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 옛이야기들 제목 - 만렙으로 사는법 연재한 곳 - 네이버 베스트리그 만든이 - 주님 만든 날짜 - 16.02.02 만든 작품 - 28번째 작품입니다. 한 마디 - 재배포 상관없고 만든이 지우지 마세요. ──────────────────────────────────── 로그인 캡슐을 통해 게임에 접속하는 순간은 기묘했다. 눈동자 안으로 오색의 빛이 쏟아지고, 우주 공간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부유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다음 순간 흐릿해졌던 시야가 맑게 개며 익숙한 목소리가 세영을 반겼다. <혼세마왕님, 마법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느새 세영이 있는 곳은 중세처럼 느껴지는 어느 도시의 광장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 요리를 태웠는지 매캐한 탄내가 이국적인 향취에 섞여 밀려왔다. 뺨을 스치는 바람과 돌바닥에서 전해지는 단단함까지 현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뇌파 동조 시스템이 일으킨 기적이었다. 가상현실. 뇌파캡슐 속에 몸을 눕히는 것만으로 환상을 현실로 바꿀 수 있었다. 끝내주는 미인이 되고, 날개로 하늘을 날고, 동물로 변신하고, 금화 속에서 헤엄을 친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곳, 세상에 다시없는 쾌락을 경험할 수 있는 곳. 그것이 가상현실의 세계였다. 하지만 빈약한 상상력에 질린 사람들은 금방 새로운 것을 원했다. 천편일률적인 환상이 아니라 현실과 닮은 또 다른 세계에서 지금과 다른 삶을 살고 싶어 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아르카디아 온라인. 현실 같은 환상을 제공하는 대표적인 VR-RPG였다. 세영은 올해 10주년을 맞이한 이 게임을 클로즈베타 시절부터 함께한 올드비 유저였다. <요거요거링: 마왕 언니!!!> 띠링 소리와 함께 시야의 한구석에 길드 채팅창이 떴다. 길드창을 열어 접속 중인 사람들을 확인한 세영이 인사를 날렸다. <혼세마왕: 요거 안녕!> <승천흑염룡: 혼세 누나 오셨어요?> <혼세마왕: 염룡이! 요새 왜 이렇게 안 들어와ㅠㅠ> <승천흑염룡: ㅈㅅㅈㅅ 어제 기말고사 끝남ㅠㅠ> 잠시 기다렸지만 요거요거링과 승천흑염룡 외에 답을 해주는 이는 없었다. 다들 접속한 채로 잠수를 타거나 딴짓 중인 모양이었다. 게임 컨텐츠를 다 소비해버린 중견 길드의 일상풍경이었다. 맥이 빠진 세영이 뺨을 긁적이는 순간이었다. <요거요거링: 언니! 왜 이제 온 거!!!> <혼세마왕: 읭? 무슨 일인데?> <요거요거링: 나 사막. 주웠다. 초보.> 초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채팅창에 기적이 일어났다. 기상나팔이라도 울린 것처럼 잠수 중이던 길드원들이 모두 튀어나왔던 것이다. <딸기겅쥬☆: 초!> <딸기겅쥬☆: 보!> <친친칠라: 헉!!!!?> <곤잘라스: 진짜 늅늅뉴비?> <엄빠쿵해쪄: 그초있?> <암흑제천: 좌표> <노란무지: 어디?> <승천흑염룡: 요거님 어디예요?> <불수의근: 좌표> <친친칠라: 님 어디?> 대화창이 어찌나 쭉쭉 올라가던지 따라 읽기가 힘들 정도였다. 모두가 동지섣달에 꽃 본 듯이 난리를 쳤다. 세영의 반응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뉴비라니. 10년 차 게임에서는 환상의 생물과 동급인 단어였다. <요거요거링: ㄲㄲㄲ 마왕 언니께 진상할 거임> <혼세마왕: 이 뉴비는 이제 제겁니다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겁니다> 흘러내린 침을 닦은 세영이 소유권을 주장했다. 사실 초보를 독점할 생각은 없었지만, 제가 온 것을 본척만척한 길드원들에게 작은 앙심이 있었다. 순순히 나눠 갖자고 말하기가 싫었다. <엄빠쿵해쪄: ㅎㅇㅁ> <승천흑염룡: 누님 한입만 주세요!> <불수의근: 와 치사하다> <딸기겅쥬☆: 쉐어합시다> <암흑제천: 쉐어222> <노란무지: 쉐어33344444455555555> <곤잘라스: 줄444444444> <친친칠라: 나 지금 포탈!!! 빨리!!!> 성격이 급한 친친칠라는 포탈 스크롤을 찢었다며 자기도 끼워달라고 칭얼거렸다. 잘못했다간 선점권을 뺏기겠다는 생각이 든 세영은 마음이 급해졌다. 누구보다 빠르게 어린 양을 품에 끼고 자신을 의지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녀는 물품보관소로 달려가며 귓속말을 날렸다. <혼세마왕: 요거야 지금 어디?> <요거요거링: 좌표 보낼게요> 잠시 뒤 좌표를 표시한 지도가 쪽지창으로 날아왔다. 라마긴 사막의 오아시스였다. 세영은 좌표를 확인하며 빈 가방에 필요한 아이템을 닥치는 대로 쑤셔 넣었다. 그래 봤자 포화 상태인 그녀의 창고는 개미눈물만큼의 티도 나지 않았다. 그다음은 은행이었다. 여분의 돈주머니를 모조리 끄집어내어 골드를 가득 채웠다. 만렙을 채운 지도 오래인 그녀에게 캐쉬도 아닌 골드쪼가리는 돌멩이만도 못했다. 묵직한 돈주머니를 뉴비의 앞에 뿌려대며 1억2천 모두 현금이라고 외칠 생각에 황홀해졌다. 세영이 정신없이 움직이는 사이에 길드 채팅장은 바다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혼자 뉴비를 먹으러 갔다는 착각에 빠진 길드원들이 눈물로 홍해를 만드는 중이었던 것이다. <친친칠라: 마왕누니뮤ㅠㅠㅠㅠ> <딸기겅쥬☆: 뉴비 혼자 먹으면 체해요ㅠㅠㅠㅠ 제 입에 버리라는ㅇ0ㅇ> <노란무지: 쌍쌍바도 나눠 먹는 게 우리의 정이거늘ㅠㅠ> <불수의근: 나쁜 여자ㅠㅠㅠ 잔인한 여자ㅠㅠㅠㅠㅠ> <혼세마왕: 같이 도실 분 라마긴 사막으로 오세요> 찌질거리는 길드원을 보다 못한 세영이 허락을 내렸다. 오아시스가 아니라 사막으로 오라고 말한 것은 약간의 심술이었다. 마지막으로 마법 상점에 들린 세영이 요거요거링에게 귓속말을 날렸다. <혼세마왕: 주력 정하셨대?> <요거요거링: ㄴㄴ 아무것도 모르심^^> <혼세마왕: ㅇㅋ 스킬북 챙겨감> 아르카디아의 가장 큰 특징은 직업시스템이 없다는 것이었다. 검사나 마법사와 같은 직업별 육성을 택하는 타 VR-RPG와 달리 아르카디아는 직업 자유화를 선언했다. 유저들은 직업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스킬들을 조합하여 전투나 생산을 했다. 모두가 잡캐라는 뜻으로 잡캐카디아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다. 만렙으로 살아온 세월이 오래된 세영은 대부분의 스킬을 완벽 수련한 그랜드 마스터였다. 존재하는 모든 스킬을 완벽 수련한 올 그랜드 마스터 유저도 있었지만, 세영은 제가 잘 쓰는 스킬만 마스터하면 된다는 생각에 거기까지 도전하진 않았다. 상점을 훑어본 세영은 보이는 대로 스킬책을 사들였다. 신선한 뉴비용이다 보니 가리지 않고 사면 돼서 편했다. 개중에 당장 필요하지 않은 생산스킬북도 있었지만, 다다익선이라는 마음으로 쓸어 담았다. 필요할 때 하나하나 꺼내주면서 익히게 하면 되지 하는 생각이었다. “뉴비~ 뉴비~ 보기도 좋고 맛도 좋은 뉴비~” 신이 난 세영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포탈 스크롤을 꺼냈다. 문득 뉴비님께 예쁘게 보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페르세포네의 봄 원피스>와 <봄의 나비 구두>로 갈아입었다. 함께 착용하면 반짝거리는 효과와 함께 허공에 살짝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캐쉬템이었다. “혼자 먹을까요~ 둘이 먹을까요~ 셋이 먹을까요~” 허공에 둥실둥실 뜬 채로 벗은 옷을 가방에 쑤셔 넣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창이 열리더니 새로운 퀘스트 <이계의 부름>이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떴다.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별생각 없이 퀘스트 창을 닫으려는 순간 우르르 공기가 흔들렸다. 허공에 반쯤 떠 있던 세영이 균형을 잃으며 휘청거렸다. 허우적거리던 그녀의 손가락이 퀘스트 창의 수락 버튼을 스쳤다. 곧바로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퀘스트 장소로 이동합니다.> “어? 어? 잠깐만!” 놀란 세영이 잠깐만을 외쳤지만, 시스템은 가차가 없었다. 세영의 발 바로 아래에 새카만 공간이 열렸다. 다음 순간 구멍이 진공청소기처럼 세영의 몸을 빨아들였다. “안돼애애애애!!!” 나의 뉴비가! 안타까운 절규와 함께 세영은 토끼굴처럼 뻥 뚫린 구멍 속으로 끌려들어 갔다. * 세영은 끝도 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진짜 앨리스의 토끼굴이었는지 이렇게나 오래 떨어졌는데도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스킵! 스킵하라고! 이런 빌어 처먹을!!!” 화가 난 세영이 욕설을 내뱉었다. 퀘스트 영상은 보통 건너뛰는 것이 가능한데, 렉이라도 걸렸는지 말을 듣지 않았다. 버둥거리는 몸이 기울어지면서 머리가 아래로 향했다. “추락사하면 가만히 안 둘 거야!” GM이고 뭐고 다 불러다 씹어 먹을 거라고 외치는 순간 갑자기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이제야 퀘스트 영상이 시작된 것 같았다. 어두운 제단에 어린아이가 누워있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몹시 아파 보였다. 베일을 쓴 여자가 제단으로 다가오더니 손에 들린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검신과 손잡이가 모두 새카만 검이었다. 검이 아이의 몸으로 내리꽂히는 순간 장면이 바뀌었다. 그다음으로 보인 것은 아름다운 금발 여자였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연신 뒤돌아보며 달아났다. 그녀의 앞에는 똑같이 생긴 벽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여자는 끝없는 미로를 헤매는 중이었다. 박쥐 같은 것이 푸드득 날았다. 이어서 사막의 모래가 흩날리는 장면이 스치더니 웅장한 성당의 모습으로 변했다. 성당 위의 하늘이 붉게 물들어 기괴해 보였다. 점점 빨라지는 장면들이 울창한 숲, 덩굴로 뒤덮인 유적, 파도가 몰아치는 섬으로 변했다. 마지막으로 동화 속에 나올 것 같은 성의 모습으로 고정된 영상이 스르륵 사라졌다. <이계인이여,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부디 내게로 와주십시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되지 않는 목소리가 웅웅 울려 퍼졌다. 엄숙하지만 어딘지 슬픈 음성을 듣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세영은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정신을 잃었다. 희미한 빛이 그녀의 몸속에서 흘러나와 전신을 뒤덮었다. 점점 강해지던 빛은 그녀를 삼키고 세상을 뒤덮을 기세로 퍼져나갔다. ──────────────────────────────────── 왕의 미궁 (1) “안 돼, 더 이상은 못 가겠어.” 탈진한 마리엔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프엘프인 그녀는 보통 사람보다 체력이 약한 편이었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미궁을 헤맨 것이 벌써 사흘째. 원래라면 진작 쓰러졌을 것을 의지로 버티고 있었던 거였다. 나머지 파티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파티의 리더인 디안을 제외하면 모두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난처한 표정이 된 디안이 마리엔의 팔을 잡아당겼다. “마리엔, 조금만 더 힘내봐. 안전지대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나도 더는 무리야. 안전지대고 뭐고 여기서 쉴래.” 마리엔의 옆에 털썩 주저앉은 시디발라가 투덜거렸다. 싱긋 미소 지은 리먼이 조용히 제자리에 앉았다. 모두가 바닥에 주저앉자 디안도 더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딱 10분만 쉬는 거야. 그 뒤엔 안전지대까지 계속 걷는 거다.”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한 디안이 자리에 앉았다. 그도 지치긴 마찬가지였다. 가진 돈을 모두 털어 장만한 갑옷이 그의 몸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건 곧 실패의 무게였다. “우리, 여기서 죽는 걸까?” 세운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마리엔이 중얼거렸다. 욱하는 기분이 된 디안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하고 쏘아붙였다. 어깨를 움츠리는 마리엔 대신 시디발라가 특유의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더는 남은 식량도 없고, 주력부대와는 떨어져 버렸고, 돌아가는 길도 모르고, 죽을 확률이 더 높잖아.” “안전지대에 있다가 후속 부대에 도움을 요청하면 돼. 운이 좋으면 보급과 마주칠 수도 있고.” 말을 하는 디안도 그대로 이뤄질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애초에 왕의 미궁에 들어오는 게 아니었어. 우리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었다고.” 시디발라가 통통한 입술을 삐쭉거리며 말했다. 디안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파티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은 그의 실수였다. 미궁 입구에서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는데 그만 욕심을 부렸다. 하급 몬스터 백 마리를 사냥하는 것보다 중급 열 마리를 사냥하는 편이 더 많은 돈을 주었다. 점점 급이 높아지는 몬스터를 따라 한 발짝씩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미궁의 최중심부에 들어와 있었다. 최중심부에 나타나는 몬스터들은 그들의 힘으로는 처리하기 힘겨웠다. 한 마리씩 처리할 때마다 다른 모험가들과의 거리가 점점 벌어졌고, 이렇게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인기척이 나.” 그때 번쩍 고개를 든 마리엔이 말했다. 일행의 시선이 그녀가 바라보는 곳으로 쏠렸다. 다들 숨을 죽인 가운데 멀리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다가왔다. 흐릿한 빛 속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 무리의 모험가들이었다. 얼굴이 확 밝아진 디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뒤늦게 그를 발견한 모험가들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어색한 미소를 지은 디안이 입을 열었다. “저, 죄송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장 앞에 서 있던 남자가 그의 배를 걷어찼다. 반사적으로 피하려던 디안은 균형을 잃고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기겁한 마리엔이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얼떨떨해하는 디안을 살핀 그녀가 날카롭게 외쳤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재수 없게 구걸하지 마라. 애송아.” “시팔, 난 사냥 전에 거지를 보면 운이 나빠진다고.” 빈정거리듯 말한 남자가 바닥에 침을 뱉었다. 디안은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 시디발라를 붙잡고 입을 틀어막았다. 숫자로 열세인 데다 잔뜩 지친 상황에선 모욕을 당해도 참는 수밖에 없었다. 버둥거리던 시디빌라가 디안의 손을 뿌리쳤을 때 모험가들은 흔적도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진 뒤였다. 어둠 속을 노려보던 시디발라가 악을 쓰듯 소리쳤다. “이따위 미궁! 죄다 무너져서 깔려버려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공기가 우르릉 떨리기 시작했다. 놀란 일행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말을 뱉은 시디발라도 놀라서 입을 뻐끔거렸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웅웅 울리던 공기가 갑자기 눈부신 빛덩이를 뱉어냈다. “뭐, 뭐야?!” 기겁하는 시디발라를 제 뒤로 밀쳐낸 디안이 검을 뽑아들었다.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다음 순간 빛덩이가 눈이 아플 정도로 번쩍거리더니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너무 강한 빛에 한순간 눈을 감았던 디안은 재빠르게 눈을 깜빡여 시야를 확보했다.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신음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저건…….” 희미해진 빛무리 속에 한 소녀가 떠 있었다. 새하얀 드레스 자락과 거기 휘감긴 리본이 살아있는 것처럼 펄럭거렸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일행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얼어붙었다. “천사야?” 침묵하는 일행들 속에서 마리엔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바보처럼 들리는 질문에 디안은 제가 그 말을 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빛이 사라지면서 소녀의 몸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분홍색 구두에 감싸인 작은 발은 여전히 한 뼘 위의 허공에 머물렀다. 은은하게 반짝이는 빛이 환영처럼 그녀의 주변을 떠돌고 있었다. 빛에 이끌리듯 마리엔이 손을 뻗었다. 뒤늦게 그것을 알아 챈 디안이 말리려 했지만, 때가 늦어 있었다. 손이 닿는 순간 소녀가 번쩍 눈을 떴다. 심연처럼 새카만 눈동자였다. * ‘여기가 어디지?’ 세영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온몸이 따스한 것에 폭 감싸인 느낌이었다. 기분 좋은 나른함이 깃털처럼 몸속을 간질였다. 금방이라도 하품이 나올 것 같았다. ‘한숨 잤으면 좋겠다.’ 기지개를 켜려던 세영은 열려있는 퀘스트 창을 발견했다. 그제야 게임에 접속 중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그녀는 재빨리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영상을 보다 정신을 잃은 것 같은데 경험치의 변동은 없었다. 행동불능이 된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떨어뜨린 아이템도 없고 입고 있는 옷 덕에 바닥에 나뒹구는 꼴도 면했다. 별것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린 세영이 아까부터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유저들을 바라봤다. 무슨 용건이냐는 뜻이었는데 상대가 바짝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마리엔, 뒤로 물러나.” 적금발의 남자가 금발 여자의 팔을 당겨 제 뒤로 돌려세웠다. 어린아이처럼 키가 작은 쥐 수인족과 성표를 목에 건 중년 남자도 보였다. 들고 있는 아이템으로 봐서 검사, 마법사, 암살자, 사제로 이뤄진 파티였다. 생활모드 적용 중인지 죄다 꼬질꼬질한 몰골이 인상 깊었다. 잠시 고민하던 세영은 가장 무난한 질문을 던졌다. “저기요, 여기가 어디예요?” 별것 아닌 질문이었는데 그들은 굉장히 당황했다. 경계 어린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더니 자기들끼리 무어라고 수군거렸다. 무례한 태도에 기분이 나빠진 세영은 답을 듣기 포기하고 지도창을 열었다. 새카맣게 물든 지역맵에 그녀가 있는 위치만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도가 이렇게 되는 경우는 한가지뿐이었다. ‘내가 모르는 던전인가? 신규 던전이 추가되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세영은 어쩌다 던전으로 떨어져 버렸는지 고민했다. 퀘스트를 누르자마자 던전으로 전송되는 경우는 몹시 드물었다. 그사이에 의논을 끝낸 유저들이 세영을 바라보았다. 조심스럽게 입을 연 것은 금발머리의 엘프 여자였다. “여긴 왕의 미궁이에요. 중앙 미로의 한가운데죠.” “왕의 미궁? 이번에 추가된 퀘스트 맵인가 보네요.” 지도창의 제목이 알 수 없음에서 <왕의 미궁–대미궁 중앙>으로 변경되었다. 올바른 정보라는 뜻이었다. 조금 전의 일로 굳어있던 세영의 얼굴이 사르르 풀렸다. 아직 약한 중드비라면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었을 때 경계하는 것이 당연했다. 만렙 중에는 심심풀이로 다른 유저를 사냥하는 놈도 있었다. 그런 인간으로 오해받은 것이 좀 섭섭했지만,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세영은 되도록 부드럽게 물었다. “그럼 지금 던전 공략 중이세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엘프녀가 고개를 저었다. 캐릭터 생성에 공을 들였는지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와 갸름한 얼굴이 꽤 미인이었다. 게임 특성상 외형 바꾸기가 힘든 편인데 이정도면 정말 잘 만든 거였다. 감탄 어린 시선에 얼굴을 붉힌 엘프가 말했다. “아뇨. 저희는 사냥에 실패해서 입구로 돌아가는 중…….” “마리엔!” 버럭 소리를 지른 검사남이 엘프녀의 어깨를 확 잡아당겼다. 엘프의 귀가 움찔하는 것을 본 세영은 울컥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말로 하면 되지 왜 사람을 잡고 흔드는 거야. 하도 가냘파서 세게 잡았다간 뚝 부러질 것 같구먼. 엘프녀를 등 뒤로 숨긴 검사가 세영을 노려보았다. 당장에라도 공격할 기세였다. 세영의 얼굴도 덩달아 험악하게 변했다. “당신, 정체가 대체 뭡니까.” “전 그냥 지나가는 유저인데요.” 검사의 추궁에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사실대로 말했다. 하지만 검사는 추궁을 멈추지 않았다. “유저라니? 무슨 유저를 말하는 겁니까. 갑자기 나타난 목적이 뭐죠?” “아니, 그냥 지나가고 있었다고요. 여기가 어딘지도 몰랐는데 목적은 무슨 목적이에요. 초면에 시비 털지 말죠?” 세영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외쳤다. 게임을 하다 보면 별별 병신들을 다 만나게 되지만,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거는 병신은 또 처음이었다. 던전이 자기 것도 아닌데 지나가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디서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데.” 흥미진진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수인족이 말했다. 미키마우스처럼 커다란 귀가 연신 팔랑거렸다. 세영은 그의 귀에 대고 빽 소리를 질러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바로 코앞에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 것 아닌가. 그런데 몸을 움찔거린 엘프녀가 똑같은 말을 했다. “비명소리가 들려. 디안, 아까 그 모험가들…….” “으아아아악!” 이어진 비명은 세영의 귀에도 충분히 들렸다.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돌아서려던 검사가 움찔했다. 세영을 제 등 뒤에 둘 수가 없어서 고민스러운 표정이었다. 미간을 찌푸린 세영이 보란 듯이 그를 제치고 선두로 나섰다. 당황한 엘프녀가 그녀를 붙잡았다. “위험하니 너무 앞으로 가지 마세요. 몬스터가 나올지도 몰라요.” “에이, 걱정하지 마세요. 보스몹이 떼로 나올 것도 아닌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지도에 찍힌 초록색 점을 보니 몬스터는 아니었다. 잠시 뒤 한쪽 어깨와 이마가 피로 범벅된 남자가 헐떡이며 나타났다. 처참할 정도로 찢어진 어깨에 세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윽, 아무리 부상모드를 좋아해도 좀 심한데.’ 세영은 남들의 플레이에 관대했지만, 부상으로 쾌감을 얻는 모드만은 좋아하지 않았다. 보기 불쾌할 정도로 부상도를 올려놓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애써 불쾌감을 감추고 있는데 헐떡이던 남자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사, 살려줘! 살려……!” “꺄아악!” 대신 비명을 지른 엘프녀가 세영을 보호하듯 감싸 안았다. 반사적으로 주먹을 내지르려던 세영은 뜻밖의 포옹에 팔이 묶여버렸다. 대신 앞으로 튀어나온 검사가 남자를 밀쳐냈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남자에게 검을 겨누며 물었다.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안에서 뭘 건드렸어요?” “벼, 벽을……. 숨겨진 통로를 열려고 했는데 몬스터가 쏟아져 나와서…….” “다른 사람은요!” “모, 모두 당했어. 몬스터 중에 오거가 있었다고!” 절규 같은 부르짖음에 검사가 움찔했다. “오거라고?” 하고 중얼대는 목소리가 너무 심각해서 연극적으로 들렸다. 세영은 갑자기 덜덜 떨기 시작하는 엘프녀의 팔을 다독이며 “여기 오거는 많이 센가 보죠?” 하고 물었다. 오거 따위야 발가락으로도 죽일 수 있는 잡몹이었지만, 새로운 던전이다보니 밸런스가 개판일 수도 있었다. “오, 오거는 식인귀예요. 빨리 도망쳐야 해요. 여기 있다간…….” “디안, 마리엔! 빨리 와!” 멀리서 수인족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수인족과 사제는 저만큼 달아나고 있었다. 신속한 그들의 후퇴를 세영은 아주 감명 깊게 평가했다. ‘팀워크가 아주 개판이네.’ “어서 가요!” 멍 때리는 세영의 팔을 엘프녀가 잡아당겼다. 엉겁결에 그녀에게 끌려 뛰기 시작한 세영이 눈을 껌뻑였다. 자신이 왜 그들과 도망을 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대해선 검사도 똑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마리엔!” “여기 놔두고 갈 순 없잖아!” 달리던 엘프녀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검사가 피 범벅된 남자를 업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힐끗 그를 돌아본 엘프녀가 못마땅한 얼굴을 했지만, 뭐라고 말을 하지는 않았다. 세영은 잡아당기는 대로 끌려가며 메신저 창을 오픈했다. “어라?” 쪽지로 늦어진 사정을 설명하려 했는데 모두 오프라인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빛이 모두 꺼진 창을 처음 본 세영은 몹시 당황했다. ‘내가 그렇게 오래 정신을 잃고 있었나?’ 현실 시간이 새벽이라면 몇몇은 자러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길드원 중 한 명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좀 이상했다. 텅 빈 쪽지함도 마찬가지였다. 빨리 오라고 독촉이라도 날아와 있어야 했건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웠다. “디안, 길이 전부 막혔어!” 갑자기 툭 튀어나온 수인족이 외쳤다. 달리던 것을 멈춘 검사가 “뭐? 다른 길은 없어?!” 하고 바보 같은 소리를 지껄였다. “다른 길도 모두 막혔습니다!” 하고 확인 사살을 가한 것은 사제였다. 세영은 ‘이 등신들아, 몹이 나왔으니 당연히 문이 닫히지!’ 라고 악을 쓰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았다. 파티구성도 괜찮고 수인족에 엘프까지 골고루 갖춰서 중드비는 되는 줄 알았는데, 이건 생짜 초보보다 못한 놈들이었다. 몹 앞에서 정신없이 도망가고 구석에 몰려서 허둥거리는 꼴이라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진짜 초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썩 반갑지가 않았다. ‘초보는 울망울망 귀여운 맛이 있어야지. 이것들은 대놓고 시비에 매너도 꽝이고…….’ “흐윽. 어, 어떡해.” 그래도 겁에 질린 얼굴로 훌쩍이는 엘프녀는 좀 귀여웠다. 마음 같아선 그녀만 보쌈해서 다 클 때까지 돌봐주고 싶었다. 망설이던 세영은 제 팔을 꼭 붙든 작은 손을 보고 결정을 내렸다. 좀 귀찮지만, 엘프녀를 봐서 딱 한 번만 도와주기로 했다. “파티 신청!” ──────────────────────────────────── 왕의 미궁 (2) 갑작스러운 외침에 놀란 검사가 움찔했다. 세영은 황당해 하는 그에게 낮게 으르렁거렸다. “뭐해요? 도와줄 테니까 빨리 넣어달라고요.” “무슨 소리입니까?” “파티에 넣어달라고요. 신청창 안 떠요?” 눈이 뼜느냐고 욕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뭐가 불만인지 버벅거리던 검사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쿵쿵거리는 육중한 진동이 느껴졌다. 마음이 급해진 세영이 꽥 소리를 질렀다. “파티 신청! 빨리 받으라고!” “뭐, 뭘 받으라는 건지. 당최…….” “수락해! 수락하라고! 빨리!” 사납게 몰아친 보람이 있었는지 파티에 참가 되었다는 메시지가 떴다. 동시에 파티원의 정보가 세영에게 공개되었다. 검사의 이름은 디안으로 Lv21이었고 엘프녀인 마리엔은 Lv18이었다. 시디발라라는 욕 같은 이름을 가진 수인족은 Lv20, 사제인 리먼은 Lv32로 일행 중 가장 레벨이 높았다. ‘가늘고 길게 가는 것이 모토인 파티인가.’ 생각보다 전체 레벨이 낮았지만, 어차피 만렙 이전까진 도토리 키 재기였다. 협공을 시켜봐야 도토리 힘 모으기니 세영 혼자 싸우는 편이 더 효율적일 듯했다. “저 사람은요?” 세영은 디안이 바닥에 내려놓은 부상자를 가리켰다. 파티원도 아닌데 왜 끌고 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잘못했다간 스킬에 휘말려 행동불능이 될 수도 있었다. 세영의 질문을 잘못 이해한 디안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파티창에 뜬 디안의 이름 아래 Lv35 우드릭이라는 이름이 추가되었다. 파티 멤버가 아니라 소환수처럼 추가된 것이 이상했지만, 따질 시간이 없었다. 세영은 적의 등장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쿵 하는 땅 울림에 이어 끄르륵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거였다. 2m가 훌쩍 넘는 덩치에 바닥에 끌릴 것처럼 길고 두꺼운 팔,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아래턱과 들창코까지. 일반 오거와 썩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오거의 뒤에서 작고 새빨간 눈들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기분 나쁘게 끽끽거리는 소리로 봐서 고블린 같았다. 숫자는 대강 스물 이상. 정석대로라면 고블린을 5마리씩 끌어내서 처리한 다음에 오거를 공략해야 했다. 물론 세영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였다. “저어기 뒤쪽에 가 있어요. 다칠지도 모르니까.” 세영은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마리엔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놀란 토끼 눈이 된 마리엔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처럼 빠끔거렸다. 세영은 그녀에게 한번 씩 웃어주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위험해!” “미친, 지금 뭐하는 거야!” 나머지 떨거지들이 뒤에서 왈왈대는 것이 들렸지만 무시했다. 대신 놈들의 상판을 즈려밟듯 바닥을 콱 내리찍었다. 구두굽이 바닥에 닿는 순간 돌진 스킬이 발동되면서 세영의 몸이 총알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갑작스러운 접근에 당황한 오거가 들고 있던 몽둥이를 휘둘렀다. 후우웅 하는 흉악한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아아악!” 얼어붙어 있던 마리엔이 비명을 질렀다. 절묘한 순간에 스킬을 취소시킨 세영이 새처럼 가볍게 뛰어올랐다. 리프 어택이었다. 오거의 몽둥이가 그녀가 남긴 잔영을 가르는 순간, 세영은 이미 오거의 바로 앞에 떠 있었다. 살짝 뒤로 돌아간 상체가 원래대로 돌아오면서 세영의 주먹이 오거의 머리를 강타했다. -파앙! 물에 젖은 천을 터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동시에 크리티컬 히트를 알리는 메시지가 떴다. 세영은 오거가 즉사했음을 느꼈다. 스킬까지 사용해서 후려쳤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충격을 이기지 못한 오거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나가는 일이었다. 뜨끈한 파편을 온몸에 뒤집어쓴 세영은 뻣뻣이 굳어졌다. 돌덩이처럼 추락한 그녀는 제자리에서 비틀거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느낄 수 있는 거라곤 지독한 악취와 온몸을 적시는 불쾌한 액체였다. 목구멍이 꽉 조여들며 숨이 턱 막혔다. 세영의 주 서버인 <아레아>는 15세 이상이면 접속할 수 있었다. 미성년자가 섞여 있는 서버라 몬스터를 죽여도 피가 튀거나 시체가 동강 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다시 말해 지금 세영이 겪은 일은 시스템적으로 불가능한 오류였다. 정적 속에서 머리를 잃은 오거가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졌다. 육중한 거체가 지진처럼 사방을 흔들었다. 그것이 충격으로 얼어붙어 있던 자들을 깨어나게 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디안의 중얼거림에 응답하듯 고블린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대장 격인 오거가 일격에 죽임을 당하자 놀란 것 같았다. 하지만 모두가 겁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숏소드를 든 고블린 한 마리가 세영에게 달려들었다. 격분한 듯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니 오거의 복수라도 하려는 듯했다. “피해요!” 멍하게 서 있는 세영을 본 마리엔이 외쳤다. 그녀는 급히 주문을 외어 워터볼을 만들었다. 하지만 캐스팅이 끝나기도 전에 고블린이 숏소드를 휘둘렀다. 순간 세영이 제자리에서 몸을 휘청거렸다. 단순히 비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는데 숏소드가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절묘한 움직임이었다. 이어서 세영은 귀찮은 것을 떨치듯 팔을 옆으로 휘둘렀다. 그녀의 팔에 스친 고블린이 바위에 으깨지듯 터져나갔다. 산산 조각난 고블린의 파편이 마리엔의 바로 앞까지 후드득 튀었다. “이, 인간 맞아?” 허옇게 질린 시디발라가 중얼거렸다. 조그마한 주먹이 내질러질 때마다 몬스터들이 퍽퍽 터져나가는 광경은 기괴함을 넘어서 무섭기까지 했다. 적, 아군 할 것 없이 모두 소금기둥처럼 굳었다. “아…….” 세영은 멍하게 자신의 손을 내려 보고 있었다. 피와 살점으로 뒤덮인 손은 붉었다. 원래의 색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옷에 닦아내려 했지만, 질퍽거리는 이상한 것들이 더 묻었다. 헐떡이며 숨을 몰아쉴 때마다 역겨운 냄새가 훅 밀려들었다. 도움을 청하듯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고블린의 눈알과 딱 마주쳤다. 머릿속에서 뭔가가 뚝 끊어지는 것 같았다. 세영은 더는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으아아아악!” 우웅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위로 떠올랐다. 세영이 완전히 이성을 잃는 순간 단축창에 저장되어 있던 스킬들이 무차별적으로 발동되기 시작했다. “엎드렷!!!” 제일 먼저 상황을 파악한 디안이 악을 썼다. 그는 마리엔을 덮치듯 쓰러뜨리며 바닥으로 굴렀다. 시디발라에 이어 리먼이 구석으로 몸을 던진 순간 둥근 번개가 공간의 한가운데를 강타했다. 콰자자작 소리와 함께 고블린들이 새파랗게 타올랐다. 이어서 시뻘건 화염구가 터지더니 격자 모양으로 뻗어 나가며 모든 것을 휩쓸었다. 바닥에서 솟구친 돌의 창들이 간신히 형체만 남아있던 재를 흩어버렸다. 마지막으로 다섯 줄기의 바람이 고블린들이 있던 자리를 할퀴고 지나간 뒤에야 사납게 으르렁거리던 공기가 가라앉았다. “다, 다들 무사합니까?” 바짝 말라버린 공기에 쿨럭거리던 디안이 물었다. 정전기로 머리카락이 빠지직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것 외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런 난리법석 속에서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았다는 것이 믿기질 않았다. “살아있는 게 이상하지만 무사해.” “저도 괜찮습니다.” 흙먼지로 한층 더 꾀죄죄해진 일행들이 대답했다. 마리엔의 대답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디안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마리엔이 몽유병 환자처럼 서 있었다. “마리엔, 괜찮아?” “…슬퍼하고 있어.” 대답 아닌 대답이 돌아왔다. 꿈꾸듯 몽롱한 목소리에 놀란 디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를 돌아본 마리엔이 한층 단호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슬퍼하고 무서워하고 있어. 내가 가야 해.” “잠깐, 어디로 간다는 거야?” 마리엔의 시선을 따라간 디안은 움찔했다. 폭주하기 전 세영이 있었던 자리에 거대한 물기둥이 치솟아 있었다. 속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회전하는 물기둥은 다가오는 모든 것을 휘감고 으스러뜨릴 것 같았다. “마리엔, 설마…….” 마리엔은 대답 대신 물기둥으로 걸음을 옮겼다. 놀라 붙잡으려는 디안을 막은 것은 리먼이었다. 왜 막느냐고 노려보자 리먼은 바닥에 널브러진 부상자를 가리켰다. 그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디안이 움찔했다. “구석으로 피한 우리와 달리 충격에 휩쓸렸을 텐데도 멀쩡합니다. 그녀의 힘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리먼의 말대로 부상자의 몸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그런 재앙에 휩쓸린다면 재가 되고도 남았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디안은 불안을 완전히 떨치지 못했다. “그러다가 마리엔이 다치면…….” “디안, 지금은 그냥 지켜보는 것이 나을 것 같군요.” 차분히 말을 마친 리먼은 부상자 옆에 앉았다. 대충이라도 상처를 싸매려는 것 같았다. 낭패감에 입술을 깨문 디안이 마리엔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이미 물기둥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괜찮아요.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속삭이듯 말한 마리엔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다가오자 물줄기가 움츠리듯 뒤로 물러났다. 마리엔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전진했다. 반으로 갈라진 물줄기 속에서 세영이 나타났다. 피가 씻겨나간 그녀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초점 없는 검은 눈동자가 마리엔을 향했다. “괜찮아요.” 다시 한 번 속삭인 마리엔이 세영을 끌어당겼다. 허공에 반쯤 떠 있던 세영이 주르륵 흐르듯이 끌려 내려왔다. 동시에 아직 남아있던 물기둥이 신기루처럼 증발했다. 마리엔은 조심스럽게 세영을 품에 안고 토닥거렸다. 그녀의 품에 감싸인 세영이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폭신폭신하고 따뜻한 가슴이 뺨을 눌러왔다. 그 아래서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듣자 뭔가가 와르륵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마리엔의 가슴에 폭 파묻힌 세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잠시 뒤 벌어진 그녀의 입에서 흐엉 하고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래요, 그래.” “으아앙! 흐아아으아앙!” “많이 무서웠죠?” “무서워써! 으아아아앙! 피!!! 으앙아! 나한테 묻었어!” “이제 괜찮아요.” 세영은 마리엔의 품으로 파고들며 어린애처럼 울었다. 마리엔은 아이를 달래는 엄마처럼 끈기 있고 상냥하게 그녀를 다독여주었다. 훈훈한 광경이었으나 지켜보는 사람들의 심정은 그렇지 못했다. “무섭단다. 난 쟤가 제일 무서운데.” “쉿, 들려.” 시디발라의 투덜거림에 기겁한 디안이 손가락 하나를 입 앞에 세웠다.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을 지은 리먼이 부상자에게 집중하는 척했다. 그 사이 마리엔의 보살핌으로 충격에서 빠져나온 세영은 침착하게 분노했다. 패치를 어떻게 했기에 이따위 오류가 발생했단 말인가. 캡슐에 저장된 영상을 들고 가서 고소해도 될 수준이었다. 피와 살점을 뒤집어쓸 때의 더러운 기분이 지워지지 않았다. “GM 소환!” <사용할 수 없는 지역입니다. 안전한 장소에서 다시 시도해주세요.> “이 시벨놈이 거부를 해? GM 소환!” <사용할 수 없는 지역입니다. 안전한 장소에서 다시 시도해주세요.> “진짜 안전한 게 뭔지 보여줄까? 당장 안 튀어나오면 고소할 거야!” 발광하는 세영을 파티원들은 얼떨떨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시스템 메시지를 보지 못하는 그들에게 세영은 혼자 허공에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는 미친 여자로 보였다. 보다 못한 디안이 그녀를 말렸다. “저기, 좀 진정하시고…….” “진정?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방금 봤잖아요? 오거 머리가 터져서 그걸 내가 다 뒤집어썼다고요!” 뭐가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한 디안이 황망해졌다. 그는 세영이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해보려고 애썼다. 아니면 그녀가 당장 주먹으로 자신을 때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음. 오거의 머리가 터져서. 그래서 화가 나신 건가요?” “보통은 저렇게 안 터진다고요! 그냥 퍽 하고 날아가서 죽는다고요!” “…아, 네. 오거가 잘못했네요.” 디안은 그녀가 우기는 대로 머리가 터지다니 정말 나약한 오거라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세영이 “제정신이에요?” 하고 물었다. 말문이 막힌 디안이 입을 다물었다. “아니, 그러니까 이런 패치를 할 거면 미리 공지해야죠. 그리고 원하는 사람만 적용할 수 있게 모드로 넣어야죠. 이렇게 다짜고짜 적용해버리면 어떡해요. 서버에 미성년자도 있는데.” 애써 침착함을 되찾은 세영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파티원들의 표정은 여전히 멍하기만 했다. 설명하길 포기해버린 세영이 인벤토리에서 포탈 스크롤을 꺼내 들었다. “그럼 전 밖으로 나가서 GM 부를게요. 즐아하세요.” 잔뜩 지친 그녀는 허공에서 불쑥 튀어나온 물건에 놀라는 파티원들을 눈치채지 못했다. 스크롤을 찢으려는 순간 손가락이 튕겨 나오더니 오류메세지가 떴다. <사용할 수 없는 지역입니다. 안전한 장소에서 다시 시도해주세요.> “야 이 씨발, 또 왜!” 전투 중도 아닌데 이동이 거부당하다니. 서버 자체가 맛이 갔거나 이동 불가인 구역이라는 뜻이었다. 스크롤을 찢으며 쿨하게 사라질 생각이었던 세영은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여기는 포탈이 안 열리네요. 포탈 어디서 열리는지 아세요?” 제게 가장 호의적이었던 마리엔을 돌아봤지만, 그녀 역시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한숨을 푹 쉰 세영이 “입구까지 나가야 하나.” 하고 중얼거렸다. 그때 망설이던 마리엔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당신은 혹시… 천사님이세요?” 디안이 황당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몬스터들을 펑펑 터트리고 씨발거리는 욕쟁이 천사라니. 신성모독에 가까운 발언이었다. 일행의 말 없는 비난을 느낀 마리엔이 어깨를 움츠렸다. 반면 세영은 그것을 ‘제가 아는 뫄뫄천사라는 유저놈이 있는데 당신이 그놈이십니까?’ 같은 질문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별생각 없이 대꾸했다. “아뇨, 전 혼세마왕인데요.” ──────────────────────────────────── 왕의 미궁 (3) 파티원들의 반응은 격렬했다. 일제히 뒤로 물러서서 무기를 뽑아든 것이다. 그들이 공격 자세를 취하는 것을 빤히 쳐다보던 세영이 눈썹을 꿈틀했다. “님들 지금 뭐하는 거? 저랑 싸우자는 거?” 세영은 지금 몹시 기분이 나쁜 상태였다. 10년의 게임생을 돌이켜봐도 이렇게 기분이 더러웠던 적이 드물었다. 누가 시비를 건다면 뼈와 살이 분리되다 못해 태어난 것을 후회할 정도로 때려줄 자신이 있었다. 제게 겨눠진 무기 끝이 덜덜 떨리지만 않았다면 실행했을 것이다. “정말 마족의 왕입니까?” 디안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이건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멍청이인가 생각하던 세영은 한숨을 푹 쉬며 설명했다. “…제 이름이 혼세마왕이라고요. 종족은 인간인데요. 마족은 아직 선택이 안 되잖아요.” 말이 끝나자 차가운 침묵이 그들 위로 내려앉았다. 넋이 나간 그들을 보고 세영은 좀 불안해졌다. 그녀는 소심하게 “혹시 새로 패치가 됐나요?” 하고 물었다. 커다란 녹색 눈을 울망거리던 마리엔이 확인하듯 물었다. “저, 그러니까 이름이 혼세마왕이라는 거죠? 마족이 아니고 이름이 마왕인 거죠?” “네.”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디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대체 누가 그런 흉악한 이름을 지은 겁니까?!” “저요.” “미쳤어요? 지을 게 없어서 자기 이름을 마왕이라고 짓습니까?” “아니, 듣자 듣자 하니 왜 시비야. 시발넘아, 불만이면 덤비든가!” 당장 멱살이라도 잡을 것 같은 두 사람 사이에 리먼이 끼어들었다. 그는 하얗게 빛나는 손으로 두 사람의 어깨를 짚었다. 블레싱이었다. 따뜻한 빛이 몸으로 스며들면서 펄펄 끓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자아, 둘 다 진정이 되었습니까?” 리먼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별것 아닌 시비에 발끈했다는 생각이 든 세영이 머리를 긁적였다. 디안도 마찬가지였는지 죄책감과 후회가 뒤섞인 얼굴로 그녀에게 사과했다. “제가 무례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이어서 다른 일행들도 마족으로 오해해서 죄송하다며 용서를 빌었다. 이렇게 정중하게 사과하는데 계속 꽁해 있기는 힘들었다. 세영은 자신도 흥분했었던 것 같다며 손을 내저었다. 그때였다. 꾸르륵 소리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트렸다. 무시하기엔 너무 커다란 소리에 놀란 세영이 시선을 돌렸다. 귀 끝까지 새빨개진 마리엔이 배를 움켜쥐고 있었다. “혹시 배고파요?” “시, 식량이 떨어져서…….” 창피했는지 고개를 푹 숙인 마리엔이 웅얼거렸다. 그렇게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는데 라고 생각한 세영이 인벤토리에서 봄 소풍용 돗자리를 꺼냈다. 화들짝 놀라는 사람들 앞에 돗자리를 펼친 그녀는 식품용 가방을 열었다. 마침 퀘스트 진행 때문에 만들어둔 요리가 있었다. 세영은 갓 만든 것처럼 따끈따끈한 음식들을 보기 좋게 늘어놓았다. 눈이 똥그래져서 쳐다보던 일행이 슬금슬금 돗자리로 다가왔다. 며칠 만에 음식을 본 그들은 반쯤 이성을 잃고 있었다. 헤 벌어진 입에서 금방이라도 침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석 달 열흘쯤 굶은 거지 떼 같은 몰골에 당황한 세영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 이제 드셔도 되는데.”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방에서 손이 튀어나왔다. 스푼과 포크 따위를 사용할 새도 없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움켜쥐고 입에 쑤셔 넣기 바빴다. 걸신들린 듯 아구아구 먹어대는 모습에 놀란 세영이 급히 음료를 만들어 건넸다. 일행은 세영이 잔을 내밀 때마다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추잡스러운 모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창피함도 잠깐 솔솔 풍겨오는 냄새에 또다시 이성을 잃고 손을 놀렸다. 배가 고픈 것도 있지만, 혀가 녹아내릴 정도로 맛있는 음식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머므 뫄이써요.” 양손에 치킨을 움켜쥔 마리엔이 행복한 얼굴로 말했다. 햄스터처럼 볼록한 뺨이 귀엽기 짝이 없었다. “치느님이 좀 맛있긴 하죠.” 고개를 끄떡인 세영은 냅킨으로 마리엔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예쁜 애는 뭘 해도 귀엽다더니, 입가에 덕지덕지 묻히고 먹는 모습도 귀여웠다. 수줍은지 배시시 웃은 마리엔이 다시 하구하구 소리를 내며 치킨을 뜯기 시작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새로 만들어서 줄 걸 그랬나. 퀘스트 용이라 재료만 때려 넣어서 대충 만든 건데.’ 후라이드 치킨은 세영이 가장 자신 있는 요리 중 하나였다. 원래 좋아해서 자주 만들었지만, 워낙 활용도가 높은 요리라 숙련도가 높았다. 마음만 먹으면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치킨도 만들 수 있었다. 미로 산맥에 사는 드래곤 NPC 블루세콰이어는 세영이 만든 치킨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이거 이름이 뭐야? 누가 만든 거야? 어디 가면 또 먹을 수 있어?” 국물만 남은 갈비찜 접시를 움켜쥔 시디발라가 애절하게 물었다. 잃어버린 애인이라도 찾는 표정이었다. 정말 몰라서 물어보나 싶었던 세영이 무뚝뚝하게 답했다. “그냥 갈비찜인데. 내가 만들었고.” 시디발라의 눈이 왕방울만큼 커졌다. 그는 텅 빈 접시와 세영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단호한 얼굴로 외쳤다. “나랑 결혼하자! 잘해줄게!” “시디발라! 미쳤어?!” 놀란 디안이 새우 머리를 뱉으며 소리쳤다. 안 들린다는 듯 커다란 귀를 틀어막은 시디발라가 도리질을 쳤다. “결혼이 뭐 어때서! 이런 요리를 매일 먹을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겠어!” “넌 음식 때문에 인생을 망칠 생각이야?!” 둘이서 왁왁거리는 소리에 세영의 얼굴이 구겨졌다. 대충 칭찬으로 여기고 넘어가려고 했더니, 이것들이 남의 면전에서 똥을 싸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휙 움직이자 화살처럼 날아간 포크가 두 사람 사이를 지나 돌 바닥에 퍽 꽂혔다. “지금 당장 인생 종 치게 해줄까?” 귀기 어린 세영의 얼굴과 부르르 떨리는 포크를 본 둘은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닭 날개를 입에 문 마리엔이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길쭉한 귀가 아래로 축 처지는 것을 본 세영이 애써 표정을 풀며 말했다. “밥 먹을 때 짖는 거 아니다.” 찍소리도 못하고 쭈그러진 둘이 남은 음식을 바쁘게 주워 먹었다. 마음 같아선 먹지 말라고 뺏어버리고 싶었지만, 너무 치사한 것 같아서 내버려뒀다. 대신 딸기로 장식한 생크림 케이크를 꺼내 마리엔과 리먼 앞에만 한 조각씩 놓았다. 두 사람은 조금 의아한 얼굴로 케이크를 내려다보았다. “후식이에요.” 세영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마리엔이 포크를 들었다. 케이크 조각을 입에 넣는 순간 녹색 눈이 쟁반처럼 커졌다. 세영은 그녀의 얼굴이 화악 밝아지는 것을 보고 웃었다. 별처럼 반짝이는 눈빛만으로 얼마나 맛있어하는지가 느껴졌다. 입에 담긴 것을 꼴깍 삼킨 마리엔이 잔뜩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혼세마왕님, 이게 뭐예요?” “딸기 생크림 케이크요. 맛있어요?” “네! 구름 같아요. 부드럽고 폭신폭신해요. 너무 맛있어요! 이렇게 맛있는 건 태어나서 처음 먹어봐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에이, 뭘요. 그냥 흔한 케이크인데.” 쏟아지는 찬사에 수줍어진 세영이 뺨을 긁적였다. 고작 케이크 하나에 이렇게 기뻐해 주니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케이크 황홀경에 빠져있는 마리엔에게 슬그머니 친구 등록을 걸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친구 해요. 제가 사냥 도와드릴게요.”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뜬 마리엔이 이내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떡였다. 세영은 친구 목록에 마리엔이 추가된 것을 흐뭇하게 확인했다. 재수 없는 놈들은 다 떼어버리고 마리엔만 데리고 다니면서 키워줄 생각이었다. “전 마리엔이에요. 보시다시피 하프엘프고 아직 미숙하지만 마법사예요. 잘 부탁드려요.” 아직 초보라서인지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마리엔이었다. 이렇게까지 진지할 필요가 있나 싶어 어색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세영도 다시 한 번 자신을 소개했다. “전 혼세마왕이고요, 혼세나 마왕이나 마음에 드는 걸로 부르시면 돼요. 주력으로 서리격투 미는데 어차피 잡캐고. 템 있어서 웬만한 수련은 다 도와드릴 수 있어요. 잘 부탁해요.” 말이 끝나는 순간 친구 신청창이 떴다. 리먼에게서 온 것이었다. 의아하게 돌아보자 깨끗하게 비운 접시에 포크를 내려놓은 리먼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는 자애의 여신을 따르는 종, 리먼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온정을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신님의 은총이 언제나 혼세마왕님과 함께 하길 빌겠습니다.” “아, 아니. 뭘요.” 잠시 망설이던 세영은 리먼의 친구 신청을 받아들였다. 조금 오글거리는 컨셉을 미는 것 같지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까. 애써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는데 퐁 하고 새로운 신청창이 떠올랐다. 어느새 그녀의 옆으로 다가온 시디발라가 긴 꼬리를 살랑거리고 있었다. 어서 쳐다보라는 듯 엣헴 헛기침을 한 그가 입을 열었다. “난 은발자국 부족의 시디발라 게겐이야.” “…이름이 참 멋지네.” “그렇지? 최고의 전사에게만 주는 이름이야.” 아무리 들어도 욕 같은 이름이었지만, 본인의 자부심은 대단한 것 같았다. 시디발라는 커다란 귀를 펄럭거리면서 수줍게 말했다. “나 엄청 잘 싸워! 길도 잘 찾고 함정도 잘 찾아! 같이 다니다 보면 분명 도움이 될 거야. 그, 그러니까 나도 케이크 먹어도 돼?” 애절한 눈빛이 안 주면 울기라도 할 것 같았다. 세영은 울망대는 그의 얼굴에 대고 “안 돼, 케이크 없어. 돌아가.” 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과 싸워야 했다. 한숨을 쉰 세영이 케이크를 꺼내 시디발라와 디안의 앞에 내놓았다. 신이 나서 달려드는 시디발라와 달리 디안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세영은 그의 앞으로 케이크를 쓱 밀어내며 “먹어요, 독은 안탔으니까.” 라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당황하던 디안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세영은 빨갛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을 샐쭉하게 외면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더니!’ 그렇게 맛있어하면서도 케이크의 절반을 남겨둔 마리엔을 보자 안 줄 수가 없었다. 디안이 케이크를 받자 방긋 웃은 마리엔이 남은 것을 먹기 시작했다. 세영은 예쁜 애가 착하기까지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제 생각을 하는 걸 알았는지 마리엔이 귀를 까딱이며 시선을 보냈다. 마침 잘 됐다고 생각한 세영이 슬그머니 수작을 걸었다. “마리엔 님, 계속 던전 도실 건 아니죠?” “그냥 마리엔이라고 부르시면 돼요. 던전은… 저희 힘으로는 무리인 것 같아요.” 긴 귀가 아래로 축 처지는 것을 보자 마구 우쭈쭈 해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오구오구, 던전 돌기 힘들었쪄요? 반쯤 날아가려는 정신줄을 꼭 붙잡은 세영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럼 로그아웃해서 던전 앞에서 만날까요?” “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마리엔에게 다시 한 번 자세히 설명했지만 통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아무리 초보라도 이렇게 기본적인 것도 모르나 싶었다. 설명하기 지친 세영이 맥없이 말했다. “그냥 기다리셨다가 제가 재접하면 던전 밖으로 나오시면 돼요.”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란 말씀이죠?” “네네.” 아리송한 표정을 지은 마리엔이 고개를 끄떡였다. 금방 다녀오겠다고 말한 세영이 외쳤다. “로그아웃!” <불가능한 지역입니다.> “엥? 로그아웃!” <불가능한 지역입니다.> “이게 미쳤나. 왜 로그아웃이 안 돼!” <불가능한 지역입니다. 퀘스트를 확인해주세요.> 호러블한 패치에다가 포털도 안 열리더니 이제 로그아웃도 안 된다. 대체 되는 게 뭐냐고 씩씩거리던 세영이 퀘스트 창을 열었다. 이전에 받아둔 퀘스트가 모두 지워지고 NEW라고 찍힌 새로운 퀘스트가 떠 있었다. 퀘스트: 이계의 부름 -이계인이여,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부디 내게로 와주십시오.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당신을 이세계로 소환했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여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묻도록 하자. -정의의 천사 자드키엘과 대화 -??? -??? “엥!?” ──────────────────────────────────── 왕의 미궁 (4) 정의의 천사 자드키엘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천사를 어디에서 찾으란 말인가. 퀘스트 창을 샅샅이 뒤졌지만, 추가 정보는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세영은 주저 없이 “공홈!” 이라고 외쳤다. 공식 홈페이지를 찾아보면 뭔가 정보가 있겠거니 생각했던 것이다. <연결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시발라마! 니가 할 수 있는 게 뭐야!” 어김없이 나타난 오류 메시지에 세영이 폭발했다. 악악거리며 날뛰는 그녀를 다른 이들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한참을 발광하던 세영이 한숨을 쉬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저기, 혹시 자드키엘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겁먹은 표정의 파티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흔들었다. 유일하게 고개를 젓지 않은 리먼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대천사 자드키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 네. 맞아요. 어디 있는지 아세요?” 뜻밖의 대답에 반색한 세영이 눈을 반짝였다. 난처한 듯 미소 지은 리먼이 말을 이었다. “제가 아는 건 그저 전설입니다. 타락한 왕 므드사엘이 미궁을 열었을 때 대천사 자드키엘이 그를 설득하기 위해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영혼까지 악에 물든 므드사엘은 자드키엘의 말을 듣지 않았고, 오히려 미궁의 가장 깊은 곳에 천사를 가둬버렸지요.” “네?” 세영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녀가 기대한 대답은 ‘뫄뫄 지역이요.’나 ‘솨솨 산이요.’ 같은 간단한 종류였다. 므드 어쩌구 하는 애가 뭘 어쨌다 같은 소리가 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쓴웃음을 지은 리먼이 덧붙였다. “그러니까 전설이 맞다면 자드키엘은 이곳에 있습니다.” 세영은 속으로 ‘아, 이거 어디서 많이 겪은 상황인데…….’ 이라고 중얼거리며 리먼의 머리 위를 바라봤다. NPC 리먼이라고 달려있으면 완벽한 퀘스트 안내 상황이었다. 세영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힐끔거리며 물었다. “혹시 숨겨진 NPC세요?” “음, 혼세마왕님은 신기한 말을 많이 쓰시는군요. NPC가 뭔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죄송. 그냥 개드립 쳐봤어요.” 이분의 독특한 세계를 존중해드리자. 컨셉러는 절대 건드려선 안 돼. 굳게 결심한 세영이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첫째, 포탈 스크롤 사용이 안 된다. 둘째, 로그아웃이 안 된다. 셋째, 로그아웃하려니까 퀘스트 먼저 하라고 한다. 넷째, 퀘스트를 하려면 던전을 깨야 한다. 결론. 게임에서 나가려면 던전을 클리어 해야 할 것 같다. 절로 끙 소리가 나오는 상황이었다. 던전 난이도는 초중급 정도였지만, 잔혹하다 못해 끔찍한 패치가 되어있었다. 두들겨 팰 때마다 몹이 터져나간다면 끝까지 클리어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잔인함으로 승부하는 성인 전용 던전인가.’ 유저 중엔 이런 컨셉을 좋아할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세영은 아니었다. 머리가 터져나갈 때의 끔찍한 감각을 떠올리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산산 조각난 고블린도 끔찍했지만, 뇌수를 뒤집어쓴 기억이 한 수 위였다. ‘머리 때리는 것만 피하자. 어떻게 잘 치면 터지지 않고 끝낼 수 있을 거야.’ 크리티컬 포인트라는 것이 있다. 인간형 몬스터의 경우에는 머리나 명치 부분을 쳤을 때 크리티컬 확률이 가장 높았다. 포인트만 노려 가격하는 수련을 하는 유저도 있을 정도였다. 세영은 그와 반대로 포인트를 피해서 치기로 했다. “혼세마왕님,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세요?” 다 먹은 접시를 주섬주섬 정리하던 마리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세영이 그녀의 손에서 접시를 받아 인벤토리에 넣었다. 허공에서 뿅 사라지는 접시에 마리엔이 신기해하는 것은 여전히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걱정은 아니고, 던전을 클리어 해야 하는데 아까 같은 일이 일어날까 봐 생각 중이었어요.” “네? 클리어요?” 마리엔의 눈이 왕방울만큼 커졌다. 다른 일행의 얼굴도 비슷했다. 접시에 남은 크림을 찍어먹던 디안이 황당한 얼굴로 세영을 보며 물었다. “혹시 지금 던전을 정복하겠다고 말씀하신 겁니까?” “네.” “여기가 왕의 미궁이라는 건 알고 계시죠?” “마리엔이 말해줘서 알게 됐죠.” 뭐가 문제냐는 눈으로 쳐다보자 디안이 난감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를 대신해서 리먼이 부드러운 어조로 설명했다. “죄송합니다만, 혼세마왕님. 왕의 미궁은 정복할 수 없는 던전입니다.” “왜요? 보스가 엄청 세요?” “그게 아니라 국가에서 정복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읭?” 어리둥절해하는 세영에게 리먼은 왕의 미궁이 칸디아 왕국의 소유이며, 관리 역시 왕실에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듣도 보도 못한 왕국인 것을 보면, 어딘가의 길드가 왕국을 자처한 모양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미궁 최중심부엔 패왕의 검이 봉인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검을 소유한 자는 세계를 갖게 된다는 이야기가 내려오지요. 왕실은 미궁의 보물이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것을 경계하여 일정 구역 이상은 들어가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습니다.” NPC 같은 설명을 끝낸 리먼이 입을 다물었다. 컨셉러의 설명답게 몹시 난해했다. 세영은 그것을 제 식대로 해석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니까 길드 하나가 신생 던전을 막아놓고 자기 길드원 아니면 클리어 못하게 방해하고 있는 건가. 근데 뭐, 입구에서 막아야지. 이미 들어와 버렸는데 지가 어쩔 거야.’ 칸디아 길드에서 항의가 들어올 수도 있지만, 지금 남의 사정을 봐줄 때가 아니었다. 일단 로그아웃은 하고 봐야 될 것 아닌가. 오류가 고쳐질 때까지 던전에서 죽치고 있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제가 사정이 좀 급해서 자드키엘을 꼭 만나야 되거든요. 님들 안 가실 거면 저 혼자 파탈하고 가볼게요. 즐아하세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세영을 따라 마리엔이 몸을 일으켰다. 일행의 시선을 받자 뺨을 붉힌 그녀가 더듬더듬 말했다. “대, 대천사를 구하러 가신다잖아. 난 혼세마왕님을 돕고 싶어.” “그런 말을 들으니 사제로서 빠질 수가 없겠군요.” 한숨처럼 웃은 리먼이 뒤따라 일어섰다. 이어서 디안의 눈치를 살핀 시디발라가 슬그머니 세영의 옆으로 가서 섰다. “나도 따라갈래. 입장료 받으며 몬스터 장사하는 왕국놈들보다는 얘가 마음에 들어.” 파티원 중 셋이 세영을 따라가겠다고 나선 상황이었다. 디안은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동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들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왕국에서 수배령을 내릴 거야. 범죄자가 되는 거라고.” 범죄자라는 말에 셋은 조금 움찔했지만, 뜻을 바꾸지는 않았다. 머리를 벅벅 긁은 디안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세영을 바라봤다. 노려보듯 강렬한 눈빛에 세영은 ‘뭐, 어쩌라고?’ 하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디안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립니다. 저도 따라가게 해주십시오. 미궁의 끝을 보고 싶습니다.” 예상 밖의 말에 놀란 세영이 멈칫했다. 얼굴이 화악 밝아진 마리엔이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을 보냈다. 에이 씨. 속으로 짧게 욕설을 뱉은 세영이 그의 친구 신청을 받아들였다. 이미 이렇게 된 이상 디안만 떨구기는 무리였다. “뭐, 됐어요. 기왕 타는 버스 다 같이 타면 좋죠.” 돗자리를 휘리릭 정리한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부상자를 쳐다보았다. 부상도가 높아서 기절했는지 움직임이 없었다. 세영의 시선을 눈치챈 디안이 그를 업기 위해 다가갔다. “잠깐만요. 그 사람은 파티원도 아닌데 왜 데려가요? 그냥 내버려두죠?” 세영의 말에 모두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부상자를 버리라는 말에 당황한 디안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시선을 보냈다.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마리엔이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하, 하지만 여기 버려두면 죽을지도 몰라요.” “파티원도 아닌데 죽든 말든……. 아, 아니에요. 울지 마세요!” 눈물을 그렁거리는 마리엔을 보고 당황한 세영이 파닥거렸다. 그녀는 너무 착해도 탈이라고 구시렁거리며 부상자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리먼이 상처를 닦고 싸매어두어서 바로 치료만 하면 되는 상태였다. “상처 치료! 상처 치료! 상처 치료! 붕대 감기! 붕대 감기!” 세영의 외침이 이어짐에 따라 상처가 눈에 띄게 아물더니 붕대가 나타나 상처 위에 휘감겼다. 기적이나 다름없는 모습에 놀란 일행은 넋을 놓고 그것을 구경했다. 흥분한 마리엔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디안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진짜 천사님이야. 동료 천사를 구하러 오신 게 틀림없어.” 천사라는 되도 않은 오해를 받는 세영은 힐링을 써줄지 말지 고민 중이었다. 결국 마나 낭비라는 결론을 내린 그녀는 대신 포션 하나를 따서 부상자의 입에 우악스럽게 밀어 넣었다. 켁켁대는 부상자의 목구멍으로 꿀렁꿀렁 포션이 넘어가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영의 시선이 디안을 향했다. “치료 끝났으니 이제 해제하세요.” “네?” 어벙하게 되묻는 디안을 보고 한숨을 내쉰 세영이 “따라하세요. 소환 해제!” 하고 말했다. 잠시 망설이던 디안이 소환 해제를 외치자 그의 이름 아래 있던 Lv35 우드릭이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진짜 소환수처럼 참가 되어 있었잖아?’ 잠시 신기해하던 세영이 표정을 바로 잡으며 일행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디안 대신 그녀가 리더가 된 분위기였다. “자, 이제 갑시다. 되도록 빨리 빨리 가죠.” “네!” 세영의 말에 모두가 기합을 넣어 외쳤다. 누구도 정복하지 못한 미궁의 끝으로 간다는 사실만으로 흥분한 것 같았다. 파티원 모두 앞으로의 여정이 색다른 고난이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웨에에엑!” 철퍽대는 손으로 벽을 짚은 세영이 헛구역질을 했다. 산산이 부서진 몬스터의 파편이 그녀가 걸은 걸음마다 놓여있었다. 웩웩거리는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던 마리엔이 자신의 수통을 건넸다. “고마워요.” 힘없이 중얼거린 세영이 수통을 받아 입을 헹궜다. 피범벅이 된 손과 얼굴은 이제 씻어내는 것을 포기했다. 씻어봤자 또 피범벅이 될 테니 의미 없는 짓이었다. ‘평타가 안 나가는 만렙이라더니.’ 세영은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자조했다. 단순히 포인트만 잘 피해서 때리면 되겠지 라고 생각한 게 어리석었다. 손끝만 스쳐도 몬스터가 터지는데 어디를 때리는지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실 세영이 다른 방법을 안 써본 것은 아니었다. 초보에게 주려고 쟁여놨던 검을 써봤더니 몬스터가 고기다지는 망치로 때린 것처럼 변했다. 형체가 남아있어서 더 역겨운 모습이었다. 마법을 쓰면 좀 나을까 싶어서 몬스터를 태워도 봤고 튀겨도 봤고 얼려도 봤다. 하지만 불덩이가 된 몬스터들이 내지르는 비명이나 살이 타들어가는 냄새는 제 정신으로 견딜 것이 아니었다. 얼리는 것은 좀 나았지만, 얼음덩어리가 통로까지 막아버려 피로 벌겋게 물든 얼음을 깨부수면서 전진해야 했다. ‘그나마 제일 나은 것이 피떡이란 말이지.’ 제일 낫다고 견디기 쉬운 것은 아니었다. 세영은 몰려나오는 몹을 퍽퍽 때려죽인 뒤에 웩웩 토하는 것을 반복해야 했다. 갈수록 멘탈이 털털 털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쳐서 벽에 기대 선 그녀를 본 마리엔이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죄, 죄송해요!” “네? 뭐가 죄송해요?” “이렇게 힘들어 하시는데. 전 아무런 도움도 못되고.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아이고, 울지 마세요. 제가 적응을 못 해서 그런 걸요. 마리엔 탓이 아니에요.” 세영은 쩔쩔 매며 마리엔을 달랬다. 말이야 바른 말로 피떡이 된 몬스터를 보고 토하는 것은 그녀가 유일했다. 다른 파티원들은 팔다리가 날아다녀도, 불덩이가 된 몬스터가 찢어지는 비명을 질러도, 피와 살점이 철퍽철퍽 튀어도 의연하게 자리를 지켰다. 혼자 비명을 지르고 호들갑을 떨고 토하는 세영은 그들을 보기 퍽 민망했다. ‘차라리 몹이 나올 때마다 필살기를 연달아 날리면서 전진할까.’ 필살기라고 불리는 최고위 스킬들을 연타한다면 몹들을 재도 남지 않게 태워버릴 수도 있었다. 문제는 마나량이 어마무시하게 들어서 마나 포션을 계속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포션 빨다가 중독에 걸리면 풀어줄 사람이 없어.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인데 그랬다간 바로 파티 전멸이다.’ 세영이 피범벅이 되는 것은 몬스터의 인식 문제도 있었다. 원래는 선두에서 공격을 가하는 세영에게 인식이 쏠려야 하는데, 가끔 세영 외의 파티원들에게 접근하는 몹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몸을 날려 공격을 차단하자니 미친 듯이 뛰어다닐 수밖에 없었다. 온몸에 피가 묻는 것은 덤이었다. “혼세마왕님, 뒤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도 몬스터 한 두 마리쯤은 처리할 수 있습니다.” 미친년 널뛰듯 날아다니는 세영을 보다 못한 디안이 말했다. 세영은 “아, 네.” 하고 대충 대답하고 씹었다. 던전 중심부로 가면서 몹들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마리엔 같은 피통 작은 엘프는 한방만 맞아도 행동불능이 될 것이다. 초보들의 맥없는 공격력을 기대하느니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게 나았다. “이거 봐. 이거 또 나왔어!” 몹의 잔해를 뒤적이던 시디발라가 뭔가를 들고 왔다. 돌돌 말린 양피지 조각이었다. 세영은 말없이 양피지를 받아 이전에 나온 조각들과 합체시켰다. 아이템 확인창에 <알 수 없는 지도 – 3/4 완성> 이라는 글자가 떴다. 시디발라가 세영이 들고 있는 지도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몬스터가 왜 이런 걸 갖고 있는 걸까. 그것도 사이좋게 조각조각 나눠서.” “그런 거 생각해 봐야 머리만 아플걸.” 세영은 피식 웃으며 지도를 집어넣었다. 몬스터를 잡을 때 왜 금화가 떨어지는지에 대해 유저들이 모여 토론한 적이 있었다. 몬스터가 갖고 있던 금화라는 주장이 대세였지만, 왜 곰이나 사슴 같은 동물을 잡아도 금화가 나오는지는 해명하지 못했다. 세영은 그런 식의 탐구에 관심이 없는, 게임만 재미있으면 장땡인 유저였다. “하지만 진짜 이상한데. 그런 거 나왔다는 소리 들은 적 없는데.” “자, 그만 정리하고 이동합시다.” 세영은 뭐라 구시렁거리는 시디발라를 무시하며 파티원들을 재촉했다. 미궁이라는 이름답게 복잡한 길들이 펼쳐졌지만, 걱정되지는 않았다. 조금만 더 돌면 마지막 지도 조각이 나올 것이고 그럼 곧바로 보스룸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보스만 잡으면 여길 나가서 항의로 폭격을 퍼부어주겠어.’ 세영은 잊지 않고 플레이 영상을 녹화하고 있었다.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는 증거자료로 쓰기 위해서였다. 운영자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는 그녀의 두 주먹에 꽉 힘이 들어갔다. 피를 본 것은 일행을 맞이한 몬스터들이었다.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몬스터들의 비명이 오래도록 던전을 울리게 만들었다. ──────────────────────────────────── 왕의 미궁 (5) 존 새클린은 이번 미궁 원정의 책임자였다. 원정이라는 이름은 붙었지만, 왕국은 이것을 왕실사냥 같은 연례행사로 취급했다. 문관인 그가 책임자로 앉아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왕의 미궁은 왕국의 큰 골칫덩이였다. 미궁에서 쏟아져 나온 몬스터들이 마을을 습격하고, 보물을 노리는 모험가들은 시도 때도 없이 사고를 쳤다. 왕실에서도 미궁을 공략하기 위해 애썼지만, 수많은 물자와 인력만 낭비될 뿐이었다. 고심 끝에 왕국은 일 년에 한 번씩 미궁을 개방하여 모험가들을 맞이했다. 입장료를 받고 미궁에 입장시킨 후 사냥한 몬스터의 수만큼 상금을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개방 구역과 미개방 구역을 나누어 엄격하게 통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왕실과 관계없는 사람에게 미궁이 정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행사는 미궁에 사는 몬스터들의 수를 줄임과 동시에 대대적인 관광효과를 낳았다. 이름난 용사들이 왕국으로 모여들어 서로의 능력을 경쟁했고, 그것을 보러 모인 사람들로 인해 부가적인 수익도 발생했다. 이제는 왕국의 대표적인 축제로 자리 잡은 국가급의 행사였다. “또 싸움이냐! 이 잡배들!” 그러자 제 아무리 유명한 행사라도 실무자의 고충이 줄어들진 않았다. 오히려 늘어나서 탈이었다. 사냥한 몬스터를 두고 주먹싸움을 하는 참가자들은 애교였다. 자기들끼리 사기를 치고, 훔치고, 습격을 하고, 상해를 입히면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켰다. 원래 모험가라는 직업 자체가 부랑아나 양아치에 가까운 집단인 이상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오늘만 참으면 된다. 오늘만…….” 존은 주문처럼 되풀이했던 말을 다시 중얼거렸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행사는 오늘로 막바지에 다다라 있었다. 왕국의 기사와 모험가들로 이뤄진 선발대가 결승점으로 정해둔 거대한 동공에 도착했다. ‘왕의 무덤’이라는 별칭이 붙어있는 이곳에 모든 참가자가 모이면 정벌은 종료된다. 물론 던전의 입구까지 돌아가는 일이 남았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겪었던 수많은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딴 길로 새는 모험가들을 잡아내며 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놈들을 밖으로 내모는 일은 무척 즐거울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거대한 동공 가득 우글우글 모여 있는 모험가들마저 귀엽게 봐줄 수 있었다. 히죽 웃은 존이 평소보다 상냥하게 말했다. “싸우는 놈들은 이유 불문하고 상금을 까버리겠다고 전해.” “하지만 경, 그랬다간 불만이 대단할 겁니다.” “잡배들이 뭐라 지껄이든 상관없다. 내 앞에서 날뛰지 못하게 하면 충분해.” 난처한 표정의 기사가 무어라 말리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우르릉 소리와 함께 왕의 무덤 전체가 진동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제자리에서 자빠진 존이 버둥거리며 무슨 일이냐고 소리쳤다. 그를 붙잡아 일으킨 기사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천장이 열립니다!” 아수라장 속에서 간신히 그의 말을 알아들은 존이 고개를 들었다. 아치형이었던 둥근 천장이 벌어지면서 거대한 구멍이 모습을 드러냈다. 뒤로 물러서는 사람들이 내지르는 소리로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다음 순간 구멍 속에서 거대한 바위가 떨어졌다. 쿠웅 하는 진동으로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기사가 어서 지시를 내려달라고 소리쳤지만, 존은 제 몸을 지탱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머릿속이 마비되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우우우우웅!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바위가 빛을 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바위에 새겨진 문양이 빛났다. 접힌 상자가 열리듯 바위가 위로 솟구치더니 사람과 같은 팔다리가 생겨났다. 존이 정신을 차렸을 때 바위는 이미 돌로 이루어진 거인의 모습으로 변화해 있었다. “골렘이다!” “도망쳐!” 통제 불능이 된 모험가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왕의 무덤 밖으로 나가는 입구는 모두 봉쇄되어 있었다. 절망에 찬 사람들의 비명이 동공을 메아리치게 만들었다. “어, 어떻게 해야…….” 존은 텅 빈 눈으로 골렘을 바라봤다. 마도시대의 괴물, 고왕국을 멸망시켰다는 죽지 않는 거인. 저런 것과 마주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무릎이 절로 덜덜 떨려왔다. 공격 명령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아니, 명령을 한다고 해서 누가 저 괴물에게 덤벼들 수 있겠는가. “걸리적거리니까 비켜!” 날카로운 소녀의 목소리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놀라 돌아보자 골렘을 향해 날듯이 다가오는 인영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발은 허공에 반쯤 뜬 채였다. 쏜살같이 날아오는 그녀를 본 골렘이 갑자기 움직였다. -우워어엉! 웅장한 포효와 함께 바위로 이루어진 팔이 내리꽂혔다. 존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다음 순간 골렘의 주먹 아래 으깨졌을 거라 생각했던 소녀가 옷자락을 펄럭이며 날아올랐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우아한 동작이었다. “피도 없는 새끼가! 쉐도우 워킹!” 허공에 둥실 뜬 소녀가 소리치는 순간 그녀의 모습이 길게 늘어나더니 여러 개로 나뉘어졌다. 순식간에 다섯으로 불어난 소녀가 사방에서 골렘을 향해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골렘이 빙글 몸을 돌리며 피하려는 것 같았다. 그보다 소녀의 주먹이 내리꽂히는 것이 빨랐다. 공동의 공기가 터엉 하고 크게 튀었다. 작은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 같았다. 골렘의 몸이 그에 반응하듯 부르르 떨었다. 다음 순간 산산 조각난 골렘의 파편이 아래로 와르르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녀의 발이 아래로 떨어지는 파편을 밟고 위로 튀어 올랐다. 천장 높이까지 치솟은 그녀가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마리엔!” “블라인드!” 그에 응하듯 호리호리한 인영이 중앙으로 달려나오며 손에 든 완드를 치켜들었다. 완드 끝에 달린 푸른 보석이 반짝 빛을 낸 순간 펄럭이는 물의 장막이 허공에 펼쳐졌다. 천장의 구멍에서 튀어나오던 네 마리의 가고일이 멈칫하며 제자리에서 날개를 펄럭였다. “문댄스!” 짧게 외친 소녀가 화살처럼 몸을 날렸다. 춤을 추듯 높게 치켜든 다리가 아래로 내리꽂히며 공중에 멈춘 가고일의 몸을 박살냈다. 부서지는 가고일의 몸을 발판으로 해서 뛰어오른 소녀가 몸을 빙글 돌린 가고일의 머리를 후려쳤다. 두 번째 가고일이 박살나는 순간 허공에서 펄럭이던 물의 장막이 사라졌다. 남은 가고일들이 도망치듯 아래로 내려 꽂혔다. “홀리 라이트!” 사제의 엄숙한 목소리와 함께 순백의 빛이 터져 나왔다. 순간적으로 눈이 먼 가고일들이 키에엑 울부짖었다. 다이빙하듯 아래로 뛰어내린 소녀가 팔을 빙글 돌려 가고일의 등을 후려쳤다. 동료의 비명을 들은 가고일이 허둥거리며 아래로 내려왔다. “윈드 블레이드!” 사람들 틈에서 튀어나온 검사가 가고일의 배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에서 일어난 푸른 바람이 가고일의 약점인 배에 적중했다. 날카롭게 울부짖던 가고일은 소녀의 발에 짓밟혀 바닥으로 추락했다. 진흙처럼 뭉개진 가고일의 등에서 뛰어내린 소녀가 주변을 돌아보며 외쳤다. “시디발라!” “3시 방향이야!” 가고일과 골렘의 조각을 열심히 주워 모으던 수인족이 답했다. 만족한 듯 고개를 끄떡인 소녀가 중년의 사제에게 손짓했다. “리먼, 버프 걸어주세요.” 온화하게 미소 지은 사제가 “부름에 답할 빠른 마음을 지니게 하소서.” 하고 기도를 올렸다. 사제를 중심으로 모여든 이들의 몸이 짧게 반짝이는 빛을 냈다. 일행에게 손짓한 소녀가 앞서 달려나갔다. “3시 방향! 전속전진!” “…와아아.” “우리 언제 쉬어요?” 힘없는 함성과 함께 그들은 빠르게 동공을 빠져나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존이 “멈춰! 거기 서라!” 하고 소리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낭패감을 느낀 존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뭣들 하고 있나! 빨리 잡아와!” 발작적인 존의 외침에 기사들이 멈칫했다.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존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경, 골렘을 죽인 자들입니다.” “나는 눈이 없는 줄 아나! 알고 있으니 잡아오라고 한 것 아닌가!” “저희들만으로는 대적하기 무리인 상대입니다. 부디 재고해주십시오.” “지금 왕명을 어기겠다는 말인가!” 존은 항의하는 기사들을 왕명이라는 말로 찍어 눌렀다. 대적하기 무리인 상대라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엄청난 놈들이 개방되지 않은 구역으로 들어간 것이 문제였다. 존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처형될 위기 상황이었다. “어물거리다가 저들이 감히 닿지 말아야 할 곳을 침범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 생각인가!” 던전 정복을 암시하는 말에 기사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허둥거리는 그들을 쫓아 보낸 존은 질근 입술을 깨물었다. 수백 년 동안 침입을 허락한 적 없는 미궁이다. 그렇게 쉽게 함락될 거라곤 생각하진 않았다. 수많은 함정과 미로로 이루어진 마경이니까. “방금 봤어? 골렘을 한 주먹에 쳐 죽였어.” “진짜 인간인가? 어디서 그런 괴물이 튀어나온 거지?” “미궁 안으로 들어갔잖아. 던전을 정복할 생각일까?” 그 사이 살아남은 모험가들이 웅성이며 떠들기 시작했다. 믿기 힘든 광경을 코앞에서 지켜본데다가 통제를 할 기사들의 수는 줄어있었다.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통로 쪽으로 슬금슬금 이동하기 시작했다. “무슨 짓이냐! 어서 막아라!” 이변을 알아챈 존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하지만 남은 기사와 병사들로는 몰려드는 모험가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흥분한 모험가들은 앞을 가로막는 자들을 밀치고 짓밟으며 통로로 밀려들어갔다. 아우성과 비명이 왕의 무덤을 쩌렁쩌렁 울리게 했다. 왕국의 역사에 기록된 <던전 약탈자들> 사건이 그 서막을 올리고 있었다. ──────────────────────────────────── 왕의 미궁 (6) “10분간 휴식!” 세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파티원들이 바닥으로 무너졌다. 갑옷을 입은 디안과 몬스터의 잔해를 잔뜩 짊어진 시디발라는 아예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천장을 보며 헥헥거리던 시디발라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죽을 것 같아.” “왠지 사냥이 아니라 달리기만 하는 기분인데.” “그냥 그거야.” 바보 같은 대화에 혀를 찬 세영이 마실 것을 만들어 던져주었다. 먹으면서 좀 닥치라는 뜻이었다. 누운 채로 잽싸게 병을 낚아챈 둘이 좋아라하면서 꼴깍꼴깍 마셔댔다. ‘그래도 호흡은 의외로 잘 맞았지.’ 발목만 안 잡으면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제법 손발이 잘 맞는 파티원들이었다. 세영의 공격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적절하게 보조를 넣었다. 특히 인식이 다른 곳으로 튈 때마다 디안과 시디발라가 열심히 시간을 벌어주었다. 환상적인 콤비 플레이에 그들을 아니꼬워하던 마음도 한풀 꺾인 상태였다. 작은 웃음소리에 돌아보자 마리엔이 리먼에게 무어라 말하며 웃고 있었다. 세영은 그들의 옆으로 다가가 음료수를 건네며 물었다. “무슨 이야기 중이에요?” “앗, 감사해요. 조금 전에 봤던 사람들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활짝 웃은 마리엔이 명랑하게 덧붙였다. “너무 웃겼어요. 다들 넋 나간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잖아요.” 공동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잔뜩 긴장했던 마리엔이었다. 당장 잡으러 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멍청히 쳐다보는 모습이 뜻밖이었다. 골렘과 가고일을 화끈하게 때려 부순 세영과 거길 빠져나올 때는 조금 통쾌하기까지 했다. “난 만인 앞에서 범죄자가 된 기분인데.” 불퉁한 표정을 지은 시디발라가 투덜거렸다. 쯧 소리를 낸 디안이 그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제일 신이 나서 날뛴 게 누구더라?” “너는 어떻고!”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마리엔의 중얼거림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당황한 듯 길쭉한 귀를 세운 마리엔이 “앗, 죄송해요.” 하고 사과했다. 세영은 무슨 말이냐는 듯 손을 내저었다. “죄송하긴요. 당연히 재미있어야죠. 재미있으라고 하는 건데.” “당연한 건가요?” “그럼요. 재미가 없으면 이런 짓 누가 하겠어요. 돈을 주고 시켜도 못하지.” 게임에서 재미가 빠지면 노가다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세영이었다. 확신이 담긴 말을 전혀 다른 뜻으로 받아들인 마리엔이 두 뺨을 발그레하게 붉혔다. “사실 무서워서 조마조마한데도,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가슴이 막 두근두근하고요, 굉장히 신났어요. 이런 건 처음이에요.” “다행이네요.” 그들에게 몬스터 사냥은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매순간을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했기에 재미나 즐거움 같은 여유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당연히 재미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세영이 낯설면서도 굉장히 멋있어 보였다. 세영은 거칠고 제멋대로였지만, 굉장히 강하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었다. 확신을 가지고 남을 이끌었고 다른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살육을 힘겨워하면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순식간에 매료당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계속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임무를 다하면 천계로 돌아가시겠지?’ 세영을 동료를 구하기 위해 내려온 천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마리엔이었다. 임무를 마치고 떠날 세영을 생각하자 벌써부터 쓸쓸해졌다. 갑자기 시무룩해진 마리엔을 눈치채지 못한 세영은 시디발라에게 눈을 돌렸다. “시디발라, 이제 얼마나 남았어?” “다 쉰 다음 말하고 싶은데…….” “왜?” “말하면 당장 일어나라고 할 것 같아서.” 세영은 그에게 지긋이 시선을 주었다. 살벌한 눈빛에 끙끙대며 자리에서 일어난 시디발라가 지도를 꺼내 펼쳐보였다. “지도엔 다음, 그 다음 방 밖에 표시가 안 되어 있어.” “뭐?!” “정말?” 세영을 제외한 모두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흥분했다. 난처한 얼굴이 된 시디발라가 손을 내저었다. “다들 진정해. 지도의 끝인 거지 진짜 미궁의 끝은 아닐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런 말로 잔뜩 흥분한 사람들을 말릴 수는 없었다. 디안은 당장 시디발라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소리쳤다. “시디발라, 넌 미궁을 정복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쉬고 싶어?!” “난 지쳤거든. 정복이고 뭐고 쉬고 싶어.” “쉬는 건 나중에 얼마든지 해도 돼! 어서 일어나!” 결국 멱살이 잡힌 시디발라가 억지로 일으켜 세워졌다. 세영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파티원들을 보고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섰다. “자, 다들 피곤하겠지만 이제 2번 남았다니까 다 끝내고 나서 쉴까요?” 파티원들의 말 없는 환호가 그녀를 웃게 했다. 그들은 곧장 다음 방으로 향했다. 보스룸에 가까워질수록 등장하는 몬스터는 무생물에 가까워졌다. 고대 석상인 가고일이나 살아서 움직이는 동상, 설치형 마물인 히드라 트랩 같은 것들이었다. 이번 방은 움직이는 동상과 히드라 트랩이 빼곡히 깔려 있었다. 피와 살이 없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손쉬운 상대였다. “히드라부터 갈게요. 동상만 잠깐 막아주세요.” 세영이 십자로 배치된 트랩으로 몸을 날렸다. 히드라의 머리가 위로 올라가는 것보다 그녀의 발이 설치대를 부수는 것이 빨랐다. 세영이 연속기술을 써서 빠르게 트랩을 박살내는 동안 다른 파티원들은 온갖 수를 다 써서 동상들의 발을 묶었다. 자연스럽게 한군데로 몰린 동상의 가운데에 파이어볼을 떨어뜨려 상황을 정리한 세영이 가볍게 손목을 털었다. “보스룸 바로 갑니다.” 박살난 동상들을 멍하게 쳐다보고 있던 파티원들이 허둥지둥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들을 맞이한 것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문이었다. 웅장할 정도로 거대한 문의 전체에 마물에게 잡아먹히는 인간들을 묘사한 지옥도가 새겨져 있었다. 아름답지만 불길한 모습에 파티원들은 바짝 긴장했다. 태평한 것은 세영 뿐이었다. 무심한 얼굴로 문을 훑어본 그녀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미궁의 주인은 타락한 왕 므드사엘이었다. 과거 인간의 왕이었던 그는 힘에 대한 열망으로 미궁의 봉인을 파괴했다. 하지만 강한 힘을 얻은 대신 신의 저주를 받아 미궁의 가장 깊은 곳에 묶여버렸다. 분노에 잠식된 므드사엘은 점차 타락하여 인간의 모습을 잃어갔다. 결국 그는 둥근 뿔과 짐승의 머리, 말처럼 휘어진 다리를 가진 마물이 되었다. 미궁에 갇힌 채로 신과 인간들을 저주하던 므드사엘은 봉인된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분노로 울부짖었다. 그는 자신의 무기인 워해머를 움켜쥐고 문으로 돌진했다. -허락 없이 미궁에 발을 들인 자, 용서하지 않…!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작은 발이 그가 살아있을 때 본 마지막 풍경이 되었다. 쿠드득 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압력을 견디지 못한 머리가 뜯겨나가 구석으로 데구르륵 굴러갔다. “왜 문을 막고 서서 지랄이야?” 솟구치는 핏줄기를 피해 물러선 세영이 작게 투덜거렸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쓰러지는 거체를 구석으로 밀쳐버리며 보스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나머지 파티원들도 므드사엘의 시체를 짓밟고 뛰어넘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유일하게 지식이 있는 리먼조자 그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다. 므드사엘의 특징인 소머리가 구석진 곳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던 탓이었다. “보스가 왜 안 나오죠?” 세영이 텅 빈 보스룸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그녀에게 므드사엘은 지나가는 미노타우르스1이었기에 보스라고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때마침 미궁 전체가 진동하더니 환하게 빛나는 인영이 보스룸 한가운데로 내려왔다. 세영은 반색하며 몸을 날렸다. “거기냐!” -나를 구원한 자여, 그대의…… 꾸엑! 감금에서 풀려난 기쁨을 표현하던 자드키엘은 세영의 주먹을 정통으로 맞았다. 그는 허리를 기역자로 꺾으며 뒤로 튕겨나갔다. 여섯 장의 날개가 안쪽으로 쏠려 거대한 배드민턴공처럼 보였다. 꿱 소리와 함께 벽에 부딪힌 자드키엘이 살기 위해 바르작거렸다. ‘역시 보스라서 한방에 안 죽네.’ 세영은 보스가 일어서기 전에 처치하기 위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파티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안 돼! 미친놈아!” “무슨 짓입니까!” “천사님이에요! 때리지 마세요!” “대천사 자드키엘입니다!” “읭?” 뜻밖의 상황에 놀란 세영이 공격을 멈추었다. 온몸으로 퍼덕거리며 꽥꽥 소리를 질러대는 동료들의 입에서 ‘자드키엘’이라는 이름이 반복되었다. 자드키엘이 누구더라 생각하던 세영은 그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했다. “아니, 무슨 NPC가 유저에게 쳐맞아!” 던전 자체가 미쳤다고 짜증을 낸 세영이 바닥에서 굴러다니는 자드키엘을 잡아 일으켰다. 빈사상태의 천사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아아, 이곳이 지옥의 밑바닥인가. 주신이여, 저를 구원하소서. “헛소리 말고 일어나. 대화해야지!” 자드키엘과 대화를 하지 못하면 퀘스트 완료가 되지 않는다. 마음이 급해진 세영이 자드키엘의 멱살을 쥐고 탈탈 털었다. 켁켁거리던 천사가 힘없이 몸을 늘어뜨렸다. -더 이상은 버틸 힘이 없구나. 눈앞이 점점 흐려진다. “미친놈아! 이런 걸로 죽지 마!” 인벤토리를 연 세영이 <하이퍼 붕붕 리큐르>를 꺼냈다. 모든 상태 이상과 부상을 치유하고 체력과 마력, 스테미너까지 완벽 회복하는 캐쉬 아이템이었다. 리큐르의 뚜껑을 딴 세영은 자드키엘의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빛나는 찹쌀떡처럼 생긴 천사는 입과 코가 어디인지 구분하기가 애매했다. 그녀는 병을 대충 구멍처럼 보이는 곳에 쑤셔 넣었다. “입이든 코든 빨리 쳐먹어!” -켁! 쿠억! 컥! 쿨럭! 갑자기 코렁탕을 먹게 된 자드키엘이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그가 세영의 힘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꿀렁꿀렁 소리와 함께 황금빛 액체가 천사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병이 다 비워질 때쯤 축 늘어진 자드키엘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엇? 죽었나?” 당황한 세영이 머리를 긁적였다. 일방적인 대화를 하긴 했지만, 제대로 된 키워드를 얻지 못했으니 퀘스트 완료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나 하고 한숨을 쉬는 순간 갑자기 자드키엘의 몸이 위로 솟구치며 번쩍이는 빛을 뿌렸다. 빛나는 여섯 장의 날개를 쫙 펼친 자드키엘이 웅웅거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타락한 왕에게 빼앗겼던 힘이 돌아왔다! “시발, 깜짝이야!” 확마씨 하고 주먹을 올리는 세영을 본 자드키엘이 움찔했다. 날개를 움직여 좀 더 높은 곳으로 이동한 그는 위엄을 되찾기 위해 애쓰며 말했다. -이계인이여. 나는 정의의 천사 자드키엘. 이곳에서 그대를 기다렸다. ──────────────────────────────────── 왕의 미궁 (7) 세영을 제외한 파티원들이 감격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그들에게 눈앞의 장면은 전설의 재현이나 다름없었다. 정작 주인공인 세영은 심드렁한 얼굴로 “오냐.” 하고 대꾸했다. 당황해서 버벅거리던 자드키엘이 간신히 평정을 되찾았다. -그대에게 주신의 영광스러운 임무를 전하겠다. “이게 왜 스킵이 안 되지.” -흠흠, 이계인이여. 이곳은 현실이다. 그대는 주신의 부름으로 이곳으로 소환되었다. “네네, 알겠으니까 퀘스트 완료. 빨리 좀.”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세영은 퀘스트 완료만 외쳐댔다. 답답함에 온몸을 부르르 떤 자드키엘이 여섯 장의 날개에서 빛을 뿜어냈다. 순백보다 더 하얀 빛이 시야를 메우며 이곳과 다른 풍경을 비추었다. 제일 처음 보인 것은 익숙한 게임 화면이었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세영을 찾는 길드원들의 대화가 보였다. <마왕 언니! 언니 어디 갔지?> 하고 계속 부르는 요거요거링을 보니 가슴이 답답했다. “나 여기 있어!” 하고 소리쳤지만, 왠지 닿지 않을 것 같았다. 갑자기 바뀐 장면이 이번엔 익숙한 집안의 풍경을 비췄다. 좁은 집을 샅샅이 훑던 빛이 게임캡슐에 닿았다. 사용자가 있는 것처럼 꽉 닫힌 캡슐의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엇, 시발. 뭐야! 내 몸 어디 갔어?”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 없자 가슴 속이 서늘해졌다. 빛이 완전히 사라진 뒤 자드키엘이 기대 어린 얼굴로 말했다. -이제 알겠는가. 그대는 차원을 건너 이곳으로 왔다. 이곳은 현실이다. “이거 몰래카메라야? 아니면 게임 이벤트?” -그러니까 차원을……. “장난이면 좀 그만하지? 나 엄청 기분 나빠지려고 하는데.” -차원 이동을 했다고! 이게 현실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건가! 참다못한 자드키엘이 버럭버럭 소리쳤다. 세영이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건 진짜 그대의 몸이다. 이곳에서 찔리고 다치면 그대는 죽는다! 그대의 세상처럼 죽어도 부활하는 일은 없어! “…….” -오거의 머리가 터져서 이상하다고 했지? 여기가 현실이라서 그렇다! 이곳의 몬스터도, 저기의 인간들도, 여기 있는 나도! 모두 실재하는 것들이다. 가짜가 아니야! “…….” 세영은 아무 말도 없이 굳어있었다. 입을 꾹 다문 창백한 얼굴이 충격을 받은 사람 같았다. 씩씩거리던 자드키엘이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여섯 개의 날개가 곱게 접힌 후에야 세영이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제가 진짜 차원 이동을 했다는 말씀이세요?” -그렇다! 이제야 이해했군. “여기가 게임 속이 아니라 다른 세상이라고요?” -진실이다. 자드키엘이 고개를 끄떡이는 순간 커다란 불덩이가 그의 옆을 스쳐 벽에 쾅 틀어박혔다. 치이익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까맣게 그을린 깃털들이 모락모락 연기를 뿜었다. 얼어붙은 자드키엘을 보고 세영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닌데? 게임 같은데? 게임 기술 다 써지는데?” -몇 번을 말해야 알겠나. 이곳은 또 다른 차원의 현실이다. 그대의 뛰어난 능력이 필요했기에 주신께서 특별히 소환한 것이다. 자드키엘은 자신을 사로잡은 섬뜩한 느낌을 뿌리치기 위해 애써 큰소리를 냈다. 순간 세영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졌다. 가면 같은 얼굴이 된 세영이 음산한 목소리를 냈다. “여기가 진짜 현실이라고?” -그렇다. “그러니까 네 주인이란 새끼가 동의도 없이 나를 납치했단 말이네?” -무엄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드키엘은 바닥에 처박혔다. 그는 바닥을 굴러다니며 맞고 또 맞고 또 맞으며 얻어터졌다. 처음엔 -감히! 라던가 –무슨 짓이냐! 라던가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같은 말을 뱉었지만, 나중엔 -악! 이나 -억! 같은 비명을 토해내는 것도 힘겨웠다. 눈앞이 가물가물해지고 정신이 혼미해져 이제 죽는구나 생각이 들 때면 어김없이 “리커버리!” 라던가 “힐링!” 이라던가 “상처치료!”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그럼 저릿한 아픔과 함께 상처가 사라지며 시야도 다시 밝아졌다. 그리고 또다시 바닥에 처박히고 두들겨 맞는 일이 반복되었다.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자드키엘의 멱살을 잡아 일으킨 세영이 으르렁거렸다. “느닷없이 납치해놓고 임무를 전하겠다고? 장난까냐! 노예한테도 이따위 짓은 안 해, 새꺄!” -죄, 죄송합니다. 자드키엘이 눈인지 입인지 알 수 없는 구멍으로 물을 질질 흘리며 빌었다. 세영은 그의 뺨을 왕복으로 찰싹찰싹 때리며 윽박질렀다. “죄소옹? 죄송? 말로 죄송하면 다야?! 죄송하면 날 돌려보내라고! 이 닭둘기 자식아!” -컥, 그건, 제가 할 수 없……. “못해? 못한다고? 지금 못한다는 소리를 지금 나한테 지껄이는 거야? 엉?” -죄, 죄송합니다. 제발 용서해주세요! 자드키엘은 온몸으로 울부짖으며 세영의 자비를 구걸했다. 그녀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는 것은 주신만이 가능한 일이라는 답을 들은 세영이 버럭 소리쳤다. “그럼 신 새끼한테 지금 당장 튀어나오라고 해!” -그래도 신이신데 말씀이 너무 지나치신……. 훌쩍훌쩍 울던 자드키엘이 주인을 욕하는 말에 발끈했다가 다시 쭈그러들었다. 피식 코웃음을 친 세영이 히죽거리며 물었다. “뭐, 지나쳐? 지금 나보고 지나치다고? 닭둘기, 너 똑똑히 대답해라. 길 가던 사람 납치해서 다른 곳에 떨궈놓고 돌아가고 싶으면 직접 찾아오라는 놈이 제정신이야?” -……. “왜 대답을 못 해. 새끼야, 빨리 신 개새끼 해봐. 신 개새끼!” -그만! 제발 그만둬!!! 신앙을 시험받는 위기에 직면한 천사가 발작하듯 세영을 밀어냈다. 엉겁결에 밀려난 세영이 어쭈? 하고 눈을 부라렸다. 곧바로 바닥에 털푸덕 엎어진 자드키엘이 세영의 발목에 매달리며 소리쳤다. -신께서 당신을 이곳으로 불러온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건 결국 우리 모두를 위해 하신 일이란 말입니다! “엥?” -이 세상에는 우리만 사는 게 아니잖아요! 다른 차원, 다른 종족, 다른 국가, 하나의 생물, 모든 생명체! 우리만 사는 게 아니니까 우리만 생각할 수는 없는 겁니다! “이게 약을 처먹었나.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아직 덜 맞은 것 같다며 주먹을 드는 순간, 가냘픈 목소리가 “혼세마왕님.” 하고 불렀다. 그동안 일행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세영이 아차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겁먹은 얼굴의 마리엔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 “그만 때리시면 안 돼요? 천사님이 너무 불쌍해요.” “그래, 그만 좀 때려! 그만하면 많이 때렸잖아!” 멀찍이 떨어진 벽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시디발라가 소리쳤다. 그와 비슷하게 허옇게 질린 디안이 고개를 크게 끄떡였다. 멋모르고 세영의 미움을 샀던 둘은 바닥을 구르는 자드키엘을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없었다. 마리엔의 뒤에 서 있는 리먼도 참담한 표정이었다. “물론 천사님이 잘못했겠지만, 그래서 이렇게 화가 나서 많이 때리셨겠지만, 그래도 계속 때리면 죽을지도 모르고, 그건 혼세마왕님께도 안 좋을 것 같아요.” 조심스럽게 말을 마친 마리엔이 간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세영의 분노를 살까 봐 무서우면서도 자드키엘이 불쌍한 것 같았다. 어느새 꽉 쥔 주먹이 풀어진 것을 느낀 세영이 자드키엘을 발끝으로 툭 쳤다. “야, 닭둘기. 너 진짜 마리엔 때문에 산 줄 알아. 마리엔 아니었으면 네 깃털 모조리 뽑아서 산채로 구워버렸을 거야.”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 자드키엘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즉시 엉금엉금 기어 마리엔의 뒤에 숨었다. 세영에게 쥐어뜯겨 엉망진창이 된 천사는 신성한 존재가 아니라 넝마처럼 보였다. 우드득 소리가 나게 목을 이리저리 돌린 세영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신새끼가 뭐 때문에 나를 불렀다고?” 마도시대. 빛의 주신이 아닌, 마신의 지배를 받았던 암흑의 시대. 그것은 타락의 시대였고, 피와 전쟁과 폭력이 대륙을 휩쓸었던 고통의 시간이었다. 마도시대를 끝낸 현자들은 마신을 불러들인 암흑 신기를 대륙 곳곳에 봉인하였다. “그냥 부술 것이지 봉인은 왜 했대? 괜히 찝찝하잖아?” -그들에게 신기를 부술만한 힘이 없었던 탓입니다. 세영의 앞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은 자드키엘이 넙죽 대답했다.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을 느낀 세영이 뺨을 긁적였다. “설마 그거 부숴달라고 날 부른 건 아니겠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역시 이계인님의 선견지명은 대단하십니다! 이 자드키엘,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 “안 어울리니까 아부 떨지 마라.” -…예. 면박을 당하는 대신 두들겨 맞는 일을 피한 자드키엘은 내심 기뻐하며 이야기를 이었다. -현자들은 왕의 미궁, 용의 둥지, 모래의 탑, 시암의 숲, 가나트리 성당, 세 가지 눈의 섬, 고대의 신전에 암흑신기를 봉인했습니다. 자드키엘이 숨도 쉬지 않고 내뱉는 지명에 세영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안 좋은 예감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아, 이거 노가다 퀘스트 받기 전의 분위기인데.’ 세영의 얼굴이 굳어지자 자드키엘의 몸이 절로 움찔거렸다. 마음 같아선 임무 전달이고 뭐고 팽개치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으니 말이 절로 빨라졌다. 던전에 대해 떠벌떠벌 설명하는 그를 가로막은 세영이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하고 물었다. 찔끔한 자드키엘이 공손하게 말했다. -주신께서는 암흑 신기를 모두 거두어 파괴하길 원하십니다. “그거 때문에 멀쩡히 게임 하고 있던 나를 설명도 없이 끌고 왔단 거네?” -……. 찔끔 나온 눈물을 삼킨 자드키엘이 ‘주신이시여, 왜 하필 이런 사람을 용사로 선택하셨나이까.’ 하고 무엄한 생각을 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천사를 보고 한숨을 쉰 세영이 물었다. “그래서 지금 나한테 던전 7개를 뺑뺑이 돌라고?” -6, 6개입니다. “지금 하나 돈 건 돈 것도 아니다 이거냐?” -아니, 그게 아니라 7대 봉인지 중 <용의 둥지>는 이미 정복되었습니다! 위로 쑥 올라오는 주먹을 본 자드키엘이 다급하게 외쳤다. 머리를 긁적거린 세영이 옆에 앉아있는 마리엔에게 물었다. “저거 진짜예요?” “네? 아, 네. 사실이에요. 15년 전에 <용의 둥지>가 로토라는 사람에게 정복되었어요. 그 뒤로 마경을 정복하려는 모험가들도 늘어났고요.” 고개를 끄떡인 마리엔이 조곤조곤 설명해주었다. 용의 둥지에 있던 보물과 ‘신검’을 손에 넣은 로토는 자신을 ‘정복왕’이라고 칭하며 나라를 세웠다. 그것을 보고, 제 2의 정복왕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마경을 향해 떠났고, 대륙 전체가 갑자기 늘어난 모험가들로 몸살을 앓았다. “그럼 로토인가 로또인가 하는 사람에게 부탁하지, 왜 날 부른 건데?” -로토는 마도의 후예입니다. 그는 신기를 모아 마신을 다시 이 땅에 강림시킬 것을 천명하고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모아 나라를 세웠지요. 그것을 막기 위해 주신께서 세영을 부른 거라 설명한 자드키엘이 눈물을 훔쳤다. 그가 생각했던 임무전달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좀 더 엄숙하며, 감동적이며, 거룩한 것이어야 했다. 이계에서 소환된 용사가 왜 날 납치했냐고 자신을 두들겨 패는 것 따윈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띨띨한 현자들이 마신을 부르는 신기를 파괴도 못 하고 대충 파묻어 놨는데, 그걸 로또라는 야심 찬 애가 파냈고, 그걸 15년 동안이나 수습을 못 한 신새끼가 날 불러서 지 똥을 대신 좀 치워달라고 했다는 말이네.” -그건……. 예에. 그렇습니다. 해탈한 표정의 천사가 고개를 끄떡였다. 어떻게든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노력이 눈물겨웠다. 그를 빤히 쳐다보던 세영이 귀를 후비적거리며 물었다. “그걸 맨입으로 해달라고?” ──────────────────────────────────── 왕의 미궁 (8) “그걸 맨입으로 해달라고?” -…네? “내가 그거 해주면 신은 나한테 뭐 해주는데?” 얼이 빠진 자드키엘이 더듬거리며 –임무를 완수하면 원래의 세계로 보내드리고……. 하고 말했다. 얼굴을 야차처럼 일그러뜨린 세영이 “그건 당연한 거고. 새꺄!” 하고 윽박질렀다. 움찔한 자드키엘이 재빨리 말을 고쳤다. -이 세계를 위해 힘써주신 이계인님의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소원? 설마 꼴랑 소원 하나만 들어주는 건 아니겠지?” -…네? “로또 1등 먹어도 살기 힘든 세상에 있는 날 끌고 와서 신나게 부려먹고는 소원 하나 던져주며 이거 먹고 떨어지란 소리는 안하겠지?” 그게 맞지만 그렇다고 하면 두들겨 팰 분위기였다. 동공에 지진을 일으킨 천사가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달싹거렸다. -그럼 뭐, 뭘 원하시는지……. “유구한 전통에 따라 소원 3개는 기본 아닌가. 그거랑 별개로 현금 보상은 당연하고. 아파트 한 채는 자동으로 들어가야지. 자동차 기종은 잘 모르니까 알아서 맞춰줘. 그리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보상 목록에 자드키엘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세영은 평생 무슨 보상을 받을지 연구했던 사람처럼 원하는 것들을 다다닥 쏟아냈다. 날개 끝까지 푸르뎅뎅해진 자드키엘이 죽어가는 목소리를 짜냈다. -저, 저기. 죄송하지만 이계인님. 그, 그걸 다 드리기엔 저희 천계의 형편이……. “왜? 왜 안 되는데? 왜 안 되는지 A4 200장으로 사유서 제출해 봐. 읽어보고 부적절한 내용 나올 때마다 너 한 대씩 때려도 돼?” 차라리 마신이 강림하는 게 낫지 않을까. 자드키엘은 진심으로 고민했다. 절망에 찬 그를 바라보던 마리엔이 세영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저기, 혼세마왕님. 천사님도 사정이 힘드신 것 같은데. 조금만 봐주세요. 나쁜 건 신님이지 천사님이 아니잖아요.” “그렇습니다. 고작 천사인 분이 무슨 권한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제발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이어서 리먼이 엎드려 빌기라도 할 듯이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자드키엘이 울망울망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위해 나서주는 두 사람이 뼈에 사무치도록 고마웠다. “쩝, 그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 없네요. 제가 좀 양보할게요.” 이럴 때 아주 뽕을 뽑아야하는데 하고 툴툴거린 세영이 인벤토리에서 종이와 깃펜을 꺼냈다. 그녀는 한참을 무어라 종이 위에 끄적거리고는 자드키엘에게 내밀었다. 의아한 표정의 자드키엘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이게 뭡니까? “보면 몰라? 계약서. 읽어보고 밑에 싸인해.” 한 장은 계약서인데 다른 한 장은 ‘신체양도각서’라고 되어 있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자드키엘이 일단 계약서부터 꼼꼼히 읽었다. 갑이 주신, 을이 주세영으로 되어있는 계약서였다. 가. 갑은 을에게 소원 하나를 제한 없이 들어준다. 나. 갑은 을에게 을의 게임 계정에 귀속된 게임 골드만큼의 현금을 일시불로 지급한다. 이때 1골드를 1천원으로 계산하되 시점은 을이 소환되기 직전의 시각으로 한다. 다. 갑은 을의 향후 수명과 건강을 보장하고……. 라. 갑은 을에게…….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계약하며, 만약 계약이 해지되거나 도중 종료된 경우 갑은 사유가 있는 날부터 3일 이내에 나. 항목의 가치가 있는 현금 또는 부동산으로 을에게 지체 없이 보상하여야 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 항목을 몇 번이나 다시 읽던 자드키엘이 소심하게 물었다. -저, 저기. 여기 만약 계약이 해지되거나 도중 종료된 경우는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내가 도중에 때려치워도 보상금 내놓으라고. 정신적인 피해보상 몰라?” 날강도라고 얼굴에 써 붙인 세영이 대꾸했다. 하지만 그건 다음에 쓰인 항목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갑의 유책인 경우 보증인 자드키엘의 신상을 을에게 양도한다. 제일 밑에는 세 사람의 서명을 요구하는 란이 있었다. 신체양도각서는 만약 계약이 지켜지지 않을 때 신체와 그에 귀속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세영에게 맡기겠다는 일종의 각서였다. 허옇게 질린 자드키엘이 손을 덜덜 떨었다. -저, 꼭 이렇게까지 해야……. “이건 그냥 안전장치야. 안전장치. 걱정 꽉 붙들어 매고 싸인해.” -하, 하지만 왜 제가 보증을……. “너 신 못 믿니? 신 믿지? 그럼 싸인해.” 자식에게도 서주지 않는다는 보증과 절대적인 신앙 앞에서 천사는 파리하게 괴로워했다. 결국 떨리는 손으로 서명을 한 자드키엘이 날개를 축 늘어뜨렸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신체양도각서를 챙겨 넣은 세영이 발끝으로 그를 툭 찼다. “뭐하냐. 빨리 가서 주신 싸인 받아와야지.” -……. “10분 줄 테니까 빨리 갔다 와라. 5분 늦어질 때마다 한 대다.” -…네.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자드키엘이 눈물을 흩뿌리며 사라진 뒤에 세영은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믿기질 않았다. 차원이동이니 뭐니 하는 건 소설 속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아, 모르겠다. 이렇게 지내다보면 어느 쪽인지 판가름 나겠지.’ 게임을 너무 오래해서 신체에 무리가 가면 캡슐에서 강제로 접속을 차단한다. 만약 여기가 게임 속이라면 어느 순간 튕겨 나오게 될 것이다. 그게 아니라 천사의 말대로 정말 차원이동을 한 거라면 퀘스트를 하면 그만이고. 보상만 제대로 받는다면 로또 1등이 장난인 금액이니 못할 것도 없었다. ‘어, 잠깐. 이게 진짜라면 마리엔도 진짜 엘프?’ 세영의 시선을 받은 마리엔이 발그레하게 얼굴을 붉혔다. 샛별처럼 반짝이는 초록색 눈이 마리엔의 미모를 1.5배는 더 돋보이게 해주었다. 훈훈한 미모에 세영의 얼굴이 절로 흐물흐물 풀어졌다. “저는 혼세마왕님이 그렇게 대단한 분이신 줄은 몰랐어요. 그냥 천계에 속한 분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도 대단한 거지만. 사실은 정말정말 대단하신 분이었네요!” “에이, 뭘요. 그저 한 마리 잉여인데.” 세영은 그냥 게임폐인일 뿐이라며 겸손을 떨었지만, 마리엔은 동경과 선망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타락한 왕을 가볍게 해치우고 천사마저 후드리챱챱 두들겨 패는 세영은 그녀에게 전설 속의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세상을 구하러 오신 용사님이잖아요. 전 혼세마왕님과 만난 것을 평생의 자랑으로 여길 거예요. 정말 다시없는 영광이에요. 감사합니다.” 마리엔은 자신이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마법사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그녀가 용사를 만나 함께 왕의 미궁을 정복했다. 전설 속의 천사도 만나고 세상을 구하라는 계시를 받는 자리에 같이 있었다. 대대손손 전해도 좋을 정도로 멋진 자랑거리였다. 두 손을 꼭 모아 쥔 그녀를 본 세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영광은 무슨……. 그럼 저랑 같이 다른 던전도 가보실래요? 제가 다른 건 몰라도 렙은 확실히 올려 드릴게요.” “나도!” 눈치만 보던 시디발라가 꽥 소리를 지르며 끼어들었다. 그는 세영이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촐싹거리며 날뛰었다. “나도 데려가! 나도! 제발! 이렇게 빌게.” 바닥에 무릎을 꿇은 시디발라를 빤히 쳐다보던 세영이 다른 파티원들을 돌아보았다. 각자의 스타일대로 애절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영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뭐,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다 같이 다니죠.” 기쁨의 환호를 지른 파티원들이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심지어 리먼까지 체면을 내던지고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다녔다. 세영은 ‘그렇게 좋은가?’ 하고 생각하며 그들의 모습을 구경했다. 그때 기쁨의 세레머니를 펼치는 그들의 한가운데로 불덩이가 된 천사가 추락했다. “으악! 뭐야!” “처, 천사님. 괜찮으세요?” 당황해 비명을 지르는 파티원들을 헤치며 자드키엘이 엉금엉금 기어왔다. 필사적인 몸짓이었다. 불이 점차 꺼지면서 까맣게 그을린 몸뚱이가 드러났다. 간신히 고개를 든 자드키엘이 세영을 보며 말했다. -10, 10분……. 안 지났……. “어, 그래.” 대충 고개를 끄떡인 세영이 손을 내밀었다. 품에서 계약서를 꺼낸 천사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내밀었다. 세영은 계약서에 찍힌 주신의 인장을 확인하고는 자드키엘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고생했다.” 뜻밖의 말을 들은 자드키엘이 어깨를 떨며 울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설움이 물밀 듯이 밀려온 탓이었다. 원하던 것을 손에 넣은 세영은 너그러웠고, 천사 한 마리의 투정쯤은 받아줄 마인드가 되어 있었다. “주신한테 많이 까였냐?” -아, 아니요. 흐, 흡……. “그래, 나쁜 건 신이지 네가 아닌데 내가 너무했네. 미안하다.” -아… 흡, 아닙니다. 재투성이가 된 자드키엘을 보고 혀를 찬 세영이 부상치료와 클렌징을 써주었다. 깃털 하나까지 윤이 나게 변한 천사가 눈물을 닦으며 감사를 표했다. 세영이 그를 힐끗 보며 물었다. “그럼 계약대로 던전 6개 돌고 신기 찾아서 파괴하면 되는 거지?” -아, 아뇨. “뭐?” -마지막 마경인 고대의 신전은 신기 6개를 모아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겁먹은 얼굴의 자드키엘이 -아까 말하려고 했는데……. 하고 덧붙였다. 설명을 자른 것은 자신이라 세영은 불편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왕의 미궁은 이미 정복하셨으니 모래의 탑, 시암의 숲, 가나트리 성당, 세 가지 눈의 섬에서 신기를 찾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정복왕이 소유한 신검을……. “로또라는 놈이 갖고 있는 신기까지 뺏어서 고대의 신전을 열라는 거네.” -…네. 음산한 목소리에 찔끔한 자드키엘이 공처럼 몸을 작게 말았다. 조금이라도 맞는 충격을 줄여보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한숨을 푹 쉰 세영이 손을 내저었다. “할 수 없지. 이야기를 안 들은 내 탓이니 그 정도의 리스크는 감수할게.” -가, 감사합니다! “알았으니 가봐. 주신께는 계약 꼭 지키라고 말하고.” -꼭 지키실 겁니다. 얼른 돌아가기 위해 날개를 펼치던 자드키엘이 조금 불만스럽게 말했다. 어떻게 주신을 의심할 수 있냐는 어조였다. 흐음 소리를 내며 그를 위아래로 훑어본 세영이 물었다. “눈물이랑 깃털도 뽑아 팔면 돈벌이가 될 것 같고. 구경거리로도 좋겠고. 너 무슨 기술 쓸 수 있냐?” -바, 반드시 꼭 지키라고 전하겠습니다! 부르르 몸을 떤 자드키엘이 쏜살같이 도망갔다. 가기 전에 마리엔과 리먼에게 빛을 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천사의 축복이었다. 그것을 눈치챈 세영이 혀를 찼다. ‘줄 거면 좋은 걸로 주지. 쪼잔하게 축복이 뭐야.’ 사실 세영의 생각처럼 쪼잔한 것은 아니었다. 대천사의 축복이므로 체력과 마력을 일정 비율 올려주고, 미약하게나마 저주와 상태 이상에 대한 저항력이 증가했다. 특히 사제인 리먼에겐 굉장히 효율적인 버프였다. “자, 그럼 이제 보상 받으러 가볼까요?” 세영의 말에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놀라는 그들을 보며 오히려 의아해진 세영이 “같이 싸웠으니 보상도 같이 받아야죠.” 하고 말했다. 그리고 반론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기세로 보상방으로 향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파티원들이 세영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 왕의 미궁 (9) 제일 먼저 보상방으로 들어간 세영이 안을 훑어보았다. 파티원들의 수에 맞춘 다섯 개의 보물 상자가 둥글게 놓여있었다. 상자의 가운데는 높은 단이 있었는데, 한가운데 거무튀튀한 반지 하나가 놓인 채였다. “저건가?” 세영은 망설임 없이 반지를 집어 들었다. 반지를 확인하자 아이템 정보창이 떴다. [타락한 미궁의 반지] 도구속성 -전설의 장신구 타이틀 속성 -낮은 확률로 적에게 혼란 스킬 발동 -적중 시 블라인드 확률 1% 전설템 치고는 참 초라한 스펙이었다. 인벤토리 구석에 반지를 넣은 세영이 그녀를 기다리는 파티원들에게 활짝 웃었다. “뭐 하고 있어요. 상자부터 열어봐야지.” 세영이 보란 듯이 상자를 열자 망설이던 일행들도 상자를 열었다. 모든 상자에서 아이템 하나와 약간의 금화, 보석이 나왔다. 시큰둥하게 아이템을 집어 드는 세영과 달리 일행은 금화를 들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와, 금화 좀 봐. 이게 다 얼마야?” “3857골드네.” 금화로 좌르륵 좌르륵 소리를 내는 시디발라를 힐끔 쳐다본 세영이 답했다. 일반 던전 등급이라서인지 보상이 미미했다. 그래도 아이템은 모두 마법템이 나왔으니 운이 나쁜 건 아니었다. “어디 보자. 전부 다 마법 등급이 나왔네요. 쓸 만한 물건은 아니니까 상점에 팔면 되겠고. 제건 일단 레어이긴 한데 옵션이 좀 구리네요.” “옵션이 뭔데?” 세영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시디발라가 물었다. 그는 ‘옵션’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달라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잘못 알아들은 세영이 자신이 들고 있는 검을 살폈다. [패왕의 검] 무기 속성 -매우 희귀한 한손무기 -공격 160~220 -부상률 10% 타이틀 속성 -낮은 확률로 도발 스킬 발동 -적중 시 낮은 확률로 체력의 1%를 회복 요구레벨 : 32 “도발 스킬이랑 체력 회복 붙어있는데. 옵션이 2개밖에 없고 스펙도 구려. 패왕의 검이라는 이름이 아깝다.” 시큰둥한 설명에 일행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황급히 시디발라를 밀쳐낸 디안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정말 패왕의 검입니까? 전설에 나오는 그?” “전설템 아닌데요. 그냥 레어템.” “그 검의 이름이 진짜 패왕의 검입니까?” “네. 별로 좋은 건 아닌데 가질래요?” 세영이 제 손에 든 검을 디안에게 내밀었다. 기겁하며 뒤로 물러선 디안이 양손을 저었다. “아니, 무슨! 전 그런 어마어마한 보물을 가질 자격이 없습니다.” “이게 무슨 보물이에요. 그냥 상점에 팔거나 녹여서 고철로 만들면 딱이겠구만.” 그래도 레어니까 파는 게 낫겠다고 덧붙인 세영이 어서 받으라며 검을 흔들었다. 디안은 이것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악몽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패왕의 검을 고철로 만들겠다고? 아니, 나한테 준다고?’ 짧은 순간 디안은 평생에 다시없을 만큼 치열하게 고민했다. 눈을 딱 감고 손을 내밀고 싶은 마음이 반, 분수에 맞지 않는 귀물에 손을 대면 안 된다는 마음이 반이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그를 보고 세영이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이었다. “잠까아아아아안!” 쿵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보상방에 난입했다. 흐린 벽돌색 머리카락에 신경질적인 얼굴과 조금 마른 체격을 가진 남자였다. 고급스러운 옷과 그와 함께 들어온 기사들로 봐서 제법 신분이 높아 보였다. 옆구리를 부여잡고 헐떡이던 남자가 애써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이번 미궁 원정의 책임자인 존 새클린이오.” “네, 안녕하세요?” 세영은 태연한 얼굴로 그의 소개를 받아넘겼다. 예상 밖의 대답에 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는 상황에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귀, 귀하의 성명과 국적을 말해줄 수 있겠소?” “왜요?” 세영에겐 당연한 물음이었지만, 존에겐 뻔뻔하기 짝이 없는 대꾸였다. 그는 분노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외쳤다. “귀하가 저지른 짓은 명백한 반역 행위요! 본국은 이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바이오!” “무슨 반역 행위요?” “기사들의 제지를 듣지 않고 미궁 안으로 들어갔지 않소! 게, 게다가 이런 약탈 행위를 달리 무엇으로 설명할 거요?” “제지 같은 건 못 받았는데요? 그리고 약탈이라니, 무슨 헛소리예요?” 세영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녀의 기준에서 약탈이란 존의 뒤통수를 쳐서 기절시키고 품에 들어있는 돈과 아이템을 빼가는 것이었다. 대체 뭘 빼앗겼냐고 묻자 말문이 막혀 우물대던 존이 다시 소리쳤다. “귀하가 들고 있는 것은 왕실의 보물이오. 당장 돌려줄 것을 요청하오!” 존도 자신의 말이 억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억지라도 쓰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해도 가족들은 살려야 했다. 그는 무도한 모험가들을 막다가 죽을 생각이었다. 창백하게 질린 존의 얼굴을 힐끗 본 세영이 파티에게 물었다. “저거 진짜예요?” “칸디아 왕실이 패왕의 검을 소유한 적은 없는 걸로 압니다만.” 디안이 세영 대신 앞으로 나서며 대꾸했다. 이미 억지를 쓰기로 결심한 존은 거침이 없었다. “미궁은 왕실의 소유! 그렇다면 미궁에 있는 보물들도 왕실의 소유가 되는 것이 당연하지!” “그게 무슨……!” 발끈한 디안이 화를 내려는 순간이었다. 손을 들어 그의 말을 가로막은 세영이 미안한 얼굴로 속삭였다. “미안한데, 이건 못 줄 것 같아요. 대신 나중에 이것보다 더 좋은 검 만들어 줄게요.” “…네? 아니. 전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요. 꼭 보상할게요.” 다시 한 번 디안에게 사과한 세영이 존을 바라봤다. 존이 다시 무어라 소리치려는 순간 세영이 까딱 손을 움직였다. 기온이 갑자기 확 내려가면서 날카로운 얼음의 창들이 허공에 나타났다. 기사들이 검을 뽑기도 전에 날아온 창이 그들의 바로 코앞에서 멈추었다. “개죽음당하기 싫으면 움직이지 마.” 세영의 말이 아니라도 그들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창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그들의 갑옷을 얼어붙게 했던 탓이다. 동상처럼 굳어진 기사들을 확인한 세영이 존의 멱살을 쥐고 보스룸으로 끌고 나갔다. 보스룸은 어느새 도떼기시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바글바글 몰려든 모험가들을 얼마 안 되는 기사와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시끄럽게 떠들던 그들은 보상방에서 나온 세영과 존을 보고 점차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기적적일 정도로 조용한 무대가 마련되었다.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고요한 가운데 세영이 존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걷어찬 것처럼 뒤로 날아간 존이 철푸덕 바닥에 쓰러졌다. 세영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아까 했던 이야기 여기서 다시 한 번 해보시죠?” “말하려면 못할 것 같나. 미궁은 왕실의 소유! 미궁에 있는 보물들도 왕실의 소유다! 너희는 왕실의 보물을 약탈한 거다. 결코 용서받지 못할 거다!” 공포로 이성이 흐려진 존이 버럭버럭 소리쳤다. 그의 말을 들은 모험가들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때 세영이 들고 있던 검을 존에게 던졌다. 반사적으로 검을 받아 안은 존은 쇠뭉치로 가슴을 후려치는 느낌에 “억!” 하고 비명을 질렀다. 충격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왕실의 보물. 패왕의 검은 확실히 돌려드렸습니다.” 비웃음을 담아 말한 세영이 보상방으로 사라졌다. 잠시 뒤 황금빛 상자를 들고 돌아온 세영이 그 안에 든 것을 존의 앞에 좌르륵 쏟아 부었다. “그럼 이것도 왕실의 돈이겠네요. 주워가시죠?” 빈 상자를 바닥으로 내던진 세영이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미궁을 정복하고 타락한 왕을 죽였지만, 감사를 기대하진 않겠습니다. 왕실은 몬스터를 계속 키우면서 미궁의 보물을 독차지하는 걸 원했던 것 같으니까요.” “자, 잠깐……!” “그럼 이만.” 세영은 존이 반박하길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렸다. 보스의 죽음과 함께 나타난, 미궁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 쪽이었다. 그녀와 교대하듯 나타난 파티원들이 손에 든 아이템을 존의 앞에 던졌다. 디안이 그들을 대표하듯 말했다. “저희가 가진 보물도 모두 돌려드렸습니다. 금화상자도 저 안에 있으니 갖고 가십시오.” 마지막으로 경멸의 눈빛을 던진 파티원들이 세영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모두 통로로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사라졌다. 넋이 나간 얼굴로 그것을 쳐다보던 존은 웅성거리는 모험가들을 눈치챘다. “저게 패왕의 검이래.” “금화상자가 저 안에 있다는데?” 모두가 ‘패왕의 검’이라고 떠들며 웅성거렸다. 심지어 기사들의 얼굴에도 탐욕이 떠올랐다. 기겁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존이 온몸으로 검을 가렸다. 그와 거의 동시에 눈이 시뻘게진 모험가들이 존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막아라!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 비명처럼 외친 존이 뒤로 물러섰다. 세영과 파티원들이 사라진 보스룸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 스카로스 (1) 통로에서 나오자 강한 햇살이 눈을 찔렀다. 게임에선 불가능한 현상에 세영은 한 손으로 눈을 가리며 인상을 썼다. 여기가 게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뭐, 다른 던전도 이런 수준이라면 클리어하기 어렵진 않겠지만.’ 세인은 퀘스트창을 열어 진행 상황을 확인했다. 왕의 미궁을 클리어해서인지 퀘스트 내용이 다소 바뀌어 있었다. 퀘스트: 이계의 부름 -주신께서는 암흑 신기를 모두 거두어 파괴하길 원하십니다. 대천사 자드키엘이 주신의 부탁을 전했다. 모래의 탑, 시암의 숲, 가나트리 성당, 세 가지 눈의 섬에서 신기를 찾아보자. -정의의 천사 자드키엘과 대화 [완료] -암흑신기 수집 [1/6] -? -? 특별한 아이템이 제시되지 않은 것을 보아 어느 던전을 먼저 가도 상관없는 것 같았다. 대륙 지도창을 열었지만, 먼저 지리정보를 갱신해달라는 메시지가 떴다. 마을로 가서 지도부터 사야겠다고 생각한 세영이 창을 닫았다. “일단 마을로 가야겠는데, 길 아는 사람 있어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아는 곳이라며 싹싹하게 말한 디안이 먼저 앞장을 섰다. 마을까지 걸어갈 생각은 없었던 세영이 펫 소환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사용할 수 없는 지역입니다.> 하는 메시지가 떴다. ‘게임에서 불러오는 건 아예 안 되나 보네.’ 세영은 조금 난처하게 뺨을 긁적였다. 비행펫을 사용해서 빠르게 이동하려던 생각이 물거품이 되었다. 잘못하면 던전 찾아다니다가 몇 년을 허비하게 생겼다. 계약서에 몇 줄을 더 추가해야 했다고 후회하던 세영은 작게 훌쩍이는 소리를 들었다. “시디발라, 왜 울어?” “누,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세영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린 시디발라가 빨갛게 변한 눈을 비벼 닦았다. 그것을 보고 웃음을 터트린 디안이 “그러게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하고 얄밉게 말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시디발라가 “시, 시끄러워!” 하고 화를 냈다. 세영이 어리둥절한 시선을 보냈다. “던전에 두고 온 돈이 아까워서 울고 있는 겁니다. 이 녀석 돈을 무지 좋아하거든요.” “아니, 그럼 들고나오지 그랬어. 쿨하게 버리고 오더니.” 디안의 설명에 의아해진 세영이 물었다. 눈가에 눈물이 조롱조롱 맺힌 시디발라가 “욕심부리면 나 버리고 갈까 봐…….” 하고 중얼거렸다. 결국, 세영을 따라가기 위해서 그렇게 좋아하는 돈을 포기했다는 뜻이었다. 의외의 귀여움에 피식 웃은 세영이 골드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시디발라, 이거 사용할 수 있는지 봐줄래?” “…이건 금화잖아?” 몰래 챙겼냐며 의심스러운 눈을 한 시디발라가 골드를 받아들였다. 금화를 요리조리 돌리고 가볍게 깨물어보기까지 한 그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진짜 금화네. 공용주화랑 모양도 무게도 같은데 문양만 좀 달라. 어디서 난 거야?” “내가 있던 곳에서 쓰던 거야. 어쨌든 사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지?” “응. 이거라면 굳이 공용주화로 바꿀 필요도 없겠다. 다들 환영할걸.” 닳을까 걱정될 정도로 금화를 만지작거리던 시디발라가 “호, 혹시 이거 나 주는 거야?” 하고 애절하게 물었다. 피식 웃은 세영이 제일 작은 금화 주머니에 골드를 담아서 그에게 내밀었다. “자, 이거 너 가져.” 냉큼 그것을 받아든 시디발라가 상상을 초월한 무게에 껙!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충격으로 주머니가 열리면서 그의 위로 반짝이는 금화들이 끝도 없이 좌르륵 좌르륵 쏟아졌다. 넋이 나간 그를 보고 혀를 찬 세영이 주머니를 집어 들어 바닥에 떨어진 골드를 쓸어 담았다. “왜 줘도 못 받아?” “주, 주세요! 금화 주세요!” 펄쩍 뛰며 몸을 일으킨 시디발라가 세영의 다리에 매달리며 애걸했다. 세영은 피식 웃으며 주머니를 흔들어 보였다. “이거 다 너한테 준다니까. 넌 못 들고 다니니까 지금은 내가 갖고 있을게.” “진짜? 진짜지? 정말이지? 무르기 없기야?” “아, 오해하지 마세요. 시디발라만 주는 거 아니고 다른 사람들 몫도 있으니까.” 금화가 콸콸 쏟아질 때부터 멍하게 있던 파티원들이 황급히 아니라고 손을 내저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그들에게 모든 금화를 나눠줄 생각인 세영은 가볍게 무시했다. 어차피 게임 골드 따위 그녀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신에겐 소환 이전의 골드만큼 현금으로 달라고 했고, 여기서 다 털어주고 가도 상관없지.’ 앞으로 5개의 던전을 같이 돌며 노가다를 함께할 파티원들에겐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게임이 아니고 현실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자신을 만나서 잘됐다고 생각하게 해주고 싶었다. ‘이제 던전 나와서 바로 헤어질 사람들이 아니라 내 파티원들이니까.’ 세영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파티원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햇빛 아래서 보자 더욱 꼬질꼬질해 보이는 모습에 그녀의 안색이 급격히 나빠졌다. 어디서 시궁창 냄새가 물씬물씬 난다고 생각했지만, 원인이 바로 옆에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코를 틀어막고 싶은 것을 꾹 참은 세영이 애써 활짝 웃었다. “일단, 씻고 옷부터 갈아입을까요?” 스카로스는 칸디아 제2의 수도라 불릴 정도로 번화한 도시였다. 발달한 상업과 검투대회, 다양한 볼거리로 유명한 곳이었다. 하지만 스카로스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미궁이었다. <왕의 미궁>을 탐험하는 모험가들을 상대하며 발전한 도시이니만큼 곳곳에 미궁과 관련된 이름이 붙어 있었다. 매해 열리는 미궁 원정은 스카로스의 축제이기도 했다. 많은 모험가가 한탕을 노리며 스카로스로 모였고, 원정에서 번 돈을 잔뜩 쓴 후에 떠났다. 올해 역시 원정으로 모여든 모험가들과 축제를 보러온 관광객들로 도시 전체가 북적거렸다. “굉장히 흥겨운 분위기네.” 도시의 주요 수입원을 끝장낸 세영과 그녀의 파티원들은 당당하게 거리를 걸었다. 아니, 당당하게 걷는 것은 세영뿐이었고 나머지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갑옷 좀 봐. 대체 뭐로 만든 거지?” “뭔지 모르겠지만 엄청 비싸 보이는데.” 가장 주목을 받는 것은 순백의 갑옷을 걸친 디안이었다. 그가 착용한 유니크 아이템 <초보 검사의 풀세트>는 의장용으로도 사용될 만큼 멋진 디자인을 자랑했다. 작은 날개가 달린 투구, 섬세한 세공이 들어간 갑옷, 부츠, 장갑, 검집까지 티끌하나 묻지 않은 순백색이었다. 세영이 클렌징 스킬로 박박 씻긴 그의 얼굴도 제법 준수해서 감상하기 딱 좋았다. “디안, 저기 여자들이 침 흘리면서 쳐다본다. 손이라도 흔들어주지 그래?” “시끄러워.” 깝죽이는 시디발라를 휙 밀친 디안이 사람들을 헤치며 걸어갔다. 사실 헤칠 필요도 없는 것이 그가 다가가기만 해도 사람들이 황급히 옆으로 물러섰다. 갑옷에 뭐라도 묻힐까 봐 걱정되는 표정이었다. 디안으로서는 숨을 곳이 없어서 더욱 난처한 상황이었다. 디안뿐만 아니라 나머지 일행들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미모의 엘프 마법사와 수인족은 가만히 있어도 튀는 존재였는데, 어울리는 옷까지 입히자 시선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사제인 리먼은 끊임없이 축복을 요청하는 사람들로 인해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있었다. “오, 저기 신기한 게 있는데. 극장인가?” 일행 중 운신이 가장 자유로운 것은 세영이었다. 눈에 띄는 <페르세포네의 봄 원피스>와 <봄의 나비 구두>을 벗고 무난한 <모험가 슈트>와 <모험가 부츠>로 갈아입은 그녀는 이 거리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전에 입으셨던 옷이 더 잘 어울리셨는데. 지금 옷이 안 예쁘다는 건 아니지만요…….” 마리엔이 조금 아쉬운 듯이 말했다. 피식 웃은 세영이 “제가 뭘 입어도 마리엔만큼 예쁘겠어요? 이 거리에서 제일 예쁜 게 마리엔 같은데?” 하고 대꾸했다. 당황한 마리엔이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감싸 쥐고 “그, 그런. 놀리지 마세요.” 하고 웅얼거렸다. 질린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던 시디발라가 디안의 옆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너 좀 분발해야겠다. 아니, 좀이 아니라 엄청! 많이! 분발해야 할 것 같아.” “무슨 헛소리야?” “라이벌이 너무 막강하다. 힘내.” 시디발라는 진심으로 동정하는 눈빛으로 디안의 허리께를 툭툭 쳤다. 디안은 조금 불안한 눈으로 마리엔을 힐끗 보고는 관심 없는 척하며 몸을 돌렸다. 일행이 도착한 곳은 <미궁의 큰사슴 여관>이었다. 제일 비싸고 좋은 숙소로 가자는 세영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는데 외관부터가 고급스러운 티가 줄줄 흘렀다. 세영의 도움으로 빈티를 벗었지만, 여전히 소시민적인 파티원들은 괜히 주눅이 드는 것을 느꼈다. 정작 제일 좋은 숙소를 요구했던 세영은 ‘왜 여관 이름에는 죄다 동물이 들어갈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어서 오십시오.” 안으로 들어서자 여관의 지배인이 나와 정중하게 인사했다. 일행의 차림이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한 지배인이 직접 접대를 맡기로 한 것이다. 세영은 무심한 눈으로 그를 보고 말했다. “제일 좋은 방으로 다섯 개 주세요.” “죄송합니다. 저희 여관에는 특실이 두 개뿐이라…….” 당황한 지배인이 허리를 굽실거리며 말했다. 세영이 ‘여기가 제일 좋은 숙소라며?’ 라는 뜻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 한층 더 죄스러워진 지배인이 땀을 뻘뻘 흘렸다. “그래도 특실이 제법 큰 편이고 방도 여러 개 있으니 분명 마음에 드실 겁니다.” “어쩔까요?” 세영이 탐탁지 않은 얼굴로 돌아보자 일행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디안이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다른 곳으로 가도 사정이 비슷할 것 같은데요.” “난 여기가 마음에 들어!” 시디발라가 거들자 세영이 고개를 끄떡였다. “숙박비는 얼마죠?” 하는 물음에 지배인이 “1박에 1골덴입니다.” 하고 공손히 답했다. 눈치로 봐서 골덴이 골드인 것 같았다. 1골드라니 굉장히 싸다고 생각한 세영이 한 움큼의 금화를 꺼내 지배인에게 내밀었다. 황급히 내민 지배인의 양손 위에 금화가 좌르륵 떨어졌다. “한 5일 정도 머물 생각이에요. 조용히 쉬고 싶으니 신경 좀 써주세요. 식사도 좀 올려보내 주시고요. 방에 목욕 시설은 있어요?” “욕조를 올려보내겠습니다.” 극도로 공손해진 지배인이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욕조는 다섯 개 보내주세요. 물은 좀 뜨겁게 하고요.” 라고 말한 세영이 지배인의 옆에 선 급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금화를 쳐다보다가 한 박자 늦게 시선을 알아챈 급사가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방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고개를 끄떡인 세영이 그의 뒤를 따랐다. 잠시 쭈뼛거리던 일행도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급사의 안내를 받아 방을 둘러본 세영은 팁으로 금화 하나를 건네주었다. 입을 쩍 벌린 급사가 몇 번이나 허리를 굽실거리며 물러났다. ──────────────────────────────────── 스카로스 (2) 세영은 두 개의 방 중 좀 더 작은 쪽을 마리엔과 함께 쓰기로 했다. 처음의 어색함을 벗어던진 마리엔이 방안을 어린애처럼 뛰어다니며 즐거워했다. 세영이 보기엔 별것 없는 여관방이 그녀에겐 궁궐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마리엔의 감탄은 장미 꽃잎이 떠다니는 욕조를 봤을 때 절정에 달했다. “와, 공주님이 된 것 같아요.” 꽃잎이 떠다니는 물을 휘저은 마리엔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귀여웠던 세영이 말없이 빙긋 웃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피로가 싹 풀리는 느낌이었다. 클렌징 스킬을 사용했을 때는 느낄 수 없는 개운함에 기분까지 좋아졌다. “꿈을 꾸는 느낌이에요. 진짜 꿈이면 어떡하죠? 사실 혼세마왕님과 만난 순간부터 계속 꿈속에 있는 것 같았거든요.” 마리엔의 재잘거림에 세영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지금까진 느끼지 못했는데 여기가 현실이라고 생각하자 ‘혼세마왕’이라는 호칭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디안이 흉악한 이름이라고 경악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세영은 갑자기 격렬한 쪽팔림을 느꼈다. “흠흠, 마리엔. 제가 임무를 수행할 때는 ‘혼세마왕’이라고 불리는데요. 사실 진짜 이름은 따로 있거든요.” “앗, 그럼 혼세마왕은 호칭인 건가요? 역시 범상치 않은 이름이라고 생각했어요!” 마리엔은 온몸으로 ‘호칭까지 따로 있다니 완전 멋져요!’ 라는 말을 뿜어내고 있었다. 순간 숨이 콱 막힌 세영이 헛기침을 했다. “이, 일종의 칭호랄까. 하지만 여기선 그런 칭호가 의미도 없을 것 같고, 마리엔은 이제 제 동료니까 말해도 될 것 같아서요. 제 진짜 이름은 주세영이에요.” 순진한 어린애를 속이는 기분에 식은땀이 뻘뻘 났다. 사색이 된 세영과 달리 동료라는 말을 들은 마리엔의 눈은 별처럼 반짝거렸다. “그럼 주세영님?” “아, 주는 성이고 세영이 이름이에요. 세영이라고 편하게 부르세요.” “…저 같은 게 세영님의 동료가 되어도 괜찮을까요?” “저 같은 거라뇨. 마리엔이 어디가 어때서요.” 성격도 착해, 얼굴도 착해, 몸매도 착해, 어디 하나 나무랄 것이 없었다. 녹색 눈을 깜빡인 마리엔이 서글프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는 마력도 약하고, 세영님께 아무런 도움도 안 될 거예요.” “마리엔이 왜 아무런 도움이 안 돼요. 던전에서 날 구해줬잖아요. 벌써 잊은 건 아니죠?” 폭주하는 세영을 멈추게 한 마리엔이었다. 분명 낯설고 무서웠을 텐데도 마리엔은 주저 없이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아주었다. 세영이 파티원들에게 한없이 너그러워진 것은 마리엔의 공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무서워서 도망치거나 괴물취급 했겠죠. 그때는 감사하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지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만약 제가 또 그렇게 날뛰면 마리엔이 절 좀 붙잡아주세요. 부탁할게요.” 빨갛게 얼굴을 붉힌 마리엔이 꼬물거렸다. 새하얀 피부가 분홍빛으로 물들어 아주 보기에 흐뭇했다. 세영은 목욕이 끝나면 이 옷 저 옷 꺼내서 입혀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리엔도 이제 30렙……. 아니. 미궁의 정복자니까 능력이 향상됐을 거예요. 마법을 쓰는 게 좀 더 편해지지 않았어요?” “앗. 그러고 보니 캐스팅 시간이 줄어들고 마법을 써도 지치지 않았어요.” “던전을 정복할 때마다 비슷한 일이 생길 거예요. 그럼 마리엔도 엄청난 실력자가 될 거라고요. 나중엔 대마법사라고 불릴지도 몰라요.” 세영이 몬스터무쌍을 찍을 동안 파티원들의 레벨도 쑥쑥 자랐다. 디안이 Lv32, 마리엔은 Lv30, 시디발라는 Lv31, 제일 렙이 높았던 리먼도 Lv38을 달성했다. 이대로 계속 자라준다면 마리엔도 중급마법 한두 개쯤은 펑펑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대마법사라니……. 정말 꿈만 같아요.” 아까보다 더 빨개진 마리엔이 웅얼거렸다. 흐늘거리는 모습을 보고 뒤늦게 상황을 눈치챈 세영이 뜨거운 물에 데쳐진 마리엔을 건져냈다. 열탕 사우나를 즐기는 그녀에겐 뜨뜻한 정도였지만, 연약한 엘프에겐 너무 높은 온도였던 것 같았다. 침대에 눕히고 찬 음료를 먹인 후에야 정신을 차린 마리엔이 죄송하다고 울먹였다. 죄송할 게 뭐 있냐고 그녀를 달랜 세영이 드레스룸을 열어 점찍어둔 옷가지와 장신구를 꺼냈다. 산처럼 쌓인 옷더미를 본 마리엔이 단번에 울음을 뚝 그쳤다. 별처럼 반짝이는 그녀의 눈을 본 세영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게임은 역시 룩덕질이지.’ 그다음은 옷 갈아입히기 삼매경이었다. 간만에 삘을 받은 세영은 마리엔에게 온갖 예쁜 옷을 골라 입혀보았다. 날씬하면서도 몸매가 좋은 마리엔은 뭘 입혀도 잘 어울려서 보는 이를 즐겁게 했다. 처음에는 정신없이 입혀지고 벗겨지던 마리엔도 세영에게 어울리는 옷을 골라서 내밀었다. 나중엔 목욕물을 버리러온 여급들마저 합세해서 머리까지 올렸다가 내렸다가 땋았다가 풀었다가 아주 난리였다. 꺅꺅거리는 비명과 화기애애한 수다로 방이 시끌시끌했다. 그러나 즐거운 시간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끝나버렸다. 여자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옆방에 방치되어 있던 남자들이 구조신호를 보낸 것이다. “저, 저기. 앞으로의 일도 의논해야 하고, 식사도 올라왔고…….” 쭈뼛거리며 변명하는 디안의 옆에서 시디발라가 “치사해! 자기들끼리만 놀고!” 하고 빽빽거렸다. 엄마 없이 방치된 5살짜리들이나 다름없었다. 한숨을 쉰 세영이 리먼을 찾았지만, 호화로운 방에 넋이 나가 가구가 되어있는 그를 보고 포기했다. “알았어요. 마리엔 데리고 갈 테니까 기다려요.” 매몰차게 문을 쾅 닫아버린 세영이 자리를 정리했다. 아름다운 옷과 장신구들을 구경하던 여급들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세영은 그들에게 금화를 한 닢씩 쥐어주고 내보냈다. 그리스풍의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고 있던 마리엔이 서둘러 옷을 벗으려 했다. “아니, 그냥 입고 있어요. 아주 잘 어울리는걸.” 특히 가슴 쪽을 부각하는 디자인이라 아주 훈훈했다. 부끄러워하는 마리엔의 손을 잡고 옆방으로 건너가자 남자들이 모두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우와, 다른 사람 같아.” 솔직한 시디발라는 입까지 떡 벌리고 감탄했다. 사실 그는 청순한 이미지로 변신한 세영을 보고 놀란 것이었지만, 세영은 그것을 마리엔을 향한 칭찬이라 착각했다. “씻고 옷만 갈아입었지, 마리엔은 원래 예뻤다고.” “아니, 내 말은….” 무어라 설명하려던 시디발라가 빠르게 포기했다. 왠지 바른대로 말했다간 세영에게 한 대 맞을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모두가 모인 것이 기뻤는지 안정을 되찾은 리먼이 “자, 식기 전에 식사부터 할까요.” 하고 싱글벙글 웃었다. 그들을 초특급 손님으로 규정한 여관에선 요리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했다.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을 본 파티원들이 입맛을 다셨다. 피식 웃은 세영이 “배고프면 먼저 먹지 그랬어요.” 하고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냐고 펄쩍 뛴 파티원들이 다 같이 먹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짹짹거리는 병아리들 같아서 조금 귀여웠다. “그럼 어서 먹죠.”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여기가 현실이라면 음식을 먹어야 했다. 세영은 제 앞에 놓인 고기요리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눈치를 보던 파티원들도 서둘러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세영은 묵묵히 고기를 씹으며 맛을 음미했다. ‘흠, 고기가 좀 질기네. 약간 탄 맛도 나고. 그래도 이만하면 뭐.’ 나쁘진 않지만 좋지도 않은 요리였다. 세영은 식당에서 파는 요리가 보통 이하인 것을 알고 있기에 실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파티원들 쪽은 사정이 달랐다. 얼굴이 일그러진 디안이 서둘러 입안에 든 것을 꿀꺽 삼켰다. 그나마 삼킨 그는 양반이었다. 마리엔은 요리를 입에 문 채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고 있었고, 리먼은 석고상처럼 굳어진 채로 식은땀을 흘렸다. 우웩 소리와 함께 입에 문 것을 뱉어낸 시디발라가 투덜거렸다. “뭐가 이래? 도저히 못 먹겠다!” 이미 세영의 요리를 경험한 혀와 뇌가 쓰고, 짜고, 시고, 탄 음식을 거부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세영이 혀를 차며 마리엔의 입 앞에 냅킨을 내밀었다. “뱉어요. 빨리.” 눈물을 글썽거리던 마리엔이 입에 든 것을 뱉어냈다. 시디발라는 보기에만 번지르르한 음식을 보며 화를 냈다. 돈을 그렇게 받아먹고 이게 뭐냐는 둥 상도덕이 없다는 둥 온갖 욕을 퍼부어대는 그를 보고 리먼이 쓰게 웃었다. “그게 아닙니다. 시디발라. 여기 있는 음식들은 우리가 평소에 먹던 것보다 몇 배로 좋은 것들이에요. 문제가 있는 것은 우리 쪽이지요.” “엥? 내가 문제라고?” 어리둥절해 하는 시디발라와 달리 다른 사람들은 그의 말을 이해했다. 얼굴이 창백해진 마리엔이 서둘러 포크를 들었다. “아까는 속이 좀 안 좋았는데, 이제는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마리엔, 괜히 무리하지 마요.” 마리엔의 손에서 포크를 빼낸 세영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내가 너무 잘난 죄지’ 하고 중얼거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궁 정복에 파티 결성을 기념하려면 좀 특별한 요리를 먹어야죠. 다들 배고프겠지만 기다릴 수 있죠?” “저도 돕겠습니다.” 미안한 듯 자리에서 일어난 리먼이 보조를 자처했다. 어차피 요리 스킬을 쓸 생각이니 그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세영은 괜찮다고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돕고 싶으면 여기 있는 요리를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세요. 아예 손대지 않은 것들도 있으니까 버리기엔 너무 아깝잖아요.” 금화를 물처럼 뿌리는 그녀가 아깝다는 말을 하자 어울리진 않았지만, 다들 수긍하며 고개를 끄떡였다. 세영은 발걸음도 가볍게 아래로 내려가 지배인을 찾았다. 주방을 쓰고 싶다는 요구에 지배인은 당황한 기색도 없이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잠시 뒤 세영은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쫓겨난 것 같은 주방에 홀로 서 있게 되었다. 어수선한 주방을 둘러본 그녀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이미 폐를 끼쳤으니 앞으로의 피해를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 기회에 최대한 많이 만들어야겠어.’ 요리도구를 꺼내 든 세영이 잠시 무슨 요리를 할지 고민했다. 서양인의 입맛에 뭐가 좋을까 생각하다가 ‘이 중에 니 취향 하나쯤은 있겠지.’ 전법을 쓰기로 했다. 즉, 아무거나 잘하는 것을 되는대로 만들기로 한 것이었다. “참, 마리엔에게 초특급 스페셜 후라이드 치킨을 먹여줘야지.” 닭 다리를 들고 행복해하는 마리엔을 상상하자 요리할 의욕이 퐁퐁 솟아났다. 세영은 전의를 불태우며 “요리!” 하고 외쳤다. 곧바로 요리창이 떠오르며 레시피와 재료 선택창이 나타났다. 후라이드 치킨을 선택하는 세영의 눈이 비장하게 빛났다. ──────────────────────────────────── 스카로스 (3) 세영은 콧노래를 부르며 요리를 내려놓았다. 연어 샐러드, 핫케이크, 미트 파이, 치즈 그라탕, 크로켓, 딸기 타르트, 크림파스타, 돈가스, 과일 샐러드, 비프스튜, 탕수육, 치킨데리야끼, 단호박 샐러드, 콘소메, 티 본 스테이크, 버섯 리조또까지. 색감과 거리를 고려해서 배치한 후 마지막으로 후라이드 치킨을 마리엔 앞에 놓았다. 노릇노릇하게 튀겨진 닭다리들이 맛있는 냄새를 뿜어냈다. ‘스페셜 등급이 많이 나와서 다행이야.’ 마리엔을 먹일 생각으로 만들어서인지 손대는 족족 스페셜 요리가 나와 놀랄 지경이었다. 세영은 식품용 가방을 모두 비우고 스페셜 요리로 꽉꽉 채웠다. 퀘스트용 요리와 등급이 떨어지는 요리들은 주방에 남겨두었다. 그녀의 요리를 맛본 주방장이 음식을 만들 때마다 ‘이 맛이 아니야!’ 라고 절규하게 되는 비극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요리한 거라 힘 좀 써봤어요. 많이 드세요.” 요리혼을 하얗게 불태운 세영은 아주 개운한 상태였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던 일행이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떡였다. 섬세한 야채 장식까지 곁들여진 요리는 감히 손대기 무서울 정도로 완벽해 보였다. “이거 정말 먹어도 돼?” 시디발라가 주눅이 든 얼굴로 물었다. 세영이 고개를 끄떡이자 그는 냉큼 후라이드 치킨에 손을 뻗었다. 세영이 마리엔을 무척 예뻐하니, 마리엔 앞에 놓인 요리가 제일 맛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눈치를 보던 사람들도 합세해 너도나도 닭다리를 손에 쥐었다. 폴폴 피어오르는 치킨 냄새에 침을 꼴깍 삼킨 시디발라가 덥석 닭다리를 물었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이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시디발라!” 놀란 디안이 들고 있던 닭다리를 내던지고 시디발라를 안아 들었다. 축 늘어진 몸뚱이를 흔들던 그는 독을 의심하며 리먼을 불렀다. 성표를 쥔 리먼이 시디발라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때 시디발라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늘으….” “시디발라? 괜찮아?” “하늘을… 날고 있어……. 훠얼… 훠얼….” 시디발라가 제 양손을 날갯짓하듯 파득거렸다. 그는 한 마리의 닭이 되어 푸른 하늘을 동료 닭들과 함께 날고 있었다. 자기가 닭이 되었다고, 무지개 너머로 날아간다고 황홀해 하는 시디발라를 흔들던 디안이 세영을 돌아봤다. “요리에 약이라도 탔습니까?” “등급이 높아서 그런가 봐요. 이벤트 영상 보는 거 좀 힘든데.” 원래 그런 거라고 태연하게 말하니 뭐라고 더 따질 수가 없었다. 그사이 정신을 차린 시디발라가 양손에 닭다리를 들고 미친 듯이 뜯어먹기 시작했다. 당황한 디안이 그를 말렸다. “어이, 정신 차려!” “먹을 거야. 내가 다 먹을 거야!” 시디발라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더 말렸다간 디안의 손을 물어뜯을 기세였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디안의 옆에서 마리엔이 닭다리를 입에 물고 울고 있었다. “맛있어. 왜 이렇게 맛있죠? 너무 맛있어요.” 마리엔은 맛있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는 듯이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계속 훌쩍훌쩍 울던 그녀는 억울한 듯이 “나는 왜 안 보이지. 나도 하늘을 날고 싶은데. 왜 안 보이는 거야.” 하고 눈물을 훔쳤다. ‘…닭이 되고 싶었나?’ 디안이 경악하는 순간, 옆에서 리먼이 풀썩 쓰러졌다. 조금 전의 시디발라와 달리 리먼은 온몸을 움츠린 채 움찔움찔 떨었다. 어쩐지 괴로워 보이면서도 즐거운 것 같은 모습이었다. 디안은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리먼을 의자에 기대 앉혔다. 그는 여전히 의심을 풀지 못한 눈으로 세영을 보며 물었다. “이게 정말 자연스러운 현상입니까? 몸에 이상이 생기진 않는 거죠?” “아주 멀쩡한 정상적인 요리거든요. 땀 뻘뻘 흘리며 요리해왔더니 따지긴.” 한숨을 푹 쉰 세영이 탕수육을 찍어 디안의 입에 쑤셔 넣었다. 반사적으로 피하려 했지만, 어느새 입안에 쏙 들어와 있었다. 혀에 닿는 새콤달콤한 맛과 고기가 풍기는 향기에 반사적으로 턱이 움직였다. 바삭하게 튀겨진 고기가 소스와 어우러져 폭발적인 풍미를 자랑했다. 디안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탕수육의 마력에서 풀려난 그가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이건… 정말…….” 감격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디안을 보고 빙긋 웃은 세영이 “맛있죠?” 하고 물었다.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디안은 맥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는 신의 뜻에 따르는 신도처럼 얌전히 포크를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헉!” 그때 정신을 놓고 있던 리먼이 눈을 떴다. 놀란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리먼이 “아아, 세상에…! 신이시여.” 하고 웅얼거렸다. 호기심이 생긴 디안이 “리먼도 닭이 되었습니까?” 하고 물었다. 당황한 얼굴로 멈칫거리던 리먼이 부끄러운 듯 제 앞의 그릇을 가리켰다. “아뇨, 제가 먹은 건 이겁니다.” “치즈 그라탕이네요.” 세영도 흥미진진한 시선을 보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보는 이벤트 영상은 유저마다 달랐기에 리먼이 뭘 봤는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저는 소가 되어 푸른 들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동료들도 많았고요. 그런데 인간이 다가오더니 저를…. 아니, 그러니까 제 몸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리먼이 더 이상은 말할 수 없다며 괴로워했다. 그는 고뇌 어린 얼굴로 그라탕을 떠먹으며 “그래도 맛있군요. 괴로울 정도로 맛있어요.” 하고 중얼거렸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 디안을 툭 친 세영이 “치즈요. 우유로 치즈를 만들거든요.” 하고 속삭였다. 한참이 지난 후에 그 말을 이해한 디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치즈 그라탕엔 손도 대지 못했다. 민망한 것도 있었지만, 리먼과 같은 풍경을 볼까 봐 무서웠던 탓이다. 광란의 식사시간이 끝난 후 세영은 종이와 펜을 꺼내 들었다. 앞으로의 일정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우선 퀘스트 창을 열어서 던전의 목록을 불렀다. “모래의 탑, 시암의 숲, 가나트리 성당, 세 가지 눈의 섬을 돌아야 하는데요. 혹시 뭐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 있어요?” “모래의 탑은 카라둔 사막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시암의 숲은 엘프들의 영역이고요. 가나트리 성당은 마도의 땅에 있습니다. 세 가지 눈의 섬은 잘 모르겠군요.” 파티원 중 유일하게 제정신을 유지 중인 디안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시디발라는 입으로 파닥파닥 소리를 내며 방을 뛰어다니고 있었고, 리먼은 구석에서 땅을 파며 “싫은 건 아니지만, 그걸 좋다고 하기는…….” 하고 웅얼대는 중이었다. 식사가 끝날 때쯤 딸기 타르트를 먹다가 쓰러진 마리엔은 “안 돼, 날 따면 안 돼.” 하고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설마 매번 식사 때마다 이러진 않겠지.’ 디안은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세영이 만들어준 음식은 매우 맛있었지만, 정신건강에는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불안해하는 그를 눈치채지 못한 채 사각사각 메모를 끝낸 세영이 펜을 까딱였다. “사막은 더울 것 같고, 마도의 땅은 위험할 것 같고, 세 가지 눈의 섬은 어디 있는지 모르니까. 남은 건 시암의 숲인가?” “아, 저기…….” “엘프들의 영역이라면 마리엔이 잘 알지 않을까요?” 디안이 곤란한 표정으로 마리엔을 힐끗 쳐다봤다. 멍한 표정으로 봐서 아직 제정신이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헛기침을 한 그가 세영에게 말했다. “마리엔도 잘 모를 겁니다. 그리고 엘프에 대한 이야기는…….” “난 괜찮아.” 차분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놀라 고개를 돌리자 마리엔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라 말하려는 디안을 눈짓으로 말린 마리엔이 “괜찮아, 내가 말씀드릴게.” 하고 말했다. “저는 하프엘프예요. 어머니는 어두운 물의 부족에 속하셨는데, 노예사냥꾼에게 붙잡혀 왕국으로 끌려왔다고 들었어요. 엘프는 무척 폐쇄적인 종족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더럽혀진 일족과 저 같은 하프엘프를 받아들이지 않아요.” 뜻밖의 사연을 들은 세영의 얼굴이 굳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는 급히 사과를 꺼냈다. “미안해요. 내가 눈치 없이…….” “앗,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시암의 숲으로 가시면 제가 방해될 거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저 같은 하프엘프가 끼어있으면 엘프들이 숲을 열어주지 않을 수도 있어요.” 예전에도 숲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당한 적이 있다고 말한 마리엔이 고개를 숙였다.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저를 파티에서 빼는 게 더 나을…….” “이놈의 엘프들이 미쳤나. 감히 마리엔을 박대했단 말이죠?” 말을 끝내기도 전에 세영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살기등등한 표정이 엘프들을 산채로 갈아 마실 것만 같았다. 놀라 눈이 동그래진 마리엔 대신 디안이 그녀를 말렸다. “호, 혼세마왕님. 진정하십시오!” “진정?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뭐, 더럽혀진 일족? 하프엘프라서 숲을 안 열어줘?” 씩씩대는 세영의 말에 동감한 디안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도 사실 엘프들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영이 엘프의 숲에서 대살육을 벌이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엘프들을 해치는 건…….” “내가 왜 엘프들을 해쳐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은 세영이 다다닥 쏘아냈다. “숲에 불 싸지르고 엘프들을 도륙하는 거야 쉽죠. 그런데 그렇게 하면 마리엔이 욕먹잖아. 난 놈들이 제멋대로 나불거리게 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거든요?” “그럼…….” “놈들이 네 발로 기어 와서 ‘마리엔님, 제발 숲에 왕림해주십시오!’ 하고 싹싹 빌게 만들어야 제대로 된 복수죠. 이 새끼들, 어디 한번 두고 보자.” 아주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말한 세영이 뭔가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당황하던 디안이 마리엔을 쳐다봤다. 두 손으로 입을 가린 마리엔이 감격한 눈으로 세영을 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둘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공기에 거북해진 디안이 헛기침을 했다. 똑똑하고 문이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의아한 표정을 지은 세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난처한 표정의 지배인이 서 있었다. 그는 세영을 보자마자 굽실거리며 말했다. “쉬시는 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일행분이 급한 일이라며 찾아오셨습니다.” “일행이요?” 세영의 물음에 답하듯 아래쪽에서 누군가가 “디안! 어이, 나야!” 하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안색이 변한 디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뭘 또 나가요. 올라오라고 하면 되지.” 심상찮은 기색을 눈치챈 세영이 지배인에게 손짓했다. 곧 올려보내겠다고 말한 지배인이 사라지자 디안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파티원들의 표정도 어두워져서 세영은 그다지 좋지 않은 사연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오, 디안. 얼굴 한번 보기 힘들다?” 이윽고 나타난 것은 양아치라고 얼굴에 써 붙인 것 같은 놈이었다. 검을 찬 두 명의 남자가 놈의 뒤를 어슬렁거리며 따라왔다. “이거, 실례!” 하고 말하며 세영의 옆으로 파고든 놈이 허락도 없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야, 방 진짜 좋다. 으리으리한데. 이번 원정에서 한몫 단단히 잡았나 봐?” “지그. 연락 미리 못한 건 미안하다. 경황이 없었어.” 방을 헤집고 다니는 놈을 가로막은 디안이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콧방귀를 뀐 놈이 탁 소리 나게 디안의 손을 뿌리쳤다. “아, 이거 서운하게 하네. 경황이 없었어? 우리 사이가 이거밖에 안 됐냐?” “그게 아니라 지금은…….” “이제 팔자 좀 폈다 이거지? 나 같은 새끼랑은 말도 섞기 싫으시다? 그런 말을 하고 싶으면 빌린 돈부터 갚아야지!” 뭐야, 빚쟁이였어? 뭔가 대단한 사연이 있겠거니 기대했던 세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난처한 표정으로 변한 디안이 그에게 사정했다. “돈은 갚을게. 갚을 테니까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나가서 이야기하자.” “그럼 지금 당장 갚아. 어? 이자도 한번 안 낸 놈을 어떻게 믿어?” 더는 들어줄 것도 없었다. 양아치 놈이 꼬장 부리는 걸 보다 못한 세영이 앞으로 나섰다. “얼마를 빌렸기에 이 지랄이세요?” “혼ㅅ…….”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던 디안이 난처하게 입을 다물었다. 남들 앞에서 ‘혼세마왕’이라고 부를 엄두가 나지 않는 듯했다. 세영 쪽을 휙 돌아본 놈이 깐죽거리며 입을 열었다. “예쁜 아가씨가 입이 쪼까 험하시네?” “귓구멍까지 막혔냐? 얼마 빌렸냐고 묻고 있잖아?” “왜? 대신 갚아 주시게?” 세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쏘아보았다. 양아치 놈이 여기에서 시위하는 이유야 뻔했다. 디안의 옆에 부유한 동료가 생겼다는 것을 알고 돈을 뜯으러 온 것이다.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 놈이 말했다. “뭐 나야 누가 갚아줘도 좋지. 이자까지 합해서 50 골덴이야.” “뭐?! 무슨 소리야! 50 골덴이라니!” 경악한 디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놀라는 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디안이 말도 안 된다고 항의했지만, 놈은 여유롭게 손가락을 휘저었다. “이거 왜 이러시나. 늦게 갚을수록 갚을 돈이 늘어난다고 말했잖아. 나야 뭐, 안 갚아도 다른 수가 있긴 하지.” 양아치의 눈이 마리엔을 징그럽게 훑어봤다. 흠칫해서 움츠리는 마리엔을 본 세영의 눈꼬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 스카로스 (4) “고작 50 골덴 가지고 이 지랄을 떨었다고?” 싸늘하게 내뱉은 세영이 인벤에서 50 골드를 꺼내 놈에게 내밀었다. 엉겁결에 손을 내민 놈은 두 손에 가득 차고도 계속 쏟아지는 금화에 허둥거렸다. 좌르륵 소리와 함께 금화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황급히 몸을 굽힌 그가 금화를 주우려는 순간 세영이 그가 집으려는 금화를 밟았다. “차용증부터 주셔야지?” 멈칫했던 놈이 품에서 차용증을 꺼내 밀었다. 세영은 꾸깃꾸깃 접힌 종이를 펴서 확인했다. 그것을 디안에게 넘긴 그녀가 “빚은 이게 전부예요?” 하고 물었다. 민망함에 얼굴이 벌게진 디안이 고개를 끄떡였다. 한숨을 삼킨 세영이 놈을 보고 말했다. “어이, 쓰레기. 네 말이 맞아. 디안은 이제 팔자가 펴서 너 같은 새끼랑은 어울릴 급이 아니야. 그러니까 앞으로 아는 척도 하지 말고 말도 걸지 마. 만약 내 경고를 무시하고 또다시 내 일행에게 접근할 때엔 네가 나온 쓰레기통까지 모조리 불 싸질러 버릴 거야.” 말을 마친 세영이 밟고 있던 금화를 놈에게로 걷어찼다. 팅 소리와 함께 날아간 금화가 놈의 정강이를 때렸다. 억 소리와 함께 쓰러진 놈이 들고 있던 금화를 놓쳤다. 좌르륵 쏟아지는 금화를 본 세영이 놈을 따라온 남자들을 돌아봤다. “뭐해? 같이 줍고 빨리 꺼져.” 머뭇거리는 남자들을 보고 “잘 안 보여? 보이게 해줘?” 라고 말한 그녀가 사람 머리통만 한 불덩이들을 만들었다. 코앞에서 둥실거리는 불덩이를 본 남자들이 재빨리 무릎을 꿇고 금화를 줍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금화를 챙겨 사라지는 그들을 보고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스킬을 취소시켰다. 주춤거리던 디안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사과했다. “정말, 정말로 죄송합니다.” “사과받을 일은 아니니까 됐고. 어쩌다가 사채를 쓴 거예요?” 자칫 잘못했다간 마리엔까지 위험해졌을 거란 생각에 세영은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죄책감 어린 얼굴로 고개를 숙인 디안이 “고향이 같은 친구인데, 원정에 필요한 돈을 빌려준다기에…….” 하고 웅얼거렸다. “무슨 놈의 친구가 사채를 빌려줘. 그런 건 친구 아니거든요?” “아는 사람이라 믿었던 것이 실수였습니다. 혼세마왕님께 폐를 끼칠 생각은 아니었는데. 갚아주신 돈은 어떻게든 갚겠습니다.” “그런 푼돈은 있으나 없으나 나한테 똑같아요. 정 마음에 걸리면 나중에 금화 나눌 때 50 골드 빼고 줄게요. 그럼 됐죠?” 그만 잊어버리라고 손을 내저은 세영이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여전히 우중충한 파티원들의 얼굴을 돌아보며 픽 웃었다. “씻고 밥도 먹었으니, 잠깐 기분 전환하러 나가볼까요.” 스카로스의 시장은 번화했다. 축제에 어울리는 먹을거리와 물건이 사람들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물론 모든 가게가 북적이는 것은 아니었다. 시장 구석에 자리 잡은 여인은 하나도 팔리지 않은 음식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잘 팔릴 줄 알았는데.’ 이국적인 가게들이 흥하기에 고향의 음식을 만들면 잘 팔릴 줄 알았다. 하지만 구석진 곳에 있는 여인의 좌판까진 아무도 오지 않았다. 가끔 다가온 사람들도 나뭇잎으로 싼 음식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며 스쳐 지나갔다. “엄마. 나 배고파.” 돌볼 사람이 없어 데려온 딸이 칭얼거렸다. 딸을 달래던 여인은 결국 좌판에 있던 음식을 하나 집어 딸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때 차랑차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뭐예요. 떡인가?” 퍼뜩 고개를 든 여인은 이국적인 소녀를 발견했다. 길게 늘어뜨린 새까만 머리에 동족인가 했지만, 사막의 일원치고는 피부가 너무 하얬다. 소녀의 고급스러운 옷차림과 질 좋은 부츠를 눈치챈 여인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푸티이예요. 맛있어요.” “흠, 맛있어 보이네요. 2개만 주세요.” 씩 웃는 얼굴이 아름다워서 순간적으로 넋을 잃을 뻔했다. 귀한 분이신가 보다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여인은 얼른 넓은 이파리에 푸티이 두 개를 싸서 내밀었다. “2 블론입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소녀가 금화 하나를 꺼내 여인에게 건넸다. 당황한 여인이 눈을 깜빡이며 소녀를 쳐다보았다. “이건…….” “잔돈이 없어서요. 거스름돈은 됐어요.”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한 소녀가 몸을 돌리려고 했다. 당황한 여인은 저도 모르게 소녀를 붙잡았다. 갑자기 손에 떨어진 거금에 소스라치게 놀란 탓이었다. 1 골덴이라니. 그녀가 1년을 쉬지 않고 일해도 구경할 수 없는 돈이었다. “이, 이렇게 많이 받을 수는 없어요. 이걸 다 팔아도 1 실버가 안 될 거예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 여인은 뒤늦게 흠칫하며 손을 놓았다. 소녀가 더러운 것이 닿았다고 화를 낼까 봐 무서웠다. 힐끔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여인의 모습에 머리를 긁적인 소녀가 이내 명랑하게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해요. 여기 있는 푸티이 제가 다 살게요. 거스름돈 대신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눠주세요. 공짜로 시식해보라고 꼭 말씀하시고요.” “…예?” “꼭 무료로 나눠줘야 해요. 알겠죠?” 여인은 멍한 머리로 고개를 끄떡였다. 만족한 듯 빙긋 웃은 소녀가 몸을 낮추더니 여인의 딸에게 말을 걸었다. “너 되게 귀엽게 생겼다. 몇 살이야?” 푸티이를 입에 가득 문 아이는 불룩한 뺨을 움실거리다가 손가락 5개를 폈다. 여인은 딸의 무례한 행동에 소스라쳤지만, 소녀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다섯 짤? 오구오구, 귀여워라. 언니가 용돈 줄게. 맛있는 거 사 먹어.” 다시 금화 한 개를 꺼낸 소녀가 아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덥석 금화를 받은 아이가 입을 오물거렸다. 안녕 하고 손을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난 소녀가 여인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때까지 멍하게 서 있던 여인이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감사합니다! 신의 가호가 있으시길! 정말 감사합니다!” 마리엔은 제게 다가오는 세영을 바라보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세영을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국적인 외모와 단정하지만 특이한 차림새 때문이었다. 감탄과 부러움, 시샘이 담긴 시선에 마리엔은 괜히 제가 뿌듯해졌다. 그녀에게 다가온 세영이 쑥스러운 얼굴로 사과했다. “좀 오래 걸렸죠. 미안해요.” “아니에요. 금방 갔다 오셨잖아요. 근데 그건 뭐예요?” 마리엔은 세영이 들고 있는 것에 관심을 표했다. 나뭇잎으로 뭔가를 말아둔 것 같은데 어디에 쓰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호기심 어린 시선에 세영이 싱긋 웃었다. “아아, 푸티이라는데 고향 음식이랑 비슷해서 사봤어요. 마리엔도 먹을래요?” 마리엔은 사양하지 않고 고개를 끄떡였다. 그녀는 세영처럼 강한 사람들이 발에 차인다는 세계에 동경을 품고 있었다. 그곳의 음식과 비슷하다니 어떤 맛인지 궁금했다. 세영이 건네준 것을 받아 나뭇잎을 반쯤 벗기자 희고 반투명한 젤리 같은 것이 나왔다. “흠, 코코넛 밀크가 들어간 건가. 약간 달고 찹쌀 같은 식감이네.” 제 몫을 우물거리던 세영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망설이던 마리엔도 푸티이를 입에 넣었다. 달짝지근한 맛은 나쁘지 않았지만, 이에 찰싹 달라붙는 식감이 이상했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는 마리엔을 본 세영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맛이 없으면 그냥 뱉어도 돼요.” “아뇨, 맛있어요.” 황급히 고개를 저은 마리엔이 다시 푸티이를 베어 물었다. 세영이 좋아하는 음식이라 생각하자 진짜 맛있는 것 같았다. 오물오물 입을 움직이는 마리엔을 보고 세영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웃었다. “볼일도 마쳤으니 이제 슬슬 돌아갈까요. 다른 사람들도 와있으려나?” 돌아가자는 말에 마리엔은 반갑게 고개를 끄떡였다. 북적이는 시장이 재미있긴 했지만, 몇 시간 동안 계속 돌아다니니 다리가 아팠다. 지도와 필요한 물건도 구했으니 이제 쉬고 싶었다. “가는 길에 아까 본 모자 사 가죠. 마리엔에게 잘 어울리던데.” “아, 아니에요. 이미 많이 받았는걸요.” 마리엔은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녀가 지금 입고 있는 원피스와 신발도 세영이 사준 것이었다. 기분 전환을 하자며 모두를 끌고 나간 세영이 최고급 의상실에서 옷을 마구 사들였던 것이다. “매일 갑옷을 입고 돌아다닐 수는 없잖아요. 갈아입을 편한 옷도 필요한데 제가 가진 건 대부분 드레스나 치마거든요. 모두 그걸 입겠다면 반대는 안 하겠지만.” 일행의 사양을 간단히 일축한 세영은 점원을 부려 모두를 반짝반짝하게 꾸며놓았다. 의상실에 고용된 미용사가 머리까지 손봐주었다. 말쑥해진 서로의 모습을 어색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세영이 금화를 가득 채운 주머니를 하나씩 건넸다. “다 떨어지면 또 채워줄 테니까 괜히 아끼지 말고 필요한 걸 사세요.” 용돈을 주는 엄마 같은 말투였다. 거부해봤자 세영을 피곤하게 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일행은 얌전히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금화를 잔뜩 가진 채 돌아다니는 기분은 색달랐다. 평소엔 쳐다보지도 못했던 물건들이 이제는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사버릴까 말까 고민하다 보니 자꾸만 걸음이 뒤처졌다. 마리엔만 챙겨서 앞서가던 세영은 자꾸만 넋을 놓는 남자들 때문에 학을 뗐다. 결국, 그녀는 필요한 것들을 사서 여관에서 만나자는 말을 한 후 그들과 찢어졌다. “다들 신이 나서 아직 안 돌아왔을 거예요.” 마리엔이 조금 수줍게 말했다. 선뜻 금화를 쓰진 못할 테니 구경하는 것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마리엔 자신도 평소 갖고 싶던 모자를 실컷 구경하고 왔으니까. “마리엔, 저게 뭐죠?” 그때 제자리에 우뚝 멈춘 세영이 싸늘한 목소리를 냈다. 화를 참는 목소리에 깜짝 놀란 마리엔이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멀리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일행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은 그들의 행색을 보자 사그라지고 말았다. 세 명 모두 머리는 산발에 옷은 엉망으로 구겨지고 얼굴에 상처까지 달고 있었던 것이다. “어, 어떻게 된…….” 놀란 마리엔이 중얼대는 순간 세영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뭐가 좋은지 웃고 떠들던 남자들이 다가오는 세영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눈가에 멍이 든 디안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 저……. 혼세마왕님.” “누구예요?” “우, 우리 많이 안 맞았는데. 걔들이 더 맞았는데!” 세영이 화가 난 것을 눈치챈 시디발라가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그 대가로 싸늘한 시선과 함께 “그래서 누군데?” 라는 질문을 받았을 뿐이다. 합죽이가 된 시디발라 대신 리먼이 나섰다. “혼세마왕님. 진정하십시오. 저희가 알아듣게 잘 타일렀습니다. 이제 이런 일은 없을 겁니다.” “네, 알겠어요. 그래서 누군데요?” 시디발라에 이어 리먼도 합죽이가 되었다. 때마침 그들의 앞에 도착한 마리엔이 “어, 어떡해. 괜찮아?” 하고 울먹였다. 훌쩍이는 소리를 들은 세영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디안, 맞고 말할래요. 그냥 말할래요?” “…예에?” 왜 하필 나야. 울상을 지은 디안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동시에 뒤로 물러선 시디발라와 리먼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마른침을 삼키는 디안을 보고 히죽인 세영이 목을 좌우로 꺾었다. “이름이 지드였나. 말해도 그 새끼 잡아 족칠 거고, 말 안 해도 그 새끼 잡아 족칠 건데. 순순히 말하면 유혈사태까지는 안 벌어지게 해볼게요.” “…말하겠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디안이 순순히 털어놓았다. 두 사람과 헤어진 후 갑자기 나타난 남자들과 부딪쳐서 시비가 붙었고, 보상금을 요구하는 그들과 싸우게 됐으며, 수적으로 불리했지만 결국 이겼다는 내용이었다. 시디발라가 옆에서 그를 거들었다. “우리 엄청 잘 싸웠어. 예전엔 일대일도 힘들었던 놈들인데 이제 두 놈도 너끈하더라니까. 근데 일대사나 다름없어서 맞은 거야. 그게 아니면 맞지도 않았을 거라고.” “그래서 그놈들이랑 지드 새끼가 관계가 있는 것 같아?” 세영의 물음에 시디발라의 눈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는 매우 조심스럽게 물었다. “과, 관계가 있으면 어떻게 되는데?” “관계가 있으면 그놈들이랑 지드 새끼가 박살 나는 거고, 관계가 없으면 그놈들이랑 지드 새끼가 박살 나는 거야.” “…응? 뭔가 이상한데?” 혼란에 빠진 시디발라 대신 디안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체념한 얼굴로 세영을 보며 말했다. “낯이 익은 놈들이었습니다. 지드와 함께 있는 것을 본 적도 있으니까요.” “그럼 그놈이 사는 쓰레기통으로 날 안내해줘요.” 세영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뻗대봤자 그녀의 화를 돋울 뿐이라는 것을 눈치챈 디안은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시디발라와 리먼이 이제 어떻게 하느냐는 손짓과 눈짓을 보냈지만, 그로서도 답이 없었다. 부디 세영의 분노를 산 놈들이 눈치가 빠르길 빌 뿐이었다. ──────────────────────────────────── 스카로스 (5) 자유여행자 길드는 스카로스에서도 악명 높은 단체였다. 퇴역 용병과 건달, 양아치들로 이뤄진 이 길드는 멋모르는 모험가들을 등쳐먹기로 유명했다. 터무니없이 비싼 장비를 팔아먹거나 적은 돈을 빌려주고 쥐어짠 후 갚지 못하면 다른 곳에 노예로 팔아먹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길드가 계속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첫째, 놈들이 먹잇감을 고르는 것에 철저하고 둘째, 길드장인 키드가 상당한 거물이었기 때문이다. 소위 높은 분들의 비밀을 많이 알고 있고 그들을 뒷배로 삼은 키드를 누구도 섣불리 건드리지 못했다. 길드의 위세는 그들이 자리 잡은 건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원래 <스카로스 상인 번영회>에서 사들인 건물을 길드가 멋대로 무단점거하여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카로스에서 제법 내로라하는 상인들도 길드와 그들의 뒷배가 무서워 건물을 빼앗기고도 항의하지 못했다. 그런 상징적인 건물의 문짝이 와자작 부서졌다.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 길드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다른 길드의 공격인가 하고 바짝 긴장하고 있는데 부서진 문으로 호리호리한 소녀가 자박자박 걸어 들어왔다. 검은 머리를 허리 아래까지 늘어뜨린 이국적인 미인이었다. 안을 휙 둘러본 소녀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길드장이 어떤 새끼야. 당장 튀어나와!” “이런 미친년이……!” 누군가가 소리치는 순간 소녀가 몸을 날렸다. 그녀의 주먹이 바닥에 꽂히는 순간 건물 전체가 무너질 듯 진동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소녀의 주먹을 탁탁 튀는 번개가 감싸고 있었다. “마법사!” “두 번째 말하는 거다. 길드장, 당장 튀어나오라고 해.” 으르렁대는 소녀의 음성에 모두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몇몇은 키드를 부르기 위해 달려갔다. 겁에 질린 시선 속에서 소녀는 팔짱을 낀 채로 침묵했다. “날 보자고 한 계집이 너냐?” 잠시 후,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거대한 몸집의 사내가 부하들을 거느린 채 나타났다. 길드장인 키드였다. 곰 같은 그의 체구를 훑어본 소녀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야 이 새끼야. 넌 대체 길드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애들이 지나가는 사람을 패?” 상상도 못 한 막말에 키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를 대신해 부하들이 소리를 질렀다. “건방진 년, 감히 어디서 행패냐!” “미친 계집년이. 죽고 싶냐!” 그러자 소녀가 히죽 웃었다. 마침 잘 걸렸다는 득의 어린 미소였다. “미친 계집년? 미친 계집년이 어떤 행패를 부릴 수 있는지 보여줄까?” 키드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전장에서나 느낄 수 있는 지독한 살기가 온몸을 짓눌렀다. 그가 반사적으로 퇴로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안돼욧!” 부서진 문으로부터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엘프가 달려 들어왔다. 그녀는 온몸을 내던지듯 소녀의 등에 매달렸다. “죽이면 안 돼요! 안 돼!” 그 뒤를 잇듯 남자 셋이 줄줄이 문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연이어 “참으세요!” 라던가 “제발 자비를 보여주십시오!” 라던가 “대낮에 사람 죽이면 안 돼!” 같은 말을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한숨을 쉰 소녀가 필사적으로 달라붙는 엘프를 떼어내며 말했다. “안 죽여요. 안 죽인다니까. 누가 죽인다고 그래요?” “오거도 한 방에 죽이는 주먹으로 때리면 누구나 다 죽어!” “때리면 죽어요. 인간은 허약하단 말입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살인은 안 됩니다!” 사방에서 내지르는 소리에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온몸을 부르르 떤 소녀가 “다들 좀 닥쳐봐!” 하고 고함을 질렀다. 우웅 하고 공기를 울리는 외침에 모두가 합하고 입을 다물었다. “지금, 좋게, 좋게, 이야기로, 풀려고, 하잖아요.”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음성에 찔끔한 사람들이 한 발짝 물러섰다. 조용해진 일행을 훑어본 소녀가 다시 키드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책임질 거야?” “…뭐, 뭘?” 뜬금없는 말에 놀란 키드가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쯧하고 혀를 찬 소녀가 일행 중 적금발의 쳥년을 끌어와 키드 앞에 세웠다. 제법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지만, 어딜 봐도 어리바리한 것이 초보모험가였다. “이거 안 보여? 봐줄 거라곤 얼굴밖에 없는 애를 이렇게 만들었으면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냐!” 소녀가 청년의 멍든 눈가를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청년은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감히 반박하지는 못했다. 키드는 그녀의 기세에 밀리지 않기 위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거 참, 이상하군. 내가 들은 이야기랑 좀 다른데. 우리 애들 말로는 수금하러 갔던 녀석의 다리를 당신들이 부러뜨렸다더군. 그래서 다른 애들이 치료비를 요구하러 갔고. 그 애들마저 당신 일행이 두들겨 패서 침대 신세를 지게 만들었다며?” 입을 꾹 다문 소녀가 그를 쏘아보았다. 제 말이 먹힌다고 착각한 키드가 “내가 오히려 책임을 물어야 하는 상황인데.” 하고 나불거렸다. 눈을 희번덕거린 소녀가 웃었다. “다리 부러졌다는 새끼, 어디 한번 데리고 와봐. 상태를 보고 책임을 질 테니까.” “상태가 위중해서 지금 요양 중이다.” 필요하다면 지드의 다리를 부러뜨려서 끌고 올 생각이었다. 병신 같은 놈이 설쳐서 일을 그르쳤으니 다리 하나 정도는 내놓는 게 당연했다. 그런 키드를 빤히 쳐다보던 소녀가 입술을 비틀었다. “야, 개수작 부리지 말고 당장 사과해.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빌면 용서해줄 테니까.” “듣자 듣자 하니 너무 날뛰는군. 당장 물러가지 않으면 치안대를 부르겠다.” 키드의 엄포에 소녀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매우 귀찮다는 얼굴로 “치안대?” 하고 중얼거렸다. 키드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살인을 꺼릴 때부터 알아봤지만, 소녀는 정의나 법에 구애받는 인간인 것 같았다. 어쩌면 기사 신분일지도 모른다. “그래, 당장 물러나면 길드에 멋대로 침입하고 문을 부수고 행패를 부린 것도 눈감아주지.” 키드의 말에 어깨를 으쓱한 소녀가 “알았어.” 하고 휙 돌아섰다. 당황한 키드가 눈을 끔벅이는 사이에 소녀는 제 일행을 챙겨 밖으로 내보냈다. 마지막으로 키드를 돌아본 소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난 분명 기회를 줬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건 전부 네가 선택한 거야.”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지?” 세영이 떠미는 대로 건물의 앞마당으로 나온 디안이 중얼거렸다. 나머지 일행도 모르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뒤늦게 상큼한 얼굴로 나타난 세영이 마리엔에게 말했다. “마리엔, 서류 받아왔어요?” “앗, 네. 가져왔어요.” 마리엔이 품에서 돌돌 말린 서류를 꺼냈다. <스카로스 상인 번영회>에서 받은 허가증이었다. 일행의 예상과 다르게 세영은 바로 자유여행자 길드로 달려가지 않았다. 그녀는 주변 상인들에게서 길드의 정보를 수집한 후 <스카로스 상인 번영회>로 향했다. 그곳에서 세영은 회주를 만나 은밀한 거래를 제안했다. “그런데 이게 왜 필요하신 거예요?” 마리엔은 <건물 부지 대여 허가증>이라고 쓰인 서류를 세영에게 건넸다. 그녀는 왜 세영이 땅을 빌렸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유여행자 길드와 뭔가 관련이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대여기한이 고작 하루였다. 하루 동안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어 약간 회의적이었다. “아아, 제가 하고 싶은 걸 하려면 이게 필수라서요.” 서류를 받아든 세영이 싱긋 웃었다. 허가 서류를 손에 쥔 순간 그들이 서 있는 땅은 그녀의 소유로 변했다. 세영이 손을 까딱이며 외쳤다. “하우징!” 하우징 창이 열리며 눈앞에 보이는 땅이 모눈종이처럼 칸으로 나뉘어 표기되었다. 목을 좌우로 돌린 세영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자, 이제 이 건물은 제겁니다.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겁니다.” 이동을 누른 순간 콰드득 소리와 함께 눈앞의 건물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눈을 홉뜬 일행 앞에서 건물은 새처럼 하늘을 날았다가 다시 가볍게 내려앉았다. 세영은 무심한 얼굴로 손을 까딱이며 말했다. “이렇게 들었다가 놨다가 들었다가 놨다가.” 다음 순간 건물이 발이라도 달린 것처럼 왼쪽으로 내달리더니 곧바로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너무 빠른 움직임에 일어난 흙바람이 일행의 머리를 세차게 휘날리게 했다. “옮겼다가 놨다가 옮겼다가 놨다가.” 세영은 아주 원 없이 건물을 이동시키며 흔들었다.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흔든 후에야 만족하고 건물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았다. 건물 배치가 끝났으니 이제 리모델링 차례였다. “건물 꾸미기!” 건물창이 열리며 건물 전체가 은은한 초록색으로 물들었다. 세영은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였다. 우지직 소리와 함께 건물의 지붕이 날아갔다. 이어서 건물을 감싼 사방의 벽들이 차례차례 뜯겨나갔다. 벽이 모두 날아가자 안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신기하게도 건물 안의 가구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굴러다니면서 혹사당한 것은 오직 사람들뿐이었다. 세영이 들었다 놨다 할 때마다 무중력을 경험한 사람들은 토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개중 가구나 벽에 부딪혀 피를 흘리는 사람은 있었지만,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다. 그들은 너나할 것 없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세영을 쳐다봤다. 사방의 벽이 뚫려 있었지만, 누구도 도망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5분 안에 튀어나오면 목숨은 살려드릴게.” 세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토하던 사람들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마음이 급했는지 3층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도 있었다. 스킬을 써서 그를 잡아채 바닥에 내려놓은 세영이 하우징 맵으로 남은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3분도 지나지 않아 건물의 모두가 탈출했다. “제발,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토사물로 범벅된 키드가 세영의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영이 귀를 후벼 파며 말했다. “이미 늦었는데?” “그, 그러지 마시고 제발 한 번만…….” “아무리 빌어도 소용없다니까. 이제 나도 스킬 취소가 안 돼.”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하늘을 가리켰다. 반사적으로 위를 쳐다본 키드는 제 눈을 의심했다. 이글이글 불타는 운석이 긴 꼬리를 끌며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부하들과 달리 그는 멍하게 건물로 떨어지는 운석을 바라봤다. “말했잖아? 난 분명 기회를 줬어. 그걸 거부한 건 너야.” 세영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운석이 건물을 뭉개버렸다. 폭삭 주저앉는 건물을 본 키드가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며 불타는 건물의 잔해로 뛰어들려고 했다. 그런 키드를 붙잡은 것은 도망친 부하들이 아니라 디안이었다. “안 돼! 저기엔 금고가!” “이미 늦었습니다. 진정하세요!” “저게 없으면 난 죽어! 죽는다고!” 키드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외쳤다. 그가 지금껏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던 것은 소위 ‘높으신 분들’의 약점을 잡고 있어서였다. 그는 그것을 서류로, 또는 증거로 만들어 비밀 금고에 보관했다. 화재나 홍수와 같은 재난에도 안전하도록 몇 겹의 안전장치를 걸어둔 뒤였다. 그러나 그것도 건물 자체가 재가 되어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렇게, 이렇게 끝낼 순 없어!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비통하게 울부짖던 키드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디안은 심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눈앞의 남자는 분명 악당이지만,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기도 했다. 뿌린 대로 거두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조금 무거웠다. “아, 재 엄청 날리네. 폐병 걸리겠다.” 정작 그의 모든 것을 날려버린 세영은 아무런 감흥이 없는 표정이었다. 몇 번 손을 휘휘 젓던 그녀는 물을 뿌려 남은 불길을 간단히 진화했다. 재까지 가라앉자 남은 것은 건물 크기만큼 움푹 팬 구덩이뿐이었다. “응?” 구덩이 한가운데 울퉁불퉁한 돌덩이 하나가 놓여있었다. 건물 한 채를 박살 낸 운석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메테오를 썼다고 이런 게 나온 것은 처음이라 조금 신기했다. 세영은 호기심으로 운석을 집어 들었다. 곧바로 아이템 정보창이 떴다. [알 수 없는 광물] 도구속성 -하늘에서 떨어진 정체불명의 돌. 특이한 성분이 섞여 있는 것 같다. 제련 스킬로 분리해보자. “어라, 이거 설마?” 세영은 운석을 좀 더 유심히 살펴봤다. 운모처럼 검은 표면에 기이한 광택이 감돌고 있었다. ‘아다만티움이잖아.’ 아다만티움은 광석지대에서만 찔끔찔끔 채취할 수 있는 희귀금속이었다. 갑옷이나 무기, 방어구를 만들 때 마무리 공정에서 들어가는 강화재료이기도 했다. 세영은 뜻밖의 득템에 즐거워하며 운석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시간 날 때마다 메테오 써봐야겠네.’ 세영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구덩이를 벗어났다. 잔치가 끝났으니 정리할 시간이었다. “땅 고르기!” 하우징 스킬을 쓰자 움푹 팬 땅이 평평하게 돌아왔다. 세영은 준비해온 목재와 석재를 써서 건물의 뼈대를 다시 세웠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건물은 불타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거기에 떼어둔 벽과 지붕까지 얹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완벽해졌다. 부서진 문짝을 갈아 끼운 세영이 건물 전체를 락 기능으로 봉쇄한 후에 손을 털었다. “좋아. 이제 끝났네.” 혼내줄 놈들은 혼내주고, 부탁받은 대로 불법 거주자들을 모조리 쫓아냈다. 마리엔의 부탁대로 누구도 죽이지 않았다. 이만하면 완벽한 퀘스트 완료라고 생각한 세영이 일행을 돌아봤다. “자, 사람들이 몰려오기 전에 돌아갈까요?” 싱긋 웃는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일행은 전처럼 쉽게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단순히 몬스터를 박살 내는 수준의 강함이 아니었다. 불타는 폐허를 거니는 그녀는 인간을 벌하기 위해 내려온 심판의 천사 같았다. 모두가 겁에 질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고개를 갸웃한 세영이 몸을 돌렸다. 아직 남아있던 재가 그녀의 검은 머리 위에 나비처럼 내려앉았다. ──────────────────────────────────── 스카로스 (6) 자유여행자 길드는 아주 폭삭 망해버렸다. 길드장인 키드가 실종된 후 길드원들도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한때 길드에 속했던 자들도 과거를 세탁하기 위해 애썼다. 신이 난 것은 <스카로스 상인 번영회>와 길드에 돈을 빌린 자들이었다. “키드가 워낙 쌍놈이다 보니 길 가다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는군.” “나는 운석에 맞아 죽었다고 들었는데.” “에이, 사람이 어떻게 운석에 맞아 죽어. 나는 아랫놈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들었네.” 잘나가던 길드가 하루아침에 망해버리자 사람들은 신이 나서 입방아를 찧었다. 일행이 머무는 여관까지 소문이 들려왔다. 사고를 친 것에 대한 반성으로 여관에 틀어박혀 있던 일행은 길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흠칫했다. “우리 때문인 걸까?” 시디발라가 전에 없이 시무룩하게 물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긴 디안이 말했다. “우리가 뭔가를 한 건 아니잖아.” 툭 내뱉는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사실 그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제 손으로 그들을 벌했다면 이런 기분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영의 힘을 빌려 그들을 뭉개버린 것은, 감히 손대선 안 될 힘을 제멋대로 휘두른 것 같은 죄책감을 들게 했다. 무엇보다 지드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들은 자기가 저지른 죄의 값을 치른 거야. 그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당했는지 생각해봐. 이러는 건 우리를 대신해 싸워주신 분을 모욕하는 것 밖에 안 돼.” 마리엔이 전에 없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비난을 담아 시디발라와 디안을 노려보았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한 시디발라가 “그렇지만….” 하고 꿍얼거렸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툭 터지듯 쏟아냈다. “그래. 놈들이 죽은 건 잘 죽었다고 치자! 근데 난 그거보다 쟤 태도가 더 마음에 걸려.” “쟤라니. 세영님을 말하는 거야?” “그래. 쟤 너무 이상하다고! 전부터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진짜 이상해!” 시디발라가 세영이 있는 방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마리엔이 절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답답하다는 듯 꼬리로 바닥을 탁탁 내리친 시디발라가 말을 이었다. “내가 쟤한테 소문을 말해줬단 말이야. 길드가 완전히 박살 났고 키드인가 하는 애가 실종됐는데 죽은 것 같다고. 그랬더니 쟤가 뭐랬는지 알아?” “뭐라고 하셨는데?” “아, 참 그랬었지- 라고 했다고!” 일행의 표정이 의아하게 변했다. 세영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시디발라는 조금 흥분한 투로 말을 이었다. “뭐가 그랬었냐고 물었더니 걔가 씩 웃더라.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기가 진짜라는 걸 잠깐 잊고 있었어.’ 라는 거야. 이게 무슨 뜻인지 니들은 알겠어?” 일행은 잠시 침묵했다. 마리엔이 조금 불안한 얼굴로 “그분께는 여기가 진짜처럼 안 느껴지는 걸까?” 하고 되물었다. 디안은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리먼이 흥분한 시디발라를 달랬다. “시디발라. 혼세마왕님은 다른 세계의 인간입니다. 우리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에요. 분명한 사실은 그녀는 빛의 편이고 선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겁니다.” “누가 걔가 악하대? 근데 이상하다고. 가끔 말이야, 걔 눈엔 우리가 안 보이는 것 같아. 아니,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하지.” 적당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지 발을 굴리던 시디발라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아, 그러니까 우리가 보이긴 하는데 같은 사람으로 생각 안 하는 것 같아. 귀여운 애완동물과 하찮은 벌레 사이의 뭔가를 보는 느낌?” “너무해! 세영님은 그런 분 아니시거든?! 얼마나 사려 깊고 상냥하신데!” 발끈한 마리엔이 세영을 두둔하고 나섰다. 심드렁한 얼굴로 콧방귀를 뀐 시디발라가 말을 이었다. “제일 예뻐하는 게 마리엔 너고. 너 외의 나머지는 일단 두고 봐준다는 느낌이고. 우리 외의 다른 놈들은 거의 물건 취급이라고. 너흰 진짜 못 느꼈어?” 디안은 문득 미궁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그때의 세영은 의식을 잃은 부상자를 그냥 내버려두자고 말했다. 마리엔이 울먹이자 할 수 없이 치료해주긴 했지만,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어쩌면 그게 당연한 곳에서 왔는지도 몰라.’ 타인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고, 동료에게 조건 없이 헌신하며, 동료를 건드리면 전력을 다해 복수한다. 그것이 디안이 지금껏 지켜본 세영의 세계였다. 그녀가 살던 곳은 상상 이상으로 치열하고 혹독한 것 같았다. ‘강한 사람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겠지.’ 그런 사람에게 자비나 동정을 이야기해봤자 위선이나 교만처럼 들릴 것이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고민하던 디안은 문득 깨달았다. 지금껏 그는 세영을 가로막고 말리기만 했지 ‘동료로서’ 대화를 청한 적이 없었다. 정작 디안을 못마땅해 하던 세영은 그를 동료의 하나로서 대우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디안?”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 디안을 시디발라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마음이 급해진 디안은 그에게 제대로 답해주지 못했다. “나 잠시 혼세마왕님과 이야기하고 올게!” “어, 잠깐. 야?!” 디안은 말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방을 뛰쳐나갔다. 세영이 있는 방문 앞에 선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꾹 눌렀다. 이상하게 긴장이 되어서 노크하는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잠시 후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디안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불을 켜지 않은 방은 어두웠다. 창문을 열어두었는지 서늘한 밤공기가 슬금슬금 밀려왔다. 어둠에 적응하기 위해 눈을 깜빡이자 창틀에 기대앉아있는 인영이 보였다. 디안을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은 세영이 이내 싱긋 웃었다. “아아, 마리엔인 줄 알았는데. 웬일이에요?” “방해가 되었습니까?” “아뇨. 그냥 멍 때리고 있었어요.” 피식 웃은 세영이 창밖을 턱짓했다. 열린 창문 너머로 흥겨운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향료를 태우는지 밀려드는 바람에 달콤한 향내가 섞여 있었다. 디안은 창밖으로 고개를 기울인 세영을 바라봤다. 호기심과 흥미가 뒤섞인 표정이 어린아이처럼 천진해 보였다. 괜히 땀이 난 손바닥을 옷에 문지른 디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이번 일 때문에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앉아서 들을 이야기는 아닌가 보네요.” 디안을 돌아본 세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양이처럼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가 손을 튕겼다. 치익 소리와 함께 방안의 모든 등잔에 불이 붙었다. 갑자기 밝아진 시야에 적응하려 애쓰는 동안 의자에 앉은 세영이 자리를 권했다. 맞은편에 앉은 디안은 불편한 기분에 헛기침을 했다. “할 말 있는 거 아니었어요?” “…….” 선뜻 입을 열지 못하는 그를 보고 세영이 피식 웃었다. “시디발라에게 대충 이야기는 들었어요. 내가 깽판 부린 덕에 거기 길드가 망하고 길드장이 죽었다던가. 그것 때문에 나한테 따지러 온 거 아니에요?” “따지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디안이 조그맣게 변명했다. 그녀가 뭘 하든 뭐라고 따질 주제가 되지 못한다. 아니, 애초에 따질 생각도 없었다. 그런 걸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오히려……. “미안해요.” “네?” 느닷없는 말에 놀란 디안이 고개를 들었다. 조금 난처한 얼굴로 웃은 세영이 말을 이었다. “멋대로 행동해서 미안하다고요. 개인적인 화풀이이긴 했지만, 파티에서 의논하고 해결할 일인데 동의도 구하지 않고 저질러버렸으니까.” “…….” “앞으로는 미리 말할게요. 죽이진 않고 자이로드롭을 태울 거라던가, 메테오로 건물을 폭삭 뭉개버릴 거라던가.” 디안은 세영의 말에서 고민의 흔적을 느꼈다. 바보가 아닌 이상 함께 있는 사람들이 갑자기 벽을 세우고 거리를 두는 것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죄책감이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사과받으려는 것도 아닙니다. 혼세마왕님이 사과하실 일도 아니고요. 저는 그냥…….” 잠시 말을 멈춘 디안이 세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심연처럼 새까만 눈동자가 망설이는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홀린 것처럼 말을 이었다. “혼세마왕님께 저희가 진짜 동료인지 여쭙고 싶었습니다.” 세영은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뜻밖의 말을 들은 놀라움이 그녀의 얼굴에 번졌다. 난처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인 그녀가 물었다. “아, 어. 뭐라고 해야 할지 좀 당황스러운데. 디안은 어때요? 절 진짜 동료로 생각해요?” “혼세마왕님의 동료라고 말하기엔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노력해서 의지할 수 있는 동료가 되고 싶습니다.” 디안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세영은 이번에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뿐만 아니라 어쩔 줄 몰라 하며 디안의 시선을 피했다. “아니, 좀… 그렇게 말하니까 엄청 부끄럽네요.” “네?” “진지해서 좋다고요. 제가 있던 곳에선 디안처럼 심각하게 말하는 사람이 잘 없었거든요.” 손을 휙휙 내젓는 세영의 뺨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얼떨떨해하던 디안도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평소대로 말했을 뿐인데 세영이 너무 부끄러워하니 제가 몹쓸 소리를 한 것 같았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건 아니고. 뭐랄까. 저도 물론 여러분을 동료로 생각하죠. 의지가 되는……. 아, 시발. 이건 맨정신으로는 안 되겠다.” 머리를 벅벅 긁은 세영이 갑자기 투명한 작은 잔을 두 개 꺼냈다. 초록색 병을 기울여 잔을 채운 세영이 하나를 디안의 앞에 내려놓았다. “내키면 한잔 해요. 전 좀 마셔야겠네요.” 말을 마치자마자 잔을 입에 털어 넣은 세영이 크으 소리를 내며 입술을 훔쳤다. 디안은 그제야 세영이 술을 마시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연이어 석 잔을 마신 세영이 탁 소리가 나게 빈 잔을 내려놓았다. 처음보다 다소 풀린 얼굴을 한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온 곳에선 동료라는 게 없어요. 적어도 디안이 말하는 의미의 동료는요. 거기선 모험이 일종의 유희예요. 몹이 나오고 던전이 있는 건 여기랑 비슷하긴 하지만, 어차피 죽어도 부활할 수 있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별로 심각하지가 않거든요.” 디안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왠지 지금은 듣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물론 진짜 세계는 다르지만. 거기선 분위기가 아예 심플하다고 할까. 개인플레이라고 해야 하나. 서로 폐 끼치지도 않고, 의지도 덜하고, 목숨을 맡길 정도로 남을 믿을 일도 없고.” 흥얼거리듯 말한 세영이 한숨을 쉬었다. 빈 잔을 톡톡 두드린 그녀가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가끔 여기가 현실이라는 걸 잊어요. 아니, 알고는 있는데 뭔가 실감이 안 난다고 해야 하나. 내 옆을 스치는 사람이 진짜 살아있는 현실의 인간이라는 확신이 안 들어요.” 백일몽을 꾸는 기분이라고 말한 세영이 피식 웃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디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지만 당신과 마리엔, 리먼과 시디발라가 진짜 제 동료냐고 묻는다면. 네, 그래요. 여러분은 제 인생 최초의 동료예요.” 직시하는 눈에 디안은 얼굴이 타는 것처럼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세영이 왜 진지해서 부끄럽다고 말했는지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별로 이곳이 현실이라는 생각도 안 들고. 여기 사는 인간들이 살아있다는 생각도 안 들지만. 그래도 내가 아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고, 내가 아는 사람들과 관계있는 인간들이라고. 그런 기준점이 되어주는 게 동료라면.” 말을 잠시 멈춘 세영이 부드러운 미소를 입에 걸었다. “의지가 되고, 함께 있으면 즐겁고, 절대 배신당하지 않는다고 믿을 수 있는 게 동료라면, 여러분은 제 동료예요. 이걸로 답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충분합니다.” 디안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싱긋 웃은 세영이 다시 빈 잔을 채웠다. 잔을 손에 든 그녀가 디안에게 손가락을 까딱여 보였다. 눈치껏 잔을 들자 가볍게 잔을 부딪친 세영이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주세영, 앞으론 세영이라고 불러요.” 뜻밖의 말에 디안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마리엔만이 부를 수 있었던 이름을 허락받자 진정한 동료로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예!” 하고 힘 있게 대답한 디안이 단번에 잔을 비웠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이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세영이 의식을 놓은 그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특이하네. 소주 먹고 이벤트 영상 걸리는 사람은 잘 없는데.” ──────────────────────────────────── 스카로스 (7) 눈을 뜬 디안은 두꺼비가 되어 있었다. 당황해서 입을 열자 우엉~ 우엉~ 하는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웃고 떠드는 동료들의 목소리가 그가 있는 언덕 위쪽에서 들려왔다. 디안은 다급하게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두꺼비의 몸으로 경사진 언덕을 기어오르기는 힘들었다. 뒷다리에 힘을 주고 풀쩍풀쩍 뛰어오르기를 수십 번, 가까스로 도착한 정상은 텅 비어 있었다. 허탈감에 멍하게 주저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디안! 디안!”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언덕 위로 둥실 떠오른 달이 시디발라의 얼굴을 하고 외쳤다. “와, 디안이 깼다!” “시디발라?” 화들짝 놀라는 순간 주변의 풍경이 변했다. 디안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있었다. 술 냄새를 폴폴 풍기는 시디발라가 그의 얼굴을 쿡쿡 찔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디안이 눈을 깜빡였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를 본 세영이 시디발라에게 말했다. “시디발라, 디안 괴롭히지 말고 이리와.” “괴롭히는 거 아닌데.” “소시지 구웠는데 안 먹을 거야?” “앗, 먹을래! 먹을 거야!” 후다닥 뛰어가는 시디발라의 등을 보던 디안이 몸을 일으켰다. 카펫 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동료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에 매달려있는 것을 보고 입을 쩍 벌린 디안이 물었다. “다들 지금 뭐하고 있는 겁니까?” 날카로운 목소리에 술잔을 기울이던 리먼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술기운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디안을 보며 허허 웃었다. “아, 디안. 일어났군요. 세영님이 멋진 술을 나눠주셔서 먼저 마시고 있었습니다.” “헤헤. 디안. 이거 진짜 맛있어! 안주도 맛있구우!” 마찬가지로 알딸딸하게 취한 마리엔이 술잔을 들어 올리며 어서 이쪽으로 오라고 말했다. 어이가 없어진 디안이 손으로 그들의 머리 위를 손가락질했다. “아니, 그거 말고. 저게 대체 뭐냐고!” “읍읍!” 밧줄에 묶인 채 거꾸로 매달려 있던 지드가 무어라 외치며 꿈틀거렸다. 입에 재갈이 물려있어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살려달라는 것 같았다. 소시지를 집어삼키던 시디발라가 신이 나서 외쳤다. “도둑이야. 몰래 들어오는 걸 내가 발견했어!” “여자 방에 몰래 숨어들어오면 도둑이 아니고 변태지.” 시디발라의 말을 정정하는 마리엔도 지금 상황에 한 치의 의문도 없는 것 같았다. 황당한 눈으로 동료들을 쳐다보던 디안이 다시 물었다. “내 말은… 왜 저렇게 매달아 둔 건데?” 동료들의 시선이 일제히 세영에게 돌아갔다. 덕분에 디안은 지드를 거꾸로 매달아둔 사람이 그녀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파악했다.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실내장식?” “…….” 침묵하는 디안을 힐끔거린 그녀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원래는 홀딱 벗겨서 매달아두려고 했는데 마리엔이 반대해서.” “으엑, 그건 나도 싫어! 내가 왜 남자 고추 따윌 봐야 해!” 디안이 뭐라고 반응하기 전에 시디발라가 먼저 격렬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빈 잔에 포도주를 따르던 리먼이 깜짝 놀란 얼굴로 만류했다. “저런, 시디발라. 숙녀들 앞에서 고추라는 말을 쓰면 안 됩니다.” “앗. 그런가. 미안! 그런데 고추라고 안 부르면 뭐라고 해?” 너무나 태연한 대화에 디안은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꼈다. 사람을 머리 위에 매달아 놓고 술을 마시는 동료들이 이상한 건지, 그것에 놀라고 경악하는 자신이 이상한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몰래 기어들어 오기에 붙잡았는데 디안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워낙 더럽게 짖어 대서 묶어놨지만 때리진 않았어요.” 머리를 쥐어뜯는 디안을 본 세영이 위로하듯 덧붙였다. 지드의 성격에 얌전히 묶여있지만은 않았을 테니, 세영의 화를 돋울 말을 지껄였을 터였다. 전처럼 마리엔을 걸고넘어졌다면 살아남은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아니, 합리화하지 말자. 나까지 저기 물들면 안 돼.’ 디안은 자신만큼은 정신 나간 동료들 사이에서 제정신을 유지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뭔가 잘못된 건 아는지 눈치를 보던 동료들이 지드를 내려 디안 앞에 부려놓았다.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지드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디안이 재갈을 풀었다. 입이 열리자마자 욕설을 퍼붓던 지드가 어서 풀어달라고 소리쳤다. 그때 도도도 달려온 시디발라가 그의 엉덩이를 뻥 걷어찼다. 요란스럽게 비명을 지른 지드가 몸을 꿈틀댔다. 얍얍 기합까지 넣어가며 그를 퍽퍽 걷어찬 시디발라가 세영을 돌아보며 엄지를 척 세웠다. “나 잘했지?” “굿 잡.” 마주 엄지를 세운 세영이 칭찬했다. 헤헤 웃는 시디발라를 끌어낸 디안이 한숨을 쉬었다. 바닥에 엎어진 채 꿈틀거리는 지드는 아주 멀쩡했다. 시디발라에게 몇 번 걷어차이긴 했지만, 별다른 상처도 없이 건강해 보였다. 그동안 걱정했던 것이 무색해져 약간 허탈해졌다. “지드, 왜 몰래 숨어들어온 거야?” 디안의 물음에 지드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잔뜩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는 적나라한 분노와 원망이 서려 있었다. “이,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디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다짜고짜 제 탓을 하는 것에 어이가 없어서였다. 그것을 잘못 이해한 지드가 신이 나서 지껄여댔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길드가 망한 거라고! 그런데 놈들은 그걸 내 탓이라고 생각해. 젠장. 나쁜 건 네 녀석인데. 대체 왜 내가 이런 꼴이 되어야 하는 거냐고!” “나쁜 건 당신이잖아!” 참다못한 마리엔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분노로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지드에게 따졌다. “당신이 디안에게 사기를 쳤잖아! 친구인 척하며 돈을 빌려준다고 해놓고 어마어마한 빚을 지웠잖아! 그것 때문에 디안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긴 해?!” “난 디안이 하도 빌려달라고 사정해서 빌려줬을 뿐이야! 그게 뭐가 나빠?” “뭐라고?” 뻔뻔한 대꾸에 기가 막힌 마리엔이 입을 뻐끔거렸다.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자 더욱 득의양양해진 지드가 목소리를 높였다. “돈 빌려달라고 바짓가랑이 붙들고 애원할 땐 언제고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쳐? 난 이번에 간부가 될 수도 있었다고! 그런데 디안 너 때문에 다 망쳐버렸어. 내 몇 년의 노력이 날아가 버렸다고! 이걸 어떻게 책임질 거야!” 큰소리를 치는 지드 앞으로 구리 동전 하나가 떨어졌다. 이어서 성의 없는 박수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자 박수를 치던 세영이 빙긋 웃었다. “병신육갑, 아주 잘 봤습니다. 관람료로 넣어두시죠?” 평소라면 욕지거리를 퍼부었을 지드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고양이 앞의 쥐처럼 움츠러든 그를 보고 세영이 몹시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너희 길드를 망하게 한 건 분명 난데. 전혀 관계없는 디안 앞에서 이렇게 지랄 염병하는 이유는 뭘까?” “…….” “네 친구들도 역시 쓰레기라서, 원흉인 나한테는 복수하지 못하고 만만한 너 새끼에게 칼빵을 놓기로 한 걸까?” 지드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못했다. 경멸을 담은 시선이 그의 위로 쏟아졌다. 지드를 노려보는 동료들을 휙 돌아본 세영이 명랑하게 말했다. “그럼 해결은 간단하겠네. 첫째, 도둑으로 신고하고 감옥에 보낸다. 그럼 면회 온 친구들이 선물을 주겠지? 아, 어쩌면 동료 죄수에게 부탁할 수도 있고.” 흠칫하는 지드를 본 세영이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둘째, 이대로 끌고 나가서 시장에 매달아 놓는다. 뫄뫄 길드 누구누구라고 이름표도 붙여줄게. 분실물이니 주인들이 찾아가야지.” 새초롬한 얼굴을 한 마리엔이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떡였다. 귀엽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 세영이 다시 지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셋째, 우리랑 상관없는 일이니 방생한다. 무사히 도망칠지 친구들에게 붙잡힐지는 운명에 맡기는 거야. 셋 중 어떤 게 좋아?” 지드가 택한 것은 셋 중 어느 것도 아니었다. 그는 디안을 향해 필사적으로 몸을 꿈틀거리며 외쳤다. “디, 디안. 살려줘! 우리는 고향 친구잖아. 우리 엄마가 너한테 얼마나 잘 해주셨는데!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돼!” “흠, 그럼 피해자인 디안에게 결정을 맡길까. 셋 중 어느 게 좋겠어요?”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디안을 바라봤다. 뒤를 따르듯 다른 사람들도 그를 쳐다보았다. 몰려드는 시선에 마른침을 꿀꺽 삼킨 디안이 입을 열었다. “제가 결정해도 되는 거라면, 전 지드를 살려주고 싶습니다.” 마리엔은 대놓고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고, 시디발라의 얼굴도 썩 좋지 않았다. 힘을 얻기 위해 온화하게 웃고 있는 리먼을 쳐다본 디안이 말을 이었다. “지드의 말처럼 저는 녀석의 어머니께 신세를 졌습니다. 고아나 다름없는 저를 자식처럼 돌봐주신 고마운 분이십니다. 지드가 죽는다면 전 고향에 돌아가 그분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바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마리엔이 소리쳤다. 그녀는 지드와 말다툼을 벌일 때보다 더 화가 난 얼굴이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녹색 눈이 비난하듯 그를 쏘아봤다. “넌 정말 바보야. 왜 그렇게 쉽게 용서해주는 거야? 저 사람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벌써 잊었어?” “…미안해.” “마리엔 말이 맞아. 그렇게 쉽게 용서해주지 말라고. 나처럼 이렇게 때리기라도 해.” 부루퉁한 표정을 지은 시디발라가 지드를 툭툭 걷어찼다. 고개를 저은 디안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시디발라는 마지못한 얼굴로 지드를 걷어차는 것을 그만두었다. 머리를 긁적인 세영이 확인하듯 물었다. “뭐, 일단 살아만 있으면 되는 거죠? 사지육신 멀쩡하고, 눈알 제대로 붙어있고.” “가능하다면, 무사히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싶습니다.” 허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디안은 서둘러 조건을 추가했다. 슬며시 미간을 찌푸린 세영이 입꼬리를 비틀며 물었다. “진짜로?” “예.” “손도 안 보고, 회도 안치고, 그냥 돌려보내고 싶다고요?” “지금 이대로 멀쩡히 보냈으면 합니다.” 마리엔이 눈물까지 보인 이상 지드의 앞날은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게 되었다. 잘못했다간 죽는 것만도 못한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디안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세영이 한숨을 쉬었다. “끄응, 뭐. 약속했으니까 멀쩡히 보내줄게요.” 죽은 듯이 엎드려있던 지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혀를 찬 세영이 그를 툭 차서 돌려 눕혔다. 놀라 눈을 부릅뜬 그의 턱을 발끝으로 밀어 올린 세영이 부드럽게 웃었다. “물론 공짜로는 안 되고. 목숨값 정도는 토해내야지?” ──────────────────────────────────── 스카로스 (8) 다음 날 오후, 마차에서 내린 세영이 눈앞의 가게를 확인했다. 허름한 외관과 숨겨진 문 때문에 가게가 있다는 것도 잘 눈에 띄지 않았다. 비바람에 반쯤 지워진 간판이 당장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매달려있었다. <크라톤 은세공 공방> 흐릿한 간판을 흩어본 세영이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긴 듯 덜컥거리던 문은 그녀가 힘을 주자마자 힘없이 끼익 하고 벌어졌다. 안으로 들어선 세영은 무심한 시선으로 안을 둘러보았다. 테이블과 세공 도구 위에 뽀얀 먼지가 쌓여있었다. 눈처럼 쌓인 먼지를 들여다보던 세영은 다가오는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뉘슈?” 허리가 잔뜩 굽은 노인이 경계 어린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노인을 위아래로 훑어본 세영이 빙긋 웃었다. “아직 영업 안 하나요?” “여긴 망한 지 오래요. 세공할 게 있으면 옆에 있는 골목에 가보시구려.” “전 의뢰를 하러 왔는데요. 여기가 도둑 길드 아니에요?” 천진하게 들리는 물음에 노인의 주름진 이마가 찌푸려졌다. 그는 볼일 없다는 것처럼 손을 휘휘 내저으며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나가기나 하쇼.” 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세영의 눈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키워드가 있나 보네. 이 쓰레기 새끼가 절반만 가르쳐줬다 이거지.” 이를 갈며 웃는 그녀를 보고 불길함을 느낀 노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나가라니까. 젊은 처자가 실성을 했나. 빨리 나가지 못해?” “연기가 제법 그럴듯하긴 한데, 그럼 걸음걸이에도 신경을 썼어야지. 늙은이가 왜 발소리를 죽이면서 걸어? 게다가 이 좁은 공방에 열세 명이나 숨어있으면 누가 봐도 수상하지 않아?” 세영의 말이 끝나는 순간 노인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는 굽혀진 허리를 쭉 펴며 고양이처럼 유연하게 튀어 올랐다. 그의 손에 쥐어진 단검이 세영의 목을 노리며 독사처럼 뻗어 나갔다. 단검이 목에 닿기 직전 세영이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대신 앞으로 튀어나온 그녀의 주먹이 단검을 맞이했다. 쨍하고 유리잔이 깨어지는 소리가 났다. 세영의 주먹과 부딪치는 순간 산산 조각난 단검이 표창처럼 날아가 그의 온몸에 박혔다. 노인, 아니 노인으로 가장했던 자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세영은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도둑 길드는 의뢰인의 실력도 확인하나 봐? 아주 좋아. 매력 있어.” “죽어!”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장에서 떨어진 남자가 검을 휘둘렀다. 빙글 몸을 돌린 세영이 남자가 든 검을 정확히 걷어찼다. 이번에도 쩡! 소리와 함께 검이 박살 나며 충격을 받은 남자가 뒤로 나가떨어져 피를 토했다. “오, 기습도 하네. 과연 도둑길드야. 대담하지.” 주춤주춤 물러나는 기척을 느낀 세영이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내가 여길 박살 내는 게 빠른지, 너희가 내 의뢰를 받는 게 빠른지, 어디 한번 해보자고.” 정확히 5분 후, 세영은 도둑길드의 귀빈실에 앉아 길드장이 직접 우려낸 차를 마시고 있었다. 길드장 얀센은 도둑보다는 졸부나 신흥귀족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인상의 남자였다. 그는 호륵호륵 차를 들이켜는 세영의 옆에서 두툼한 손바닥을 싹싹 비벼댔다. “이거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아랫것들이 워낙 모자란 탓에 귀빈을 알아 뵙지 못하고 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아뇨, 저야말로 실례했죠.” 빈 잔을 우아하게 내려놓은 세영이 사르르 웃으며 답했다.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기는 손길이 지극히 여성스러웠다. 어딜 봐도 수문장들을 모조리 아작내며 날뛰던 괴물처럼 보이지 않았다. “여길 가르쳐준 놈이 장소만 딱 알려줬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니 절 엿 먹이려고 일부러 안 가르쳐줬나 봐요. 아, 아니다. 여길 엿 먹이려고 한 건가?” 무슨 일이 일어날진 아주 뻔한데 말이죠. 손가락 하나를 입가에 댄 세영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말에 눈가를 꿈틀한 얀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례지만, 여길 가르쳐준 놈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제 동료의 친구 중에 아주 쓰레기 같은 놈이 있어요. 최근 그 녀석의 길드가 망했거든요. 우리 길드 망했으니 너희 길드도 망해보라는 귀여운 심술이려나. 참 세상을 더불어 살려는 놈이죠.” “……그게 누군지 여쭤 봐도 될까요?” “이거 참. 말해도 되려나 모르겠네요. 자유여행자 길드의 지드라는 놈인데, 혹시 아세요?” 길드장인 얀센이 그런 피라미까지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지드는 도둑 길드를 몰살시키려고 한 흉악한 악당이었다. 얀센은 자유여행자 길드의 지드라는 이름을 뼈에 새기듯 중얼거렸다. “신세를 졌으니 꼭 기억해둬야겠군요.” “이번에 고향으로 내려간다니. 직접 보실 일은 없을 것 같네요.” 세영이 아쉽다는 듯 눈을 찡긋했다. 입꼬리를 말아 올린 얀센이 “정말 아쉽군요.” 하고 맞장구를 쳤다. 그를 따라 빙긋 웃은 세영이 양손을 깍지 끼며 말했다. “제 동료가 워낙 호구… 아니, 착해서 그런 쓰레기 같은 놈도 사지육신 멀쩡히 돌려보내고 싶어 하더라고요.” “저런, 자비심이 지나치시군요.” “그런데 뭐, 고향으로 가는 길이 워낙 머니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죠. 막말로 팔다리랑 눈코입만 제자리에 붙어있으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두 사람은 공모자의 시선을 주고받았다. 길드장님과는 말이 잘 통하는 것 같다며 입에 발린 말을 한 세영이 손가락을 튕겼다. 손톱만 한 새파란 보석이 얀센의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별것 아니지만, 앞으로 잘 지내보자는 선물이에요.” “아이고, 뭘 이런 걸 다.” 고개를 굽실거린 얀센이 슬그머니 보석을 확인했다. 크기는 작지만, 순도가 높고 커팅이 완벽한 최상급이었다. 얀센의 미소가 신전의 신관처럼 온화하게 변했다. “자, 그럼 의뢰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볼록한 주머니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세영이 말했다. 얀센은 테이블에 내려놓는 소리만 듣고도 주머니 안에 든 것이 금화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의 두 귀가 절로 쫑긋 일어섰다. “칸디아 국경을 넘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신분증이 필요해요. 그리고 마도의 땅에서 쓸 수 있는 신분증도 다섯 개 준비해주세요. 여자 둘, 남자 셋이에요.” “마도의 땅 말입니까?” “거기 갈 일이 좀 생겨서요. 마지막으로 7대 마경에 대한 정보를 받고 싶어요. 최대한 상세히 정리해주세요.” 고개를 끄떡인 얀센이 신분증을 만들 때 필요한 정보를 써넣었다. 신분증을 쓸 사람들의 머리색과 눈 색, 연령대, 신체적 특징에 대해 메모한 뒤에 의뢰 절차가 끝났다. “신분증은 삼일 이상 걸릴 겁니다. 아시다시피 마도에서 통용되는 신분증이 좀 까다로워서요. 마경에 대한 정보는 돌아가실 때 바로 받으실 수 있게 하겠습니다.” “삼일 뒤에 찾으러 오면 되나요?” “아뇨, 삼일 뒤에 머무시는 곳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얀센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를 빤히 쳐다보던 세영이 피식 웃었다. 대놓고 미행하겠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주머니를 얀첸의 앞으로 쓱 밀었다. “아이고, 감사…….” 얀센이 주머니를 집어 드는 순간, 또 다른 주머니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처음의 주머니보다 배는 커 보였다. 주머니를 쿡 찌른 세영이 웃으며 말했다. “두 가지 조건만 들어주면, 이것까지 함께 드리죠.” “…말씀하시죠.” “첫째, 나와 내 동료들에 대한 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팔지 않는다. 둘째, 나와 내 동료들에 대한 정보를 교란시킨다.” 얀센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는 세영의 정보를 팔았을 때의 이득과 주머니 속에 든 금화를 저울에 매달아보았다. 세영은 여유로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머니 속에 든 금화에 미래의 원한까지 더해졌다. 저울이 빠르게 기울었다. “저도 제 주제를 압니다.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정보는 감히 팔지 않는다는 입장이죠.” 세영은 파리처럼 손을 비비는 얀센에게 두 번째 주머니를 밀어주었다. 두 사람의 거래는 만족스럽게 끝났다. 얀센은 마차 앞까지 세영을 배웅했다. 세영이 마차에 오르기 전 그가 은밀하게 입을 열었다. “귀빈께서는 던전 약탈자들에 대해서 아십니까?” “던전 약탈자?” 세영이 흥미로운 시선을 던졌다. 얀센은 관심을 보여줘서 고맙다는 듯이 굽실거리며 말했다. “소문에 따르면 다섯 명의 모험가들이 왕의 미궁을 정복했다고 합니다. 지금껏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미로의 끝에서 저주받은 왕을 해치우고 패왕의 검을 손에 넣었다지요.” “흐음. 그래서요?” “그런데 칸디아 왕실에서 패왕의 검이 자신들의 소유라고 주장하며 강제로 검을 뺏으려고 했다지 뭡니까. 왕실에선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있지만, 목격자가 한둘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얀센은 입담 좋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미궁을 정복한 모험가들이 왕실을 비난하며 검을 내던지고 떠난 일이 눈에 보일 듯 생생히 그려졌다. 그로 인해 칸디아 왕실이 안팎으로 비난받고 있으며 마도의 추종자라며 매도당하고 있다고 했다. “결국, 왕실에선 포고문을 내걸었습니다. 모든 것이 오해며 미궁 정복자들에게 패왕의 검을 돌려주고 싶다고요. 하지만 뒤로는 수배령을 내려 던전 약탈자들을 잡아들이려 한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던전 약탈자들은 검은 머리의 이국적인 소녀, 적금발의 검사, 금발의 엘프 여마법사, 회색 머리의 쥐 수인, 갈색 머리의 중년 사제라고 하더군요.” 세영의 미소가 꽃처럼 화사해졌다. 찡긋 윙크를 한 얀센이 덧붙였다. “7대 마경의 정보에 밀항루트에 대한 안내도 넣어 드렸습니다. 별것 아니지만, 앞으로 잘 지내보자는 선물입니다.” “이런, 한 방 먹었네요.”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악수를 청했다. 싱긋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놓은 얀센이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깊게 절했다. “여행에 행운이 있길 빌겠습니다.” “고마워요.” 마주 고개를 숙인 세영이 마차에 올랐다. 얀센은 마차가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숙인 머리를 들지 않았다. 그것이 과거의 모험가가 던전 정복자에게 보낼 수 있는 최대의 예우였다. ──────────────────────────────────── 샤르마흐 사막 (1) “흥미로운 이야기군.” 옥좌에 앉은 사내가 비스듬히 몸을 기울였다. 흥미롭다는 말과 달리 불쾌감이 가득 묻어나는 음성이었다. “어린 계집이 맨주먹으로 골렘을 쓰러뜨리고, 타락한 왕까지 해치워 던전 정복자가 되었단 말이지.” “소, 송구합니다.” 보고하는 자의 이마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던전 정복자>라는 말이 사내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 틀림없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를 보고 코웃음을 친 사내가 손을 내저었다. “물러가라. 다음엔 소문이 아니라 제대로 된 소식을 들고 오도록.” 사죄의 말을 읊조린 자가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문이 닫힐 때까지 기다린 사내가 허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미궁의 봉인이 풀린 것은 사실입니다. 옥좌의 그림자에서 무감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못마땅한 얼굴로 옥좌의 팔걸이를 톡톡 두들기던 사내가 중얼거렸다. “그 계집이 진짜 정복자일까?” 눈에 보이는 사실과 진실은 다를 수 있다. 사내는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아는 자였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그는 단신으로 <용의 둥지>를 정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겐 일곱 명의 동료가 있었고, 그들과 함께 <용의 둥지>로 들어갔다. 다만, 밖으로 나온 것이 사내 혼자였을 뿐이다. 그렇게 그는 유일무이한 던전 정복자가 되었다. “해방된 신기는 지금 어디에 있지?” -서쪽으로 이동 중입니다. “샤르마흐 사막이군. 모래의 탑을 찾고 있는 거야. 그 계집, 정말 신기를 모을 셈인가.” 사내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매달렸다. 마신을 부활시킬 신기를 모으는 계집이라. 다른 나라에서도 즉시 손을 뻗겠지만, 그에겐 남들보다 좀 더 유리한 카드가 있었다. “가서 계집을 찾아. 죽이든 생포하든 손에 넣은 후에 보고해라.” -……. 목소리는 침묵했다. 거부를 담은 침묵에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주인의 명령이 아니면 따를 수 없다는 건가?” -……. “건방진 놈! 짐 또한 정복자다. <용의 눈>을 손에 넣은 건 바로 나란 말이다!” 사내는 발작적으로 팔걸이를 내리쳤다. 하지만 목소리는 사내의 분노에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원래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내에겐 그것이 비웃음처럼 느껴졌다. 으득 이를 간 사내가 씹어뱉듯 말했다. “네 어미, 올리비아의 목숨이 더는 아깝지 않은 모양이군.” -…부디 용서를. 목소리는 마지못해 복종을 표했다. 사내는 기분 나쁜 것을 떨치듯 손을 내저었다. “어서 가라. 계집을 찾기 전에 돌아오지 마.” -명을 받듭니다. 옥좌 옆에 드리운 그림자가 짧아졌다. 그것으로 사내는 상대가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언제 봐도 기분 나쁜 능력이었다. 적이라고 생각하면 끔찍할 정도다. ‘하지만 놈은 결코 나를 배신할 수 없지. 이게 내 소유인 이상은.’ 사내의 손이 제 손등을 쓸었다. 그의 왼쪽 손등에 박힌 붉은 보석이 크게 일렁였다. 꼭 커다란 눈동자가 껌뻑거리는 것만 같았다. 마신의 신기 중 하나인 <용의 눈>이었다. 사내는 15년 전, 동료의 등에 칼을 꽂은 순간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동료를 배신한 대가로 그가 얻은 것은 수없이 많았다. 정복왕이라는 위명은 그중 가장 작은 것에 속했다. “그 계집은 신기가 가진 진짜 의미를 알고 있을까.” 이미 50살을 훌쩍 넘어선 그의 피부는 주름 하나 없이 팽팽했다. 신기를 손에 넣기 순간보다 젊어져서 거의 30대로 보일 정도였다. <용의 눈>이 박힌 손등을 내려다보던 사내가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너는 어떤 선택을 할까. 이국의 소녀여.” * “누가 내 욕을 하나? 왜 이렇게 귀가 가렵지?” 갑판 위에 나와 있던 세영이 심드렁한 얼굴로 귀를 후벼 팠다. 그녀의 옆에서 과자를 흡입 중이던 시디발라가 손가락을 쪽쪽 빨며 말했다. “지드? 아니면 왕실 애들? 욕할 사람 엄청 많을 것 같은데.” “넌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이제 그만 죽어라.” 연극조로 말한 세영이 시디발라의 머리 양쪽에 주먹을 대고 꾹꾹 눌렀다. 으아악 비명을 지른 시디발라가 온몸을 퍼덕거리며 외쳤다. “물어봐서 말해준 거잖아!” 툭탁거리는 그들을 구경하던 리먼이 웃었다. 그는 흐뭇한 얼굴로 세영을 칭찬했다. “그 사이 힘 조절이 많이 좋아지셨군요.” “좋아지긴, 골 깨지는 줄 알았다고!” 간신히 세영의 손에서 풀려난 시디발라가 볼이 퉁퉁 부어서 투덜댔다. 조금 측은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리먼이 말했다. “시디발라, 세영님이 진심으로 누르면 정말 깨질 겁니다.” “진지하게 말하지 마! 무섭단 말이야!” 온몸을 부르르 떤 시디발라가 세영을 노려보았다.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댔다. 거만한 자세에 발끈한 시디발라가 뭐라고 하려는 순간이었다. “저, 과자를 더 드릴까요?” 수줍음 가득한 목소리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볼을 빨갛게 물들인 웨이트리스가 세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돌려 텅 빈 과자 접시를 확인한 세영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커피도 한잔 더 갖다 주세요.”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얼굴이 확 밝아진 웨이트리스가 쪼르르 달려갔다. 시디발라는 뚱한 얼굴로 세영에게 물었다. “너 사실 즐기고 있는 거지?” “뭐가?” 의아한 표정으로 변한 세영이 되물었다. 목깃이 높게 올라오는 셔츠와 수놓은 조끼, 몸에 딱 맞는 코트와 바지를 입은 그녀는 졸부집 막내아들 같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어서 얼핏 보면 소년처럼 보였다. 시디발라의 눈에는 그냥 남자 옷을 입은 소녀였지만, 여자들의 눈에는 퍽 달라 보이는 모양이었다. 특히 나이 어린 여자애들은 세영이 갑판 위를 거닐 때마다 넋을 놓고 쳐다보곤 했다. 왕자님 같다는 둥 너무 멋지다는 둥 온갖 해괴한 소리가 들려올 때도 있었다. “그게 아니면 변태도 아니고 왜 남자 옷을 입어.” “이거 여캐옷이거든? 남캐옷이 이렇게 딱 맞을 리가 없잖아.” “거짓말! 어딜 봐도 남자 옷인데!” 세영은 못 믿으면 말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괜히 시근덕거리던 시디발라가 괜히 리먼에게 “너도 뭐라고 말 좀 해봐!” 하고 화를 냈다. 난처한 얼굴이 된 리먼이 웃었다. “잘 어울리시잖습니까. 편해 보이고요.” 너무 잘 어울려서 문제였다. 세영은 평생 바지만 입고 산 사람처럼 행동했고, 사람들도 그런 그녀를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시디발라에겐 이상하다 못해 괴상한 일이었다. “과자와 커피 나왔습니다.” 돌아온 웨이트리스가 탑처럼 쌓인 과자와 넘칠 듯이 가득 담긴 커피를 내려놓았다. 고맙다고 인사한 세영이 그녀의 쟁반 위에 금화 하나를 내려놓았다. 깜짝 놀란 웨이트리스가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일등석 승객에게 모든 음식은 무료로…….” “그건 아는데, 추워 보여서요. 따뜻한 거라도 사 마셔요.” 다정한 웃음에 웨이트리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웅얼대던 그녀가 해파리처럼 흐늘거리며 사라졌다. 시디발라는 썩어들어가는 얼굴로 그녀와 세영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왜?” 그의 앞에 과자를, 리먼의 앞에 커피를 밀어놓은 세영이 조용히 물었다. 제 앞에 수북이 쌓인 과자를 본 시디발라는 하려던 말을 조용히 삼켰다. 사실 세영의 남장으로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은 그였으니까. “정말 좋군요. 제가 이렇게 호강하는 날이 있을 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리먼이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영의 돈 지랄로 커피를 접하게 된 그는 새로운 취향에 눈을 떴다. 하루에 대여섯 잔씩 커피를 들이켜는 그를 보고 세영이 잠은 오냐고 걱정할 정도였다. “하긴. 나도 내가 비행선을 타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열심히 과자를 작살내던 시디발라가 배 옆을 지나가는 구름을 보고 말했다. 그것도 보통 비행선이 아닌, 초호화 비행선 <아스트리드>에 타게 될 거라고는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않았다. “나도 놀랐어. 비행선이라고 해서 기구가 달려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배일 줄이야.” 세영이 펄럭이는 돛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그녀의 예상과 달리 <아스트리드>는 세 개의 돛대를 가진 범선이었다. 바다에 떠 있어야 할 것 같은 배가 허공에 못 박혀있는 것을 처음 봤을 때는 약간의 쇼크까지 받았다. “기구? 무슨 기구?” “내가 있던 곳에서 비행선은 커다란 풍선 같은 게 달려서 공중에 뜨는 거였거든.” “뭐? 그럼 풍선이 터지면 어떡해?” “글쎄. 추락하나?” 비행선의 원리를 잘 모르는 세영은 대충 대답했다. 시디발라는 “으악, 그게 뭐야. 이상해.”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세영의 입장에선 아무런 장치도 없이 허공을 날아가는 배가 더 이상했다. “대체 이 배는 어떻게 날아다니는 거지?” “사실 모든 비행선은 마도 시대의 유물입니다.” 잔을 내려놓은 리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뜻밖의 말에 세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마도 시대요? 타락의 시대라면서 고통의 시간이 어쩌고 하지 않았어요?” “물론 그랬지만, 모든 문화가 무섭게 발전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수로와 위생시설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지요. 지금 남아있는 빼어난 건축물들도 대부분 그 시대의 유적입니다.” 리먼은 비행선의 동력장치와 이동방식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보통 <부유석>을 중심으로 한 동력기관이 있고 마나를 연료 삼아 움직인다고 했다. 현재의 마법사들은 비행선을 움직일 정도의 마력이 없어서 대신 마나가 풍부한 마정석을 연료로 사용했다. “고가의 마정석을 연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비행선의 요금도 높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사실 비행선의 요금은 단순히 높은 수준이 아니었다. 서민의 경우 평생 한 번 탈까 말까한 것이 비행선이었다. 보통 비행선도 아니고 <아스트리드>의 일등석이라면 부유한 귀족쯤은 되어야 욕심낼 수 있었다. 리먼이 호강한다고 말한 것은 말 그대로의 진심이었다. 물론 세영의 입장에선 얼마 안 되는 푼돈이었지만. “무슨 이야기 중이에요?” 그때 마리엔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고개를 든 세영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마리엔, 오늘도 정말 예쁘네요.” “아, 아니에요. 세영님이 더 멋지신 걸요.” 얼굴이 빨개진 마리엔이 장갑을 낀 손을 꼼지락거렸다. 종 모양으로 펼쳐지는 에메랄드빛 드레스에 같은 색의 양산을 든 그녀는 인형처럼 깜찍했다. 머리에 쓴 보닛 때문에 엘프 특유의 귀가 가려져서 귀족집 아가씨처럼 보였다. 세영이 마리엔의 손을 끌어 옆자리에 앉히자 참다못한 시디발라가 발작했다. “아, 제발. 둘이 연애 하냐! 디안이 불쌍하지도 않아?” “나, 난 왜 끌어들여!” 빈자리를 찾아 앉던 디안이 기겁해서 소리쳤다. 시디발라는 “이 등신아. 내가 말을 말아야지!” 하는 한탄으로 그를 응징했다. 한 손으로 턱을 괸 세영이 놀리듯 물었다. “마리엔이랑 데이트 많이 했어요?” “데이트는 무슨…….” 홍시처럼 빨개진 디안이 세영의 시선을 피했다. 입술을 삐쭉 내민 마리엔이 “둘만 있으니까 하나도 재미없어요.” 하고 퉁퉁거렸다. 두 사람은 추적을 피하고자 일행과 떨어져 신혼부부 행세를 하는 중이었다. 하프엘프와 쥐 수인족은 어딜 가도 시선을 끄는 존재였다. 함께 다니면 행적을 숨기기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세영은 일행을 둘로 나누는 것으로 간단히 문제를 해결했다. “넌 재미만 없지. 난 무지하게 불편하다고.” 바지에 눌린 꼬리를 꿈지럭거린 시디발라가 투덜거렸다. 사실 일행 중 가장 힘든 사람은 시디발라였다. 커다란 귀를 가리기 위해 터번을 쓰고 피부도 사막부족처럼 갈색으로 칠했다. 풍덩한 바지에 꼬리까지 감추자 그럭저럭 인간의 어린아이로 보였다. “사흘만 참으십시오. 조르디아에 도착하면 변장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외알 안경을 고쳐 올린 리먼이 싱긋 웃었다. 그는 사제복을 벗고 상단의 회계사로 위장 중이었다. 세영은 그를 따라온 상단주의 딸, 시디발라는 그녀의 시동 역할을 맡았다. “흐음, 사흘이라.”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린 세영이 디안을 지긋이 바라봤다. 그녀의 눈이 ‘병신아, 이렇게 밀어주는데도 똑바로 안 할래?’ 라고 말하고 있었다. 찔끔한 디안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저, 마리엔. 뭐라도 마실래?” “목 안 말라.” 고개를 팩 돌린 마리엔이 냉랭하게 말했다. 그녀는 아직 지드의 일로 화가 난 상태였다. 디안이 지드에게 금화 주머니를 준 사실을 안 뒤부터는 얼굴도 쳐다보지 않으려 했다. 디안이 머뭇머뭇 말했다. “저기, 그러면…….” “세영님, 저 너무 심심해요.” 그의 말을 무시한 마리엔이 세영의 팔을 잡으며 응석을 부렸다. 눈썹을 찡긋 들어 올린 세영이 “저런, 마리엔이 심심하면 안 되죠.” 하고 맞장구를 쳤다. 뭐든 해주겠다는 허락을 알아챈 마리엔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어제처럼 연주해주시면 안 될까요?” “안될 리가요. 누구 부탁인데.” 세영은 즉시 인벤에서 류트를 꺼냈다. 얼굴이 확 밝아진 마리엔이 두 손을 모아 쥔 채 그녀를 바라봤다. 가볍게 현을 고른 세영이 “듣고 싶은 것 있어요?” 하고 물었다. 고개를 저은 마리엔은 세영이 연주해주는 건 뭐든 좋다고 대답했다. 피식 웃은 세영이 아르카디아 BGM 중 하나인 <달빛 요정의 춤>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세영의 손끝을 따라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한숨이 나올 정도로 완벽한 연주였다. 모은 두 손으로 가슴을 누른 마리엔이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디안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세영을 바라봤다. ‘밀어준다면서요.’ ‘네가 병신인 걸 나보고 어쩌라고.’ 세영이 살짝 찡그린 눈으로 대답했다. 얼핏 보기엔 고뇌와 격정을 누르는 연주자처럼 보였다. 아름다운 멜로디에 이끌려온 사람들이 감탄사를 흘렸다. 충격이 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쿵 소리와 함께 배가 우르릉 흔들렸다. 의자에 앉아있던 일행은 무사했지만, 서 있던 사람들은 모두 나동그라지거나 난간에 부딪혔다. 사방에서 비명이 들리며 평화롭던 배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 샤르마흐 사막 (2) “갑판은 위험합니다! 모두 선실로 돌아가 주십시오!” 승무원들이 나타나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세영이 마리엔을 일으켰다. “리먼, 마리엔을 데리고 선실로 들어가요. 디안, 시디발라는 선미 쪽으로. 일단 상황부터 파악해야겠어요.” “저도 도울 수 있어요!” 당황한 마리엔이 세영을 붙잡았다. 싱긋 웃은 세영이 “그 옷으로는 무리예요.” 라고 말했다. 폭넓은 드레스 차림으로 넘어졌다간 바람에 휩쓸려 날아갈 수도 있었다. 물론 그것만이 문제는 아니었지만, 반박할 수 없는 이유이긴 했다. 입술을 꼭 깨문 마리엔이 몸을 돌렸다. “옷 갈아입고 올게요!” 달려가는 마리엔의 뒤를 리먼이 급히 쫓아갔다. 마리엔이 선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세영이 배의 선미로 향했다. 먼저 출발한 시디발라와 디안이 승무원들에게 붙잡혀 있었다. “여긴 위험합니다. 저희를 믿고 선실로 돌아가 주십시오.” “아니, 그러니까 대체 무슨 일이냐고!” 답답해서 발을 동동 구르던 시디발라가 꽥 소리를 질렀다. 어린 승객의 불안이라고 착각한 승무원들이 그를 달래기 위해 애썼다. 그들 사이에 불쑥 끼어든 세영이 화염구를 만들었다. 도미노처럼 우르르 물러선 승무원들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스킬을 취소한 세영이 상냥하게 웃었다. “부족하지만 마법을 쓸 줄 압니다. 여기 이 친구들도 한가락 하고요. 무슨 일인지 말씀해주시면 저희가 도울 수 있을 것 같군요.” “아, 그럼 이쪽으로 와주십시오. 가면서 상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상급 승무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세영을 안내했다. 그들이 달리기 시작했을 때 다시 충격이 가해지며 배가 크게 흔들렸다. 으악 소리를 지르며 나자빠지는 승무원을 세영이 재빨리 붙잡았다. 그녀는 다른 손으로 난간으로 굴러가는 시디발라를 낚아채고 넘어지는 디안을 어깨로 떠받쳤다. 남자를 휙 떠밀어 바로 세운 세영이 물었다. “뭐가 자꾸 꽝꽝거리는지 이제 말 좀 해보시죠.” “아, 모래상어입니다. 원래 얌전한 놈들인데 갑자기 떼로 몰려와서 부딪치고 있습니다.” “모래상어요?” 별 해괴한 게 다 있다는 표정을 지은 세영이 걸음을 빨리했다. 화들짝 놀란 승무원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 모래상어의 정체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계단을 오르던 세영은 거대한 가오리 같은 생물이 구름 위로 솟구치는 것을 보았다. 