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푸른 눈동자와 루시의 짙은 어둠이 모여 만들어진 듯한 검은 눈동자는 한동안 서 로를 마주보았다. 서로의 눈동자 속에 숨어있는 생각의 파편을 엿보려는 치열한 눈싸 움은 계속되었다. 언제나처럼 웃고 있는 그의 눈동자에서 마치 타인을 보는 듯한 이질 감과 감정이라고는 한 오라기도 스며있지 않는 냉막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것과 동시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동질감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러나 그 것은 친밀감이 느껴지는 동질감이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저 깊은 곳에서 불안감과 적의가 스멀스멀 올라오게 만드는 동질감이었다. 마치 한 우리에 같은 맹수를 가둬놓으면 서 로 하나가 죽을 때까지 물어뜯고 물어뜯기는 것을 반복하는 것과 같았다. 예상 밖의 루시의 모습에 크게 떠졌던 눈은 가늘게 좁혀지면서 차갑게 식어갔다. 그리고 마주보 고 있는 루시의 검은 눈동자에도 날카로운 예기가 서렸다. 그러나 나와 루시의 이 기 묘한 대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후후후. 마리엔, 놀랐군요." 어느새 루시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의 차갑고 잔혹해 보이는 검은 눈 동자도 평소처럼 지친 자를 포근히 감싸안는 밤의 부드러운 빛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것과 동시에 그에게서 느껴지던 동질감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약간의 기묘한 느낌만이 조금 전에 느꼈던 동질감의 잔재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잔재를 애써 품에 갈무리하며 다시 한번 루시를 보았지만 내가 왜 이런 인간에게 그런 동질감과 불안감 을 느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역시 놀랐군요. 이야, 마리엔도 이런 이야기에는 약하군요. 평소에 하는 행동과는 달 리 그래도 소녀다운 여린 면이 있군요. 정말 뜻밖인데요." 루시는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싱글거리며 말했다. 그 모습이 또래의 여자아이에게 몇 차례 장난을 쳤다가 여러 번의 실패 끝에 마침내 장난에 성공한 말썽꾸러기 남자아 이를 보는 것 같았다. 한참 루시를 미심쩍은 눈으로 보던 나는 그의 말에 눈썹이 약간 꿈틀거렸다. '평소에 하는 행동과는 달리'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 미미한 변화를 눈치챈 사람은 거의 없었다. 루시가 나를 겁주려고 그런 말 을 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너무 장난이 심했다는 가벼운 책망의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다만 상대적으로 나와 지낸 기간이 길었던 가스톤과 죠안만이 나의 작은 변화를 눈치채고 불안한 눈으로 내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루시는 나를 놀라게 한 것이 그렇게 즐거운지 신이 나서 옆에서 계속 조잘거렸다. 시 간이 지날수록 내 가슴 속에는 불안감은 서서히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를 분노라는 감 정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무서울 것이 없어 보이던 내가 루시의 말에 잠시나마 겁을 먹자-그들의 관점에서다- 일행들은 너나할 것 없이 빙글거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아무리 강한 척 해도 아직 어린 소녀구나'라는 생각이 그대로 써져 있었다. 특히 그 동안 내 말빨이 몇 번 당한 적이 있던 도키오 할아버지는 루시 다음으로 신이 나있었 다. "결국 마리엔도 어쩔 수 없는 꼬,마,였군. 어른이라면 예전에 죽은 마녀 이야기로 겁 을 먹지는 않지." "너무 겁먹지마. 벌써 옛날 사람이니까." "그래. 그리고 설령 있다고 해도 궁......아니, 마리엔이 살고 있는 곳에는 쉽게 못들 어와." 나는 놀리는 기색이 역력한 일행들의 말에 입꼬리는 올라가 있데 눈끝은 살짝 일그러 진 기묘한 얼굴로 말했다. "겁 먹은 적 없어." 그러나 일행들은 내가 창피해서 그런 것이라고 오해하고 더욱 싱글거리면서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대부분 사람들이 아직도 요이체로스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을 꺼려하고 있으니까 마리엔의 반응을 이해못하느 것도 아니야." "제가 말한 거지만 진짜로 겁을 먹을 줄은 몰랐는데요." 마족인 내가 마녀에게 겁을 먹을 리가 없었다. 나는 서서히 분노로 잠식되어 가는 마 음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면서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 겁......먹은 적 없다니까." 그러나 항상 짓궂은 장난과 다른 사람을 놀려먹기를 계속하던 나를 놀려먹을 기회가 생겨서인지 끈질겼다. 그들은 이런 진귀한 경험은 지금이 아니면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스톤과 죠안을 제외하고 말이다. "마리엔, 역시 겁을 먹은 것 맞죠? 하지만 겁을 먹은 모습도 귀여웠어요. 앞으로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해드려야겠네요." 루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인간에게 불안감을 느꼈던 것 이 약간 부끄러운데다 주변에서 계속 놀리자 잔뜩 화가 나있던 상태였다. 그런데 모든 일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그가 바로 눈앞에서 웃으면서 그런 말을 하고 있으니 가만 히 넘어갈 리 만무했다. 그는 짚을 짊어지고 활활 타오르는 불 속으로 자진해서 뛰어 들었던 것이다. 분풀이 대상을 찾아 헤매던 분노들은 당연하게도 모두 루시에게 쏠렸 다. 내 손은 자연스럽게 몇 백년동안 호흡을 함께 해왔던 창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혼연일 체가 된 손과 창은 허공을 부드럽게 가르며 공중을 유영했다. 나는 눈 앞의 사내를 강렬하게 노려보았고, 내 시선에 그는 고양이 앞에 생쥐처럼 움 츠러들었다. 그가 나 같은 소녀의 시선에 이렇게 움츠러든 이유는 그의 이마에서부터 뒤쪽 머리까지 감싸고 있는 붕대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매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왜 생겼겠는가. 게다가 한 방에 기절까지 갔으니 멀쩡하게 대한다면 그 것이야말로 이상 했다. 그러나 내가 워낙 잘 때린 점도 있었지만 루시가 기절까지 간 것은 허약한 마법 사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많은 여행으로 다져진 몸이었지만 그래도 마법사는 마법사였 는지 그는 자신의 머리에 창대가 직격하자 방의 한 구석에 처박히면서 의식을 끈을 놓 고 만 것이다. 루시가 기절하자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사라와 엔젤, 로즈는 당황해서 기절한 루시를 간호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도키오 할아버지들은 갑작스런 내 행동보다는 단번에 그를 기절시켜버린 실력에 놀라고 있었다. 에릭과 세린, 촌장은 너무나 황당하다는 얼굴들 이었다. 그리고 히크리트 신관은 잔소리를 늘어놓았지만 가스톤과 죠안이 극구 말리는 바람에 루시를 치료해주러 가버렸다. 참으로 현명한 판단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계 속 잔소리를 늘어놓았다면 아마 루시의 옆에서 사이좋게 같이 잠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 히크리트 신관은 불만스러운 눈초리였지만 무사히 넘어가자 가스톤과 죠안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중얼거렸다. "그러게 건드릴 사람을 건드려야지.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래도 운이 좋군. 단번에 기절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지옥을 맛보았을 거 야." 그동안 나와 대련을 하면서 많이 맞아본 덕에 누구보다 내 기분상태를 감지하는데 능 숙해진 그들이었다. 루시는 내가 힘을 조절한데다 히크리트 신관의 신성마법 덕에 금 새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그 후로 내 앞에서 뭐 마려운 사람처럼 쩔쩔매고 있었던 것 이다. 