던 단 하나의 바람이 틀어져 버리니까. 그리고 그걸 인정하기가 싫었으니까. “…건.” 결국에는 잔의 말이 옳다. 해답은 진작에 나왔다. 잔의 말대로였다. 나는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해버린 찰나, “모르겠어….” 결국, 머리를 떨구고 말았다. “…그런가.” 잔의 말투는 여전히 담담하다. 까닭 없이 혼잣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미지는 외면의 결과인가. 선택이 다가올 미래에 두려움을 느꼈다니, 실로 안타깝구나.” “……?” “십오 년간 목적했던 순간을 비로소 앞뒀음에도…. 하긴, 그나마 버티게 해주던 독이 빠졌다면 남는 건 정신의 마모일지도. 그렇다면 너는 이미 아름답게 부서져 가는 중이겠지….” “뭐?”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좋다. 시험은 끝내도록 하지. 이제 그만 손을 얹도록.”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이었냐고 묻고 싶었다. “축하해야 할지, 아니면 애도해야 할지. 어쨌든 네 끝이 어떨지 나도 자못 궁금해졌거든.” 그러나 미처 입을 떼기도 전, 내 손은 이미 무형의 기운에 끌어당겨 져 잔을 덮어버린 후였다. “가라, 마주쳐라, 부딪쳐라. 그리고….”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웅웅웅웅웅웅웅웅! “내게, 너의 끝을 보여라.” 말이 끝나는 것과 함께 장내로 돌연히 거대한 마력이 흐르기 시작했다. “현 시간부로 사용자 김수현을 첫 번째 계승자로 설정하며, Code Name Zero를 실행한다.” 끄긍, 끄그그긍! 이어서 어디선가 녹슨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며, 내 손에 덮인 잔으로부터 푸른 성화(聖火)가 치솟았다. 어찌나 강렬하게 타오르는지, 손 틈새로 줄기줄기 새어 나온 빛무리가 장내를 가득하게 물들일 정도였다. 이윽고 푸르고 흰빛에 시야가 점차 희미해진다. 어디선가 불어온 강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펄펄 나부꼈다. 귀로는 여전히 녹슨 기계음이 들리며,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오묘한 기운이 전신으로 올올이 스민다. 그리 낯설지는 않은 감각. 나는 본능에 따라 안간힘을 쓰며 잔을 쥔 손을 꽉 오므렸다. 다음 순간, “!” 손아귀로 동글동글하면서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띠링! 여러 개의 메시지가 삽시간에 시야를 점령했다. ============================ 작품 후기 ============================ 어제 절단으로 독자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벌인지…. 어제 오후부터 오늘 새벽까지 참 되는 일 하나 없더라고요. ^^; 속이 한 서너 번은 터진 것 같네요. 후유유유. 그리고, 몽구헌터 님께. Q. 작가님 진짜 악마들이 안솔 죽이는 거 성공해서 북대륙 애들 많이 조지고 나서 김수현이 그거보고 제로코드로 안솔을 위해 다시 시간을 돌리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죠?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드리자면, ‘누가 죽든, 또 어떤 일이 벌어지든, 절대로 3회차는 없습니다.’ 고 말씀드리겠습니다. :) 0931 / 0933 ---------------------------------------------- A Poisoned Chalice, Two. 잠시 후. 간신히 버텼다고 생각한 찰나, 덥석 삼켜질 것만 같던 거대한 기운이 흔적도 없이 증발한 걸 느꼈다. 부단히 귀를 긁던 녹슨 기계 소리도 한순간 사라졌고, 강풍도 멈춰 휘날리던 머리카락이 사뿐 가라앉는다. 방금 일어난 현상이 거짓말처럼 생각될 정도로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장내를 가득 메웠던 광채는, 어느새 빛을 점점이 흩뿌리며 차츰차츰 잦아들고 있었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단지, 시야로 여러 개의 메시지가 출력돼 있을 뿐. 나는 살짝 숨을 들이켜고 침착히 눈을 내렸다. 『공전절후(空前絶後)한 업적!』 『사용자 김수현 외 네 명은 제로 코드(Zero Code)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제로 코드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미지의 차원인 십천(十天)에서 탄생한 신명(神命)입니다. 법역과 수호의 지대, 그리고 약속의 신전을 거쳐 제로 코드의 주인으로 인정받은 업적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전무후무한 업적입니다.』 『사용자 김수현 외 네 명에게 총 150,000,000 Gold Point를 부여합니다!』 『보상 결과를 수정합니다. 제로 코드를 강제 공략으로 획득한 게 아니라, 자격을 갖추고 정식으로 인정받았음을 확인했습니다.』 『기존 Gold Point 보상이 열 배로 늘어납니다. 정정된 보상은 1,500,000,000 Gold Point이며, 사용자당 300,000,000 Gold Point가 부여됩니다.』 『사용자 김수현이 '정상(頂上)' 칭호를 획득합니다.(해당 칭호는 특정한 상황이나 조건을 만족하면 발동합니다.)』 메시지를 읽는 도중 억 소리가 나올 뻔했다. 아니, 진짜로 억이다. 총 보상이 일억 오천 GP가 아니라 십오억 GP란다. 개인당 떨어지는 것만 해도 무려 삼억. 일 회차 때 받았던 GP보다 무려 두 배에 달하는 양이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수현(5년 차) 2. 클래스(Class) : 검의 군주(Arousal Secret, Sovereign Of Sword, Master) 3. 소속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S Zero) 5. 진명 • 국적 : 1. 정상(頂上) 2. 검의 군주(君主) 3. 마성(魔性)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8) 7. 신장 • 체중 : 181.5cm • 75.5kg 8. 성향 : 중용 • 혼돈(Moderation • Chaos) [근력 99(+2)] [내구 95(+2)] [민첩 101] [체력 101(+2)] [마력 96] [행운 90(+2)] (잔여 능력치는 0포인트입니다.) 거기다 두 번째로 얻은 정상이라는 칭호까지. 어떤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보다 비로소 실감이라는 걸 할 수 있었다. 오른손을 꾹 거머쥐자 작고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천천히 팔을 들고 손을 펴자, 말간 빛을 띤 푸른 구슬 하나가 손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몇 번을 봐도 제로 코드가 확실하다. 그래. 드디어 해냈다. 나는, 고통으로 얼룩졌던 과거를 내 손으로 직접 바꾸는 데 성공했다. 무엇보다 형과 한소영을 죽게 놔두지 않았으며, 이제는…. 이제는…. “…….” 이상하다. 왜 갑자기 가슴이 턱 막혀올까. 아무리 애를 써도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하기 싫다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나는. ‘하지만 가슴 한 켠으로는 받아들이기 싫었겠지?’ ‘차라리 세라프의 조언을 듣는 게 더 나았을 테니까.’ ‘너를 지금껏 지탱해온 단 하나의 뜻이, 신념이, 목적이, 목표가….’ ‘모조리 무너져버릴 테니까.’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온 거지? 바라 마지않던 일을 해냈음에도 왜 기쁘지 않은 거야? 그때였다. “아?” 찰나의 순간, 시야가 느닷없이 오른쪽으로 기울었고, “위험해요!” 누군가가 내 등을 받치더니 팔을 붙잡는다. 언뜻 정신이 드니 천장이 보였다. 돌연히 다리가 풀려 넘어질 뻔했던 것 같다. “괜찮아요?” 고연주가 눈을 살짝 내리뜬 채 그늘진 얼굴을 가까이했다. “아니,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긴 한숨과 함께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손에 쥔 걸 다시금 물끄러미 응시했다. 제로 코드는 예의 말간 푸른빛을 은은히 흘리는 중이다. 꼭 이대로 빨려 들어가버리고 싶을 만큼 아주 아름답다. 그 순간 또다시 나를 확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수현!” “예, 예?” 깜짝 놀라 눈을 들자, 고연주가 복잡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왜 그래요? 네?” “왜 이래요. 제가 뭘 어쨌길래.” “아니…. 눈빛도 죽은 사람 같고…. 꼭 당장에라도 쓰러질 사람처럼….” “…제가 말입니까?”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싶었다. 순간적으로 맥이 풀리기는 했지만, 몸에 별 이상은 없는데. 그러나 고연주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하더니 숫제 눈까지 그렁그렁해졌다. 비단 고연주뿐만이 아니라 한소영의 낯빛도 한 줄기 수심이 서렸고, 남다은과 마르도 근심하는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망연한 기분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화정. 방금 내가 진짜로 그랬어?’ - ……. ‘화정?’ - …조금 이상하기는 했어. 정신 차…! 아니, 아니야. 아무튼, 속 좀 추슬러봐. 조금이라. 마지못해서 말한 것처럼 느꼈다면 착각이려나. 아니, 화정의 말대로다. 일단 이곳에서 서둘러 나가는 게 좋겠다. 이렇게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니까. 목적은 달성했고, 갑자기 사라졌으니 밖에서 많은 걱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고민은 돌아가고 난 후에 하자. 정신을 차리려는 요량으로 뺨을 세게 쳤다. 곧바로 제로 코드를 품속으로 집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나갑시다. 돌아갑시다.” 그렇게 방을 나서기 직전,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뒤를 돌아봤다. 안은 여전했다. 오직 시퍼런 화롯불만이 쓸쓸히 장내를 밝히고 있었다. 시원섭섭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애증이라고 해야 할까. 모르겠다. 단지 확실한 건 하나. 이제 여기로 돌아올 일은, “…….”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 약속의 신전을 나온 후 궁금한 게 하나 생겼다면, 다름 아닌 네 지대의 행방이었다. 성스러운 지대로 돌아가자마자 빛무리들이 다가와 아까처럼 우리를 안내하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자못 궁금해졌다. 일 회차 때는 한 놈도 남김없이 처리했으니 비교할 수 없고. 해답은 화정이 알려줬다. 거두절미하고 말해서, 내가 제로 코드로 법역을 해제하는 즉시 사라진단다. 물론 약속의 신전은 물론, 최후의 관문이나 고대 유적은 계속 남겠지만, 수호자는 ‘제로 코드를 지킨다.’ 는 명분이 없어진 이상 무(無)로 돌아가야 한다고. 만약 가능하다면 아군으로 동원할 계획을 세웠던 나로서는 못내 아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하니 깨끗이 포기하기는 수밖에. 그렇게 아까처럼 안내받으며 돌아가는 와중, “으으. 정말 보면 볼수록 아쉽다. 마르야. 얘네 데려가고 싶지 않아? 키울 맛도 있을 것 같아.” “네. 저도 할 수만 있다면 같이 지내보고 싶어요. 그런데 다은이 언니는 칼이니까, 무기로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네 여인은 기웃거리는 수호자와 놀거나, “흠. GP를 삼억이나 받아본 건 처음이네요. 사실 아직도 얼떨떨해요.” “저도 삼억은 처음이지만, 전에도 비슷한 일을 겪었네요. 이스탄텔 로우 로드는 모르시겠지만, 저희 클랜에서는 이런 걸 보고 김수현 효과라고 부르죠.” 보상 메시지를 보고 감탄하는 등등 돌아가는 내내 수선을 떨었다. 심지어 한소영도 평소보다 말이 많았다. 그러나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다. 내게 묻고 싶은 말이 많지만, 꾹 참고 있다는 걸. 그리고 정말 즐거워서 떠드는 게 아니라, 나 때문에 일부러 저러고 있다는 사실을. 기실 스스로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미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하여 가끔 맞장구도 치고 웃기도 했으나, 그럴수록 분위기는 외려 어색해졌다. 특히 한소영은 걱정하는 빛이 심히 짙어지기까지 했다. 아마 초감각으로 내 감정 상태를 알아차린 것 같아서, 그냥 조용히 입 닫고 있기로 했다. 그리하여 성스러운 지대, 철혈의 지대, 칼의 지대를 거쳐 첫 번째 그림자 지대로. 우리는 진입할 때와 비슷한 시간을 들여 처음 들어왔던 지점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 “데려다 줘서 고마워…. 그래그래…. 아, 그러고 보니 여기 들어온 지 몇 시간이나 지났죠?” 그때 그림자 거인과 작별을 나누던 고연주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아마 일고여덟 시간쯤 됐을 거예요. 생각보다 오래 있었죠.” 한소영이 어림잡아 말했지만, 거의 정확하다. 가는데 약 세 시간. 약속의 신전에서 한 시간 삼십 분. 돌아오는데 세 시간. 즉 대강 일곱 시간 삼십 분쯤 지났을 터. 확실히 짧다고 볼 수 없는 시간이다. (물론 일 회차와는 비교조차도 되지 않지만 말이다.) 워낙 신기한 현상을 겪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여하튼 이제 남은 건 하나. 제로 코드로 법역을 해제하고, 나가자마자 워프 게이트로 들어가면 모든 게 끝난다. 십오 년의 홀 플레인 인생에 마침표를 찍게 되는 것이다. 새삼스러운 생각이지만…. 참 길기도 길었다. 나는 손을 더듬어 보이지 않는 막을 찾았고, 법역 앞에 선 후 품에서 작고 푸른 구슬을 꺼내 들었다. 가슴은 두근거리는데 머릿속은 이상하게 멍하다. “그럼….” 잠시 후, 제로 코드를 쥔 손을 천천히 막과 맞붙였다. 그러나. “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법역이 해제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반응이 전혀 없다. 혹시 몰라 제로 코드를 이리저리 굴려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어라? 설마 이대로 쭉 갇히는 게…?” 아직은 여유로운지 고연주가 너스레 떠는 소리가 들렸고, 남다은이 웃는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그래도 좋을 것 같은데. 신전을 왕국으로 삼고 다섯이서 오순도순 사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외로워지면 오빠랑 애 낳으면 되고.” “다은이 너. 입 조심해. 마르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네.” “왜요? 어차피 형식상으로만 부녀지간이니까 근친은 아니잖아요.” “네, 네에에에? 제, 제가 아빠랑요?” 마르야. 왜 그렇게 놀라는 거니. 저런 말은 신경 쓸 가치도…. 아니. 얼굴 붉히지 말라고. 누구를 짐승으로 만들려고. “일단 좀 더 기다려보죠. 이 막의 크기가 있으니 해제에 시간이 걸리는 걸지도 몰라요.” 그나마 한소영이 가장 정상적이고 현실적인 말을 하는구나. 덕분에 곤란한 상황도 벗어났다. 눈빛으로라도 감사를 표하기 위해, 나는 막에 손을 댄 채로 한소영을 돌아봤다. 그 순간이었다. “……?” 문득 매캐한 연기가 코를 훅 찔러오는 것과 동시에, 화르르르, 화르르르! 앞쪽에서 뜨거운 열기가 물씬 흘러들었다. ============================ 작품 후기 ============================ 이제 에피소드 2도 4, 5화 안으로 정리될 것 같습니다. :) 0932 / 0933 ---------------------------------------------- A Poisoned Chalice, Two.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찰나, “…아?” 한소영이 탄식 같은 신음을 터뜨리며 두 눈을 치떴다. 아무 생각 없이 뒤를 돌아본 나는, 순간적으로 뒤통수를 강타당한 듯한 충격을 느꼈다. 화르르르, 화르르르! 짙게 깔린 석양빛 아래, 곳곳에서 타오르는 시뻘건 불길. 황혼의 하늘로 펑펑 솟구치는 회색 연기. 그리고 귀가 저릿해질 정도로 메아리치는 괴성과 단말마의 비명. 이게.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처음 도착했을 때 안개로 가득 차 있던 신비로운 대지는, 더 이상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다. 아니. 안개는커녕, 오직 헤아릴 수 없는 시체만이 광활한 초원을 나뒹굴고 있을 뿐. 거기다 줄기줄기 흘러나온 핏물은 강을 이루며 흘러 역한 피비린내가 물씬 풍겨온다. 그뿐일까. 구르는 소리, 부딪치는 소리, 고함치는 소리, 폭발하는 소리…. 여러 소음이 사방에서 정신없이 난무하는 중이다. 법역이 해제되고 드러난 바깥은, 생지옥을 방불케 하는 어마어마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진행 중이었다. 직감적으로 늦었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늦어도 한참 늦었다. 전장은 이미 무시무시한 광기에 휩쓸렸다. 무조건 닥치는 대로 죽이는. 이성 따위는 저편으로 날린 채, 서로 물어뜯고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것에 열중하는. 말 그대로 아비규환(阿鼻叫喚)을 보는 듯하다. 망연히 걸음을 옮긴 찰나, 무언가가 발끝으로 툭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사용자였다. 복부 아래가 끔찍하게 뜯겨나간 어느 사내의 주검. 죽을 때 몹시 고통스러웠는지 얼굴도 잔뜩 일그러져 있다. “…….” 그 어느 때보다 심안이라는 능력에 감사한 순간이었다. 혼란스럽기 짝이 없던 머리가,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만 같던 가슴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상황은 아직 잘 모르지만, 짐작 가는 바는 있다. 애초 이런 짓을 벌일 놈들은 그놈들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하며 온 신경을 집중했다. 부담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잠시 후, 시야로 과거의 장면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첫 번째 영상을 확인하자마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 아아아아아아아악! 왜냐면 안솔이 찢어지라 소리 지르고 있었으니까. 정확히는 창의 형상을 한 시커먼 기운에 온몸이 관통당한 채 힘없이 쓰러지는 중이었다. 주변의 사용자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며, 허공에는 익숙한 낯짝이 우수수 떠올라 있었다. 낯설지는 않지만 처음 보는 요정. 리리스, 아스모데우스, 아스타로트. 악마 군주. 거기다, 심지어 타나토스까지 모조리 안솔 한 명을 겨냥하고 있었다. 상황을 확인하자 이가 절로 갈렸다. 내가 강제로 소환당한 사이, 적들이 습격했다는 것까지는 유추했다. 하지만 설마 공중을 통한 기습으로 안솔을 가장 먼저 노렸을 줄이야. - 막아! 막으라고! 다음 순간, 영상이 휙 넘어가더니 고성과 함께 새 전투 영상이 보였다. 마족이 삼 방향을 에워싸며 쳐들어오고, 아군은 제단을 지키며 맞서 싸우는 장면이다. - 워프 게이트에서 지원군이 넘어왔답니다! 어서 후퇴를…! - 무슨 소리야! 그럼 우리 형은 어쩌라고! - 여기서 개죽음당하자는 겁니까! - 그쪽에서 오라고 하면 되잖아! 형이 언제 나올 줄 알고…! 개중에는 머셔너리 클랜원도 여럿이 있었다. 누군가 다급한 목소리로 후퇴를 외치고 있으나, 안현이 벌컥 화를 내며 거절한다. 파직! 그때 시야가 갑작스럽게 잡신호 일색으로 칠해지며 화끈한 통증이 눈을 덮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부여잡으며 강한 침음을 흘렸다. 제 3의 눈 지속 시간이 끝난 것이다. 탈력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알아낸 사실은 두 가지. 안솔이 저격당했다는 것과 워프 게이트에서 타 도시 원정대가 넘어왔다는 것. 그나마 형이 발 빠르게 대처한 것 같기는 하지만, 의문은 한층 강해졌다. 지원군이 왔다면 병력이 못해도 이만 명에 가까웠을 텐데, 어쩌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된 걸까? 나는 가렸던 손을 내리며 다시 앞을 응시했다. 전장은 여전하다. 도처에서 중구난방으로 전투가 벌어지는 걸 보니, 북 대륙의 진영은 붕괴하다 못해 아예 지리멸렬해버린 것 같다. 차라리 한 군데 뭉쳐 있으면 불행 중 다행이겠으나, 이건 이미 난전이라고 볼 수도 없을 정도였다. 최악이라면 최악이다. 몸이 하나인 이상, 뭘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콜록콜록! 그런데….” 그러한 찰나, 약간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거기서 갑자기 요정 군대가…. 콜록! 수천에 달하는 정령을 소환해서…. 콜록!” 한소영이 어느새 생존자를 발견해 말을 듣는 중이었다. 아마 전장을 보고, 시체 더미 속에서 숨이 붙어 있는 사용자를 찾아내 상황을 알아내려 한 듯싶다. “부지불식간에 좌측을 강타…. 마족도 겨우 막아내고 있던 터라…. 결국…. 뿔뿔이…. 끄르르륵!” 한 손으로는 물약을 부어주며 계속 격려했지만, 안타깝게도 사용자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워낙 상처가 심했던 터라, 거의 다 죽어가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급격히 숨을 몰아쉬더니 머리를 툭 떨궜다. 한소영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나를 돌아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짜자자작! 돌연 귀를 찌르는 굉음과 동시에 먼 곳에서 누런 뇌광이 찬란하게 퍼졌다. “형.”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금 벼락은 형이 소환한 게 분명하다. 말인즉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일 터. 전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더는 가만히 있을 틈도 없다. 뭐라도 해야 한다. “이쪽으로!” 나는 네 여인을 향해 외친 후, 바로 몸을 돌려 뇌전이 내리쳤던 방향으로 달렸다. 짜자자작, 짜자자작! 달리는 동안에도 번개는 몇 번이고 계속 내리쳤다. 그럴수록 마음은 가일층 급해졌다. 형은 기본적으로 마력을 함부로 낭비하는 성격이 아니다. 허나 이렇게까지 남발한다는 건 그만큼 위기에 몰렸다는 방증일 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아니나 다를까. 먼빛으로 유독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는 장소가 언뜻 시야에 잡혔다. 좀 더 정확히 보니, 그곳은 남 대륙 사용자와 마족으로 겹겹이 포위당해 있었으며, 또한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하지만 그 결사적인 저지도 거의 끝나가는 중인 듯했다. 왜냐면 갑자기 한쪽이 와르르 무너지며 마족이 꾸역꾸역 밀고 들어가기 시작했으니. 그때였다. “형?” 문득 어지러워지는 포위망 사이로 누군가의 모습이 밟혔다. 마족 한 놈이 방어선이 무너지는 틈을 타서 안쪽 깊숙하게 파고들어 가더니, 이를 씩 드러내며 하늘로 팔을 뻗친다. 그 아래에는 힘에 겨운 얼굴을 한 형이 주저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마족의 손이 땅까지 쪼갤 듯한 기세로 아래로 그어졌다. 그 찰나의 순간, “……!” 나는 목이 터지라 소리 질렀다. * 커허허허허허허헝! 분노에 찬 고함이 전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저 단순한 외침이 아니다. 검의 군주에게 부여되는 권능 중 하나이며 마력이 동반된 ‘군주여, 호령하여라.’ “크키이익?” 손을 힘껏 내리쳤던 마족은 전신을 강타하는 고함에 깜짝 놀라 주춤거렸다. 그리고 본능에 따라 뒤를 돌아보려는 찰나, 돌연히 세찬 바람이 불었다. 썩둑! 스치듯 지나치는 순간, 마족의 목이 깔끔하게 떨어지더니 몸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땅에 닿는 순간까지도 자기가 왜 죽는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를 악물고 있던 김유현의 낯에 황망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꼼짝없이 죽겠구나 싶었는데, 자기를 노리고 들어왔던 마족이 머리와 몸이 분리된 채 쓰러져 있다. 게다가 머리통마저도 거친 발길질에 밟혀 퍽 부서졌다. 이윽고 흘끗 시선을 올리자, 죽음을 각오했던 김유현의 안색이 일변했다. 힘겨움에서 놀라움으로, 놀라움에서 환희로. 앞을 단단하게 막아서는 칠흑색 갑옷. 펄럭거리는 붉은 망토. 누구인지 안 봐도 알 수 있다. 원래는 상당한 거리가 남아 있었지만, 김수현이 오벨로 부츠의 능력인 ‘급 가속’을 사용해 단걸음에 거리를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수, 수현아…!” 김유현은 치밀어 오르는 격한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김수현은 이미 사방의 적들을 향해 칼을 가열차게 휘두르고 있었다. 감동적인 상봉보다는 적의 말살이 우선이었으니. 뻥! 칼등으로 허공을 힘껏 후려갈기자, 대기가 크게 출렁거렸다. 동시에 붉은빛 검기가 기다랗게 뿜어지더니, 돌연 반월형으로 휘어지며 전방의 적을 무차별로 덮쳤다. 콰콰콰콰! 부메랑처럼 날아가는 검기는 포위망을 거침없이 가르며 전진했다. 붉은 선이 닿는 곳마다 검붉은 핏물이 야단스럽게 폭발하고, 때늦은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몸을 피하기도 전에 수십의 열화 검까지 우수수 날아와 폭격하자, 주춤거리며 서 있던 적들이 흡사 해일에 휩쓸리듯 와그르르 쓸려나갔다. 적의 입장에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나 다름없는 상황.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곧장 다른 방향을 바라본 김수현이 양손의 검을 핑그르르 돌리며 훌쩍 뛰어들었다. 무검이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붉은 잔상을 그리자, 멍하니 서 있던 남 대륙 사용자 네 명의 목에서 부지불식간에 핏물이 뿜어졌다. 동시에 빅토리아의 영광이 반대편을 향하며 희멀건 한 빛을 토해냈다. 채채채채채채채챙! 시끄러운 철성과 함께 검 빛이 전방을 눈부시게 쓸어버리자, 아차 한 순간 전신이 난자당한 열댓 명이 고통에 울부짖으며 수수깡처럼 쓰러진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십 초. 누가 봐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김수현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그렇게나 두껍던 포위망에 구멍이 뻥뻥 뚫리고 있으니. 하지만 아군은 악전고투 속에서도 상황을 알아차렸다. 눈 깜짝하는 사이 전황이 반전됐다. 이 정도로 압도적인 무력을 선보이는 사용자는 단 한 명밖에 없다. 이쯤 되자 적들도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았지만, 늦어도 너무 늦었다. 칼이 한 번 그어질 때마다, 마력이 줄기차게 분사되며 기본으로 서넛이 걸려든다. 김수현은 이미 완전히 미쳐 날뛰는 중이었다. 이윽고 왼손에 쥔 검을 하늘로 힘껏 떨치자, 복부에 칼이 박힌 마족 한 마리가 바동거리며 공중으로 치켜졌다. 그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칼자루를 역수로 바꿔 잡은 김수현은, 이내 아래로 힘차게 무검을 내리찍었다. 퍽! 소리가 나며 시커먼 복부가 처참하게 터지고 짓이겨졌다. 하지만 문제는 마족이 아니었다. 왜냐면. 꾸웅! 갑작스러운 폭음과 함께 칼이 박힌 곳으로부터 대지가 어깨를 들먹이듯 힘차게 들썩거렸으니까. 그러자 안 그래도 우왕좌왕하던 포위망의 균형이 크게 흐트러진다. 드드드드, 드드드드!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작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덜덜거리며 들썩들썩 진동하더니, 꽈아아앙! 종래에는 대 전차 지뢰를 터뜨리듯, 장장 오 미터에 달하는 대지가 뒤집히며 솟구쳤다. 흡사 폭풍과 해일이 동시에 휘몰아치면 과연 이럴까. “으아아악!” “캬아아아!” 범위 안에 있던 적들이 깡그리 공중으로 치솟더니, 무섭게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버렸다. 이어서 들어가는 족족 신체가 분쇄되며 가루로 갈려버리자, 왈칵 터져 나온 핏물과 살점이 나선으로 흩뿌려진다. 한 차례 폭풍이 가라앉고 남은 건, 곤죽으로 화한 고깃덩이들과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뜨끈한 핏빛의 비였다. 그리하여. “후욱…. 후욱….” 시시각각 무너져가던 전장으로, 마침내 김수현이 돌아왔다. ============================ 작품 후기 ============================ 내일 (7월 13일 월요일) 연재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비도 오는데 아버지께서 가족 모임으로 멀리 드라이브나 가자고 하시네요. 무슨 속초를 말씀하시던데…. 가까운 곳이면 모를까, 너무 멀어요. 제가 멀미도 심하게 타고 사는 곳도 서울인데. -_-; 일단 저번에 한 번 갔으니, 이번에는 안 가면 안 되느냐고 슬쩍 눈치 좀 보겠습니다. 하지만 예전과 같이 혼나는 사태가 벌어지면 저도 어쩔 수 없이…. ^_ㅠ 곧 예순을 바라보셔서 그런가. 요새 좀 많이 외로우신가 봐요. 어제는 영화 보러 가자고 하시고, 근래 주말만 되면 계속 어디를 가자고 하시니…. ㄷㄷㄷㄷ 이럴 때 좋은 회피 방법(?) 아시는 독자분이 계시다면 무척 감사하겠습니다. 아무튼, 혹시 못 올리게 되면 코멘트로 올려드릴게요. 0933 / 0933 ---------------------------------------------- A Poisoned Chalice, Two.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포위망은 박살 나다 못해 완전히 와해하고 말았다. 김수현의 무력에 기함한 적들이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쳤기 때문이다. 하기야 뒤늦게 쫓아온 네 여인까지 가세했으니 더 버틸 도리가 없기도 했다. 덕분에 전멸 직전까지 갔던 아군 무리는 간신히 숨 돌릴 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 봤자 아직 전장 한복판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구출한 인원은 어림잡아 이백 명 남짓에 불과하다. 그 정도로 진영이 깨지고 산산이 조각나버렸다는 뜻이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무리 중 머셔너리 클랜원이 소수나마 섞여 있다는 정도일까. “클랜 로드!”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 나왔다. 흘끗 돌아본 찰나, 씩씩 몰아쉬던 김수현의 숨소리가 순간적으로 멎었다. “사용자…?” 걸레 쪼가리를 보는 듯한 더러워진 로브와 그을음이 잔뜩 묻은 얼굴. 두 손은 선혈로 잔뜩 적셔져 핏방울을 뚝뚝 떨구는 중이다. 굳이 어땠냐고 묻지 않아도 거한의 몰골은 몹시 처참하기 짝이 없다.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정말로 다행입니다.” “아니, 사용자 신재룡. 괜찮습니까? 상처가….” “저는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동료들이…!” “동료들이요?” “죄,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는데, 저도 모르는 사이 떨어져 버려서…. 큭!” “…….” 당장 쓰러져 죽을 것만 같은 모습임에도 신재룡은 동료를 걱정하고 있었다. 김수현이 머리를 무겁게 끄덕거리며 손을 들었다. “혹시 안솔은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저격당하고 나서요.” 이상할 정도로 침착한 태도와 목소리는, 듣는 이에게 묘한 안도감을 느끼게 했다. 신재룡은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다가 아차 하며 말을 이었다. “안솔은…. 모르겠습니다. 검은 머리 여인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순간, 사용자 제갈 해솔이 간발의 차이로 안솔을 감싸고 워프 능력을 사용했습니다.” 검은 머리 여인은 아마 타나토스를 뜻하는 말일 터. 말인즉 목숨이 끊기기 직전 제갈 해솔이 구출해 도망쳤다는 소리다. 물론 생사는 아직 불투명하지만, 총명한 제갈 해솔이라면 분명히 어떻게든지 손을 써놨을 것이다. 잠시 안도한 김수현은 다시금 전장을 둘러봤다. 전황은 여전히 최악으로 치달리는 중이었다. 아군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무의미하게 죽어 나가고 있으니. 냉정하게 보면 여기서 상황을 반전시키는 건 이미 글렀다. 제로 코드를 가지고 돌아오는 동안 기울어도 너무 기울었다. 이윽고 두 형제의 시선이 마주쳤다. 동시에 김수현의 얼굴빛에 심히 갈등하는 기색이 어렸다. 아무리 전장이 어지럽다지만, 김수현이 이 무리만 이끌고 후퇴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정령 군단을 소환할 수 있는 마르도 있으니 어떻게든 이탈할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자리에는 김유현과 한소영이 있지 않은가. 이렇게나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꼭 지켜야 할 대상이 같이 있다는 건 그야말로 천운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김수현은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어차피 제로 코드도 얻었겠다. 그냥 눈 딱 감고 빠져나간 후, 지구로 몰래 돌아가 버리면 알게 뭔가. “…….” 잠시 후, 김수현의 입에서 기나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입가에 묻은 핏물을 손등으로 닦더니 나직이 입을 열었다. “물러나자.” “예?” 신재룡이 놀라는 동시에 김유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뜻밖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전황상 퇴각이 최고의 선택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일말의 죄책감이 엄습했다. 김유현이라고 상황을 이렇게 만들고 싶었을까. 약간 손해를 보더라도, 좀 더 신속히 후퇴할 수도 있었고 억지로 버티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단지 일곱 시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김수현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무리하게 맞서다가 이 지경이 됐을 뿐. 형 된 처지에서 하나뿐인 동생을 어떻게 버리겠는가. 그때 김수현이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김유현은 흠칫 놀랐다. 김수현의 얼굴은 극도로 절제된 표정이었으나, 두 눈만큼은 서슬 퍼런 불길을 뿜고 있었다. 이윽고 가까이 다가온 김수현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작고 예쁜 푸른 구슬이었다. “일 계승자의 이름으로 명하오니, 사용자 김유현을 제로 코드의 이 계승자로 요청한다.” 『사용자 김유현. 이 계승자로 설정 완료.』 맑은 기계음과 함께 구슬이 말간 빛을 뿜었다. 김유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그래. 이게 제로 코드야. 잘 보관하고 있어. 절대로 뺏기면 안 되는 거니까.” 그렇게 말한 김수현이 제로 코드를 맞은편 로브 안으로 깊숙이 찔러 넣는다. 김유현은 잠시 그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무어라 말하기도 전, “그리고 잘 들어.” 뜨거운 음성이 이어졌다. “나는 지금부터 전장에 남아 있는 아군을 구출하면서 적의 시선을 끌 거야. 날개로 날 수 있으니까 기동성은 내가 훨씬 나아.” 기이한 열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컸다. 흡사 여기 있는 모두가 들으라는 것처럼. “그러니까 형은 여기 사람들이랑 바로 이탈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최대한 빠르게, 멀리 벗어나는 거야. 알아 들어?” “뭐, 뭐라고?” 김유현이 황망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김수현의 말인즉 여기는 자기 혼자서 어떻게든 해볼 테니,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고 도망치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아무리 제로 코드를 맡겼다고 해도, 김유현이 ‘아 그래? 그럼 그러지 뭐.’ 라고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있겠는가. 물론 그러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김수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게…!” 퍽. “무슨, 우욱!” 벌컥 고함치려는 순간, 김수현은 김유현의 복부를 있는 힘껏 후려갈겼다. 퍽, 퍽. 한 번으로도 부족해 두 번, 세 번 연속해서 같은 곳으로 주먹을 꽂는다. 그러자 순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보는 것도 잠시, 결국 김유현의 몸이 축 늘어졌다. 가만히 보고 있던 이들은 하나같이 입을 쩍 벌렸다. 이렇게 위급한 상황 속에서 뇌제라는 중요한 전력을 강제로 기절시킨 게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수현이 미안한 눈을 하면서도 해류마를 소환하고, 그 위로 김유현을 올리는 걸 보자, 머리 회전이 빠른 사용자는 아차 했다. 아까 김수현의 외침이 누구한테 한 말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도. “마르, 사용자 고연주!” 그 와중에서도 김수현은 특별히 두 명을 호명했다. 이 전장을 아무 방해 없이 벗어날 확률은 0%에 수렴하지만, 이 두 명을 붙인다면 이탈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마르의 정령 군단은 어지간한 마족 무리 일천과 맞먹는 전력이며, 고연주라면 혹시 모르는 상황에서도 김유현 한 명 정도는 데리고 탈출할 수 있을 테니까. “자, 잠깐만요!” 그렇게 생각하고 서둘러 끌어서 앉히려 했지만, 마르의 반항이 생각보다 굉장히 거셌다. “마르야. 지금 상황이 얼마나…!” “그럴 수 없어요! 아니, 싫어요! 절대로 싫어요!” “설마 같이 가자는 거냐? 아군을, 동료를 버리고?” “결국에는 아버지 혼자만 남겠다는 거잖아요! 차라리, 차라리 제가 남을래요!” 거의 악을 쓰다시피 저항했으나 마르는 김수현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끝내 강제로 해류마 위에 앉혀지자 마르는 엉엉 소리 내서 울기 시작했다. 김수현은 희미하게 웃었다. “왜 우는 거냐. 지금 너한테 굉장히 어렵고 중요한 부탁을 하는데.” “하지만…!” “제발, 부탁한다. 지금껏 봐와서 알겠지만, 나는 형을 내 목숨 이상으로 생각한단다.” “저도 아버지를…!” “어리광부리지 마라. 아비는 죽지 않고 빠져나올 자신이 있어서 이러는 거니까. 하지만 만에 하나, 형이 또 한 번 죽는다면…. 그때는 나도 더는 견디지 못할 거다. 아마 미쳐서 따라 죽어버릴지도 몰라.” “윽…. 흑….” 또 한 번이라는 말이 잠시 걸리기는 했지만, 어쨌든 김수현은 진심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 너는 형을 지키면서 무사히 빠져나가야 해. 나를 위해서라도.” 이렇게까지 말하자 마르도 결국에는 입을 다물었다. 김수현은 격려라도 해주려는 듯 손을 올렸지만, 이내 사방에서 심상치 않은 기척이 와르르 일어나자, 그대로 해류마를 내리쳤다. “가거라. 어서!” 후르르르! 주인의 마음을 읽은 해류마는 힘차게 울음을 토하더니, 화마에 휩싸인 전장을 빛살처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점이 돼 멀어지는 해류마와 그 뒤를 쫓아가는 아군을 보며 김수현은 쓰게 웃었다. 하지만 감상에 젖는 것도 잠시. 이윽고 등에서 용의 날개가 활짝 펼쳐지더니 김수현의 몸이 공중으로 훌쩍 솟구쳤다. 그렇게 하늘 높이 오르니 전장이 한 눈에 잡힐 듯이 작아졌다.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함을 인지했는지 비행 속도에 가일층 가속이 붙기 시작한다. 한껏 높인 시력으로 아래를 둘러보면서도, 김수현은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 계속해서 뒤를 돌아봤다. 기실 지금이라도 몸을 돌린다면 금방 쫓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형과 한소영만 지킨다는 명목하에 나머지 대부분을 버리기에는 심히 망설여진다. 영웅 놀음을 하려는 게 아니고, 영웅이라 불리고 싶은 생각 또한 추호도 없다. 단지. - 그럼! 그럼 우리 형은 어쩌라는 건데! 김수현의 머릿속으로, 형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필사적으로 싸우던 안현이 자꾸만 떠올랐으니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불현듯 김수현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눈에 보이는 아군은 대부분이 당하거나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지만, 딱 한 곳만은 달랐다. 그 무리는 약 삼사십 명으로 이루어진 적은 숫자였지만, 유독 겹겹이 에워싸였으면서도 격전을 치르며 끊임없이 어딘가로 향하려 하고 있었다. 머셔너리 클랜이었다. 보아하니 김수현이 법역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게 분명했다. 악전고투 속에서도 어떻게든 제단을 확보하려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으니까. 김수현의 몸이 황급히 정지했다. 이어서 허공을 한 번 거세게 박차자, 삽시간에 열화 검 수십 개가 생성되며 맑을 불꽃을 뿜는다. “……!” 한편, 막 하급 마족 한 마리에 창을 꽂아 넣은 안현은, 갑자기 찬란한 불빛이 드리워지자 멍하니 위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화르르륵, 화르르륵! “어…?” 하늘을 뒤덮으며 소낙비처럼 내려오는 열화 검과, “형…?” 그 속에서 무섭게 쇄도해오는 김수현을 확인한 순간, “형…! 형이다!” 눈에서 눈물을 왈칵 뽑더니 울음 섞인, “형이다아아아! 형이 왔다아아아아!” 그러나 환희에 찬 소리를 질렀다. ============================ 작품 후기 ============================ 이히히힣. 김수현 무쌍이다! 무쌍 발사! [KHAN14] < -- A Poisoned Chalice, Two. -- > 그 무렵 . 한창 전황을 조율하던 에르윈은 갑자기 느껴지는 거대한 기운에 황급히 눈을 돌렸다. 콰과콰콰콰콰콰쾅 ! 번쩍! 어마어마한 굉음이 귀를 찌름과 함께 초신성 폭발처럼 터져 나온 빛무리가 온 전장을 환하게 밝혔다. "!" 먼발치에서 봤음에도 불구하고, 층격의 여파는 바람을 타고 번져 서 에르윈이 있는 곳까지 와르르 들이닥쳤다. 머리카락이 뜨거운 바람에 펄펄 흩날리는 가운데, 에르윈은 약간 찡그린 눈으로 먼 빛을 주시했다. 그리고 작은 감탄을 터뜨렸다. “호오.” 시선이 향하는 곳에서는, 공중에서 막 하강한 김수현이 성난 사자처럼 무차별로 칼을 휘두르며 덮쳐들어 가는 중이었다. “이제야 나온 건가?” 칼끝에서 터진 불꽃이 전방으로 시원스레 뻗어 나가자, 예닐곱 명이 한꺼번에 불길에 휩싸여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러나 땅에 채 닿기도 전에 순백의 칼이 눈부신 빛을 터뜨리더니, 검의 형상을 한 빛무리가 시끄러운 철성과 함께 나타나 사방을 난무한다. 그러자 다음 순간 아홉 명이 동시에 균형을 잃으며 핏물을 뿜는다. 명하니 보고 있던 에르윈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어느 정도 거리 가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으로 가는 팔뚝을 몇 번이나 쓸었다. 오직 검만 사용하는 게 아니다. 팔꿈치로 강하게 후리거나 발로 차버리는 등, 상대는 온몸으로 포위망을 종횡무진 휘젓는 중이 다. 흡사 작은 연못에 휘몰아치는 강대한 폭풍을 보면 이럴까. ‘이래서야…. 어째서 셋이나 당했는지 알만하군.’ 김수현의 무력을 이렇게나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 아니 두 번째 던가. 예전에 안배가 족족 어그러졌을 때는 의문이 없잖아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용의 잠든 산맥을 평정하고, 쿠산 토르를 이겨냈으며, 또 게헨나와 고대 악신 그리고 아스트랄 차원에서 살아 돌아왔는지. 이제는 알 것 같 았다. “헤~. 무지 화났나 보네.” 그때, 언제 왔는지 타나토스가 생글생글 웃으며 탄성을 홀렸고,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첫 기습 때만 해도 가장 앞장서서 신나게 뛰놀더니 이제 싫증이 나버린 모양이다. 하기야 한낱 유희라면 모를까, 한때 죽음의 신이라고 추앙받았던 타나토스가 고작 이 정도 전장에 구미가 당기겠는가. 그나마 유 일하게 흥미가 동하는 게 있다면, 저기 멀리서 날뛰고 있는 사내 뿐. 둘은 한동안 말없이 같은 방향을 구경했다. 깨질 듯 말 듯 위태롭 던 머셔너리 무리는, 김수현이 왔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가만히 보고 있던 타나토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으음. 조금 무리하는 것 같기도?” “무리라기보다는 처음부터 내내 전력으로 싸우는 중이죠. 뭐, 그게 그거이기는 하지만요.” 그러자 타나토스는 수긍하는 기색으로 끄덕거리더니 갑자기 눈을 반짝 빛냈다. “저 상태가 영영 계속될 것 같지는 않은데…. 어때? 지금 들이치는건?” 타나토스의 말은 구구절절 옳다. 상대 쪽에서 최고 전력이 나왔다면, 이쪽도 최고 전력으로 대응해야 응당 옳은 일일 터. 가만히 놔둔다면 피해는 계속해서 커질 것이다. “아니요.” 하지만 뜻밖에도 에르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전쟁은 이겼어요.” 툴린 말은 아니다. 전장은 어느새 서서히 끝이 가까워져 오고 있 었으며, 아무리 개인이 강하다고 해도 한계는 있다. 단지 에르윈에게 있어서 전쟁의 승패는 아무 의미도 없을 뿐. 중요한 건 오직 하나였으니까. “법역은 해제됐고, 왕이 돌아왔으니….” “아 귀찮아. 또 뜬구름 잡는 소리 하지 말고, 이대로 가만히 보고 만 있자고?” “좀 더 기다려야 해요. 힘이 빠지는 것도 있지만, 더 구출하고 구출해서 스스로 층분하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사탄!” 그때였다. 흰 수염이 휘날리도록 달려오는 멜리너스를 보며 에르윈은 눈살을 찌푸렸다. 두 번 연속 말이 끊겨서라기보다는, 그동 안 누누이 주의했던 호칭 문제가 전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 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시끄러운 전장이라서 목소리가 묻혔지, 옆에 엘도라가 있었다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급보입니다!” 허겁지겁 달려온 멜리너스가 귀에 대고 자그맣게 속삭이자, 에르윈의 표정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찡그렸던 눈이 놀란 듯 치 떠졌다가, 이내 기묘한 호선을 그렸다. “북쪽으로, 이백 명에 달하는 무리? 뇌제를 포함한?” 얼마나 예상외의 소식이었으면 자기도 모르게 원래 말투로 돌아 왔을 정도였다. “그리고, 거기서 김수현이 가장 먼저 출현했다? 정확한가?” “그렇습니다. 한두 명이 본게 아닙니다.” “호. 그럼 지금이 아니라, 아까 나왔다는 건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에르윈은 기이한 얼굴로 다시 먼 곳을 주시했다. 벌써 포위망이 박살났는지, 마족 대부분이 죽어 나가거나 견디지 못해 등을 돌 리고 있었다. 에르윈이 입을 열었다. “운이 좋군. 혹시 몰라 추적을 지시했지만,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멜리너스! 현재 사브나크는 어디 있지?” “그게…. 사방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 사제 여인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빠르게 돌아오는 중이라고….” “좋아. 잘됐어. 사브나크에게 바로 전하도록. 그 무리가 도망쳤다 는 방향으로 신속히 이동한 후, 서둘러 워프 게이트를 활성화하 라고. 그리고 너는 책임지고 서대륙 병력 전원을 그쪽으로 넘어 가게 해라. 어서!” “어렵지는 않지만…. 서대륙만으로 가능하겠습니까?” 멜리너스는 자못 걱정하는 어조로 말했으나 에르윈은 싱겁게 웃었다. “이미 전장은 기울었고, 어차피 이백 명에 불과한 인원이다. 그에 반해 서대륙은 사오천 명은 족히 넘어. 그 정도면 층분해.” “…알겠습니다.” 머리 숙인 멜리너스는 곧장 어던가로 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용히 엿듣고 있던 타나토스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언가 재밌는 일이 벌어지리라 직감한 걸까. “뭐야 뭐야? 나 촉 되게 좋아!” 어서 말하라는 것처럼 두 발을 구르자, 에르윈은 그 기대에 부응 이라도 하듯이 입을 열었다. “계획 변경입니다. 지금 바로 김수현에게 접근하겠어요.” “오호. 그럼…!” 물론, 아직은 몰라요.…반반이죠.” “응? 반반?” 타나토스가 반문하자, 에르윈은 모호한 미소를 짓는다. “네.반반….” 이윽고 은연중 붉은 안광이 흐르는 눈동자가 김수현이 있는 곳을 주시한다. 그리고 에르윈은 혼잣말처럼 나직이 중얼거렸다. “과연 어느 쪽이 거미줄에 걸려든 나비가될지….” 한편, 같은 시각. “한창축제 중에 혼자서 난입하는 건 여전하군. 흥이 깨졌어.” 포위망이 깨진 후, 약간의 여유가 생기자 허준영이 선혈이 뚝뚝 흐르는 장검을 땅에 치며 씩 웃었다. “초대장 못 받았을까 봐 걱정한 건 아니고?” 칼을 핑그르르 돌리며 핏물을 털던 김수현도 구변 좋게 받아쳤 다. “형…! 형…!” 그리고 안현은 아까부터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부르짖고 있었 다. 얼굴은 활짝 웃고 있건만, 눈물을 줄줄 홀리는 이상한 표정을 한 채로. 그때 어설프게 웃던 김수현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등을 돌린 채 숨을 몰아쉬는 거한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뭐야. 너도 있었어?” 그러자 거한, 아니 공찬호는 마치 이제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홀끗 눈을 돌렸다. 잠시 김수현을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뭐.” 무심한 목소리로 한 마디 툭 던졌다. “설마 같이 싸워준 건가?” “…흥. 미리 말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너를 위해서 여기 있었던 게 아니라, 그나마 같이 싸울만한 놈들이 이놈들밖에 없었으니까.” 공찬호가 살그머니 투덜거리자 김수현은 참지 못해 푸 웃음을 터 뜨렸다. 흡사 미리 외운 대사를 말하는 모양새가 자못 웃겼기 때문이다. 그러자 발끈한 공찬호가 낯을 붉히며 소리치려는 순간, 우정민이 다급히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이야기는 나중에. 클랜 로드. 이제 어떻게 할 거지?” 그 순간 사위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회포를 푸는 것보다, 한 시라도 빨리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는 것 쯤은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 주변을 쪽 둘러본 김수현은 조용히 입맛을 다셨다. “몇 명이 안 보이는군.” “제단을 지키려다가 몇 명이 불뿔이 흩어져서….” 우정민은 담담히 말을 흐렸다가, 곧바로 물었다. “어디 있는지는 우리도 모른다. 구출할 건가?” “물론이지.” 김수현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하지만 홑어진 클랜원은 일단 나 혼자서 찾아보마.” “뭐라고?” “그리고 너희는 나 대신 따로 해줄 일이 있다.” “그건 또 뭔…! 예?” 벌컥 고함치려던 안현은, 대신해줄 일이 있다는 소리에 순간 말 을 멈췄다. 김수현은 어스레한 미소를 짓더니 북쪽을 가리켰다. “상황은 대층 들었다. 아까 신재룡을 만났거든. 그리고 고연주, 남다은, 마르까지. 아마 이 넷이서 한창 퇴로를 확보하는 중일 거 야.” “퇴로를…. 확보하는 중이라고요?” “그래. 아군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워낙 중과부적이니 지금쯤 한명 한명이 절실할 거다. 그러니까 너희가 빨리 쫓아가서 도와줘.” “하, 하지만….” 안현은 아리송해 하는 기색으로 머뭇거렸다. 전장에서 퇴로를 확보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고 있으니까. “그래도…. 같이 행동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여성의 촉은 무섭다고 하던가. 무언가 이상한 감을 느꼈는지 차 소림이 조심스레 건의했다. 그러나 김수현은 단호히 머리를 흔들 었다. “이 상황에서는 저 혼자서 행동하는 게 더 낫습니다. 날개가 있으니까요. 다른 분들은 현재 고군분투하고 있을 동료를 돕는 게 더 낫습니다. 그게 저를 돕는 길이기도 하고요.” “비행이라면 저도….” “그리고 저는 제 형도 찾아야 합니다. 찾는 대로 구출해서 쫓아갈 테니, 지금은 제 말을 따르세요.” 이렇게까지 말하자 차소림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만약 혼자 남 겠다고 했다면 생각지도 않고 싫다고 했겠지만, 김수현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쪽도 급하기는 매 한 가지였으니까. …그래. 김수현의 말이 사실이라면. “결정 났으면 빨리 이동하자고! 또 우르르 몰려오기 전에 !” 공찬호가 수라마창을 풍차처럼 돌리며 외쳤다. 김수현은 끄덕거 리고 몸을 돌리려다가, 아차 하며 공찬호를 향해 걸음을 옮졌다. “아, 공찬호. 실은 너한테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뭔데?” 김수현이 불길한 기운을 흘리는 창을 가리켰다. “그것 좀 빌려주라.” “뭐….뭐 임마?” 공찬호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수라마창을 올려다봤지 만, 이내 낯을 와짝 일그러뜨렸다. 이어서 벌컥 화를 내려는 찰나, 순간적으로 다가간 김수현이 공찬호의 귓속에 무어라 은근하게 속닥거렸다. 그 순간, “어….” 덜컥 주춤한 공찬호의 얼굴빛이 느닷없이 명해졌다. “엉…?” “그럼 부탁했다. 이건 나중에 꼭 돌려줄 테니까.” 싱긋 웃은 김수현은 큰소리로 돌려주겠다고 말하며 손을 뻗었다. 공찬호는 방금 들은 말을 채 받아들이기도 전, 손아귀에서 수라 마창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이옥고 미련 없이 등을 돌린 김수현은 날개를 활짝 펼쳐 날아올 탔다. 잠시 후. “너무 아까워하지 말라고. 상황이 상황이지 않나. 분명히 돌려주러 올거다. 자.” 그렇게 말한 우정민이 주변에 떨어진 무기 중 그나마 큰 창을 주 워 건넸다. 하지만 공찬호는 받을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저 망연한 얼굴로, 순식간에 점이 돼 사라지는 김수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작품 후기====== 죄송합니다. 어제 집필 도중 까무룩 장들어버렸습니다. 일어나보니까 새벽 두 시…. OTL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KHAN14] < -- A Poisoned Chalice, Two. -- > 얼마나 시간이 홀렸을까. 해가 중천에 있을 때 곳곳에서 선혈이 튀길 정도로 격렬했던 전장은, 황혼이 지고 석음이 어스레하게 깔릴 즈음에야 차춤차춤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늘로 솟구쳤던 핏물은 땅을 흠뻑 적셔 강물처럼 흐르고, 고함치며 싸웠던 이들은 피아를 가리지 않고 초원에 누워 차갑게 식어간다. 전장이 시시각각 종국으로 치달림에 이제 남은 건 단 셋. 쫓는 자와 쫓기는 자, 그리고 구하는 자. 한데, 이 무렵 김수현 말고도 구하는 자의 구실을 하는 이가 한명 더 있었으니, 다름 아닌 한소영이었다. 김수현이 떠난 이후 무리와 같이 전장을 벗어난 게 아니라, 혼자서 살짝 이탈해 전장으로 돌아갔다. 그때는 김수현의 발목을 잡기 싫어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을 뿐, 애초 혼자서 팔자 좋게 빠져나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왜냐면 한소영도 엄연히 한 클랜의 로드였으니까.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천운이 따랐는지도 모르겠지만, 한소영은 이곳저곳을 헤맨 끝에 일부나마 이스탄텔 로우 클랜을 발견, 여 왕의 군대를 소환해 구출할 수 있었다. 그 후 곧바로 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나아갔으나, 합류에 성공했다고 해서 무사하게 된 것은 전혀 아니었다. 길을 뚫는 도중 적에 게서 달아나는 아군이 보이면 구해내고, 적이 우르르 몰려와 에워쌀라치면 신속히 도주하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여기서 전면 전은 무리라고 판단, 약식으로나마 게릴라식으로 부대를 운영한 것이다. 그렇게 한참 동안 방향을 돌리고, 잇달아 치고 빠지기를 거듭한 후에야 한소영은 겨우 숨 고를 틈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즈음 뒤따르는 사용자는 약 오륙백 명 남짓. 그나마도 절반 이 상이 중간중간 구해낸 아군이 섞인 인원이다. 한때 단일 클랜으 로 일천 명이 넘는 인원을 자랑하던 이스탄텔 로우치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행렬이지만, 현 상황상 이 정도로 아군을 결집했다는 것 자체가 한소영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방증이리라. 그렇게 한껏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며 사방을 돌아보는 와중, 한소영의 얼굴에 문득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어던가로 서둘러 달려가는 수백의 적 무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니. 눈을 돌리는 곳마다 똑같다. 전장 곳곳에 퍼져 있던 적군이 갑자기 떼로 움직이고 있었다. 심지어 어느 무리는 한소영이 이 끄는 집 단을 봤음에도 그냥 지 나치기까지 했다. 가만히 보고 있자, 불현듯 모종의 감이 엄습한다. 특히 초감각을 가지고 있는 한소영이라면 더더욱.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이상했다. 전장으로 돌아갈 때만 해도 한소영은 결코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 여졌다. 하물며 최악 에는 죽음까지 각오하고 있었건만, 어찌어찌 이스탄텔 로우와 만 났고, 또 적게나마 무리를 군집하기까지 했다. 한데 과연 단순히 행운이 따라서 이렇게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걸 까? ‘아니, 아니야.’ 한소영은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 광휘라는 타이툴이 있는 엽기적인 사제라면 모를까, 이만큼이나 기운 전장에서 자신의 성 과가 마냥 운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무엇보다 아까 자기를 홀깃거리며 그대로 지나친 적군도 있지 않은가. 무언가 잘못됐다. 툴어져도 단단히 툴어졌다. 그와 동시에 한소영의 뇌리로 김수현의 모습이 빛살처럼 스쳤다. 생각하기가 무섭게 한소영은 사방을 확인한 후 무리더러 변장을 지시했다. 투구든 뭐든 머리카락을 최대한 숨기고, 온몸에 피를 묻히며 적의 장비를 찾아 걸쳤다. 주변에는 아군뿐만 아니라 적 의 시체도 상당수 널려 있던 터라, 변장은 금세 끝낼 수 있었다. 그렇게 얼기설기 위장을 마치고 은밀하게 뒤쫓아가자, 오래지 않 아 워프 게이트를 넘어가는 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수만 해도 거의 수천을 헤아릴 정도였다. 그리고 포탈 옆에는 흰 수염의 노인이 손을 휘저으며 다급히 고함치는 중이었다. 한소영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늦추며 청력을 높였고, 동시에 조용 히 번역 마법을 활성화했다. - 빨리, 빨리 넘어가라! 절대로 놓쳐서는 안 돼! - 젠장! 그림자는 또 무슨, 뭐? 처음 보는 정령이 출현했다고? 수 백 마리나? - 당장 사탄, 아니 에르윈에게 가서 지원군을 요청해라! - 놈들의 저항이 생각보다 거세다고 해! 이러다 놓치겠다고! 어 서! 그 순간 한소영의 얼굴이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이 이지러졌다. 영리한 머리는 단 네 마디를 듣고도 전후 사정을 알아차렸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적은 뇌제가 있는 무리가 도망쳤 다는 사실을 인지한 듯하다. 그리고 어떻게든 추격하려 하고 있 었다. 그림자나 정령이라는 말이 나온 걸 보니 거의 확실하다. 아 마 지금쯤 한창 격전을 치르고 있을 수도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소영의 낯에 심한 갈등의 빛이 서렸 다.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 이끄는 병력이래 봤자 겨우 오륙백 명 남짓. 그나마도 이리저리 쫓겨 다니면서 상처 입은 부상자 집단 에 불과하다. 탁 까놓고 말해서, 현재 적들의 주의는 다른 곳으로 돌려져 있다. 이 틈을 타 여기서 물러 난다면 높은 확률로 이탈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다른 선택지도 없는 건 아니다. 저기 워프 게이트가 있는 곳 까지 돌파해 넘어갈 수만 있다면, 단숨에 거리를 줄이는 건 물론, 기절한 뇌제를 보호하는 무리와 합류해 탈출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후자가 지독한 자기 합리화라는 걸 알아차리기까지는, 그 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단지. ‘제발, 부탁한다. 나는 형을 내 목숨 이상으로 생각한단다.’ ‘형이 또 한 번 죽는다면…. 그때는 나도 더는 견디지 못할 거다. 아마 미쳐서 따라 죽어버릴지도 몰라.’ 아까 언뜻 들었던 진심이 절절한 두 마디가 발길을 붙잡고 있을 그때 였다. - 거기 너희! 어서 안 오고 뭐 하고 있는 거지? 정면에서 써렁써렁한 외침이 울린 순간, 한소영은 거의 본능적으 로 마음을 굳혔다. 전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가운데, 여인은 침착히 손을 들었다. “라운드 하우스(Round House).” 꾹 닫혀 있던 입술이 조용히 떼어졌다. 다음 순간, 한소영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땅을 박차 워프 게이 트로 뛰어들었다. 한편, 같은 시각. 빠르게 공중을 비행하던 김수현은 맞은편에서 날아오는 십여 마 리의 마족과 맞닥뜨렸다. 날개가 있는 걸 보니 최소한 중급 마족 이상일 터. 그러나 구출과 동시에 한창 근원을 찾고 있던 김수현 은 귀찮다는 얼굴로 무검을 쪽 내밀었다. 상대도 무섭게 괴성을 지르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지만, 이내 눈부신 검광이 번쩍이며 서로 스치듯 지나쳤다. 그러자 일 초도 지나지 않아, 선두에서 날아오던 다섯 마리가 갑자기 고꾸라지며 땅으로 추락한다. 엇갈리기가 무섭게 절반이나 결딴나버린 것이 다. 굳이 뒤돌아 남은 절반은 상대할 여유는 없는 터라, 김수현은 비 행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돌연 아래로부터 무시무시한 돌풍을 동반한 살기가 솟구쳤고, 김수현은 반사적으로 몸을 회전시키며 무검을 휘둘렀 다. 까앙! 찢어질 듯한 철성이 귀를 찔렀다. 이옥고 가볍게 쳐낸 대상의 정체를 확인한 김수현이 놀란 숨을 삼켰다. “엘도라?” 엘도라는 허공으로 튕겨 날아가면서도 김수현을 똑바로 직시하 고 있었다. 증오에 가득 찬 눈을 한 채로. 하지만 갑자기 나타났다 는 것보다 살아 있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이건…. 좀 놀랍네요.” 그러한 찰나, 어디선가 웅혼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들렸다. 급 히 자세를 바로 한 김수현은 아래를 확인하자마자 입을 딱 벌렸 다. 잠깐 기습을 받았을 뿐인데, 어느새 수백에 달하는 사용자가 땅에서 활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또 언제 도착했는지, 전후좌우로 가히 일만 이 넘는 군대가 착실히 거리를 좁혀오는 중이었다. 사용자와 마 족은 물론, 심지어 요정과 정령도 부지기수였다. 말인즉 하늘과 대지가 모조리 점거당한 것이다. 왜 요정이 여기 있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김수현은 사위의 압박 을 이기지 못해 아래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검의 군주라 고 해도 이 정도의 대규모 포위망을 뚫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 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왕 싸울 거면 공중전보다는 지상전이 더 자신 있기도 했고. “타나토스의 조각으로 각성한 엘도라의 일격을 쉽게 받아넘기다니…. 역시 대단해요.” 결국에는 땅으로 사뿐 내려앉자, 한 요정이 느긋한 미소와 함께 말을 건넸다. 그곳에는 타나토스도, 대 악마도, 악마 군주도 모조리 한 자리에 있었다. 서대륙을 제외한 모든 전력이 김수현 하나를 에워싸는 데 집중한 것이다. 잠시 후. “역시살아 있었군.” 김수현은 요요히 웃고 있는 요정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제 3의 눈 으로 상대의 정체를 금세 파악한 것이다. “그나저나 말투는 또 왜 그렇지 ? 에르윈? 아니, 사탄.” “응? 저를 알고 있나요?” “뭐? 알고 있나요? 여인 몸에 들어가니 성향도 여성스럽게 변한 건가? 하하.” “후후. 꼭 알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김수현은 위기 상황에서도 이죽거렸지만, 에르윈은 어깨를 으쓱 이며 잔잔한 낯을 유지했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곤층의 마지막 발악을 보는 것처럼. 김수현은 이를 악물었다. “이것 참 영광이군. 고작 나 하나 잡으려고 이만큼이 나 동원하다니 말이야.” “이미 전쟁은 끝났으니, 떨거지보다는 왕을 잡는 데 집중해야죠.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에르윈은 또 한 번 구변 좋게 받아친 후,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 다. 김수현은 바로 칼끝으로 겨누었으나 걸음은 어느 정도 거리 를 남기고 멈췄다. “뭐, 상황이 상황이니 말싸움보다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개 인적인 생각을 말하라면, 더 이상 이 의미 없는 전쟁을 질질 끌고 싶지 않아요.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하고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간단해요. 그것만 넘겨준다면 우리는 여기서 전쟁을 멈추고 얌전하게 물러 나겠어요.” 그렇게 말한 에르윈은 가녀린 팔뚝을 불쑥 내밀었고, 어서 무언가를 넘기라는 듯 손을 활짝 필쳤다. 김수현은 잠시 명한 얼굴빛을 보였다. 하지만 곧 싱겁게 웃더니 손바닥을 향해 침을 뱉었다. 에르윈은 재빨리 손을 거두었지만 별로 당황한 표정은 아니었다. “방금 행동은….” “미친놈. 나보고 너희를 믿으라고?” “믿을 수밖에 없을 텐데요? 설마 혼자서 이 전력을 감당하겠다는 건 아닐 거고.” “그건 부딪쳐보면 알겠지. 어디 한 번 해봐. 아니, 뺏어봐.” 김수현은 담담히 말하며 왼손의 창을 꼬나 쥐었다. 그 모습은 마냥 허세라 보기는 어려울 정도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기실 이 정도로 둘러싸였으면 조금이나마 주눅이 들 법도 한데, 김수현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 모습을 천천히 관찰하던 에르윈이 느릿하게 팔짱을 꼈다. “아니면….” 그러더니 묘한 미소를 지으며 은근하게 말을 홀린다. “지금 제로 코드가 수중에 없다거나?” 정곡을 찔렸음에도 불구하고, 김수현은 간신히 반응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다. 왜냐면 적들이 자신을 포위한 이유가 제로 코드 때문이라는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는 동안에도 에르윈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네요. 실은 아까 보고를 받았거든요. 뇌제 를 포함한 한 무리가 북쪽으로 도망쳤다는.” “그런데, 혹시 그거 알아요? 우리 쪽에서 초반에 사라졌단 광휘의 사제를 수색하러 나간 인원이 있다는 걸.” “그 인원이 지금 어디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여기까지 들었을 때만 해도 김수현의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 었다. 흡사 계속 짖으라는 듯이 한결같은 낯빛을 유지했다. 그러나. “에르윈 님!” 어디선가 에르윈을 찾는 다급한 외침이 울렸다. “멜리너스 님의 전언입니다! 북쪽으로 향하던 도망자 무리 중 그 림자와 새로운 정령 군단이 출현! 병력 지원을 요청한다고…!” 그리고 이어지는 말을 듣자마자 김수현의 눈썹이 크게 꿈툴거렸 다. 떠보기라고 생각했던 상대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기 때문이 다. 에르윈은 그 찰나의 순간 일어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흘끗 옆 을 쳐다봤다가, 팔짱을 풀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는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선택하라기보다는, 거의 일방적인 통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잠깐,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잠시 후, 김수현의 눈동자가 심히 흔들리더니, 종래에는 망연한 빛마저 감돌았다. “…하.” 끝끝내 칼과 창을 느릿하게 내리며, 머리를 젖혀 하늘을 향해 긴 탄식을 터뜨렸다. 흡사 절망과 체념에서 우러 나오기라도 한 듯 몹시 기나긴 한숨이 었다. 마침내 포기했다고 지레짐작한 에르윈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한걸음 내디뎠다. 그 순간이었다. ======작품 후기====== (933회 후기) 로유진 : 히히히힣 ! 무쌍 발싸아아! (933회 코멘트) 천광혜운 : 완결 다 되가니까 작가님이 정신 줄 놓은 것 같다…. (그걸 본 로유진) 0〇0•••. 예! 그렇습니다! 어차피 이제 완결도 나겠다, 지구가 멸망하기 직전의 마음으로 그동안 숨겨왔던 제 모습을 보여드릴 생각입니다! 앞으로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후하후하후하후하 ! 치 키 치 키 차카차카 쵸코쵸코쵸 ! 날아라 슈퍼 보드 ! 아핳하핳하하핳하하하하핳 ! [KHAN14] < -- A Poisoned Chalice, Two. -- > 광! 부지불식간에 거대한 굉음이 고막을 찔렀다. 다 끝났다고 여 겼던 에르윈은 명하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뒤늦 게 덮쳐오는 돌풍에 앞머리가 펄럭 나부꼈다. 복숭앗빛 뺨에 시 커멓고 진득한 액체가 철썩 달라붙는다. “…아?” 에르윈은 그제야 간신히 상황을 인지했다. 서슬 퍼런 기운을 뿜는 창끝이 롯등에 닿을 듯 말 듯 엄춰서 있다. 그리고 눈앞으로 악마 군주 하나가 갈가리 찢겨 홑날리고 있었 다. 가슴을 꿰뚫은 칠흑색 창은 부르르 떨리는 중이다. 사탄 휘하의 악마 군주가 본능적으로 주군의 위험을 감지, 순간 적으로 기습해오는 김수현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갑작스러운 공격도 무시무시한 속도도 놀라웠다. 하지만 누구도 예상 못 했던 일이 하나 있었으니 . 단 일격, 즉 한 번의 찌르기에 명을 달리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특히 악마 군주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는 마족은 방금 눈앞에 서 보고도 믿지 못할 지경이었다. 잠시 후, 일직선으로 뻗어졌던 창이 다시 뒤로 당겨지며 김수현 의 무릎이 굽혀졌다. 이옥고 두 눈동자가 예리한 빛을 분사함과 함께 머리카락이 세차 게 휘날렸다. 기함한 적들이 몰려드는 것과 김수현이 쇄도하는 것은 거의 동시 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렇게 서로 맞닥뜨리는 순간, 무시무시한 기운을 동반한 무검이 횡으로 휘둘러졌다. 맑은 불꽃이 흔들거리며 일어나 화염 방사기 처럼 전방을 무자비하게 덮치자, 수십의 마족이 삽시간에 염화에 휩싸여 재로 변해 쓰러졌다. 하지만 잠깐 생긴 공백은 새로운 마족들로 삽시간에 채워졌다. 안 그래도 겹겹이 에워싸인 상태였는데, 우르르 몰려가는 적들의 숫자는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귀찮다!” 김수현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일갈하며 수라마창으로 휘저어 버리자, 창날에 걸리는 족족 머리통이 뼝뼝 터지며 핏물과 뇌수가 튀어 올랐다. 그러나 쓰러지기가 무섭게 또 다른 마족들이 우르르 몰려와 다시 금 김수현을 에워쌌다. 전후좌우는 물론, 심지어 중급 이상 마족 들은 하늘마저 점거했다. 말 그대로 계속해서 철벽처럼 둘러싸는 것이다. 기실 이 정도의 무력을 직면하면 오금이 저려 주춤거릴 법도 하 다. 그러나 마족들은 이게 자신의 사명이라는 듯 죽음을 각오한 불나방처럼 쉬지 않고 달려들었다. 피조물의 특성상, 상대에 대한 공포보다는 조물주를 지키는 게 무엇보다 우선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마족들의 목숨을 가리지 않은 돌격으로 뒤로 물러난 에르윈은 가까스로 놀란 가슴을 추슬렀다. 어느 정도 거리를 떨어트렸으나, 상대는 흡사 목전에서 칼을 내두르는 듯 어마어마하게 날뛰고 있었다. 아까 직전에서 엄췄던 창 때문인지 아직도 코가 아릿했다. 하지만 어쨌든 이것으로 하나는 확실해졌다. 지원군을 보내겠다고 한 마디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 김수현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포기하고 협상하거나, 아니면 최 후로 발악하거나. 그리고 김수현은 후자를 선택했다. 제로 코드 를 가지고 있었다면 아마 이렇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터. 이게 뜻하는 바는 하나. ‘넘겼구나.’ 그렇게 결론을 내린 에르윈은 바로 손을 들었다. 그러자 화살을 겨누고 있던 남 대륙 사용자나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요정 등등, 에워싸고 있던 전 병력이 뒷걸음질 치며 자세를 잡는다. 제로 코 드가 없다는 걸 확인한 이상 더 이상 망설일 건 없었다. 이윽고 에르윈의 손이 내려간 순간, 가장 먼저 들린 건 시위를 튕 기는 소리였다. 무려 수백을 헤아리는 화살이 마족으로 이루어진 철창을 향해 쏘아졌다. 아직 마족이 꽁꽁 에워싸고 있음에도 에 르원의 지시는 거리낌이 없었다. 말인즉 일종의 자폭 공격인 셈 이다. 그뿐일까. 황급히 방어막을 치는 일부를 제외하면 마법사들도 차 례차례 마법을 발사했으며, 정령들도 각양각색의 기운을 개방했 다. 게다가 혼신을 다한 엘도라의 검기는 물론, 대 악마와 타나토 스의 기운까지. 이 모든 공격이 한꺼번에 날아가, 김수현이 있는 곳으로 모조리 빨려 들어가 얽히고설켰다. 번쩍! 최후는 폭발. 꽈아아앙, 꽈아아앙! 김수현과 마족들이 있던 곳을 중심으로 어마어마한 불기등이 치 솟아 올랐다. 찰나의 순간, 일대에 있던 이들의 시야가 새하얘지고 귀도 먹먹 해졌으며, 하늘은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아니, 감각이 마비됐다고 해야 하나. 살이 녹아내리는 뜨거운 열기마저도 느껴지지 않 을 지경이었다. 에르윈의 입에서도 신음이 터졌다. 최대한 멀찍이 물러났음에도 불구하고, 폭격의 영향이 온몸을 뒤흔들리만치 무시 못할 정도 였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스리슬쩍 눈을 뜨자, 거대한 버섯 모양의 구름이 하 늘높이 치솟는 중이었다. 폭심에는 매캐한 냄새가 진동하며 커다란 분화구가 뚫려 있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어떤 기척도 잡히지 않았다. 보이는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끝났나.’ 후련한 기분도 잠시, 에르윈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최종 목적 이 제로 코드인 이상 서둘러 워프 게이트로 넘어갈 필요가 있었 다. 그러나 그때, 사방으로 웅성거림이 가득히 차오른다. 또 뭔가 싶어 뒤를 돌아본 에르윈은 순간 눈을 의심했다.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하던가. 차춤차춤 걷혀가는 연기 사이로, 춤추듯 너울거리는 그림자 하나 가 서서히 드러난다. 웅웅웅웅! 그러나 굉음에 묻혔던 무검은 주변 허공을 일그러뜨리게 할 정도 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 에르윈의 호흡이 살짝 멎었다. “절멸자의 검?” 혼돈 왕의 권능 중 하나이며 모든 것을 없애버린다는 절멸. 저 능 력을 방어에 사용했다는 건 미처 예상 못한 일이었다. 이어서 허공에 꽂혀 있던 빅토리아의 영광은 허연 김을 피우며 아래로 추락하고, 동시에 손목에 감겨 있던 브레이슬릿이 특특 쪼개져 땅으로 떨어진다. 갑옷 안 소망의 셔츠는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한 빛을 발하며, 마법을 가득 흡수한 붉은 망토는 찢기다 못해 넝마로 변해 한들거리 는 중이다. 거기다 이형환위까지 사용했는지 검은 형상은 폭심에서 약간 벗 어나 있었다. 그래. 김수현은 살아남았다. 비록 머리에서 홀러내리는 피가 전신을 적시고, 온몸은 당장에라 도 쓰러질 듯 후들거 리고 있었지 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 을 동원해 살아남은 것이다. 이윽고 두 발이 미끄러지듯이 떨어져 땅에 디며졌다. 돌연 코와 입에서 선혈이 뿜어졌지만, 핏물로 범벅된 얼굴을 닦을 생각조차 않고 힘껏 숨을 들이켠다. 김수현은 분명히 살아 있었다. “놀라…. 하! 어떻게 견며낸 거지?” 어느새 사탄은 에르윈의 말투가 아니라 원래의 말투로 돌아와 있 었다. 그 정도로 동요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러나 김수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 있는 것조차 힘겹다는 듯 숨만 고르더니 또 한 번 피를 왈칵 뱉어낼 뿐. 진정으로 어이없는 기분이었으나 에르윈은 차분히 손을 들었다. 설마 오륙천이나 되는 서대륙 병력이 고작 이백에 불과한 무리 를 놓칠 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어떤 변수가 끼어들지 모르니 까. 만에 하나 제로 코드를 놓치는 일이 생긴다면 이제껏 해온 일 이 모조리 헛수고가 돼버릴 것이다. 그때 였다. “너희는….” 문득, 김수현이 입을 열었다. “정말로….” 목소리는 흡사 한탄과도 같이 작았지만, 극도로 분노한 듯 감히 홀려 들을 수 없는 힘이 깔려 있었다. 한 마디 한 마디마다 털끝이 올올이 곤두서는 느낌이었으니 . 모종의 이상함을 느낀 걸까. 에르윈은 무언가에 이끌리기라도 한 것처럼 손을 내렸다. 그러나, 아까와 같은 공격은 이어지지 않았다. 설마 살아남으리 라고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기에 전원 명하니 응시하고 있을 뿐. “나를.” 바로 그 순간, “끝까지 방해하는구나.” 김수현이 격분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치켜들었다. 부릅뜬 두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맑은 불꽃을 내뿜었다. 동시 에 강둑을 부수고 범람하는 홍수처럼, 특 터져 나온 살기가 사방을 거칠게 집어삼켜 가기 시작한다. 반사적으로 아차 했을 때는,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 화르르르! 김수현이 전신이 삽시간에 폭발적인 불꽃으로 뒤덮인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 (Name): 김수현 (5 년 차) 2. 클래스(Class): 검의 군주(Arousal Secret, Sovereign Of Sword, Master) 3. 소속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S Zero) 5. 진명 • 국적 : 1. 정상(頂上) 2. 검의 주인 3. 마성(魔性) • 대한민국 6. 성별 (Sex): 남성 (29) 7. 신장 • 체중 : 181.5cm • 75.5kg 8. 성향 : 중용 • 혼돈(Moderation • Chaos) [근력 105(+8)] [내구95(+2)] [민첩 101] [체력 101 (+2)] [마력 96] [행운 90(+2)] (잔여 능력치는 0포인트입니다.) 1 • 화정을 심장에 품었습니다.(현재 3차 각성이 진행된 상태입니다.) 2. 고대 무녀의 각인을 심장에 새겼습니다.(마력 회로가 크게 안 정되며 효율이 상승합니다.) 3. 체내에 한 치의 노폐물을 찾을 수 없습니다.(마력이 흐르는 속도가 두 배로 상승합니다.) 4. ‘군주여, 호령하여라.’의 영향으로 상시 S Zero 랭크의 카리스마 효과가 발생합니다. 5. 용족화를 사용한 상태입니다.(물리 방어력과 마법 저항력이 크게 상승하며 비행이 가능해집니다.) 6. 미확인 능력 ‘염화(炎火)’를 발동했습니다. 마침내 최후의 보루인 염화를 발동한 것이다. 여태껏 김수현이 염화를 사용한 건 단 두 번. 지속 시간도 길지 않 으며 목숨을 담보로 하는 최강이자 최악의 능력. 단,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김수현도 홀 플레인 최강인 게헨나와 호각 으로 싸울 수 있다. 설령 오 분 한정이라 할지라도. 가장 먼저 반응한 건 타나토스였다. “뭐,뭐, 뭐, 뭐야…?”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그러나 전신을 짓누르다 못해 쥐어짜는 것처럼 무시무시한 압력이 엄습했다. 심지어 타나토스조차도 함 부로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힘. 설령 여기 있는 모든 존재의 힘 따위를 합친다고 해도, 감히 댈 수 없을 만큼 강대하고 어마어마한 기운이 었다. 그때,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갑자기 몸이 잔뜩 무거워지는 감각을 느꼈다. 이윽고 고개 젖혀 위를 올려다본 타나토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하늘에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굉장한 양의 마력이 등 글게 뭉치는 중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표면이 깡그리 불길로 덮 여가며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다. “저건! 네, 네가어떻게!” 타나토스는 자기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발이 엇갈려 넘어졌다. 얼굴빛은 창백하다 못해 파리하고, 한껏 치떠진 두 눈은 완연한 두려움에 질려 있다. 어찌 잊을 수 있으라. 수천 년 전 있었던 신들의 전쟁에서 자신을 참패시킨 그녀의 능력인데. 다음 순간, “도망쳐어어어어어!” 죽음의 신임에도 불구하고, 공포에 찬 타나토스의 고함이 일대를 왕왕 울렸다. ======작품 후기====== 에피소드 2도…. 겨우 다음화로 끝…. 〇<-< 드디어 에피소드 1 로 넘어가네요. -T.TT [KHAN14] < -- A Poisoned Chalice, Two. -- > “도망쳐어어어어어!” 타나토스가 공포에 찬 목소리로 외쳤으나, 이미 늦었다. 늦어도 한참이나 늦었다. 한순간 표면에 흐르던 청명한 다홍빛이 눈이 아릿해질 만치 뿜어 져 구름을 붉게 작열시켰다. 그리고 잠시 후, 서서히 기우는 저울 추처럼 주르륵 미끄러지며 땅으로 무겁게 곤두박질친다. 스스로 ‘최고’라 일컫는 태고(太古)의 기운, 화정(火正). 최고를 자처하는 염화(炎火)의 태양이 대지와 맞부딪친 순간, 꾸융! 또 한 번 터져 나온 빛무리가 온 세상을 환하게 밝혔다. 이어서 화륜과 땅이 맞물리는 면부터 콰득콰득 일그러지며, 흡사 아이스크 림 녹듯 태양의 아랫면부터 차례차례 부서진다. 꿍. 꿍. 꿍. 꿍!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대지는 태양을 한 입씩 삼킬 때마다 배가 찢어지겠다는 듯 쩍쩍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종래에는 압력을 감당치 못했는지 와르르 터져나가 버리고, 동시에 열화와 파편을 머금은 어마어마 한 기운이 고리처럼 등글게 뻗어 나갔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불타 녹아내리는 열풍이, 넓적한 파문을 그 리며 넘실넘실 퍼겨나가는 광경은 진정 장관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끝은 폭발. 끝없이 파인 등근 구명으로부터 붉은 빛무리가 화산 폭발처럼 솟 구쳤다. 전해지는 기운은 너무나 강렬해 먼 곳에 있던 이들의 시 야마저 빛으로 물들여졌다. 고오오오오오오오 … . 얼마나 시간이 홀렀을까. 종 장장해졌다 싶자, 본능에 따라 몸을 웅크렸던 여인이 황망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스리슬쩍 앞을 바라보는 찰나 얼굴이 해쓱해진다. 약 일백 미터는 될까.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폭발 반경에 포함돼 있던 모든 것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대지는 깡그리 부서져 깊숙하게 숨어 있던 지하까지 드러났다. 신체나 장비는 말할 것도 없고, 영혼까지 연소해 소멸당하고 말았다. 아름답던 초원이 일 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허허벌판으로 변해 버렸다. 오직 김수현이 서 있던 곳으로 거대한 화구가 생성돼 있으며, 펑 펑 치솟는 허연 연기와 붉어진 대기가 바다처럼 흐르고 있을 뿐. 여인은 급격히 치밀어 오르는 공포에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하지만 과연 알고 있을까. 이게 끝이 아니라는걸 . 아니. 이제 시작이라는걸. 히、르_르_르_르_르_르르_! 놀란 가슴을 채 추스르기도 전, 돌연 또 한 번 불이 세차게 타오르 는 소리가 들렸다. 망연히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들은 순간 아연 실색하고 말았다. 허공 곳곳에서 또다시 찬연한 화염이 이글거리 며 검의 형상을 갖춰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게헨나조차도 가볍게 보지 못했던 김수현의 장기, 열화 검이 었다. 태양에 비하면 크기는 훨씬 작지만 숫자가 장난이 아니다. 처음 에는 수십 개에 불과했지만, 이내 기하급수로 늘어나 삽시간에 하늘을 뒤덮는다. 이옥고 능히 수천 개에 달하는 열화 검이 동시에 비스듬히 기울 었다. 말갛고 어른어른한 칼끝이 불특정 다수를 겨냥함을 인지한 순간, 그 아래에 있던 이들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으아아아!” “끼:아아악!” 사용자고 요정이고 가리지 않고 등을 돌려 달아나자, 기껏 에워 쌌던 포위망이 이제 막 무너지기 시작하는 도미노처럼 순식간에 와해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상대는 단 한명에 불과했지만, 혼자서 뿜어내는 기세가 일대의 모든 존재를 짓누르고도 남을 만큼 압도적이 다. 심지어 맹목적으로 층성하는 마족조차도 슬금슬금 물러나는 지경이었으니. 김수현의 얼굴은 아직도 흐르는 핏물로 점철돼 있는 터라,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단지 적들이 도주하는 방향으 로 천천히 눈을 돌리다가 힘겹게나마 왼손을 뻗는다. 그리고 조 용히 입을 열었다. “영역 선포(Area Declared).” 그 순간 붉디붉은 기운이 등글게 번지며 내려와 대지로 힘차게 내리꽃혔다. 그러자 여럿이 함께 비명을 지르며 삽시간에 소란에 휩싸였다. 커다란 그릇을 거꾸로 엎어놓은 것과 흡사한 장막이, 죽어라고 도망치던 수백 명을 한꺼번에 가뭐버린 것이다. 즐지에 갇혀버린 인원은 미친 듯이 장막을 두드리며 악을 썼지 만, 영역은 꿈꺽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김수현은 뻗었던 손을 단숨에 움켜쥐었다. 그 순간이었다. 어마어 마한 굉음과 함께 중앙으로 시뼐건 불길이 분수처 럼 솟구 쳤다. 장막 자체가 덜커덕 흔들리며 반투명하던 내부가 뺄겋게 물들었고, 창즐간에 비명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졌다. 중앙에 있던 이들은 끽소리도 못한 채 믹서기에 갈리듯 한 중의 핏물로 화했지만, 외곽에 있던 이들은 한 박자 늦게 불길에 휩싸 였다. 끝까지 막을 치고 문지르며 아우성치던 어느 요정은, 결국 열기 를 이기지 못해 온몸의 살이 녹으며 눈을 까뒤집는다. 그야말로 지옥 불구덩이의 재현이었다. 내부가 얼마나 끔찍했으면, 간발의 차이로 장막에서 빗겨난 여인 이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을 보고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그나마 정신이 있는 이들은 후들거리는 몸을 추스르려 애썼지만, 미처 다리를 움직이기도 전에 목덜미가 인두로 지져지는 감각이 엄습했다. 아차 하며 눈을 돌리는 찰나, 갑자기 한명이 목젖에 무언가가 꽂히더니 혀를 길게 빼며 털썩 쓰러졌다. 이어서 볼 수 있었던 건, 하늘에서 사방팔방 홑뿌려지는 열화 검의 향연이었다. “맙소사….” “말도…. 안돼….” 적들은 더는 달아날 생각도 못 한 채, 섬광처럼 쏟아지는 불의 폭 우를 하염 없이 바라볼 뿐이 었다. 콰콰콰광, 과과콰쾅! 수백의 벌컨포가 일시에 불을 뿜으면 이럴까. 가까운 곳부터 가 해지는 폭격은 모든 방향으로 무섭게 쇄도하더니, 지면마저 깨부 수며 확 퍼졌다. 처음 태양처럼 한 지역을 날려버 리는 수준은 아니었지 만, 반경은 훨씬 넓다. 거기다 예전의 열화 검이 단순히 칼 한 자루에 불과했다면, 염화 능력을 등에 업은 지금은 하나하나가 포탄에 가까운 위력이었다. 핏빛 융단이 깔리는 곳마다 땅이 펄떡 일어나 요동치고, 깨져나 간 조각이 도처를 휩쓸어버린다. 그리하여 사방에서 무력한 울부짖음으로 채워질 무렵. "우욱!" 불현듯 김수현이 한 움큼의 핏물을 토했다. 입뿐만이 아니라, 눈, 코, 귀 등등 구명이 있는 곳에서는 한 곳도 예외 없이 선혈이 샘솟 는다. 꼭 악귀와 같은 형상. 세 번이나 연달아 커다란 기술을 사용 하니 자연스레 몸의 붕괴가 가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찔 수 없는 일이었다. 적들이 한 군데 꽁꽁 뭉쳤다면 모 를까, 첫 공격 이후 사방으로 개미 떼처럼 홑어졌기 때문이다. 발 동한 목적이 화풀이로 마구잡이로 죽이는 게 아닌 이상, 하나하 나 쫓아가 죽이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콜록!” 다시 한 번 선혈이 뿜어졌다. 기실 염화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으로 기운을 증폭시켜주는 능력 에 불과할 뿐, 몸을 치료해주지는 않는다. 말인즉 김수현의 몸은 진즉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아까 집중 사격으로 받은 타격도 무시할 수 없지만, 누적되는 층격을 못 견 며 파괴된 게헨나의 수호 요새로 마력도 바닥을 찍었다. 그뿐일까. 체내의 장기가 미쳐 뒤툴리는 감각은 차마 눈을 뜰 수 조차 없을 만큼 괴롭다. 몸을 지탱해주는 뼈는 새카맣게 그슬려 가루로 갈리는 느낌이다. 마치 당장에라도 온몸이 폭발해 갈가리 찢겨나갈 것만 같았다. 하다못해 엘릭서 한 병, 아니 간단한 치료 주문이라도 받을 수 있 다면 이토록 육신이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터. “끄으….” 그러한 찰나, 굳건히 서 있던 몸이 기우뚱 기울기 시작한다. 한순 간 정신을 놓을 뻔했지만, 김수현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몇 분이 나 홀렀는지 얼마나 남았는지는 이미 신경 쓸 여력조차 없다. 죽 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염화 능력을 발동한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절대로. 절대로, 보내지 않겠다. “크르르르•••!” 흡사 검승이 부르짖는 괴성을 내지르는 동시에 절반쯤 굽혀졌던 무릎이 쪽 펴졌다. 이어서 불길에 휩싸인 날개가 날갯짓하며 몸 이 사선으로 붕 떠오른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 자기가 왜 공중으로 떠오르는지도 모르는 채로 양손으로 창을 움킨다. 그리고 한 번 빙그르르 돌리 자, 수라마창의 끝으로 파괴적인 불줄기가 꿈툴거리며 분출됐다. 그렇게 멀리멀리 뻗어 나가던 기운이 하늘까지 찌를 즈음, 김수 현도 돌연 덜컥 정지했다. 이어서 수라마창을 하늘로 힘껏 치키 자, 기나긴 줄기가 낚싯대의 선처럼 거친 도자를 그리며 출렁거렸 다. 다음 순간, “끄아•아아아아아•아!” 김수현은 양손을 내리치는 것과 함께 젖 먹던 힘까지 뽑아내 몸 을 회전시켰다. 그러자 땅을 쪼갤 듯이 내리쳐진 불의 채찍에 한 층 가속이 붙어, 시계 속 시침이 돌아가는 것처럼 무시무시한 속 도로 사방을 휘몰아 쓸어버린다. 필생의 힘을 기울인 최후의 일격. 비록 단 한 번의 선회에 불과했지만, 파괴력은 가히 무시무시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한껏 숨죽이고 있던 대지가, 몰아쳐 오는 폭풍에 호응해 폭발 직 전의 활화산과 같이 끓어오른다. 불줄기가 스치는 곳마다 땅으로 울퉁불퉁한 크레이터가 파이고, 땅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시끄 럽게 뒤흔들린다. 그 층격에 얼떨떨하게 서 있던 에르윈의 다리가 풀려 나동그라지 고 말았다. 화르르르! 그 찰나의 순간, 뜨거운 바람이 정수리를 흘고 지 나쳤다. 그와 동시에 덮쳐오는 해일 같은 압력은 갑옷을 찢고 땅으로 푹 파묻히게 해, 에르윈은 잠깐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머리 위로 혜성 꼬리처럼 이어지는 붉은 궤적과, 가까이 있던 마족 군단이 앙그리 이등분되며 몰살당하는 광경을 확인한 순간, 에르윈은, 아니 사탄은 악마가 된 후 처음으로 머릿속이 새하얗 게 칠해지는 현상을 경험했다. 공교롭게도 다리가 풀려 넘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는 명약관화였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끊임없이 이어질 것 같던 돌풍도 가까스 로 가라앉았다. 이윽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에르윈의 입이 꺽 벌어졌다. 김수현이 강하하고 있었다. 에르윈이 있는 곳으로 정확하게 내려 오고 있다. 에르윈은 아래로 내뻗어진 창끝을 똑바로 바라봤다. 좀 더 정확 히 말하면 바라보고만 있었다. 서둘러 지원군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은커녕, 머릿속의 사고는 이미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하다. 왜냐면 이런 경험 자체가 처음 이었으니까. 아무리 계산하고 계산해도, 저 정도의 무력에 대응할 수 있는 방 도가 떠오르지 않는다. 심지어 도주조차도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정도였으니. 잠시 후. 시커먼 창이 아래로 느릿하게 떨어진다. 에르윈이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창 날이 봉긋한 젖가슴의 가운데를 찌르는 중 이었다. ‘이런…. 바보 같은….’ 생각보다 약하기는 했지만, 가슴이 푹 뚫리는 감각과 함께 에르윈은 신음을 터뜨렸다. 그때 였다. 갑자기 복부 쪽으로 무언가 거대한 것이 부딪치는 층격이 느껴졌 다. 고통에 겨워하는 와중에도 에르윈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렸 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명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가슴을 찌른 수라마창은 어느새 느슨해진 손아귀에서 흐 르듯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이게…. 무슨…?” 김수현이 엎어진 채로 쓰러져 있었다. 비록 핏물로 범벅된 끔찍한 몰골이었으나, 감긴 두 눈만큼은 편 안하기 그지 없었다. …오분. 딱 오분이었다. 삼백 초 동안 쉴 틈 없이 들끓었던 초원은, 오 분이 지난후, 거짓말처럼 조용해져 있었다. ============================ 작품 후7|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많이 늦었습니다. 사실 집필 시작 시간이 평소보다 약간 늦기는 했어요. 하지만 오늘은 장들지는 않았습니다. 분명히 어제 21 시 30분쯤에 시작했는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저도 정 말 몰랐습니다.n 부디 너무 노엽다 여기지 마시고, 어여삐 봐주세요. _(」_ 그리고 다음 회부터, 에피소드 1 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전에 후기에서 한 번 말씀드렸지만, 악마와의 전쟁은 크게 총 세 번 예정돼 있습니다. 이렇게 두 번이 끝났네요. 이제는 익을 대로 익은 누구 씨와도 헉헉(?)하고, 누구도 살리고, 또 누구도 나오고. 드디어 독자 분들과의 약속을 지킬 때가 왔군요. :) [KHAN14] < -- If You Change, One. -- > 그 무렵 . 비록 김수현이 일으킨 천재지변 급의 재앙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던 워프 게이트에도 한바탕 난리가 있었 다. 멜리너스는 아무리 기다려도 지원 병력이 오지 않자 노심초사하 다가, 갑갑한 마음에 직접 에르윈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 전장을 가로지르던 걸음은 이십 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우뚝 엄 콧속이 익을 만치로 뜨거운 공기가 확 찔러왔다. 어디선가 자글 자글 끓는 소리도 나고 있었다. 명하니 사방을 돌아보는 멜리너 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오 분 전만 해도 시끄럽기 짝이 없던 초원은 어느새 죽어버린 듯 고요해졌다. 아니. 이제 초원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어느 곳은 소행성이 층돌하기라도 했는지 땅이 산산이 조각나다 못해 커다란 구명이 뼝 뚫렸다. 이 정도면 싱크 홀이라고 봐도 믿 을 정도였다. 또 어느 곳은 녹아내린 살과 핏물이 섞인 액체가 웅덩이처럼 고 여 있으며, 인간, 요정, 마족을 가리지 않고 상반신과 하반신이 이 등분된 시신도 부지기수였다. 그때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짓고 있던 멜리너스의 눈에 이채가 스 쳤다. «크으으으… 55 “아, 아스타로트 님!” 아스타로트는 심각한 상처를 입은 채 쓰러져 있었다. 특히 가슴 과 복부에 난 깊은 자상은 심지어 아직도 시커먼 연기를 올리며 타들어 가는 중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공격에는 영향권에 들 어가지 않았지만, 열화 검의 폭격에는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하기야 진즉 고꾸라진 덕분에 네 번째 공격 때는 벗어날 수 있었 으니 어찌 보면 다행이라고 할만도 했다. 이옥고 아스타로트가 힘겹게 입을 뻐끔거리자, 멜리너스는 황급 히 아스타로트를 들고 시신이 가장 많이 쌓인 곳으로 달렸다. 서둘러 주문을 외워 양분으로 만든 후 흡수하게 하니, 그제야 아 스타로트의 숨통이 살짝 트였다. “후우우우….”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스타로트의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지 아는 만큼 멜리너스의 어 조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아스타로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열기는커녕 한껏 터 진 숨만 덜덜거리며 뱉을 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멜리너스는 오 분 전 무시무시했던 기운을 느끼지 못한 건 아니 었지만, 그저 김수현의 저항이 심했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 다. 하지만 이렇게 보니 무언가 툴어져도 단단히 툴어졌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양해를 구하고 다시 달리자, 오래지 않아 에르윈을 발견할 수 있 었다. 에르윈은 땅에 주저앉은 채 간신히 상반신만 일으킨 상태였다. 가슴 가운데로 작은 구명이 뚫려 있었으나 심한 부상까지는 아니 었다. 멜리너스의 기척을 느꼈는지 에르윈은 흥깃 몸을 떨었다. 그리고 아차 하더니 복부에 얼굴을 묻고 있는 김수현을 살짝 밀어냈다. “멜리너스?” “사…. 에르윈 님. 무사하십니까.” 에르윈은 힘겹게나마 자리에서 일어서며 끄덕거렸다. 아직 정신 이 명명하기는 했으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상관없다. 그나저나 그쪽은 어떻게 됐지?” 곧바로 물었으나 멜리너스는 쉬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광경에 잠깐 정신이 팔렸지만, 현실로 돌아오자 할 말 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사방이 시체와 부상자의 신음으로 가득한 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꾸만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니 이상한 감을 느낀 걸까. 에르윈이 눈이 단박에 실쪽해졌다. “어떻게 됐지?” “사브나크가 신속히 움직여준 덕분에 도망치는 무리를 둘러싸는 건 성공했습니다.” 또 한 번 묻자, 멜리너스는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지금은 주변 시 선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놈들의 저항이 만만치가 않았으며, 또 서른 명에 달하는 인원이 새로 나타나 불시에 후방을 들이쳐버리는 바람에….” “그래 봤자 삼백 명도 안 되는 인원이지 않나. 설령 그림자나 정령 이 있었다고 해도 육천 명에 달하는 서대륙이 놓칠 리가 없을 텐 데.” “그게 실은…. 포탈로 한창 병력을 보내던 중에 예상치 못한 습격 을 받았습니다.” “습격?” “예. 제가 정신없는 틈을 타 아군으로 가장해서 달려오더니, 가까 이 오자마자 갑자기 공격하더군요. 처음에는 메모리아 스톤을 뺏 으려는 듯했지만, 제가 겨우 지키는 데 성공하자 바로 포탈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그수가 적지 않아서…. 서둘러 지원을요청했는데 멜리너스가 또 한 번 말을 흐리자, 에르윈이 입술을 짓씹었다. 설 마 설마 했는데 정말로 변수가 발생했다. 