꼬리길이까지 합치면 5m는 족히 되어보였다. 배를 내밀고 춤추듯 우줄거리던 놈이 순식간에 낙하해 시야에서 사라졌다. “저게 어딜 봐서 상어야?” 새도 아닌 놈이 날아다니는 것도 이상했지만, 멀쩡한 배가 날아다니는 판국이니 따지기엔 늦어있었다. 괜히 판타지 세상이 아니라며 혀를 찬 세영이 걸음을 서둘렀다. “포문 개방했습니다!” “소리포 준비 완료했습니다!” 후미 쪽은 소리 지르고 뛰어다니는 사람들로 난리였다. 그런 혼란 속에서도 용케 일행을 발견한 선장이 소리쳤다. “누구야! 어떤 미친놈이 이럴 때 외부인을 들인 거냐!” “마법사시랍니다. 도움이 되고 싶다고 하셔서 모셔왔습니다.” 세영을 안내한 승무원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세영을 위아래로 훑어본 선장이 썩 미덥지 않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절차 생략하고 바로 묻겠소. 동력장치에 마나를 불어넣어 줄 수 있소?” “할 수는 있지만, 컨트롤이 아직 미숙해서 동력장치를 박살 낼 것 같은데요.” 세영은 솔직히 대답했다. 힘 조절을 연습하고는 있지만, 아직 섬세한 컨트롤까진 불가능했다. 평소대로 마나를 때려 넣었다간 동력장치가 맛이 갈 확률이 높았다. “동력장치를 박살 내? 전설의 대마법사라도 되나 보지?” 빈정거린 선장이 손을 내저었다. 어서 꺼지라는 뜻이었다. 세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공격 쪽으로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모래상어에겐 마법이 통하지 않아! 어디서 이런 멍청이가 나타나서 내 시간을 뺏는 거냐!” 울컥한 디안이 나서려는 순간, 세영이 가볍게 바닥을 내리찍었다. 단단한 바닥이 썩은 판자처럼 퍼석 깨져나갔다. 놀라 입을 다문 선장을 향해 세영이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마법만 쓴다고 한 적은 없는데요.” 일행은 배의 중앙으로 안내되었다. 이동하는 동안 안내역을 맡은 승무원이 모래상어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같은 말이 반복되는 것에 싫증이 난 세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항마력이 높아서 마법도 안 통하고 껍데기가 두꺼워서 물리 공격도 튕겨낸다는 말 아니에요.” “예, 간단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공격하자면 답이 없는 놈들이지만, 겁이 많아서 큰 소리를 내면 보통 도망갑니다. 그런데 이번엔 어쩐 일인지 소리포를 쏴도 도망가질 않아서…….” 말끝을 흐린 승무원의 얼굴이 어두침침해졌다. 모래상어는 덩치는 크지만, 대체로 무해한 놈들이었다. 호기심이 많아 비행선 주변을 기웃거리다가도 사람이 나타나면 쏜살같이 도망쳐버리곤 했다. 이번 일은 상식의 궤도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제가 부탁한 것들은요?” 하지만 이곳에 대한 상식이 없는 세영은 아무 느낌이 없었다. 원래 얌전하던 놈들이 맛이 가면 더 무서운 법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너무나 태연한 그녀를 보고 감탄하던 승무원이 급히 대답했다. “마법사님의 지시대로 준비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한 무더기의 포탄과 가죽부대, 갈고리 달린 밧줄이 준비되어 있었다. 밧줄의 길이를 확인한 세영이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떡였다. “디안, 도발과 윈드 블레이드를 써서 놈들을 한군데로 몰아줘요. 시디발라, 무리에서 벗어나려는 놈들을 섬광과 까마귀로 교란시켜. 그동안의 성과를 보여줄 기회니까 둘 다 힘내고.” 실패하면 다시 처음부터 훈련하겠다는 말에 두 사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여행을 준비하는 동안 세영은 1분 1초도 아까워하며 두 사람을 굴리고 또 굴렸다. 그나마 디안은 익숙한 훈련이라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소환술을 처음 배우는 시디발라는 잠꼬대로도 “까마귀 소환!”을 외칠 정도로 그녀에게 시달려야 했다. 그때로 돌아가느니 배에서 뛰어내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때마침 소리포 공격에 흩어졌던 모래상어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둘은 결사적인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는 난간 쪽으로 달려갔다. “윈드 블레이드!” 디안의 검에서 뻗어 나간 다섯 줄기의 바람이 놈들의 중앙을 갈랐다. 이어서 도발을 실은 고함이 터졌다. 윈드 블레이드로 디안을 인식한 모래상어들이 고함을 듣고 한 덩어리로 모였다. “흩어지면 안 돼! 까마귀 소환!” 시디발라에게 소환된 까마귀 모양의 그림자가 아래로 도망치려던 모래상어를 가로막았다. 도발 효과가 그리 길지 않아서 시디발라는 쉴 새 없이 섬광탄을 날리며 소환을 외쳐야 했다. 그 사이 세영은 생산 스킬을 써서 가죽 부대를 물매로 만들었다. 물매에 포탄을 끼워 넣은 그녀는 두 개의 줄을 잡고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 돌아가는 물매가 웅웅웅 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줄 하나를 놓음과 동시에 총알처럼 날아간 포탄이 모여 있는 모래상어들의 한가운데 적중했다. 투웅! 북이 터지는 소리가 나며 산산 조각난 모래상어들이 아래로 후두둑 떨어졌다. 끔찍한 광경에 시디발라가 우웩 소리를 냈다. “아싸, 스트라이크!” 이미 익숙해진 세영은 해맑게 기뻐했다. 기가 질려 그녀를 쳐다보던 디안은 다시 모으라는 손짓에 살아남은 모래상어에게 윈드 블레이드를 날렸다. 두 번째 포탄을 집어 드는 세영을 힐끔거린 그는 왠지 못할 짓을 하고 있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어, 어떻게 모래상어를. 그것도 손으로 포탄을 던져서….” 디안과 다른 이유로 경악한 승무원이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거의 동시에 두 번째 포탄이 모래상어들에게 발사되었다. 두 번의 공격에 반수로 줄어든 모래상어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극심한 혼란 탓인지 디안의 도발조차 먹히지 않았다. 정신없이 날아다니던 놈들이 순식간에 낙하해 모습을 감추었다. 깨끗해진 하늘을 본 세영이 손을 탁탁 털었다. “벌써 끝났나?” 말이 끝나자마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배가 흔들렸다. 이번에는 쿵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쿵쿵쿵 하고 연속적으로 진동이 왔다. 난간 너머로 떨어질 뻔한 동료들을 붙잡은 세영이 승무원을 돌아보았다. “지금 이놈들이 어디에서 치는 거예요?” “미, 밑입니다! 배의 아래쪽에서 공격하는 겁니다!” 새파랗게 질린 승무원이 외쳤다. 흔들림을 무시하고 난간 밖으로 머리를 내민 세영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배 위쪽에서는 아래를 공격하는 모래상어가 보이지 않았다. “쳇, 내려가야 하나.” 혀를 찬 세영이 밧줄의 끝을 기둥에 묶었다. 고소공포증이 없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난간 밖으로 갈고리를 떨어뜨리려는 순간이었다. 아까보다 가까워진 지상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어라, 고도가 낮아지는 것 같은데? 동력에 이상이 생긴 건가?”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일 겁니다. 계속 내버려뒀다간 배가 파손될 테니까요.” 엉금엉금 기어와 아래를 확인한 승무원이 추락하는 건 아니라고 확답해주었다. 세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위로 올라가는 게 낫지 않아요?” “모래상어는 비행선보다 높게 날 수 있습니다. 고도를 낮추면 모래 때문에 제대로 날지 못해서 공격 강도가 낮아질 겁니다.” 속도를 빠르게 해서 떼어내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마정석을 너무 많이 소비한다. 도중에 연료가 떨어져 버리면 비행선이 추락할 위험이 있었다. 승무원의 설명을 들으며 아래를 주시하던 세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좀 이상한데.” “네?” “아래로 끌어내리려고 일부러 이러는 것 같지 않아요? 유인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모래상어에게 그 정도의 지능은 없습니다.” 생긴 것처럼 멍청하다고 반박하는 승무원에게 세영은 콧방귀를 뀌었다. 이미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해봤자 어리석을 뿐이었다. “그럼 조종하는 놈이 있는 거겠죠. 선장님께 빨리 위로 올라가라고 전해요.” “예에?” “내가 책임진다고. 잘못하면 배가 나포될 수도 있다고 말하세요.” 어리둥절해 하던 승무원이 나포라는 말에 새파랗게 질렸다. 때마침 쿵쿵거리는 진동이 멎었다. 승무원이 서둘러 몸을 돌리는 순간, 세영은 모래를 가르며 솟구치는 거대한 풍선 같은 것을 발견했다. “…복어?” 생긴 것은 영락없이 몸을 잔뜩 부풀린 복어였다. 정확히는 온몸을 새하얀 털가죽으로 감싼 복어였다. 배의 1/3이 될 정도로 거대한 몸집을 가진 복어가 천천히 위로 떠올랐다. 선장에게 뛰어가던 승무원이 입을 떡 벌리며 외쳤다. “하늘고래다!” 가오리 닮은 놈을 상어라더니 복어를 보고는 고래라고 한다. 작명법도 판타지라고 생각한 세영이 한숨을 쉬었다. 난간 밖으로 몸을 내민 시디발라가 “우와! 짱 크다!” 하고 감탄했다. “피하십시오! 아니, 당장 엎드려요!” 그들의 태평함에 경악한 승무원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불길함을 느낀 세영이 시디발라와 디안의 목덜미를 잡고 뒤로 물러서는 순간이었다. 복어 아니, 하늘고래의 입에서 회오리처럼 회전하는 한줄기의 바람이 발사되었다. 물줄기처럼 뻗어 나간 바람은 그대로 <아스트리드>를 꿰뚫어버렸다. “으아아아악!” 부서질 것처럼 흔들리는 배에 시디발라가 비명을 질렀다. 세영은 제게 굴러떨어지는 포탄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균형을 잡기 위해 애썼다. 그녀의 양손에 붙잡혀 휘둘러지는 시디발라와 디안이 꺄악꺄악 소리를 질러댔다. 일행을 안전한 곳으로 던져놓은 세영이 옆으로 굴러가는 포탄을 집어 들었다. 물매가 다시 윙윙윙 하는 무서운 소리를 냈다. 전보다 더 강한 힘을 받은 포탄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포탄이 적중하는 순간 하늘고래의 하얀 털이 움푹 꺼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워낙 두꺼운 털에 공격이 막혀버린 것 같았다. “와 시발, 시몬스 침대 같은 새끼잖아!” 경악한 세영이 들고 있던 물매를 내던졌다. 푸우욱 하고 김빠지는 소리를 낸 하늘고래가 둥실둥실 배 쪽으로 다가왔다. 몸으로 들이박으려는 것 같았다. “이런 미친!” 구멍 뚫린 배에 저런 덩치가 부딪치면 두 쪽으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짧게 욕설을 내뱉은 세영이 근처에서 굴러다니는 갈고리를 집어 들었다. 기둥에 묶여있는 밧줄을 확인한 후 갈고리를 세차게 돌리기 시작했다. 세영은 슬금슬금 다가오는 하늘고래를 향해 갈고리를 날렸다. 화살처럼 날아간 갈고리가 하늘고래의 몸통에 박혔다. 팽팽하던 줄이 슬금슬금 늘어지는 것을 본 세영은 주저 없이 난간 밖으로 몸을 날렸다. “세영님!” “야!!!” 세영은 동료들의 비명을 들으며 밧줄을 밟고 달리기 시작했다. 묘기나 다름없는 움직임에 난간에 매달린 디안과 시디발라가 입을 뻐끔거렸다. 1분도 지나지 않아 하늘고래의 몸통 위에 내려앉은 세영이 있는 힘껏 주먹을 꽂았다. “차 빼라고! 십 원짜리야!” -끼에에에엥! 주먹이 꽂히는 순간, 푹신한 털이 짓눌리며 둥근 몸통에 물결 같은 출렁임이 일어났다.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른 하늘고래가 서글프게 울었다. 허공에서 비척비척 몸을 떨던 고래가 다음 순간 힘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멍청아! 돌아와!” “빨리 이쪽으로 오십시오!” 세영은 동료들의 외침을 들으며 팽팽히 당겨진 밧줄로 달려갔다. 휘청거리며 아래로 끌려 내려가는 배를 본 그녀는 갈고리를 잡아 뽑아 던져버렸다. 반동으로 배가 뒤로 물러나며 순식간에 거리가 벌어졌다. “안 돼!!!” 갑판을 가로지르며 달려온 마리엔이 비명을 지르며 손을 뻗었다. 난간 밖으로 뛰어내리려는 그녀를 디안과 시디발라가 붙잡는 것이 보였다. 세영은 무섭도록 빠르게 추락하는 것을 느끼며 쓰게 웃었다. ‘역시 좀 무모했나?’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거기까지였다. 바닥으로 추락한 고래가 거대한 모래 기둥을 만들었다. 고래의 등에서 튕겨 나간 세영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 샤르마흐 사막 (3) 눈을 뜨자 밤이 되어 있었다. 모래 속에 반쯤 파묻혀 있던 세영은 부스스 상체를 일으켰다.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보이는 거라곤 사막의 모래뿐이었다. 함께 추락한 하늘고래는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었다. ‘살아서 도망쳤나 보네.’ 보기보다 튼튼한 녀석이었다. 머리를 긁적이던 세영은 모래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새까만 하늘에 별이 가득 박혀있었다. 어찌나 많은지 당장에라도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내가 왜 그랬지?” 세영은 멍하게 중얼거렸다. 한 방 맞은 고래가 비틀거릴 때, 그녀는 처음으로 죽음을 떠올렸다. 여긴 게임이 아니라고. 떨어지면 끝이라고. 배가 추락해도 어쩔 수 없으니 밧줄을 타고 돌아가자고.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갈고리를 뽑아서 던지고 있었다. 어서 돌아오라고 소리치는 동료들을 보자 절로 손이 움직였던 것이다. “…미쳤나?” 세영은 딱히 정의로운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개인적인 성향이 강했고, 남 때문에 피해를 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나는 너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테니, 너도 나에게 폐를 끼치지 마라.’가 그녀의 모토였다. 동료들이 죽을까 봐 혼자 희생하는 것은 그녀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세뇌된 건가.’ 호구들과 함께 있으니 물들었다고 세영이 중얼거렸다. 순진하고 착하기만 한 그들 옆에 있다 보니 저도 모르게 남을 위해야 한다고 착각하게 된 것 같았다. “의지할 수 있는 동료라.” 어차피 퀘스트를 마치면 헤어질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착한 사람들이라곤 해도 결국은 남이었다. 그들을 위해 뭔가를 희생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은 받겠다고. 처음엔 분명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은데. -의지가 되고, 함께 있으면 즐겁고, 절대 배신당하지 않는다고 믿을 수 있는 게 동료라면, 여러분은 제 동료예요. 그렇게 말은 했지만, 온전히 진심은 아니었다. 그저 껄끄럽던 디안과 친하게 지내기 위해 그가 기뻐할 만한 말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이 진심으로 변했던 모양이었다. 적어도 추락하는 고래의 등에 남아있을 만큼은. “…바보네. 진짜.” 한탄하듯 중얼거린 세영이 눈을 감았다. 이번이 예외고, 이제 정신 차렸으니 앞으론 절대 목숨을 걸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한숨 자고 일어나 목적지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바람결에 누군가의 부름이 들리는 것 같았다. 처음엔 잘못 들었나 했지만, 계속 반복되자 절대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도 맵을 켜자 근처를 빙빙 맴돌고 있는 푸른색 점들이 보였다. “이 똥멍청이들이.” 살아있으면 어련히 알아서 목적지로 찾아가려고. 얌전히 배에 있으면 될 텐데 쪼르르 내려서 허둥지둥 찾으러 온 모양이었다. 지도맵도 없으면서 사막에서 조난당하면 어쩌려고 저렇게 헤매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한숨을 내쉰 세영이 두 손을 모아서 소리쳤다. “어이! 여기예요!” 두세 번 부르자 그제야 들린 모양이었다. 푸른색 점이 허둥지둥 이동하는 것을 보며 피식 웃은 세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락할 때 내팽개쳐진 탓인지 팔다리가 약간 뻐근했다. 그래도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잠자리가 바뀌어서 계속 잠을 설친 탓에 그대로 곯아떨어진 것 같았다. 팔을 휙휙 돌리는 동안 모래 언덕 저편에서 동료들이 나타났다. “세영님!” “으아아앙! 세영님 바보!!!” “멍청아! 죽은 줄 알았잖아!” “살아계셔서 다행입니다!” 세영을 보자마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동료들이 모래언덕을 달려 내려왔다. 얼마나 헤매고 다녔는지 너나 할 것 없이 꼬질꼬질한 모습이었다. 습관처럼 한숨을 쉰 세영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느새 그녀의 입가엔 흐릿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세영은 새끼오리처럼 꽥꽥거리는 동료들을 위해 텐트를 쳤다. 클렌징 스킬로 씻기고, 음식을 먹이고, 자리를 깔아주자 다들 금방 곯아떨어졌다. 사막을 헤매고 다니느라 피곤했던 모양이다. 불안해하며 옆을 떠나지 못하던 마리엔은 세영의 손을 꼭 쥐고 잠들었다. “그러게 왜 사서 고생이람.” 혀를 찬 세영이 잠든 동료들을 바라봤다. 세영이 추락한 후 동료들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배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선장은 배가 또다시 공격받을지 모른다며 그들의 요청을 묵살했다. 화가 난 마리엔이 선장에게 덤벼들었고, 험악해진 분위기에서 디안이 자신들이라도 내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렇게 사막 한가운데 내린 동료들은 지금까지 세영을 찾기 위해 무작정 헤매고 다닌 것이다. 사실 그들이 세영을 만난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만약 길을 잃고 같은 자리를 빙빙 맴돌지 않았다면 모래 속에 파묻힌 세영을 그대로 지나쳐버렸을 터였다. ‘그럼 어딘지도 모를 사막 구석에서 말라죽었겠지.’ 세영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동료들의 행태에 화가 났다. 다음부터는 알아서 잘 찾아갈 테니 목적지에 있으라고 타일렀다. 그러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영을 쳐다보던 마리엔이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며 바닥을 굴러다녔다. 놀란 세영은 그녀를 달래기 위해 쩔쩔맸다. 결국, 다시는 위험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후에야 마리엔은 울음을 그쳤다. ‘걱정했구나.’ 핼쑥해진 마리엔의 얼굴을 내려다본 세영이 중얼거렸다.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목숨을 걸고 사막을 헤매고 다닐 정도로 자신을 걱정했다. 부모 형제도 아닌 남이면서. ‘진짜 바보들이라니까.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들을 살리기 위해 서커스를 했던 자신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무모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까놓고 말해 세영은 하늘에서 추락해도 살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동료들은 이제 고작 렙이 오르기 시작한 초보들이었다. 세영은 이제 막 깃털이 돋기 시작한 병아리를 돌보는 어미 닭의 심정이 되었다. ‘나라도 정신 바짝 차려야지.’ 세영은 그날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앞으로의 일들과 제가 돌아간 뒤의 문제에 대해 수없이 생각하면서. ‘호구들이니까 일정 금액만 주고 연금을 넣어야겠어. 부동산 좀 사서 묶어놓고 여기저기 분산시켜서 다달이 돈을 찾아 쓰게 해야지. 아니면 사기꾼이나 이웃 사촌 만나서 다 털린다. 특히 디안이라면 100% 털리겠지.’ 사기 친 놈에게 덥석 돈주머니를 준 디안이 제일 병신 같았지만, 나머지도 썩 나은 건 아니었다. 리먼의 경우에는 책 몇 권을 사고 근처의 신전에 몽땅 기부해버렸다. 모자를 사러 나간 마리엔은 뜬금없이 노예 엘프들을 사서 제 스승님에게로 보냈다. 그나마 시디발라가 제일 나은 편이었는데, 열두 명의 동생들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돈을 부쳤다. 제 몫으로는 동전 몇 푼을 남긴 것이 전부였다. 세영은 그들에게 돈 관리를 맡기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뭐, 그런 호구들이니까 나를 동료로 받아줬겠지만.’ 갑자기 나타나 기묘한 말을 떠드는 낯선 여자라니. 자신이라면 상대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피식 웃은 세영이 세운 무릎에 턱을 괴었다. 도롱도롱 코 고는 소리가 텐트를 울리고 있었다. * 사막의 열기는 굉장했다. 해가 높이 떠오를수록 공기까지 이글거리며 불타올랐다. 습기 하나 없는 건조한 공기가 피부를 따끔거리게 했다. 지옥이 있다면 이런 풍경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찜질방 불가마에 들어온 것 같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만 없다면 영락없는 불가마였다. 세영은 뜨거운 모래를 바라보며 여기 달걀을 올려두면 익을까 안 익을까 따위의 태평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태평한 것은 그녀뿐이었고 다른 일행들은 열기에 허덕이며 죽어가고 있었다. ‘이 속도라면 앞으로 좀 힘들겠는데.’ 그들은 새벽쯤 텐트를 접고 길을 나섰다. 사막의 항구인 조르디아를 향해서였다. 비행선을 타고도 사흘이 걸리는 곳이니, 걸어서 가면 얼마나 걸릴지 몰랐다. 지금처럼 느릿느릿 나아간다면 몇 달은 걸릴 것 같았다. ‘그래도 버리고 갈 수는 없으니까.’ 혼자 간다면 지금의 몇 배로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느릿느릿한 동료들이 짜증스럽지는 않았다. 다 죽어가면서도 좀비처럼 비척비척 걷는 모습이 기특하기까지 했다. “우린 원래 사막으로 가려고 했잖아요. 여기도 사막인데 조르디아까지 가야 해요?” “여긴 샤르마흐 사막입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카라둔 사막이죠. 조르디아에서도 북서쪽으로 한참을 가야 할 겁니다.” 비틀거리던 리먼이 착실히 대답했다. 더위 탓인지 로브에 달린 동그란 너구리 귀가 아래로 축 처져 있었다. 꼬리도 마찬가지였다. ‘의외로 잘 어울리네.’ 쫓겨나듯 배에서 내린 탓에 일행은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다. 사막의 열기를 대비한 장비들이 화물칸에 실려 있었지만, 그걸 챙겨올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세영은 급한 대로 드레스 룸에 있는 동물귀 로브를 나눠주었다. 남녀공용 로브가 달리 없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디안은 토끼, 마리엔은 고양이, 리먼은 너구리, 시디발라는 강아지 로브를 걸치게 되었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디안의 머리 위에서 토끼 귀가 까딱이는 모습은 꽤 희극적이었다. 그때 디안의 뒤에서 비틀비틀 걸어가던 마리엔이 풀썩 쓰러졌다. 놀란 세영이 쓰러진 마리엔을 안아 올렸다. 창백한 얼굴이 식은땀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급히 달려와 마리엔을 살핀 리먼이 텐트를 쳐달라고 부탁했다. “일사병 증세인 것 같습니다. 그늘에서 쉬면 회복될 겁니다.” 엘프는 원래 체력이 썩 좋지 않았다. 물과 나무가 없으면 시든 풀떼기처럼 늘어지는 종족이었다. 하프엘프인 마리엔은 그나마 순수한 엘프보다는 나았지만, 이틀 연속으로 사막을 가로지를 정도는 아니었다. 텐트를 친 세영이 마리엔을 눕혔다. 로브와 겉옷을 벗겨 옷차림을 가볍게 하고 회복의 포션도 하나 먹였다. 포션이 효과가 있었는지 마리엔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렸다. “좀 괜찮아요?” “제가 어떻게……. 앗! 죄송해요!” 벌떡 일어난 마리엔이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세영은 이제 괜찮다고, 걸을 수 있다고 말하는 그녀를 억지로 눌러 눕혔다. “어차피 쉬어갈 생각이었으니 잠깐 누워있어요. 준비할 게 있거든요.” “…정말 죄송해요.” “이건 죄송할 문제가 아니잖아요. 아무도 마리엔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마음 편하게 먹고 쉬고 있어요.” 눈물을 글썽이는 마리엔을 다독인 세영이 텐트 밖으로 나왔다. 걱정스러운 얼굴의 디안이 텐트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 텐트의 그늘에 주저앉은 시디발라와 그 옆에 선 리먼도 제법 지쳐 보였다. ‘체력 분배를 잘못했어. 적당히 쉬면서 끌고 갔어야 했는데.’ 자신이 괜찮다 보니 초보의 체력을 배려하지 못했다. 끄응 소리를 내며 머리를 긁적인 세영이 인벤에서 물과 음식을 꺼내 디안에게 떠맡겼다. 엉겁결에 그걸 받아든 디안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물었다. “마리엔은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금방 깨어났고 좀 쉬면 회복될 거예요. 일단 그거라도 먹으면서 쉬고 있어요.” “어디 가?” 발딱 몸을 일으킨 시디발라가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 일일이 설명하기 귀찮았던 세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금방 갔다 올 테니까 쉬고 있어.” 하고 말했다. 맵을 열고 근처의 바위산으로 향하는 그녀를 시디발라가 졸래졸래 따라왔다. “쉬고 있으라니까?” “싫어. 같이 갈래.” 형편없는 몰골을 한 주제에 고집을 부리는 시디발라였다. 짜증이 난 세영이 지긋이 노려보자 꼬리를 축 늘어뜨린 시디발라가 웅얼거렸다. “귀찮다고 우리 버리고 가면 어떡해.” “진짜 도망갈 거라면 마리엔을 업고 가겠지.” “……!” 농담이었는데 충격받은 반응이 돌아왔다. 피식 웃은 세영이 그의 머리를 툭 쳤다. “멍청아. 굶어 죽을 거 뻔히 알면서 여기 버려두고 가겠냐. 내가 사이코패스인 줄 알아?” “아야, 사이코패스가 뭐야?” “그런 게 있어.” 시디발라는 끝내 포기하지 않고 세영을 따라왔다. 한숨을 쉰 세영이 그를 덜렁 들어 옆구리에 꼈다. 잠시 바동거리던 시디발라가 몸을 축 늘어뜨렸다. 이런 상태로 쫓아올 만큼 나름대로 절박했던 모양이다. 세영은 질주 스킬을 써서 모래 위를 미끄러지듯이 달렸다. 모래 위에는 새발자국 같은 약간의 흔적만 남았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목표였던 바위산에 도착한 그녀가 시디발라를 내려놓았다. 황량한 바위산을 둘러본 시디발라가 실망한 얼굴로 물었다. “여기 뭐가 있어?” “선인장.” 세영은 말라죽은 선인장으로 다가가 단검으로 채취했다. 의아해하는 시디발라 앞에서 그녀는 선인장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속을 파냈다. 멀뚱멀뚱 구경하던 시디발라가 그녀를 도와 다른 선인장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선인장 손질을 마친 세영이 인벤에서 물의 결정석을 꺼냈다. 투명한 보석 같은 모습에 시디발라가 예쁘다며 감탄했다.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결정석을 움켜쥐고 우둑우둑 부쉈다. 시디발라의 안색이 급격히 흐려졌다. 세영은 대충 으깨서 덩어리진 결정석을 한쪽 끝을 막은 선인장에 쏟아 부었다. 적당히 속이 찬 후에 다른 쪽 끝을 막자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구름의 레인스틱] 도구속성 -타악기 장인의 손길로 다듬어진 악기다. 흔들면 빗소리가 날 것 같다. 가루가 남은 손을 탁탁 턴 세영이 완성한 레인스틱을 시디발라에게 던졌다. 엉겁결에 그걸 잡아챈 시디발라가 ‘이걸 어쩌라고?’ 하고 묻는 표정을 지었다. 세영은 간단한 손짓으로 연주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이렇게 한쪽으로 천천히 기울여봐.” 의아한 표정의 시디발라가 레인스틱을 기울였다. 쏴아아 하고 시원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퍼붓는 빗소리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 고개를 끄떡인 세영이 “계속 연주해.” 라고 말하며 다른 선인장을 집어 들었다. “재미있기는 한데, 이건 갑자기 왜 만든 거야?” 레인스틱을 이리저리 기울이던 시디발라가 물었다. 그의 얼굴에 뚝 떨어진 물방울이 대신 대답했다. 놀라 고개를 들자 손바닥만 한 구름이 그의 머리 위에서 비를 뿌리고 있었다. “어어! 구름이 생겼어!” “다 만들었으니 이제 돌아가자.” 세 번째 레인스틱을 완성한 세영이 미련 없이 일어났다. 그녀는 열성적으로 레인스틱을 흔드는 시디발라를 달랑 들어 텐트로 돌아갔다. 손바닥만 한 비구름이 그들의 뒤를 졸졸 쫓았다. ──────────────────────────────────── 샤르마흐 사막 (4) 일행은 비구름과 함께 다시 출발했다. 동시에 세 개의 레인스틱을 연주하자 손바닥만 하던 구름이 집채만 한 크기로 불어났다. 구름은 일행의 머리 위에서 비를 뿌리며 강렬한 햇빛을 막아주었다. 빛과 열기가 가시자 걷기가 훨씬 수월했다. “정말 신기해요. 사막에서 비가 오는 걸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손바닥을 펼쳐 내리는 비를 받은 마리엔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절반이 물의 엘프라서인지 비를 보자 한층 더 생생해진 모습이었다. 그녀의 옆에서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음을 옮기던 세영이 고개를 끄떡였다.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네요.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힘들면 바로 이야기해요.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니까.” “이제 괜찮은데…….” 말은 그렇게 해도 걱정해주는 게 좋은지 방긋 웃는 마리엔이었다. 그때 레인스틱을 흔들며 앞서가던 디안이 달려왔다. “세영님, 저쪽을 좀 보셔야겠습니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돌아본 세영이 눈을 가늘게 했다. 거대한 물체가 모래 속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그 끝에 조각된 아름다운 여성의 상반신이 눈에 익었다. “아스트리드?” 추락한 세영을 버리고 떠났던 비행선이었다. 뱃머리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을 보면 두 동강이 났거나, 선미가 모래 속에 파묻혀버린 것 같았다. 디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저희가 떠난 후에 추락한 것 같습니다. 생존자가 있는지 수색해볼까요?” 세영은 맵을 열어 배 내부가 표시되는지 확인했다. 볼 수 없는 상태로 표시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배 안으로 진입해야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안전한지 확인해보고 올게요. 여기서 마리엔을 지켜요.” “저, 저도 싸울 수 있어요!” 마리엔이 손에 든 완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다른 사람과 달리 자꾸 보호받는 게 싫은 눈치였다. 그게 귀여워서 피식 웃은 세영이 손을 내저었다. “배를 추락시킨 놈들이 안에 남아있을 수도 있어요. 안전하면 신호를 줄 테니까 서로 떨어지지 말고 주변을 경계해요. 시디발라, 리먼. 이쪽으로 와요!” 일행을 불러 모은 세영은 시디발라에게 폭죽을 건네주었다. “수상한 놈들이 보이면 신호를 보내.” “있잖아, 배에 값나가는 거 있으면 우리가 챙겨도 될까?” 시디발라가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물었다. 콧방귀를 뀐 세영이 그의 이마에 꿀밤을 놓았다. “여기서도 현상수배범 되고 싶어?” “칫, 우리가 구조해주면 보답으로 뭔가 챙겨주지 않을까?” “공짜 좋아하면 대머리 된다.” 화들짝 놀란 시디발라가 머리를 감싸며 “저 말 진짜야?” 하고 리먼에게 물었다. 그 사이 세영은 질주 스킬을 써서 비행선으로 접근했다. 떨어진 자리가 안 좋았는지 아스트리드는 천천히 모래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며칠만 지나면 완전히 파묻혀버릴 것 같았다. 입구로 들어가려면 모래를 파내야 할 상황이라 세영은 과감하게 갑판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 맵이 사막에서 비행선 내부로 바뀌었다. “흠? 요것 봐라?” 예상과 전혀 다른 상황에 세영이 입꼬리를 쓱 말아 올렸다. 비행선의 내부는 텅 비어있었다. 살아있는 사람은커녕 시체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때 펑하고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세영은 지체 없이 갑판의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낯선 무리와 대치하고 있는 동료들이 보였다. “어라, 저건 또 뭐야?” 세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동료들과 승강이를 벌이는 건 두발로 서 있는 도마뱀들이었다. 머리는 악어 같았고 몸에는 카멜레온 같은 무늬가 있었다. 어깨가 좁고 팔이 지나치게 길어 불안정해 보였지만, 길고 두꺼운 꼬리가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하는 듯했다. ‘몬스터도 아니네.’ 지도에 나타난 초록색 점을 확인한 세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예상과 달리 도마뱀과 동료들은 살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서로에게 뭐라고 떠들면서 옥신각신 다투고 있었다. 그들을 떠밀던 시디발라가 모래를 잘못 밟고 미끄러지자 얼른 잡아주기까지 했다. “무슨 일이에요?” 그들의 옆에 가볍게 내려앉은 세영이 물었다. 모래 위를 평지처럼 달리는 그녀를 보고 입을 떡 벌리고 있던 도마뱀이 외쳤다. “마, 마귀다!” “뒈질래?” 험악한 세영의 얼굴에 도마뱀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것에 반색한 디안이 물었다. “혹시 저들의 말을 알아들으십니까?” “흠? 아, 쟤들이랑 말이 안 통해요?” “네. 뭐라고 화를 내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서….” 몬스터st인 놈들이 다가와 다짜고짜 화를 내는데 얌전히 몸싸움이나 하고 있었단 소리다. 짜증스런 세영의 얼굴을 본 디안이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다. 그때 개처럼 헥헥거리는 소리를 내던 도마뱀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이, 인간. 너희 저 배에 탔나?” “보면 몰라? 생존자 있는지 확인하고 돌아온 거 안 보여?” 세영이 신경질을 내자 도마뱀이 당황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탔다는 건지 안 탔다는 건지 헷갈리는 눈치였다. 눈을 굴리던 놈이 동료 도마뱀들과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대장 배에 탄 인간 데려오라 했다. 안 탄 인간 데려오라 안 했다.” “인간 데려가야 한다. 대장 화낸다.” “배에 탄 인간 나쁘다. 지나가는 인간 안 나쁘다.” “인간 다 나쁘다. 우리 속였다.” 세영은 팔짱을 낀 채로 놈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가만 보니 배를 추락시키고 사람들을 끌고 간 건 이놈들인 것 같았다. 옥신각신 다투는 놈들을 빤히 쳐다보던 세영이 입을 열었다. “야. 너희 대장에게 안내해.” 당황했는지 눈만 끔뻑거리는 도마뱀들에게 세영이 버럭 화를 냈다. “교육을 어떻게 했기에 얌전히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어. 이것들 순 양아치 아니야. 대장인지 너네 애비인지 얼굴 보고 따져야겠다. 어서 안내해!” “아, 아니다. 우리 안 했다.” “안 하긴 뭘 안 해. 너희가 내 동료한테 시비 걸고 밀쳤잖아! 여기서 굴러떨어졌으면 어쩔 뻔했어! 엉? 보상 어떻게 할 거야!” “아, 안 밀쳤다. 우리 안 했다.” 도마뱀들이 쩔쩔매며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말투가 어째 어눌하다 했는데 덩치도 작고 주둥이도 덜 여문 것을 봐서 아직 어린놈들인 것 같았다. 세영은 가차 없이 그들을 윽박지르며 어서 앞장서라고 다그쳤다.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는 동료들이 그녀를 말렸다. “세, 세영님. 왜 이러십니까.” “그냥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화 푸세요. 네?” 동료들까지 나서서 허둥거리자 도마뱀들은 뭔가 큰일이 났다고 생각한 듯했다. 기가 팍 죽은 놈들이 터덜터덜 앞장을 섰다. 세영은 입을 꾹 다문 채 놈들을 따라갔다. 잠시 수군거리던 동료들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뒤를 쫓았다. 가만히 내버려뒀더니 동료들과 도마뱀들은 10분도 지나지 않아 친해졌다. 도마뱀들은 비구름을 신기해하며 이것저것 물었고, 동료들은 또 그걸 알아듣고 손짓 발짓까지 해가며 설명했다. 말도 안 통하는데 어쩜 그렇게 잘도 노는 지 신기할 정도였다. “빨리 안 가냐? 발이 논다?” 세영의 으르렁거림에 레인스틱을 흔들며 놀던 도마뱀들이 움찔했다. 시무룩해진 그들에게 마리엔이 손짓 발짓으로 세영이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고 설명해 주려 애썼다. 그것이 위로라는 것을 알아챈 도마뱀들이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배에 탄 인간 나쁘다. 너희 착하다.” “배에 탄 인간이 왜 나쁜데?” 세영의 물음에 도마뱀들이 처음으로 사나운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딱딱 소리 나게 입을 열었다가 닫으며 헥헥거렸다. “나쁜 인간. 우리 알 가져갔다.” “알 전부 훔쳐갔다. 나쁘다.” “우리 속였다. 복수한다.” “배에 알 있었다. 도둑 모두 죽인다.” 입을 모아 떠드는 놈들을 보며 세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리먼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무슨 일인지 물었다. 세영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인간에게 알을 몽땅 도둑맞았는데, 비행선에 쟤네들의 알이 있었대요. 배에 타고 있던 놈들이 도둑이라면서 복수할 거라고 하네요.” “어머, 어떡해.” 마리엔이 놀란 표정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는 진심으로 알을 도둑맞은 도마뱀들을 동정하고 있었다. 이어서 리먼이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밀수업자가 아스트리드에 타고 있었나 봅니다. 나샴은 힘세고 인내심이 강해서 노예로 인기가 높죠. 나샴의 알이라면 무척 비싸게 팔릴 겁니다. 귀족이나 왕족이 주문한 것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대부분의 승객은 그런 사실을 몰랐을 겁니다. 무고한 피해자예요.” 심각한 얼굴로 변한 디안이 말했다. 세영은 저 도마뱀들을 <나샴>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 그녀는 나샴을 산적 비슷한 놈들이라 생각했고 본거지로 쳐들어가 모조리 족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들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고, 승객들은 운 없이 몰매를 맞은 것 같았다. ‘귀찮게 됐네.’ 세영은 슬슬 발을 뺄까 생각 중이었다. 누가 옳다 그르다 따지기도 귀찮았고, 거기에 책임지기도 싫었다. 하지만 동료들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나샴들을 설득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풀어줘야 한다고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니, 걔들 눈엔 똑같은 인간들일 텐데. 무슨 수로 설득하려고요?” “사정을 설명하면 분명 이해해줄 겁니다. 나샴들도 알을 훔친 도둑에게 복수하려는 거지,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는 건 아니니까요.” 디안이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세영은 “아이고야.” 하고 한탄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야말로 꽃밭 같은 생각이었지만, 뭐라고 반박하기도 귀찮았다. 그녀는 대신 나샴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배에 알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냐? 혹시 지나가는 배는 몽땅 잡아서 까본 거냐?” 만약 그런 거라면 사정이 있든 없든 쳐 죽이면 그만이었다. 착해빠진 동료들도 죄 없는 사람들을 몰살시킨 놈들을 봐주자고 하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나샴들은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 온다고 가르쳐줬다.” “배에 알 있다고 했다. 우리 기다렸다.” “알 조금 있었다. 다 못 찾았다.” “누가 가르쳐줬는데?” 의아해진 세영이 묻자 나불대던 나샴들이 입을 딱 다물었다. 고개를 붕붕 흔드는 것이 말할 수 없다는 것 같았다. 눈을 부라린 세영이 “이것들을 그냥 확!” 하고 위협하는 소리를 냈다. 주춤 뒤로 물러선 나샴들이 겁에 질린 목소리를 냈다. “으, 은인이다. 약속했다.” “말하면 안 된다. 우리 착하다.” “약속 지켜야 한다. 말 못한다.” “말하면 슬퍼한다. 우리 안 한다.” 머리를 긁적인 세영이 “은인은 인간이야?” 하고 물었다. 나샴들은 일제히 머리를 붕붕 흔들었다. 말을 안 한다더니, 진짜 말만 안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세영은 질문을 계속 던져서 <은인>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냈다. “그러니까 인간도 아니고 나샴도 아닌 작자가 갑자기 나타나서 너희 알을 찾아주겠다고 약속하고 훌쩍 떠나더니, 오늘 배가 오는데 거기에 알이 있다고 말한 거네?” “헉! 어떻게 알았냐.” “인간 똑똑하다. 다 안다.” 나샴들은 기절할 것처럼 놀랐다. 한숨을 삼킨 세영이 “됐으니까 빨리 앞장이나 서라.” 하고 손을 내저었다. 감탄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 나샴들이 아까보다 좀 더 빠르게 걸었다. 세영은 동료들에게 간단히 사정을 설명했다. <은인>에 대한 말을 전해 들은 시디발라가 코를 킁킁거렸다. “뭔가 좀 구린 냄새가 나지 않아? 딱 들어도 엄청 수상한 느낌이잖아.” “바보들이라 이용하기도 딱 좋았겠지.” 세영은 ‘너희들도 오십보백보다.’ 라는 뜻을 담아 동료들을 바라봤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동료들은 그저 안타까운 표정만 지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꾸민 것일까요?” “누구겠어. 악당이지. 바보라서 악당에게 이용당하는 거야.” 동료들은 이제 <은인>에게 이용당하는 나샴도 돕고 싶은 눈치였다. 점점 귀찮아지는 상황에 세영은 입맛을 다셨다. “일단 대장이라는 놈을 만나서 자세한 상황을 들어보죠.” 모른 척 지나가긴 틀렸으니 적당한 선에서 발을 뺄 생각이었다. 그것을 달리 해석한 동료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나샴들은 점점 더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을 쫓아가던 마리엔이 힘이 들어서 휘청거릴 정도였다. 창백해진 마리엔을 힐끗 본 세영이 “좀 천천히 걸어.” 하고 소리쳤다. 하지만 나샴들은 멈추지 않았다. “빨리 간다. 해 진다.” “밤 춥다. 못 움직인다.” “은신처 간다. 우리 숨는다.” 딱 보기에도 도마뱀처럼 생겼다 싶더니만, 추워지면 못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은신처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북동쪽을 가리켰다. 딱 봐도 사막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세영은 눈을 부라리며 그들을 노려봤다. “거짓말이면 죽는다? 너희뿐만 아니라 너희 동료들까지 잡아 죽일 거야.” “거, 거짓말 아니다. 은신처 있다.” “형제들 기다린다. 우리 간다.” 일행은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질 때까지 조금도 쉬지 못하고 걸었다. 완전히 지쳐버린 마리엔은 도중에 디안의 등에 업혔다. 원래는 세영이 업으려고 했지만, 마리엔이 한사코 사양하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은신처 보인다.” “우리 왔다. 이제 쉰다.” 멀리 있는 바위산을 가리킨 나샴들이 신이 나서 소리쳤다. 세영은 눈을 가늘게 하고 바위산을 바라봤다. 죽순처럼 삐죽삐죽 솟아오른 바위들이 하나로 모여 커다란 산을 이루었다. 자세히 보니 바위 중간마다 동굴과 같은 구멍들이 뽕뽕 뚫려있었다. ‘동굴에 사는 건가?’ 나샴들은 세영의 눈치를 살폈다. 마음 같아선 은신처까지 달려가고 싶은데 세영에게 혼날까 봐 무서운 것 같았다. 개중 용기 있는 녀석이 리먼의 팔을 덥석 붙잡고 끌어당겼다. “빨리 간다. 해 진다.” “엇, 잠깐! 기다려주십시오!” 허둥거리던 리먼이 나샴과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반색한 다른 나샴이 시디발라의 목덜미를 덥석 움켜쥐고 그의 뒤를 따랐다. 허공에 반쯤 떠서 끌려가는 시디발라가 비명을 질렀다. “으악! 이게 뭐하는 짓이야!” 그 꼴을 보고 화들짝 놀란 디안이 재빨리 세영의 뒤로 숨었다. 디안을 낚아채려다 실패한 나샴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빨리 가고 싶다.” “그냥 제 발로 걷겠습니다.” 세영의 뒤에 숨은 디안이 비장한 얼굴로 소리쳤다. 남을 방패막이로 해서 그런 말을 해봤자 웃길 뿐이었다. 때 아닌 희극에 세영이 긴 한숨을 쉬었다. 바로 그때였다. “으아아악!” 쿠르르릉 땅이 울리더니 갑자기 모래가 푹 꺼졌다. 앞서 달려가던 나샴과 리먼이 모래 구덩이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그것을 보고 비명을 지른 다른 나샴들이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 샤르마흐 사막 (5) “마, 마귀다!” “죽는다! 도망친다!” 세영과 디안은 그들을 지나쳐 구덩이로 달렸다. 나샴에게 붙잡혀 반대쪽으로 끌려가는 시디발라가 구슬픈 비명을 질렀다. “난 놔두고 가라고!” 그 사이 세영이 먼저 구덩이의 가장자리에 도착했다. 모래가 깔때기 모양으로 움푹 패 있었다. 얼핏 봐도 3층 높이 정도는 되어 보였다. 리먼은 깔때기의 중간쯤에 허리까지 푹 파묻힌 채였다. 모래가 무너질 때 같이 쓸려간 모양이었다. 반면 나샴은 깔때기의 한가운데에서 버둥거리는 중이었다. 구덩이를 기어오르려 애를 썼지만, 모래가 계속 무너지면서 실패했다. 가만히 있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데 필사적으로 펄쩍거리고 있었다. “꺼내줄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세영은 밧줄로 쓸 것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그때였다. 모래 속에서 거대한 입이 솟구치며 버둥거리는 나샴을 한입에 삼켜버렸다. “신성한 철퇴!”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른 리먼이 놈에게 공격 스킬을 퍼부었다. 그것이 놈의 주의를 끈 것 같았다. 리먼 쪽으로 향하는 놈을 본 세영이 주저 없이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때 세영이 다가오는 것을 눈치챈 놈이 갑자기 몸을 돌려 모래 속으로 파고들었다. “먹튀냐!” 세영은 있는 힘껏 모래를 걷어찼다. 모래가 튀어 오르면서 순간적으로 놈의 꼬리가 드러났다. 얼핏 보기엔 물고기의 꼬리 같았다. 세영은 무를 잡아 뽑듯 놈의 꼬리를 움켜쥐고 당겼다. 잠깐 꿈틀거리던 놈이 결국 힘없이 끌려오기 시작했다. “으쌰!” 세영은 원심력을 이용해 놈을 구덩이 바깥쪽으로 던졌다. 거대한 물고기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올랐다. 어두운 자주색의 몸통에 거대한 입, 푸른색의 지느러미를 가진 아귀였다. 헤엄치듯 지느러미를 허우적거리던 놈이 배를 위로 한 채 거꾸로 떨어졌다. 그 사이 리먼의 허리를 휘감은 세영이 모래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녀는 배를 드러낸 채 누워있는 아귀를 발 디딤대로 써서 구덩이 위까지 올라왔다. 리먼을 적당한 곳에 내려놓은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렸다. 조심스럽게 구덩이로 내려간 후에 뒤집힌 채로 버둥거리는 아귀의 촉수를 움켜쥐었다. 아귀를 구덩이 밖으로 집어 던지자 근처에서 지켜보던 나샴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모래마귀다!” “무섭다! 죽는다!” “이 시벨놈들이! 빨리 와서 꼬리나 내밀어!” 참다못한 세영이 버럭 고함을 지르자 도망가던 나샴들이 다시 돌아왔다. 그들은 동료들과 손을 잡고 인간 밧줄을 만들었다. 구덩이 바깥으로 나온 세영이 나샴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퍼억 하고 박 터지는 소리가 났다. “으악! 엉덩이 터진다!” “이것들이 동료를 버리고 도망을 가? 단체로 뒈져볼래?” “무섭다. 잘못했다.” “안 그런다. 잘못했다.” 나샴들이 쩔쩔매며 잘못했다고 빌었다. 나중에 두고 보자고 으르렁거린 세영이 디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미안한데 검 좀 빌려줘요.” “네? 아, 네. 여기.” 아귀를 멍하게 쳐다보던 디안이 검대 채로 검을 끌러 내밀었다. 검을 뽑아든 세영은 옆으로 누워있는 아귀의 대가리 쪽을 향해 가볍게 휘둘렀다. 잠시 후 아귀의 머리통이 쩍 벌어지며 몸통에서 떨어져 나갔다. 꿈틀거리던 아귀는 바위처럼 잠잠해졌다. “아귀찜으로도 못 만들게 생겼네.” 혀를 찬 세영이 아귀의 몸통 쪽으로 다가갔다. 아귀라면 여러 번 손질해서 어디를 어떻게 갈라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검이 빠르게 휘둘러졌다. 잠시 후 아귀의 배가 스르륵 갈라지며 끈적이는 액체로 범벅된 나샴이 주르륵 미끄러져 나왔다. “으아악!” 동료들과 나샴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황당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본 세영이 나샴의 팔을 움켜쥐고 옆으로 끌어냈다. 끈적이는 액체에 닿은 소매가 치이익 타들어 가는 소리를 냈다. 놀라울 정도로 강한 산성액이었다. “에이 씨, 옷 버렸네. 이번에 산 신상인데.” “세, 세영님. 손… 괜찮으세요?” 마리엔이 겁에 질린 얼굴로 물었다. 세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멀쩡한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죽은 듯 늘어져 있는 나샴에게 클렌징 스킬을 썼다. 산성액이 씻겨나가며 몸의 군데군데가 녹아내린 처참한 몰골이 드러났다. “울룰루. 죽었다?” “울룰루. 불쌍하다.” “슬프다. 죽었다.” 하얗게 탈색되어 있던 나샴들이 갑자기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시끄럽다고 눈을 부라린 세영이 울룰루라고 불린 나샴을 걷어찼다. 죽은 건 아니었는지 몸을 꿈틀거린 나샴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뾰족한 주둥이 끝은 물론 한쪽 눈과 손가락 몇 개도 사라진 끔찍한 모습이었다. “나 참. 살다 살다 도마뱀 새끼에게 캐쉬템을 다 써보네.” 혀를 찬 세영이 <하이퍼 붕붕 리큐르>를 꺼냈다. 웬만하면 회복 포션으로 해결을 보려고 했지만, 손가락과 눈까지 날아갔으니 답이 없었다. 그는 울룰루의 뾰족한 주둥이를 벌리고 목구멍에 병을 쑤셔 넣었다. 펄쩍 뛰어오른 울룰루가 병을 뱉어낼 기세로 캑캑거렸다. 세영이 그의 주둥이를 움켜쥐고 으르렁거렸다. “까불지 말고 마셔라. 한 방울 흘릴 때마다 한 대다.” 하나 남은 눈을 데굴데굴 굴린 울룰루가 필사적으로 리큐르를 삼켰다. 꿀꺽꿀꺽 목울대가 움직일 때마다 녹아내린 살이 돋아나고 잘린 손가락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움푹 꺼졌던 자리에 눈이 생겼다. 세영은 눈만 데굴데굴 굴리는 울룰루의 입에서 빈 병을 빼냈다. 손을 들어 새로 돋아난 손가락을 확인한 울룰루가 말했다. “나 살았다? 안 죽었다?” “울룰루!” “울룰루 살았다!” 나샴들이 그를 둘러싸고 펄쩍펄쩍 뛰며 기뻐했다. 말은 못 알아들어도 분위기로 짐작한 동료들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얼싸안고 좋아하던 나샴들이 세영에게 감사를 표했다. “인간 고맙다. 착하다.” “착한 인간이다. 우리 은인이다.” “고맙긴 뭘. 다 돈 받고 파는 건데.”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동료들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세영은 보란 듯이 빈 병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게 얼마나 비싼 약인지 알아? 돈 주고도 못 사는 거야. 세상에 몇 병 없는 귀한 약이라고. 보통 약 먹고 눈 돋고 손가락 돋는 게 가능할 것 같아?” “우, 우리 돈 없다.” “인간 돈 안 쓴다. 없다.” 새파래진 나샴들이 고개를 붕붕 저었다. 병을 등 뒤로 휙 내던진 세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너희 대장에게 받아야겠다. 사막을 다 팔아도 못 갚을 정도로 비싼 약을 처먹었으니까, 대가를 내놓으라고 해야지.” “아, 안 된다. 대장 인간 돈 없다.” “잘못했다. 돈 없다.” 나샴들이 쩔쩔매며 빌기 시작했다. 세영은 귀를 후벼 파며 어서 앞장서라고 말했다. 우물쭈물하던 나샴들이 결국 훌쩍훌쩍 울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리엔이 조심스럽게 세영의 옆으로 다가왔다. “저, 세영님.”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그녀를 보고 세영이 웃었다. 세영은 입에 손가락 하나를 대며 조용히 말했다. “쉿, 만약을 위해서예요. 붙잡힌 사람들이 있잖아요.” “앗!”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은 마리엔이 서둘러 고개를 끄떡였다. 그녀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세영을 보았다. 감탄과 존경이 담긴 시선에 살짝 부담스러워진 세영이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서둘러 동료들에게 돌아간 마리엔이 소곤소곤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세영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야기가 그렇게 잘 풀린다면 좋겠지만.’ 붙잡힌 사람들과 복수심에 불타는 나샴들을 모두 만족하게 하는 방법 같은 건 없다. 가장 쉬운 방법은 나샴을 모조리 쳐 죽이고 사람들을 풀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샴도 불쌍하다고 동정하는 동료들이 그걸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결국, 이쪽과도 협상하고 저쪽과도 협상해야 하나. 귀찮아 죽겠네.’ 남은 건 양쪽을 적당히 조율하는 방법뿐이었다. 협상에 소질이 없는 세영은 일단 목소리 큰 놈들을 적당히 패면서 대화하기로 했다. 공동의 적이 나타나면, 혹은 맞아 죽기 싫으면 적당히 타협할 거라는 얄팍한 계산이었다. “멈춘다!” “침입자 막는다!” 은신처라는 바위산에 도착하자 여기저기서 나샴들이 튀어나와 무기를 겨누었다. 세영은 눈썹을 한번 꿈틀하는 것으로 짜증을 눌렀다. 무기라고 부르기도 조악한 창과 활을 들이대는 것으로 화를 낼 필요는 없었다. “치, 침입자 아니다!” “침입자다. 인간 데려왔다!” “침입자 아니다. 은인이다!” “우리 구했다. 착하다.” 세영과 함께 온 나샴들이 필사적으로 은인을 데려온 거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다른 나샴들은 그들보다 똑똑한 것인지 쉽게 경계를 풀지 않았다. “허락 없다. 침입자다!” “침입자 죽인다!” 위협하듯 창끝을 내미는 것에 세영의 눈꼬리가 휙 위로 올라갔다. 그걸 보고 기겁한 울룰루가 양손을 휘저으며 그들을 말렸다. “아, 안 된다! 큰일 난다!” “마귀 무섭다! 모래마귀 죽였다!” “인간 아니다! 덤비면 죽는다!” <모래마귀>를 죽였다는 말에 나샴들이 주춤했다. 그들은 눈을 껌뻑거리며 세영을 바라보았다. 인간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그들의 눈에는 세영이 긴 머리의 소년으로 보였다. 팔뚝도 한 줌이 안 될 정도로 얇고 몸도 가늘어서 비실비실했다. 나샴 중 하나가 분노해서 소리쳤다. “거짓말 나쁘다! 규칙 어겼다!” “거짓말 아니다. 모래마귀 죽었다. 모래마귀 저기 있다.” “가서 봐라. 우리 거짓말 안 했다.” 주춤거리던 나샴들이 어떻게 할까 의논하기 시작했다. 결국 세 마리의 나샴이 아귀의 사체를 확인하러 뛰어갔다. 세영은 울룰루와 싸우던 나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비켜. 들어가게.” “확인 먼저 한다!” “거짓말이면 그때 죽이든 살리든 알아서 해. 말로 할 때 비켜. 아니면 모래마귀에게 했던 걸 그대로 해줄까?” “아, 안 된다. 규칙이다.” 지긋이 노려보자 움찔거리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나샴이었다. 세영은 이놈을 어떻게 팰지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때 허허 웃는 소리와 함께 굴 안에서 새하얀 나샴이 걸어 나왔다. “소란이 있어서 나와 봤더니, 아주 재미있는 손님들을 데려왔구나.” 카키색 몸에 황금 눈의 나샴들과 달리 놈은 새하얀 몸뚱이에 붉은 눈을 갖고 있었다. ‘알비노 도마뱀인가?’ 하고 생각하는 세영과 달리 다른 나샴들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미갈루!” “미갈루다!” “넌 말을 꽤 잘하네?” 세영이 흥미를 숨기지 않고 물었다. 다시 입을 벌려 웃는 소리를 낸 미갈루가 말했다. “나는 여기의 어떤 나샴보다 나이가 많지. 예전엔 모두가 나와 같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게 된 것뿐이라네.” 대를 이을수록 점점 멍청해졌다는 이야기였다. 세영은 저와 동행했던 나샴들을 힐끗 보며 이놈들의 새끼들은 더 멍청해지겠거니 생각했다. 지금도 띨띨한데 여기보다 더 멍청해진다면 그냥 멸종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미, 미갈루. 마귀 은인이다. 나 구해줬다.” “모래마귀 울룰루 먹었다. 마귀 울룰루 구했다.” “울룰루 죽었다. 마귀 다시 살렸다.” “착한 마귀다. 안 나쁘다.” 나샴들이 입을 모아 세영을 착한 마귀라고 소개했다. 세영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미갈루는 “오오, 그래그래.” 하고 고개를 끄떡이며 놈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붉은 눈을 휘며 세영에게 말했다. “이방인이여. 이 비를 부른 것도 그대인 것 같군. 혹시 마법사인가?” “마법만 쓰는 건 아니지만. 뭐, 일단.” “마법사와 토끼 전사, 너구리 사제, 강아지 수인족, 고양이 엘프라. 재미있는 일행이군.” 미갈루가 이쪽을 멀뚱멀뚱 쳐다보는 동료들을 보고 웃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헤헤 따라 웃는 동료들은 울룰루만큼 멍청해 보였다. 세영은 아무것도 못 본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한걸음 물러선 미갈루가 이마와 가슴에 차례로 손을 대며 머리를 숙여 보였다. “울룰루를 구했다면 그대는 우리의 은인, 사막의 손님이다. 부디 발길을 멈추고 우리의 환대를 받아주시길.” 고개 숙인 미갈루를 본 나샴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똑같은 동작을 했다. 세영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럼 좀 들어가서 쉬자. 여기까지 뛰어온다고 피곤하거든?” 그러자 껄껄 소리 내어 웃은 미갈루가 따라오라며 앞장섰다. 세영은 동료들이 따라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미갈루의 뒤를 쫓았다. ──────────────────────────────────── 샤르마흐 사막 (6) 좁은 바위굴을 지나가자 뻥 뚫린 공터가 나왔다. 바위산인 줄 알았던 은신처는 속이 텅 빈 원뿔형 구조였다. 공터를 둘러싼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작은 동굴들이 아파트처럼 층을 이루고 있었다. 거기서 몸을 내민 나샴들이 세영과 동료들을 동물원 원숭이처럼 구경했다. “생각보다 수가 많네?” “많아 보이나? 사실 여기 모여 있는 것이 우리 부족의 전사 전부라네.” 미갈루가 어쩐지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영은 눈으로 나샴들을 세었다. 대충 봐도 이백 마리는 훌쩍 넘을 것 같았다. “예전엔 이것보다 많았어?” “많았지. 전사들만 천명을 넘길 때도 있었다 하네. 그러나 내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지.” 미갈루의 대답에 세영은 안 좋은 예감을 느꼈다. 상대가 이렇게 아련아련한 과거의 일을 말할 때는 노가다 퀘스트가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도마뱀들의 꽁무니를 닦아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설마 이렇게 빙 둘러싸고 구경하는 게 환대는 아니겠지?” “아, 이런. 실례했군. 워낙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이라서 말이야.” 나샴들 쪽으로 몸을 돌린 미갈루가 은인을 환영할 준비를 하라고 했다.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쌕쌕거리는 소리를 낸 나샴들이 일제히 흩어졌다. 미갈루는 공터의 중앙에 있는 모닥불로 일행을 안내했다. “인간에겐 우리의 동굴이 너무 덥겠지. 이곳이 제일 시원한 곳이라네.” 미갈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르르 몰려온 나샴들이 털가죽으로 만든 방석을 주변에 놓았다. 일행이 방석 위에 앉자 딱딱한 열매와 새알로 보이는 것을 내밀었다. 미갈루는 시범을 보이듯 열매를 잡고 뚜껑처럼 비틀었다. 열매의 가운데에 그어진 칼집이 벌어지며 새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구워서 먹는 열매인 듯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어서 들게. 메셈 열매는 영양이 풍부해서 사막을 지날 때 매우 요긴하지.” 미갈루가 껍질을 벗긴 열매를 세영의 손에 쥐어주었다. 세영은 사양하지 않고 그것을 베어 물었다. 젤리처럼 물컹한 열매에선 구운 사과 맛이 났다. 세영이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떡이자 동료들도 조심스럽게 열매를 먹기 시작했다. 새알 속에는 뭔지 모를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알 꼭대기 부분을 손으로 꾸욱 누르면 구멍이 벌어지며 액체가 새어 나오게 되어 있었다. 한 모금 맛을 보자 들큼한 맛의 술이었다. 어쩐지 짓궂은 표정이 된 미갈루가 “맛이 어떤가?” 하고 물었다. 세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나쁘진 않네.” 딱딱 소리가 나서 돌아보자 나샴들이 집채만 한 넙치를 손질하고 있었다. 흥이 나서 주둥이를 열었다 닫았다 할 때마다 딱딱거리는 소리가 났다. 한쪽에선 팔뚝만 한 쥐를 굽는 중이었다. 공처럼 생긴 선인장을 쪼개서 속을 파내는 모습도 보였다. 그야말로 손님을 맞이해서 잔치를 준비하는 풍경이었다. “그대는 다른 인간들과 좀 다른 것 같군. 우리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가?” 미갈루가 먼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세영은 어떻게 할지 잠시 고민했다. 좀 더 사태를 파악하자는 신중함보다는 압도적인 귀찮음이 이겼다. 그녀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울룰루에게 대충 들었는데, 배를 추락시키고 인간들을 잡아왔다지? 알을 훔친 도둑이야 삶아 죽이든 튀겨 죽이든 상관없어. 하지만 그 외의 인간들은 풀어줘야겠다. 나도 인간인 이상 그냥 지나칠 수가 없거든.” 마지막 한마디는 동료들을 의식한 것이었다. 무슨 말이 나올지 알고 있었는지 미갈루는 놀라지 않았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예의 아련아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잠깐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겠나?” “…….” 세영은 대놓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도 이런 분위기가 될 것 같아 피했지만, 소용이 없는 모양이다. 이 도마뱀 새끼는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때까지 끈질기게 매달릴 가능성이 컸다. “그냥 들어주기만 해도 괜찮다면 어디 한번 해봐.” “고맙군. 아까도 말했듯이 우리 부족은 쇠락의 길을 걷고 있네. 이건 우리뿐만이 아니야. 다른 부족, 일족 전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지.” 잠시 말을 멈춘 미갈루가 침울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세영은 별 감흥 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나샴이 멸종위기종이라고 해도 그녀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 “우리 일족은 알에서 태어나지. 마을의 특별한 장소에 부화실이 있고, 거기에 암컷들이 낳은 알을 모아두네. 그리고 새끼들이 깨어나면 모두가 함께 돌보지. 그것이 부족의 율법이야.” 일족의 쇠락은 천천히 시작되었다. 점점 알에서 깨어나는 암컷의 숫자가 줄기 시작한 것이다. 미갈루가 태어났을 때쯤에는 열 개 중에 두세 개의 알에서만 암컷이 태어났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는 수컷만이 태어나게 되었다. 미갈루의 부족뿐만 아니라 다른 부족도 마찬가지였다. “태어난 수컷들도 정상이 아니었네. 몸에 장애가 있거나 말이 어눌했지.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가 둔하고 깊은 생각을 못 하는 새끼들만 태어나게 되었어.” 시간이 지날수록 정상인 나샴은 사라지고 둔하고 멍청한 나샴이 남았다. 과거에 그들이 그렇지 않았다는 걸 기억하는 것도 미갈루 뿐이었다. “알을 낳을 수 있는 암컷의 수도 점차 줄어들고 있었네. 가만히 있다간 멸족할 상황이었지. 그래서 우리는 외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네.” “사기당했구나?” 세영은 지루한 얼굴로 말했다. 장황한 이야기에 싫증이 난 그녀는 간단히 요점만 말해주길 바랐다. 상대의 동정심을 끌어내지 못한 것을 눈치챈 미갈루가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부족의 나샴이 인간의 마법사와 함께 찾아왔지. 마법사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네. 우리는 그를 부화실로 데려갔고 철저하게 감시했지. 하지만 마법사는 우리의 감시를 뚫고 알을 훔쳐서 사라졌네.” “몇 개나?” “백여덟 개.” 세영은 미갈루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샴 중엔 그나마 낫다고 생각했지만, 이놈도 결국은 똥멍청이였다. “알을 백여덟 개나 훔쳐 가는데 몰랐다고? 계란도 그만큼 훔쳐 가면 눈치채겠다. 등신아.” “부정할 수 없군. 그래도 일족의 명예를 위해 변명하자면, 놈이 사라진 후에도 알은 제자리에 있었지. 그래서 마법사가 사라졌을 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도망친 거라고 생각했네.” 시간이 지나도 부화하지 않아서 뒤늦게 가짜 알이라는 것을 알아챘다고 한다. 세영은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그때 은인께서 찾아오셨지. 우리는 인간에게 분노하고 있었기에 은인을 공격했네. 하지만 그분은 인간이 아니었어. 은인은 우리 모두를 제압하고 왜 공격했는지 물으셨네.” <은인>이라는 놈은 세영과 달리 부족에게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았다. 그는 미갈루의 지루한 사연을 다 들어주고 알을 찾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일족에게 그들의 유산이라며 기묘한 피리를 넘겨주었다. “피리라고?” “은인께서는 그게 원래 우리의 피리였다고 하셨네. 아주 오래전 마도전쟁이 있을 때 우리가 빼앗긴 유산이었다고. 우린 그분에게 피리를 사용하는 법을 배웠지.” 피리를 사용하면 사막의 괴수들을 길들일 수 있었다. 나샴들이 피리의 사용법을 익히자 <은인>은 그들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 뒤 <은인>의 심부름꾼이 열두 개의 알을 싣고 찾아왔다. 기뻐하는 그들에게 심부름꾼은 알들이 비행선에 실려 사막을 지나갈 것이라고 전했다. “배를 공격하라고 시킨 거잖아.” “은인은 인간들의 경매에서 알을 사들이려 했지만, 실패했다고 전하셨네. 그리고 다른 알들을 찾으러 <전사의 도시>로 향한다고 하셨지. 그 뒤로는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네.” 세영은 잠시 고민했다. 처음엔 <은인>이라는 놈이 뭔가의 목적으로 나샴을 이용해 먹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동료들처럼 사람 좋은 호구라서 나샴을 위해 무료봉사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뭐, 그놈이 어떤 놈이든 나랑은 관계없지.’ 까놓고 말해 나샴이 이용당하든, 그것 때문에 전쟁이 터지든, 멸종당하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동료들이 나샴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세영은 하품을 삼키며 물었다. “그래서 이 길고 지루한 이야기를 나한테 들려준 이유가 뭐야?” “이제 막 이야기하려던 참인데.” “아직도 안 끝났다고?” “…미안하네.” 미갈루는 면목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이 망할 늙은 도마뱀은 불쌍한 척하면서 계속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고 있었다. 세영은 딱 5분만 더 참아주겠다는 얼굴로 턱짓했다. 미갈루는 전보다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배를 습격해서 알을 되찾았네. 배 안에는 스물세 개의 알이 있었어. 하지만 알은 마법으로 단단히 밀봉되어 있었고,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알을 가둔 상자를 열수가 없었네.” “그래서?” “우리는 인간들에게 상자를 열라고 했지. 하지만 인간들은 모두 모른다고 답하더군. 자신들은 배에 타고 있었을 뿐이고 알이 있는지도 몰랐다고 했지. 우리는 누가 알을 훔친 도둑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그들 모두를 끌고 와 가두어두었네.” 미갈루는 처음부터 도둑이 아닌 인간들은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가 도둑인지 모르니 모두 다 가둘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만약 누가 도둑인지 밝혀낼 수 있다면 결백한 인간들은 풀어주겠네.” 미갈루가 하고 싶었던 말은 결국 이것인 듯했다. 뜻밖의 요청을 받은 세영이 목덜미를 긁적였다. 뭘 믿고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도 인간이잖아. 뭘 보고 내 판단을 믿어? 내가 아무 놈이나 하나 찍어서 ‘이놈이 도둑이다!’ 해버리면 어쩌려고?” “우리는 도둑을 밝혀낼 현명함이 없네. 그럼 다른 이의 도움을 청해야 하는데, 그대는 우리에게도 인간에게도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군. 그럼 모두에게 공정하겠지. 그렇지 않나?” 미갈루가 붉은 눈을 휘며 말했다. 여전히 멍청한 생각이긴 했지만, 세영에 관한 판단만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할 말이 없어진 세영이 입을 다물자 갑자기 마리엔이 끼어들었다. “관심이 없다니요. 세영님이 얼마나 다정하신 분인데요. 지금도 당신들을 도와주기 위해 오신 거란 말이에요. 그리고 울룰루라는 나샴도 세영님이 구해주셨잖아요. 너무해요.” “어, 마리엔? 이놈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들은 거예요?” 당황한 세영이 버벅거리며 물었다. 덩달아 초록 눈을 깜빡인 마리엔이 고개를 끄떡였다. “세영님을 사막의 손님이라고 부를 때부터 공용어를 쓰셨어요.” “나는 인간들의 말에도 익숙하다네.” 시침을 떼듯 혀를 날름거린 미갈루가 말했다. 세영은 지긋이 그를 노려보다 한숨을 쉬었다. 멍청한 도마뱀에게 놀아나다니, 인간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때 마리엔의 눈치를 슥 살핀 미갈루가 입을 열었다. “우리를 도와주러 왔다니. 염치없지만 하나만 부탁해도 되겠나?” “이 영감탱이가 진짜…….” “이렇게 빌겠네. 제발 우리를 도와주게. 부탁일세.” 미갈루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애원했다. 세영은 동료들이 동요하는 것을 느꼈다. 이제 보니 구구절절 사연을 늘어놓은 것은 그녀가 아니라 동료들을 낚기 위함임이 분명했다. 이를 악문 세영이 으르렁거렸다. “야, 나 엿 먹인 놈 치고 끝이 좋았던 새끼는 하나도 없었다?” “이 늙은이는 죽든 살든 상관없네. 내가 죽어 우리 부족을 살릴 수 있다면 천 번이라도 다시 죽을 거야. 인간의 마법사여. 제발 우리를 불쌍하게 여겨주게.” 세영은 슬쩍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안타까운 얼굴로 미갈루를 쳐다보던 이들이 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도와주고 싶지만, 세영에게 강요하게 될까 봐 피하는 듯했다. 다시 죽은 듯이 납작 엎드려 있는 미갈루를 보자 울화가 치밀었다. “아오, 확 그냥!” 세영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버티는 미갈루를 차마 후려 팰 수가 없었다. 끄응 소리를 낸 세영이 이마를 감싸 쥐었다. ‘진짜 짜증 나지만, 이게 연계 퀘스트일 수도 있으니까.’ 게임에선 자잘한 서브 퀘스트를 해결하다가 메인 퀘스트의 단서를 얻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사막에서 살아온 나샴들이라면 모래의 탑에 대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깊은 한숨으로 마음을 정리한 세영이 입을 열었다. “좋아, 이 빌어먹을 영감탱이야. 도와달라니 도와줄게. 대신 공짜로는 안 돼. 이미 울룰루라는 새끼가 사막 하나를 팔아도 못 살만큼 비싼 약을 처먹었다고. 그런 주제에 날 공짜로 부려 먹겠다는 건 도둑놈 심보 아냐?”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내줄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주겠네.” 미갈루는 놀라지도 않고 차분하게 물었다. 세영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빈정거리듯 말했다. “너희가 갖고 있는 알. 열두 개에 스물세 개라고 했지. 그럼 서른다섯 개네. 서른다섯 개 전부 내놔. 싫으면 난 그냥 손 털고 여길 뜰 거야.” “…우리의 알로 뭘 할 생각인가?” “내가 뭘 할지 무슨 상관이야? 구워 먹든 튀겨 먹든 그건 내 마음이야. 싫으면 그냥 집어치워.” 말을 마친 세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미갈루는 주저 없이 그녀를 붙잡았다. 그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떡였다. “좋네. 알을 내어주지. 그대가 무얼 해도 상관하지 않겠네.” “계약 성립. 대신 알부터 받아야겠어. 그걸로 도둑을 잡을 생각이거든.” 세영이 이를 씩 드러내며 웃었다. 그녀는 미갈루에게 풀지 못한 짜증을 도둑들에게 풀기로 했다. 살기 어린 웃음을 마주하게 된 미갈루의 얼굴이 좀 더 하얗게 변했다. ──────────────────────────────────── 샤르마흐 사막 (7) 세영은 나샴에게 끌려 나온 사람들을 바라봤다. 여자와 어린 소년들은 뒤쪽, 선원들은 중간, 남자 승객들은 그녀의 바로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초췌하고 더러운 모습이었지만, 크게 다친 사람은 없어 보였다. 나샴들을 잔뜩 거느리고 나타난 세영의 모습에 사람들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몇몇은 상황을 눈치챈 듯 적대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들고 있던 상자를 가볍게 떨어뜨렸다. 텅 소리와 함께 떨어진 상자는 투명해서 속이 다 보였다. 뭔지 모를 액체 속에 담긴 알이 느릿하게 부유했다. 상자 위에 한쪽 발을 턱 올려놓은 세영이 말했다. “이게 뭔지 알지? 이거 갖고 배에 탄 새끼 누구야?”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 저와 관계없는 일이라는 듯 눈을 내리깔고 시선을 피했다. 세영은 입을 꾹 다문 이들을 쓱 둘러보며 말했다. “누군지는 조사하면 다 나와. 지금 나오면 목숨만큼은 살려준다.” 이번 역시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세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좋아, 아주 마음에 들어. 악당이라면 이정도의 패기는 있어야지. 안 그래?” “…….” “듣자하니 이거 굉장히 비싸다며? 산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지금쯤 물건을 받지 못해서 굉장히 빡쳤겠어? 어쩌면 너무 빡쳐서 여기까지 뛰어오고 있을지도 모르지.” 앞줄에 앉아있는 몇 명의 남자가 몸을 움찔거렸다. 세영은 그것을 못 본 척하며 알이 담긴 상자를 툭툭 찼다. “천금을 주고 이걸 살 놈이니까 돈도 많고 권력도 많겠네. 그렇게 능력 좋은 놈이면 성격도 엄청 더럽겠지. 근데 그런 놈이 자기 물건이 완전히 부서졌을 경우에는 어떻게 나올까?” 궁금하지 않냐고 물은 세영이 상자를 콱 밟았다. 빠각 소리가 나며 상자에 금이 가더니 이내 퍼석 부서지고 말았다. 상자가 어떤 물건인지 아는 자들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그건 의뢰인이 가진 키가 아니면 절대 열리지 않는 마법도구였다. 어떤 충격에도 견딜 수 있게 고안된 아티팩트가 단순히 밟힌 것만으로도 부서진 것이다. 몸을 굽혀 상자에서 흘러나온 알을 집어 든 세영이 빙긋 웃었다. “이게 깨지면 운반책들의 머리 정도는 댕강댕강 날려버리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영이 주저 없이 알을 집어 던졌다. 순간 남자 중의 한 명이 몸을 날려 알을 받으려 했다. 하지만 알은 그의 손을 스쳐 바닥에 떨어졌고 화려하게 깨져버렸다. 멍청한 얼굴로 깨진 알을 바라보던 남자가 엉금엉금 기어서 알껍데기를 손에 쥐었다. “아, 안 돼. 안 돼!” “저 새끼 끌어내.” 세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샴들이 남자를 잡아 끌어냈다. 몸부림치던 남자가 세영을 보고 욕설을 퍼부었다. “미친년! 네가 감히! 이 버러지 같은 년아! 네가 누굴 건드렸는지 알아?!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거다!” “한 대 때려.” 나샴 중 하나가 남자의 얼굴을 후려쳤다. 강철 같은 주먹에 얻어맞은 남자가 이리저리 휘청거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세영은 감정 없는 눈으로 그를 보다가 말했다. “바지 내려.” 주먹을 휘둘렀던 나샴이 즉시 남자의 바지를 끌어내렸다. 갑작스러운 봉변에 당황한 남자가 몸부림쳤다. 세영은 이내 그의 다리 사이를 턱짓하며 말했다. “잘라.” “으아아아아악!” 스겅 소리와 함께 뽑히는 칼을 본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승객들의 얼굴이 일시에 창백해졌다. 제 다리 사이를 가리는 자들도 있었다. 나샴은 주저 없이 남자의 것을 쥐고 칼을 가져다 댔다. 미친 듯이 몸부림치던 남자가 세영을 향해 소리쳤다. “용서, 용서해주십시오! 제발!” “멈춰.” 세영의 말이 떨어지자 파고들던 칼날이 멈췄다. 눈을 까뒤집으려는 남자의 뺨을 찰싹찰싹 후려친 세영이 차갑게 말했다. “너 혼자야. 아니면 다른 놈도 있어?” “그, 그게…….” “잘라.” “말하겠습니다! 저, 저 혼자가 아닙니다! 매튜 새끼와 피터 새끼도 한통속입니다!” 남자는 침까지 튀겨가며 필사적으로 말했다. 세영은 승객들 쪽으로 눈을 돌렸다. 매튜 새끼와 피터 새끼가 누구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벌떡 일어나 남자에게 욕설을 퍼붓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영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저 새끼들도 끌어내.” 똑같은 방법으로 놈들을 취조하자 5분도 채 안 되어 모든 범인을 색출할 수 있었다. 알을 갖고 탄 운반자는 모두 세 명이었고, 돈을 받고 그것을 눈감아준 선장과 거래를 알선한 선원 한 명이 연루되었다. 그들은 서로 욕설을 퍼부으며 자신은 무고하다는 것을 밝히려고 애썼다. 아랫도리의 안위 앞에서 우정과 동료애는 빛이 바랬다. 놈들은 심지어 <의뢰주>가 알을 되찾기 위해 사막을 건너오고 있으며, 이제 이틀 뒤면 도착할 거라고 자백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물고 버티고 있었군. 이틀 뒤에는 의뢰주가 너희를 구하러 올 테니까. 그런데 나샴들이 홧김에 모두를 죽여 버릴 거란 생각은 안 했어?” 세영의 말에 시끄럽게 떠들던 놈들이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벌어진 촌극을 지켜보던 승객들의 눈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세영은 슬그머니 놈들에게 책임을 돌렸다. “너희 때문에 무고한 사람이 죽든 말든 전혀 상관없었겠네?” “저런 나쁜 놈들!” “저놈들 때문에 우리가 이 꼴이 된 거잖아!” “진작 자백했으면 이 고생도 안 했을 텐데!” 사람들의 분노가 놈들을 향해 쏟아졌다. 그들은 언제 목숨을 빼앗아갈지 모르는 나샴보다는 이기적인 범인들을 탓하기 시작했다. 원하는 반응을 얻은 세영이 나샴들에게 말했다. “미갈루에게 데려가. 그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 고개를 꾸벅 숙인 나샴들이 범인들을 끌고 갔다. 범인들은 마지막까지 몸부림을 치며 자비를 구걸했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동정을 보내지 않았다. “저기,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던 승객 중 하나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세영은 깜짝 놀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무고하신 분들이 왜 무릎을 꿇고 계세요? 어서 일어서세요.”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섰다. 그들 모두가 일어서자 세영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놈들이 빨리 자백했으면 좋았을 텐데, 나쁜 놈들 때문에 안 해도 될 고생을 하셨네요. 곧 구조대가 올 테니 일단 씻고 옷을 갈아입으시죠.” 세영의 말은 그들에게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안도감을 주었다. 얼굴이 확 밝아진 사람들이 세영의 안내를 받아 공터로 나갔다. 안을 벗어나자 서늘하고 신선한 공기가 사람들을 맞이했다. 급히 숨을 들이마시던 사람들은 제 몸에서 나는 악취를 느끼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들을 달래듯 상냥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세요.”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아름다운 엘프와 눈부시게 하얀 갑옷을 입은 전사가 그들을 반겨주었다. 사람들은 일종의 경건함까지 느끼며 발길을 멈췄다. 세영이 그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짧게 박수를 쳤다. “자, 여성분들은 저기 보이는 엘프 아가씨를 따라가서 씻고 옷을 갈아입으시면 됩니다. 남성분들은 저쪽의 검사님이 안내해주실 거예요. 그럼 옷을 갈아입고 이곳에서 다시 모입시다. 식사를 준비 중이니 너무 늦으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고분고분 그녀의 지시에 따랐다. 이미 지쳐있어서 뭔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편했다. 따뜻한 온천에서 몸을 씻고 나오자 엘프와 전사가 갈아입을 옷을 나누어 주었다. 천은 조금 조악했지만, 움직이기 편하고 몸에 딱 맞았다. 공터로 돌아오자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 잔뜩 차려져 있었다. 무엇으로 만든 건지 몰라도 입에 넣자 하나같이 살살 녹았다. 며칠 동안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한 사람들은 정신없이 손을 움직였다. “한 잔씩 하시죠. 이럴 땐 역시 술이 최고잖아요.” 배가 어느 정도 찼을 때 세영이 슬그머니 술병을 내놓았다. 배가 부르자 느긋해진 사람들은 거부하지 않았다. 술맛은 더욱 기가 막혔다.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석 잔이 넉 잔이 되었다. 기분이 좋아서 흥얼대던 사람들은 이내 하나 둘 쓰러져 잠들기 시작했다. 술을 입에 대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배가 부르자 잠들어버렸다. 세영은 팔짱을 끼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잘 자네.” “모두 잠들었네요.” 마리엔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을 받았다. 고개를 끄떡인 세영이 디안을 바라봤다. “남은 식량은 충분해요?” “사흘 분량이 있더군요. 아껴먹으면 엿새도 버틸 겁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세영이 히죽 웃었다. “자, 그럼. 우리도 튀죠.” 세 사람은 재빠르게 움직여 은신처를 빠져나왔다. 입구 쪽에서 얼쩡거리던 시디발라가 그들을 발견하고 불만스럽게 외쳤다. “왜 이렇게 늦었어!” “술을 먹여도 안 자는데 어떻게 하냐.” “쳇,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안에 있을걸. 맛있는 것도 못 먹고.” 발밑을 툭 걷어찬 시디발라가 꿍얼거렸다. 피식 웃은 세영이 그의 머리를 마구 비벼 헝클어뜨렸다. “바가지 그만 긁어라. 음식 만들고 옷 만들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느라 기운 빠져서 죽겠다.” “맞아. 세영님한테 그러지 마. 얼마나 힘드시겠어.” 마리엔까지 맞장구를 치자 샐쭉해진 시디발라가 “둘 다 미워!” 하고 소리치고는 쪼르르 달려가 버렸다. 미안한 얼굴로 눈치를 본 마리엔이 말했다. “아무런 도움도 못 돼서 서운해서 그래요.” “하긴. 이번에 제일 활약한 사람은 마리엔이니까요.” “화, 활약은요. 우연이죠.” 마리엔이 빨개진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나샴들이 압수한 승객들의 소지품에서 아티팩트를 찾아낸 것이 바로 그녀였다. 아이템 정보를 통해 그것이 발신기이며, 수신자에게 현재의 위치를 알리는 것임을 안 세영은 도둑들의 속셈을 눈치챘다. 그래서 가짜 알을 들고 가서 한바탕 신나는 연기를 벌인 것이다. ‘가짜 알로 흥한 자, 가짜 알로 망하는 거지.’ 인챈트 스킬로 아티팩트를 만들 수도 있는 세영에게 상자에 걸린 마법을 푸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도둑들은 상자의 성능을 너무 믿어버린 탓에 아무런 의심 없이 속아 넘어갔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두고 가도 괜찮을까요?” 디안이 힐끗 은신처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는 세영이 이번 계획을 설명할 때부터 승객들만 두고 가는 것을 반대했다.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강하게 말했다. “이게 최선이에요. 여기 남아있으면 나샴들도 전멸하고 사람들도 절대 좋은 꼴 못 봐요. 우리가 얼른 사라져 주는 것이 모두를 위한 길이라니까요.” 그리고 사막으로 열심히 달려오고 있을 <의뢰주>에게 엿을 먹이는 방법이었다. ‘똥줄 빠지게 달려와서 조난객들이나 구하라고.’ 완벽한 복수를 위해 잠든 승객들의 옆에 편지를 남겨두었다. 내용은 <이틀 뒤에 오는 놈이 님들을 그렇게 만든 개새끼입니다. 아주 좆같은 새끼죠. 그놈의 멱살을 잡고 이번 일의 책임을 무세요. 보상으로 금화를 한 주머니씩 뜯을 수 있을 겁니다.>였다. ──────────────────────────────────── 샤르마흐 사막 (8) “오, 돌아왔군.” 리먼과 담소를 나누고 있던 미갈루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세영은 친한 척하지 말라는 뜻으로 그를 찌릿 노려보았다. 모른 척 허허 웃으며 몸을 일으킨 미갈루가 보트를 가리켰다. “일단 그대가 말한 대로 준비는 다 해두었네.” 배 아래에 보트를 매단 하늘고래들이 허공에 둥실둥실 떠다녔다. 십여 명씩 보트에 나눠 탄 나샴들이 출발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뱃머리에는 로프가 묶여 있었는데, 열두 마리의 모래상어들이 거기 연결되어 있었다. 아스트리드에서 가져온 물건들로 만든 운송수단이었다. “꼭 마차 같아요.” 마리엔이 허공을 휘젓고 다니는 모래상어들을 보며 말했다.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디안에게 눈짓을 했다. 발을 꾹 밟히고 나서야 눈치를 챈 디안은 마리엔이 보트에 타는 것을 도왔다. “이 늙은이도 좀 도와주게나.”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미갈루가 세영에게 말했다. 리먼과 시디발라를 보트에 태우던 세영이 인상을 썼다. 하지만 빨간 눈을 깜빡거리는 도마뱀은 도무지 겁이라는 것이 없어 보였다. 실랑이하는 것도 포기한 세영은 그를 번쩍 들어 보트 안으로 집어 던졌다. “어이쿠!” “아이고, 어르신. 조심하십시오.” 벌러덩 넘어가는 미갈루를 리먼이 재빨리 붙잡아주었다. 세영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알을 가득 실은 보트에 올라탔다. 미갈루와 동료들을 떼어놓으려고 했는데, 리먼 때문이라도 떨어질 기색이 아니었다. 부디 그녀가 없는 사이에 헛소리를 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전원 출발 준비!” 세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피리 소리가 울렸다. 허공을 휘젓던 모래상어들이 피리 소리에 따라 같은 방향으로 정렬했다. 그때 갑자기 “잠깐만요!” 하는 외침과 함께 디안이 세영이 탄 보트로 넘어왔다. “저는 여기에 타겠습니다.” “한사람 정도는 상관없지만, 괜찮겠어요?” 의아하게 말한 세영이 마리엔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시디발라와 무어라 이야기하던 마리엔이 시선을 느끼고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디안이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동료들에겐 양해를 구하고 왔습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가면서 듣죠.” 고개를 돌린 세영이 “출발!” 하고 외치며 보트의 앞면을 쾅 때렸다. 움찔한 모래상어들이 일제히 앞으로 튀어 나갔다. 보트가 빠른 속도로 사막 위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세영과 미갈루의 보트를 선두로 해서 다른 보트들도 줄지어 출발했다. 수십 마리의 하늘고래와 모래상어가 행진하는 모습은 다시 보기 힘든 장관이었다. 세영은 적절히 속도를 조절하며 모래상어들이 바람을 타고 날도록 만들었다.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게……. 뭐라고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우물쭈물 망설이던 디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대로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나샴들을 돕자고 한 건 저희였습니다. 하지만 이건 저희가 생각한 것보다 너무 큰 규모라…….” 하고 싶은 말이 잘 정리가 되지 않는지 입을 다물어버리는 디안이었다. 그는 고뇌 어린 얼굴로 수십 마리의 하늘고래를 바라보았다. 하늘고래 한 마리가 아스트리드를 좌초시킬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정도의 숫자라면 작은 도시도 점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빡친 나샴들이 도시라도 습격할까 봐 무서워요?” 세영이 그의 걱정을 다 안다는 것처럼 피식 웃으며 물었다. 잠시 눈치를 보던 디안이 고개를 끄떡였다. <대탈출>을 계획한 세영은 제일 먼저 미갈루에게서 은인이 줬다는 피리를 빌렸다. 미갈루는 아무런 주저도 없이 제가 가진 피리들을 모두 넘겨주었다. 피리를 꼼꼼히 뜯어본 세영은 이제 됐다며 그것을 돌려줬다. 그리고 즉석에서 수십 개의 피리를 만들어 나샴들에게 뿌렸다. 디안은 그 일에 대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이전의 나샴들에겐 한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피리의 숫자도 늘어났고, 다룰 수 있는 하늘고래의 수도 늘어났죠. 전 이번 일이 전쟁으로 이어질까 봐 걱정됩니다.” 디안은 세영을 말리고 싶었지만, 나샴들이 제때 도망가지 못하면 싸움이 벌어질 테니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늘어난 피리와 그에 따라 커진 위험 때문에 걱정이 태산 같았다. 결국, 세영에게 이번 일의 대책을 의논하기 위해 건너온 것이다. “아, 이거 오해가 좀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 세영이 조금 곤란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녀는 다시 보트의 뱃머리를 쾅 쳐서 딴 곳으로 새려는 상어들을 바로잡았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던 세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미갈루의 피리와 제가 만든 피리는 같은 게 아니에요. 미갈루가 갖고 있던 피리는 일종의 아티팩트였고, 제가 만든 건 그냥 단순한 피리였어요.” “예?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피식 웃은 세영이 인벤에서 여분의 피리를 하나 꺼내 디안에게 던졌다. 그녀는 얼떨떨해하는 디안에게 불어보라고 권했다. 당황하던 디안이 모래상어를 가리켰다. 세영은 상관없으니 불어보라고 말했다. 주저하던 디안이 피리를 불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래상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세영의 지시에 따라 날아가고 있었다. 세영이 조금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그건 그냥 보통 피리예요. 테이밍 스킬이 없는 사람은 백날 불어봤자 아무 소용도 없거든요.” “아. 예.” 디안이 뻘쭘한 얼굴로 피리를 돌려주었다. 세영이 피식 웃으며 설명했다. “미갈루의 피리는 아티팩트였어요. 그걸 부는 사람은 무조건 테이밍 스킬이 생기는 착용템이죠. 디안이나 마리엔도 미갈루의 피리를 불기만 하면 상어를 조종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에요.” “네? 정말요?” 디안은 심각함도 잊고 반색했다. 내심 사막의 동물을 마음대로 다루는 나샴의 능력이 부러웠던 탓이다. 고개를 끄떡인 세영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물론 상어를 조종할 수 있을 때까지 피리를 불어야 하지만요. 한 오천 번 정도?” “…….” “고래는 만오천 번 정도 불면 될 것 같네요. 등급을 보니까. 물론 저처럼 장시간 조종하려면 스킬레벨을 올려야 하니까 오만오천 번?” 폐인력을 은근슬쩍 드러내는 세영이었다. 진심으로 ‘오만오천 번은 불어야 테이밍을 한다고 할 수 있지.’ 하고 생각하는 얼굴에 디안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말이 좀 샜는데. <은인>이라는 놈이 나샴 일부의 테이밍 스킬을 피 터지게 올려놨더라고요. 걔들은 그냥 보통 피리 불어도 상어 다룰 수 있어요. 안 가르쳐줄 거지만.” “…….” “그리고 제가 준 피리 마감 처리 안 해서 오래 못써요. 아마 삼사일 정도? 그 뒤엔 망가질 거고 전 더 안 만들어 줄 거예요. 그럼 원래 있었던 피리만 남으니까 상관없잖아요.” ‘이제 됐지?’ 라고 쓰여 있는 세영의 얼굴에 디안은 풀썩 웃었다. 지금까지 걱정했던 게 허탈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마를 쓱쓱 문지른 그가 긴장이 풀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도 우연히 알 수 있지 않을까요? 보통 피리를 불다가 우연히 상어를 부른다든가.” “테이밍 스킬을 사용하겠다는 생각으로 불어야 할걸요. 지금도 제가 마법의 피리라고 거짓말해서 쓸 수 있는 거예요. 걔들이 우연히 발견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고. 그건 <은인>이라는 놈이 책임질 문제잖아요.”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문제라고 말한 세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것도 그랬다. 이미 생긴 능력을 없앨 수도 없는 일이었고, 그 이상은 디안이 간섭할 문제도 아니었다. 한숨을 쉰 디안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정말 쓸데없는 걱정을 했군요.”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생각해요?” 세영이 히죽 웃으며 되물었다. 디안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뺨을 긁적인 세영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전 이곳을 잘 몰라요. 여기는 제가 살던 세계랑 너무 다른 데다가 이곳이 현실이라는 것도 종종 잊어버린다고요.” 시디발라에게 들었던 말과 똑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들으니 전에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일종의 이질감이 느껴졌다. 콧등을 찡긋한 세영이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이곳에 간섭할 자격도 없죠. 어차피 이방인에다가 곧 돌아갈 사람이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책임질 수가 없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영님은 이곳을 구하러 오신 분이고…….” “그걸 부정하겠다는 건 아닌데. 뭐랄까. 구원자나 구세주라고 해서 여길 마음대로 뜯어고쳐도 되나? 전 그렇게 생각을 안 해서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한 디안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는 구원자를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고, 악을 없애기 위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세영도 그렇게 할 것이라 막연히 기대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의 입에서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고 들으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를 본 세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단 당신과 마리엔, 시디발라, 리먼에게 위해가 가해질 경우. 그때는 절대 안 참아요. 누구든 박살을 내버릴 거예요. 걔들이 먼저 선빵을 날린 거니 간섭한다고 말할 자격도 없죠.” 덤빈 순간 살기를 포기한 거라 말한 세영이 덧붙였다. “그리고 동료들이 개입하길 원하는 경우. 동료들이 제가 움직이는 게 옳다고 생각할 때. 그때는 끼어들기로 했어요. 이곳을 사는, 내 사람들이 원하는 거니까.” 디안은 또 다른 의미로 놀랐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버벅대던 그가 간신히 말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이거 책임을 떠넘긴 거예요. 난 잘 모르니까 네가 알아서 판단해라. 난 책임 하나도 안 질 거다. 근데 네가 손을 빌려달라고 하면 빌려준다. 이런 거라고요.” “아닙니다. 그만큼 저희를, 그리고 저희의 판단을 믿으시는 거잖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디안은 세영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었다.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산을 조각내고 땅을 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신화 속에 나오는 영웅, 아니면 신의 화신과 비견될만한 힘이었다. 그런 대단한 사람이 자신의 판단을 절대적으로 믿겠다고 말해주는 것은 가슴 벅찬 감동이었다. 눈시울을 붉히는 그를 빤히 쳐다보던 세영이 말했다. “흔들리지 마세요. 변하지도 말고. 성장하는 건 괜찮아요. 다만 지금 옳다고 생각하는 걸 지켜줘요. 동료들이 길을 잃으면 저도 함께 길을 잃게 되니까.” “명심하겠습니다.” 명심할 것까진 없다고 피식 웃은 세영이 몸을 돌려 보트의 옆면을 때렸다. 지쳤는지 흐늘거리던 상어들이 다시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디안은 밀려드는 사막의 바람을 즐기듯 눈을 가늘게 떴다. 기분 탓인지 건조한 사막의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졌다. ──────────────────────────────────── 샤르마흐 사막 (9) 하늘고래와 모래상어를 이용한 이동은 쾌속했다. 세영은 하늘고래를 하루에 한 번, 모래상어는 세 번씩 새로운 놈들로 교체하면서 쉴 새 없이 달리게 했다. 기온이 떨어지면 움직이지 못하는 나샴 때문에 밤에는 <은신처>를 경유해야 했다. 어쨌든 그때를 제외하고 이틀을 꼬박 달리자 나샴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샴의 마을은 생각보다 컸다. 건물은 대부분 납작했고 돌을 쌓아서 만든 담을 갖고 있었다. 모래바람을 막기 위한 것 같았다. 오아시스를 끼고 있는 탓인지 과일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나무도 보였다. 수확물로 보이는 것을 들고 분주히 오가던 나샴들이 갑자기 들이닥친 비행군단을 보고 놀라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재빨리 보트에서 내린 미갈루가 그들을 안심시켰다. 세영은 지쳐서 허덕이는 모래상어에게 고기를 한 덩이씩 물려서 돌려보냈다. 마지막으로 하늘고래에게도 먹이를 준 후 보트를 분리했다. 떼어낸 보트를 번쩍 들어 올린 그녀가 미갈루의 옆으로 다가가 물었다. “영감탱이, 부화실 어디야?” 미갈루의 말에 안심하던 나샴들이 다시 기겁하며 물러섰다. 얼핏 봐도 크기가 작고 시들거리는 나샴만 마을에 남아있었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세영을 돌아본 미갈루가 손을 들어 부화실을 가리켰다. “저기, 마을 중앙에 있는 건물일세.” “내 동료들 잘 대접하고 있어라. 소홀하면 죽는다?” 경고하듯 한마디 던진 세영이 보트를 들고 부화실로 향했다. 보트에서 폴짝 뛰어내린 마리엔이 세영의 뒤를 쫓아왔다. “저도 돕게 해주세요!” “나도!” 질세라 달려든 시디발라가 세영의 다리에 매달렸다. 세영은 피식 웃으며 그들을 돌아봤다. “안 그래도 마리엔에게 부탁하려고 했어요. 마리엔의 힘이 필요하거든요. 시디발라, 넌 와도 잔심부름이나 해야 하는데 괜찮겠어? 피곤할 텐데?” “돕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화색이 도는 마리엔과 달리 부루퉁해진 시디발라가 툴툴댔다.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고맙다고 말하며 보트를 들고 앞장섰다. 부화실로 들어서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반지하에 가까운 바닥에 내려서자 뜨끈뜨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부화실 내부의 온도가 외부보다 높게 유지되는 것 같았다. “여긴 굉장히 덥네요.” 마리엔이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근처에 보트를 내려놓은 세영이 찬찬히 안을 돌아보았다. 화로처럼 속이 움푹 팬 둥근 석좌가 일정한 거리마다 놓여있었다. 다가가 들여다보자 속에 모래가 가득 찬 채였다. 모래를 헤집자 말라서 딱딱해진 알껍데기가 나왔다. “여기 알을 넣고 부화시키는 모양이네.” “알을 부화시키게?” 석좌에 매달려 안을 들여다본 시디발라가 물었다. 세영은 그를 빤히 쳐다보며 “안 그럼 내가 여기까지 왜 왔겠냐?” 하고 되물었다. 시디발라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난 알을 몽땅 달라기에 어디 다른 곳에 쓰려고 하는지 알았지.” “내가 부화시켰는데 수컷이 튀어나왔다. 그럼 그 영감탱이가 책임지라고 지랄할 건데, 그 꼴을 어떻게 봐? 아예 나한테 모든 권리를 땡겨놓고 시작하는 게 낫지. 실패해도 내 알인데 지들이 어쩔 거야.” 어쩔 수 없이 도와주게 됐지만, 잘못됐다고 덤터기를 쓰는 것은 질색이었다. 눈치 빠른 도마뱀 새끼는 세영의 뜻을 알아채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알을 넘겨주었다. 어느 쪽이 됐건 저희에게 손해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세영이 득득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도마뱀 새끼. 기회만 오면 온몸이 퍼렁둥이가 될 때까지 패주겠어.” “야, 넌 왜 맨날 때리려고 하냐. 세상이 다 주먹으로 해결되는 게 아냐.” 시디발라가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세영은 콧방귀를 뀌며 “돈이랑 주먹으로 해결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하고 대꾸했다. 순간적으로 할 말이 없어진 시디발라가 버벅거렸다. “세영님, 그런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으세요?” 부화실 안을 기웃거리던 마리엔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시디발라 역시 눈을 반짝이며 세영을 바라봤다.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말했다. “아니, 뭐. 도마뱀 새끼 말을 들었을 때 답은 알았어요. 확률이 반반이라서 말은 안 했지만. 여기 와서 확인해보니 맞는 것 같네요.” 메인 퀘스트 중에 이것과 똑 닮은 것이 있었다. 그때는 도마뱀이 아니라 드래곤이었지만, 파충류라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세영은 부화실의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보세요. 벽에 구멍이 있죠? 그리고 바닥에도 일정 간격으로 구멍이 있고.” “진짜네? 저게 뭔데?” “벽에 있는 구멍은 물이 들어오는 곳, 바닥에 있는 구멍은 물이 나가는 곳이야.” 세영은 시디발라에게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파충류 중에는 부화할 때의 온도로 성별이 결정되는 종이 있다. 드래곤도 그런 놈들이었는데 부화기간 내내 유저들을 닦달하며 알을 데워라 식혀라 지랄염병이었다. “낮은 온도에선 암컷만 태어나. 그보다 높은 온도에선 수컷과 암컷이 섞여서 태어나고. 그것보다 더 높으면 수컷만 태어나지. 원래는 나샴도 여기 물을 끌어들여서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했을 거야. 그런데 여긴 물이 없지.” “엇, 그러면…….” “그래. 온도가 너무 올라가 버려서 수컷만 태어난 거야. 덤으로 지능까지 떨어진 거고.” 세영은 인벤에서 온도계를 꺼내 모래 여기저기에 꽂았다. 시디발라가 반색하며 말했다. “그럼 여기 물만 잔뜩 넣어두면 문제가 해결되는 거네?” “그렇게 간단한 문제라면 좋겠지만, 나샴들도 여기 물을 일부러 뺀 건 아닐 거야. 아마 오아시스의 물이 부족해져서 여기까지 물을 댈 여력이 없었을걸.” 세영은 말 나온 김에 미갈루에게 물어보고 오라며 시디발라를 보냈다. 잠시 후 시디발라가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왔다. “네 말이 맞았어. 지금의 오아시스는 식수랑 생활하는 데 쓰는 것도 아슬아슬하대. 예전엔 물이 많았는데 점점 말라버리고 있댔어.” 이미 그럴 거라고 예상했던 세영은 놀라지 않았다. 보트에서 내린 알을 석좌 옆에 쌓으며 밖으로 나가라는 듯 손을 휙휙 저었다. “디안이랑 리먼하고 손잡고 오아시스 옆에 가서 레인스틱이나 연주해. 비가 오면 당분간 먹을 물은 확보되겠지.” “우씨, 왜 자꾸 날 쫓아내려고 해?” “쫓아내는 게 아니라 이제 너랑 나는 할 일이 없거든.” 뜻밖의 말에 놀란 시디발라가 “엥?” 하고 반문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피식 웃은 세영이 마리엔 쪽을 돌아봤다. “이제 모든 건 마리엔에게 달렸어.” “저, 저요?” 마찬가지로 눈을 동그랗게 뜬 마리엔이 손으로 제 가슴을 가리켰다. 고개를 끄떡인 세영이 인벤에서 책 한 권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물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라는 수상한 제목이었지만, 사실 워터 마스터리 스킬을 얻기 위한 스킬북이었다. “자, 이걸 우선 읽고 물에 대해 이해한 후 시작하죠.”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떡인 마리엔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얇은 책이라 읽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 읽고 책을 덮자 세영이 그것을 받아 꼼꼼히 확인했다. 사용된 스킬북으로 나오는 것을 보니 성공한 듯했다. 만족한 세영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수계 마법 중에 일정 범위를 물로 감싸서 유지하는 거 있죠? 물의 가호나 운딘의 키스나 물의 장막이나.” “네.” “어느 게 제일 자신 있어요?” “음, 물의 장막……. 아니, 운딘의 키스요.” 잠시 고민하던 마리엔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둘 다 비슷한 마법이지만, 운딘의 키스는 정령마법에 한발 걸친 수계 마법이었다. 물을 끌어올 곳이 없는 장소에서 사용하기에 가장 적절한 마법이기도 했다. 세영이 석좌 주변에 둥글게 원을 그렸다. “그럼 범위는 이렇게 석좌를 감싸듯이 해주세요. 원기둥형으로 유지하는 거예요. 할 수 있겠어요?” “자신은 없지만, 해볼게요.” “자신 없으면 안 되는데. 앞으로 나샴들이 멸종하느냐 마느냐는 마리엔의 손에 달렸어요.” 무시무시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하는 세영이었다. 안색이 파리해진 마리엔이 완드를 들어 올리며 캐스팅을 했다. “운딘의 키스!” 잠시 후 푸르스름한 막이 석좌를 감쌌다. 세영은 온도계가 내려가는 것을 관찰했다. 아래로 내려가던 온도가 어느 순간 고정되었다. “범위를 좀 더 넓게 할 수 있겠어요? 원기둥을 두껍게 했으면 좋겠는데.” 말없이 고개를 끄떡인 마리엔이 완드를 흔들었다. 푸르스름한 막이 좀 더 두꺼워지며 파래졌다. 세영은 잠시 후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떡였다. “좋아요. 이대로 유지해주세요. 알 갖고 올게요.” 세영은 쌓아둔 상자에서 봉인을 풀고 여덟 개의 알을 꺼냈다. 알을 손에 쥐자 자동으로 아이템 정보가 떠올랐다. [나샴의 알] 도구속성 -요리 재료 나샴이 낳은 알이다. 맛은 없어 보인다. 적절한 조건을 갖추면 부화할 것 같다. 부화에 필요한 시간 : 3/4일 하루를 남겨두고 마법처리를 한 것이 참 노렸구나 싶었다. 세영은 모래를 파고 알들을 파묻었다. 위치에 따라 모래의 온도가 달랐으므로 적절히 나눠서 분배했다. ‘일단 29도, 31도, 33도, 34도로 두 개씩 해봐야겠군.’ 알을 다 묻은 다음에는 마나 포션을 꺼내 마리엔의 손에 쥐어 주었다. 아직 레벨이 낮아 마나통도 작은 마리엔은 벌써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영은 안쓰러운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견디기 힘들 때마다 마셔요.” 말없이 고개를 끄떡인 마리엔이 포션병을 꽉 쥐었다. 세영은 아까부터 말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얼굴의 시디발라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부화실에서 멀어지기 무섭게 시디발라가 속닥속닥 물었다. “너도 할 수 있는 거 아냐? 근데 왜 쟤만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해?” “할 수야 있지. 그런데 이번처럼 스킬 올리기 좋은 퀘스트가 어디 있다고 내가 하냐.” 노가다 없는 만렙도 있을 수 있지만, 노가다를 하면 만렙이 될 수 있다. 특히 마법 스킬은 노가다를 해야지 키울 수 있었다. 지금껏 적당한 기회가 오지 않아 미뤄뒀을 뿐이었다. 시디발라는 곧바로 납득했다. 그와 디안은 여행 내내 신나게 굴려졌지만, 마리엔과 리먼은 상대적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것 때문에 마리엔이 시무룩해질 때도 있었으니까. 세영이 얼마나 사람의 피를 말리는지 알고 있는 시디발라는 걱정부터 앞섰다. “마리엔, 괜찮을까.” “괜찮아. 다 될 만하니까 시키는 거야. 너도 죽는다 어쩐다 하면서 결국 잘했잖아?” 천연덕스러운 세영의 대답에 시디발라의 혈압이 치솟았다. 엄살을 떠는 게 아니라 정말 숨이 넘어갈 뻔했는데도 어서 스킬을 쓰라며 채찍질하던 세영이 떠올랐다. 절로 입이 삐쭉 튀어나왔다. “마녀.” “우리 시디발라. 요즘 좀 편해졌지? 이제 슬슬 다른 스킬도 배워볼까?” 세영이 히죽히죽 웃으며 물었다. 안색이 파래진 시디발라가 슬슬 뒷걸음치다가 “나, 난 디안이 불러서!” 하고 쏜살같이 도망쳤다.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다시 부화실 안으로 들어갔다. ──────────────────────────────────── 샤르마흐 사막 (10) 마리엔은 손에 쥔 완드가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완드가 떨어지지 않게 꼭 움켜쥐는 것뿐이었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렸지만, 그녀의 의지로는 멈출 수가 없었다. 식은땀이 그녀의 이마를 타고 뚝뚝 떨어졌다. ‘주, 죽을 것 같아.’ 이렇게 오랫동안 마법을 쓴 것은, 그것도 같은 마법을 쭉 유지한 것은 처음이었다. 너무 힘들어서 눈앞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당장 그만둬버리고 싶었지만, 코앞에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는 알들이 있었다.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었다. “흑, 으흑, 으어엉…….” 바짝 마른입에서 절로 울음이 나왔다. 서 있기도 힘들어서 바닥에 주저앉은 지 오래였다. 한참을 훌쩍훌쩍 울던 그녀는 습관처럼 손에 쥔 포션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씁쓸하고 싸한 맛이 나는 액체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뱃속이 화한 느낌이 들며 온몸을 쥐어짜던 고통이 사라졌다. 하지만 이것이 오래가지 않을 거란 건 앞선 수십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때 젖은 수건이 다가와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눈앞이 빙빙 돌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세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리엔이 울먹이며 말했다. “세, 세영님. 저 너무 힘들어요.” “힘들죠? 마력이 딸려서 그래요. 그래도 잘하고 있어요. 조금만 참아 봐요.” “흐, 흐윽. 어, 언제까지요?” “해가 뜰 때까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였다. 몸을 굽힌 마리엔이 웩웩 토하기 시작했다. “어이쿠, 어이쿠.” 소리를 내며 등을 두드려준 세영이 수건으로 더러워진 입가를 닦아주었다. 멀건 위액만 잔뜩 토해낸 마리엔이 울먹이며 말했다. “너, 너무 힘들어요. 못 버틸 것 같아요.” “저런. 너무 힘들면 포기해요. 어쩌겠어요. 쟤들 운명이지.” 그런 말을 하면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리엔은 좀 더 크게 엉엉 울었다. 세영은 그녀를 다독거리면서 마나포션을 먹였다. 간신히 숨을 돌린 마리엔이 히꾹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세영이 뭔가를 그녀의 귓가에 들이댔다. “자, 이거 들어봐요. 들려요?” 귓가에 닿은 물체에서 삑삑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리엔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세영은 웃으며 나샴의 알이라고 말해주었다. 알 속에서 새끼가 내는 소리라고. “마리엔이 잘 버텨준 덕분에 이놈들이 이제 알을 깨고 나올 준비를 하고 있어요. 조금만 더 참으면 껍질을 깨고 나올 거예요. 그때까지 참을 수 있겠어요?” 마리엔은 울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세영이 “힘들 텐데 괜찮겠어요?” 하고 확인하듯 물었다. 다시 고개를 끄떡인 마리엔이 “참을 수 있어요.” 하고 말했다. 아까와 달리 울먹임이 사라진 목소리였다. 기나긴 인내의 시간이 흘렀다. 마리엔은 세영이 입 안에 넣어주는 과일즙과 마나포션을 먹으며 버티고 또 버텼다. 고통스러움을 넘어서 세포 하나하나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지만, 버틸 수 있었다. 살겠다고 삑삑거리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의지로는 버틸 수 없는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마리엔은 눈앞이 검어졌다가 밝아졌다가 반복하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시야가 콩알만큼 작아지더니 팟 소리와 함께 꺼져버렸다. 마리엔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낯선 곳이었다. 흙을 발라 만든 토벽에 바닥에 털가죽만 깔린 휑뎅그렁한 집이었다. 벽에 난 조그마한 창문으로 밝은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당황한 마리엔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핑 돌았지만, 어찌어찌 일어나서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문으로 사용되는 천을 젖히자마자 강렬한 햇살이 눈을 찔러왔다. “어, 일어났어?” 반가워하는 목소리에 눈을 돌리자 조그마한 것들과 놀고 있는 시디발라가 보였다. 마리엔은 눈을 깜빡였다. 중형견 크기의 나샴들이 시디발라에게 매달려 삑삑거리는 소리를 냈다. 알 속에 있을 때와 똑같은 소리였다. “얘들 좀 봐. 알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막 뛰어다녀. 신기하지?” 마리엔은 시디발라의 말을 흘려들으며 멍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작은데 머리도 꼬리도 손도 발도 다 달려있었다. 조그마한 손끝에 손톱까지 붙어있는 게 신기했다. 시디발라는 제 자식들을 자랑하듯 새끼 나샴을 하나하나 짚으며 말했다. “얜 다루마바라, 그리고 얘는 아유르바르와다, 쟤는 라기바흐라고 지었어.” 셋 다 수컷이라고 덧붙인 시디발라가 나머지는 암컷들이라고 말했다. “얜 퇴레게네야. 그리고 애가 카이미쉬. 그리고 얜 소르칵타니. 얘는 차부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부이야. 어때? 괜찮지?” “쟤 좀 말려봐. 여기랑은 전혀 안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해도 듣지를 않아.” 멀리서 지켜보던 디안이 슬그머니 다가와서 말했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마리엔은 입을 열었다 다시 닫았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흐느끼는 그녀를 보고 당황한 디안이 버벅거렸다. “마, 마리엔? 왜 울어?” “내가 지은 이름이 그렇게 감동적이었나?” “멍청아, 좀 닥쳐봐!” 툭탁거리는 두 사람을 보고 눈물을 쓱쓱 닦은 마리엔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도중에 기절해버렸어. 그러면 안 되는데, 애들이 죽을 수도 있는데, 그냥 나 힘들다고 정신을 놔버렸어.” 그때였다. 마리엔의 목소리를 들은 새끼 나샴들이 갑자기 시디발라를 버리고 그녀에게 몰려들었다. 삐삐거리는 나샴들에게 놀란 마리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아달라는 듯 폴짝거리는 나샴들을 보고 디안이 웃었다. “이것 봐. 얘들도 너 알아보잖아. 네가 알에서 깨워준 사람인 걸 아는 거야.” “맞아. 기절하면서까지 도와줬으면 됐지, 뭘 더해주려고 그래.” 나샴들을 빼앗긴 시디발라가 툴툴거리며 말했다. 아직 실감을 못 하고 있던 마리엔이 “그렇지만 내가 기절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 하고 우물쭈물 말했다. 그때 과일로 가득 찬 바구니를 들고 돌아온 리먼이 그녀를 보고 반색했다. “마리엔, 깨어났군요. 일어나지 않아서 걱정했습니다. 세영님이 괜찮으니 자게 두라고 하시긴 했지만, 너무 오래 잠들어 있어서요.” “…세영님은 지금 어디에 계세요?” 혹시 세영님이 나한테 실망하진 않으셨을까. 마리엔은 그것이 제일 걱정이었다. 허허 웃으며 과일바구니를 내려놓은 리먼이 그녀에게 답해주었다. “새끼 나샴들이 먹을 것을 사냥하러 가셨습니다. 어린 나샴은 날고기를 먹는데, 신선한 고기가 좋다고 해서요. 곧 돌아오실 겁니다.” 마리엔의 시선이 발치의 새끼 나샴들에게로 향했다. 양손을 다소곳이 모은 나샴들이 마리엔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리먼이 바구니에 담긴 과일을 마리엔의 손에 쥐어주었다. “먹이를 달라는 겁니다. 이걸 주세요. 과일도 잘 먹습니다.” 마리엔의 손에 쥐어진 과일을 보자 나샴들의 눈이 한층 더 초롱초롱해졌다. 아직 어린 나샴들의 눈은 황금색이 아니라 아주 새까맸다. 세영의 눈과 똑같은 색에 마리엔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손에 쥔 과일을 내밀자 순식간에 머리를 내민 새끼가 그것을 물고 통째로 꿀꺽 삼켜버렸다. 과일을 먹지 못한 새끼들이 요란하게 삑삑거렸다. “어, 어…….” 당황한 마리엔은 손에 잡히는 대로 주섬주섬 과일을 내밀었다. 과일을 집어 올리기 무섭게 새끼들은 족족 그것을 꿀꺽 삼켜버렸다. 먹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마리엔이 허둥지둥 바구니를 뒤질 때였다. “이 똥돼지들. 이제 막 일어난 사람을 괴롭히고 있냐.”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마리엔의 손을 멈칫하게 했다. 과일을 받아먹던 나샴들이 일제히 빠빠거리며 세영에게로 몰려갔다. 집채만 한 생선을 장대에 꿰어 매고 오던 세영이 손을 내저었다. “저리 가. 계속 얼쩡거리다가 밟힌다?” 하지만 이미 생선 냄새를 맡은 나샴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더 격하게 빠빠 하고 외쳤다. 한숨을 내쉰 세영이 디안을 향해 말했다. “디안, 미안한데 검 좀 빌려줘요.” “아, 네. 여기.” 얼른 세영의 옆으로 디안이 검을 내밀었다. 바닥에 장대를 콱 꽂은 세영이 생선의 옆구리 살을 큼지막하게 잘라냈다. 잘라낸 살을 슥슥 저며서 떨굴 때마다 나샴들이 붕어처럼 뛰어올라 받아먹었다. 정확히 세 덩이의 살코기가 없어진 뒤에야 만족한 나샴들이 얌전해졌다. 세영은 클렌징 스킬로 검을 깨끗하게 만들어 디안에게 돌려주었다. “생선 자르는데 빌려달라고 해서 매번 미안해요.” “아닙니다. 제 검을 써주시는 게 영광이죠.” 고개를 꾸벅 숙인 디안이 옆으로 물러났다. 그동안 마리엔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머리를 긁적인 세영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배가 볼록해진 나샴들이 세영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오는 게 보였다. 여느 때처럼 싱긋 웃은 세영이 말을 걸었다. “마리엔, 몸은 좀 괜찮아요?”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고개를 숙인 마리엔이 입술을 꼭 깨물었다.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빡인 세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저기. 혹시 화났어요?” 쏟아지는 눈물을 훔친 마리엔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지만 세영은 여전히 마리엔이 화났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미안해요. 스킬이 쑥쑥 올라가는 게 눈에 보이니까 나도 모르게 욕심이 나서 적당히 멈추질 못했어요. 한 번에 마스터 찍는 건 무리라는 걸 알고는 있었는데…….” “세, 세영님은 저한테 화 안 나셨어요?” 마리엔은 꼴사납게 히꾹거리면서 물었다.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세영이 “아니, 제가 왜 마리엔에게 화가 나요.” 하고 말했다. 마리엔은 계속 히꾹거리며 말했다. “제, 제가 도중에 기절해서. 기, 기절하면 안 되는데. 흑, 흡.” “아, 기억을 못 하는구나. 마리엔은 잘해냈어요. 마지막까지 잘 버텼다고요.” “지, 진짜요?” “마지막 새끼가 잘 안 나와서 껍질을 까주고 있는데, 갑자기 마리엔이 옆으로 쿵 쓰러지잖아요. 그게 아니라면 잡았을 텐데 못 잡아줘서 미안해요. 머리는 안 아파요?” 안심한 마리엔이 고개를 끄떡였다. 갑자기 긴장이 풀어져서 몸이 휘청거렸다. 화들짝 놀란 세영이 그녀를 부축해 집 안으로 데려갔다. 몰려온 새끼 나샴들이 요란스럽게 삐삐거렸다. 마리엔을 자리에 눕힌 세영이 놈들을 밖으로 몰아냈다. “시끄러, 이놈들아. 니들 때문이잖아. 어서 나가. 쉭쉭.” 눈을 감은 마리엔에겐 그 모든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가물거리는 정신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마음이 깃털처럼 포근히 내려앉았다. 마리엔은 순식간에 밀려드는 수마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 샤르마흐 사막 (11) 세영은 석좌를 툭툭 걷어찼다. 끌로 파면서 생긴 부스러기들이 단번에 후드득 떨어져 나갔다. 손 가는 대로 대충 팠지만, 조각 스킬을 마스터한 탓에 삐져나온 곳 하나 없었다. “일단 틀은 완성했고…….” 암컷이 부화하는 온도를 알아냈으니 세팅만 하면 되었다. 세영은 석좌 전체에 마법진을 파고 동력으로 마정석을 박아 넣었다. 일정한 온도 이상으로 올라가면 마법진이 발동되어 열을 식혀주는 방식이었다. ‘나샴들이 마정석을 갖고 있어서 다행이야.’ 석좌에 박아 넣은 마정석들은 추락한 아스트리드호의 동력원이었다. 알을 찾기 위해 배를 뒤지던 나샴들이 그저 보기에 예쁜 돌로 생각해서 주워온 것이다. 세영은 그것 모두를 아낌없이 마법진에 사용했다. ‘당분간은 암컷이 많은 편이 좋겠지.’ 세영은 나머지 알들을 석좌에 파묻었다. 온도를 균일하게 유지하도록 맞춰둔 탓에 굴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냥 모래에 묻어두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 끝이었다. 세영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손을 털었다. 부화실 밖으로 나간 그녀는 새끼들과 놀고 있는 시디발라에게 미갈루를 데려오라고 말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온몸에 화색이 도는 미갈루가 나타났다.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 얼마나 얄밉던지 한 대 때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세영은 그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이쪽의 세 개는 암컷이 부화하는 곳, 저쪽의 세 개는 수컷이 부화하는 곳이야. 다른 놈들에겐 알리지 말고 영감만 혼자 알고 있어. 부화실에 출입하는 놈들도 제한하고.” 세영은 부화온도가 문제였다는 것과 석좌의 작동방법을 간단히 설명한 후 덧붙였다. “아껴 쓰면 10년 정도는 무리 없이 작동할 거야. 그 뒤엔 영감이 알아서 해. 부화장소를 옮기든가, 여기 다시 물을 끌어넣든가, 마정석을 바꾸든가.” 세영의 설명을 들은 미갈루는 기뻐하며 석좌 속에 든 알을 살폈다. 그는 감격에 젖어 몇 번이고 슉슉거리는 소리를 냈다. 서늘한 모래를 어루만지던 그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물었다. “다른 부족도 우리와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네.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겠는가?” 세영은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보자보자 했더니 사람을 아주 보자기로 보는 모양이다. “내가 무슨 신이야?” “하지만…….” “욕심도 적당히 부려. 동료들이 아니었으면 여기도 안 도왔을 테니까.” 여기야 굴러다니는 마정석으로 가볍게 처리했지만, 다른 곳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꽤 골치가 아플 터였다. 세영은 그렇게 해줄 생각도 없고 필요도 못 느꼈다. 나샴이 멸종하건 말건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여기서 살 것도 아닌데. 잠시 그녀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던 미갈루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럼 하다못해 해결법을 알려주는 건…….” “미쳤어? 걔들에게 ‘니들은 암컷 없지? 우리 부족엔 암컷 나온다?’ 자랑이라도 하려고? 헛소리 말고 주둥이 닫고 있어.” “자랑이 아닐세. 다른 부족도 사정이 뻔한데, 우리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모른 척하는 건 아니지 않나.” “영감탱이. 왜 이렇게 미련을 떨어. 만약 여긴 암컷이 안 태어나는데 다른 부족에선 암컷 뽑아내면 가만히 있을 거야? 가만히 입 닫고 있어도 쳐들어올까 봐 걱정해야 할 상황이라고.” 미갈루는 실망한 얼굴로 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세영은 미심쩍은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영악한 도마뱀 새끼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지금 이렇게 모른 척 찡찡거리는 이유도 뻔했다. 불쌍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짓던 미갈루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좀 도와주면 안 되겠나?” “하하, 미친.” 탑에 대한 단서 때문에 계속 참아줬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세영은 당근을 버리고 대신 주먹을 들었다. 도돌이엔 그저 매가 약이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미갈루의 목을 잡으며 “움직이지 마라. 뼈 부러진다.” 하고 경고했다. 그때 타이밍도 나쁘게 시디발라가 새끼들을 끌고 부화실로 들어왔다. “애들이 빠빠 찾는데 뭐하고. 어?” 그의 뒤로 우르르 몰려든 새끼들이 세영을 둘러싸고 빠빠 하고 울어댔다. 굳어있던 시디발라가 “지, 지금 때리는 거야?” 하고 물었다. 숨어서 남을 패는 꼴이 되어버린 세영이 난처한 얼굴로 손을 놨다. 그러자 미갈루가 “아이고!”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놀란 시디발라가 “왜, 왜 그래?” 하고 물었다. 미갈루는 꺼이꺼이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저 다른 동족들을 도와달라고 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심하게 할 필요는 없잖나.” “시발, 진짜!” 울컥한 세영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어차피 싫은 소리 들을 거 몇 대 패고 들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야. 그만 좀 해.” 바락 소리 지른 시디발라가 앞으로 나섰다. 예상과 달리 그는 세영이 아니라 미갈루를 노려보고 있었다. “얘가 지금까지 많이 도와줬잖아. 뭘 더 도와달라는 거야? 너 진짜 뻔뻔하다.” “시디발라?” 눈을 동그랗게 뜬 세영이 시디발라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잔뜩 화가 난 시디발라는 미갈루에게 따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너희는 다 함께 애들 키운다며? 왜 자꾸 우리한테 맡기는 거야? 우리가 보모야?” “워낙 어린아이들이라 아직 부모의 손길이 필요해서…….” “얘한테 떠맡겨서 발목 잡으려는 게 아니고?” 시디발라의 되물음에 움찔한 미갈루가 입을 다물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삐쭉 입을 내민 시디발라가 말했다.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거면 도와줬을 거야. 근데 우리 핑계로 얘 이용하려는 거잖아. 이게 도와주는 거야? 너희 문제에 부려 먹는 거지.” 이쯤 되자 아무리 뻔뻔한 미갈루라도 대꾸할 말이 없는 듯했다. 흥하고 코웃음 친 시디발라가 불안하게 삑삑거리는 새끼 나샴들을 미갈루에게 밀어냈다. “너희는 할아버지랑 있어. 따라오지 말고.” 냉정한 태도에 우왕좌왕하던 나샴들이 얌전히 미갈루 옆에 앉았다. 새끼들의 애절한 눈빛에도 시디발라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세영의 손을 잡아당겨 부화실 밖으로 나갔다. 입구를 빠져나가기 전 그는 미갈루를 돌아보며 마지막 경고를 남겼다. “더는 내 동료들 이용해 먹지 마. 안 참을 거야.” 박력 있게 말한 시디발라가 세영을 잡아당겼다. 세영은 선선히 시디발라의 걸음에 보조를 맞췄다. 부화실에서 멀리 벗어나자마자 그녀의 손을 놓은 시디발라가 타박했다. “너도 참 그렇다. 아무리 호구라도 그렇지, 언제까지 이용당해줄 생각이었어?” “…….” 세영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 호구라고 생각했던 동료들에게 넌 호구라고 까이는 것은 정말이지 색다른 기분이었다. 그 사이 시디발라는 투덜투덜 불평했다. “디안도 대책 없지만, 넌 어째 더한 것 같아. 돈주머니 막 퍼줄 때부터 불안했는데 쟤들한테까지 이용당할 필요는 없잖아. 바보도 아니면서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멀뚱히 쳐다보는 세영의 반응에 시디발라가 가슴을 탕탕 치며 “아이고, 답답해!” 하고 소리를 질렀다. 세영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내가 답답해?” “그래! 다른 애들도 말은 안 해서 그렇지, 너 너무 호구 같은 거 아니냐고 걱정하고 있다고. 특히 마리엔, 걔는 네가 여기 발목 잡힐까 봐 걱정이 산더미야!” “흐음, 그렇단 말이지?” 세영의 입꼬리가 삐쭉 올라갔다. 연약한 동료들이 충격을 받을까 봐 내숭을 떨었는데 그게 좀 지나쳤던 것 같았다. 심상치 않은 반응에 시디발라의 꼬리가 빠르게 흔들렸다. 세영을 힐끔거리던 그가 불안하게 물었다. “왜, 왜 그래? 뭔가 엄청 기분 나쁜 얼굴을 하고 있는데?” “별 거 아냐. 그랬구나. 답답했구나. 미안. 앞으로는 안 그럴 테니까.”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사근사근한 목소리인데 전보다 더 불안해졌다. 시디발라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세영은 연신 자신의 안색을 살피는 그를 모른 척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럼 뭐, 내 방식대로 하면 되지.’ 간단하고 심플하게. 입속으로 중얼거린 세영이 빙긋 웃었다. 다음날, 부화실에서 새로운 새끼들이 깨어났다. 27마리 모두 암컷이었다. 전에 태어난 5마리의 암컷을 합치면 무려 32마리의 암컷이 탄생한 것이다. 함께 태어난 3마리의 수컷들도 기존의 나샴과 달리 무척 영리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나샴들은 일행을 신처럼 추앙하고 숭배했다. 세영이 부른다는 소리에 하던 일도 팽개치고 달려올 정도였다. “자, 한 마리도 빠짐없이 다 모였지?” 마을의 중앙에 버티고 선 세영이 나샴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35마리의 새끼들이 그녀의 발치에서 꼬물거리고 있었다. 동시에 고개를 주억거린 나샴들이 새끼들을 보며 헤헤거리고 웃었다. 찍어낸 것처럼 모자라 보이는 얼굴에 쓴 웃음을 지은 세영이 말했다. “다들 알겠지만, 이번에 태어난 내 새끼들이야.” 제 말을 하는 것을 알아챈 새끼들이 일제히 삑삑거렸다. 나샴들은 눈이 동그래진 채로 세영의 입만 쳐다보았다. “난 급히 여행을 떠나야 해서 이 애들을 돌볼 수가 없게 됐거든. 그래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얘들을 맡아줄 마을이 필요한데 말이야. 혹시 추천해줄 곳 있냐?” “우, 우리 마을 좋다. 우리 착하다.” 눈치만 보던 울룰루가 잽싸게 입을 열었다. 그와 같은 산란기에 태어난 형제인 구루무와 뭄바무가 얼른 머리를 끄떡이며 도왔다. “우리 마을 태어났다. 우리 마을 좋아한다.” “우리 잘 돌본다. 새끼 잘 키운다.” 다른 나샴들도 차마 입을 못 열 뿐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겨우 태어난 암컷들을 다른 부족으로 보낼까 봐 걱정이 되는 눈치였다. 부족의 경비 대장인 탄다무는 연신 안절부절 못하며 꼬리 끝을 물어뜯고 있었다. 난처한 듯 뺨을 긁적거린 세영이 말했다. “뭐, 너희가 나한테 제일 익숙한 나샴이긴 해. 근데 너희는 다 수컷이잖아. 얘들은 세 마리 빼고 다 암컷이고.” “우리 수컷이다. 암컷 잘 지킨다.” 울룰루가 가슴을 탕탕 치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히죽 웃은 세영이 발끝에 걸리는 돌을 가볍게 걷어찼다. 아기 주먹보다 조금 큰 돌을 낚아채 손에 쥔 그녀가 말했다. “난 니들을 믿거든. 엄청 믿어. 혹시 그럴 리가 없겠지만, 이 어린 애들에게 ‘내 알을 낳아!’ 하고 덤빈다든가. ‘일족의 부흥을 위해 희생해라!’ 하고 강요한다든가. ‘싫어도 짝짓기해야 해!’ 하고 협박을 한다면.” 우둑우둑 소리와 함께 부서진 돌이 가루가 되어 아래로 흘러내렸다. 세영은 돌 알갱이가 남은 손을 탁탁 털며 말을 이었다. “가운데 알은 쥐어서 터트리고 남은 것은 열두 조각으로 토막 친 다음, 팔다리를 잘라서 산채로 모래마귀에게 먹이로 줄 거야.” 다리 사이를 꼬리로 가린 나샴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세영은 히죽히죽 웃으며 그들을 보고 물었다. “혹시 내 말을 안 믿을까 봐 걱정이 되는데, 직접 체험해보고 싶은 놈은 없냐? 이 어린 것들을 보고 욕정이 들끓는다든가. 미래의 내 신부라는 생각이 든다든가.” “…….” “야, 쫄지 마. 절대로 접근하지 말라고는 안 했어. 내가 또 한 너그러움 하잖아. 너희가 너무너무 잘해줘서 애들이 ‘울룰루 아저씨에게 시집갈래!’ 라든가 ‘탄다무 오빠랑 결혼할 거야.’ 이러면 내가 어떻게 말리겠어. 안 그래?” 나샴들의 시선이 울룰루와 탄다무에게 쏠렸다. 세상의 암컷들을 모두 그들이 차지한 것처럼 살벌하기 짝이 없는 눈이었다. 그때 세영이 발로 바닥을 쿵 내리찍었다. 화들짝 놀란 나샴들의 시선이 세영에게 쏠렸다. “때가 되면 애들을 데리러 올 거야. 그때까지 잘 돌봐준다면 앞으로도 부족에 계속 암컷들이 태어나게 해주겠어. 하지만 만약 약속을 어기고 괴롭히거나 불행하게 만든다면…….” 세영이 엄지손가락으로 제 목을 슥 긋는 시늉을 했다. “너희의 뼛조각 하나도 남겨놓지 않을 거야. 명심해.” 안색이 파래진 나샴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떡였다. 그들의 뇌리에 세영은 ‘무서운 마귀’로 각인되어 있었다. 이제 ‘어린 새끼들을 사랑하는 무서운 마귀’가 될 예정이었다. 경고가 끝난 뒤 세영은 새끼들을 데리고 오아시스로 향했다. 동료들이 열심히 물을 채운 오아시스는 제법 새파래져 있었다. 세영은 오아시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경작스킬을 썼다. 거칠어진 땅을 고르고 땅 깊은 곳에서 수맥을 끌어올려 연못을 설치했다. 연못 주변에는 과실수를 잔뜩 심었다. 가드닝을 사용하자 나무들은 금방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 열매를 맺었다. 삑삑거리는 새끼들의 입에 열매를 물려준 세영이 말했다. “여긴 너희 거야. 오아시스가 말라붙어도 여기만큼은 괜찮을 거니까 굶지 말고.” 까만 눈을 반짝이는 새끼들의 콧등을 슬슬 쓰다듬은 세영이 덧붙였다. “삐삐랑 빠빠가 없어도 씩씩하게 커야 해. 구박하는 놈들은 패버려.” 그러자 새끼들이 무어라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세영의 능력으로도 어린 것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조금 아쉽다고 생각하던 세영이 이내 미련을 털며 씩 웃었다. 이제 떠날 시간이었다. ──────────────────────────────────── 샤르마흐 사막 (12) 떠나자는 세영의 말을 들은 동료들은 즉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반가움과 안도가 가득한 얼굴에 세영은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제가 여기 말뚝 박을까 봐 다들 걱정한 것 같네요.” “세영님은 상냥하시니까, 새끼들 때문에 여기 남겠다고 하실까 봐…….” 말하다 말고 고개를 푹 숙인 마리엔이 손을 꼬물거렸다. 그녀는 내심 나샴을 돕겠다고 나섰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이기적인 마음이지만, 나샴들에게 세영을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하하 웃은 세영이 손을 내저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제가 그렇게 호구는 아니거든요.” 그때 움집문을 밀며 미갈루가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눈이 날카로워진 마리엔과 시디발라가 세영의 앞을 막아섰다. 일행의 반감 어린 태도에 쓴웃음을 지은 미갈루가 고개를 숙였다. “이 늙은이가 헛된 욕심을 부렸네. 사막에 묶여 말라죽는다고 해도 변명할 수 없을 정도야. 다만 그대들에게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어 찾아왔으니 잠시만 시간을 내주게.” 잠시 머뭇거리던 일행들이 세영의 눈치를 보았다.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용건만 간단히.” 하고 말했다. 안색이 밝아진 미갈루가 급히 입을 열었다. “이전엔 말하지 않았지만, 은인께서는 이곳에서 안내자를 구하셨네. 우리에게 전승을 이어받은 자가 누구냐고 물었지. 그분이 말한 전승은 이미 잊혔지만, 예전부터 전해지는 노래가 남아있네.” 말을 마친 미갈루가 단조로운 노래를 불렀다. 자장가처럼 반복되는 멜로디의 가사는 다음과 같았다. 오직 우리만이 볼 수 있네. 하얀 사막으로 가는 길. 시련의 들판을 건너 지혜의 탑으로 향하는 자. 지금 여기서 전사의 노래를 들어라. 불꽃은 희생을 기리니. 사자는 죽음을 두려워 않네. 오직 우리만이 볼 수 있네. 사막을 베어내는 길. 세영의 눈이 반짝 빛났다. 메인 퀘스트로 이어지는 힌트였다. 신이 그녀를 엿 먹이려는 게 아니라면 지혜의 탑은 모래의 탑과 같은 것일 가능성이 컸다. ‘혹시나 하고 생각하긴 했지만, 헛수작을 부려서 꽝인 줄 알았더니.’ 게임에서 퀘스트에 대한 힌트를 얻으려면 관련 있는 자들에게 묻는 게 가장 빨랐다. 하지만 무턱대고 묻는다고 답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일정 이상의 호감도를 올리고 특정한 대화를 해야 정해진 키워드를 뱉어냈다. 세영이 나샴들을 도운 것은 동료들의 부탁과 더불어 모래의 탑에 대한 단서를 얻기 위해서였다. 게임 시스템이 그대로 적용되는 곳이니, 호감도를 높이면 이것저것 다 말해줄 가능성이 컸다. 다행히 그녀의 계산이 맞아떨어져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노래와 함께 전해지기를, 그곳은 선택받은 전사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무서운 장소네. 대신 시련을 이겨낸다면 고대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하지. 만약 그대들이 그곳으로 가고자 한다면 내가 안내해주겠네.” “좋아.” 세영은 두말없이 미갈루의 제안을 승낙했다. 그러자 흐릿하게 웃은 늙은 나샴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아주 예전에 우리 일족의 전사들도 그곳으로 향한 적이 있었지. 하지만 누구도 살아오지 못했네. 그대들이 베풀어준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는군.” “영감, 잡소리 하지 말고 빨리 안내해줘. 그걸로 은혜인지 뭔지 다 퉁치기로 할 테니까.” 세영의 재촉에 허허 웃은 미갈루가 준비를 하겠다며 사라졌다. 세영은 일행을 돌아보았다. 다들 겁을 먹기는커녕 기대 어린 얼굴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내 동료들이지.’ 어쩐지 뿌듯한 마음이 된 세영이 가볍게 말했다. “자, 그럼 무시무시한 장소라는 곳으로 가볼까요?” “네!” 일행은 너나 할 것 없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들은 세영을 필두로 하여 위풍당당하게 밖으로 걸어나갔다. “더워!” 뱃전에 늘어진 시디발라가 헉헉거리며 소리쳤다. 다른 일행들은 뭔가를 말할 기운조차 없는지 무릎에 이마를 박고 있었다. 아직 멀쩡한 것은 미갈루와 세영 뿐이었다. “무지막지 더워! 왜 이렇게 더운 거야! 우리 요리되고 있는 거 아냐?” 시디발라의 불평에 호응하듯 눈앞의 풍경이 일렁거렸다. 너무 높은 온도 때문에 공기 전체가 아지랑이처럼 출렁대고 있었다. 헥헥거리는 일행을 보다 못한 세영은 아이스 스피어를 전개해 허공에 띄웠다. 얼음의 창에서 흘러나온 냉기가 뜨거운 열기를 식혀주었다. 얼음을 움켜쥐려고 허우적대는 시디발라를 잡아 앉힌 세영이 그를 다독였다. “조금만 더 버텨봐. 거의 다 왔다고 하잖아.” “다 왔다고 한지 벌써 한 시간은 지났겠다!” 빼액 터진 불평에 미갈루가 허허 웃으며 꼬리를 움직였다. 그를 찌릿 노려본 시디발라가 배 한가운데 털썩 드러누웠다. “은인이라는 놈은 미쳤어. 어떻게 여길 걸어올 생각을 했담.”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은 보이는 모든 것을 불사를 기세였다. 배를 타고 와도 이렇게 힘든데 맨몸으로 가로지르는 건 상상하기도 싫었다. 시디발라는 그런 미친놈이 있다는 것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세영이 무심하게 그에 대꾸했다. “인간이 아니라잖아. 더위를 못 느낄 수도 있지.” <은인>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미갈루도 모른다고 했다. 부족에서도 이미 잊혀진 전승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오래 사는 아인종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불안한 얼굴로 입술을 깨문 시디발라가 물었다. “혹시 그놈이 던전을 정복했으면 어떡하지?” “뭘 어떻게 해. 덮쳐서 신기를 뺏어야지.” 배고프면 밥을 먹는다는 것처럼 단호한 대답이었다. 순간 멈칫했던 시디발라가 “그건 그렇지만….” 하고 수긍했다. 그때 아래를 주시하던 미갈루가 반갑게 소리쳤다. “저기야! 바로 저기에 균열이 있네.” 다급히 몸을 일으킨 시디발라가 뱃전으로 기어갔다. 하지만 아래를 내려다보아도 미갈루가 말하는 <틈>은 보이지 않았다. 어리둥절해 하는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 세영이 말했다. “우리 눈엔 안 보여. 나샴들만이 볼 수 있는 길이니까.” 이어서 뱃머리의 옆면을 탕탕 내리친 그녀가 날아가는 모래상어들을 멈추게 했다. 지나친 더위에 흐느적거리던 상어들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먼저 배에서 내린 미갈루가 보이지 않는 틈의 주변을 살폈다. 하늘고래와 모래상어들을 풀어준 세영이 그에게 다가갔다. “뭔가 보여?” “아아, 틀림없네. 전에 왔던 것과 똑같은 곳이야. 은인께서는 바로 이곳으로 들어가셨지.” 미갈루가 길쭉한 손가락으로 <틈>이 있는 허공을 가리켰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일행은 긴가민가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답답한지 혀를 날름거린 미갈루가 손을 내밀었다. “자, 내 손을 잡게. 안내해주겠네.” 세영은 주저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세영의 남은 한 손은 마리엔이 쥐었다. 마리엔의 손은 디안이, 디안의 손은 리먼이, 리먼의 손은 시디발라가 잡는 식으로 길게 늘어선 일행이 <틈>안으로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미갈루의 인도에 따라 걷기 시작하자 그야말로 살을 태울 것 같은 열기가 밀려들었다. ‘윽, 이건 좀 뜨겁긴 하네.’ 세영마저 뜨거움을 느낄 정도니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모두 비명을 참으며 필사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눈도 못 뜰 정도로 강렬한 백광이 번쩍이더니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금지에 발을 대는 자! 영혼까지 불타리라! “거인이여,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미갈루의 외침이 비명처럼 울려 퍼졌다. 폭풍처럼 밀려들던 열기와 백광이 주춤했다. 세영은 그제야 눈을 뜨고 목소리의 주인을 볼 수 있었다. -사막의 일족. 감히 내 앞을 가로막은 이유를 고하라. 그들의 앞에 불꽃으로 온몸을 감싼 거인이 서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피부는 검푸른 색이었고 한 손에는 초승달처럼 휘어진 도를 들고 있었다. 그 앞에 납작 엎드린 미갈루가 새끼처럼 보일 정도로 거구였다. 엎드린 채로 양손을 위로 들어 올린 미갈루가 말했다. “시련을 원하는 전사들을 데려왔습니다. 여기 고대의 맹약에 따라 청합니다. 제 몸을 희생의 제물로 삼아 불태우시고 이들은 지혜의 탑으로 들게 해주십시오.” -자격이 없는 이들이다. 허락할 수 없다! 목숨을 건 간청이 거부당했다. 미갈루는 재차 애원했지만, 거인은 들어주지 않았다. 두 사람의 꼬락서니를 잠시 지켜보던 세영이 앞으로 나섰다. “대체 무슨 자격이 필요하기에 지랄이야?” 화들짝 놀란 미갈루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떡 벌어진 주둥이에 커다란 수포가 맺혀있었다. 일행의 가장 앞에서 백광과 열기를 뒤집어쓴 미갈루는 온몸에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시뻘게진 도마뱀을 본 세영의 눈가가 꿈틀했다. 거인이 불쾌한 듯 우렁우렁 울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건방진 계집은 뭐지? “건방진? 야 이 새끼야, 초면에 다짜고짜 하이빔 날려놓고 뭐가 잘했다고 큰소리야!” 세영이 활활 불타는 거인의 얼굴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제일 앞에 서 있던 것이 미갈루가 아니라 마리엔이었다면?’ 하고 가정하자 놈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그녀는 인벤에서 잠자고 있던 무기를 꺼내 손에 꼈다. [얼어붙은 눈물의 징벌자 너클] 무기속성 -전설의 양손 무기 -공격 3420~3970 -추가타격 10% 타이틀 속성 -빙결 속성 -빙결 기술로 주는 피해 19% 증가 -공격속도 5% 증가 -적중 시 마비확률 5% -적에게 주는 피해의 3%를 생명력으로 전환 요구레벨 : 110 / 계정귀속 넘치는 공격력으로 굳이 너클을 찾아 낀 것은 놈을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세영은 이를 갈며 내뱉었다. “넌 진짜 나를 빡치게 했어. 곱게 죽을 생각은 버려라.” 마리엔에게 화상을 입힐 뻔했다는 것만으로 거인은 일백 번 고쳐 죽을 죄를 지었다. 도마뱀의 몸에 돋아난 물집의 수만큼 풀스윙으로 처맞아야 했다. “세영님, 조심하세요.” 화상을 입은 것은 아니었으나 눈썹 위쪽과 볼 한쪽이 빨개진 마리엔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화마가 스쳐 지나간 흔적에 세영의 미소가 더욱 흉악해졌다. “걱정하지 말고 저어기 구석에 가 있어요. 혹시 모르니까 물의 장막 치고요.” -건방진 인간! 내 손속을 원망치 마라! 날카롭게 포효한 거인이 손에 든 신월도를 내리찍었다. 불꽃을 휘감은 도의 날이 패도적인 기세로 세영을 덮쳤다. 다음 순간 캉 하는 소리와 도가 위로 튀어 올랐다. 주먹을 휘젓는 것만으로도 가볍게 도를 튕겨낸 세영이 말했다. “익스큐즈 미. 세이 잇 어게인?” -뭐, 뭐라는 거냐!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다. 병신아!” 말이 끝남과 동시에 땅을 걷어찬 세영이 거인에게 달려들었다. 눈에 잡히지도 않을 만큼 빠른 움직임에 놀란 거인이 도를 쓸어내듯 휘둘렀다. 한쪽 무릎을 굽힌 세영이 미끄러지듯 몸을 뒤로 젖혔다. 도가 세영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것과 그녀가 바닥을 짚으며 튀어 오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온몸으로 바닥을 박차며 솟구친 세영의 주먹이 거인의 아랫배에 틀어박혔다. -커헉!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거인의 입에서 불꽃이 터져 나왔다. 빠른 스텝으로 거인의 뒤로 빙글 돌아간 세영이 거인의 오금을 향해 반원 차기를 날렸다. 생각지도 못한 곳을 걷어 채인 거인이 털썩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놈! 모래가 진동할 정도로 소리친 거인이 손으로 세영을 낚아채려 했다. 순식간에 뒤로 물러선 세영이 놈의 손목 관절을 후려쳤다. 펑 소리와 함께 손목의 윗부분이 터져나갔다. 비명을 지른 거인이 도를 놓고 제 손목을 움켜쥐었다. 거인의 온몸에서 우르르 몰려든 불꽃이 손상된 부위를 재생시켰다.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인간! “이거 도마뱀 꼬리 같은 새끼잖아?” 재미있게 되었다며 목을 이리저리 돌린 세영이 씩 웃었다. 괴성을 지른 거인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세영은 쿵쾅쿵쾅 뛰어오는 놈을 맞이해 가볍게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 샤르마흐 사막 (13) 펑펑 터지는 불꽃과 함께 불비가 후드득 떨어졌다. 가끔 백광이 번쩍번쩍 터지기도 했다. 일렁거리는 물의 장막으로 인해 더욱 환상적으로 보이는 풍경이었다. “꼭 불꽃놀이 같군요.” 미갈루의 화상을 치료하던 리먼이 농담처럼 말했다. 연속기로 신나게 얻어터지는 거인만 빼고 보면 확실히 불꽃놀이 같았다. 사방으로 튀는 불꽃들이 거인의 피와 살점이라는 걸 잊는다면 제법 낭만적이기까지 했다. 두 뺨이 발그레해진 마리엔이 고개를 끄떡였다. “세영님은 역시 멋진 분이세요.” 세영의 특훈으로 워터 마스터리 스킬이 제법 오른 그녀는 물의 장막을 장시간 펼치고도 지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덕분에 일행들은 마리엔이 펼친 장막 속에서 두 다리를 쭉 뻗고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근데 언제까지 팰 생각일까?” 열기에 구운 육포를 우물우물 씹던 시디발라가 말했다. 세영이 질 리가 없다고 믿기에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었지만, 계속 앉아 있으려니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나도 좀 줘.” 그때 불쑥 손을 내민 디안이 시디발라가 쥐고 있던 육포를 쏙 빼갔다. 분노한 시디발라가 “야! 네가 먹을 건 직접 구워 먹어!” 하고 소리쳤다. 툭탁거리는 두 사람을 보고 눈을 껌뻑인 미갈루가 중얼거렸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건지, 도무지 믿기질 않는군.” 옛 노래와 함께 전해지는 불꽃의 거인. 숨결만으로 마을을 불태우고, 살아있는 것들을 짓눌러 죽인다는 무시무시한 정령. 하지만 지금 인간의 주먹에 얻어터지고 있는 거인은 그 모든 이야기가 무색할 정도로 처량 맞아 보였다. 우뚝한 콧대 아래에서 두 줄기의 불꽃을 흩뿌리는 거인이 애절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그만! 그만 때리란 말이다!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무기 꼬나 들고 그딴 말 지껄이면 들어줄 것 같냐?” -이걸 놓으면 더 때릴 거면서! “잘 아네. 그러니까 빨리 덤벼.” 약을 올리듯 주먹을 휘젓는 세영이었다. 하지만 거인은 전처럼 선뜻 달려들지 못했다. 전처럼 무작정 덤비다 걸리면 바닥을 굴러다니며 두들겨 맞는다는 것을 깨우친 탓이었다. 연속기와 콤보 어택이라는 것을 모르는 거인에게 세영의 주먹은 공포 그 자체였다. 분명 치고 들어오는 것이 보이는데, 몸을 일으키면 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거대한 의지 아래 짓눌린 것처럼 얌전히 몸을 맡긴 채로 두들겨 맞아야 했다. -사악한 인간! 더러운 족속들! 나는 절대 굴복하지 않는다! “어, 굴복하지 마. 빨리 덤벼.” -맹약을 지키려는 나를 이렇게 괄시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몰라? 모르면 더 처맞아야겠네. 빨리 덤벼.” 세영이 개를 부르듯 손가락 두 개를 까딱였다.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한 얼굴에 분노하면서도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계속된 부상과 재생으로 하늘을 찌를 듯이 거대하던 그의 몸은 이제 인간보다 조금 더 큰 정도로 쪼그라들어 있었다. 이대로 계속 맞다간 난쟁이들보다 더 쪼그라들어 사라질지도 몰랐다. -이유라도 알려다오! 만약 탑으로 가기 위해 이러는 것이라면 그냥 보내주겠다! 맹약을 어기는 일이었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제아무리 본체를 다른 곳에 두고 현신한 상태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손상을 입으면 무사할 수가 없었다. 소멸의 위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 거인이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피식 웃은 세영이 뚜둑 소리가 나게 손가락 관절을 꺾었다. “이거 아주 웃기는 새끼네. 저거 안 보여?” 세영이 가리키는 곳에는 바닥에 주저앉은 일행들이 멍을 때리고 있었다. 덩달아 멍한 표정을 짓는 거인을 보고 발끈한 세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꽃 같은 아가씨의 얼굴을 불로 지져놓고 이유를 알려달라고 씨불이냐!” “어머, 저 때문이면 안 그러셔도 되는데.” 부끄러운 듯 두 뺨을 감싸 쥐는 마리엔이었지만, 결코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제야 더럽게 잘못 걸렸다는 것을 깨달은 거인이 버벅거렸다. -그, 그것은 맹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가 너무 살살 때렸어. 요즘 너무 자비로워진 탓에 주먹에 힘을 빼고 쳤어. 너 같은 새끼를 봐줘 봤자 남는 것 하나 없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세영은 자신이 너무 어리석다는 듯 한탄하며 몸을 날렸다. 비명을 지른 거인이 몸을 빼내려 했다. 그전에 맹수처럼 들이닥친 세영이 그의 어깨를 걷어찼다. 벌러덩 자빠진 거인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방어했다. 세영은 사양하지 않고 그의 온몸을 작신작신 밟아주었다. “야, 그만 좀 패. 쟨 이제 싸우지도 못할 것 같은데 우리 그냥 지나가면 안 돼?” 구경하다 지친 시디발라가 두 손을 모아 소리쳤다. 멍하게 육포를 씹고 있던 디안이 시디발라의 눈총에 움찔했다. 흠흠 헛기침을 한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러다 해가 질 것 같습니다. 이만 탑으로 가는 게 어떨까요?” “세영님, 저 너무 더워요. 그늘로 가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마리엔이 애교를 부리듯 외쳤다. 마지못해 거인을 밟던 것을 멈춘 세영이 반쯤 기절해있는 놈의 엉덩이를 뻥 걷어찼다. “야, 좋게 말할 때 꺼져라.” -부, 불가능한……. 도망칠 수 있다면 진작 도망쳤을 것이다. 거인은 두 눈에서 불똥을 뚝뚝 흘리며 머리를 휘저었다. 미간을 찌푸린 세영이 “당장 안 꺼져?” 하고 눈을 부라렸다. 화들짝 놀라 온몸을 부르르 경련한 거인이 마지막 힘을 모아 말했다. -매, 맹약 때문에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여기에 묶여 있는 신세다. “뭐?” 뜻밖의 말에 머리를 긁적인 세영이 “어디에 묶인 건데?” 하고 물었다. 훌쩍거리던 거인이 손으로 저를 묶고 있는 바위를 가리켰다. 세영은 그를 밀치며 바위로 다가갔다. 새하얀 바위 위에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대충 뜯어보니 소환진에 봉인진에 이것저것을 중첩해 둔 모양새였다. “이것만 없어지면 되는 거지?” 세영은 거인의 대답도 듣기 전에 바위를 후려쳤다. 바위에 걸린 마법이 잠시 저항하려 했으나 압도적인 힘에 짓눌려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다. 퍼석 소리와 함께 바위가 내려앉았다. 툭툭 손을 턴 세영이 거인을 돌아보았다. “됐지? 이제 꺼져.” 충격을 받은 거인이 멍하게 서 있었다. 수백 년 동안 그의 심령을 옥죄고 있던 사슬이 끊어졌다. 잠시 일그러졌던 그의 형상이 휘몰아치는 불꽃으로 변해 타올랐다. 그는 거대한 회오리바람으로 변하여 사방을 날아다녔다. -자, 자유다! 난 자유다! 자유를 되찾았다! 거인의 부르짖음이 하늘과 땅을 울리게 했다. 그때 철썩 소리와 함께 날아다니던 그의 몸이 내동댕이쳐졌다. 힘을 잃은 거인이 볼품없이 모래 속에 처박혔다. 거인의 뺨을 후려친 손을 탁탁 턴 세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정신 사납게. 무슨 날파리처럼 날아다니고 있어.” 모래 속에 파묻혀있던 거인이 번쩍 눈을 떴다. 그는 다시 거대하게 몸집을 부풀리며 세영의 바로 앞에 양손을 대고 엎드렸다. -인간! 내게 자유를 준 인간이여! “왜?” 세영은 제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는 거인을 보고도 덤덤하게 되물었다. 그녀의 당당함에 히죽 웃은 거인이 말했다. -소원을 말하라. 나는 지고한 마리드 중 하나인 이쉼. 나를 풀어준 대가로 네 소원을 들어주겠다. “니가?” -흐, 흠. 오래 봉인되어 힘이 약해졌을 뿐. 마리드의 힘은 강대하다! “지랄한다.” 세영은 하찮은 것을 보는 눈으로 거인을 훑어보며 말했다. 발끈한 거인이 우렁우렁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네, 네가 지나치게 강한 거다! 너는 마신보다 강한 놈이다! “당연하지. 병신아.” 신들의 대학살 퀘스트를 완료한 적이 있는 세영이 대꾸했다. 농담이 아닌 것 같은 어조에 멈칫한 거인이 몸을 원래 크기로 되돌렸다. 살기 위해 열심히 눈치를 살피는 그를 보고 뺨을 긁적인 세영이 말했다. “근데 뭐, 네가 정 들어주고 싶다면 부탁 하나 하자.” -무, 무슨 부탁? “마리엔, 이리 와요.” 몸을 돌린 세영이 장막 안에 있는 마리엔을 불렀다. 잠시 뒤 상기된 얼굴의 마리엔이 세영의 옆으로 달려왔다. 자랑하듯 그녀의 어깨를 감싼 세영이 말했다. “예쁘지? 얼굴도 착하고 마음씨도 착하고 전체적으로 얼마나 착한지 몰라.” “부, 부끄러워요.” 적극적인 칭찬에 얼굴이 빨개진 마리엔이 몸을 비비 꼬았다. 거인은 착잡한 얼굴로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착하긴 개뿔이.’ 제가 신나게 두들겨 맞고 있어도 말리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던 엘프였다. 부루퉁한 얼굴의 거인에게 손을 까딱인 세영이 말했다. “마리엔의 친구가 되어줘. 이렇게 착하고 예쁜 애의 친구가 된다면 너한테도 좋은 일이잖아.” -친구? “뭐야. 넌 친구도 없냐?” -아니, 그…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최상위 진니인 마리드, 그중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고 칭송받는 이쉼이다. 친구는커녕 그와 대등한 위치의 진니를 찾기도 힘들 정도였다. “힘들 땐 도와주고, 슬플 땐 위로해주고, 기쁠 땐 축하해주고.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의지가 되는 존재지.” -종이 되라는 소리냐? “친구가 왜 종이야? 네가 마리엔의 친구면 마리엔도 너의 친구다. 서로 해주는 거야.” 세영의 설명에 거인은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계약자도 아니고 주인도 아니고 친구가 되라는 청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그러면 너는? “나 뭐 왜?” -너도 나를 도와주는 거냐? 이렇게 강한 놈을 <친구>로 할 수 있다면 결코 손해는 아니었다. 마신과도 대등해질 수 있을지 모른다.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이는 거인을 보고 피식 웃은 세영이 되물었다. “내 친구가 되기엔 네가 좀 딸린다는 생각은 안 들고?” -하지만 나는 친구다. “내 친구가 아니라 마리엔의 친구라고. 뭐, 네가 마리엔에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면 또 모르지. 친구의 친구로서 너까지 챙겨줄지.” 거인은 <친구>와 <마리엔의 친구>, 그리고 <친구의 친구>가 무슨 차이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어쨌든 자신이 잘하면 세영이 친구를 해주겠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가족 같은 회사와 친구 같은 계약자가 당장 피해야할 사회악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탓이다. 순진하게 고개를 끄떡인 거인은 제 숨결을 담은 불꽃을 토해냈다. 그의 입에서 토해진 불꽃이 한 마리의 작은 새가 되어 마리엔에게 날아갔다. 그것은 이내 작은 보석이 되어 마리엔의 옷에 달라붙었다. -나는 마리드의 하나인 이쉼이다. 친구여, 내 이름을 불러라. 언제든 너를 돕겠다. “이쉼님, 저는 하프엘프 마법사인 마리엔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우아하게 무릎을 굽힌 마리엔이 인사를 했다. 세영은 흐뭇하게 그것을 지켜보면서도 보석이 달라붙은 장소를 신경 썼다. ‘왜 하필 가슴이지? 목도 있고 어깨도 있는데 왜 저기지? 이놈 혹시 변태 아닐까?’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눈치채지 못한 거인은 제 도를 집어 들고 허공을 갈랐다. 불꽃이 휘감긴 도가 스치는 순간 환상처럼 눈앞의 풍경이 갈라지며 새하얀 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 샤르마흐 사막 (14) -너희가 찾고 있던 지혜의 탑이다. “우와아!” 펄쩍 뛴 시디발라가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그 뒤를 디안과 리먼이 따랐다. 피식 웃으며 달려오는 동료들을 지켜보던 세영이 문득 떠오른 것을 물었다. “얼마 전에 우리 말고 여길 찾아온 사람 있었지? 누군지 알아?” -그는 사람이 아니다. 저주받은 자. “저주?” 거인은 입에 담기도 싫다는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악운을 내쫓는 손짓을 한 그가 마지못해 덧붙였다. -마신에게 저주받아 타락한 자. 맹약과 주술로 나를 여기에 붙들어 맨 놈이다. “정체가 뭔지는 몰라?” -모른다. 만날 때마다 모습이 바뀌어 있었으니. 이번에 나타난 놈은 평범한 인간처럼 보였다. 저주로 낙인찍힌 영혼이 아니었다면 결코 알아보지 못했을 거다. 모호한 설명에 난감해진 세영이 뺨을 긁적였다. 바위에 그려진 것은 얼핏 봐도 복잡한 마법진이었다. 그 위에 소환진까지 겹쳐져 있으니 소환능력이 있는 마법사라고 봐야했다. 인간이 아니라는 말은 여러 차례 들었지만, 생각보다 까다로운 상대였다. 가는 곳마다 놈에 대한 말이 들리니 슬슬 거슬리기 시작했다. “뭔가 눈에 띄는 특징은 없었어?” -저주가 아니라면 못 알아볼 정도로 평범했다. 그냥 시시한 인간으로 보였지. “머리색이나 눈 색이나 피부색이나 그런 건?” 거인은 잘 모르겠다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침입자인 줄 알고 덤벼들었다가 주문으로 제압당해 내내 엎드려 있었다는 것이다. 세영은 사막에 사는 생물은 모두 멍청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심함을 담은 그녀의 표정에 민망한지 헛기침을 한 거인이 말했다. -놈의 이야기를 하니 더욱 피곤해지는군. 허락한다면 이만 내 보금자리로 물러가고 싶다. 지금은 너무 지쳐서 휴식이 필요하다. 그에게 더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세영이 선선히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 대신 마리엔이 부르면 재깍재깍 튀어와. 농땡이 부리고 안 오면 뭐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친구를 내팽개치고 있는지 확인해 볼 테니까.” -알겠다. 겁에 질린 얼굴로 대답한 거인이 후우우 하고 긴 숨을 내뱉었다. 숨결과 함께 밀려 나온 불꽃이 뱀처럼 그의 몸을 휘감았다. 이내 기세 좋은 모닥불처럼 후루룩 타오른 불꽃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열기를 담은 바람이 사방을 휘저었다. 엉망이 된 머리를 쓸어내린 세영이 투덜댔다. “새끼, 좀 조용히 꺼질 것이지.” “세영님, 손은 괜찮으세요? 안 데이셨어요?” 걱정스러운 얼굴의 마리엔이 그녀의 손을 잡고 확인했다. 배시시 웃은 세영이 반대쪽 손을 반짝반짝 흔들어 보였다. “하나도 안 다쳤어요. 옷은 좀 탔지만, 그거야 갈아입으면 되니까.” 어차피 나샴 때문에 소매를 날려 먹어서 버리려 했던 옷이었다. 괜찮다는 말에도 꼼꼼히 확인하던 마리엔이 한참 후에 안심한 듯 손을 놓아주었다. 그것이 귀여워 헝클어진 머리를 쓱쓱 쓸어 넘겨주었다. 수줍은 듯 뺨을 붉힌 마리엔이 고개를 숙였다. 그때 흠흠 헛기침을 한 디안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저, 세영님. 아까 거인이 한 말이 마음이 걸립니다. 마신의 저주를 받은 자라니, 대체 정체가 뭘까요?” “거인 걔도 엄청 세 보이던데. 지금까지 은인이라는 애한테 꼼짝도 못 하고 붙잡혀 있었던 거잖아. 그럼 은인이라는 애도 엄청 센 거 아닐까?” 그의 뒤를 이어 시디발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세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센 놈이든 약한 놈이든 방해가 되면 치우고 아니면 그만이었다. 그때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던 리먼이 말했다. “좀 묘하군요. 신기와도 관련이 있는 사람인 것 같던데, 아무래도 그에 대해서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리먼은 나샴의 알을 대량으로 구매한 사람을 조사해보자고 했다. 은인이 열두 개의 알을 구해왔으니 구매흔적이 남아있을 거라는 추측이었다. 세영은 별 반박 없이 고개를 끄떡였으나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알을 구매하는 것 따위야 대리인을 시켜도 될 일이었다. ‘무엇보다 어떻게 생겼는지, 정체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이잖아.’ 세영 역시 은인이라는 놈이 찜찜했지만, 굳이 찾으려는 생각은 없었다. 목적이 비슷한 것 같으니 신기를 찾다 보면 부딪치게 될 것이다. 그건 거의 확신과도 같은 예감이었다. 그때가 되면 생각해보자고 신경을 끈 세영이 손짓으로 미갈루를 불렀다. 멀리서 주춤거리던 미갈루가 조심스럽게 옆으로 다가왔다. 리먼이 최선을 다해 치료했지만, 여전히 울긋불긋한 나샴을 훑어본 세영이 물었다. “몸은 좀 어때?” “대수롭잖은 부상일세.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야. 그것보다 정말 놀라운 능력이었네. 신화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았어.” 연신 감탄하는 미갈루에게 회복 포션을 던져준 세영이 피식 웃었다. 조금 남아있던 악감정은 그가 자신을 희생하여 일행을 통과시키려 했을 때 사라진 뒤였다. “신화는 무슨.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치료나 잘해. 돌아가서 내 새끼들을 잘 키워야지.” “그러겠네. 남은 생을 모두 걸고 부끄러움 없이 키워야지. 그리고 아이들이 자라면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줄 생각이네.” 루비처럼 붉은 눈이 감격으로 가득 차있었다. 사막을 불태우는 거인을 물리치고 일족을 구원한 세영은 신화 속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거인이 떠난 사막은 점차 차가워져 다른 부족에서도 자연스럽게 암컷들이 태어날 터였다. 오아시스가 말라붙는 일도 멈출 것이다. “일족을 대신해 감사를 표하고 싶네. 정말로 고맙네. 고마워.” 세영의 손을 움켜쥔 미갈루가 몇 번이나 감사를 표했다. 시답잖은 감사에 피식 웃은 세영이 그를 툭 쳐서 밀어냈다. “고마우면 오래 살아. 애들이 다 자랄 때까지 꿋꿋하게 버티라고. 그 전에 영감이 죽으면 영감네 부족 전체가 노예로 잡혀갈지도 몰라.” “명심하겠네.” 세영은 미갈루를 치료해준 후 돌아가는 것을 배웅했다. 틈을 벗어날 수 없는 일행은 틈 바로 앞에서 그와 헤어졌다. 떠나기 전 미갈루는 일행의 손을 하나하나 붙잡으며 축복했다. “토끼 전사여, 고양이 엘프와 잘 되길 기원하겠네.” “네? 아, 감사합니다.” 나샴말로 된 호칭을 이해하지 못한 디안이 대충 감사를 표했다. 허허 웃은 미갈루가 리먼과 시디발라를 바라보았다. “너구리 사제, 다음에도 꼭 놀러 오게. 못다 한 이야기를 하지. 강아지 수인족이여. 그대의 호의를 배신해서 미안하네.” “그동안 신세 졌습니다.” “애들한테 안부 전해줘.” 동료들과 인사를 끝낸 미갈루가 세영을 바라봤다. 그는 거인의 앞에서 그러했듯 세영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부족의 수호신이여. 약속의 날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부디 뜻한 바를 이루시기를.” “끈질긴 영감탱이.” 세영의 대꾸에 허허 웃은 미갈루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몇 번이고 일행을 돌아보며 틈 밖으로 향했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 세영은 길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준비운동이 너무 길었네요.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가봅시다.”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떡인 일행은 곧장 모래 속에 반쯤 파묻힌 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침묵의 탑 (1) -혼자 있을 수 있지?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여자가 말했다. 세영은 시큰둥하게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지워진 것이 아니다. 잊어버린 거였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친엄마가 다시 말했다. -우리 세영이는 어른스러우니까 혼자 있어도 되겠지? “내가 어른스럽든 아니든, 당신에겐 별 상관없는 거잖아?” 어른스럽지 않고 손이 많이 가는 아이라면 그래서 키울 수 없다고 말할 터였다. 어느 쪽이든 제 마음을 가볍게 하려는 변명일 뿐이다. -엄마 올 때까지 할머니 말 잘 듣고 있어. 울지 말고. 울지 말라며 제 살길을 찾아 떠났던 여자는 세영이 경제적으로 독립한 후에야 연락을 해왔다. 어떻게 번호를 알았는지 대뜸 전화를 걸어 울면서 이름을 불렀다. 세영은 아무 대꾸 없이 전화를 끊고 여자의 번호를 차단했다. 얼핏 듣기로 재혼을 하고 자식도 둘이나 있다고 했다. 무슨 생각으로 연락했는지 관심도 없고 듣고 싶지도 않았다. 세영에게 여자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탑으로 들어갔던 것까진 기억나는데.’ 세영은 여자의 환영이 떠들게 내버려둔 채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이 환영은 탑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몬스터 중에 환상을 보여주는 게 있다던데. 그건가?’ 세영은 공격이 들어올까 봐 사방을 경계하며 앞으로 나갔다. 세영의 관심을 잃어버린 여자는 순식간에 먼지가 되어 내려앉았다. 그저 새까맣기만 한 앞을 헤치고 나아가던 세영은 뭔가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절로 몸이 긴장하며 자세가 낮아졌다. -너 때문이야! 날카로운 목소리가 어둠을 찢었다. 익숙한 상황에 세영의 미간이 절로 일그러졌다. -너랑 네 애비가 내 인생을 망쳤어! 어둠을 뚫고 나타난 여자는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술에 취해 붉어진 얼굴, 증오로 번들거리는 눈, 당장 내려칠 것처럼 팔을 번쩍 쳐든 채였다. 세영은 냉담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눈 똑바로 뜬 것 좀 봐. 넌 내가 아주 우습지? 계모라고 무시하고 비웃잖아! 너 때문에 나쁜 년이라고 욕먹는 것도 지겨워. 꼴도 보기 싫어. 징글징글한 년. 내 집에서 나가! 나가라고! “그래서 나가줬잖아. 왜 나타나서 지랄이야?” 코웃음 친 세영이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세영이 관심을 두지 않자 환영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스러졌다. 세영은 다시 캄캄해진 사방을 휙 둘러보며 물었다. “이제 뭐가 나올 차례인데? 나보고 거지새끼라고 비웃던 놈들? 무능력한 아버지? 성희롱을 농담이라고 던지던 골 빈 새끼들? 귀찮은데 하나씩 나오지 말고 몰려나오지그래?”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다. 다만 짜증이 날 뿐이다. 이 환영을 만드는 놈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저런 것들이 제게 고통을 줄 거라고 생각했다는 게 화가 났다. 빡침이 밀려오다 못해 빡이 된 기분이었다. “확실히 게임은 아니네. 게임에서 이딴 짓 하면 고소 걸릴 테니까.” 투덜대듯 내뱉는 순간 갑자기 앞이 환해졌다. 흐릿하게 빛나는 물체를 발견한 세영은 주저 없이 몸을 날렸다. “거기냐!” 주먹을 뻗던 세영이 멈칫했다. 빛 속에 있는 것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어린애였다. 공격을 멈춘 세영이 경계 어린 눈으로 아이를 훑어봤다. “뭐야, 너?” 어깨까지 닿는 까만 머리를 갖고 있었지만, 아이는 명백한 서양인의 얼굴이었다. 그러니 세영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은 아니었다. 동그랗고 새까만 눈이 아무 두려움 없이 세영을 바라봤다. 약간의 죄책감을 느낀 세영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안 들려? 너 뭐냐고 묻잖아?”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아이가 뭐라고 입을 움직였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입술에 당황한 세영이 머리를 긁적였다. “말 못해?” 그러자 아이가 웃었다. 어린애다운 순진한 웃음이 아니라 서글픔을 담은 표정이었다. 멈칫한 세영이 다시 경계심을 끌어올리는 순간이었다. 이쪽으로 오라는 듯 손을 팔랑팔랑 흔든 아이가 몸을 돌려 어딘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뭐야?” 당황한 세영이 멍하게 서 있는 동안 아이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잠시 밀려났던 어둠이 슬금슬금 다가오는 것을 느낀 세영이 혀를 찼다. 따라가기엔 수상한 녀석이지만, 여기 남아있어 봤자 별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야, 기다려!” 세영은 벌써 까마득히 멀어진 아이를 따라잡기 위해 달렸다. 게임 능력치가 반영된 이상 사슴과 달리기를 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와의 거리가 일정 이상 좁혀지지 않았다. ‘뭐지? 귀신같은 건가?’ 세영이 볼 때 아이는 전력으로 달리고 있지 않았다. 가끔 뒤를 돌아보며 세영이 따라오는지 확인까지 하고 있었다. 여유가 넘치는 모습에 울컥한 세영이 있는 힘껏 땅을 박찼다. 세영의 몸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가며 거리가 급격히 좁혀졌다. 갑작스러운 질주에 놀란 듯 아이가 허둥거리는 게 느껴졌다. 급히 방향을 틀어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느낀 세영이 스킬까지 써가며 아이를 따라잡았다. “잡았다!” 아이의 팔을 낚아챈 세영이 장난스럽게 소리쳤다. 그런데 손에 잡히는 느낌이 이상했다. 아이의 가느다란 팔이 아니라 단단하고 큰 손이 잡혀있었다. 고개를 든 세영은 아이 대신 장신의 남자를 발견했다. 그는 로마 시대에나 입을 것 같은 길고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있었다. 먹물을 부은 것처럼 새까만 머리가 허리 아래까지 내려왔는데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과 제법 잘 어울렸다. “어?” 세영은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동안 남자는 다정한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상황을 파악한 세영이 머뭇머뭇 손을 놓았다. 그러자 남자 쪽에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당황하던 세영이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아까 걔가 당신?” 남자는 대답 없이 웃었다. 웃는 표정이 아이와 닮아있었다. 세영이 머뭇거리는 사이 남자가 그녀의 손을 살짝 당겼다. 그리고 따라오라는 것처럼 앞서 걷기 시작했다. “어디 가는 건데?” 세영의 물음에 손을 든 남자가 저편을 가리켰다. 기분 탓인지 좀 더 밝아 보이는 장소였다. 세영은 그에게 이끌려 걸으면서 붙잡힌 손을 내려다봤다. ‘다 좋은데 왜 꼭 손을 잡고 걸어야 하는 거지? 아까처럼 앞서 가면서 안내해줘도 되잖아?’ 하지만 남자의 손을 뿌리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손을 잡고 걷는 그가 기뻐 보였기 때문이다. 제 얼굴을 훔쳐보는 시선을 느낀 세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진짜 뭐지?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남자가 누군가와 착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입을 열지는 않았다. 어찌 됐건 도와주려는 것 같았으니까. 세영은 느긋하게 걸어가며 남자의 모습을 감상했다. ‘키 엄청 크네. 머리도 길고.’ 160센티를 조금 넘는 세영이 어깨 아래에 오는 것을 보면 190센티는 훌쩍 넘는 거였다. 여행을 하면서 깨달은 사실이지만, 서양인이라고 다 키가 크지는 않았다. 저도 모르게 흐음 소리를 내자 놀란 듯이 돌아보는 얼굴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럴 때까지 얼빠라니. 나도 참.’ 왜 순순히 손을 내어주고 따라왔나 했더니 남자가 굉장히 잘생겨서 그랬던 모양이다. 디안도 제법 반반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남자에겐 상대도 되지 않을 듯했다. ‘아니, 디안은 훈남이고 얘는 미남인건가. 카테고리가 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고전적인 미남은 이런 것이라고 표본으로 보여주는 듯한 외모였다. 안색이 창백해서인지 우울한 표정 때문인지 청승맞은 분위기였지만, 갈고 닦으면 청순가련이 될 가능성이 보였다. ‘응? 남자가 청순가련이면 좀 이상한가?’ 세영이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 동안 두 사람은 빛의 가장자리에 다다랐다. 검은 장막을 길게 찢어놓은 것 같은 틈이 보였다. 빛은 틈의 안쪽에서 번져 나오고 있었다. 아쉬운 듯 머뭇거리던 남자가 세영의 손을 놓았다. 그는 틈을 가리키고는 어서 가라는 듯 손짓을 했다. “당신은 안 가?” 세영의 물음에 희미하게 웃은 남자가 고개를 끄떡였다. 아련아련을 통째로 갈아 만든 것 같은 미소에 세영은 괜히 손을 꼼지락거렸다. 왠지 이대로 떠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근데 난 당신이 누군지 몰라. 이름이 뭐야?” 말을 못하면 써보라고 말한 세영이 제 손을 내밀었다. 남자는 가만히 그녀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웃는지 우는지 모를 모호한 표정이었다. 뭔가를 쓰려는 것처럼 손을 내민 남자가 세영의 팔을 잡고 제 쪽으로 당겼다. 무방비하게 서 있던 세영은 순식간에 그의 품으로 끌려들어 갔다. “억?” 당황한 세영이 버벅이는 사이 남자는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세게 껴안는 것에 답답해져 밀쳐 내려는 순간 뭔가 따뜻한 것이 뚝뚝 떨어졌다. 가늘게 떨리는 팔과 떨어지는 물방울이 의미하는 것은 한가지뿐이었다. ‘우, 울어? 운다고? 왜? 내가 뭘 했다고?’ 패닉에 빠진 세영이 남자를 밀쳐냈다. 눈가가 젖은 남자가 보기 괴로울 정도로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버려진 강아지 같은 얼굴에 당황한 세영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니, 왜 울고 그래?” 예의 희미한 미소를 지은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세영은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자가 무어라 입술을 달싹거렸다. 세영은 그가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하다는 거야?” 세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손이 그녀를 떠밀었다. 균형을 바로 잡을 틈도 없었다. 아차 하는 순간 기울어진 몸이 틈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아득한 부유감과 함께 남자의 모습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 침묵의 탑 (2) “으아악!” 세영은 누운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멍하게 눈을 깜빡이는 그녀의 뺨을 가느다란 손가락이 콕 찔렀다. 흠칫해서 돌아보자 싱글벙글 웃는 시디발라가 서 있었다. “너 3등! 나 2등. 내가 이겼다!” “뭐?” 뺨을 쓱쓱 문지른 세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누워있던 곳은 신전 같은 장소였다. 대리석을 깎아 만든 고풍스러운 기둥이 일정하게 늘어서 있었다. 정면에는 거대한 제단처럼 보이는 게 있었는데 양옆에 제물을 태우기 위한 화로도 보였다. “일어나셨군요.” 나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눈에 띄게 핼쑥해진 리먼이 보였다. 그는 제 발치에 잠들어있는 마리엔과 디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슬슬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세영님이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세영이 잠든 이들을 살피며 물었다. 죽은 듯이 눈을 감은 두 사람은 어깨를 흔들어도 깨어날 줄 몰랐다. 쓴웃음을 지은 리먼이 답했다. “이곳은 뭔가를 시험하는 장소인 것 같습니다. 들어섬과 동시에 잠에 빠지고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과 마주하게 되더군요. 그걸 이겨내야만 잠에서 깰 수 있는 듯합니다.” “두려워하는 거?” 세영은 의아하게 되물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친모와 계모라는 말이 된다. 시답지 않다고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리던 세영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럼 그 남자는 뭐지?’ “있잖아. 넌 꿈에서 뭐 봤어? 뭐가 나왔어?” 디안의 뺨을 죽죽 잡아당기던 시디발라가 천진하게 물었다. 세영은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그의 눈에 피식 웃었다. 대놓고 약점을 묻는 것이니 불쾌할 만도 하련만,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별다른 감정이 안 들었다. “징징 짜는 여자와 남 탓하는 여자. 그리고 모르는 남자.” “엥? 그게 뭐야. 이상해.” 성의 없는 대답이라며 입을 삐쭉거린 시디발라가 시키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나는 동생들이 잔뜩 나왔다? 나와서 왜 나만 장가 가냐고 막 따지는 거야. 내가 가고 싶어서 가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래서 막 싸우다가 깼어.” “너 결혼했어?” “아니, 말은 나왔는데 돈이 없어서 파혼했어.” 제법 무거운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었다. 세영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꼬리를 살랑거리던 시디발라가 말했다. “사실 우린 대가족이라서 결혼하기가 힘들어. 다 함께 열심히 돈을 모아서 맏이부터 결혼하는 거야. 그런데 내가 결혼할 만큼 돈이 모이니까 일곱째가 화를 냈어. 왜 형만 장가 가냐고. 집이 너무 가난해서 다섯째부터는 결혼하기가 힘들거든. 여동생들도 시집 보내야 하니까.” “그래서 파혼했어?” “응. 사실 결혼 같은 거 하고 싶지도 않았어. 잘됐다 싶어서 파혼하고 바로 집을 나왔지. 돈을 잔뜩 모아서 동생들이 다 결혼하면, 그땐 내가 장가가도 아무 말 안 할 거 아냐.” 평소와 달리 나직한 목소리였다. 같이 자란 형제가 없는 세영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시디발라에겐 그 사건이 꽤 큰 상처였던 것 같았다. 어정쩡한 세영의 얼굴에 헤헤 웃은 시디발라가 말을 이었다. “이전이라면 나도 못 깨어났을 텐데, 동생들이 따질 때 그래서 내가 돈 줬잖아! 하고 꽥 소리 질렀다? 그러니까 눈이 번쩍 떠지는 거야. 그래서 내가 2등 했어.” 몇 번이나 강조하는 것을 보니 두 번째로 깨어난 것이 퍽 기뻤던 모양이다. 아니면 세영을 이긴 것이 좋거나. 피식 웃는 세영의 팔을 살짝 잡은 시디발라가 수줍게 말했다. “고마워. 네 덕분이야.” 세영은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시디발라가 계속 미주알고주알 떠든 것은 이 말을 하고 싶어서였던 것 같았다. 세영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되물었다. “네 동생들 일이라면 나는 해준 게 없는데?” “네가 준 돈으로 동생들이 다 결혼할 수 있을 테니까. 네가 날 구해준 거야. 고마워.” “그래.” 굳이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말릴 이유는 없었다. 멋대로 생각하게 내버려둔 세영이 리먼을 돌아보았다. “시디발라가 2등이면 리먼이 1등이겠네요.” “제가 익힌 수행법 중에 이것과 비슷한 종류가 있습니다. 워낙 익숙하다 보니 제일 먼저 깨어나게 됐군요.” 익숙하다고 말하는 것치고는 안색이 영 좋지 않았다. 세영은 그가 본 환상이 뭔지 궁금했다. 그것을 눈치챈 시디발라가 경쾌하게 소리쳤다. “리먼은 리먼을 만났대!” “…과거의, 아직 철없던 시절의 저를 봤을 뿐입니다.” 쓴웃음을 지은 리먼이 덧붙였다. 세영은 점잖은 그도 어릴 때는 이불 찰 짓을 많이 했구나 생각하며 측은한 눈빛을 보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싸웠어요?” “아뇨, 인정했습니다. 지금의 저에겐 후회스러운 과거지만, 그것 역시 저를 이루는 일부라는 것을. 그때가 없었다면 지금에 이르지 못했을 테니까요.” 고해하듯 말한 리먼이 사실 인정하기 굉장히 힘들었다며 웃었다. 세영은 새삼스럽게 그가 어른이라는 것을 느꼈다. ‘어쨌든 시디발라처럼 맞서 싸우거나 리먼처럼 받아들이면 깨어날 수 있는 모양이네.’ 세영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녀는 맞서 싸우기보다는 무시했고, 그것이 자신의 상처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세영이 깨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녀를 이끌어준 남자가 있어서였다. ‘누구지?’ 그냥 무의식이 만들어낸 환상일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제 취향을 십분 반영한 모습이 의심스러웠다. 머리를 긁적인 세영은 남자에 대한 생각을 날려버렸다. “마리엔과 디안은 깨어날 수 있을까요?” 세영은 깊은 잠에 빠진 둘을 쳐다보며 물었다. 대충 듣기에도 디안은 고아나 다름없이 자랐고 마리엔은 하프엘프라 핍박당한 일이 많았다. 두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뭔지 몰라도 쉽게 극복할 성질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잘 모르겠군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리먼 역시 같은 생각인지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세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디안의 몸을 잡아 일으켰다. “여기가 시험하는 장소라면 통과하지 못한 사람을 깨우는 방법도 있을 거예요. 일단 이동하죠. 디안은 제가 옮길 테니, 리먼은 마리엔을 부탁해요.” 이왕이면 마리엔을 맡고 싶었지만, 갑옷까지 입은 덩치를 리먼이 계속 나르기는 무리일 것이다. 시디발라의 도움을 받아 디안을 등에 업은 세영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일행은 탑의 2층으로 올라갔다. 잔뜩 경계했지만, 갑자기 잠에 빠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2층은 수영장처럼 중앙이 움푹 꺼진 공간이 있었고 석주와 조각상이 그곳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약탈의 흔적인지 조각상의 머리 부분은 대부분 깨져 나간 채였다. 조각상들은 가부좌를 틀거나 한쪽 무릎을 세운 채 앉아 있었다. 반쯤 부서진 팔을 보니 각각 어떠한 손동작을 취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조각상의 옆에서 어설프게 흉내를 내보던 시디발라가 이상하다며 히히 웃었다. “여긴 정말 수행의 장소였던 모양입니다. 간간이 눈에 익은 동작들이 있군요.” 조각상을 찬찬히 둘러보던 리먼이 말했다. 조각상의 동작이 요가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던 세영이 말을 받았다. “사제들도 이런 수행을 하나 봐요?” “사제라고 기도만 하진 않으니까요. 틈틈이 체술과 명상법을 익히지요. 저는 몸을 쓰는 데 젬병이지만, 진득하게 앉아있는 것은 자신이 있습니다.” 딱 봐도 책상물림처럼 생긴 리먼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조금 웃겼다. 일행은 조각상을 구경하며 석주를 따라 2층을 한 바퀴 돌았다. 처음의 자리로 다시 돌아온 그들의 얼굴에 난감함이 떠올랐다. “왜 계단이 없지?” 커다란 귀를 펄럭인 시디발라가 말했다. 셋은 혹시 숨겨진 계단이 있는지 벽을 확인하며 다시 한 바퀴를 돌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위로 올라갈 수 있을 만한 장소는 발견되지 않았다. 슬쩍 미간을 찌푸린 세영이 말했다. “1층에서 3층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는 게 아닐까?” “아냐, 네가 자고 있을 때 1층을 다 살펴봤다고. 여기로 올라오는 계단뿐이었어.” 시디발라가 조금 뿌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세영이 중앙의 공간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등에 업은 디안을 구석에 밀어놓은 세영이 바닥을 살폈다. 고개를 숙인 시디발라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꼬리를 살랑였다. “거기 뭐가 있어?” “앉을 수 있는 자리. 수행을 위한 장소라면 수행을 하면 건너갈 수 있겠지.” 바닥을 더듬던 세영이 답했다. 돌을 다듬어 만든 바닥에는 둥글게 패인 홈이 있었다. 홈을 따라 손을 더듬어간 세영은 먼지를 털어내고 둥근 원 안에 앉았다. 정면에 있는 조각상과 비슷하게 다리를 포개자 바닥에서 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이윽고 조각상이 위치한 기단에서 물이 흘러나오더니 홈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세영이 앉은 둥근 원을 채운 물은 이리저리 번지며 내달리더니 마지막으로 중앙으로 흘러갔다. 세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리먼, 마리엔을 저한테 건네주고 내려오세요. 시디발라, 너도 여기로 와.” 일행은 세영의 지시에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각각의 조각상 앞에 다리 모양을 흉내 내며 앉았다. 원 안에 앉은 채로 일정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물이 흘러나왔고 주변의 홈을 모두 채운 후에 중앙에 있는 구멍으로 들어갔다. 세영은 디안과 마리엔도 책상다리로 만들어서 원 안에 엎드려 있게 했다. 의식이 없는 사람을 멋대로 주무르는 것 같아 찜찜했지만, 내버려뒀다간 둘만 따로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 자리를 옮겨가며 모든 원을 물로 채우고 중앙으로 보냈을 때였다. “어, 바닥이 흔들려!” 시디발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중앙에서 한 줄기 빛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홈을 타고 흐르는 물을 따라 바닥 전체로 번져나갔다. “움직이지 마. 원을 벗어나면 안 돼.” 움찔해서 일어서려는 시디발라를 멈추게 한 세영이 흔들리는 바닥을 짚었다. 그때 첫 번째 원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이윽고 두 번째, 세 번째 원이 연달아 빛나기 시작했다. 마리엔과 디안의 몸이 빛에 휩싸이는 것이 보였다. 모든 원이 빛으로 차는 순간 2층 전체가 폭발하는 밝은 빛으로 채워졌다. 세영은 몸이 붕 뜨는 것 같은 부유감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 침묵의 탑 (3) 제일 먼저 들린 것은 까르륵 웃는 소리였다. 눈을 뜬 세영은 곧장 제게로 달려오는 아이들을 보고 움찔했다. 하지만 피할 새도 없이 아이들은 그녀를 뚫고 지나가 버렸다. “환상?” 미간을 찌푸리는 세영의 손을 누군가가 잡아당겼다. 흠칫해서 내려다보자 겁먹은 얼굴의 시디발라가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여기 뭐야. 이상해.” 세영은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당황한 표정의 리먼과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마리엔과 디안이 보였다. 이전처럼 꿈은 아닌 것 같았다. ‘여기는 어디지?’ 처음 보는 낯선 장소였다. 얼핏 보기에는 도시나 마을의 골목 같았다. 집들은 모두 하얀색이었고 벽은 푸른빛으로 칠해져 있었다. 돌로 포장된 바닥을 툭툭 걷어찬 시디발라가 말했다. “벽이랑 바닥은 단단한데. 만질 수도 있고. 그런데 진짜인지는 모르겠어.” 세영은 힐끗 위를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이 아닌 텅 빈 공간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해가 떠 있지 않은데도 주변은 낮처럼 환했다. 보이는 것들이 진짜라고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가보자. 가다 보면 뭔가 나오겠지.” 다시 디안을 둘러업은 세영이 말했다. 그녀의 생각이 옳다면 이곳은 탑의 3층이었다. 리먼이 허둥거리며 마리엔을 업고 쫓아왔다. 그들은 사방을 경계하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골목 밖으로 벗어나자마자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대부분 길고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나막신 같은 것을 신고 있었다. 여자들은 사리처럼 긴 천을 머리와 가슴에 둘렀고, 남자들은 모자처럼 머리에 둘둘 말았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거나 길을 걷거나 물건을 사는 중이었다. 하지만 건너편 벽이 비치는 반투명한 몸이 진짜가 아닌 환상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 세영의 물음에 시디발라가 고개를 저었다. 대신 환상을 유심히 쳐다보던 리먼이 답했다. “사막 민족과 닮은 사람들이군요. 하지만 그들보다 피부가 더 짙습니다. 의복 형식도 아주 오래된 겁니다. 어쩌면 마도시대 이전의 도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영은 리먼의 말에 따라 사람들의 생김새를 살폈다. 갈색의 피부에 이목구비가 굉장히 뚜렷한 편이었다. 하얀 피부의 동료들만 보다가 색다른 피부색을 보니 신선했다. ‘어, 근데 옷이 그 남자랑 비슷하네?’ 세영을 도와준 남자도 저들처럼 길고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있었다. 머리를 천으로 싸매고 피부를 어둡게 칠한다면 똑같아 보일 터였다. ‘그럼 유령이었나?’ 유령이라면 왜 자신을 도와줬는지 모르겠다. 찜찜함을 애써 떨쳐버린 세영은 빠르게 사람들을 훑어보며 지나갔다. 이곳을 벗어나기 위한 단서를 찾아야 했다. 시디발라가 눈치 빠르게 그녀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뭐 찾는 거야?” “이상한 거.” “여긴 다 이상하잖아.” “그럼 더 이상한 거.” 무뚝뚝한 대꾸에 쳇 하고 혀를 찬 시디발라가 사람들을 가르며 달려갔다. 그가 부딪치는 순간 흩어졌던 환상이 순식간에 복구되었다. 그럴 때마다 빛나는 모래 같은 금빛 알갱이가 허공에 휘날렸다. ‘모래?’ 빙글 몸을 돌린 세영이 바로 옆의 벽을 걷어찼다. 퍼석 내려앉은 벽에서 황금빛 모래가 떨어져 나왔다. 흘러내린 모래들이 다시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며 벽을 만들었다. 하지만 세영의 발 앞에는 부서진 잔해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움직임을 멈춘 리먼이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잔해를 툭 걷어찬 세영이 설명했다. “도시의 잔해 위에 모래를 매개체로 해서 환상을 덧씌운 것 같아요. 결국, 마법을 시전 하는 술사나 아티팩트가 있다는 소리죠. 그걸 부수면 여길 나가는 길도 알 수 있을 거예요.” “아티팩트를 찾아야겠군요.” 고개를 끄떡인 리먼이 사방을 휙휙 둘러보았다. 어설픈 모습에 소리 없이 웃은 세영이 지도맵을 켰다. 동료들의 위치가 파란 점으로 나타났다. 지도를 살피던 세영은 기묘한 색의 점을 발견했다. “이게 뭐지?” 보통 NPC는 노란색, 일반 유저는 초록색, 동료는 파란색, 몬스터는 붉은색 점으로 표시된다. 그런데 지금 지도에 나타난 점은 적갈색이었다. 처음 보는 색깔에 당황한 세영이 고개를 들었다. 앞서 가는 푸른색 점이 빠르게 적갈색 점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시디발라!” 세영은 시디발라를 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이변을 알아차린 리먼이 필사적으로 쫓아왔다. 그 사이 어디까지 가버린 건지 시디발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입술을 질끈 깨문 세영이 리먼을 돌아보았다. “먼저 갈게요! 너무 뒤처지지 말고 따라와요!” “노, 노력은 하겠습니다.” 힘없는 대답을 들은 세영은 즉시 바닥을 박찼다. 질주 스킬이 발동되며 몸이 빠르게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녀는 환상들을 가차 없이 헤집으며 시디발라를 찾았다. “시디발라! 어디 있어?” 분명 푸른 점은 근처에 찍혀있는데 보이지가 않는다. 초조해진 세영이 주변을 둘러보며 시디발라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그때 머리 위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건물의 지붕 위에서 작은 머리가 쏙 나왔다. “응? 나 불렀어?” “야 임마! 혼자 가면 어떡해!” 세영이 버럭 화를 내자 놀란 시디발라가 주춤 물러섰다. 그런데 물러서면서 밟은 곳이 푹 꺼졌다. 추락하는 시디발라를 본 세영이 디안을 내던지고 달려갔다. 아슬아슬하게 시디발라를 낚아챈 세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으악, 뭐야! 갑자기 바닥이 없어졌어!” 제가 더 놀랐다는 듯이 호들갑을 떠는 시디발라를 보자 화낼 기운도 사라졌다. 내던지듯 시디발라를 놓은 세영이 바닥에서 굴러다니는 디안을 집어 들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시디발라가 그녀를 쫓아왔다. “화났어? 미안해. 위에 올라가면 뭔가 보일까 싶어서 그랬어.” “화 안 났어. 그래도 너무 위험한 짓은 하지 마.” 무뚝뚝한 대꾸에 헤실 웃은 시디발라가 세영의 손을 꼭 잡았다. 이어서 꼬리까지 그녀의 발목에 휘감았다. 걷기가 불가능해진 세영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수줍은 듯이 몸을 배배 꼰 시디발라가 말했다. “나는 너하고 진짜 결혼해도 괜찮은데.” 피식 웃은 세영이 시디발라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딱 소리가 나자 펄쩍 뛴 시디발라가 이마를 감싸 쥐었다. 원망스러운 시선에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말했다. “난 곧 떠날 사람이야. 헛된 미련을 버리시지?” “쳇, 거기 가면 뭐 좋은 게 있어?” “좋은 건 없지만 편리하긴 하지.” 세영은 원래 세계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원래 세계에 대해 생각한 것도 꽤 오랜만이었다. 그동안은 이런저런 일들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삐쭉 입술을 내민 시디발라가 따지듯 물었다. “거기가 우리보다 좋아?” “아니.” “그럼 왜 가려고 해? 그냥 여기서 우리랑 살자.” 세영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왜 돌아가려 하냐고 묻는다면 이유는 많다. 일일이 말하기 구차할 뿐이다. “시, 시디발라. 괜찮습니까?” 그때 데굴데굴 구르듯이 도착한 리먼이 헉헉거리며 물었다. 온몸이 물에 빠졌다가 나온 사람처럼 흠뻑 젖은 채였다. 고개를 갸웃한 시디발라가 말했다. “엥? 난 괜찮은데?” “다, 다행입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리먼이 제자리에서 비틀거렸다. 세영이 재빨리 그를 붙잡았다. 미안한 듯 미소 지은 리먼이 균형을 되찾았다. 시디발라가 불안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나 뭔가 잘못한 거야?” “아니, 그냥 저기에 뭔가 있어. 아마도 적인 것 같은 놈이.” 세영이 정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디발라와 리먼이 바짝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세영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보스인 것 같으니까 잡으면 여길 나갈 수 있을 거야.” 긴장한 두 사람이 고개를 끄떡였다. 리먼이 숨을 돌릴 시간을 주고 싶었지만, 저쪽 또한 일행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 증거처럼 느닷없이 악기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세영은 재빨리 상태창을 켰다. ‘현혹이나 매혹이 담겨있는 건 아니군. 그냥 연주야.’ 침입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대뜸 연주부터 하다니. 어떤 몹인지 몰라도 꽤 엉뚱한 것 같았다. 어쩌면 세이렌이나 하피 같은 종류일 수도 있었다. 세영은 정면에서 날아오는 공격에 대비한 채로 걸음을 옮겼다. 점점 줄어들던 사람들의 환상은 광장에 도착하자 완전히 사라졌다. 텅 빈 광장 한가운데 물이 흘러나오는 분수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분수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사람이 리라를 연주하는 게 보였다. 반사적으로 앞으로 튀어 나갈 뻔했던 세영이 디안부터 내려놓았다. “시디발라, 만약의 경우엔 네가 디안을 지켜.” “응.” 야무지게 고개를 끄떡인 시디발라가 단검을 꺼내 손에 쥐었다. 디안의 옆에 마리엔을 내려놓은 리먼이 성표를 움켜쥐고 공격에 대비했다. 그때 리라 소리가 멈췄다. 천천히 분수에서 몸을 일으킨 자가 세영을 보며 말했다. “살아있는 인간이 이 땅을 밟은 게 얼마만의 일인지.” “넌 뭐냐?” 예의상 묻는 말을 던진 세영이 상대를 쭉 훑어 보였다. 그는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목덜미를 덮는 검은 곱슬머리에 갈색 피부, 선명한 황금색 눈을 갖고 있었다. 치렁치렁한 흰옷 위에 짙은 보라색 천을 둘렀는데, 천에 수 놓인 자수와 머리 장식이 그가 꽤 높은 신분임을 짐작하게 했다.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탑의 수호자, 나스쿤. 침묵의 탑에 온 것을 환영한다. 여행자여.” “침묵의 탑? 모래의 탑이 아니라?” 여기 온 것이 헛수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세영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고개를 갸웃한 나스쿤이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아, 새로운 정복자인가? 꼬마에게 듣긴 했지만, 정말 어린 여자애군. 놀라워.” “네 눈엔 내가 애로 보이냐?” 세영의 반박에 나스쿤은 입가를 끌어올려 미소 같은 것을 지어 보였다. 눈가와 얼굴 근육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아서 스산하게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어리다고 말했을 때 화를 내는 건 어린애뿐이지. 하지만 놀리려는 의도는 아니다. 내게 살아있는 인간은 모두 어린애나 다름없어.” “그래서 뭐. 할아범 취급해주길 원하는 거야?” 세영의 빈정거림에 나스쿤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야기가 길을 잃었군. 정복자여, 네가 원하는 것은 탑의 신기겠지?” 천천히 펼쳐진 나스쿤의 손 위에 푸르스름한 구체가 나타났다. 구체의 가운데 은빛으로 빛나는 서클렛이 있었다. 나스쿤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것이 내가 지키는 신기. 지혜의 관이다. 수호자인 나를 쓰러뜨리면 얻을 수 있겠지. 물론 쉽게는 내어주지 않을 생각이지만.”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스쿤의 손이 리라의 줄을 튕겼다. 광장 전체가 진동하며 바닥을 뚫고 나온 거대한 뼈들이 새장처럼 그의 주변을 감쌌다. 동시에 세영은 사방에서 몰려드는 인기척을 느꼈다. 도시를 배회하던 환상들이 갑자기 광장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제게 달려드는 뚱뚱한 남자의 환영을 후려친 세영은 주먹에 와 닿는 느낌에 미간을 찌푸렸다. 산산이 부서진 뼈가 발치로 굴렀다. 세영은 이를 갈 듯 내뱉었다. “네크로맨서.” ──────────────────────────────────── 침묵의 탑 (4) “영리하구나. 그럼 재주껏 발버둥 쳐보렴.” 다정하게 말한 나스쿤이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세영은 그의 연주가 환상을 조종한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개미떼처럼 사방에서 몰려드는 환상을 본 그녀는 빠득 이를 갈았다. 이 도시 전체가 나스쿤의 수족이었다. 최단시간 안에 놈을 잡는 것 외엔 답이 없었다. 문제는 동료 중 절반이 전투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에 있었다. 세영은 리먼을 돌아보았다. “리먼, 5분만 버틸 수 있겠어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떡인 리먼이 제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세영은 파이어 스톰을 써서 몰려드는 환상들을 박살 낸 다음 동료들의 주변에 아이스 월을 쳤다. 잠깐이지만, 시간을 벌 수 있을 터였다. 다시 빽빽이 몰려든 환상들이 얼음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리먼의 오러 실드가 펼쳐지는 것을 확인한 세영이 나스쿤을 향해 질주했다. 그녀가 연달아 펼치는 마법을 본 나스쿤이 감탄하며 말했다. “어린 나이에 그런 실력이라니. 과연 정복자라 이건가.” “헛소리 말고 죽어!” 세영의 발차기가 단번에 뼈를 박살 냈다. 나스쿤의 손이 좀 더 빠르게 리라를 연주했다. 세영이 뼈를 부술 때마다 또 다른 뼈가 솟아올라 그녀의 앞을 막았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에 달했다. 점점 좁혀지던 거리가 마침내 0이 되어 세영의 주먹이 나스쿤의 코앞에 멈춰 섰다. 황금색 눈동자가 세영을 똑바로 바라봤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도 그는 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너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군.” 세영의 어깨가 움찔했다. 분한 듯이 이를 악물었지만, 멈춰버린 주먹은 움직이지 않았다. 부서진 뼛조각이 할퀴고 지나간 나스쿤의 뺨에서 한줄기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몬스터가 아닌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아무리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라지만, 살인을 해도 되는 건가?’ 처벌을 받지 않고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면, 그럼 사람을 죽여도 괜찮은 건가. 머뭇거리는 세영을 느낀 나스쿤이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지 마라. 네 앞에 있는 건 인간이 아니라 과거의 망령이니까. 죽여도 상관없어.”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저를 죽이라고 말했다. 환상들이 리먼의 실드를 두들기는 소리도 들렸다. 이성은 당장 그를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데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세영을 바라보던 나스쿤이 어깨를 으쓱했다. “정복자답진 않지만, 상관없겠지. 내가 진 것은 분명하니.” 나스쿤이 손을 내젓는 순간 끝없이 몰려들던 환상이 멈췄다. 그들은 언제 공격을 했냐는 듯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받아라. 지혜의 관이다.” 나스쿤은 세뱃돈을 던져주는 할아버지처럼 불쑥 서클렛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든 세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나 해서 인벤에 넣자 퀘스트 창에 변화가 생겼다. 진짜 신기라는 뜻이었다. 그 사이 나스쿤은 다시 분수대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연주를 시작했다. 묵묵히 그를 쏘아보던 세영이 물었다. “넌 누구야?” “벌써 건망증이 올 나이로는 보이지 않는데.” “난 왜 여기서 청승을 떨고 있냐고 물은 건데?” 이곳은 환상들만 존재하는 도시였다. 살아있는 인간이 살면 미치기 딱 좋은 장소로 보였다. 어쩌면 이미 맛이 간 뒤일 수도 있었다. 물음에 대한 답은 나스쿤이 아닌 뒤에서 들려왔다. “현자 나스쿤. 샤이렌드라의 군주. 마신봉인자.” 백지장처럼 안색이 창백해진 리먼이 나스쿤에게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마도시대와 함께 사라진 당신이 어떻게 살아있는 겁니까?” “샤이렌드라의 군주라는 말 빼고는 다 틀렸군. 나는 현자였던 적이 없고, 마신을 봉인하지도 않았으니까.” 연주를 멈춘 나스쿤이 냉담하게 답했다. 낯이 익은 단어에 세영이 그를 훑어보며 물었다. “마신 부르는 신기 모아다가 파괴도 못 하고 대충 파묻어둔 띨띨한 새끼가 너야?” “그렇게 전해진 모양이지? 하긴. 그편이 속 편하긴 하겠군.” “그 말은, 사실은 아니라는 거네?” 나스쿤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황금빛 눈으로 뚫어져라 세영을 바라보더니, 이내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설명하기 귀찮다. 그냥 그렇게 알고 있던지.” “나 사람 죽인 적은 없는데 팬 적은 많다?” 히죽 웃은 세영이 주먹을 뚜둑 소리 나게 꺾었다. 픽 웃은 나스쿤이 “난폭한 아이네.” 하고 중얼거렸다. 진짜 한 대 때릴까 생각하는 순간 리라를 만지작거리던 나스쿤이 물었다. “너는 왜 신기를 모으려는 거지? 그게 뭔지 알고?” “신과 계약해서. 뭔지는 몰라.” “무슨 계약?” “지금은 내가 묻고 네가 떠들 시간인데?” 팔짱을 낀 세영이 냉담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어깨를 으쓱한 나스쿤이 세영을 마주 봤다. “신과 계약을 했다면 너도 뭔가 이루고 싶은 게 있는 거겠지. 만약 신기를 모았을 때 이 세상이 멸망한다면 어쩔 거냐.” “무슨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야?” 코웃음 치는 세영과 달리 리먼의 안색은 급변했다. 창백하다 못해 새파랗게 질린 그가 다그치듯 물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주신은, 사하는 우리를 버린 겁니까?” “리먼?” 갑자기 널뛰는 대화를 따라잡지 못한 세영이 그를 불렀다. 의아한 듯 눈을 깜빡이던 나스쿤이 문득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아, 넌 사제군. 펠릭스가 기록을 남겼나? 빛의 신전 쪽에서 그걸 남겨뒀다니 의외인데.” “저는 자애의 여신을…….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사실입니까?” “알고 있다니 다행이네. 네가 설명해.” 잘됐다는 듯이 말한 나스쿤이 다시 리라로 시선을 돌렸다. 본격적으로 멍을 때리기 시작한 그를 대신해 리먼이 땀을 뻘뻘 흘리며 설명했다. “그, 일설에 따르면 현자들은 마신을 부르는 신기를 봉인한 것이 아니라…….” “아니라?” “주신인 사하를 지상에 강림시켜 봉인했다고 합니다.” “그게 뭔 소리예요?” 세영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리먼은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버벅였다. 보다 못한 나스쿤이 그를 도왔다. “신에게도 권태기가 있다는 소리다. 인간처럼 다 때려치우고 싶어 하고 가끔은 자살기도도 해. 사하가 딱 그랬어. 문제는 그가 이 세상 자체를 의미하는 신이라는 거지.” 예상치 못한 말에 세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깨를 으쓱한 나스쿤이 천연덕스레 말을 이었다. “뭐, 이해 못 할 건 아니야. 신 노릇도 오래 하면 지겹겠지. 게다가 너희가 마도시대 라고 부르는 그때는 사하의 힘을 사정없이 끌어다 썼으니까.” 견디다 못한 사하는 이 별을 떠나려고 했고, 그건 곧 세계의 멸망을 의미했다. 나스쿤은 강박적인 손놀림으로 리라를 만지작거렸다. “재수 없게도 우린 그걸 미리 알아버렸고 사하가 떠나지 못하게 수작을 부렸지. 사하의 신체를 지상으로 강림시킨 후 신기에 나누어 봉인한 거다. 실패했어야 했는데 성공해버렸어. 젠장. 왜 성공하고 난리야.” 나스쿤의 손아래 짓눌린 리라의 현이 기괴한 소리를 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듣고 있던 리먼이 슬그머니 반박했다. “하지만 성공했기에, 이 세계가 그리고 저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냉담한 황금빛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나스쿤은 회한과 자조가 어린 얼굴로 물음에 답했다. “우리는 성인군자가 아니야. 세계의 끝을 늦추고자 했던 것은 각자 지키고 싶은 것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봉인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지.” 쓴웃음을 지은 나스쿤이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환상을 가리켰다. 그것은 오래된 환상이었다. 한때 샤이렌드라라고 불렸던 도시의 일부였다. 과거에 묶여버린 군주는 제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기억했다. “나는 내 백성들을 봉인의 대가로 잃었다. 멜로이는 약혼자를, 아리스타타는 동생을 빼앗겼지. 꼬마는 이름을, 펠릭스는 신앙을, 케이론은 고향을 잃었다. 우리는 우리가 지키고자 한 것을 제물로 바쳐 시간을 얻었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닌 시간을.” 어리석게도. 덧붙이는 목소리는 너무나 작아서 거의 들리지 않았다. “대가가 너무 컸기에 실수를 인정할 수 없었다. 절대 후회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아무리 굳은 결의도 시간 앞에선 모래성이나 다름없더군. 지금의 나는, 세상이 멸망하든 말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니까.” 마도시대를 종결시키고 현자의 이름을 역사에 새긴 남자는, 그러나 후회한다고 말했다. 세상을 구한 것을 후회한다고. 이제 멸망이든 뭐든 신경 쓰지 않는다고. 찡그린 미간을 벅벅 긁은 세영이 한숨처럼 말했다. “어쨌든 내가 신기를 가졌으니 넌 이제 여기 있을 필요 없는 거 아니야? 우리랑 같이 나갈래, 아니면 여기 있을래?” 나스쿤은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뚫어져라 세영을 바라보던 그가 헛된 희망을 움켜쥐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를 데려가 줄 거라고?” “우리가 나가는 김에 겸사겸사.” 세영의 대답에 나스쿤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우는 것 같은, 혹은 웃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던 그는 이내 손을 내밀었다. “가고 싶어. 나를 데리고 가줘.” 세영은 뚱하게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같이 나갈 거냐고 먼저 묻긴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는데. 한숨을 삼킨 그녀는 나스쿤의 손을 잡고 확 끌어당겼다. 자리에서 벌떡 일으켜 세워진 나스쿤이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하하 웃었다. 전보다 자연스러워진 웃음이었다. “저기, 끝난 거야? 나도 그쪽으로 가도 돼?” 디안과 마리엔 옆에 서서 안절부절못하던 시디발라가 외쳤다. 리먼이 멋대로 자리를 이탈한 터라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을 깜빡 잊고 있었던 세영이 서둘러 다가갔다. 신기도 손에 넣었는데 디안과 마리엔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세영은 나스쿤을 돌아보며 손짓했다. “어이, 할배. 이리와 봐.” “움직이기 귀찮은데.” “혓바닥으로 걸어가게 만들기 전에 빨리 와.” 세영의 재촉에 한숨을 쉰 나스쿤이 움직였다. 보는 사람이 괴로워 질만큼 느릿느릿한 동작이었다. 세영은 그의 멱살을 잡고 질질 끌고 오는 쪽을 택했다. “아야야, 아프잖아. 정말 난폭한 아이네.” “헛소리하지 말고. 이거 어떻게 깨워?” 세영이 잠든 동료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멀뚱히 그들을 내려다본 나스쿤이 어깨를 으쓱했다. “자는 것 같은데 어쩌란 거냐. 그냥 흔들어서 깨워.” “여기 들어왔더니 이렇게 됐다고. 뭔가 방법이 있을 거 아냐.” “아, 시험의 장소가 있었지. 워낙 오래 돼서 깜빡했네.” 나스쿤은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이 제 머리를 툭툭 쳤다. 쪼그리고 앉아 디안과 마리엔의 뺨을 쿡쿡 찔러본 그가 쯧쯧 혀를 찼다. “나약한 애들이군. 그냥 버리는 게 나을 텐데. 데리고 있어 봐야 도움도 안 돼.” “네 무개념부터 버리게 해줄까?” 눈가를 꿈틀한 세영이 차갑게 말했다. 나스쿤의 입술에 냉담한 미소가 걸렸다. “사람을 죽이지도 못하고, 동료를 버리지도 못하고. 계속 그런 식이라면 앞으로 힘들 텐데.” “자기가 엿 먹었던 일을 남에게 권하는 건 같이 엿 되어보자는 심보야 뭐야?” 톡 쏘아붙이자 순식간에 창백해진 나스쿤이 입술을 깨물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세영이 되레 놀랄 정도였다. “아니, 나는 누구도 나처럼 되길 바라지 않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 나스쿤이 “이곳을 벗어나면 깨어날 거야.” 하고 덧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상처받은 것 같은 태도에 찝찝해진 세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빙글 몸을 돌린 나스쿤은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밖으로 나갈 거라면 저쪽이다.” 광장의 반대편을 가리키는 손에 고개를 끄떡인 세영이 디안을 들춰 업었다. 서둘러 다가온 리먼이 마리엔을 업었다. 불안한 표정의 시디발라가 세영의 근처에서 얼쩡거렸다. “저기, 괜찮아?” “뭐가?”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묻자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휘젓는다. 세영은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빠르게 광장을 가로질러 도시의 외벽으로 향했다. 외벽 한가운데 검은 구멍 같은 것이 뻥 뚫려 있었다. ──────────────────────────────────── 침묵의 탑 (5) “자, 잠깐만.” 앞서가던 나스쿤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제 무릎을 짚었다. 몸을 숙인 채 허억허억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꽤 고통스러워 보였다. 미간을 찌푸린 세영이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어디 아파?” “이렇게 오래 걸어본 건 거의 백 년만의 일이라…….” 땀에 젖은 얼굴을 든 나스쿤이 수줍게 말했다. 기가 막힌 세영이 대놓고 혀를 찼다. “미친, 대체 얼마나 잉여로 산 거야?” “그래도 이 정도면 관리 잘한 건데 말이다.” “어디가?” 세영의 면박에 멋쩍은 미소를 지은 나스쿤이 숨만 훅훅 몰아쉬었다. 보다 못한 세영이 디안을 내려놓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흠칫 놀라 물러서려는 나스쿤를 잡아당겨 단번에 어깨 위로 들쳐 맸다. 당황한 나스쿤이 어어 소리를 냈다. “버둥거리다 떨어진다. 가만히 있어.” “이거 참. 체면이…….” 뭐라 투덜거리는 나스쿤을 무시하고 디안을 옆구리에 낀 세영이 걸음을 옮겼다. 구멍 안쪽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시디발라가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안 무거워? 도와줄까?” “안 무거워. 걱정하지 마.” 무뚝뚝한 대답에 뺨이 부루퉁해진 시디발라가 나스쿤을 노려보았다. 불행히도 나스쿤은 여자의 어깨에 매달려가는 신선한 경험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케이론이 이걸 못 봐서 다행이군. 거의 만년의 놀림감이야.” 흔들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나스쿤이 투덜거렸다. 힐끗 눈을 돌린 세영이 피식 웃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만약 만나게 된다면 꼭 이야기해줄게.” “못 만나. 죽었거든. 아직 지상에 남아있는 것은 나와 아리스타타, 꼬마뿐일 거다. 나머지는 모두 사라진 지 오래야.” 심각한 내용과 다르게 말하는 이의 목소리는 가벼웠다. 먼저 사라진 자들을 부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잠시 입을 다물었던 나스쿤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미궁은 멜로이가 지키는 곳이었지. 황금의 공주, 아직도 그녀의 금발이 기억나. 타락한 왕에게 살해당했다고 하더군. 내 친구의 원한을 대신 갚아줘서 고맙다.” 세영은 타락한 왕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의 뇌리에서 자드키엘을 제외한 몬스터들은 극도로 존재감이 흐릿했다. 잠시 스쳐 지나간 소머리 괴물 따위가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신기를 얻으려다 그렇게 된 거니 고마워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근데 넌 여기 처박혀 있었다면서 바깥소식은 어떻게 들은 거야?” “꼬마에게 들었지. 얼마 전에 놀러 왔거든. 이런저런 세상 이야기도 듣고 옛날이야기도 했지.” 나스쿤은 잘 키운 아들을 둔 기분이라며 으스댔다. 순간 양로원에 온 기분을 느낀 세영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네가 말하는 꼬마가 탑 밖에 불타는 날파리를 붙잡아둔 놈이냐?” “응? 벌써 꼬마와 만난 거냐? 하. 역시 어린애들은 빨라.” 순간 저만 빼고 다들 연애에 도가 텄다고 투덜대는 나스쿤을 집어 던지고 싶어졌다. 세영은 대신 나스쿤의 종아리를 찰싹 때렸다. 파드득 떤 나스쿤이 “세상에, 이건 악몽이야.” 라고 중얼대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보기와 다르게 아주 시끄러운 녀석이었다. “불타는 날파리에게 들었어. 마신의 저주를 받은 흉악한 놈이라고 하던데.” “아니, 우리 꼬마가 얼마나 귀여운…. 자세히 보면 귀여운 면도 있다고. 덩치는 좀 크다만.” “덩치가 큰데 왜 꼬마야?” “처음 만났을 때는 아주 쪼끄맣고 예뻤어. 진짜 여자애인 줄 알았으니까. 나도 장가가서 꼬마처럼 생긴 딸 낳고 싶었는데. 젠장, 내 인생은 완전히 망했어.” 나스쿤은 쉬지 않고 투덜거렸다. 한심함을 감추지 않는 세영과 달리 리먼은 착잡한 얼굴이었다. 나름대로 전설 속 현자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밖에 나가면 장가가든가. 누가 알아? 허약한 할배라도 사랑해줄 정신 나간 여자가 있을지.” 무심한 대꾸에 하하 웃은 나스쿤이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입을 다무는 게 수상했지만, 그만큼 떠들면 지칠 때도 됐다 싶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빙글빙글 내려가던 세영이 한숨을 쉬었다. “이놈의 계단은 왜 이렇게 길어. 대체 언제까지 내려가는 거야?” “사막 하나를 가로지르는 건데 이 정도면 짧은 거지.” “뭐?” 뜻밖의 말에 세영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아, 내가 말을 안 했나?” 하고 천연덕스럽게 말한 나스쿤이 설명을 덧붙였다. “침묵의 탑은 태양의 탑과 이어져 있거든. 침묵의 탑이 입구, 태양의 탑이 출구지. 태양의 탑에선 들어올 수 없고 침묵의 탑에선 나갈 수가 없게 되어 있단다.” “사막을 가로지른단 말은 태양의 탑이라는 게 다른 장소에 있단 소리야?” “예전엔 카라둔 사막이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군.” 그 말을 들은 세영은 일이 묘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일행은 비행선을 타고 샤르마흐 사막을 지나서 다시 카라둔 사막으로 갈 예정이었다. 비행선이 추락하지 않았다면 분명 탑을 지나쳐서 카라둔 사막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러면 신기를 발견하지도 못했겠지. 이게 과연 우연일까?’ 기분이 나쁠 정도로 용의주도한 우연이었다. 세영은 목덜미를 더듬는 찜찜함을 애써 떨쳐냈다. 모든 사건이 우연이 아니고,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잠시 조용해졌던 나스쿤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나는 신나게 설명만 해주고 정작 답을 못 들었군. 신기를 모아서 주신의 봉인을 풀면 이 세상이 멸망할 수도 있다. 그래도 넌 봉인을 풀 생각이냐?” 세영은 잠시 침묵했다. 늙은 놈들은 하나같이 집요한지, 답해주지 않으면 끈질기게 달라붙을 기세였다. 그녀는 그냥 솔직하게 답하기로 했다. “모르겠는데.” “응? 뭐라고?”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는지 나스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피식 웃은 세영이 말을 이었다. “난 사실 여기 사람 아니거든. 다른 세계에서 왔어.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신기를 찾아서 파괴하라기에 그러겠다고 한 거고.” 나스쿤은 꼼짝도 않고 그녀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숨은 제대로 쉬는지 걱정될 정도였다. “내 세계도 아닌 곳이 멸망한다고 해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해야 할까. 이곳을 멸망시킬 정도로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게 중요할까. 둘 다 잘 모르겠어. 그래서 모르겠다고 한 거야.” “그러면… 앞으로 어쩔 생각인데?” “일단 다 모아서 그 날 기분대로 결정하려고.” 지금 결정해서 밀고 나간다고 해서 나중에 바뀌지 않을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그때 끌리는 쪽으로 결정하기로 했다. 솔직한 세영의 대답에 굳어있던 나스쿤이 이내 펄떡거리며 웃어댔다. 뭐가 그렇게 웃긴지 좀처럼 웃음을 그치질 못했다. “진짜 걸작이다. 아, 웃겨라. 꼬마가 네 말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한데.” 헉헉거리며 간신히 웃음을 그친 나스쿤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세영은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그때 뭔가가 디안을 움켜잡은 손을 건드렸다. 시선을 내리자 안도한 얼굴의 시디발라가 웃고 있었다. 세영은 의아하게 그를 보며 물었다. “왜?” “다행이다 싶어서.” “뭐가?” “넌 여기가 멸망하든 말든 상관없다고 할 줄 알았거든.” 세영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물었다. 기회만 엿보던 나스쿤이 신이 나서 “저런, 전혀 신뢰받지 못하고 있는데?” 하고 놀려댔다. 한숨을 내쉰 세영이 “엉덩이도 한번 맞아볼래?” 하고 대꾸했다. 나스쿤은 곧바로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앗, 저기 봐봐. 출구가 보여!” 언제 조용히 있었냐는 듯이 생기를 되찾은 시디발라가 후다닥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피식 웃은 세영이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때 얌전해졌던 나스쿤이 몸을 꿈틀거렸다. “잠깐. 나 좀 내려줘.” 세영은 그냥 집어 던질까 했다가 마음을 바꿔 얌전히 내려놓았다. 구겨진 옷을 펴고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한 나스쿤이 빙긋 웃으며 한 바퀴 돌았다. “어때, 괜찮아 보여?” 세영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주둥이가 얄미워서 그렇지 껍데기만큼은 아주 번듯하니까. 찡긋 윙크한 나스쿤이 “역시 난 시대를 뛰어넘는 미남이야.” 하고 자화자찬했다. 세영은 그를 한 대 치려다 말았다. 리라를 고쳐 든 나스쿤이 먼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할배, 괜찮아?” 벽에 의지해 가까스로 걸음을 옮기는 나스쿤은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싱긋 웃으며 세영을 돌아본 그는 “긴장해서 그래.” 하고 되지도 않은 변명을 했다. 세영은 언제든 그를 낚아챌 수 있게 바짝 뒤를 쫓아갔다. 휘청거리며 계단을 모두 내려온 나스쿤이 긴 한숨을 쉬었다. “내 눈으로 태양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활짝 열린 문을 쳐다본 그가 감격한 듯 말했다. 탑 바깥은 황무지였다. 메마른 땅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지만, 나스쿤은 그곳이 마치 천국이라도 되는 양 바라보고 있었다. “안 가?” 세영의 물음에 망부석이 된 듯했던 나스쿤이 움직였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이 보였지만, 더는 휘청거리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며 뭔가를 붙잡으려는 것처럼 손을 뻗었다. 마치 신기루처럼, 탑을 벗어난 그의 손이 형체를 잃고 흘러내렸다. “멈춰!” 이변을 알아챈 세영이 나스쿤의 목덜미를 낚아채 뒤로 당겼다. 힘 조절을 하지 못해서 헝겊 인형처럼 붕 휘둘린 나스쿤이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세영은 황급히 그의 오른손을 살폈다. 아주 잠깐, 오른손이 바깥으로 나갔을 뿐인데도 팔의 절반이 사라져 있었다. “이게 무슨…….” “이런. 잡혀버렸네.” 난처하게 웃는 나스쿤을 본 순간 세영은 진실을 깨달았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다. 알면서 탑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던 것이다. “죽으려고 나한테 데려가 달라고 한 거야?” 분노한 세영의 앞에서 나스쿤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울컥해서 뭐라고 쏘아붙이려는 순간 “세영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참담한 표정의 리먼이 천천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는 이해하는 자의 눈을 하고 있었다. 힘이 빠진 세영이 나스쿤을 돌아보았다. “죽고 싶어?” 고개를 숙인 나스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숨을 쉰 세영이 그의 무릎을 툭 찼다. “솔직히 말해도 돼. 화내지 않을 테니까.” 놀란 듯이 고개를 든 나스쿤이 웃었다. 탑 바깥으로 시선을 돌린 그가 말했다. “죽고 싶었던 것은 아주 오래전이야. 지금은 그냥 쉬고 싶어.” 담담한 목소리였다. 나스쿤은 한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리라의 먼지를 털어내고 주워들었다. 연인을 안듯 리라를 소중히 품에 안은 그가 말을 이었다. “그 도시는, 반나절의 환상을 끊임없이 보여주지. 내가 제물로 바친 이들이 살았던 마지막 낮을 반복하며 존재하는 거야. 절대 잊지 말라는 것처럼. 그리고 나 역시 그곳에 속해있어.” 목을 매든, 심장을 찌르든 반나절이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고 말한 나스쿤이 웃었다. 도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탑을 나가는 것뿐인데 불가능했다고. 벗어나려고 할 때마다 힘이 빠져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고 했다. “사실 꼬마가 왔을 때, 나를 죽게 해달라고 애원하고 싶었어. 내가 그렇게 만든 거나 다름없는 불쌍한 녀석에게 말이야. 양심이라는 게 조금은 남았는지 끝내 말하지 못했지만, 아마 알아챘을 테지.” 씁쓸하게 말한 나스쿤이 품에 안고 있던 리라를 내밀었다. “이걸 꼬마에게 전해줘. 미안하다는 말도 같이 해주면 좋고.” 세영은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받았다. 나스쿤은 조금 안도한 얼굴로 말했다. “착한 녀석이야. 나처럼 막 대하지 말고 잘해줘.” “내가 꼬마인가 하는 놈을 어떻게 안다고 이런 걸 막 맡겨?” 눈썹을 삐딱하게 쳐든 세영이 물었다. 그러자 악당처럼 웃은 나스쿤이 “너희는 반드시 만나게 될 거야. 내기해도 좋아.” 하고 말했다. 한숨을 내쉰 세영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기 이름이 꼬마라고 나서는 놈이 있다면 전해줄게. 다른 유언은 없어?” 그것이 떠나도 된다는 뜻임을 느낀 나스쿤이 웃었다. 지금까지 보았던 것 중에서 가장 환한 미소였다. 하나 남은 손으로 세영의 손을 잡은 그가 손등에 입을 맞췄다. “고마워, 그리고 정말 미안하다.” “미안하면 좀 고쳐. 솔직히 너 민폐야.” 세영은 그의 뺨을 쿡 찔렀다. 아야야 소리를 내며 뺨을 감싼 나스쿤이 “다시 태어나면 고칠게. 일단 좀 쉬고 나서.” 하고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피식 웃은 세영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손을 잃은 나스쿤 대신 구겨진 옷을 털고 머리를 정리해준 그녀는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잘 가.” 세영의 인사에 나스쿤은 빙긋 웃었다. 그는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현자 나스쿤.” 조용히 지켜보던 리먼이 그를 불렀다. 멈칫한 나스쿤이 리먼을 돌아보았다. 황금빛 눈동자에는 처음의 불쾌감이 사라져있었다. “나는 한 번도 현명했던 적이 없는데.” “당신은 세계를 구원했고 우리가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저는 당신이 구원한 사람 중 하나로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조심스럽게 말을 마친 리먼이 고개를 숙였다. 나스쿤은 씁쓸한 얼굴로 그에게 답했다. “누군가 소원을 하나 들어준다면, 태양 아래서 죽고 싶다고 말하려 했지. 그걸 들어준 너희가 나의 구원이다. 그러니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뭐라고 말하려던 리먼이 입을 다물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이 나스쿤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 그가 뒤로 물러섰다. 다시 싱긋 웃은 나스쿤이 흘러내린 앞머리를 옆으로 쓸어 넘겼다. “자, 그럼 가볼까.” 나스쿤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문 바로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 그가 마지막으로 세영을 돌아보았다. 피식 웃은 세영이 한 손을 흔들어주었다. 마주 손을 흔든 나스쿤이 몸을 돌려 빛 속으로 걸어나갔다. 태양이 한순간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잠시 뒤 나풀거리는 보라색 천이 허공을 부유했다. 깃털처럼 날아오른 그것은 햇살이 닿자마자 하얗게 타들어 갔다. 한 줌의 재조차 흙 위에 남지 않았다. ──────────────────────────────────── 조르디아 (1) 디안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잠깐 잠들었다가 깨보니 옆에서 시디발라가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씁쓸한 얼굴의 리먼이 그를 달래는 중이었고, 세영은 혼자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이거 선물로 주려고 했는데. 앞으로 잘 지내자고 말하려고 했는데…….” 울먹거리는 시디발라의 손에는 선명한 보라색 꽃이 들려있었다. 국화처럼 소담한 꽃송이에 바늘처럼 뾰족한 이파리를 가진 꽃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는 디안은 그저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아, 깼어요?” 그때 고개를 든 세영이 디안을 발견했다. 안도를 느낀 디안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는 순간 온몸이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 여기저기를 흠씬 두들겨 맞은 느낌이었다. 일순 당황한 표정을 지었던 세영이 곧 이해했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 맞다. 두 번이나 집어 던졌지.” “네? 집어 던져요?” “미안해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영혼 없는 사과를 한 세영이 허공에서 작은 병을 꺼내 내밀었다. 디안은 그녀의 원한을 샀는지 의심하며 병에 든 것을 마셨다. 몸을 괴롭히던 통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의 표정이 편안해지는 것을 확인한 세영이 물었다. “잘 잤어요?”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잠들어버려서.” 디안은 낭패감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름대로 각오를 다지며 탑으로 들어갔는데 눈을 뜨자 모든 게 끝난 분위기였다. 동료들에게 짐만 되었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피식 웃은 세영이 그를 달랬다. “아뇨. 원래 그런 장소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거보다 기분은 괜찮아요?” “네. 좋은 꿈을 꿨습니다.” “흠?” 의아한 세영의 얼굴에 디안은 눈을 깜빡였다. 눈을 가늘게 한 세영이 “무슨 좋은 꿈?” 하고 되물었다. 민망함에 얼굴을 붉힌 디안이 띄엄띄엄 설명했다. “어릴 때의 꿈이었습니다. 부모님이 모두 집에 계시고 함께 식사를 하는…….” 아기 때 모친을 잃은 디안은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꿈에서 어머니로 나온 것은 마리엔의 모친인 아일라였다. 디안은 제게 상냥했던 그녀를 좋아했고, 아일라가 엄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꿈은 그것을 반영하듯 단란한 가정의 모습을 그려냈다.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보여줬던 건가.” “네?” 세영의 중얼거림을 알아듣지 못한 디안이 되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은 세영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깨어나기 싫었겠네요.” “네. 정말 행복…… 앗, 아뇨.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당황한 디안이 버벅거렸다. 그때 그의 옆에 누워있던 마리엔이 몸을 뒤척였다. 고개를 돌리자 허공을 멍하게 바라보는 녹색 눈이 보였다. 동지가 생겼다는 기쁨에 디안은 “어, 일어났어?” 라고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잡고 일어나라는 뜻이었는데 다가오는 손을 본 마리엔이 그것을 쳐내버렸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퍽 소리가 날 정도였다. 갑자기 손을 내밀어 놀라게 했나 싶었지만, 선명한 초록색 눈은 명백한 적의를 품고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디안은 뻣뻣이 굳었다. “마리엔?” 그때 몸을 숙인 세영이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디안을 노려보던 마리엔이 흠칫해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세영은 다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마리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세영을 바라보던 그녀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당황한 세영이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디안은 마리엔이 쳐낸 손을 꾹 감싸 쥐었다. 보호구를 끼고 있어서 크게 아플 리도 없건만, 이상하게 따끔거리는 느낌이었다. 적대 어린 눈빛을 떠올리자 손이 아니라 가슴이 아팠다. 디안은 왜 그러냐고 묻지도 못하고 흐느끼는 마리엔을 쳐다보기만 했다. “마리엔, 무슨 일인지 말해줄 수 있어요?” 세영의 물음에 마리엔은 세차게 고개를 휘저었다. 어깨를 떨며 흐느끼는 모습이 보기 애처로웠다. 난감한 듯 뺨을 긁적인 세영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이제 조르디아로 떠나야 해요. 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까, 만약 도움이 필요하면 부르세요. 알겠죠?” 입술을 꼭 깨문 마리엔이 세영을 바라봤다. 옆에 있어 주길 바라는 눈이었지만, 세영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마주 보기만 했다. 이내 체념한 마리엔이 천천히 고개를 끄떡였다. 세영은 어쩔 줄 모르는 디안에게 눈짓을 하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빈말이 아니라 해가 지기 전에 떠날 준비를 하려면 꽤 서둘러야 했다. 일행에게서 떨어진 세영은 인벤토리에 넣어둔 보트를 꺼냈다. 테이밍 스킬로 모래 속에 숨어있는 하늘고래를 불러들인 다음 보트를 설치했다. 이어서 모래상어를 꾀어내서 하나하나 로프에 매달고 있는데 걱정스러운 얼굴의 시디발라가 총총히 다가왔다. “마리엔 왜 저래?” 시디발라가 우중충한 분위기의 마리엔을 눈짓하며 물었다. 아직 눈가가 발갛게 물들어있는 그를 내려다본 세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 뭔가 안 좋은 걸 떠올린 모양이지.” 반응으로 봐서 디안과 관련된 과거일 가능성이 컸다. 걱정스럽긴 했지만, 제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번 기회에 둘이 해결을 보고 털어내던가 아니면 계속 안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시큰둥한 대답에도 아무 말 없이 꼼지락거리던 시디발라가 말했다. “있잖아. 현자라는 사람 말이야.” “나스쿤?” “…응. 떠날 때 어땠어?” 마지막 상어를 보트에 매단 세영이 시디발라를 돌아보았다. 제 발끝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는 어딘지 침울해 보였다. 잠시 나스쿤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린 세영이 말했다. “후련해 보였어.” 세영의 말을 들은 시디발라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하지만 아직 미련이 남았는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말하지를 못했어.” “나스쿤에게 고마웠어?” 싫어하는 게 아니라? 세영은 조금 의아한 눈으로 되물었다. 대놓고 쏘아보고 툴툴거리고 경계하는 모습만 보이지 않았나. 쑥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떡인 시디발라가 답했다. “그 사람 때문에 세상이 계속된 거잖아. 그래서 나랑 내 동생들도 태어날 수 있었던 거고. 그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훌쩍 가버릴 줄은 몰랐어.” “별로 신경 안 쓸 거야. 고맙다는 말 들으려고 한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잊어버려, 그냥.” 죽은 자는 기억 속에 묻히는 것이 좋다. 나스쿤도 그것을 바랄 것이다. 덤덤히 말하고 짐을 실으려고 몸을 돌리는데 팔이 살짝 잡아당겨 졌다. 그녀의 옷자락을 꽉 쥔 시디발라가 뭔가를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네가 돌아가는 걸 선택해도 원망 안 할 거야.” “…….” “진짜야. 너한테 우릴 위해 희생 하라던가, 그런 생각은 전혀 안 해.” 시디발라는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제가 진심이라는 것을 보이려 애썼다.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그래 봐야 그냥 귀여워 보일 뿐이었지만. 세영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뺨을 붉힌 시디발라가 “그, 그냥 그 말이 하고 싶었어!” 하고 뽀르르 도망쳤다. 세영은 피식 웃었다. * 조르디아는 바냐 일족이 세운 도시였다. 상업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바냐들은 세상을 주무른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부를 쌓았다. 조르디아 역시 상업이 발달해 진귀하고 아름다운 물건들이 넘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르디아는 상인의 도시가 아닌 전사의 도시라고 불렸다. “조르디아는 바냐의 최고 전사인 라오 조드가 황금으로 세운 도시입니다. 사막 한가운데 궁을 짓고 자신의 성을 따서 조르디아라는 이름을 붙였지요. 라오 조드와 그를 따르는 자들의 혈통이 이어져 뛰어난 전사들이 많다고 하더군요.” 세영은 리먼의 설명을 들으며 번화한 도시를 구경했다. 전통에 따라 벽은 푸른색으로, 문은 살구색으로 칠한 건물들은 어딘지 모르게 몽환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의 남자들이 둥글넓적한 흰 모자를 쓴 채로 거리를 지나갔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상의는 대부분 격자무늬였는데, 넓게 접어 올린 소매만 새하얀 색이었다. 바지는 통이 넓은 흰색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흰 바지만 입으라는 법이라도 있나 의심될 정도였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은 많았지만, 여자들은 신기할 정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지나가는 남자들이 모두 일행을 힐끔거렸다. 정확히는 세영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혹시 제 차림이 이상해요?” 도시로 들어오기 전에 세영은 <사막의 오아시스 세트>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반짝이는 장식이 달린 머릿수건과 원피스는 햇빛을 적절히 가려주면서도 시원해 보였다. 팔꿈치까지 내려오는 반소매에 치마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길이니 노출이 심한 것도 아니었다. “아뇨, 딱히 이상한 점은 없어 보입니다.” 리먼도 조금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여자가 있어서 쳐다보나 했지만, 마리엔은 상대적으로 시선을 덜 받았다. 세영만 대놓고 쳐다보는 시선에 일행은 바짝 긴장했다. 세영의 앞으로 나선 시디발라가 두 팔을 활짝 펼쳤다. 다가오는 시선을 막으려는 것 같은 몸짓이었다. 그 옆에 선 디안이 팔짱을 끼고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세영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흩어졌다. “갔네?” 시디발라가 조금 의아한 듯이 말했다. 안도한 얼굴로 고개를 끄떡인 리먼이 “그래도 조심해야겠군요. 긴장을 풀면 안 될 것 같습니다.” 하고 말했다. 세영은 제게 달려드는 부나방이 있겠나 생각했지만, 동료들이 신경을 써주는 것이 고마워 피식 웃었다. “일단 숙소부터 찾죠. 다들 휴식이 필요한 것 같으니까.” 지친 얼굴의 마리엔을 힐끗 쳐다본 세영이 말했다. 동의하듯 고개를 끄떡인 일행은 주변을 잔뜩 경계하며 걷기 시작했다. “긴장을 풀면 안 될 것 같다더니…….” 정확히 10분 후. 일행과 떨어져 혼자가 되어버린 세영이 머리를 긁적였다. 숙소를 찾아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그녀와 다르게 일행은 화려한 구경거리에 자꾸만 뒤처졌다. 그걸 고려해서 속도를 늦춘다고 했는데 어느새 혼자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어어이, 아가씨. 혼자 나온 거야?” 느끼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세영의 팔을 덥석 쥐었다. 어이가 없이 힐끗 돌아보자 느물느물 웃고 있는 까무잡잡한 놈이 보였다. 뒤쪽에 놈의 동료인 것 같은 까무잡잡한 놈팽이들이 있었다. 놈은 세영의 팔을 슬슬 쓰다듬으며 말했다. “여기가 얼마나 위험한데, 혼자 돌아다니면 쓰나. 집이 어디야. 데려다줄게.” “내 집은 알아서 뭐하게. 니가 갈 곳은 하나뿐인데.” 세영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미소를 다른 뜻으로 착각한 놈이 헤벌쭉하게 입을 벌렸다. 세영은 이 새끼의 팔을 ㄷ자로 만들까 ㄹ자로 만들까 고민했다. 그 사이 놈이 손을 슬슬 위로 올리면서 말을 이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우리…….” 그때 불쑥 끼어든 손이 놈의 손목을 콱 움켜쥐었다. 우두둑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한 힘에 놈이 꽥하고 비명을 질렀다. “내 일행에게 무슨 볼일입니까.” 서늘하고 낮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낯선 목소리에 의아해진 세영이 고개를 돌렸다. 상대의 키가 커서 시선이 절로 위로 향했다. 깊게 눌러쓴 후드에 가려져 코 아래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디안이나 리먼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 조르디아 (2) “소, 손 좀……!” 얼굴이 시뻘게진 놈팽이가 애원하듯 말했다. 남자는 그것을 듣지 못한 것처럼 놈의 동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치안대를 부르겠습니까. 아니면 이대로 물러갈 겁니까.” “이, 이놈! 내 후견인이 누군지 알고 이런 행패를 부리는 거냐!” 붙잡힌 놈팽이가 버르적거리며 소리쳤다. 다음 순간 우두둑 소리가 나며 놈이 찢어지는 것 같은 비명을 질렀다. 놈의 친구들이 움직이려 했지만, 다음 순간 남자에게서 뭘 본 건지 창백하게 질려서 굳어졌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군요.” 감정 없이 말한 남자가 놈의 손을 놓아주었다. 손목을 감싸 쥐고 뒤로 물러난 놈팽이가 “이잇, 어디 두고 보자!” 라는 악당의 대사를 날리며 도망쳤다. 머뭇거리던 나머지 놈팽이들도 놈의 뒤를 따라 사라졌다. ‘어, 그러니까…. 내가 구해진 거지?’ 세영은 굉장히 난감한 기분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약한 척 내숭을 떤 것 같은 민망함이 밀려왔다. 그녀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공손히 말했다. 놈팽이에게 잡혔던 팔을 살핀 남자가 물었다.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아, 네. 덕분에?” 세영은 제 말투가 너무 영혼 없게 들리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어쨌든 제 일처럼 나서서 도와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뭔가 보답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남자가 제가 입은 로브를 벗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괜찮으시다면 이것을 쓰십시오.” “네? 이건 왜……. 어?” 갑자기 옷을 벗어 내미는 것에 당황하던 세영은 환히 드러난 남자의 얼굴에 움찔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와 빚어 만든 것처럼 우아한 얼굴이 탑에서 만났던 사람과 똑같았다. 반가움을 느낀 세영은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 움찔한 남자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낯선 사람을 보는 시선에 당황한 세영이 물었다. “어, 저기요.” “예.” “우리 전에 만난 적 있지 않아요?” “…….” 남자의 긴 침묵에 세영은 그가 뭔가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당황해서 다른 손을 파닥파닥 흔든 그녀가 진지하게 말했다. “아니, 그쪽을 꼬시려는 게 아니라요. 탑에서 저랑 만나지 않았어요?” “뭔가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이곳 출신이 아닙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진데요.” 세영의 말에 남자가 혼란스러운 눈을 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에 멋쩍어진 세영이 슬그머니 그의 팔을 놓았다.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던 남자가 물었다. “혹시 카르니안입니까?” “카르니안?” 모르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한 세영이 되물었다. 순간 남자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쳐 지나갔다. 뭔가를 실수했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세영님!” 그때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타난 리먼이 그녀를 불렀다. 그를 확인한 남자가 세영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실례했습니다. 그럼 이만.” 뒤로 물러선 남자가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세영이 “어, 잠깐만!” 하고 불렀지만, 그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세영은 난감한 기분으로 제 손에 들린 로브를 바라봤다. 급히 뛰어오느라 헉헉거리는 리먼이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아주 멀쩡해요.” 오히려 땀으로 범벅이 된 리먼이 상태가 더 안 좋아 보였다. 주변을 휙휙 둘러본 리먼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까 그 남자는 누굽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요.”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에요. 절 구해줬어요.” “네? 구해주다니….” 의아해하는 리먼에게 세영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 남자가 로브를 벗어줬다는 말까지 하자 리먼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미리 알아챘어야 했는데. 일단 그의 말대로 로브를 입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세영은 제가 입은 옷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지금 입은 옷에 문제가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난처한 표정이 된 리먼이 손을 내저었다. “세영님의 차림이 문제라는 게 아니라 이곳의 인식이 문제라고 할까요. 최대한 얼굴과 몸을 가리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워낙 길어서 바닥에 질질 끌릴 것 같은 로브를 들어 올린 세영이 “꼭 이걸 입어야 하는 건 아니죠?” 하고 물었다. 리먼이 고개를 끄떡이자 그녀는 드레스 룸에서 적당한 로브를 꺼내 입고 후드를 눌러썼다. 남자가 준 로브는 인벤에 잘 넣어두었다. 나중에 마주치게 된다면 깨끗이 세탁해서 돌려줄 생각이었다. 세영의 옆에 바짝 붙어선 리먼이 사람들을 뚫고 지나가며 설명했다. “조르디아는 여성에게 굉장히 보수적인 곳입니다. 특정 시간이 아니면 집 밖으로 나올 수도 없고 외부의 남성에게 얼굴을 드러내는 것도 금지하고 있습니다.” “어떤 식인지는 알겠어요. 제가 온 세계에도 그런 곳이 있었거든요.” 세영은 여자가 외출할 때 히잡이나 차도르를 착용해야 하는 나라를 떠올리며 말했다.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떡인 리먼이 말을 이었다. “보통 외국 여성에게까지 규칙을 적용하지 않습니다만, 세영님이 그들과 흡사한 용모인 게 문제가 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검은 머리에 흰 피부는 그들이 가장 선호하는 조건입니다.” “음, 제가 여기 사람인 줄 알았다는 거네요.” “네,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눈이 번쩍 띄는 미인이 속옷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느낌이겠군요.” 그건 미친년이잖아. 세영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어쩐지 다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고 했다. 건달 같은 놈팽이들이 달라붙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말없이 로브를 벗어준 남자를 떠올리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굉장히 신사적으로 대해준 거였네.’ 다시 만나게 되면 꼭 인사를 해야겠다고 다짐한 세영이 리먼에게 물었다. “혹시 카르니안이 뭔지 아세요?” 별 거 아닌 질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멈칫하는 반응이 돌아왔다. 리먼이 굳어진 얼굴로 되물었다. “그 말은 어디에서 들으신 겁니까?” “아까 그 남자가 저한테 카르니안이냐고 물었어요.” 