살벌한 눈초리에 감히 따질 염두가 나지 않는지 식은땀을 삐질거리는 것이 아프 긴 아픈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도 내 화를 달래려고 어색한 미소를 짓는 모습이 어딘 지 모르게 진한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나도 기절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냥 몇 대만 때려준다는 것이 어떻게 일이 꼬여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새하얀 얼굴의 그가 붕대까지 감고있자 마치 죽을 병에 걸린 사람처럼 보였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의 눈동자에는 루시가 기가 팍 죽어있자 황당함 과 함께 저 사람이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그렇게 무자비하게 팰 수 있냐는 항변의 뜻 이 서려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루시가 조금 불쌍해 보였다. 더군다나 내 시선이 움직 일 때마다 움찔거리는 모습에 '너무 심했나?'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나는 표정 을 약간 누그러뜨리고 말했다. "그러게 겁 안 먹었다고 했잖아." 내 말에 일행들은 기가 막힌 얼굴로 쳐다보았다. 예상은 했지만 루시를 기절까지 몰고 간 이유를 직접 들으니 느낌이 다른 것이다. 조금 양심이 찔렸던 나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기 전에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험, 그런데 요이체로스 이야기가 갑자기 왜 여기에서 나온 거야?" 다행히 다른 사람들도 그 이유가 궁금했는지 더 이상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루시를 보았다. 루시도 내가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진데다 어느 정도 충격에서 회복되자 입을 열었다. "요이체로스는 사람들을 고문하다가 죽으면 그 시체를 모두 한 곳에 묻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악행을 보다못한 5명의 마법사들이 그녀를 처단하려고 모였습니 다. 8서클 마법사와 4명의 7서클 마법사로 구성된 마법사들은 이틀 간의 사투 끝에 마 침내 요이체로스를 쓰러뜨릴 수 있었지만 그녀의 힘이 너무 강대해 육체는 소멸시켰지 만 정신은 죽이지 못하고 봉인했다고 합니다. 요이체로스는 봉인당하면서도 반드시 깨 어나 이 세상을 피로 물들이겠다고 저주를 퍼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봉인장소가 바로 이 곳 로마니 숲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결국 루시가 조금 전에 한 말은 이미 죽어버린 요이체로스가 봉인이 풀려 다시 깨어나 지 않았을까 하는 말이었다. 엄밀한 의미로 따지면 죽은 것은 아니었지만 육체가 소멸 당했으니 죽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게다가 몸은 없고 정신만 봉인에서 풀렸다면 유령 으로 볼 수도 있었다. "저도 그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곳 로마니 숲이 그 봉인의 장소라는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요. 그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던데 루시퍼씨는 어떻게 그걸 알고 계신 겁 니까?" 로즈의 질문에 루시는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이곳저곳을 여행하다보면 여러 가지 풍문을 듣게되지요. 사실 저도 이 말이 사실인지 는 확실하게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 그리고 이 것이 아니면 요이체로스에게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이 한 일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확실히 루시의 말처럼 여러 방향으로 생각해보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미리 준비를 해 두면 나중에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위험이 줄어들고, 한번정도 생각해본 후에 일을 당 했을 때에 는 그렇지 않을 때보다 빨리 대처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정말 요이체로스가 깨어나서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라면......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우리들 사이로는 정적이 흘렀다. 요이체로스가 깨어난 것이라면 문제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컸다. 뭐라고 해도 그녀는 8서클 마법사와 대 등하게 싸운 인물이 아닌가. 그 것도 8서클 마법사 혼자만 싸운 것이 아니라 4명의 7 서클 마법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틀이나 사투를 벌였다고 하지 않은가. 물론 약 간은 과장된 면이 있겠지만 그런 점을 제하더라도 요이체로스라는 마녀는 강했다. 때 문에 일행들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진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를 그렇게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자기가 잘나봐야 얼마나 잘났 겠어? 그래봐야 인간이야. 나는 버릇대로 모든 인간을 내 아래로 보고 있었다. 현재의 몸이 진짜 내 몸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몇 백년동안 가져온 생각을 한순 간에 바꾸기란 쉽지 않았다. 상황이 아무리 바뀌어있다고 해도 말이다. 우리들은 잠시 요이체로스의 등장을 가정해보았지만 이내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런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은 1%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악령으로 추 정되는 그 것이 정말로 요이체로스라면 너무 조용했다. 사람들이 사라지고는 있지만 요이체로스가 나타난 것이라면 실종사건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잔혹했던 그녀가 봉인까지 당했다 깨어났는데 가만히 있을 턱이 없었다. 한바탕 피바 람이 불겠지. ----------------------------------------------------------------------------- 이런저런 의견이 나왔지만 로마니 숲에서 보인다는 이상한 빛들의 정체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단순히 마을 주민들의 말로는 확실한 것을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이 뭔가 다 른 것을 보고 착각을 한 것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공포심에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고는 헛것을 본 것일 수도 있었다. 때문에 우리는 빛들이 나타난다는 시간까지 로 마니 마을에서 죽치고 기다렸다. 로마니 숲에서 나타난다는 이상한 빛들은 자정이 되 면 나타났다가 새벽 3시까지 숲을 배회하다 사라지곤 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둠이 모든 만물을 포근하게 감싸안는 시간까지도 잠을 자지 못하고 그 이상한 빛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촌장집의 창 밖으로 보이는 로마니 숲은 검 은 색으로 물들은 채 밤하늘 아래 조용히 자리잡고 있을 뿐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 고 있었다. 로마니 숲의 위로 보이는 밤하늘에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은 어의 비늘과 같은 빛을 뿜어내는 별들이 총총히 박혀있었다. 그리고 검은 물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은어들의 위로는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고양이의 눈이 있었다. 고양 이의 노오란 눈은 은빛의 물고기들이 탐이 나는지 노란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그 광 채는 단 하나의 눈에서 나는 것이지만 수백만 개의 은어의 반짝이는 비늘을 합친 것보 다 더 밝은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노란 빛은 밤하늘의 지배자로 하늘뿐만 아니라 지 상까지도 비추고 있었다. 