그나마 에워싸는 데는 성공했다지 만 이상할 정도의 불안감이 뭉클뭉클 샘솟는다. 에르윈은 신속히 눈을 돌렸다. 완전히 난장판이 됐지만, 시간을 지체하더라도 한 시라도 빨리 병력을 수습해 넘어가야만 했다. 그때 였다. 한쪽에서 돌연히 한 무리가 우르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 생각 없이 눈을 돌리는 멜리너스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 다. 헉헉거리며 달려오는 무리는 서대륙 사용자가 분명하다. 지 금쯤 한창 싸우고 있어야 하건만, 이곳으로 왔다는 것 자체가 불 보듯 뻔한 일이 었다. “크, 큰일 났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외침을 듣자마자, “놓쳤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뭐라고!” 고함의 근원은 멜리너스가 아니라 에르윈이었다. 막 숨을 고르려 던 사내는 서슬 퍼런 호령에 순간적으로 딸꾹질을 뱉었다. “놓. 쳤. 다. 고.” 차갑게 노려보는 에르윈의 두 눈과 마주하자 사내는 온몸이 얼어 붙는 감각을 느꼈다. 차디찬 서리 속으로 맨몸으로 뛰어들면 이 럴까. 흡사 뱀을 앞에 둔 쥐의 기분이었다. “그, 그게 ! 추격은 하고 있는데 !” 사내의 횡설수설에 에르윈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똑바로. 말하라.” 아름답던 목소리가 갑작스레 낮아지고 사악한 어조가 물씬 풍겼 다. 이는 사탄이 극도로 분노했다는 방증이었다. 결국, 기세를 견디지 못한 사내가 느닷없이 황급히 누군가를 앞 으로 끌어냈다. “이,이년 때문입니다!” 이어서 앞으로 내던져진 여인은 다름 아닌 한소영이었다. 항상 단정하던 긴 생머리는 몹시 헝클어졌고, 군데군데 깊은 상 처도 여럿 보였지만, 분명히 한소영이 맞았다. 끝내 붙잡혔음에도 불구하고 표정은 언제나처럼 무감정하다. 마 치 너희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이년이 갑자기 워프 게이트로 넘어와서는…!” 사내는 한소영을 삿대질한 채 계속 떠들었으나, 에르윈은 더는 듣고 있지 않았다.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다리 풀려 주저앉는 등의 추태는 보이지 않았지만, 종 전까지 꼿 꼿하던 어깨가 살짝 늘어졌다. 그리고 워프 게이트가 있는 방향 을 하염없이 응시할 뿐. 이윽고 조용히 생각에 장기기라도 하듯 지그시 눈을 감는다. 하기야 힘이 빠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타나토스를 깨우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 한순간만을 바라보고 온갖 모험을 감수하고 노력을 기울였는데, 모조리 수포로 돌아가 버렸으니까. 이래서야 전쟁은 이겨도 이긴 게 아니다. 냉정하게 봐서 이번 전 쟁도 악마 진영의 패배였다. 결국에는 대계의 예언이 맞았다. 잠시 후. 멜리너스의 고성이 이어지는 가운데, 한소영은 침착히 주변을 돌 아봤다. 죽지 않은 이상 어떻게 틈이라도 엿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땅에 누워 있는 김수현을 발견할 수 있었 다. 무표정 일색이던 한소영의 두 눈이 놀라 치떠졌다. “머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가, 순간 닫는다. 무언가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한소영은 자기도 모르게 양팔을 움직여 김수현을 향해 몸을 끌었 다. “머셔너리….” 잔뜩 쉰 목소리로 불렀으나 회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답은커녕, 미동조차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한소영은 손을 뻗어 뺨에 찰싹 달라붙은 핏물에 절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쓸었다. 그러자 비로소 편안히 감겨 있는 두 눈이 드러 “머셔너리…. 로드…?” 한소영은 그제야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아직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한소영의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과 김수현의 얼굴이 느릿하게 가까워진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흑수정 같 은 눈동자가 상대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저렇게 땅에 누워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는다. 지금 당장 에라도 나보라는 듯이 일어설 것만 같다. 그러나 한소영의 초감각은 아까부터 대상의 정보를 낱낱이 전해 주고 있었다. 숨은 이미 끊졌다. 그나마 남아 있는 생명의 불꽃도 빠르게 사그 라겨가고 있다. 한참 동안 망연히 바라보더니 김수현의 얼굴에 자신의 뺨을 살며 시 붙인다. 살은 아직 미지근했으나 빠르게 식어가는 중이었다. “당신….” 그 순간 한소영은 스스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김수현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살짝 열렸던 입이 서서히 이지러지다가 “흑.” 소리와 함께 아랫입술이 꽉 짓씹어졌다. 동시에 소리 없이 터진 투명한 눈물 한 줄기가, 뺨을 타고 턱을 홀러 뚝 떨어졌다. 그때 갑자기 날아온 발차기가 한소영의 등을 퍽 소리가 날 만큼 강타했다. “이년 때문입니다! 이년이 모두 망쳤어요! 이년! 이 개 같은 년!” 사내는 험한 욕설을 뱉으며 있는 힘껏 발길질한 것이다. 게다가 한 번에서 끝나지 않고, 머리, 얼굴, 등, 다리를 가리지 않고 무자 비하게 후려갈겼지만, 한소영은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그저 김수현을 힘껏 감싸 안으며 소리 죽여 오열할 뿐. 얼마나 시간이 홀렸을까. 끊임없이 이어질 것 같던 발길질이 불현듯 뚝 멎었다. 찡그린 눈을 든 한소영의 낯에 의아한 빛이 서렸다. 자기를 걷어 차던 사내와 흰 수염의 노인이 약간 당황한 얼굴로 한 곳을 쳐다 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어느새 눈을 뜬 요정이 한소영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 다. 그렇게 서로 시선이 얽힌 찰나, 한소영은 까닭 모를 오싹한 기분 을 느꼈다. 에르윈은 겉보기에는 극도로 절제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나 초감각이 알려주는 상대의 감정은, 미쳐 날뛴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휘몰아치는 중이었다. 이윽고 에르윈이 흘끗 눈을 돌리자, “예, 예!” 아직 부르지도 않았는데 사내는 자동으로 차려 자세를 했다. “포로가 이 한명만은 아니겠지.” “그, 그게….” “지금부터 한명도 죽이지 말고 전부 데려오도록. 지금 당장.” “그,그렇게 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자리를 뜨고 싶었던 터라, 사내는 빠르게 자취를 감췄 다. 에르윈이 말을 이었다. “멜리너스.” “사용자든 요정이든, 치료 능력이 가장 좋은 이를 데려와라.” “…알겠습니다.” 멜리너스 또한 군말 않고 신속하게 걸음을 옮졌다. 물론 왜 이런 명령을 내리는지 전혀 모르고 있지만, 분명히 모종의 뜻이 있으 리라여졌다. 왜냐면 사탄이니까. 포기 직전에서 성공 직전까지 끌고 왔으니 까. 그래. 사탄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사위를 천천히 돌아보던 에르윈의 시선이 오른쪽에서 정지했다. 언제 다시 돌아왔는지 약간 맥 빠진 얼굴을 한 타나토스가 땅에 주저앉아있었다. “타나토스 님.” “안돼.” 이름을 부르자마자 타나토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마치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에르윈은 전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담담히 말을 잇는다. “엘도라 때처럼은 안됩니까?” “안 되는 게 아니라 불가능한 거야. 설령 육신이 죽었어도 영혼만 살아 있으면 살려내는 건 어렵지 않아. 하지만 저 경우는 완전히 달라. 육신과 영혼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이루는 뿌리까 지 깡그리 불살랐어 .” “정녕 방법이 없습니까?” “그렇다니까? 저놈은 이제 그냥 존재가 사라지고 무로 돌아가는 일만 남은 거라고.” 타나토스는 드물게도 평소보다 길게 말하더니 김수현을 보며 쯧 혀를 찼다. “애초 인간이 화정 정도의 신격을 통제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 는 일이지. 그걸 모르니 시시각각 목숨이 파먹히는 것도 모르지. 명청한 놈.” 그렇게 말한 타나토스는 숫제 고개를 돌렸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러려는 찰나, 갑자기 낯을찌푸렸다. 에르윈이 여전히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흡사 방 법이 없어도 찾아내라는 것 같은 무언의 눈초리였다. 타나토스는 짜증을 내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내 힘이 온전하면 가능하기는 해. 강제로라도 생명력을 채워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저번 계획 실패로 조각도 세 개밖에 회수 못했고, 그조차도 하나는 엘도라를 되살리는 데 썼는데. 이제 와서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심히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성큼성큼 걸어가 김수현의 가슴에 손을 얹는다. 한소영은 이미 본능에 따라 물러나 있었다. 무슨 말을 오고 가는 지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분위기상 김수현이 소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미처 희망이 생기기도 전에 기대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한동안 손을 대고 있던 타나토스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기 때문이다. “역시. 안돼. 이건 지금 내 상태로는 무리….” 그때 였다. “…어라?” 손을 떼려던 타나토스가 문득 눈을 반짝 떴다. “이거…. 잠깐, 잠깐만….” 귀찮음이 역력하던 얼굴빛에 순식간에 흥미가 동한다. 이윽고 심장이 있는 곳으로 손을 옮겨 지그시 짓누르더니, “하? 이것 봐라?” 재밌다는 탄성과 함께 입가로 오묘한 미소가 걸렸다. “통제가…. 아니었어?” ======작품 후기====== 이번 후기는 에피소드 2에서 있었던 의문을 제가 어떤 구상으로 내용을 전개했는지 답변을 드리려고 합니다. Q&A에 들어가기 앞서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건, 굳이 제 생각을 맞는다고 여기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느 상황이든 여러 갈래가 있을 수 있고, 굳이 어느 하나가 정답이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니 이 후 기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제가 맞다.’ 가 아니라, ‘저는 이렇게 생 각해서 적었습니다.’로 초점을 맞춰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단, 질문 중 내용을 건너서 읽으신 경우는 제외하겠습니다.) 그럼 시 작하겠습니다.(아래는 최근 10회에 달린 코멘트를 읽고 나름대 로 선발한 것들입 니 다.) Q 1. 그냥 제로 코드만 얻으면 다 끝나는 거 아니었나요? Sol) 아닙니다. 제로 코드는 획득이 끝이 아닌, 소환의 방으로 돌 아가 천사를 통해서만 발동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김수현이 법 역 주변에 워프 게이트를 설치한 겁니다. 나오자마자 바로 도시 로 돌아갈 수 있게요. Q 2. 어째서 악마가 단 시간에 북 대륙까지 올 수 있었던 거죠? Sol) 현재 진행 내용의 배경은 북 대륙이 아닌 중앙 대륙입 니다. 그리고 중앙 대륙 중 약속의 신전이 있는 곳이지요. 혹시 제가 질 문을 잘못 이해한 노파심에 말씀드리자면(도망친 김유현 무리를 봉쇄하는 내용에 달린 코멘트라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악 마가 첫 기습 때 안솔을 저격했지만, 제갈 해솔의 기지로 도망에 는 성공합니다. 그리고 사탄은 악마 14 군주 중 하나인 사브나크 에게 추적 지시를 내리지요. 그래서 사브나크가 전장을 벗어나 외곽에 있을 수 있었던 겁니다. Q 3. 김수현이 애초 악마를 먼저 처리하는 게 맞지 않았나요? Sol) 김수현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정확히는 약속의 신전을 공략 하면서 악마의 동태를 살피려 했지요. 그 당시 악마에게 그나마 유리했던 상황은 주력이 빠진 곳을 기습하거나(물론 이건 김수현 도 똑같이 워프 게이트로 대응했지요.), 아니면 북 대륙이 제로 코드를 획득한 직후를 노리는 것이었으니까요. 한데, 여기서 김 수현도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합니다. 일 회차 때는 어떤 짓을 해도 뚫리지 않던 법역이 김수현과 네 여인이 제단에 들어서자마 자 반응한 겁니다. 그걸 알고 있었다면 김수현도 함부로 제단에 가까이 가지는 않았을 겁 니다. Q 4. 김수현이 혼자서 전쟁터로 돌아가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아 요. Sol) 아마 메모라이즈 초기부터 읽으신 독자 분이시라면, 초창기 의 김수현과 현재의 김수현이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느끼고 계 실 겁니다. 처음에는 고연주, 유현아를 보자마자 ‘죽여야 한다.’ 는 강박증에 시달렸다면, 지금은 정말 많이 변했습니다. 실제로 900 회가 넘는 동안 김수현이라는 캐릭터는 스스로 알게 모르게 심경 이 변화됐고, 근래 제로 코드를 얻는 장면고ᅡ, 법역에서 나온 후 형 과의 만남 전후로도 심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하나 분명한 건, 이 번 전쟁에서 김수현에게 기회는 있었습니다. 형과 한소영을 억지 로라도 데리고 탈출할 기회가요. 즉 형과 한소영을 데리고 이탈 한다는 선택지오ᅡ, 형과 한소영과 힘을 합쳐 전장으로 돌아간다는 선택지가 있었는데, 여기서 김수현은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했습 니다. 형을 전장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으면서도, 동료들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리하여 갈등 끝에 결국 각 선택지를 절반 씩만 선택하게 됩니다. 이는 처음 수단으로만 취급하던 클랜원들 이 시간이 지나면서 김유현, 한소영과 비슷한 선으로 올라온걸 의미합니다. 그리고 문득 다른 코멘트 하나가 더 떠올랐는데(초점이 다른 질 문이기는 하지만요.), 현 상황을 게헨나 전과 비교하는 건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당시 김수현은 수많은 동료와 함께 했거니 오는, 실제로 엘릭서나 여러 주문으로 치료받는 원호가 있었고, 무 엇보다 상대는 게헨나 단 혼자였습니다. 하지만 김수현이 등장하 자 사탄은 모든걸 포기하고 김수현만 잡는데 전 병력을 집중합니 다. 그 결과 일만이 넘는 적에 홀로 에워싸였으며, 그때처럼 누군 가를 지키는 게 아니라 지원군이 가지 못하게 막아야 하는 상황 이었으니까요. 단, 김수현이 변화한 건 맞습니다. 그 부분이 안타 까우셨다면, 그건 어느 독자님이든 개인이 으레 느낄 수 있는 부 분이라고 생각합니 다. Q 5. 북 대륙이 이렇게 쉽게 무너진 게 이해가 가지 않아요. 마무 리에 너무 극적 상황을 연출하려고 억지성 짙게 전개하는 건 아 닌지? Sol) 현재 북 대륙의 전력을 정확하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총 병 력은 약 이만 명에 가까우며, 그중 최고 정예는 약 오천 정도이고, 베테랑이라 볼 수 있는 사용자는 약 일만, 그리고 나머지 오천은 2〜3년차 사용자로 구성돼 있습니다.(작중에 중앙 대륙 원정의 참가 조건을 대폭 확대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후 김수현 과 네 여인이 빠지게 되지요. 그에 반해 적의 전력은 타나토스, 대 악마 넷, 마족 전사 약 일만 이천, 동 대륙 전투 직후 남 대륙 생존 자와 서대륙 사용자를 합해서 약 일만 오천, 그리고 요정+정령 으로 약 삼만에 가까운 전력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저격으로 안솔을 상태 불능에 빠트리고, 안개를 틈탄 기습 공격으로 우세 를 점합니다. 그러니 김수현이 없어진 여덟 시간 동안, 쉽사리 무 너졌다기보다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우세한 전력에 있는 적을 맞 아 버티다가 붕괴됐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Q 6. 염화 능력까지 발동했으면서 왜 지휘관을 안 잡고 부하만 잡은 거죠? Sol) 김수현이 법역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접한 후, 사탄은 두 가 지 행동을 취합니다. 하나는 서대륙을 보내 김수현이 도망시킨 뇌제 무리를 봉쇄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적의 잔존 병력을 포기하고 나머지 병력을 김수현 하나를 잡는데 깡그리 투입합니 다. 왜냐면 제로 코드가 가장 중요했으니까요. 물론 이건 김수현 또한 마찬가지지만, 동시에 하나가 더 있습니다. 김수현은 제로 코드를 빼앗기지 않는 한편, 형과 한소영(당시 김수현은 한소영 의 이탈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방향으로 간 클랜원 들의 안위도 생각해야 했지요. 만에 하나 사탄이 지원군 파견에 성공한다면 정말 상상하기도 싫은 최악의 상황이 펼쳐졌을 테니 까요. 그러니 어떤 수를 써서라도 지원군 파견을 막아야 했고, 거 기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 바로 염화 발동이었습니다. 말인 즉 김수현은 대 악마만 신경 쓸 수는 없었던 겁니다. 이미 몸은 심 각한 부상을 입었고, 염화가 허용하는 시간은 단 300초. 물론 대 악마를 처리하면 휘하 마족의 소멸이라는 부가 이득을 얻을 수 있지만, 대 악마 넷을 각각 쫓으며 처리하는 동안, 남 대륙 사용자 나 요정 중 하나라도 놓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곳에도 역시 나 지휘관 급의 캐릭터가 있으며, 게다가 사방으로 도망치는 적 들이 지원군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염두에 둬야 했지요. 그래서 커다란 기술을 연달아 사용해 상대 진영을 고루고루 타격 했습니다. 도망치는 적들을 일부러 붙잡고, 최대한으로 타격을 입혔습니다. 악마를 소멸시킨다는 목적에서 살짝 빗겨난, 어느 누구도 못 가게 하겠다는 목적하에, 압도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혼란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지요. …이렇게 생각하고 적었지만, 이 부분은 독자님들의 말씀대로 확 실히 석연치 않는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코멘트를 읽으 면서 끄덕여지는 말씀들이 있었거든요. 결과적으로 독자 분들께 서 납득하실 수 있는 만큼의 상황을 설정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 는데 실패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완결 이후 필히 수정토록 하겠습니다. 현재 수정안은 총 두 개가 나온 상태입니다. 그냥 바로 수정할까도 생 각해봤지만, 그러려면 여러 부분 손봐야 할 것 같아, 완결 이후에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한테 현재 제일 중요한 게 연재이며, 완결 전까지 부분이라도 리메이크에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아 내린 결정이오니, 부디 너른 양해 부탁드리겠 습니다. 후기가 생각보다 길어졌네요. 층분한 답변이 되었기를 바라며, 독자분들 모두 즐거운 일요일 보내세요! :) [KHAN14] < -- If You Change, One. -- > 시간을 조금 돌려, 김수현이 막 둘러싸이기 시작했을 즈음. 쉴 틈 없이 북쪽으로 달리던 머셔너리 클랜은, 김수현의 말대로 서대륙에 에워싸여 악전고투를 치르는 한 무리의 아군을 발견, 곧바로 원호에 나섰다. 하지만 중과부적이라고 해야 할까. 여덟 시간 동안 버티느라 몸이 지친 상태이기도 했지만, 일단 적의 숫자가 거의 수십 배에 달했고, 게다가 시시각각 불어나는 중 이었다. 아무리 개개인의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물량에는 장사 없는 법이다. 고연주의 그림자 군단과 마르의 정령이 없었다면 아마 방진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었을 터.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음에도 악착같이 고군분투하는 와중, 돌연 한창 밀고 들어오던 적의 후방이 갑자기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적이 나오던 포탈에서 갑작스레 한소영이 등장한 것이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수십의 전투 처녀와 오백 명에 달하는 아군사용자와 함께. 고연주는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한 곳으로 전력을 집중했고, 덕분에 간신히 한줄기 길을 열어 에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분노한 사브나크가 황급히 추격하려 했지만, 그조차도 한소영이 결사적으로 길을 막아서는 바람에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머셔너리 클랜은 그때까지만 해도, 동료와 형을 구해낸 후 바로 쫓아가겠다는 김수현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몇 시간이 채 가기도 전에 거짓이었음이 밝혀졌다. 왜냐면 재회한 동료 중 고연주의 등에 김유현이 업혀 있는 걸 볼 수 있었으니까. “거짓말쟁이!” 이유정은 눈물을 왈칵 터뜨렸다. 달리면서 울었다. 아무리 깊게 생각하기 싫어하는 그녀라지만 김수현이 왜 거짓말을 했는지 모 를리가없었다. 안현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현재 공찬호 의 어깨에 맥없이 걸쳐져 좌우로 흔들리는 중이었다. 부상을 당해서가 아니다. 거짓말을 알아차리자마자 김수현한테 돌아가려다가, 공찬호에게 불시에 머리를 얻어맞고 기절해버렸 기 때문이다. 애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돌아오는 상황을 우려한 김수현이 미리 부탁해놓은 것이다. “나쁜 놈!” 결국에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계속 도망치면서 이유정은 속으로 간 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부디 김수현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그리하여 정신없이 빠져나간 결과, 날이 어두컴컴해질 무렵에야 적의 끈질긴 추격을 간신히 떨쳐낼 수 있었다. 적이 포기한 듯 싶자 고연주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당장 눈에 보이는 사용자는 약 이백 명 남짓했다. 억지로 포위망 을 뚫느라, 또 무조건 앞만 보고 달리느라 떨어져 나간 인원이 적지 않았다. 실로 안타까웠지만 어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하나 하나 모두 감싸 안았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테니까. 마르는 왼쪽 다리를 절면서도 용케 쫓아오고 있었다. 해류마가 갑자기 소환 해제되면서 떨어져 다친 듯싶다. 그렇게 절룩거리면서 고연주가 엄춘 곳까지 오더니, 돌연 털썩 엎드려 엉엉 울어 젖혔다. 그동안 참고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아이가 울듯 처량하기 짝이 없어 주변에 있 던 이들도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고연주는 무어라 한 마디 하려다가, 신재룡이 조용히 치료 주문을 외우며 다가가는 걸 보고 입을 닫았다. 기실 앞일이 막연한 건 고연주도 매한 가지였다. 물론 고연주라 고 당장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 않겠느냐마는,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 로는 김수현이 속였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왜 그렇게 말했는지 십분 알 것 같았으니. 그렇게 생각한 고연주는 양손으로 있는 힘껏 뺨을 쳤다. 언제 추격대가 쫓아올지 모르는 만큼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계속 늘어져 있을 수 없었으니까. 한시라도 빨리 수색 범위를 벗어나고 지칠 대로 지친 아군을 정 비하는 게 급선무였다. 김유현이 눈을 뜬 건 하루가 지나고 이톰날 밤중이었다. 생각보다 오래 기절해 있었다. 김수현이 작정하고 연달아 친 것 도 있지만 애초 몸의 피로도가 극에 달해 있었다. 긴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마력을 써댔으니 자연스레 정신이 노곤해진 것이다. 오랫동안 기절해 있었던 탓인지 자연스레 침음이 흘렀다. 김유현은 마른 침을 삼키며 눈을 찡그렸다. 머리가 몽롱하고 강 한 현기증이 돌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손은 자꾸만 침대 시트를 더듬고 있었다. ‘그래. 이게 제로 코드야. 그러니까 잘 지켜야 해?’ 홀연 익숙한 음성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 한껏 찌그러졌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밖을 돌아다니던 고연주는 가까운 천막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리 자 깜짝 놀라 걸음을 옮졌다. 조심스레 입구로 들어서니 김유현 이 간이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아주버님!” “수으으으…! 혀어어어…!” 메마른 목에서 갈라진 소리가 새나왔다. 그러나 고연주는 어렵지 않게 수현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진정하세요!” 애원 섞인 목소리로 외쳤으나 김유현은 한동안 누그러지지 않았 다. 오히려 양팔로 땅을 기며 허등지등 천막을 벗어나려고 했다. 고연주는 김유현을 억지로 붙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이미 가봐야 늦었어요. 우선은 쉬세요. 쉬셔야….” 하지만 차마 말을 끝맺지는 못했다. 가봐야 늦었다고 말한 찰나, 김유현이 머리 돌려 무섭게 쏘아봤기 때문이다. 노려보는 두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형형한 빛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마치 그 이상 지껄이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이. 속상하기는 고연주도 마찬가지였지만 내심 김유현을 이해했다. 예전 아틀란타 원정 때도 한 번 그랬지만, 눈앞의 사내는 동생에 관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제발…. 냉정해지세요. 아직 추격을 완전히 떨친 것도 아니고, 지금 가셔봤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런다고 수현 씨가 기뻐할 것 같아요?” “지금도 계속 통신을 넣는 중이에요. 다행히 연락이 닿은 아군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 우선은 집결지로 가요. 다음 일은 일단 합류하고 나서 생각해요. 네?” 그래도 어느 정도 이성이 남아 있었던 걸까. 끊임없이 고연주를 뿌리치려던 움직임이 우뚝 멎는다. 노려보던 눈동자에서 서서히 힘이 빠지더니 이글거리던 눈빛도 꺼겨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홀렀을까. 한참 동안 침묵하고 있던 김유현이 풀썩 주저앉는다. 그러더니 덜덜 떠는 손을 품속으로 집어 넣고 작고 푸른빛이 흐르는 구슬을 꺼내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렇게 계속 하염없이 바라보더니 꾹 다물려 있던 입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이지러진다. 고연주는 김유현을 침대로 옮겨놓을까 하다가, 그냥 조용히 나오는걸 선택했다. 잠시 후, 무언가 집어 던졌는지 둔탁한 소음이 울리는 것과 함께 천막은 끅끅거리는 소리로 조용히 채워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참으려고 애쓰는 듯해도 결국에는 삼키지 못해 낮은 흐느낌이 이어졌다. 자고로 여인의 눈물은 무기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사내가 구슬프게 우는 소리 또한 무척 애절하기 그지없다.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억지로 강하게 마음 먹은 고연주도 그렁그렁해질 지경이었다. “개 자식. 아주 돌아오기만 해봐.” 진심을 담아 뇌까린 후 고연주는 기나긴 한숨을 홀리며 고개를 떨궜다. 공공이 생각에 장기려 했으나 여전히 막막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 다. 그나마 근원과 연락이 닿아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확인한 게 불행 중 다행일까. 그때 였다. “응?” 문득 흐릿하게 반짝거리는 것이 눈에 잡혔다. 목에 걸린 목걸이 의 보석이 희미하게나마 빛을 홀리고 있었다. “이건…?” 아주 예전에 밤의 거리에 갔을 때 김수현이 사준 목걸이였다. 그 순간 고연주는 머리가 강하게 얻어맞는 듯한 층격을 느꼈다. 그동안 전혀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목걸이의 효능이 떠 올랐다. “아…!” 고연주는 탄성과 함께 허겁지겁 목걸이를 붙잡아 올렸다. 그리고 살짝살짝 흔들리는 보석을 유심한 눈으로 관찰했다. 블랙 다이아몬드는 예전처럼 아름답고 화려한 빛을 뿜지는 않는다. 하지만. “살아….” 예전보다 빛을 잃었을 뿐 빛은 분명히 살아 있다. 보석 깊숙한 곳 아래쪽으로 어렴풋한 빛이 잇따라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 하고 있었다. 고연주는 망연히, 그러나 살짝 환희 섞인 음성으로 중얼거 렸다. “살아있었어…!” 불현듯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기이한 기 분을 느꼈다.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심지어 몸조차도. 아니. 아니다. 느껴지기는 한다. 단지 전신이 굉장히 무겁고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감각이 다. 흡사 누군가가 나를 억지로 세워 구속하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나는 살았나? 아니면 죽은 건가? 모르겠다.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은 염화 능력을 발동하고 땅으로 추락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 무언가 이상한데. 정말로 죽었다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터. 염화는 단순히 육신의 죽음뿐만이 아니라, 영혼과 생명력까지 모조리 앗아가는 능력이다. 즉 제로 코드라면 모를까, 소원으로는 부활조차 불가능한 무(無)로 돌아간다는 소리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돌연 눈을 뜨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직감상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 일이 이상하게 된 것 같았 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형은 어떻게 됐으려나. 잘 빠져나갔을까? 또 한소영은 그리고 클랜원들은…. “후우우우….” 갑갑한 가슴에 저절로 한숨이 홀러 나온 찰나, “…응?”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방금 숨소리가 확실하게 들렸다. 도로 숨을 들이켜자 이번에는 몹시 습한 공기가 맡아졌다. 설마…. 설마 하는 생각에 살며시 눈을 뜬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시야가 몹시 가물가물하다는 것과 굉장히 어둡다는 것이다. 그리고 작고 푸른 불빛 여러 개가 허공에 사라 질 듯 말 듯한 형체로 깜빡거리고 있다. 소환의 방과 비슷한 분위 기였다. 그 순간이었다. “…큭!” 살짝 몸을 움직이려고 하자, 느닷없이 심히 비틀리는 것 같은 차가운 감촉이 양팔을 엄습한다. 그와 동시에. 주변으로 작게 흐느끼는 신음 같은 쇳소리가 강가의 잔물결처럼 조그맣게 일었다. ======작품 후기======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루 쉬니 확실히 싱숭생숭한 감정이 종 가시는 기분이네요. 어제는 왜 그리 잡생각이 들던지…. 卜卜、•, 그나저나 아직도 메모라이즈에 NTR을 걱정하시는 분이 계시네 요. 물론 상황상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은 십 분 이해합니다. 또 NTR도 잘 사용하면 소설 내 장치로 훌륭하게 활용될 여지가 있다는 부분도 인정하고요. 하지만 제가 예전에 몇 번이나 약속했듯이 메모라이즈에 NTR은 나오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주인공 주변 여인들 대상으로 말입니다. 아니 왜 자꾸 말이빈다로 오타가 나죠. 다섯 번이나 고쳐 썼네. 화나게. 아무튼, 이중에는 당연히 한소영도 포함됩니다. 익다 못해 타겠다는 등 여태껏 많은 독자 분들께서 기다려주셨는 데, 이제 와서 한소영은 NTR로 돌린다는 건 그분들에 대한 배신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다시 확실히 말씀드리면 한소영에 관한 NTR은 나오지 않 습니다. 그러지 않는 방향으로 가려고 합니다. 혹시 기대하신 분이 계시다면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KHAN14] < -- If You Change, One. -- > 사슬소리? 힘겹게 시선을 올리며 뒤를 돌아본 찰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가물거리던 시야가 점차 또렷이 잡히는 가운데, 아주 조금이지만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양팔은 위로 한껏 뻗쳐 있고, 각 손목에는 굉장히 두꺼운 사슬이 칭칭 감겨 있다. 이래서 아까 억지로 세워졌다는 감각을 느꼈나 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구속된 상태라는 말인가? “깨어나셨군요.” 가없이 위를 올려다보고 있자, 홀연 낮은 음성이 고요한 공간을 울렸다. 화들짝 눈을 돌리니 오 미터 옆으로 거무스름한 형상 하 나가 아스라하게 밟혔다. 반사적으로 시력을 높이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마력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요지부동, 회로에 응고된 것처럼 꼼짝도 않았다. “소용없을 거예요. 사지가 구속된 것뿐만 아니라 마력 속박 장치까지 채워져 있으니까.” 그러자 내가 뭘 하려는지 알겠지만, 괜히 힘쓰지 말라는 투의 말이 이어졌다. 잠깐만. 방금 목소리는…? “이스탄텔 로우 로드?” 설마라는 생각에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네.” 그런 내 감정을 느꼈는지 회답은 약간 늦게 돌아왔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어째서 한소영이 여기 있는 거야? 설마 이탈에 실패하고 붙잡혔다는 건가? 나도 모르게 몸을 비툴자 철그렁거리는 거슬리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해밀 로드와 머셔너리 클랜은 무사히 빠져나 갔을 거예요. 아마도.” 의문이 끊임없이 증폭하는 찰나, 담담히 들려오는 음성이 조금이나마 동요를 가라앉혀줬다. 물론 일말의 불안은 아직 남아있지만. 우선 침착해지자. 지금 미친듯이 날뛰어봤자 득 될 건 전혀 없으니.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치솟는 의혹을 억누르며 힘껏 숨을 들이켰다. 계속 호흡을 추스르자 심안 덕분인지 두근거리던 가슴이 빠르게 장잠해졌다. 상황을 보아하니 나는 어떻게 살아 있으며 어던가에 억류돼 있는 듯싶다. 그 외에 아는 건 아무것도 없다. 머릿속이 몹시 복잡하니 하나씩 의문을 푸는 게 최선일 터. 일단은…. “이스탄텔 로우 로드는 왜 여기 계시는 겁니까?” 기억에 따르면 한소영은 분명히 그 자리에 같이 있었다. 한데 어 째서 혼자서 붙잡혔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추격대를 막느라 이탈할 시기를 놓쳤어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고요한 음성이 이어졌다. 살며시 옆을 돌아보자 눈은 그새 어둠에 익숙해졌는지 한소영의 형체가 어렴풋하게나마 잡혔다. 나와는 달리 두 팔만 사슬에 단 단히 묶인 채 무릎 모아 주저앉은 상태였다. 꽤 지친 것 같은 느낌 이라 보채기보다는 이어지는 말을 차분히 기다렸다. 잠시 후. “아….” 한소영의 설명을 듣고 나자 암담한 감정이 엄습했다. 두 다리에 꽉 묶인 사슬만 아니었다면 차라리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아득한 기분이었다. 사실 처음 몰래 전장으로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분노에 가까운 어이없음이 치밀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니 내가 화를 낼 처지는 아니었다. 내가 머셔 너리 클랜을 구하러 전장에 돌아왔듯이 한소영도 똑같다. 클랜 로드가 동료를 구하겠다는데 과연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한소영은 전장을 돌아다니며 적잖은 아군을 결집하는 데 성공한 듯싶다. 아마 그 무리로 워프 게이트로 넘어가 서대륙 포위망의 후미를 기습해주지 않았다면, 형도 붙잡혔을지 누가 알겠는가. 결과적으로 한소영 덕분에 형과 머셔너리 클랜이 가까스로 도망 칠 수 있었으니, 나로서는 차마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 “미안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소영은 사과했다. 왜 사과하는지 모르겠다. 정작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은 나인데. “자책하지 마세요. 분명히 빠겨나갈 수 있었지만 그건 머셔너리 로드가 만들어준 기회였죠. 그리고 선택은 제가 했어요. 저는 그 때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아요.” 한소영의 음성은 나를 위로하는 것처럼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그 목소리에 힘입어 나는 겨우 말을 이었다. “제가 정신을 잃은 지…. 며칠이나 됐습니까?” “나흘이요.” 한소영은 간단하게 말했다. 몹시 단조로운 대답에 나는 놀랄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생각보다 길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였다. 짧다. 짧아도 너무 짧다. 예전에는 깨어나기까지 못해도 일 주일은 걸렸는데 고작 나홀만에 깨어났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결국에는 내가 쓰러진 직후 무언가가 있었다는 소리다. 전혀 좋은 쪽으로 생각되지 않는 심상찮은 일이. 이뿐만이 아니다. 아무리 구속돼 있다지만 아까부터 자꾸만 무언가가 어색하다. 기 실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느꼈던 기이한 감각. 꼭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젠장. 어지럽잖아. 일단 확실한 것부터 정리해보자. 전쟁은 끝났고 나홀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악마에게 포로로 붙잡혔으며 형과 동료들은 무사히 빠져나간 것 같다. 좋아. 여기까지는 알겠고. 그럼 여기서 가장중요한 의문이 남는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네.” “혹시 제가 어떻게 살아났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러자 아까와는 다르게 조용히 침묵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조용히 기다려도 입을 열 기미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말인즉 둘 중 하나. 모르거 나.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게 있거 나. “조금이라도 좋습니다. 저는 어떻게 살아난 겁니까?” 다시 한 번 묻자, 작게 한숨짓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눈앞에서 보기는 했지만…. 어떻게 설명을….” 마지못해 말한다는 어조가 물씬 풍겼으나 나는 계속 귀를 기울였 다. “어쨌든 제가 본 것만 말씀드리자면….” 광! 그때 였다. 돌연 둔탁한 소음과 함께 다수의 발걸음 소리가 공간을 흔들었 다. 소리가 나는 방향을 돌아본 순간, 그제야 내가 있는 공간을 확 인할 수 있었다. 아까 봤던 은은한 빛무리는 화로 그릇에 담긴 푸른 화롯불이었 다. 멀리서 넓적한 잔이 놓인 제단도 보였다. 단지 두 개만 확인했음에도 속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어던가 소환의 방 비슷한 분위기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게 아니 라 제로 코드를 획득한 장소이지 않은가. 즉 약속의 신전 심층부에 갇혔다는 소리다. 어슴푸레한 그림자 서너 개가 지그재그로 배치된 화로를 빠르게 가로질러 다가왔다. 혹시 한소영에게 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들 었으나, 다행히 그림자는 모두 내 쪽으로 가까워졌다. 이윽고 가장 선두에 있던 형체가 성뭄 걸어 나오자, 어둠이 살며 시 걷히며 푸른빛이 드리운 금색의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아름답 다기보다는 심하게 탈색돼 빛을 잃은 금발에 가까웠다. (정말로 정신을 차렸군. 그녀 말대로야.) 들리는 말은 근엄한 체하는 소프라노 톤의 목소리였다. 번역 마법을 통해 말해서인지 귓전이 왕왕 울렸다. 그나저나 정말로라는 말을 들었다. 그녀 말대로라고도 했다. 가만히 들어보니 누군가 내가 깼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뉘앙스 같은데. "!" 그때 갑작스레 목에서 바람을 동반한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거대한 대검 같은 것이 어느새 내 목덜미를 살짝찌르고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푹 들어가버릴 것처럼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다. (네게 용무를 가진 이가 많으니 긴말은 않겠다. 그러니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하라. 북 대륙 사용자 김수현.) 악마 같아 보이지 않는데 나를 알고 있다. 홀끗 눈을 들자 비로소 상대의 얼굴이 차춤차춤 눈에 보였다. 소녀 같으면서 단정한 이 목구비와 시꺼멓게 죽어 마주치기 거북한 눈동자. 이렇게 보니 엘도라와 상당히 비슷하나, 다른 사용자인 것 같다. 왜냐면 내가 기억하는 엘도라와 분위기가 매우 다르기…? 잠시만. 이 칼, 엑스칼리버잖아. 그럼 이 소녀가 엘도라라고? (엑스칼리버에 무슨 짓을 했지?) 좀 더 자세히 관찰하고 싶었지만, 순간 칼등으로 턱이 확 젖혀지 는 바람에 숨이 턱 막혔다. “뭐….라고?” 간신히 반문하자 엘도라는 다시 칼을 살그머니 내렸다. (네가 내게서 엑스칼리버를 빼앗은 후 무슨 짓을 했는지 묻는 거다.) 숨통이 트이기는 했으나 엘도라는 여전히 나를 씹어먹을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목에 닿은 칼날은 털이 곤두설 정도의 예리한 살기를 유감없이 뿜어내는 중이다. 게다가 왜인지 전신에서 타나토스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말하라.) 엘도라는 같은 말을 거듭 반복하며 칼자루를 힘주어 고쳐 잡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왜 내가 더 이상 주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거지?) 응? (아직 내가 주인일진대…. 엑스칼리버는 어째서 나를 거부하는 거냐는 말이다!) …이거는 또 무슨 소리야? 김유현과 머셔너리 클랜은 약 나홀 후 집결지에 도착했고, 마침 내 아군과 재회할 수 있었다. 거기서 김유현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아틀란타로 돌아가는 것이 었다. 살아 돌아온 근원에게 부탁해 워프 게이트를 활성화하고 곧장 포탈로 넘어가 버렸다. 약간 책임감 없는 행동이었지만, 고연주는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왜냐면 김유현이 단순히 쉬고 싶어서 저러는 게 아님을 알고 있었으니까. 목걸이를 증거로 김수현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자, 다 죽어가던 김유현은 조금이나마 생기를 되찾았다. 그 이후 서로 자세한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지만, 적어도 모종의 생각이 있는건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한 고연주는 김유현은 잠시 놔두기로 하고, 자기가 할 일을 착실히 수행했다. 우선은 집결지에 약간의 병력을 배치 해 살아남은 아군을 지속해서 불러모으게 하고, 동시에 사라진 안솔의 행방을 찾았다. 결과적으로 안솔은 살아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제갈해솔 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그 당시 안솔을 감싸고 빠져나간 제갈 해솔은 안솔의 상태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거두절미하고 말해서, 어깨부터 발끝까지 어 디 한 군데 성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머리나 급소를 피한 게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급하게 응급 치료를 했으나 사제도 없는 상황에서 당연히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제갈 해솔이 믿을 건 안솔이 버텨주기를 바라는 것과 워프 능력뿐이었다. 그렇게 대기 시간이 돌아오는 대로 워프 능력을 발동해 철혈의 숲으로 이동, 보급 요새에 있는 워프 게이트로 아틀란타로 넘어 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아마 게헨나가 워프 능력을 개선해주지 않았다면 못해도 며칠은 더 걸렸을 터. 그 며칠 사이에 안솔이 어떻게 됐을지는 누구도 장담 못 할 일이었다. 어쨌든, 안솔은 살았다. 비록 이제껏 내내 사경을 헤매며 혼수상태에 빠져 있으나, 일단 목숨이 붙어 있다는 사실에 고연주는 가슴을 쓸어 내릴 수 있었다. 한편, 그 무렵. 아틀란타에 도착한 김유현은 포탈에서 나오자마자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꿈에 그리던 아늑한 도시로 돌아왔지 만, 한편으로는 한때 분주하던 거리가휑하니 비었으니 어색할 법도 한데,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오로지 달리기만 했다. 그렇게 달리고 달리는 걸음이 비로소 엄춘 장소는 다름 아닌 흰 대리석으로 세워진 웅장한 신전이었다. 김유현은 한 달음에 계단을 올라가, 신관의 안내도 뿌리치고 소환의 방으로 가는 포탈로 뛰어들었다. 한 손에 제로 코드를 꼭 죈 채로. ======작품 후기====== 어…. 정말 그러네요? 제가 알기로 NTR은 배우자나 애인이 타인에게 성적으로 가로채 이는 걸로 알고 있는데. 여기서 만약 김수현이 한소영의 눈앞에서 누군가와 불가항력으 로 성관계를 맺게 된다면(예를 들어 에르윈, 엘도라, 올리비아, 타나토스 등등.), 그건 한소영의 관점에서 NTR을 당한다고 볼 수 있겠네요. 물론 공식적으로 애인은 아니지만 현재 관계는 그에 준할 정도니까요. 음. 이렇게 생각하니 독자 분들께 궁금한 게 하나 생겼어요. 만약 위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면, 혹시 그 장면도 보기 불쾌하실 까요? [KHAN14] < -- If You Change, One. -- > 엘도라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아니. 깨어나자마자 찾아와 하는 말이 칼을 어쨌냐니. 당최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건지. …라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공공이 따져보니 가슴이 뜨끔해졌다. 엄밀히 말하면 엑스칼리버 로 엄한 짓을 안 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 봤자 말로 압박하고, 손놀림으로 희롱하고, 혀로 날름날름 할고, 때로는 이쑤시개로 활용하는 정도…? (왜 말을 안 하는 거지?) “어, 어? 모, 모르겠는데.” 결국에는 발뺌하고 말았다. 이 상황에서 곧이곧대로 말하기는 종 그렇잖은가. 또 한소영도 옆에 있는데. 엘도라는 여전히 노려보는 눈매로 나를 의심스럽다는 듯이 쳐다봤다. (모르겠다고?) “그래. 애초 엑스칼리버는 나를 주인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고. 그런데 내가 뭘 알겠어?” 일단 적당히 넘겨야겠다는 생각에 되는 대로 말을 꺼냈다. 그러나 그 순간, 뜻밖에도 엘도라의 표정이 살짝 누그러 졌다. (너…. 주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갑자기 왜 저러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조심스레 머리를 끄덕거렸 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엘도라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단지 한 동안 나와 엑스칼리버를 번갈아 보다가, 입꼬리를 비웃듯이 올리 며 천천히 칼을 거뒀다. (하기야…. 엑스칼리버가 네놈 따위를 주인으로 인정할 리가 없지. 이해했다.) 심지어 목소리에는 묘한 기쁨마저 서려 있었다. 그러더니 다시 나를 쏘아보며 말을 잇는다. (그렇다면 나한테 문제가 있다는 건가…. 좋다.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다.) 엘도라는 지금 당장에라도 죽이고 싶지만, 간신히 참는다는 듯이 말한 후 몸을 돌렸다. 성큼성큼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나는 명하니 응시했다. 무어라 해야 할까. 돌연히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방금 엘도라의 모습에서 옛날 열등감에 찌들었던 공찬호가 겹쳤다면 착각이려나. “하~ 아.” 그때 앞에서 푹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한명만 들 어온 게 아니었지. 이윽고 정면을 돌아보는 순간 눈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이해해. 괜찮은 척해도, 지금 재 꽤 혼란스러울 거야.” 쭈그려 앉은 채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이는 다름 아닌 타나토스였다.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싱긋 웃으며 느긋하게 몸을 일으 켰다. “그래도 생각보다 일찍 깨어났네? 뭐 다 내 덕분이기는 하지만.” “뭐?” “후후. 감사의 인사는 언제쯤 들을 수 있으려나?”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네게 감사해야 할 기억은 없는데.” 스스로 들어도 차가운 음성이었다. 하지만 타나토스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까르르 간드러지게 웃더니 검지로 내 가슴의 중앙을 콕 찔렀다. 그리고 천천히 빙그르르 돌리며 말을 잇는다. “야. 이러기야?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거니?” “봐봐. 부서져 가는 육체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사그라져가는 영혼을 되살리고. 무로 돌아가려는 네 존재의 뿌리를 붙잡고. 이게 가능한 게 누구일 거라고 생각해?” “뭐…. 윽!” 그때 갑작스레 명치가 쿡 쑤셔지는 바람에 약한 신음을 터뜨렸다. 나도 모르게 아래를 내려다보는 찰나, 순간적으로 눈을 의심 하고 말았다. 검지가 찌르고 들어간 부분을 중심으로 가슴 전체에 시커먼 기운 이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리고 있다. 이내 손가락이 살그머니 떨어 지자 칠흑빛을 번들거리는 작은 반달 문양이 눈에 밟혔다. “응? 누굴까〜?” 속살거리는 음성이 흐르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계속 듣고 있으 려니 나를 소생시킨 장본인이 자기라고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 하기야 예전에 염화를 발동했을 때도 두 번 모두 게헨나에게 목 숨을 구원받기는 했다. 그 게헨나와 동급으로 취급되는 타나토스 라면 확실히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 하지만 그래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는다. “어떻게…? 너는 힘의 절반을 잃었을 텐데?” “어머? 그 말은 나 무시하는 거니? 자존심 상하게. 이래 봬도 죽 음을 관장하는 신인데.” 뾰로통하게 말한 타나토스는 한두 걸음 물러나며 양손을 허리에 짚었다. 이어서 두 눈을 살며시 치뜬다. 갑자기 정색하니 느닷없이 오싹한 한기가 스쳤다. 그러고 보니 예전과 무언가 달라진 것 같기도…. “뭐 사실 틀린 말은 아니지. 아니. 맞아. 그때 조각났던 상태로는 네 소생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어.” 홀로 고개를 끄덕거리는 타나토스의 입가에 오묘한 미소가 걸렸 다. “그럼 여기서 문제. 나는 어떻게 너를 살릴 수 있었을까?” “…물라.” “아. 너무 뜬금없는 질문이었나? 그럼 다시. 방금 말했지만, 그 당 시 나로서는 너를 회생시킬만한 힘이 없었어. 그러니 너를 살리 려면 조각나기 이전, 즉 최소한 온전했을 때 정도로 힘을 되찾을 필요가 있었지. 여기까지 이해가 가?” “그래서.” “좋아 좋아. 건방지지만 이해했다는 걸로 알아들을게. 그렇다면 ~. 내가 힘을 되찾는 데는 어떤 방법이 있었을까?” “그거야 네 내부에 있는 봉인 진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화정에게 들은 대로 입을 열었다. 그때였다. 문득 동 대륙 전투 때의 상황이 뇌리를 스치는 찰나, “동급의 힘으로…. 파괴….” 호흡이 뚝 멎었다. 동시에 온몸이 얼어붙는 감각마저 느껴졌다. 있다. 타나토스의 힘을 회복하는 방법이. 설마…. “헤~. 보아하니 아직 못들었나 보네?” 놀리듯이 말한 타나토스는 쪽 기지개를 켜며 다시 생글생글한 얼 굴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내가 말해주지.” 그리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 Reminiscence > 타나토스는 김수현의 심장에 손을 댄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현재 김수현의 안에서는 총 두 개의 기운이 동시에 사그라지는 중이었다. 씰물처럼 흘러나가는 하나는 김수현의 생명 그 자체. 그리고 다 른 하나는 염화로 증폭된 화정 본연의 기운. 홑어지는 속도는 비슷하지만, 기운의 강도나 늘어난 양의 워낙 심후해 아직 체내에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통제가 아니라…. 심장에 품었잖아? 그럼 힘을 빌리는 형태인 가?” 다음 순간, 타나토스는 두 손을 뻗어 쓰러져 있는 김수현을 일으 켰다. “야. 듣고 있지? 화정?” 그 순간이었다. 타나토스가 말을 걸자마자 감겨 있던 김수현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그와 동시에 맑은 진홍색으로 채색된 안광이 상대를 가만 히 응시한다. 단지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김수현이 평소 짓는 야수 같은 눈이 아니라, 알 듯 말 듯하게 날카로우면서도 고아한 눈빛이었다. 흡사 여인이 조용히 조소하는 것처럼. 죽은 줄로만 알았던 김수현이 눈을 떴다. 주변에 있던 이들이 깜짝 놀라 주춤주춤 물러나는 가운데, 오직 타나토스만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역시 예상이 맞았어. 너는 자의로 힘을 빌려주고 있었던 거야. 이 야~. 그 콧대 높은 영원히 타오르는 화정께서 웬일이래?” “아니. 네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느냐고. 천사들 때문인가? 아니면 설마 얘한테 반하기라도 한 거야?” “아니지? 그냥 나처럼 재밌어서 그러는 거지? 응?” 타나토스가 연신 말을 걸었으나 김수현은 묵묵부답이었다. 오직 차갑게 노려보기만 할 뿐. 그러자 타나토스의 미소도 약간 시들 해졌다. “뭐…. 하기야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네가유희를 하든 뭘 하든” 빈정거리듯 말한 순간 불현듯 타나토스의 몸이 희미해지기 시작 그렇게 순식간에 반투명해졌으나 저번처럼 붉은 진은 나오지 않는다. 타나토스 봉인의 중추를 담당하는 진. 천신사법(天神四法)의 구역. 해계 금진(解界 禁陣). 저번에 형상화에 성공했던 건 어디까지나 내부에 사탄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지, 기실 타나토스는 이 진의 털끝조차 건드릴 수 없다. 원래대로라면 김수현이 일격을 내리칠 때를 노려, 찰나의 순간 진을 드러내 파괴하게 하려는 계획이었지만, 안솔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다. 눈앞의 실체는 이 진을 파괴할 수 있는 지식도 힘도 층분한 지고지순한 존재니까. 타나토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든지, 혹은 네 기운이 먼저 홑어지든지 •••. 시간 없으니까 빨리 결정하자고.” 그리고 얼굴을 가까이하며 조용히 속닥거 렸다. “살릴 거야, 말 거야?” “…그래서 화정이 내 봉인 진을 파괴하는 데 성공. 층분한 힘을 되 찾은 나는 네게 생명력을 부여. 이렇게 거래가 성립됐다는 말씀이지.” 타나토스는 으쓱거리듯 말하며 설명을 마쳤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대꾸할 생각조차 못 했다.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해야할까. 흡사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기분이었다. 타나토스의 말인즉 화정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였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염화 발동 직후였으니 화력도 층분했다고.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여기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다. 여태껏 화정이 전투 중 알아서 나를 보조하거나, 발끈할 때마다 스스로 불꽃을 터뜨리는 걸 몇 번이고 보고 겪지 않았는가. 즉 화정은 마음만 먹으면 내게 힘을 빌려주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이것은 내가 화정을 완벽히 통제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심장에 거주 공간을 마련하고 힘을 빌리는 형태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한데 이렇게 일이 터질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불현듯 속에서 열불이 급격하게 치밀어 올랐다. 미쳤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있는 대로 욕이라도 퍼부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아무리 나를 살릴 방법이 없었다지만 타나토스의 봉인을 해제하면 어쩌자는 말인가. 물론 화정이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서운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 회차를 시작한 이래 처 음으로 화정을 얻은 걸 후회했다. 아니. 화정의 선택을 후회했다. “흐흐. 그 표정 좋네. 신선하잖아. 그렇게 분해?” “너….” “에이~. 너무 노려보지 마. 어쨌든 네 생명의 은인이잖아?” “큭…” 이를 갈며 힘을 줘 노려보자 타나토스는 깔깔 웃으며 물러 났다. “그럼 이야기도 층분히 했으니 이만 가볼게. 워낙 너랑 만나고 싶 은 애들이 많으니 이쯤에서 물러 나야지.” “자, 잠깐.” “여하튼 일만 잘 풀리면 너도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니 까. 그때까지 죽은 듯이 지내라고.” “기다려!” 마지막 말이 신경 쓰이기는 했으나 나는 황급히 타나토스를 붙잡 았다. 사실 내가 어떻게 살아났는지보다는, 어떤 목적으로 나를 살렸는지가 더 궁금했다. “너는 왜 나를 살린 거지? 어째서?” “응?” 다행스럽게도 타나토스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 천연덕스레 어깨를 들먹였다. “글쎄…. 부탁받았으니까? 개가 너를 반드시 살려야 한다고 해서 살렸을 뿐이야.” “개? 부탁?” “굳이 말하라면 나는 너를 별로 살리고 싶지 않은 쪽이었어. 왜냐면 무서우니까.” “…뭐라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물론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강해진 건 맞지만…. 이렇게 봉인이 해제됐다고 해서 무적이 된 건 아니거든?” “그건 또 무슨 말이지?” 계속 질문이 이어지자, 조금 갑갑했던 걸까. 타나토스는 쯧쯧 혀 차는 소리를 내더니 한쪽 팔을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아니. 생각 종 해봐. 원래 이 세상에 강림하는 즉시 힘의 대부분이 제한되지만, 그건 어찔 수 없는 법칙이니 차치하고. 먼저 저번 전투 때 나눴던 여섯 조각 중 세 개가 너희한테 소멸당했으니 빼도 박도 못하게 절반 깎였고.” “남은 세 개 중 하나는 엘도라한테 박았으니 여기서 하나 빠지고. 거기다 너한테도 하나 박았으니까 또 하나 빠지고. 결국, 현재 나 한테 남은 조각은 하나.” “결과적으로 홀 플레인에 작용하는 법칙 속에서 내가 낼 수 있는 힘은 원래 그릇의 육분의 일.” “하지만 이조차도 아직은 그릇에 불과해. 즉 제물이든 양분이든, 물을 채우지 않으면 그릇이 넓어져 봤자 소용없다는 거지.” 긴말을 마친 타나토스는 돌연 킥 웃음을 터뜨렸다. “자. 이제 왜 이걸 너한테 얘기해주는지 답변해주면 되니?” “간단해. 화정도 나랑 똑같이 생각했을 테니까. 설령 내가 옛날처럼 깽판을 친다고 해도, 네가 또 한 번 그 능력을 발동하면 나 정 도는 가볍게 잡을 수 있다. 아마 이렇게 계산하고 봉인을 풀어준 거겠지. 하여간 앙큼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셔~.” 끝에 가서 은근한 어조로 비아냥거린 타나토스는, “아무튼,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 이내 입구 쪽으로 몸을 돌리며 귀찮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었다. “그 이상은 네 스스로 생각해보렴. 뭐, 어차피 곧 알게 되겠지만.” 그리고 뜻 모를 말을 남긴 채 입구 너머로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츄츄츄츄츄츄추 ======작품 후기====== 네. 제가 구상했던 대로 소신껏 적도록 하겠습니다. 단 독자분들의 의견을 고려해, 해당 내용의 무게를 조절하는데는 반영할 수 있을 듯합니다.:) [KHAN14] < -- If You Change, One. -- > 그 무렵, 소환의 방에서는…. “그, 그게 무슨 말이지 ?” 김유현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거렸다. 강한 불신의 빛으로 정면의 제단을 쏘아보자, 시선을 받은 상대가 지그시 눈을 감는 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듯 낯부끄러운 빛을 잔뜩 드러 내면서. “그게 무슨 말이 냐고!” 김유현으로서는 드물게도 고함을 질렀다. 거의 절규처럼 들리는 괴성이었다. “어려운 부탁도 아니잖아! 고작 사람 하나 옮겨달라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한 번 시작된 고성은 둑 터진 강물처럼 엄출 줄을 몰랐다. “뭐라고? 소원으로도 안 된다? 제로 코드로도 안 된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제단으로 내밀었던 오른팔이 눈이 보일 정도 로 떨리기 시작한다. 꽉 말아 준! 손아귀에는 푸른 잔상을 홀리는 구슬 하나가 바스러질 듯이 잡혀 있었다. “하! 그래. 어차피 제로 코드도 얻었겠다. 이제 수현이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건가?” 거기까지 말한 김유현은 거칠게 숨을 들이켜며 제단의 천사를 죽 일 듯이 노려봤다. 사내의 눈초리를 더는 견디기 힘들었는지, 아니면 그 말만은 그 냥 넘길 수 없었는지. 살며시 눈을 뜬 세라프가 슬픔 가득한 눈으로 상대와 마주한다. 그리고 고요히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사용자 김수현을 이곳으로 이동시켜달 라는 소원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로 코드로… !” “제로 코드로는 사용자 김유현의 요청을 이행할 수 있습니다. 불 가능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현재로써는 힘들다는 말이 었습니다.” 힘들기는 니미 씨발!” 그 순간, 퍽 소리와 함께 세라프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앵무 새처럼 반복되는 말에 김유현이 손에 쥐고 있던 제로 코드를 힘 껏 던진 것이다. 게다가 어지간하면 하지 않던 험악한 욕설까지 섞었다. 이는 김유현이 극도로 분노했다는 방증이었다. 평소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행동이었지만 세라프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조심스레 제로 코드를 도로 굴려 보낸 후 처 연한 낯으로 다시 상대를 응시한다. 도를 넘는 행동을 했음에도 사내의 기세는 살벌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세라프는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김유현의 요청을 십 분 이해하고 있었다. 단순히 혈육 관계라는 점을 떠나서, 하나의 희망만 보고 죽으라 달려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벽에 부딪혔으니 얼마나 절망스럽겠는가. 단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뿐 알아듣지 못한 건 아닐 터. 기실 이 문제는 세라프가 김수현한테도 항상 주의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던 부분이 었다. ‘제로 코드는 사용자가 바라는 모든 걸 이루어주는 만능의 결정 체.’ ‘그러나 화정 님이나 타나토스 님 정도의 신은 마음만 먹는다면 제로 코드의 명령에도 일부나마 저항할 수 있습니다.’ ‘설령 명령이 이행된다고 해도,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 이르는 시간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타나토스 님을 끌어들인 것만으로도 악마는 무수한 변수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은 이 점을 항상 주의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말인즉 제로 코드의 명령은 인간과 신을 가리지 않고 모두 범주 에 포함할 수는 있지만, 결코 동일 선상으로 놓을 수는 없다는 소 리였다. 특히 화정이나 타나토스 정도 되는 격 높은 신이라면 더 더욱. 제로 코드로 김수현을 데려오는 건 가능하다. 그러나 문제는 악마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실제로 김수현은 이미 타나토스의 조각 하나를 강제로 받아들인 상태였다. 즉 시간을 돌리든 김수현을 데려오든, 제로 코드의 명령이 실행될 기미라도 보이면 타나토스는 즉시 알아차릴 테고, 그렇게 되면 김수현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세라프가 제로 코드의 사용을 반대하는 것이다. 설령 저항을 뚫는 데 일 분도 걸리지 않는다손 쳐도, 그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대체 뭐가 만능의 힘이라는 건데…. 그까짓 것도 하나 못 해주면서….” 그때, 홀연 다리가 풀렸는지 김유현이 털썩 무릎 끓는다. “차라리…. 좀 더 일찍 도착했다면….” 자책하는 목소리가 이어졌으나, 사실 일찍 도착했어도 결과는 똑같았을 것이다. 아니. 설혹 악마가 모종의 목적이 있었다 해도, 어쨌든 김수현을 살리지 않았다면 결과적으로 소생조차 불가능했을 터. 살아있는 이상, 기회는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세라프였으나 함부로 입을 열지는 않았다. 왜냐면 그것이 불 난 집에 기름을 붓는 꼴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결국에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사내 를 보며 조용히 고개 숙일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홀렸을까. 계속 어두운 공간에만 갇혀 있다 보니, 그리고 사지가 꽁꽁 묶여 있으니 시간 개념조차 희미해질 지경이다. 가끔 누군가가 왔다가 갔다가 하는 것 같지만, 그뿐이다. 우리는 외부와 철저하게 격리돼 있었다.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결국 생각밖에 없었다. 타나토스가 떠난 후,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계속 생각을 정리하고 또 정리했다. 한소영도 그런 내 상태를 읽었는지 무리하게 말을 걸려고 하지 않았다. 일단 들었던 말 중에서 유독 신경 쓰였던 두 마디. 하나는 악마의 부탁으로 나를 살렸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일만 잘 풀리면 무사히 보내주겠다는 것. 처음에는 왜 나를 살렸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 두 말을 연결해서 생각해보니 불현듯 짚이는 바가 있었다. 어렵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타나토스의 말은 악마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뉘앙스였다. 또 한, 놈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제로 코드의 획득에 초점이 맞춰 져 있으며, 악마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귀찮은 방해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말인즉 애초 해답은 하나였다. 사탄은 나를 인질로 삼기 위해 살렸다. 내 생존과 무사 귀환을 조건으로, 제로 코드를 가지고 있는 형과 협상하려고 할 것이다. 결국에는 일종의 교환이라고 해야 하나. 게다가 한소영에게 들어보니 포로로 잡힌 건 우리 둘뿐만이 아닌 듯하다. 만에 하나 다른 포로 중에서 나와 형의 관계를 누설해버 리면, 사탄은 분명히 해볼 만하다고 여길 가능성이 높다. 실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일련의 추측을 마치자, 구해줬으면 하는 마음과 그냥 오지 않았으면 하는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내가 형의 처지였다면 아마 절대로 응하지 않았겠지. 아무리 놈들이 달콤한 말로 유혹한다고 해도 본질이라는 게 있다. 악마를 믿고 놈들과 손을 잡는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 다. 같이 힘을 합쳐 천사를 쓸어버리자는 말을 괜히 단칼에 거절 한게 아니었다. 어쨌든 저쨌든 결정권은 내가 아니라 형한테 있다. 형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글쎄. 솔직히 어떻게 나올지는 나조차도 예측하기 힘들다. 부디 누군가가 적절한 브레이크 역할을 해주면 좋으련만…. 모르겠다. 그냥 모든 것이 영망이 된 느낌이다. “후우우우….” 가슴이 갑갑해서인지 저절로 긴 한숨이 새나왔다. ‘화정.’ 혹시나싶어 말을 걸어봤지만, 역시나. 정신을 차린 이후, 화정은 여태껏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셀 수도 없이 불렀으나 회답은 단 한 번도 들려오지 않았다. 혹시 화정이 사라진 게 아닐까 걱정도 들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심장에 여전히 따뜻하면서 묵직한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니 까. 어써면 봉인 진을 해제하면서 커다란 층격을 받았거나, 힘을 회 복한 타나토스가 수작을 부렸는지도 모르겠다. 뭐 이도 저도 아 니라면, 저번에 내 생각을 읽고 화가 났을 수도 있겠고. 설마 정말로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아무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그때 였다. 한창 상념에 장겨 있는 와중, 불현듯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방법…. 방법이….” 김유현은 의자에 몸을 묻은 채 연신 혼잣말을 되됐다. 왼손은 제 로 코드를 꽉 쥐고, 오른손은 덜덜 떨면서도 책상을 자꾸만 두드리는 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최후의 보루였던, 아니.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 했던 ‘제로 코드의 명령으로 사용자 김수현을 아틀란타로 소환한 다.’ 는 방법이 무산된 이상, 사실상 김수현을 무사히 데려오는 일은 물거품이 돼버렸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 다시 전쟁을 치러서라도 직접 되찾아오는 수밖에는 없다. 물론 말로는 쉽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실현하는가인데, 여러모로 생각해도 딱히 뾰족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다. 김유현은 현 재 아군이 얼마나 살아남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젠장….” 수십 개의 가정이 생각나기가 무섭게 수면으로 가라앉는다. 악마도 문제고 타나토스도 문제다. 특히 사탄은 욕 나올 정도로 집요하고 끈질졌다. 어지간하면 그냥 포기할 법도 한데, 어떤 상 황에서도 솟아날 구명을 찾는 능력이 탁월하다. 이쯤 되면 일 회 차 때 악마를 상대로 승리한 사용자들에게 존경심마저 들 지경이 었다. “후우…. 후우….” 일 초도 쉬지 않고 머리를 맹렬하게 회전시키면서도 김유현은 본능에 따라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가슴이 뼝 터질 만치로 갑갑했으니까. 그때. “…응?” 돌연히 푸른 빛무리가 김유현의 얼굴을 간헐적으로 비췄다. 책상 한쪽에 놓아둔 통신 구슬이 빛을 깜빡거리는 중이었다. 명하니 응시하던 김유현은 아차 하며 서둘러 마력을 홀려 넣었다. 그러 자 구슬이 작은 영상을 비추며 누군가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 여왕?” (네. 아주버님.) 곧바로 알아본 김유현이 입을 열자, 고연주도 살짝 고개를 끄덕 거렸다. 한데 왜인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라, 김유현은 무언가 사건이 터졌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죄송하지만…. 처리해주실 일이 하나생겼어요.) “아니, 아닙니다. 죄송하기는요.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어디입니까?” 안 그래도 뒷일은 나 몰라라 하고 맡겨둔 터라, 김유현은 미안한 마음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아니요.) 고연주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굳이 오실 필요는 없어요. 방금 그쪽으로 보냈으니까요.) “예? 보냈다고요?” 로브를 걸치던 김유현이 엄깃하며 반문하자, 고연주가 돌연 살그 머니 눈썹을 치켰다. (악마 쪽에서 전령이 찾아왔어요.) 그러자. “…전령?” 김유현의 두 눈도 와짝 이지러졌다. 한편, 같은 시각. 머셔너리 캐슬에서는 임한나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계단으로 오르는 중이었다. 마침내 꿈에 그리던 성으로 돌아왔건만, 안색은 전혀 밝지 못하다. 하기야 현 상황에서 누가 방긋방긋 웃고 다니 겠느냐마는…. 이옥고 복도로 들어간 임한나는 조용히 방문을 열고 들어가 안을 살펐다. 조심조심 걸어서 침대 옆에 배치된 의자에 앉자, 시트에 죽은 듯 누워 있는 안솔이 눈에 밟혔다. 두 눈은 꼭 감겨 있지만, 무언가 힘에 겨운지 씩씩 숨을 내쉬고 이마에 땀도 송골송골 맺 혀 있다. 물론 지금이야 치료도 마쳤고 외관상 문제도 없다. 하지만 그래서 더 걱정이었다. 있는 때로 치료 주문을 쏟아 부었고, 엘릭서도 무려 두 병이나 사 용했다. 이쯤 되면 조금이나마 반응이 있을 법도 한데, 안솔은 여 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까. 거기다 방금 신재룡과 교 대하면서 처음과 별 차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온 터였다. ‘어쩌면 뇌나 영혼에 타격을 받은 걸지도….’ “내, 내가 무슨 생각을?” 임한나는 화들짝 놀라더니 스스로 관자놀이를 탁탁 때리며 고개 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깨끗한 천을 집어 땀 맺힌 이마를 닦아주 기 시작한다. “후유…. 솔아. 언니가 미안해? 혼자서 이상한 생각을 해버렸네 •••.주책 맞게시리.” 듣고 있을 리가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면서도, 임한나는 처연 히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래도 우리 솔이…. 얼른 털고 일어날 거지? 그렇지? 응?” 그리고 걱정과 애정이 뒤섞인 얼굴로 살며시 얼굴을 가까이한다. 그 순간이었다. 번쩍! 엄마야아!” 찰나의 순간, 임한나는 양팔을 활짝 벌리며 비명과 함께 엉덩방 아를 찧었다. “에,에?” 기함한 와중에도, 황망한 두 눈은 명하니 침대를 올려다봤다. 종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감겨 있던 두 눈이, 느닷없이 무섭게 부 릅떠졌다. 이마에 입이라도 맞출 생각에 얼굴을 가까이했는데, 바로 코앞에서 안솔의 눈이 갑작스럽게 떠진 것이다. 그러니 어 찌 놀라지 않으라.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 잠시 후. “소, 솔아…?” 안솔은 느릿하게, 그러나 은연중 심상찮은 기세를 흘리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 작품 후7| H 비아아아(가아! [KHAN14] < -- If You Change, One. -- > ‘전령이 왔다고?’ 통신을 종료한 김유현의 얼굴은 반쯤 걸쳤던 로브를 도로 벗기까 지 내내 찌푸려져 있었다. 어느 정도 설명을 듣기는 했으나 갑작 스럽다는 감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마 쪽에서 왜 나한테 전령을…. 아!’ 그때였다. 김유현이 일말의 가능성을 생각해낸 찰나, 적막한 공 간이 돌연히 어수선해졌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창문 너머로 갑 자기 시끄러운 소란이 일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무어라 무섭게 소리치거나 물러나라고 고함치는 등,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지르는 소리가 영망으로 뒤섞 여 도저히 종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소란 이 차춤차춤 찾아들며 문밖 복도를 걸어오는 발소리가 이어졌다. 잠시 후, 정중한 노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한 사내가 안으로 들 어와 꾸벅 인사하더니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낯으로 뒤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무려 열댓 명에게 무기가 겨누어진 누군가가 방 안으로 느긋하게 들어온다. “허허….” 이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노인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거리낌 없이 웃더니 길게 늘어트린 흰 수염을 살며시 쓰다듬는 다. 그리고 가벼운 눈인사와 함께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뇌제.” “너는…?” “아니면…. 사용자 김수현의 친형인 김유현이라고 해야 할까요?” 잠깐 요란스럽기는 했지만, 방 안은 곧 다시 조용해졌다. 김유현 이 같이 들어온 사용자 무리를 모두 물리쳤기 때문이다. 처음 들 어왔던 사내가 위험할 수 있다고 한사코 거절했으나, 결국에는 한 걸음 물러나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겠다고 했다. 김유현도 그것까지는 막지 않았다. 그렇게 일련의 사태가 진정된 후에야 김유현과 백발의 노인은 서로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우선 제 소개부터 하지요. 저는 남 대륙에서 과분하게나마 선지자라고 불리는 멜리너스라고 합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하는 노인을 보고 김유현이 받은 첫인상 은 현자라는 느낌이었다. 고고하다기보다는 지혜롭고 사람 좋은 노야 같다고 해야 하나. 단지 어디까지나 겉보기에 그럴 뿐, 속내는 모종의 꿍꿍이를 품은 늙은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물론 실체는, 사탄을 모시는 악마 십사 군주 중 하나인 벨리알이라고 합니다만….” 그 순간 김유현의 두 눈이 대번에 가늘어졌다. 어림짐작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 아무 접점도 없는 남 대륙보다는 차라리 악마가 볼 일이 있어서 찾아왔다는 게 말이 되니까. “배짱 한 번 좋군. 홀몸으로 적진에 뛰어들 생각까지 다하고 말이 지.” 상대의 정체를 알게 된 만큼 당연히 고운 말은 나오지 않았다. “글쎄요. 일단 들어갈 수만 있다면 몸 성히 보내주실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요. 그보다 오히려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멜리너스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받아쳤다. “이야기하려고 찾아갔는데 보자마자 공격당하는 건 사양하고 싶 었거든요. 그래서 경계심을 누그러트릴 수 있는 좋은 수가 없을 까 고민하다가, 경사경사 저희 쪽에서 성의를 보이기로 했습니다.” “성의?” “예. 저희 쪽에서 억류하고 있던 포로 중 일부를 함께 데려왔지요. 그러니까 북 대륙 사용자 말입 니다. 허허.” 약간 호의까지 느껴지는 음성에 김유현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그러 나 머 릿속은 무섭게 회전하는 중이 었다. ‘일부라고 했으니 현재 억류 중인 포로가 적지 않다는 뜻…. 그렇 다면 이미 웬만한 건 파악하고 왔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자신과 동생의 관계에 성실히 답해준 이들을 우선해서 데 리고 온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스쳤지만, 뭐가 됐든 어찔 수 없는 일이었다. 멜리너스는 상대의 안색이 딱히 변한 것 같지 않자 짧은 한숨을 홀렸다. 하지만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뭐…. 좋습니다. 피차 좋은 감정은 없는 것 같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낫겠군요.” “다행이야. 그나마 눈치는 빨라서.” “그럼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죠. 사용자 김수현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의식도 회복했지요.” “그래서.” 김유현 스스로 들어도 놀랍도록 서늘한 음성이었다. 마치 그래서 어쩌라는 듯한 어조라고 할까. 멜리너스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이 반응은 예상치 못했다는 듯 넉넉하던 얼굴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졌다. “음…. 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건 네가 알 거 없고. 그래서? 내 동생이 살아 있으니 제로 코드와 교환하자?” “예?” “그렇게 넘기면 서로 힘을 합쳐 천사라도 쓸어버리자는 건가? 아. 이건 너무나갔나?” 이번에는 멜리너스가 입을 닫을 차례였다. 갑자기 말문이 막힌 듯 한참을 수염만 쓸어내리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말씀은 꿈도 꾸지 말라는 뜻입니까? 아니면 저희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겠다는 말씀이신지요?” “둘 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상대를 비웃듯이 말하기는 했지만 기실 김유현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이왕 내친 김이라 대놓고 배짱을 부렸다고 해 야 하나. 말인즉 협상에 동생을 걸고넘어지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라고 볼 수 있었다. “허허. 그렇군요. 이것 참….” 그러자 곤란하다는 표정도 잠시. 멜리너스가 희미하게 웃는다. “그렇다면 부탁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뭐?” 그렇게 말한 멜리너스는 양손을 깍지 끼며 살그머니 몸을 숙였 다. 무언가 굉장히 중요한 말을 하기라도 할 것처럼. 반사적으로 마력을 모았던 김유현은 상대가 그 이상의 행동은 보 이지 않자 스리슬쩍 손을 내렸다. “제가 뇌제께서 흥미가 동할만한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려도 되겠 습니까?” 별로 듣고 싶지 않은데.” “그런가요? 하지만왜 천사가 홀 플레인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지 궁금하실 텐데요?” "!" 이 말만큼은 김유현도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예전부터 품어왔 던 풀리지 않는 의문 중 가장 큰 것이었기 때문이다. 검작 가는 바 가 없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한 번쯤 들어볼 가치는 있었다. “뇌까려봐.” 마지못해 허락하자 멜리너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그레 웃었 다. “뭐…. 굉장히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딱히 제 한이 있는 것도 아니지요. 오히려 지극히 인간적인 이유라고 할 까요?” “할말만 해.” “그러죠. 무섭기 때문입니다.” “무섭기 때문이라고?” 김유현은 이상하다는 눈으로 멜리너스를 응시했다. 알 듯 말 듯 하기는 하지만 무섭다는 말은 너무 광범위했다. “천사는 너희가 무서워서 나오지 않는다고?” “아주 툴린 말은 아니지만, 초점이 약간 어긋났습니다. 천사는 저희가 두렵다기보다는 이 세상에 강림함으로써 손실될 전력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잠깐. 그게 무슨 말이지? 그러니까 천사는 너희와싸워서 전력이 떨어질 걸 걱정하고 있다는 건가?” “정확합니다. 혹시 천사 진영이 저희 악마와의 전투에서 기록적인 패배를 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는지요?” 김유현은 복잡한 와중에도 가까스로 끄덕거렸다. 예전에 김수현 이 처음 비밀을 털어놨을 때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럼 얘기가 쉬워지겠군요.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면 현재 이 홀 플레인에 개입하고 있는 천사는 천계의 마지막 전력이라고 봐 도 무방합니다.” 마지막 전력?” “그렇습니다. 즉 최후의 보루라고 할까요. 저희야 사실 여기서 깡 그리 소멸해도 전세가 뒤바뀔만한 영향이 있는 건 아닙니다. 뼈 아프기야 하겠지만, 그동안 지속해서 승전을 거듭해왔으니 한 번 쯤 져도 괜참다는 겁니다. 아, 물론 제로 코드는 논외로 치고요.” “그럼….” “하지만 천사는 다릅니다. 아마 천사들이 홀 플레인에 나와 전멸이라도 당한다면, 그날로 천계의 전력은 텅 비어버린다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닙니다. 즉 어느 쪽이든 힘들어지기는 마찬가지라 는 거지요. 그래서 기를 쓰고 제로 코드를 지키려 하면서 어떻게든 나오지 않으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당신들이 이 세상에 소환 된 정확한 배경입니다.” “그럼 잠시 화제를 바꿔서, 제가 중요한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 니까?” “…해봐.” 갑작스러운 질문에 김유현은 간신히 처음 보였던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정보를 알려중으로써 멜리너스가 뭘 의도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뻔해. 어쨌든 결론은 서로 손을 잡고 천사를 몰아내자는 말이겠지.’ 사실 확인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그렇게 생각한 김유현은 혼란을 가라앉히며 귀를 기울였다. “여기서 뇌제가 만약 제로 코드를 양보해주신다면 이후로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요?” “글쎄. 달콤한 말로 유혹해 얻어낸 다음에는 아마 제로 코드를 사 용해 천사와 인간을 쓸어버리지 않을까?” 그때. “푸 ” 김유현이 약간 빈정거리듯 말하자마자 멜리너스가 실소를 터뜨렸다. “아, 죄송합니다. 방금 말씀이 너무 뜬금없어서…. 아니. 솔직히 좀 웃겼습니다. 생각해보시죠. 저희가 그 귀한 걸 왜 한낱 인간한테 사용합니까? 그럼 천계는 어쩌고요?” 황급히 손을 흔들었으나 킥킥거리는 소리는 계속해서 흘렀다. “흥흥. 실수했군요. 부디 양해를. 아무튼, 간단합니다. 천사는 바로 천계로 철수할 것이고 저희 악마도 마찬가지입니다.” “뭐라고?” “거짓말이 아닙니다. 제로 코드는 천계를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 그것이 저희 손에 들어왔는데 과연 가만히 있겠습니까? 어쨌든 자기들의 고향을 버릴 수는 없으니 싫어도 돌아갈 수밖에 없겠지요. 즉 홀 플레인에는 더 이상 외부 세력의 개입이 없어지며 결과 적으로 인간만이 남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제로 코드를 넘겨달라는 말 아닌가?” “결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 나보고 너희를 믿으라는 건가? 이 말만 듣고?” 그때 였다. “하기야 믿지 못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살짝 몸을 기울였던 멜리너스가 돌연 자세를 바로 했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모릅니다. 수천 년, 아니. 어쩌면 수만 년이 걸릴 수도 있겠지요.” 담담히 말하며 깍지 꼈던 손도 풀고 팔을 서서히 아래로 내린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 서로 이렇게 싸울 필요가 없다는 말… 이런 말들은 하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잘 알고 계실 테니까요.” 그리고 탁자에 이마가 닿을 만치 엄숙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러니까, 진심으로 부탁 드리겠습니다. 제로 코드를 저희에게 양보해주십시오.” 설마 악마가 정면으로 굽힐 거라고 생각도 못 하고 있던 김유현 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멜리너스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물론, 불안해하시는 마음은 사탄께서도 층분히 이해하고 계십니 다. 그러니 정 믿지 못하시겠다면 믿게 해드리는 것이 도리겠지요.” “이에, 사탄께서는 총 다섯 가지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더니, “우선 모든 피조물을 무로 돌리겠습니다. 마족은 하나도 남지 않 고 모조리 원래 있었던 곳으로 돌려보내겠습니다.” “그리고 남은 대 악마와 악마 십사 군주 중, 대계에 제로 코드를 전달할 하나만 제외하고 전원 인질이 될 용의가 있습니다.” “아울러 천사가 신경 쓰이신다면 그것 또한 저희가 처리해드리겠 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절 도움은 받지 않을 것이며, 그냥 가만히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동생분을 포함한 포로 전원의 무사 귀환 또한 당연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이래도 믿지 못하시겠다면 직접 조건을 설정해서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너무 무리한 의견만 아니라면, 어지간하면 받아들일 용 의가 있습니다.” 실로 엄청난 소리였다. 김수현 포함 인질 전원의 해방은 물론, 마족을 없애고, 스스로 인질이 되겠으며, 원한다면 천사도 처 리해주겠다. 게다가 이래도 믿지 못하겠다면 직접 조건을 제시하란다. 김유현은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자기 귀를 의심했다. 그 정도로 악마의 조건은 몹시 파격적이 었다. 더 굽히려야 굽힐 것도 없는 만큼 최대한의 성의를 보이고 양보 한셈이다. [KHAN14] < -- If You Change, One. -- > (이번 회는 NTR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성적인 내용 이 직접 나오는 건 아니지만, 이와 관련된 내용에 거부감이 있으신 분께서는 꼭 건너뛰어 주시기 바랍니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그렇잖은가. 이 공간에 있는 사람이래 봤자 겨우 둘인데, 누구의 눈초리인지는 불 보듯 뻔하다. 몰래 옆을 홀기니 아니나 다를까. 한소영이 사슬을 툴어 몸을 꼰 채 나를 물끄러 미 보고 있었다. 계속 홀깃거리고 있으니 홀연 명한 기분이 들었다. 은은한 푸른 빛이 드리우는 어두운 공간 속에서, 성숙한 여인이 사슬에 묶여 주저앉아 있는 모습은, 왜인지 적나라하다 생각될 정도로 야릇하 게 느껴졌다. “머셔너리 로드?” 그때 돌연히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아, 죄송합니다.”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사과하고 말았다. 상황이 이런데 이상한 상상이나 하고 있다니. 한심하다. 아마 한소영도 어이가 없었겠지. “왜 사과하시는 거예요?” “에…. 예?” 어. 혹시 초감각이 발동되지 않은 건가? 어쩌면 나를 보고 있던 게 아니었거나. “저를 보고 야한 상상이라도 하신 건가요?” “…죄송합니다.” 역시 알고 있었구나. 그래, 모를 리가 없지. 부끄러워 죽겠네. 무안한 기분을 이기지 못해 머리를 푹 숙이자, 가볍게 웃는 소리 가홀렀다. 한소영이…. 웃었다? 정신 줄을 놓으신 건가? 아니면 어떤 이유로? 머리를 들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즈음. “머셔너리 로드.” 그녀가 다시 나를 부른다. 좀 전보다 훨씬 가라앉은 음성이라 조심스레 눈을 올렸다. 정신 을 차리고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으나, 눈이 슬슬 어둠에 적응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렴풋하던 주변이 이제 꽤 또렷하게 보이고 있으니. 한소영은 약간 처연해 보이지만 그리 나쁘지 않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혹시…. 예전에 저와 하신 약속 기억하세요?” “약속이요?” “네. 이번 일이 끝나면 모두 말씀해주신다 하셨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다. 아니. 한소영은 내 생각보다 훨씬 전부터 궁금해하고 있었을 것 이다. ‘머셔너리 로드는…. 왜 저한테 잘해주시는 건가요?’ 아마 강철 산맥 때부터. 하기야 한소영 정도의 사용자가 이제껏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 다. 아마 가슴 한 켠에 의구심만 품고 있다가, 법역으로 들어가면 서 확신했으리라. 고연주와의 대화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테고. “그게…. 그러니까 아직 일이 끝났다고 보기는….” “…장난하세요?” 무, 무서워. 갑자기 저러니까 너무 차갑찮아. “아…. 음….” 말할까, 말까. 심히 망설여지는구나. 사실 이제 와서 말해도 별 상관없기는 하다. 그런 것쯤은 알고 있 다. 한데 왜 이렇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나 자신도 잘모르겠다. “꼭 듣고 싶습니까?” “네.반드시 들어야겠어요.” 한소영 치고는 드물게도 단호한 표현이 었다. “제가 내키지 않는다고 해도요? 정녕 억지로라도?” 반 장난으로 어깃장을 놓자 이번에는 바로 입을 열지는 않았다. 하지만 침묵은 길지 않았다. “네.” 한소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냐면…. 이번 기회가 아니면…. 다시 듣지 못할 것 같으니까요.” 띄엄띄엄 이어지는 음성에 돌연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건 차치하고서라도, 별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망설이는 나보다 한소영이 훨씬 절실한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이번이 아니면 다시 듣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이 마음을 움직였다. 이쯤 되면 말해주지 못할 것도 없다. 단지…. “좋습니다. 대신 약속 하나만 해주시죠.” “듣고 나서 절대 화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싫어요.” 한소영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칼에 거절했다. “들어보고 화낼만한 이야기가 있으면 당연히 화낼 거예요. 그러니 그런 약속은 싫어요.” 아주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심보구나. …뭐, 좋다. 화를 내든 욕을 먹든 이제 털어놓을 때가 된 것 같다. 오히려 늦은 감도 없잖아 있으니까. “그럼….” 그렇게 생각한 나는 힘껏 숨을 들이켜며 말문을 열었다. 그때 였다. * 불현듯 커다란 소음이 공간을 울렸다. 막 입을 열던 김수현도 조용히 귀를 기울이던 한소영도 깜짝 놀 라 눈을 돌렸다. “흐응.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고 있어?” 입구 쪽에서 조롱하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약간 낮고 어둡지만 요염한 여인의 음성이었다. 이윽고 긴장한 얼굴로 바라보던 김수현의 두 눈이 한껏 치떠졌다 가, 곧장 찡그려졌다. 전혀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리리스…!” “어머? 목소리만 듣고도 알아차리네? 그 정도로 나한테 관심 있었던 거야?” 까르르 웃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 형상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 다. 그 순간 등 뒤로 커다란 박쥐 날개가 활짝 펼쳐졌고, 버들가지 같은 허리를 지나 발목까지 닿은 검디검은 머리카락이 어지러이 홑날렸다. “왜 온 거지?” “글쎄? 왜 왔을까?” 김수현의 목소리는 듣는 이가 한기를 느낄 정도로 서리가 잔뜩 껴 있었지만, 리리스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성큼성큼 걸 어오더니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살살 눈웃음을 친다. “왜 왔다고 생각해? 호호.” 약간 흐릿한 기마저 감도는 살짝 젖은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휘어 져 상대를 응시한다. 김수현도 증오에 찬 눈으로 마주 바라봤다. 악마라면 누구든지 막론하고 싫어하지만, 그중에서도 리리스는 특별하고 또 특별하다. 거의 극도로 험오하는 수준이라고 할까. 왜냐면 일 회차 때 형의 죽음이나 한소영이 그렇게 된 게, 전부 리리스와 벨페고르가 직접 연관돼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 참. 눈 좀 봐. 내가 그렇게 밉니?” 리리스는 가늘고 긴 검지를 뻗어 사내의 턱을 살그어니 받쳤다. 김수현은 거칠게 몸부림쳐 떨쳐내려 했지만, 외려 리리스의 입가 에 걸린 미소만 진해졌다. 오래간만에 매우 마음에 드는 먹잇감 을 찾았다는 듯이. “꺼져줬으면 좋겠는데. 너한테 볼 일은 없으니까.” “후후. 좋아. 계속 그렇게 뻣뻣하게 있어달라고. 그래야 길들이는 맛이 있지.” “뭐,뭐?” “그리고 입 종 조심하는 게 좋을걸? 지금 네 처지가 어떻다고 생 각하는 거야?” 김수현이 반문하자, 리리스는 즐거워 죽겠다는 듯 흥얼거렸다. “조용히만 있으면 건드리지 않겠다고 들었는데.” “아.사탄이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 리리스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인정했다. “하지만 내가 딱히 명령받을 입장은 아니거든. 또 우리가 할 일은 끝나서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터라….” 그리고 은연중에 말을 흐리더니, “그전까지 약간 괴롭히는 정도는 괜찮잖아?” 문득 손가락을 딱 튕 졌다. 그러자 김수현의 두 발목에 묶여 있던 사슬이 순식간에 느슨해졌 고, 이내 차르르르 소리 내며 단숨에 풀려 나갔다. 부지불식간에 다리가 자유로워지자 김수현은 순간 의아한 기색 을 감추지 못했지만, 앞을 보자마자 왜 사슬을 풀어줬는지 이해 할 수 있었다. 리리스는 어느새 뱀의 혀를 연상케 하는 빨간 설육을 내밀어, 핏 물을 머금은 듯한 관능적인 입술을 살짝 할고 있었다. 게다가 한 손으로는 연한 회색빛이 흐르는 이국적인 살결을 슬꺽슬꺽 쓰다 듬고, 둔부는 사내의 애간장을 태우듯 농염하게 실룩거린다. 밤의 여왕이라는 이명을 증명이라도 하기라도 하듯, 가녀린 체구 에서 뿜어지는 퇴폐적인 색기는 가히 폭발적이라 봐도 부족할 정 도였다. 그러나. 이 정도로 대놓고 유혹하는데 넘어가지 않을 사내가 어디 있겠느 냐마는, 김수현만큼은 예외였다. 