뒤쪽을 힐끗 돌아본 리먼이 조금 꺼림칙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도인이냐고 물은 겁니다.” “마도인?” “카르나이는 마도의 옛 이름입니다. 정복왕 로토가 라토니아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예전엔 카르나이 왕국이 있었던 곳이죠. 그래서 마도인들은 자신들을 카르니안이라고 부릅니다.” <마도인>이라는 단어는 처음 들었지만, 아마 라토니아에 사는 사람들을 낮잡아 부르는 말 같았다. 마신이라며 봉인된 것이 주신 사하라는 것을 알게 된 세영에겐 조금 미묘하게 느껴지는 단어였다. 뒤를 돌아보며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리먼이 설명했다. “세영님과 만난 사람도 마도인인 것 같습니다. 아마 자신의 동족인 줄 알고 도와줬을 겁니다.” “동족이요?” “왕국의 후손들은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갖고 있다더군요. 지금은 혈통이 흐려져 거의 보이지 않지만요.” 세영을 처음 봤을 때도 마도인인지 의심했고, <혼세마왕>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는 무척 놀랐다고 회상한 리먼이 웃었다. 그러고 보니 남자도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이었다. 석연치 않은 기분에 고개를 갸웃한 세영이 말했다. “동족이라고 착각해서 구해준 건 아니에요. 제가 이곳 출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세영이 계속 아는 척을 하자 고향 사람이라고 생각해버린 것이다. 낭패한 표정을 짓던 남자를 떠올리자 조금 웃기고 안쓰러웠다. 어깨를 으쓱한 그녀가 말을 이었다. “갑자기 도망가 버려서 인사도 제대로 못 했네요.” “마도인은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하니까요. 마도인인 걸 밝히면 보통은 꺼리거나 무서워하죠.” 세영이 무서워하거나 꺼릴까 봐 재빨리 자리를 떴다는 소리였다. 자신을 구해준 은인인데도 마도인이라고 하면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마도인에 대한 반감이 없는 세영에게는 다소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정말, 탑에서 만났던 그 사람이 아닌가?’ 남자는 세영을 생전 처음 본 사람처럼 대했다. 착각인 것 같다고 말하는 표정 또한 거짓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긴 사람이 둘이나 있을 리가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으아아악!” “어서 피해!” 그때 갑자기 요란한 비명과 함께 갑자기 사람들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구석으로 몸을 던지는 사람까지 있었다. 쿵쿵거리며 가까이 다가오는 진동을 느낀 세영이 바짝 긴장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바로 앞에 있던 사람들까지 치워지자 달려오는 것의 정체가 보였다. 넓은 길이 비좁아 보일 정도로 거대한 흰 코끼리였다. 그녀가 아는 코끼리보다 두 배는 커 보였다. “뭐야, 저거? 장르가 다르잖아.” 사막에 사는 동물은 낙타 정도로 생각하던 세영이 맥없이 중얼거렸다. 그 사이 코끼리는 거리를 질주하며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당황한 리먼이 세영의 로브를 잡아당겼다. “세영님, 일단 피하셔야…….” “놔두면 사람 많이 치고 다닐 것 같은데 어쩔래요. 막을까요?” 세영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리먼이 고개를 끄떡였다. 피식 웃은 세영이 코끼리의 앞으로 달려갔다. 사람들의 비명과 멈추라는 외침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세영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코끼리가 끼에엥 하고 울며 앞발을 쳐들었다. 단번에 짓이겨버리겠다는 뜻을 담아 내리찍은 공격은 세영의 손에 가볍게 가로막혔다. 묵직한 앞발을 한 손으로 받쳐 든 세영이 말했다. “어이, 덤보, 누나랑 하이파이브 할까?” 세영은 들고 있던 앞발을 위로 휙 밀어 올렸다. 앞발을 내리려고 용을 쓰던 코끼리가 갑자기 밀려드는 힘에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기우뚱거리던 놈이 결국 쿵 엉덩방아를 찧었다. 주저앉은 코끼리의 코를 툭툭 두들긴 세영이 “길에서 뛰어다니면 혼난다.” 하고 경고했다. 그때 그녀의 머리 위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힘 엄청 세네. 그런데 목소리 들어보니까 여자잖아?” 미간을 찌푸린 세영이 고개를 쳐들었다. 코끼리의 머리를 밟고 웬 사내새끼가 서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은발이 햇빛을 반사했다. 헐벗은 상체에 조끼 하나만 달랑 걸쳤는데, 그럼에도 제법 귀한 신분이라는 느낌을 풍겼다. 세영의 목소리가 불쾌감으로 음산해졌다. “니가 이 코끼리 몰았냐?” “아하, 내가 제대로 찾았나 본데. 당신이 정복자지?” “…이 싸가지 없는 새끼가 씹기까지 하네.” 눈썹을 꿈틀한 세영이 으르렁거렸다. 사나운 반응에 혀를 찬 은발남이 코끼리의 목을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사뿐히 바닥에 내려선 그가 세영의 앞으로 성큼 다가서며 말했다. “이런, 그렇게 화내지 말라고. 내 도시에 정복자가 들어왔다는데 누군지 찾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내가 직접 마중 나왔잖아. 영광으로 생각해도 좋아.” 세영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날 찾으려고 코끼리까지 몰고 나오셨다?” “하나하나 찾으려니 사람이 너무 많잖아. 정복자라면 날뛰는 코끼리 정도는 쉽게 막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 물론 힘으로 막을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찾았잖아?” 은발남은 결과만 좋으면 다 좋은 것 아니냐고 깐죽거렸다.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던 세영이 그녀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코끼리에게 다가갔다. 공깃돌처럼 코끼리를 번쩍 들어 올린 세영이 은발남을 돌아봤다. 상상 이상의 괴력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은발남이 심상찮은 세영의 기색을 느끼고 버벅거렸다. “어, 어? 잠깐! 그걸로 뭐하려고?” “됐고. 너도 코끼리로 한번 맞아봐.” ──────────────────────────────────── 조르디아 (3) 세영이 코끼리를 집어 던지려는 것을 눈치챈 은발남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저기, 나 몰라? 나 라오 조드인데…….” “유언은 그것뿐이야?” “농, 농담이지? 우리 이성적으로 대화……!” 세영이 당장 던질 것 같은 포즈를 취하자 히이익 소리를 낸 은발남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때 급히 달려온 리먼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는 다급한 얼굴로 말했다. “세영님, 라오 조드입니다. 죽이면 안 됩니다.” “그게 누군데요?” “…조르디아를 다스리는 군주요.” 세영은 멀뚱히 그를 쳐다보다가 “아, 맞다.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중얼거렸다. 씁쓸한 표정이 된 리먼이 “여기 올 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하고 말했다. 약간의 미안함을 느낀 세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 미어캣처럼 발딱 고개를 든 라오 조드가 소리쳤다. “맞아! 난 이곳의 왕이나 다름없다고. 날 죽이면 후회할 거야. 지금 크게 실수하는 거라고!” 세영은 심드렁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왕이나 다름없는 거지, 왕은 아니잖아. 니가 코끼리 몰고 질주하는 거랑 내가 너한테 코끼리 집어 던지는 거랑 뭐가 달라?” “다, 달라! 엄청 다르지 그건!” “뭐가 다른지 전혀 모르겠는데.” 시큰둥한 대답에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난 라오 조드가 헤헤 웃으며 말했다. “에이, 누님. 이러지 말자고. 우리 좋게 이야기로 풀면 안 돼? 내가 누님 보러 급하게 뛰어오느라 그랬다니까. 귀엽게 봐줘, 응?” “너 같은 동생 둔 기억은 없는데.” “너무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라니까아.” 슬금슬금 다가온 라오 조드가 콧소리를 내며 달라붙었다. 세영은 차갑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균형이 흔들리자 손바닥 위의 코끼리가 꾸에엥 하고 울었다. 한숨을 내쉰 세영이 코끼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소원대로 봐줄 테니까 이제 꺼져.” “누님, 이제 막 만났는데 서운하게 왜 그래. 이러지 말고 내 궁으로 가자. 전망도 끝내주고 음식도 기가 막힌다고. 정복자가 왕림하셨는데 식사 정도는 대접해야지. 응? 응?” 안색이 확 밝아진 라오 조드가 본격적으로 달라붙었다. 어찌나 철썩철썩 달라붙는지 끈끈이주걱이 따로 없었다. 그를 뿌리치다 지친 세영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군주라는 새끼가 왜 이렇게 싸게 놀아?” “응? 내가 싸게 노나? 아니, 전혀 아닌데. 누님이 아직 날 몰라서 그러는데 나 자체가 하나의 예술이라고. 자자, 눈 크게 뜨고 자세히 봐봐.” 라오 조드는 제 가슴을 팡팡 치며 환상적이지 않으냐고 물었다.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흘리자 번개처럼 손을 뻗은 라오 조드가 세영이 쓴 후드를 휙 벗겨버렸다. 환히 드러난 얼굴에 당황한 세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우와, 누님. 상상 이상의 미인이잖아! 우락부락할 줄 알았는데 완전 예뻐!” 호들갑스럽게 감탄을 내뱉은 라오 조드가 세영의 뺨을 만지려 했다. 순간적으로 인내심이 끊어진 세영이 그의 얼굴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코피를 뿌리며 뒤로 나가떨어진 라오 조드가 요란하게 쿨럭거렸다. “콰, 콴이시여!” “이게 무슨……!” 호위병으로 보이는 놈들이 일제히 튀어나와 쓰러진 라오 조드를 부축했다. 세영을 향해 무기를 들이대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의 손을 뿌리친 라오 조드가 비틀비틀 세영에게 다가왔다. “누, 누님. 나 코뼈 부러진 것 같아. 완전 아파.” 세영은 말없이 그를 쏘아보았다. 두들겨 맞은 사람이 아프다고 낑낑거리면 미안한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워낙 깐죽거리는 놈이라 그런지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라오 조드가 한층 더 징징거렸다. “내 잘난 코가 낮아지는 건 세계적인 손실인데, 이거 어쩔 거야. 책임져.” “그래. 책임질게.” 그의 어깨를 턱 움켜쥔 세영이 덤덤히 말했다. 눈이 동그래진 라오 조드가 “어? 진짜?” 하고 되물었다.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떡인 세영이 그의 다리를 걸어 바닥에 쓰러뜨렸다. “그러니 일단 좀 맞자.” 그녀는 지금껏 갈고 닦은 컨트롤 능력을 아낌없이 선보였다. 바위를 박살 내는 주먹으로 상대를 두들겨 패는 것은 망치로 계란을 두드리면서 깨지 않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두들겨 맞는 라오 조드가 그런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는 정신없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러다녔다. 그러면서도 호위병들이 나서려고 할 때마다 손을 내젓거나 고개를 저어 끼어들지 말라는 뜻을 표했다. 라오 조드가 검푸른 뭔가의 덩어리로 변한 뒤에야 만족한 세영이 손을 털었다. “우으. 누, 누님…….” 얼굴이 찐빵처럼 부풀어 오른 라오 조드가 무어라 웅얼거렸다. 세영은 그의 턱을 움켜쥐고 비뚤어진 코를 바로 맞췄다. 요란스런 비명을 지르는 입술에 회복 포션을 물려주었다. 선심 써서 부상치료 스킬도 썼다. 순식간에 상처가 사라진 라오 조드가 눈을 껌뻑였다. 그는 원래대로 돌아온 제 얼굴을 더듬더듬 만져보고는 호들갑스럽게 감탄했다. “우와. 이게 뭐야. 굉장해!” “책임졌으니 그만 꺼져.” 개 값도 물었으니 이제 볼일이 없었다. 돌아서려는 세영의 손목을 라오 조드가 덥석 움켜쥐었다. 돌아보는 세영의 눈에 시퍼런 안광이 흘렀다. 하지만 온몸을 발갛게 물들인 채로 할딱거리는 놈의 얼굴을 보자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제 가슴팍을 꼭 움켜쥔 라오 조드가 말했다. “누님, 이게 사랑인가 봐. 누님을 보니까 가슴이 막 뛰어.” “부정맥이다. 병신아.” “아하, 누님도 나처럼 이렇게 가슴이 뛰는……꿹!” 철썩 소리와 함께 라오 조드가 데구르르 바닥을 굴렀다. 그를 발끝으로 툭툭 차서 굴린 세영이 한숨을 삼켰다. 이런 놈을 군주로 섬기는 조르디아 사람들이 불쌍할 정도였다. 세영은 힐끗 호위병들을 바라봤다. 제 주인이 두들겨 맞는 꼴을 볼 수 없어서인지, 아니면 보기 창피해서인지 호위병들은 모두 등을 돌린 채로 주변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는 것은 바닥에 주저앉은 코끼리뿐이었다. “야, 너는 쪽팔리지도 않냐?” 세영이 발끝으로 라오 조드를 툭툭 차며 물었다. 그러자 발딱 일어난 라오 조드가 발정 난 수캐처럼 그녀의 다리에 철썩 달라붙었다. “누님, 누님은 아직 모르는구나. 사랑은 절대 부끄럽지 않은 거야. 아름다운 거라고! 지금 난 누님에 대한 사랑으로 세상이 무지갯빛으로 보이……꿹!” 주절거리는 그를 걷어차서 반대쪽 구석으로 굴려 보낸 세영이 한숨을 쉬었다. 뭔가 노리는 게 있을 것 같은데 도무지 짐작 가는 곳이 없었다. 칠렐레 팔렐레 구는 꼴만 보면 그냥 똥멍청이로 보였다. 하지만 한 도시의 군주라는 그의 위치로 보면 절대 어울리지 않는 태도였다. 그것이 세영을 경계하게 했다.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지만 적당히 해. 보기 버거우니까.” “우와, 누님. 속셈이라니. 진짜 너무한 거 아냐? 나 같은 미남이! 이렇게 애절하게 고백하면서 들이대는데! 어떻게 그런 무정한 반응을 보일 수가 있어!” 라오 조드는 정말 억울한 사람처럼 바닥을 탕탕 치며 화를 냈다. 세영은 그의 정강이를 아낌없이 걷어차 주었다. 다리를 움켜쥐고 데굴데굴 구르는 라오 조드를 보고 한숨을 내쉰 그녀가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주접떨지 말고 원하는 것을 말해.” 순간적으로 라오 조드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서늘한 금안이 세영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것도 잠깐, 다시 빙긋 웃는 얼굴로 돌아온 그가 까불거리며 말했다. “여기선 좀 그렇고. 내 궁으로 가서 이야기하면 안 될까? 다른 사람들도 있는 데서 사적인 이야기하기엔 너무 부끄럽단 말이야.” “여기서 더 부끄러워질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남자의 마음이 얼마나 섬세한데. 진짜 속는 셈 치고 한 번만 같이 가주면 안 돼?” 이쯤이면 초대 못 해서 죽은 귀신이 붙은 거다. 이대로 돌아설까 생각하는 세영의 로브자락을 꽉 움켜쥔 라오 조드가 “부탁이야.” 하고 속삭였다. 겁에 질린 것처럼 커다랗게 뜨인 황금색 눈동자가 마음을 조금 움직였다. 세영은 뒤에서 멀거니 구경 중인 리먼을 돌아보았다. “리먼, 어떻게 생각해요?”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된 리먼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세영과 라오 조드를 번갈아 보더니 무어라 입을 열려고 했다. 그전에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라오 조드가 말했다. “제왕의 계보. 샤히아 왕실 연대기. 디디아 전기.” 눈이 동그래진 리먼이 그를 쳐다보았다. 히죽 웃으며 먼지 묻은 옷을 탁탁 턴 라오 조드가 말을 이었다. “나 고서적 모으는 거 취미인데. 내 궁에 오면 구경시켜줄게. 올래?” 세영은 리먼이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평정을 되찾기 위해 흠흠 헛기침을 한 리먼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디디아 전기라면 전소해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을 텐데요.” “조르디아엔 낭송가인 나칼이 있으니 구전되거든. 난 구전을 기록으로 바꾸는 작업도 하고 있어. 원한다면 작업물도 보여줄 수 있는데. 어때?” 멍하게 입을 벌린 리먼이 라오 조드를 바라봤다. 말도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모습이 처량했다. 이게 경기라면 라오 조드에게 판정승을 줘야 할 것 같았다. ‘여우 같은 새끼였군.’ 세영은 라오 조드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생각보다 교활한 놈이니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강아지 새끼처럼 눈을 빛내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영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다른 일행도 있어서 말이야. 초대에 응하긴 힘들 것 같네.” “아, 그거라면 걱정 마.” 라오 조드가 손뼉을 치자마자 호위병들이 양쪽으로 갈라섰다. 그러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 동료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제일 먼저 달려온 것은 펑펑 울고 있는 마리엔이었다. “괘, 괜찮으세요? 흐윽. 어디 다친 곳은요?” 계속 울고 있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서 얼굴이 엉망이었다. 멀뚱거리는 세영의 다리에 매달린 시디발라가 급하게 물었다. “야, 너 코끼리에게 밟혔다며! 안 아파?” “아니, 밟힌 건 아닌데…….” 밟는 걸 막았으니 밟히긴 한 건가. 난감하게 뺨을 긁적이는 세영의 옆으로 다가온 디안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세영님이라면 당연히 무사하실 줄 알았습니다.” “…….”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렇게 말해봤자 안쓰러울 뿐이었다. 세영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때 그들의 어깨 사이로 불쑥 머리를 내민 라오 조드가 말했다. “하하, 누님의 동료들은 정말 누님을 좋아하나 봐. 아주 거슬릴 정도야.” “누구십니까?” 평소와 달리 날을 세운 디안이 경계하는 시선을 보냈다.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세영이 코끼리에 짓밟혔다는 말을 듣고 달려온 터라 다들 예민해진 상태였다. 교활한 시선으로 그것을 살핀 라오 조드가 씨익 웃었다. “나? 누님의 약혼자.” 예상치 못한 답변에 놀란 동료들이 입을 떡 벌렸다. 눈가를 일그러뜨린 세영이 “자꾸 지랄할래?” 하고 으르렁거렸다. 그다음으로 정신을 차린 마리엔이 세영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세, 세영님. 저 사람 대체 누구예요?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예요?” “미친놈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단호한 대답에 마리엔이 조금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세영의 팔에 매달린 채로 라오 조드를 노려보았다. 험악한 그녀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한 라오 조드가 애절하게 말했다. “누님. 나 진짜 누님한테 뻑 갔다니까. 자꾸 그렇게 튕기면 내 가슴이 너무 아프잖아. 방금 전까지 뜨겁게 나를 만졌으면서. 이제 와 모른 척하다니, 정말 너무해.” “지랄도 그 정도면 참 정성이다.” “아이 참. 역시 받기만 하는 게 잘못인가. 그럼 내가 입술로 누님을 때려줘야지.” 가당찮은 말을 지껄인 라오 조드가 붕어처럼 입술을 모은 채로 얼굴을 내밀었다. 닿을 거리도 아니었고 닿게 해줄 세영도 아니었지만, 시각적인 파괴력만큼은 엄청났다. 경련하듯 몸을 떤 마리엔이 들고 있던 완드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꺼져! 이 변태얏!” “으악!” 퍽 소리와 함께 라오 조드의 몸이 휘청거렸다. 옆머리를 감싼 손가락 사이로 피 한줄기가 쭈르륵 뿜어져 나왔다. 제자리에서 비틀거리던 그가 털썩 주저앉자 사방에서 “라오 조드!” 라던가 “콴이시여!” 하는 비명이 들렸다. 라오 조드는 이번에는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호위병들이 험악한 표정으로 무기를 겨눴다. 새파랗게 질린 마리엔을 향해서였다. “젠장.” 도발에 걸려든 것을 느낀 세영이 혀를 찼다. 그녀는 즉시 마리엔의 어깨를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바닥에 주저앉아 어지러운 척 하는 라오 조드의 배를 걷어찼다. 꺽 소리를 내며 앞으로 엎어지는 그의 어깨를 짓밟은 세영이 으르렁거렸다. “너, 말로 끝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다. 또 수작 부리면 알아서 해.” “두, 두 번이나 봐주는 걸 보면 누님도 역시 내가 싫진 않…… 컥!” 세영은 아무 말 없이 그의 머리를 콱 짓밟았다. 바닥에 짓눌린 채로도 헛소리를 내뱉던 라오 조드는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한숨을 내쉰 세영이 여전히 무기를 겨누고 있는 호위병들을 돌아봤다. “야, 이 멍청이 들고 궁인지 어딘지 안내해라. 무슨 용건인지 들어나 보게.” 멈칫거리던 호위병들이 어떻게 할지 의논하듯 서로에게 눈짓했다. 그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무기를 치운 후 라오 조드를 끌어냈다. 세영에게 다가가기 무서운 모양이었다. “제, 제가 잘못한 거죠? 죄송해요. 세영님에게 수작을 거니까 너무 화가 나서…….”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마리엔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사과했다. 설명하기 모호해진 세영이 고개를 저었다. 교활한 여우 새끼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트집거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다른 동료들을 여기까지 유인해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리먼도 그렇고 저도 궁에 관심이 있었거든요.” “세영님의 말이 맞습니다. 여러분이 오기 전에도 이미 초대를 받은 상황이었습니다. 태양의 궁은 여행자라면 누구나 가보고 싶어 하는 멋진 곳이죠.” 리먼이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 마리엔은 그래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눈치를 보던 시디발라가 위로하듯 그녀의 손등을 다독였다. 침울한 분위기의 일행에게 눈치를 보던 호위병 중 하나가 다가왔다. “정복자님. 친위대를 맡은 압둘 이븐 샤우드입니다. 이렇게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세영은 아무 말 없이 그에게 턱짓했다. 앞장서라는 뜻에 고개를 깊게 숙인 호위대장이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다른 놈들이 말을 끌고 왔지만, 본 척 만 척하자 조용히 물러갔다. 세영의 눈치를 보는 것인지 누구도 말을 타지 않았다. 머리가 터진 라오 조드도 호위병의 등에 업혀가고 있었다. 사서 고생이었지만, 타고 가라고 말하기도 이상해서 그냥 내버려두었다. “있잖아. 저 코끼리가 널 밟은 놈이야?” 신이 나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시디발라가 세영에게 물었다. 세영은 그가 가리키는 뒤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새하얀 코끼리가 행렬의 제일 뒤쪽에서 느릿느릿 따라오고 있었다. 고개를 끄떡이자 눈이 동그래진 시디발라가 재차 물었다. “혹시 널 밟았다고 때렸어?” “아니.” “그럼 왜 다리를 절지?” 고개를 갸웃거린 시디발라가 물어보고 오겠다며 뒤쪽으로 달려갔다. 그를 따르듯 시선을 옮긴 세영이 코끼리를 확인했다. 시디발라의 말대로 뒷다리를 조금씩 절룩이는 것이 보였다. 세영은 군주가 타는 코끼리가 원래 다리를 저는 놈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며 웃었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데.” 입꼬리를 비튼 그녀가 기절한 채로 업혀가는 라오 조드를 힐끗 쳐다봤다. 아무래도 놈이 털어놓을 사연이 상당히 꿉꿉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 조르디아 (4) 태양궁의 정문은 세 개였다. 오른쪽에 있는 황금색 문은 ‘태양의 문’으로 모든 사람이 드나들 수 있었다. 왼쪽에 있는 은색 문은 ‘축복의 문’으로 궁에서 일하는 자만이 드나들 수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 있는 나무문인 ‘사자의 문’은 오직 군주의 출입을 위해서만 개방되는 문이었다. “그런데 왜 중앙의 문이 제일 작고 볼품없어?” 호위대장의 설명을 듣던 시디발라가 궁금한 듯 물었다. 볼품없다는 말에 멈칫한 호위대장이 어색한 미소와 함께 설명했다. “사자의 문은 조르디아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유적입니다. 초대 조드께서 침묵의 궁에 있던 문을 가져와 그곳을 계승하는 상징으로 삼으신 것이지요.” “남의 집 문짝을 떼어온 거야? 그런 걸 상징으로 삼아도 돼?” 고개를 갸웃거린 시디발라가 되물었다. 안색이 흙빛으로 변한 호위대장이 버벅거렸다. “그, 그게 아니라 위대한 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사자의 문을 통과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 전하려다가 본전도 못 찾고 말았다. 낙심한 그를 보다 못한 리먼이 입을 열었다. “시디발라, 초대의 라오 조드는 자신이 샤이렌드라의 후계자라고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곳을 상징하는 문을 달았던 거고요.” “어, 샤이렌드라? 어디서 들어봤는데?” “고대의 왕국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바냐 일족은 왕국이 멸망하기 전에 사막으로 도망친 이들의 후손이라고 하죠.” 리먼은 평온한 얼굴로 설명을 마무리 지었다. 시디발라는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세영은 투박한 나무문을 지그시 바라봤다. ‘모든 백성을 잃은 건 아니었나 보군.’ 샤이렌드라는 나스쿤의 나라였다. 전설이 사실이라면 그의 백성 중 일부가 살아남아 자손을 남겼다는 뜻이었다. 세영은 그 게으른 남자가 이걸 알면 좋아했을까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문이 열리자 안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뜻밖의 광경에 멈칫한 세영이 발길을 멈췄다. 그러자 송구한 얼굴로 허리를 굽힌 호위대장이 청했다. “정복자님, 이제 물의 궁으로 가셔야 합니다. 부디 가마에 올라 주십시오.” 그의 손짓에 멀리서 대기 중이던 가마꾼들이 다가왔다. 제 앞에 내려놓아 진 가마를 힐끗 쳐다본 세영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자꾸 정복자님이라고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예?” “내 동료들도 전부 정복자야. 정복자님이라고 부르면 누구를 부르는지 알 수가 없잖아?” 뜻밖의 말에 당황한 호위대장이 눈을 굴렸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그럼 어떤 호칭을 사용하는 게 좋을지….” “정복자만 빼고 아무렇게나 불러도 상관없어.” 이름을 가르쳐주면 끝날 문제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불쾌한 기색을 느낀 호위대장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무시한 세영이 말을 이었다. “저 가마에 여기 있는 모두가 함께 타라는 소리는 아닐 테고.” 지붕이 달린 하얀 가마는 제법 컸지만, 다섯 명이 앉을 크기는 아니었다. 화제가 바뀌자 얼굴이 한결 밝아진 호위대장이 설명했다. “아, 남성분들은 대사의 궁으로 모실 생각입니다. 물론 연회 때는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왜?” “법도가 그러합니다. 환관이 아닌 남자가 여인과 어울려 지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영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그저 쳐다보는 시선에도 호위대장은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피식 웃은 세영이 말했다. “강제로 궁에 초대한 것도 모자라 이젠 내 일행들과 갈라놓겠다?” “오해십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나와 일행들은 같은 장소에서 머물 거야. 안 된다는 헛소리를 할 거라면 방문은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지. 라오 조드에게도 그렇게 전해.” “하지만 궁의 법도가 워낙 지엄하여.” 세영이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돌아섰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도 제대로 된 동네에서나 통하는 거다. 저들의 뭘 믿고 연약한 동료들을 맡긴단 말인가. “용서해주십시오! 일행분도 물의 궁으로 모시겠습니다. 제발, 이대로 가시면 안 됩니다!” 세영의 앞으로 달려온 호위대장이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절박한 외침에 세영은 조금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매달릴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인덕이 있는 여우 새끼인가.’ 물끄러미 보고만 있자 디안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힐끗 시선을 주자 동료들 전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상대가 무릎까지 꿇고 애원하자 불편한 마음이 든 모양이었다. ‘하여튼 마음들이 약해서.’ 속으로 혀를 찬 세영이 고개를 까딱했다. 그녀의 입만 쳐다보고 있던 호위대장이 눈을 크게 떴다. 빠릿빠릿하지 못한 태도에 인상을 쓴 세영이 으르렁거렸다. “가서 준비하라고.” 튕기듯 벌떡 일어난 호위대장이 총알 같이 튀어나갔다. 결국 일행은 모두 가마에 실려 물의 궁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주인은 마음에 안 들지만, 참 아름다운 곳이네요.” 고집을 부려 세영의 가마에 함께 오른 마리엔이 재잘거렸다. 그녀는 굳이 발치에 있는 방석에 앉아 세영의 다리에 몸을 붙이고 있었다. 남이 보면 오해가 만발할 자세였다. 동공지진을 일으키는 호위대장을 힐끗 쳐다본 세영이 마리엔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헤헤 웃은 마리엔이 고양이처럼 머리를 기댔다. 마리엔의 말처럼 궁은 무척 아름다웠다. 황금색 기와를 올린 새하얀 건물들, 맑은 물로 채운 인공의 연못들,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꽃과 나무들이 어우러져 낙원의 일부를 옮겨놓은 듯했다. 잠시 후 나무들의 키가 유독 커진다 싶더니 가마가 멈췄다. “여기서부터는 내궁이라 제가 따를 수 없습니다. 시종장인 카셈이 안내할 겁니다.” 바닥에 닿을 듯 절을 한 호위대장이 뒤로 물러섰다. 시종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대신 다가와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귀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물의 궁의 시종장인 카셈입니다. 성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이쪽의 인간들은 사람 그림자만 봐도 납죽 엎어지는 모양이었다. 탐탁잖은 얼굴로 고개를 끄떡인 세영이 가마에서 내렸다. 눈치껏 몸을 일으킨 시종장이 한 발짝 물러서며 말했다. “물의 궁까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배를 준비했습니다. 어서 오르시지요.” 시선을 돌리자 연못과 이어진 수로에 작은 배가 떠 있었다. 그때 쪼르르 달려온 시디발라가 세영의 허리에 매달렸다. 그는 시종장과 배를 번갈아 힐끔거리며 쫑알댔다. “저거 뭐야. 여기 사막 아니었어?” “사막이니까 물로 돈 지랄을 하는 거지.” 세영은 그의 머리를 다독이며 답했다. 납득한 표정의 시디발라가 배로 달려갔다. 세영은 디안과 리먼이 무사한지 확인한 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일행이 모두 배에 오르자 시종장이 수로를 조작했다. 고여 있던 물들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길쭉한 배의 앞뒤에 선 노예들이 열심히 노를 저었다. 배는 쏜살같이 수로를 가로지르며 나아갔다. 감탄하는 동료들의 사이에서 세영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주변을 살폈다. ‘미로 같군. 탈출하기도 까다롭겠어.’ 키 큰 나무들이 이어져 거대한 초록색 벽이 되어있었다. 나무들 사이로 난 수로는 제법 깊어서 배가 없이는 이동하기 곤란했다. 게다가 수로 자체가 복잡하게 얽혀서 길을 모르면 헤매기에 십상이었다. 이런 곳으로 초대하는 여우새끼의 속셈이 뻔히 보였다. ‘여차하면 불로 모조리 태워버리고 빠져나가면 되지만.’ 뱃전을 가볍게 두드리는 세영의 손을 맞은편의 마리엔이 꼭 쥐어왔다. 세영은 불안해하는 그녀를 느끼고 표정을 풀었다. 괜한 생각으로 동료들을 걱정시킬 필요는 없었다. 여우새끼의 헛수작 정도야 알아서 해결하면 된다. 마음을 정리한 세영이 씩 웃자 마리엔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우와, 저기 좀 봐!” 시디발라의 호들갑에 고개를 든 세영은 푸른 보석처럼 반짝이는 궁을 발견했다. 파르스름한 기와를 얹고 하얀 벽에 푸른 타일과 금박을 박아 넣은 건물은 화려하고 시원한 느낌이었다. 커다란 연못이 거울처럼 궁의 모습을 반사하고 있었다. 수로를 빠져나온 배가 궁의 입구를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색색의 옷을 차려입은 여자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세영은 몹시 떨떠름한 얼굴로 배에서 내렸다. 당혹해 하는 것은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어미 닭을 찾는 병아리처럼 세영의 주변으로 모였다. 모른 척 고개를 숙인 시종장이 말했다. “여독이 쌓이셨을 테니 목욕을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니면 간단한 요깃거리를 올릴까요.” 세영은 그를 힐끗 보고 무릎 꿇은 여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자리를 비켜야 일어설 수 있는 모양이었다. 빠르게 결론을 내린 세영이 답했다. “목욕부터.” 깊게 절을 한 시종장이 앞서 걷기 시작했다. 안내하겠다는 뜻을 느낀 세영은 잠자코 그의 뒤를 따랐다. 겁먹은 표정의 동료들이 그녀를 졸졸 쫓아왔다. 목욕을 마친 세영과 마리엔은 시녀들의 안내를 받아 궁을 둘러보았다. 물의 궁이라는 이름답게 지하에는 거대한 물 저장소가 있었고, 내실마다 작은 분수와 수로가 놓여 시원함을 주었다. 벽면과 천장에는 쳐다보기 무서울 정도로 정교한 조각들이 소용돌이치는 물과 빗방울, 구름을 묘사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인어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가느다란 대리석 기둥이 둥글게 늘어선 가운데 사자의 상반신을 한 물고기상이 물을 토했다. 푸른 유리창을 끼운 천장에서 떨어지는 빛이 은은하게 부서져 심해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세영은 물처럼 부드럽게 감겨드는 카펫을 가로질러 푹신해 보이는 쿠션들 사이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압도적인 풍경에 쭈뼛거리던 마리엔이 황급히 그녀의 옆에 앉았다. 발소리 없이 움직이는 시녀들이 다가와 간단한 음식과 음료를 내밀었다. 눈치를 보는 마리엔의 손에 잔을 쥐여 준 세영이 쿠션에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희고 푸르고 화려하다. 그것이 물의 궁에 대한 그녀의 감상이었다. 더 어울리는 미사여구가 있을 법도 했지만, 세영은 그런 쪽에 영 젬병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늦네요.” 눈이 아플 정도로 정교한 무늬가 새겨진 벽보다는, 목욕으로 볼이 발그레한 마리엔을 보고 있는 게 나았다. 방석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세영이 웃었다. “그 옷. 굉장히 잘 어울려요.” “앗, 정말요?” 마리엔이 반색하며 제가 입은 옷을 내려다보았다. 밝은 초록색 옷감에 금사와 금박을 넣은 옷은 무척 화려하면서도 앙증맞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무릎 위까지 길게 내려오는 상의에 긴 치마를 입은 차림이었다. 노출은 전혀 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없었다. ‘음, 아라비안나이트를 기대한 내가 나쁜 거지.’ 히죽 웃은 세영이 손에 든 잔을 기울였다. 과실주를 희석한 음료수로 달짝지근한 것이 꽤 맛있었다. 세영을 따라 잔을 홀짝이던 마리엔이 헤헤 웃었다. “세영님은 굉장히 멋있어요. 원래 멋있으시지만.” 마리엔의 것에 비하면 활동적이고 간편한 옷이었다. 심지어 하의는 통이 넓은 바지로 되어있었다. 남장에 가까운 옷에 세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여우 새끼가 어디까지 조사했는지는 모르지만, 제 취향을 간파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으아악! 살려줘!” 그때 벌컥 문이 열리며 가운만 걸친 시디발라가 뛰어들었다. 이어서 상체를 벗은 디안과 사색이 된 리먼이 넘어질 듯 안으로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시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기어코 콰당 넘어진 시디발라가 바퀴벌레처럼 사사삭 기어서 세영에게 매달렸다. “뭐야?” 뒤이어 제 뒤로 숨어드는 동료들을 힐끗 쳐다본 세영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하얗게 얼굴이 뜬 디안이 입을 열기도 전에 누군가 열린 문으로 사뿐사뿐 들어섰다. “술래잡기는 이제 끝?” 나른하면서도 애교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윤기 흐르는 갈색 피부에 쭉 뻗은 팔다리, 풍만한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는 옷을 입은 여자가 세영을 향해 눈웃음쳤다. 세영은 그녀의 새하얀 머리카락 사이로 튀어나온 커다란 귀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고양이?” ──────────────────────────────────── 조르디아 (5) “어머, 실례야. 이래 봬도 엄연한 수인족이라고.” 뿌루퉁하게 말한 여자가 긴 꼬리로 바닥을 탁탁 쳤다. 나름대로 화가 났다는 표현인 듯했지만, 그것 때문에 영락없는 고양이로 보였다. ‘페르시안인가.’ 가늘고 풍성한 흰 머리카락과 한쪽은 푸르고 한쪽은 노란 오드아이, 먹이라도 바른 듯 짙은 눈매가 똑같았다. 다행히 페르시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들창코는 닮지 않았다. 흐음 소리를 낸 세영이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습격당했습니다!” 고양이녀 대신 디안이 버럭 소리쳤다. 그의 옆에서 새파랗게 질려있던 리먼이 크게 고개를 끄떡였다. 고양이녀가 짧게 코웃음을 쳤다. “습격은 무슨. 잠깐 놀아달라고 했을 뿐인데. 호들갑 떨긴.” “씻는데 쳐들어와서 다짜고짜 깔아뭉갰잖아! 날 물어뜯기까지 했으면서!” 세영의 팔을 붙든 채로 오들오들 떨던 시디발라가 외쳤다. 어깨를 으쓱한 고양이녀가 말했다. “궁금해서 살짝 핥아봤을 뿐인데.” “핥긴 왜 핥아!” “하지만 너무 심심했는걸.” 어린애처럼 말한 고양이녀가 제 손가락을 입에 넣고 깨물었다. 요염하기 짝이 없는 동작이었지만, 남자들은 모두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실망 어린 표정으로 변한 고양이녀가 허리에 척 양손을 올렸다. “여자 둘, 남자 셋이면 짝이 안 맞잖아. 한 명 정도는 나랑 놀아줄 수 있겠네.” “나, 나나난 결혼할 사람 있어!” 세영의 옆구리에 달라붙은 시디발라가 외쳤다. 세영은 ‘그게 설마 나는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며 힐끗 시선을 주었다. “저는 신관이라 세속의 관계를 멀리해야 합니다.” 이어서 리먼이 단호하게 말했다. 당황한 눈으로 동료들을 바라본 디안이 “저, 저는….” 하고 버벅거렸다. 앙증맞은 입술을 핥은 고양이녀가 꼬리를 까딱이며 그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대경실색한 디안이 양손을 휘저었다. “자, 잠깐만요! 저는….” “디안은 내 거야.” 그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마리엔이 엄숙하게 말했다. 다 죽어가던 디안의 얼굴이 꽃처럼 활짝 피어났다. 그는 감격에 젖은 눈으로 “마, 마리엔…….” 하고 중얼거렸다. 뜻밖의 선언에 놀란 세영이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그때 세영의 무릎 위에 묵직한 무게가 실렸다. 가느다란 팔로 세영의 목을 휘감은 고양이녀가 눈웃음치며 말했다. “난 여자라도 괜찮아.” 이어서 가칠가칠한 혀가 세영의 뺨을 샤악 핥아 올렸다. 뭔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번개처럼 달려든 마리엔이 고양이녀의 머리채를 잡았다. 어찌나 세게 잡아당겼는지 세영의 상체까지 홱 끌려갈 정도였다. 고양이녀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꺄악! 이게 무슨 짓이야!” “너, 너야말로 무슨 짓이야! 세영님은 우리 거란 말이야!”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새하얀 머리채를 움켜쥔 마리엔이 빽 소리쳤다. 그러자 몸을 홱 돌린 고양이녀가 마리엔의 뺨을 할퀴었다. 꺅 하고 비명을 지른 마리엔이 곧바로 고양이녀의 머리를 들이박았다. 휘청한 고양이녀가 다시 달려들면서 두 사람의 싸움은 육탄전으로 변했다. “이거 놔! 못 놔? 못생긴 게!” “너야말로 오크처럼 생겨가지고! 웃기지 마!” 서로의 머리채를 쥐어뜯으며 악다구니를 쓰는 두 사람은 세영이 보기에도 무서웠다. 연약한 남자들은 원숭이처럼 모여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말릴 사람은 저 혼자인 것 같은데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며 장중한 음악 소리가 쏟아졌다. 예쁘장한 소년들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새하얀 꽃잎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즈려밟으며 화려하게 치장한 라오 조드가 안으로 들어섰다. “누님! 오래 기다렸지?” 양팔을 활짝 벌린 그를 맞이한 것은 사나운 눈빛의 여자들이었다. 서로의 머리채를 움켜쥔 그녀들의 모습에 당황한 라오 조드가 돌처럼 굳어졌다. “어, 여기가 아닌가?”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문이나 닫아.” 슬금슬금 뒷걸음치는 그를 보고 한숨을 쉰 세영이 말했다. 아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은 라오 조드가 짝짝 손뼉을 쳤다. 장중한 음악이 경쾌하게 바뀌더니 커다란 상을 받쳐 든 남자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세영의 앞에 상을 내려놓았다. 상 위의 거대한 은접시에 한 마리의 낙타가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채 앉아 있었다. 세영은 원형을 그대로 살려낸 요리에 압도되었다. 그건 마리엔도 마찬가지였는지 새하얀 머리채를 움켜쥔 손에 힘이 빠졌다. 재빨리 마리엔을 밀쳐낸 고양이녀가 라오 조드에게 달려갔다. “무냐크! 쟤가 날 때렸어. 혼내줘!” 라오 조드의 팔에 매달린 그녀가 마리엔을 가리키며 씩씩거렸다.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굴린 라오 조드가 세영을 쳐다봤다. 세영은 모른 척 그의 시선을 흘려버렸다. 흥하고 코웃음을 친 마리엔이 보란 듯이 걸어가 세영의 무릎에 척 올라앉았다. 그것을 본 고양이녀가 이이익 소리를 내며 발을 굴렀다. “혼내줘! 날 때렸단 말이야!” “미안해. 파티마. 그런데 나도 쟤한테 맞았어. 피까지 났다니까?” 쓰고 있던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린 라오 조드가 붕대를 보여주었다. 놀라 입을 떡 벌린 고양이녀가 마리엔을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미쳤구나! 무냐크를 때리다니. 넌 역시 미친년이었어!” “뭐, 뭣!?” 울컥한 마리엔이 소리쳤지만, 라오 조드를 때린 것이 사실이기에 뭐라고 항의하지 못했다. 도시의 지배자를 때리다니.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씩씩거리며 날뛰는 고양이녀를 붙잡은 라오 조드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래, 그러니까 파티마가 이해해줘.” “흥, 정상인 내가 이해해야지.” 새침하게 눈을 내리깐 고양이녀가 힐끔 세영을 쳐다보았다. 세영은 그녀의 시선을 모르는 척 울먹이는 마리엔을 치료했다. 하얀 뺨에 난 손톱자국이 가련할 정도로 아파 보였다. “마리엔, 많이 아팠죠? 미안해요. 괜히 나 때문에.” “아, 아니에요. 세영님이 잘못하신 게 어디 있다고요.” 황급히 고개를 저은 마리엔이 고양이녀를 찌릿 노려보았다. 고양이녀 역시 만만찮은 시선으로 응수했다. 당장 2차전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에 겁먹은 남자들이 몸을 움츠렸다. 한숨을 쉰 세영이 그들에게 말했다. “멀거니 서 있지 말고, 가서 마저 씻고 옷 입어요.” 한심함을 숨기지 않은 시선에 디안이 머리를 긁적였다. 젖은 머리에서 거품이 북적북적 일어났다. 그것을 보고 당황한 리먼이 그와 시디발라를 끌고 나갔다. 빠른 퇴장에 히죽 웃은 라오 조드가 고양이녀를 데리고 다가왔다. “누님, 파티마를 소개할게. 내 유일한 형제야.” “만나서 반가워.” 고혹적으로 눈웃음친 파티마가 말했다. 세영은 아무 대답 없이 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민망할 법도 한데 두 사람은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를 잡았다. 손발이 제법 잘 맞는 남매였다. 제 맞은편에 자리 잡은 라오 조드를 보고 픽 웃은 세영이 말했다. “생각보다 정보가 느린 것 같네. 아니면 헛소문만 수집했거나.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마리엔을 건드리면 빡친다는 걸 알면서 이런 짓거리를 한 건 아닐 테고.” 파티마의 정체에 기죽어 있던 마리엔이 눈을 깜빡였다. 세영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라오 조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 오해가 좀 있는 것 같은데…….” 어색하게 하하 웃은 라오 조드가 무어라 말하려고 했다. 그것보다 먼저 파티마가 마리엔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쟤가 먼저 내 머리를 당겼어!” “네가 먼저 세영님한테 무례한 짓을 했잖아!” 마리엔이 제 앞에 놓인 상을 쾅 내리치며 외쳤다. 황금 접시에 담긴 요리를 내려놓던 시종이 움찔했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세팅을 계속했다. 붕대를 감은 머리를 부여잡은 라오 조드가 낑낑거렸다. “누님, 나 쟤 좀 무서워.” 세영은 한심함을 숨기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본격적으로 으르렁거리는 두 여자를 내버려두고 황금 접시로 눈을 돌린 그녀가 말했다. “조르디아의 손님 대접은 항상 이런 식인가보지? 형제를 보내서 희롱하고, 독을 탄 음식을 대접하고.” 상 위에 놓인 화려한 요리들은 하나같이 보라색의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 올리고 있었다. 큐어 포이즌 스킬을 마스터까지 찍은 세영에게만 보이는 연기였다. 접시 하나를 천천히 밀어 바닥에 떨어뜨린 세영이 물었다. “어지간히 날 죽이고 싶었나 봐?” 순간 방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행동이 정지했다. 요리를 나르던 시종들도, 마리엔과 툭탁거리던 파티마도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눈을 굴렸다. 그때 굳은 표정으로 세영을 바라보던 라오 조드가 싱긋 웃었다. “역시, 누님은 대단하네. 독 같은 거로는 절대 누님을 죽일 수 없겠는데?” 세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이번에도 이런 식으로 넘어가려는 건가. 중얼대는 말을 들었는지 낮게 웃은 라오 조드가 짝짝 손뼉을 쳤다. “모두 나가.” 접시를 나르던 시종들이 썰물처럼 방을 빠져나갔다. 시중을 들던 시녀들도 마찬가지였다. 라오 조드는 마지막으로 안절부절못하는 파티마를 일으켜 세웠다. “파티마, 수정궁으로 돌아가. 나중에 찾아갈 테니까.” “하지만…….” “어서.” 라오 조드의 다그침에 미적미적 걸음을 옮기던 파티마가 갑자기 홱 돌아섰다. 그녀는 결연한 얼굴로 세영을 바라보며 외쳤다. “무냐크가 한 게 아니야! 무냐크는 아무 잘못이 없어. 푸쿠도 무냐크가 그런 게 아니라….” “나가랬잖아!” 상을 쾅 내리친 라오 조드가 사납게 소리쳤다. 움찔한 파티마가 사나운 시선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세영이 “파티마.” 하고 불렀다. 세영은 부드러운 부름에 눈을 깜빡이는 파티마에게 피식 웃어 보였다. “알고 있어. 걱정하지 말고 가도 돼.” 확신을 담은 검은 눈동자에 파티마의 오드 아이가 커졌다. 막을 틈도 없이 쏜살같이 달려온 파티마가 세영의 뺨에 쪽 소리 나게 입 맞췄다. 한 박자 늦게 반응한 마리엔이 쿠션을 휘둘렀지만, 잽싸게 몸을 뺀 파티마에겐 닿지 않았다. “고마워.” 요염한 미소를 지은 파티마가 발걸음도 가볍게 밖으로 빠져나갔다. 뒤이어 문이 닫히자 기묘한 정적이 방을 가득 채웠다. 쿠션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세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코끼리 이름이 푸쿠야? 생각보다 귀여운 이름이네.” 라오 조드는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든 감정을 짓누른 바위 같은 얼굴이었다. 세영은 독기를 풀풀 피워 올리는 접시 사이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잔을 집어 들었다. “이제 원하는 걸 말할 때가 된 것 같은데. 코끼리로 사람을 짓밟고 독을 탄 음식을 내어놓는 놈의 부탁을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잔을 입가에 가져다 댄 세영이 빙긋 웃었다. 도발에 가까운 말에도 라오 조드는 반응하지 않았다. 황금빛 눈으로 묵묵히 세영을 바라보던 그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 “태양의 탑을, 내게 넘겨줬으면 좋겠어.” “흠?” 예상에서 벗어난 말에 세영의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탁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은 그녀가 말했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니니, 넘겨주고 말고 할 게 없는데.” “초대 라오 조드가 태양의 탑을 발견한 후 140년 동안 누구도 탑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어. 이제는 전설에 가까운 상징이 된 곳이지.” 라오 조드의 말에 세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스쿤은 침묵의 탑은 <입구>, 태양의 탑은 <출구>라고 했다. 즉, 태양의 탑에선 무슨 짓을 해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걸 모르는 사람들이 140년 동안 삽질을 하다가 정복할 수 없는 전설로 만든 것이다. “지금의 나는 누구보다 그 상징이 필요해.” 여우처럼 웃는 표정을 벗어던진 라오 조드는 날카롭게 벼려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영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로 황금빛으로 빛나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왜냐고 묻지 않는 것은 그다지 흥미가 일지 않아서였다. 젊다 못해 새파랗게 어린 권력자의 사정이란 대개 비슷하니까. “솔직히 말하면 귀찮아. 나랑 상관없는 일이고.” “대가라면 얼마든지 낼 수 있어. 몸무게만큼의 황금을 줄까? 아니면 보석? 대륙 최고의 미녀는 어때?” 라오 조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설득했다. 왜 대륙 최고의 미남이 아니라 미녀인가 싶었지만, 세세히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귀찮다는 얼굴로 귀를 후비적거린 세영이 말했다. “네 몸무게만큼의 황금과 보석을 줄 테니까 닥치고 꺼지는 게 어때?” “과연, 굉장한 부자라는 말은 들었지만.” 쓰게 웃은 라오 조드가 제 무릎을 가볍게 두들겼다. 초조해 하는 것 같은 동작이었지만, 표정만은 여전히 태평해 보였다. 그는 슬쩍 떠보듯이 입을 열었다. “마경을 찾아다닌다고 들었는데, 혹시 비행선은 필요하지 않아? 조르디아의 비행선은 대륙 최고라고 할 수 있지.” 황금보다는 혹하는 제안이었지만, 사막 하나를 가로지르는 수고를 무릅쓸 수준은 아니었다.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다시 쿠션에 몸을 기댔다. “살 수 있는 거면 내 돈으로 사도 될 것 같은데?” “국보나 마찬가지라 사는 건 불가능할걸.” “굳이 국보급 비행선을 타고 싶은 생각은 없어. 적당히 다니지 뭐.” 심드렁하게 대답한 세영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슬슬 여우 새끼와 승강이를 벌이는 것에 질리기 시작했다. “네 무기가 재력뿐이라면 나를 이기는 건 불가능해. 그러니 다른 걸 내걸어.” “뭐,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잖아.” 어깨를 으쓱한 라오 조드가 물러날 뜻을 표했다. 무슨 이유를 대든 적당히 대꾸하고 포기시킬 작정이었던 세영은 짜증이 났다. 그녀는 치미는 짜증을 숨기지 않고 상을 걷어찼다. 휘떡 뒤집힌 상에서 낙타가 튀어 올라 바닥에 쭉 미끄러졌다.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던 시디발라가 그에게 다가오는 낙타를 보고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뭐, 뭐, 뭐야!” “세, 세영님?” 영문을 모르는 동료들이 상을 엎어버린 세영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선 라오 조드가 생글생글 웃었다. “누님, 난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내 목숨은 누님 손에 달린 거나 마찬가지니까.” 세영은 말없이 가운뎃손가락을 세웠다. 분명 욕이라는 것이 느껴졌을 텐데도 라오 조드는 싱긋 웃으며 손 키스를 날렸다. 세영보다 더 발끈한 마리엔이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당장 때리고 싶다는 눈빛에 하하 웃은 라오 조드가 밖으로 향했다. 아직 낙타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동료들이 서둘러 옆으로 비켜섰다. 우연인지 라오 조드의 어깨가 디안과 부딪쳤다. 비틀거리며 물러선 디안을 보고 여우처럼 웃은 라오 조드가 “이거 실례.” 하고 말했다. 당황한 디안은 그냥 고개를 숙였다. 다음 순간 철컥하고 문이 닫히며 라오 조드의 모습이 사라졌다. “뭐야, 저거! 일부러 부딪친 거잖아!” 어버버 거리다가 따질 기회를 놓친 시디발라가 분한 듯 소리쳤다.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을 느낀 디안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과일을 입에 문 낙타 요리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 조르디아 (6) 디안은 요즘 갈 곳 없는 소외감을 느꼈다. 세영과 시디발라는 매일 볼일이 있다며 밖으로 나돌았고, 리먼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장서관에 박혀 있었다. 유일하게 궁에 남아있는 마리엔은 가까이 가기만 해도 한기를 뿜어냈다. ‘디안은 내 거야!’ 라고 선언했던 일이 거짓말인 것처럼. ‘그것뿐이라면 이렇게 외롭진 않겠지만.’ 디안을 더욱 고립시키는 것은 궁인들의 교묘한 괴롭힘이었다. 궁인들은 디안이 머무는 곳마다 청소를 해야 한다며 번잡스럽게 굴었고, 그가 잘 먹지 못하는 매운 음식이나 향신료가 듬뿍 들어간 요리만 내어왔다. 말을 걸면 못 들은 척하며 지나치기 일쑤였다. 하지만 동료들이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정중하게 행동했다. 뭐라 따지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마 그 사람 때문인 것 같은데.’ 디안은 무거운 마음으로 조르디아의 군주를 떠올렸다. 궁인들이 그를 괴롭히는 것도 라오 조드가 어깨를 치고 간 뒤부터였다. 피해의식일 수도 있지만, 웃으며 사과를 건네던 황금색 눈동자엔 분명 적의가 서려 있었다. ‘대체 왜?’ 가장 괴로운 건 이유를 모른다는 점이었다. 시골구석에 살다가 검이나 좀 익혀 상경한 그가 군주의 미움을 살 일이 뭐가 있겠는가. 영문을 몰라 더 쭈글거리던 어느 날이었다. 오늘도 밖에 나가겠거니 했던 세영이 갑자기 훈련하러 가자는 말을 했다. “훈련이요?” “디안도 이제 새로운 스킬을 익혀야죠. 시디발라는 이제 혼자서 연습하면 되니까.” 까맣게 모르던 사실을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것에 디안은 멍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새삼스럽게 ‘아, 이런 사람이었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영은 자기 생각을 굳이 설명하는 편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경우 혼자 생각하고 판단해서 행동했다. 물어보면 말해주지만,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도 않았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그것까지 말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디안은 세영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추측해가면서 움직였다. “이곳에 머무시는 것도 저희를 훈련시키기 위해서입니까?” 가령, 라오 조드를 싫어하면서도 궁을 떠나지 않는 이유 같은 것이었다.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세영이 피식 웃었다. “뭐 그것도 있고. 이쯤에서 접선을 해볼까 해서요.” “접선이요?” “다음 던전을 위한 준비라고 해야 하나. 이제 남은 던전은 우리끼리 막무가내로 들어갈 수가 없으니까요.” 물어볼 때마다 친절하게 답해주지만, 그걸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모래의 탑을 정복했으니 이제 남은 던전은 시암의 숲, 가나트리 성당, 세 가지 눈의 섬이다. 이 중 세 가지 눈의 섬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시암의 숲과 가나트리 성당은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접선을 한다는 말 또한 의미 불명이었다. “우리가 가지 못하면 저쪽에서 찾아오게 해야죠. 그런 의미에서 여긴 꽤 적절한 장소니까.” “누군가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엘프나 신전? 엘프는 사막을 힘들어하니까 신전 쪽이 가능성이 크겠죠.”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시암의 숲과 가나트리 성당은 주인이 쫓겨난 마경이었다. 신기의 힘에 이끌린 몬스터들이 원주인인 엘프와 빛의 교단을 몰아낸 것이다. 빛의 교단에서 세영의 소문을 듣는다면 도와달라고 요청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교단이 지금 접선을 할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물론 해주면 정말 좋겠지만, 그런 일들이 타이밍 좋게 이뤄질 리가 없다. 교단의 권위를 생각하면 다른 던전이 모두 정복된 후에야 마지못해 손을 내밀 것 같았다. 디안의 반박에 세영은 뒤틀린 웃음을 지었다. “할 걸요. 그래야 퀘스트 진행이 되니까.” 처음 보는 표정에 놀란 디안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순식간에 표정을 바로잡은 세영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저한테 맡기고 디안은 수련이나 걱정해요. 이곳을 떠나기 전에 스킬 레벨을 많이 올려둬야 하니까.” 세영의 입에서 나오는 ‘수련’이라는 말에 디안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어서 강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반, 도망가고 싶다는 마음이 반이었다. 세영은 그의 마음 따윈 상관없다는 듯이 궁에 딸린 공터로 그를 질질 끌고 갔다. “블레이드 스톰은 다수의 적을 공격할 때 주로 쓰는 스킬이에요. 스킬이 유지되는 동안 지속적인 데미지가 들어가고, 경직된 적들이 뒤로 밀려나죠. 중반까지 계속 쓰이는 스킬이니까 익혀두면 편할 거예요.” 빠르게 설명을 마친 세영이 갑자기 “대전 모드!” 하고 외쳤다. 순간 움찔했던 디안은 곧 평정을 되찾았다. 세영이 허공에 뜬금없는 말을 외치는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잠시 뭔가를 기다리던 세영이 이내 만족한 듯 손에 든 목검으로 디안을 겨누었다. “자, 이제 몸에 힘 빼고 가만히 맞아요.” “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디안이 날벼락 맞은 표정을 지었다. 새로운 검술 때문에 들떴던 마음이 푸시시 식었다. 주춤 뒤로 물러난 그가 물었다. “세, 세영님.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비록 목검이지만, 세영의 손에 들리면 가는 나뭇가지라도 명검이나 다름없었다. 목숨의 위기 앞에서 절로 떨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잠시 의아한 표정으로 변했던 세영이 이내 뭔가를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아, 이게 일단 맞아야 습득이 가능한 스킬이라서요. 원래라면 하르피아나 와이번에게 두들겨 맞아가면서 익히는 건데 근처엔 없는 것 같고. 그러니 제가 대신 때려드릴게요.” “아니, 굳이 그러실 필요는…….” “살살 할 테니 엄살 부리지 말고. 블레이드 스톰!” 세영이 휘두른 목검에서 그야말로 폭풍 같은 기운이 뻗어 나왔다. 반사적으로 옆으로 피하려던 디안은 몸이 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으아아아!” 디안은 회오리바람에 휩쓸린 종이 인형처럼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거센 바람이 몰아칠 때마다 방어구가 쫘좌자작 끔찍한 소리를 내며 갈려 나갔다. 디안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양 팔로 얼굴을 가리고 비명을 지르는 것뿐이었다. 결국, 훈련용 방어구가 갈기갈기 찢어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뒤에야 폭풍이 멎었다. “어라, 나름대로 힘 조절을 했는데. 너무 셌나?” 빈사 상태가 된 디안을 보고 뺨을 긁적인 세영이 부상을 치료해주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디안이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꼬꾸라졌다.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는 그를 세영이 잡아 일으켜주었다. “저, 절 죽이시려는 겁니까.”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지탱한 디안이 물었다. 하하 웃은 세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설마요. 걱정하지 말아요. 대전 모드에선 절대로 사망하지 않으니까. 죽기 직전까진 가지만.” “…….” 농담인지 아닌지 모를 말에 디안은 무겁게 침묵을 지켰다. 느낌상 농담이 아닐 것 같아서 슬펐다. ‘나 역시 미움 받는 걸까.’ 너덜너덜해진 자존감으로 쭈글거리는 디안에게 세영이 얇은 책 한 권을 건넸다. 겉면에 <바람의 파이터>라는 알 수 없는 제목이 적혀있었다. 불길한 예감에 머뭇거리는 그의 손에 책을 쥐어준 세영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 이거 읽고 다섯 방만 더 맞으면 아마 초급수련은 완료될 거예요.” 하늘이 순간 노랗게 보였다. 결국, 다섯 번 더 블레이드 스톰을 맞은 디안은 완전히 뻗어버렸다. 걸친 것이 다 찢어져 나체나 다름없는 그에게 로브를 덮어준 세영이 “힘든 모양이니, 나머지는 내일 할까요?” 하고 웃었다.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감사를 표한 디안은 그대로 기절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다음날이 되어있었다. 디안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다시 공터로 끌려갔다. 이번에는 열세 대를 맞은 후 뻗었다. 세영은 생각보다 맷집이 좋다며 훈련 속도를 올려야겠다는 말을 했다. 디안은 죽은 개구리처럼 뻗은 채로 눈물을 흘렸다. “내일부터는 공격을 주고받는 식으로 하죠. 쿨 타임 차이가 있으니까 디안이 세 번 공격하고 제가 한번 공격하는 식으로 하면 될 것 같아요.” 그나마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 약간의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막상 공격을 시도해본 디안은 제가 잘못 판단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블레이드 스톰은 몸의 기운을 검에 집중시켜 폭발하듯 뿜어내는 기술이었다. 한 번만 써도 무릎이 후들후들 떨릴 정도였다. 연달아 세 번을 쓰자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이어서 들어온 공격에 곧바로 기절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렇게 기절해 실려 오기를 닷새 정도 계속하자 궁인들의 괴롭힘이 어느새 사라졌다. 한심해서인지 불쌍해서인지 모르지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괴롭힘까지 당하면 폭발했을 것이다. ‘그래도 이제 슬슬 적응하고 있으니까. 어제는 기절도 안 하고.’ 디안은 모든 것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공터에서 커다란 우리를 발견하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그는 불길한 예감을 누르려고 애쓰며 세영에게 물었다. “세영님, 저건 대체 뭡니까?” 회색 피부의 난쟁이 같은 것들이 우리 속에 갇혀 있었다. 구부정한 등과 불룩 튀어나온 배, 하얗게 센 머리카락, 특유의 기분 나쁜 울음소리까지. 전형적인 몬스터의 모습이었다. “사막 고블린이요. 훈련용으로 특별히 잡아온 거예요.” “훈련용이요?” 디안의 되물음에 세영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디안이 잠시 멍해진 사이에 세영은 훈련방법을 설명했다. “이제부터는 다수의 상대에게 스킬을 써야 빨리 올라요. 그리고 스킬로 막타를 쳐야, 아니 죽여야 수련치가 올라가거든요. 지금 스킬렙으로는 한 30번 정도 쓰면 죽겠네요.” “그러니까 이제 저와 저 몬스터들을 싸우게 할 생각이십니까?” 디안은 최대한 세영의 행동을 이해해보려 애쓰면서 말했다. 고개를 갸웃한 세영이 말했다. “아뇨, 등급이 비슷한 몹이랑 일대 다수로 싸우면 위험하죠. 그냥 이대로 스킬을 쓰면 돼요. 우리를 강화해놔서 30번 정도 친다고 부서지진 않을 거예요.” “…….” 디안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블레이드 스톰은 말 그대로 상대를 난도질하는 스킬이었다. 상대가 몬스터라지만, 수십 차례 난도질을 해가며 천천히 죽일 정도의 악감정은 없었다. “우리가 부서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상대가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게 문제입니다. 아무리 몬스터라고 해도 필요 이상의 고통을 주면서 죽일 필요는 없잖습니까.” “읭?” 디안의 설명에 세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의아한 시선을 보내던 그녀가 이내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아, 좀 잔인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스작은 보통 이렇게 올리는데. 흠, 어쩐다?” 단순히 잔인한 게 문제가 아니었지만, 왠지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난감한 듯 뺨을 긁적이던 세영이 이내 결론을 내렸다는 듯이 말했다. “좀 힘들겠지만, 등급이 높으면서 한 방에 죽일 수 있는 몬스터를 찾아볼게요. 그럼 오늘은 막타만 치고 자율수련으로 하죠.” “네? 막타만 친다는 게 무슨…….” 디안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세영이 목검을 집어 들었다. 반사적으로 흠칫한 디안은 세영을 말릴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위로 치켜 올라간 목검이 우리 바로 옆의 땅을 향해 휘둘러졌다. “쇼크웨이브!” 무형의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흉맹한 기운이 휘몰아치며 그에 휘말린 우리가 산산이 부서졌다. 우리 안에 들어있던 고블린들의 몸이 납작 찌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목검을 거둬들인 세영이 피떡이 된 고블린의 옆으로 다가갔다. 발끝으로 툭툭 치자 형체를 잃은 놈이 끼끽거리는 울음소리를 냈다. “다행히 살아있네요. 솔직히 빈사 상태로 만들 자신은 없었는데. 운이 좋았나 봐요.” 싱긋 웃은 세영이 옆으로 비켜섰다. 그녀는 넋을 놓은 디안을 돌아보며 재촉했다. “뭐해요? 죽기 전에 빨리 스킬 쓰세요.” 하지만 디안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멍하게 서서 죽어가는 고블린들을 내려다봤다. “디안?” 세영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디안은 무어라 대답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세영은 그를 돕기 위해 몬스터를 잡아오고, 해를 끼칠까 봐 우리에 가둬둔 거였다. 필요 이상으로 고통을 주는 건 싫다고 하자 숨만 붙여서 넘겨주었다. 그것은 분명 ‘호의’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디안은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지만, 도저히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를 악문 디안이 세영을 바라보며 되풀이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쓰러진 몬스터가 괴로운 소리를 냈다. 검을 들어 휘두르기만 하면 놈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었다. 자신은 더 강해질 것이고 세영 또한 만족할 것이다. 하지만 검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건 그가 원하는 방법이 아니었다. 디안은 맥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를 빤히 쳐다보던 세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싫으면 할 수 없죠. 뭐.” 예상 외로 담담한 목소리였다. 목검을 휘둘러 고블린들의 숨통을 끊은 세영이 검에 묻은 피를 툭툭 털었다. 슬그머니 고개를 든 디안이 눈치를 살폈다. 그것을 알아챈 세영이 피식 웃었다. “왜 그렇게 봐요?” “화나셨을 것 같아서…….” “전혀요. 수련하는 사람은 디안이잖아요. 자기 스타일이 아닌 걸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단순히 스타일의 문제인가.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 어쩐지 맥이 빠져버린 디안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마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세영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방법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니 너무 풀죽지 말고요.” “…죄송합니다.” 다시 고개를 수그리는 디안을 보고 세영이 푸하고 웃었다. 디안은 그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조금 전의 세영은, 인간이 아닌 뭔가로 느껴져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당분간 체력 단련하고 윈드 블레이드의 숙련을 올리세요. 대신 쓸 만한 몹을 골라 볼게요.” “아니, 단순히 몬스터 종류가 문제가 아니라…….” “알아요. 그것까지 고려할 테니까.” 사람을 불러 주변 정리를 해야겠다고 말한 세영이 총총히 공터를 떠났다. 한숨을 몰아쉰 디안이 앞을 돌아보았다. 지독한 피비린내가 훅 끼쳐왔다. 그것을 지금껏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워,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 조르디아 (7) 용광로의 불길이 세영을 환영하듯 크게 일렁거렸다. 세영은 사람들이 몽땅 쫓겨난 대장간에 서서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하던 일을 급히 멈추고 물러났는지 제법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여관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린 그녀가 피식 웃었다. ‘시설은 꽤 좋네.’ 말편자나 만드는 곳이라 들었는데, 궁에 속한 시설이라 그런지 작업하기 편하게 되어 있었다. 세영은 우선 모루부터 살폈다. 이 정도면 게임에서 굴러다니는 모루보다 성공확률이 높게 나올 듯했다. ‘제대로 만들려면 별자리에 시간까지 따져서 만들어야 하지만, 지금은 그냥 하자.’ 대장간의 위치를 알아낸 것은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였다. 다음 던전 공략을 위해서라지만, 거슬리는 것들을 참고 있으려니 슬슬 짜증이 났다. 지금의 그녀는 마음껏 두들겨 팰 뭔가가 필요했다. 용광로 속에 불의 결정을 몇 개 던져 넣어 온도를 맞춘 세영이 인벤토리에서 망치를 꺼내 들었다. “생산!” 곧바로 생산창이 뜨며 만들 수 있는 물건과 필요한 재료가 표시되었다. 세영은 스페이드 소드를 선택한 후 철괴 다섯 개를 꺼내 모루 위에 배치했다. 처음엔 어색하던 망치가 그새 적응이 되었는지 손에 착 달라붙었다. “자, 그럼 어디 한번 때려볼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스페이드 소드 생산 BGM인 <스페이드 퀸>이 시작되었다. 음악에 맞추어 다섯 개의 철괴가 차례대로 빛나기 시작했다. 블랙스미스 스킬을 마스터까지 올리면서, 모든 생산 BGM의 리듬을 외워버린 세영은 망설임 없이 망치를 내리쳤다. 쇠를 두드린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맑은 소리가 났다. 보통 검을 만들 때는 무쇠를 담금질한 후 균일하게 두들기고, 이것을 접어 다시 두드리는 일을 반복한다. 하지만 세영의 스킬은 그것을 모두 무시했다. BGM이 끝나자 모루 위에는 모양이 거의 다 갖춰진 검이 놓여 있었다. 식히는 과정조차 필요 없었다. 세영은 만들어진 검을 옆으로 밀어내고 새로 철괴를 깔았다. ‘옵질’을 위해서였다. 스킬로 생산되는 무기들은 제작 과정에서 성능이 결정되고 마감 공정에서 옵션이 붙는다. 옵션의 경우는 정말 복불복이라서 되도록 많이 만들어 원하는 성능을 골라내는 수밖에 없었다. 지겹지만, 쓸 만한 검을 만들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중옵템을 살 수 있으면 좋은데, 여기선 거래소 이용이 안 되니까 맨땅에 헤딩해야지.’ 속으로 투덜거린 세영은 다시 시작된 <스페이드 퀸>을 들으며 기계적으로 망치를 놀렸다. 라오 조드가 대장간에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뒤였다. 세영이 대장간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전해 들은 그는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찾아왔다. 후끈거리는 대장간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번뜩이는 빛이 그의 눈을 찔렀다. 반사적으로 팔을 든 라오 조드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애썼다. “뭐하냐. 거기서?”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빛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뻘쭘한 얼굴로 팔을 내리던 라오 조드가 멈칫했다. 그의 눈이 세영의 손에 들린 검으로 향했다. “…아.” 라오 조드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그 검은 마치 은빛으로 타오르는 불꽃 같았다. 퍼렇게 선 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매끄러운 검신을 도깨비불처럼 빛나게 만들었다. 그것은 악녀와 같은 매력으로 그를 사로잡았고,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게 만들었다. “웃긴 놈.” 넋이 나간 그를 보고 피식 웃은 세영이 들고 있던 검을 모루에 내려놓았다. 망치를 찾아드는 그녀의 모습에 라오 조드는 의아함을 느꼈다. 그의 의문은 망치가 아래로 내리 처지는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따앙! 경쾌하리만큼 맑은 소리와 함께 모루에 놓인 검이 뽀각 부서졌다. 라오 조드는 눈을 홉뜬 채로 그것을 바라봤다. 또다시 따앙 소리가 나며 검의 조각이 셋으로 늘었다. 한 박자 늦게 사태를 이해한 라오 조드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아 시발, 깜짝이야!” 분해 스킬을 사용하던 세영이 움찔해서 망치를 멈췄다. 그녀에게 달려든 라오 조드가 동강이 난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공격 자세를 취하는 세영에게 소리쳤다. “어,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읭?” 황당한 표정을 짓는 세영의 앞에서 그는 안타까운 얼굴로 동강난 검을 쓰다듬었다. 인세에 다시없을 명검이 이런 무참한 꼴을 당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야, 분해해야 하니 빨리 내려놔라.” 검을 분해해서 다시 철괴로 만들 생각만 가득한 세영이 재촉했다. 라오 조드는 새끼를 지키는 어미처럼 검을 끌어안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던 세영이 다른 검을 꺼내 모루에 올렸다. 또 다른 명검에 등장에 라오 조드의 입이 멍하게 벌어졌다. -땅! “으아악!” “아, 새끼 진짜 시끄러워 죽겠네. 자꾸 소리 지를 거면 나가!” 세영의 신경질에 비틀거리던 라오 조드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앞에서 명검이 두 개나 작살나는 광경을 보고 힘이 풀린 거였지만, 세영은 그것을 일종의 반항으로 받아들였다. 짜증스러운 눈으로 라오 조드를 노려본 그녀는 다시 분해 작업을 계속했다. 옵션이 구린 검들을 모조리 분해해 철괴로 되돌린 후 성공작을 꺼냈다. 속성을 부여하고 검집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때까지 바닥에서 빌빌거리던 라오 조드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그녀의 팔에 매달렸다. “안 돼!” 반사적으로 그의 가슴을 찌를 뻔했던 세영이 멈칫했다. 이 여우 새끼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른 라오 조드가 말했다. “더는 부수지 마. 제발!” “이건 성공작이니까 부술 생각 없다만.” 이게 뭔 지랄인가 싶어 사실대로 말해주자 라오 조드의 눈이 깜빡였다. 그는 못 믿겠다는 얼굴로 “성공작?” 하고 되물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세영이 그를 휙 밀어냈다. “알아들었으면 놔.”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선 라오 조드가 다시 “성공작이라고?” 하고 중얼거렸다. 세영은 ‘이놈이 렉이 걸렸나?’ 하고 생각하며 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 부순 것들이 실패작이라는 거야?” “실패까진 아니지만, 굳이 필요 없으니까.” 광석을 캐러 갈 상황도 아니니 필요 없는 템은 분해해 버리는 편이 나았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라오 조드가 물었다. “그놈에게 주려고 만든 거야?” 격양된 목소리에 의아해진 세영이 그를 돌아봤다. 일그러진 얼굴을 한 라오 조드가 따지듯 말을 이었다. “그런 놈에게 왜 그렇게까지 해주는 거야? 출신이 좋은 것도 아니고, 재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특별한 점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놈인데. 그놈의 뭐가 그렇게 좋냐고!” 세영은 빤히 그를 쳐다보다 검을 휘둘렀다. 검면으로 퍽하고 얻어맞은 라오 조드가 머리를 감싸 쥐고 비틀거렸다. 세영은 어이없는 마음을 담아 쏘아붙였다. “뭔 개소리야. 등신아.” “…등신은 그놈이겠지. 제가 어떤 행운을 누리는지도 모르고 흙발로 걷어차는 새끼.” 고개를 든 라오 조드의 눈이 기이하게 번들거렸다. 세영은 그가 말하는 새끼가 디안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이왕 만든 검이니 디안에게 줄 생각이긴 했지만, 왜 그걸로 여우 새끼가 지랄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디안이 등신인 건 사실이지만, 병신탈춤을 추든 벽에 똥칠하든 제 마음이지.” “…….” “그리고 내가 이걸로 똥을 푸든, 지나가던 똥개에게 던져주든 네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않아?” 유치원생에게 말하듯 조곤조곤 설명한 세영이 검을 인벤에 집어넣었다. 검이 사라지는 순간 라오 조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분노와 갈망, 억울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세영을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 “나랑 대련해.” 뜬금없는 말에 세영이 콧방귀를 뀌었다. 광견병이 유행할 시기도 아닌데 이 여우 새끼가 왜 맛이 가서 덤빈단 말인가. “대련하다가 팔다리 날아가고 싶냐?” “상관없어.” 뜻밖의 대답에 세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미친놈을 보는 시선에도 라오 조드는 “내가 놈이랑 다르다는 걸 보여줄 테니까.” 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정신 상태라면 확실히 다르다는 걸 알겠다만.” 쯧쯧 혀를 찬 세영이었지만, 굳이 굴러들어온 펀칭머신을 사양하진 않았다. 라오 조드를 따라 대장간을 나선 세영이 적당한 곳에 멈춰 섰다. 공간도 적절하고 돌담이 높게 둘러쳐 있어 이목을 막아줄 듯했다. “뭐가 좋냐. 검? 주먹?” “검. 그놈도 검을 쓰잖아?” 세영은 삐딱하게 대답하는 라오 조드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왜 디안에게 으르렁거리는지 모르겠지만, 샐샐거리는 낯짝보다는 확실히 나았다. 세영은 인벤에서 제 몫으로 만들어 두었던 정글도를 꺼냈다. 허공에서 도가 튀어나오자 잠시 멈칫했던 라오 조드가 웃었다. “특이한 모양이네.” “막 쓰기엔 이것보다 좋은 게 없지.” 정글도를 들어 어깨에 척 걸친 세영이 라오 조드를 쳐다봤다.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씨익 웃은 라오 조드가 제 검을 뽑았다. 베기에 특화된 것 같은 특이한 검이었다. 칼날 폭이 꽤 넓은 편이었고, 보통 검처럼 끝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너비를 유지했다. 칼날은 일직선이었지만 손잡이는 약간 휘어있었다. 검을 든 모양새를 보니 무게 중심도 앞으로 쏠려있는 듯했다. “검 꼴을 보니 네 성격도 알만하다.” 있는 성질을 다 드러낸 것 같은 검에 세영이 피식 웃었다. 어서 오라는 듯이 고개를 까딱하자마자 라오 조드가 달려들었다. 다른 검보다 긴 칼날이 하늘을 찢어발길 기세로 내리쳐졌다. 첫 공격에 전력을 다 쏟아 부은 기세였다. 세영의 정글도가 라오 조드의 검을 맞이하듯 앞으로 내밀어 졌다. 검이 움직이는 길에 도를 갖다 댔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 전력을 다한 공격이 가볍게 가로막혔다. 라오 조드가 검을 밀어붙이며 웃었다. “나 누님에게 진짜 반할 것 같은데.” “집어치워.” 심드렁하게 대꾸한 세영이 라오 조드를 밀어냈다. 하지만 라오 조드는 곧바로 거리를 좁혀왔다. 어떻게든 바짝 달라붙어 공격을 이어가려는 속셈이 보였다. ‘발상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난 근접 딜러라고.’ 한숨을 삼킨 세영이 사선으로 베어오는 검을 막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라오 조드의 실력은 썩 나쁘지 않았다. 무식한 검에 비해 공격은 유연했고, 검로는 깨끗했으며 속도는 빨랐다. 강과 유가 적절하게 조화된 검술이었다. ‘가위바위보로 라오 조드가 된 건 아니란 말이지.’ 하지만 상대가 너무 나빴다. 차라리 라오 조드가 마법사였다면 약간은 곤란했을지도 모른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실드를 친 채로 원거리 마법만 팡팡 쏘면 공격이 먹힐 가능성은 있었다. 아주 약간이지만. ‘이 정도면 한 세대 정도는 견디겠다.’ 대충의 가늠이 끝난 세영이 도로 검의 옆면을 때렸다. 부러질까 봐 신경 썼지만, 카강 소리와 함께 요란하게 불꽃이 튀었다. 검을 옆으로 밀어낸 세영의 도가 라오 조드의 심장을 노리며 찔러 들어갔다. 찌르기보다 뭉개버릴 기세였다. 이를 악문 라오 조드가 세영의 도를 쳐내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도가 밀려나지 않자 오히려 그것을 이용해 옆으로 나뒹굴었다. 길게 찢어진 가슴팍에서 피가 팍 튀었다. “일어나.” 세영이 당나귀처럼 흙바닥을 뒹구는 그를 향해 말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라오 조드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세영은 곧바로 몸을 날렸다. 그녀의 도가 하늘을 두 동강 낼 기세로 라오 조드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한걸음 물러섰던 라오 조드가 한발을 내디디며 검을 위로 올려쳤다. 필사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정글도가 직선을 그렸다. 라오 조드의 눈에는 하늘이 내려앉는 것처럼 보였다. 위로 치켜든 검이 압력에 짓눌려 수평을 이루다 산산이 깨어져 나갔다. 그는 바위에 짓눌린 개구리처럼 무릎을 꿇었다. 그의 머리 바로 위에서 도가 멈춰 있었다. ──────────────────────────────────── 조르디아 (8) “우웩!” 내상을 입은 라오 조드가 피를 토했다. 신발에 튄 핏방울을 보고 눈을 찌푸린 세영이 그의 가슴을 걷어찼다. 벌렁 뒤로 나자빠진 라오 조드가 다시 쿨럭쿨럭 피를 토했다. “일어나.” 기계적으로 말한 세영이 속으로 혀를 찼다. 세 대 정도는 때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검이 깨졌으니 한 대는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왜….”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라오 조드가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 빌빌거리며 일어나는 것을 보면 제법 근성 있는 놈이었다. 바닥에 피 섞인 침을 뱉은 라오 조드가 실실 웃으며 물었다. “그건 왜 안 써? 놈에게 썼던 거 있잖아.” 이런 상황에서도 디안 이야기인가. 세영은 이놈이 사실 게이가 아닐까 생각하며 말했다. “지금 스킬 쓰면 넌 죽어.” 협박이 아니라 순수한 사실이었다. 파티원도 아니고, 대전 모드로 싸우는 것도 아니었다. 이대로 스킬을 쓰면 확실하게 죽는다. 낮게 키득거린 라오 조드가 말했다. “누님의 손에 죽는다면 영광이지.” “헛소리 작작해. 네 자살 놀이에 어울려줄 생각은 없으니까.” “어차피 누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난 죽어. 그럼 누님의 손에 죽을래.” 이건 5살짜리 애새끼도 아니고…. 차오르는 짜증을 삼킨 세영이 목을 이리저리 꺾었다. 리먼이 몇 번이고 당부했었다. 지금 라오 조드가 죽으면 후계자가 없어서 내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아무리 개소리를 해도 전쟁이 일어나면 안 되니 죽이진 말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너 지금 이 지랄하는 게 디안 때문이냐? 내가 걔 챙기는 게 꼬와서 이래?” “…세상 참 불공평하지 않아?” 질투와 열등감으로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한 라오 조드가 말했다. “누군 노예 몸에서 태어난 죄로 죽을 둥 살 둥 발버둥 쳐야 하는데, 재능도 없고 노력도 안 하는 어떤 새끼는 운이 좋다는 이유로 최고의 기회를 얻고. 그게 고마운지도 모르고 발로 걷어차지.” ‘한마디로 그냥 열폭이라는 거잖아?’ 세영은 한심함을 숨기지 않고 그를 쳐다보았다. 여우 새끼의 사연 따위 1g도 궁금하지 않았지만, 파티마가 매일같이 쫓아다니며 지껄이는 바람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여우 새끼는 선대의 아들 중 유일하게 노예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이었다. 다섯 명의 형과 세 명의 남동생을 죽이고 군주가 된 놈이기도 했다. 거기 그치지 않고 일곱 조카와 세 종손자까지 죽여 아예 씨를 말려버렸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두 조카가 살아남았다. 하나는 외가의 힘을 빌려 외국으로 도망쳤었고, 다른 하나는 원래 유학을 가 있어 목숨을 부지했다. 그들은 라오 조드가 선대의 자식이 아니라고 비방하며 놈의 은발을 걸고넘어졌다. 역대 모든 라오 조드들은 검은 머리였으므로. 군주의 자리는 신성한 것. 형제살해로 이뤄지는 계승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여론이 들끓었다. 조카들이 진정한 군주라 주장하는 자들까지 나타났다. 고작 머리색 하나로 군주의 권위가 위협받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 내가 나타난 거지.’ 누구도 들어가지 못했던 <태양의 탑>에서 나타난 세영은 모든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패였다. 초대 라오 조드의 유산인 <탑>을 넘겨받는다면 누구보다 정통성 있는 군주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라오 조드는 그녀를 붙잡기 위해서 애썼다. 유치하고 뻔한 수작을 부려가며 기회를 손에 넣으려 했다. 세영이 그를 인내했듯, 놈도 세영을 인내하고 있었으리라. ‘바꿔 말하면 그걸 다 내던질 정도로 디안에게 빡쳤다는 건데.’ 어디에서 그렇게 짜증이 났는지도 대충 짐작이 갔다. 디안이 수련용 몬스터를 죽이는 걸 거부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그게 왜 놈을 이렇게까지 자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열등감의 기폭제가 된 것은 맞는 듯했다. 세영은 들고 있던 정글도를 다시 어깨에 걸쳤다. “너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디안이 너보다 못하다고 생각해?” 세영은 귀찮음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입을 꾹 다문 라오 조드가 반항적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피식 웃은 세영이 말을 이었다. “왜? 네가 더 재능이 있어서? 더 잘 싸우는 것 같아서?” 여전히 대답이 없는 라오 조드를 보고 세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딴 건 하나도 안 중요해. 중요한 건 끝에 닿느냐 못 닿느냐다.”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아무리 빨리 배워도 결국 그 끝은 만렙이다. 게임을 접지 않는 이상 모든 유저는 만렙에 도달한다. 절대적인 종착점 앞에서 실낱같은 재능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닿은 자와 아직 닿지 못한 자가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디안은 너보다 나아. 너는 이미 네 검술에 만족하고 있지만, 디안은 나를 목표로 쫓아오고 있으니까. 결국, 끝에 닿을 사람은 디안이겠지.” 말을 하다 보니 한심함이 모락모락 우러나왔다. 이제 고작 중드비나 된 놈이 제 실력을 믿고 설치는 꼴이었다. 혀를 차는 세영을 보고 발끈한 라오 조드가 말했다. “그놈이 나보다 나은 것 역시 누님을 만난 행운 때문이네. 내게 기회가 있었다면, 결코 그놈보다 못하진 않았을 거라고.” 말로 해서 알아들을 거면 애초에 지랄하지도 않는다. 절대적인 진리를 체감한 세영이 피식 웃었다. 애초에 그녀는 말로 설득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확실히 일리가 있네.” 세영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디안이 봤다면 진저리를 치며 도망갈 표정이었다. “기회를 줄게. 그게 네가 원하는 공평이겠지?” 전에 없이 상냥한 목소리에 라오 조드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뜻인지 몰라 머리를 굴리는 듯했다. 세영은 “소환수 등록!” 하고 외쳤다. 잠시 후 파티창에 뜬 세영의 이름 아래 Lv65 무나크라는 이름이 추가되었다. 이어서 “대전 모드!” 라고 외친 세영이 정글도로 라오 조드를 겨누었다. “라오 조드, 이게 네가 닿아야 할 끝이다. 잘 보고 따라와라.” 다음 순간 정글도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도를 향해 몰려든 무형의 기운이 공간을 왜곡시켰다. 무표정한 얼굴의 세영이 도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왜곡은 점점 더 심해져서 그녀가 서 있는 공간 전체가 일그러져 보였다. “둠 블레이드.” 블레이드류 최고위 스킬이 발동되었다. 터질 것처럼 일렁이는 기운이 나비처럼 가볍게 도 끝을 떠났다. 아무런 기척도 색도 없었지만, 그것은 자신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파괴하며 나아갔다. 압도적인 힘은 비명과 작은 발버둥조차 삼켜버렸다. 그 뒤에 남은 것은 고요와 침묵뿐이었다. “잘 탔네.” 세영은 바닥에 쓰러진 숯덩이를 향해 툭 내뱉었다. 좀 심하게 타서 전신이 새카맣지만, 일단 숨은 붙어 있으니 약속은 지켰다. 인벤을 열어 정글도를 집어넣은 그녀는 대신 회복 포션을 꺼냈다. 뚜껑을 딴 포션을 새까맣게 탄 입술에 물리려는 순간이었다. “사람 살려! 누구 없어요? 도와주세요!” 어디선가 소년의 비명이 들려왔다. 라오 조드의 입에 포션을 박아 넣은 세영이 고개를 들었다. 그 사이에도 절박한 외침은 계속되고 있었다. “아무도 없어요? 담이 무너져서 사람이 깔렸어요!” “…어라.” 세영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 하고 지나치기엔 둠 블레이드를 날린 방향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쓰러진 라오 조드에게 치료 스킬을 몇 번 걸어준 뒤 외침이 들리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런, 시벌.” 뜻밖의 광경을 본 세영의 입에서 욕설이 터졌다. 돌담의 일부가 깨끗이 사라져 있었다. 라오 조드를 치고 지나간 둠 블레이드가 담까지 먹어치운 모양이었다. 세영은 난감한 기분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내 건물 아니면 파괴 안 되는 거 아니었나?’ 게임에선 아무리 날뛰어도 마을이 부서지는 일은 없기에 여기도 그런 줄만 알았다. 통제 없이 날아간 스킬은 담 하나를 잡아먹고도 모자라 반대편의 축대까지 무너뜨린 듯했다. 열 서넛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산처럼 쌓인 돌과 흙더미를 파헤치고 있었다. 훌쩍거리며 돌을 치우던 소년이 세영을 보고 반색하며 일어섰다. “도와주세요! 갑자기 담이 무너졌는데, 기사님이 절 밀치고 대신 깔리셨어요. 빨리 꺼내드려야 하는데…….” 소년은 펑펑 울며 상황을 설명했다. 아무래도 소년과 함께 있던 누군가가 둠 블레이드의 희생양이 된 것 같았다. 세영은 속으로 욕설을 되뇌며 침착하게 말했다. “내가 대신 치우고 있을 테니까, 빨리 가서 의사나 도와줄 사람들을 불러와.” “의, 의사요?” “치료할 수 있는 사람.” 짧게 대답한 세영이 돌을 치우는 척했다. 고개를 크게 끄떡인 소년이 사람들을 부르러 달려갔다. 소년이 사라진 후에 들고 있던 돌을 내던진 세영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 진짜. 미치겠다.” 둠 블레이드의 여파를 맞고 담 아래 깔렸으면 확실하게 죽었을 터였다. 이런 식으로 살인을 하게 되다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제일 황당한 건 죽은 사람이겠지만. “침착하자. 침착해.” 심호흡을 한 세영이 쌓인 돌더미를 우르륵 밀어냈다. 밑에 깔린 것이 시체라도 일단 꺼내야 했다. 그래야 파묻든 태우든 자수를 하든 결정을 내릴 게 아닌가. 남은 돌덩이를 반대쪽으로 밀어낸 순간, 흙더미 아래서 뭔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반사적으로 공격하려던 세영은 그것이 누군가의 손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살아 있어?!” 반색한 세영이 흙더미를 파헤쳤다. 흙이 퍽퍽 파여 나가며 상대의 상체가 드러났다. 밖으로 끌어내자 몇 차례 쿨럭거리던 사람이 다시 조용해졌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다급히 그를 흔들던 세영은 짙은 피 냄새를 느꼈다. 무너지는 돌더미에 머리라도 깨진 모양이었다.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클렌징 스킬을 쓴 세영이 멈칫했다. 긴 검은 머리와 창백하고 우아한 얼굴. 그녀에게 로브를 건네주고 사라졌던 남자였다. 우연이라고 치기엔 너무 기묘한 상황에 세영은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보통 인연은 아닌 모양인데…….” 상당히 의심스럽지만, 그걸 따지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세영은 남자의 한쪽 어깨와 가슴이 거의 뭉개진 것을 발견하고 치료하기 시작했다. ‘이러고도 살아있다니. 대단하네.’ 한 손에 꽉 쥐고 있는 검을 보니 둠 블레이드를 쳐내려고 했던 모양이다. 약간의 죄책감을 느낀 세영은 치료를 끝내고 다시 한 번 클렌징 스킬을 써주었다. 남아있던 핏자국이 깨끗이 사라지자 기묘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응? 덜 지워졌나?’ 뭔가가 울긋불긋해서 찢어진 옷을 잡아 벌려보았다. 흐릿한 흔적으로 남은 상처에 붉은 얼룩 같은 것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저게 뭔가 싶어 쳐다보고 있는데 꾸물꾸물 움직이기까지 했다. “벌레?” 손끝으로 툭툭 떨어내려는데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자세히 들여다본 세영은 그것이 아주 작은 글자라는 것을 알아챘다. 사람 피부에 움직이는 글자가 박혀있다니. 신기해서 꾹 눌러보자 꿈틀거리는 글자의 일부가 세영의 손가락에 달라붙었다. “어, 이게 뭐야. 왜 이래?” 당황한 세영이 손을 떼어냈다. 하지만 이미 옮겨붙은 글자들은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손등에 자리를 잡았다. 손을 흔들어서 떨어내 보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혹시나 싶어 남자의 몸에 손을 대봐도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네모난 글자 하나가 더 달라붙으면서 손등에 글자로 이루어진 둥근 원이 생겼다. “야, 니들 집으로 돌아가라고.” 손등을 무단 점거한 글자에게 화를 내는데 뭔가가 손목을 휘감았다. 어느새 눈을 뜬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남자의 입장에서 보면 모르는 여자가 맨 가슴을 쭈물거리는 상황이었다. 비명이라도 지를까 봐 걱정된 세영이 서둘러 말했다. “저기, 저 치한 아니거든요.” “…….”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리알처럼 검게 반짝이는 눈이 세영을 비췄다. 상태가 이상하다고 느낀 세영이 남자의 얼굴 앞에 손을 휙휙 저어 보였다. 눈을 깜빡인 남자가 갑자기 푹 고개를 떨구었다. 세영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도 스르륵 풀렸다. “어쩐다?” 세영은 다시 기절해버린 남자를 두고 머리를 긁적였다. 평소라면 치료도 해줬겠다, 금화 좀 넣어주고 튀었을 것이다. 하지만 손등에 떡하니 자리 잡은 글자도 그렇고 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시선도 마음에 걸렸다. 이대로 버리고 가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릴 것 같았다. “할 수 없지.” 망설임을 접은 세영이 남자를 잘 접어서 어깨에 들쳐 멨다. 워낙 길어서 바닥에 질질 끌렸지만, 빨리 움직이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몸을 돌리려는 순간 철컹 소리와 함께 뭔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남자가 쥐고 있던 검이었다. 검신과 손잡이가 모두 새카만 특이한 모양이었지만, 세영은 별생각 없이 그것을 주워서 인벤에 집어넣었다. 순간 퀘스트창에 변화가 생겼다. 퀘스트: 이계의 부름 -주신께서는 암흑신기를 모두 거두어 파괴하길 원하십니다. 대천사 자드키엘이 주신의 부탁을 전했다. 모래의 탑, 시암의 숲, 가나트리 성당, 세 가지 눈의 섬에서 신기를 찾아보자. -정의의 천사 자드키엘과 대화 [완료] -암흑신기 수집 [3/6] -? -? 하지만 퀘스트창을 열어놓지 않은 세영은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남자를 둘러업은 채 담 위로 훌쩍 뛰어오른 그녀는 물의 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조르디아 (9)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은 마리엔이 훌쩍훌쩍 울었다. 디안은 그녀의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눈치만 보던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 마리엔. 괜찮아?” “괜찮을 리가 없잖아! 세영님이! 세영님이 남자를 데려오셨는데……!” 빽 소리친 마리엔이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딸이 남자친구를 데려온 것을 본 아빠처럼 충격에 빠져있었다. 디안은 머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니, 그냥 조난객을 주워 오신 거라잖아.” 사실 그도 세영이 남자를 데려왔을 때는 깜짝 놀랐다. 사냥당한 짐승 같은 꼴로 끌려온 남자는 옷이 다 찢어진 채로 기절해 있었던 것이다. 파랗게 질린 디안을 본 세영이 허허 웃으며 “저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하고 말할 정도였다. “조난객인데 왜 벗고 있어!? 나쁜 놈. 세영님을 유혹하려고 벗은 게 틀림없어!” “…….” 누가 봐도 벗은 게 아니라 찢어진 옷이었지만, 마리엔은 그게 다 수작이라며 열변을 토했다. 디안은 지금의 마리엔에겐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미천한 남자인 그로서는 여자들의 우정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세영님은 마리엔과는 좀 다른 것 같은데.’ 세영은 마리엔을 아꼈지만, 그녀를 독점하려고 하진 않았다. 오히려 디안과 마리엔을 이어주기 위해 애를 썼다. 그에 비해 마리엔은 좀 더 세영에게 집착하는 편이었다. 어디서 빠득빠득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마리엔이 손수건을 물어뜯고 있었다. 그녀는 열리지 않는 문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남자와 함께 방으로 들어간 세영이 나오지 않는 게 신경 쓰이는 듯했다. 보다 못한 디안이 말했다. “저기, 그렇게 걱정되면 들어가 보는 게…….” “싫어! 세영님이 질투한다고 생각하시면 어떡해!” 이미 질투하고 있으면서 아니라고 빡빡 우기는 마리엔이었다. 한숨을 푹 쉰 디안이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놀란 마리엔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뭐, 뭐하는 거야!” 폭발하듯 얼굴이 빨개진 마리엔이 그를 밀쳐 내려 했다. 하지만 디안은 더욱 힘주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마리엔, 내가 있잖아. 난 세영님처럼 떠나지 않을 거야. 계속 너와 함께 있을 거라고.” “…….” 그를 밀쳐 내려던 마리엔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디안은 펑펑 울고 있는 마리엔을 보고 당황했다. 고개를 흔들며 그를 밀쳐낸 마리엔이 말했다. “나는… 세영님이 안 떠나셨으면 좋겠어.” “마리엔.” “계속 우리와 함께 계셨으면 좋겠단 말이야.” 디안은 필사의 고백이 귓가를 스치는 바람이 된 것에 좌절감을 느꼈다. 덕분에 그의 대답은 평소보다 무뚝뚝해지고 말았다. “너도 알잖아. 세영님이 원래 세계로 돌아가길 원하신다는 거.” “내가 말하면, 가지 말라고 매달리면 안 가실지도 모르잖아.” 귀를 축 늘어뜨린 마리엔이 고집스럽게 말했다. 디안은 마리엔이 이럴 때마다 속이 상했다. 제게는 그만큼 기댈 수 없다는 것처럼 느껴져서, 의지할 수 없다고 밀쳐지는 느낌이었다. “세영님이 왜 돌아가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그분의 세계는 이곳이 아니야. 원래 세상에서 세영님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을 거라고.” 디안 역시 세영이 떠나는 게 즐거운 건 아니었다. 그녀는 좋은 동료이자 스승이었고 의지할 수 있는 산 같은 사람이었다. 가능하면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욕심일 뿐 세영을 위한 길은 아니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하지만 정석 그대로인 그의 말은 마리엔을 화나게 하고 말았다. “그래, 몰라! 난 너처럼 착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아서 그런 거 모르고 싶어! 나는 이기적이고 못된 애라서 내 행복이 더 중요해. 우선 내가 행복해지고 싶다고!” 날카롭게 소리친 마리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디안은 그녀를 붙잡으려 했다. 탁 소리 나게 그의 손을 뿌리친 마리엔이 외쳤다. “너는 내 행복 같은 거 관심도 없으면서!” 원망스런 눈으로 그를 쏘아본 마리엔이 몸을 돌려 밖으로 뛰쳐나갔다. 멍하게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디안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 여자의 하소연에 “나도 그래.” 하고 맞장구칠 줄 모르는 남자의 허망한 중얼거림이었다. 문밖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는 세영은 남자에게서 털어낸 소지품을 살펴보고 있었다. 사실 오래 살필 것도 없었다. 약간의 금전이 든 주머니와 신분패, 낡은 목걸이 하나가 전부였다. “카라드 트라에. 칸디아 왕국의 기사로 24살이라.” 모서리가 닳은 신분패를 손안에서 굴린 세영이 중얼거렸다. 신분패를 믿기엔 남자의 행적이 좀 수상쩍었다. 리먼의 말처럼 그가 마도에서 온 사람이라면 이것 역시 가짜일 수 있었다. ‘칸디아 기사 중에 둠 블레이드를 맞고 살 정도로 튼튼해 보이는 놈도 없었고.’ 맷집만 보면 동료로 영입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모르는 여자를 도와주거나 어린애 대신 담에 깔리는 걸 보면 성품도 호구호구하니, 동료들과도 잘 어울릴 듯했다. ‘탱커로 꽂으면 딱 맞을 것 같은데. 몇 대 맞아도 안 죽을 테고.’ 지금의 파티 구성도 나쁜 건 아니지만, 고기방패 역할을 할 사람이 하나쯤 있었으면 했다. 그런데 하필 눈에 들어온 사람이 수상쩍은 남자라니. 세상일이란 쉬운 게 없었다. ‘적이라면, 패서 전향시키거나 돈으로 회유하는 건 안 되겠지?’ 회유의 가능성을 점쳐보던 세영은 이내 깨끗이 포기했다.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그녀는 고문이 아닌 설득에는 영 재능이 없었다. 이전에 저를 도와주기도 했고, 저 때문에 드러누운 사람을 패는 것도 마음에 좀 걸렸다. 그때 침대 위의 남자가 몸을 뒤척이더니 작은 신음을 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세영이 그에게 다가갔다. “정신이 들어요?” 몽롱함이 담긴 검은 눈동자가 세영을 바라봤다. 몇 번 눈을 깜빡이던 남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변하더니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는 경계 어린 눈으로 세영을 보며 물었다. “…누구십니까?” 혹시나 했지만, 역시 그는 세영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 하던 세영이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일단 가해자라고 해둘게요. 음, 뭐랄까. 피치 못할 사고가 있었거든요. 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세요?” 가해자라는 말에 당황한 얼굴이 된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세영은 다 이해한다는 듯 자상한 얼굴로 말했다. “충격이 너무 컸나 보네요. 담이 무너져서 그 밑에 깔렸거든요. 그것 때문에 심하게 다치기도 했고요.” “…….” 남자는 멍하게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눈치를 보던 세영은 “사실 그 담이 저 때문에 무너진 거거든요. 죄송합니다.” 하고 덧붙였다. 그러자 미간을 찌푸린 남자가 이마에 손을 올렸다. 화가 치밀어서 저러나 생각하는데, 창백하게 질린 남자가 입을 열었다. “기억이 안 납니다.” “너무 갑자기 기절해서 모르는 거 아닐까요?” “그게 아니라…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납니다.” 세영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설마 그런 재수 없는 일이!’ 하고 생각하는 그녀에게 남자는 약간의 두려움을 담아 물었다. “혹시 제가 누군지 아십니까?” * 설마가 사람을 잡을 때가 있다. 지나가던 사람이 빗나간 스킬을 맞고 기억 상실증에 걸리는 일 같은 것 말이다. 세영의 설명을 들은 동료들은 황당함을 감추지 않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시디발라였다. “진짜 기억이 안 나? 아무것도?” “예.” 난감한 표정이 된 남자가 답했다. 꼬리를 축 늘어뜨린 시디발라 대신 디안이 말했다. “신분을 증명할 물건 같은 건 없었습니까?” “이런 게 있긴 한데요.” 세영이 신분패를 건네자 그것을 확인한 디안의 얼굴이 밝아졌다. “잘됐군요. 이거라면 아는 사람을 찾아내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궁에 협조를 구할 수도 있고요.” “근데 그게 가짜일 수도 있어서요.” 난감한 얼굴로 덧붙인 세영이 남자 쪽을 쳐다보았다. 미리 언질을 받았던 남자가 고개를 끄떡였다. 세영은 되도록 가볍게 들리도록 애쓰면서 말했다. “어, 이분이 마도에서 왔을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궁에 협조를 구하는 건 좀 무리라고 해야 하나. 조사하다가 마도인으로 드러나면 위험해질 것 같고.” 동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반응했다. 디안은 대놓고 입을 떡 벌렸고, 시디발라는 뻣뻣하게 굳었으며, 마리엔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리먼은 여신부터 찾았다.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반응에 세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마, 마도인이요? 저 사람이 마도인이라고 하신 거예요?” “진정해요. 마리엔. 마도인일 수도 있다는 거니까. 그리고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세영은 혼란에 빠진 마리엔을 달래려고 애썼다.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휘저은 마리엔이 말했다. “하지만 마도인일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세영님이 모르셔서 그래요. 마도인은 어린아이까지 사악하고 잔인하다고요. 기억을 잃었다는 것도 거짓말일지 몰라요.” 다른 사람들도 그녀의 말에 동조하는 기색이었다. 세영은 동료들이 보이는 반응이 당황스러웠다. 마도가 대체 어떤 곳이기에 마도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질색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전에 절 도와줬던 사람이에요. 그것만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제가 사고를 낸 건 사실이고 이분은 그냥 죄 없이 휘말린 거예요. 마도인이든 아니든 피해자라고요?” 세영의 말이 끝나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런 식의 의견충돌은 처음이라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난감했다. 그때 말없이 듣고만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제 기억이 온전치 못해서 잘못 판단한 것 같습니다. 허락하신다면 지금 떠나겠습니다.” “아니, 그쪽이 죄송할 일이 아니잖아요. 기억도 온전치 않으면서 어디로 가려고요?” 당황한 세영이 남자를 말렸다. 하지만 그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제가 진짜 마도인이라면 절 도와준 사람에게도 피해를 줄 것 같습니다. 이대로 떠나는 게 모두에게 좋을 겁니다.” 세영은 그가 제법 고집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말로 설득할 자신은 없어서 그냥 기절시킬까 생각하고 있는데 리먼이 입을 열었다. “이대로 나가는 것도 좋은 생각은 아닐 것 같군요. 근처에서 일행이 찾고 있을 수도 있으니 당분간 여기 머무르면서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뜻밖의 말에 놀란 사람들이 모두 리먼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흔들림 없이 말을 이었다. “기억이 금방 돌아오는 경우도 있으니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어설프게 행동하다가 마도인이라고 밝혀지는 게 더 곤란합니다. 기억을 되찾거나 일행을 찾아서 돌아가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당황한 표정으로 리먼을 보던 남자가 뭐라 말하려 했다. 그보다 먼저 디안이 말을 꺼냈다. “세영님께는 죄송하지만, 전 아직 이 사람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여기 있는 동안 시디발라와 제가 교대로 감시하도록 해주십시오.” 조건을 붙였지만, 남자가 여기 머무는 것을 찬성한다는 뜻이었다. 디안을 올려다본 시디발라가 고개를 끄떡여 동의를 표했다. 그러자 한숨 같은 소리를 낸 마리엔이 남자를 노려봤다. “만약 흑심을 품고 세영님께 접근한 거라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요. 그게 아니라면 여기 있어도 상관없어요. 그리고… 거짓말이라고 말한 건 미안해요. 제가 너무 심했어요.” “아닙니다.” 얼떨떨한 얼굴로 답한 남자가 도움을 청하듯 세영을 바라봤다. 그가 난처해하고 있는 것을 느낀 세영이 피식 웃었다. “그런데 이분, 시디발라와 디안을 합친 것보다 셀 건데요.” “네?” “제 스킬 맞고도 안 죽었잖아요. 맷집만 따지면 저 못지않을걸요.” 시디발라와 디안의 눈이 동그래졌다. 남자를 쳐다보는 시선이 ‘저게 사람인가?’ 하는 의혹을 담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남자는 두 사람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 조르디아 (10) 남자는 신분패에 적힌 그대로 카라드라고 불리게 되었다. 진짜 이름이 아닐 수도 있지만, 달리 부를만한 것이 없었다. 카라드는 무척 조용한 사람이었다. 말수도 적고 얌전해서 얼굴에 비해 존재감이 약했다. 뜻밖에도 그런 점이 동료들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감시니 뭐니 하며 따라다니던 디안과 시디발라는 며칠이 지나자 셋이서 어울려 놀기 바빴다. 세영은 원래의 목적을 까맣게 잊은 둘을 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역시 호구들이야.’ 어쨌든 사이좋게 지낸다는데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기억이 돌아오면 방생해야 하니 너무 정을 주지 말았으면 하는 정도였다. “아무리 봐도 마도인은 아닌 것 같아요. 마도인 중에 저 사람만 착할 수도 있지만요.” 카라드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마리엔마저 긍정적인 평가를 주었다. 까칠하게 굴어도 얌전히 수긍하는 남자를 계속 미워할 순 없었던 모양이다. 제풀에 지쳐버린 그녀는 상냥한 성격답게 기억을 잃은 그를 배려해 주었다. 역설적으로 카라드와 가장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것은 세영이었다. 기억을 잃게 만든 원흉이라서일까. 모두에게 수더분한 남자가 세영이 다가오는 것은 약간 꺼리는 태도를 보였다. 말을 걸면 긴장하는 것이 눈에 보였고, 지나치게 정중한 대답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털털한 세영으로서도 쉽게 친해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너한테 한 대 맞고 기억이 날아갔잖아. 본능적으로 무서운 것 아닐까.” 시디발라는 아주 당연한 반응이라며 영혼까지 새겨질 공포였을 거라고 장담했다. 별 반론 없이 수긍한 세영이었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분양받은 강아지가 저를 뺀 다른 가족에게만 꼬리를 흔드는 기분이었다. ‘내가 감시한다는 걸 아는 건가?’ 카라드를 여기 머물게 하자고 한 건 세영이었지만, 그를 완전히 믿는 건 아니었다. 가능성은 작지만 그가 연기 천재라 모두를 속이고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시야에 두고 뭘 하고 있는지 관찰했다. 카라드의 일과는 무척 단순했다. 시디발라와 놀아주다가 그가 훈련을 하러 가면 리먼의 옆에서 책을 읽었다. 그게 아니면 멍하게 창밖을 보고 있거나 디안에게 이끌려 산책을 하고 돌아왔다. 누군가 건드리지 않으면 얌전히 앉아만 있는 편이었다. “그렇게 있지 말고 검이라도 휘둘러보는 게 어때요?” 세영은 선인장처럼 볕을 쬐는 남자에게 검을 잡아보라고 권했다. 검사라면 검을 잡고 휘두르는 시간이 많았을 테고, 익숙한 일을 하다 보면 기억이 돌아올 수도 있었다. 불쑥 다가온 세영을 보고 놀란 듯 움찔한 카라드가 쓰게 웃었다. “아직 검은 익숙하지가 않아서….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하라는 말이 아닌데.” 난감하게 뺨을 긁적인 세영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대신 인벤을 열어 새카만 검을 꺼냈다. 그녀가 내민 검을 건네받은 카라드는 어딘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세영은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여전히 떠오르는 게 없어요?” “예.” 한숨처럼 대답한 카라드가 검을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빛을 거부하는 것처럼 온통 검기만 한 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게 정말 제 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발견했을 때 손에 쥐고 있었으니까. 맞지 않을까요?” 사실 세영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그의 검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는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보기에는 아주 멋들어졌던 검에는 날이 전혀 서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템 정보에도 도검류가 아니라 둔기류로 나올 정도였다. ‘공격력도 그냥 주먹으로 치는 게 더 나을 정도였지.’ 카라드에 대해 아직 잘은 모르지만, 허세 때문에 장식용 검을 들고 다닐 사람은 아닐 듯했다. 그가 가짜 신분으로 숨어들었다고 가정하면 검 역시 위장용일 가능성이 컸다. 즉, 그가 주로 쓰는 무기는 검이 아닐 수도 있었다. “검 말고 창이라던가, 메이스라던가, 도끼 같은 거라도 좀 들어 볼래요?” 세영의 제안에 카라드의 안색이 좀 더 창백해졌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말했다. 그것이 에두른 거절이라는 것을 알아챈 세영이 머리를 긁적였다.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도움이 될까 해서요. 기억이 안 나는 게 답답해 보이기도 하고.” 그러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던 카라드가 웃었다. 처음 보는 편안한 얼굴이었다. “굳이 제게 책임을 느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건 사고였고, 기억을 잃은 것도 제 운이 나빠서니까요. 상처를 치료하고 여기 머무르게 해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얼굴에 말문이 막혔다. 잠시 머뭇거리던 카라드가 말을 이었다. “일행분들과 여행 중이시라고 들었습니다. 혹시 저 때문에 여기 발이 묶여 계신 거라면….” “그건 아니에요. 여기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세영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빛의 교단을 기다린다고 발이 묶여 있었던 거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안도한 얼굴의 카라드가 고개를 끄떡였다. “다행입니다. 그래도 너무 오래 신세를 지는 것 같으니, 내일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놀란 세영은 “아니, 어디로 가려고요?” 하고 묻고 말았다. 그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는지 잠시 당황하던 카라드가 답했다. “칸디아 왕국으로 가야겠지요. 그곳에 저를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거기서 찾을 수 없다면… 마도로 가볼 생각입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대답이라 할 말이 없었다. 조개처럼 입을 다문 세영에게 카라드가 검을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아든 세영이 한숨을 쉬었다. “떠날 거라면 그냥 갖고 있는 게 낫지 않겠어요?” 이 검을 주려다가 돌려받은 것이 벌써 세 번째였다. 날이 없어 쇠뭉치나 다름없는 검인데도 카라드는 이상하게 이것을 꺼렸다. 목걸이와 신분패는 소중히 간직하면서도 검을 주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제 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머쓱한 표정을 지은 카라드가 검을 받았다. 검집이 없어서 달리 어떻게 하지 못하고 다시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여전히 어색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말했다. “죄송한 사람은 저죠.” 카라드는 말없이 세영을 바라봤다. 며칠 얼굴을 봤다고 그게 의아한 표정이라는 게 읽혔다. 피식 웃은 세영이 말을 이었다. “다치게 한 것도, 기억을 잃게 한 것도, 또 일행을 찾아주지 못한 것도 그렇고. 말하다 보니까 제가 정말 죄인이네요. 죄송합니다.” 작은 단서라도 찾아냈다면 이렇게 미안하지 않았을 것이다. 외모와 신분패에 적힌 정보를 토대로 조사해봤지만,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궁의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조차 그런 남자는 보지 못했다고 했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 같았다. “사과는 이미 첫날 해주셨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한 번으로 충분하다고 말한 카라드가 검에 손을 얹었다. 이어서 어딘지 씁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말했다. “저는 어쩌면, 기억이 돌아오지 않길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뜻밖의 말에 세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동료들이 봤다면 헉! 하고 물러설 표정이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카라드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제가 진짜 마도인이라면 좋지 않은 목적으로 여기 들어왔을 테니까요. 절 좋게 봐준 분들 앞에서 사실은 악당이라고 고백해야 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 찔린 세영이 헛기침을 했다. 철없이 들이대는 동료들 사이에서 카라드도 내심 고뇌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왠지 더욱 미안해져 버린 세영이 물었다. “설마 그것 때문에 빨리 떠나려는 건 아니죠?” 그러자 쓰게 웃은 카라드가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꺼리는 듯, 불편한 눈으로 검을 내려다본 그가 말했다. “되도록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을 때 떠나고 싶습니다.” 감상적인 이유였지만,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뺨을 긁적이던 세영이 제 손등을 힐끗 보았다. 문신처럼 선명한 글자들이 원을 이루고 있었다. 카라드가 기억을 되찾으면 이걸 어떻게 지울 수 있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자기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이걸 해결하는 법을 알 리가 없지.’ 깨끗이 포기한 세영이 인벤에서 검은 로브를 꺼내 내밀었다. 엉겁결에 그걸 받아든 카라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번에 빌려주신 옷이요. 세탁했으니까 바로 입어도 될 거예요.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세영의 설명에 카라드의 표정이 한층 미묘해졌다. 옷을 빌려줄 일이 뭐가 있는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특징 없는 검은 로브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가 한숨을 쉬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 아무것도 안 떠오르는군요.” 무표정해도 무척 답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의 등짝을 한 대 치려던 세영은 제가 가해자라는 것을 떠올렸다. 잠시 망설이던 손이 카라드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카라드,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놀란 듯이 돌아보는 눈이 유난히 까맣고 맑았다. 세영은 참 죄책감을 자극하는 눈이라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모르는 여자를 돕기 위해 싸우고, 어린애를 구하려다 담에 깔리기까지 했잖아요. 그런 사람은 악당이 될 수가 없다고요.” 세영의 기준으로 카라드는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호구였다. 뭘 걱정하는 건지 알겠지만, 헛된 삽질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대놓고 한심해 하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카라드가 말했다. “하지만 전 진짜 마도인일지도 모릅니다.” “거기도 어차피 사람 사는 땅이잖아요. 착한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겠죠. 어쨌든 저는 당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기억할 거예요. 자신을 좀 더 믿었으면 좋겠어요.” 오히려 마도인이라는 것만으로 쓰러져 발작을 일으킬 것 같은 사람들이 이상했다. 세영의 투덜거림에 카라드가 웃었다. “고맙습니다.” 입 아프게 말한 보람이 있을 정도로 환한 미소였다. 세영은 역시 미인은 좋구나 하고 생각하며 그의 웃는 모습을 감상했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누님!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어떻게 나를 거기 버리고 갈 수가 있어!” 보석으로 치장된 두건을 쓴 라오 조드가 안으로 들어섰다. 흥이 깨진 세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둠 블레이드를 맞고 좀 조용해졌나 했더니 고작 며칠이 한계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한참은 더 떠들 줄 알았던 라오 조드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돌아보자 삐뚜름한 미소를 입에 건 그가 카라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뒤따라오는 시종들을 막으며 문을 걸어 잠근 라오 조드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게 누구야.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여기 기어들어 와 있었나?” ──────────────────────────────────── 조르디아 (11) “저를 아십니까?” 낯선 자의 등장에 몸을 일으킨 카라드가 경계하며 물었다. 이죽거리는 시선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본 라오 조드가 말했다. “우린 이미 구면일 텐데. 안 그래?” 스르릉 소리와 함께 그의 허리춤에 매달려있던 검이 뽑혔다. 하지만 검이 완전히 빠져나오기도 전에 날아간 쿠션이 라오 조드의 얼굴을 강타했다. 벽돌로 내려친 것처럼 빡 소리가 났다. “이게 어디서 검을 뽑아. 죽고 싶어?” 쿠션을 집어 던진 세영이 싸늘하게 물었다. 코피가 철철 흐르는 코를 움켜쥔 라오 조드가 억울한 듯 소리쳤다. “아, 진짜! 누님이 몰라서 그래. 저놈은 마도의 개라고.” 역시 그쪽 사람이었나. 속으로 혀를 찬 세영이 팔짱을 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도 아니고 이제 와 마도인이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래서?” “그, 그래서라니? 혹시 저놈이 마도놈이라는 거 알고 있었어?” 라오 조드가 카라드 쪽을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세영은 조금 전보다 더욱 무표정해진 카라드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짜증스러운 세영의 반응에 라오 조드가 정색했다. “누님, 이건 꽤 심각한 문제야. 누님 옆에 저런 놈이 붙어 있으면 곤란해진다고!” “곤란하고 안 하고는 내가 정해.” “빛의 교단에서 누님을 만나러 오고 있다니까. 근데 마도놈이 함께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 세영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순식간에 멱살이 붙잡힌 라오 조드가 의자에 처박혔다. 그를 짓뭉개듯 손에 힘을 준 세영이 물었다. “빛의 교단에서 날 만나러 온다고?” “누, 누님. 얼굴이 너무 가까운데….” 머리를 뒤로 물린 라오 조드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세영은 이게 어디서 딴청인가 싶어 멱살을 잡고 두어 번 정도 털어주었다. 캑캑거리던 라오 조드가 서둘러 말했다. “빛의 교단뿐만 아니라 각국에서 모이고 있다고. 구원자인 누님을 만나기 위해서 말이야.”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꿀 먹은 듯 입을 다무는 것을 보니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낸 모양이었다. 피식 웃은 세영이 “잘했다.” 하고 말하며 그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라오 조드의 얼굴이 확 살아났다. “나 잘한 거야? 그럼 있잖아…….” 슬금슬금 다가오던 라오 조드의 얼굴이 가로막혔다. 그의 입을 틀어막을 기세로 손을 뻗은 카라드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무례하게 굴지 마십시오.” “왜 끼어들고 난리야, 이 망할 개가!” 카라드의 손을 확 밀쳐낸 라오 조드가 꽥 소리를 질렀다. 카라드는 그에 굴하지 않고 세영에게 뻗어진 손을 콱 움켜잡았다. 라오 조드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감히 누구 손을 막는 거냐!” 세영은 갑자기 힘겨루기를 하는 둘을 어이없이 쳐다봤다. 잠시 구경하던 그녀는 이내 말리는 것을 포기하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저러다 말겠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문을 잠근 거 보면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은 없는 것 같고. 나중에 적당히 협상하면 되겠지.’ 몰래 내보내는 일이 걱정이었으니, 차라리 잘된 것일 수도 있었다. 긍정적으로 생각을 다잡은 세영이 의자에 기대는 순간이었다. “꺄아아악!” 문밖에서 여자들의 비명이 들렸다. 살려달라는 외침을 들은 세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때를 맞춘 것처럼 창문을 부수며 빨판이 달린 분홍색 촉수가 기어들어 왔다. 튕기듯 주먹을 내뻗은 세영이 촉수를 후려쳤다. 펑 소리와 함께 촉수 끝이 터져나갔다. 거의 동시에 카라드가 라오 조드를 테이블 밑으로 쑤셔 넣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라오 조드가 세 사람을 대표하듯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시끄러워!” 짜증을 낸 세영이 정글도를 꺼내 다가오는 촉수를 썩둑 잘랐다. 사람 몸뚱이보다 더 큰 촉수가 바닥에 떨어져 꿈틀거렸다. 제 쪽으로 다가오는 그것을 팍팍 걷어찬 라오 조드가 외쳤다. “이게 뭐야!” “뭔가의 다리 같습니다.” 꿈틀거리는 촉수를 살펴본 카라드가 답했다.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변한 라오 조드가 “내가 그걸 몰라서 물은 거 같아?!” 하고 쏘아붙였다. 카라드의 표정이 어리둥절하게 변했다. “제기랄, 크라켄이 왜 내 궁에 나타난 거냐고!” 이를 부득 간 라오 조드가 테이블 밖으로 나왔다. 검을 뽑아든 그는 때마침 창문을 뚫고 들어온 또 다른 다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다리는 가볍게 검을 튕겨내며 그를 향해 뻗어왔다. 카라드가 그를 잡아당기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붙잡혔을 것이다. “꼼지락거리지 말고 구석에 박혀 있어!” 두 번째 다리를 뎅강 잘라낸 세영이 외쳤다. 제 검이 조금도 통하지 않는 것에 충격을 받은 라오 조드는 비틀거리며 구석으로 물러섰다. 그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두 개의 다리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검 끝도 안 들어가던데. 대체 어떻게 자른 거지?” 카라드는 그에게 대꾸하는 대신 바닥을 쏘아보고 있었다. 민망한 표정을 지은 라오 조드가 그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어이, 마도놈. 뭔가 아는 거 없어? 갑자기 크라켄이 튀어나올 리가 없잖아. 네놈 짓 아냐?” 놀란 듯 움찔한 카라드가 그를 돌아보았다. 잠에서 깨어난 것 같은 얼굴에 라오 조드도 흠칫했다.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카라드가 중얼거렸다. “뭔가 떠오를 것 같았는데.” “떠오르긴 뭐가 떠올라? 진짜 네 짓이냐?” 버럭 소리 지르는 라오 조드의 머리를 향해 커다란 돌덩이 하나가 날아들었다. 기겁한 라오 조드가 바닥으로 몸을 굴렸다. 재빨리 테이블을 쓰러뜨린 카라드가 라오 조드를 낚아채 그 뒤로 숨었다. “뭐, 뭐야?!” 숨죽인 라오 조드의 물음에 또 다른 돌이 날아와 테이블에 부딪혔다. 쉿 하고 경고를 한 카라드가 상황을 살폈다. 벌써 두 개의 다리가 잘린 크라켄은 공격 방식을 바꾸기로 한 듯했다. 창문으로 다리를 밀어 넣는 대신 정원의 바위를 닥치는 대로 집어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세영은 가볍게 피하거나 밀쳐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소란을 듣고 몰려온 병사들이 희생되고 있었다. 짧게 혀를 찬 세영이 라오 조드를 돌아보았다. “라오 조드, 5분 동안 버틸 수 있겠어?” “응? 뭐라고 했어, 누님?” “5분 이내에 저 문어를 처리할 테니까 버틸 수 있겠냐고.” 세영은 부서진 창틀에 한 발을 걸치며 말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라오 조드가 무어라 말하려 했다. 그것보다 카라드의 말이 좀 더 빨랐다. “다녀오십시오.” 의외라는 얼굴로 카라드를 돌아본 세영이 피식 웃었다. 고개를 까딱한 그녀는 순식간에 창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라오 조드가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난 저런 괴물 못 이긴다고!” “검을 넘겨주시면 제가 어떻게든 막겠습니다.” “마도놈의 뭘 믿고 검을 넘겨!” 세영은 라오 조드의 고함을 들으며 궁의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지붕 위를 점령한 채로 병사들을 짓이기던 문어가 그녀를 보자마자 도망치기 시작했다. 유인하는 것 같은 몸짓에 세영이 머리를 긁적였다. “여우 새끼를 노리는 건가?” 오라고 한다고 굳이 따라가 줄 생각은 없었다. 세영은 파이어볼을 만들어 문어에게 집어 던졌다. 그러자 꾸물거리던 문어가 곧장 아래로 몸을 던져 피해버렸다. 예상보다 훨씬 빠른 움직임이었다. ‘덩치에 비해 엄청나게 잽싼 놈이잖아. 묶어놓고 두들겨 패야 할 것 같은데.’ 혀를 찬 세영이 아래를 노려보았다. 라오 조드에겐 5분만 버티라고 했지만, 정말 자리를 비워도 될지 확신이 없었다. 그때였다. “쏴라!” 앙칼진 외침과 함께 문어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병사들이 거대 석궁과 같은 것으로 작살을 쏘아대고 있었다. 작살이 박히면 대기 중이던 노예들이 끝에 달린 쇠사슬을 끌어당겼다. 사격을 명했던 목소리가 다시 외쳤다. “어서 당겨! 놓치지 마!” 세영은 노예들을 지휘하는 사람이 파티마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능숙하게 지시를 내리며 노예들을 독려했다. 계속된 작살 공격에 문어의 다리 세 개가 바닥에 묶였다. 하지만 아직 세 개의 다리가 남아 있었다. “피해!” 세영의 외침과 거의 동시에 세 개의 다리가 파티마를 노리며 쏘아 들어갔다. 병사들이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파티마는 특유의 유연한 움직임으로 공격을 이리저리 피했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 다리에 몸이 휘감기고 말았다. 허공으로 끌려 올라간 파티마가 비명을 질렀다. 혀를 찬 세영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손을 쓰려는 순간이었다. “워터픽!” 물의 송곳이 문어의 몸을 꿰뚫었다. 경악한 세영이 스킬이 날아온 쪽을 바라봤다. 정원 한구석에 무기를 빼 든 동료들이 있었다. 연이어 워터볼을 캐스팅하는 마리엔이 보였다. “마리엔! 멈춰요!” 세영은 더 지체하지 못하고 몸을 날렸다. 수계 속성의 마법을 연속으로 맞은 문어가 갑자기 힘을 얻어 퍼덕거리기 시작했다. 쇠사슬을 잡아당기던 노예들이 문어에게 끌려가며 비명을 질렀다. 결국, 모든 구속을 끊어낸 문어가 미친 듯이 날뛰었다. 몬스터와 같은 속성의 공격 스킬을 쓸 때 낮은 확률로 일어나는 광화 현상이었다. “젠장!” 세영은 욕설을 내뱉으며 날뛰는 문어의 머리를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스킬을 썼다가는 파티원이 아닌 사람들이 휘말려들 수 있었다. 세영의 공격을 눈치챈 문어가 홱 몸을 돌리더니 폭포처럼 먹물을 토해냈다. 예상치 못한 공격을 맞은 세영이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끈적끈적한 먹물에 휘말린 사람들이 바닥에 들러붙은 채로 비명을 질렀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나한테 침을 뱉어?!” 하지만 끈적이는 먹물은 분노한 세영까지는 막지 못했다. 세영의 온몸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기운에 들러붙어 있던 먹물이 푸확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갔다. 이를 갈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세영의 얼굴은 악귀나 다름없었다. 주춤 물러서는 사람들처럼 꿈지럭거리며 물러난 문어가 도망치려 했다. “어딜!” 돌진 스킬로 튀어 나간 세영이 정글도를 휘둘렀다. 은빛 무지개가 허공을 가르는 순간 공중에 매달려 있던 파티마가 아래로 추락했다. 비명을 지르던 파티마는 몸을 묶던 다리가 풀려나감과 동시에 유연하게 몸을 뒤집어 바닥에 착지했다. 고개를 든 그녀가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세영은 이미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도망치려던 문어는 쏜살같이 달려드는 세영을 보고 도주를 포기했다. 놈은 대신 남은 다리를 모두 뻗어 세영을 공격했다. 세영은 물러서지 않았다. 피하기는커녕 한 손에 쥐고 있던 정글도를 바닥에 꽂고 달려드는 다리들을 껴안았다. 날카로운 창처럼 파고들던 다리들은 세영의 팔 안에서 멈춰버렸다. “이야앗!” 세영의 몸이 제자리에서 팽이처럼 회전했다.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른 속도에 문어의 몸통이 그녀 쪽으로 점점 끌려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문어는 회오리바람에 휩쓸린 풍선처럼 위로 떠올랐다. 세영이 손을 놓아버리자 놈은 투포환처럼 하늘을 날았다. “숙회나 되어 버렷! 와일드 크래쉬!” 곧장 정글도를 뽑아든 세영이 허공으로 스킬을 날렸다. 수십 개의 섬광이 빛살이 되어 번쩍였다. 잠시 뒤 하늘에서 문어의 비가 내렸다. 후드득 쏟아지는 문어의 살점 속에서 사람들은 뻣뻣이 굳어있었다. 괴물을 물리쳐준 세영에게 감사하면서도 그녀의 신위에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사람들 앞으로 뛰어나온 파티마가 세영을 와락 껴안았다. 그녀는 감격에 가득 찬 얼굴로 외쳤다. “나의 정복자님, 저를 구하러 와주셨군요!” “아니, 그게…….” 무어라 말하려던 세영은 갑자기 다가오는 얼굴에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쪽 소리와 함께 파티마의 입술이 세영의 뺨에 닿았다. 훈훈한 광경에 표정이 풀린 사람들이 하나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만세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이게 아닌데 말이지.’ 세영은 자꾸만 들러붙는 파티마를 밀쳐내며 한숨을 삼켰다. 사람들 앞에 보이는 연기이려니 했지만, 하트가 뿅뿅 튀어나올 것 같은 오드아이가 불안했다. 그때 소름 끼치는 비명이 축제 분위기를 멈춰 세웠다. 아차 한 세영이 지역맵을 확인했다. 소환수로 표시된 라오 조드의 근처에 또 다른 붉은 점이 나타나 있었다. ──────────────────────────────────── 잃어버린 도시 (1) ‘양동작전이었나.’ 어쩐지 바깥으로 꼬여내는 느낌이라더니. 혀를 찬 세영이 파티마를 밀어내고 몸을 날렸다. 지붕으로 올라가자 정원을 질주하는 오징어가 보였다. 창을 든 병사들이 시간을 버는 사이에 라오 조드의 손을 붙든 카라드가 필사적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저게 뭐하는 짓이람.” 비련의 연인들도 아니고 왜 손을 잡고 도망친단 말인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지켜보던 세영은 그게 나름의 눈물겨운 노력이라는 것을 깨닫고 조금 미안해졌다. 잠깐 보는 사이에도 카라드는 쉴 새 없이 뻗어오는 오징어의 다리를 피해 라오 조드를 밀치고 잡아당기고 집어 던졌다. 덕분에 당장에라도 붙잡힐 것 같았던 둘은 정원의 나무를 엄폐물 삼아 끈질기게 도망치는 중이었다. 세영은 게릴라전을 방불케 하는 카라드의 기지에 감탄을 표했다. 반면 라오 조드는 계속해서 달리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는 듯했다. ‘명색이 군주라는 놈이…….’ 속으로 혀를 찬 세영이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질주 스킬로 다가오는 세영을 발견한 오징어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놈은 필사적으로 라오 조드를 붙잡기 위해 애를 썼다. 파도처럼 휘둘러진 다리에 병사들이 조약돌처럼 튕겨 나가면서 목표물인 라오 조드와 카라드만 남았다. 아까보다 더 빨라진 공격에 두 사람은 벼룩이 튀듯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결국, 스텝이 꼬여 오징어 다리에 휘감긴 라오 조드가 비명을 질렀다. 황급히 달려든 카라드가 라오 조드의 몸을 붙잡았다. “으아악, 놓지 마!” 지푸라기를 잡듯 카라드를 붙잡은 라오 조드가 소리쳤다. 안간힘을 쓰던 카라드는 몸이 질질 끌려가자 바닥에 검을 박아 넣으며 버텼다. 거슬리는 장애물을 느낀 오징어가 또 다른 다리로 카라드를 후려쳤다. 퍼억 소리와 함께 몸이 크게 흔들렸지만, 카라드는 라오 조드를 붙든 손을 풀지 않았다. 두어 차례 더 그를 후려갈기던 오징어는 결국 다리로 카라드를 휘감아 위로 뽑아냈다. “이 순대로 만들 새끼가!” 머리가 깨졌는지 피를 철철 흘리는 카라드를 본 세영이 분노했다. 코앞으로 다가온 위험을 느낀 오징어가 곧장 몸을 돌려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두 다리에 라오 조드와 카라드를 휘감은 채였다. “아, 시발!” 코앞에서 오징어를 놓친 세영이 욕설을 뱉으며 입수했다. 물속을 빠르게 가로지르는 오징어가 보였다. 세영이 따라오는 것을 눈치챈 오징어가 들고 있던 카라드를 그녀에게 던졌다. 몸을 비틀어 충돌을 피한 세영이 카라드를 잡아챘다. 당기는 힘에 기절한 듯 축 늘어져 있던 카라드가 정신을 차렸다. 그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한 듯 오징어를 향해 헤엄쳤다. 그냥 물 위로 올려보낼 수도 있었지만, 머리에서 피를 흘리던 것이 생각나서 내버려두었다. ‘상처라면 스킬로 치료하는 게 더 나으니까.’ 안 그래도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인데 바보라도 되면 큰일이다. 결론을 내린 세영이 카라드를 낚아채서 오징어 쪽으로 집어 던졌다. 놀랐는지 공기 방울을 쿨럭 토해낸 카라드가 곧바로 오징어의 다리를 붙들었다. 뒤이어 세영이 오징어를 따라잡았다. 당황한 오징어가 좀 더 긴 두 개의 다리로 세영을 공격했다. 세영은 곧바로 정글도를 휘둘러 달려드는 것들을 써걱써걱 잘랐다. 고통에 움츠린 오징어가 좀 더 속도를 내어 헤엄치기 시작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으로 적을 따돌리기로 한 것 같았다. 세영은 총알처럼 튀어 나가는 오징어의 몸에 정글도를 박아 넣었다. 빠른 속도에 몸이 사정없이 흔들렸지만, 나가떨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이대로 오징어를 갈라버릴까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뭐야, 이거?’ 당황한 세영이 눈을 깜빡였다. 검게 물들었던 시야가 환하게 밝아지며 눈앞이 푸른 하늘로 변했다. 새처럼 창공을 가로지르던 시선은 다음 순간 추락하듯 아래로 향했다. 새하얀 탑이 부딪힐 듯 가까워졌다. 다음 순간 세영은 탑의 내부를 보고 있었다. 새하얀 밖과 달리 안은 온통 검었다. 대리석처럼 반들거리는 바닥에 섬세한 선이 그어져 있었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복잡한 마법진이었다. 그리고 진의 중앙에 리라를 든 남자가 서 있었다. ‘나스쿤.’ 세영은 곧바로 그를 알아보았다. 검은 곱슬머리와 갈색 피부, 입고 있는 옷까지 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생기로 반짝이는 황금색 눈동자는 그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다들 준비됐겠지? 나스쿤이 쾌활하게 입을 열었다. 거기에 응답하듯 마법진이 있는 바닥에서 작은 파문이 일었다. 웅웅거리는 진동이 공기를 울리며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자꾸 묻는 것을 보니 불안한 모양이군요. 나스쿤. -어머, 아리스타타. 저건 불안한 게 아니라 그냥 소심한 거예요. 까르륵 웃는 명랑한 음성이 그에 답했다. <아리스타타>라는 이름에 세영은 자신이 뭘 보고 있는지 깨달았다. 과거 주신을 봉인할 때의 영상이었다. 이번엔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네. 군주여. 우리는 길을 찾아냈고 언제나처럼 승리할 걸세. 수면처럼 동심원이 이는 바닥에 흐릿한 인영들이 비쳤다. 이목구비까지 뚜렷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서로 다르다는 것을 구별할 정도는 되었다. 그중 성기사의 투구를 쓴 남자가 소리쳤다. -나는 반대다. 나스쿤. 저런 애송이를 봉인의 축으로 세우다니.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 텐데. -저런, 남자의 질투는 정말 추하군요. -닥쳐라, 빌어먹을 엘프! 으르렁거리는 포효가 공기를 울렸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 나스쿤이 그들을 말렸다. -자자, 다들 그만하라고. 거사 직전에 동료끼리 싸워서 어쩔 생각이야? 그의 만류에도 그르렁대는 소리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한숨을 내쉰 나스쿤이 몸을 숙여 성기사의 얼굴을 가까이하며 말했다. -펠릭스. 너도 알잖아. 꼬마가 아니면 지금 축을 맡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녀석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이번 계획은 시작부터 불가능했다고. 내 얼굴을 봐서 이번 한 번만 꼬마를 믿어줘. 달래는 음성에 철판을 긁는 것 같은 소음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뒤를 잇듯 지금껏 침묵하고 있던 청년이 말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펠릭스. -…두고 보겠다. 못마땅하게 대꾸한 성기사가 입을 다물었다. 만족한 듯 몸을 일으킨 나스쿤이 장난스럽게 외쳤다. -자, 제군들. 우리는 오늘 세상을 구한다. 어쩌면 역사에 이름이 남을지도 모르지. 뭐, 나야 불세출의 천재니까 굳이 세상을 안 구해도 이름이 남겠지만. -나스쿠운! 이런 순간까지 잘난 척을 해야겠어요?! 소녀처럼 뺨을 부풀린 금발여자가 외쳤다. 어깨를 으쓱한 나스쿤이 말을 이었다. -너희 역시 이제 와서 명예를 탐할 정도로 궁한 놈들은 아니잖아. 각자가 지키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이 자리에 섰을 거라고 생각해. 그것에 걸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줘. 갑자기 진지해진 그의 목소리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각오를 다지듯 결연한 얼굴을 한 이들이 서로를 마주했다. 거짓말처럼 모두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살아서 다시 만나도록 하지요. -모두 내 결혼식에 꼭 와줘야 해요! 누구보다 화려하게 할 테니까! -실수하는 놈은 내 검에 걸고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이런, 펠릭스. 나는 자네가 제일 걱정이라네. 웃고 떠드는 목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다시 점점 어두워지는 시야 속에서 나스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들, 끝까지 함께 해줘서 고맙다. 영상이 끝나면서 시야가 확 밝아졌다.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연달아 떠올랐다. <잊혀진 기억 : 과거의 영웅들을 감상하였습니다> <잃어버린 도시 - 샤이렌드라가 지도에 추가 되었습니다> 세영은 몸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목적지에 도착한 오징어가 그녀의 몸을 잡아채 벽으로 내던진 것이다. 세영은 재빨리 몸을 돌려 눈앞의 기둥을 걷어찬 후 바닥으로 착지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뻗어오는 오징어의 다리를 뎅강 자른 그녀는 곧장 앞으로 튀어 나갔다. 세영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오징어가 방법을 바꾸었다. 놈은 남은 다리에 카라드와 라오 조드를 나눠 쥐고 흔들었다. 위협적인 기세로 보아 인질극이라도 벌일 생각인 듯했다. 피식 웃은 세영이 개의치 않고 달려가자 오징어의 다리가 죄어들었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축 늘어져 있던 두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세영은 달리는 그대로 정글도를 집어 던졌다. 풍차처럼 회전하며 날아간 정글도가 카라드를 묶고 있는 다리를 잘랐다. 인질 중 하나를 잃은 오징어가 라오 조드를 움켜쥐고 도망치려고 했다. 세영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걸렸다. “이젠 휘말릴 사람도 없거든! 파이어 스톰!” 바로 앞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온 불꽃이 오징어를 덮쳤다. 이글거리며 회오리치는 불기둥이 놈을 하얗게 불살랐다. 불꽃이 사라지고 나자 간신히 형체만 남아있던 재가 바닥으로 풀썩 주저앉았다. “거 새끼. 더럽게 빠르네.” 뻐근한 어깨를 주무른 세영이 작게 투덜거렸다. 그 사이 간신히 몸을 일으킨 카라드가 절뚝거리며 그녀에게 걸어왔다. 피와 물에 젖어 엉망이 된 그가 고개 숙여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어….” 뜻밖의 말에 놀란 세영이 그를 돌아보았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티더니, 그녀에게 한 말을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피식 웃은 세영이 손을 내저었다. “5분, 버텨줬잖아요. 늦은 건 내 쪽이니까 카라드 잘못이 아니에요.” “하지만….” 머뭇거리던 카라드의 시선이 바닥에 널브러진 라오 조드에게 향했다. 파이어 스톰의 여파에 휘말린 그는 온몸이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이전에 대전모드를 해제한다는 걸 깜빡한 듯했다. “아, 안 죽었어요. 겉이 좀 그을리긴 했지만. 씻어내면 괜찮을 거예요.”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인벤에서 힐링 포션을 꺼내 라오 조드의 입에 박아 넣었다. 이 짓도 몇 번 했더니 능숙해져 한 방울도 밖으로 흐르지 않았다. 간단한 치료를 끝낸 그녀는 라오 조드의 몸을 뻥 걷어차서 물속으로 처넣었다. “푸학!” 물에 빠지자 정신이 돌아온 라오 조드가 버둥거렸다. 검은 물을 뚝뚝 흘리면서 물가로 기어 나온 그가 바닥에 털벅 엎어졌다. 당황한 카라드가 그의 옆으로 다가가 몸을 굽혔다. “괜찮으십니까?” “두 번이나…. 벌써 두 번이나 나를 불태웠겠다아!” 부축하려는 손을 무시하고 엉금엉금 기어온 라오 조드가 세영의 앞에 널브러졌다. 타다 만 봉제인형 같은 몰골이었다. 머리를 긁적이던 세영은 대전모드를 해제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다리를 붙잡은 라오 조드가 오열하며 외쳤다. “진짜 너무하잖아! 어떻게 나 말고 마도놈을 구할 수가 있어!” “넌 타도 안 죽잖아. 저쪽은 타면 죽어.” 소환수로 등록된 라오 조드는 스킬을 맞아도 빈사 상태가 되지만, 파티원이 아닌 카라드에겐 치명상일 수 있었다. 무심한 대답에 “그런 게 어디 있어!” 하고 외친 라오 조드가 서럽게 흐느꼈다. 뺨을 긁적인 세영이 클렌징을 써주었다. “야, 근데 너 머리 탔다?” 검댕이 완전히 사라지자 문어처럼 반들거리는 라오 조드의 머리가 드러났다. 탐스럽던 은발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울컥한 라오 조드가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저번에 벌써 사라졌다고! 누님이 태웠잖아!” “…어, 그래. 미안.” 이번만큼은 세영도 그에게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라오 조드는 두 번이나 탔으니 이제 영영 머리가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울부짖었다. 난처함을 느낀 세영이 그의 어깨를 말없이 다독여 주었다. ──────────────────────────────────── 잃어버린 도시 (2) “자, 이제 카라드 차례예요.” 세영은 카라드에게 상처 치료 스킬과 힐링을 아낌없이 뿌렸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애쓴 사람은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클렌징으로 핏자국까지 없애자 깨끗해진 손을 멍하게 바라보던 카라드가 물었다. “혹시 인간이 아니신 겁니까?” 세영은 저도 모르게 푸핫 하고 웃어버렸다. 무례하게 굴 생각은 아니었지만, 진지한 카라드의 얼굴이 너무 순진해 보였던 탓이다. “당연히 인간이죠. 이런저런 재주를 익혔을 뿐이에요.” 잠시 망연해졌던 카라드가 이내 표정을 바로잡았다. 세영의 말을 믿기보다는 수긍하겠다는 기색이었다. 낑낑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라오 조드가 투덜거렸다. “웬 내숭이야. 누님이 누구인지 알고 접근했을 거면서.” “잘 모릅니다만, 제가 알아야 하는 거라면 가르쳐주십시오.” “뭐?! 왜 그걸 나한테 물어봐. 그리고 알아도 너한테 가르쳐줄 것 같아?” 괜히 움찔한 라오 조드가 화를 냈다. 정말 몰라서 물어봤던 카라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바보 콤비처럼 보이는 둘을 보고 세영이 머리를 흔들었다. 마도놈이 어쩌고저쩌고 수선을 떨던 라오 조드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제기랄, 허리가 아프잖아. 남자의 생명은 허리인데. 그런데 여긴 어디지?” “참 빨리도 물어본다.” 맵을 켜서 주변을 확인하고 있던 세영이 한심함을 담아 내뱉었다. 어깨를 으쓱한 라오 조드가 반쯤 무너진 기둥으로 다가갔다. 아름답게 조각된 기둥의 상부는 담쟁이덩굴과 뒤엉켜 있었다. 어린애처럼 기둥 주변을 빙빙 돌던 라오 조드가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내 궁에 이런 곳이 있었단 말이야?” “지하수로를 통해 끌려 왔으니, 궁과 꽤 떨어진 곳일 겁니다.” 옆에서 주변을 경계하던 카라드가 충실하게 답했다. 무심결에 수긍하려던 라오 조드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물었다. “마도놈, 너 혹시 쌍둥이냐? 아니면 정신병 같은 거 있어?”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긴 뭘 몰라! 나샴의 알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던 놈이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냐고!” “뭐?” 그 말에 반응한 것은 카라드가 아니라 세영이었다. 그녀의 손에 멱살이 잡힌 라오 조드가 켁 하고 개구리 죽는 소리를 냈다. 세영은 버둥거리는 그를 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네가 그 빌어먹을 의뢰주는 아니겠지?” “무, 무슨 말…. 크걱! 누, 누님! 말로 하자고?!” 숨이 막혀 캑캑거리는 그를 잠시 바라보던 세영이 손을 놓았다.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라오 조드가 쿨럭거리며 원망을 토해냈다. “너무 나만 미워하는 거 아니야?” “라오 조드, 아스트리드 호에 택배 주문한 적 있냐?” “태, 택배가 뭔데?” 세영은 아스트리드라는 말이 나온 순간 황금빛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한숨을 쉰 세영이 안타까운 척하며 말했다.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어쩔 수가 없네.” 세영의 발이 라오 조드의 다리 사이로 향했다. 그녀가 뭘 짓밟으려는 건지 눈치챈 라오 조드가 비명을 질렀다. “자, 잠깐만! 왜, 왜 이러는 건데!” “너한테 유감은 없지만,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지. 너의 2세와 영원히 작별하게 만들 수밖에.” “나 아냐! 아니라고!” 다가오는 발을 붙잡은 라오 조드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세영이 못 믿겠다는 시선을 보내자 그는 거의 입에 거품을 물고 항변했다. “진짜 아니라니까! 의뢰한 건 세레비야. 난 그걸 중간에서 가로채려고 했을 뿐이라고!” “가로채?” 잠시 고민하던 세영은 일단 들어보기로 하고 발을 내려놓았다. 엉덩이 걸음으로 물러나 안전거리를 확보한 라오 조드가 말했다. “세레비라고, 내 자리를 노리는 돼지가 있어. 내세울 건 외가밖에 없어서 헛소문이나 퍼트리는 놈이었는데 갑자기 위험한 방법을 쓰더군. 난 놈이 나샴의 알을 대량으로 구매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걸 가로채려고 했을 뿐이야. 뭐가 잘못됐는지 이미 털린 후였지만.” 모르는 사람들에게 멱살을 잡히고 난리였다고 말한 라오 조드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짜증스러운 눈으로 카라드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저 마도놈이, 갑자기 나타나서 알을 내놓으라고 날 협박했다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불쑥 나타났다니까! 처음엔 영락없는 유령인 줄 알았는데 마도인이라고 해서 얼마나 식겁했는지.” “…제가 말입니까?” 멍하게 되묻는 카라드를 보고 라오 조드가 “자꾸 모른 척하지 마!” 하고 화를 냈다. 세영은 난감한 기분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좀 이상하게 꼬인 것 같은데.’ 그녀는 옥신각신하는 둘을 내버려두고 맵을 체크했다. 지도창에는 <잃어버린 도시 – 샤이렌드라>라는 제목이 떠 있었다. ‘수로를 통해야만 들어올 수 있는 히든맵인가.’ 아직 남아있는 도시의 잔해가 탑에서 본 건물들을 떠올리게 했다. 환상이 아닌 진짜 도시에 서 있는 것은 묘한 감흥을 일으켰다. 짧게 혀를 찬 세영이 라오 조드를 돌아봤다. “싸울 힘이 있으면 아껴둬.” “응?” “우릴 여기로 초대한 놈들이 오는 모양이니까.” 맵 위에 나타난 수십 개의 붉은 점들이 그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세영의 말에 바짝 긴장한 라오 조드가 사방을 둘러봤다. 그 사이 주변을 뒤지던 카라드가 정글도를 주워와 세영에게 내밀었다. 강아지도 아니고 던진 물건을 물어오는 것에 당황한 세영이 손을 내저었다. “어, 그건 카라드가 쓰는 게 좋겠어요. 무기 없죠?” “무기라면 주신 것을 가져왔습니다.” 카라드가 다른 손에 쥔 것을 들어 보였다. 날이 없는 새카만 검이었다. 의아해하는 세영을 본 그가 쓰게 웃었다. “어떻게 쓰는지 알 것 같습니다. 이건 정말 제 검이었군요.” 오징어에게 머리를 두들겨 맞더니 기억이 조금은 돌아온 듯했다. 피식 웃은 세영이 우울함에 물든 그의 얼굴 앞에 박수를 쳤다. 짝! 하는 경쾌한 소리에 동그랗게 변한 눈이 깜빡였다. “생각은 나중에 하죠. 지금은 싸움에 집중할 때니까.” “예.” 카라드의 얼굴에 날카로운 기세가 감돌았다. 흐뭇해 하는 세영의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온 라오 조드가 찡얼거렸다. “누님, 나는? 나도 무기 없는데….” “넌 그냥 몸으로 막아.” 카라드의 손에서 정글도를 받은 세영이 무심하게 말했다. 충격받은 눈으로 그녀를 본 라오 조드가 얼굴을 가리고 흑흑 우는 척을 했다. “나한테 진짜 너무하는 거 아냐? 좀 불쌍하게 여겨주라. 나 이제 누님 때문에 장가도 못 가는 신세라고.” “장가를 왜 못 가?” 어이없이 되묻자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힌 라오 조드가 “그, 그때 아래도 같이 타버렸단 말이야. 다른 사람한테 그걸 어떻게 보여줘.” 하고 손을 꼼지락거렸다. 예상외의 답변에 세영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때 새카만 검이 라오 조드의 목을 겨누었다. 싸늘하게 얼굴을 굳힌 카라드가 이를 갈 듯 내뱉었다. “감히 그런 더러운 소리를 하다니!” “어, 잠깐. 누님, 이놈 왜 이래!? 눈이 맛이 갔잖아!” 기겁한 라오 조드가 뒤로 물러섰지만, 카라드의 검은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따라붙었다. 세영은 “더럽다니, 내 털이 타서 탔다고 말하는 게 왜 더러워!” 라고 왈왈거리는 라오 조드와 “다시 태어난다면 수치를 배우십시오!” 하고 으르렁대는 카라드 사이에서 한숨을 쉬었다. “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지 않아?” 날카로운 물음에 옥신각신하던 남자들이 움찔했다. 합죽이가 된 둘을 보고 피식 웃은 세영이 스페이드 소드를 꺼내 던졌다.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 안은 라오 조드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거 나 주는 거야?” “빌려주는 거니까 깨끗하게 써라. 흠집 내면 죽는다.” 디안의 레벨이 조금만 더 높았어도 세영의 손을 떠났을 검이었다. 디안이 스킬수련에서 발목을 잡히는 바람에 첫 개시를 엉뚱한 사람의 손에서 하게 된 것이다. 떨떠름해하는 세영과 달리 검을 뽑아든 라오 조드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우왓, 검 주제에 왜 이렇게 예쁜 거야. 진짜 너무 아름다워! 보는 것도 아까울 정도야.” “헛소리하지 말고 정신 차려. 곧 온다.” 세영의 경고에 그제야 검에서 눈을 뗀 라오 조드가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걱정 말라고. 이 검이라면 어떤 적이라도 해치울 수 있을 테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무 마리에 가까운 거대 오징어들을 본 라오 조드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됐다. “이, 이게 아닌데?” 세영의 얼굴도 덩달아 굳어졌다. 거대 오징어는 필드 보스에 필적한 몬스터였다. 혼자라면 떼로 나와도 아무 문제가 없지만, 파티원이 아닌 둘을 달고 부딪치기엔 무리가 있었다. 짧게 혀를 찬 그녀가 외쳤다. “파티 탈퇴!” 시야 왼쪽에 떠 있던 파티창이 사라졌다. 파티장은 디안이었기 때문에 새 파티원을 추가하려면 기존 파티를 탈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동료들의 이름이 사라지는 순간 쓸데없는 죄책감이 느껴졌다. 세영은 그런 자신을 책망하며 다시 외쳤다. “파티 생성!” <새로운 파티의 이름을 정해주십시오> “맥반석 오징어!” <맥반석 오징어 파티가 생성되었습니다> 새로운 파티창을 확인한 세영이 옆을 돌아보았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남자들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뻘쭘함에 뺨을 긁적인 세영이 말했다. “나와 함께 오징어를 때려잡지 않을래?” <파티를 신청하였습니다> 멍하게 있던 남자들 중에 라오 조드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씨익 웃은 그가 “좋아!” 라고 외치자 파티에 참가 되었다는 메시지가 떴다. 파티원의 정보가 공개되며 Lv65 무나크라는 이름이 나타났다. “함께 싸우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어서 카라드가 파티 신청을 수락했다. 세영은 파티창에 나타난 Lv79 ??? 라는 정보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기억을 잃으면 원래 이름이 뜨지 않는 건지, 단순한 오류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느닷없이 인상을 쓰는 세영을 보고 카라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피식 웃은 세영이 말을 돌렸다. “생각보다 레벨이… 아니, 실력이 좋아서요.” “쳇, 저런 마도놈이 무슨.” 라오 조드의 투덜거림에 세영은 너보다 14레벨은 더 높다고 말해 주려다 말았다. 우글대는 오징어 사이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탓이다. “배신자, 도둑, 건방진 계집이라니. 재미있는 조합이군요.” ──────────────────────────────────── 잃어버린 도시 (3) 세영은 다시 한 번 맵을 확인했다. 빽빽한 붉은 점이 그들 앞에 모여 있었다. 즉, 방금 지껄인 여자 역시 적이란 소리였다. ‘인간.’ 정글도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죽일 수 있을까?’ 세영은 자신에게 물었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못했다. -사람을 죽이지도 못하고, 동료를 버리지도 못하고. 계속 그런 식이라면 앞으로 힘들 텐데. 냉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는 것 같았다. 짧게 혀를 찬 세영이 오징어 사이에서 걸어 나오는 여자를 쳐다봤다. 대단히 요염한 여자였다. 녹색 비단으로 만든 드레스가 터질 것 같은 가슴과 엉덩이를 그대로 드러냈다. 아래로 처진 눈과 도톰한 입술, 입가에 찍힌 점이 어우러져 어딘지 천박하면서도 섹시한 분위기를 풍겼다. 세영은 속으로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앗, 너는 세레비가 다섯 번째로 갈아치운 첩!” 그녀가 나타나자 화들짝 놀란 라오 조드가 손가락질을 했다. 여자의 눈가가 파득 떨렸다. 그녀는 자신이 아닌 오징어를 가리키는 라오 조드를 향해 앙칼지게 물었다. “지금 어디를 보고 말하는 거죠?” “이런, 미안. 워낙 비슷한 것들끼리 서 있으니까 구분이 안 돼서 말이야.” 여우처럼 씨익 웃은 라오 조드가 능청을 떨었다. ‘우와, 이 새끼. 재수 없어.’ 세영은 저도 모르게 그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여자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까드득 소리가 나게 이를 갈며 웃었다. “흥, 여전히 입만 살았군요. 크라켄에게 짓이겨지고도 계속 지껄일 수 있는지 두고 보죠.” “아, 이 저주받은 미모란. 날 소유하지 못해서 죽이려 드는 여자가 이렇게 많다니까.” 민둥산인 머리를 쓸어 넘기는 척한 라오 조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아무리 선량한 사람도 살인자로 만들 만큼 재수 없음이 넘쳐흘렀다. 이를 앙다문 여자가 시퍼렇게 안광이 돋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다 말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어요. 물건의 행방을 말한다면, 단번에 편히 죽게 해드리죠.” “무슨 물건을 말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는데? 설마 내 마음?” “네놈이 훔쳐간 용의 알을 내놓으란 말이다! 이 대머리 자식아!” 깐족거리는 그의 태도가 기어이 여자를 폭발하게 했다. 충격을 받은 라오 조드가 “어,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하고 비틀거렸다. 대충 돌아가는 사정을 짐작한 세영이 그를 노려봤다. “너 이 새끼, 상습범이었잖아?” “오, 오해야. 그거 밀수품이었다고? 그리고 그런 귀한 물건을 덜렁덜렁 싣고 다니는 쪽이 더 나쁜 거잖아.” 라오 조드는 자신은 죄가 없다며, 그저 눈에 띄기에 집어왔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눈에 보일 정도로 이마의 혈관이 튀어나온 여자가 그를 가리키며 명령했다. “당장 놈을 잡아. 잡아서 내 앞에 무릎 꿇려!” 오징어들이 곧장 다리를 뻗어왔다. 제게 달려드는 수십 개의 다리에 당황한 라오 조드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대신 앞으로 뻗어 나온 새카만 검이 오징어의 공격을 모조리 튕겨냈다. “적을 너무 자극하지 마십시오.” 라오 조드의 앞을 가로막은 카라드가 질책하듯 말했다. 세영은 그가 들고 있는 검에 마나가 휘감겨 있는 것을 눈치챘다. ‘마검사? 그래서 검날이 없었군.’ 어떻게 쓰는지 알 것 같다더니, 이런 뜻이었나 보다. 앞으로 나선 카라드를 보고 멈칫한 여자가 처음의 요염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이런, 카벨님. 왕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저를 막겠다는 겁니까? 아무리 당신이라도 이 아이들을 전부 상대하는 건 무리일 텐데요.” 세영은 저도 모르게 카라드의 얼굴을 살폈다. 예상과 달리 카라드는 아무런 동요 없이 검을 휘둘러 오징어의 공격을 쳐냈다. 대꾸도 하지 않는 그를 보고 얼굴을 굳힌 여자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필요한 건 라오 조드뿐이다. 나머지는 전부 죽여 버려!” 세영도 그때쯤 관찰을 끝냈다. 18마리의 오징어 중에 움직이는 것은 9마리뿐이었다. 예상대로의 상황에 미소 지은 그녀가 라오 조드의 등을 향해 말했다. “내가 신호하면 둘 다 뒤쪽으로 달려가서 물속으로 뛰어들어.” “뭐? 하지만…….” “설명할 시간 없어. 뒤돌아보지 말고 곧장 뛰어가.” 라오 조드의 말을 끊은 세영이 오징어의 공격을 필사적으로 막아내는 둘을 쳐다봤다. 카라드의 검이 오징어의 다리들을 한 번에 튕겨냈다. “지금!” 카라드의 앞으로 튀어 나간 세영이 횡으로 크게 정글도를 휘둘렀다. 초승달 모양의 바람이 공간을 갈랐다. 곧바로 반응한 오징어들이 사방으로 확 퍼졌다. 성가실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세영은 놈들을 뒤쫓는 대신 화살처럼 몸을 날렸다. 제자리에 멈춰 서 있는 9마리의 오징어를 향해서였다. 세영이 바로 앞에 내려앉자 멈칫한 오징어가 다리를 내리꽂았다. 다리를 밟고 훌쩍 뛰어올라 오징어의 머리를 뛰어넘은 세영이 뒤쪽에 웅크리고 있던 남자에게 말했다. “안녕?” 피리를 입에 문 남자가 사색이 됐다. 바닥에 내려앉은 세영이 그의 배를 걷어찼다. 놈이 물고 있던 피리가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세영은 가볍게 짓밟는 것으로 피리를 박살 냈다. 테이밍 스킬이 깨어지며 남자가 조종하던 오징어들이 멈춰 섰다. 혼란에 빠진 놈들이 바로 옆에 있는 것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오징어의 다리가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낚아챘다. “으아악!” 남자의 비명이 울려 퍼질 때 세영은 또 다른 목표물을 찾아 몸을 날리고 있었다. 두 번째 테이머는 다가오는 세영을 피해 도망치다가 뒤통수를 걷어차이고 기절했다. 미쳐 날뛰는 오징어를 피해 물러선 세영이 조소를 날렸다. “테이밍으로 남을 공격하려면 군대라도 끌고 와서 테이머를 지켰어야지.” 한 마리의 오징어로 적을 공격하고 다른 한 마리로 테이머를 지킨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충분히 통했을 전략이다. 하지만 상대가 세영인 이상 제 목을 찌르는 방법일 뿐이었다. “마, 막아! 모두 저 계집을 죽여! 당장!” 기겁한 여자가 명령을 내렸다. 남은 오징어들이 한꺼번에 세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세영은 놈들이 몰려들길 기다리다가 한복판에 파이어볼을 던졌다. 본능적으로 사사삭 물러나는 오징어들을 뚫고 튀어 나간 그녀는 곧바로 무방비하게 서 있는 테이머들을 덮쳤다. 테이머들이 모두 무력화되자 통제가 풀린 오징어들이 본능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명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어, 어떻게 이런….” 새파랗게 질린 여자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왕이 그녀에게 내려준 술사들은 무적이었다. 그런 자들을 한순간에 박살 낸 세영은 도저히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제게 다가오는 세영을 발견한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마!” 날카로운 소리가 오징어들을 자극한 듯했다. 여자에게 뻗어지는 다리들을 쳐낸 세영이 파이어 스톰을 써서 오징어들을 물러나게 했다. 안색이 시퍼렇게 죽은 여자를 일으켜 세운 세영이 물었다. “여기 혼자 있을래, 아니면 나 따라갈래?” 잠시 망설이던 여자가 세영을 붙잡았다. 세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좋은 선택이야.” 여자의 뒷목을 내리쳐 기절시킨 세영이 축 늘어진 그녀를 들쳐 맸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오징어들이 다시 다리를 뻗었다. 세영은 파이어볼을 날려 놈들을 물러서게 한 뒤에 포위를 뚫고 질주했다. 맵을 보자 파티원들 옆에 붉은 점 두 개가 찍혀 있었다. 테이밍이 깨어져 서로를 치고받던 오징어 중에 두 마리가 따라붙은 모양이었다. 가까이 달려가자 물속에 박힌 기둥 위로 올라가서 오징어들의 공격을 쳐내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누, 누님! 뭘 데리고 오는 거야?!” 세영의 뒤로 따라붙은 십여 마리의 오징어를 본 라오 조드가 질겁했다.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파이어볼을 만들어 둘을 공격하는 오징어들에게 던졌다. 화닥닥 뒤로 물러선 오징어들이 보복하듯 세영을 공격했다. 곧바로 바닥을 박찬 세영이 오징어를 짓밟으며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새처럼 날아오른 그녀를 붙잡기 위해 수십 마리의 오징어들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노바!” 앞으로 내뻗은 세영의 손앞에 푸른 번개가 동그랗게 모여들었다. 세영은 파직거리는 번개의 공을 우글거리는 오징어들의 한복판에 가차 없이 내리꽂았다. 다음 순간 물 전체가 시퍼렇게 변하며 타올랐다. 눈이 아프도록 번쩍이던 빛은 희생양의 목숨을 움켜쥔 채로 사라졌다. 빛과 어둠이 다시 역전되는 순간 공기가 요동쳤다. 폭풍처럼 날뛰던 바람이 다음 순간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수면에 둥둥 떠다니는 오징어의 사체를 발판 삼아 물 밖으로 나온 세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파티 이름을 맥반석이 아니라 전기구이로 할 걸 그랬나.” 어쨌든 구이는 구이니까 썩 틀린 작명은 아니었다. 어깨에 짊어진 여자를 적당한 곳에 내려놓고 여전히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파티원들을 돌아보았다. “곧바로 올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좀 걸렸네. 다친 곳은?” “…이건 진짜 말도 안 돼! 누님, 진짜 인간 맞아?” 다쳤냐고 묻자 빽 소리를 지른 라오 조드가 제 뺨을 찰싹 때렸다. 꿈인지 확인해본다는 거였다.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본 세영이 “머리 다친 건 확실하네.” 하고 말했다. 어색하게 웃은 카라드가 라오 조드를 끌고 물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세영의 옆에 달라붙은 라오 조드가 방금 그건 뭐냐, 어디서 배운 거냐, 나도 할 수 있냐 따위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도록 뒤로 물러선 카라드는 기절한 여자를 살피고 있었다. 이럴 때까지 성실한 사람이구나 생각하는데 세영 쪽으로 몸을 기울인 라오 조드가 속삭였다. “좀 신경 쓰이는 게 있는데 말이야. 저 여자가 말한 카벨님이 카벨 루스타나는 아니겠지?” 카벨 루스타나. 기억을 더듬었지만, 이전엔 들은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세영은 제 귓가에 달라붙은 라오 조드의 주둥이를 밀어내며 물었다. “그게 누군데?” “뭐? 몰라?” 화들짝 놀란 라오 조드가 되물었다. 세영은 시큰둥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내가 꼭 알아야 하는 사람이야?” “…누님, 마도왕이 누구인지는 알지?” “대충은?” 라토니아를 마도라고 부른다고 했으니, 정복왕도 마도왕으로 부를 터였다. 세영은 기절한 여자를 힐끗 쳐다봤다. 왕이 어쩌고 하더니 로또놈의 부하였나. 전에 없이 심각한 얼굴이 된 라오 조드가 말했다. “그놈의 오른팔이 바로 카벨 루스타나야. 마도왕의 제일 가는 수하이자 잔혹하기로도 유명한 놈이라고.” 세영은 힐끗 카라드 쪽을 바라봤다. 막 몸을 일으키던 카라드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세영은 잠시 잔혹하고 악명 높은 마도왕의 오른팔을 상상해 보았다. 그런 악당이 어린애를 밀치고 대신 흙더미에 깔릴 것 같지는 않았다. “절대 아닐걸.” “…그렇겠지? 악명 높은 루스타나가 저런 이상한 놈일 리가 없지.” 어딘지 안도한 것 같은 목소리였다. 세영은 흐음 소리를 내며 라오 조드를 쳐다보았다. 당황한 라오 조드가 눈을 깜빡였다. “왜 그렇게 봐?” “이러쿵저러쿵해도 꽤 마음에 들었구나 싶어서.” “뭐?!” 기겁한 라오 조드가 양팔을 가슴 앞에 교차하며 머리를 붕붕 휘저었다. “절대 아니야! 난 여자가 좋다고!” “…그런 의미 말고. 인간적으로 마음에 들었냐고.” “아, 난 또. 내 참, 그럴 리가 없잖아. 다른 것도 아니고 사악한 마도놈이라고?” 말도 안 된다며 손을 내젓는 라오 조드의 정수리에 카라드의 주먹이 쾅 떨어졌다. 컥 소리를 낸 라오 조드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카라드가 딱딱한 얼굴로 내뱉었다. “자꾸 마도놈, 마도놈 하면 듣는 마도놈의 기분도 나쁩니다.” 가만히 듣고는 있었지만, 역시 싫었던 모양이다. 세영은 은근히 성깔 있구나 생각하며 말없이 지켜봤다. 머리를 부여잡고 낑낑거리던 라오 조드가 꽥 소리를 질렀다. “이 마도놈이!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당연히 모릅니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으니까요.” “아오, 진짜 환장하겠네. 자꾸 거짓말할래?!” 세영은 길길이 날뛰는 라오 조드를 외면했다. 기억을 잃었다고 말해주면 끝날 문제이긴 하지만, 당사자가 말하지 않는 것을 굳이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잡소리 하지 말고, 저 여자나 들어.” 대신 바닥에 쓰러져있는 여자를 가리킨 후 몸을 돌렸다. 불만스럽게 그녀를 쳐다본 라오 조드가 찡찡거렸다. “마도놈도 있는데 왜 내가 들어?” “왜 여기에 떨어졌는지 따지면서 네 잘못 나올 때마다 손가락 하나씩 꺾어도 돼?” “…잘못했습니다.” 단번에 얌전해진 라오 조드가 여자를 들쳐 매고 따라왔다. 세영은 맵을 확인하며 앞서 걷기 시작했다. 쭐래쭐래 따라오던 라오 조드가 물었다. “그래서 지금 어디 가는 건데?” “계속 여기 있을 수는 없잖아. 나가는 길을 찾아야지.” 당연한 것을 묻는 라오 조드와 달리 카라드는 길을 탐색하는 중이었다. 익숙해 보이는 행동에 세영은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카벨 루스타나라.’ ──────────────────────────────────── 잃어버린 도시 (4) ‘카벨 루스타나라.’ 아닐 거라 생각하지만, 일말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일찍이 리먼은 카라드의 지적 수준을 평가하며 경고했었다. -읽고 쓰는 게 자유롭고, 신성문자도 기초적인 수준은 해석하더군요. 상당히 고등교육을 받은 것 같습니다. 이 정도의 지식을 쌓았다면 마도에서도 고위층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각오는 되어 있었지만, 마도왕의 오른팔 같은 것은 정말 예상 밖이었다. 세영은 약간 곤란해지는 것을 느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그녀의 옆으로 다가온 카라드가 머뭇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세영은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 있어요?” 잠시 세영을 바라보던 카라드가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목숨을 구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기회가 된다면 꼭 은혜를 갚겠습니다.” “아니, 뭐. 딱히 구해준 건 아닌데요.” 이런 식의 정중함에 약한 세영이 난처하게 말했다. 그것을 알아챈 듯 카라드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세영은 그가 왜 지금 인사를 하는지 깨달았다. “바로 떠날 생각이에요?” “그편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카라드의 얼굴에 깃든 것은 미안함과 죄책감이었다. 세영도 고개를 끄떡였다. 동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면 더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딜 가든 잘 지내길 빌게요.” “감사합니다.” 두 사람의 옆을 휙 스쳐 지나간 라오 조드가 “난 아무것도 못 봤다!” 하고 외쳤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은 세영이 눈을 찡그렸다. 미운 정이라도 든 건지 여우 새끼가 하는 짓이 귀여워 보이려 했다. 괜히 멀리까지 달음박질쳤다가 다시 돌아온 라오 조드가 능청을 떨었다. “진짜 쓸데없이 넓군. 여긴 대체 어디야?” “샤이렌드라.” 무심한 대답에 라오 조드의 얼굴이 굳었다. 멍하게 세영을 쳐다보던 그가 활짝 웃었다. “와, 누님. 샤이렌드라라고 한 줄 알았어.” “맞는데?” “…뭐?” 혼이 빠진 표정을 짓는 것을 보니, 이 도시가 제법 의미 있는 유적인 모양이었다. 세영은 고개를 들어 천정을 바라보았다. 흐릿하게 빛나는 야명주들이 별자리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박혀 있었다. 환기 시설이 있는지 공기도 답답하지 않았다. 이런 환경으로 만들려면 그야말로 천금을 쏟아 붓는다고 해도 부족했을 것이다. 세영은 누가 이런 돈지랄을 했나 하고 다시 맵을 켜서 옆에 나오는 상세 정보를 읽었다. <샤이렌드라. 인간과 나샴이 평화롭게 공존했다는 전설 속의 도시. 하지만 과거의 재앙으로 이 아름다운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바냐 일족의 라오 조드가 발견하고 복구하였으며, 그의 전사들은 침묵으로 수호하길 맹세하여…> 뒤에 이어지는 설명은 한 인간의 역사적인 노력을 말하고 있었다. 세영은 드문 감탄을 담아서 말했다. “라오 조드, 네 선조는 이 도시를 발견하고 그 위에 궁을 지은 거야. 이곳을 지키기 위해서.” 초대의 라오 조드가 이곳에서 가져간 것은 단지 문 하나였다. 아마 그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고개를 돌린 세영이 그의 후손에게 물었다. “어쩔래?” “…뭘?” “여길 공개하면 태양의 탑을 손에 넣을 필요도 없어. 네가 바로 샤이렌드라의 계승자니까.” 과거 샤이렌드라의 군주는 두 개의 탑을 다스리며 인간과 나샴을 통치했다. 라오 조드가 태양의 탑을 손에 넣고자 한 것도, 세레비가 나샴의 알을 무리하게 사들인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초대 라오 조드는 샤이렌드라의 후예였기에. 만약 라오 조드가 이곳을 공개한다면 초대와 맞먹는 정통성을 얻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잠시 침묵하던 라오 조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지? 누님 눈엔 내가 형편없어 보이겠지만, 그래도 선조가 지키려던 유산을 팔아먹을 놈은 아니야. 나한테도 군주의 자존심이 있다고?” 세영은 심드렁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백성을 코끼리로 짓밟는 군주의 자존심?” “윽, 그건…….” 움찔한 라오 조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백했다. “푸쿠는 선대 라오 조드에게 받은 유일한 거였어. 내 친구이자 자랑이라 누님을 마중할 때도 타고 나갔던 건데, 누군가 녀석의 다리를 찔렀던 모양이야. 아마도 날 노린 공격이었겠지.” 푸쿠가 그렇게 날뛰는 것은 처음이었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대로 떨어져 짓밟히거나 깔려 죽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때 거짓말처럼 세영이 나타났다. “꼭 사막에서 신을 만난 것 같았다니까.” 멋쩍게 말한 라오 조드가 하하 웃었다.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던 세영이 물었다. “범인은 잡았고?” “아니, 정황상 세레비 쪽일 거라고 생각해. 이 여자를 털면 나오겠지. 멍청한 녀석이지만, 마도와 손을 잡을 정도로 멍청한지는 몰랐는데.” “멍청한 건 너도 마찬가지야. 왜 공격당했다고 말하지 않은 건데?” 분명 사실을 밝힐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라오 조드는 모호한 말로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얼버무렸다. 세영의 의문에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 하면 군주를 위험하게 한 죄로 푸쿠가 죽을 테니까. 달리 녀석을 살릴 방법이 생각이 안 났거든.” “그냥 멍청이가 아니라 왕멍청이네.” “에이, 왕멍청이는 너무 심하다.” 냉정한 대답에 작게 투덜거린 라오 조드가 힐끗 옆을 보았다. 없는 사람처럼 묵묵하게 걷던 카라드가 말했다. “전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뭐, 상관없어. 마도놈이 하는 말 따위 누가 믿겠어.” 누가 믿어도 욕 좀 더 먹을 뿐이라고 말한 라오 조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자조적인 미소가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군주로서 교육받았다면 뭔가 다른 방법을 썼을지도 모르지. 근데 나는 노예 몸에서 태어난 비천한 새끼고, 이런 식으로밖에 내 것을 지키지 못해. 라오 조드가 된 것도 어쩌다가 얻어걸린 거랄까. 형들에게 살해당하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말이야, 이렇게 되어버렸다고?” 세영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약한 척 징징 짜고 있지만, 절대 억지 춘향으로 군주에 오를 놈은 아니었다. 파티마를 내세워서 수인족을 관리로 채용하고 화폐법을 건드리는 등의 꽤 공격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들었다. “핑계 대지 마. 멍청아. 저 좋을 대로 굴어놓고 약한 척하는 건 비겁하지 않아?” “음, 그건 그러네. 미안.” 뻔뻔하게 사과한 라오 조드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그때 누님이 나를 구해줘서 기뻤어. 처음 봤을 때도….” “출구를 찾은 것 같습니다.” 절묘하게 끼어든 카라드가 벽 쪽을 가리켰다. 반색한 세영이 그가 가리킨 곳으로 달려갔다. 순식간에 그녀를 놓친 라오 조드가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일부러 그런 거지?”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카라드는 아무런 동요 없이 대꾸했다. 꺼릴 것 하나 없다는 듯 잔잔한 시선이었다. 라오 조드가 헛웃음을 지었다. “와, 이거 생각보다 음흉한 놈일세. 너 누님에게 관심 있냐?” “저는 곧 떠날 사람입니다. 쓸데없는 경계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태도가 더 마음에 안 드는데 말이야. 관심 없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손 뻗고 있잖아.” 빈정거리는 그를 말없이 응시하던 카라드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어딜 도망 가냐는 라오 조드의 말을 무시하고 세영의 옆으로 다가갔다. 짜증스럽게 혀를 찬 라오 조드가 그의 뒤를 쫓았다. 기척을 느낀 세영이 고개를 들었다. “여긴 환풍구인 것 같아요. 밖으로 있을 것 같긴 한데, 멀쩡히 나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벽에 난 둥근 구멍이 청소기처럼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섣불리 몸을 던졌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다른 출구를 찾는 편이 좋겠지만, 생각보다 도시의 규모가 컸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논하는 두 사람 사이에 라오 조드가 불쑥 끼어들었다. “진짜 출구를 찾을 시간 없어. 내가 사라져서 바깥에선 난리가 났을 텐데,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 해.” “좋아, 널 여기 집어넣고 비명이 들리는지 확인해볼까.” “…진짜 나한테 너무하는 거 아냐?” 투덜거리는 라오 조드를 무시한 세영이 구멍의 덮개를 떼어냈다. 바람이 더욱 강해지면서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휘날렸다. 구멍의 안쪽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팔이 확 당겨졌다. “뭘 하시는 겁니까.” 세영은 뜻밖의 제지에 멀거니 카라드를 바라봤다. 그는 조금 놀라고, 화가 난 것 같은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당황해서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말했다. “밖으로 나가야죠?” “위험하다고 말씀하신 것이 조금 전입니다.” “음, 그렇긴 한 데 계속 이렇게 있을 순 없잖아요? 일단 제가 올라가 보고….” “아뇨, 안됩니다.” 괜찮다고 해도 씨도 안 먹힐 것 같은 얼굴이었다. 세영은 답답함에 한숨을 쉬며 말했다.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데, 제가 좀 강하거든요. 뭐가 있어도 때려 부수면 되니까 앞장서는 게 나아요.” “강하다고 위험한 게 덜 위험해지진 않습니다.” 논리에서 밀린 세영이 입을 다물었다. 한방에 오징어들을 작살낸 것을 보고서도 한사코 말리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답지 않은 기사도인가 싶어서 짜증도 나고, 조금 민망한 기분도 들었다. 오묘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푹 쉰 카라드가 말했다.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뭐가 달라요?” “저는 군주도 아니고, 동료도 없습니다. 잘못된다고 해도 딱히 문제는 없을 겁니다.” 세영은 왠지 울컥 화가 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따지려고 입을 열자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냥 때려서 기절시킨 다음 끌고 갈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둘이 싸우지 말고 그냥 이 여자를 집어넣지?” 둘을 멀뚱멀뚱 바라보던 라오 조드가 기절한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한숨을 쉰 세영이 인벤에서 로프를 꺼냈다. 모래상어를 보트와 연결할 때 쓰던 것이었다. 라오 조드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아까의 검도 그렇고 어디서 그런 게 자꾸 나오는 거야? 마법인가?” “네가 살아서 나가면 말해줄게.” 세영은 로프로 라오 조드의 몸을 묶으며 말했다. 안색이 허옇게 질린 라오 조드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누, 누님. 농담이지? 나 아직 장가도 못 갔는데….” “최소한의 안전장치야.” 무뚝뚝하게 말한 세영이 로프의 반대쪽 끝을 제 몸에 묶었다. 풀리지 않게 잘 고정한 후 카라드를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마땅찮은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의 팔을 툭 치며 웃어 보였다. “여기서 제가 제일 가벼우니까, 문제가 생겨도 끌어내기 쉬울 거예요.” 이거라면 논리에서도 밀리지 않는다. 뿌듯해 하는 세영을 보고 카라드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세영의 로프를 풀어 다시 묶어주었다. 처음 보는 매듭이었는데 전보다 훨씬 움직이기 편하면서 풀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정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위험할 것 같으면 바로 로프를 당기십시오.” 카라드는 어린애를 물가에 내놓는 것처럼 몇 번이고 당부했다. 이런 식의 걱정은 처음 받아본 세영이 뺨을 긁적였다. 어쩐지 멋쩍어진 그녀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떡였다. “누님, 조심해.” 진지한 분위기에 휩쓸린 듯 라오 조드마저 한마디 거들었다. 그에게 피식 웃어준 세영이 구멍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 잃어버린 도시 (5) ‘어?’ 허공에 발을 디딘 것 같은 느낌과 함께 몸이 둥실 떠올랐다. 바닥이 없는 것에 당황하는 사이 몸이 홱 치솟았다. 위로 빨려 들어가다가 로프에 의해 덜컹 멈춰 서게 된 세영이 쿨럭쿨럭 기침을 뱉었다. “아, 젠장. 뭐야?” 윙윙 돌아가는 소리가 그녀의 목소리를 삼켰다. 파이어볼을 만들어 환풍구 안을 비추자 거대한 환기팬이 세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다가오는 모든 것을 갈아버릴 기세였다. ‘오, 그냥 뛰어들었으면 난리 났겠는데?’ 제아무리 그녀라도 대비 없이 저런 것에 휘말리면 다칠 수 있었다. 그래 봐야 좀 긁히는 정도겠지만, 거세게 돌아가는 팬의 날개에 베이면 제법 아플 것 같았다. 웬만한 몬스터는 한방에 때려잡다 보니 갈수록 위험에 무뎌진다. 세영은 앞으로 정신 차려야겠다고 다짐하면서 환기팬을 노려봤다. ‘파이어볼을 던져 넣으면 불꽃축제 한마당이 될 것 같고.’ 전기로 움직이는 장치라면 라이트닝 같은 것으로 지져버리면 된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잡아먹을 기세로 돌아가는 선풍기는 아티팩트거나 마법의 힘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컸다. 잠시 고민하던 세영이 정글도를 뽑아들었다. 파이어볼이 사라지며 주변이 어두워졌지만, 목표물이 워낙 커서 상관없었다. ‘애매할 때는 그냥 힘으로 해결해야지.’ 요즘은 주먹보다 검을 더 자주 쓰는 것 같다고 한탄한 세영이 힘차게 정글도를 휘둘렀다. “쇼크 웨이브!” 바람의 중심으로 스킬을 날려 보내자 잠시 후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좋아할 틈도 없이 바람이 훅 줄어들며 몸이 아래로 추락했다. 충격에 대비하던 세영은 로프가 홱 잡아당겨 지는 것을 느꼈다. 무게감 없이 휙 날아간 몸이 카라드와 부딪히며 우당탕 바닥을 굴렀다. “괜찮으십니까?” 온몸으로 그녀의 깔개가 되어준 카라드가 물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싶어 얼떨떨해하던 세영이 고개를 끄떡였다. “무거워! 어서 비키라고!” 두 사람의 밑에 깔린 라오 조드가 죽는 소리를 냈다. 세영은 거의 구르듯이 두 사람 위에서 내려왔다. 카라드까지 몸을 일으키자 캑캑거리던 라오 조드가 옆구리를 부여잡았다. “으으,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아.”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꽈르릉하고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환풍구 안쪽에서 쇳덩이를 마구 집어 던지는 것 같은 쿵쿵 소리가 나더니 뿌연 먼지가 풀풀 새어 나왔다. 놀란 표정으로 그걸 지켜보던 라오 조드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누, 누님. 안에서 대체 뭐한 거야?” “미안. 내가 너희 유물 박살 낸 듯.” 세영은 약간의 민망함을 담아 말했다. 환풍구 팬이라지만 역사가 담긴 물건인데 너무 생각 없이 때려 부쉈나 싶었다.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던 라오 조드가 옆구리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반사적으로 그를 부축한 세영이 물었다. “많이 아프냐?” “더럽게 아파악! 마도놈, 너만 믿으라며! 알아서 한다고 잘난 척하더니 이게 뭐냐고!” 낑낑거리던 라오 조드가 난데없이 카라드를 탓을 했다. 세영을 묶은 로프를 풀어주던 카라드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하는 바람에.” “실수요?” “로프에 역중력을 걸려고 했는데 그… 계산이 틀린 것 같습니다.” 어쩐지 몸이 헝겊 인형처럼 홱 끌려간다 싶더니 마법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어디에서 실수했는지 눈치챈 세영이 피식 웃었다. 가끔 여자의 몸무게가 새끼 고양이 이상은 나가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남자들이 있으니까. “음, 제가 좀 많이 무거웠죠?” 눈에 띄게 당황한 카라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다 큰 남자가 도리도리하는 것을 보니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세영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덕분에 살았어요. 고마워요.” 로프 없이 들어갔거나 적당한 때에 당겨주지 않았다면 다칠 뻔했다. 활짝 웃는 그녀를 보고 입술을 달싹이던 카라드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어디 아픈가?’ 생각하던 세영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그의 귀가 빨갛게 변한 것을 알아챘다. ‘오, 부끄러움 타나. 의외로 귀여운 성격이네.’ 싱긋 웃는 그녀의 옆구리로 불퉁한 표정의 라오 조드가 파고들었다. “누님, 나도! 나도 칭찬해!” “그래. 고맙다.” 세영은 어깨에 비벼대는 그의 머리를 손으로 툭툭 다독였다. 무릎까지 굽혀가며 달라붙어 있던 라오 조드가 불만을 표했다. “아아아, 머리 때리지 말고 진심으로 칭찬해달라고!” “나름대로 진심으로 칭찬한 건데?” “진짜 너무우우붑!” 세영은 새끼 새처럼 짹짹거리는 그의 입에 작은 병을 처박았다. 엉겁결에 입안에 흘러든 액체를 꿀꺽 삼켜버린 라오 조드가 캑캑거렸다. 그가 한 모금을 삼킨 것을 확인하고 병을 갈무리한 세영이 피식 웃었다. “고맙다고.” 동시에 라오 조드의 머리를 반짝이는 은발이 뒤덮었다.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대며 자라난 머리카락은 어깨에 닿는 길이가 되어서야 멈췄다. 놀라 제 머리를 더듬거리던 라오 조드의 얼굴이 환해졌다. “머, 머리가 자랐어! 앗, 그럼 아래도 자랐…?!” 바지 속을 들여다보는 그의 정수리에 카라드의 주먹이 쾅 떨어졌다. 컥 소리와 함께 입을 틀어막은 라오 조드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카라드를 노려봤다. “혀, 혀 때물어댜나! 날 듁일 셈이댜!?” “대체! 숙녀 앞에서 무슨 더러운 짓입니까!” 만만찮게 화가 난 카라드가 소리쳤다. 으르렁거리는 둘을 보고 한숨을 쉰 세영이 환풍구로 다가갔다. 파이어볼을 켜서 안을 비추자 부서진 팬의 잔해가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음, 개판이네.” 뺨을 긁적이던 세영의 눈이 반짝 빛났다. 환풍구 왼쪽의 움푹 들어간 자리에 장식인지, 손잡이인지 모를 것이 붙어 있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는 그녀를 어느새 달려온 카라드가 붙잡았다. 세영은 그가 또 위험하다고 말하기 전에 선수 쳐서 입을 열었다. “옆에 사다리 같은 것이 있는데 저걸 타고 위쪽으로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요?” “오래돼서 부서질지도 모릅니다.” 세영이 가리키는 것을 확인한 카라드가 심각하게 말했다.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그에게 손을 내밀며 소리쳤다. “손!” 반사적으로 손을 척 올린 카라드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세영은 한 손으로 그의 손을 쥐고 다른 손으로 사다리에 매달렸다. “오래돼도 멀쩡한지 확인해보자고요.” “잠깐!” 화들짝 놀란 카라드가 양손으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세영은 그에게 싱긋 웃어주며 두어 칸 정도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생각보다 튼튼한데요. 일단 저걸 타고 위로 올라가 보죠.” 혹시나 해서 아이템 정보도 확인해봤지만, 위험하다든가 떨어질 것 같다는 설명은 없었다. 그녀를 달랑 들다시피 해서 옆에 내려놓은 카라드가 말했다. “너무 무모하십니다.” “음, 그런가? 나름대로 생각해서 움직이는데.” “강하니까 조금 다쳐도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 아닙니까.” 정곡을 찌른 지적에 할 말이 없어진 세영이 입을 다물었다. 난처해하는 그녀를 보고 뭔가를 더 말하려던 카라드가 멈칫했다. 혈색 없는 입술에서 한숨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주제넘은 말을 했군요.”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 그는 라오 조드 쪽으로 가버렸다. 세영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왠지 화나게 해버린 것 같네.’ 주제넘은 말을 했다며 사과했지만, 라오 조드를 때릴 때의 표정과 똑같았다. 세영은 남이 화를 낼 만큼 무모하게 군것에 반성했다. 적만 보면 달려드는 성격이라 얼마나 갈지는 몰라도 당분간은 조심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번엔 약간 위험할 뻔했으니까.’ 잠깐의 의논 끝에 일행은 세영이 발견한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가기로 했다. 선두에 세영이, 중간은 여자를 로프로 등에 고정한 라오 조드가, 마지막에 카라드가 서기로 했다. 내내 빌빌거리던 라오 조드가 여자를 업고 올라가겠다고 하자 카라드는 대놓고 불안해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제가 대신 업는 편이…….” “웃기지 마. 마도놈의 뭘 믿고 포로를 맡기겠냐!” 살랑거리는 머리만큼 한층 재수 없어진 라오 조드가 이죽거렸다. 한숨을 쉰 카라드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걱정 받는 것이 쑥스러워서 이죽대는 것을 눈치챈 세영이 고개를 저었다. 차례를 정한 세 사람은 부지런히 위로 올라갔다. 세영이 허공에 띄운 불덩이가 유일한 길잡이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올라가도 사다리가 끝이 없자 라오 조드가 불평했다. “이거 너무 높지 않아? 대체 언제까지 이어지는 거지?” 세영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올라온 높이로 봐서는 진작 지상에 닿고도 남았어야 했다. 그런데도 사다리는 계속해서 위로 향했다. 카라드가 불안해하는 라오 조드를 달래듯 말했다. “지금은 계속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힘들어도 조금만 참으십시오.” “이게? 내가 언제 힘들다고 했어?” “시끄러우니까 입 말고 다리를 움직여.” 세영의 타박에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라오 조드가 입을 다물었다. 침묵 속에서 5분 정도를 더 오른 뒤에야 사다리가 끝났다. 수직으로 이어지던 환풍구가 갑자기 수평이 되며 거대한 통로로 바뀐 것이다. 불덩이를 움직여 위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세영이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이걸 다 만들었다니. 내 조상님들이 존경스러워지는걸.” 통로 안쪽을 휙 둘러본 라오 조드가 감탄했다. 세영 또한 그것에 동의했다. 카라드까지 무사히 올라온 것을 확인한 그녀는 통로 안쪽으로 들어섰다. 통로는 그리 길지 않았다. 서른 걸음 정도 걷자 빛이 쏟아지며 통로를 막은 덮개가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덮개를 떼어낸 세영은 감탄을 흘렸다. 조르디아의 시가지가 바로 발아래에 있었다. “조심하십시오.” 카라드가 겁 없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녀를 붙잡았다. 세영은 붙잡힌 김에 마음 놓고 멋진 경치를 감상했다. 푸르게 칠해진 집들과 멀리 보이는 사막이 대비되어 신기루와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라오 조드, 네 선대는 분명 이 풍경을 좋아했을 거야.” 세영은 분명 남들 몰래 와서 한참을 구경하다 돌아갔을 거라고 장담했다. 그만큼 멋지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세영보다 더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라오 조드가 말했다. “여기, 설마 사자상 안인가?” “사자상?” “태양궁을 중심으로 12개의 사자상이 있거든. 거기서 보면 이런 풍경일 것 같아서.” 라오 조드는 허공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여기가 어디쯤이고 물의 궁에서 얼마나 떨어진 곳인지 설명했다. 머릿속에 지도가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세영의 감탄 어린 시선을 받은 그는 가슴을 쭉 내밀며 잘난 척했다. “난 군주니까. 내 도시에서 내가 모르는 곳은 없다고.” “샤이렌드라가 있는 건 몰랐잖아.” “윽, 그건…….” 움찔한 라오 조드가 “뭐, 나 같은 놈에게 알려줄 비밀은 아니었겠지.” 하고 시무룩해 했다. 괜히 상처를 건드리는 꼴이 된 세영이 뺨을 긁적였다. 생각해보면 적들도 알고 있었던 비밀을 군주인 그가 몰랐던 셈이었다. ‘응? 그런데 여우 새끼의 조카들도 여기를 공개하지 않았잖아?’ 불리한 상황을 단숨에 역전시킬 수 있는데, 왜 굳이 어려운 길로 돌아가려 한 걸까. 마도와 손을 잡는 것보단 샤이렌드라의 존재를 밝히는 게 백번 나을 텐데. ‘설마 그놈들도 모르고 있는 건가?’ 누구도 여기가 샤이렌드라인지 몰랐다면 가능하다. 선대 라오 조드 중에 비밀을 전하지 못하고 죽은 자가 있다면 이곳은 다시 잊혀진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저 오래된 폐허일 뿐이니까 적들의 아지트 따위로 사용됐을 테고. ‘말해줘야 하나.’ 세영은 잠시 고민하다 그만두었다. 근거 없는 추측인 데다 붙잡은 여자를 털면 자연히 알게 될 일이었다. 그 사이 기운을 회복한 라오 조드는 “이제 알았으니 내 도시에서 내가 모르는 비밀은 없어!” 하고 큰소리를 쳤다. 의기양양해 하던 그는 곧 심각한 얼굴로 변했다.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내려가지?” “확실히 그냥은 못 내려가겠네.” 덮개를 적당히 우그러뜨려 통로 안쪽으로 집어 던진 세영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비행펫이 있다면 간단하지만, 소환할 수가 없으니 무용지물이었다. 다시 내려가는 건 싫다고 투덜거리던 라오 조드가 카라드에게 물었다. “마도놈, 너 마법 쓸 수 있잖아. 그럼 역중력인지 뭔지로 안전하게 착지하는 건 안 되나?” “…가능은 합니다만,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추락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바보냐! 당연히 안 괜찮지!” 옆에서 꽥꽥거리는 소리를 듣던 세영이 “안전한 착지라면 가능한데.” 하고 끼어들었다. 툭닥거리던 두 사람이 동시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뺨을 긁적인 세영이 말을 이었다. “마법보다 훨씬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이지만, 문제가 하나 있어.” “무슨 문제?” “좀 많이 쪽팔려.” 라오 조드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의 카라드를 보니 ‘쪽이 팔린다’라는 말을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라오 조드가 이내 결심했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은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야. 조금의 쪽팔림 정도는 감수할 수 있어. 나체로 거리를 뛰어다니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양심의 가책에 눈을 피한 세영이 물었다. “전신쫄쫄이와 하우두유두 중에 뭐가 좋아?” ──────────────────────────────────── 잃어버린 도시 (6) 운명의 선택이 이루어졌다. 착잡한 기분으로 옷을 건네준 세영은 자신도 옷을 갈아입었다. <한여름 밤의 드레스>, <요정 여왕의 날개>, <푸른 요정의 구두>, <여름꽃 화관>으로 이루어진 티타니아 풀세트였다. 순식간에 옷을 장착한 그녀와 달리 남자들 쪽은 한참을 꾸물거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화를 냈을지도 모르지만, 이번만큼은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누님, 이거 뭔가 좀 이상한데?” 양팔로 가슴을 가린 라오 조드가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그가 선택한 것은 요정 파크의 의상이었다. 재킷 형태의 상의와 통바지, 뾰족한 신발과 긴 모자로 이루어진 세트였다. “…왜 가슴이 안 가려지지?” 문제가 있다면 재킷의 길이가 무척 짧았다. 너무 짧아서 어깨나 간신히 가려질 정도였다. 그 아래 가죽 멜빵까지 달려서 게이셋이라는 불명예를 안은 의상이었다. 자연히 선호도도 바닥을 쳤다.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업적 달성에 꼭 필요한 옷인데도, 주변의 누구도 갖고 있지 않을 정도였다. 혼자서는 달성할 수 없는 업적이라 결국 남자 옷까지 전부 사서 강제로 입히는 것으로 해결했다. 사실 누가 강제로 입히지 않으면 감히 입고 다니기 힘든 옷이긴 했다. “안 가려져도 괜찮아. 원래 그런 옷이니까.” 추궁을 피해 돌아선 세영은 “카라드, 아직 멀었어요?” 하고 괜히 바쁜 척했다. 잠시 후 파리하게 질린 카라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 꼴도 잊은 라오 조드가 “푸핫! 저게 뭐야!” 하고 손가락질을 했다. 요정왕 오베론 세트는 온몸에 찰싹 달라붙어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는 옷이었다. 허리에 두른 천 쪼가리로 풍기문란은 피했지만, 변태셋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는 없었다. 카라드가 입으니 늘씬한 팔다리는 물론이고 어깨와 가슴 근육 하나까지 다 보였다. ‘오, 가슴 근육이 아주 예쁘네.’ 세영은 여기가 게임의 광장이었다면 지나가던 여자들이 박수를 쳐줬을 거라 생각했다. 그만큼 군살 없이 잘 빠진 몸이었다. 의연히 버티던 카라드도 자꾸만 깐죽거리는 라오 조드 때문에 견디기 힘들어진 듯했다. “…뭔가로 몸을 가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미안해요. 그게 끝이 아니거든요.” 푸른색의 화관을 꺼낸 세영이 사과했다. 한 대 맞은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던 카라드가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세영은 그의 머리에 화관을 씌우고 형광으로 빛나는 거대한 나비 날개를 달아주었다. “푸, 풉! 거, 거대나방!” 팔랑팔랑 흔들리는 날개를 본 라오 조드가 폭소를 터트렸다. 괴로워하는 카라드를 보고 한숨을 내쉰 세영이 잠자리 날개를 꺼내 들었다. “네 것도 있거든?” “어, 어째서?! 난 끝난 거 아니었어?”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라오 조드는 몹시 억울해 보였다. 날개까지 한꺼번에 달면 도망칠 것 같았다는 말을 삼킨 세영이 손을 까딱거렸다. 결국, 잠자리 날개를 달고 훌쩍이는 그의 어깨를 카라드가 말없이 다독여주었다. “우는소리 하지 말고. 정 부끄러우면 짐을 사용해서 적당히 가리든가.” 세영이 바닥에 널브러진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뒷목을 너무 세게 쳤는지 기절한 여자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울먹임을 멈춘 라오 조드가 얼른 그녀를 안아 들었다. 조금 부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던 카라드가 세영을 간절히 바라봤다. “위에 걸치는 건 안돼요. 효과 때문에 입은 건데 옷을 가리면 소용없어져요.” 단호한 거절에 카라드의 어깨가 축 처졌다. 가슴 덮개처럼 여자를 고정한 라오 조드가 한결 나아진 얼굴로 날개를 파닥였다. “그럼 이제 이걸로 날면 되는 거야?” “아니, 날 수는 없어. 날개는 그냥 관상용이랄까. 하지만 셋이 모이면 추락할 때 속도를 좀 줄여주는 효과가 있거든.” 세영은 그의 반짝이는 눈빛을 외면하며 답했다. 그녀는 더 설명하지 않고 양손을 내밀었다. “추락?” 하고 의아해하던 라오 조드가 얼른 손을 잡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카라드도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세영은 두 사람에게도 서로의 손을 잡으라고 말했다. 세 사람의 손이 연결되자 세트 착용 효과가 나타났다. 세영은 그들의 몸이 흐릿하게 빛나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얼른 손을 놓았다. “뛰어내릴 때 지금처럼 손을 잡는 거예요. 팔의 위치로 방향을 잡을 수 있으니까, 되도록 펴고 있는 게 좋아요. 지금 더 말해봤자 무슨 소리인지 모를 테니까 일단 가죠.” 세영은 그들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 전에 통로 끝으로 내몰았다. 손에 든 옷과 무기까지 뺏어서 인벤에 집어넣고, 도망칠 곳도 사전에 차단했다. 얼떨떨해하던 남자들은 결국 손에 손을 잡고 삼천궁녀처럼 뛰어내렸다. 몸이 허공에 뜬 순간 세영은 얼른 손을 내밀어 카라드의 손목을 낚아챘다. 손이 연결되자 세트 효과가 발휘되면서 그들의 몸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여름 숲의 의상이 모두 모이면 나타나는 <페어리링>이었다. BGM <한여름 밤의 꿈>이 흘러나오면서 몸이 위로 붕 떠올랐다. 둥실둥실 떠다니며 천천히 회전하는 세 사람을 중심으로 화려한 꽃잎이 휘날렸다. 빛의 원이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효과는 덤이었다. 라오 조드가 비명을 질렀다. “누, 누님! 이게 뭐야!” “…좀 많이 쪽팔린다고 했잖아.” “좀이 아니잖아! 이건 사회적 자살 수준이라고!” 처절한 외침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위에서 팔랑팔랑 떨어지는 꽃잎에 고개를 든 사람들이 무어라 웅성거리는 것이 보였다. 새파랗게 질린 라오 조드가 급박하게 외쳤다. “안돼안돼안돼!!! 여기 착륙하면 난 끝장이야!” 애절한 외침에 빨리 착지해서 옷을 갈아입는 게 더 나을 거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세영은 바람의 방향을 확인한 후에 팔의 위치를 바꿨다. “궁 쪽으로 이동하자. 팔을 오른쪽으로 기울여봐.”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그들의 몸을 좀 더 높게 밀어 올렸다. 황금빛 사자상을 지나치자 순식간에 궁을 둘러싼 벽이 가까워졌다. 세영은 충돌하지 않게 방향 조절에 더욱 신경 썼다. 벽 위를 순찰하던 병사들이 그들을 발견하고 우왕좌왕하는 것이 보였다. 라오 조드가 절망적인 얼굴로 말했다. “방금 북문 경비 대장이 날 본 것 같아. 눈 마주쳤어…….” “나중에 해명하면 되니까 지금은 집중해. 바람을 잘못타면 추락한다고.” “…해명이 될까?” 세영은 씁쓸한 중얼거림에 굳이 답하지 않았다. 원래 노력은 사람이 하고 결과는 하늘에 맡기는 거였다. 한동안 말이 없던 라오 조드가 뭔가를 발견했는지 소리쳤다. “저기 본궁! 황금색 지붕 보여? 본궁으로 가줘!” “착륙하기엔 지금 높이가 너무 높습니다.” 지금껏 기절한 것처럼 말이 없던 카라드가 반대했다. 안전제일주의인 그다운 말이었다. 거의 필사적인 얼굴이 된 라오 조드가 외쳤다. “연못! 본궁 앞에 큰 연못이 있어! 거기에 뛰어내리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제발 된다고 해주라!” “일단 시도는 해보자. 카라드, 팔을 왼쪽으로 기울여주세요.” 세영은 본궁으로 향하도록 방향을 조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법 커다란 연못이 눈에 들어왔다. 라오 조드의 간절한 마음이 통한 것인지 연못 중앙에 이르자 뛰어내리기 적당한 높이가 되어있었다. 세영은 재빨리 소리쳤다. “셋에 손을 놓는 거예요. 하나, 둘, 셋!” 다음 순간 첨벙 하고 거대한 물보라가 일었다. 세영은 모두가 무사히 뛰어내린 것을 확인하고 연못가로 헤엄쳤다.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연못 밖으로 기어나간 라오 조드가 짐을 벗어 던지듯 여자를 떼어냈다. 제자리에 털퍽 드러누워 하늘을 보던 그가 갑자기 큭큭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푸하하 하고 웃으며 배를 잡고 굴렀다. “아, 진짜 미치겠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겨.” 세영은 갑자기 폭소하는 그를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봤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머리가 어떻게 되었나 싶었다. 그의 옆에 말없이 주저앉은 카라드가 세운 무릎에 머리를 박았다. 젖은 머리카락에 개구리밥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것을 보자 왠지 모를 죄책감이 느껴졌다. “일단 씻고 옷을 갈아입을까요?” 세영은 연못 냄새가 풀풀 나는 드레스 자락을 탈탈 털며 물었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린 세영은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남자가 검을 쥐고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카벨 루스타나아악!” 살기를 흩뿌리는 남자를 보자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세영은 곧바로 한걸음 움직여 남자의 발목을 걷어찼다. “악!” 하고 비명을 지른 남자가 앞으로 철푸덕 넘어졌다. 크게 튀어 오른 진흙이 카라드와 라오 조드를 덮쳤다. 얼굴을 감싸 쥔 라오 조드가 비명을 질렀다. “으악, 내 눈! 눈이 안 보여!” 당황한 얼굴로 남자를 쳐다보던 카라드가 팔짝팔짝 뛰는 라오 조드를 붙잡았다. 세영은 남자가 쥐고 있는 검을 걷어차 날려버린 후 그를 퍽퍽 차서 연못 속으로 밀어 넣었다. “안 그래도 짜증 나 죽겠구만 왜 시비야, 새꺄!” 세영은 살려고 발버둥 치는 남자의 가슴을 빨래 밟듯 퍽퍽 밟았다. 때아닌 물고문을 당하게 된 남자가 필사적으로 그녀의 다리를 붙잡았다. “푸학! 컥! 살려……!” “살고 싶냐? 무기도 없는 사람에게 칼 들고 달려든 새끼가 살고 싶어? 어?” “우억! 꾸룹! 푸엇!” 금붕어처럼 파닥거리던 남자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세영은 그를 다시 툭툭 걷어차 물 밖으로 끄집어냈다. 웩웩거리며 연못 냄새가 나는 물을 토하던 남자는 제가 토해낸 것에 머리를 박고 기절해버렸다. “어, 성기사 단장이네.” 뒤늦게 세영의 옆으로 다가온 라오 조드가 벌게진 눈을 문지르며 말했다. 세영의 미간에 금이 갔다. “누구라고?” “아아, 빛의 교단에서 사람을 보냈다고 했잖아. 아마 이 사람일걸?” 라오 조드가 썩 자신 없는 얼굴로 말했다. 세영은 난처한 기분으로 뺨을 긁적였다. 잘못하면 지금껏 기다린 일이 수포가 될 것 같았다. “저를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두운 표정의 카라드가 말했다. 안 그래도 창백하던 낯빛이 아예 새파랬다. 위로를 하고 싶었지만,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세영은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착각했을 수도 있죠. 지금 옷이라면 착시 현상이 일어나도 안 이상하니까.” “…….” 왠지 모르게 상처받은 표정을 지은 카라드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제가 모욕당한 것처럼 파르르 떤 라오 조드가 “누님, 그건 너무 심하잖아!” 하고 질책했다. 머쓱해진 세영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 음, 미안해요. 상처를 줄 생각은 아니었어요.” “아닙니다. 제게 사과하실 필요는….” 세영의 사과에 흠칫 놀란 카라드가 고개를 저었다. 도리도리 머리를 흔드는 것이 귀여워 피식 웃자 창백하던 뺨이 붉어졌다. 황급히 눈을 피하는 모습에 괜히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자!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자리를 옮기자고.” 그때 잽싸게 끼어든 라오 조드가 세영을 끌어당겼다. 의아하게 쳐다보자 어깨를 으쓱하며 정원 입구 쪽을 가리킨다. 시선을 돌리자 정원을 지키는 병사들이 온몸으로 입구를 막고 있었다. 그 너머에서 단장을 찾는 외침과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었지? 저 치의 부하들이 이쪽으로 오면 꽤 시끄러워질 거야. 빨리 움직이자.” 바닥에 너부러진 여자를 안아 든 라오 조드가 본궁 쪽으로 걸어갔다. 혀를 찬 세영이 술을 꺼내 단장의 몸에 골고루 뿌렸다. 마지막으로 빈 병을 단장의 손에 꼭 쥐어준 후에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카라드가 물었다. “뭘 하신 겁니까?” “어설픈 위장. 술 냄새 풀풀 풍기는 남자가 나비날개 단 여자에게 두들겨 맞았다고 말하면 누가 믿겠어요?” 아주 잠깐이지만, 혼란을 일으키는 정도면 충분하다. 만족한 얼굴로 손을 턴 세영이 라오 조드의 뒤를 쫓았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던 카라드가 기절한 단장을 돌아보았다. 사죄하듯 살짝 고개를 숙인 그는 세영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 잃어버린 도시 (7) 일행은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에 다시 모이기로 했다. 뜨거운 물 속에 잠겨있을 기분이 아니었던 세영은 클렌징 스킬을 썼다. 결국, 가장 먼저 단장을 마친 그녀는 푹신한 방석 사이에 파묻힌 채로 남자들을 기다렸다. 먼저 돌아온 것은 카라드였다. 아무 장식도 없는 흰옷으로 갈아입었는데, 심플한 느낌으로 잘 어울렸다. 하긴 저 얼굴에 안 어울리는 옷을 찾기가 더 힘들 것 같았다. 급히 오느라 그랬는지 젖어있는 머리를 본 세영이 손짓했다. 순간 멈칫했던 카라드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서 있지 말고 앉죠?” 조금 심술궂게 말한 세영이 옆자리를 툭툭 쳤다.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던 남자는 이내 얌전히 그녀의 옆에 앉았다. 긴 다리를 접어 다소곳이 앉는 모습이 한 마리의 수사슴 같았다. 방석 위로 흘러내린 그의 머리카락을 거머쥔 세영이 물기를 날려버렸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보송보송해진 머리를 놓아준 세영이 말했다. 그녀가 손을 뻗을 때부터 당황하던 카라드는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세영은 거울처럼 새카만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저한테 거짓말한 적 있어요?” “없습니다. 결코.” 차분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였다. 그를 빤히 쳐다보던 세영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뭐, 그럼 됐어요.” 기분이 좀 나아진 그녀는 방석을 다시 쌓아 올려 자세를 바꿨다. 옆에서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일부러 모른 척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화려한 성장을 한 라오 조드가 들어왔다. 찰랑거리는 은발에 갖은 보석장식을 단 것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좀 늦었나?” 싱겁게 웃으며 다가온 라오 조드가 세영의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그는 세영의 옆에 앉은 카라드를 보고 히죽거리더니, “어이, 카벨 루스타나. 너 제라드 루스타나가 신녀를 겁탈해서 낳은 사생아라며. 진짜야?” 대뜸 시비를 걸었다. 부모를 들먹이는 말에도 카라드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잠시 라오 조드를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그자라고 확신하십니까?” “벌써 두 명이나 널 루스타나라고 불렀잖아. 놈이 마도를 비운 것도 확인됐다고. 이쯤이면 우연이라고 우기기 부끄럽지 않아?” 라오 조드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어디 이래도 정체를 숨길 수 있는지 보자는 얼굴이었다. 한숨 같은 소리를 낸 카라드가 대꾸했다. “그럼 저를 체포해 주셨으면 합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시비를 걸던 라오 조드의 얼굴이 굳어졌다. 흠흠 헛기침을 한 그가 말했다. “어, 그게 제일 깔끔하긴 하지. 이왕 하는 김에 목을 쳐서 성벽에 걸어둘까?” “원하신다면.” “아, 경매를 부치는 게 나으려나. 너한테 원한 있는 놈들이 천금을 주고서라도 달려들겠지.” “뜻대로 하십시오.”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다는 투였다. 한숨을 쉰 세영이 뭐라 더 지껄이려는 라오 조드의 무릎을 걷어찼다. 그녀는 얄미울 정도로 침착한 카라드를 돌아보며 물었다. “굳이 빠른 자살을 하려는 이유가 뭐예요?” 뜻밖의 물음이었는지 카라드의 표정이 조금 묘해졌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말했다. “저와 함께 있는 것이 목격된 이상 두 분도 마도의 첩자로 몰릴 수 있습니다. 그전에 저를 처분하고 결백을 밝히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내 결백을 위해 죽으시겠다?” “은혜를 갚지는 못할망정 해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요.” “은혜를 갚을 생각이면 당장 도망칠 궁리나 하든가.” 무슨 오수의 개도 아니고, 목숨을 바쳐서 은혜를 갚겠다니. 그딴 건 사양이었다. 그때 눈치를 보던 라오 조드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아니, 그건 내가 곤란해. 누님. 녀석을 도망치게 놔뒀다간 진짜 마도의 추종자로 몰린다고?” “그래서?” “으음, 죽이는 게 백번 낫겠지만. 정 살리고 싶다면 누님이 저놈을 거두는 건 어때?” “뭐?” 세영의 미간에 금이 갔다. 애완동물도 아니고 거두긴 뭘 거둔단 말인가. 확 짜증을 내려던 그녀는 문득 카라드의 눈과 마주쳤다. 사슴처럼 순한 눈이었다. 까맣게 물기가 도는 것까지 닮아있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낀 세영이 혀를 찼다. 언제부터 저를 보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저런 눈에 대고 싫다는 말을 뱉기는 어려웠다. 라오 조드가 그녀를 부추기듯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감당 못 해. 다른 사람에게 넘기거나 재빨리 목을 쳐서 전시하는 게 최선이야. 하지만 누님은 다르잖아.” “어째 짐을 떠넘기는 느낌이다만.” “에이, 짐이라니! 듣는 마도놈 서운하게.” 짐 취급은 누가 했는데. 어이가 없었던 세영이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의 눈치를 힐끗 본 라오 조드가 보석으로 장식된 머리를 긁적였다. “나도 좀 난처하다고. 군주의 체면이 있지, 목숨을 구해준 놈을 죽여 버릴 수는 없잖아.” “네가 언제부터 그런 체면을 따졌어?” “지금부터?” 히죽 웃은 라오 조드가 손뼉을 쳤다. 대기 중이던 시동이 잽싸게 다가와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커다란 목걸이와 여성용으로 보이는 팔찌였다. 목걸이와 팔찌가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좀 특이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거 어때?” 라오 조드가 목걸이를 들어 올렸다. 두꺼운 금속재질에 끈을 연결하는 고리까지 달려서 꼭 개목걸이 같았다.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세영이 물었다. “그게 뭔데?” “앗, 몰라? 노예에게 채우는 구속구인데 팔찌랑 한 쌍이야. 여길 이렇게 돌려서 꾹 눌러봐.” 라오 조드가 장난감을 자랑하듯 팔찌를 들이밀었다. 팔찌에 박힌 보석을 한 바퀴 돌린 후 누르자 목걸이 안쪽에서 칼날이 철컹 튀어나왔다. “봤지? 이렇게 자르는 기능도 있고, 미관상으로도 꽤 괜찮아서 인기 있는 상품이거든.” 세영은 힐끗 카라드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단정한 자세로 앉아있는 남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안색이 좀 더 창백해진 것 같지만, 항상 그랬으니 구분하기 어려웠다. 미간을 찡그린 세영이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저 사람을 노예로 만들자고?” “응! 역시 누님은 이해가 빠르네.” “…드디어 미쳤구만.” 전부터 영 상태가 안 좋더니만, 게이셋을 입은 충격으로 맛이 간 모양이다. 아니면 옷을 갈아입으러 가서 쥐약이라도 주워 먹었던가. 정색하는 세영을 본 라오 조드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봐. 이거 엄청 좋은 방법이라니까. 노예는 사유재산이잖아. 누님이 ‘이건 내 노예다!’라고 선포해버리면, 빛의 교단이 아니라 교황이 직접 온다고 해도 어쩌지 못한다고?” “…….” “아, 진짜 이거보다 좋은 방법이 어디 있어? 마도놈도 보호하고, 마도와 얽혔다는 질책도 안 받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완벽한 계획이잖아. 게다가 지금 다른 방법 있나, 없잖아?” 얼핏 듣기엔 제법 그럴싸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그녀로서는 절대 생각해낼 수 없는 방법이기도 했다. 세영은 약간의 찝찝함을 느끼며 물었다. “노예로 만드는 게 그렇게 간단해? 아무나 붙잡고 노예라고 하면 바로 노예가 되는 거야?” “아니, 이번엔 적국의 포로라는 특수한 상황이라서 가능한 거랄까. 몸값을 받지 못하는 포로는 가끔 노예로 삼기도 하거든. 절차가 더럽게 복잡해서 그렇지.” 까다로운 절차 때문에 몸값을 못 받는 포로는 그냥 죽이거나 불법으로 팔아넘긴다고 했다. 악당처럼 웃은 라오 조드가 덧붙였다. “하지만 내가 또 이런 쪽으로는 한 유능하잖아. 등록에 필요한 서류는 이미 다 준비해놨단 말씀. 누님은 그냥 받아들일지 말지 선택만 하면 돼.” 아주 철두철미 했다. 마도와 얽혔다는 추궁을 피하려고 잠깐 사이에 제법 용을 쓴 모양이었다. 잠시 인권과 편의 사이에서 고민하던 세영이 이내 포기하고 카라드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생각해요?” 사슴 같은 얼굴을 한 남자가 당황한 듯 고개를 저었다. 세영은 제가 그에게 약한 것이 저 몹쓸 얼굴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저기서 조금만 덜 잘생겼어도 이런 삽질은 안 했을 텐데. “저는 이런 보호를 받을 자격이….” “아, 잠깐만요. 제가 먼저 말할게요.” 세영은 재빨리 카라드의 말을 끊었다. 뭔가 또 속 터지는 말이 나올 것 같아서였다. 저놈의 입술은 보기 좋게 생긴 주제에 열리기만 하면 고구마를 토해냈다. 하도 찌푸려서 주름이 질 것 같은 미간을 문지른 그녀가 입을 열었다. “대충 어떤 기분인지도 알 것 같고, 뭐 때문에 그러는지도 알겠는데요. ‘아, 몰라. 내가 나쁜 놈이라니. 그냥 죽을래.’ 따위의 태도는 피해자에게 전혀 속죄가 되지 않는다는 거 알죠?” “…….” “제가 피해자나 피해자 가족이나 뭐 그런 입장이라면 기분이 엄청 더러울 것 같아서요. 기억도 제대로 못 하는 놈이 순교자 행세하며 죽는 거요.” 뭔가 말을 하려는 것처럼 달싹이던 입술이 이제 조개처럼 꾹 다물려 있었다. 훨씬 보기 좋다고 생각한 세영이 싱긋 웃었다. “말 끊어서 미안해요. 그래서 하려던 말은요?” “…….” 잠시 후 카라드는 얌전히 모가지를 내밀었다. 세영은 그의 목에 목걸이를 채운 후 불편하지 않은지 확인했다. 어딘가 질린 표정으로 그걸 지켜보던 라오 조드가 말했다. “누님. 부추긴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엄청 악랄하다.” “칭찬 고맙다?” 심드렁하게 대꾸한 세영이 자리에 앉았다. 고개를 숙인 카라드가 제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채울 때는 몰랐는데 조금 떨어져서 보니 굉장히 퇴폐적인 분위기였다. 괜히 민망해진 세영이 위로하듯 말했다. “음, 노예라곤 해도 임시니까요. 성기사인지 뭔지가 꺼지고 나면 적당한 곳에 풀어줄게요.” 어딘지 멍해 보이는 카라드가 그녀를 쳐다봤다. 눈에 초점이 없는 것을 보니 넋이 나간 것 같았다. 뻘쭘해 하는 세영에게 라오 조드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누님, 낙인은 안 찍을 거지?” “당연하잖아?” “그런데 말이야, 낙인 안 찍힌 노예는 거의 침실노예거든.” 세영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의 라오 조드가 점잖은 척하며 말했다. “사람들 앞에서 실수하지 않게 말을 맞춰 놔야 할 것 같아서.” 세영은 슬쩍 카라드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수치사라는 것이 있다면 당장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던 세영이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손 안 댈 테니까.” “…알고 있습니다.” 카라드가 꺼져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라오 조드 다시 짝짝 박수를 쳤다. 세영은 그의 손목을 확 분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놈이 박수를 쳤을 때 절대 좋은 게 나온 적이 없었던 탓이다. “두 사람의 새로운 관계를 축하하며 약소한 선물을 준비해봤어.” 이번에 등장한 것은 어린애 머리통 크기의 돌이었다. 고운 비단으로 겹겹이 싸여 있었지만, 거무튀튀한 것이 꼭 타다 남은 석탄처럼 보였다. 세영의 미간이 다시 일그러졌다. ──────────────────────────────────── 잃어버린 도시 (8) “이건 또 뭔데?” “아, 나도 몰랐는데 이게 세라비의 첩이 말한 용의 알인가 봐. 귀한 것 같아서 뺏어오긴 했는데 뭔지 몰라서 그냥 창고에 박아뒀었거든.” “그런데?” “뭐, 내가 갖고 있기엔 무리인 물건 같아서. 누님에게 진상하려고.” 라오 조드는 귀여운 척 눈을 깜빡였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낯짝이 미갈루의 것과 똑 닮아있었다. 세영은 마땅찮은 눈으로 돌을 힐끗 봤다. 아무리 봐도 알보다는 타다 남은 나무토막처럼 보였다. “역시 떠맡기는 거잖아.” “그렇다고 마도왕에게 넘길 수는 없잖아. 그놈이 손에 넣으려는 걸로 봐서 엄청 수상한 물건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누님이 맡아줘.” 라오 조드를 노려보던 세영이 손을 뻗어 알을 잡았다. 잠깐 기다리자 아이템 정보가 떴다. [알 수 없는 화석] 도구속성 -과거 어떤 생물의 알이었던 화석. 기묘한 힘이 잠들어 있는 것 같다. 전문가에게 보여 보자. ‘퀘템인가?’ 제일 먼저 기묘한 힘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이것이 진짜 용의 알이라면 귀한 재료일 가능성이 컸다. 세영은 알을 던지려던 생각을 바꿔 인벤에 집어넣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맡아주지.” “역시 누님, 화끈하다니까.” 개운한 표정의 라오 조드가 히죽히죽 웃었다. 세영은 더 화끈해지도록 그의 머리를 홀랑 태워버릴까 하다가 참았다. 한숨을 쉰 그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해결된 거지?” “어, 잠깐! 아직 이게 남았잖아.” 팔찌를 붕붕 흔든 라오 조드가 히죽 웃었다. 일부러 모른 척 하고 있었던 세영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를 초월한 표정의 카라드가 팔찌를 받아 세영의 손목에 채웠다. 라오 조드가 결혼식장의 주례처럼 외쳤다. “자, 그럼 이제 두 사람이 주종이 되었음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쾅하고 접견실의 문이 열렸다. 악귀 같은 표정의 단장을 선두로 해서 성기사들이 우르르 밀려 들어왔다. 그들은 멀거니 서 있는 카라드를 보고 일제히 짖어대기 시작했다. “카벨 루스타나!” “진짜였군. 이 마도의 개!” “감히 빛의 땅에서 돌아다니다니! 신의 심판을 받아라!” 흥이 깨진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던 라오 조드가 박수를 쳤다. 대기 중이던 병사들이 들어와 성기사들의 등에 무기를 겨누었다. 심상찮은 상황을 눈치 챈 성기사들이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극도로 조용해진 공간에서 라오 조드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접견을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떼거지로 쳐들어온 이유가 뭐지?” 허락도 없이 접견실로 밀고 들어온 것은 외교 문제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무례였다. 숨기던 것을 들켜 쩔쩔맬 줄 알았던 상대가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자 단장의 얼굴에 난처함이 스쳤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서긴 억울했는지 한층 목소리를 높이며 앞으로 나섰다. “콴이여, 성하의 자비를 이런 식으로 저버릴 줄은 몰랐소. 저런 악적을 몰래 숨기고 있다니. 군주로서 부끄럽지도 않단 말이오?” “난 너희가 더 부끄러워. 왜 이렇게 매사에 심각해, 응?” “이잇, 말 돌리지 마시오! 조르디아는 카벨 루스타나를 지금껏 숨기고 있던 것을 명백히 해명해야 할 것이오!” “저놈이 멋대로 여기 와 있었던 건데 무슨 해명을 하란 말이야?” 세영은 옥신각신하는 그들을 쳐다보다 뺨을 긁적였다. 저런 멍청이들이라면 내버려둬도 여우 새끼가 알아서 할 것 같았다. 이만 가자는 뜻으로 카라드의 팔을 잡아당기자 조금 멈칫하다니 이내 순순히 끌려왔다. 그것이 단장의 시선을 끈 것 같았다. “멈춰라!” 대뜸 검을 뽑아든 단장이 세영을 겨누었다. 세영은 황당한 기분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처맞고도 검을 들이대다니 생존본능이 없는 놈인 듯했다. “넌 누구냐! 너도 저 악적처럼 마도의 주구냐?” 꿈틀해서 앞으로 나서려는 카라드를 멈춰 세운 세영이 씨익 웃었다. “너는 정말 싸가지가 없구나.”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단장이 멍해졌다. 목을 좌우로 돌려 두둑거리는 소리를 낸 세영이 상냥하게 덧붙였다. “네 발로 기어 다니면서 멍멍 짖게 만들기 전에 당장 꺼져.” “음,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라오 조드가 단장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말했다.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을 쳐낸 단장이 세영을 위협했다. “당장 악적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여인이라도 벨 수밖에 없다!” “지랄은.” 세영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검을 들고 달려들었을 때 곱게 돌려보낸 것만으로도 나름의 호의를 베푼 것이었다.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달려든다면 알 때까지 패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주먹을 쥐는 순간 절묘하게 끼어든 라오 조드가 양팔을 펼쳤다. “잠깐만, 누님!” “비켜.” 세영이 고개를 까딱했다. 양팔을 크게 퍼덕거린 라오 조드가 외쳤다. “아, 안 돼. 여기서 단장을 패 죽이거나 패 죽이거나 패 죽이면 내가 정말 곤란하다고!” “…사실 패 죽이길 원하는 거 아냐?” “그건 중요하지 않아! 어쨌든 싸울 필요 없잖아. 대화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패죽여도 되지만 내 앞에선 곤란하다고 우기는 라오 조드였다. 한숨을 쉰 세영이 팔짱을 끼면서 단장을 노려봤다. “일단 들어보기나 하자. 대체 뭐 때문에 내 노예한테 자꾸 집적거리는지.” “…노예?” 뜻밖의 말에 주춤한 단장이 되물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올 개목걸이가 그에겐 아예 보이지 않았던 듯했다. 세영은 팔찌를 찬 손을 보란 듯이 들어 올렸다. “이거 안 보여? 아니면 뭔지 몰라?” 단장의 시선이 팔찌에 달린 끈을 타고 카라드의 목걸이에 닿았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뒤늦게 알아차린 그가 소리쳤다. “말도,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기는. 조르디아의 군주인 내가 보증하는 합법적인 거래다. 절차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 배부른 고양이처럼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라오 조드가 말했다. 숙적을 앞에 두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단장이 노성을 질렀다. “수치도 모르는 비겁한 놈! 이런 식으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카라드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덤덤한 얼굴로 서 있었다. 코앞에서 내지르는 고함에 귀를 후벼 판 세영이 투덜거렸다. “거, 남의 노예한테 소리 지르는 거 좀 그만할 수 없나? 내 거에 남의 침 튀는 거 별로거든?” 그녀는 보란 듯이 카라드의 옷을 툭툭 털었다. 움찔하며 고개를 숙인 카라드가 귀 끝을 붉혔다. 그것을 보고 속이 뒤집힌 얼굴을 한 단장이 세영에게 외쳤다. “놈을 내게 파시오. 저것을 살 때 낸 금액의 두 배를 주겠소!” 세영의 입술이 순간 비뚜름해졌다. 단장이 알아채기 전에 표정을 바로 잡은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호오, 두 배나 주시겠다. 성기사가 무슨 돈이 있어서?” “교단이 놈에게 가진 원한은 결코 작지 않소. 얼마가 됐든 기꺼이 돈을 낼 거요.” 단장의 얼굴은 비장했다. 그에게 눈앞의 남자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척살해야 할 상대였다. 억울하게 살다간 동료들을 위해서 아니,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 반드시 없애야 했다. 심드렁한 얼굴로 그를 쳐다본 세영이 고개를 까딱했다. “뭐, 좋아. 그런데 돈이 아니라 현물거래였거든. 물건을 두 배로 줄 순 없을 거 아니야.” “현물 값어치의 두 배만큼 대가를 치르겠소.” 피식 웃으며 입꼬리를 올린 세영이 말했다. “태양의 탑.” “…무슨?” “나는 라오 조드에게 태양의 탑을 넘겨주고 이 노예를 샀어. 교단에서 그 두 배의 가치가 있는 것을 준다면 기꺼이 넘겨주지.” 라오 조드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세영은 좋아서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진 그를 슥 째려보았다. 즉시 표정을 가다듬은 라오 조드가 호들갑을 떨었다. “아, 내가 괜히 교단 대신 이분께 노예를 넘기기로 한 게 아니라고. 태양의 탑! 이라고. 퇴애양의 톼압을 준다는데 누가 감히 그걸 거부할 수 있겠어? 안 그래? 태양의 탑인데!” 좋아서 날뛰는 그의 옆에서 단장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세영을 보며 물었다. “설마 당신이 정복자요?” 세영은 싱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단장은 충격과 배신감이 얼룩진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당신 같은 분이 저런 놈을 감싸는 겁니까?” “잘생겼잖아.” 세영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딱 부러진 대답에 단장의 표정이 멍해졌다. 세영은 그 위에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몸 좋고 잘생겼으면 됐지. 노예한테 뭘 더 바랄까.” 넋이 나간 단장의 옆에서 라오 조드가 경박하게 낄낄거렸다. 면전에서 몸 좋고 잘생겼다는 말을 들은 카라드의 표정도 기묘했다. 세영은 모른 척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주춤거리던 성기사들이 물러서서 두 사람이 지나갈 길을 만들었다. 배웅하듯 쭐래쭐래 따라 나온 라오 조드가 카라드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마도놈, 세상에서 제일 비싼 노예가 된 걸 축하한다. 아마 전설 속의 왕비보다 네 몸값이 더 높을 거야.” “…….” 카라드의 어깨가 뻣뻣이 굳어졌다. 한숨을 쉰 세영이 “자꾸 까불면 반품해 버린다.” 하고 말했다. 헛! 하고 눈을 부릅뜬 라오 조드가 고개를 휘저었다. “아니, 어떻게 그런 잔인한 말을. 마도놈이 불쌍하지도 않아?” “그만하십시오.” 카라드가 놈의 옆구리에 주먹을 꽂았다. 까불다가 정통으로 얻어맞은 라오 조드는 새우처럼 몸을 구부린 채 쿨럭거렸다. 그거 참 쌤통이라고 생각한 세영이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당겨지는 끈에 이끌리듯 카라드가 그녀의 뒤를 쫓았다. 라오 조드는 마지막 엿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 가마와 꽃을 뿌리는 시동들, 축하곡을 연주하는 악단을 준비해 두었다. 세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라오 조드를 두들겨 팼다. 이번만큼은 아무도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라오 조드에게서 갈취한 백마를 타고 물의 궁으로 돌아왔다. 궁 안에서 말을 타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기에 모두가 놀란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얼굴이 따끔거릴 정도였지만, 번쩍번쩍 빛나는 가마를 타고 행진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다들 괜찮겠지?’ 세영은 서둘러 말을 몰았다. 파티를 탈퇴한 탓에 동료들의 상태를 볼 수가 없어 불안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꼭 동료들을 내버린 것처럼 느껴져 마음이 무거웠다. 뒤에서 카라드가 무어라 말을 하는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쉴 새 없이 달려 도착한 물의 궁은 쥐 죽은 것처럼 고요했다.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진정 신의 돌보심입니다!” 말발굽 소리에 달려 나온 시종장이 감격한 얼굴로 소리쳤다. 뒤따라온 시녀들도 일제히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하지만 세영이 찾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뭐야?” 심상찮은 공기를 느낀 세영이 중얼거렸다. 적의 공격이 있었으니 발랄한 분위기라면 어색했겠지만, 이렇게까지 가라앉은 것도 좀 이상했다. “내 동료들은 어디 갔지?” 싸늘한 물음에 시종장의 얼굴이 탈색되었다. 급히 무릎을 꿇은 그가 고하는 말을 들은 세영은 더없이 무표정하게 변했다. ──────────────────────────────────── 잃어버린 도시 (9) 기억 속의 엄마는 항상 창밖을 보고 있었다. 어린 마리엔은 그녀의 시선을 끌기 위해 노력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엄마의 시선이 창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빠가 집에 돌아왔을 때뿐이었다. 그럼 엄마는 나무에서 사람으로 변한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였다. “엄마가 많이 아파서 그래. 마리엔이 엄마를 잘 돌봐주렴.” 아빠는 늘 마리엔이 참아야 한다고 했다. 엄마가 왜 자신을 보지 않는지 궁금했지만,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얌전히 고개를 끄떡이고 “착하구나.” 하고 칭찬을 들을 뿐이었다. 변화가 생긴 것은 디안이 잠깐 집에 맡겨진 뒤였다. 신기하게도 디안이 집에 있으면 엄마는 아빠가 있을 때처럼 움직였다. 아주 가끔은 소리 없이 웃기도 했다. 단지 그것뿐이었지만, 사실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마리엔은 아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빠가 기뻐할 것을 알면서도 입을 꾹 다물었다. 엄마를 웃게 한 것이 그녀가 아닌 디안이었기 때문에, 아빠가 자신을 쓸모없다고 생각할까 봐 무서웠다. “마리엔은 좋겠다. 엄마가 있어서.” 디안이 부러워할 때마다 마리엔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좋다고 말하면 거짓말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겨울이 되자 디안의 아버지가 오셨고 디안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다시 창밖만 바라보았다. 그날은 눈이 오는 날이었다. 눈 섞인 바람이 창문으로 들이쳤다. 눈바람을 맞는 엄마가 걱정된 마리엔은 낑낑거리며 창문을 닫았다. “변하지 않는구나.” 작은 속삭임이었다. 화들짝 놀라 돌아본 마리엔은 엄마의 눈과 마주쳤다. 그늘진 숲 같은 눈이었다. 엄마가 이렇게 자신을 바라보는 건 처음이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디안에게 그랬던 것처럼 상냥한 목소리가 말했다. “이대로는 돌아갈 수가 없어. 그렇지?” 마리엔은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떡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러자 엄마는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날은 눈이 많이 오는 날이었다. 눈 때문인지 아빠는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마리엔. 엄마랑 같이 가자.”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마리엔의 목을 움켜쥐었다. 차갑고 메마른 손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마리엔은 숨이 막히기 시작하자 발버둥을 쳤다. 나뭇가지처럼 마른 엄마는 어린 그녀의 몸부림에도 휘청거렸다. 하지만 목을 휘감은 손은 거미처럼 끈질겼다. 엄마의 손을 뿌리치는 것이 마리엔이 한 최초의 저항이었다. 그녀는 살기 위해 엄마의 손을 할퀴고 때렸다. 버둥거리는 와중에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디안이 보였다. 도와달라고 말한 것 같았지만, 확실하진 않았다. 깜빡 정신이 들었을 때는 아빠가 있었다. 그는 열이 펄펄 끓는 마리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무엇이 미안한지는 말하지 않았다. 다음날, 잠든 디안의 옆에서 눈을 떴을 때는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불에 타서 새카맣게 변한 집은 원래의 형태를 잃고 무너져 있었다. 퍼붓는 눈조차도 치솟는 불길을 막지 못했다. 모두가 사고라고 말했지만 마리엔은 자신이 버려졌다는 것을 알았다. 이상하게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그렇구나 하는 수긍이 있을 뿐이었다.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자신은 필요가 없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혼자가 되고 싶었다. 혼자라도 괜찮아지기를 바랐다. 마리엔이 마법을 배운 것은 그런 이기적인 이유였다. -마리엔. 엄마랑 같이 가자. 모래의 탑에서 마리엔은 그날의 꿈을 꾸었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꿈이었다. 엄마는 그녀의 목을 졸랐고, 어린 디안이 아니라 지금의 디안이 그것을 지켜봤다. 괴로움 속에서 마리엔은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디안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제 괜찮아요. 내뻗은 그녀의 손을 잡아준 것은 세영이었다. 세영이 나타나자 엄마도, 디안도 사라졌다. 그녀를 괴롭히는 것들이 자취를 감췄다. 안도하는 순간 손을 놓은 세영이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당황한 마리엔은 세영을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세영님, 가지 마세요! 마리엔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엉엉 우는 그녀를 세영이 돌아봤다. 난처한 듯 미소 지은 세영이 말했다. -하지만 전 마리엔이 필요 없는걸요. 헉 소리와 함께 눈을 뜬 마리엔은 화려한 천장을 보고 안도했다. 이번에도 꿈이었다. 근처에서 얼쩡거리던 시디발라가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괜찮아?” “괜찮아. 미안해.” 마리엔이 애써 웃는 표정을 만들었다. 부루퉁한 얼굴로 그녀를 보던 시디발라가 디안과 리먼을 불렀다. 지금 디안을 보고 싶지 않았던 마리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마리엔?” 탑 앞에서 눈을 떴을 때 마리엔은 아빠를 보았다. 아니, 아빠를 닮은 디안을 보았다. 그녀는 디안에게서 아빠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해한다고 믿었던 부모님을 계속 미워하고 있었다는 것도. 그녀는 버려진 아이에서 조금도 자라지 못했다. “열이 굉장히 많이 났어. 어지럽진 않아?”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오는 디안은 아빠를 닮았다. 아니, 닮지 않았지만, 그와 비슷했다. 당장에라도 미안하다고 말하며 떠나버릴 사람 같았다. 그래서 그를 좋아했다. 디안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사랑받고 싶었다. “난 괜찮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마리엔은 고개를 저어 다가오는 손을 거부했다. 시무룩해지는 디안을 보자 미안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런 마음으로 디안에게 닿는 게 더 미안한 일이니까. “…세영님은요?” 잠시 머뭇거리던 마리엔이 물었다. 서로를 마주 본 동료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열심히 수색하고 있으니,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맞아. 이렇게 찾아도 없는 걸 보면 분명 무사한 거야. 불쑥 나타나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지 왜 찾아다녔냐고 할걸!” 여전히 행방불명이란 소리였다. 괴물을 쫓아 물속으로 뛰어든 세영은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사람들이 물속을 수색했지만, 작은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마리엔은 속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마법을 잘못 써서 세영님이…….” “네 잘못 아니야. 마리엔.” “아냐. 내가 욕심만 부리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후회가 눈물이 되어 방울방울 떨어졌다. 세영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자신도 도움이 된다고 보여주고 싶어서 익숙하지도 않은 마법을 썼다. 그러지 않았다면 라오 조드가 납치되는 일도, 그를 구하려다 세영이 실종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욕심 부려서 벌 받은 거야.’ 젖은 얼굴을 세차게 문질러 닦은 마리엔이 동료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자신 때문에 함께 갇히게 된 동료들에게도 면목이 없었다. “정말 죄송해요.” “마리엔, 지나치게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 갇힌 건 다른 이유가 더 크니까요.” 쓴웃음을 지은 리먼이 그녀를 달랬다. 마리엔의 마법을 맞고 광폭해진 크라켄 때문에 많은 노예와 병사들이 다쳤다. 다행히 가벼운 부상이었지만, 일행을 처벌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마수를 풀어주려고 했으니 마도의 첩자가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계속되는 항의에 파티마는 일행을 내궁의 감옥에 가두었다. 잘못을 저지른 후궁들을 감금하는 곳으로, 사실상 이름만 감옥인 곳이었다. 파티마는 그들을 가둘 수밖에 없는 사정을 설명하며 덧붙였다. -무냐크를 찾을 때까지만 여기 있어.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곳이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도 물의 궁보다 안전할 거야. 안전을 약속하는 파티마의 얼굴은 비장했다. ‘어떤 일’을 각오한 듯한 얼굴에 마리엔은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 약하기 짝이 없는 몸뚱이는 과도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열을 내며 앓기 시작했다. 그것까지 자신의 쓸모없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괴로웠다. “그런데 우리 계속 여기 있어도 되는 거야? 도망쳐야 하는 거 아냐?” 시디발라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부터 공기가 술렁술렁한 것이 당장 뭔가가 터질 분위기였다. 파티마는 안전하다고 말했지만, 이대로 갇혀있기에는 영 불안했다. “세영님이 돌아오시면 우릴 찾으실 텐데, 만약 도망쳤다가 엇갈리면?” 디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리먼 역시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멍하게 있던 마리엔은 낯선 기척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여럿이 아닌 한 사람의 발소리였다. “앗, 누가 온다!” 커다란 귀를 팔랑거린 시디발라가 외쳤다. 두 사람이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자 다른 동료들까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구지?” 디안의 중얼거림에 답하듯 달칵거리는 소리와 잠긴 문이 열렸다. 열린 문으로 뜻밖의 사람이 나타났다. “모두 무사하십니까?” 긴 검은 머리와 귀족적인 우아한 얼굴, 세영이 카라드라고 부르는 남자였다. 생각할 것도 없이 앞으로 뛰어나간 마리엔이 카라드의 팔을 붙잡았다. 세영과 함께 사라졌던 이 남자라면 자신의 물음에 답해줄 것 같았다. “세영님은…, 세영님은 무사하세요?” 조금 놀란 표정으로 마리엔을 보던 카라드가 작게 미소했다. “예,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가보십시오.” “고, 고맙습니다.” 울먹이며 감사를 표한 마리엔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어서 카라드의 옆으로 달려온 시디발라가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 “어떻게 된 거야?” “설명해드리고 싶지만,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야합니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엥?” 시디발라를 달랑 들어 올린 카라드가 밖으로 향했다. 서두르라는 뜻을 알아들은 동료들도 재빨리 그의 뒤를 따랐다. 