계속 로마니숲과 밤하늘을 쳐다보던 나는 지루해져서 옆에 있는 사라에게 말했다. "정말 나타날까?" "달이 뜨는 밤이면 항상 나타난다고 하니 조금 있으면 나타날 거야. 졸리면 지금 좀 자두지 그래? 뭔가 이상한 점이 생기면 바로 깨울 테니까." "아니, 좀 지루하긴 하지만 잠은 안 오니까 괜찮아." 사라는 약간 걱정이 되는 얼굴이었지만 그동안 여행하면서 내가 보여준 강인한 정신력 , 다시 말하면 오기를 떠올리고 더 이상 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사라와 나는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면서도 계속 로마니숲을 주시했다. 이런 점은 아마 다른 방에 있는 일행 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로마니숲에서 언뜻 희미한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나와 사라는 동시에 눈을 크게 뜨 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치 차례로 촛불에 불이 붙는 것처럼 로마니숲에서 하 나둘 빛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빛들은 듣던 대로 빨간 색에서부터 파란 색, 노란 색 , 흰 색, 녹색, 보라색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색이었다. 그 다채로운 빛들이 로마니 숲의 이곳저곳을 떠다니는 모습은 괴기스럽다기 보다는 마치 숲 전체에 색색의 보석 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로마니숲에서는 유령이 나타났다기보다는 빛들의 축제가 열리는 듯한 모습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가만히 감상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었다. 나와 사라는 재빨리 방문을 박차고 나갔고, 다른 동료들도 거의 동시에 방에서 나왔다. 미리 준비를 해놓고 있었 기 때문에 따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모두 봤어요?" "그래. 하지만 유령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좀 이상한 것 같던데." 내 질문에 세린이 답하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유령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이 상했다. 유령마다 색깔이 다르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었고, 언뜻 보기에 그렇게 위험한 존재로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방심할 수는 없었다. 마을과 로마니숲은 서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얼마 걸리지 않아 숲 앞에 도착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숲에 들어가지 않았다. 아니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 이 맞을 것이다. 멀리서 보던 로마니숲의 모습도 아름다웠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마치 빛의 호수에 빠져버린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색색의 빛을 받아 나무들은 보라색으 로, 덤불은 붉은 색으로, 오솔길은 녹색으로, 꽃들은 파란 색으로 저마다 평소와는 전 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게다가 숲을 감싸고 있는 옅은 안개가 반짝이는 빛들을 받아 다채로운 색으로 물들어있어 더욱 환몽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빛의 근원지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는 볼 수 없었다. 다만 숲 안쪽에서 강한 빛 이 나오고 있는 걸로 봐서 더 안으로 들어가 봐야만 할 것 같았다. 다행히 빛들 때문 에 로마니숲은 대낮까지는 아니어도 활동하는데는 지장이 없을 정도로 밝았다. 빛을 따라 숲으로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숲을 색색으로 물들인 빛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마치 세상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처럼 나무들이 둥글게 둘러싼 공터에는 반짝이는 날개를 가진 아주 작은 인간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투명한 날개를 날갯짓할 때마다 빛의 가루들이 떨어져 나와 허공에서 춤을 추며 색색으로 수 놓았다. 몇십 명이나 되는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숲은 시시각각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 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꾸 아름답게 변해버린 숲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지 자기들끼리 바삐 날아다니고 있었다. "페어리?" 그 모습에 항상 조용하던 시이라마저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 다. 페어리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 금 눈앞에서 날아다니고 있는 작은 인간들은 페어리라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했다. 페 어리는 쉽게 볼 수 있는 종족도 아니었고, 설령 볼 수 있다해도 이런 흔해빠진 숲에서 는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앞의 인간들은 페어리처럼 손바닥만한 크기가 아 니라 적어도 팔뚝 정도의 크기였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루시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글쎄요. 페어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지 않나요? 그리고 페어리가 저마다 색깔이 다 르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루시의 말에 모두 수긍하는 눈치였다. 처음에는 페어리라고 생각했지만 자세히 보니 들어오던 페어리와는 생김새가 약간 달랐던 것이다. 잠자코 바삐 날아다니고 있는 소 인(小人)들을 보던 에릭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요정의 일종이 아닐까요?" "일단 그런 것 같긴 한데." 엔젤이 그렇게 말을 하긴 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요정을 직접 본 적 이 없었기 때문에 추측만 했을 뿐 확실히 단정지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단 은 요정 비슷한 것일 거라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저 모습은 어디로 보나 요정이 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빛의 정체가 요정-확실하지는 않지만-이라는 것을 알자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그런데 로마니숲에서 나타나는 이상한 빛들의 정체가 요정이라면 이들이 사람들을 납 치할 이유가 없지 않나요?" "그 것도 그렇군. 지금까지는 유령이나 유령을 가장한 사람의 짓으로 생각했는데 말이 야." 내 질문에 세린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난감해하기는 다른 사람들 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봐도 저 요정들이 사람을 납치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저 작은 몸으로 사람들을 납치하기는커녕 사람들에게 잡혀 팔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었 다. 하지만 빛이 나타난 시점부터 실종자가 급증한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렇게 새로운 의문에 고민하고 있을 때, 요정들도 우리들의 등장을 눈치챈 모양이었 다. 그들은 우리들의 모습을 보자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 인간이다." "인간이다." "인간이다." 몇 요정의 말에 공터를 바삐 날아다니던 요정들은 일제히 그 자리에 멈춰서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우리 주위로 날아오더니 상당히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 다. "위험해." "맞아. 위험해." "위험해. 여긴 위험해." 많은 요정들이 우리 주위를 파닥파닥 날아다니자 요정의 날개에서 떨어져 나오는 빛의 가루가 우리들을 완전히 감쌌다. 