흥분된다기보다는, 도리어 구역 질이 치밀어 오를 만큼 역겨움을 느끼는 중이라고 해야 하나. 물론 일 회차 때 리리스를 억지로 범한 적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복수심에서 발로한 행동에 불과했다. 더구나 한소영이 보고 있는 앞에서 강제로 당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꺼져라. 너 따위랑 할 생각은 없으니까.” “후후. 무언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나는 해달라고 애걸하는 게 아 니야. 응?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너한테는 선택권이 없다고 했잖아?” 김수현이 눈앞에서 으르렁거렸으나 리리스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 쳤다. 전장에서 봤을 때는 무서웠지만, 이제는 잡힌 신세에 불과하니까. “너무 그렇게 죽일 것처럼 쳐다보지 마. 그럴수록 완전히 망가트리고 싶어지잖니.” “뭐라고?” “으응? 말 안 했나? 내 취미가 그거거든. 사내든 여성이든, 자기 주제도 모르고 나대는 놈들 잡아다가 굴복시키는 거. 그래야만 직성이 풀려.” “큭!” “아, 정말 참을 수가 없단 말이야. 한낱 인간 주제에 강한 척, 고고한 척! 하지만 결국 분수를 깨닫고, 스스로 무릎 끓으면서 복종할 때, 그때의 쾌감이란! 아아, 상상만 해도 짜릿해!” “미친년!” 벌써 황홀경에 빠져 몸을 부르르 떠는 꼬락서니를 보며 김수현이 악에 받쳐 외 쳤다. 그러 나 리 리스는 그 반항조차 귀 엽 다는 듯, 악 다문 입에 쪽 소리가 날 정도로 입술을 맞췄다. 찰나의 순간, 얼떨 결에 키스를 허용한 김수현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퉤!” 힘차게 뱉어진 침이 리리스의 얼굴에 탁 들러붙는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하…?” 이건 마냥 반항으로 넘기기 어려웠던 걸까. 우뚝 행동을 엄춘 리 리스가 망연히 뺨을 쓸더니 헛웃음을 짓는다. “오, 이런…. 그래…. 끝내 이렇게 나오시겠다?” 나른하던 표정이 삽시간에 표독해졌다. 어지간하면 웃으면서 넘 기겠지만, 이번만큼은 자존심이 크게 상한 것이다. “네가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생각이 있지.” 한참 동안 김수현을 노려보던 리리스의 입가에 돌연 비릿한 미소 가 걸렸다. 그리고 옆에 있는 한소영을 흘끗 쳐다보더니 빈정대 듯 말했다. “나는 다 들었지. 너희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며 ?” 그 순간, 네가월 어찔 거냐는 듯이 쳐다보던 김수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뭐 좋아, 좋다고. 사탄의 말도 있으니 너는 놔둘게. 그런데 이거 알아? 너는 웬만하면 건들지 말라고 했지만, 재는 아니거든?” 이어지는 말을 듣자마자 이가 바스러지듯이 갈리는 소리가 새나 왔다. 리리스가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킥. 어때? 이제 처지를 알겠어? 아니, 아직인가? 저 여인이 돌리고 돌리고 돌리고 돌려져서, 정액 범벅인 채로 헤 웃고 있어야 정신좀 차리려나?” “너…!” 물론 협 박용으로 꺼 냈을 뿐, 리리스는 아직 전혀 그럴 마음까지는 없었다. “흥. 그러게 그나마 대우해줄 때 못 이긴 척 받아들이지 그랬어? 그럼 너도 좋고 나도 즐길 수 있잖아. 이 명청한 자식아.” “리리스!” 그렇지만 일단 기를 죽여놓을 필요가 있기에 미련 없이 몸을 돌 리는 척을 했다. “그럼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지금 당장 불러올 테니까. 아마눈 이 벌게져서 달려올 놈들이 한둘이 아닐걸?” 그 순간이었다. 광, 광, 광, 광! 갑자기 엄청난 굉음이 연달아 터지고, 철그렁, 철그렁! 사슬이 비 명을 지르는 듯한 거슬리는 소음이 왕왕 울렸다. “리리스으으으으으! ” 검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이럴까. 화들짝 뒤를 돌아본 리리스는 속으로 몹시 기함했다. 김수현이 이글거리다 못해 활활 타는 눈동자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흡사 당장에라도 사슬을 끊고 나와 씹어먹기라도 할 것 처럼. ‘뭐,뭐야?’ 거기다 살 떨릴만한 살기까지 전해지자 리리스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수현 처지에서는 당연한 분노이자 폭발이었다. 한소영이 ‘또’ 당한다? 구구절절 말할 것도 없다. 일 회차에 가장 커다랬던 트라우마 중 하나요, 평소에 떠올리는 것조차 자제했던 기억이다. 물론 의도 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결과적으로 김수현의 역린(逆藏) 중의 역린을 건드린 셈이다. 리리스는 느닷없이 떨리기 시작하는 숨을 진정시키며 냉정해지 려 무진 애를 썼다. 하기야 양팔의 사슬은 물론, 사지도 구속 장치 로 도배돼 있고 타나토스의 조각도 박혀 있는데, 끊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간신히, 억지로나마 가슴을 가라앉힌 리리스는 서둘러 입을 열었 다. “네, 네가 굳이 거부하겠다면 그러겠다는 소리야. 네가 얌전히 내 기대에 응해주겠다면 저년은 곱게 놔두겠어.” 그러는 동안 김수현은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사슬에 늘어 진 채, 숨만 거칠게 몰아쉬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리리스는 여유를 되찾음과 동시에 일말의 자신감 이 생졌다. 김수현이 저 여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강이나마 검작이 갔기 때문이다. ‘혹시나 했는데 정답이었어.’ 그렇게 생각한 리리스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내가 말했지? 나는 너 같은 놈들을 길들일 때 가장 큰 쾌감을 느낀다고. 그러게 적당히 까불지 그랬어 ?” «크으으으.!” “용쓰기는. …하지만 말이야. 말은 이렇게 했지만, 너도 꽤 즐거울 거라니까? 내 말만 얌전히 듣는다면, 네가 여태껏 한 번도 겪어본 적 없을 쾌락을 약속하겠어. 정말로.” “후욱…. 후욱….” 잠시 후, 리리스의 양손이 둔부를 은근히 스쳤다. 그러자 하반신 을 가리고 있던 검은 실루엣 같은 것이 특 떨어지더니, 가늘면서 탄력적인 허벅지나 육감적인 영덩이, 그리고 털 하나 보이지 않 는 깨끗한 음부 등이 훤히 노출됐다. 이윽고 실룩거리며 걸어간 리리스는 김수현의 어깨에 손을 얹었 다. 그러자 잠깐 움찔하는 기색은 느껴졌지만, 그뿐. 부르르 떨리 는 감촉을 제외하면 저항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 리리스의 입꼬 리가 씩 올라갔다. “호호호호. 좋아. 착해, 아주 착해. 기대해도 좋아. 내가 괜히 대 탕녀, 그리고 밤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줄 알아? 대계에서도 나랑 한 번 자보고 싶어서 무릎 끓는 놈이 천지야, 천지. 오히려 영광으로 알라고.” 리리스는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웃다가, “그러니까.” 갑자기 정색했다. 그와 동시에 어깨에 얹은 손에 힘을 주어 김수현을 주저앉힌 후, 분노로 일그러진 인중 앞으로 자신의 음부를 살짝 들이 밀었다. 그리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명령하듯 말했다. ======작품 후기====== 김수현: 세라프의 잔소리를 감수하고 정(精)의 반지를 샀던 건, 바로 이 순간을 위함이었다…! 원래 이번 에피소드 소제목은 역관광이라고 하려다가, 그건 너무 적나라하다는 생각에…. AA; 7월 27일(월요일)은 하루 쉽니다. 다른 일이 있는 건 아니고, 머리와 몸 종 쉬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그럼 7월 28일(화요일)에 뵙겠습니다. 독자님들 모두 편안하게 한 주 마무리하세요.:) [KHAN14] < -- If You Change, One. -- > 굴욕적인 명령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김수현은 미동도 보이 지 않았다. 마치 못 들었다는 것처 럼 한동안 아무 행동도 하지 않 는다. 그러나 밤의 여왕은 조바심을 내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리리 스는 여태껏 무수한 상대와 장자리를 가져왔으며, 그런 만큼 눈 앞의 사내를 어떻게 요리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단순히 무력 여부를 떠나서, 김수현이라는 인간은 확실히 강하 다.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악마에게 굉장히 깊은 원한과 증 오를 가지고 있다. 이 정도로 뻣뻣하다면 온갖 수를 동원해 극한 까지 몰아붙인다 해도 절대로 굽히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부러졌으면 부러졌지. 그래서 리리스는 한소영을 걸고넘어졌다. 아무리 개인이 강인하고 확고하다손 쳐도, 결국에는 본인 한정일 뿐이 니까. 걸고넘어지는 대상이 소중할수록 약점은 더더욱 확실해진다. 이 런 면에서 보면 한소영은 김수현의 최대 취약점이었다. 고집을 부려서라도 신념을 세울 것인가, 아니면 자존심을 접고서 라도 소중한 이를 지킬 것인가. 해답은 곧나왔다. “으응…!” 문득, 음문을 살짝 홀어 올리는 메마른 혀의 감촉에 나직한 비음 이 새나왔다. 결국, 음부에 얼굴을 묻은 김수현을 확인한 리리스 는 순식간에 차오르는 격정과 환희에 부르르 떨었다. 마침내, 마 침내 해냈다. “후…. 후후…. 아하하하!” 리리스는 무언가 참을 수 없는 없다는 기분에 큰 소리로 웃기 시 작했다. 비록 기교는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지만, 오히려 하기 싫 다는 기색이 역력한 거슬리기 짝이 없는 혀 놀림이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사랑하는 연인이 바로 옆에서 무력하게 지켜만 보고 있다 는 상황 또한 흔히 맛볼 수 없는 별미였다. 현재에 이르러 육체보 다 정신적인 쾌락을 갈구하는 리리스로서는 호흡이 급격히 거칠 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좋아, 아주 좋아…. 계속 이렇게만 해…. 그럼 약속한 대로 네 여인은 털끝도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 호호호호!” 나긋나긋 뻗어지는 리리스의 양손이 김수현의 머리를 살며시 부 여잡았다. 그리고 지그시 짓누르며 이리저리 문지르자 계곡에 전 해지는 감각도 한층 강해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 앓는 소리를 내며 마음껏 커닐링구스를 음미하던 리리스는 가까스로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이, 이상하네…? 이렇게 빠르게 흥분된 적이 없는데…?” 온몸이 짜릿짜릿하고 아랫배가 근질근질하다. 심지어 목소리도 떨려 나왔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겨버렸다. 실제로 그 억세던 김수현이 굴복 했다는 사실 자체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정신적 쾌감을 가져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침대에서는 무서울 게 없다는 밤의 여왕도 모르고 있는 점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관계가 시작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김수현의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가 말간 빛을 발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리리스가 강렬한 색기를 뿜어 상대의 욕정을 가일층 부채질할수록 반지의 빛은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이 반지의 이름이 정(精)의 반지라는 것과 어떤 효능이 있는지 모 르고 있다는 것이 바로 리리스가 간과하고 있는 점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지옥 같은 시간이, 또 누군가에게는 쾌락의 시간이 흐른 후, 리리스는 긴 한숨을 흘리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후우우우…. 좋아…. 이제 그만.” 사내의 침과 질에서 흘러나오는 애액이 뒤섞여 계곡 선을 타고 뚝뚝 떨어진다. 하반신은 홍수까지는 아니었으나 가랑이가 번들 번들할 정도로 흥건해진 상태였다. 리 리스는 사랑스럽 다는 듯이 김수현의 정수리를 부드러이 쓸다가, 이윽고 차디찬 바닥에 느긋하게 드러누웠다. 그리고 살짝 고 개를 들자, 힘없이 주저앉은 채 명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김수현 이 보였다. 그 망연한 모습을 보니, 그때까지 가슴 한 켠에 다소 남아 있던 ‘무언가 좀 이상하다.’ 는 의심마저도 깨끗하게 사라졌 다. 아니, 리리스는 애초 이 상황을 한껏 즐기는 중이었다. 리리스는 흥분에 겨운 비음을 흘리며 허리를 비틀다가, 어느 순간 가랑이를 양옆으로 살그머니 젖혔다. 이어서 두 손을 움직여 음부마저도 스스로 활짝 벌리자, 꼭꼭 숨겨져 있던 발그스름한 속살이 흡사 과시하기 라도 하듯 화려하게 자신을 노출한다. 동시 에 안쪽에 투명한 액체가 왈칵 흘러 나와, 물씬 풍겨오는 악마의 향기는 가히 정신이 아찔해지리만치 적나라한 내음이었다. 정작 김수현은 벌레 보듯 극도로 혐오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 만. “킥. 뭐해? 애도 아니고, 하나하나 말해줘야 알아?” 리리스가 키득거리자, 이가 바스러지듯이 갈리는 소음이 이어졌다. “창녀보다 못한 쓰레기 년.” “그러는 너는 곧 창녀한테 허리를 흔들게 될 개새끼가 되겠지.” 구변 좋게 받아친 리리스는 검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하여간 좀 즐기려고 하니까 기분 잡치게 하네. 바지 벗어. 박아.” “참고로 이게 마지막 경고니까 알아서 해. 나한테 더 이상의 인내 심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말한 리리스는 유혹하는 몸짓을 멈추고 네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눈을 감아버 렸다. 그러자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스탄텔…. 로우…. 로드….” “부탁…. 드립니다…. 눈을….” 치 떨리는 음성과 함께 사슬이 약하게나마 철그렁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견디기 힘든 고요를 가르며, 마침내 꽃잎으로 뜨거운 기등의 끝이 맞닿는다. 입구에 걸쳐진 육중한 귀두의 감촉을 느끼며 리리스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꿈에도 모르는 채. 잠시 후. 김수현의 페니스는 그 어떤 예고와 전조 없이 부드러운 살구명 을 단숨에, 그리고 끝까지 관통해버렸다. 다음 순간, 꼭 감겨 있던 두 눈이 불현듯 찢어질 듯 커다랗게 떠지더니, 리리 스의 전신이 빳빳하게 굳으며 경악성이 터졌다. 방 안에서는 달빛 한 줄기만이 희미하게 새나오고 있었다. 문 앞에 선 이효을은 문고리는 돌리려던 손을 멈추고, 스리슬쩍 안을 들여다봤다. 안은 어두웠다. 오직 창문으로 들어오는 월광만이 방을 어렴풋하 게나마 밝히고 있었고, 정면 방향의 책상에는 시커먼 그림자만이 쓸쓸하게 드리워져 있다. 이효을은 반쯤 돌렸던 문고리를 완전히 돌리고,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왜 불도 안 켜고 있느냐고 말하려다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닫는다. 불청객이 떠난 적막한 방에는 독한 술 냄새가 은근하게 흐르고 있다. 심지어 책상에는 곳곳에 비벼 끈 흔적과 끝까지 탄 연초도 서너 가치 굴러다니는 중이었다. 평소 술은 몰라도, 연초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어색하게 여길 수밖에 없 었다. “너… 그러나 이효을은 간신히 말을 삼켰다. 그저 가만히 홀깃거리다가, 빈 의자에 조심스레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 조용히 머리 숙 이고 있는 김유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착 가라앉은 얼굴빛에서는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다. 이효을이 기척을 냈음에도, 오직 고요히 눈을 감은 채 깊은 생각에 장긴 듯한 모습이 었다. 아주 가끔, 왼손에 죈 울퉁불퉁한 돌을 쥐었다 가 펴기를 반복할 뿐. 그것을 발견한 이효을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메모리아 스톤이었다. ‘저게….’ 연락을 받고 찾아오면서 대층 이야기는 들었다. 악마 쪽에서 결코 무시 못 할 조건을 제시했다. 그리고 멜리너스는 떠나면서 메모리아 스톤을 두고 갔다. 거두절미하고 말해서, 이것으로 워프 게이트를 활성화하면 법역이 있었던 곳까지 단숨에 이동할 수 있는 포탈이 생성된다. 말인 즉 김유현은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에라도 동생을 데려올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제로 코드라는 걸 넘긴다는 전제하에. 그때, 갑자기 눈을 뜬 김유현이 천천히 턱을 젖혔다. 심원하게 침장한 흑색 눈동자가 책상을 빤히 응시한다. 이옥고 양손에 쥐고 있던 제로 코드와 메모리아 스톤을 책상에 함께 올려놓는 것과, “효을아.” 잔뜩 쉰 목소리로 여인을 부른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 었다. 김유현은 여전히 이효을을 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말이 들려오지 않자, 질문을 바꿔서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생존자…. 그렇게 많지는 않지?” 덜덜 떨리는 목소리에서 이효을은 사내가 원하는 답을 직감했다. 순간적으로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응.” 긍정하는 순간 김유현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효을은 이를 악물었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예전처럼 물불을 가리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건만, 그나마 현실은 인식하고 있는 듯했으니. 어쨌든 이어지는 말이 상대에게 사형 선고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입을 열 수밖에 없다. 왜냐면 김유현이 듣고 싶어하는 말은 사실 이 아니었으니까. “일이 차 강철 산맥 원정 때도, 서대륙과 부랑자 연합군과 전쟁을 치렀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예전 수준으로 회복하려면…. 나도 잘 모르겠네. 얼마나 걸릴지.” “…그래?” “그래. 그리고…. 그 조건들이 사실이라면 나는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 특히 우리가 조건을 추가할 수 있다는 점을 굉 장히 유리해. 이건 저쪽에서 사실상 패배를 시인한 거나 마찬가지 아냐? 그러니까 어깨 좀 펴.” 이효을로서는 최대한 순화한 말이었다. 말은 저렇게 했어도 기실 현 상황에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조건이요, 남은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게 현실이었다. 김유현은 잠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두 손으로 천천히, 느릿하게 얼굴을 감싸더니 흐느낀다고 생각될 정도의 기나긴 한숨을 홀렸다. 이효을은 사내의 모습에 안쓰러움을 느끼 면서도 방금 한 말을 후 회하지 않았다. 감정에 이끌리기보다는, 항상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온 그녀였으니 . 그 짧은 대화를 끝으로 방에는 다시금 고요가 찾아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당장 벗어나고 싶을 정도의 불편한 침묵이 한없이 이어지는 와중, 돌연 복도로 큼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음은 문 앞에 이르 러 뚝 멎었으나, 이내 방문이 쾅 젖히며 누군가가 뛰어들어왔다. 그 기세는 자못 무시무시해 이효을은 물론, 석화하던 김유현도 약간 놀란 얼굴로 바라봤다. 매섭게 눈을 치뜬 안솔이 씩씩거리 며 김유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은…?” “왜 가만히 있어요?” 이효을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안솔은 다짜고짜 책상에 앉은 사 내를 몰아붙였다. 김유현이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을 짓자, 안 솔은 낯을 와짝 일그러뜨리더니 성큼성큼 다가가며 으르렁거렸 “왜 가만히 있느냐고요. 오라버니 안구하실 거예요? 친형 맞아 요?” “자, 잠시만요.” 이효을이 벌떡 일어났지만, 안솔은 애초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 다. 그리고 무언가를 획 꺼내 던지자, 책상에 둔탁한 소음이 연달 아 울려 퍼졌다. 하나는 가득 차 있는 카오스 미믹이요, 하나는 신 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아름다운 검이었다. “우리가 이겨요. 아니, 이기게 해줄게요. 그러니까 빨리…!” “사용자 안솔!” 김유현이 얼떨떨한 기색으로 두 물건을 보는 동안, 이효을은 제 말만 하는 사제의 어깨를 세게 잡아챘다. 그때였다. 상대가 귀찮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는 찰나, 목구명 끝까지 치솟 았던 노기가 쏙 들어가버렸다. 안솔의 전신에서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기운이 줄기차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왜요?” “…아니, 일단 진정해요. 사용자 안솔의 마음은 나도 이해해요. 클랜 로드가 붙잡혀 있는데 당연히 한 시라도 빨리 구하고 싶겠죠. 그건 우리도 같은 마음이에요.” “그래서. 고작 한다는 게 악마와 거래를 한다는 겁니까? 수현이 절대로 믿지 않았던 그 악마 놈들과.” “네…? 그, 그걸 어떻게?” 이효을의 눈이 휘등그레졌다. 아직 자세한 조건까지는 알려지지 않았을 텐데,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뿐 만 아니라 평소와 말투도 달라졌으나, 그것까지는 미처 잡아내지 못했다. 안솔은 한동안 이효을을 쏘아보다가, 다시 앞으로 눈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우습네요. 만약 오라버니가 이 자리에 계셨다면, 아마….”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책상을 세게 치는 소리가 안솔의 말을 날카롭게 끊었다. 깜짝 놀란 두 여인이 정면을 바라보자, 눈을 크게 뜬 김유현이 입 을 꺽 벌린 채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왜인지 커다란 층격을 받은 듯한 느낌이 었다. 흡사 목욕탕에서 유레 카를 외친 아르키메데스처럼 . “그래….” “기,김유현?” “그렇지, 그래….” “왜, 왜 그래? 그렇다니? 뭘 말하는 거야?” 이효을이 거듭해서 물었으나 김유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 그 방법이…. 그 방법이 있었어…. 내가 왜 이 생각을….” 그냥 정신 나간 사람처럼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부지 불식간에 까맣게 죽었던 눈동자가 형형한 빛을 뿜기 시작한다. 존재를 감췄던 기가 순식간에 살아나고, 사라졌던 투지에 다시 불이 붙는다. 그러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이효을의 속에서 까닭 모를 불안이 고개를 치켰다. 설마 하는 기분이 엄습한 것이다. “너 설마…. 전쟁을 하려는 거야? 아, 아니지?” “후우우우….” “…진짜로? 정말로? 너 미쳤어? 뭘 믿고서? 지금 이 사제가 한 말만 믿겠다는 거야? 내가 말한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아?” “이길 수 있게 해준다고… !” 이효을과 안솔의 눈에서 동시에 불꽃이 튀졌다. 그리고 서로를 째려보며 질세라 입을 열었으나, 다음 순간, 어쩐 일인지 둘 다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김유현이 손을 뻗어 둘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김유현은 한결 차분해진 모습으로 둘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갑자 기 책상에 있던 카오스 미믹과 맹세의 검을 안솔에게 도로 던졌 다. “둘다 그만. 그리고 이건 다시 가겨가세요.” “이건…!” “들어요. 그게 뭔 물건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토록 자신만만 한 걸 보니 어딘가에 쓸모는 있겠죠. 그렇다면 그걸로 층분합니 다. 알아서 사용하시면 되는 일이에요.” 김유현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말했다. 전에 없는 엄중한 음성에 안솔은 주춤 물러 나며 두 물건을 품에 꼭 안았다. 흡사 되려 압박 당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상대를 쉴 틈 없이 몰아붙이던 기세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김유현은 잠시 안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 다. “수현이는 사용자 안솔을 중히 썼죠. 저도 이야기는 몇 번이나 들었습니다. 아, 물론 당신의 행운은 저도 인정해요. 확실히 대단한 힘이죠.” “저는….” “하지만, 이것만큼은 알아두시길.” “네,네?” “저는 당신의 클랜 로드인 김수현이 아니라, 사용자 김유현입니다. 저에게는 저만의 방식이 있습니다.” 안솔은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만큼 사내의 태도가 백팔십도 변했기 때문이다. 두 눈동자가 일견 싸늘함 속에서도 무섭도록 이글거리는 게, 방금 얼굴을 감싸며 좌절하던 사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완전히 달라졌다. “이번 전쟁은…. 이번 전쟁은 누구 하나의 행운에 의지할 수 없습니다.” 뇌제는 여전히 안솔을 똑바로 주시하며 결연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남아 있는 북 대륙의 전력을 하나로 결집할 수 없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 아군은 물리적인 피해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크게 위축된 상태입니다. 좀 전의 저처럼, 싸워봤자 무조건 질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 만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불확실한 행운이 아니라….” “두려움을 투지로 바꿀 수 있는,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폭포수처럼 흐르는 말 앞에서 안솔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 았다. 한 번 발동이 걸리면 김수현조차도 한 수 접고 들어간다는 김유현의 말발은, 작두 탄 안솔조차도 반박하기 힘들만큼 정연하고 논리적이었다. 이효을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사제의 말만 믿고 전쟁을 하겠다고 하면 죽는 한이 있어도 결사 저지할 생각이었는데, 김유현은 그 어느 때보다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긴말을 마친 김유현은 안솔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곧장 이효을을 바라봤다. “이효을.” “어, 응?” “누구라도 좋으니까, 사용자들을 최대한 광장으로 모아줘. 나도 바로 갈 테니까.” “어….” 빠르게 말을 끝낸 김유현은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기라도 하는 듯 홀연히 방을 빠져나갔다. 이효을은 아무 의미 없이 반사적으로 팔을 뻗었다가, 힘없이 손 을 내렸다. 그리고 왼쪽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좀 전부터 심장이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는 다. [KHAN14] < -- If You Change, One. -- > 철그렁, 철그렁! 격렬한 움직임 덕분인지 사슬이 맞부딪쳐 울리는 소음이 조용하 던 공간을 왕왕 울렸다. 듣기 싫어도 귀를 긁는 철성에 한소영은 핏물이 나올 정도로 입술을 짓씹는다. 여태껏 사내의 신음은 단 한 번도 들려오지 않았다. 들려오는 소음이라고는 쉴 틈 없이 부딪치는 사슬 소리와 간헐적으로 흐느끼는 여인의 신음뿐. 기실 거슬리는 기분에 초점을 맞추자면 사슬보다는 앓는 소리가 더 신경 쓰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소영은 눈을 뜨지 않는다. 왜냐면 사내가 보지 말아 달라고 했으니까. 그리고 어떤 기분으로 그 말을 했는지 절절히 느꼈으니까. 사실 지금 당장에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달려가서 사내를 꼭 안고 괜찮다고, 무리하지 말라고 속삭이고 싶었다. 하지만 두 손목이 둘둘 묶인 채로는 그럴 수조차 없다. 그리고 멋대로 나서봤자 리리스가 반응할지도 의문이며, 까닥 잘못하면 사내의 희생이 물거품이 돼버릴 수도 있으니. 결국, 한소영이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없다. 마음 같아서는 눈 만이 아니라 귀도 막고, 인지할 수 있는 모든 감각을 차단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초감각은 필요 이상이라 생각될 정도로 성실하게, 계속 정보를 전해주는 중이다. 결국에는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를 긴 시간 동안 홀로 방치된 채 이를 악물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어영…. 어어어영….” 종 전까지만 해도 훌쩍거 리는 듯했던 신음이 갑작스레 우는 소리 로 변했다. 철그렁, 철그렁! 사슬 소리 또한 계속된다. 소음은 점차 찾아들기는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도를 더해가고 있 었다. 여인의 소리는 시끄러운 사슬에 곧 묻혔으나, 무언가 이상 하다는 생각이 엄습한다. 가히 좋지 않은, 아니 몹시 불길하기까지 한 기분. 잠시 갈등하기는 했지만,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한소영은 눈에 살짝 힘을 주고 천천히 눈을 떴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약 일 미터 앞으로 거무스름한 형상이 엎드 려 있는 광경이 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눈을 감았는지 시야가 어렴풋하기 짝이 없다. 뜨겁게 달궈진 공기가 흐르고 진한 밤꽃 냄새가 풍기는 가운데, 한소영은 시야를 회복하려 애썼다. 그러자 긴 시간이 지나지 않 아 주변이 차츰차츰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잠시 후, 마침내 형상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한소영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그것이 리리스라고 확신하기까지는 생각보다 시간이 상당히 걸 렸다. 왜냐면 스스로 밤의 여왕이라며 자신만만해하던 대 악마는 온데간데없고, 눈물과 롯물, 그리고 정액으로 범벅이 된 가련한 여인만이 보였기 때문이다. 두 눈은 완전히 까뒤집어져 어디를 보는지도 모르고, 사지는 실 끊긴 듯한 인형처럼 덜컥덜컥 흔들리고 있다. 흡사 만취한 사람 을 보는 듯하지만, 가끔 힘겹게 고개를 저으며 그만하라고,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것 같기도 하다. 처음 들어왔을 때를 상기하면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리리스의 위로, 누군가가 등을 돌린 채 기계적으로 허리 를 움직이고 있었다. “아…!” 마침내 김수현까지 확인한 찰나, 한소영은 자기도 모르게 탄식을 터뜨리고 말았다. 머리를 푹 숙인 김수현은 쓰러진 리리스를 압박하듯이 깔아 짓뭉 개고 있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완전히 몰두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겉보기에는 그렇다. “머, 머셔너리….” 그러나 한소영은, 한소영 만큼은 다르다. 두 남녀의 관계를 보고 느끼는 감정은 질투 따위가 아니었다. 심지어 안쓰럽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눈앞의 광경은 더 이상 섹스라고 보기도 어렵다. 리리스는 차치하고서라도, 적어도 김수현에 한해서는 그랬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한소영의 낯빛에 거미줄처럼 번지는 감정은 오히려 두려움에 가까웠다. 무어라 해야 할까. 슬픔은 괴로움으로, 괴로움은 체념으로, 체념은 비관으로, 비관은 자기험오로, 자기험오는 절망으로, 절망은 광기로, 그리고, 광기는 허무로…. 온갖 마이너스한 감정이 김수현의 내부에서 넘쳐 흐르고 있다. 까닭 모를 눈물이 왈칵 터질 것만 같은 이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의 바닷속에서, 한소영은 불현듯 김수현의 붕괴를 직감했다. 여태껏 간신히 버텨왔던 무언가가 시시각각 스러겨가고 있었다. 너무도, 한없이 허무하게. 만약 지금 하는 행위가 끝나고, 내부를 채우고 있는 감정이 빠져 나가면, 그때 김수현은 어떻게 될까. 거기까지 인지한 순간, “머셔너리 로드!” 한소영은 처음으로 본능을 앞세워 소리 질렀다. 다른 것보다는, 오직 엄춰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머셔너리 로드! 머셔너리 로드!” “사용자, 사용자 김수현 !” “김수혀언!” “…야!” 워낙 급한 마음에 얼떨결에 반말이 나왔다. 허나 그런 만큼 효과는 있었던 걸까. 몇 번이나 부르고 부른 끝에, 겨우 외침이 닿았다. 끊임없이 움직이던 허리가 움찔 멈췄다는 게 그 방증이었다. 그러나 지성은 이미 저편으로 날아갔는지, 김수현은 극히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차갑게 가라앉은 두 눈동자는 보는 이가 오싹해질 만치 시린 냉기를 풀풀 날리고 있다. “그만…. 이제 그만하세요…. 제발….” 그러나 숫제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자, 언뜻 얼떨떨한 빛이 스쳤다. 그리고 비로소 한소영을 돌아본 순간, 홀린 듯한명한 얼굴에서 반쯤은 얼이 빠졌다. 벼랑 끝으로 치달리기 직전, 한순간이나마 이성이 돌아온 것이다. “이, 이스탄텔….” 흡사 자기 자신도 뭘 했는지 잘 모르겠다는 듯한 반문. 그러나 한소영은 이해 따위는 집어 던지고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것기만 했다. 무엇보다, 두 번째로 보는 한소영의 그렁그렁한 눈물은 김수현에게 적잖은 층격이었다. “흐에…. 흐에에에….” 그렇게 김수현이 층격에서 헤어나오는 동안, 리리스는 정신없이 적적거리는 와중에도 본능에 따라 손을 허우적거리며 몸을 움직 였다. 겨우겨우 상반신만 들더니 영금영금 도망치기 시작한다. 김수현의 행위가 멈추자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더 버틸 수 없으니 도망치라고. 가는 도중 몇 번이나 힘없이 비틀거리고, 또 음부에서 흘러나오는 정액 뭉치가 바닥에 실 가락처럼 수놓아지는 광경은 몹시 비 참하다. 그래도 살고자 하는 의지는 남아 있었는지 리리스는 필사적으로 기어나가 기어코 자취를 감췄다. 그리하여 다시 둘만 남게 되고, 철그렁거리던 소음도 사라지자, 공간은 다시금 적막을 되찾았다. 한소영은 힘껏 숨을 들이켜 속을 추슬렀다. “머셔너리 로드.” 그리고 거친 숨을 뱉어내며 말한 후, 웃는지 우는지 모르는 얼굴로 김수현을 응시했다. “저,저는….” 김수현이 말을 더듬거렸다. “괜찮아요. 다 끝났으니까, 이제 괜찮아요.” 한소영은 진정하라는 듯 괜찮다는 말을 반복했으나, 김수현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마치 이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는 것처럼. 사실 그것은 한소영도 매한가지였다. 단지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이끌려 말할 뿐.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그냥 나오는 대로 입을 열 었다. “저한테…. 저한테 가까이 와주시겠어요?” “예,예?” “이쪽으로 와주세요. 제발.” 김수현은 흥깃 떨며 그답지 않게 불안해했으나, 한소영의 목소리 에는 거부할 수 없는 절박함이 실려 있었다. 아직 김수현의 사지에는 사슬이 묶여 있었으나, 처음과 달리 상 당히 느슨해진 상태였다. 관계를 수월하게 맺기 위해 리리스가 꽤 길게 늘인 탓이다. 물론 공간을 왕복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한소영에게 닿기까지는 층분한 거리였다. 결국에는 주춤주춤하면서 조심스레 다가가자, 한소영은 이곳에 누우라는 듯 얼른 양 무릎을 모았다. 그러자 이왕 내친 김이었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아직도 정신이 없었던 걸까. 혹은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던 걸까. 잠깐 엄깃 하기는 했지만, 김수현은 순순히 한소영의 허벅지에 머리를 뉘였다. 그리고 참았던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만약 김수현이 리리스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면, 자기가 당할 수 도 있었다는 것쯤은 한소영도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사 인사였으나, 김수현의 대답은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았다. 그저 한소영의 허벅지를 베고 웅크린 채 조용히 눈만 감고 있을 뿐. 딱 하나 달라지는 점이 있다면,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빛무리를 발하던 반지의 빛이 서서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한소영은 수도 없이 입을 달싹거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진심으로 원망했다. 무어라 위로의 말이라도 하고 싶어 애는 타는데, 머릿속이 완전히 뒤죽박죽이었다. 하기야 지금껏 위로라고는 제대로 해본 적도 없으니 말문이 열리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다못해 꼭 안아줄 수라도 있다면 좋으련 만.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클랜 로드.” 잠든 줄만 알았던 김수현이 문득 입을 열었다. “네.” 한소영은 반사적으로 대답하면서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하나는 안도감. 들려오는 음성은 아까보다 확연히 가라앉아 조금 이나마 흥분을 진정한 듯하다. 한데, 한편으로는 묘한 기시감도 느껴졌다. 항상 이스탄텔 로우 로드라고 불렀는데 갑자기 클랜 로드라고 부르니 이상했기 때문 이다. 그리고 왜인지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을 한 번 겪어본 것 같았다. “아주 예전에 말입니다.” 그러나 김수현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눈을 감은 채로 말을 이었 다. “옛날…. 아마 약 십오 년 전의 일일 겁니다.” “십오 년 전이요?” “예. 제가 현재 오 년 차니까, 아마 그쯤 됐을 겁니다.” 그 순간 한소영은 조용히 침묵했다. “현대에서 한 사내가 있었습니다. 그 사내는 군인이었죠. 이 년 동안의 군 생활을 끝내고, 전역 신고도 마치고, 붕 뜬 기분으로 집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약간 뜬금없는 감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 일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어써면 아까 하려다가 만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스쳤다. 홀가분한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전날 과음을 한 탓일까요. 그때는 제가 술이 엄청나게 약했거든요. 맥주 한 잔만 마셔도 취하는 주제에, 전역하는 날 새벽에 행보관의 부름을 받고, 둘이서 치킨이랑 맥주를 양껏 먹고 마셨지요. 그래서인지 좌석에 앉자마자 세상 모르고 곯아떨어졌습니다.…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기분 좋게 자고 눈을 떠보니…. 서울역이 아니라, 소환의 방이라 는 웬 이상한 공간에 누워 있더군요.” 한편, 북 대륙에서는…. 동이 튼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청 명했으나, 아틀란타는 무슨 일인이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다. 이상한 일이었다.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어젯밤 까지만 해도 축 처겨 있던 도시의 분위기가, 하릇밤 새 완전히 달 라졌다. 물론 밝고 희망차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활기라고 부를만한 기운은 분명히 돌고 있었다. “이 방법은…. 진짜 기발한데요.” 그때 소란의 근원지를 지그시 응시하던 고연주가 어이없다는 듯 이 감탄을 터뜨렸다. “나도 나도. 그동안 워낙 심하게 금기로 여겨지다 보니,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어.” 옆에 서 있던 이유정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나 입가 에는 알듯 말듯한 미소가 아주 살짝 걸려 있다. 거듭 말하지만, 정말로 이상한 일이다. 과연 어떻게 이렇게 하루 만에 분위기가 반전한 걸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다 여러분 덕분입니다.” 두 여인의 감탄에 사내의 낮은 음성이 회답한다. 김유현의 목소리였다. 곧 어던가로 떠나려는 사람처럼 로브에 꿰인 끈을 질끈 묶으며 담담히 말을 잇는다. “제가 한 건 계획을 내세운 것뿐. 사용자 이유정은 계획을 한층 보강해줬고, 사용자 고연주는 솔선수범으로 계획의 실현을 이끌어 줬습니다. 그러니 오히려 감사해야 할 건 저겠지요.” 이어지는 칭찬에 놀랍게도 이유정이 몸을 배배 꼰다. “아, 아니…. 저는 그냥…. 예전에 했던 일이 생각나서 말씀드린 것뿐인데….” 고연주도 빙그레 미소 지으며 눈을 찡긋한다. “호호. 저뿐만이 아니죠. 다은이와 마르도 동참해줬는데요.” 가벼운 너스레에 김유현도 싱겁게 웃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그래…. 이제 곧….’ 그렇게 한동안 먼 곳을 응시했다가, 다시 두 여인을 바라봤다. “그럼…. 나머지를 부탁 드리겠습니다.” 고연주는 살짝 주먹을 쥐었다. “네. 남은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돌아오실 즈음이면 전부 준비돼 있을 거니까.” 믿음직스럽기 그지없는 대답에 김유현을 차분히 머리를 끄덕거 렸다. 그리고 잠시 후, 미련없이 등을 돌려 신속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 했다. 강철 산맥으로. ======작품 후기====== 참…. 오늘 하루 굉장히 바빴습니다. 설상가상이라고, 일이 하나 터지니까 연달아서 뼝뼝 터지네요. 이번 주는 잘못하면 내내 바블 것 같아요. 종 빨리 처리되면 좋을 텐데…. AA; 아, 그리고 김수현과 화정의 일러스트가 점차 완성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아마 머지 않아 보여드릴 수 있을 듯해요. 화정도 무척 예쁘지만, 개인적으로는 김수현이 더 마음에 듭니 다. 굉장히 잘생기게(?) 나왔거든요.:) [KHAN14] < -- If You Change, One. -- > 언뜻 정신을 차렸을 때, 기계적으로 움직이던 허리는 어느새 멎어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불과 일 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에 서 한소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몹시 상심한 눈으로 말이다. 리리스의 엉덩이를 움켜쥔 채 용두질에 몰두하던 내 모습은 과연 어땠을까. 아마 구역질 나올 정도로 추했겠지. 나도 일 회차 때 망가진 한소영을 보고 견디지 못했는데 그녀도 당연히 똑같은 기분을 느꼈을 터 . 그래.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 라고 생각했건만. 날 대하는 한소영을 보고 있으니 무언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얼굴로 나를 응시하는 얼굴은 과거 마냥 울부짖기만 했던 나와 전혀 달랐다. 고맙다는 말을 들었고 미안하다는 말도 들었다. 이후 그녀는 계속 입만 달싹거렸으나 적어도 날 위로하려는 마음만큼은 층분히 전해졌다. 덕분에 혼란한 내면을 가까스로 안정시킬 수 있었다. 거기다 허벅지를 베고 누우니 극한까지 치달았던 몸이 푹신한 이불을 덮은 듯 삽시간에 나른해지 더라. 홀가분히 일 회차 이야기를 시작한 것도 아마 서서히 편안해지는 심신에서 문득 발로한 것이리라. 지금 날 보고 경청하는 한소영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이해해줄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십오 년 전의 내가 홀 플레인에 입장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형을 만나고 형을 잃고, 한소영을 만나고 한소영을 잃고, 결국에는 악마를 물리치고 제로 코드를 얻는 것까지. “…그래서 사내는 결심했습니다. 혼자서 지구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설령 십 년의 세월을 반복하는 한이 있더라도 암울했던 과거를 바꿔버리겠다고.” “이번에는 기필코 형과 클랜 로드를 죽게 놔두지 않겠다고.” “그리하여…. 사내는 제로 코드에 요청해서 시간을 돌렸습니다. 즉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것이지요.” 길고 길었던 이야기를 끝맺자마자, 불현듯 시간이 엄춘 듯한 기 분이 들었다. 동시에 잔잔하던 가슴도 돌연히 두근거리기 시작한 한소영의 반응이 궁금하다. 그녀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혹은 어떤 말을 할까? 아니. 과연 믿어주기나 할까? “그 사내가 바로 머셔너리 로드였군요.” 여러 생각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킬 즈음, 고요히 흐르는 음성에 이야기하는 내내 한 곳만 바라보던 시선이 저절로 돌아갔다. 뜻밖에도 한소영은 무척 담담했다.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날 물 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겨우 말씀해주셨네요.” 응? “좀 더 일찍 털어놓으셨다면 좋았을 텐데.” “믿어…. 주시는 겁니까?” 한소영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의외다. 아무리 초감각이 있다 하더라도 이 정도로 쉽게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물며 형도 처음에는 혼란스러워 하다가 진실의 수정을 사용하고 나서 겨우 인정했는데. “아마 처음 만났을 때 말씀하셨어도 저는 믿었을 거예요.” 그러나 한소영은 진심이라는 것처럼 보일 듯 말 듯한 희미한 미 소를 지었다. 살며시 턱을 젖히며 천장을 올려다본다. “물론 시간은 종 걸렸겠지만…. 첫 만남부터 느꼈거든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여느 사용자와 다른, 오직 머셔너리 로드에 게서만 느낄 수 있었던 영문 모를 특별했던 감정들….”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고개 숙여 그옥한 눈초리로 날 응시했다. “그래요.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이제야 이해가 가는 것 같아요.” “아….” “저는, 머셔너리 로드한테 그런 존재였어요.” 하…. 하하….” 그 순간 갑작스레 말문이 막혀와 그냥 웃고 말았다. 하지만 스스 로 들어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웃음이었다. 모르겠다. 종 전부터 이상한 기분이 가시지를 않는다. 어쨌든 최 소한 한 번쯤은 반문할 줄 알았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예?” “제가 첫 번째인지 두 번째인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털어놓으니 어떤 기분인지 궁금해요.” 이제는 숫제 내 기분이 어떠냐고 묻기까지 한다. 아무튼, 기분이라. 글쎄. “모르겠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기쁜가요?” 이어지는 질문에 머리를 가로저었다. 상황이 상황이기도 하고 냉정히 말해서 딱히 기쁜 것 같지는 않다. 단지 한소영의 반응이 워 낙 예상을 뛰어넘어서 어안이 벙벙할 뿐. 한편으로는 시원섭섭한 감도 없잖아 있었지만. “그럼 슬픈가요?” 이번에도 머리를 흔들었다. 슬픈 것치고는 지나치게 편안한 느낌이니까. 그냥 놓아버렸다는 표현이 정확하려나. “웃고 싶어요?” 절레절레. “그럼 울고 싶나요?” 그때, 계속 가로것던 머리가 엄깃 정지한다. 가만히 말을 곱씹었다. 울고 싶으냐고…. 침묵이 길어질수록 느껴지는 눈초리는 한층 강렬해져 머리를 반쯤 돌려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한소영이 느닷없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나는 방금 확실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울고 싶었다. 이 상황에서 울고 싶다는 게 아니라 예전부터 가끔 해왔던 생각이었다.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진심으로 눈물이라는 걸 흘려보고 싶다. ‘그런가….’ ‘너는 이미 아름답게 부서겨 가는 중인 건가….’ 이곳에서 나눴던 제로 코드와의 대화는 뼈저릴 만치 공감하고 있었다. 사실 이 회차를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암암리에 느꼈다. 몇몇 감정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서서히 무뎌져 가고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지 못하고, 진심으로 슬퍼하지 못한다. 순수하게 웃지 못하고, 순수하게 울지 못한다. 정말 자극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임의로 감정을 표출하는 것조차 어색해졌다. 결국에는 되찾고 싶다는 일종의 갈망이라고 해야 할까. 나라고 감정이 풍부했던 시절이 없었겠는가.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울어본 게 언제였더라. 한소영이 죽은 이후로 한 번도 없지 않았나? 그럼 거의 십 년 가까이 울지 않았다는 말인데. 어써면 그 시간 동안 눈물샘이 메마른 것일지도. 한소영의 말이 이어졌다. “울고 싶으신 건가요?” “…어떻게 울어야 하는데요.”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는 이스탄텔 로우 로드는 어떤 기분이십니까?” 비겁하다는 건 알고 있으나 결국 화제를 돌리고 말았다. 한소영의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음…. 저요.” 아쉽다는 듯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으나 한소영도 더는 파고들 생각은 없는 것 같다. “꼭 안아주고 싶어요.” “예?” 순간적으로 반문이 튀어나왔다. 화들짝 눈을 돌리자 다시금 한소영이 눈에 밟혔다. 시야로 들어오는 그녀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이상했다. 아니. 평소와 다르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 황혼빛 입술이 한 번 더 움직였다. “키스하고 싶어요.” 나도 모르게 상반신을 일으켰다가, 반사적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하. 꼭 비 맞는 강아지가 된 기분이네요. 하지만 그렇게 안쓰러워하실 필요는….” “머셔너리 로드.” 그러나 약간 화난 듯한 음성이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내 말을 끊어버렸다. 가슴이 뜨끔하다. 살그머니 눈을 들자 실망과 애처로움이 섞인 눈빛을 빛내며 날 바라보는 한소영이 보였다. “그게 아닌 거…. 아시잖아요.” 그 말이 이제 그만 외면해달라는 말처럼 들렸다면 내 착각일까. 설마. “저 정말 많이 기다렸잖아요. 모르시는 거 아니잖아요.” 착각이 아니었다. 기실 외면이라는 단어를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인정한 것과 진배없다. “저번에 그러셨죠.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동경하는 거라고.” 말인즉. “그때는 머셔너리 로드의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진심이라고 느꼈으면서도 오히려 그 상황을 모면하려는 변명이라고 멋대로 치부해버렸죠. …하지만, 이제는 이해해요. 아니. 이해할 게요.” 한소영이 그럴 리 없다는, 한소영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일 회차의 저는 분명히 동경의 대상이었는지 몰라요. 그래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항상 그렇게 생각해왔던 내 마음의 유일한 성역. “하지만 과거의 저로 인해 현재의 제가 가려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죽을 것 같이 가슴이 아파요.” 그 성역으로 정면 돌파하며 들어온다. “그러니까.” 다른 누군가도 아닌, “이제 그만, 과거에서 헤어나와 줘요.” 한소영 본인이.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봐달라는 여인의 한 마디. 그 한 마디가 숨을 멎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뭇거리고 있자, 이제껏 참고 참아온 무언가가 폭발했는지 한소영이 전에 없는 빠른 말로 나를 몰아붙였다. “이상하지 않잖아요. 이상한 일이 아니잖아요. 십오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아무 말도 않고 묵묵히 절 지켜준 사내인데. 마침내 진실을 알게 된 여인이 그 사내한테 반하는 게 그렇게 이상해요? 네?” 아니요. 이상하지 않아요.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아니면 여전히 저라서 안되는 건가요?” 아니요. 한소영이라서가 아니에요. 아니,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그동안 저는 알고 있으면서 무조건 피하기만 했습니다. 스스로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쩌면 내심 즐기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맞아요. 저는 비겁한 놈이었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왜 입은 뻐끔거리기만 하는걸까. “저 싫어하시는 거 아니잖아요. 싫어하지 않으니까 그렇게까지 하신 거잖아요.” 그리고 왜 슬슬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걸까. 무엇이 두려워서. “가지 마요…. 제발….” 목이 꽉 툴어 막힌 듯하다. 마음 같아서는 주먹을 목구멍으로 쑤셔 넣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때였다. “흐윽…!” 한소영이 갑자기 끓는 신음을 홀리더니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 어섰다. 철그렁, 철그렁, 철그렁, 철그렁! 철그렁, 철그렁, 철그렁, 철그렁! 그리고 입술을 짓씹으며 신경질적으로 양팔을 흔들기 시작했다. 원망하는 눈으로 손목에 묶인 사슬을 노려보며 어떻게든 끊겠다 는 듯 미친 듯이 흔들고 있다. “이, 이스탄텔 로우 로드!” 잘못하면 손목이 먼저 끊어질 것 같아 서둘러 가까이 다가간 찰나. “그만…?” 불현듯 한소영이 목이 부러질 듯한 기세로 고개 돌렸다. 한껏 이 지러진 두 개의 흑 수정은 마치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보는 이로 하여금 도저히 뿌리칠 수 없게 하는 강렬한 마력마저 느껴졌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칠해졌다. “아니…. 에요?” “저 혼자….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 찰나의 순간. “아….” 내 왼발이 무작정 한 걸음 내디뎌졌다. 이어서 오른발도 한 걸음 내디뎌졌다. 어어 하며 걸음을 물리려고 해도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리리스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완전히 정반대다. 이성은 가만히 있는데 본능이 눈앞의 여인을 원하고 있다. 흡사 내 안에 있던 무의식이 더 이상은 갑갑해서 못 참겠다며 뛰어 나와 날 억지로 끌고 가는 듯하다. 애초 일 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터라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들썩거리는 가슴이, 깊은 고저 를 그리는 목울대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이, 여전히 깨물린 입술이 차례차례 눈에 밟혔다. 그리고 비로소 코앞까지 다가갔을 때, 서글프게 치떠졌던 두 눈이 천천히 가늘어지더니 종래에는 지그시 감졌다. 한소영은 턱을 살짝 내밀었다. 나는 거기서 접근을 멈췄다. 바보가 아닌 이상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 “으….” 하지만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나는 지금 단순히 분위기에 이끌 려서 책임지지도 못할 행동을 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여기서 그만둬야 한다. 왜냐면 한소영은, 한소영은…. 그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붉은 입술이 시야를 가득히 물들였다. 아랫입술에 난 잇자국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그렇게 아차 한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린 것과, 얼굴이 살짝 밀려나는 것과, 성숙한 어른의 향기가 콧속을 물씬 찌르는 것과, 입술이 녹아내릴 듯 뜨거운 감촉과 맞닿은 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작품 후기====== 한소영과의 플래그만 회수하고, 에피소드 1 의 최종 무대로 들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가(09시 28분) 후기를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시는 것 같은데, 한소영과의 H신은 최종 무대(전쟁)가 끝난 다음, 즉 에피소드 1의 대미를 장식하는 부분에서 그간 어두웠던 분위기를 반전하는 용도로 서술이 예정 돼 있습니다. 여기서는 말 그대로 딱 플래그 회수까지, 즉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부분까지만 적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오늘 내용 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것도 거의 끝난 상태이고요. 마지막 무 대는 늦어도 다다음 회부터 시작됩니다. AA; [KHAN14] < -- If You Change, One. -- > 시간을 조금 돌려, 김유현이 강철 산맥에서 일을 끝내고 아틀란타로 귀환했을 즈음. “후후….” 타나토스는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의 산을 보며 나지막한 웃음을 홀리고 있었다. 입꼬리를 씩 올린 채 히히 웃는 것이 흡사 당장에라도 덩실거리며 춤을 출 기세였다. 물론 명색이 죽음의 신이 인간처럼 공복이나 식탐을 느낄리 만무하다. 단순한 유희라면 모를까. 그러나 보다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은 어느 존재든 동일하게 갖고 있다. 말인즉 타나토스가 이토록 기뻐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이 정도면 층분해…. 아니, 남아. 채우고도 남아. 흐흐흐흐!” 더 강해질 수는 없지만 손실한 힘을 회복할 수는 있다. 봉인 진의 해제로 그릇은 넓어졌으나, 그릇에 채울 물이 없어 아쉬워하던 타나토스로서는 눈앞에 쌓인 시체의 산이 노다지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북 대륙은 동 대륙보다 평균 수준도 높으니 질적으로 더욱 층족시켜 줄 수 있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타나토스는 롯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느긋한 걸음걸이로 주변 둘레를 돌았다. 미소 띤 얼굴로 이곳저곳을 살피는 모습이 꼭 ‘어디 부터 먼저 먹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는 듯하다. 그렇게 한참을 빙그르르 돌다가, 마침내 결정한 걸까. 걸음을 멈춘 타나토스가 시체 더미를 향해 힘차게 팔을 뻗었다. 그러자 잠시 후, 땅으로부터 붉게 빛나는 진이 그려지며 차곡차곡 쌓여 있던 시체가 순식간에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시체의 육 신과 영혼이 양분으로 변해 몸으로 흡수되는 것이다. “좋아! 왔다, 왔어 !” 타나토스는 아랫배에서부터 간질간질하게 차오르는 기운을 느끼 며 광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아하하하…. 응?”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방금 양분화한 시체만 무려 한 뭉텅이인 터라, 온몸이 취할 만치로 기운이 차올라야 마땅한 일이었다. 한데 어찌 된 일인지, 기대와는 다르게 실제로 흡수되는 기운이 극히 소량에 불과하다. 예상했던 양에 절반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음식을 먹으려는데 내용물은 없고 껍데기만 씹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니 타나토스의 얼굴이 찡그려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거…. 뭐야?” 다른 건 몰라도 타나토스는 약속은 어느 정도 지키는 듯했다. 부질없는 탈출 시도보다 얌전히 있는 걸 선택하자, 앞서 말했던 대로 거의 건드리지 않았으니. 그리고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리리스도 그때 호되게 혼난(?) 이후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중이다. 물론 상황은 여전히 암울하나, 놈들이 우리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불행 중 다행이라 할만했다. “으응….” 살짝 몸을 뒤척이니 문득 작은 침음이 홀렀다. 시선을 내리자 내 팔을 베고 한껏 달게 자는 한소영이 보였다. 세상 모르고 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보는 이로 하여금 몽롱하게 하는 분위기가 발산해 나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졌다. 비단결같이 찰랑거리는 흑진주 색의 머리카락, 몇날 며칠을 갇혔음에도 눈부시리만치 희고 고운 살결,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그린 듯한 긴 눈썹, 색색 숨을 내쉬는 선이 뚜렷한 코, 약간 고집스럽게 닫힌 진한 붉은빛 입술, 그리고 탄탄하면서 야무져 보이는 가슴…. 잠깐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갑자기 심한 죄책감이 엄습해 머리를 탈탈 흔들었다. 이런 불건전한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천벌을 받을 것 같다. 아니면 길 가다가 느닷없이 벼락을 맞는다거 나. “흐으으흠...” 그러한 찰나, 한소영이 갑작스레 숨을 푹 내쉬더니 입맛을 다시며 몸을 한껏 밀착시켜 왔다. 살짝 닿자마자 내 몸이 딱딱히 굳어 버린 건 당연지사. 풍만하고 물컹한 감촉이 가슴을 압박하고 홀러나오는 숨결은 목을 간질일 정도로 바짝 붙어와, 숫제 느릿하게 들썩거리는 등이 보일 지경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얼음 상태로 있다가, 나는 간신히 팔을 뻗어 등글게 구부렸다. 이어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반드러운 등을 살며시 쓰다듬자, 잠결에 감각을 느꼈는지 한소영이 뺨을 내 목에 슬쩍 슬쩍 비비기 시작한다. 깜짝 놀라 손을 떼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문지름이 멎는다. 하지만 다시 쓰다듬으니 또다시 공살맞게 비비고. 뭐지. 설마깨어있는 건가. 꼭 잔망스러운 고양이를 보는 것 같아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나는 한소영의 등을 계속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조용히 상념에 잠겼다. 그러니까 한소영 님이 나한테…. ‘아,드디어 했다.’ ‘어 버?’ ‘입 한 번 맞추기 참 힘드네요.’ ‘어버, 어버버버?’ 기, 기습키스를 하신 날. 흠흠. 아무튼, 그날 이후 우리의 관계는 상당히 묘해졌다. 아니, 확실하게 변했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나와 너의 마음을 확인하고, 서로에 관해서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고 해야 하나. 나도 과거에 포로가 돼봐서 알지만, 이렇게 한정된 공간에서 신체가 구속돼 있으면 시간은 지독하게도 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제껏 시간이 얼마나 홀렀는지는 몰라도, 나는 근래 한 번도 지루하다는 감정을 느껴보지 못했다. 나나 한소영이나 한 번 말문이 터지니 이야깃거리가 둑 터진 강물처럼 홀러넘쳤기 때문이다. 한소영은 과거의 자기 자신의 행보에 관해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원했고, 나는 그녀가 현대에 있을때 어땠는지 관심이 있었다. 내가 말하다 지치면 한소영이 이야기하고, 그러다 한소영이 지치면 다시 내가 입을 열었다. 한소영은 내가 해줬던 여러 얘기 중, 성스러운 여왕 유현아와 박 터지게 싸웠던 이야기를 특히 흥미로워했다.(한데, 왜인지 내가 예전에 항상 사고만 치고 다녔던 민폐 사용자였다는 말은 믿지 않았다.) 그리고, 한소영이 홀 플레인으로 넘어온 건 꽃다운 스물세 살. 그녀는 여중, 여고, 여대를 나왔으며, 성적을 인정받아 대학교를 조기 졸업한 후, 집에서 회사를 하나 받아 운영하는 CEO였다고 한 다. 그러던 어느 날, 밤늦게까지 야근을 마치고 개인 오피스텔에 와서 쓰러지듯 잠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소환의 방이 보였다고. 어이없지 않았냐고 물어보니 왜 안 그랬겠느냐며, 기절하고 싶을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었다고 조용히 투덜거렸다. 그러나 곧 나를 보며 ‘그래도 전역하는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소환된 사람보다는….’이라며 외려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더라. 그 외에도 애인은 몇 번 사귀었느냐는 집요한 질문에, 집안이 굉장히 엄하고 보수적이라, 살면서 남자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다고 부끄럽다는 듯이 실토했을 때는 괜스레 기쁘기까지 했다.(물론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곧 후회하고 말았다. 한소영은 초감각으로 내가 기뻐한다는 걸 알아차렸으며, 그 순간 화제가 갑자기 게헨 나의 임신 사건으로 넘어가 버렸다.) 이뿐일까. 마음의 문을 연 한소영이 보여주는 어색한 감정 표현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조금은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며 이야기 꽃을 피우는 동안, 딱 한 번 야릇한 분위기가 형성된 적도 있었다. 나도 한소영을 원하고, 한소영도 나를 원하는 그런 분위기 말이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온갖 신을 찾으면서 애써 참았다. 일단 감히 손을 대도 되겠느냐는 생각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런 곳에서 손발이 묶인 채 관계를 갖는 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이런 곳에서 첫 경험을 하게 하는 것도 싫었고, 악마가 지켜볼지도 모르는데 하는 것도 싫었다. 무엇보다, 굳이 육체로 사랑을 확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해야 하나. 플라토닉 러브니 뭐니 어려운 말은 모른다. 단지 과거에 먼발치서 지켜보기만 했던 여인이 현재 이렇게나 가까이 있지 않은가. 보기만 해도 즐겁고 이야기만 나눠도 행복하다. 이렇게 자면서 내 품에 안겨올 때마다 몸살 날 정도로 가슴이 벅차오르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굳이 섹스를 하지 않아도 온몸은 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기분으로 층만하기 그지 없다. 여하튼 이렇게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한소영은 이따금 좀 더 일찍 말할 걸 이라며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이고는 했다. 아쉬운 건 나도 매한가지였다. 좀 더 정확히 말 하면 무력감, 혹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만 해도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그러 나 한소영과 가까워질수록 살고 싶다는 욕심이, 같이 도시로 돌아가고 싶다는 갈망이 강해졌다. 허나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어떻게 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신체 구속은 물론, 마력과 화정까지 모조리 묶여 있는데 이 상 태로 뭘 어찌겠는가. 더군다나 제로 코드와 교환할 목적으로 인질이 된 이상, 사탄의 감시가 녹록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결국에는 북 대륙이 와줄 것이라 믿고, 형의 능력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이게 얼마나 무책임한 기대인지 알면서도. 하다못해 한소영이라도 무사히 보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한소영의 잠든 모습을 보며 한창 생각에 장긴 와중, 저벅저벅, 저벅저벅. 문득, 바깥으로 여러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소리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리고 약간 빠른 속도로 우리가 있는 곳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구로 눈을 돌리자, 역시나. 입구로 어스름 한 그림자 예닐곱 개가 드러나더니 약간의 거리를 남기고 걸음을 멈췄다. 여섯 놈 전부 마족이었다. “한소영, 한소영!” 한소영을 흔들어 깨운 후, 서둘러 몸을 일으켜 놈들을 노려봤다. 처음에는 사탄의 말을 듣지 않고 몰래 침입한 놈들인 줄 알았다. 과거 서로 한소영을 가지겠다고 악마 쪽에서 내분이 일어났던 만 뭄, 이번에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러나 의심이 의문으로 변하기까지는 오 초의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건…?” 왜냐면 여섯 놈 전부가 품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것이 나와 한소영의 장비라는 걸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 이 걸리지 않았다. 이윽고 가장 선두에 있던 마족이 까닥 머리를 숙이더 니 칠흑색 갑옷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두 팔을 움직여 내 방향으로 조심스레 밀어놓는다. 그 행동에서 일말의 두려움을 느꼈다면 내 착각일까. 그때 였다. < - If You Change, One. - > < 회상(Reminiscence) > 문득 세찬 바람이 불었다. 땅에서 일어나는 흙먼지가 얼굴을 두 드려, 눈을 질끈 감는다. 바람은 곧 멎었으나 눈을 뜨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나,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은 더욱 예민해졌다. 죽음의 공포에 펄 떡거리는 심장도, 파르르 떨리는 입도, 정수리를 어루만지는 추악한 손길도, 그리고 인근의 대지를 밟고 있는 무수한 어둠의 기 운도. 큼! 그때, 땅을 울리는 강한 진동이 무릎을 타고 전해졌다. 몹시 거친 발걸음. “벨페고르 님. 정찰부대의 연락입니다.” 이어서 쇠를 긁는 듯한 불쾌한 음성이 귓구멍을 푹 찔렀다. “뇌제(雷帝)의 출현을 확인했습니다.” 그 순간 벨페고르가 내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었고, 갑작스레 머리가 통째로 뽑히는 듯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아픔은 금세 사라졌다. 방금 들은 믿지 못할 소식에 고통보다는 놀라움이 물밀 듯 밀려왔다. “허!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로 왔어? 아니, 잠깐만. 뇌제 혼자 온건 아니겠지?” “첫 보고를 받자마자 연락이 끊겼습니다. 단 일천 명은 족히 넘는 것같다고….” “일천 명이라. 그럼 해밀 놈들이 모조리 왔을 수도 있겠는데…. 뭐, 알겠다. 바로 상황을 전파하도록. 숫자는 우리가 훨씬 많으나, 절대 방심하지 마라. 그놈들은 몇 차례나 우리와 동등하게 싸워 온, 한명 한명이 얕볼 수 없는 놈들이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발소리는 다시금 멀어졌다. 그리고 난 놀라움을 내색하지 애쓰려 무진 애를 썼다. 형이 온다. 형과 해밀 클랜의 동료들이 날 구하러 오고 있다. 그 순간 두려움에 젖었던 심장에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일었다. 가장 선두에 있던 놈이 갑옷을 내려놓자, 나머지 다섯 놈도 들고 있던 것을 동시에 바닥에 놓는다. 이어서 양옆으로 세 명씩 신속히 물러나 서로 마주 보며 도열했다. 마치 누군가 곧 들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아직 스스로 입을 힘 정도는 남아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누군가가 좌우 일렬로 늘어선 마족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걸어 들어온다. 낯설지 않은 음성이었다. “원한다면 입혀줄 수도 있기는 한데.” 이윽고 한 걸음 한 걸음 느긋하게 걸어오는 형상이 서서히 드러 났다. 씩 미소 짓고 있는 여인은 바로 에르윈이었다. “이게 무슨 속셈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영문 모를 상황이라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실컷 가뭐두다가 갑자기 장비를 돌려준다?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다. “원 말이지? 속셈이라니?” 그러나 에르윈은 이상하다는 듯 오히려 눈썹을 치켰다. “속셈 따위는 없어. 네 형이 곧 이곳에 도착할 거다. 그게 다다.” “뭐라고?” 반문한 찰나, 에르윈이 딱 소리가 날 정도로 손가락을 강하게 튕 겼다. 그와 동시에 손목과 발목을 옴아매던 사슬이 순식간에 풀 려나갔다. 나뿐만이 아니라 한소영도. 일거에 해방된 신체는 갑작스레 되찾은 자유에 적응하지 못하고 균형을 잃었으나, 나는 가까스로 자세를 바로 할 수 있었다. “어차피 길게 말할 시간도 없고, 똑똑한놈이니 이 정도면 층분히 알아들었겠지 . 그럼 얼른 입고 나오도록.” “잠깐…!” “아, 아직 구속 장치를 풀어줄 수 없다는 것쯤은 이해하겠지?” 그렇게 말한 에르윈은 옹을 돌려 입구로 모습을 감췄다. 나와 한 소영은 서로 한참 동안 명하니 바라보다가, 마족이 장비를 건드 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상황이 어찌 된 건지 모르겠으나 빨리 입고 나오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에는 무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느릿하게나마 팔을 뻗었다. 장비는 예상외로 깨끗하게 보존돼 있었다. 거기다 장갑(装甲)은 물론, 무검이나 빅토리아의 영광 등 무기까지 모조리 넘겨줬다. 딱 하나, 엑스칼리버만 빼고. 어쨌든 구속 장치는 차치하고서라도, 마력이 묶인 채 장비를 입으니 확실히 어색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래도 소망의 셔츠 덕분에 큰 무리 없이 움직이는 건 가능해 주섬주섬 걸치고 입구로 나오자, 에르윈이 복도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에르윈은 날 흘끗 홀기 더니 아무 말도 않고 걷기 시작했다. 빠르게 멀어지는 등을 향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가, 그냥 거두고 말았다. 묻고 싶은 건 산더미였지만 우선은 조용히 지켜보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홀렀을까. 우리가 있던 공간은 약속의 신전인 최상층부. 계단을 내려가고 미로를 벗어나기까지 들리는 것이라고는, 휘적 휘적 앞서 가는 에르윈과, 나와 한소영과, 감시하듯 뒤따라오는 마족 놈들의 발소리뿐이 었다. 그러다 문득. 오묘한 기시감이 엄습했다. 이상하다. 이 상황은 분명히 처음 겪는 것일 텐데, 왜 이미 경험해 본 적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죽기 좋은 날이군….” 그때, 느닷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소리가 은근하게 흘렀다. 깜짝 놀라 앞을 바라보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살짝 등을 밀쳤다. “윽!” 그와 동시에 나는 약한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등을 떠밀려서가 아니라 갑자기 시야로 밝은 빛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얼마 만에 보는지도 모르는 햇살은 눈이 저절로 찡그려질 만큼 층분히 따갑고 눈부셨다. 동시에 무겁고 음습한 공기가 아닌, 가슴을 뼝 뚫어주는 맑고 시원한 공기가 코로 밀려들었다. 아직 시야는 하얀색 일색이었으나, 나는 넓은 단상의 중심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직감으로 깨달았다. 약속의 신전은 총 삼단으로 결합한 거대한 건축물이다. 가장 위로는 아치형 지붕과 이어져 있는 교회 건물이, 중간에는 전면이 기등으로 둘러싸인 입구 달린 신전이, 가장 아래에는 좌우로 긴 계단이 난, 두 건축물을 탄탄하게 받쳐주는 높고 두꺼운 단상이. 이 중 나는 하부와 중부 사이에 있을 터. 이윽고 간신히 빛에 적응하고 차춤차춤 시야가 회복될 즈음. 망연히 아래를 내려다보는 찰나, 온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순간적으로 경악성을 지를 뻔했다. 단상 아래 대지에는 무수한 존재가 오와 열을 맞춰 가지런하게 도열해 있었다. 마족은 물론, 남 대륙 사용자도, 서 대륙 사용자도, 요정도 있다. 하얀 구름이 가득 낀 하늘 아래, 찬란한 햇빛을 받으며 모조리 단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광활한 대지를 가득 채우는 엄청난 군세가 한 눈에 들어오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으라. 그만큼이나 죽였건만 아직도 상당 수가 남아있으니. 이뿐만이 아니었다. 보면서 하나느낀 게 있다면, 곳곳으로 묘하게 긴장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내 검작이 맞는다면 이 자리는 나와 제로 코드를 교환하는 만남의 장일 터. 한데 필요 이상으로, 목이 바짝 탈 만큼의 흉흉한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내가 잘못 느낀 게 아니라면. 그나저나 타나토스는 왜 보이지 않는 걸까. 어디 있는 거지? “김유현은 어디쯤 오고 있지요?” 타나토스를 찾으려는 찰나, 에르윈의 음성이 들렸다. 아마 요정 을 의식하고 말투를 바꾼 것 같은데 몇 번을 들어도 적응되지 않 는 느낌이다. “관문은 아~까 통과했다던데. 정찰보고가…. 아, 마침 저기 오네.” 단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던 아스타로트가 무심히 왼쪽 계단을 가리켰다. 공교롭게도 한 마족이 계단을 급하게 뛰어 올라오 더니 큼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부복했다. “보고드립니다. 적의 접근을 확인했습니다.” 접근 확인이라. 이쯤 되면 믿을 수밖에 없다. 사실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정 말로 형이 오고 있었다. “관문은 통과했다고 들었어요.” “예. 약 이십 분 후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인원은요?” “여전히 사천 명 가량 됩니다. 멜리너스 님이 설치했던 워프 게이트로 나왔던 인원과똑같습니다. 이후 여기까지 오면서 더 줄지도, 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찰을 풀어 반경 십 킬로미터까지 샅샅이 뒤진 결과, 특이한 낌 새는 전혀 찾지 못했습니다. 지원군은커녕, 몰래 따라오는 병력이나 우회해오는 병력은 눈 씻고 봐도 없었습니다. 워프 게이트는 멜리너스 님이 진작에 폐쇄하셨습니다.” 그렇게 에르윈이 보고를 듣는 동안, 아스타로트가 살그머니 뒤를 돌아보며 투덜거렸다. “거 참. 관문을 그냥 통과하게 둔 게 잘한 짓인지….” 에르윈은 손짓으로 마족을 물리 친 다음, 고개를 끄덕 거 렸다. “어찔 수 없죠. 그 사내가 미치지 않은 이상 이곳에 단신으로 올 리가 없잖아요? 적다고 볼 수는 없지만, 사천 명 정도는 호위병 력으로 인정 가능한 범위예요.” “그러는 너도 찜찜해서 계속 정찰을 풀어놓은 게 아닌가?” “그렇기는 하지만, 이렇게 탁 트인 초원에서 수작을 부릴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결국에는 둘 중 하나죠. 저게 현재 전력 이거나, 아니면 호위로 데려왔거나.” “…하기야. 놈들이 우리처럼 날개가 있다면 모를까.” 그렇게 말한 아스타로트는 혼자서 키득거리며 웃었다. 전혀 웃기지 않은 농담이었지만, 여하튼 에르윈의 생각은 내 생각과 거의 비슷했다. 분명히 사천 명이라고 했다. 마냥 적은 병력은 아니나, 기실 그 정도로 싸우겠다고 보기는 어렵다. 에르윈은 두 가능성을 제시했으나 아마 후자에 무게를 두고 있을 것이다. 나도 그렇고. 말인즉 형은 결국 교환을 선택했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가슴 한켠이 아릿해졌다. 물론 날 살리겠다는 형의 마음은 이해하고, 나 또한 살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제로 코드를 포기한다고 생각하니 까닭 모를 허무함이 엄습했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지만, 왜인지 그래서는 안될 것 같다는….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 정말로…. 정말로, 이대로 끝나는 건가? “후우우우….” 순간 갑갑함을 이기지 못해 긴 숨을 내쉬고 말았다. 일대는 간간 이 들리는 말소리만 제외하면 한없이 적막했다. 그래서인지 한숨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그때였다. 웅성웅성, 웅성웅성 ! “응?” 돌연 누군가의 탄성과 함께 먼 곳으로부터 돌연히 소란스러운 기척이 들리더니, “…저기, 오는군.” 아스타로트의 목소리를 기점으로, 술렁거리는 기류가 부지불식 간에 사방으로 물결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작품 후기====== 김유현 사탄: 월 웃냐. 사천 명밖에 데려오지 않은 주제에. 마르, 안솔 사탄: 우, 우리에게는 힘을 되찾은 타나토스가…. 게XX, 수 X:=1=1=1=1=1=1=1=1 사탄 : …아 X발. 설마. 이건 진짜 아니지. 김수현 :=1=1=1=1=1=1=1=1 사탄: 웃지 마라. 아직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 로유진 :=1=1=1=1=1=1=1=1 사탄: 아니 개새끼야. 너까지 웃으면 어떡하냐고. < - If You Change, One. - > …온다고? 아스타로트의 말에 홀연 눈을 들고 말았다. 그리고 앞을 바라보 는 순간, 돌연 심장이 멎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왜냐면 먼빛의 아 래로, 정말로 수천의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으니. 단순히 온다는 말만 들었을 때와 직접 눈으로 보는 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뛰어오는 것도, 달려오지도 않는다. 마침내 출현한 사천 명의 북 대륙 사용자는 그저 보통 행군하는 속도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내의 웅성거림은 가일층 심해지는 중이었다. 심지어 선두에 있는 적들은 주춤주춤 물러나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렇게 단상을 기준으로 사오백 미터 앞까지 접근했을 즈음, 비로소 행군이 멈췄다. 조심스레 물러나던 적들은 어느새 학익진과 같은 형태로 북 대륙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북 대륙 진영에서 누군가가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형이었다. 형은 차분히 주변을 돌아보다가, 갑자기 턱을 젖혀 내가 있는 곳을 정확하게 올려다봤다. 형이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심장의 고동이 더욱 빨라졌다. 그때 에르윈이 단상의 끝자락으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오시느라 수고하셨어요.) 양팔을 살며시 펼치더니 조신한 숙녀와도 같이 정중하게 인사한다. (우리는 북 대륙을 환영해요.) (…환영?) 형도 증폭된 음성으로 인사를 받는다. 허나 어던가 모르게 억누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면 내 착각일까. 형은 한동안 날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품속으로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으나 그것이 제로 코드라는 것쯤 은 알 수 있었다. 왜냐면 대 악마들이 작게나마 탄성을 터뜨렸으니까. (역시….) 에르윈은 지금껏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현명한 선택을 할 줄 알았어요. 뇌제.) (저희를 믿고 이렇게 친히 걸음 해주신 점,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에르윈은 긴장된 분위기를 풀고 대화의 장을 마련하려 애쓰는 듯했다. 그러나 형은 단칼에 말을 끊고 오른손을 느릿하게 움켜쥐 었다. (수현이를 보내라.) 구구절절 말할 필요도 없고, 이것저것 잴 것도 없다는 단호한 직구였다. 에르윈은 순간 엄깃했으나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살아 있어요. 그리고 돌아갈 준비도 끝났죠. 보시다시피.) (그럼 보내.) (물론 그럴 거예요. …하지만, 그전에 저희가 받을 게 하나 있지 않나요?) (그전에 받는 게 아니라 그 후에 받는 거겠지. 보내는 게 우선이다.) 형의 말투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어조가 깔려 있었다. 에르윈은 장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대표의 대화가 끊기자 적막하던 분위기가 한층 고조돼 가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에르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요. 그러시겠죠. 후보다는 선을 먼저 차지하는 게 마음이 놓이니까. 그러니 불안해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 생각해요.) 약간 비꼬는 어조로 뇌까리더니 살그머니 팔짱을 낀다. (유세 떨 의도는 없지만…. 저희 쪽 조건은 검토해보셨나요?) 형은 담담히 머리를 끄덕거 렸다. (그 조건들은 저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였어요. 특히, 다섯 번째 항목은 더더욱.) (마지막 조건은 양보의 의미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상황을 대비한 사항이기도 했죠.) (그러니까 직접 말씀하세요.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서로 만족할 수 있을지.) (들어보고 타당하다 싶으면 저희 또한 뇌제의 말을 따르겠어요.) 길었던 에르윈의 말이 끝나자 이번에는 형이 침묵했다. 하지만 두 번째로 찾아온 정적 또한 오래가지 않았다. (확실히…. 좋은 조건이기는 했어.) 에르윈의 말을 인정한 형이 한 걸음 더 앞으로 걸어 나왔다. (처음 들었을 때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지. 무의미한 전쟁을 끝내 자. 솔깃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야.) (후후. 그렇죠. 일종의 예우라고 생각하셔도 좋아요.) 어쨌든 대화의 장은 생성됐다고 여겼는지 에르윈은 기쁜 낯빛으 로 고개를 주억거 렸다. (그래서 말인데. 그 마지막 조건이라는 거….) 그때. (어쩌지? 딱히 생각해온게 없는데.) 갑자기 그렇게 말한 형은, (사실 아무리 생각해도 너흴 믿을수가 없어서 말이지.) (…네?) (그러니 애초 협상 따위, 오히려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 씩 입꼬리를 올리더니 손에 죈 제로 코드를 품속으로 도로 넣는다. 에르윈의 얼굴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형의 말에 적잖은 층격을 받았는지 극도로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얼음처럼 굳어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방금 말은 빼도 박도 못하는 선전포고였다. (그러니까 갖고 싶으면 뺏어봐. 우리도 똑같이 할 테니까.) 그 한 마디에 오르락내리락하던 일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하늘 을 찌를 듯 치솟았다. 이내 무기를 꺼내는 소음과 시위를 당기는 소리로 순간적으로 시끄러워지는 것도 당연지사. “하.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 순간 탄식을 터뜨린 아스타로트가 내 쪽으로 성뭄성큼 다가왔다. “아스타로트. 가만히 있어라.” 에르윈이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으나 아스타로트는 기어코 나를 끌고 가장자리로 걸었다. 그리고 억지로 끓어 앉히더니, 갑작스레 머리칼을 세게 움켜잡는 감촉이 느껴졌다. (어이, 뇌제.) 아스타로트의 분노한 음성이 사방을 왕왕 울렸다. (도대체가 말이야…. 왜 그렇게 뻗대는 거지? 뭘 믿고?) 머리카락을 움켜죈 힘은 시시각각 강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숫제 머리가 들리다 못해 목이 뽑혀나갈 것만 같았다. (그냥 조용히 제로 코드 넘기고. 그냥 조용히 넘겨주는 포로들 받고. 그리고 조용히 꺼지면 될 거 아니냐고.) (그 말은 애초 다른 조건은 이해할 생각이 없었다는 건가?) 형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이죽거리는 음성으로 답했다. 아스타로트는 싱겁게 입을 터뜨렸다. (어휴…. 이래서 벌레 새끼들은 안 돼. 조금만 잘해주면 그냥, 응? 자기들이 아주 신이라도 된 줄 알아요.) 그렇게 말한 아스타로트는 킬킬 웃다가 갑작스레 정색했다. (됐고, 마지막 기회다. 우리도 더 말 안 할 테니까. 교환할 거야, 말 거야? 뭐 동시 교환 정도면 수긍할 용의도 있으니까.) 그리고 살벌한 음성이 귓전을 흐르는 찰나, "!" 문득, 예전의 기억이 뇌리를 번개처럼 스쳤다. 그와 동시에 아까 내려오면서 느꼈던 기시감이 갑작스럽게 강렬해졌다. (참고로 말하자면 네가 여기 제로 코드를 갖고 왔을 때부터 게임은 끝난 거야. 왜냐고? 널 죽이고 빼앗으면 그만이거든.) (닥치고 그 손부터 놓는 게 어때?) 그러는 동안에도 둘의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경고하건대, 물어본 것에만 답하는 게 좋을 거다.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동생의 머리통이 터지는 게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머리카락이 잡힌 고통도, 형의 목소 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아, 그럼 나도 경고하지. 아스타로트? 지금 당장 손 떼는 게 좋을 거다. 죽고 싶지 않으면.) 왜냐면, 왜냐면…. (뭐? 경고?) …그래. 확실하게 있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방금 완전히 떠올랐다. 과거에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확 실히 있다. 그러니까 이 회차가 아니라 일 회차에. 왜 이제껏 잊고 있었던 걸까.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걸. (이게 진짜…!) 그때 머리를 쥐어짜 터뜨리려는 것처럼 손아귀의 힘이 부지불식 간에 강해졌다. 뭄! 그 찰나의 순간, 무섭도록 짧은 침묵을 가르며 무언가가 단상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질척질척한 액체가 뺨을 철썩 때리고, 시야로 붉은 줄기가 물에 탄 물감처럼 번졌다. 액체가 핏물이 라는 걸 깨 달은 순간 눈동자에 힘 이 들어 갔다. “뭐, 뭐야?” 아스타로트도 순간적으로 당황했는지 어느 순간 손아귀의 힘도 풀려 있었다. 이리저리 눈을 돌려봤으나 어떠한 이상 현상도 발 견할 수 없었다. 단, 인근에 서 있던 놈들이 바라보는 곳으로 웬 마족 시체 하나가 널브러져 있을 뿐. “이거…. 아까 정찰 보냈던 농중 한놈 아니야?” 리리스가 망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잠깐만. 정찰 보냈던 놈 중 하나라고? 설마…. 그때 였다. 후우우융, 후우우융…. 불현듯 위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한껏 고양해 뜨거워진 목 덜미를 식혔다. 끼르르르, 끼르르르… ! 이제 곧 벌어질 일을 알고 있다는 듯, 시체를 갈구하는 까마귀의 불길한 울음도 아스라이 들리는 듯했다. 그 순간 돌연히 사위가 어둑해졌다. 종 더 정확히 말하면 먹구름 이 낀 것 같다고 할까. 나는 퍼뜩 눈을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핏물이 눈앞을 어지럽혔으나 머리를 세게 털자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형은 그 누구보다 침착한 얼굴로 고요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뇌신은커녕, 일말의 마력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결국에는 명한 기분으로 천천히 머리를 젖혀 형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 봤다. 펄럭, 펄럭! 그리고 이어지는 거대한 무언가의 날갯짓 소리. 펄럭! 펄럭! 펄럭! 펄럭! 펄럭! 펄럭! 펄럭! 펄럭! 가히 헤아릴 수 없는 날갯짓 소리와 나며 미세한 바람이 몸을 슬 쩍슬쩍 스치기 시작한다. “아…?”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아스타로트는 물론, 대 악마 전원이 화들짝 고개를 치켰다.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전부 하나같이 명한 기색으로 입 을꺽 벌린다. 이건 또 무슨 일일까. 지금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걸까. 머릿속으로 온갖 복잡함이 휘몰아치는 속에서, 나는 믿을 수 없는 기분으로 하늘을 올려 다봤다. 이옥고 일 초도 채 안 되는 순간, “하늘! 하늘에…!” 구름을 푹 헤치며 무언가 거대한 형체가 드러났고, 끼루루루루루루룩 ! 인간의 목소리라 볼 수 없는, 괴물이 울부짖는 듯한 괴성이 하늘을 왕왕 울렸다. “괴,괴조 떼다! 괴조 떼가 나타났다!” 누군가가 고래고래 지르는 비명에 언뜻 정신을 들었다. 맞다. 옛날에 본 기억이 있다. 괴조, 괴조가 맞다. 수십, 아니 수백? 모르겠다. 단 하나 확실한 건, 기천에 가까운 상앗빛 괴조들이 느닷없이 하늘을 빽빽하게 가릴 정도로 나타났다는 것. 그리고 어마어마한 그림자가 단상을 무서운 속도로 덮어오고 있다는 것. _크르_르_르_르_르_르_르• •! 그러 더 니 어 떤 예고도 전조도 없이 끓는 듯한 부르짖음이 하늘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홀로 은은한 푸른빛을 띤, 유난히 커다란 옹 집을 가진 괴조가 나타나 주등이를 꺽 벌렸다. 그 순간이었다. 크롸•롸•롸롸롸•롸롸•! 사납기 짝이 없는 포효가 온 세상을 찢어 발길 것 같은 기세로 장내를 무시무시하게 떨어 울렸다. 이윽고 선두의 괴조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몹시 자연스럽게 지면으로 활강하고, 뒤쪽의 괴조들도 있는 힘껏 날개를 펼쳐 동 시다발적으로 푸른빛 괴조를 따르기 시작한다. 가속까지는 아니었지만, 속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으며 한 마리도 남김없이 땅으로 강하한다. 그 광경을, 무어라 형언해야 할까. 기천에 가까운 괴조 무리가 한꺼번에 허공을 미끄러지듯이 내려 와 착지하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다음 순간, 콰과콰황! 단숨에 지면으로 착지한 찰나,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어마어마 한 층격파가 장내를 뒤흔들었다. «크으으으! ” “으, 으아아아아아! ” 워낙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층격에 대비하지 못했는지 도처에서 비명이 터졌다. 대지가 벌떡 일어나고 폭풍과도 같은 강풍이 사방을 휩쓸었다. 어찌나 층격파가 강한지 심지어 굳건한 단상마저도 지진이라도 난듯 덜덜거리며 흔들릴 지경이었다. 당장에라도 눈을 감고 싶었으나, 한껏 눈을 찡그리면서도 정면을 쏘아보듯이 응시했다. 그리고 나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파편을 동반한 폭풍에 쓸려 우르르 무너지는 적들. 대 전차 지뢰 수백 개를 일거에 터뜨린 듯, 곳곳에서 버섯구름처럼 일어나는 어마어마한 흙 연기. 그리고. 그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홀로 우뚝 서서 나부끼는, 사자 모양이 그려진 눈부신 금빛을 반사하는 커다란 깃발 하나. 말도….”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안돼….” 그것은 툴림없이 황금 사자를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 작품 후7| 실은 얼마 전에 어떤 독자 분께서 코멘트로 말씀해주셨는데, 제 가 항상 월요일마다 쉰다고 하셨습니다. 가만히 휴재 날짜를 헤아려보니 맞는 말씀이더군요. 그리고 내일은 8월 3일로 월요일입니다. 네. 월요일이네요. 하하. 그러므로 내일 8월 3일(월요일) 하루 안 쉬겠습니다. < - If You Change, One. - >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장내를 가득히 물들였던 흙 연기가 서서히 가라앉는다. 그리고 잠시 후. 점차 드러나는 괴조 군단의 위용과, 괴조의 등에서 뛰어내리는 새로운 사용자들을 확인한 순간, 나는 헛바람을 들이 킬 수밖에 없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멀리서 펄럭거리는 깃발에는 분명히 황금 사자 클랜을 상징하는 금빛 사자가 그려겨 있다. 한데, 그뿐만이 아니다. 깃발은 하나가 아니었고, 황금 사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제껏 북 대륙의 전성기는 크게 보면 총 두 번이 있었다. 한 번은 구 북 대륙을 호령했던 황금 사자 클랜을 필두로 바바라를 공략했을 때. 또 한 번은 우리 머셔너리 클랜이 선봉에 서서 아틀란타를 공략했을 때. 그러할진대. 황금 사자는 물론, SSUN, 발해, 북녘, 스텔라, 아크로스 바이노, 멸화랑, 아이리스, 미르, 한울, 높새바람, 싸울아비…. 과거 북 대륙을 이끌며 영광을 이룩했던 클랜들이 이 자리에 총 집합했다. 당장 내가 알고 있는 클랜 상징 기(旗)만 해도 무려 열 개가 넘는다. 거기다 중간중간 예전의 십 강이 보이는 것도 전혀 착시가 아니리라. 모르겠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 단 몇 분 만에 북 대륙의 인원이 기하급수로 늘어났다. 하지만 어떻게…. “아.” 아니, 있다. 방법이 없는 게 아니다. 아로 소원을 이용하면 죽은 사용자도 거주민으로 되살릴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형은 저만한 인원을 모조리 GP로 부활시켰다는 건가? 전쟁을 치르고, 나를 구하겠다고? “하아아아….” 그때 누군가가 탄식에 젖은 긴 한숨을 홀렸다. 아스타로트가 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관문에서 막아야했다고…. 왜 여기까지 들여서는….” 나도 모르게 눈을 돌리자, 가장자리에 여전히 굳은 듯이 서 있는 에르윈이 보였다. 얼굴빛은 창백하기 짝이 없으나 표정 만큼은 극도로 감정을 절제하는 듯했다. “아무래도….” 마침내 에르윈이 나직이 말문을 열었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군.” 이어지는 말에 아스타로트가 에르윈을 흘끗 흘겼다. “어차피 일만 명도 안 되는 수준. 그냥 쓸어버리고, 빼앗으면 그만 이다.” “…그래. 애초야 그랬어야 했다고. 제기랄!” 욕설을 뱉은 아스타로트는 갑갑해 죽겠다는 듯 단상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아하하하하하하하!” 동시에 불현듯 하늘에서 까르르 웃어 젖히는 소리가 사방을 왕왕 울렸다. 왜인지 낯설지 않은 소리 같아 눈을 이리저리 돌릴 무렵, 누군가가 갑작스레 훌쩍 옆으로 뛰어내렸다. 그 정체를 확인한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치뜨고 말았다. “타나토스…!” ‘수현아.’ 약속의 신전에 도착한 이래, 줄곧 단상을 올려다보던 김유현의 눈이 가늘게 이지러졌다. 적의 동태가 갑작스레 이상해지는 기척 이 느껴졌으나, 왜인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동생에 게서 눈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쨌든, 이곳까지 무사 입성하는 건 성공했다. 