감옥 밖은 개미 한 마리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무거운 공기를 느낀 디안이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흠칫했다. “저게 대체 뭐지?” 거대한 물거울 같은 것이 하늘에 떠 있었다. 끊임없이 일렁거리는 수면은 태양궁의 모습을 그대로 비춰냈다. 현기증이 날 것 같은 풍경이었다. 잠시 넋을 잃었던 디안은 거꾸로 뒤집힌 궁의 지붕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 저거 지금 이쪽으로 떨어지는 거야?” 시디발라의 물음에 쓴웃음을 지은 카라드가 말했다. “예, 그래서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한 겁니다.” “이, 이럴 게 아니라 어서 가서 말려야…!” 디안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누구를 말려야 하는지는 분명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건 십중팔구 세영이 일으키는 것이었다. 고개를 저은 카라드가 말했다. “일단 여기서 벗어난 후에 생각하는 게 좋겠습니다.” 입구에서 우왕좌왕하는 남자들과 달리 마리엔은 망설임 없이 달렸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몰랐지만 상관없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바로 저기에 세영이 있다고 속삭이는 듯했다. 어느 순간 환하고 따뜻한 것으로 가득 찬 공기가 느껴졌다. 세영이 있는 곳은 언제나 그랬다. 제자리에 멈춰선 마리엔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리엔!” 고개를 들자 장식용 기둥 위에 서 있는 세영이 보였다. 싱긋 웃는 얼굴이 너무 눈부셔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기둥에서 가볍게 뛰어내린 세영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어디 다친 곳은 없어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는 세영을 보자 기어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울고 싶지 않은데 유독 세영의 앞에만 서면 눈물샘이 고장 났다. “죄, 죄송해요. 제가… 제가 실수해서 세영님이 위, 위험해 지셨….” 목이 메여 목소리가 더는 나오질 않았다. 끅끅거리는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던 세영이 손을 뻗었다. 흠칫해서 고개를 들자 세영이 전에 없이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마리엔, 저랑 약속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마리엔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기.” “…네?” “약속하는 거죠?” 박력에 밀린 마리엔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세영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와도 그에 따를 생각이었다. 지금 당장 불 속에 뛰어들라는 말을 들어도 기꺼이 고개를 끄떡였을 것이다. “그럼 이제 울지 말고, 웃는 얼굴을 보여줘요. 예쁜 얼굴이 엉망이 됐네.” 하지만 뺨을 닦아주는 손길은 한없이 다정하기만 했다. 자신은 이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는 것 같아서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울먹거리던 마리엔은 결국 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왜 화를 안 내세요?” “음, 마리엔한테 화난 게 아니라서?” 왜 화내지 않냐고 물었으면서 막상 세영이 화가 났다고 생각하니 무서웠다. 겁먹은 마리엔을 보고 피식 웃은 세영이 덧붙였다. “마리엔을 보니까 갑자기 화가 풀리려고 해서 큰일이네요. 굉장히 화났다고 시위해야 하는 상황이거든요. 깽판 좀 쳐달라는 부탁도 받았고.” “네?” 깽판을 좀 쳐달라니, 누가 그런 부탁을 했는지 궁금했다. 대답 없이 웃은 세영이 두어 걸음 물러섰다.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올려다본 그녀가 물었다. “마리엔, 혹시 수계 최상위 마법을 본 적 있어요?” 마리엔은 자꾸만 위로 올라가는 시선을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잠시라도 눈을 뗐다간 세영이 사라져버릴까 봐 무서웠다. 세영이 그녀의 머리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봐요. 제가 물법사들의 로망을 보여줄게요.” 주저하던 마리엔이 세영이 가리키는 쪽을 향해 돌아섰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하늘에 거대한 호수가 떠 있었다. 거울처럼 땅을 그대로 비추는 호수 때문에 태양궁이 두 개가 된 것처럼 보였다. “저건…….” 마리엔은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압도적인 광경에 질식할 것 같았다. 그 사이 타킷 설정을 마친 세영이 외쳤다. “리바이어던!”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던 호수가 멈췄다. 다음 순간 잔잔한 수면을 뚫고 거대한 기둥 같은 것이 불쑥 튀어나왔다. 나무뿌리처럼 울퉁불퉁한 기둥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더니 다섯 갈래로 갈라졌다. 벌어진 기둥 안에서 날카로운 이빨들이 드러났다. 마리엔은 그제야 그것이 기둥이 아니라 뭔가의 머리라는 것을 알아챘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거대한 괴물의 머리가 지상으로 처박혔다. 마리엔이 조금 전까지 갇혀있었던 건물이 케이크처럼 뭉개졌다. 1분도 되지 않아 감옥은 형체도 남지 않은 폐허가 되어버렸다. -끼에에에엑! 소름 끼치는 괴성을 지른 괴물이 쑥 빨려들 듯 호수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출렁거리던 호수의 가장자리가 부서지며 물방울이 되어 휘날렸다. 마리엔이 두어 번 눈을 깜빡이는 사이 호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이 거짓말 같았다. “로망답죠? 마나 잡아먹는 하마에 실용성은 없어도 비주얼 하나는 최강이거든요.” 세영의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린 마리엔이 눈을 깜빡였다. 세영이 말하는 ‘로망’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을 위해서 보여줬다는 것이 기뻤다. “네, 정말… 멋졌어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답하자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마리엔은 조금 주저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무시무시한 마법보다는 바로 뒤에서 세영이 웃고 있다는 것이 더 꿈같았다. “그게 마리엔이 닿아야 할 목표에요. 한 번쯤 목표를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해서요.” “…제가 그렇게 강해질 수 있을까요?” “마리엔은 착하니까, 얼마든지 가능하죠.” 착한 것과 재능은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세영이 말하면 아주 그럴듯하게 들렸다. 개구쟁이처럼 씩 웃은 세영이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아, 저기 봐요. 무지개다.” 호수가 사라진 곳에 선명한 무지개가 떠 있었다. 무지개가 생긴 건 처음이라고 웃는 세영의 옆에서 마리엔은 강해지고 싶다고 기도했다. 강해져서, 조금이라도 세영에게 도움이 되게 해달라고. “세영니임! 마리엔!” “대체 뭐한 거야아!”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동료들이 보였다. “아이고, 저 잔소리쟁이들.” 하고 고개를 저은 세영이 그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마리엔이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 걸린 무지개가 용기를 주는 것 같았다. ──────────────────────────────────── 천공섬 (1) 백조처럼 새하얀 배가 우아한 곡선을 자랑했다. 초승달 배 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쾌속선 <세헤라자드>였다.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리는 세영의 옆에서 라오 조드가 깐죽거렸다. “어때, 직접 보니까 멋지지? 갖고 싶지?” “됐다니까. 빌려주는 것만으로 충분해.” 예쁘긴 하지만 모험에 끌고 다니기엔 거추장스러웠다.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과 시간을 생각하면 여객선을 타는 게 훨씬 나았다. 다음 목적지가 빛의 교단이 있는 <천공섬>이 아니었다면 빌려준다는 말도 사양했을 것이다. “뭐, 나야 이런 것밖에 못 해줘서 미안하지. 누님에게 실컷 받기만 했는데.” 머쓱한 표정의 라오 조드가 말했다. 웬일로 기특한 소리를 하나 싶어 쳐다보자 슬그머니 옆구리에 달라붙는다. “대신 누님이 부르면 세상 어디라도 달려갈게. 하나뿐인 약혼자잖아.” 처음 만났을 때도 약혼자가 어쩌고 하더니, 여전히 미련을 못 버린 모양이었다. 피식 웃은 세영이 그를 밀쳐내며 말했다. “언제라도 달려올 수 있도록 집안 단속이나 잘해.” 뒤로 물러난 라오 조드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제 약혼자라고 해도 안 때리네?” 하고 히죽대는 것을 보니 사실 맞고 싶었던 모양이다. 주먹을 들자 재빨리 안전거리를 확보한 라오 조드가 말했다. “집안 정리는 걱정하지 마. 누님이 본때를 보여준 덕에 다들 벌벌 기고 있으니까. 이번 기회에 싹 정리해버릴 거야.” 도시 전체를 뒤덮은 깽판에 동료들의 처벌을 주장한 자들은 힘을 잃었다. 살아 돌아온 라오 조드가 길길이 날뛰기까지 하니 다들 납작 엎드려 눈치만 보는 상황이었다. 정치 쪽은 전혀 관심이 없는 세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샴들 쪽은?” “아직. 아무런 반응도 없어.” 라오 조드가 조금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세영은 그에게 두 개의 탑과 나샴에 대해 알려주었다. 침묵의 탑으로 직접 데려다줄 수도 있지만, 그래서야 아무 의미가 없었다. 진정한 탑의 주인이 되려면 나샴의 인정을 받아야 했다. 불꽃의 거인이 사라졌다고 사막이 곧바로 정상이 될 리가 없다. 식량과 물이 부족한 나샴과 믿을만한 인재가 부족한 라오 조드라면 좋은 합의점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늙은 생강인 미갈루와 기회를 놓치지 않는 여우 새끼의 조합을 떠올리자 제법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진짜 샤이렌드라의 후계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두 개의 탑을 다스리며 인간과 나샴을 통치하는 사막의 주인. 어설픈 여우에게는 아직 한참 먼 이야기겠지만. “포기하지 말고. 계속 집적거리면 귀찮아서라도 나와 볼 테니 노력해봐.” “포기는 무슨. 벌써 나샴말을 할 줄 아는 통역들도 잔뜩 구해놨는걸. 일단 접선만 하면 나샴들도 내 매력에 퐁당 빠질 거야. 두고 봐.”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라오 조드를 보니 불안해졌다. 저 얄미운 주둥아리를 생각하면 입을 열자마자 나샴에게 공격당할 것 같았다. 한숨을 쉰 세영이 자비를 베풀었다. “만약 아무 말도 안 들어주면 그냥 내 이름 대.” “누님 이름을? 그럼 나한테도 이름을 허락해 주는 거야?” 라오 조드가 확 밝아진 얼굴로 물었다.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눈에 피식 웃은 세영이 말했다. “사막마귀라고 하면 알아들을 거야.” 라오 조드의 표정이 멍해졌다. 세영은 그를 지나쳐 한쪽에 모여 있는 동료들에게 다가갔다. 마리엔에게 이런저런 잔소리를 퍼붓던 파티마가 반색하며 말했다. “어머, 나의 정복자님이 오셨잖아.” “그 소유격 좀 어떻게 할 수 없어? 굉장히 이상하게 들린다고.” “이상하다니. 나를 구해주신 정복자 중 제일 멋진 분을 줄인 말이라고.” 생글생글 웃던 파티마가 손키스를 날렸다. 뿌루퉁해진 마리엔이 그녀를 노려봤다. 싸울 생각은 없다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한 파티마가 꼬리를 살랑거렸다. “지금 떠난다니 너무 아쉬워. 정복자님을 위한 노래를 만들고 있었는데.” “…뭘 만든다고?” “그녀는 음유시인, 이쪽 말로는 나칼이라고 불리는 구비문학가입니다. 얼마 전부터 세영님의 무용담을 담은 시를 쓰기 시작했더군요.” 파티마 대신 리먼이 즐거운 듯이 설명했다. 초반만 봤지만, 내용이 아주 멋지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썩어들어가는 세영의 얼굴을 보지 못한 시디발라가 “나도 도와줬어! 우리가 했던 모험도 말해주고!” 하고 나불거렸다. 파티마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몇 년 뒤엔 조르디아의 모든 사람들이 정복자님을 칭송하게 될 거야. 기대하라고.” “…하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던 세영은 문득 카라드와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닿는 순간 슬쩍 고개를 돌렸지만, 분명 웃고 있었던 것 같았다. ‘조금은 나아진 건가.’ 세영은 동료들에게서 한걸음 떨어져 있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한동안 우울해 보여서 걱정했는데 빨리 회복해서 다행이었다. 카라드가 마도왕의 오른팔이라는 사실은 동료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마리엔이 적극적으로 세영을 지지하지 않았다면 파티에 합류하는 것도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들의 우정에는 확실히 금이 간 듯했다. 이전과 달리 서먹해 하는 시디발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빛의 종인 비오가 구원자님을 뵙습니다.” 수척해진 수사슴을 감상 중인데 거슬리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속으로 혀를 찬 세영이 돌아섰다.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던 단장과 성기사들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눈치를 보던 단장이 덧붙였다. “동행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영이 깽판을 친 다음 날, 그는 교황의 초대장을 들고 물의 궁으로 찾아왔다. 전과 달리 아주 정중한 태도였다. 카라드 때문에 고민하던 세영은 결국 초대를 받아들였다. 다음 던전인 가나트리 성당은 신전의 협조 없이는 공략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이겠지만, 잘 부탁해요.” 뼈가 있는 말에 움찔한 단장이 카라드를 노려보았다. 제가 박대당하는 것이 다 그의 탓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덤덤한 카라드와 달리 동료들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후다닥 달려온 시디발라가 카라드의 앞을 막아서자 나머지 사람들이 주변을 빙 둘러쌌다. ‘오, 이거 제법 쓸 만하겠는데.’ 세영은 단장의 가치를 좀 더 높게 평가했다. 잘만 이용하면 비행이 끝나기 전에 원래의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저희는 먼저 승선하겠습니다.” 따가운 시선을 받은 단장이 헛기침을 하며 물러섰다. 동료들은 성기사들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카라드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도놈, 의외로 사랑받고 있잖아?” 슬금슬금 다가온 라오 조드가 속삭였다. 모기도 아니고 왜 앵앵거리나 싶어 쳐다보자 할 말이 있다며 팔을 잡아끌었다. 세영은 귀찮음을 참으며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누님은 여전히 놈을 풀어줄 생각이지?” 답지 않게 심각한 표정을 지은 라오 조드가 물었다. 대답 없이 쳐다보자 머리를 긁적이던 놈이 품에서 곱게 접힌 쪽지를 꺼냈다. “이걸 전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는데, 누님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이게 뭔데?” 쪽지를 받아든 세영이 물었다. 뭐로 만들었는지 바스락거리지도 않는 종이가 찝찝하게 느껴졌다. 씁쓸한 웃음을 지은 라오 조드가 말했다. “카벨 루스타나에 대한 정보. 그리고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을 정리한 거야. 읽어 보고 마도놈에게 전해 줄지는 누님이 결정해.” 표정을 보니 썩 좋지 않은 내용이 담겨 있는 듯했다. 고개를 끄떡인 세영이 종이를 주머니에 넣었다. 배에 오른 후에 읽을 생각이었다. 한결 홀가분한 표정을 지은 라오 조드가 말했다. “전에 말했었나? 난 사실 군주가 아니라 모험가가 되고 싶었어. 갇혀 지내는 게 너무 싫어서, 나중에 크면 세상의 곳곳을 둘러보겠다고 생각했지.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어버렸지만.” 씁쓸한 눈으로 태양궁 쪽을 쳐다본 라오 조드가 싱긋 웃었다. “그래서 누님과 함께 있을 때는 정말 행복했어. 잠깐의 모험이었지만, 어렸을 때의 꿈을 이룬 것 같았거든. 정말 고마워.” 고맙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은 어린 소년 같았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하던 세영이 피식 웃었다. “네가 모험가였다면 좋은 동료라고 생각했을 거야. 하지만 너한테는 군주가 더 잘 어울려.” “우와, 칭찬해주는 건가. 기쁜데.” “마음대로 생각해.” 짜증스럽게 손을 내저은 세영이 돌아서려 했다. 잽싸게 그녀의 손을 낚아챈 라오 조드가 손등 위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어이없이 쳐다보자 히죽 웃으며 덧붙인다. “좋은 여행이 되기를 비는 부적이야.” 세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후손이란 원래 닮는 걸까. 아주 가끔 라오 조드에게서 나스쿤의 모습을 볼 때가 있었다. 어쩌면 같은 군주라 그런 건지도 모른다. 붙잡힌 손을 휙 빼낸 그녀가 물었다. “우리가 떠나도 넌 괜찮겠어?” “응? 뭐가?” “날 팔아서 각국의 사람들을 초대했다며. 어떻게 수습하려고?” 자신이 책임질 문제는 아니긴 하지만, 아무래도 신경 쓰였다. 뒤늦게 알아들은 것처럼 아- 소리를 낸 라오 조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전혀 문제없어. 누님에게 눈도장 찍으러 온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다들 내 즉위기념식에 온다고 참석한 거거든. 누님이 떠났다고 해도 항의할 입장이 아니란 말씀.” “…그거 사기 아니냐.” “원래 한 방을 노리면 쉽게 망하는 법이지.” 라오 조드가 악당처럼 히죽거렸다. 역시 걱정을 해줄 필요가 없는 놈이었다. 세영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으로 파티마와 작별 인사를 한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 배에 올랐다. 라오 조드가 듣는 사람이 창피할 정도로 크게 외쳤다. “누님, 날 잊지 마! 누님이 가면 나 매일 밤 이불 덮어쓰고 엉엉 울 거라고!” 세영은 그냥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답하기로 했다. 날개를 펼친 <세헤라자드>가 천천히 위로 떠올랐다. 범선 같은 <아스트리드>와 달리 세헤라자드는 날개 달린 물고기와 같은 형태였다. 손을 흔드는 라오 조드와 파티마의 모습을 끝으로 조르디아가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푸른 신기루처럼 빛나는 도시가 사라지고 끝없는 사막의 풍경이 펼쳐졌다. “조금 아쉽다.” 난간에 매달려있던 시디발라가 중얼거렸다. 피식 웃던 세영은 문득 카라드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일행과 조금 떨어져 있는 남자가 보였다. 이마에 손을 대고 있는 모습이 어째 상태가 영 안 좋아 보였다. “어디 아파요?” 옆으로 다가온 세영을 보고 움찔한 카라드가 급히 손을 내렸다. 가까이에서 보자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기분이 좀 안 좋은 것뿐입니다.” “괜찮긴요. 딱 봐도 상태 별로인데.” 혀를 찬 세영이 그의 팔을 움켜쥐고 선실로 끌고 갔다. 카라드는 정말 괜찮다며 사양했지만, 그의 말을 들어줄 기분이 아니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시디발라가 뒤를 쫓아왔다. “어디 아파? 많이 아픈 거야?” “괜찮….” “뱃멀미인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 일단 쉬게 해야지.” 카라드의 말을 끊은 세영이 선실 문을 열었다. 선실이라고 부르기 미안할 정도로 호화로운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라드의 다리에 달라붙은 시디발라가 재잘거렸다. “잠을 못 자서 그런 거 아냐? 계속 못 잤잖아.” “불면증이에요?” 처음 듣는 말에 놀란 세영이 물었다. 카라드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이런 식으로 걱정 받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니, 뭘 또 죄송해요. 자, 이거 마시고 푹 자면 나을 거예요.” 세영은 회복 포션을 꺼내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세영의 재촉에 포션을 마신 카라드가 삐걱삐걱 침대로 향했다. 뭐 때문에 긴장한 건지 사람보다는 나무토막 같은 움직임이었다. “아, 편하게 잘 수 있도록 목걸이 풀어 줄게요. 푸는 법 알아왔거든요.” 라오 조드가 풀어주면 안 된다며 계속 반항을 하는 바람에 알아내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목걸이 뒤쪽에 팔찌의 보석을 갖다 대면 풀리는, 의외로 간단한 방법이었다. 세영이 팔찌를 꺼내자 시디발라가 그것을 받아 침대 위로 올라갔다. 보석을 목걸이에 갖다 대자 달칵하고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목걸이를 잡아 벌리려던 시디발라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 안 풀리는데?” “뭐?” 당황한 세영이 옆으로 다가가 팔찌를 넘겨받았다. 그녀가 시도해보아도 역시 달칵거리는 소리만 날 뿐 목걸이는 풀리지 않았다. 뒤늦게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여우 새끼가….” “괜찮습니다.” 카라드가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세영을 붙잡았다.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꼴을 보자 속에서 뭔가 울컥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안 괜찮은 거 뻔히 보이는데.” “제가 이걸 걸고 있는 편이 더 나을 겁니다. 다른 분들도 안심하실 테고요.” 목걸이에 손을 얹은 카라드가 웃어 보였다. 아픈 얼굴로 그러는 것을 보자 더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한숨을 푹 쉬자 미안해하는 시선이 돌아왔다. 어이구 소리가 절로 나왔다. “어, 저기! 나 잠깐 밖에 나가 있을게!”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본 시디발라가 갑자기 뽀르르 밖으로 나가버렸다. 당황한 세영이 그를 불렀지만, 대답 대신 문 닫히는 소리가 돌아왔다. 황당한 눈으로 문을 바라보던 세영이 다시 카라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 천공섬 (2) 눈이 마주치자 카라드가 바짝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때리는 것도 아닌데 왜 매번 저런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다. 목걸이나 부술까 싶었지만, 충격을 줬다가 칼이 튀어나오면 큰일이었다. 나중에 안전하게 해체하기로 한 세영이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래서 진짜 불면증이 있어요?” “…아.” 카라드가 순간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그냥 솔직하게 말해요.” 라고 강요하자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불면증은 아닙니다.” “아니면요?” “악몽 때문에 도중에 깨서….” 점점 붉어지던 카라드의 얼굴이 거의 홍시가 되었다. 악몽에 시달리는 것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세영으로서는 대체 왜 부끄러워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매일 그러면 심각한 거잖아요? 잠을 전혀 못 자는 거예요?” “아뇨, 잠깐씩은 수면을 취하고 있습니다.” 거의 못 잔다는 소리였다. 한숨을 삼킨 세영이 미간을 긁적였다. “무슨 악몽을 꾸는지 물어봐도 돼요?” 어쩌면 기억이 돌아오고 있다는 징조일 수도 있었다. 잠깐 망설이던 카라드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항상 같은 꿈입니다. 어떤 소년이 울면서 화를 내고, 저는 그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습니다.” 세영은 저도 모르게 풉 소리를 냈다. 간신히 가라앉았던 카라드의 얼굴이 다시 빨개졌다. 세영은 서둘러 손을 저었다. “아, 미안해요. 생각보다 귀여운 꿈이라서. 애가 엄청 무섭게 생겼나 봐요.” 눈을 깜빡이던 카라드가 품속에서 낡은 목걸이를 꺼냈다. 그를 발견했을 때 지니고 있었던 거였다. 목걸이의 뚜껑을 연 카라드가 그것을 세영에게 내밀었다. 저게 열리는 거였냐고 내심 놀라던 세영은 목걸이 속의 초상화에 감탄을 흘렸다. 옅은 회색머리를 틀어 올린 푸른 눈의 미녀가 정면을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귀족적인 우아한 얼굴이 카라드와 닮았다. 순간 누나인가 했지만, 뚜껑의 안쪽에 <이것이 널 지켜주기를, 사랑하는 엄마가>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목걸이가 낡은 것을 보면 오래전에 그려진 초상화였다. “이분과 무척 닮았습니다. 머리색도 같아서 혹시 제 형제가 아닐까 하고….” 이런 미모가 셋이나 있다니.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이롭게 하는 가족이었다. 고개를 주억거린 세영이 그에게 목걸이를 돌려주었다. “어머니가 굉장히 미인이시네요.” 수줍게 미소 지은 카라드가 고개를 숙였다. 세영은 저 사슴은 뭘 믿고 저렇게 귀여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예전 기억이 꿈으로 보이는 것일 수도 있어요. 그래도 자꾸 잠을 설치면 몸에 안 좋아요. 정 안되면 약이라도 구해줄게요.” “괜찮습니다. 그렇게 신경 쓰실 필요는-.” “그놈의 괜찮다 좀 하지 말고 어서 누워요. 환자에겐 관심을 거부할 권리가 없거든요.” 반강제로 눕혀진 카라드가 얼떨떨한 얼굴로 세영을 보았다. 목 아래까지 이불을 덮어준 세영이 피식 웃었다. “무서우면 손잡아줄까요?” 얼굴을 붉힌 카라드가 고개를 저었다. 세영은 손을 뻗어 그의 눈을 감겼다. 나비처럼 팔랑거리는 속눈썹이 손바닥을 간질였다. “자, 이제 악몽 같은 거 꾸지 말고 푹 자요.” 잠깐 기다렸다 손을 떼자 어느새 잠들어버린 카라드가 보였다. 너무 순식간에 잠들어서 놀랐지만, 그만큼 피곤했던 거라고 생각하니 좀 안쓰러워졌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세영은 문득 라오 조드가 준 쪽지를 떠올렸다. ‘가족 이야기가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보고 말해줄 걸 그랬나.’ 또 까먹기 전에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세영은 주머니 속의 쪽지를 꺼냈다. 부들부들한 종이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없이 펼쳐졌다. 별 생각 없이 쪽지를 읽어나가던 세영의 얼굴이 끝 부분에 이르자 살짝 굳었다. 그녀는 편히 잠든 카라드를 힐끗 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다들 여기서 뭐 해요?” 문을 열고 나가자 근처에서 방황 중인 동료들이 보였다. 얼굴이 빨개진 마리엔이 디안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러자 헛기침을 한 디안이 입을 열었다. “카라드는 괜찮습니까?” “네, 멀미를 했나 봐요. 막 잠들었으니까 나중에 보는 게 좋겠어요.” “어? 잔다고?” 세영의 대답에 시디발라가 깜짝 놀란 듯이 말했다.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본 세영이 고개를 끄떡였다. “피곤했는지 자더라. 깨우지 말고 내버려둬. 리먼은?” “으응, 조금 전에 다른 선실로 갔어.” 시디발라가 정말 이상하다는 얼굴로 답했다. 한숨을 쉰 세영이 그의 머리를 꾹꾹 눌렀다. “무슨 오해를 하는지 몰라도 그런 거 전혀 아니거든?” “아야야, 내가 뭘 했다고!” “어디 아픈지 묻고 재웠을 뿐이니까,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말라고.” 억울하다고 투덜거리던 시디발라가 조금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세영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보다가 다른 동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다들 구경하러 온 거에요?” 여기가 무슨 동네 물레방앗간도 아니고. 뿌루퉁한 시선에 화들짝 놀란 디안과 마리엔이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그냥 걱정이 돼서 왔는데, 시디발라가 이상한 말을 하면서 못 들어가게 해서….” “아, 내가 뭐!” 무슨 이상한 말인지는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떡인 세영은 리먼이 있을만한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시디발라가 안내를 해주겠다며 쫓아왔다. “아, 세영님. 카라드는 좀 좋아졌습니까?”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두루마리 같은 것을 정리하던 리먼이 반색했다. 가벼운 멀미였다고 답하자 빙긋 미소 지은 그가 시디발라에게 말했다. “그것 보세요. 별일 아닐 거라고 했지요.” “아니, 난 그냥…….” 우물거리던 시디발라가 리먼의 등 뒤로 숨어버렸다. 세영은 그것을 못 본 척하며 리먼에게 말했다. “리먼, 혹시 루스타나에 대해서 아세요?” “루스타나 가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대체 뭐 하는 곳이에요?” 다른 것보다 이걸 알아야 쪽지의 내용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두루마리를 내려놓은 리먼이 세영에게 자리를 권했다. “루스타나 가문은 마도에서 가장 명망 높은 곳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카르나이 왕국이 멸망했을 때, 생존자들을 배에 태우고 마도로 향했던 섭정왕의 후예라고 합니다. 정복왕 로토가 나타나기 전에는 루스타나의 가주가 마도를 지배했지요.” 제법 뼈대 있는 귀족 집안이라는 뜻이었다. 슬슬 골치가 아파지는 걸 느낀 세영이 물었다. “정복왕과 사이가 나쁜 편인가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서로를 건드리지 않고 공존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겠군요.” 세영은 추측이나 이해를 포기하고 리먼의 손에 쪽지를 건넸다. “이거 좀 봐주세요.” 의아한 표정이 된 리먼이 쪽지를 읽었다. 세영은 그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드는 것을 보며 작은 위안을 얻었다. 그래, 나만 저게 당황스러운 게 아니었어. 쪽지를 다 읽은 리먼이 당황스러운 듯이 물었다. “이게 사실일까요?” 세영은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잘 모르겠다는 뜻을 표했다. 시디발라가 궁금한 얼굴로 기웃거렸다. “무슨 내용인데?” “카라드의 어머니가 인질로 붙잡혀 있는데, 지금 목숨이 위태롭다는 내용.” “뭐?” 시디발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세영은 직접 보라는 듯이 리먼의 손에서 쪽지를 건네받아서 그에게 넘겼다. 카벨 루스타나는 루스타나 가문의 사생아였다. 가주의 동생이 고아를 거둔 것처럼 알려졌지만, 가주가 ‘신녀’를 건드려 낳았다는 것이 유력했다. 실제로 신전 쪽에는 임신으로 파문당한 여사제의 기록이 남아있었다. 카벨이 정복왕의 부하가 된 것도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인 것으로 추측되었다. 하지만 이번에 포로가 된 여자는 정반대의 주장을 펼쳤다. 정복왕의 수하들은 모두 가족들이 인질로 붙잡혀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주장으로는 카벨 루스타나 역시 어머니의 목숨을 저당 잡힌 신세라고 했다. “양아버지 쪽에 최후통첩이 보내졌대. 카라드가 마도로 돌아오지 않으면 그의 어머니를 죽이겠다고.” “어, 그럼… 이거 엄청 큰일 아냐?” 시디발라가 당황하며 물었다. 세영은 대답 없이 팔짱을 꼈다. 잠깐 생각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루스타나 가문이 카라드를 위해 움직여줄 가능성이 있을까요.” “움직일 거라면 진작 했을 겁니다. 인질의 구출이 불가능하거나 구출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겠지요.” 딱 부러진 대답에 세영은 한숨을 쉬었다. 하여튼 쉽게 가는 법이 없었다.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리먼이 말했다. “그에게 말씀해주실 겁니까?” “…글쎄, 어쩔까요.” “뭐? 말 안 해줄 거라고?!” 무심한 대답에 화들짝 놀란 시디발라가 물었다.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전과는 상황이 좀 다르니까.” 하고 말했다. 세영은 카라드를 안전한 곳에 숨겨둘 계획이었다. 마도에서는 배신자로, 이쪽에서는 악당으로 찍힌 상황에 마음 편히 풀어줄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신분을 세탁하고 평온하게 살 수 있도록 적당한 장소를 모색 중이었다. ‘하지만 인질이 있다면 적이 될 위험이 더 커지지.’ 마도로 돌아간다면 이쪽의 정보를 탈탈 털리는 것은 물론,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이 하나 생기는 셈이다. 카라드가 적으로 나타났을 때 주저 없이 공격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리먼이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덧붙였다. “하지만 이대로 넘어갔다가 나중에 알게 된다면 더 곤란해질 겁니다.” “알고 있어요. 적이 되느냐 원수가 되느냐의 선택이네요.” 참 거지 같은 선택지였다. 충격을 받은 얼굴로 세영을 바라보던 시디발라가 반박했다. “말해줘도, 적이 안 될 수도 있잖아.” “가족이 인질로 잡힌 상태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기대하지 마. 무엇보다 저쪽은 기억이 전혀 없는 상태라고.” 기억이 없으면 가족에게 무심해지거나 집착하기 마련인데, 초상화를 보는 카라드의 눈은 애틋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봐도 해피엔딩이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어라 말하려던 시디발라가 귀를 축 늘어뜨렸다. 한숨을 쉰 세영이 말했다. “어느 쪽으로 가도 혼파망이니까 다수결로 하죠. 디안과 마리엔의 의견도 들어봐야겠어요.” 결과야 뻔하겠지만. 속으로 덧붙인 세영이 지끈거리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조용히 침묵하던 리먼이 말했다. “세영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세영은 리먼의 차분한 눈을 바라봤다. 위로하듯 다정한 눈이었다. 문득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제 잘못이 맞죠. 제가 카라드를 다치게 하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까.” 그랬다면 기절한 카라드를 주워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때 그냥 지나치는 것이 서로를 위한 길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나를 원망하려나.’ 기억을 잃은 것도 제 운이 나빠서라고 말하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실을 듣게 된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왠지 보고 싶지 않았다. ──────────────────────────────────── 천공섬 (3) 상황은 세영의 예상과 좀 다르게 흘렀다. 잠에서 막 깬 카라드를 둘러싼 동료들이 이 비극적인 사건을 조금이라도 덜 충격적으로 전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디안은 한마디가 끝날 때마다 카라드가 숨은 쉬는지 확인했고, 시디발라는 그가 졸도하지 않도록 긍정적인 생각을 불어넣으려고 애썼다. 새파랗게 질린 마리엔이 “괜찮으세요? 괜찮으세요?” 하고 앵무새처럼 반복할 때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군요.” 멍하게 눈을 깜빡이던 카라드가 말했다. 그의 덤덤한 반응에 놀란 동료들이 다시 허둥거렸다. 카라드는 그들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면서 말을 이었다. “예상했던 일입니다. 인질이 잡혀있는 것은 몰랐지만, 제가 배신자라고 불린 이상 가족들이 화를 입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동료들이 오히려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세영은 더는 꼴사나운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당장 돌아가고 싶겠지만 좀 더 기다려줘야겠어요. 이곳에서 마도로 향하는 것보다 비행선으로 이동한 후에 마도로 가는 게 빠를 거예요. 가나트리 성당은 마도와 인접해있으니까 거기서 헤어지기로 하고, 당분간은 저희와 동행해주세요.” 동료들과 함께 머리 터지게 계산을 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세영의 말을 듣고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은 카라드가 물었다. “저를 돌려보낼 생각이십니까?” “그렇게 말하면 꼭 갖다 버리는 것 같잖아요. 돌아가겠다면 보내주겠단 소리예요.”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너무 뜻밖의 말이라 놀라서. 죄송합니다.” 세영의 질책에 당황한 카라드가 말했다. 사과할 필요는 없다고 고개를 저은 세영이 말했다.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면 돌아가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마도와의 연락 수단이라도 있다면 갈 테니 기다려달라고 하겠지만, 지금은 아무런 방법도 모르니까요.” “…….” “하지만 당신의 지위를 생각하면 곧바로 인질을 해치진 않을 거예요. 마도왕의 오른팔이라면 쓸 만한 정보를 많이 알 테고, 어떻게든 회유하려 들겠죠. 그러니까….” 잠시 말을 멈춘 세영이 이마를 문질렀다. 문득 굉장히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끝내버리자는 생각에 좀 더 빠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만약 가지 않겠다고 하면 전 최선을 다해서 당신을 보호하겠어요. 하지만 마도로 돌아간다면, 돌아간 순간부터 저와 적이 된다고 생각해주세요.” “세, 세영님. 그런 말은….” 당황한 디안이 그녀를 불렀다. 세영은 그것을 듣지 못한 척 카라드를 바라봤다. 민감한 문제긴 하지만,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했다. 그리고 이렇게 선을 긋는 쪽이 서로에게 편할 것이다. 한참동안 말이 없던 카라드가 입을 열었다. “잠깐 생각할 시간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안 그래도 창백한 얼굴이 더욱 파리해져 있었다. 그에게 충격을 준 게 어머니의 위험이 아니라 제 말인 것 같아 입맛이 썼다. 고개를 끄떡인 세영이 뒤로 물러섰다. “잘 생각해보고 가나트리 성당에 도착하기 전까지 결정하세요.” 하지만 세영은 그가 내릴 결정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돌아간다는 쪽을 선택하겠지. 오히려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게 뜻밖이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동료들을 힐끗 본 그녀는 간다는 말도 없이 방을 나섰다. * “봤지? 뭔가 이상해졌다고. 저기서 꼼짝도 안 한단 말이야.” 갑판 구석에 몸을 숨긴 시디발라가 소곤거렸다. 세영은 선인장처럼 햇볕을 쬐는 카라드를 보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일광욕 중인 것 같은데.” “아냐, 전에는 안 저랬다니까. 역시 그 일로 충격을 받은 게 틀림없어.” 평소와 똑같다고 말해봤자 시디발라의 귀엔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시디발라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디안은 카라드가 어젯밤 잠을 설쳤다며 걱정했고, 마리엔은 오늘따라 식욕이 없는 것 같다며 안쓰러워했다. 일일이 답해주기도 지친 세영은 그저 한숨만 쉬었다. ‘뭐, 아예 영향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지만.’ 볕을 쬐는 카라드의 근처에 어슬렁거리는 성기사들이 보였다. 평소라면 그들이 나타나자마자 자리를 피했을 카라드는 멍하게 앉아있었다. 왠지 시비가 붙을 분위기에 슬슬 가서 수거해올까 생각하던 찰나였다. “카라드!” 성기사들을 헤집으며 나타난 디안이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멍하게 있던 카라드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이어서 디안이 무어라 말을 걸자 한참을 망설이다 고개를 끄떡인다. 왠지 모르게 신이 난 디안이 그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보자 불안해졌다. “뭐하는 거지?” “디안이 움직이다 보면 기분이 나아질지 모른다고, 대련을 할 거라고 그랬어.” 그녀의 눈치를 보던 시디발라가 말했다. 참으로 디안다운 발상이요, 위로 방법이었다. 속으로 한숨을 쉰 세영이 그들이 향한 곳으로 움직였다. 시디발라가 쫄래쫄래 뒤를 따라왔다. ‘대련도 어느 정도 수준이 비슷한 상대랑 해야지. 디안과 하면 오히려 스트레스만 쌓일 텐데.’ 현재 동료들의 레벨은 디안이 Lv34, 마리엔 Lv32, 시디발라가 Lv38, 리먼이 Lv44였다. 카라드의 레벨은 현재 79. 평타로 때려도 디안이 나가떨어질 수준이다. ‘파티 상태라서 서로 데미지를 먹지는 않으니까 그건 다행이네.’ 세영은 배에 쓸데없이 연무장 따위가 있어서 문제라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연무장 안으로 들어서자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마리엔과 리먼이 두 사람을 반겼다. 마리엔은 그렇다 쳐도 리먼까지 있는 것은 조금 의외였다. 의아한 시선을 느낀 리먼이 허허 웃었다. “왠지 제가 시발점이 된 듯해서 말입니다.” “시발점이요?” “마검사를 본 것은 처음이라 이것저것 질문하다가 그만.” 쓸데없이 디안의 호승심에 불을 질렀다는 말이었다. 갑자기 웬 대련인가 싶었던 세영은 그제야 납득했다. “카라드가 마검사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 “제 잘못이에요. 괜히 저 때문에….” 잔뜩 풀이 죽은 마리엔이 고백했다. 사연인즉슨 이랬다. 요즘 마법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는 그녀는 잠시도 책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독학에는 한계가 있어서 자주 막히곤 했는데, 수식을 앞에 놓고 끙끙거리는 것을 본 카라드가 약간의 도움을 주었다. 카라드가 마법을 쓸 줄 안다는 것을 알게 된 리먼이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고, 호기심을 느낀 디안이 대련을 마음먹었다는 이야기였다. “마리엔, 요즘 굉장히 열심히 공부하네요.” 세영은 흐뭇함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빨갛게 얼굴을 붉힌 마리엔이 고개를 저었다. “전 재능이 부족하니까 노력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래도 카라드 씨가 실패율을 줄이는 법을 가르쳐주셔서 조금 자신감이 생겼어요.” “아, 실패율. 그런 게 있었죠.” 세영이 난감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마법 스킬은 백번 사용하면 백번 다 성공했기 때문에 실패를 대비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의 마법사들은 아무리 숙련되어도 어느 정도의 실패 확률이 있었다. 마법이 아예 실행되지 않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튀는 것이다. 그나마 마리엔은 안정적인 마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실패율이 낮은 편이었다. “미안해요. 제가 도움이 못 되네요.” “세영님은 전능하시니까요. 실패 같은 건 모르시는 게 당연해요.” 마리엔이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세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민망해진 세영이 시선을 피했다. ‘스킬 때문이라고 말해줄 수도 없고 좀 미안하네.’ “세영님과 비교할 순 없지만, 카라드 씨도 대단한 것 같아요. 실패를 대비해서 연결할 수 있는 스펠을 3개 더 준비한대요. 그래서인지 수식도 굉장히 줄여서 사용하더라고요.” 이어지는 수식이 어쩌고 하는 설명은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카라드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연무장에 서 있는 카라드에게 시선을 돌린 마리엔이 부러운 듯 말했다. “검도 잘 쓰는 것 같던데, 저런 사람을 천재라고 하나 봐요.” 그러면서 힐끗 세영의 눈치를 보는 것이 동생을 질투하는 어린애 같았다. 피식 웃은 세영이 마리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마리엔도 충분히 재능이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얼굴이 확 밝아진 마리엔이 헤헤 웃었다. 귀여움에 몸서리치던 세영이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우연인지 카라드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뭔가를 말하려는 것 같던 남자가 멈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뭐지?’ 괜히 찝찝해진 세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냐고 물어볼 틈도 없이 대련이 시작되었다. 세영은 빠르게 검을 주고받는 둘을 지켜보며 말했다. “진검이네?” “응, 디안이 마법검이 어떤 건지 궁금하다고 그랬어.” 시디발라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구경하며 대꾸했다. 어차피 진검이라도 데미지가 없으니 상관은 없었다. 긴장감 없이 지켜보던 세영은 문득 이상한 것을 느꼈다. ‘어라, 저거….’ 단박에 승부가 나지 않는 것은 그렇다 쳐도 카라드가 쓰는 검술이 전에 본 것과는 달랐다. 부딪힘이 이어질수록 위화감은 더욱 심해졌다. “저거 있잖아, 디안이랑 같은 검술처럼 보이는데.” 시디발라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세영은 고개를 저었다. 같은 검술을 사용한다고 해서 검을 쓸 때의 습관이나 약점까지 닮진 않는다. 지금 카라드의 검은 디안의 나쁜 습관까지 고스란히 옮겨져 있었다. ‘카피능력?’ 게임에는 존재하지 않는 스킬이었다. 처음 보는 능력에 세영은 약간의 흥미를 느꼈다. 그것과 별개로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대결은 재미가 없었다. 시디발라의 얼굴에도 지루함이 역력했다. 피식 웃은 세영이 소리쳤다. “카라드, 봐주지 말고 싸워요. 디안에게 본때를 보여줘요.” 멈칫한 카라드가 검을 늘어뜨렸다. 까맣게 물기가 돌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무표정해졌다. 다음 순간 그의 검에서 새카만 기운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진짜 너무하시는 거 아니냐고 투덜거리던 디안의 얼굴이 설핏 굳어졌다. “어, 잠까….” 디안이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카라드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경악한 디안이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바로 앞에 나타난 새카만 검이 그의 검을 두부처럼 잘라낸 후 목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멈춰!” 세영의 외침과 거의 동시에 카라드의 몸이 덜컥 정지했다. 하지만 패닉에 빠진 디안은 제때 검을 멈추지 못했다. 반 토막 난 검이 카라드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꺄악!” 마리엔이 뒤늦게 비명을 질렀다. 검을 떨어뜨린 디안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충격으로 하얗게 질린 얼굴이 당장 쓰러질 것 같았다. 황급히 달려간 마리엔이 그를 부축했다. “괜찮아요?” 거의 동시에 날듯이 뛰쳐나간 세영이 카라드의 팔을 붙잡았다. 멍하게 서 있던 카라드가 고개를 끄떡였다. “옷 위를 스친 것뿐입니다.” 파티 상태라 옷만 찢어졌을 뿐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한숨을 내쉰 세영이 충격에 빠진 두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그녀의 물음에 카라드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동료들의 경계어린 시선을 느낀 그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답답함을 느낀 세영이 무어라 말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어느새 다가온 리먼이 카라드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순간 움찔했던 카라드는 이내 체념한 듯 얌전히 서 있었다. 하얗게 빛나는 손으로 그의 팔을 건드린 리먼이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를 의아해하는 느낌이었다. 세영이 더 기다리지 못하고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어요?” “이상하군요. 카라드에게서 미약한 저주의 기운을 느꼈습니다만,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입니다.” “저주라고요?” 뜻밖의 말을 들은 세영이 되물었다. 고개를 끄덕인 리먼이 생각에 잠겼다. 그를 쳐다보던 세영이 카라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순하게 눈을 깜빡이는 남자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조금 전에 날뛴 것이 거짓말 같았다. 그때 퍼뜩 고개를 든 리먼이 말했다. “세영님, 카라드에게 명령을 해보십시오.” “네?” “아무 명령이나 상관없습니다. 간단한 거면 더 좋고요.” 뜬금없는 말에 당황하던 세영이 손을 내밀었다. “손!” 카라드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척 올렸다. 올려놓고 움찔 놀라는 모습이 조금 귀여웠다. 그를 관찰하던 리먼이 고개를 끄떡였다. “역시 그렇군요. 세영님이 명령을 할 때마다 발동되는 저주인 것 같습니다. 상황으로 봐선 명령을 듣도록 강제하는 종류인 듯합니다.” “…네?” ──────────────────────────────────── 천공섬 (4) 세영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일그러졌다. 명령을 따르게 강제하는 저주라니, 기분 탓인지 굉장히 이상하게 들렸다. 퍼뜩 고개를 돌린 그녀는 카라드에게 변명했다. “제가 건 거 아니에요. 무엇보다 그런 저주는 알지도 못한다고요.” “예, 알고 있습니다.” 쓴웃음을 지은 카라드가 답했다. 그를 멀뚱멀뚱 쳐다보던 시디발라가 안심한 듯 말했다. “우와, 그럼 아까는 봐주지 말고 싸우라고 해서 그렇게 된 거야?” “아니, 전에는 안 그랬는데 왜 갑자기?” 카라드가 이상하게 행동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면 분명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자 마리엔이 알겠다는 듯 손을 들었다. “세영님은 평소에 ‘하는 게 어떨까요?’ 라던가 ‘하도록 하죠.’ 라고 권하는 식으로 말씀하시니까요. 그래서 그게 명령이라고 인식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 세영도 미처 몰랐던 습관이었다. 할 말을 잃은 그녀는 카라드를 바라봤다. 망연한 얼굴로 서 있던 남자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피했다. 그의 목에 걸린 노예 목걸이가 오늘따라 유독 거슬렸다. “…이 여우 새끼를 죽여 버리겠어.” 이 상황에서 의심할 거라곤 저 목걸이뿐이었다. 세영은 정말 놀랍도록 화가 나는 것을 느꼈다. 카라드가 어떤 처지인지 뻔히 알면서 푸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은 라오 조드에게도, 놈의 말에 홀랑 넘어가 의심 없이 목걸이를 채운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부드득 이를 간 세영이 카라드의 목으로 손을 뻗었다. 움찔한 남자가 찢어진 옷을 그러쥐었다. 그것이 꼭 정조의 수탈 앞에 놓인 사슴 같았다. “가만히 있어 봐요. 일단 그 망할 목걸이부터 풀자고요.” 고개를 휘젓던 카라드가 세영의 ‘명령’에 뻣뻣이 굳어졌다. 혀를 찬 세영이 목걸이를 우그러뜨릴 듯이 움켜쥐었다. “자, 잠깐만. 억지로 풀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세영님, 세영님! 일단 진정하십시오.” “아, 좀 놔 봐!” 목걸이 대신 카라드의 목을 뽑을 기세인 그녀를 동료들이 뜯어말렸다. 리먼이 황급히 말했다. “라오 조드는 아닐 겁니다. 이건 상당히 고급의 기술이니까요. 그가 그런 저주를 쓸 수 있었다면 곤란한 상황까지 몰리지도 않았겠지요.” “…….” 그제야 진정한 세영이 카라드의 목을 놓아주었다. 놀란 사슴처럼 물러선 남자를 디안과 시디발라가 보호하듯 둘러쌌다. 남자들의 방어에 뒤늦게 머쓱해진 세영이 뺨을 긁적였다. 그때 그녀의 손등에 시선이 닿은 리먼이 물었다. “세영님, 손등의 그 글자는 어쩌다 생기신 겁니까.” “아, 이건…….” 반사적으로 손등을 내려다본 세영이 멈칫했다. ‘설마 이것 때문인가?’ 결국, 세영은 결국 글자가 생기게 된 경위를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고백을 들은 카라드의 얼굴이 굳어졌다. “왜 진작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어, 안 그래도 기억이 없어서 힘들 텐데 저까지 고민을 얹어줄 필요는 없으니까요.” 변명처럼 말하자 카라드가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분명 맞는 말을 한 것 같은데 왜 저런 얼굴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세영은 그를 이해하기 포기하고 리먼에게 말했다. “저주라면 푸는 방법도 있겠죠?” “당연히 있겠지만, 제가 풀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군요. 카라드의 몸에 있다는 글자부터 살펴봐야겠습니다.” 리먼이 일단 보고 말해준다며 카라드를 끌고 갔다. 멍하게 끌려가던 카라드가 세영을 돌아봤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눈빛에 세영은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왠지 풀이 죽은 것 같은 남자가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시디발라가 세영에게 원망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그렇게까지 싫어할 건 없잖아.” “뭐?” “…나빴어.” 이해할 수 없는 비난을 던진 시디발라가 카라드의 뒤를 쫓아갔다. 세영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보다가 동료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진짜 잘못했냐는 뜻이었다. 슬그머니 눈을 피하는 디안과 마리엔을 보자 왠지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 천공섬은 말 그대로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섬이었다. 구름 사이로 초록빛 섬이 나타나자 성기사들이 의미 모를 환호를 질렀다. 단장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세영에게 설명했다. “천공섬은 저희 교단의 상징이자 자랑인 곳입니다. 조부 때부터 삼 대가 선업을 쌓아야만, 발이라도 붙여볼 수 있다는 말이 있지요. 그렇다고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신심이 깊고 정의로운 자만을 허락하는 성지 중의 성지니까요.” 말하는 도중 카라드를 힐끔 노려보는 것이 티가 나서 귀여울 지경이었다. 피식 웃은 세영이 말했다. “그럼 전 못 들어가겠네요. 신심도 없고 정의롭지도 않아서.”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구원자님은 자격이 충분하십니다!” 당황한 단장이 허둥지둥 수습에 나섰다. 생긴 것처럼 허술한 양반이 왜 자꾸 시비를 거는지 모를 일이었다. 카라드가 적국의 기사이긴 하지만, 단장의 행동엔 분명 과한 면이 있었다.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건가?’ 무슨 사정이든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다. 연약한 사슴을 성기사들이 득시글대는 곳에 끌고 온 것만으로도 미안했으니까. ‘사냥꾼이 될 정도로 실력 있는 놈은 없어 보이지만, 혹시 모르니 경계해야겠어.’ 세영은 신이 나서 떠드는 성기사들을 하나하나 스캔하듯 훑어봤다. 맹수의 시선을 느낀 성기사들이 점차 입을 다물었다. 새파랗게 질린 그들을 보다 못한 마리엔이 손을 흔들었다. “세영님, 이쪽으로 와서 같이 구경해요.” 고개를 끄떡인 세영이 동료들에게 다가갔다. 시디발라와 마리엔이 슬그머니 움직여 카라드의 옆자리를 비워주었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친절에 세영의 미간에 금이 그어졌다. ‘아니, 대체 왜?’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이상해서 느릿느릿 걸어 빈자리에 섰다. 눈에 띄게 당황하는 카라드를 보니 그도 이상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한숨을 삼킨 세영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섬을 노려보았다. 딱딱해진 분위기를 느낀 마리엔이 애교 있게 말을 걸었다. “진짜 하늘에 떠 있는 섬이라니 깜짝 놀랐어요. 전 천공섬이라는 이름을 들어도 일종의 비유 같은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게요.” 사실 게임에선 하늘에 떠 있는 섬이 그렇게 드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흔해서 온갖 차별화 전략을 쓸 정도였다. 화려한 라퓨타들을 섭렵한 세영에게 천공섬은 소박할 정도로 특징이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말하고 나니 너무 시큰둥하게 답했나 싶었다. 세영은 얼른 섬을 훑어보며 나름대로 특성을 찾으려고 애썼다. “어, 신기하네요. 그러니까 음, 뒤집힌 거북이처럼 생긴 게?” 윗면은 평평하고 아래는 둥그스름한 것이 딱 거북이 모양이었다. 반사적으로 풉 웃은 디안은 성기사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입을 가렸다. 미간을 찌푸린 세영이 돌아보자 흠칫한 성기사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그래도 계속 그녀가 보이는 곳에서 얼쩡거릴 기세였다. ‘와, 이걸 참다니. 나 성격 진짜 많이 죽었네.’ 세영은 지금의 대치 상태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구원자랍시고 숭배의 눈빛을 보내는 것도 불편했고, 동료들이 무시당하는 것은 화가 났다. 하루만 더 있었더라면 성기사들을 모조리 배 밖으로 던져버렸을 것이다. 못마땅한 얼굴로 팔짱을 낀 그녀가 중얼거렸다. “왜 섬으로 들어가지 않고 계속 멈춰있는 걸까?” “섬을 둘러싼 결계 때문인 것 같습니다.” 대답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세영은 뜻밖이라는 얼굴로 카라드를 돌아보며 물었다. “결계요?” “네, 저기 있는 투명한 벽이….” 카라드가 섬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길게 뻗은 손가락은 참으로 보기 좋았지만, 그것이 향한 곳은 텅 빈 허공이었다. 난간에 매달린 시디발라가 말했다.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저도 벽 같은 건 안 보여요.” 눈을 동그랗게 뜬 마리엔이 그의 말을 받았다. 이어서 디안도 고개를 저었다. 멈칫한 카라드가 손을 내렸다. 그때 기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리먼이 입을 열었다. “제 눈에도 보이지 않지만, 신성력에 가까운 어떤 힘이 섬을 감싸고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카라드는 특별히 잘 보이는 체질인 것 같군요.” 그러자 오오 하고 감탄을 흘린 동료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떡였다. 마리엔이 조금 부러운 얼굴로 “그런 것까지 보이다니, 굉장히 편하겠어요.” 하고 중얼거렸다. 세영은 의혹에 찬 눈으로 리먼을 바라봤다. ‘그런 체질이 있을 리가 없지. 신성력에 특화되지 않는 이상 힘을 느끼는 것도 힘들 텐데.’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은 리먼이 시선을 돌렸다. 세영은 그가 카라드를 위해 적당한 말로 둘러댔음을 깨달았다. “카라드의 말대로 천공섬에는 신성결계가 있어서 허가받은 배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은 입항을 원한다는 신호를 보내고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중일 겁니다.” “방문객은 우리뿐인 것 같은데, 허가 한번 하는데 더럽게 오래 걸리네요.” 세영의 툴툴거림에 리먼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투정을 부린 기분에 조금 민망해진 세영이 뺨을 긁적였다.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는 섬을 바라본 리먼이 덧붙였다. “조금 이상하긴 하군요. 대기 중인 방문객이 저희뿐이라는 것도, 입항 허가가 이렇게 오래 걸리는 것도 말입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기선을 제압하려는 목적이 아닐까 했지만, 리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카라드에게 시선을 돌린 그가 뭔가 다른 것은 보이지 않냐고 물었다. 잠깐 머뭇거리던 카라드가 입을 열었다. “좁은 공간에 많은 힘을 밀어 넣은 것처럼 결계가 불안정합니다. 지금 당장 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세영은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상황에 안 맞는 건 알지만, 힘이 소용돌이치고 있다며 손짓하며 설명하는 카라드가 꽤 귀여웠던 탓이다. 제게 사슴 애호 취향이 있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녀와 달리 심각한 얼굴로 변한 리먼이 말했다. “몇 년 전에 천공섬의 항구를 단 하나만 남기고 모조리 폐쇄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때는 뭔가가 와전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세영은 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섬을 바라봤다. 강한 햇빛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빽빽하게 나무를 심어 여기서 보이는 것이라곤 그저 초록색의 물결뿐이었다. “항구를 폐쇄한 것도 불안정한 결계 때문이라는 말이네요?”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겁니다. 다만 빛의 교단에서 세영님을 초대한 이유가 그렇게 간단할 것 같진 않군요.” 리먼의 말에 한숨이 나왔다. 퀘스트 넘어 퀘스트라니. 이런 것까지 게임을 닮을 필요는 없다고 투덜대던 세영은 섬에서 뭔가가 솟구치는 것을 발견했다. 반짝이는 원반과 같은 것이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왔다. ‘때아닌 UFO는 아닐 테고….’ 왜 저런 모양인지는 모르겠지만, 천공섬에서 나온 사자일 터였다. 기다리던 허가 대신 사람이 직접 온다는 게 왠지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저곳에 꼭 들어가셔야겠습니까?” 카라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안전을 추구하는 그로서는 섬의 상태가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세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보였다. “뭐, 들어가야죠. 그래야 왜 우릴 초대했는지도 묻고 그 저주도 풀지 않겠어요?” 저주라고 말하는 순간 카라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걸 본 세영도 아차 싶었다. 그에겐 예민한 문제일 텐데 너무 가볍게 입에 담은 것 같았다. 리먼은 결국 카라드에게 걸린 저주를 풀지 못했다. 온갖 애를 써도 카라드의 몸에 새겨진 글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한 리먼은 교황이라면 이것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빛의 교단은 해주술과 정화에 능한 곳이었다. 세영은 교황에게 요구할 조건에 저주의 해제도 덧붙이기로 했다. “어, 미안해요. 기분 나쁘게 하려는 게 아니고, 꼭 풀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은인께서는 제가 귀찮으십니까?” “네?” 이건 또 무슨 개 풀 뜯는 소리인가 싶었다. 황당해 하는 시선을 받은 카라드가 쓰게 웃었다. 무슨 말이냐고 다그치려는 순간 성기사들 쪽이 소란해졌다. 아까의 UFO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급히 내린 줄사다리를 타고 누군가가 갑판 위로 올라왔다. 근엄한 얼굴의 노인이었다. 짧은 머리에 바지를 입었지만, 얼핏 봐도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줄줄이 무릎을 꿇는 성기사들을 지나쳐 곧장 세영에게로 다가온 그녀가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빛의 첫 번째 종인 조안나라고 합니다.” ──────────────────────────────────── 천공섬 (5) 세영은 ‘빛의 첫 번째 종’이 교황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누군가 인사를 해오기에 그냥 마주 인사를 했을 뿐인데, 단장이 무례하다고 난리를 쳤기 때문이다. 상황을 정리한 것은 교황이었다. “구원자는 주신께서 부르신 손님. 그런 분을 일개 성직자 앞에 무릎 꿇으라 하는가.” 교황의 질책에 새파랗게 질린 단장이 바닥에 엎드렸다. 이어서 교황이 세영에게 무례를 용서해달라 청하며 고개를 숙였다. 당황한 세영이 손을 내저었다. “교황님을 못 알아본 것은 제 잘못이니, 이러실 필요는 없는데요.” “부디 조안나라고 불러주십시오. 구원자께 그리 불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정중하다 못해 부담스러운 태도에 세영은 더 말을 이을 수가 없게 되었다. 보다 못한 리먼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러지 말고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세영님, 이만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어쩔 줄 모르는 동료들과 달리 그는 지금 상황이 아주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결국, 일행은 황급히 세헤라자드의 내실로 들어갔다. “저기, 성하. 정말 수행원이 없으셔도 되겠습니까?” 디안이 뻣뻣하게 굳은 채로 물었다. 방안에는 동료들과 교황만 있을 뿐, 교단 측 사람들은 한 명도 없었다. 끝까지 따라 들어오려던 단장도 문 앞에서 내쳐진 상태였다. 빙긋 웃은 교황이 말했다. “일부러 비공식적인 방문을 한 것이니 수행원이 있을 필요는 없지요.” 세영은 조금 신기한 눈으로 교황을 바라봤다. 사실 교황이 여자일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게다가 흔히 떠오르는 자비로운 이미지가 아닌 소탈하고 근엄한 군인 같은 인상이었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교단으로 모셔야 마땅하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이렇게 외부에서 뵙게 되었습니다.” 차를 내놓는 것도 사양한 교황이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세영이 ‘신기’를 얻기 위해 모험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도움을 청했다고 설명했다. “가나트리 성당이 있는 모리아는 교단의 성지입니다. 마도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냈고 몬스터의 범람으로부터 수호하던 곳이었죠. 그러나 과거의 재앙으로 인해 교단은 모리아를 버리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리아를 수복하는 것은 교단의 숙원입니다.” 모리아는 마도와 빛의 교단 양쪽에서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분쟁지역이었다. 수많은 전쟁이 반복되었고 셀 수 없는 시체가 쌓였다. 그러나 ‘과거의 재앙’이 일어난 후에는 누구의 땅도 아닌 마경으로 남게 되었다. 한걸음 걸을 때마다 언데드가 발에 차이는, 시체의 땅으로 변해버렸으므로. “제게 원하시는 도움은요?” “가나트리 성당을 점령한 데스나이트들을 제거하는데 손을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교황의 요청에 세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교단의 도움을 받길 결심한 이유는 모리아가 말 그대로 시체밭이기 때문이다. 도둑길드에서 넘겨받은 정보를 종합해보면, 가나트리 성당에 닿기 위해 가로질러야 하는 통곡의 벌판은 끝없이 몰려드는 언데드를 해치우며 달려야 하는 맵이었다. 비행선을 타고 가는 방법도 생각해봤지만, 사실 비행 언데드들이 상대하기 더 까다로웠다. 제아무리 세영이라고 해도 사방에서 달려드는 언데드를 상대로 파티를 지켜내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밀대 역할을 해줄 성기사들이 필요했다. ‘성당 앞까지 밀어주고 보스만 처리해달라고 하니 이거보다 좋을 순 없긴 한데….’ 언젠가 느꼈던 찝찝함이 또다시 찾아왔다. 누군가가 상황을 이리저리 비틀어서 그녀에게 유리하게 맞춰놓는 느낌이었다. 잠깐 고민하던 세영이 입을 열었다. “기꺼이 도와 드릴게요. 대신 저도 교단의 도움을 받았으면 합니다.” “무슨 일이든 말씀하십시오. 빛의 종으로서 구원자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영광입니다.” 굳이 도움을 주지 않아도 발 벗고 나설 기세였다. 세영은 신의 사자라는 타이틀이 도움이 될 때도 있구나 생각하며 말했다. “빛의 교단 측에 과거 ‘봉인’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고 하던데, 혹시 내용을 아세요?” “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극비문서 중 하나입니다.” 극비문서라는 말에 의아해진 세영이 리먼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리먼이 어떻게 주신이 봉인되었다는 기록을 읽었는지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럼 이것부터 여쭤봐야겠네요. 주신 사하는 왜 현자들에게 봉인을 당해준 거죠?” “…세영님? 그게 무슨….” 처음 듣는 소리에 눈을 크게 뜬 디안이 물었다. 세영은 나중에 답해주겠다고 손짓을 한 다음 말을 이었다. “주신은 세상을 의미하는 신이라고 들었습니다. 그건 그가 곧 이 세상이란 뜻이고,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무슨 준비를 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겠죠. 애초에 그들이 멸망을 미리 알게 된 것도 주신이 원한 거 아닌가요?” 탑에서 나스쿤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생긴 의문이었다. 나스쿤이 몰랐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어서 대답해 달라는 시선에 쓴웃음을 짓고 있던 교황이 고개를 끄떡였다. “예, 맞습니다. 삼백여 년 전에 봉인 당한 것은 주신 스스로의 의지셨습니다.” 교황은 비의로 전해진 기록을 읽은 후 이것이 사실인지 신에게 여쭈었다. 그리고 역대 모든 교황이 같은 질문을 던졌다는 것을 알았다. 나스쿤이 권태기라고 표현한 것을 교황은 ‘오염’이라고 말했다. 주신은 오염된 자신이 ‘타락’할 것을 걱정하며 봉인을 준비했다. 봉인 속에서 오염이 더 진행되는 것을 막고 정화의 기회를 노리기 위해서였다. “그럼 봉인을 풀어 주신이 해방되면 세상이 멸망하는 것도 맞나요?” 세영의 물음에 교황은 그것은 자신도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 “해방된 주신께 달려있습니다. 봉인에서 풀려난 것이 그분이라면 세상이 유지되겠지만, 이미 타락해버린 마신이라면 이 별은 멸절할 것입니다.” 현자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몇백 년의 유예. 하지만 이제 세영이 불려 왔고 그것은 곧 봉인의 효용이 다했음을 의미했다. 주신이 봉인 대신 다른 방법을 쓰기 위해 풀려나길 원하는 건지, 아니면 마신이 세상을 멸하기 위해 해방되길 원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영은 한결 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라고 말한 교황이 처음으로 인자한 표정을 지었다. 헛기침을 한 세영이 슬그머니 손을 내밀었다. “저, 이것도 좀 봐주셨으면 하는데요.” 교황은 흥미로운 눈으로 세영의 손등에 새겨진 글자를 바라봤다. 세영은 기대를 담아 물었다. “저주라고 들었는데 이걸 풀어주실 수 있나요?” “음, 이건 제 힘으로는 안 되겠군요.” 난처한 표정을 지은 교황이 고개를 저었다. 교황조차도 풀 수 없는 저주라니…. 난감해진 세영이 카라드를 쳐다봤다. 무심한 얼굴로 앉아있던 남자가 눈이 마주치자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한눈을 파는 세영의 주의를 끌 듯 헛기침을 한 교황이 말했다. “여기서 모리아로 가려면 반드시 용의 계곡을 거쳐야 합니다. 그곳에 사는 용에게 물어보십시오. 그건 용들이 쓰는 글자이니 분명 좋은 답을 줄 겁니다.” “용들이 쓰는 글자요?” 세영은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손등을 내려다봤다. 고개를 끄떡인 교황이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용이 구원자께 저주를 새길 리는 없으니, 다른 자의 소행으로 보아야 할 것 같군요. 카벨 루스타나, 당신의 짓입니까?” “…읭?” “저자의 어미가 용을 섬기는 무녀라 들었습니다. 그 밑에서 자랐다면 분명 몇 가지 잔재주쯤은 부릴 수 있겠지요. 아무리 마도의 자식이라 하나 감히 구원자께 불경을 저지르다니.” 난데없이 카라드에게 불똥이 튀었다. 세영이 아니라고 부정해도 교황은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구원자를 잘도 속여 넘겼다며 분노하고 있었다. ‘아니, 자기 몸에 노예 만드는 저주를 거는 변태가 어디 있냐고!’ 마음 같아선 확 말해버리고 싶었지만, 카라드의 명예 때문이라도 쉽게 내뱉을 수가 없었다. 입만 벙긋거리는 세영에게 교황이 충고하듯 말했다. “구원자께서 저자를 거두신 뜻이 따로 있겠지만, 이번 정벌에서 그가 지닌 힘은 몹시 위험합니다. 되도록 멀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무슨 힘을 말하는 거죠?” 세영의 물음에 교황은 오히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셨습니까. 저자의 힘은 신성력을 봉인합니다. 신성력이 없다면 숨을 쉬기도 힘든 땅에서 그가 배신한다면 치명적일 겁니다.” “성하, 그는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확신을 담아 입을 연 것은 리먼이었다. 세영이 이야기했을 때와 달리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교황이 한숨을 쉬었다. “리먼 사제께서 그렇게 믿으실 때는 분명 이유가 있겠지요.” “두 분, 아는 사이였나요?” 세영이 리먼의 이름을 부르는 교황을 보고 조금 놀랐다. 멋쩍게 미소 지은 리먼이 답했다. “성하께서 아직 보좌에 오르시기 전에 치료사제로 잠깐 수행한 적이 있습니다. 원래 빛의 교단과 자애의 신전은 교류가 활발한 편입니다.” 단순히 그것만은 아닌 듯했지만, 본인이 그렇게 말하니 고개를 끄떡일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보다 진정된 것 같은 교황이 말했다. “앞선 6년 전의 정벌에서 교단은 성당의 바로 앞까지 진출했습니다. 그때 저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모리아의 수복에 성공했을지도 모릅니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도 모를 남자는 기묘한 힘이 깃든 검으로 성기사들을 베었다. 그의 검에 상처 입은 자들은 신성력을 쓸 수가 없었다. 선두가 무너진 상황에서 갑자기 들이닥친 데스나이트의 무리는 악몽이나 마찬가지였다. 교단은 급히 부상자들을 챙겨 후퇴해야 했다. 그때 상처를 입은 성기사들은 대부분 독기에 침식되어 사망하거나 폐인이 되었다. “성기사 중엔 그때의 원한을 잊지 못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교황은 카라드가 동행하면 성기사들의 반감을 살 수 있음을 경고했다. 세영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어차피 성기사들과 잘 지낼 생각도 없었다. 그녀가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을 눈치챈 교황은 그에 대해 더 언급하지 않았다. “달리 필요하신 것은 없으십니까. 교단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돕겠습니다.” “음, 지금은 딱히 필요한 게 없는데요. 생각나면 부탁드릴게요.” 너무 적극적으로 달려드니 오히려 요구할 것이 없었다. 그녀가 필요로 하던 것이 다 이뤄진 상태이기도 했다. 급히 대가를 궁리해 내는 것보다는 빚을 만들어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대화가 마무리되어가자 리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성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모리아 정벌을 결심하신 것과 지금 천공섬의 상태가 관련이 있습니까.” 교황의 얼굴이 굳어졌다. 다음 순간 한숨 같은 소리를 낸 그녀가 고개를 끄떡였다. “…리먼 사제까지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겠군요. 그렇습니다. 천공섬은 지금 폐쇄의 위기 앞에 놓여있는 상황입니다.” 천공섬을 둘러싼 결계는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교단을 보호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결계의 힘이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했다. 교단은 왜곡을 막기 위해 애썼지만, 섬이 완벽하게 폐쇄되는 것만을 늦췄을 뿐이었다. 교황은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있으면 누구도 드나들지 못하는 죽음의 땅이 되겠죠.” 유일한 해결책은 결계를 거두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결계의 역할에는 섬을 하늘에 고정하는 것도 있었다. 즉, 결계를 거두는 순간 천공섬은 더는 하늘에 떠 있는 섬이 아니게 된다. “저는 천공섬을 착륙시킬 장소를 찾고 있었습니다. 구원자께서 강림하신 소식을 들은 이후에는 모리아 정벌을 결심했지요. 이것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리아에서 언데드를 몰아낸 후 섬을 착륙시켜, 결계를 유지하던 신성력으로 오염된 땅을 정화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모리아를 수복함과 동시에 새로운 교단의 거점으로 만들려는 생각이었다. ‘이 아줌마, 내가 안 도와준다고 했으면 어쩌려고 그랬대. 저번 원정에 실패해서 머릿수도 꽤 줄어든 것 같은데.’ 세영은 조금 어이없는 기분으로 교황의 설명을 들었다. 이왕 듣는 김에 지도까지 가져와 펼쳐놓고 공략법과 시기를 의논했다. 서로가 만족할 만큼의 설명이 오간 후에야 의논이 끝났다. “교단으로 모시지 못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사죄드립니다. 대신 머무실 곳을 마련했으니 여독을 푸시고 편히 쉬셨으면 합니다.” 교황은 일행을 천공섬으로 초대하지 못함을 거듭 사과했다. 물론 세영은 입구가 언제 닫혀버릴지 모르는 섬보다 바닥에 붙어있는 저택이 더 좋았다. 수행원들에게 일행을 저택으로 모실 것을 당부한 교황은 다시 천공섬으로 돌아갔다. 원정과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섬을 비울 수 없기 때문이라 했다. 세영은 교황도 참 힘들구나 생각하며 동료들을 돌아봤다. “다들 저한테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동료들은 표정만으로 천 가지의 말을 쏟아내는 능력이 있었다. 특히 디안은 하고 싶은 말이 다른 사람의 배는 더 많은 것 같았다. 멋쩍게 뺨을 긁적인 세영이 말했다. “여기서 이야기하긴 그렇고 자리 좀 옮기죠. 오랜만에 술 한 잔씩 하는 건 어때요?” ──────────────────────────────────── 천공섬 (6) 술자리의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 자칫하면 앙금으로 남을 수 있는 문제도 술의 힘을 빌리자 쉽게 털어낼 수 있는 것으로 변했다. 세영이 아낌없이 들이부은 소주는 디안의 울분을 서러움으로 희석해 주었다. “아무리 제가 못 미더워도 그렇지,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숨기실 수가….” “에고, 미안해요. 전 디안이 괜히 마음고생 할까 봐 그랬죠.” “진짜 너무하십니다아.” “울지 말고. 자, 한잔 더해요.” 서러워하는 디안의 잔에 소주를 콸콸 따른 세영이 ‘마셔라~ 마셔라~’ 노래를 불렀다. 훌쩍거리던 디안이 커다란 잔을 단번에 쭉 비웠다. 마무리로 빈 잔을 머리 위에 탈탈 털기도 했다. “자, 이것도 먹어!” 맞은편에선 시디발라가 카라드의 입에 안주를 쑤셔 넣고 있었다. 유일하게 이벤트 영상에 걸리지 않은 남자를 보고 괜한 승부욕이 발동한 모양이었다. 주는 대로 얌전히 받아먹는 그를 보다 못한 세영이 말했다. “시디발라, 억지로 먹이지 마. 복불복이라 안 걸릴 수도 있다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멍하게 눈을 깜빡이던 남자가 배시시 웃었다. 세영은 ‘내가 안 괜찮다고!’ 하고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참았다. 술에 약한지 눈가가 발개진 사슴은 몹시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게다가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그녀를 보며 연신 방긋방긋 웃었다. 왜 자꾸 쳐다보는지 모르겠지만, 난처하다 못해 민망했다. 더 참지 못한 세영은 결국 극단적인 조치를 했다. 폭탄주를 만들어 카라드의 앞에 밀어놓은 것이다.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한 남자가 잔을 들더니 겨우겨우 다 마셨다. 괴로운 듯 찡그려진 얼굴이 세영을 보자 다시 웃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과 몽롱해진 눈동자가 전보다 몇 배는 더 요망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한계였는지 테이블에 기댄 상체가 휘청했다. 절로 감기는 눈을 뜨려고 애쓰던 카라드는 결국 기절하듯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잠들어버렸다. 그의 시선에서 겨우 풀려난 세영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너 진짜 나빠.” 갈 곳을 잃은 소시지를 내려놓은 시디발라가 툴툴거렸다. 디안이 거기 동의하듯 맹렬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어깨를 으쓱하던 세영은 마리엔까지 “이번에는 좀 심하셨어요.” 하고 거들자 찔끔했다. “아무리 귀찮아도 그렇지, 너무 불쌍하잖아.” 시디발라의 항의에 세영은 어이없는 시선을 보냈다. 카라드가 제가 귀찮으냐고 물었을 때처럼 괜히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내가 언제 귀찮아했다고 그래?” “…아니었어?” 시디발라는 오히려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동료들까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본 세영은 조금 심각해졌다. “다들 그렇게 생각해요?” “귀찮아하는 건 아니지만, 좀 책임감으로 대하시는 것 같다고 할까요.” 허허 웃은 리먼이 말했다. 눈치를 보던 디안이 조심스럽게 거들었다. “저는 싫어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리엔은 아니라고 했지만, 제가 볼 때는 좀 많이?” “진짜 오해거든요. 귀찮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고요.” 세영은 정말 억울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카라드를 챙겼는데, 동료들은 그녀를 악독한 계모처럼 보고 있었다. 뿌루퉁해진 그녀를 보고 한숨을 쉰 시디발라가 말했다. “카라드랑 너랑 말할 때 말이야, 처음엔 기억에 대한 이야기만 했잖아.” “그야 카라드가 기억을 잃었으니까?” “그 다음엔 목걸이를 어떻게 풀까에 대한 이야기만 계속했고.” “그거야….” “요즘에는 저주에 대한 이야기만 했잖아. 저주를 어떻게 하면 풀릴까 같은.” 무어라 변명하려던 세영이 입을 다물었다. 그가 뭘 말하려는지 감을 잡은 것이다. 싱긋 웃은 디안이 한마디 거들었다. “아니, 중간에 불면증 이야기도 하셨다고. 마도에 돌아갈 때까지 몸 상하면 안 된다면서.” 이어지는 비난의 시선에 끙 소리를 낸 세영이 이마를 짚었다. 다른 이야기도 했다고 항의하고 싶었지만, 대부분 샤이렌드라에서 주고받은 대화였다. “그거 말고 다른 화제가 없었다고. 달리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 “…마리엔이 머리에 묶은 리본 하나 가지고 한 시간 넘게 이야기했으면서.” “카라드 머리에 리본을 묶을 수는 없잖아.” “넌 카라드가 머리에 리본을 묶어도 ‘오, 그 리본 예쁘네요. 그러니까 우리 힘내서 저주를 풉시다.’ 이럴걸?” 세영의 변명에 샐쭉해진 시디발라가 투덜거렸다. 할 말이 없어진 세영이 뺨을 긁적거렸다. 화기애애하게 떠들기엔 가해자와 피해자, 게다가 미래의 적이라는 관계다. 거기다 노예 목걸이 사건에 민망한 저주까지 더하면 친한 척하기도 미안한 수준이었다. 괜히 부담을 줄까 봐 의식적으로 대화를 피했던 면도 있었다. “전 그냥 카라드 씨에게 전혀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카라드 씨는 계속 세영님 주변에서 맴도니까 조금… 가여워 보여서요.” 그때까지 눈치만 보던 마리엔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열렬히 고개를 끄떡이는 동료들 사이에서 세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맴돌아요? 대체 언제요?” 그러자 화들짝 놀란 마리엔이 “진짜 모르셨어요?” 하고 되물었다. 세영은 정말 모르겠다고 고개를 끄떡일 수밖에 없었다. 마리엔은 ‘이걸 말해도 되나?’ 하고 고뇌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게… 세영님은 다른 사람들과 카라드 씨가 같이 있으면, 그대로 인사만 하고 휙 지나가 버리시잖아요.” “아니, 그건….” 잘 놀던 남자가 저만 보면 뻣뻣하게 굳어버리니까, 나름대로 생각해서 자리를 비켜준 거였다. 하지만 카라드에겐 그게 싫어서 피하는 거로 보였는지 매번 심하게 풀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가 끼어 있으면 세영님이 제 옆에 앉아서 이야기도 하고 말도 걸고 하시니까. 되도록 제 근처에 있으려고 하는 느낌이거든요. 그게 너무 티가 나서 부끄럽다고 해야 하나.” 말하면서 얼굴이 빨개진 마리엔이 두 뺨을 가렸다. 세영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가끔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을 보긴 했지만, 각자의 일을 하고 있기에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해해요. 세영님은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분이시잖아요. 제가 카라드 씨 입장이었으면 저, 정말 견디기 힘들 것 같아서….” 마리엔은 상상만 해도 괴롭다는 듯이 눈물까지 글썽였다. 그것을 본 세영은 처음으로 제가 좀 심했나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어서 팔짱을 낀 시디발라가 투덜거렸다. “어떻게든 친해지고 싶어서 얼쩡거리는데, 매번 뻥뻥 차이니까 보는 사람이 더 민망하단 말이야. 적당히 하라고.” “아니, 내가 뭘 뻥뻥 찼다고….” 구시렁거리던 세영은 동료들의 날카로운 시선에 헛기침을 했다. 머리를 긁적인 그녀가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럼 좀 더 다양한 화제로 말하고, 카라드가 있어도 자리를 피하지 않으면 되는…거지?” “…….” “…아니야?” 동료들이 일제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디발라는 한숨까지 포옥 쉬었다. 그는 어린애에게 설명하듯 차근차근 말했다. “네가 카라드는 기억이 없어서 불안정한 상태라고, 가족처럼 의지할 수 있는 것에 집착할 거라고 했잖아.” “…그랬지.” “그런 애가 기억 잃고 깨어나서 처음 본 것도 너고, 위험할 때 구해준 것도 너고, 제일 세니까 믿을 수 있는 것도 너고. 자연히 너한테 의지할 수밖에 없잖아.” “그…런가?” “그런데 너는 조금 친해진 것 같다고 생각하자마자 무시하고, 이름도 안 가르쳐주고, 말 걸어도 제대로 안 받아주고, 저주 걸렸다니까 진짜 싫다는 표정 짓고, 어떻게든 빨리 떼어버리려고 하잖아.” “아니, 그건….” 결국 세영은 변명을 그만둔 채 한숨을 쉬었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해도 상대가 상처를 받았다면 그녀의 잘못이었다. 물론 남이야 상처받든 말든 상관없다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동료들과 카라드는 약간 예외에 속했다. 항복하듯 양손을 들어 올린 그녀가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돼?” 교황이 내어준 저택은 작지만, 몹시도 아름다웠다. 대놓고 사치를 부릴 수 없으니 은근슬쩍 돈을 바른 느낌이었다. 정원과 이어지는 호수에는 뒤룩뒤룩 살찐 백조들이 떠다녔다. 세영은 시끄럽게 꽥꽥거리는 놈들에게 빵조각을 던져주며 생각했다. ‘혹시 식용으로 키우는 건가?’ 살찌고 기름진 모양새가 구워 먹으면 딱 맞을 것 같았다. 세영의 시선에 위기감을 느낀 백조들이 퍼드득거리며 도망쳤다. 세영의 옆에서 빵조각을 나눠주던 카라드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근처의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앉을래요?” 옆자리를 툭툭 두들기며 묻자 망설이던 카라드가 조심스럽게 옆에 앉았다. 세영은 일부러 먼 호수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일단 초반 조건은 클리어했고.’ 조용한 곳으로 불러낸 다음 실없는 짓도 함께 했다. 적당히 분위기도 잡힌 것 같으니, 오해를 풀고 사과를 하면…. “제가 무슨 실수라도 한 겁니까.” 침울한 목소리에 움찔한 세영이 옆을 돌아보았다. 죄인처럼 눈을 내리깐 카라드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혹시 술에 취해 은인께 무례한 짓을 저지른 거라면….” “아니, 그게 아니라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부른 건데요.” 당장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에 놀란 세영이 그를 말렸다.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빡인 남자가 그녀를 바라봤다. 숙취로 고생하는 동료들과 달리 부기 하나 없이 청초한 얼굴이었다. 이쯤이면 종족이 아예 다른 게 아닐까 싶었다. “음, 뭔가 좀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요. 저는 카라드가 귀찮다거나 싫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굉장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헤어지는 것도 좀 아쉽다고 할까.” “…….” “그리고 저주로 엮여서 싫었던 게 아니라, 경솔하게 목걸이를 채운 저 자신에게 화가 난 거였어요. 그때는 목걸이 때문에 저주에 걸렸다고 생각했거든요.” 말을 마친 세영은 힐끔 카라드의 안색을 살폈다.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보던 카라드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시디발라가 무슨 말을 한 모양이군요.” 이상하게도 그는 무척 비참해 보였다. 고이 숨겨온 비밀을 짓밟힌 것처럼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영은 제가 그를 상처 입힌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시디발라만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뭐, 제가 너무 심했다고 이런저런 말을 들었어요. 근데 정말 싫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 해야 서로가 편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왠지 말을 하면 할수록 늪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세영은 식은땀을 흘리며 카라드를 바라봤다. 시든 꽃처럼 고개 숙인 남자 앞에 앉아 있느니, 혼자 레이드를 백번 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한참을 말이 없던 카라드가 입을 열었다. “제가 적이기 때문입니까?” “아직 적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적이 될 거라서 꺼린 것도 아니고. 그건 알죠?” “…….” 모르는 것 같았다. 세영은 더 이상 설명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녀까지 입을 다물자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초조함을 견디지 못한 세영이 멀리서 꽥꽥거리는 백조를 때리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쯤이었다. “만약 마도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머뭇거리며 흘러나오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손을 뻗어 그의 입을 틀어막은 세영이 싱긋 웃어 보였다. “나중에 후회할 말은 안 하는 게 좋아요. 나중에 정말 의지해야 할 가족들을 만나면 지금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게 부끄러울 걸요.” “…….” “그리고 그때쯤이면 당신을 배신자로 만든 제가 원망스러울 거예요.” 얌전히 듣고 있던 카라드가 세영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뜻밖의 행동에 놀란 세영이 눈썹을 까딱 치켜들었다. 카라드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화가 난 것 같았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은인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 이번에 할 말을 잃은 것은 세영 쪽이었다. 잠깐 머뭇거리던 그녀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건 고맙긴 한데, 일단 이거 좀 놔주실래요?” 화들짝 놀란 카라드가 움켜잡은 손목을 놓았다. 순식간에 새빨간 사슴으로 변한 그가 죄송하다고 사죄했다. 할 말이 없어서 허허 웃은 세영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세영이에요. 좀 많이 늦은 인사긴 하지만, 남은 시간 동안은 친하게 지내요.” “…….” “아, 명령이 아니라. 음, 친하게 지냅시다? 친하게 지내주세요?” 멍한 눈으로 세영을 바라보던 카라드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세영은 제 손을 가만히 잡고만 있는 그의 손을 몇 번 흔들고 놓아주었다.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이 민망해서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이만 들어갈까요? 다른 사람들이 기다릴 것 같은데.” 고개를 끄떡인 카라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서 걷는 세영의 뒷모습을 보고 뭔가를 망설이던 그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세영님.” “네?”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한 세영이 그를 돌아보다 흠칫했다. 환하게 웃는 사슴을 보자 눈이 부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반짝반짝 빛나는 미소에 반쯤 얼어버린 그녀가 얼떨떨하게 물었다. “왜, 왜요?” 싱긋 웃은 사슴이 도리도리 필살기까지 선보였다. 타격을 입은 심장이 ‘저 사슴은 해로운 사슴이다!’ 라고 항의했다. 아까까지 땅을 파던 남자가 갑자기 반짝반짝 빛을 내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시디발라의 추궁에서 벗어날 것 같았다. 모두가 만족하는 결말이었다. ──────────────────────────────────── 용의 계곡 (1) 일행은 <세헤라자드>를 타고 먼저 용의 계곡으로 출발했다. 교황은 성전기사단과 함께 출정하길 원했지만, 단호한 거절에 할 수 없이 물러났다. 대신 본대와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성기사들을 파견했다. 세영은 사슴에게 집적거리면 배 밖으로 던져버리겠다고 경고한 후 그들을 받아들였다. “정말 우리끼리 출발해도 괜찮을까요?” 동료들 역시 선발대가 된 부담감을 느끼는 듯했다. 저택에 있는 동안 모리아에 대한 온갖 흉흉한 소문을 들은 탓이었다. 세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모리아로 바로 쳐들어가는 게 아니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계곡에 대기하면서 기사단이 도착할 때까지 훈련할 생각이거든요.” “훈련…이요?” “네, 마침 이번 퀘스트와 딱 맞는 몬스터가 있어서요.” 세영이 노리는 것은 용의 계곡에만 서식한다는 독개구리였다. 중독 속도가 느린 독에 약간의 타격만 줘도 쉽게 잡을 수 있는 것이 매력 포인트다. 레벨도 제법 높아서 스킬을 수련하기엔 최적이었다. “큐어 포이즌과 블레이드 스톰의 레벨을 올릴 기회예요. 물론 다수를 상대로 하는 스킬에도 적절하고요. 단기간에 최대한 스킬 레벨을 올리는 걸 목표로 합시다.” 물론 올리는 내내 독기에 피를 토하고 굴러다녀야겠지만, 자세한 설명은 생략했다. 멋모르는 동료들은 “오오, 역시 세영님! 그런 깊은 뜻이!” 하고 좋아했다. 세영은 동공지진을 일으키는 카라드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움찔한 사슴이 고개를 숙였다. ‘사실 그것만은 아니지만 말이야.’ 교황의 목적이 ‘모리아 정벌’이라면 세영의 목표는 ‘던전 공략’이었다. 두 개의 목표는 같은 것 같아도 상당히 달랐다. 잘못하면 정벌의 밑거름으로 쓰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 세영은 본대와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성기사들은 던전에 도달하기 위한 밀대일 뿐 공략의 주체가 되어선 안 되니까. 또한, 모리아는 대량의 희생을 요구하는 맵이다. 성기사들이랑 붙여두었다가 쓸데없는 정이라도 들면 곤란했다. 마음 약한 동료들은 함께 지내던 사람들이 픽픽 죽어 나가는 걸 견디지 못할 것이다. ‘뭐, 내가 할 소리는 아닌가.’ 세영은 수줍은 시선을 던지는 사슴을 힐끗거리며 생각했다. 아무리 길어봤자 모리아에서 헤어질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동안 정이 들었는지, 상처받은 얼굴이 신경 쓰이고 마음이 갔다. 우울하게 고개 숙인 모습을 보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아니, 나라도 정신 차려야지.’ 세영은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을 홀리는 사슴에게서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동료들이 자꾸 이상한 분위기로 몰고 가서 그렇지, 카라드의 태도는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그녀에게 보이는 호의도 이성적인 호감보다는 동료로서의 동경에 더 가까웠다. 그래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오해하기 충분한 태도이긴 했다. 심란한 마음과 달리 항해는 순조로웠다. 쾌속선인 세헤라자드는 비행선으로도 일주일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사흘 만에 주파했다. 오늘 밤이면 용의 계곡에 도착할 거라는 전언을 들은 세영은 기분이 꽤 좋아져 있었다. “회개하십시오! 세상의 육욕은 한순간에 지나가나 정의는 영원히 거하는 법입니다!” 선실에 처박힌 카라드를 산책시킬 겸 목줄을 매어 끌고 나온 참이었다. 갑자기 앞을 가로막은 성기사가 왈왈 짖어댔다. ‘욕정’이 어쩌고 ‘침실노예’가 어쩌고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떠드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세영이 카라드에게 물었다. “밖으로 던질까요?” “…던지는 건 너무 심하고, 적당한 곳에 매달아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흠.” 고개를 끄떡인 세영이 카라드의 목에 묶인 줄을 풀었다. 비뚤어진 목걸이를 바로 잡은 카라드가 곧장 성기사에게 주먹을 날렸다. 방어할 틈도 없이 관자놀이를 얻어맞은 성기사가 풀썩 쓰러졌다. 언제 봐도 깔끔한 솜씨였다. 방해꾼을 배 밖에 매달아 놓고 돌아온 사슴이 세영에게 모가지를 내밀었다. “굳이 목줄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세영의 거부에 카라드가 의아한 듯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팔랑거리는 것을 본 세영은 한숨을 삼키며 줄을 연결했다. 알고 쓰는지 모르고 쓰는지 알 수 없지만, 미인계란 것이 참 무서웠다. 그제야 고개를 든 사슴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생각보다 안개가 짙군요.” “이 동네는 항상 그렇다고 하던데요. 계곡 가까이 가면 속도를 줄여서 이동할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하지만 이런 상태에서 공격을 받는다면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잠깐 머뭇거리던 카라드가 우려를 표했다. 일리 있는 말이지만, 허공에서 공격을 가해올 몬스터는 몇 되지 않았다. 가고일이나 와이번 정도가 아니면 큰 위협도 안 될뿐더러 용의 서식지 근처에서 사냥할 리도 없었다. “괜찮을… 응?” 막 괜찮다는 말을 하려던 세영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안개 너머에서 뭔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더 생각할 틈도 없이 뱃전으로 달려가 정글도를 꺼내 들었다. 끈 때문에 함께 끌려온 카라드가 “세영님?” 하고 불렀지만 답해줄 상황이 아니었다. “윈드 블레이드!” 정글도 끝에서 뻗어 나간 다섯 줄기의 바람이 안개를 갈랐다. 세헤레자드로 돌진하던 것이 황급히 몸을 뒤집으며 반대쪽으로 날아갔다. 짧은 순간이지만, 놈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하마!?’ 그것도 날개 달린 하마였다. 정체불명의 생물을 본 세영이 당황하는 사이 반대편으로 날아간 하마가 입에서 불을 뿜어냈다. 화염방사기처럼 길게 뿜어진 불꽃이 배를 새까맣게 그슬렸다. “이런 씨발!” 뱃전에 불이 붙은 것을 발견한 세영이 뛰쳐나가려다 멈칫했다. 황급히 카라드의 목에 걸린 줄을 풀어준 그녀가 말했다. “매달아 놓은 사람부터 회수하고, 동료들에겐 공격 대신 화재진압을 맡아달라고 전해주세요.” “저도 도울 수 있습니다.” “알아요. 그러니까 부탁하는 거잖아요.” 잠시 세영을 바라보던 카라드가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하고 몸을 돌렸다. 세영은 곧장 배를 공격하고 있는 하마를 향해 달려갔다. “블레이드 스톰!” 일직선으로 날아드는 하마를 향해 스킬을 날리자 날개를 뒤로 젖힌 놈이 순식간에 방향을 바꿨다. 세영은 바둑알처럼 튕겨드는 놈을 향해 찌르듯이 정글도를 뻗었다. “드래곤 테일!” 도 끝에서 화살처럼 튀어 나간 스킬이 하마의 몸을 꿰뚫었다. 하지만 하마는 뒤로 밀려나거나 멈칫하는 일도 없이 곧장 날아와 배와 충돌했다. 충격으로 뒤로 튕겨 나간 세영이 갑판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스킬무효라고?’ 유효타격을 넣었는데도 몬스터가 뒤로 밀려나지 않는 현상이었다. 중급 이상의 보스 몬스터에게서나 나타나는 기술이 날아다니는 하마에게서 발견되다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설마 마법 스킬도 무효인 건 아니겠지. 그럼 진짜 엿 되는 건데.’ 땅 위에서라면 이리저리 피해가며 주먹을 꽂아 넣으면 된다. 밀려나거나 굴러다니지 않을 뿐 타격은 그대로 받기에 언젠가는 쓰러진다. 문제는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이 비행선 위라는 것이다. 단시간 내에 처리하지 않으면 배가 추락할 위험이 있었다. “끄와앙!” 기묘한 울음소리에 고개를 들자 배에 처박힌 하마가 버둥거리고 있었다. 거세게 충돌해서 타격을 준 것까진 좋았는데 몸이 끼여서 움직일 수가 없게 된 모양이었다. 갑판에 끼인 투실투실한 엉덩이가 정신 사납게 흔들렸다. “이건 또 뭐….” 어이없는 상황에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몸을 일으킨 세영은 전력으로 달려가 하마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끄앙! 하는 구성진 비명이 터졌다. 역시 중급 보스 이상인지 한 방에 죽지는 않았다. 세영은 동료들이 나오기 전에 놈을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주저 없이 주먹을 뻗었다. 그때 발밑이 화끈해지더니 거센 불기운이 치솟았다. 연타를 날리려던 세영은 황급히 몸을 뒤로 빼냈다. 갑판에 시커먼 구덩이가 생기며 자유로워진 하마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불꽃을 내뿜어서 몸 주변을 태워버린 것이다. “세영님!” 동료들이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최악이라면 최악이라 할 수 있는 타이밍에 당황한 세영이 입을 벙긋거렸다. 정확히는 그녀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동료들이 먼저 움직였다. “운딘의 키스!” “신성한 철퇴!” 안개를 끌어모은 물의 장막이 생기자마자 리먼의 스킬이 거기 충돌했다. 크게 일렁거린 장막이 눈 부신 빛을 반사했다. 갑작스럽게 시야가 막힌 하마가 끄엥! 하는 기괴한 소리를 내질렀다. 때를 놓치지 않고 시디발라와 디안의 스킬이 놈의 몸통을 두들겼다. “세영님, 어서요!” 워터볼을 하마의 콧구멍에 처박은 마리엔이 소리쳤다. 세영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갑판 위를 가로질렀다. 하마의 등 위로 뛰어오른 그녀가 연속기로 놈을 후려 패는 동안 동료들은 끊임없이 시야를 가리고 숨통을 틀어막으면서 발목을 잡았다. “그만, 쿱, 푸웁, 해!” 정신없이 두들겨 맞던 하마가 날개를 홱 떨쳐 세영을 밀어냈다. 바로 그때 카라드가 던진 올가미가 놈의 목에 걸렸다. 하마는 목을 당기는 줄을 물어뜯어 끊으려 했지만, 마법으로 강화한 로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감히!” 분노 어린 외침을 토해낸 하마가 후우웁 숨을 들이켰다. 불꽃을 뿜어내기 위해서였다. 새파랗게 질린 마리엔이 있는 힘껏 장막을 펼치며 외쳤다. “다들 피해요!” 바로 그때, 세영이 인벤에서 뭔가를 꺼내 하마 쪽으로 던졌다. 빛과 같은 속도로 날아간 그것은 불을 내뿜기 위해 벌어진 놈의 입속으로 쏘옥 들어갔다. 컥! 하고 숨을 멈춘 하마가 눈을 부릅떴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다음 순간 하마의 몸이 살충제를 맞은 파리처럼 빙글빙글 돌며 추락했다. 카라드가 황급히 역중력을 걸었지만, 놈이 갑판에 떨어지는 순간 배 전체가 우르릉 흔들렸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하마를 멍하게 바라보던 디안이 물었다. “세, 세영님. 방금 뭘 던지신 겁니까?” “치킨이요.” 세영이 비장한 얼굴로 답했다. “아….” 하고 낮은 감탄을 흘린 디안이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눈으로 하마를 바라봤다. 동료들의 얼굴도 덩달아 오묘해졌다. “일단 묶어야 할 것 같습니다. 치킨 때문이라면 얼마 못 가서 정신을 차릴 테니까요.”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카라드가 말했다.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표정의 동료들이 고개를 끄떡였다. 결국, 하마는 마법으로 강화한 사슬로 꽁꽁 묶이게 되었다. 불꽃을 내뿜지 못하도록 입안에 있는 가스선도 단단히 봉했다. “정말 그렇게만 막아놔도 괜찮아요? 불을 뿜으면 금방 녹아버릴 것 같은데.” 세영이 밀랍으로 작업 중인 카라드에게 물었다. 하마의 입속에서 상체를 빼낸 카라드가 싱긋 웃어 보였다. “외부에서 불이 붙기 전에는 전혀 뜨겁지 않으니까요.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 그렇구나. 그런데 그걸 어떻게 다 알아요?” 처음 보는 생물인데도 다루는 법을 알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세영의 물음에 뒤늦게 깨달은 표정을 지은 카라드가 고뇌하기 시작했다. 끙끙거리는 사슴을 보다 못한 세영이 피식 웃었다. “보자마자 저절로 떠오른 거예요?” “…예.” “어쩌면 마도엔 이런 생물이 많은 거 아닐까요?” “아뇨, 이건… 용일 겁니다.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카라드의 대답에 세영의 눈이 둥그레졌다. 그녀는 아무리 봐도 날개 달린 하마에 지니지 않는 것을 가리키며 물었다. “설마 여기의 용은 다 이렇게 생겼어요?” 황급히 고개를 저은 카라드가 무어라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입을 열려는 순간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더니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의아해진 세영이 “왜 그래요?” 하고 되묻자 도리도리로 타격을 입혔다. 보다 못한 리먼이 대신 설명에 나섰다. “번식기에 짝을 구하지 못한 용이 다른 생물과 결합하면 이런 혼혈용이 태어나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용마나 용인도 비슷한 사례라고 할 수 있지요.” “아, 그러니까 지나가는 하마를 용이 덮쳐서 생긴…?” 쓴웃음을 지은 리먼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 옆에선 홍시가 된 카라드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하마라니, 취향 한번 독특한 용이었다. 바로 그때 옆에서 새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니야! 아버지는 우리 엄말 진짜로 사랑하셨단 말이야!” 세영은 힐끗 시선을 돌렸다. 언제 깨어났는지 분노한 하마가 씩씩거리며 콧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놈이 바락바락 소리쳤다. “엄마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누가 뭐라고 해도 진실한 사랑을 하셨다고 그랬어!” 귀를 후벼 판 세영이 신기한 듯 중얼거렸다. “말도 하네?” “아까도 했었다고!” “아, 그랬지. 워낙 말 같지도 않아서 까먹었네.” 하마와 용의 진실한 사랑이라. 하긴 인간과 용의 사랑 이야기도 많은데, 하마와 용의 사랑이 불가능할 리는 없었다. 어차피 용의 눈에는 인간이나 하마나 그게 그거일 테니까. “그런데 네 엄마 아니, 어머니가 그 상황에 동의했는지는 너도 모를 거 아니야. 동의 없으면 그거 강간인데.” “…….” “뭐, 어차피 말이 안 통하니 상관없나.” 하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동물의 얼굴이 파래지는 것을 처음 본 세영은 조금 신기해했다. 다음 순간 쩍 벌어진 하마의 입에서 빼애액 울음소리가 터졌다. “흐애애애애앵! 엄마아아아!” “야, 시끄러워!” 귀를 틀어막은 세영이 하마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하지만 하마는 꿋꿋하게 울어댔다. 짜랑짜랑한 울음소리가 온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세영이 놈의 입에 재갈을 물릴까 고민하는 순간이었다. 골짜기 왼편이 우르릉 흔들렸다. 다음 순간 절벽을 이루는 바위들이 배를 향해 쏟아졌다. 때아닌 산사태에 당황한 세영이 떨어지는 바위를 향해 정글도를 휘두르려는 순간이었다. 배의 바로 위에서 바위가 정지했다. 거짓말처럼 벌어진 바위들이 부드러운 목소리를 토해냈다. “무슨 일이니, 후와와?” “뭐야, 애가 왜 갑자기 우는 거야?”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용이 긴 목을 구부려 배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 용의 계곡 (2) 용은 무척 거대했다. 제자리에 웅크리고 앉은 모양이 꼭 무너진 종탑 같았다. 오래된 바위처럼 거친 암녹색 피부에는 계란색의 점이 콕콕 박혀 있었다. 주변의 바위와 색이 비슷해서 절벽으로 착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으에에엥! 흐애애애앵!” 제 편이 나타나자 하마용은 더욱 우렁차게 울었다. 시력이 좋지 않은 건지 배 쪽으로 바싹 다가온 용의 눈알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후욱 내뿜는 숨결에서 아릿한 유황 냄새가 났다. 꽁꽁 얼어붙은 동료들 사이에서 시디발라가 말했다. “아, 아빠가 하마였어?!” “지금 그게 문제야?” 디안이 꽥 소리를 질렀다. 황망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본 시디발라가 “엥? 그럼 뭐가 문젠데?” 하고 되물었다. 그에 답하듯 하마용이 빼액 소리쳤다. “우리 아버지는 용이야. 멍청한 쥐새끼야!” “뭐, 뭣? 이 더러운 하마 새끼야. 내가 왜 쥐새끼야!” “나, 나한테 하마 새끼라고 하다니! 아버지한테도 들어본 적 없는데!” “네 아빠는 하마 애호가니까 그렇지. 하마 새끼야!” “너어, 너 말 다했어?!” 하마와 쥐가 꽥꽥거리며 싸우는 사이 세영은 정글도를 어깨에 걸친 채 앞으로 나섰다. 데굴데굴 구르던 용의 눈알이 세영에게 고정되었다. 세영이 소리쳤다. “어이, 아줌마!” “응?” 용이 커다란 눈을 껌뻑였다. 또 다른 머리가 다가오더니 신기한 듯 말했다. “인간이네? 인간이 언제 계곡에 들어왔지?” “뭐야, 인간이라고? 그런데 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 처음의 머리가 킁킁하고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세영은 정글도로 하마용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하마 엄마가 당신이야?” “아니.” “아닌데.” 두 개의 머리가 동시에 답했다. 예상외의 대답에 멈칫한 세영이 “아니라고?” 하고 되물었다. 뒤에서 하마용이 “난나랑 난마는 우리 엄마 아냐!” 하고 버럭 댔다. 시끄럽다고 일갈한 세영이 쌍두룡을 향해 말을 이었다. “어쨌든 댁네 하마가 이 배를 다짜고짜 공격해서 새카맣게 태워버렸다고. 남한테 빌린 배인데 이거 어떻게 책임질 거야?” “으으응?” 용이 두 머리를 갸웃거렸다. 세영은 그게 정말 못 알아들은 게 아니라 못 알아들은 척하는 것임을 눈치챘다. 지그시 노려보자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 머리들이 “진짜야?” “탄내가 나긴 나는데.” 하고 속닥거렸다. 워낙 커서 속닥거리는 소리까지 다 들렸다. “교황이 그러던데. 여기 사는 용들은 사람을 해치지 않고 얌전히 지내는 대신 매해 교단의 공물을 나눠 받는다고.” 교황이 구원자인 세영에게 위험한 길을 추천할 리가 없었다. 계곡의 용들에게 가보라고 권한 것에는 교단의 영향력을 과시하려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그런데 세영이 탄 배가 습격당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사실은 얌전히 지낸다고 해놓고 몰래 여행객을 습격해서….” “어머머, 이게 무슨 말이니. 우릴 뭐로 보고 그런 소리를 함부로 해!” 서둘러 세영의 말을 끊은 용이 날개까지 파르르 떨며 소리쳤다. 심상찮은 반응에 세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마용의 잘못을 부각할 생각으로 한번 찔러본 건데 어째 구린 냄새가 풀풀 났다. “…진짜 털었냐?” “새, 생용 잡는데도 정도가 있지! 증거도 없이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얘!” “허 참, 요즘 인간들은 용 무서운지도 모르고.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지 원.” 말세라고 떠들어대던 용이 세영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폈다. 그래 봤자 초점이 맞지 않아 제대로 보진 못하는 것 같았다. 한숨을 삼킨 세영이 너그럽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너희가 다른 사람을 습격했든 말든 관심 없거든. 문제는 내가 습격받은 거야. 적절한 보상만 해주면 교단 쪽엔 입 다물어 줄 수도 있는데, 어때?” ‘보상’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두 개의 머리가 동시에 똥색으로 변했다. 커다란 눈알만큼 화려한 동공 지진을 선보인 용이 냉큼 갑판 위에 널브러진 하마용을 집어 들었다. “애, 애가 아직 어려서 실수한 것 같네. 호호, 미안해?” “그래, 다들 실수하면서 크는 거지 뭐. 보상은 무슨. 여행 잘하고 앞으로 보지 말자!” 커다란 몸집과 어울리지 않게 잽싸게 몸을 돌린 용이 그대로 도망치려고 했다. 물끄러미 용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세영이 중얼거렸다. “나 일주일 뒤에 교황 만나는데…….” 도망치던 용이 덜컥 정지했다. 세영은 그 위에 쐐기를 박듯 “보상이 꼭 돈이나 보석이 아니라도 될 것 같고.” 하고 덧붙였다. 순식간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용이 갑판 위에 하마용을 내려놓았다. “새, 생각해보니까 이대로 가면 애 교육에 안 좋을 것 같네. 자기 잘못은 책임져야지.” “맞아, 그래야 책임감 있는 용으로 클 거 아니겠어.” 맞장구를 치는 머리들을 빤히 올려다보던 세영이 피식 웃었다. 그 옆에서 동료들은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고 있었다. 결국, 세영과 동료들은 용의 둥지로 초대받았다. 성기사들과 선원들은 초대받지 못했고 아마 받아도 거부했을 것 같았다. 쌍두룡은 일행을 손수 둥지까지 옮겨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황금과 보석과 같은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라면 뭐든 해줄 기세였다. 용의 품에 안긴 채로 아래를 구경하던 세영이 말했다. “이대로 모리아로 쳐들어가서 성당을 뿌셔뿌셔 해달라고 부탁해볼까.” “아니, 그건 좀 힘들 겁니다. 용들은 천성이 게을러서 웬만해선 자신의 둥지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거든요.” 특히 암컷용은 번식기에도 귀찮다고 둥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덕분에 상대를 찾지 못한 수컷용이 다른 종족을 덮치는 비극이 일어나곤 했다. 얼굴이 붉게 물든 카라드가 항의하듯 말했다. “모든 용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현명하고 자애로운 용도 있습니다.” “아, 이런. 제가 실수했군요. 모욕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당황한 리먼이 사과했다. 괜찮다고 고개를 흔든 카라드가 세영에게 “정말입니다.” 하고 호소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것이 귀여워서 피식 웃은 세영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마도에선 용을 신으로 섬긴다고 들었어요. 진짜예요?” “에레슈키갈 이야기니?” 쌍두룡의 머리 중 하나가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처음 듣는 이름에 세영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에레슈… 뭐라고?” “에레슈키갈. 우리 중 하나였지. 정말 아름다운 그림자용이었단다.” 꿈을 꾸듯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건조한 동굴 속으로 기어든 쌍두룡의 몸이 흐릿하게 빛났다. 그리 밝은 빛은 아니었지만, 동굴 가득히 쌓인 황금과 보석 때문에 눈부시게 느껴졌다. 일행을 보물 더미 중 한 곳에 내려놓은 용이 긴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있을 때는 정말 좋았지. 아름다운 시절이었어. 사람들은 우리를 두려워하고 숭배했고, 무녀들은 춤과 노래를 바쳤지. 보름달이 뜨면 다 함께 달 바위에 앉아서 이야기를 했었는데….” 용이 똬리를 틀며 드러눕자 산더미처럼 쌓인 보물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동료들이 서 있는 곳도 마찬가지라 모두 비명을 지르며 굴러떨어졌다. 제 머리 위로 떨어진 마리엔을 낚아챈 쌍두룡이 코를 킁킁거리더니 반갑게 말했다. “어머, 너는 엘프구나. 어쩐지 좋은 냄새가 난다고 했어. 예쁘기도 해라.” “말랑말랑한 것을 보니 아직 어리네. 엘프들은 모두 이곳을 떠난 줄 알았는데 아직 남아있는 일족이 있었나 보지?” “저, 저는 하프엘프예요. 인간들 사이에서 자랐어요.” 바로 옆에서 날름대는 혓바닥에 새파랗게 질린 마리엔이 말했다. 흉측한 이빨을 드러내며 히죽 웃은 용이 그녀를 놓아주었다. 비틀거리는 마리엔을 부축한 세영이 쌍두룡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엘프들이 떠났다고? 어디로?” “엘프들 뿐만이 아니야. 떠날 수 있는 자들은 모두 이 별을 떠났지. 날 수 있는 용들도 진작 다른 별로 건너갔고. 여기 남은 건 나와 난마, 그리고 후와와 뿐이야.” 용이 쓸쓸한 목소리로 답했다. 보물 사이에서 불쑥 머리를 내민 하마용이 “난 여기가 좋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세영은 금화 속에 파묻혀 버둥거리는 놈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했다. “쟤는 날 수 있는 것 같던데?” “별을 건너가기엔 너무 작잖니. 저 애의 아빠가 데려가 줬으면 좋았겠지만….” 다른 별로 가면서 버리고 갔다는 이야기였다. 세영은 힐끗 하마용을 쳐다보았다. 왠지 버려진 애완동물을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사이 디안을 집어 든 쌍두룡은 “이건 못생겼네.” “냄새도 별로야.” 라는 말로 남자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이거나 좀 봐줘.” 세영은 다음 희생양으로 리먼을 노리는 쌍두룡에게 손등을 내밀었다. 고개를 숙여 세영의 손등을 바라본 용이 고개를 갸웃했다. 눈이 나빠서 글자가 보이질 않는 것이다. 다른 머리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한숨을 쉰 세영이 말했다. “교황 말로는 이게 용들이 쓰는 글자라고, 계곡으로 가면 분명 좋은 답을 줄 거라고 했거든.” “어머, 진작 그 말을 했어야지. 후와와, 뭐하니! 빨리 이쪽으로 좀 와보렴!” 호들갑스러운 부름에 시디발라와 다투고 있던 하마용이 고개를 돌렸다. 때를 놓치지 않고 시디발라가 집어 던진 보석이 놈의 뒤통수를 때렸다. 씩씩거리던 하마용이 “나 지금 바쁘단 말이야!” 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쌍두룡의 머리 하나가 “이놈의 자식이!” 하고 벌컥 화를 내자 할 수 없이 다가왔다. 입을 닷 발이나 내민 하마가 물었다. “왜애!” “왜긴 왜야. 이거 좀 읽어봐. 읽을 줄 알지?” 쌍두룡의 재촉에 세영의 손등을 들여다본 하마용이 “응? 모르겠는데!” 하고 경쾌하게 대답했다. 당황한 쌍두룡이 “왜 몰라. 가르쳐줬잖아!” 하고 놈을 닦달했다. 다른 머리가 “지금 몇 살인데 아직 글을 못 읽어!” 하고 소리를 질렀다. 세영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아니, 왜 애한테 소리를 질러. 워낙 안 쓰니까 까먹을 수도 있지!” “잘한다, 잘해. 대체 애를 어떻게 키웠기에 용 주제에 까막눈이야?” “애는 나 혼자 키워? 내가 가르칠 때 넌 뭐했어?!” 급기야 머리끼리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싸우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참다못한 세영이 하마용을 퍽퍽 걷어차며 “울어!” 하고 소리쳤다. 죄 없이 엉덩이를 까인 하마용이 빼애앵 울음을 터트렸다. 머리들은 그제야 다툼을 멈췄다. 하마용의 입에 파이 하나를 던져넣어 울음을 그치게 한 세영이 말했다. “일단 내가 다른 곳에 써볼 테니까, 보고 아는 거 있으면 말해줘.” 이런 놈들을 상대로 쉽게 가려 한 것이 나빴다. 한탄한 세영이 파이어 애로우를 만들어 그것을 붓처럼 이리저리 움직였다. 불꽃의 궤적을 뒤쫓던 용의 머리가 갸우뚱했다. “이건 저주구나. 그것도 주인 될 자의 몸에 새겨지는 글자야. 다른 한쪽은 어디에 있니?” 세영의 시선을 따라간 용이 카라드를 덥석 움켜잡고 들어 올렸다. 움찔한 사슴은 이내 얌전히 용의 손에 몸을 맡겼다. 뭔가가 이상한 듯 한참을 킁킁거리던 용이 말했다. “어머머,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구나. 아가야.” 죽은 듯이 견디고 있던 카라드가 눈을 떴다. 다른 쪽 머리가 의아하게 제 짝에게 물었다. “뭐, 누구?” “걔 있잖아. 걔. 에레슈키갈이 데리고 다니던 인간 아이 말이야.” “아아아. 걔가 얘야? 세상에. 너무 달라져서 못 알아봤네.” “그러게. 좀 서운하네. 인사라도 해주지.” 두 머리의 수다에 카라드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반가운 얼굴로 그를 쭈물거리던 용이 아쉬워했다. “난 예전 모습이 더 좋은데. 냄새도 훨씬 좋았고.” “맞아, 그때는 정말 예뻤지. 에레슈키갈이 자랑하려고 매번 보름마다 데리고 나왔잖아. 지금도 나쁘지는 않지만, 역시 그때만큼 반짝반짝 빛나지는 않네.” “이 아줌마들아. 성추행하지 말고 눈으로만 봐!” 세영이 화를 내자 용은 정말 마지못해 카라드를 내려놓았다. 언제 물고 빨았는지 침 범벅이 된 카라드가 용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저를 아십니까?” “내가 기억 안 나니? 하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가 삼백 년 전이었나.” “그것보다 더 됐어. 인간에겐 제법 긴 시간이니까 까먹을 만도 하지.” 혹시나 하는 기대를 담아 용을 올려다보던 카라드가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되도록 용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사실을 알리려고 했다. “인간은 그렇게 오랜 시간을 살지 못합니다. 저는 올해로 24살이 되었으니 아마 다른 사람과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듯이 고개를 갸웃한 용이 말했다. “그야 인간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지금 그건 네 몸이 아니잖니?” ──────────────────────────────────── 용의 계곡 (3) 카라드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멍하게 용을 올려다보던 그가 “제가… 인간이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하고 되물었다. 용이 난처한 듯 쫑알거렸다. “어머, 내 말이 기분 나빴어? 지금의 넌 인간이라고 부르기에 좀 그렇잖니.” “맞아. 몸은 없는데 유령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령도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정신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사념 덩어리?” 재잘거리던 용이 뭐가 웃긴지 낄낄댔다. 세영은 새삼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인간이라면 저렇게 참혹한 표정을 짓는 사람 앞에서 즐겁게 떠들지 못할 테니까. 참다못한 그녀가 버럭 소리쳤다. “차근차근 설명해 봐! 그렇게만 말하면 어떻게 알아?” “아니, 왜 짜증을 내고 그러니?” “내가 지금 짜증이 안 나게 생겼어? 자기 몸이 아니라는 건 대체 무슨 소리야?” 당장 폭발할 것 같은 세영의 표정에 용이 키득거리는 것을 멈췄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본 머리가 말했다. “달리 설명할 것도 없는데? 저 아이의 진짜 몸은 삼백 년 전 그때 사라져 버렸잖아. 그러니 다른 인간의 몸을 빼앗아 쓸 수밖에.” “…삼백 년 전 그때?” 기분 나쁜 뭔가가 발목을 타고 스멀스멀 위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 사막 한복판에서, 교황 앞에서도 느꼈던 더러운 느낌. 꼭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기분이었다. “주신 사하를 봉인할 때 말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 예쁜 몸뚱이가 사라지다니. 에레슈키갈이 알았다면 분명 슬퍼했을 거야.” “모르고 죽어서 다행이지. 내 보물이라며 물고 빨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이어지는 용의 말에 세영의 예감은 확신으로 변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자신이 ‘카라드’라고 부르던 남자를 바라봤다. 창백한 그의 얼굴을 보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오려 했다. 진실은 이렇게 간단한데, 눈이 먼 것처럼 앞을 보지 못했다. “당신이 그 꼬마라고?” 신을 봉인했던 여섯 현자 중 한 명. 봉인의 대가로 이름을 빼앗겼던 남자. 나스쿤이 꼬마라고 불렀던, 그가 바로 카라드였다. “저는….” 멈칫한 카라드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무어라 말을 잇지는 못했다. 그가 혼란에 빠진 것을 느낀 세영은 이성을 되찾았다. 자신도 몰랐을 일로 그를 책망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었다. 한숨을 삼킨 그녀는 남자의 팔을 툭 쳤다. “괜찮아요?” “아….” 카라드는 마치 악몽에서 깨어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뭔가를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세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차마 닿지 못하고 허공에 맴도는 손을 세영이 대신 덥석 움켜쥐었다. 꼭 잡아달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움찔하는 카라드에게 그녀가 말했다. “안 싫어해요. 좀 놀라긴 했는데, 뭐. 내가 싫어한다고 또 오해하지 말라고요.” “…….” 그러니 그런 버려진 개 같은 표정은 짓지 말았으면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 생각이 뭐가 중요할까 싶었지만 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그냥, 떨리는 손이 너무 차가워서 걱정스러웠다. “어머, 세상에. 어쩐지 침 발랐다고 쌍심지를 켜더라.” “핥았을 때 냄새도 좀 다르지 않았어?” “했네, 했어.”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에 울컥한 세영이 “하긴 뭘 해! 이 아줌마야!” 하고 화를 냈다. 얼른 뒤쪽으로 대피한 머리들이 “여자가 저렇게 드세서 어째. 꽉 잡혀 살겠네.” “왜, 에레슈키갈도 성격 더러웠잖아.” “어머, 그런 취향인가 봐.” 하고 속닥거렸다. “그, 그럼 카라드가 현자야?” 멍하게 서 있던 시디발라가 정신 나간 대화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히죽 웃으며 흉측한 이빨을 드러낸 용이 답했다. “인간들은 그렇게도 부르더라고. 우리는 그냥 산제물이라고 했지만.” 산제물. 비참하게도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가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을 그것보다 더 잘 표현할 단어는 없을 테니까. 동료들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카라드를 바라봤다. 과거의 현자라 밝혀진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주춤거리며 그에게 다가가려는 시디발라를 디안이 붙잡았다. 세영 쪽을 눈짓한 그가 끼어들지 말라고 고개를 저었다.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은 시디발라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분위기 파악 못 하고 그를 집적거리던 하마용만 “이 하마 새끼! 하마의 자식!” 하고 쓸데없이 욕을 얻어먹었다. “근데 쟤가 뭘 물어봤더라? 아, 맞다. 글자. 하지만 그건 에레슈키갈이 네게 걸어둔 거잖니.” “대가로 받은 거니 풀 수 없는 게 당연하잖아. 설마 그것도 잊어버렸니?” 용은 이제 제멋대로 떠들고 있었다. 세영은 놈들의 입을 틀어막고 싶어졌다. 상냥한 척 재잘거리는 목소리에 옆에 선 남자가 무참히 상처받는 게 느껴졌으므로. “…무슨 대가 말입니까?” 카라드는 이제 버티는 게 용하다 싶을 만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용이 네 개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군거렸다. “정말 잊어버렸나 봐.” “세상에, 저게 말로만 듣던 치매?” 세영은 조용히 “…교황이랑 삼자대면이나 할까.” 하고 중얼거렸다. 움찔한 머리들이 단박에 조용해졌다. 그들 중 하나를 올려다본 카라드가 말했다. “저는 모든 것을 잊었습니다. 제가 누군지, 어떤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제발 말씀해주십시오.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겁니까?” 절박한 목소리에 압도당한 용이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갈대처럼 우왕좌왕하던 머리들이 세영을 바라봤다. 서둘러 아래로 내려온 머리 중 하나가 말했다. “저기.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네가 저 아이의 주인이 된 상황이지?” 세영은 대답 대신 놈의 눈을 쏘아봤다. 그것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머리가 좀 더 목소리를 낮춰서 소곤거렸다. “그럼 우리에게 묻지 말고 그냥 명령하지 그러니?” “명령?” “그래, 기억해내라고 명령하면 되잖아?” “잊어버린 걸 굳이 되살릴 필요가 있을까 싶긴 한데, 본인이 저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지.”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당황한 세영이 카라드를 바라봤다. 명령을 듣도록 강제하는 저주라고 들었지만, 설마 그런 것까지 가능할지는 몰랐다. 잠시 머뭇거리던 세영이 물었다. “…제가 기억을 하라고 명령하면 된다는데요. 그렇게 하고 싶어요?” 솔직히 말하면, 그가 그러지 않길 바랐다. 기억하지 못하는 삼백 년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니까. 세영은 탑에서 본 나스쿤의 눈을 기억했다. 죽은 황금 같은 눈을 한 남자는 그저 안식만을 원하고 있었다. 죽고 싶은 것조차 오래 전의 일이라고 말하던 황폐한 얼굴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기억하게 되면, 분명 지금과 많은 것들이 달라질 거예요.” 세영의 만류에 카라드가 웃었다. 그는 제 손을 움켜쥔 세영의 손을 잠시 바라본 후 확신을 담아 말했다. “제가 책임져야 마땅한 일입니다. 기억을 되살릴 방법이 있는데도 도망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 제가 치러야 하는 대가가 다른 이들에게 해가 된다면, 저는 절대로 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겁니다.” 왠지 이런 대답이 돌아올 것 같았다. 한숨을 쉰 세영이 그의 눈을 바라봤다. 기억을 되찾은 카라드는 그녀가 아는 사슴이 아닐 것이다. 이 물기가 도는 까만 눈을 보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겠지. 왠지 모르게 쓸쓸한 기분에 피식 웃은 세영이 말했다. “자, 그러면 지금 당장 기억해내요.” 다음 순간 몸을 휘청한 카라드가 바닥으로 무너졌다. 놀란 세영이 그를 붙잡았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던 카라드가 울컥 피를 토해냈다. 동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세영은 계속해서 새카만 피를 토하는 남자를 멍하게 쳐다봤다. “세영님, 손을 놔주십시오.” 황급히 다가온 리먼이 그녀에게 말했다. 제대로 듣지 못하고 멍하게 있던 세영은 마리엔이 재차 말을 한 뒤에야 붙잡은 손을 놓았다. 카라드를 바닥에 앉힌 리먼이 있는 대로 신성력을 퍼부었다. 그제야 각혈을 멈춘 남자가 정신을 잃고 축 늘어졌다. 그때까지 넋을 놓고 서 있던 세영의 눈에 사나운 빛이 감돌았다. 그녀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용을 노려봤다. “…어떻게 된 거야?” “그, 그러게?” “아니, 이건 우리 잘못이 아니야! 저 몸뚱이의 수명이 다 된 거겠지!” 사색이 된 용이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악귀처럼 히죽 웃은 세영이 산더미처럼 쌓인 보물 더미 중 하나에 파이어볼을 집어 던졌다. 볼링공처럼 날아간 불덩이가 펑 터지면서 금화가 줄줄 녹아내리고 보석이 숯덩이가 되었다. 용이 끼아악 하고 이중창을 내질렀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보물의 아름다움도 모르는 불쌍한 야만인 같으니!” 빽빽대는 용의 말을 무시한 세영이 다시 파이어볼을 허공에 띄웠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용에게 차갑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라고?” “여, 연결이 끊어져서 본체로 돌아갔나 봐!” “걱정할 것 없다고. 어, 어차피 자기 몸도 아닌데 부서지면 새것 찾아서 쓰면 되지. 여기도 셋이나 있네!” 용은 앞다투어 떠들어댔지만, 안타깝게도 세영이 바라는 대답은 아니었다. 두 번째 파이어볼을 보물 더미에 꽂아 넣은 세영이 말했다. “그럼 니들도 새로운 보물 찾아서 써. 여기 있는 건 내가 다 태워버릴 테니까.” “아아악! 그만, 제발 그만둬어!”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우리도 진짜 모른다고!” 용이 울부짖는 소리가 동굴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머리 중 하나는 세영을 공격하려 했지만, 다른 하나가 교황을 생각하라며 필사적으로 말렸다. 그 사이에 또 다른 파이어볼을 띄운 세영이 말했다. “카라드의 본체가 뭔데?” 질문이 바뀌었다. 네 눈을 부릅뜬 용이 서둘러 답했다. “검, 검이야! 에레슈키갈이 자신의 일부로 만든 검!” “새카만 검인데 날이 없어서 보기만 하면 알 수 있어!” 세영은 카라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치 빠른 시디발라가 카라드의 허리에 매달려 있던 검을 가져다주었다. 검을 손에 쥔 세영이 용을 올려다봤다. 묻지도 않았는데 서둘러 고개를 끄떡인 용이 바로 그 검이라고 확인해주었다. “원래 인간인데 검이 되었단 이야기야?” “우리도 자세히는 몰라. 봉인을 완성하기 위해서 그렇게 됐다고 들었어.” 파이어볼을 던져 숯을 구워도 같은 대답이 나오는 것을 보니, 사실인 것 같았다. 세영은 기묘한 기분으로 검을 바라봤다. ‘이게 진짜 카라드라고?’ 생각보다 놀랍지 않다는 것이 이상했다. 처음에 워낙 유령 같은 모습으로 만나서인가. 사실 검에 붙은 귀신같은 거라고 해도 그냥 그렇구나 하고 납득이 갔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저 몸으로 다시 집어넣을 수 있는데?” 만약 진짜 몸에서 튕겨 나와 본체로 돌아간 거라면 그냥은 깨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 것을 물어볼 줄은 몰랐는지 당황하던 용이 중얼거렸다. “원래는 힘을 탐낸 인간이 검을 쥐고, 그럼 시험을 해서 자격이 없으면 몸을 빼앗는 식인데. 지금은 몸뚱이 쪽이 아예 의식이 없잖니.” “아니, 애초에 기억을 되살리니까 몸에서 튕겨 나가는 게 이상한 거잖아.” “역시 저 몸뚱이의 수명이 다 된 거 아닐까?” 용의 수다를 들어줄 기분이 아니었던 세영은 곧장 걸음을 옮겨 카라드 쪽으로 다가갔다. 힘없이 늘어진 손을 잡아 검 손잡이에 대어봤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세영이 명령했다. “다시 들어가.”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명령은 의식이 있을 때만 통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세영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뭘 하려는지 눈치챈 마리엔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세영님, 안돼요!” “지금은 이 방법뿐이잖아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연약한 사슴에게 질 정도는 아니니까.” 불안해하는 마리엔에게 피식 웃어준 세영이 검을 고쳐 쥐었다. 전에도 여러 번 잡아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것은 이것을 소유하려는 생각이 없어서였던 모양이다. 사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카라드’ 라고 생각하자 쉽게 가져야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난처함에 혀를 찬 세영이 검을 휙휙 움직이며 말했다. “시험이든 뭐든 얼마든지 받아줄 테니까. 일단 해봐.” 말이 끝나는 순간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눈을 다시 한 번 깜빡였을 때, 세영은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니,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비어있다고 생각했던 곳에 루비처럼 붉은 두 개의 눈동자가 나타났다. -내 이름은 칼라드볼그. 시험의 공간에 온 것을 환영한다. 어둠처럼, 새카만 몸을 가진 용이 세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용의 계곡 (4) “뭐냐, 넌?” 세영은 들고 있던 검을 용에게 겨누며 물었다. 처음엔 환상인가 했지만, 레이드 보스 특유의 위압감이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루비 같은 눈을 깜빡인 용이 말했다. -내 이름은 칼라드…. “아니, 너 말고 사슴 어디 갔냐고. 사슴!” 세영은 용의 말을 싹둑 자르며 소리쳤다. 여기 들어오기만 하면 사슴을 만날 거라 생각했는데 웬 생뚱맞은 용이 있으니 짜증이 났다. 잠시 침묵하던 용이 말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시험을 통과하면 된다. 역시 쉽게 가는 건 그른 모양이다. 쯧 혀를 찬 세영이 검을 움켜쥐었다. 펫도 없이 혼자 잡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나마 용의 크기가 작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시험은 바로…. “둠 블레이드!” 또다시 말이 끊긴 용이 입을 다물었다. 스킬이 나가지 않는 것에 당황한 세영이 검을 휙휙 휘둘렀다. 시험 삼아 다른 스킬도 써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심지어 인벤도 열리지 않았다. “뭐야, 이거?” 스킬도 없이 용이랑 싸우라는 건가. 기가 막혀 혀를 찬 세영이 검을 고쳐 쥐었다. 지금 상황에서 믿을 것은 이것뿐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용이 물었다. -무슨 시험인지 듣지도 않고 공격부터 하는 건가. “내가 널 쓰러뜨리면 사슴을 돌려주는 거잖아. 아니냐?” 히죽 웃은 세영이 되물었다. 순간 얼빠진 표정이 된 용이 입을 우물거렸다. 세영은 더 기다리지 않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놀라 퍼드덕거린 용이 날개 끝으로 그녀를 쳐냈다. 피할 새도 없이 얻어맞고 뒤로 튕겨 나간 세영이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쳐놓고 화들짝 놀란 용이 소심하게 물었다. -괜찮나? “씨이발, 스킬도 안 써지는데 능력치도 거지네!” 바닥을 내리찍은 세영이 분통을 터트렸다. 파랗게 독기가 돋은 눈에 용이 움찔했다. 살기등등한 얼굴로 일어선 그녀가 다시 검을 고쳐 잡았다. 포기의 이파리도 보이지 않는 눈빛에 당황한 용이 말했다. -너는 절대 날 이길 수 없다. “그건 찔러봐야 알지. 새끼야.” 녹슨 철검으로도 찌르고 또 찌르면 쓰러지는 것이 보스다. 물론 운이 나쁘면 한방에 이쪽이 죽을 수도 있지만, 먼저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검을 겨눈 세영이 포악하게 웃었다. “배때기에 칼 들어가도 멀쩡한지 어디 한번 보자고.” 힘이 없다고 울며 나자빠질 정도로 약하지 않다. 넘어지면 그것으로 끝인 삶 속에서 그녀가 얻은 것은 독기뿐이었다. 손이 쥔 검이 아니라 그것이 세영의 무기였다. 묵묵히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용이 말했다. -…주인은 이런 여자가 좋은 건가. 어쩐지 암담해 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멈칫한 세영이 “주인?” 하고 되묻자 용이 고개를 까딱했다. -나는 칼라드볼그. 네가 들고 있는 검의 정령이다. “이거?” 세영은 제가 쥐고 있는 새카만 검을 들어 보였다. 용의 일부로 만들었다더니, 검에 붙은 놈까지 용의 형상인 것 같았다. “잠깐만. 그럼 사슴은 어디 갔어?” -…많이 지친 것 같아서 재웠다. 하지만 대답 여부에 따라서 영원히 잠들게 할 수도 있다. 순간 안심했던 세영의 미간이 다시 찌푸려졌다. 저를 훑어보는 불온한 시선에 용이 의아하게 물었다. -뭘 하는 거냐? “어딜 찌르면 더 잘 들어갈까 찾는 중인데.” -…여긴 나의 공간. 네가 들고 있는 것은 나의 일부.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일단 묻고 싶은 것부터 지껄여봐.” 세영이 슬슬 용의 뒤쪽으로 돌아가면서 말했다. 날갯죽지와 등줄기를 훑는 시선에 한숨을 내쉰 용이 빙글 몸을 돌렸다. 우아한 목을 구부려 세영의 눈과 시선을 마주한 그가 말했다. -이것 하나만 답하면 된다. 이 세계는 내 주인이 희생할 가치가 있는가? 다음 순간, 용은 사라지고 주변이 새하얀 대전으로 바뀌었다.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세영은 대리석 위에 깔린 장미꽃잎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황금의 관을 쓴 남자와 여자가 작은 요람 옆에 서 있었다. 기쁨이 만개한 얼굴이 그들이 막 부모가 되었음을 알려주었다. 갑자기 떠드는 소리가 그쳤다. 뒤돌아본 세영은 조그마한 아이 하나가 요람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제 몸통만큼 커다란 리라 때문에 내딛는 걸음이 뒤뚱거렸다. 조금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사람들은 아이가 제 앞을 지나칠 때마다 고개 숙여 경의를 표했다. 바닥까지 끌리는 보라색 옷자락에 입을 맞추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는 걷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드디어 요람 앞에 이른 아이가 한숨을 돌린 얼굴로 절을 올렸다. 웃음기 어린 얼굴로 그것을 지켜보던 남자가 말했다. -어린 현자여, 내 아들의 별을 보았소? -…예. 잠시 머뭇거리는 것 같던 아이가 답했다. 웃으며 손을 뻗은 여자가 아이를 발판 위로 올려주었다. 발판을 딛고 서서 요람 속을 들여다본 아이는 한순간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조그마한 입술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이 아이는 장차 자라, 아버지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어머니를 살해할 것입니다. 충격이 파도처럼 대전을 휩쓸었다. 세영은 웅성거리는 사람들 속에 서서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귀밑에서 땋아 내린 검은 머리와 옅은 갈색의 피부, 황금색 눈동자. 사막 민족 특유의 외모가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그때 시야가 갑자기 어두워지며 풍경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신전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신상 대신 거대한 검은 용이 웅크리고 있는 것만이 달랐다. 차가운 바닥에 머리를 풀고 엎드린 여자가 울부짖었다. 여자의 옆에는 비단과 공단에 감싸인 아기가 놓여 있었다. -나의 주인이여, 신이시여. 제 아이의 운명을 바꿔주십시오. 이대로 살해당하도록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당신의 무녀가 간청 드립니다. 제발! 제발! 울부짖는 어미의 통곡이 신전을 가득 채웠다.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던 용이 말했다. -바뀐 운명으로 이 아이가 더 비참한 삶을 살게 된다면 어쩔 테냐? -아비의 손에 살해당하는 것보다 더 비참하진 않을 겁니다. 제 아이가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저를 원망할 정도로 자랄 수 있다면 제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용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여자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몸이 숨을 쉴 때마다 신전의 횃불들이 일렁였다. 여자의 그림자가 다섯 번 정도 흔들렸을 때 용이 말했다. -네르티아, 나의 무녀여. 너의 소원을 이루어주겠다. 고개를 든 여자의 얼굴이 환희로 빛났다. 몸을 숙여 아기에게 입을 맞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도하듯 두 손을 모은 여자의 위로 용의 머리가 내려왔다. 비명은 없었다. 우두둑 하고 질긴 살점과 뼈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세영은 차마 그것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어미의 죽음을 느낀 듯 비단에 감싸인 아기가 울었다. 피가 묻은 얼굴로 아이를 내려다본 용이 제 팔을 물어뜯었다. 어둠과도 같은 조각이 굴러떨어지며 한 자루의 검으로 변했다. 그것을 아기의 옆에 내려놓은 용이 말했다. -너에겐 결코 패퇴하지 않는 운명을 주겠다. 이 땅에서 태어난 그 무엇에도 패배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운명이 너를 쓰러뜨릴 때, 너는 그의 노예가 될 것이다. 용의 말은 주술이자 저주가 되어 조그마한 몸 위로 내려앉았다. 몸에 새겨지는 글자에 아기가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아기의 옆으로 다가가려던 세영은 다시 처음의 공간에 돌아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궁금해 하던 것의 답이 되었는가. 붉은 눈을 가진 용이 말했다. 제 손등을 내려다본 세영이 “반쯤은.” 하고 대꾸했다. 어쩐지 좀 멍해진 기분에 손등에 새겨진 글자를 만지작거렸다. -나의 주인은 상냥한 아이였다. 네르티아의 예상과 달리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지. 용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검을 닦느라 꼬물거리는 작은 손가락, 외롭게 웅크린 등이나 조용히 떨어지던 눈물 같은 것들을. 다정한 눈동자와 “카라드-” 라고 속삭이는 앳된 목소리도 있었다. ‘결국, 그 이름도 진짜는 아니었구나.’ 세영은 제가 부르던 이름이 검의 애칭이라는 것을 깨닫고 조금 씁쓸해졌다. 그녀는 감상에 빠진 듯 아련한 눈빛을 한 용에게 물었다. “주신을 봉인할 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러자 루비와 같은 눈동자에 처음으로 분노의 기색이 서렸다. 용은 -그 뻔뻔한 인간이…. 하고 격앙된 어조로 시작했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침착함을 되찾으려 애쓰는 용을 보며 세영은 문득 사슴을 떠올렸다. 검이 주인을 닮은 것인지 반대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주인이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에 그가 찾아왔다. 세영의 머리 위로 눈처럼 새하얀 꽃잎이 떨어져 내렸다. 휘날리는 꽃잎 사이로 제 몸만큼 긴 검을 휘두르는 아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드는 나스쿤도. -운명을 망쳐버린 것에 대한 용서를 빈다고 했지만, 사실 신을 봉인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서였지. 결코 패퇴하지 않는 운명이란 신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으므로. 세영은 문득 샤이렌드라에서 보았던 과거의 영상을 떠올렸다. 그때 나스쿤은 시비를 거는 성기사를 말리며 ‘꼬마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이번 계획은 시작부터 불가능했다’고 했다. 그가 말한 능력이 바로 이것이었던 모양이다. ‘와,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아무리 세상을 구한다는 대의가 있어도 그렇지. 자기 예언 때문에 인생 말아먹은 애를 참 알뜰살뜰 우려먹었구나 싶었다. 외로움에 말라비틀어진 어린애 하나를 꼬여내는 것은 그에겐 일도 아니었으리라. 나스쿤이 뭐라고 말을 했는지, 검을 멈춘 아이가 머뭇머뭇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내민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는 모습이 막장드라마의 한 장면 같아 짜증이 났다. 세영은 용을 퍽 걷어차며 쏘아붙였다. “넌 대체 안 말리고 뭐했냐. 병신아.” 이런 일은 처음 겪는지 눈이 동그래진 용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멍청하게 눈을 깜빡인 용이 -아니, 나는… 말리려고 했다. 하고 변명했다. 혀를 찬 세영이 그를 노려봤다. “그래서 이 꼴이야? 어?!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서라도 가둬놓을 것이지, 시답잖게 혓바닥이나 놀리니 이렇게 되잖아!” -……. 뭐라고 주둥이를 뻐끔거리던 용이 결국 침묵했다. 세영은 제 머리 위에 내려앉은 꽃잎을 그에게 홱 집어 던지며 “야 이 시발,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다음 이야기나 해봐. 그래서 왜 몸도 날려버리고 저 모양 저 꼴이 됐는데?!” 하고 화를 냈다. -내가 주인을 잘못 키운 건가. 대체 여자 취향이 왜 저런…. 고개를 떨군 채 무어라 중얼거리던 용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드는 순간 휘날리던 꽃잎도, 아이와 나스쿤의 모습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 날, 봉인의 축이 된 주인은 신을 강림시켜 그의 신체를 여섯 조각으로 찢어냈다. 다른 이들은 그저 찢어진 조각들을 소환하여 봉인했을 뿐이야. 아무리 운명의 힘을 빌렸다고는 하나 한낱 인간의 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용은 제 주인이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주인은 사그라지는 생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봉인을 완성하는 것에 모든 걸 쏟아 부었다. -그리고 주인은 봉인의 대가로 이름을 빼앗겼다. 이름은 하나의 존재를 정의하는 것이다. 하나의 이름이 하나를 증명한다. 그렇기에 이름을 빼앗긴 자는 자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존재를 이루는 육신과 기억, 그리고 영혼까지 의미를 잃고 흩어질 상황이었다. -모든 주술은 술자의 의지를 기초로 한다. 주인은 이대로라면 실패한다는 것을 깨닫고 봉인이 완성될 때까지는 자신의 존재를 남겨야 한다고 판단했지.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흩어지는 자신을 내게 밀어 넣고 가두었다. 용은 마지막으로 들었던 주인의 목소리를 기억했다. “부탁한다, 카라드.” 그것이 주인의 마지막이었다. 어쩌면 유언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네가 알고 있는 이는, 나의 주인이자 주인이 아닌 자다. 그가 남긴 의지이자 사명이라고 할 수 있지. 용은 제 존재를 깎아가며 주인이 남긴 것들을 받아들였다. 사실 지금 와서는 어디까지가 주인이고 어디까지가 자신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제 안에 주인의 일부가 있고, 그는 지금까지 사명을 다 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기를 모으는 자여, 내게 대답해다오. 주신을 봉인한 여섯 신기 중 하나인 검. 그리고 주인의 영혼을 봉인한 검이기도 한 칼라드볼그가 물었다. -내 주인에게 또 다른 희생을 요구할 정도로 이 세계에 가치가 있는가? ──────────────────────────────────── 용의 계곡 (5) “또 다른 희생? 누가 사슴에게 그따위 요구를 하는데?” 어떤 건방진 새끼가 그딴 요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입을 십자로 찢어놔야 할 것 같았다. 흉악하게 웃는 세영을 보고 잠시 침묵하던 용이 말했다. -…아직 모르나 보군. 네가 들고 있는 검이 바로 신기다. 세영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제가 들고 있던 것을 빤히 쳐다보던 그녀가 되물었다. “이게 신기라고?” -그렇다. “여기에 사슴 들어가 있는 거 아니야?” -그렇다. 퀘스트 때문에 신기를 파괴해야 하는 것을 떠올린 세영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확인하듯 물었다. “그럼 봉인을 풀면 사슴은 어떻게 되는데?” 용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분노와 좌절이 뒤섞인 그의 표정이 곧 대답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영은 뒷목까지 차오르는 혈압을 느끼며 이를 갈았다. “와, 진짜 씨발……!” 세상은 날강도와 사기꾼, 일반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뭔가를 내놓으라는 놈은 날강도고, 뭔가를 준다는 놈은 사기꾼이었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거금에 눈이 멀어 덥석 문 것이 잘못이었다. “신이면 다냐! 이 신발샛길아!” 세영은 허공에 검을 휘두르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은 알지만, 울화통이 터져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 신과 자드키엘이 있다면 생닭 대신 잘게 썰어서 튀겨버리고 싶었다. 씩씩거리는 그녀를 멍하게 쳐다보던 용이 말했다. -괜찮은가? “왜, 뭐! 뭐가 불만이야. 발광하는 사람 처음 봐, 어?!” 세영이 그를 퍽퍽 걷어차며 시비를 걸었다. 움찔움찔 날개를 뒤로 뺀 용이 웅얼거렸다. -난 그냥 뭔가 안 좋아 보이기에……. “내 문제니까 그냥 신경 꺼!” 쪽팔려서도 계약사기를 당했다는 소리는 할 수가 없었다. 보험과 연봉은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는 것이 법도라고 하지만, 이건 좀 너무하지 않는가. 가장 짜증 나는 건 사기꾼의 멱살을 틀어쥐려면 사슴부터 동강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드글드글 끓는 속을 한숨으로 진정시킨 세영이 용을 쏘아 보았다. “뭐, 됐어. 그것보다 이번엔 내가 물어볼 차례지?” -아니, 넌 아직 대답하지 않았는데…. 구석으로 몰린 용이 소심하게 웅얼거렸다. 세영은 그의 항의를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삼백 년 동안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에게 행복이란 과연 뭘까?” 구시렁대던 용의 입이 뚝 멎었다. 피식 웃은 세영이 가슴 앞에 팔짱을 꼈다. “네가 생각하는 주인의 행복은 뭐야? 앞으로 천년이고 만년이고 계속 여기 갇혀 있으면 행복한 거야?” 봉인을 풀지 않는다고 해도 사슴의 미래는 썩 밝지 않았다. 계속 검 속에 갇힌 채로, 누군가의 육신을 빼앗으며 살아가야 했다. 그게 과연 살아간다고 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러면 또다시 인간을 위해 희생되어야 한다는 건가. 그르렁대며 이빨을 드러낸 용이 외쳤다. 루비처럼 붉은 눈이 분노로 일렁거렸다. 혀를 찬 세영이 검으로 용의 머리를 후려쳤다. 움찔한 용이 얻어맞은 뺨을 감싸 쥐며 그녀를 쳐다봤다. “병신아, 누가 그렇대? 네가 생각하는 주인의 행복은 어떤 거냐고! 그걸 알아야 합의점을 찾을 거 아니야. 너 혼자 여기서 질질 짜고 있으면 누가 알아서 행복하게 만들어준대?” -……. “생각 안 해봤냐? 그래서 니가 안 되는 거야. 새꺄. 누가 고철 덩어리 아니랄까 봐.” -…나는 고철이 아니다. 용이 할 수 있는 항의는 그것뿐이었다. 혼란스러워하는 그를 보고 한숨을 쉰 세영이 어깨에 검을 걸쳤다. “됐고. 그럼 네가 바라는 건 뭔데. 그 정도는 말할 수 있겠지?” 노골적인 시선이 ‘그것도 못하면 넌 병신이다.’ 라고 말하고 있었다. 멍하게 입을 뻐끔대던 용이 서둘러 머리를 쥐어짰다. -…주인의 희생이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누구에게?” -지금의 주인을 아는 인간들에게. 말을 마친 용이 세영을 힐끗 쳐다봤다. 비웃지 않을까 걱정되는 눈이었다.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고개를 끄떡여주었다. “별로 어렵진 않네. 그리고?”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받으면… 더 좋겠지. 주저하며 말을 이은 용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의아해진 세영이 “왜?” 하고 묻자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용이 -아무 것도 아니다. 하고 말했다. 탐탁잖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본 세영이 말했다. “그것뿐이야?” -사랑하는 사람과 아들딸 낳고 평온하게 살다가 생을 마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하지 않나. 주인의 행복을 그리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평범한 삶조차 기대할 수 없는 처지가 가슴 아파서 뭔가를 원하지도 못했다. 고개 숙인 용의 주둥이를 툭툭 두들긴 세영이 말했다. “무자식이 상팔자야, 임마. 그리고 저런 호구 같음에 반하는 여자가 있을지 누가 아냐.” -…그래, 그렇군. 부드럽게 휘어진 용의 눈이 세영을 향했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세영이 길쭉한 주둥이를 문질문질 하며 말을 이었다. “내 동료들도 호구라서인지, 네 주인을 많이 좋아해.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애도 하나 있고.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극성떨지 마. 네 주인은 네 생각보다 더 잘하고 있어.” 용은 그제야 그녀가 저를 위로해 주려는 것을 느꼈다. 그가 아는 인간은 탐내고, 두려워하고, 도망치는 모습뿐이었다. 지금처럼 다정한 손길로 그를 만진 것은 주인뿐이었다. 그것이 조금 신기해서 빤히 쳐다보았다. 뭘 보냐고 코끝을 쿡 쥐어박은 세영이 말했다. “그리고 내 대답은 ‘없다.’야.” 갑자기 떨어진 말에 용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피식 웃은 세영이 덧붙였다.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는 세계에는 가치가 없다. 그 말이 듣고 싶었던 거잖아. 아니냐?” -……. “원한다면 몇 번이고 말해주지. 그따위 세계는 그냥 망하는 게 나아.” 용은 그것이 제가 한 질문의 대답이라는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 자신이 그런 대답을 원했다는 것도. 하지만 그의 안에 있는 뭔가가 그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도 느꼈다. “하지만 네 주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거겠지. 호구니까. 그렇지?” -…내 주인은, 희생이 아니라고 했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과거에 용은 몇 번이고 주인을 말렸다. 위험하다고, 이 세계를 위해 굳이 네가 희생할 필요는 없다고. 그럴 때마다 주인은 자신은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며 웃었다. 용은 다시 한 번 그 미소를 보고 싶었다. 누군가가 그렇게 말해줬으면 했다. -나는 그런 주인이 슬프고, 또 자랑스러워서…. 누구라도 좋으니 그를 기억해주길 바랐다. 세영은 뚝뚝 떨어지는 용의 눈물에 머리를 긁적였다. 저것도 주인 하나 잘못 만나서 마음고생만 죽도록 하는구나 싶었다. “뭐, 어쨌든 수고 많았다. 의리 있네. 너.” 딱한 마음에 길쭉한 주둥이를 툭툭 쳐주자 용이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 순간 붉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상냥하구나. “뭐래?” -내 주인이 왜 너를 좋아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용의 시선에 담긴 기대를 느낀 세영이 움찔했다. 동료들이나 용들이나 하나같이 짝을 지어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그녀가 쏘아붙였다. “아니, 오해거든? 그건 그냥 동료애 비슷한 번데기랑 같은 거라고.” -그래, 좋은 동료로서 좋아하는 거겠지. 용은 ‘네가 정 그렇게 말하니 그런 셈 치자.’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떡였다. 울컥한 세영이 그를 노려보다 한숨을 쉬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니라고 우겨봤자 자신만 손해였다. “그래서 어때? 내 대답은 합격이야?”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용이 고개를 저었다. -…적절한 대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주인을 맡기기엔 충분하다. “까다로운 놈일세.” -이제 데려가도 좋다. 용이 아래로 내리깔린 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거기에 꽃으로 뒤덮인 침대가 나타났다. 취향 한번 특이하다고 혀를 차며 옆으로 다가간 세영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뭐, 뭐, 뭐야!?” -왜 그러는가? 의아하게 묻는 용의 다리 뒤로 대피한 세영이 무리가 온 심장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아, 아니. 누구야, 저거?” 사슴과 닮았는데 사슴이 아닌 남자가 침대에 누워있었다. 이전의 사슴이 보통 사슴이라면 저건 꽃사슴이나 흰 사슴이었다. 겁에 질린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한 용이 말했다. -내가 기억하는, 내 주인의 원래 모습이다. “…저게 진짜 인간이라고?” -물론 진짜 인간이다. 그의 부모는 모두 인간이었으니. 물론 부모도 미남미녀로 보이긴 했지만, 꽃사슴은 단순히 미인이나 미남 수준이 아니었다. 유전자의 기적이나 세포의 혁명으로 불러야 할 것 같았다. 그제야 세영의 놀라움을 이해한 용이 뿌듯하게 말했다. -에레슈키갈은 그를 내 보석이라고 부르며 무척이나 아꼈지. “…용들도 얼굴 엄청 밝히나 보네.” -당연하지. 아름다운 것은 누구나 다 좋아한다. 어쩐지 공감하기 싫은데, 공감할 것 같은 말이었다. 용기를 끌어모으기 위해 심호흡을 한 세영이 용의 날개를 붙잡은 채 걸음을 옮겼다. 날개 뒤에 숨어서 살금살금 접근하는 그녀를 본 용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지금 뭐하는 건가? “좀 닥쳐봐. 저 옆으로 다가가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너는 정말 특이한 인간이군. 보통의 인간들은 그를 보면 도망치고 주인을 보면 달려들었는데 세영은 그 반대였다. 어쩌면 그래서 주인이 그녀를 좋아하는 것인지도. 그 사이 가까스로 꽃사슴의 옆으로 다가간 세영이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눈을 질끈 감고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콕콕 찔러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뜨고 사슴의 몸을 흔들었다. “저기, 이제 일어나보죠? 일어나요. 제발 좀.” 제멋대로 흔드는 것도 가슴이 아프건만, 사슴은 일어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좀 더 세게 붙잡고 흔들어보려던 세영은 결국 포기하고 용을 올려다보았다. “안 일어나는데?” -…음, 예로부터 전해지는 전통적인 방법을 쓰는 게 어떤가. “뭐? 그런 것도 있어?” 솔깃해서 바라보는 세영에게 용은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왜 인간들은 잠자는 공주를 깨울 때…. “야 이 시발, 이게 미쳤나?!” 세영의 반발에 용은 풀이 죽은 것 같았다. 머뭇거리던 그가 마지못해 덧붙였다. -정 싫다면, 뺨을 때려도 된다. “저 얼굴에는 입술이든 손이든 갖다 대는 게 범죄야!” 쳐다보고만 있어도 ‘세상에, 숨을 쉬잖아!’ 하고 깜짝깜짝 놀랄 것 같은데, 뭘 갖다 대라고? 경멸이 담긴 세영의 눈빛에 용은 토라진 듯 옆으로 돌아앉았다. -그러면 할 수 없지. 이대로 둘 수밖에. 그러자 난처해진 것은 세영 쪽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사슴을 못 데리고 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었다. 괴로워하며 머리를 쥐어뜯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짜 그 방법뿐이냐?” -그게 제일 쉬운 방법이다. 용이 여전히 토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세영은 ‘뭐지? 왠지 속는 기분인데?’ 하고 생각했지만, 삐진 용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닦아세우긴 힘들었다. 후우- 하고 긴 한숨을 내쉰 그녀가 꽃사슴을 바라봤다. 왠지 죄를 짓는 기분이 들어서 좀처럼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에이 씨, 젠장!” 세영은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마음으로 꽃사슴의 멱살을 낚아채 입술을 들이밀었다. 부드러운 온기를 느끼며 입술을 떼었을 때, 보이는 것은 정든 옛 사슴의 얼굴이었다. “…어?” 그녀는 어느새 쌍두룡의 동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것도 사슴의 위에 올라타서 그의 멱살을 움켜쥔 채였다. 당혹스러운 상황인데도 멍한 눈을 깜빡이는 사슴을 보자 안도감부터 들었다. “역시 이 얼굴이 더 좋네요.” 피식 웃은 세영이 멱살을 잡은 손을 놓아주었다. 눈부신 꽃사슴보다는 지금의 사슴이 숨쉬기 편해서 더 좋았다. 멍하게 있던 사슴이 세영을 따라 환하게 웃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타격을 입은 세영이 심장 위를 부여잡았다. “아니, 그렇다고 바로….” 힘없는 중얼거림은 쪽 하고 부딪히는 입술로 끊어졌다. 놀란 세영이 “어?” 하고 눈을 부릅뜨는 사이 사슴은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단순히 입술이 닿았을 뿐이었지만, 효과는 굉장했다. 완전히 얼이 빠진 세영은 멍하게 그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조심스럽게 손을 내민 사슴이 그녀의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더듬는 손끝이 간지러워서 어깨가 절로 움찔했다. 그때 불쑥 끼어든 시디발라가 그의 팔을 톡톡 쳤다. “저기, 이거 꿈 아니야.” ──────────────────────────────────── 용의 계곡 (6) 세영은 뺨에 닿은 손가락이 뻣뻣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눈이 동그래진 사슴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숨은 제대로 쉬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야, 이럴 땐 눈치 없이 끼어드는 거 아니라고.” 시디발라를 뒤로 잡아당긴 디안이 소리죽여 질책했다. 바닥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고 구경하던 쌍두룡이 재촉하듯 말했다. “그래, 우린 그냥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어휴, 젊은 게 좋긴 좋아. 방금 쓰러져도 입술 비빌 힘은 남아있고.” 그러자 사슴의 얼굴이 화아악 달아올랐다.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고개를 숙였지만, 그런다고 목 끝까지 빨개진 것이 가려질 리가 없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이 애처로워서 “아니, 뭐. 살다 보면 실수로 남의 입술에 갖다 박고 그럴 수도 있죠.” 하고 달래줘야 할 것 같았다. “어머머, 부끄러운 모양이네. 보는 용 쑥스럽게.” “한 게 있어야 부끄럽지. 어디, 진도 더 나가게 자리 비켜줘?” 용의 재잘거림을 참다못한 세영이 벌떡 일어나 동굴 한쪽을 불 싸질렀다. 끼아악 하는 날카로운 비명이 공기를 쩌렁쩌렁 울렸다. 세영은 “차라리 날 죽여라!” 하고 울부짖는 용을 퍽퍽 걷어차며 “내가 닥치랬잖아, 어? 왜 자꾸 내 성질 건드려?!” 하고 윽박질렀다. 그런 그녀를 멍하게 바라보던 카라드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재빨리 다가온 시디발라가 그를 부축했다. “괜찮아?” “이제 괜찮습니다.” 살짝 미소 지은 카라드가 감사를 표했다. 전과 달리 쭈뼛거리며 그를 올려다보던 시디발라가 물었다. “저기, 그럼 기억이 돌아온 거지?” “…예.” 카라드의 미소가 쓴웃음으로 변했다. 그의 정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버린 세영과 달리 동료들은 갑자기 거리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어쩔 줄 몰라 하던 디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현자. 아니 현자님? 어, 어떻게 불러야 할지.” “전처럼 부르시면 됩니다.” “그, 그래도….” 디안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을 꿈지럭거렸다. 전처럼 그의 옆으로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고 싶었지만,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기억을 되찾은 카라드에게는 타인의 접근을 거부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귀족들에게서나 느끼던 위압감 같은 것이었다. “그럼 전처럼 카라드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때 리먼이 앞으로 나섰다. 평소처럼 온화한 얼굴이었지만, 다른 동료들과 달리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개를 끄떡인 카라드가 말했다. “뭐라고 부르셔도 상관없습니다.” “좋습니다. 카라드. 지금 당신은 카벨 루스타나의 몸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예.” 카라드의 대답에 동료들의 어깨가 움찔했다. 육신을 잃어 어쩔 수 없다고 했지만, 타인의 몸을 빼앗아 사용한다는 사실에 거부감이 들었다. “그게 언제부터입니까.” “15년 전입니다.” 평온한 대답에 움찔한 마리엔이 디안을 쳐다보았다. 디안의 표정도 살짝 일그러졌다. 카라드의 말이 사실이라면 카벨 루스타나는 9살에 몸을 빼앗긴 것이 된다. 9살의 어린아이의 몸을 빼앗아 사용하는 것을 과연 용납해야 할까. 리먼은 무표정한 카라드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마도왕의 오른팔로 활동한 것은 당신이었겠군요.” “예.” 짧은 침묵이 흘렀다. 동료들이 그동안의 정으로, 혹은 미처 생각지 못해 묻어둔 사실을 모두 파헤친 리먼이 한숨을 쉬었다. 의혹 어린 시선에도 한마디 변명하지 않는 남자가 답답했던 탓이다. 결국, 그는 더 이상의 대답을 이끌어내는 것을 포기하며 말했다. “하나만 더 여쭙겠습니다. 당신은 저희의 적입니까?” “저는 누구의 적도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이 마도왕의 편에 선다면 저희와 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리먼의 지적에 카라드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살짝 고개를 숙인 그가 “제가….” 하고 중얼거렸다. 세영이 돌아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한결 개운한 표정으로 나타난 그녀는 심각한 분위기에 어리둥절해 했다. “무슨 이야기 중이에요?” 리먼을 제외한 동료들이 일제히 고개를 저으며 무어라 빠끔거렸다. 알아듣지 못한 세영이 “응?” 하고 되묻는 순간 카라드의 말이 이어졌다. “그의 명령에 따른 것은 두 가지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약속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기에-.” 카라드의 시선이 세영 쪽으로 향했다. 갑작스럽게 주목을 받은 세영이 “아니, 뭐?” 하고 되물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 중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그녀의 앞으로 다가간 카라드가 무릎을 꿇었다. “나의 주인이여.” “억?!” 갑작스러운 상황에 화들짝 놀란 세영이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카라드는 그녀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곁을 떠나지 않고 충성을 다하며, 당신의 검과 방패가 되어 적과 싸울 것을 맹세합니다.” 세영은 제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와 입을 떡 벌린 동료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뒤쪽에서 훌쩍이던 용이 “어머머, 고백하나 봐.” 하고 감탄을 흘렸다. 너무 당황해서인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저기, 일단 일어나서 이야기하죠?” 그래도 상대가 사슴이라 생각하니 걷어차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세영을 올려다본 카라드가 몸을 일으켰다. 그것이 꼭 그녀의 말에 따르는 모습처럼 보여서 기묘했다. ‘뭔가 좀 이상한데?’ 그녀의 예상대로 사슴은 변했다. 어디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분위기라던가 행동에서 낯선 냄새가 났다. 까맣게 물기가 도는 눈도 색이 더 깊어져 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홀릴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던 사슴이 사회에서 뿔 좀 부러져 본 뒤에 가질 눈빛이었다. 하지만 세영이 느끼는 것은 그런 변화와도 좀 달랐다. 묘하게 벽을 세우는 느낌이랄까.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괴로운 듯 눈을 돌리는 것만 봐도 좀 그랬다. ‘피하는 건가?’ 갑자기 무릎 꿇고 충성을 맹세하는 바람에 왜 내게 입술을 비벼댔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이상한 말이지만, 충성을 방패로 도망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고백을 받으면 곤란한 상황이었기에 세영은 그의 변화를 모른 척하기로 마음먹었다. 불타버린 동굴을 포함해 이런저런 일을 수습하고 나자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세영은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힐 겸 간만에 요리혼을 불태웠다. 그녀의 요리에 호기심을 느낀 쌍두룡이 통돼지 바비큐를 먹고 뻗어버리기도 했다. 모두가 배를 채운 후 세영은 칼라드볼그의 이야기를 간추려서 전달했다. 주인의 희생을 알리고 싶다는 검의 소원도 들어줄 겸,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눈물을 글썽이던 동료들은 신기를 파괴하면 카라드 또한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 창백해졌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예상과 달리 카라드는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당황한 마리엔이 “하지만… 그럼 죽는 거잖아요?” 하고 말해도 “전 살아있는 게 아니니 죽는 것도 아닙니다.” 하고 대꾸했다. 되레 마리엔이 상처 입은 표정을 지었다. 리먼이 확인하듯 물었다. “그럼 신기를 모아 파괴해도 상관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제가 존재하는 것은 봉인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봉인의 효용이 다한 지금, 저의 존재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목소리였다. 꼭 자신에게 다짐하는 것 같은 말에 세영은 빤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발끈한 디안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하고 소리쳤다. 세영이 그의 어깨를 툭 쳐서 멈추게 했다. 디안이 왜 말리느냐는 듯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디안, 삼백 년이에요. 삼백 년 동안 검속에 쭉 갇혀 있었다고요. 이런 문제는 당사자가 아니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잖아요.” “하지만….” 무어라 말하려던 디안이 입술을 깨물고 카라드를 노려봤다. 피곤한 기분에 미간을 문지른 세영이 카라드에게 말했다. “그리고 확실히 말해주는 건 좋은데, 당신을 아끼는 사람들에게 상처는 주지 마요.” “…죄송합니다.” 충격을 받은 시디발라의 표정을 보고 멈칫한 카라드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세영은 그의 눈에서 꺾이지 않는 고집을 느꼈다. 대체 뭐 때문에 뿔을 세우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파고들어 봤자 좋은 반응은 얻지 못할 것 같았다. “언제라도 좋으니 마음이 바뀌면 이야기해줘요. 일단 교황의 부탁을 받았으니, 가나트리 성당 공략을 마치고 다시 한 번 의논하죠.” 세영의 말에 서로를 마주 본 동료들이 고개를 끄떡였다. 세영은 카라드가 또 고구마를 뱉기 전에 빠르게 다음 문제로 넘어갔다. “거취 문제를 의논해야 할 것 같은데. 마도로 돌아가는 건 어떻게 할 거예요?” 지금까진 당연히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맹세가 조금 거슬렸다. 불길한 예감이 적중한 것인지, 카라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본체에서 멀리 떨어지면 의식을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고 다시 신기를 넘겨줄 수는 없으니 돌아가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동료들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변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마리엔이 대표로 물었다. “그럼, 저기…. 어머니는요?” “그녀는 제 어머니가 아닙니다.” 냉정한 대답에 마리엔의 어깨가 움찔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었기에 누구도 더 말하지 못했다. 카라드는 기묘한 표정을 짓는 동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중요한 일이 아니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가나트리 성당의 데스나이트를 제가 처리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세영은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가 소중히 간직하던 목걸이를 본 그녀는 무리하고 있는 사슴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모른 척 맞장구를 쳐주기로 했다. “별로 상관은 없지만, 무슨 이유라도 있어요?” 잠시 머뭇거리던 카라드가 이내 결심한 듯 말했다. “그는 삼백 년 전 저와 함께 신을 봉인했던 성기사, 펠릭스입니다. 가능하다면 제 손으로 그를 보내주고 싶습니다.” 세영은 어렵지 않게 ‘펠릭스’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신을 봉인할 때, 카라드가 축을 맡는 것을 반대하며 소리를 지르던 성기사였다. 보스몹으로 데스나이트가 나온다고 했을 때 설마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가 사람을 잡은 셈이었다. 리먼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 현자였던 분께서 데스나이트가 되었단 말입니까?” 카라드가 조금 괴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떡였다. 데스나이트는 상위의 언데드였다. 생전에 뛰어난 기사를 사령술사가 일으켜 세우거나 타락한 기사가 죽은 후 스스로 부활해서 만들어진다. 어느 쪽이건 영혼까지 구제받지 못할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상징이었다. 위로하듯 그의 팔을 붙잡은 시디발라가 물었다. “대체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데?” “펠릭스는… 그의 평생을 바쳤던 교단에게 배신당했습니다.” 흔하다면 흔한 이야기였다. 펠릭스는 당대 가장 뛰어난 신성력을 지닌 성기사였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 아닌 수인족이었기에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했다. 아마 나스쿤이 아니었다면 교단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뛰어난 힘은 추종을 부르는 법. 펠릭스는 그와 비슷한 처지의 성기사들에게 광신적인 지지를 받았다. 수인족이면서 성기사라는 특징 때문에 신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뒤였다. 그것이 교단의 주류층에는 큰 위협이 되었다. “그가 봉인지로 가나트리 성당을 선택한 것은 교단의 도움이 되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모리아는 계속된 전란으로 독기에 침식되어 있었다. 펠릭스는 그 땅에 신의 일부를 봉인함으로써 독기를 정화하고 교단의 밑거름으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순수한 선의가 비극을 낳았다. 봉인이 끝난 직후, 교단은 무력해진 펠릭스를 파문하고 살해하였다. 그를 지키려던 성기사들 역시 함께 죽음을 맞았다. 그들의 억울한 죽음은 멀리 떨어진 땅에서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못하고 묻혔다. 교단이 거짓으로 지어낸 죄가 생전에 빛나던 명성까지 추락시켰다. “봉인의 대가로 신성력을 빼앗긴 펠릭스는, 자신을 감싼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때의 느낀 절망과 분노, 배신감이 죽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끝까지 담담하게 말한 카라드가 입을 다물었다. ──────────────────────────────────── 용의 계곡 (7) 달빛이 푸르게 빛나는 밤이었다. 모두가 잠든 것을 확인한 남자는 조용히 동굴을 빠져나왔다. 용의 둥지는 꽤 험한 곳에 있었기에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원하던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가파른 절벽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본 남자는 품속에서 낡은 목걸이를 꺼냈다. 13년 전, 그가 어머니라고 불렀던 여자가 부적 대신 목에 걸어준 것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생각한다면 함께 있는 거라는 말에 그는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약속을 지킬 수가 없게 되었다. “…죄송합니다.” 마지막으로 안을 보고 싶었지만, 마음이 약해질까 봐 그만두었다. 하도 어루만져서 닳아버린 목걸이를 꽉 움켜쥔 남자는 그것을 아래로 던지려 했다. “동작 그만.” 느닷없이 떨어진 ‘명령’에 그의 손이 덜컥 정지했다. 이어서 “천천히 돌아서서 이쪽으로 옵니다. 실시.”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일단 명령이 떨어지면 그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남자는 무력하게 돌아서서 그의 주인에게로 다가갔다. 달빛이 세영의 찌푸려진 얼굴, 불만스러운 표정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이제 이러지 말자고 다짐했음에도 절로 시선이 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조그마한 손을 쫙 펼친 세영이 “내 놔요.” 하고 명령했다. 반사적으로 저항하려 했지만, 몸이 저절로 움직여 목걸이를 그녀의 손 위에 떨구었다. “달밤에 체조하는 것도 아니고, 대체 뭐하는 짓이에요?” 목걸이를 확인한 세영이 힐난했다. 반사적으로 변명하려던 남자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겨우 “돌려주십시오.” 라고 말할 수 있었다. 콧방귀를 낀 세영이 팔짱을 꼈다. “싫은데? 어차피 돌려주면 버릴 거잖아요?” 가슴 안쪽이 뜨끔하게 아팠다. 그런 자신을 질책한 남자는 애써 단호하게 말했다. “버려야 하는 물건입니다.” “왜 버려야 하는데요?” 곧바로 받아치는 질문이 그를 당황하게 했다. 사실 그녀와의 대화는 언제나 그랬다. 흐트러지는 표정을 가까스로 다잡은 남자가 말했다. “제게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에….” “그럼 제가 가져도 상관없겠네요.”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돌아섰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은 남자가 그녀를 붙잡았다. 붙잡은 후에 놀라 손을 놓을 뻔했지만, 그녀의 손에 쥐어진 목걸이를 보자 도저히 물러설 수가 없었다. “제발, 돌려주십시오.” 지금이 아니면 미련을 잘라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짓밟아도 자라나는 마음에 결심이 무너질까 두려웠다. 죽은 자에게 마음 따위는 필요 없는데 왜 이런 감정이 남아있는지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울망거려도 안돼요. 남한테 뿔 세우는 건 상관없지만, 자기를 찌르는 건 도저히 못 봐주겠거든요. 그러라고 있는 뿔 아닐 텐데?” 알 수 없는 말을 던진 세영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 붙잡은 손이 떨어진 것뿐인데도 이상하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를 놀리듯 세영이 웃었다. “그러니까 이건 압수. 나중에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돌려줄게요.” “저는 제정신입니다!” 저도 모르게 소리친 남자는 흠칫했다.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했다는 것을 느낀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동요하고 싶지 않은데 그게 잘 안 되었다. 그를 약하게 만드는 것들이 모여 있는 상황이었다. “헛소리하지 말고 들어가서 발 닦고 자는 게 낫겠네요. 힘이 남아돌면 이 근처나 뛰어다니던가.” 싸늘한 얼굴로 내뱉은 세영이 홱 돌아섰다. 그녀를 붙잡은 남자는 짜증 서린 시선에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절박한 마음에 다른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뭘 원하시는지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원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 뭘 원하느냐가 중요한 거죠.”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던 세영이 말했다. 몸을 낮춰 그와 시선을 마주한 그녀가 손에 쥔 목걸이를 내밀었다.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했죠. 하지만 소중한 거잖아요. 아니에요?” “…….” 원하던 것이 눈앞에 있었지만,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손이 닿으면 그것이 소중하다고 인정하게 될 것 같아서. 두 번 다시 버리겠노라 말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멍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그때 혀를 찬 세영이 그의 손을 낚아챘다. “쓰읍, 그 사이 또 피를 냈네. 진정될 때까지 어디에 묶어놔야 하나.” 부드러운 손길이 스칠 때마다 바닥을 긁어 엉망이 된 손톱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제 손을 덮은 작은 손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가 물었다. “살고 싶어요?” 움찔한 남자는 붙잡힌 손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세영은 그가 도망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살고 싶죠? 어머니도 구하고 싶고. 행복해지고 싶고. 그런데 욕심부리면 안 될 것 같고. 나만 포기하면 될 것 같고.” 저절로 벌어진 입술을 달싹이던 남자는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거짓말쟁이.” 툭 떨어진 비난에 남자의 말이 끊어졌다. 가늘게 떨리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던 세영이 픽 웃었다. “기억 없을 때는 귀엽더니만, 삼백 년 동안 거짓말하는 법만 배웠나 보네.” “…….” “죽고 싶어하는 사람 눈을 본 적이 있는데, 지금의 당신이랑은 전혀 다르더라고요.” 남자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눈 위를 더듬었다. 그것으로는 제가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에 추하게 발버둥 치는 것으로 비칠까 봐 두려웠다. 그때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인 세영이 말했다. “욕심부려도 돼요. 뭐, 이 경우는 욕심도 아니잖아요. 당신이 호구처럼 굴면 모두가 편해지긴 하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도 모두가 조금 곤란해질 뿐이에요.” “…….” “고작 그 차이라고요. 그걸 위해서 이렇게 아파할 필요는 없잖아요?” 고작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세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몸을 일으켰다. “신이니 세상이니 걱정하지 마요. 답답하면 지가 또 새로운 방법을 찾겠죠. 뭐.” 사람까지 납치해온 놈들이 뭘 더 못하겠냐며 투덜거린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멍하게 바라보는 그를 보고 피식 웃은 세영이 “뭐해요, 일어나기 싫어요?” 하고 타박했다. 절로 내뻗어지는 손을 가까스로 멈춘 남자가 말했다. “저는 동정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입니다.” 남은 용기를 끌어모아 겨우 꺼낸 고백이었다. 미간을 찌푸린 세영이 “동정이라는 말은 기분 나쁜데, 동정이 아니라고 하긴 좀 그렇고.” 하고 중얼거렸다. 한숨을 푹 쉰 그녀가 남자의 무릎을 툭툭 걷어차며 말했다. “그래, 무슨 죄를 얼마나 지으셨는지 어디 한번 말해보시죠. 대체 뭘 했기에 달밤에 석고대죄하면서 고백해야 하냐고. 어? 진짜 궁금하네.” “…저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남자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예언대로 제 고향인 카르나이를 멸망시키고, 어머니인 에레슈키갈을 살해했습니다.” 주신을 지상에 강림시키기 위해서는 막대한 힘이 필요했다. 그가 성년이 될 때까지 나스쿤은 봉인진의 핵이 될 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남자는 처음부터 답을 알고 있었기에 어머니이자 그의 신이기도 했던 에레슈키갈 앞에 엎드려 빌었다. 사랑하는 양자의 애원에 에레슈키갈은 기꺼이 자신의 심장을 내어주며 말했다. -대가는 필요 없다. 너는 무엇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니까. 가장 오래된 그림자용인 에레슈키갈은 어둠을 통해 미래를 보는 자였다. 인간의 현자인 나스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을 내다봤으리라. 하지만 남자는 어리석었고, 그녀의 예언이 어떤 의미인지도 몰랐다. “이상을 이룰 수 있다면 작은 희생쯤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기에, 저 자신과 다른 이들의 희생을 너무나 가볍게 여겨서… 그것이 죄를 짓는지조차 몰랐습니다.” 여섯 조각으로 찢긴 신의 파편 하나가 모리아 전체를 사령의 땅으로 바꿀 힘을 지니고 있었다. 신이 직접 강림하고 찢겨나간 카르나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의식을 치렀던 신전으로부터 퍼져나간 막대한 신성력은 왕국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다. 너무나 강한 힘은 독이 되어 무엇도 자라고 태어나지 못하게 했다. 결국, 사람들은 천 년 동안 살아오던 터전을 버리고 떠나야 했다. 그곳은 삼백 년이 지난 지금도 풀이 돋지 않는 황무지가 되었다. “그런데도 전 제가 지은 죄를 책임지지도 못했습니다.” 육신을 잃고 검에 옮겨진 충격은 그를 오랫동안 잠들게 했다. 겨우 깨어났을 때는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의식만 남아있을 뿐인 그는 무력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검 속에 갇힌 채로 가끔 도전해오는 모험가로부터 봉인을 수호하면서, 그렇게 무의미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16년 전, 레오나드 루스타나와 만났다. 다른 모험가와 달리 그는 남자를 만나자마자 비난을 퍼부었다. 레오나드는 과거의 ‘재앙’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왕국의 후손이 ‘마도인’이라고 핍박받는 것을 남자의 탓이라고 여겼다. 거기까지 들은 세영이 귀를 후벼 파며 말했다. “별 싸가지 없는 새끼가 다 있네. 그래서 그 싸가지에게 ‘미안하다, 후손아. 내가 어떻게든 책임질게.’ 하고 약속한 거예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와 씨 진짜! 어쩌면 이렇게 한 치도 예상을 벗어나질 않냐.” 버럭 화를 내는 그녀에게 놀란 남자가 눈을 깜빡였다. 그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내뱉은 세영이 제 얼굴을 감싸 쥐고 “으으으!” 하고 기괴한 소리를 냈다. 걱정되어 쭈뼛거리는 그를 쏘아본 그녀가 중얼거렸다. “진짜 딱 한 대만 때리고 싶다.” “원하시면 때리셔도….” “변태 같은 소리 하지 말고. 그래서 던전에서 끌려 나와서 무료봉사한 거예요?” “…저는 레오나드에게 수호를 약속했지만, 그의 동료가 배신했습니다.” 레오나드가 인정받은 순간, 동료였던 로토가 그의 등에 칼을 꽂았다. 다른 동료인 마법사도 한패였기에 나머지 사람들은 손쓸 틈도 없이 당해버렸다. 차라리 레오나드의 육신을 빼앗았다면 어떻게든 대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오나드가 죽어버린 상황에서 남자는 완벽하게 무력했다. 무슨 수를 썼는지 잠시 의식이 끊어진 뒤 깨어나자 신전 안이었다. 삼백 년 만에 듣는 무녀들의 노래가 주변을 휘감고 있었다. 회색 머리의 무녀가 그를 붙잡고 간절히 기도했다. -신검이여, 제발 제 아들을 살려주십시오. 이대로 허무하게 죽어가게 두지 마십시오. 그리고 제단 위에 눕혀진 어린아이가 있었다. 열에 들떠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에서 사그라지는 생명이 느껴졌다. 자신에게 죽어가는 자를 살릴 힘은 없다고 말했지만,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의식 끝에 무녀는 아들의 가슴을 내리찍었다. 끝까지 망설이던 남자는 아이의 비명을 듣고 움직였다. 아이가 모친의 손에 살해당하는 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처음엔 아이의 몸을 차지한 후에 상처를 치료하고, 다시 주인에게 돌려줄 생각이었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는 남자도 알지 못했다. 의식의 영향인지, 죽음을 앞둔 육신이 그를 붙잡은 건지, 아니면 자신의 탓인지. 아이의 몸에 붙잡힌 것처럼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검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남자는 당황했다. 이대로 있다간 그의 존재에 짓눌린 아이의 영혼이 사라질 것 같았다. 결국 남자는 과거 그의 검이 그랬던 것처럼 의식을 열고 아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연약한 아이의 영혼은 자아를 지키지 못했다. 햇빛에 녹아내리는 눈처럼 아이는 그대로 남자에게 흡수되었다. “카벨의 흔적은 지금도 제 의식 속에 남아있습니다. 꿈을 꿀 때마다 나타나서 화를 내거나 울곤 합니다. 기억을 잃었을 때는 돌려달라는 그 아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두서없이 말을 잇던 남자가 멈칫하며 세영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너무 변명처럼 말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던 그녀가 물었다. “카벨은 어머니를 무척 사랑했나 봐요?” “예.” “당신도?” 남자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가끔 카벨이 제게 흡수된 것인지, 제가 카벨에게 먹힌 것인지 분간이 안 될 때가 있었다. 남자가 올리비아와 함께 있었던 시간은 고작 2년이었다. 하지만 자아의 혼란을 겪는 자신을 헌신적으로 돌봐준 ‘어머니’를, 다시 갖게 된 가족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저는 그럴 자격이….” 갑자기 손을 뻗은 세영이 그의 뺨을 닦아냈다. 움찔한 남자는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깊은 한숨을 쉰 세영이 말했다. “그냥 당신은 아무 생각을 안 하는 게 좋겠어요. 이제부터 제가 대신 생각할 테니까, 괜히 옆에 있는 사람 속 터트리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 “이제 일어나요. 뒷다리 다 닳겠네.” 세영의 명령에 자리에서 일어선 남자는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를 붙잡는 손에는 경멸도, 꺼림칙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믿어지지 않는 상황에 당황하던 남자가 물었다. “제가 정말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뭐, 비명이라도 질러줄까요. 아니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걷어차 줄까요.” 시큰둥하게 말한 세영이 들고 있던 목걸이를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눌러 목걸이를 꽉 쥐게 한 그녀가 웃었다. “당신이 진짜 극악무도한 죄인이라고 해도 그게 뭐 어때서요. 죄인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마구 희생당해야 하나? 죄를 지었으니까 여기도 쓰고 저기도 쓰고 막 굴려도 돼요? 사슴 씨, 그렇게 안 봤는데 무서운 사람이네.” “…사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어쨌든 당신은 행복해져도 돼요. 욕심도 부리고요. 안된다고 하는 놈은 제가 때려줄게요.” 진심이 담긴 눈빛에 마음이 그대로 무너질 것 같았다. 못난 가슴이 “제가 뭘 원하는지 모르시잖습니까.” 하고 원망을 토해내려 했다. 그게 그녀의 잘못이 아닌 것을 알고 있는데도. “이제 자러 가야죠. 안 졸려요?”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잡아당기는 손에 원망은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남자는 제가 정말 바보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세영이 시야 안에 있으면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뭔가를 할 때마다 제 행동이 어떻게 비칠지 자꾸만 신경 쓰였다. 이러면 싫어하게 될까 봐, 저러면 한심해 보일까 봐 마음대로 움직이는 게 어려웠다. 사소한 눈빛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지나가듯 던진 말 한마디에 기뻐하거나 슬퍼했다. 정작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잊어버릴 텐데도, 저 혼자 간직하는 것임을 뻔히 아는데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당신은 모르시니까, 괜찮지 않을까 하고.’ 처음 겪는 일에 남자는 이런 감정을 어떻게 숨겨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주변 사람들이 다 눈치챈 마음을 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그런 ‘사고’까지 있었는데도 그냥 실수이겠거니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것이 제게 관심이 없어서인 것 같아 슬프면서도, 그럼 이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어도 될 것 같아서 기뻤다. “자, 어서 누워요.” 모닥불 옆으로 그를 끌고 온 세영이 ‘명령’했다. 자동으로 깔린 자리에 누운 남자는 두 번째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그녀를 붙잡았다. 그는 옆자리의 동료들을 의식해 작게 속삭였다. “…이대로 잠들면 악몽을 꿀 것 같습니다.” 악몽이 무섭기보다는 그냥 그녀가 제 옆을 떠나는 게 싫었다. 이 순간이 조금이라도 길어졌으면 했다. 못 말린다는 듯이 한숨을 쉰 세영이 그의 옆에 주저앉았다. 마침 옆자리의 시디발라가 디안 쪽으로 굴러가 있어서 앉을 공간이 넉넉했다. “뭐, 손이라도 잡아줄까요?” 장난스럽게 묻는 말에 그는 부끄러움을 참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욕심부리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조금 놀란 표정을 지은 세영이 순순히 손을 내어주었다. 그의 가슴 위를 성의 없이 토닥거린 그녀가 말했다. “카벨 만나면 좀 닥치라고 전해줘요.” “…예.” “눈 감아야죠.” 얼른 눈을 감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얼굴이 붉어지지 않길 바라는 게 전부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가슴 위를 토닥이는 손이 느려지더니 가만히 얹혀있었다. 살짝 눈을 뜬 남자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세영을 발견했다. 오늘만 해도 이런저런 일을 겪었으니 피곤한 것이 당연했다. 남자는 제 배려 없음에 자책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바로 그때 숨죽인 목소리가 들렸다. “둘 다 잠들었어?” “쉿. 세영님이 앉아서 졸고 계셔.” 부스스 일어나는 동료들의 기척에 남자는 얼른 눈을 감았다. 시디발라가 “아, 자는 척하느라 죽는 줄 알았다.” 하고 작게 투덜거렸다. “쉿! 조용히 하라니까.” 하고 질책한 마리엔이 다가와 세영을 조심스럽게 눕혔다. 잠깐 뒤척이던 세영은 남자 쪽으로 몸을 돌린 채 다시 잠들었다. “어떡하지? 세영님 자리로 옮길까?” “그러다 깨실라. 그냥 담요 가져와서 덮어드려.” 분주한 기척이 오가더니 다시 조용해졌다. 남자는 제 얼굴을 훑고 지나가는 시선을 느꼈다. 잠든 척하는 것을 들킬까 봐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잠시 후 작은 속닥거림이 이어졌다. “맞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조금 운 것 같긴 한데.” 시디발라의 목소리에 남자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이상한 표정을 지을 것 같아서 무서웠다. “안 보이는 곳을 때릴 수도 있지. 자세히 봐봐.” “옷 속을 어떻게 봐. 그냥 내일 일어나면 물어보면 되지.” “바보야, 너 같으면 좋아하는 여자에게 두들겨 맞았다고 말할 수 있겠어?” 디안과 시디발라의 대화가 소곤소곤 이어졌다. 제발 빨리 끝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그의 심정이 통한 것일까. 리먼이 그만하고 자자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동료들이 각자의 자리에 눕는 것이 느껴졌다. 남자는 신중하게 백까지 센 뒤에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옆으로 웅크린 채 잠든 세영의 얼굴이었다. 어쩐지 제 숨소리가 그녀에게 거슬릴 것 같아서 잠시 숨을 멈춘 채로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떨리는 숨을 뱉은 남자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아주 살짝 그녀의 손등에 닿았다. 어쩐지 죄스러워지는 기분에 손을 쥐었다 편 그는 용기를 내어 세영의 손을 잡았다. 이 정도라면 허락받았던 거니 지나친 욕심은 아닐 것이다. 다시 한 번 세영의 얼굴을 바라본 남자는 눈을 감았다. 왠지 좋은 꿈을 꿀 것 같았다. ──────────────────────────────────── 용의 계곡 (8) 다음 날, 눈을 뜬 세영은 아주 따끈따끈하게 익어있는 사슴을 발견했다. 기억은 안 나지만, 사슴의 옆에서 자다가 추워지자 모피 속으로 파고든 모양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죽은 척하는 사슴이 안쓰러웠던 그녀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근처에서 아침을 준비하던 동료들이 일제히 바쁜 척하는 것이 보였다. ‘에이 씨, 이 꼬라지인 걸 보면 좀 깨워주지.’ 머리를 긁적이던 세영은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했다. 죽은 척하던 사슴이 벌떡 일어나 돕기 시작했다. 손끝이 스치자 얼음처럼 굳어버리는 그를 보다 못한 세영이 말했다. “어, 잘 잤어요?” “…예.” 눈이 빨간 것을 보니 한숨도 못 잔 모양이었다. 수줍은 듯 고개를 떨어뜨린 사슴이 순식간에 자리를 정리하고 도망쳤다. 세영은 조금 멋쩍은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모른 척하는 것도 힘드네.’ 전날의 뽀뽀뽀 사건으로 사슴은 그녀를 좋아한다고 동네방네 광고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전에도 전조가 좀 있긴 했지만, ‘저렇게 예쁜 애가 왜 날 좋아하겠어.’ 하고 무시했던 세영은 도망칠 곳을 잃고 말았다. 이젠 동료애라고 변명할 수도 없었다. 사실 세영도 마음이 복잡했다. 복작복작한 머릿속은 ‘하고많은 사람 중에 하필 나를?’ 하는 의문과 ‘어차피 난 떠날 사람인데….’ 하는 곤란함, ‘아, 나까지 상처 주기는 싫다고!’ 라는 난감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슴이 고백할 생각이 없다는 거였다. 세영이 입맞춤을 실수로 넘기자 완전히 용기를 잃은 것 같았다. 그래서 세영도 그의 마음을 모른 척하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각 잡고 이야기를 꺼내기도 애매한 상황이었으니까. ‘아오, 저놈의 사슴이 야행성만 아니었어도….’ 결심대로 할 거였다면, 불안하게 꼼질거리던 사슴이 밖으로 나가든 말든 따라가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세영은 그를 따라 나갔고, 중대한 결심까지 방해했으며, 네 미래를 책임지겠다는 약속 비슷한 것까지 해버렸다. 아주 확실하게 자살골을 넣은 상황이었다. ‘그래도 눈치가 없어서 다행이야.’ 세영은 시디발라와 대화 중인 사슴을 힐끗 쳐다봤다. 무어라 묻는 말에 연신 도리도리를 하는 모양이 꽤 곤란한 질문을 받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해 눈치가 백 단인 시디발라는 몇 마디 대답만으로 어젯밤의 일을 꿰맞출 것이다. 그것까지는 상관없지만, 혹시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면 곤란했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세영이 마리엔에게 다가갔다. “마리엔, 뭐 도울 거 없어요?” “앗, 세영님. 일어나셨어요? 이제 다 했어요.” 수프로 보이는 것을 휘젓던 마리엔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상 차리는 거라도 돕겠다며, 스킬로 손을 씻은 세영이 주섬주섬 그릇을 꺼냈다. “아침 먹은 후엔 본격적으로 훈련에 들어가야겠네요. 아 참. 교황에게 받은 모리아 지도, 누가 가지고 있는지 알아요?” “…어, 그거 누가 갖고 있더라. 잠깐만요. 시디발라!” 마리엔의 부름에 잠시 후 시디발라가 쪼르르 달려왔다. “아, 왜!” 하고 불퉁해 하는 것이 한창 재미있는데 방해받은 표정이었다. 마리엔은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모리아 지도 있잖아. 네가 가져가지 않았어?” “응? 나 안 갖고 있는데. 디안이 달라고 해서 줬어.” “디안이 보고 돌려줬잖아. 그 뒤에 어디에 뒀어?” “…어어?” 당황한 시디발라가 버벅거렸다. 쥐 수인족의 특성인지, 모으긴 부지런히 모아도 정리에는 다소 약한 그였다. 어른스럽게 한숨을 쉰 마리엔이 “빨리 가서 찾아봐.” 하고 그를 쫓아냈다. 투덜거리며 짐 쪽으로 다가가던 시디발라가 ‘뭔가 이상한데?’ 라는 표정으로 세영을 쳐다봤다. 물론 세영은 수프를 뜨느라 바쁜 척했다. 위기의 순간이 지나가자 평소와 다름없는 식사 시간이 되었다. 문제는 식사가 끝난 뒤였다. 뜬금없이 잘 자는 하마용을 끌고 온 시디발라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있잖아, 계속 생각해봤는데. 우리가 꼭 교단을 도와야 하는 거야?” 오늘의 설거지 당번을 정하던 동료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미간을 긁적인 세영이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교단의 도움을 받는 거지.” “아, 어쨌든 걔들은 나쁜 놈들이잖아. 걔들이랑 같이 행동하면 우리도 나쁜 놈이 되잖아!” 시디발라의 반박에 동료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과거 교단의 악행을 들은 뒤라 모두 크든 작든 그의 말에 공감하고 있었다. 난처한 표정을 지은 카라드가 달래듯이 말했다. “그건 삼백 년 전의 일입니다. 시디발라. 관련자들은 모두 흙으로 돌아간 뒤고, 후손들에게도 진실이 전해지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너도 그게 분했으니까, 저번 정벌 때 그런 거잖아.” 움찔한 카라드가 고개를 숙였다. 6년 전에 그는 가나트리 성당 앞까지 쳐들어온 성기사들을 공격해서 정벌을 방해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카라드는 “…펠릭스를 또다시 교단의 손에 죽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고 말했다. 동료들의 얼굴이 좀 더 침울해졌다. “그래서 네 손으로 보내겠다고 한 거야?” “그건 정말 별다른 의미가 아닙니다. 교단에겐 이제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생겼고,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모리아를 정벌할 겁니다. 그렇다면 제 손으로 거둬주는 게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사슴에겐 미안하게도 이미 회생 불가능한 분위기였다. 한 손으로 턱을 괸 채로 잘도 놀고 있는 둘을 구경하던 세영이 말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내가 심심해서 교단의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하진 않을 거 아니야. 누군가의 협조가 없으면 이번 공략은 불가능해.” “이전까진 그랬지. 하지만 얘가 있잖아?” 시디발라가 하마용의 다리를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그러자 뻐기듯 머리를 치켜든 하마용이 “거기라면 난 백번도 더 갔다 왔어!” 하고 지껄였다. 시디발라가 그를 돕듯이 말했다. “얘가 불을 뿜으면 거기 사는 놈들이 꼼짝도 못 한대. 날아다니는 애들도 막 도망가서 심심할 때마다 성당에 놀러 갔다 왔다는 거야. 어차피 우리는 성당까지만 가면 되잖아.” 무엇이든 태워버리는 용의 불꽃, 그리고 태생적인 스킬인 위압과 공포를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세영은 뺨을 긁적이며 물었다. “그래서 쟤가 따라와 준대?” “응, 어제 내 치킨을 양보했더니 얼마든지 따라와 준다고 했어.” 시디발라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조그마한 눈을 깜빡인 하마용이 “너, 널 위해서라면 어디라도 갈 수 있어.” 하고 수줍게 고백했다. 반짝이는 눈빛이 ‘날 위해 먹을 걸 양보해준 것은 네가 처음이야.’ 하고 말하고 있었다. 세영은 조금 뜨악한 눈으로 쥐와 하마를 바라봤다. ‘아니, 뭐. 편견 없이 보면 썩 안 어울리는 커플은 아닌데.’ 눈치 빠른 시디발라가 “좋아, 오늘 치킨도 양보해줄게!” 하고 멍청이처럼 구는 것을 보니 확실히 러브라인인 모양이었다. 속으로 허허 웃은 세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보류. 오늘 훈련하는 거 봐서 고려는 해볼게.” “…엥? 왜?” 나름대로 회심의 계획이었는지 시디발라가 대놓고 실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세영은 그의 머리를 꾹 눌렀다. “계획은 좋아. 하지만 너무 위험해. 저 녀석 혼자 우릴 보호하면서 성당까지 날아가야 하는 건데 그게 과연 가능할까?” “하지만….” “그리고 우린 여섯 명이야. 무리하면 넷까지는 안정적으로 탈 수 있을 것 같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탈 건데?” 사실 세영은 시디발라의 계획을 들었을 때, 보완책까지 떠올렸다. 문제는 그것이 동료들의 반감을 살 것 같았다. 그래서 좀 더 튕기다가 이 방법밖에 없다고 쐐기를 박을 생각이었다. 반복된 경험으로 얻은 성숙한 지혜였다. “자, 회의는 이걸로 끝. 이제 훈련하러 갑시다.” 세영이 손을 흔들자 동료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던 시디발라가 밖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당황한 하마용이 날개를 펄럭이며 그를 쫓았다. * 계곡의 하류 쪽은 독개구리 밭이었다. 몸은 초록색이고 등에 새빨간 무늬가 있는 놈들이 바글거리자 계곡 전체에 단풍이 든 듯했다. 오랫동안 천적이 없었던 개구리는 사람의 기척에도 반응하지 않고 한자리에서 개굴개굴 울었다. “블레이드 스톰!” 디안이 스킬을 내지르자 수십 마리의 독개구리들이 퍼버벅 터져나갔다. 문제는 그 뒤였다. 스킬 때문에 디안을 적으로 인식한 개구리들이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개구리로 뒤덮인 디안이 독기로 비틀거리다가 첨벙 계곡에 빠졌다. “꺄악, 어떻게 해! 괜찮아?” “멍청아. 스킬 쓰고 바로 피하랬잖아!” 마리엔과 시디발라가 디안에게 달라붙은 개구리를 떼어내다가 같이 중독되었다. 사실 죽을 맛인 것은 리먼이 더 했다. 이제 막 큐어 포이즌을 익힌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중독되는 동료들을 해독하느라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아이구, 저런.” 멀리 떨어진 바위에 앉아 그걸 구경하던 세영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카라드가 “도우러 가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세영은 자꾸만 일어서는 그에게 “앉아요.” 하고 명령을 내린 후 팝콘을 들려주었다. “그거 다 먹을 때까지는 일어설 생각하지 마요.” “하지만….” “이것도 훈련이거든요. 남의 아픔을 강 건너 불 보듯이 하는 훈련. 매번 그렇게 이성을 잃어서 파티에 도움이 되겠어요?” 자기희생은 고기방패에게 필요한 조건이지만, 카라드는 그 정도가 지나친 면이 있었다. 특유의 안전제일주의가 유일한 방어기제처럼 보일 정도였다. 제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이 아주 습관이 된 것 같아 조금 언짢았다. 애절한 눈으로 세영을 바라보던 카라드가 서둘러 팝콘을 먹기 시작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니 당장 체할 것 같았다. 한숨을 쉰 세영이 달래듯이 덧붙였다. “지금 가봤자 도움이 안 돼요. 피 몇 번 토하고 구르는 게 실전에서 죽는 거보다 낫죠.” 멈칫한 카라드가 세영을 바라봤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팝콘을 내려놓았다. 모른 척 고개를 돌린 세영이 다시 동료들을 구경했다. 몇 번 쓴맛을 본 동료들은 공략방법을 바꾸기 시작했다. 디안이 블레이드 스톰을 쓰면 곧바로 마리엔이 물의 장막을 펼쳐 달려드는 개구리를 막았다. 막을 뚫고 들어오는 놈은 시디발라가 처리했다. 타이밍이 어긋나 중독이 되면 리먼이 재빨리 해독했다. 점차 능숙해지는 그들을 보고 세영이 피식 웃었다. “봐요, 걱정할 필요 없잖아요.” “저들을 진심으로 아끼시는군요.” 부러움이 담긴 목소리였다. 세영은 그에게 힐끗 시선을 주었다. 한껏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농담으로 넘겨버릴 수가 없었다. 머쓱하게 뺨을 긁적인 세영이 말했다. “제가 진짜 저 사람들을 아꼈으면, 첫 공략이 끝나자마자 버리고 오지 않았을까요.”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입을 열자 속마음이 흘러나왔다. 고해하듯 제 죄를 말하던 사슴이 뇌리에 박혀서인지, 이 정도는 그에게 말해도 될 것 같았다. 비밀교환도 아니고 영 쑥스러운 모양새지만 말이다. “제가 있던 곳에서는 초보가 오면 다 함께 사냥을 갔거든요. 저만큼이나 아니, 저보다 강한 사람도 많았는데도 던전을 도는 동안 초보는 몇 번이나 죽더라고요. 상위 던전이라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한 번도 죽지 않고 끝난 경우가 드물었어요. 그때는 그걸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할 텐데도 카라드는 조용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래서 세영도 마음 편히 털어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는 현실이잖아요. 지금까지는 정말 운이 좋았던 거예요. 운이 조금이라도 나빴으면 미궁에서 저만 빼고 다 죽었을 수도 있었어요. 그리고 저는 그것에 별 의미도 두지 않았을 테고요.” 세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는 게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만, 마리엔이 눈앞에서 죽어도 아무 생각이 없었을 자신을 생각하면 조금 충격적이었다. “알았으니 놓아줘야 하는데 그게 안 쉽더라고요. 잘못하면 죽는 거 뻔히 아는데, 저 사람들이 괜찮다고 하니까 그냥 같이 있어도 되지 않을까 싶고.”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동료들을 강하게 만들려고 했다. 강해지면 쉽게 죽지 않을 것 같아서, 누구도 잃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에. 세영은 늘 자신이 생각하는 최선의 방법을 썼다. 그것이 동료들의 반감을 사거나 그들을 당혹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저들이 소중하고 그래서 결코 죽지 않길 바란다고.” “별로 알아주길 바라는 건 아닌데요.” 세영의 뚱한 대답에 카라드는 말없이 웃었다. 왠지 쑥스러워서 고개를 돌려버린 세영에게 그가 말했다. “에레슈키갈께서는 용이셨기에, 저는 그분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를 무척 걱정하셨다는 것도 나중에야 깨달았지요. 한 번이라도 저를 아낀다고 말씀해주셨더라면….” 우울하게 내리깔린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든 남자가 “미력한 자의 변명이지만, 듣는 자가 후회하지 않기 위한 말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고 말했다. 까맣게 물기가 도는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것에 압도당한 세영은 “기, 기회 봐서요.” 하고 말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카라드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앗, 뭐해! 둘이서만 맛있는 거 먹고!” 그때 불쑥 나타난 시디발라가 카라드에게 매달렸다. 그를 반긴 남자가 자연스럽게 팝콘을 넘겨주었다. 왠지 모르게 방해받은 기분이 든 세영이 “뭐야, 훈련 안 해?” 하고 묻자 “잠깐 쉬러 나온 거다, 뭐.” 하는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제야 시선을 돌리자 물 밖으로 빠져나온 동료들이 보였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갔는지, 사슴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와, 이거 맛있다. 나 역시 너랑 결혼할래.” 팝콘을 흡입하던 시디발라가 해맑게 말했다. 순간 움찔한 사슴이 세영을 바라봤다. 한숨을 푹 쉰 세영이 농담처럼 대꾸했다. “시동생 열두 명인 집에 시집갈 생각 없거든.” “아, 아니야. 다들 시집 장가 가서 집에 없단 말이야!” 얼른 고개를 저으며 부정한 시디발라가 “그 사이 몇 명 더 태어났을 수도 있지만.” 하고 소심하게 덧붙였다. 세영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식 낳을 생각도 없다. 너희 집안은 축구단이 기본이잖아?” “으음, 그럼 좀 줄여서 여섯…은 안 되려나?” “없어. 돌아가.” 냉정한 세영의 말에 시디발라가 “치이.” 하고 입을 내밀고는 마리엔 쪽으로 가버렸다. 디안이 그의 귀를 잡아당기며 “야, 자꾸 방해하지 말랬잖아.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하고 질책하는 것이 보였다. 못 본 척 고개를 돌린 세영은 카라드를 바라봤다. 어쩐지 넋이 빠진 것 같은 사슴이 멍하게 그녀를 보고 있었다. “왜 그래요?” 세영의 물음에 갑자기 얼굴이 빨개진 사슴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심장에 타격을 받은 세영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르려던 사슴이 첨벙 물 발자국을 남겼다. 좋은 날씨였다. ──────────────────────────────────── 모리아 (1) 사흘째 계속된 훈련으로 계곡의 개구리들은 씨가 말랐다. 현재 레벨에서 올릴 수 있는 스킬은 모두 올렸다고 판단한 세영은 하마용을 투입했다. 시디발라는 제 의견이 통과되었다는 것을 알고 뛸 듯이 기뻐했다. 시험 비행에서 하마용은 동료들을 주렁주렁 매달고도 가뿐하게 날았다. 아래에서 놈의 비행을 관찰하던 세영이 말했다. “생각보다 별 부담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네.” 혼혈이라서인지 하마용은 일반 하마보다 덩치도 크고 홀쭉했다. 짐말로 쓰기에는 최적의 형태였다. 세영의 말을 들었는지 바닥에 쿵 내려앉은 하마용이 으스댔다. “흥, 내가 얼마나 힘이 센데! 이것보다 열 명도 더 태울 수 있다고!” “잘됐네. 거기서 두셋은 더 태워야 하니까.” 세영의 말에 사색이 된 것은 동료들이었다. 지금도 간신히 매달려 있는데 여기서 셋이나 더 타면 붙어있을 자신이 없었다. 임시 안장에서 쿵 떨어진 디안이 “두, 두셋이라니. 누구를 데려가시려고요?” 하고 물었다. 싱긋 웃은 세영이 “건전지요.” 하고 답했다. 세영이 말한 ‘건전지’는 금방 밝혀졌다. 세헤라자드호로 돌아간 그녀는 방심하고 있던 성기사들을 덮쳤다.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기사들은 반항조차 못 하고 당해버렸다. 카라드가 바닥에 널브러진 그들을 하나하나 신중히 살피기 시작했다. 세영은 그렇게 꼼꼼하게 고를 필요가 없다며 손을 내저었다. “그냥 신성력 많은 놈으로 고르면 돼요. 다른 능력은 필요 없고, 오러 실드를 쓸 수 있기만 하면 되니까.” 결국, 신성력이 가장 많은 성기사 둘이 간택되었다. 세영은 나머지는 필요 없다며 모조리 묶어서 창고에 처박았다. 세헤라자드의 선장이 껄껄 웃으며 모자를 들어보였다. “또 뭘 꾸미고 계십니까. 구원자님.” “글쎄요. 교단을 적으로 돌리려는 노력?” 자조적으로 말한 세영은 용의 계곡을 떠날 준비를 했다. 교황이 도착하기 전까지 아직 이틀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그 사이에 던전의 공략을 마치고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소리였다. 급격히 피곤해진 그녀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별로 정의 따져가며 움직인 적은 없는데.’ 현실에서도, 게임에서도 세영은 별로 정의감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업보 수치 때문에 악행을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선하게 살았느냐고 하면 영 아니올시다였다. 문제 되지 않는 선까지는 적당히 규칙을 어기면서 그렇게 살았다. 그게 당연하지 않다고 말한 것은 지금의 동료들뿐이었다. “피곤하십니까?” 조심스러운 물음에 고개를 돌린 세영은 어느새 곁에 서 있는 사슴을 발견했다. 바로 옆이라고 하기엔 좀 떨어져 있었지만, 전보다는 꽤 가까운 거리였다. 처음에는 멀리서 보고만 있더니 아주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진짜 야생동물을 길들이는 느낌이라 기분이 묘해졌다. “…세영님?” 카라드의 부름에 움찔한 세영이 머쓱하게 웃었다. “아, 생각할 게 많아서 그래요.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정중하게 말한 카라드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검을 쥔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섬세한 손이 세영의 이마를 건드렸다. 손가락이 닿은 곳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퍼져나가 온몸을 감쌌다. 머리까지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와, 이거 버프예요? 효과 엄청 좋네요.” 세영은 제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감탄했다. 게임을 하면서 별별 버프를 다 받아봤지만, 이렇게 몸이 가볍고 기분까지 상쾌해진 것은 처음이었다. 수줍게 미소 지은 카라드가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하고 말했다. “마법은 아닌 것 같은데, 전투 중에도 사용할 수 있어요?” “…자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서.” 세영의 물음에 잠깐 머뭇거리던 카라드가 답했다. 왠지 미적지근한 반응이었지만, 이렇게 효과 좋은 버프를 펑펑 쓸 수 있는 쪽이 더 이상했다. 세영은 활짝 웃으며 그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고마워요. 덕분에 기운이 났어요.” 그러자 카라드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직접적인 반응에 놀란 세영이 손을 멈출 정도였다. 황급히 고개를 숙인 사슴이 시디발라 쪽으로 도망쳤다. 잡을 틈도 없이 혼자 남은 세영은 괜히 손을 꼼지락거렸다. “세영님, 식량을 모두 꺼내놨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아, 지금 갈게요.” 디안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배의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마른 식량을 분류 중이던 리먼이 고개를 들다가 멈칫했다. 세영은 그의 시선이 제 이마에 닿는 것을 느끼고 갸웃했다. “리먼?” “아니, 잘 어울리시는군요.” 싱긋 웃은 리먼이 다시 식량 분류를 시작했다. 미간을 찌푸린 세영이 “여기 뭐가 있어요?” 라고 물었지만 “별것 아닙니다.” 하는 대답만 돌아왔다. 마리엔에게 물어봐도 모르겠다고 고개를 흔드는 것을 보면 눈에 보이는 종류는 아닌 모양이었다. ‘뭐, 이상한 건 아닌 것 같으니까. 나중에 성기사나 족쳐봐야지.’ 세영은 불안한 마음을 접고 식량을 인벤에 정리했다. 모리아는 오염된 곳이라 노출된 물과 식량도 오염될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여분의 식량과 짐을 인벤에 보관하고 나머지는 배에 남겨두기로 했다. 정리가 끝나자 마지막으로 하마용이 배에 승선했다. 뒤따라 나온 쌍두룡이 걱정을 빙자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상한 것 덥석덥석 집어먹지 말고, 아무리 귀찮아도 일주일에 한 번은 깨끗하게 씻고.” “아, 알았다니까!” “똥 쌀 때도 조심하고. 너란 애는 여기저기 튀기면서 싸잖니.” “맞아, 다른 애들 앞에서 그러면 더럽다고 흉볼 거야.” “내, 내가 언제 튀기면서 쌌다고 그래!” 얼굴이 벌게진 하마용이 시디발라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배 위로 얼굴을 바짝 들이댄 쌍두룡이 계속 주절거렸다. “일 끝나면 바로 돌아와야 한다. 괜히 딴 곳으로 샜다가 사냥당하지 말고.” “알았다고! 그만 좀 해, 한 번만 더 하면 백 번째야!” “얘는, 걱정돼서 그러는 거잖니!” “어이, 아줌마.” 옥신각신하는 그들을 보다 못한 세영이 나섰다. 그녀는 새치름한 시선을 보내는 쌍두룡을 향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초대해줘서 고마워. 내가 진짜 잘 쉬고 간다고, 보답으로 동굴 가득히 보석을 채워주기로 했다고 교황에게 말해.” “…지, 진짜?” “응, 교황이 나한테 빚이 좀 있거든. 이왕 하는 김에 동굴을 하나 더 파서 가득 채워달라고 해봐.” 그들은 교단의 도움을 받지 않지만, 교단은 그들 덕에 손쉽게 모리아를 정벌할 것이다. 과거의 원한을 생각하면 약간의 손해를 입히는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흑심이 가득한 보상에 쌍두룡은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감격했다. “넌 사실 좋은 인간이었구나. 내 이름은 난나야.” “나는 난마. 이 은혜는 잊지 않으마.” “또 놀러 와. 너희라면 얼마든지 지나가게 해줄게.” 일행은 쌍두룡의 전송을 받으며 계곡을 떠났다. 자욱한 안개를 가르며 두 시간 넘게 비행하자 지도 전체가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기본 몬스터까지 독으로 강화된 언데드의 땅, 모리아였다. 동료들은 모리아의 경계에서 하선하기로 했다. 이대로 조르디아까지 직행하라는 주문에 선장은 “그동안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갑판에 늘어선 선원들이 일제히 경례를 올렸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들을 보던 세영이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세헤라자드까지 떠나고 나자 동료들의 얼굴엔 팽팽한 긴장이 서렸다. 경계에 섰을 뿐인데도 자욱하게 밀려드는 독기가 이전과 차원이 다른 위협을 느끼게 했다. 하마용에게 안장을 채운 세영이 독려했다. “자, 다들 연습한 대로만 하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포션 다시 한 번 점검하고 말에 탑시다.” “난 말이 아니라구!” 투덜거리던 하마용이 몸을 숙였다. 세영이 만든 안장은 자루 형태의 주머니가 양옆에 셋씩 매달려 있었다. 가운데 빈 공간에는 로프에 돌돌 말린 성기사들이 길게 늘어뜨려졌다. 도르래를 사용해서 성기사들을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게 조절한 세영이 마지막으로 탑승했다. “자자, 이랴!” “난 말이 아니라니까!” 투덜거린 하마용이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세영은 하마용의 고도를 조절해서 적당한 높이로 비행하게 했다. 어중간한 높이가 불편했던지 하마용이 작게 투덜거렸다. “좀 더 높이 날면 안 돼?” “더 빨리 날기나 해. 리먼, 공격에 대비해요!” 동료들을 적으로 인식한 비행 언데드들이 일제히 아래로 쏘아져 내렸다. 하마가 “크아앙!” 하고 울부짖었지만, 그들 중 일부만 멈칫했을 뿐이었다. 거의 동시에 리먼이 “신성한 방패!” 하고 외쳤다. 우윳빛의 방어막이 펼쳐지며 언데드들의 공격을 막았다. 날카로운 부리가 방어막을 두드리는 소리가 소낙비처럼 요란했다. 하마용의 높이가 낮아지면서 땅 위의 언데드들이 반응했다. 슬금슬금 몰려드는 언데드들을 확인한 세영이 외쳤다. “건전지 1번!” 디안이 도르래를 풀자 왼쪽에 묶인 성기사가 아래로 내려갔다. 재갈이 물린 입으로 비명을 지르던 성기사가 급하게 오러 실드를 펼쳤다. 둥글게 펼쳐진 실드가 리먼의 방어막을 보조하면서 하마의 배를 보호했다. “마리엔, 지금이에요!” 리먼의 방어막이 흔들리는 것을 눈치챈 세영이 외쳤다. 대기 중이던 마리엔이 물의 장막을 펼쳤고 리먼은 휴식에 들어갔다. 물의 장막은 물리력을 완전히 막아내지 못하는 대신 아군의 공격이 가능한 장점이 있었다. 일렁거리는 장막 사이로 부리가 비집고 들어오자 디안과 카라드, 시디발라가 열심히 놈들을 찔러 아래로 떨어뜨렸다. “세영님, 준비됐습니다!” 스킬을 준비한 리먼이 외치자 세영이 하마를 툭 치며 “빨리 불어!” 하고 외쳤다. 대기 중이던 하마가 서둘러 불꽃을 토해냈다. 앞을 가로막던 언데드들이 새까만 재가 되어 추락했다. 그 충격으로 물의 장막이 파괴되자 곧바로 리먼의 실드가 빈자리를 메꿨다. “2번 내려요!” 그 사이 힘을 다한 성기사의 오러가 반딧불처럼 깜빡이고 있었다. 서둘러 도르래를 움직인 디안이 성기사를 교체했다. 1번 건전지의 재갈을 푼 시디발라가 그의 입에 포션병을 꽂았다. “어, 어떻게… 푸억!” 무어라 항의하려던 성기사는 꿀렁꿀렁 넘어가는 포션에 쿨럭쿨럭 기침을 토해냈다. 비워진 병을 빼낸 시디발라가 다시 재갈을 물렸다. 인정사정없는 손놀림이었다. 물 흐르듯 진행된 공방에 세영이 척 엄지를 들었다. “다들 잘했어요. 그래도 방심하지 말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공격이 심해질 테니 정신 바짝 차립시다.” 드물게 떨어진 칭찬에 동료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세영은 그 사이 동료들에게 스며든 독기를 정화하며 지도를 노려보았다. 아직 성당의 끄트머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잘못하면 중간에 추락할 수도 있겠어.’ 거기에 대한 대비책도 몇 가지는 세워두었다. 다만 이번 맵의 난이도로 볼 때 몇 가지로는 모자랄지도 모른다는 것이 문제였다. ‘네임드 몹이 얼마나 나올지가 관건인데.’ 그 사이 시디발라가 “야, 전에 말한 거랑 다르잖아! 네 앞에선 다들 꼼짝도 못 한다며!” 하고 하마용을 질책하고 있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하마용이 “이, 이상하다? 전에 왔을 때는 분명 안 이랬는데….” 하고 변명했다. 세영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이고, 사랑이라는 게 뭔지. 참….’ 좋아하는 쥐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싶었던 하마용의 마음은 “거짓말쟁이!” 라는 비난 앞에 짓밟히고 말았다. 견디다 못한 하마용이 빼애앵 울음을 터트렸다. 그의 울음을 직격으로 맞은 몬스터들이 힘을 잃고 비실비실 추락하는 것이 보였다. ‘오, 제법 효과가 있잖아?’ 의외의 발견에 감탄한 세영이 시디발라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깜짝 놀라 돌아보는 그에게 그녀는 “더 해봐.” 하고 재촉했다. 당황한 시디발라가 “뭐, 뭘 더하라고?” 하고 되물었다. 세영이 “더 욕하라고.” 하고 속삭였다. 잠깐 망설이던 시디발라가 “이 거짓말쟁이야!”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 거짓말쟁이 아니야!” 분노한 하마용이 빼애액 고함을 내질렀다. 그것에 몬스터들이 놀라 물러서는 것을 확인한 시디발라는 신이 났다. 그는 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외쳤다. “거짓말만 하는 못생긴 하마래요! 돼지감자처럼 생긴 하마래요!” “너, 너어! 우리 아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생겼다고 했단 말이야!” “너희 아빠도 못생겼으니까 그렇지. 대왕 돼지감자야!” “야, 너 내려! 가만히 안 둘 거야!” 하마용이 고속비행을 하며 길길이 날뛰었다. 괜히 도르래를 올렸다 내렸다 하던 디안이 “저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겁니까?” 하고 세영에게 물었다. 세영은 그냥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마용의 활약에 한층 여유가 생긴 리먼이 “허허, 청춘이군요.” 하고 즐거워했다.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힌 카라드가 먼 산을 바라봤다. 모리아 전체에 들리도록 돼지감자를 외치던 시디발라는 “내려서 어쩌려고 그래!” 하는 마리엔의 질책을 받고 조용해졌다. 그제야 뒷수습이 걱정되는 눈치였다. 때로는 사랑보다 미움이 더 강하다더니, 첫사랑에 배신당한 하마용은 모리아를 주파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반 탈진상태로 성당 앞에 내려앉은 하마용이 원망스런 눈으로 시디발라를 노려봤다. 재빨리 세영의 뒤로 대피한 시디발라가 “미, 미안. 나도 어쩔 수 없었어.” 하고 사과했다. 그러자 눈물을 뚝뚝 흘리던 하마용이 “나쁜 계집애!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래!” 하고 외쳤다. 얼음처럼 굳어버린 시디발라 대신 피식 웃은 세영이 대꾸했다. “야, 이렇게 귀여운 애가 여자아이일 리가 없잖아?” 하마용의 눈이 댕그래졌다. 바르르 입술을 떤 그는 시디발라를 향해 “거, 거짓말이지?” 하고 물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시디발라가 “내가 어딜 봐서 여자야!” 하고 화를 냈다. 어디선가 쨍그랑하고 깨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우와앙! 하고 울음을 터트린 하마용이 눈물을 흩뿌리며 성당 안으로 돌진했다. 미처 말릴 틈도 없었다. “자, 그럼 우리도 슬슬 들어가 볼까요.” 세영의 말에 동료들이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하는 눈빛을 쏘아냈다. 괜히 “세영님은 저희를 생각해서….” 하고 편을 들던 사슴이 같은 공격을 받았다. 시디발라가 배신감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쟤가 착각하는 거 알고 있었지?” “전혀. 그냥 종족과 성별을 뛰어넘는 사랑인 줄 알았지.” 세영의 대꾸에 시디발라가 마구 불신감을 표했다. 슬쩍 그를 밀어낸 세영이 “이제 가자.” 하고 성당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리엔이 황급히 그녀의 뒤를 쫓아가며 물었다. “저, 세영님. 이렇게 아무런 대비 없이 들어가도 될까요?” “데스나이트는 지능이 있는 몬스터니까요. 싸울 것도 아닌데 뭔가 할 필요는 없죠.” 무심한 대답에 멈칫한 디안이 “예? 싸울 것이 아니라면…?” 하고 되물었다. 세영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신기만 넘겨받으면 굳이 싸울 필요 없잖아요. 그리고 교단의 악행을 고발할 수 있는 유일한 당사자가 사라지면 곤란하죠. 적당히 설득해서 어딘가로 대피시키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 그게 될까요?” 디안이 확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세영은 카라드를 가리키며 “뭘 걱정해요. 여기 옛 동료가 있는데, 설마 다짜고짜 공격하겠어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난처한 표정으로 변한 카라드가 중얼거렸다.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읭? 설마 동료도 못 알아볼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아요?” 세영의 되물음에 안 그래도 창백하던 얼굴이 납빛으로 변한 그가 설명했다. “…아니요. 펠릭스는 저를 무척 증오하기 때문에, 아마 설득이 통하지 않을 겁니다.” ──────────────────────────────────── 모리아 (2) 순간 세영이 느낀 것은 ‘와, 저 얼굴을 보면서도 그게 가능하구나.’ 하는 감탄이었다. 매사에 얌전하고 말이 없는 남자에게 ‘증오’라는 강렬한 감정을 품을 수 있는 것도 놀라웠다. 동료들의 생각도 비슷했는지, 시디발라가 그의 손을 당기며 물었다. “아니, 대체 왜?” 잠깐 망설이던 카라드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고 맥 빠진 대답을 했다. 놀라서 눈이 동그래진 마리엔이 “짐작 가는 곳도 없으세요?” 하고 물었다. 잠깐 고민하는 것 같던 카라드는 “확실한 건 아니지만, 몇 가지 정도라면….” 하고 중얼거렸다. 썩 자신 없는 목소리였다. 미간을 꾹꾹 누른 세영이 “잠깐 쉬었다 가죠.” 하고 휴식을 선언했다. 세영은 과거 성당의 정원이었던 곳을 깨끗하게 불살랐다. 풀풀 날리던 독기가 주변을 얼쩡거리던 언데드 몇 마리와 함께 사라졌다. 동료들은 뜨끈뜨끈한 열기가 남아있는 땅 위에 돗자리를 펴고 모여 앉았다. 카라드는 제 입만 쳐다보는 시선에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자, 여기 물. 이건 간식. 모자라면 더 달라고 하세요.” 슬그머니 끼어든 세영이 동료들의 주의를 흐트러뜨렸다. 좋아라 박수치며 호박파이를 집어 든 시디발라가 멈칫했다. “이거 후와와도 좋아할 텐데…. 내가 가서 데려올까?” “걔가 지금 목구멍으로 뭐가 넘어가겠냐. 내버려뒀다가 다 끝나고 나면 불러.” “하지만….” “안전한 곳에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마. 괜히 네가 가서 들쑤셔봐야 도움 안 돼.” 냉정한 대꾸에 시디발라의 어깨가 축 쳐졌다. 카라드가 그의 등을 조심스럽게 다독였다. 파티창으로 하마용의 상태를 체크한 세영이 물었다. “그래서 펠릭스가 당신을 증오하는 이유는요?” 난처한 듯 얼굴을 흐린 카라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펠릭스가 저를 증오한다고 말한 것은 6년 전입니다. 그전에는 무척 싫어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나름대로 고민해봤지만, 왜 증오로까지 발전한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간식을 입에 넣던 동료들의 손이 멈칫했다. 세영의 표정도 기묘해졌다. 저 말대로라면 6년 전의 사슴은 자신을 증오하는 사람을 위해 성기사들과 맞서 싸웠다는 이야기가 된다. 눈만 데굴데굴 굴리던 시디발라가 말했다. “걔는 왜 널 싫어했는데?” “글쎄요. 처음 봤을 때부터 저를 싫어했기 때문에….” 말끝을 흐린 사슴이 침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리먼이 그를 위로하듯 말했다. “빛의 교단과 용의 신전은 원래 사이가 나쁜 편이라고 들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무녀들과는 사이가 좋았습니다.” 쓴웃음을 지은 카라드가 덧붙였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펠릭스는 성격이 불같지만, 속정이 깊고 주변을 잘 돌보는 편이었다. 정의롭고 고결한 성품으로 부하들의 존경도 한 몸에 받았다. 다만 사슴 하나만 죽도록 미워했을 뿐이다. “아마 저의 뭔가가 그를 거슬리게 했던 모양입니다. 만날 때마다 점점 더 저를 싫어하는 것이 보여서, 나중엔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난처할 정도였으니까요.” 세영은 문득 샤이렌드라에서 보았던 영상을 떠올랐다. 중요한 시기에도 그렇게 시비를 걸었다면 다른 때는 말도 못하게 사슴을 쪼아댔을 듯했다. 즐겁게 떠드는 무리에서 홀로 침묵을 지키던 사슴을 생각하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할 말을 잃고 있던 디안이 물었다. “이유도 없이 일방적으로 미움받은 것 같은데, 그래도 그를 돕고 싶어?” 세영은 여기서 호구병은 더한 호구로 고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의아한 듯이 눈을 깜빡인 카라드가 답했다. “그것과는 상관없는 문제입니다. 저를 싫어하든 그렇지 않든, 펠릭스는 저의 동료고 뜻을 함께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의무를 다하는 한 제가 그를 먼저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이런 말을 진심으로 할 수 있다는 점이 증오를 산 것일지도. 한 손으로 턱을 괸 채로 카라드를 바라보던 세영이 말했다. “펠릭스는 수인족이라고 했죠? 무슨 종족이에요?” “호인족입니다. 그중에서도 극소수인 백호족이었습니다.” 하얀 호랑이라. 세영은 호랑이 옆에 괜히 친한 척 얼쩡거리는 사슴을 그려보았다. 피식 웃은 그녀가 물었다. “둘이 붙으면 누가 이겼어요?” “…펠릭스는 절대 약하지 않았지만, 속성상 제가 유리했습니다.” “펠릭스가 일방적으로 발렸다는 소리네요.” 자존심 강한 호랑이가 절대 이길 수 없는 사슴을 만난 격이었다. 정작 사슴은 영문도 모르고 ‘친하게 지내요!’ 하고 뿔을 비벼대고 있으니 호랑이 입장에선 환장할 지경이었을 것이다. 조금 딱하다는 기분이 든 세영이 말했다. “펠릭스는 나스쿤이랑 친했죠?” “단순히 친한 것 이상이었습니다. 나스쿤이 펠릭스를 키운 거나 다름없어서, 펠릭스는 그를 가족으로 여겼습니다.” 나스쿤은 가끔 펠릭스를 아들이라고 부르며 장난을 쳤다. 그럴 때마다 펠릭스는 자신은 혼자 컸다며 화를 냈지만, 썩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세영은 부러움이 몽글몽글 떠다니는 회상을 듣고 혀를 찼다. “그렇게 사이가 좋았는데, 어느 날 아빠가 말도 없이 둘째를 데려온 거잖아요.” “둘째…?” “당신이요, 당신. 꼬마 씨.”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니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세영은 어처구니없음에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고양이는 말이죠, 주인이 둘째를 데려오면 남편이 첩을 들인 것처럼 충격을 받는대요. 첩년이 꼬마꼬마 하고 귀여움받는데 눈이 안 뒤집히고 배기겠어요?” 얄미운 라이벌이 계속 얼쩡거리는데 제힘으로는 이길 수도 없지, 열 받아서 물어뜯으면 자기만 혼나지. 환장하고도 그 위에 화병이 생겼을 듯했다.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인 시디발라가 “뭐야, 질투였네.” 하고 말했다. 다른 동료들도 치정이면 어쩔 수 없지 하는 표정이었다. “저는… 그런 쪽으로는 한 번도 생각하질 못해서….” 충격을 받은 사슴이 더듬더듬 말했다. 신이 그를 만들 때 온갖 좋은 걸 다 쑤셔 넣느라 눈치를 넣을 공간이 다소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것도 나름대로 귀엽다고 생각한 세영이 말했다. “뭐, 당신 잘못 아니에요. 질투하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남을 죽자고 괴롭히면 안 되죠.” “그럼 어떡하죠? 질투가 쌓여서 미움이 된 거면 쉽게 풀리지 않을 텐데.” 마리엔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삼백 년 분량의 질투를 상상한 동료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잠시 생각하던 세영이 고개를 저었다. “삼백 년 전에는 그걸로 미워할 수 있지만, 갑자기 증오하게 된 이유는 아닐 거예요. 뭔가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 같은데. 혹시 6년 전에 만났을 때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짚이는 게 전혀 없는 건 아닌지, 카라드의 안색이 흐려졌다. 선뜻 말하기 어려운지 망설이던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봉인의 대가로 이름을 잃었다고 말해서인 것 같습니다.” “그게 왜요?” 언뜻 들어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이유였다. 오히려 이름을 빼앗김으로써 모든 것을 잃은 남자를 동정해야 하지 않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세영을 보고 희미하게 웃은 카라드가 말을 이었다. “펠릭스는 처음부터 제가 나스쿤의 계획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저를 받아들인 뒤에도 저의 자격을 의심했지요. 제게는 그들처럼 세상을 구할 절실한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나스쿤이 그를 ‘꼬마’라는 애칭으로 불렀다면, 펠릭스는 ‘인형’이라고 불렀다. 용의 뜻대로 키워진 인형이 과연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냐는 거였다. 그때만 해도 감정표현에 서툴렀던 남자는 뭐라고 반박하지 못했다. “제가 에레슈키갈의 심장을 가져왔을 때도 그는 저에게 봉인을 맡길 수 없다며 화를 냈습니다. 저에게 구원을 받느니 차라리 세상이 멸망하는 게 낫다며….” 그때는 펠릭스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왜 자신을 그렇게 불쾌하게 여겼는지도. 누구에게나 절대로 놓을 수 없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뒤였다. “이름을 잃은 저는 그의 말이 옳다는 증명이나 다름없었을 겁니다.” 세영은 뺨을 긁적였다. 여전히 납득이 가진 않았지만, 둘의 갈등이 쉽게 풀릴 종류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그녀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린 사슴을 툭 쳤다. “그렇게 풀죽지 말고요.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의외로 쉽게 들어줄지도 모르잖아요?” 뻣뻣한 북어도 두들겨 맞다 보면 연해지는 법이다. 풀죽은 사슴을 위해서라면 호랑이가 연고가 될 때까지 두들겨줄 의향이 있었다. 세영의 위로 아닌 위로에 창백한 얼굴에 옅은 핏기가 돌아왔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니, 최선을 안 다해도 되니까 내가 그놈을 팰 계기만 만들어주면 돼.’ 세영은 속마음을 감추고 빙긋 웃었다. 제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성격 고약한 호랑이가 귀담아들을 리가 없다. 사슴 쪽이 녹다운이 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갑자기 불안해진 그녀가 덧붙였다. “혹시라도 다치진 말고요.” 눈이 동그래진 사슴이 “…예.” 하고 답하며 보스스 웃었다. 괜히 겸연쩍어진 세영이 헛기침을 했다. 단순히 미끼로 쓰는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내뱉고 나니 오해받을 여지가 다분했다. “이, 이제 그럼 갈까요!” 큰 소리로 말하며 벌떡 일어난 디안이 분위기를 더욱 이상하게 만들었다. 두말 않고 일어난 동료들이 분주히 주변을 정리했다. 세영은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왠지 들어줄 분위기가 아니었다. 난처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그녀를 본 카라드가 몰래 얼굴을 붉혔다. 일행은 하마용이 열어젖힌 문을 통해 성당 안쪽으로 진입했다. 긴 복도를 걸어 본당으로 향하던 세영은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삼백 년 동안 언데드의 소굴이 된 것치고는 지나치게 깨끗한데?’ 온몸에서 사기를 내뿜는 언데드들은 산자의 생기를 빼앗고 나무를 썩게 한다. 건물 자체야 돌로 지은 것이니 멀쩡하다 해도 나무로 만든 가구 따위는 이미 폭삭 내려앉았을 것이다. 하지만 부서진 가구나 먼지 따위는 흔적도 없었다. 꼭 누군가가 정성 들여 치운 것 같았다. ‘여기 사는 건 데스나이트 뿐일 텐데. 걔들이 빗자루 들고 청소하는 건 좀….’ 지능이 있는 몬스터이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별로 상상하고 싶진 않았다. 딴생각에 빠져있던 세영은 정면에서 튀어나온 몹을 뒤늦게 발견했다. -멈춰라! 기세 좋게 튀어나왔던 데스나이트는 세영의 주먹을 맞고 복도 끝까지 날아갔다. 돌바닥에 갑옷이 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놀란 가슴을 누른 세영이 “아, 씨발. 깜짝이야!” 하고 소리쳤다. 덩달아 놀란 동료들이 “뭐, 뭐였지?” 하고 두리번거렸다. 완전히 찌그러진 데스나이트가 거기 대답할 리가 없었다. 주저하던 사슴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때릴 생각 없었거든요. 놀라서 그런 거예요.” 각자의 말을 내뱉은 둘이 멈칫했다. 머리를 긁적인 세영이 “쟤가 좀 약한 놈인가 봐요.” 하고 변명했다. 어색하게 웃은 사슴이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하고 앞으로 나갔다. 마리엔이 “그래도 저게 펠릭스라는 분은 아니라서 다행이에요.” 하고 말했다. 찔끔한 세영이 오른손을 뒤로 감췄다. 그때 복도의 끝에 닿은 카라드가 본당의 문을 열었다. 순간 세영의 시야가 까맣게 물들며 이벤트 영상이 시작됐다. 성당을 관통하듯 거대한 빛기둥이 치솟았다. 모리아 전체를 밝게 비추던 기둥은 어느 순간 힘이 다한 듯이 점차 줄어들었다. 마침내 그것은 두 손에 들어올 크기의 작은 구로 변했다. 날카로운 손톱이 달린 손이 그것을 움켜쥐려다 실패했다. 빛나는 구는 마치 환영처럼 그의 손을 통과시켜버렸다. 그때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펠릭스 님, 어서 피하십시오! 교단에서…! 외침의 끝은 날카로운 비명이 되었다. 본당 안으로 밀고 들어온 자들이 닥치는 대로 검을 휘둘렀다. 붉은 망토를 장식하는 은십자는 이단 심판관들의 상징이었다. 안에 있던 자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숫자상으로 불리했다. -대체 왜? 그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외쳤다. 그에 돌아온 대답은 날카롭게 찔러든 창이었다. 누군가 그것을 가로막으며 피를 뿜었다. 그것에 물들듯이 영상 전체가 붉게 흐려졌다. 붉어진 화면이 점점 멀어지며 누군가의 눈빛이 되었다. 투구 아래로 새어 나온 붉은 안광이 차갑게 빛났다. 뼈로 만든 옥좌 위에 왕관을 쓴 기사가 비스듬히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열리는 문을 응시하던 기사는 안으로 들어선 방문객을 향해 말했다.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 모리아 (3) 또다시 바뀌는 장면에 이제 끝난 줄 알았던 세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에 보인 것은 새하얀 대리석을 깎아 만든 계단이었다. 계단 중간에 새카만 검을 품에 안은 소년이 앉아있었다. 단순한 모직옷도 소년의 아름다움을 가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신비로운 분위기를 부추겨 소년을 인간이 아닌 신성한 존재처럼 보이게 했다. 그건 세영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는지, 중년의 여인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 보였다. 소년은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기도를 마친 여인이 절을 하고 물러가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때 건물의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가장 먼저 시선을 끈 것은 호랑이를 닮은 머리였다. 귀만 빼면 인간에 가까운 시디발라와 달리 그는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맹수처럼 보였다. -펠릭스! 조각상처럼 앉아있던 소년이 벌떡 일어나더니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달처럼 하얀 맨발이 맨땅을 밟고 호랑이에게 다가섰다. 보통 아이라면 경기를 일으켰을 얼굴에 소년은 잔뜩 반기는 눈빛을 보냈다. 두꺼운 팔로 가슴 앞에 팔짱을 낀 호랑이가 물었다. -방금 그 인간은 뭐냐? -…네? 아, 어머니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한 박자 늦게 그의 질문을 이해한 소년이 답했다. 변성기가 오지 않았는지 여리고 앳된 목소리였다. 눈을 가늘게 뜬 호랑이가 되물었다. -네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께 전해 달라 기도하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어머니의 양자이니. 긴 속눈썹을 내리깐 소년이 말했다. 제법 오래 사슴을 관찰해온 세영은 그것이 쓸쓸해 하는 표정임을 알아챘다. 하지만 호랑이는 그것에 별 관심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너는 그들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지? -그냥 안타깝다던가, 안됐다는 생각을 합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소년이 답했다. 바짝 긴장한 얼굴이 눈에 보여서 조금 딱할 정도였다. -그럼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거냐. -어머니께서 그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금하셔서…. -무슨 말만 하면 어머니, 어머니! 네놈에겐 생각이라는 게 없나? 갑자기 화를 내는 호랑이에게 놀란 소년이 주춤했다. 품에 안은 검을 본 호랑이가 그것마저 거슬린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건 또 왜 안고 있는 거냐. 검이 무슨 장난감인 줄 알아? -…카라드는 제 친구입니다. -하, 검 밖에 친구 삼을 게 없었나 보지? 너 같은 인형에겐 아주 잘 어울리는 친구군. 비꼬듯이 말한 펠릭스가 홱 돌아섰다. 긴 꼬리가 사납게 흔들렸다. 그를 붙잡으려다 멈춘 소년이 맥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검을 쓰다듬은 소년이 자신은 괜찮다고 말하는 것으로 영상이 끝났다. “괜찮긴 개뿔이.” 세영은 언짢은 기분으로 내뱉었다. 저놈의 ‘괜찮다’를 금지어로 설정해야 할 것 같았다. 마리엔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세영이 왜 그러냐고 입 모양으로 묻자 그녀는 본당 안쪽을 가리키며 “저대로 둬도 괜찮을까요?” 하고 물었다. 아차 싶었던 세영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데스나이트들에게 포위된 카라드가 보였다. 