그러자 우리들의 몸에서도 요정들처럼 빛이 나기 시 작했지만 우리들의 관심은 다른 곳으로 쏠렸다. 위험하다니? 무엇이 위험하단 말인가? 그러나 요정들은 무엇이 위험하다는 소리는 하지 않고 계속 위험하다는 소리만 반복 하고 있었다. 만약 이대로 있는다면 요정들은 끊임없이 위험하다는 말만 반복할 것 같 아 나는 그들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위험하다니? 뭐가 위험하다는 거야?"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큰 목소리로 말해서 그런지 요정들은 입을 다물고 서로의 얼굴 을 쳐다보았다. 작은 인간들이 고개를 기웃거리는 모습은 귀여워 보였지만 그들의 표 정은 영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금새 그들은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전갈의 마녀가 있어." "마녀가 사람들을 잡아가." "사람들이 못 오도록 막는데도 사람들이 자꾸 와." 한 명 한 명의 말로는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모든 요정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전 갈의 마녀인 요이체로스가 사람들을 잡아간다는 말이 됐다.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날까 싶었던 우리들은 요정들의 말에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도대체 봉인되었다던 마녀가 어떻게 깨어나서 이렇게 활개를 치고 다닌단 말인가. "잠깐. 그럼 요이체로스가 깨어났단 말이야?" "맞아. 그 여자가 깨어났어." "마녀가 사람들을 잡아먹어." "우리를 만들어준 할아버지들이 지키라고 했는데 누가 봉인을 풀어버렸어." 내 말에 요정들은 다시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말하는 할아버지들이란 아마도 요이체로스를 봉인했던 마법사들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요정이 아니라 마법사 들이 만들어낸 마법생물들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특별한 힘은 없어 보이는 것으로 보 아 그저 감시 역할로 만들어놓았던 것 같다. 여러 요정들의 말을 종합해본 결과 원래는 요이체로스가 깨어날 기미가 보이면 자신들 이 먼저 깨어나 그 걸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역할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마법사 들은 요이체로스가 스스로 봉인을 깬 경우만 생각했을 뿐 누군가 그녀의 봉인을 풀 것 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하긴 어느 미친 인간이 그런 살인마를 깨우려하겠는 가. 그녀의 그동안의 악행으로 봐서 봉인을 풀어준 인간조차 죽이려 들텐데 말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된 게 어느 인간이 그녀의 봉인을 풀어버렸고, 그녀가 깨어난 지 얼 마 지나지 않아 이들도 깨어났다고 한다. 이들의 몸에서 나오는 빛이 가루는 요이체로 스를 어느 정도 억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어 이 곳을 떠나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도 못한 것이다. 하지만 요이체로스가 로마니숲에 들어온 사람들을 모두 죽이 고 그 영혼을 흡수하면서 힘을 길러 가는 바람에 지금은 그것조차 힘든 상황이라고 한 다. 요정들의 말에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한 우리들의 인상은 일그러졌다. 특히 같은 마법 사라 그녀의 힘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로즈와 루시의 안색은 새파래졌다. 그나 마 다행이라면 예전보다는 힘이 많이 약화됐다는 점이지만 말이다. "맙소사! 어떤 미친 놈이 그런 마녀를 깨운 거야!" "이거 정말 미치고 팔짝 뛰고 환장할 노릇이군! 죽고 싶으면 곱게 절벽 위에서 떨어지 면 될 것이지 이게 무슨 짓이야!" "문제가 너무 커져버렸는데요."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이야!" "아이고, 골치 아파!" 도키오 할아버지와 겐지오 아저씨, 세린, 로즈, 가스톤이 동시에 탄식했고, 다른 사람 들도 말은 하지 않지만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그들의 반응을 흥 미로운 눈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마녀란 말이지. 곱게 봉인당한 걸 보면 마족과 계약 한 인간은 아닌 것 같은데 뭐하는 인간이려나? 다른 이들과는 달리 약간의 호기심과 기대심을 가지고 있던 나는 갑자기 주변의 기운이 변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덤불 속에서 들려오던 풀벌레의 찌르르하는 울음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게 되 었다. 우리 귀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나는 사르륵하는 소리와 요정들의 날갯짓 소리였다. 그러나 얼마 후 바람마저 그치자 요정들의 날갯짓 소리만이 우리들의 고막을 울릴 뿐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풀벌레의 향연으로 제법 시끄럽던 로마니숲은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온 것처럼 고요했다. 공터는 살아있는 생명체가 주변의 공기를 들이마시 는 것처럼 숲 속의 안개를 모두 들이마셨는지 점점 뿌연 안개로 뒤덮이더니 종래에는 흡사 공포 소설의 한 장면에 나오는 장소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조용하고 평화롭던 밤의 숲은 어느새 위험이 어느 곳에 도사리는 지 알 수 없는 어둠 의 숲이 되어버렸다. 한차례 폭풍이 불어닥치기 전의 고요처럼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 게 만드는 고요가 우리들의 주위를 에워쌌다. 그러나 주변을 바삐 살필 뿐 누구도 이 적막을 깨지 않았다. 이 적막이 깨어지는 순간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험을 감지한 우리들이 서로 거리를 좁혀 서자 어둠에 가려져 있는 숲의 한 구석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둠의 장막을 들추고 귀로 전해져오는 소리는 마치 수십 마리의 바퀴벌레가 움직일 때 나는 소리와 비슷했다. 나뭇잎이 밟히 는 소리와 함께 귀에 익숙하지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나타났다." "나타났어." "도망가." 그 소리에 요정들은 주위를 산만하게 날아다녔다. 그 와중에 자기들끼리 부딪치기도 했지만 모두 무시하고 계속 우리의 위를 날아다니는 요정들 덕분에 우리들은 완전히 빛의 가루에 뒤덮여버렸다. 마치 빛으로 만들어진 사람처럼 빛이 났다. 재미있는 것은 요정들도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 서로 제각각인지 사람마다 위를 맴도는 요정들의 색 깔이 달랐던 것이다. 그래서 저마다 빛을 내는 색 또한 달랐다. 로즈와 엔젤, 겐지오 아저씨는 붉은 색을, 에릭과 페르는 파란 색을, 세린과 리카, 죠안은 녹색을, 가스톤 과 사라, 도키오 할아버지는 노란 색을, 히크리트 신관과 시이라는 흰 색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루시는 보라색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모든 신경을 다른 곳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나 혼자였다. 요정들이 난리를 치면서 도망가라고 했지만 우리들은 둥글게 원을 그리게 모이기만 했 지 도망가지는 않았다. 이미 상대는 우리의 존재를 눈치챈 모양이었고, 분위기상 쉽게 도망갈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요이체로스라는 존재를 확인해야할 의무가 있었 다. 정 급하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원의 바깥에는 기사들과 페르, 도키오 할아버지, 겐지오 아저씨가 서서 나머지 사람들 을 감싸고 있었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창을 손에 들고 앞으로 가려했지만 이들에게 나는 그렇게 강한 전력으로 인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지금은 가장 한가운데에 있 었다. 로즈와 루시는 만약을 대비해 주문을 외우고 있었고, 리카는 활에 화살을 매기 고 있었다. 화살에 복잡한 주문이 적어져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마법이 걸린 화살 인 듯 했다. 그리고 얼핏 적인 주문을 보니 빙계 마법 같았다.