그러나 냉정히 말하면 오기만 했을 뿐, 아직 무엇 하나 이루지 못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으며, 이제 겨 우 시작이라고 해야 하나. “이봐.” 암담해지려는 기분을 애써 떨치는 찰나, 문득 누군가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을 걸며 왼쪽 어깨를 특 짚는다. 돌아보는 곳에는, 겉 보기로 한 마흔 살쯤 되려나. 서글서글한 눈매가 특징인 멋들어 진 중년의 사내가 빙긋 웃고 있었다. 예전 북 대륙을 호령했던 클 랜, 황금 사자의 클랜 로드였다. “명하니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친구.” 친근한 음성에 김유현이 가는 숨을 홀리며 머리를 끄덕거리는 찰 나였다. “그래서, 저놈들이 그때 서 대륙을 움직여서 전쟁을 걸어온 놈들이요?” 이번에는 오른쪽에서 잔잔한 음성이 물어온다. 언제 왔는지, 전 고려 로드가 팔짱을 낀 채 담담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김유현은 침착히 입을 열었다. “예. 하지만 그뿐만이 아닙니다. 악마는 강철 산맥 공략 때도 타 차원의 존재를 소환하는 수작을 부렸지요. 그것만 아니었다면, 아틀란타를 목전에 두고 고려 클랜이 멸망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 말에 고려 로드의 안색이 딱딱히 굳었다. “…잘알았습니다.” 그리고 나직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더 니 문득 옆을 흘깃거렸다. “그나저나 참 의외요.” “예?” “아니, 당신 말고. 황금사자 로드.” “…응?” 오른팔을 붕붕 돌리고 있던 황금 사자 로드가 옆을 돌아보자, 고려 로드가 싱겁게 웃는다. “설마 당신이 참전을 받아들일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나야 함께 했던 부하들의 원한을 갚는다손 쳐도.” “아아…. 간단해. 살려줬으니까. 그리고 부활도 약속했고. 부탁 한 번에 이 정도면 수지맞는 장사 아닌가.” “뭐,그렇기는 하지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서로 으르렁거리지 말자고. 나 참, 고작 내분으로 황금 사자가 멸망했다니…. 대강 듣기는 했지만, 아직도 이 해가 안가.” “허! 꼭 당신은 잘못 없다는 것처럼 말하는구려.” “뭐야?” 고려 로드가 빈정거리자 황금 사자 로드가 발끈하며 외쳤다. 그 러나 곧 흘깃 놀라며 물러서고 말았다. 홀연 굉장히 긴 지팡이 하 나가 코앞으로 불쑥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거 뭐가 이렇게 시끄럽나!” 약간 쉬었으나, 마력이 층만한 목소리가 거세게 호통친다. 이내 지팡이를 거두고 휘적휘적 걸어오는 이는, 다름 아닌 전 북 대륙의 수호자이자 대모라 불렸던 사용자, 손분례였다. 손분례가 주름진 눈으로 노려보자 쯧쯧 혀를 차자, 황금 사자 로드가 머쓱히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니…. 저놈이 먼저….” “시끄러워! 기껏 살아나 놓고서, 지금이 투닥투닥싸우기나 할 때야?” “살아나기는 그쪽도 마찬가지….” “이 영감태기가! 조용히 안 해 !” 버럭 외친 손분례가 돌연 위협적으로 휘두르던 지팡이로 하늘을 가리켰다. 이옥고 동시에 머리 젖힌 세 사내의 시야에 공중으로 우수수 떠오르는 마족 군단이 밟혔다. 크롸롸롸•롸•롸롸•롸•! 그러자 괴조 우두머리 또한 힘찬 괴성을 토하며 힘껏 날개를 펼쳤다. 이미 상대가 공중을 점거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 은 터라, 지체 않고 움직이려는 것이다. 그 찰나의 순간, “저,적의 공격이 시작됐습니다!” 전방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적진으로부터 치솟은 무수한 화살이 허공을 가득히 메우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흐르자, 아 까부터 화살을 겨냥하고 있던 궁수들이 명령을 받고 모조리 시위를 놓은 것이다. 말인즉. 전쟁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방어 마법을… !” 쏜살처럼 쇄도해오는 화살 비를 보며 고려 로드가 황급히 외쳤 다. 그러나 북 대륙도 가만히 있던 건 아니었다. “디펜시브 매트릭스!” 휘이이잉! 홀연 주변으로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시퍼런 빛을 띤 바람이 사방을 광범위하게 감싸더니, 삽시간에 둥그스름한 형태를 갖춰 거대하게 옹을 일으킨다. 그렇게 머리카락이 펄펄 나부낄 정도의 강풍 속에서, 백한결은 이를 악물며 양팔을 활짝 펼쳤다. 그리고 한 번 더 외쳤다. “되비침!” 그 순간 바람으로 이루어진 장막이 새하얀 빛을 발하는 것과, 곡 선을 그리며 하강하는 화살이 막에 부딪히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오호…!” 황금 사자 로드는 숨기지 않고 탄성을 터뜨렸다. 당장에라도 북 대륙을 뒤덮을 것 같던 화살의 향연이, 모조리 장막에 가로막힌 것이다. 거기다 날아오던 속도 그대로 적진으로 튕겨 날아가기까지. 물론 개중에는 보호막을 부수고 들어온 것도 없잖아 있었지만, 마법사나 사제의 방어 마법으로 층분히 막을만한 수준이었다. 그리하여 한 차례 공격이 끝난 후. “…시작됐군.” 하늘로 우르르 솟구치는 괴조 군단을 보던 손분례는 명하니 서 있는 김유현의 등을 쿡 찔렀다. “자네!” “예?” “이미 적들은 움직이고 있어. 그리고 이 전장의 지휘관은 바로 자네고. 한데, 계속 명 때리고 있을 건가?” “물론 아닙니다.” 김유현은 담담히 대답했다.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이지, 머릿속은 이미 맹렬하게 회전하는 중이었다. 현재 적의 전력은 총 넷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서 대륙, 남 대륙, 마족, 요정 . 이 중 서 대륙과 남 대륙은 어떻게 해볼 수 있다손 쳐도, 나머지 둘이 문제다. 괴조 군단만으로는 공중에서 공격해오는 중급 이상 의 마족들을 막기 부족한 감이 있으며, 요정의 정령 소환도 결코 만만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기자….’ 이길 수 없다면 애초 오지도 않았다. 아니, 그랬다면 그냥 얌전히 협상에 응했을 터. ‘이겨야 한다…!’ 하지만 이길 자신이 있으니 여기까지 왔다. “적의 움직임이 포착됐습니다!” “서 대륙과 남 대륙이 정면으로 치고 들어오는 중입니다!” “마족들이 공중으로…!” “요정의 정령 소환이 감지…!” 생각하기가 무섭게 연달아 보고가 들어왔다. 화살 공격이 막히자 드디어 적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는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어, 김유현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우선 두 분께서는 서로 힘을 합쳐 정면으로 들어오는 적을 막아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응? 막기만 하면 된다고? 겨우?” “겨우 인지 아닌지는 붙어보시면 알 겁니다. 단, 할수만 있다면 밀어 내주시는 것도 좋습니다.” “허 참!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는데…. 뭐, 좋아. 한 번 해보자고.”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던 황금 사자 로드가 입꼬리를 씩 끌어올 린다. 그리고 성큼성뭄 앞으로 걸어나가, 창을 치키며 우렁차게 외쳤다. “황금 사자 궁수 부대 ! 앞으로!” 그러자 서른 남짓한 인원이 움직이는 걸 시작으로, 전방의 인원이 일사불란하게 진을 짜기 시작한다. 김유현이 구 북 대륙 사용자를 살리겠다고 결정한 건 총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우선은 전투 경험이 현재 정예 사용자와 거의 맞 먹을 정도로 풍부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호 클랜에 한해서 이기는 하나, ‘황금 사자’ 라는 말 한 마디에 모든 명령 체계가 통일돼 있다는 점이었다. 즉 일단 전장으로 데려올 수만 있다면, 얼뜨기처럼 우왕좌왕하지 않고 조직적으로 움직여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리고 구 북 대륙 인원은 실제로 김유현의 계산에 기대 이상으로 부응해주고 있었다. “윗들하고 있나! 활줄이 늘어질 만큼 마음껏 퍼부어줘라!” 익숙하게 지휘하는 황금 사자 로드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김유현은, 이윽고 품속에서 통신 구슬 하나를 꺼냈다. 곧장 마력을 홀려 넣자 구슬이 말간 빛을 뿜으며 영상이 생성된다. 장시 후, 영상속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네. 큰아버지. 기다리고 있었어요.) (음…. 예. 실은 방금 요정이 정령을 소환한다는 보고가 들어왔습 니다.) (그런 것 같아요. 저도 보고 있어요.) (•••정말자신 있습니까?) 김유현은 반 박자 늦게, 그리고 약간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무엇이 자신 있느냐는 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여인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마구 끄덕거 렸다. (그럼요. 저번에는 있는지도 몰랐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알고 있는이상, 확실하게 가능해요.) (하지만….) (믿어주세요. 제발. 저는 그들의 여왕입니다.)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시선은 저희가 최대한 끌어볼 테니까, 적당한 기회를 보다가 접촉해주십시오.) 간절하기 그지없는 청에 김유현을 결국 미안하다는 투로 부탁하 고 말았다. 그러나 여인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한편, 같은 시각. 바야흐로 전조 없는 최후의 전쟁이 막 기지개를 켤 무렵. 연합군의 진영은 악마 십사 군주는 물론, 대 악마까지 모조리 전장으로 나가 있었으나, 에르윈만큼은 여전히 단상에 남아있었다. 하기야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전쟁이든 명령을 내릴 지휘자는 필요하며, 이 높은 단상은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적격인 장 소였기 때문이다. 현재 에르윈이 하달한 명령은 금번의 전쟁에서 북 대륙을 깨트렸 던 전략과 거의 비슷한 골자였다. 우선 서, 남 대륙과 하급 마족으로 정면에서 공격하고, 중급 이상의 마족은 최대한 빠르게 괴조를 처리한 후 공중에서 지상군을 원호한다. 그리고 상대 진영이 차차 어지러워지기 시작하면 요정과 정령을 시켜 측면에서 친다. 예전과 상황이 달라진 이상, 이대로라면 악마의 승리는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르윈의 두 눈은 까닭 모를 초조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디지…?” 사탄의 장점 중 가장 큰 하나는 바로 어느 상황에서도 방심하지 않는 것이다. “무슨 생각이지…?” 말인즉 그 정도의 협상안을 거부하고 먼저 선전포고를 날릴 정도라면 분명히 모종의 수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기에 두 눈은 공격 지시를 내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관찰하는 중이었다. 그때 였다. 정확히는 상대 진영에서 느닷없이 특 튀어나오는 한 명을 발견한 순간, “…뭐, 뭐?” 사탄으로서는 드물게도 말을 더듬었다. 왜냐면 그 여인은 사탄도 익히 알고 있는 이였으니까. 어찌 모를 수 있으라. 김수현 다음으로 요주의 인물에 올랐던 사용자인데. 한데, 서둘러 방진을 짜던 북 대륙 진영에서 웬 여인이 홀로 달려 나왔다. “혼자서…. 나온다고…?” 전장 한복판이라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자기 자신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실로 미쳤다고밖에 볼 수 없는 광경이 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아차!” 날카롭던 에르윈의 눈동자가 부지불식간에 찢어질 듯 치떠졌다. 바로 이 순간, 사탄은 통한의 실수 두 개를 저질렀다. 첫 번째는 김유현의 선전포고와 갑자기 출현한 괴조 군단에 정신 이 팔려, 안솔의 존재를 뒤늦게 떠올렸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이제 막 안솔에게 시선을 집중해버려, 다른 방향으로 몰래 빠지는 여인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 (죽여어어어어어어!) 어찌나 급했으면 에르윈은 포효에 가까운 고함을 질렀다. 고성에 엄깃한 마족들은 이내 홀로 달려 나오는 안솔을 발견, 곧 장 선회를 엄추고 땅을 향해 쏜살같이 쇄도했다. 그러나 늦었다. 늦어도 이미 한참이나 늦었다. “에이이잇!” 안솔은 앙증맞은 비명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장하기 짝이 없 는 얼굴로 한 자루의 검을 하늘 높이 치켰다. 이옥고 순백의 검은 눈부신 햇살을 반사하며 땅으로 힘차게 내리꽃혔다. 그 순간이 었다. ======작품 후기====== 죄송합니다. 항상 월요일에 쉬다 버릇하니 옹이 영 따라주지를 않았습니다. T.TT 계속 쉬고 싶다는 생각은 드는데, 그래도 억지로나마 연재를 마 치 니 뿌듯하기는 하네요. 저는 월요병에 이긴 것입 니다. 하하. …그런데 말이죠. 실은 코멘트 하나가 제 멘탈을 완전히 붕괴시켰습니다. 동X 님 : 로유진을 로유미로 부르면 싫어하는 게 당연합니다. 예 로부터 진선미 라고 해서 미 보단 진이 여성대회에서 일등을 의 미했죠. •••네. 인정합니다. 아뇨 진선미를 인정한다는 말이 아니라, 참 참신한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아무튼, 확실히 신선하기는 해요. 그런데 한 번 여쭙고 싶습니다. 꼭 이러셔야 했는지요. 사실 로유미는 제 아이디와 다르니 인정을 안 하면 그만인데, 이 코멘트를 보고 로유진이라는 닉네임 자체에 부담감이 생겼어요. 로그인할 때마다 제 닉네임을 보면 저 코멘트가 떠올라요. 그리 고 모니터에 머리를 박죠. 진짜로 바꾸고 싶은 심정입니다. 한데, 재밌다고 같이 웃으신 독자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이제 곧 완결이니 그만 종 하자고 말려주는 독자 님은 한 분도 안 계시던데! …좋습니다. 저 코멘트는 제 정신을 산산이 조각 낸 아주 훌륭한 선전포고였 습니다. 그토록 피하고 싶었건만, 그렇게나 원하신다면, 제 3차 로리 전 쟁,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선공을 받았으니, 응당 돌려드려야 도리이겠지요. 아, 독자님들. 깜빡 잊고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는데요! 실은 게XX, 수X 등장 예고는 이벤트성 출현이었습니다. 말인즉 그 둘이 없어도 전쟁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작품의 흐름상 게XX와 수X의 등장이 정말 괜찮은지, 다 시 한 번 심도 깊이 검토해볼 예정입니다. 절대로 저 코멘트 때문은 아닙 니다. < - If You Change, One. - > 마족이 거칠게 뻗은 손톱이 안솔에 닿을락 말락 하는 즈음. 번쩍! 그 찰나의 순간, 땅에 꽂힌 검이 삽시간에 백열(白熱)했고, 새하얀 빛무리가 갑작스럽게 폭렬한다. 다음 순간, 폭발적으로 터진 빛은 하나의 기등이 되어 수직으로 웅장하게 솟구쳤다. 우주까지 단숨에 돌파할 기세로 치솟더니, 하늘에 닿자마자 창천을 자신의 빛깔로 화려하게 채색한다. 화아아악! 누가 여기서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그야말로 오 초도 되지않는 시간에 온 세상이 희멀건 한 빛으로 물들었는데. 이 어마어마하고 웅장한 위용에 가까이 있던 안솔과 마족은 물론, 다음 전략을 생각하던 김유현도, 초조하게 안솔을 응시하던 에르윈도…. 아니. 장내의 전원이 눈부심을 이기지 못해 눈을 감고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그에 따라 막 불붙으려던 최후의 전쟁도 자연스레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안솔이 이루어낸 미지의 현상은, 그 정 도로 압도적인 위세를 드러내고 있었으니. 사르르르,사르르르…. 장시 후, 일대를 점령한 빛이 서서히 사그라지는 것과 함께 반짝 이는 빛 가루들이 땅으로 우수수 떨어진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빗발친다는 표현이 적당할 만큼 비정상적인 속도였다. 가히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빛 가루가 일제히 땅을 뒤덮는 광경은 거의 장관에 가까울 정도로 아름답다. 그러한 찰나, 또 한 번의 변화가 일어났다. 땅으로 가라앉은 빛 가루들이 곳곳에서 신속하게 뭉치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스미듯이 번져서, 모종의 형상으로 재 구성되는 것이다. 얼굴이, 두 팔이, 몸이, 두 다리가, 심지어 무기와 갑옷까지. 온통 빛으로 이루어지는 것들이 전장에 새로이 탄 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작업마저 거의 완료됐을 즈음. 안솔의 주변으로 은은한 빛의 여운을 흘리는 형상, 아니 인간이 등글게 둘러싸듯이 서 있었다. 그 수만 해도 무려 수천. 물론 겉보기에는 전신이 반투명해 살아 있는 인간이라 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육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영혼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온몸에서 넘칠 듯이 흘러나오는 거룩하고 경건한 기운은, 그들이 인간 이상의 존재라는 점을 검작하게 하고도 남는다. 안솔은 여전히 기도하는 자세로 끓어앉아 있다. 이내 그녀를 에워싼 무리 중, 연갈색 머리카락의 사내가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 드디어 불러주셨군요. 은인이시여. 이윽고 호의 가득한 웃음과 마주하는 순간, “아…!” 안솔의 명한 얼굴에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기색이 역력해졌다. - 하도 불러주지 않으셔서, 설마 잊어버리신 게 아닐까 걱정했습니다. 하하. 능청스레 말하는 사내는 입만 뻐끔거 리고 있는 안솔을 보며 다시금 상냥한 미소를 머금었다.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 것 같으나 그 렁그렁한 두 눈은 감사하다는, 와줘서 고맙다는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 너무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 제가, 아니 오히려 저희가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야 용이 장든 산맥에서 입은 은혜를 갚을 기 회가 생겼으니까요. 그랬다. 이 갑작스럽게 발생한 현상의 정체는, 다름 아닌 ‘맹세의 검’의 발동이었다. 『맹세의 검 (고대를 넘어서는 아득한 신화 시절. 용과 인간은 대륙의 주도권을 놓은 대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리하여 신화 속의 영웅들은 광휘의 사제가 이뤄낸 기적으로 억겁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 습니다. 맹세의 검은 영웅들이 빛을 인도해준 구원자에 맹세한 일종의 서약입니다. 사용자는 단 한 번, 스스로 원할 때 신화 속의 영웅들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해방된 영웅들은 비로소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으나, 구원자가 호출할 시 일말의 망설임 없이 달려올 것입니다.) 용이 장든 산맥에서 기적으로 망령을 구원하고 얻은 한 자루의 검. 안솔은 여태껏 아끼고 아껴온 이 장비를 가장 중요한 상황에 서, 가장 중요한 때 사용한 것이다. 기실 지금이야 거주민의 위상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홀 플레인의 황금기였다는 고대조차 거슬러, 아득한 신화 시절에 존재했던 인간들은 현재의 거주민과 완전히, 백팔십도 궤를 달리하는 이들이다. 구구절절 말할 것도 없다. 그 강력하다는 용들과 대륙의 지배권을 놓고 다틀 정도의 실력자들이며, 끝내 승리를 쟁취한 존재들 이다. 그러한, 한 명 한 명 영웅이라 불렸던 인간이 무려 수천이나 소환됐다. 이만한 전력이 전장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는 안 봐 도 비디오였다. -그럼 저희가 어떻게…. 전장의 한복판에 소환됐음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여유를 잃지 않으며 사방을 돌아봤다. 그때였다. “고대의 망령이 현세에 무슨 볼 일이지요?” 불현듯 울리는 에르윈이 외침이 적막하기 그지없던 침묵을 날카롭게 깨트렸다. 사내는 잠시 의아한 기색을 보였으나 금세 표정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온 단상을 올려다보며 느긋이 입을 열었다. - 고대의 망령이라. 썩 듣기 좋은 말은 아니군요. “툴린 말은 아니니까요. 고대도 아니고, 신화 시대의 잔재가 아직 남아있다니….” 에르윈의 음성은 언뜻 냉정하게 들렸으나 암암리에 불안으로 떨리고 있었다. 맹세의 검이 발동한 순간, 에르윈은 본능적으로 소환된 존재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용이 장든 산맥에 해놨던 안배에는 사탄의 입김도 어느 정도 들어갔었기 때문이다. “한 시대에서 발생하는 사건에는 그 시절만의 이유와 사정이 있는 법. 하지만 그대들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어요.” 그런 만큼 에르윈은 자기도 모르게 필사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가볍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건만, 저 정도의 전력이 갑자기 상대 진영에 합세하면 전황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하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라도 막아야만 했다. “돌아가세요.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당신들은 이 시대에 끼어들 자격이 없어요. 순리에 맞지 않는다는 건 스스로도 알고 있을 텐데요?” - 하하하하. 잠시만요. 아까부터 뻔지르르하기만 한 헛소리만 하고 있는데. 지금 하는 말이 얼마나 궤변인지 스스로 알고 있지 않습니까? 사내가 구변 좋게 받아치자, 에르윈의 입에서 저절로 큭 소리가 나왔다. 정곡을 찔린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손 놓고 보기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안타깝네요. 수천 년 동안이나 고통받다가 간신히 해방됐으면서. 여기서 자깃 잘못하다 소멸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토록 그 리워하던 마음의 고향으로 갈 수 없을 텐데요?” 맹점이라면 나름 맹점이었다. 그러 나 사내는 조금도 흔들리 지 않았다. - 우습군요. 그 따위 말에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라 생각했습니까? 진정으로 그렇게 여겼다면 실로 실소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차갑게 조소하며 손에 쥔 지팡이를 천천히 내밀었다. 그러더니. - 그리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말입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한껏 낮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어차피 두 번, 아니 세 번은 죽었던 목숨입니다. 은인을 위해 싸우다 무로 돌아간다면 그것 또한 무척 값진 일이겠지요. 우리는 기쁘게 소멸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어지는 차분한 음성에 에르윈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요?” - 그대는 아마 모르겠지요. 사내는 희미하게 웃었다. - 그래요. 말 그대로 우리는 망령이었습니다. 옛날을 회상하는 걸까. - 평화를 되찾겠다는 단 하나의 신념조차 잊은 채, 수천 년 동안 산맥을 배회하던 망령. 아스라한 음성이 흐르는 속에서, - …하지만. 사내는, 문득 안솔을 응시했다. - 지금 이 자리에는 그런 우리를 알아주고, 진심으로 위해주었으 며, 억겁의 고통 속에서 해방해준, 오직 유일한 분이 계십니다. - 우리는, 그 고마움을 아직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사내는 다시 단상을 바라보며 또렷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 이게 바로 우리가 이 전장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는 증거이며. 바로 그 순간, - 또 기필코 싸워야 하는 이유입니다. 영웅들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순식간에 무기를 뽑고 자세를 잡 는다. “무슨…!” 무어라 외치려던 에르윈은 순식간에 전투 태세에 들어가는 영혼 들을 보며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사내 또한 더 대화할 가치도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두고 조용히 시 선을 거둔다. 그리고 말했다. - …전우들이여. 드디어 우리의 진정한 마지막 전쟁의 막이 올랐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강력한 용의 힘에 짓밟히고, 같은 인간마저 등 돌려 배신하는, 자그마한 빛조차보기 어려웠던 암흑의 시대가. - 우리가 용과 최후의 일전을 앞뒀을 때를 기억하는가?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그들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산맥으로 들어가는 걸 자청했다. 다시 살아 돌아오기 어렵다는걸 알고 있으 면서도. - 긴 말은 않겠다. 두려운 자들은 바로 떠나라! 잡지 않겠다! 살아생전 모든 것을 바쳐 싸웠다. 믿었던 지휘관에게 뒤통수까지 맞았다. 사후에도 수천 년 동안 산맥을 외로이 떠돌아야 했다. 응당 누려야 할 것을 누리지 못하고, 세상에서 까맣게 잊혔었다. 한데, 비로소 해방된 지금. - 하지만 그때 간직했던 신념이 아직 남아 있다면…!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에라도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구원자의 부름에 화답한 신화 속의 영웅들은, ‘은 혜를 갚겠다’는 새로운 신념 아래. - 모두 무기를 들어라! 다시 한 번 싸우는 길을 선택했다. 어쩌면 유수의 기다림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영원한 소멸조차 두려워하지 않고서. 일말의 주저함 없이 하늘로 치솟은 각양각색의 무기들이 그 방증이리라. 실로 얄궂은 일이 아닐까. 그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죽음 후의 영면을 갈망했을 뿐이건만, 그들의 삶은 결국 살아서도 죽어서도 전쟁으로 시작해서, 전쟁으로 끝난다. - Drrrrrrr…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사내는 뒤를 돌아보지 않 았다. 굳이 보지 않아도 동료들이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 알고 있 는지, 그는 반쯤 들었던 팔을 한껏 치 켰다. 그리고 더없이 홀가분한 얼굴로 힘차게 외쳤다. - Ea - Yaaaaaal! 그리하여. 거대한 함성이 사방으로 왕왕 울려 퍼지는 동시에 에르윈의 입에서 이가는 소리가 흘렀다. 영혼들이 최후의 전투를 맞이해 환호하는 순간을 기점으로, 잠깐 엄췄던 전장이 다시 흐를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악마 진 영에는 전혀 좋지 못한 쪽으로.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르윈은 차가운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른다기보다는, 전략을 수정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해야 하나. 실제로 에르윈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냉정히 말하면 전황은 더는 유리하다고 볼 수 없다. 영웅이 소환된 후 거의 비등비등해졌다. 이 말인즉, 아직 크게 불리한 수준은 아니라는 소리다. 연합군의 전력은 아직 건재하거니와, 무엇보다 비밀 병기인 봉인 해제된 타나토스까지 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저번 전쟁 때 얻은 시체의 팔 할을 몰아주지 않았는가. 단지 여유 전력이라 생각했던 요정을 다른 곳에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울 뿐. ‘포위망은 무조건 유지해야 하는데…. 어찔 수 없지. 여차하면 타나토스도 있으니까. 쯧: 결국, 에르윈은 요정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원래는 중급 이상의 마족들이 상대의 본진을 교란하는 사이 측면에서 후려칠 계획이었지만, 저 영혼들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이긴다고 장담은 못 하지만, 적어도 시간 벌이 정도는 할 수 있을 터. 그러나 에르윈은 과연 알고 있었을까. 일련의 사태에 신경을 쏟는 동안, 요정 쪽에서도 모종의 사건이 벌어졌음을. “에르윈 님!” 공교롭게도 소식이 왔는지 한 마족이 계단으로부터 헐레벌떡 뛰 어 올라왔다. “큰일 났습니다!” “큰일?” “요, 요정들의 동태가 이상합니다! 아니 ! 지, 직접 보셔야…!” “…뭐라고?” ======작품 후기====== 구 북 대륙, 맹세의 검, 요정, 그리고…. 아무튼, 에피소드 1 도 서서히 끝날 기미가 보이네요. 기분이 싱숭생숭해요. < - If You Change, One. - > 한편, 같은 시각. 요정 진영은 약속의 신전을 기준으로 우측에 편재된 상태였다. 에르윈의 지휘 아래, 전령이 오는 즉시 적의 측면으로 치고 들어 갈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요정 장로는 맹세의 검이 발동하기 전까지 차분히 기회를 엿보던 중이었다. 한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웅성웅성. 맹세의 검 발동 전후로 요정 진영의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저,저분은…?” 말도 안돼….” 전운으로 긴장된 분위기가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요정들의 시선은 모조리 한 곳으로 쏠렸으며, 얼굴빛은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심지어 어느 요정은 땅에 털썩 주저앉더니 멍하니 입을 벌리기까지 했다. 깜짝 놀라 달려오는 장로도 마찬가지. 약 십 미터 밖으로 자신들 을 지그시 응시하는 요정을 보자마자 동작이 우뚝 멎으며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이게…. 무슨…?” 황망해 함은 물론, 목소리조차 떨려 나온다. 순간적으로 무릎이 꺾였으나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만큼 장로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어느 요정보다 지고지순했던 마르가리타의 기운을.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가 자신들이 여태껏 그토록 찾아 헤매왔던 전대 요정 여왕의 적통이라는 사실을. “아니야….” 단지. “이럴 리 없어…. 분명히 니뮤에가 억류되어 있다고….” 너무나 갑작스럽게 맞이한 사태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뿐. "쯧." 그 순간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는 소리가 귓전을 예리하게 찔러와 장로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이윽고 마르가 무섭게 노려보며 한 걸음 내디디니 요정 전원이 동시에 한 걸음 물러난다. 사시나무 떨 듯 덜덜 떠는 요정도 하나 둘 생겨났다. 상대가 뿌리는 기운은 친숙하게 느껴지는 한편, 온 몸을 짓누르듯 강하게 압박해오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고개 처박고 빌빌 기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이는 요정이라는 종족이 원래 갖는 본성에 기 인한다. 요정에게 있어 여왕이라 함은, 태어날 때부터 공경하며 두려워하는 무조건적인 경외의 대상이다. 그리고 마르는 더 이상 천진난만한 아이가 아니다. 가시나무 관의 통과의례를 거친 이후, 그녀는 더없이 확실한 요정의 여왕으로 인정받았다. 무엇보다 지금 마르의 정수리에 얹힌 가시나무 관이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여왕을 찾겠다는 일념은 이해하나…. 설마 수백 년이 넘게 매달리는 동안 진실의 눈마저 가려졌을 줄은. 니뮤에한테 조금 듣기는 했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실로 안타까워요.” 이렇게 천신만고 끝에 만남이 이루어졌으나 마르의 음성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하기야 아무리 같은 종족이며 앞으로 이끌어가야 하는 처지라손 쳐도, 마르의 눈에 저들이 곱게 보일리가 만무하다. 왜냐면 사랑 해 마지 않는 아빠가 붙잡힌 것에는 요정들도 커다랗게 일조했기 때문이다. “아니, 아니에요! 에르윈도 그랬고, 저도 몇 번이나 확인했다는 말이에요! 분명히…!” 허겁지겁 말을 잇던 장로가 돌연 아연한 표정을 짓는다. 자신이 왜 필사적으로 변명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인즉 코앞에서 보고 있으나 아직 의심이 가시지 않는다고 해야하나. “미, 믿을 수 없어요. 그래요. 어쩌면 당신이 가시나무 관을 강제로 빼앗았을 수도….” 스스로 말이 안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장로는 미친듯이 고개를 흔들며 안간힘을 다해 부인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일 년도 아니고 십 년도 아니다. 자그마치 팔백 년이 넘는다. 한데, 그토록 찾았던 여왕이 이런 장소에서 갑자기 떡하고 나타나 면 과연 누가 ‘아. 그렇구나.’ 하고 바로 믿을 수 있을까. 허나 애초 첫 만남부터 단단히 어긋난 상태였다. 저번 전쟁이 끝난 후, 동족이 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까닭 모를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마르로서는, 그런 사정 따위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여왕이고 뭐고 깡그리 때려 치우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정말 한심해요. 생각하는 수준이 그 정도니 자기들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지요.” 마르치고는 드물게도 독설이 튀어나왔다. 이어서 두 눈동자에 진한 실망의 빛이 어리자, 장로는 갑작스레 가슴이 심히 미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자, 잠시만요! 잠시만 제 말을 들어주세요!” 장로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으나, “아니요. 더는 듣지 않겠어요. 현재의 당신들은….” 마르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눈을 감았다. “여왕을 모실 자격조차 없는 이들이에요.” 그러더 니 하늘로 오연히 오른팔 뻗는다. “신격, 루미너스의 절대자.” 화아아악! 그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거대한 빛이 비치더니 마르가 서 있는 장소를 환히 물들였다. “일체화.” 또 한 번 곧바로 말을 잇자마자, 휘황찬란한 빛무리가 마르의 전신을 나선으로 휘감아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이옥고 휘몰아치는 빛의 소용돌이는 엄청난 속도로 마르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에 따라 마르의 모습도 점차 변화하기 시작 했다. 얼굴, 양팔, 몸, 두 다리 등이 모조리 하얀색으로 채색되는 동시에 온몸이 기하급수적으로 자라나기 시작한다. 흡사 거인, 아니 그 이상으로 커지는 마르의 형상에 요정들은 물론, 맹세의 검으로 몰렸던 전장의 시선이 모조리 하늘로 올라갔다. “아…. 아아….” 장로는 순식간에 십 미터 이상으로 거대화된 존재를 앞에 두고 망연한 침음만 홀리다가, 종래에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트렸다. 비단 장로뿐만 아니라 오래 산 요정들은 대부분이 비슷한 반응이 었다. 왜냐면 서서히 제대로 된 형상을 갖춰가는 빛무리를 보며 누군가의 모습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저 모습을 어찌 모를 수 있으라. 빛과 어둠의 정령 신, 루미너스(Luminous). 그리고 그 루미너스와의 일체화. 아득한 옛날, 역대 최고라 칭송받은 초대 여왕만이 가능했던. 그러나 그나마도 스스로 침식을 이기지 못해 꽁꽁 봉인하고 말았다는 능력. 오직 전설로만 내려왔던 기록 속의 한 구절이, 지금 이 자리에서 재현된 것이다. “여왕이시여어어어!” 마침내 장로가 애달프게 부르짖으며 털썩 무릎 끓어 엎드렸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망연히 올려다보던 모든 요정이 일제히 무릎 끓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새로운 여왕의 탄생과 신의 강림, 그리고 요정의 경배를 받는 광경은 절경이라 봐도 좋을 정도로 아름답고 웅장하다. 우우우웅! 불현듯 강대하기 그지없는 마력이 천지를 울리며 흐르자, 땅을 쳐다보고 있던 장로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마르는 분명히 ‘여 왕을 모실 자격이 없다.’ 고 말했다. 즉 저 기운이 누구를 향하는 지 안봐도 훤하다. “여왕이시여!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결국, 장로는 목이 터지라 외치며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 루미너스의 재현까지 확인한 이상 믿고 싶지 않아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부디, 부디 분노를 거두어주소서 !”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의 회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오히려 기운은 한층 거대해겨만 가자, 숫제 이마를 쿵 찧으면서까지 외쳤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제가 종족을 잘못 이끌어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습니다! 아이들은 오직 저를 따른 죄밖에 없으니, 제발…!”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로는 순간 전신의 털끝이 곤두서는 기분을 느꼈다. 이어서 주변 풍경마저 가릴 정도의 찬란한 빛이 부지불식간에 드리워지자, 장로는 더 말할 생각도 못한 채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이제 다 끝났다고 여긴 탓이다. 이제야 겨우 여왕님을 만났건만, 한순간의 실수로 팔백 년의 꿈이 물거품이 돼버렸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제 아버지는…. 홀연 웅혼한 음성이 귓전을 부드러이 울리는 동시. “…아?” 장로가 의아한 탄식을 질렀다. 꼼짝없이 빛에 삼켜져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기는커녕, 어머니의 손길 같은 무언가가 온몸을 따스하게 어루만지고 있었으니. - 누군가가 잘못을 저지르면 가장 먼저, 언제나 앞장서서 그 일을 해결하시고는 하셨어요. 분노하시거나 처벌하시는 건 항상 그 다음이었죠. 이어지는 음성에 스리슬쩍 눈을 뜬 요정들은, 순간 깜짝 놀라 탄 성을 질렀다. 왜냐면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온몸에 은은한 빛깔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단순히 겉보기만 변한 게 아니다. 다음 순간, 왜인지 요정들이 아연한 얼굴을 하면서도 하나같이 두 눈을 더듬거리기 시작한다. -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얻고 싶나요? 그때였다. 번쩍! 찰나의 순간, 공포로 얼룩져 있던 요정들의 눈동자가 선명한 색을 뿜는다. 요정의 동태가 이상하다는 소식을 접한 에르윈이 도착한 것도 바로 그 즈음이었다. - 그렇다면, 고개를 들어요. 들려오는 것은 세상에 강림한 신의 음성뿐. 이상한 일이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어수선하던 일대가, 한순간 보고만 있음에도 숨이 턱 막혀올 만큼 적막해졌다. 심지어 괴괴하다고 느껴질 정 도의 무거운 분위기가 흐른다. - 자리에서 일어나, 진실을 추구하는 눈으로 직시하세요. 단지, 에르윈은 거의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무언가 일이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졌다. - 그리고 깨달으세요. 다음 순간, 요정 전원이 무언가에 홀린 듯 하나씩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몸을 돌려 선연히 빛나는 눈동자로 상대를 응시한다. 이윽고 뜻 모를 묵직함마저 느껴지는 수천 쌍의 눈초리와 마주하는 순간. 신화 속의 거주민들이 등장했을 때도 이성을 잃지 않았던 에르윈은, 태어나 처음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현상을 경험했다. 단 단한 망치로 뒤통수를 수십 번이나 후려 맞으면 이럴까. 설마 요정 여왕이 출현한 줄 몰랐던 사탄으로서는 그야말로 꿈에도 꾸지 못한 상황이다. 하다못해 알고 있기라도 했으면 사전에 대비책이라도 마련해 놨을 터. 동 대륙 전투 도중, 안솔이 기를 쓰고 숨겼던 마르의 존재가 드디어 빛을 발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시작되었다. - 그대들의, 우리의 적은 바로 저기 있어요. 여왕의 힘으로 새로이 각성한 요정 일천 명과, 소환 정령들. - 적이었던 상대를 아군으로 만든다…. 그것도 전장에서. 훌륭하군요. 은인과의 약속을 지키러 달려온 영웅들의 영혼, 육천. 크롸롸롸롸롸롸롸! 거인 멸망 후 강철 산맥의 지배자가 된 괴조 군단, 구백 마리. “하! 이거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소원으로 되살아난 구 북 대륙 정예 사용자, 삼천 명. 현 북 대륙 정예 사용자 사천오백 명. 그리하여. “…전군.” 최후의 전쟁에 앞서, “전투준비.” 악마 연합군에 대항하는, 사상 초유의 북 대륙 연합군이 마침내 탄생했다. ======작품 후기====== 몇몇 독자 분들이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아, 바로 알려드리고자 후기를 빌립니다. 839회부터 시작해서, 현재 진행 중인 에피소드의 구분은 오름차 순이 아니라 내림차순으로 가는 중입니다. 즉 앞선 에피소드 8 〜 2까지는 이미 전부 나왔다는 뜻이지요.(소제목을 보시면 아실 듯 합니다.) 즈 에피소드 8 : 839히 〜 845히 에피소드 7 : 846히 〜 853히 에피소드 6 : 854회 〜 860회 에피소드 5: 861회 〜 866회 에피소드 4: 867회 〜 881회 에피소드 3 : 882회 〜 911회 에피소드 2 : 912회 〜 937히(919히 외전 제오|) 에피소드 1 : 938히 〜 현재 연재 중. 이렇게 가고 있는 셈이지요. 그리고 에피소드 1 도 아마 다음 주 안으로 끝날 것 같고요. 그래서 어제 완결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씀을 드린 겁 니다. 부디 층분한 답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 - If You Change, One. - > 비로소 본격적인 개전을 알리는 신호는 지상전이 아닌 공중전에서 시작되었다. 공중을 점거해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려는 중급 이상의 마족들과 괴조 군단이 가장 먼저 맞붙은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단순한 신체 능력은 마족보다 괴조가 더 낫기는 하다. 그러나 수적으로는 마족이 갑절이나 우위에 있으며, 무엇보다 괴조에게 없는 중요한 요소를 하나 가지고 있다. 바로 마력. 즉 중급 이상의 마족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폐허의 연구소에 갇혀 있던 벨페고르가 당시 중급 마족이었다는 걸 고려하면 이 전력의 막강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터. 그런고로 마족들은 육탄으로 부딪치기보다는, 대열을 갖추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마법으로 공격하는 전술을 선택했다. 급변하는 전황을 참작하면 나름 현명한 전략이었다. 서둘러 후방으로 선회한 마족들은 곧장 진을 짜고 정면으로 손을 뻗었다. 이어서 어둠의 기운이 펄떡 요동치는 찰나, 작살 모양의 칠흑색 줄기 수천 개가 무섭게 쇄도하는 괴조 무리로 빗발치듯 쏘아졌다. 이대로 공격을 허용한다면 괴조 군단이 벌집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그 순간이었다. "키르르르…?" 쉬지 않고 다음 공격을 준비하던 마족들이 돌연히 인상을 썼다. 심지어 황급히 회피 기동을 하려던 괴조들도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당장에라도 상대를 집어삼킬 것 같던 마법들이 허공에서 갑작스레 엄춰 섰기 때문이다. 흡사 풀로 단단히 붙여놓기라도 한 듯, 아무리 팔을 휘두르며 용을 써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 갑작스러운 현상의 해답은 공중이 아니라 지상에 있었다. 무수한 영웅의 영혼 중, 금발의 여인이 해맑은 미소로 하늘을 올려 다보고 있다. 다름 아닌 용이 장든 산맥에서 김수현에게 입을 맞추고 사라져 안솔의 분노를 산 영혼이었다. 생글생글 웃으며 왼손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빙그르르 돌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허공에 엄춘 줄기들이 천천히 후진하기 시작하더니, 마치 되감기라도 하듯 하나도 남김없이 도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그렇게 말끔해진 허공을 보며 공중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상대의 마법을 강제로 취소시켰다? 이제껏 듣지도 보지도 못한 능력이다. 캔슬을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지 모르나, 지금 이 순간 마법이 무용지물이 됐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이와 반대로, 괴조 입장에서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자기들을 원호해주는 세력이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우두머리는, 회피 기동을 버리고 곧장 돌진했다. 길이만 팔 미터가 넘는 육중한 체구가 안간힘을 다해 부딪치니 충격을 이기지 못한 마족들이 와르르 튕겨 나가는 것도 당연지사. 그중 한놈이 쩍 벌려진 주둥아리에 걸려 힘껏 씹히자, 뼈 부서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핏물이 폭발한다. 그리하여 두 종이 서로 얽히고설키는 순간을 기점으로 하늘은 완전히 난장판이 돼버렸다. 거기다 마족은 괴조뿐만이 아니라 땅에서 공격해오는 영혼들도 신경 써야 하는 상황. 한때 용을 지겹게 상대한 전력이 있는 만큼, 신화의 영웅들은 지대공 전투에도 일가견이 있는 이들이었다. 결과적으로, 악마 진영 최고 전력이 괴조와 영혼 군단의 연합에 꽁꽁 묶여버렸다. 괴조를 최대한 빠르게 처리한다는 사탄의 계획이 어긋나버린 순간이랄까. 한데, 틀어진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화르르르르르르! 차분히 전장을 살피던 황금 사자 로드는, 문득 들려오는 타오르는 소리에 흘끗 옆을 흘겼다. 그러더니 돌연 안색을 굳혔다. "부, 불 회오리다!" 누군가가 기함한 목소리로 외쳤다. 말 그대로였다. 오른 방향 먼 빛으로 약 이 미터가 넘는 불의 회오리가 가열차게 회전하며 솟구친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무려 기백 개 정도가. 다음 순간, 불의 소용돌이들이 가일층 가속하며 하나둘 미끄러지듯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시뺄건 불꽃을 홑날리며 시시각각 일대를 불태워오는 광경은, 아무리 담이 큰 사용자라도 어느 정도 두려움을 느낄만한 장면이다. 그래서인지 북 대륙 사용자들이 황급히 방어막을 전개했으나, 애초 기우에 불과한 움직임이었다. 왜냐면 불의 폭풍은 북 대륙 진영으로 오기는커녕, 전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그것들은 기나긴 포물선을 그리며 세차게 우회하더니 부지불식간에 서, 남 대륙 사용자들이 있는 장소를 물밀듯 덮쳐버렸다. "뭐, 뭐야! 왜 갑자기… !" "으, 으아아아아아!" 이 갑작스러운 불의 향연은, 안 그래도 무언가 이상해 오도가도 못하고 있던 서, 남 대륙 사용자들의 아우성을 이끌어내는 데 충분하고도 넘쳤다. 설마 아군이라 여겼던 요정들한테 공격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불의 해일이 진영을 휩쓸어버리며 꿈틀꿈틀 춤을 추는 풍경은, 당하는 처지에서는 아닌 밤중에 불지옥이요, 보는 처지에서는 더없이 호쾌하고 장대한 광경이다. 이뿐일까? 아직 불의 회오리는 사그라지지도 않았건만, 우측에서 요정들이 거대한 함성을 지르며 몰려오기 시작한다. 그 수는 언뜻 약 이천 가량에 불과했으나, 느닷없이 사천, 팔천, 일만 이상으로 순식간에 기하급수로 불어났다. 빛, 어둠, 불, 물, 바람, 번개, 땅 등등 각양각색의 정령들이 파도치듯 측면을 후려치고, 요정들은 정령을 앞세우며 화살비를 날리며 뒤따른다. "허…!" 그에 따라 도미노 무너지듯 와르르 와해하는 상대 진영을 보며 황금 사자 로드는 탄성을 터뜨렸다. 호기롭게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약간 긴장하고 있었는데, 한순간 전황이 일변했다. 이글거리는 불길에 얼굴이 벌겋게 된 그는 문득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살아생전 무수한 아수라장을 헤쳐 나온 만큼, 황금 사자 로드 또한 싸움을 아는 자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이 상대를 들이치기 절호조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이만큼이나 멍석을 깔아주는데 어찌 사양할 수 있으라. 더 생각 할 것도 없이 가장 선두로 뛰어 나가더니 기다란 창을 꼬나쥐며 외쳤다. "뭣들 하냐! 가자! 이놈들아!" 그리고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가뜩이나 요정의 기습으로 정신없는 와중, 북 대륙마저 방진을 풀고 공격해 들어오니 상대 진영은 한층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이로써 사탄이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했던 포위망은 산산이 부서진 셈이다. 아니. 공중에서는 마족들이 제 몸 하나 건사하기 바쁘고, 요정은 측면을 찔러오며, 정면 방향으로는 구 북 대륙 사용자들이 치고 들어가는 중이다. 이제는 숫제 포위망이 와해하는 걸 넘어서 반 대로 에워싸인 것과 진배없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큭…!" 삽시간에 반전되는 전황을 에르윈은 부릅뜬 눈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가까스로 이성은 유지하고 있으나, 그뿐이었다. 여유가 사라졌다. 덜덜 떨리는 양 주먹은 현재의 심정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하늘에서는 이빨 자국이 선명한 마족들이 부지기수로 추락하고 있다. 그리고 서, 남 대륙을 저대로 놔둔다면 곧 붕괴할 것은 명약관화였다. 저번 전쟁 때 북 대륙이 무너졌던 과정을 이번에는 악마 연합군이 고스란히 답습하는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차오르는 초조함에 입술을 쉴새없이 짓씹는다. 아까는 그나마 전략을 수정할 여지라도 있었지. "크으…!" 어떻게 수를 내야 하는데, 무어라 지시라도 내려야 하건만. 하지 만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이 난국을 타개할 해답이 떠오르 지 않는다. «크흐으으...!" 그 사실을 인정하자 순간 어마어마한 무력감이 온몸을 무너트릴 듯한 기세로 엄습했다. 흉부를 확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가슴 이 몹시 갑갑하다. "뇌제에에에에에에!" 결국, 에르윈은 쾅 터질 것 같은 머리를 세게 감싸 쥐고 말았다. 그시각. "전군, 좌익으로!"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던 김유현이 마침내 진군 명령을 내렸다. 전황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 풀려가는 중이었으나, 얼굴빛은 그리 밝지 못하다. 왜냐면 이번 전쟁의 최우선 목적은 승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악마는 한 놈도 남김없이 전멸시킬 생각이었으나, 엄밀히 말해서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목표에 불과하다. 김유현 개인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되는 건 김수현의 무사 구출이었다. 설령 전쟁 에서 이겼다손 치더라도 동생이 죽는다면 모든 의미가 사라진다. 그래서 김유현은 애초 단기 결전을 노리고 있었다. 상대를 차근차근 정리하고 멋지게 동생을 구하기까지, 적이 마음씨 좋게 기다려준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막말로 악마는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김수현을 죽일 수 있으니.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 상황은 이미 만들어졌다. 적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남은 인원으로 단상까지 쾌속하게 길을 뚫는데 성패 가 달렸다.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러나 놀랍게도 김유현은 이미 실패를 예상하고 있었다. 딱히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그의 버릇 중 하나가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계획을 세우기 때문이랄까. 무엇보다 김유현이 이곳에서 하나 생소한 감을 느낀 게 있다면 바로 생각보다 적의 숫자가 적다는 점이었다. 누가 그랬는지는 안 봐도 훤하다. 한편으로는, 김수현 본인도 지금쯤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을 터. 만약 구출에 성공해서 검의 군주가 전장에 복귀한다면, 이후 어떻게 될지는 적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만큼 아무리 상황이 이렇다 하더라도, 단상까지 가는 길을 순순히 열어주리라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말인즉 이대로 성공한다면 그걸로 좋다. 하지만 실패하는 순간을 대비한 차선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제부터 그 준비에 들어간다.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그렇게 생각한 김유현이 힘껏 외치자, "응!" 약간 거만함이 섞 인 낭랑한 음성 이 화답한다. 잠시 후, 비비앙은 훌쩍 선두로 나오더니 방정 맞게도 뛰며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뛰는 모습이 어했든, 점차 멀어지는 여인의 뒷모습을 보며 김유현은 일말의 미안함을 느꼈다. 사전에 층분히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기는 했지만, 그녀에게 맡긴 임무는 스스로 생각해도 가혹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때 였다. < - If You Change, One. - >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고요하던 일대가 삽시간에 전장으로 변했다. 얼굴이 뜨겁다. 거세게 휘몰아치는 불 회오리들이 휩쓸고 지나가자 적들의 비명이 귓전을 한가득 울린다. 그 뒤를 각양각색의 정령들이 해일처럼 덮쳐가고 요정들의 원호 사격이 이어진다. 동시에 구 북대륙 진영이 방진을 풀고 정면으로 치고 나오니 서, 남대륙 진영은 자연스레 붕괴. 아무리 엘도라가 강해도 이 정도로 완벽하게 이어지는 연속 공격에는 어쩔 수 없을터. 공중은 더 볼 것도 없다. 용의 잠든 산맥의 영웅들과 괴조 군단의 합격은 거의 완벽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라, 지금 이 순간에도 마족의 시체가 우수수 추락하는 중이었다. 애초 마법을 쓰지 못하고 육탄전을 허용했을 때부터 승부가 난 셈이다. 계속 눈을 감았다가 떴으나 눈앞의 광경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이길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전쟁이 한순간 반전됐다. 사실 아직도 믿기지가 않지만 몇 번을 봐도 보이는 그대로다. 악마 진영에 맞서 결성된 북 대륙 연합군은 그야말로 노도와 같은 기세로 상대를 몰아붙인다. 그리고. 마침내 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형뿐만이 아니라 사천 명 전원이 동시에 좌익으로 빠지며 비비앙이 돌연히 선두로 나왔다. 이어서 질서의 오르도를 하늘높이 들더니 무어라 힘껏 외치는 모습이 잡혔다. 아마 제 삼 군단을 소환하려는 거겠지. 그러자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 순식간에 어두운 운무가 깔리더니, 이윽고 죽음의 기사 수십 명이 연기를 헤치며 튀어나왔다. 한 명 한 명이 기마로 이루어진 베히모스의 군단은 평지에서 최강의 전력을 발휘한다. 단상까지 일직선으로 길을 뚫는 데 이보다 적합한 선택이 있을까.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더없이 초라하게 보이던 병력이었다. 하지만 전황이 일변한 지금, 왼쪽으로 치고 들어오는 사천 명은 더없이 위협적으로 변모했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꼼짝없이 끝났구나 싶었건만. 불가능이라 여겼던 현실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나는 비로소 전신에 힘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온몸에 전율이 스쳤다. 혈관을 흐르는 핏물이 끓는 것 같다. 지금 당장에라도 단상 아래로 뛰어내리고 싶은데, 같이 싸우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가일층 힘을 줘도 구속 장치는 요지부동. 아무리 용을 써도 끊어지지 않는다. 그때 였다. “아•하•하•하•하•하•하•하!” 문득 바로 옆에서 신 나게 웃어 젖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옆을 돌아보자 단상 끝자락에 걸터 앉은 타나토스가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그 순간 갑작스레 숨이 멎는 동시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들끓던 피가 한순간 가라앉는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 잊고 있었다. 이 전황을 다시금 반전시킬 수 있는 악마 진영의 최병기를. “아,정말. 이러니까 옛날 생각나잖아.” 그렇게 말한 타나토스는 느긋하게 전장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흡사 곳곳에 널린 먹잇감을 보며 흡족하게 웃는 맹수 같다고 느꼈다면 내 착각일까. 아니. 착각이 아니다. 봉인이 해제된 타나토스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을 회복했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최소한 아틀란타 전에 등장한 게헨나의 삼분의 일 정도? 거기다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의 범위가 늘어났다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한다. 무엇보다 저번에 기운이 극도로 약해진 상태였을 때도 제대로 막지 못했는데, 이대로 전장에 참가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명약관화였다. 그나마 모든 전력을 하나로 모은다면 모를까. 이렇게 따로따로 상대하는 상황에서는 각개격파 당하기에 십상이다. 탁 까놓고 말해서 지금 타나토스의 전력을 다한 일격을 받아낼 수 있는 존재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타나토스 하나 상대하겠다고 다른 적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으니…. 말인즉, 진퇴양난. “흥, 거의 전역이 위험한 것 같은데〜.” 타나토스는 마치 나 들으라는 듯이 말을 끌더니 검지를 펴 전장을 가리켰다. 그리고 흥얼거리며 집게손가락으로 한군데씩 가리키기 시작한다. “어디.” 처음에는 공중을 가리켰다가, “부터.” 그 아래 구 북 대륙 사용자 진영으로 내리더니, “갈까?” 돌연 요정 진영으로 돌렸다. 검지 끝은 신으로 화한 마르를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이윽고 날 흘깃거리며 배시시 웃는 꼬락서니를 보니 진심으로 저 손가락을 휘어잡아 부서트리고 싶어졌다. “…요?” 그때 느닷없이 검지가 오른쪽으로 획 돌아갔다. 다음 순간, “좋아, 정했다!” 타나토스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몸을 한껏 웅크렸다가, 단상으로부터 필꺽 솟구쳤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아래로 쏜살같이 쇄도하며 오른손을 어깨 뒤로 한껏 당기는 중이었다. 날아가는 방향에는 베히모스의 뒤에 탄 비비앙이 있었다. 아차 하기도 전에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타나토스는 깔깔 웃어 젖히며 근접한 비비앙을 향해 독사처럼 주먹을 내질 렀다. 그러자 어둠의 기운이 단박에 뭉쳐 요동치더니 깜짝 놀라 고개 돌리는 비비앙을 향해 폭발적으로 쏟아진다. 싸늘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치솟는다. “비비아아아앙!」”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찰나, 불현듯 뒤통수에 강한 충격이 느껴지며 순간적으로 고꾸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시야가 새하얗게 채색되며 턱이 단상에 힘차게 부딪친다. 숨이 턱 막혀왔으나 어떻게든 일어서려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그럴수록 어깨와 등을 짓누르는 압박감만 한층 강해졌다. 그러한 찰나. 꽈앙! 갑자기 무시무시한 굉음이 귀를 찔렀고, “아….” 나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피 분수를 포물선처럼 뿌리며 허공을 훨훨 나는 비비앙을. 왜. 왜 날고 있는 거지? 왜 힘없이 땅으로 떨어지는 거지? 저 엄청난 핏물은또뭐고? 어째서 일어나지 못하는 건데? 빨리 일어나서…! 그 순간, 쿵! 왜인지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들어 단상에 머리를 처박고 말았다. -이런…. 한창 전장을 질주하던 베히모스는 씁쓸한 음성을 뱉으며 이를 부딪쳤다. 한 손에 들고 있는 장검은 반으로 부러졌고, 갑옷도 상단이 반파된 것이 정상이라 보기는 어려운 모습이다. 그리 고 그 앞으로 타나토스가 손을 툭툭 털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 자 싱긋 미소 짓는다. “멍청하기는. 그러게 누가 소환사 태우고 신나게 달려오래? 양전히 뒤에나 처박혀 있을 것이지.” -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굳이 타겠다고 억지를 쓰셔서요. 사실 어지간하면 막아낼 자신은 있었는데 말이죠. 누가 치사하게 깜짝 기습을 해서. 베히모스가 빈정거리자 타나토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놀고 있네. 어쨌든 나야 고맙지. 귀찮은 놈들을 이렇게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으니. 너보다는 소환사를 죽이는 게 훨씬 쉽거든 ” - …그때보다 기운이 굉장히 늘어나셨습니다? 예전에는 계신 줄도 몰랐는데 말입니다. “아, 그때? 착각하지 마. 당시에 전력을 다한 건 아니었으니까. 뭐 그때보다 수십 배 강해진 건 맞지만.” 그렇게 어깨를 으쓱인 타나토스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획획 저었다. “아무튼, 이만 조용히 꺼지라고. 더 기어 나올 생각하지 말고. - 예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두고 보시죠. 전부 일러바칠 테니까요. “응? 누구한테? 설마 게헨나?” - 일 군단장님뿐이겠습니까. 마침 얼마 전 만년설님도 깨어나셨겠다…. 아! 특히 왕께서 이 소식을 들으면 굉장히 분노하실 것 같은데요? 타나토스는 허리를 꺾으며 웃었다. “나 참. 마음대로 해. 그전에 나올 수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서서히 사라지는 제 삼 군단을 비뚜름하게 바라보다가, 아래 널브러져 있는 비비앙의 시체를 뼝 걷어차 날려버렸다. 게헨나의 이름이 나오니 기분이 더러워진 탓이다. 하지만. “자〜. 그럼 다음 타깃은….” 곧바로 몸을 돌리는 바람에, 공교롭게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비비앙의 몸이 땅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걸.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어느 사내가 가까스로 받아냈다는 것을. “스승님 ” 약간 말을 더듬는 사내가 품으로 받아낸 여인을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미 심장 부근에 구멍이 뼝 뚫린 터라 비비앙은 미동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단지 엄청난 양의 핏물만 꾸역꾸역 흘러 나올 뿐. 아래를 보는 사내의 얼굴빛에 서글픈 기색이 서렸으나, 그것도 잠시. 이내 천천히 뻗은손이 아직도 꽉 쥐어져 있는 질서의 오르도에 닿는다. 웅웅웅웅! 질서의 오르도가 세차게 진동한다. 마치 주인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찬란한 빛을 사방으로 뿌린다. 허나 그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사내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우, 우리…. 오랜만에 보지요? 하, 하하.” 웅웅웅웅! “그, 그래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거기까지 말한 사내는, “하지만.” 돌연 목소리에 힘을 줬다. “드, 들었던 것보다 상대의 힘이 너무 강합니다. 이대로라면 본진이 꼼짝없이 잡히고 말 거예요. 그렇게 되면 계획이 어긋나 버리죠. 조금이라도 좋으니 저라도 시간을 끌어야 합니다.” “주,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제발 힘을 빌려주십시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사내의 간절함이 닿았는지는 알수 없으나, 끊임없이 이어지던 진동음이 뚝 멎더니 주먹 쥔 손이 느슨하게 풀린 것이다. 잠시 후, 사내는 힘 있게 질서의 오르도를 움켜쥔 후 긴 숨을 흘리며 허리를 펐다. 햇살을 반사하는 안경을 고쳐 쓰며 멀리 보이는 타나토스의 등을 겨냥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라!” 한편, 같은 시각.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의 사망을 확인했습니다!” 소환의 방에서는 때아닌 고성이 오가는 중이었다. 세라프는 영상을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몇 번이나 돌려봐도 똑같다. 타나토스의 기습은 확실히 훌륭했으나, 베히모스의 방어를 뚫고 비비앙을 즉사시켰다는 건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일이었다. 결국,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은 하나. 타나토스가 그게 가능할 정도로 힘을 회복했다는 소리다. 당연히 전혀 달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이래서야 두 마수 소환사를 이용해 단상을 순간적으로 점거하고, 동시에 김수현을 끌어내리겠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생각보다 일찍 죽기는 했는데.” 그때 들려오는 나직한 음성에 세라프는 언뜻 정신을 차렸다. 제단 앞 오 미터 즈음에는 이효을이 살짝 상기한 얼굴로 영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해?”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입니다.” 무엇을 한다는 지는 모르겠으나, 세라프는 또박또박 음성으로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렀다. “좋아. 그럼….” 이효을은 곧장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용자 이효을은, 북 대륙 사용자 이만 사천오십칠 명의 GP 사용 권한을 넘겨받은 대리인의 자격으로.” 그리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거주민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의 부활 소원을 요청합니다. =============== 작품 후기 ============== ^Insert GPU - Continue? 10-". 9…. 8…. 7"、 < - If You Change, One. - > 제 삼 군단을 일격에 돌려보낸 후. “응?” 흡족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몸을 돌린 타나토스는 순간 의아한 빛을 비췄다. 마수들을 뒤따라오던 적들의 분위기가 예상보다 침착했기 때문이다. 무언가 대단한 반응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조금은 놀랐으리라 여겼다. 게다가 동료가 허망하게 죽었으니 하다못해 분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게 인지상정. 물론 중간중간 일그러진 얼굴이 안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이내 입을 짓씹으며 극도로 절제한다. 마치 진군이 가로막힌다는 것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이. “흥…. 뭐 믿고 있는 거라도 있는 건가?” 그렇다면 그것 나름대로 즐겁겠지만, 어쨌든 타나토스는 약간 맥 빠진 낯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단신으로 수천을 맞이하고도 뜸지근하던 눈동자에 돌연히 이채가 스쳤다. 천천히 둘러보는 도중 익숙한 얼굴이 걸렸기 때문이다. “잠깐만, 너!” 타나토스의 손끝이 누군가를 향한다. “…살아있었네?” 검지가 가리키는 곳에는 약간 불안한 얼굴을 한 안솔이 서 있었다. 자신이 정확히 지목당하자 목울대가 꼴깍 움직이더니 목에 걸린 ‘목걸이’를 꼭 움켜쥐며 주춤주춤 물러난다. 그에 반해 타나토스의 입꼬리는 씩 올라갔다. 다음 타깃이 정해졌다. “자~. 그럼….” 물론 타나토스는 안솔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사탄이 그토록 경계하던 인간이다. 또한, 실제로 저 여인이 영웅들의 영혼을 소환한 순간부터 전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모르긴 몰라도 여기서 확실하게 죽여놓는 게 뒷맛이 깔끔할 터. 그렇게 생각한 타나토스가 다시 한 번 오른팔을 뒤로 크게 당긴 순간이었다. “오라! 아라냐! 제 삼십이 군단을 지배하는 죽음의 거미줄이여!” “오라! 임프리손! 제 사십구 군단을 지배하는 강철의 구속자여!” 불현듯 똑같은 목소리가 연달아 들려오는 동시에. “뭐, 뭐야?” 후방에서 짓쳐 든 거미줄과 강철 사슬 수십 줄기가 타나토스의 몸을 칭칭 감는다. “…설마!” 타나토스의 두 눈이 화들짝 치켜지더니 황급히 뒤를 돌아본다. 겉으로는 아닌 척했지만, 실은 베히모스의 으름장(?)이 은근하게 신경 쓰이던 중이었다. 한데 갑작스레 마수 군단이 소환되니 설마 하는 생각이 든 탓이다. 그 찰나의 순간.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타나토스가 뒤를 돌아보는 틈을 타, 총 네가지 일이 순차적으로 발생했다. 김유현이 재빠르게 신호를 보내자, ‘안솔’이 순식간에 뒤로 빠졌고, 어느 사내가 빠른 속도로 조용히 ‘주문’을 외웠으며, 최후방에서 홀로 대기하고 있던 작은 ‘괴조’ 한 마리가 스리슬쩍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일련의 과정은 그야말로 창졸간에 일어나, 타나토스는 미처 보지 못했다. 몹시 안타깝게도. “후유. 아 뭐야. 진짜 게헨나라도 나온 줄 알았잖아.” 이옥고 양손에 두 지팡이를 든 사내를 확인한 타나토스는 안도의 한숨을 홀렸다. 정확히는 그 뒤에 소환된 마수 군단을 보고 안심한 것이지만. 하기야 아무리 두 군단을 소환했을지라도 최상위 군단인 제 삼 군단도 ‘그냥 좀 귀찮다.’ 고 말한 타나토스다. 그러니 까마득한 아래의 하위 군단이 눈에 들어오겠는가. “얘〜. 놀랐잖아. 먼저 죽고 싶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다시 여유를 찾은 타나토스가 사내를 보며 상냥히 말을 걸었다. 그러자 사내는 어수룩하게 머리를 긁적이더니 한결 침착히 입을 열었다. “아…. 시, 심기가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당신을 최대한 빠르게 끌어낼 필요가 있어서요.” “날? 끌어내서 어찌려고?” “시,시간을 끌어야지요.” “시간? 킥.” 고개를 갸우뚱하던 타나토스는 시간을 끌겠다는 말을 듣더니 픽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서 가볍게 몸을 비틀자 몸에 중구난방으로 감겨 있던 거미줄과 사슬이 뚝 소리를 내며 한꺼번에 끊어졌다. 타나토스는 사내의 오묘한 표정을 즐기며 한 손을 옆구리에 척 얹었다. “축하해! 한 일 분은 끌었네?” 그러나 왜인지 사내는 잔잔한 미소로 화답했다. “뭐….그정도면 충분합니다. 하, 하하.” “…뭐라고?” 그때였다. “신상요오오옹! 내 것 내놔아아!” 갑자기 낭랑한 외침이 전장을 왕왕 울린다. 그 순간 사내, 아니. “임프리손!” 신상용은 기다렸다는 듯이 왼팔을 쪽 뻗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힘껏 던졌다.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사슬이 질서의 오르도를 잡아챈 후,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쏜살처럼 날아갔다. 잠시 후. “좋아! 다죽었어! 오라! 베히모스! 제 삼 군단의 지배자, 적을 정토하는 최후의 왕이여!”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어두운 운무가 삽시간에 주위에 깔린다. 그리고. - 요호호호! 안녕하신가! 힘세고 강한 아침! 누구냐고 묻는다면 내 이름은 베히모스! 연기를 헤치며 발 빠르게 달려오는 죽음의 기사들을 본 타나토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분명히 좀 전 직접 소환사를 죽여 강제로 송환시켰는데, 얼마나 지났다고 나보라는 듯이 등장했다. 간단하다. 해답은 바로 사용자 상점의 활용에 있었다. 이유정은 예전에 미리 허락을 맡고 김수현의 GP를 대리인의 자격으로 사용한 전력이 있다. 그래서 그때와 똑같은 방법을 사용해, 이효을은 사망 소식을 접하자마자 대리 사용 허가를 받은 GP로 소원을 구매해 비비앙을 부활시 켰다. 그리고 소생한 비 비앙은 곧장 근원이 활성화한 워프 게이트로 달려가 전장으로 복귀, 또 한 번 제 삼 군단을 소환한 것 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GP를 내놓은 사용자의 수가 무려 이만 명이 넘는다는 것. 말인즉 GP가 마르기 전까지 북 대륙 연합은 무한한 부활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너…?” - 이것 참.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다시 기어 올라왔네요? 단숨에 인근까지 도착한 베히모스가 장검을 획획 흔들며 조롱하듯 말했다. 이로써 상황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찡그린 눈으로 바라보던 타나토스는 금세, 억지로나마 표정을 가라앉혔다. 자존심 상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으니까. - 이야〜. 정말 아쉽네요. 안 그래도 막 고자질을 끝내고 반응을 구경하던 중이었거든요. “반응…?” - 오! 듣고 싶으십니까? “…지껄여봐.” 그러자 베히모스는 두 손을 꽉 말아 쥐었다. 그러더니 마치 무언 가를 광광 내리치듯, 양 주먹을 미친 듯이 위아래로 흔들면서 외쳤다. - 이이이익! 이이이이이이이익! 그러자 억지로 가라앉혔던 타나토스의 얼굴이 다시금 황망해졌다. - …이러셨습니다. 정말 엄청나게 분노하셨다고요. 타나토스 님 이제 정말 큰일 나셨습니다. “뭐,뭐?” - 아!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이제 말도 곧 잘하시고 뛰어다니기도 잘하시는데요. 이익거리는 건 그냥 버릇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싫은 척하시거나 진짜로 분노하셨을 때만…. “잠깐만. 게헨나가 그랬다고? 진짜로?” 타나토스가 말을 끊자 베히모스는 예? 라고 명청하게 반문했다. 게헨나가 아니라 수나의 반응을 말해준 것인데, 무슨 말을 하는 지 이해가 안 가는 것이다. 허나 지옥의 왕, 즉 수나가 탄생한 걸 알 리가 없는 타나토스인 터라, 베히모스가 자기를 놀리고 있다고 여겨도 달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 갑자기 원 헛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후우우우…. 아니, 됐어. 도대체 어떻게 도로 튀어나왔는지 모르지만, 또 죽이면 그만이지 뭐. 이번에는 아주 영혼까지 철저하게 소멸시켜줄 테니까.” - 호오. 아까처럼 쉽지는 않을 텐데요? “아하하하! 야, 게헨나만 휘하 군단이 있는 건 아니거든?” 까르르 웃어 젖힌 타나토스가 돌연 양팔을 활짝 펼치며 고개 젖혀 긴 포효를 내질렀다. "!” 알아듣지 못할 음성이 이어지는 찰나, 두두두두, 두두두두! 주변으로 갑작스레 굉음을 동반한 지진이 일기 시작한다. 능력의 정체는, 다름 아닌 타나토스의 권능 중 하나인 사령 소환. 흡사 마수 군단을 소환할 때처럼 검은 구름 같은 것이 뭉게 뭉게 솟아나더니, 북 대륙과 마수 군단을 삽시간에 광범위하게 에워싸버렸다. 그리고 곧, 운무 안 곳곳에서 어두운 불꽃이 홀연히 피어오르며 차곡차곡 형체를 갖춰간다. 아직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건 아니 었으나, 사위로 흐르는 흉흉한 기운은 결코 얕볼만한 수준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윽고 타나토스는 북 대륙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소환사가 보이지 않는 이상 제 삼 군단은 사령들에게 맡겨도 충분하다. 그보다 아까 발견한 안솔이라는 인간을 한시라도 빨리 처리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로 정확한 판단이기는 했지만…. 글쎄. 타나토스는 과연 알고 있을까? 아까 신상용을 돌아봤을 때부터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북대륙은 이미 모종의 준비를 신속에 가까운 속도로 마쳤다는 사실. 아마 에르윈, 아니 사탄이 있었다면 중간에 한 번쯤 조용하기 짝이 없는 상대의 동태를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단상으로 길을 뚫기는커녕, 사령 소환으로 사방이 포위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할 정도로 침착하다. 하지만 적 전력 전부가 달려들어도 상대할 자신이 있는 타나토스로서는 굳이 의심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중이었다. 즉 절대적인 자신감에서 발로한 일종의 여지라고나 할까. 한편, 북 대륙은 어느새 방진을 구성한 상태였다. 마치 전원 홀드 주문에 걸리기라도 한 듯, 하나같이 몹시 긴장한 얼굴로 조용히 타나토스의 접근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조금도 개의치 않고 걸어가던 타나토스는, 그 중심에 서 있는 안솔을 확인한 타나토스는 흡족하게 웃으며 휙 휘파람을 불었다. “오? 아직 있었어? 가상하네. 도망이라도 치지 그랬어.” "아무튼,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생글생글한 얼굴로 느물거리 면서 느릿느릿 팔을 뻗어 안솔이 있는 지점을 겨냥한다. 이어서 잠깐 손을 요리조리 돌리는 것이 꼭 장난이라도 치는 듯하다. 그렇게 끝끝내 여유를 부리다가, 마침내 어둠의 기운을 끌어올리는 찰나였다. 특! 데구루루…. 무언가 각진 물체 같은 것이 갑작스레 머리를 특 때리며 떨어졌다. “아•이:?” 막 기운을 방출하려던 타나토스는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매만졌 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찰나, 한만 하던 두 눈 매가 순간적으로 가늘어졌다. 하늘로부터 네모난 상자처럼 보이는 것 수십 개가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이건 또.” 마침 눈앞을 스치며 낙하하는 상자를 잽싸게 잡아채더니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 순간이었다. 화아아악! 타나토스 주변에 떨어진 상자 수십 개가 동시에 희멀건 한 빛을 발하는 것과, 지팡이를 내민 안솔이 입을 달싹거린 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작품 후기====== 게임에서 과금을 하는 이유.txt 과금 전사 안솔! < - If You Change, One. - > 쾅! 가장 먼저 발생한 현상은 땅을 쪼갤 듯이 내리꽂힌 빛의 기둥이 었다. “무슨…!” 층격에 덜컹 흔들리는 단상 위에서 김수현이 경악성을 내지른다. 한껏 치켜 올라간 두 눈은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왜냐 면 차츰차츰 천사의 형상으로 변하는 빛의 기둥은 하나의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광휘의 사제 최후의 권능, 기적이 발동됐다. 웅웅웅웅웅웅! 다음 순간 타나토스의 주변으로 떨어진 상자들이 일제히 희멀건 한 빛을 뿜었다. 웅혼한 진동음을 동반한 눈부신 빛깔을 뿌리는 마법진들이 공중으로 우후죽순 솟구친다. 그 수만 해도 무려 수십 개. 내리쬐는 빛살이 어찌나 강렬한지 일대가 삽시간에 광(光)으로 채색된다. 아차 하는 찰나 일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이 되었다. 하얗게 일색된 세상에 간절히 바라는 듯한 외침이 하늘에서 아스라하게 울려 퍼졌다. 여기까지 한 십 초는 걸렸을까. 그야말로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 다. 거기다 전장에 뿌리내린 빛무리는 코앞의 상대가 가려질 정도로 휘황찬란해 저절로 행동을 엄추고 위로 시선을 빼앗긴다. 심지어 타나토스조차도. 여전히 희기만 한 시야 속에서 에르윈은 간신히 시력을 높여 하 늘을 노려봤다. 그리고 어렴풋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불꽃을 튀기며 힘차게 회전하는 마법진들. 예전 루시퍼와 같이 영상을 구경했을 때 한 번 본 기억이 있는 광경이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점 이 하나 있었다. 천사가 등장한 것과 마법진을 구성하는 형식이 제멋대로 변화하는 것까지는 같다. 그러나 빙그르르 돌아가는 수십의 진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거대한 진으로 새롭게 탄생하는 현상은 에르윈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잠시 후, 광활한 하늘을 뒤덮는 방대한 원진이 또 한 번 찬란한 빛을 토해냈다. 안 그래도 희미하던 시야에 한층 강한 광파가 번쩍이자, 죽어라 쏘아보던 에르윈도 결국 견디지 못해 눈을 감는다. 그와 동시에 장내는 시야도 소리도 아득하게 멀어져, 오직 기이 한 공명만이 흐르는 기괴한 공간으로 변모한다. 그 상태로 약 삼십 초쯤 지났을 무렵, 새로이 배열된 마법진이 차곡차곡 응축해온 기운을 일거에 터뜨렸다. 쿵! 천지가 비명을 질렀다. 와르르 흔들리는 땅에 누구 하나 할것 없이 깡그리 넘어진다. 약속의 신전도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이 건물 전체가 진동한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던 무시무시한 존재의 소환을 예고하기라도 하듯 미증유의 기운이 해일처럼 사방을 휩쓸기 시작한다. 이옥고 한 번 더 굉음이 울리는 찰나. 전장에 존재하는 전원의 뇌리로 공통된 감각이 스쳤다. 꼭 시간 이 멈춘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고 해야 할까. 정확히는 쉴 틈 없 이 몰아치던 현상이 갑작스레 가라앉았다.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던 강력한 변동이 단 한 순간에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하아…. 하아….” 그저 버티기만 했을 뿐인데 호흡이 한껏 거칠어져 있다. 숨소리는 귀가 아니라 몸 안에서 울리는 것 같다. 안솔은 입 밖으로 역류하려는 침을 억지로 삼켰다. 그리고 겨우 정신을 추스르며 힘겹게 고개를 젖혔다. 시야가 가물거리는 건 아직 빛의 여파가 남아서일까, 아니면 눈이 적응하지 못해서일까. 여하튼 무언가 작달막한 형상이 흐릿한 잔상이 스민 하늘 사이로 하강하는 것이 눈에 밟힌다. 그 순간 안솔은 불현듯 의문을 느꼈다. 마구잡이로 던지기는 했으나 개봉한 ‘괴물 소환 상자 4’의 수는 적어도 수십 개에 달한다. 한데 어째서 보이는 건 하나뿐일까. 혹시 다른 곳에 소환된 건가 싶어 곳곳으로 시선을 뿌릴 무렵, 강제로 소환된 존재가 땅으로 사뿐 안착한다. 에르윈과 안솔은 동시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아!” 안솔은 순간 허망하기 그지없는 기색을 비쳤다. “하…?” 에르윈은 약간 어이 없다는 듯 두 눈을 조용히 치떴다. 분명한 건 수십 개의 상자를 투자해 소환된 존재는 단 하나. 그 실체는 오벨로 기사단이 아니다. 심지어 게헨나도 아니었다. 이제 갓 서너 살, 아니 너덧 살은 됐을까. 양 갈래로 예쁘게 묶어 정리한 용암색 머리카락. 피보다 더욱 진한 빛을 발하는 동그란 두 눈동자. 고사리 같은 검지는 작고 도톰한 아랫입술에 살짝 얹혀 있다. "어, 어라?” 약간 멍멍한 기색으로 고개를 휘휘 돌리며 주변을 돌아보는 존재는 유치원생보다 어려 보이는 굉장히 어여쁜 여아였다. “하…. 하하….” 안솔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홀렸다. 반쯤 일으켰던 몸이 도로 풀썩 주저 앉는다. 기적, Blue Dahlia, 바라는 대로를 모조리 동원한 상자 동시 개봉은 대 타나토스 용으로 생각한 비장의 수였다. 할 수만 있다면 지옥의 마수 군단을 모조리 소환해달라고 빌었을 터였다. 최소한 그 많은 상자 중 하나 정도는 저번처럼 게헨나를 소환해줄 줄 알았다. 그런데 결과가 고작 처음 보는 여아 한 명이라니. 힘이 빠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안솔의 사고는 상대의 정보를 손톱만큼도 모르고 있기에 나온 생각이다. 실제로 여아가 지옥의 여덟 구간을 관할하는 절대자라는 걸. 홀 플레인 최강이라는 게헨나조차도 고개를 조아리는 존재라는 걸. 손가락 한 번 튕김으로써 게헨나뿐만이 아니라 육십육 마수 군단 전부를 소환할 수 있다는 걸. 그러므로 바람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진배없다는 사실을 안솔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여기는 어디야?” 그러거나 말거나 여아는 이미 한창 스스로 상황을 파악하는 중이었다. “으응. 정말 이상하네…. 에, 그러니까…. 베히모스는 보고가 끝나자마자 다시 소환됐고…. 게헨나한테 아빠한테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 지시하는 중이었는데….”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자못 황망해 마지않던 눈동자는, “…어? 너희는….” 안솔과 머셔너리 클랜이 있는 곳을 보자마자 휘둥그레졌다. “으응? 너희도?” 어느새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아라냐와 임프리손도 발견했다. 이어서 인근에서 아가리를 꺽 벌린 채 딱딱히 굳은 베히모스까지 확인한 순간이었다. 돌연 여아의 눈이 번쩍 떠지더니 자그맣게 주먹 쥔 손을 손바닥에 탁 소리가 날 정도로 부딪쳤다. 그리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끄덕. 뉘 집 딸이길래 이리 똑똑한지 벌써 상황 파악을 끝낸 듯싶다. “우와 신기해. 나 정도가 강제로 소환되는 경우가 있기는 있구나 ….아차!” 그러다 문득 미소를 싹 지우고 검짓 근엄 표정을 짓는다. 한껏 무게를 잡으며 적막해진 공간을 위엄 넘치게 가로지르더니(사실 아장아장 걸었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른다.) 주저앉은 안솔 앞에서 걸음을 엄췄다. 아무리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고 해도 좀 전까지 핏물이 튀기던 전장이다. 한데 조금도 개의치 않고 걸은 걸 보면 확실히 여간내기는 아닌 듯하다. 그리하여 전장의 시선이 모조리 쏠리는 가운데. “흥!” 앙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여아가 어울리지 않는 헛기침을 하며 양손을 옆구리에 척 짚는다. 한껏 눈을 내리뜨는 모양새가 픽 거만해 보인다. 그러니 안솔의 정수리로 오랜만에 물음표가 동동 떠오르는 것도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리라. 잠시 후, 여아는 자못 오연한 음성으로, 그러나 기쁜 빛을 감추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낯설지 않은 낯짝이로다. 아무튼, 네놈이 날 소환한 장본인인가?” 안솔이 명하니 고개를 끄덕거리자 여아가 지엄한 음성으로 말을 잇는다. “실로 어이가 없도다! 겨우 시간을 내 한가로운 때를 보내는 중이었건만…. 감이 이 몸을 소환한 죄는 천번 만번 죽어 마땅하다!” 아니. 새빨간 거짓말이다. 한가로운 때는커녕, 베히모스의 보고를 받고 아빠가 어떻게 될까 봐 시시각각 초조해 하는 중이었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타나토스와 악마라는 종족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 죽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아까 스스로 말하지 않았는가. 게헨나더러 방법을 총동원해 중간 세계로 가는 방법을 찾으라 했다고. “…허나! 어했든 한두 번 본 정리도 있는 만큼 말을 들어볼 여지는 있을 터. 아뢰어 보아라! 우선 들어보고 판단하겠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자꾸 요망한 갈고리 표시만 띄우는 것이냐? 그니까 울 아빠 어디쪄…. 아니! 한 번 들어보고, 까짓거 힘을 빌려주지 못할 것도 없다는 뜻이다!” 정리해보면 아빠가 어디 있는지 빨리 뱉으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안솔은 전혀 이해 못 했다는 얼굴로 물음표 공세만 필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죄송하지만….” “흥.죄송이라.” “누구세요?” “그래, 당연히 죄송해…. 으, 응?” 여아의 얼굴에 순간 떨떠름한 빛이 스쳤다. 하지만 영리하기 그지없는 머리는 ‘나는 상대를 알고 있으나 상대는 나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금세 인지했다. 이윽고 여아의 통통한 볼이 발그스 름해지더니 순간 팍 인상을 쓴다. “이이이익!” 그 순간 SS 클랜원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전매특허인 이익이익을 듣자 떠오르는 아기가 한명 있었기 때문이다. “어? 잠깐만!” 말인즉 비로소 여아의 정체가 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호,혹시…?” “이 바보들아! 나야 나! 나잖아! 고작 얼마 지났다고 벌써 잊어버린 거야?” 앙증맞게도 소리 지르더니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쏘아본다.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수치심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그러나 기실 아기 때보다 몸이 자란 이면에는, 수나가 김수현의 기록 구슬을 받고 분노를 거둔 후, 게헨나의 가르침 아래 진정한 왕으로서 일 차 각성을 완료했다는 점이 숨어 있었다. 이러니 한번에 못 알아보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었지만, 어쨋든 서운한 건 서운한 거였다. 그때였다. “꼬맹이 아가씨? 잠깐만?” 불현듯 낮은 음성이 들리며 누군가 수나의 아담한 어깨를 짚는다. “아까부터 뭘 혼자서 쫑알거리는지는 모르겠는데….” 어깨너머로 살금살금 얼굴을 들이미는 여인은 다름 아닌 타나토스였다. “언니가 슬슬 기분이 더러워지려고 하거든? 여기는요. 네 놀이터가 아니에요.” 얼굴은 웃고 있고 목소리도 상냥하지만 왜인지 암암리에 살기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이제 좀 신나게 날뛰려고 하는데, 자꾸 이상 한 일이 터져 전장이 엄추니 자못 기분이 거슬린 탓이다. 그러나. “…이 덜떨어진 명청이는 또 뭐야? 안그래도 기분 나빠죽겠는데.” 아무리 격 높다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라도. “그리고 어깨에 손 치워! 너 따위가 어디서 감히 손을 올리는 거야?” “…뭐?” 단언컨대, 이번만큼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작품 후기====== 월요일 휴재의 유혹을 뿌리치고 어찌어찌 연재에 성공했습니다 월요병을 이겨냈어요. 뿌듯하네요. …가 아니라, 휴재는 8월 12일(수요일)에 하겠습니다. 실은 그때 중요한 약속이 하나 생겨서요. AA; 그럼 독자 분들 모두 활기찬 월요일 보내세요.:) < - If You Change, One. - > 조막만 한 머리가 느릿하게 옆을 돌아본다. 이내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타나토스는 갑자기 기분이 매우 더러워지는 현상을 경험했다. 종 전까지 뿡뿡 화를 내던 올망즐망한 눈동자는, 어느새 착 가라 앉아 벌레 보듯 무심하게도 응시한다. 특히 한쪽 눈을 남을 업신 여기듯 치켜 올리는 것이 곡 누군가와 닮았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손" 통증은. “떼라고.” 생각보다. “하지 않았어?” 굉장히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 처음에는 그저 약간 따끔한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감을 인지하는 찰나. “어,어…?” 돌연 어깨에 얹은 손이 한들대는 불길에 휩싸였다. 열기는 곧 살결로 스며 체내로 침투했고, 흐르는 핏물에 섞여 단숨에 전신으로 퍼졌다. 어떤 예고도 전조도 없었다. 심지어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단지 아차 하는 순간, 영혼을 불로 지지는 것처럼 무시무시한 고통이 엄습했다. "까아아아아아아악!" 괴성을 지르며 손을 뗀 타나토스가 미친 듯이 땅을 구르기 시작 한다. 땅이 깨져나갈 정도로 쾅쾅 두드려도 꺼지지 않고 기운을 일으켜 상쇄하려는 족족 살라 먹힌다. 결국. “키아아악! 키아아아아아아악!” “이이이익! 시끄러워! 목소리는 또 왜 이렇게 큰 거야!” 불이 꺼진 건 한쪽 귀를 틀어막은 수나가 인상을 쓰며 손을 저었을 때였다. 낙지처럼 꿈틀꿈틀 발광하던 타나토스의 눈이 번쩍 떠졌다. 온몸을 괴롭히던 화마가 한순간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윽고 거친 호흡을 추스르며 몸을 일으키더니 망연자실한 낯으로 상대를 응시한다. 전쟁 시작부터 내내 이어지던 여유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말도 안 된다는 기색만이 역력하다. 그러는 동안 수나는 폴짝 뛰어올라 허공에 사뿐히 앉았다. 낑낑 애를 쓰며 간신히 두 다리를 꼬더니 후유 숨을 내쉬며 비스듬히 턱을 괸다. 그렇게 허공에 앉은 자세를 확인한 순간, 타나토스는 불현듯 아까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를 구체화할 수 있었다. 용암 빛깔 머리카락. 피처럼 진한 붉은색 눈동자. 그리고 특히 상대를 깔아보는 듯한 특유의 거만한 눈빛. “…게헨나? 아니, 아니야. 넌 누구지?” 게헨나는 당연히 아니다. 일단 외형은 차치하고서라도 방금 느꼈던 기운은 게헨나라고 보기 약간 오묘한 구석이 있다. 파괴력은 겁화를 능가하고 영원성(永遠性)은 화정을 넘어선다. 이러니 타나토스가 이해 못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애초 두 상반 속성이 공존한다는 것부터가 믿기 어려운 일이었으니. “뭐 그럭저럭 격은 있는 애인 것 같은데…. 별로 볼 일은 없네. 나참. 애초 깨진 그릇으로 뭘 어쩌겠다고.” 수나는 척 보자마자 타나토스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당사자는 놀라는 것보다 상대가 누군지 알아내는 게 더 중요했다. “누구냐고 했잖아아아아아악!” 그래서 한 번 더 소리 지르는 도중, 갑자기 얼굴을 감싸쥐며 또다시 쓰러졌다. 정확히는 고함치는 순간 입술에 불꽃이 튀겼고 아까와 같은 끔찍한 고통이 재차 엄습한 것이다. “어디서 함부로 목소리를 높이는 거야? 조용히 안 해?” 수나가 건방지다는 듯이 말하며 거듭 손을 것자, 땅에서 헤엄치던 타나토스라는 물고기의 펄떡거림이 우뚝 멎는다. 수나의 음성이 이어졌다. “…아니지. 그냥 더 지껄여. 그래야 네게 드는 호기심보다 죽이고 싶다는 욕구가 앞설 것 같으니까.” 아까의 여아라고 생각되지 않는 서슬 퍼런 호령이다. 즉 ‘한 번만 더 목소리 높이면 죽는다.’는 소리로,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할 타나토스가 아니었다. 전신을 덜덜 떨면서도 힘겹게 고개를 드니 놀람과 치욕이 뒤섞인 얼굴이 드러났다. 죽음의 신으로 숭배받으면서 언제 이런 굴욕을 겪어보기라도 했을까. 그러나 그 어떤 감정도 없이 무심하게 눈을 내리뜬 수나와 마주한 타나토스는 까닭 모를 오한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이제야 불현듯 깨달았다. 이렇게 눈앞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기운이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은 총 두 가지 경우로 상정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감지하는 본인이 어떤 힘도 없는 평범한 존재일 때. 두 번째는 상대의 격이 감히 측정할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하게 높을 때. 물론 타나토스를 보통의 존재로 볼 수 없으니 여기서는 당연히 후자일 터. 거기까지 인지한 타나토스의 얼굴에 비로소 공포의 빛이 서렸다. “말도 안 돼…. 이 내가? 다, 당신은 설마 십천의…?” 그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수나는 앙증맞게도 웃으며 (본인은 요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입을 열었다. “글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보아하니 넌 날 모르지만 게헨나는 알고 있는 것 같은데 ?” 타나토스는 명하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직접 만나서 물어보는 건 어때?” 그렇게 말한 수나가 살며시 팔을 뻗으려는 찰나였다. "끄으으으!” 쾅! 이상한 신음을 터뜨린 타나토스가 순간적으로 뒤로 훌쩍 물러났다. 동시에 흡사 김수현의 영역 선포처럼 둘레 십 미터 크기의 어두운 장막이 그녀의 사위로 생성된다. 또 알 수 없는 힘에 당할 거라는 지레짐작에 반사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어휴. 그것도 영역이라고.” 한데 수나의 반응이 더 가관이다. 언뜻 한심하다는 눈초리를 보내더니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가로것는다. “자기 영역을 선포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흡사 한 수 가르쳐주기라도 하겠다는 말투. 그러더니 문득 반쯤 편 팔을 완전히 뻗으며 살짝 손가락을 튕긴다. 그 순간이었다. 자그마한 엄지와 중지가 튕기듯 어긋나는 찰나, 웅. 웅. 웅! 창즐간에 총 세 번의 웅혼한 소리가 홀렀다. 그야말로 부지불식 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 누구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단 한명만 제외하고. 적어도 타나토스만큼은 분명히 볼 수 있다. 일 초, 아니 영점 일초도 안 되는 시간에 온 세상의 색깔이 네 번이나 변했다. 본래의 빛깔에서 잿빛으로, 잿빛에서 붉은빛으로, 붉은빛에서 다시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눈 한 번 깜빡이기도 전에. 쿠르르르르르르! 곧바로 이어지는 현상은 갑작스러운 탑의 솟구침.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흔들리더니 웬 탑 하나가 지면을 깨트리며 하늘 높이 치솟는다. 보고 있던 이들 중 몇몇 북 대륙 사용자는 약한 탄성을 터뜨렸다. 왜냐면 탑의 모양새가 아틀란타 인근에 있는 이정표와 거의 똑같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수나가 돌출된 어탑의 권좌에 사뿐 내려앉는다. 그리고 잠시 후, 어탑 아래로 무언가가 점차 넓적하게 젖어 번지는 순간을 기점으로 세상이 차츰차츰 변화하기 시작한다. 푸른 도화지에 채색이라도 하듯 굳건한 대지로 생생한 적빛이 서서히 드리운다. 청명하던 대기에 말간 진홍색을 발하는 반딧불들이 눈처럼 분분히 홑날린다. 하늘은 이미 온통 선명한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이 붉어졌을 때. 망연자실한 얼굴을 한 타나토스가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끓는다. 같은 영역 선포이기는 하나 자신이 사용한 권능과 궤를 달리하는 수준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수나는 사방을 왕의 의지가 닿는 영역으로 선포해버렸다. 그게 가능한 공간은 전 차원을 통틀어 한 곳밖에 없다. 