그는 저를 겨눈 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옥좌에 다가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제발,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펠릭스. 어서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교단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정벌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시끄럽군. 일개 교단 따위가 무슨 문제란 말이냐. 옥좌에 기대앉은 펠릭스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오만하기까지 한 발언에 버둥거리던 사슴이 움직임을 멈췄다. 붉은 안광이 무심히 그를 응시했다. -이곳은 정복되지 않는다. 정복하려는 자가 정복될 뿐. 지난 삼백 년 동안 이곳에서 죽어 나간 성기사들을 생각해봐라. 그들 모두가 데스나이트로 일어선다면 어떻게 될 거라 생각하나. 세영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저걸 잘났다고 지껄이는 것을 보면 데스나이트가 될 때 뇌가 구멍 난 스펀지로 변한 모양이었다. ‘악당은 왜 굳이 저런 이야기를 시시콜콜하게 털어놓을까. 그냥 몰래 하면 안 되나?’ 계획의 기본은 보안이거늘. 기본도 안된 놈이라며 탄식하는 세영과 달리 하얗게 질린 카라드가 말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씀입니까?” -애송이. 6년 전 네가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진작 끝났을 일이다. “당신은 수호자입니다. 신기의 힘을 사사로이 사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을 잊었습니까.” 카라드의 목소리가 필사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펠릭스는 그의 간절한 마음을 비웃었다. -수호자? 그 이름이 내게 뭘 해주었단 말이냐. 내 모든 것을 빼앗고 비참하게 살해당하게 한 이름 따위는 버리겠다. “펠릭스!” 옥좌로 달려들려는 사슴을 데스나이트의 검이 가로막았다. 세영은 머쓱하게 뺨을 긁적였다. ‘뭐, 이해 못 할 소리는 아닌데….’ 오히려 모든 것을 희생하고도 계속 의무를 다하려는 사슴 쪽이 이해가 안 된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월급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녀라면 진작 때려치우고도 남았을 일이었다. 그때 올무에 걸린 것처럼 몸부림치던 사슴이 외쳤다. “저는 당신을 믿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데스나이트가 되었을 뿐 당신의 고결함은 변하지 않았다고!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타락한 겁니까.” -타락? 옥좌에서 벌떡 일어난 펠릭스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검을 겨눈 데스나이트를 밀어내고 사슴의 모가지를 움켜쥔 호랑이가 으르렁거렸다. -네놈이 감히 타락을 말해? 반사적으로 앞으로 나서려는 디안을 가로막은 세영이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로는 아직 연고를 만들기에 부족하다. 곤죽이 되도록 때려도 원망을 듣지 않으려면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했다. -타락이라고? 내게 주어진 힘으로 과거의 원수들을 처단하는 것이 왜 타락이란 말이냐! 날카로운 손톱에 긁힌 옷이 찢어지며 목걸이 일부가 드러났다. 투박한 광택에 눈을 찌푸린 펠릭스가 목깃을 잡아 뜯었다. 훤히 드러난 목걸이에 카라드의 얼굴에 낭패가 스쳤다. -…이건 또 뭐야. 그 사이 노예라도 된 거냐? 펠릭스가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어릴 때 사냥당해 노예가 되었던 그는 목걸이가 어떤 의미인지 곧바로 알아보았다. 붉어진 얼굴로 목을 가린 카라드가 “제 주인께서 주신 겁니다.” 하고 답했다. 펠릭스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네놈은 갈수록 형편없어지는구나. 주인이라고? 펠릭스는 카라드의 목을 움켜잡고 헝겊 인형처럼 바닥에 팽개쳤다. 나동그라진 사슴의 가슴을 짓밟은 그가 차갑게 말했다. -처음은 빌어먹을 용, 그다음은 나스쿤. 이번에는 아예 주인이냐! 네놈은 누군가에게 기생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는 건가? “윽…!” 펠릭스의 다리를 움켜쥔 카라드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었다. 가슴을 짓밟은 그대로 몸을 숙인 펠릭스가 카라드의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흠칫한 사슴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손대지 마!” -새 주인에게도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았겠지. 세상에 다시없는 충성을 바칠 것처럼 굴면서, 사실 네놈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이용할 뿐인데도. 언데드의 사기에 침식된 목걸이가 시커멓게 변했다. 완전히 부식된 그것을 힘주어 뜯어낸 펠릭스가 목걸이의 파편을 바닥으로 집어 던지며 말했다. -결국, 너는 너 자신이 가장 소중할 뿐인 이기적인 놈이다. “…….” 다음 순간 검은 번개 같은 것이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펠릭스가 날카롭게 휘둘러지는 검을 피해 뒤로 물러섰다. 가슴팍을 움켜쥐고 몸을 일으킨 카라드가 녹슨 목걸이의 파편을 내려다보았다. 한순간 흔들렸던 눈이 펠릭스를 노려봤다. -이제야 싸울 마음이 들었나? 빈정거리는 펠릭스의 말에 꽉 다 물린 입술이 열렸다. “당신을 형으로 여겼습니다.” -너 따위 인형을 동생으로 둔 적 없다. 차갑게 대꾸한 펠릭스가 곁으로 다가온 데스나이트에게서 검을 받아들였다. 세영은 흉악한 가시가 뾰족뾰족 돋은 검을 보고 “…구려.” 하고 중얼거렸다. 왜 죽었다 깨어나면 저따위 미의식을 갖게 되는지 조금 궁금했다. “펠릭스, 정말 이런 길밖에는 없는 겁니까?” 여전히 미련이 남은 사슴이 물었다. 사기가 줄기줄기 흐르는 검을 치켜든 펠릭스가 웃었다. -네게 남은 길은 이대로 쓰러져 내 권속이 되는 것뿐이다. 그래도 다행이지 않느냐. 처음으로 내게 도움이 될 일이 생겼으니. 말이 끝나기 무섭게 펠릭스가 달려들었다. 사선으로 내리꽂히는 검을 재빨리 피한 사슴이 다시 한 번 몸을 비틀었다. 펠릭스의 검 끝에서 튀어 나간 검은 반원이 그의 옆구리를 스치며 날아가 벽을 박살 냈다. 그 과정에서 두 마리의 데스나이트가 희생되었지만, 펠릭스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것도 피하지 못하다니, 실력이 녹슬었구나. 애송이. 시커멓게 물든 옆구리를 움켜쥔 카라드가 한걸음 내디뎠다.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꺼지듯 사라진 그의 몸이 펠릭스의 그림자에서 불쑥 솟아났다. 빙글 몸을 돌린 펠릭스가 회전하는 힘을 실어 카라드의 검을 때렸다. 피하지 않고 맞받아치는 카라드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치솟았다. 쩡 소리와 함께 펠릭스의 검이 위로 들렸다. 절호의 기회였지만, 주춤한 카라드가 울컥 검은 피를 토했다. 순식간에 승기를 되찾은 펠릭스가 그를 밀어붙였다. 간신히 그것을 막아낸 카라드로 인해 두 개의 검이 맞붙은 대치상태가 되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검을 본 펠릭스가 비웃었다. -연약한 몸뚱이가 네 힘을 감당하지 못하는 모양이지? “…….” -좀 더 강한 몸을 찾지 그랬나. 아, 그 예쁘장한 얼굴 때문인가? 경멸하듯 말한 펠릭스가 카라드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반사적으로 피하려던 카라드는 옆얼굴에 그것을 맞고 말았다. 사기가 응축된 침이 새하얀 뺨을 시커멓게 태우기 시작했다. 황급히 펠릭스의 검을 밀어낸 카라드가 비틀거리며 한쪽 눈을 감싸 쥐었다. -이제야 네게 어울리는 꼴이…. 껄껄 웃던 펠릭스의 몸이 갑자기 뒤로 휙 날아갔다. 화살처럼 쏘아진 세영이 그의 가슴을 걷어찬 것이다. 옥좌 앞 계단에 쿠당탕 떨어진 펠릭스가 분노어린 고함을 내질렀다. -감히! 누구냐! “나?” 히죽 웃은 세영이 목을 좌우로 꺾었다. 그녀에게 정말 다행이게도 펠릭스는 발차기 한 방에 죽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 힘을 빼고 차기도 했지만, 펠릭스의 피통이 제법 큰 탓도 있었다. 왕관을 쓴 몰골을 보니 데스나이트가 아니라 데스킹 정도는 되는 모양이었다. “쟤 여자 친구인데.” 놀란 참새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사슴을 가리킨 세영이 말했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돌바닥에 카라드의 검이 떨어졌다. 의혹 어린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던 펠릭스가 물었다. -저놈의 새 주인인가? “저건 그냥 내 취미 생활이고. 히드라 새꺄.” 목걸이의 파편을 턱짓한 세영이 말했다. 연고 만들기에 앞서 주먹을 우둑우둑 꺾은 그녀가 상쾌하게 웃었다. “그래서, 내 사슴을 울린 각오는 되어 있겠지?” ──────────────────────────────────── 모리아 (4) -…사슴? 펠릭스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온 동료들도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시디발라가 카라드를 훑어보며 “아니, 어딜 봐서?” 라고 물었다. 카라드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디안이 황급히 시디발라의 팔을 잡아당기며 “야, 그런 건 묻는 게 아니야!” 하고 질책했다. “내가 사슴이라고 하면 사슴인 거다.” 세영은 그들의 옹이구멍 같은 눈에 한탄하며 말했다. 아니, 왜 모르는 거지. 딱 봐도 하늘에서 춤추며 내려온 사슴의 요정처럼 생겼는데. -이상한 여자군. 펠릭스의 평가에 분개한 세영이 몸을 날렸다. 빠악 소리와 함께 투구를 쓴 머리가 뒤로 홱 젖혀졌다. 그것이 원래 자리로 돌아오기도 전에 세영의 주먹이 다시 잔상을 남기며 날았다. “그러는 넌! 새꺄! 동생 얼굴에! 침이나 뱉고! 잘하는 짓이다!” 말이 끊어질 때마다 뻐억뻐억 북 터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펠릭스는 정신을 못 차리고 두들겨 맞았다. -왕이시여! 탈탈 털리는 그를 보고 당황하던 데스나이트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것도 잠깐, 몸을 홱 돌린 세영의 권격을 맞고 그대로 뻗어버리고 말았다. 세영은 잘됐다는 듯이 쓰러진 데스나이트를 들어 그걸로 펠릭스를 패기 시작했다. 콰작콰작 갑옷 찌그러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누군 손댈 줄 몰라서 가만히 둔 건지 알아? 앙? 나도 못해본 침질을 왜 니가 하냐고! 이 개불알꽃 같은 새꺄!” 형이 쳐맞을 때마다 움찔거리던 카라드가 돌처럼 굳었다. 리먼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자, 일단 치료부터 합시다.” 하고 말했다. 그때 내려치는 힘을 견디지 못한 데스나이트가 산산이 부서졌다. 발 앞까지 굴러온 허연 팔목뼈를 본 시디발라가 히이익 소리를 냈다. 세영은 다른 데스나이트를 집어 들었지만, 새로운 놈은 내구도가 썩 좋지 못했다. 고작 두어번 내려치고 끝이었다. 더욱 분개한 세영이 부서진 데스나이트의 정강이뼈로 펠릭스의 머리를 갈겼다. “다시 뒈져, 인마! 넌 인류에게 죄를 지었다! 죽음으로 그 죄를 조금이나마 갚아!” 좀 패서 정이나 떼라고 내버려뒀더니 저 예쁜 얼굴을 지져놓았다. 그녀에겐 국보가 불탄 것만큼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손이 떨려서 이 새끼를 한 방에 신의 옆으로 보낼 것 같았다. 세영은 잠깐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 망할 계집이! 좀 덜 맞았다고 정신이 돌아온 펠릭스가 이를 드러냈다. 세영은 그의 멱살을 잡고 “계집이 뭐? 왜? 뭐? 계집한테 맞으니 꼽냐?” 하고 뺨을 철썩철썩 갈겼다. 12연속 뺨 때리기를 맞은 펠릭스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이냐!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세영의 손을 뿌리친 펠릭스가 소리쳤다. 그동안의 분노와 한이 절절히 우러나오는 목소리였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영의 발차기가 그의 턱에 작렬했다. “남의 남친 얼굴을 조져놓고!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어?! 모르겠어? 모르겠으면 알 때까지 맞아! 새꺄!” 펠릭스는 계단을 위아래로 굴러다니며 갑옷에서 먼지가 나도록 맞았다. 세영은 아예 제 신발을 벗어들고 그것으로 펠릭스를 두들겨 팼다. 계집 운운 하는 놈에게 여자 구두로 맞아 죽는 영광을 베풀어줄 생각이었다. 그녀의 속셈을 눈치챈 펠릭스가 노성을 질렀다. -이 무도한! 네게 최소한의 자비가 있다면 명예롭게 죽여라! “자비? 난 그딴 거 안 키우는데.” 냉랭하게 대꾸한 세영이 구두 밑창으로 그의 안면을 갈겼다. 간신히 버티던 투구가 박살 나며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사실 그것은 얼굴이라 부르기에 부족했다. 이목구비도 없는 시커먼 덩어리 속에 붉은 눈알이 젤리처럼 박혀 있었다. 황급히 제 얼굴을 가린 펠릭스가 으르렁거렸다. “어딜 짖어!” 미의식을 빼면 감수성이 심히 부족한 세영은 가차 없이 그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펠릭스가 깽! 소리를 내며 나가떨어졌다. 제 형의 몰골을 본 사슴이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는 애절한 눈으로 세영을 올려다보며 애원했다. “제발 펠릭스의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아니, 쟨 이미 죽었는데요.” 당황한 세영이 변명처럼 말했다. 그녀의 말이 가슴에 박힌 것인지 까만 눈에 물기가 그렁그렁 고였다. 버벅거리던 세영이 황급히 그를 달래기 시작했다. “왜, 왜 울고 그래요. 안 죽일게요. 안 죽인다니까!” “하지만….” “아니, 죽일 거면 한 방에 죽였죠. 저렇게 보여도 별로 안 아플 거예요. 나름대로 살살 때렸거든요.” 저놈이 엄살이 심해서 그런 거라는 말에 뻗어있던 펠릭스가 바르작거렸다. 억울함이 가득 담긴 움직임이었다. 슬쩍 몸을 움직여 사슴의 시야를 가린 세영이 얼른 클렌징 스킬로 손을 씻었다. 깨끗해진 손으로 결 좋은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자, 착하죠. 저기 가 있으면 금방 끝낼게요. 살다 보면 주먹으로 대화할 수도 있죠. 너무 신경 쓰지 마요. 상처에 안 좋아요.” 무어라 더 말하려던 카라드의 얼굴이 서서히 빨개졌다. 뺨까지 만지작대며 “우쭈쭈, 아이 예쁘다.” 하고 말하자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되는 표정이었다. 그의 혼을 쏙 빼놓은 세영이 눈짓으로 시디발라를 불렀다. 동정 어린 표정으로 달려온 시디발라가 넋 나간 사슴을 쿡쿡 찔러 일으켜 세웠다. 사슴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 얼굴로 세영을 돌아보며 끌려갔다. -진심인가? 아니면 그냥 갖고 노는 거냐? 펠릭스가 사납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세영은 ‘어쭈?’ 하고 생각하며 눈썹을 치켜들었다. “진심이든 아니든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않아?” -……. 펠릭스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뭉개진 케이크 같은 얼굴로 세영을 응시하며 말했다. -우리는 봉인의 대가로 각자의 소중한 것을 잃었다. 저놈이 뭘 잃었는지 들었나? “들었어. 그게 뭐?” 세영이 시큰둥한 얼굴로 답했다. 붉게 일렁이던 눈이 처음으로 가라앉았다. 그는 광기가 사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스쿤은… 저놈을 무척 아꼈다. 제 예언으로 인생을 망친 것이나 다름없다며, 어떻게든 보상을 하고 싶어 했어. 사람 같지도 않았던 저놈을 가르치고 돌봐서 사람 같은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지. 검의 정령은 나스쿤을 천하의 개새끼로 묘사했지만, 펠릭스의 입장은 좀 다른 모양이었다. 어찌 됐든 나스쿤이 방치되어 있던 새끼 사슴을 주워서 돌봐준 것은 사실인 듯했다. -나스쿤뿐만이 아니었다. 콧대 높은 엘프도, 현명했던 케이론도, 공주까지 모두 녀석을 아꼈지. 심지어 빌어먹을 용까지 놈을 사랑했다. 그래, 그도 지금의 너 같은 눈을 하고 있었지. 세영은 이놈이 질투를 하는 건지, 자랑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그를 응시했다. 펠릭스의 얼굴에 일순 분노가 어렸다. -하지만 결국,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다. 놈에게 소중한 건 제 이름뿐이었어. 그들 역시 놈에게는 언제든 심장을 뜯어낼 수 있는 산제물일 뿐이었다. 피식 웃은 세영이 그의 안면을 맨발로 걷어찼다. 사슴을 달래느라 잠깐 내려놓은 신발을 집어 든 그녀가 흥겹게 말했다. “자, 또 맞자. 계속 맞으니까 적응돼서 안 아프지? 원래 이렇게 쉬어가면서 맞아줘야 더 아픈 법이거든.” 이목구비가 없는 얼굴이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세영은 자진모리장단에 맞춰 그를 두들겨 팼다. 발톱을 세우고 저항하던 펠릭스는 얌전히 있는 쪽이 덜 아프게 맞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2차 매타작이 끝났을 때 그는 두 팔을 옹송그린 채 몸을 새우처럼 구부리고 있었다. 꼼짝도 못 하는 그를 콱 밟은 세영이 말했다. “아이고, 이 괭이 새끼. 동생이 우리 가족을 가장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니, 써운했나 봐?” -무슨…! “그럼 서운하다고! 말을 할 것이지! 왜 증오니 뭐니 해서! 애 가슴에 못을 박아, 개새꺄!” 반박하려던 펠릭스는 또다시 떨어지는 매타작에 입을 다물었다. 그는 세영의 욕설 속에서 개가 되었다가 소가 되었다가 다시 말이 되었다. 그의 종족을 열두 번은 더 갈아치우고 만족한 세영이 손을 멈췄다. 그녀는 이제 꼼짝도 못하게 된 펠릭스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버려진 개를 주워주면, 개는 무조건 주인을 사랑해야 하는 거냐?” 머리를 감싼 팔 사이로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사슴에게 했듯 그의 가슴을 짓밟은 세영이 말을 이었다. “여름에 삶으려고 키워도 감지덕지하면서 떠받들어야 하냐고. 대답해봐. 새끼야.” -……. “목이 말라 죽어가는 애한테 물 한 바가지 끼얹어놓고, 왜 이 물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안 하냐고 비난하는 거랑 뭐가 달라?” 소중한 것이 있고 그것을 지키느라 바쁜 이들의 관심은 그저 스치는 바람과 같았을 것이다. 사슴이 진정으로 사랑받는다 느낀 것은 카벨의 어머니와 함께했던 시간이었겠지. 삼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고작 이년이라니. 안쓰러운 수치였다. “내 사슴에겐 소중한 것을 선택할 자유도 없는 거냐?” 차분한 물음에 펠릭스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세영을 보고 있었다. 피식 웃은 그녀가 말했다. “야, 네가 왜 기를 쓰고 사슴을 미워하는지 맞춰볼까?” 펠릭스를 봤을 때부터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카라드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마치 미워하는 것으로 뭔가에서 도망치려는 듯이. “너희의 말대로라면 봉인 계획을 세우고, 수호자를 결정한 것은 나스쿤이다. 그리고 그는 한때 자신의 혓바닥 하나로 망가뜨린 아이를 주워왔지. 봉인의 축으로 삼기 위해서.” 여기까지는 이미 알고 있었던 이야기였다. 그런데 여기에 펠릭스의 입장을 넣어보면 좀 더 재미있어진다. “그런데 그의 옆에는 이미 당대 최고의 신성력을 지닌 큰 아이가 있었거든. 그럼 그 애는 필요 때문에 주워온 걸까, 아닐까?” -닥쳐라! “불쌍한 괭이 새끼. 주인이 잡아먹으려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아양을 떨었겠구나.” 사납게 달려드는 펠릭스를 다시 바닥에 메다꽂은 세영이 조롱했다. 버둥거리는 펠릭스의 목을 짓밟은 그녀가 화사하게 웃었다. “어떻게든 사슴을 쫓아내고 싶었겠지. 그래야 네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고 믿을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그렇게 안 됐지?” -크윽…! “당연한 일이잖아. 같은 도구라도 넌 고작 부속품, 사슴이 메인이나 다름없는데. 너라면 걜 쫓아내겠어? 차라리 너를 갈아치우지.” 10년 묵은 케이크 같은 얼굴이 기묘하게 꿈틀거렸다. 세영은 완전히 저항을 멈춘 그를 보고 천천히 발을 떼어냈다. 펠릭스는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있었다. 세영은 한심함을 담은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나스쿤은 네가 죽은 줄 알더라. 하긴 이 꼴로 굴러다니는 거 보느니, 모르고 그냥 뒈진 게 걔한테는 다행이다.” 그러자 펠릭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격정적으로 흔들리는 눈이 그의 동요를 보여주었다. -나스쿤이… 죽었나? “왜? 널 이용해 먹은 주인님이라도 뒈졌다니까 슬퍼?” 세영이 기가 막힌 듯이 물었다. 그들에게 이용당한 거나 다름없는 사슴은 움직일 수 있게 되자마자 탑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정작 나스쿤에게 사랑받으며 컸을 호랑이 새끼는 무려 삼백 년 동안 소식도 알리지 않았다. ‘이게 바로 사랑 못 받고 큰 자식이 효도한다는 부조리인가.’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하지만 믿지 못하는 자에게 복 따위는 없다. 제가 만들어낸 지옥이 있을 뿐이다. 세영은 자신의 분노와 배신감, 의심에 사로잡혀 망령이 된 자를 보며 말했다. “어쨌든 내가 이겼으니, 신기는 접수한다. 동생 잘 둬서 목숨 붙어있는 줄 알아. 새꺄.” ──────────────────────────────────── 모리아 (5) 세영은 옥좌의 왼편에 떠 있는 신기를 향해 다가갔다. 둥근 구슬 같은 신기가 그녀에게 반응하며 반짝이는 빛을 뿌렸다. -안 돼! 그때까지 멍하게 있던 펠릭스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비틀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세영에게 달려들었다. -넘겨줄 수 없다! 그건 내 거야! 내 것이란 말이다! “지랄은.” 세영은 가차 없이 그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계단 위에서 휙 날아간 그의 몸이 본당 한가운데 쿵 떨어졌다. 고통스럽게 쿨럭이는 그를 카라드가 조심스럽게 부축했다. 정신을 차린 펠릭스가 그의 손을 뿌리쳤다. -놔라! “펠릭스, 우리 임무는 끝났습니다.” -끝나? 뭐가 끝났단 말이냐!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어! “저분은 주신의 대리자십니다. 신기의 진정한 주인이니, 이제 그만 미련을 버리십시오.” 발악하는 형을 붙잡은 카라드가 나름대로 냉정하게 말했다. 그것이 펠릭스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았다. 부축하는 동생의 가슴을 떠밀어 뒤로 주저앉게 한 그가 으르렁거렸다. -주신의 대리자? 그게 뭐 어쨌단 거냐. 신이 나를 이 꼴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는데! 잠시 할 말을 잃은 듯했던 카라드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고해하듯 힘겹게 말했다. “…펠릭스. 우리는 무모했고 자신을 과신했습니다. 운명을 비틀면서도, 그 의도가 선하다는 이유로 어떤 대가를 치를 생각도 하지 않았지요.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의 잘못입니다.” -닥쳐라! 펠릭스가 카라드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톱에 긁혀 피가 흘러내렸지만, 둘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를 악문 펠릭스가 씹어뱉듯이 외쳤다. -잘못이라고?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꼴이 되어야 한단 말이냐? 나는… 나는 단지 그들을 위해 검을 들었을 뿐인데! 성기사로서 교단의 영광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쓰디쓴 배신뿐이었다. 평생을 이용당했다는 분노와 배신감이 그를 광기에 물들게 만들었다. -이것이 정말 내 잘못으로 일어난 결과라면, 나를 이렇게 만든 그들도 벌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니냐? “…….” -대답해 봐라! 나를 끝없는 절망 속에서 되살아나게 한 그들도. 그들에게 힘을 준 신도 나처럼 되어야 하는 게 아니냔 말이다! 그를, 그리고 그의 동료들을 희생시킨 교단은 지금까지 건재했다. 원수들은 영광을 누리며 편히 살다 죽었고 어떤 대가도 치르지도 않았다. 시간의 흐름 속에 그의 이름만이 오명으로 남았다. 피맺힌 울부짖음에 고개를 숙인 카라드가 눈물을 흘렸다. “…무력하여 원수를 갚지 못한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그따위 변명은 필요 없다! 그들의 뒤에서 팔짱을 낀 채로 지켜보던 세영이 펠릭스의 머리를 갈겼다. “이게 어디서 패악질이야. 거지 같은 놈들에게 뺨 맞고 자꾸 동생에게 화풀이할래?” -크아악! 펠릭스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전과 달리 세영에게 얻어맞은 부분이 치이익 하고 타들어 갔다. 놀란 카라드가 그를 붙잡았다. 세영은 붙잡은 곳을 피해서 펠릭스를 퍽퍽 걷어찼다. “새끼야, 누가 그렇게 허망하게 뒈지래? 어? 동생이 너 죽으라고 고사라도 지냈어? 왜 자꾸 얘한테 지랄이야!” “세영님!” 안 되겠다 싶었던 카라드가 온몸으로 세영에게 매달렸다. 옴짝달싹 못 하게 된 세영이 눈을 치켜떴지만, 차마 그를 뿌리치지는 못했다. 한숨을 내쉰 그녀는 머리를 움켜쥐고 부들부들 떠는 펠릭스에게 쏘아붙였다. “그렇게 억울했으면 가서 교황 목이나 딸 것이지, 왜 여기 죽치고 앉아서 염불하고 자빠졌는데?” 너무 원통해서 죽지도 못하고 일어났다는 놈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었다. 데스나이트들과 함께 교단 앞에 몰려가서 시위라도 했으면 인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놈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모두에게 잊혀질 때까지도. “니가 억울한 것도 알고 배신감 느낀 것도 알겠는데, 삼백 년 동안이나 궁둥이 붙이고 앉아서 지껄이긴 좀 부끄럽지 않냐?” 적어도 사슴은 사실을 알자마자 교단에 검을 세웠다. 현재의 교황이 이를 벅벅 갈 정도였으면 나름대로 복수는 한 셈이었다. 그런데 당사자라는 새끼가 손 놓고 앉아서 남이 떠먹여 주길 기다리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한 번만 더 내 사슴 눈에서 눈물 뽑아봐라. 강바닥에 거꾸로 묻어버릴 테니까.” 차갑게 말한 세영이 무릎 꿇은 카라드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사슴의 손목을 당기며 “할 만큼 했잖아요. 이제 가죠.” 라고 말했다. 잠깐 망설이던 카라드가 펠릭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부디, 다시 뵐 수 있기를….” 말을 끝맺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그가 세영을 바라봤다. 잘했다는 뜻으로 그의 팔을 다독인 세영이 몸을 돌렸다. 아니, 그러려는 순간 발목이 붙잡혔다. -…돌려줘. 그건 내 것이다. 바닥을 기듯이 해서 다가온 펠릭스가 세영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그 꼴이 초라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해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녀의 한숨에 분개한 펠릭스가 소리쳤다. -신이라고 해도 내게서 그걸 뺏어갈 권리는 없다. 그건 내 거야! 어서 내놓으란 말이다! 제 형의 추태에 놀란 사슴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를 힐끗 쳐다본 세영이 손에 쥐고 있던 신기를 펠릭스 앞으로 내밀었다. “이걸 원하는 거냐?” 그토록 갈구하던 것임에도 펠릭스는 멈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도 그럴 것이 신기는 빛의 교단의 성표였다. 언데드인 그에게는 상극이나 마찬가지인 물건이었다. 차마 손을 뻗지 못하는 그를 보고 세영이 피식 웃었다. “살아있을 때도 잡지 못한 걸 죽은 뒤에 손에 넣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발끈한 펠릭스가 성표를 잡으려다 불에 덴 듯 물러났다. 시커멓게 타들어 간 손을 움켜쥔 펠릭스가 이를 악물었다. 세영은 빤히 그를 쳐다보다가 물었다. “너 사실 배신당한 게 억울해서 되살아난 게 아니지?” -……. “원한으로 되살아났으면 진작 교단으로 뛰어갔겠지. 그냥 이걸 뺏긴 게 억울해서, 그 미련 때문에 언데드가 된 거 아니야?” 맞잡은 손으로부터 사슴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정말이냐고 묻는 눈으로 제 형을 바라봤다. 석상처럼 굳어진 펠릭스의 모습이 대답을 대신했다. 무어라 말하려던 카라드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비키는 것으로 형을 비난하지 않으려 했다. “뭐, 신성력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녀석이었으니. 이해 못할 일은 아니네.” 비꼬듯이 세영이 손에 쥔 신기를 던졌다. 그것은 펠릭스의 가슴을 시커멓게 태운 뒤에 그의 무릎 앞에 떨어졌다. “필요 없으니까 너 가져.” “…세영님?” 당황한 카라드가 세영을 바라봤다. 피식 웃은 세영이 그의 손을 잡고 밖으로 향했다. 순식간에 본당 밖까지 끌려 나온 카라드가 다급하게 말했다. “정말 신기를 가져가지 않으시는 겁니까?” “가져가서 뭐 어쩌라고요. 다 모아서 검이나 부술까?” 시큰둥한 대답에 카라드의 얼굴이 흐려졌다. 잠깐 머뭇거리던 입술이 “저 때문에….” 하고 중얼거렸다. 머리를 긁적인 세영이 말했다. “그리고 뭐, 거지 손에 들린 빵을 뺏을 정도로 잔인하진 않거든요?” 신성력을 뺏긴 게 억울해서 부활한 놈이라면 성표를 뺏겨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그거야 전혀 상관없지만, 사슴에게 보여주는 것은 좀 곤란했다. 감격으로 눈을 반짝이던 카라드가 예쁘게 웃었다. “펠릭스를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 음. 딱히 걜 배려해준 건 아닌데요.” 슬쩍 눈을 피한 세영이 중얼거렸다. 무어라 말하려던 카라드는 문득 아직 붙잡혀있는 손을 의식했다. 얼굴이 빨개진 그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 세영이 무심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걔가 딱 하나 잘한 건 있네요. 그 목걸이, 처치 곤란이었는데 풀려서 다행이에요.” “…….” 카라드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여자친구’와 ‘내 사슴’ 선언으로 잠깐 잊고 있었던 일이 떠오른 것이다. 허전해진 목을 만지작거린 그가 우울하게 말했다. “펠릭스에게 저의… 여자 친구라고 하신 것은….” “아, 그거요?” 세영이 ‘그걸 묻다니 좀 의왼데?’ 하는 눈빛으로 그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동료라고 하면 마음대로 팰 수… 아니, 참견할 자격이 없을 것 같아서요. 여자 친구라고 하면 끼어들 명분도 있고, 간섭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거짓말했는데. 곤란해요?” “…아뇨,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라드가 맥없이 중얼거렸다. ‘역시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실망하게 되었다. 이러지 말자고 되뇌면서도 어깨가 축 처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여자 친구라고 해서 기분 나빴어요?” 그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선 세영이 물었다. 놀라 움찔한 카라드가 멍하게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그는 “제게는… 영광이었습니다.” 하고 답했다. 그러자 피식 웃은 세영이 까딱까딱 손짓했다. 무슨 말인지 몰라 주춤거리는 카라드에게 “고개 좀 숙여 봐요.” 라는 말이 떨어졌다. 명령에 따라 고개를 숙인 그의 입술에 세영이 가볍게 쪽 하고 입 맞췄다. 놀란 표정으로 굳어버린 그를 본 세영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빚은 갚았어요. 처음이야 제가 멋대로 한 거지만, 두 번은 아니었잖아요?” “…….” “다들 안에서 뭐 한다고 안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후와와 찾아올 테니까, 안 좀 확인해서 챙겨줘요.” 무심하게 말한 세영이 몸을 돌려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넋을 놓고 있던 카라드가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결국, 벽에 쿵 부딪힌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으로 가리지 못한 턱이 단풍잎처럼 붉게 물들어있었다. 세영이 성표를 던지고 나가버린 후 펠릭스는 멍하게 주저앉아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성표가 요요하게 반짝였다. 그는 광기가 걷힌 눈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이제는 손에 넣을 수 없는, 그런데도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물건이었다. 그때 본당의 구석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세영과 함께 나타났던 인간들이었다. 펠릭스는 그들이 근처에서 꾸물거리는 것을 모른 척했다. 하도 두들겨 맞아서인지 반응하기도 귀찮았다. 그때 그의 앞에 몸을 낮춘 중년의 사제가 말했다. “저는 자애의 여신을 따르는 종, 리먼이라고 합니다. 성표에 손대는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이어서 조심스럽게 성표를 집어 든 사제가 손수건으로 그것을 감쌌다. 사제에게 또 다른 손수건을 내민 적금발의 남자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저, 저는 디안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려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어릴 때부터 펠릭스 님의 무용담을 듣고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흥분해서 말하던 남자가 얼굴을 붉히며 덧붙였다. 그의 뒤에서 주춤거리던 엘프가 “…감사합니다.” 하고 따라 말했다.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이었지만, 펠릭스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저기, 이거 줄까?” 어린아이처럼 키가 작은 수인족이 데스나이트의 투구를 내밀었다. 잠깐 망설이던 펠릭스가 그것을 받아들었다. 씨익 웃은 수인족이 말했다. “있잖아, 진짜 진짜 고마워. 세상이 계속된 것도, 나랑 내 동생들이 태어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네 덕분이야. 나스쿤에게 말하진 못했지만, 이번엔 꼭 말하고 싶었어.” -……. “그리고… 나스쿤은 떠날 때 후련해 보였대. 너무 슬퍼하지 마.” 수인족은 조그마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펠릭스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세상을 구해줘서 고맙다고 말한 것은 이들이 처음이었다. “펠릭스 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손수건으로 몇 겹이고 꼼꼼히 감싼 성표를 주머니에 넣은 사제가 그것을 펠릭스의 목에 걸어주었다. 주머니에 담긴 성표가 그의 가슴께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삼백 년 전처럼 아무런 고통도 없이. 펠릭스는 천천히 손을 들어 주머니를 움켜쥐었다. 손으로 만지면 분명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질 하얀 주머니엔 분홍색 꽃잎이 수놓아져 있었다. “마, 마음에 안 드세요? 혹시 노란색이 좋으시면 그걸로 바꿔드릴까요?” 여전히 겁에 질린 엘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녹색 눈동자가 상냥한 빛을 담고 있었다. 펠릭스는 그녀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것을 보던 사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펠릭스 님, 감히 당신을 이해한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겪으신 일은 충분히 참혹했고, 당신의 긴 방황 역시 가슴 깊이 공감합니다. 저 역시 신성력이 제 전부라 믿었던 적이 있으니까요.” 제 가슴에 걸린 성표를 움켜쥔 사제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힘없이 아래로 떨어진 펠릭스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당신의 신은 당신을 버리신 게 아닙니다. 우리가 지닌 이 힘은 힘이 없는 자를 돕기 위해 신이 내리신 것. 당신께서는 그저 주어진 사명을 훌륭히 완수하신 것뿐입니다.” 늘어진 손을 잡아 올려 펠릭스의 손에 주머니를 꼭 쥐어준 사제가 웃었다. “그러니 당신은 분명 이것을 지닐 자격이 있으십니다.” “내가 말해줄게. 교단이 나쁜 거고, 넌 잘못이 없다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다 말하고 다닐게!” 수인족이 힘주어 말했다. 자신을 믿으라며 작은 가슴을 팡팡 치는 것이 제법 야무졌다. 잠깐 그 작은 얼굴을 바라보던 펠릭스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목에 건 주머니를 벗었다. 다시 한 번 주머니를 꼭 쥐어본 그는 그것을 사제에게 내밀었다. -…성기사 펠릭스는 삼백 년 전 이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유품이니, 사제님께서 거두어 주십시오. “하지만….” -부탁드립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사제가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펠릭스는 깊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의 붉은 눈에서 뚝뚝 떨어진 눈물이 돌바닥을 검게 물들였다. ──────────────────────────────────── 모리아 (6) 펠릭스는 자신이 삼백 년 동안 머물렀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분노가 가라앉으면서 붉게 소용돌이치던 하늘은 사라졌지만, 대신 우중충한 독기가 안개처럼 깔렸다. 언데드들이 내뿜는 사기가 뭉쳐서 생긴 구름이었다. 이곳을 떠나 다른 장소로 간다고 해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곳이 죽음의 땅이 되겠지. 이대로 교단의 손에 죽어주는 게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길일지도.’ 펠릭스는 자신이 산 자처럼 생각하는 것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사제가 성표를 목에 걸어주었을 때, 그의 안에서 살아있는 것에 대한 미움과 증오 대신 뭔가가 깨어났다. 언데드에게 필요하지 않은 말랑한 감정이었다. “펠릭스.” 부름에 돌아보자 카라드가 서 있었다. 비록 모습은 달라졌지만, 눈빛만큼은 삼백 년 전과 똑같았다. 애정과 기대가 담긴 까만 눈이었다. 살아있을 때는 그것이 너무도 싫었는데 죽고 나서 보니 긴 세월 동안 변하지 않은 것은 그뿐이었다. -상처가 나았군. 사기에 닿았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해져 있었다. 당황하며 제 뺨을 감싼 카라드가 “세영님이 치료해주셨습니다.” 하고 수줍게 웃었다. 은은히 붉어지는 얼굴을 본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정말 그 여자가 좋은 거냐? 확 붉어지는 얼굴을 보니 답을 들을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펠릭스는 왜 그런 여자냐고 호통치고 싶은 것을 누르며 팔짱을 꼈다. ‘대체 어디가 좋은 거지?’ 펠릭스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세영을 힐끗 바라봤다. 엘프의 옆에 앉아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세영이 고개를 돌렸다. 차갑고 무기질적인 시선과 마주친 펠릭스가 슬며시 눈을 피했다. -네 취향도 참 곤란하구나. 이국적인 외모와 균형 잡힌 몸매만 보면 미인이라 할 수 있는 여자였다. 하지만 오만하고 냉소적인 태도와 무기질적인 눈빛이 그녀를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보이게 했다. 게다가 얼마나 입이 험하고 손속이 거친지, 거리의 왈패나 다름없었다. ‘이 녀석의 짝이라면 좀 더 다정하고 상냥한 여자가 좋을 텐데.’ 펠릭스는 그녀가 자신을 물건처럼 본다는 것을 알았다. 보통의 인간들이 가지는 혐오나 경멸과는 다른, 상대를 철저히 무가치하게 여기는 눈빛이었다. 차라리 용의 눈빛이 더 정감이 있을 듯했다. 그가 언데드라서도 아니었다. 그저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제겐 너무 과분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의 말을 달리 해석한 카라드가 침울하게 말했다.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본 펠릭스가 대꾸했다. -과분한 분께 잘도 인장을 찍었군. 어깨를 움찔한 카라드가 “…보셨습니까?” 하고 중얼거렸다. 민망한 듯 아래로 떨어진 시선에 피식 웃은 펠릭스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보라고 이마 한가운데에 찍어둔 것이 아니냐? 이건 내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전 단지…!” 화톳불만큼 얼굴이 붉어진 카라드가 필사적으로 말했다. 이렇게 동요하는 모습을 처음 본 펠릭스는 좀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손이 근질거리는 느낌이었다. 죽어버린 몸에 그런 감각이 있을 리가 없는데도. “그냥,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보지 못하실 테니까, 작은 것이라도 제 흔적을 남겨놓고 싶은 욕심에….” 고개를 푹 숙인 카라드가 “비겁한 짓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고 덧붙였다. 애초에 그를 비난할 생각이 없었던 펠릭스는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보기보다 음흉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무뚝뚝하게 내뱉은 그는 아차 했다. 이러지 말자고 생각하면서도 습관처럼 빈정거림이나 날 선 말이 튀어 나갔다. 이제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조금이라도 다정한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제 친우와 똑같은 말을 하시는군요.” 하지만 카라드는 오히려 뭔가가 떠오른 얼굴로 웃었다. 펠릭스는 ‘이런 짓을 다른 사람 앞에서도 했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며 물었다. -친우? 네 검 말이냐? “아닙니다. 조르디아에서 만난 분인데, 과분하게도 제 친우가 되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친우가 자신을 노예로 팔아먹었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펠릭스의 눈 위쪽이 이미 불쾌한 듯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놈의 과분! 대체 뭐가 과분하단 말이냐! 너는 카르나이의 마지막 왕족이자 현자가 키운 자다. 오히려 그놈이 과분하다고 생각해야 하는 게 마땅한데! “…….” 놀란 듯이 눈을 깜빡이는 카라드를 보고 아차 싶었던 펠릭스가 이마를 짚었다. 통제되지 않는 입이 원망스럽고 자신에게 화가 났다. 끙끙거리는 그를 응시하던 카라드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 뜬금없는 사과에 놀란 펠릭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에 카라드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저는, 펠릭스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좋아해 달라고 쫓아다녔을 뿐 어떤 마음으로 저를 보고 계실지 몰랐습니다. 단 한 번도 당신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이라도 제대로 펠릭스를 봤다면, 그의 입장에서 생각했다면 이렇게까지 관계가 나빠지진 않았을 것이다. 사랑받기만을 원하는 인형이라는 말도 틀린 것이 없었다. “다른 이들은 잠깐 생각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을 저는… 끝까지 몰랐습니다. 그런 주제에 왜 저를 좋아해 주시지 않을까 원망했습니다.” -…그만해라. 나는 네 사죄를 들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고개를 돌린 펠릭스가 맥없이 말했다. 그는 알았기에 더 죄스러워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용들 틈에서 외롭게 자란 아이가 어떤 심정인지, 어떤 마음으로 제게 손을 뻗는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외면했다. 자신의 것을 빼앗아가는 원수처럼 미워하고 헐뜯었다. -미안하다. 내가 못난 것을 너의 탓으로 돌렸다. 너에게 저질렀던 짓은 어떤 것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겠지만, 이렇게라도 사죄하고 싶다. “펠릭스, 당신은 한 번도 이유 없이 화내지 않으셨습니다. 제 잘못을 고쳐주려 하셨던 거잖습니까. 저는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아서….” 그의 사과에 사색이 된 카라드가 허둥거렸다. 펠릭스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다행히 호인족이었던 그의 키가 훨씬 커서 어렵지 않게 카라드의 머리에 닿을 수 있었다. -한 번도 형 노릇을 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구나. 멈칫한 카라드가 멍한 눈으로 그를 보다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펠릭스는 살아있을 때 이렇게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훈훈한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갑자기 들이닥친 세영이 정체불명의 마법진 위로 펠릭스를 끌고 갔다. 놀란 카라드가 그녀를 쫓아가며 무슨 일인지 물었다. “소환수 강화를 시도해보려고요. 뭐, 안 되면 말고.” 언제나처럼 세영은 간단하지만, 못 알아듣는 말로 답해주었다. 펠릭스를 중앙에 둔 채로 부서진 데스나이트의 갑옷과 보석을 둥글게 늘어놓았다. 한창 지도를 보며 의논 중이던 동료들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모여들었다. 세영은 무슨 일인지 묻는 마리엔의 말에 답해주었다. “펠릭스를 소환수로 등록한 다음에 강화할 거예요. 그럼 부상도 회복되고 지금보다 강해질 테니까. 물론 실패할 수도 있지만, 보통은 강해지거든요.” -강해져서 뭘 하란 말이냐? 세영은 당연하다는 듯 펠릭스의 질문을 무시했다. 정확히는 소환수 등록을 하고 대전모드로 바꾸느라 바빴다. 보다 못한 카라드가 같은 질문을 던지고 나서야 귀찮음을 누르는 얼굴로 대답해주었다. “지금처럼 찌그러진 깡통 같은 몰골로 이주했다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객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걸요. 그리고 시킬 일도 있으니까, 뭐 하다 보면 알게 되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죠.” -시킬 일이라니? “자, 그럼 강화 시작할게요.” -잠깐 기다려라!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낀 펠릭스가 저항하려 했지만, 세영은 그의 명치에 정권 지르기를 먹였다. 쿨럭 기침을 내뱉은 펠릭스가 무릎을 꿇었다. 말리려던 카라드는 세영의 명령에 망부석이 되고 말았다. 이윽고 마법진이 번쩍 빛을 냈다. “우와, 진짜 고쳐졌어!” 시디발라가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그의 말대로 세영에게 두들겨 맞아 여기저기 금이 가고 부서졌던 갑옷이 완전히 새것처럼 변했다. 전보다 더 화려해진 것 같기도 했다. 가장 큰 변화는 머리에 있었다. 뭉개진 케이크 같던 머리가 둥근 형태를 이루고 뾰족한 귀 같은 것이 돋아났다. 파묻힌 젤리처럼 박혀있던 눈도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너… 이 무도한! 강제로 강화 당한 펠릭스가 분노어린 고함을 내질렀다. 세영은 그의 앞에 지도를 들이대고 어느 한 점을 콕콕 두들겼다. “여기 보이냐? 난 널 여기로 보낼 거야.” 그곳은 황무지라고 적혀 있을 뿐, 아무런 이름도 없었다. 가끔은 황량한 벌판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카르나이 왕국의 수도가 있던 곳이었다. 과거 주신이 쪼개질 때 가장 많은 타격을 받았던 장소라 지금까지도 생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마도의 발원지이면서도 아무도 살지 않는 땅이었다. “그리고 네 영향력으로 가능한 많은 몬스터들을 데려가 줘야겠다.” 교황은 사기로 오염된 모리아를 정화시키기 위해 대량의 신성력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세영은 그걸 뒤집으면 카르나이의 신성력도 정화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과도한 신성력이 문제라면 언데드가 떼로 몰려가서 사기를 뿌려주면 그만이었다. 마음 같아선 모리아의 언데드 전체를 그곳으로 보내고 싶었다. 펠릭스가 왔다 갔다 하며 몹몰이를 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지금은 시간제한 때문에 한 번에 옮길 정도의 몬스터만 챙겨야 하니 아까운 일이었다. 리먼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곳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신성력이 강한 땅입니다. 펠릭스 님께는 고통스러운 환경일 텐데요.” “알아요, 그래서 거기서 아무렇지도 않게 지낼 수 있게 만드는 중이고요.” 그것을 고려해서 강화석으로 마기와 신성 저항력이 있는 강옥을 선택했다. 인벤에 있는 강옥을 모조리 털면 신성력으로 샤워를 해도 끄떡없는 언데드 하나 만들기엔 충분했다. 물론 강화실패 횟수가 적어야겠지만. 세영은 펠릭스을 지그시 쳐다보며 말했다. “형이라면 동생이 저지른 일의 뒷수습 정도는 해줘야지? 거기서 다슬기처럼 기어 다니며 신성력이나 중화시켜. 네가 오래 버틸수록 거기도 정상에 가까워질 테니까.” -……. 펠릭스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녀가 꼭 자신이 고민하던 것을 알고 이런 제안을 하는 것 같았다. “왜? 싫어?” 빈정거리듯 묻는 얼굴이 얄미워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꼭 나스쿤이 장난을 걸 때처럼 정겨운 느낌까지 들었다. 속으로 작게 웃은 펠릭스는 몸을 숙여 바닥에 손을 대고 깊이 머리를 숙였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존재조차 무의미했던 자신에게 다시 주어진 사명이었다. 또한 불가능할 것으로 여겼던, 동생에게 조금이라도 속죄하는 길이었다. 복종의 자세를 취한 그를 보고 뺨을 긁적인 세영이 말했다. “강화 실패하면 조금 아플 수도 있어. 뭐 그래도 나한테 맞을 때만큼 아프진 않을 거야.” 위로인지 아닌지 모를 말을 던진 그녀가 다시 인벤에서 보석을 꺼내 마법진 주변에 늘어놓았다. 펠릭스는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앞으로 다가올지도 모르는 고통을 기다렸다. ──────────────────────────────────── 모리아 (7) 강화 작업은 다음 날 새벽까지 계속됐다. 강화석인 강옥은 넘쳐났지만, 강화재료인 언데드가 모자랐던 탓이다. 세영은 주변의 언데드들을 사냥해서 급히 재료를 모았다. 동료들도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손을 보탰다. 모리아에서 태어난 데스나이트라 주변에서 재료를 수집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펠릭스가 저주캐인 것도 강화 시간에 한몫했다. 웬만해선 제작이나 강화에 실패하지 않는 세영의 행운도 펠릭스의 박복함 앞에서는 맥을 못 췄다. 결국, 마지막 강화가 끝났을 때는 이미 해가 뜬 뒤였다. 파김치가 된 동료들은 여기저기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그들 중 가장 체력이 좋은 카라드마저 맨바닥에 주저앉아 쉬는 중이었다. “내가 했지만, 생각보다 더 잘됐는데?” 세영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펠릭스의 갑옷을 두들겼다. 멈칫한 펠릭스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움직일 때마다 새카만 갑옷 위로 붉은 광택이 감돌았다. “그 정도면 웬만한 신성력은 다 튕겨낼 수 있을 거다.” 펠릭스는 이제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드는 언데드킹으로 변했다. 투구 위로 돋아난 뿔 같은 왕관과 보석으로 치장된 갑옷이 전보다 몇 배로 정교하고 화려해졌다. 보기만 좋은 게 아니라 최고위 성직자가 신성력으로 후려쳐도 끄떡없을 정도였다. 언데드는 마법이나 물리적 공격에 내성이 있었다. 압도적인 힘이 아니라면 타격조차 입지 않는다. 신성력이 거의 유일한 약점인데 이제 그것마저 사라진 셈이었다. 사실상 세영이 아니라면 대적할 상대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주먹을 꾹 쥐었다 편 펠릭스가 물었다. -내가 허튼 마음을 먹고 날뛰면 어쩌려고? “어쩌긴. 그냥 내 안목이 형편없다는 거겠지. 그리고 그땐 쉽게 죽을 생각하지 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을 체험하게 해주겠다고 말한 세영이 피식 웃었다. 먼 곳으로 눈을 돌린 그녀가 말했다. “이미 각오는 했겠지만, 거기 가면 많이 힘들 거야. 너무 고통스러우면 굳이 버티지 않아도 돼. 흙으로 돌아가도 원망하지 않을 테니까 미련 떨지 말고.” 말을 주고받을 데스나이트도 없으니, 펠릭스 혼자 광야를 헤매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기약 없이 떠돌아다니는 일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아직 감정이 살아있는 놈에겐 잔인한 짓이기도 했다.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보던 펠릭스가 말했다. -걱정해주는 건가. “퇴직할 길을 뚫어줘야 너도 마음 놓고 일할 거 아니야.” 견디기 힘들면 죽으라는 것도 퇴직이긴 했다. 민망함에 뺨을 긁적인 세영이 덧붙였다. “공짜로 부려 먹진 않을 테니까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봐. 교황 목을 따는 건 안 되지만 천공섬 정도는 박살 내줄 수 있으니까.” -무엇이라도 상관없나? 펠릭스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세영은 잠깐 망설이다 고개를 끄떡였다. 진짜 교단을 박살내 달라는 거면 좀 곤란하겠지만, 못 해줄 것도 없었다. 하지만 펠릭스는 눈을 돌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카라드를 쳐다보았다. 잠깐 쉬었다고 기운을 차린 사슴은 널브러진 동료들을 잠자리로 옮기는 중이었다. 시키지도 않은 짓을 자청해서 하는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펠릭스가 말했다. -…녀석을 갖고 노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버리지는 말아다오. “전부터 좀 오해하는 것 같은데. 난 갖고 논 적 없거든?” 귀를 후비적거린 세영이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는 사슴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오히려 내가 밀당을 당하는 기분이라고. 초식동물이라 그런지 다가가면 도망친단 말이다.” 뽀뽀 한번 했다고 어찌나 피해 다니는지. 치료해줄 때도 꽤 애를 먹었다. 팔 하나 정도로 줄었던 접근 거리가 세 배로 늘어난 것도 은근히 열 받았다. 툴툴거리는 그녀를 의외라는 눈으로 쳐다보던 펠릭스가 물었다. -지금 녀석의 모습이 진짜가 아니란 건 알고 있나? “뭐, 사정은 대충 들었어.” 세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뜬 펠릭스가 다시 말했다. -모습이 바뀌어도 계속 좋아해 줄 건가? “으음, 장담할 순 없겠지만. 지금처럼 귀여우면?” 사실 세영은 미인은 그냥 관상용이라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예쁜 것은 다 함께 보고 즐겨야지 괜히 손대서 망치면 안 된다는 자연 보호주의기도 했다. 요망한 사슴이 부끄러운 척 얼쩡대지 않았다면 이런 식의 관심을 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못생긴 몸이라도? “…잠깐. 내가 왜 이런 추궁을 당해야 해?” 발끈한 세영이 되물었다. 펠릭스의 눈이 더욱 의심스러워졌다. 슬며시 눈을 피한 그녀는 “모, 못생긴 사슴이라도 상관없다고. 물론 예쁜 게 더 좋지만.” 하고 중얼거렸다. 못 믿겠다는 얼굴로 팔짱을 낀 펠릭스가 말했다. -좋아해 주지 않아도 되니까, 못나졌다고 버리지만 않으면 된다. “왜 남을 파렴치한으로 만드는 건데?” 세영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펠릭스는 그걸 몰라서 묻느냐는 표정으로 반박했다. -녀석에게도 버리지 않겠다고 말해줘라. 왜 저 몸뚱이를 여태 끌고 다녔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한계일 테니까. “그거 나랑은 전혀 상관없단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로토와 올리비아 때문이었다. 그들로 인해 카벨의 몸에 갇힌 카라드는 카벨의 영혼과 융합되었고, 아직 몸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세영은 심각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런데 저 몸이 진짜 한계야?” -역시 못생기면 버릴 것 같아서…. “아니라고! 새꺄!” 결국, 새 갑옷 위에 다시 세영의 발자국이 찍혔다. 콰당탕 나가떨어지는 펠릭스를 보고 놀란 카라드가 달려오면서 대화가 끊겼다. 세영은 제 형을 부축하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생각했다. ‘한계란 말이지.’ 생각해보면 기억을 되돌릴 때도, 펠릭스와 싸울 때도 새카만 피를 몇 번이고 토했다. 치료해서 괜찮을 줄 알았지만, 사실은 아니었던 거다. 진작 눈치채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였다. “세영님?”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세영은 자신을 응시하는 사슴의 눈에 움찔했다. 도리도리 공격이 제일 강하긴 하지만, 물끄럼 공격 역시 막강했다. 타격을 입은 심장이 뻐근해졌다. “아, 잠깐 딴 생각하느라 못 들었어요. 뭐라고요?” “피곤해 보이셔서 조금이라도 주무시는 게 어떨까 하고….” 수줍은 듯 미소를 지은 카라드가 말했다. 뺨을 긁적인 세영이 그의 손을 낚아채며 “뭐, 좋아요. 자러 갑시다.” 하고 말했다. 놀라 눈을 크게 뜬 사슴이 홍시로 변했다. 당황한 펠릭스가 소리쳤다. -…뭣? 잠깐, 기다려라! “넌 가서 몹이나 몰아와. 백 단위 이하는 취급 안 하는 거 알지?” 펠릭스를 퍽퍽 걷어차 쫓아낸 세영이 사슴을 잡아당겼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카라드가 못 이기는 척 끌려왔다. 적당한 곳으로 그를 끌고 간 세영이 고개를 못 드는 사슴을 훑어보았다. “아파요?” 뜬금없는 물음에 카라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세영은 그의 가슴 위를 툭툭 쳤다. “몸이요. 많이 안 좋아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제야 납득했다는 얼굴로 변한 카라드가 말했다. 한숨을 쉰 세영이 “그놈의 괜찮다는.” 하고 투덜거렸다. 카라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입니다. 무리해서 힘을 쓰지만 않으면 아프지 않습니다.” “무리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건….” 머뭇거리는 그를 보고 세영이 제 미간을 꾹꾹 눌렀다. 천성이 사슴이라 그런지, 조심성이 지나치다 못해 미련해서 큰일이었다.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관심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말하면 버림받을 것 같았다. 어느 쪽이에요?” 난처한 듯 입을 다문 사슴이 그녀를 바라봤다. 호소하듯 가늘게 떨리는 눈동자가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저도 모르게 얼굴을 누그러뜨린 세영이 그를 다독였다. “세 번째만 아니면 돼요.” “…….” “뭐, 세 번째라고?” 뾰족해진 눈에 당황한 카라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필사적이기까지 한 얼굴로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했다. 당장 울 것 같은 눈이었다. “저를 괴물처럼 보지 않고 받아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다른 일도 많은데 제 문제로 괴롭혀 드리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숨긴 건 아닙니다.” 비슷한 말을 카라드에게 한 적 있었던 세영은 난처해졌다. 자신을 위해서 그랬다는 건 알겠는데, 이건 또 뭔가 묘하게 짜증이 났다. 그때의 카라드도 이런 기분이었다면 사과해야 할 것 같았다. “어, 음. 그냥 좀 서운해서 말해본 거예요. 그리고 괴물이라뇨. 그런 이상한 생각하지 마세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힘없이 대답하는 얼굴엔 옅은 자기혐오가 드러나 있었다. 세영은 저도 모르게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 놀란 듯 눈을 깜빡이는 사슴의 얼굴에서 조금 전의 감정은 지워져 있었다. 그것이 이상하게 다행스러웠다. ‘분명 모른 척하려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게 만든단 말이야.’ 동정은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가끔 보이는 그의 약한 부분이, 붙잡아 주지 않으면 당장 무너질 것처럼 보여서 자꾸만 손을 뻗게 했다. 그럴 때마다 뒤로 물러서는 사슴이 ‘넌 그럴 자격이 없어.’ 라고 말하는 듯해서 괜히 발끈해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초식동물의 밀당인가.’ 감탄하던 그녀는 손을 까딱였다. 잠깐 주저하던 카라드가 고개를 숙였다. 세영은 사양하지 않고 그의 뺨을 꽉 꼬집었다. 화들짝 놀란 카라드가 제 뺨을 감싸 쥐었다. 피식 웃은 세영이 “조금 얄미워서요.” 하고 말했다. 그의 얼굴이 한층 더 혼란스러워졌다. 세영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몸을 벗어나려는 시도는 해봤어요?” “몸을 벗어나면 의식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정신을 차리면 다시 몸으로 돌아와 있고요.” 고개를 저은 카라드가 말했다. 무녀들에게도 답을 구해봤지만, 뾰족한 해결책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방법은 카벨과 관련된 부분을 완전히 제거한 다음 육신을 부수는 것이었다. 실패하면 그대로 소멸할 위험이 있어서 마지막으로 미뤄두었다. “그럼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할 수가 없겠네요. 무리하지 않고 조심하는 방법밖에는.” “…그래서 말씀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카라드가 조금 침울하게 말했다. 잘 보여도 뭐할 판에 자꾸만 못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속상했다. 자책하는 그에게 세영이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럼 진짜 자러 가요. 재워줄게요.” 카라드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순수한 의도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이상하게 가슴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욕심부리지 말자고 다짐할 때마다 세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마음을 휘저었다. 그것이 원망스러운데도 한편으론 가슴이 아플 정도로 설렜다. “진짜 손만 잡고 잔다니까.” 장난스럽게 말한 세영은 더 기다리지 않고 그의 손을 낚아챘다. 카라드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심장 소리가 너무 커져서 밖으로 들릴까 봐 걱정될 정도였다. 반면 세영의 얼굴은 무덤덤해 보였다. ‘나만 이렇게 설레는 걸까.’ 카라드는 세영에게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인간을 싫어하는 펠릭스도 그녀의 앞에선 단박에 태도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는가. 그것이 어쩐지 신경 쓰여서 계속 세영의 얼굴을 힐끔거리게 되었다. 그걸 본 세영이 ‘저 울망거리는 눈 좀 보게. 누굴 유혹하려고. 요물 같으니.’ 라고 투덜대는 것은 까맣게 몰랐다. 땅거미가 진 것도 아닌데 지평선이 온통 검게 물들었다. 하늘과 땅을 빽빽하게 메운 언데드들이 사기를 안개처럼 뿌리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 감도는 은은한 붉은 빛은 펠릭스의 권속이라는 증거였다. “…백 단위 이하는 취급 안 한다곤 했지만, 진짜 알뜰살뜰 긁어왔네.” 세영은 검은 구름처럼 모여 있는 언데드를 보며 감탄했다. 그렇다고 무작위로 긁어모은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큰놈, 작은놈을 적당히 묶어서 배치했다. 부하들을 이끈 경험이 그대로 반영된 것 같았다. “뭘 보게 될지 예상은 했지만, 이건 생각보다 더 대단하군요.” 리먼이 조금 질린 얼굴로 덧붙였다. 균형 있게 잘 모았다는 것은 세영의 감각일 뿐, 보통 사람에겐 지옥의 한 장면처럼 느껴질 풍경이었다. 심약한 사람은 보기만 해도 졸도할 것 같았다. 미리 언질을 받은 동료들조차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펠릭스의 유령마에 탄 시디발라만은 예외였다. 펠릭스는 시디발라의 부탁을 받고 기꺼이 그를 자신의 앞에 태워 언데드 사이를 달렸다. 시디발라의 환호성이 멀리 떨어진 언덕까지 들려왔다. 그럴 때마다 하마용이 제자리에서 빙빙 돌았다. 가까이 가자니 무섭고 보고만 있자니 질투가 나는 듯했다. ‘아니, 저건 왜 지 동생을 내버려두고 다른 애랑 놀아줘?’ 세영의 심기도 썩 좋지 않았다. 엄마 미소를 짓고 있는 카라드 때문에 내색하진 않았지만, 슬금슬금 불쾌해지고 있었다. 다행히 그녀가 행동으로 나서기 전에 언덕으로 돌아온 펠릭스가 시디발라를 내려주었다. 흥분으로 얼굴이 벌게진 시디발라가 작은 손을 흔들었다. “우와, 재미있었다. 다음에 또 태워줘야 해!” 그러겠다고 대꾸한 펠릭스가 카라드를 바라봤다. 그가 떠나려는 것을 느낀 카라드가 말했다. “펠릭스, 부디 조심하십시오.” 아무 말 없이 동생을 응시하던 펠릭스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것만으로도 카라드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어서 동료들도 펠릭스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대부분 건강하시라던가, 잘 지내라는 언데드에게 어울리지 않는 축언이었다. 그들의 말에 하나하나 정중히 답한 펠릭스가 마지막으로 세영을 쳐다봤다. -내 부탁을 잊지 마라. “그럴 일 없을 테니까 신경 끄고, 너나 잘해.” 시큰둥한 답변에 만족한 듯 미소 지은 펠릭스가 말머리를 돌렸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카라드를 돌아본 그가 말했다. -…다음에 또 보자. 그때까지 건강해라. 카라드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유령마가 내달렸다. 붉은 사기가 깃털처럼 휘날렸다. 펠릭스가 언데드 무리에 합류하는 것을 확인한 세영이 카라드의 팔을 톡톡 두들겼다. “형이랑 화해해서 잘됐네요.” “…예, 정말로.” 떨리는 목소리로 답한 카라드가 웃었다. 세영은 그의 촉촉한 눈망울을 얼른 외면하며 말했다. “자, 그럼 우리도 출발할까요?” “어? 우리 어디로 가?” 시디발라가 의아한 듯 물었다. 인벤에서 하마용의 안장을 꺼내려던 세영이 “비블레스 항구?” 하고 되묻듯이 말했다. 방금까지 지도를 보고 있었던 디안이 놀란 듯이 말했다. “하지만 비블레스는 마도의 땅입니다. 원래 그곳을 통해 모리아로 들어오려 했지만, 모리아 공략이 끝났으니 이제 그럴 필요는 없을 텐데요.” “아, 그럴 필요는 없는데. 마도에 가서 구해야 할 사람이 있잖아요.” 세영은 ‘심심한데 인질구출이나 해볼까?’ 하는 투로 말했다. 그제야 납득한 동료들이 고개를 끄떡였다. 반면 당황한 카라드는 머리를 흔들었다. “너무 위험합니다. 제가 오는 것을 예상하고 함정을 파놨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거의 확실하게 함정일 겁니다. 마도로 가는 건 너무 무모한….” “전에 생각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요? 생각은 제가 할 테니까, 그냥 머리 비우라고.” 세영의 되물음에 멈칫한 카라드가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가슴 앞에 팔짱을 낀 세영이 말했다. “뭐, 위험한 건 맞아요. 그래서 당분간 두 개 조로 나눠서 움직이는 게 어떨까 하는데. 일단 당신과 저는 구출팀을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안전한 곳에….” “그건 안돼요!” 얌전히 듣고 있던 마리엔이 세영의 말을 잘랐다. 놀란 세영이 그녀를 바라봤다. 새파랗게 질린 마리엔이 전에 없이 강압적인 어조로 말했다. “위험한 줄 뻔히 알면서 세영님만 보낼 수는 없어요.” “맞아, 이제 와서 우리만 두고 어딜 간다는 거야.” 뿌루퉁한 얼굴의 시디발라가 세영의 손을 붙잡으며 투덜거렸다. 디안도, 심지어 리먼까지 비슷한 얼굴이라는 것을 깨달은 세영이 당황했다. “아니, 위험하다니까요?” 하고 중얼거려도 동료들은 그들만 보내는 건 절대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족한 힘이지만, 부디 도움이 되게 해주십시오.” “우리도 꽤 강해졌잖아. 어디 가서 죽지 않을 정도는 된단 말이야.” “몬스터도 아니고 인간을 상대로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왠지 다 함께 이동하는 쪽으로 결론이 나버린 것 같았다. 머쓱해진 세영이 뺨을 긁적이는 순간, 우르릉 땅이 진동했다. 펠릭스가 이끄는 언데드 무리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언데드들이 질서정연하게 행진하는 모습은 엄청난 장관이었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붉은 사기가 안개처럼 휘날려 하늘을 덮었다. 모리아의 황혼이었다. ──────────────────────────────────── 비블레스 항구 (1)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싸늘한 얼굴의 마리엔이 말했다. 장작을 모으던 남자는 허를 찔린 기분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손에 잡힌 검이 흥미진진하다는 듯이 말했다. -드디어 선전포고인가. 남자는 조용히 하라고 말하는 대신 그를 허리에 매달았다. 지면 안 된다는 응원 역시 못 들은 척했다. 아무 말 없이 그를 지켜보던 마리엔이 먼저 몸을 돌려 어디론가 향했다. 잠시 망설이던 남자는 한숨을 삼키며 그녀를 따라갔다. 마리엔이 대화 장소로 택한 것은 한적한 공터였다. 그들이 노숙 장소로 정한 곳보다는 다소 좁았지만, 졸졸 흐르는 냇물 소리가 대화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아줄 듯했다. 아주 철저히 준비했구나 싶어 쓴웃음이 나왔다. ‘도저히 못 이길 것 같은데….’ 어둠 속에서 새파랗게 빛나는 눈을 본 남자가 생각했다. 이런 상황이 아니라도 그녀는 꽤 벅찬 상대였다. 단단히 준비까지 하고 온 것 같으니 그가 이길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애초에 이기고 지는 문제는 아니지만 말이다. “세영님은 잠깐 주무시고 계세요. 그래서 지금 상황은 모르시겠지만, 이 대화는 우리끼리의 비밀로 하죠.” “…예.” 기세에서 밀린 남자가 얌전히 대답했다. 못마땅하다는 듯이 그를 노려본 마리엔이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이 왠지 저를 채찍질하는 듯해서 시선이 절로 아래로 향했다. “세영님은 무척 다정하고 상냥한 분이세요. 동료들을 자신의 몸처럼 아끼시고요.” 마리엔은 잘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하듯이 말했다. 남자는 고개를 끄떡이는 것으로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을 표했다. 그야말로 세영의 상냥함에 몇 번이나 구원받았으므로. “처음 이곳에 오셨을 때는, 몬스터를 죽이는 것도 힘들어하셨어요. 하지만 저희를 위해서…. 동료들이 위험해질까 봐, 괴로워하면서도 손을 쓰셨죠.” 격양된 마리엔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마른침을 삼킨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왠지 죄인이 된 기분이라서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감정을 가라앉히려는 것처럼 먼 곳을 바라보던 마리엔이 다시 그를 바라봤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세영님은 사람을 못 죽이세요.” 뜻밖의 말에 놀란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마리엔은 자신의 두 손을 꽉 맞잡은 채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아무리 화가 나셔도,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을 죽이진 않으셨어요. 리먼은 그분이 구원자라 그렇다고 했지만, 전 다르게 생각해요. 세영님은 너무 상냥하셔서 그런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갑자기 끼어든 검의 말에 남자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평소엔 그만큼이나 과묵한 검은 이상하게 흥분해서 나름의 추측을 늘어놓았다. -저주라든지, 무슨 제약이 있는 것일지도.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인 남자가 검 손잡이를 툭 쳤다. 다행히 제 이야기에 골몰한 마리엔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힘든 이야기를 끝낸 듯이 표정을 바로잡은 그녀는 다소 사무적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희는 서로에게 약속했습니다. 만약 세영님이 사람을 해쳐야 할 때가 온다면 먼저 손을 쓰자고, 절대 그분의 손에 사람의 피를 묻히지 말자고.” 남자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한참 만에 겨우 “그래도 괜찮으신 겁니까?” 하고 물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마리엔이 차갑게 웃었다. “처음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프엘프로 살아가는 건 그렇게 녹록하지 않거든요.” 남자는 그게 진심인지, 아니면 강해 보이려고 거짓으로 하는 말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사실 그는 이런 식의 대화에 약한 편이었다. 혼란스러워하는 그를 보던 마리엔이 말했다. “마도로 가면 세영님은 사람을 해칠 수밖에 없겠지요. 전 그렇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아요.” 남자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어머니를 구출하러 마도로 가겠다는 세영의 말에 감격하고, 너무 위험하다며 걱정스러워 했을 뿐. 그것이 지금까지 지켜온 신념을 꺾겠다는 말인지도 몰랐다. 아마 마리엔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끝까지 몰랐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남자의 사과에도 마리엔은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사과해봤자 아무 것도 바뀌지 않기 때문이리라. 대신 그녀는 냉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처음에 세영님은 인질을 구출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셨죠. 저희가 위험해질 것을 염두에 두셨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제 당신의 어머니를 구하기로 하셨고, 저희는 그것을 당신을 동료로 인정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세영님께서 인정하셨다면 당신도 저의 동료예요. 그리고 당신이 동료인 이상 목숨을 걸어서라도 이번 일을 도울 겁니다.” 남자는 이것이 그녀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슴을 짓누르는 죄책감에 목이 꽉 조이는 것 같았다. 그는 겨우 사죄의 말을 토해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어리석어서….”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온몸으로 매달려서, 세영의 발아래 엎드려 빌어서라도 마도로 가겠다는 결심을 바꿨어야 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통감하고 있는데 마리엔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지만, 아마 소용없었을 거예요. 세영님은 한번 결심하신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뤄내시니까.” 새침한 눈이 ‘너 따위가 감히 세영님의 결심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남자는 그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리고 어머니를 구하고 싶으시잖아요. 당신에게 그런 마음이 남아있는 이상, 세영님은 절대 결심을 바꾸지 않으실 거예요. 오히려 어떻게든 이뤄주려 하시겠죠. 이제 와 매달려봤자 역효과란 소리예요.”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남자는 덫에 걸린 기분으로 말했다.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마리엔이 “한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라고 말했다. 남자는 듣기도 전에 고개를 끄떡이고 싶은 것을 참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만약, 정말 위험한 상황이 오면 저희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시간을 벌 겁니다. 그때 세영님을 데리고 도망치겠다고 약속해주세요. 무엇보다 세영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겠다고요.” 생각과 달리 쉽게 고개를 끄떡일 수가 없었다. 남자가 생각하기에 세영은 절대 동료를 버리고 도망칠 성격이 아니었다. 남자의 팔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그 자리에 남을 것이 분명했다. 과연 가능할지 몰라서 머뭇거리자 마리엔은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제게 당신과 같은 능력이 있었다면 이런 부탁을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하고 말했다. “저희는 세영님께 도움이 되려는 거지 발목을 잡으려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저희가 따라가는 이상 세영님은 모두를 지키면서 인질을 구출하려 하시겠죠. 그런 건 원하지 않아요. 그래서 당신의 힘을 빌리고 싶은 거예요.” 따라가지 않는 것이 나을 거라는 것쯤은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영이 위험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알면서 안전한 곳에서 따뜻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제 손을 더럽혀서라도, 제 몸을 희생해서라도 돕고 싶었다. “당신은 단 한 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제 마음을 모르겠죠.” 남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을 뻔했다. 왜 모르겠는가. 세영이 손을 내밀어 줄 때마다, 구원받았다고 생각할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신이 너무나 싫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마리엔이 무슨 말을 하는지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저는 세영님이 원하신다면, 세상이 멸망하는 일이라도 기꺼이 할 거예요. 그것으로 세영님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요. 목숨을 거는 일은 거기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 말을 들으면 분명 슬퍼하실 겁니다.” 남자의 말에 마리엔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은 그녀가 “알고 있어요.” 하고 말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해요.” 하고 깍듯이 인사를 한 후 물러났다. 마리엔이 사라진 뒤에도 멍하게 있던 남자는 보이는 곳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온종일 쉬지 않고 싸운 것처럼 온몸에 기운이 없었다. -첫사랑은 원래 이뤄지지 않는다지. 넋을 놓고 있자 검이 맥락 없는 위로를 건넸다. 괜히 울컥한 남자는 검을 발아래 집어 던졌다. 평소라면 무어라 항의했을 검은 내던져진 채로 얌전히 누워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제 행동을 후회한 남자는 검을 들어 먼지를 털어주었다. “미안.” -아니, 나도 말이 심했다. 검이 조금 침울하게 말했다. 남자는 그를 품에 안고 몸을 웅크렸다.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한 버릇이었지만, 괜히 심란한 마음만 더해졌다. 그는 자신의 본체이자 친구인 검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때, 떠나는 게 나았을까.” 용의 둥지에서 모든 것을 알게 된 뒤 그는 세영의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했다. 단순히 그게 옳다고 생각하며 움직였던 것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교활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의 옆에 붙어있을 명분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이제 와 후회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지. 너는 결국 그녀의 옆에 있는 걸 택했다. 냉정한 검의 말에 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제 마음을 훤히 알고 있을 검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입으로는 다가갈 자격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세영이 보내는 관심에 기뻐서 날뛰고 있지 않은가. 이번 일도 저를 생각해준 것에 감격해서 제대로 생각지 않은 탓에 일어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소리들을 거라고 예상했지 않나. 난 그 엘프가 네 머리라도 쥐어뜯을 줄 알았다. 검이 조금 김이 샜다는 투로 말했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린 카라드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마리엔은 끝까지 ‘세영님의 옆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의 약점을 공격하지도 않았다. 그저 품위 있게 자신이 해야 할 말을 하고 돌아섰을 뿐이었다. ‘나라면 그렇게 하지 못했겠지.’ 서로의 입장이 반대였다면, 남자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마리엔을 떼어내려고 했을 것이다. 어쩌면 세영에게 접근하기 전에 쳐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가 보여준 인내심에 감사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급하게 장작을 주워서 돌아가자 시디발라가 쪼르르 달려와 물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리먼과 디안이 한창 요리에 열중하는 중이었다. 마리엔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쓸 만한 나무가 없어서 조금 멀리 갔었습니다.” 적당히 변명한 남자가 눈으로 세영을 찾았다. 그녀는 모닥불 옆에 길게 드러누운 하마용에게 등을 기댄 채로 잠들어 있었다. 손에는 마도의 것으로 보이는 지도가 쥐어진 채였다. “아까 앉자마자 잠들었어. 말은 안 해도 꽤 피곤했나 봐.” 뭘 보고 있는지 알아챈 시디발라가 말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세영은 밤새워 펠릭스를 강화하고 모든 일이 정리될 때까지는 한숨도 자지 않았다. 아마 무방비하게 잠든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있잖아, 마리엔이 화 많이 냈어?” 잠깐 주저하던 시디발라가 물었다. 역시 알고 있었구나 생각한 남자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딘지 기가 죽은 시디발라가 “정말?” 하고 되물었다. 남자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었을 뿐입니다.” 하고 답했다. 조금 안심한 것 같은 시디발라가 말했다. “나는 마리엔이랑 달라. 둘 다 돕고 싶어서 가는 거야. 혹시 둘이서만 가고 싶었어?” “…아뇨,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는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다행이라는 얼굴로 그의 손을 두드린 시디발라가 디안 쪽으로 쪼르르 가버렸다. 적당한 곳에 장작을 내려놓은 남자는 곧장 손을 씻고 리먼 쪽으로 가려 했다. 칼질에 서툰 사제가 당장 손가락을 자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모닥불 앞에서 발을 멈춘 것은 절대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잠깐 갈등하던 남자는 결국 세영의 앞으로 다가갔다. 마리엔이 덮어놓은 것 같은 담요가 그녀의 허벅지까지 내려와 있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담요를 끌어올려 주려는데 덥석 손목이 잡혔다. 반대쪽 손으로 눈을 비빈 세영이 돌처럼 굳어버린 남자를 보고 웃었다. 평소와 달리 무방비한 미소에 가슴이 덜컥했다. “아, 난 또 누군가 했네. 아깐 없더니 어디 갔다 왔어요?” “…장작을 주우러 갔었습니다.” 넋이 나간 남자가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여전히 졸린 목소리로 “그랬구나.” 하고 중얼거린 세영이 제 옆자리를 톡톡 쳤다. 남자가 멍하게 쳐다보자 그녀는 “혼자 땡땡이치면 그렇잖아요. 같이 좀 있어 줘요.” 하고 말했다. 분명 명령을 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어느새 몸이 그녀의 옆에 앉아 있었다. 중간의 과정은 머릿속에 없었다. 왜 이렇게 된 건가 생각하는데 세영이 작게 중얼거렸다. “마도로 가려니까 긴장돼요? 어째 전보다 표정이 더 안 좋아.” “아뇨. 그게 아니라….” 무어라 답하려던 남자는 무언가 가벼운 것이 제 팔에 툭 닿는 것을 느꼈다. 그새 다시 잠든 세영이 그의 몸에 기대고 있었다. 잠시 숨을 멈췄던 남자는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여 세영이 좀 더 편하게 기댈 수 있게 했다. -그만 정신 차리고 앞을 봐라. 검의 경고에 고개를 든 남자는 막 야영지로 들어선 마리엔을 발견했다. 어디서 찾았는지 버섯과 나무 열매를 잔뜩 손에 든 채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녹색 눈동자가 빤히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전에 나눈 대화와 지금의 상황을 떠올린 남자는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도발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왠지 보란 듯이 자랑하는 것 같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를 본 마리엔은 다시 걸음을 옮겨 리먼 쪽으로 가버렸다. 그제야 남자는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당분간 뭔가 먹을 때 조심하는 게 좋겠다. 검의 심각한 목소리에 남자는 다시 손잡이를 치려다 말았다. 그의 심란한 마음이야 어쨌든 평온한 밤이었다. ──────────────────────────────────── 비블레스 항구 (2) ‘음, 뭔가 좀 수상한데.’ 세영은 동료들 사이에 떠도는 불온한 공기를 감지했다. 안절부절못하는 사슴과 뾰족뾰족해진 마리엔을 보니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모르는 척 넘어간 그녀는 아침 식사를 준비할 때 시디발라를 잡아와 추궁했다. “어어, 난 모르는데!” “진짜?” “으응, 무슨 일 있었나?” 시디발라는 눈을 떼굴떼굴 굴리며 시침을 뗐다. 그러면서 불안한 얼굴로 디안 쪽을 힐끔대는 것이 그쪽도 사정을 안단 이야기였다. 이렇게 되면 동료들 전부 한통속이라고 봐야 했다. ‘무슨 일인지는 대충 짐작이 가지만, 뭔가 따돌려지는 기분이랄까.’ 애초에 행선지를 멋대로 바꾼 건 자신이니 뭐라고 따질 자격이 없긴 했다. 난감하게 뺨을 긁적인 세영이 카라드를 힐끗 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힌 사슴이 디안 쪽으로 도망쳤다. 괜한 불똥을 뒤집어쓴 탓인지 전보다 더욱 경계가 심해진 느낌이었다. ‘아니면 어젯밤 일 때문인가.’ 아무래도 사슴이란 것은 친한 척하면 멀어지고 관심 없는 듯 굴면 다가오는 생물인 모양이었다. 잠결에 손목을 덥석 잡고 끌어당긴 것이 문제였는지, 사슴의 안전거리는 더욱 벌어져 있었다. 세영은 괜히 입맛이 쓴 것을 느꼈다. ‘에라, 내 팔자에 무슨 연애냐. 그냥 할 일이나 하자.’ 한숨을 쉰 세영은 온 신경을 요리에 쏟았다. 덕분에 살그머니 고개를 든 사슴이 자신을 살피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비블레스로 바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할 것 같습니다. 일단 비블레스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 파키라에서 정보를 모으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아침 식사가 끝난 후엔 본격적인 의논이 시작됐다. 세영이 세운 계획은 사슴과 단둘이 마도에 잠입하는 것이었다. 숫자가 늘어난 이상 처음부터 다시 짜야 했다. “다 함께 몰려다니기엔 너무 눈에 띌 것 같고, 전처럼 둘로 나눠서 다녀야 할 것 같은데.” 세영의 제의에 모두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눈치를 보던 디안이 매우 조심스럽게 “둘로 나눈다면 구성원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하고 물었다. 세영은 별생각 없이 대꾸했다. “카라드와 리먼, 시디발라가 한 팀. 저와 마리엔, 디안으로 한 팀 하면 될 것 같네요.” “…….” “왜요?” 세영은 동료들의 이상한 반응에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와 카라드를 가리킨 시디발라가 “어, 둘이 같이 안 가?” 하고 물었다. 무슨 소리인가 했던 세영이 피식 웃었다. “지금 이게 놀러 가는 거냐. 인질구출 하러 가는 거지.” “그, 그런가? 후와와는 그럼 어느 쪽으로 가?” 민망한 표정을 지은 시디발라가 화제를 돌렸다.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걘 그냥 돌려보낼 건데?” 하고 답했다. 냄비 바닥을 구멍 낼 듯이 핥아대던 하마용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왜? 왜? 나 용의 신전에 가볼 거란 말이야!” “엄마한테 허락 안 받았잖아.” 신세계의 신이 되겠다는 하마용의 소망은 가볍게 짓밟혔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하마용이 “난나랑 난마는 우리 엄마 아냐!” 하고 반항했다. 하지만 세영은 덩치 크고 눈에 잘 띄는 그를 데려갈 생각이 없었다. 날아서 바다를 건널 수 없는 이상은 짐 덩어리였다. “엄마 아니고 보호자잖아. 정 따라가고 싶으면 허락받아서 오든지.” 냉랭한 대꾸에 당황한 하마용이 시디발라를 쳐다봤다. 도움을 청하는 시선에 시디발라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세영이 왜 하마용을 떼어버리려는지 눈치챈 것이다. “짐도 없으니 이틀이면 엄마한테 갈 수 있을 거야. 닷새 동안 파키라에서 기다려주지. 그때까지 허락받아와.” 물론 쌍두룡이 허락해줄 리가 없지만. 속으로 덧붙인 세영이 싱긋 웃었다. 입을 벙긋거리던 하마용이 우와앙 울음을 터트리며 어디론가 달려갔다. 바닥에 냄비 구르는 소리가 요란했다. 놀란 시디발라가 황급히 그의 뒤를 쫓아갔다. 너무하다는 시선을 받은 세영이 말했다. “따라가 봤자 좋은 꼴 못 볼 걸요. 신전에서 쟤를 용으로 인정할 리가 없잖아요?” 용의 신전에서 섬기는 것은 에레슈키갈 같은 완벽한 용이지, 하마와 섞인 혼혈 따위가 아니었다. 용이면 다 받아주는 곳이었다면 쌍두룡이 교단에 몸을 의탁할 리가 없었다. 쓴웃음을 짓는 사슴을 보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실컷 이용해 먹고 버리는 것 같아서.” 디안이 어딘지 찜찜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사실이었기 때문에 세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개고생시킨 뒤에 굳이 가혹한 현실까지 알려줄 필요가 있나요. 꿈과 희망을 지켜준다고 좋게 생각하죠.” “…….” “일단 신전을 목표로 삼았지만, 유일한 인질인 이상 다른 곳으로 옮겨졌을 수도 있어요. 후보지를 설정해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세영의 박력에 휘말린 동료들은 다시 열심히 지도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카라드의 의견을 반영해서 세 개의 후보지를 설정했을 때쯤이었다. 눈이 퉁퉁 부어서 듀공처럼 변한 하마용이 시디발라를 태우고 돌아왔다. 세영을 노려보던 놈은 아직 울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허락받아 올 테니까, 절대 먼저 가버리면 안 돼!” 하고 말했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동료들과 달리 세영은 태연히 “당연하지. 너나 약속에 늦지 마.” 하고 대꾸했다. 하마용은 마지막 의리를 지켜 일행을 파키라 근처까지 태워주었다. 하루 정도는 걸을 생각이었던 세영에겐 잘된 일이었다. 무슨 작당이라도 하는지, 시디발라와 한참을 속닥이던 하마용은 금방 돌아오겠다며 계곡 쪽으로 날아갔다. 왠지 찜찜했던 세영이 무슨 말을 했냐고 묻자 “남자들끼리의 비밀!” 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비밀은 얼어 죽을 비밀인가 싶었지만,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캐어물을 수가 없었다. 하마용과 헤어진 일행은 곧 파키라에 도착했다. 별 특색 없는 작은 마을이라는 설명과 달리 입구까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가끔 꽃잎 같은 것이 뿌려지는 것도 보였다. “무슨 축제가 있나 봐요!” 북적거리는 거리를 본 마리엔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은 세영이 “스카로스 축제가 생각나네요.” 하고 말했다. 발그레하게 얼굴을 붉힌 마리엔이 헤헤 웃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굳이 일행을 나누지 않아도 될 것 같군요.” 리먼이 조금 안도 어린 얼굴로 말했다. 피식 웃은 세영이 고개를 끄떡였다. 하지만 디안은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좀 이상합니다. 이곳은 사냥철이 아니라면 방문객이 없는 마을입니다. 하필 이런 시기에 축제라는 것도 앞뒤가 안 맞고요.” 한번 알아봐야겠다고 말한 디안이 적당한 사람을 골라 접근했다. 귀찮은 듯 돌아본 사람이 디안의 차림을 보자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와 몇 마디 말을 나눈 디안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뭐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에 세영이 먼저 물었다. “무슨 축제래요?” “축제가 아니라… 구원자께서 방문하셔서, 그분을 보러왔다는데요?” 일행의 표정이 어리둥절하게 변했다. 마리엔이 “세영님이 여기 오신다는 걸 저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을까요?” 하고 말했다. 고개를 저은 디안이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라 이미 저 마을에 있답니다. 구원자라는 여자가요. 하루에 한 번씩 마을을 돌면서 행진 같은 걸 한다는군요.” “엥?!” 괴상한 소리를 낸 시디발라가 세영을 보며 “너 말고 다른 구원자가 있는 거야?” 하고 물었다. 애초에 자신을 구원자로 생각하지 않았던 세영은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답했다. 디안이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리고 저한테 검사 디안을 흉내 내서 입은 거냐고. 정말 진짜 같다고 칭찬해줬습니다.” 그제야 일행은 상황을 파악했다. 그들을 흉내 낸 ‘가짜’가 먼저 마을에 와 있다는 이야기였다. 눈을 동그랗게 뜬 시디발라가 말했다. “우와, 디안. 너 엄청나게 유명해졌나 보다.” “뭐라는 거야. 널 흉내 낸 가짜도 저기 있다는 소리잖아.” “앗, 진짜? 그럼 나 구경 갈래!” 시디발라가 신이 나서 외쳤다. 자신을 사칭하는 ‘가짜’가 있다는 것보다 그만큼 제가 유명해졌다는 게 신기한 듯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마리엔마저 거기 휘말려 피식 웃었다. 당장 마을로 뛰어갈 것 같은 시디발라를 붙잡은 디안이 말했다. “잠깐, 가기 전에 옷 갈아입자. 이대로 가면 분명 들킬 거라고.” “응? 내가 진짜인데 왜 갈아입어야 해?” “야, 우리 지금 마도로 잠입해야 하거든?” “아직 마도 아니잖아?” 시디발라와 옥신각신하던 디안이 도움을 청하듯 세영을 바라봤다.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재미있겠는데요. 옷 갈아입고 가보죠.” 하고 말했다. 카라드가 조금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런 외진 곳에 세영님을 사칭하는 자가 나타난 것이 우연 같지는 않습니다. 디안이 걱정한 것처럼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숨어 들어가면 모를 것 같지 않아요?” 세영이 피식 웃으며 사람들로 북적이는 마을을 가리켰다. 그들을 노리고 판 함정이라도 이렇게 붐비는데 어떻게 찾아내겠는가. 찾아낸다고 해도 어떻게 손쓰기에는 힘든 환경이었다. “하지만….” “단순한 사기꾼일 확률이 높으니까 잠깐 살펴보고 나와요. 아니면 잡아서 족치면 되죠.” 세영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더는 반대할 수 없었던 카라드도 고개를 끄떡였다. 결정을 내린 일행은 모두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오랜만에 원피스를 입은 세영을 보고 마리엔이 기뻐하며 박수를 쳤다. 이쯤이면 거의 놀러 가는 분위기였다. ‘그동안 죽어라 공략만 했으니까, 잠깐 쉬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세영은 힐끗 카라드의 얼굴을 살폈다. 어머니의 목숨이 위태로우니 불안할 텐데도 그는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겠지만. ‘음, 쓸데없는 일로 시간 끈다고 생각하려나?’ 너무 배려 없이 움직였나 반성하는데 문득 사슴의 눈과 마주쳤다. 이번에도 먼저 피하겠거니 생각했는데 시선이 계속 고정되어 있었다. “왜요?” 하고 조금 무뚝뚝하게 묻자 그가 “옷이 잘 어울리셔서….” 하고 수줍게 웃었다. 머쓱해진 세영이 뺨을 긁적였다. “…어, 고마워요?”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다였는지, 꾸벅 고개를 숙인 사슴이 뽀르르 도망쳤다. 저렇게 부끄러워하면서도 옷이 어울린다는 소리가 굳이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왠지 뺨이 간지러워서 자꾸만 긁적이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사슴의 앞에선 거의 바지만 입고 돌아다녔다. 딱 한 번 드레스를 입은 적이 있지만, 그에게 강렬한 수치를 선사할 때라 가능한 한 잊어줬으면 싶었다. ‘나도 참 엄청나게 용감했지.’ 그렇게 생각하면 사슴은 굉장히 관대한 편이었다. 입장을 바꿔 세영이었다면 저를 수치 코스프레 시킨 남자의 옆에도 가지 않았을 테니까. 죄책감을 느낀 세영은 사슴이 당분간 도망쳐다녀도 봐주기로 마음먹었다. “세영님, 이쪽이에요!” 앞서 가던 마리엔이 바쁘게 그녀를 불렀다. 명당자리를 찾아냈다며 연신 흔드는 손이 귀여웠다. 피식 웃은 세영은 걸음을 재촉해서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마리엔이 찾아낸 명당자리는 길에서 조금 떨어진 담장이었다. 사람들이 붐비는 곳을 피해 마을 뒤쪽의 언덕으로 빙 둘러온 일행은 담장 위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확실히 사람에게 치이지 않는 좋은 장소였지만, 지나가는 가짜를 구경하기엔 힘들 것 같았다. 그때 마리엔이 손에 쥔 완드를 휘둘렀다. 물의 장막이 넓게 펼쳐지면서 길의 모습을 크게 비추었다. 물 위에 비친 영상이지만,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생생했다. “오, 대단해요. 마리엔. 근데 계속 장막 펼치고 있으면 힘들지 않겠어요?” “이 정도는 끄떡없어요. 이제 다른 일을 하면서 유지할 수도 있는 걸요.” 감탄하는 세영을 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은 마리엔이 말했다. 그녀의 레벨을 확인한 세영이 고개를 끄떡였다. 용의 계곡에서 등급이 높은 독개구리들을 몰살시키고, 모리아에서 비행 언데드들을 한나절 가까이 사냥한 덕에 파티원들의 레벨은 제법 높아져 있었다. 이제 디안이 Lv40, 마리엔이 Lv39, 시디발라가 Lv43, 리먼이 LV48이었다. 아직 중급이라고 하기에는 모자라지만, 초보파티에선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오, 저기 오신다!” “구원자님!” 그때 떠들썩한 소란이 일어났다. 환호성을 지르거나 축복을 내려달라고 소리치는 사람들로 길 전체가 웅웅 울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무릎을 꿇거나 몸을 내던지는 사람들 사이로 ‘가짜’ 구원자 일행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저게 나야?’ 장막에 비친 구원자를 확인한 세영이 피식 웃었다. ‘가짜’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생머리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진 미인이었다. 피부는 아주 옅은 갈색이었는데, 고양이처럼 치켜 올라간 눈매와 풍만한 가슴이 어우러져 굉장히 관능적인 이미지였다. “가짜라고 하지만 나보다 훨씬 예쁜데?” 세영의 감탄에 발끈한 마리엔이 “전혀! 아니에요! 대체 어딜 봐서!”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장막에 비친 여자를 가리켰다. “가슴 크고 다리 길고 섹시하잖아요.” ‘구원자’라는 명칭을 의식했는지, 여자는 흔히 여신 드레스라 불리는 것을 입고 있었다. 하늘하늘한 옷감이 그녀의 수박만 한 가슴을 부각하며 살결까지 살짝 비췄다. 걸을 때마다 맨다리가 슬쩍 보이는 것이 저렇게 입고 춥지 않나 싶었다. 그때 흠흠 헛기침을 한 리먼이 말했다. “일반적인 기준에선 세영님이 더 미인이십니다.” “맞습니다. 가슴이 미의 전부는 아니라고요!” 얼굴이 빨개진 디안이 거들었다. ‘답정너’가 된 기분에 머리를 긁적인 세영이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보기엔 진짜 예쁜데요.” 하고 머쓱하게 말했다. 뿌루퉁해진 마리엔이 “세영님이 너무 겸손하셔서 그런 거예요.” 하고 대꾸했다. “엇, 저게 나야?” 시디발라가 ‘가짜 세영’의 옆에 서 있는 소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비율이 안 맞는 것을 보면 아마 선천적으로 키가 작은 사람인 것 같았다. 그의 머리 위에는 가짜 귀로 보이는 것이 커다랗게 달려 있었다. “내가 저렇게 못생겼어?” 시디발라가 잔뜩 실망한 듯이 말했다. 무어라 답하려던 세영이 멈칫했다. 검은 머리의 남자가 노예 목걸이를 한 채로 ‘가짜 시디발라’의 손에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 비블레스 항구 (3) ‘설마 저게 가짜 사슴?’ 세영은 가짜 카라드를 유심히 관찰했다. 흑발흑안으로 조건은 맞췄지만, 머리는 짧고 얼굴은 험상궂었다. 갈색으로 그을린 뺨에 칼자국까지 있어서 꼭 범죄자처럼 보였다. ‘아, 하긴. 적국의 악명 높은 기사라면 보통 저런 모습을 연상하겠지.’ 실제는 꽃사슴이지만. 피식 웃은 세영이 진짜 사슴 쪽을 쳐다봤다. 그러다가 눈을 똥그랗게 뜬 동료들이 자신을 살피는 것을 눈치챘다. “왜 그래요?” “아니, 그… 화가 나셨을까 봐.” 디안이 폭탄을 앞에 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말했다. 고개를 갸웃한 세영이 “제가 왜요?” 하고 묻자 “…아닙니다. 제 착각이었나 봅니다.”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뭐지?’ 세영은 다시 가짜 카라드를 훑어봤지만, 동료들이 왜 화낼 거라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음을 놓은 동료들이 다시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너무해, 세영님은 카라드 씨를 저렇게 끌고 다니지 않으셨는데.” “근데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끌고 가는 거야?” “아마 자발적으로 복종한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 같군요.” 그때 길 쪽에서 “꺄아악, 디안님!” 하는 여자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곧이어 어딘가 어설픈 흰 갑옷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놈이 치렁치렁한 금발을 쓸어넘기며 싱긋 웃자 여자들이 자지러질 듯이 비명을 질렀다. “프린스 챠밍?” 세영이 어이없이 중얼거렸다. 제비처럼 미끈한 안면에 눈부시게 반짝이는 이가 느끼한 왕자를 떠올리게 했다. 움찔한 사슴이 “아는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피식 웃은 세영이 “아니, 누가 생각나서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사슴이 굉장히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저는 저렇게 재수 없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디안이 조금 억울한 듯이 말했다. 고개를 크게 끄떡인 시디발라가 “맞아, 나도 저렇게 못생기지 않았다고!” 하고 동조했다. 투덜거리는 동료들을 재미있어하던 세영은 이어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보고 소리쳤다. “나의 마리엔은 저렇지 않아!” 무엇보다 엘프가 아니잖아! 분개하는 세영을 보고 발그레하게 뺨을 붉힌 마리엔이 힐끗 카라드를 보았다. 의기양양한 얼굴에 카라드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가짜 마리엔’은 ‘가짜 리먼’의 손을 잡고 조신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마리엔처럼 밝은 금발이었지만, 어린아이처럼 키가 작았다. 몸도 무척 가냘파서 나이 어린 소녀가 아닐까 싶었다. 시디발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귀여운데? 내 가짜처럼 못생기진 않았네.” “단순히 귀여운 걸로는 안 돼. 귀여우면서도 청순하고 예뻐야 한다고.” 세영은 냉정하게 말했다. 무엇보다 몸매가 너무 빈약했다. 마리엔은 얼굴도, 몸매도, 성격도 착한 삼무결의 천사거늘. 아무리 가짜라지만 양심이 없구나 싶었다. 팔짱을 끼고 가짜 마리엔을 노려보던 세영이 말했다. “일단 저놈들을 잡아서 족치죠.” “네? 아무리 그래도 그럴 것까진….” 디안이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세영은 가짜 카라드가 등장할 때부터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우리의 구성과 특징을 다 파악하고, 카라드가 동료가 된 것까지 아는 건 그렇다 쳐요. 그런데 카라드가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는 것까지 아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요?” 물론 소문이야 날 수 있다. 하지만 소문의 전파속도는 그렇게 빠르지 않다. 사막을 가로질러서 다른 나라까지 전해지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중간에 세부적인 사항은 빠지거나 바뀌기 마련이다. 즉, 이건 누군가가 작정을 하고 연출한 쇼라는 이야기였다. “목걸이에 대해 알고 있는 누군가의 입김이 닿은 거군요.” 리먼이 그럴듯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떡였다. 세영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일단 마도는 아니에요. 마도왕의 오른팔이 노예로 전락한 것을 사방에 알릴 이유가 없잖아요. 오히려 감췄으면 감췄죠. 그리고 빛의 교단은 우리의 도움을 구하는 처지이고, 저런 짓을 할 여유도 없었을 거예요. 그럼 남은 후보는?” 세영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챈 디안이 “설마… 라오 조드라고요?” 하고 말했다.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전 그렇게 생각해요.” 라고 답했다. 마리엔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아니, 그 인간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가짜를 만든 걸까요?” “그걸 알고 싶으니까 잡아서 족쳐보자는 거죠.” 세영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왠지 그놈이라면 ‘누님의 위명을 대륙 전체에 알리고 싶어서!’ 라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움직일 것 같았다. 하긴, 제정신이 박힌 놈이면 아는 사람의 사칭범을 만들진 않았겠지. “일단 추측이지 확실한 건 아니니까, 다들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일단 저 먼저 저 사람들 숙소에 잠입해서….” “안돼요!” “안 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리엔과 시디발라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세영은 어리둥절한 시선을 보냈다. 얼굴을 붉힌 마리엔이 “위, 위험하면 어떡해요.” 하고 조그맣게 말했다. 그것이 귀여워 저도 모르게 히죽 웃은 세영이 헛기침을 했다. “괜찮아요. 마을에 들어올 때 확인해봤는데, 적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어요. 또 저 사람들이 절 해칠 수 있을 정도로 강할 것 같지도 않고요” 물론 은신 스킬이 있는 사람이나 몬스터라면 적이라고 해도 맵에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공격을 하려면 은신을 풀어야 하고, 그러면 맵에 표시되기 마련이었다. 주의해서 살핀다면 습격받을 염려는 없었다. “그, 그럼 한 명이라도 데리고 가세요. 카라드 씨라든가.” “읭?” 의아해하는 사이 마리엔은 “세영님과 같이 가주실 거죠?” 하고 카라드에게 묻고 있었다. 얌전히 고개를 끄떡인 사슴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아무래도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라고 한 것이 동료들의 불안감을 부추긴 것 같았다. 머쓱해진 세영이 뺨을 긁적였다. “그럼 그냥 다 같이 가요. 생각해보니 몇 명은 망을 보고, 몇 명은 안으로 들어가서 족치는 게 나을 것 같네요.” 가짜들이 비명을 질러서 사람들이 몰려들면 그것도 나름대로 골치 아팠다. 되도록 속전속결로 조용히 처리하는 것이 나을 듯했다. 그때 행진을 끝낸 가짜들이 뭔가를 했는지 사람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마리엔의 마법으로는 더는 관찰할 수가 없었다. 담 아래로 가볍게 뛰어내린 세영이 길 쪽으로 다가갔다. ‘가짜 구원자’가 사방으로 손을 흔들며 외치고 있었다. “저희와 함께 모험을 떠날 분은 ‘질풍 용병단’에 신청서를 내시면 됩니다!” “마경을 정복하는 용사가 될 마지막 기회입니다. 절대로 놓치지 마세요!” 이어서 ‘가짜 디안’이 소리쳤다. 홈쇼핑 광고 멘트 같은데도 여자들은 좋다고 비명을 질렀다. 가짜들은 다시 환호성을 받으며 숙소로 보이는 곳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악기를 든 사람들이 가짜들의 빈자리를 채웠다. 그들은 흥겨운 멜로디를 연주하며 ‘구원자의 업적’을 칭송하는 노래를 불렀다. 시디발라가 두 귀를 쫑긋 세웠다. “앗, 나 저 노래 알아!” “파티마님이 지으신 거군요.” 리먼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이걸로 라오 조드의 짓이라는 게 증명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영은 아무 말 없이 팔짱을 낀 채로 노래를 들었다. 파티마의 각색이 들어간 이야기는 꽤 흥미진진한 영웅담이었다. 미궁에 갇힌 공주를 구출하거나 마도의 기사를 유혹해 사로잡는 근본 모를 내용이 들어있었지만,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악사들은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흉내 내거나 말발굽 소리 같은 효과음까지 넣어가며 사람들의 이목을 붙잡았다. ‘아주 전문적인데?’ 가짜들이 어설픈 냄새가 났다면 악사들은 숙련된 프로였다. 이야기는 이제 정체를 감춘 구원자와 그녀에게 반한 ‘사막왕’의 로맨스로 넘어갔다. 거듭되는 청혼을 거절한 구원자는 정체를 밝히며 사막왕에게 축복을 내렸다. 사막왕은 실연에 괴로워하면서도 가장 위대한 왕이 되리라는 축복에 기뻐했다. 정말 쓸데없이 끼어든 이야기였으나 사람들은 귀를 쫑긋 세우며 들었다. ‘결국, 찌라시냐.’ 세영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아무리 사막이 있어 주먹이 멀다지만, 이렇게까지 일을 쳐놓고 어떻게 수습할 생각인지 궁금했다. 그 사이 능숙하게 노래를 끝맺은 악사들이 절을 했다. 넋을 놓고 구경하던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이제 남은 마경은 셋! 구원자와 모험하며 용사가 되고픈 이는 질풍 용병단을 찾으시길.” “마경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절을 한 악사들이 악기를 챙겨 물러났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천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속는 셈치고 지원해보겠다며 용병단이 머무는 여관으로 향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이 빠지길 기다리던 세영이 싱긋 웃으며 동료들을 돌아봤다. “자, 그럼 우리도 슬슬 가보죠.” 파키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건 곧 번듯한 숙소가 몇 개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가짜 구원자가 머무는 곳을 추측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숙소 앞을 지키고 있는 용병들은 그 추측을 확인해 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해치우기는 어렵지 않겠지만, 몰래 들어가긴 오히려 힘들겠는데?” 건물을 확인한 시디발라가 난처하게 말했다. 구원자가 머무는 곳은 작은 이층집이었는데, 입구 쪽을 용병들이 빽빽하게 서서 막고 있었다. 심지어 문과 창문이 없는 벽 쪽도 세 명의 용병이 지키는 중이었다. “저라면 들키지 않고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침묵하던 카라드가 말했다. “어떻게요?” 하고 물었던 세영은 곧 납득했다. 벽 쪽으로 그림자가 져있었다. “참, 그림자를 통해 이동할 수 있었죠. 은신하는 것도 가능해요?” “예. 한 명 정도는 데리고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림자드래곤인 에레슈키갈이 양자인 그에게 부여한 능력이었다. 멀리 떨어진 곳은 안 되지만, 시야로 확인되는 그림자라면 얼마든지 옮겨 다닐 수 있었다. 그림자에 숨어서 장시간 은신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것참. 암살자가 되기 적합한 능력일세.’ 잠깐 신기해하던 세영은 고개를 끄떡이며 맵을 확인했다. 맵의 특성상 건물 안쪽까지는 파악되지 않기 때문에, 일단 진입한 후에 안의 인원을 파악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럼 저와 카라드가 벽 쪽으로 접근한 다음에 세 명의 용병들을 제압하죠. 그다음 벽을 도려내고 안으로 진입해서 인원을 파악할게요. 나머지 사람들은 용병들을 적당한 곳에 숨기고 따라와 주세요.” 몇 가지 수신호를 정한 후 곧바로 작전에 돌입했다. 세영을 공주님 안기로 안아든 카라드가 나무그림자를 통해 이동했다. 왜 굳이 이런 자세인가 싶었지만, 뭐라고 할 틈도 없었다. 그림자를 통과하는 느낌은 꽤 기묘했다. 온도가 없는 깃털로 온몸을 간질이는 느낌이었다. 작게 진저리친 세영은 눈앞에 있는 용병의 뒤통수를 쳐서 기절시켰다. 그가 쓰러지기 전에 카라드의 품에서 튀어 나간 그녀는 또 다른 용병을 덮쳤다. 그 사이에 카라드가 마지막 용병을 처리했다. ‘별거 아니네.’ 정글도를 꺼낸 세영이 스킬을 써서 벽을 둥글게 오려냈다. 과자 반죽처럼 떨어져 나간 조각을 카라드가 잡아채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가려는 세영을 붙잡은 그가 다시 그녀를 안아 들었다. ‘아, 맞다. 잠입하는 거였지.’ 왠지 민망하다고 생각한 세영이 괜히 맵을 노려보았다. 카라드가 그림자처럼 조용히 집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들이 숨어든 곳은 계단 밑에 있는 자투리 공간이었다. 창고처럼 여기저기 널린 물건들을 피한 카라드가 부엌 쪽을 바라보았다. 은신 스킬을 사용 중인지 시야가 물처럼 일렁거렸다. 부엌 쪽으로 접근한 그들은 세 명의 용병이 카드놀이를 하는 것을 확인했다. 1층에 있는 두 개의 방에는 각각 네 개와 다섯 개의 초록색 점이 찍혀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세영은 2층을 가리켰다. 2층에는 세 개의 방이 있었는데, 그중 점이 하나만 찍힌 곳이 있었다. ‘독방을 차지하고 있다면 가짜 구원자일 확률이 있지. 아닐 수도 있지만, 일단 저기부터 확인을 해봐야겠어.’ 결정을 내린 세영은 카라드의 귀에 대고 “밖은 대기하라고 하고 2층으로 가요.” 하고 속삭였다. 움찔한 사슴이 고개를 끄떡였다. 처음의 장소로 돌아간 두 사람은 동료들에게 대기하라는 신호를 보낸 후에 2층으로 향했다. 2층의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카라드가 은신을 풀었다. 세영은 여전히 자신을 안고 있는 그의 팔을 톡톡 두드리며 “이제 내려줘요.” 하고 말했다. 잠깐 머뭇거리던 카라드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내려놓았다. 세영은 거침없이 목표로 삼은 방에 노크했다. 잠시 후 안에서 “네에!” 하는 명랑한 대답이 들렸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문을 활짝 열었다. 화장대 앞에 앉아있던 ‘가짜 구원자’가 무심코 돌아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명을 지를 것처럼 벌어진 입을 화장대의 그림자로 이동한 카라드가 틀어막았다. 팔짱을 낀 세영이 피식 웃었다. “안녕, 가짜 아가씨. 우리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 ──────────────────────────────────── 비블레스 항구 (4) 10분도 지나지 않아 가짜들은 일행 앞에 줄줄이 무릎을 꿇었다. 집 앞을 점령한 용병은 그들이 직접 쫓아낸 뒤였다. 사람들의 이목이 사라지자 ‘가짜 리먼’이 대표로 납죽 엎드리며 말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구원자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가짜 리먼’은 동글동글한 인상의 중년 남자였다. 선량해 보이는 눈매와 밋밋한 얼굴이 도저히 사기꾼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바닥에 닿은 그의 고동색 머리를 내려다본 세영이 웃었다. “죽을죄를 지었으면, 죽어야지.”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는 말에 가짜들의 등이 흠칫했다. 그들의 얼굴에 ‘설마?’나 ‘그래도 구원자인데 죽이진 않겠지?’ 하는 불안감이 떠올랐다. 세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러게 죽을 짓을 왜 했어?” “머,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정말 어쩔 수 없이….” 살기를 느낀 ‘가짜 리먼’이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했다. 그는 “모두 제 잘못입니다! 제가 죽일 놈입니다!” 하고 외치면서 자신의 뺨을 철썩철썩 때리기 시작했다. 리먼처럼 차려입은 남자가 그러는 것에 동료들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세영은 ‘가짜 리먼’의 어깨를 툭 걷어찼다. 개구리처럼 발라당 뒤로 넘어간 남자가 아이쿠 하고 죽는 소리를 냈다.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있던 ‘가짜 구원자’가 “아, 아빠! 괜찮아?” 하고 물으며 그를 붙잡았다. ‘뭐야, 부녀였어?’ 세영은 더 걷어차려던 것을 그만두었다. 아무리 사기꾼이지만, 자식 앞에서 부모를 때리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그때 발딱 고개를 쳐든 ‘가짜 구원자’가 외쳤다. “억울합니다. 구원자님. 저희도 누군가가 시켜서 강제로 한 거예요!” “라나!” ‘가짜 리먼’이 대경실색하여 딸을 붙잡았다. 입꼬리를 올린 세영이 “그래? 누가 시켰는데?” 하고 물었다. ‘가짜 구원자’는 아버지를 바라봤지만, 그는 모든 게 틀렸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깐 주저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 그게… 확실하진 않지만, 높은 사람인 것 같아요. 아니, 분명 귀족이었어요! 저희에게 돈을 줄 테니 구원자 일행의 역할만 해주면 된다고, 그럼 계속 지원해준다고 했어요.” 그녀는 주인의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은 눈빛을 보냈다. 세영은 선망을 가득 담은 시선에 조금 의아한 기분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가짜를 대하는 말투도 누그러졌다. “그건 내가 이미 아는 이야기인데. 뭐 다른 건 없어?” “…어, 어? 또 뭐가 있더라?” ‘가짜 구원자’는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끙끙거렸다. 그녀가 털어놓은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은 조르디아와 파디샤 인근을 떠도는 유랑예인이었다. 어느 날, 귀족처럼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상당한 지원금을 약속했다. 별 유명하지도 않은 예인에게 그런 기회는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승낙했고, 몇 가지 교육을 받은 후 이곳으로 파견되었다. “제가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데요. 구원자님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매일 한 끼만 먹고 잘 때도 앉아서 자고. 진짜 굉장히 노력했어요!” 해맑게 웃는 얼굴에서 꽃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머릿속이 꽃밭인 아가씨였다. 피식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은 세영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 이야기해줘서 고마워.” “그럼 용서해 주시는 거예요?” “응, 이렇게 예쁜 아가씨를 죽일 수야 없지. 살려줄게.” 세영의 말에 ‘가짜 구원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뾰로통해진 마리엔이 “돈 받고 했으면 강제가 아니죠!” 하고 쏘아붙였다. 시무룩해진 가짜가 세영의 눈치를 살폈다. 세영은 마리엔을 다독이며 “좀 봐줘요. 귀엽잖아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무릎 꿇고 있던 ‘가짜 디안’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정말 사실대로 말하면 살려주시는 겁니까?” “어, 근데 넌 재수 없게 생겨서 더 열심히 지껄여야 할 것 같아.” 세영의 대답에 디안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는 “아니, 그렇게 말씀하실 것까진….” 하고 웅얼거리며 가짜를 힐끔댔다. 느끼한 생김새와 달리 ‘가짜 디안’은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저희를 보고 노여우셨겠지만, 가짜는 저희뿐만이 아닙니다. 제가 알기로는 대륙 전역에 저희 같은 가짜들이 보내진 것으로 압니다. 저희만 죽이신다고 가짜 구원자가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말입니다.” “뭐라고요?” 마리엔이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다른 동료의 얼굴도 괴상해졌다. ‘가짜 구원자’가 “맞아요! 제가 아는 것만 해도 다섯 군데는…!” 하고 지껄이다가 제 아비에게 입이 틀어 막혔다. 멍하게 입을 벌린 시디발라가 감탄했다. “와, 진짜 미친놈이잖아?” “그러니 벌하실 거라면 그 미친놈이라는 사람부터 벌해주십시오.” 담담하게 말을 맺은 ‘가짜 디안’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쯤이면 제 목숨값으로는 충분하다는 태도였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본 세영이 말했다. “하나만 더 답해주면 살려주지. 너희끼리 멋대로 돌아다니는 건 아닐 테고, 분명 활동비를 지급하고 다음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 있을 거다. 그게 누구지?” “악사들입니다. 비행선을 타고 이곳으로 올 때부터 그들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가짜 디안’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고개를 끄떡인 세영이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디안, 카라드. 둘이 가서 악사들을 생포할 수 있겠어요? 아니면 제가 갈까요?” “맡겨주십시오. 당장 가서 끌고 오겠습니다.” 디안이 제 가슴을 두드리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카라드는 거기 동의하듯 고개를 끄떡였다. 두 사람이 방을 떠난 뒤에 ‘가짜 구원자’가 우와 하고 탄성을 질렀다. 그녀는 두 눈을 반짝거리며 세영에게 물었다. “아까 디안님 옆에 있던 사람이요. 그 마도 기사예요? 마도왕의 오른팔이라는 사람 맞죠?” 이미 긴장감 따위는 하늘 너머로 날려버린 것 같았다. 피식 웃은 세영이 고개를 끄떡이자 다시 우와아 소리를 지른 그녀가 재잘거렸다. “진짜, 너무 잘생겼어요. 처음 봤을 때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줄 알았어요. 세상에! 대본엔 왜 미남이라는 소리가 없었을까요?” “라나, 제발 조용히 좀 하렴.” “아빠는 맨날 조용히 하래.” 제 아비의 면박에 뽀로통해진 ‘가짜 구원자’가 투덜거렸다. 세영이 웃으며 “왜? 그냥 내버려둬. 귀여운데.” 하고 말하자 그녀는 다시 신이 나서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요, 사막왕이랑 진짜 연인 사이세요? 청혼은 왜 거절하셨어요?” “연인도 아니고, 청혼받은 적도 없는데.” “앗! 정말요? 그럼 마도의 기사는요? 정말 유혹해서 생포하신 건가요?” “글쎄?” 세영은 간간히 대답까지 해가며 그녀의 수다를 들어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사자의 앞발에 끼인 생쥐를 보는 표정으로 가짜를 바라봤다. 말하다 지친 가짜가 잠깐 입을 다물자 세영이 말했다. “나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거기 금발 아가씨. 마리엔 역인 것 같은데 왜 엘프가 아니지?” 그때까지 납죽 엎어져 있던 금발 소녀가 떨면서 고개를 들었다. 세영과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눈을 떨군 소녀가 말했다. “저, 저는 엘프 역할이 아닌데요.” “그럼?” “저, 전 미궁에서 구출된 릴리-로즈 공주입니다. 아니, 공주역입니다. 세계 최고 전사 디안님의 연인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근본 없는 역할이었다. 황당해 하는 세영과 달리 시디발라는 “세계 최고 전사 디안님이래!” 하고 배를 잡고 웃었다.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가짜 카라드’가 뭐라도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차별화 전략입니다. 엘프 마법사 대신 미궁의 공주를 넣는 것으로 저희만의 개성을 추구하기로 한 겁니다. 절대 엘프가 없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그거 제가 제안했어요! 그전에는 구원자와 마도 기사의 로맨스를 밀었는데 인기가 없었거든요. 미궁의 공주와 최고 전사의 로맨스는 누구나 다 좋아하잖아요?” ‘가짜 구원자’가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울컥한 ‘가짜 카라드’가 “네가 연기를 못해서 그렇잖아!” 하고 소리쳤다. 둘은 옥신각신하며 네가 못하니 내가 잘하니 싸워대기 시작했다. 그들이 3년 전의 일을 끄집어내어 싸워대기 시작할 때쯤, 디안과 카라드가 악사들을 앞세워 돌아왔다. 저항의 흔적은 없었다. 태연한 얼굴로 다가온 악사들이 세영의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구원자님을 뵙게 되어 일생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너흰 뭔데?” 제법 오래 기다려서 짜증이 났던 세영이 퉁명스레 물었다. 왼쪽의 악사가 “구원자님이 생각하시는 그곳에 소속된 악사입니다.” 하고 답했다. 즉, 조르디아의 궁정악사란 소리였다. 리먼이 조금 감탄한 듯이 말했다. “나칼이었군요. 어쩐지 보통이 아닌 솜씨라고 생각했습니다.”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악사들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것이 거슬렸던 세영이 “아주 당당하네?” 하고 시비를 걸었다. 움찔한 악사가 품속에서 황금색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는 그것을 공손히 세영에게 바치며 “만약 들키게 되면 이것으로 목숨을 보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고 말했다. 세영은 썩 내키지 않는 손놀림으로 봉투를 뜯었다. 또 무슨 개 짖는 소리로 사람의 혈압을 올릴지 기대가 되었다. 봉투 속에서 예의 바스락거림조차 없는 종이 한 장이 나왔다. 종이 위에는 아마 친필은 아닐 궁정식 서체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친애하는 누님에게 누님이 어디서 이 편지를 읽고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 내가 짐작하는 장소 중 하나겠지. 누님의 행적은 며칠만 있으면 내 귀에 들어오거든. 이 편지를 읽은 것도 얼마 뒤엔 알게 될 거야. 누님은 전혀 신경 쓰지 않겠지만, 마도왕의 사정도 나와 비슷하겠지? 그 가짜들은 누님의 행적이 낱낱이 밝혀지는 것을 염려한 내 선물이야. 누님은 강하지만, 누님의 귀여운 동료들은 허약하잖아. 지금까지 잘 때 습격당하지 않은 건 거의 기적이라고. 누님이 정체를 숨기고 돌아다니는 건 기대도 안 하니까, 나라도 나서야지 뭐. 가짜들이 날뛸수록 누님이 움직이긴 좀 편해질 거야. 굳이 감사할 필요는 없어. 약혼자라면 당연히 해야 할 내조니까. 요즘 마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마도왕이 직접 움직였다는 소문까지 들려. 누님, 이제부터는 정말 조심해야해. 응원군을 보냈으니 조금만 기다려. 참, 누님의 음흉스런 애견에게도 안부를 전해줘. 대륙 전체에 녀석이 누님의 소유라는 것을 알려주다니, 난 정말 좋은 친우인 것 같아. 그럼 이만 총총. 추신 - 파티마가 지은 노래 들었어? 뭐라도 좋으니까 감상을 전해줘. 아니면 계속 귀찮게 굴 것 같아. 사랑스러운 누님의 약혼자가 편지를 다 읽은 세영은 절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읽기 전에는 ‘뭐라고 유언을 남겼는지 어디 한번 볼까?’였는데, 읽고 난 뒤에는 뭔가 설득되어 버렸다. 적에게 행적이 파악되는 건 그녀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였다. 가는 길을 바꾼다고 해도 목적지가 마경이라는 것은 정해져 있었다. 마도왕이 작정을 하고 달려들거나 암살자들을 보내면 아차 하는 사이에 동료들을 잃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세영이라고 해도 24시간 깨어있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이렇게 되면 오히려 칭찬을 해줘야 하나? 완전히 순수한 마음은 아니겠지만, 이쪽을 위해서 움직인 건 분명하니.’ 피식 웃은 세영이 손짓으로 카라드를 불렀다. 저를 가장 먼저 부르는 것에 의아해하던 카라드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에게 편지를 내민 세영이 “읽어봐요.” 하고 말했다. 잠자코 편지를 받아 읽던 카라드가 멈칫했다. 그의 눈이 복잡하게 흔들렸다. “다 읽었어요?” 장난스럽게 묻자 창백한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예.” 하고 답한 사슴이 편지를 돌려주었다. 세영은 그가 언급된 아랫부분을 접은 후에 단검으로 잘라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을 동료들에게 건네주었다. 동료들이 편지를 읽는 동안 세영은 싱글싱글 웃으며 사슴을 쳐다봤다.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사슴의 얼굴이 점점 홍시로 변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듯했다. ‘덫에 걸린 가련한 사슴이로고.’ 심술이라면 심술이었지만, 계속 도망만 다닌 사슴에게는 이것도 봐준 거였다. 이젠 안전거리가 벌어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기로 했으니까. “앗, 알았다. 두 분은 연인이죠?” 눈을 또록또록 굴리던 ‘가짜 구원자’가 손뼉까지 치며 말했다. 그러자 얼굴을 굳힌 카라드가 그녀를 홱 돌아봤다. 노려보는 것도 아니고 쳐다볼 뿐이었지만, 상대가 파랗게 질릴 정도로 위협적인 기세였다. 제자리에 얼어붙은 가짜가 입을 빠끔거렸다. “응?” 눈앞에서 사슴이 사냥개로 돌변하는 것을 본 세영이 의아한 소리를 냈다. 순간 스르륵 표정을 푼 카라드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순하게 눈을 깜빡이는 것을 보니 아까는 뭘 잘못 봤나 싶었다. “와, 그렇게 정색할 정도로 싫어요? 좀 서운하네.” 장난스럽게 묻자 멈칫한 카라드가 “아닙니다.” 하고 대꾸했다. 발개진 귓불만 아니라면 꽤 무뚝뚝하게 들리는 어조였다. 세영이 “진짜 싫은가 보다.” 하고 그를 놀리고 있을 때 동료들이 막 편지 읽는 것을 끝냈다. 리먼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이 내용대로라면 참작의 여지가 있군요.” “결국, 돈 벌려고 한 짓이잖아요. 나쁜 짓인 거 뻔히 알면서도.” 마리엔이 뽀로통하게 말을 받았다. 디안은 그녀와 다른 점에서 문제를 지적했다. “저희로 사칭한 것까진 좋은데, 사람들을 모아서 대체 뭘 할 생각이었습니까?” 가짜들은 분명 질풍 용병단을 통해 모험가를 모으고 있었다. 서로를 마주 본 악사들과 가짜들이 변명하기 시작했다. “저희는 시키는 대로 한 거라 자세히는 모릅니다. 비행선에 태워서 어디론가 데려간다고만.” “사람들을 뽑아서 좋은 일자리를 구해주는 거라고 들었습니다. 이 불경기에 일자리를 준다는데 괜찮은 기회인 것 같아서….” 주절주절 늘어놓는 그들을 보고 팔짱을 낀 시디발라가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할 거야?” 하고 으름장을 놓았다. 모두가 조개처럼 입을 뚝 다물었다. 히죽 웃은 세영이 “목숨이 안 아까우면 계속하든지.” 하고 말했다. “쟨 왜 아무 말도 안 해?” 구석에 껴있는 소인을 가리킨 시디발라가 물었다. 난처한 듯 고개를 든 ‘가짜 리먼’이 “바셋은 벙어리입니다.” 하고 말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인을 쳐다보던 시디발라가 말했다. “응, 그럼 난 용서해줄래.” “시디발라!” “처음부터 별로 화나지도 않았는걸. 게다가 우리에게 도움도 되잖아?” 어깨를 으쓱한 시디발라가 “대신 사람들을 속여서 데려가는 건 그만둬. 납치하는 거잖아.” 하고 덧붙였다. 그렇게 말하자 디안도 더는 뭐라고 할 수가 없는 듯했다. 그때 눈치를 보던 ‘가짜 리먼’이 엉금엉금 기어와 시디발라의 발에 매달렸다. “살려주십시오, 나으리!” “왜 그래? 난 안 죽일 건데?” “그, 그게 아니라… 이렇게 모든 것을 털어놓은 것을 알면, 그 귀족이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결국, 모두 죽게 될 거라고요.” 세영을 돌아본 시디발라가 “진짜?” 하고 입 모양으로 물었다. 세영은 대답 없이 귀찮은 표정만 지었다. 살려준 것도 모자라서 목숨줄까지 붙여줘야 한다니, 제가 왜 그래야 하나 싶었다. “나, 나 때문이야…?” 하지만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떠는 ‘가짜 구원자’를 보자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사실 그녀의 호감을 이용한 것도 사실이기에 조금 양심이 찔렸다. 한숨을 쉰 세영이 입을 열었다. “세 가지 조건이 있다. 받아들인다면 목숨만은 붙여주지.” 고개를 든 가짜들이 그녀의 입만 바라보았다. 세영은 시간 끌지 않고 말을 이었다. “첫째, 가짜일 당장 때려치워. 이건 너희의 생각보다 위험한 일이야. 잘못 걸리면 마도애들 손에 모가지 갈린다.” 생각보다 쉬운 조건이었다. ‘가짜 리먼’은 “예, 당연히 그래야죠. 당연합니다!” 하고 연신 굽실거렸다. 피식 웃은 세영이 “둘째, 지금까지 가짜질 하면서 모은 돈 다 내놔.” 라고 말했다. 가짜들의 얼굴이 쩌적 얼어붙었다. 팔짱을 낀 세영이 덧붙였다. “남 팔고 사기 쳐서 번 돈으로 잘 먹고 잘사는 꼴은 못 봐주겠거든. 뒤져서 동화 한 닢 나올 때마다 열 대씩이다. 어디, 안 걸릴 자신 있으면 숨겨보든가.” ──────────────────────────────────── 비블레스 항구 (5) 가짜들은 모험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동안 모아둔 돈을 동전 한 닢까지 탈탈 털었다. ‘가짜 구원자’가 히잉 콧소리를 내며 세영을 올려다봤다. “진짜 다 뺏어 가실 거예요? 그동안 힘들게 모았는데….” “사기 쳐서 힘들게 모은 돈이겠지.” 피식 웃은 세영이 그녀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소리가 나자 아야 하고 이마를 감싸 쥔 가짜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너무하다고 꽁알거리는 딸을 ‘가짜 리먼’이 황급히 잡아당겨 엎드리게 했다. “이게 다란 말이지?” 세영은 수북하게 쌓인 동전을 바라봤다. 간간이 은화가 섞여 있지만, 거의 동화였다. 고개를 조아린 가짜들이 자신들이 가진 전부라고 답했다. 피식 웃은 세영이 리먼을 돌아봤다. “근처에 기부할 곳이 있을까요?” “작은 마을이라 신전은 없지만, 기도소가 있을 겁니다. 거기 맡기면서 과부와 고아들을 돌보는데 써달라고 하면 되겠군요.” 리먼의 대답에 고개를 끄떡인 세영이 “그럼 저 아가씨 이름으로 기부해주세요. 라나라고 했었지?” 라고 말했다. 고개를 든 ‘가짜 구원자’가 다시 히잉 콧소리를 냈다. 힘들게 번 돈을 몽땅 기부해버린다니,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가짜들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들이 했던 짓을 생각하면 목숨이라도 건진 것이 다행이었다. 사칭죄는 때로 살인죄보다 무거웠다. 높은 사람을 사칭하다 붙잡히면 사지가 찢기기도 했다. 돈을 뺏기는 건 그것에 비하면 처벌도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구원자가 갑자기 돈을 내놓으라고 할 줄은 몰랐지만. ‘세 번째 조건만 쉬운 거라면….’ ‘내가 어쩌다 돈에 눈이 멀어서. 두 번 다시 위험한 짓은 안 해야지.’ 후회와 안도로 범벅된 얼굴을 한 이들이 마지막 조건을 기다렸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던 세영이 ‘가짜 리먼’의 무릎을 툭 찼다. 흠칫한 남자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세 번째로, 내 심부름을 좀 해야겠다. 별건 아니고 물건이랑 말 한마디만 전하면 돼.” “…예에.” 공손히 대답하는 ‘가짜 리먼’의 얼굴에 불안이 서렸다. 높으신 분의 심부름으로 편지를 전했더니 ‘이 편지를 전한 자를 죽이라’고 적혀있었다는 괴담이 떠올랐다. 구원자가 그러지는 않을 거라고 믿을 뿐이었다. 세영은 인벤을 열어 검 한 자루를 꺼냈다. 조르디아에서 만들었던 스페이드 소드였다. 디안에게 주려 만든 것이지만, 남의 손을 탄 검이라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 결국, 라오 조드가 주인이었던 모양이다. “이 검을 주면서 ‘상이다.’ 라고 말하면 된다.” 세영은 ‘가짜 리먼’의 손에 검을 건네주었다. 두 손으로 공손하게 검을 받아든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누구에게 전해야 할지….” “조르디아의 군주, 라오 조드에게 가면 돼.” 덤덤한 대답에 ‘가짜 리먼’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조르디아의 군주라니. 비천한 예인은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신분이었다. 이런 식으로 죽이려는 건가 싶어 온몸이 덜덜 떨렸다. “저, 저 같은 놈이 어떻게 군주를 뵐 수가 있겠습니까.” “내 심부름이라고 말하면 맨발로 뛰쳐나올 테니 걱정하지 마. 적당히 던져주고 심부름 값으로 한 재산 뜯어내라. 군주가 얼마나 통이 큰지 내가 궁금해하더라고 전하면 섭섭하게 대하진 않을 거다.” 사기꾼 대장 같은 놈이니, 좀 뜯겨도 된다고 생각한 세영이 팔짱을 꼈다. 그녀는 검을 힐끔거리는 ‘가짜 디안’을 향해 경고하듯 말했다. “혹시라도 꿀꺽할 생각은 하지 마라. 그놈은 좀 변태 같은 구석이 있어서, 자기 검을 뺏긴 것을 알면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갈 거거든.” 세영은 부러진 검을 안고 울부짖던 라오 조드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가짜 리먼’은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무사히 전달하겠다고 다짐했다. 피식 웃은 세영이 작은 주머니에 금화 몇 개를 넣어서 던졌다. “이건 교통비. 제일 빠른 비행선을 타고 가라.” “가, 감사합니다.”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가짜 리먼’이 주머니를 쥐고 머리를 조아렸다. 세영은 그의 옆에서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가짜 구원자’를 힐끗 보며 말했다. “심부름 값을 받으면 동화 한 닢까지 똑같이 나눠 가져. 괜히 욕심부리다가 칼침 맞는다. 딸을 생각해서라도 더 이상 위험한 짓은 하지 마.” 그녀는 감격하여 절을 하는 가짜들에게 눈을 돌려 무릎 꿇은 악사들을 쳐다봤다. “저들을 조르디아까지 데려가라. 그걸로 용서해주지.” “감사합니다.” 안도한 표정을 지은 악사들이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세영이 짝짝 박수를 쳤다. “이제 해산. 15분 안에 짐을 챙겨서 이 마을을 뜰 것. 그 뒤에도 남아있는 놈들은 나한테 걷어차일 각오를 하고.” 엎드려있던 자들이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도 15분이라는 시간제한에 이의를 표하지 않았다. 우르르 뛰쳐나가서 자신의 짐을 챙기느라 바빴다. 가끔 “내 빗! 빗이 없어졌어!” 라던가 “빗 챙길 시간에 옷을 챙겨, 바보야!”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우리도 그만 가죠.” 기지개를 켠 세영이 동료들에게 말했다. 고개를 갸웃한 시디발라가 “이제 어디로 가?” 하고 물었다. 세영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얼굴로 답했다. “숙소를 정해야지. 겸사겸사 정보도 좀 캐고.” “응?” 곧장 여관으로 향한 일행은 ‘질풍 용병단’을 만났다. 용병들은 귀여운 소녀가 아니었고, 가짜들처럼 눈치가 좋지도 않았다. 구원자를 호위한다는 생각에 잔뜩 기고만장해져 있기까지 했다. 세영을 우습게 보고 시비를 걸던 놈들은 곧 여관 밖에 널린 빨래 신세가 되었다. 세영은 용병단장을 물통 속에 넣었다 뺐다 하며 정보를 털었다. 용병들은 국적과 상관없이 고용되었기에 마도에 대한 정보도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었다. 최신 정보는 아니지만, 항구에 숨어들어 가는 방법은 꽤 쓸 만할 것 같았다. 세영은 몹시 너그러운 마음으로 단장을 집 밖에 널어 말려주었다. “방법을 알았으니 이제 변장만 생각하면 되겠네요.” 용병들을 모조리 쫓아내고 여관을 차지한 세영이 말했다. 넝마가 된 용병들을 보며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주먹이 곱다’는 진리를 깨달은 동료들이 얌전히 고개를 끄떡였다. “전처럼 꾸미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으니까. 시디발라. 여장해도 괜찮겠어?” “어? 뭐?” 가만히 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시디발라가 화들짝 놀랐다. 세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구성원은 고정되어 있으니까, 성별을 바꾸는 게 제일 낫잖아. 다른 사람들은 너무 크거나 어깨가 넓거나 답이 없는데, 너라면 어떻게든 속일 수 있을 것 같아서.” “…….” “일단 염색하고, 머리스타일도 바꿔보죠. 디안은 검은 머리로 하고, 리먼은 붉은색 어때요?” 어영부영하는 사이 여장으로 결정된 시디발라가 울상을 지었다. 사슴을 바라본 세영이 고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일행 중 제일 튀는 것은 이 남자였다. 어딜 가도 눈길을 끄는 외모라 어떻게 변장시켜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녀가 고민하는 것을 느낀 사슴이 단호하게 말했다. “머리를 자르겠습니다.” “어, 자르게요? 좀 아까운데.” 슬그머니 손을 뻗은 세영이 사슴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걸리는 것 하나 없이 손가락 사이로 사르르 빠져나가는 감촉이 비단 같았다. 타고난 것이 아니라면 에센스를 통으로 들이부어도 만들 수 없는 머릿결이었다. “역시 아깝다.” 아쉬워하는 세영을 보고 멈칫한 카라드가 “그럼 색을 바꾸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머리의 위쪽에서부터 마치 물이 빠지듯이 하얀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흰 사슴이 된 그를 보고 동료들이 우와아 소리를 냈다. ‘오, 자동염색인가. 신기하네.’ 세영은 하얗게 변한 사슴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염색한 것 같은데 감촉은 전과 똑같았다. 마치 마법 같다고 생각하던 그녀는 그냥 그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법은 꽤 편하네요. 그런데 갑자기 풀리진 않아요?” “예, 기절할 정도로 충격을 입지 않는다면 풀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답하는 카라드의 눈동자는 선명한 파란색이었다. 전체적으로 색소를 옅게 만드는 마법인 것 같았다. 속눈썹은 또 하얘서 눈을 깜빡일 때마다 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렸다. ‘낮에 나가면 눈 아프겠다.’ 검은 사슴도 단아하지만, 흰 사슴은 화려한 매력이 있었다. 물론 전보다 배로 눈에 띈다는 점에서 변장하는 의미가 없었다. 그때 흰 사슴을 유심히 쳐다보던 리먼이 말했다. “포교하는 신관으로 꾸미면 어떻겠습니까.” “신관?” 세영은 다시 한 번 사슴을 쳐다봤다. 확실히 성직에 종사할 것 같은 성스러운 느낌이었다. 펠릭스의 성표를 꺼낸 리먼이 그것을 카라드의 목에 걸어주었다.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떡였다. “훨씬 그럴듯하군요. 아니, 완벽합니다.” “마도에서는 용신 말고 다른 신은 못 믿는다면서요. 그런데 포교하는 신관이 있어요?” “다른 종교는 금지지만, 몰래 믿는 사람들은 있으니까요. 포교를 위해 돌아다니는 척하면 다들 그렇구나 하고 눈감아 줄 겁니다.” 어딘지 수상하다고 생각하다가도, 신관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착각해 버릴 거란 이야기였다. 이런 쪽으로 잘 모르는 세영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시선을 돌리자, 사슴이 굳은 얼굴로 성표를 만지작대고 있었다. 아차 한 리먼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분께 성표를 거는 무례를 저질렀군요.” “아닙니다. 제 신은 이미 죽었으니, 종교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씁쓸한 미소를 지은 사슴이 성표를 벗어 그에게 돌려주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리먼이 더욱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맞다, 용의 신전은 사슴의 양엄마를 섬기는 거였지.’ 제 손으로 어머니를 죽였다고 했으니 신자가 신을 죽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에레슈키갈의 동의를 얻긴 했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편할 리는 없었다. 그 사이 표정을 정리한 사슴이 말했다. “좋은 의견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교단의 성기사로 변장하고 리먼은 대지의 여신을, 시디발라는 자애의 여신을 섬기는 여사제로 꾸미는 게 좋겠군요.” 대지의 여신은 별다른 성표 없이, 세 갈래로 갈라진 나뭇가지를 신표로 삼는다. 성표 없이 성직자로 위장하기에 최적인 종교였다. 세영은 둘이서 세부사항을 의논하게 내버려두고 마리엔을 돌아봤다. “마리엔은 귀와 얼굴형 때문에 엘프라는 걸 감추기 좀 힘들 거예요. 이전과 같은 방법을 쓰자니 장소가 좀 안 맞고. 그래서 말인데요, 엘프 말고 다른 종족으로 변장하면 어떨까요?” “다른 종족이요?” 마리엔이 생각도 못 했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고개를 끄떡인 세영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마리엔이 희귀한 이종족으로 변장하고, 디안과 제가 밀수업자로 꾸미면 좋을 것 같은데요.” “앗, 정말 멋진 생각인 것 같아요.” 마리엔은 손뼉까지 치며 기뻐했다. 흠흠 헛기침을 한 세영이 “저한테 입으면 인어처럼 보이는 옷이 있거든요.” 하고 운을 떼며 슬쩍 그녀의 눈치를 봤다. 마리엔이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인어들은 무척 아름답다던데, 제가 입어도 괜찮을까요?” “걱정하지 마요. 마리엔보다 예쁜 인어는 없을 테니까. 그것보다 문제는….” 멈칫한 세영이 “그 옷이 물법사에겐 정말 최고거든요. 스킬 등급도 막 올려주고, 무엇보다 마법이 세져요. 마나량도 굉장히 늘려주고요.” 하고 갑자기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녀의 감언이설에 홀딱 넘어간 마리엔은 ‘그런 멋진 옷이 있다니!’ 하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문제가 뭔데?” 여장해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던 시디발라가 뚱하게 물었다. 뺨을 긁적인 세영이 “어, 좀 쪽팔린 달까.” 하고 중얼거렸다. 리먼과 이야기 중이던 카라드가 흠칫했다. 그는 흔들리는 눈으로 세영을 쳐다봤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마리엔은 단호하게 말했다. “무슨 문제라도 상관없어요.” “괴로울지도 모르는데?” “아무리 괴로워도 참을 수 있어요.” 다짐을 받고 씨익 웃은 세영이 “자, 그럼 옷 갈아입으러 갑시다.” 하고 그녀를 빈방으로 끌고 갔다. 잠시 후 방 안에서 “꺄아악!”이라는 비명이 들렸다. 동료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 마리엔?” 자리에서 일어난 디안이 방문을 노크했다. 하지만 “오지 마!”와 “들어오지 마요!” 하는 연타를 받고는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 기다리니 “말도 안 돼!” 라던가 “이건 꿈이야!” 하고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디안은 안절부절못하며 방문 앞을 서성거렸다. 잠시 후 끼이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세영이 나왔다. 그녀의 등 뒤에 숨어있던 마리엔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뾰족한 귀가 반투명한 아가미로 변해있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것이 꼭 보석 같았다. “괜찮아요. 예쁘다니까.” 세영이 달래자 마리엔은 겨우 용기를 내어 한걸음 걸어 나왔다. 그녀가 입은 것은 원피스이되 원피스가 아닌 옷이었다. 팔과 어깨는 물론 치마 앞쪽이 무릎 위까지 훤히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사실 가리비처럼 생긴 가슴 장식을 빼면 옷 전체가 반투명했다. 하지만 비늘 같은 레이스와 뒤쪽으로 살랑거리며 늘어진 치맛자락이 이것이 바로 인어라고 주장하는 듯했다. 시디발라가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우와, 진짜 인어 같아!” “제 생각보다 훨씬 더 정교하군요. 인어족이라고 해도 믿겠습니다.” 이어서 리먼도 고개를 끄떡였다. 두 사람의 긍정적인 반응에 마리엔이 안심한 듯 웃었다. 하지만 하얗게 드러난 그녀의 무릎을 본 디안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는 더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너 대체 그 꼴이…!” 카라드의 손이 디안의 입을 틀어막았다. 전에 없이 매서운 눈을 한 그는 “무례한 말은 안 됩니다.” 하고 경고했다. 하지만 이미 때가 늦어서 새빨개진 마리엔이 으아앙 소리를 내며 방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고마워요?” 하고 말하고 문을 쾅 닫았다. “넌 왜 화를 내고 그래?” 시디발라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디안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제야 카라드의 손에서 풀려난 디안이 “저렇게 야한 옷을 입고 어딜 가겠다는 거야!” 하고 화를 냈다. 시디발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인어는 원래 벗고 다니는 거 아니야? 저 정도면 괜찮잖아.” “벗…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저런 꼴로 돌아다니는 건 절대 안 된다고!”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베개가 휙 날아와 그를 퍽 때렸다. 눈물을 조롱조롱 매단 마리엔이 “바보 멍청이!” 하고 쏘아붙이고는 문을 쾅 닫았다. 디안은 황망한 표정으로 닫힌 문을 바라봤다. 잠시 후에 방에서 나온 세영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디안을 향해 양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내가 생각을 잘못했어요. 당연히 기분 나빴을 거라고 생각하고, 정말 미안해요. 그런데 차라리 나한테 화를 내지 그랬어요. 마리엔은 내가 입혀서 억지로 입은 잘못밖에 없는데, 그렇게 화를 내면 가엾잖아요.” “…….” 디안은 말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멋쩍게 뺨을 긁적인 세영이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마리엔과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하고 다시 한 번 부탁했다. 한숨을 쉰 디안이 “마리엔에게 사과하겠습니다.” 하고 답했다. 그는 동료들의 응원을 받으며 닫힌 문을 노크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안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점점 커져서 밖으로 새어나올 정도가 되었다. 급하게 안으로 들어간 동료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화가 난 마리엔이 “난 입을 거야!” 하고 소리쳤고 디안이 “다른 거 하면 되잖아!” 하고 맞받았다. 절레절레 머리를 흔든 세영이 디안을 강제로 끌어냈다. 디안이 억울한 듯이 말했다. “아니, 다른 아인종도 많잖아요. 왜 인어가 좋다고 고집을 부리는 겁니까!” ‘딱히 인어가 좋은 게 아닐 텐데.’ 하고 속으로 생각한 세영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쩌다가 커플 사이에 끼어서 이렇게 되었는지, 후회가 막심했다. 세영은 마리엔에 대한 그의 불평을 모두 들은 후 등을 두드려주었다. “일단 머리 좀 식히고 나중에 이야기해요. 마리엔은 제가 잘 달래볼게요.” 맥없이 고개를 끄떡인 디안이 마른세수를 했다. 다시 안으로 들어간 세영은 리먼에게 디안을 맡겼다. 기도소에 가는 김에 데리고 가달라는 말에 시디발라가 자신도 가겠다며 따라나섰다. 대충의 정리가 끝나자 세영은 방으로 향했다. 울고 있거나 화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마리엔은, 뜻밖에 평온한 표정이었다. 오히려 그녀의 근처에 앉아있는 카라드가 더 퀭한 것 같았다. 세영이 “괜찮아요?” 라고 묻자 마리엔은 생긋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카라드 씨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셔서, 기분이 많이 풀렸어요.” “재미있는 이야기요?” 세영이 궁금한 듯 묻자 멈칫한 카라드가 “제 경험담을 말씀드렸습니다.” 하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머쓱한 기분이 된 세영이 뺨을 긁적였다. 눈치를 보던 사슴이 마실 것을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사슴이 방을 나서자 애써 밝은 표정을 짓고 있던 마리엔이 다시 시무룩해졌다. 수치스러운 이야기까지 하며 달래주는 사람 때문에 참고 있었을 뿐이지, 기분이 엉망일 것이 분명했다. 세영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내버려두었다. 팔걸이 장식을 콕콕 찌르던 마리엔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세영님, 혹시… 원래 있던 곳에 연인이 있으셨나요?” ──────────────────────────────────── 비블레스 항구 (6) 세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항상 자신만만한 그녀에게도 죽 쑤는 분야가 몇 개 있었는데, 연애도 그중 하나였다. 남들은 잘만 만나고 잘만 헤어져도 세영에겐 그게 좀 힘들었다. “연인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고, 잠깐 사귀었던 사람은 있는데요.” 얼마 못 가 번번이 깨지는 것도 연애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허허 웃는 그녀를 보고 고개를 갸웃한 마리엔이 되물었다. “네? 사귀어요?” “어, 그러니까 남자친구요?” 그러자 마리엔은 더욱 혼란스러워했다. ‘남자친구인데 왜 연인이 아니지?’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남자친구가 연인인 사람도 있겠지만, 세영에게는 뭔가의 번데기에 더 가까웠다. 그녀는 ‘썸’을 타는 일과 ‘번호’를 주고받고 사귀는 과정에 대해 대충 설명했다. “호감이 있는 상태라고 해야 하나? 첫눈에 반했다는 일도 있겠지만, 제 주변엔 좀 드물어서요. 그러다가 좋아지면 계속 연락하고 사귀는 거고, 안 맞으면 깨지는 거고. 보통은 그렇죠.” “정말 다들 그러나요?” 마리엔은 별나라 이야기라도 듣는 것처럼 신기해했다. 세영은 ‘여긴 좀 다른가?’ 하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떡였다. “제가 있던 곳에선 연애도 스펙이었거든요. 연애를 안 하는 사람은 주변에서 좀 모자란 취급을 당해요. 그래서 서로 열렬히 좋아하지 않아도 대충 소개를 받거나 해서 만나죠.” 잠깐이라도 연애를 못 하면 누군가를 소개해 달라고 주변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었다. 딱히 상대가 좋다기보다는 연애하는 상태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검사나 의사와 사귀어 봤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 연애는 자신의 가치를 측정하는 도구였다. 세영의 이야기를 듣던 마리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그… 사귀신 분도 대충이었나요?” “어, 사실 소개도 받고 고백도 받아봤는데. 뭐, 어느 쪽이든 제 성격을 감당 못 하더라고요. 결국, 얼마 못 가 깨졌어요.” 세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의 연애패턴은 거의 정해져 있었다. 처음엔 좋다가 일단 사귀기 시작하면 지옥이었다. 별것 아닌 말에도 자존심 상해하고, 넌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몰아붙이고, 속았다는 말을 하면서 훌쩍 떠나버리는 것이다. “계속 그렇게 되니 반쯤 포기랄까. 연애가 적성에 안 맞는지도 모르죠.” 세영도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친구들은 그녀가 가족이 없고 학벌이 낮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미묘하게 태도가 변했다. 동정하는 쪽은 그나마 다행이었고, 무시하거나 쉽게 여기는 쪽으로 바뀌었다. 남들은 예의를 지키며 하지 않는 말도 남친이라는 이유로 함부로 내뱉었다. 그러면 좋았던 마음도 차갑게 식어버리곤 했다. “열심히 참았던 적도 있는데, 결국 잘 안됐거든요. 그래서 안 되는 일에 집착하지 말자고 결심했죠.” 남자와 사귀는 것보다 게임이 더 재미있고 즐거웠다. 게임에선 아무리 복잡한 문제라도 해결법이 있었다. 답이 없는 연애에 골머리를 썩이는 것보단 백번 나았다. 혼자서 고개를 끄떡끄떡 하는 세영을 보고 마리엔이 조금 화가 난 듯이 말했다. “그건 상대가 나빴던 거잖아요. 세영님을 진심으로 좋아했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아뇨, 상대를 괴롭게 한 제 잘못이 더 크죠. 어차피 서로 좋으려고 사귀는 거잖아요. 만나서 괴롭다면 계속 사귈 이유도 없고, 잘 끝났다고 생각해요.” 세영은 단호하게 말했다.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뜬 마리엔이 그녀를 쳐다봤다. 너무 진지하게 말한 것 같아 머쓱해진 세영이 헛기침을 했다. 마리엔이 흐릿하게 웃었다. “세영님의 세계는, 정말 자유로운 것 같아서 부러워요.” “읭?” “이쪽에선 ‘사귀면’ 보통 결혼까지 가거든요. 결혼하지 않으면 여자 쪽이 불리한 상황이라,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마리엔은 시무룩해 보였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던 세영은 다시 뺨을 긁적거렸다. 사귀기만 하면 결혼을 해야 한다니, 상대가 똥차나 병신이면 어쩌란 말인가. 이쪽의 연애는 남녀칠세부동석까진 아니라도 꽤 보수적인 것 같았다. ‘…응? 뭐지. 방금 뭔가가 마음에 걸렸는데?’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기분이었지만, 선뜻 떠오르지는 않았다. 고개를 갸웃한 세영은 마리엔의 손등을 다독이며 말했다. “정말 미안해요. 마리엔. 제가 연애 고수면 뭔가 도움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연애치라서 상황만 꼬이게 하고. 저 때문에 싸운 거나 마찬가지라 두 사람을 볼 면목이 없네요.” “아니에요, 전 그것 때문에 여쭤본 게 아니라….”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힌 마리엔이 손을 꼼지락거렸다. 말하기 민망한지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카라드 씨와 왜 사귀지 않으시는지 궁금했어요. 분명 세영님도 마음이 있으신 것 같은데, 아직 별다른 진전이 없는 것 같아서요.” “…컥!” 놀라서 사레가 들린 세영이 쿨럭쿨럭 기침했다. 마리엔의 얼굴이 더욱 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면목없다는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세영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말했다. “어, 뭐랄까. 전 마리엔이 카라드를 싫어하는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갑자기 왜 둘이 안 사귀냐고 물어볼 줄은….” “싫어하진 않아요. 좋은 분이라고 생각하고요. 무엇보다 세영님을 무척 좋아하니까요.” 단호하게 말한 마리엔이 “알고 계신 거 맞죠?” 하고 조금 불안한 듯 물었다. 세영은 멋쩍게 뺨을 긁적이며 고개를 끄떡였다. 마리엔이 다행이라는 것처럼 웃었다. “처음엔 모른 척하시려는 것 같았는데, 그다음엔 또 마음을 바꾸신 것 같아서요. 그만큼 카라드 씨가 좋은 거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어, 음. 티가 많이 났나 보네요.” 세영은 민망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제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동료들이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니. 태연한 척 자리에 앉아있었지만, 마음 같아선 괴성을 지르며 벽을 걷어차고 싶었다. “사실은 세영님이 누군가와 사귀고 결혼하면 이곳에 남아주실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두 분이 사귀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죄송해요.” 마리엔이 풀 죽은 얼굴로 고백했다. 이번에야말로 할 말을 잃은 세영이 허허 웃었다. 어쩐지 동료들 모두 사슴이랑 붙여주려 애를 쓴다 싶더니, 나름대로 귀여운 속셈이 있었던 모양이다. “마리엔, 제가 여기 남지 않는다고 해서 섭섭했어요?” 진지하게 묻자 녹색 눈동자에 눈물이 잔뜩 고였다. 잠깐 주저하던 마리엔이 “세영님이 제가 볼 수 있는 곳에 계셨으면 좋겠어요. 함께 있지 못해도, 아주 멀리서라도 좋으니까.” 하고 중얼거렸다. 세영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저는 그냥 이곳이 제 세계가 아니라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저희가… 세영님께 소중하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니죠?” 세영의 팔을 꼭 붙잡은 마리엔이 물었다. 세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말하는 건데 전 사실 가족이 없어요. 친구는 몇 명 있지만, 지인에 더 가깝고요. 그래서 마리엔과 동료들이 제겐 가족만큼이나 소중해요.” 의식주를 함께 하며 생사를 맡긴 동료들이 남보다 못한 가족보다 소중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마리엔은 그것만으로도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몇 번 눈을 깜빡인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왜 거기로 돌아가려고 하시는 거예요?” “어, 그건 정말 별것 아닌데….” 세영이 조금 쓰게 웃었다. 이렇게 진지하게 쳐다보고 있으니 거짓말이나 농담으로 넘겨버릴 수도 없었다. 그녀는 이번 한 번만 솔직해지기로 했다. “모험은 언젠가 끝이 나요. 그럼 우리 모두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죠. 지금은 아니라도 마리엔 역시 가정을 꾸릴 거고, 아이를 낳고 기르겠죠. 그때가 되면 오히려 제가 귀찮아질걸요?” “아니에요! 귀찮아지다니요. 절대 그렇지 않을 거예요!” 마리엔이 펄쩍 뛰듯이 말했다. 세영은 달래듯이 그녀의 손등을 다독였다. 생활에 치이면 친부모라도 소홀하게 되는 것이 사람이었다. 그건 그 사람이 나빠서가 아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동료들 역시 지금이야 모험을 하느라 한 몸처럼 붙어 지내지만, 모험이 끝나면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할 것이다. “미안해요. 그런데 저는 누군가를 이유로 이곳에 남고 싶지 않아요.”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곳. 그것이 세영이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이유였다. 이곳에 있으면 그녀는 분명 동료들에게 심정적으로 의지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세영은 누군가가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혼자라도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저는, 저는 정말 세영님께 안 그럴 거예요.” “아이고, 제가 괜한 말을 했나 보네요. 울지 마요. 응?” 마리엔은 정말 서럽게 울었다. 디안과 싸웠을 때보다 지금이 더 많이 우는 것 같았다.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그녀를 달래서 재운 세영이 조용히 방을 나섰다.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줘버린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응?” 방문을 닫고 돌아서자 저쪽 창문가에 멍하게 넋을 놓고 서 있는 사슴이 보였다. 무겁지도 않은지 쟁반까지 들고 서서 하염없이 바깥을 보고 있었다. 호기심을 느낀 세영이 다가가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창밖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세영이 물었다. “여기서 뭐 해요?” 쟁반 위의 컵들이 달칵 소리를 냈다. 놀란 눈으로 세영을 돌아본 사슴이 쟁반을 창문턱에 내려놓았다. 그 사이에 표정을 정리한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진지한 이야기 중이신 것 같아서, 잠깐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음, 그냥 들어와도 되는데.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세영은 자연스럽게 쟁반 위의 컵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따뜻하게 먹는 차 같은데 식어서 좀 맹맹했다. 아차 한 사슴이 새것으로 가져다주겠다며 컵을 가져가려 했다. 세영은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왠지 표정이 좀 안 좋은데. 뭔가 들었나?’ 세영은 마리엔과 나눴던 대화를 되짚어 보았다. 문제 될 부분은 없는 것 같지만, 사슴이 갑자기 넋 나간 부랑자가 된 까닭이 있을 터였다. 붙잡고 추궁해볼까 생각하던 세영이 멈칫했다. ‘아, 젠장. 뭐가 계속 마음에 걸리나 했더니….’ 사슴의 청순하기 짝이 없는 목에 <건드리지 마세요, 건드리면 결혼해야 함> 하는 보이지 않는 팻말이 걸려있는 것 같았다. 세영은 지긋이 결혼 땅땅! 하고 못 박힌 글자를 노려보았다. ‘아이스크림 가게에도 맛보기 스푼이 있거늘, 상도덕도 없는 사회 같으니라고.’ 청순하고 귀엽지만, 저것은 300년 묵은 사슴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 시대 남자나 다름없다는 소리였다. 왠지 들이댈 때마다 조신하게 사부작거린다 했다. 속으로 혀를 찬 세영이 다시 컵으로 관심을 돌렸다. 보기 좋고 맛도 좋아도 먹을 수 없다면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쩐지 여기 와선 연애운이 좋더라니. 사슴이 코앞에 있는데 왜 먹질 못하니.’ 식은 차만 죽어라 들이켜는 세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사슴이 고개를 숙였다. 꼼지락거리는 폼이 당장 뭔가 고백할 것 같은 포즈였다. 위기감을 느낀 세영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어, 저기.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 좀 했으면 좋겠는데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보던 사슴이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미인의 슬픈 얼굴이란 대단히 위협적이라 당장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빌어야 할 것 같았다. 세영은 그동안의 연애실패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생각했다. ‘사실 못생긴 애들이랑 사귀었던 게 문제가 아니었을까. 미인이랑 사귀었다면 간도 쓸개도 다 빼주면서 잘 지냈을지도 몰라.’ 피식 웃은 세영이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팻말을 의식해서 소맷자락만 살짝 잡았지만, 사슴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끌려왔다. 어디로 갈지 고민하던 세영은 사슴이 묵는 방으로 향했다. 문을 닫지 않고 활짝 열어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실 말씀이라는 게….” 사슴이 교수대에 선 죄수 같은 표정으로 재촉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매우 비관적인 얼굴이었다. ‘아니, 그런 거 아닌데….’ 하고 멋쩍은 표정을 지은 세영이 말했다. “나스쿤 말이에요.” “…예?” “제가 탑에 가서 나스쿤을 만났거든요. 그건 알고 있죠?” 만난 것뿐만 아니라 자살을 방조하기도 했다. 뜬금없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헤매던 사슴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것으로는 모자라다 생각했는지 “시디발라에게 들었습니다.” 하고 덧붙였다. 설명이 길어지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한 세영이 인벤에서 나스쿤의 리라를 꺼냈다. “그때 나스쿤이 저한테 이걸 맡겼거든요. 꼬마에게 주면서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했어요.” “…….” 사슴은 아무 말 없이 세영의 손에 들린 리라를 바라보았다. 세영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진작 전해줬어야 했는데, 꼬마가 당신인지 몰라서요. 알게 된 뒤에는… 적당한 기회가 없었고.” 되도록 혼자 있을 수 있을 때 전해주고 싶었다. 그녀가 아는 사슴이라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혼자 슬퍼하고 마음을 추스르려고 할 테니까. 그래서 혼자 묵는 방이 생긴 지금이 세영이 생각한 적당한 때였다. ‘왠지 사슴의 입을 틀어막는 것에도 사용된 것 같지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무시하자.’ 잠시 머뭇거리던 사슴이 손을 뻗었다. 그가 리라를 받아드는 순간, 단단하던 악기가 갑자기 은빛의 재가 되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재마저도 바닥에 닿지 못하고 스르륵 없어졌다. 세영이 막아보려 했을 때는 이미 흔적조차 사라진 후였다. ‘뭐, 뭐지? 보관을 잘못했나?’ 당황해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세영과 달리 사슴은 멍하게 제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것 같은 그가 물었다. “나스쿤이, 뭔가 다른 말을 하진 않았습니까?” “…전 꼬마를 모르는데 뭘 보고 이걸 맡기냐고 했더니, 너희는 반드시 만나게 될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던데요.” 그때는 노망이 들어서 헛소리를 하나 싶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제법 용한 말이었다. 세영의 말을 듣고 웃으려고 하던 사슴의 눈에서 또르륵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세영은 으아악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성의 없이 눈물을 닦아낸 사슴이 말했다. “나스쿤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나 봅니다.” “…악기가 사라질 줄 알고 있었다고요?” 깜짝 선물치고는 무척 센스가 없었다. 뭐가 웃긴지 어깨를 들썩인 사슴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전해주려고 한 것은, 악기에 담긴 그의 생명력이었습니다. 제가 살고 싶어 할 거라고 예상했던 모양입니다.” “아, 맞다.” 깜빡 잊고 있었지만, 나스쿤은 네크로맨서였다. 자신의 생명력을 뽑아서 남에게 전하는 것도 가능하단 소리였다. 신기해하는 세영과 달리 어딘지 착잡한 표정을 지은 사슴이 말했다. “나스쿤을 만났을 때, 그가 너는 곧 살고 싶어 할 거라고 말했다면 믿지 않았을 겁니다. 그때의 저는 끝을 기다리고 있었고….” 과거를 회상하던 사슴이 목이 메는지 말을 멈췄다. 세영은 괴로워하는 그가 가여워서 팔을 다독여 주려다가 말았다. 섣불리 손을 대기에는 팻말의 존재가 너무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왜 제게 경고해주지 않았던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에겐 분명 보였을 텐데도….” 고개를 숙인 사슴이 뚝뚝 눈물을 흘렸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세영은 일단 달래주자 생각하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사슴이 먼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는 서글프고, 화가 나고,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께 연인이 있는 줄 미리 알았더라면…. 결국, 이렇게 됐을지라도 지금처럼 무도한 생각까진 하지 않았을 겁니다.” ──────────────────────────────────── 비블레스 항구 (7) “…엥?” 이 사슴이 왜 개 풀 뜯는 소리를 하는 걸까. 세영은 어이없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것을 비난이라 여겼는지 사슴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도, 제가 이렇게 비열한지 몰랐습니다. 다른 사람의 연인을 탐내고, 어떻게든 빼앗고 싶다고 생각할 줄은 몰랐단 말입니다.” “아니, 저기. 잠깐만요.” 세영은 사슴의 폭주를 막으려고 애썼다. 여기서 끝내면 자다가 이불을 걷어차는 흑역사지만, 더 지껄이게 놔뒀다간 수치심을 못 이겨 자살할 것 같았다. 하지만 사슴은 세영의 배려를 전혀 알아주지 않았다. 제 입을 틀어막으려는 그녀를 붙잡으며 필사적으로 물었다. “정말 저 혼자만의 감정이었던 겁니까? 제가, 멋대로 오해해서….” “아, 좀! 조용히 해보라고요!” 참다못한 세영이 버럭 소리쳤다. 강제로 입을 다물게 된 사슴은 그녀의 양팔을 잡고 구속했다. 이대로 놓아주지 않겠다는 저항이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세영이 말했다. “뭐 때문에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저 연인 같은 거 없거든요?” 그러자 사슴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세영의 말을 믿고 싶은 마음과 의혹이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울컥한 세영이 소리쳤다. “와 씨, 진짜 없다고요!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제가 남친이 있으면 막 뽀뽀하고 그랬겠어요?” 양팔을 꽉 붙잡고 있던 손에서 살짝 힘이 빠졌다. 이제야 들어줄 마음이 생긴 모양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세영이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마리엔한테도 남친 같은 거 없다고 말했다고요. 대체 뭘 어떻게 들은 거예요?” 말해보라고 하자 잠깐 머뭇거리던 사슴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닙니다.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남자친구라고 하신 것만….” 차를 갖고 오다가 몇 마디 주워들은 것을 제대로 오해했다는 이야기였다. 뭐라고 할 말이 없었던 세영이 혀를 찼다. ‘어떻게 딱 거기만 듣냐. 진짜 그것도 재주다.’ 머리를 긁적이려던 세영은 여전히 팔을 놓아주지 않는 사슴 때문에 한숨을 쉬었다. 혀를 차고 한숨을 쉴 때마다 움찔거리는 모습을 보니 더 심란해졌다. “이렇게 오해하느니 그냥 엿듣는 게 낫죠. 그냥 끝까지 듣지 그랬어요. 그럼 오해했다는 걸 바로 알았을 텐데.” 세영의 투덜거림에 놀란 표정을 지은 사슴이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세영은 그의 멱살을 틀어쥐고 “왜 안 돼! 어? 니가 지금 예의 따질 때야?” 하고 윽박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눈물로 젖은 속눈썹을 깜빡이는 사슴을 보자 분노가 저절로 가라앉았다. “진짜 연인 같은 거 없거든요. 남자친구라고 한 건, 예전에 잠깐 사귀었던 사람이 있었다는 말이었다고요.” 세영의 설명에 사슴이 다시 쇼크를 받은 얼굴을 했다. 사실 남자친구들이지만, 하나였다고 해도 충격받는데 여럿이었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세영은 달래듯이 덧붙였다. “여기랑 거기는 좀 달라요. 결혼 상대가 아니라 그냥, 호감이 좀 있는 이성이랑 만나는 거란 말이에요. 서로 말 주고받고 같이 여기저기 놀러 다니고 그런 정도거든요.” 사실 그것뿐만은 아니지만, 사실대로 말했다간 사슴이 다시 폭주할 것 같았다. 소꿉장난이나 다름없다는 거짓부렁에 사슴이 안심한 듯, 하지만 다른 의미로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남자친구가 아니잖습니까.” 처음 보는 새침한 얼굴이었다. 세영은 껄껄 웃고 싶은 것을 참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거기에선 그런 것도 남자친구로 쳐요. 애인이나 연인은 따로 있고, 또 결혼은 연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하지 않고 적당히 조건 맞춰서 하는 거고요.” “…….” “이제 오해 풀렸어요?” 그제야 집을 나갔던 사슴의 이성이 도로 기어들어 온 듯했다. 목 끝까지 빨개진 사슴이 세영의 팔을 놓아주었다. 그는 당장 벽을 들이박고 싶은 얼굴로 더듬더듬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뭐. 이해해요. 거기만 들었으면 제가 갖고 놀았다고 생각했겠네요.” 세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혼자 벽을 긁어대지 않고 이렇게 따지는 것이 좀 기특했다. 죽어라 바닥을 노려보던 사슴이 고개를 들고 힘겹게 말했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말하려고 했습니다.” “응?” “이곳에 있을 때만이라도 저를, 연인처럼 생각해주신다면 상관없다고….” 세영은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물에 빠진 사슴을 겨우 건져놨더니 도로 흙탕물에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이맛살을 찌푸린 그녀를 보고 쓰게 웃은 사슴이 말했다. “싫다고 하시면 매달릴 생각이었습니다. 죽을 날만 기다리던 저를 살고 싶게 하셨으니 책임을 지라 억지를 부리려 했습니다.” “…….” “이런 자라서 실망하셨습니까.” 대체 어디에 실망할 포인트가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앞뒤 맥락으로 봐서는 연인이 있는 사람에게 들이댈 결심을 한 것이 죄스러운 듯했다. 세영은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뭐, 사실 책임지라고 해도 할 말이 없긴 하지.’ 뽀뽀는 물론 손목도 여러 번 잡았고, 오늘도 머리카락을 쭈물거렸다. 이곳의 ‘건드리는’ 기준이 어디까지인지 몰라도, 사슴이 순결을 잃었다고 은장도를 꺼내면 싹싹 빌어야 할 처지였다. “실망 같은 거 안 해요. 당연하잖아요. 제가 그런 말 할 처지도 아니고.” “…세영님은 때로 지나치게 너그러우십니다.” 상처받은 탓인지 오늘따라 새침하게 구는 사슴이었다. 그럼 뭐, 엉덩이라도 때려야 했나 싶었던 세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일을 이렇게 만든 건 제 책임도 있으니까요. 솔직히 말하면, 이곳의 ‘사귀는’ 기준이 어떤 건지 몰랐어요. 저는 결혼할 생각도 없고 아이를 낳고 싶지도 않거든요. 그런 쪽으로 오해의 여지를 줬다면 정말 미안해요. 제가 생각하는 연애는 그것보다 훨씬 가벼워서요.” 너무 무책임한 말인가 싶었지만, 한 번쯤 말을 해둬야 했다. 사슴이 저를 깃털보다 가볍고 문란하다 생각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세영을 빤히 쳐다보던 사슴이 물었다. “제가 결혼이나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면 남자친구로 삼아주실 겁니까.” 짚신도 아니고 뭘 삼아 싶었지만, 안된다고 하면 당장 은장도를 빼 들 표정이었다. 왠지 구석에 몰린 기분이 된 세영이 삐딱하게 말했다. “갑자기 왜요? 그동안 계속 피해 다녀서 그런 거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싫어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감히 바라볼 수 없는 자리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자가 연인이 되고 싶다 청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슴의 반박에 세영은 “…어?” 소리를 내며 굳어졌다. 사실 그녀는 사슴의 상태를 ‘몸에서 못 나온다고? 그럼 나올 방법을 찾으면 되겠지.’ 정도로 가볍게 여겼다. 하지만 사슴은 자기가 곧 죽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스쿤이 생명력을 나눠주지 않았다면 남친으로 삼아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호감이 있는 이성과 어울리는 정도라 하셨으니, 그거라면 저도 욕심내도 될 것 같아서…. 자격이 없다 여기시면 내치셔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다소곳이 눈을 내리깐 사슴이 말했다. 세영은 이것이 외통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에서 거절하면 “남자친구? 니가?” 라는 뜻이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남자친구는 사실 그런 관계가 아니고요.” 라고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잠깐. 이렇게 되면 사귀어도 손잡고 뽀뽀밖에 못 하는 거 아니야?’ <건드리면 결혼해야 함>을 떼어내면 뭐하나. 여전히 못 먹는데. 심란한 기분으로 마른세수한 세영이 “우리 인간적으로 진도는 좀 더 나가죠.” 하고 말했다. 고개를 든 사슴이 순진한 눈으로 갸웃거렸다. ‘시벌, 속어 쪽은 영 깡통이구만.’ 쪽팔린다는 말을 못 알아들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다. 그렇다고 별당 아씨 같은 사슴의 손목을 붙잡고, ‘너한테 이런저런 짐승 같은 짓을 하고 싶은데 협조 좀 해주겠니?’ 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절로 한숨이 나오는 것을 느낀 세영이 눈썹 위쪽을 긁적였다. “좋아요. 까짓거 사귑시다. 그럼 우리 오늘부터 1일?” “……?” 못 알아듣는 것을 보니 기념일은 챙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역시 백일이며, 천일 따윈 다 상술이었어.’ 라고 생각한 세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빨리 깨져서 한 번도 챙긴 적이 없지만. “그럼 잘 부탁합니다. 남친님.” 세영의 인사에 사슴이 움찔했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세영을 보던 그가 “…감사합니다.”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세영은 피식 웃어버렸다. “여자친구에게 할 말이 감사합니다 밖에 없어요?” “…아.” 그제야 뭔가 잘못된 것을 깨달은 사슴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세영은 여자친구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없냐, 하고 싶었던 건 없냐 하고 그를 괴롭혔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사슴이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졌다. 아주 느리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사슴의 손은 검을 잡아서인지 섬세한 모양과 달리 제법 거칠었다. 그래도 워낙 조심스럽게 만져서 거슬리지는 않았다. ‘좀 팍팍 만져라. 그래야 나도 주물러보지.’ 세영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사슴이 하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뺨을 어루만지던 손이 관자놀이를 스치더니 눈썹 위를 살며시 지나갔다. 어쩐지 간지럽고 조금 민망한 기분이었다. 마지막으로 이마 한가운데를 살짝 만진 손이 떨어져 나갔다. “끝?” 세영의 물음에 다시 얼굴이 빨개진 사슴이 고개를 끄떡였다. 여전히 수줍어하지만, 그런 점이 더 좋았다. 물론 감질나는 것과는 별개였다. ‘아이고, 이걸 언제 키워서 잡아먹나.’ 숙성된 지금도 이런 데 300년 전에는 정말 이빨도 들어가지 않았을 듯했다. 세영은 차근차근 진도를 나가자 생각하며 까딱까딱 손짓했다. 얼굴이 더 빨개진 사슴이 고개를 숙였다. 세영은 그의 입술에 쪽쪽 입 맞춰주었다. “키가 크니까 이러긴 좀 불편하네요.” 웃으며 말하자 귀 끝까지 빨개진 사슴이 그녀를 꼭 껴안으며 이마에 입술을 댔다. 뺨도 아니고 뭐냐 싶었지만, 첫날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그래, 계속 이러지만 않으면 되지. 뭐’ 세영은 약간의 불안감을 묻어두며 뿔을 비벼대는 사슴을 다독였다. 어쨌든 행복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사슴은 사랑스러우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충분하긴, 뭐가 충분해!’ 세영은 어제의 자신을 마구 때리고 싶은 충동에 빠졌다. 어쩐지 불안하다 싶더라니. 아무래도 사슴이 생각하는 ‘남자친구’란, 심심할 때 같이 어울려 다니면서 손이나 잡는 사이임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전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상황이 이어질 리가 없었다. ‘그럼 어제의 뽀뽀는 남친 기념 수여식이냐고. 시벌.’ 세영이 코앞에서 뽈뽈 돌아다니는 흰 사슴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노려보고 있는데도 다가올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아니, 남자친구라는 타이틀을 땄으면 뭔가 어필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침에 잘 잤냐고 인사할 때 얼굴을 붉히는 것 외엔 왜 달라지는 게 없어! “어디 아파?” 양 갈래로 땋아 내린 가발을 쓰고, 소녀풍의 원피스를 입은 시디발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 비블레스 항구 (8) 세영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마용이 시디발라를 여자로 착각했을 때는 ‘애비보다 모자란 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입혀놓자 착각하는 것도 당연한 듯했다. 수인족 특유의 동글동글한 얼굴과 귀여운 생김새가 합쳐져 꽤 예쁘장한 여자애처럼 보였던 것이다. 딱 하나만 빼고. “다 좋은데, 이 수염은 뭐야?” 시디발라의 뺨에는 양쪽으로 4개씩 가늘고 빳빳한 털이 나 있었다. 이전에는 그냥 ‘쥐라서 수염이 있군.’ 정도로 생각했는데, 여장을 하자 심히 거슬렸다. “으악, 뭐하는 거야!” 세영이 수염을 잡아당기자 시디발라가 꽥 비명을 질렀다. 쥐의 수염과 마찬가지로, 수인족의 수염 역시 감각기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잡아당기니 아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세영은 바둥거리는 시디발라의 팔을 잡아당기며 냉담하게 말했다. “여자애 얼굴에 왜 수염이 있어?” “있을 수도 있지! 여자도 원래 있어!” “지금 수인족이 아니라 인간으로 변장하는 거잖아. 가만히 있어.” “싫어어! 그만둬!” 뱀장어처럼 퍼덕거려 세영의 손에서 벗어난 시디발라가 사슴의 등 뒤로 숨었다. 세영은 사슴을 빤히 쳐다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사슴이 시디발라를 달랑 들어 그녀의 품에 안겨주었다. 충격을 받은 시디발라는 수염이 하나 뽑힐 때까지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이 배신자!” 결국, 수염이 몽땅 뽑힌 시디발라가 엉엉 울며 사슴을 원망했다. 사슴은 잔뜩 미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끝내 사과하진 않았다. 그것을 본 세영은 부글부글 끓던 속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곧바로 이런 것으로 만족하다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진짜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세영은 난감한 기분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두드렸다. 이제 와서 무슨 변명이냐 싶지만, 그녀는 정말 사슴과 연애할 생각이 없었다. 뽀뽀뽀 사건이 터졌을 때만 해도 그녀의 감상은 ‘고백하면 곤란하니 모른 척하자.’였으니까. 일이 꼬인 것은 그날 밤부터였다. 왠지 위태로워 보이는 사슴의 뒷모습을 보면서 지금 그를 따라가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결국 동굴을 나섰다. 그것도 선택이라면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그때를 기점으로 사슴이 찰싹 달라붙었다면 뭔가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사슴은 안전거리만 약간 좁혔을 뿐 계속 그녀를 피해 다녔다. 결국, 뭔가 초조하고 안절부절못하게 된 것은 세영 쪽이었다. ‘그때는 그게 밀당이라는 걸 몰랐지.’ 돌아서지 못한 것은 자신이 뱉은 말 때문이었다. 직접 책임지겠다고 말한 것은 아니지만, 엇비슷한 약속은 해버렸다. 사슴의 결정을 바꾼 것에 대한 부채감도 느꼈다. 그래서 그의 손을 놓아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당했다고 느낀 것은 펠릭스를 두들겨 팰 때였다. 떽떼굴 구르는 사슴을 보고 화가 나서 ‘내 사슴’이라던가 ‘여자친구’라는 수습 불가의 말을 뱉은 후이기도 했다. 거짓말이라고 얼버무렸다가 푹 짜부라드는 사슴을 보고 얼마나 식겁했던지. ‘아, 그래. 이게 문제구만. 뭔 표정을 지어도 무시했어야 했는데….’ 뒤늦게 제 약점을 깨달은 세영이 혀를 찼다. 중요한 순간마다 사슴의 얼굴에 휘둘린 기분이었다.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았다. ‘어제도 거기서 그렇게 넘어가면 안 됐는데….’ 사귀면 곧 결혼이라는 말에 얼마나 놀랐던가. 사슴의 오해에 잠깐 당황하기도 했지만, 자신은 그럴 생각이 없다고 사과한 후에 관계를 매듭지을 생각이었다. 사슴이 남자친구로 삼아달라고 치고 들어오지만 않았어도 깨끗이 정리했을 것이다. ‘으으, 왠지 모르지만 말려든 느낌이라고!’ 괜히 사슴 핑계를 대는 것 같지만, 그때는 정말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거기서 물러서면 꼭 인간의 도리를 저버리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되짚어 생각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는데. 꼭 귀신에 홀린 느낌이었다. “세영님?” 머리를 쥐어뜯는 세영을 본 사슴이 다가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푸르게 변한 눈동자가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온갖 근심걱정이 다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세영이 헛기침을 했다. “아니, 그… 호칭 좀 바꿀 수 없어요? 계속 세영님이라고 부르는 건 좀….” 솔직히 말하자면 동료들이 계속 ‘세영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거슬렸다. 그냥 편하게 세영이라고 부르고 반말을 쓰라고 했지만, 다들 펄쩍 뛰며 그럴 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세영도 모두에게 말을 높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남자친구’가 그러는 건 좀 심하다 싶었다. 세영의 투덜거림에 빙긋 웃은 사슴이 정중하게 말했다. “세영님은 제 주인이자 주군이십니다. 제겐 다른 무엇보다 그것이 우선입니다.” 뭐지. 분명 눈새 같은 소리를 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귀여워 보이지. 세영은 제 눈이 잘못된 것 같아 손으로 비벼보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귀엽게 보여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고장 났나?’ 사실 고장 난 것은 머리였다. 이성은 옳은 답과 가야하는 길을 알려주는데 그걸 실행할 수가 없었다. 왜 못하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그냥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이런 비이성적인 상태가 아주 당연한 것 같은 미친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아, 진짜 왜 이러냐고. 답답해서 돌아버리겠네.’ 세영은 자꾸만 사슴에게 휘둘리는 것이 짜증 났다. 생각대로 하지 못하고 일을 망쳐버리는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그런데도 막상 사슴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매번 지나가고 난 후에야 자학하며 왜 그랬냐고 스스로를 다그치고 있었다. ‘저놈의 얼굴. 저 요망한 얼굴 때문이다.’ 저를 걱정하는 사슴을 노려보던 세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성을 유지하려면 저 얼굴을 안 보면서 생각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당황하는 사슴을 제가 앉았던 의자에 눌러 앉혔다. “지금 머리로 돌아다니면 오히려 눈에 더 띌 것 같고, 땋아줄게요.” 절대 사슴을 쭈물쭈물해보려는 수작은 아니었다. 그런 흑심이 아예 없다곤 할 수 없지만, 사슴의 뒤통수를 보고 있으면 뭔가 생각이 정리될 것 같았다. 하지만 새하얀 머리카락을 손에 쥔 순간 욕이 나올 뻔했다. ‘시벌탱. 이놈의 사슴은 왜 털까지 곱냐고.’ 부들부들한 것이 아주 손이 녹을 것 같았다. 남의 머리카락을 만져본 일은 거의 드물지만, 이런 감촉이 흔하지 않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사락사락 빠져나가는 느낌에 왠지 더 심란해졌다. 세영은 입을 꾹 다문 채로 사슴의 머리를 빗어 내렸다. ‘나만 애가 타고, 매달리는 것 같아서 짜증 난단 말이지.’ 속으로 투덜거리는 것과 달리 그녀의 손은 착실하게 사슴의 머리를 땋고 남색 리본을 단정히 매어주었다. 다 됐다고 말하려던 세영은 땋은 머리로 드러난 귀가 빨갛게 물든 것을 알아챘다. 시디발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사슴에게 물었다. “왜 그래? 얼굴이 완전 빨개졌는데?” “…더워서 그런 것 같습니다.” 어깨를 움찔한 사슴이 답했다. 흐음 소리를 낸 시디발라가 쪼르르 달려와 세영을 붙잡았다. “둘이 무슨 일 있지? 내 눈은 절대 못 속….” 세영은 손가락을 세워 그의 눈을 푹 찔렀다. 아악 소리를 낸 시디발라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놀란 사슴이 그를 붙잡고 “괜찮습니까?” 하고 물었다. 시디발라는 와아앙 울음을 터트렸다. “너희 둘 다 미워!” 사슴의 손을 뿌리친 시디발라가 밖으로 뛰어나갔다.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모습에 세영이 피식 웃었다. 사슴이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세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제가 너무 심했다고 생각해요?” “아뇨, 그게 아니라… 계속 뭔가를 고민하시는 듯해서.” 잠깐 머뭇거리던 사슴이 답했다. 그는 세영의 손을 잡으며 “어제 일을, 후회하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물음에 당황한 세영이 손을 꼼지락거렸다. “어, 후회는 아닌데요.”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는 것도 후회인가. 솔직히 말하면 무르고 싶은 마음도 좀 있었다. 혼란스러워하는 그녀를 보고 쓰게 웃은 사슴이 말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모든 게 꿈인 줄 알았습니다. 정말 행복한 꿈을 꾸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영님이 잘 잤느냐고 말을 걸어주셨을 때 사실이라는 걸 깨닫고 너무나 기뻐서….” 세영의 손바닥에 살짝 입을 맞춘 사슴이 “그러니 후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세영은 순간 컥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새하얀 속눈썹을 팔랑거린 사슴이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하는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갑자기 요망해져서 놀랐잖아! 예고 없이 변신하지 말라고!’ 세영은 왠지 저린 것 같은 손을 꽉 붙잡은 채 눈으로 항의했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흠칫한 그녀는 문 쪽을 돌아봤다. 반쯤 열린 문 앞에 리먼이 서 있었다. 그는 방해해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준비는 다 끝나셨습니까?” 그의 허리에는 볼이 잔뜩 부은 시디발라가 매달려 있었다. 그새 리먼에게 가서 일러바친 모양이었다. 세영은 슬그머니 사슴의 옆에서 떨어졌다. “이제 성표만 걸면 될 것 같아요. 저도 옷 갈아입고 올게요.” ‘좋아, 자연스러웠어!’ 하고 자화자찬한 세영이 리먼의 옆을 스쳐 방을 빠져나갔다. 사슴의 도발에 당황해버린 그녀는, 두 사람의 관계를 무를 마지막 기회를 놓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우와, 마리엔. 진짜 예쁘네요!” 세영이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자 마리엔과 디안도 준비를 끝낸 뒤였다. 마리엔은 결국 인어로 꾸미되 좀 더 점잖은 차림을 했다. 디안이 손수 고른 옷은 하늘거리는 옷감이 구불거리며 발목까지 내려오는 물빛 원피스였다. 머메이드 세트 효과를 받지 못하는 것은 아쉬웠지만, 예쁘게 꾸민 마리엔을 보는 것은 즐거웠다. “세영님도 아주 근사하신걸요.” 수줍게 얼굴을 붉힌 마리엔이 답했다. 세영은 제 꼴을 내려다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는 머리를 포니테일로 높게 묶고 장사꾼들이 흔히 입는 튜닉에 장화를 신고 있었다. 그 위에 조끼를 하나 더 걸쳤지만, 어딜 봐도 평범한 차림이었다. “그런데 콧등의 그 상처는 분장입니까?” 디안이 세영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하얀 흉터를 보고 물었다. 피부를 어둡게 칠한 탓에 흉터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세영은 흉터를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아, 이건 그냥 데칼이에요. 상처가 있으면 인상이 달라 보이잖아요.” 다르다 못해 굉장히 사나워 보였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청순해 보였던 이전과 달리 밑바닥에서 구르면서 살아온 여자 같은 느낌이었다. 이 모습이 더 본질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하던 디안은 “잘 어울리십니다.” 하고 어색한 칭찬을 했다. 피식 웃은 세영이 손을 내저었다. “디안도 아주 멋지니까 자신감을 가져요.” “…그게 더 문제입니다만.” 세영의 분장술은 디안을 훈남에서 뒷골목 불한당으로 바꿔 놓았다. 갈색으로 찌든 피부에 반 배는 더 두꺼워진 입술, 그 위에 지저분한 수염까지 달자 오는 세월을 정면으로 맞은 것처럼 나이 든 모습이었다. 그런 얼굴로 늘씬한 몸인 것도 이상해서 배에 두툼한 것을 덧대 술 배가 나온 것처럼 만들었다. “거울을 보고 진짜 놀랐습니다. 동네 술집에서 흔히 보던 모습이라…….” 디안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냐고 한탄하듯 말했다. 바로 근처에 천국에서 내려온 것 같은 남자가 서 있으니 더욱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사실 저보다 시디발라가 더 놀랍지만요. 아무런 위화감이 없어서….” “내가 뭐!” 소녀풍 원피스에 어울리는 귀여운 망토를 입고 돌아다니던 시디발라가 그의 정강이를 퍽 걷어찼다. 짱알거리는 목소리까지 어울리게 들려서 곤란한 지경이었다. 세영은 치마를 허리까지 걷어 올리고 발길질하는 시디발라를 붙잡았다. “여자애가 치마 훌렁훌렁 들어 올리는 거 아니야.” 세영은 원피스를 입고 싸웠던 처음을 잊은 듯이 말했다. 시디발라가 분한 듯이 툴툴거렸다. “나 여자 아니라고!” “당분간 여자애인 척해야 하잖아. 옷은 편해? 불편하면 다른 걸로 바꿔줄 테니까.” 재빨리 화제를 바꾸자 시디발라가 으음 하고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그르르 돈 후에 고개를 끄떡였다. “괜찮아. 아래에 바람 슝슝 들어오는 것 빼곤. 가발이 더 불편해.” 시디발라는 특유의 커다란 귀를 감추기 위해, 머리 전체에 얇은 천을 덮고 가발을 쓴 상태였다. 불편한 것은 물론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감각도 떨어졌다. 세영은 이대로는 싸우기 힘들 것 같다고 투덜거리는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혹시라도 싸우게 되면 가발 벗고 싸워.” “치마도 벗어도 돼?” “…변태 같으니까 그냥 입고 싸워.” “입는 게 더 변태 같을 것 같은데.” 투덜거리던 시디발라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떡였다. 그는 리먼의 옆으로 쪼르르 다가가 손을 붙잡았다. 붉은 벽돌색으로 염색해 전보다 배로 젊어 보이는 리먼이 웃으며 말했다. “저희는 그럼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항구에서 기다릴 테니 빨리 와주십시오.” 파키라 근처에는 항구까지 사람들을 태워 나르는 밀수업자들이 있었다. 물건을 밀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밀반입하는 자들이었다. 세영은 약간의 협박과 금전을 통해 그들의 협조를 구할 수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동시에 움직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좀 더 잠입이 쉬울 것 같은 성직자들이 먼저 들어가고, 나중에 세영과 다른 이들이 따르기로 했다. 세영은 여관 안에서 떠나는 세 사람을 배웅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움직이는 일이라 멀리까지 따라 나갈 수가 없었다. 문 앞에서 서서 당부의 말을 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조심하세요. 혹시 문제가 생기면 미리 약속한 대로 움직이고요.” 그때 후드를 깊게 눌러쓴 사슴이 그녀를 돌아봤다. 세영은 아무 말 없이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살짝 고개를 숙인 사슴이 돌아섰다. 기분 탓일까. 이상하리만큼 불길한 예감에 세영은 말없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 비블레스 항구 (9) ‘역시 뭔가, 느낌이 안 좋군.’ 세영은 가볍게 무릎을 두드렸다. 그녀를 포함한 일행은 짐마차를 타고 강 하구로 이동한 후 작은 배로 옮겨 탄 뒤였다. 출발은 순조로웠고, 별다른 문제가 될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뭔가를 놓친 기분이 들었다. ‘방법이 잘못됐나?’ 밀수업자를 이용하는 것은 도둑 길드에서 얻어낸 정보였다. 정확한 위치와 검문을 통과하는 방법은 용병단장을 털어서 확인받았다. 사슴을 먼저 보낸 게 문제였나 싶었지만, 지리나 풍습은 그쪽이 더 익숙했다. 몇 번을 생각해도 결론은 똑같았다. ‘딱히 문제가 될 부분은 없는데, 그래도 뭔가가 불길하단 말이지.’ 일이 틀어진다고 해도 세영은 제 능력껏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살인’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었다.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는 이상 계속 몸을 사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괜찮으세요?” 옆자리의 마리엔이 걱정스럽게 소곤거렸다. 세영은 제 불안감이 동료들에게 전염된 것을 느끼고 표정을 바로잡았다. “먼저 출발한 사람들이 잘 도착했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무사할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마리엔이 그제야 안심한 듯 웃었다. 계속 그들 쪽을 힐끔거리던 디안도 “문제없을 겁니다.” 하고 덧붙였다. 세영은 고개를 끄떡이는 것으로 동의를 표했다. 문제가 있다고 해도 이제 와선 뾰족한 수가 없었다. 낡은 배는 파도가 칠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느릿느릿한 속도로 봐서 한밤중은 되어야 항구에 도착할 듯했다. 세영은 삐걱거리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깐 눈을 붙였다. “세영님, 배가 멈췄어요.” 소곤거리는 소리에 깨어난 세영은 그 사이 반쪽이 된 두 사람을 보고 머리를 긁적였다. 자장가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던 흔들림이 둘에겐 멀미 증폭제 역할이었던 모양이다. 내버려뒀다간 배에서 토할 기세라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도착한 것 같으니 일단 밖으로 나가죠.” “위쪽에선 아무 신호도 없는데요. 검문 중이면 어쩌죠?” 걱정스러운 물음에 세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언제부터였는지 배 위의 움직임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지도를 확인했지만, 역시 아무런 점도 나타나지 않았다. 일행을 제외한 모두가 배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불길한 느낌은 이것 때문이었나.’ 막상 일이 틀어졌다고 느끼자 불안하던 마음이 빠르게 진정되었다. 들켰다고 여기서 미적거릴 틈은 없었다. 세영은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들킨 것 같아요. 마리엔, 물의 장막이랑 공격마법을 함께 준비해주세요. 디안은 화살 공격을 주의하고요. 일단 배에서 내리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합시다.” 잠깐 당황하던 동료들은 이어지는 지시에 침착성을 되찾았다. 준비를 마친 것을 확인한 세영은 곧바로 뚜껑문을 열어젖혔다. 솜털 같은 밤안개가 배 위를 뒤덮고 있었다. 밀수업자의 것으로 보이는 시체가 근처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세영은 그의 등에 꽂힌 화살을 확인한 후 정면으로 눈을 돌렸다. 그때였다. 팟 소리와 함께 한 줄기 빛이 배에 쏟아졌다. 이어서 사방에서 켜진 빛줄기가 꽂혀 들었다. 세영은 한 팔로 눈을 가리며 정면을 쏘아보았다. 빛 속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의 왕국에 온 것을 환영하오. 구원자여. 아니, 정복자라 불러드릴까?” 빛을 등진 남자의 그림자가 보였다.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나의 왕국’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정글도를 어깨에 걸친 세영이 피식 웃었다. “누군가 했더니, 자기 동네에 놀러 왔다고 똥개가 마중 나왔나 보네. 그렇게 할 짓이 없냐?” 그녀의 비웃음에 어깨를 꿈틀한 ‘로토’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명예를 안다면 예의를 지켜라. 짐은 일국의 왕이자 그대의 선배나 마찬가지이니.” “초면에 눈갱 하는 새끼가 예의 찾고 지랄.” 차갑게 내뱉은 세영이 화살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마리엔이 “세영님!” 하고 외칠 때는 이미 로토의 바로 앞에서 정글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눈으로 보면서도 막을 수 없는 속도였다. ‘최단 시간에 적의 우두머리를 친다.’ 그녀는 차단된 시야 대신 맵을 통해 적의 위치를 파악했다. 생각보다 배를 포위한 적의 숫자가 많았다. 학살극을 벌이는 것쯤은 각오했지만, 눈먼 화살에 동료들이 맞을 수도 있었다. 지금 상황을 빠져나가는 최선의 방법은 로토를 제압해서 인질로 삼는 것이었다. -땅! 맑은 소리와 함께 정글도가 허공에서 튕겨 나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미간을 찌푸린 세영은 팽이처럼 몸을 돌리며 재차 도를 휘둘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로토에게 닿기도 전에 도가 가로막혔다. “폐하!” 뒤늦게 검을 뽑아든 기사들이 로토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한 손을 든 로토가 그들을 멈춰 세웠다. 가까이에서 본 로토는 30대 정도로 보이는 학자 같은 인상의 남자였다. 마도의 지배라기에는 너무나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진정해라. 그대의 힘으로는 짐을 죽일 수 없어.” 순간, 마리엔이 날린 워터볼이 로토의 바로 앞에서 터졌다. 반짝이는 물방울들이 로토의 몸을 감싼 둥근 방어막을 눈으로 확인시켜주었다. 한 발짝 물러선 세영이 정글도를 다시 어깨 위에 걸쳤다. “똥개치고는 용감하다 했더니 믿는 구석이 있었군. 그 껍데기, 뭐로 만든 거냐?” 태연히 말하고 있지만, 세영은 전에 없이 긴장한 상태였다. 이곳에 떨어진 뒤 처음으로 제 공격이 가로막혔다. 만약 놈에게 또 다른 능력이 있다면 동료들까지 위험한 상황일 수도 있었다.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지은 로토가 말했다. “짐은 신기의 계약자다. 주신의 사자인 그대와 동류나 마찬가지지. 동족끼리 서로를 죽일 수 없게 되어있는 건 당연하지 않나.” “똥개 새끼가 껍데기 좀 입었다고 사람하고 맞먹으려고 드네. 무슨 자신감이야?” 세영의 빈정거림에도 로토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는 호소하듯 양손을 내밀며 말했다. “짐은 그대와 싸우고 싶지 않다. 다시 생각해 봐라. 우리가 왜 싸워야 하는 거지?” “이 지랄을 해놓고 왜 싸워야 하냐고 묻는 건 뇌가 병신이라서냐.” 하지만 세영 역시 그의 말에 흔들릴 사람은 아니었다. 픽 웃는 그녀를 보고 얼굴을 굳힌 로토가 소리 높여 외쳤다. “우리는 악이 아니다. 마도라 불리며 오랫동안 핍박받아온 민족일 뿐이야. 그대가 구원자라면 제일 먼저 손을 뻗어야 하는 불행한 자들이지. 그대는 이미 진실을 알고 있지 않나.” 세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것에 자신감을 얻은 듯 로토가 열정적으로 말했다. “그대가 진정한 구원자라면 우리의 손을 잡아다오. 짐은 그대가 원하는 것들을 모두 이루어줄 수 있다. 주신의 뜻을 따르지 않을 거라면 짐과 함께 하는 것이 최선이다.” 세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까부터 조금씩 마음에 걸리던 것이 구체화 된 느낌이었다. 그녀는 어깨에 걸친 정글도를 내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내가 주신을 따르지 않겠다고 한 건 어떻게 알았지?” “그대의 사슴 덕분이지.” 빛 때문에 그늘진 것처럼 보이는 얼굴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세영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로토는 뒤늦게 생각난 것처럼 덧붙였다. “오해하지 마라. 짐은 그저 감시하라고 명했을 뿐이야. 그대가 짐의 기사를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할 줄 어떻게 알았겠나.” “…….” “그대가 원한다면 그를 넘겨주지. 다른 동료들도 무사히 돌려주겠다.” 세영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배 쪽에서 마리엔이 “세영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영은 일부러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우리는 단 하나뿐인 동류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 라토니아는 그대의 새로운 고향이 되어주겠다. 짐의 백성들 또한 무엇이든 그대의 발아래 바칠 것이야.” 로토는 세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짐과 함께 이 세상을 다스리자.” 그때까지 침묵하던 세영이 피식 웃었다. 어깨를 으쓱한 그녀가 물었다.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 이미 망해가는 세상 다스려서 뭐하게?” “아직 주신의 말을 믿고 있나? 그는 위선자이자 거짓말쟁이에 불과해. 멸망의 계시를 내린 후 인간들이 발버둥 치는 모습을 즐길 뿐이다. 짐의 손을 잡으면 모든 진실을 알려주지.” 로토는 어서 제 손을 잡으라고 재촉했다. 그의 손을 빤히 쳐다보던 세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마도… 아니, 라토니아는 확실히 악이 아니겠지. 하지만 그게 네놈이 선이라는 말은 아니잖아. 내가 보기에 넌 암 덩어리야. 그리고 암 덩어리를 왕으로 모시는 여기 사람들은 죄다 병신이라고 생각한다.” “…거절한단 말인가? 동료들의 목숨이 아깝지 않나?” 세영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로토는 그녀에게 너무 많은 시간을 허락했다. 파티창과 맵을 통해 상황을 파악한 세영에겐 협박이 통하지 않았다. “인질극을 벌일 땐 인질을 코앞에 두고 협상하는 거야. 병신아.” 차가운 비웃음을 날린 세영이 “라이트 익스플로전!” 하고 외쳤다. 배를 비추던 6개의 광구가 폭발하면서 사방에서 비명이 들렸다. 세영은 뒤로 훌쩍 뛰어 배 쪽으로 물러났다. 혼란 중에 화살 몇 대가 날아왔지만, 그 정도로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마리엔, 뛰어내려요!” “워터 슬라이드!” 마리엔이 기다렸다는 듯이 디안을 데리고 배 아래로 뛰어내렸다. 두 사람의 몸이 바닷물로 만들어진 미끄럼틀을 타고 무사히 세영의 옆에 내려앉았다. 동료들을 확보한 세영은 일단 한숨을 돌렸다. 로토를 인질로 잡을 수 없는 이상 여길 빨리 뜨는 것이 최선이었다. “디안, 마리엔을 업어요. 제가 뒤에서 따라가면서 등을 보호할게요. 마법 쓰면 곧바로 그쪽으로 뛰는 거예요.” “예, 세영님도 조심하십시오.” 디안이 재빨리 마리엔을 업고 앞장섰다. 세영은 파이어 스톰을 터트려 앞을 가로막는 적을 분산시켰다. 그녀가 빠져나가려는 것을 느낀 로토가 노성을 질렀다. “도망치게 내버려 둘 것 같나!” 세영은 안 내버려두면 어쩔 거냐는 생각에 무시했다. 그녀가 도망치기로 했다면 그걸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순간 로토의 손등에서 뭔가가 붉게 빛났다. “나타나 주인의 명에 따르라!” 로토의 외침이 끝남과 동시에 바다가 출렁거렸다. 세영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로봇이라도 튀어나오나 했는데, 뭔가 허연 것이 바다에서 솟구쳤다. 길게 휘어진 두 개의 목과 하늘을 가득 채울 것처럼 거대한 몸뚱이, 짝이 맞지 않는 기형의 날개. 어딘가 눈에 익숙한 모습이었다. “저건 용의 계곡에서 본….” 디안이 아연실색해서 중얼거렸다. 세영은 아무 말 없이 이를 악물었다. 쌍두룡이 그냥 나타났다면, 좀 당황스럽지만 그럴 수도 있다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다에서 기어 나온 것은 살아있는 생물이 아니었다. 죽은 용을 사령으로 만든 본드래곤이었다. ‘저게 가능하다고?’ 게임 속에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죽은 것을 일으켜 세우는 사령소환은 자신보다 약한 생물에게만 통했다. 드래곤은 만렙인 유저보다 등급이 높은 생물이었고, 누구도 죽은 드래곤을 일으켜 세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긴 현실이었다. 로토의 등급이 쌍두룡보다 높으면 가능할 수도 있었다. ‘아니, 로또놈이 나보다 강할 리가 없어. 용을 혼자 잡는 건 나한테도 좀 무리라고.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제일 의심이 가는 건 로토의 손등에서 반짝였던 붉은 빛이었다. 하지만 더는 생각을 이어갈 여유가 없었다. 세영과 동료들을 가리킨 로토가 본드래곤에게 명령했다. “죽여라.” 그의 손등에서 다시 한 번 붉은 빛이 반짝였다. ──────────────────────────────────── 비블레스 항구 (10) 용은 아르카디아 유저들의 좋은 재료공급원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기재료, 식재료, 하우징재료로 알뜰하게 사용되기에 버릴 게 없었다. 그만큼 인기 있는 레이드 몹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용을 사냥할 때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은 몇 명일까. 셋이다. 둘은 지상에서, 하나는 비행펫을 타고 하늘에서 공격하는 것이 보통이다. 가끔 공격이 어긋나서 용이 날아오를 때가 있는데, 일단 비상한 용은 광역기를 쓰는 데다 지상의 공격이 먹히지 않기 때문에 위에서 쏴서 떨어뜨려야 했다. 가끔 숙련자 둘이서 용을 사냥하기도 하지만, 솔플을 시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혼자서는 용의 비상을 막기 어려울뿐더러 약값이 많이 들어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거기에 초보를 둘이나 끼고 있다면 전멸하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그런 미친 짓을 내가 하게 생겼군.’ 투덜대는 것과 달리 세영의 발은 날개 달린 듯이 움직였다. 그녀는 마리엔을 업은 디안을 가볍게 낚아채며 몸을 날렸다. 한 박자 늦게 뼈만 남은 앞발이 그녀가 있었던 곳을 내리찍었다. 세영은 벼룩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머리를 굴렸다. ‘날아오르려고 하면 무조건 막아야 해. 만약 날지 못한다면 승산이 있다.’ 쌍두룡의 날개는 기형이었다. 한쪽이 조금 더 크고 안쪽으로 말려들어 간 형태였다. 그 때문인지 살아있을 때도 네 발로 기듯이 움직였다. 시력이 나쁜 탓도 있지만, 아마 선천적으로 날지 못했을 것이다. 이리저리 움직이며 비행을 유도해도 날아오르지 않는 게 그 증거였다. ‘날지 못한다면 머리 공격, 몸통 공격, 꼬리 공격, 마비, 속성마법, 충격파와 브레스 뿐이지.’ 그중 몸통 공격은 빼도 될 것 같았다. 본드래곤은 상체를 방파제에 걸쳤을 뿐 위로 기어 올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날개를 쓸 수 있다면 좀 달랐겠지만, 지금은 머리와 앞발을 움직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본드래곤이 되었으니 피통은 원래의 7에서 8할 정도. 좋아, 이 정도라면 해볼 만하다.’ 문제는 동료들을 들고 뛰어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제법 컸다고 해도 아직 용의 공격을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충격파라도 비껴 맞으면 풍선처럼 터져버릴 것이다. 자연히 한쪽 팔이 묶이게 된 세영도 썩 유리하지만은 않았다. 서로가 전력을 다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세영의 움직임에 따라 두 개의 머리가 작살처럼 내리꽂혔다. 세영은 순식간에 세 번이나 몸을 뒤집으며 공격을 피했다. 동시에 카가캉! 하고 용의 머리뼈에서 불꽃이 튀었다. 세영의 도가 단단한 뼈 위에 흠집을 냈다. ‘거리 유지가 최선이야. 너무 멀어지면 충격파와 꼬리 공격이 들어오니까, 머리 공격을 유도해서 꾸준히 피를 깎자.’ 갑자기 많은 피를 깎으면 마법 공격이나 브레스가 날아온다. 지금의 세영에겐 그것마저도 부담스러웠다. 이런 미약한 공격이나마 되풀이하며 실리를 취하는 수밖에 없었다. 세영의 도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휘둘러졌다. “진정 놀랍구나. 과연 주신의 전사다.” 로토가 신들린 듯 움직이는 그녀를 보고 감탄을 표했다. 세영의 기준에서나 미약한 공격일 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충분히 놀라웠다. 누구도 용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인간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건 이미 전설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나도 적은 적인 법. 애석하지만 어쩔 수 없지. 사격 준비.” 로토가 경탄하는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그의 명령을 받은 자들은 선뜻 공격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싸움에 감히 끼어들어도 될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상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부하들을 다그치며 자신의 활에 살을 먹였다. 쏘아진 화살은 용의 공격을 피하느라 여념이 없는 세영의 등을 노렸다. “워터픽!” 세영이 화살을 피한 것과 물의 송곳이 남자의 목을 꿰뚫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디안의 등에 매달린 마리엔이 정신없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마법을 완성한 것이었다. 세영은 화살이 날아온 것보다 마리엔이 사람을 죽인 것에 더 놀랐다. “어서 쏴라!” 활을 쏜 남자가 쓰러짐과 동시에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궁수들이 일제히 활을 겨누었다. 로토가 그것을 부추기듯 말했다. “주신의 전사를 맞추면 상으로 금화 천 개를, 그의 동료를 맞춰도 금화 백 개를 내리겠다.” “똥개 새끼, 끝까지 치사하게 나오네.” 혀를 찬 세영이 어느새 다가온 용의 앞발을 피해 몸을 날렸다. 그때까지 이를 악물고 있던 디안이 외쳤다. “세영님, 저희를 버리고 도망가십시오!” “정신 사납게 굴지 말고 입 다물어요.” 사납게 일갈한 세영이 궁수들 쪽으로 뛰쳐나갔다. 갑자기 다가오는 그녀에게 놀란 궁수들이 서둘러 활을 쐈다. 정글도를 휘둘러 가볍게 화살을 쳐낸 세영이 갑자기 하늘 높이 훌쩍 뛰어올랐다. 거의 동시에 본드래곤이 내지른 충격파가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나갔다. “으아악!” 비명이라도 지를 수 있었던 사람은 다행이었다. 대부분은 충격파가 닿자마자 그대로 터져나갔다. 새처럼 훌쩍 날아올랐다가 다시 내려앉은 세영은 연이어 터지는 충격파를 피해 내달렸다.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지자 두 개의 머리가 동시에 브레스 공격 모션을 취했다. ‘머리가 두 개인만큼 공격 범위가 넓다. 보통 드래곤이었다면 피할 곳이 없겠지만, 본드래곤이라서 안전한 곳이 딱 한군데가 있지.’ 세영은 미끄러지듯 로토의 뒤에 멈춰 섰다. 갑작스러운 접근에 당황해 검을 휘두르던 기사들이 그녀의 발차기에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그들은 곧바로 본드래곤의 브레스에 정통으로 맞았다. 세영을 향해 뿜어지던 브레스가 황급히 양옆으로 비켜갔다. 사령은 본능적으로 주인을 공격하는 것을 피했다. 본드래곤의 위치가 고정된 이상 로토의 뒤가 가장 안전하다는 소리였다. “좋아, 이제 본격적으로 가볼까.” 세영은 브레스 공격이 끝나자마자 둠 블레이드와 쇼크웨이브, 와일드 크러쉬 같은 블레이드 스킬을 연달아 날렸다. 마법생물인 용의 특성상 마법 공격이 무효에 가까워 활과 검으로 공격하는 것이 더 이득이었다. 공격이 제대로 먹히는 것을 본 그녀가 씩 미소 지었다. 블레이드 스킬로 공격하되, 브레스와 충격파는 로토의 뒤에 숨어서 피한다. 스킬의 쿨타임이 찰 때까지는 머리와 앞발 공격을 유도해서 꾸준히 피를 깎는다. 공략이 정해진 이상 본드래곤은 조금 크고 힘센 도마뱀에 불과했다. “신의 사자 주제에 비겁하구나!” 뒤늦게 제가 방패가 되었다는 것을 느낀 로토가 성질을 부렸다. 무슨 수를 써도 등 뒤의 세영을 뿌리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사령술사는 사령과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해서 멀리 떨어지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세영이 차갑게 비웃음을 날렸다. “니 기술이 후져서 그래, 병신아.” 만약 로토에게 기묘한 방어막이 없었다면, 진작 뒤통수를 맞고 쓰러졌을 것이다. 사령술을 쓰면서 등을 비워두다니. 이런 실수를 하는 멍청이는 참 오랜만이었다. ‘평소에도 썼다면 진작 칼빵 맞고 고쳤을 텐데, 설마 처음인 건가?’ 본드래곤을 움직이는 것은 대단하지만 그뿐이었다. 운용에서는 이제 막 사령술을 익힌 초보만도 못하다. 세영이라면 절대 이렇게 어설프게 써먹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온화한 가면을 완전히 벗어던진 로토가 외쳤다. “짐이 그럴 마음만 먹었다면, 진작 용을 이끌고 대륙을 정벌할 수 있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은 줄 아느냐?” “후져서 능력이 딸리니까.” “짐의 능력을 발휘할 만한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럴 가치를 느끼지 못해서였지.” “후진 새끼.” 세영의 대꾸에 로토의 입이 꾹 다물렸다. 그는 제 왼손을 쳐들며 “지금부터 짐의 능력을 보여주겠다.” 하고 엄숙하게 말했다. 세영은 공기 중의 마나가 움직여 로토의 손등에 있는 보석으로 빨려드는 것을 느꼈다.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에 도를 휘둘렀지만, 이번에도 역시 방어막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시벌, 진짜 짜증 나는 새끼네.’ 적당한 안전거리를 확보한 세영이 정글도를 고쳐 잡았다. 발밑이 핏물로 질퍽거리는 것이 불쾌했다. 대여섯 번의 충격파와 두 번의 브레스가 휩쓸고 지나간 지금, 멀쩡히 살아있는 것은 세영과 동료들, 로토뿐이었다. 그런데도 로토는 제 부하들의 떼죽음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본드래곤이여, 너에게 새로운 힘을 주마.” 로토가 본드래곤 쪽으로 손을 뻗자, 바닥에 고인 핏물과 잔해 따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자석에 철가루가 달라붙는 것처럼 용의 몸에 달라붙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설마?’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나며 본드래곤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온몸에 뾰족뾰족한 돌기가 돋아나고, 기형이었던 날개가 조금이나마 바로잡혔다. 여기저기 금이 갔던 부분까지 모조리 회복된 것을 눈치챈 세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주제에 회복까지? 똥개 새끼의 마나통이 바다처럼 클 리는 없을 텐데.’ 워낙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니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더욱 강화된 것 같은 본드래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문제였다. ‘데미지를 먹여도 계속 회복된다면 공격해도 소용없잖아.’ 이런 경우 힐러를 먼저 제거하지만, 로토에겐 공격을 가로막는 방어막이 있었다. 본드래곤을 공략하기 위해선 저 방어막부터 깨트려야 할 것 같았다. ‘일단 각 속성의 마법부터 사용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원거리 공격으로 가자.’ “지금이라도 항복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세영은 항복을 권하는 로토의 면상에 파이어볼을 집어 던졌다. 불꽃은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하고 그의 앞에서 터졌다. 본드래곤이 주인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움직였다. 앞발로 로토를 감싸 들어 올린 것이다. 이로써 드래곤도 앞발 하나가 묶였지만, 세영도 훌륭한 방패를 잃게 되었다. ‘브레스가 나오기 전에 끝내야겠군.’ 세영은 드래곤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온갖 속성의 마법을 쏘아냈다. 로토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소용없다. 아무리 애써봤자 짐의 옥체엔 흠집조차 내지 못한다.” 세영이 혀를 찼다. 있을 수 없는 가정이지만, 로토의 방어막은 전 속성 방어라는 사기적인 능력인 듯했다. 그게 말이 되나 싶어도 이미 본드래곤 자체가 게임의 룰에서 벗어난 존재였다. 공격 불가의 방어막이 있어도 그다지 이상할 것 같지는 않았다. ‘회복시키기 전에 본드래곤을 쓰러뜨리는 수밖에는 없나.’ 하지만 한방에 용을 잡는 것은 아무리 그녀이라도 힘든 일이었다. 세영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항구 안쪽으로 도망치면… 그건 안 되겠군.’ 이대로 도망치면 방파제며 건물이며 다 부수며 쫓아올 기세였다. 이전엔 불가능했겠지만, 날개가 좀 더 자란 지금이라면 위로 기어 올라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비블레스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는 이상 희생자만 늘리는 방법이었다. ‘분명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세영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드래곤의 약점에 대해 머리를 쥐어짜다 보니 미로 산맥의 NPC드래곤 블루세콰이어가 떠올랐다. 그녀의 치킨에 사족을 못 쓰는 드래곤이었다. ‘본드래곤에게 치킨이 통할 리도 없으니….’ 세영은 작게 혀를 찼다. 그녀가 아는 드래곤은 전혀 현명하고 지혜로운 생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탐욕스럽고 이기적이었으며, 거짓말도 아주 팔자로 하는 썩어빠진 놈들이었다.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반짝이는 보석과 자신의 이름을 건 약속뿐이었다. “이제 지루하구나. 태워버려라.” 로토가 말없이 도만 휘두르는 세영을 지켜보다 손을 내저었다. 명령을 받은 본드래곤이 동시에 입을 벌리며 브레스 모션을 취했다. 순간 세영의 머릿속에 과거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용의 계곡에서 쌍두룡과 헤어질 때의 일이었다. -넌 사실 좋은 인간이었구나. 내 이름은 난나야. -나는 난마. 이 은혜는 잊지 않으마. -또 놀러 와. 너희라면 얼마든지 지나가게 해줄게. 이름을 건 약속. 세영은 지체하지 않고 외쳤다. “난나! 난마! 약속을 지켜라. 너희는 우리가 지나가게 해준다고 약속했어!” 본드래곤의 입이 반쯤 벌어진 상태로 정지했다. 놈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세영이 훌쩍 뒤로 뛰어 물러났다. 그것을 본 로토가 당황해서 본드래곤을 재촉했다. “뭐하는 거냐! 어서 공격해라!” ‘저 병신, 역시 사령 이름 안 바꿨을 줄 알았다.’ 속으로 혀를 찬 세영이 디안을 내려놓았다. 당장 토할 것처럼 하얗게 질린 디안이 제자리에서 비틀거렸다. 마리엔은 이미 기절한 것인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세영은 가차 없이 디안의 등을 떠밀었다. “뛰어요, 어서!” 휘청거리던 디안이 이내 균형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세영은 마지막으로 로토를 힐끗 쳐다본 후에 몸을 돌렸다. 로토가 “어서 붙잡으란 말이다! 거기 아무도 없느냐!” 하고 외치는 것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를 따르는 병사들은 이미 다 죽은 후였다. 뼈만 남은 본드래곤 외에는 그의 명령을 들어줄 자가 없었다. ‘일단 벗어나긴 했는데, 앞일이 깜깜하군.’ 세영은 맵을 통해 안전한 방향을 살피며 디안을 이끌었다. 적진에 들어온 것을 확인시키듯 맵 전체가 불긋불긋했다. 로토가 통행을 막았는지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의 수가 적어 다행이었다. 이러다가 누군가에게 부딪치기라도 하면 충격으로 즉사시킬 것 같았다. “세영님, 카라드가 배신한 겁니까?” 한참 죽어라 뛰던 디안이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세영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배신했다면 주절주절 떠들 게 뭐가 있어요. 얼굴 한번 보여주면 끝나는걸. 그렇게 알아달라고 시위를 할 땐 뭔가 속셈이 있겠죠. 다른 사람들도 무사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전투가 벌어지거나 상처를 입었다면 파티창에 뜨지 않을 리가 없다. 하다못해 기절했다면 기절 상태라고 나타나야 한다. 하지만 상태창은 아주 멀쩡했다. 그래서 세영은 동료들이 로토를 피해서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 하지만 세영님이 그를 사…슴이라고 부르는 건, 본인이 말하지 않는 이상 알기 어려울 텐데요.” “카라드가 자기 별명이 사슴이라고 확신할 눈치만 있으면 참~ 좋겠네요.” 얼굴 보고 불러도 그게 자기 별명인지 아닌지 한참 고민할 짐승이었다. 남에게 밀고할 싹퉁머리가 있었으면 이렇게 고생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영의 반박에 디안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그럼 마도왕은 대체 어떻게 안 걸까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가면 한번 알아보죠.” 지금은 일단 뛰어야 할 때였다. 그때 이층집 지붕 위에서 화살 한 대가 날아와 디안의 발 앞에 퍽 꽂혔다. 기겁한 디안이 껑충 뛰듯 뒤로 물러섰다. 맵을 본 세영은 화살이 쏘아진 위치에 초록색 점이 찍혀있는 것을 확인했다. 다음 순간 초록색 점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린아이처럼 작은 인영이 가볍게 지붕과 지붕 사이를 뛰어넘었다.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듯 돌아보는 모습에 세영은 그가 어디론가 안내하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가요, 빨리!” “예?” “아니, 그냥 절 따라오세요!” 설명할 시간이 없었던 세영은 그대로 디안을 지나쳐 달렸다. 허둥거리던 디안이 황급히 그녀의 뒤를 쫓았다. ──────────────────────────────────── 비블레스 항구 (11) ‘제법 움직임이 빠른데?’ 세영은 이동 중인 초록색 점을 확인하며 생각했다. 놈은 지붕과 지붕 사이를 평지처럼 달리고 있었다. 웬만한 야생동물 뺨치는 빠르기였다. 따라잡기 그리 어렵지는 않았지만, 점점 뒤처지는 디안이 문제였다. 보다 못한 세영이 마리엔을 넘겨받았다. “죄, 죄송합니다.” 디안이 면목없다는 듯이 사과했다. 그의 얼굴에는 죄책감마저 서려 있었다. 그동안 열심히 수련했는데도 아무 도움이 못됐다는 것이 충격인 듯했다. 초보 때는 흔히 느끼는 좌절감이라 세영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음?”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초록색 점은 훌쩍 멀어져 있었다. 놈은 대로에서 떨어진 변두리 쪽으로 이동 중이었다. 그 아래에 빽빽하게 찍힌 붉은 점을 발견한 세영은 ‘함정이었나?’ 생각했다. 다음 순간 지도가 갱신되면서 한복판에 푸른 점 세 개가 나타났다. 푸른색은 파티원을 뜻했다. “디안, 서둘러야겠어요. 앞쪽에 다른 사람들이 있는데, 포위당한 것 같아요.” 상황을 설명한 세영이 빠르게 내달렸다. 디안은 지친 상태로도 죽자 사자 따라왔다. 그들은 곧 변두리에 도착했다. 무기를 든 남자들이 동료들을 이중삼중으로 둘러싼 것이 보였다. 세영은 곧바로 파이어스톰을 내질렀다. 갑자기 등 뒤를 덮치는 열기에 놀란 자들이 거미 새끼처럼 양옆으로 달아났다. 세영은 뻥 뚫린 길로 유유히 걸어 들어갔다. “제가 좀 늦었죠?” 씩 웃으며 말한 세영은 마리엔을 리먼의 손에 맡겼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던 리먼이 마리엔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때 눈물범벅이 된 시디발라가 세영의 품에 폭 안겼다. 가발은 어디 내팽개쳤는지, 커다란 귀가 튀어나와 있었다. “나, 나 고장 났어! 하나도 안 맞아.” “뭔 헛소리야 또.” “던져도 하나도 안 맞는단 말이야.” 앞뒤 없이 왱알거리는 소리를 조합해보니, 갑자기 싸우게 돼서 스킬을 던졌는데 죄다 빗나가버렸다는 말인 것 같았다. 백발백중의 명중률을 자랑하던 시디발라에겐 충격적인 일이었다. 손이 고장 났다며 빼애앵거리는 그를 내려다본 세영이 뺨을 긁적였다. ‘설마 수염 뽑아서 그런 건가?’ 인벤을 뒤져 작은 병을 꺼낸 세영은 병의 주둥이를 시디발라의 입에 쑤셔 넣었다. 라오 조드에게 먹이고 남은 거라 좀 미안했지만, 새 병을 뜯는 것도 그랬다. 캑캑거리던 시디발라가 한 모금을 꼴깍 삼키는 순간 여덟 개의 수염이 퐁퐁 돋아났다. “앗, 돌아왔다!” 시디발라가 저주에서 풀려난 공주처럼 뺨을 감싸 쥐며 기뻐했다. 귀를 드러내고 수염까지 돋자 여자라고 말하기 힘든 모습이 되었다. 수염과 소녀풍 원피스의 조화를 봐주기 힘들었던 세영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도련님, 큰 공을 세우셨군요. 구원자의 목을 베어 간다면 아버님께서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포위망의 한복판에서 누군가가 크게 소리쳤다. 시디발라가 “도련님이 누구야?” 하고 쫑알거렸다. 세영은 어둠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사슴을 돌아보며 물었다. “제 목에 관심 있었어요?” 당황했는지 얼굴을 붉힌 사슴이 고개를 저었다. 세영이 “오, 관심 없다고? 좀 서운하네.” 하고 놀리자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는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려는 것처럼 말했다. “루스타나 가문에서 배신자인 저를 죽여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온 겁니다.” “아하.” 세영은 그제야 석연치 않았던 점에 답을 낼 수 있었다. ‘항구를 통제하고 있는 건 루스타나 가문이었군. 어쩐지 로또놈은 영 허술하더라니.’ 왕의 행차치고는 초라한 수행원에 어설프기 짝이 없는 회유작전이었다. 본드래곤만 믿고 부랴부랴 달려온 느낌이 강했다. 그런 것치고는 항구 전체가 잘 통제되고 있어서 대체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처음부터 루스타나 가문이 벌인 판이었는데, 로토가 슬쩍 끼어든 거라면 그럭저럭 이해가 되었다. ‘똥개 새끼는 스틸 하는 걸 참 좋아한단 말이야.’ 세영이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어쨌든 사슴을 노리고 왔다면 곱게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이것들을 어떻게 조져야 잘 조졌다고 소문이 날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세, 세영님.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디안이 벌떡 일어나서 검을 들었다. 단검을 빼든 시디발라가 “맞아, 넌 좀 쉬고 있어.” 하고 말했다. 병아리들의 반란에 세영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사슴은 거기서 한술을 더 떴다. “저로 인한 일이니 저 혼자 해결하겠습니다.” “읭, 어쩌려고요?” 얼핏 봐도 적의 숫자는 백 정도는 훌쩍 넘었다. 사슴의 레벨이 제법 높긴 하지만, 아무 부담 없이 제압할 정도는 아니었다. 간간이 궁수까지 섞여 있으니 혼자서 싸우다간 험하게 다칠 것 같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어요? 같이 싸우면 빨리 정리될 것 같은데.” 앞으로 나서려는 세영의 손을 사슴이 꽉 붙잡았다. 평소와 다른 행동에 당황한 세영이 그를 돌아보았다. 사슴은 어딘지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저로 인해, 당신께서 지켜온 신념을 잃는 것은 싫습니다.” 그게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냐고 물을 틈이 없었다. 달빛 아래 하얗게 빛나던 사슴의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다. 그것이 신호가 된 것처럼 사방에서 비명이 터졌다. 적들의 발밑에서 솟구친 그림자가 일제히 제 주인을 덮친 것이다. “으악, 이게 뭐야!” 시디발라가 너울너울 움직이는 그림자를 보고 기겁했다. 도망치는 그를 따라간 그림자가 시디발라를 꼭 끌어안았다. 붙잡힌 시디발라가 “아니, 얘는 왜 이러는 거야!” 하고 발버둥 쳤다. 다른 사람들의 상황도 거의 비슷했다. 세영의 발밑만 마치 다른 공간인 것처럼 고요했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무리하면 안 된다면서요!” 당황한 세영이 사슴을 짤짤 흔들었다. 이런 대단위의 능력에 힘이 소모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만두라고 명령했다가 타격을 입을까 봐 섣불리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맥없이 흔들리던 사슴이 입을 열었다. “저는….” 그때였다.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사슴의 등을 노렸다. 세영은 곧바로 정글도를 휘둘러 그것을 쳐냈다. 거의 동시에 사방에서 화살비가 쏟아졌다. 하지만 이번에 날아온 화살들은 사슴이 아닌 적들의 몸에 틀어박혔다. 맵을 확인한 세영은 주변의 지붕 위에 찍힌 수십 개의 초록색 점을 발견했다. ‘지금까지 은신하고 있었던 건가?’ 그림자에 묶인 채로 발버둥 치던 적들은 끽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어갔다. 적이 죽을 때마다 그를 묶고 있던 그림자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 맵에 뜨는 붉은 점이 모두 사라졌다. “누구지? 우리 편이야?” 시디발라가 지붕 위를 쳐다보며 말했다. 잔뜩 경계하며 검을 든 디안이 “글쎄, 카라드한테 화살을 쐈잖아.” 하고 대꾸했다. 리먼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신성한 방패를 펼쳐서 동료들을 보호했다. 그때 지붕 위에서 누군가가 뛰어내렸다. 이층 높이에서 뛰어내렸음에도 가볍게 내려앉은 그는 발소리도 없이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후드를 젖힌 그가 똑바로 사슴 쪽을 응시하며 말했다. “세 번째 힘은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을 잊었나 보군요.” 젖혀진 후드 아래로 흑단처럼 검고 매끄러운 피부가 드러났다. 길고 뾰족한 귀는 엘프의 것이었다. 아래로 길게 흘러내린 청회색 머리카락은, 자연적인 색이 아닌 세월에 빛바래진 것처럼 보였다. 색은 검지만 엘프답게 단정한 얼굴을 한 남자가 사슴을 향해 웃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제 얼굴도 잊어버렸나요?” “아리스타타?” 멍하게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던 사슴이 말했다. 아는 사이인가 싶어 침묵하고 있었던 세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리스타타라면 과거의 현자 중 하나인 그 아리스타타?” “예, 그 아리스타타랍니다. 구원자님.” 엘프가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세영은 난감한 기분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무례한 질문이라는 것은 알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마, 그 모습으로 여자라는 건….” “아뇨, 지금은 남자로 바꾼 상태랍니다. 제가 별로 남자답지 않나요?” 남자로 바꾼 상태라는 건, 성별을 바꿀 수가 있다는 말이었다. 당황한 세영이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마리엔을 쳐다봤다. 설마 마리엔도 남자로 막 바뀌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그녀의 시선을 따라간 엘프가 말했다. “아, 본드래곤에게 당한 것 같군요. 제가 한번 보겠습니다.” 엘프는 몹시 자연스럽게 마리엔에게 다가갔다. 방어막을 펼치고 있던 리먼이 당황한 듯 세영을 바라봤다. 그것을 본 사슴이 “믿을 만한 자입니다.” 하고 장담했다. 품에서 작은 병을 꺼낸 엘프가 안에 든 것을 마리엔에게 먹였다. “있잖아, 본드래곤이 뭐야?” 세영의 소매를 잡아당긴 시디발라가 조그맣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궁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던 세영은 “…뼈만 남은 드래곤?” 하고 답했다. 대신 나선 것은 디안이었다. 그는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마도왕이 나타난 것과 죽은 용을 뜻대로 부리던 사실을 실감 나게 이야기했다. “그것도 우리가 만났던 계곡의 쌍두룡이었어.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대체 언제 죽은 건지. 아니, 그것보다 마도왕에게 용을 죽일 능력이 있었다는 게 충격적이야.” “그건 로토가 지닌 신기의 힘입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엘프가 불쑥 끼어들었다. 동료들이 돌아보자 싱긋 웃은 그는 “적당한 조치를 했으니, 곧 깨어날 겁니다.” 하고 말했다. 그들 중 가장 당황한 것은 카라드였다. “신기라니요? 로토가 신기를 지니고 있습니까?” “아, 당신은 몰랐겠군요. 당신이 검에 봉인된 후에 만들어진 신기니까요.” 엘프가 무심하게 답했다. 그는 카라드가 무어라 더 물을 기회를 주지 않고 세영을 향해 정중히 절했다. “뒤늦게 인사드립니다. 저는 달빛 호수 일족의 수호자, 아리스타타라고 합니다. 저희 일족의 환란을 끝내기 위해 구원자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인사는 됐으니까 아까 이야기나 계속해줬으면 좋겠는데요.” 세영이 대충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녀 역시 로토가 무슨 방법으로 용을 죽였는지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빙그레 웃은 엘프가 말했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일단 장소부터 옮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희의 배로 구원자님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세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말해 그다지 따라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것을 느낀 듯 엘프가 긴 속눈썹을 늘어뜨렸다. “제가 얼마나 뵙기만을 고대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인간의 지배자가 저를 속이는 바람에 사막에서 말라 죽을 뻔했었지요. 모리아에서도 간발의 차로 구원자님을 놓쳐 가까스로 따라잡은 것이 여기입니다. 제발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세영은 제 손을 꽉 붙잡는 사슴을 느끼고 헛기침을 했다. 넘어갈 생각도 없었지만, 넘어가면 큰일 날 분위기였다. 그녀는 “제가 좀 바빠서요.” 하고 얼버무렸다. 낙심한 듯이 한숨을 내쉰 엘프가 품에서 봉투를 꺼냈다. “이런 짓까지 하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군요. 이것은 카벨 루스타나의 양아버지인 마그누스가 보낸 편지입니다. 올리비아의 행방이 담겨있는 것 같더군요. 만약 5초 안에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이걸 태워버리겠습니다.” “아리스타타!” 곧바로 협박에 들어간 엘프를 보고 당황한 사슴이 외쳤다. 어이가 없었던 세영이 쳐다보는 사이 5초를 센 엘프는 정말로 편지를 화르르 태워버렸다. “아, 시발. 이게 미쳤나!” 곧바로 세영의 주먹이 그를 퍽 쳤다. 악 소리와 함께 날아간 엘프가 철퍼덕 바닥에 엎어졌다. 아무렇게나 나가떨어진 것 같은데 버림받은 여인처럼 가련하기 짝이 없는 포즈가 되었다. 그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세영을 올려다보았다. “장난을 친 것뿐인데, 너무하십니다.” “장난칠 게 따로 있지. 진짜 대차게 맞아볼래?” 세영이 그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드는 사이 작은 인영들이 지붕 위에서 하나둘 뛰어내렸다. 까만 피부의 꼬마 엘프들이었다. 크기도 생김새도 똑같은 꼬마들이 우르르 몰려드는 것에 당황한 세영이 멱살을 흔들던 손을 멈췄다. “뭐야?” “아직 님피드 상태군요. 이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겁니까?” 당황하는 세영과 달리 꼬마들을 훑어본 사슴이 비난하듯 말했다. 그러자 피식 웃은 엘프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어느새 제 손을 빠져나간 그를 세영이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사슴이 침착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아리스타타, 진짜 편지는 어디 있습니까?” “당연하지 않나요. 배에 있습니다.” 이쪽도 그렇게 여유가 없어서요 하고 싱긋 웃는 아리스타타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생겼다. ──────────────────────────────────── 비블레스 항구 (12) 결국, 일행은 엘프의 배로 이동하기로 했다. 언제 우울해 했냐는 듯 표정이 확 밝아진 엘프가 팔랑거리며 앞장섰다. 그의 뒤를 꼬마 엘프들이 올챙이처럼 따라붙었다. 세영은 엘프의 뒷모습을 마뜩잖게 노려보았다. “죄송합니다. 아리스타타가 장난이 심해서….” 사슴이 면목없는 얼굴로 그녀에게 사과했다. 당황한 세영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장난친 건 쟨데 왜 대신 사과하고 그래요.” “아리스타타는 저에게 큰누이 같은 사람이니까요. 지금은 그렇게 부르기 힘들지만.” 사슴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누나가 남자가 되어 돌아왔으니 그의 입장에선 심란할 만했다. 그때 근처를 얼쩡거리던 꼬마 엘프 하나가 사슴에게 달라붙었다. 사슴은 선선히 아이를 안아 들고 걷기 시작했다. 세영은 빤히 그의 품에 안긴 꼬마 엘프를 쳐다봤다. 예쁘장한 얼굴이지만, 여자애치고는 어딘가 중성적이었다. “남자애인지 여자애인지도 모르겠네.” “사실 어느 쪽도 아닙니다.” “읭?” 화들짝 놀라는 세영을 보고 작게 웃은 사슴이 설명했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님피드라고 불리는데, 아직 자아가 확립되지 않아서 성별도 개성도 없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좀 더 자라면 구분할 수 있는 개체가 되지요.” 세영은 조금 떨떠름한 눈으로 꼬마 엘프를 쳐다봤다. 어째 다들 쌍둥이처럼 생겼나 했더니, 그냥 그거였던 모양이다. 그때 또르르 눈을 굴린 꼬마 엘프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렇게 열심히 설명하는 건 처음 보는군요. 역시 사랑의 힘인가?” “아이들로 장난치지 마십시오. 아리스타타.” 한숨을 쉰 사슴이 말했다. 그러자 꼬마 엘프가 입술을 쭉 내밀었다. “당신은 너무 진지해요. 이런 건 장난에도 안 들어간다고요.” “편지 장난을 쳤으니 오늘은 끝입니다. 약속하셨잖습니까.” “칫.” 투덜거림을 끝으로 꼬마 엘프는 다시 원래의 멍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어쩐지 기분 나쁜 모습이었다. 사슴 역시 썩 좋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님피드인 아이들은 자아가 없어서 성체의 의식에 쉽게 휘둘립니다. 그래서 안전한 곳에서 보호받아야 하는데, 왜 여기까지 데려온 것인지 모르겠군요.” 세영은 말없이 엘프의 등을 쳐다보았다.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저지르는 놈이 제정신이 아니거나 상황이 막장이거나. 왠지 후자 같지만, 그것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프들은 빠르게 이동했다. 골목길이며 남의 집 담벼락이며 가리지 않고 뛰어넘은 덕에 얼마 지나지 않아 부둣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예상과 달랐다. “…배라고 하지 않았어?” 세영은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것을 보고 말했다. 아무리 봐도 그것은 뿌리 뽑혀 떠내려온 나무처럼 보였다. 시디발라가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다 타기엔 너무 작지 않을까?” 일단 탈 생각이 있다는 점에서 참 긍정적이었다. 세영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를 엘프를 힐끗 쳐다보았다. 생글거리는 엘프를 보고 한숨을 쉰 사슴이 검을 꺼내 휘둘렀다. 서걱 하고 뭔가가 베이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보이던 풍경이 바뀌었다. 나무가 있던 자리에 커다란 배가 나타난 것이다. 엘프의 배는 꼭 영화에 나오는 로마 군선 같았다. 세로로 길쭉한 형태에 커다란 돛이 달렸으며 수많은 노가 밖으로 나와 있는 형태였다. 일행이 갑자기 나타난 배에 당황하는 사이 엘프가 투덜거렸다. “제 주술을 그렇게 베어버리다니. 너무 난폭하잖아요.” “다 벤 건 아니잖습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만 배의 모습이 보일 겁니다.” “너무해, 조금만 더 있다가 제가 짠하고 풀면서 설명하려고 했단 말입니다.” “아리스타타, 세영님께는 장난치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정말 혼쭐이 날 겁니다.” 사슴의 경고에 슬쩍 세영을 돌아본 엘프가 긴 속눈썹을 깜빡였다. 그게 꼭 ‘때릴 거야?’ 하고 묻는 것 같아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빨리 배에 타기나 하자고.” 볼일만 끝내고 이런 정신 나간 놈들과 빨리 헤어지고 싶었다. 뿌루퉁한 얼굴로 엘프를 돌아본 시디발라가 물었다. “대체 왜 목숨 걸고 장난을 치는 거야?” “목숨을 걸 가치가 있으니까요.” 엘프가 엄숙하게 답했다. 배로 옮겨가는 내내 그는 장난의 미학과 가치에 대해 떠들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엘프에게 장난이란 ‘길고 긴 삶의 유일한 낙’ 같은 것인 듯했다. “역시 인간이 제일 좋아요. 분노든 기쁨이든 슬픔이든 폭발적으로 내뿜으니까, 보기만 해도 즐겁거든요.” 엘프가 생각만 해도 황홀하다는 듯이 말했다. 리먼이 멋쩍게 웃으며 “숲 지역에선 엘프들의 장난으로 민원이 쏟아진다더니, 사실인가 보군요.” 하고 말했다. 마리엔을 업고 있던 디안이 고개를 저었다. “마리엔이 하프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은 처음입니다.” 세영은 마리엔이 기절해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깨어있었다면 이런 미친 종족과 반이나마 피가 섞였다는 사실에 어쩔 줄 몰라 했을 테니까. 한숨을 푹 쉰 그녀가 물었다. “너희는 인간을 좋아한다면서, 왜 인간과의 하프는 배척하는 거지?” “으음, 반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아나 성별이 정해져 있잖아요. 그게 자연스럽지 않아서 꺼리는 엘프들이 많지요. 다 자란 상태라면 그런 구분이 무의미하니 딱히 배척하진 않아요.” 날 때부터 성별이 정해져 있다는 게 변태 같아서 싫을 뿐, 다른 건 별 상관없다는 대답에 시디발라가 따지듯 물었다. “하지만 마리엔은 아예 숲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던데?” “그 일족이 아니라서 뭐라 단정하긴 힘들지만, 아마 뭔가의 이유가 있을 겁니다. 다 성장한 반인간이라면 숲에 들어와도 아무 문제가 없거든요.” 엘프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쩐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지만, 당사자도 아닌데 따질 수도 없었다. 세영은 사슴의 일만 해결되면 마리엔의 부족을 털어보기로 했다. “저희 일족이 아닌 분을 배에 태운 건 처음이라 떨리네요.” 엘프는 살랑거리며 일행을 선실로 안내했다. 원래 여자였다가 남자로 바뀌어서 그런지 말투나 행동에 여성스러운 부분이 조금씩 남아있었다. 그게 안 어울린다는 것은 아니지만, 약간 어색하게 느껴졌다. 세영은 엘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엘프는 보통 성별을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건가?” 순간 멈칫한 엘프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 위에 조금 전에 보았던 스산한 표정이 스쳤다. 다음 순간 다시 빙긋 웃는 얼굴로 돌아온 그가 말했다. “아니요. 보통 저처럼 바꾸는 일은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아리스타타, 숲에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사슴이 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 엘프는 예의 빙긋 웃는 표정으로 “그냥, 더는 여유가 없어진 것뿐이랍니다.” 하고 이전의 말을 되풀이했다. 결국, 엘프가 입을 연 것은 마리엔을 눕히고 자리에 앉은 일행에게 과일 따위를 내어놓은 후였다. 