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 전투 태세를 취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요이체로스의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그려보았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가 어깨 너머로 출렁거리고 마치 불을 머금은 듯한 강렬한 눈 동자가 정면을 주시하고 있다. 그리고 몸에 쫘악 달라붙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글래머 한 몸매를 자랑한다. 입에는 약간은 비릿한 비웃음을 띠고 있는 미녀가 살기를 내뿜으 며 누군가를 두들겨 패는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이 어디의 누군가 와 매우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내 머리 속에 그려진 요이체로스의 영상은 다름 아닌 8대 마왕 중에서도 가장 과 격하기로 유명한 레이지 마왕, 즉 우리 엄마의 모습과 너무도 똑같았다. 엄마처럼 붉 은 머리와 붉은 눈을 가졌기 때문인가 보다. 그러나 나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고귀하 고 우아하고 지엄한 마왕인 우리 엄마와 그런 정신나간 여자와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순간이나마 엄마와 요이체로스와 겹쳐 상상했던 나는 엄마 에게 미안한 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그런 몰상식한 생각을 모두 날려버리려고 머리를 붕붕 내젓고 있는데 부드러운 손길이 와닿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루시가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고 있었다. 그의 부 드러운 미소에는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었다. 아마 내 가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겁을 먹은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조금 전에 나에게 맞아서 기절해놓고도 이렇게 나올 수 있는 것을 보면 루시는 마음씀씀이가 좋은 것 같 았다. 나같았으면 마물들이 떼거지도 있는 틈 속에 던져버릴 텐데 말이다. 그의 걱정 대로 겁을 먹은 것은 아니었지만 의외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느낌이 괜찮아서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우리들이 만반의 준비를 하는 사이 정체불명의 소리는 상당히 가까운 곳까지 와있었다 . 동료들이 긴장을 하는 것이 느껴졌다. 무엇이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희대의 마녀 와의 첫 만남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더욱 불안해하고 있었다. 소리는 이제 바로 공 터 옆에서 들려왔고, 조금 전에는 들리지 않았던 무엇인가 뿜어져 나올 때와 같은 쉬 이익, 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바짝 긴장해서 주변을 경계하는 사이 왼쪽 덤불이 부스럭거리더니 거대한 물체 하나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접근했다. 그러나 그 물체는 요정들이 필사적으로 달려들고 이 미 우리가 빛에 둘러 쌓여있자 쉬이익하는 소리를 내며 약간 뒤로 물러섰다. 그 물체 가 움직일 때마다 뼈마디가 부딪치는 것과 같은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물체 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한 우리는 그런 소리가 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리들의 앞에서 위협적으로 붉은 꼬리를 흔들고 있는 것은 바로 거대한 전갈이었다. 전갈은 머리에서 꼬리까지 족히 7m는 될 것 같은 거대한 몸체였고, 마치 피바다에서 건져 올린 것처럼 온통 붉은 색이었다. 그 색은 요정들의 빛을 받아서 더욱 섬뜩해 보 였다. 전갈의 입은 인간정도는 갈가리 찢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웠고, 꼬리는 한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우리 일행을 모두 저 멀리 날려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 거대한 전갈이 보통 전갈과 다른 점은 비단 엄청난 크기만이 아니었다. 전 갈의 입에서는 마치 썩어버린 늪에서 나오는 듯한 녹색의 독무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 다. 아마 우리가 들었던 쉬이익,하는 소리는 이 독무가 뿜어져 나오면서 나는 소리였 던 모양이다. 녹색의 독은 바람을 타고 전해져서 우리들의 숨을 턱턱 막히게 하고 있 었다. 그리고 전갈의 딱딱한 등허리 위에는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에는 전갈의 위에 서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그녀의 발은 전갈의 몸체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 었다. 그녀의 붉은 머리는 헝클어진 채 하늘을 향해 뻗쳐있었고, 원독어린 붉은 눈에 는 감출 수 없는 광기와 잔인함이 엿보였다. 하얀 치아를 보이며 웃고 있는 그녀의 입 술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그녀는 붉은 색의 로브를 걸치고 있었는데 로즈의 붉은 로브와는 달리 검붉은 기운이 강했고, 나는 그 것이 피색과 비 슷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 날파리 같은 것들!!!" "저리가!" "저리가!" "이쪽으로 오지마!" 그녀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를 치면서 요정들을 향해 거대한 꼬리를 휘둘렀다. 그 러나 요정들은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그 공격을 피했다. 날아다니고 있는 파리를 막대 기로 잡으려고 해봐라. 절대 죽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요정들도 전갈 여자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피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전갈의 몸체 위에 있는 여자의 손에 서 나오는 불덩이는 피하지 못하고 몇몇 요정들이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전갈 여인은 더 이상 요정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공터의 중간에 있는 우리들 에게 고개를 돌렸다. 전갈의 입에서는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나고 있었지만 여자의 입 에서는 분명한 인간의 말이 나왔다. "요즘에는 저 날파리들 때문에 인간들이 오지 않더니 이렇게 떼거지로 오다니. 운이 좋군," 지금까지의 상황과 요정들의 반응으로 유추해보건데 전갈 여인은 전갈의 마녀라는 요 이체로스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을 받아드리기가 힘들었다. "뭐야! 저 할망구는!" 내가 듣기로는 요이체로스는 그 행동이야 어떻든 아름다운 미녀라고 했다. 때문에 내 가 불효막심하게도 우리 엄마의 모습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전갈의 몸체 위에 있 는 여자의 얼굴은 이보다 더 추할 수는 없었다. 얼굴의 절반은 녹아 내려서 형체를 알 아보기 힘들었고, 코는 사마귀가 여러 개 달린 매부리코였다. 눈썹은 어디서 태워먹은 것인지 몇 개의 털만이 눈썹이 있었던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입은 완전히 비뚤어 져 있었다. 무엇보다 얼굴 전체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그러나 자신의 얼굴 상태를 모르는 것인지 전갈 여인은 크게 화를 내면서 소리쳤다. "할망구라니! 감히 너 따위가. 죽고 싶은 것이냐!" "넌 거울도 안보냐! 그 얼굴은 할망구라는 말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내가 지지 않고 소리치자 누렇던 여자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여인은 이빨이 부러질 정 도로 이를 뿌드득 갈고 있었고, 전갈의 입에서 나오는 독무는 더욱 진해졌다. 나는 그런 전갈 여인을 보면서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정말 요이체로스 맞아? 얼굴이 영 아닌데." "닥쳐라! 이 계집애야! 나라고 이렇게 되고 싶어서 된 줄 알아! 