왕의 탄생과 최후를 함께하는 공간. 무간 지옥(無間 地獄). 말인즉 이 일대로 아예 무간 구간을 구현화 해버린 것이다. 이게 바로 수나가 말한 진정한 의미의 영역 선포였다. 하지만 아직 놀라기는 이르다. “게헨나, 메르세데스.” 여전히 턱을 괴고 있는 수나가 어탑을 톡톡 두드리는 순간이었 다. 귀찮다는 어조로 입을 열자마자 어탑이 무음으로 휘황찬란한 빛을 비췄다. 수나가 영역을 선포한 순간부터 근방은 중간 세계에 팔열(A熱) 구간이 강제로 겹쳐진 상태라 볼 수 있다. 즉 마음만 먹으면 지옥에 존재하는 전 마수 군단을 불러올 수 있다는 소리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콰르르르! “으응?” 이윽고 어탑의 왼쪽, 불꽃이 순간적으로 거세게 휘몰아쳤다가 사라지는 자리로, 불현듯 한 여인이 고운 자태를 드러냈다. 풍성하게 흘러내리는 웨이브 진 용암 색 머리카락. 어디 한 군데 흥잡을 곳 없는 유려한 몸매. 한 손에 긴 불의 채찍을 우아하게 들고 있는 여인은 다름 아닌 게헨나였다. 단신으로 북 대륙 정예 사용자 일만 오천 명을 압도한 지옥의 겁화가 마침내 전장에 강림했다. 후르르르! “사라진 왕께서 어떻게 호출을…. 어머나?” 그리고 어탑의 오른쪽에는, 놀랍게도 냉기를 보는 듯한 불길이 가라앉으며 메이드 복장을 한 푸른 단발의 여인이 나타났다. 두 눈이 지그시 감겨 있는 그녀는 입만 살짝 벌려 놀란 빛을 드러냈다. 특이하다면 확실히 특이한 여인이었다. 희디흰 살결에 어른어른 하는 냉기의 아지랑이를 보면 얼음처럼 차갑게 보여야 정상이나, 왜인지 불처럼 이글거리는 느낌 탓에 괜스레 뜨겁게 느껴진다. 치마 상단에 공손하게 모여 있는 양손, 그리고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정자세로 서 있는 자태는 언뜻 영리하면서 정숙한 숙녀를 연상케 했다. 그러나 살을 필요 이상으로 노출하는 메이드 복 상의는 물론, 왼 눈 아래 찍힌 작은 눈물점이나 농익은 사과색 입술은 어던가 모르게 성적인 분위기를 은근하게 풍긴다. 거기다 코르셋을 살짝 끄르면 신난다며 특 튀어나올 것 같은 무르익은 젖가슴과, 입가로 알 듯 말 듯 지어지는 묘한 색기가 흐르는 미소…. 아무튼, 김수현이라면 좋다고 달려들 만한 육감적인 몸매의 여인이다. 잠시 후. 수나가 아무 말도 않고 씩 웃기만 하는 가운데, 갑작스레 두 여인의 시선이 한 곳으로 꽃혔다. 그리고 동시에 입을 열었다. “흐응? 타나토스?” “어머? 개새끼 씨잖아요?” …어째서 메이드가 개새끼라고 했는지 아직 알 수 없지만, 어쨋든 타나토스를 알고 있다는 말투임은 분명하다. “호오. 살다보니 정말 별일을 다 겪는구나.” 신기하다는 듯이 말한 게헨나는 순간 손목을 힘차게 젖혔다. 차원 버프로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있어서일까. 아니면 애초 이 비상식적인 상황에 어느 순간 정신줄을 놓아서일까. 타나토스는 고요한 사위를 가르며 날아오는 불길의 채찍에 순순히 목덜미를 내주고 말았다. 이윽고 착 소리와 함께 채찍이 목에 감기는 동시에 게헨나는 있는 힘껏 손을 떨쳤다가 아래로 내리쳤다. 그러자 타나토스의 몸이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허공을 유영하더니 그대로 땅으로 곤두박질친다. 광, 폭음과 함께 몸이 펄떡 요동쳤다. 게헨나는 바로 앞에 처박힌 타나토스의 턱 아래로 살그머니 발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아주 살짝 발등으로 젖히니, 홑어지는 흙 연기 사이로 분노와 황당함으로 일그러진 낯짝이 올라왔다. 한 대 맞더니 겨우 정신을 차린 듯싶다. 그러나 게헨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특유의 내리뜬 눈으로 타나토스를 내려 다본다. “별일이구나. 안 그래도 베히모스 놈의 보고를 받고 노심초사하고 있었건만…. 설마 이렇게 널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헨나아아아아아!” 담담하게 이어지는 음성에 타나토스가 울부짖듯이 외쳤다. “뭐 썩 반갑지는 않은가 보군. 하기야 나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그나저나 어떻게 봉인을 풀고 나올 수 있었던 거지?” 게헨나는 조소하듯 말하며 스리슬쩍 발을 치웠다. 그러자 타나토스가 무어라 알아듣지 못할 말로 절규하며 양손으로 땅을 강하게 짚는다. 그때였다. 콰앙! 막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타나토스의 고개가 또 한 번 강제로 땅으로 처박혔다. 어찌나 강한 위력인지 지면에 금이 꺽 갈라지고, 팔다리는 개구리처럼 대자로 뻗는다. 푸들푸들 경련하는 정수리에는 어느새 하이힐처럼 굽 높은 신발이 다소곳하게 박혀있다. “안 돼요. 게헨나.” 언제 온 걸까. 푸른 단발의 메이드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게헨나를 나무란다. “개 쌍년은 개 쌍년 취급을 해줘야 해요. 그래야 자기 주제를 알아요.” 두 손으로 얌전히 치마 양 끝을 잡아 올려, 관능적인 선을 자랑하는 종아리까지 드러낸 채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또 예전처럼 날뛸지도 모른답니다?” 살포시 미소 짓자 눈매가 초승달 모양으로 느릿하게 휘어진다. 그로 인해 실처럼 드러나는 눈동자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소름 끼치게 하는 서늘한 얼음 빛깔이었다. 그러더니 일어나려 용을 쓰는 타나토스의 뒤통수를 꾹꾹 밟아 비비면서 물었다. “그렇죠? 개새끼 씨?” ======작품 후기====== 정말 죄송합니다. 워낙 체력이 달리다 보니 집필 내내 극도로 집중력이 떨어졌습니 다. 이렇게 적느니 안 쓰는 것만 못하다는 생각에 두 번 갈아엎어, 예 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PS. 어제 후기에 말씀드렸듯이 8월 12일 수요일 하루 쉽니다. 전장은 여전히 고요하다. 갑자기 등장한 수나와 갑자기 변한 세상. 그리고 타나토스가 세 여인, 아니 두 여인과 한 여아에게 무기력하게 짓밟히는 가운데, "아." 김유현이 짧은 탄성을 터뜨렸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멍하니 있었으나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렸다. 전쟁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사용자 신상용!" 간절한 부르짖음에 신상용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아라냐와 임프리손을 시켜 사용자 무리를 가리키자, 쏜살같이 뻗어 나가는 거미줄과 강철 사슬이 한 명씩 순식간에 감쌌다. 그리고 잠시 후, 칭칭 감긴 사용자들이 공중으로 붕 솟구친다. 그 상태로 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더니 사방을 에워싼 사령의 벽을 넘어 무사히 땅으로 안착했다. 넘어간 수는 약 이삼십 명 가량에 불과했지만, 한순간 격전지를 벗어나 안쪽까지 침투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접근하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던 단상이 이제 손에 잡힐 듯이 다가왔다. "…저기 있었구나."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던 게헨나는 차분히 단상을 응시했다. 입을 쩍 벌린 채 한껏 경악한 김수현을 보자마자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피었다. 그러더니 돌연 몸을 살짝 꼬며 오른손을 내리쳤다. 부드러이 굽이친 불의 채찍은 슬금슬금 꿈틀거리는 타나토스의 등을 철썩 때리며 발그스름한 궤적을 남겼다. 멍한 와중에도 잔혹한 손속을 보이는 주제에, 게헨나는 무언가 애써 감추려는 듯 뺨을 살그머니 붉히며 입을 열었다. "우선…. 메르세데스는 저것들을 처리해주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저것들이라 함은 아직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사령 군단을 말하는 것이었다.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던 메르세데스는 스리슬쩍 발을 치우며 말했다. "저 아이들도 오랜만에 보네요. 귀염둥이들…. 아무튼,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왕께서 제 군단을 소환해주신다면 더 편할 텐데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저것들이 있는데." 이번에는 우두커니 서 있는 제 삼 군단을 일컫는 말이었다. 메르세데스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후유. 어쩔 수 없네요. 그나마 없는 것보다는 낫겠죠. …들었니? 우리 검둥이." 그러자 지목당한 검둥이, 아니 베히모스가 움찔 몸을 움츠렸다. 아마 해골이 아니라 생전의 얼굴이었다면 지금쯤 떨떠름한 표정을 짓지 않았을까. 선봉에서 길을 뚫던 북 대륙 연합 주력 부대가 한순간 들러리 신세로 전락했다. 이윽고 게헨나는 여전히 타나토스를 밟은 채 어탑을 돌아봤다. "왕이시여." 어느새 권좌에서 벌떡 일어난 수나는 왜인지 빨개진 얼굴로 단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 한심해. 정말 한심하잖아. 내 반려면 반려답게 그런 약한 모습 따위는…." 이라고 중얼거리다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 "가보시지요." 게헨나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담담히 말을 잇는다. 수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으, 응?" "사령 군단은 메르세데스와 제 삼 군단이 청소할 테고, 타나토스는 제가 맡고 있겠습니다. 그러니 왕께서는 부왕을 구해오소서."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어. 애초 저런 약하디약한 인간이 부왕이라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지만, 뭐…. 어쩔 수 없으니까." "……." 뭐가 뭐 어쩔 수 없으니까 입니까. 당장에라도 구하고 싶으면서. 그러니 되지도 않는 새침함은 잠시 넣어두시고 빨리 구해오기나 하시지요. 라는 말이 순간적으로 목구멍 끝까지 치솟았으나 게헨나는 가까스로 삼켰다. 하기야 자신이라고 얼른 구출하고 싶지 않겠느냐마는…. 탁 까놓고 말해서 중증의 엘렉트라 콤플렉스에 걸린 수나가 아닌가. 특히 게헨나를 연적으로 여기는 만큼 넌 가지 말라고, 혼자서 구하겠다며 못 가게 막을 소지가 다분하다. 아니, 불 보듯 뻔하다. 그이가 아직 적의 손에 붙잡혀 있는 이상, 쓸데없는 말다툼은 시간 낭비에 불과할 터. 그리고, 무엇보다. 문득 생각난 굉장히 중요한 계획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어쨌든 수나가 김수현을 구하러 가야 했다. 어차피 구출하는 건 수나 혼자서라도 충분하다 못해 남으며, 이렇게 나오게 된 이상 타나토스는 무조건 소멸시키는 게 아니라 다른 곳에 쓸 데가 있었으니까. 한편, 멈췄던 전장이 서서히 재개될 낌새를 보이는 즈음. 신상용 덕분에 사령의 포위망을 벗어난 북 대륙과 머셔너리 클랜은 목전의 단상을 향해 한창 달리는 중이었다. 그러나 격전지를 벗어났다고 해서 길이 뻥 뚫렸다는 건 아니다. 사탄이 바보도 아니고, 단상을 지키는 최후의 병력 정도는 남겨둔 상태였기 때문이다. "훅…! 훅…!" 주변 풍경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간다. 요동치는 심장 탓에 호흡이 금세 거칠어졌으나 왜인지 누구 한 명 낙오하지 않는다. 오히려 단상이 가까워질수록 힘이 나는 듯 달리는 속도에 가일층 가속이 붙는다. 할 수 있는 모든 수는 동원했다. GP로 사용자들을 살렸고, 괴조 군단을 끌고 왔으며, 실시간 부활 계획까지 가동했다. 영웅들의 영혼을 소환하고, 요정들도 돌려세웠다. 괴물 소환 상자로 타나토스까지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즉 이제 남은 건 하나뿐. 전력을 부딪쳐서 김수현을 구한다. "크으으으…!" 물론 그 사실은 에르윈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뒤늦게 이성을 찾은 그녀는 순간 심한 갈등에 사로잡혔다. 손 하나 까딱 않고 타나토스를 갖고 논 정체 모를 여아. 화정과 동급의 힘이라 평가받는 '만년설' 메르세데스.'지옥의 겁화' 게헨나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애초 수나가 등장했을 때부터 에르윈은 암암리에 모든 것이 끝났음을 직감했다. 그나마 가능성 있는 방법이라고는 김수현을 볼모로 잡고 협박하는 방법뿐. 하지만 과연 저 정도의 존재들한테 위협이 먹힐까? 그 타나토스조차도 끽소리도 못하고 벌벌 기고 있는데?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겨우 돌아가는 머리는 그것이 성공할 가능성이 0%에 수렴할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간이 없다. 이 전쟁의 끝이 어떻게 나든, 종국에 이르기까지 십 분도 채 남지 않았다. 결국에는 사탄에게도 남은 방법은 하나. 모두 포기하고 김수현을 최우선으로 확보한다. 협박이 안 된다면 적어도 죽이기라도 한다. 영혼을 붙잡아놓을 수만 있으면 시체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하니 말이다. 고민은 길었지만, 결정은 빨랐다. "당장 죽여어어어어어어!" 에르윈의 일대를 왕왕 울리자 단상에 서 있던 마족들이 웅성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김수현을 억누르고 있던 마족이 곧장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당장에라고 내리칠 듯한 기세로 오른팔을 하늘 높이 들었을 때였다. 휘리리릭! 막 손으로 머리통을 후려치려는 찰나, 쏜살같이 단검 한 자루가 되려 목을 관통했다. 그 순간 잠깐 움찔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족이 꿋꿋이 손을 내리치려는 찰나! 푹! "키에에엑!" 곧바로 짓쳐 든 검붉은 화살이 관자놀이까지 꿰뚫자,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쓰러진다. 그 단상 아래에는 우정민과 선유운이 각각 무언가를 투척한 자세로 멈춰서 있다. 저들이 방금 처형당할 뻔한 김수현을 구했다는 사실은 안 봐도 알 수 있을 터. 은혜는 바다같이, 복수는 칼날같이. 두 사내는 가장 중요한 때, 마침내 김수현에게 진 목숨 빚을 갚는 데 성공한 것이다. 아무리 가까이 왔다고 하나 저 정도 높이에 있는 마족의 저격에 성공했다는 건 거의 신기에 가까운 능력이었다. 허나 위기는 이제 겨우 한 번 넘겼을 뿐이다. 피조물의 처지에서 조물주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본능적으로 최대한 신속하게 행동한다. 저격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 이내 단상의 마족 전원이 삽시간에 김수현을 에워싸 모조리 달려들었다. 아무리 우정민과 선유운의 실력이 출중하다고 해도, 서른이 넘는 마족을 동시에 쓰러트리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대로라면 김수현의 죽음은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 그때. 웅웅웅웅!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 김수현과 한소영을 중심으로 희뿌연 막이 둥글게 솟아올랐다. "되비침!" 백한결이 젖 먹던 힘까지 뽑아낸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보호막이 말간 빛을 뿜는 것과 마족들이 막에 충돌하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크으으윽!" 황급히 단상으로 돌아가던 에르윈은 달려든 마족들이 모조리 떨어져 나가거나 단상 아래로 추락하자 괴성에 가까운 신음을 흘렸다. 두 번의 살해 시도가 모조리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는 동안 상대와 단상의 거리는 이백 미터, 아니 일백 미터 안쪽으로 줄어들었다. "저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 결국, 이제는 이판사판 공사판이었다. "전군…!" 이를 갈던 에르윈이 무어라 외치자마자 전장으로 나갔던 마족들이 일제히 등을 돌렸다. 놀랍게도 전원 전장을 포기하고 김수현 하나에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날개가 있는 마족들의 이동 속도는 인간보다 몇 배는 빠르다. 그런 만큼 후방에 있던 마족들은 비교적 짧은 시간에 목적지 인근으로 도착해, 일부는 땅으로 나머지는 단상으로 한꺼번에 쇄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에르윈은 알고 있었을까. 전장을 버리고 단상으로 모이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 최악의 한 수였음을. 하기야 수나가 출현한 후 승산은 없어졌고, 또 그만큼 상황이 급하기도 했다. 발 빠르게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고 김수현 하나에 집중한다는 선택은 분명히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아주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하다못해 한 번이라도 뒤를 돌아봤다면. 그랬다면, 그와 같은 명령은 내리지 않았을 텐데. 왜냐면. "뭐, 뭐야 저것들은 또?" 한 박자 늦게 따라붙은 수나가 눈이 벌게진 채 공중으로 무섭게 날아오는 중이었으니. 안 그래도 곧 아빠를 본다는, 아니 구한다는 생각에 몸이 달아오르다 못해 폭발 직전이었다. 한데 갑자기 웬 하루살이 같은 것들이 전방을 빽빽하게 물들이니 얼마나 짜증이 나겠는가. "이이이익!" 끝내 사랑스럽게도 분노를 터뜨리며 팔을 앞으로 뻗는다. 이윽고 조그마한 손바닥이 단상에 있는 김수현을 정확하게 향한다. 수나가 다루는 힘의 정체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딱 하나 특징지을 수 있는 건 있다. 그건 바로 어떤 소리도 소음도 나지 않는다는 것. 말인즉. 수나의 의지가 발동하는 동시에 전방의 일대가 온통 붉은빛으로 번쩍거렸다. 이어져 발생하는 현상은 아까와 하등 차이가 없었다. 거두절미할 것도 없다. 단지 수나가 손을 뻗자마자 수백의 마족들이 일제히 녹아내렸다. 정확히는 붉은빛이 언뜻 스칠 때 순간적으로 소멸했다는 표현이 옳을 터. 어떤 조짐이나 징조는커녕, 수나의 의지가 발현하는 즉시 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작은 소리라도, 아니. 하다못해 일말의 마력 흐름이라도 느꼈다면 어떻게 알아차리기라도 했을 터. 한데 손 한 번 뻗었다고 하루살이 떼처럼 모인 마족들의 중심에 큼지막한 구멍이 뻥 뚫렸다. 그러니 어찌 공포를 느끼지 않고 배길 수 있으랴. 물론 병력은 아직 수천이나 남았다. 또한, 조물주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은 마족들이 두려움을 이기고 본능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하지만 상대가 나빠도 너무 나쁘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물량도 소용없다고 해야 하나. 구천(九天) 격 신인 겁화와 화정의 합일로 탄생한 수나는 진정으로 어마어마한 무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수천의 마족 군단 중 일백 명, 아니 단 열 명이라도 빠져나갈 수 있다면 어떻게든 명령을 따를 수 있을 텐데. 허나 손짓하는 족족 곳곳에 구멍이 뻥뻥 뚫리고, 모이기 무섭게 소멸해버리니 허공은 그야말로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풍경을 연출하는 중이다. 이와 반대로 단상에 거의 근접한 북 대륙 무리의 상황이 한층 나아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까딱 잘못하면 김수현의 처형을 코앞에서 올 려다볼 뻔했는데 수나의 활약으로 일말의 여유가 생겼다. 덕분에 급박함 속에서도 상황을 살필 시간을 얻을 수 있었으니. 샛노란 빛으로 물든 김유현의 눈동자에 순간 이채가 스쳤다. '단상 아래로 떨어진 놈이 다섯. 아직 남아 있는 놈은 열둘.' 좀 전 백한결의 보호막으로 처형을 막아내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다. 쪼롱이로 내려다보는 시야로 아까 떨어져 나갔던 놈 중 여럿이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잡혔다. 그러자마자 김유현의 두 눈동자가 형형한 안광을 뿜었다. 우르르릉! 이윽고 하늘에서 정확히 열두 줄기의 벼락이 내려꽂히는 찰나. 쿠르르르! 돌연 땅에서도 뇌전과 똑같은 숫자의 불길이 동시에 솟구쳤다. 불길한 기운을 뿌리는 시커먼 불기둥은 흡사 피뢰침이라도 된 듯 뇌신의 벼락을 모조리 상쇄해버렸다. "에르윈! 네가 김수현을 죽여라!" 이어지는 외침에 김유현의 눈이 한껏 가늘어졌다. 흘끗 눈을 드니 날개를 활짝 펼친 어둑한 그림자가 빠르게 강하하고 있었다. 한 번 본 기억이 있는 형상이었다. "아스타로트!" 치 떨리는 목소리가 새나왔다. 시꺼멓게 이글거리는 양손을 보니 당장에라도 불을 뿜을 듯한 폼이다. 저 하나라면 현 인원으로 지지는 않겠지만, 마냥 쉽게 이길 수도 없는 상대였다. 아스타로트도 그걸 알고 아까처럼 외쳤을 터. 즉 최대한 시간을 끌려는 속셈이었다. 물론 김유현도 순순히 끌려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만큼 가장 선두에서 달리던 발걸음이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갑작스레 멈췄다. 빠르게 하강하는 아스타로트를 노려보며 두 손이 찬란한 뇌광을 방출한다. 공교롭게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신재룡, 차소림의 걸음도 동시에 멎는다. 왜 멈췄는지는, "부탁합니다!" 이 한 마디에 전부 들어 있었다. "제발…!" 간절한 외침에 메아리친다. 그 말을 듣자마자 어쩔 줄 몰라 하던 나머지 이들은 이내 앞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비록 자세한 말은 오고 가지 않았으나 김유현과 나머지 두 명이 왜 멈춰 섰는지 본능으로 이해했으니까. 아스타로트의 포효와 전류가 사납게 방전하는 소음이 등 뒤로 빠르게 멀어진다. 김유현이 빠진 자리에는 두 사용자가 동시에 선두로 올라왔다. 죽으라 달리는 두 남녀는 바로 안현과 이유정이었다. 하지만 아스타로트를 뚫었다고 해도 안심할 수 없다. 공중은 수나에 의해 차곡차곡 정리되고 있다손 쳐도, 애초 구출 조를 가로막으려는 놈들도 없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내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왼쪽에서 이유정을 노리는 기운이 폭풍처럼 치고 들어왔다. 워낙 신속한 속도라 무조건 달리는 것에 주력하던 이유정이 놀라는 것도 전혀 무리는 아니었다. 그때. 퍽! 돌연 어깨에 강한 충격을 받은 이유정이 크게 비틀거렸다.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가는 순간 시린 냉기가 뺨을 스쳤다. 화들짝 치떠진 눈이 긴 생머리를 휘날리는 남다은의 뒷모습을 응시한다. 이유정의 입이 벌어졌다. "언니!" "어서 가…. 아악!" 그 순간 남다은이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다. 바로 이어서 시커먼 기운을 풀풀 날리는 엘도라가 악귀와 같이 일그러진 얼굴로 무섭게 들어오는 찰나였다. 까앙! 부지불식간에 또 한 번 세찬 쇳소리가 울리는 동시에 진한 보랏빛 코트 자락이 펄럭거렸다. 긴 장검을 든 사내는 땅에 기다란 자국을 남 기며 밀려났으나 엘도라의 돌진을 저지하는 데 간신히 성공했다. 그 상태로 허준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 손을 뻗어 상대의 등을 세게 밀쳤다. 주춤 밀려난 이유정이 얼굴이 멍해졌다. "어, 어…." "언니! 그냥 가요!" 이 악물고 충격을 견디느라 허준영이 하지 못한 말을 김한별이 대신 해줬다. 이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성난 검음과 보석을 무작위로 뿌리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이유정 역시 뒤돌아보지 않고 다시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또 세 명이 빠졌다. 이제 남은 인원은 고작 일고여덟 남짓. 근원, 안현, 안솔, 이유정, 진수현, 제갈 해솔, 차희영. 그리고 언제 따라왔는지 모를 유니콘 한 마리. 단상 주변은 그 어느 때보다 시끄러운 소란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일직선으로 주파하는 구출 조의 분위기는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마지 억지로 감정을 절제하는 듯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들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조건 그래야 하는 것처럼. …단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짓씹고 있을 뿐. 잠시 후. "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인원은 비로소 단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시각각 다가오던 건물이 이제 한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커졌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단상 바로 앞까지 도착했을 뿐, 올라가려면 좌우로 난 계단까지 가야만 했다. "────. ────." 그때 제갈 해솔이 빠르게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렸다. 사방에서 물보라 같은 기운이 일어나자 망연하던 안현과 이유정의 얼굴빛에 화색이 돌았다. 제갈 해솔의 장기를 떠올린 것이다. 워프 능력을 사용하면 굳이 계단까지 갈 필요가 없으니까. 그러한 찰나 차희영이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그랬다면 진작 사용하면 됐을 텐데 왜 이제껏 아끼고 있었던 걸까? 또 왜 영창 하는 와중 초조한 눈으로 계속 주변을 둘러보는 거고? 해답은 곧 알 수 있었다. 주문이 거의 완성되기 직전에 갑자기 날카로운 줄기들이 화살처럼 쇄도해왔기 때문이다. "────, 아이 씨!" 인상을 쓴 제갈 해솔은 주문을 취소하고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그거…. 기다리고 있었어. 언제 쓰는지." 곧 요염한 목소리를 내며 등장한 여인은 바로 리리스였다. 제갈 해솔의 워프 능력은 저번 전쟁 때 한 번 밝혀진 바 있다. 적들의 눈앞에서 워프로 안솔을 구출하지 않았는가. 말인즉 악마도 그녀의 능력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에이 씨! 알고 있었는데!" "그런 것 같더라고. 그래서 일부러 기척을 숨겼지." 차갑게 말한 리리스는 우아하게 두 손을 펼쳤다. 열 손가락이 점차 길어지더니 송곳처럼 뾰족해졌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절대 보내지 않겠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하아아아…." 긴 한숨을 뱉은 제갈 해솔이 고개를 꺼트렸다. "아쉽네. 구해주고 유세 좀 떨어보고 싶었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곧장 턱을 젖힌다. "근원, 차희영. 도와줘. 혼자서는 힘들 것 같으니까." 그 순간 곧바로 발 빠르게 뛰는 소리가 이어졌다. 안현과 진수현이 좌측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리고 바로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그러자 어정거리고 있던 안솔와 유니콘도 금세 둘을 뒤따라간다. "놀고 있네. 누가 놓칠 줄 알고?" 가소롭다는 듯이 빈정거린 리리스가 팔을 뻗었으나, "에베베베? 놓치게 할 건데?" 거대한 마력 파동이 리리스가 방출한 검을 줄기를 받아쳤다. 리리스의 눈이 화등잔만 해지더니 입에서 큭 소리가 샜다. 나름 여유라고 여겼건만 생각보다 상대의 마력이 만만하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갈 해솔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주문을 외면서 살랑살랑 손만 흔들었다. 괜찮으니 어서 가라는 뜻. 이내 근원도 조용히 마법 진을 소환하기 시작하고, 차희영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황급히 부채를 꺼낸다. 결국. "……!" 남아 있던 이유정조차 등을 돌렸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나마 움직이기 시작한다. 등 뒤는 여전히 소란스럽다. 신재룡의 거친 고함도 들렸고 칼과 칼이 부딪치는 시끄러운 철성도 들렸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어둡고 뭉클뭉클한 마력과 제갈 해솔의 방대한 마력까지 섞여 마구잡이로 느껴졌다. 그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이유정은 달린다. 달리는 와중 두 눈이 돌연히 그렁그렁해지기 시작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까닭 모를 감정이 갑작스레 왈칵 솟구친 탓이다. 허나 아까 등을 떠밀던 감촉이 아직도 남아 있어 꾹 참으며 전방을 응시했다. 안현과 진수현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도 않는다. 이대로라면 구출을 하든 못하든 늦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하등 관계가 없다. 게헨나나 수나가 알아서 해줄 거라고 생각했다면, 아니. 남의 손에 맡길 거였다면 애초 이렇게 나서지조차 않았을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만이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직접 구하겠다기보다는, 김수현의 구출을 위해 뭐라도 하겠다는 일념으로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그런 만큼 자기를 믿고 남은 이들을 위해서라도 팔자 좋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정이 살며시 단상을 흘겼다. 어지간한 도시의 성벽 규모와 맞먹는 정도의 단상은 여전히 드높기만 하다. "……." 할 수 있겠느냐는 갈등이 잠깐 스쳤으나 세차게 고개를 털었다.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해야만 했다. 결심한 순간 이유정의 온몸이 황금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동체 강화와 묘 족 체술의 동시 발동. 성패는 일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결정 날 것이다. 성공하기만 한다면 곧바로 목적지까지 단숨에 다다를 수 있다. 긴장으로 손을 말아 쥔다. 딱딱 부딪치는 이빨이 서로 강하게 맞물린다. 당장 떠오르는 문제만 해도 한두 개가 아니었으나….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 가늠하는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으니. 기합과 함께 있는 힘껏 땅을 박차자 황금의 형상이 허공을 훨훨 날았다. 이어서 한 발이 단상에 살짝 닿는 순간, "하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놀랍게도 이유정의 전신이 폭발적으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흡사 섬광의 움직임이 저럴까. 혼신의 힘을 다한 금빛 질주가 반듯하게 세워진 단상의 표면을 빛살처럼 가로지른다. 혜성의 꼬리 같은 잔상이 반듯한 수직으로 상승하는 광경은 그야말로 아름답고도 용맹하다. 스치는 풍경도 보이지 않고 귀를 스치는 바람도 느껴지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하나. 점차 가까워져 오는 붉은 하늘뿐. 이것만 넘으면 그토록 바라던 김수현을 볼 수 있다. 그렇게 순식간에 끝자락까지 올라간 이유정이 한 번 더 발에 힘을 줬다. 힘차게 도약해 용수철처럼 튕겨 올라가자 시야가 단상 위로 훌쩍 넘어간다. 이어서 드디어 한 발을 걸치려는 순간이었다. 텅! 불현듯 전신이 무언가 단단한 것에 가로막히는 감각을 느꼈다. "…아?" 이유정의 입에서 망연한 침음이 흘렀다. 멍한 두 눈이 거무스름한 빛이 흐르는 앞을 응시한다. 비로소 보게 된 안에는 김수현이 크게 놀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 "오빠!" 급한 대로 손을 뻗었으나 애꿎은 장막만 치고 말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단상 전체가 정체 모를 검은 막으로 뒤덮인 상태였다. 결계 안쪽에는 마족 수십의 시체가 사방에 널브러져 있고, 그 속에 고연주가 섞여 있었다. 한 손으로 복부를 짚어 쓰러진 채로. 그리고 약간 떨어진 곳으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늙은 노인 한 명. 이제 막 전투가 끝났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던 노인은, 방금 올라온 이유정을 보자마자 귀찮다는 듯이 눈을 치떴다. "…또 귀찮은 떨거지인가." 나직이 중얼거리더니 힘겹게 지팡이를 들어 상대를 겨냥한다. "어떻게 올라왔는지 모르지만…. 잘 가시게." 쾅, 작은 폭음과 함께 이유정이 몸이 세차게 기울었다. 미처 대응할 틈도 없었다. 하릴없이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허무함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눈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느릿하게 흘러간다. '다…. 갔었는데….' 딱 한 발자국이면 됐건만, 설마 단상에서까지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국에는 서서히 아래로 떨어지는 동시에 지그시 눈을 감는다. 그런 이유정이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건 이제 막 계단으로 올라오는 서너 명이었다. "후우우우…." 실로 정신이 없었으나 멜리너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한 발만 늦었다면 저 그림자를 이용하는 이상한 인간이 김수현의 구출에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헐레벌떡 단상으로 올라왔을 때는 이미 마족 대부분이 쓰러진 후였으니까. 또 방금 숫제 단상을 타고 올라온 여인도 그렇다. 뭔 놈이 이렇게 아슬아슬한 순간의 연속인지 결계를 친 것도 정말이지 간발의 차였다. "그래도 어쨌든 확보는 성공했으니까…." 혼잣말을 중얼거린 멜리너스는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서며 눈을 돌렸다. 꿇어앉아 있는 김수현은 어느새 머리를 푹 숙이고 있다. 옆의 여인이 담담히 한쪽 손을 잡아주고 있으나 사내는 미동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꽉 쥐어진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보면 아직 살아는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잠시 후, 김수현을 바라보던 멜리너스가 서둘러 지팡이를 들었다. 그때였다. 쾅! 파츳, 파츠츠츳! 갑자기 귀를 때리는 폭음과 동시에 단상에 쳐진 결계가 뒤흔들리며 푸른빛이 드리웠다. 깜짝 놀라 돌아보는 멜리너스는 자그맣게 금이 간 결계를 보고 경악성을 내질렀다. 웬 유니콘 한 마리가 매섭게 달려오더니 머리의 뿔을 결계에 처박고 있었다. 신성한 힘이 깃든 유니콘의 뿔인 만큼 악마 속성에 큰 힘을 발휘하는 건 당연지사. 후르르르! 나직이 울부짖은 유니콘이 눈을 찌푸리며 멜리너스를 노려본다. 그러더니 다시 고개를 쳐들고 갈라진 부분으로 재차 뿔을 찔러 넣는다. 쾅! 콰직, 콰지지직! 깨졌다. 거듭되는 폭음과 동시에 결계의 한 부분이 와장창 깨지고, 그 사이로 두 사내가 황급히 뛰어들어온다. 멜리너스가 반사적으로 김수현을 향해 마법을 발사한 것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으나, 머리를 치기 직전 펑 소리와 함께 터져버렸다. 진수현이 재빠르게 검기를 날려 상쇄시킨 것이다. "이놈들! 어, 어…?"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는 멜리너스의 몸이 갑자기 휘청거렸다. 불침 맞은 황소처럼 달려든 진수현이 멜리너스의 다리로 태클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위에서 덮쳐든 안현이 늙은 노인의 몸을 완전히 짓뭉개버렸다. 의외라면 의외였다. 목적지에 다다른 만큼 물불을 가리지 않는 두 사내의 육탄 돌격에 멜리너스는 허망하게도 균형을 잃고 말았다. "솔아!" "안솔!" 다음 순간, 얽히고설킨 세 사내를 한 여인이 힘차게 뛰어넘는다. 흰 로브를 펄럭이며 넘어가는 안솔을 확인하는 순간 멜리너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 안 돼…!" 그러나 안솔은 이미 지팡이를 꺼내 든 상태였다. 급한 상황 속에서도 한결 침착한 얼굴로 주문을 외우더니 안간힘을 기울여 팔을 내뻗는다. "김수현!" 이윽고 희멀건 한 빛을 발하는 지팡이가 끝끝내 망연자실한 얼굴에 닿으려는, "닿아라아아아!" 그 찰나의 순간! 퍽. 어디선가 고요히, 그러나 쏜살같이 날아온 무언가가 복부에 꽂혔다. "꺄아아악!" 그에 따라 몸이 절반으로 접힌 안솔이 김수현을 그대로 지나쳐 하염없이 날아간다. 퉁, 퉁 튀기면서 단상 밖으로 나가떨어질 뻔하다가, 가장자리에 가까스로 한 손을 걸치는 데 성공했다. 평소의 안솔이라면 생각할 수도 없는 반사 신경. 하지만 이내 작은 손등조차도 누군가의 발이 세게 눌러 밟는다. "역시. 마지막에 네 년이 나올 줄 알았다." 씩씩 숨을 몰아쉬면서 독설과 함께 등장한 여인은 다름 아닌 에르윈, 아니 사탄이었다. "귀찮은 놈들. 정말 지지리도 끈질겼어." 증오에 찬 눈동자로 아래를 노려보면서 짓밟은 발에 가일층 힘을 준다. 그러나. "피차일반이야. 흐흐…." 뜻밖에도 안솔은 신음은커녕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비웃음과 마주하는 순간 에르윈의 눈이 찢어질 듯 치떠졌다. 곧바로 발을 떼로 걷어차려고 했는데 갑작스레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황급히 눈을 내리자 어느 순간 왼쪽 발목을 잡고 있는 손 하나가 보였다. 여인의 작고 고운 손이 아니라 사내처럼 크고 거친 손이었다. "좋은 거 하나 알려줄까?" 들리는 목소리조차도 낮고 굵은 톤으로 바뀌었다. 어느새 단상에 대롱대롱 매달린 형상은 안솔이 아니라 한 사내의 형상으로 변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애초 김수현을 구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어." "뭐…." "정확히는 살해 시도를 막으면서 너희를 모조리 끌어내는 게 주목적이었지." "그게 무슨…! 아니, 넌!" 에르윈이 크게 기함하는 순간 하승우가 씩 웃는다. 그러더니 에르윈의 발목을 더욱 힘 있게 잡으며 단상을 잡고 있던 손을 떼버렸다. "아!" 아차 하는 순간 에르윈은 상대의 행동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돌연히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는 찰나, 하승우가 아래로 빠르게 떨어지는 동시에 에르윈은 배꼽이 확 쏠리는 감각을 느꼈다. 펄럭, 펄럭! 느닷없이 정수리를 간질이는 날갯짓에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본다. 공중에 작은 괴조 한 마리가 하늘을 선회하고 있다. 하승우에 딸려 추락하는 와중에도, "……!" 에르윈은 분명히 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괴조의 등에서 뛰어내리는 흰 로브의 여인. 등에서 일렁거리는 반투명한 색의 날개. 언뜻 녹 빛이 스치는 한 쌍의 눈동자. …그래. 안솔은 그곳에 있었다. "사용자…." 아래로 뻗는 손이 희게 빛난다. 거리는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삽시간에 가까워졌다. "김수현…!" 이어서 손바닥이 내려꽂히듯 가슴에 맞닿는 순간. 화아아악! 상대의 전신이 단숨에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김수현은 눈을 감은 채 온몸으로 퍼지는 따뜻한 기운을 음미했다. 곳곳으로 퍼지는 기운은 체내의 활력을 활성화하고, 몸에 걸린 구속 장치를 하나도 남김없이 바스러트린다. 이제껏 강제로 억눌려 있던 마력이 무서운 기세로 솟구쳐 텅텅 비어 있던 회로에 가득히 흐르기 시작한다. 본연의 힘이 일거에 해방되고 몸이 자유를 되찾는다. 갇혀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후회를 했는가. 자기를 구하려 무진 애를 쓰는 동료를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서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않아도 된다. 속박의 시간은 완전히 끝났다. 이윽고 전신을 힘껏 떨치며 가슴을 펴자,꾸웅! 하늘을 찌를 듯 예리하게 치솟는 기세가 외부까지 표출됐다. 사위로 흐르는 마력이 웅혼한 울음을 토하고 주변 공간도 기이하게 진동하며 덜덜거리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지그시 감겨 있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흐릿하던 눈에 빛이 돌아왔다. 사라졌던 기력이 살아나고, 묻혀 있던 투지가 불타오른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형형한 불빛이 비치며 시뻘건 불꽃을 튀겼다. 그리하여. 마침내. "……." 김수현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지그시 감겨 있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흐릿하던 눈에 빛이 돌아왔다. 사라졌던 기력이 살아나고, 묻혀 있던 투지가 불타하늘을 찌를 듯 예리하게 치솟는 기세가 외부까지 표출됐다. 사위로 흐르는 마력이 웅혼한 울음을 토하고 주변 공간도 기이하게 진동하며 덜덜거리기 시작한다. 툭, 툭. 부스스스. 자리에서 일어서니 가루가 된 구속 장치가 어지럽게 떨어졌다. 기분이 아득하다. 꼭 꿈을 꾸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천천히 팔을 굽혔다가 쭉 펴본다. 회로의 마력은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흐르는 느낌이다. 되찾은 자유는 자못 생소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와아아아아아아아! 전방에서 들려오는 함성은 하나의 사실을 확실하게 알려준다. 날 담담히 보고 있는 형. 하나같이 울고 웃는 머셔너리 클랜원들. 양팔을 번쩍 들고 환호하는 북 대륙 사용자들.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드는 영웅들의 영혼들. 허공에서 날 흘깃거리는 괴조 우두머리. 그리고 게헨나…. …그래. 나는, 마침내 구출 받았다. 최후의 순간, 하승우가 안솔로 변장해 사탄을 속인 건 나도 예상치 못한 속임수였다. 불가능이라 생각했던 일을 형이, 아니 동료 전원이 힘을 합쳐 이루어냈다. 그 끈질기기 짝이 없던 악마의 방해를 모조리 격파하고 끝끝내 나를 구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기대에 보답할 차례였다. 화르르르! 염화 능력을 사용하자 시야로 맑은 불꽃이 타오른다. 게헨나가 있으니 목숨 걱정은 없으나 그렇다고 무작정 발동한 건 아니다. 예전에 이 능력이 개화됐을 때 화정은 선물이라는 표현을 썼다.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시간이 좀 지나서 알게 됐다. 나는 화정을 통제하는 게 아니라 서로 계약을 맺은 관계에 불과하다. 지금껏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지만 화정이 마음만 먹으면 힘을 빌려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염화 능력만큼은 다르다. 내 사용자 정보 내 잠재 능력 슬롯에 등록이 된 이상 이것만큼은 내 의지로 발동 여부를 정할 수 있다. 말인즉 염화 능력을 발동한 이유는 하나. 타나토스 조각의 각인으로 모종의 제재를 받고 있는 화정을 사용자 설정으로 다시 끌어내기 위함이었다. 마력이 돌아온 지금은 충분히 가능하다. - 푸하! 푸하아아! 아이고! 아이고 죽겠다! 그러자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 가슴이 화끈해지는 동시에 콜록거리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가득히 울렸다.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리운 음성이었다. '화정?' - 후아, 드디어…. 응? 김수현? '화정!' - 김수현! 너…! 화정치고는 격한 호응이다. 아마 화정도 나를 간절히 그렸음이 분명하리라. - 이놈의 자식! '그래…. 어, 어?' -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너 갇혀 있는 동안 뭐라 그랬어? 뭐? 타나토스의 봉인을 왜 해제했냐고? 나더러 미친 거 아니냐고? 실망했다고?'자, 잠깐만.' - 바보 아냐? 너 살리려 그랬다 왜! 살아만 있으면 기회는 오니까! 봐봐! 덕분에 이렇게 구출 받았잖아! 그런데 뭘 안다고 멋대로 지껄이는 거야? '…듣고 있었어?' 짹짹짹짹짹짹짹짹! 화정이 그렇다는 듯 한층 소리 높여 무섭게 지저귄다. 타나토스의 조각에 강제로 억눌려 있는 동안 못했던 말을 전부 쏟아내려는 감도 없잖아 있는 듯하다. 결국, 화정이 진정한 건 아직 전쟁 도중이고 일단 복수부터 하자는 내 말에 동의했을 때였다. 문득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기대한 것처럼 감동적인 재회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이 편이 더 나았다. 평소와 같은 정상적인 반응이었으니까. 화정까지 되찾은 이상 이제 두려워할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우선…. "아!" 왼손으로 상대의 팔을 잡고 화정의 기운을 흘려 넣자 한소영이 짧은 탄성을 터뜨렸다. 구속 장치를 깡그리 태워버렸으니 아까의 나와 똑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겠지. 그와 동시에 오른손을 옆으로 뻗어 화정의 기운을 힘껏 방출했다. 일직선으로 뻗어 나간 맑은 불길은 살금살금 멀어지는 늙은 노인의 등을 직격했다. 그리고 삽시간에 전신이 불에 휩싸인다. "끄으으으!"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 참는 건 칭찬해 줄만 하지만, 그뿐이다. 염화 능력을 발동했을 때부터 멜리너스, 아니 벨리알 따위 애초 상대도 되지 않는다. 이윽고 멜리너스가 찍소리도 못하고 한 줌의 재로 화했을 즈음, 불현듯 멍한 눈초리가 느껴졌다.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안현과 진수현이 망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살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반갑다기보다는 고맙다는 쪽에 무게가 쏠린 표시였다. 잠시 후. "형…." "형님…." 둘은 동시에 눈을 치뜨더니 서로 껴안고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그러지 마. 부끄러움은 내 몫이잖아. "어? 뭐야. 벌써 구했어?" 그때 가는 톤의 음성이 머리 위로 흘렀다. 흘끗 눈을 드니 아니나 다를까. 수나가 허공에 둥둥 뜬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한쪽 눈이 살짝 치켜 떠져 있다. "나 참. 기껏 청소하고 왔더니만…." 약간 아쉽다는 어조라면 내 착각일까. 그러고 보니 공중을 빽빽하게 메우던 마족 군단이 어느새 말끔하게 사라졌다. 누가 했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뉘 집 딸이길래 이렇게 청소도 잘하는지. "수나야." 이리오라는 뜻으로 양팔을 살며시 벌리니 수나의 입이 헤 벌어진다. 이어서 방실방실 해맑게도 웃으며 똑같이 팔을 벌리는 찰나. "빠빠…. 아차!" 갑자기 정색하며 근엄한 표정을 짓는다. 멈칫한 양팔은 순간적으로 팔짱을 낀다. 솔직히 자연스럽다고는 못 해주겠다. "뭐, 뭐 하는 거야? 다, 다 보고 있는데 나, 남사스럽게. 망측하잖아!" 창피함을 감추기 위해 괜히 신경질을 부리는군.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기에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옮겼다. 재회의 기쁨은 나중에 나눠도 충분할 테니. 그렇게 생각한 나는 한 발을 내디디며 옆에서 어정거리고 있는 여인의 정수리를 짚었다. "아…." 우물쭈물하던 안솔이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아니, 이제는 정말 안솔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지금이야 예전과 같은 모습이라고 하나…. '사용자….' '…김수현!' 연한 초록빛이 스쳤던 눈동자. 등에 있었던 일렁거리는 날개. 무엇보다 오라버니가 아니라 사용자 김수현이라고 불렀다. 날 구했을 때의 안솔은 안솔이 아니라 분명히 세라프였다. 당최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나중에 얘기하자." 안솔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이내 고개를 조심스레 끄덕거리는 걸 마지막으로 나는 단상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쿵! 높이가 높이여서 그런지 땅에 착지하는 소리가 거대하다. 하지만 힘이 돌아온 이상 이 정도는 가뿐하다. 전장의 시선이 모조리 쏠리는 가운데 나는 풀썩 일어난 흙 연기를 헤치며 천천히 걸었다. 기실 전쟁 자체는 이미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수나가 등장했을 때부터 적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고, 내가 풀려난 순간을 기점으로 완전히 전의를 잃어버렸다. 하기야 전력의 한 축을 담당하던 마족 군단이 전멸했으니 눈이 있으면 승산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터.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어도 승리는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야만 한다. 이제는 지긋지긋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나나 악마나 서로 너무나 오랫동안 귀찮게 굴었다. 그러니 내 손으로 직접 끊어야 한다. 일 회차 때부터 이어져 온 십오 년간의 악연을. "김수혀어어어어언!" 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누군가 나를 향해 질풍처럼 치고 들어온다. 뜻밖에도 아직 전의를 불태우는 이는 타나토스도 악마도 아니었다. 전신으로 어둠의 기운을 흩뿌리며 달려오는 여인은 바로 엘도라였다. "잘도 멜리너스르으으을!" 아, 설마 단상에서 벨리알을 살해한 것 때문에 그런가? 문득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도라는 여기까지 이르렀음에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왜 이 전쟁이 일어났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동료가 오래전 악마에게 먹혔다는 사실조차도. 이쯤 되면 그냥 진실을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검을 뽑아 대응할까 하다가 순간 조용히 서서 기다리기로 했다. 왜냐면. "죽어어어, 어어…?" 인근까지 근접한 엘도라의 몸이 느닷없이 멈칫 정지했으니까. 정확히는 휘두른 엑스칼리버가 코앞에서 거짓말처럼 멈췄다. "에, 엑스칼리버…?" 물론 엘도라 자의로 멈췄다고 보기는 어렵다. 자기 자신도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안간힘을 쓰며 팔을 움직이지만, 칼은 허공에 딱 붙은 듯 미동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그대로 말하면 엑스칼리버는 스스로 엘도라의 손에서 휘둘러지기를 거부한 셈이다. 엘도라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떠진다. "엑스칼리버? 엑스칼리버! 왜? 어째서…!" 약속의 신전에 갇혔을 때 찾아온 엘도라는 그랬다. 엑스칼리버에 무슨 짓을 했느냐고. 왜 자기를 더 이상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거냐고. 그러다 결국에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 말대로였다. 그 당시에는 짐작만 할 뿐이었지만…. 염화 능력으로 온몸의 감각이 극한을 넘어서는 지금은 칼의 감정이 더없이 확실하게 느껴진다. 아마 내가 엘도라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때, 엑스칼리버는 주인의 생존 사실을 직감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엘도라는 타나토스의 조각을 받아들여 부활에 성공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그 당시 엑스칼리버는 날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칼의 처지에서 보면 난 강제로 빼앗은 강탈자였고, 또 주인을 그리는 마음도 남아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온갖 능욕을 견디며 그토록 그리던 주인과 다시 만난 지금, 엑스칼리버는 몹시 슬퍼하고 있었다. 왜 그러는지 엘도라는 이해하지 못하겠지. 타나토스는 그 사악했던 고대 악신을 수하로 둘 정도의 악 성향을 대표하는 신이다. 나처럼 상반 속성을 품고 있다면 모를까. 조각 하나를 통째로 받아들였으니 성향이 뒤바뀌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즉 엘도라는 타나토스의 힘에 되살아난 시점부터 엑스칼리버의 주인이 될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그렇다면. 엘도라의 타락을 직접 확인한 만큼 이제 나한테도 한 번의 기회 정도는 생기지 않았을까. "엑스칼리버어어어!" 흡사 절규하듯 부르짖은 엘도라가 증오에 찬 눈동자로 날 노려본다. 될지 안 될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천천히,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우웅우웅, 희미한 검음이 귓전을 스치고 지나갔다. "와라." 그리고. "이제 내가 너의 주인이다." 나직이 입을 연 순간이었다. 띠링! 『정상(頂上)의 칭호 효과가 발동합니다.』 갑자기 메시지 하나가 출력되는 동시에. 화아아악! 엑스칼리버의 검신이 휘황찬란한 빛을 뿜었다. 허공에서 요지부동이던 엑스칼리버가 순간 예전과 같은 순백의 빛을 뿜는다. "어, 어어…!" 그와 동시에 엘도라의 상반신이 갑자기 엄청난 기세로 기울기 시작했다. 양손에 거머쥔 엑스칼리버가 내 쪽으로 쭉 뻗어 나온다. 척 봐도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만큼 강렬한 흐름이 느껴졌다. 어떻게든 끌어당기려는지 무진 애를 쓰는 듯했지만, 결국 칼의 힘을 이기지 못했는지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아…!" 잠시 후, 엘도라의 얼굴이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심히 일그러졌다. 왜냐면 자기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칼이 허공을 한 바퀴 선회한 후 내 손으로 얌전히 안착했으니까. 현실을 외면하지 않은 이상 이제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됐을 터. 『황금의 시대 때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상징하는 절대 선이요, 암흑의 시대 때는 어둠을 밝히는 한 줄기 찬란한 빛이었다…. 전설의 성검 엑스칼리버는 사용자 엘도라 코르넬리우스의 타락을 확인, 자신을 사용할 자격을 상실했다고 스스로 판단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내키지는 않지만, 사용자 김수현의 힘을 빌려 악에 물든 전 주인을 처단하고자 합니다.』 그런가. 너도 역시 알고 있었던 건가. 웅웅웅웅…! 나는 서글픈 검음을 흘리는 엑스칼리버의 칼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이윽고 묵직하다 느낄 정도의 무게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엑스칼리버가 사용자 김수현을 주인으로 인정합니다.』 간단하지만 무거운 메시지가 떠오른다. 『사용자 김수현의 호칭 '정상(頂上)'과 '검(劍)의 군주'의 연동이 시작됩니다.』 『상세 효능에 걸려 있던 제한 조건이 전부 강제로 개방됩니다. 현재 조건을 불만족한 상태더라도 사용자 김수현이 획득한 자격으로 엑스칼리버 본연의 힘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용자 김수현의 근력 능력치가 6포인트 상승합니다.』 『사용자 김수현의 체력 능력치가 4포인트 상승합니다.』 『사용자 김수현의 민첩 능력치가 2포인트 상승합니다.』 『사용자 김수현의 고유, 특수, 잠재 능력의 랭크가 2등급씩 상승합니다.』 『이제부터 사용자 김수현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자동으로 강대한 마력을 동반한 일격이 가능해집니다.』 『사용자 김수현의 마력 흐름이 2.5배 상승합니다.』 여섯 개의 메시지가 차례대로 시야를 점령하는 순간. "……." 현실은 조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수현(5년 차) 2. 클래스(Class) : 검의 군주(Arousal Secret, Sovereign Of Sword, Master) 3. 소속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S Zero) 5. 진명 ? 국적 : 1. 정상(頂上) 2. 검의 군주(君主) 3. 마성(魔性)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9) 7. 신장 ? 체중 : 181.5cm ? 75.5kg8. 성향 : 중용 ? 혼돈(Moderation ? Chaos)[근력 111(+14)] [내구 95(+2)] [민첩 103(+2)] [체력 105(+6)] [마력 96] [행운 90(+2)](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1. 화정을 심장에 품었습니다. 2. 고대 무녀의 각인을 심장에 새겼습니다. (마력 회로가 크게 안정되며 효율이 상승합니다.) 3. 체내에 한 치의 노폐물을 찾을 수 없습니다. (마력이 흐르는 속도가 두 배로 상승합니다. 엑스칼리버(+2.5배), 치우천왕 갑옷(+2.5배)의 영향으로 최대 7배까지 출력이 가능합니다.) 4. '군주여, 호령하여라.' 의 영향으로 상시 S Zero 급의 '카리스마(Charisma)' 효과가 발생합니다. < 업적(11) > < 고유 능력(1/1) > 1. 제 3의 눈(Rank : EX)< 특수 능력(1/1) > 1. 심검(心劍)(Rank : S Zero)< 잠재 능력(5/5) > 1. 백병지왕(百兵之王)(Rank : S Zero) 2. 쓰러질 수 없는(Rank : EX) 3. 심안(정)(Rank : EX) 4. 검신(劍神)의 가호(Rank : EX)5. 염화(炎化)(Rank : - )(잔여 능력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최근 능력치 비교 > 1. 변경 전 : [근력 105(+8)] [내구 95(+2)] [민첩 101] [체력 101(+2)] [마력 96] [행운 90(+2)](Total : 588 Point) 2. 변경 후 : [근력 111(+14)] [내구 95(+2)] [민첩 103(+2)] [체력 105(+6)] [마력 96] [행운 90(+2)](Total : 600 Point) 갑작스럽게 진화한 사용자 정보에 놀라는 것도 잠시. 상승한 정보를 채 받아들이기도 전. 두근! 문득 심장이 뛰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심장이 힘차게 고동치기 시작한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상하게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다. 오히려 까닭 없이 몸이 고양되는 듯하다. 그동안 꽁꽁 억눌려 있던 잠력(潛力)이 조금씩 고개를 느낌. 이대로 있는 힘껏 기지개를 켜면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뻥하고 터질 것만 같다. "하아…!" 자연스레 거칠어지는 숨을 추스르며 연신 방망이질하는 가슴에 손을 얹는다. 왜 이러지, 왜 이럴까. …그러고 보니 예전에 들은 기억이 있다. 우리엘이 그랬다. 내 체력이 일백이 포인트를 넘어가는 순간 화정이 설정을 풀고 본연의 힘을 되찾는다고. 그 힘은 무려 이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을 편집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이라고. 생각해보면 화정의 일 차 각성은 체력을 구십 포인트 찍었을 때 이루어졌다. 이 차 각성은 일백 포인트, 삼 차 각성은 일백일 포인트 때 각각 이뤘다. 그리고 현재 내 체력은 무려 일백오 포인트. 나와 화정이 그토록 갈망하던 일백이 포인트보다 무려 삼 포인트나 높다. 화르르르르르르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불현듯 온몸에 어른거리던 불길이 홀연 소리 없이 솟구치기 시작한다. 이어서 심력이 정수리로부터 뽑히는 듯한 기분이 순간적으로 엄습해 다리가 풀릴 뻔했다. 마치 영혼이 쑥 빠져나가는 것 같은 자못 생소하기 그지없는 감각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화정을 얻은 이후 항상 묵직하던 심장이 갑작스레 가벼워졌다. 그렇게 마력을 천천히 순환시켜 몸의 균형을 가다듬는 가운데. "…흥." 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목덜미가 한층 뜨거워졌다. 그와 동시에 엘도라가 땅에 털썩 주저앉는다. 멍하니 날…. 정확히는 내 위를 올려다보는 걸 보니 이상함을 느낀 건 나만이 아닌 듯하다. 아니. 사실상 전장의 대부분이 하나같이 경악한 채로 내가 있는 방향의 허공을 바라보는 중이다. …이상하다. 다들 왜 이러는 걸까? 내 위에 뭐가 있길래? 그러고 보니 방금 가까이서 새침한 콧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수나가 했다고 보기에는 상당히 어른스러웠어. 그때였다. "하찮은 것들 같으니라고…. 그나저나 타나토스는 어디 있지?" 고아하면서도 한껏 무게가 실린 음성이 귓전을 살그머니 울렸다. 그 어조가 화정의 말투임을 깨닫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왜냐면 평소처럼 머릿속을 울리는 게 아니라 확실히 귀로 들렸기 때문이다. 공명(共鳴)음과 입에서 직접 나오는 소리라는 점만 제외하면 화정의 목소리가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실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화정이 육성을 냈다고? 궁금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턱을 젖혀 눈을 들려 했으나, "앗!" 차마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올려다보기는커녕, 도리어 순간 기함하고 말았다. 갑자기 머리에 황급히 닿는 정체 모를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양 관자놀이를 감싸는 감촉은 흡사 여인의 손처럼 매우 부드럽고 아주 따뜻했다. "아, 안 돼. 보지 마." 그때 앞선 목소리와는 달리 한껏 부끄러워하는 음성이 귓가를 스쳤다. 그러면서 내 머리를 강제로 앞만 보게 고정했다. 위를 올려다보는 걸 결단코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화정?" "으, 응? 화정이라니? 나, 난 화정이 아닐지도 모르니까!" "뭐라고?" "보지 말라고 했잖아!" 도로 눈을 올리려는 찰나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양 옆머리에 가해지는 힘이 한층 강해졌다. 이제는 왜인지 굉장히 당황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래서야 꼼짝도 할 수 없잖아. "후유…. 누, 누가 그렇게 갑자기 보래?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 됐는데…." "뭐?" "또 보고 실망하면 어떡해…." "아니. 너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시,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부, 부끄러워 죽겠으니까 얼른 네 할 일이나 하라는 말이야!" "자, 잠깐." 이건 뭔 말이지? 여기 있는 전원이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난 보면 안 된다고? 그럴 수는 없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한순간 상승한 체력으로 화정이 이 세상에 직접 강림했을 가능성이 높다. 즉 화정의 고운 자태를 볼 수 있다는 소리다. 무조건 보고야 말겠다. "크윽…!" 그리하여 억지로라도 보려고 했으나, "이익…! 보지 마아…!" 그럴수록 화정의 손길이 가하는 압박은 필사적으로(?) 강해졌다. 도저히 내가 이길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에는 힘에 눌려 강제로 머리를 떨구자 여전히 주저앉아 있는 엘도라가 자연스레 눈에 밟혔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위를 올려다보고 있더니 나와 언뜻 눈을 마주치자 움찔 몸을 떨었다. 시꺼멓게 죽은 두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거미줄처럼 번진다. 기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위를 봐야 내 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화정이 이처럼 극렬하게 거부하고 있으니. 뭐 좋다. 어쨌든 사용자 정보도 진화했겠다. 일단 들은 대로 할 일을 끝내는 게 낫겠다. 최대한 빠르게 이 전쟁을 끝낸다. 화정의 모습은 그 다음에 보면 되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엘도라가 벌벌 떨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기 시작한다. "싫어…." 한 걸음 내디디자 팔다리를 중구난방으로 움직이며 떨어지려 애를 쓴다. 고개를 흔드는 속도도 덩달아 빨라졌다.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했잖아!" 또 히스테리를 부리는 건가. 동 대륙 전투 때 워낙 충격을 받아서인지 이제는 별로 새삼스럽지도 않다. 생각해보면 나름 불쌍한 구석도 있다. 원래대로라면 남 대륙에서 칼집도 찾고 한창 승승장구하고 있을 텐데. 한데 아직도 진실을 모르고 있고, 내내 이용당하기만 했으며, 끝내 엑스칼리버한테서 버림받기까지 했다. "엑스칼리버? 엑스칼리버! 왜 거기 있는 거야? 네 주인은 나잖아! 그런데 왜애애애!" 하지만 일 회차는 일 회차고 이 회차는 이 회차다. 애초 엘도라는 한 번 사망했으며 타나토스의 조각으로 부활한 사용자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그녀에게 남은 미래는 하나밖에 없다. 이윽고 바로 앞까지 다가가자, 공포에 떨리는 눈동자가 순식간에 그렁그렁해졌다. "시, 싫어! 나, 난! 난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어디까지나…!" 잘못한 게 없다고. 그래. 틀린 말은 아니다. 단지…. 나는 횡설수설하는 엘도라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잘못했다기보다는…." "저리…!" "잘못된 거겠지." "……!"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엘도라는 돌연히 말을 멈췄다. 이어서 할 말을 잃은 듯 서서히 입을 벌린다. "김수현." "…음." 나는 끄덕거리며 엑스칼리버를 수직으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있는 힘껏 내리그었다. 그때 화정이 내 귀로 무어라 은밀하게 속삭였고,그때 화정이 내 귀로 무어라 은밀하게 속삭였고, 그때 화정이 내 귀로 무어라 은밀하게 속삭였고,아래가 아니라 왼쪽으로. 왜냐면 옥신각신하는 틈을 타, 누군가 모종의 행동을 하려는 낌새를 느꼈다고 화정이 말해줬기 때문이다. 그 찰나의 순간. 쯔우우웅! 난 속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냥 단순히 칼을 힘껏 휘둘렀을 뿐이다. 한데 대기를 가르는 느낌부터가 달라졌다. 흡사 가위 안쪽으로 종이를 자르듯 썩썩한 감각이 손을 시원하게 스쳤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불현듯 정체 모를 반발력에 손아귀가 한층 묵직해지더니 칼이 소리 없이 폭발하는 감각이 전해졌다. 불쑥 뽑힌 불그스름한 빛을 띤 거대한 검기가 스리슬쩍 몸을 일으키는 누군가를 향해 거침없이 쇄도한다. 무언가 이상한 감을 느낀 걸까. 뒷걸음질을 치던 리리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멍하니 입을 벌리는 것과 방출한 기운이 명중하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화르르르르르르르! 그 다음에 발생한 현상은. "……!" 스스로 해놓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경악적이었다.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 불길은 적중한 부분으로부터 단숨에 리리스의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 그러더니 형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삽시간에 시뻘겋게 물들였다. 그게 끝이었다. 활활 타오르던 불이 사그라졌을 때 남은 건 허공에 흩날리는 한 줌의 재뿐이었다. 본 그대로 찍소리도 못하고 깡그리 녹아내린 것이다. "……." 방금 장면은 아마 평소 출력의 일곱 배인 마력과 엑스칼리버의 기운, 그리고 해방된 화정의 힘이 섞여 이루어낸 광경일 터. 이성은 그렇게 분석해 알려주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그저 그런 마족도 아니고 악마, 대 악마 리리스를 한 방에 소멸시켰다?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손을 움켰다. 내 힘에 굉장히 놀란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운 기분도 없잖아 있었다. 딴 놈은 몰라도 적어도 리리스는 진심으로 고통스럽게 죽이려고 했는데…. "김수혀어어언!" 그때 분노에 찬 괴성이 들리며 한 기척이 갑작스럽게 가까워졌다. 몸을 한껏 굽힌 채 돌진해오는 이는 바로 아스타로트였다. 한껏 일그러진 얼굴로 흑염에 휩싸인 주먹을 필사적으로 뻗는다. 그러나 시야에 포착하는 순간 왜인지 상대의 동작이 파노라마 흐르듯 한없이 느릿하게 보였다. 하여 머리를 젖혀 얼굴을 노리는 공격을 스치게 한 후, 아스타로트가 들어오는 때에 맞춰 왼 주먹을 마주 뻗었다. 이윽고 주먹이 상대의 가슴에 정확하게 꽂히는 찰나였다. 뻥! 처음 느낀 감각은 물이 가득 찬 풍선을 힘껏 쳐서 터뜨리는 듯한 감촉이었다. 푹 퍼진 시커먼 핏물이 폭풍 같은 바람에 동반돼 낯에 힘차게 부딪친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자 검은 줄기가 흘러내리는 시야로 허공을 훨훨 나는 아스타로트의 시체가 밟혔다. …아니, 나도 모르게 시체라 표현하고 말았다. 왜냐면 가슴부터 복부까지 커다란 구멍이 뚫려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상태였으니까. 심지어 장기째로 터져 폭발했는지 구멍 건너편으로 허공이 훤히 보일 지경이었다. "끄르르르!" 잠시 후, 땅으로 털썩 떨어진 아스타로트의 몸이 펄떡펄떡 떨리기 시작했다. 두 눈은 한껏 까뒤집혔고 입은 거품을 토한다. 목숨은 용케 붙어 있는 것 같으나 저 상태로 살아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러자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간헐적으로 경련하던 아스타로트의 몸이 축 늘어졌다. 일 회차 때 죽기 직전까지 온갖 저주를 퍼붓던 과거와 비교하면 상당히 허망하고 비참한 최후였다. 혹시 하나 남은 목숨으로 부활할지도 몰라 바로 확인 사살을 준비했으나 기우에 불과했다. 미처 기운을 쏘기도 전 아스타로트의 시체는 좀 전의 리리스처럼 한 줌의 재로 화해버렸으니까. 남은 건 대지에 고인 시커먼 핏물뿐이었다. 그렇게 확실히 소멸을 확인하는 순간 난 이번에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당황스럽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어안이 벙벙하다고 해야 하나. 단순한 주먹질 한 번에 아스타로트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건 그냥 강해졌다는 한 마디로 설명이 되지 않는 기상천외한 무력이 아닌가. 물론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수현(5년 차) 2. 클래스(Class) : 검의 군주(Arousal Secret, Sovereign Of Sword, Master) 3. 소속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S Zero) 5. 진명 ? 국적 : 1. 정상(頂上) 2. 검의 군주(君主) 3. 마성(魔性) ? 대한민국6. 성별(Sex) : 남성(29) 7. 신장 ? 체중 : 181.5cm ? 75.5kg8. 성향 : 중용 ? 혼돈(Moderation ? Chaos)[근력 111(+14)] [내구 95(+2)] [민첩 103(+2)] [체력 105(+6)] [마력 96] [행운 90(+2)](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사용자 정보, 특히 근력 능력치는 몇 번을 확인해도 받아들이기 자못 생소하다. 원래 내 순수 근력 능력치는 구십칠 포인트. 여기서 TOPG로 이 포인트, 수라마창으로 육 포인트, 엑스칼리버로 육 포인트. 총합 십사 포인트 상승으로 백십일 포인트를 찍었다. 백일 포인트만 넘어도 인간을 초월하는 영역으로 알고 있는데…. 백십일 포인트는 십오 년 동안 사용자로 활동하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능력치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 자신이 두려워질 정도의 힘이다. 그때 정수리를 톡 건드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흥. 내가 봐주는 걸 고맙게 여기라고. 방금 자칫 잘못했으면 저놈뿐만이 아니라 아군까지 죽을 뻔했으니까." …뭐라고? 즉 방금 일격은 화정이 개입해서 딱 아스타로트만 죽일 정도로 힘을 조절해줬다는 건가? 그럼 전력으로 하면 어느 정도라는 거지? "생각해봐. 단순 수치로만 따져서, 저 애도 행운이라는 능력치로 차원 법칙을 극복할 정도의 힘을 발휘하고 있잖아." 흠. 안솔의 행운 능력치가 백오 포인트였던가? "능력치 종류가 다르기는 하지만 어쨌든 넌 무려 백십일 포인트라고. 이쯤 되면 차원 법칙을 극복하는 정도가 아니야. 훨씬 넘어서는 수준이지. 그러니 이런 놈들 따위는 애초…? 야. 이게 어디서 은근슬쩍 눈을 들어?" 깜짝 놀란 척하며 위를 올려다보려는 찰나, 화정이 가하는 관자놀이의 압박이 가일층 강해졌다. 아쉽다. "진짜 조금도 방심할 수가 없다니까. …아무튼, 넌 아직 네 힘이 어느 정도인지 감도 못 잡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더니 내 머리를 움켜잡고 강제로 시선을 돌린다. "우선 저놈들은 어떻게 할 거야?" 화정이 보게 한 곳은 소강상태로 접어든 전장의 한가운데였다. 정확히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날 보고 있는 서, 남 대륙 사용자들. 뭐 물어볼 것까지 있나. 내 처지에서는 저들도 공범이나 마찬가지다. 저놈들만 아니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도 않았을 터. 내가 무슨 성인군자도 아니고, 살려줄 생각 따위 추호도 없다. 그리고 저들도 여기서 죽는 게 차라리 깔끔할 수도 있다. 설령 항복해서 목숨은 건진다손 쳐도 이후 남은 삶은 비참하기 짝이 없을 테니까. "좋아. 그럼…." 그 순간 손목부터 팔뚝까지 부드러우면서 따뜻한 기운이 얹혔다. 생각을 읽었는지 화정이 내 팔을 들어 정면을 겨누게 한 것이다. 난 그제야 화정의 신체 중 일부를 볼 수 있었다. 그래 봤자 팔 한쪽에 불과했지만, 맑은 불빛이 흐르는 고운 선은 왜인지 여성스러운 매력을 물씬 풍긴다. "…집중해.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기본적인 원리는 신화계 권능과 똑같아. 네가 해야 할 건 의지만 담는 것뿐이야. 나머지는 내가 해. 무슨 말인지 알지?" 화정이 중얼거리는 가운에 천천히 머리를 끄덕거렸다. 간단한 말이다. 신화계 권능의 가장 큰 특징은 사용자가 어떤 식으로 힘을 발동할지 결정할 수 있다는 권한이 넓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같은 범위 내에 공격한다고 해도 아군과 적군을 따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 등등. "좋아. 그렇게만 하면 돼. 그대로. 좀 더. 옳지, 옳지….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손끝으로부터 불 줄기가 무음으로 두 갈래 튀어나왔다. 각각 좌우로 쭉 뻗어 나가더니 일대를 빛살처럼 가로지르며 둥근 둘레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이내 빙그르르 회전을 시작하자 적들도 현재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겨우 깨달은 듯싶었다. 물결처럼 넘실거리는 불 줄기는 이미 장내를 고리 형태로 에워싼 채 무섭게 선회하고 있었다. 눈 깜짝하는 틈에 가속하며 차츰차츰 원의 범위를 좁혀간다. 이대로라면 저 불길의 원 안에 갇힌 적은 한 명도 남김없이 소멸할 것이다. "아…!" 공교롭게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바로 아래서 엘도라의 탄식이 터졌다. 이어서 내 발목을 붙잡고 처절하게 늘어지기까지. "안 돼! 그만둬! 저 사람들은 아무 죄도 없잖아! 제발, 제발…!" 처절하리만치 울부짖었으나 이미 한참 늦었다. 불의 움직임은 거친 회전에 비해 몹시 고요하고 조용했다. 가장 외곽에 있던 사용자에 회전하는 불길이 스치는 순간 남는 것은 붉디붉은 안개뿐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전신으로 불이 옮아 붙는 동시에 몸이 녹으며 연기를 뿜는 것이지만, 일련의 과정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빨랐다. 한 명에서 두 명, 두 명에서 네 명, 네 명에서 열여섯 명, 열여섯 명에서 이백오십육 명…. "그, 그만두라고! 차라리 날 죽여! 이 악마 같은 자식아아아아!" 엘도라의 절규와 적들의 비명이 묘하게 어우러져 하모니를 울린다. 하지만 그 시끄러운 합창은 얼마 지나지 않아 뚝 끊겼다. 소용돌이처럼 휘돌던 불의 고리는 원점에 닿은 순간 세찬 불꽃을 튀기며 사라졌으니까. 잠시 후. 시야로 보이는 건 얼떨떨한 얼굴로 휑한 전장을 돌아보는 아군뿐이었다. 여기까지 이르는 시간은 실제로 십 초도 걸리지 않았으나 체감상 몇 시간은 걸린 것 같았다. "하…." 그냥 헛웃음만 나온다. 수천에 이르는 병력이 한순간 불에 녹아 소멸했다. 동시에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세상을 편집한다.' 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우리엘이 왜 그토록 내 체력 상승을 두려워하고 반대했는지. 화정이 설정을 벗고 해방된 이상 천사나 악마 따위는 더 이상 상대도 되지 못한다. 이건 사기라고 말해도 부족할 정도다. 허탈할 정도로 쉽지 않은가. …여하튼 마족 군단은 수나가 전멸시켰고 대 악마도 대부분 처리했다. 서, 남 대륙도 방금 소멸시켰고. 그럼 이제…. "아아아아아아아악!" 단말마처럼 들리는 괴성. 난 애타게 부르짖는 엘도라를 그대로 지나쳤다. 어차피 가만히 놔둬도 죽음은 기정사실이니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어 걸음은 스무 발자국이 되기 전에 멈췄다. "……." 에르윈은 아까 단상에서 떨어진 그대로 땅에 드러누워 있었다. 대자로 누운 채 한가로이 하늘을 보고 있는 모습은 여유롭다기보다는 이미 모든 걸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내려다보자 흐릿한 두 눈동자가 느릿하게 날 마주한다. 순간 기분이 어떠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꾹 참고 어느새 느슨해진 칼자루를 꽉 쥐었다. "죽기 전에…." 그때 에르윈이 입을 열었다. "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난 대답 대신 에르윈의 목젖에 엑스칼리버를 겨눴다. 돌연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이 일었다. 가슴은 아까부터 고동치고 있었으나 머릿속은 소름 끼칠 만큼 차분하다. 아랫배가 찡한 것 같기도 하다. 마침내 기대하고 기대하던 시간이 왔다. 얼마나 이 순간을 그려왔는가. 얼마나. "글쎄. 난 너랑 별로 할 말이 없는데." 내가 말하기는 했지만 몹시 차가운 음성이었다. "넌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날 짜증 나게 했거든. …이번에도 그랬고." "……?" "과거에도." "……!" 마지막 말은 누구도 들리지 않게 낮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에르윈은 순간적으로 흠칫 떨더니 눈에 이채가 스쳤다. 아마 사탄이라면 얼추 짐작은 하겠지. 나름의 배려라면 배려였다. "…하." 문득 사탄이 팔뚝을 교차해 얼굴을 가린다. 곧바로 어깨가 들썩거리기 시작한다. "흐흐…. 흐하하하…." 낮게 흐르는 소리. 양팔을 얼굴에 얹은 터라 어떤 표정인지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웃음인지 울음인지도 모르겠다. "그랬군…. 그런 거였어…." "뭐가 그렇게 웃기지?" "응? 아아…. 실은 아까까지만 해도 별 감흥이 없었거든. 다 끝났는데 이상할 정도로 말이야. 그런데…." "……." "방금 말을 듣자마자 그건 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하하하." "…뭐 글쎄. 어차피 그때나 지금이나 결과는 똑같아서." 그렇게 말한 나는 "그러니까." 엑스칼리버를 하늘 높이 들며 말을 이었다. "이제 그만 끝내자. 이제 지긋지긋할 정도로 지겨우니까." 그 순간 끊임없이 이어지던 사탄의 웃음이 뚝 멎었다. 얼굴은 여전히 두 팔로 가려져 있었다. "피차일반이다. 사용자 김수현." 종막에 어울릴만한, 스스로 생각해도 매우 깔끔하고 멋진 일격이었다. 그렇게 에르윈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난 엑스칼리버를 내리쳤다. 눈 부신 햇살을 반사하는 엑스칼리버는 공기를 가르며 힘차게 목그렇게 에르윈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난 엑스칼리버를 내리쳤다. 눈 부신 햇살을 반사하는 엑스칼리버는 공기를 가르며 힘차게 목으로 내려꽂혔다. 그렇게 에르윈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난 엑스칼리버를 내리쳤다. 눈 부신 햇살을 반사하는 엑스칼리버는 공기를 가르며 힘차게 목결국,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건 히죽 올라가는 입꼬리였다. 그렇게 에르윈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난 엑스칼리버를 내리쳤다. 눈 부신 햇살을 반사하는 엑스칼리버는 공기를 가르며 힘차게 목엑스칼리버의 칼끝이 에르윈의 목을 단숨에 찔렀다. 난 바로 뽑지 않고 강하게 비틀어 돌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 화정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악마의 목숨이 두 개임을 고려해 한 번에 끝내기 위함이었다. 목젖이 꿰뚫렸음에도 에르윈은 몸부림은커녕 한 마디 입을 열지 않았다. 신음도 새지 않았다. 단지 두 눈을 크게 뜨며 부르르 경련했을 뿐. 이윽고 에르윈의 전신이 맑은 불길에 휩싸이더니 한 줌의 재가 되어 푹 흩날린다. 난 핏물조차 떨어지지 않는 칼을 들고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 사실 여전히 멍한 기분이 가시질 않는다. 한 번에 너무 큰 힘을 얻었다. 적응 문제라기보다는 아마 허탈하다는 표현이 옳지 않을까. 온갖 고난을 거치며 간신히 오른 무대의 막이 너무 쉽게 내린 느낌이었다. …스무 살 즈음인가. 영장을 받고 입대했을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군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하는 상상. 어서 나가고 싶다. 이년 후 전역하면 기분이 어떨까. 홀 플레인에 들어오고 나서도 비슷했다. 한 시라도 빨리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나중에 모든 일이 끝나고 편안해지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순간이 찾아온 지금. FreelancerK1장FreelancerK1장FreelancerK3장dkeogu2001 "…하." 모르겠다. 전역하고 부대를 나올 때는 그냥 붕 뜬 것 같았는데 그때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이것 하나만큼은 알겠다. 마침내. "끝난 건가." 쾅! 라고 말하는 찰나, 느닷없이 커다란 폭음이 귀를 때렸다. 깜짝 놀라 돌아보자 시커먼 기운이 연기처럼 뭉게뭉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순간 내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왜냐면 연기 속에서 뒤로 쭉 밀려나는 이가 바로 게헨나였기 때문이다. 타나토스는 심히 비틀거리면서도 뒷걸음질 치는 게헨나를 불침 맞은 멧돼지처럼 뒤쫓는 중이다. 말도 안 돼. 게헨나가 밀리고 있다고? "게헨나!" 믿을 수 없다는 생각에 외치는 순간, 난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날 흘끗 흘긴 게헨나의 살짝 미소 짓는 얼굴을. 꽝! 다음 순간 타나토스의 공격이 또 한 번 적중했다. 게헨나의 복부가 반으로 접히더니 하늘을 훨훨 날아 땅을 구른다. 거기까지 확인했을 때 내 몸은 이미 그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게헨나?" "읔. 그, 그대여…." 게헨나는 간신히 상반신만 들더니 분한 기색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더니 돌연 한없이 애처로운 표정을 짓고 기다렸다는 듯이 얻어맞은 복부를 가리켰다. "쟤, 쟤가 날 때렸다." "…응?" "타나토스가 날 막 때렸느니라. 난 계속 당하기만 했다." "……." 그런 것치고 상처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게 좀 이상하다. 어쨌든 방금 밀리는 광경은 확인했으니까. 하지만 뒤를 돌아본 나는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장에라도 찢어 죽이겠다는 분노가 단박에 가라앉는 걸 느꼈다. 왜냐면 가까이서 본 타나토스의 상태가 굉장히 끔찍했기 때문이다. 우와, 심하다. 팔 하나는 뜯겼는지 아예 보이지도 않고, 온몸에는 구멍이 뻥뻥 뚫린 게 상당히 그로테스크하다. 거기다 겁화에 심하게 당했는지 살은 녹아 흐르다 못해 흉하게 짓무르기까지 했다. 이건 어딜 봐도 타나토스가 죽기 일보 직전의 모습이잖아. 실제로 기운도 극도로 약해져 있고. 아마 방금 장면은 젖 먹던 힘까지 뽑은 최후의 공격이 아니었을까. "검둥이 씨. 저 문득 궁금한 게 생겼어요." "네. 말씀하시지요. 메르세데스." 혼란스러워하는 와중, 가까운 곳에서 남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웬 메이드 여인과 베히모스가 사이좋게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생각해보니 이것도 이상하다. 게헨나가 밀리고 있었다면 왜 도와주지 않은 거지? "좀 전까지 게헨나는 저 개새끼 년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지 않았나요?" "몰아붙였다기보다는 가지고 놀았다는 표현이 옳지 않을까 사료됩니다." "맞아요. 사실 우리보고 끼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 한 것도, 금방 끝낼 수 있는 전투를 질질 끄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방금은 일 부러 당하기까지 했네요?" "아, 그건 말입니다. 제 짧은 소견으로 가로되, 아마 부왕을 의식해서인 듯싶습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실은 게헨나 님께 예전에 있었던 부왕과의 재회를 몇 번 언급하신 적이 있거든요. 그 뭐라더라. 고대 악신? 여하튼 그때도 일부러 당한 척했다는데, 부왕께서 자기를 위해 진노하는 모습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고 하십디다. 말인즉…. 억!" "어머! 게헨나? 이게 무슨 짓이죠?"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으나 한순간 베히모스가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등 뒤로 갑작스레 어마어마한 살기가 느껴졌다. 굳이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아, 난 투구가 찌그러진 채 기절한 베히모스에 시선을 고정했다. 지금 돌아보면 게헨나한테 까닭 없이 살해당할 것 같으니까. 그래. 지금은 타나토스를 처리하는데 신경을 쏟자. "?" 그러나 타나토스는 어느새 아까 봤던 자리에서 사라져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언제 끌려왔는지, 코앞 허공으로 올라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마치 멱살을 잡혀 끌려 올라간 것처럼 말이다. 누구한테 잡혔는지는 안 봐도 훤하다. "야, 다시 말해봐." 낮지만 분노로 끓는 듯한 음성이 들렸다. 짝! 이어서 살 부딪치는 차진 소리가 울렸다. 붉은 염화를 머금은 손바닥이 상대의 뺨을 세차게 갈긴 것이다. 얼마나 강하게 후렸으면 타나토스의 턱이 휙 돌아갈 정도였다. "그때처럼 말해보라니까?" 짝! 이게 원조 불꽃 싸대기인가. 실제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뭐? 꼴 좋다고?" 짝! 뜨거운 불똥이 흩날리는 가운에, 가녀린 고개가 부러질 기세로 연달아 돌아간다. 타나토스는 반항은커녕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다. 기실 몸이 축 늘어져 있는 게 이미 죽은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아마 내가 풀려나는 동안 게헨나가 그만큼 심하게 족쳤다는 방증이리라. "너도 한 번 봉인된 기분을 맛보라고?" 짝! 그렇지. 아무렴. 게헨나가 질 리가 없지. 더욱이 타나토스는 제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그나저나 신은 원래 이렇게 싸우는 건가? 아니면 이 상황이 특별한 건가? "하! 죽음의 신께서 왜 꼬리를 마셨어? 그때 당당한 기세는 어디 가고…. …어, 뭐야?" 불현듯 화정이 당황하는 음성이 들린다. 타나토스의 몸이 힘없이 출렁출렁 흔들리는 것이 목을 붙잡고 흔드는 듯싶다. 갑자기 불안해졌다. "주, 죽었네?" 뭐? "죽었다고?" 깜짝 놀라 위를 올려다보는 순간 느닷없이 타나토스가 휙 던져졌다. 그러더니 화정이 다시금 내 머리를 붙잡아 아래로 고정한다. 그리고 잠시 후, 화정의 것이라 추정되는 불길이 타나토스를 차츰차츰 살라 먹는걸 보며 난 속으로 땅을 치고 후회했다. 화정을 볼 절호의 기회를 날렸기 때문이요, 타나토스가 너무 허무하게 소멸했기 때문이다. 그렇잖은가. 극적으로 구출 받았고 모처럼 어마어마한 힘도 얻었건만. 물론 짠하고 멋들어지게 등장하는 걸 기대한 건 아니지만, 왜인지 제대로 복수했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허탈한 느낌이다. 적어도 타나토스라면 치열하게 싸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놀고 있네. 그럼 내가 괜히 누누이 체력 올리라고 조언했겠어? 다 일이 쉬워지니까 그러라고 한 거 아냐." 내 생각을 읽었는지 화정이 핀잔 조로 말했다. "그리고…. 나, 나도 타나토스가 이렇게 쉽게 죽을 줄은 몰랐어. 그냥 원한 좀 풀 겸 몇 대 친 건데 완전히 빈사 상태였다고. 그러니까 전부 게헨나 탓이야." 하기야 그렇기는 하다. 내가 봐도 타나토스의 상태는 심각했으니까. 아마 게헨나는 딱 한 대만 정통으로 꽂으면 죽일 수 있는 수준까지 몰아붙인 후, 일부러 농락하지 않았으려나. 애초 다 이긴 전쟁이기도 했고. 어쩌면 직접 마무리를 지었다는 것에 만족해야 할지도. "잠깐! 왜 내 핑계를 대는 거지?" 책임을 돌리는 말에 발끈했는지 게헨나가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럼 아니라고?" "그렇다. 내가 보기에는 네 무식한 공격에…." "뭐야? 무식? 연극도 제대로 못 하는 게…!" "무어라?" …아니. 둘이 싸우는 건 좋아. 한데 왜 관자놀이의 압박이 한층 강해지는 거냐. 내 머리에 화풀이하지 말라고. 뭐, 아무튼. "그럼…." 이제 정말로 끝난 건가? "수현아." 그렇게 생각한 찰나,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겨우 시선을 돌리니 저절로 탄성이 터졌다. 날 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는 이는 바로 형이었다. "자, 돌려주러 왔다." 형은 날 보자마자 손을 쑥 내밀었다. 손바닥에는 푸른빛을 흘리는 작은 구슬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제로 코드였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제로 코드를 손에 쥐었다. 왜인지 손아귀가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기분은 어때?" 멍하니 쳐다보는 동안 나직한 음성이 귓전에 흘렀다. 형의 부드러운 눈빛과 마주하자 돌연 몸이 굳은 듯 꼼짝도 하지 않는다. 굳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말문이 막혔다고 하겠다. 형은 한참을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날 끌어안았다. "혀, 형." "잠깐만. 가만히 있어봐. 좀 안아보자." 결국에는 핏물 젖은 팔이 내 목을 휘감았다. 어찌나 강하게 조이는지 호흡이 약간 곤란할 정도였다. 캑캑거릴 즈음에야 은근슬쩍 놓아준 형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내 어깨를 토닥토닥 쓸었다. "난 이 정도로 봐주겠지만, 나머지는 모른다?" 이윽고 영문 모를 말을 하더니 한 걸음 살짝 비켜선 순간이었다. 난 화들짝 놀라 머리를 뒤로 뺐다. 형이 빠진 자리로 누군가 정면으로 치고 들어오며 다짜고짜 따귀를 올렸기 때문이다. "이 못된…?" 손이 하릴없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가자, 고연주가 크게 휘청거리며 얼떨떨하게 바라본다. 나도 당황스럽다. "왜, 왜 피해요?" "왜, 왜 때립니까?" 똑같이 반문하자 고연주는 두어 번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자세를 바로 하더니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거린다. "그냥…. 왠지 이 상황에서는 그래야 할 것 같아서요." "말도 안 됩니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잠시만요. 지금 어디서 잘했다고 목소리 높여요? 아까 단상에서 전 신경도 안 쓰고 그냥 갔죠? 그리고 거짓말도 했잖아! 뭐? 클랜원만 구출하고 바로 돌아오겠다고?" "…어." 이번에는 내가 할 말이 없어졌다. 고연주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더니 독기 찬 눈으로 손을 요리조리 돌렸다. 마치 꼭 한 대는 때려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듯이. 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내 잘못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떨어져 있는 동안 상당히 건방져진 것 같다. 돌아가는 대로 저 되바라진 가슴 좀 혼내야겠다고 다짐하며 양팔을 살며시 벌렸다. "그보다는…. 차라리 안기는 건 어떻습니까?" "뭐, 뭐요?" "그게 상황상 더 어울릴 듯한데요?" "……." 눈을 찡긋하며 천연덕스레 말하자 고연주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 순간이었다. "오라버니!" 앳된 음성과 함께 익숙한 형상이 고연주의 옆을 스쳐 신속하게 쇄도해온다. 두 팔을 활짝 펼친 안솔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훌륭한 기습이다. 그리하여 약 일 미터쯤 남았을 즈음. "야! 감히 누구한테…!" 공중에서 웬 작달막한 덩어리가 사이로 쏜살같이 파고들었다. 수나였다. 퍽! "오뿝!" 수나는 뒷발 차기로 안솔의 얼굴을 절묘하게 밀어냈고, 그 반발력을 이용해 붕 날아온다. 한데 왜 날 보자마자 팍 인상을 쓰는 걸까. "누, 누구야! 감히 누가 날 밀었어!" …설마 내가 정말로 못 봤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리고 '나는 정말 안기기 싫지만, 누가 밀었기 때문에 정말 어쩔 수 없다.' 고 말하는 듯한 얼굴빛은 또 뭔데. 기다렸다는 듯 양팔을 활짝 벌리며 날아오는 주제에 저러면 설득력도 없다. 그때였다. "어딜!" 우우우웅! 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갑자기 게헨나의 수호 요새가 발동됐다. 정확히 수나가 내 품에 안기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텅! 당연히 수나는 장막에 부딪혀 주르륵 떨어졌고, 난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봤다. "후유…. 으, 응?" 돌아본 곳에는 입꼬리를 씩 올린 게헨나가 내 쪽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치자 황급히 손을 숨기더니 짐짓 엄한 얼굴로 먼 산을 응시한다. 그러고 보니 무언가 이상하다. "……?" 어느 순간 에워싸였다. 하나 궁금한 건, 왜 남자는 한 명도 없고 전부 여성이냐는 거다. 게헨나, 수나, 고연주, 안솔, 화정은 그렇다 치고. "후후후후. 후후후후." 생글생글 웃으며 활에 화살을 재는 임한나. "……." 말없이 고개를 꺾는 남다은. "자. 이걸로 치면 그래도 꽤 아플 거예요." 커다란 얼음 덩어리를 소환해 누군가에게 쥐여주는 정하연. "뭐, 하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받아 드는 비비앙. 게다가 단검을 꺼내 돌리는 이유정, 차분히 보석을 고르는 김한별, 그리고 약간 화난 듯한 기색의 한소영…. 아니 한소영은 또 왜? 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전원 얼굴이 진심이다. 어느새 형은 멀찍이 물러났고, 안현은 진수현과 짝을 이뤄 "팝콘 팔아요!" 라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담담히 서 있던 선유운은 날 보더니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머리를 숙인다. 뭐냐. 이건 또 무슨 전쟁이냐. "나 참. 정말 웃기지도 않아서." 그때 화정의 어이가 없다는 듯한 음성이 들렸다. 이어서 내 옆으로 살짝 스치는 듯한 기색이 느껴져, 반사적으로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설마…. 드디어 모습을 보여줄 자신이 섰나? 그 순간 따뜻한 기운이 갑작스레 얼굴 옆으로 가까워졌다. "김수현. 너 잘 들어." 몹시 낮은 음성. 스리슬쩍 눈알을 굴리자, 흰 눈을 연상케 하는 새하얀 뺨과 가지런하게 흘러내린 긴 생머리가 보였다. 예쁜 다홍색이다. "그, 그러니까." 왜인지 굉장히 진중한 음성이라 나도 모르게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러고도 화정은 한참을 주저하더니, "…거야." 내 귀에 조용히 속닥거렸다. 너무 작은 소리라 미처 잘 듣지 못했다. "뭐?" "죽일 거라고." "너도 뜬금없이 뭔 소리야. 날 왜 죽여?" "아 그러니까!" 화정은 신경질적으로 소리 지르더니 다시 내 귀에다 입을 착 붙였다. 부르르 떨리는 감촉이 전해졌다. 그리고. "가, 가슴 작다고 놀리면 죽일 거야! 기필코!" 예상치도 못한 말을 들은 순간이었다. "푸!" 문득 몸을 무겁게 짓누르던 정체 모를 느낌이 탁 풀리는 걸 느끼는 동시에. "하하…. 하하하하…!"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화정이 무어라 화내는 소리가 들렸으나, 사방에서 이상한 눈초리가 느껴졌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예기치 못한 그 한 마디에 비로소 전쟁이 끝났다는 걸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난 멈추지 않고 마음껏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는 조용한 주변으로 기분 좋게 울려 퍼져, 살며시 드리워지는 햇살을 따라 여운처럼 퍼져나가는 듯했다. ============================ 작품 후기 ============================김수현 & 화정 일러스트 업데이트했습니다. 전쟁은 끝났다. 아니. 이로써 홀 플레인에서 십오 년 동안 했던 사용자 활동의 끝자락에 겨우 한 발을 걸쳤다고 해야 하나. 중요한 건 아직 마침표 혹은 종지부를 찍었다고 보기는 이르다는 것이다. 여러 생각이 동시에 뇌리를 스쳤으나, 우선 전장을 확실하게 정리할 것을 지시했다. 마족 군단은 수나가 말끔히 정리했고, 서, 남 대륙 사용자는 내가 직접 처리했다. 그것보다는 난 대 악마의 잔재를 살피는데 주력했다. 리리스, 사탄, 아스타로트의 소멸을 거듭 확인하는 한편, 보이지 않는 아스모데우스의 행방도 확인했다. 알고 보니 아스모데우스는 수나가 공중을 청소하면서 딸려 들어갔더라. 엘도라는 어느새 울부짖던걸 멈추고 조용해져 있었다. 쓰러져 혼절한걸 보고 목을 벨까 하다가 일단 포로로 데려가기로 했다. 어디서 한 번 부활했다는 말을 들었는지 비비앙이 연구용으로 사용해보고 싶다고 간곡히 요청했기 때문이다. 기실 타나토스가 소멸한 이상 죽음의 조각으로 생명을 잇던 엘도라는 곧 죽는다고 봐야 옳다. 하지만 그냥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다. 어쨌든 시신에 가치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이어서 타나토스 소멸까지 꼼꼼하게 확인한 후, 마지막으로 영혼 군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전 그들과 용이 잠든 산맥에서 맺었던 약속이 기억났으니. 가벼운 인사와 구출 협조에 관해 감사 인사를 하고 나서, 난 헬레나에 관해 알고 있는 대로 설명했다. 최후의 전쟁이 끝나고 마그나카르타가 어떤 저주를 내렸는지, 그리고 그때 헬레나가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 등등. 물론 용이 잠든 산맥 이후의 일도 잊지 않았다. "흠…. 그랬던 것이군요. 그래서 헬레나가…." 일련의 설명을 끝내자 사내의 영혼은 심각한 얼굴빛으로 머리를 끄덕거렸다. 후련하다기보다는 복잡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잠시 사내를 살펴보다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혹시 원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대면시켜드릴 수도 있습니다." "예? 하지만 그때 소멸하셨다고…." "완전한 소멸은 아니었습니다. 정확히는 존재의 힘을 회복하는 양분이 된 것이지요. 듣기로 지옥에서 마그나카르타와 같이 살아났다고 들었습니다." "지옥…." 순간적으로 사내의 낯에 갈등의 빛이 역력해졌다. 난 조용히 사내의 결정을 기다렸다. 