상식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헷갈리는 놈이었다. “로토가 지닌 신기는 ‘용의 눈’이라는 것으로, 그림자용 에레슈키갈의 심장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양어머니의 이름에 사슴이 움찔했다. 엘프는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별 볼 일 없는 저희의 신기와 달리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죠. 지금까지 밝혀진 것 중 하나는 용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죠.” 그것을 들은 세영은 로토가 어떻게 쌍두룡을 죽였는지 깨달았다. 만약, 용을 꼼짝도 못 하게 제압할 수 있다면 죽이는 것쯤은 쉬울 것이다. 과일 따위가 널려있는 테이블을 톡톡 두드린 세영이 물었다. “그럼 왜 죽인 거지? 명령할 수 있다면 살려두는 쪽이 나을 텐데.” “명령은 절대적이긴 하지만, 명령하지 않은 부분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죽여서 자유의지를 없애버리는 편이 편하죠. 구원자님도 많이 해보셨으니 아실 텐데?” 엘프가 세영에게 찡긋 윙크하며 말했다. 눈에 띄게 당황한 사슴이 “아리스타타, 세영님은 저에게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하고 반박했다.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은 엘프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럼 명령도 하지 않았는데 몸도 마음도 다 갖다 바쳤단 말이야? 저는 당신을 이렇게 싸게 키우지 않았어요.” “…한마디만 더 하면 진짜 화낼 겁니다.” “너무해.” 입을 삐쭉거린 엘프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는 조금 심각하게 말했다. “두 번째 능력은 구원자님도 경험하셨을 방어의 능력입니다. 어떤 것으로도 깰 수 없는 막이죠. 이것이 밝혀진 것도 모리아 전투에서입니다.” “모리아 전투?” “이틀 전 본드래곤을 이끌고 모리아에 나타난 로토가 빛의 교단과 교전, 교단이 대패하여 물러난 일이 있었습니다.” 이틀 전이라니. 그럼 본드래곤이 만들어진 것도 최소 이틀 전이라는 이야기였다. 어쩐지 날짜가 굉장히 빠듯했다. 디안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의문을 표했다. “그럼 마도왕의 행선지는 용의 계곡에서 모리아, 그리고 비블레스 항구가 되는 거잖습니까. 우리의 뒤를 바짝 따라오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래서 저는 ‘용의 눈’에 세 번째 능력이 있지 않나 가정하게 되었습니다. 마도왕의 행적을 보면, 엘프처럼 다른 용의 시야나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되는 부분이 있거든요.” 디안과 세영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만약 저 추측이 사실이라면 마도왕이 ‘사슴’이라는 별명이나 세영의 결심이 바뀐 것을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도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펼친 엘프가 자신의 추측을 이어갔다. “마도왕은 이미 보름 전에 마도를 벗어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분명 구원자님을 경계하고 어떻게든 없애버릴 생각이었겠죠. 그러다가 갑자기 구원자님이 용의 계곡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엘프가 지도 위에 마도왕의 동선을 손으로 그려 넣었다. 조르디아 쪽으로 향하던 로토가 갑자기 용의 계곡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확실히 ‘갑자기’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된 반응이었다. 날짜를 물어본 시디발라가 머리를 긁적였다. “팔일 전이면 우리가 계곡에 도착한 날이잖아?” “아마 로토의 원래 계획은 용의 계곡에서 구원자님을 없애버리는 거였을 겁니다. 거기엔 그가 이용할 수 있는 용이 셋이나 있었거든요. 쌍두룡과 새끼용, 그리고….” 엘프의 손이 마지막으로 카라드를 가리켰다.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인 사슴이 되물었다. “저도 포함된 겁니까?” “정확히는 당신의 본체인 검이에요. 그 검은 에레슈키갈의 일부나 마찬가지니까요. 검에 속한 당신이 신기의 명령에서 벗어날 거라고 생각되진 않는군요. 또한 저는 로토가 검을 통해 정보를 얻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슴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동안 적의 눈과 귀가 되어줬다니, 충격적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난감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인 세영이 엘프에게 물었다. “네 말이 다 맞다 치자. 그럼 왜 계곡에 도착해서야 알게 된 건데? 검을 통해 정보를 얻었다면 그동안 행선지를 다 파악했어야지. 굳이 조르디아로 향할 리도 없잖아?” “카라드의 기억 때문이 아닐까요.”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리먼이 말했다.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는 동료들의 시선에 민망해하던 그가 말을 이었다. “팔일 전이라면, 카라드가 기억을 되찾은 그때잖습니까. 갑자기 알게 된 계기라면 그것 밖에 없다고 생각해서요.” “그렇지만 다른 용들도 있었으니까, 카라드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잖아.” 시디발라가 카라드의 편을 들듯이 한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그의 손을 잡아서 내려준 세영이 “아니, 일리 있는 말이야.” 하고 말했다. 그녀는 엘프를 바라보며 물었다. “로토가 계곡에 도착한 것은 언제지?” “사흘 전입니다.” “로토가 계곡에 도착했을 때는 우린 이미 떠나고 쌍두룡 혼자 있었겠지. 이때 쌍두룡을 죽이고 본드래곤으로 만들었어. 그다음에 모리아로 향했고 여기서 성기사들과 싸우고.” 성기사들을 살육하며 본드래곤을 다루는 방법을 익혔을 것이다. 하지만 일행이 비블레스항으로 떠난 것은 뒤늦게 알았다. 만약 하마용을 통해 정보를 얻었다면 일행이 비블레스로 향한 것은 아예 몰랐어야 했다. “검을 통해 정보를 얻을 가능성은 크다. 하지만 하루, 이틀 정도의 쿨 타임이 있군.” 엘프의 정보와 추측을 조합한 결과, 로토는 사슴이 비블레스 항구로 이동한 것을 알고 본드래곤을 이용해 급하게 바다를 건너온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땐 세영이 도착하기 이전이었다. 그래서 밀항하는 곳에 그녀를 붙잡기 위한 덫을 만든 것이다. “…제가 밀정 노릇을 한 것이나 다름없군요.” 사슴이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를 빤히 쳐다보던 세영이 손을 내밀었다. 평소라면 삽질할 시간을 줬겠지만, 지금은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이 안 들었다. “미안하지만 검은 압수할게요.” 얼떨떨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던 사슴이 검을 풀어 내밀었다. 세영은 그것을 인벤에 집어넣었다. 아공간에 속하는 인벤 안에 있어서는 위치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이걸로 정보가 새는 문제는 해결됐고. 이제 편지 내놔.” 사슴처럼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엘프가 “저기, 본드래곤 처리엔 관심 없으신가요?” 하고 물었다. 세영은 “없는데?” 하고 냉담하게 말했다. 엘프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정말 문제가 해결된 거 맞습니까?” “쌍두룡이 죽었으면 후와와는 어떡해? 허락받으러 간 거 아니었어?” 동료들도 본드래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별 관심이 없어보였다. 분노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발딱 일어난 엘프가 소리쳤다. “너무해, 정말 실망했습니다. 로토와 드래곤을 내버려두면 온 세상을 쑥밭으로 만들고 말 거예요. 이 세상을 구해야 할 구원자께서 어떻게 관심이 없다고 말씀하실 수가 있습니까.” “다른 구원자 알아봐.” “안 돼! 제발 구해주세요. 자꾸 그러시면 진짜 편지 드리지 않을 거라고요!” 세영의 눈에 시퍼렇게 안광이 돋았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고 “맞고 내놓을래, 그냥 내놓을래?” 하고 물었다. 제자리에서 바르르 떤 엘프가 에잇! 하고 선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이가 없어 그를 바라보던 세영이 벌떡 일어나 그를 뒤쫓았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사슴누나고 나발이고 없었다. “잡히면 넌 뒈진 줄 알아.” ──────────────────────────────────── 비블레스 항구 (13) 엘프는 정말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어찌나 요리조리 잘 도망 다니는지, 세영이 그를 붙잡았을 때는 배를 반 바퀴는 돈 뒤였다. 사슴도 아니고 이딴 놈을 잡으러 다니다니 열이 뻗쳤다. 냅다 엉덩이를 걷어차자 갑판에 털썩 쓰러진 엘프가 가냘픈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살려주세요!” “이상한 비명 지르지 말아 줄래?” 인벤에서 로프를 꺼낸 세영이 그를 포박했다. 엘프는 앙알거리며 분위기를 한층 더 이상하게 만들었다. 세영은 그의 가슴을 꾹 밟으며 말했다. “편지 어디 있어?” 어머니 때문에 애가 탈 사슴을 생각하면 이런 질 나쁜 장난을 쳐선 안 되는 거였다. 화가 난 세영을 보고 눈을 또르르 굴린 엘프가 말했다. “안 드리면 안 되겠죠?” “진짜 죽고 싶지?” “…하지만 보면 분명 울 텐데, 그런 건 별로 보고 싶지 않거든요.” 한숨을 쉰 엘프가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그는 제 가슴을 쑥 내밀며 “자, 여기 있어요.” 하고 말했다. 세영이 그의 머리를 퍽 소리 나게 때렸다. “배에 있다며?” “아야, 지금은 제가 배에 있으니 틀린 말도 아니잖아요.” 엘프가 울상을 지으면서도 나불거렸다. 한숨을 쉰 세영이 엘프의 품을 뒤져 봉투를 꺼냈다.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봉투를 본 그녀는 “이번엔 진짜지?” 하고 물었다. 힘없이 웃은 엘프가 고개를 끄떡였다. “읽을 때 옆에 있어 주세요.” 이쯤이면 무슨 내용인지 대충 짐작이 간다. 세영은 제 손에 들린 봉투를 내려다보며 이걸 전해줘야 하는지 갈등했다. 쓸데없는 고민에 화가 난 그녀는 엘프의 가슴을 걷어찼다. 바닥에 도로 쿵 쓰러진 엘프가 서러워했다. “또 차다니 너무해요! 아직 남자에게도 차여본 적 없는데!” “자랑이다, 인마.” 세영은 그를 질질 끌고 가서 배 밖에 매달아두었다. 로프에 묶여 시계추처럼 흔들리게 된 엘프가 꺅꺅거렸다. 세영은 “머리도 식히고 딱 좋을 거다.” 하고 말한 다음 선실로 돌아갔다. 동료들은 지도를 보면서 앞으로의 일을 의논 중이었다. 대충 들어보니 로토가 어떻게 나올지, 어디로 가야 본드래곤을 피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았다. 적어도 그녀에게 본드래곤 사냥을 부탁할 생각은 아닐 듯했다. ‘뭐, 예전에도 잡아 달라가 아니라 잡을 테니 함께 싸워달라는 쪽이었지.’ 본드래곤에게 관심이 없기보다는 세영이 ‘싫다’고 못을 박아서일 것이다. 그녀에게 부담이 될까 봐 애써 외면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세영은 속으로 근심·걱정하고 있을 동료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적을 등 뒤에 남겨두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뭔가 꺼림칙하거든.’ 세영은 여행 동안 그들을 조종한 ‘보이지 않는 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지금까지 꽤 도움을 받았지만, 그건 그녀가 퀘스트를 잘 따르고 있어서다. 지금처럼 퀘스트를 중단하면 어떤 식으로 돌변할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보통은 할 수밖에 없게 만들겠지.’ 본드래곤의 등장은 강제 퀘스트 진행을 위한 사건일 수 있었다. 신기는 모두 모이기 전에는 파괴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로토의 신기인 ‘용의 눈’을 파괴하기 위해서 신기를 모아야 할 가능성이 있었다. 로토가 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날뛴다면 순진한 사슴이 제 목숨을 포기하고도 남을 테니까. ‘짜증 나는 상황이네, 진짜.’ 세영은 제 손에 들린 봉투를 바라봤다. 여기 담긴 내용 또한 사슴이 좀 더 쉽게 결심하도록 도울 것 같았다. 마치 때를 맞춘 것처럼 지도를 보고 있던 카라드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무표정한 얼굴에 반가움과 수줍음이 떠올랐다. 세영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으며 그에게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아, 세영님. 성공하셨나 보군요.” 뒤늦게 세영의 등장을 알아챈 리먼이 봉투를 보고 축하를 건넸다.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올게요.” 하고 카라드를 끌어당겼다. 얼떨결에 끌려 나온 사슴이 까만 눈을 깜빡거렸다. 근처의 다른 선실로 그를 질질 끌고 간 세영이 봉투를 내밀었다.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닐 것 같아요.” 세영의 경고에 멈칫한 카라드가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었다. 안에 든 것은 단순히 편지 한 장뿐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펼친 그가 서둘러 읽기 시작했다. 세영은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카라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편지 읽기를 끝냈을 때, 그는 처음의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와 있었다. 세영은 조각상처럼 굳어선 그의 손에서 편지를 빼내 읽기 시작했다. 급히 휘갈긴 듯이 흐트러진 글씨가 보였다. 카벨, 보아라. 이 편지를 볼 때쯤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 너에게 내 유언을 들어줄 의리는 없지만,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주길 간청하마. 네 어미 올리비아는 항상 너를 걱정했었다. 다른 사람은 돌아보지 않고 오직 너 하나만을 사랑했어. 어린 너를 질시했던 이 못난 마음을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그 아래는 죄책감이 가득 담긴 넋두리가 이어졌다. 세영은 그 부분을 모두 건너뛰고 본론처럼 보이는 부분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올리비아는 늘 말했었지. 네가 자신의 길을 찾는다면, 더는 너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고. 네가 자유의 몸이 된 것을 그녀가 어찌 알았는지는 알 수 없구나. 누군가 알려준 것이 아닌 어미의 육감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녀는 고대하던 신의 품으로 돌아갔고 안식을 찾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제 그녀의 옆으로 가서 참회할 생각이다. 너희 모자를 갈라놓은 죄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길 바라면서…. 카벨, 이곳으로 돌아올 생각은 하지 말아라. 로토와 루스타나 가문은 절대로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다. 새로운 자리에서 행복을 찾기를 바라마. 신께서 너와 함께하기를. 너의 양아버지이자 죄인인 마그누스가 마그누스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루스타나 가주의 동생이 카벨을 거뒀다고 했으니 그 자인 것 같았다. 병신미가 돋보이는 편지에 세영은 혀를 찰 뻔했다. ‘애 엄마가 좋다고 애를 질투하는 병신이군.’ 이런 놈이 양아버지였으니 사슴의 인생이 팍팍할 수밖에. 세영은 슬쩍 사슴을 쳐다봤다. 무표정한 얼굴 때문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괜찮냐고 물으면 또 괜찮다고 하겠지.’ 지금은 그런 말을 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세영은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멍하게 있던 사슴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에 뺨을 기댔다. 그것이 조금 뿌듯했지만, 티를 낼 상황이 아니었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라고 말하면 너무 남 같고.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하나.’ “…말했어야 했습니다.” 그녀의 고민을 덜어주듯 카라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제 뺨을 감싼 세영의 손을 꽉 붙잡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헤어질 때라도 말했어야 했습니다. 그러지 못한 제 나약함이 그녀를 죽게 한 겁니다. 제 손으로 죽인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고개를 숙인 그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점점 젖어드는 손에 세영은 조금 난처해졌다. 다른 손으로 머리를 긁적인 그녀가 툭 내뱉듯이 말했다. “그럼 그때 이런 일이 일어났겠죠. 제가 그분이었다면 끝까지 모르는 편이 더 나았을 거예요. 만약 선택할 수 있는 거였다면요.” “…….” “그리고 그분 입장에서도 아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보다는, 어떤 형태로라도 남아있는 게 좋지 않을까요.” 철저히 사슴의 여자 친구로서, 사슴을 위한 이기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세영은 한 점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고, 도덕적으로 산다고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되돌릴 수 있는 일도 아닌데 마음이나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어쨌든 카벨이랑 섞였으니까 아들은 아들이잖아요. 그분께서 마지막까지 생각한 것도 당신일 거구요.” 한순간 멍해졌던 카라드가 웃었다. 울다가 웃으면 안 된다고 놀릴 새도 없었다. 아차 하는 순간 그의 품 안으로 끌려들어 간 세영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카라드가 숨이 막힐 정도로 그녀를 꼭 껴안았다. ‘음. 모르겠다. 그냥 가만히 있어야지.’ 세영은 아무 생각 없이 그를 다독였다. 손이 차서 몸도 차가울 줄 알았는데 사슴은 제법 따끈따끈했다. 겨울에 난로로 좋겠구나 생각하는 그녀의 정수리에 가벼운 입맞춤이 떨어졌다. 놀라 고개를 드는 세영을 카라드가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기로 반짝이는 까만 눈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사슴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마음을 알고 계십니까?” “어, 그게….” 세영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눈을 굴렸다. 대충이야 알고 있지만,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궁해졌다. 슬그머니 사슴의 손에서 제 손을 뺀 세영이 뺨을 긁적였다. 그녀의 손을 붙잡은 카라드가 한 자 한 자 새기듯이 말했다. “저는 당신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세영은 뒷덜미가 삐쭉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사귀었던 남자 중에서 이렇게 진지하게 고백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대충 호감을 표시하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사귀기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서 사슴이 진심으로 고백하자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얼어붙은 그녀를 보고 희미하게 웃은 카라드가 말을 이었다. “당신께서 제 마음과 같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저와 같은 마음이 되어 달라 떼를 쓸 생각도 없습니다.” “…….” “그저 이곳에 있으신 한, 저와 함께 해주시길 원합니다. 전 누구에게도 당신의 옆자리를 넘겨주고 싶지 않습니다.” 영역부터 주장하는 것은 역시 사슴이라서일까. 진지하게 말하는 그에겐 미안하게도 엉뚱한 생각부터 들었다. 딴생각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사슴이 그녀의 손을 꽉 붙잡으며 말했다. “약속해주십시오.” “어, 그러니까 바람피우지 말라는 거죠?”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세영이 확인하듯 물었다. 갑자기 얼굴이 확 빨개진 사슴이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고개를 갸웃한 세영이 “아니에요?” 하고 되묻자 한참 후에야 “…맞습니다.”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체 왜 이 시점에서 바람피우지 말라는 말이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워낙 충격을 받아서 그런 것으로 이해했다. “바람 안 피울게요. 대신 하나만 약속해요.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죽겠다든가, 이 세상을 위해 한 몸 희생하겠다든가, 저만 죽으면 끝납니다 같은 소리는 하지 않기로요.” 제일 걱정되는 것이 사슴이 죽겠다고 나자빠지는 일이었다. 말하고 보니 하지 말라는 것만으로는 좀 약한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세영이 덧붙였다. “만약 죽겠다의 죽자만 나와도, 삼처사첩에 애까지 만들어서….” 사슴은 그녀를 제 품에 파묻는 것으로 이어지는 말을 막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팔을 푼 그가 이마를 콩 기대면서 말했다. “농담이라도 그런 무서운 말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음, 그러니까 하지 말라고요.” 조금 멋쩍어진 세영이 말했다.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그녀를 보고 희미하게 웃은 사슴이 말했다. “제 목숨은 이미 당신께 드렸습니다. 죽으라고 명령을 받지 않는 이상, 제 판단대로 행동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안심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모를 기분이었다. 세영은 왠지 발목 잡힌 기분이라고 생각하며 뺨을 긁적였다. 사슴이 그 위에 못을 박듯이 말했다. “제겐 이제 당신뿐입니다.”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그의 옆에 있는 것은 삼백 년 묵은 언데드인 형과 남자가 된 누나뿐이었다. 둘 다 없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에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사슴은 아무 말도 없는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세영은 이런 순간까지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사슴이 가엾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조금 마음이 아픈 것 같았다. “드디어 오셨군요.” 울음을 그친 사슴을 씻겨서 돌아가자 반갑지 않은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영은 건방진 자세로 턱을 괸 엘프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동료들에게 물었다. “누가 풀어줬어요?” 동료들이 일제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 자력으로 풀고 나왔거나 수족인 꼬마 엘프들을 부린 모양이었다. 엘프가 뿌루퉁하게 말했다. “너무해요. 전 갈 곳 없는 여러분을 구해 와서 신기에 대해 설명하고 편지까지 전해드렸는데. 그 보답이 배 밖에 매달아 놓는 거라니, 상처받았어!” “또 헛소리하면 이번엔 거꾸로 매달아 놓는다.” 냉담한 대꾸에 더 뿌루퉁해진 엘프가 입을 삐쭉거렸다. 반가운 얼굴로 세영에게 매달린 시디발라가 말했다. “있잖아. 후와와는 빛의 교단에서 보호하고 있대. 우리가 가서 데려오면 안 돼?” “용은 다 피해 다녀야 하는 상황인데, 데려와서 어쩌려고?” “…그렇지만 후와와는 이제 혼자잖아.” “빛의 교단에서 돌봐준다면 내버려두는 게 나아. 우리를 따라오면 괜히 고생만 더 할 거야.” 쌍두룡의 복수를 하겠다고 설치기라도 하면 골치가 아팠다. 냉정한 세영의 말에 실망한 시디발라가 두 귀를 축 늘어뜨렸다. 그의 머리를 쓱쓱 쓸어준 세영이 적당히 자리를 찾아 앉으며 말했다. “계획을 변경해야겠어요. 최단시간 내에 마도에서 벗어나서 안전한 곳으로 가는 걸 목표로 하죠. 어디가 좋을지 의견을 들려주세요.” 동료들의 시선이 일제히 카라드에게 향했다. 경험상 세영에게 묻는 것보다 그에게 묻는 게 빨랐다. 난처한 표정을 지은 사슴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하고 설명했다. 동료들의 표정이 뻣뻣이 굳어졌다. “로, 로토가 그런 거야?” 시디발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고개를 저은 사슴이 “저를 위해서 자결하셨다고 합니다.” 라고 답했다. 멍하게 입을 벌리고 있던 시디발라가 그의 팔을 톡톡 치며 “힘내.”하고 말했다. “분명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겁니다.” 뒤이어 리먼이 축원하듯 말했다. 그의 등을 두드린 디안도 “힘들면 언제든 말해.” 하고 위로의 뜻을 표했다. 세영은 저만 별 다른 위로의 말을 하지 않은 것 같아 머쓱해졌다. 위로에 감사를 표하듯 고개를 숙인 카라드가 이어서 말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저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는 무슨, 그런 생각하지 마. 동료잖아.” 시디발라가 손을 휙휙 내저으며 어른스럽게 말했다. 세영은 저도 모르게 피식 미소 지었다.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동료들은 다음 목적지를 의논했다. 시디발라는 자신의 고향인 수인족의 마을로 가자고 했고, 리먼은 아예 남쪽으로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의했다. 그때 눈치만 보던 엘프가 끼어들었다. “다음 목적지가 없다면 저희 숲으로 오시는 건 어떨까요. 엘프의 숲이라면 귀찮은 일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속셈이 빤히 보여서 귀여울 지경이었다. 세영이 심드렁한 얼굴로 그를 보며 말했다. “일 시켜먹으려는 수작이겠지. 기각.” “…일단 듣는 척이라도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이건 구원자님께도 도움이 되는 일이에요.” “필요 없어.” 냉담한 반응에 상심한 엘프가 풀죽은 강아지처럼 카라드를 쳐다봤다. 하지만 무표정하게 마주 보는 그를 움직일 자신은 없었는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구원자님은 아직 자신의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계시지요. 저라면 지금의 한계를 뛰어넘도록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 달빛 호수 (1) 세영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대신 반응한 것은 동료들이었다. 시디발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여기서 더 강해질 수 있다고?” “아뇨, 더 강해지는 게 아니라 더 잘 다루게 된다는 겁니다. 둘은 엄연히 다르죠.” 엘프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디안이 불신이 가득 담긴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런 힘이 왜 필요한 겁니까? 대륙이라도 멸망시킬 생각입니까?” 세영의 능력은 인간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났다. 너무 뛰어나서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여기서 더라니. 그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고 상상하기도 싫은 영역이었다. 그러자 엘프가 냉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왜 필요하냐고요? 좀 이상한 질문이네요. 구원자님은 자신이 가진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하고 있어요. 그걸 바로잡고 싶다는 게 이상한가요?” “…너 지금 나보고 발컨이라고 욕한 거냐?” 세영은 좀 다른 의미에서 발끈했다. 올드비의 명예를 걸고 말하건대, 그녀의 컨트롤은 완벽에 가까웠다. 다른 건 몰라도 발컨이라고 욕하는 것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 주먹이 튀어 나가려는 걸 누르고 있는데 엘프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발컨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아닐 거예요. 구원자님은 지금 자신의 힘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시잖아요. 시작부터 글러 먹었단 소리예요.” “어디서 왔는지 모르기는. 당연히….” 게임에서 온 거라고 말하려던 세영은 멈칫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의문이 떠올랐다. ‘이 힘이 정말 게임에서 온 게 맞나?’ 세영은 지금껏 게임을 하다 옮겨져서 게임 속의 능력을 그대로 쓸 수 있는 거라고 믿었다. 사실 처음엔 차원을 이동한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갑자기 천사라는 놈이 튀어나왔고 여기가 현실이라고 우겨서 일단 두고 보자고 했을 뿐이었다. 그때까지도 그녀에겐 이곳이 게임의 연속이었기에, 능력을 쓸 수 있다는 것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 몸뚱이는 내 진짜 몸이라고 했지.’ 정신 나간 천사가 텅 빈 게임 캡슐을 보여주며 경고했다. 지금의 몸은 게임 아바타가 아닌 세영의 진짜 몸이고, 이곳에서 찔리고 다치면 죽을 수도 있다고. 부활시켜주는 일은 없으니 알아서 몸을 사리라는 말이었다. ‘힘은 게임에서 왔는데 몸은 내 몸뚱이고. 뭔가 앞뒤가 안 맞긴 하네.’ 게임캐릭터가 차원 이동을 한 것이 아니다. 주세영이 차원 이동을 한 것이다. 그런데 게임캐릭터의 스킬을 그대로 쓸 수 있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 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더 이상하긴 하지만. ‘게임만 하다 보니 뇌가 빠가가 됐나.’ 세영은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에 혀를 차며 엘프를 쳐다봤다. 어떠냐는 듯 생글생글 웃는 모습에 피식 웃은 그녀가 물었다. “그럼 너는 내 힘이 뭔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안다는 거네.” “당연하지요. 그러니까 도와드릴 수 있다고 한 거잖습니까.” “물론 공짜로 도와주는 건 아니겠고.” “저도 사정이 어려워서요.” 엘프가 조금 멋쩍은 듯이 말했다. 세영은 테이블을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엘프가 원하는 것은 뻔했다. 그가 지닌 신기와 관련해서 도움을 구하려는 것이다. 갑자기 남자가 된 것이나 애들을 끌고 나온 것만 봐도 그의 상황이 막장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신기를 더 모으면 사슴이 위험해진다.’ 이제 남은 신기의 수는 2개. 그것까지 모두 모으면 주신의 봉인이 풀린다. 단순히 풀리는 것까진 상관없지만, 봉인 중의 하나는 사슴의 본체였다. 고로 봉인이 풀리면 사슴은 죽는다. ‘죽는 게 아니라 소멸하는 건가. 그게 그거긴 하지만.’ 제 힘에 대해 알고 싶긴 해도 사슴을 위험에 밀어 넣을 정도는 아니었다. 결론을 내린 세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도 별 상관없었는데 앞으로도 이렇게 살지 뭐.” “지금은 본드래곤 한 마리를 상대하는 것도 벅차시잖아요.” 세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엘프가 반박했다. 은근히 자존심을 긁는 말에 세영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녀는 경고하듯 말했다. “나 지금 주먹 나가려는 거 세 번이나 참았어. 다음은 안 봐준다.” “치려면 치세요. 하지만 제 말이 틀렸다고는 못하실 겁니다. 이번에는 동료들을 지켜내셨지만, 다음에는 어떨까요. 이 많은 동료를 끌어안고 도망치진 못하실 거 아니에요.” 용감하게 나불거리던 엘프는 세영이 벌떡 일어나자 머리를 감싸 쥐고 웅크렸다. 바들바들 떨리는 귀를 보니 일부러 이러는가 싶었다. 가만히 엘프를 쏘아보고 있는데 누군가 손을 잡아왔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사슴이었다. 처맞을 위기 앞의 엘프가 아니라 그녀를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저 때문이라면 괜찮습니다.” “삼처사첩. 약속했잖아요.” 세영의 대꾸에 움찔한 사슴이 손을 꼬옥 쥐었다. 이 요망한 짐승이 이제 말도 안 하고 죔죔 하나로 사람을 휘두르려고 하고 있었다. 비난의 시선을 보내자 머뭇거리던 사슴이 변명했다. “죽겠다는 게 아닙니다. 당신께 도움이 되는 일을 저 때문에 내치지 말라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런 말로 피해 가려 해도 소용없거든요.” 툴툴거리면서도 얼굴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다행히 첩을 들이겠다는 위협에 풀 죽은 사슴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시든 꽃처럼 고개를 숙인 채로 말했다. “가능하다면, 아리스타타가 아니라 제가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더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한숨을 푹 쉰 세영이 머리를 북북 긁었다. “아, 알았어요. 도와달라고 하면 되죠?” 마지막 신기만 찾지 않으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그녀는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엘프를 향해 “단, 선불이야.” 하고 덧붙였다. 엘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세영이 무뚝뚝하게 설명했다. “넌 지금부터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나를 돕는다. 네 정성이 하늘에 닿았다고 생각되면 그때, 네 부탁을 들어보고 도와줄지 말지 결정하지.” “네?” “물론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도울 상대엔 내 동료들도 포함된다. 싫으면 지금 거절해.” 사악하게 웃는 세영을 보고 움찔한 엘프가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하고 볼멘소리를 했다. 하지만 귀를 후벼 판 세영이 “싫으면 거절하라고.” 하고 말하자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그가 “정말 너무하시네요.” 하고 투덜거렸다. 그러자 사슴이 전에 없이 쨍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리스타타, 도움을 구하고 싶다면 그런 태도를 보이지 마십시오. 세영님이 당신을 도와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구원자잖아요?” “세영님은 구원자가 아닙니다. 주신이 구원해달라고 떠맡긴 것뿐이잖습니까.” “와, 당신이 그런 억지를 쓰기도 하네요.” 엘프가 기가 막힌 듯이 말했다. 하지만 뭐가 억지냐고 묻는 사슴을 보자 할 말을 잃은 듯했다. 그는 부부사기단을 보는 눈으로 세영과 사슴을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제가 잘 도와드리면, 그럼 구원자님도 저희 일족을 도와주시는 겁니까?” “봐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세영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사실 그녀의 입장에선 엘프가 도와줘도 그만, 안 도와줘도 그만이었다. 그것을 느꼈는지 입술을 질끈 깨문 엘프가 고개를 숙였다. “달빛 호수 일족의 아리스타타, 몸과 마음을 다하여 구원자님을 돕겠습니다.” “그래?” 엘프를 빤히 쳐다보던 세영이 기지개를 쭉 켰다. 나른한 자세로 턱을 괸 그녀가 “야, 그럼 가서 밥 차려.” 하고 말했다. 놀란 토끼 눈이 된 엘프가 “네?” 하고 되물었다. 인상을 쓴 세영이 툭 내뱉었다. “밥… 아니, 식사 가져오라고. 풀 말고 고기로.” “저기, 지금 구원자님의 힘 이야기 하는 거 아니었나요?” “그래서 차리기 싫다고?” 눈을 부라리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 엘프가 “차, 차릴게요.” 하고 말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자 뭔가가 억울했는지 가다가 말고 머뭇거렸다. 세영은 빤히 그를 쳐다보다 말했다. “3분 준다. 1분 늦을 때마다 엉덩이 한 대씩 깐다.” “진짜 너무해!” 원망스러운 눈으로 세영을 노려본 엘프가 서둘러 달려나갔다. 아직도 반항하는 것을 보니 앞으로 많이 굴려야 할 것 같았다. 혀를 차는 그녀를 사슴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엉덩이를….” “네?” “…아닙니다.” 무어라 중얼거리던 사슴이 다시 풀이 죽었다. 대체 어떤 점에서 속상해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세영은 초식동물은 너무 섬세하다고 생각하며 뺨을 긁적였다. 그때까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시디발라가 물었다. “두 사람, 대체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된 거야? 삼처사첩은 또 뭐고?” “…아.” 그제야 동료들 앞에서 커플짓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세영이 눈을 굴렸다. 무엇보다 사슴이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게 신경 쓰였다. 잠시 할 말을 고르던 그녀는 “뭐, 그렇게 됐어.” 하고 얼버무렸다. 시디발라가 “흐음….” 하고 둘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나름대로 선심을 쓰는 것처럼 물었다. “그럼 내가 처고 카라드가 첩이야?” 사슴의 의자가 끼익 소리를 냈다. 사슴이 평정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얼굴로 “시디발라, 그런 농담은 하는 게 아닙니다.” 하고 말했다. 시디발라의 얼굴이 뚱해졌다. “내가 먼저 만났잖아. 그럼 내가 정실인 거 아니야? 삼처사첩이라며?” “그…….” “알았어, 너도 정실 해. 그런데 나머지 처랑 첩은 누구야?” 후보들을 하나하나 꼽는 시디발라의 귀를 잡아당긴 디안이 “미안, 질투가 나서 그러나 봐.” 하고 대신 사과했다. 시디발라는 그 와중에도 제가 정실이라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헛기침한 세영이 화제를 돌렸다. “마리엔은 왜 안 깨어나는 거죠, 뭔가 들은 말 없어요?” 약 같은 것도 먹였는데 창백한 안색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혹시 살인한 충격 때문이 아닐까 싶어 좀 초조해졌다. 동료들을 대신해서 리먼이 입을 열었다. “엘프는 주변에 순응하는 종족이라 그렇다고 합니다. 아리스타타님은 모리아의 사기와 본드래곤의 공포에 오래 노출된 영향인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임시처방으로 달빛 호수의 물을 먹였지만, 계속 깨어나지 않으면 호수로 옮겨서 장기적인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아니, 그 이야기를 왜 이제야 해요?” 세영은 기가 막히는 것을 느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무조건 엘프가 사는 동네로 가야 할 판이었다. 사슴의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 투덜거리는 그녀를 보고 쓴웃음을 지은 리먼이 말했다. “말을 하면 세영님께서 뜻을 꺾으실지도 모르니까요.”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사람이 못 깨어날 수도 있다는데.” “마리엔이라면… 자신 때문에 세영님의 뜻을 바꾸느니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할 겁니다.” 극단적인 말에 놀란 세영이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그것이 리먼이라는 게 놀라웠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를 본 리먼이 웃었다. “그리고 달빛 호수로 가는 것만이 해결법이라는 말에는 믿음이 가지 않아서요.” 세영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디안마저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니 알면서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 같았다. 세영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제 뜻은 여러분의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제가 뜻을 꺾어서 동료들이 안전할 수 있다면 몇 번이라도 바꿀 거예요. 그러니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주세요.” 세영은 구원자도, 신의 대리인도 아니었다. 그녀의 뜻이 곧 하늘의 섭리 같은 것도 아닌데, 왜 이런 극단적인 말이 나오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리먼은 선선히 고개를 숙이며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했다. 시디발라가 대신 변명하듯 말했다. “마리엔은 네가 실종되었을 때도 엄청 걱정했단 말이야. 계속 자기가 욕심 부려서 그렇다고 자책했어. 너한테 방해만 된다고, 이제 그러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그래서 나한테 방해될까 봐 말을 안 했다 이거야?” 날카로운 물음에 시디발라가 귀를 축 늘어뜨리며 “…잘못했어.” 라고 말했다. 세영은 이마를 짚었다. “저번 일로 뭔가 오해가 있었나 본데, 마리엔이 깨어나면 잘 이야기해서 풀게요. 그리고 여러분은 절대 제 방해가 아니라고요. 방해되면 그냥 내버려뒀겠어요?” 믿음이 없다고 투덜거리자 디안이 말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세영은 왠지 마음이 착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쓸데없는 피해의식이라는 것을 알지만, 이것도 제가 본드래곤 따위에게 허둥거려서 일어난 일처럼 느껴졌다. ‘더 강해지면, 그래서 본드래곤 따위는 한 방에 보낼 수 있다면 걱정하지 않으려나.’ 마리엔이 쓸데없는 걱정도 안 하고, 동료들이 제게 방해가 될까 봐 사실을 숨기지도 않을 것 같았다. 괜한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보다 더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강해져서 나쁠 일은 없으니까.’ 사실 만렙을 찍은 후에 더는 강해질 일이 없어서 조금 기대가 되었다. 사실 기대되다 못해 가슴이 두근거렸다. 부려지길 자처하는 종놈도 하나 들였으니, 아예 뽕을 뽑을 생각이었다. “…전에 이야기했던 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죠.” 잠깐 사이에 얼굴이 퀭해진 엘프가 비틀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밥 잘 차려주고 엉덩이를 걷어 채인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동정심을 유발하는 몸짓에 세영은 누가 그렇게 꾸물거리라고 했냐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온 엘프가 물었다. “구원자님의 힘은 어디에서 온 걸까요.” “뭐, 주신이겠지?” 잠깐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문제였다. 이 몸뚱이가 세영의 진짜 몸이라면, 스킬 같은 것은 누군가가 일부러 넣어줬다는 거였다. 그럴 존재는 세영을 부른 주신 외에는 없었다. ‘대체 왜 게임 스킬처럼 넣어놔서 사람을 헷갈리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이곳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평소 하던 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만약 낯선 방식의 힘이었다면 잘 다루지 못해 허둥거리다 낭패를 봤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이 힘은 일종의 배려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 봤자 납치범의 배려지만 말이다. “맞습니다. 구원자님은 주신의 대리로 이곳에 오신 분, 이곳에선 주신의 화신이나 다름 없으십니다. 게다가 주신의 힘까지 나눠 받으셨죠.” 그렇게 심각하게 말해봤자 이제야 깨달은 사실이라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묵묵한 그녀의 얼굴에 조금 실망하는 듯했던 엘프가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주신께선 이 세계 자체나 다름이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구원자님의 힘에는 한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왜일까요?” “…내가 스스로 한계를 만들었다고, 그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세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마치 정답이라고 말하듯이 엘프가 미소 지었다. ──────────────────────────────────── 달빛 호수 (2) 샤르마흐 사막의 남부에는 또 다른 나샴들이 살고 있었다. 흔히 ‘이와라’ 라고 불리는 이 일족은 사막에서 가장 오래된 부족 중 하나였다. 하지만 오랜 가뭄으로 인해 오아시스가 말라붙자 이들 역시 조상의 땅을 버리고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의 물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거야.” “사냥할 고기들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길어봤자 두 달이 한계입니다.” 일족의 ‘쿠리’들은 연이은 회담을 열었다. 지혜를 가진 자라고 불리는 ‘쿠리’는 지도자로 뽑힌 나샴들이었다. 그들은 부화할 때부터 특별히 관리되어 조상의 지혜를 가진 채로 태어났다. 원래 암컷을 탄생시키는 방법이었지만, 이젠 쿠리를 만드는 것도 벅찼다. “떠돌이가 전하기를, 동쪽 부족은 인간의 보호 아래 들어가기로 했답니다.” 누군가가 던진 말에 회담장 전체가 웅성거렸다. 회담을 진행하던 쿠리가 주둥이를 닫아 딱딱 소리를 냈다. 하지만 웅성거림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동쪽 부족이라면 하얀 미갈루가 있는 곳이 아닌가. 현명한 쿠리라고 들었는데, 동족 전체를 욕되게 하고 있군.” “인간에게 붙었다면 동족이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배신자입니다.” 쉭쉭거리며 열을 올리는 자들 사이에서 가장 오래된 쿠리가 말했다. “지금 같은 시기에는 현명한 판단일지도 모르지.” 회담장 안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늙은 쿠리는 자신의 일족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일족을 모두 굶겨 죽이는 것보다야 배신자가 되는 게 낫다고 생각한 거다. 명예롭지는 않으나 존중할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 일족에선 그런 자가 나오지 않아야 할 것이야.” 늙은 쿠리의 눈은 제일 먼저 말을 꺼낸 자를 쳐다봤다. 부러움을 담아 말을 꺼냈던 나샴이 몸을 움츠렸다. 조용해진 회담장은 모래 폭풍이 스치는 소리만 요란했다. 늙은 쿠리가 말했다. “이번엔 또 어디로 이동할지 의논해보지. 우리에게 남은 길은 그것뿐이니.”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회담이 재개되었다. 그때 바깥에서 위급 상황을 알리는 방울 소리가 울렸다. 그런데 소리가 이상했다. 적의 침입이 아니라 누군가의 방문을 알리고 있었다. 회의하던 쿠리들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폭풍 속에 누가 찾아온 건가?” 모래 폭풍을 뚫고 찾아온 손님이라니, 기이한 일이었다. 회담을 중단하고 밖으로 향한 쿠리들은 뜻밖의 장면을 마주했다. 부족의 모두가 집 밖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엎드린 나샴들은 마을 안으로 들어온 가마를 향해 절을 올렸다. 그때, 쿠리들을 발견한 가마가 이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은으로 칠해지고 꽃으로 치장된 가마를 떠받친 것은 여섯 명의 인간이었다. 창을 든 스무 마리의 나샴이 가마를 호위하고 있었다. 또렷하게 보이는 광경에 쿠리들은 그제야 모래 폭풍이 그쳤음을 알았다. “내 이름은 카이미쉬, 사막 여신의 딸.”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메마른 공기를 울렸다. 쿠리들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마에 앉은 이는 암컷이었다. 그것도 아직 눈이 새카만 어린 암컷이었다. 기적과 같은 모습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 붉은 비단과 꽃으로 치장한 암컷이 일어섰다. 머리에 쓴 관에 달린 황금 방울이 쟈르륵 소리를 냈다. “너희에게 내 어머니의 명을 전하러 왔다.” 이와라 일족은 ‘사막 여신’의 명을 받들어 ‘인간의 왕’을 도울 전사들을 보내기로 했다. 이는 고대에 있던 맹약에 따르는 것으로 결코 부족의 수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르디아는 이들을 대대적으로 환영하였으며 풍족한 식량과 함께 부화실을 수리할 마법사들을 제공했다. 가장 전통 있는 일족 중 하나인 이와라의 합류는 사막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사막각지의 부족들이 맹약에 따라 ‘인간의 왕’을 돕길 바라며 전사들을 보내왔다. 나샴뿐만이 아니라 사막의 수인족, 나라 없이 떠도는 인간의 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비의 날갯짓이 폭풍을 불러오듯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 변화를 불러온 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길을 헤매는 중이었다. ‘응? 누가 내 욕을 하나?’ 왠지 가려운 귀를 후비적거린 세영이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까마득한 낭떠러지였다. 저 아래에 촘촘한 숲이 있긴 하지만, 떨어지면 꽤나 아플 것 같았다. “이번에는 진짜예요. 저만 믿고 따라오시면 한계에서 벗어나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녀의 옆에 선 엘프가 근엄한 척하며 말했다. 세영은 며칠째 달라지지 않는 멘트에 한숨을 쉬었다. “그놈의 믿음 타령, 이제 그만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냐?” “이게 다 구원자님 탓이잖아요. 대체 왜 고집이 그렇게 센 거예요!” 제 놈이 무능한 것을 세영의 탓으로 돌리는 엘프였다. 세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네가 시켰던 거. 게임에서 전부 다 해봤던 것들이거든.” 가상현실 게임에는 인간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모든 방법이 다 구현되어 있었다. 요가니 차크라니 람림이니, 국적불명 종교불명의 모든 수행방법이 다 망라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방울 소리를 들으며 명상하거나, 불의 속삭임을 들으라는 집중훈련 따위는 별로 특별한 것도 없었다. “저는 구원자님의 안에 있는 근원인 주신의 힘을 좀 더 가깝게 느끼라는 뜻에서….” “그러니까 그 근원수련법도 이미 해봤던 거라고.” 세영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어째 게임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게임에 더 가까워진다는 느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엘프의 수련법 따위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좋아요, 저도 연이은 실패로 느낀 바가 있거든요. 바로 구원자님께는 웬만한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죠. 그래서 저도 이제 한계를 두지 않기로 했습니다.” 엘프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세영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엘프는 그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구원자님께서 이곳으로 오셔서 처음으로 타격을 입은 건, 하늘고래랑 싸우다가 추락한 때였죠?” “미친, 너 그래서 여기로 온 거냐?” “구원자님의 무의식은 여기가 ‘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떨어지는 순간 위험하다고 생각하셨고, 그것으로 진짜 타격을 입고 기절하신 거지요. 저는 그걸 역으로 이용해보기로 했습니다.” 어째 훈련을 한답시고 배를 세우고 절벽 위로 불러낸다 싶었다. 물론 그때 추락했다고 정신을 잃은 건 이상한 일이었지만, 미친 것처럼 눈을 번들거리는 놈의 말을 신뢰하기는 힘들었다. “여기서 뛰어내리라고 하면 죽인다.” 세영의 결연한 말에 엘프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어린애처럼 발을 쾅쾅 구르면서 화를 냈다. “정말이지! 한계를 넘겠다는 생각이 있으신 거예요? 맨날 싫다, 모른다, 했던 거다 이런 말만 하시고 협조를 안 해주시잖아요.” “당연하잖아. 한계 넘다가 죽을 일 있어?” 세영도 덩달아 화를 냈다. 이 절벽의 높이는 전에 떨어졌던 것보다 절대 낮지 않았다. 잘못 떨어졌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엘프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안 죽는다니까요!” “시발, 그럼 니가 먼저 떨어져 봐.” “전 당연히 죽죠.” 엘프가 뻔뻔하게 말했다. 세영은 한 손으로 머리를 싸쥐었다. 애초에 이놈의 말을 믿은 게 잘못인 것 같았다. ‘한계는 무슨 얼어 죽을 한계야.’ 이럴 시간에 차라리 동료들의 레벨을 올려서 다 함께 본드래곤을 잡는 게 나을 듯했다. 제대로 된 장비를 끼고 공략을 짜서 친다면 무리도 아니었다. 그때 엘프가 놀란 얼굴로 세영의 뒤쪽을 가리켰다. “앗, 마리엔 씨다.” “내가 그런 뻔한 수작에 속을 것….”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던 세영은 덤불이 움직이자 저도 모르게 눈을 돌렸다. 그때 엘프가 있는 힘껏 그녀를 밀쳤다. 덤불을 헤치며 나타난 사슴이 놀란 표정으로 외쳤다. “아리스타타!” “아, 씨발!” 뒤늦게 속은 것을 깨달은 세영이 욕을 내뱉었다. 그 사이에도 그녀의 몸은 속절없이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높이로 봐서 낙하 데미지가 장난이 아닐 것 같았다. 엘프가 내내 지껄이던 한계를 깨트리는 일 따위는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세영님!” 언제 따라 뛰어내렸는지, 사슴이 그녀의 조금 위에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세영은 어이없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미쳤어요? 댁이 무슨 논개야?!” 뭐 좋은 곳에 간다고 따라온단 말인가. 하지만 사슴은 그녀의 면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잡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화가 나는 것도 잠깐, 허공을 휘젓는 손을 보자 괜히 짠한 기분이 들었다. 세영이 사슴의 손을 잡는 순간, 갑자기 추락하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지기 시작했다. ‘아, 마법이 있었지.’ 뒤늦게 깨닫고 주억거리는 세영을 품에 꽉 끌어안은 사슴이 말했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엘프의 말대로 세영은 그냥 추락한다고 해서 죽지 않았다. 낙하 데미지가 있으니 피통은 좀 깎이겠지만, 그거야 포션을 마시면 금방 해결될 일이었다. 하지만 괜찮다고 사양할 틈도 없이 검은 그림자가 두 사람을 휘감았다. 이윽고 단단한 고치 같은 막이 만들어졌다. 그 사이에 숲까지 떨어졌는지, 가지들이 막을 스치는 소리가 났다.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가 와삭와삭 요란하게 들렸다. 이윽고 소리가 좀 잦아든다 싶더니 풍덩 하고 물속으로 빠졌다. ‘아래가 물이었나?’ 위에서 볼 때는 물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잠깐 물 위를 둥둥 떠다니던 막은 이내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어, 이거 풀어야 할 것 같은데….” 당황해서 중얼거리던 세영은 어느새 축 늘어진 사슴을 깨달았다. 추락할 때, 온몸으로 그녀를 감싸고 대신 낙하 데미지를 먹은 뒤에 기절한 모양이었다. 정말 쓸데없다고 한숨을 쉰 세영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이 닿기 무섭게 스르륵 풀려나간 막으로 물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묘하게도 반짝반짝 빛나는 은빛 알갱이가 섞여 있는 물이었다. ‘오염된 물은 아닌 것 같지만, 마셔서 좋을 건 없는 것 같네.’ 한 팔로 사슴을 끌어안은 세영이 위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다행히 물은 그리 깊지 않아서 얼마 지나지 않아 물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엘프들의 성지 – 달빛 호수가 지도에 추가되었습니다> 익숙한 시스템 알림음이 들려왔다. 세영은 사슴부터 물가에 걸쳐놓고 물 밖으로 나왔다. 둥치는 하얗고 잎은 거무스름한 나무들이 그녀를 반겼다. 하나로 뒤엉킨 나무뿌리들이 벽이 되어 물을 가두어 놓고 있었다. 물속에서 반짝이는 은빛 알갱이들은 뿌리의 조각이거나 죽은 나무로부터 흘러나온 것이었다. “이 나무들은 한때 주신이 이곳에 깃들었다는 흔적이랍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주신의 힘과 접촉하면 뭔가 변화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기대하지 않았던 목소리에 세영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생글생글 웃는 엘프가 어느새 뒤쪽에 서 있었다. “어떻게 따라온 거지?” “저 나름대로 준비를 했답니다.” 엘프가 작은 낙하산 같은 것을 들어 보였다. 저런 작은 것으로 추락속도를 다 줄일 수는 없으니 아마 마법이 걸려있는 물건일듯했다. 엘프가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방해를 받을 줄은 몰랐네요. 이번엔 정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유언이냐?” 세영이 이를 갈며 주먹을 치켜들었다. 낭떠러지에서 사람을 밀다니. 손모가지를 분질러놔야 이딴 장난은 안 칠 것 같았다. 히이익 소리를 낸 엘프가 단번에 껑충 뛰어 나무 위로 올라갔다. 엘프가 아니라 치타인 것 같았다. 엘프가 아래를 보며 원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어떻게 엘프의 숲에서 엘프를 팰 생각을 하실 수 있어요?” “나무 다 불 싸지르기 전에 내려와라.” 잘난 척 쫑알거리던 엘프가 굳어졌다. “노, 농담이시죠?” 하고 묻는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세영은 말없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응징의 시간이었다. ──────────────────────────────────── 달빛 호수 (3) ‘음, 역시 엘프가 최고구나.’ 세영은 엘프를 패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적당히 부들부들하면서 차진 것이 칠 때마다 손에 착착 달라붙었다. 나샴과 인간, 수인족과 비교했을 때 손맛이 제일 좋은 것은 엘프인 듯했다. 물론 개체차가 좀 있겠지만 말이다. 응징의 결과로 불어터진 오뎅처럼 변한 엘프가 털썩 쓰러졌다. 세영은 오래 묵은 화장실 청소를 끝낸 기분으로 팔을 휙휙 저었다. 개운하진 않았지만, 뭔가를 해치웠다는 느낌은 좋았다. “너무해. 예쁘면 안 때린다며…!” 엘프가 퉁퉁 부은 얼굴을 가리며 흐느꼈다. 비스듬히 돌아누운 채로 훌쩍거리는 폼이 꼭 순결을 뺏긴 처녀 같았다. 세영은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내려다봤다. “누가 그딴 헛소리를 해?” “다들 그랬단 말이에요. 뭐야, 내가 안 예쁘다는 거야?” 엘프는 두들겨 맞은 것보다 그게 더 서러운 것 같았다. 제가 남자라는 자각이 없는 게 분명했다. 세영은 그의 머리통을 툭툭 걷어차며 말했다. “보통 처맞으면 안 예뻐진다. 그리고 너는 맞기 전에도 예쁘진 않았거든.” “거짓말!” “니가 쟤보다 예쁘냐?” 격렬하게 반발하던 엘프는 기절한 사슴을 가리키자마자 조용해졌다. 세영은 덜 말린 빨래처럼 널브러진 사슴을 주워들었다. 먹을 게 없었는지 낙뎀을 주워 먹은 사슴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위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것이지, 왜 뛰어내려서는….’ 쯧쯧 혀를 차면서도 다루는 손길은 부드러웠다. 공주님 안기로 사슴을 안아 든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엘프가 물었다. “진심이에요?” “그게 왜 궁금해? 어차피 버린 애 아냐?” 세영은 왜 보는 놈마다 사슴을 갖고 노는 거냐고 따지는지 좀 궁금해졌다. 자기가 써먹고 버린 애를 누가 주워간다니 갑자기 정이라도 팍팍 솟는 건지. 아니면 나는 이용해도 남이 이용해먹는 꼴은 못 보겠다는 놀부 심보인 건지. “…버린 적은 없는 데 말이죠.” 피가 터진 입술을 오므린 엘프가 변명처럼 말했다. 세영이 코웃음을 치자 그는 정말이라며 억울한 듯 말했다. “저, 300년 전에 그곳으로 찾아갔었어요. 혹시 유해라도 남아있었으면 묻어주고 싶어서, 그게 제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 그 아이 대신 이상한 게 남아 있더군요.” 제법 오래 살아온 그였지만,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인간의 육신을 빼앗아 뒤집어쓰고 있었으나 대화가 통하진 않았다. 오직 집념만이 남은 어떤 존재였다. “마치 망령처럼 보였지요. 그건 그 아이라고 할 수 없었어요. 봉인을 유지하기 위해 잘라낸 팔다리 같은 거였죠. 저는 그걸 보고 그 애가 죽었다는 것을 인정했고… 다시는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던 엘프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얼마 뒤 그는 다시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저를 찾아왔더라고요. 300년 전처럼 웃으면서 제 이름을 부르고, 그동안 잘 지냈느냐고 묻더군요. 마치 그 아이가 살아 돌아온 듯이.” 그때의 섬뜩함을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차라리 죽은 자가 살아 돌아왔다면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엘프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과거에 죽은 자인 척하는 어떤 존재였다. 엘프는 부어터진 얼굴로 헤실헤실 웃으면서 물었다. “제가 뭐라고 말해야 했을까요? 너는 그 아이가 아니라고 할까요. 사실 다른 인간의 영혼을 뜯어먹으면서 자라난 망령이라고?” 하지만 결국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하면 외롭게 죽어버린 ‘그 애’를 배신하는 것만 같아서. “나한테는 이게 진짜야.”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세영이 말했다. “네가 말한 그놈을 나는 모르니까. 나한테는 이 사슴이 진짜 사슴이다. 네 죄책감 따위 나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어.” 엘프가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세영에겐 오히려 그런 반응이 더 이상했다. 그럼 뭐 징그럽다고 기겁이라도 할 줄 알았나. ‘검에 씐 귀신이라도 괜찮다고 사귀고 있으면 견적 나오는 거 아니야?’ 속으로 투덜대던 세영은 조금 심각해졌다. 제가 너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기절한 사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잡념이 싹 사라졌다. 보기 좋으면 됐지 뭐. 게다가 순하고 착하기까지 하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절로 흐뭇해진 그녀는 넋 나간 엘프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도 괜히 왔다 갔다 하지 말고 태도 확실하게 해라. 그놈이 아니라고 확실히 쳐낼 건지, 그놈의 2세 정도로 생각하고 잘해줄 건지. 괜히 어정쩡하게 굴다 상처 주지 말고.” 지금은 사정 봐줘서 타박상 정도로 끝냈지만, 사슴 눈에서 눈물을 뽑았다간 전치 10주로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러자 한숨을 폭 쉰 엘프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이지, 이런 사람이 왜 구원자인가 했는데.” “지금 시비 거냐?” 툭 내뱉는 세영을 빤히 쳐다보던 엘프가 웃었다. 그는 허공을 보며 “좋아요, 인정합니다.” 하고 말했다. 그 순간, 숲 전체가 웅성거리는 소리를 냈다.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여럿이 내지르는 아우성 같기도 했다. 반사적으로 공격 자세를 취하려던 세영은 사슴을 고쳐 안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해치려는 건 아니니까.” 엘프가 그녀를 진정시키며 다가왔다. 여전히 얻어터져 부어오른 얼굴이었지만, 조금 전과는 뭔가 달랐다. 가라앉은 눈빛, 차분한 목소리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그는 딱지가 앉기 시작한 입술을 부드럽게 휘었다. “뭐, 나쁘지 않겠지요. 이런 것이 세상이 원하는 구원이라면.” 엘프가 세영의 이마를 향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피하려던 세영은 뒤늦게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깨닫고 당황했다. 낙엽처럼 서늘하고 메마른 손이 그녀의 이마를 덮었다. 순간 눈앞이 핑 돌면서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너 이 새끼….” 세영이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품 안에서 사슴이 굴러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옆으로 쓰러지는 그녀를 부축한 엘프가 흥얼거리듯 말했다. “다시 눈을 뜨면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을 겁니다.” 다음 순간 몸이 붕 뜨는 것 같더니, 풍덩 소리와 함께 차가운 것에 감싸였다. 엘프가 그녀를 호수 속으로 밀어 넣은 것 같았다. 세영은 몸이 천천히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가라앉는 몸처럼 의식이 점점 사라져서 마침내 새까맣게 물들었다. 호수의 밑바닥은 온통 반짝이고 있었다. 은빛 모래알에서 나온 빛이 시리게 눈을 찔렀다. 세영이 짜증을 내자 누군가 넓은 소매로 눈가를 가려주었다. 세영은 그제야 잔뜩 찌푸린 미간을 폈다. <너무 빨리 이곳에 오셨습니다.> 누군가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다정하게 머리를 어루만지는 손길에 세영은 그가 사슴일 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서두르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이 기쁘면서 또 슬프군요.> 흐느끼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세영은 ‘이 사슴이 왜 또 혼자 울고 있나.’ 싶어 서둘러 눈을 뜨려고 했다. 용을 쓰는 그녀를 달래듯 부드러운 손길이 이어졌다. <당신의 문제는 돌아가면 해결되어 있을 겁니다. 이런 것밖에 해드릴 수 없음을 용서하시기를.> 세영은 온몸이 폭신폭신한 것에 둘러싸이는 것을 느꼈다. 가라앉을 때와는 반대로 이번에는 둥실둥실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요람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멀리서 사슴이라고 생각했던 누군가가 속삭였다. <다음에 다시 뵙게 된다면, 그때는….> 잦아드는 목소리는 끝에서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할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하라고 말하려던 세영은 몸이 어디론가 쑥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세영님!”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낯선 나무 천장, 그리고 마리엔의 얼굴이었다. 세영은 조금 어리벙벙하게 눈을 깜빡였다. “마리엔, 언제 깨어났어요? 몸은 괜찮아요?” 모든 상태 이상을 회복시켜주는 ‘하이퍼 붕붕 리큐르’를 먹여도 눈을 뜨지 못했던 마리엔이었다. 그런데 제가 깜빡 정신을 놓은 사이에 눈을 떴으니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일주일 전이요.” “…읭?” “제가 깨어난 후에도 일주일 동안이나 잠들어 계셨어요. 정말… 걱정했어요.” 울먹이며 말하던 마리엔이 기어이 울음을 터트렸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난 세영이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뜬 것 같은데 일주일이나 지났다니, 당황스러웠다. “세영님, 이제 괜찮으십니까?” “진짜 걱정했단 말이야. 바보야.” “깨어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마리엔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동료들이 요란하게 기쁨을 표했다. 걱정시켜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던 세영은 동료들의 틈에 끼어 있는 사슴을 발견했다. 키도 크면서 잘도 눈에 안 띄게 숨어있구나 싶었다. 그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사슴이 얼굴을 보였다. “헉, 얼굴이 왜 그래요?” 세영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일주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멀쩡하던 사슴이 기근에 시달린 몰골이 되어 있었다. 바짝 말라 하얗게 뜬 입술을 달싹이던 사슴이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제대로 지켜드리지 못해서….” “읭?”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던 세영이 동료들을 쳐다보았다. 시디발라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자꾸 이래. 너 떨어질 때 제대로 못 잡아줬다고, 그 엘프가 믿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전부 다 자기 탓이라잖아. 내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아, 그놈이 그래요? 제가 절벽에서 떨어져서 이렇게 됐다고?” 세영이 수척해진 사슴을 제 쪽으로 슬슬 끌어당기며 물었다. 반짝반짝한 느낌은 좀 줄었으나 가련한 맛이 더해진 지금의 모습도 썩 나쁘지 않았다. 잠시 쭈뼛거리던 그는 “아리스타타는 세영님이 특별한 잠을 자는 거라고, 이것도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이라고 했습니다.” 하고 답했다. 시디발라가 “맨날 수행이래.” 하고 투덜거렸다. “뭐. 썩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효과는 있는지 없는지 아직 모르겠지만.” 세영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말했다. 특별히 강해졌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기운이 넘치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평소와 똑같았다. “뭐가 달라진 건지는 놈을 만나서 물어봐야겠네요.” 효과가 없으면 동료들을 걱정시킨 죄까지 합해서 주리를 틀어야 할 것 같았다. 시디발라가 자신이 안내해주겠다며 팔랑팔랑 뛰어나갔다. 마리엔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세영을 붙잡았다. “세영님, 그 엘프를 꼭 만나셔야겠어요?” “음, 만나서 묻기만 할 건데. 싫어요?” “…전 그 사람이 좀 위험한 것 같아요. 저한테 먹인 물도 그렇고요.” 마리엔은 그때 이미 의식이 깨어나는 중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엘프가 그녀에게 뭔가를 먹이자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주변의 소리는 다 들리는 상태에서 눈을 뜰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디안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왜 그런 말을 지금까지 안 한 거야.” “말해도 도움이 안 될 거라고 생각했어. 세영님이 깨어나기 전에는 그 엘프를 해칠 수 없다고, 그러니 가둬놓는 것이 최선이라고 네가 그랬잖아.” 마리엔이 조곤조곤 설명했다. 그러자 디안의 표정이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것으로 변했다. 이마를 문지른 그가 “그런 것까지 세영님을 닮지 말아줘.” 하고 말했다. 난데없이 불똥이 튄 세영이 “엥?” 소리를 냈다. 하지만 왠지 따졌다간 질 것 같아서 슬며시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다들 절벽 위에 있었잖아요? 어떻게 내려왔어요?” 엘프가 자신의 뒤를 따라 뛰어내린 것을 보고 절벽 위에 남아있을 동료들이 걱정이었다. 어찌어찌 숲까지 잘 찾아온 것 같았지만, 오느라 고생하진 않았는지 신경 쓰였다. 마리엔은 엘프를 가둬둔 곳으로 향하면서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해주었다. 꼬마 엘프들의 도움으로 낙하산을 사용해서 숲에 도착한 일, 카라드와 엘프가 싸우고 있는 것을 본 일, 기절한 세영을 발견한 일, 세영을 엘프의 마을로 옮겨서 간호하기로 한 일 같은 것들이었다. “카라드 씨 말로는 그 엘프가 세영님을 절벽에서 밀었다던데….” “아, 민 건 맞는데 그것 때문에 기절한 건 아니었어요.” 세영은 머쓱하게 말했다. 사슴의 입장에선 엘프가 자신을 민 것밖에 못 봤으니 떨어진 충격으로 그렇게 됐다고 착각할 만도 했다. “그 사람도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가둬놓기로 했어요.” “다들 많이 놀랐겠네요.” “…놀라기도 했지만, 화가 나서 난리였어요. 특히 카라드 씨가요. 말수 적고 조용한 분으로 생각했는데 화가 나니 꽤 무섭더라고요.” 마리엔의 놀림에 세영에게 붙잡힌 사슴의 손이 움찔했다. 세영은 애절한 그의 시선을 모른 척하며 “원래 얌전한 사람이 화나면 무섭죠.” 하고 맞장구를 쳤다. 그 사이 일행은 밖으로 나와 마을 광장으로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엘프들의 마을이라고 해서 인간의 마을과 특별히 다른 점은 없었다. 그저 숲 한가운데에 있고, 나무로 된 물건이 좀 많아 보이는 정도였다. 엘프놈을 가둬둔 곳은 마을 한가운데 있는 우리였다. 들이치는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앉아있던 놈이 반가운 듯이 손을 흔들었다. “앗, 깨어나셨군요. 다행이에요. 일주일은 더 갇혀있어야 하는 줄 알았거든요.” 그 사이에 부기가 빠진 엘프는 꽤 싱싱해 보였다. 퀭해진 사슴이 비하면 반짝반짝 빛나보여서 짜증이 날 정도였다. 한숨을 쉰 세영은 엉성하기 짝이 없는 나무 우리를 퍽 걷어찼다. “지금 빠삐용 놀이 하냐?” 그 순간이었다. 익숙한 시스템 메시지가 주르르륵 떠올랐다. <로우 킥이 0.001 포인트 올랐습니다!> <크리티컬 히트가 0.001 포인트 올랐습니다!> 당황한 세영이 “읭?” 소리를 냈다. 창살에 매달린 엘프가 생글 웃었다. “주신을 만나셨지요?” ──────────────────────────────────── 달빛 호수 (4) “…주신?” 세영이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반응에 엘프의 안색이 흐려졌다. “못 만났어요? 그럴 리가 없는데….” “그게 주신이었다고?” 쓰러져있는 동안 누군가 옆에서 돌봐준 기억이 있었다. 다정한 목소리와 손길에 세영은 그를 사슴이라 생각했다. 기억을 더듬는 그녀를 보고 엘프가 빽 소리를 쳤다. “아니, 누굴 만났는지도 몰랐단 말이에요? 그럼 지금까지 대체 뭐한 거예요?” “아, 좀 닥쳐봐. 새꺄.” 짜증을 낸 세영이 일단 스킬창부터 열어서 점검을 시작했다. 다행히 걱정했던 것처럼 초기화가 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MAX였던 스킬레벨이 모두 숫자로 표기되어 있었다. ‘스킬 레벨 제한이 풀렸어?’ 스킬뿐만이 아니었다. 최고 레벨로 표기되어있던 캐릭터 레벨도 숫자로 변했다. 만렙에서 레벨을 더 올릴 수 있도록 바뀐 것이다. 지금까지 게임시스템에서 벗어나려고 삽질을 한 것을 생각하면 허무한 해결법이었다. ‘만렙 상향 패치라니…. 뭐, 이쪽이 이해도 쉽고 더 빠르게 강해질 수는 있겠지만.’ 세영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녀는 별로 창의적인 쪽이 아니었다. 남이 만들어놓은 퍼즐을 이리저리 짜 맞출 수는 있어도 자기가 퍼즐을 만들지는 못했다. 주신이 그걸 알고 허들을 낮춰준 것 같아서 조금 민망했다. “무슨 소리입니까. 아리스타타. 세영님이 누굴 만났단 말입니까.” “아니, 그게… 저는 분명 통로를 열어드렸거든요. 이상하다. 왜 모르지?” 그 사이 사슴이 엘프를 추궁하고 있었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엘프를 보고 이를 악문 그가 우리를 퍽 내리쳤다. 어찌나 세게 쳤는지 세영이 걷어찰 때도 멀쩡하던 우리가 삐걱거렸다. 사슴이 으르렁거리듯이 물었다. “무슨 통로인지부터 설명하십시오.” “주, 주신과 연결되는 통로죠. 당연하잖아요?” 기가 죽은 엘프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우리를 움켜쥔 사슴의 손에 힘줄이 돋아났다. 그는 한 마디 한 마디 씹어뱉듯 물었다. “그걸, 왜 당신 멋대로 결정하는 겁니까?” “네? 그거야 주신에게 부탁받은 것도 있고….” “세영님의 허락을 구하지도 않았잖습니까.” 구경하던 세영이 사슴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내버려뒀다간 화가 난 그가 엘프의 목이라도 물어뜯을 것 같았다. 흠칫해서 그녀를 돌아본 사슴이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했다. 하지만 사나운 기색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음, 대신 화내줘서 고마워요. 이제 제가 물어볼게요.” “…죄송합니다.” 왠지 풀이 죽은 사슴이 뒤로 물러섰다. 세영은 그가 왜 그러는지 몰라 시선을 주다가 다시 엘프를 쳐다봤다. 엘프가 조금 머쓱하게 웃었다. “무서워라. 이번엔 진짜 목이 졸리는 줄 알았네요.” “내가 목을 조를 거라는 생각은 안 하냐?” “설마요. 지금은 안 그러실 거잖아요?” 여우처럼 눈을 찡긋하는 엘프를 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확실히 만렙 제한이 풀린 이상 놈을 두들겨 패기도 좀 그랬다. 보기보다 눈치가 빠른 놈이었다. “주신이랑 잘 아는 사이였냐?” “움, 알긴 하지만 잘 아는 사이는 아니죠.” 엘프가 귀여운 척 귀를 까딱이며 말했다. 오래 살아서 그런지 의뭉 떨기 좋아하는 놈이었다. “목이 졸리고 싶다고?” “집주인이랑 세입자 같은 사이에요. 친하다고 말하면 이상하잖아요?” 엘프의 설명에 따르면 그들은 이 별의 원주민이 아니라고 했다. 아주 오래전에 다른 별에서 이주해온 종족이었다. 엘프들은 원래 고대 정령에서 분화된 일족이라, 그들이 사는 곳 또한 정령의 힘이 강해지고 숲이 번창했다. 그래서 분가할 때가 되면 여기저기서 러브콜을 받았다. “저희 선조들이 이곳에 터를 잡은 것도 주신이 자신의 힘이 깃든 호수를 내어주겠다고 약속해서였지요. 대신 호수가 나쁜 일에 사용되지 않도록 수호하는 임무를 줬고요.” ‘지하철 5분 거리, 신축 풀옵션 같은 혜택인가.’ 별을 옮겨 다니면서 살다니, 역시 희한한 놈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용들도 이 별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고 들었다. 그때는 단순히 ‘요새 용들은 우주여행도 한단 말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엘프의 이야기를 들으니 분양 계획까지 짜서 이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신기한 이야기군요. 엘프들이 별을 옮겨 다닌다는 말은 처음 들었습니다.” “응? 디안도 몰랐어요?” 의아하게 돌아보니 동료들 모두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 중 제일 박식한 리먼까지 전혀 몰랐다며 고개를 저었다. 엘프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인간이나 수인족은 모두 자생종이니까요. 평생 이사 다닐 걱정이 없는 종족이니 굳이 알 필요도 없죠. 아, 물론 별이 망하면 같이 망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 말씀은, 이 별이 망해가고 있다는 건가요?” 마리엔이 조금 날카롭게 되물었다. 엘프는 굳이 말로 해서 뭐하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세영이 씁- 소리를 내며 주먹을 들어 보이자 마지못해 설명을 덧붙였다. “적어도 용들은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아요. 용들이 이 별을 떠난 뒤엔 다른 종족도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죠. 엘프들도 마찬가지고요. 아, 당신의 일족이 하프의 출입을 막은 것도 어쩌면 이주에 방해되어서가 아닐까요.” 새파랗게 질린 마리엔이 입술을 깨물었다. 세영은 문득 용들에게 버려져 이 별에 남았던 후와와와 쌍두룡을 떠올랐다. 엘프는 마리엔에게 너도 그들과 다름없는 처지라고 말한 것이다. 세영은 혀를 차며 빗장을 열었다. “역시 매가 부족했어. 기운이 없어서 세 대 때릴 것을 한 대만 때렸더니.” “아니, 또 왜요?! 제대로 설명해줬잖아!” “모르니까 이자까지 쳐서 더 맞자?” 엘프가 싫다고 바동거리며 우리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우리 안에 있으면 못 때릴 거라고 생각하는 멍청함이 귀여웠다. 혀를 찬 세영이 우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엘프가 끄앙앙 하고 이상한 소리를 냈다. “걱정마라. 내가 설마 죽일까.” “구원자님이 때리면 진짜 아프단 말이에요!” “그럼 아프라고 때리지, 좋으라고 때리겠냐. 이상한 취미가 있었나 보네?” “너무해, 진짜 너무해요!” 엘프가 얼굴을 가리고 빼액빼액 울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영은 우리를 들고 마을 밖으로 나갔다. 안 그래도 수련치를 채워야 하는데 잘 됐다 싶었다. ‘아 씨, 또 레벨 올린다고 개노가다를 해야겠네.’ 마지막 레벨 채울 때도 지겨워서 죽는 줄 알았는데, 그 짓을 또 하게 생겼다. 세영은 지긋지긋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말과 달리 그녀의 입가엔 흐릿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시발, 지금 좋아하면 변태 되는데.’ 참으려고 했지만,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멈출 수가 없었다. 문득 어떤 유저가 한 말이 떠올랐다. 모든 변태가 만렙은 아니지만, 모든 만렙은 변태라고. “저거 진짜 말려야 하는 거 아닐까?” 시디발라가 심각하게 말했다. 그의 옆에 앉아있던 디안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시선이 닿는 곳에선 세영이 허공에 발차기를 하고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동작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기고 있던 디안이 한참 후에 중얼거렸다. “우리가 하는 말은 아예 귀에 들리지도 않으실걸?” 세영이 ‘수련’을 하겠다고 선언한 지 벌써 일주일째였다. 그녀는 일단 ‘기본’ 수련만 하겠다며 마을의 공터로 향했다. 그리고 동료들은 그녀가 생각하는 ‘기본’과 자신들이 생각하는 ‘기본’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 같은 자리에서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수련만 했다. 너무 지치면 그 자리에 쓰러져서 자고 몇 시간 만에 일어나서 다시 수련했다. 배가 고프면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어 먹고 다시 수련에 돌입했다. 수련에 미친 사람 같았다. 물론 동료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마리엔은 울면서 세영을 말렸고, 카라드는 아예 무릎까지 꿇고 빌었다. 다른 동료들도 이러면 큰일 난다고 뜯어말리며 세영을 숙소로 끌고 갔다. 하지만 숙소에서도 세영은 수련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말을 걸어도 제대로 듣지 못했고, 먹는 것도 건성이었다. 자리에 눕혀도 잠을 자지 않았다. 동료들이 잠들면 다시 공터로 가버리는 통에 결국 모두가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훈련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세영님을 보니 그동안 논 것 같아.” 괴롭게 말한 디안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쯧쯧 혀를 찬 시디발라가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그래도 저러니까 강해질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은 들잖아. 세상은 공평한 거거든.” “나도 세영님처럼 수련하면 강해질까?” 디안이 혹시 하는 얼굴로 물었다. 우움 하고 고민하던 시디발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귀여운 얼굴로 심각하게 “우리는 아마 안 될 거야. 애초부터.” 하고 말했다. 위로는 안 되었지만, 납득은 되었다. 디안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세영님, 이제 식사하세요!” 자포자기한 그들과 달리 마리엔은 새로운 길을 찾았다. 세영이 먹으러 오지 않으면 자신이 가져가면 그만이었다. 쟁반 가득 먹을 것을 담아온 그녀는 세영의 옆에 서서 하나하나 입에 넣어주기 시작했다. 몇 번의 경험상 수련에 방해되지 않게 먹이는 법도 터득했다. 우물우물 입을 움직이는 세영을 쳐다보던 마리엔이 물었다. “맛있어요?” 세영은 한참 후에 고개를 끄떡였다. 이 정도의 반응을 보여주는 것도 상대가 마리엔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음식을 가져오는 것도, 말을 거는 것도 귀찮아했을 것이다. “다행이에요. 많이 드세요.” 수줍게 웃은 마리엔은 다시 조그맣게 자른 음식을 세영의 입에 넣어주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는 게 이런 마음인 듯했다. 사실 세영에겐 도움이 아니라 방해라는 생각이 들면 조금 우울했지만, 그래도 음식을 가져오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리먼을 본지 오래된 것 같네요. 어디 갔어요?” 잠시 수련을 멈춘 세영이 쟁반에 놓인 컵을 들며 말했다. 오래 입을 열지 않아서 조금 잠긴 목소리였다. 세영이 뭔가를 물어본 것에 놀랐던 마리엔이 이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을 근처를 조사하면서 돌아다니고 있어요. 뭔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대요.” “그래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한 세영이 물을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 마리엔은 리먼에게 성과가 좀 있는지 물어볼 것을 그랬다고 후회했다. 모처럼의 대화가 끊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깐 고민하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카라드 씨도 수련을 하는 중이에요. 세영님께 자극을 받았나 봐요.” “읭?” 세영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벌써 며칠 된 일이었는데, 까맣게 몰랐던 모양이었다. 마리엔은 지금쯤 숲에서 수련하고 있을 남자를 떠올리며 조금 안됐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심술궂다고 느끼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마리엔의 동정을 산 남자는 마을 서쪽의 공터에서 목검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사실 그의 수준에서 이런 훈련은 별 의미가 없었지만, 번잡한 생각을 없애는 것에는 꽤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왜 그렇게 화가 났지요?” 검이 멈추길 기다렸다는 듯이 명랑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남자는 천천히 검을 내리고 그를 돌아보았다. 아리스타타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설마, 주인님께서 놀아주지 않으셔서?”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남자는 그의 말을 끊듯이 물었다. 세영이 함께 있을 때와 달리 차가운 목소리였다. 아리스타타의 얼굴이 대번에 뚱해졌다. “저번 일은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그렇지만 아주 잠깐 만난 것뿐이라는데, 그렇게 화낼 필요가 있어요? 집착하는 남자는 매력이 없다고요.” 남자의 목검이 사납게 움직였다. 새카만 빛줄기가 검 끝에서 튀어 나가 아리스타타의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부서진 목검을 내던진 남자가 말했다. “당신이 지금 저를 화나게 하고 있습니다. 용건이 있다면 빨리 말씀해주십시오.” “할 말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지금의 당신에겐 말해도 소용이 없겠네요. 다음에 하죠.” 한숨을 내쉰 아리스타타가 몸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남자는 그가 떠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지금 말씀하십시오. 이런 식의 대화라면 다음에 또 이어지는 건 사양하고 싶습니다.”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인 아리스타타가 장난스러운 기색을 버렸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구원자님에 대한 당신의 감정이 진짜라고 생각하나요?” ──────────────────────────────────── 달빛 호수 (5)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남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리스타타는 그것이 분노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분노를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남자를 자극하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아니면 말해줄 사람이 없잖아?’ 엘프들은 원래 명랑하다. 장난스럽고 쾌활하지만, 그만큼 책임지는 일은 싫어한다. 족장이 되기 싫어서 가출하는 엘프가 있을 정도였다. 아리스타타 역시 어쩔 수 없는 엘프라 자신의 일이 아니면 모른 척하는 편이었다. 다른 엘프보다 손가락 한 마디만큼 더 있는 책임감 때문에 이 꼴이 되었지만. -너도 괜히 왔다 갔다 하지 말고 태도 확실하게 해라. 그놈이 아니라고 확실히 쳐낼 건지, 그놈의 2세 정도로 생각하고 잘해줄 건지. 괜히 어정쩡하게 굴다 상처 주지 말고. 그 말만 듣지 않았어도, 이번에도 그냥 모른 척 넘어갔을 텐데. 속으로 입을 삐쭉거린 아리스타타가 말했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이유 없이 좋았죠? 왠지 시선이 떨어지지 않고, 주변의 공기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고, 계속 함께 있고 싶고. 뭐, 첫눈에 반했다고 착각할 만하죠.”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보고 있었다. 여전히 창백한 얼굴에 눈만 기묘하게 빛났다. 그것이 꼭 공격을 준비하는 맹수 같았지만, 아리스타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끝맺었다. “하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아직도 제가 인형인 것 같습니까? 기쁜지 슬픈지, 당신이 알려줘야 느낄 수 있는 그때의 소년처럼 보입니까?” 당장 달려들 것 같았던 남자는 의외로 침착하게 되물었다. 그는 아리스타타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차분하고 냉정한 성격이었다. 한숨을 쉰 아리스타타가 말했다. “아니요, 당신은 그가 아니니까요.” “…….” “당신은 나스쿤이 주워오고 제가 막내라고 불렀던 그 아이가 아니에요. 어쩌다가 그렇게 착각하게 됐는지 모르지만, 당신도 뭔가 위화감을 느끼고 있지 않나요?” 영혼과 영혼은 섞일 수 없다. 그건 물과 기름을 섞는다는 말과 비슷했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눈이 아플 정도로 뒤섞인 영혼을 갖고 있었다.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영혼의 키메라였다.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건 미안해요. 솔직히 말하면 죽은 그 애가 돌아온 것 같아서 좋았거든요. 하지만 확실하게 하라고 혼났으니까 말해야 할 것 같아서요.” 아리스타타는 덤덤하게 말했다. 남자의 안색이 죽은 사람처럼 창백해졌다. 한참이나 굳어져 있던 남자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저는, 무엇입니까? 300년 전의 그도 아니고 카벨 루스타나도 아니라면 저는 대체….”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제겐 그냥 여러 가지 영혼이 섞여 있는 것처럼 보여서요. 그래서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리스타타가 어깨를 으쓱했다. 멍하게 그를 바라보던 남자가 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잠깐 사이에 황폐해진 눈으로 아리스타타를 보며 물었다. “그럼 당신은 그분에 대한 제 감정이 뭐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탐욕.” 아리스타타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영혼을 자신의 것으로 삼잖아요. 구원자님처럼 강렬하고 힘 있는 영혼이라면 충분히 탐을 내겠죠. 먹음직스러운 먹이 같은 거랄까. 그걸 애정으로 착각한다면 언젠가 분명 문제가 생길 거예요.” 그러자 남자는 웃었다. 미소라고 부르기엔 힘이 없었지만, 그 말을 듣고 웃을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눈을 동그랗게 뜬 아리스타타에게 그가 말했다. “제 감정에 대한 당신의 추측들. 그건 모두 틀렸습니다. 저는 그분께 첫눈에 반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무어라 말을 잇다가 멈칫한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잠시 아래로 시선을 내렸던 그가 다시 아리스타타를 보고 말했다. “하실 말씀은 그게 전부입니까?” “제 말을 믿지 않는 건가요?” 아리스타타가 의아하게 물었다. 말없이 그를 보던 남자가 “상관없을 뿐입니다.” 하고 답했다. 그는 자신에게 들려주듯 말했다. “제 감정에 어떤 이름이 붙든 상관없습니다. 그분이 제게 소중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 남자는 다시 웃었다. 그는 몸을 굽혀 목검의 파편을 주워들고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고 인사했다. 아리스타타는 옆을 스쳐 지나가는 남자를 붙잡지 않았다. 남자의 발길이 향한 곳은 세영이 있는 공터였다. 이유까지는 떠올리지도 못했다. 지금 당장 그녀를 봐야겠다는 절박함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아, 왔어요?” 수련 중일 거라는 생각과 달리 세영은 그늘에 앉아있었다. 하나로 묶었던 머리도 풀고 옷도 갈아입은 상태였다. 싱긋 웃은 그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요. 방해될 것 같아서 나중에 찾아가려고 했는데.” “…저를, 말입니까?” 자기도 모르게 되물은 남자는 혀를 깨물 뻔했다. 왠지 그녀의 앞에 있으면 바보가 되는 것 같았다. 멋쩍게 머리를 긁적인 세영이 말했다. “음, 저도 오늘 수련이 일찍 끝나서요. 괜찮으면 이 근처나 같이 걸을래요?” 수련이 일찍 끝날 리는 없으니, 일부러 시간을 낸 것일 터였다. 무어라 입을 열려던 남자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성큼 다가온 세영이 “싫어요?” 하고 싱긋 웃었다. 남자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이 사람이 좋다. 볼 때마다 조금씩 좋아져서 이젠 저항할 수 없는 감정이 되었다. 좋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이유 없이 좋았죠? 왠지 시선이 떨어지지 않고, 주변의 공기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고, 계속 함께 있고 싶고. 뭐, 첫눈에 반했다고 착각할만하죠. 아리스타타의 말이 떠올라 손에 힘이 들어갈 뻔했다. 첫눈에 반했다라. 쓰게 웃은 남자가 옆에서 걷고 있는 세영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처음’은 두 번이었다. 기억을 잃기 전과 기억을 잃은 후의 첫 만남. 남자는 그 순간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전에 만난 적 있지 않아요? 반가움이 담긴 눈동자. 그것과 마주쳤을 때 그가 느낀 감정은 혼란과 두려움이었다. 그때는 그저 어린 소녀로만 여겼는데, 무엇이 그렇게 꺼려졌는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녀의 물음에 어리석은 말을 내뱉고 당황해서 도망치는 것에만 급급했다. -정신이 들어요? 두 번째의 첫 만남은 좀 더 강렬했다. 백지상태의 그에게 그녀는 일종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제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상하게 두려웠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거역할 수 없는 이를 앞에 둔 두려움이었다. 주인에 대한 두려움과 껄끄러움, 그것이 너무 강렬해서 다른 인상을 모두 짓눌러 버렸다. 아리스타타가 말한 달콤한 감정 따위는 느낄 틈도 없었다. “무슨 생각 해요?” 세영의 말에 멈칫 고개를 든 남자가 얼굴을 붉혔다. 왠지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세영님과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 그때요.” 세영이 조금 난감하게 뺨을 긁적였다. 남자는 내내 가지고 있던, 하지만 선뜻 묻지는 못했던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때는 왜 혼자 계셨던 겁니까.” 그때의 세영은 조르디아를 돌아다니기엔 너무 가벼운 차림이었다. 한낱 불량배들에게 당할 사람은 아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조금 아찔해졌다. 그렇게 도망치지 말고 숙소까지 데려다줬어야 했다고 내내 후회했다. “그게… 어쩌다 보니 길을 잃어서요.” 세영이 멋쩍은 얼굴로 고백했다. 남자는 민망해하는 그녀를 보고 미소 지었다. 세영은 무서울 정도로 강한 사람이지만, 조금은 무방비하고 자신을 잘 돌보지 않는 면이 있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감히 손을 뻗을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지.’ 두려움이 희석된 자리에 기묘한 책임감이 생겼다. 자신이 아니면 아무도 그녀를 잡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당연하게도 세영은 남자의 손에 닿지 않았다. 조금은 귀찮은 듯이 사무적인 태도로 일관할 뿐이었다. 샤이렌드라에서 보여준 관심이나 따뜻한 눈빛은 그만의 착각인 것 같았다. 그것이 이상하게도 괴로웠다. 왜 괴로운지 모르면서도 홀로 가슴앓이했다. “카라드.” 세영이 제자리에 멈추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사실 그건 남자의 이름이 아니었지만, 그녀가 그렇게 부른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남자의 시선에 머쓱하게 웃은 세영이 말했다. “제가 좀 한 가지에 몰두하면 다른 게 안 보이는 성격이거든요. 절대 소중하지 않다거나, 하찮다거나 그렇게 생각해서 잊어버리는 건 아니고 그냥….” “…….” “미안해요. 제가 수련에만 정신이 팔려 있어서 서운했죠?” 뜻밖의 사과를 받은 남자는 침묵했다. 그녀가 제가 감춘 마음을 다 읽었을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아마도 서운하리라 짐작해서 건넨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약해져 있던 마음은,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흔들렸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도 재능이라면 그녀에겐 천부적인 재질이 있었다. ‘그때도 분명 이런 느낌이었는데.’ 그때는 조르디아를 떠나는 날이었다. 긴장한 탓이었는지, 배에 오른 뒤에는 계속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지러움을 참기 위해 애쓰고 있는데 뜻밖에도 세영이 다가왔다. -어디 아파요? 내내 냉정하던 그녀답지 않게 상냥한 손길이었다. 그녀가 저를 싫어한다고 착각하고 있었기에 당황스러우면서도 기뻤다. 그래서 저를 부축하는 손길을 끝까지 사양하지 못했다. 마법과도 같은 순간은 계속 이어졌다. 세영은 그의 불면증에 관심을 보였고 걱정하기까지 했다. 갈수록 가슴이 무섭게 뛰어서 이상할 정도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굉장히 미인이시네요. 정말 별것 아닌 한마디였다. 하지만 싱긋 웃으며 목걸이를 돌려주는 세영을 본 순간 자신이 그녀를 좋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저의 괴로움이 거기에서 비롯되었음을 느꼈다. 그 미소를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다는 가당찮은 욕심이 생겼으므로. “괴로웠습니다.” 괜찮다는 거짓말은 할 수 없다. 괜찮다고 말하면 영영 저를 돌아보지 않을 것 같아서 무서웠다. 떼를 쓰고 매달려서라도 붙잡고 싶었다. “저를 잊으신 것 같아서 두렵고, 제가 소중하지 않은 것 같아 괴로웠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요.” 쩔쩔매는 그녀를 보고 미소 지은 남자가 세영의 손을 끌어 제 뺨에 갖다 댔다. 따뜻한 온기에 가슴에 맺혔던 것들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제게 와주셔서 기쁩니다.” 뺨에 닿은 손가락이 움찔했다. 당황한 표정을 그대로 드러낸 세영을 보고 남자는 소리 내어 웃었다. 세영의 얼굴이 붉어지며 입술이 달싹였다. 남자는 충동적으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어?” 놀란 듯 눈을 깜빡이는 세영을 보고 걱정스러워진 그가 “싫으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피식 웃은 세영이 말했다. “잘 모르겠는데요. 한 번 더 해보면 알 것 같은데?” 당황하는 그를 끌어 좀 더 길게 입 맞춘 그녀가 웃었다. “역시 좋네요.” 하고 덧붙이는 말에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 세영이 맞잡은 손을 흔들며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왠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남자는 잠시 넋을 잃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 감정이 무엇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무어라 이름을 붙이든, 그를 쓰러트리고 무릎 꿇리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처럼 간절하게 누군가를 바라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마음이 깊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거역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있었다. “제가 만약….” 충동적으로 입을 연 순간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비명이 터졌다. 와삭와삭하고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에 이어 또 다른 비명과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이 들렸다. 얼핏 듣기에도 시디발라와 디안의 목소리였다. 두 사람의 걸음이 뚝 멈췄다. “뭐지? 공격?” 잠시 허공을 바라보던 세영이 손을 놓고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남자는 갑자기 비어버린 손을 꾹 움켜쥐었다. 치솟는 감정들을 눌러 죽인 그는 세영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 달빛 호수 (6) ‘너무 방심했어.’ 세영은 맵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는 점을 확인하며 생각했다. 파티원을 나타내는 푸른 점과 적을 의미하는 붉은 점이 바짝 붙은 채로 이동 중이었다. 빠르게 깜빡이는 점은 숲의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파티원이 몹에게 납치당하는 일은 처음인데….’ 게임의 몬스터는 수동적이다.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면 먼저 찾아와 공격하거나 수작을 부리지 않는다. 무의식중에 이곳 또한 안전할 거라고 생각해서 동료들을 풀어놨다. 바보 같았다고 혀를 찬 세영이 뒤따라오는 사슴을 돌아보았다. “먼저 가서 잡을게요. 이러다 정말 놓칠 것 같아서요.” 대답을 들을 틈도 없이 곧바로 질주 스킬을 써서 땅을 박찼다. 요란한 시스템 메시지가 스킬 포인트가 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 전력을 다해 스킬을 쓰자 발이 허공에 뜬 채로 날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지나간 뒤에는 사나운 바람이 몰아쳤다. 한 레벨이 올라간 스킬의 위력은 대단해서, 세영은 금방 적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체감하기에는 한 단계가 아니라 서너 단계는 훌쩍 올라간 느낌이었다. 역시 버프 중의 버프는 빽이라는 실감이 들었다. ‘내 팔자에 빽 찾을 날이 있을 줄이야.’ 피식 웃은 세영이 아이스 스피어를 캐스팅했다. 주력인 격투술에 비해 보조인 빙결마법은 거의 수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가 숲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파티원들을 구출하기에는 최적의 방법이었다. 시야에 적의 모습이 들어왔다. 온몸이 시커멓고 등이 구부정한 모습이었다. 덩치는 예상외로 크지 않았다. 제 몸뚱이의 반이 넘는 시디발라를 들고 빠르게 달리는 것을 보면 보기보다 힘이 좋은 듯했다. 상황 파악을 끝낸 세영은 공격 시점을 재었다. ‘앞으로 네 걸음 더.’ 세영은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림자를 향해 얼음의 창을 날렸다. 빗나가나 했던 창은 다시 나타난 그림자의 등에 퍽 박혀 들었다. “키에에엑!” 등을 꿰뚫린 적이 날카롭게 울부짖더니 쩌저적 얼어붙었다. 그 틈에 달려간 세영이 얼음덩이가 된 놈의 팔에서 시디발라를 꺼냈다. 축 늘어진 시디발라의 온몸에 검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묻어있었다. “이건 또 뭐야?” 세영이 인상을 쓰며 그것을 문질렀다. 그러자 액체가 세영의 손을 피해 홍해처럼 갈라졌다. 장난삼아 콕콕 찔러보던 세영은 뭔가를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 맞다. 디안도 잡혀갔지.’ 그녀는 멀리서 달려오는 카라드를 확인하고 시디발라를 내려놨다. 부탁한다는 말을 던지자마자 또다시 질주 스킬을 썼다. 그녀의 몸이 적을 향해 화살처럼 날아갔다. 하지만 두 번째 적을 따라잡았을 때, 놈은 이미 포위된 상태였다. 어디선가 나타난 엘프와 꼬마 엘프들이 놈에게 화살을 날렸다. 순식간에 고슴도치가 된 적이 풀썩 쓰러졌다. 다행히 놈이 들고 있던 디안은 생채기도 없이 무사했다. 신기에 가까운 활 솜씨였다. “잡았냐?” 깃털처럼 가볍게 내려선 세영이 물었다. 전에 없이 침울한 표정이 된 엘프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감시망을 뚫고 들어온 줄 미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꼬마 엘프들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낑낑거리며 디안을 바닥에 눕히고 차가운 물을 끼얹었다. 그러자 디안의 온몸에 묻어있던 구정물 같은 것이 씻겨나갔다. 그의 곁으로 다가가려는 세영을 붙잡은 엘프가 고개를 저었다. “가까이 가시면 안 돼요.” “왜?” “오염되니까요.” 그제야 세영은 그가 멀찍이 떨어져 있는 이유를 알았다. 그 구정물 같은 것이 예사 물건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애들만 부려 먹느냐는 시선을 보내자 엘프가 멋쩍게 웃었다. “님피드들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성체가 된 엘프들은 오염에 취약해요. 인간과 수인족은 오염에 강하고, 그냥 몸에 묻은 정도니까 회복될 수 있을 겁니다.” “…회복?” 왠지 안 좋은 느낌이 들었다. 엘프놈을 빼면 죄다 어린애뿐이었던 마을과 시커멓게 물든 몬스터, 이상한 구정물과 회복이라는 단어. 마음에 걸리는 것을 모으자 아주 싫은 그림이 나왔다. 세영은 엘프의 손을 뿌리쳤다. “아까 만졌는데 아무런 이상이 없었거든.” 구정물이 알아서 피한 거지만, 어쨌든 제게는 해가 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성큼성큼 다가간 세영은 꼬마 엘프의 손에서 물동이를 빼앗았다. 그녀는 화살꽂이가 된 몬스터 위에 물을 쏟아 부었다. 그러자 시커멓게 물든 몸뚱이에서 진흙 같은 것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드러난 것은 무척 눈에 익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몸을 숙인 세영이 죽은 몬스터의 목을 짚었다. 곧바로 몬스터의 이름이 표기되었다. <오염된 엘프> 짐작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한 세영이 엘프놈을 쳐다보았다. 놈은 모든 것을 체념한 것 같은 기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가 구하고 싶다는 도움이 이거였냐?” “오염된 저희 일족과 오염의 숙주를 제거해주시길 바랐습니다. 구원자님께서 제 헌신에 감동하실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너무 빨리 알아버리셨군요.” 유감스러운 것처럼 말하는 엘프였지만,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세영은 그의 얼굴에서 얼핏 나스쿤을 본 것 같았다. ‘이쪽 역시 정상은 아니군.’ 현자들이 하나같이 맛이 간 것을 보면 이것도 일종의 직업병인 모양이었다. 사슴은 저 모양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세영은 뒤늦게 아차 했다. ‘사슴한테 오염된 시디발라를 줬는데.’ 급히 몸을 돌리던 세영은 막 도착한 사슴을 발견했다. 시디발라를 안아 든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급하게 다가간 세영이 그를 살폈다. 갑자기 붙잡고 이리저리 더듬는 손에 사슴이 얼굴을 붉혔다. “괜찮아요? 어디 아프거나 기분 나쁘거나 하진 않고요?” “전 괜찮습니다. 다만 시디발라의 상태가….” 사슴은 정신을 못 차리는 시디발라를 내려다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꼬마 엘프들이 그의 손에서 시디발라를 받아가서 몸에 묻은 것을 씻기기 시작했다. 엘프가 무척 흥미로운 표정으로 사슴을 살피며 말했다. “역시 ‘이쪽’도 오염이 묻진 않는군요.” “어떻게 된 겁니다, 아리스타타. 이번엔 꼭 설명을 들어야겠습니다.” 사슴이 제게 던져진 말에는 신경 쓰지 않고 물었다. 그를 빤히 쳐다보던 엘프가 아무래도 좋다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말씀드릴 거였어요. 다른 분들도 함께 들었으면 하니 일단 자리를 옮기죠.” 오염을 씻어낸 디안과 시디발라는 호수로 옮겨져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사정을 들은 동료들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마리엔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둘을 보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진정되기까지 기다렸던 엘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별로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300년 전. 엘프, 아리스타타는 자신의 나무이자 일족의 수호목을 매개로 주신을 봉인하려 했다. 봉인은 성공적이었지만, 그 대가로 그녀는 동생이자 분신인 마타라키를 잃었다. “저는 일족을 이끄는 족장, 마타라키는 일족의 수호자였습니다. 하지만 봉인의 여파로 마타라키는 오염되었고, 일족을 공격하여 오염을 전염시켰습니다.” 오염된 엘프에게 장시간 접촉하거나 상처를 입으면 천천히 오염된 엘프로 변한다. 일단 오염되어 버리면 별다른 해결책이 없었다. 그저 호수의 물로 변하는 시간을 늦출 수 있을 뿐이었다. 아리스타타의 설명을 들은 세영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좀비 같은 건가?’ 접촉이나 상처로 감염되는 것을 생각하면 좀비와 비슷했다. 하지만 오염된 엘프들은 움직임이 빠르고 힘이 셌으며 은신과 같은 엘프의 기술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좀비보다는 타락한 다크엘프에 가까운 것 같았다. 타락이 전염된다는 것이 문제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미리 알았다면 어떻게든 대처했겠죠. 하지만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때의 마타라키는 충실한 수호자이자 사랑스러운 동료였으니까. 누가 그의 변화를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일족 전체가 봉인의식을 위해 돕기 위해 모여 있는 상태였다. 오염된 마타라키는 그들을 손쉽게 상처 입힌 뒤에 북쪽 숲으로 도망쳤다. 엘프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둘 오염된 엘프로 변해갔다. 그 뒤는 지옥과도 같았다. “저는 무력하고 무능했습니다. 족장이면서도 빠르게 판단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오염된 엘프들을 제거하기로 했을 때는 이미 일족의 반수 이상이 당한 뒤였습니다.” 그리고 지루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엘프들은 어제의 동료, 연인, 친구와 싸워야 했다. 차라리 이성이 없는 괴물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적은 과거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로 그들을 죽이고 싶어 했다. 적을 쓰러뜨려도 누구도 기뻐하지 않았다. 비통한 울음소리가 숲을 울렸다. “그러다 아주 우연히 님피드 상태의 아이들은 오염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직 아무것도 깃들지 않은 아이들이기에 오염도 되지 않는 것 같더군요.” 아리스타타는 즉시 아이들을 님피드 상태로 고정했다. 엘프들은 자신의 나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원래 육신보다 나무가 본체에 더 가까운 종족이었다. 그래서 나무의 성장을 묶으면 육신도 성장하지 않았다. 여기까진 일족 내부에서도 반발이 있었지만,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아리스타타가 님피드 아이들을 이끌고 오염된 엘프를 없애자 일족 전체가 들고일어났다. 그들은 일족 회의를 통해 아리스타타의 족장 자격을 박탈했고, 호수를 버리고 다른 숲으로 이주하기로 했다. “막으려고 했지만,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리스타타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대로 계획되지 않은 이주는 참사를 불러왔다. 이주 계획을 어떻게 알았는지, 적들의 대대적인 공격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일족 대부분이 희생되었다. 결국, 아리스타타에게 남은 것은 님피드 아이들과 습격에서 겨우 살아남은 일족 수십 명뿐이었다. 아리스타타는 남은 일족들을 정리해 먼 혈족이 사는 곳에 맡겼다. 그리고 님피드 아이들과 함께 숲을 지키면서 오염된 엘프들을 죽였다. 300년 전부터 지금까지 그에겐 단 한 순간의 평온도 없었다. “너는 용케 오염을 피했다?” 턱을 괸 채로 이야기를 듣던 세영이 말했다. 그러자 피식 웃은 아리스타타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벗기 시작했다. 세영의 옆에 있던 사슴이 움찔했지만, 곧 드러난 몸을 보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흑단처럼 검고 매끄러운 피부 위에 나무껍질처럼 우둘투둘한 것이 돋아나 있었다. “저는 그렇게 운이 좋지 않아서요. 마타라키가 제일 먼저 찌른 것이 옆에 있던 저였지요.” ──────────────────────────────────── 달빛 호수 (7) 그를 빤히 쳐다보던 세영이 벌떡 일어나 주먹을 내질렀다. 퍽 소리와 함께 아리스타타가 쿵 나가떨어졌다. 놀란 마리엔이 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아팟! 진짜 너무해요!” 배를 부여잡고 콜록거리던 아리스타타가 항의했다. 세영은 제가 친 부분을 빤히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역시 안 되나.” “어떻게 이런 슬픈 사연을 듣고도 절 때릴 수가 있어요!” “시끄러워, 인마. 그냥 한번 시험해본 거라고.” 구정물이 그녀의 손이 닿자마자 갈라지기에 오염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쉽게 풀리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사실 오는 내내 두들겨 맞았으니, 효과가 있다면 놈이 먼저 알아챘을 것이다. 머리를 긁적인 세영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다른 놈들은 다 맛이 간 상황에서 왜 너만 멀쩡한 건데?” “이게 멀쩡해 보이세요?” 아리스타타가 제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세영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아니, 뇌에 오염이 쏠린 것 같긴 하다.” “…너무해.” 입을 삐쭉거린 아리스타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먼이 재빨리 그를 부축해주었다. 고맙다고 말한 아리스타타가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그제야 뻣뻣하던 사슴의 얼굴이 풀어졌다. 매무시를 정리한 아리스타타가 말을 이었다. “전에 엘프는 모두 자신의 나무를 갖고 있다고 말씀드렸죠?” 엘프에겐 고대 정령의 습성이 남아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번식이었다. 엘프들은 단순히 짝짓기로 번식하지 않았다. 우선 나무가 태어나고, 그것이 자라 영혼이 깃들면 부모가 될 엘프가 정해진다. 그들이 결합하여 육신을 만든 후에 나무의 영혼을 옮겨오는 것이다. “엘프가 죽으면 나무도 죽습니다. 하지만 나무가 죽는다고 엘프가 죽지는 않아요. 고향을 잃은 것 같은 상실감을 느낄 뿐이죠. 단 하나의 예외가 있는데 수호목은 연결된 엘프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수호자와 족장을 탄생시키죠.” 고대의 엘프들은 모두 짝짓기 없이 나무의 열매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영혼만이 잉태되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일족을 이끄는 족장과 수호자만큼은 계속 수호목이 탄생시켰다. 수호목은 한 대에 두 개의 열매를 맺는다. 열매 중 하나는 족장이, 나머지 하나는 수호자가 된다. 성별은 자라면서 정해지지만, 대부분 여성이 족장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부모가 없어서 저놈이 저 모양인가.’ 세영은 다소 기괴한 엘프의 번식법을 들으며 생각했다. 그때 주저하던 마리엔이 물었다. “저기, 그럼 하프엘프는 어떻게 태어나는 거죠? 당신의 말대로라면 하프엘프는 아예 태어나지 않아야 하는 거잖아요?” 그러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아리스타타가 말했다. “혹시 그거 알고 있나요? 인간에게 잡혀간 일족의 여자는 혼혈을 잉태하지만, 남자는 다른 종족을 잉태시키지 못한다는 걸요.” 마리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처음 엘프들을 잡아들인 노예 상인은 그들을 번식시켜 어린 엘프를 팔아치우려 했다. 하지만 인간의 손에 떨어진 엘프들은 불임이라도 된 것처럼 번식하지 않았다. 가끔 여자 엘프가 혼혈아를 낳았을 뿐이다. 마리엔 또한 그렇게 태어난 경우였다. “엘프는 혼혈을 같은 일족으로 인정하지 않아요. 우리는 본체가 나무고, 육체는 부가적인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당신과 같은 혼혈은 나무의 정을 이어받지 않았으니, 귀가 조금 긴 인간이나 마찬가지죠.” 인간을 좋아하기에 배척하진 않지만, 같은 일족으로 여기진 않는다. 냉혹한 단언에 마리엔이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세영이 곧바로 주먹을 들었다. “왜 오염이 덜 됐는지 말하라고 했더니 헛소리나 지껄이고.” “말하려고 했는데 마리엔 씨가… 알았어요! 말하면 되잖아요!” 위기감을 느낀 아리스타타가 꼬리를 내렸다. 그는 억울하다고 구시렁거리며 말을 이었다. “마타라키가 그렇게 된 이후에 수호목에 새로운 열매가 맺혔더군요. 우리가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판단한 거였죠. 하지만 저는 승복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그 열매를 먹었습니다.” 새로운 수호자와 족장을 탄생시키는 열매에는 강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으로 300년 동안 오염에 저항하며 버틸 수 있었다. 여성을 버리고 남성이 된 것도 좀 더 강한 힘을 손에 넣기 위해서였다. 설명은 간단하지만, 자신을 뒤를 이을 존재를 잡아먹었다는 것과 똑같은 말이었다. 리먼이 조금 안쓰러운 눈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습니까?” “마타라키를 죽여야 하니까.” 아리스타타가 스산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전 300년 동안, 그 애를 죽이겠다는 생각만으로 살았습니다.” 하고 덧붙였다. 날이 저물자 숲에도 어둠이 내렸다. 그늘진 숲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졌다. 아리스타타는 내일 다시 치료를 계속하자며 기절한 동료들을 마을로 옮겼다. 세영은 그들을 따라가지 않고 호수에 머물렀다. 다른 이들은 생각에 잠긴 그녀를 보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밤이 되자 호수 속을 떠다니는 은빛 알갱이들이 더욱 강한 빛을 내뿜었다. 시커먼 물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것들을 보고 있으니 우주가 생각났다. 우주치고는 모든 별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지만.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호수를 내려다보던 세영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다가온 사슴이 처연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왜 또 저런 표정일까 생각하던 세영이 피식 웃었다. “그냥 좀 멍해서요.” “…아리스타타 때문입니까?” 세영은 굳이 대답하지 않고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그러자 사슴이 그녀의 손을 잡고 쪼물거렸다. 나름의 위로인 같았다. 너무 순수한 거 아닌가 싶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풀리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때 사슴이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오염된 엘프들이라면 제가 처리할 수 있습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읭?” 세영의 이마가 절로 찌푸려졌다. 이 사슴이 왜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나 싶었다. 어리둥절한 시선을 받은 사슴이 웃었다. “그들을 죽이는 걸 꺼리시는 게 아닙니까. 저 역시 오염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니, 굳이 세영님께서 나서실 필요는 없습니다.” 예쁜 얼굴로 꽤 과격한 소리를 하는 사슴이었다. 머쓱하게 뺨을 긁적인 세영이 다시 호수로 눈을 돌렸다. “주신이 원하는 게 정말 엘프 대학살일까요?” 차라리 엘프들이 좀비로 변한 상태라면 ‘아니, 뭘 이런 걸 다.’ 하고 감사히 경험치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엘프들은 단순히 오염된 상태일 뿐이었다. 단순한 오염치고는 상태가 나쁘지만, 그렇다고 닥치는 대로 죽여 버리기엔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이 퀘스트의 목적이 뭘까?’ 모든 퀘스트에는 목적이 있다. 세영은 처음 몬스터를 발견했을 때 스킬 수련용이라고 생각했다. 혼자 할 수 있는 수련은 이제 거의 끝났고 사냥으로 올리는 것만 남았다. 그런 시기에 적절하게 튀어나온 몬스터는 주신의 안배라고 여겨질 만했다. ‘하지만 그냥 받아먹으려고 하니까, 체할 것 같단 말이지.’ 세영이 고민하는 것은 이 ‘찝찝함’의 정체였다. 그녀에게 몬스터는 경험치를 주는 셔틀 정도였다. 놈들이 이전에 엘프였다고 해서 못 죽일 것은 없었다. 맵에 붉은색으로 뜨는 이상은 몬스터였고, 죽인다고 비난받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죽여주길 간절히 원하는 사람도 있었다. ‘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가 바로….’ 세영의 시선이 사슴을 향했다. 그녀가 던진 물음에 어떻게든 답하려고 끙끙거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그러고 보니 모리아에서도 사슴이 고뇌하는 모습에 인벤까지 탈탈 털어서 펠릭스를 강화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몬스터인 데스나이트 따위 굳이 살려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 처갓집 말뚝에 대고 절하는 타입이었나?’ 찝찝함의 정체를 깨달은 세영은 약간의 쇼크를 받았다. 처가 예쁘면 처갓집 지붕 위의 까마귀도 귀여워 보인다더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약해지는 모양이었다. 시끄럽게 꺅꺅거리는 엘프놈의 사정 따위를 봐주다니 말이다. “주신 또한 세영님의 손에 죄 없는 피를 묻히길 원하진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옆에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사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용이야 어쨌든 조곤조곤 말하는 모습이 예뻤다. 그걸 보고 있자니 뭐가 어찌 됐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시도해보고 안 되면 그때 가서 죽이면 되는 거지.’ 세영은 그냥 단순하게 가기로 했다. 뭐든 단순한 것이 제일이었다. 그녀는 슬며시 사슴의 양손을 붙잡았다. “물 묻히기도 아까운 손인데, 피를 묻혀서 되겠어요?” 움찔한 사슴이 “이미 익숙한 일입니다.” 하고 답했다. 피식 웃은 세영이 손을 끌어다 제 뺨에 갖다 댔다. 딱딱한 손이었지만, 뺨에 닿는 것만으로도 힐링 되는 느낌이었다. 이게 바로 애니멀 테라피인 모양이다. “제가 있던 곳에서는 청혼할 때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준다고 하거든요. 그런 말은 못할망정 저 대신 피 묻히라는 소리는 하고 싶지 않아요. 여자의 존심이 있지.” “…….” 뺨에 닿은 사슴의 손이 뻣뻣이 굳어졌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그녀를 응시하는 시선이 마구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세영은 피식 웃으며 그를 놓아주었다. “덕분에 생각이 정리됐어요. 고마워요.” 이만 돌아가자고 말한 세영은 가벼운 기분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사슴은 못 박힌 것처럼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뒤늦게 그가 뒤따라오지 않는 것을 깨달은 세영이 “뭐해요?” 하고 불렀다. 그제야 사슴이 삐걱삐걱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슴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던 세영이 손을 내밀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사슴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부끄러운지 손끝만 살짝 잡아오는 것에 세영이 다시 웃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손을 잡고 마을로 돌아왔다. 어두웠지만 발이 걸리거나 비틀거리는 일은 없었다. 아마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잔뜩 들뜬 상태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옷 벗어.” 세영이 툭 던진 말에 아리스타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의 옆에 있던 마리엔의 눈도 마찬가지였다. 아리스타타가 양팔을 교차해서 제 가슴을 가리자 세영은 더 기다리지 않고 손을 뻗었다. 아리스타타가 요란한 비명을 질렀다. “꺅! 기다려주세요. 처음인데, 허락도 없이 이런 건 싫어!” “뭔 헛소리야. 병신아.” 세영은 그의 멱살을 붙잡고 질질 끌고 나갔다. 집 앞의 마당에는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카라드와 님피드 아이들이 있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나무통에는 반짝이는 호수의 물이 가득 담긴 채였다. 카라드가 도살장의 소처럼 끌려 나오는 아리스타타를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입니까?” “협조하기 싫대요. 그냥 집어넣죠.” 세영의 말에 아리스타타가 “아무 설명도 안 했잖아요!” 하고 악을 질렀다. 솔직히 설명하기 귀찮았던 세영은 그를 그대로 나무통에 빠트렸다. 꼬마 엘프들이 물속에 파란 가루 같은 것을 풀었다. 그러자 대번에 풍성한 거품이 뭉게뭉게 올라왔다. 제법 구색을 갖췄다고 생각한 세영이 옆에 있던 빨랫방망이를 집어 들었다. 아리스타타의 안색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자, 잠깐만요. 설마 그걸로 절…?” “혹시나 해서 말해두겠는데, 너한테 유감은 없다.” 엄숙하게 말한 세영이 빨랫방망이를 휘둘렀다. ‘오염된 건 그냥 빨면 되겠지.’ 하는 지극히 단순한 결론이었다. 그 뒤 오랫동안 아리스타타의 비명소리가 메아리쳤다. “이걸로는 안 되나 보네.” 빨래방망이를 내던진 세영이 팔짱을 꼈다. 곤죽이 되도록 두들겼지만, 물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변사체처럼 늘어져 있던 아리스타타가 몸을 꿈틀거렸다. 그의 입에서 억울함이 가득 담긴 통곡이 흘러나왔다. “아, 안 되는 걸 알면서… 알면서 계속 때렸어.” “300년 묵은 빨래니까 좀 많이 패야 빠질 줄 알았지.” 세영이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러자 아리스타타는 얼굴을 감싸 쥔 채 엉엉 울었다. 잠시 고민하던 세영이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우는 척하던 아리스타타가 화들짝 놀라 그녀의 손을 밀어냈다. “무, 무슨 짓이에요!” “가만히 있어 봐. 일단 봐야 물빨래를 하든, 기름 빨래를 하든, 방법을 내놓을 거 아니야.” “싫어싫어! 이 변태!” “세영님, 차라리 제가 하겠습니다.” 아리스타타가 두들겨 맞을 때는 보기만 하던 사슴이 나섰다. 아리스타타가 반쯤 벗겨진 옷을 여미며 “그게 더 기분 나빠!” 하고 소리쳤다. 세영이 그의 머리를 퍽 때렸다. “어쩌라고, 시발아.” “흐어엉, 싫어요! 전 순결한 몸이라고요!” “순결이 다 얼어 죽었냐?” 세영이 그의 옷을 바투 잡고 양쪽으로 확 열어젖혔다. 단추들이 이리저리 튕겨나가며 가슴팍이 훤히 드러났다. 나무껍질처럼 달라붙은 오염도 그대로였다. 덕지덕지 앉은 껍질이 꼭 불린 때 같았다. 더러운 느낌에 인상을 쓴 세영은 오염 위에 거품을 끼얹은 후에 북북 문질렀다. “으아악! 아팟! 아파팟!” 아리스타타가 갓 잡아 올린 고등어처럼 펄쩍펄쩍 뛰었다. 가만히 있으라고 그의 등짝을 후려갈기던 세영은 사슴이 제 팔을 꽉 잡은 후에야 진정했다. 그때 멀리서 구경하던 마리엔이 아리스타타의 가슴을 가리켰다. “앗, 저기! 뭔가 변화가 있는 것 같아요!” 모두의 시선이 아리스타타의 가슴으로 향했다. 세영이 마구 문지른 오염을 타고 시커먼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효과가 있다는 것에 반색한 세영이 빨랫방망이를 집어 들었다. 아리스타타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구원자님이 만져주니까 벗겨진 것 같단 말이에요!” 빨랫방망이를 움켜쥔 세영이 멈칫했다. 아리스타타가 부끄러운 듯 몸을 꼬며 말했다. “사, 살살 만져주세요. 아프니까.” “…….” 잠시 할 말을 잃었던 세영은 제 팔을 꽉 움켜잡는 손을 느꼈다. 하얗게 질린 사슴이 <싫어. 정말 싫어. 말은 못하지만 죽어도 싫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머리를 긁적인 세영이 신발을 벗었다. 이어서 바지를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린 그녀가 아리스타타에게 물었다. “너 겨울 이불 어떻게 빠는지 아냐?” “…네?” “몰라? 걱정하지 마. 곧 알게 될 거야.” 아무래도 주신이 준 퀘스트는 <세영과 400개의 겨울 빨래> 같은 것이었던 모양이다. 한숨을 쉰 세영이 빨래통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 달빛 호수 (8) 아리스타타는 세영이 퍽퍽 밟을 때마다 시커먼 물을 줄줄 흘렸다. 더는 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밟고 나자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세영은 깨끗해진 아리스타타를 헹구며 빨래에 걸린 시간을 가늠했다. ‘생각보다 더 오래 걸리는데.’ 오염된 엘프 전체를 빨려면 몇 달은 걸릴 것 같았다. 몇 달씩 빨래만 하고 있을 생각은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기절한 아리스타타를 들고 통 밖으로 나오자 대기 중이던 사슴이 얼른 받아들었다. “뭘 무겁게 들고 다녀요. 잘 빨았으니 적당히 던져놓으면 될 거예요.” “죄송합니다.” 꼬마 엘프들에게 아리스타타를 넘겨준 사슴이 세영의 팔을 주물렀다. 혼자 빨래하게 해서 미안한 것 같았다. 옆에서 논 것도 아니고 더러워진 물을 버리고 새로 길어온다고 바빴건만, 시집살이라도 시킨 것처럼 기를 못 펴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왜 팔을 주물러요? 다리가 아니라?” “…….” 얼굴이 빨개진 사슴이 손을 멈췄다. 세영은 히죽 웃으며 “방에 가서 주물러줘도 되는데?” 하고 그를 놀렸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슴을 보고 있자니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이었다. 더하고 싶었지만, 왠지 성희롱이 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일단 한숨 자고 일어나서 결과가 어떤지 봐야겠어요. 만약 오염을 빼서 문제가 생기면 이 방법은 못 쓰는 거니까.” 300년이나 오염과 함께 살았다면 갑자기 사라졌을 때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아리스타타의 변화를 관찰해서 적절한 세탁법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샘플로 몇 마리 더 잡아와야겠네.’ 세영이 하품을 하자 눈치만 보던 마리엔이 “자리 정리해뒀어요. 어서 들어가서 주무세요.” 하고 말했다. 오염 때문에 다가오진 못했지만, 이것저것 챙겨주며 함께 밤을 새운 것은 고마웠다. ‘응?’ 아무 생각 없이 마리엔이 안내한 방으로 들어선 세영이 멈칫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방에 커다란 침대, 두 개의 베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어라?’ 하고 생각하는 순간 사슴의 등을 떠밀어 안으로 집어넣은 마리엔이 “걱정하지 말고 편히 쉬세요.” 하고 말했다. 뭐라고 할 틈도 없이 달칵 문이 닫혔다. ‘아하, 이게 바로 차려진 밥상이군.’ 고생했다고 사슴을 한 상 차려주다니 아주 넉넉한 인심이었다. 꽃으로 치장된 침대를 감상하던 세영이 힐끗 사슴을 쳐다봤다. 닫힌 문에 등을 바짝 붙인 사슴이 아주 빨갛게 익어있었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영이 물었다. “피곤하죠?” “…네?” 바짝 얼어버린 사슴이 되물었다. 어찌나 겁을 먹었는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뺨을 긁적인 세영이 말했다. “피곤하니까 빨리 자자고요.” “…….” 망부석이 된 사슴을 모른 척 등을 돌린 세영이 스킬로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놀란 사슴이 문짝에 쿵 부딪히는 소리를 냈지만, 역시 못 들은 척했다. 침대에 앉은 세영이 옆자리를 팡팡 두들겼다. “뭐 하고 있어요. 빨리 와요. 씻겨줄 테니까.” 본의 아니게 명령을 해버린 덕에 빨개진 사슴이 침대로 배달됐다. 세영은 클렌징 스킬로 아주 정성 들여 그를 씻겨주었다. 손아래서 바들바들 떠는 사슴을 보니 그동안 쌓아둔 흑심이 폭발할 것 같았다. ‘아니, 진정하자. 이러다가 접근금지 신청받을라.’ 세영은 막 나가려는 손을 진정시키며 사슴을 살폈다. 상대는 아주 섬세한 천연기념물이었다. 잘못 건드렸다가 뿔이라도 부러뜨리면 골치 아파진다. 게다가 실수로 빨리 오라고 명령을 내린 탓에 ‘침대에 올라왔으니 동의한 거 아닌가요?’ 하고 우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안 뛰쳐나갔으니 허락한 거 아닐까?’ 슬슬 이성을 잃어가는 머리가 ‘허락한 거겠지?’에서 ‘허락한 거라고 해줘!’ 라고 고쳐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세영의 손이 사슴의 옷을 그러쥐기 직전에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질투가 심한 편입니다.” “응?” 다행히 싫다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허락도 아닌 것 같지만. 어정쩡해진 손을 슬그머니 내린 세영이 “그랬어요?” 하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수줍게 웃은 사슴이 말을 이었다. “저도 제가 이렇게 질투가 심한지 몰랐습니다. 씻겨주는 것 외에 다른 뜻이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아리스타타를 만지시는 모습을 보니 참기가 힘들었습니다.” “…어, 그건 제가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아차 한 세영이 시무룩해진 사슴을 열심히 달랬다. 사실 사슴이 보는 앞에서 다른 남자의 맨가슴을 벅벅 문질렀으니 그녀가 잘못한 것은 맞았다. 세영의 눈엔 더러운 곰인형이나 다름없어 보였지만, 어쨌든 성별은 남자니까. ‘그럼 삐져있는데 내가 눈치 없이 군건가. 에이 씨, 타이밍도 참.’ 삐진 티를 전혀 안 내는 사슴이다 보니 제대로 헛발질을 하고 말았다. 안절부절못하는 세영의 손을 끌어 손등에 입을 맞춘 사슴이 말했다. “제가 옹졸하고 부족하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저는 이렇게 당신의 손을 잡을 때도, 입을 맞출 때도 질투하고 있습니다.” “……?” 어리둥절한 세영의 얼굴을 보고 눈을 내리깐 그가 “이건 카벨 루스타나의 몸이니까요.” 하고 덧붙였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세영은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다른 자의 손이 당신께 닿고, 다른 자가 당신께 입 맞추는 것 같아서 괴로웠습니다.” “아니, 그래도 지금은 사슴… 카라드의 몸이잖아요?” ‘흰 사슴이든 검은 사슴이든 맛있으면 그만 아닐까?’ 하는 세영과 달리 사슴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괴로움에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보니 차마 속마음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어, 음, 그럼 어떻게 하면 안 괴로울까요?” “…죄송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괴로울 예정이라는 소리였다. 세영은 심란한 기분에 마른세수를 했다. 그녀의 소매를 살짝 붙잡은 사슴이 “죄송합니다.” 하고 다시 한 번 사과했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그를 보니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 들어봐요.” 명령에 따라 자동으로 고개를 드는 사슴에게 쪽 입을 맞춘 세영이 말했다. “사람 참 나쁘네. 그럼 내가 이렇게 뽀뽀할 때마다 카벨 루스타나에게 하는 거라고 질투했다는 거잖아요?” “…….” “그럼 어떡할까요. 이제 뽀뽀하지 말까요?” 소매를 붙잡은 손에 꾹 힘이 들어갔다. 싫다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흔드는 사슴에게 세영은 다시 한 번 쪽 입을 맞췄다.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말해요. 그래도 안 미워하니까.” 그러자 사슴이 그녀를 꽉 껴안았다. 세영은 아무 말 없이 그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뭐든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은 그녀에 비해 사슴은 복잡하고 섬세했다. 뽀뽀 받는 건 좋은데 질투가 난다니, 그런 발상을 대체 어떻게 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반한 사람이 죄인이지, 뭐.’ 사실 손만 잡고 다니고 가끔 뽀뽀하는 사이라고 해놓고 갑자기 덮치려고 한 그녀의 잘못이었다. 혼전순결주의자인 사슴이 놀라 울며불며 고백할만했다. ‘아니, 그럼 내가 덮치지 않았으면 혼자서 끙끙 앓았을 거란 이야기잖아?’ 세영은 약간의 죄책감을 그것으로 떨쳐버렸다. 오늘 사슴을 덮친 것은 이 삽질을 알기 위함인 것 같았다. 그때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춘 사슴이 속삭였다. “제가 좋다고 말씀해주십시오.” 이 요망한 짐승이 또 무슨 수작인가 하고 몸을 떼어내자 당장 울 것 같은 얼굴이 보였다. 울망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사슴이 애원하듯 말했다. “단 한 번이라도… 거짓말이라도 좋습니다. 저를 좋아한다고 말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원래 그런 말 잘 안 하거든요.” ‘누나 쪽팔리게 왜 이러니?’ 하는 시선에 사슴이 팍 기가 죽었다. 이 세상의 서러움을 다 짊어진 것 같은 표정에 더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뒷머리를 긁적인 세영이 말했다. “에이 씨, 좋…으니까 사귀는 거죠. 그걸 꼭 제 입으로 들어야겠어요?” 꼭 들어야겠나 보다. 애절하기 짝이 없는 시선에 세영이 이마를 북북 문질렀다. 슬며시 시선을 피한 그녀가 말했다. “…좋아해요. 당연하잖아요.” “…….” 아무 반응이 없는 것에 불안해진 세영이 더 이상은 못한다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환하게 웃고 있는 사슴을 보고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요즘 익숙해져서 깜빡 잊었지만, 반짝반짝 빛을 내뿜는 사슴은 웬만한 심장으로는 버틸 수 없는 미모였다. 사슴이 그녀의 양손을 꼭 붙잡은 채로 물었다. “정말 저를 좋아하십니까?” “그, 그렇다니까요?” 세영은 저도 모르게 눈을 피하며 답했다. 발광 다이오드 같은 사슴을 맨눈으로 쳐다볼 용기가 없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녀의 손을 잡아끈 사슴이 말했다. “제가, 이 얼굴이 아니라도 계속 좋아해 주실 겁니까?” 세영은 그 말에서 어느 때보다 강한 불안을 느꼈다. 사슴은 그녀가 자신의 얼굴에 반한 것이 아닌지 불안한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카벨 루스타나를 의식하고 질투하는 모양이다. 피식 웃은 세영이 되물었다. “지금 제가 얼굴 밝힌다고 흉보는 거죠?” “…처음에는 이런 얼굴이라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한 번이라도 더 당신께 시선을 받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하지만 점점 더 욕심이 커져서 이 얼굴보다 저를 더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떨리는 눈에는 ‘저를 좋아해 주세요. 지금보다 더 좋아해 주세요.’ 하는 애원이 담겨있었다. 이것이 미인계라면 나라가 망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이런 눈으로 보는데 누가 감히 싫다고 내칠 수가 있겠는가. “전 원래 미인은 감상용이고 자연으로 보호해야지, 사귀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만약 지금의 얼굴에 아리스타타나 펠릭스 같은 성격이었으면 절대로 안 사귀었을 거예요.” “…….” “사슴 씨는 저한테 특별하다는 소리예요. 저 남자한테 좋아한다고 말한 것도 처음이거든요?” 세영의 고백에 잠깐 멍하게 있던 사슴이 웃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이마를 맞대고 “저를 또 사슴이라고 부르셨습니다.” 하고 속삭였다. 아차 한 세영이 “어, 그건….” 하고 버벅거렸다. 나름 조심한다고 했는데 이렇게 들통이 나는 건가 싶었다. 소리 죽여 웃은 사슴이 말했다. “당신께서 저를 사슴이라고 부르든, 개라고 부르든 상관없습니다. 기꺼이 그렇게 되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원하시는 대로 불러주십시오.” “아니, 그게….” 진짜 사슴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라고 변명하려는데 사슴의 입술이 살짝 닿아왔다. 세영은 그냥 변명을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닫힌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볕이 따스했다. 낮잠을 자기에는 퍽 좋은 날씨였다. ──────────────────────────────────── 달빛 호수 (9) ‘이러다 진짜 몸에서 사리 나오는 거 아닐까?’ 세영은 새근새근 잠든 사슴을 보며 생각했다. 밤새도록 물 긷느라 피곤했을 사슴은 “손만 잡고 잘게요.” 라는 그녀의 말에 넘어가 곤히 잠들었다. 이걸 귀엽다고 해야 할지, 괘씸하다고 해야 할지 모를 기분이었다. ‘에휴, 그래도 자는 모습이 예뻐서 봐줬다.’ 잘 차려진 밥상을 앞에 두고 이게 무슨 미련한 짓인지. 하지만 ‘카벨 루스타나’를 질투한다고 고백한 사슴을 감히 건드릴 용기는 없었다. 안 그래도 상처 많은 가슴에 또다시 금이 가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 시발. 처량한 내 신세.’ 남친이 생기면 뭐하나요. 관상용인데. 천장을 보고 한숨을 푹푹 쉬던 세영은 도저히 잠이 안 올 것 같은 상황에 소리 없이 일어났다. 사슴이 꼭 쥐고 자는 손도 살그머니 빼냈다. 깰 때까지 옆에 있어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간당간당한 제 이성부터 챙겨야 했다. ‘나가서 냉수나 먹고 속 차려야지.’ 꾸물꾸물 밖으로 나간 세영은 문 앞에서 리먼과 맞닥뜨렸다.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던 리먼이 “아, 세영님. 피곤하실 텐데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왠지 민망해진 세영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뭐…. 잠이 안 와서요.” 하고 얼버무렸다. 다 이해한다는 듯 인자한 표정을 지은 리먼이 고개를 끄떡였다. 세영은 왠지 변명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순진한 사슴은 안 건드렸습니다. 제가 그렇게 파렴치한은 아니거든요.’ 하지만 말하려고 보니 결코 자랑은 아니었다. 제가 바로 차려진 밥상을 걷어찬 병신입니다 하고 광고하는 꼴이 아닌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세영은 산책이나 하고 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시벌, 왜 날씨까지 좋고 지랄이야.” 쨍쨍한 날씨까지 그녀를 놀리는 것 같았다. 결국, 세영은 무척 까칠해졌다. 그녀는 이 까칠함을 풀 곳을 찾아 오염된 엘프가 사는 북쪽 숲으로 향했다. 점점 빨라지던 그녀의 발이 새처럼 가볍게 허공으로 떠올랐다. 세영은 질풍처럼 빠르게 숲을 가로질렀다. ‘왠지 처음 비행펫을 탔을 때가 생각나네.’ 펄럭이는 바람과 흔들리는 나무가 내는 시끄러운 소리, 하지만 그 가운데 머무는 기묘한 정적. 빠르게 움직이는 세상이 멈춘 것 같은 착각까지. 그때의 기분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어?’ 세영은 갑자기 시야가 확장되는 것을 느꼈다. 분명 앞을 보고 있는데 옆은 물론이고 뒤쪽까지 다 보였다. 굉장히 이상하지만, 동시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뭐지?’ 세영의 시야는 거기서 점점 더 넓어졌다. 그녀는 눈앞을 보는 동시에 제가 지나쳐온 숲을 보았다. 제가 일으킨 바람에 휩쓸린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도, 놀란 다람쥐가 도망치는 것도 느껴졌다. 그건 확실히 본다기보다 ‘느낀다’에 더 가까운 감각이었다. 그것을 ‘느낀다’라고 정의하자 더 많은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졌다. 숲의 나무와 풀과 바위의 자취, 기고 나는 동물들의 기척, 숨은 샘과 흐르는 물의 흔적… 엉망으로 뒤섞인 색채에 멀미가 났다. 이대로 질식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날아든 한줄기의 살기가 그녀를 깨웠다. 퍼뜩 정신을 차린 세영은 제 가슴을 노리는 화살을 피했다. 그녀를 스치고 바로 옆의 나무에 꽂힌 화살이 폭발했다.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나무를 본 세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얼씨구?” 화살이 날아온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엘프 하나가 서 있었다. 처음에는 아리스타타가 서 있는 줄 알았다. 그만큼 닮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의 머리는 칙칙한 청회색이 아닌 반짝이는 청은색에 가까웠다. 키가 크고 어깨도 넓어서 아리스타타보다 강인한 인상이었다. 세영은 저를 빤히 쳐다보는 엘프를 향해 히죽 웃어 보였다. “마타라키냐?” 그러자 엘프 역시 웃어보였다. 살기어린 웃음이었다. 세영은 처음의 위화감이 더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오염된 엘프와 다르게 이놈은 겉보기엔 멀쩡한 엘프처럼 보였다. 시커먼 물을 흘리지도, 진흙 같은 것에 뒤덮여 있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정상처럼 보이지도 않지만. -아리스타타는? 놈이 입을 여는 순간 갑자기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돌발적인 이벤트 영상에 세영은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적어도 영상이 계속되는 동안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만화 주인공의 변신시간에 걸린 악당처럼 멍하게 서 있는 것이 전부였다. 어두워진 시야가 흐릿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반딧불과 같은 빛무리가 하나둘 떠다녔다. 밤의 숲과 빛나는 호수를 배경으로 청은발의 여자가 서 있었다. -아리스타타. -마타라키, 아직 안 잤어? 부름에 돌아본 아리스타타가 웃었다. 지금의 얼굴과 비슷했지만, 여자였을 때가 몇 배는 더 미인으로 보였다. 저 정도면 자기도 예쁜데 때렸다고 억울해할 만 했다. 그녀의 팔을 꽉 붙잡은 마타라키가 물었다. -정말 가야겠어? -또 그 소리구나. 어쩔 수 없잖아. -꼭 네가 가지 않아도 괜찮잖아. 족장인 네가 나설 필요는 없어. 차라리 다른 사람을…. 아리스타타의 손이 만류하는 그의 뺨에 닿았다. 그녀와 똑 닮은 얼굴의 마타라키가 입을 다물었다. 아리스타타가 동생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마타라키, 난 늘 생각했어. 우리가 이 시대에 태어난 건 뭔가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고. 그래서 나스쿤을 만났을 땐 답을 얻은 기분이었어. -그는 널 이용하는 거야! 그녀의 손을 확 끌어내린 마타라키가 소리쳤다. 아리스타타가 싱긋 웃었다. -알아. 하지만 누군가 이용당하지 않으면 이 별은 멸망할 거야. 그걸 막을 수 있다면 난 기꺼이 이용당해줄 거고. -대체 왜 그래야 하는데? 멸망한다면 그냥 그렇게 내버려두면 돼. 이 별이 망한다면 다른 곳으로 떠나면 되잖아! 화를 내는 그를 본 아리스타타의 얼굴에 의아함이 번졌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동생을 보며 말했다. -이곳은 우리들의 고향이야. 선조부터 소중히 지켜온 곳이고. 나는 여기를 지키고 싶은 거야. -난 너보다 이곳이 중요하지 않아. 네가 위험해지는 것보다 여길 버리는 게 더 나아! -나이가 많거나 어려서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일족들도 많아. 넌 그들을 다 버리겠다는 거니? 아리스타타의 얼굴에도 옅은 분노가 서렸다. 아차 한 표정을 지은 마타라키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의 말을 취소하고 싶은 듯 아리스타타의 팔을 살짝 어루만졌다. -수호자의 직무를 잊지는 않았어. 하지만 나는… 네가 희생하는 게 싫어. 아리스타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야. 아리스타타가 그의 손등을 다독였다. 그녀는 정말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었다. 마타라키의 얼굴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세상을 구하려는 너는 훌륭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나는 네가 훌륭해지는 게 싫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면 안 되는 거야? -……. -다른 일족들을 봐. 그들은 아무 생각도 없어. 멸망의 전조를 봐도 너처럼 이렇게 나서지 않아. 멸망하면 여길 떠나면 되겠지, 그렇게 속 편하게 생각하며 살고 있잖아! 마타라키의 목소리엔 분노와 무력감, 이해받지 못하는 답답함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었다. 그런 그를 아리스타타는 그저 멍하게 바라봤다. -제발, 아리스타타. 가지마. 애원하듯 떨리는 손이 아리스타타를 붙잡았다. 가지 말라고, 여기서 함께 있자고. 아주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그녀에게 매달렸다. 아리스타타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 -대체 왜! 너한텐 내가 중요하지 않아? 내가 싫다는데도, 내 애원을 짓밟으면서 가야겠어? 마타라키의 목소리엔 원망이 서렸다. 반신이나 다름없는 그를 뿌리치고 그들이 가꿔온 숲을 떠나 불확실한 가능성을 뒤쫓겠다는 누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리스타타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말했다. -모두를 위해서라는 거짓말은 하지 않을게. 나는 이게 바로 내 사명이라는 생각이 들어. 내가 반드시 짊어져야 하는 짐이라고. -네가 그런다고 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알아. 알아주길 바라는 건 아니야. 네가 알아주길 바란 것도 이기적이겠지. 정말로 미안하다. 죄스럽다는 듯 말하고 있지만, 그녀의 눈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고집이 서려 있었다. 그것을 본 마타라키의 얼굴이 뒤틀렸다. 한 발짝 뒤로 물러나는 그의 얼굴에 호수의 빛이 기괴한 음영을 드리웠다. 꼭 반으로 금이 간 것처럼 보였다. -아리스타타는 어디 있지? 진흙처럼 진득거리는 사념이 몸을 휘감았다. 그제야 세영은 영상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꼼짝도 못 하는 사이 다가온 마타라키가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다. 세영은 바로 앞에 서 있는 엘프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놈을 왜 나한테서 찾아?” -아리스타타가 더는 느껴지지 않아. 네 짓이냐? 엘프가 분노하며 목을 조르는 순간 세영은 가볍게 그의 배를 쳤다. 탱탱볼처럼 튕겨 나간 마타라키가 나무에 부딪쳤다. 순간 기묘한 반탄력을 느낀 세영은 깨달았다. 마타라키는 오염된 엘프도, 오염의 숙주도 아니었다. 이놈 자체가 바로 오염이었다. ‘빨면 그냥 없어지려나?’ 오염된 엘프와 다르게 이놈은 구제할 방법이 없었다. 오염을 제거하면 놈 자체가 사라져버릴 테니까. 그렇다고 오염원인 놈을 계속 내버려둘 수도 없으니 답은 하나뿐이었다. ‘좀 안됐지만, 어쩔 수 없네.’ 그냥 처리하기로 한 세영은 마타라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결국, 아리스타타가 동생을 돌려받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주신을 봉인하기 위해 지불한 대가를 돌려받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당신은 결국 이름을 되찾지 못하겠구나.’ 사슴을 떠올린 세영의 얼굴이 씁쓸해졌다. 계약을 파기하고 자드키엘이나 주신을 만나게 되면 멱살을 잡고 탈탈 털어서라도 사슴의 이름을 알아내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주신이라도 그의 이름을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사라져버린 이름일 테니까. ‘뭐, 없으면 하나 지어주면 되겠지.’ 천애 고아나 다름없는 사슴이었다. 그녀가 이름을 붙여준다고 해도 그리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다. 언데드인 형이나 내 동생 아니라고 부정하는 누나보다는 그나마 여자친구인 자신이 낫지 않을까 싶었다. 세영은 배를 움켜쥐고 쿨럭거리는 마타라키의 무릎을 툭 치면서 물었다. “야, 김꽃사슴이랑 박꽃사슴 중에 뭐가 더 좋은 것 같냐?” 그래도 (구)엘프니까 인간보다 감각이 좀 있지 않을까 싶었다. 둘 다 별로라고 하면 자매품으로 최꽃사슴이나 이꽃사슴도 있었다. 이 중에서 하나쯤은 괜찮은 게 있겠지. 자기 생각에 만족한 세영이 고개를 끄떡였다. 어이없는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던 마타라키가 입을 열었다. -너는…. “마타라키!” 그때 날카로운 외침이 고요해진 공기를 찢었다. 가지에서 가지로 건너뛰며 순식간에 다가온 아리스타타가 활을 쐈다. 마타라키는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굴려 공격을 피했다. 푸른 불꽃이 어린 화살이 마타라키가 기대고 있던 나무를 폭발시키고 불타게 했다. 엘프답지 않게 과격한 공격이었다. 마타라키는 불타는 나무를 돌아보지도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양팔을 활짝 펼친 채로 자신의 형제를 올려다보았다. -아리스타타. 너를 또 잃어버린 줄 알았어. 거기에 돌아온 것은 분노어린 공격이었다. 마타라키는 그리 힘들이지 않고 그의 공격을 피했다. 연이어 세 발의 화살을 쏘아낸 아리스타타가 악에 박힌 목소리로 소리쳤다. “마타라키, 나는 너를 죽이러 왔다. 이번에야말로 너를 죽이겠어!” 그 순간 세영은 마타라키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어리는 것을 보았다. ──────────────────────────────────── 달빛 호수 (10) 죽이러 왔다는 선언에 그는 마치 고백이라도 들은 듯 황홀해 했다. 증오로 가득 찬 아리스타타의 시선이 오직 그만을 향했기 때문이었다. 희열에 찬 눈동자를 바로 코앞에서 보게 된 세영은 쌍심지를 켰다. “이 시벌새끼들이 내 앞에서 뭔 짓거리야!” 강조하지만, 세영은 무척 까칠한 상태였다. 그 와중에 커플질 아닌 커플지랄을 관람하게 되자 머릿속에서 뭔가가 뚝 끊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까맣게 타들어 간 나무를 무 뽑듯이 뽑아서 부웅 휘둘렀다. “지금 내가 밥상 찼다고 무시해?! 어?!” “악! 구, 구원자님. 뭐하시는 거예요! 저 아리스타타라고요!” 기겁한 아리스타타가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이미 눈이 뒤집힌 세영에겐 들리지 않는 소리였다. 그녀는 이를 갈며 내뱉었다. “닥치고 그냥 둘 다 죽어!” “꺄아악!” 또다시 부웅 날아오는 나무를 피해 두 마리의 엘프가 메뚜기 튀듯이 달아났다. 세영은 이 한 쌍의 꼽등이를 때려잡겠다는 일념으로 쫓아가며 나무를 휘둘렀다. 그녀의 힘에 부딪힌 나무들이 우두둑 꺾이고 쓰러지면서 숲이 초토화됐다. 거기 휩쓸린 오염된 엘프들이 나무 열매처럼 털썩털썩 떨어졌다. “…어라?” 그제야 반쯤 날아갔던 세영의 이성이 집으로 돌아왔다. 멧돼지 떼가 휩쓸고 지나간 것 같은 폐허에 오염된 엘프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너무 날뛰었나 싶어 머리를 긁적인 그녀는 부러진 나무들을 주워 스킬로 지게를 만들었다. 그리고 지게 위에 기절한 엘프들을 차곡차곡 쌓아올렸다. 샘플로 쓰기엔 충분한 숫자였다. “이 새끼는 또 어디 갔어?” 지도를 켜서 이리저리 살폈지만, 도망친 아리스타타는 이미 흔적도 없었다. 마타라키도 함께 사라진 것을 보면 어디서 치고받고 싸우는 모양이다. ‘뭐, 내 앞에서만 하지 않으면 상관없지.’ 나무를 휘두르며 한차례 야단법석을 떨었더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욕구불만일 땐 역시 운동이 최고라고 생각한 세영은 샘플을 짊어지고 마을로 돌아갔다. 죄 없이 폐허가 된 숲에 횅한 바람이 불었다. “나 다리 아파!” 빨래통 속에서 자박자박 발을 놀리던 시디발라가 투덜거렸다. 나무 그늘에 드러누워 있던 세영이 흥얼거리듯 말했다. “아직 두 시간도 안 지났다. 정 힘들면 디안이랑 교대하든가.” 시디발라는 바로 옆에서 고무장갑을 끼고 빨래 중인 디안을 힐끗 쳐다보았다.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해서 힘들었지만, 쪼그려 앉아 일하는 디안이 더 힘들어 보였다. 뿌루퉁해진 시디발라가 다시 발을 놀렸다. 그의 발에는 세영이 만든 고무장화가 신겨있었다. “저도 가서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세영의 무릎베개가 되어주던 마리엔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세영은 전혀 그럴 필요 없다며 손을 내저었다. “어제도 무리했잖아요. 오늘은 좀 쉬어도 돼요. 지금은 샘플 세척이라 일손도 필요 없고.” 대조군이라면 둘만 해도 충분하다. 오염에 취약한 엘프인 마리엔을 세탁에 동원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자 배시시 웃은 마리엔이 옆에 놓인 포도를 한 알 따서 세영의 입에 넣어주었다. 태평하게 드러누워 포도를 우물거리는 그녀를 보고 시디발라가 다시 투덜거렸다. “나 진짜 힘들단 말이야. 막 어지럽고, 기절할 것 같고!” 침대에서 끌려 내려오자마자 세탁에 동원된 그였다. 세영이 만든 장화를 신은 채로 오염된 엘프들을 자박자박 밟는 작업이었다. 처음엔 좀 재미있었지만, 이젠 피곤하고 팔다리가 저렸다. 계속 물에 들어가 있어서인지 좀 춥기까지 했다. “잠깐만 기다려봐.” 떠는 척하는 시디발라를 보고 마지못해 입을 연 세영이 스킬창을 열었다. 아르카디아의 스킬들은 크게 3단계로 나누어진다. 그에 따라 스킬창도 기초스킬과 상급스킬, 고급스킬로 각각 페이지를 나누어 총 3장에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스킬창에는 4번째 장이 생긴 상태였다. 이것도 숲에서 이상한 일을 겪은 후에 이리저리 뒤지다가 발견한 것이었다. 세영은 허공에 손을 놀려 문제의 4번째 장을 폈다. 그곳에는 2개의 스킬칸이 채워져 있었다. 《천리안》 좀 더 먼 곳을 볼 수 있다. 현재의 등급 : 타켓이 위치한 지역의 정보를 읽는다. 수련치 : 1/? 《?》 천리안이라는 스킬은 대충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갔다. 세영이 숲에서 경험한, 시야가 넓어지는 현상은 이 스킬 때문에 생긴 듯했다. 하지만 두 번째 스킬인 《?》은 대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손을 갖다 대도 별다른 설명이 뜨지 않았다. “천리안!” 스킬이름을 외치자 곧바로 시야가 확장됐다. 세영은 스킬을 몇 번 켰다 껐다 하며 사용하는 요령을 익혔다. 천리안은 알고 싶은 정보를 시각화해서 나타내는 스킬이었다. 어떤 대상에 집중하면 과도한 정보가 흘러들어오지도 않았다. 세영은 아예 눈을 감아서 집중도를 높였다. ‘좋아, 그럼 일단 오염된 놈들을 볼까.’ 세영은 오염된 엘프들에게 집중했다. 어두운 시야에 적외선 영상처럼 사람 형체가 떠올랐다. 빨래통에 담겨있는 엘프들은 물론 엘프들을 밟고 있는 시디발라의 형체까지 보였다. 시디발라는 대체로 푸른빛이었다. 여러 가지 알록달록한 색이 섞여 있었지만, 가장 많은 면적은 맑은 하늘색이 차지했다. 반면 그가 밟고 있는 엘프들은 거무튀튀했다. 겉면은 회색으로 옅어져 있었지만, 중심은 아직도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만들고 인챈트만 한 건 별 효과가 없는 것 같네.’ 아예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세영이 직접 밟은 것보다는 미미했다. 흐음- 소리를 낸 세영이 디안 쪽을 바라봤다. 쪼그려 앉은 채 빨래들을 북북 문지르는 디안도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다만 시디발라보다는 좀 더 단단해 보이는 청남색에 가까웠다. ‘오, 이쪽은 훨씬 효과가 있는데?’ 디안이 낀 고무장갑은 시디발라와 똑같은 처리를 한 것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호수의 물 자체에 세영이 스킬을 쓴 것뿐이었다. 즉, 세영이 만든 장갑이나 장화는 오염을 막는 역할만 할 뿐이지 오염을 몰아내는 역할은 하지 못했다. 그녀가 직접 문질러 씻겨 내거나 그녀의 힘이 깃든 물을 사용해 세탁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어떤 스킬을 사용할 것인지가 문제네.’ 눈을 뜬 세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으로 보는 정보와 시각화된 정보가 겹쳐지면서 시야가 순간적으로 핑 돌았다. 비틀거리는 그녀를 놀란 마리엔이 재빨리 부축했다. 세영은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휙휙 저어 보인 후 시디발라 쪽으로 향했다. “세영님!” 갑자기 사슴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팔이 붙잡혔다. 어질어질한 느낌에 눈을 감았다 뜨자 하얗게 물든 사슴이 보였다. 잘못 봤나 싶어 다시 눈을 감자 사슴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어, 아니. 전 멀쩡한데요.” 스킬사용을 멈춘 세영이 괜찮다고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사슴은 썩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안색이 창백합니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심각한 얼굴로 말한 사슴이 그녀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들었다. 그는 뜨악한 표정을 짓는 세영을 재빨리 나무 그늘로 옮겼다. 마리엔이 눈치 빠르게 그녀를 눕힐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사슴이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편히 쉬지 못하셔서….” “아니, 잠깐 현기증이 났을 뿐이라고요. 전 진짜 괜찮거든요.” “많이 어지러우십니까?” 사슴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다 제 탓이라고 생각하는 얼굴에 아니라고 말하려던 세영은 그만두었다. 저를 보듬는 사슴의 손이 꽤 기분 좋았던 것이다. ‘뭐, 좀 어지러웠던 것도 사실이잖아?’ 세영은 뻔뻔하게 생각하며 조심스러운 손길을 즐겼다. 슬며시 천리안 스킬을 켜서 사슴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조금 전에 사슴에게서 본 하얀 빛이 마음에 걸렸다. ‘왜 하얀색이지?’ 다시 봐도 사슴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옆에 있는 마리엔마저 민트에 가까운 파란색인데 그만은 조금의 푸른 기도 없었다. 순백색인 머리와 상체와 비교하면 팔다리와 하체는 또 색이 달랐는데, 그 경계마다 검은 실로 꿰맨 것 같은 자국이 있었다. ‘테디 베어?’ 이 상황에서 가장 납득 가는 설명은 그가 인간이 아니고, 다른 영혼을 먹고 자라 저런 색이 되었다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누덕누덕 꿰맨 자국은 어쩐지 이질적이라 말없이 시선을 주고 있었다. 그때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많이 아파?” 장화까지 벗어 던지고 달려온 시디발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동그란 눈이 당장 울 것 같았다. 더 누워있으면 안 될 분위기에 천리안을 끈 세영이 몸을 일으켰다. “네가 자꾸 애먹여서 그래.” “미, 미안해! 진짜 아픈지 몰랐어. 나 혼자 꾀부려서 미안.” 장난스럽게 던진 말에 시디발라의 두 귀가 축 처졌다. 바닥에 끌릴까 봐 늘 꿋꿋하게 들고 다니는 꼬리도 마찬가지였다. 급기야 까만 눈에 눈물까지 맺히자 당황한 것은 세영 쪽이었다. 그녀는 시디발라를 번쩍 안아 들고 달래기 시작했다. “농담한 것 가지고 왜 그래. 설마 너 때문에 내가 아프겠냐.” “그렇지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우물대던 시디발라는 사슴이 “제가 대신 안겠습니다.” 하고 손을 내밀자 뿌루퉁해졌다. 세영의 목을 꽉 끌어안는 폼이 쉽게 떨어질 것 같지가 않았다. 사슴이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듯 허공에 멈춘 손을 움찔거렸다. “세영님, 괜찮으십니까?” 그때 고무장갑을 낀 디안이 뒤늦게 다가왔다. 쪼그리고 앉아있었더니 허리가 아픈지 어기적어기적 걷는 폼이 영락없는 동네 아줌마였다. 그는 곧바로 세영에게 달라붙은 시디발라를 떼어내며 “야, 눈치 없이 왜 끼어들고 그래.” 하고 구박했다. 시디발라가 “왜에!” 하고 짜증을 내자 그는 “아니, 지금 네가 끼어들 상황이 아니라니까.” 하고 닦달했다. 어째 좀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시디발라가 다시 그녀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그는 칭얼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카라드랑 결혼할 거야?” “뭔 헛소리야, 또?” “하지만, 하지만….” 울먹이던 시디발라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카라드를 쳐다보았다.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던 세영은 “아, 시발. 그런 거 아니거든!” 하고 화를 내야 할지, “그래, 이미 녹용 맛을 보았으니 너는 포기해라.” 하고 선언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때였다. “세영님! 도와주십시오!” 누군가를 등에 업은 리먼이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다. 새 물을 길으러 갔던 양반이 저렇게 뛰어오는 것은 뭔가 일이 터졌다는 뜻이었다. 세영은 시디발라를 옆구리에 낀 채로 그의 앞으로 달려갔다. 리먼이 등에 업은 사람을 재빨리 바닥에 내려놓았다. 피범벅이 된 아리스타타였다. “아리스타타!” 뒤따라 달려온 사슴이 놀란 얼굴로 그를 붙잡았다. 날카로운 것으로 난자당한 배를 감싼 아리스타타가 하얗게 질린 입술로 웃어 보였다. “제, 제가 제일 늦었네요.” ──────────────────────────────────── 달빛 호수 (11) 세영은 대꾸하지 않고 그의 손을 떼어냈다. 상처는 배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목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팔과 다리에도 길게 이어진 상처가 남아있었다. 즉사하지 않도록 아주 공들여서 베어낸 흔적이었다. 리먼이 치료했는지 출혈은 거의 없었다. 일단 큰 상처만 아물게 하고 후속 조치를 위해 급하게 옮겨온 것 같았다. “해부라도 당한 거냐?” 세영의 물음에 아리스타타의 얼굴이 파삭 일그러졌다. 그는 괴로운 얼굴로 고백했다. “졌어요. 이번에도 결국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 사이에 세영은 상처치료와 붕대 감기를 끝냈다. 마지막으로 포션을 꺼내 던져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너 이제 이번 일에서 손 떼라. 방해되니까.” “…네?” 아리스타타의 눈이 동그래졌다. 세영은 차가운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손 떼겠다고 약속하면 오염된 놈들 모두 세탁하고 마타라키도 죽여주지.” “세영님, 그건….” 사슴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만류했다. 세영은 눈짓으로 그가 더 이상 말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멍하게 있던 아리스타타가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마타라키는 제 손으로 죽여야 합니다. 저희 일족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어느 세월에?” 날카로운 대꾸에 아리스타타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그것을 본 세영이 픽 웃었다.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지금까지 못 죽였으면 그건 못 죽이는 거야. 열매까지 처먹고도 그놈을 못 이기는데 갑자기 무슨 수로 죽이려고?” “이번에는… 이번에는 졌지만, 다음엔 절대 실수하지 않겠습니다.” “웃기지 마. 여기 죽치고 앉아서 네 미련 놀음이나 구경할 생각 없다.” 세영이 본 아리스타타의 마음은 애증에 가까웠다. 저를 배신하고 일족을 해친 동생을 미워하면서도 저 때문에 그리된 죄책감과 미안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지만, 그것 때문에 덩달아 발목 잡히는 것은 질색이었다. “못 한다는 거 인정하고 그냥 나한테 맡기든가, 아니면 네 자기만족이라는 거 인정하고 천년만년 이렇게 살든가 결정해. 난 네 욕심 다 맞춰주면서 일 못 하니까.” “…….” 뭔가를 말하고 싶은지 입술을 달싹이던 아리스타타가 결국 고개를 떨어뜨렸다. 세영은 “사흘 준다. 그 안에 결정해라.” 하고 덧붙인 후에 몸을 돌렸다. 시디발라가 쪼르르 달려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세영은 어쩔 줄 몰라 하는 동료들을 눈치채고 말했다. “자, 이렇게 돼서 빨래는 일시 중단이에요. 결정이 날 때까지 다들 편히 쉬세요.” 그러자 멍하게 있던 마리엔이 움직였다. 그녀는 무어라 말하려는 디안을 잡아당겨 빨래를 수거하러 갔다. 리먼은 넋이 나간 아리스타타를 달래 포션을 먹였다. 오염된 엘프들을 적당히 얼려서 창고에 처넣은 세영은 숙소로 향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조용한 곳에서 낮잠이나 잘 생각이었다. “나도 같이 가.” 시디발라가 재빨리 그녀의 뒤로 따라붙었다. 오늘따라 유독 어리광을 부리는 느낌이었다. 세영은 매달리는 그를 굳이 뿌리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세영님.” 그때 뒤따라온 사슴이 그녀를 불렀다. 세영은 힐끗 그를 돌아보았다. 뭔가를 망설이는 것 같던 사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타라키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어, 그게 좋겠다. 나도 도울게!” 시디발라가 기다렸다는 듯이 맞장구쳤다. 묘한 눈으로 둘을 쳐다보던 세영이 물었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제가 뭔가를 죽이는 게 싫어요? 자꾸 왜 대신하겠다고 그러지?” 동시에 움찔하는 둘을 보니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세영의 눈이 가늘어지자 사슴이 서둘러 변명했다. “싫은 것이 아닙니다. 그저 종종 살인을 꺼리는 모습을 보이시기에…. 저는 익숙하니까 대신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뜻밖의 말에 난처해진 세영이 머리를 긁적였다. 나름대로 배려해준 것 같지만, 그렇다고 사슴에게 살인을 대신 해달라고 말할 생각은 없었다. 대신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을 것이고. “하지만 사슴 씨는 마타라키랑 아는 사이잖아요.”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지인인 정도의 사이입니다.” “그게 아는 사이죠.” 대답이 궁해진 사슴이 입을 다물었다. 세영은 한 번쯤은 설명해둘 필요를 느끼고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살인을 꺼렸던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까지 뒤로 뺄 생각은 없어요. 꼭 죽여야 한다면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도 않을 거고요.” 처음 주신과 계약할 때부터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일국의 왕에게서 신기를 빼앗으며 아무도 죽이지 않겠다는 건 잠꼬대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사슴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대신할 자가 있으니 굳이 손을 더럽히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뇨, 저에겐 필요해요. 그리고 남에게 미룬다고 죄가 없는 것은 아니죠. 살인이나 살인교사냐의 차이잖아요. 오히려 후자가 더 무겁기도 하고.” 솔직히 말하면 마타라키를 죽이는 것이 별로 꺼려지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마타라키는 단순한 몬스터였다. 아주 약간 남아있던 망설임은 난도질 된 아리스타타를 본 이후에 버렸다. “마타라키를 다른 엘프들처럼 되돌릴 방법은 없어요. 그를 죽이지 않으면 이 오염은 안 끝나요. 그리고 꼭 죽여야 한다면 가족이나 지인의 손을 빌리는 것보다야 모르는 사람인 제가 나을 거라고 판단한 거예요.” “그건 살인을 너무 가볍게 여기시는 겁니다.” 사슴의 반박에 잠깐 고민한 세영이 “그건 전혀 아닌데요.” 하고 반박했다. 20년이 넘도록 현대사회에서 윤리를 학습한 그녀에게 살인이 가벼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사슴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제가 대신 그를 죽이려는 것은 살인이 죄라서가 아닙니다. 살인이라는 선을 넘은 후에 누구나 크든 작든 변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당신께서 후회하길 바라지 않습니다.” “음, 거기에 대해선 저도 고민해볼게요. 사슴 씨 말대로 제가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나름대로 고민해서 내린 결론이니 별수 없을 것 같지만, 걱정해주는 게 고마워서 일단 그렇게 말했다. 그때 둘을 멀뚱멀뚱 쳐다보던 시디발라가 물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카라드가 왜 사슴이야?” 카라드의 얼굴이 갑자기 빨개졌다. 세영은 주춤 뒤로 물러서는 그를 모른 척하며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냥 별명이야. 사슴을 닮았으니까.” “전혀 안 닮았는데?” 시디발라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사슴을 훑어보았다. 어디가 닮았는지 뜯어보는 모습이었다. 좀처럼 감을 못 잡는 것에 답답해진 세영이 한마디 툭 던졌다. “목이 길잖아.” “그게 왜?” “사슴은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니까?” 세영은 길고 우아한 사슴의 목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그를 보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라는 시가 떠오르곤 했다. 시디발라가 한 대 맞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 “아니, 그냥 딱 봐도 사슴이잖아. 모르겠어?” 답답해진 세영이 사슴을 손가락질했다. 길고 우아한 목과 잘 빠진 다리, 까맣고 촉촉한 눈동자까지. 그야말로 사슴의 요정, 밤비의 의인화나 다름없었다. 바로 코앞에 사슴을 두고 사슴이 어디 있냐고 되묻는 꼴을 보자 한심하기까지 했다. “어, 그러니까 애칭 같은 거지? 그럼 내 별명도 지어줘!” 다시 기운을 되찾은 시디발라가 재잘거렸다. 심드렁해진 세영이 “네 별명을 내가 왜?” 하고 물었다. 그러자 갑자기 서러운 표정이 된 시디발라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난처해진 세영이 눈썹 위를 긁적이며 말했다. “…새앙쥐?” “나 쥐 아니란 말이야!” “그럼 다람쥐?” “쥐 아니라니까 왜 그래! 카라드는 사슴이라고 해놓고 나보고는 쥐래!” 원래 세계로 가면 디즈니랜드에서 스카웃 해갈 것 같은 놈이 자긴 쥐가 아니라며 억울해했다. 한숨을 삼킨 세영이 시디발라를 살폈다. 어딜 봐도 쥐 같은 녀석에게서 다른 동물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잔뜩 기대하고 있는 얼굴에 대고 “넌 순도 100%의 쥐니까 다른 동물은 넘보지 마라.” 하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세영은 한참의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햄스터?” “그건 뭐야? 쥐야?” 시디발라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세영의 계산대로 여긴 햄스터가 없는 모양이었다. 쥐가 아니라고 답해주자 아직 의심을 버리지 못한 시디발라가 다시 물었다. “햄스터는 어떻게 생겼어?” “너랑 닮은 좀 귀여운 거.” 무성의한 답변에 만족하지 못한 시디발라가 꼬치꼬치 캐물었다. 결국, 아주 작고 귀여우며 온몸이 뽀송뽀송한 털로 뒤덮여있고 귀가 작고 꼬리가 짧다는 설명을 얻어낸 그는 대단히 만족했다. 특히 귀가 작고 꼬리가 짧다는 점에서 쥐가 아니라고 판단한 듯했다. “그럼 난 아주 귀여운 동물을 닮은 거구나.” 시디발라가 신이 난 얼굴로 말했다. 귀엽다고 해서 싫어할 줄 알았는데 썩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연신 히죽거리던 시디발라가 디안에게 자랑하겠다며 쪼르르 달려갔다. 피식 웃던 세영은 갑자기 따끔거리는 기운을 느꼈다. 흠칫해서 돌아본 그녀는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사슴을 발견했다. ‘앗, 이건… 삐짐의 기운인가?!’ 아리스타타의 가슴을 벅벅 문질렀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꾸물꾸물한 주변의 공기와 딱딱하게 굳은 얼굴, 그리고 원망이 철철 흐르는 눈빛까지. 세영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한 사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사슴이 좀 더 특별한 의미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별명을 지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세영의 귀에는 그것이 ‘어떻게 내 앞에서 다른 남자 별명을 지어줄 수가 있어? 실망이야, 헤어져!’로 들렸다. 당황해서 입을 뻐끔거리던 세영이 겨우 목소리를 쥐어짰다. “그, 그게 아니고요, 시디발라가 막 울면서 조르니까….” “그럼 디안이 울면서 조르면 또 별명을 지어주실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죠.” 세영이 정색하자 사슴의 표정은 더욱 안 좋아졌다. 그는 “역시 시디발라의 별명은 특별한 거군요.” 하고 중얼거렸다. 난처해진 세영이 “어, 그게 아닌데….”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사슴이 고개를 팩 돌렸다. 싸늘한 표정이 꼭 토라진 것처럼 보였다. 놀란 세영이 서둘러 변명을 늘어놓았다. “시디발라의 별명은 전혀 안 특별해요. 사슴이 더 특별하다고요. 진짜예요.” “…….” “아니, 남자친구랑 동료랑 같아요? 사슴은 애칭이고 햄스터는 별명이잖아요.” 세영의 설득에 조금 풀리나 했던 사슴이 다시 표정을 다잡았다. 난처함에 머리를 벅벅 긁은 세영이 말했다. “아 씨, 이건 진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사실 햄스터도 쥐예요.” 그러자 사슴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멋쩍어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가 “아니라고 하셨잖습니까.” 하고 물었다. 민망해진 세영이 투덜거렸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고요. 별명 내놓으라고 자꾸 다그치는데 진짜 다른 게 생각 안 났단 말이에요.” “너무하셨습니다.” 너무하다고 말하면서도 날카롭던 눈매가 스르륵 풀려있었다. 세영은 햄스터를 떠올린 과거의 자신에게 감사했다. 만약 다른 동물 이름을 내뱉었다면 사슴의 질투를 수습할 방법이 없었겠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쉰 그녀가 대꾸했다. “뭐, 끝까지 모르면 되죠.” “그래도… 시디발라를 햄스터라고 부르시면 화낼 겁니다.” 새침하게 말한 사슴이 그녀의 팔을 꼭 붙들었다. 세영은 얼른 고개를 끄떡이며 절대 안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지은 사슴이 그녀의 이마에 키스해주었다. ‘하, 씨발. 조심해야겠다. 추궁당할 때 죽는 줄 알았네.’ 세영은 아직까지 벌렁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슴이 제 입으로 ‘질투가 심하다’라고 말할 때는 귀엽기만 했는데, 실제로 당해보니 썩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아니, 좀 귀여운가?’ 당할 때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질투해서 토라진 사슴은 꽤 귀여운 것 같았다. 팩하고 고개만 돌렸지, 언제든 붙잡을 수 있도록 가까이 서서 그녀의 변명을 들어주지 않았던가. 세영이 갑자기 피식 웃자 사슴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세영이 그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것보다 제가 사슴 씨 이름을 생각해봤는데요.” 그날 저녁, 창백한 안색의 아리스타타가 세영을 찾아왔다. 인벤에서 장비를 꺼내 점검하던 세영이 그를 돌아보았다. “결정했냐?” 하고 묻자 흐릿하게 웃은 그가 세영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부탁드립니다. 마타라키를 죽이고, 저희 일족들을 구해주십시오.” ──────────────────────────────────── 달빛 호수 (12) 세영은 말없이 아리스타타를 바라보았다. 동생을 죽여 달라고 말한 그의 얼굴은 무표정하게 굳어있었다. 하지만 겉이 굳었다고 속까지 잠잠하진 않을 터였다. 그녀는 확인하듯 물었다. “후회하지 않겠냐?” “후회는 300년 동안이나 계속해왔습니다. 그만하면 이제 충분합니다.” 아리스타타는 쓰디쓴 얼굴로 중얼거렸다. 세영은 그의 얼굴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떠나지 말라는 애원을 거부당한 마타라키가 지금의 그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허무함과 울분이 뒤섞인 참혹한 얼굴이었다. 머리를 긁적인 세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좋아, 그럼 대가 이야기를 해볼까.” “…네?” 뜻밖의 말에 놀란 아리스타타의 눈이 토끼처럼 커다래졌다. 세영은 오히려 시큰둥한 얼굴로 대꾸했다. “뭘 놀란 듯이 ‘네에?’ 거려. 사람을 부리려면 당연히 대가를 내놓아야지.” “하지만 제가 손 떼겠다고 약속하면….” “공짜로 일 해주겠다는 말은 없었는데? 애초에 네 정성이 하늘에 닿을 정도로 나를 도우면-이라는 조건도 있었고. 너한테는 네 정성이 하늘에 닿은 것처럼 느껴지냐?” 할 말이 없어진 아리스타타가 입을 다물었다. 그가 한 일이라곤 세영을 절벽으로 떠밀고, 호수에 빠트리고, 주신과의 통로를 열어준 것뿐이었다. 사실 마지막 일은 아주 대단한 것이었지만, 네 정성이 하늘에 닿을 정도였냐고 물으면 대꾸하기가 어려웠다. 어물거리는 그에게 세영이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네 정성 대신 세 가지 대가를 받지. 하나는 달빛 호수, 둘째는 너라는 발닦개, 마지막 조건은 일이 끝난 뒤에 말하겠다. 질문 있으면 지금 하고.” “저기, 두 번째 조건은 대체 뭔가요.” 발닦개라는 말에 불안감을 느낀 아리스타타가 한 손을 들고 질문했다. 세영은 흔들리는 그의 눈을 모른 척하며 말했다. “지금까지와 별달라지는 점은 없어. 네 정성이 하늘에 닿도록 나를 모시는 거지. 뭐, 지금까지가 임시직이었으면 이제부터는 정식이라는 차이?” “이상하게 좋은 것처럼 들리네요.” “당연히 좋은 거지.” 뻔뻔한 대답에 아리스타타의 얼굴이 뽀로통해졌다. 예전이라면 어딜 귀여운 척하냐고 생각했겠지만, 여자였을 때 모습을 봐서인지 크게 거슬리진 않았다. 잠깐 망설이던 그가 물었다. “세, 세 번째 대가로 뭔가 이상한 걸 요구하진 않으실 거죠?” “이상한 거 뭐?” 세영의 되물음에 아리스타타가 어물거렸다. 몇 가지 떠오르는 것은 있는데 입 밖으로 내뱉기는 무서운 듯했다. 세영이 가슴 앞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나를 믿지 말고 너를 믿어. 내가 이상한 걸 요구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는 너를 믿으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왠지 설득되어 버린 아리스타타가 한숨을 쉬었다. “…그거 아세요? 가끔은 정말 얄미운 면이 있으세요.” “난 잘나서 그래도 돼.” “칫.” 입을 삐죽거린 아리스타타가 이내 대가를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사실 그에게 세영의 조건을 거부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동안의 미련이 자기만족이었다는 것을 인정한 순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결정했으면 여기 싸인해.” 세영은 인벤에서 몇 장의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종이를 받아든 아리스타타가 가장 위의 제목을 소리 내어 읽었다. “고용계약서? 신체양도각서? 이게 뭔가요?” “내가 있던 곳에선 원래 남에게 일 시킬 땐 계약서 써.” 세영은 둘 중의 하나만 설명했지만, 아리스타타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계약서에 적힌 몇 가지 용어를 물어본 후에 싸인했다. 세영은 그것들을 인벤에 잘 챙겨 넣었다. “내일부터 세탁작업을 시작할 거야. 넌 신경 쓰지 말고 요양이나 해.” “…감사합니다.” 아리스타타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홀가분하면서도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이만 물러가겠다고 인사하는 그를 빤히 쳐다보던 세영이 “아리스타타.” 하고 불렀다. 막 방을 나서려던 아리스타타가 의아한 얼굴로 돌아봤다. 세영은 덤덤하게 물었다. “이 세상을 구한 걸 후회해?” 수면에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아리스타타의 얼굴이 파삭 일그러졌다. 한참을 대답 없이 굳어있던 그가 웃었다. 회한으로 가득한 미소였다. “…후회합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같은 선택은 하지 않을 거예요.” 고개를 끄떡인 세영이 이만 가보라고 말했다. 잠시 그녀를 쳐다보던 아리스타타가 밖으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세영은 문이 닫히자 신체양도각서를 꺼내 다시 훑어보았다. 그때 누군가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고 말하자 사슴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교대하듯 들어온 것이 아무래도 밖에서 기다렸던 것 같았다. “이야기는 잘 끝나셨습니까.” “그럭저럭?” 슬금슬금 다가간 세영이 그를 슥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방안으로 끌려 들어온 사슴이 얼굴을 붉혔다. 그는 변명하듯 “좀 늦었지만, 식사 준비가 다 되었기에 함께 드셨으면 했습니다.” 하고 말했다. “아, 저녁이요. 흠.” 세영은 아쉬운 눈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여기서 “저녁 대신 사슴 씨를 먹고 싶은데요.” 라고 말했다간 순진한 사슴이 기겁할 것 같았다. 흑심을 누르려고 애쓰며 사슴의 손을 쪼물거리자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리스타타가 무슨 말을 했습니까?” “응?” “왠지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셔서.” 위로하듯 뺨을 살살 쓰다듬는 손이 기분 좋았다. 사슴은 그녀의 이마에서 뺨까지 터치하는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고 있었다. 가끔 너무 느려서 답답한 기분도 들지만, 지금처럼 간질간질하게 설레는 기분을 좀 더 즐기고 싶기도 했다. 세영은 아쉬운 마음으로 쪼물거리던 사슴의 손을 놓아주었다. “제가 아니라 아리스타타가 기분이 안 좋을 거예요. 꽤 민감한 질문을 했거든요.” 세영의 말에 사슴이 고개를 갸웃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컥 하고 심장 위를 움켜쥔 세영은 서둘러 그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계속 방에 있으면 인내심이 뚝 끊길 것 같았다. 식당을 향해 걷던 세영이 물었다. “사슴 씨는 이 세상을 구한 걸 후회해요?”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았던 사슴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세상을 구한 적이 없습니다. 아주 잠깐 멸망을 미뤘을 뿐입니다.” 사슴답게 아주 고지식한 대답이었다. 피식 웃은 세영이 질문을 바꿔서 물었다. “음, 만약에 30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그때와 똑같은 선택을 할 거예요?” “예.” “어째서요?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서 결정을 바꾸지는 않을 겁니다.” 잠시 말을 멈춘 사슴이 흐릿하게 웃었다. “어쩌면 제가 잃은 것이 너무 적어서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군요.” “전혀 아니라고요. 그건.” 몸뚱이가 통째로 날아갔는데 뭐가 적단 말인가. 영혼까지 너덜거려서 누군가가 하나하나 꿰매서 붙인 것 같던데. 정색하는 세영을 보고 다시 고개를 저은 사슴이 말했다. “300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지금의 저에게 주신을 다시 봉인하라고 하면, 그러겠다고 답할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잃을 것이 뭐가 될지 알고 있으니까요.” 이 사슴의 무서운 점은 진심으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다. 생각 없이 물었다가 갑자기 저격당한 세영이 뺨을 긁적였다. 쑥스러움 때문에 손발이 다 저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사슴이 죄책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리스타타도 대가를 치르는 것이 자신이었다면 지금처럼 후회하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그저 다른 사람들보다 운이 좋았던 것에 불과합니다.” ‘쳇, 역시 꼬시는 게 아니었군. 천연의 무서움이란.’ 괜히 혼자 설렜던 세영은 입맛만 다셨다. 하지만 그녀는 밥을 알아서 챙겨 먹을 줄 아는 어른이었다. 손을 까딱거려 사슴의 고개를 숙이게 한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그거 제가 이 세상보다 소중하다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 “아니에요?” 사슴의 얼굴이 물들인 것처럼 붉어졌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가 “…맞습니다.” 하고 겨우 고백했다. 씩 웃은 세영이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홱 잡아당겼다. 얼떨결에 끌려온 사슴이 살포시 눈을 감았다. 인사하듯 가볍게 입을 맞춘 세영은 이내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파고들었다. “……!” 그녀는 파드득 떠는 사슴을 붙잡고 보들보들한 입안을 마음껏 맛본 뒤에 놓아주었다. 멍하게 굳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베이비 키스를 해주자 그제야 움찔한 사슴이 고개를 들었다. 넋이 나간 눈으로 쳐다보는 그에게 싱긋 웃은 세영이 “소중히 여겨줘서 고마워요.” 하고 말했다. 무어라 말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던 사슴이 떨리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완전히 익었다고 생각했던 얼굴이 더 붉어지는 것을 보자 좀 신기했다. 놀랄 거라 예상은 했지만, 너무 충격받은 모습에 살짝 걱정도 되었다. ‘아니, 뭐 그렇게 심하게 하진 않았는데 말이지.’ 초심자임을 배려해서 진짜 맛만 봤는데, 그것조차 사슴에겐 강도가 너무 셌던 모양이다. ‘에이, 다들 하는 건데 뭐 어때.’와 ‘내가 너무 심했나?’ 사이에서 고민하던 세영이 물었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자동 응답처럼 대꾸한 사슴이 아예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부끄러워서 견디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무어라 말을 하려던 세영은 왠지 그를 더 괴롭게 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사슴의 동요는 금방 진정되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내려가는 사이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식사하는 내내 세영을 쳐다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녀가 쳐다볼 때마다 황급히 눈을 피하곤 했다. 대번에 그것을 눈치챈 시디발라가 세영의 다리를 톡톡 걷어찼다. “싸웠어?” “아니.” “그럼 때렸어?” “아니.” 무심한 대꾸에 고개를 갸웃한 시디발라가 “안 때렸어? 그럼 카라드 입술이 왜 저래?” 하고 추궁했다. 쨍그랑 스푼을 떨어뜨린 사슴이 쿨럭쿨럭 기침을 시작했다. 사레가 들린 모양이었다. 그때 탁 소리 나게 컵을 내려놓은 마리엔이 스산한 얼굴로 말했다. “시디발라.” “으, 응?” “입 다물고 조용히 먹어.” 한기가 느껴지는 목소리에 찍 움츠러든 시디발라가 조용히 포크를 움직였다. 더 이상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은 채로 식사가 끝났다. * 동료들은 다음 날부터 세탁작업을 위해 바쁘게 일했다. 우선 카라드와 디안, 리먼이 한팀이 되어서 오염된 엘프를 잡으러 다녔다. 엘프들의 은신은 카라드에게 통하지 않았기에 작업이 훨씬 수월했다. 카라드가 엘프가 숨어있는 위치를 알리면 디안이 블레이드 스톰을 써서 떨어뜨렸다. 간간히 날아오는 화살은 리먼이 신성한 방패를 펼쳐서 막았다. 세영이 만든 특수 그물에 떨어진 엘프를 열 마리씩 집어넣으면 끝이었다. 한편 세영과 마리엔, 시디발라는 호숫가에서 작업했다. 세영이 도르래를 만들면 시디발라가 나무 위에 설치했다. 마리엔은 밧줄과 같은 물건들을 옮기거나 수면의 높이를 체크해서 도르래의 위치를 조절했다. 설치는 이틀 만에 끝났기에 그들 역시 엘프 사냥에 합류했다. 마지막 오염된 엘프가 생포된 것은 작업을 시작한 지 8일 만의 일이었다. 붙잡힌 엘프 중에는 마타라키가 없었다. 그는 아리스타타를 공격한 뒤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천리안을 써도 잡히지 않는 것에 더 이상 북쪽 숲을 뒤지는 것을 포기한 세영이 손을 털었다. “자, 그럼 이제 세탁을 시작하죠.” ──────────────────────────────────── 달빛 호수 (13) 생포된 빨래들이 호숫가로 옮겨졌다. 놈들은 크기별로 분류된 뒤 빨래망에 담겨 호수 위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동료들은 도르래를 조절하여 빨래망이 반쯤 물에 잠기도록 했다. 그 과정에서 빨래들이 연신 비명을 지르거나 버둥거렸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세영이 그들을 철저히 빨래로만 대했기 때문이다. ‘지금 같은 때에 동정심을 가지면 손이 무뎌지니까.’ 세영은 그것을 염두에 두고 동료들을 천천히 세뇌했다. 오염을 씻어내기 전에는 몬스터이며 세탁에 실패하면 죽여야 한다는 점도 몇 번이고 강조했다. 그것에 감화된 동료들은 오염된 엘프를 단순한 세탁물로 취급했다. 그게 아니라면 생포 작업에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세영님, 설치가 모두 끝났습니다.” 마지막 체크를 끝낸 디안이 보고했다. 순간 세영은 묘한 감상에 빠졌다. 스킬을 올리기 위해서 몬스터를 죽이는 것을 거부하던 그가 떠오른 탓이었다. 자신이 동료들을 타락시키는 것이 아닌가 싶은 의심도 들었다. ‘뭐, 나도 좀 변했으니까. 서로에게 영향을 준 거겠지.’ 예전의 그녀였다면 이것저것 귀찮게 신경 쓰지 않고, 몬스터를 죽여 스킬을 올리는 데 집중했을 것이다. 너무 호구 같아 걱정되던 처음의 동료들을 생각하면, 지금의 변화는 긍정적이라 할 수 있었다. 합리화를 마친 세영이 싱긋 웃어 보였다. “고생했어요. 그럼 저 잠깐 준비하고 올게요.” 나무 뒤로 숨어든 세영이 인벤에 옮겨둔 장비로 갈아입었다. 그 자리에서 갈아입어도 아무런 문제는 없었지만, 사슴이 싫어할까 봐 알아서 조심했다. 장갑 대신 너클을 끼던 그녀가 한숨을 푹 쉬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눈치를 보게 됐지? 분명 처음은 안 이랬던 것 같은데….’ 좋으니까 사귀고 안 맞으면 헤어지겠다는 가벼운 생각으로 시작된 연애였다. 그런데 사슴이 그 가벼움에 조금씩 무게를 더해가고 있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고민하던 세영이 나무 뒤에서 나왔다. “우와, 멋있어. 그 옷 뭐야?” 시디발라가 손뼉까지 치며 물었다. 동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에 세영은 약간의 민망함을 느끼며 답했다. “내 최종무장?” <얼어붙은 왕관>, <백은의 슈트>, <징벌자 너클>, <심판자 부츠>, <서리 날개>로 이루어진 빙룡셋이었다. 이름처럼 빙룡을 잡아 만든 것으로 서리격투가라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 전투세트였다. 세영은 사슴의 눈치를 힐끗 살폈다. <백은의 슈트>는 가슴골이 보일락 말락 한 상의에 정장 재킷, 아주 짧은 숏팬츠와 가터스타킹으로 되어있었다. 다른 전투 의상에 비해서 아주 점잖은 편이었지만, 사슴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알 수가 없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 같으십니다.” 리먼이 드물게 먼저 제 감상을 말했다. 빙룡셋의 효과로 세영의 주변에는 서리가 휘몰아치는 것 같은 이펙트가 발생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를 인간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디안은 거의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 날개도 있어!” 세영의 주변을 한 바퀴 돈 시디발라가 소리쳤다. 어른 손바닥 크기의 피막 날개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가볍게 파닥거렸다. 시디발라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나 만져 봐도 돼?” 그때 아주 자연스럽게 다가온 사슴이 시디발라를 안아 들었다. 만져볼 수 있게 도와주려는 줄 알았던 시디발라는 두어 걸음 물러서는 사슴 때문에 “어?” 소리를 냈다. 사슴은 손을 허우적거리는 그를 모른 척 입을 열었다. “춥지는 않으십니까.” “세트 효과 때문에 이렇게 보이는 거지 하나도 안 추워요.” 세영은 서리가 내려앉은 것처럼 하얗게 변한 머리카락을 들어 보였다. 고개를 끄떡인 사슴이 입을 다물었다. 시디발라가 “나 내려줘.” 하고 꾸물거려도 대꾸하지 않았다. 세영은 평온한 사슴의 얼굴을 살피며 생각했다.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은데….’ 오히려 얼굴이 굳은 것은 마리엔 쪽이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세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화가 난 것 같고, 어떻게 보면 슬픈 것 같기도 했다. 세영의 시선을 느낀 마리엔이 평소처럼 웃어 보였다. 괜히 머쓱해진 세영이 뺨을 긁적였다. “어, 그럼 세탁 시작할게요. 물이 튈 것 같으니 좀 멀리 떨어져 계세요.” 착한 아이처럼 고개를 끄떡인 동료들이 뒤로 물러섰다. 그 정도로는 턱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라고 덧붙이기도 그랬다. 세영은 세탁에 집중하기로 했다. 부츠로 가볍게 바닥을 탁탁 친 그녀는 전력을 다해 호수로 달려갔다. “스탬핑!” 새처럼 가볍게 뛰어오른 그녀는 발을 모아 수면을 거세게 내리찍었다. 스킬 이펙트가 터지면서 그녀의 발이 닿는 곳이 움푹 꺼졌다. 동시에 치솟은 물기둥이 빨래망에 담긴 엘프들을 거세게 후려쳤다. 곧바로 데자뷰 스킬로 수면 위에서 몸을 회전시킨 세영이 연속기를 썼다. “블레이징 토네이도!” 세영의 주먹이 내리쳐진 곳으로부터 나타난 다섯 개의 소용돌이가 수면을 거세게 휘저었다. 그러자 호수 전체가 컵 속의 물처럼 거세게 출렁였다. 빨래망을 걸어둔 나무들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아, 이거 좀 쪽팔린다.’ 적도 없이 호수를 상대로 스킬을 쓰는 것은 제법 민망한 일이었다. 무슨 아쿠아 에어로빅도 아니고 물 위를 첨벙첨벙 뒹구는 것을 동료들이 구경하고 있으니 더 그랬다. 하지만 여기서 움츠러들면 더 이상해 보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꿋꿋하게 주먹을 날렸다. “빙아탄!” 위로 솟구친 물기둥들이 얼어붙었다가 깨지면서 사방으로 쏘아졌다. 예상보다 얼음이 퍼지는 범위가 넓어서 빨래망 하나를 건드릴 뻔했다. 움찔해서 연속기를 취소한 세영이 대신 리바이어던을 캐스팅했다. 허공에서 내려온 거대한 머리가 호수에 처박히자 하늘로 치솟은 물이 파도처럼 동료들을 휩쓸었다. “꺄아악!” 떠내려가는 동료들을 본 세영이 황급히 몸을 날렸다. 때아닌 홍수를 만난 동물들도 도망치느라 바빴다. 동료들을 모두 건져서 나무 위로 올려놓자 멀리 떠내려가는 빨래망이 보였다. “살려주세요!” 오염이 거의 빠진 엘프들이 비명을 질렀다. 한숨을 내쉰 세영이 다시 빨래망을 건지기 위해 몸을 날렸다. 아무래도 그녀는 빨래에는 영 재능이 없는 듯했다. 달빛 호수에는 주신의 힘이 녹아있었다. 그것이 엘프들의 오염을 씻어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주신의 힘은 단순히 물을 끼얹는다고 발휘되는 것이 아니었다. 세영이 제힘을 불어넣어 활성화를 해야 했다. 세영은 몇 차례의 실험으로 더 많은 마나를 소비하는 스킬을 쓸수록 오염이 잘 씻겨나간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엘프들을 상하게 할 정도로 강한 스킬을 써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공격범위가 좁고, 더 많은 마나를 빨아먹는 스킬을 물에 사용해서 엘프들을 세척했다. “자, 이걸로 끝.” 마지막 엘프를 호수에 첨벙첨벙 헹군 세영이 그를 옆으로 집어 던졌다. 대기 중이던 동료들이 그의 물기를 닦고 담요를 덮었다. 마지막으로 마리엔이 세영의 몸에 담요를 둘러주었다. “고생하셨어요.” “아니, 뭐. 고생이랄 것까지야. 저보다 다른 사람들이 더 고생했죠.” 세영이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솔직히 그녀가 한 일이라고 해봤자 도르래 몇 개 만들고 스킬 몇 개 쓴 것이 전부였다. 반면 동료들은 오염된 엘프들을 잡고, 분류한다고 잠시도 쉴 틈 없이 일했다. 세영이 씻어서 던져놓은 엘프들을 마을로 운반하기까지 했으니 꽤나 고되었을 것이다. “다들 정말 고생 많았어요. 이제 푹 쉬자고요.” 세영의 말에 동료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축 늘어진 엘프를 끌고 마을로 돌아온 그들은 뜻밖의 광경을 마주했다. 마을 여기저기 주저앉아 울부짖는 엘프들이야 충분히 예상했던 광경이었다. 문제는 그들에게 쥐어뜯기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리스타타!” 들고 있던 엘프를 내던진 사슴이 황급히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래도 누나랍시고 챙기는 모습이 눈물겨웠다. 한숨을 내쉰 세영이 사슴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사슴의 난입에도 엘프들은 아리스타타를 놓아주지 않았다. 막 세탁된 뒤라 힘도 없으면서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나서지만 않았어도 아무도 죽지 않았어!” 얼떨결에 오염되어서 300년이나 미쳐있었으니 충분히 분노할만했다. 물론 그 대상이 주신이 아니라 만만한 아리스타타라서 그렇지, 아예 턱도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세영은 엘프들을 잡아떼어내는 것에만 주력했다. 아리스타타는 저항하지 않았다. 저항해도 소용없어서인지, 아니면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해서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고개를 숙인 그는 죽은 물고기처럼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돌아올 수 없다고 했잖아! 오염된 사람은 회복될 수 없다고 말했잖아! 그 말을 믿었는데 이게 뭐야. 이제 어떻게 살라는 거야!” “당신 말만 믿고 우리 손으로 가족과 친구를 죽였는데, 이제 와서 그게 아니었다고?” “죽은 사람들을 어쩔 거야. 내 딸을 어쩔 거냐고. 어서 대답해봐!” 한 서린 목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엘프들은 단순히 ‘재앙’을 불러들인 일을 원망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오염된 엘프들과 맞서 싸운 것을, 그들을 죽이게 한 것을 원망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들과 절대 싸우지 않았을 거야.” “구원자가 올 줄 알았으면 차라리 모두가 오염되는 게 나았어.” “맞아, 애초에 싸우자는 당신 말을 듣는 게 아니었어!” 사정은 이해하지만, 이런 개소리까지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한숨을 내쉰 세영이 인벤에서 정글도를 꺼냈다. 그녀는 가볍게 허공에 도를 휘둘렀다. “쇼크 웨이브!” 무형의 충격파가 엘프들을 덮쳤다. 직접적인 공격이 아니었음에도 엘프들은 모두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세영은 신음하는 그들을 발로 밀어내며 아리스타타의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인형처럼 반응이 없는 그의 멱살을 질질 끌고 나온 세영이 말했다. “모두가 오염된 엘프가 되면 나도 편했겠지. 고민하지 않고 너희 모두를 죽여 버릴 수 있었으니까.” 사실 아리스타타가 사슴의 누나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세영이 엘프들을 살려둔 것은 별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한순간의 변덕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것에 매달려서 ‘어차피 구원받을 거니까, 싸우지 않는 게 더 나았어.’ 라고 말하는 멍청한 소리를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구원자가 아니야. 그러니까 나를 빌미로 다른 놈을 공격하진 마라. 누군가 당연히 구해줄 거라고 믿는 것보다 멍청한 짓은 없으니까.” ──────────────────────────────────── 달빛 호수 (14) 차갑게 내뱉는 세영은 위압적이었다. 그녀의 힘에 휘둘렸던 엘프들에겐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하지만 말 한마디로 물러서기엔 그들이 가진 원통함이 너무 깊었다. 주춤거리던 엘프 중 하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구, 구원자가 아니라면 나설 자격은 없어. 외인이 우리 일족의 일에 간섭하지 마시오!” 어이가 없었던 세영이 픽 웃었다. 한 명이 나서자 쓰러져 있던 놈들도 용기가 생긴 듯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났다. “그래, 이건 우리 일족의 일이니 인간은 간섭할 수 없어!” “구해준 건 고맙지만, 족장의 처벌은 우리가 알아서 할 거요.” “당장 놈을 내놓고 물러서시오!” 여럿이서 떠들어대자 벌떼처럼 윙윙거리는 소리로만 들렸다. 시뻘게진 눈알을 보니 세영의 힘이 약했다면 당장 달려들어 때려눕혔을 기세였다. 세영은 젖은 신문지처럼 흐늘거리는 아리스타타를 힐끗 쳐다봤다. ‘이런 놈들을 구하고 싶었나?’ 그녀로선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처음이라면 몰라도, 멋대로 이주하겠다며 떠난 놈들이 당해버렸을 때 난 할 만큼 했다며 손을 털었을 것이다. 시끄럽게 짹짹대는 엘프들을 바라보는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구할 가치가 없어 보이는데.’ 그때였다. 후다닥 달려온 마리엔이 세영의 앞에서 양팔을 펼쳤다. 그녀는 잔뜩 화가 난 눈으로 엘프들을 쏘아보며 외쳤다. “으, 은혜도 모르는 사람들 같으니. 어떻게 세영님한테 소리를 지를 수가 있어요!” “맞아. 너희 진짜 너무 심하다. 최악이야!” 앞으로 튀어나온 시디발라가 그들을 손가락질했다. 디안과 리먼 또한 아리스타타를 감싸듯이 앞을 가로막았다.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세영님이 아니었다면 당신들은 영원히 그렇게 살았을 텐데, 감히 외인이며 간섭할 수 없다는 말을 하다니요.” “무분별한 증오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부디 지혜롭게 헤아려주십시오.” 동료들의 비난에 엘프들은 더욱 분노했다. 험악한 목소리가 우르르 쏟아졌다. 움찔거리는 동료들을 본 세영의 얼굴이 빙하처럼 굳었다. 그녀가 막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따뜻한 것이 그녀의 손등을 감쌌다. 죄책감 가득한 얼굴의 사슴이 “죄송합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치솟던 분노가 스르륵 가라앉았다. 세영이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였다. 사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뭐가요?” 하고 물었다. 조금 망설이던 사슴이 입을 열었다. “아리스타타로 인해 모욕당하시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허락하신다면 제가 대신 저들을 벌하고 싶습니다.” 피식 웃은 세영이 도를 다시 인벤에 집어넣었다. “전 모욕당한 적 없으니까, 사슴 씨가 미안해할 필요도 없어요.” 그리고 이제 모욕당하는 것은 엘프들이 될 터이니 그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세영은 아리스타타를 질질 끌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엘프들과 입씨름을 벌이던 동료들이 주춤 옆으로 물러섰다. 시끄럽게 떠들던 엘프들도 세영의 기세에 눌러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세영은 조용해진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외인에 인간이라는 말은 맞아. 하지만 그게 관계자가 아니라는 뜻은 아니거든.” 아리스타타를 제 발치에 내던진 세영이 인벤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이럴 때 쓰려고 만든 것은 아니지만, 여기저기 쓴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이게 뭔지 아냐? 신체양도각서. 너희 식으로 말하자면 노예계약서지. 쉽게 말해서 이놈이 내 노예라는 증거다.” 아리스타타가 처음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세영은 무어라 입을 달싹이는 그를 무시했다. 하얗게 질린 엘프들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족장이 당신의 노예라고?” “내 노예가 니들의 족장이었던 거지. 나보고 자꾸 빠져라 꺼져라 떠들어대는데 자기 노예 두들겨 패는 걸 보고 가만히 있는 병신이 어디 있냐.” 엘프들의 얼굴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들에게 ‘노예’는 인간에게 사냥당한 엘프였다. 엘프 스스로 노예가 되길 자청한 경우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세영은 그들에게 못을 박듯이 말했다. “내 노예를 패고 싶으면 나한테 허락을 받아. 무릎 꿇고 애원하면 한 대 정도는 때리게 해줄 테니까.” “거, 거짓말. 우리 일족은 스스로 노예가 되지 않는다! 당신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 세영이 반발하는 엘프를 지긋이 쳐다보면서 말했다. “대가리가 있으면 생각을 좀 하지 그래. 니들 족장이 몸뚱이 말고 뭘 내걸 수 있는데? 남한테 줄 것이 없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니들을 구해야 할 거 아냐?” “…우리를 구해주는 대가로 족장을 노예로 삼았단 말인가?” “당연한 거 아닌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쓸모없는 엘프 따위를 구해줄 리가 없잖아.” 세영이 툭툭 던지는 말에 엘프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죽이니 살리니 할 때는 언제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분노 어린 시선이 쏟아졌다. 물론 세영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뭐, 니들 사정도 딱하긴 하지. 그동안 쌓인 게 있으니 얼마나 억울하겠어. 당연히 화풀이 상대가 필요하겠지. 나도 그렇게 인정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 심정 다 이해하거든.” 비아냥거리듯 말한 세영이 아리스타타의 등을 걷어찼다. 그녀는 털썩 쓰러지는 아리스타타의 배를 발끝으로 툭툭 밀어 엘프들 쪽으로 굴려 보냈다. 흠칫해서 물러서는 그들을 향해 싱긋 웃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넓은 마음으로 내 노예를 빌려줄게. 자, 마음껏 걷어차고 침 뱉고 모욕해. 주인인 내가 허락해줄 테니까 이번 기회에 마음껏 화풀이하라고. 죽이는 건 곤란하지만, 때리는 것 정도야.” “…….” “뭐 하고 있어? 때리라고 멍석 깔아주니 못하겠냐?” 성큼성큼 다가간 세영이 아리스타타의 머리를 짓밟았다. 아리스타타의 몸이 들썩이며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굳어있던 엘프 중 하나가 “그만둬!” 하고 소리쳤다. “아리스타타는 우리의 족장이다. 그를 모욕하지 마라!” “족장? 내 노예가 왜 니들 족장이야. 요즘엔 족 같은 대우 해주는 걸 족장이라고 하나 보지?” 차갑게 비웃은 세영이 아리스타타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아리스타타를 엘프들 앞에 보란 듯이 내밀었다. 쥐어뜯겨 엉망이 된 그의 얼굴을 본 엘프들이 하나둘 시선을 피했다. 세영은 그제야 아리스타타를 놓아주었다. “그딴 엿 같은 자리, 니들 중에서 새로 뽑아야 할 거다. 다 같이 동의한 일이라도 잘못되면 죽일 듯 달려드는 놈들을 위해 누가 또 이런 꼴이 될지 궁금하지만.” 몸을 돌리려던 그녀가 바닥에 주저앉은 아리스타타를 보고 말했다. “뭐 하고 있냐. 빨리 따라와. 노예새꺄.” 멍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아리스타타가 겨우 일어섰다. 넘어질 듯이 기대어오는 그를 붙잡은 세영이 몸을 돌렸다. 아리스타타가 그녀의 어깨에 기댄 채로 속삭였다. “…아파요.” “누가 그렇게 처맞고 있으래?” “구, 구원자님이 너무 세게 때리셨잖아요.” 투정부리듯 말하는 목소리에 울음이 섞였다. 세영은 제게 기대 흐느끼는 그를 모른 척하며 걸음을 옮겼다. 동료들은 아무 말 없이 그 뒤를 따랐다. 마을 밖으로 나선 세영이 미안한 눈으로 그들을 돌아봤다. “미안해요. 피곤할 텐데 마을에서 쉬지도 못하게 해서.” “아닙니다. 저희도 이제 강해졌는걸요. 이 정도로는 끄떡도 없습니다.” 디안의 말에 이어서 마리엔이 “만약 거기 남아 있었으면 마음이 더 불편했을 거예요.” 하고 말했다. 시디발라가 작게 투덜거렸다. “구해줬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나쁜 놈들이야.” “그들도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슬펐던 거겠지요. 그만큼 힘든 일을 겪었으니까요.” 리먼이 씁쓸한 얼굴로 덧붙였다. 분노가 사람을 변하게 한다면 슬픔은 마음을 잠식한다고, 그래서 슬픈 사람들은 때로 이해하기 힘든 모습을 보인다고. “하지만 슬픈 건 얘가 더할 텐데?” 시디발라가 아리스타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아리스타타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시디발라를 외면하며 말했다. “저는 슬퍼할 자격이 없어요.” “그런 게 어디 있어? 슬픈 건 그냥 슬픈 거잖아.” 시디발라의 되물음에 그는 침묵했다. 사슴이 가만히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위로가 담긴 손길에 아리스타타가 조용히 웃었다. 그것을 본 세영이 한숨을 쉬었다. 훈훈한 분위기를 깨고 싶진 않았지만, 나서지 않으면 안 될 분위기였다. “마타라키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지?” 툭 던져진 물음에 아리스타타가 멈칫했다. 세영은 그것을 신경 쓰지 않고 물었다. “북쪽 숲엔 없었어. 하지만 너라면 놈이 어디 있는지 짐작할 테지.” “…숲의 남쪽에, 숲이 시작되는 곳에 있을 겁니다.” 어릴 때부터 그곳을 좋아했다고 말하는 아리스타타는 쓸쓸해 보였다. 그것이 안 되어 보였던지 사슴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마타라키가 오염된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건 봉인의 대가였습니다.” “아뇨, 그건 제 잘못이었어요.” 아리스타타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를 설득해야 했습니다. 그 애의 이야기를 들어줬어야 했어요. 하지만 전 이상에 빠져서 저만이 옳다고 자만했던 겁니다. 저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를 이기적이라고 매도하고, 이해받으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았어요.” 이상을 추구한다는 마음 또한 마타라키만큼 이기적이었다. 그것을 너무나 늦게 깨달았다. 정말로 소중하다면 이해해주길 바라기보다 이해시키려고 노력했어야 했다. 자학하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세영이 말했다. “병신 같긴 하지만, 그게 300년 동안이나 삽질을 해야 할 죄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저의 반신을 저버린 일입니다. 300년은 너무 짧아요. 아마 평생을 짊어지고 살아야겠죠.” 먼 곳을 응시하는 아리스타타의 눈은 황폐했다. 엘프 주제에 300년을 산 인간처럼 지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죄책감과 불행을 짊어지고 사는 것 또한 그의 선택이었다. 지옥의 한가운데 같은 생을 살고 싶다면 그 또한 존중받아야 했다. 삶의 방식이란 각자가 다른 것이니까. ‘애증이라는 건가.’ 오염으로 변해버린 마타라키는 아리스타타에게 집착했다. 그는 제 형제가 저에 대한 증오로만 살길 바라는 것 같았다. 계속 자신만을 바라봤으면 하는 비뚤어진 마음이었다. ‘뭐, 그럼 끌어내기는 쉽겠군.’ 세영의 입가에도 삐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마타라키가 남쪽으로 도망친 것은 아리스타타를 자극함과 동시에 호수를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오염 그 자체인 그에게 호수의 힘은 위협적이니 더 먼 곳으로 가고 싶었겠지. 세영은 동료들을 돌아보며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했다. 그것을 들은 동료들이 난색을 보였지만, 완벽하게 진행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아리스타타에 대한 ‘집착’을 지키려면 마타라키는 어쩔 수 없이 도발에 걸려들게 되어있었다. * 일행은 숲에서 하루 노숙을 한 후에 아리스타타가 말한 장소에 도착했다. 숲이 갑자기 뚝 끊기고 허리까지 오는 풀들이 이어지는 들판이 나타났다. 맵을 열어 지형을 살핀 세영이 손짓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리스타타가 들판으로 나아갔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외쳤다. “마타라키, 여기 있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살랑거리는 풀과 간간히 보이는 이름 모를 풀꽃들만 물기 어린 향기를 뿜어냈다. 잠시 기다렸던 아리스타타가 다시 외쳤다. “나는 숲을 떠날 거야. 구원자님과 함께 세상을 구하러 갈 거야.” 가늘게 떨리던 목소리는 결국 끝으로 가면서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아리스타타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의 얼굴에 고통이 서렸다. “너에겐 정말 미안해. 하지만 나는 이 세상을 구한 걸 후회하지 않아. 다시,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할 거야. 나는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건 단순히 세영이 말하라고 시킨 대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을 내뱉는 아리스타타는 너무나도 괴로워 보였다. 비명처럼 소리친 그는 비틀거리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미안해. 이게 내 선택이야.” 때를 맞춰 등장한 디안과 시디발라가 아리스타타에게 다가갔다. 타이밍은 정확했지만, 나무토막처럼 뻣뻣한 동작이 눈에 거슬렸다. 바닥에 주저앉은 아리스타타의 앞에 선 디안이 책을 읽는 것 같은 어조로 말했다. “아리스타타, 당신은 올바른 선택을 하셨습니다. 이번에도 우리들을 위해 싸워주십시오.” “세, 세상을 위해서 희생해줘. 다른 엘프들은 믿을 수 없으니까, 네가 아니면 안 돼.” 시디발라는 조금 더듬었지만, 나름대로 자연스러운 말투였다. 두 사람의 손을 잡고 일어선 아리스타타가 아련하게 말했다. “안녕, 마타라키.” -아리스타타! 돌아서는 그를 붙잡듯 사나운 외침이 터졌다. 예상 그대로의 상황에 세영이 냉소를 지었다. ‘그래, 넌 나올 수밖에 없었겠지.’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도, 함정이라는 것을 알아도 마타라키는 나타나야만 했다. 그는 오직 아리스타타의 증오만을 위해 존재하니까. 아리스타타가 이 게임을 끝내겠다고 선언하면 막을 수밖에 없었다. -나를 또 버리겠다고? 너 때문에 이렇게 된 나를 버리고 또다시 가버리겠단 소리야? 갑자기 나타난 마타라키를 본 동료들이 당황했다. 세영의 장담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쉽게 튀어나올 줄 몰랐던 것이다. 아리스타타가 일그러진 동생의 얼굴을 바라봤다. “나는 너를 버린 적이 없어.” -아니, 넌 나를 버렸어. 네 이상을 위해 나와 일족을 내팽개쳤잖아! 마타라키가 절규하듯 소리쳤다. 비극적인 분위기를 강조하듯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누구도 그것에 반응하지 않았다. 축축하게 젖어든 마타라키의 청은발을 바라보던 아리스타타가 말했다. “너는 내 죄책감이었어. 너에게 상처 입고 너를 뒤쫓을 때마다 나는 내 잘못을 보상하고 있다고 착각했지. 누군가에게 ‘자, 봐. 나는 이렇게나 열심히 속죄하고 있어.’ 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야.” -…아리스타타? 차분한 목소리에 이질감을 느낀 마타라키가 당황했다. 아리스타타의 눈에서는 더 이상 증오도, 증오에 가려진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쓰디쓴 후회만이 남아있었다. “300년 동안, 나는 동생인 마타라키가 아니라 내 죄책감인 너와 함께 했어. 그것이 자기만족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기로 했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휙 날아든 얼음의 창이 마타라키를 꿰뚫었다. 뒤이어 몸을 날린 세영이 그의 몸에 꽂힌 창을 걷어찼다. 창이 바닥에 퍽 박히면서 마타라키의 몸도 고정되었다. 디안과 시디발라가 아리스타타를 나무 위로 던지는 것과 동시에 번개가 대지에 내리꽂혔다. 섬광이 들판을 하얗게 물들였다. -어, 어떻게 된…. 세영은 바르작거리는 마타라키를 내려다보았다. 땅에 고정된 그의 몸이 거품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오염이자 저주 자체인 그는 치명상을 입어도 다시 재생되었다. 아리스타타가 지금까지 그를 죽이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세영은 호수의 물을 얼려 인벤에 넣은 채로 이동했다. 그들의 머리 위로 내리는 비는 마리엔이 그 얼음을 녹여서 하늘 높은 곳에서 뿌리는 것이었다. 그것이 세영의 스킬과 만나서 활성화되자 오염을 정화하기 시작했다. “알게 뭐야. 그냥 죽어.” 세영은 차갑게 내뱉었다. 제 몸에 박힌 얼음창을 빼내려 애쓰던 마타라키는 손까지 사라지자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그는 미친 듯이 아리스타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나무 위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아리스타타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아리스타타. 이리와.” 세영의 부름에 흠칫한 그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그 사이 마타라키는 머리와 상체만 남기고 녹아내린 상태였다. 세영은 인벤에서 얼음을 깎아 만든 단검을 꺼냈다. 그녀의 힘이 깃든 단검은 시퍼런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네가 끝내라.” “…….” “넌 300년 동안이나 동생을 괴롭혔다. 이제 그만 보내줘.” 아리스타타가 떨리는 손으로 단검을 받아들였다. 차가운 단검이 온몸을 얼어붙게 하는 것 같았다. 넋을 잃고 서 있는 그를 마타라키가 불렀다. -아리스타타. 바닥에 죽은 듯이 누운 마타라키는 언제 버둥거렸냐는 듯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희미한 미소를 띤 얼굴은 조금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사랑해, 아리스타타. 그 말이 아리스타타를 움직이게 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 푸르게 빛나는 단검이 아래로 내리꽂혔다. 비명은 없었다. 마타라키의 유해는 눈처럼 녹아내렸다. 아리스타타는 그의 형태가 없어지고, 검은 얼룩이 되고, 마침내 그것마저 사라질 때까지 바닥에 엎드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을 내려다보던 세영이 입을 열었다. “계약은 완료됐다. 이제 세 번째 조건을 말해도 되겠지?” “…….” “절대 자살하지 마라. 아리스타타. 어떤 식으로든 목숨을 끊지 마. 끝까지 살아.” 엎드려있던 아리스타타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흐려진 눈동자가 원망과 절규, 애원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세영은 자신의 말을 취소하지 않았다. “너는 어떤 조건이라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유 없이 살아간다. 하지만 가끔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만들어줘야 하는 자들이 있었다. 아리스타타가 바로 그런 놈이었다. 한숨을 삼킨 세영이 몸을 굽혔다. 마타라키가 있던 자리에 거무튀튀하게 변한 팔찌 하나가 놓여있었다. 집어 들고 살피자 섬세한 덩굴 문양이 새겨진 안쪽에 아직 은빛을 잃지 않은 글자가 남아 있었다. <사랑하는 누님의 성년을 기념하며> 글귀로 봐서 마타라키가 아리스타타의 성년에 선물한 팔찌인 것 같았다. 미궁에서 찾은 반지와 나스쿤의 왕관, 그리고 펠릭스의 성표. 사슴의 검, 그리고 이 팔찌까지. 신기는 현자들이 가장 아끼는 물건으로 만들어진 듯했다. “이거 네 거지?” 세영이 던진 팔찌를 엉겁결에 받아든 아리스타타가 입술을 달싹였다. 팔찌 안에 적힌 글귀를 어루만진 그는 이내 웃으며 그것을 내밀었다. “저는 이걸 가질 자격이 없습니다. 구원자님이 대신 거둬주셨으면 합니다.” 아리스타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세영이 다시 몸을 굽혔다. 그녀는 마타라키가 소멸한 곳에 손을 얹었다. 오직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희미한 기운이 있었다. 세영은 채집 스킬을 써서 그것을 뽑아냈다. 복숭아씨 정도의 크기에 검고 반들거리는 씨앗이 손에 들어왔다. 뭔지는 잘 모르지만, 마타라키가 소멸된 곳에서 뽑았으니 그와 관련된 물건일 듯했다. 원래 나무에서 나온 놈들이니 죽어서 씨앗을 남긴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았다. “뭐, 공짜로 받긴 그렇고. 이거랑 교환하자고.” 씨앗을 던져준 세영이 팔찌를 인벤에 넣었다. 씨앗을 받아든 아리스타타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온갖 감정이 다 뒤섞인 얼굴로 세영에게 물었다. “이건 설마….” “뭔지는 나도 몰라. 궁금하면 심어서 키워보든가. 한 백 년 정도 키우면 뭔지 알겠지.” 무심하게 말하던 세영은 갑자기 와락 달려드는 아리스타타 때문에 뒤로 주저앉았다. 젖은 흙이 들러붙는 느낌에 인상을 쓴 그녀는 제 목을 껴안고 엉엉 우는 엘프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손에 묻은 진흙을 아리스타타의 머리에 쓱쓱 문질러 닦아내는 것으로 봐주기로 했다. ──────────────────────────────────── 초승달의 들판 (1) “어떻게 이런 일이…….” 교황은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듯 중얼거렸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승리할 거라 생각했다. 적의 수장인 로토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가 부리는 끔찍한 괴물도 모습을 감추었다.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 본드래곤이 사라진 이상 그들이 패배할 이유는 없었다. 교황이 이끄는 성전기사단은 뛰어난 무력을 자랑했고, 한낱 마도의 무리에게 밀릴 자들이 아니었다. 이번에야말로 모리아를 수복하고 지난날을 설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마도가, 이런 힘을 숨기고 있었단 말인가?’ 모리아 수복은 교단의 사활이 걸린 일이었다. 교황은 대륙 전체에서 원군을 긁어모았다. 교황 직속의 성기사 2천, 칸디아 왕국에서 빌려온 보병 1천을 포함하여 거의 6천 명에 달하는 정벌군이 모였다. 본드래곤의 공격으로 막대한 손해를 봤어도 아직 5천의 병력이 남아있었다. 그에 비해서 마도군은 4천이 안 되는 전력이었다. 기병이 3천으로 교황군보다 많았지만, 신성력을 사용하는 성기사들의 무력은 압도적이었다. 그래서 기병의 수적 열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자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먼저 선공한 마도군의 기병이 칸디아 보병을 집중 섬멸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교황은 성기사들을 이끌고 마도의 중군을 쳤다. 기병이 빠져나간 마도의 중군은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 하고 수세에 몰렸다. 그것이 함정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칸디아 보병을 섬멸하고 돌아온 기병과 우측에서 대기 중이던 마도의 2군이 양동작전으로 몰아친 뒤였다. 결국, 연합군의 한계로 지휘체계가 통합되지 않았던 교황군의 대패였다. 하지만 교황은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후방에서 몰아치는 기병들로 사방이 아수라장이었지만, 그저 멍하게 있을 뿐이었다. “성하,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보다 못한 측근들이 교황을 잡아끌었다. 교황이 전투복을 벗고 평기사로 위장하는 사이 남은 성기사들은 필사적으로 퇴로를 뚫었다. 그들의 희생으로 간신히 전장에서 벗어나자 백 명도 안 되는 측근들만 남아있었다. “포기하셔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성하께서 무사하셔야 교단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살아남은 이들이 낙심한 교황을 위로했다. 하지만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추격이 따라붙은 것이다. 남은 성기사들이 힘을 모아 휙휙 날아드는 화살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말이 지쳤습니다. 이대로는 곧 따라잡힐 겁니다.” 추격은 끈질겼다. 계속되는 질주에 힘이 빠진 말은 거품까지 물고 있었다. 눈짓을 주고받은 성기사들이 대열에서 뒤처졌다. 뒤에 남아서 추격자들을 막으려는 것이다. “성하, 부디 무사하십시오.” “교단의 정의를 빛내주십시오.” 유언과 같은 말을 남긴 성기사들이 추격자들을 향해 말을 돌렸다. 교황은 이를 악물고 고삐를 틀어쥐었다. 형식적인 감사를 표할 여유조차도 없었다. 그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면 조금이라도 더 앞으로 나가야 했다. 쓰디쓴 눈물이 그녀의 뺨으로 흘러내렸다. 정신을 차릴 때마다 남아있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었다. 신성력이 고갈되어 화살을 맞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더 가까워진 추격자들을 돌아본 교황이 생각했다. ‘이대로 끝인가.’ 사방은 황량한 들판으로 추격을 떨쳐낼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품에 넣어둔 단검을 의식하며 이를 악물었다. ‘포로로 붙잡히는 것보다는 자결하는 편이 교단에 타격이 작을 것이다.’ 자살은 교단에서 금하는 중죄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 교황이 포로로 붙잡힌다면 교단의 손발이 묶이게 된다. 하지만 그녀가 죽는다면 새 교황을 선출하여 그를 중심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 죽음을 결심한 교황의 얼굴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바로 그때였다. “으아악! 괴물이다!” “피해라, 어서!” “도망치지 말고 막아라!” 추격자들 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쿵쿵거리는 굉음도 들려왔다. 다시 돌아본 교황은 질겁했다. 짐승의 머리와 날카로운 손톱을 가진 구울, 거대한 해파리처럼 생긴 헬가스트가 추격자들을 덮치고 있었다. 희생자들의 비명이 황량한 들판을 울렸다. “언데드들이 왜 여기에?” 헬가스트는 모리아에서도 쉽게 보기 힘든 상위의 언데드였다. 어린애처럼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낸 놈이 수십 개의 촉수를 뻗어 추격자들을 휘감았다. 놈은 생물의 몸에 촉수를 박아 넣고 체액을 빨아먹는 몬스터였다. 붙잡힌 희생자들이 말라붙은 미라처럼 변했다. “후퇴! 어서 후퇴하라!” 견디다 못한 추격자들이 빠르게 달아났다. 구울의 무리가 개가 짖는 소리를 내며 그들을 쫓았다. 반면 말라비틀어진 시체를 내던진 헬가스트는 교황을 향해 날아왔다. 질겁한 성기사 중 하나가 신성력을 내질렀다. “빛이여!” “안 돼!” 기겁한 교황이 만류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반으로 찢어진 헬가스트의 몸체에서 수십 개의 유체가 튀어나왔다. 분열된 헬가스트들이 교황의 주변을 포위했다. 어쩔 수 없이 말을 멈춘 교황이 전투를 준비했다. “헬가스트는 단순한 공격으로는 분열될 뿐이다. 강력한 신성력으로 단번에 태워서 없애도록.” “서, 성하. 저쪽을 보십시오.” 그때 측근 중 누군가가 먼 들판을 가리켰다. 급박한 목소리에 돌아본 교황이 미간을 찌푸렸다. 멀리서 붉은 아지랑이 같은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점점 붉게 물드는 들판을 노려보던 교항은 그것이 거대한 언데드의 무리라는 것을 알아챘다. 지평선을 붉게 물들이며 수많은 언데드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세상에, 신이시여….” 성기사 중 하나가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압도적이고 끔찍한 장관이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사람들이 있는 힘을 다해 무기를 움켜쥐었다. 마지막 힘을 긁어모은 오라가 뿌옇게 서렸다. “성하, 저희가 길을 뚫겠습니다. 어서 도망치십시오.” 측근의 말에 교황은 침묵을 지켰다. 그것도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때의 말이었다. 달아나려고 시도하는 순간, 까맣게 밀려드는 언데드들에게 짓밟힐 것 같았다. 그때 언데드 무리에서 변화가 일었다. 가장 선두에 있던 기마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그들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유령마를 타고 보석으로 치장된 관을 쓴 기사였다. 기사가 다가오자 교황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헬가스트들이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마치 경의를 표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 땅에서 신성력을 쓰지 마라. 유령마를 멈춰 세운 기사가 노여운 듯이 말했다. 그는 오러를 내뿜는 자들의 발치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너희의 신성력이 이곳을 오염시키고 있다. 흠칫한 성기사들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언데드 기사의 말처럼 그들의 서 있는 바닥이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이들이 오러를 거둬들였다. 기사는 그제야 만족한 듯이 말머리를 돌리려 했다. 교황이 급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름은 없다. 이곳에서 속죄하는 자일 뿐. 무뚝뚝하게 대꾸한 기사가 추격자들의 시체 쪽을 턱짓하며 말했다. -뒤를 쫓는 자는 이제 없을 것이다. 신성력을 쓰지 말고 되도록 빨리 이곳을 벗어나라. 너희가 오래 머물수록 이 땅은 더욱 고통받을 테니까. 기사가 손을 내밀자 바닥에 내려앉은 헬가스트 중 가장 작은놈이 떠올랐다. 손바닥에 내려앉은 헬가스트를 교황 쪽으로 날려 보낸 기사가 말했다. -따라가라. 안전한 곳으로 안내해줄 거다. 그들 쪽으로 둥실둥실 날아온 헬가스트가 끼기긱 소리를 냈다. 흠칫해서 몸을 물린 교황이 시선을 돌렸을 때 기사는 이미 말을 달려 무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잠시 멈춰있던 언데드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넋을 잃고 그를 쳐다보던 교황과 측근들은 헬가스트의 재촉에 말을 움직였다. 한층 느려진 속도 덕분에 지친 말도 그럭저럭 걸음을 옮겼다. 헬가스트들은 앞서가니 뒤서가니 하며 그들을 감시할 뿐 별다른 위협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즉시 공격할 것 같았다. “그 기사는 대체 뭐였을까요?” “언데드가 왜 우리를 도와준 건지 모르겠습니다.” 한층 여유로워진 측근들이 의문을 표했다. 그곳의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기사의 정체를 알고 있는 교황은 입을 다물었다. 모리아의 데스나이트,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교단의 영웅. 교단의 정의를 믿는 이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입술을 꾹 깨문 교황이 말했다. “이곳에서 무사히 돌아간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원자를 뵈어야겠다.” “…하지만 구원자님은 실종되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성기사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구원자가 본드래곤에게 당해 실종되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일부는 죽었다고 말하고, 일부는 어딘가에 살아있다고 믿었다. 교황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주신께서 내리신 사자가 한낱 괴물 따위에 당할 리가 있겠는가. 분명 무슨 사정이 있어 몸을 숨기고 계신 거겠지. 지금의 환란을 끝내기 위해서는 그분의 힘이 꼭 필요하다.” 구원자를 거짓이라 의심하는 이들과 달리 세영을 직접 본 교황은 확신할 수 있었다. 세영의 몸에 깃든 것은 진정 주신의 힘이었다. 그녀는 인간이라 부르기 이상할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신의 사자가 아니라 신 그 자체처럼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직 교단에 대한 증오로만 살아오던 괴물을 한순간에 변화시킨 것도 놀라웠다. 구원자가 아니라면, 신의 사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교황은 확신하듯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자를 찾아야 한다.” ──────────────────────────────────── 초승달의 들판 (2) 아리스타타는 숲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일행을 배웅해주었다. 동료들이 함께 가자고 권했지만, 그는 당분간 육아에만 집중하고 싶다고 거절했다. 그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기에 다들 시원섭섭한 얼굴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구원자님,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리스타타가 세영에게 감사를 표했다. 실컷 울어서인지 팅팅 부은 얼굴이었지만, 예전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세영이 피식 웃었다. “말로만 금칠하지 말고 나중에 진짜 갚아.” 그러자 싱긋 눈웃음친 아리스타타가 품속에서 푸른 병을 꺼냈다. 중지 정도 크기의 반투명한 병 속에는 은을 녹인 것처럼 반짝이는 액체가 반쯤 담겨 있었다. 병을 받아든 세영이 이게 뭐냐는 눈짓을 보냈다. “저희의 선조가 이 별에 정착할 때 주신께 받은 것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것의 절반을 숲에 따르자 달빛 호수가 되었다고 해요.” 주신의 힘이 농축된 물이었지만,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리스타타 역시 이것을 사용해 일족의 오염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힘으로는 다룰 수 없다는 사실만 깨달았을 뿐이었다. 구구절절한 설명을 들은 세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니들의 보물일 텐데, 나한테 던져줘도 되냐?” “대가로 호수를 받겠다고 하셨잖아요.” 호수를 가져갈 순 없으니 그 대신이라고 말한 아리스타타가 생글생글 웃었다. 세영은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호수를 받겠다고 한 것은 오염 때문에 더러워져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다행히 세영의 힘을 충분히 받은 호수는 세탁이 끝난 후에도 멀쩡했다. “뭐, 챙겨줘서 고맙다.” 어쨌든 준다는 것을 사양할 필요도 없었다. 세영은 병을 인벤에 집어넣었다. 아리스타타가 아차 하는 얼굴로 품을 뒤졌다. “앗, 또 잊을 뻔했네요. 이것도 가져가세요.” 그가 꺼낸 것은 푸른 탱자처럼 생긴 열매였다. 시퍼렇게 물든 열매는 아직 덜 익었다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워낙 딱딱해서 이가 들어갈지도 의문이었다. 세영의 표정이 묘해지자 아리스타타가 서둘러 말했다. “수호목의 열매예요. 항상 한 쌍이 열린다고 말씀드렸었죠? 둘 다 먹는 것은 무리라서 하나는 남겨두었어요. 필요하시다면 그에게 주세요.”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열매를 건네주는 척하며 세영에게 한 걸음 다가선 아리스타타가 속삭이듯 덧붙였다. “구원자님도 알고 계시죠? 그의 육신은 이제 한계예요. 나스쿤이 시간 벌이를 해준 것 같지만, 그릇 자체에 금이 간 이상 얼마 버티지 못할 거예요.” “…….” “열매를 먹으면 몇십 년 정도는 더 버틸 수 있겠죠. 하지만 끝까지 책임지실 마음이 아니라면 그냥 내버려두세요. 구원자님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실 생각이잖아요.” 아리스타타는 주인에게 버림받는 것보다 주인의 옆에서 죽는 게 더 행복하지 않겠냐며 웃었다. 한숨을 쉰 세영이 그의 손에 들린 열매를 낚아챘다. “나도 참 꼬인 성격이지만, 너도 만만치는 않아.” “제가 아니면 누가 이런 말을 하겠어요?” 배시시 웃은 아리스타타가 한걸음 물러섰다. 그의 시선을 받고 옆을 돌아본 세영은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사슴을 발견했다.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속닥이고 있으니 불안한 모양이었다. 아리스타타가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안 그렇게 생겨선 질투가 심하네요. 아까도 저를 이렇게 노려보던데.” “내 앞에서 사슴 까지 마라.” 질투가 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점까지 포함해서 귀여운 거다. 눈을 부라리는 세영을 보고 한걸음 더 물러선 아리스타타가 “네네, 알겠습니다.” 하고 얄밉게 말했다. 받을 것까지 다 받아 챙긴 세영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아리스타타가 그녀의 등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일이 다 끝나면 놀러 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농담인가 싶어 힐끗 돌아본 세영은 진지한 그의 얼굴에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인사는 하고 가야 할 것 같아서 한마디 툭 내뱉었다. “괜히 마을 근처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어디든 안 보이는 곳에 처박혀서 애나 키워.” 세영이 아리스타타를 노예로 삼은 것은 그가 또 희생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오염에서 풀려난 엘프들은 한동안 마을을 재건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약점이 있는 아리스타타는 공용 노예에 화풀이 대상으로 굴려질 가능성이 있었다. 세영의 염려를 느낀 듯 아리스타타가 배시시 웃었다. “의외로 상냥하시네요.” “헛소리하지 말고.” “네네, 주인님.” 주인님 발언에 바짝 긴장한 사슴이 다가와 세영의 팔을 붙잡았다. 세영은 그의 손을 다독인 후에 미련 없이 발길을 옮겼다. 무슨 일이 벌어지나 하고 눈치만 보던 동료들이 서둘러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아리스타타는 움직이지 않았다. * “지금 저희가 있는 곳이 초승달 평원입니다. 아마 지금 위치는 이쯤일 거구요.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칸디아 국경이고, 서북쪽으로 올라가면 파디샤로 통합니다.” 지도를 펼친 디안이 손으로 위치를 짚어가며 설명했다. 모두가 지도에 집중한 사이 남자는 세영의 옆모습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때 고개를 갸웃한 세영이 입을 열었다. “칸디아는 좀 곤란하지 않을까요. 수배령이 내려져 있잖아요.” “그럼 파디샤로 가야겠군요. 당분간 노숙을 해야겠지만, 날씨도 온화하니 썩 나쁘진 않을 겁니다.” 지도를 접어 넣는 디안의 얼굴에 만족감이 서렸다. 남자는 그것이 모험이 끝나지 않았다는 기쁨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의 마음 역시 디안과 똑같았으니까. “어, 파디샤라면 내 고향이랑 가까운 곳이야.” 시디발라가 꼬리를 살랑이며 말했다. 세영이 관심을 보이자 그는 좀 더 열정적으로 수인족의 마을에 대해 설명했다. 남자는 부러운 얼굴로 그것을 지켜봤다. 언제나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그것을 이해받는다. 그로서는 감히 따라 할 엄두도 나지 않는 일이었다. “우리 마을에 가면 사람들이 굉장히 환영해 줄 거야. 귀찮은 일도 없고, 동생들도 굉장히 반가워할 거라고.” “글쎄, 어쩔까.” “가자! 같이 가줘, 응?” 시디발라가 어린아이처럼 몸을 뒤채며 졸라댔다. 그것을 내려다보는 세영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멍하게 그녀의 입술을 쳐다보고 있던 남자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의식하지 말자고 다짐하는데도 자꾸만 시선이 향하는 것에 난감해졌다. “카라드 씨, 저녁 준비 좀 도와주시겠어요?” 마치 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마리엔이 말을 걸어왔다. 흠칫한 남자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같이 돕겠다고 나서는 디안을 시선만으로 제압한 마리엔이 방긋 웃었다. 전혀 웃고 있지 않은 녹색 눈을 본 남자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카라드 씨는 눈이 좋으니까 보이시죠. 세영님이 달라지셨다는 거요.” 재료를 손질하는 내내 말이 없던 마리엔이 입을 열었다. 놀라서 손이 베일 뻔했던 남자가 그녀를 바라봤다. 대답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는지, 마리엔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세영님을 처음 봤을 땐 천사라고 믿었어요. 그분 주변만 환하고 따뜻한 것으로 가득 차 있었거든요. 마치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시선을 뗄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요즘은 그게…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리엔은 숲으로 오는 내내 잠들어 있었다. 만약 그녀가 깨어있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아리스타타를 막았을 것이다. 한계를 뛰어넘는다니,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인간에겐 한계가 있고, 또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마리엔의 생각이었다. 한계가 없다면 그건 이미 인간에서 벗어난 인외의 존재였다. “제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죠. 세영님의 힘은 지금 이 순간에도 강해지고 있어요. 저는 보는 힘이 약하지만, 그분 주변의 공기가 점점 더 빛나는 것이 느껴져요.” “…그분께서 원하신 일입니다.” 남자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그는 한계를 뛰어넘겠다는 세영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진심으로 기대하는 것이 보였기에, 그 기대를 꺾는 것이 두려웠다. “카라드 씨는 그래도 정말 괜찮으신가요?” “저는 그분이 어떤 존재이든 따를 뿐이니까요.” 평범한 인간이든 신의 사자든 상관없었다. 세영이 아무런 힘이 없었다면 남자는 기쁘게 그녀를 위해 봉사했을 것이다. 가끔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의 대꾸에 미간을 찌푸린 마리엔이 뾰족하게 대꾸했다. “저는 세영님이 강해지는 게 싫은 게 아니에요. 세영님께서 그 힘을 이기지 못할까 봐 걱정되는 거라고요. 갑자기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손에 넣어서 세영님이 망가지실까 봐 두려워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한 남자가 멈칫했다. 세영은 새로 얻은 힘을 자신의 것으로 차근차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힘에 휘둘린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마리엔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만약 세영이 지금과 같은 속도로 강해진다면, 그녀의 몸이 버티지 못하는 한계가 올 수도 있었다. 갑자기 많은 물을 쏟아 부은 그릇이 깨지듯이. ‘무모한 면이 있는 분이시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겠지.’ 남자는 제가 너무 안이했던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점점 강해지는 세영을 보면서도 그녀가 더 멀어지는 것 같아서 슬퍼했을 뿐이었다. 마리엔처럼 그것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지 못했다. 굳어진 그를 빤히 쳐다보던 마리엔이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전 카라드 씨가 세영님을 붙잡아주지 않을까 기대했어요.” 이미 알고 있었던 일이지만, 당사자의 입으로 듣는 기분은 조금 색달랐다. 마리엔은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세영님은 이 세계에 미련이 없으시니까, 카라드 씨가 그 미련이 되어주셨으면 했어요. 비겁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세영님께서 여기 남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카라드 씨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으신 건가요?” “저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던 남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세영 앞에서는 당당하게 내뱉었던 말들이 갑자기 졸렬하고 비겁한 변명처럼 느껴졌다. 마리엔이 다그치듯이 말했다. “세영님이 원래 세계로 돌아가신다고 하면, 그대로 보내실 거예요?” 마리엔은 조금 답답하고 화가 나보였다. 더는 입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던 남자가 힘겹게 고백했다. “…저는 남아있는 수명이 그리 길지 않습니다.” 마리엔의 눈이 동그래졌다. 뜻밖의 대답에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남자는 도망치고 싶은 것을 필사적으로 누르며 말을 이었다. “세영님께서 저를 곁에 두시는 것은 제가 감히 그분을 붙잡을 수 없다는 걸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방해될 정도로 오래 살지도 못할 테니까요. 그래서….” “당신은, 그걸 알면서도 세영님께 접근한 건가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마리엔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할 수 있다면 들고 있는 식칼로 그를 찔러버리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면목이 없었던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기적인 것은 알지만, 한 번만이라도 저를 봐달라고 매달려 보고 싶었습니다.” 뒤죽박죽이던 감정을 정리하자 몰랐던 자신의 밑바닥이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신다면 내가 곧 죽는다고 해도 크게 개의치 않으시리라는 이기심. 죽기전까지 만이라도 함께 있고 싶다는 욕심. 커진 연정을 주체하지 못해 고백이라도 하고 싶었던 미련까지. 세영은 그것을 꽃처럼 받아주었지만, 사실 졸렬하고 못나기 짝이 없는 감정이었다. 남들 앞에 내놓기도 부끄러웠다. 비난 어린 시선을 견디지 못한 남자는 주먹을 꽉 쥐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던 마리엔이 눈을 감았다 떴다.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은 그녀는 시퍼렇게 날이 선 눈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을 연인으로 선택한 건 세영님께서 결정하신 일이니 제가 간섭할 수는 없겠죠. 어디까지나 두 분의 문제니까요.” 여기서 연인이 아니라고 고백했다간 마리엔이 폭발할 것 같았다. 