그 망할 마법사 놈들 에게 당해서 어쩔 수 없었다." 요이체로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분명히 육체는 소멸당했다고 했는데. 그리고 그 밑에 있는 전갈은 또 뭐야? 저 것 때 문에 전갈의 마녀라고 불린 건가? 하여간 웃기게 생기긴 했군." 동료들이 말리기도 전에 내 입은 내 생각을 여과없이 그대로 옮겨 말했다. 이제 전갈 여인은 온 몸이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붉어지더니 찌를 듯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녹색의 독무에 감싸인 전갈 여인의 모습은 이상한 빛을 내는 숲과 어울려 더욱 괴기 스러워 보였다. 그녀의 입에서는 화를 완전히 내리누르지 못해 약간씩 떨리는 목소리 가 새어나왔다. "원래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봉인되어 있는 나를 다시 깨운 인간이 다시......" 그러나 요이체로스는 말을 하다 멈추었다. 그래도 아주 멍청하지는 않군. 보통은 화가 나면 되는대로 지껄이기 마련인데 중간에 말을 멈춰버린 것을 보면 말이다. 덕분에 일의 전말을 할 수 없게 되긴 했지만 말이다. 요이체로스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 했다. "곧 죽을 인간에게 그런 말을 해도 소용이 없지. 하지만 네 놈들의 영혼을 흡수하면 빨리 원래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지. 특히 네 년은 내 얼굴이 보기 싫은 듯한데 네 영 혼을 나에게 주면 이 얼굴을 다시 볼일은 없을 꺼다! 네 년만은 반드시 가장 고통스럽 게 죽여버리겠다!" "으흠, 그건 싫은데."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요이체로스는 그 거대한 몸체와는 달리 빠른 속도로 우리들에 게, 정확히 말하면 한가운데 있는 나에게 달려들었다. 요정들의 빛의 가루가 그녀를 제어하는 역할을 하긴 하지만 모든 행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미 그녀는 제 법 힘을 되찾았은 상태라 빛의 가루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조금만 더 인간들의 영혼을 흡수하면 요정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숲을 벗어나 마음껏 활 개치고 다닐 것이다. 요이체로스는 내가 자신의 외모를 보고 뭐라고 한 것 때문인지 무시무시한 기세에 달 려들었다. 거대한 붉은 전갈의 몸이 지면을 박차고 달려올 때마다 흙이 여기저기로 튀 었다. 그리고 요이체로스와 우리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로즈가 손을 앞으로 내 밀며 외쳤다. "비켜요!" 로즈의 외침에 우리들은 마법을 사용하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재빨리 양쪽으로 갈라섰 다. 미리 마법주문을 외워두고 있었기 때문에 따로 주문을 외울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 다. 우리가 모두 물러선 것을 확인한 로즈는 시동어를 외웠다. "라이트닝 볼트!" 로즈가 시동어를 외침과 동시에 구름 한 점 없던 밤하늘에서 여러 줄기의 굵은 전격이 내리쳤다. 콰르릉. 시퍼런 뇌전은 대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요이체로스 를 강타했고, 이 소리에 겁을 먹은 대지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진동은 떨어져있는 나에게까지 전해져 내 몸도 떨리게 같이 떨리게 했다. 시퍼런 뇌전이 내리칠 때마다 로마니숲은 그 번쩍거리는 번개로 인해 어둠에 가려져 있던 부분을 드러냈다. 그리고 한 줄기의 뇌전이 사라지면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한 줄기의 뇌전이 내려 치면 다시 어둠 밖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곤 했다. 괜히 7서클이 아니었는지 굉장히 위력적인 마법이었다. 만약 아무런 방어도 없이 저 번개들을 맞는다면 단 몇 초만에 전기에 감전돼서 죽고 말 것이다. 그러나 공격은 거 기서 그치지 않았다. 몇 차례 번개가 내려치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밤하늘이 다시 맑 아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루시가 외워두었던 시동어를 외웠다. "익스플로젼!" 퍼어엉. 라이트닝 볼트의 영향이 채 가시기도 전에 대지는 한차례 폭음과 함께 몸의 일부가 터져 나가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익스플로젼은 공격범위에 들어갔던 대지에 서 자갈들과 흙 채 뽑힌 풀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부옇게 인 흙먼지 와 함께 우리들의 시야를 방해했다. 이윽고 흙먼지가 사라지고 시야를 확보할 수 있게 되자 약간의 기대감을 가지고 요이체로스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요이체로스는 상처 하나 입지 않은 몸으로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정도로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저렇게 멀쩡하자 약간 허탈한 감마 저 들었다. 세긴 세나보군. 그새 실드를 치다니. 하지만 주문을 외우는 것은 보지 못 했는데. 분명히 요이체로스는 주문을 외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녀의 몸 주 위로는 막이 둘러쳐져 있었다. 그런데 이 실드라는 것이 보통의 실드와는 많이 달랐다. 그 막은 그냥 투명하지 않고 흐릿한 무언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것의 정체를 알아챈 순간 나는 약간 인 상을 찌푸리면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미쳤나봐." 내 말에 동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협오스럽다는 눈으로 요이체로스를 쳐다보았다. 특 히 신관인 히크리트 신관의 놀라움은 엄청났다. 히크리트 신관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떨리는 목소리도 말했다. "여, 영혼." 실드를 이루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사람들의 영혼이었다. 하나가 아닌 몇 개의 영혼들 이 한꺼번에 뭉쳐 정확히 얼마나 되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람의 얼굴로 추정되는 것들이 상당수 되었다. 얼굴은 남자에서 여자, 노인,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 류의 것들이 모여있었고, 개중에는 병사의 모습으로 보이는 형상도 있었다. 그 영혼들 은 마법을 맞아 고통스러운지 일그러진 얼굴로 아우성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마치 유리를 손톱으로 긁는 듯한 소름끼치는 괴성들이었다. 그동안 요이체로스가 사람들을 죽이고 영혼을 흡수했다고 했으니 아마도 그녀에게 당 한 사람들의 영혼인 모양이었다. 주문도 외우지 않고 실드를 친 것은 이 영혼들을 자 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실드를 이루고 있는 영혼들은 의식 은 남아있지 않은지 기괴한 소리만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보는 사람까지 아픔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고통에 찬 얼굴들이라 동료들은 한순간 움찔했다. 그리고 마법사인 나와 루시, 로즈만이 비교적 담담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미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붙잡아두고 저런 식으로 이용한다는 것은 분명 인간의 기준 으로는 잔인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영혼이 잡혀있는 한은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 고, 살아도 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하고 있는 요 이체로스의 모습은 그동안 보아왔던 인간들의 모습과 사뭇 달라 느낌이 새로웠다. 인 간이란 종족의 이중성에 대해서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지만 직접 보니 조금 더 피부로 와닿는 느낌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기발한 생각을 어떻게 해낸 것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저 깊은 곳에서 불쾌함이 차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뭐라고 해도 지금의 내가 있는 곳은 마계가 아닌 인간계이고, 나 역시 마족이 아닌 인간으로 있는 상태였 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히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효과만은 굉장했다. 