정말로 원한다면 게헨나나 수나한테 부탁해 만나게 할 수도 있으니까. "아니요." 그러나. "말씀은 감사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뜻밖에도 사내는 단호히 거부했다. "저주를 들은 당사자로서 느꼈을 갑갑함과 인간을 위하는 마음. 그리고 전쟁에 승리해 기뻐했던 우리를 보며 들었을 복잡한 기분…. 그걸 이해 못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들리는 음성에는 여전히 씁쓸함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아마 저였다면 한 치의 가감 없이 사실을 밝혔을 겁니다. 저뿐만 아니라 동료 전원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방도를 강구했을 겁니다. 왜냐면 같이 목숨을 걸고 싸운 전우니까요." "그렇습니까." "예. 사정이 어쨌든 헬레나의 독단은 분명히 잘못됐습니다. 그러니 이해는 해도 용서는 할 수 없습니다. 지옥으로 떨어졌다니 그 나름대로 속죄의 길이 될 수는 있겠지만요." "……." 저렇게까지 말하니 차마 수나의 장난감으로 되살아났다는 말까지는 못하겠다. 쓰게 웃자 사내는 아차 하더니 멋쩍게 미소 지었다. "아…. 뭐 저도 썩 호인은 아니라서요. 하하. 실망하셨지요?" "아니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난 머리를 가로젓고 한 걸음 조용히 물러났다. 그러자 사내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무슨 의미인지 알아 들었으리라. "그럼…." "구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요. 오히려 조금이나마 은혜를 갚을 수 있어 기쁩니다." "그리고…. 그동안 정말로 수고하셨습니다." 그 순간 사내의 얼굴에 얼떨떨한 빛이 스쳤다. 그러나 계속 미소를 유지한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말." 약간은 서글프게 느껴지는 홀가분한 목소리. "사실…. 수고했다는 그 말 한 마디가 듣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래전부터요." 그 순간이었다. 사내는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은 마치 무언가를 훌훌 털어낸 듯 보여 가만히 지켜봐야겠다는 것 외에는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한순간 햇살이 눈부시게 강렬해지는가 싶더니. "아!" 안솔의 탄성과 함께 사내의 영혼이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흡사 물보라 흩어지듯 새하얀 입자 같은 것들이 분분히 흩날린다. - 감사합니다….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긴 채 반짝이는 빛 가루들이 천천히 한들거리며 하늘로 올라간다. 이 세상에 얽매이던 것이 모조리 사라진 지금, 아마 원래 가야 할 곳으로 가는 것일 터. "멋진 광경이네." 옆에서 보고 있던 형이 홀연 중얼거렸다. 나는 머리를 끄덕거리며 공감했다. 꼭 땅이 하늘로 눈을 내리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좋은 곳으로…. 가셨겠죠…?" 그렁그렁한 눈으로 쳐다보던 안솔도 살짝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대답 대신 안솔의 정수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렇게 온 세상이 빛으로 반짝거리는 속에서, "그럼 우리도 이제 슬슬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형은 한결 개운한 얼굴로 날 돌아봤다. "…그래." 난 꽉 쥐고 있던 제로 코드를 의미 없이 던졌다가 세게 잡아챘다. 그리고 말했다. "돌아가자." 아직 할 일은 남아 있으니까. 하기야 이 정도의 힘을 얻었으니 굳이 거리낄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서도. 난 약속의 신전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 우선은, 나도 돌아가자.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길은 일 분. 아니, 십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근원이 활성화한 워프 게이트가 남아 있어서, 포탈을 나오자마자 그리고 그리던 아틀란타의 전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북적거리는 워프 게이트도, 사람 냄새 나는 거리도,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하얀 신전도, 그리고 머셔너리 캐슬도. 그렇게 도시를 보자마자 갑자기 긴장이 한꺼번에 풀렸다. 긴장이 풀리니 그동안 억눌려 있던 피로가 해일처럼 몰려들었다. 거두절미하고 당장 뭘 해야 할지 딱 잡히는 건 없었다. 그러나 지친 이는 가로되, 난 일단 쉬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딱히 죽을 것 같은 정도는 아니었지만, 붙잡혀 있는 동안 체력이 소모됐고 이후 바로 전투를 치렀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의 힘을 가졌다고 하나 사용하는 몸이 인간인 이상 휴식이 필요한 법이니까. 사실 일을 이렇게까지 만든 장본인으로서 약간 무책임한 감도 없잖아 느꼈으나, 형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내 요청을 이해해줬다. 하고 싶은 말이나 듣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일단 한 걸음 물러난다는 분위기였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쉬고 몸을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그리하여 머셔너리 캐슬로 직행한 후, 난 오랜만에 보는 집무실을 감상할 틈도 없이 쓰러지듯 잠들고 말았다. 그리고. 똑똑.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흘깃 눈을 떴을 때. "……." 주변의 풍경은 고요한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똑똑. 마침 또 한 번 소리가 들렸다. 굳이 확인할 것도 없이 노크 소리였다. 단지 공교롭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자세히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희미한 소리였기 때문이다. 멍하니 문을 응시하다가 물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에 힘을 줬다. 그러자 비로소 침대의 푹신한 감각이 느껴지는 동시에 머리에 어질어질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가물가물하던 시야도 한층 초점이 잡혔다. 서서히 정신이 깨어나는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다. 내가 돌아왔을 때 해는 중천에 걸려 있었다. 아마 정오 즈음이라 가정하면 못해도 어림잡아 한나절, 아니 그 두 배는 잠들었다는 소리다. 그럼 아마 밤을 지나 새벽일 가능성이 높다. 똑똑. 좋아. 수면도 충분히 취했고. 이 야심한 새벽에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들어오라고 하자. 그렇게 생각하고 침대에 딱 붙은 몸을 억지로 떼어낸 순간이었다. 달칵. 문득 조용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놀라 눈을 돌리자 흰 가운을 입은 어두운 그림자가 살그머니 들어오고 있었다. 아직 시야는 어렴풋했으나 긴 생머리를 보아 여성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깼다는 걸 모르는 걸까. 여인은 발소리를 한껏 죽인 채 거침없이 가까워져 왔다. 방금 목욕을 했는지 뜨끈뜨끈한 공기와 향기로운 살 내음이 물씬 흐른다. 그때였다. "머셔너리 로드…?" 정신이 번쩍 들었다. ============================ 작품 후기 ============================사실 김수현의 얼굴은 완성 직전 제가 수정을 요청했습니다. 원래 버전은 음영이 강하고 약간 화난 듯한 표정, 그리고 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이었습니다. 눈이 마주쳤다. 차츰차츰 걷히는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여인은 전혀 낯설지 않다. 허, 설마 한소영이 찾아올 줄이야. 순간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엉겁결에 머리를 끄덕거리고 말았다. 한소영도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약간 느려진 걸음으로 침대까지 다가왔다. "미안해요. 최대한 작게 노크했는데…." "아니요. 저도 막 눈을 떴는데요." 암흑보다 더 어두운 한 쌍의 흑 수정이 요요한 빛을 발한다. 날 물끄러미 보는 것이 초감각으로 진실 여부를 가늠하는 걸까. "그런가요. 전 두 시간 전에 깼어요." "일찍 일어나셨군요. 여기서 주무신 겁니까?" "네. 성이 참 훌륭하더라고요. 잠자리도 그렇고, 목욕 시설도." "맘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간단하고 담백한 대화. 하지만 오고 가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무겁게 느껴지리만치 진지하다. 나도, 한소영도. 그때 침대에 조심스레 걸터앉으려던 한소영의 둔부가 엉거주춤했다. "…잠시, 아니 길어질지도 모르는 이야기 좀 할래요?" 솔직하기 그지없는 표현에 그냥 웃고 말았다. "테라스로 가시죠. 바람이 시원할 겁니다." 잠시 후, 우리는 테라스로 나가 한없이 어둑한 야경을 맞이했다. 먹구름이 잔뜩 낀 밤이라 그런지 정원은 그저 어둡기만 했다. 따르르르…. 액체와 유리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방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한소영은 한 손에 와인 한 병을 들고 있었다. 테라스에 비치된 탁자 위에 와인을 따르더니 잔 하나를 집어 건넨다. 살짝 흔들며 가까이하자 코앞에서 진한 보랏빛 액체가 찰랑거렸다. 몹시 독하면서도 향기롭다. 이윽고 남은 잔을 든 한소영이 고개를 갸웃한다. "드리고 나서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괜찮으신가요?" "딱 좋네요. 축하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요." 챙. 잔과 잔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뒤따랐다. 한 모금 머금고 천천히 음미할 즈음 한소영은 놀랍게도 벌써 잔을 깨끗하게 비우고 있었다. "푸." 숨을 뱉은 그녀는 원샷으로 부족했는지 또다시 와인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두 번째 잔도 조금도 남김없이 쭉 마셨다. 한소영은 테라스로 나왔을 때부터 줄곧 야경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가끔 입술을 달싹거리는 걸 제외하면 시선은 계속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찬 바람에 몸이 빠르게 식어가는지 젖은 가운이 말리도록 움켜쥔다. 한소영은 돌려 말하는 성격이 아니다. 시작부터 직구를 날려올 소지가 다분하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게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거듭 숨을 고르며 주저주저하던 입술이 열린 건 "보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켠 순간이었다. "보고 싶어서 왔어요." 취기라고는 터럭만치도 느껴지지 않는 또렷한 목소리. "…그런데 술의 힘을 빌려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건 마찬가지군요." "예?" "그러니까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할래요. 아까도 말했지만 깨어난 건 두 시간 전이에요. 눈을 뜨자마자 머셔너리 로드 생각이 났어요. 신기하게도. 침대에 한참을 누워 있었지만, 그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일단 정신이나 차리려는 요량으로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가봐도, 오히려 보고 싶다는 마음만 강해졌죠." "……." 한 번 입이 트이자 말은 춤추듯 튀어나왔다. "한데 막상 그래 한 번 가보자. 이렇게 마음먹으니 여러 걱정이 발길을 붙잡더라고요. 자고 있으면 어쩌지. 깨면 어쩌지. 시간도 많이 늦었고 이상한 여자로 생각하면 어떡해. 가면 또 무슨 말을 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도 모르잖아…. …이러다가, 불현듯 정신을 차리니 와인 하나 들고 문 앞에서 노크하고 있었네요." 문득 난 한소영의 과감하면서도 정숙한 말투에 호감을 느꼈다. 나라면 몇 번이고 더듬거렸을, 아니 부끄러움에 할 수 있을지조차 모르는 말을 그녀는 부드러우면서 분명한 목소리로 이어가고 있었다. 흡사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는 것 같아 소리를 듣는 감각이 저절로 빼앗기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왔어요." 한소영은 여기까지 해낸 자신에 상이라도 주려는 듯 또 한 번 잔에 와인을 넘칠 듯이 채웠다. "보고 싶어서요." 이번에도 단숨에 비워버렸다. 난 나직이 입을 열었다. "영광입니다." 탕. 탁자에 부딪힌 잔이 두어 번 흔들렸다. 말하고서 아차 싶었다. "…예전에는." 그러나. "머셔너리 로드의 그런 말들이 마냥 갑갑하기만 했지요." 한소영의 음성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용기 내서 다가가면 피하고, 억지로 다가가면 피하고…. 제가 남한테 하던 짓을 고스란히 당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맨날 벙어리 냉가슴 앓듯 끙끙거리기만 했죠." 다시 와인을 따른다. "하지만…." 한데 잔을 채우는 기세가 아까와 사뭇 판이했다. 벌써 다 떨어졌는지 왈칵왈칵 흐르던 보랏빛 물줄기는 조금씩 얇아지고 있었다.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아니, 알아요. 머셔너리 로드가 왜 그랬는지." 이윽고 실처럼 가늘어지더니 결국에는 한 방울 한 방울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기실 제가 어렸죠. 상대가 내 안에 특별하게 자리 잡았다고 해서, 상대도 날 특별하게 생각해주리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는데." 마지막으로 떨어진 한 방울은 가까스로 잔을 가득 채웠다. "후, 제 처지에서는 우스운 일이네요. 설마 다른 누구도 아니고, 설마 과거의 저 자신이 장벽이 될 줄은." 그리고 실그러지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저는." "알아요. 머셔너리 로드 주변에 여자가 많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시면서…. 그리고." "네. 당신은 지금 여기 서 있는 제가 아니라 과거의 절 동경하는 마음이 크겠죠. 알아요. 다 아는데 온 거예요." 한소영은 그런 것 따위는 조금도 상관없다는 듯 단호하리만치 말을 끊었다. "…사, 사용자 한소영 정도면 분명히 더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말문이 막힌 탓에 진부한 말을 꺼내고 말았다. 최악이라는 걸 알면서도. "물론 그럴 수도 있겠죠." 뜻밖에도 한소영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래요. 머셔너리 로드 말대로 언젠가 좋은 남자를 만난다고 해도…." 말을 하면서 미세한 파문이 퍼지는 잔을 넘칠세라 매우 조심스레 쥐었다. "…그 누구도, 당신만큼 특별할 것 같지는 않네요." 사실상 마지막 잔이었다. 휘이이잉! 문득 강풍이 불었다. 그와 동시에 한소영이 완전히 날 돌아본다. 그녀의 가지런한 생머리가 테라스를 덮치는 바람을 담뿍 머금어 크게 부풀었다. 그리고 곧바로 터지며 바람을 타고 파도처럼 흩날렸다. 깃발처럼 나부끼는 물결과 물끄러미 응시하는 잔잔한 두 눈동자는 깊고 심원한 바다처럼 아름다웠다. "누군가 그러더라고요. 첫사랑이 이뤄지는 건 기적이라고." 그 속에서 한소영이 어지러운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천천히 정리해 넘기며 말을 잇는다. "안 될 수도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살면서 한 번은요. 한 번 정도는 마음 속 기적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러더니 손에 쥔 와인을 눈앞까지 차분히 들어 올렸다. 덩달아 미소도 씁쓸해졌다.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이제부터 축복을 마시게 될지, 아니면 미련을 삼키게 될는지…." 이어서 두 눈을 살그머니 치뜬 한소영은 "그러니까 딱 한 번만." 부지불식간에 타는 듯한 시선으로 날 직시했다. "더 어리광부리지도 않고, 더 조르지도 않을 테니까. 한 번만 진심으로 말해줘요." 그 찰나의 순간, 스리슬쩍 오르려 폼을 잡던 취기가 순식간에 식는 듯했다. 마주 보이는 눈에서 진심을 넘어서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절박함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이 마지막 잔을 다 마시기 전에." 이 한 마디만 남긴 채로. 한소영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천천히, 매우 천천히 잔을 기울였다. 하지만 떨리는 턱이 젖혀질수록, 흔들리는 손이 기울어질수록 액체가 흐르는 속도는 가일층 빨라졌다. 아차 하는 순간 비스듬히 경사진 잔 속의 액체는 시시각각 낮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빨려 들어가고, "……." 한소영의 팔이 힘없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우당탕탕! 갑자기 시야가 미끄럼틀을 타며 부딪쳐 넘어지는 소리가 적막한 테라스에 울렸다. "!" 아차 하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일이 벌어진 뒤였다. 아래 깔린 한소영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날 올려다본다. 떨어지는 팔을 보고 엉겁결에 손을 뻗었는데 순간 발이 꼬였는지 덮쳐 쓰러트리고 말았다. 이성은 끝끝내 주저했으나 본능이 제멋대로 행동해버렸다. 결국에는 나도 모르게 답을 해버린 셈이다. 왜냐면 진심으로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이런 저라도…." 본능에 점령당한 입이 멋대로 뇌까린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한소영의 입이 살짝 열렸다. 어지럽게 흩어진 머리카락 틈으로 드러난 새까만 눈동자가 희미하게 빛난다. 이내 그녀의 고개가 더 마주치기 부끄럽다는 듯 살며시 꼬아졌다. "여기서는…. 싫어요…." 그 수줍은 고갯짓이, 그 애절한 한 마디가 가슴 속 불씨를 당겼다. 살그머니 부축하자 눈을 반쯤 감은 한소영이 조용히 고개를 기대온다. 흡사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듯한 감각에 난 그녀가 깨어질세라 조심스레 몸을 돌렸다. 달빛조차 비치지 않는 집무실은 어둡기만 할 뿐만 아니라, 을씨년스러울 만큼 고독하다. 들리는 거라고는 간간이 몰아쉬는 숨소리뿐. 그제야 호흡이 거칠어졌음을 깨달았다. 나도 그렇고, 품속의 여인도. 한소영이 눈을 완전히 감으며 턱을 젖힌다. 뭘 원하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훤하다. 난 꿀꺽 침을 삼킨 후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두 번째로 맛보는 그녀의 입술은 몹시 차가웠으나, 독한 술 향기가 섞인 숨결을 토하며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응…. 으응…." 목이 바짝 타는지 앓는 듯한 신음이 귀를 스친다. 문득 목이 옥죄는 느낌이 들었다. 한소영이 내 멱살을 잡으며 깨금발을 들고 있었다. 한층 강하게 입술을 밀어오는 것이 왜 이렇게 늦었냐고 투정부리는 것 같아, 난 그녀의 뒷머리에 달래듯이 손을 얹었다. 이윽고 내 손길에 이끌린 한소영은 비틀거리며 침대에 앉더니 풀썩, 시트에 몸을 뉘었다. 아직 입맞춤의 여운에서 헤어나오지도 못했건만. 어스름한 침대 위에 놓인 몸맵시를 난 빠져들 듯이 응시했다. 아직 물기가 가시지 않은 흑단 같은 머리카락은 뺨에 아주 조금 접착돼 있고, 나머지는 전부 공작새의 날개처럼 시트에 흐드러지게 펼쳐졌다. 실눈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는 평소와 같은 무심한 빛이 아니라, 무언가를 갈구하듯 흐릿하게 풀려 흔들린다. 하아, 하아. 달뜬 입술이 뱉는 숨에는 관능적인 향기가 물씬 흐른다. 아름답다. …사실 아직 '정말 이래도 될까?' 라는 거부감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돌이키기 늦었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다. 거기다 어른어른 올라오는 살 내음은 몹시도 자극적이라, 손을 대면 천벌을 받을 것 같은 까닭 모를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홀린 듯이 손을 뻗게 된다. 허리를 조인 띠를 풀어 잡아당기니 흰 가운이 느슨히 풀어지며 주름이 잡힌다. 그것마저도 양쪽으로 열며 넘겨버리자, 젖혀지는 가운 사이로 노출되는 나신이 활짝 피어나는 백합이 탐스러운 속살을 드러내듯 눈 부신 빛을 발한다. 설마 설마 했는데 놀랍게도 가운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지는 한소영의 행동은 굉장히 재빨랐다. 왼쪽 팔로 얼굴을 절반이나 가리고, 오른쪽 팔로는 젖가슴을 덮으며, 양 허벅지를 꼭 오므리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입술을 질끈 깨무는 것이 지금 어떤 기분인지 짐작이 간다. 하지만 난 금세 시선을 한 곳으로 빼앗겼다. 한소영이 맨몸을 가린 것 따위는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손을 내밀어 오른팔을 잡자 흠칫하는 저항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주저주저하면서도 곧 내 손에 끌려 끝내 팔을 치우고 만다. "하." 마침내 드러난 젖무덤은 저절로 탄성이 터질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형태는 전체적으로 공을 반으로 갈라 붙인 듯 둥그스름한 형태였으나, 특이하게도 앞이 뾰족하게 튀어나온 원추형 가슴이었다. 완만하게 내려오는 위 가슴을 불룩한 밑 가슴이 균형 있게 받쳐줘, 아주 조금의 처짐도 없이 툭 하고 위로 향한다. 그 결과 선명한 선홍빛 유두도 도드라지게 돌출돼 있으니 이 어찌 이상적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응!" 그때 한소영이 낸 것이라고 믿을 수 없는 앙증맞은 비음이 터졌다. 언뜻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양손이 그녀의 젖가슴을 거머쥐고 있었다. 실로 은혜롭다고 생각될 정도로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기분 좋은 탄력이 실시간으로 전해진다. 게다가 이미 빳빳하게 세워진 젖꼭지가 손을 긁어와 나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한소영의 젖가슴은 이런 기분이었구나. 임한나처럼 무지막지한 크기는 아니지만, 한소영도 충분히 글래머라고 볼 수 있는 풍요로운 가슴의 소유자였다. 서너 번 힘껏 쥐었다가 펼 때마다 손아귀에 미처 잡히지 않는 살이 손가락 틈새로 부풀 듯 빠져나온다. 이왕 내친 김이었다. 한동안 젖무덤을 주무르던 두 손은, 곧 희고 가는 목덜미부터 시작해 젖가슴에 비해 너무나 작아 보이는 아담한 어깨를 조심조심 쓸어내렸다. 이어서 섬세하게 그러나 물 흐르듯 그녀의 온몸을 희롱하기 시작한다. 볼록 솟은 일자 복근이 인상적인 잘록한 허리선을 지나 풍만한 곡선을 그리는 둔부를 어루만진다. 탱글탱글한 감촉을 선사하는 엉덩이를 몇 번 주무르다가, 항상 건강하다고 생각했던 허벅지 안쪽까지 손을 뻗쳤다. "으, 으응…. 흐으…. 흐아아앙…!" 한소영은 중간중간 까닭 모를 원망 어린 눈초리를 보내며 끊임없이 애간장을 녹이는 신음을 흘렸다. 허리나 엉덩이를 이리저리 비트는 등 최소한의 반항을 해보지만 난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저 손끝으로 온 신경을 집중해 자꾸만 움직이는 그녀의 전신을 정성스레 애무했다. 들썩들썩하는 몸에는 잔 물방울들이 아직도 곳곳에 맺혀 있다. 진짜 황금 비율이라는 게 있다면 이럴까. 마치 바다에서 갓 태어난 비너스를 보는 것 같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던가.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강하게 옥죄여 있던 허벅지가 아주 조금이지만 느슨하게 풀렸다. 테라스에서 차갑게 식었던 몸은 어느새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뜨끈하게 달궈져 있었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됐다는 생각이 들어 난 오르락내리락하는 둔부 사이로 은근슬쩍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한소영의 몸이 순간적으로 허벅지를 오므렸으나 이미 침투에 성공한 손은 그녀의 소중한 곳을 더듬고 있었다. 가슬가슬한 수림을 스친 손끝으로 딱 붙어 갈라진 계곡이 만져졌다. "머, 머셔너리 로드…." 한소영이 젖은 목소리로 날 부른다. 난 괜찮다는 의미로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 살며시 틈을 벌리는 순간이었다. "?" 정확히는 음부 안으로 막 중지를 집어넣으려는 찰나, 느닷없이 뜨듯한 액체가 왈칵 흘러나오는 걸 느꼈다. 깜짝 놀라 손을 빼자 투명하고 진득한 액체가 묻어 번들거리는 걸 볼 수 있었다. 이게 뭔지는 알고 있다. 애액. 그런데 문제는…. "……." 그 양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다. 과장 조금 보태서 손아귀로 물이 고여 찰랑거리는 중이었다. 이 정도면 효과 좋은 미약을 뭉텅이로 썼다고 봐도 좋을 수준이었다. 그러나 미약은 쓰지 않았고, 생각나는 건 정의 반지밖에 없다. 아마 본인이 느끼는 흥분에 내가 느끼는 흥분까지 더해지니 몸이 갑절로 민감해진 듯싶다. 하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이건 민감해도 너무 민감한데. 홍수까지는 아니지만, 사타구니까지 흥건해졌다고 보기는 충분하니까. 그때였다. 문득 예전 게헨나가 쪽지로 알려줬던 경고가 뇌리를 스치는 순간,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흘렀다. 수치심 때문인지 한소영이 이를 악문 채 몸을 떨고 있었다. 그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에 잠깐 깨어난 의식이 다시 그녀를 향해 빠져든다. 어쨌든 이 정도면 전희는 충분하고도 남는다. 난 한소영의 몸 위로 겹치듯이 몸을 실었다. 그리고 지그시 짓누르니 내 가슴에 그녀의 젖무덤이 뭉개지는 감촉이 기분 좋다. 한소영은 싫다는 몸짓을 보였으나 서둘러 입을 맞추자 버둥거림을 멈췄다. 어르고 달래듯 키스하니 삐죽거리면서도 느릿하게 눈을 감는다. 조금 안심했는지 그리 싫어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그러는 동안 난 스리슬쩍 그녀의 다리를 벌리며 하부를 접근시켰다. 이제 넣겠다는 분위기 깨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사실은 한 시라도 빨리 한소영과 한 몸이 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남근은 가운을 벗겼을 때부터 빳빳하게 발기된 상태라 이제는 피가 몰리다 못해 미약한 아픔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잠시 후, 페니스의 첨단으로 아까 찾았던 입구가 느껴졌다. 이미 몇 번이고 겪어본 만큼 난 익숙하게 힘을 주며 은근하게 허리를 찔렀다. "악…!" 입맞춤에 열중하던 한소영이 움찔하며 소리를 지른 것도 그때였다. 자신의 소중한 곳을 푹 파고 들어오는 딱딱한 기둥을 느꼈는지 나른하던 두 눈이 부지불식간에 치떠졌다. "아, 아…!"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안타까운 소리가 새어나오나 이미 귀두는 입구로 들어가 있었다. 그 상태로 아주 조금 더 밀어 넣자 한소영의 전신이 딱딱하게 경직됐다. "후우우우…." 긴 한숨이 나왔다. 아직 반의 반의 반의 반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일차 삽입은 성공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생각보다 쉬웠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바로 아래 찢어질 듯 커진 한소영의 두 눈동자가 애달프게도 흔들리며 허공을 응시한다. 덜덜거리던 온몸의 떨림은 심한 경련으로 변해 간헐적으로나마 펄떡거리기 시작한다. 거기다 두 손은 어느새 침대 시트를 쥐어뜯을 기세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아…, 윽…, 흐…, 흑…." 거기다 단말마처럼 들리는 다채로운 비명까지. 평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지만 어쩔 수 없다. 한소영은 어디까지나 첫 경험이고 또 처녀였으니까. 한 여인으로서 처음을 무서워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잠시 후, 난 남근이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한소영이 진정하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찔러 넣기를 시도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럴수록 그녀는 어떻게든 벗어나려 위로 올라갔지만, 난 몸부림치는 둔부를 침착히 누르며 허리에 서서히 힘을 가했다. 확실히 한소영의 안은 특이하다. 살이 뜨겁기는 하지만 여느 처녀처럼 무조건 밀어내지도 않고 터뜨릴 듯 쥐어짜지도 않는다. 적당한 딱딱함과 딱 알맞은 압박감. 힘을 주는 대로 내 기둥에 맞춰 길이 개척되고 만들어진다. 꼭 불에 뜨겁게 달군 촉촉한 찰흙을 가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하으, 하으으응…!" 그러는 동안에도 한소영은 여전히 도를 넘는 반응을 보이는 중이었다. 아직 처녀막까지는 닿지도 않았는데 두 종아리는 벌써 힘이 잔뜩 들어가 허공으로 올라와 있었다. 발가락까지 꼭 오므린 것이 나만 기분이 좋은 것 같아 안쓰럽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어쩌면 욕망이 앞서 너무 서둘렀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한 난 또다시 허리를 굽혀 서로의 몸을 겹쳤다. 그 탓에 남근이 좀 더 안으로 침투해서인지 뻣뻣하게 뻗어 올라가 있던 다리 두 개가 힘껏 시트를 내려쳤다. 출렁출렁하는 진동을 느끼며 양팔로 한소영의 목을 살며시 감았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허리에 힘을 바짝 주며 아래를 흘깃거렸다. 그 찰나의 순간, 무언가 이상하다는 직감이 엄습했다. "어?" 그와 동시에 한소영과 관계를 맺을 때 필히 조심하라는 게헨나의 경고가 재차 떠올랐다. "어, 어." 분명히 귀두 정도만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자, 잠시만." 한데 눈에 보이는 페니스는 생각보다 더 들어간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도 구멍에 집어삼켜 지듯 차츰차츰 매몰되어가는 중이었다. 내 의지와는 다르게. 이윽고 어떻게 할 틈도 없이 귀두가 연하디연한 막에 닿는 걸 느끼는 순간이었다. 약한 저항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찍, 찌직! 곧 귀두 끝으로 연한 점막을 밀어 찢는 감도가 느껴졌다. "……?" 순간적으로 넋을 놓고 말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이렇게 삽입할 생각은 없었다. 처음에는 천천히 들어가다가 막 앞에서 잠깐 멈출 생각이었는데…? 다, 당최 어떻게 된 거지? 지금 이러는 순간에도 딱 붙은 질을 가르며 살이 달라붙는 감촉이 여실히 전해진다. 이게 아니라고, 어떻게든 멈추려 용을 써도 귀두는 자꾸만 안으로 헤엄치듯 들어가는 중이다. …아니, 아니다. 끌어당겨 지고 있다. 흡사 사내를 처음 만난 여인이 호기심을 가지고, 두 손으로 꼭 붙잡은 채 어서 오라며 끌어당기는 것 같다. 참으로 되바라지지 않은가. 결국, 페니스는 깊숙이 들어가다 못해 숫제 뿌리 끝까지 사라지고 말았다. 엉겁결에 아래를 응시하자, 사타구니가 한소영의 허벅지에 아주 약간의 틈도 없이 딱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서로 한 몸으로 이어진 것 같이 말이다. 흥건한 통로는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물 흐르듯 움직였다. 탐문이라도 하듯 기둥을 나근나근 주물렀다가 풀어주기를 반복한다. 처음 받아들이는 여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유연하고 촉촉하다. "흐으으으…?" 흡사 환영받는 기분에 흡족한 침음을 흘릴 즈음,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신속히 신경을 집중하자 어느새 기분이 매우 고양돼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갓 삽입한 단계에 불과한데? 확실히 이상하기는 하지만 무어라 형언할 수가 없다. 한소영의 안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지경이었다. 한데 그 좋다고 느끼는 감정이 충격적일 정도로 갑작스러운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과정이 굉장히 자연스럽다. 그냥 어느 순간 알아차렸다고 해야 하나. 게헨나처럼 필요 이상으로 화끈하지도 않고, 애들처럼 터뜨릴 듯이 쥐어짜는 것도 아니다. 속살은 딱 알맞게 뜨거우며 찰싹 붙는 주름은 기분 좋을 정도로 조여준다. 어느 것 하나도 과하다는 느낌 없이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안성맞춤이다. 마치 맞춰주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단, 차이점이 하나 있다면 끝 부분부터 서서히 그리고 은근하게 잡아당기는 감각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더 들어갈 부분도 없건만, 남근은 한층 기둥을 빳빳이 치키며 호응해 안으로 계속 들어가려 한다. 중요한 건 이 상황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제야 위화감이 조금씩 잡히는 듯했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아까도 이렇게 당했다. 이제는 사타구니가 한소영의 둔부를 아예 앞으로 밀어내기까지 하고 있다. 이대로는 부족하다는 듯, 몸 전체가 안으로 말려들어 가야 만족하겠다는 것처럼. 정말로 집어삼켜 지는 게 아닌지 덜컥 겁이 날 정도였다. 아, 안 되겠다. 우선 빼고 보자. 숨 좀 추슬러야겠다는 생각에 억지로 숨을 흘렸다. 그리고 스리슬쩍 허리를 빼려는 순간이었다. "…윽?" 빼려는 찰나, 문득 음부가 세게 닫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기둥을 삼키고 있던 구멍이 잔뜩 우므러들었다. 그 찰나의 순간, "흑!" 남근이 통째로 뽑혀나갈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흡인력이 하부를 강타했다.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지만 나갈 때는 아니라는 걸까. 그 순하던(?) 질이 이제 막 왔으면서 어딜 가느냐고, 뭘 했는데 벌써 가냐는 듯 되게 성질을 부리는 것 같다. 이윽고 힘 있게 옥죄는 감각이 뿌리부터 쭉 올라와 귀두 끝까지 순식간에 차올랐을 때였다. "아, 으…." 쾌감은. "으, 아윽…?" 생각보다. "아, 아으으아…!" 몹시,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엉치뼈부터 생성된 자극이 삽시간에 등골을 타고 올라와 목뼈를 저릿하게 감전시켰다. 언뜻 정신을 차렸을 때 양손은 어느새 침대 시트를 힘껏 그러모으고 있었다. 발가락은 사정없이 오므려져 부들부들 떨린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언제 이렇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고통인지 쾌락인지 모를 감각이 온몸을 점령해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리고. "허으으윽!" 다음 순간, 미처 어떻게 할 틈도 없이 체내의 무언가가 쾅하고 폭발해 요도로 방출된다. "……! ……! ……! ……!" 황홀한 절정에 겨워 스스로 무슨 말인지 모를 소리를 질렀다. 그저 왈칵왈칵 힘차게 분출되는 정액만이 느껴질 뿐. 거기다 체력도 올랐으니 정의 반지의 효과로 사정 시 나오는 양이 한층 증가했을 터. 그 때문인지 꼭 한계까지 참았던 소변을 시원하게 싸는 것 같은 느낌 이었다. 그렇게 페니스의 약동이 끝났을 무렵, 밀려오는 홀가분한 기분에 몸이 저절로 부르르 떨렸다. 쉬이이이…. …어? 설마 하는 생각이 스쳤다. 화들짝 아래를 응시하니 아니나 다를까. 아닌 게 아니라 접합부에서 노란 물이 줄줄 새나오는 중이었다. 싯누런 액체에 흰 정액과 처녀를 증명하는 붉은 핏물이 뒤섞여 있으니 거의 확실하다. 정말로 소피를 본 것이다. 그것도 다 큰 성인이.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변한다. "왜, 왜 그래요?" 뜻밖에도 한소영의 음성은 상당히 안정돼 있었다. 하지만 곧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린 듯 작은 탄성이 들렸다. 이어지는 어색한 침묵에 난 머리를 푹 숙이고 말았다. 이게 말이 되나? 무경험자도 아니고 유경험자인 내가 이, 내가 순간을 참지 못하고 사정해버렸다. 아니, 백 번 양보해서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넣자마자 싼 것도 창피해 죽겠는데 소변까지 지려버렸다.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잖아. 나 자신을 조절하지 못했다는 방증인 셈이다. 사정이야 어쨌든 본의 아니게 상대를 변기 취급한 셈 아닌가. 그야말로 유구무언.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죄, 죄송…. 합니다…. 너, 너무 기분 좋아서…. 아니…." 수치심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 여운이 남았는지 목소리도 떨려 나온다. 동시에 멍청하다는 생각도 스쳤다. 변명을 한다는 게 고작 이 따위라니. 어떻게든 기억에 남는 첫 경험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은 이미 저편으로 훨훨 날아갔다. 한소영도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또 난 지금 어떤 한심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진심으로 병신 같다. "킥." 그때. "머셔너리 로드의 그런 얼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문득 팔이 잡아당겨 지는 감이 엄습했다. 어깨를 타고 올라온 손이 내 이마를 차분히 쓰다듬는다. "그렇게…. 기분 좋았어요?" 화난 음성은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들리는 질문에 끄덕끄덕 머리를 주억였다. 조용히 눈을 내리자 한소영은 귀여운 동생을 보는 듯한 상냥한 누나처럼 미소 짓고 있었다. "후후. 괜찮아요. 괜찮아…." 위로하는 어조로 속삭이며 손바닥이 뺨을 부드러이 쓸었다. 그러면서 옆으로 반쯤 돌아눕더니 과감하게 허벅지를 벌렸다. 잠시 후, 한껏 들어 올린 종아리 한쪽이 내 오른쪽 어깨에 얹힌다. "자, 괜찮으니까…." 아까 두려워하던 여인은 온데간데없고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인다. 난 위화감을 느끼며 한소영을 응시했다. 그러나 두 번 보고 세 번 봐도 여인은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다. 아마 정의 반지의 효과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리라. 삽입과 동시에 증폭한 쾌감이 첫 경험의 공포와 통증을 모조리 덮어버린 것이다. 어쩌면 내 약한(?) 반응이 한소영 내면의 무언가를 충족시켰을 수도 있겠고. 하지만 그걸 참작하고서라도 그녀의 적응력은 여태껏 겪어온 어느 여인보다 단연코 뛰어났다. 비정상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서…." 상당히 가라앉은 색정적인 음성에 망연한 기분으로 올려진 발목을 붙잡았다. "옳지, 더 깊숙하게…." 말 잘 듣는 아이처럼 허리를 움직여 최대한 깊숙이 남근을 쑤셔 박았다. 살살 뺐다가 다시 느릿하게 찌르기를 반복하자 한소영이 지그시 눈을 감으며 시트에 고개를 묻는다. 철썩, 철썩. 오직 살과 살이 부딪치는 음란한 소리만이 적막한 방을 울린다. "옳지, 옳지…. 착해…." 형세 역전이다. 한소영은 처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적응력으로 날 리드하고 있었다. 하지만 굴욕적이라기보다는 그녀의 칭찬 에 오히려 힘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라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미, 미친…." 진짜 말도 안 돼. 나도 모르게 욕설을 뱉고 말았다. 곧이어 또 한 번 미칠 듯한 사정감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시시각각 숨이 턱턱 막혀와 절로 이가 악물린다. 이대로 허리를 튕겨 흔들고 싶으나 그럴 수가 없다. 난 이제야 여인으로서 한소영의 정체를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았다. 원래 남자든 여자든 섹스할 때 누구나 전희, 고양, 고조, 절정, 여운이라는 단계를 거친다. 한데 한소영의 안은 앞선 단계를 빠르게 넘어간다. 전희, 고양, 고조를 넘기고 순식간에 절정에 다다르게 만든다. 이 순환이 무한으로 반복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하다. 그러나 더 무서운 점은 알고 있으면서 허리를 멈추지 않는 나 자신이었다. 한소영은 어서 안기라는 듯 양손을 뻗어 내 팔을 붙잡고 있었다.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난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의 품으로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예쁜 젖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찌르는 속도를 가일층 높이자, '잘한다, 잘한다.' 격려하는 것처럼 나긋한 두 손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준다. 그러나 그럴수록 절정으로 치달리는 속도가 빨라지는 건 실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큭!" 결국에는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몸이 뻣뻣해지면서 두 번째 절정에 오르고 말았다. 주름진 속살이 펄떡거리는 양물에 빈틈없이 밀착하 더니 정액을 쥐어짜듯 쭉쭉 뽑는다. 아니, 내 페니스가 무슨 치약인가? 이윽고 절정 이후 특유의 탈진이 찾아왔다. 몸의 진이 쑥 빠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체력은 아직 넘치도록 충분하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탈력감이다. 그나마 정의 반지가 아니었다면 오만 추한 꼴을 보이며 진작 나가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짧은 시간에 두 번이나 클라이맥스를 경험했다. 그리고 두 번 모두 단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특이한 쾌락을 맛봤다. 이와 반대로 한소영은 간간이 가벼운 신음만 흘릴 뿐, 교성조차 지르지 않고 있었다. 혹시 불감증이 아닐까 의심도 들었으나 그녀는 확실히 흥분하고 있었다. 딱딱하던 얼굴이 몽롱해지고 눈동자가 흐릿하게 풀린 게 그 방증이다. 단지…. "후우우우…!" 저 한숨이 약간 불만스럽게 들렸다면 내 착각일까. 제, 젠장. 게헨나도 함락한 내가 지금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 거야? 이쯤 되면 내가 무서워질 지경이다. 별생각이 다 들었다. 어쩌면 한소영은 전설에서나 등장하는 여인이 아닐까? 왜, 있잖아. 잠자리를 가지는 것만으로 상대를 복상사시킨다는 요녀. 그렇다면 난 대체 어떤 존재를 일깨운 거지? 그때였다. "이리로…. 정말 수고했어요." 갑자기 부드러운 손길이 닿아 몸이 절로 옆으로 이끌렸다. 난 헐떡거리는 숨을 고르며 한소영이 해주는 팔베개에 머리를 뉘었다. 그리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그녀의 젖가슴에 찰싹 붙어 얼굴을 살살 문지르며 여운에 잠겼다. 귀를 간질이는 한소영의 숨결이 느껴졌다. "저…. 어땠어요?" 속살거리는 음성에 돌연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더욱 세게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한소영은 집요했다. "많이 좋았어요?" "모, 모릅니다. 그런 거 묻지 말…." "머셔너리 로드." "…예." 마지못해 끄덕끄덕. 여하튼 사실이니까. 한소영의 안은 명기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고 본인은 색녀를 뛰어넘는다. 아직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내가 두려워할 정도의 무언가가 있다. 한소영의 손이 내 머리를 사랑스럽다는 듯 슬슬 어루만진다. 그러자 나른히 눈이 감기며 난 그녀의 품에 완전히 안겼다. 아, 행복하다. 뭔가 남녀의 역할이 뒤바뀐 것 같다만 아무래도 좋다.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이 아늑한 분위기에 한껏 취하고 싶다. 생각해보니 정복당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 …그런데. 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까? 그리고 또 왜 어깨가 강하게 짓눌리는 거고?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이제껏 끈질기게 꽂혀 있던 남근이 쑥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시원한 바람이 달궈진 양물을 식혀주는 동시에 복부로 육중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자 뒤바뀐 시야의 초점이 잡혔다. 한소영이 조용히 내 위로 올라타고 있었다. 신기하다는 눈초리로 남근을 쳐다보던 한소영은, "아, 그게…." 내 눈치를 보더니 돌연 가랑이를 차츰차츰 벌리기 시작했다. 살짝 갈라지는 음부 구멍으로 잔존한 소변이 새나오고, 쏟아 부었던 정액도 울컥 뱉어낸다. 시뻘건 혈흔이 감도는 흰 점액이 질질 흘러나오는 광경은 지극히도 도발적이라, 양물이 성을 내는 것도 당연지사. "힘들어 보이는 것 같아서…." 스리슬쩍 말을 흐린 한소영은 손을 뻗어 페니스를 움켰고 둔부를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활처럼 등허리를 젖히면서 엉덩이를 왔다 갔다 하며 구멍에 귀두를 맞춘다. 그리고 조준을 마친 순간, 느닷없이 정면을 응시하며 결연한 빛으로 긴 숨을 내쉰다. 잠시 후. 내 복부로 양손을 공손히 겹쳐놓은 한소영은 두 다리를 좌우 일자가 되게 활짝 펼쳤다. 그리고 요가라도 하듯이 힘껏 숨을 들이켜며 조준한 그대로 엉덩이를 천천히 눌러오기 시작했다. 육감적인 골반은 천천히, 흡사 미식가가 진미를 음미하듯 느릿하게 내려왔다. 탐욕스런 동굴이 양물을 꿀떡꿀떡 삼킬수록 한소영의 턱도 서서히 젖혀져 흰 목덜미가 또렷이 드러난다. "흐으으으…." 그 정도로 좋은 걸까. 가느다랗게 뿜는 숨소리에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는 기색이 서려 있다. 물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앞서 두 번이나 정액을 받은 질은 한결 무르익어 기둥에 끈적하게 감겨왔다. 이윽고 두 달덩이가 사타구니로 털썩 주저앉고, 남근도 뿌리 끝까지 푹 파묻혀 음부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동시에 한소영의 몸이 움찔하며 경련하더니 "아!" 달뜬 신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동작을 멈춘 것도 잠시. 앓는 신음을 흘리며 양손에 힘을 준 한소영이 배를 덜덜 떨면서도 엉덩이를 도로 올린다. 기승 위, 아니 여성 상위라고 하나? 한가득 머금어졌던 기둥에 살 주름이 진득하게 눌어붙으며 구멍을 빠져나오는 광경은, 하나하나 적나라하게 보여 굉장히 강한 흥분을 이끌어냈다. 그렇게 귀두가 뽑히기 직전까지 아슬아슬하게 들어 올리더니 아까와 사뭇 다른 기세로 거칠게 둔부를 내렸다. 쩍. 물 젖은 살이 살을 때리는 음란하기 그지없는 소리가 들렸다. "힉…!" 한소영은 이 체위가 몹시 마음에 든 모양이다. 이를 꽉 깨물며 환희에 찬 찬 미소를 짓더니 양 무릎을 천천히 구부려 올려 쭈그려 앉는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본격적으로 엉덩이를 들썩들썩 움직이기 시작했다. 퍽퍽, 퍽퍽퍽퍽. 희멀건 한 둔부가 올라갔다가 내려가기를 반복할 때마다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연달아 울린다. 한소영은 진정으로 온 신경을 몰두하고 있는 듯했다. 지그시 감은 눈과 조금씩 벌어지는 입. 가랑이를 활짝 벌린 채 애달픈 신음을 토하며 스스로 방아를 찧는 모습은 몹시 야릇하고 음탕하다. 무엇보다 좀 전부터 시야를 어지럽히는 젖가슴이 날 진심으로 미치게 했다. 사뿐 내려앉기 무섭게 힘껏 쳐들 리는 출렁임은 고귀한 여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이율배반적이니. "좋아…. 너무 좋아아아…!" 리듬이 이어질수록 속도도 가일층 빨라졌다. 어느새 한소영도 슬슬 신호가 오는 듯했다. 얼굴을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일그러뜨리며 이를 악무는 것이 그 방증이다. 게다가 비음 섞인 교성을 지르기까지. 그래. 난 저런 한소영을 보고 싶었다. 단. "헉…! 헉…!" 문제는 내가 먼저 한계에 다다를 것 같다는 것이다. 피가 잔뜩 몰린 양물은 당장에라도 폭발할 듯한 사정감을 겨우겨우 참아내고 있었다. 질척한 속살을 가르는 느낌이나 하부에서 풍기는 진한 살 내음을 맡을 때마다 저절로 헐떡거리는 숨이 들이켜진다. 어떻게든 견디고 싶으나 귀두 끝으로 집중적으로 차오르는 쾌락의 돌진을 막을 힘은 없었다. 그때 쉴 틈 없이 위아래로 움직이던 둔부가 찰싹 밀착하는 걸 느꼈다. 바로 이어서 복부를 꾹 누르던 손바닥의 감촉이 서서히 멀어졌다. 흘끗 눈을 뜨자 한소영이 등허리를 젖히고 있었다. 그리고 시트에 얹은 양손을 지지대 삼아 엉덩이를 시계 방향으로 힘차게 돌렸다. "허억!" 불시의 기습. 할 수만 있다면 악하고 있는 힘껏 소리 질렀을 것이다. 이 기술은 또 어떻게 습득했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순간 참지 못하고 사정할 뻔했기 때문이다. 강제로 휘돌려진 남근이 한소영의 속살을 고루고루 맛보는 감각은 그야말로 상상 이상으로 황홀했다. 그러자 사정할 낌새를 느꼈는지 한소영이 눈을 반쯤 내리뜨며 애절한 눈초리를 보냈다. "머, 머셔너리 로드…!" "예, 예에에에…." "저, 저 곧, 으응! 그러니까, 흐으으응!" "……."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애처롭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미루어보아 뭘 원하는지는 알겠다. 여기서 사정하면 지금껏 이어져 온 템포가 끊길 건 자명하다. 한소영은 이제 막 절정으로 치달리는 시점에서 쉬지 않고 계속 달리고 싶을 터. "제발…!" "…큭." 결국에는 무겁게 머리를 끄덕이고 말았다. 참는다. 무조건 참는다. 설령 복상사로 죽는 한이 있어도 참는다. 곧 여인으로서 첫 기쁨을 맞이할 한소영을 위해서. 이 결연한 의지가 전달됐는지 한소영은 엉덩이를 더욱 괘씸하게 놀리기 시작했다. 좌로 세 번 돌리고 우로 세 번 돌리고. 거기다 앞뒤로 미끄러지듯 왔다 갔다 하기까지. 그렇게 물 흐르듯 빙그르르 요분질을 하며 갖은 교태를 부린다. 양물이 정신없이 돌려지는 만큼 내 정신도 멀리 날아가려 했으나 가까스로 붙잡으며 최후의 기력을 모았다. 쾌락에 겨운 교성이나 물 만난 고기처럼 펄떡거리는 몸짓은 그녀가 절정이 임박했음을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아…, 아아…, 아아아아…!"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 한소영은 금세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세차게 도리질을 치고 있었다. 동시에 엉덩이 놀림도 처음으로 돌아가 침대를 부서트릴 기세로 방아 찧기 시작한다. 이제는 힘들다. 난 더 버티는 건 무리라고 직감, 모으고 모았던 힘을 아래로 집중시켰다. 그리고 둔부가 위로 올라갈 때를 기다렸다가, 내려오는 순간에 맞춰 있는 힘껏 허리를 쳐올렸다.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한 최후의 튕김. 이윽고 세찬 소리가 터지며 엉덩이와 사타구니가 접합하는 순간이었다. "……………………!" 불현듯 끊임없이 이어지던 교성이 뚝 멎더니 한소영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어서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고개도 뒤로 훌쩍 넘어가더니 "히야아아아아아앙!" 희열 찬 비명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와 적막한 방 안이 떠나가라 울렸다. 양팔과 두 다리가 뒤쪽으로 한껏 젖혀지고 허리는 앞으로 쭉 밀려나온다. 등에 작살이라도 맞았는지 온몸을 푸들푸들 떨기 시작한다. 해냈다. 마침내 한소영이 첫 절정을 맛봤다. 시야가 새하얘지며 그동안 눌러왔던 정액이 분출되는 걸 느낀 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잠시 후. 정지된 사고 회로가 활동을 재개할 즈음 난 힘겹게 눈을 떠 앞을 응시했다. 한소영은 아직도 처음 경험하는 절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중이었다. 두 눈에서는 눈물까지 흐르고 있었으나 정액이 울컥울컥 토해질 때마다 움찔거리기만 할 뿐. 꼭 전기에 감전되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쉴 새 없이 경련한다. 그때였다. 쪼륵! 쉬이이이! 문득 쉬하는 소리와 함께 톡 쏘는 지린내가 코를 찔렀다. 음부에서 뿜어지는 샛노란 물줄기가 하반신을 뜨듯하게 적시며 고여가고 있었다. 한소영도 오줌을 싸버린 것이다. 정작 장본인은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것 같았지만. 예상치 못한 한소영의 실금에 기분이 나쁘다기보다 그냥 웃고 말았다. 오히려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자기 자신을 절제하지 못할 정도로 기분 좋았다는 방증이리라. 이로써 놀림당할 일은 없겠지. 이윽고 양쪽에서 오가던 정액과 소변이 서서히 잦아들 무렵, 난 비로소 숨을 몰아 내쉬는 한소영을 향해 양팔을 벌렸다. 아까 그녀가 왜 날 보며 손을 뻗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자 굴곡 넘치는 몸매가 살짝 한들대더니 비단처럼 빛나는 머릿결이 우수수 쏟아진다. 가슴에 찰싹 달라붙는 유방이 참으로 기분 좋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차분히 쓰다듬어주자 한소영은 그대로 잠들어버린 듯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 "…머셔너리, 로드." 불현듯 날 부르는 음성이 들렸다. 잠든 줄 알았던 한소영이 살포시 고개 들어 눈을 맞췄다. "이제…. 알겠어요…. 직접 해보니까…. 겨우 알 것 같아요…. 머셔너리 로드 말고…. 절 만족시켜줄 남자는…. 이 세상 어디에도…. 그러니까…." 중간중간 숨을 고르며 말하는 한소영의 눈동자는 꿈을 꾸듯 몽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직 여운에서 깨지 못했는지 횡설수설하고 있지만,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저…. 머셔너리 로드 것이 될래요. 아기 가지고 싶어요." "…예?" "아기요, 아기. 당신의 아이를 낳고 싶어요." "……." 충격적일 정도로 예상외의 말이었다. 하지만 곧 한소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예전 게헨나와 수나가 나타났을 때를 아직 잊지 못한 듯싶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 테지. "네. 저도 좋습니다." 난 빙긋 웃으며 화답했다. 그러자 한소영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더니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고마워요. 저 정말 열심히 할게요." 아니, 뭐 열심히 할 필요까지야. 이미 세 번이나 질 내 사정했는데요.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느닷없이 허벅지로 한소영의 다리가 착 감겨온다. "머셔너리 로드도 꼭 절 임신시켜주세요." 이어서 아까와 같이 조준하며 자세를 잡더니 엉덩이를 들어 올…. 철썩! …어? 아침이 밝았다. 동이 튼 아틀란타의 하늘은 전날의 폭풍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시원한 파란빛을 뿌리고 있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심신이 고요히 가라앉을 정도로 맑고 평화롭다. 그러나 머셔너리 캐슬은 이른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아니. 어수선한 걸 넘어서 굉장히 소란스럽다는 표현이 옳지 않을까. 마치 무언가 큰일이라도 난 듯하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사 층, 정확히는 집무실에서 때아닌 고성이 왕왕 울렸다. 성난 어조를 감추지 못하는 것이 매우 화가 난 듯하다. 실제로 집무실 안에서는 신재룡이 흰 점액과 누렇게 스민 자국 그리고 붉은 핏물로 더럽혀진 침대 시트를 보며 크게 화를 내고 있었다. 신재룡으로서는 보기 드문 감정 표현이었다. "클랜 로드는 쉬고 싶다고 하셨고, 저도 분명히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신재룡이 가리키는 곳에는 김수현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고 광대뼈도 살짝 드러나 있을 정도로 야위었다. 꼭 죽은 사람을 보는 것 같다. 단지 간간이 흘러나오는 약한 숨소리나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만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 그러자 멍하니 김수현을 응시하던 고연주는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했다. "저, 재룡 씨? 왜 저한테 화를…? 저 언제 얌전히 잠만 잤다고요?" "아 글쎄, 그림자 여왕님이 범인이라는 말이 아니라요. 사실 이건 그동안 제가 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고 해서 모른 척했지만, 어쨌든 사용자 고연주는, 그…! 아무튼, 클랜 로드의 안주인 노릇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알아서 잘 단속해주셨어야지요." "그, 그건…." "허 참!" 말인즉 왜 알아서 자제시키지 않았냐는 비난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고연주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막말로 김수현 휘하 무수한 여인 중 한 명이 고새 못 참고 도둑고양이가 되지 않았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물론 정말로 그렇다고 해도 억울한 건 매 한 가지였지만. 그러나 신재룡의 분노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껏 목숨을 걸고 구출해왔는데 까닥 잘못하면 존경해마지 않는 클랜 로드를 골로 보낼 뻔하지 않았는가. 결국에는 고연주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아, 알았어요. 이건 제가 단단히 주의 줄 테니 우선 체력 회복부터…." "체력은 문제없습니다." "네, 네?" "심신 중 신이 문제가 아니라 심이 문제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무리하셨으면 기력이 아주 심하게 쇠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말한 신재룡은 안쓰럽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연주는 차마 '그럼 복상사 당할 뻔했다는 말이에요? 저 인간이?' 라고 묻지는 못했다. 경험자로서 말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결국, 그저 이마를 짚으며 끙 신음을 흘릴 뿐. 그때. "…아." 혼란스러운 와중, 문득 오늘 아침 집무실 문 앞에서 우연히 만났던 여인이 갑작스레 뇌리를 스쳤다. '한소영.' 아니, 문 앞에 있던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당장 자신도 김수현의 상태를 보고 싶어 잠에서 깨자마자 달려오지 않았는가. 진짜 문제는 한소영의 겉모습이었다. 땀에 흠뻑 젖어 떡이 졌으나 윤기가 흐르던 머리카락. 뺨에 스민 발그레한 혈색과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살결. 몇 주 동안 포로로 잡혀 있던 걸 고려하면 상태가 좋아도 너무 좋았다. 깜짝 놀라 밤에 뭐 좋은 거라도 먹었느냐고 반 장난으로 묻지 않았는가. 한데 왜인지 안절부절못하던 한소영은 배를 감싸 안으며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아직 돌아오지 않는다. 당시는 별로 이상하다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 배, 분명히 부풀어 있었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고연주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눈을 형형히 빛내며 김수현을 노려봤다. "이 양반이 진짜!" ============================ 작품 후기 ============================어째서 또 제 여성 설이 고개를 드는지…. 흠 잡힐까 봐 요즘 일부러 후기도 자제하고 있는데요…. ^^;PS. 970회로 에피소드 1이 끝납니다. 이후 연재 예정은 내일 후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후기는 꼭 읽어주세요.)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하루라는 시간이 더 지나 있었다. 말인즉 이십사 시간 동안 꼬박 기절해 있던 셈이다. 신재룡의 말에 따르면 난 실제로 꽤 위험한 상태까지 몰렸었던 것 같다.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고 하던가? 농담하지 말라고 웃어넘기자 신재룡은 정색하며 안색을 굳혔다. …글쎄. 열두 번 사정한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이후로 필름이 뚝 끊겼다. 그럼 한소영은 내가 기절하고 나서도 계속 했다는 건가? 생각해보니 소름 끼친다. 이윽고 푹 한숨을 내쉰 신재룡은 몸 좀 생각해달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며 걸음을 돌렸다. 그때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도로 열리더니 다음 타자가 집무실로 입성했다. 멈칫한 신재룡이 깍듯하게 허리를 숙이길래 형이나 한소영인 줄 알았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한껏 무게를 잡으며 이쪽으로 걸어오는 여인은 바로 화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바타(Avatar)를 자세히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날카로워 보이는 눈동자는 역시나 맑고 선명한 선홍빛을 발하고 있었다. 긴 눈썹은 살짝 올라가는 형태라 언뜻 화난 인상이 강하다. 붉은 머리카락은 반듯한 이마를 돋보여주는 양쪽으로 난 가르마로부터 흘러넘쳐, 날씬한 허리 아래로 내려갈수록 붓 꼬리처럼 모여 눈길이 간다. 갸름한 이목구비까지 더해져 진한 여성스러움을 풍기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단순히 '예쁘다.' 고 보기는 확실히 부족했다. 아무리 인간 의 모습을 했다고 해도 신으로서의 위엄은 감춰지는 게 아니었으니. …하나 궁금한 게 있다면 왜 에이프런을 걸치고 있느냐는 거다. 빨간색 계통으로 맞춰서 리본까지 깔끔하게 묶었다. 어울리지 않게 말이야. "하이고. 아주 얼굴 한 번 보기 힘들어?" 그때 아니꼽다는 듯이 말한 화정이 불쑥 팔을 뻗는다. 가슴에 손이 닿는 순간 돌연 산뜻한 기운 한 줄기가 심장으로 흘러들었다. 이어서 몸이 한결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라졌던 기력이 샘솟고 활력이 도는 것 같다. 자신의 기운을 나눠주면서도 화정은 계속 투덜거렸다. "참, 깼으면 날 찾아올 생각부터 해야지. 설마 내가 없다는 것도 몰랐던 거야? 정말이지…." 어. 그러고 보니 어떻게 현신이 아직도 유지되는 거지? 궁금해 물어보려다가 화정이 눈을 치뜨는 걸 보고 그만두기로 했다. 그럼 정말 잊고 있었다는 걸 증명하는 셈이 되니까. "뭐? 말해." 쳇. 놓치지 않는 건가. "아, 다들 뭐 하고 있나 궁금해서." "…바빠." 화정은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는 미꾸라지를 보는 표정으로 말했다. "바쁘다고?" "그래. 너 따위는 잊고 전부 바쁘게 살고 있지. 그러니 이렇게 찾아와준 걸 감사히 여기라고. 나 아니면 누가 널 챙겨주겠어?" 꼭 너 따위라는 말을 붙여야 했는지 항의하고 싶었으나 굳이 토를 달 생각은 없었다. "영광이야. 몸소 찾아와주기까지 하고." "호호. 그럼 그럼. 정말 치열했다니까? 그 뭐냐, 가위바위보? 하도 들어가겠다는 애들이 많아서 그 게임으로 한 명만 들어가기로 서로 합의했거든?" 응? "정말 멍청해. 감히 인간이 신을 이길 생각을 하다니 말이야. 아무튼, 너도 봤어야 했어. 결승전에서 패배하고 분해하는 게헨나의 얼굴을. 최종 승자는 결국 이 몸이었지. 오호호호!" 아니. 아까는 전부 바쁘다며. 가위바위보는 또 뭔데. 신 나게 웃은 화정은 손을 떼고 침대에 털썩 걸터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승자의 여유를 만끽하는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게헨나가 분함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흘렸다거나 무릎 꿇고 한 판만 더하자고 애걸했다는 등등. 화정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건 게헨나가 이왕 이렇게 된 거 날 깨끗이 포기하고 물러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였다. 다행히 가위바위보 이야기는 오래지 않아 끝나고 근황으로 주제로 넘어갔다. 가만히 들어보니 바쁘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닌 듯했다. 하기야 전쟁이 끝난 직후고 또 구 북 대륙 사용자들의 처우도 해결해야 하니 그럴 만도 하다. 이효을은 물론, 형도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다는데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소영이 일찍 돌아갔다는 것도 같은 맥락인 듯했다. 아쉽네. 한 침대에서 햇살을 받으면서 눈을 뜨고 같이 정답게 아침 식사해보고 싶었는데. "그래서 넌 이제 어떻게 할 거야?" 한창 망상에서 헤엄치는 와중 갑작스러운 질문이 공습했다. "나?" "뭐야. 설마 이 난리를 쳐놓고 그냥 이대로 행복하게 살래~. 이 마인드는 아니겠지?" 말인즉 끝맺음은 확실하게 지으라는 소리였다. 물론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제로 코드를 얻은 이상 어떤 식으로든 매듭은 지어야 했다. 주머니로 손을 찔러 넣자 무언가가 손아귀로 잡혔다. 작고 동글동글한 구슬을 난 한참 동안 만지작거렸다. "뭐…. 한 번 천천히 생각해봐. 시간은 많으니까. 적어도 네 과거와 비교하면 행복한 고민이잖아?"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화정은 더는 독촉하지 않았다. "그렇기는 하지." 씁쓸히 동의하자 문득 화정이 내 손을 잡아끌어 몸을 일으키게 했다. "화정?" "자아, 이제 일어나라고. 한 단체의 수장이 나 몰라라 계속 누워 있는 것도 보기 안 좋아." "아, 아니." "시끄러워! 고작 이런 이야기나 해주려고 그깟 게임에 권능까지 사용하면서 우승한 줄 알아?" 부정이다. 부정을 실토했어. 끝끝내 날 일으킨 화정은 콧노래를 부르며 방 곳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뭘 하는가 봤더니 별것도 아니었다. 옷을 가져와 등 뒤에서 입혀주는 행동이 꼭 신혼을 맞이한 새댁이 남편의 출근 준비를 도와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심지어 어디서 줄 하나를 가져와 직접 목에 매어주기까지 했다. 설마 이게 넥타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헤…. 이런 기분이었구나. 평생 하고 싶다." 혼잣말을 중얼거린 화정은 기어코 날 문 앞까지 끌고 갔다. "그럼 다녀와! 일찍 들어오고!" 생글생글 웃으며 한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니 문득 옛날 화정과 나눴던 이야기가 뇌리를 스쳤다. '그래도 명색이 신인데. 하고 싶은 것도 있나?' - 그럼. 당연하지. 일종의 유희라고나 할까? 왜 그런 거 있잖아, 그런 거. '그런 게 뭔데?' - 어디 보자. 네가 있던 지구에서는 바깥양반이라고 하던가? 남편이 바빠서 막 돌아다니면 부인은 내심 서운해하지만, 그래도 가족을 위해서 저러는 거니 생각하며 참고 내조하잖아. 그런 기분 말이지. '아하. 현모양처.' - 그렇지! 사실 바가지는 내 취향이 아니라서. 호호. '그리고 나를 남편으로 생각했고.' - 바로 그거…. …어, 어? '에, 저, 화정. 그러니까…. 일단 고마….' - 다, 닥쳐! 입 다물어! 멍하니 응시하자 혼자서 뺨을 붉히고 있던 화정이 돌연 얼굴빛을 싹 굳혔다. "뭐, 뭘 봐?" "…너." 난 손가락으로 화정의 가슴을 가리켰다. 그리고 말했다. "생각보다 안 작은데?" 화정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내렸다. 다시 고개를 올렸을 때는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이…!" 짝!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얼얼한 볼을 부여잡고 집무실을 나서자 곳곳을 돌아다니는 클랜원들을 볼 수 있었다. 한데 의외로 예상했던 것보다 시끄럽지는 않았다. 요란을 떨기는커녕 몸은 좀 괜찮으냐고 묻거나 인사를 건네는 정도였다. 소란스러운 걸 질색하는 내 성격을 알고 암암리에 배려해주는 것이리라. 난 그제야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화정에게 쫓기듯 나온 걸음은 자연스레 일 층 식당으로 향했다. 약속의 신전에 붙잡혀 있는 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허기가 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라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아, 수현이 왔다." "거봐. 여기로 올 줄 알았다니까? 언니 말 듣기 잘했지?" 고연주, 차소림, 비비앙, 임한나. 식당에는 이미 네 여인이 진을 치고 있었다. "흥. 뭐해요. 어서 이리 안 오고." 고연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곱게 눈을 흘겼다. "혹시 가위바위보에서 진 사람들의 모임입니까?" 멋쩍게 웃으며 말을 걸자 고연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들었어요?" "약간." "뭐…. 우리 네 명은 진 건 아니에요. 오히려 일찌감치 포기를 선언하고 식당을 확보했죠. 애초 신을 어떻게 이겨요? 그 똑똑한 하연 씨도 조별 예선에서 떨어졌는데." "……." 조별 예선이라. 생각보다 스케일이 큰 대회였나 보다. "아무튼, 앉아요. 배고프죠? 우선 먹고 얘기해요." 그렇게 말한 고연주는 식당으로 들어가더니 금세 그릇 하나를 들고 나왔다. 그릇에는 담백한 냄새를 풍기는 말간 수프가 뜨끈하게 고여 있었다. "우선 이걸로 속 좀 달래요." 사양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한 스푼 떠먹자 약한 현기증이 단숨에 가라앉더니 공복감이 한층 강해졌다. 뱃속에 들어앉은 거지가 더 달라고 아우성치는 걸 느끼며 스푼을 놓고 그릇째로 부여잡았다. 원샷으로 흡입하자 고연주는 두 번째로 지글지글 끓는 커다란 스테이크를 내놓았다. "먹어요. 먹고 힘 좀 내라고 일부러 살짝 익혔어요." 암. 그렇지. 철분을 보강하는데 고기만 한 게 없지. 난 손끝으로 검기를 일으키며 큼직큼직하게 잘라 씹지도 않고 꿀떡꿀떡 삼켰다. 버터를 발라 익혔는지 입에서 살살 녹는다. 맛있다. 중간중간 입을 달싹이던 고연주는 문득 싱겁게 웃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양손으로 턱을 괴며 아이를 보는 듯한 엄마의 얼굴로 날 지그시 응시했다. 열심히 먹어야겠다. 잠시 후, 이번에는 차소림이 새 그릇을 놓았다. "이것도 드세요. 소화에 좋을 겁니다." 괴조의 알을 토핑으로 얹은 우동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 아주 먹음직스럽게 보여 이번에도 그릇을 잡고 입으로 와르르 밀어 넣었다. 쫄깃쫄깃하게 씹히는 면발이 아주 맛깔스럽다. 국물 한 방울까지 깨끗하게 비우니 마침 비비앙이 해맑은 얼굴로 새 그릇을 놓는다. 거기에는 시꺼멓게 죽어 문드러진 생전 오믈렛으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잘 먹으니까 보기 좋잖아! 자, 이것도 먹으라고! 온갖 단맛 나는 걸 집어넣었으니…." "퉤!" "꺄아아악! 무슨 짓이야! 얼마나 열심히 만들었는데!" "아, 오해하지 마. 침 발라 놓은 거니까. 누구도 못 먹게." 거짓말이 먹혔는지 펄펄 화를 내던 비비앙이 조금 수그러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제일 맛있어 보여서. 난 맛있는 음식은 가장 나중에 그리고 최대한 아껴 먹는 성격이거든. 몰랐어?" "그랬나?" "그래. 이건 나중에 방으로 올라가서 버릴, 아니 이것들 먼저 다 먹고 먹을 거야." 잘못하면 속내를 밝힐 뻔했다. 이게 진짜. 한창 맛있게 먹는 중인데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지잖아. 솔직히 좀 짜증까지 났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비비앙은 어색하게 볼을 긁으며 몸을 배배 꼬았다. "그래도 뜨거울 때 먹는 게…." "먹는 스타일까지 간섭하지는 않아 줬으면 좋겠다. 아니면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만든 널 탓해." "그, 그래. 미안해. 잘못했어. …헤헤. 그런데 대놓고 말해주니까 좀 부끄럽네. 여기 세 명한테도 미안해지잖아." "?" "여기 모두가 널 위해서 열심히 만들었어. 네 말은 고맙지만 다음부터는 같이 칭찬해줘. 눈치 보이니까." "……." 비비앙아. 전혀 그렇지 않아. 오히려 이런 말까지 해야 하는 날 이해하는 눈빛으로 보고 있다고. 이윽고 비비앙의 음식만 빼고 모조리 먹어 치운 후 임한나가 가져온 디저트로 입가심했다. 접시에 딱 맞게 얹힌 푸딩은 크고 부드러운 것이 황금빛 꿀까지 넘치게 흐르고 있었다. 한 입 베어먹자 달고 고소한 우유의 풍미가 부드러이 퍼지는 게 꼭 임한나의 젖가슴을 무는 것 같아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최대한 천천히 먹었다. 그때였다. "클랜 로드!" 푸딩이 절반쯤 남았을 즈음 식당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어온 사내가 반갑게 소리 질렀다. 서류를 한 아름 안아 올린 조승우가 빙긋이 웃고 있었다. 안 그래도 푸딩을 다 먹기 전까지 식당을 탈출할 계획을 짜고 있던 터라, 나로서도 반갑기 그지없었다. "오. 일입니까? 그동안 많이 밀렸지요? 어서 주시죠. 검토해보겠습니다." "예…? 하하. 일은 맞는데요. 제가 처리할 것들입니다. 이제 막 깨어난 분께 어찌 일을 맡기겠습니까." 속 편한 말을 하는 상대를 향해 난 들키지 않게 썩은 오믈렛을 가리키려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조승우는 쿵 소리가 나게 서류 더미를 내려놓고 후유 숨을 흘렸다. "그보다는 손님이 왔습니다." "예?" "전령이요. 신전에서 왔다고 합니다." "신전…?" 그 말을 들은 순간 꾸준히 움직이던 숟가락이 뚝 멈췄다. 조승우는 당황했다. "혹시 제가 잘못한 거라도…?" "아니, 아닙니다. 신전에서 찾아왔다고요…." 사실 전령을 보낸 이유야 뻔하다. 제로 코드도 얻었겠다. 한 번 찾아오라는 거겠지. 하지만 난 비비앙을 의식하는 감도 없잖아 있어 무거운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 속에서 속으로 삼 분을 센 후. "후우우우…. 신전에서…." 긴 한숨을 뱉는 동시에 숟가락을 탁 놓으며 입을 열었다. "고연주. 아직 엘릭서 남은 게 있습니까?" "네? 네. 있기는 하죠." "하나 가져오세요. 제가 마실 겁니다." "…알겠어요."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고연주는 서둘러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한나야." "응?" "씻고 나올 테니까. 내 장비 좀 준비해줘. 특히 엑스칼리버는 꼭 가져다 놓고." "바로 가져다 놓을게." 임한나도 빠르게 모습을 감췄다. 이 정도면 충분히 심상찮은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판단, 입술을 살짝 짓씹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론 가기 전에 한 마디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안하다. 좀 중요한 일이 생겨서. 갔다 와서 먹어야겠네." "으, 응? 아니야. 다녀와. 난 괜찮으니까." 비비앙이 걱정하는 얼굴로 끄덕거리는 걸 보며 난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 작품 후기 ============================오랜만에 일상을 적으니 좋네요. 하하. (그리고 늦어서 죄송합니다. ㅜ. ㅠ)독자님들 안녕하세요. 오늘 후기로 말씀드릴 건 휴재 공지입니다. 예전처럼 하루가 아니라, 좀 많이 긴 휴재가 될 것 같습니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많이 힘들어서 그렇습니다. 오늘 회로 에피소드 1도 끝났으며, 이제 남은 내용은 에피소드 0과 에필로그밖에 없습니다. 에피소드 0인 'Code Name, Zero'는 총 6회 ~ 10회 정도로 예정돼 있으며, 에필로그는 4회로 예정돼 있습니다. 말인즉 적어도 14회 안에는 메모라이즈가 완결이 날 겁니다. 하루 쉬고 어정쩡한 상태서 헉헉거리며 띄엄띄엄 연재하느니, 며칠 푹 쉬고 완결까지 휴재 없이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래는 더 일찍 체력의 한계를 느꼈으나, 적어도 에피소드 1은 끝마치고 쉬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휴재 기간은 아마 2015년 8월 28일(금요일) ~ 2015년 8월 31일(월요일)까지 총 나흘 동안 쉴 듯합니다.2015년 9월 1일(화요일)부터 연재가 재개되며 이후 완결까지 깔끔하게 매듭지어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하겠습니다. 쉬는 동안 짬짬이 그동안 보지 못했던 쪽지도 답신하고 뜰에도 들를 예정입니다. 부디 독자분들의 너그러운 양해 부탁드립니다. - 변한다. 변하지 않는다. 첨벙! "흐으으으…." 김이 피어오르는 욕조에 안착하자 저절로 신음이 새나왔다. 안 그래도 한가득 받아져 있던 물은 몸이 들어가자마자 급격히 올라와 밖으로 흘러넘쳤다. 난 물 흐르는 욕조에 양팔을 걸치고 천천히 뒷머리를 뉘었다. 펄펄 끓는 늪지대에 온몸이 조용히 가라앉는 것 같은 감각. 시시각각 살이 뜨거워지는 이 형언할 수 없는…. "하하." …기분에 취하는 것도 잠시에 불과했다. 투명하던 물에 거뭇한 액체가 검정 물감처럼 섞여 번지는 걸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자세히 보니 피부의 땟국이 장난이 아니었다. 고온의 물에 반응해 이럴 정도라면 얼마나 꾀죄죄했다는 걸까. 하기야 몇 날 며칠을 갇혀 있다가 처음 씻는 거니 더러운 것도 당연하겠지. 우선은 제대로 씻자. 푸석하고 떡 진 머리도 감고, 때도 박박 밀고, 구석구석 비누칠도 하고, 새 물을 받아서 꼼꼼히 끼얹고…. 장장 두 시간이나 투자한 목욕을 끝내자 심신이 보송보송해졌다. 욕실 밖으로 나가니 햇살이 비치는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 지경이랄까. 마침 방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임한나가 밟혀 난 태초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걸었다. 그러나 이미 몇 번 당해본 장난이라 내성이 생겼는지 옛날처럼 귀여운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그저 쓰게 웃더니 손에 들고 있던 큰 수건을 펼쳐 내 전신을 휙 감아버렸다. 졸지에 미라가 돼버린 난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까르르 웃은 임한나는 온몸을 세심히 닦아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전신의 물기를 제거했는지 임한나가 날 붙잡고 흔들었다. 그러나 난 죽은 듯이 누워 계속 못 들은 척했다. 잘 자고 잘 먹고 잘 씻고. 거기다 나긋나긋한 손길까지 더해지니 심신이 기분 좋게 노곤해졌기 때문이다. 이대로 임한나를 껴안고 그녀의 품에서 푹 잠들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정말, 가끔 이렇게 어리광부릴 때가 있다니까." 약간의 실랑이가 이어졌으나 결국 항복한 건 임한나였다. 긴 한숨을 흘리더니 옷과 장비를 가져와 손수 입혀주기 시작했으니. 후후. 임한나는 훗날 참 좋은 부인이 될 거야.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옷은 입히기 쉽다손 쳐도 장비를 입히는 건 어려울 법도 한데, 임한나는 단 한 번의 끙끙거림 없이 능숙하게 손을 놀렸다. 조용히 옷을 입히던 임한나가 말문을 연 건 갑옷 속으로 날 쑥 집어넣었을 때였다. "참. 그러고 보니 오늘 언제쯤 돌아와?" "오늘? 왜?" "오늘 저녁에 축제가 있거든. 너 돌아온 거 축하도 하고 겸사겸사 여러 이야기도 좀 하고…. 시간이 되나 해서." "……." 상냥한 목소리에는 조심스러운 기색이 없잖아 있었다. 이제 막 기억난 듯 말하기는 했으나 어색한 어조는 숨기지 못했다. 아까 식당에서 일부러 무겁고 심각한 분위기를 연출해서 저러는 거겠지. 그 순간 느닷없이 은근슬쩍 장난기가 일어 난 목에 힘을 빼고 최대한 씁쓸히 말을 흘렸다. "그렇구나…." "응?" "그게….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뭐, 뭐야. 왜 그래. 응?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니?" 끊임없이 이어지던 손길이 뚝 멎는다. 이어서 불안해 보이는 얼굴이 날 응시했지만 애타던 두 눈매는 곧 몹시 노려보는 모양으로 변했다. 목소리와는 달리 빙글빙글 웃고 있는 내 표정을 확인했기 때문이리라. 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응. 알았어. 일찍 올게." "못됐어. 정말." 곱게 눈을 흘긴 임한나는 내 볼을 한 번 꾹 찌르고 몸을 돌렸다. 난 껄껄 웃으며 일어나 왼손에는 제로 코드를 오른손에는 엑스칼리버를 부여잡고 집무실을 나섰다. 하늘은 맑고 햇볕은 따뜻하다. 정원은 유니콘을 타고 깔깔 웃는 수나로 시끄러웠고, 도시는 돌아온 사용자 그리고 되살아난 사용자로 북적거렸다. 그야말로 아무 걱정도 느껴지지 않는 활기찬 일상의 장면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신전으로 가는 동안 오묘한 위화감이 날 감싸서인가. 좀 전까지 임한나와 장난까지 칠 정도로 행복함을 느꼈을 터인데. 한데 제로 코드를 들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아니. 끝을 마주해야 하는 현실을 직시하자마자 들떴던 기분이 착 가라앉는 걸 느꼈다. 모르겠다. 슬픈 것도 아니고 기쁜 것도 아니다. 어떻게 딱 집어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무언가 오랫동안 쫓기던 처지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것 같은데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담담하다. 이래서야 그때와 그날과 똑같지 않은가. 그때였다. 멍하니 움직이던 발끝으로 갑자기 단단한 것이 툭 부딪치는 느낌이 들었다. 부츠는 어느새 흰 계단에 닿아 있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드는 순간 느닷없이 환몽이 날 사로잡았다.'축하해야 할지, 아니면 애도해야 할지.' 이윽고 환청이 들리는 동시에 계단을 헐레벌떡 뛰어 올라가는 사내가 눈에 밟혔다. 그 사내는 다름 아닌 나였다. 지금처럼 멋들어진 갑옷도 망토도 없고 오히려 전쟁터에서 간신히 살아나온 듯한 비루하기 짝이 없는 몰골이었으나 저 사내는 분명히 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과거의 나라고 해야 할까. 왜냐면 한 손에 제로 코드를 꼭 쥐고 있었으니까. '네 끝이 어떨지 나도 자못 궁금해졌거든.' 또다시 환청이 들린다. 누구의 목소리인가 했더니 제로 코드의 음성이었다. 접때 한 번 들은 게 전부였지만 워낙 특이한 톤이라 기억해낼 수 있었다. '가라, 마주쳐라, 부딪쳐라. 그리고….' 그렇다면. 굳이 이 과거를 보여주는 목적은 무엇일까. 어서 매듭을 지으라는 무언의 압박인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모종의 이유가 있는가. '내게, 너의 끝을 보여라.' 어느 순간 과거의 난 신전 안으로 사라져 있었다. 그와 동시에 환몽도 사라졌다. 한참 동안 눈앞의 신전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가, 복도를 걸어, 포탈로 몸을 묻는다. 그리하여. "사용자 김수현." 십오 년. 이 긴 세월 동안 그토록 열망하고 꿈꿨던 바를 이루고 마침내 이 자리에 서게 됐다. "어서 오십시오. 사용자 김수현."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멍하니 왼손에 쥔 작은 구슬을 굴려본다. 모든 것의 시작을 알리고 모든 것을 마무리 짓는 소환의 방. "사용자 김수현에게 묻겠습니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음성이 귓전에 울린다. 끌리듯 눈을 올리자 잿빛 벽돌로 이루어진 바닥이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서른 평에 달하는 공간을 시야에 담았을 즈음 비로소 시선의 움직임이 멈췄다. "세라프." 방의 중앙 직사각형의 제단에는 등 뒤로 반투명한 날개를 일렁이는 천사가 앉아 있다. 언제나처럼 공손히 모은 양손과 살짝 열린 입술. "사용자 김수현은 이번에도 홀 플레인의 시간을 되돌리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까?" 이윽고 눈을 보려는 찰나 갑작스러운 질문이 날아들었다. 그 탓에 얼굴로 올라가던 시선이 입에서 멈췄다. "너." 너. 이 단 한 마디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에 들리는 내 목소리는 매우 차가웠다. 스스로 생각해도 성에 있을 때와 지금 여기 서 있는 날 동일하게 여길 수 없을 정도로. 세라프의 말이 이어졌다. "사용자 김수현은 홀 플레인의 정상을 거머쥔 사용자입니다." "…그런데." 그리고 엉겁결에 반문한 순간. "그런데…. 가 아닙니다." 깨달았다. 아까 오면서 느꼈던 감정의 정체가 어떤 것인지 말이다. "그렇게나 열망하던 제로 코드를 획득했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은 자격이 있습니다. 그 자격이 허락하는 한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위화감이 아니었다. 기시감…. 아니. 어쩌면 데자뷔라고 해야 할지도. 아, 둘 다 같은 말인가? "지구로의 귀환? 좋습니다. 그 길을 선택하신다면 현재의 사용자 정보를 유지한 채 지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괜찮네." "홀 플레인에 남는다? 좋습니다. 제로 코드만 있다면 전 대륙을 다스리는 왕…. 아니. 현재의 사용자 김수현이라면 그 이상의 존재도 될 수 있습니다." "나쁘지 않아." 어느새 세라프의 말에 장단을 맞추고 있다. 그래. 그때도 이랬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난 이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냐면 가부 여부를 떠나서 선택권 자체가 없었으니까. 힘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생겼다. 힘도 생겼다. 변한다. 변하지 않는다. 이게 어떤 의미였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할 말은." 비록 그때와 상황은 달라졌을지라도. "그게 끝인가?" 나 자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두 팔을 정면으로 느릿하게 들어 올린다. 왼손에는 제로 코드. 오른손에는 엑스칼리버. 그중 칼자루를 바스러지도록 말아 쥐었다. 회로를 따라 흐르는 강대한 마력을 일으킨다. 무섭게 용솟음치는 기운을 느꼈는지 조용히 이어지던 음성이 뚝 끊기는 찰나. "그럼…. 그 두 개가 아니라면." 세라프의 목소리가 잠깐의 텀을 두고 재차 귀를 찔렀다. 뜻밖에도 매우 담담한 음성이었다. "사용자 김수현은 천사의 멸절을 원하는 겁니까?" 그 순간이었다. 문득.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아무 까닭도 이유도 없는 웃음이었다. 난 한동안 소리 없이 웃었다. ====== 작품 후기 ====== 9월 1일부로 연재 재개합니다. 덕분에 사흘 동안 잘 쉬다 왔습니다. 기다려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완결까지 휴재 없이 꾸준하게 달리도록 하겠습니다! :) 예컨대. 예를 들어 영장을 받고 갓 입대한 신병 처지가 아니라, 이 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하는 병장 같은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그즈음 흔히 하는 말 중 이런 말이 있다. 정말 힘들기는 했지만 돌이켜보면 얻은 것도 많다고. 군대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하지만 '그럼 한 번 더 할래?'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백이면 백 '아니. 그건 싫어.' 라고 말하더라.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사용자도 비슷하지 않을까. 햇수로는 15년. 일로는 5,475일. 시간으로는 131,400시간. 분으로는 7,884,000분. 초로는 473,040,000초. 결코, 짧다고 볼 수 없는 숫자들이다. 물론 이 긴 세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불행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분명히 좋은 시절도 있었고 행복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몇 번을 고민해도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는다. 이것만큼은 확실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왜냐면. "세라프." 애초 겪을 필요가 없었던 일이었으니까. "넌 알고 있잖아." 시야는 여전히 고정돼 있다. 들다 만 시선은 상대의 인중쯤에서 멈췄다. 세라프의 입술은 아직 굳게 닫혀 있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얼마나 죽고 싶었는지…. 이것만큼은 형도, 아니 아무도 몰라. 하지만 넌, 너만큼은 알고 있잖아. 그 누구보다." 날 계속 봐왔으니까. 무려 십오 년 동안이나. "네가 얼마나 날 도와줬고 또 위해줬는지는 알고 있다. 나도 그 점은 부인하지 않을게." 원래대로라면 현재의 세라프한테는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일 회차를 끝과 이 회차의 시작 사이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날 구하러 왔을 때의 안솔을 보고 의심했고 오늘 이 자리에 와서 확신했다. 무엇보다 방금 세라프의 입술이 살짝 떼어졌다가 닫힌 게 그 방증이다. "그래도 넌 알고 있으니까…." 차분히 숨을 들이켠다. 그리고 도로 내쉬는 것에 맞춰 멈췄던 시선을 올리는 동시에. "내가 이러는 거…. 나쁜 거 아니지? 그렇지?" 갈고 갈았던 칼날을 밖으로 드러냈다. 그리하여 비로소 보게 된 세라프는 극도로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저 언제나처럼 날 고요히 응시하고 있었다. 의외라면 의외였다. 저 얼굴은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일까. 그럼 답이 없는 건 할 말이 없는 건가. 아니면 또 감언이설을 준비하는 건가. 뭐 아무래도 좋다. "Yes." …………아니. "물론 이해합니다. 우리 천사는 종족의 안전을 위해 지구의 인간을 강제로 소환, 악마와의 전투에 대리로 내세웠습니다. 홀 플레인의 사용자들은 마땅히 누려야 할 생활을 박탈당했으며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 점을 부인할 생각은 없습니다." "…세라프?" "그러므로 그 분노는 지극히 온당하며 합리적입니다. 또 사용자 김수현은 현재 막강한 무력을 갖추는 데 성공했습니다. 설령 천사 수만이 모여도 한 번의 손짓으로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의 힘…." "너…." 죽은 듯 미동도 보이지 않던 심장이 조금씩 방망이질을 시작한다. 세라프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허나." 혼란스러운 와중 세라프가 말을 반전한다. 복잡하던 사고 회로가 순간적으로 가라앉았다. 그렇지. 이래야지. 어떤 변명이 나올지 모르지만 한 번 들어줄 의향은 있다. 그래야 나도 미련을 깨끗이 털어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하나 안타까운 사실은." 이윽고 나직한 음성을 듣는 순간. "현재 가브리엘 님을 포함한 천사 대부분이 자리를 비웠다는 점입니다." 돌연 숨이 멎는 동시에 시간도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겉으로는 악마의 소멸을 확인했으니 천계에 보고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말끝을 흐리는 세라프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작 그 이유로 대 천사를 포함해 칠 할에 가까운 수가 자리를 비웠다는 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마 사용자 김수현을 두려워해 지레짐작으로 물러난 것으로 생각됩니다." 갑자기 헛웃음이 나왔다. 말도 안 된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가브리엘을 위시한 천사 대부분이 발을 뺐다는 뜻인가? 세라프만 남겨두고? "그럼 넌?" "저는 애초 이 전쟁의 전권을 위임받은 처지였습니다. 이 상황을 끝까지 지켜보고 홀 플레인의 일을 매듭지으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망치로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것 같다. 그 당시는 막연히 제대로 도와주려는 거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하지만 세라프의 말인즉 가브리엘은 그때부터 차곡차곡 준비하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하, 하하. 애초 이럴 생각으로 전권을 넘긴 거였나? 미친. 정말이지 끝까지 정이 안 가는 놈들이잖아." "기껏 악마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는데 똑같이 소멸하면 도로아미타불이 돼버리니까요. 아마 그들 입장에서는 사용자 김수현을 상대로 승산 없는 전투를 하기보다 얌전히 도망치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겁니다." 그래. 지독하리만치 합리적이기는 하네. 그나저나 방금 그들이라고 말했나? 꼭 타인을 지칭하는 것처럼 들렸다면 내 착각일까. "기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사용자 김수현의 책임도 없잖아 있습니다." 세라프의 말이 이어졌다. 연달아 충격적인 소식을 전하는 중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처음처럼 고저를 유지했다. "물론 어느 순간 감히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격이 높아진 것도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평소 천사를 적대하는 태도를 필요 이상으로 드러낸 것이 문제였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적의를 표출한 게 한두 번도 아니고. 특히 악마 다음은 천사라고 공공연하게 말한 적도 있다. 정말 천사를 없애고 싶으면 속으로 숨기라는 형의 말이 이제야 와 닿는 느낌이다. "정말로 천사까지 소멸시키고 싶었다면…." 그때 심원한 한 쌍의 연녹색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조용히 말을 잇던 세라프는 날 보더니 주저하며 입을 닫는다. 난 그제야 정면으로 겨눴던 엑스칼리버의 칼끝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단지, 단지…. 한동안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어쨌든 상황이 이렇게 됐지만 사실 전혀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잠시 후 목을 가다듬은 세라프가 새로 입을 열었다. "……?" "사용자 김수현의 의지만 확고하다면 제가 어떻게든 상황을 만들어보겠습니다." "상황? 네가?" "네. 지금쯤 천계로 들어간 천사들은 제 소멸을 예상하고 있을 터. 하지만 제가 살아남는다면 그들은 분명히 의문을 표할 겁니다." "거기서 네가 적당히 구슬려 돌아오게 하고 자리를 마련해주겠다는 건가?" "다시 돌아올지는 미지수지만 우선 요약하자면 그렇습니다." 세라프는 천사들이 날 두려워해 미리 도망쳤다고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만 된다면 확실히 돌아올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계획의 성공 여부보다는 더 큰 의아함이 앞섰다. 사실상 세라프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Yes.' 라고 답했을 때부터 생긴 의문이었다. "그 말은." 떨리는 손에 억지로 힘을 밀어 넣는다. 흔들리는 엑스칼리버를 고쳐 잡고 다시 세라프를 겨냥한다. "내가 널 죽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으니 하는 말인가?" "확신…. 말입니까?" "모르는 척하지 마. 제로 코드를 발동하려면 네가 필요하니까." "아닙니다." 뜻밖에도 세라프는 즉답했다. "제로 코드의 발동은 천사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혼자 살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습니다." "그럼 그렇다고 치고. 생각해보니 제로 코드를 이용하면 되겠네. 걔들은 이건 생각하지 못한 건가?" "제로 코드로 통하는 요청에 최대한 간섭하라는 지시도 당연히 받았습니다. 물론 저는 그 명을 따를 생각은 없지만, 혹시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다면 지금은 말리고 싶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은 이미 원하는 바를 이룰 힘은 충분하고도 넘치지 않습니까. 아까운 제로 코드를 급하게 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의 추이를 지켜보자는 말인가." 이상하다. 왜 자꾸만 이를 악물게 되는 걸까. 딱히 반박할 말을 못 찾겠다. 분명히 세라프의 말은 구구절절 옳다. 그리고 진심으로 날 도와주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확히는 이건 내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었다. "…모르겠어." "네?" "정말 내가 아는 세라프가 맞기는 한 건가?" "사용자 김수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아. 너도 천사잖아." "…그렇습니다." 날카로운 어조로 쏘아붙였으나 세라프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왜?" "저는 사용자 김수현의 도우미입니다." "헛소리하지 마. 왜? 왜지? 어째서 이렇게 발 벗고 도와주려는 거지?" "그…." 그때였다. "그, 그건." 그 찰나의 순간. 이제껏 시종일관 담담함을 유지하던 세라프의 표정이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곧 원래대로 돌아오기는 했으나 차이점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좀 전까지 자연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면 지금은 무언가 억지로 참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으니. "왜, 왜냐면." 이윽고 덜덜거리는 두 눈동자가 가까스로 날 응시한다. "저는." 이제는 숫제 목소리도 떨려 나오고 있었다. "저는…." ====== 작품 후기 ====== 아아아아아아아아. 화가 나고 속이 터집니다. 00시 01분부터 조아라 접속 시도만 수십 번을 했는데 참 접속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PC로 저만 접속이 안 됐던 건가요? 주소 창에 www. joara. com 치고 멍하니 화면 보기만 계~~~~속 반복. 앱 접속은 잘만 되던데 말이죠. 제 컴퓨터가 문제인지 서버가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진짜 접속 시도 하다 하다 짜증나 죽겠어요. 좀 된다 싶으면 페이지 넘어가면서 멈추고 또 멈추고 하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 안 그래도 오늘 이벤트로 표지 교체하고 공지사항 교체하고 클릭할 곳도 많은데 정말 가는 날이 장날입니다. 디도스 개xx. 오랜만에 혈압 빵 터지네요. 조아라 분들 부디 악의 무리 디도스에 지지 말아주세요! 후우우우우우우우. 뭐 각설하고! 완결도 얼마 안 남았는데 가벼운 이벤트를 해보고자 합니다. 현재 김수현 & 화정 표지는 약간의 수정 작업에 들어간 상태인데요. 정말 감사하게도 일러스트레이터 분께서 완결 축전으로 SD 캐릭터를 하나 그려주셨습니다. (표지, 공지사항, 뜰에 오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여기서 그림을 보시면 캐릭터 아래 『?』