침묵하는 남자를 향해 부드득 이를 간 마리엔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가 당신이었다면 그런 이기적인 선택을 하진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세영님께서 당신을 연인으로 삼은 이유가, 단순히 방해되지 않을 것 같아서라는 멍청한 생각도 하지 않을 거고요.” 탕 소리 나게 식칼을 내려놓은 마리엔이 “잠시 자리 비울게요.” 하고 매섭게 돌아섰다. 뺨이라도 맞은 기분으로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던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찔린 것처럼 가슴 안쪽이 뜨끔거렸다. “으악! 타잖아!” 뭉게뭉게 연기를 내뿜는 냄비를 보고 달려온 시디발라가 호들갑을 떨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남자가 아차 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서 냄비 안의 내용물이 숯덩이가 되어 있었다. 결국, 그날 저녁은 세영이 만들어둔 요리가 되었다. 뒷정리가 끝나고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받던 동료들은 하나둘 잠자리에 들었다. 사방이 허허벌판이라 돌아가며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거의 끝의 순번을 맡은 남자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의 이기적인 행동과 마리엔의 비난을 되풀이해서 떠올리며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그때 부드러운 손길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움찔한 남자는 그것이 세영의 손길이라는 걸 깨닫고 긴장을 풀었다. “잠이 안 와요?” 그의 머리맡에 배를 깔고 엎드린 세영이 속삭였다.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목소리에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주먹을 꽉 쥐었다 편 남자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제게 닿은 손등을 어루만지자 세영이 소리죽여 웃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춘 세영이 말했다. “안 졸리면 밖에서 잠깐 이야기 할래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남자의 표정에서 대답을 읽었는지 세영이 다시 웃었다. 그 소리 없는 떨림이 남자를 무척 수줍게 만들었다. ──────────────────────────────────── 초승달의 들판 (3) 둘은 조용히 야영지 근처를 거닐었다. 오늘따라 유독 밝은 달빛이 주변을 푸르게 물들이고 있었다. 남자는 맞잡은 손을 의식하며 세영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고요한 분위기에 선뜻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를 돌아본 세영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무슨 생각 해요?” “세영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궁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한 대답에 세영이 소리 내어 웃었다. 농담이 아니었던 남자는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여전히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세영이 말했다. “미안해요. 너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물어본 거였거든요.” “…….” “음, 그냥 이렇게 있으니까 참 좋구나 하는 생각?” 남자는 얼굴에 화끈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들키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이는 그의 손을 잡아당긴 세영이 물었다. “사슴 씨는 어디든 가보고 싶은 곳이 없어요?” 의아한 시선에 그녀는 “그냥,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같이 갔으면 해서요.” 하고 덧붙였다. 별것 아닌 말이었지만, 남자는 가슴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붉어진 얼굴을 감추는 것을 포기한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저는 지금으로도 만족합니다. 세영님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게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어….” 그러자 세영의 얼굴이 기묘해졌다. 난처해 하는 그녀를 느낀 남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인 세영이 변명하듯이 말했다. “아니, 뭐랄까. 좀 뜻밖의 대답이라서.” “부담스러우십니까?” 남자는 초조함을 누르며 물었다. 너무 제 욕심을 드러낸 것 같아 후회스러우면서도 그녀가 그렇다고 답하지 않길 바랐다. 바짝 긴장한 그를 힐끔거린 세영이 “음, 부담까진 아닌데요.” 하고 애매하게 말했다. 어쩔까 고민하듯 머뭇거리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단순히 사귀는 상대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아서요. 이제 와서 좀 늦은 말이긴 하지만요.” “…….” “다른 남자 별명 지어줬다고 화내거나 좋아한다고 말해달라고 하거나. 뭐, 그런 것도 가볍게 사귀는 사이에선 안 하는 말이거든요.” 멍하게 있던 남자가 입을 달싹였다. 목이 졸린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불안감에 맞잡은 손을 꽉 붙잡자 세영이 가볍게 그의 손등을 다독여주었다. 그제야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지 않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질투하지도, 저를 좋아해 달라고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어,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저 그만두자고 말하려는 거 아닌데요.” 세영이 당황한 듯이 말했다. 더욱 당황한 남자는 어찌할 바를 몰라 손끝만 움찔거렸다. 난감하게 머리를 긁적인 세영이 덧붙였다. “사실 아리스타타한테 한소리 들었거든요. 원래 세계로 돌아갈 거면서 당신한테 손대지 말라고요. 뭐, 직접 그렇게 말한 건 아니지만, 대충 그런 뜻이었달까. 그런 와중에 사슴 씨의 말을 들으니까 제가 너무 무책임하게 느껴져서요.” 남자는 울컥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저를 알아주지 않는 누이가 밉고,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하던 자신도 미웠다. 그는 거칠어지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말했다. “아리스타타는 아무 것도 모르고 한 말일 겁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뇨. 저도 제가 무책임하다는 거 알아요. 애초에 사슴 씨도 좋고 저도 좋으면 사귀면 된다고 생각 없이 시작한 거니까. 진지하지 않다고 까여도 할 말은 없죠.” 세영은 제가 잘못한 거라고 시원하게 인정해버렸다. 그만두자고 말하는 게 아니라고 했지만, 불안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남자를 꽉 붙잡은 세영이 말했다. “말이 좀 꼬였는데…. 음, 제 말은 우리가 좀 더 진지한 관계가 되면 어떨까 해서요. 물론 결혼까지는 무리지만, 단순히 손잡고 놀러 다니는 사이로는 서로 부족한 것 같고.” “…….” “뭐, 그렇다고요. 싫어요?” 말을 마친 세영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한동안 멍하게 있던 남자가 조용히 물었다. “제가 좋다고 하면… 그럼 당신을 제 연인이라 말해도 되는 겁니까?” “어, 음, 그렇게 말하니까 되게 쑥스럽네요.” 세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것이 말 그대로 민망한 기색이었다. 그다지 싫은 반응이 아닌 것에 용기를 낸 남자가 그녀의 양팔을 꽉 붙잡고 물었다. “제가 당신께 접근하는 이들을 질투해도 용서해주실 겁니까? 저를 좋아해 달라고… 아니, 저만을 좋아해 달라고 말해도요?” “그건 지금도 그러잖아요. 별로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은데?” 세영이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잠시 멈칫한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허락하시면 저는 지금보다 더 욕심을 부릴 겁니다. 나중에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하실지도 모릅니다.” “흠, 예를 좀 들어봐요. 사슴 씨가 욕심부리는 건 잘 상상이 안 가서요.” 세영은 여전히 장난스러운 얼굴이었다. 남자는 잠시 망설였다. 제아무리 너그러운 그녀라도 이런 말을 하면 웃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머뭇거리던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돌아가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제 옆에 있어 주셨으면 합니다.” 세영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남자는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서둘러 말했다. “주제넘은 말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하신다는 것도, 그래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저를 받아주셨다는 것도 압니다. 이제 와 이렇게 매달리는 것이 비겁해 보이겠지만….” 목이 메여 잠시 말을 멈춘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수백 번을 되풀이해서 생각해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추해도 어떻게든 매달려 보고 싶었다. “저는, 좀 더 살고 싶어졌습니다. 당신께서 제 옆에 있으셔서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고 싶다고. 제가 그러면… 아니, 제가 그래도 옆에 있어 주실 겁니까?” 멍하게 눈을 깜빡이던 세영이 뺨으로 손을 올리려다 멈칫했다. 남자의 손에 붙잡힌 제 팔을 내려다본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어, 뭔가 가로채인 느낌이네요. 저도 사슴 씨에게 물어보려고 했거든요. 좀 더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이 있냐고요.” “…예?” “뭐, 어쨌든 알아들었어요. 제가 옆에 있으면 더 오래 살겠다는 말인 거죠?” 잠깐 망설이던 남자가 고개를 끄떡였다. 피식 웃은 세영이 붙잡힌 양팔을 들어 올렸다. 남자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여 그녀가 제 뺨을 만지게 해주었다. 그의 뺨을 장난치듯 꾹꾹 누른 세영이 말했다. “사슴 씨야말로 후회하면 어떡하려고요? 나중에는 분명 골치 아파져서 내가 왜 이런 여자 때문에 더 살기로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걸요.” “절대로 그러지 않을 겁니다.” 남자는 맹세하듯 말했다. 하지만 세영은 썩 믿는 표정이 아니었다. “사람 마음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니라니까요. 저만 해도 절대 안 그럴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 지금 다 하고 있잖아요.” “어떤 것을 말씀하십니까?” “음, 너무 잘난 남자랑은 사귀지 않는다는 거?” 세영이 그의 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부드러운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간지러움과 다른 감각이 몸속을 간질였다. 남자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춘 세영이 속삭였다. “그리고 누군가 때문에 거주 문제를 결정하지 않겠다는 거?” “제 옆에 있어 주실 겁니까?” 남자는 초조한 마음으로 답을 재촉했다.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애가 탄 남자가 그녀의 손끝에 입 맞추며 제발 말해달라고 애원했다. 세영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럼 서로 약속하죠. 둘 중 한 사람이라도 더는 좋아하지 않게 되면 바로 헤어지기로요. 그리고 좋아하지 않는 데 억지로 좋아하려고 노력하지 않기로요.” “…….” “약속하면, 사슴 씨와 사귀는 동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가지 않을게요.” 남자는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내일 당장에라도 세영의 마음이 변하면 그녀를 놓아줘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그녀 나름의 양보라는 것을 알기에 차마 싫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남자는 필사적으로 평온한 목소리를 짜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자 세영이 환하게 웃었다. 남자는 그 미소를 보며 불안해진 마음을 누르려고 애썼다. 자신이 잘 선택한 건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의 반응이 이상했는지 세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무어라 대답하기 힘들었던 남자는 대신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 맞췄다. 웃으며 그걸 받아주던 세영은 무작정 덤벼드는 그에게 떠밀렸다. 남자는 서툴게나마 그녀가 해줬던 입맞춤을 흉내 냈다. 어떻게든 세영의 마음을 붙잡고 싶었다. 몸으로 부딪혀서라도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때 미간을 찌푸린 세영이 그를 확 떼어냈다. 그녀는 어이없는 얼굴로 남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 이 겁도 없는 사슴이? 왜 지금 유혹을 하고 그래요?” “…싫으십니까?” “아, 진짜…! 저 지금도 참고 있거든요? 그러다가 잡아먹혀요.” 세영의 위협에 남자는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는 말 그대로 절박했고, 카벨에 대한 질투 따위를 떠올릴 여유도 없었다. 눈이 동그래져서 남자를 쳐다보던 세영이 피식 웃었다. 머리를 벅벅 긁적인 그녀가 말했다. “그래도 첫 경험일 텐데 맨땅에 굴리기는 좀 그렇잖아요. 허리 나가면 어쩌려고.” 남자는 개의치 않는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번의 거절로 그녀에게 까다롭다는 인상을 주게 된 것 같아 초조했다. 달래듯 그의 등을 다독인 세영이 한숨을 쉬었다. “제가 아무리 양심이 없어도 사귀자마자 몸부터 요구하고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지금 수청 드는 춘향이 같은 표정 짓고 있는 거 알아요?” 남자는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세영이 그를 다시 품에 꼭 안아주었다. “진도는 천천히 나가도 된다고요. 너무 부담 느끼지 말고요.” “제가… 너무 서툴러서 싫으십니까?” 떨리는 물음에 세영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불안해하는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발꿈치를 든 그녀가 긴장으로 굳어있는 남자의 턱에 가볍게 입 맞췄다. “제가 겪어본 것 중에서 최고로 유혹적이었어요.” “…….” 왠지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세영은 고개를 숙인 그의 입술에 다시 한 번 입 맞추며 물었다. “그래서 진짜 가보고 싶은 곳이 없어요? 예전에 사슴 씨가 살던 신전은 어때요?” 잠시 머뭇거리던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있었던 신전은 이미 폐허가 된 지 오래입니다. 가셔도 볼만한 것은 없을 겁니다.” “관광하려고 가는 건 아니니까 볼만한 게 없어도 괜찮은데요.” 세영은 어디 가서 좀 앉자며 그를 근처에 있는 바위로 이끌었다. 남자는 세영을 들어 바위 위로 올려준 후에 그녀의 옆에 앉았다. 조금 높은 곳에 올라왔다고 달빛에 검푸르게 물든 들판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어린애처럼 다리를 흔들던 세영이 말했다. “전에 더 이상 신기를 모을 생각이 없다고 말했죠? 그래서 이제부터는 봉인을 풀지 않고 멸망을 막을 방법을 찾을 생각이에요.” 멸망을 막는 방법을 찾는 것보다 이제 하나 남은 신기를 모아 봉인을 푸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죄책감을 느낀 남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스킬로 손을 씻은 세영이 인벤에서 정체 모를 과일을 꺼내 껍질을 깎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슴 씨가 봉인을 했던 신전에도 가보려고요. 주신을 봉인한 곳이니까 단서를 찾을지도 모르고. 자, 아-.” 솜씨 좋게 과육 윗부분을 베어낸 세영이 그것을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그것을 받아먹은 남자는 쓰고 떫고 신맛에 멈칫했다. 그의 표정을 보고 쿡쿡 웃은 세영이 “맛없어요?” 하고 물었다. 남자는 대답 없이 그것을 삼킨 후에 과즙이 묻은 그녀의 손끝을 핥았다. 그의 입술을 꼬집은 세영이 다시 껍질을 벗겨냈다. 아무래도 저것을 다 먹이겠다는 것 같아 남자는 조금 우울해졌다. “신전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용도 엘프처럼 이곳을 떠나는 게 가능했던 거잖아요. 그런데 왜 그… 사슴 씨 양엄마이신 그 용님은 봉인을 도와주셨던 거죠?” “…….” “음, 대답하기 힘들면 안 해도 되고요.” 세영이 마치 대답을 막으려는 것처럼 그의 입에 과육을 밀어 넣었다. 거의 씹지 않고 과육을 삼킨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건 에레슈키갈께서 정말로 신이셨기 때문입니다.” “읭?” 세영이 그녀 특유의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눌러 참은 남자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용이라고 불리지만, 그분의 실체는 오히려 어둠에 가깝습니다. 태고부터 이어진 오래된 어둠입니다. 그래서 그림자용은 에레슈키갈 하나뿐이며, 종의 시작과 끝이시기도 합니다.” “음, 어. 알겠어요. 종교네요.” 세영이 세 번째 과육을 남자의 입에 꾹꾹 눌러 넣었다. 이번 조각은 꽤 커서 그는 한참이나 우물거리고 있어야 했다. 남자는 겨우 그것을 삼킨 후에 말을 이었다. “그분께서 불멸의 어둠 중 하나란 뜻이었습니다. 저는 봉인이 끝난 후에 에레슈키갈께서 부활하시리라 믿었습니다. 카벨의 몸에 들어온 후에야 그게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고요.” 그때의 절망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봉인 때문인지 다른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만약 힘을 빌려 달라고 청하지 않았다면, 에레슈키갈은 여전히 건재했을 것이다. 남자는 자신의 신을 죽였다는 죄악감으로 오랫동안 고통스러워했다. “또 안 좋은 생각 하고 있죠? 제가 그런 생각할 바에야 그냥 머리를 비우라고 했잖아요.” 마지막 조각을 그의 입에 눌러 넣은 세영이 타박했다. 기계적으로 그것을 삼킨 남자가 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을 느끼며 물었다. “이건… 대체 무슨 과일입니까?” “음, 그렇게 맛없었어요? 아리스타타가 준 수호목 열매예요.” 세영이 조금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남자는 수호목 열매가 뭔지 떠올리려고 애썼다.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일렁이는 머릿속에서 그것이 뭔지 끄집어내는 순간, 갑자기 시야가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남자는 그대로 픽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 초승달의 들판 (4) 열매를 먹고 기절한 사슴은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 그냥 자는 건가 싶어 자리에 눕혀놓자 갑자기 심한 열을 내며 끙끙 앓기 시작했다. 당황한 세영은 리먼을 두들겨 깨워서 도움을 청했다. 사슴의 몸을 꼼꼼히 진찰한 리먼이 크게 걱정할 건 없다고 말했다. “말씀하신 것처럼 식중독은 아닌 듯합니다. 제가 보기엔 단순히 피로가 누적된 것 같군요.” “그냥 몸살이면 포션이 들어야 하는데, 전혀 안 듣는데요?” 회복 포션, 해독 포션, 치유 포션, 하이퍼 붕붕 리큐르까지 먹였는데 사슴의 열은 내리지 않았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빈 병을 확인한 리먼이 안쓰러운 미소를 지었다. “약은 이걸로 충분합니다. 지금은 열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군요. 제가 보고 있을 테니 조금이라도 쉬십시오.” 리먼의 권유에도 세영은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그녀는 얼음 주머니를 만들어 좀처럼 열이 떨어지지 않는 사슴의 이마에 올려놓았다. 땀으로 축축한 몸을 스킬로 씻기고 담요로 꼼꼼히 감싸서 보온 스킬을 썼다. 그러자 더는 해줄 것이 없어서 답답했다. ‘젠장, 이런 건 처음인데….’ 단순히 걱정스러운 것과는 좀 달랐다. 안타깝기도 하고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싱숭생숭한 기분이었다. 진정하자고 되뇌어도 좀처럼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꽁꽁 싸맨 담요가 답답한지 뒤척이던 사슴이 그녀 쪽으로 돌아누웠다. 떨어진 얼음 주머니를 도로 올려준 세영이 열로 붉게 달아오른 뺨을 쓰다듬었다. 차가운 손이 닿자 사슴이 뺨을 비벼왔다. 주면 주는 대로 받아먹고 뻗어있는 모습이, 그래도 좋다고 기대오는 것이 미련하고 가여웠다. “싫으면 싫다고 말해도 돼요.” 세영의 속삭임에 사슴이 꼼지락거렸다. 열에 들떠 정신을 못 차리면서도 꾸물거리는 손이 뭔가를 찾는 듯했다. 한숨을 삼킨 세영이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제야 사슴이 꼼지락거림을 멈췄다. ‘내가 당신한테 대체 뭐라고.’ 세영은 알 수 없는 생물을 보듯 사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딱히 잘해준 적도 없고, 오히려 못 볼 꼴만 보인 것 같은데 이렇게 매달리는 것이 이상했다. 제게 뭘 바라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아침이 올 때까지, 그녀는 사슴의 손을 잡은 채로 자리를 지켰다. “어? 열이 난다고? 많이 아파?” “저녁 내내 기분이 안 좋아 보이긴 했습니다. 아픈 줄 알았다면 뭔가 조치를 취했을 텐데….” 사슴이 아프다는 말을 들은 동료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간단히 사정을 설명한 세영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사슴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그녀를 보고 동료들은 어떻게 할지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때 조용히 있던 마리엔이 나섰다. “제가 가서 아리스타타 씨를 데려올게요.” “마리엔?” “아리스타타 씨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실 거예요. 숲을 통해서 움직인다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어요.” 일행은 아리스타타와 헤어진 후에 저녁이 될 때까지 이동했다. 그 거리를 거슬러 올라가서 어디로 갔는지 모를 엘프를 찾겠다는 말이었다. 무모한 계획이었지만, 마리엔은 이미 결심을 굳힌 표정이었다. 당황해서 그녀를 쳐다보던 세영이 고개를 저었다. “굳이 마리엔이 그럴 필요는 없어요. 제가 너무 호들갑을 떤 모양이네요. 좀 더 지켜보고 계속 열이 떨어지지 않으면 제가 갈게요. 제 잘못이니까.” “아뇨, 이번 일은 제 책임이에요.” 마리엔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백했다. “제가 카라드 씨를 이기적이라고 비난했어요. 카라드 씨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그걸 알면서 어떻게 세영님께 접근할 수 있냐고 화냈어요. 카라드 씨가 죽으면, 세영님이 상처받으실 것 같아서….” 모두가 눈이 동그래진 채로 마리엔을 보고 있었다.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그녀가 사죄했다. “죄송해요. 제가 만약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그걸 속죄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책임을 지고 싶어요.” “이건 정말 마리엔 잘못이 아니에요. 알지도 못하면서 위험한 걸 먹인 제 잘못이죠. 마리엔 탓이라고 생각하지 마요.” 자리에서 일어선 세영이 마리엔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러자 고개를 숙인 마리엔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때 헛기침을 한 디안이 말했다. “마리엔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카라드가 나아지길 기다리는 것보다 아리스타타를 찾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저희가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이렇게 기다리는 것보다 우리가 가서 알 만한 사람을 데려오는 게 나을 거야.” 시디발라가 얼른 손을 들고 동조했다. 세영은 난감함에 이마를 문질렀다. “일단 숲으로 간다고 해서 아리스타타를 찾는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만나자고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아니에요. 찾을 수 있어요. 숲에선 엘프의 기척이 잘 남으니까 그걸 따라서 추적하면 돼요.” 마리엔은 정말 자신이 있다며 꼭 맡겨달라고 청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이상 말릴 수가 없었다. 세영은 무겁게 고개를 끄떡였다. 그녀는 동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제 잘못인데 이렇게 도와줘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세영님 잘못이라뇨.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맞습니다. 카라드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을 겁니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쉬고 계십시오.” “응, 금방 갔다 올게. 나만 믿고 기다려!” 결정이 내려지자 동료들은 서둘러 야영지를 떠났다. 그들을 배웅한 세영은 다시 사슴의 옆으로 돌아왔다. 리먼과 눈이 마주친 그녀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잘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제가 가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고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들 잘해낼 겁니다.” 리먼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세영은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제 잘못을 동료들에게 떠넘긴 것 같아서요.” “짐이라고 여기실 필요는 없습니다. 모두 조금이라도 세영님께 도움이 되고 싶어 나선 것이니까요. 지금처럼 고마워하고 믿어주면 다들 그걸로 만족할 겁니다.” 리먼의 위로에 세영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녀는 이런 식의 호의가 어색했다. 남의 도움을 받는 것보다 스스로 하는 게 더 편하다고 여기는 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시간은 흘러 정오가 되었다. 사슴의 열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다리를 떨고 손톱을 물어뜯는 그녀를 보다 못한 리먼이 머리를 식히고 오라고 쫓아냈다. 달리 할 일이 없었던 그녀는 인벤을 열어서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기 시작했다. ‘포션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고.’ 포션을 구석으로 밀어 넣던 그녀는 습관대로 인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마구 집어넣기만 했지 제대로 정리를 안 해서 온갖 물건들이 섞여 있었다. 신기도 마찬가지였다. 온갖 잡동사니 사이에서 신기만 뽑아서 정리하던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로토의 신기에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지. 그럼 다른 신기에도 뭔가 능력이 있지 않을까.’ 만약 5개의 신기중에 치유능력이 있는 것이 있다면 사슴에게 쓸 수도 있을 터였다. 인벤을 살핀 세영이 제일 먼저 손이 가는 것을 꺼냈다. [타락한 미궁의 반지] 왕의 미궁에서 손에 넣은 신기였다. 원래 금빛이었을 반지는 마치 불에 탄 것처럼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전설템치고는 옵션이 구리다고 생각해서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았다. 세영은 반지를 손가락 끝에 걸고 한 바퀴 돌렸다. 반지 안쪽에 음각된 글자들이 느껴졌다. “영원한 사랑을 담아서… 레이먼드?” 소리 내어 말하는 순간 갑자기 시야가 시커멓게 물들었다. 예고도 없이 시작된 이벤트 영상에 세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 싸우는 도중은 아니니 다행이지만, 적을 만났을 때도 이러면 진짜 곤란한데.’ 투덜거리던 그녀는 계속 시커멓게 물든 시야에 의아함을 느꼈다. 보통 영상이 시작되자마자 뭔가가 나타나기 바빴는데, 이번에는 암전된 채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툭 내뱉는 순간 뭔가 물컹한 것이 손에 닿았다. 반사적으로 물러서는 세영의 팔을 우악스러운 손이 붙잡았다. 손길은 거칠지만, 악력은 그리 세지 않아 쉽게 뿌리칠 수 있었다. 뭔가가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 가냘픈 여자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이건 또 무슨 지랄인가 싶었던 세영은 파이어볼을 써서 시야를 밝혔다. 사방은 돌벽으로 막혔고 발치에는 낯선 여자가 쓰러져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금발이 제멋대로 흐트러진 채로 바닥에 쓸렸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바닥에 엎어진 여자가 중얼거렸다. 세영은 뚱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여자한테 사랑한다는 소리한 적은 없는데.” -거짓말쟁이. 나를 사랑한다고 해놓고…. 여자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살이 지글지글 녹아내리는 얼굴이 세영을 향했다. 뻥 뚫린 눈구멍에는 눈 대신에 구더기가 들락거리고 있었다. 흉측한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자 여자가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냈다. -이제 더는 사랑하지 않아? 왜? 꽉 막힌 돌벽에 여자의 웃음소리가 반사됐다. 짜랑짜랑한 울림에 세영은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때 벌떡 몸을 일으킨 여자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해골만 남은 얼굴이 가까워지는 순간 시야가 순식간에 반전됐다. ──────────────────────────────────── 초승달의 들판 (5) -레이먼드 크리티코스님? 어디선가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홍으로 칠해진 기둥 앞에 인형처럼 생긴 소녀가 서 있었다. 긴 금발을 살랑거리며 세영 쪽으로 다가온 소녀가 말을 이었다. -저는 당신의 약혼녀인 멜로이에요. 처음 뵙겠어요. 주먹을 앞으로 내밀고 있던 세영은 머쓱하게 손을 거둬들였다. 그녀는 멜로이의 시선이 자신의 명치쯤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 삐쩍 마른 소년의 뒷모습이 나타났다. -나, 나는 레이먼드야. 하지만 넌 나와 약혼했으니까 레이라고 불러도 돼. 허, 허락하지. 레이먼드라는 놈은 불쌍할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듬거리면서도 머리를 꼿꼿이 치켜드는 것이 제법 고집스러운 성격 같았다. 그를 빤히 쳐다보던 멜로이가 방긋 웃었다. -그럼 레이님? -그, 그냥 레이라고 불러. 쭈뼛거리던 레이먼드가 대답했다. 그러자 쪼르르 다가온 멜로이가 그의 양손을 덥석 붙잡았다. 놀라 움찔거리는 레이먼드를 빤히 쳐다보던 그녀가 말했다. -레이, 전 오늘부터 당신을 사랑하기로 결심했어요. 그러니 당신도 저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주세요. -어… 어? 뜻밖의 말에 당황한 레이먼드가 버벅거렸다. 멜로이는 간절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전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었거든요. 그러니 약혼자인 당신이 제 연인이 되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너무 무리한 부탁인가요? -…아, 아니. 그녀의 기세에 짓눌린 레이먼드가 얼떨결에 대답했다. 그러자 멜로이의 얼굴이 확 피어났다.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레이먼드를 압박하며 말했다. -그럼 노력해주실 거죠? 저를 위해서. -노, 노력할게…. 노력을 강요당한 레이먼드는 거의 쥐어짜듯이 대답했다. 그러자 환한 미소를 지은 멜로이가 와락 그를 끌어안았다. -기뻐요! 전 레이가 정말로 마음에 들어요. 레이도 제가 마음에 드나요? -어, 어으응. 세영은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레이먼드를 보다가 혀를 찼다. 하긴 저런 미소녀가 육탄돌격을 하는데 저 어리바리한 놈이 당해낼 리가 없었다. ‘쯧쯧, 준비된 밥일세.’ 멜로이에게 질질 끌려가는 레이먼드를 구경하던 그녀는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왠지 레이먼드의 모습 위에 자신이 겹쳐지는 것 같았다. 세영은 서둘러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아니, 사슴은 저런 깜찍한 짓은 안 한다고. 무엇보다 걔는 자기 미모를 무기로 휘두르지 않잖아. 뭐, 그 점이 더 귀엽지만.’ 무엇보다 사슴의 매력은 외모가 아니었다. 부끄러운 말을 진지하게 내뱉고, 그게 왜 부끄러운지도 모르는 천연미에 있었다. 서툴면서도 그것을 감추려고 하지 않는 점도 귀여웠다. 어젯밤의 키스를 떠올리고 히죽거리던 세영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 또 이러네. 진짜.” 조금만 방심해도 사슴이 머릿속을 뽈뽈 돌아다녔다. 요즘은 아주 습관처럼 이러는 것이 둥지라도 튼 모양이었다. 세영은 뇌 주름에 끼인 사슴을 쫓아내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녀가 딴짓을 하는 사이 눈앞의 장면은 몇 번이나 휙휙 바뀌고 있었다. -당신이 멸망을 예언한 현자인가요? 그사이 조금 자란 멜로이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것은 아직 소년의 모습을 한 나스쿤이었다. 멍하게 바닥을 내려다보던 나스쿤이 멜로이를 쳐다봤다. 무기력한 눈동자였다. -맞긴 하는데, 나한테 무슨 볼일이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멜로이가 주먹을 날렸다. 표본으로 삼고 싶을 정도로 깨끗한 한방이었다. 머리가 휙 돌아간 나스쿤이 비틀거리다 콰당 넘어졌다. 얻어맞은 뺨을 감싸 쥔 그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멜로이를 올려다봤다. 멜로이가 씩씩거리며 외쳤다. -왜! 그걸 이제야 발표한 거야! 당신은 진작 알고 있었잖아! -메, 멜, 멜로이! 뒤늦게 나타난 레이먼드가 그녀를 붙잡았다. 나스쿤의 다리 사이를 내리 찍으려다가 실패한 멜로이가 으르렁거렸다. 그제야 몸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선 나스쿤이 말했다. -언제 발표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이 별은 망할 건데. -어머, 기가 막혀! 당신 때문에 몇 년의 시간을 헛되게 날렸는지 알아? 씩씩거리던 멜로이가 그의 가슴을 와락 떠밀었다. 그녀는 휘청 뒤로 물러선 나스쿤을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당신은 현자잖아. 다른 사람은 꿈도 못 꾸는 고대의 지식을 물려받았잖아! 내가 당신 같은 지식이 있다면 제일 먼저 멸망을 막을 방법을 찾기 위해 움직일 거라고! -현자의 예언은 절대적이야.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은 적은 없어! 나스쿤도 조금 화가 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그러자 흥하고 코웃음 친 멜로이가 개미처럼 가느다란 허리에 척 손을 올렸다. 그녀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스쿤을 노려보며 말했다. -잘 들어.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별의 멸망을 막을 거야. 그 후에 레이와 누구보다 멋지게 결혼할 거라고! 운명 따위가 뭐야, 주신이 직접 와도 나를 막을 수는 없을걸! 사랑에 빠진 소녀를 우습게 보지 말라고 일갈한 그녀가 당당하게 선포했다. -멸망을 막은 후에 당신 앞에서 말해주지. 예언은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있는 거라고! 세영은 얼음기둥이 된 두 남자에게 깊게 공감했다. 다시 한 번 흥! 하고 코웃음 친 멜로이가 약혼자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여전히 어리바리한 레이먼드가 그녀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메, 멜로이. 현자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조른 게…. -네! 만나서 한 대라도 때려주고 싶었거든요. 재수 없어서! 시원스러운 약혼녀의 대답에 레이먼드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곤란해 하는 그의 얼굴을 쓰다듬은 멜로이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레이. 제가 꼭 멸망을 막을 테니까. -하, 하지만 현자의 예언은 빗나간 적이 없는데…. -전 마법사라고요. 그것도 시간마저도 속일 수 있는 공간마법사! 이번엔 운명까지 속일 거예요! 멜로이가 가슴을 탕탕 치며 장담했다. 그녀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하던 레이먼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 물론 멜로이의 실력은 뛰어나지만, 현자는…. -아이참! 레이는 현자를 믿어요, 저를 믿어요? -…너, 널 믿지. 대답을 강요당한 레이먼드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세영은 전혀 변함이 없는 그의 모습에 다시 혀를 찼다. 레이먼드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활짝 웃은 멜로이가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폭넓은 치맛자락이 활짝 펼쳐졌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전 5월의 신부가 되고 싶어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세상에서 제일 멋진 결혼식을 올릴 거예요. 그다음엔 많은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 거라고요. 이 별이 멸망한다는 예언이 있다고 해서 왜 제 꿈을 포기해야 하죠? 전 절대 포기할 수 없어요. 꿈을 말하는 그녀의 눈은 샛별처럼 반짝였다. 어리벙벙하게 서 있던 레이먼드가 얼굴을 붉혔다. 그의 팔에 찰싹 달라붙은 멜로이가 물었다. -레이, 절 사랑하죠? -…응, 사랑해. 얼굴이 붉어진 레이먼드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사랑해. 멜로이. 또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멜로이가 보였다. 그녀는 끈질기게 자료를 뒤지고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방법을 찾았다. 고군분투 하는 그녀의 옆에는 항상 레이먼드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스쿤의 모습이 거기 더해졌다. 예전의 무기력함은 완전히 벗어던진 것 같았다. 그는 멜로이와 함께 멸망을 막을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소금기둥? 멜로이가 내민 계획서를 본 나스쿤이 되물었다. 고개를 끄떡인 멜로이가 설명했다. -이건 시전자의 생명력을 담보로 하는 봉인이에요. 시전자가 살아있는 동안엔 무엇으로도 깨지지 않죠. 공간마법사가 만들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공간이기도 하고요. 떨떠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나스쿤이 말했다. -너 귀여운 얼굴로 은근히 잔인한 수법을 많이 내놓는단 말이야. 성격 더러운 건 알아봤… 그앗! -어머, 앞말 빼고는 다 헛소리를 하네? 그에게 가벼운 응징을 가한 멜로이가 호호 웃었다. 명치를 붙잡고 부들부들 떨던 나스쿤이 한숨을 쉬며 계획서를 돌려주었다. -이건 기각. 우리는 거의 영구적인 봉인을 찾아야 해. 생명력을 담보로 한다면 인간은 아무리 많아 봤자 백 년이고. 드래곤이라도 갈아 넣지 않는 이상 유지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저도 그대로 사용한다는 생각은 안 했다고요! 이걸 기본 틀로 해서 중심에 영구적인 원동력을 두고 기둥으로 에너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어떨까 구상해봤어요. 멜로이는 계획서 뒷장을 펴들고 알아들을 수 없는 설명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듣던 나스쿤이 손이 휙휙 내저으며 물었다. -아니, 좋은 방법이긴 한데… 그 영구적인 원동력은 어디서 구하려고? -당연히 지금부터 찾아봐야죠? 당당한 건지 뻔뻔한 건지 모를 대답에 나스쿤이 얼굴을 감싸 쥐고 한숨을 쉬었다. -아이고, 진짜. 내가 이런 애를 믿고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흥, 제가 뭐 어때서요? 염세주의자에 비관론자인 당신보다 백배는 더 낫거든요! 멜로이가 주먹을 붕붕 휘두르며 위협했다. 그녀의 이마를 누르며 방어를 하던 나스쿤이 문득 움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황급히 손을 떼며 뒤로 물러선 나스쿤이 몸을 돌렸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났어. 그만 가볼게. -응? 네, 잘 가요. 나스쿤.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배웅한 멜로이가 돌아섰다. 안으로 들어가려던 멜로이는 우중충한 얼굴로 서 있는 약혼자를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에게 달려간 그녀가 명랑하게 물었다. -레이, 언제 왔어요? 왔으면 말을 하지. 레이먼드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어두워진 눈으로 멜로이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메, 멜로이, 날 사랑해? -그럼요. 당연하죠. 전 레이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요. -…내, 내가 약혼자라서? 아니면 날 사랑하려고 노력해서? 레이먼드의 반문에 눈이 동그래진 멜로이가 그를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레이먼드가 더듬거리며 외쳤다. -나, 나는 고작해야 작은 나라의 왕자일 뿐이야. 잘 생기지도 않았고 말더듬이에 변변찮은 능력도 없어. 이런 나를 네가 진심으로 사랑할 리가 없잖아! ‘아이고, 저 병신.’ 세영은 열등감을 터트리는 그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저보다 잘난 놈이 어여쁜 약혼녀 근처에서 얼쩡거리자 질투를 하는 모양이었다. 질투를 할 거면 나스쿤을 두들겨 잡을 것이지, 왜 만만한 약혼녀에게 지랄용천인지 모를 일이다. 뺨이라도 갈기라고 응원하는 세영과 달리 멜로이는 찡얼거리는 레이먼드의 양손을 꼭 붙잡았다. -레이는 걸음이 느리죠? -……. -저한테 맞춰주려고 천천히 걷다가 아예 습관이 되어버렸잖아요. 그녀는 머뭇거리는 약혼자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레이는 항상 남을 배려하고 누구보다 다정하고 친절해요. 그런 사람을 사랑하는 데 필요한 노력은 아주 잠깐, 이렇게 손을 잡고 눈을 마주 보면 되는 거였는걸요. 얼굴을 붉힌 레이먼드가 시선을 피했다. 시무룩해진 멜로이가 그의 손을 놓아주며 말했다. -레이에 비하면 전 그냥 일개 마법사일 뿐이잖아요. 게다가 제멋대로에 성격도 나쁘고 어리광쟁이고요. 저를 사랑하느라 당신은 아주 많이 참고 노력했겠죠. 그래서 항상 미안해요. -아, 아냐! 나는… 사실 처음부터 멜로이가 좋았는걸. 얼른 그녀의 손을 다시 붙잡은 레이먼드가 말했다. 그러자 멜로이가 환하게 웃었다. -우리는 역시 천생연분인가 봐요. 아, 빨리 레이랑 결혼하고 싶다! 춤을 추듯 한 바퀴 빙글 돈 멜로이가 다시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레이먼드의 얼굴이 불타는 것처럼 붉어졌다. -레이도 기대되죠? 우리 결혼이요. -…응. -빨리 그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꿈을 꾸는 것 같은 그녀의 목소리를 끝으로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눈이 아플 정도로 강렬한 빛이 쏟아졌다. 광풍으로 멜로이의 긴 머리카락이 펄럭펄럭 휘날리는 것이 보였다. 한동안 홀 안에 머물고 있던 빛 기둥은 다음 순간 주먹만 한 크기로 줄어들었다. 빛의 구 안에 떠 있는 반지를 움켜쥔 멜로이가 환희에 차서 소리쳤다. -서, 성공했다! 그녀는 제일 먼저 약혼자를 돌아보며 자신의 기쁨을 알리려고 했다. -정말로 성공했어요, 레이! -끄… 끄으윽! 하지만 멜로이가 본 것은 머리를 감싸 쥐고 신음을 흘리는 레이먼드였다. 튀어나올 것처럼 부릅뜬 눈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입, 그리고 불룩거리며 기괴하게 일그러지는 몸까지. 이변을 감지한 멜로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레이? -끄아아악! -레이! 그녀는 괴성을 지르는 레이먼드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 순간 마치 옷감이 찢기듯 레이먼드의 몸이 찢겨나갔다. 천처럼 펼쳐진 그의 몸이 부풀고 확장되며 사방을 가득 메웠다. 멍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멜로이는 갑자기 홀의 바닥이 부서지면서 아래로 추락했다. -꺄아악! 비명과 함께 그녀는 어둠 속으로 끌려들어 갔다. 살아있는 것처럼 꾸물거리는 벽이 그녀가 떨어진 구멍을 메웠다. 그리고 한 겹, 또다시 한 겹의 벽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꾸물거리는 벽이 사방으로 파고들면서 홀이 붕괴하고 궁이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거대한 폐허, 그리고 미궁뿐이었다. -…레이? 멜로이는 지독한 어둠 속에서 다시 눈을 떴다. 추락의 충격으로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그녀는 사방을 더듬었다. 그녀는 약혼자의 대답을 기대하며 연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레이? 레이! 어디 있어요? 마법사인 그녀는 이상함을 감지했다. 사방이 모두 그녀의 약혼자였다. 모든 벽이, 모든 바닥이, 모든 천정이 레이먼드의 기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이럴 리가 없어. 이건 꿈이야. 뭔가가, 뭔가가 잘못됐어. 멜로이는 비척거리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지독한 어둠과 계속해서 이어지는 약혼자의 흔적들만이 그녀를 괴롭혔다. -하지만 왜… 당신이 왜! 주술이 실패하더라도 그건 시전자인 그녀가 감당할 몫이었다. 어째서 레이먼드가, 그녀의 약혼자가 이렇게 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멜로이는 엉엉 울면서 앞으로 걸어나갔다. 공간마법사인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길을 잃었다. 그녀의 힘은 이곳에서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레이먼드가 변한 미궁은 살아있었고 일정 시간마다 스스로 움직여 길을 바꾸었다. 멜로이는 몇 번이나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후에야 제가 갇혔다는 것을 알았다. 미칠 것 같은 상황에서 그녀는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을 합리화했다. -…당신이 저를 가둘 리가 없어요. 저를 지켜주려는 거죠? 제가 위험할까 봐? 소금기둥의 봉인. 시전자의 의지가 계속되는 한 봉인 안에 있는 것은 영구하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서 벗어나 손상되지 않는다. 멜로이는 배고픔도, 목마름도, 시간의 흐름도 느끼지 못하고 갇혀있었다. 그녀는 봉인을 유지하는 것이 레이먼드의 사랑이라 믿었다. 자신에 대한 그의 사랑, 그의 마음이 이 견고한 봉인을 유지하고 있다고. 그렇지 않으면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기에. -당신이 저를 미워할 리가 없어요. 조그맣게 중얼거린 멜로이가 눈을 감았다. 영원에 가까운 공간 안에서 그녀는 시간에서 벗어난 잠을 자고 있었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마법이 풀리기 기다리는 소녀처럼. 하지만 파국은 언제나 그렇듯 갑자기 찾아왔다. 봉인된 미궁을 열고 한 떼의 사람들이 찾아온 것이다. 타락한 왕 므드사엘이 이끄는 병사들이었다. 미궁은 잠잠했고 벽은 움직이지 않았다. 므드사엘은 멜로이가 잠든 곳까지 아무런 방해도 없이 침입했다. 놀란 그녀는 미궁 안으로 달아났지만, 건장한 남자들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살려줘요, 레이! 멜로이는 움직이지 않는 벽에, 대답 없는 미궁에 대고 호소했다. 자신을 지켜달라고 울부짖었다. 병사들에게 끌려가는 그녀의 옷이 처참하게 뜯겨나가는 것이 보였다. 박쥐가 미로 안을 푸드덕거리며 날았다. -저는 그때 살해당했어요. 세영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온몸에서 피를 흘리는 멜로이가 서 있었다. 구더기가 끓는 처음의 모습은 아니었으나 그보다 비참했다. 그녀가 흘리는 피눈물이 찢어진 옷을 적셨다. -그때… 왜 저를 구해주지 않았죠? “그러니까 나 레이먼드 아니라고.” 세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자 멜로이는 제 얼굴을 감싸 쥐며 흐느꼈다. -사랑한다고 했으면서… 왜 제가 짓밟히고 살해당하게 내버려둔 거예요. 왜! “아, 진짜 사람 말 안 듣네!” 울컥해서 주먹을 움켜쥔 세영은 이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피를 철철 흘리는 여자를 두들겨 팰 정도로 막장은 아니었다. 속으로 투덜거린 그녀가 말했다. “그… 므드 뭐라고 하는 놈은 내가 죽였다고. 미리 알았다면 육젓을 담가서 너한테 갖다 줬겠지만, 이제 와서 어쩔 수 없잖아. 그러니 그만 포기하고 승천해라.” 솔직히 말하면 피곤했다. 멜로이의 처지는 분명 가련했지만, 그녀는 불쌍하다는 말 외에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렇게 안전한 위치에 서서 가련한 피해자를 내려다보며 동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무뚝뚝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너한테 아무것도 못 해줘. 나는 레이먼드도 아니고, 너를 구해줄 수도 없어.”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면, 여기에서 나가게 해줘! 고개를 번쩍 든 멜로이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세영은 어느새 처음의 장소로 돌아온 것을 깨달았다. 사방이 벽으로 막힌 장소였다. 창문조차 없어 벽장처럼 보이는 좁은 공간에서 다시 해골로 변한 멜로이가 기어 다녔다. -나가게 해줘! 여기서 나가게 해달라고! 비명을 지르던 멜로이는 다시 날카롭게 웃었다. 짜랑짜랑한 웃음소리가 벽에 부딪혀 주변을 윙윙 울렸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날 가두지 마! 여기서 벗어나게 해줘! “뭐, 그거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세영은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사방이 벽이라 어디가 위고 아래인지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천장이라고 생각했던 곳을 기어 다니는 멜로이를 보면 딱히 상관은 없을 것 같았다. 세영은 일단 눈앞에 보이는 벽을 후려쳤다. 벽이 퍼석퍼석 깨어져 나가자 그 속에서 또 다른 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벽도 퍽퍽 걷어차 부쉈지만, 안에서 또 다른 벽이 나타날 뿐이었다. 멜로이가 소리 높여 그녀를 비웃었다. -소용없어! 소용없다고! 그래 봤자 여길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 ‘호오, 이거 제법….’ 세영의 얼굴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귀찮게 이리저리 돌아다니지 않아도, 계속해서 부술 수 있는 벽이 나타나다니. 이건 아예 수련하라고 입에 쑤셔 넣어 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 사슴 때문에 수련 거의 못했지.’ 자길 잊어버려서 서운하다고 울망거리는 사슴을 보자 무서워서 다시 수련하겠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지금도 끙끙 앓고 있을 사슴을 생각하자 가슴이 따끔거렸지만, 이것도 다 여기서 나가기 위해서였다. 빠르게 합리화를 끝낸 세영이 씩 미소 지었다. “자, 그럼 어디 한번 부숴볼까.” 그녀는 간단한 기본동작부터 시작했다. 훅과 잽, 스트레이트 펀치로 시작해서 상중하 차기, 연속펀치, 연속 차기, 연결기를 착실히 올렸다. 이벤트용 던전이라 시스템 메시지가 뜨지 않아 계산하기가 불편했지만, 대충 감으로 수련치를 채워가며 다음 스킬로 넘어갔다. -…소용…없다고 했잖아요. 세영이 부순 벽들이 길게 이어져 이제 거의 터널이 되었다. 거의 무아지경에 돌입했던 세영은 속삭임 같은 목소리에 뒤늦게 “어?” 하고 반응했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멜로이가 외쳤다. -소용없는데…! 이미 늦었는데…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세영이 머리를 긁적였다. 잠깐 수련한다는 것이 그만 이성을 잃었다. 민망함에 쭈뼛거리던 그녀가 말했다. “어…, 뭐 하다 보니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이거 좀 더 하면 안 될까?” -이 바보! 그런 거로 여기서 나갈 수 있을 리 없잖아요! “뭐. 부수다 보면 언젠가 끝이 있겠지.” 대충 대꾸한 세영이 벽으로 눈을 돌렸다. 다시 수련에 돌입하려는 그녀의 등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해골의 모습을 벗고 원래대로 돌아온 멜로이가 그녀의 등을 끌어안고 있었다. -…이제 됐어. 이제 충분해요. 그만해도 돼요. “아, 아니. 난 아직 멀었는데…….” 아쉬워하는 세영을 꼭 끌어안은 멜로이가 속삭였다. -사실은 저를 구해주고 싶으셨죠? 지금처럼…. 더 이상의 수련은 글렀다는 것을 깨달은 세영이 한숨을 쉬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멜로이는 더는 피를 흘리지 않았다. 아파 보이지도 않았다. 세영은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남인 내가 이 정도로 하는데, 약혼자인 놈이야 당연히 그랬겠지.” 무뚝뚝한 말에도 멜로이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회상에서처럼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다음 순간 그녀의 몸이 흐릿하게 반짝이더니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나가면, 이번엔 정말 결혼식을 올릴 거예요. 모두를 초대하고 누구보다 행복하게. “그래.” 세영의 손을 맞잡은 멜로이의 몸이 위로 둥실 떠올랐다. 잠시 망설이던 세영은 이내 손을 놓아주었다. 소녀처럼 까르르 웃은 멜로이가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활짝 펼쳐지는 치맛자락이 한 송이 꽃 같았다. 손끝에서부터 점점 흐릿해져 사라지던 멜로이가 편안한 얼굴로 속삭였다. -고마워요. 다음 순간 이벤트 영상이 끝났다. 갑자기 밝아진 시야에 눈을 깜빡이던 세영이 손을 내려다보았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반지가 그녀의 손바닥 위에 놓여있었다. ──────────────────────────────────── 초승달의 들판 (6) [정화된 미궁의 반지] 도구속성 -전설의 장신구 타이틀 속성 -높은 확률로 적에게 혼란 스킬 발동 -적중 시 블라인드 확률 10% -범위 내에서 블링크 사용 -공간분리 +1 반지의 상세 정보를 확인하자 옵션이 2개에서 4개로 늘어나 있었다. 반지의 주인인 멜로이가 공간마법사라서 공간마법 옵션이 붙은 모양이었다. ‘흐음, 이 정도면 옵이 썩 나쁘지 않은데.’ 반지를 손가락에 끼려던 세영이 멈칫했다. 반지 안쪽에 새겨진 <영원한 사랑을 담아서 –레이먼드>라는 글귀가 거슬렸다. 생각해보면 이건 남의 약혼반지였다. 게임에서야 무슨 반지든 아무 생각 없이 끼고 다녔지만, 이번엔 왠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울망거리는 사슴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뭐, 치료스킬 아니니까 그냥 넘어가자.’ 세영은 반지를 다시 인벤에 넣었다. 첫 경험을 발판 삼아 다음 신기부터는 인벤에서 꺼내지 않고 상세정보만 살폈다. [오래된 지혜의 왕관]과 [창백한 그림자 검]은 지력과 마법에 관련된 스킬이 붙어있었다. 마지막으로 [오염된 숲의 덩굴 팔찌]는 정보가 공개되어 있지 않지만, 테이밍과 궁수 스킬일 듯했다. ‘아무래도 펠릭스의 성표 쪽을 살펴보는 게 나을 것 같네.’ 세영은 다시 인벤을 닫고 야영지로 돌아갔다. 카라드의 옆을 지키던 리먼이 반가운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집 나갔다 돌아온 자식을 반기듯 세영에게 달려오며 말했다. “어디 가셨던 겁니까.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셔서 걱정했습니다.” “아니, 저… 바로 앞에 있었는데요.” 세영은 조금 민망한 얼굴로 변명했다. 차마 이벤트 던전에서 수련하고 있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머뭇거리는 세영을 끌어당긴 리먼이 급하게 말했다. “아, 이럴 때가 아니라 카라드의 상태가 많이 안 좋습니다. 아무래도 세영님이 보셔야 할 것 같아서….” “네?” 놀란 세영이 사슴의 옆으로 다가갔다. 확실히 그녀가 자리를 비우기 전보다 상태가 훨씬 나빠 보였다. 리먼이 죄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세영님께서 자리를 비우시자 갑자기 열이 심해졌습니다.” “괜찮을 거예요.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세영은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위로하며 급히 스킬을 썼다. 반쯤 녹은 얼음 주머니를 갈고 뜨끈뜨끈한 몸을 씻겨주었다. 끙끙거리던 사슴이 그녀의 손에 달라붙었다. 세영은 리먼을 돌아보며 물었다. “리먼, 혹시 펠릭스의 성표를 보여줄 수 있나요?” “아, 여기 있습니다.” 급히 품을 뒤진 리먼이 성표를 내밀었다. 성표를 들고 상세설명을 읽은 세영은 실망했다. 펠릭스의 성표인 [방황하는 성직자의 아뮬렛]에는 자기희생과 오러실드에 관계된 옵션밖에 없었다. 생각하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정의의 신을 믿던 놈이니 치유와는 관계가 없겠구나.’ 성표를 돌려준 세영은 천리안 스킬을 켰다. 시각 정보라도 보면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야가 어지럽게 일그러지더니 이내 하얗게 빛나는 사슴이 보였다. 그런데 전과 다른 점이 눈에 들어왔다. 테디베어처럼 팔다리에 남아있던 꿰맨 자국이 거의 사라져 있었다. 정확히는 꿰맨 부분 자체가 본체와 융합된 것처럼 색이 뒤섞이는 중이었다. ‘수호목 열매 때문인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썩 나쁜 현상은 아닌 것 같았다. 사슴이 끙끙 앓는 것도 순백한 부분에 팔다리에 묻은 때가 섞여서인 것 같았다. 안쓰러운 마음에 오염된 부분을 주물러주자 사슴의 얼굴이 조금 편안해지는 듯했다. 아주 약간이지만 때가 낀 부분이 옅어진 것도 같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것도 오염이니까, 세탁할 때처럼 하면 되려나?’ 사슴의 몸을 슬슬 문지르던 세영은 뒤늦게 리먼의 시선을 눈치챘다. 순간 뻘쭘해진 그녀는 사슴을 주무르던 손을 뗐다. “아니, 왠지 이러면 좀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말하고 나니 왠지 분위기가 더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난처해 하는 그녀를 보고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리먼이 몸을 일으켰다. “치료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리를 비켜드릴 테니 계속하십시오.” 그럴 필요까진 없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리먼은 이미 텐트를 빠져나간 후였다. 괜히 민망한 기분에 뺨을 긁적인 세영이 사슴에게 슬쩍 손을 뻗었다. ‘뭐, 난 진짜 흑심은 요만큼도 없다니까. 이건 그냥 치료라고.’ 괜히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은 그녀가 사슴의 팔을 살살 문질렀다. 늘씬해 보이던 팔뚝은 뜻밖에 꽤 단단했다. 탄탄한 근육과 팔꿈치의 감촉을 즐기던 세영은 아차 해서 손을 뗐다. ‘헉, 위험했다. 나도 모르게 그만.’ 과연 기절해 있어도 요망한 사슴이었다. 다시 천리안을 켜서 때가 탄 부분이 밝아진 것을 확인한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건 찰흙이다. 사슴이 아니다. 난 지금 도자기를 만들고 있는 거야.’ 세영은 부동심의 마음으로 손을 놀렸다. 자꾸 만지다 보니 정말 찰흙을 주무르는 것처럼 아무런 생각이 없어졌다. 손이 닿을수록 점점 하얗게 변하는 사슴을 보며 약간의 뿌듯함을 느낄 뿐이었다. “…음.” 마지막 관문인 사슴의 허벅지를 남겨둔 세영은 잠시 고뇌했다. 사슴의 자정능력을 믿고 여기서 손을 뗄 것인가, 이왕 손을 댄 김에 끝까지 도울 것인가. “뭐, 이 상황에서 허벅지만 피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변명하듯 말한 세영이 슬금슬금 손을 뻗었다. 변태셋을 입었을 때 알아봤지만, 사슴의 허벅지는 워낙 탄탄해서 바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시험하듯 허벅지 위를 꾹꾹 눌러본 세영이 한숨을 쉬었다. ‘하, 힘내라. 내 이성.’ 세영은 온갖 번뇌를 다 느끼면서 사슴의 허벅지를 주물렀다. 그녀는 부동심을 유지하기 위해 사슴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파서 끙끙거리는 얼굴이면 죄책감이라도 좀 느낄 텐데, 그녀의 안마를 받는 사슴은 한결 편안한 표정이었다. 땀으로 촉촉하게 젖은 얼굴과 붉어진 입술이 어우러져 어딘지 요염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 시발. 미쳤냐. 환자 보면서 뭐하는 생각이야.’ 제 머리를 쥐어뜯은 세영이 반대쪽 허벅지로 손을 옮겼다. 꽉 그러쥐는 손이 아팠는지 허벅지가 움찔하고 떨렸다. 너무 심했나 싶어 쥐었던 곳을 슬슬 쓰다듬는데 사슴의 몸이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세영은 사슴의 눈과 딱 마주쳤다. “어….” 세영은 사슴의 다리 사이에 앉아 그의 허벅지를 그러쥔 자신의 모습을 깨달았다. 놀란 것처럼 커다래진 검은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꿈이에요. 사슴 씨는 지금 꿈을 꾸고 있거든요.” “…….” “지금 너무 아파서 헛것이 보이는 상황이니 자고 일어나면….” 부스스 몸을 일으킨 사슴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다리 사이에 앉아있던 세영은 그대로 품속에 갇혀버렸다. 당황하는 그녀에게 몸을 기댄 사슴이 속삭였다. “꿈이니까 계속 같이 있어 주십시오.” “어, 아니. 그게….” 난처해 하며 고개를 든 세영의 이마에 쪽 입을 맞춘 사슴이 웃었다. 왠지 기뻐 보이는 얼굴에 세영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뭐, 어쨌든 기분이 나쁘지 않다면 다행이었다. “몸은 좀 괜찮아요?” “……?” 어리둥절한 표정이 된 사슴이 고개를 갸웃했다. 열에 들떠 몽롱한 눈을 보니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었다. 괜히 걱정된 세영은 그를 달래 다시 자리에 눕히려고 했다. 하지만 이 요망한 짐승이 그녀와 떨어지지 않겠다며 떼를 썼다. “제가 깰 때까지는 같이 있어 주셔야 합니다.” 꿈이라고 하지 않으셨냐고 우기는 것에 세영은 할 수 없이 그와 함께 누웠다. 사슴은 곰인형처럼 그녀를 품에 꼭 껴안았다. 순간적으로 긴장했지만, 사슴은 그녀를 안고 있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아니, 뭐. 아프니까 뭔가 하려고 해도 말렸겠지만 말이지.’ 속으로 한숨을 쉰 세영이 사슴의 등을 토닥거렸다. 기분 좋은 얼굴로 눈을 깜빡인 사슴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들어 입을 맞췄다. 그래놓고 부끄러운 듯 눈을 피하는 것이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짐승이었다. 피식 웃은 세영은 사슴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맞닿은 몸이 뜨끈뜨끈해서인지 금방 졸음이 밀려왔다. 끙끙 앓는 사슴에게 놀라 간밤에 한숨도 자지 못한 여파도 있었다.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에 저항하던 그녀는 어느 순간 까무룩 잠들고 말았다. 잠결에 뺨을 쓰다듬는 손을 느꼈지만, 조금도 반응할 수가 없었다. 귓가에 무어라 속삭이던 목소리가 멀어졌다. 세영이 눈을 떴을 때는 사방이 어두워져 있었다. 모닥불이 흐릿하게 사방을 밝혔다. 저를 꼭 껴안고 있는 사슴을 확인한 세영이 다시 눈을 감으려는 순간이었다. “끄아아아! 비켜!” “으아앙아아!” 밖에서 굉장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광풍으로 텐트가 흔들리는 것을 느낀 세영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쿵 하고 뭔가가 땅에 부딪히는 진동이 전해졌다. 텐트 밖으로 뛰쳐나간 세영은 커다란 바위처럼 엎어져 있는 하마용을 발견했다. 하마용의 안장에 매달린 채로 기절한 동료들도 보였다. ──────────────────────────────────── 초승달의 들판 (7) “이, 이게 어떻게 된….” 텐트 밖에서 모닥불을 지키고 있던 리먼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세영은 그의 등을 토닥여준 후 동료들을 살폈다. 다행히 추락한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을 뿐 별다른 부상은 없어 보였다. “이놈은 대체 어디에서 튀어나온 거야?” 하마용의 엉덩이를 툭 걷어찬 세영이 투덜거렸다. 파키라에 가기 전 떼어버린 놈이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가까이 가시면 위험합니다.” 어느새 다가온 사슴이 그녀를 하마용으로부터 떼어놓았다. 열은 좀 떨어진 것 같지만, 여전히 아파 보이는 얼굴이었다. 비틀거리는 그를 지탱한 세영이 말했다. “아니, 누워있지 왜 나왔어요. 몸도 안 좋은 사람이.” “저는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다른 사람들을….” 사슴은 허우적거리며 동료들에게 다가가려고 애썼다. 한숨을 쉰 세영이 그를 공주님 안기로 번쩍 안아 들었다. 당황한 사슴이 뻣뻣하게 굳었다. 리먼은 먼 곳으로 눈을 돌리며 아무것도 못 본 척했다. “자, 환자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요. 쉬어야 빨리 낫죠.” “…….” 자리에 눕힐 때까지 멍하게 있던 사슴이 담요를 끌어 얼굴을 가렸다. 공주님 안기를 당한 것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뭐, 전에도 공주님 안기로 들고 다녔는데.’ 이전에는 기절해 있어서 몰랐던 모양이었다. 모른 척하자고 결심한 세영이 동료들을 수거하러 갔다. 리먼과 함께 기절한 동료들을 자리에 옮긴 후 마지막으로 하마용을 살폈다. 쌍두룡과 있을 때는 피둥피둥하던 놈이 못 알아볼 정도로 홀쭉해진 데다가 여기저기 상처가 생겼다. “얼씨구, 날개까지 당했나 보네.” 피막으로 이루어진 날개에 구멍이 뿅뿅 뚫려있었다. 길게 찢어졌다가 아문 흔적도 보였다. 갑자기 추락한 것을 보면 비행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하마용과 싸워본 세영은 놈의 가죽이 얼마나 튼튼하고 질긴지 알고 있었다. 이런 상처를 입히려면 웬만한 힘으로는 안 된다. 중렙 정도는 되는 놈이 모여서 죽이겠다고 작정을 하고 두들겨 패야 했다. 먹보에 어린애처럼 순진한 하마용이 그런 원한을 살 리는 없으니, 이런 짓을 할 놈들은 한정되어 있었다. ‘로토랑 싸운 건가?’ 날갯죽지를 잡아당기는 게 아팠는지 낑낑거리던 하마용이 눈을 떴다. 놈은 제 앞에 서 있는 세영을 보자마자 빼애앵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머, 먼저 안 간다고 해놓고… 나한테 거짓말했어!” “어, 그래.” 시큰둥하게 대꾸한 세영이 날개를 놓았다. 크게 다친 건 아닌 것 같으니 이대로 방생하면 될 듯했다. 그러자 놀란 얼굴을 한 하마용이 그녀의 뒤로 따라붙으며 말했다. “어, 어디가?” “귀찮게 굴지 말고, 살려줄 때 어디든 가라.” 세영은 시큰둥하게 내뱉었다. 로토의 신기는 일정 시간마다 다른 용이 보는 정보를 알려준다. 하마용을 데리고 다녀봐야 해가 됐지 득이 될 일은 없었다. 냉담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하마용이 겁먹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왜, 왜? 나도 같이 있을래.” 세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돌아보았다. 하마용이 넋 나간 부랑자 같은 얼굴로 울먹거렸다. “나 갈 곳이 없어. 난나랑 난마가….”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정 갈 곳이 없으면 교단에나 가보든가.” 교단에서 뜨신 밥 먹고 있을 줄 알았던 놈이 왜 여기 와서 몸을 의탁하려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게 쌍두룡의 복수 때문이라면 더욱 달갑지 않았다. 쭈뼛거리며 그녀의 눈치를 보던 하마용이 말했다. “교단에 갔었어. 교황이 복수해준다고 해서 성당까지 다시 따라갔었는데. 갑자기 내가 막 이상해졌단 말이야.” “야, 그렇게 개떡같이 말해도 내가 알아들어 줘야 하는 거냐?” “나, 나도 잘 모르겠는데… 갑자기 내 몸이 막 멋대로 움직였어! 내가 그러려고 한 거 아니었는데 인간들이 막 화내고 날 죽이려고 했다고. 날개도 막 찌르고. 왜 그랬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하마용이 억울한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먼저 이유를 물어보던 존재가 없어졌다. 남은 것은 그를 이용하거나 죽이려는 인간들뿐이었다. 그에게 세영은 마지막으로 남은 동아줄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영은 띄엄띄엄 이어지는 설명으로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했다. 교단과 함께 복수에 나섰던 하마용은, 오히려 신기의 힘에 휘말려서 성기사들을 공격했던 모양이다. 그것 때문에 정신을 차리자마자 교단의 손에 처리될 뻔했고. ‘그 교황이라면 이놈이 단순히 이용당한 것을 알아도 처리하려고 했겠지. 잠재적인 적을 등 뒤에 두고 전쟁을 할 수는 없으니까.’ 사실 세영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로토에게 이용당할 수 있는 하마용은 죽이는 편이 나았다. 살려두면 분명 나중에 뒤통수를 맞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손을 쓰자니 영 내키지 않았다. ‘쳇, 나도 많이 물러졌네.’ 인간도 아닌데 그냥 죽여 버릴까 싶다가도, 서럽게 우는 못난 얼굴을 보자 맥이 빠졌다. 동료들이 깨어나기 전에 치워버려야겠다고 생각한 세영이 그의 엉덩이를 퍽퍽 걷어찼다. “맞고 꺼질래, 안 맞고 꺼질래?” “…안 맞고 안 꺼지면 안 돼?” 하마용이 절박한 얼굴로 물었다. 세영이 인상을 찌그려도 쉽게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하긴 교단을 공격했던 놈이 여기 와서 비비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마 죽어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할 터였다. 그렇다고 로토의 신기부터 시작해서 그놈이 무슨 힘이 있고 널 데려가면 왜 문제가 되는지 일일이 설명해주기엔 너무 귀찮았다. 주절주절 말한다고 알아들을 정도로 똑똑한 놈도 아니었고. ‘두들겨 패서 어딘가에 버리고 와야 하나.’ 죽지 않을 정도만 패면 되겠지 생각한 세영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눈치챈 하마용이 주춤주춤 물러서는 순간이었다. “세영님!” 얼굴이 누렇게 뜬 디안이 텐트 밖으로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뒤이어 텐트 밖으로 튀어나온 시디발라가 도도도 달려와 그녀에게 매달렸다. “큰일 났어!” “뭔 큰일?” “신기! 신기를 가져갔대!” 하마용의 이야기인 줄 알고 찡그렸던 세영은 신기라는 말에 멈칫했다. 겨우 그녀의 쪽으로 다가온 디안이 보충설명을 했다. “로토가 세 가지 눈의 섬을 정복하고 마지막 신기를 손에 넣었다고 합니다.” “…어, 음. 그래요?” 세영은 그들이 왜 이렇게 난리인지 몰라 떨떠름하게 반응했다. 어차피 사슴 때문에 마지막 신기는 손에 넣을 생각도 없었다. 그녀의 시큰둥한 반응에 당황하던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봤다. 시디발라가 답답하다는 듯이 외쳤다. “아니, 그 마지막 신기가 바닷물을 막막 이렇게 한 거래. 그래서 지금 바깥에선 난리가 났다는 거야!” 시디발라가 양손을 마구 휘저으며 말했다. 이어서 디안이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교단을 쑥대밭으로 만들던 로토가 갑자기 동남부에 있는 엘리사 왕국에 갑자기 나타났다. 정확히는 트리파니라는 섬에 있는 티레 항구를 본드래곤으로 휘저어놓았다. 이에 엘리사 왕국이 자랑하는 해군이 모두 출동했지만, 갑작스러운 해류에 휩쓸려서 모두 침몰했다는 이야기였다. “그게 바로 로토가 손에 넣은 신기 때문이랍니다. 트리파니의 신전에 보관된 성물이 바로 마지막 신기였다고 하더군요.” “어, 그렇군요.” 생소한 지명에 멍하게 있던 세영이 뒤늦게 말했다. 그녀가 썩 관심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디안이 심각한 얼굴로 덧붙였다. “로토는 분명 나머지 신기도 손에 넣을 생각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세영님을 노릴 겁니다.” “뭐, 그건 조심해야겠네요.” 고개를 끄떡인 세영이 “그래서 아리스타타를 만났어요?” 하고 물었다. 뒤늦게 앗! 하고 놀란 표정을 지은 두 사람이 고개를 끄떡였다. 잠깐 머뭇거리던 시디발라가 말했다. “그거… 원래 그렇다는데? 자기도 열매 먹고 열흘 넘게 아팠대.” “이 개쉽싸리가! 죽고 싶나 진짜! 부작용이 있으면 말해줬어야지!” 세영의 입에서 험악한 욕설이 터졌다. 움찔한 시디발라가 디안의 뒤로 숨었다. 잠깐 머뭇거리던 디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말하면 세영님은 도저히 못 먹일 것 같아서… 그랬답니다.” “…….” 세영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뭔가 한 방 먹은 기분에 뺨을 긁적이던 그녀가 변명하듯 말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죠. 저 그런 이미지예요?” 디안의 뒤에 숨어있던 시디발라가 고개를 크게 끄떡였다. 디안 역시 난처한 얼굴로 눈을 피해버렸다. 세영은 어쩌다 제 이미지가 공처가가 되었는지 생각하며 물었다. “그거 외엔 다른 말은 없었어요?” “달빛 호수의 물이 통증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면서 깨끗한 물을 좀 나눠줬습니다. 지금은 마리엔이 갖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떡인 세영이 “다들 고생했어요. 고마워요.” 하고 인사했다. 별거 아니라고 손을 내저은 디안이 머쓱한 표정으로 눈치를 살폈다. 그때 하마용이 시디발라의 옷자락을 물어 당기면서 징징거렸다. 세영이 힐끗 놈을 눈짓하며 물었다. “그런데 저건 왜 데려온 거예요?” “아, 그게….” 디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시디발라를 쳐다봤다. 분위기로 봐서 그도 하마용을 떼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다만 호구답게 버리고 가면 죽는다고 징징거리는 것을 뿌리치지 못한 것 같았다. “새로운 소식을 듣고 세영님께 전해드려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습니다. 그리고 후와와가 여기까지 찾아온 것도 조르디아 쪽의 입김인 것 같아서요. 저 혼자 판단을 내리긴 힘들어서, 부득이 여기까지 데려오게 된 겁니다.” “조르디아? 라오 조드?” 세영의 되물음에 한숨을 쉰 디안이 고개를 끄떡였다. “라오 조드가 자신을 사막왕이라 칭하며, 마도왕을 물리치기 위해 군사를 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 초승달의 들판 (8) 무냐무냐 주제에 ‘사막왕’이라니 제법 출세했구나 싶었다. 그때 흠흠 헛기침을 한 디안이 “자세한 것은 안에 들어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가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세영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자 디안은 곧바로 시디발라를 하마용 쪽으로 밀어냈다. “시디발라, 넌 여기서 후와와랑 같이 있어.” “어? 왜?” “후와와 혼자 둘 수는 없잖아. 그렇다고 다 함께 안에 들어갈 수도 없고.” 하마용과 텐트의 입구를 번갈아 쳐다본 시디발라가 고개를 끄떡였다. 따돌림당하는 기분인지 꽤 시무룩해진 표정이었다. 그를 옆으로 잡아당긴 하마용이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았다. 어떻게든 비벼서 붙어 있으려는 것이 눈물겨웠다. 안으로 들어선 디안이 품에서 지도를 꺼냈다. 말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구를 닫은 세영이 펼쳐진 지도를 바라봤다. 디안이 지도 위에 표시하며 말했다. “저희가 숲에 도착했을 때 후와와는 이미 아리스타타를 만난 후였습니다. 후와와는 길을 헤매다가 ‘우연히’ 만난 ‘사막의 떠돌이들’에게 저희가 숲에 있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는군요. 제가 볼 때는 조르디아 쪽에서 의도적으로 정보를 흘린 것 같습니다.” 그는 라오 조드가 정보를 흘려 일을 꼬이게 한 것이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뺨을 긁적인 세영이 한마디 거들었다. “뭐, 아리스타타와 만난 것도 라오 조드 때문이었잖아요. 그걸 생각하면 썩 놀랄 일은 아니네요.” 물론 엘프들 때문에 고생하기도 했지만, 비블레스 항구에서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세영의 말에 눈을 크게 뜬 디안이 되물었다. “그,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 몰랐어요?” 가짜 구원자 일행이 전한 라오 조드의 편지에 ‘응원군을 보냈으니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이 있었다. 그다음에 만난 조력자가 ‘아리스타타’였기에 세영은 당연히 그를 라오 조드가 보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세영의 설명을 들은 디안이 떨떠름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것만 보고 아셨다고요?” “처음 만났을 때 아리스타타가 그랬잖아요. 인간의 지배자가 속이는 바람에 사막에서 말라 죽을 뻔했었다고. 그럴 놈이 라오 조드밖에 더 있어요?” 세영이 아는 놈 중에 사막에 사는 사기꾼은 라오 조드 뿐이니 당연한 결론이었다. 심란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한 디안이 말했다. “제발 그런 건 미리 말씀을 좀 해주십시오. 보통은 모른단 말입니다.” “아니, 당연히 다들 아는 줄 알았죠. 저야….” 세영이 뻘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쓴웃음을 지은 리먼이 디안의 등을 다독였다. 그제야 마음을 가라앉힌 디안이 리먼을 위해 대강의 사정을 설명했다. 그는 이어서 아리스타타에게 들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저희가 아리스타타를 찾기 위해 숲으로 향하고 있을 때, 아리스타타 역시 저희를 찾아오는 중이었답니다.” 아리스타타는 님피드 아이들의 성장을 묶어둔 것이 마음에 걸려 마을에 숨어들었다. 그렇게 접촉한 아이들에게서 로토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을 전달하기 위해 숲을 빠져나오다가 근처를 헤매고 있던 하마용과 만난 것이다. “아리스타타는 하마용을 최대한 숲에서 멀리 떨어뜨리고 싶어 했습니다. 저희도 거기 동의해서 함께 이곳으로 날아온 겁니다.” “음?” “달빛 호수는 주신의 힘을 갖고 있잖습니까. 로토가 사실을 알고 호수를 손에 넣으려고 하면 큰일이니까요. 지금의 엘프들은 외부의 침입을 방어할 능력이 전혀 없고.” “아, 그래서 하마용과 여기까지 동행한 거네요.” 세영의 수긍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디안이 지도 위를 짚었다. 동남쪽으로 치우친 곳에 제법 커다랗게 표시된 섬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확인된 로토의 위치는 여기입니다. 저희가 있는 곳으로 오려면 바다를 건너서 디도 산맥을 넘어야 하죠. 그러니 저희는 후와와를 타고 칸디아 쪽으로 이동한 뒤에….” 칸디아 쪽으로 방향을 튼 디안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이내 결심을 굳힌 듯이 말했다. “이곳에서 후와와를 버리고 다시 파디샤 쪽으로 가야 한다고 봅니다.” “호오?” 뜻밖의 말에 놀란 세영이 휘파람을 불었다. 움찔한 디안이 죄책감을 누르듯 고개를 크게 저으며 말했다. “불쌍하지만, 후와와를 데리고 갈 수는 없습니다. 물론 로토의 명령에 휘둘리고 정보를 주는 것이 후와와의 잘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세영님이고, 이 세계의 안위를 위해서도 세영님이 우선 무사하셔야 합니다.” “디안, 저도 당신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후와와에게 최소한의 설명을 해주고 거처를 마련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저희가 버리고 간다고 해서 후와와가 포기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리먼은 어디로 가도 날 수 있는 하마용에게 곧 따라잡힐 거라며,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상황을 설명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디안은 줄곧 회의적인 표정이었다. “후와와는 사실을 알아도 떨어지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사실을 알려주고 날개를 분질러서 어디에 처박아두는 방법도 있긴 하죠.” 세영의 대꾸에 남자들의 표정이 뜨악해졌다. 너무 본성을 드러냈나 싶어 뺨을 긁적인 그녀가 무어라 변명하려는 순간이었다. 줄곧 조용해서 자는 줄 알았던 사슴이 입을 열었다. “라오 조드는 왜 후와와를 보냈을까요.” “응?” 세영은 뜻밖의 물음에 그를 돌아보았다. 아른거리는 모닥불이 사슴의 얼굴에 음영을 만들었다. 열이 가라앉은 얼굴은 창백하기만 해서 예술적으로 찍은 흑백 사진을 보는 느낌이었다. 누웠다 일어나서 흐트러진 머리조차 마치 연출인 것처럼 보였다. 세영이 잠시 넋을 놓은 사이 사슴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는 저희의 위치를 알 정도로 정보가 빠른 편입니다. 후와와가 성기사들을 공격했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저희에게 보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군요.” 그의 지적에 디안이 약간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예 생각하지 못했던 점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사막의 떠돌이들이 후와와에게 구원자를 찾아가 보라고, 구원자라면 분명 새로운 힘을 줄 거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게 라오 조드의 생각이겠죠.” “이전에 모리아에서 펠릭스님을 정화하셨잖습니까. 그게 이번에도 가능할 거라 생각했나 봅니다. 라오 조드가 정말 군대를 일으킬 생각이라면 본드래곤이 꽤 부담될 테니까요.” 고개를 끄떡인 리먼이 자신의 추측을 덧붙였다. 결국, 본드래곤을 상대하기 위한 ‘대항마’로 하마용에게도 손을 써주길 바란다는 뜻이었다. 디안이 툴툴거리듯 말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자입니다.” 라오 조드의 친우이자, 그에게 노예 매매를 당한 적이 있는 사슴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파리한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세영이 말했다. “뭐,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닌데요.” “…예?” “정말 가능하십니까?” 동료들의 놀란 표정에 오히려 의아해진 세영이 고개를 끄떡였다. “펠릭스처럼 강화하는 거라면, 좀 귀찮아서 그렇지 불가능한 건 아니긴 하죠. 근데 재료를 댈 수 있으려나?” 세영이 마음을 바꿔 먹은 것은 사슴 때문이었다. 아리스타타의 말대로라면 앞으로 열흘은 더 비실거릴 거라는 소리인데, 그럴 때 무리를 해서 좋을 리가 없었다. 로토의 눈을 피하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간 분명 탈이 날 거다. ‘아픈데 계속 걷게 하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비용이 좀 들어도 비행펫 하나 뽑는다는 생각으로 투자하면….’ 이리저리 주판을 튕긴 세영이 “뭐, 좋아요. 강화하죠.” 하고 결론을 내렸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나간 생각을 알지 못하는 동료들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디안이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럼 후와와를 데려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전쟁에 참가시킬 생각은 없고요. 사람 나르고 짐 나르고 하는 것에 쓰려고요. 펫으로 귀속시켜서 강화할 때는 용으로서의 특성을 없앨까 싶은데. 뭐, 그래도 날개는 필요하니까.” 펫을 강화하는 것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브리딩으로 두 마리의 펫을 섞어서 더 강한 하나의 펫을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석과 아이템을 제물로 펫 자체를 강화하는 것이다. “펠릭스의 경우에는 언데드라 브리딩이 불가능했지만, 후와와라면 가능하겠네요.” 어차피 하프이니 말이나 새 같은 것을 사서 두세 번만 브리딩을 하면 용 속성이 빠진 펫이 나올 듯했다. 멍하게 이야기를 듣던 디안이 말했다. “아, 아니. 그런데 말씀대로라면 브리딩…이라는 것을 하면 후와와가 없어지잖습니까.” “아예 없어지는 건 아니고, 후와와 대신 녀석의 몇 대 후손 같은 게 남는 거죠. 빠른 번식?” “…그냥 후와와를 남겨주시면 안 될까요.” 핼쑥해진 동료들을 본 세영은 그제야 제 실책을 깨달았다. 난감한 기분으로 뺨을 긁적인 그녀가 “음, 그러면 두 번째 방법을 써야 하는데. 용 속성을 어떻게 뺄지 생각해 볼게요.” 하고 답했다. 그렇게 하마용은 한 줌의 정자로 바뀔 위기를 벗어났다. 안도의 한숨을 쉰 디안이 머쓱하게 웃었다. “괜히 시디발라를 떼어놓은 것 같습니다. 후와와를 버리고 가자고 하면 녀석이 알면 난리를 칠 것 같아서….” “아, 그래서 밖에 떼어놓은 거예요?” “시디발라는 눈치가 빨라도, 음모를 꾸미거나 하는 성격은 아니니까요.” 디안이 조금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세영은 그가 정말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예전처럼 고지식하고 정의로운 호구지만, 어딘지 달라진 느낌이었다. 그의 어깨를 툭 친 세영이 웃었다. “디안도 별로 음모가 어울리는 성격은 아니에요.” “…….” 입을 꾹 다문 디안이 고개를 숙였다. 왠지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세영은 그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몸을 돌렸다. “그럼 일단 후와와에게 물어보고 올게요. 녀석이 강화를 거부할 수도 있으니까.” 펠릭스는 강화를 거부하지 않았다. 아마 그가 지닌 죄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마용에게 그와 같은 책임감과 인내심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만약 녀석이 강화를 거부한다면 역시 처음 결심한 대로 두들겨 패서 어딘가에 버리고 갈 생각이었다. 텐트 밖으로 향하는 그녀의 뒤로 사슴이 슬그머니 따라붙었다. 제 손을 살짝 쥐는 것에 그를 알아차린 세영이 타박했다. “누워있으라니까 왜 자꾸 돌아다녀요.” “계속 누워있었더니 갑갑합니다.” 핏기없는 입술로 웃는 것을 보자 차마 더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세영은 그의 손을 꾹 쥐었다 놓으며 말했다. “후와와의 강화에 성공하면, 사슴 씨 검도 강화해서 로토에게서 벗어나게 해줄게요.” 세영의 말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던 사슴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다른 검을 만들어주려고 했는데, 딱 이거라고 떠오르는 게 없어서요. 그 검을 들고 있는 모습이 제일 잘 어울리기도 하고.” 세영의 말에 얼굴을 붉힌 사슴이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손을 꼭 잡아오는 것이 썩 싫은 것은 아닌 눈치였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사슴이 “저는…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어서….” 하고 고백했다. 왠지 풀이 죽은 그를 보고 피식 웃은 세영이 그를 끌어당겨 쪽 입 맞췄다. “헉! 뽀뽀했어!” 눈이 동그래진 하마용이 감명 깊은 표정으로 외쳤다. 뿌루퉁해진 시디발라가 그의 옆구리를 툭툭 걷어찼다. 세영은 모르는 척 하마용의 앞으로 다가갔다. “네 처분에 대해 잠깐 의논을 해봤는데. 너 내 펫이 될래, 아니면 죽을래?” 강화에 대한 설명을 기다리던 사슴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어라 입을 달싹이던 그는 이내 체념한 얼굴이었다.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던 하마용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사, 살려주세요.” 그렇게 하마용은 험난한 강화의 길을 택했다. ──────────────────────────────────── 초승달의 들판 (9) “그건 설명이 아니라 협박이잖아!” 디안에게 차조지종을 들은 시디발라가 불퉁거렸다. 바닥에 강화진을 그리던 세영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펫에게 왜 설명이 필요해?” “…….” 할 말을 잃은 그를 보고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마저 선을 그었다. 눈치를 보던 하마용이 시디발라의 소매를 물고 뒤로 당겼다. “나, 난 괜찮아.” “뭐가 괜찮아. 무섭다고 울었으면서!” 빽 소리를 지른 시디발라가 부루퉁한 얼굴로 세영을 쳐다봤다. 하지만 세영은 그를 못 본 척하며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휙휙 저었다. “뭐하고 있냐. 빨리 올라가.” “…히잉.” 잠시 쭈뼛거리던 하마용이 강화진 위로 올라갔다. 곧바로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애완동물 후와와(을/를) 강화하시겠습니까?> “응.” 그러자 새로운 창이 표기되면서 후와와의 모습과 강화 타입을 고르는 선택지가 나타났다. 세영은 자체 강화를 선택한 후에 강화 개조식을 살폈다. ‘여기서 지능이 떨어지면 안 되니까 그냥 두고. 속도, 순간 가속, 지구력을 중점으로 강화하면 되겠군. 드리프트는 딱히 필요 없겠지.’ 필요한 조건을 고르자 펫에게 남길 수 있는 스킬이 떴다. 용 속성 스킬인 <브레스>, <피어>를 빼고 <돌진>과 <몸통 굴리기>를 선택하자 예상 화면에 뜨는 그림자가 동글동글하게 변했다. 강화에 필요한 재료: 강화석(1)/금괴(0/5)/매직아이템(1) ‘강화석?’ 재료창을 살핀 세영의 얼굴이 기묘해졌다. 그녀가 가진 것 중에 <강화석>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템은 없었다. 텅 빈 재료칸을 지긋이 노려보던 세영이 인벤을 열었다. ‘일단 되는대로 꽂아보지 뭐. 어느 게 들어가려나.’ 이런저런 보석을 넣다가 실패한 세영은 문득 구석에 박혀있는 시커먼 돌을 발견했다. 손을 가까이 가져다 대자 금방 상세정보가 떠올랐다. [알 수 없는 화석] 도구속성 -과거 어떤 생물의 알이었던 화석. 기묘한 힘이 잠들어 있는 것 같다. 전문가에게 보여 보자. 라오 조드에게 받아온 <용의 알> 화석이었다. 진짜 용의 알이라면, 하마용을 강화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재료는 없을 듯했다. 속는 셈 치고 알을 재료칸에 넣자 달칵 소리와 함께 딱 맞아 들어갔다. 예상 그대로의 상황에 세영의 미간을 찌푸려졌다. ‘용 속성을 없애야 하는데 오히려 더 보태는 거 아냐?’ 퀘스트 템일지도 모르는 것을 하마용을 위해 날려버리는 것도 좀 아까웠다. 잠시 고민하는 사이 강화진 위에 올라간 하마용이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뒤늦게 그것을 눈치챈 세영이 손을 휙휙 저었다. “확인 끝났으니까 움직여도 돼.” “끄, 끝났어?!” 꼭 감고 있던 눈을 뜬 하마용이 제 앞발을 내려다보더니 “앗, 안 변했다!” 하고 기뻐했다. 세영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어. 그냥 확인만 한 거야.” “…힝.” 풀 죽은 하마용이 찌그러졌다. 디안으로부터 용의 속성을 없앨 거라는 말을 들은 그는 상당히 불안해하고 있었다. 지금의 자신과 갑자기 달라지는 것이 무서운 것 같았다. 동료들이 열심히 위로했지만, 그건 위로를 듣는다고 가라앉을 불안이 아니었다. 세영은 하마용을 위로하지도 동정하지도 않았다. 비행펫 정도는 다른 동물을 브리딩 하는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하마용의 등장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비행펫이 필요할 일도 없다. 그를 강화해서 로토에게 벗어나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꽤 큰 호의를 베푼 셈이었다. 정체성 갈등은 스스로가 이겨내어야 할 일이고. “…넌 왜 아무것도 설명을 안 해?” 수염을 축 늘어뜨리고 있던 시디발라가 물었다. 아까 대화의 연장인가 싶어 한숨을 쉬자 시디발라가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아까 일만 말하는 거 아니야. 넌 다른 사람이 뭘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이 없잖아. 오해하든, 잘못 알고 있든, 너랑은 하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잖아.” 아예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왠지 그런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눈물까지 그렁그렁한 시디발라가 말했다. “처음에는 여기가 낯설어서 그런 줄 알았어. 여기에 관심도 없고, 다른 사람들도 필요 없어서 그렇다고. 그래도 앞으로는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세영은 난감하게 뺨을 긁적였다. 솔직히 말하면 이곳에 별 관심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동료들 외의 사람에게 관심이 안 가는 것도 맞았다. 하지만 그게 문제라던가 달라질 거라 생각했단 말에는 수긍하기가 어려웠다. ‘왜 그래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는데.’ 사실 현실에서도, 게임에서도 세영의 태도는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고작해야 하루, 길어도 한 달 정도 볼 사람에게는 최소한의 관심만 두었다. 그 이상을 줘봤자 쓸데없는 감정소모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디발라는 그녀의 그런 면이 불만인 듯했다. 시디발라는 ‘잘 모르는 사람에겐 인사도 안 한다. 동료들이 아니면 이름 밝히는 것도 싫어한다. 옆에서 누가 죽어도 아무 생각이 없다.’ 등등 온갖 불만을 늘어놓더니, 이제는 동료들에게도 너무 말을 안 한다며 불평하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설명 안 해주면 불안하단 말이야. 하지만 물어보면 또 귀찮아하잖아. 나중에 말해줄 때도 당연한 건데 왜 몰랐냐고 말하고. 보통은 다 모른단 말이야.” “아니, 왜 이렇게 흥분하냐. 진정해봐.” 세영은 씨익씨익거리는 시디발라를 달래기 위해서 애썼다. 쉽게 진정되지 않는 것을 보니 그동안 쌓아왔던 것이 하마용 때문에 터져버린 것 같았다. 세영은 그걸 심각한 문제라고 여기지 않았기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하긴, 내가 불편한 게 아니라 동료들이 불편한 거니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하면 고치는 게 맞다. 난감하게 뺨을 긁적인 세영이 몸을 낮춰 시디발라와 눈을 마주했다. “이곳에 관심이 없고 사람들과 친해지지 않으려는 거. 그건 그냥 내 생활방식이야. 난 원래 다른 사람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 “…….” “하지만 다른 건 고칠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동료들에겐 말하고 설명할게. 그럼 괜찮아?” 시무룩한 얼굴로 세영을 보던 시디발라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는 세영의 손을 양손으로 꼭 쥐면서 물었다. “넌 우리를 좋아하지? 우리가 좋아하는 만큼 너도 우릴 좋아하는 거 맞지?” “응.” “갑자기 없어져도 잊어버리지 않을 거지?” “그래.” 세영의 대답에 눈이 그렁그렁해진 시디발라가 그녀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잠시 후 뒤로 물러난 그가 팔로 눈 위를 쓱쓱 문질렀다. 세영은 그의 체면을 위해 아무것도 못 본 척해주었다. 가까스로 진정한 시디발라가 크게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들어줘서 고마워.” “쟤나 좀 어떻게 해봐. 계속 저러고 있으니까.” 세영이 벌처럼 8자 춤을 추고 있는 하마용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차 한 시디발라가 그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몸을 일으킨 세영은 언제부터였는지 뒤에서 지켜보던 리먼을 발견했다. 민망해서 괜히 어깨를 으쓱한 그녀가 물었다. “그동안 불편하게 해서 죄송해요. 제가 이런 쪽으로 좀 둔해서요.” “아닙니다. 사실 저도 시디발라의 말을 듣고 반성 중입니다.” 쓴웃음을 지은 리먼이 함께 산책하겠느냐고 권했다. 물을 떠서 아침을 준비하려는지, 작은 솥 하나를 들고 있었다. 선선히 고개를 끄떡인 세영이 그를 따라나섰다. 잠시 아무 말 없이 새벽의 들판을 걷던 리먼이 말했다. “세영님께 사과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저는 처음의 다짐을 잊고 세영님께 제가 원하는 구원자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었습니다. 세영님의 무심함과 자애로움까지, 신의 사자로서 지극히 당연하다 생각해 왔던 겁니다.” 무심함까진 이해되는데 자애로움이라니,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민망해하는 세영을 보고 빙긋 웃은 리먼이 말을 이었다. “어느 것이든 그건 세영님이 세영님 자신이기 때문이지, 신의 사자라서가 아닐 겁니다. 그래서 시디발라의 말을 듣고 참 많은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음, 굳이 그런 것까지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요. 다른 사람이 저를 뭐라고 부르든, 어떤 기대를 하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서요.” 물론 세영도 상종 못 할 인간으로 보이지 않게 신경 써서 행동한다. 하지만 그건 자신을 위한 이미지 관리일 뿐이지, 남들의 기대를 그대로 수용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리먼이 그녀를 구원자로 생각하든 동료로 생각하든 그다지 변할 것은 없었다. 세영의 대꾸에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던 리먼이 말했다. “예전의 저는 남들보다 많은 신성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후보에서 신관이 되었고, 미래의 대사제라고 기대를 받으며 자랐지요. 그런데 어느 날 모든 것이 뒤바뀌었습니다.” 2차 성징을 겪으면서 신성력의 양이 급변하는 사람들이 있다. 리먼은 대부분의 신성력을 잃어버린 쪽이었다. 그에게 걸린 기대 역시 한순간에 사라졌다. “저는 제 안의 오만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성력의 유무는 상관없다고, 여신께서는 모두를 평등하게 사랑한다고 말하던 제가 얼마나 그것에 집착해 왔는지 깨달은 겁니다. 저는 여신께 받은 신성력을 저의 것, 저의 전부라 여기고 있었습니다.” 세영은 갑자기 펠릭스가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현자 중 하나였지만, 신성력을 잃은 것에 절망해 언데드가 되어버렸다. 그만큼 신성력은 사제의 정체성에 가까운 것이었다. “다시 처음부터 해나가자고 결심했습니다. 사제로서, 신의 말씀을 따르는 자로서 진정 신이 제게 원하시는 모습이 무엇인가 생각하면서요.” 그런 리먼 앞에 나타난 세영은 또 하나의 시험이었다. 누구보다 강한 신의 힘을 가지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행하는 그녀는 힘을 잃기 전의 그가 그리던 이상향이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신의 사자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세영은 자신이 구원자가 아니라고 했다. 리먼은 그녀의 뜻을 존중하고, 신의 사자가 아닌 동료로 대우하고 싶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또다시 치우친 것 같다고, 민망하게 웃는 그를 본 세영이 고개를 저었다. “리먼이 저를 신경 써서 그런 말을 해주는 것 알아요. 그래서 무척 고맙고요. 하지만 리먼은 신을 모시는 사람이니까, 그 위주로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요. 자연스러운 것 가지고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역시 상냥하십니다.” “…아니, 그건 절대 아닌 것 같은데요.” 리먼의 칭찬에 난감해진 세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난감해 하던 찰나 목표로 잡은 샘이 보였다. 리먼의 손에서 솥을 빼앗은 그녀가 물을 채우며 말했다. “제가 굳이 설명 안 하는 건… 남들이 하찮아서 그런 건 아니에요. 저는 그냥, 설명했을 때 남이 이해해준다는 확신이 없어서요. 제가 말한 것이 잘 전달될지도 모르겠고요. 가끔은 좀 쓸데없다는 생각도 들어요. 어차피 직접 보거나 경험하면 알 텐데, 말해봤자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 거….” 어깨를 으쓱한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귀찮은 것 같아요. 말하고 나니 굉장히 무책임하네요.” 그래서 게임의 인간관계가 편했다. 화제도 극히 한정되어 있었고, 신변잡기도 몇 마디로 넘어가기 마련이었다. 이런 고민조차 그녀에게 낯선 경험이었다. “저는 시디발라와 달리 세영님이 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서두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세영님께는 세영님만의 기준이 있으니까요.” 다독이듯 말을 받은 리먼이 자연스럽게 솥을 받아들였다.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돌아오자 텐트 앞에 사슴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식의 변화라면 반가운 것도 같다고 생각한 세영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아침 인사였다. ──────────────────────────────────── 교역도시 하란 (1) 둥- 둥- 둥 북소리가 산자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메아리와 섞여 기묘해진 울림에 옅은 흐느낌이 섞여들었다. 공포와 슬픔에 질린 한 떼의 사람들이 북소리에 맞춰 산을 오르는 중이었다. 절벽이 끝나는 곳에 거대한 동굴이 있었다. 그 앞에는 돌로 된 제단이 놓였는데, 평평한 윗부분으로 간신히 제단임을 알아볼 정도로 허술한 것이었다. 화려하게 치장한 무당이 주문을 외우며 제단 위로 올랐다. 그의 뒤를 밋밋한 통옷을 입은 여섯 명의 아이들이 따랐다. 아이들이 모두 제단 위에 무릎을 꿇자 무당은 재빨리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자 뭔가의 신호처럼 북소리가 빨라졌다. 그와 동시에 동굴 안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신께서 나오신다. 어서 엎드려라!” 무당의 재촉에 흐느끼던 사람들이 재빨리 바닥에 엎드렸다. 동굴 안쪽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남자 하나가 연기처럼 일렁이는 짐승의 눈을 보고 얼른 납작 엎드렸다. “신이시여, 저희가 준비한 제물을 받고 부디 노여움을 푸소서!” 무당의 외침에 입맛을 다신 짐승이 제단으로 다가왔다. 놈은 다 큰 코끼리 정도의 크기였다. 피부는 피처럼 붉었고 머리는 사자와 비슷했지만, 꼬리는 전갈처럼 마디가 지고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있었다. 짐승의 입이 벌어지며 촘촘한 이빨이 드러나자, 겁에 질린 아이들이 울음을 터트렸다. 그것에 흥분한 짐승이 피리 같은 소리를 냈다. 놈이 막 제단 위의 아이들을 덮치려는 순간이었다. 하늘 위에서 매처럼 내리꽂힌 그림자가 짐승의 이마를 걷어찼다. 거짓말처럼 육중한 거체가 휙 날아가 절벽에 쿵 부딪혔다. 제단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세영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뭐, 제대로 잘 찾아온 것 같네.” “세영님! 괜찮으세요?” “갑자기 뛰어내리셔서 놀랐습니다.” 한 박자 늦게 하마용을 타고 내려온 동료들이 아우성을 쳤다. 세영이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휙휙 젓는 순간이었다. 짐승이 시뻘건 아가리를 벌리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놀란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는 사이 세영은 짐승의 아가리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아니, 이게 미쳤나?” 꼼짝도 못 하고 붙들린 짐승이 눈알을 굴렸다. 세영은 놈을 번쩍 들어 바닥에 처박았다. 붕붕 휘둘러지는 짐승을 피해 바닥에 내려앉은 하마용이 동료들을 풀어주었다. 너덜거리는 짐승의 목덜미를 움켜잡은 세영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여기서 끝낼까요, 아니면 잡아볼래요?” “한번 상대해 보고 싶습니다. 만티코어는 희귀한 마수니까요.” 디안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동료들도 호승심에 찬 얼굴로 무기를 움켜쥐었다. 고개를 끄떡인 세영이 짐승을 절벽 쪽으로 휙 내던졌다. 동료들이 꺅꺅거리며 짐승을 쫓아가는 것이 보였다. 제단 위에 주저앉은 세영이 따라갈지 말지 고민하는 사슴을 불렀다. “가지 말고 여기서 같이 구경이나 해요.” 긴 속눈썹을 자랑하듯 깜박이던 사슴이 조신하게 제단 위로 올라왔다. 세영은 옆을 손으로 툭툭 털어 깨끗한 자리를 마련했다. 마음 같아선 손수건도 깔아주고 싶었지만, 너무 오버하는 것 같아서 관뒀다. “그러다 다치십니다.” 세영의 손을 잡아 먼지를 털어준 사슴이 그녀의 옆에 앉았다. 은근슬쩍 손을 잡고 있는 것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멀리서 짐승의 울부짖음, 마법과 스킬이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지만, 왠지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졌다. “몸은 좀 어때요?” “이제 많이 좋아졌습니다.” 며칠째 반복되는 대화였지만, 둘 다 별 개의치 않았다. 세영은 괜히 사슴의 손을 잡고 주물럭거렸다. 아무리 주물러도 부족한 기분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지금이 싫은 건 아닌데, 단둘이 있는 시간이 있으면 좋겠네요.” “…….” “아니, 야한 짓 하려는 게 아니라요. 그래도 애인 사이인데 데이트하기도 힘들고, 좀 아쉽고?” 괜히 변명하는 세영의 손을 꼭 잡은 사슴이 “저도 그렇습니다.” 하고 속삭였다. 히죽 웃은 세영이 얼른 표정을 바로 잡으며 헛기침을 했다.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인 사슴의 긴 머리를 손에 휘감으며 장난치던 그녀가 물었다. “이름이요. 생각해봤어요?” “…전에 지어주신 이름이 제일 좋습니다.” “아니, 근데 그건 사슴 씨가 발음을 못 하잖아요.” 세영의 물음에 사슴이 풀이 죽었다. <김꽃사슴>이나 <박꽃사슴>이나 본인이 말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애초에 이곳에는 <꽃>이라는 발음에 가까운 게 없는 모양이었다. 세영은 그를 살살 달랬다. “적어도 자기 소개할 때 말할 수 있는 거로 해야죠.” “다른 사람은 어떻게 불러도 상관없습니다. 전 세영님만 부르시는 게 더 좋습니다.” 사슴의 고집에 세영은 ‘헐, 이 귀여운 짐승 좀 봐!’ 하고 감탄했다. 순간 홀딱 넘어갈 뻔했던 그녀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러지 말고 다른 이름으로 하죠. 백록이라든가, 흑록이라든가.” “…….” “흑록은 발음이 너무 어려운가? 백록은 어때요?” 세영의 말에 잠깐 망설이던 사슴이 ‘백록’이라고 말했다. 세영은 이곳에서 백록이 꽤 센 발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거의 <빽녹>에 가까웠다. 그녀는 사슴의 손등을 토닥거렸다. “제가 좀 더 좋은 이름으로 지어볼게요. 누구 이름을 지어본 게 처음이라.” “그렇게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더 좋은 걸로 지어주고 싶어서 그래요. 제가 살던 곳에서 이름은 상대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었거든요. 이름 때문에 미래가 바뀐다는 믿음도 있었고요.” 사실 사슴의 이름은 그냥 생긴대로 지은 것이지만, 어쨌든 아무렇게나 결정할 수는 없었다. 진지한 대답에 미소 지은 사슴이 고개 숙여 세영의 손에 입 맞췄다. 깃털처럼 윤이 나는 검은 머리카락이 사르르 손등을 간질였다. “이름을 얻는 것보다 저를 생각해 주시는 마음이 더 기쁩니다.” 수줍게 말한 사슴이 세영의 손목에 다시 한 번 입 맞추고 고개를 들었다. 세영은 순간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것을 느꼈다. 저를 응시하는 눈이 전보다 더 깊어진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초록불!’ 하고 깨달으며 쓰윽 손을 내미는 순간이었다. “저, 용사님.” 바로 그때 눈치만 보던 아이들이 말을 걸었다. 아련하던 분위기가 파사삭 깨어지는 것을 느낀 세영이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하, 시발. 우주 공간에서 사슴이랑 둘만 있고 싶다. 사슴이 부족해.’ 하지만 놀란 마을 사람들과 무당, 그리고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도를 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간신히 이성을 되찾은 그녀가 “뭐?” 하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아이 중 제일 나이가 많을 것 같은 소녀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저, 저희를 구하러 온 용사님이신가요?” “아니, 그냥 마수 죽이러 온 사람.” 무뚝뚝한 세영의 대답에 소녀가 어쩔 줄 몰라 했다. 한숨을 쉰 세영이 덧붙였다. “저건 만티코어라는 사람 잡아먹는 괴물이고, 저걸 신이라고 부르면서 너희를 제물로 바친 놈은 개새끼고, 신이 아닌 거 뻔히 알면서도 따른 놈들은 나쁜 새끼들이다. 다른 궁금한 거 있냐?” 소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세영은 제가 너무 까칠하게 굴었나 생각했지만, 부드럽게 말한다고 해도 별달라질 내용은 아니었다. 하얀 통옷을 손으로 쥐어짜던 소녀가 물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요?” “글쎄. 여기서 살아도 되고, 여기서 못 산다면 적당한 신전까지 데려다주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어조에 소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소녀의 시선이 웅성거리는 사람들에게 닿았다. 그녀는 이내 결심한 듯이 “신전으로 가고 싶어요.” 하고 말했다. 고개를 끄떡인 세영이 자신의 옆을 가리키며 “그럼 이쪽에 서 있어.” 하고 말했다. 소녀는 가장 어려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세영의 옆에 섰다. 쭈뼛거리던 다른 아이들이 용기 내어 물었다. “저희도 같이 가도 돼요?” 세영이 말없이 턱짓했다.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와 그녀의 옆에 섰다. 그때 쥐 죽은 듯이 눈치만 보던 무당이 외쳤다. “시, 신성한 의식을 방해하다니. 어서 정체를 밝혀라!” “맞아 죽을까 봐 발악하는 건 알겠는데, 진짜 뒈지기 전에 닥쳐라. 기분 안 좋으니까.” 세영의 대꾸에 멈칫한 무당이 주변을 살폈다. 사람들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그가 갑자기 몸을 돌려 숲으로 달아났다. 몇몇 사람들이 욕설을 내뱉으며 그의 뒤를 쫓았다. “세영님! 잡았습니다!” “우리가 해냈어!” 동료들이 돌아온 것은 그때였다. 넷이서 힘을 합쳐 코끼리만 한 짐승을 끌고 오는 것을 본 세영이 픽 웃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반응한 것은 마을 사람들이었다. “진짜 용사님들이다!” “저희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용사님!” 무릎까지 꿇으며 요란하게 감사를 표하는 것을 본 동료들이 주춤했다.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난 세영이 사슴에게 말했다. “잠깐 애들 좀 보고 있어요.” 사슴이 끄떡이자마자 그녀는 단 아래로 뛰어내려 동료들에게 다가갔다. 슬금슬금 다가오던 사람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인벤에서 정글도를 꺼낸 세영이 허공에 도를 휘둘렀다. 파바박 소리와 함께 바닥에 깊은 흠이 생겼다. “죽고 싶지 않으면 선 넘어오지 마라.” 짧게 경고한 세영이 만티코어 해체에 들어갔다. 열 개의 발톱은 모두 매직 등급이었고, 가죽과 눈알, 꼬리, 독주머니는 레어였다. 고기와 뼈까지 깨끗하게 분리해서 인벤에 집어넣은 그녀가 웃었다. “다들 수고하셨어요.” “많이 나왔어?” 주변에서 얼쩡거리던 하마용이 기대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세영은 대충 고개를 끄떡였다. “열 개 나왔다. 뭐, 이걸로 열 번은 시도할 수 있겠네.” “우와앙!” 하마용이 깝죽거리며 엉덩이춤을 추었다. 처음 꺼리던 것은 까맣게 잊은 듯했다. 강화가 계속될수록 둔중하던 몸은 날씬해졌고, 황금빛이 돌기 시작한 가죽은 매끄러워졌다. 날개는 정말 황금을 녹여 빚은 것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해진 하마용은 제법 귀여웠다. 엄밀히 말해서 용도 하마도 아니게 되어버렸지만, 본인은 무척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시디발라가 멋지다고 열심히 칭찬해준 것도 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매직 아이템을 찾아 쉬지도 않고 날아다닐 정도로 강화에 열광했다. “잠깐만 쉬고 있어요. 여기서 강화까지 마치고 가게요.” 세영의 말에 동료들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면서도 사람들 쪽을 힐끔거리는 것이 뭔가가 불안한 모양이었다. 세영은 뒤쪽에서 사람들이 울부짖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강화진을 그렸다. 진이 완성되자 하마용이 냉큼 위로 올라섰다. <애완동물 후와와(을/를) 강화하시겠습니까?> “응.” 강화에 필요한 재료: 강화석(0/1)/금괴(0/5)/매직아이템(0/1) 시스템 알림음에 대답하자마자 강화창이 떴다. 처음이 아니므로 곧바로 재료창으로 이어졌다. 금괴와 만티코어의 발톱을 꽂아 넣은 세영이 마지막으로 화석, 아니 화석이었던 것을 꺼냈다. [정체불명의 알] (3/5) 도구속성 -누가 낳았는지 모르는 알의 일부. 기묘한 힘이 잠들어 있는 것 같다. 전문가에게 보여 보자. ──────────────────────────────────── 교역도시 하란 (2) 처음 세영은 화석을 강화석으로 사용하면 사라져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강화를 해보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알의 모습으로 변하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하마용에게서 뽑아낸 용의 힘이 알을 재생시키는 듯했다. ‘뭐가 될지 모르겠지만, 왠지 완성해야 할 것 같단 말이야.’ 퀘스트만 보면 꼭 완료를 해야 하는 고질병이 도졌다. 세영은 귀찮음조차 떨쳐버리고 강화에 집중했다. 강화에 필요한 매직 등급의 아이템이 떨어지자 사냥을 결심할 정도였다. 보상으로 얻는 아이템은 노멀, 매직, 레어, 유니크, 전설 등급으로 나뉜다. 하마용을 강화하는 것에는 매직 등급의 아이템이 쓰였다. 매직 등급은 굉장히 흔하지만, 또 일반 몬스터에게선 잘 나오지 않는 애매한 등급이었다. 뜬금없이 사냥감을 찾는 세영에게 디안은 <모험가가 꼭 읽어야 하는 마물 수첩>을 내밀었다. 작년에 발행된 개정판으로 유명한 마물과 출몰장소를 기록해둔 책이었다. 그는 조금 부끄러운 듯이 덧붙였다. “제가 강해지면 꼭 이런 놈들을 사냥해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좋네요. 당장 그 꿈을 이뤄보죠.” 그렇게 열정과 흑심이 가득한 마물 사냥이 시작되었다. 가끔 허위정보도 있었지만, 대개는 기록된 곳에 마물이 있었다. 터무니없이 약하거나 매직 아이템을 하나도 뱉지 않아서 문제였다. 몇 번의 실패 후 세영은 어설픈 마물보다 제법 강한 마물을 잡아 부속물을 노리는 편이 낫다는 것을 깨달았다. 덕분에 책에 위험하다고 기록된 마물들이 족족 갈려 나가는 중이었다. 알을 재료창에 넣어 세팅을 마친 그녀가 우둑거리며 손을 꺾었다. ‘좋아, 열 번이니까 아무리 박복한 놈이라도 두어 번은 성공하겠지.’ 하마용은 펠릭스만큼은 아니었지만, 강화 성공률이 낮은 편이었다. 펫이라 망정이지 무기였다면 진작 깨져서 사라지고 남았을 것이다. 알은 강화가 2번 성공해야 1/5씩 완성되기 때문에 앞으로 4번은 더 성공해야 했다. ‘느낌이 왔어. 바로 지금이다!’ 세영은 주저 없이 시작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강화진에서 환한 빛이 쏟아지며 하마용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다음 순간 쨍그랑! 하고 접시 깨지는 소리와 함께 돼지 멱따는 것 같은 비명이 들렸다. 쳇 하고 혀를 찬 그녀는 다시 재료를 세팅했다. 그녀에겐 아직 9개의 만티코어 발톱이 남아있었다. 만티코어의 발톱은 하마용에게 풀 강화라는 영광을 안겨주었다. 풀 강화된 하마용은 전체적으로 황금색이었지만, 지나치게 반짝거리지 않는 은은한 광택을 자랑했다. 도마뱀처럼 길쭉한 꼬리와 날개를 빼면 용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굉장해. 진짜 멋있다!” “상상 이상의 변화군요. 어떻게 보면 귀…여운 것 같기도?” “진짜? 나 귀여워?” “네, 정말 귀여워요. 인형 같아요.” 동료들은 강화를 마친 하마용을 둘러싸고 축하해주었다. 세영도 완성된 알을 보며 흐뭇함을 즐겼다. 인벤 위로 손을 가져다 대자 갱신된 상세정보가 떠올랐다. [용의 알] 도구속성 -요리 재료 -용이 낳은 알이다. 왠지 요리하면 맛있을 것 같다. 기묘한 힘이 느껴진다. 전문가에게 보여 보자. 전문가라는 말에 사슴을 힐끗 쳐다본 세영이 인벤을 닫았다. 어쨌든 여기서 알을 꺼내는 것은 그리 현명한 짓이 아니었다. 그녀는 우줄우줄 잘난 척을 하는 하마용을 툭 쳤다. “이제 그만 가죠. 아, 갈 때 애들을 한 명씩 챙겨야 할 것 같아요.” “신전으로 보내는 겁니까?” “네, 여기도 뭐. 다른 곳이나 사정이 비슷하네요.” 마물을 사냥하면서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닌지라 다들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이곳은 무당이 적극적으로 제물을 바치는 쪽이었지만, 가끔 입을 줄이기 위해서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마물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행은 구해낸 사람들이 원할 때는 기부와 함께 가까운 신전에 맡기고 약간의 돈을 연금처럼 찾아 쓸 수 있게 해주었다.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기도 했다. 사슴과 함께 제단을 내려온 아이들을 하나씩 안아 들고 하마용의 등에 탔다. 가장 큰 아이는 시디발라를 안고 탔다. 하마용이 무어라 불평했지만, 부담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강화가 되면서 힘이 더 강해진 덕이었다. “요, 용사님! 기다려 주십시오!” 일행이 정말 떠날 생각임을 깨달은 마을 사람들이 동요했다. 변명하듯 뻐끔거리는 수십 개의 입을 힐끗 쳐다본 세영이 하마용을 툭 쳤다. 곧장 위로 치솟은 하마용이 우르르 다가오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스치듯 다가오는 하마용을 본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엎어졌다. 세영은 쓰러진 사람들을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저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변명을 들어줄 생각도 없었다. 그들은 그냥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살면 된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모습이 멀어지고 푸른 산등성이만 남았다. 세영은 제 품에 안긴 아이가 흐느끼는 것을 모른 척했다. * 일행이 도착한 곳은 하란이라는 도시였다. 여기선 드물게 높은 성벽이 도시를 갑옷처럼 감싸고 있었다. 리먼은 이곳이 파디샤의 대표적인 무역도시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커다란 강을 끼고 있는 도시는 쉴 새 없이 오가는 배와 수레들로 북적거렸다. 특이하게도 멀리서 내려다본 하란은 보랏빛이었다. 진한 보랏빛은 없었지만, 연보라부터 시작해서 자주색까지의 온갖 색의 천막들이 펄럭였다. 보라색 무지개 같았다. 세영의 의문에 리먼이 자주색 옷감이 이곳의 특산물이라 답해주었다. “성문 앞으로 가자.” 세영이 하마용의 목덜미를 툭툭 두들겼다. 재빨리 날개를 퍼덕여 방향을 바꾼 하마용이 성문 앞에 내려앉았다. 재빨리 바닥으로 뛰어내린 시디발라가 제 팔을 툭툭 쳤다. 모르는 아이에게 안겨있는 것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일행도 모두 안장에서 내려와 아이들을 내려놓았다. “저게 대체 뭐지? 말은 아닌데?” “날아다니잖아? 저런 건 생전 처음 보는군.” 문 앞에 길게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웅성거렸다. 주변을 휙휙 돌아본 하마용이 물었다. “줄이 두 개인데 어느 쪽으로 가야 해?” “한쪽은 상인을 위한 줄일 겁니다. 우리는 일반 방문객이니 저쪽으로 가면 되겠군요.” 리먼이 수레가 없는 쪽을 가리켰다. 하마용이 졸래졸래 다가가자 줄 서 있던 사람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하마용이 “줄 안 서?” 라고 묻자 흠칫하며 어서 앞으로 가라고 손짓했다. 그것이 줄줄이 이어져서 결국 일행은 줄의 제일 앞에 서게 되었다. 성문 앞을 지키던 병사 중 하나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시, 신분패를 보여주셔야 합니다.” “앗, 난 신분패 없는데!” 명랑한 하마용의 대꾸에 병사의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머뭇거리던 그는 “사, 사람만 확인하겠습니다.” 하고 덧붙였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머리를 쭉 내민 하마용이 병사의 냄새를 킁킁 맡았다. 놀란 병사가 제자리에서 쩌저적 얼어붙었다. 세영이 하마용의 목덜미를 툭 치며 질책했다. “버릇없이 굴지 마. 죄송합니다. 길들인 지 얼마 안 돼서요.” “아, 아닙니다.” 병사는 일행이 내민 신분패를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도망쳤다. 덕분에 일행은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도시로 입성할 수 있었다. 하란은 부유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의 도시였다. 사람들도 어딘지 깍쟁이 같은 느낌이 강했다. 하마용의 등장에 놀란 표정을 짓다가도 이내 ‘흥, 저런 하마용 따위 우리 집에도 있어.’ 같은 얼굴로 지나쳤다. 대놓고 보지 않았지만, 멀리서 힐끔거린다는 느낌이었다. 그들과 달리 동료들은 넋을 잃고 주변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제 중렙 정도는 되었는데 여전히 초보 같은 모습이었다. 세영은 제가 너무 그들을 외진 곳으로 끌고 다닌 게 아닌지 반성했다. 박수를 쳐서 동료들의 시선을 끈 그녀가 재빨리 일을 분담했다. “리먼은 신전 쪽을, 디안은 은행 쪽을 맡아줘요. 저랑 마리엔은 마탑 쪽을 맡을게요. 시디발라와 사슴 씨는 새로운 정보가 있는지 알아보고요. 일이 끝나면 다시 여기로 모이죠.” 눈을 깜빡이던 시디발라가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어, 그럼 후와와는 어떻게 해? 혼자 있어?” “혼자 있을 수 있지?” 세영의 물음에 우물쭈물하던 하마용이 “어, 나 자신 없는데….” 하고 소심하게 말했다. 그러자 마리엔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리먼 혼자 아이들을 다 돌보긴 힘들 거예요. 제가 리먼과 함께 신전에 갈게요. 카라드 씨가 세영님과 함께 마탑으로 가주세요. 시디발라, 넌 후와와 데리고 다녀와.” 무어라 할 틈도 없이 좋아라 시디발라에게 달려든 하마용이 그를 데리고 가버렸다. 세영이 혼자 남아있으라고 할까 봐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적당한 마구간에 처박아둘 생각이었던 세영은 머리를 긁적였다. 마리엔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놓으며 말했다. “둘이서 천천히 구경도 하고 놀다가 오세요. 저희가 알아서 숙소 잡아둘게요.” “아니. 굳이 그럴 필요는….” “흠흠, 그럼 저는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상황을 눈치챈 디안이 서둘러 몸을 돌렸다. 이어서 리먼이 아이들을 챙겨서 걸음을 옮겼다.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에 주춤거리는 세영에게 손을 흔든 마리엔이 리먼을 쫓아갔다. 세영은 뺨을 긁적이며 사슴을 올려다보았다. “음, 왠지 신경 쓰이게 한 모양이네요.” “저는 기쁩니다. 세영님은… 마리엔 씨와 함께 가고 싶으셨습니까?” 사슴이 조금 서운한 얼굴로 물었다. 대답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을 파악한 세영이 바짝 긴장해서 말했다. “아, 아뇨! 뭐랄까. 마리엔이 요즘 통 기운이 없기에 이야기를 좀 해보고 싶어서요. 절대 사슴 씨랑 데이트하기 싫었던 게 아니라, 그 뭔가 마음에 걸리는 점이랄까. 그런 게 있어서….” “…….” “저, 저야 물론 데이트하고 싶죠. 전에도 그렇게 말했는데 기억나죠? 아, 물론 알고도 마리엔이랑 가려고 한 게 아니라요.” 횡설수설하는 세영을 빤히 쳐다보던 사슴이 고개를 푹 숙이며 어깨를 떨었다. 그렇게 화가 났나 싶어 눈치를 보던 세영은 그가 웃음을 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진정한 사슴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웃을 생각이 아니었는데 너무 당황하셔서 그만.” “…….” “…세영님?” 멍청한 얼굴로 그를 보던 세영은 갑자기 격렬한 쪽팔림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여기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휙 몸을 돌려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당황한 사슴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 “세영님? 잠깐 기다려주십시오. 세영님!” “아, 저 좀 내버려둬요. 잠시면 되니까.” 세영이 귀찮은 것을 쫓듯 손을 휙휙 저었다. 어디든 조용한 곳으로 가서 마음을 좀 진정시키고 싶었다.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것을 느낀 사슴이 얼굴을 굳혔다. 그는 세영을 뒤에서 번쩍 안아 들고 근처의 골목으로 들어갔다. 시끄러운 바깥과 달리 어둑어둑한 골목은 조용했다. 미간을 찌푸린 세영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숨을 내쉰 사슴이 세영의 이마에 자신의 것을 맞대고 속삭였다. “도망가지 마십시오.” “도망가는 게 아니라….” “도망가셨습니다.” 사슴의 확언에 한숨을 내쉰 세영이 마른세수를 했다. 그녀는 “미안해요. 순간적으로 짜증이 좀 났어요.” 하고 사과했다. 사슴이 “제가 웃어서 화가 나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난감하게 이마를 문지른 세영이 말했다. “이런 말 하는 것도 유치하다는 거 아는데. 뭔가 항상 저만 애가 타고, 사슴 씨 눈치 보고, 매달리는 것 같아서요. 사슴 씨는, 뭐랄까. 항상 초연하잖아요.” 말을 할수록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머리를 콩콩 쥐어박는 세영의 손을 붙잡은 사슴이 무겁게 말했다. “저는… 조금도 초연하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제 속마음을 보신다면….” 잠시 말을 멈춘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계속 모르셨으면 좋겠습니다. 보면 분명 싫어하실 겁니다.” 손목을 붙잡은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많이 놀란 것 같아서 당황한 세영이 그의 손을 감싸 쥐었다. 세영의 손등에 입을 맞춘 사슴이 죄스러운 듯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투정부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투정부린 거였어요?” 세영의 되물음에 얼굴을 붉힌 사슴이 고개를 숙였다. 세영은 ‘뭐야, 투정부린 거 맞구나.’ 하고 안심하며 붉어진 뺨을 쓱쓱 어루만져 주었다. 사슴이 그녀의 손끝에 입을 맞췄다. 잠시 머뭇거리던 세영이 말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좀 당황했거든요.” “……?” “그냥, 안 어울리게 변명했는데 놀림당한 줄 알고…. 에이씨, 진짜 미안해요.” 민망한 듯 시선을 피하는 세영을 보고 조용히 웃은 사슴이 그녀의 뺨에 입 맞췄다. 간지러운 접촉에 저도 모르게 따라 웃은 세영이 그의 턱에 쪼듯이 키스했다. 잠깐 헤매던 입술이 조심스럽게 겹쳐졌다. 짧지 않은 입맞춤이 끝난 후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시 웃었다. 사슴의 뺨을 만지작거리다가 아쉽게 손을 물린 세영이 물었다. “혹시 마탑으로 가는 길 알아요?” “아….” 어딘지 멍해 있던 사슴이 눈을 깜빡였다. 당황이 깃든 눈에 세영은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아끌며 골목을 나섰다. “괜찮아요. 뭐, 지금부터 찾아보자고요.” ──────────────────────────────────── 교역도시 하란 (3) 마탑은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 도시에서 제일 높은 건물, 그게 바로 마탑이었다. 3층만 되어도 높은 건물이라 할 수 있는 곳에서 바늘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탑은 못 찾는 것이 더 어려웠다. 한층 여유로워진 세영은 곧바로 마탑으로 가지 않고 사슴의 손을 붙잡고 돌아다녔다. “오, 이거 귀엽네.” 가판대를 구경하던 세영이 머리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가짜 보석이 박힌 싸구려 장식이었지만, 제법 공들여 만든 티가 났다. 무료한 얼굴로 앉아있던 주인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어린 아가씨가 안목이 있으시네. 여기서 제일 잘 나가는 거야. 이제 딱 하나 남았는데, 애인한테 사달라고….” 그때 세영이 사슴에게 손짓했다. 얌전히 고개를 숙인 사슴의 귀 옆에 핀을 꽂자 제법 잘 어울렸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더니, 싸구려 장식조차 그의 머리에선 명품처럼 보였다. 저도 모르게 감탄한 그녀는 다른 핀도 찾아 꽂아보았다. 뭘 갖다 대도 어울려서 무서울 지경이었다. “이거 다 주세요.” 세영은 착용했던 핀들을 전부 사들였다. 사슴 머리에 꽂았던 것을 다른 사람에게 팔수는 없다는 마음에서였다. 왠지 떨떠름한 표정이 된 주인이 그것을 포장해주었다. 사슴 쪽을 힐끔거리던 그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거 참, 남자 망신….” 세영에게 몸을 맡기고 있던 사슴이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단순히 쳐다볼 뿐인데도 알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흠칫한 주인이 입을 다물고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다음에 진짜 보석으로 세공해서 선물해야겠다.’ 값을 치른 핀을 인벤에 던져넣은 세영이 작게 흥얼거렸다. 생각해보니 다른 동료들을 이리저리 꾸며본 적은 있는데 사슴을 이리저리 꾸며본 적은 없었다. 거적때기를 입어도 빈티지로 보일 얼굴이긴 하지만, 멋지게 차려입은 모습도 보고 싶었다. ‘내가 가진 것 중에는 남자도 착용할 수 있는 템이 별로 없어서….’ 남녀공용 의상은 귀여운 것이 많아서 늘씬한 사슴에겐 안 어울릴 것 같았다. 매의 눈으로 사슴을 스캔한 세영은 역시 제복이나 클래식한 정장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의 음흉한 시선에 눈을 깜빡인 사슴이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어, 사슴 씨에게 뭐가 어울릴지 생각해봤어요. 별건 아니고 액세서리 같은 거라도 한 쌍으로 맞출까 싶은데, 역시 반지가 좋을까요?” 슬그머니 화제를 돌린 세영은 ‘좋아, 자연스러웠어.’ 하고 자화자찬했다.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 사슴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이곳에서의 반지는, 결혼을 약속한다는 의미입니다.” “어, 그렇군요. 그럼 안 되겠네요.” 세영이 어색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그러자 왠지 풀이 죽은 사슴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세영은 그의 손등을 토닥거리며 물었다. “그거 말고 뭐 갖고 싶은 거 없어요?” 그러자 씁쓸하게 웃은 사슴이 그녀의 손을 꽉 붙잡았다. “목걸이가 좋겠습니다.” “목걸이요?” “예, 세영님의 이름이 새겨진 목걸이를 갖고 싶습니다.” 세영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그거 꼭 개목걸이 같은데….’ 하고 생각한 그녀는 그냥 그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에 걸고 다니던 노예 목걸이까지 떠올라서 더 심란한 기분이 되었다. ‘아니, 뭐. 개인의 취향이니까.’ 어쨌든 본인이 갖고 싶다니까 말릴 생각은 없었다. 어떤 디자인이 좋을까 궁리하던 세영이 별생각 없이 말했다. “그럼 저도 사슴 씨 이름이 새겨진 목걸이를 걸어야겠네요.” 제자리에 우뚝 멈춰선 사슴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뜻밖의 반응에 갸웃한 세영이 “한 쌍이라고 했잖아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사슴의 얼굴이 확 빨개졌다. 세영은 그가 부끄러워하는 포인트를 잡지 못해 어리둥절해했다. 수줍어하는 사슴을 희롱하다 보니 어느새 마탑에 도착해 있었다. 가늘고 길어서 좁아 보이는 외관이었는데, 안으로 들어가자 거짓말처럼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대기 중인 사람들로 안이 북적거렸다. “물건을 사러 오신 분들은 2층으로, 팔러 오신 분들은 이쪽에 줄을 서세요.” 입구 쪽 데스크에 앉아있는 안내인이 성의 없이 말했다. 딱 봐도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세영은 대충 줄의 끝으로 보이는 곳에 가서 섰다. 용병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그녀를 힐끗힐끗 쳐다봤다. 남자들로 가득한 곳에 여자가 줄을 서자 신기한 듯했다. 세영은 쏟아지는 시선을 무시하며 안을 휙 둘러봤다. 이렇게 사람이 많을 줄 알았으면 이것부터 처리하고 놀 걸 그랬다. 뒤늦은 후회를 한 그녀가 사슴을 쳐다봤다. “생각보다 좀 오래 걸릴 것 같네요. 사슴 씨 먼저 여관으로 돌아갈래요?” “함께 있고 싶습니다.” 용병들을 경계하던 사슴이 고개를 저었다. 세영은 미안한 마음에 괜히 그의 팔을 쓱쓱 쓰다듬었다. 수줍게 웃은 사슴이 그녀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계속 힐끔거리는 용병들이 불편한 눈치였다. 그는 조금 굳은 얼굴로 물었다. “이전에는 마탑에 온 적이 없으셨습니까?” “음, 별로 거래할 물건이 없었거든요. 인벤 차지하는 게 귀찮아서 웬만한 것은 다 버렸고.” 세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사실 이번에 팔러온 것들도 그리 대단한 아이템은 아니었다. 하지만 동료들이 사냥해서 얻은 것들이기에 돈으로 바꿔서 성취감을 주고 싶었다. 남이 주는 것과 자신이 직접 사냥해서 얻는 돈은 느낌이 다르니까. “그렇다고 동료들을 보내자니, 왠지 떼어먹힐 것 같아서요. 여기도 가격 후려치기가 꽤 심하다고 들었거든요.” “다음에는… 디안이나 리먼을 대신 보내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사슴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당황한 세영이 빤히 쳐다보자 얼굴을 붉힌 그가 덧붙였다. “꼭 오셔야 한다면 저와 동행해 주십시오. 혼자 오시거나 마리엔 씨와 단둘이 오시면 절대 안 됩니다.” “아니, 뭐 굳이 그럴 필요 있나요.” 세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여기 있는 남자들이 다 달려들어도 한주먹으로 처리해 버릴 자신이 있었다.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손을 사슴이 더욱 꼭 붙들었다. “세영님을 쳐다보는 게 싫습니다.” “…어, 그냥 신기해서 쳐다보는 것 같은데요.” “그래도 싫습니다.” 단호한 얼굴이 바늘 끝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알겠다고 말하자 그제야 스르르 표정이 풀렸다. 세영은 사슴이 영역동물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다음 접수하실 분, 빨리 오시죠.” 탕탕하는 소리에 돌아보자 접수를 받는 사람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영이 다가가자 그는 질이 나빠 보이는 종이를 여러 장 겹쳐서 내밀며 물었다. “읽을 줄 아십니까?” “네.” 세영이 고개를 끄떡이자 그는 몹시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문맹인 사람에게 내용을 일일이 설명한다고 꽤 힘들었던 모양이다. 서필용 목탄을 내민 그가 한쪽 옆에 있는 책상을 가리켰다. “저기로 가셔서 읽어보시고요. 거래하실 물건이 목록이 있으시면 칸에 체크해주시고 기타 물건은 제일 뒷장에 작성하시면 됩니다. 옆에 수량 표시 꼭 해주세요. 다 작성하시면 여기로 와서 접수하시고요.” 다시 고개를 끄떡인 세영이 종이를 들고 책상으로 갔다. 목록에는 슬라임의 결정, 고블린의 가죽, 자이언트스넬의 점액 같은 비교적 흔한 아이템이 적혀있었다. 목록을 휙휙 넘겨본 세영은 체크할 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제일 뒷장을 펼쳐 판매할 것들을 쓰기 시작했다. 인벤을 확인하며 수량까지 체크한 그녀가 다시 접수대로 갔다. 무심한 얼굴로 그걸 받아든 접수원은 적힌 것들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 적힌 것들 전부 진짜입니까?” 세영이 적은 것 중에 바이콘의 뿔이나 가룸의 이빨, 만티코어의 독주머니는 희귀하다 못해 구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아이템이었다. 운 좋게 몬스터를 잡아도 저주나 독, 그 밖의 이유로 채취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실물을 보여 달라는 말에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인벤에서 아이템 하나를 꺼내 접수대에 내려놓았다. 그것이 진짜 바이콘의 뿔이라는 것을 알아본 접수원은 흠칫해서 뒤로 물러났다. 스치기만 해도 저주에 걸린다는 뿔을 겁먹은 눈으로 보던 그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 저기. 이럴 것이 아니라 귀빈실로 가시지요. 물건을 감정하고 바로 돈을 드리겠습니다.” “그러죠, 뭐.” 뿔을 도로 인벤에 집어넣은 세영이 귀빈실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왠지 허둥거리던 접수원이 자리까지 비우고 그녀를 안내했다. 그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던 세영이 피식 웃었다. “음, 물건 팔다가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요.” 고작해야 레어 등급인 템으로 이렇게 호들갑스러운 반응이라 민망하기도 했다. 왠지 아리송한 얼굴로 계단을 오르던 사슴이 웃었다. “저는 뭔가를 팔아본 일이 처음이라….” “아, 참. 그렇겠네요.” 몸을 잃고 대부분의 시간을 검 속에서 잠들어 있었지만, 그 전에는 신전에서 아주 곱게 자란 사슴이었다. 태생부터가 다르니 속어는 못 알아들을 만도 했다. 너무 환경 차가 나는 게 아닌지 고민하던 세영은 이내 결혼할 것도 아닌데 뭐 어떠냐고 넘겨버렸다. 접수원이 안내한 귀빈실은 제법 으리으리하게 꾸며져 있었다. 귀족을 상대하는 것에 사용되다 보니 그쪽 취향으로 맞춘 모양이었다. 푹신한 소파를 권한 접수원이 굽실거리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바로 담당자가 와서 설명해드릴 겁니다. 차를 내어올까요?” “아뇨, 괜찮아요. 바쁘실 텐데 그만 가서 일보세요.” 별말 한 것도 아닌데 황송하다는 듯이 굽실거린 접수원이 귀빈실을 나섰다. 사슴과 단둘이 귀빈실에 남게 된 세영은 괜히 팔걸이를 톡톡톡 두드렸다. 왠지 조용한 곳에 단둘이 있게 되자 어색한 것을 넘어서 안절부절못하는 기분이 되었던 것이다. 정서불안을 일으키는 그녀를 고요히 응시하는 사슴 때문에 더 그랬다. “아, 음, 맞다. 보여주고 싶은 게 있었는데….” 간신히 화제를 떠올린 세영이 인벤에서 <용의 알>을 꺼내 내밀었다. 조금 놀란 표정으로 알을 받아든 사슴이 신기한 듯 말했다. “이건, 용의 알이군요. 이렇게 작은 알은 처음 봅니다.” 알을 살짝 흔들어본 사슴이 웃으며 그것을 돌려주었다. “지금은 잠들어 있습니다. 아직 깨어날 생각이 없는 것 같군요.” 화석이 될 정도로 잤으면 충분한 것 같은데 꽤 게으른 녀석이었다. 알을 받아든 세영이 상세정보를 확인하자 끝의 한 줄이 바뀌어 있었다. [용의 알] 도구속성 -요리 재료 -용이 낳은 알이다. 왠지 요리하면 맛있을 것 같다. -동면 상태. 부화하려면 특별한 조건이 필요한 듯하다. 특별한 조건이라는 말에 한숨을 쉰 세영이 물었다. “불을 뗀다든가 해서 따뜻하게 해줘야 할까요. 이쪽 용들은 어떻게 부화하는지 모르겠네요.” 아르카디아의 용알은 유저들이 데웠다 식히기를 반복하며 온도를 맞춰줘야 했다. 고개를 저은 사슴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동족이 있다면 도움이 되지만, 꼭 필요한 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태어나고 싶어지면 안쪽에서 신호를 보낼 겁니다. 부화 시기가 오면 껍질이 가죽처럼 얇고 거칠어져서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직접 본 적이 있나 봐요?” “예, 한 번이지만.” 과연 용 전문가라고 감탄하자 사슴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추억을 회상하는 사람이 그렇듯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아주 어렸을 때 아기는 어떻게 생기고 태어나는지 어머니께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어릴 때 다들 한 번씩 해보는 질문이지만, 그가 물은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용이었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은 세영이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 하고 물었다. “직접 보라고 하시며 알이 부화하는 곳에 데려가 주시더군요. 막 깨어난 용을 보고 인간들도 이렇게 태어나는 거냐고 놀라자 그건 아니라고 웃으셨습니다.” “…음.” ‘뭐지, 놀린 건가?’ 하고 생각하는데 사슴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저를 보고 웃으신 게 처음이라, 무척 기뻤던 기억이 납니다.” 기쁜 것처럼 말하는데도 왠지 쓸쓸한 목소리에 가슴이 콕콕 쑤셔오는 것 같았다. 세영은 사슴의 손을 잡으며 위로하듯 말했다. “그분은 사슴 씨를 무척 사랑하셨을 거예요.” 표현방식이 좀 달랐을 뿐이지, 아들의 부탁에 심장까지 뽑아줄 정도로 극성인 엄마였다. 세영의 손을 꼭 맞잡은 사슴이 웃었다. 어딘지 모르게 아련한 미소였다. 흠흠 헛기침을 한 세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떻게 태어나는지도 물어봤어요?” 왜 이런 게 궁금하냐고 물으면 무척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세영은 에레슈키갈이 양아들의 성교육만큼은 확실히 해줬기를 빌었다. 300년 연상의 남자친구에게 성교육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간절한 그녀의 바람이 통했는지 사슴이 망설이며 말했다. “…예. 굉장히 직접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보여줘요?” 세영의 되물음에 머뭇거리던 그가 신전에는 노예가 있었다고 말했다. 용은 사슴의 성교육을 위해서 남녀노예들을 불러 시청각 자료를 제공한 모양이었다. 무척 순화된 표현 속에서 사실을 추측한 세영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어, 놀랐겠네요.” “충격도 충격이었지만. 다음부터는 궁금한 것이 있어도 책에서 알아보자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사슴이 먼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 한마디에서 용의 양자로 살아가는 것의 고충을 느낀 세영이 말없이 그의 팔을 토닥였다. 그때였다. “아이고, 고객님! 오래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활짝 문이 열리더니 또각 또각 발굽소리와 함께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 교역도시 하란 (4) “마탑의 매입 담당을 맡고 있는 폴~로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세영은 꾸벅 배꼽 인사를 하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싱글거리는 인상 때문인지 높게 빗어 올린 머리 때문인지 왠지 날티가 느껴지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남자의 하체였다. 딱 달라붙는 예복을 입은 상체와 달리 하체는 네 발이 달린 짐승의 것이었다. ‘말이잖아?’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남자가 또각또각 발굽 소리를 내며 한 바퀴를 돌아 보였다. 밤색의 털로 뒤덮인 말의 하체에는 보기 좋은 윤기가 흘렀다. “우리 고객님, 켄타우로스 처음 보시는구나. 꼬리 만져보실래요?” 세영의 쪽으로 엉덩이를 내민 말남이 살랑살랑 꼬리를 움직였다. 실룩거리는 엉덩이를 빤히 쳐다보던 세영이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손목을 덥석 움켜잡은 사슴이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됩니다.” “앗, 죄송합니다! 임자가 있으신 고객님이셨네요. 혹시 마탑에서 발행한 연인들을 위한 카탈로그 보셨나요. 사랑스러운 연인을 위한 다양한 아이템들이 준비되어있답니다. 밤을 위한 상품에는 관심이 없으신가요?” 무어라 덧붙이려던 사슴은 다다닥 쏟아지는 말남의 말에 휩쓸려 입을 다물었다. 미간을 찌푸린 모습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세영은 그를 대신해 조용히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카탈로그. 빨리.” “꺅, 우리 고갱님. 너무 화끈하시다.” 신이 난 말남이 비치된 카탈로그를 가져왔다. 세영은 제법 두꺼운 카탈로그를 팔랑팔랑 넘겨보았다. 왼쪽에는 상품의 그림과 함께 설명이 적혀 있고 오른쪽에는 옷감이나 재료 일부가 붙어있었다. 직접 만져보고 사라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든 세영이 당장 설명을 쏟아낼 것 같은 말남에게 말했다. “고르는 동안 이쪽 물건도 감정해줬으면 좋겠는데요.” “앗, 그럼요. 여기 올려주시면 됩니다.” 테이블 위에 종이처럼 얇은 가죽이 펼쳐졌다. 세영은 부피가 작은 것부터 차례대로 내려놓았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킨 말남이 확대경을 꺼내 쓰고 그것을 살펴봤다. 틀림없는 진품에 흠집 하나 없는 최상급이라는 것을 알아본 그가 감탄을 흘렸다. “엄청난 물건들이군요. 방금 잡은 것처럼 신선하고요. 전부 고객님께서 사냥하신 건가요?” “아뇨, 제 동료들이요.” “동료들이 굉장히 강하신 모양이네요.” “뭐, 그럭저럭?” 이제 Lv50 정도 되었으니 길을 가다가 두들겨 맞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무심히 대답한 세영이 꽉 찬 테이블을 보고 “나머지는 어디에 둘까요?” 하고 물었다. 말남은 급히 바닥에도 가죽을 깔았다. 가죽 3장을 더 메우고 나서야 진열이 끝났다. 세영은 다시 카탈로그를 넘기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생활 전반의 다양한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사슴이 좋아할 것 같은 SM계 목걸이가 있어 보여주려고 했는데, 막 감정을 끝낸 말남이 돌아왔다. “휴, 세상에. 보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나네요.” 말남은 이렇게 희귀한 물건이 모여 있는 것도 처음 본다며 혀를 내둘렀다. 감정서를 받아든 세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예상은 했지만, 상점가보다 훨씬 낮은 가격만 적혀 있었다. “목탄.” 말남의 손에서 목탄을 받아든 세영이 적힌 금액에 줄을 긋고 새로 가격을 써넣었다. 정확히 상점 판매가의 2배였다. 마음 같아선 3배를 적고 싶었지만, 다른 곳에 또 가기가 귀찮았다. “이 가격 아니면 안 팔아요.” 감정서를 받아든 말남이 동공지진을 일으켰다. 그는 줄줄 땀을 흘리며 눈치를 보더니 힘겹게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저희 마탑에서는 고객님의 물건을 모두 사들일 정도의 현금이 없습니다.” “다 합쳐서 5만 골드도 안 되는데요?” “…5만 골드를 보유한 곳은 파디샤 전체에서도 무척 드물 겁니다.” 세영의 경제개념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말남이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파디샤의 유명한 명마도 100골드 선에서 거래되고, 최고급 비단으로 만든 옷도 아무리 비싸 봐야 150골드 정도란다. 난감함에 머리를 긁적인 세영이 말했다. “뭐, 그럼 필요한 것만 사주시죠. 강매는 아니니까.” “하지만 이런 물건을 보고 그냥 지나쳐서야 어떻게 마탑 소속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그냥 넘어가도 마법사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말남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호소했다. 세영이 ‘어쩌라고?’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는 연신 굽실거리며 말했다. “저… 그래서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고객님께 필요한 물건이 있으시면 저희가 원가로 모시겠습니다. 구매 후에 남은 금액을 현금으로 받아 가시는 것은 어떠시겠습니까.” 세영은 잠깐 생각하다 고개를 끄떡였다. 어차피 쇼핑하려고 했으니 느긋하게 봐도 상관은 없었다. “그러죠, 뭐. 그럼 일단 계산서부터 깨끗하게 써주세요. 옷 쪽을 좀 더 봤으면 좋겠는데. 특별한 기능은 없어도 되니까, 방수·방한·방염 기능 있고 움직이기 편한 걸로요.” 마법적인 기능이 들어간 옷이라면 원가라고 해도 많이 남는다. 방수·방한·방염 기능이 있는 것은 더욱 비쌌다. 표정이 확 밝아진 말남이 한층 더 간드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드레스 쪽으로 보여 드릴까요?” “아니, 이쪽.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요.” 세영이 사슴 쪽을 가리켰다. 히죽 웃은 말남이 “당장 대령시키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당황한 사슴이 세영의 팔을 붙잡았다. “저는 옷이 필요 없습니다.” “음, 사슴 씨는 필요 없어도 제가 필요해서요.” “……?” 세영의 대답에 사슴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카탈로그를 한 아름 가져와 세영 앞에 차곡차곡 쌓은 말남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고객님. 우리 고객님 부끄럽게 왜 그러세요. 그거 있잖습니까. 그거. 옷을 선물하는 의미가 있잖아요.” “……?” “엥? 모르시나?” 세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슴을 모른 척하며 카탈로그를 끌어당겼다. 사슴의 옆으로 다가간 말남이 다 들리는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애인에게 옷을 선물하는 건 당연히 벗기려고 하는 거지요!” “…….” 사슴은 세영이 카탈로그를 한 장 더 넘길 때까지 멍하게 눈만 깜빡였다. 뒤늦게 말뜻을 이해했는지 얼굴을 붉히는 그를 보고 말남이 킬킬 웃었다. “자꾸 그렇게 빼다간 우리 고객님이 부끄러워서 도망가시겠어요. 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치수를 재야 옷을 만들죠.” “잠깐…!” 사슴이 올무에 걸린 사슴 같은 눈으로 세영을 쳐다보며 끌려갔다. 그 사이에 카탈로그들을 빠르게 독파한 세영은 이곳의 패션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했다. 그녀는 다시 찬찬히 카탈로그들을 보면서 사슴에게 어울릴 것 같은 옷들을 체크했다. ‘그러고 보니 남자친구 옷 골라주는 게 여자들의 로망이라고 했던가. 그 반대였나?’ 카탈로그를 뒤지다 보니 간편한 디자인의 여성복도 있었다. 세영은 말남의 센스가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대부분 귀엽거나 소녀 같은 디자인이라 마음에 드는 것은 없었지만, 마리엔에게 어울릴 만한 것이 있어서 몇 개 체크했다. 마지막으로 액세서리 카탈로그를 펼친 세영이 괜찮은 디자인의 목걸이를 보고 있을 때였다. 왠지 창백해진 사슴이 비틀거리며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갑자기 파리해진 얼굴에 걱정스러워진 세영이 “무슨 일 있었어요?” 하고 물었다. 당황한 듯 움찔한 사슴이 도리질했다. “괜찮습니다. 잠깐 현기증이 났을 뿐입니다.” “아니, 왜 갑자기 현기증이….” “고객님. 그렇게 도망 가버리시다니요. 아직 반도 못 보셨는데!” 허둥지둥 달려온 말남의 외침에 사슴이 움찔했다. 말남을 휙 돌아본 세영의 눈이 절로 날카로워졌다. 그녀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을 눈치챈 말남이 얼른 굽실거리며 말했다. “아이고, 치수를 재고 시간이 좀 남아서 스페셜한 상품을 좀 보여드렸더니 고객님이 놀라셨나 봅니다.” “…스페셜한 상품?” “흠흠, 그 있잖습니까. 어른들을 위한 특별한 장난감이랄까. VIP 고객님들을 위한 라인이죠.” 세영은 저도 모르게 사슴의 얼굴을 살폈다. 창백해진 사슴이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파르르 떨리는 사슴의 속눈썹을 본 세영이 울컥해서 말남을 쏘아봤다. ‘이 말새끼가 아직 순수한 사슴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갑자기 진도를 너무 나갔잖아!’ 부드득 이를 가는 그녀를 보고 움찔한 말남이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사죄의 뜻으로 이걸 드리겠습니다. 아까 보니 고객님께서 여기에서 눈을 못 떼시더라고요. 왠지 취향이신 것 같아서 가져와 봤는데.” “…….” 세영은 투박한 가죽 목줄을 받아들였다. 겉은 가죽이지만, 속은 부드러운 천이 덧대어진 목걸이였다. 앞쪽에는 앙증맞은 방울이 달려서 움직일 때마다 짤랑짤랑 소리가 났다. 말남이 활기찬 목소리로 설명했다. “청명한 방울 소리로 인기가 높은 제품입니다. 구속의 즐거움을 아는 연인들이 많이 찾는 제품이지요. 초보자께 많이 추천해 드리기도 하고요.” “…….” 세영은 목걸이를 들고 사슴을 돌아봤다. 얼굴이 빨개진 사슴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취향이 있든 없든 별로 상관은 없었다. 어쨌든 사슴이 눈을 떼지 못하고 봤다는 점이 중요했다. 그녀의 눈치를 보던 말남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한 쌍인 쇠줄도 있는데. 절대 녹슬지 않고 꼬이는 일도 없는 멋진 상품이죠. 보여드릴까요?” “…같이 주세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고객님.” 말남이 굽실굽실하며 표시된 카탈로그를 거두어갔다. 다른 필요한 것은 없으시냐는 물음에 침묵하던 세영이 입을 열었다. “마법 주문 제작을 넣고 싶은데요. 특정한 속성을 강화한 무기가 있는데, 무기엔 전혀 손상을 주지 않고 속성을 봉인하고 싶어요. 가능할까요?” 사슴의 검 때문에 넣으려는 주문이었다. 사슴의 검 속에는 칼라드볼그 라는 이름의 검령이 살고 있었다. 하마용 같은 방법으로 속성을 없앴다간 검령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가능한 검을 손상하지 않고 봉인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잠깐 고민하던 말남이 말했다. “음, 예를 들면… 불 속성의 무기에서 불 속성을 봉인하고 싶으시다는 말이죠? 무기의 효율성이 떨어지긴 하겠지만,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불로 만든 무기여도?” “그건 좀… 어렵겠군요. 원하신다면 탑의 마스터들에게 문의해볼까요?”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던 세영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딸랑거리는 목걸이를 인벤에 쑤셔 넣은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 “뭐, 그럼 됐어요.” “아이고, 고객님. 그러지 마시고 무구들도 한번 보시지요. 저희 마탑의 명성을 증명하는 다양한 마법 무구들이 준비되어 있답니다.” 말남의 성화에 두 사람은 마탑이 자랑하는 마법 무구들을 보게 됐다. 거의가 매직 등급이고 가끔 레어 등급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상점표 무기가 그렇듯 성능이 많이 떨어졌다. 상세 정보를 읽으며 무기를 휙휙 넘기던 세영이 그럭저럭 괜찮은 검을 가리켰다. “이거랑 이것, 그리고 저것이 제일 낫네요.” “…고객님, 안목이 정말 대단하시네요. 저것들은 전부 저희 마탑이 자랑하는 장인이 만든 검입니다.” 말남이 한층 더 공손해진 말투로 말했다. 호기심을 느낀 세영이 되물었다. “장인?” “예, 마탑 전속의 장인으로 무려 드워프랍니다.” 자랑스러움이 가득한 말남의 소개에 세영의 눈이 번뜩였다. 그녀는 말남의 팔을 덥석 붙잡으며 물었다. “그 드워프, 혹시 소개해줄 수 있어요?” ──────────────────────────────────── 교역도시 하란 (5) 난감해 하던 말남은 상당한 소개비를 약속받은 후에야 고개를 끄떡였다. 그는 정말 소개만 해주는 거라며 몇 번이나 다짐했다. “워낙 괴팍해서 마탑의 주문도 잘 받지 않는 사람이라 불쾌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덧붙인 말남이 그들을 데려간 곳은, 마탑에서도 멀리 떨어진 낡은 작업장이었다. 비바람만 간신히 피할 수 있을 것 같은 지붕을 유심히 쳐다보던 세영이 “정말 여기 맞아요?” 하고 물었다. 말남이 열심히 손바닥을 비벼대며 말했다. “장인께서 밤낮으로 작업하다 보니 주민들의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거든요. 결국, 이렇게 한적한 곳으로 모실 수밖에 없었답니다.” “흐음.” 별로 믿기지 않는 말이었지만, 고개를 끄떡인 세영이 앞장서라고 손짓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말남이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영감님, 계세요?” 대답 대신 뭔가가 휙 날아왔다. 세영이 재빨리 말남의 머리를 노리는 망치를 낚아챘다. 뒤늦게 위기를 눈치챈 말남이 으헉 소리를 내며 물러섰다. 그는 작업장 안쪽을 향해 빼액 소리를 질렀다. “영감님! 진짜 죽을 뻔했잖아요!” “이 뻔뻔한 놈이 어딜 기어들어 와. 당장 꺼지지 못해?!”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함께 작달막한 드워프가 나타났다. 예상과 달리 왜소하고 깡마른 모습이었다. 근육질의 장인을 상상했던 세영은 비 맞은 생쥐처럼 비루한 그를 보고 침묵했다. 말남이 볼멘소리를 했다. “이번엔 물건 받으러 온 거 아니거든요. 영감님의 손님을 모시고 왔다고요.” “손님? 여기에 내 손님이 어디 있어? 너희 도적놈들과 도적놈들의 친구겠지!” 드워프가 온 얼굴을 대추처럼 물들이며 화를 냈다. 난처한 듯 세영의 눈치를 살핀 말남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영감님, 계약대로 하는 일인데 자꾸 그렇게 도적놈이라고 하시면…….” “이런 시러베자식이! 당장 꺼지지 못해?!” “으헉!” 부지깽이를 들고 쫓아오는 드워프를 본 말남이 재빨리 세영의 뒤에 숨었다. 움찔한 사슴이 세영을 붙잡은 그의 손을 빤히 쳐다보았다. 한숨을 쉰 세영이 말남을 밀어냈다. “소개 끝났으니 이제 그만 가셔도 돼요.” “네? 하지만….” “계속 있고 싶으면 말리진 않겠지만, 별로 좋은 꼴은 못 볼 것 같으니 가라고요.” 잠시 주춤거리던 말남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그럼 주문하신 물건과 대금은….” “여기서 볼일 보고 마탑에 들러서 찾을게요.” “예에, 그럼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말남은 그야말로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더욱 기세가 등등해진 드워프가 부지깽이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너희들도 당장 꺼져. 난 더는 마탑놈들을 위해서 아무것도 안 만들 테니까!”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세영이 한 손을 펼쳐 사람 머리통만 한 불덩이를 만들었다. 더욱 울컥한 드워프가 “그런 것으로 또 위협해 봤자…!” 하고 소리쳤다. 하지만 불덩이가 날아간 곳은 그가 아닌 불이 꺼진 화로 쪽이었다. 이어서 윈드 마법을 써서 노를 사용 가능으로 만든 세영이 그에게 물었다. “안 만드는 거야, 못 만드는 거야?” “…뭐?” “영감, 망치 놓은 지 얼마나 됐어?” 그녀는 주춤거리는 드워프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반사적으로 부지깽이를 휘두르는 그의 손목을 덥석 움켜잡은 세영이 피식 웃었다. “손이 벌벌 떨리는데, 술 많이 마셨나 봐?” “시, 시끄러워! 드워프에게 술은 연료야!” 부르르 떨리는 그의 입술을 빤히 쳐다보던 세영이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녀는 제 손에 들린 망치를 까딱거렸다. “잠깐 이거 좀 빌릴게.” 드워프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세영은 그것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울퉁불퉁한 돌덩이들을 꺼내서 모루 위에 늘어놓았다. [알 수 없는 광물] 도구속성 -하늘에서 떨어진 정체불명의 돌. 특이한 성분이 섞여 있는 것 같다. 제련 스킬로 분리해보자. 메테오를 쓸 때마다 랜덤하게 나오는 운석 조각이었다. 자유여행자 길드를 박살 낼 때부터 모아온 것이 최근 몬스터를 사냥하며 꽤 많이 쌓였다. 세영은 곧바로 제련에 들어갔다. 이내 환한 빛과 함께 돌덩이들이 정련된 괴의 형태로 바뀌었다. [아다만티움] 도구속성 -별의 파편에서 나온 신비한 금속. 어떤 물질보다도 단단하다. 마법적인 불로만 변형할 수 있으며 완성된 뒤에는 무엇으로도 형태를 바꿀 수 없다. -파괴되지 않는 속성 주변의 빛을 모조리 흡수할 것처럼 어둡게 일렁이는 금속을 본 드워프가 움찔했다. 그는 당장 달려들고 싶은 것을 꾹 참는 얼굴로 말했다. “별철이로군. 희귀한 놈이긴 하지만, 이런 걸로 내 마음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하지만 세영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움직였다. 그녀의 망치가 아다만티움 위를 빠르게 내리치기 시작했다. 무슨 짓이냐고 외치려던 드워프는 떨어져 있던 괴들이 하나로 뒤섞이며 검의 형태를 이루는 것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세영은 검의 형태가 어느 정도 잡힌 후에야 뒤로 물러났다. 미완성 상태라 물처럼 일렁거리는 검을 내려다본 그녀가 드워프를 향해 말했다. “영감이 이걸 다듬어서 검으로 만들어줘.” “뭐? 지금 날 놀리는 거냐? 아무리 폐물이 되었다지만, 명예를 아는 드워프가….” “여기서 내가 손을 대면 무조건 실패해.” 세영이 그의 말을 자르듯이 말했다. “난 다른 거 안 섞고 아다만티움 하나로만 검을 만들고 싶거든. 그런데 내가 아는 도면에선 그런 게 없어. 비슷하게 만들어봤자 마지막 공정에서 실패해서 쓰레기가 될 뿐이야. 게임에선 레시피를 따르지 않으면 무조건 실패하니까.” “…….” “어쩔 거야. 도와줄 거야, 아니면 이걸 그냥 쓰레기로 만들 거야?” 드워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세영의 설명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제가 돕지 않으면 눈앞의 별철이 쓰레기가 된다는 것만은 알아들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금속을 내려다보았다. 별철은 최고의 장인이라도 평생 한 번 다룰까 말까 한 귀한 금속이었다. 그것이 눈앞에 있는데 쓰레기가 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검은 물처럼 일렁거리는 별철이 제발 도와달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장인이라면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외침이었다. 이를 간 드워프가 세영의 쏘아보며 외쳤다. “이 간악하고 버르장머리 없는 놈!” “쓰레기로 만들자고?” 세영의 되물음에 입을 꾹 다문 드워프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탑을 위해선 화살촉 하나도 만들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이건 탑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다. “망치 이리 내놔! 기본도 안된 놈이 감히 내 모루에 망치를 올리다니!” 세영의 손에서 망치를 빼앗은 그는 손이 벌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너무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힘없이 망치를 내려놓은 드워프가 말했다. “…씻고 와야겠다. 그때까지 절대 식히지 말고 똑바로 지켜라. 별철은 식어버리면 끝장이야.” “그러지 뭐.”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말했다. 노를 지키는 그녀 대신 드워프를 도우려던 사슴은 “넌 또 뭐야, 꺼져!” 라는 말로 내쳐졌다. 침울해진 사슴은 주변의 쓰레기를 주우며 돌아다녔다. 얼마 뒤 목욕재계를 마치고 머리와 수염까지 깨끗이 정리한 드워프가 돌아왔다. 세영은 그에게 포션 하나를 던졌다. “영감. 이거 마셔.” “뭐냐?” 얼떨결에 병을 받아든 드워프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세영은 여전히 떨리고 있는 그의 손을 힐끗 보며 말했다. “영감이 헛되이 버린 시간을 메꾸는 데 좀 도움이 될 거야.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끄응.” 잠시 주저하던 드워프가 병을 따서 쭉 들이켰다. 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장인의 욕심이 앞선 그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기분 탓인지 병을 비우고 나자 손의 떨림이 멎고 예전의 활력이 그대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성큼성큼 모루 앞으로 걸어간 드워프가 기세 좋게 소리쳤다. “무조건 두드린다고 검이 되는 게 아니야! 어떤 놈에게 배워서 이 모양이냐?” “음, 그냥 책 보고 배웠는데.” “이래서 스승이 없는 것들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드워프가 세영의 손을 낚아채 들여다보았다. 굳은살 하나 없는 손은 장인의 것이라기엔 너무 희고 고왔다. 글렀다며 그녀의 손을 놓아준 드워프가 혀를 찼다. “무기 만들 놈도 아닌데 왜 이러고 있어.” “남자친구한테 검 만들어주려고?” “…이런 염병할.” “사려고 했는데 쓸 만한 게 안 보이더라고.” 세영은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얼굴을 붉힌 것은 주변을 얼쩡거리던 사슴이었다. 자포자기해버린 얼굴로 서 있던 드워프가 그를 힐끗 쳐다봤다. “검을 쓸 놈이 저놈이냐?” “놈은 아니지만 맞아.” 세영의 대답에 한숨을 쉰 드워프가 사슴에게 다가갔다. 멈칫하던 사슴이 “손 내놔봐라.” 하는 말에 얌전히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 박인 굳은살을 유심히 관찰한 드워프가 상의를 벗으라고 말했다. 힐끗 뒤를 돌아본 세영이 물었다. “영감이 왜 내걸 벗겨? 나도 아직 안 벗겨봤는데.” “시끄럽다! 무슨 계집이 부끄러움도 없어!” 기함한 드워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벌겋게 물든 사슴을 끌고 나가서 상체의 근육과 어깨의 폭을 관찰한 후에 돌아왔다. 돌아와서 검을 본 드워프가 고개를 저었다. “이걸로는 안 돼. 폭이 좀 더 넓고 길이가 길어야 한다.” 망치를 집어 든 드워프가 작업을 시작했다. 물처럼 일렁이는 금속이 그가 다루는 대로 유연하게 움직였다. 금방 새로운 재료에 적응한 드워프는 무서울 정도로 집중해서 망치를 놀렸다. 세영은 그에게 방해되지 않게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는 사슴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둘은 손바닥만큼 햇빛이 들어오는 양지에 앉아 속닥속닥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주변을 휙 둘러본 사슴이 세영을 들어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찬 바닥에 그냥 주저앉아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았다. 막연히 기다리기 지겨워진 세영은 이내 사슴을 끌고 배를 채우러 갔다. 두 사람이 군것질을 하고 이런저런 것들을 사서 돌아올 때까지 망치질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결국, 검이 완성된 것은 밤하늘에 별이 총총히 떠오를 때쯤이었다. 사슴의 팔에 기대서 졸던 세영은 망치질 소리가 멎은 것을 깨닫고 벌떡 일어났다. 졸린 눈을 비비며 안으로 들어가자 입을 꾹 다문 드워프가 완성된 검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다가간 세영이 휘파람을 불었다. “영감, 아직 쓸 만하잖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 다듬었다. 미련이 없을 정도로.” 드워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세영은 아직 식지 않은 검신을 집어 들고 마감 작업을 했다. 드워프는 고요한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볼 뿐 말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손잡이를 끼우자 검이 완성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상세정보가 떠올랐다. [골드문트의 명작 : 파괴되지 않는 소생의 검] 무기속성 -드워프 골드문트가 심혈을 기울여 다듬은 검이다. -유니크 양손 무기 -공격 2370~2950 -밸런스 10% 타이틀 속성 -개조 불가 -공격 속도 3% 감소 -마법 효율 10% 증가 -카운터 스킬의 피해 10% 증가 -치명상에서 소유자의 생명을 보호한다. ‘오, 생각보다 엄청 잘 나왔잖아?’ 아다만티움을 쑤셔 넣긴 했지만, 이렇게 잘 뽑힐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감탄하던 세영이 검을 사슴에게 넘겨주었다. “한번 들어볼래요?” 조심스럽게 검을 받아든 사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검을 고쳐 쥐고 이리저리 움직여본 그는 새로운 장난감을 받은 아이처럼 들뜬 얼굴을 했다. “신기할 정도로 딱 맞는 느낌입니다. 다른 검을 쥐었을 때 편하다고 느껴진 적은 없는데.” “그래도 사용하기 전엔 모르니까 나가서 시험해 봐요. 마법도 써보고요.” 세영의 말에 잠깐 망설이던 사슴이 고개를 끄떡였다. 신이 나서 뛰어나가는 그를 본 세영이 피식 웃었다. 저렇게 좋아할 줄 알았다면 진작 하나 만들어줄 걸 싶었다. 그때 흠흠 헛기침을 한 드워프가 말했다. “잘 만든 검이라고 다가 아니야. 너 정도 실력이 되면 사용할 이에게 어떤 검이 맞는지도 생각하면서 만들어야 한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새로운 스킬 : 무기 창작을 습득하였습니다> “응?” 스킬창을 열어보자 <천리안> 스킬 아래 새로운 스킬이 생겨나 있었다. 《무기 창작》 장인의 가르침을 얻어 새로운 무기를 창작할 수 있다. 현재의 등급 : 조언을 통해 새로운 무기를 만든다. 수련치 : 1/? 새로운 스킬을 빤히 쳐다보던 세영은 스킬창 끝을 차지한 《?》의 정체를 어렴풋이 짐작했다. 아무래도 《?》은 그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스킬을 만들어주는 놈인 것 같았다. ‘신기하네. 그럼 비행 스킬 같은 것도 만들 수 있는 건가?’ 원한다고 바로바로 생기는 게 아니라서 어딘가에서 추락하거나 해야 할 것 같지만, 시도해볼 가치가 있었다.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 그녀의 옆에서 드워프가 긴 한숨을 쉬었다. “이것으로 오랜 숙원을 풀었다. 이름을 물려줘도 아깝지 않을 검을 만들었으니 이제….” “영감, 당장 할 일 없지?” 덥석 그의 어깨를 붙잡은 세영이 말했다. 진지한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끊기게 된 드워프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등급 상승의 욕심으로 타오르는 세영에겐 먼 나라 일이었다. “그럼 나랑 무기 만들자. 아주 많이.” “아니, 나는 더 이상은….” “조언이 필요 없어지면 놓아줄게. 그러니까 어서 만들자고. 빨리!” “자, 잠깐만!” 모루로 질질 끌려가는 드워프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의 애달픈 비명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노의 불꽃이 무섭도록 타오르기 시작했다. ──────────────────────────────────── 교역도시 하란 (6) 얼마 뒤 작업장으로 돌아온 사슴은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세영을 말리는 대신 동료들에게 사실을 알리는 쪽을 택했다. 근처의 여관을 잡아놓고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동료들이 사슴의 말을 듣고 허둥지둥 달려왔다. 제일 먼저 어두컴컴한 작업장에 도착한 마리엔이 세영의 모습을 확인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는 무어라 소리치려는 시디발라를 막으며 침착하게 말을 걸었다. “세영님,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엇, 마리엔? 어떻게 알고 왔어요?” 드워프를 쥐어짜던 세영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녀의 손에 붙잡혀 있던 드워프가 필사의 발버둥을 쳤다. 세영은 그의 뒷덜미를 잡고 탈탈 털었다. “아직 멀었다니까. 이제 겨우 양손 검만 뗐잖아. 이제 한손검도 해야 하고, 단검도 해야 하고, 오늘 내로 검은 다 끝내야 한다니까. 시간 없다고. 내일은 창이나 도끼 만들어야 한다고” “그만 좀 해라, 이 악마야!” 얼굴이 시커멓게 물든 드워프가 발악했다. 그때 주변을 둘러보던 디안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검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날카로운 검 날과 뾰족한 끝을 자랑하는 클레이모어였다. “우와, 이거 진짜 대단한 검이군요. 이렇게 긴데도 균형이 딱 맞다니.” “나도! 나도 들어볼래!” 시디발라가 두 팔을 버둥거리며 말했다. 피식 웃은 디안이 “넌 이거 들면 허리 나가.” 라고 말하며 그를 밀어냈다. 뚱해진 시디발라가 세영을 바라봤다. 세영은 그때까지도 도망가려고 애쓰는 드워프를 붙잡고 있었다. 보다 못한 리먼이 중재에 나섰다. “장인께서 많이 지치신 것 같습니다. 그러지 말고 잠깐이라도 쉬게 해주심이 어떻겠습니까.”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는데요. 이제 막 감이 잡혀가는데….” “얼마 안 되긴 뭐가? 난 배도 채우고 잠도 자야 해! 이거 놔랏!” 아쉬워하던 세영은 잠깐만 쉬라는 마리엔의 만류에 드워프를 놔주었다. 간신히 풀려난 드워프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잠깐 사이에 온몸의 기가 몽땅 빨린 얼굴이었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세영이 고개를 끄떡였다. “뭐, 소도 먹여 가면서 부리니까. 뭐 좀 먹고 다시 하자고.” “…안 돼. 못 해! 차라리 날 죽여라!” “돼. 해. 할 수 있어. 영감 자신을 믿어봐.” 세영이 엉금엉금 기어서 도망가는 드워프를 죽 끌어왔다. 버둥거리던 드워프가 서러움에 엉엉 울기 시작했다. 체면조차 내던진 모습에 안쓰러워진 동료들이 그를 위로했다. “너무 그렇게 무서워하지 마. 한 일주일…이면 놔주지 않을까?” “의외로 빨리 끝날 수도 있습니다. 세영님은 요령이 좋으시니까.” “이 시러베놈들! 다 꺼져!”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던 드워프는 어느 순간 해탈의 경지에 올랐다. 이 지옥에서 자신을 꺼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완전히 체념한 그는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아 세영이 차려놓은 음식을 먹었다. 뚱한 얼굴로 족발을 베어 문 드워프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맛있죠? 이거 전부 세영님이 만드신 거예요.” 그의 눈이 동그래진 것을 확인한 마리엔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드워프가 으음 하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시디발라가 커다란 잔에 포도주를 가득 따라서 내밀었다. “이것도 먹어봐. 진짜 맛있어.” 못 이기는 척 잔을 받아든 드워프가 맛을 보더니 흠칫했다. 벌컥벌컥 잔을 비우는 그를 보고 세영이 말했다. “영감, 술 많이 마시지 마. 손 떨리는 거 또 도져.” “포도주 따위가 술이냐! 이건 음료야, 음료!” 시디발라의 손에서 병을 빼앗은 드워프가 소리쳤다. 그는 뺏길 새라 병을 품에 안고 열심히 음식을 주워 먹었다. 슬슬 분위기가 무르익자 눈치를 보던 디안이 입을 열었다. “사실 여관에 돌아가서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상황이 좀 심상치 않습니다. 어쩌면 오늘 밤에 이곳을 떠나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 있어요?” 사슴의 손을 갖고 놀던 세영이 의아하게 물었다. 디안이 뭐라 말하기 전에 시디발라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교황이 널 찾고 있대. 그러니까 다른 곳에서도 널 먼저 찾는다고 난리래. 그런데 가짜들이 너무 많아서 막 헤매고 있는데 여기 있는 거 곧 들킬 거야.” 시디발라 식으로 줄여진 정보는 이해하기 쉬웠지만, 세부적인 상황까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어서 디안이 천천히 말했다. “모리아 2차전에서 대패한 교황이 세영님을 찾으라고 지시를 내린 것 같습니다. 교단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수배령이 내려져 있고요. 덩달아서 칸디아 왕국에서도, 조르디아에서도, 엘리사에서도, 마지막으로 포에니에서도 세영님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답니다.” 어쩐지 보물찾기의 우승 트로피가 된 기분이었다. 뺨을 긁적거린 세영이 물었다. “다른 건 다 들어봤는데 포에니는 어디죠?” “수인족들의 왕국이지.” 그녀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던 드워프였다. 그는 세영의 시선을 받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널 데려온 말 같은 놈들이 모여 있는 왕국 말이다. 아주 예전엔 부족끼리 뭉쳐 살았는데 300년 전인가, 어떤 놈이 왕을 자처하면서 아주 골고루 섞여서 연합을 맺었지.” “거기서 왜 날 찾는데?” 세영의 되물음에 드워프가 멈칫했다. 그것까지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세영의 손을 꼭 잡은 사슴이 대신 말했다. “아마 케이론의 신기를 되찾기 위해서일 겁니다.” “…케이론이라면 마지막 현자의 이름이군요.” 세영이 그게 누구냐고 되묻기 전에 리먼이 적절하게 받아쳐 주었다. 고개를 끄떡인 사슴이 말을 이었다. “300년 전에 케이론은 고향인 폴로에 산을 지키기 위해 봉인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봉인의 대가로 고향을 잃게 되었죠.” “고향을 어떻게 잃어?” 고개를 갸웃한 시디발라가 물었다. 땅이 어디로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잃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쓴웃음을 지은 사슴은 천재지변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화산폭발과 지진, 태풍에 의해서 그의 혈족들은 모두 전멸했습니다. 폴로에 산 역시 해일에 휩쓸려 일부만 남기고 바닷속에 잠겨버렸지요. 지금은 아마 포에니 섬이라고 불릴 겁니다.” 새로 생긴 섬은 인어들의 서식지가 되었다. 케이론은 먼 혈족의 힘을 빌려 고향을 되찾으려고 했지만, 인어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케이론은 혼인동맹을 제안하여 인어들의 여왕과 결혼했고 두 일족의 결합이 포에니 왕국의 시초가 되었다. “괴, 굉장하네. 인어랑 결혼이라니….” 디안이 뭐가 굉장하다는 건지 모를 얼굴로 말했다. 왠지 새침한 표정이 된 마리엔이 물었다. “그런데 왜 포에니가 수인족의 왕국이죠? 인어의 후손이라서?” “아, 케이론은 켄타우로스였습니다. 모친이 바다의 네레이드라 물의 힘이 깃든 창을 사용했지요. 아마 케이론의 신기가 해류를 움직이는 힘 역시 거기서 비롯되었을 겁니다.” 사슴은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덧붙였다. 그제야 납득한 동료들이 고개를 끄떡였다. 물론 납득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시디발라가 조심스럽게 한 손을 들고 물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인어랑 말 사이에선 뭐가 나오는 거야? 해마?” 동료들의 얼굴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갑자기 시선 집중을 당한 사슴이 머뭇거리다가 “저도 케이론의 후손을 직접 보지 못해서….” 하고 얼버무렸다. 그때까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리먼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군요. 마지막 신기는 엘리사에 있지 않았습니까?” “앗, 그러게?” 열심히 해마 예상도를 그리던 시디발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사슴이 씁쓸한 얼굴로 설명했다. “지금 포에니의 왕은 케이론의 후손이 아닙니다. 인어와의 혼혈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것에 반발한 자들이 있었고, 케이론의 후손은 인어들과 함께 세 가지 눈의 섬으로 갔다고 알고 있습니다.” 결국, 반란으로 쫓겨난 후손이 신기와 함께 엘리사에 정착했다는 이야기였다. 세영은 <포에니 개국 역사>를 공부하는 기분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왠지 신기에 대해 알게 될수록 과거에 휘말리는 기분이었다. 살아있는 유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슴을 힐끗 쳐다본 세영이 체념했다. ‘뭐, 내 처지에 이런 불평을 할 때는 아니지.’ 한 손으로 턱을 괸 그녀가 피식 웃었다. 포에니에서 뭘 하든 관심은 없지만, 열심히 설명하는 사슴의 목소리는 꽤 듣기 좋았다. 세영의 시선을 느낀 사슴이 움찔하더니 티 나지 않게 살짝 눈을 피했다. 세영은 그것을 못 본 척 입을 열었다. “그럼 포에니에서도, 엘리사에서도 마지막 신기를 되찾고 싶어 하겠네요. 서로 자기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마도와의 싸움이 끝나도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겠군요.” 리먼이 침중한 얼굴로 결론을 내렸다. 동료들의 분위기가 일시에 가라앉았다. 시디발라가 조금 침울해진 얼굴로 말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다들 힘들어지는 거지? 시장에 가니까 물가가 올랐다고 다들 불평하던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그만큼 많은 세력이 세영님을 찾고 있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의논해야 한다는 거죠.” 디안이 자꾸만 분산되는 화제를 정리하듯 딱 잘랐다. 동료들의 시선이 다시 세영에게 모였다. 마리엔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지금이라도 후와와를 타고 여기서 도망칠까요?” “아니, 처음부터 궁금했는데. 제가 왜 도망쳐야 하는 거예요?” 세영의 물음에 동료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잠깐 머뭇거리던 마리엔이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럼 전쟁에 참여하실 건가요?” “아뇨, 전혀요. 어차피 남의 전쟁이고 제가 끼어들 이유가 없잖아요.” 마도에 약간의 원한이 있긴 하지만, 그건 로토와 본드래곤만 손봐주면 끝날 문제였다. 국방의 의무도 없는 곳에서 굳이 전쟁에 끼어들 의욕 따윈 없었다. 동료들을 대신해서 디안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교황은 세영님을 찾을 때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그 사람이랑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니고, 만약 오면 바쁘다고 말하고 돌려보내야죠.” 자신만만한 세영의 말에 동료들도 ‘응? 그런가? 그런지도?’ 하고 납득하는 표정으로 변했다. 사실 세영이 싫다고 하는데 억지로 전쟁터로 끌고 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군대를 데려온대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디발라가 어딘지 찜찜한 얼굴로 물었다. “정말 그래도 될까?” “전쟁에서 어느 쪽이 이기냐보다 이 세계의 멸망을 막는 게 더 중요하잖아. 전쟁에서 이겨도 세계가 망해버리면 뭐해. 아무 소용도 없는데.” “응, 정말 그러네!” 세영의 확답에 고개를 끄떡인 시디발라가 소시지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동료들을 안심시킨 세영은 이때다 싶어 못을 박았다. “전 당분간 여기 있을 테니까 다들 걱정 말고 돌아가세요. 혹시 누가 물으러 오면 아니라고 딱 잡아떼고요. 혹시 안 떨어지거든 저한테 데려오세요. 제가 알아듣게 잘 이야기할 테니까.” “세영님은 안 돌아가세요?” 마리엔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안 돌아갈 걸 알면서 혹시나 물어본다는 것을 느낀 세영이 피식 웃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넋을 잃고 앉아있는 드워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전 작업 조금만 더 하고 돌아갈게요.” 결국, 의논 끝에 마리엔과 사슴이 작업장에 남기로 했다. 세영이 너무 무리하지 않도록 감시하려는 의도였다. 내심 모두가 돌아가길 원했던 세영은 조금 불만이었지만, 이것도 나름의 양보라는 것을 알기에 잠자코 수긍했다. “영감, 빨리하고 끝내자고. 나도 이제 진짜 시간이 없거든.” 제아무리 세영이라도 마리엔의 눈물과 사슴의 토라짐을 모두 이겨낼 배짱은 없었다. 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작업 계획을 검토하며 드워프를 모루 앞에 세웠다. 그때였다. 주름지고 화상으로 얼룩덜룩해진 드워프의 손이 그녀를 꼭 붙잡았다. “정말로 구원자신가?” ──────────────────────────────────── 교역도시 하란 (7) 드워프는 애절하기까지 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세영이 대답하지 않자 그는 양손으로 그녀의 손을 붙들며 다시 물었다. “우리를 구하러 오신 건가? 응?” “난 누굴 구원한 기억이 없는데.” 세영이 슬쩍 손을 빼내며 말했다. 말없이 그녀를 올려다보던 드워프가 웃었다. 허탈한 것 같기도 하고 환희에 찬 것 같기도 한 이상한 웃음이었다. “정말이군. 정말로 구원자였어.” “영감도 누가 구해주길 바라나?” 세영은 심드렁한 얼굴로 물었다. 천천히 고개를 저은 드워프가 회한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내 고향도 폴로에처럼 멸망했네. 재앙에서 도망친 나와 몇 명만이 겨우 살아남았어.” 그 몇 명도 이제 행방을 알 수 없다고 말한 드워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게 눈물을 훔쳐낸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구원자가 오셨군. 그럼 이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건가. 더는?” “…막으려고 노력은 하고 있어. 확답은 못 해.” 머리를 긁적인 세영이 한숨처럼 말했다. 사실 확답을 못 하는 수준이 아니라 이제부터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다시 눈물이 글썽해진 드워프가 그녀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떡였다. “다행이군. 다행이야. 정말 고맙네.” “난 세상을 구한 것도 아니고, 앞으로 구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고마워?” 세영은 구원자라는 존재만으로 감격하는 드워프가 이상했다. 고향은 이미 멸망해서 그가 득을 볼 일도 없건만, 뭐가 그렇게 고마운지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삐딱하기까지 한 물음에 쓴웃음을 지은 드워프가 말했다. “고향이 멸망할 때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그냥 정신없이 도망쳤을 뿐이지.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때 무엇이라도 해야 했는데 하고 후회가 들더군. 이제 그럴 힘이 있는 사람이 내가 하지 못한 노력까지 해준다는데. 감사해야지. 감사할 수밖에 없지 않아.” “…….” “이 늙은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네. 무기 만드는 법을 알려달라고 하면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알려줄 것이고, 내 뼈를 뽑아달라고 해도 뽑아줄 것이야. 뭐든 말해주게.” 그녀의 손을 다독이는 드워프는 진심이었다. 그의 말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한쪽 무릎을 굽혀 그와 시선을 맞춘 세영이 처음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영감, 나는 개인적인 욕심으로 이걸 가르쳐 달라는 거야. 영감이 날 도와줘 봤자 세상을 구하는 일에는 손톱만큼도 도움이 안 된다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이건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보은이야. 구원자께 가르침을 주게 되다니. 오히려 내가 더 영광일세.” 드워프는 이런 대단한 제자를 둔 이는 일족 중에 자신밖에 없을 거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를 빤히 쳐다보던 세영이 말했다. “영감 자신을 위한 일을 부탁할 생각은 없어? 지금 마탑에 노예계약 되어 있잖아.” 드워프가 구원자냐고 물었을 때, 세영은 그가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으며 도와달라고 부탁할 줄 알았다. 아니면 일족이 어려우니 구해달라고 하든가. 하지만 드워프는 세영의 물음에도 고개를 저었다. “그건 구원자께서 신경 쓸 필요 없는 하찮은 문제라네.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이고.” “말대가리 잡아와서 족쳐볼까. 영감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인지.” 몸을 일으키는 세영을 붙잡은 드워프가 결사적으로 말했다. “폴로스는… 고향을 잃고 떠돌던 내게 일자리를 소개해준 놈이야. 비록 계약으로 날 속이긴 했지만, 죽으려고 했던 나를 붙잡아준 은인이기도 하지. 그에게 해가 되는 것은 싫네.” “노예로 부려 먹으려고 끌고 온 게 은혜인가?” “구원자께는 이런 내가 바보처럼 보일 테지. 하지만 그때 놈이 내밀어 준 손이 내게는 빛이요, 구원이었다네.” 드워프는 진심으로 그녀가 나서는 걸 원하지 않는 듯했다. 일이 커지면 말남에게 피해가 갈 거라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놈도 알고 보면 그렇게 나쁜 놈이 아니라고, 혼자서 딸을 키우는 견실한 놈이라고,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목소리에 세영은 한숨을 쉬었다. “뭐, 됐어. 나도 싫다는 사람 위해서 마탑 때려 부술 정도로 한가하진 않으니까. 검 만드는 법이나 가르쳐줘.” 자기 팔자 자기가 꼬겠다는데 뭐 어쩌겠나 싶었다. 투덜거리는 세영을 보고 싱긋 웃은 드워프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는 심각하기까지 한 얼굴로 말했다. “구원자께서는 검이 뭐라고 생각하나?” “잘 죽이기 위한 도구지.” 퉁명스러운 세영의 대답에 드워프는 과장되게 고개를 끄떡여 보였다. “맞네, 검은 살생을 위한 도구야. 그래서 모두 효율적인 도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네. 하지만 효율적인 것은 결국 마음을 뛰어넘지 못하지.” 세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만드는 법 가르쳐달라고 했더니 웬 개똥철학인가 싶었다.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자 드워프가 말을 이었다. “효율을 따지자면 평균대로 만드는 것이 가장 나아. 나머지는 검을 쥐는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 메꿔야 하지. 하지만 누군가를 위해 검을 만든다면, 그 사람에게 가장 잘 맞는 검을 생각하며 만들어야 하네. 그 사람만을 위한 검이어야 하지.” “결국, 쓸 사람에게 맞게 제작하라는 소리잖아.” 심드렁한 세영의 대꾸에 히죽 웃은 드워프가 손짓했다. “한번 해보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걸세. 그럼 저기 있는 엘프 아가씨를 위한 검을 만들어 보겠나?” 드워프의 손이 한창 분주하게 움직이는 마리엔을 가리켰다. 그녀는 밤늦은 시간에도 자지 않고 모닥불을 피워놓은 채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아마도 세영에게 먹일 야참인 것 같았다. 머리를 긁적인 세영이 말했다. “마리엔은 검을 안 쓰는데.” “필요할 때가 있을지도 모르지.” 드워프의 말에 고개를 끄떡인 세영이 망치를 쥐었다. 잠깐 고민하던 그녀는 시디발라가 주로 쓰는 가벼운 단검을 만들었다. 이 정도라면 힘이 약한 마리엔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완성작을 받아든 드워프가 평가했다. “좋은 단검이군. 균형도 잘 잡혀있고 날카로워서 상대를 공격하기도 쉽겠지. 그럼 이걸 엘프 아가씨는 언제, 어떻게 사용하겠나?” “…글쎄, 마법을 사용할 수 없을 때?”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위기일 것이다. 하지만 마리엔은 검에 그렇게 능숙한 쪽이 아니었다. 단검을 들고 어설프게 저항하다가 오히려 빼앗겨서 더 위험해질 것 같았다. 미간을 찌푸린 세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아닌 것 같다. 다시 만들어볼게.” 두 번째로 세영이 만든 것은 장신구 같은 은장도였다. 하지만 막상 만들고 나니 이것도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단검보다야 잘 쓸 수 있겠지만, 상대를 끝장낼 위력이 부족했다. 만약 마리엔이 마법을 쓸 수 없는 상태라면 대놓고 적을 위협하는 것보다 한 방을 노리는 것이 나았다. 결국, 완성작은 길이가 짧고 송곳처럼 뾰족한 단검인 스틸레토가 되었다. 빈틈을 노려 상대를 깊게 찌른 후 도망가는 것에 적합했다. 급소를 노린다면 한 방에 죽일 수도 있었다. “생각보다 어렵네.” “완성했나?” “음, 아니. 잠깐만.” 세영은 비슷한 모양의 스틸레토를 하나 더 만들었다. 처음 것보다 자루가 더 길고 화려하게 장식된 단검이었다. 마지막으로 초록색 보석을 박아 마무리한 세영이 웃었다. “좋아, 이 정도라면 마리엔과 잘 어울리겠지.” 말없이 그녀를 지켜보던 드워프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는 세영의 팔을 토닥이며 “그럼 가서 전해주게.” 하고 말했다. 세영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지금?” “딱히 못 줄 이유도 없지 않나?” “아니, 뭐.” 왠지 민망해져 입을 다문 세영이 세공한 검집에 단검을 넣었다. 마리엔을 위해 만들긴 했지만, 그래도 본인에게 전해준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이상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마리엔에게 다가갔다. 드워프가 씩 웃으며 그녀를 지켜보았다. “앗, 세영님. 필요한 게 있으세요?” 쪼그려 앉아 부글부글 끓는 냄비를 들여다보던 마리엔이 벌떡 일어났다. 뒷머리를 벅벅 긁적인 세영이 말했다. “어, 아뇨. 필요한 건 없는데. 그, 뭐랄까.” “……?” “음, 마리엔 생각나서 만들었는데. 가질래요?” 불쑥 단검을 내밀자 마리엔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세영의 손에 들린 단검을 보며 물었다. “제, 제 거예요?” “마리엔 주려고 만든 거예요. 근데 마음에 들진 잘 모르겠네요.” 떠넘기듯 단검을 쥐여준 세영이 이마를 문질렀다. ‘널 위해 특별히 만들었어!’ 따위의 말을 하려니 민망해졌다. “그, 쓸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만일에 대비해서 하나 갖고 있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해서…. 마리엔이 쓰기 쉽게 만들어봤어요.” 횡설수설하는 세영을 멍하게 쳐다보던 마리엔이 단검을 반쯤 뽑아냈다. 얇고 가늘어서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단검은 무엇이라도 끊어낼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자신을 걱정하는 세영의 마음이 느껴져서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정말, 정말 기뻐요.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더 기뻐하는 마리엔의 모습에 세영은 더 민망해졌다. 그녀는 “아직 연습 중이라 좀 부족한데. 나중에 더 좋은 걸로 만들어줄게요.” 라고 말했다. 마리엔은 웃으며 검집 위를 쓰다듬었다. “전 이걸로 충분해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어, 음… 전 그럼 들어가 볼게요.” 세영은 얼른 드워프에게로 도망쳤다. 히죽히죽 웃고 있던 드워프가 그녀의 팔을 툭툭 쳤다. 그는 민망함에 벌게진 이마를 쓱쓱 문지르는 세영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래, 그게 바로 마음을 담는다는 걸세.” “아니, 이 영감탱이가?” 세영이 눈을 부라리는 순간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무기 창작 스킬의 승급 조건을 달성하였습니다. 승급 하시겠습니까?> “응.” 서둘러 동의하자 손끝에서 흐릿한 빛이 감돌다가 사라졌다. 세영은 스킬창을 열어 승급된 스킬을 확인했다. 《맞춤 무기 제작》 주변에서 영감을 얻어 새로운 무기를 제작할 수 있다. 현재의 등급 : 상대에게 맞는 새로운 무기를 만든다. 수련치 : 1/? 마리엔을 위한 단검을 하나 완성했을 뿐인데 단번에 등급이 올랐다. 세영은 무작정 많이 만드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깨달았다. 망치를 집어 든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영감, 앞으로 딱 다섯 개만 더 완성하자고. 그때까지만 도와줘.” 조언이 필요 없는 등급이 되었지만, 이렇게 좋은 치트키를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생각을 알지 못하는 드워프는 선선히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게 지옥의 대장간이 열렸다. 세영은 그때부터 나흘 동안 작업장에 틀어박혀 무기를 만들었다. 딱 한 번 마탑에 들러 정산을 마친 것 외에는 밖에도 나가지 않았다. 잠을 잘 시간에도 망치를 두들겨대는 통에 참지 못하고 도망 나온 드워프가 혀를 내둘렀다. “살다 살다 저런 지독한 놈은 또 처음일세.” 제아무리 무기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드워프라도, 저렇게까지 무식하게 작업하진 않았다. 무엇보다 세영은 자신이 만들어낸 무기에도 별 애착이 없었다. 잘 만들어지면 잘 만들어지는 대로, 못 만들어지면 못 만들어지는 대로 앞에 던져놓고 다음 작업을 했다. 꼭 무기 찍어내는 기계 같았다. 동료들은 번갈아가며 보초를 섰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할 일이 없으면 작업장 앞에서 얼쩡거렸다. 가끔 정체를 의심하고 달라붙는 사람도 있었지만, 알아서 해결하고 세영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했다. 작업에 열중하는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한번은 하마용이 찾아와 소란을 피웠으나 시디발라의 선에서 정리됐다. 《무기 창조》 자연의 기를 받아 새로운 무기를 창조할 수 있다. 현재의 등급 : 원하는 속성의 새로운 무기를 만든다. 수련치 : 1/? 그리고 나흘 만에 세영은 새로운 등급으로 돌입했다. 등급을 하나 더 올린 것에 만족하고 망치를 내려놓은 그녀는 완전히 곯아떨어진 드워프를 깨웠다. 드워프가 떨어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드디어 끝난 건가?” 고개를 끄떡인 세영이 들고 있던 것을 보여주었다. 손잡이부터 시작해서 검신까지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된 검이었다. 검신에는 황금빛 드래곤이 비늘 하나하나까지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검 날까지 황금빛으로 반짝여서 빛을 비추면 눈이 멀 것 같은 검이었다. 드워프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뭐냐, 그 정신 사나운 검은?” “돈지랄 검. 도와준 답례야.” 세영은 가볍게 검을 던졌다.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 안은 드워프는 검에 전혀 날이 서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모양만 그럴싸할 뿐 공격력은 전혀 없는 가검이었다. 세영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환상 마법과 빛 마법을 인챈트 해둬서 값이 꽤 될 거야. 그걸 마탑으로 들고 가서 빚을 갚아. 영감 몸값이니까.” 드워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가 마탑과 한 계약은 만든 물건을 가져가는 대신 물건값의 일정 금액을 지급받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물건에 사용할 재료는 무조건 마탑에서 사야 했다. 마탑은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재료를 팔았고, 이런저런 명목으로 빚을 지웠다. 물건을 만들수록 빚이 늘어나는 사기계약이었다. 하지만 이런 검이 있다면 그동안의 빚을 갚고도 남았다. “나는….” 검을 든 드워프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처졌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힘겹게 고백했다. “나는 여길 벗어나도 갈 곳이 없네.” 벗어날 기회가 있음에도 그러지 못했던 것은 외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마탑에게 착취당하고 분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체념하는 마음이 있었다. 체념은 지금은 그래도 먹고 살 수는 있지 않으냐고, 저항하면 모든 것이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고 끈질기게 그를 설득했다. 오랫동안 그것과 함께 살아온 드워프는 어느새 그에 길들어 변화를 무서워하게 되었다. 물론 상대는 그런 사정을 알아줄 정도로 섬세하지 못했다. “한 시간 내로 빚 정리하고 내가 있는 여관으로 와. 영감을 알차게 부려 먹을 곳에 떨궈줄 테니까. 만약 한 시간이 지나도 영감이 오지 않으면, 마탑 통째로 뭉개버릴 테니까 알아서 행동하라고 전해. 못 알아들으면 걔들한테 내가 누군지 말해도 돼.” 주변을 정리하고 일어선 세영이 “한 시간 이내에 와.” 하고 경고하고 작업장을 떠났다. 넋을 잃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드워프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세영은 작업장 앞에서 얼쩡거리던 마리엔과 함께 여관으로 향했다. 사실 그녀가 여관이 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망이 정말 좋다고 재잘거리던 마리엔이 특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세영의 눈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킬킬거리며 도망치는 시디발라와 정신없이 그를 뒤쫓는 사슴이었다. “전망이 좋긴 한데.” 세영이 턱을 긁적였다. 그때 그녀를 발견한 시디발라가 신이 나서 달려왔다. “이것 봐! 이것 봐!” “시디발라, 제발 돌려주십시오!” 얼굴이 붉어진 사슴이 필사적으로 그를 말렸다. 하지만 시디발라는 세영과 마리엔의 눈앞에서 손에 든 것을 펼쳐 보였다. 악! 하고 비명을 지르는 표정이 된 사슴이 제 얼굴을 가렸다. “응?” 세영은 시디발라의 손에 들린 옷을 알아보았다. 마탑에 가서 사슴의 옷을 고를 때 마리엔에게 어울릴 것 같은 원피스도 몇 벌 주문했었다. 시디발라가 들고 있는 것은 그중 하나였다. 전체적으로 소녀풍에 가슴에는 귀여운 프릴이 달려 있었고, 녹색으로 강조를 넣어 깔끔하면서도 예쁜 디자인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사이즈가 매우 컸다. 길이도 무척 길어서 마리엔이 입으면 바닥에 질질 끌릴 것 같았다. 사슴 정도로 키가 큰 사람이 입어야 맞는 옷이었다. “…아.” 세영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알아챘다. 여성복을 따로 주문했는데 사이즈를 묻지 않을 때 이상하게 여겼어야 했다. 말남이 준 카탈로그는 애초에 여성복이 아니었던 것이다. 수치심에 죽어버릴 것 같은 사슴을 본 그녀는 무슨 변명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 교역도시 하란 (8) “그거 내가 주문한 건데.” 툭 던진 말에 사슴을 놀리던 시디발라가 우뚝 굳어졌다. 댕그랗게 뜬 눈을 보고 뺨을 긁적인 세영이 말을 이었다. “잘 어울릴 것 같아서.” “헉!” 경기하듯 놀란 시디발라가 들고 있던 원피스를 툭 떨어뜨렸다. 재빨리 그것을 주워 세영의 손에 넘긴 마리엔이 새빨개진 얼굴로 화를 냈다. “시디발라, 그런 걸로 남을 괴롭히면 어떡해. 취향을 존중해야지!” “…어, 나는 그냥 별생각 없이….” “생각 없이 남을 놀리지 마!” “미, 미안해. 잘못했어.” 당황한 시디발라가 쩔쩔매며 사슴에게 사과했다. 그만큼 당황한 사슴이 괜찮다고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세영의 손에 들린 원피스를 보는 눈이 어쩐지 착잡했다. 세영은 그것을 모른 척하며 마리엔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갔어요?” “앗, 그러게요?” 마리엔이 그제야 깨달았다는 것처럼 말했다. 하긴 아침부터 세영의 옆에 붙어있었던 그녀가 동료들의 행방을 알 리가 없었다. 마리엔 대신 시디발라가 답을 주었다. “디안은 시장이라는 사람이 불러서 나갔고 리먼은 신전 쪽에 볼일이 있대.” “시장?” “응, 매일매일 찾아와서 귀찮게 해. 처음은 억지로 끌고 가려다가 안 된다는 거 알고는 막 불쌍한 척하잖아.” 숙소를 옮겨라 방을 바꿔라 온갖 간섭을 다 한다며 투덜거리던 시디발라가 문득 생각한 것처럼 말했다. “앗, 그리고 나 무지 세졌어! 이제 여럿이랑 싸워도 안 져!” “누가 공격했어?” “응. 좀 귀찮게 구는 애들이 있었는데, 내가 다 혼내줬어.” 세영의 물음에 히히 웃은 그는 주먹만 휘둘러도 다들 나가떨어지더라고 자랑했다. 50레벨이 넘는 그가 쳤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왠지 흐뭇해진 세영은 시디발라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어쨌든 두들겨 맞고 다니는 것보다야 패고 다니는 게 더 나았다. ‘레벨이 올라도 여전히 초보처럼 순진해서 걱정했더니, 알아서 잘하고 있었구나.’ 솔직히 말해서 하루 이틀만 지나면 구원자를 외치는 인간들이 작업장 앞에 바글거릴 줄 알았다. 하지만 동료들은 무려 나흘이나 외부의 압박을 막아냈다. 기대하지 않았던 성과였다. “다들 대단하네.” “정말?” 솔직한 감탄에 시디발라가 부끄러운 듯 몸을 꼬았다. 세영은 다시 한 번 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고 물었다. “그 둘은 언제쯤 돌아올 것 같아?” “으음, 잘 모르겠어. 그래도 어두워지기 전엔 돌아올 거야.” “그래?” 오늘 이곳을 뜨려고 했던 세영은 머리를 긁적였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떡인 그녀는 둘이 올 때까지 방에서 쉬고 있겠다고 말했다. 마리엔이 재빨리 그녀의 방을 알려주었다. “저….” 그때까지 말없이 있던 사슴이 세영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는 뭔가 필사적인 얼굴로 말했다. “옷… 선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뭐, 제가 좋아서 주문한 건데요.” 세영이 머쓱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어색한 공기를 느낀 마리엔이 “저희는 들어가 볼게요. 천천히 이야기 나누세요.” 하고 시디발라를 끌고 갔다. 시디발라는 계속 남아있고 싶은 눈치였지만, 근엄한 마리엔의 기세에 짓눌려 반항하지 못했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사슴이 손을 내밀어 세영의 뺨을 어루만졌다. 세게 만지면 부서질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간지러움에 피식 웃은 세영이 고개를 저었다. “포션 먹어가면서 해서 그렇게 피곤하진 않아요. 사슴 씨야말로 얼굴이 많이 창백하네요.” 왠지 창백해진 이유가 제 손에 들린 원피스 때문일 것 같아 미안해졌다. 이걸 본 사슴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굳이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의아한 표정으로 제 얼굴을 쓱쓱 문지른 사슴이 이내 깨달은 듯 쓴웃음을 지었다. “며칠 제대로 잠을 못 자서 그런가 봅니다.” “어, 불면증 도졌어요?” 놀란 세영이 손을 내밀자 사슴이 가만히 뺨을 기대어왔다. 그는 ‘저는 지금 굉장히 무리하고 있습니다.’ 라고 써진 얼굴로 힘겹게 말했다. “세영님이 안 계셔서… 쓸쓸했습니다.” “…헉!” 세영은 ‘어머, 이 사슴 좀 보게!’ 라는 놀라움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말하고 나서도 쑥스러웠는지 고개를 못 드는 사슴을 슬금슬금 끌어당긴 그녀가 물었다. “제가 없어서 쓸쓸했어요?” “…예.” 나흘 동안 방치해둔 보람이 있었는지 몹시 요망해진 사슴이었다. 피곤이 싹 달아난 세영이 히죽히죽 웃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훔쳐본 사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피곤하지 않으시다면, 잠시 후에 제 방으로 와주셨으면 합니다.” “응?” “그… 옷을 선물 받았으니 보여드리고 싶어서….” 두 귀가 빨개진 사슴이 필사적으로 말했다. 그가 있는 용기를 다 짜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세영은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직접 입혀줄게!” 하고 달려들고 싶었지만, 사슴이 겁을 먹을 것 같아서 참았다. 그녀는 애써 점잖게 고개를 끄떡였다. “좋아요. 저도 굉장히 보고 싶네요.” “그럼….” 고개를 살짝 숙인 사슴이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에 그녀를 한번 돌아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것이 묘하게 기대감을 부추겨서 세영은 괜히 닫힌 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아, 맞다. 이거 어떡하지.” 까맣게 잊고 있던 원피스를 내려다본 그녀는 뺨을 긁적였다. 처음엔 마탑으로 뛰어가서 말남의 멱살을 잡을까 했는데, 사슴이 워낙 귀여운 짓을 하는 바람에 그럴 마음이 사라졌다. ‘예쁘다 예쁘다 했더니 갈수록 더 예뻐지는 것 같네.’ 시디발라에게 놀림 받으면서도, 끝내 그녀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던 사슴을 떠올린 세영이 히죽 웃었다. 원피스를 인벤에 쑤셔 넣은 그녀는 너그럽게 말남을 용서하기로 했다. ‘…몇 분 지났지?’ 5분 정도는 지난 것 같은데 안에 들어간 사슴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입을 것이 많아서 그러려니 했던 세영은 10분 정도가 지나가자 초조해졌다. 자신의 애를 태우려는 건가 고민하던 그녀는 콩콩 방문을 두들겼다. “사슴 씨, 아직 멀었어요?” 대답 대신 안에서 쿵 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놀란 세영은 문을 열고 “사슴 씨?” 하고 불렀다. 급히 움직이다 넘어졌는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사슴이 보였다. 문을 연 세영을 보고 급히 일어서려던 사슴이 치맛자락을 밟고 콰당 넘어졌다. “…어?” 세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사슴이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 하지만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얼굴로 천천히 일어섰다. 예상하지 못했던 광경에 넋을 놓고 있던 세영은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달칵 문 잠그는 소리에 움찔한 사슴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고 말했다. “…이런 걸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잠시 할 말을 잃고 있던 세영은 가슴 쪽을 꽉 누르고 있는 사슴의 손을 보고 상황을 눈치 챘다. 여러 가지 원피스 중에서 그나마 프릴이 적고 무난한 디자인을 골라 입으려고 했는데, 하필 등을 단추로 잠그는 식이었던 것 같았다. 애써 웃음을 참은 그녀가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도와줄까요?” 목 끝까지 새빨개진 사슴이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떡였다. 세영은 등을 뒤덮은 그의 긴 머리를 걷어내고 단추를 하나하나 잠가주었다. 키가 워낙 커서인지 단추도 많아서 오래 걸렸다. 마지막 단추를 잠그고 머리를 정리해준 그녀가 웃었다. “제가 좋아할 것 같아서 입은 거예요?” 사슴이 다시 고개를 끄떡였다. 그의 앞으로 돌아온 세영은 꽃처럼 붉게 물든 그의 자태를 감상했다.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자 사슴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는 받기만 하고 아무것도 드릴 게 없어서, 이런 것으로 기뻐해 주신다면….” 연인의 변태 같은 취향이라도 맞춰주고 싶은 애절함이 느껴졌다. 세영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기분으로 고백했다. “음, 사슴 씨. 사실은요. 중간에 오해가 좀 있었어요. 전 그게 남성복인 줄 모르고, 마리엔에게 잘 어울리겠다고 생각해서 주문했거든요.” “…….” 사슴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세영은 그가 도망치지 못하게 두 팔을 꼭 잡으며 말을 이었다. “어, 그래서 원피스 봤을 때는 굉장히 당황했는데. 사슴 씨가 입은 거 보니 예쁘고 좀 좋네요. 저도 제가 이런 취향인 줄 몰랐는데…. 음, 생각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 넋을 놓고 있던 사슴이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세영은 비틀거리는 그를 부축해서 침대에 앉혔다. 몸을 돌려 침대에 얼굴을 파묻은 사슴이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냈다. 세영은 그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아니, 진짜 예뻤는데. 그렇게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잖아요.” 사슴은 아예 이불을 끌어당겨 그 속으로 숨어버렸다. 이불 뭉치가 된 그를 끌어안은 세영이 정말 예쁘다고 달래기 시작했다. 미동도 없이 죽어있던 사슴이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정말 너무하셨습니다.” ──────────────────────────────────── 교역도시 하란 (9) “…정말 너무하셨습니다.” 사슴은 정말 속이 상했는지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항의하는 목소리에도 절절한 원망이 스며있었다. 세영도 이번엔 자신이 좀 많이 나빴다고 인정했다. 사슴이 오해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사실을 밝혔어야 했다. 그런데 좀 더 제대로 보고 싶은 욕망에 그만 단추까지 채워버렸다. ‘사실 엄청나게 화내도 할 말이 없긴 하지.’ 변명하자면 원피스를 입은 모습이 너무 잘 어울렸다. 여자 같은 느낌이 아니라 남자로 보이는데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아주 자연스럽고 그럴듯해서 안 봤으면 땅을 치고 후회했을 듯했다.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느낌이었다. “저는, 정말 진지하게 고민했는데….” 생각할수록 억울한지 다시 침대에 얼굴을 파묻은 사슴이 끙끙 앓았다. 창피하고 괴롭고, 그런데 세영에게 화낼 수가 없어서 더 속이 상한 것 같았다. 이러다 병이라도 날 것 같아 걱정된 세영이 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미안해요. 그 자리에서 말했어야 했는데, 그럼 마리엔도 당황하고 사슴 씨도 민망할 것 같아서 저 혼자 처리하려고 했어요.” “…….” “음, 방에 들어왔을 때 말하지 않은 건요.” 잠깐 망설이던 세영은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직접 보니까 좀 좋더라고요. 저도 제가 이런 취향인 줄 몰랐거든요. 좋은데 어떡해요?” “…….” “뭐, 그런 의미에서 다른 것도 입어볼래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사슴이 다시 앓는 소리를 냈다. 세영은 그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잘못했다고 사과했다가 누가 그렇게 어울릴 줄 알았냐며 뻔뻔하게 굴다가 또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것을 반복했다. 결국, 모든 것을 놓아버린 표정이 된 사슴이 이불 속에서 손을 내밀었다. 그는 세영의 손등을 살짝 어루만지며 말했다. “항상 한심한 모습만 보여드리는 것 같아 속이 상했습니다.” “음, 사슴 씨는 항상 멋진걸요.” 세영의 대꾸에 쓴웃음을 지은 사슴이 “이런 모습이라도 말입니까?” 하고 물었다. 세영은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떡였다. “절 기쁘게 해주려고 입은 거잖아요. 아니에요?” “…….” “전 그런 사슴 씨가 정말 좋거든요.” 이래 보여도 세영은 꽤 감격하고 있었다.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긴 하지만, 저를 위해 체면까지 접어두고 애써주는 것이 참 고마웠다. 사슴의 긴 머리를 희롱하던 그녀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나도 사슴 씨가 좋아하는 거 해주고 싶다.” “…….” “뭐가 좋을까요? 사슴 씨가 고른 목걸이를 걸까요? 아, 아니면 사슴 씨 목에 채워줄까요?” 사슴이 당장 가죽 목걸이를 꺼내려고 하는 세영의 손을 붙잡았다. 잠깐 망설이던 그가 물었다. “뭐든 괜찮습니까?” “지금 기분 같아선 스트립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세영의 농담에 ‘그게 뭐지?’ 라는 얼굴이 되었던 사슴이 표정을 가다듬었다. 어딘지 비장해 보이는 얼굴이 된 그가 말했다. “그럼 저를 가져주십시오.” “…그거 무슨 의미예요?” 하룻사슴이 애인 무서운 줄 모르고 내뱉는 말에 당황한 세영이 되물었다. 아무래도 이 사슴은 제가 지금 침대 위에 누워있다는 자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아니면 이렇게 깜찍한 말을 할 리가. 하지만 사슴은 다시 요망하게 말했다. “당신의 것이 되고 싶습니다.” 세영은 당장 ‘럭키!’ 하고 달려들지 않는 제 인내에 박수를 보냈다. 사실 좋다고 덮치기에는 사슴이 너무 필사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뺨을 긁적인 세영이 물었다. “왜 제 것이 되고 싶어요?” “세영님은 자신의 것을 쉬이 버릴 분은 아니니까요.” 담담하지만, 수많은 감정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를 빤히 내려다보던 세영이 말했다. “그렇게 안 해도 전 사슴 씨 안 버려요. 왜 제가 버릴 거라고 생각해요?” 사슴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라 너무 많아서 다 옮기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세영은 조금 의아하게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제가 사슴 씨를 불안하게 했어요?” 연애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사귈 때 상대가 이런 표정을 짓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은 안다. 고개 숙인 그녀는 사슴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물었다. “저 때문에 많이 힘들어요?” 사슴은 괴로운 얼굴임에도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세영의 팔을 붙잡고 엄지로 팔 안쪽을 어루만졌다. 잠깐 망설이던 사슴이 솔직하게 고백했다. “당신께 잘 보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보다 더 저를 좋아하고, 원해서 제 옆을 떠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걸 해주고 싶었어요?” “…예.” 사슴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세영은 그의 입술에 다시 입 맞췄다. 사슴이 생각하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원피스 입기’와 ‘야한 짓’ 따위라 심란했지만, 딱히 부정하기도 힘들었다. 그녀는 속 편하게 인정하자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럼 제 거 할래요?” 다시 고개를 끄떡이려던 사슴은 이불을 풀어내는 세영의 손에 멈칫했다. 잠깐 이불자락을 붙잡았던 그는 이내 체념한 듯 손을 놓았다. 방해되는 것을 치워버린 세영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사슴을 감상했다. “…음, 야하다.” 농담이 아니라 지금의 사슴은 심장에 무리가 올 정도로 야했다. 구겨진 옷과 헝클어진 머리가 묘하게 어우러져 굉장히 위험해 보였다. 원피스 입은 남자를 야하다고 생각할 줄은 몰랐는데, 뭔가 신세계를 영접한 기분이었다. 얼굴을 붉힌 사슴이 항의했다. “…놀리지 마십시오.” “놀리는 거 아닌데요. 저 지금 엄청 진지한데.” 지긋이 쳐다보자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던 사슴은 결국 눈을 감아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눈을 감다니 무방비해서 귀여웠다. 세영은 원피스에 달린 프릴을 만지작거리는 척하며 그의 가슴을 쓸었다. 움찔해서 눈을 뜬 사슴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세영이 씩 웃으며 속삭였다. “제 거 한다면서요. 이렇게 겁먹으면 제 거 못하는데?” “겁먹지 않았습니다.” 조금 발끈한 사슴이 말했다. “다행이네요.” 하고 말한 세영이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키스하면서 사슴의 목 뒤를 더듬던 그녀는 이내 포기하고 “그럼 등 좀 보여줘요.” 하고 말했다. 뜬금없는 요구에 당황하는 그에게 세영은 “그래야 옷을 벗기죠.” 하고 덧붙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사슴이 몸을 일으켜 등을 보이며 앉았다. 상황 탓인지 머리카락을 한쪽 어깨로 쓸어 넘기는 손길이 묘하게 요염해 보였다. 세영은 제가 채웠던 단추를 천천히 풀었다. 진짜 벗기려고 입힌 것은 아닌데 기분이 오묘했다. 햇빛을 받지 못해 유독 창백한 목덜미를 보니 더 그런 기분이 들었다. 뒷목에 쪽 하고 입술을 떨어뜨리자 사슴이 움찔했다. 다시 단추 하나를 더 푼 그녀가 새로 드러난 곳에도 입을 맞췄다. 다시 움찔한 사슴이 떨리는 목소리로 “…세영님?” 하고 그녀를 불렀다. “쉿, 지금 제 거라고 도장 찍는 중이거든요. 얌전히 있어야죠.” 웃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인 세영이 단추를 풀며 도장을 찍어나갔다. 단단한 등이 연신 움찔거리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등줄기를 따라 입술을 내리자 사슴이 도망치듯 몸을 앞으로 숙였다. 반 이상이 풀린 단추 때문에 원피스가 스르륵 아래로 흘러내렸다. “…우와.” 세영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단련된 어깨와 군살 없이 늘씬한 허리선의 조화가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단단한 등을 쓸어보았다. 스치듯 어루만지던 손이 옆구리로 향하자 움찔해서 몸을 돌린 사슴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세영은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사슴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와 살짝 거칠어진 숨소리에서 아찔함이 느껴졌다. 사람에게 홀린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왠지 목이 타는 것 같아서 마른 침을 삼킨 그녀가 말했다. “앞에도 찍어줄까요?” 환히 드러난 가슴을 향하는 시선에 움찔한 사슴이 슬며시 다가오는 손을 붙잡았다. 결국, 양손이 모두 붙잡힌 세영이 그를 빤히 쳐다봤다. 뿌리치려면 쉽게 뿌리칠 수 있겠지만,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저는….” 무어라 말하려던 사슴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흔들리는 눈으로 세영을 보고 있었다. 머뭇거리듯 다가온 그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겹쳤다. 전처럼 살짝 닿기만 하는 입맞춤이었지만, 뭔가가 달랐다. 전기가 통한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서로의 눈을 훔쳐본 두 사람이 다시 입술을 겹쳤다. 손목을 움켜잡은 손이 풀린 것을 느낀 세영이 사슴을 끌어안으려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밖에서 똑똑 문을 두드렸다. 멈칫한 둘이 그대로 굳어졌다. 잠시 후 다시 똑똑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잠깐 망설이던 사슴이 세영의 뺨을 감싼 손을 내렸다. 세영은 골이 띵해지는 것을 느꼈다. “와…나 ㅆ….” 사슴 때문에 쌍욕은 못 했지만, 문밖에 서 있는 놈을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얼굴을 감싸 쥔 세영이 심호흡을 했다. 민망한 듯 시선을 피한 사슴이 옷을 추스르려다 멈칫했다. 원피스를 다시 입어야 하나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한숨을 쉰 세영이 이불을 끌어 그의 몸에 둘러주었다. “제가 먼저 나가볼 테니까 옷 갈아입고 나와요.”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사슴이 고개를 끄떡였다. 세영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문으로 향했다. 잠긴 문을 손가락만큼 열고 밖을 내다보자 눈을 동그랗게 뜬 시디발라가 보였다. “어? 왜 거기에 있어?” “…무슨 일인데?” 음산한 세영의 목소리를 눈치채지 못한 시디발라가 머리를 긁적였다. “전에 본 할아버지랑 이상한 말이 찾아와서 이상한 소리를 하잖아. 우리랑 어딜 같이 가야 한다는데 쫓아내려니까 계속 매달리고. 마리엔이 절대 너 깨우지 말라고 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카라드에게 물어보려고 했거든.” “…아, 잊고 있었다.” 한 시간을 주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다시 한숨을 쉰 세영이 살짝 열린 문틈으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왔다. 그것을 본 시디발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왜 그러냐고 묻지는 않았다. 문을 굳게 닫아건 세영이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여관 앞에 등짐을 진 드워프와 초조해 보이는 말남이 서 있었다. 빤질빤질한 말남의 면상을 보자 갑자기 짜증이 확 치솟았다. 세영은 다짜고짜 그의 꼬리를 움켜쥐고 근처의 골목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놀라 비명을 지른 말남이 필사적으로 말했다. “고, 고객님. 잠깐 진정하시고 제 설명 좀….” “야 이 시발, 죽고 싶냐! 그게 남자가 입는 원피스면 남자옷이라고 설명을 해야 할 거 아냐! 너 때문에 괜히 변태로 오해받았잖아!” 드워프의 일을 추궁하는 줄 알았던 말남은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물론 지금의 세영은 그저 화풀이할 상대가 필요했기 때문에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니, 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고갱님의 취향을 맞춰드리겠다는 신념으로….” 뒤늦게 변명을 지껄이던 그는 멱살이 잡혀 쥐불놀이를 경험한 후 무조건 빌어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세영은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비는 그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변태로 오해받은 내 마음의 상처는 어떻게 책임질 거야, 어?” 오늘 오지 않았더라면 무사히 넘어갔을 것을 괜히 찾아와서 A/S까지 하는 말남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세영에게 탈탈 털린 그는 결국 마탑에서 제일 잘 나가는 하네스와 패들, 목걸이 3종 세트를 제물로 바친 후에야 용서받을 수 있었다. ──────────────────────────────────── 교역도시 하란 (10) “그래서 뭐 때문에 찾아온 건데? 널 보면 내가 더 빡칠 거라는 예상은 못했냐?” 제물을 받고 다시 침착함을 되찾은 세영이 물었다. 죽다가 살아난 말남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애써 웃어 보였다. “고, 고객님께서 저희 마탑을 오해하신 것 같아서….” “오해? 남을 변태로 만들어놓고 오해라고 말하면 끝인가 보지? 하마로 오해받을 때까지 처맞고 싶어?” 세영이 다시 주먹을 불끈 쥐는 것을 본 말남은 서둘러 두 손을 내저었다. “아, 아, 아뇨. 그게 아니라 골드문트의 계약 말입니다!” “…그게 누군데?” “드워프 영감님요.” “…아. 그 영감 일을 왜 나한테 말해?” 주먹을 내린 세영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예상 밖의 반응에 당황한 말남이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접대 방면으로 노련한 그는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는 최대한 거슬리지 않는 어조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영감님을 놓아주지 않으면 저희 마탑을 박살 내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랬는데?” 드디어 정상적인 반응을 얻은 말남이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그는 즉시 허리를 굽히고 두 손을 싹싹 비비면서 말했다. “아이고, 고객님. 오해십니다. 마탑은 절대 강제적인 계약을 하지 않습니다. 영감님께서 워낙 괴팍하신 분이다 보니 뭔가를 잘못 전달하신 모양입니다. 제가 여기 계약서도 보여 드리려고 이렇게 가져왔는데요.” 부스럭거리며 계약서를 꺼내는 말남을 본 세영이 한숨을 쉬었다. 무슨 용기로 방해를 하나 했더니 예상보다 더 같잖은 일이었다. 그녀는 짜증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야, 넌 내가 부르면 부르는 대로 내려오니까 병신 같지? 그래서 네 혓바닥으로 어떻게든 속여 넘길 수 있을 거 같지?”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네가 아니면 마탑이 날 아주 우습게 본 거겠지. 널 던져주고 이 문제에서 빠지겠다는 것 같은데, 그걸 뻔히 알면서도 꾸역꾸역 기어오는 너란 놈도 참.” 혀를 찬 세영이 “됐으니까 헛발질하지 말고 꺼져.” 하고 손을 내저었다. 시킨 대로 하는 놈을 두들겨 팬다고 떡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이럴 시간에 위에 올라가 사슴이나 주물럭거리는 것이 나았다. “…고객님은 아무것도 모르시잖습니까.” 골목을 빠져나가려는 세영을 억울해하는 목소리가 멈춰 세웠다. 힐끗 돌아보자 일그러진 표정의 말남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인간이 얼마나 배타적인지, 인간이 아닌 제가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떤 일을 감수했는지, 아무것도 모르시잖습니까.” 그를 빤히 쳐다보던 세영이 “그걸 왜 내가 알아주길 바라는데?” 하고 물었다.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은 말남을 보고 피식 웃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아, 알아주길 바라는 게 아니지. 나 존나 힘들었어. 이렇게 힘든 내게 뭐라고 하지 마. 나만큼 힘들지 않은 놈은 날 비난할 자격이 없어.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거잖아?” 세영에게 힘이 없었다면 이런 같잖은 변명조차 하지 않았을 놈이었다. 남의 인생을 짓밟아 놓고 고작 한다는 말이 “제가 좀 힘들어서요.” 라니 웃기지도 않았다. 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솔직히 말할까? 관심 없어. 그리고 넌 어차피 남의 평가가 중요한 것도 아니잖아. 남의 눈이 중요한 놈이 그따위로 살진 않았겠지. 그냥 변명하고 싶은 거지. 나만 나쁜 게 아니라고.” “…….” “그래, 맞아. 너만 나쁜 게 아니야. 세상엔 너처럼 사기 치는 놈도 많고, 자길 신뢰하는 사람의 통수 치는 놈도 많지. 너 정도쯤이야 이 더러운 세상에 티끌만도 못한 수준이겠지.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그따위로 살든가.” 세영은 더는 시간 낭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멍하게 있던 말남이 “고객님!” 하고 다급하게 불렀지만, 돌아보지도 않았다. 여관으로 돌아온 그녀를 등짐을 멘 드워프가 처연하게 맞이했다. 그는 면목없다는 듯 고개를 숙인 채로 말했다. “미안하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자.” 세영은 그의 짐을 받아들고 앞장섰다. 드워프의 주변을 경계하듯 얼쩡거리던 시디발라가 쫄래쫄래 따라왔다. 일행은 다음 날 일찍 하란을 떠나기로 했다. 시장이라는 염소수염이 잠깐 귀찮게 했지만, 디안이 좋은 말로 달래서 돌려보냈다. 기대하지 않았던 유능함에 세영이 감탄할 정도였다. “그런 영업 기술은 어디서 배운 거예요?” “…기술은 아니고, 없는 실력으로 이리저리 끼어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익힌 겁니다.” 쓴웃음을 지은 디안이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세영은 처음 만났을 때 미궁에 있었던 일행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떡였다. 뒤늦게 알았지만, 미궁 정벌 역시 돈만 낸다고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디안이 발로 뛰어가며 동료들의 자리를 만든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것 때문에 죽을 뻔했지만, 나랑 만날 계기를 만들기도 했고.’ 괜히 리더가 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세영이 “그래도 대단하잖아요. 마리엔도 그렇게 생각하죠?” 하고 옆을 돌아봤다. 흘러내리는 천과 씨름하던 마리엔이 “…네?” 하고 되물었다. 뺨을 긁적인 세영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리 줘요. 다시 해줄게요.” 말남 덕에 마리엔의 옷을 맞추지 못한 세영은 웃돈을 주고 연보라색 천을 구입했다. 하란의 특산물인 이 천은 별다른 재봉 없이 몸에 빙빙 두르는 식으로 착용하는 것이었다. 아직 서툰 마리엔 대신 세영이 천이 흐트러질 때마다 다시 고쳐주고 있었다. “불편하면 다른 거 입어도 되는데. 자꾸 흘러내려서 번거롭지 않아요?” “안 불편해요. 그리고 번거로워도 예쁘잖아요.” 귀엽게 얼굴을 붉힌 마리엔이 말했다. “마리엔에게 잘 어울려요.” 하고 칭찬해준 세영이 천에 꽂을 브로치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카라드가 멍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하마용과 장난을 치던 시디발라가 의아하게 물었다. “쟤가 뭐 잘못했어? 아까부터 왜 자꾸 노려봐?” “노려보는 것이 아니라… 아닙니다.” 당황한 듯 고개를 돌린 카라드가 짐을 옮기러 가버렸다. 고개를 갸웃하는 시디발라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은 리먼이 웃었다. “다들 좋을 때군요.” “응, 날이 좋을 것 같아. 근데 우리 언제 출발해?” 시디발라의 재촉에 힘입어 일행은 5분 뒤에 여관을 출발했다.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성문 앞에는 꽤 많은 사람이 몰려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 오셨다!” “용사님들! 이쪽을 봐주세요!” 함성에 놀란 하마용이 날개를 퍼덕거렸다. 그러자 사람들의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개중엔 손을 흔들거나 꽃을 뿌리는 사람도 있었다. 시디발라가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지금 우리 보고 저러는 거야?” “저희가 마물을 잡으러 다닌다는 소문이 나서 저러나 봅니다. 황금새의 용사인가, 뭐 그렇게 부르더군요.” 디안이 조금 민망한 듯이 말했다. 리먼도 알고 있었는지 쓴웃음을 지었다. 하마용이 “난 새가 아니라 용이란 말이야!” 하고 투덜거렸다. 물론 아무도 그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계속되는 환호성에 어깨를 으쓱한 세영이 “새벽부터 나온 것 같은데 손이라도 흔들어 주죠?” 하고 말했다. 그래서 일행은 매우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행진은 성문 앞에 이르러서야 끝났다. 처음 그들을 맞이했던 어리바리한 병사가 몹시 딱딱한 동작으로 경례했다. “요, 용사님,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영광입니다. 언제든 다시 하란을 방문해주십시오. 하란은 용사님의 방문을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세영의 간단한 대답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병사가 다시 경례했다. 일행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에게 인사하며 하마용에 탑승했다. 그들이 멀어질 때까지 사람들은 계속해서 손을 흔들었다. 세영은 사람 중에서 말남을 본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강화도 끝났으니, 용의 신전으로 가볼까 하고요.” 세영이 새로운 목적지를 밝혔을 때 동료 중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전에 한번 들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멀미를 일으켜 구석에 짜부라져 있던 드워프가 “용의 신전? 그럼 마도로 간단 말인가?” 하고 되물었다. 세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가 말한 것은 300년 전의 폐허였지만, 그런 것까지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영감은 도중에 내릴 테니 괜한 걱정할 필요 없어.” “하지만 마도는 위험한 곳인데….” “이미 갔다 왔거든? 거기도 사람 사는 동네라 별것 없더라.” 드워프를 침묵시킨 그녀는 다시 설명을 이었다. “주신을 봉인한 곳이라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요. 그래서 위험부담을 좀 줄이려고요.” 그녀는 제일 먼저 인벤에서 나스쿤의 서클렛을 꺼냈다. 잠시 기다리자 상세정보가 떴다. [오래된 지혜의 왕관] 방어구 속성 -전설의 투구 -지력 130~140 -마나 회복속도 15% 증가 타이틀 속성 -모든 마법 스킬의 숙련도를 상승 -높은 확률로 적에게 테러 스킬 발동 -디크리피파이 +1 -본 월 +2 “이건 지력을 올려주고 마나 회복을 도와주는 아이템이에요. 착용하고 있으면 디크리피파이와 본 윌을 사용할 수 있고요. 마리엔에게 맡길게요.” 세영이 내민 서클렛을 마리엔이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세영은 [정화된 미궁의 반지]는 시디발라에게 [깨끗해진 숲의 덩굴 팔찌]는 디안에게 주었다. [방황하는 성직자의 아뮬렛]은 리먼이 갖고 있으니, 그녀에게 남은 것은 카라드의 본체인 [창백한 그림자 검]뿐이었다. 아이템을 나눠주며 쓸 수 있는 스킬을 설명한 세영이 웃었다. “생각해보니 제가 신기를 다 갖고 있는 것도 좀 위험한 것 같더라고요. 만약에 대비해야겠다 싶어서요.” “제 목숨을 걸고 신기를 지키겠습니다.” 디안이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예전과 다르게 단단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이어서 동료들도 저마다 신기를 수호하겠다고 맹세했다. 세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현재 동료들의 레벨은 디안이 Lv49, 마리엔이 Lv50, 시디발라가 Lv52, 리먼이 Lv55였다. 동료 중 가장 레벨이 낮았던 마리엔은 세영과 함께 마타라키를 처치하면서 디안을 앞질렀다. 그동안 직접적으로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보조만 했던 사슴도 Lv81을 기록했다. “제가 신기를 맡기는 건 대신 지켜달라든가 목숨을 걸라는 뜻이 아니에요. 그냥 여러분을 믿는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어요.” 세영이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신기라고 해봤자 아이템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귀한 물건을 맡은 듯 눈을 반짝이는 동료들을 보자 조금 미안했다. 마리엔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그게 더 기쁜걸요. 세영님께서 저희를 신뢰해 주신다는 뜻이니까.” “맞아, 신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너도 우릴 믿는다는 게 중요해.” 시디발라가 세영의 손을 꽉 붙잡았다. 질세라 마리엔이 그 위에 손을 포갰고, 다른 이들도 한손씩 보탰다. ‘아, 이런 거 좀 쪽팔리는데.’ 라고 생각하던 세영은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시디발라의 말처럼 먼 여행을 떠나기 좋은 날이었다. ──────────────────────────────────── 용의 신전 (1) 풀 강화된 하마용은 체력도 지구력도 엄청났다. 한 번의 짧은 휴식을 취한 뒤로 쉬지 않고 날아 산맥을 훌쩍 넘어버렸다. 하란을 떠난 후 이틀 뒤, 일행은 ‘시날’이라는 작은 산간 마을에 도착했다. “용사님이다!” “용사님!” 멀리서 하마용을 본 아이들이 달려왔다. 일행은 금방 수십 명의 아이에게 둘러싸였다. 안장에서 뛰어내린 세영이 드워프의 목덜미를 잡아채 바닥에 내려놓았다. 순식간에 시선 집중을 받은 드워프가 질린 얼굴로 물었다. “여긴 대체 뭐 하는 곳인가?” “유니콘 떼가 출몰했던 마을.” 세영이 무뚝뚝하게 답했다. 아름다운 외양과 다르게 유니콘은 사나운 맹수였고, 놈들이 지나간 곳은 아이들만 남은 폐허가 되었다. 이동속도도 더럽게 빨라서 무려 세 번이나 허탕을 친 끝에야 붙잡을 수 있었다. “잡는 것도 더럽게 귀찮더니 뱉는 것도 모조리 레어였지. 더러운 말새끼들.” 부드득 이를 간 세영이 귀찮은 파리를 쫓듯 아이들을 밀어냈다. 우르르 밀려난 아이들은 그녀가 한 걸음을 떼기 무섭게 다시 달라붙었다. 세영은 꼬리처럼 아이들을 달고 마을의 창고로 향했다. “용사님! 오셨군요.” 창고는 두 명의 소년이 지키고 있었다. 폐허가 된 세 마을의 생존자 중 그나마 나이가 많은 아이들이었다. 세영은 그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창고를 연 후 인벤에 넣어두었던 자루를 휙휙 던져 넣었다. 반쯤 비어있던 창고가 꽉 차는 것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창고의 문을 닫은 세영이 소년들을 바라봤다. “식량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앞으로 필요한 것들은 저 영감이랑 상의해. 이것저것 잘 만드니까 도움이 될 거야.” 아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서 드워프로 옮겨갔다. 반짝이는 눈빛을 본 드워프가 움찔했다. 세영이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아, 물론 저 영감이 여기 정착하겠다고 말한 뒤에야 가능한 일이지만. 어쩔래, 영감? 착취당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서 여기로 골랐는데, 다른 곳이 더 좋다면 옮겨줄게.” 그 말에 아이들의 눈빛이 더욱 간절해졌다. 당장 그의 바지라도 붙들고 매달릴 기세였다. 드워프는 간신히 그들의 시선을 피해 세영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한테 거부권이 있는 건가?” “당연히 있지. 같잖은 정에 휘둘려서 인생을 낭비했잖아? 영감이 제정신이라면 또 병신 같은 선택은 하지 않겠지.” 진심인지 아닌지 모를 말에 드워프는 침묵했다. 연거푸 한숨을 쉬던 그는 결국 입을 열어 병신 같은 선택을 했다.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세영은 제정신이 아닌 드워프를 위해 커다란 대장간을 지어주었다. 순식간에 뚝딱뚝딱 올라가는 건물을 본 드워프가 머리를 싸쥐었다. 어쩐지 속았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의 어깨를 토닥인 디안이 열쇠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은행 이름과 숫자가 쓰여 있는 열쇠였다. “이걸 가져가면 은행에서 돈을 줄 겁니다. 유니콘 뿔과 가죽을 판 대금이니 아이들을 위해서 써주십시오. 매해 일정한 금액이 나오고 한꺼번에 찾을 수는 없으니 주의하시고요.” 이어서 그는 매달 상단에서 물건을 공급받는 방법과 주의할 점까지 알려주었다. 한두 번 해본 설명이 아닌지 능숙한 태도였다. 드워프는 열쇠를 받아들며 물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나?” “자주는 아니고… 최근에 익숙해졌습니다. 이 마을은 좀 특수한 경우입니다. 이렇게 많은 아이를 어딘가에 맡길 수는 없었거든요.” 쓴웃음을 지은 디안이 답했다. 아이들의 숫자를 눈으로 헤아려본 드워프가 무겁게 고개를 끄떡였다. 이 정도 숫자의 아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고아원이나 신전은 없었다. 아이들 또한 뿔뿔이 흩어지느니 이곳에서 살기를 원했다. 세영은 마을 전체를 사유지로 설정해서 외부의 침입을 막았다. 그녀가 허락하지 않은 사람은 마을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구조였다. 규칙을 정하고 나이에 맞춰서 임무를 주기도 했다. 처음엔 괜찮을까 걱정했으나 아이들은 서로를 돌보며 제법 잘 해나가고 있었다. “아이들끼리 살아갈 수 있게 안배해 두셨지만, 역시 마음에 걸리셨나 봅니다. 저도 영감님이라면 이곳을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 안심이 됩니다.” 잘 부탁한다고 말한 디안이 싱긋 웃었다. 드워프는 다시 속았다고 말하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재잘거리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이전에 없던 생기가 깃들어 있었다. 살아갈 이유를 되찾은 자의 눈이었다. 시날에서 드워프와 헤어진 일행은 다시 용의 신전으로 출발했다. 하마용은 바람을 타고 빠르게 날았다. 마을에 들르는 것을 피하고 노숙을 했기에 행로를 변경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일행은 일주일 만에 대륙을 가로질러 ‘옛 왕국’의 땅에 도착했다. 300년 전, 이곳에는 카르나이라는 왕국이 있었다. 왕국의 위세는 몹시 대단하여 주변의 나라를 식민지나 종속국으로 삼았다. 왕국의 번성은 식민지에서 착취한 물자와 종속국의 조공으로 이루어졌다. 힘과 영광, 착취의 시대였다. 왕국의 후예가 마도라 불리는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착취당한 자들에게 왕국이 군림하던 때는 마신이 지배하는 시대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마도에 대한 적대감은 대를 이어서 자손에게 전해졌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유조차 잊어버린 경멸이 되었다. “여기서 용의 신전까지는 하루면 충분합니다.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위치는 여기쯤일 겁니다.” 세영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모닥불에 비친 카라드의 얼굴을 바라봤다. 멸망한 왕국의 마지막 왕족인 남자는, 고향에 돌아온 것에 별다른 감회가 없어 보였다. 그것보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기 급급한 것 같았다. “…흠.” 세영의 헛기침에 카라드의 어깨가 흠칫했다. 거의 조건반사적인 반응에 나머지 동료들은 난처한 얼굴로 눈을 굴렸다. 여행하는 내내 세영은 배고픈 승냥이처럼 카라드 주변을 어슬렁거렸고, 그럴 때마다 카라드는 연신 흠칫흠칫 파드득거리며 과민 반응을 보였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 눈이 달린 사람이라면 다 알 수 있었다. 그게 무슨 일인지는 각자 해석이 달랐다. ‘세영이 잘못해서 둘이 싸웠다’를 밀고 있는 시디발라가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나섰다. “근데 말이야, 여기에 형이 있었잖아. 만나러 가고 싶지 않아?” “넓은 지역이라 펠릭스를 찾으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다음에 따로 기회를 내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제야 제정신을 되찾은 카라드가 고개를 저었다. 분위기가 바뀐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동료들이 하나둘 대화에 참여했다. “그럼 용의 신전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찾아보는 건 어떨까.” “좋은 생각입니다. 펠릭스 님이 이곳에서 잘 적응하고 계신지도 확인할 겸 한 번쯤 뵈었으면 했거든요.” “연락할 방법이 있으면 좋을 텐데, 조금 아쉽네요.” 말없이 이야기를 듣던 세영이 머리를 긁적였다. 마리엔이 ‘연락할 방법’이라고 말해서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그녀는 소환수 관리창을 열어서 펠릭스의 이름을 선택했다. 소환수는 한 마리만 소환할 수 있기에 펠릭스는 소환해제 상태가 되어있었다. ‘소환해제 상태에서 명령전달이 가능하려나?’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세영은 <동생 보고 싶으면 내일 용의 신전으로 와>라는 명령을 입력했다. 펠릭스가 신전으로 찾아온다면 제법 유용한 의사소통 수단을 얻게 되는 셈이었다. ‘형이랑 만나게 해주면 뽀뽀 정도는 받아도 되겠지?’ 한 손으로 턱을 괸 그녀는 카라드를 지긋이 쳐다봤다. 음흉한 시선을 느낀 사슴이 또다시 움찔했다.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본 세영이 피식 웃었다. 그러자 발끈한 사슴이 눈을 마주해왔다. 얼마 못 버티고 시선을 피해버렸지만, 그녀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우리 사슴 씨가 이제 어른 사슴이 된 건가?’ 세영은 휘파람을 불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그녀는 대신 아르카디아의 BGM 중 하나인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내일>을 흥얼거렸다. 다음날, 시디발라는 안장 밖으로 몸을 쭉 빼고 아래를 살폈다. 말로는 구경하는 거라고 했지만, 펠릭스의 흔적을 찾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는 드문드문 푸르러진 아래를 가리키며 신기한 듯이 말했다. “황무지라고 했는데 제법 파랗지 않아?” “모래 없는 사막이라고 들었습니다만, 확실히 그런 모습은 아니군요.” 리먼이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아주었다. 시디발라는 세영의 쪽을 힐끔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펠릭스 때문인 거 아닐까. 걔가 열심히 일해서 이렇게 바꿔 놓은 거야.” 그것에 카라드가 오히려 당황해서 고개를 저었다. “300년 동안이나 회복되지 못했던 땅입니다. 펠릭스가 노력한다고 해서 이렇게 단시간에 바뀌긴 힘들 겁니다.” “300년 동안이나 잠들어 있었던 곳이니까 뭔가 계기가 있으면 빠르게 회복되지 않았을까요?” 마리엔까지 펠릭스의 편을 들자 카라드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그때 시디발라가 호들갑스럽게 아래를 가리켰다. “앗, 저거 봐! 저거!” 일행은 시디발라의 손짓에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래에 유독 푸르고 붉은 언덕이 있었다. 하마용이 그에 이끌린 것처럼 고도를 낮췄다. 하마용의 날갯짓에 언덕이 출렁거리며 주황에 가까운 꽃잎들을 흩뿌렸다. 가을의 장미였다. 그리고 장미가 흐드러진 언덕에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가 서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담담히 고개를 든 그를 본 카라드가 눈을 크게 떴다. 세영을 제외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재회였다. “펠릭스!” 카라드는 하마용이 착륙하자마자 황급히 제 형에게 달려갔다. 달려오는 그의 모습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스캔한 펠릭스는 이내 아무런 관심 없다는 듯이 팔짱을 꼈다. 숨이 차게 달려온 카라드가 반가운 듯 물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널 보러온 건 아니다. 단지 명령을 받았을 뿐. 팩 고개를 돌린 펠릭스가 세영을 쳐다봤다. 세영은 대놓고 얼굴을 찡그려주었다. ‘아니, 저 새끼는 동생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달려와 놓고선 왜 아닌 척하고 지랄이야?’ 귀여운 여자애도 아니고 시커먼 덩치가 저러니 정말 꼴불견이었다. 그녀는 맞춰주기 더럽게 힘들다고 투덜거리며 손을 휙휙 내저었다. “어, 그래. 내가 명령했다. 그러니까 니 동생 데리고 근처나 한 바퀴 돌고 와. 빨리.” “…아.”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표정이 된 카라드가 얼굴을 붉혔다. 세영을 바라보는 눈이 이전과 달리 아슬아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세영이 그것을 충분히 즐기기도 전에 뜨악한 얼굴이 된 펠릭스가 동생을 끌고 가 버렸다. 세영은 왠지 입에 문 고기를 뺏긴 기분이 되었다. ‘방금 뭔가 중요한 타이밍이었던 것 같은데.’ 무서운 표정으로 서 있는 그녀를 보고 안절부절못하던 동료들이 “저, 해가 곧 질 것 같습니다. 여기서 야영 준비를 할까요?” 하고 물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세영이 고개를 끄떡였다. 형제는 사방이 어둑해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세영은 왠지 모를 초조함을 느꼈다. 한 바퀴 돌고 오라고 보낸 것은 그녀였는데도, 왠지 사슴을 뺏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괜한 생각이라고 스스로를 다그치면서도 계속 힐끗힐끗 언덕 아래를 보게 됐다. “이제 식사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은데, 펠릭스 씨의 식사는 어떻게 하죠?” 저녁 담당인 마리엔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쓴웃음을 지은 리먼이 “언데드인 분께 식사를 내놓는 것은 곤란하겠지요. 난처한 상황이긴 하군요.” 하고 말했다. 그때 언덕 아래를 쏘아보고 있던 세영이 말했다. “펠릭스가 먹을 건 제가 따로 만들게요.” “…네? 펠릭스 씨도 뭔가 먹을 수 있나요?” “언데드라도 소환수니까, 아마 제가 만든 건 먹을 수 있을 거예요.” 음울한 목소리로 말한 세영이 냄비를 꺼내 소환수용 펫푸드, 일명 개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냄비 속에서 꾸물꾸물 퍼지는 정체불명의 요리를 본 동료들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설마 카라드의 형에게 못 먹을 것을 주진 않으리라고 믿고 못 본 척했다. 그렇게 방관과 체념 속에서 개밥이 완성되어갔다. 카라드가 돌아온 것은 냄비에서 구수한 냄새가 풍길 때쯤이었다. 펠릭스에게 무어라 말하며 웃고 있던 그는 저녁준비를 하는 동료들을 보고 당황한 표정으로 변했다. 시간이 이렇게 흐른 줄 몰랐던 것 같았다. ‘아, 이건 뭔가 좀 다른 의미로 속이 꼬이네.’ 팔짱을 낀 세영이 눈을 가늘게 뜬 채로 펠릭스를 노려봤다. 그것을 눈치챈 펠릭스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괜히 울컥한 그녀는 국자로 냄비 윗부분을 탕탕 쳤다. “식사 준비 다 됐어요. 빨리 오세요.”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쪼르르 달려오는 카라드와 달리 펠릭스는 잠깐 머뭇거렸다. -하지만 나는 음식을 먹지 못하는…. “내가 그걸 몰라서 이걸 만들고 있겠냐. 빨리 와서 먹기나 해.” 까칠한 세영의 반응에 입을 다문 펠릭스가 뚜벅뚜벅 다가왔다. 그는 도전적인 기세로 세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세영은 펫푸드 전용의 뼈다귀 그릇에 개밥을 떠주었다. 싱긋 웃은 그녀가 덧붙였다. “내 정성이 아주 듬뿍 들어갔으니 맛있게 먹으라고.” “여기 앉으세요.” 마리엔은 아예 자리까지 깔아주며 분위기를 잡았다. 