라이트닝 볼트와 익스플로젼을 완벽하게 막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히크리트 신관은 인간의 영혼으로 만들어진 실드를 잠시 멍하니 보고 있다가 곧 악에 받친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마녀! 어떻게 같은 사람의 영혼을 가지고! 그러고도 당신이 인간이라고 할 수 있어?! 당신같이 짐승보다 못한 인간은 반드시 천벌을 받을 꺼야!" 히크리트 신관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과격한 말을 한 것이지만 요이체로스는 피식 웃으 면서 말했다. "신?! 웃기는군. 그럼 그 잘난 신에게 한번 빌어보시지. 너희들을 살려달라고 말이 야. 아무리 그래도 영혼을 조종할 수 있는 나에게는 이길 수 없어! 으하하하!!!" 영혼을 조종하는 것은 마계에서는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이 그렇 게 많은 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영혼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인간 은 100년도 살지 못하는 짧은 생명을 지니고 있지만 마치 모든 힘을 한꺼번에 불사르 는 것처럼 그사이에 무수한 발전과 일을 한다. 100년 정도는 할 일이 없을 때 실컷 자 고 일어나면 지나가는 마족과는 다른 존재였다. 그 타오르는 정열만은 다른 종족들에 게 없는 인간만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정열을 삐뚤어진 쪽으로 쏟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지금 우리들 앞에서 광소를 터트리고 있는 여자 또한 그런 부류에 속하는 대표적인 사 람이었다. 웃을 때마다 몇 년은 빗지 않은 것처럼 제멋대로 흐트러진 머리가 공중에서 나부끼는 모습과 엉망인 얼굴의 한가운데 자리잡은 두 눈동자가 묘한 광채를 발하고 모습을 보면 그녀는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그나마도 정상과는 거리가 멀던 여자 가 육체가 소멸당하고 근 200년간 봉인당해있었으니 미칠 만도 했다. 미친 인간은 되도록 상종을 하지 말라는 어른들의 말씀이 있다. 미친 인간은 보통 사 람보다 강한 법이다. 사람은 전투 중에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다칠 것을 염려해 조금씩은 몸을 사리게 마련이지만 미친 사람은 눈에 뵈는 것이 없으니 무작정 달려든 다. .그리고 미친 인간은 무서운 법이다. 정상인과는 달리 무슨 행동을 할지 전혀 예 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들의 말씀은 참으로 타당한 이야기였고, 그런 것 이 아니더라도 미친 인간을 상대하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재수없게 반쯤은 돈 저런 여자가 걸리다니. 저런 인간일수록 무섭도록 질긴데 말이야. 하지만 안 싸울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왕 싸울 것이라면 상대가 빈틈을 보일 때 속 전속결로 해치워버리는 것이 제일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인지 에릭이 가장 먼저 검을 빼들고 요이체로스를 향해 달려들 었다. 요이체로스가 광소를 터뜨리면서 자만하고 있는 틈을 노린 것이다. 마치 얼음판 을 타는 것처럼 미끄러지듯이 요이체로스의 곁까지 접근한 에릭은 딱딱해 보이는 전갈 의 몸보다는 인간의 몸을 공격했다. 전갈의 입에서 뿜어 나오는 독무와 연약한 인간의 몸 정도는 갈가리 찢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살벌한 집게를 경계한 에릭은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요이체로스는 몸체가 큰데다 에릭이 이렇게 빠르게 공격해올지는 몰랐던 지 빠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에릭은 공중으로 뛰어오르면서 요이 체로스의 머리를 양단할 기세로 검을 내리그었다. 그러나 요이체로스는 침착하게 에릭을 향해 거대한 집게를 휘둘렀다. 이대로라면 에릭 이 요이체로스의 머리를 박살내는 것보다는 집게가 에릭을 후려치는 것이 더 빠른 것 같았다. 게다가 지금 에릭은 공중에 떠있는 상태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었지만 미운 정도 정이라고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에릭이 실력적으로 가장 우위인데 저 놈이 저렇게 맥없이 당해버리면 다른 인간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러나 쓸데없는 걱정이었는지 에릭은 공중에서 거의 신기에 가까운 동작으로 몸을 틀어 충돌하기 전에 집게를 발로 차서 그 반동으로 땅으로 내려섰다. 요이체로스는 에릭이 일어서기 전에 완전히 없애버리려는지 거대한 꼬리를 위협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에릭을 꿰뚫을 기세로 움직이던 꼬리는 그 진로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사방에서 검을 휘두르며 공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동안 같 이 여행하면서 서로의 검술 실력을 어느 정도 파악한 일행들은 합공을 가하기 시작했 다. 에릭과 세린은 각각 우측과 측면에서 공격해갔다. 에릭은 절제된 움직임으로 급소만 을 노렸었고, 세린은 빠른 스피드로 순식간에 이곳저곳을 휩쓸고 다녔다. 두 사람 모 두 어느 쪽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실력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공격해 오니 요이체로스로서는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요이체로스은 조금 전에 실드를 만들었던 영혼을 쏘아보내자 영혼들은 과연 과 거에는 사람이었는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면서 두 사람을 물 어뜯으려고 달려들었다. 그 모습은 이미 사람의 형상이라기보다는 본능에 따르는 괴물 에 가까웠다. 하지만 고통은 느끼는지 에릭과 세린의 검이 가르고 지나갈 때마다 기괴 한 소리를 내지르며 요이체로스의 몸 속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요이체로스가 명령을 하면 어쩔 수 없이 다시 달려들었다. 두 사람이 영혼을 상대하고있는 사이 가스톤과 죠안, 사라는 정면에서 고분분투하고 있었다. 독무와 날카로운 집게를 피하면서 움직이기는 힘들었지만 그런 대로 집게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있었다. 가스톤과 죠안은 피하는 동작만은 가히 일품이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사라는 이런 상대는 처음인지 상당히 힘들어하고 있었다. 엔젤과 페르도 요이체르스의 빈틈을 노려 잘 공격하고 있었다. 엔젤의 실력은 익히 알 고 있는 바였지만 페르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뛰어난 실력이었다. 비록 다른 사람들처 럼 절도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쌍검을 동시에 사용하는 예측할 수 없는 검세였다. 방어 보다는 공격에 치중하고 검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니 많은 실전을 통해 검술을 익혔다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었다. 검은 전갈의 딱딱한 몸체에 막혀 큰 효과 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고, 독무로 인해 활동이 크게 제약되고 있었다. 게다가 요이 체로스가 조정하는 영혼들의 기세가 너무 강해 에릭과 세린이 점점 밀리고 있었다. 검사들이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뒤에서 도와주는 후방 역시 요이체로스를 공격하는데 상당히 애를 먹고 있었다. 겐지오 아저씨가 던지는 단검과-겐지오 아저씨는 외모와 어 울리지 않게 단검을 무기로 사용하고 있었다-리카가 쏘아보내는 화살도 전갈의 갑주와 집게에 막혀 되튕겨져 나오고 있었다. 간간이 인간의 형체까지 도달한 것들도 요이체 로스의 실드에 막혀버렸다. 그렇다고 마법을 날리기에는 요이체로스와 우리 편의 사이 가 너무 가까웠다. 자칫하면 우리편까지 마법에 휘말릴지 몰라 로즈와 루시는 발만 동 동 구르고 있었다. "이거 위험한 상황 아니야?" "마리엔, 한가하게 상황 중계나 하지말고 너도 좀 도와." 한가하게,라니. 이래봬도 걱정을 담아서 말한 거였는데 그렇게 말하면 섭하지. 