는 사랑입니다! 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는 그려진 캐릭터의 이름이 있었는데 제가 요청해서 공란으로 변경했지요. ㅎㅎㅎㅎ독자 분들께서는 그림을 보시고 연상되는 캐릭터를 코멘트로 적어주세요. 정답을 맞춘 분들 중 선착순 5명, 랜덤으로 5명을 뽑아서 각각 딱지 100장씩 보내드리겠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스치는 조용한 밤이었다. 그러나 성의 정원은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로 몹시 부산스러웠다. 임한나는 생환을 축하하는 겸사겸사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라고 했으나 실상은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지금껏 겪었던 축제 중 가장 큰 규모라고 해야 하나. 단순히 우리끼리만 하는 게 아니라 중앙 관리 기구나 이스탄텔 로우, 해밀 클랜 등 몇몇 외부 인사도 참여하는 자리였다. 그러니 이 넓은 정원이 북적북적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없이 혼란스럽다기보다 즐겁고 흥겨운 분위기가 흐른다는 점은 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버님이 그 계획을 입안했을 때 딱 감이 오더라고요. 아, 이건 가능하다. 정말 될 수도 있겠구나." 고연주는 중앙 탁자에 앉은 채 싱글거리며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날 구출하려는 계획을 말하는 것 같았다. "사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어요. 걸리는 게 너무 많아 걱정이 없는 것도 아니었죠. 누구부터 살려야 할까. 과연 설득에 응해줄까. 그리고 무엇보다 GP는 충분할까 등등." "바로 거기서! 이 몸이 나섰다는 말씀이지!" 고연주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유정이 으스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에야 안 사실이지만 놀랍게도 이유정은 날 구출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원 중 한 명이었다. 아무리 고연주, 남다은이 육억에 달하는 GP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소원으로 살릴 수 있는 사용자는 육백 명에 불과하다. 즉 약속의 신전 전쟁에서 사망했던 인원과 구 북 대륙 사용자 수천 명을 살리는 데는 역부족이었다는 소리다. 그 문제의 해결책을 찾은 게 바로 이유정이었다. 예전에 내 허락을 받고 GP를 사용했던 것처럼 '대리인'의 자격으로 북 대륙 사용자 전원의 GP를 끌어모은 것이다. 살려낸 사용자의 GP까지 포함해서. "아,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그만 좀 해요. 이번에 들으면 정확히 스무 번째예요." "뭐라고?"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계획을 보강한 건 언니지만 직접 행동한 건 우리잖아요. 한 명 한 명 붙잡고 상황 설명하는 게 얼마나…." "……." 김한별의 핀잔에 이유정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할 말은 없는지 얌전히 자리에 앉고 병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이윽고 사방에서 한 명씩 공을 자랑하는 말에 적당히 대꾸하며 난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어차피 준비는 진작 끝난 상태였고 참가자와 초대받은 이들은 각자 축제를 즐기는데 여념이 없었다. 안현과 진수현은 이미 술에 거나하게 취해 옷을 벗어젖히고 막춤을 추며 주변의 비웃음을 사고 있었다. 신재룡과 신상용은 껄껄거리며 웃는 얼굴로 잔을 부딪쳤다. 우정민은 원혜수를 데리고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며 같은 탁자의 선유운은 둘을 흘깃거리며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술잔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허준영은 그런 선유운을 보며 웃었다가 선유운이 무심히 응시하자 헛기침을 하며 눈을 돌렸다. 비비앙은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어달라며 정하연에게 그릇을 내밀었다가 단칼에 거절당하고 시무룩이 고개를 떨궜다. 그러다 마침 옆을 지나가는 백한결을 발견하고 눈을 반짝였다. 백한결은 싫다고 대성통곡을 하며 도리질을 쳤으나 끝끝내 한 입 먹고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비비앙이 입맛을 다시며 눈을 돌리자 근원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수나는 아기 페가수스의 꼬리를 잡고 쥐불놀이하듯 신 나게 돌리다가 아차 하며 놓치고 말았다. 우수에 젖은 눈으로 달을 바라보며 홀로 우유를 홀짝이던 안솔은 갑자기 날아온 아기 페가수스에 직격당해 울음을 터뜨렸다. 게헨나와 한소영은 서로 대치하며 모종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윽고 게헨나는 아기 페가수스가 날아간 곳을 멍하니 응시하는 수나를 안아 올리며 거만하게 웃었다. 그러자 한소영은 침착히 주변을 둘러보더니 인근에서 유니콘을 쓰다듬으며 미소 짓고 있던 마르를 데려와 똑같이 안아 올렸다. 게헨나는 당황했고, 마르는 두어 번 눈을 깜빡거렸다. 제갈 해솔은 두 여인의 기 싸움을 구경하며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난 축제의 한복판에서 스리슬쩍 물러나 불붙인 연초를 물고 연기를 길게 흘렸다. 하늘은 짙은 남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 아래 캠프파이어처럼 타오르는 거대한 모닥불의 그림자는 조용히 한들거린다. 이 한가롭고 일상적인 장면을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지루하네." 말하고서도 아차 싶었다. "뭐 확실히 그럴 수도." 그때 등 뒤로 낮은 사내의 음성이 말을 건다. "사람에 따라서 지루하다고 느낄 수는 있겠지." 익숙한 목소리라고 느끼는 동시에 어깨너머로 술잔이 불쑥 넘어왔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형임을 알 수 있어 가볍게 술잔을 낚아챘다. 이내 옆으로 살그머니 붙는 기척이 전해졌다. "하지만 이게 네가 원하던 광경 아닌가." 형의 말에 애꿎은 잔만 만지작거렸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이 회차를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난 이런 미래를 그렸고 원했다. 그 누구도 죽지 않는, 그 누구도 슬퍼하지 않는 세상. 신경 쓸 적이 사라진 평화로운 세상. 그래. 맞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형이 입을 열었다. "허전해?" "…별로?" "아, 신전에 다녀왔다며?" "다녀오기는 했지." "다녀오기는?" "그냥…. 생각 좀 해본다고 했어." 거짓말이다. '저는….' 그 말 이후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세라프는 무언가 알아주기를 바라듯 절실히 호소하는 것처럼 보였고, 난 끝내 선택을 내리지 못해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세라프는 그런 날 붙잡지 않았다. 결국에는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 현재로써는. "생각이라…. 하기야 시간을 두고 정리하는 것도 괜찮지. 이제 거리낄 것도 없는데." "왠지 너무 속 편한 거 아니냐고 비꼬는 것처럼 들리는데." "설마. 그리고 속 편하게 지내면 좀 어때서? 네가 그런다고 해서 욕할 사람 여기 아무도 없다. 설령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런가." 격려해주는 말을 들었음에도 공연한 덧없음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무거운 적막이 가라앉는다. "그런데 말이다." 형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는지 화제를 돌리려는 듯싶다. "예컨대, 그러니까 정말 만약에 말인데." "괜찮으니까 말해." "…천사를 정리하고 여기에 남는다면 어떻게 할 거야?" "응?" "사용자로서 계속 이렇게 지내지는 않을 거잖아?" "아하, 그거야 당연하지." 당연하다고 말한 순간 형의 표정이 약간 변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질문을 듣자마자 돌연 온몸의 감각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한없이 아스라하게 느껴지던 모호한 경관이 돌연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하잖아?" "해야 할 일? 여기서 더 할 게 있다고?" "그럼. 많지. 우선 시간을 두고 좀 추슬렀다가 서, 남 대륙 잔당 놈들을 처리해야지. 여태껏 당한 게 있는데." "그리고?" "그다음에는 서 대륙과 동 대륙을 전초 기지로 삼아서 불모의 황야와 서리 협곡을 공략하는 거야. 그 두 곳은 나도 잘 모르는 곳이니 모험하는 맛도 있겠지. 지금 우리 수준이라면 충분히 공략하고도 남아." "그래?" 그 말을 끝으로 형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경직된 얼굴로 술잔만 연거푸 들이키더니 쓰게 웃었다. "너…. 이제야 웃네." "뭐?" "좀 전까지는 되게 힘없어 보였거든." "…내가?" 형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저 머리를 젖혀 술잔에 남은 액체를 깨끗이 비울 뿐. 난 멍하니 손을 올려 얼굴을 더듬거렸다. 그제야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였다. "야호! 여기 난봉꾼, 아니 왕 등장이요!" 발랄한 외침과 함께 형을 보던 시야가 확 기울었다. 갑작스럽게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자자! 그럼 이제부터 모두가 기다리던 왕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니 내 팔을 부여잡은 제갈 해솔이 하늘로 번쩍 들어 올리며 쩌렁쩌렁하게 소리 지르고 있었다. "뭐, 뭐 하는 겁니까?" "어? 빼지 마요. 축제 주인공이 구석에 처박혀서 복학생처럼 쳐다보고만 있는 게 얼마나 궁상맞아 보이는지 알아요?" "그, 그게 무슨." "자 그럼 저부터 질문 시작! 우리 클랜 로드는 이 자리에 있는 여인 중에서 누가 제일 이상형에 가까워요?" 그 순간 쉴 틈 없이 떠들썩하던 사방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여기저기서 형형한 눈초리가 쏟아지는 게 그 방증이다. 매우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난 황급히 눈을 돌렸다. 형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또 여전히 씁쓸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느긋하게 술잔을 흔들더니 천천히 등을 돌려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난. "……." 그런 형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 작품 후기 ====== 생각보다 많은 독자 분들이 이벤트에 응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_(__)_원래는 선착순 5분, 랜덤으로 5분을 선발할 생각이었는데, 코멘트 숫자를 보고 선발 범위를 좀 더 넓히기로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물론 첫 조건은 그대로 유지합니다.)우선 내용부터 올리고, 지금부터 바로 선발 작업에 들어가겠습니다. 완료되는 즉시 후기로 업데이트할 테니, 차후 확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진도가 느리거나 세라프의 떡밥 회수를 걱정하는 독자 분들이 종종 계시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예전에 말씀드렸듯이 에피소드 0은 6회 ~ 10회 안으로 확실하게 끝나며, 그 안에 세라프의 떡밥 회수도 예정돼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얼마 남지 않은 만큼 느긋하게 즐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벤트 결과 발표합니다! 정답은 고연주였습니다. :)선착순 정답 상(연재란 5분, 공지사항 6분, 뜰 4분) - 각각 딱지 100장씩Xyroe, Unkn0wn, 마천력, 물고기인간, 카드보험, 블랙퍼스트(블랙퍼스트 님은 저한테 쪽지 한 통만 보내주세요. 제가 로그인 아이디를 찾지 못했습니다.), 앞치마, 샤티엔, 묻지마몰러, 말퓨리온스톰레이지, 백발마인, Ho0149, 슈비듀비, 휘네아, 성이아빠정답에 관계 없는 랜덤 상 - 각각 딱지 100장씩모르카렌, Ken12, 달빛고수, myverry1, kyyc3748, 쭌1218, 들마로, 판갤러, nourvorse, dhgkdldy2패기 상(이벤트에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고 연재 내용에 관한 코멘트를 달아주신 분께 드리는 상) - 각각 딱지 50장씩NineBreaker, 오딘z, 사랑은달처럼, 래리어트, 국제경제학기분 좋은 상(로유진이라 불러주신 분들께 기분이 좋아서 드리는 상) - 각각 딱지 50장씩늘푸르른하늘 , 몽구헌터, 아플리고 에헤이 왜들 이러시나 상(그토록 작가가 거부했음에도 꾸준히 로유미라 부르는 분들께 제발 이제 그만해달라고 뇌물 겸 드리는 상) - 각각 딱지 10장씩hwang3820, 슬픈달고양이, 예니카같은 상(어제 서버 접속 오류로 저와 같은 심정을 느낀 분께 동질감을 느껴 드리는 상) - 각각 딱지 10장씩하늘길냥이문득 상(계산해보니 생각보다 구매한 딱지가 남아서 이제 또 누구를 드릴까 고민하다가 코멘트 보면서 문득 생각난 독자 분들께 드리는 상) - 각각 딱지 100장씩단벌신사, 호박호박, 이슬며르, 쭈떵이, 판타지나라, Rocket단, Idealiste, 멜리스, hohokoya1, Optolove, 겜마스터, 레시테, 오뭬, UrDREAM, 플룻이상입니다. 최대한 많은 분께 드리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한계는 있더라고요. ^^;당첨되신 분께는 축하를 드리며, 당첨되지 못하신 분께는 양해를 구합니다. 딱지는 현 시간부로 순서대로 지급하겠습니다. 항상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D 강렬한 햇살이 눈을 두드렸다. 힘겹게 눈을 뜨자 가물가물한 시야로 낡은 천장이 당장에라도 떨어질 듯 흔들거린다. 초점이 잡히기를 기다렸다가 끙 몸을 일으키니 어지러운 현기증이 해일처럼 밀려온다. 죽겠다. "……." 헝클어진 머리카락, 창백한 얼굴, 시꺼멓게 죽은 눈동자…. 지저분한 수정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이 한없이 처량하기만 하다. 난 누구인가 또 여긴 어디인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그냥 죽는다. 어젯밤 진짜 죽을 뻔했다. 속으로 오만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자 돌연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깨셨네요." 흰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나오는 여인은 바로 한소영이었다. 날 보더니 기분 좋게 웃으며 다가와 살며시 품으로 끌어안는다. 그리고 등을 상냥히 토닥토닥. "어제 정말 고생했어요. 후후." 속살거리는 목소리를 듣자 어젯밤 무자비한 카우걸(Cow Girl)로 변신했던 한소영이 떠올라 오싹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억지로나마 미소를 짓고 빠르게 선수를 쳤다. "고생은요. 그럼 저도 얼른 씻고 나오겠습니다." "그러시겠어요?" "예. 돌아가기 전에 아침이라도 먹고 갈까요?" "네. 좋아요." 한소영은 예전이었다면 십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끄덕거렸다. 혹시 '그냥 돌아가기 아쉬우니 아침에 가볍게 한 판?' 이라는 말을 들을세라 서둘러 욕실로 들어가 문을 꼭 닫았다. 문 너머로 들리는 흥얼흥얼 한 콧노래에 약간이지만 안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이름도 모르는 여관에서 아침밥을 먹고 아틀란타로 돌아가는 내내 한소영은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사근사근하게 굴었다. 심지어 헤어질 때는 클랜 하우스까지 바래다줘서 고맙다며 진한 입맞춤까지 받을 수 있었다. 어제 만났을 때만 해도 행동 하나하나에 까닭 모를 짜증과 히스테릭이 묻어 있었는데, 하룻밤 새 태도가 백팔십도 달라졌다. 그 정도로 욕구가 심히 쌓여 있었다는 소리다. 머셔너리 캐슬로 가는 동안 계속 한숨이 나왔다. 도대체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걸까. 하기야 누구를 탓하랴. 다 내 입이 문제지. 사건은 일주일 전 축제의 현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갑자기 끌려가고 나서 '누가 제일 이상형이냐.' 는 돌발 질문에 난 아무 생각 없이 '흠. 아마 임한나?' 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질문이 공명의 함정, 아니 제갈 해솔의 덫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한참 늦은 상황이었다. 흥겹기 그지없던 축제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단박에 가라앉았으니까. 아무리 해명을 해도 소용없었다. 몹시 부끄러워하는 임한나를 제외한 여인 전원이 각자의 방식대로 유감없이 불만을 표출했으며, 결과적으로 축제는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끝나고 말았다. '클랜 로드가 축제를 망쳤다.' 나 '클랜 로드가 잘못했다.' 는 비난은 덤이라고 해야 하나. 그 다음 날, 난 고연주를 통해 '타도 왕 찌찌'라는 이상한 집단의 공식 성명서를 받을 수 있었다. 우리의 기분을 풀어주려면 한 명 한 명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는 깜찍한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별것 있겠냐는 생각에 시원하게 승인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을 기점으로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더니 어느새 이 지경까지 오게 됐다. 아니. 백 번 양보해서 소원을 들어주는 것까지는 좋다. 실제로 첫 타자였던 수나와 온종일 놀아줬을 때는 이것도 꽤 괜찮다고 여겼으니까. 하루 동안 누나라고 부르라던 고연주의 부탁도 할만했고, 남다은의 '자기는 검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가진 온 세상의 우러름을 받는 고결하고 강인한 여성 용사인데, 세상을 집어삼키려는 김수현이라는 마왕과의 결투에서 패배해 붙잡혀 온갖 능욕을 당해 끝끝내 타락하고 저속해진다.' 는 상황극을 하자는 별 괴상한 부탁도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문제는 게헨나와 화정이었다. 넷째 순번이었던 게헨나는 화정 앞으로 날 데리고 가 '화정은 너무 못생겼다.' 라거나 '역시 화정 따위보다 게헨나가 훨씬 낫다.' 등의 말을 하기를 요구했다. 그러자 다섯째 순번이었던 화정은 바로 다음 날 '한 번 도망쳤던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다시 기어들어 왔느냐.' 와 '꼴도 보기 싫으니 얼른 지옥으로 썩 꺼져라.' 라는 말을 소리 높여 하게 했다. 결국에는 둘이 머리끄덩이 잡고 대판 싸우더라. 거기다 섹스로 시작해서 섹스로 끝난 한소영과의 만남까지…. "하아아아…." 그러고 보니 이제 몇 명 남았더라. 한소영까지 여섯 명은 끝났고. 난 품에서 고연주에게 받은 성명서를 꺼냈다. 어디 보자. 남은 인원이 이유정, 정하연, 김한별, 엑스칼리버…. 응? 아니 엑스칼리버는 또 뭐야. 이거 누가 적었어. "오빠!" 그때였다. 눈을 비비고 재차 성명서를 확인할 무렵 고음의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흘끗 눈을 들자 어느새 도착했는지 새하얀 성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정문에는 한껏 예쁘게 차려입은 이유정이 날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렇게 나와 있다는 건…. "이제 오네! 히히." "어, 뭐 그렇지. 설마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럼~. 내 차례가 오는 걸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데. 나 오늘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준비하고 기다렸다?" "하하.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그렇게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하지 마. 좀 쉬자고 말하면 상처받을 것 같잖아. "그, 그렇구나. 그나저나 어떤 부탁을 하려고?" 하지만 약한 이는 가로되, 기대에 부응해줄 수밖에 없었다. 나도 이런 내가 싫다. 얼마 전 전군을 호령하며 벌판을 가로지르던 위엄은 어디 가고 이런 허약한 모습이라니. 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유정은 나는 듯 가까워졌다. "이미 다 생각해놨지. 따라와." "어디 가려고?" "아 일단 따라와 보라니까!" "그러니까 어디 가는지 말 좀…." 이유정은 꼭 날 제 것처럼 잡아끌며 방방 뛰었다. 그리하여 질질 끌려가 워프 게이트로 이동한 도시는 구 북 대륙의 바바라였다. 이유정은 포탈을 나오자마자 팔짱을 끼며 걷자 더니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걸음이 멈췄다. "여기는…?" 최종적으로 도착한 장소는 뜻밖에도 시작의 여관이었다. 통과의례에서 살아남은 예비 사용자가 처음 홀 플레인에 발을 내디디는 곳. "어디였더라…. 두 번째였나? 아, 저기다!" 이유정은 왼쪽에서 두 번째 건물로 걸어가더니 거침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약한 탄성을 질렀다. "여기는 예전 모습 그대로네." "여기 오고 싶었던 거야?" "응? 으응. 그렇지 뭐." "왜?" "그냥 한 번쯤 와보고 싶었어. 오빠랑 단둘이서." "……." 이유정은 몸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돌더니 날 보며 싱긋 웃는다. 생각보다 건전한 부탁이라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어쨌든 여러모로 의외 였다. 난 멀뚱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틀란타로 이전 작업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구 시작의 여관은 이유정의 말대로 예전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먼지가 켜켜이 쌓였다는 점만 빼면 오 년간의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집처럼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이야, 감회가 새롭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난 그때 오빠가 진짜 죽은 줄 알았다니까?" "맞아. 여기였어. 여기서 부러진 석궁을 봤다는 박동걸 새끼랑 엄청나게 싸웠어." "그러고 보니 그 새끼는 지금쯤 뭐 하고 지내려나? 살아는 있을까?" 그러는 동안 이유정은 곳곳을 돌아다니며 깔깔거렸다. 난 혼잣말하는 이유정을 한참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유정아." "응?" "혹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집? 지구?" 느닷없는 질문이었는지 회답은 한 박자 늦었다. 이유정은 난간 아래로 굽혔던 허리를 펴더니 붉은 머리카락 끝을 살그머니 꼬며 고개를 갸웃했다. "응~. 아무래도 한 번쯤은?" "한 번쯤?" "응응. 오빠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정말 갑작스럽게 끌려온 처지잖아. 그러니까 엄마 아빠도 보고 싶고. 또 친구도 보고 싶고. 여기서 계속 산다손 쳐도 한 번쯤은 마음의 정리를 하고 싶어." "꼭 지구보다는 홀 플레인에서 살고 싶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아마도?" "어째서?" 쉴 틈 없이 반문하자 이유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말했다. "지구에서의 삶에 적응할 자신이 없으니까." 아까 한 번쯤이라는 말은 이런 의미였나. 이유정의 말은 상당히 모호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마음과 상당히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그럼 돌아갈 기회가 생겨도 가지 않겠다는 뜻인가?" "아니? 그건 아니야. 당연히 돌아가지." "뭐? 방금은…." "아니, 오빠. 잠깐만 기다려봐." 그 순간이었다. "꼭 그렇게 하나만 정해야 해?" 한 마디. 그 단순한 한 마디에 복잡하던 머릿속이 우뚝 멈췄다. 멍하니 응시하자 이유정이 뭐 어려울 게 있느냐는 듯이 눈을 깜빡거렸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옆으로 걸어가 계단에 걸터앉았다. 계속 이야기해보라는 신호였다. 이유정은 내 옆으로 털썩 앉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까도 말했지만 난 이 세상이 좋아. 지구에서는 살 자신이 없어. 하지만 한 번쯤 엄마 아빠는 보고 싶어." "……." "그 뭐냐. 거주민은 힘들어도 사용자는 왔다 갔다 하는데 제한이 없다며. 그럼 오빠 말대로 기회만 생긴다면 갔다가 돌아오면 되는 거잖아?" "사실 잘 모르겠어. 가서 살만하다고 생각되면 계속 살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사용자 능력으로 돈이나 잔뜩 벌어서 효도해야지. 한 일이 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 후? 엄마 아빠? 글쎄? 괴물이랑 싸우고 싶어서 근질거리는 홀 플레인의 나보다는 여경이라는 평범한 꿈을 향해 착실히 걸어가는 지구의 내가 더 낫지 않으려나?" 거기까지 말한 이유정은 "아. 착실하다는 말은 취소." 라고 말하며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 난. "…………어." 문득 신기한 기분을 느꼈다. 이유정의 말은 분명히 쉽다. 흔한 수다라고 봐도 무방한 말이다. 될지 안 될지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머릿속이 깨끗해졌다. 그동안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나로서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방법이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듣고 일말의 거부감 없이 공감한다. 실로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다. 그냥 타인의 생각이 궁금해서 던져본 말인데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꼭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걷다가 먼빛으로 빛을 발견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날 꽁꽁 옭아매던 보이지 않는 올가미를 벗겨내 몸이 자유로워진 느낌이었다. 상념에 잠긴 와중에도 한 번 터진 이유정의 수다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오빠오빠. 이 얘기하니까 갑자기 그때 생각난다. 예전에 그 뮬의 여관…. 어디였더라?" "조신한 숙녀." "아 맞다. 혹시 그때 기억나? 아직 영 년 차 사용자일 때 오빠가 나한테 단검 하나 줬었잖아." "그렇지. 뭣 때문에 그랬는지는 기억 안 나지만 혼자서 이불 뒤집어쓰고 꽁해 있었지." "읔. 그렇게 콕 집어서 말하지 마. 창피하니까. 아무튼, 아마 그때 이후로 조금씩 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 변했는데?" 물어보며 은근슬쩍 옆구리를 찌르자, "생각해봐. 그 착하고 순종적이던 소녀가 오 년 후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세상에 피에 젖은 미친년이라니…. 으히히힝!?" "오호. 오늘따라 신음이 아주 간드러진데?" "뭐, 뭐야! 놀랐잖아. 신나서 말하는 중인데." "그럼 한 번 더." 이번에는 불시에 겨드랑이를 기습하자 이유정은 "히이이익!" 교성을 터뜨렸다. 이 귀여운 반응을 보니 불현듯 장난기가 일어 아예 작정하고 양손으로 간질이기 시작했다. 웃음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지르고 몸부림치는 이유정을 보며 난 껄껄 웃었다. "적당히 좀 참아봐. 밖에서 누가 들으면 그거라도 하는 줄 알겠다." "흐앙, 흐아아앙! 나 간지럼 약하다고!" "이야, 그 명성 높은 용병 여왕이라는 사용자가 이렇게 낯 뜨거운 신음을 흘리다니. 우리 클랜원, 특히 안현이 보면 아주 기절초풍 하겠어." "그, 그런 말 하지 마! 힉! 내가 오빠 앞에서만 이러지! 흐응!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러는 줄 알아? …아 오빠! 갑자기 왜 이러는데!" 기특해서. 이 말은 속으로 꿀꺽 삼키고 일부러 유들유들하게 말했다. "왜. 좋으면서." 그리고 그대로 이유정을 덮쳐 쓰러트렸다. "응. 사실 좋기는 한데…. 꺅! 자, 잠깐마안!" ====== 작품 후기 ====== 이전 회 후기에 이벤트 결과를 올려놨습니다. 선물 받으신 딱지는 마이 페이지의 선물함 관리 ? 받은 선물 내역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아직 확인하지 않으신 분들이 몇 분 계시는데, 얼른 확인하고 가져가세요! 그럼 편안한 밤 보내세요. :) 소환의 방은 엄밀히 말하면 홀 플레인과 서로 차원이 다른 일종의 독립 공간으로 봐도 무방하다. 신전 내 포탈과 연결된 공간은 명목상으로 천사가 맡은 사용자를 다각도에서 보조해주는 공간으로 활용한다. 그러므로 도우미로 선발된 천사는 항상, 온종일 소환의 방에 상주하며, 한 시도 쉬지 않고 담당 사용자를 관찰하고 있다. 온통 잿빛 일색인 공간에서 차가운 제단에 앉아 언제나 사용자를 기다리는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소환의 방. 제단에서 일어선 세라프는 다소곳이 앞을 응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의 도우미를 맡은 세라프입니다." 그리고 정면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천사로서는 보기 드문 정중한 몸가짐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사용자 김유현입니다." 상대 또한 최소한의 격식은 갖춘 목소리였다. 김수현의 영향으로 평소 천사를 곱게 보지 않는 점을 고려하면 나름 의외의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호출을 받고 조금 놀랐습니다. 설마 수현이의 담당 천사가 절 먼저 부를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요." 이윽고 바닥에 앉은 김유현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 혹시 폐가 됐습니까?" "아니요, 전혀 아닙니다. 마침 호출해주지 않으셨다면 제가 먼저 요청했을 테니까요. 한 번쯤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나저나 수현은…."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변 여인이 기운을 북돋아 주려 여러모로 노력하는 모양이니까요. 고마운 일이지요. 아무튼, 여기에 신경을 쏟을 여력은 없을 겁니다." 훈훈한 대화가 오고 가는 것도 잠시. 세라프는 조심스레 제단에 앉았고 김유현은 자세를 고쳤다. 마주 보는 시선 사이로 순식간에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는다. 먼저 말문을 연 건 김유현이었다. "천사 세라프." "네." "제가 수현이 몰래 와달라는 당신의 호출에 응한 이유는…. 그리고 한 번쯤 보고 싶었다 말한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 김유현이 천천히 깍지를 끼며 말을 잇는다. "당신만큼 사용자 김수현을 잘 아는 존재가 없으니까요." 그랬다.'사용자'로서의 김수현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천사, 세라프.'인간'으로서의 김수현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친형, 김유현. 오늘 이 두 명이 만난 목적은 결코 가벼운 주제 때문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 둘에 한해서는. "최근 수현이의 동향은 알고 계십니까?" 김유현의 물음에 세라프는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습니다. 뭐 구구절절 말할 필요는 없겠군요." 김유현의 말인즉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소리였다. 어차피 서로 정다운 이야기를 나눌 사이는 아니니만큼 세라프도 거부할 이유는 하등 없었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묻지요. 가능합니까?" 그리고 시작된 밑도 끝도 없는 질문. 하지만 세라프의 표정은 차분했다. "지구와 홀 플레인을 오고 갈 수 있는 통로의 개설 여부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일단 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제한 조건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가능하다는 대답에 김유현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단." 그러나 세라프는 곧바로 모종의 반전을 예고했다. "지구로 돌아간다는 선택이 사용자 김수현에게 적절한 행동이 될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차원의, 문제?" "그렇습니다. 최근 사용자 김수현의 행동에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음…." 김유현의 머리가 살짝 숙어졌다. 바닥을 향하는 시선이 잠시 상념에 잠긴 듯한 기색이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얼마 전에 축제가 있었어요." 약간 힘없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전쟁도 이겼겠다, 정말 즐겁고 흥겨운 분위기였죠." 그때를 회상하는지 김유현의 입에 쓴웃음이 걸렸다. "하지만 거기서 수현이는…." 그때였다. "근질근질하겠지요." 갑자기 끼어든 세라프의 음성에 김유현의 말이 멈췄다. "항상 악마를 없애야 한다는 관념에 강박적으로 시달려온 수현은…. 마침 신을 넘어서는 힘도 얻었겠다. 비로소 얻은 평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김유현의 머리가 휙 들리며 입이 반쯤 벌어졌다. "……!"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는 듯 입만 뻐끔거린다. 왜냐면 차마 부인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까지 했으니까. 그 당시 한 발 뒤로 물러나 조용히 축제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묘하게 날이 서 있던 동생의 모습을. 그런 김수현이 즐거워할 때도 딱 한 번 있었다. 바로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였다. 천사를 처리하고 잔당을 깡그리 쓸어버리겠다고 말하면서 김수현은 분명히 웃었다. 그때. "이제부터 보여드릴 것은." 문득 김유현의 눈앞으로 여러 개의 메시지가 출력됐다. 허공을 채우는 메시지를 보는 김유현의 얼굴이 순간 멍해졌다. 마치 믿을 수 없는걸 본 사람처럼 얼굴이 떨리기 시작한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수현(8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검사(Normal, Sword User, Master)3. 소속 국가(Nation) : 아틀란타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1. 사이코 패스 2. 광인(狂人) 3. 정신 분열증 4. 에로토포노필리아(Erotophonophilia) ? 대한민국6. 성별(Sex) : 남성(31) 7. 신장 · 체중 : 181.5cm ? 63.2kg8. 성향 : 혼돈 ? 악(Chaos ? Devil) "이건…." "팔 년 차. 일 회차 시절 가장 심했을 때….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사용자 김수현의 정신이 붕괴 직전까지 몰렸을 때의 사용자 정보입니다." 세라프는 한결 침착히 말을 이었다.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고, 또 채찍질하고, 그렇게 계속…. 스스로 부여한 중압감에 쫓기듯이 살아온 만큼, 본능이 타성에 젖어 물드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 모순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 십오 년 동안 수현을 지탱해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적이라는 존재였습니다." 세라프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시궁창을 뒹굴고 뒹굴면서 그토록 악마를 증오하며 절규했던 사내를. 그 사내가 오매불망 원했던 건 단 하나에 불과했다. 오직 살고 싶었고, 살리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 지금, 이미 딱딱히 굳어버린 김수현이라는 사용자는 '전장'이라는 곳을 제외하면 몸을 둘 곳이 사라져버렸다…. "악마라는 거대한 적은 이미 소멸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천사는 물론, 서 대륙과 남 대륙도 순식간에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전쟁을 거치고 거치고 거쳐서, 끝내 수현의 앞에 무엇도 남지 않게 되면…." 거기까지 말한 세라프의 눈은 서서히 가늘어지기 시작하더니. "…저는, 그 이후의 일이 두려운 겁니다." 안타까워하는 빛을 드러내며 서글프게 감겼다. "그러니…. 까." 그리고 일련의 말을 듣던 김유현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당신의…. 말은…." "이번에는 제가 사용자 김유현에게 묻겠습니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띄엄띄엄 말하는 김유현의 심정을 이해했는지 세라프가 말을 받는다. "지구의 인간 김수현은 홀 플레인의 사용자 김수현을 감당할 가능성이 있습니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김유현은 입을 다물었다. 기실 굳이 따져볼 필요도 없는 사안이었다. 과장 조금 보태서 벌레 하나 죽이는 것도 주저하던 동생이다. 한데 살육에 길들여진 사용자 김수현의 본성을 받아들이고 감당한다?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두 존재의 괴리감에 미쳐 자살하지나 않으면 다행일 터. 여기까지 생각한 순간 김유현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고 말았다. 실로 얄궂은 일이었다. 마침내 원했던 바를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김수현이 돌아갈 장소는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단지 결과에 이르는 시간 차이만이 있을 뿐, 인간을 선택하든 사용자를 선택하든 종착역은 동일하다. 잠시 후, 김유현은 얼굴을 감싸 쥐고 말았다. "그나마 나은 건 사용자…." 하, 덧없는 한탄이 새나왔다. "결국, 수현이가 인간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건 제 욕심이었다는 거군요…." 흡사 포기하는 듯한 목소리. 그 순간이었다. "실은 그 부분에 관해서입니다만." 돌연 세라프의 음성이 한층 강해졌다. 고요한 소리가 공간을 왕왕 울릴 정도였다. "저조차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뭐라고요?" 김유현의 눈이 번쩍 뜨였다. 흡사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 상대를 유심히 살폈으나, 세라프의 얼굴은 여전히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이 방법을 실행하려면 사용자 김유현의 협조가 무조건 필요합니다. 이게 제가 오늘 당신을 호출한 이유입니다." "제 협조가 말입니까?" "Yes. 왜냐면 사용자 김유현 또한 제로 코드를 계승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으니까요." "그거야…." 틀린 말은 아니다. 김수현은 분명히 김유현은 제 이 계승권 자로 설정한 전력이 있다. "그렇기는 한데…." 김유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세라프는 침착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길었던 이야기가 끝난 순간. "…그거,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김유현의 어조는 자못 심각해져 있었다. 밤이 깊어서인지 방 안은 한없이 고요하기만 하다. 잠이 오지 않아 한참을 뒤척거리자, 문득 내 쪽으로 돌아누운 채 조용히 눈 감고 있는 게헨나가 밟혔다.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살금살금 접근해 품에 코를 묻고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살을 스치는 찹찹한 새벽 공기가 아니라, 따뜻한 살 내음이 콧속을 물씬 찌르고 들어온다. 뻣뻣하던 몸이 조금씩 풀리는 느낌에 기분도 절로 느슨해졌다. 하여 숫제 말랑한 젖무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얼굴을 문지르자, 돌연 부드럽게 안아주는 감촉이 전해졌다. 게헨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아까와 달리 입가에 느른한 미소가 걸려 있다. 한 손으로는 내 머리를 살며시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내 등을 한없이 쓰다듬는다. 어쩔 줄 몰라 우는 아이를 달래듯 끊임없이, 끊임없이…. 현기증이 날 것 같은 평안 속에서, 난 본능적으로 지금 이 순간의 영원성을 추구한다. 문득 피식거리는 싱거운 콧소리가 들린다. "오늘따라 꽤 칭얼거리는구나." "…응?" "수나도 하지 않던 짓이건만, 그대는 무에 그리 못마땅해서 이리도 보챌까. 설마, 잠들기가 두렵다거나?" "……." 약간 놀리는 어조. 글쎄. 근래 들어 악몽을 꾸는 빈도가 잦아지기는 했다. 가끔 아는 얼굴도 나오지만 대부분 누구인지도 모르는 놈들이 퍽 그로테스크한 몰골로 출몰하더라. 하지만 두려우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하겠다. 이 회차를 시작하고 좀 잦아들었을 뿐, 이런 적이 처음도 아니고 예전에는 흔하게 겪었던 일이다. 고작 꿈에 불과하지 않은가. "아무튼, 적당히 간질이고 어서 자거라. 답지 않게 구는 짓은 그만하고." "…나다운 게 뭔데?"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 반문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등을 쓰다듬던 손길이 뚝 멎었다. 잠잠함은 잠깐, 곧 나직이 웃는 소리가 이어졌다. "생각해보니 나도 모르겠군.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어." "그래…." "또 침묵하는 건가. 그대여. 혹시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게냐? 그럼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다만." "그때 왜 몰래 도망갔어?" "으, 응? 갑자기 무슨. 사, 사과하지 않았느냐." "뭐 그러기는 했지." 그냥 화제를 돌리기 위해 아픈 곳을 찔렀을 뿐. 정말 탓할 생각은 없었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제는 슬슬 밝힐 때도 됐으니까. 오직 게헨나뿐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물론 이대로 넘어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러기는 싫었다. 이유정의 말대로 일이 년 자리를 비운다고 해도, 여기 남는 이들에게 왜 떠나는지에 대해서 확실하게 이해시켜야 한다. 설령 회귀의 비밀을 말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 와서 숨겨봤자 딱히 의미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렇게 마음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아마, 아직도 망설임이 남아 있다는 방증이겠지. 아아, 의미 없다. 시간은 하루하루 의미 없이 흘러가는데, 난 아직도 선택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다. 생각해보니 말하는 것도 문제네. 혹시 형한테 부탁하면 나 대신 알아서 잘 말해주지 않으려나. 한 번 부탁이라도 해볼까? 스스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 속으로 웃고 말았다. 모르겠다. 이대로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생각도 정리되고 결심도 서겠지. 그저 한 시라도 빨리 그날이 오기를 바랄 뿐. 지금은 그냥 편안해지고 싶다. 자는 게냐…. 꿈결처럼 들리는 게헨나의 목소리를 반주 삼아 서서히 눈을 감는다. 이제 좀 잠이 오는 것 같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을 뒤척대던 김수현이 고른 숨을 내쉬기 시작하자, 게헨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깊은 잠에 빠진 사내를 부드러운 눈으로 응시하더니 혹여 깰세라 조심스레 침대에서 멀어진다. 최대한 소리 죽여 방문을 열자 거무스름한 인영이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게헨나는 빙긋 웃었다. "가자. 어서 안내하거라." 잠시 후, 두 남녀는 어둠을 틈타 조용히 머셔너리 캐슬을 빠져나갔다. 워프 게이트로 이동해 포탈을 넘어서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구 북 대륙의 소 도시 모니카.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과거 머셔너리 클랜의 거점으로 사용되던 클랜 하우스였다. "이제 오신 것 같아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꾸벅꾸벅 고개를 꺼트리던 수나를 안고 있던 임한나가 눈을 돌렸다. 라이트 스톤이 밝혀주는 사 층 회의실에는 이미 쉰 명 남짓한 인원이 들어앉은 상태였다. 머셔너리 클랜원은 물론, 평소 김수현과 가깝게 지내는 이는 전부 모였다고 봐도 무방할 터. "왜 이렇게 늦었지?" 마침내 게헨나가 안으로 들어오자 화정이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 게헨나는 무시하고 회의실을 가로질러 적당한 자리에 털썩 앉았다. 발끈한 화정이 붉어진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왜 이렇게 늦었냐니까? 너 하나 때문에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기나 해?" "시끄럽구나. 소리 지르지 마라." 게헨나는 눈을 찡그리더니 고개를 비뚜름하게 기울이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뭘 시시콜콜 캐묻고 그러느냐. 귀찮게. 이 야심한 밤에 남녀가 한 방에 있었으면 그렇고 그런 일이 있었구나 생각하면 되지." 그 순간 수십 쌍의 눈초리가 일제히 게헨나를 향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게헨나는 킥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다, 농담. 오늘따라 그이의 칭얼거림이 심하더군. 재우느라 애 좀 먹었다. 이해해다오." "물론 괜찮습니다. 어차피 오늘 밤은 길게 남았으니까요." 그때 잔잔한 음성이 후끈해지려는 회의실을 차갑게 식혔다. 그러자 게헨나에게 모였던 시선은 자연스레 한 곳으로 돌아갔고, 그곳에는 김유현이 상석에 앉아 눈을 빛내고 있었다. 한 손은 탁상에 얹어 놔둔 채로. 이내 살며시 말아 쥔 손 틈에서는 미미한 빛줄기가 새나오기 시작했다. 게헨나가 흘러나오는 빛을 보고 이채를 띠는 동안, 김유현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우선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제 갑작스러운 요청에 협조해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마음에 안 들어." 이번에도 태클은 화정의 몫이었다. "시간은 상관없지만, 어째서 김수현 몰래 모여야 하는 건데? 뭐 켕기는 게 있다는 거 아니야?" 이어지는 말에 다수가 끄덕거리며 동의를 표시했다. 그러나 김유현은 조금도 불쾌해 하지 않고 침착히 말을 이었다. "저도 이 방법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총 세 가지입니다." 그리고 팔걸이에 얹었던 왼손을 들어 엄지와 소지를 접는다. "일단 첫 번째. 오늘 드리게 될 말씀은 사실 전적으로 제 생각이 아닙니다. 수현이의 도우미를 맡은 천사 세라프에게서 비롯된 생각이며, 저는 긴 고심 끝에 그녀의 말에 동의했습니다. 그 방법밖에 없다고…." 말인즉 이 자리는 김유현뿐만이 아니라 세라프의 의지도 섞여 있다는 소리였다. "두 번째는 수현이의 방황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입니다.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도 여전히 망설이고 있지요. 처음에는 시간을 두고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이 상황이 길어져 봤자 좋을 게 없다고 판단, 여러분을 호출하게 됐습니다." 몇몇 여인의 낯빛이 심각해졌다. 기실 최근 김수현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건 여기 있는 전원이 동의하는 바였다. 무언가 약해졌다고 해야 하나. 예전의 주도적으로 움직이던 모습은 사라지고, 있는 듯 없는 듯 지내고 있다. 흡사 언제라도 사라져버릴 사람처럼, 혹은 꺼지기 일보 직전의 촛불처럼. "그리고 마지막으로…. 친형으로서, 친동생인 수현이를 위해서라고 하겠습니다." 김수현을 위한다. 짧지만 사실상 가장 설득력 있는 한 마디였다. 설령 여기서 김유현이 '김수현을 죽이자.' 라는 발언을 한다고 해도 농담이라 여기며 웃고 넘길 것이다. 왜냐면 상석의 사내가 평소 동생을 얼마나 위하는지, 어지간한 사용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동생을 위하는 마음을 알기에. 김수현한테 알리지 말라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했기에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이 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자리를 통해 그대가 얻으려는 건 무엇이지?" 게헨나가 손등에 턱을 괴며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건 수현이에 관한 여러분의 이해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회의실에는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김유현의 목소리가 자못 심각해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 어색한 흐름을 전환하고 싶었는지 불현듯 진수현이 크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러니까 뭔데요. 뭐길래 이렇게 무게를 잡아요? …아, 혹시 형이 미래에서 온 사나이라던가?" "야 인마." 옆에 앉아 있던 안현이 분위기 파악 좀 하라는 듯 팔꿈치로 툭 건드렸다. 진수현은 낄낄 웃었다. "아 왜. 만화에서는 자주 나온다고." 그때였다. "그래, 맞다."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진수현의 웃음이 뚝 멎었다. 화정의 눈이 가늘어졌고, 한소영은 질끈 눈을 감았다. "수현이는 미래에서….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 번 시간을 돌렸다. 이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 전체의 시간을. 말인즉 우리는 사실상 두 번째로 이 세상을 겪는 셈이지." 김유현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비단 진수현뿐만이 아니라, 회의실에 있는 모두가 그 말을 이해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두 여인만 제외하고. "뭐야…. 그, 그게 뭐예요."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진수현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김유현은 씁쓸히 웃으며 탁상에 얹어놨던 손을 활짝 펼쳤다. "그렇게 말하니까 꼭 진짜 같잖아…. …요?" 그 결과 가까스로 꺼낸 말은 끝에 가서 갑작스레 높아졌고, "무…!" "…아?" 곳곳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터졌다. 손바닥 아래에는 푸른 불을 품은 작달막한 수정 하나가 놓여 있었다. 진실의 수정이었다. ====== 작품 후기 ====== …예전에 3회차는 없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여전히 무한 루프를 걱정하시는 독자 분들이 계시는 것 같군요. 정말이지 독자님들은…. ……………………. 진짜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실은 저는 독자 분들께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감히 곧 완결이 난다는 거짓말을 한 것이지요! 완결은 무슨, 사실 여기까지는 프롤로그에 불과합니다. 우선 김수현은 집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하고, 제로 코드를 이용해 지구로 이어지는 통로를 개설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모종의 문제가 생기고, 결과적으로 지구 곳곳에 차원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수한 괴물이 쏟아집니다. 처음에 지구는 혼란에 빠지지만, 곧 차원 괴물에 세상에 엄청엄청 도움되는 물질이 있다고 밟혀집니다. 즉 대 레이드 시대가 도래하게 되죠. 거기서 김수현과 동료들은 사용자 능력을 발휘해 엄청난 부를 쌓게 됩니다. 우선 여기까지가 1부. 그러나 지구가 안정되자마자 외계인이 침공을 해옵니다. 김수현은 지구의 모든 전력을 끌어 모아 외계 전력을 맞서고, 지구를 지켜내는데 엄청난 공을 세웁니다. 그렇게 지구에 군림하게 되죠. 여기까지가 3부. 그리고 비로소 홀 플레인으로 돌아가게 되나, 돌아간 세상은 멸망해 있었습니다. 김수현은 살아 남은 동료들과 재회하고, 세상을 이렇게 만든 적과 사투를 벌입니다. 그리고 신을 죽이고 스스로 신이 되기에 이릅니다. 여기까지가 4부. 여기서 끝이냐? 아니죠. 신이 된 김수현은 엄청난 무료함을 느끼죠. 그래서 우주로 나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리하여 무수한 외계 종족과 싸우는 건 물론, 다른 은하도 정복하고, 중간중간 천계와 대계라는 곳도 보게 되죠. 최종적으로 우주의 신과 싸워 이겨 전 우주를 평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들과 평생을 행복하게 산답니다. 이 5부가 바로 진정한 최종 결말입니다. 그러므로 아마 예상컨대 9123478917329081회쯤에 완결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일 연재를 한다고 가정하고 제 평균 수명을 그러나 지구가 안정되자마자 외계인이 침공을 해옵니다. 김수현은 지구의 모든 전력을 끌어 모아 외계 전력을 맞서고, 지구를 지켜내는거기서 끝이 아니죠. 갑자기 핵전쟁이 터집니다. 그 결과 세상 곳곳에서 좀비가 창궐합니다. 갑자기 맞이하게 된 포스트 아포칼립스 속에서, 김수현은 극한 서바이벌을 거치며 좀비 숙주를 파괴합니다. 여기까지가 2부. 툭…. 새벽. 툭…, 툭툭! 밤하늘에 잔뜩 끼어 한참 동안 무게만 잡던 먹구름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비를 조금씩 떨구기 시작한다. 아틀란타가 발견된 이후 대다수 사용자가 빠져나간 구 북 대륙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것은 한때 안정화로 첫손에 꼽히던 남부 소 도시 모니카라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아, 땅에 간신히 점을 남기는 가냘픈 빗줄기라도 확실하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고요하다. 그리하여 밤이 깊어질수록 조용한 도시는 점점 거세져 가는 빗소리로 가득히 채워진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쾅! 문득 아직 환한 빛을 발하는 어느 건물의 사 층 창문에서 세찬 울림이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돼요!" 갑작스러운 소음의 주인공은 안현. 전원 앉아 있는 장소에서 오직 홀로 일어나 있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양손은 탁상을 부술 듯이 짚은 채로. 잠깐의 소란 이후, 회의실은 당장에라도 폭발할 듯 폭탄 같은 적막이 흘렀다. 일부는 갑자기 튀어나온 안현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나머지는 멍하니 탁상을 내려다보거나 정신이 나간 것처럼 허공만 응시한다. "저는 인정 못 합니다. 아니,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잠시 후, 안현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이를 악물 듯 끓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그건…. 그건 아니잖아요…." "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눈치만 보던 이유정이 재빠르게 나섰다. "저도 오빠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너무 갑작스럽잖아요. 너무 잔혹하잖아요." "……." "오빠는 언제나 오빠니까. 아니,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차라리 그냥 이대로 있어요. 네? 그렇게 힘들면 우리가 옆에서 오빠를 도와주면 되니까…!" "그렇게 힘들면?" 혼잣말 같은 김유현의 반문에 횡설수설하던 이유정은 양손을 꽉 맞잡는다. 하기야 정신없을 만도 하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흔들리는 두 눈동자는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으니. 기실 김수현이 회귀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도 적잖은 시간이 필요할 터. "수현이를, 도와준다고요." 나직한 음성이 뚝뚝 끊어 회답한다. 진실의 수정인 이미 시간이 흘러 한 줌의 재로 화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이제 진실 여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자리에는 김유현 말고도 진실을 알고 있는 존재가 둘이나 있었다. "수현이는 좋은 동생들을 뒀군요. 이해하고, 도와준다. 형으로서 고마운 말입니다. 하하." 김유현은 빙긋 웃더니 천천히 깍지를 끼고 턱을 괴었다. "그럼 여담이기는 하지만, 잠시 제 이야기 좀 들어보시겠습니까? 아, 이건 수현이 포함 누구한테도 말한 적 없어요. 별로 길지도 않고요. 분명히 들을만할 겁니다." 그리고 억지 부리는 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제가 어릴 적…. 아마 초등학생 때였을 겁니다. 학교가 일찍 끝나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무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냉장고에 있는 간식을 꺼내먹고 실컷 놀다가 방 침대에 엎어져 잠이 들었죠. 한데 한창 달게 자는 도중 거실을 돌아다니는 발소리가 꿈결에 들리더군요. 혹시 동생이 왔을까, 저는 반가운 마음에 일어나 슬쩍 내다보았죠. 정말 동생이라면 몰래 놀래줄 생각을 하면서." 뜬금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가벼운 이야기치곤 상당히 낮고 진중한 음성이라 안현과 이유정은 물론, 전원이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거실에 있던 건 동생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의 뒷모습이었습니다.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검정 잠바에 달린 모자를 눌러쓰고, 한 손에는 칼을 든…. 네. 강도였습니다." 김유현이 지그시 눈을 감는다. "사실 그 당시 제 대응이 좋다고는 말 못 하겠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본능적으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방 안으로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그리고 혹여 강도가 들을세라 살그머니 문을 닫았습니다. 딸칵, 문 잠그는 소리가 날 때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지요. 전화기는 거실에 있었고 휴대폰은 없었습니다. 그냥 작은 방에 갇혀 있는 수밖에 없었어요. 이를 악물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저도 모르게 주저앉았습니다. 그리고 방문에 등을 기대는 찰나." "……." "똑똑. …하고 등으로 감각이 전해지더군요. 당연히 외부에서 전해진 진동이었습니다. 즉 강도는 제가 문을 닫은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일부러 노크를 했다는 겁니다." 김유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똑똑…. 똑똑…. 똑똑…. 똑똑…. 강도는 한동안 끊임없이, 주기적으로 문을 두드렸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간간이 낄낄거리는 웃는 소리만 내면서요. …흔히들 그러지요? 혼이 빠진다고. 그때 제 심정이 딱 그랬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공포와 두려움. 아, 정말 별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왜 노크를 하는 걸까. 혹시 부모님 아는 사람은 아닐까. 아니, 그럴 리 없어. 죽기 싫어. 살고 싶어. 아차, 곧 수현이도 집에 올 텐데 어떡하지…." 대체로 가만히 듣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머리 회전이 빠른 몇 명은 조금씩 감을 잡아가고 있었다. 김유현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뭐 결과적으로 강도는 어느 순간 사라졌고, 저는 무사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때 천 년 같다고 생각했던 강도와 제가 문 하나를 두고 있던 시간은, 나중에 알고 보니 고작 십오 분에 불과했죠. 겨우 십오 분만으로도 저는 성인이 된 지금도 떨쳐낼 수 없는 트라우마가 생겼어요. 사실 요즘도 아주 가끔 식은땀에 흠뻑 젖어서 잠에서 깨고는 합니다. 하하." 여기까지 말한 김유현은 싱겁게 웃으며 깍지를 풀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서서히 눈을 뜨며 아직도 서 있는 안현과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정을 직시했다. 그리고 말했다. "이제 와서 어리광부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두 남녀의 눈이 화들짝 치떠졌다. 바로 그 순간. "너희가 뭘 알아." 봄바람 같던 김유현의 얼굴빛이 순간적으로 무섭도록 딱딱하게 굳었다. "항상 울타리 안에서 안전하게 지내왔던, 언제나 수현이 뒤만 졸졸 쫓아갔던 너희가 뭘 아냐는 말이다." 그와 동시에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싹 걷히며 느닷없는 긴장이 치솟는다. "십오 분. 어린 나이이기는 했지만, 단지 십오 분에 불과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난 억겁을 느꼈고, 미쳐버릴 것 같은 정신적인 충동에 시달려야 했다." 형형한 두 눈과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낮디낮은 음성에 두 명의 몸이 움찔 떨렸다. "하지만 수현이는…. 십오 분도 아니야. 무려 십오 년이다. 이 못난 형과 사용자 한소영을 거주민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괴로움에 절어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움켜쥐고, 안간힘을 기울여, 수십 수백 수천 번을 부딪치고 헤쳐서 여기까지 온 거라는 말이다. 나 따위는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는 그런 고통 속에서." 김유현의 말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그런데 인정하지 못한다? 그렇게나 힘들면 이해하고, 도와주겠다? 너희가? 하! 그냥 너희가 기억하는 수현이를 잃고 싶지 않다는, 마냥 좋을 대로 생각하는 주제에…. 어떻게 이미 꺼져버린 불을 붙이겠다는 거지? 자신 있나? 정말로?" 김유현의 숨은 한껏 거칠어져 있었다. 흡사 씹어먹을 듯 노려보는 눈초리에 넋을 잃은 얼굴로 서 있던 안현은 머리를 떨궜다. 이유정은 차오르는 울음을 참는지 그렁그렁한 눈을 하면서도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어느새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한동안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저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들릴 뿐. 불현듯 얼마 전 집으로 돌아가고 싶으냐는 김수현의 물음이 뇌리를 스쳤다.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운 공간에서 이유정은 어깨를 떨며 주변을 돌아봤다. 이곳 또한 김수현과의 추억이 묻혀 있는 장소다.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고작 몇 년 전의 일에 불과하다. 모니카에 터를 잡은 머셔너리 클랜은 이곳을 중심으로 세를 키웠다. 그 중심에는 당연히 김수현이 있었다. 클랜 로드라는 이름 아래 언제나 선두에 서서 클랜원들을 이끌었다. 통과의례부터 함께 해오면서 누구보다 가까이서 봐왔었기에. 그렇기에 이유정은 최근의 김수현이 자신이 기억하는 모습과 서서히 멀어져 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동안, 김유현은 느릿하게 얼굴을 감싸 쥐었다. "미안합니다. 조금, 아니 많이 흥분했습니다." "…뭐, 됐어. 네가 어떤 놈인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화정은 약간 힘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골이 아픈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잇는다. "그래서, 이미 꺼진 불씨는 살리기 어려우니 결국 새 불을 피우겠다는 건가?" 김유현은 침착히 끄덕거렸다. 화정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뭐, 확실히 방법은 될 수 있겠네. 성공 여부를 떠나서. …그런데." 잠깐 말을 끊은 화정은, "후회할 거야." 날카롭게 김유현을 응시했다. "장담하는데 분명히 후회할 거야. 나도, 너도, 여기 있는 모두가." "예. 아마 그러겠지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이해를 구한다고 한 겁니다." 김유현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결연히 대답했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려 창문을 응시했다. 어느새 해가 떴는지 창문에 묻은 물방울은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며 회의실을 비추고 있었다. "단지." 김유현이 입을 열었다. "단지…." 그러나 말은 단 한 마디를 끝맺지 못하고 아스라이 흐려졌다. "……." 강한 햇살 때문인지 두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소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동이 트고 비가 그쳐 잠잠해진 하늘을, 그저 가없이,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 작품 후기 ====== 저…. 어제 후기 끝에 분명히 아니라고 써놨는데…. ;;;;제가 예상한 반응과 너무 다르니 심히 당황스럽네요. 그냥 좀 울컥해서 멋대로 휘갈겼을 뿐인데, 정말 믿으시면 곤란해요. 하하. ^^;;;;아무튼, 드디어 여기까지 왔네요. 이로써 에피소드 0이 7회째인가요? 눈을 떴을 때 해는 중천에서 넘어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날은 아직 밝았으나 황혼이 깔릴락 말락 하며 제 자리를 찾는 걸 보니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어제 늦게 잠든 감은 있지만 참 오래도 잤다. 옆구리가 휑한 게 게헨나는 벌써 일어난 건가. 아마 잠꾸러기라고 한 마디하고 나갔겠지. 일어날 때 같이 깨워줬으면 좋았을 텐데. 간밤에 비가 내렸는지 창문에 빗물 자국이 선명하다. 눈 부신 햇살을 분사하는 물 흔적을 한동안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갑자기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또 뭘 할까? 스스로 생각해도 웃기는 질문이다. 내가, 이 내가 오늘은 뭘 할지 걱정하고 있다니. 예전에는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정확히는 해본 기억조차 없다. 이루고자 했던 게 남은 이상 난 언제나 목표에 매진해 달렸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주변에 신경 쓸 여력이 없을 만큼 충분히 벅차고 힘겨운 삶이었다. 하지만 그 목적이 사라진 지금 갑작스레 찾아온 평화는 자못 낯설게 느껴졌다. 이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대로 사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적이 없는 세상에서 아무 걱정 없이 일상을 즐기며 살아간다는 것. 근 한 달 동안의 생활을 돌이켜봐도 알 수 있다. 좋은 점이, 아니 좋은 점만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게헨나가 날 보며 아름답게 웃어준다. 식당으로 내려가면 화정이 밤에 뭘 했느냐며 입술을 삐죽거린다. 두 여인이 싸우기 시작하면 스리슬쩍 끼어든 제갈 해솔이 살살 부채질을 하고, 주방에서 나오는 고연주가 또 싸우느냐며 혀를 차고 식사를 내놓겠지. 어쩔 줄 몰라 하는 임한나의 품에 안겨 말다툼을 구경하는 동안, 왜 이렇게 시끄러우냐며 신경질을 부리며 등장하는 수나를 보며 인사할 것이다. 거기서 식당은 침묵한다. 난 이익이익거리는 수나를 껴안고 입맞춤을 퍼붓는다. 아, 그러고 보니 수나의 동생을 만들어주는 것도 좋겠다. 한소영이 임신하고 싶다는 의사를 강력히 피력하기도 했으니까. 그래, 내 아이를 여럿 낳아 육아에 전념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어여쁜 부인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에 둘러싸여 지내는 일도 분명히 즐거움이 있으리라. 상상만 해도 행복…. …아니. 행복하지 않아. 거짓말은 아니지만, 확실히 그랬으면 좋겠다는 기분은 들지만, 행복이라는 감정과는 거리가 멀다. 진짜 속내를 털어놓으라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따로 있었다. 세라프의 계획은 훌륭하다. 장담할 수는 없으나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도망간 천사들을 돌아오게 하고 자리를 만들어 한꺼번에 쓸어버린다. 천사가 아니었으면 애초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테니 명분은 충분하다. 충분하고도 남는다. 이 정도로 날 위해주는데 세라프 하나쯤 살려주지 못할 것도 없다. 제로 코드의 사용을 위해서도 남겨둬야 하고. 이뿐이랴? 이 회차 내내 우리를 괴롭혔던 서 대륙도 깔끔하게 청소하고, 악마에게 힘을 보탠 남 대륙도 깡그리 몰살시킨다. 아아,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증오해 마지않는 적을 굴복시켰을 때 얻는 쾌감은 그 무엇도 대체할 수 없다. 머리통이 짓밟혔을 때 가브리엘은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분노로 일그러질까, 아니면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할까. 살려준다고 안심시킨 후 불시에 목젖을 찌르는 것도 좋을 터. 엘도라는 목을 베는 게 좋겠지. 긴 창끝에 목을 꽂고 농성하는 남 대륙 사용자들을 향해 보란 듯이 흔들면 굉장한 효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즐거울 거야. 하하. 뭔 생각을 하는 거지. 짝! 양손으로 뺨을 쳤다. 멍멍한 정신으로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망상의 나래를 펼친 듯싶다. 일의 경중을 따져야 하는데. 일단 세라프를 찾아가 지구와 홀 플레인을 잇는 통로 개설 여부를 확인한다. 또 이제 슬슬 클랜원들한테 말할 때도 되지 않았나. 다짜고짜 밝히면 설득력이 떨어지겠지. 이건 형을 찾아가 조언을 구해봐야겠다. 우선 침대에서 나와 씻는 것부터 하고. 세안을 끝내고 방을 나오자 고요한 복도가 날 맞이했다.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저녁때이니만큼 꽤 소란스러울 법도 한데 성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적막하다. 심지어 사 층에서 계단을 내려와 일 층에 도착했을 때도 조용하기만 했다. 이상한 일이다. 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걸까…. "응?" 사방을 둘러보며 로비를 가로지를 즈음, 문득 정면에 시선이 꽂혔다. 일 층 입구로 들어오던 안현이 나와 시선을 마주치고 걸음을 멈칫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안현뿐만 아니라 한 무리의 사용자가 들어오는 중이었다. 당연히 머셔너리 클랜원들이었다. "단체 소풍이라도 다녀온 건가?" 농담조로 건네기는 했지만, 피로가 그늘진 얼굴들을 보고 한 말이었다. 안현은 입을 반쯤 열더니 흠칫하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따라 시선을 내리자 무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무표정한 얼굴의 수나를 볼 수 있었다. "수나…." 웃으며 양팔을 뻗은 순간 탁, 손을 쳐내는 감각이 전해졌다. 엉겁결에 행동이 멈춰졌다. 그러나 수나는 날 보지도 않고 찬바람이 날릴 만큼 세게 지나쳐버렸다. 이내 숫제 양 갈래머리가 휘날릴 정도로 달려가 계단 위로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머쓱한 기분에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런 반응이 처음은 아니지만 오늘따라 까닭 없이 서운함이 몰려온다. 방금은 진심 같았다고 해야 하나. "뭐야…. 뭔 일이라도 있었어?" 수나가 사라진 계단을 올려다보며 물었으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제야 이상함이 느껴졌다. 의아한 기분에 머리를 갸웃하자 안현이 터벅터벅 걸어와 힘없이 머리를 숙인다. 그리고 말했다. "형." 잔뜩 쉰 목소리였다. "우리 축제해요." 이게 피로에 절은 낯을 하고 뭔 말을 하는 거지. 뜬금없이. "갑자기 뭔 소리야. 축제는 얼마 전에 한 번 하지 않았나." "해요, 축제." "안현?" "하자고요." 고장 난 인형처럼 똑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하긴 이제 하든 말든 별 상관없기는 하지만. "뭐 마음대로 해라." 한 마디하고 수나를 찾으러 올라가 보려는 찰나, 돌연 강하게 잡아끄는 감각이 전해졌다. 살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안현이 날 부여잡은 채 서서히 머리를 들고 있었다. 흐릿해 보이던 두 눈동자가 순간 진해지며 날 직시한다. "형도 와요. 어디 가지 말고." "놔라…. 뭐?" "형도 오세요. 하루, 아니 반나절 정도 시간 내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잖아요." "…뭐라고?" 나 또한 저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이놈이 지금 장난하는 건가? 그러나 장난으로 치부하기에는 진심이 여실히 전해졌다. 안현이 이를 악물었다. "축제 따위, 다시는 안 해도 좋으니까…."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마지막이어도 좋으니까…." 급기야 옷깃이 찢어지라 손을 꽉 말아 쥐기까지 한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 정도로 하고 싶은 건가? 흘끗 입구로 눈을 돌리니 고연주가 서글프게 미소 짓는다. "그래요. 해요. 저번에는 중간에 분위기를 망쳤지만, 오늘은 원 없이 놀아봐요." 심지어 고연주까지. "허 참."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지만 결국에는 어깨를 으쓱거리고 말았다. 그렇게 즉석에서 하기로 한 축제는 시작부터 축 처진 분위기였다. 원 없이 놀아보자고 했으나 전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오직 달그락거리는 소음이 간헐적으로 들릴 뿐. 고연주를 비롯한 여인들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음식을 만들고 나르기 바쁘고, 나머지는 곳곳에 비치된 탁자에 앉아 입을 닫고 기다리기만 한다. 이래서야 축제는커녕 여느 때와 같은 저녁 풍경이지 않은가. 나야 떠들썩하지 않아서 좋기는 하다만. 건너건너 탁자에 앉은 비비앙은 언제나처럼 잘 먹는다.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으나 쉴 틈 없이 양손을 움직이는 게 음식을 욱여넣는 듯싶다. 목이 막히는지 가끔 꺽꺽 소리 죽여 흐느끼며 고개를 들고 천장을 응시한다. 한참을 그러고 있더니 어깨를 가늘게 떨기 시작한다. 그렇게 맛있나? 참 반응 한 번 좋아. 한 번쯤 지구로 데려가 먹방을 시켜보고 싶을 정도라니까. "그러고 보니." 문득 옆자리로 그릇을 놓는 소리가 들렸다. "축제만 하면 오빠는 항상 조용히 있다가 어느 순간 몰래 사라지지 않았어요? 오늘처럼." 의자에 털썩 앉은 김한별이 날 보며 말했다. 지금 이 상황이 축제처럼 보이느냐고, 당최 어딜 다녀왔길래 이러는 거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목구멍으로 씹어 넘기는 음식과 함께 꿀꺽 삼켜버렸다. "축제를 즐기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 "그건 그래요." 김한별은 순순히 동의하며 웃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억지 미소였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와 김한별뿐만이 아니라 식당 전체에 정적이 흐르고 있다. 우리 대화에 집중이라도 하는 것처럼. 뭐, 착각이겠지. "저기, 오빠." "응? 왜." "있잖아요, 만약에요. 정말 만약인데요." "그냥 말해. 슬슬 짜증 나려고 하니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가 아니었으면…. 우리가 통과의례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상당히 새삼스러운 질문인데. "글쎄."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적당히 대꾸했다. 일 회차에서는 통과의례에서 죽었으리라 예상하지만 직접 확인한 건 아니다. 무엇보다 일 회차와 이 회차가 달라진 만큼 어떻게 됐을지는 나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럼요." 또? 애초 뭘 묻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만약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 또다시 통과의례에서 만난다면…. 그때도 예전처럼 살려주실, 이끌어주실 거예요?" 탁. 나도 모르게 숟가락을 놓고 말았다. 움찔 몸을 떤 김한별은 한없이 불안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아차 하고 말을 바꾸기는 했으나 분명히 살려주실 거냐고 물었다. 엄밀히 말하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 이상하다. 정말로 이상하다. 기실 집무실에서 나왔을 때부터 느꼈던 위화감이었다. 느릿하게 연초를 꺼내며 주변을 돌아보자 한 명도 빠짐없이 날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그렇게 생각한 난 다시 김한별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도대체…." 그때였다. ====== 작품 후기 ====== 1. 현재 진행 중인 에피소드들은 오름차순이 아니라 내림차순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즉 에피소드로서는 0이 마지막입니다.2. 완결은 에피소드 0은 10회, 에필로그는 4회로 구성돼 있습니다. 이제 에피소드 0은 2회, 그리고 에필로그 4회가 남았습니다. 즉 메모라이즈는 앞으로 6회 연재 후 완결이 납니다. * 위 사항에 대해서는 이미 대부분의 독자분들이 알고 계시는 만큼, 앞으로 1, 2번에 대해서는 이번 후기를 마지막으로 더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3. 독자분들의 결말 예상 코멘트가 거의 한 방향으로 집중되고 있습니다. 애초 그 방향으로 생각하시도록 유도한 것이니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만, 차후 진행이 어떻게 될 것이라고 미리 답변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현재 확실하게 밝힐 수 있는 건,1. 1회차로 돌아가지 않는다.2. 2회차를 재 시작하지 않는다.3. 3회차를 시작하지 않는다.4. 그러므로 무한 루프 결말은 없다. 이 정도입니다. 완결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양해 부탁 드립니다. :) 끼익…. 식당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몹시 작은, 그냥 일상에서 흘려 듣는 정도에 불과한 소음이었다. 장내는 살짝 건드리면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있는 터라 문 여는 소리는 고요 속의 파문처럼 커다란 물결을 일으켰다. 수십 쌍의 시선이 돌아가는 곳에는 한 신관 복장의 거주민이 들어오고 있었다. 사내는 우수수 집중된 눈초리를 보고 주춤하더니 당황하며 말했다. "시, 식사 중에 실례하겠습니다. 전령입니다." "뭐? 버, 벌써?" 득달같이 일어나 외친 이유정이 순간 아차 하는 표정을 짓는다. 한동안 두 눈을 깜빡거리던 신관은 한층 조심스러워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에, 혹시…. 머셔너리 로드님 계신지요?" 그 순간 신재룡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정하연은 긴 한숨을 흘렸고, 김한별은 고개를 숙였다. 쉴 틈 없이 음식을 푸던 비비앙의 숟가락도 움직임이 멈췄다. 단지 신전에서 호출이 왔을 뿐이다. 여태껏 몇 번이고 있었던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한데 주변에서 보이는 각양각색의 반응은 여느 때와 같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굳이 묶어서 표현하라면 '올 게 왔구나.' 라는 듯한 표정이랄까? 그 모습들을 김수현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난 김수현이 손을 들었다. "접니다." "예 예. 지금 바로 와달라고 하시는데…." "알겠습니다." "그럼…." 사내는 꾸벅 인사하고 허둥지둥 모습을 감췄다. 신관이 사라진 식당에 다시금 무거운 정적이 침전한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쥐 죽은 듯 고요하던 식당에 돌연 달그락거리는 소음이 이어진다. "또 가보셔야겠네요." 담담한 음성의 주인공은 안현이었다. "어차피…. 항상 바쁘셨잖아요." 안현은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퉁명스레 말을 끝냈다. 말투에서 무언가 느낀 걸까. 김수현은 묵묵히 식사하는 안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나라면 안 간다." 이번에는 비비앙의 음성이었다. 목멘 소리로 말하더니 옆에 놓인 물잔을 시원하게 들이키고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랑 약속도 있잖아. 기억나지? 그럼 가긴 어딜 가? 약속 이행하기 전까지는 아무 데도 못 가." 방금 물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목소리가 여전히 잠겨 있다. "도대체…." 김수현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머리를 절레절레 젓더니 소리 없는 숨을 기다랗게 내쉬었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으니 자못 갑갑한 것이다. "오늘따라 왜들 이러는지…." 평소답지 않게 말을 흐리며 주변을 돌아본다. 그러나 대답은 어느 곳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이대로 기다려봤자 나오는 건 한숨뿐. 결국, 김수현은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무튼, 호출이 왔으니 응해야겠지요. 그리고 오늘 밤이 되든 내일 아침이 되든, 우선 다녀오고 듣겠습니다. 마침 저도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단 세 마디. 그 세 마디를 남긴 채 김수현은 휘적휘적 탁자를 가로질렀다. 중간중간 누군가의 손길이 그를 잡으려는 듯 뻗어졌으나, 끝내 옷깃도 스치지 못하고 허공을 의미 없이 휘젓는다. 김수현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발 빠르게 식당 밖으로 사라졌다. 한 걸음. 두 걸음. 뚜벅, 뚜벅…. 세 걸음, 네 걸음….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발소리조차도 희미해졌다. 김수현의 민첩 능력치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보통 사용자의 보행 속도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말인즉 정문을 나서는 건 금방이었다. "이래서 마지막 자리를 마련하자고 했던 거니? 고작 투덜거리려고?" 고연주의 음성이 조용한 식당을 울렸다. "정말 괜찮아? 이대로 보내도? 이대로 헤어져도?" 시선은 안현을 향해 있으나 오직 한 명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최소한 웃으며 보내줄 수는 있는 거잖아." 처음 힐난하는 것 같던 음색은 어느새 달래는 어조로 변해 있었다. "잘 생각해.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몰라. 너희가 아는, 기억하는 그 사람을." 하지만 안현은 여전히 느릿하게나마 숟가락을 움직이는 중이었다. 식사에 열중한다기보다는 기계적인 동작에 가까웠다. 이내 손을 더듬어 잡은 물잔을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재차 숟가락을 놀리기 시작한다. 들리기는 하는 걸까. 고연주의 낯에 안타까운 빛이 스쳤다. 결국에는. "좋아. 멋대로 해." 최후로 입을 열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그 순간이었다. "!" 후회. 후회라는 한 단어에 기계 같던 안현의 행동이 정지했다. 사시나무 떨 듯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삐걱 뒤를 돌아봤다. 그리하여 비로소 보게 된 김수현이 떠난 자리는…. "…아." 까닭 모를 공허함과 허무함만이 남아 맴돌고 있었다. 안현의 입이 살며시 벌어졌다. "형…." 기껏 불렀으나 당연하게도 찾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김수현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러니 말을 들을 수 있을 리 없다. 그제야 현실을 인지했는지 텅 빈 의자를 멍하니 바라보는 두 눈동자가 서서히 일렁거린다. 김수현은, 정말로 떠났다. "보아하니 장비를 가지러 올라간 것 같은데…." 고연주는 느릿하게 눈을 돌렸다. 김수현이 나갔던 방향으로. "아직 늦지 않았어." 그 순간. "혀, 형!" 쿵! 의자를 박차는 소리와 함께 급하게 일어난 안현이 미친 듯이 식당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 무렵. 고연주의 말대로 김수현은 집무실에서 장비를 챙기고 내려와 이제 막 입구를 나서는 중이었다. 한데 느닷없이 우르르 밀려오는 인기척을 느낀 걸까. 성큼성큼 정원으로 향하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등 뒤로 안현을 선두로 한 머셔너리 클랜원들이 무질서하게 달려 나오고 있었다. "혀엉!" 가까스로 뒷모습을 붙잡은 안현이 목이 터지라 외쳤다. 먼빛의 김수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순간 이를 악물었으나 곧 씩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너무나 유쾌하게 소리쳤다. "헤헤, 죄송해요! 서운해서 잠깐 투정 좀 부려봤어요!" "뭐?" "그래도 괜찮죠? 아니! 괜찮을 거죠?" "으, 응?" "에이, 괜찮잖아요. 괜찮을 거라고 말 좀 해봐요. 형은 최강이잖아요. 무엇이든 질 리가 없잖아요!" "너…?" 안현의 말은 심하게 격양돼 끝에 가서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사실상 거의 횡설수설하는 것과 진배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김수현은 차마 아까부터 뭔 헛소리냐며 말할 수 없었다. 안현의 두 눈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봤으니까. "맞아요! 우리 오라버니가 얼마나 센데요!" 안솔도 소리 높여 외쳤다. "분명히 괜찮을 거예요, 분명히. 제 행운을 걸고 맹세해요!" 방실방실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그렇죠? 오라버니. 내 오라버니!" 악을 쓰듯 소리 지르는 안솔의 얼굴 또한 눈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좋아! 정 그렇다면 약속은 좀 미뤄주지 못할 것도 없지!" 비비앙도 질 수 없었는지 양손을 허리에 척 붙이며 앞으로 나섰다. "가뿐히 끝내고 빨리 돌아와! 알겠지?" 그러나 애써 강한 척하는 몸짓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여기서…! 계속,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응?" 그러자 다른 사용자들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던 걸까. 이윽고 비비앙이 말이 끝나는 순간을 기점으로 머셔너리 클랜원들도 이구동성으로 외치기 시작했다. 정말로 고마웠다는 말, 믿는다는 말, 지지 말라는 말, 꼭 돌아오라는 말…. 조금씩 다르기는 했으나 전부 격려라는 범주로 묶을 수 있는 말들이었다. 그 광경은 떠나려는 사내를 당황하게 하기 충분하고도 남아서 김수현은 한동안 멍멍히 서 있을 뿐이었다. "아니, 무슨 사지로 가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하나씩 가만히 듣고 있는 동안 문득 피식거리는 웃음이 새나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김수현 스스로 느끼기에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여전히 사정은 모르지만 왜인지 어리둥절했던 기분이 조금 가시는 느낌이었다. "하하…. 진짜." 은근슬쩍 눈 둘 곳을 찾던 김수현은 살그머니 시선을 올렸다. 어느새 어둑해진 밤하늘을 보며 볼을 살짝 긁적거린다. 그러더니. "뭐, 최대한 일찍 오겠습니다." 부끄럽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그 찰나의 순간. "……!" 소란은 거짓말처럼 뚝 멎었다. 기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웃음에 불과했다. 그러나 방금 웃음은 예의 광소(狂笑)도 비웃음도 아니었다. 환하기 그지없는, 처음으로 보는 김수현의 미소였다. 잠시 후, 김수현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아, 아아…." 이유정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대로 땅에 고개를 처박고 소리 죽여 오열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바보." 사 층 집무실에는 수나가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밖은 무어라 외치는 소리로 몹시 소란스럽다. "나 참. 왜 저렇게 시끄러워? 고작 인간 한 놈 떠나는 건데. 하여간 유난 떨기는." 수나는 듣기 싫다는 듯 귀까지 틀어막고 인상을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수선한 느낌은 계속해서 전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멍청해. 아, 진심으로 애잔하다. 그딴 놈이 부왕이라고? 놀고 있네. 난 그런 약골 절대로 인정 못 해. 마음대로 하라 지. 나야 지옥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야." 무언가를 떨치려는 듯 수나는 계속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 하지만 난 너그러우니까.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일말의 재고할 여지는…?" 그때였다. 속으로 생각나는 온갖 비난을 가하는 동안, 여아는 돌연 바깥 소란이 뚝 끊겼음을 인지했다. "……." 수나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하지만 두 귀를 막은 양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살며시 떼어지고 있었다. 밖은 확실히 전보다 조용했다. 들리는 거라고는 여인의 오열하는 소리뿐. 수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부리나케 일어난 수나는 곧장 테라스로 나가 정원을 내려다봤다. 아래에는 머셔너리 클랜원들이 있었다. 수나의 시선이 재빠르게 사방을 훑는다. "아…." 그러나. 아무리 찾고 찾아도. "아, 아빠…?" 김수현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 어디 있어?" 무의미한 자문이다. 한 손으로 죽음의 신을 갖고 놀았던 존재가 고작 사내 하나 찾지 못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 어?" 한참을 정신없이 돌아보던 수나는 정말로 김수현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갔어?" 아닐 거라고, 혹시나 싶었던 가슴 속 기대가 물거품으로 화하는 순간이었다. "진짜야? 정말로?" 아직도 현실이 믿기지 않는 걸까. "뭐, 뭐야. 뭐 이렇게 매정해. 나 아직 여기 있는데…." 수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씨이, 너무하잖아. 그러고 보니 딱 하루밖에 안 놀아줬으면서…." 힘이 잔뜩 빠진 목소리. 심지어 아까처럼 날이 서 있기는커녕, 울음이 살짝 섞여 있기까지 했다. "내가 그렇게 매몰차게 달려갔는데 한 번 와주지도 않고…." 깜빡깜빡 감았다가 뜰 때마다 눈동자는 서서히 젖기 시작하더니 기어코 아래서부터 액체가 고인다. "가…." 종래에는 큼직한 눈망울에 가득하게 차오르더니. "가지 마…." 끝내 한 줄기 뜨거운 액체가 발그레한 뺨을 타고 애처롭게 흐르기 시작한다. "아, 알았어! 아까 버릇없이 군 거 잘못했으니까…." 어느새 수나는 난간 아래로 양팔을 뻗어 내리고 있었다. 흡사 누군가를 붙잡으려는 듯 고사리 같은 손을 끊임없이 오므렸다가 펴기를 반복한다. "까짓거 앞으로 말도 잘 들어줄 테니까…! 윽." 들을 리도 없고 들릴 리도 없다. 그 사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수나의 음색은 어느 순간 완연한 흐느낌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뜨문뜨문 말을 잇더니 고개를 떨궜다. "어엉…." 결국에는 꾹 감긴 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울음을 삼키며 수나는 간신히 말을 뱉었다. "가지 마요…. 제발…. 아빠아아…." ====== 작품 후기 ====== 하나 힌트를 드리자면 아직 결말을 완전히 맞추신 독자분은 없습니다. 물론, 김수현의 기억을 '삭제'한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럼 좋은 하루 보내세요! :)그렇게 보일 여지는 있겠지만요. 그럼 좋은 하루 보내세요! :)성을 벗어난 후, 난 한동안 싱숭생숭한 기분에 시달려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클랜원들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작 신전에 간다고 우르르 나온 것도 의아하지만 배웅하는 태도는 더욱 이상했다. 꼭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긴 이별을 앞두고 작별을 나누는 듯했으니까. 순간 내가 신전이 아니라 위험한 사지로 가는 건지 착각했을 정도였다. "에이." 혼자서 계속 끙끙 앓을 필요가 있나. 안솔이 그러지 않았는가.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고. 한두 명도 아니고 단체로 그렇게 행동한 것에는 분명히 나름의 이유가 있으리라. 그렇다면 나중에 들으면 된다. 마침 세라프한테 볼 일도 있으니 편하게 생각하자. 그래, 그게 낫겠다. 생각을 정리하고 눈을 들자 어느새 도착했는지 신전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난 가슴 한구석에 남은 의문을 애써 떨치며 포탈에 몸을 묻었다. "어서 오십시오. 수현." 들어가자마자 언제나처럼 고요한 미성이 날 맞이했다. 단지 미세한 차이점이 하나 있다면 세라프가 제단 중앙이 아니라 왼쪽으로 살짝 비켜 앉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본체만체하며 바닥에 주저앉자 무어라 말하려던 세라프가 입을 꾹 닫는다. 그리고 날 물끄러미 응시하기 시작한다. 난 딴청을 피우며 연초를 꺼내 물었다. "……." 계속, 계속 기다렸으나 필터 끝까지 태우는 동안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심지어 연초 두 대를 결딴낼 때까지 정적은 끝나지 않았다. 뭐지? 얘는 또 왜 소리 없는 아우성이지? 오늘 단체로 약이라도 빤 건가? 결국에는 반쯤 타다 남은 연초를 바닥에 비벼 끄며 일어서고 말았다. "알았어, 알았다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걸어가 제단에 털썩 앉았다. 처음에는 최대한 끝에 걸터앉았지만, 세라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곧장 몸을 기울였다. 하지만 나도 네가 이럴 줄 알았거든. 하여 선수 쳐서 몸을 바짝 붙이자 움찔 놀라는 기척이 전해졌다. 상당히 당황하더니 떨떠름히 날 돌아본다. 몸냄새는 여전히 좋네. "수, 수현이 웬일입니까?" "어차피 그대로 있었어도 네가 올 거 아니었나." "그거야…. 아, 아닙니다. 굉장히 그렇지 않습니다." "거짓말하지 마. 아예 폼까지 잡아놓고서." 확실한 증거를 말했지만 세라프는 완강히 시치미를 뗐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헛기침이 이어지는 동안 난 새 연초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연기를 길게 흘려내며 입을 열었다. "천사는?" "…칠 대 악마의 소멸로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게 제가 받은 답변 전부입니다." 난 킥킥 웃었다. 가브리엘도 참 어지간한 겁쟁이잖아. "아무튼, 설마 이 늦은 시간에 부를 줄은 몰랐는데." "혹시 폐가 됐습니까?" "아니, 전혀. 오히려 잘됐지. 안 그래도 한 번 찾아오려고 했으니까." "아, 그렇습니까?" 문득 세라프의 음성이 약간 천연덕스럽다 느껴졌다. 하지만 궁금한 이는 가로되, 난 단도직입으로 지구와 홀 플레인을 잇는 통로 개설의 가능성에 관해 물었다. 뜻밖에도 세라프는 생각하는 모습도 없이 바로 끄덕거렸다. "결과만 놓고 따지면 가능합니다." 목소리도 담담하다. "과정에서 제한이나 조건 같은 게 있다는 건가?" "Yes. 총 두 가지 제한이 있습니다. 수현은 지구와 홀 플레인 사이를 원하는 때마다 왕복하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만, 아닙니까?" "그러면야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왠지 불가능하다는 뉘앙스처럼 들리는데."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세라프는 또 한 번 고개를 주억였다. "제로 코드는 무한의 힘을 발휘하는 신의 결정체. 하지만 만능의 의미는 이룰 수 있는 소원의 범위에 한할 뿐, 엄밀히 말하면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힘의 한도는 존재합니다." 순간 거주민도 사용자로 못 만드는 주제에 잘도 만능이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그러니까 재사용하는 데 충전이 필요하다는 건가? 대기 시간 개념처럼." "정확합니다. 단순히 지구로 보내는 것뿐만이 아니라 돌아오게 하는 것도 요청 범주에 포함되니까요. 말인즉 소원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가용해야 할 힘도 기하급수로 높아집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어느 정도나 걸리지?" "오고 가는 대상이 수현 혼자라면 애초 충전할 필요도 없겠지만…." 세라프가 스리슬쩍 말을 흐렸다. 난 뒤에 이어질 말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아마 같이 돌아가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만큼 무게도 늘어난다는 거겠지. "오차 범위를 포함해서 아마 오 년에서 육 년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응? 