빼도 박도 못하게 된 펠릭스가 털썩 자리에 앉았다. 그는 겉으로 봐선 뭔지 알 수 없는 음식을 휘젓다가 성의 없이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다. 다음 순간 그의 붉은 안광이 번쩍 빛나더니 몸이 옆으로 스르륵 기울어졌다. 만약을 대비해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카라드가 형과 개밥을 지켜냈다. 놀라 눈을 휘둥그레하게 뜨고 있던 시디발라가 박수를 쳤다. “와, 한방에 걸렸어!” “…과연, 저 음식은 언데드도 쓰러트리는 건가.” 디안이 어딘가 질린 얼굴로 말했다. 그때 고개를 갸우뚱한 시디발라가 말했다. “그런데 왜 카라드는 한 번도 안 걸려?” “응? 그랬나?” “지금까지 한 번도 안 걸렸다고. 불공평해!” 시디발라의 불평에 난처한 표정을 지은 카라드가 변명했다. “진짜 몸이 아니다 보니 혀가 둔해서 그런 듯합니다.” “…하지만 둔하기로 따지면 언데드가 더 둔하지 않을까요. 펠릭스 씨도 걸리는데.” 갑자기 숙연해지는 분위기를 마리엔의 반박이 깨트렸다. 뒤늦게 깨달은 표정을 지은 시디발라가 말했다. “맞아. 언데드는 반시체 같은 거 아냐? 반시체보다 혀가 둔할 수도 있어?” “그런 쪽으로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해서….” 더욱 난처해진 표정으로 변한 카라드가 세영을 바라봤다. 그때 냄비에 남은 개밥을 푹 뜬 시디발라가 “그럼 이거도 한 번 먹어봐!” 하고 눈을 빛냈다. 세영은 얼른 그가 든 스푼을 낚아챘다. “어허, 지금 누구에게 뭘 먹이려고.” “으, 응?” 시디발라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카라드의 표정도 매우 미묘하게 변했다. 그때 장미를 잔뜩 뜯어 먹고 늘어져 있던 하마용이 음식냄새를 맡고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는 반쯤 남은 냄비를 보고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와아! 이거 맛있겠다. 내가 먹어도 돼?” “먹어.” 세영은 두말하지 않고 냄비를 들어 하마용의 앞에 내려놓았다. 우걱우걱 개밥을 먹기 시작하는 하마용을 보고 동료들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세영은 그걸 모른 척하며 “우리도 밥 먹어야죠.” 하고 말을 돌렸다. -…으… 으으…! 펠릭스는 일행이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 당번을 정할 때쯤에야 깨어났다. 수십 마리의 강아지들에 의해 마당에 파묻히는 악몽을 꾼 그는 헉! 하고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냄비를 비운 뒤 펠릭스 몫의 개밥까지 깨끗하게 처리한 하마용이 그의 얼굴을 날름날름 핥고 있었다. -뭐, 뭐, 뭐냐! 이런 식의 스킨십은 처음이었던 펠릭스가 놀라 하마용을 밀어냈다. 아무렇지도 않게 제 입술을 싹싹 핥은 하마용이 명랑하게 말했다. “너도 소환수지? 나도 소환수야! 앞으로 친하게 지내. 아 참, 난 후와와 라고 해. 멋진 황금용이지!” -……. “근데 넌 암컷이야? 이름이 뭐야?” 입을 굳게 다문 펠릭스에게 하마용이 주절주절 자신의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펠릭스가 갑자기 노성을 지르며 세영에게 달려든 것은 그로부터 5분 후였다. “뭐야, 갑자기 미쳤냐?” 뒷정리를 돕다가 갑자기 펠릭스의 돌진을 막아낸 세영이 의아하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 광폭상태가 된 펠릭스는 길길이 날뛰며 소리를 질렀다. -너, 너! 삿대질하는 그를 보며 세영은 이 새끼를 한 대 때려서 기절시킬까 고민했다. 때마침 사슴은 여분의 장작을 주우러 자리를 벗어난 뒤였다. 하지만 그녀가 막 주먹을 쥔 찰나 펠릭스가 포효하듯 외쳤다. -결혼도 안 하고 내 동생을 건드려?! “…아.” ──────────────────────────────────── 용의 신전 (2) 세영은 순간적으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슴이 말했을 리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나 싶었다. 범인은 곧바로 발견됐다. 펠릭스가 뛰어온 쪽에서 하마용이 투덜거리며 나타난 것이다. “너무해! 갑자기 나 혼자 두고 가버리고!” “야, 너 펠릭스에게 대체 뭐라고 한 거야.” 하마용이 뭔가를 지껄였다는 것을 눈치챈 시디발라가 그를 다그쳤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끼지 못한 하마용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응? 주인이랑 예쁜 애랑 잘 지내냐고 물어서, 짝짓기도 하고 잘 지낸다고 했는데?” 동료들의 얼굴이 일시에 창백해졌다. 당황한 시디발라가 세영의 눈치를 보며 변명했다. “그, 그런 거 아니라니까. 유니콘이 카라드는 공격 안 하는 거 봤잖아.” “그때 말고! 여관에서 예쁜 애가 나 밥 주러 왔는데, 주인 냄새가 폴폴 났단 말이야! 틀림없이 발정….” 시디발라가 하마용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싸늘하게 얼굴을 굳힌 세영이 “저 새끼 끌고 가.” 하고 으르렁댔다. 시디발라가 서둘러 하마용을 끌고 갔다. 죄인 취급당하는 것이 억울했던 하마용이 그의 손을 뿌리치며 항의했다. “아니, 왜 나한테 그래. 둘이 짝짓기한 거 맞잖아!” “바보야! 조용히 좀 해!” 둘이 사라진 후 세영은 뺨을 긁적이며 펠릭스를 바라봤다. 분노한 펠릭스는 온몸에서 사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사기 때문에 꼭 성냥처럼 보였다. 잠깐 망설이던 세영이 진지하게 말했다. “야, 오해할 것 같아서 말하는데 끝까진 안 갔거든.” -닥쳐라! “…진짜인데, 안 믿네.” 세영도 좀 억울했다. 그녀가 한 일이라곤 고작해야 사슴 단추나 몇 개 풀고 입술 도장 몇 개 찍은 것이 전부였다. 그걸로 건드렸다고 따지는 건 너무 심했다. 물론 펠릭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애를 농락해놓고! “아무것도 모르진 않던데.” 세영이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성교육도 4D로 받은 사슴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면 이쪽이 더 곤란했다. 그녀의 말을 다른 뜻으로 받아들인 펠릭스가 발끈했다. -뭣이?! 지금 내 동생을 의심하는 거냐?! “아니, 왜 이야기가 그렇게 돼?” -그렇게 말했잖아, 방금! 둘은 이제 언성을 높이며 다투기 시작했다. 서로 멱살을 잡고 옥신각신하는 둘을 보다 못한 리먼이 나섰다. “진정하십시오, 펠릭스님! 두 분은 진지하게 교제하는 사이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런 가벼운 관계는 아닐 겁니다.” “마, 맞아요! 세영님을 어떻게 보고 그런 모함을 하세요!” 얼굴이 빨개진 마리엔이 ‘우리 세영님,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씨익씨익.’ 하고 거들었다. 동료들이 나서자 주춤한 펠릭스의 기세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입을 꾹 다물고 세영을 노려보던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이냐? “뭐가?” -정말로 진지한 관계냐고 묻는 거다. “…진지하다면 진지하다고 할 수도.” 난처해진 세영이 말끝을 얼버무렸다. 사슴과 사귀기로 한 건 사실이지만, 가족에게 알릴 정도는 아니다 싶었다. 난처해 하는 그녀를 지그시 노려보던 펠릭스가 말했다. -좋다. 그럼 책임지고 내 동생과 결혼해라. “…뭐?!” -건드렸으면 책임을 져야지! 청천 날벼락 같은 소리에 화들짝 놀란 세영이 버럭 소리쳤다. “끝까지 안 갔다고, 인마! 그리고 네 동생이 날 건드렸을 수도 있지, 왜 일방적으로 날 의심하는 건데!” -웃기지 마라! 그럴 리가 없잖나! “…쳇!” 할 말이 없어진 세영이 눈을 피했다. 이러다가 정말 튀겠다 싶어 마음이 급해진 펠릭스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세영의 멱살을 쥐고 잘잘 흔들며 외쳤다. -책임져! 책임지고 결혼해라! “아니, 책임지는 게 왜 결혼이야! 난 독신주의자라고!” 기가 막힌 세영이 그를 확 밀어냈다. 그녀의 서슬에 바닥에 풀썩 엎어진 펠릭스가 분한 듯 소리쳤다. -그럼 결혼도 안 할 거면서 내 동생을 건드렸단 말인가?! “아이 씨, 니 동생도 동의했거든?! 결혼 안 해도 괜찮다고 했거든?!” -이 나쁜 놈! 불한당 같으니! 분노로 몸을 일으킨 펠릭스가 다시 죽자사자 달려들었다. 그가 진심으로 달려들자 세영도 상대하기가 좀 난처해졌다. 내키는 대로 팰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맞아주기도 그랬다. “그만두세요! 세영님한테 무슨 짓이야!” 보다 못해 펠릭스에게 마법을 쓴 마리엔은 주문이 갑옷에 튕겨 나가자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굴렀다. 그녀는 멀거니 구경만 하는 디안에게 화를 냈다. “보고만 있지 말고 좀 말려봐!” “뭐, 책임질 일을 하셨다면야… 어쩔 수 없잖아.” “책임질 일 안 하셨다잖아! 넌 왜 세영님 말을 안 믿고 다른 사람 말을 믿는 거야!” 마리엔이 화를 내자 디안이 난처하게 눈을 굴렸다. 그는 사실 심정적으로 펠릭스 편이었다. 그리고 무심한 세영 때문에 절절히 애를 태우는 카라드가 불쌍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좀 잘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펠릭스?” 마치 때를 맞춘 것처럼 장작을 가득 든 카라드가 돌아왔다. 그는 개판 오 분 전인 상황을 보고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왜 세영님을…?” 야영지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세영의 멱살을 잡은 펠릭스도 잡힌 세영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침묵을 깨트린 것은 마리엔이었다. 세영의 멱살을 잡은 일로 화가 난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펠릭스 씨가 자꾸 책임지라고 화내시잖아요!” “마, 마리에엔!” 당황한 디안이 그녀를 붙잡았다. 그것에 더욱 울컥한 마리엔이 쏘아붙이듯 말했다. “내가 뭐! 사실이잖아. 카라드 씨 건드렸으니 책임지라고, 당장 결혼하라고 우기셨다고요!” 카라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들고 있던 장작을 내려놓은 그는 노여움이 서린 얼굴로 형을 보며 물었다. “사실입니까?” -그, 그게……. 동생 앞에서 작아질 수밖에 없는 펠릭스가 우물거렸다. 이를 악문 카라드가 말했다. “당장 그 손 놓으십시오.” 펠릭스는 서둘러 세영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기가 막힌 듯이 그를 쳐다보던 카라드가 말했다. “아리스타타나 당신이나 왜 이러는 겁니까. 이건 제 문제입니다. 잘되든 잘못되든 제가 알아서 할 일이란 말입니다. 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 미치고 팔짝 뛰겠다는 카라드의 얼굴에 펠릭스가 안절부절못했다. 커다란 어깨를 옹송그린 그가 변명처럼 말했다. -나는… 그냥 네가 걱정되어서…. “제가 매달리는 겁니다. 제가 세영님을 귀찮게 하고 있는 거라고요. 만약 당신 때문에 세영님이 절 버리면 그땐 어쩌실 생각이셨습니까.” 펠릭스가 움찔하며 세영을 쳐다봤다. ‘정말 그러진 않겠지?’ 하는 눈빛에 세영은 그냥 어깨를 으쓱해주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펠릭스를 차갑게 노려본 카라드가 말했다. “두 번 다시 간섭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용서 안 할 겁니다.” 그 말을 들은 펠릭스는 보신각 종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리는 표정을 지었다. 카라드는 넋을 놓은 그를 본 척도 하지 않고 세영의 손을 잡은 채 야영지를 벗어났다. 못 이기는 척 끌려가던 세영이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펠릭스를 리먼과 디안이 둘러싸고 위로해주고 있었다. 왠지 난처해진 그녀는 뺨을 긁적이며 카라드를 쳐다보았다. 잔뜩 화가 난 사슴은 ‘몰라. 여길 떠나버릴 거야.’ 하는 기세로 무작정 걷고 있었다. 흐음 소리를 낸 그녀는 맵을 켜서 주변을 탐색했다. 이쯤이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싶을 만큼 왔을 때 마침 커다란 바위가 보였다. 세영은 슬쩍 걸음을 늦추며 사슴을 끌어당겼다. “사슴 씨, 잠깐만 멈춰 봐요.” 멈칫한 카라드가 그제야 걸음을 멈췄다. 홧김에 세영을 끌고 여기까지 와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시든 꽃처럼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화 많이 났어요?” 세영이 발갛게 달아오른 그의 뺨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멈칫한 사슴이 면목없다는 듯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세영님을 위해 화낸 것이 아니라 저를 위해서 화를 낸 것 같습니다.” “에이 뭐, 그런 걸로 사과하고 그래요.” 세영은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사슴이 펠릭스가 아닌 제 편을 들어줬기에 꽁했던 것까지 풀린 상태였다. 그녀는 사슴을 다독이며 입에 발린 말을 했다. “저 때문에 펠릭스랑 싸울 필요 없어요. 형 많이 좋아하잖아요. 그리고 펠릭스 입장에선 저한테 화내는 게 당연했고요.” “…제가 귀찮지 않으십니까?” 그녀의 손에 뺨을 비빈 사슴이 물었다. 가늘게 떨리는 눈동자가 퍽 애처로워서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세영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왜요? 결혼하라고 닦달하는 형이 있어서요? 제가 ‘전에 했던 약속이랑 다르잖아, 귀찮은데 우리 그냥 헤어지자.’ 할 것 같아요?” “…….” 눈을 크게 뜬 사슴이 뻣뻣이 굳어졌다. 농담으로 한 말에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것을 본 세영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저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닌데. 사슴 씨 절 너무 오해하는 거 아니에요?” “놀랐습니다.” 사슴이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난처해진 세영이 그의 팔을 살살 쓸며 달래듯이 말했다. “아니, 자꾸 불안해하지 말라니까요. 도장까지 찍어줬는데 이러면 어떡해요.” “…불안합니다. 저는, 세영님이 절 좀 더 생각하고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그런 거였는데 왜 저만….” “저만?” 세영이 점점 흐려지는 말끝을 붙잡듯이 물었다. 얼굴을 붉힌 사슴이 난처한 듯 눈을 피하며 말했다. “저만… 전보다 더 애가 타고 세영님을 생각하는 것 같아서….” 겨우 말을 마친 사슴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동안 애를 태웠다는 고백에 히죽 웃은 세영이 재빨리 진지하게 표정을 고쳤다. “아, 사슴 씨. 몰랐구나. 원래 도장 찍히면 그렇게 되거든요. 그러라고 찍어준 거였는데.” “……!” 고개를 번쩍 든 사슴이 ‘그런 건가!’ 하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세영은 슬금슬금 그를 끌어당기며 속삭이듯 물었다. “그동안 제 생각 많이 했어요?” “…예.” “제가 사슴 씨 생각 많이 안 하는 것 같아서 억울했나 봐요.” “…억울한 게 아니라… 서운했습니다.” 사슴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그동안 승냥이처럼 근처를 어슬렁거리기만 하고 전처럼 다가오지 않아서 섭섭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전에 없이 그녀의 팔을 꽉 붙잡으며 말했다. “저처럼 세영님도 저만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사슴 씨도 저한테 도장 찍을래요?” 장난스럽게 말한 세영이 상의의 단추를 풀었다. 앞섶이 벌어지며 목과 가슴 위가 그대로 드러나자 당황한 사슴이 움찔했다. 세영이 피식 웃으며 재촉했다. “자, 어서요.” 잠깐 머뭇거리던 사슴이 고개를 숙였다. 세영은 그의 이마에 쪽 입 맞추며 “도장 남아있는 동안엔 사슴 씨만 생각할게요.” 하고 약속했다. 떨리는 입술이 그녀의 목에 살짝 닿았다. ──────────────────────────────────── 용의 신전 (3) 세영은 수줍어하는 사슴을 달래가며 도장 찍기에 익숙하게 만들었다. 시범을 보인답시고 사슴의 옷을 풀어헤치고 진한 자국도 몇 개 새겼다. 처음엔 벌어진 옷자락을 움켜쥐고 어쩔 줄 몰라 하던 사슴이 끝에 가선 그녀의 쇄골에 제법 짙은 흔적을 새겼다. 제가 만들고도 놀라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것이 귀여웠다. 싱글싱글 웃던 세영은 그의 이마에 쪽 키스하며 말했다. “지워지면 또 찍어줘요.” 얼굴을 붉힌 사슴이 고개를 끄떡였다. 둘이서 하는 은밀한 일이 마음에 들었는지 불안해하던 것이 꽤 진정된 상태였다. 흐트러진 옷을 정리한 세영은 그의 손을 이끌어 야영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늘 펠릭스랑 무슨 이야기 했어요?” “…….” “아, 별건 아니고 좀 궁금해서요. 대답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아뇨, 그게 아니라…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아서.” 머뭇거리던 사슴이 말했다. 당황한 세영이 “아니, 그럼 지금까지 뭐했어요?” 하고 물었다. 수줍은 미소를 지은 사슴이 고백했다. “저에게 수하들을 소개해주셨습니다. 특별히 아끼는 이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신 것 같더군요. 그리고 산책도 하고… 오히려 이야기는 제가 더 많이 했습니다.” 세영은 아이고야 소리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그래도 한심해 하는 것이 전해졌는지 사슴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저도 그랬지만, 펠릭스도 제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아아, 뭐.” 세영은 그제야 납득했다. 워낙 서툴러서 서로를 대하는 방법도,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형제라는 이름으로 단번에 가까워지기엔 멀리 있던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래도 좋았나 보네요.” “…예, 저를 정말 동생으로 여기시는 것 같아서 기뻤습니다.” 수줍게 웃던 사슴의 얼굴이 흐려졌다. 펠릭스에게 간섭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세영은 시무룩해진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가면 화해할 거죠?” “…….” “지금 헤어지면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몰라요. 싸운 채로 헤어질 거예요?” 그녀는 답지 않은 선심을 베풀었다. 이렇게 형을 좋아하는데 갈라놓기는 좀 불쌍하다. 어차피 여길 떠나면 못 볼 형제이니 너그러운 척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녀를 조심스럽게 훔쳐본 사슴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제가… 펠릭스와 화해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안 괜찮을 건 또 뭐 있어요?” 피식 웃는 세영을 본 그가 조금 혼란스러운 듯이 말했다. “하지만 펠릭스는 세영님을 모욕했고,” “했고?” “오늘 펠릭스와 돌아왔을 때도 왠지 언짢아 보이셔서….” 말끝을 흐린 사슴이 눈을 내리깔았다. 티는 안 냈지만, 그녀가 냄비를 두들기며 으르렁거리는 것을 보고 제법 놀랐던 모양이다. 뺨을 긁적인 세영이 뻔뻔하게 말했다. “어, 그건 그냥 질투한 건데요. 사슴 씨가 저보다 펠릭스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 “왜 그렇게 놀라요? 저도 질투 심해요. 사슴 씨 관심 뺏기면 당연히 질투하죠.” “…아.” 놀란 얼굴로 눈만 깜빡이던 사슴이 환하게 웃었다. 세영은 갑자기 어둠 속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 같은 착시현상을 느꼈다. 그녀의 손을 꼭 움켜쥔 사슴이 기쁘고 수줍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말했다. “…기쁩니다.” “읭?” “질투할 정도로 제게 관심을 주신 것이 기쁩니다.” 세영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솔직히 말하면 귀엽긴 하지만 상태가 좀 심각하다. 걸음을 멈춘 그녀가 사슴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슴 씨, 저 사슴 씨를 진짜 좋아해요.” “…….” “정말 많이 좋아해요. 그러니까 전 사슴 씨가 좀 더 욕심부렸으면 좋겠어요. 제가 좋아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질투하면 귀찮아하고, 그럴 정도로요.” 멍하게 눈을 깜빡이던 사슴이 웃었다. 그는 붙잡은 손을 살짝 흔들 듯 움직이며 말했다. “제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일 것 같습니다. 그걸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도, 귀찮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러니….”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세영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익숙해질 때까지 저를 좋아한다고…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래놓고 살짝 눈치를 보는 것이 어찌나 요망한지 심장에 무리가 올 뻔했다. 요사스러운 사슴은 ‘절 좋아한다는 말이 더 듣고 싶어요.’ 라는 애원을 담아 그녀를 응시했다.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있던 세영이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 “와, 사슴 씨. 치사하다. 왜 저한테만 요구해요?” “……?” “저도 사슴 씨가 좋아한다고 말하는 거 듣고 싶은데? 지금까지 딱 한 번밖에 안 해줬는데?” “…아.”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표정이 된 사슴이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때의 고백도 없는 용기를 다 짜내어 내뱉은 것일 터였다. 수줍음 많은 그에게 쉽게 할 수 있는 말도 아니니 당황하는 게 당연했다. 세영은 조금 심술궂게 말했다. “연애는 주고받는 거거든요. 좋아한다는 말이 듣고 싶으면 먼저 좋아한다고 말해줘야죠.” “…….” 입만 달싹이는 사슴을 잠깐 구경하던 그녀는 앞으로 서로 노력하자고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 전에 사슴이 먼저 그녀를 끌어안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꽉 끌어안는 것에 세영이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합니다.” 속삭이듯 떨리는 목소리였다. 무슨 말이냐고 되물을 틈도 없이 사슴이 다시 반복했다. “저는 세영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 “정말로 사랑합니다.” 세영은 뭔가 되로 주려다 말로 받은 기분으로 눈을 깜빡였다. 몸을 뒤로 빼듯이 하며 사슴을 올려다보자 꽉 끌어안은 팔이 풀렸다.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진 사슴이 다시 한 번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꾹꾹 억눌러왔던 말을 토해내는 것 같았다. 놀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쓴웃음을 지은 사슴이 말했다. “대답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저와 같은 마음이 되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저를 좋아한다고 말씀해주십시오.” “…어.” 난처한 기분으로 입을 달싹이던 세영은 그냥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사실… 전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어요. 그게 어떤 건지는 들어서 아는데, 제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어떤 마음이 되는지는 잘 몰라서…. 그러니까….” 왠지 말하다 보니 하고 싶은 말이 꼬이는 기분이었다. 제 이마를 꾹꾹 누른 그녀가 말했다. “제가 사슴 씨를 좋아하는 건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랑 좀 달라요. 저는 사슴 씨가 소중해요.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요. 그런데 이게 남들이 말하는 사랑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미안해요.” 사실 세영은 끝까지 이런 말을 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사슴이 너무 진심으로 나오자 저도 속마음을 털어놓아야 할 것 같았다. 실망했을까 생각하며 고개를 들자 사슴이 열정적으로 입을 맞춰왔다. 몇 번이나 입술을 겹치고 세영의 뺨을 어루만지던 그가 속삭였다. “사랑인지 잘 모르시겠다는 건, 사랑일 수도 있다는 거군요.” “…뭐, 그렇긴 한데요.” 세영이 조금 떨떠름하게 말했다. 너무 좋은 쪽으로 해석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뭐라 반박을 할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 그녀의 수긍에 사슴은 꽃처럼 예쁘게 웃었다. 반짝이는 눈 때문인지 잔뜩 들떠 보이는 표정 때문인지 왠지 위험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좀 더 고민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좀 더 저를 생각해주셨으면….” 세영의 이마에 입 맞춘 사슴이 갑자기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에 놀란 세영은 눈만 깜빡였다. 순식간에 단추 세 개를 풀어버린 사슴이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다음 순간 아플 정도로 콱 깨물린 세영이 파드득거렸다. “아야야! 사, 사슴 씨. 잠깐만요!” 세영의 만류에 살짝 입술을 뗀 사슴이 깨문 곳을 부드럽게 핥았다. 흠칫거리는 그녀를 보고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 된 그가 말했다. “싫으셨습니까. 깊게 찍으면 더 저를 생각해주실 것 같아서….” “아니, 그거 아니라고!” 순진한 사슴 놀리려다가 본전도 못 찾은 세영이 빽 소리쳤다. 하지만 뭐가 잘못되었나 눈을 깜빡이는 그를 본 그녀가 소심하게 덧붙였다. “깨, 깨물지는 말고요. 아니, 깨물어도 되는데 너무 세게 물면 아파요.” “아….” 그제야 알겠다는 표정이 된 사슴이 처음 깨문 자리 주변에 욕심껏 흔적을 남겼다. 그냥 영역표시를 하고 있을 뿐인데, 왠지 오싹한 느낌이 든 세영이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그녀는 어둠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굳어있는 펠릭스를 발견했다. 들킨 것을 알고 놀라 물러서던 펠릭스가 마른 나뭇가지를 밟았다. 딱 하고 부서지는 소리에 흠칫한 사슴이 고개를 들었다. -…미, 미안. 동생과 눈이 마주친 펠릭스가 버벅거리며 말했다. 어색한 침묵이 셋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 용의 신전 (4) ‘…어떻게 하지? 증거 인멸?’ 세영은 동공 지진을 일으키는 펠릭스를 지그시 노려봤다. 사슴의 형만 아니었더라도 당장 달려들어 기절시켰을 터였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펠릭스 역시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셋 중 가장 침착한 사람은 의외로 카라드였다. 그는 천천히 세영의 단추를 채우고 흐트러진 차림을 바로잡아 주었다. 이어서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말한 후 세영을 품에 폭 감싸서 안아 들었다. ‘어?’ 세영이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카라드는 그녀를 안은 채 펠릭스를 지나쳤다. 당황한 펠릭스가 그를 붙잡으려 했다. 그보다 먼저 고개를 돌린 사슴이 말했다. “펠릭스, 잠깐 시간을 내주실 수 있습니까.” -…응?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세영님을 야영지로 모신 후 바로 돌아오겠습니다.” -…그, 그래. 얼떨떨하게 말한 펠릭스가 손을 거둬들였다. “그럼.” 하고 고개를 숙인 카라드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순식간에 정리된 상황에 세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배려해준 것은 알지만, 분명 제 일인데도 뭔가 할 새도 없이 배제된 느낌이었다. “화가 나셨습니까?” 야영지 근처에서 멈춘 카라드가 물었다. 세영은 찌푸린 얼굴을 펴며 “아뇨, 뭐. 좀 당황해서….” 라고 얼버무렸다. 그녀의 이마에 제 것을 맞댄 카라드가 사과했다. “멋대로 결정해버려서 죄송합니다. 더는 펠릭스의 일로 귀찮게 해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 음. 그래요. 일단 내려줄래요?” 어색하게 몸을 뒤로 빼자 잠깐 머뭇거리던 카라드가 그녀를 내려놓았다. 세영은 새삼스럽게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계속 사슴이라고 부르니까, 진짜 사슴처럼 느껴져서 몰랐는데.’ 세영이 그를 사슴이라 부르는 것에는 귀엽고 예쁘고, 해를 끼치지 않고, 얌전한 수줍은. 그 모든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카라드가 그렇게 행동했고, 그녀도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편했기 때문에 그 외의 모습은 보지도 듣지도 않았다. ‘하지만 사람이지. 그것도 남자.’ 몰랐던 것은 아니다. 알면서도 인식하지 않은 것에 가까웠다. 그녀가 원한 것은 예쁜 사슴과의 유희였지, 사람 대 사람의 만남이 아니었으니까. 카라드가 포기하지 않고 다가오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관계였다. 새삼 깨닫게 된 사실에 세영은 어쩐지 난감해졌다. 계속 이마를 문지르는 그녀의 손을 카라드가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세영은 제 손목을 움켜쥔 손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평소와 다른 반응에 카라드가 불안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세영은 한숨처럼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것보다 이제 펠릭스에게 가봐야지 않겠어요? 기다릴 텐데.” “…세영님.” 무어라 말하려는 그를 끌어당긴 세영이 짙게 입을 맞췄다. 입술 사이로 파고든 혀에 움찔한 카라드가 이내 서툴지만, 열정적으로 응해왔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저를 끌어당기는 손을 느낀 세영이 천천히 입술을 떼어냈다. 젖은 입술에 쪽 소리 나게 입 맞춘 그녀가 카라드의 목을 놓아주었다. 사슴처럼 까만 눈이 멍하게 깜빡였다. 세영은 그 속에 담긴 애정과 두려움, 그리고 강렬한 소유욕을 느꼈다. 사슴, 아니 낯선 남자의 눈은 그녀가 평소에 질색하던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싫지 않아서, 참 곤란하네.’ 세영은 피식 웃어버렸다. 사슴이든, 아니든 그녀는 눈앞의 이 남자가 좋았다. 너무 늦은 깨달음에 멋쩍어진 그녀는 색색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그의 가슴을 살짝 밀어냈다. “어서 가야죠.” “…예.” 넋을 놓고 있던 사슴이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대답만 했지 꼼짝도 하지 않는 그를 보고 뺨을 긁적인 세영이 덧붙였다. “화해 꼭 하고요.” “…….” 사슴은 애가 타는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세영은 그것을 모른 척 손을 흔들어주고는 야영지로 향했다. 등 뒤로 사슴의 시선이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 깊은 밤이었다. 달빛에 젖은 광야를 바라보던 펠릭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때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그의 등으로 날아들었다. “언데드 주제에 왜 한숨질이야?” -……. 펠릭스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평소에도 그렇긴 했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서 있었다. 동요하지 않은 척 몸을 돌린 그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왜 온 거냐. “뭐, 그냥. 어린 동생의 성장에 상심이 클 누군가를 구경하러?” 세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위로하러’도 아니고 ‘구경하러’ 왔다는 말에 펠릭스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저벅저벅 발소리를 내며 그의 옆으로 다가온 그녀가 갑옷을 툭툭 쳤다. “너무 충격받지 말고 힘내라. 인생이 다 그렇지 뭐.”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뻔히 알면서 왜 튕기고 그러실까.” 펠릭스의 얼굴이 한층 뚱해졌다. 죽어서 언데드가 되었건만, 세영만 보면 목 뒤로 혈압이 치솟는 착각이 들곤 했다. 가끔은 이런 몸이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살아있었다면 벌써 열두 번은 쓰러졌을 터였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그가 말했다. -그 녀석이… 네가 아니면 죽겠단다. “…응?” 고개를 갸웃하는 세영의 얼굴 위로 동생의 것이 겹쳐졌다. 아주 사소한 버릇인데 이상하게 닮아 보였다. 동요를 감추기 위해 시선을 돌린 펠릭스가 말을 이었다. -널 만나기 전엔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고, 그런데 널 만나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러니까 반대하지 말아 달라고 하더군. 그런 말을 듣고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어, 음, 사슴 씨가 그랬어?” 기분 좋게 히죽대는 얼굴을 보자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갑옷 위를 쿵쿵 때린 펠릭스가 한탄하듯이 말했다. -녀석의 짝으로는 좀 더 다정하고 상냥한 여자가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이, 지금 내가 다정하고 상냥하지 않다 이거야?” -몰라서 묻나. 펠릭스의 반박에 뺨을 긁적인 세영이 피식 웃었다. “사슴 씨에게는 충분히 다정하고 상냥하다고 생각하는데. 아니면 네가 지금 몸 성하게 날 내려다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팔에 한 번, 다리에 한 번 와 닿는 시선이 무척이나 싸늘했다. 뒤늦게 생존의 위협을 느낀 펠릭스가 변명하듯 말했다. -녀석의 성품에는 좀 더 순하고 착한 여자가 좋을 거라 생각했을 뿐이다. “진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 그런 호구 같은 여자랑 니 동생이랑 붙여놓으면 한 쌍의 새처럼 잘 살 것 같아? 아니면 쌍으로 붙잡혀서 튀겨질 것 같아?” 이죽거리듯 말한 세영이 하얗게 이를 드러냈다. 그녀의 성질을 건드렸다는 것을 깨달은 펠릭스는 얼른 침묵했다. 얌전히 입을 다문 그를 보고 조금 멋쩍은 얼굴이 된 세영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쌀이 익어서 밥이 됐는데 어쩔 거야. 그냥 니가 포기해. 네 팔자에 순하고 착한 동생 여친 따위는 없는 모양이니까.” -…하아. 고개를 숙인 펠릭스가 마른세수를 했다. 기분 같아선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었지만, 제가 아니면 동생을 구제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마지막 협상을 시도했다. -하나만 약속해라. “뭘 또?” 세영의 눈꼬리가 사납게 치솟았다. 하지만 펠릭스는 그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만약 아이가 생기면… 그때는 무조건 결혼해라. “피임할 건데?” -생기면 결혼하란 말이다! 뻔뻔한 대답에 울컥한 펠릭스가 소리쳤다. 그를 빤히 쳐다보던 세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지 뭐.” 조건부이긴 하지만, 결혼하겠다는 대답을 받아낸 펠릭스가 후유 하고 긴 한숨을 쉬었다. 기분 탓인지 뻣뻣해진 뒷목을 주무른 그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조금은 안심했다. 여기 와서 그의 말을 들어줄 정도로, 동생을 진지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니까. 감춰진 뜻을 알아들었는지 피식 웃은 세영이 “할 말 다 끝났지? 자러 간다.” 라며 손을 휙휙 저었다. 펠릭스는 말없이 장미의 언덕을 올라가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분명 자그마한 등인데도 왠지 든든해 보였다. -그래, 어쩌면. 이쪽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지. 들판을 푸르게 물들이는 달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무심히 서쪽으로 향했다. 다음날 일찍 일행은 용의 신전으로 출발했다. 시디발라는 펠릭스와 동행하길 원했지만, 신전은 언데드가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결국, 일행은 아쉬운 마음으로 펠릭스와 헤어져야 했다. “금방 갔다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시디발라의 말에 고개를 끄떡인 펠릭스가 동생을 바라봤다. 말없이 시선을 주던 그가 몸조심하라는 한마디를 겨우 내뱉었다. 수줍은 미소를 지은 카라드가 고개를 끄떡였다. 다시 화해한 형제를 본 동료들이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세영만 빼고. “그럼 곧 다시 뵙겠습니다.” 리먼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하마용이 날아올랐다. 점점 멀어지는 황금빛 동체를 바라보던 펠릭스는 뭔가가 빠르게 날아오는 것을 발견했다. 둥근 몸체와 커다란 눈알이 달린 헬가스트였다. 펠릭스는 이런 작은 헬가스트들을 버려진 땅 곳곳에 뿌려놓고 눈과 귀로 사용했다. 신성력을 쓰는 침입자들을 막기 위해서였다. 앞으로 뻗은 그의 손에 내려앉은 헬가스트가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끼긱거리는 울음소리에서 뭔가 급박한 상황을 느낀 펠릭스가 몸을 돌렸다. 이상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괜찮겠지. 마지막으로 하마용이 날아간 곳을 쳐다본 그는 유령마를 소환했다. 유령마 위에 오른 펠릭스는 헬가스트가 알려준 장소로 달리기 시작했다. 긴 꼬리를 단 혜성처럼 유령마의 발굽 아래서 붉은 사기가 번져나갔다. ──────────────────────────────────── 용의 신전 (5) “와, 저기가 신전이야?” 시디발라가 신기하다는 투로 말했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끌로 다듬은 것처럼 드넓은 터가 있었다. 그곳엔 매서운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거대한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었다. 출렁거리는 나뭇잎 사이로 언뜻언뜻 신전의 모습이 보였다. 한때 웅장했을 건물들은 거대한 나무뿌리에 뒤엉켜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외곽의 돌담 역시 덩굴로 완전히 뒤덮여 있었다. 검푸른 폐허 위를 하마용이 낮게 가로질렀다. “좀 이상해요. 여기에 왜 이렇게 나무가 많은 거죠? 오염된 신성력이 퍼져나간 중심지인 곳이잖아요.” 마리엔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나무와 덩굴로 뒤덮인 신전의 모습은 이제껏 그들이 가로지른 황무지와는 전혀 달랐다. 리먼 역시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아무리 300년이 지났다지만, 좀 과도하게 자란 감이 있군요.” 사방팔방으로 가지를 뻗은 나무들은 천 년은 묵은 것처럼 거대했다. 건물 하나를 독차지한 욕심 많은 놈도 있었다. 묵묵히 아래를 내려다보던 세영이 말했다. “이상하다면 제대로 찾아온 거죠. 가서 뒤져보자고요. 왜 이렇게 됐는지.” 그녀의 말에 수긍한 동료들이 고개를 끄떡였다. 하마용도 날개를 퍼덕이며 착륙할 곳을 찾기 시작했다. 워낙 나무가 빽빽하게 자라서 작은 터를 찾기도 어려웠다. 아래를 훑어보며 고개를 갸웃한 시디발라가 카라드에게 물었다. “네가 떠날 때도 이런 상태였어?” “…전 대부분의 시간을 검 속에서 잠들어 있었고, 간혹 깨어나도 주신전 안에서만 있었습니다. 이렇게 된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카라드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우울한 눈으로 신전을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변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런 황폐한 모습일 거라고는….” 고향집이나 마찬가지인 곳이 이렇게 된 것을 봤으니 나름대로 충격일 것이다. 그제야 제가 눈치 없이 굴었다는 것을 깨달은 시디발라가 “미안.” 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흐릿하게 웃은 카라드가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때 공중을 오가며 계속 날개를 퍼덕이던 하마용이 물었다. “저기, 어디에 내려야 해?” “주신전… 중앙에 있는 큰 건물의 뒤로 가면 정원이 있습니다. 넓은 터라서 다른 곳보다 착륙하기 쉬울 겁니다.” 카라드의 말과 달리 주신전의 정원 역시 나무에 점령되어 있었다. 적당한 장소를 찾지 못한 하마용은 결국 커다란 나뭇가지에 착륙했다. 일행은 우두둑거리며 휘어지는 나무 위에서 서둘러 내려왔다. “입구가 막혔군요.” 디안이 무너져 내린 주신전의 후문을 살피며 말했다. 돌더미 위로 가볍게 뛰어오른 시디발라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기, 저쪽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 무너진 벽을 뒤엉킨 덩굴이 촘촘히 막고 있었다. 검을 꺼내는 디안을 마리엔이 가로막았다. “내가 할게. 자르는 것보다 태우는 게 더 빠르겠어.” 마리엔의 가슴에 달린 보석이 붉게 반짝였다. 다음 순간 앞으로 향한 손에서 튀어나온 불꽃이 뒤엉킨 덩굴을 단번에 태워버렸다. 불꽃의 거인, 이쉼의 힘이었다. 마리엔의 레벨이 올라가면서 그동안 묵혀두었던 정령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뿌듯한 표정으로 변한 마리엔이 칭찬을 바라듯 세영을 쳐다보았다. 피식 웃은 세영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어요. 그래도 그 힘은 너무 과용하지 마요. 마리엔과 상극의 힘이니까.” “네!” 기쁘게 대답하는 마리엔과 달리 시디발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신전 안에서 사용할 횃불을 만들며 물었다. “상극의 힘인데 왜 마리엔에게 불의 정령을 붙여준 거야?” 모래의 탑 앞에서 불꽃의 거인을 굴복시켰을 때, 세영은 굳이 마리엔을 지목해서 거인과 맺어주었다. 그때는 단순히 마리엔을 예뻐해서라고 생각했는데 상극의 힘이라는 말을 들으니 뭔가 좀 이상했다. 시디발라의 손에서 횃대를 받아든 세영이 답했다. “보통 물법사를 공격해야 할 때는 뭘 쓸까?” “…불?” “그래서야. 물법사들은 대부분 불저항력이 낮은 편이거든. 불의 정령을 붙여두면 마리엔의 마법과 충돌하지 않으면서 불저항력을 올릴 수 있지.” 그래서 정령을 잡았을 때 곧바로 마리엔에게 붙여주었다. 이쉼은 제법 높은 등급의 정령이었기에 마리엔의 불저항력도 중급 이상이었다. 설명을 마친 세영이 마리엔에게 경고했다. “그러니까 불의 힘은 되도록 안 쓰는 게 좋아요. 알게 모르게 힘을 깎아 먹거든요.” “…네. 조심할게요.” 마리엔의 귀가 아래로 축 처졌다. 겨우 쓸 만한 능력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용하지 말라니 실망하는 것도 당연했다. 괜히 미안해진 세영이 뺨을 긁적이다 말했다. “음, 지혜의 관에 딸린 스킬 있잖아요. 그건 좀 익숙해졌어요?” “앗, 네. 이제 범위 설정하는 것도 익숙해졌고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이해했어요.” 세영이 관심을 주는 것에 기뻐진 마리엔이 활짝 웃었다. 반지의 블링크를 사용해서 세영의 바로 앞에 쨘 하고 나타난 시디발라가 “나도 이제 잘 써!” 하고 외쳤다. 세영은 대충 그의 머리를 토닥거려주었다. “그동안 열심히 연습하더니 잘됐네.” 칭찬을 받고 신이 난 시디발라가 여기저기를 블링크로 옮겨 다녔다. 여분의 횃불을 만들던 디안이 “정신 사납다. 그만 좀 해.” 하고 투덜거렸다. 시디발라가 얄밉게 히죽거렸다. “너도 써! 너도 팔찌 있잖아!” “필요하면 쓸 거거든?” 디안이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그가 받은 아리스타타의 팔찌에는 바람계열 스킬을 강화하고, 근처의 동물들을 소환하는 힘이 있었다. 생각 없이 팔찌의 힘을 연습하다가 시궁쥐 무리와 비둘기 떼의 습격을 받은 디안은 스킬 연습을 포기해버렸다. “자, 이제 그만하고 들어갑시다.” 리먼이 투닥거리는 동료들을 달랬다. 불을 붙인 횃불을 든 세영이 자연스럽게 앞장을 서려는 것을 카라드가 붙잡았다.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안의 구조에는 익숙하니까요.” “음, 그래요.” 세영은 선선히 횃불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카라드가 먼저 들어가겠다고 우길 때는 그냥 져주는 게 더 나았다. 고집이 세서 한 번 주장을 시작하면 좀처럼 물러서지 않기 때문이다. 들어주면 귀가 쫑긋해져서 기뻐하는 모습도 볼 수 있고. ‘자꾸 이렇게 귀엽게 구니까 사슴에서 못 벗어나는 거라고.’ 속으로 한숨을 쉰 세영이 카라드의 뒤를 이어 안으로 들어갔다. 제가 떼쟁이 사슴으로 찍힌 줄 모르는 카라드는 신중히 앞을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안은 의외로 멀쩡하잖아?” 시디발라가 까마득하게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용을 모시는 곳답게 신전은 높이도 넓이도 엄청났다. 손에 든 횃불로는 안을 다 비춰볼 수 없을 정도였다. “정말 굉장하군요.” 리먼이 거대한 열주와 그 앞에 있는 돌계단을 보며 말했다. 계단 하나의 높이가 성인 남자 키의 세 배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새카만 표면 전체에는 핏줄처럼 보이는 붉은 금이 있었다. 손을 대면 당장 펄떡거리는 맥박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너무 커서 무서워요.” 마리엔이 질린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화려함과 섬세함은 없었지만, 대신 거대한 위압감으로 방문자를 짓누르는 구조였다. 다른 동료들 역시 어깨가 뻣뻣이 굳어있었다. “나, 난 하나도 안 무서워. 나도 용인걸!” 동료들의 뒤에 숨은 하마용이 소심하게 외쳤다. 물론 아무도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세영은 아무 말 없이 계단의 제일 위쪽을 바라봤다. 과거의 영상에서 검은 용이 엎드려있던 자리였다. 주인을 잃은 자리는 그저 공허해 보였다. 옆을 보자 카라드 역시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예.”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로 카라드가 웃었다. 세영은 괜찮냐는 말 말고 다른 것을 물을 걸 그랬다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일단 저 위로 가보죠. 후와와. 날 수 있지?” “으, 응? 나 좀 무서운데….” 하마용이 계단으로 가기 싫다는 듯이 엉덩이를 뒤로 뺐다. 세영이 어디를 때릴까 고르고 있자 시디발라가 얼른 앞으로 나섰다. “조사하러 온 거니까, 날아가는 것보다 다른 곳도 살피면서 걸어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마용을 구하기 위해 한 말이지만,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다. 세영은 힐끗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모두가 별 상관없다는 뜻을 표하자 그녀는 카라드에게 물었다. “계단 위로 올라가는 길 있어요?” “예. 계단 옆에 신녀들을 위한 길이 따로 있습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카라드가 답했다. 결국, 그들은 둘씩 짝을 지어 사방을 수색한 뒤에 계단 앞에서 다시 모이기로 했다. 하마용은 언제나처럼 시디발라를 따라갔다. 어느새 세영은 카라드와 짝이 된 후였다. 동료들이 아주 당연한 듯 두 사람을 남겨두고 떠났고, 카라드도 그것에 별 위화감을 못 느끼는 것 같았다. 어색하게 뺨을 긁적인 세영이 “뭐, 빨리 가죠.” 라고 재촉했다. 수줍게 웃은 사슴이 조금 앞에서 횃불을 비추었다. 오랫동안 어둠에 잠겨있던 기둥들이 벌거벗은 알몸을 드러냈다. 불빛에 길게 늘어진 카라드의 그림자가 기둥 위로 기묘한 일렁임을 만들었다. 순간 위화감을 느끼고 시선을 줬지만, 단지 오래된 기둥이 서 있을 뿐이었다. ‘잘못 본 건가?’ 세영은 신경이 점점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무겁게 눌어붙는 이곳의 공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유령처럼 창백하게 보이는 사슴의 모습도 거슬렸다. 당장 여기서 끌고 나가서 햇빛에 말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바로 그때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응?” 걸음을 멈춘 세영이 주변을 살피자 카라드가 “뭔가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맵을 확인했지만, 역시 특별한 것은 나타나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생각한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결국, 계단 앞에 닿을 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동료들을 발견한 세영이 미소 지었다. 괜히 긴장했다는 생각에 맥이 풀리는 것 같았다. 다시 걸음을 내딛는 순간, 그녀의 발밑에서 붉은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어, 어? 저거 뭐야?” 제일 먼저 이상을 감지한 것은 시디발라였다. 세영이 디딘 바닥이 점점 붉은 빛으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붉은 기운은 그녀가 걸어 들어온 길과 계단을 향해서 뿌리처럼 번져나갔다. 미처 막을 새도 없이 그것이 계단에 닿았다. -그그그긍 그러자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계단이 진동했다. 갈라진 틈처럼 보이던 붉은 선들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갑작스러운 흔들림에 비틀거리는 동료들을 본 세영이 소리쳤다. “후와와에 타요! 빨리!” 뒤늦게 정신을 차린 동료들이 후와와로 향했지만, 이미 때가 늦어있었다. 계단 쪽에서 번쩍하고 뭔가가 폭발했다. 노도처럼 솟구친 어둠이 그들을 덮쳤다. 세영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을 깜빡여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칠흑과 같은 어둠이 사방을 꽉 메우고 있었다. 손을 들어 눈앞에 가져다 댔지만, 그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완벽한 어둠에 잠긴 것은 처음이었다. “사슴 씨?” 입을 열어 소리를 냈지만, 목소리까지 어둠에 먹혀버렸다. 제가 한 말이 귀로 들리지 않는 것은 꽤 이상한 기분이었다. 미간을 찌푸린 세영이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제대로 걷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감각이 뒤틀리는 기분에 세영은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분명 이쯤에 사슴이 있었는데.’ 세영은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갔다. 맵이 있었으면 좀 더 쉬웠겠지만, 그것마저 어둠에 덮인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예상했던 자리에 사슴이 없어서 몇 번 헤매다 보니 나중엔 방향마저 알 수가 없었다. 난감해진 세영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어떻게 하지?’ 머리를 굴려 봐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게임에선 갑자기 이렇게 환경이 바뀔 때는 적이 나타날 때였고, 적을 처지하고 나면 원래대로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문제는 어디에도 적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동료들 쪽을 덮친 거면….’ 미간을 찌푸린 세영이 몸을 돌릴 때였다.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덥석 움켜쥐었다. 반사적으로 공격하려던 그녀는 저를 꽉 끌어안는 팔에 멈칫했다. 따끈따끈한 품이 묘하게 익숙했다. “사슴 씨?” 보이지 않는 곳으로 손을 뻗자 기다렸다는 듯이 뺨을 비벼온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세영이 경계를 풀었다.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춘 사슴이 손바닥 위에 글자를 썼다. <괜찮으십니까> 간지러운 느낌에 손을 꼼지락거린 세영이 사슴의 손을 찾아 답했다. <ㅇㅇ> 움찔한 사슴이 더듬더듬 그녀의 머리와 어깨를 만졌다. 뒤늦게 그가 못 알아들은 것을 눈치챈 세영이 좀 더 성의 있는 답변을 썼다. <괜찮아요 사슴 씨는> <괜찮습니다> 사슴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아왔다. 어쩐지 뜨끈뜨끈하다고 했더니 지금까지 어둠 속을 뛰어다닌 모양이었다. 용케 찾아온 것이 대견하고 고마워서 마주 꼭 쥐고 있다가 깍지로 바꾸었다. 움찔한 손가락이 이내 단단히 얽혀들었다. “일단 사슴은 챙겼고, 나머지는 어쩐다.” 주변을 휙휙 둘러보던 세영이 “인벤!” 하고 외쳤다. 사실 별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시야에 인벤창이 떴다. 의아하게 눈을 깜빡이던 세영은 인벤창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병을 발견했다. 아리스타타가 그녀에게 주었던 푸른 병이었다. 세영은 인벤에서 그것을 꺼냈다. 중지 정도의 반투명한 병 안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액체가 살아있는 것처럼 꾸물거리고 있었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가느다란 병목에 <나를 마셔요>라고 쓰인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세영이 상세 정보를 확인했다. [새벽의 빛이 담긴 물병] 아이템 속성 -달빛 호수의 엘프들이 손에 넣은 보물. 대대로 수장에게 전해져 내려왔다. -신비한 힘이 잠들어 있는 듯하다. 상세 정보만 봐서는 이것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병을 들고 사방을 비춰보려던 세영은 이내 주변을 확인하려는 것을 포기했다. 병은 그 자신만 빛날 뿐 주변을 전혀 밝히지 못했다. ‘결국, 이걸 먹어야 뭔가가 진행된다는 소리군.’ 해결방법이 하나밖에 없는 이벤트라면 어쩔 수 없었다. 세영은 뚱한 얼굴로 병 속에서 움실거리는 액체를 노려보았다. “맛없게 생겼다.” 꾸무럭거리는 모습이 물이 아니라 슬라임에 가까워 보였다. 한숨을 삼킨 세영이 입으로 병뚜껑을 딴 후에 안에 든 것을 마셨다. 차갑고 미끄덩한 것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썩 좋지 않았다. 으엑 하고 미간을 찌푸리던 그녀는 갑자기 몸이 부웅 떠오르는 것 같은 것을 느꼈다. 다음 순간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세영님?” 남자는 깍지를 끼고 있던 세영의 손이 움찔하는 것을 느꼈다. 다음 순간 맞잡은 손에서 힘이 빠지더니 세영이 옆으로 스르륵 쓰러졌다. 반사적으로 그녀를 받아 안은 남자가 “세영님!” 하고 소리쳤다. 그의 외침에 응답하듯 주변을 메운 어둠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술렁거리던 어둠이 날개를 접었다. 시야가 확 트이는 순간 기둥 옆에 있는 화로들에서 푸른 불꽃이 솟구쳤다. 순식간에 밝아진 신전이 주변을 헤매고 있던 동료들을 드러냈다. “다들 어디 갔어어어! 엇?!” “마리엔!” “앗! 원래대로 돌아왔다!” 빛과 소리를 되찾은 동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남자는 동료들이 아닌 머리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신전의 천장에 고인 어둠이 세영을 향해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안 돼!” 온몸으로 세영을 감싼 남자를 비웃듯 어둠이 그녀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남자는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비명 같은 그의 목소리에 놀란 동료들이 달려왔다. “세영님!” 리먼이 다급히 세영의 상태를 살폈다. 파리하게 눈을 감은 세영은 숨을 쉬지 않았다. 급히 신성력을 끌어올린 그가 치유의 힘을 퍼부었지만, 세영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손에 쥐고 있는 병을 발견한 남자가 급히 고개를 숙여 차가워진 입술에 숨을 불어넣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놀라서 제자리에 주저앉은 시디발라가 물었다. 하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새파랗게 질린 마리엔이 떨리는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디안 역시 멍한 눈으로 앞을 보고만 있었다. “안 돼, 제발! 세영님! 이러지 마십시오!” 몇 번이나 숨을 불어넣던 남자가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뭐가 잘못됐는지 알 수 없었지만, 세영이 조금 전의 어둠을 걷어 내려다가 이렇게 됐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미칠 것 같은 기분으로 다시 숨을 불어넣었다. “세, 세영님. 세영님! 안돼요!” 털썩 무릎을 꿇은 마리엔이 기듯이 다가가 세영의 손을 붙잡았다. 흐느끼는 그녀를 본 시디발라가 “…거, 거짓말이지?” 하고 물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하마용이 그의 등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트렸다. 계속해서 숨을 불어넣던 남자는 아주 작은 숨결을 느꼈다. 멈춰있던 호흡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서둘러 입술을 떼어내자 작게 쿨럭 기침을 한 세영이 숨을 쉬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멍해졌던 남자가 떨리는 손을 내밀어 세영의 호흡을 확인했다. “…아.” 안도한 남자가 쓰러지듯 엎드렸다. 그는 세영의 입술에 입 맞추며 몇 번이나 감사하다고 속삭였다. 세영의 호흡이 안정적으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리먼이 그제야 치유를 거두었다. 시디발라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괘, 괜찮아? 살아났어?” “예, 이제 괜찮습니다.” 리먼의 확답에 동료들의 얼굴에 안도가 번졌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마리엔이 아까보다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상태에서 벗어난 디안이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노, 놀랐잖아. 진짜 죽은 줄 알았단 말이야.”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하마용이 투덜거렸다. 그제야 몸을 일으킨 남자가 세영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고개를 숙이고 소리 없이 우는 그를 동료들은 모두 못 본 척해주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신전이 무너질 것처럼 세차게 흔들렸다. 천장에서 툭툭 떨어지는 낙석에 동료들이 비명을 올렸다. 꽈르릉 소리와 함께 신전의 한쪽 벽이 무너지더니 새하얀 뼈로 된 용의 머리가 나타났다. ──────────────────────────────────── 용의 신전 (6) “본드래곤!” 디안이 경악하며 외쳤다. 길쭉한 머리를 들이민 본드래곤은 비블레스 항구에서 본 것보다 더 흉악한 모습이었다. 온몸에서 삐죽삐죽 솟아오른 가시 때문에 고슴도치처럼 보였다. 뼈만 남은 앞발로 무너진 벽을 긁어낸 본드래곤이 육중한 몸을 들이밀었다.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는 통에 신전 전체가 우르릉 흔들렸다. “이러다가 무너지겠어!” 시디발라가 머리 위로 떨어지는 돌을 피하며 외쳤다. 디안이 서둘러 동료들을 재촉했다. “빨리 후와와에 타. 여길 빠져나가야 해!” 세영이 의식이 없는 상황에서 본드래곤과 싸우는 것은 승산이 없었다. 디안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동료들이 서둘러 하마용 쪽으로 달려갔다. “카라드 씨! 어서요!” 마리엔의 재촉에 남자도 세영을 안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다음 순간 섬뜩한 것을 느낀 그는 급히 마리엔을 밀어냈다. 마리엔이 디안 쪽으로 엎어지자마자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 화살이 박혔다. “리먼!” 디안의 외침과 거의 동시에 우윳빛의 막이 펼쳐졌다. 뒤늦게 비처럼 쏟아진 화살비가 방어막을 두드렸다. 마지막으로 화염 마법으로 보이는 것이 날아와 화려하게 터졌다. 계속된 공격에 리먼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방어막이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후와와, 빨리!” 하마용을 재촉하려던 디안이 멈칫했다. 바닥에 웅크린 하마용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당황한 시디발라가 그를 달랬지만, 하마용은 “시, 싫어… 난나….” 하고 겁에 질린 목소리를 토해낼 뿐이었다. 본드래곤이 내뿜는 공포에 완전히 잠식당한 것 같았다. “어딜 그렇게 급히 가는 거냐. 짐이 너희를 보러 왔거늘.” 남자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신전의 입구를 가로막은 적들이 보였다. 남자는 그들 중 어렵지 않게 목소리를 주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카벨의 어머니, 올리비아를 목줄로 그를 오랫동안 묶어두었던 자였다. “로토!” “주인을 배신한 개가 여기에 있었군.” 불쾌한 듯 입술을 일그러뜨린 로토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대기하고 있던 궁수와 마법사들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계속 방어막을 펼치는 리먼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마리엔이 서둘러 뼈의 방패를 만들었지만, 그 또한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일어나, 어서 일어나라고! 이럴 시간이 없어!” 시디발라가 하마용의 엉덩이를 퍽퍽 걷어찼다. 그때 다시 손을 들어 공격을 멈추게 한 로토가 입을 열었다. 마법이라도 썼는지 또렷한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모두 죽일 생각은 없다. 신기와 배신자만 넘겨준다면 구원자와 너희들은 보내주지.” 멈칫한 남자가 세영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숨은 쉬지만, 여전히 파리하게 질린 얼굴이었다. 로토가 한층 더 간사하게 말을 이었다. “생각해봐라. 너희에게 중요한 것은 구원자가 아니냐? 신기와 배신자를 내려놓고 떠난다면 붙잡지 않겠다. 짐의 이름을 걸고 약속한다.” “웃기지 마라!” 디안이 로토의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분노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시디발라가 그에 이어서 악을 썼다. “카라드는 우리 동료라고! 너 따위에게 넘길 것 같아?!” 마리엔은 뭐라고 말하는 대신 3연발 워터픽을 날렸다. 로토를 둘러싼 막에 가로막혀 타격을 입히진 못했지만, 거절의 뜻만은 분명히 전해졌다. 막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를 보고 얼굴이 굳어진 로토가 벽에 끼인 본드래곤을 불렀다. “라하무여! 건방진 적들에게 너의 힘을 보여주어라!” ‘이름을 건 약속’ 때문에 세영을 놓쳤던 그는 쌍두룡의 이름을 지우고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주인의 명령을 받은 본드래곤이 거대한 입을 벌려 브레스를 토해냈다. 신들의 영혼까지 불태우는 화염이 일행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단지 스치기만 했을 뿐인데 방어막과 본쉴드가 산산이 부서졌다. 타격을 받은 리먼이 울컥 피를 토해냈다. “리먼!” 놀란 디안이 그를 부축했다. 로토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생각이 바뀌었나?” 그때였다. 떨리는 다리로 자리에서 일어선 하마용이 일행에게 등을 내밀며 소리쳤다. “빠, 빨리 타! 어, 어떻게든 빠져나가 볼 테니까!” 여전히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하마용이었지만, 네 다리로 버티고 있었다. 일행은 누가 뭐랄 것도 없이 그의 안장으로 뛰어들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하마용이 부들부들 떨리는 날개를 활짝 폈다. “나, 난나가 사라졌어. 난마는 내 힘으로 편하게 해줄 거야. 절대 여기서 지지 않아!” 일행은 그제야 본드래곤의 머리가 하나로 줄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벽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또 하나의 머리가 이어지는 곳이 잘려나간 듯 끊어져 있었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 잔재주를 부리는군.” 위로 날아오른 하마용을 본 로토가 혀를 찼다. 주인의 의지에 반응한 본드래곤이 충격파를 발산했다. 필사적으로 날개를 퍼덕인 하마용이 부채꼴의 공격범위에서 벗어났다. 충격파로 인해 신전 전체가 흔들리며 낙석이 후두둑 떨어졌다. 리먼이 필사적으로 방어막을 펼쳤다. “시작해라.” 로토의 손짓에 방패를 든 병사들이 전진했다. 그 뒤를 궁수와 마법사부대가 뒤따랐다. 거대한 작살을 쏘기 위한 상자노도 있었다. 본드래곤의 공격으로 일행을 구석으로 몰고 포위하여 생포하려는 듯했다. “다른 출구는 없어?” 신전 안을 빙글빙글 돌던 하마용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하지만 신전의 입구는 모두 무너지거나 돌로 가로막힌 상태였다. 유일한 출구는 로토와 기사들이 막고 있는 그곳뿐이었다. 무리를 해서라도 뚫고 나가자고 의견을 모았지만, 본드래곤이 브레스와 충격파로 견제해서 다가갈 수가 없었다. 가끔은 긴 꼬리가 채찍처럼 휘둘러지기도 했다. 결국, 하마용은 점점 더 구석으로 몰렸다. “조심해!” 시디발라의 외침에 하마용이 급히 몸을 뒤틀었다. 거대한 작살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충격파가 미치지 않는 곳에 진을 친 적들이 본격적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리먼이 급히 방어막을 펼쳤지만, 막의 색이 점점 옅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마리엔이 그를 대신해서 물의 장막을 펼쳤다. 다른 이들도 모리아에서 언데드들을 공략했던 것처럼 움직였다. 일행은 곧 난항을 겪었다. 인간과 언데드의 공격방식은 달랐다. 무엇보다 리먼의 방어막이 있을 때는 그들 또한 공격할 수가 없다는 점이 치명적이었다. 인간은 신성력에 타격을 입지 않아 반격의 타이밍이 매끄럽지가 못했다. 방어막을 거두었다가 곧바로 날아오는 공격에 급히 다시 막을 펼치기 일쑤였다. 그나마 마리엔의 대단위 마법이 활약을 보였지만, 연속으로 쓸 수가 없는 데다가 꾸역꾸역 밀려드는 적들을 모두 상대하긴 역부족이었다. ‘이대로는 잡히고 만다.’ 새파랗게 질린 리먼과 힘겨워하는 하마용을 본 남자는 눈을 감았다. 판단은 처음부터 했다. 선뜻 결심할 수가 없었을 뿐이다. 눈을 뜬 그는 세영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불같이 화를 내시겠구나.’ 벌써 화를 내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미소 지은 남자는 디안을 향해 말했다. “디안, 제가 길을 뚫겠습니다. 세영님을 잘 부탁합니다.” “응? 뭐라고?” 공격에 여념이 없던 디안이 조금 늦게 반응했다. 남자는 세영을 안장에 단단히 고정한 후 아래로 뛰어내렸다. 동료들이 비명처럼 그를 불렀다. 마법을 써서 안정적으로 바닥에 착지한 남자가 검을 휘둘러 날아온 화살을 쳐냈다. “뭐, 뭐하는 거야! 갑자기 뛰어내리면 어떻게 해!” 놀란 하마용이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남자는 그에 대꾸하지 않았다. 공격을 멈추게 한 로토가 그를 보고 비웃음을 지었다. “진작 내려왔으면 고생을 안 했을 텐데.” 남자는 로토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말없이 묵묵히 다가오는 그를 보고 미간을 찌푸린 로토가 본드래곤을 향해 손짓했다. “태워버려라.” 그그긍 소리와 함께 본드래곤의 입이 벌어졌다. 브레스를 뿜어내려는 것을 느낀 동료들이 “안 돼!” 하고 비명을 질렀다.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것처럼 하마용이 본드래곤을 향해 돌진했다. 그보다 한발 앞서 바닥에서 솟구친 그림자가 본드래곤의 주둥이를 묶었다. 당황한 본드래곤이 머리를 털었지만, 그림자는 오히려 더 단단히 들러붙었다. 거의 동시에 땅에 발을 디딘 모든 자들이 자신의 그림자에 붙들렸다. “으악! 이게 뭐야!” “몸이 안 움직여!” 그림자에 삼켜지는 인간들이 헛된 몸부림을 쳤다. 공격당하지 않은 것은 동료들과 로토뿐이었다. 로토의 막이 제게 덤벼드는 그림자를 밀어내고 있었다. 제자리에 못 박힌 로토가 유령처럼 다가오는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감히! 이런 수작으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로토의 손등에 박힌 보석이 붉은빛을 뿜어냈다. 하지만 남자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로토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심장이 뒤틀리는 것 같은 통증과 함께 피 냄새가 올라왔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세 번째 힘은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아리스타타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에레슈키갈이 양자인 그에게 내려준 세 가지 능력, 그중 세 번째인 그림자를 움직이는 힘은 대가로 수명을 요구했다. 아리스타타는 그가 요절할 것을 우려하여 세 번째 힘은 사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래서 남자가 이 힘을 제 의지로 사용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에 불과했다. ‘어머니, 당신은 어디까지 보셨습니까.’ 어둠을 통해 아득한 미래를 내다보았던 그림자용. 남자는 자신의 양모가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지 궁금했다. 나스쿤의 생명을 나눠 받고, 수호목의 열매를 먹은 일까지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쿨럭 기침을 토해냈다. 가슴을 태우는 불덩이가 목을 타고 치솟더니 죽은 피가 되어 쏟아졌다. 검붉은 핏덩이를 토해낸 그는 로토와의 거리를 가늠했다. 생각보다 생명력의 소모가 빨랐다. 이대로라면 로토에게 다가가기 전에 먼저 그의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다.’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시도하고 싶었지만, 서둘러 움직였다가 집중력이 깨어져 그림자가 풀려버릴 수도 있었다. 더는 움직이는 것을 포기한 남자는 들고 있던 검으로 손목을 그었다. 선명한 붉은 색을 띈 피가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머니 에레슈키갈이여, 제 기도를 들으소서.” 한 번도 자신의 생명이 아깝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의미 없는 생명이 있다면 그게 바로 자신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 남자는 진심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격히 사라지는 제 생명이 안타깝고 아까웠다. 그것에 감사했다. “태초의 어둠이시여, 명계의 수호자여. 여기 제 피를 제물로 바치오니 성전을 범한 무도한 자들을 벌하소서.” 에레슈키갈의 본질은 어둠이다. 그녀는 명부와 지상을 가르는 상징이며, 명계의 입구를 지키는 수호자였다. 그녀가 거하는 신전은 지상에서 가장 명부에 가까운 곳. 모든 조건이 맞춰진 지금이 차라리 운명처럼 느껴졌다. 남자의 피가 떨어진 자리가 검게 물들었다. 정확히는 검고 깊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남자를 중심으로 순식간에 확장된 구멍이 그림자에 묶인 인간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명부의 깊은 곳에서 기어 나온 어둠이 산 자들의 발목을 낚아챘다. -그그이이잉! 어둠에 휘감긴 본드래곤이 구멍 안으로 끌어당겨 졌다. 육중한 거체가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치면서 남아있던 벽을 무너뜨렸다. 충격을 견디지 못한 신전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와르륵 무너지는 천장에 남자의 머리 위를 맴돌던 동료들이 비명을 질렀다. 남자는 인간들을 붙잡고 있던 그림자를 거둬 동료들을 덮치는 낙석을 걷어냈다. 천장이 무너져 빠져나갈 틈이 생긴 것을 확인한 그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검에 기대어 몸을 지탱한 그가 이를 악물었다. “제발… 빨리….” 한계가 오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동료들이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로토를 끌고 명부에 떨어진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었다. 허공을 맴돌던 하마용이 다가오는 어둠을 피해서 위로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안도감에 눈을 감았다 떴다. ‘태어난 의미를 정할 수 있다면… 당신을 지키는 것으로 하고 싶었습니다.’ 세영이 원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안다. 그녀는 지켜지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남을 지키기 위해서 항상 등을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안타까워 손을 끌어 제 뒤에 서게 했다. 그럴 때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는 모습이 좋았다. 계속 보고 싶었다. 남자는 바닥에 떨어진 눈물을 손으로 지워버렸다. 구멍의 가장자리에 매달려있던 본드래곤이 굴러떨어졌다. 하지만 로토는 끝까지 발악했다. 어둠에 휘감긴 막 때문에 그는 검은 구체처럼 보였다. 조금씩 구멍으로 끌려들어 가는 구체를 보던 남자가 스르륵 옆으로 쓰러졌다. 이것이 끝이라 생각해서인지 마음이 평안했다. “정신 차려!”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반쯤 정신을 잃었던 남자는 간신히 눈을 떴다. 잔뜩 화가 난 얼굴의 시디발라가 그의 몸을 붙잡았다. 그는 거의 고함처럼 소리쳤다. “누가 죽게 내버려둘 줄 알아!?” 어디선가 요란한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디안이 팔찌의 힘으로 불러들인 새들이 시디발라를 잡으려는 어둠을 교란하고 있었다. 동료들이 자신을 구할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은 남자가 급히 말했다. “안 됩니다. 저는 여기 남아서 문을 닫아야…!” “바보 멍청아! 조용히 해! 누가 너한테 그런 거 하래!” 악을 쓴 시디발라가 남자를 붙잡은 채로 블링크를 썼다. 그는 파다닥거리는 새들의 머리를 계단처럼 밟으며 계속 위로 이동했다. 무리한 블링크의 사용으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남자가 빠져나가려는 것을 감지한 어둠이 일제히 위로 치솟았다. 동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스킬을 썼다. “블레이드 스톰!” “워터볼!” 스킬을 맞은 새들이 폭풍에 휩쓸린 것처럼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혼란을 느낀 어둠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시디발라는 무사히 하마용의 등에 도착했다. 동료들이 펑펑 우는 얼굴로 두 사람을 붙잡았다. 쓰러지듯 안장에 기댄 시디발라가 웩웩거리며 토하기 시작했다. “둘 다 괜찮아?!” “무사해서 정말 다행입니다!” 동료들의 외침에 남자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로토는 에레슈키갈의 심장을 갖고 있었다. 제대로 문을 닫지 않으면 명부에 떨어진다고 해도 다시 기어 나올 터였다. 하지만 그의 모든 반론은 시디발라의 외침에 가로막혔다. “죽지 마! 죽으면 절대 용서 안 할 거야! 쟤도 용서 안 하고 나도 용서 안 해!” 울먹이는 목소리에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다른 것보다 다시 보게 된 세영의 얼굴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걱정과 같은 안도를 느끼며 의식을 잃었다. 그 사이 하마용은 필사의 날갯짓으로 신전에서 멀어졌다. 점점 넓어지는 구멍이 치솟은 나무와 남아있던 건물들을 집어삼켰다. 더 이상 삼킬 것이 없자 마지막으로 비명 같은 울림을 내뱉은 구멍이 순식간에 닫혀버렸다. 충격으로 신전이 있던 절벽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뒤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비탄의 들판 (1) ‘아무것도 안 변하네.’ 세영은 일렁거리는 어둠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아리스타타가 약을 판 것인지 잠깐 붕 뜬 느낌이 든 것 외에는 변하는 게 없었다. 흐음 소리를 낸 그녀가 뺨을 긁적였다. ‘어, 사슴 씨가 어디 갔지?’ 뒤늦게 손을 붙잡고 있던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세영이 움찔했다. 주변을 휙휙 둘러보는 그녀의 귓가에 웃음소리가 스쳤다. -…재미있구나. 여자의 웃음소리였다. 소리가 들리는 쪽을 돌아보는 순간 갑자기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 갑자기 사람이 북적이는 장소로 변했다. ‘이벤트 영상?’ 이제야 뭔가 시작되나 보다 생각한 세영이 주변을 살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둥글넓적한 흰 모자를 쓴 남자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상의와 넓게 접어 올린 소매가 눈에 익었다. 조르디아에서 흔히 봤던 옷차림이었다. -저기 나오신다! 누군가 외치자 뒤이어 함성이 잇따랐다. 앞으로 달려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사적으로 피하려던 세영은 저를 뚫고 지나가는 팔에 미간을 찌푸렸다. 손을 내려다보자 반투명해져서 아래의 바닥이 보일 정도였다. 이벤트 영상은 많이 봤어도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하던 세영은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사람들을 뚫고 지나가는 건 불쾌했지만, 꽤 신기한 경험이었다. 마침내 선두로 나선 그녀는 사람들이 뭘 보고 환호하는지 확인했다. 저 멀리에 눈에 익은 탑이 있었다. 세영은 그것이 ‘태양의 탑’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활짝 열린 문으로 공작새처럼 치장한 라오 조드가 걸어 나왔다. 탑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막전사와 나샴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왕이시여! -폐하께 충성을! -조르디아에 영광을! 한목소리로 외치는 전사들을 보고 군중은 환호했다. 라오 조드는 여유 있는 동작으로 손을 흔들었다. 함성이 더욱 커졌다. 세영은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그가 코끼리 위에 올라서 행진하는 모습을 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럼 이건 어떠니. 다시 한 번 풍경이 바뀌었다. 이번에 보인 것은 황량한 들판이었다. 한 떼의 구울이 무리 지은 병사들을 덮쳤다. 날카로운 발톱이 방패를 긁었다. 내리찍는 힘을 견디다 못한 병사가 나동그라지자 곧바로 피가 튀어 올랐다. -살려줘! 아아악! 환영처럼 너울거리는 망령, 레이스에게 휘감긴 기사가 비명을 질렀다. 그에 답하듯 웃음처럼 날카로운 소리를 낸 헬가스트가 희생자의 체액을 빨아먹기 시작했다. 세영은 떼죽음을 당하는 인간들을 감정 없는 눈으로 바라봤다. 선두가 무너지자 언데드의 무리가 대열 안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공포에 질려 달아나는 자들까지 나타났다.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인간들 위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내려앉았다. 그때였다. -라무, 라하무여! 놈들을 죽여라! 누군가의 외침이 혼란을 갈랐다. 뒤이어 터져 나온 브레스가 언데드와 한 무리의 병사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남은 것은 검게 그을린 대지뿐이었다. 세영은 본드래곤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로토.” 저 재수 없는 면상을 이벤트 영상에서까지 보게 되다니. 투덜거리는 순간 본드래곤이 충격파를 발산했다. 브레스에서도 살아남았던 언데드들이 폭죽처럼 터져나갔다. 물론 선두에 있던 인간들도 마찬가지였다. -끼기긱! 충격파로 분열된 헬가스트 한 마리가 쏜살같이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남아있는 언데드는 물러나지 않고 공격을 계속했다. 언데드들이 인간들을 죽이고, 본드래곤이 그런 언데드들을 죽이는 일이 반복되었다. 대지가 새카맣게 물들었다. -후퇴! 후퇴하라! 로토는 그제야 인간들을 뒤로 물렸다. 본드래곤이 언데드들을 견제하는 사이 병사들이 살아남은 자들을 챙겨 뒤로 물러섰다. -본드래곤이여!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라! 로토가 손을 뻗자 새카맣게 물든 땅에서 솟은 핏줄기와 언데드의 잔해가 본드래곤 쪽으로 끌려갔다. 마침내 그것들을 흡수한 본드래곤의 몸뚱이가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온몸에 돌기가 솟아 흉측하게 변한 본드래곤이 포효했다. -날개는 아직 완성되지 못했군. 일그러진 날개를 확인한 로토가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그때 검붉은 사기가 날아왔다. 로토의 막이 사기를 튕겨냈다.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린 로토가 사기가 날아온 쪽을 바라봤다. -인간이 무슨 일로 이 땅을 침범했느냐. 유령마에 탄 기사가 그를 향해 물었다. 그의 뒤로 붉은 사기가 노을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기사의 어깨에 앉은 헬가스트가 끼긱거리는 소리를 냈다. 본드래곤이 주인을 보호하려는 듯이 앞으로 나섰다. -너는 뭐지? 언데드인가? -나는 이곳에서 속죄하는 자일 뿐. 돌아가라. 지금은 객을 받을 수 없으니. 기사의 축객령에 로토는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는 잔뜩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그렇군. 짐은 그대를 알고 있다. 영광을 빼앗긴 과거의 영웅, 주신에게 속은 희생자. 성기사 펠릭스여. 펠릭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가 탄 유령마가 주인의 불편한 심기를 대변하듯 히힝거리는 울음을 토해냈다. 하지만 로토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짐과 손을 잡지 않겠는가. 짐이 그대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 신에게 복수할 기회를,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기회를 주겠다! -…영광. 쓴웃음을 지으며 그의 말을 되풀이한 펠릭스가 말을 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나도 네가 누구인지 알겠군. 마도왕이여. 하지만 내가 왜 너를 따를 거라 생각하지? -우리는 공통의 적을 두고 있지 않나? 너를 그렇게 만든 자들에게, 신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은 건가? 로토의 목소리가 한층 유혹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의 제안은 펠릭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 것 같았다.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던 펠릭스가 말했다. -너는 내 동생을 착취한 자. 그리고 내 주인의 적. 신과 손을 잡을 수는 있어도 너와는 손을 잡을 수 없다. 그의 뒤로 몰려든 언데드들이 시야를 검붉게 물들었다. 붉은 사기를 안개처럼 뿌리는 언데드들을 본 인간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냈다. 펠릭스가 손에 든 검을 로토에게 겨누었다. -마도왕이여, 내가 이곳에 있는 한 너를 지나가게 하지는 않겠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언데드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황한 로토가 막아라! 하고 비명을 질렀다. 본드래곤이 브레스를 내뿜었지만 그건 고작 한 떼의 언데드들을 없앴을 뿐이다. 파도처럼 밀려든 언데드들이 본드래곤을 덮쳤다. -그그그그응! 사방으로 충격파를 내지르던 본드래곤이 언데드들에게 둘러싸였다. 순식간에 본드래곤의 몸을 타고 오른 언데드들이 맹렬하게 공격했다. 비행 언데드들은 본드래곤의 머리를 뒤덮고 시야를 가렸다. 휘청거리던 본드래곤이 썩은 나무처럼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 모습이 불개미떼에게 물어뜯기는 사마귀 같았다. -살아있는 모든 자를 죽여라. 붉은 안광을 빛낸 펠릭스가 명령했다. 순식간에 두 무리로 나누어진 언데드들이 인간들을 덮쳤다. 노도처럼 밀려드는 언데드의 공격에 인간들은 명령도 듣지 않고 흩어져 달아났다.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낸 괴조들이 인간들을 낚아채서 허공에 내던졌다. -이, 이럴 수는 없다! 이런…! 스켈레톤에게 둘러싸인 로토가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는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지만, 꾸역꾸역 밀려드는 언데드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사방을 둘러보던 로토가 제 손을 움켜쥐었다. -도우소서! 나의 신이여! 당신의 뜻을 따르는 저를 저버리지 마소서! 순간 그의 왼쪽 손등에 박힌 붉은 보석이 크게 일렁였다. 커다란 눈동자처럼 껌뻑이던 <용의 눈>이 빛을 뿜어냈다. 동시에 바닥에 쓰러져 버둥거리던 본드래곤의 몸에서도 검푸른 빛이 나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본드래곤의 몸에 달라붙어 있던 언데드들이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뭐냐…!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펠릭스가 인간들에게 향하던 유령마의 고삐를 돌렸다. 몸을 일으킨 본드래곤이 길게 포효했다. 거대한 몸을 뒤덮은 기운은 다름 아닌 신성력이었다. 급히 달려들던 언데드들이 본드래곤의 몸에 닿자마자 소멸했다. 로토가 광소를 터트렸다. -보았느냐! 이것이 바로 정의다! 상황이 반전됐다. 본드래곤은 닥치는 대로 언데드 무리를 쓸며 지나갔다. 순식간에 불타서 재가 되는 언데드로 주변의 공기가 뿌옇게 물들었다. 본드래곤이 내뿜는 신성력에 땅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가까스로 숨을 틔웠던 것들이 다시 죽어가기 시작했다. -이놈! 분노로 일갈한 펠릭스가 말을 재촉했다. 날카로운 울음을 내뱉은 유령마가 본드래곤을 향해 돌진했다. 유령마가 소멸하기 직전 본드래곤의 위로 뛰어오른 펠릭스가 검을 휘둘렀다. 붉은 사기로 뒤덮인 검과 신성력이 부딪히며 요란한 스파크를 만들었다. 몸을 홱 돌린 본드래곤이 펠릭스의 몸을 낚아채려 했다. 왕을 지키기 위해 언데드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닿는 순간 소멸해도 수없는 언데드들이 부딪치는 충격은 무시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본드래곤이 휘청거리는 사이에 펠릭스는 놈의 어깨로 뛰어올랐다. 펠릭스의 갑옷이 붉게 달아올랐다. 강화된 그의 갑옷은 최고위 성직자들이 몰려와 신성력을 퍼부어도 끄떡없을 정도로 견고했다. 하지만 본드래곤을 감싼 정체불명의 신성력에 갑옷은 점점 형체를 잃고 녹아내렸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음을 느낀 그의 얼굴이 결연해졌다. -너만은 내가 데리고 가겠다! 펠릭스가 온 힘을 다해 본드래곤의 목에 검을 꽂아 넣었다. 그의 검이 횃불처럼 불타올랐다. 비명을 지른 본드래곤이 몸부림을 쳤다. 인간들 쪽으로 몰려갔던 언데드들이 돌아와 본드래곤에게 달라붙었다. 아주 잠깐의 틈, 그것으로 충분했다. 펠릭스의 검이 본드래곤의 목 하나를 잘라낸 것과 본드래곤이 그를 움켜잡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날카로운 울부짖음을 내뱉은 본드래곤이 펠릭스를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부서진 인형처럼 바닥을 구르던 펠릭스가 본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하나만 남은 머리를 확인한 후 희미하게 미소 지은 그가 중얼거렸다. -기다리지 못해서… 미안하다. 본드래곤의 브레스가 그를 덮쳤다. 시뻘겋게 타오른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다시 처음의 공간으로 돌아온 것을 깨달은 세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펠릭스가 죽었다. 아니, 이미 죽은 놈이니 소멸했다고 해야겠지만. 어쨌든 사라졌다. 강화된 소환수를 잃은 것 이상의 허탈감이 그녀를 덮쳤다. -그것은 미래, 그리고 이제는 과거가 된 것.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처음 들었던 여자의 목소리였다. 주먹을 꾹 움켜쥔 세영이 앞을 노려보며 말했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면상은 보이고 말을 하지그래.” 그래야 팰 수 있지. 속말을 감춘 세영의 말에 답하듯 공간을 가르며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 세영은 순간 멈칫했다. 긴 검은 머리에 검은 눈, 하얀 얼굴, 길고 우아한 목선을 가진 여자는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황금의 관을 머리에 이고 풍성한 주름이 잡힌 옷을 입은 모습이 눈에 익었다. 기억을 더듬느라 미간을 찌푸린 세영이 물었다. “당신은… 사슴 씨의 친엄마?” 사슴의 검 정령이 보여준 과거의 영상, 거기서 본 진짜 사슴을 낳은 친엄마였다. 여자는 세영의 물음에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기억력이 좋구나. 이 모습은 나의 무녀, 네르티아의 것을 빌렸지. 세영은 직감적으로 상대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차갑게 얼굴을 굳힌 그녀는 여자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에레슈키갈.” ──────────────────────────────────── 비탄의 들판 (2) -한때 그렇게 불린 적도 있었지. 여자는 부정하지 않았다. 세영은 의혹 어린 눈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죽은 줄 알았는데.” 그러자 여자는 재미있는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고개를 갸웃했다. 의미심장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떠올랐다. -죽음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슴 씨에겐 의미가 있지. 당신의 죽음에 괴로워했으니까.” 세영이 슬슬 치미는 빡침을 누르며 말했다. 어머니께서 부활하실 거라 믿었고, 카벨의 몸에 들어온 뒤에야 그것이 아님을 알았다고, 괴로워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사슴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여자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 아이는 마음이 너무 여려서 문제였지. “그게 귀여운 점이거든?” 울컥한 세영이 사슴의 편을 들고 나섰다. 여자는 그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생각에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래, 괴로워했단 말이지. 가엾게도. 말과 다르게 웃는 얼굴이었다. 불쾌감을 느낀 세영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지금 뭐하자는 건데?” -음? “날 불러다 놓은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빨리 말하고 꺼지지?” 사슴의 양엄마이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니었다. 잘 보여야겠다는 마음이 급격하게 희석된 세영이 휙휙 손짓했다. 그러자 여자는 곤란한 듯이 말했다. -기억력만큼의 눈치는 없는 것 같구나. 너는 여기 갇힌 거란다. “뭐?” -넌 더 이상 필요 없으니까. 담담한 여자의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세영은 제가 거대한 테이블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상아색 테이블보 위에는 그녀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접시가 늘어서 있었다. 벌떼처럼 웅성거리는 대화와 달그락거리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세영은 제 머리 위로 내려놓아 지는 유리컵을 피했다. 이어서 제게 다가오는 거대한 인간의 손을 밟고 테이블 아래로 뛰어내렸다. -너는 이방인이지. 보이지 않는 여자가 속삭였다. 풍경이 또 한 번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 추락하던 세영은 아스팔트로 뒤덮인 길 위에 서 있었다. 출근 시간인지 북적이는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넜다. -이곳이 너의 세계. 네가 태어나고 자란 곳. 세영은 길 맞은편의 여자를 노려보았다. 여자는 태연히 세영의 앞으로 걸어오며 말을 이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니? 아니면 돌아갈 곳이 없는 건가? 어이없다는 뜻으로 한숨을 내쉰 세영이 대꾸했다. “처음 본 사이에 왜 호구조사야? 그런 걸 물을 정도로 우리가 친했나?” -…건방진 아이구나. 사하조차 나에게 그렇게 말할 수 없거늘. 처음으로 여자의 입술이 뒤틀렸다. 피식 웃은 세영이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아무리 봐도 진짜 같지만, 이것은 환상이었다. 여기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 그녀가 외쳤다. “천리안!” 다음 순간 세영은 눈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시야가 조각조각 쪼개지며 뒤섞이는 기분이었다. 얼굴을 감싸고 비틀거리는 그녀를 본 여자가 혀를 찼다. -어리석은 아이야. 나를 보려는 건 어둠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너는 내가 보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느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시야가 환해졌다. 새벽이 깃든 장미봉오리가 보였다. 저문 들판을 달려가는 소녀. 피 웅덩이에 쓰러진 병사, 고원을 오르는 산양이 보였다. 누군가 신전에 엎드려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날아간 화살이 토끼를 꿰뚫었다. 춤을 추는 사람들. 달리는 말과 하늘을 나는 용. 나무에서 떨어진 사과가 바닥을 굴렀다. 뒤죽박죽으로 뒤엉킨 영상, 그 위에 겹쳐지는 또 다른 영상들. 수만 가지의 장면들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홍수처럼 끝없이 밀려드는 정보에 질식할 것 같았다. -어머니! 까맣게 물들어가던 시야에 갑자기 빛이 번졌다. 뿌옇게 번지는 빛 가운데 조그마한 아이의 형체가 있었다. 기대감에 들뜬 얼굴이 보였다. 고사리처럼 작은 두 손 위에 색색의 구슬을 엮어 만든 끈이 놓여있었다. 두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아이가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더없이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다음 순간 모든 장면이 사라졌다. -보았니? 여자는 조금 지친 얼굴로 말했다. 무어라 입을 열려던 세영은 잠자코 고개를 끄떡였다. 새끼 사슴의 귀여움에 압도당한 기분이었다. 민망함에 코끝을 쓱쓱 문지르던 그녀가 중얼거렸다. “어, 좋은 거 보고 사시네.” 눈이 좀 욱신거리긴 하지만, 그 정도의 가치는 있는 장면이었다. 세영의 반응에 쓴웃음을 지은 여자가 말했다. -나는 어둠, 시작과 끝을 보는 자. 그래서 그 아이를 처음 봤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뭘 아는데?”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한 세영이 되물었다. 다 자란 사슴이 이렇게 요망해질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인가.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그녀의 망상과는 전혀 달랐다. -그 아이는 주신 사하가 봉인을 위해 빚어낸 생명. 신의 힘으로 빚어지고 무녀를 통해 태어나 흔적도 없이 찢길, 가장 순결한 속죄양. “…….” -그 아이가 내게 왔을 때, 나는 그 운명을 보았지. 오직 죽기 위해 태어난 생명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도록 키우고 싶었다. 슬픔도 기쁨도 고통도 괴로움도 느끼지 못하고 홀로 죽어가길 바랐다. 하지만 돌 바닥을 뚫고 꽃이 피어나듯 아이는 감정을 깨우쳤고, 처연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보지 않으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새 시선이 닿았고, 그 다음엔 마음이 가버렸단다. 내가 보지 못한 유일한 것이었지. 세영은 ‘과연, 종족을 초월한 마성의 사슴.’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떡였다. 낯선 용에게서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졌다. 고개를 든 여자가 웃었다. -그래서 개입했다. 운명을 뒤틀고 너를 이곳으로 끌어오고 싶어 하는 사하에게 협조했지. 내 가장 오랜 소망 역시 그에 닿아있었으니. “…와, 씨. 뭐라고?” 사슴 엄마가 납치범과 한통속이었다니. 잘 가다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욱해서 튀어 나가려던 세영이 멈칫했다. 사슴에게 변명하려면 결정적인 한 방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춤거리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여자가 말을 이었다. -이방인이여, 너는 혼돈. 이 세상의 규칙을 어그러뜨리는 자. 운명을 바뀌기 위해 너보다 더 나은 패는 없었다. “…….” -하지만 혼돈은 이미 충분해. 더 이상의 개입은 필요 없을 터. 모든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는 지금 너는 방해물에 불과하지.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삼류악당의 대사였다. 머리를 긁적인 세영이 물었다. “뭐, 그건 됐고. 봉투는 준비 안 했어?” -…무슨 말이지? “이거 받고 내 아들에게서 떨어져 이런 대사 안 하냐고.” 여자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멀뚱거렸다. 역시 용 정도가 되면 협상도 없이 바로 납치 감금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실망인지 안도인지 모를 기분으로 픽 웃은 세영이 말했다. “이거 어쩌지. 난 댁의 아드님과 헤어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데.” -……. “그리고 여기 얌전히 갇혀있을 생각도 없고. 블레이징 토네이도!” 세영의 주먹이 내리쳐진 곳이 얼어붙으며 다섯 개의 회오리바람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여자의 머리카락 하나 펄럭거리게 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영은 그것에 실망하지 않고 곧장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선풍권!” -…그렇구나. 너는 나와 싸울 생각이군. 세영의 주먹이 여자의 머리를 통과해서 지나갔다. 쳇 하고 혀를 찬 세영이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분명 타격을 줄 만한 곳이 있을 텐데, 사방이 어둡다 보니 짐작할 수가 없었다. 여자가 신기해하는 얼굴로 물었다.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그거 용 전용 대사냐? 왜 싸울 때마다 물어?” 세영이 어이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여자가 하룻강아지를 보는 시선으로 말했다. -나는 태고의 어둠. 시작도 끝도 없는 자. 네가 나를 이기는 방법은 없다. “잡소리 하지 말고 덤벼, 어서. 난 사슴 보러 갈 거니까!” 세영은 마음이 급했다. 펠릭스가 로토에게 죽은 게 언제 일인지 모르지만, 과거라면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지금 태평하게 만담이나 주고받을 때가 아니었다. 주먹을 움켜쥔 그녀를 본 여자가 웃었다. -원한다면. 순식간에 여자가 사라지며 주변의 벽이 이지러졌다. 보이는 것은 껌뻑거리는 눈, 수없이 많은 눈동자였다. 경멸과 혐오, 비웃음을 띈 눈들이 낄낄거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우리 세영이는 어른스러우니까 혼자 있어도 되겠지?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엄마가 말했다. 검게 이지러진 얼굴은 구멍이 뻥 뚫려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뒤에서 깜빡이던 눈동자들이 소곤거렸다. -쟤 엄마는 바람나서 집을 나갔대. -불쌍하다. -불쌍해. 세영은 흐느적거리는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손으로 밀자 허수아비처럼 휘청거리던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 소곤거리던 눈동자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세영은 어이없이 말했다. “이딴 걸로 겁줄 생각인가?” 그러자 눈동자들이 일제히 낄낄거렸다. 기분 나쁜 울림이었다. 네 진정한 상처를 보여 봐. 네가 두려워하는 것을 보여 봐. 네가 그걸 극복할 수 있는지 보여 봐. 어디 한 번 뛰어넘어 봐. -너 때문이야! 부그르륵. 바닥으로부터 피가 차올랐다. 쓰러진 엄마가 그 속에 잠겼다. 반사적으로 물러나려던 세영은 피할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멈춰 섰다. 젖은 옷이 몸에 들러붙는 느낌이 기분 나빴다.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손을 내려다보는 그녀에게 누군가가 속삭였다. -너처럼 이기적인 애는 처음 봤어. 이러니까 부모한테도 버림받지. 세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건 또 어떤 병신이 말한 거야. 기억에는 남아있지 않은 말이었다. 그녀가 무심코 흘려 넘겼던 비난, 희롱, 혐오의 시선들까지 눈동자들은 고스란히 들려주었다. 이제 콸콸 차오르는 피가 허리 위를 넘어섰다. 비릿한 냄새가 퍽 역겨웠다. -너는 줄곧 상처 받아왔구나. 더 상처받지 않기 위해 모른 척했을 뿐. 어느새 나타난 여자가 세영의 손을 잡았다. 여자는 위로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를 버린 엄마를, 학대한 새엄마를, 방치한 아빠를 용서하렴. 너를 비웃고 깔보고 무시했던 자들을 용서하렴. 용서하고 상처를 극복하는 거야. 부모에게 버림받은 세영은 사람을 믿지 못했다. 자신을 믿지 못하고, 사랑을 믿지 못하는 것은 모두 과거의 경험 때문이라 여자가 말했다. 그 상처를 더는 내버려두지 말라고. 그동안 헛되이 보낸 시간들을 속죄하고 죄를 지은 자들을 먼저 용서하라고. 여자는 말했다. 용서는 힘이라고. 그리고 세영이 답했다. “웃기시네.” 부글거리는 핏물이 그녀의 머리 위로 치솟았다. 세영은 솟구친 핏물 속에 그대로 잠겨버렸다. ──────────────────────────────────── 비탄의 들판 (3) 세영은 제 성격이 딱히 차갑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딱 남들만큼만 나빴고 이기적이었다. 무심하다는 말은 종종 들었지만, 크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게 거슬리지 않도록 나름대로 신경 쓰고 있었다. -하지만 너는 사람을 믿지 않지. 너 자신조차도. 여자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세영은 제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려다 포기했다. 이 정신 나간 공간에선 그런 것 따위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조금 전에 그녀를 집어삼켰던 핏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그 사이 여자의 말은 계속됐다. -무심함과 인간불신, 얕고 가벼운 관계들. 그 모든 것이 네 과거의 상처와 관련되어 있어. 그런데도 그걸 바꾸지 않겠다는 거니? “내가 왜 바뀌어야 하는 건데?” 세영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이렇게 남이 쫓아다니며 바꾸라고 조를 정도로 제 인생이 막장이었나 싶었다. 그녀의 물음에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좀 더 나은 네가 되기 위해서지. “좀 더 나은?” -더 나은 삶을 바라지 않니? 지금보다 더욱 행복한 삶 말이야. 그러기 위해선 너 자신을 변화시켜야 해. 지금과 달라져야 하지. 여자의 목소리는 확신을 품고 있었다. 오직 변화 속에만 빛과 진리가 있다는 것처럼, 지금 변하지 않으면 제 삶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몹쓸 사람인 것처럼 말했다. 세영은 한숨을 삼켰다. “너 같은 이야기 하는 사람 참 많더라. 모든 걸 내려놓고 용서하고 극복하라고. 세트메뉴처럼 말이야. 무슨 유행인가?” -그것이 올바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진 않나 보구나. 올바르다라. 사람을 납치 감금한 용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기엔 퍽 웃겼다. 피식 웃은 세영이 보이지 않는 여자를 향해 말했다. “때린 놈은 아무 생각도 없는데 맞은 놈이 혼자 용서하고, 그건 내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라고 우기는 건 그냥 자위 아닌가?” -……. “그리고 뭘 극복하면 되는 건데? 내 부모가 자식 하나 건사 못하는 인간이었다는 게 내가 극복해서 바뀌는 거였어?” 빈정거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째 말하고 나니 그렇게 들렸다. 괜히 발끈한 것 같아 뺨을 긁적인 그녀는 “뭐… 어쨌든 상관없는 일이지만.” 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상처받았다는 것을 부정하진 않는다. 분명 그때의 세영은 상처받았다. 그녀를 버렸던 엄마나 방치한 아버지나 미워하던 새엄마의 영향으로 타인에게 관심 없고 남과 깊게 관계하길 피하는 성격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성희롱하던 새끼나 틈틈이 비웃던 놈들 탓일 수도 있고. 그래서 아니, 그러니까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잘못한 게 남이고 상처받은 게 나면 잘못한 놈이 고쳐야지. 왜 내가 나 자신을 고쳐가며 그걸 극복씩이나 해야 하는데?” 상대가 원하지도 않는 용서를 억지로 베풀어가며, 거지 같은 현실을 억지로 밝게 생각하는 것이 ‘더 나아지는 것’이라면 그딴 건 필요 없었다. 세영이 보기에 그건 그냥 정신병이었다. “무엇보다 난 지금의 내가 좋거든. 살아가는데 별 불편함 없고 남에게 폐 끼치지 않으면 그걸로 충분한 거 아닌가?” 여자는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별로 그녀의 대답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지만. 빠르게 포기한 세영은 출구를 찾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한참 후에 다시 여자가 물었다. -넌 절대로 변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자신하니? “내가 언제?” -…왜 바뀌어야 하느냐고 내게 묻지 않았니? “그게 왜 절대로 바뀌지 않겠다는 말이 되냐?” 세영은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용들은 사고가 단순하거나 특이한 쪽인 듯했다.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람들 때문에 변할 이유가 있냐는 거였지.” 용서하지 않는다는 게 그들에게 큰 의미를 둔다는 건 아니었다. 세영에게 그들은 낡은 사진이나 읽지 않는 책, 이미 흘러간 영화의 한 장면과 같았다. 아마 눈앞에서 차에 치여 죽는다고 해도 “아이고, 세상에. 무슨 일이람.” 하고 화젯거리로나 삼겠지. 고작 그런 존재 때문에 변하고 싶지도 않고, 변할 수도 없었다. 세영을 변하게 한 것은 오히려 다른 것들이었다. 동료들의 호구스러움과 세상에 대한 믿음, 그녀에게 건네는 작은 기대. 마리엔의 상냥함과 사슴의 사랑스러움. 현자들의 민폐와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들.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만남과 그에 따른 감정이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은 세영을 지배할 정도로 큰 의미는 아니었으나 적어도 그녀를 미소 짓고 행복하게 했다. “결국, 변한다는 건 그런 거 아닐까. 나 혼자서 극복이라고 외치면서 갑자기 레벨업 할 줄 알았다면 만화를 너무 많이 본 거지. 아줌마.” 다음 순간 세영의 너클에서 푸른 불꽃이 튀었다. 너클에서 길게 돋아난 푸른 손톱이 허공을 찢었다. 세영의 주먹이 상흔처럼 남은 흔적 위에 틀어박혔다. “이모탈 브레이크!” 서리 격투가의 최고위 스킬이 발동되었다. 생명력, 마나, 스테미너를 동시에 소비하여 근방의 모든 적에게 타격을 입히는 필살기였다. 세영의 온몸이 푸른 불꽃에 휩싸였다. 극저온의 불꽃에 그녀에게 닿는 공기조차 얼어붙었다. 잘게 쪼개어진 얼음이 파편이 되어 휘몰아쳤다. 푸른 불꽃과 조각난 얼음, 휘몰아치는 서릿바람으로 태풍이 불어 닥치는 것 같았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바람에서 흐름을 비껴가는 곳이 느껴졌다. “거기냐!” 세영의 몸이 돌풍처럼 튀어 나갔다. 그녀를 휘감은 모든 것들이 하나가 되어 내뻗은 주먹과 함께 부딪혔다. 쿠웅 하고 공간 전체가 흔들렸다. 쩌저적 금이 간 공간이 무너지며 여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놀랍구나. 무표정으로 변한 여자가 말했다. 그녀의 등 뒤로 수없이 많은 날개가 펼쳐졌다. 절반은 희고 절반은 검은색으로, 성스러움과 마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활짝 펼쳐진 날개를 반쯤 접은 여자가 말했다. -이 별에 온 이후로 이렇게 낭패해보긴 처음이다. 주신의 힘을 받았다지만, 고작 인간이 내게 타격을 입힐 줄은…. 여자의 모습이 이지러졌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 거대한 눈동자가 박힌 어떤 것이 생겼다. 어찌 보면 짐승의 얼굴 같기도 하고 새의 얼굴 같기도 한 덩어리였다. 동시에 수많은 날개에도 촘촘한 눈알이 나타났다. 기괴하고 기묘한, 밤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진심으로 상대해주마. 어디 한번 덤벼보렴. 세영이 웃었다. 이를 악문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분명 웃음이었다. 하얗게 이를 드러낸 그녀는 서리 폭풍을 휘감은 채로 밤을 향해 돌진했다. * “세영님?” 쥐고 있던 손이 움찔하는 것을 느낀 남자가 급히 세영을 불렀다. 하지만 눈을 꼭 감은 세영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실망감을 삼킨 그는 세영의 손등에 살짝 입술을 댔다.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의식을 잃은 세영은 벌써 한 달 지나도록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단순한 기절이 아니라는 것은 그녀의 몸을 감싼 흐릿한 빛으로 알 수 있었다. 빛은 세영을 보호하면서 매일 조금씩 짙어졌다. 꼭 고치 같았다. “이기적이라는 것은 압니다. 한 번만이라도 눈을 떠주십시오. 제발 한 번만이라도….” 남자는 애가 닳다 못해 재가 되는 기분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수명과 눈을 뜨지 않는 세영이 그를 초조하게 했다. 매일 밤 눈을 감으며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길 기도하고, 깨어나 세영의 손을 잡으며 안도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뭐야, 또 여기 있었어?” 노크도 없이 문이 활짝 열리며 떠들썩한 목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일어나 세영을 가린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라오 조드.” 남자의 부름에 라오 조드가 씩 웃었다. 스스로를 ‘사막왕’이라 칭하며 강력한 지배자로 떠오른 그는, 남자의 앞에선 여전히 철없는 애송이처럼 굴었다. 하지만 남자는 전과 달리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의식이 없는 구원자는 권력자에게 너무나도 매력적인 먹잇감이니까.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었다면 다른 방법을 찾았을 텐데.’ 하마용의 활약으로 무사히 신전을 벗어난 일행은 가까운 마을로 향했다. 모두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잔뜩 지친 상태였다. 하지만 휴식을 취하기 위해 들린 마을에선 정체불명의 적이 습격해왔다.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몰려드는 적을 감당하지 못한 일행은 급히 마을에서 도망쳤다. 하지만 다음 마을에도, 그다음 마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달려드는 자들이 마도나 로토의 수하가 아니라는 것은 진작 알아챘다. 구원자를 죽이고 싶어 하거나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자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일행은 분노하고 실망했다. 동료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다. 마리엔은 세영을 데리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어들자고 했고, 시디발라는 그것이 더 위험하며 추격을 떨치기 어려울 거라 주장했다. 남자도 시디발라의 의견에 동의했다. 세영을 노리는 자들은 집요했고 어디로 숨듯 포기하지 않을 터였다. 그때 눈치만 보던 하마용이 라오 조드의 이름을 꺼냈다. 그에게 정보를 준 떠돌이들이 위험할 때는 사막왕을 찾아가라며 방법을 가르쳐줬다는 것이다. 뻔한 공작이었지만, 결국 내밀어 진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용당하는 것보다 세영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으니까. “그냥 무나크라고 부르라니까. 그리고 웬 경계야? 내가 누님을 해칠 것 같아?” 라오 조드가 조금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남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한 라오 조드가 밖을 가리켰다. “잠깐 나가자고. 할 말 있어.” “세영님을 혼자 둘 수는….”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라오 조드가 어딘가를 향해 손짓했다. 쪼르르 달려온 시디발라가 “응? 나 불렀어?” 하고 물었다. 당황한 남자가 그에게 물었다. “시디발라? 언제 돌아온 겁니까. 전투는요?” “엥? 끝나고 돌아온 건데? 벌써 해가 졌다고.” “…아.” 그제야 사방이 어두워졌다는 것을 깨달은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한숨을 쉰 라오 조드가 그의 등을 팡팡 쳤다. “좀 나가자고. 너한테는 바깥바람이 필요해.” 남자는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눈에 익은 선원들이 아는 척했지만, 그다지 입을 열고 싶지 않아 묵례로 답했다. 그런 그를 질질 끌고 갑판 위로 올라온 라오 조드가 “자자, 저기 좀 봐!” 하고 손짓했다. 가리키는 쪽으로 무심코 시선을 돌린 남자가 눈을 깜빡였다. 그들이 타고 있는 것은 수상비행선인 <듀나자드>였다. 자매선인 <세헤라자드>에 비해 속도가 느린 대신 갑판이 넓고 전투에 특화된 구조였다. 그런 듀나자드의 넓은 갑판이 피로 젖은 것처럼 붉게 변했다. 황금과 주홍, 그리고 자줏빛으로 물든 하늘이 일렁거렸다. 기울어진 해가 붉은 바닷속으로 잠기고 있었다. 장미꽃잎처럼 붉어진 구름이 듀나자드에게 밀려 깃털처럼 흩어졌다. “멋지지. 비행선에 탔으면서 이걸 안 본다니 말이 안 되지.” 장엄한 광경에 넋을 잃은 남자를 보며 뿌듯해진 라오 조드가 말했다. 멍하게 서 있던 남자가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세영님도 함께 보셨으면 좋았을 텐데.” “…너 그거 병이야. 모든 생각이 누님에게로 향하는 병.” 얼굴을 찌푸린 라오 조드가 질린다는 듯이 말했다. 남자는 ‘그게 뭐가 문제지?’ 라는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한숨을 푹 쉰 라오 조드가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가 말이지. 그 얼굴에 그 몸으로! 대체 지금까지 뭐했냐고. 응?” “……?” “누님이 널 최고가로 입찰했을 때만 해도 ‘곧 전세역전이 되겠구나, 지금은 저래도 곧 누님이 매달리게 되겠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영혼까지 탈탈 털려오고. 진짜 너한테 실망이다.” 이래서야 투자한 보람이 없다고 혀를 끌끌 차는 라오 조드였다. 멀뚱멀뚱 그를 쳐다보던 남자가 “용건은 그게 전부입니까?” 하고 물었다. ‘어서 빨리 지껄여라, 세영님께 돌아가게.’ 하고 쓰여 있는 그의 얼굴을 본 라오 조드가 이마를 짚었다. “아니, 뭐, 그건 됐고. 마도왕의 움직임을 발견한 것 같아.” “…….” 남자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돌아왔다. ──────────────────────────────────── 비탄의 들판 (4) 라오 조드가 조금 난처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네 말을 믿지 않았더라면 그냥 무시해버릴 소문이었으니까. 지금 사실 여부를 조사 중이고.” 사실 ‘명계의 문을 열고 로토를 떨어뜨렸는데 다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말을 믿어준 것이 더 대단했다. 묵묵히 고개를 끄떡인 남자가 물었다. “로토가 목격된 겁니까?” “아니, 정체불명의 괴물.” 라오 조드가 씩 웃으며 말했다. 신전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 다시 말해 엘리샤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5개의 마을이 초토화되었다. 건물은 모두 부서졌고 대량의 혈흔이 발견되었지만, 시신은 남아있지 않았다. 유일한 목격자는 ‘거대한 괴물’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본드래곤일 수도 있겠군요.” “유감스럽게도 말이지.” 라오 조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남자는 낭패감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꾹 쥐었다. 로토가 다시 나타날 거라곤 생각했지만, 본드래곤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남은 힘으로 다시 문을 열 수 있을까.’ 무엇보다 그는 신성한 의식을 더럽혔다. 자신을 제물로 삼아 문을 닫는 것이 의식의 끝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시디발라의 도움으로 대가를 치르지 않고 달아났다. 다시 문을 연다면 명계의 문지기들은 제일 먼저 그를 붙잡아 갈기갈기 찢으려 할 터였다. ‘어떻게든 본드래곤을 상대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돌아온 로토는 한층 집요하게 세영과 신기를 노릴 터였다. 신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세영을 조건으로 연합군에 협상을 걸 수도 있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놈을 제거해야 했다. “그게 진짜 로토라면, 사람들을 죽이고 시체를 가져갔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데.” 라오 조드의 중얼거림이 남자의 상념을 깨트렸다. “본드래곤을 강화하기 위해 흡수시켰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알아. 아는데 뭔가가 석연치 않다고 할까. 무엇보다 그렇게 거대한 놈이 움직이는데 다른 목격자가 없다는 게 말이 되나?” 라오 조드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불안감이 전염되었는지 남자도 꺼림칙함을 느꼈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능력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처음 본 로토는 동료의 등에 칼을 꽂는 비열한 인간에 불과했다. 마도왕으로 즉위한 뒤에는 젊고 패기 넘치는 모습으로 변했지만, 특별한 힘을 지녔다곤 생각지 못했다. 그의 말에 따른 것은 올리비아의 목숨과 마도의 쇠퇴가 자신의 탓이라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때, 무슨 대가를 치르든 로토를 제거했다면….” 세영에게 걸림돌이 될 줄 알았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없애버렸을 것이다. 살기 어린 남자의 모습에 어색한 웃음을 지은 라오 조드가 말했다. “이, 일단 조사는 계속하고 있으니까 결과가 나오면 알려줄게. 목격자의 증언이나 피해 마을의 위치로 봐선 바레인으로 향하고 있는 것 같거든. 그쪽을 털어보면 뭔가가 나올 것 같아.” “바레인?” “아, 마도에선 다르게 부르나. 칸디아와 엘리샤를 잇는 긴 평야인데.” 라오 조드의 설명에 남자가 고개를 끄떡였다. “어디인지 알겠습니다. 엘룸 평원이군요.” “엘룸?” “…한때 비탄의 들판이라고 불렸던 곳입니다.” 엘룸은 카르나이 왕국에서 사용되던 지명이었다. 에레슈키갈 이전에 모셔졌던 엔킬이라는 남신을 위해 제물을 바치던 곳이기도 했다. 카르나이 사람들은 자신의 첫 아이와 가축의 첫 번째 새끼, 처음 수확한 작물을 엔킬에게 바쳤다. 에레슈키갈의 신전이 세워지며 자식을 바치는 일은 사라졌지만, 대신 노예들의 목을 쳐서 제사를 지냈다. “들판이라고 하니 생각났는데, 전에 부탁한 것 말이야.” 옛 기억을 떠올리던 남자가 라오 조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깐 망설이던 라오 조드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음, 어떻게 말해야 하나. 결국, 그 펠릭스라는 언데드왕은 찾지 못했어. 대신 엄청난 수의 시체와 언데드의 잔해를 발견했다더군. 본드래곤이 한탕 한 것 같다고.” “…….” “알아보니 꽤 유명한 몬스터던데. 혹시 아는 사이였어?” 멍하게 있던 남자가 라오 조드의 물음에 고개를 끄떡였다. “…제 형님이십니다.” “으응? 엉? 뭐라고?” “로토가 신전에 나타났을 때 예상은 했습니다. 펠릭스라면 분명….” 분명 로토를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두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막연히 짐작한 것과 확인을 받는 것은 좀 달랐다. 남자는 혼란해 하는 라오 조드에게 청했다. “잠깐 혼자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다행히 라오 조드는 별말 없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남자는 천천히 갑판의 끝까지 걸었다. 바닷속으로 잠겨버린 해는 이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붉은빛을 잃은 바다는 밤처럼 깊고 어두웠다. 그대로 빨려들 것 같아 휘청한 남자는 간신히 난간을 짚고 몸을 지탱했다. 배를 스치는 바람이 울음처럼 펄럭였다. 그는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서 어두운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 로토가 사라진 지금, 마도를 이끄는 것은 제라드 루스타나였다. 로토의 실종이 확인되자 바다를 통해 2만에 달하는 병력이 건너왔다. 본격적인 마도의 침공이 시작된 것이다. 그에 맞서 칸디아, 엘리사, 파디샤, 빛의 교단에서 연합군을 일으켰다. 신진왕국인 조르디아 역시 그에 합세했다. 연합군에서 가장 큰 축이 되리라 믿었던 포에니는, 기대를 배신하고 마도에 붙었다. 그렇게 되자 마도군 2만, 수인군 1만7천으로 가까스로 2만5천을 넘긴 연합군의 숫자를 뛰어넘었다. 마도가 제일 먼저 제물로 삼은 것은 엘리사 왕국이었다. 엘리사는 인어의 후손이라고 불리며 강력한 해군력을 자랑하는 곳이었으나 마도의 공격에는 맥을 못 췄다. 무엇보다 마도군에게는 해류를 조종하는 신기가 있었다. 결국, 첫 번째 해전에서 엘리사는 60척의 배를 잃고,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패배했다. 상황이 반전된 것은 라오 조드의 참전부터였다. 라오 조드가 이끄는 비행군단과 디안이 팔찌의 힘으로 불러들인 고래떼, 마리엔의 파도 공격으로 마도가 참패한 것이다. 연합군은 대대적으로 승전을 발표함과 동시에 <구원자와 그를 따르는 용사들>이 자신들의 편임을 선전했다. 이로 인해 지금껏 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한 발 뒤로 물러서 있던 자들까지 연합군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엘프와 드워프와 같은 요정족과 자애의 교단을 위시한 종교단체들, 포에니 연합에 속하지 않은 수인족, 마탑에서 파견된 마법사들까지 나서게 된 것이다. 대륙 전체가 전쟁으로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일행은 전쟁에 좀 더 깊숙이 개입하게 되었다. 단순히 라오 조드를 거들며 세영의 안전을 보장받을 의도였던 것과 달리, 연합군의 간판이자 상징으로 내몰리게 된 것이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맨날 전투, 전투, 전투! 서로 얼굴 보기도 힘들잖아.” 제일 먼저 불만을 터트린 것은 시디발라였다. 계속되는 지원요청에 못 이겨 밖으로 떠돌던 동료들이 모두 듀나자드에 모인 날이었다. “어쩔 수 없잖아. 싫든 좋든 전쟁에 참여하게 되어버렸으니까.” 검을 닦던 디안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동안 바닷바람에 시달린 그는 전보다 까맣게 그을리고 거칠어진 얼굴이었다. 뚱하게 뺨을 부풀린 시디발라가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그을리진 않았으나 전보다 차가운 얼굴이 된 마리엔이 말했다. “나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 내가 승낙한 건 세영님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전투에 몇 번 참여하는 정도였지, 지금처럼 본격적으로 뛰어들겠다는 뜻은 아니었다고. 무엇보다 세영님은 전쟁에 참여하는 걸 원하지 않으셨어.” “…지금이라도 여길 나갈까?” 시디발라의 제안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정말 그럴까?’ 하는 분위기가 되기 전에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불가능할 겁니다. 연합군이 놓아주려 하지 않을 테니까요. 보내주느니 차라리 모두 죽여서 마도에게 살해당했다고 꾸밀지도 모릅니다.” “저희를 미끼로 다른 이들까지 끌어들인 상황이니까요. 나간다고 하면 곤란해지겠지요.” 리먼마저 남자의 말을 지지하자 모두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시디발라가 우울한 얼굴로 남자에게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어?” “바레인으로 이동하는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대대적인 전투가 있을 것 같더군요.” 남자는 라오 조드에게 들은 대로 말해주었다. 동료들의 배려로 그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세영의 곁을 지켰다. 덕분에 라오 조드에게 앞으로의 진행 상황을 전달받고 알리는 역할도 맡았다. 엘리사 정벌을 포기한 마도군은 우회하여 칸디아로 진군하고 있었다. 바레인에서 수인군과 연합하여 대대적인 공세를 펼칠 예정인 듯했다. 연합군은 그것을 막기 위해 급히 병력을 바레인 쪽으로 이동 중이었다. “…싫다. 거기서 또 싸우고 죽이고 하겠지.” 시디발라의 투덜거림에 잠깐 망설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저도 전투에 참여할 생각입니다.” “응?” “아니, 갑자기 왜?” 갑작스러운 선언에 동료들이 모두 당황했다. 세영의 손을 잡고 빨리 일어나라고 히잉히잉 투정을 부리던 마리엔마저 당황해서 말을 멈출 정도였다. 남자가 당황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예상대로 로토가 명계에서 벗어난 것 같습니다. 바레인에서 전투가 있다면 높은 확률로 거기 나타나서 본드래곤으로 공격할 겁니다. 그 전에 제가 그를 죽이겠습니다.” “어, 어떻게? 로토 걔는 막 같은 걸로 이렇게 감싸져 있잖아.” 당황한 시디발라가 물었다. 남자는 자신이 생각한 계획을 천천히 풀어냈다. “신전에서 로토의 힘이 저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제힘 역시 로토에게 통하지 않았지만, 다른 방법을 시도할 수는 있겠더군요.” 용에게 명령을 내리는 로토의 힘은 남자에게 통하지 않았다. 동시에 그림자를 움직이는 남자의 힘도 막에 가로막혀 로토에게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토의 막은 범위가 넓었고, 발밑 또한 보호막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림자를 통과하는 남자의 능력이라면 로토의 보호막 안으로 이동해서 그를 죽이는 것도 가능했다. “너무 위험해! 잘못해서 실패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 디안의 반박에 다른 동료들 역시 고개를 끄떡였다.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만약 제힘이 통하지 않는다면, 그림자를 통과해서 로토에게 가는 것은 불가능할 겁니다. 그럼 시작부터 실패한 것이니 제게는 아무런 피해도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로토에게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제가 그에게 질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로토의 능력은 본드래곤을 부리는 것과 모든 것을 다 튕겨내는 보호막이었다. 뒤집어 말하면 그것을 제외한 특별한 능력은 없었다. 세영을 제외하고 일행 중 가장 강한 남자라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마리엔이 어지럽게 고개를 휘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 만약 이동한 후에 실패하면요! 보호막 때문에 저희가 지원할 수도 없다고요.” “…제게는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어쩌면 바레인에 도착하기 전에 죽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때까지 제가 살아있다면 한번 시도해보고 싶습니다. 실패한다고 해도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이라면 세영에게, 동료들에게 위협이 될 만한 요소를 제거하고 싶었다. 그것이 모두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시디발라가 버럭 소리쳤다. 놀라서 “…시디발라?” 하고 부르는 그의 손을 탁 쳐낸 시디발라가 화를 냈다. “너는, 넌 왜 항상 그런 식이야! 쟤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항상 아무 미련 없다는 듯이 멋대로 해버리고. 난 할 말도 없게 하고! 진짜 진짜 싫다고!” 울분을 쏟아내듯 소리친 시디발라가 문을 열고 뛰어 나가 버렸다. 당황한 남자의 어깨를 툭 친 디안이 “이번엔 네가 나빴어. 가서 사과해.” 하고 말했다.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남자는 시디발라가 활짝 열어놓고 나간 문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 비탄의 들판 (5) 남자가 시디발라를 발견한 곳은 갑판의 구석이었다. 안 그래도 작은 몸을 더 작게 웅크린 시디발라가 세운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기척을 느낀 시디발라가 훌쩍이며 고개를 들더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화내서 미안.” “아뇨, 제가 잘못했습니다.” 몸을 낮춰 시디발라와 눈을 마주한 남자가 말했다. 팔로 얼굴을 쓱쓱 얼굴을 문지른 시디발라가 고개를 끄떡였다. “맞아, 네가 나빠. 왜 그렇게 자기 목숨을 가볍게 생각해?” “가볍게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왜 자꾸 죽으려고 하는데! 네가 죽으면 다들 슬퍼할 거라고. 넌 왜 다른 사람을 생각을 안 하는 건데!” 시디발라가 분하다는 듯 말했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저는 죽으려는 게 아닙니다. 그냥, 더는 누구도 잃고 싶지 않습니다.” 남자는 항상 남겨지는 쪽이었다. 그래서 이제 잃는 것이 두려웠다. 겁쟁이라고 비난해도 좋았다. 더는 잃고 싶지 않았다. 남자의 말에 우울한 표정을 지은 시디발라가 말했다. “…내가 수호목인지 뭔지 하는 그 열매 훔쳐올게. 그거 말고 다른 것들도 뭐든 구해올 테니까. 얼마 안 남았다 그런 말 하지 말고, 무슨 일이 있어도 살겠다고 생각하란 말이야.” “그러겠습니다.” 남자의 수긍에 시디발라가 “진짜?” 하고 되물었다. 다시 고개를 끄떡이자 얼굴이 환해져서 “좋아. 그럼 남자 대 남자로 약속해.” 하고 팔을 불쑥 내밀었다. 남자는 잠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헤매다가 다짐하듯 말했다. “약속하겠습니다. 시디발라. 그러니 이번 한 번만 제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남자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던 시디발라가 제법 어른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남자의 팔을 톡톡 두들기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알았어. 대신 다 함께 계획을 짜자. 절대 실패하지 않게.” “미안, 실패했어.” 작전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라오 조드가 말했다. 회의가 끝나기만 기다리던 동료들이 눈을 크게 떴다. 단정히 빗질 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긴 라오 조드가 잔 가득히 과실주를 따라 들이켰다. 연거푸 두 잔을 마시고서야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힌 그가 설명했다. “마도왕에게 대비할 병력을 도저히 뺄 수가 없다더군.” “대체 왜?” “다른 이유도 많겠지만, 내가 이야기해서 그런 거 아닐까? 내가 공을 세우는 걸 마도보다 싫어하거든. 그 치들은.” 라오 조드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로토와 함께 사라진 마도의 선봉군 3천, 그중 일부는 펠릭스와의 싸움으로 잃었다고 쳐도 꽤 위협적인 숫자였다. 거기에 본드래곤까지 합세한다면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연합군의 수뇌들은 발의자가 라오 조드라는 것만으로도 두들겨 패기 바빴다. 구원자를 후광으로 연전연승을 거두는 그의 명성이 거슬린 것이다. “너희의 활약으로 마도왕이 실종되었다고 말했을 때도 비웃으면서 무시했잖아. 그런데 이제 마도왕이 돌아온다고 말하니 말도 안 된다면서 박박 우기네. 정황상의 증거 말고 직접적인 내어놓으라는데?” “무슨! 증거라면 지금까지 조사한 걸로 충분하잖아요. 직접적인 증거라니. 마도왕이라도 끌고 와서 보여 달란 소리예요?” 기가 막힌 마리엔이 빽 소리를 질렀다. 다른 동료들도 그녀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라오 조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말해봤지만, 씨도 먹히지 않아서 말이야. 결국, 나 혼자서라도 병력 빼서 너희를 지원하겠다고 말하고 나왔지.” 동료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 얼굴로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고개를 끄떡여 보였다. “예상했던 일이니 괜찮습니다. 하지만 저희를 지원하는 대가로 당신은 상당한 손해를 봤을 텐데요.” “뭐, 그만큼 병력을 따로 빼야 하니까. 나중에 공을 갈라 먹을 때 고려하겠지. 아니면 트집 잡아서 가진 것도 뺏으려고 들거나. 지금도 날 이겼다고 생각하고 좋아하고 있을걸. 그게 문제가 아닌데 말이지.” 라오 조드가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말은 멍청한 놈들이니 어쩌니 욕해도 진 것 같은 기분이라 분한 것 같았다. 한참을 구시렁거리다가 한숨을 푹 쉰 그가 남자를 향해 물었다. “그래도 할 생각이야?” 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와 동료들이 세운 계획은 단순했다. 하마용의 등에 타고 있다가 로토가 나타나면 즉시 가까이 접근한다. 로토의 그림자로 옮겨가 그를 죽인 후 다시 하마용의 등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단순한 만큼 실패할 가능성도 컸다. 라오 조드가 심각하게 말했다. “위험할 수도 있고, 제때 지원해주지 못할 수도 있어. 솔직히 말하면 미친 짓이야.” “알고 있습니다.” 남자를 말릴 수 없다는 것을 느낀 라오 조드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일행을 휙 둘러보며 다짐을 받았다. “나중에 누님이 깨서 날 패면 말려줘야 한다?” “…그냥 같이 맞아.” 시디발라가 자신 없다는 듯 말했다. 무책임하다고 투덜거린 라오 조드가 한탄했다. “당장 누님이 일어나서 이 어처구니없는 계획을 좀 말려줬으면….” “세영님이 깨어나면 바로 저희를 데리고 여길 벗어나실 걸요.” 마리엔이 기다렸다는 듯 톡 쏘아붙였다. 그녀는 동료들을 여기저기 마구 써먹은 라오 조드에게 감정이 나쁜 상태였다. 상상만 해도 싫다는 듯 으악! 하고 비명을 지른 라오 조드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건 안 돼! 근데 그럴 것 같아서 진짜 무서워! 너희 없으면 난 망한단 말이야!” “흥, 엄살은.” 코웃음을 치는 마리엔을 리먼이 다독였다.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온 라오 조드가 말했다. “할 수 있는 건 뭐든 지원해줄게.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 모두 무사히 돌아와. 손가락 하나라도 다쳐오면 난 진짜 누님에게 뼈가 추려질 거라고.” “노력하겠습니다.” “노력으로 부족해. 절대 다치지 말라고! 너희한테 내 목숨이 걸려 있다. 명심해!” 눈을 부릅뜬 라오 조드를 보고 디안이 “네네, 폐하. 명심하겠습니다.” 하고 마지못해 말했다. 얼굴을 찌푸린 라오 조드가 남자에게 “쟤가 폐하라고 부르는 건 왜 기분이 나쁠까?” 하고 속삭였다. 남자는 그저 말없이 웃었다. 일주일 뒤, 바레인 평원. 일행은 하마용을 타고 조르디아군의 상공을 날고 있었다. 둥둥둥. 북소리에 맞춰 푸른 깃발이 휘날렸다. 이글거리는 광선과 날개로 둘러싸인 여자의 얼굴은 사막의 여신을 상징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샤먼들의 노래가 듣는 이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노래를 마친 하얀 나샴, 미갈루가 나샴과 인간의 언어를 번갈아 써서 외쳤다. “전사여, 용감히 싸워라. 여신께서 지켜보고 계신다. 무기를 들고 죽는 자, 여신의 낙원에서 영생하리라.” “우와아아아!” 흥분한 나샴들이 광기에 찬 함성을 질렀다. 사막의 전사들도 수인족들도 그에 전염된 듯 무기를 움켜쥐며 눈을 번뜩였다. 긴장감으로 터질 것 같은 다른 진영과 달리 묘하게 활발한 분위기였다. 흡사 광신도의 집회와도 같은 분위기에 마리엔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주 본격적이네요.” “세영님은 저런 거 원하지 않으실 텐데.” 디안이 못마땅한 듯이 말했다. 휘날리는 푸른 깃발을 보는 시선이 씁쓸했다. 그때 시디발라가 그의 팔을 두드렸다. “시작됐어.” 연합군의 기병들이 먼저 마도군을 향해 몰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 뒤를 떠받치듯 보병이 진군했다. 규모만 좀 커졌지 어느 때와 별다를 것이 없는 전투였다. 하지만 앞서간 우익군이 막 마도군과 부딪혔을 때 전장에 변화가 생겼다. 뒤처진 좌익군을 향해서 땅거미처럼 새까만 것들이 몰려들었다. 갑자기 나타난 그 무리는 송곳처럼 연합군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진영을 본 하마용이 방향을 바꿔 그쪽으로 날았다. 당황한 동료들이 소리쳤다. “뭐야?!” “언데드야!” 아래를 확인한 마리엔이 비명처럼 외쳤다. 날개를 좁힌 하마용이 아래로 내려갔다. 일행은 아래에서 새카맣게 바글거리는 것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좀비와 굴이 섞인 언데드들은 모두 반쯤 찢겨서 너덜거리는 마도군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수는 거의 3천에 달했다. 경악한 시디발라가 소리쳤다. “자기편을 언데드로 만든 거야? 저걸 전부?” “미쳤어!” 언데드에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이 울러 퍼졌다.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병사들 대신 성기사와 사제들이 언데드를 막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성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들의 숫자는 언데드에 비하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적었다. “미천한 인간들이여! 마신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위대한 신의 발 앞에 무릎을 꿇어라!” 그리고 로토가 등장했다. 전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그의 외침에는 광기가 담겨 있었다. 그에 반응한 남자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후와와, 조금만 더 가깝게 접근해주십시오!” “조심해!” 시디발라가 그의 팔을 움켜쥐며 말했다. 걱정이 담긴 동료들의 시선에 미소 지은 남자가 아래를 바라봤다. 한순간 로토의 모습이 가까워지며 그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곧바로 로토의 그림자로 이동했다. 한순간의 어둠, 그리고 어둠이 걷히는 순간 보이는 뒷모습을 향해 그는 있는 힘껏 검을 찔러넣었다. 하지만 로토의 몸에 닿기 직전 검이 저절로 멈췄다. 놀란 남자가 안간힘을 썼지만, 온몸이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로토가 돌아섰다. “너라면 분명 나타날 거라 생각했지.” 히죽거리는 얼굴이 악귀와도 같았다. 남자는 그의 손에 들린 붉은 덩어리를 보았다. 어른의 주먹만 한 그것은 로토의 신기에 반응하듯 연신 펄떡이고 있었다. “왜 움직일 수 없는지 궁금한가?” 로토는 굳어진 남자를 향해 제 손에 들린 것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카벨 루스타나의 어미, 올리비아의 심장이다. 혹시나 해서 파내어 왔는데 역시 통하는군. 영혼은 아니어도 육신은 반응하겠지. 어미를 죽인 패륜아에게 썩 어울리는 저주가 아니냐?” 분노로 순간 눈앞이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이를 악문 남자가 몸부림을 쳤다.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는 몸을 향해 그는 절박하게 명령했다. ‘움직여!’ 검을 쥔 손끝이 미약하게 떨렸다. ‘지금 네 주인은 나다. 카벨 루스타나가 아닌 나야. 그러니 움직여라!’ 지금껏 한 번도 이 몸을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이 손으로 로토를 죽이길 원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조금씩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토는 저주에 저항하는 남자를 비웃듯이 말했다. “오, 저항하는 건가. 어디 한번 마음껏 발버둥 쳐봐라. 아무 소용도 없겠지만.” “로토. 너만은, 반드시 죽이겠다.” 남자의 눈에 담긴 살기에 로토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억지로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감히 날 죽이겠다고? 네깟 놈이 짐을? 마도왕인 나를 말이냐?” “넌 동료를 배신하고 그의 것을 가로챈 비겁자에 불과해.” 남자는 로토의 배신을 목격한 증인이었다. 비겁한 방법으로 왕의 자리에 오른 그가 저지른 악행들도 고스란히 목격했다. 비난이 담긴 검은 눈에 어깨를 부르르 떤 로토가 단검을 빼어 들었다. 푹 소리와 함께 남자의 옆구리에 로토의 단검이 박혔다. 불로 지지는 것 같은 통증에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갑자기 광소를 터트린 로토가 난도질을 하듯 그를 찌르고 또 찔렀다. “고작 망령 주제에! 죽지도 않고! 죽어! 죽으란 말이다!” 멀리서 동료들의 비명이 들렸다. 고통으로 휘청거리던 남자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그냥 죽을 수는 없었다. ‘…세영님!’ 한순간 그를 묶고 있던 저주가 약해졌다. 남자는 마지막 힘을 그러모아 검을 들어 올렸다. 흠칫한 로토가 뒤로 넘어질 듯 몸을 피했다. 남자의 검 끝에서 튀어 나간 검은 번개가 로토의 심장을 노렸다. 하지만 로토가 나자빠지듯 몸을 굴린 덕에 가슴이 아닌 왼쪽 어깨가 터져나갔다. “으아아악!” 어깨를 움켜쥔 로토가 비명을 질렀다. 더 버틸 수 없었던 남자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것을 본 로토가 더듬더듬 단검을 쥐고 달려와 그의 등을 찔렀다. 조금 전과 달리 필사적인 내리찍음에 남자의 몸이 힘없이 앞으로 쓰러졌다. 긴 검은 머리칼이 피로 더럽혀졌다. 제가 흘린 핏물 위에 쓰러진 남자를 내려다보던 로토가 광소를 터트렸다. “어미를 죽인 패륜아여. 오늘이 네 죗값을 치르는 날이다!” 그는 제 손에 묻은 남자의 피를 <용의 눈> 위에 문질렀다.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오늘을 위해 300년 전의 망령을 육신에 가두고, 신기를 모아 놈을 파괴할 기회를 노렸다. 드디어 그때가 왔다. 손등에 박힌 신기를 높게 들어 올린 로토가 외쳤다. “부활하소서. 에레슈키갈! 나의 신이여! 여기 이 죄인의 피로 대가를 치르니, 다시 지상에 강림하여 영원한 영광을 베푸소서!” -드디어! 어둠 속에서 어둠보다 더 어두운 것이 소리쳤다. 또다시 달려드는 세영을 뿌리친 그녀는 여기저기 뜯겨나간 날개를 활짝 폈다. 바닥에 떨어진 그녀의 깃털들이 눈을 뜨고 노래를 불렀다. -탄생이다! 탄생이다! “뭐야?” 찢어지는 노랫소리에 귀를 막은 세영이 쓰러진 몸을 일으켰다. 수없이 치고받으며 바닥을 구른 그녀 역시 너덜너덜한 모습이었다. 다시 여자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림자용이 새하얀 팔을 들어 올렸다. -사하여, 이제 그대가 약속을 지킬 때. 내 아이에게 새로운 생명을, 영원한 생명을 부여해라! 순식간에 공간을 채운 어둠이 씻겨나갔다. 그것들은 물이 흐르듯 어디론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심상찮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낀 세영이 “씨발, 뭐냐고!” 하고 소리쳤다. “말도 안 돼! 저게 대체 뭐야!” 시디발라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카라드를 부르던 동료들 역시 창백해진 채로 앞을 보고 있었다. 거대한 산과 같은 것이 그들의 눈앞에 떠 있었다. 중력에 역행하는 것처럼 단 한 번의 날갯짓조차 하지 않고. 검은 비늘로 뒤덮인 몸과 하늘을 가릴 정도로 큰 날개, 길쭉한 머리를 장식한 여섯 개의 하얀 뿔과 긴 목, 흉포한 발톱과 꼬리. 전설에 나오는 모습 그대로였다. “용신?” 디안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놈이 눈을 떴다.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였다. 거대한 날개를 펼친 용이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로토가 광소를 터트리며 두 팔을 들었다. “마신 에레슈키갈이여! 저 분수도 모르는 적들을 물리치소서!” 사라진 신을 다시 불러내기 위해 그는 본드래곤과 쌍두룡의 심장, 그리고 검은 머리카락의 죄인을 바쳤다. 이제 신이 그의 노고에 보답해줄 차례였다. 그때, 용이 거대한 입을 벌렸다. 검은 번개, 혹은 그림자와 같은 브레스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연합군과 마도군, 언데드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재로 만들었다. 당황한 로토의 팔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신이여?” 뒤늦게 용이 제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로토는 혼란에 빠졌다. 마치 환청처럼 여자의 웃음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쳤다. 천천히 날갯짓한 용이 지상에 내려앉았다. 그것만으로도 대지가 비명을 지르며 진동했다. 살육의 시작이었다. ──────────────────────────────────── 비탄의 들판 (6) “으아악! 살려줘!” “어머니!” “신이시여!” 살아있는 것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용의 앞에선 모두가 공평했다. 연합군과 마도군 같은 소속도 인간과 나샴과 같은 종족도 의미가 없었다. 용은 차별 없이 죽이고 또 죽였다. “마, 막아야 하는 거 아니야?” 시디발라가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피로 물들어가는 대지를 멍하게 내려다보던 디안이 “어떻게 막아?” 하고 되물었다.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만둬! 뭘 하는 거야. 이 덩치야, 그만하란 말이야!” 하마용이 거대한 용의 머리 위를 선회하며 소리쳤다. 새로운 동족을 보고 기뻐하던 그는 죽어가는 인간들을 보고 당황했다. 어떻게든 말리려는 몸짓이 애처로울 정도였다. 핏빛의 눈동자가 깜빡거리며 하마용을 향했다. 용이 나비를 쫓는 고양이처럼 앞발을 휙휙 휘저었다. 거기 휩쓸린 하마용이 으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때 <듀나자드>가 광선포를 발사했다. 뒤를 이어 라오 조드가 지휘하는 비행선들이 일제히 포를 쏘아 용을 공격했다. 하마용을 뒤쫓던 용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후퇴! 어서 후퇴해!” 듀나자드에서 퇴각을 의미하는 깃발이 펄럭였다. 그것이 잔뜩 성이 난 용의 시선을 끌었다. 거대한 입이 벌어지며 새하얀 이빨이 드러났다. 으르렁거리던 용이 브레스 모션을 취했다. “안 돼! 거긴 세영님이 있다고!” 날카롭게 소리친 마리엔이 워터픽을 쏘았다. 다섯 개의 송곳이 일제히 용의 눈을 노렸다. 그러나 마법은 용의 몸에 닿자마자 스르륵 사라졌다. 다른 동료들도 급히 스킬을 썼지만, 용의 몸은 그것을 모두 튕겨내 버렸다. 상황을 눈치챈 듀나자드가 급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용의 공격을 피하기엔 무리로 보였다. 날개를 크게 펄럭인 하마용이 소리쳤다. “다들 꽉 잡아!” 빛줄기처럼 위로 솟구친 하마용이 화살처럼 아래로 내리꽂혔다. 브레스를 뿜으려던 용의 머리가 온몸으로 들이박는 하마용 때문에 휙 밀려났다. 이번엔 제법 아팠는지 카웅 소리를 낸 용이 앞발로 부딪힌 곳을 쓰다듬었다. 반면 충격으로 튕겨 나간 하마용은 빙글빙글 돌며 아래로 추락했다. “후와와! 정신 차려!” 시디발라의 비명에 눈을 뜬 하마용이 힘겹게 날개를 퍼덕였다. 오른쪽 날개가 부러진 것처럼 꺾여 있었다. 간신히 일행을 바닥에 내려놓은 하마용이 배에 묶인 안장의 끈을 풀었다. 그는 평소의 겁쟁이답지 않게 말했다. “다들 빨리 도망가. 내가 어떻게든 막아볼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같이 가야지!” 시디발라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리먼이 하마용의 날개를 급히 치료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저은 하마용이 그를 밀어내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뒤이어 거대한 용의 앞발이 일행의 머리 위를 스쳐 하마용에게로 향했다. “안 돼! 돌아와! 돌아오란 말이야!” “시디발라! 어서 가야 해!” 디안이 시디발라의 팔을 잡아끌었다. 화를 내려던 시디발라는 울 것처럼 일그러진 디안의 얼굴에 입을 다물었다. 그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달리기 시작했다. 하마용은 분전했다. 일행과 용을 멀리 떨어뜨리기 위해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한 용이 분노해서 꼬리를 휘둘렀다. 비질한 것처럼 마도군이 쓸려나갔다. “후퇴, 후퇴해라!” 용의 관심이 하마용에게 쏠린 사이 연합군은 재빨리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마도군이 철시를 쏘아 올렸다. 용을 피해 달아나던 하마용은 갑작스럽게 날아온 쇠화살을 맞고 바닥을 굴렀다. “후와와!” 시디발라가 비통하게 그를 불렀다. 거대한 용의 앞발이 쓰러진 하마용을 덮쳤다. 하마용이 저를 움켜쥔 것을 물어뜯으며 저항하는 게 보였다. 그것도 잠깐, 갈기갈기 찢긴 황금빛 날개와 함께 붉은 비가 후드득 쏟아졌다. “아아악!” 끔찍한 광경에 마리엔이 비명을 질렀다. 피에 젖은 앞발을 날름날름 핥던 용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루비처럼 번뜩이는 눈동자가 뭔가를 찾고 있었다. 정확히 자신들을 향하는 용의 눈동자에 디안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다들, 빨리 도망쳐!” 넋을 놓은 시디발라와 비명을 지르는 마리엔을 끌고 달아나려던 그는 옆을 지나치는 리먼을 보고 당황했다. 갈색 머리의 사제는 당연히 가야 할 곳으로 향하는 사람처럼 용에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리먼! 어디 가는 겁니까!” 디안의 외침에 리먼이 그를 돌아보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단정한 얼굴이었다.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빙긋 웃은 그가 말했다. “디안. 마리엔. 시디발라.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부족한 내게 여러분은 좋은 동료가 되어주셨습니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마리엔이 악을 쓰듯 외쳤다. 불안감으로 떨리는 목소리였다. 대지를 진동시키며 다가오는 용을 쳐다본 리먼이 말했다. “길게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군요. 제가 용을 막겠습니다. 성공한다고 해도 그리 긴 시간은 아닐 겁니다. 그사이에 도망치십시오.” “리먼!” 그를 붙잡으려던 디안은 갑자기 터져 나온 빛에 얼굴을 가렸다. 펠릭스의 신기, <방황하는 성직자의 아뮬렛>을 꺼내 든 리먼이 다시 용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노래하듯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빛이여, 당신의 종이 아닌 자가 힘을 빌리고자 합니다.” 신기는 이제 제대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빛을 내뿜었다. 성기사 펠릭스의 성표였던 그것은 주인의 능력을 이어받아 자기희생과 오러실드의 스킬이 담겨 있었다. 리먼은 신기를 손에 쥔 순간부터 깨달았다. 이것이 저의 역할이며, 이 땅에서 제게 주어진 사명이라는 것을. “제 몸을 바쳐 기원합니다. 가엾은 자들을 당신의 날개로 보호하소서.” 자기희생 스킬이 발동됨에 따라 성표가 빛을 뿜었다. 그것은 리먼의 몸을 삼키고 점점 거대해져 마침내 하늘까지 닿는 빛 기둥을 만들었다. 빛 기둥 속에서 인간의 형상을 닮은 무언가가 내려왔다. 황소의 뿔로 된 관을 쓰고 톱날 같은 칼을 오른손에 든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의 어깻죽지부터 시작된 빛이 날개처럼 등 뒤로 활짝 펼쳐져 있었다. “신이다!” “빛의 신, 샤마쉬가 강림하셨다!” 달아나던 연합군이 그것을 보고 발길을 멈췄다. 쿵쿵거리며 다가오던 용이 갑자기 나타난 샤마쉬의 형상에 멈칫했다. 그때 샤마쉬가 날개를 펼쳤다. 거대한 반구가 사람들을 감싸며 용이 뒤로 주욱 밀려났다. “리, 리먼.” 디안이 떨리는 손을 뻗었다. 리먼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은 채로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의 모습대로 깎아낸 조각상 같았다. 시디발라가 휘청거리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런 거, 이런 거 싫어! 왜 이렇게 된 거야. 카라드도… 후와와도… 리먼까지 왜!” 그의 울부짖음에 정신을 차린 마리엔이 손을 뻗었다. 그녀는 강압적으로 시디발라를 일으키며 “가자!” 하고 소리쳤다. 그녀는 흐느끼는 시디발라의 손을 잡아끌며 사납게 말했다. “가야 해! 이대로 리먼의 희생을 헛되게 만들 순 없어!” 디안도 리먼에게서 손을 떼고 물러섰다. 그들은 서둘러 듀나자드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샤마쉬께서 우리를 보호하신다!” “가자! 어서 용을 물리치자!” 빛의 교단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제가 믿는 신의 강림에 눈이 벌게진 성기사들이 용을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놀란 디안이 “뭐하는 거야! 그만둬!” 하고 소리쳤지만 닿지 않았다. “지금이다! 마도와 마신을 물리쳐라!” 교황마저 이성을 잃고 혼란을 부추기고 있었다. 후퇴하던 연합군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 용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라오 조드 쪽에서 급히 퇴각 신호를 보냈지만, 무시당했다. “이 멍청이들이! 진짜 미쳤나!” 악을 쓴 라오 조드가 듀나자드를 일행을 향해 몰았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일행만 빼내서 도망칠 생각이었다. 나중에 비겁자로 욕을 먹든 말든 지금 상황에선 그게 최선이었다. “멈춰! 멈추라고!” 디안이 달려가는 연합군을 말리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광기와 같은 흥분에 젖은 인간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시디발라가 고개를 저었다. “소용없어. 우리라도 여길 빠져나가자.” 그때 땅이 우르릉 흔들렸다. 일행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용이 반구 밖으로 나온 인간들을 짓밟기 시작했다. 한참을 쿵쿵거리던 놈은 시뻘겋게 물든 앞발을 들어 샤마쉬의 형상을 공격했다. 그대로 형상을 통과해버린 앞발이 반구를 후려쳤다. 결계에 쩌저적 금이 갔다. “으아악! 도망쳐!” 불리함을 깨달은 연합군이 다시 후퇴했다. 용이 금이 간 곳을 다시 후려갈겼다. 그때 허둥지둥 도망치던 병사가 실수로 리먼을 들이박았다. 리먼의 몸이 쓰러지면서 조각조각 부서졌다. 거의 동시에 샤마쉬의 형상이 흩어지며 반구도 사라졌다. 앞을 가로막는 막이 사라진 것을 깨달은 용이 도망치는 인간들을 공격했다. -크아아아아! 용이 내뿜는 브레스가 땅을 검게 태우면서 지나갔다. 일행 쪽으로 다가오던 듀나자드도 그에 휩쓸렸다. 브레스에 직격당하는 것은 피했지만, 여파에 휘말린 것만으로도 비행선의 오른쪽이 떨어져 나갔다. ‘역시 우리를 찾고 있어.’ 디안이 루비 같은 눈을 번뜩거리는 용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때마침 주인을 잃은 말이 보였다. 결정은 순식간이었다. 그는 시디발라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시디발라, 부탁한다. 마리엔을 데리고 듀나자드로 가. 내가 시간을 벌게.” “디안! 너까지 왜 그러는 거야! 같이 싸워! 도망치지 말고 같이 싸우잔 말이야!” 마리엔이 악을 쓰듯 소리쳤다. 하지만 디안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시디발라에게 말했다. “세영님을 지킬 사람은 너희밖에 없어. 라오 조드도 믿지 마. 되도록 빨리 여길 벗어나.” “…….” 입술을 꾹 깨문 시디발라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는 마리엔의 팔을 움켜쥐고 블링크를 썼다. 순식간에 디안과 떨어진 마리엔이 비명을 질렀다. “시디발라, 이거 놔! 놓으라고!” 디안은 마지막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 후에 말을 향해 달렸다. 기마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저항하는 말의 등에 올라탄 그는 듀나자드 쪽으로 향하는 용에게 블레이드 스톰을 날렸다. “이쪽이다! 빌어먹을 용아!” 호기롭게 외친 디안은 말의 배를 걷어찼다. 뭔가가 이상한지 잠시 멀뚱거리던 용이 그를 향해 앞발을 뻗었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말이 필사적으로 달렸지만, 용을 따돌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디안은 팔찌의 힘으로 불러들인 까마귀 떼로 용의 시선을 교란했다. 집중력이 썩 좋지 않은 용은 파닥거리며 날아다니는 까마귀들에게 한눈을 팔았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야.’ 말을 멈춰 세운 디안은 있는 힘껏 검을 움켜쥐었다. 아직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스킬이지만,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세영이 만들어준 검과 바람속성을 강화하는 신기의 능력을 합친다면 가능할 수도 있었다. “난 죽고 싶지 않아. 죽으려고 여기 온 게 아니야. 살아서 동료들에게 돌아갈 거라고!” 있는 힘을 다해 외친 디안이 용의 머리 쪽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다음 순간 검의 주변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검을 향해 몰려든 무형의 기운이 공간을 왜곡시켰다. 더는 견딜 수 없을 때까지 힘을 끌어모은 디안이 용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둠 블레이드!” 터질 것처럼 일렁이는 기운이 용을 향해 날아올랐다. 마지막 순간까지 성공을 확신하지 못했던 디안은 멍하게 그것을 바라보았다. 광폭하게 몰아치는 기운이 용의 목을 꿰뚫었다. 그것은 마치 블랙홀처럼 용의 피와 살을 뜯어 먹으며 번져갔다. 용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됐다!” 기뻐하며 소리친 디안은 다음 순간 순식간에 회복되는 용의 목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카갹 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낸 용이 그를 노려봤다. 거대한 앞발이 디안과 그가 탄 말을 한꺼번에 짓밟았다. -300년 전,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날갯짓을 멈춘 여자가 말했다. 그녀의 눈은 세영이 아닌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는 듯했다. 내 말 씹는 거냐며 그녀의 머리채를 쥐어뜯으려던 세영이 잠깐 손을 멈췄다. -그 자리에서 내 아이의 영혼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것을 봐야 했지. 그때의 내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네가 과연 알까. 여자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세영은 조금 머쓱한 기분으로 손을 내렸다. -아이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애썼지만,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저 찢겨나간 아이의 영혼을 붙잡고 흩어지지 않도록 애쓸 뿐이었지. 여자의 말에 세영은 왜 사슴의 영혼이 너덜너덜한 테디베어처럼 보였는지 알 수 있었다. 갈기갈기 찢긴 영혼을 여자가 붙잡고 한 땀 한 땀 꿰매어 붙인 듯했다. 엄청난 장인정신이었다. -아이의 영혼을 온전하게 만드는 것에만 300년이 걸렸다. 새로운 몸을 주기 위한 준비도 마쳤지.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구나. 해충과도 같은 너희가 있는 한, 내 아이는 결코 행복할 수 없겠다고. 담담히 이야기하던 여자의 목소리에 살기가 어렸다. -한 번 버렸던 내 아이를 찾아와 희생을 요구하고, 육신까지 잃은 아이에게 책임을 묻는 버러지 같은 것들. 내 아이가 부활해도 다시 뜯어먹을 기회만 노리겠지. “아니, 그건 사슴 씨 문제도 있지. 그걸 왜 해 줘. 호구도 아니고.” 세영의 반박에 여자가 차갑게 웃었다. -사갈 같은 것들에게 내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고 결심했다. 너희의 피와 영혼을 제물로 바쳐 내 아이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아 주겠다고. 어둠이 걷힌 공간이 거대한 용의 모습을 비쳤다. 용은 개미떼처럼 흩어지는 인간들을 짓밟고 있었다. 세영의 얼굴이 뻣뻣이 굳어졌다. 여자가 광기로 물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에겐 고맙다고 해야겠구나. 네 덕에 운명을 비틀어 내 아이가 새로운 생을 얻게 되었으니. “…저게 사슴 씨라고?” 검은 용이었다. 거대한 날개도, 여섯 개의 뿔도, 루비 같은 눈동자도, 그녀가 아는 사슴과는 닮은 곳이 없었다. 하지만 여자는 고개를 끄떡였다. -정말 오랜 기다림이었지. 하지만 드디어 성공했다. “이 미친년이 무슨 짓을 한 거야?” 미간을 찌푸린 세영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미친놈은 패는 것이 답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달려드는 그녀를 보고도 소리 높여 웃었다. -화를 내는구나. 하긴, 그것 외에 네가 무얼 할 수 있겠니. “닥쳐, 싸이코년아!” 세영의 몸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녀는 정면으로 여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퍼억 소리와 함께 여자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용에게 모든 힘을 쏟아 부은 탓인지 전보다 약해진 느낌이었다. 세영의 주먹이 여자의 날개를 후려치고 거기 박힌 눈알을 터트렸다. 키에엑 소리를 지른 여자가 전신에서 불꽃 같은 섬광을 토해냈다. 나는 듯이 스텝을 밟아 그것을 피한 세영이 다시 여자의 가슴께를 후려쳤다. 퍼억 소리와 함께 여자의 상체가 뭉그러졌다. 그 사이에도 용은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다. 분노를 참지 못한 세영이 악을 썼다. “씨발, 영혼만 들어가면 다 그놈 되는 거냐! 저게 무슨 사슴 씨야!” 그녀가 아는 사슴은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느니, 자신을 희생하는 쪽을 택할 호구였다. 그런데 어미라는 여자가 사슴의 영혼을 괴물 속에 쑤셔 넣어두고 부활입네 쫑알거리고 있었다. 그때 세영의 손목을 붙잡은 여자가 속삭이듯 물었다. -그래서… 네 손으로 내 아이를 죽일 거니? 겨우 되살아난 그 아이를? ──────────────────────────────────── 비탄의 들판 (7) “디안! 디안! 안 돼!” 마리엔은 점점 멀어지는 디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거리는 자꾸만 벌어졌다. 말을 탄 디안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지더니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또다시 터져 나온 눈물이 하얀 뺨을 흠뻑 적셨다. “왜, 왜 이렇게 된 거야! 왜!” 끔찍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리가 멍하고 귓가에선 윙윙 울리는 소리가 났다. 시디발라가 훌쩍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때 캬갹 하는 날카로운 울부짖음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그쪽을 돌아보려는 마리엔을 누군가가 붙잡았다. “보지 마! 보지 말고 어서 배에 타!” 라오 조드였다. 엉망으로 헝클린 머리에 그을음이 묻은 얼굴이었다. 그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빨리 배에 타라고!” 하고 그녀를 윽박질렀다. 간신히 목표 지점에 도달한 시디발라가 마리엔의 팔을 놓고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요, 용자께서…!” “용이 전사 디안을 죽였다!” 그때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마리엔은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어지럽게 밀려드는 단어들이 하나의 사실을 만들었다. 디안이 죽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는 순간, 그녀는 앞으로 뛰쳐나갔다. 라오 조드의 부름도, 시디발라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안 돼. 디안, 안 돼!” 마리엔은 도망치는 사람들을 지나치며 앞으로 달렸다. 디안을 확인해야 했다. 그가 정말 죽었다면 시체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미친 사람처럼 내달리며 아수라장을 헤매던 그녀가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를 발견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비열한 성품과 어울리지 않게 학자처럼 생긴 얼굴. 반백의 머리와 앞으로 굽은 어깨는 이전과 달라졌지만,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마리엔은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로토!!!” 흠칫한 로토가 그녀를 돌아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마리엔은 분노로 눈앞이 시뻘겋게 물드는 착각을 느꼈다. 다음 순간, 로토가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마리엔은 악을 쓰며 그를 뒤쫓았다. “거기 서! 서란 말이야!” 그녀의 마법은 로토의 방어막에 가로막혔다. 마리엔은 필사적으로 로토의 뒤를 쫓았지만, 거리는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울분으로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그때였다. -힘을 원해? 머릿속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마리엔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자 목소리가 웃었다. -그럼 가져. 어떻게 하면 되는지 넌 이미 알고 있잖아. 그녀의 가슴에 달린 보석이 빛나기 시작했다. 멍하게 앞을 바라보던 마리엔이 허리춤에 달린 단검을 뽑아들었다. 세영이 만들어서 그녀에게 건넨 스틸레토였다. 마리엔은 주저 없이 보석을 찔렀다. 다음 순간 거대한 불길이 그녀의 머리 위로 치솟았다. 그것은 차츰 이글거리는 거인의 형상을 취했다. -나는 위대한 마리드의 하나, 불꽃의 정령 이쉼. 친구여, 내게 어떤 도움을 바라는가. 마리엔은 제 손이 불꽃에 휘감긴 것을 보았다. 고통은 없었다. 그녀는 거인을 향해 양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쉼, 나의 친구! 내게 힘을, 적에게 복수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그녀의 목소리는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비탄과 증오, 복수심에 불타는 엘프를 내려다본 거인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대의 소원은 이루어질 것이다. 다음 순간, 그의 모습은 소용돌이치는 불꽃으로 변했다. 뒤늦게 달려온 시디발라가 “안 돼!” 하고 부르짖었다. 하지만 마리엔의 몸은 불꽃에 휘감긴 뒤였다. 그녀를 삼킨 불꽃은 점점 자라나서 불타는 악귀의 형상이 되었다. 분노와 복수의 정령, 바르카였다. 마리엔은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도망치던 로토를 덮쳤다. -죽어! 죽어엇! 불꽃으로 이루어진 손톱이 로토의 방어막을 드드득 긁었다. 로토와 함께 도망치던 마도인들이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한 줌의 재로 변했다. 겁에 질려 주저앉은 로토의 위로 거대한 주먹이 내리쳐졌다. -너 때문에! 네가 모든 걸 망쳤어! 죽어! 죽으란 말이얏! 증오에 물든 외침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것이 용의 시선을 끌었다. 카카각 소리를 낸 용이 거대한 입을 열었다. 놈이 활활 타오르는 마리엔을 향해 브레스를 쏘려는 순간이었다. 하늘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섬광이 내리꽂혔다. -카아아악! 휘청거리던 용은 재차 내리꽂힌 번개에 바닥으로 처박혔다. 우르릉하고 땅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놀라 도망치던 사람들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은빛으로 빛나는 것이 허공에 떠 있었다. 얼어붙은 뿔로 만들어진 관을 쓰고 몸에 딱 맞는 슈트를 입은 여자였다. 그녀의 등에는 백은처럼 빛나는 피막 날개가 달려있었다. 서리의 폭풍이 여자를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넋을 잃고 있던 사람들은 제 눈앞으로 떨어지는 눈송이에 정신을 차렸다. “여신…이신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여신이라고 부르는 자도 있고, 구원자라고 외치는 자도 있었다. 희망으로 들뜬 이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세영이 시선을 돌렸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이 버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용을 향해 말했다. “끝을 내자.” 용이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세영은 저를 집어삼키려는 용의 주둥이에 브로그 킥을 날렸다. 고개가 뒤로 홱 꺾인 용이 카아악 하고 성난 고함을 질렀다. 놈의 콧등을 밟고 크게 텀블링한 세영이 펄럭이는 날개를 향해 뛰어내렸다. “산탄격!” 그녀의 주먹과 부딪힌 날개가 퍼엉 소리와 함께 터져나갔다. 동심원이 번지듯 2차, 3차의 폭발이 일어나면서 날개 전체에 구멍이 뻥뻥 뚫렸다. 데자뷰 스킬로 몸을 회전시킨 세영이 연속기를 썼다. “빙룡참!” 빠르게 회복되던 날개 죽지가 다시 길게 찢어졌다. 십자형의 상흔이 연속으로 다섯 번 겹쳐지며 날개에 치명상을 입혔다.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 용이 아래로 추락했다. 떨어지는 용을 본 인간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여긴 네 세계도 아니잖니. 인간들이 죽든 말든, 그건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란다.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세영은 추락한 용을 향해 몸을 날렸다. 용을 떨어뜨렸다지만, 고작 날개에 상처를 입혔을 뿐이다. 죽이려면 지금부터 피를 깎아야 한다. -피이이이! 쓰러진 용이 어린 짐승처럼 울었다. 돌진으로 용에게 달려들던 세영이 멈칫했다. -너도 내 아이를 좋아하잖아. 너만 눈감아주면 돼. 그럼 그 애는 불멸의 생을 받을 수 있어. 악귀처럼 들러붙던 속삭임이 떠올랐다. 뭔가가 다가오는 느낌에 흠칫해서 고개를 든 세영은 거대한 꼬리에 직격당했다. 그녀의 몸이 배트에 맞은 공처럼 뒤로 튕겨 나갔다. “…젠장!”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세영이 포션을 입에 쏟아 부으며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으스러지는 것 같았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사슴의 양엄마를 때려잡으면서 렙업을 한 모양이었다. 새빨간 눈을 번뜩인 용이 크르릉 목을 울렸다. 찢어진 날개가 제법 아팠는지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세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영생 따위를 기뻐할 리가 없지.” 사슴이라 부르는 게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순한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버리는 버릇이 있어서 무던히도 속을 썩였다. 그런 남자가 남을 희생시켜 얻은 영생에 달가워할 리가 없었다. 영원한 고문을 당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기뻐한다고 해도 내가 막을 거고. 블레이징 토네이도!” 세영이 바닥에 주먹을 내리찍는 순간 거대한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이전과 달리 한 개뿐이었지만, 용의 몸 전체를 휘어 감고 하얗게 얼어붙게 했다. 양손에 낀 너클을 맞부딪힌 세영이 허공에 떠오른 문양을 후려갈겼다. “산탄포!” 폭발하듯 터져 나온 섬광이 한줄기 빛줄기가 되어 용의 어깨를 꿰뚫었다. 비명을 지른 용이 날개를 펼쳐 위로 날아올랐다. 동시에 땅을 박차고 위로 떠오른 세영이 용의 날개를 노렸다. ‘…패턴이 똑같아?’ 용의 공격패턴은 앞서 싸운 에레슈키갈과 똑같았다. 타격을 입으면 위로 날아올라 내려찍는 것도, 날개 주변에 불꽃을 소환해서 쏘아내는 것도, 몸을 한 바퀴 돌리며 공격하는 것도, 심지어 브레스와 충격파 공격 전의 동작까지 똑같았다. 단지 덩치와 위력이 다를 뿐이었다. 벌써 수십 번 가까이 에레슈키갈과 싸우며 패턴을 외운 세영에겐 상대하기 손쉬운 적이었다. “대체 무슨 속셈이야! 에레슈키갈!” 용의 날개를 후려친 세영은 분노로 일갈했다. 하지만 이미 사라져버린 여자가 그녀에게 답해줄 리가 없었다. 이를 악문 세영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다시 추락하는 용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모탈 브레이크!” 푸른 불꽃이 세영의 전신을 휘감았다. 멀리서 넋을 놓고 구경하던 인간들이 갑자기 몰아치는 눈 폭풍에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가렸다. 세영의 몸이 서리로 된 화살처럼 용의 가슴을 꿰뚫었다. 날카롭고 슬픈 울음소리가 태풍이 몰아치는 하늘을 갈았다. “안 돼…! 안 돼!” 로토는 제 손이 점점 주름지고 오그라드는 것을 보고 있었다. 용이 공격당할 때마다 그는 갑자기 나이를 먹는 것처럼 젊음을 잃었다. 허리가 굽은 노인의 모습으로 변한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신이여! 신이시여! 제게 약속한 영생을 주십시오! 나의 신이여!” 로토는 비틀거리는 용을 향해 울부짖었다. 그때 퍽 소리와 함께 그의 손등에 박힌 신기가 검게 빛을 잃더니 산산이 부서졌다. 로토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벌어졌다. “안 돼! 안 돼애애애!” 절규하던 그는 제 뺨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을 느꼈다. 하얗게 센 머리 위로 그보다 더 순결한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섬뜩함을 느낀 로토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활활 불타는 여자의 형상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카맣게 찢어진 검은 입이 히죽거리며 미소 지었다. “…사, 살려…!” 로토는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기어갔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손톱이 그를 움켜쥐었다. 거세게 몰아치는 눈보라에 비명과 갈가리 찢어지는 소리가 묻혀버렸다. 휘날리는 눈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구슬픈 울음소리를 낸 용의 몸이 새하얀 가루가 되어 휘날렸다. 반사적으로 그것을 움켜쥔 세영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고 손을 놓았다. 풀려난 가루는 은빛의 반짝임을 남기고 사라졌다. 뚝 하고 떨어진 물방울이 세영의 머리를 적셨다. 어느새 그친 눈보라 대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멍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던 세영이 고개를 숙였다.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에 그녀의 뺨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세영님. 쏟아지는 빗줄기는 복수를 끝마친 마리엔에게도 떨어졌다. 불타오르던 그녀의 몸이 치익거리는 소리를 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도 이성을 되찾았다. 마리엔은 비틀거리며 세영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마리엔.” 날개를 펄럭인 세영이 마리엔의 앞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제게 뻗어진 마리엔의 손을 잡았다. 불꽃에 휘감긴 손톱이 치이익 소리를 냈다. 마리엔의 몸을 휘감은 불꽃이 줄어들면서 그녀는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저 한 번도 세영님께 도움이 되지 못했어요. 죄송해요. 더듬거리는 마리엔의 말에 세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다음 순간 애써 웃는 표정을 지은 그녀가 말했다. “마리엔은 언제나 제게 도움이 되었는걸요.” -정말요? “그럼요. 마리엔이 있어서 항상 즐겁고 행복했어요.” -…다행이다. 세영의 말에 마리엔은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몸이 천천히 앞으로 기울어졌다. 세영은 재가 되어 무너져 내리는 마리엔을 온몸으로 떠받쳤다. 하지만 그녀의 품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금이 간 서클렛이 철컹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세영은 멍하게 피와 재로 더럽혀진 손을 내려다보았다. “…미안해.” 울먹임이 담긴 목소리가 그녀에게 닿았다. 천천히 돌아보자 비와 피, 흙탕물에 젖어 엉망이 된 시디발라가 서 있었다. 그는 양손으로 흠뻑 젖은 눈을 문지르며 다시 말했다. “미안해, 나 아무도 지키지 못했어. 정말 미안.” “…시디발라.” “모두 죽었어. 나만, 나만…!” 세영은 그에게 손을 뻗었다. 울먹이던 시디발라가 달려와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트렸다. 세영은 떨리는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까 울지 마.” 그러자 시디발라가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통곡과 같은 울음이었다. 세영은 멍하게 앞을 보았다. 잠깐 잠들었다가 깨어난 것 같은데 웃으며 달려와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너무나 이상했다. ‘다들, 어디로 간 거지. 죽었다니. 그럴 리가 없는데….’ “누, 누님….” 시디발라를 끌어안고 있던 세영이 고개를 들었다. 하얗게 질린 라오 조드가 입술을 달싹였다. “누님, 있잖아. 내가….” 다음 순간 라오 조드의 몸이 위로 붕 떠올랐다. 그의 목을 움켜잡은 세영의 눈이 번뜩였다. 표정이 사라진 입술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는 내가 퍽 우스웠나 보네.” 꽈르릉. 천둥이 울었다. 내려쳐 진 벼락이 곳곳에서 나부끼는 푸른 깃발 위로 떨어졌다. 불타는 깃발에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세영의 목소리가 공기를 쩌렁쩌렁 울렸다. “아니면 내 동료들이 우스웠나? 쉽게 이용해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 하지만 정도껏 했어야지. 내가 이 꼴을 보게 해?! 네가 감히!!!” “…컥, 커억!” 세영의 외침에 하늘이 콰르릉 울었다. 버둥거리던 라오 조드의 몸이 천천히 늘어졌다. 그때 조그마한 주먹이 세영을 때렸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울부짖으며 세영을 때리던 시디발라가 털썩 주저앉았다. 입을 다물고 그를 내려다본 세영이 손을 놓았다. 바닥으로 내던져진 충격에 정신을 차린 라오 조드가 쿨럭거리며 기침을 토해냈다. 다시 콰르릉 천둥이 쳤다. 낙뢰가 엉망이 된 대지를 파헤쳤다. 잠시 그쳤던 눈 폭풍이 몰아쳤다. 서리가 바닥을 흐르던 피를 얼어붙게 했다. “여신이여, 부디 노여움을 푸소서.” 거센 바람을 가르며 절뚝절뚝 다가온 미갈루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들것에 실린 무언가를 세영의 앞에 내려놓은 나샴들이 그를 따라 엎드렸다. 들것 옆에 놓인 검에 세영은 그것이 디안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시디발라가 울면서 들것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부디 저희를 용서하소서.” 성기사들이 리먼의 유해를 거두어 바쳤다. 힘을 다한 성표 역시 깨어진 채였다. 수인족들은 죽은 저희의 왕을 바쳤다. 켄타우로스의 시신에는 금이 간 황금색 허리띠가 휘감겨 있었다. 세영은 그것이 제가 찾지 못한 마지막 신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용서하소서, 신이여. 어리석은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마지막으로 마도인들이 카라드와 하마용의 시신을 데려왔다. 세영은 천천히 손을 뻗어 피로 더럽혀진 하얀 얼굴을 만져보았다. 차갑게 식은 뺨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데인 듯이 손을 움츠린 세영이 몸을 일으켰다. 이건 꿈도, 환상도 아니었다. “시디발라.” 들 것 앞에 엎드린 시디발라의 손을 잡은 세영이 그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냈다. 울먹이는 그의 얼굴을 어루만져 준 세영이 웃었다. “괜찮아. 나를 믿어.” “뭐, 뭘 하려고?” 시디발라가 훌쩍이며 물었다. 세영은 말없이 인벤에서 카라드의 검을 꺼냈다. 밤처럼 새카만 검 전체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가 있었다. 반지를 바닥으로 떨어뜨린 그녀는 있는 힘껏 검을 내리찍었다. 폭발하는 것 같은 섬광이 터져 나오며 빛이 모든 것을 삼켰다. 그리고 빛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어서 오십시오, 나의 구원자여.> ──────────────────────────────────── Nowhere (1) 세영은 얼굴을 가린 팔을 내렸다. 서릿바람이 휘몰아치는 전쟁터도, 시디발라도 보이지 않았다. 기묘할 정도로 새하얀 공간이 끝없이 펼쳐졌다. 텅 비어있는 그곳에 누군가 서 있었다. “…뭐야, 넌?” 세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얼굴을 굳힌 그녀는 눈앞의 존재를 노려보았다.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을 바닥까지 길게 늘어뜨린 남자였다. 창백한 얼굴에 하얀 속눈썹, 핏기없는 입술, 소매가 넓은 고전적인 옷까지 온통 하얀색이었다. 병적으로 흰색에 집착하는 것 같은 남자는 낯설지만 어딘지 눈에 익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영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사슴 코스프레냐?” 완전히 똑같진 않지만, 어딘가 비슷한 외모에 비슷한 분위기였다. 머리를 까맣게 물들인다면 사슴과 형제처럼 보일 듯했다. 남자가 장님처럼 꼭 감은 눈을 세영 쪽으로 향했다. <나는 이 세계의 주신, 사하. 그리고 당신을 이곳으로 부른 자이기도 합니다.> 남자, 아니 사하가 말했다.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린 세영이 주먹을 들었다. “이 새끼가 어디서 개수작이야. 사슴 닮게 변하면 내가 못 팰 줄 알았냐.” 사슴 영혼이 들어간 용도 때려잡았는데, 고작 고라니 새끼를 그냥 둘 생각은 없었다. 빠득빠득 이를 가는 그녀를 멍하게 바라보던 사하가 살짝 웃었다. <이건 나의 진짜 모습입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순간 물결치듯 일렁거린 사하의 모습이 어린 소녀로 변했다. 은빛에 가까운 금발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가냘픈 미소녀였다. 어찌나 얼굴이 작은지 한 손으로도 다 가려질 것 같았다. 조그마한 손을 기도하듯 가슴 앞에 모은 소녀가 물었다. <이 모습은 마음에 드시나요?> “…….” 작은 새가 지저귀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이거나 저거나 때리기 찝찝한 건 똑같았다. 한숨을 내쉰 세영이 손을 내렸다. “주신 사하.” <……!> 세영의 부름에 사하가 움찔했다. 깜짝깜짝 놀라는 모습이 묘하게 사슴을 닮았다. 미간 사이를 긁적인 세영이 말했다. “난 너와의 계약대로 6개의 신기를 모두 찾아 파괴했다. 인정 하냐?” <…네.> “이제 네가 대가를 지급할 차례야. 계약서 보여줘?” 고개를 저은 사하가 <아뇨, 저도 똑같은 것을 갖고 있어요.> 하고 말하며 오른손을 들었다. 조막만 한 손 위에 돌돌 말려 리본까지 곱게 묶인 계약서가 나타났다. 머쓱해진 세영이 뺨을 긁적였다. 이내 표정을 바로 잡은 그녀가 진지하게 말했다. “계약서의 첫 번째 조항 알지? 갑은 을에게 소원 하나를 제한 없이 들어준다. 그거 지금 당장 써야겠다.” 사하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고개를 숙인 그녀를 보고 세영은 ‘이 새끼, 갑자기 배 째라 하는 거 아냐?’ 하고 불안해했다. 잠시 뒤, 사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세요?> “…뭘?” <왜 여기로 부른 건지, 왜 신기를 파괴해 달라고 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별로?” 솔직하게 말해서 알고 싶지 않다는 것에 가까웠다. 무슨 시시껄렁한 이유로 자신을 불렀는지는 모르지만, 알아도 속만 터지고 바뀌는 것이 없을 듯했다. 소원을 이루고 나머지 대가를 받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게 더 나았다. 어깨를 으쓱하는 세영을 멍하게 바라보던 사하가 갑자기 커다란 눈물방울을 후드득 떨구었다. “…야, 왜 우는데? 뭘 잘했다고 우냐고! 내가 울린 거 같잖아, 당장 못 그쳐?!” 당황한 세영이 그녀를 윽박질렀다. 하지만 사하는 어깨를 들썩이며 더욱 서럽게 울었다. ‘이걸 그냥 확!’ 하고 주먹을 움켜쥐었던 세영은 이내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래, 이 납치범 새끼야. 뭐 때문에 날 납치해 왔는데? 그걸 나한테 자랑 못 해서 뒤지겠든?”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변태가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남에게 자랑하고 싶어 하는 변태 역시 있을 만 했다. 소원 달성을 위해라면 잠깐 못 들어줄 것도 없었다. 훌쩍거리며 눈물을 닦은 사하가 말했다. <…시길 원했어요.> “뭐?” <당신이 저를… 죽여주시기를 빌었어요.> 하지만 이런 말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어이없이 쳐다보는 시선에 사하가 웃었다.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미소였다. 슬슬 머리가 아파지는 것을 느낀 세영이 짜증스럽게 물었다. “야. 너 나 아냐? 다짜고짜 죽여 달라 부탁할 만큼 우리가 친한 사이였어?” 보통 친한 사이라도 죽여 달라고 부탁하진 않지만, 어쨌든 사하와 그녀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대체 뭘 믿고 이런 말을 하는지 몰라서 당황스러웠다. 조금 시무룩해진 사하가 말했다. <당신은 절 모르시겠지만, 전 늘 당신을 보고 있었어요.> 사하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들이 서 있던 바닥이 변했다. 물거울처럼 일렁이는 바닥이 어딘가를 비추고 있었다. 회색의 도시, 낯익은 거리,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 세영은 수면에 비친 것이 제가 사는 곳 근처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사하가 새처럼 재잘거렸다. <아주 오랫동안 지켜봤어요. 매일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요.> 천천히 움직인 화면이 세영을 비추었다.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지, 무척 지치고 피곤한 얼굴이었다. 세영은 어두운 골목길을 빠르게 걷는 자신의 모습을 어이없이 바라봤다. “…너 스토커냐?” 그냥 스토커도 아니고 무려 신급의 스토커다. 스토커가 신일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그녀에게 사하가 <스토커가 뭐예요?> 하고 병아리처럼 짹짹거렸다. 세영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관심 가는 사람 하나 찍어서 일방적으로 쫓아다니면서 괴롭히는 놈들. 몰래 훔쳐보고 미행하고 하는 너 같은 변태를 스토커라고 부르는데.” <…괴롭히려고 했던 게 아니에요.> “허락 없이 몰래 지켜보는 건 범죄고, ‘날 죽여줘, 할라할라.’ 하는 건 괴롭히는 거거든.” 세영의 대답에 사하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것처럼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영은 팔짱을 낀 채로 그를 쳐다봤다. “인간이면 교도소에라도 처넣지. 신 주제에 왜 그렇게 살아?” <…죄송해요.> “죄송하다는 말로 끝나면 경찰이 왜 있고 법이 왜 있겠어, 엉?” 사하는 더 이상 변명조차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세영은 입맛을 다시며 뺨을 긁적였다. 조그마한 소녀가 울먹이며 고개를 숙이자 제가 못된 마녀라도 된 기분이었다. 빌어먹을 미모 같으니. 투덜거린 세영이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왜 날 지켜봤는데?” <…처음에는 단지, 할 일이 없어서였어요.> 잠깐 망설이던 사하가 말했다. 할 일이 없어서 널 스토킹 했다는 말에 세영의 얼굴이 와작 구겨졌다. “뭐? 니가 백수야? 주신 주제에 왜 할 일이 없어?” <전 가만히 있는 게 더 도움이 되니까요.> 사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귀여운 소녀의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스산함이 깔렸다. <단지 필요 때문에 존재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더 나은 신이죠.> “누가 그래?” 세영의 되물음에 사하가 움찔했다. 그녀는 작은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모두가 그랬어요. 저를 아는 모두가요.> 사하는 이 별의 두 번째 주신이었다. 사하가 존재하기 이전의 주신은 ‘천공의 레아’로 지금의 신들은 대부분 그녀의 자식이었다. 인간이 번성할 때까지 별을 잘 꾸려나가던 레아는 수명이 다해 빛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뒤에 태어난 것이 ‘세상의 사하’. 지금의 주신이었다. <이 별을 더욱 번성시키고 싶었어요. 레아님이 있었던 그때보다 더 풍요롭게 만들자고 결심했어요. 그래서 노력했는데….> 사하는 다른 종족을 별에 불러 모으기 위해 애썼다. 엘프와 용과 인어, 그 밖의 종족들과 계약을 맺고 별에 잘 자리 잡도록 도와주었다. 그림자용과 계약하고 명계와 지상의 경계를 갈랐다. 사하는 전보다 더 푸르러진 별을 보며 뿌듯해 했다. 그런데 새로운 종족이 별에 정착하면서 새로운 문제들이 생겼다. 대비해 놓은 것들은 잘 처리할 수 있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문제는 임기응변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원하지 않은 일을 떠맡게 된 신들은 몹시 불만스러워 했다. 그들은 입을 모아 사하를 비난했다. -주신이여,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레아께선 이종족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력으로 별을 꾸려나가는 것을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그런데 태고의 어둠까지 끌어들이다니요. -맞습니다. 어둠이 이 별을 삼키려고 들면 어쩔 작정이십니까. -이건 레아의 뜻을 저버리는 짓입니다. 저희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가장 목소리를 높인 것은 빛의 신인 샤마쉬였다. 레아의 첫 번째 자식이기도 한 그는, 그림자용이 별에 자리를 잡은 것을 두고 거세게 항의했다. 이전에 충분히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고 생각했던 사하는 당황했다. 신들은 사하를 제멋대로 구는 폭군 취급하며 사과를 원했다. <그때, 사과하지 않았다면 뭔가가 달라졌을까요.> 사하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세영은 신이나 인간이나 별다를 게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투덜거렸다. “단체로 후려치기 학원에 등록했나. 꼰대 새끼들이 일하기 싫어서 별 지랄을 다 하네.” <…네?> 사하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사슴도 그러더니, 이놈도 역시 속어는 영 깡통이었다. 한숨을 푹 쉰 세영이 손을 내저었다. “그래서 병신처럼 걔들에게 사과했냐?” <그때는 당황해서,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어요.> 사하는 제가 너무 의욕만 앞세운 것 같다고, 하지만 계약을 해서 이제 와 물릴 수는 없다고 설명하려 애썼다. 무엇보다 자신이 벌인 일로 신들의 업무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신들은 몹시 불만스러워하면서도 물러났다. 사하는 일단 신들을 이해시킨 것에 안심했다. 단순히 설명하고 양해를 구한 걸로는 부족했는지도 모른다. 다음에는 좀 더 잘해야지. 그런 생각이었다. -레아께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건 그리 현명한 판단 같지 않습니다. 선대라면 결코 이렇게는…. -선대를 닮으시려고 조금이라도 노력하시는 것이….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신들은 불만을 토해냈다. 사하도 사사건건 레아를 들먹이는 신들에게 지쳐갔다. 어느 날 그는 결단을 내렸다. 더는 선대에 대해서 거론하지 말라고, 앞으로는 자신의 방식대로 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러자 신들은 만신전을 비우고 칩거하며, 사하의 부름에도 응답하지 않았다. 결국, 사하는 텅 빈 만신전을 혼자 지켜야 했다. <얼마 뒤 샤미쉬가 저에게 물러나 쉬는 것이 어떠냐고 권했어요. 말로만 권유일 뿐 사실상의 유폐였지요. 저는 그의 말을 따르기가 죽기보다 싫었어요.> 사하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만신전을 막아버렸다. 다른 신들 따위 없어도 된다고, 혼자서 잘해내겠다고 다짐하며 별을 돌봤다. 하지만 주신 혼자서 모든 것을 돌보는 일은 무리가 있었다. 타락은 아주 천천히, 하지만 명확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몬스터들이 범람하고, 동물들은 새끼를 낳지 않고, 식물은 열매를 맺지 않았다. 정하지 않은 재해가 일어나고 지형과 기후가 멋대로 바뀌었다. 인간들은 타락했고 질서는 무의미해졌으며, 전쟁과 병충해가 줄을 이어 일어났다. <제가 원인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있었어요.> 사하는 자신의 일부가 점점 망가져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세상의 사하.’ 그의 타락은 곧 세상의 타락을 의미했다. 별을 지키기 위해서는 별과 자신을 격리해야 했다. <그것을 위해서 저의 일부를 떼어 세상으로 보냈지요.> 반짝이는 작은 파편이 세상으로 떨어졌고, 그것을 중심으로 더없이 선량한 자들이 모였다. 다른 이들보다 강하고 깨끗한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속죄양이 될 수 있었다. 사하는 그들을 희생하여 자신을 여기 가두는 것에 성공했다. <옳지 않은 일이라는 건 알아요. 오염된 저 때문에 그들을 희생하다니….> “변명은 됐고. 궁금한 게 있는데…. 네가 말한 그 파편이라는 거. 설마 사슴 씨냐?” 험악해진 세영의 얼굴을 보고 주춤한 사하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떡였다. 세영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처음부터 다 네 계획이었냐. 사슴 씨가 날 좋아한 것도?” <아니에요!> 사하가 격렬하게 반응했다. 그는 당혹하고 슬픈 얼굴로 <아니에요, 정말로.> 하고 반복했다. 하지만 세영은 의심스러운 눈을 풀지 않았다. “미남계로 날 이용해 먹은 게 아니라고?” <…제 파편을 에레슈키갈께 보낸 건 의도한 게 맞아요. 저를 봉인할 때 그분의 도움이 필요했거든요. 아무리 부탁해도 들어주지 않으셔서 그랬어요.> 그림자용은 사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오히려 사하가 신들을 쓸어버리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 과정에서 별이 좀 파괴되고 지상에 사는 것이 몽땅 죽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또다시 번성할 터였다. 모조리 죽이고 다시 시작하자는 그녀에게 사하는 제가 심혈을 기울여 빚은 파편을 보냈다. <그냥 지상에 있는 것을 조금이라도 어여삐 여기시길 바랐어요. 그럼 제 부탁을 들어주실 줄 알았어요. 이런 결과가 생길 줄은 저도 몰랐어요.> 그림자용은 파편에 아주 홀딱 빠졌다. 인간이 애완동물을 자식처럼 애지중지하듯이 그녀도 파편을 아끼고 사랑했다. 파편의 죽음을, 그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는 봉인을 완성하지 못하게 방해할 정도로. 쓸쓸하게 말을 잇던 사하는 갑자기 뻑 하고 정수리로 떨어지는 세영의 주먹에 <아얏!> 하고 비명을 질렀다. 세영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이 새끼가 아까부터 자꾸 누굴 찢는다고 지랄이야. 사슴 씨가 색종이야? 오징어야?” <하, 하지만 제 파편을 계속 지상에 둘 수는 없었어요.> 사하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조각난 신의 파편이 소멸하지 않고 환생이라도 해버린다면, 그것만큼 골치 아픈 일도 없었다. 그래서 반드시 없어져야 했는데 그림자용이 막아버리고 말았다. 결국, 계획이 틀어져 남은 현자들은 지나치게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 뒤엔 제 손을 떠나버려서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제가 파편을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면, 당신을 좋아하지 못하게 막았을 거예요!> “왜?” <그건….> 사하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말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이 일렁거리며 수많은 별을 비추었다. 굉장한 장관이었다. 무어라 따지려던 세영도 잠시 말을 잃고 그것을 구경했다. <예쁘죠? 여기에 갇힌 뒤엔 항상 이걸 보고 있었어요.> 사하가 어린애처럼 웃었다. 천진난만한 표정에 치밀던 화까지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별들을 하나하나 비추던 사하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여기 비친 것은 정말 우연이었죠.> 사하가 관심을 가진 것은 다른 별이었다. 정확히는 다른 별을 보면서 ‘나도 이렇게 하고 싶었는데.’ 하고 부러워하는 일이었다. 번성하는 별을 보고 질투를 느끼고, 멸망해가는 별을 보고 그래도 여기보단 낫구나 하고 안도하면서 약간의 위안을 구했다. 그러다 우연히 세영의 모습이 비쳤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칠 인간이 눈에 띈 것은, 그녀의 영혼 때문이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앞으로 두세 번 정도 환생을 반복하다 보면 신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건 별로 희귀한 일도,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환생하는 영혼들은 깨달음을 얻고 다시 잃는 과정을 반복해 결국 신의 길에 들게 된다. 사하 역시 똑같은 과정을 거쳤다. 아마 별 사이를 뒤지다 보면 세영보다 더 신에 가까운 영혼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냥 지켜보게 됐어요. 그때의 당신이 힘들어 보여서.> 자신보다 못한 처지의, 비천한 인간의 영혼. 사하는 그녀를 통해 약간의 위안을 구하고자 했다. 그녀의 암울한 처지에 약간의 동질감도 느꼈다. 하지만 사하는 곧 세영이 자신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당신은 계속 싸우고 있었지요. 지치지도 않고.> 세영은 자신이 당하는 부당함을 절대 참지 않았다. 그녀를 둘러싼 현실은 힘이 없고, 어리고 약하며, 가족이 없는 자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했다. 세영은 독하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물고 뜯고 싸우며 화를 냈다. 그러다가 실수하는 일도 있고 지쳐서 주저앉는 일도 있었지만, 다시 벌떡 일어나서 앞으로 나아갔다. <처음엔 싫었어요.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생각도 했고, 그래 봤자 바뀌지 않을 거라고 비웃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질투하게 됐어요. 점점 나아지는 당신의 주변을 보면서 나는 그렇게 못하는 것이 화가 났어요.> 화가 났고 그래서 미워하면서도 계속 지켜봤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좋아하게 되었다. 자신이 그녀라는 공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때도 있었다. 만약 내가 그녀였다면, 절대 그때 참지 않았을 텐데. 말없이 돌아서는 대신 샤마쉬의 수염을 잡아 흔들며 화를 냈을 텐데. <바보 같은 말이라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저는 당신이 되고 싶었어요. 당신이 저였다면 좋았을 거라고, 제가 아닌 당신이 이곳의 주신이었다면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타락이 점점 심해질수록 그런 생각은 더 강해졌다. 이대로 타락해서 마신이 되거나 폭주해서 소멸하면 샤마쉬나 다른 신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사하는 그것이 너무나 괴로웠다. 그들 중 누구에게도 주신의 자리를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사랑한 이 별을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고 싶었다. 그래서 세영을 납치해 신으로 만들겠다는 극단적인 계획을 짰다. <저는 더 이상 이 별을 지탱할 힘이 없어요. 그래서… 당신이 저를 죽이고 이곳의 신이 되어주시길 원했어요.> ──────────────────────────────────── Nowhere (2) 그것을 위해 세영을 이곳으로 불렀다. 그녀가 좋아하는 게임의 형식을 빌려서 자신의 힘을 조금씩 넘겨주었다. 세영을 이 세계의 주신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너무 총체적으로 병신 같아서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한숨을 푹 내쉰 세영이 서릿발처럼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결론은 네 병신놀음에 호구 같은 내 동료들이 등신처럼 죽었단 말이네.” <…아.> 사하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겁에 질린 소녀의 모습은 가련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세영은 그에 굴하지 않고 손을 까딱였다. “일단 좀 맞자. 볼기짝 터지게 맞다 보면 ‘아, 내가 이렇게 족같이 굴면 안 되겠구나.’ 하고 깨닫게 될 테니까.” 세영은 얼어붙은 사하의 목덜미를 잡아 제 허벅지 위에 척 올렸다. 이어서 하늘을 가르고 대지를 진동시키는 그녀의 손바닥이 사하의 엉덩이로 떨어졌다. 다음 순간 투웅! 하고 세계가 울었다. 응징의 시간이 끝난 후에도 바닥에 엎어진 사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늘로 높게 쳐들린 채 바들바들 떨리는 엉덩이가 그녀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엎드린 채로 훌쩍훌쩍 우는 꼴을 보니 아직 살만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벌써 거품을 물고 기절했겠지. 사슴을 닮아 저도 모르게 살살 때린 모양이라며 혀를 찬 세영이 물었다. “뭐, 다른 건 다 젖혀두고 일단 이거부터 묻자. 넌 여기 강제로 끌려온 사람이 이 별을 잘 돌볼 거라고 생각했냐?” <…….> “개 한 마리라도 공짜로 받아오면 우습게 보고 막 굴리는 게 사람이야. 강제로 남의 자식 떠맡게 되면 학대하는 놈들도 있어. 넌 대체 뭘 보고 내가 이 별을 예뻐할 거라고 믿었는데?” 무엇보다 세영에겐 뭔가를 키우는 재능이 전혀 없었다. 선인장도 말려 죽이는 그녀보단 샤프심인가 하는 놈이 더 별을 잘 돌볼 것이다. 대체 뭘 믿고 자신을 골랐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녀의 물음에 훌쩍거리던 사하가 고개를 들었다. <확신할 순 없었지만, 여기 오면 이곳을 좋아하게 되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차피 환생하면 신이 될 거 주신이 되면 더 좋은 거 아니냐고 멋대로 생각했겠지. 니 새끼가 예쁘니까 남의 눈에도 예쁠 거 같았겠지. 그런데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고, 자기 새끼는 보통 자기 눈에만 예쁘다고.” 세영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대체 무슨 용기로 이런 짓을 했는지 궁금했는데, 근거 없는 믿음 때문이었다니 기가 찼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사하가 몸을 일으키더니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제발 이 세계를…. 저를 구원해주세요.> “싫어.” 세영은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러자 새하얀 공간 전체가 우르르 흔들렸다. 달걀 껍질처럼 쩍쩍 갈라지고 떨어지는 공간 사이로 시커멓고 거대한 뭔가가 보였다. 줄줄 녹아내리는 진흙처럼 생긴 괴물이었다. 놈과 눈이 마주친 세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저건.” <타락한 저의 일부예요. 따로 떼어서 봉인했지만, 제힘이 약해져서….> 사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설명했다. 세영에게 가진 힘 대부분이 넘어가면서 더 이상 봉인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대로는 타락한 자신에게 삼켜질 것이 분명했다. <부탁드려요. 제가 이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제가 미쳐서 이 별을 파괴하기 전에 저를 없애주세요.> “난 이미 싫다고 말했는데?” 세영의 대답에 낙담한 사하가 비틀거렸다. 절망에 빠져 주저앉으려는 그의 팔을 낚아챈 세영이 냉담하게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네가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겠거든.” <저는….> “넌 그냥 아픈 거야.” 다시 한 번 공간이 우르릉 흔들렸다. 세영은 부서진 틈 사이를 긁어대는 진흙 괴물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그거 단순한 육아 스트레스라고. 이렇게 삽질할 시간에 병원 가서 치료받아라.” 사하가 멍청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너무 바보 같은 표정이라 세영은 손수 멍하게 벌어진 입을 닫아주었다. 아기처럼 말랑말랑한 뺨을 잡고 지익 늘여보기도 했다. 사슴의 뺨이 더 찰졌다는 결론을 내린 세영이 피식 웃었다. “이곳의 신이 되고 싶진 않아. 그럴 필요도 못 느끼고. 하지만 네가 치료받는 동안 잠깐 땜빵 정도는 해줄 수 있어. 단기알바라고 생각하면 못할 것도 없으니까. 시급만 제대로 쳐주면.” 사하의 말대로 아주 조금쯤은 정이 든 세계였다. 사슴이 목숨까지 바쳐서 지키려고 했고, 동료들이 보호하려고 애썼던 별이었다. 이대로 망해버린다면 뒷맛이 매우 찝찝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계속 책임질 생각은 없지만, 잠깐 맡아줄 정도의 의리는 있었다. 앞선 계약으로 평생 놀고먹어도 될 정도의 재산은 챙겼으니까. 몇 년 정도는 이곳에서 보내도 괜찮았다. ‘워킹 홀리데이라고 치지 뭐.’ 무엇보다 돈을 받으면서 이번 일의 원흉인 신들을 조질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사하가 되물었다. <…알바요?> “저거까지 처리해야 한다면 보너스도 줘라.” 세영이 진흙괴 물을 엄지로 가리키며 말했다. 내친김에 시급과 주휴수당과 휴일에 대한 요구도 덧붙였다. 사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뺨을 감싸 쥔 채 서 있었다. 아무래도 오래 갇혀있다 보니 머리에 녹이 슨 것 같았다. 한숨을 내쉰 세영이 말했다. “죽음으로 뭔가를 바꿀 수 있는 사람도 있어.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뭔가를 이뤄낼 수 있는 사람. 하지만 넌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그냥 도망치는 것뿐이지.” <…….> “걔들 다 쥐어 패고 이겨 먹으란 소리까진 안 해. 그냥 너 자신에게 지지 마.” 누구에게나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런 자신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가련한 일인가. 세영은 사하의 머리를 가볍게 다독였다. “널 구원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 그걸 위해 남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기댈 수도 있지만, 결국은 네 발로 일어서야 해.” 그러자 사하는 울었다. 전과 달리 어린애처럼, 얼굴이 빨개지고 눈물 콧물까지 흘려 가며 울었다. 세영은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다독이다가 와락 안겨들려는 것을 막았다. “난 임자 있는 몸이다. 꺼져.” <한 번만 안아주시면 안 돼요?> “안 돼.” 세영의 거절에 사하는 시무룩해졌다. 세영은 울망거리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인벤에서 손수건을 꺼내 던졌다. “콧물이나 좀 닦아.” <…너무하세요.> 뾰로통해진 사하는 그럼에도 거절하지 않고 손수건을 챙겼다. 다시 깨끗해진 얼굴로 돌아온 그녀가 말했다. <소원으로 뭘 원하세요?> “빨리도 물어본다.” 세영은 소원 한번 빌기 더럽게 힘들다고 투덜거렸다. 사하의 얼굴이 다시 빨개졌다. 사슴과 닮은 소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세영이 말했다. “너 때문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줘. 내 동료들을 포함해서.” <…….> “그게 내 소원이야.” 당황스러운 듯이 그녀를 쳐다보던 사하가 말했다. <동료들을 살려달라고 하실 줄 알았어요.> “그런 욕심이 없었던 건 아니야. 하지만 그들이 자기 죽음에 만족했다면? 자신의 끝이 이것이라고 받아들였다면, 내가 슬프다고 되살리는 건 폭력 아닌가?” 에레슈키갈과 만나지 않았다면, 분명 동료들을 살려달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제가 원하는 것보다 동료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길 바랐다. 그러자 잠깐 머뭇거리던 사하가 물었다. <그들이 만약… 지나친 소원을 빌면요?> “무슨 지나친 소원?” <당신에게 해가 되는 소원을 빌 수도 있잖아요.> “너만큼 나한테 해가 되진 않거든?” 세영의 대꾸에 사하가 입을 우물거렸다. 차마 대꾸는 못 해도 불만은 있는 표정이었다. 피식 웃은 세영이 그녀의 이마에 딱콩을 날렸다. “괜찮아. 워낙 호구들이라서 나한테 해가 될 사람들도 아니고. 진짜 그런 소원을 빈다고 해도, 뭐. 그건 내가 감수해야지.” 그렇지 않을 거라고 믿고, 믿음을 배신당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세영에게 동료란 그런 것이었다. 감동한 얼굴로 두 눈을 반짝인 사하가 말했다. <정말 좋아해요.> “뭐, 인마. 꺼져.” 1초 만에 튀어나온 대답에 사하는 다시 시무룩해졌다. 세영은 해파리처럼 축축 늘어지는 그녀를 다그쳐 고용 계약서를 썼다. 계약서를 인벤에 집어넣은 세영이 손을 내저었다. “빨리 가서 입원하든 치료를 하든, 내가 이 별 다 말아먹기 전에 돌아와.” <감사해요.> 사하가 웃었다. 어린애처럼 밝은 미소였다. 물결처럼 일렁거리던 모습이 다시 처음의 새하얀 남자로 바뀌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사하의 모습이 빛무리가 되어 흩어졌다. 나비처럼 나풀거리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영은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진흙처럼 뭉개진 괴물이 벽을 무너뜨리며 기어 나오고 있었다. 갑자기 귀찮은 기분이 든 세영이 뺨을 긁적였다. “괜히 계약했나?” 하지만 이미 결정한 일이었다. 어쩌면 동료들의 호구병이 옮겨왔는지도 모른다. 한숨을 쉬며 주먹을 움켜쥔 세영이 괴물을 노려보며 외쳤다. “이모탈 브레이크!” ──────────────────────────────────── Nowhere (3) +오늘은 2편입니다. -못된 계집! 새하얀 손이 옥좌의 팔걸이를 내리쳤다. 거대한 흑옥을 통째로 깎아 만든 옥좌는 거기 앉은 검고 흰 여자와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렸다. 우아한 눈썹을 찌푸린 여자가 생각할수록 분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어쩜 그리 독할 수가 있단 말이냐. 내 아들의 영혼이 들어있다는데 그걸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쳐 죽여? 옥좌 앞에 무릎을 꿇은 대천사 자드키엘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여섯 장의 날개를 다소곳이 접은 그는 여자를 살살 달래듯이 말했다. -하지만 진짜 아드님도 아니었잖습니까. 그렇게 노여워하실 필요는…. -걘 진짜로 알고 있었잖니?! 여자의 목소리가 빽 높아졌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자드키엘이 고개를 숙였다. 못마땅하게 그를 노려본 여자가 한층 더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지! 내 아들이 뭐가 모자라서 그런 인간 계집에게 쩔쩔매야 한단 말이냐. 인물이며 성품이며 재능이며, 어디 하나 빠지는 곳이 없거늘! -…그렇지만 새 주신께서도 그리 빠지는 분은 아니십니다. 여자의 타박을 듣고만 있던 자드키엘이 조심스럽게 반박했다. 여자가 단박에 눈을 부라렸다. -지금 내 말에 반항하는 거냐? -반항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는 거지요. 제가 주신을 욕하는 건 괜찮아도 남이 욕하는 건 듣기 싫은 것이 천사의 습성이었다. 저도 모르게 세영의 편을 든 자드키엘이 흠흠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인정해 주십시오. 위대한 어둠이여. 새로운 주신께서는 당신의 시험을 통과하셨습니다. 여자, 에레슈키갈은 대놓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아무 말이 없던 그녀가 한껏 부루퉁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할 수 없구나. 행실이 괘씸해서라도 방해해야겠지만, 사하의 체면을 봐서 이번 한 번만 인정해주마. 자드키엘은 히죽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에레슈키갈은 성격이 사나운 어둠 중에서도 제멋대로 굴기로 유명한 여신이었다. 괜히 웃었다가 무슨 트집이 잡힐지 모를 일이었다. 안 봐도 다 안다는 것처럼 심술궂은 표정을 지은 에레슈키갈이 덧붙였다. -하지만 다른 이들도 나처럼 쉬이 인정하리라 생각하진 마라. 신으로 변한 것도 아니고 인간의 몸으로 주신에 오르겠다니. 웃음거리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지. 이번엔 자드키엘의 얼굴이 뭐 씹은 것처럼 변했다. 어서 인간의 몸을 버리고 신이 되시라는 간언에 이게 미쳤느냐며 주먹을 들이대던 세영이 떠오른 것이다. 그는 애써 헤헤 웃으며 고개를 굽실거렸다. -새 주신께서 워낙 완고하셔서 말입니다. 절대 인간의 몸을 버릴 생각은 없다고 하시더군요. -어찌 그리 어리석을꼬. 정말 마음에 차지 않는 계집이구나. 한숨 같은 소리를 낸 에레슈키갈이 옥좌에 기댔다. 정말 못마땅하게 여겼다면 당장 쫓아가서 잡아 죽이려고 했을 여신이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세영이 제법 그녀의 마음에 든 것이리라. 문득 두 존재가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한 자드키엘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서둘러 화제를 바꾸었다. -그보다 위대한 어둠이시여. 이제 그만 돌려주실 때가 되셨습니다. -갑자기 뭘 돌려달란 말이냐. 옥좌에 기댄 에레슈키갈이 시침을 뗐다. 잠깐 눈치를 본 자드키엘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사하 님과의 내기에서 지셨잖습니까. 가져가신 전사와 새끼용의 영혼을 돌려주십시오. -지다니! 하나만 더 죽였어도 내 승리였다! 졌다는 말이 거슬렸는지 벌떡 일어난 에레슈키갈이 소리쳤다. 그녀의 노성에 움찔한 자드키엘은 세영의 주먹을 떠올리며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니지요. 죽은 것은 넷이나 하나는 스스로를 희생했고 하나는 자신을 불태웠으니, 손에 넣으신 영혼은 둘 뿐입니다. 여신이여, 당신이 지셨습니다. 에레슈키갈은 못마땅한 얼굴로 자드키엘을 노려보았다. 천사는 전과 달리 그녀의 시선에 당당히 맞섰다. 아마 새로운 주신인 세영의 성격이 반영된 것일 터였다. 내내 빌빌거리던 천사의 꼴만 보던 그녀는 지금의 변화가 썩 나쁘지 않았다. -새 주인을 믿고 꽤 위세가 당당하구나. -송구합니다. -어쩔 수 없지. 자, 가져가거라. 그녀의 손에서 솟아오른 두 개의 구체가 반짝거리며 날아왔다. 서둘러 그것을 받아 소매 속에 갈무리한 자드키엘이 품속에서 새카만 알을 꺼냈다. -감사합니다. 여신이여. 위대한 어둠에 대한 경의로 대신 이것을 바치겠습니다. -내 아기! 자드키엘의 앞으로 달려온 에레슈키갈이 알을 낚아채 품에 안았다. 반질반질한 껍질에 쪽쪽 입을 맞춘 그녀가 감격에 찬 얼굴로 말했다. -너무나 예쁜 것. 간신히 이 어미의 품으로 돌아왔구나. -새 주신께 빌고 빌어 간신히 받아온 것입니다. 부디 내기의 결과에 승복해주십시오. 세영은 저 알의 정체가 무엇인지 몰랐다. 알았으면 절대 남의 손에 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자드키엘은 세영의 인벤에 든 알을 얻기 위해 자식을 잃어버린 어미의 눈물겨운 사연을 구구절절 지어냈다. 거짓말을 한 탓인지 날개 끝에 까맣게 때가 탄 것 같았다. 괜히 날개를 팔락거린 자드키엘이 강경하게 말했다. -사하 님께 약속하신 대로 이 별을 떠나셔야 합니다. -이 어린 것을 두고 떠나란 말이냐. 어찌 이리 매정할꼬. 에레슈키갈이 한숨을 푹푹 쉬며 말했다. 사하와 내기를 할 때만 해도 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 별을 떠나 새로운 거처로 옮겨가게 생겼다. 아쉬워하는 그녀를 달래듯 자드키엘이 사근사근 말했다. -새로운 어둠께서도 태어나자마자 성체가 되실 겁니다. 어머니의 보살핌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아시잖습니까. -그래도 그렇지. 이 아이가 알에서 깨어나는 것은 보고 떠나고 싶구나. 에레슈키갈이 몇 번이고 알을 쓰다듬었다. 300년이나 기다려 겨우 얻은 알을 놓고 가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자드키엘은 깊게 고개를 숙였다. -부디 뜻대로 하십시오. 에레슈키갈은 어둠 중에서도 조금 특이한 존재였다. 그녀는 그림자용이라는 하나의 종이자 유일한 개체로 완벽한 자였다. 하지만 에레슈키갈은 자신의 완전성을 싫어했고, 저와 이어진 자식을 갖고 싶어 했다. 그것이 그녀의 소원이었다. 주신 사하는 그녀의 힘을 빌리는 대신 소원을 이뤄주기로 약속했다. 에레슈키갈의 영혼을 쪼개서 새로운 그림자용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에레슈키갈은 엄청나게 까다로운 여신이었고, 자식에 대한 기대치도 높았다. 덕분에 사하는 몇 번이나 퇴짜를 맞아야 했다. 그런데 에레슈키갈이 한 인간의 아이에게 홀딱 빠지면서 문제가 생겼다. 그녀는 이 아이로 제 자식을 만들어달라며 생떼를 썼다. 사실 그 아이는 사하의 파편이었고, 그걸 용으로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사하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알은 그림자용의 힘을 다 담지 못하고 까맣게 타서 화석이 되어버렸다. 무용지물이 된 화석은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자드키엘에게 맡겨졌다. 자드키엘은 매우 조심스럽게 손을 써서 그걸 세영에게 흘러가게 했다. 세영은 그것을 하마용에게서 용의 특성을 없애는 데 사용했고, 화석은 300년의 기다림 끝에 용의 알로 완성될 수 있었다. 남은 건 적절한 순간에 영혼을 담는 것뿐이었는데, 그것조차 욕심 많은 인간인 로토의 도움으로 쉽게 이루어졌다. 사하의 파편을 주워서 완성된 알로 전송시킨 자드키엘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너무 순조로워서 지금까지 고생했던 것이 허탈할 지경이었다. 알 속에 든 새끼가 삐익삐익 우는 소리를 냈다. 알의 부화 시기가 가까워진 것이다. 우쭈쭈 하고 어르는 소리를 낸 에레슈키갈이 속삭였다. -걱정할 것 없단다. 이 어미가 널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두었어. 그 계집을 영원히 너만의 것으로 할 수 있게 말이다. -아니, 저기. 아무리 그래도 저희 주신인데 그런 말씀은…. 참다못한 자드키엘이 소심하게 항의했다. 그러자 눈을 무섭게 번뜩거린 에레슈키갈이 간사하게 속삭였다. -너 역시 그 계집이 이 별에 묶이길 원할 텐데? -…그건 그렇습니다만. 자드키엘은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움츠러들었다. 세영은 이미 사하의 힘 중 대부분을 물려받았다. 아마 전성기 때의 사하의 힘과 거의 같거나 조금 약한 정도일 것이다. 그런 세영이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건 에레슈키갈이나 새로 태어날 그림자용 정도였다. 그림자용이 나서서 세영을 붙잡아준다면 오히려 환영할 일이었다. 눈을 피하는 그를 보고 샐쭉 웃은 에레슈키갈이 말했다. -그럼 이럴 게 아니라 내 아이를 도와야 할 거 아니냐. -하지만 새 주신의 의사도 듣지 않으시고 이러시면…. 자드키엘이 마지막 남은 양심을 쥐어짜서 말했다. 그러자 에레슈키칼의 손톱이 그의 뺨을 길게 긁어 내렸다. -내가 내 아이에게 최고의 것을 쥐어 주겠다는데,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해? -…아, 아뇨. 지당하십니다. 자드키엘은 다시 고개를 굽실거리며 답했다. 용의 사랑은 널리 알려진 것보다 더 파멸적이다. 용에게 설교하는 일도 밀려드는 파도 앞에서 개울의 도리를 따지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었다. 흥 하고 코웃음을 친 에레슈키갈이 알을 끌어안고 옥좌로 돌아갔다. ──────────────────────────────────── Nowhere (4) ‘어머니?’ 남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친숙한 어둠이 그의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약간의 답답함을 느낀 남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꿈이었나.’ 기억을 더듬었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슬금슬금 밀려드는 졸음에 깜빡 눈을 감았던 남자는 머리를 털며 정신을 차렸다. ‘뭔가 중요한 일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쿵쿵거리는 심장이 비명을 질렀다.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고, 어서 빨리 떠올리라고 재촉했다.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뒤지던 남자는 문득 어떤 기억을 떠올렸다. 고개를 갸웃하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뭔가를 보듯 그를 응시하던 그녀가 픽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바람 안 피울게요. 대신 하나만 약속해요. 그 사랑스러운 얼굴, 그리고 목소리. 다음 순간 잊고 있었던 모든 것들이 어지럽게 뇌리를 수놓았다. 세영과 동료들, 신전, 어지러운 전장, 로토의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남자는 현기증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마지막 기억은 피로 물든 바닥으로 쓰러지는 것에서 끊겨있었다. ‘…나는 죽은 건가?’ 남자는 제 몸을 더듬었다. 체온이나 맥박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온도가 없는 물체를 만지는 느낌이었다. 남자는 멍하게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각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제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하지만 막상 이런 순간이 오자 제가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남은 미련이, 지키지 못한 약속이 사납게 가슴을 후벼 팠다. 잠든 세영의 뺨을 쓰다듬으며 돌아왔다고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눈을 뜬 그녀를 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입으로는 죽음을 말하면서도 사실은 세영의 옆에서 살고 싶었다. 남자의 뺨을 타고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한 번만이라도 당신을 만나 죄송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미련과 슬픔이 만나 강한 염원을 만들었다. 펄떡이는 심장으로부터 시작된 빛이 점점 커져 그를 감싸 안았다. 다음 순간 남자는 제 몸이 어디론가 옮겨지는 것을 느꼈다. 흐릿해졌던 시야가 다시 천천히 밝아졌다. “거기냐!” 갑자기 튀어나온 주먹에 남자는 움찔했다. 코앞에서 손을 멈춘 세영이 그를 노려보더니 “뭐야, 너?” 하고 쏘아붙였다. 놀란 남자는 잠시 아무 말도 못 하고 굳어져 있었다. ‘환상인가?’ 처음 보는 옷을 입고 머리를 높게 올려 묶은 세영은 어딘지 낯설게 느껴졌다. 잔뜩 날이 선 눈과 까칠해 보이는 얼굴, 적대적인 분위기가 그를 당황하게 했다. 우물쭈물 하는 그를 보고 세영이 다시 짜증스럽게 말했다. “안 들려? 너 뭐냐고 묻잖아?” 반사적으로 입을 연 남자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에 당황했다. 뻐끔거리는 그를 보고 세영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 “말 못해?” 그녀의 눈에 동정의 빛이 스쳤다. 남자는 세영이 자신을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된 거지?’ 어둠이 그의 의문에 답하듯 움직였다. 남자는 이곳이 지혜의 탑, 나스쿤이 있던 장소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눈과 귀로 보는 것처럼 어둠으로부터 정보가 흘러들어왔다. 바닥에 자박자박 남겨진 발자국은 세영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럼 여기는.’ 그를 모르는 세영이 이미 정복된 탑에서 헤매고 있었다. 남자는 어렵사리 하나의 가정을 떠올렸다. ‘과거인 건가.’ 멍하게 있던 남자는 웃었다. 기뻐서가 아니라 울지 않기 위해서였다. 자신을 모르는 세영에게 죄송하다고 말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녀의 입장에선 당황스럽기만 할 텐데. 그것이 수상하게 보였는지 세영의 표정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남자는 세영을 향해 손짓했다. 길을 잃고 헤매는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는 천천히 출구 쪽으로 향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출구가 가까워질수록 남자는 점점 초조해졌다. 자신이 누군지 털어놓고 싶은 욕심과 다시 얼굴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마음이 싸우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남자에게 달려든 세영이 덥석 그의 손을 붙잡았다. “잡았다!” 놀란 남자가 그녀를 바라봤다. 비슷한 상황이라서일까. 세영을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우리 전에 만난 적 있지 않아요? 제 팔을 덥석 움켜쥔 세영의 눈에는 의아함이 담겨있었다. 왜 모른 척하느냐는 의문도. 과거를 떠올린 남자는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을 느꼈다. 그때의 그녀는 지금의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으리라. “어?” 뭐 때문인지 잠깐 머뭇거리던 세영이 손을 놓으려 했다. 남자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당겨 쥐었다.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당신을 미래로 보내기 전에 잠깐 손을 잡는 것 정도는. 남자는 이 순간을 감사히 여기자고 다짐하며 걸었다. 더는 욕심을 부려선 안 된다고, 다시 한 번 연인의 얼굴을 보게 된 것으로 만족하자고 생각하면서. “도와줘서 고마워. 근데 난 당신이 누군지 몰라. 이름이 뭐야?” 하지만 세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결심을 부숴버렸다. 남자는 제게 내밀어 진 그녀의 손을 보며 흐릿하게 웃었다. ‘제 이름은 당신만 알고 계십니다.’ 세영이 지어주었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모른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이름이었다. 지금의 자신처럼. 남자는 충동적으로 세영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사실은 보내고 싶지 않았다. 계속 함께 있고 싶었다. 영원히 이대로 있었으면 했다. 그때 버둥거리던 세영의 손이 그를 밀쳐냈다. 남자는 남은 인내를 긁어모아 그녀를 놓아주었다. 품에서 벗어나는 온기가 살이 떨어져 나가듯 아프게 느껴졌다. “아니, 왜 울고 그래?” 세영이 당혹한 얼굴로 물었다. 남자는 그제야 제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지금의 제 마음을 영원히 몰랐으면 했다. -죄송합니다. 남자는 손을 뻗어 세영을 출구로 밀었다. 놀란 표정의 세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곳을 멍하게 바라보던 남자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 손으로 그녀를 보냈지만, 그것이 믿기지 않았다.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인데도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새로운 어둠이여, 왜 그녀를 붙잡지 않으셨나요.> 갑작스러운 부름에 놀란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어린 소녀 하나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당황한 남자가 입술을 움직였다. -누구…십니까? <저는 과거의 주신, 사하. 이곳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당신을 보러 왔어요.> 소녀는 마치 그의 목소리가 들린 것처럼 말했다. 남자는 멍하게 자신을 사하라고 밝힌 소녀를 바라봤다. 과거 주신을 소환해 봉인하긴 했지만, 그때의 신은 거대한 빛 덩어리로만 보였다. 지금처럼 인간의 모습을 한 신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 기도하듯 두 손을 모은 사하가 다시 물었다. <당신의 힘이라면 그분을 이곳에 붙들어두는 것도 가능했을 거예요. 왜 그러지 않았나요.> 단조로운 목소리가 아니라면 추궁하는 것처럼 들릴 법했다. 입을 꾹 다물었던 남자가 그녀에게 되물었다. -꼭 대답해야 하는 겁니까?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저한테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거든요.> 사하는 정말로 간절해 보였다. 여전히 답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겐 마음의 빚이 남아있었다.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곤 해도 그는 과거 사하의 몸을 갈가리 찢어 봉인했다. 죄책감에 진 남자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왜요?> -여긴 세영님께 어울리는 곳이 아니니까. 함께 있다면 자신은 행복하겠지만, 세영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제 욕심으로 붙잡기에는 너무나 빛나는 사람이었다. 남자는 항상 자유롭고 거침없는 그녀의 모습을 사랑했다. 좋은 곳에서 좋은 사람들과 행복하길 바랐다. 사랑한다는 핑계로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은 정말로 저와 다르군요.> 사하는 감고 있던 눈을 떠서 남자를 바라봤다. 달처럼 창백한 은색으로 빛나는 눈이 반짝였다. 쓴웃음을 지은 사하가 말을 이었다. <전 당신을 질투하고, 원망했어요. 그분의 사랑을 받는 당신이 정말로 미웠어요.> -……. <만약 당신이 그분을 가두는 것을 선택했다면,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당신을 없앨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결국, 그것도 제 오만에 불과했네요.> 남자는 무슨 답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다시 한 번 빙긋 웃은 사하가 그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로 인해 오랫동안 고통 받으신 분이여.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제게 원하시는 소원이 있다면 무엇이든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역시 이건 꿈이 아닐까. 남자는 멍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꿈이라고 해도 그에겐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었다. -세영님의 옆에 있고 싶습니다. 저를 사랑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분을 옆에서 지키고 도울 수 있다면…. <새로운 어둠이여, 당신께서 그분의 옆을 지켜주신다면 저도 안심할 수 있겠어요.> 남자는 자신을 계속 ‘어둠’이라고 칭하는 사하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세영의 옆에 있을 수 있느냐는 거였다. 잔뜩 긴장한 그를 보고 활짝 웃은 사하가 말했다. <혹시 신계의 일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당신께서 신계에서 일하신다면 언제나 그분의 옆에서 보좌하며 도울 수 있을 거예요.> -뭐든 좋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남자는 다소 급하게 말했다. 갑자기 신계가 나오는 것이 이상했지만, 어디든 가릴 때가 아니었다. 세영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곳이 지옥이라도 기꺼이 갈 생각이었다. 사하는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떡이며 손을 내밀었다. <마침 잘 되었네요. 지금 좌천사의 자리에는 자드키엘이 있지만, 우천사의 자리는 아직 비어있답니다. 자, 제 손을 잡으세요.> 곧바로 그녀의 손을 잡으려던 남자가 멈칫했다. 사하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잠시 망설이던 남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 로그아웃 “으악!” 비명과 함께 눈을 뜬 디안은 익숙한 천장을 보고 숨을 헐떡였다. 그는 서둘러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철이 들기 전부터 사용해왔던 작은 방이 보였다. 디안은 멍하게 중얼거렸다. “어, 어떻게 된 거지?” 그는 구원자인 세영과 함께 던전을 정복하며 수많은 곳을 여행했다. 마지막에는 동료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거대한 용과 싸웠다. 저를 짓밟던 용의 앞발이 눈앞에 생생한데, 눈을 뜨자 어느새 고향의 방에 돌아와 있었다. “…꿈이었나? 그게 전부?” 혼란에 빠진 디안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는 문득 벽에 기대어진 낡은 검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혹시 그게 꿈이 아니라면 세영이 가르쳐준 기술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가 검을 쥐기도 전에 벌컥 문이 열렸다. “아이고, 우리 용사님이 깨셨네.” 밝은 갈색 머리를 틀어 올린 중년 부인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스승인 닐의 아내, 미셸이었다. 디안은 저를 보고 늘 인상을 찌푸리던 그녀가 활짝 웃는 모습에 당황했다. “자, 어서 씻고 내려가자.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까.” “…예?” “쯧쯧, 술 좀 작작 마셔라. 발가벗은 채로 문 앞에 쓰러져 있는 널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닐이 먼저 발견해서 다행이지, 다른 사람들이 봤으면 어쩔 뻔했어.” “네? 제가요?” 당황한 디안이 그녀에게 되물었다. 절레절레 머리를 흔든 미셸이 손에 든 것을 그에게 떠넘겼다. 대야에 담긴 따뜻한 물과 갈아입을 옷이었다. “그냥 내려오지 말고. 깨끗하게 씻고 옷도 반듯하게 입어라. 전사 디안이 돌아왔다는 소문을 듣고 다들 모여 있단다. 네 스승을 창피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겠지?” 미셸은 다 입고 검사받으라며 밖으로 나갔다. 디안은 서둘러 세수를 한 후 옷을 꿰입으며 머리를 굴렸다. ‘전사 디안’이라는 별명은 세영을 만난 이후에 생긴 것이었다. 그는 안도감에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꿈이 아니구나.’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세영이 구해준 것일까. 그런데 왜 자신을 홀딱 벗겨서 집 앞에 던져놓은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디안은 미셸의 검사를 받고 아래층으로 끌려 내려가며 생각했다. ‘마리엔도 집으로 돌아왔을까? 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면….’ “우와앗! 전사 디안이다!” 누군가의 고함에 생각이 뚝 끊겼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든 디안은 아래층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보고 당황했다. 절반은 아는 얼굴이었고 절반은 모르는 얼굴이었다. 모두 신기한 구경거리를 보는 얼굴로 그를 관찰하고 있었다. “허허, 이제야 깼느냐!” 스승인 닐이 전에 없이 점잖은 얼굴로 느릿느릿 다가왔다. 당황한 디안이 머뭇거리자 미셸이 그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그는 서둘러 “늦잠을 자서 죄송합니다.” 하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음, 아니다. 용을 죽인다고 얼마나 고단했겠느냐. 늦잠 정도는 잘 수 있지.” 닐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사람들이 일제히 감탄하며 고개를 끄떡였다. 디안의 얼굴이 절로 빨개졌다. 용을 죽인 게 아니라 죽을 뻔했다고 말하려는데, 닐이 그의 어깨를 잡고 식탁 쪽으로 끌고 갔다. “자자, 이럴 게 아니라 식사하며 천천히 이야기하자꾸나. 그동안 얼마나 집의 음식이 그리웠겠냐.” “호호, 네가 좋아하는 버섯스튜를 만들었단다. 많이 먹으렴.” 미셸의 말에 사람들이 “전사 디안은 버섯스튜를 좋아하는구나.” 하고 수군거렸다. 이 집에서 버섯스튜라곤 본 적도 없었던 디안은 당황해서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설마 여기서 내가 먹는 걸 구경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식탁을 둘러싼 사람들이 그가 자리에 앉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밖에서 “디안! 디안!” 하고 부르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일제히 밖을 내다보았다. “앗, 대마법사 마리엔 님이다!” “헉, 진짜 마리엔 님이다!” 빽빽하게 몰려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서서 길을 만들었다. 그러자 잠옷원피스에 슬리퍼 차림의 마리엔이 집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경악한 디안이 소리쳤다. “으악, 마리엔!” “디안!” 울면서 달려온 마리엔이 그의 품에 푹 안겼다. 무어라 소리치려던 디안이 당황해서 굳어버렸다. 그를 끌어안고 훌쩍훌쩍 울던 마리엔이 말했다. “죽은 줄 알았어! 네가 죽은 줄만 알고….” “마, 마리엔! 잠깐만!” 허둥지둥 겉옷을 벗은 디안이 그것으로 마리엔의 잠옷을 덮었다. 그제야 쏟아지는 시선을 느낀 마리엔이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사람들의 눈빛에 디안은 서둘러 닐에게 말했다. “스승님, 잠시 위에서 마리엔과 이야기 좀 하고 오겠습니다.” “그, 그래. 힘내!” 그의 박력에 당황한 닐이 평소의 어투로 답했다. 디안은 마리엔을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문을 닫을 때까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마리엔이 중얼거렸다. “꿈… 아니겠지?” “응?” “세영님을 만나서 모험한 거, 꿈이 아니겠지?” 디안은 그녀가 불안해하는 것을 느꼈다. 그 역시 모든 것이 꿈일까 걱정하지 않았던가. 마리엔의 손을 꼭 잡은 디안이 “꿈이 아니야. 절대.” 하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자 마리엔이 살포시 웃었다. “나 있잖아. 네가 죽은 줄 알고 화가 나서 로토에게 복수하려고 했어. 그래서 이쉼의 힘을 빌렸거든.” “뭐?! 그 힘은 위험하다고 세영님이….” “알아, 하지만 그만큼 화가 났었는걸.” 시무룩해진 마리엔이 말했다. 디안은 말없이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제 죽음에 화가 나서 복수하려 했다는 그녀의 말이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마리엔이 꿈을 꾸는 것 같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 뒤에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떠보니 모르는 곳이었는데, 천사처럼 예쁜 사람이 나타나서 소원이 뭔지 묻는 거야.” -전사여, 당신의 소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순간 디안은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착각인지 진짜인지 자신도 마리엔과 똑같은 일을 겪은 것 같았다. 어딘지 모를 곳에서 눈을 뜬 그에게 미궁에서 만났던 천사, 자드키엘이 나타나 소원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래서 그는…. “디안, 내 말 듣고 있어?” 마리엔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린 그는 “어, 어? 그래서?” 하고 되물었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던 마리엔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모두와 함께 다시 모험하고 싶다고 빌었어. 그러니까 천사가 웃으면서 내 소원이 들어주기 제일 힘들겠다고 하더라고.” “어, 그랬구나.” “…그건 그냥 꿈이었을까? 세영님은 집으로 돌아가신 걸까?” 마리엔이 쓸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디안은 그제야 제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생각해냈다. 그는 당신은 이미 죽었다는 자드키엘의 말에 충격을 받아 엉엉 울면서 소리쳤다. -죽고 싶지 않아요. 아직 마리엔에게 고백도 못 했는데! 사랑한다는 말도 못했는데, 이렇게 죽는 건 싫습니다! -그럼 당신의 부활을 소원으로 하시겠습니까? 디안은 머리를 감싸 쥐고 “으아악!” 소리를 질렀다.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너무 창피해서 벽에 머리를 박고 죽고 싶었다. 의아한 표정을 지은 마리엔이 “디안, 갑자기 왜 그래?” 하고 물었다. 디안은 시뻘게진 얼굴로 고개를 휘저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문을 콩콩 두드렸다. 당황한 디안이 담요를 마리엔에게 건네며 “이거라도 덮고 있어.” 하고 말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연 그는 예쁘장한 금발의 아이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뭐야, 아직 준비 안 했어?”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가 물었다. 처음 보는 아이의 친한 척에 그는 “꼬마야, 넌 누구니?” 하고 되물었다. 그러자 히죽 웃은 아이가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아 보였다. “어때, 멋지지? 예쁘지?” “속지 마, 성형이야.” 아이를 옆으로 휙 밀친 시디발라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예상하지 못했던 등장에 놀란 디안이 “시디발라!” 하고 외쳤다. 금발의 아이가 징징거리며 시디발라에게 달라붙었다. “성형이라니! 난 원래 예뻤단 말이야! 그냥 변신할 수 있게 된 것뿐이라고!” “…혹시 후와와?” 마리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아이가 “응!” 하고 명랑하게 대답했다. 디안은 그의 변신에 놀라 입을 떡 벌렸다. “네가 그 하마, 아니 후와와 라고?” “응! 소원으로 내게 어울리는 멋진 모습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거든!” 후와와의 대답에 디안은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마리엔이나 후와와에 비해 자신은 살려만 달라는 정말 소박한 소원을 빈 것이다. 다행히 그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너희 집 대체 뭐야. 사람들이 너무 북적거려서 도저히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잖아. 결국, 2층 창문으로 숨어들어 왔다고.” 미간을 찌푸린 시디발라가 투덜거렸다. 마리엔이 다급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세영님은? 지금 어디 계신지 알아?” “쉿,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되도록 조용히 너희를 데려오래.” 손가락 하나를 입에 댄 후와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당장 아래층으로 달려가려는 마리엔을 붙잡은 디안이 고개를 저었다. “계단으로 나가면 붙잡힐 거야. 우리도 창문으로 나가자.” 그래서 그들은 집 뒤쪽의 창문으로 몰래 뛰어내렸다. 시디발라와 후와와가 앞장서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잠시 뒤 그들은 커다란 나무 밑에 서 있는 세 사람을 발견했다. 단출한 여행자 차림을 한 세영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세영님!” 마리엔이 울면서 그녀에게 달려갔다. 세영이 달려드는 그녀를 가볍게 받아 안았다. “마리엔, 잘 있었어요?” “아뇨, 세영님이 없어서 너무 슬펐어요. 다들 막막 죽고… 힘들었어요.” 마리엔이 히잉히잉 울면서 말했다. 그녀를 다독이던 세영이 디안을 쳐다봤다. 왠지 모르게 목이 콱 메는 것을 느낀 디안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세영이 피식 웃었다. “와, 그런데 엄청나게 귀여운 잠옷이네요. 마리엔, 평소에 이런 거 입고 자는구나.” “앗! 이건… 으아앙!” 세영의 놀림에 당황한 마리엔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길쭉한 그녀의 귀가 마구 파닥거렸다. 세영은 “예쁘지만 갈아입어야겠네요. 잠깐 다녀올게요.” 하고 그녀를 나무 뒤로 끌고 갔다.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자 디안은 남은 이들에게 눈을 돌렸다. 리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디안, 이렇게 다시 보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리먼.” 간신히 그의 이름을 부른 디안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쓴웃음을 지은 리먼이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다독였다. “미안합니다. 모두에게 내가 너무 큰 짐을 지운 것 같군요.” 팔로 눈물을 쓱쓱 훔치던 디안이 리먼의 옆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봤다. 새카만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카라드?” 디안의 물음에 상대가 천천히 후드를 벗었다. 길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며 감춰진 얼굴이 드러났다. 깜짝 놀란 디안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누, 누, 누구세요?” “…카라드입니다.” 쓴웃음을 지은 카라드가 답했다. 디안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그를 훑어보았다. 그가 알고 있는 사람과 너무 달라서 혼란스러웠다. 예전의 카라드 역시 미남이긴 했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는 인간이라고 부르기 황송한 외모였다. 시디발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게 카라드의 원래 모습이래. 처음엔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는데, 자꾸 보다 보니까 익숙해지더라고.” “…저게 익숙해져?” 디안이 못 믿겠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카라드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디안은 제가 대역죄를 지은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저 얼굴을 시무룩하게 만들다니, 당장 잘못했다고 빌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으악! 사슴 씨, 뭐하는 거예요!” 그때 옷을 갈아입은 마리엔과 함께 나타난 세영이 비명을 질렀다. 후다닥 달려온 그녀가 카라드의 팔을 붙잡고 질책했다. “얼굴 가리고 다니라니까! 당신 얼굴은 흉기라고 말했잖아요!” “…….” 그러자 카라드는 당장 눈물을 떨굴 것 같은 표정으로 변했다. 마리엔이 “헉! 저게 카라드 씨라고요!?” 하고 뒤늦게 경악했다. 세영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카라드의 얼굴이 다 가려지게 후드를 꾹꾹 눌러 씌웠다. “그러게 왜 갑자기 얼굴을 바꿔서 이 고생이에요.” 카라드의 어깨가 아래로 축 처졌다. 그러자 눈을 세모꼴로 치켜뜬 남자들이 격렬히 항의했다. “너무해! 어떻게 그런 말을! 살다 보면 얼굴 좀 바꿀 수도 있지!” “세영님, 방금 그건 너무 심하셨습니다.” “원래 모습으로 사랑받고 싶다잖아! 어떻게 그렇게 매정한 말을 할 수가 있어!” 동료들의 비난에 난처한 표정으로 변한 세영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동안 카라드가 냉대 아닌 냉대를 받는 것을 목격한 시디발라는 다른 이들보다 더욱 분개했다. “진짜 너무하다고. 아무리 옛날 얼굴이 더 마음에 들어도 그렇지, 얘 진짜 모습은 이거라는데. 좋아한다면서 이런 것도 못 받아줘?!” “…시디발라. 제발 그만해 주십시오.” 편을 드는 건지 상처를 후벼 파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한층 더 우울해진 카라드를 보고 당황한 시디발라가 “힘내, 쟤도 익숙해지겠지.” 하고 그를 다독였다. 비난 어린 동료들의 시선에 참다못한 세영이 팍 터졌다. “야 이 시발, 애인이 갑자기 미성년자가 돼서 돌아왔는데 어떤 미친년이 좋아해!” “……?!” 당황한 동료들의 시선이 카라드에게 향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란 카라드는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쳇 하고 바닥의 돌을 걷어찬 세영이 “앞으로의 이야기나 하죠.” 하고 화제를 돌렸다. 동료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떡였다. 뒤늦게 카라드가 “세, 세영님. 잠깐 기다려주십시오!” 하고 외쳤지만 무참하게 씹혔다. “제가 뭐랄까, 임시로 계약직을 좀 맡았는데. 거기 애들이 뺀질뺀질 해서 말을 잘 안 듣더라고요.” “계약직이요?” “네, 좀 돈 안 되고 귀찮은 일이 있어요.” 세영의 설명에 의아해하던 마리엔이 이내 고개를 끄떡였다. 무슨 일이든 그 일을 하는 동안은 세영이 떠나지 않을 테니 안심이었다. 마냥 좋아하는 그녀와 달리 디안은 “와, 세영님 말을 안 듣는 사람들이 있다니 정말 놀랍네요.” 하고 감탄했다. “아, 요즘은 잘 들어요. 몇 대 쥐어박고 걷어찼더니. 이젠 사사건건 쫓아다니며 귀찮게 빼애앵 거려서 문제랄까.” ‘그럼 그렇지.’ 동료들의 얼굴에 납득이 스쳤다. 세영이 조금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제 직장의 협력업체 같은 곳이 있는데, 거기에서도 좀 말썽이 있어서요. 자꾸 제 말을 씹고 무시해서 직접 가서 갈아치울까 싶거든요. 심심하면 같이 갈래요?” “네! 갈래요!” 마리엔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외쳤다. 이어서 디안도 크게 고개를 끄떡였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가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간단히 소지품만 챙겨서 나와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세영의 말에 얼굴이 환해진 두 사람이 “금방 다녀올게요!” 하고 집으로 달려갔다. 나는 듯이 앞서 달려가는 마리엔과 달리 문득 뭔가가 떠오른 디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세영을 향해 외쳤다. “세영님, 그런데 정확히 어디로 가는 겁니까?” “아, 제가 말 안 했나요.” 세영이 그를 돌아보며 웃었다. 역광을 머리에 인 그녀의 머리가 하얗게 빛났다. “마계요.” ──────────────────────────────────── 후기 안녕하세요, 독자님. 야기입니다. 드디어 만렙으로 사는 법이 완결을 맞이했습니다. ‘여주가 나오는 게임모험물이 보고 싶어!’ 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된 이야기인데 많은 분이 봐주셔서 정말 기뻤습니다. 독자님도 재미있게 보셨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아요. 사실 좀 더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지만, 여기서 끝내는 것이 제일 깔끔한 마무리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장본에 대해 문의하시는 분이 계셨는데요. 만렙으로 사는 법은 2016년에 디앤씨미디어에서 책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외전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구상 중이니 기대해주세요. 모두 독자님의 응원과 사랑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로 행복했습니다. 저는 그럼 새로운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