뭐야. 난 아직 이야기만 꺼냈을 뿐, 누구와 몇 명과 돌아갈 것이라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다. 한데 벌써 오차까지 생각해서 계산을 마쳤다? 이건 좀 이상한데. …하기야 어림잡아 계산했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오 년에서 육 년 사이라니. 생각보다 길다. "시간 회귀는 금방 처리되지 않았나?" "그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단순하기도 했지만, 소원의 대상이 수현 한 명에게 한정됐었으니까요. 특히나 홀 플레인에 국한하는 요청과 지구와 홀 플레인 두 세상을 저울질하는 요청은 차이가 클 수밖에 없습니다." "하긴…. 그럼 기간을 줄이는 방법은 아예 없는 거야?" "돌아가는 인원을 줄이거나." "그거 말고. 솔직히 얼마나 돌아갈지는 나도 잘 모르겠거든. 어쩌면 수백 명이 될지도 몰라." "아니면 개개인이 사용자 정보를 포기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보통 인간을 보내는 것과 능력 높은 사용자를 보내는 것도 엄연히 무게가 다른 일이니까요." 사용자로서의 능력을 내려놓는 것도 무게를 덜어내는 방법이 된다는 건가. 하지만 선뜻 그러기는 누구나 싫을 것 같은데. 천신만고 끝에 거머쥔 힘인데 그냥 포기하는 건 좀 그렇잖아. 모르긴 몰라도 아마 대부분이 비슷한 생각일 터. 하여튼 정말이지 만능은 개뿔이다. 돌아가면 제로 코드한테 꼭 말해줘야겠다. 능력 없는 놈이라고. "일단 그렇다 치고. 하나 더 있다고 하지 않았나." "네. 수현은 지구에도 또 하나의 수현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니까. "알아. 지구의 난 원본, 그리고 홀 플레인의 난 원본을 복사해 옮겨놓은 존재라는 거잖아." "부분적으로 맞습니다. 그럼 지구와 홀 플레인의 시간이 동일하게 흐르는 건 아십니까?" "…그렇겠지? 아마도. 어쨌든 뭘 말하고 싶은 거야?" "돌아갈 시점에 대해서입니다. 수현은 전역하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홀 플레인으로 소환됐습니다." 썩 듣기 좋은 내용은 아니었다. 세라프도 내가 불편해하는 낌새를 느꼈는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지구로 귀환한다면 수현은 어느 시간대로 돌아갈 생각입니까?" "당연히 내가 소환되기 직전의 시점으로 돌아가야…. 잠깐만. 그럼 나랑 연차가 다른 사용자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자동으로 수현이 돌아가는 시점에 맞춰서 돌아가게 됩니다." "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면 기본 베이스가 되는 건 어디까지나 지구의 인간이니까요." "……?" 내가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세라프는 부연 설명을 계속했다. "아까 수현이 말했듯이 홀 플레인의 사용자는 강제로 소환된 처지입니다. 즉 두 존재는 서로 동등하게 합쳐지는 게 아니라, 사용자가 인간에 덧씌워지는 형태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아하, 그렇구나. 세라프의 말인즉 사용자로서 인간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사용자를 받아들인다는 소리였다. 가령 현재 십일 년 차 사용자인 고연주의 경우 육 년 간의 공백 기간에 괴리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신기하겠다. 평범하게 살고 있다가 갑자기 수년 간의 기억과 경험이 합쳐지면 어떤 기분일까? 당연히 괴리감이 없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전자보다는 훨씬 낫겠지. 왠지 부품 취급받는 느낌이지만 어차피 이곳이나 저곳이나 나 자신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맞다. 세라프." "네?" "혹시 임의로 돌아가는 시간을 조정할 수도 있을까? 오 년 전이 아니라 한 십오 년 전으로." "…영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때 시종일관 차분하던 세라프의 얼굴이 처음으로 살짝 일그러졌다.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째서?" "십오 년 전이라면…. 수현의 나이가 열너덧 살쯤 되지 않습니까?" "응. 그게 왜…. 아차." 난 그제야 왜 세라프가 주저했는지 알 수 있었다. 동시에 방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는지 알아차렸다. 세라프와 이야기하느라 잠시 잊고 있던 사념이었다. 기실 건강히 군대를 전역한 스물넷의 나도 지금의 날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정신에 문제가 생기는 선에서 그치면 그나마 다행이겠지. 어쩌면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 한데 고작 중학생의 내가 현재의 날 감당한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터. "그러네. 무슨 말인지 알겠다." 혹시나 고집을 부리지 않을까 걱정했는지 세라프가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난 쓰게 웃었다. 물론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아니, 해야만 했다. 이대로 하루하루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며 어물쩍거리기보다는, 앞일을 장담할 수 없어도 어떻게든 길을 개척하고 싶었다. 아무튼, 이로써 어느 정도 윤곽은 잡혔고 들을 말도 다 들은 것 같다. 남은 건 세부 사항을 정하는 것뿐인가. "이것도 시간 좀 걸리겠네…." 사실 막연한 감이 있기는 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돌아가면 될 줄 알았는데 상세히 따져보니 마냥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나 혼자라면 모를까. 못해도 수십 명을 아우르려다 보니 이것저것 고려해야 할 게 많아져 오히려 복잡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무엇보다 형과 한소영은 물론, 클랜원의 의견도 수렴해야 한다.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니고 천천히 진행해도 되겠지. "…좋아. 일어날까." "수현?" "아, 이만 가보려고. 시간도 늦었고." "아…." < --Epilogue 1. 안녕, 세라프.-- > 흘끗 뒤를 돌아보니 반쯤 일어나다 만 세라프가 보였다. 언제 붙잡았는지 살짝 쥔 손아귀로 붉은색 망토가 그러모아 져 있다. 하지만 팽팽하게 당기는 게 아니라 느슨하게 잡아끄는 것이 약간만 힘을 줘도 뿌리칠 수 있을…. "가시렵니까…?" 것 같은데, 들리는 목소리가 너무 애처롭다. 그런 눈동자로 보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꼭 하룻밤도 지내지 않고 무정히 떠나버리는 낭군을 보는 가여운 여인 같잖아. 난 괜히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손에 잡히는 제로 코드를 만지작거렸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갈피조차 잡지 못하고 있을 즈음, 세라프가 입을 열었다. "수현과 좀 더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야기?" "그냥 할 말만 하고, 들을 말만 듣고 가시는 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뭐, 뭔." 천사는 평소답지 않게 스스럼없이 소신을 밝혔다. 하지만 이내 진정하고 무언가 갈구하듯 눈동자를 빛내는 세라프를 빤히 응시한다. …하기야, 곰곰이 생각해보니 세라프와는 이번이 마지막 만남일 수도 있겠다. 다음에 만날 때는 제로 코드를 사용할 수도 있으니까. 맘 놓고 이야기할 기회는 어쩌면 지금뿐일지도. 아마 그래서 저러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응할까, 말까. …." 사실 근래 세라프를 보며 드는 감정은 상당히 미묘하다.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나조차도 모르겠다. 확실한 기준이 내려지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돌이켜보면 언제부터였더라? 세라프가 안솔의 몸을 빌려, 아니 날 따라 일 회차로 돌아왔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였나? 어쨌든 그 이후 하나 확신하는 건, 옛날처럼 꼴도 보기 싫을 정도의 증오는 씻은 듯 사라졌다는 것뿐. 그래, 그뿐이다. "그러고 보니." 망토를 천천히 당겨 빼며 말하자 세라프가 눈을 살짝 치뜨며 제단에서 완전히 일어섰다. "나도 묻고 싶은 게 남아 있었지." 그 순간 "잠시만, 한 시간, 아니 삼십 분이라도…!" 라고 뒤늦게 외친 세라프는 제단에 도로 앉는 날 보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왜? 좀 더 있어도 괜찮은데." 눈을 동그랗게 뜨며 천연덕스레 연초를 꺼내 물자, 곱게 눈을 흘기더니 얌전히 제단에 앉는다. 그러나 두 눈이 전혀 다른 곳을 응시하고 아랫입술이 삐쭉 튀어나온 것이 단단히 삐친 게 분명했다. 세라프가 토라지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꽤 귀엽잖아. "삐쳤어?" "안 삐쳤습니다." "에이, 삐…. 알았어.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날 붙잡은 거야?" "……." 약간 화난 음성으로 말한 세라프는 한동안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나서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하던 세라프가 날 비뚜름히 흘겨봤다. 이윽고 입꼬리가 살그머니 올라갔다. "사실 최근 수현의 동향을 간간이 관찰했습니다." "뭐?" "여러 여인과 무척 즐겁게 지내시는 것 같았습니다." "…봤어?" 세라프는 스리슬쩍 끄덕거렸다. 으음. 화끈한 기운이 올라오는군. 하지만 난 '그래서?' 라는 의미가 전달될 수 있도록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혹시 내가 창피해 하기를 바랐다면 오산일 거다." "설마 그러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유치하지 않습니다." 불현듯 길게 하품이 나왔다. 밤이라서 그런가. 이상하네. 늦게 일어났으니 잠이 부족하지는 않을 텐데. 그때 세라프가 말을 이었다. "단지…." "단지?" "부러웠습니다." "하, 부러울 것도 쌨다." 연초를 씹으며 말하자 가볍게 웃는 소리가 이어졌다. 흠. 세라프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참 오랜만인 것 같다. 농담 따먹기 하는 것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군. "그래서 말인데, 수현." 이윽고 살금살금 몸을 밀착해온 세라프가 귓가에 나직이 속닥거렸다. "혹시, 제 부탁도 하나 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들어보고." 질근질근 씹던 연초에 불을 붙이며 중얼거렸다. 그 찰나의 순간, 갑자기 시야가 확 미끄러졌다.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뜨니 잿빛 천장이 밟혔다. 그 아래로 세라프가 반쯤 고개 숙인 채 날 내려다보고 있다. 동시에 뒷목을 편안히 받쳐주는 푹신푹신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무릎베개라. 짐작하건대, 아마 세라프는 어떻게 해서든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 같다. "이게 부탁?" 기껏 물었으나 세라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않은 채 두 손을 움직여 내 머리카락을 차분히 쓸어 넘기기 시작한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쉬지 않고…. 나도 이제 와서 거부할 이유는 하등 없어 가만히 몸을 맡겼다. "으으으음…." 회색 제단은 차가웠으나 세라프의 손길은 그 이상으로 따뜻했다. 기분 좋다. 머리가 풀리자 몸도 늘쩍지근해져 저절로 눈이 감긴다. 꼭 싱그러운 봄을 맞이한 초원에서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누워 있는 것 같다. 이 상태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수현." 문득 세라프가 말을 걸었다. 난 완전히 감기려는 눈을 반쯤 감는 걸로 타협하고 세라프를 응시했다. 시야가 좁아진 탓인지 아까보다 약간 가물가물해진 것 같다. "수현은…. 홀 플레인에서의 삶이 어땠습니까?" "……?" 뜬금없는, 하지만 새삼스러운 질문이었다. 갑자기 뭔 소리냐고 반문하려다가 말을 꿀꺽 삼켰다. 어쩌면 이 답변이 세라프가 말한 부탁일지도 모르니까. "글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상념에 잠겼다. 예전이었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부정적으로 말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단지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다르게 말할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불행하기도 했지만…." 형의 죽음을 목격했을 당시 난 불행했다.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해야 했고, 동료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으며, 동경하는 여인의 타락을 확인했을 때의 기억은 지금조차도 떠올리기 싫을 정도다. 이것 말고도 불행한 기억은 무수히 널리고 널렸다. 하지만 사용자로서 활동하는 내내 불우하기만 했을까? "좋은 기억도 있고…." 엄밀히 말하면 그건 아니었다. 형을 만났을 때, 한소영에게 구원받았을 때, 게헨나와 만났을 때, 마르와 수나가 태어났을 때, 동료들이 날 구하러 와줬을 때…. 그때의 기억은 분명히 불행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것 또한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얼굴을 간질이는 감촉이 느껴졌다. 은은히 빛나는 은발이 우수수 흘러내린다. 세라프의 얼굴이 점차 기울어지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왜…. 아까보다 자세히 보이지가 않는 거지? 시야가 상당히 불선명해졌다. 눈꺼풀도 나도 모르는 사이 천근만근 무거워진 것 같다. "과거를 잊을 필요는 없지만, 굳이 얽매일 필요도 없습니다." 순간 번쩍 눈을 뜨려다가, 그냥 조금 더 눈을 감고 말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신을 부드러이 어루만져주는 듯한 느낌이 가히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대로 잠에 빠지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하다. "그러니 수현도 이제 행복하게 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자장가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렀다. "그거야…." 당연하다. 어느 누가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겠는가. 세라프가 말을 잇는다. "그럼 수현에게 있어서 행복한 삶은, 어떤 삶입니까?" 그 순간 턱하고 말문이 막혔다. "……." 이게 문제였다. 사람은 개인에 따라 우선하는 가치가 다르다. 그러므로 무엇을 행복하다고 정의하는지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행복이라…." 보통 사람이 추구하는 행복한 삶과 내가 행복하다 느끼는 삶은 서로 굉장히 어긋나 있다. 끊임없이 죽이고 살육해야 살아가는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삶이 과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설령 나 자신이 만족한다손 쳐도, 형이나 한소영 등 주변 사람의 시선은…? 약속의 신전에서였나. '미지는 외면의 결과인가. 선택이 다가올 미래에 두려움을 느꼈다니, 실로 안타깝구나. 십오 년간 목적했던 순간을 비로소 앞뒀음에도….' '하긴, 그나마 버티게 해주던 독이 빠졌다면 남는 건 정신의 마모일지도. 그렇다면 너는 이미 아름답게 부서져 가는 중이겠지….' 제로 코드의 말은 뼈저릴 만치 공감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난 스스로 감정을 속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경계했던 건 슬픔과 아픔에 대응하는 감정이었다.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우는 건 약한 것이라고 여겼으니까. 복수를 위해 누구보다 강해지고 싶었다. 힘들어 울고 싶을 때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았다. 정 참지 못할 것 같으면 분노라는 감정으로 대체했다. 스스로 계속해서 감정을 속인 결과 눈물샘이 완전히 메마르고 말았다. …결국, 남는 것은 공허함과 허무함뿐. "아마…." 그래서였다. 그래서 울고 싶었다. 웃는 것보다는,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행복할 때는 진심으로 웃을 수 있지만, 불행할 때는 진심으로 웃을 수 없다. 하지만 우는 일은 단순히 슬픈 상황일 때만 국한되지 않는다. 행복할 때도 가능하다. 너무 기뻐서, 혹은 감동을 이기지 못해 우는 경우는 많지 않은가. 그래. 말인즉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는 삶. 좀 더 나아가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그런 삶…?" "…그렇습니까." 간신히 대답을 마치자 불현듯 눈앞을 어지럽히던 무언가가 서서히 멀어져 감을 느꼈다. 아마 세라프가 고개를 든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이상하다. "수현이 정말로 그러기를 원한다면." 따라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수현의 진심을 존중하겠습니다." 도리어 몸이 축 늘어지는 느낌이었다. 난 그제야 정신 줄이 놓일락 말락 하는 지경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니, 안 되는데. 아직 묻고 싶은 게 남았는데. "이제 와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그 순간이었다. "저는, 오 년 전 회귀를 앞두고 제로 코드 앞에서 맹세했습니다." 불현듯 시야가 급속히 어두워지는 동시에 흐릿하게나마 보이던 세라프의 형체가 완전히 흩어져버렸다. "이제야 그때의 서약을 이행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아까도 말했지만, 사용자 김수현은 현재 상당한 양의 GP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걸 그대로 없애는 건 전혀 합리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우선 수현이 원하는 바와 지구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장담컨대, 이대로 아무 대책 없이 돌아간다는 건 결코 합리적이라 볼 수 없습니다." 세라프?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신의 의지는 제로 코드의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좋습니다. 도우미의 권한으로, 세부 사항은 임의로 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사용자 김수현에게 해가 되는 일은 손톱만큼도 없을 겁니다. 그럼 작업을 끝내고 곧 뵙도록 하겠습니다.' "수현은…. 도우미의 권한으로…. 임의로 요청하도록…. 물론 수현에게 해가 가는 일은…." 젠장, 잘 들리지 않아. 아무리 집중하려 용을 써도 의식이 시시각각 흐려져 간다. "그럼 작업이 끝난 후…." 그런 내가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었던 건. "다시 뵙는 건…." 살짝 젖은 목소리로 말하는 세라프의 목소리였다. "아마도 힘들겠지요…?" 그와 동시에 난 간당간당하게 쥐고 있던 의식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김수현 : 아마, 울 수 있는 삶…? 세라프 : 그럼 울어봐. 김수현 : ? 세라프 : 울어서 네 순수를 증명해봐! 이 갈보야! < --Epilogue 2. 지구로….-- > "당신이…." "세라프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림자 여왕." "네네. 아, 그이는…?" "사용자 김수현은 사용자 김유현이 데리고 먼저 돌아갔습니다." "…그래요. 나머지도 다 갔겠죠?" "전원 무사히 진입에 성공했습니다. 덕분에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후유…. 그나저나 보랏빛 포탈은 처음 보네. 아무튼, 저기로 들어가면 되는 건가요?" "Yes." "좋아. 그럼 나도…." "……." "…저기, 뭐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네?" "저 말고, 수현한테요. 적어도 당신한테 고맙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맘에 담아둔 말 있으면 지금 해요. 꼭 전해줄 테니까." "아…." …젠장! 그때 그 말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 응? 왜 그러느냐? 궁금하구나. ? Gehenna/ 왜긴 왜예요. 요즘 그이랑 섹라프랑 하는 짓 보면 몰라요? PS. 잠깐만. 누가 멋대로 회고록 훔쳐보랬어요? 아주 이름까지 당당하게 밝히셨네? + 아, 회고록이었느냐? 하긴 일기치고 서술이 꽤 자세하더군. 그나저나 섹라프는 또 누구지? 설마 그이가 또…? - Gxxxxxx/ 또는 아니고요. 누구겠어요. 하루가 멀다고 그이와 섹스 라이프를 즐기는 음탕 천사죠. 줄여서 섹라프. PS. 그런데 앞글자만 봐도 누군지 알 것 같네요? 내가 보지 말라고 했죠? + 무엄합니다. 음탕 천사라니. 회고록을 적는 건 사용자 고연주의 자유지만 호칭만큼은 조속한 수정을 요구하겠습니다. - SeraphPS. 그때 해주셨던 말씀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미처 메시지로 전하지 못했던 말을 할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 얼씨구? 본인까지 납셨어? 싫다면? 섹라프 주제에. 억울하면 그쪽도 마음대로 부르세요~. + 꼬-연-추. - Seraph+ 아하, 중간에 하이픈(-)을 빼고 읽어 보아라. 네가 정말 좋아하는 게 읽힐 게다. - xxxxxxa/ 이 여편네들이 진짜! 아니! 그전에 남의 회고록 멋대로 보지 말라고 했잖아! - 아틀란타 머셔너리 캐슬 『그림자 여왕 회고록』 中 발췌. 가늘어진 눈 틈으로, 흔덕흔덕 흔들리는 눈동자가 흐릿한 빛으로 흐려졌다. 바르르 떨던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가고, 머리도 축 늘어졌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미약하게나마 이어지던 움직임이 뚝 멎는다. 잠시 후, 미세하게 떨리는 흰 손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사내의 얼굴을 살며시 감쌌다. 여인은 그 상태로 한참을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가끔 거친 볼을 조심스레 어루만질 뿐, 깊은 잠에 빠진 사내를 하염없이 응시한다. 차디찬 손바닥에 전해지는 따뜻한 뺨의 온기를 잊지 않으려는 듯이. 그러나 여인이 이 순간의 영원을 바랄수록, 얄궂은 시간은 찰나의 틈도 남기지 않으려 흐르는 속도에 한층 박차를 가한다…. 불현듯 어두운 그림자가 제단을 드리웠다. 언제 들어온 걸까. 짙은 색 코트의 사내가 우두커니 선 채 김수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소환의 방에 두 명의 사용자가 같이 있는 건 드문 일이나 세라프는 동요 없는 눈으로 사내를 마주했다. "오면서 계속 고민했습니다." 살며시 눈을 찡그린 김유현은 느릿하게 무릎을 굽혔다. "정말 이대로 진행해도 되는지…. 차라리 말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나직이 말을 흘리며 김수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름답게 세공된 유리 장식을 다루듯 살살 쓸 듯이 소중하게 쓰다듬는다. "나중에 전말을 알려주면 굉장히 원망할 겁니다." 일말의 후회가 묻은 어조였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처럼, 지금이라면 되돌릴 수 있다는 듯이. "아마 그렇겠지요?" 그러나 세라프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남긴 메시지가 출력되기 시작하면 원망은 오롯이 저 하나로 쏟아질 테니. 그리고…." 말을 멈추더니 양팔로 김수현을 끌어안고 정수리에 고개를 묻는다. "원망은 하되, 이해해줄 겁니다…. 언제가 되더라도 수현이라면 분명히 이해해주리라 믿습니다." 한층 힘주어 말한 천사는 팔을 풀려 했지만, 품에서 갑자기 칭얼대는 소리가 나는 바람에 멈칫하고 말았다. 세라프는 자꾸만 가슴으로 파고드는 김수현을 멍하니 바라봤다. 김유현은 못 말리겠다는 듯 쓰게 웃었다. "지구에서 원래 저랬어요. 몸만 컸지 어리고 야리야리한 성격이죠." "…그렇, 습니까. 아, 제로 코드는…?" 김유현은 상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는 걸 알아챘으나 조용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찾지 못했습니다. 아마 수현이가 가지고 왔을 겁니다." 김유현은 김수현의 주머니로 손을 넣더니 갑자기 움찔 몸을 떨었다. 이내 천천히 손을 빼더니 다른 곳으로 침착히 손을 옮겼다. 괜히 갑옷을 건드리거나 망토를 들추는 등등. 몹시 느릿한 속도로 제로 코드를 찾는 동안, 세라프는 낑낑 보채는 새끼를 억지로 떠미는 어미 새처럼 가까스로 감은 팔을 풀 수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삼십 분. 단순히 구슬 하나 찾는 것치고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윽고 김유현이 처음 뒤졌던 주머니에서 제로 코드를 빼냈을 때, 세라프는 언제나처럼 제단에 앉아 고요히 기다리고 있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지만 세라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침내 결심을 굳혔는지 세라프 본연의 웅혼한 미성(美聲)이 소환의 방을 가득히 울렸다. 이제 더는 시간 끌지 말자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사용자 김유현. 같이 돌아갈 분들은…?" "전원 신전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호를 보면 바로 들어올 겁니다." "통로가 개설되는 건 금방입니다. 유지되는 시간은 짧다고 볼 수 없으나…." "예. 사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사용자 고연주가 그랬습니다. 서로 작별도 끝냈고 준비도 마쳤다고요. 그러니 공연히 시간이 지체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김유현은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일부는 내심 제로 코드가 발동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지만 말이죠." "제로 코드가 반응하지 않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어 그래요? 사실 저도 발동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는데요." "왜냐면 수현의 바람과 우리의 바람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세라프는 부드러운 미소로 말을 이었다. "저는 도우미로서, 사용자 김유현은 제 이 계승권자로서 간접적으로나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 "무엇보다 단순한 통로 개설 여부를 떠나서 수현 스스로 말했습니다. 인간답게,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고…. 말인즉 우리의 요청과 수현의 소망이 동일한 이상, 제로 코드가 반응하지 않을 이유는 하등 없습니다." "…하기야 수현이에게 해를 입히는 요청이었다면 애초 들어줄 리가 없겠지요." 김유현이 씩 웃었다. 그때였다. 한창 달게 자던 김수현이 느닷없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두 남녀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이런, 설마?" "…예상보다 훨씬 빠릅니다. 화정의 기운이 없는 상태라 겨우 잠재우는 데 성공했지만, 수현의 사용자 정보가 워낙 강력한 탓에…." 세라프가 말을 흐렸다. 여기서 김수현이 깨버리면 기껏 준비한 계획이 물거품으로 화할 건 불 보듯 뻔하다. 김유현과 세라프의 눈이 마주쳤다. 기실 준비는 초저녁에 끝난 상황이었다. 단지 서로 아쉬움이 남아 미적미적하고 있었을 뿐. "이제…. 정말 끝이군요…." 김유현이 중얼거렸다. 긴 한숨과도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김유현은 웅크려 누워 있는 김수현을 조심조심 부축해 일으켰고, 구슬을 쥔 손을 쭉 내밀었다. 그리고 세라프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 이 계승권자의 권한으로…." 그 찰나의 순간. "…제로 코드의 발동을 요청합니다." 은은하게 빛나던 제로 코드가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제로 코드의 반응을 확인한 세라프는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사용자 김유현의 요청을 확인했습니다. 25%, 50%, 75% 100%. Loading…. 승인. 요청이 통과됐습니다. 지금 이 순간 Code Name, Zero의 실행을 알립니다." 작업을 처리하면서도 세라프의 시선은 김수현한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김유현은 동생을 더욱 강하게 안으며 정면을 뚫어지라 응시한다. 끄긍, 끄그그긍!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녹슨 기계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아아악! 그와 동시에 김유현의 손을 벗어난 제로 코드가 허공으로 올라가 빛을 폭발적으로 분출했다. 잠시 후, 소환의 방이 새하얀 빛무리로 가득하게 물들었다. 번쩍! 어두운 새벽을 밝히는 빛이 터졌다. 입구 앞에서 초조히 기다리고 있던 머셔너리 클랜원들은 일제히 턱을 젖혔다. 신전의 꼭대기로부터 진한 보랏빛이 치솟는다. 빛무리는 일말의 미련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듯 무시무시한 속도로 하늘로 솟구쳤다. 혜성처럼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더니 눈 깜빡하기도 전에 어둑한 하늘을 밝히며 사라져버렸다. "성공했나 보네. 결국에는." 고연주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뒤를 돌아봤다. 아직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사용자들 너머로 약간 뒤쪽에 서 있는 무리가 눈에 밟혔다. 그중 시선을 마주친 한 명이 성큼 걸어 나왔다. "빨리 안 가고 뭐 해? 신호 왔잖아?" 화정이 날카롭게 외쳤다. 고연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어깨를 웅크리며 키득거렸다. "어머, 보자마자 가라니. 매정하셔라." "놀고 있네. 그럼 서로 껴안고 펑펑 울기라도 할까?" "할래요?" "싫어. 김수현이라면 모를까. 아니 걔도 될까 말까야. 어쨌든 우리가 그렇게 정다운 사이는 아니잖아." 화정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거절했다. 그러나 고연주는 딱히 매몰차다는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썩 꺼지라기보다는, 우리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가라는 어조에 가까웠으니까. "하, 하하. 사, 사실 저희보다 돌아가는 분들이 더 큰 일 아닙니까?" 신상용도 어수룩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 오 년 전으로 돌아가시는 거잖아요? 그, 그리고 제로 코드가 충전돼서 돌아오는 통로가 열리는 것도 오륙 년 후. 즈, 즉 그쪽은 온전히 오륙 년을 기다려야겠지만, 이, 이쪽은 끽해야 일 년?" "…신상용 군.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네만, 그렇게 울먹거리면서 말해봤자 설득력이 없네." 횡설수설을 보다 못한 신재룡이 점잖게 타일렀다. "그래도 전혀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구나." 게헨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저 사내의 말대로 시점이 공교롭게 딱 맞아떨어지지 않느냐. 우리 처지에서는 이 상황이 끝나자마자 돌아오는 통로가 열리는 걸 볼 수도 있다. 정말로." 신상용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더니 팔짱을 끼며 고연주를 바라봤다. "뭐, 고생하거라. 워낙 까다로운 사내다 보니 고생길이 훤할 것 같다만." "걱정하지 마요. 오 년 동안 당신 따위 까맣게 잊게 해버릴 거니까." "흠? 그 세상에 계속 있을 게 아니라면 적당히 까부는 게 좋을 텐데?" "그보다 상심에 빠진 귀여운 따님을 어떻게 달랠지 걱정부터 하시는 게?" 고연주는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받아쳤다. 게헨나는 아차 했다. 이윽고 두 여인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게헨나는 살짝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배웅은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지. 아무튼, 부디 온전히 돌아오게만 해다오. 부탁한다." 고연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을 찡긋하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거기까지였다. 이별은 진작에 마쳤고 신호는 왔다. 시간은 부족한 건 아니지만 끌어봤자 좋을 건 없다. 결국, 남은 일은 하나. "김수현한테 전해! 약속 안 지키면 죽을 줄 알라고!" 마흔 남짓한 사용자는 악을 쓰는 비비앙을 뒤로한 채 신전 안으로 자취를 감췄다. 그리하여 하나같이 우르르 달리는 와중 고연주는 김유현의 기대에 부응해 침착하게 상황을 통제했다. 포탈에 도착해서 일렬로 줄을 세우고, 최소 이 분 간격으로 한 명씩 들여보내기 시작했다. 소환의 방은 애초 천사와 사용자, 이 두 대상을 상정하고 설계된 공간이다. 즉 수십 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없는 장소라 혼잡함을 방지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클랜원 중 일부는 순순히 통로로 들어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언니. 나…." "여기까지 와서 왜 이러니. 어차피 돌아올 거잖아." "하지만…." "그럼 남을래? 기다리기 싫으면 여기 계속 있어도 돼. 그렇게 할 거야?" 중간중간 주저하는 사용자를 어르고 달래던 고연주는, 약 한 시간 반이 지나고 나서야 전부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었다. 길게 늘어져 있던 줄이 사라지자 어둠에 휩싸인 신전의 복도는 을씨년스러우리만치 적막해졌다. 최후로 들어가기에 앞서 마지막 남은 여인은 뒤를 돌아봤다. 이미 긴 통로를 지나쳐온 만큼 무언가 보일 리는 없을 터. 그러나 고연주는 갑자기 인상을 썼다. "하여간, 손 많이 가는 남자라니까!" 그 한 마디만 남긴 채 빛으로 뛰어들었다. 포탈을 빠져나온 고연주가 볼 수 있었던 건, 소환의 방 중앙을 차지하는 처음 보는 보랏빛 포탈 하나. 그리고 제단에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는 아름다운 천사였다. 고연주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날 밤. 아틀란타의 하늘은 새벽 중 총 마흔두 번 빛을 쏘아 올렸다. …아니, 정확히는 마흔세 번. ====== 작품 후기 ====== 에필로그가 끝난 후, 외전은 2회 정도 예정돼 있습니다. 외전 1은 안솔의 일기(현대에서 있었던 일을 일기 형식으로 풀어내는 내용입니다.), 외전 2는 5년 후의 홀 플레인을 다루는 내용입니다. :) 외전 1은 안솔의 일기(현대에서 있었던 일을 일기 형식으로 풀어내는 내용입니다.), 외전 2는 5년 후의 홀 플레인을 다루는 내용입니마흔두 개의 보라색 빛무리가 차례대로 하늘로 치솟은 후, 한 푸른색 빛무리가 신전의 꼭대기로 떨어졌다고 한다. < --에필로그 3. Dreams And Reality.-- > 2011년 12월 6일. 대한민국. 오전 11시 45분. 차가운 삭풍(朔風)이 예리하게 스치는 잿빛의 계절. 중천의 해가 쬐는 강한 광선 덕분에 희미하게나마 햇빛을 느낄 수 있는 정오 즈음이었다. 약간의 구름이 낀 한낮의 도시는 부산했다. 사 차선 도로는 차들이 쉴 틈 없이 교차한다. 학교가 일찍 끝난 초등학생들은 교문에서 우르르 몰려나오고, 직장인들은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고민하며 거리를 활보한다. 그리고 떠들썩하게 웃으며 자전거를 타는 대학생들 등등. "공강이라니 신 난다!" 두꺼운 파카를 껴입은 청년이 활짝 웃으며 외쳤다. 흰 입김을 후후 불며 힘차게 페달을 밟더니 선두로 나가며 뒤를 돌아봤다. "아, 우리 어디 갈까?" "노래방." "야 인마!" "왜." 뒤에서 느릿느릿 따라오는 놈 좀 생각해라. 방금 노래방에서 아르바이트 끝내고 나오던 놈 잡아서 억지로 끌고 왔잖냐. 안 그래도 가기 싫다고 투덜투덜 댔는데 노래방 가자고 하면 퍽이나 좋아하겠다." "하긴." 일리 있다고 여겼는지 대꾸하던 청년이 끄덕거렸다. 그리고 말했다. "가볍게 당구 한 판 어때?" "저놈 오후 아르바이트 당구장에서 하지 않나. 야야, 이렇게 시간 맞는 날도 흔치 않은데 좀 생산적으로 놀자고." "피시 방은?" "거기도 안 돼. 아마 야간 아르바이트로 할걸?" "뭐야. 노래방도 안 돼, 당구장도 안 돼, 피시 방도 안 돼. 그럼 네가 말해." "어…." 선두의 청년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위 세 장소를 제외하니 갈만한 곳이 딱히 생각나지 않는 대한민국 남자의 현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내놈 셋이서 칙칙한 냄새 풀풀 풍기면서 영화관이나 전시회를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냥 현이한테 직접 물어볼까?" 결국에는 멋쩍게 말한 청년이 브레이크로 자전거를 세우고 뒤를 돌아봤을 때였다. 불현듯 후방에서 반사된 보랏빛이 거리를 번쩍 비췄지만,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 사라져버려 두 청년은 조금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단지 청년이 의아하다 느낀 건 따로 있었다. "너 어디 가고 싶은 데라도…?" 부지불식간 쌩, 하고 자전거가 스쳤다. 청년은 아슬아슬하게 지나치는 자전거를 따라 멍하니 시선을 이동했다. 일직선으로 쭉 나가던 자전거는 돌연 좌우로 위태하게 흔들리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지고 말았다. 덩달아 안장에서 튕겨 나간 안현은 갑자기 머리를 부여잡고 격한 신음을 지르며 인도를 뒹굴었다. "어, 어, 어, 어, 안현!" "야, 야! 괜찮아? 왜 그래!" 사실 겉으로만 보면 흔한 일이다.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지는 일 따위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지 않는가. 두 청년을 제외한 주변 사람들이 관심은커녕 한 번 쳐다보고 지나가는 게 그 방증이었다. 단지 공교로운 점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하나 있기는 있었다. 안현이 쓰러진 인도의 건너편 거리에서 한 여인이 주저앉아 숨넘어갈 듯 비명을 중이었다. "아아, 아아아아…!" "정, 정하연 씨?" "아파…! 머리가,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정신 차려요! 아, 안 되겠어. 지금 바로 119에 전화해!" 두 남녀의 공통점은 보랏빛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진 후 느닷없이 두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는 것. 또 동시에 발생했다는 점도 나름 기이하다면 기이하다고 볼 수 있을 터. 그러나 정작 문제는 방금 사태가 이 거리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선생님! 선생님! 안솔이 울어요!" "뭐? 또 왜." "모, 모르겠어요. 갑자기 아프다고…." "허 참…." 학원에서도. "아악…! 아아아악…!" "유, 유정아? 이유정!" "아파…. 아파아아아악…!" "어떡해 어떡해! 누, 누가 여기 좀 도와주세요!" 도서관에서도. "뭐야? 저기 왜 저렇게 사람이 모여 있어?" "아, 너 싸가지 알지? 갑자기 신중도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나 봐." "싸가지? 김한별? 왜?" "몰라. 아무튼, 꼬시네. 킥킥." 대학에서도. "한 이사님. 방금 정산 보고서…. 하, 한 이사님?" "끅…!" "세상에, 무슨 땀을 이렇게…! 괜찮으세요? 구급차 부를까요?" "……!" 회사에서도. 보랏빛이 밝혀진 곳이라면 어느 장소든 가리지 않고 사건이 발생했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하기 직전인 어느 기차에서도 여지없이 보랏빛이 스쳤다. 카메라 플래시처럼 터진 빛의 근원은 창가에 기대 곤히 자는 사내였다. 물론 이번에도 기차 안 승객 중 누구도 이변을 눈치채지 못했다. 잠시 후. 사내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감겼던 눈이 살며시 벌려지더니 빠르게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한다. 한참을 깜빡거리다가 무언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미간이 살그머니 좁혀졌다. "……?" 한데, 그뿐이었다. 아주 살짝 당황한 눈빛을 하고 있을 뿐, 그마저도 곧 침착히 가라앉았다. 비명은커녕 신음조차 들리지 않는다. 두통도 호소하지 않았다. 심지어 전체적인 얼굴빛은 편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꿈. 꿈을 꿨다. 꿈이 으레 그렇듯이 깨고 나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느낌만이 어렴풋하게나마 남아 잔향처럼 감돌 뿐. 뭐, 꿈 따위 아무래도 좋다. 문제는 아직도 꿈을 꾸는 중이라는 것이다. 세라프의 무릎을 베고 불가항력으로 잠든 것까지 기억나는데, 눈을 뜨니 기차 안이다. 정확히는 전역하고 돌아가는 날, 기차 안. 말인즉 확실히 꿈이다. 하지만 난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왜냐면 일이 년 전 비슷한 꿈을 꾼 적이 있으니까. 아마 지옥으로 끌려들어 갔을 때 꿨었지? 내용이 어땠더라. 반사적으로 옆자리를 쳐다봤다. 그러나 텅 비어 있는 걸 보니 예전에 꿨던 꿈과 마냥 똑같지는 않은 것 같다. 그 꿈에서는 유현아가 옆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어쨌든, 또…. - 승객 여러분. 우리 열차는 이 열차의 종착역인 서울역, 서울역에 도착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실내를 울리는 방송이 울렸다. 아, 맞아. 방송도 나왔었어. 멘트는 약간 달라진 것 같지만. 이제 곧 기차가 서울역에 도착한다. 기차에서 내려서 역에 서 있으면 하늘에서 비가 쏟아진다. 난 비를 맞고 꿈에서 깼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이 정도였으리라. - 오늘도 우리 철도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아." 이번에도 똑같이 깰 거라 장담할 수 없지만 자각몽에 어울려주는 것도 괜찮겠지. 설령 꿈이 아니라 환영이라도 상관없다. 제 3의 눈이 있는 이상, 그리고 꿈이라는 걸 아는 이상 해제하는 건 금방이다. 좀 기다렸다가 영 끝날 기미가 안 보이면 그때 사용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힘 있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였다. 철그렁! 복도로 나가려는 찰나 몸에서 무거운 쇳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승객 여러 명이 날 힐끔거리며 수군거렸다. 엉겁결에 아래를 내려다보자 거무튀튀한 치우천왕의 갑옷이 보였다. …뭐지. 전역하고 돌아가는 중이니 군복일 줄 알았는데. 덜컹덜컹, 덜컹덜컹! 문득 기차 속도가 서서히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바퀴가 레일에 부딪히는 소리가 이상하게 선명하다. "……."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천천히 눈을 돌려 차창을 응시했다. 약간 얼룩진 창문은 느릿하게 스치는 서울역의 풍경과 투명한 유리에 비치는 내 모습을 투영하고 있었다. 이윽고 창문에 비치는 형상을 확인하는 순간. "뭐…." 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까까머리가 아니라 상당히 긴 머리카락. 치우천왕의 갑옷. 붉은 망토. 그리고 햇볕을 반사하는 귀걸이, 빅토리아의 영광. 여기까지만 봐도 확실했다.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인간은 군인 김수현이 아니라,- 가시는 목적지까지 안녕히 가시기 바랍니다…. 홀 플레인의 사용자 김수현이었다. ====== 작품 후기 ====== 그러게요. 독자분들 코멘트를 보니 그냥 무난하게 갈걸 그랬나 봐요. ☞☜완결 내고 외전도 끝나면 처음부터 끝까지 싹 리메이크할 예정인데, 필수 수정에 완결도 추가해야 할 듯싶습니다. ㅜ. ㅠ이제 에필로그도 1회 남았으니 우선은 예정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사실 제가 일부러 꼬아 쓴 건 맞지만, 어디까지나 결말 예측을 힘들게 하려는 게 1차 목적이라(그럼에도 불구하고 맞추신 분이 꽤 계시다는 게 함정…. 기억 삭제, 기억 봉인 연막까지 쳤는데 설마 꿰뚫어보실 줄은 몰랐습니다. ㅜ. ㅠ), 결말에 나올 내용은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말인즉 너무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으세요.1. 세라프가 김수현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 --공지사항입니다.-- >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오늘 이렇게 공지를 올린 이유는…. 네…. 휴재 공지입니다. 완결까지 휴재 없이 달리고 싶었는데, 직전에 분량 조절에 실패했습니다…. ㅠㅠ현재 1544 단어(6241 문자)까지 진도가 나갔는데, 완성까지 딱 절반에 불과한 수준입니다. 물론 에필로그를 1회 늘리고 그냥 올릴까 생각해봤지만, 이 내용은 따로 따로 읽는 것보다 완결 끝까지 한꺼번에 읽는 게 더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므로 9월 14일(월요일) 하루 쉬고, 내일 9월 15일(화요일)에 몰아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함이오니 부디 독자분들의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_(__)_ 그러므로 9월 14일(월요일) 하루 쉬고, 내일 9월 15일(화요일)에 몰아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함이오니 부디 현재 1544 단어(6241 문자)까지 진도가 나갔는데, 완성까지 딱 절반에 불과한 수준입니다. 물론 에필로그를 1회 늘리고 그냥 올릴까 생각해봤지만, 이 내용은 따로 따로 읽는 것보다 완결 끝까지 한꺼번에 읽는 게 더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언뜻 정신을 차렸을 때 시야로 풍경이 빠르게 스치고 있었다. 칼날 같은 바람이 귀를 차갑게 긁는다. 머리는 사거리를 교차하는 차들처럼 어지럽고, 중간중간 웅성거리는 소란도 거슬렸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냥 무작정 달리기만 했다. 얼마나 달렸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 번도 쉬지 않고 전력으로 달리자, 어느 순간 낯익은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무려 십오 년 만에 보는 우리 동네였다. 낯설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달리는 속도는 줄기는커녕 가일층 가속했다. 홀 플레인에서 수백, 수천 번 집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했으니까. 물론 그 상상은 이렇게 갑작스럽지 않았지만…. 집으로 기억하는 연립 주택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듯 계단을 올라 현관문 앞에서 멈추자, 쿵쿵 고동치는 심장이 느껴졌다.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잠금이 풀리는 문을 조심스레 열어젖혔다. 서서히 드러나는 빛바랜 흰색 벽지를 보며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현관으로 들어가니 눈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도둑이라도 들었는지 상당히 엉망으로 어지럽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주방의 전자레인지는 쩍쩍 갈라져 금이 갔고, 안방의 문고리는 박살 나 구멍이 뻥 뚫려 있다. 부엌도 난리가 났다. 싱크대는 거칠게 잡아 뜯기라도 한 듯 떨어져 있으며 바닥에는 깨진 컵 조각이 흐드러지게 널렸다. "이게…?" 그때 희미한 신음이 얼핏 들렸다. 마력 감지를 돌리고 화장실 문을 젖히자, 악취가 코를 찔렀다. 화장실은 방보다 훨씬 가관이었다. 세면대는 처참히 묵사발이 난 상태였고, 타일은 토사물로 범벅돼 있다. 무엇보다 이 만신창이가 된 공간에 형이 있었다. 변기에 엎어지듯 쓰러져 간헐적으로 신음을 흘리는 중이었다. "형!" 곧바로 다가가 흔들었지만, 헛구역질만 할 뿐, 형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사실 강제로라도 각성시켜 어떻게 된 일이냐 묻고 싶은 생각이 굴뚝이었다. 하지만 심안으로 진정된 마음은 계속 흔들어 깨우기보다 침대로 눕혀주는 길을 선택했다. 한동안 끊임없이 괴로워하는 형을 보고 있다가, 무형의 기운에 이끌리듯이 화장실로 돌아갔다. 온수 조절기를 끝까지 돌리고 샤워기를 틀었다. 찬물이 세찬 소리를 내며 정수리를 적시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뿐이었다. 제 3의 눈은 진작에 발동하고 있었고, 뺨을 쳐도 허벅지를 꼬집어도 정신은 또렷해지기만 했다. 꿈에서 깨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눈을 떴을 때 날은 어둑해져 있었다. 하도 머리가 복잡해 눈을 붙였는데 푹 잠들어버린 듯싶다. 실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홀 플레인이 아닐까 기대했지만, 시야는 면면이 내 방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침내 그리고 그리던 집에 왔는데 별 감흥은 느껴지지 않는다. 감회가 새롭기는커녕 줄곧 의문이 샘솟는다. 상정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세 가지. 첫 번째는 꿈속이라는 것이나, 일단 제외하는 게 좋겠지. 꿈 치고 너무 선명하니까. 감각도 살아 있고 사람의 반응도 굉장히 현실적이다. 두 번째는 환상을 보고 있다는 점이지만, 역시 가능성은 낮다. 정말로 환상이었다면 제 3의 눈으로 이미 해제됐어야 정상이기 때문이다. EX 랭크까지 찍었는데 못 깰 리가 없다. 세 번째는…. "정말 지구로 돌아온 건가." 사실 이성은 이미 그렇다고 외치고 있었다. 단지 감성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뿐. 하지만 여러모로 봐도 세 번째가 확실했다. 형도 지구로 돌아왔다면 집에 도착했을 때 봤던 풍경도 이해가 갔다. 아마 사용자 시절의 경험과 기억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터. 정신적인 혼란을 이기지 못해 그 난리를 쳐놨던 거고. "하…………." 한숨이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 없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이렇게 이상해졌을까. 돌이켜보면 기차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아니, 소환의 방으로 갔을 때부터…. 아니 아니, 식당에서 클랜원들과 만났을 때부터…. 갑자기 딩동 하는 신호음이 들렸다. 책상의 휴대폰 액정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상념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무시했다. 딩동. 딩동. 그러나 삼십 분 후 신호음이 연달아 울리자 마냥 묵살할 수도 없었다. 허공섭물로 휴대폰을 가져오자 문자 세 개가 와 있었다. 첫 문자의 발신인은 모르는 번호였다. 『탄천 계단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탄천 계단? 아, 누가 고백하려나 보다. 잘못 보냈을 거라는 생각에 싱겁게 웃고 말았다. 그러나 두 번째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웃음은 자동으로 멈췄다. 『올림픽대로로 와서 탄천으로 쭉 내려와. 기다리고 있을게.』 왜냐면 발신인이 형이었으니까. 침대를 박차고 나와 확인한 결과 형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내가 자는 동안 의식을 차리고 나간 게 분명했다. 난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섰다. 원래 집에서 올림픽대로까지 걸어서 삼십 분은 걸리는 거리지만, 전력으로 질주하니 오 분도 안 돼서 도착할 수 있었다. "수고했습니다. 일단 병원으로 옮기고…." 세 번째 문자는 지도였다. 위치를 확인하며 탄천으로 내려가려는 찰나 불현듯 말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곳을 둘러보니 계단 아래 서 있는 거무스름한 형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침 사내도 날 보더니 손을 번쩍 들었다. "클랜 로드!" "조승우?" 사내는 조승우였다. 아래로 내려가자 꾸벅 인사하더니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다. "몸은 괜찮으시죠? 이야, 저는 진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사용자 조승우." "예 예. 저 맞습니다. 맞아요." "같이 돌아온 겁니까?" 조승우는 머리를 끄덕거리더니 돌연 날 빤히 응시했다. "클랜 로드. 왜 제가 마중 나왔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괴리를 가장 적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머셔너리 클랜에 가입했을 때부터 비전투 사용자로 활동했으니까요." "예?" "성에서 매일 헉헉거리며 서류 작성에 시달렸는데, 회사에서 보고서 작성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받아들이는 게 비교적 빨랐습니다." "아…." 일리 있는 말이었다. 전쟁, 전투, 탐험보다 행정만 담당했으니까. 괴리가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전투 사용자보다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을 테지. "이쪽으로 가실까요?" 조승우가 왼쪽으로 나 있는 보행로를 가리켰다. 어차피 가야 할 방향이었다. 가면서 이야기하자는 뜻인 것 같은데 거절할 이유는 하등 없다. "지구로 귀환한 사용자는 마흔 명이 좀 넘습니다." 잠시 후, 나란히 서서 걷자마자 조승우가 말문을 열었다. 마흔 명이 좀 넘는다고…. "꼭 돌아올 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맞습니다." 시원스레 인정하더니 안색을 굳혔다. "제가 돌아오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아 물론 적응하는 시간은 필요했지만요. 어쨌든 귀환자들한테 연락하는 거였습니다. 미리 연락처와 집 주소를 받아두기까지 했죠." 안경을 추어올리며 말을 잇는다. "첫 번째로 전화를 돌렸을 때 총 몇 명이 연락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한 절반?" "여덟 명이었습니다." "여덟 명이요?" "예. 우리가 귀환한 시각은 오전 열한 시 사십오 분. 제가 전화하기 시작한 시각은 오후 여섯 시가 좀 안 돼서였습니다. 여섯 시간이 지나는 동안 전화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심신이 안정된 사람이 여덟 명이었다는 겁니다." "……." 난 땅을 쳐다보며 걸었다. 충격이라면 충격이었다. 마흔 명 중에 고작 여덟 명…. "뭐, 결과적으로 전원 무사합니다. 가족이나 친구가 받기도 했고, 나중에 통화가 된 사람도 있으니까요." "설마 아까 통화가…?" "아, 들으셨습니까? 사실 딱 한 명이 끝까지 연락이 안 됐었는데 방금 통화를 받았습니다. 다행히 늦지 않아 가까스로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죠." "잠시만요. 안전 확보? 설마 자살 기도라도 했다는 겁니까?" "예.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 부하 직원을 집 주소로 보냈는데…. 안타깝지만, 예상이 맞았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쯤 병원으로 가는 중일 겁니다." "누가…?" 조승우는 쓰게 웃더니 걸음을 멈췄다. "클랜 로드. 중간에 끊어서 죄송하지만, 나머지는 차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안내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리고 먼빛을 가리켰다. "보행로로 쭉 가시면 됩니다.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정면에는 어둠밖에 없었으나 시력을 높이니 금세 경관이 명확해졌다. 조승우가 가리키는 곳에는 두 남녀가 긴 나무 의자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었다. 형은 예상했지만, 한소영도 있다는 건 의외였다. "…알겠습니다." 망설이는 것도 잠시. 누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신경 쓰이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전원 무사하다 하니 우선 눈앞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성큼성큼 걸을수록 두 형상이 점차 확실해졌다. 형은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아 유유히 흐르는 강을 가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냈으나 약간의 미동도 보이지 않는다. 한소영은 몰라도 형은 전말을 알고 있을 터.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었다. 왜냐면 제로 코드 발동 권한을 가진 사용자는 나 말고 한 명밖에 없으니까. 이윽고 나무 의자가 있는 곳까지 가까이 갔지만 앉지는 않았다. 돌담에 비스듬히 기대 서 있는 한소영과 눈을 맞추고 탄천으로 시선을 돌렸다. 밤을 빨아들인 강물은 오싹하리만치 고요했다. 보는 이로 하여금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할 정도로 시커먼 빛깔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왔구나." 형의 음성은 잔뜩 쉬어 있었다.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가슴을 한 번 추스른 후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난 모르는 사정을 형은 알고 있는 것 같아서." 형은 여전히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내가 보고 있는 걸 알았는지 느릿하게 끄덕거렸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지구로 돌아온 거 맞지?" 형도 또다시 말없이 머리를 주억거렸다. "아마." 그리고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아마 네가 생각하는 게 맞을 거다." 인정하는 말을 들은 순간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양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억지로 주머니로 찔러 넣고 일부러 숨을 힘껏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설마 설마 했는데. "뭐? 형이 나 몰래 제로 코드를 사용했다는 거?"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말을 이었다. "정말 까맣게 몰랐네. 언제부터였어?" 그러나 언성이 점차 높아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형은 이마를 짚더니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알아. 알고 있다. 지금 굉장히 혼란스러울 거라는 거. 그리고…." "됐고, 언제부터였냐고." 형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 빨리 본론을 말하라는 뜻이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비난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꽤 오래전부터 계획한 일이었다. 물론 너 모르게 진행했지." 형은 차분하게 말했다. 침착한 목소리가 까닭 없이 몹시 거슬렸다. 기실 나도 일단 지구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만큼 귀환을 책잡을 생각은 없다. "앞장서서 실행한 것도 나고, 제로 코드를 사용한 것도 맞아."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렇게 일을 벌였다는 건 아무리 삼키고 삼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계획을 세운 건 내가 아니야. 세라프다." "뭐?" "세라프가 계획을 세웠고 난 계획을 실행했다." "……!" 순간적으로 목구멍이 달아올랐다. 가까스로 가라앉혔던 속이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처럼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식당에서부터 꾹꾹 눌러 참았던 거북함이 비로소 한꺼번에 들끓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세라프와 형이 한통속이다?" 그래서인지 저절로 비웃는 어조가 깔렸다. "수현아." "아아, 그래. 물론 이유가 있으시겠지." "……." "말해봐. 얼마나 대단한 계획이길래 이 지랄을 했는지 감도 안 잡히네. 뭐 적어도 들어줄 수는 있으니까." 형 앞에서 이러고 싶지 않은데 자꾸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하지만 제대로 설명하는 게 좋을 거야. 미리 경고하는데 날 위해서라는 말 따위…." "널 위해서였다." 그 순간 간신히 버티던 이성의 끈이 뚝 끊어지는 걸 느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주머니에 넣어놨던 오른손이 형의 멱살을 움켜쥐기 일보 직전이었다. 찰나의 순간, 가까스로 방향을 틀어 뒤의 돌담을 쳤다. 쿵, 막판에 힘을 뺐음에도 불구하고 돌담 전체가 진동하는 소음이 울렸다. 형한테 주먹질을 할 뻔했다. 스스로 하고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형을 노려봤다. "왜." 왜. 단순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왜 그랬어." 형은 비로소 강물에서 눈을 떼고 날 바라봤다. "왜 멋대로…!" "하나만 물어보자." 이번에는 형이 힘없이 말을 끊었다. "넌 왜 날 살렸지?" "뭐라고?" "네가 그랬잖아. 내가 죽기 직전에 날 되살리지 말라 했다며. 하지만 넌 날 살렸어. 넌 왜 그랬지?" "……." "지금 네가 느끼는 기분이 내 대답이겠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형은 그렇게 말했었고 난 유언을 따르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나도 멋대로 행동한 셈이다. 왜냐고 묻는다면 해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날 위해서, 형을 위해서. "물론." 형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잘했다는 건 아니야. 어떤 이유가 있든, 어떤 변명을 하든, 멋대로 행동한 건 사실이고, 분명히 잘못한 일이다. 절대로 부인하지 않으마." 낮은 목소리는 피로에 잔뜩 절어 있었다. 말하는 것도 힘이 드는지 띄엄띄엄 이어졌다. "수현아. 약속하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왜 그래야 했는지. 이 자리에서 전부 가감 없이 밝힐 테니까…." 형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그리고 천천히 머리를 떨구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바로 다음 회 올리겠습니다. < --Epilogue 5. 세라프의 계획.-- > 긴 침묵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우리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난 속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했고, 형은 기력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정적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가끔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머셔너리 로드. 우선 앉아요. 제발." 돌담에서 등을 뗀 한소영이 조심스레 말했다. 명령이라기보다 애원에 가까운 어조였다. 무너지듯 의자에 앉아 애꿎은 연초만 질근질근 씹었다. 잠시 후, 필터가 씹히다 못해 뭉그러졌을 즈음, 형이 느릿하게 머리를 들었다. "…아, 혹시 메시지는 봤어?" "문자?" "아니. 문자 말고." "……?" 형은 "아직 못 봤구나." 라고 중얼거리더니 사용자 정보를 확인해보라고 말했다. 아직 반발심이 가라앉은 건 아니었지만, 순순히 창을 띄웠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이윽고 익숙한 창이 허공에 떠올랐을 무렵 얼핏 이상한 부분이 눈에 밟혔다. 아랫부분에 무언가 작은 점처럼 보이는 것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뭔가 싶어 물끄러미 응시하자,『메시지가 있습니다. (Y/N)』 새로운 창이 홀연히 출력됐다. "메시지?" "역시. 읽어봐." 처음 보는 거라 망설임이 들었지만, 이내 끌리듯이 손을 뻗어 Y를 건드리는 찰나였다. - 사용자 김수현. 순간적으로 펄쩍 뛸 뻔했다. 메시지 창이 뜰 거라 예상했는데 갑자기 머릿속으로 생생한 음성이 울렸기 때문이다. 화정이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 이 메시지를 읽을 때면 수현은 굉장히 혼란스러우실 겁니다. 아마 혼란의 원인이 저한테 있다는 사실도 알고 계시겠지요. 수현이 자초지종을 알게 됐을 때 절 얼마나 원망하실지 생각하면 사실 무섭습니다. 당신에게 미움받는 건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긴 변명을 남기게 됐습니다. 하지만 먼저 말씀드리건대, 제가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한 건 사실입니다. 어떤 변명을 한다고 해도 제 잘못이 정당화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부디 이야기를 들어주시겠습니까? 세라프다. 몇 번을 들어도 세라프였다. 세라프임을 확신하는 순간 바로 귀를 기울였다. - 우선 드리고 싶은 말씀은 현 상황에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저는 당신의 도우미인 만큼, 약관상 사용자에게 위해가 가는 짓은 원천적으로 봉쇄돼 있습니다. 최소한 악의로 이런 짓을 저지른 건 아니라는 점은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세라프는 설령 선의로 거짓말은 했을지언정, 날 잘못된 길로 이끈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형은 말할 것도 없고. 알고는 있지만 이건 좀 다른 문제였다. - 악마와의 전쟁이 끝난 후, 저는 비로소 선택의 시간이 도래했음을 직감했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아마 수현도 복잡한 심경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소환의 방에서 하루하루 기다리는 와중, 수현의 뜻을 알게 된 건 이유정이라는 사용자와 나눴던 이야기를 듣고 나서였습니다. 두 세상을 잇는 통로를 개설한다. 그리고 지구로 돌아가 몇 년 동안 정리하는 시간을 가진 후, 홀 플레인으로 돌아온다. 확실히 나쁜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합리적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어쨌든 한 번은 지구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저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유가 뭐냐고. - 수현도 아시겠지만 홀 플레인의 사용자는 지구의 인간에게서 파생된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서로 동일하면서 구분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둘이 하나로 합쳐질 때, 원칙적으로 파생된 존재가 본체로 들어가는 게 옳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지구로의 귀환은 홀 플레인의 '사용자'가 지구의 '인간'에게 덧씌워지는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즉 '인간'이라는 그릇에 '사용자'라는 물이 새로 채워지는 셈입니다. 세라프의 음성은 성질 급한 아이를 달래듯 차근차근 이어졌다. -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특히 받아들이는 '인간' 처지에서는 필연적으로 괴리가 발생하게 됩니다. 수십 년을 평범하게 살다가, 한순간 알지도 못하는 세상의 경험과 기억을 받아들이는 건 굉장히 무리가 따르는 일이니까요. 일단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조승우도 말하지 않았는가. 마흔 명이 넘는 귀환자 중 응답한 이는 얼마 안 된다고. - 여기서 관건은 지구의 '인간' 김수현이 홀 플레인의 '사용자' 김수현을 감당할만한 그릇이 되느냐는 점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회의적인 입장이었지만 단순히 예상만 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이므로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실험? - 십오 년 전 갓 소환됐을 때의 인간 김수현. 현재의 사용자 김수현. 이 두 자료를 토대로 삼아 일종의 귀환 시뮬레이션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안타깝지만 예상대로였습니다. 결과를 듣는 순간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 한두 번이 아니라, 수천수만 번을 돌렸습니다. 그중에서 딱 한 번이라도 원하는 결과가 나왔다면. 아마 그랬다면 저는 그 방법을 선택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무수한 시뮬레이션의 결과는 단 하나도 예외 없이 전부 동일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비록 시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인간 김수현이 사용자 시절의 경험과 기억을 견디지 못해, 끝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으로…. …수현. 사람의 본성이 형성되는 과정은 관성과 비슷합니다. 버릇이나 습관처럼 오랫동안 반복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익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말인즉 실험의 결과는 하나의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관성이 붙고 붙은 사용자 김수현의 본성은, 아직 때 묻지 않은 시절의 인간성이 붙잡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멀리 가버린 겁니다…. 시뮬레이션의 결과에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라 해야 하나. 속으로는 믿고 싶지 않았으나, 사실 세라프가 걱정하는 부분은 나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유정이 엇나가려는 낌새가 보였을 때, 스쿠렙프를 부셔서까지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는가. 난 이미 늦었지만, 이유정은 아직 늦지 않았다는 생각에. - 몇 날 며칠을 고민했습니다. 때로는 밤을 지새우고, 힘들 때는 동향을 관찰한다는 명목으로 수현을 한없이 구경했습니다. 어차피 시뮬레이션에 불과하니 현실은 다를 것이라는 합리화도 해봤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당신을 아무 조치 없이 보내는 건 안 된다는 생각만 강해졌습니다…. 세라프의 걱정은 공감한다. 무슨 생각으로 어떤 의도로 계획을 세웠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들을수록 의문은 증폭됐다. 이 회차로 돌아온 것도 나고, 제로 코드를 획득한 것도 나다. 무엇보다 당사자 아닌가. 한데 세라프는 어째서 혼자서 끙끙 앓았을까. 아니, 왜 언질이라도 주지 않았을까? - 결국에는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 김수현은 사용자 김수현을 감당할 수 없다고…. 그러나 그때, 한 생각이 벼락처럼 떠올랐습니다. 인정하기 싫었던 명제를 인정하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갑자기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새로운 길? "수현아." 그때 공교롭게도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침 음성도 바로 이어지지 않는 것 같아 옆으로 눈을 돌렸다. 형은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후회해?" "…뭐?" "지금 이 상황을 후회하느냐고." "그걸 말이라고 해?" 뭔 말을 하는가 했더니.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후회하느냐고? "그래." 후회한다. 당연히 후회한다. 미치도록 후회한다. 분명히 지구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지만, 이렇게 돌아오는 걸 원한 건 아니었다. 게헨나가 아무 말도 않고 수나를 데리고 떠났을 때, 난 심한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때 얼마나 게헨나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는가. 한데 자의가 아니라 타의라지만 이번에는 내가 똑같은 짓을 해버렸다. 탁 까놓고 말해서 멋대로 통로를 개설한 것까지는 이해해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제대로 된 이별의 시간을 갖기를 원했다. 그랬다면 어느 정도 감정도 정리할 수 있었을 테고, 비록 회한은 남되 후회는 없었을 테니까.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에라도 홀 플레인으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야." "그래. 그렇구나." 으르렁거리며 말하자, 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날 보며 자기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아, 수현아. 너도 봐서 알겠지만 나는 돌아왔을 때 몹시 극심한 괴리를 겪었다.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지." 멍하니 형을 응시했다. 후회하느냐고 묻더니 이제는 괴리로 화제를 돌린다. 형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런데 말이다." 그때였다. "그런 날 보면서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 형의 말이 이어지는 순간. "생각해봐. 나도 그렇고 돌아온 사용자 전원이 괴리를 느꼈고 고통에 몸부림쳤잖아. 하지만 너는…. 어땠지?" 느닷없이 망치로 머리를 세게 후려 맞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뭐…." 맞다. 어째서. 어째서 이제껏 놓치고 있었던 걸까? 돌이켜보면 기차에서 내 모습을 봤을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다. 왜 군복이 아니라 갑옷을 입고 있었는지. 그리고 왜 아무렇지도 않았는지. 나도 지구로 돌아왔으니 분명히 괴리를 느꼈어야 정상인데…? 간신히 정신 줄을 잡고 형을 바라봤을 때, 형은 더는 날 보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 긴장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조용히 중얼거렸다. "온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형은 빙긋 웃었다. "기대해도 좋아. 아까 내가 왜 그 상태로 너도 조금은 이해할 거다." - 그 새로운 길이란, 인간 김수현에게 사용자 김수현을 덧씌우는 게 불가능하다면. 형과 세라프의 음성이 겹쳤다. 엉겁결에 따라 시선을 올리는 찰나, 돌연 반투명한 창 너머의 하늘을 밝히는 단 하나의 푸른빛이 밟혔다. 푸른 빛무리는 정확히 날 향해 강하하고 있었다. 잠시 후. - 반대로 해서, 사용자 김수현에게 인간 김수현을 덧씌우는 길이었습니다. 세라프의 음성이 이어지는 것과,번쩍! 푸른빛이 정수리로 내려꽂히는 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인간이 사용자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사용자가 인간을 받아들인다…?" 워낙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망연히 뇌까리고 말았다. - 수현은 사용자로서 완전무결했지만, 바꾸어 말하면 인간성을 거의 소실됐다고 봐도 무방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니까 세라프는 날 보내고, 지구에 있던 날 홀 플레인으로 데려갔다는 건가? 그래서 내가 군복이 아니라 갑옷을 입고 있던 거고? - 그러므로 저는 명제를 바꾸어, 수현이 인간 시절에 느꼈던 기억과 경험이…. 세라프의 담담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그리고 형이 경고했던 괴리는. - 사용자 김수현이 상실한 인간성을 되살릴 수 있는, 새로운 불씨가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생각보다, 천천히 찾아왔다. "큭!" 어떤 예고도 없이 찌르는 듯한 통증이 관자놀이를 엄습했다. 통증은 바로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시시각각 커지며 머리를 압박했다. 흡사 무언가를 억지로 쑤셔 넣으려는 것처럼. - 이렇게 마지막 기대를 걸었지만, 사실 이 계획에도 맹점은 있었습니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고 있을 즈음, 이번에는 갑자기 시야가 둘로 나누어졌다가 도로 합쳐졌다. 순간적으로 다리가 풀릴 뻔했지만, 가까스로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 설령 인간성이 무사히 수현 속에 자리 잡는다손 쳐도, 이미 넘쳐 흐르는 사용자 본성에 잡아 먹혀 희석되는 경우도 염두에 둬야 했으니까요. 젠장, 초점이 흔들리니 안 그래도 심하던 두통의 강도가 더 강해지잖아. 이제는 숫제 날 중심으로 세상이 빙그르르 회전하는 것 같다. 이게, 이게 괴리라는 건가? - 그래서 저는 대비책으로, 수현이 홀 플레인을 떠올릴 때마다 후회와 회한이라는 미련을 느끼기를, 그리고 그 감정이 될 수 있으면 크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세라프의 음성은 쉬지 않고 머릿속에 또렷하게 울리고 있었다. - 오 년 동안, 보고 싶은 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원동력 삼아 견뎌낸 수현이,오 년 후, 돌아가는 통로가 열렸을 때. 그 순간 갑자기 무게 중심이 푹 꺼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고통과 어지러움의 합동 공격을 이기지 못해 결국 무릎 꿇은 것이다. 좌우에서 황급히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으나, 나는 털썩 엎어져 쓰러지고 말았다. - 왜냐면 그것이 수현이 바랐던 진정한 인간다움일 테니까…. 그리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바로 다음 회 올리겠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무게 중심이 푹 꺼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고통과 어지러움의 합동 공격을 이기지 못해 결국 무릎 꿇은 것이다. 좌우에홀 플레인이 살육과 전투 욕구를 마음껏 해소할 수 있는 장소보다는,회포를 풀 수 있는 고향으로 생각해주기를 바랐던 겁니다. < --Epilogue 6. Memorize(完).-- > 진심으로 이상하다. 음~.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일단 하나씩 상황을 정리해보자. 난 분명히 오늘 아침 전역 신고를 하고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그리고 붕 뜬 기분을 즐기며 자리에 앉은 후 잠이 들었지. 좋아, 여기까지는 완벽해. 그런데…. "……." 왜 눈을 뜨니까 회색 공간에 있는 거지? 또 어째서 난생처음 보는 아름다운 천사의 무릎을 베고 있는 거고? "왁." 눈이 마주치자 천사가 살며시 웃는다. 아유, 예뻐라. 살 떨릴 정도로 아름답잖아. 헤헤…. 아니, 잠깐만. 이럴 때가 아니지. "여, 여긴 어디야?" 벌떡 일어나서 묻자 천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어서 천연덕스레 고개를 갸웃하기까지. "너, 넌 누구세요!" 한 번 더 묻자 천사가 킥킥 웃는다. 와, 어째 웃는 모습도 저리 기품이 넘치지. "여기는 독립 공간 홀 플레인, 그리고 저는 천사 세라프입니다." …아니. 순순히 말해줘서 고맙기는 한데, 그렇게 말해봤자 못 알아듣는다고. 흠. 우선 팔짱부터 끼고 생각해보자. 아, 혹시 꿈인가? 짝! 스스로 힘차게 뺨을 때렸지만 깨지 않는다. 일단 꿈은 아닌 것 같고. 아씨, 그나저나 아프잖아. 좀 살살 칠걸. "다음에는 소리 지르면서 뛰어다니실 겁니까?" 헉. 어떻게 알았지? "귀신?" "천사 세라프입니다." 혹시 말실수했나? 목소리가 약간 화난 것 같아. 후, 침착하자. 당황하면 지는 거야. "조, 좋아요. 천사 세라프 씨. 일단 궁금하니 묻겠는데, 제가 왜 여기 있는 거죠?" "납치했습니다." 어이쿠, 그러세요. 참 시원하게도 인정하십니다그려. "그렇군요. 그럼 그냥 돌려보내 주시면 안 될까요?" 물론 안 된다고 하…. "네. 그러겠습니다." 어이. …………뭐지? 난 어느 장단에 춤을 추면 되는 거지? 아차, 설마 희망 고문으로 농락하려는 건가? "저, 정말요?" "네." "정말이죠? 정말 돌려보내 주는 거죠?" "Yes." "무르기 있기 없기?" "없기." 막판에 농담을 던졌는데 제대로 먹혔는지 천사가 또 한 번 입을 가리며 쿡쿡 웃는다. 예쁘긴 진짜 예쁘네. 색시 삼고 싶다. "…참, 십오 년 전에는 이렇게 해맑고 사랑스러웠는데…." 응? 방금 혼잣말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감사합니다. 덕분에 옛 향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니…. 뭐…." 에이, 칭찬받으니까 괜히 쑥스럽잖아. "그런데요. 이럴 거면 애초 왜 납치." "아, 이제 슬슬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곧 통로가 닫힐 것 같으니까요. 그리고…." 그때 천사가 내 말을 끊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지만, 난 순간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뭐라고 해야 하나. 아까 무릎을 베고 있을 때는 천사한테서 빛이 나는 것 같았는데, 지금 보니 날개로 추정되는 부분이 시꺼멓다. 검정으로 변색한 것뿐만이 아니라, 스러지듯 희미해지며 잿가루가 흩날린다. 한데 그럴수록 후광은 점차 강해지니 이 무슨 역설적인 형상이라는 말인가. 꼭 소멸 직전의 타락 천사를 보는 것 같잖아. 이윽고 변색 범위가 어깨까지 침범했을 즈음,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저…." "네?" "괜찮으세요?" "……!" 천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약간 아련한 느낌의 미소를 지었다. "놀라지 마세요. 어차피 예정된 일이었으니까요." "예정…. 이요?" "네. 왜냐면 수현의 회귀 요청 때 저는 포함돼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도우미의 권한으로 제로 코드에 따로 요청했었고, 다행히 받아들여졌습니다. 즉 제로 코드의 요청에 정식으로 포함된 존재가 아니라 편승한 존재라는 뜻이지요." "……." 어, 어려워. "그에 따라 수현의 목적이 이루어진 지금, 수현을 물심양면으로 돕겠다는 제 맹세도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더 존재할 의의가 사라졌으니 순리를 따르는 게 당연합니다." 뭔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냥 가만히 들었다. 왜인지 나한테 하는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이윽고 천사는 내 옆구리에 팔짱을 끼더니 자줏빛이 넘실거리는 타원형 관문으로 이끌었다. 게임에서 자주 보는 포탈처럼 생긴 관문이었다. 신기하기도 하지. "여기로 들어가면 되나요?" 천사는 고개를 끄덕였고, 난 스리슬쩍 오른발만 담가 봤다. 뜻밖에도 기분은 상당히 괜찮았다. 고요히 물결치는 바다에 발을 집어넣은 느낌이랄까? "이야! 이거 상당히…?" …어? 뭐야. 이 천사 왜 이래. 아까는 어깨까지였는데, 벌써 목까지 변색했다. 가슴도, 팔도. 왜 이렇게 빨라? "인간 김수현." 그러나 천사는 잔잔한 미소로 말했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어서 들어가라는 듯 등을 살짝 떠밀면서 말을 잇는다. 어어, 잠시만요. 부탁할 거 있다면서 떠밀면 어떡해. 이윽고 몸이 순식간에 반쯤 들어갔을 때, 난 간신히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부드러이 내 몸을 떠미는 천사는 어느새 절반으로 후광으로 가려져 있었다. "무, 무슨 부탁이요?" 간신히 말을 꺼냈다. "사용자 김수현에게 전해주세요." 고요한 음성이 돌아왔다. 너무 센 빛무리에 눈을 찡그렸지만, 조용히 달싹거리는 입술은 어렴풋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당신을…."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저 멍한 기분으로 온몸의 감각에 집중했다. 일단 머리를 쪼갤 듯한 격통은 어느 정도 참을만해 졌다. 세상이 돌아가는 것 같던 어지러움도 견딜만하다. 물론 아직 끝나지 않은 것도 하나 있었다. - 수현…. 바로 세라프의 목소리였다. 괴리를 받아들인다는 건 세라프의 말대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형이 가구를 망가트리거나 여기저기 구토를 했던 건 엄살을 부려서가 아니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사용자도 절대 과장이 아닐 것이다. 세라프가 말했던 시뮬레이션도 이제야 믿음이 갔다. 직접 겪어본 결과, 난 '그냥 돌아가겠다.' 고 했던 생각이 얼마나 안일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사용자 김수현으로서 인간 김수현을 받아들이는 게 이 정도인데, 아마 원래대로 돌아갔다면…. 세라프는 괴리가 시작됐을 때부터 하염없이 날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목소리 덕분에 난 정신 줄을 붙잡을 수 있었다. 우연한 일치겠지만, 괴리 중간중간 의식이 끊기려 할 때마다 세라프는 또렷한 음성으로 날 불렀다. 지지 말라는 듯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인간 시절의 경험과 기억을 하나하나 음미해보라는 것처럼. 그래. 성공했어. 성공했다고. 계획의 성공 여부는 스스로 판단할 수 있었다. 지금 내 내면에는 익숙한, 그리고 낯선 감정이 바다처럼 흘러넘치고 있었다. 무엇보다 까맣게 잊었던 슬픔이라는 감정이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그 방증이었다. 물론 이 불씨가 앞으로 활활 타오를지, 힘없이 꺼져버릴지, 아니면 사용자 본성과 섞이지 못하고 충돌해 정신을 붕괴시킬지는 나 하기에 달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사용자 김수현을 본체로 바꾸고, 인간 김수현을 덧씌워 새로운 불씨를 불어넣겠다는 세라프의 계획은 분명히 성공한 것이다. 그때. - 실은 말할까 말까,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때 가없이 이름만 부르던 세라프가 말하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귀를 기울였다. - 이 메시지를 듣고 계시다는 건 우선 안착에는 성공하셨다는 뜻이겠지요. 축하드립니다. …아니, 축하드릴 자격은 없겠지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제멋대로 판단했고, 독단으로 행동했습니다. …그래, 잘 알고 있네. 만약 세라프 덕분에 원하는 바를 이룬다고 해도 이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일단 오 년 동안 기다렸다가, 홀 플레인으로 돌아가면 톡톡히 빚을 받아낼 것이다. 진심으로. - 이 점 당신께 진심으로 죄송하며 용서받지 못할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워하셔도, 원망하셔도 들 낯이 없지만…. 그래도 수현이 괜찮다면 돌아가기 전에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응? 돌아가기 전에? '네. 왜냐면 수현의 회귀 요청 때 저는 포함돼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도우미의 권한으로 제로 코드에 따로 요청했었고, 다행히 받아들여졌습니다. 즉 제로 코드의 요청에 정식으로 포함된 존재가 아니라 편승한 존재라는 뜻이지요.' '그에 따라 수현의 목적이 이루어진 지금, 수현을 물심양면으로 돕겠다는 제 맹세도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더 존재할 의의가 사라졌으니 순리를 따르는 게 당연합니다.' 이 기억은 뭐지? 아, 세라프는 날 지구로 보내는 동시에 지구에 있던 날 홀 플레인으로 끌어갔다. 그럼 그놈과 세라프가 나눴던 이야기의 편린일 수도…. 잠깐만. - 수현. 사실 저는 계속 홀 플레인에 남고 싶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원하는 수현을 볼 날을 기다리며 즐겁게 기다리고 싶었습니다. 변한 당신이 어떤 삶을 살지 지켜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일 회차 제로 코드에 했던 맹세가 끝난 이상 이룰 수 없는 바람이며, 이 사실은 지금 이 메시지를 전하는 순간에도 너무 괴롭기만 합니다. …세라프? - 하지만 수현. 저는 언제까지 당신을 기억하고 싶고, 기억할 것입니다. 세라프. - 그리고 저는…. "……." - 당신을…. "…당신을?" 세라프…? 말해. 말하라고. 말해줘. 듣고 있으니까. "세라프?" 간신히 입을 열어 소리 내 불렀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세라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음성은 없었다. 마치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종료한 것처럼. 혹시 몰라 사용자 정보 창을 켰다. 그러나 아까 봤던 반짝거리는 점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 끝난 건가? 이게 끝이라고? 이딴 짓을 해놓고? 사과한다고 끝나는 건 아니잖아? 최소한…. "…어." 그때 난 스스로 필요 이상으로 감정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심안이 발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은 평소 이상으로 들끓고 있었다. 하지만 왜인지 가라앉히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솔직히,…분했다. '헤헤, 죄송해요! 서운해서 잠깐 투정 좀 부려봤어요! 그래도 괜찮죠? 아니! 괜찮을 거죠?' '에이, 괜찮잖아요. 괜찮을 거라고 말 좀 해봐요. 형은 최강이잖아요. 무엇이든 질 리가 없잖아요!' 왜. '분명히 괜찮을 거예요, 분명히. 제 행운을 걸고 맹세해요!' '그렇죠? 오라버니. 내 오라버니!' 왜 좀 더 일찍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좋아! 정 그렇다면 약속은 좀 미뤄주지 못할 것도 없지! 가뿐히 끝내고 빨리 돌아와! 알겠지?' '여기서…! 계속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응?' 녀석들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렇게 말한 것일 텐데. '수현과 좀 더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냥 할 말만 하고, 들을 말만 듣고 가시는 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조금만 신경 썼다면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텐데. 최소한 걱정하지 말라는 한 마디만 할 수 있었다면…. "사용자…?" "늦어서 죄송…." 불현듯 먼 곳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아마 심야에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이겠지. "……." 마냥 쓰러져 있을 수는 없으니 그만 일어나야겠다. 아직 띵한 현기증은 남아 있었지만, 삐걱거리는 팔을 억지로 움직여 땅을 짚었다. 천천히,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기실 힘만 주면 금방 몸을 일으킬 수 있겠지만, 일부러 속도를 늦췄다. 하지만 두 발을 땅에 디딜 때까지 내가 기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수현, 수현 부르던 음성만이 귓가에 아련하게 메아리 칠뿐…. 결국에는 긴 숨을 토해내며 눈을 들었을 때였다. "……?" 문득. 화아아악…! 빛이 보였다. 어둑한 하늘을 밝힐 정도의 환한 빛이었다. 환상인지 기억 속의 광경인지는 모르겠다. 비록 휘황찬란한 광채에 모습이 거의 가려져 있었지만,부딪쳐 흩어지는 물보라처럼 차츰차츰 빛 가루를 날리고 있었지만,눈앞의 빛은, "세라프." 세라프였다. 그것은. "세라프!" 아주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다. '인간 김수현.' 흩날리는 빛은, '사용자 김수현에게 전해주세요.' 바람에 실려, '당신을….' 돌아설 듯 날아가며, '정말로, 좋아했어요.' 하늘로 멀리멀리 휘날렸다. 턱을 끝까지 젖힐 때까지, 무수한 빛무리는 나비처럼 노닐며 밤하늘을 은은하게 수놓는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빛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세라프의 모습도 사라졌다. 하지만 난 세라프가 있었던 하늘을 우두커니 응시했다. 몸을 일으킬 때 희미해졌던 감정이 다시금 북받쳐 오르는 걸 느꼈다. "형…." 낯익은 목소리였다. 어느새 웅성거리는 소음은 사라져 있었다. 그 대신 인근에는 형과 한소영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날 사방에서 에워싸고 있었다. 여전히 턱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겨우 눈을 내려 주변을 확인했다. 그러나. "어…."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시야가 불선명하다. 마치 물속에서 보는 것처럼 풍경은 거세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오라버니…." 빠르게 눈을 깜빡거리자 안솔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뿌옇게 흐려졌다. 웃고 싶은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어깨를 들먹이고 싶은데. "…아." …그런데 왜 목마저 메는 걸까? 숨을 있는 힘껏 들이켰다가, 크게 내쉬었다. 한 번, 두 번, 아니 몇 번이고 반복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숨은 더욱 억세게 떨려가고 있었다. "머셔너리 로드." 누군가 살며시 가까이 다가왔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한소영이었다. 천천히 손을 뻗더니 살짝 끌어 쥔 소매로 조심스레 내 눈을 쓸었다. 꼭 눈물이라도 훔치듯이. 시야에 잡힌 한소영은 역시나 금세 어슴푸레하게 흐려졌다. "지금 머셔너리 로드가 느끼는 그 감정…." 문득. 툭. 눈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라. 이건, 뭐지?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요." 부드러운 음성은, 내 눈을 지그시 감기고 고개를 아주 살짝 떨구게 했다. 툭. 그러자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툭, 툭. 눈에서 흘러내리는 따뜻한 액체를. "그래요." 눈에서 흐르는 줄기가 뺨을 지나 턱을 거쳐 순식간에 떨어지는 느낌은, "그게 우는 거예요." 비록 짧지만, "당신이 궁금해했던." 다시는, 다시는 잊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눈이 떠지지 않았다. 입도 떨어지지 않았다. 난 한동안 소리 죽여 울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2012년 12월 12일 메모라이즈 연재 시작.2015년 9월 15일 메모라이즈 연재 완결. 우선 생각보다 업데이트가 늦었던 점 진심으로 사죄 드립니다. 마지막에 딱 자정에 올려서 멋지게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에필로그가 꼬여버리면서 훨훨 날아갔습니다. ㅜ. ㅠ하나 변명을 드리자면 중간에 내용이 한 번 날아갔습니다. 전부는 아니고, 에필로그 5의 절반 정도 분량이었습니다. 제가 연재를 하면서 이런 적이 딱 두 번 있었는데, 오늘로 세 번째네요. 순간 정신이 붕괴될 뻔하다가, 겨우 추스르고 다시 적었습니다. 아무튼, 거의 3년 전에 시작한 작품을 이제야 끝맺었네요. 사실 노블레스 첫 처녀작이다 보니 글 솜씨가 미숙하기도 했고, 전달하고자 했던 내용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번 에필로그를 적으면서 가장 강하게 느꼈습니다. 김수현이 인간성을 되찾는 내용을 좀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싶었는데, 되도 않은 떡밥 뿌리고 연막 친다고 독자분들의 원성만 샀지요. 에필로그를 적으면서 그냥 무난하게, 담백하게 갈걸 이라고 몇 번이나 후회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작가가 소신껏 적는 것도 중요하지만, 독자분들이 이해하지 못하면 의미 없다는 점을 배운 것 같아요. 어느 독자분 말씀처럼요. 하지만 이렇게 많이 부족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독자분들이 많이 아끼고 사랑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노파심에 말씀드리면, 세라프는 퇴장(?)하지 않았습니다.982화 초반 부분을 보시면 이해가 가실 듯하네요. 하하. 메모라이즈는 기본적으로 여기서 완결이지만, 예전에 말씀드렸듯이 외전이 2회 준비돼 있습니다. 외전 1은 원래 안솔의 일기 형식으로 가려고 했지만, 생각을 바꿔서 현대 내용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외전 2는 예정대로 5년 후, 홀 플레인으로 돌아가는 내용입니다. 이것 외에, 혹시 독자분들이 보고 싶으신 외전이 있으시면 코멘트로 적어주세요. IF 버전도 좋습니다. (EX ? 카오스 미믹에서 사탄이 소환됐었다면?)제가 해야 할 일도 있고, 또 내년에 학교에 복학하면 졸업반이라 정기적인 연재는 약속드릴 수 없지만, 가끔씩 업데이트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차기 작품은 생각 중에 있습니다. 총 세 개 중에서 두 개로 좁힌 상태입니다. 하나는 게임 소설이고 하나는 현대 마법사인데, 좀 고민해봐야 할 듯싶습니다. 아, 비주얼 노벨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현재 제작 중에 있습니다. 얼마 전에 조아라에 다녀와서 잠깐 보기도 했어요. ㅎㅎ아마 이르면 올해 12월, 늦으면 내년 초쯤에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후기 적기 전에는 여러 말씀을 드리고 싶었는데, 막상 적고 보니 횡설수설한 기분입니다.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자꾸. 외전은 9월 17일(목요일)부터 업데이트할 예정입니다. (하루는 쉬고 싶어서요. ^^;)외전 내용은 아마 한없이 가벼울 것 같으니 부담 없이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미리 양해를 구하는데…. 약간 좀 그럴 수도 있습니다. (?)외전 아니면 쓸 기회가 없는 내용이 들어갈 수도…. 흠흠. 그럼. 그동안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독자분들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2015년 9월 15일 화요일 17시 38분 로유'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