그러나 로즈에게 그런 말을 하기에는 상황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었다. 그동안 전투만 나면 조용히 구경만 하고 있던 나까지 끌어들이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특히 직 접 앞에서 싸우고 있는 검사들은 치명상은 아니어도 여기저기에 작은 상처를 입고 있 었다. 전갈의 집게와 꼬리뿐만 아니라 요이체로스가 간간이 사용하는 마법과 영혼들 때문에 여러 명을 상대하는 것과 같았다. 내가 주문을 외울 태세를 보이자 히크리트 신관이 움찔했지만 로즈가 먼저 그녀를 제 지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히크리트 신관. 세상 천지에 흑마법만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는 이 세상에 없어요. 백마법이나 흑마법이나 근본은 비슷하니까 흑마법사라도 백마법은 어 느 정도 사용할 수 있어요. 그렇지, 마리엔?" "그렇지 뭐." 로즈의 노란 눈동자는 그동안 싸울 수 있었으면서도 논 것을 봐줄 테니 열심히 도우라 는 무언의 압력이 담겨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도우려고 했는데. 동료들이 고전을 하 고 있는데도 가만히 있었다는 사실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특 히 히크리트 신관의 눈초리는 한겨울철에 내리는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쳇, 내가 누구 때문에 그랬는데. 나는 왠지 모를 억울함을 느끼면서 주문을 중얼거렸다. "세상을 이루는 근원 중의 하나인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하얀 숨결이여, 지금 얽매여 있는 굴레의 속박을 끊고 흐르는 피조차 얼려버리는 얼음의 화살로 내 앞의 적을 섬멸 하라. 아이스 에로우(Ice arrow)!" 시동어를 외치자 냉기가 흘러나오는 얼음의 화살들이 공기를 가르며 빠른 속도로 요이 체로스를 향해 날아갔다.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주변의 사람들을 내려다보 던 요이체로스는 얼음의 화살이 내는 파공성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향 해 날아오는 마법을 보면서 여유로운 얼굴로 손짓을 했다. 그러자 몇몇의 영혼들이 요 이체로스의 둘레에 모여 흐릿한 막을 형성했다. 마법이 막에 가로막혀 소멸되자 요이 체로스는 막을 거두어들이면서 말했다. "겨우 이정도밖에 되지 않으면서 잘도 그따위 말을 내뱉었......" 그러나 요이체로스는 말을 끝까지 마칠 수 없었다. 내가 첫 마법을 쏘아보낸 후에 다 시 한번 만들어놨던 아이스 에로우를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날려보낸 탓이었다. 눈부 신 속도로 요이체로스의 얼굴로 향해 날아가는 마법을 보는 요이체로스는 낭패한 얼굴 이 되었다. 상대가 말하는 중에 공격을 하면 비겁하지만 상대가 악인일 때는 비겁한 방법을 사용해도 된다는 인간들 사이의 이상한 생각 때문에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선 과 악을 판단하기가 어려운데도 악인에게는 비겁한 방법을 사용해도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 자체가 우습지만 말이다. 하긴 이런 것이 없다고 해서 내가 사람이 말하는 와중에 공격하지 않으냐 하면 그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불의의 기습은 빛을 발하지 못했다. 실드를 형성해낼 시간이 없 자 몇 개의 영혼들이 몸을 날려 마법을 막았던 것이다. 그러나 마법과 영혼들이 부딪 치면서 일어난 폭발의 여파로 생긴 날카로운 바람과 얼음 조각들이 요이체로스의 몸으 로 튀었다. 전갈의 몸은 딱딱한 갑주로 인해 아무런 피해가 없었지만 인간의 형체는 얼음조각에 긁혀 여기저기 생채기가 생겼다. "이......이 계집애! 갈가리 찢어서 전갈의 먹이로 줘버리겠어!" 요이체로스는 상처의 아픔보다는 나 같은 새파란 애송이에게 당했다는 생각에 더욱 화 를 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요이체로스는 상처를 입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눈앞에 있으면 찢어 먹을 듯한 사나운 눈초리였지만 나도 지지 않고 마주 노려보아 주었다. 그 정도 눈빛이야 열 받은 우리 엄마의 눈빛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내가 겁을 먹고 떨기를 바랬던 요이체로스는 겁을 먹기는커녕 '이 잡것이 누구를 노려 보고 있는 거야? 그렇게 까불다 죽도록 맞는 수가 있다' 라는 얼굴로 째려보자 이를 빠드득 갈면서 외쳤다. "당장 저 년을 이리로 끌고 와!" 요이체로스의 말에 에릭과 세린을 상대하고 있던 영혼들이 절반 정도 뒤에 서있던 내 쪽으로 향해 날아왔다. 괴성을 지르며 날카로운 이빨이 다 드러나도록 입을 쩌억 벌리 며 달려드는 영혼들의 모습은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아귀의 모습과 흡사했다. 우리들 이 그 모습에 흠칫하자 이를 눈치챈 영혼들이 더욱 사나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우리들 사이로 성스러운 흰 빛이 폭발하듯이 퍼져 나왔다. 그 빛의 근원지는 히크리트 신관이 들고 있는 메이스로 흰 빛은 우리를 완전히 감쌌다. 전에 그녀가 신성력을 사용했을 때처럼 불쾌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가만히 있었다. 그 빛이 향한 것은 내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참을 수 있 었던 것이다. 조용한 폭발을 일으키며 일어난 빛은 우리뿐만 아니라 가장 앞쪽에서 달려들던 영혼들 까지 감쌌다. 그러자 영혼들은 기괴한 비명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얼마 후에는 괴물 같은 모습이 점차 인간의 형태로 돌아가더니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빛에 가려 영혼들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왠지 평화로운 미소를 지으며 사라졌을 것이라는 느 낌이 들었다. 그러나 빛에 직접 닿지 않은 영혼들은 그 빛이 자신들에게 치명적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지 두려운 비명소리를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쩐지 기분 나쁜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더니 신관이었나?!" "넌 눈을 장식으로 뒀냐? 이 신관복이 보이지도 않는단 말이야? 그런 있으나 마나한 눈은 그냥 떼어버리지 그러냐!" 나는 신성력을 사용해서 약간 지친 히크리트 신관을 대신해서 요이체로스의 말을 받아 쳤다. 고지식한 히크리트 신관보다는 내 쪽이 이런 쪽에는 강하지 않겠는가. 사실대로 말하자면 요이체로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자연스럽게 삐딱한 말이 나간 것이지만 이 유야 어쨌든 내 말에 요이체로스는 몸이 전갈과 연결되어 있지만 않다면 길길이 날뛸 것 같은 모습으로 씩씩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히크리트 신관 때문에 무작정 달려들지는 못하고 있었다. 입술을 질겅질겅 씹 으며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던 요이체로스는 히크리트 신관이 다시 한번 주문을 외울 기미가 보이자 칫소리를 내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도망쳤던 영혼들이 다시 한번 우리 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수가 조금 전보다 불어난 것이 히크리트 신관을 잔뜩 경계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조금 전에는 미리 신성 주문을 외워두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대응할 수 있었지 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이를 알고 있는 요이체로스는 히크리트 신관이 주문을 외 울 틈도 주기 않기 위해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영혼들이 가까이 달려들자 로즈와 루 시는 바삐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고, 겐지오 아저씨와 리카도 목표를 요이체로스에서 영혼들로 바꾸었다. 그들의 단검과 화살은 매번 정확하게 영혼들에게 적중했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았다. 앞에서 싸우던 사람들도 갑자기 공격이 우리 쪽으로 치중되자 당황하며 되돌아오려 했 지만 번번이 요이체로스에게 막혔다. 우리를 도와주려 하면 자신이 당할 판이니 가까 이 오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카르르. 크아아. 키에엑. 영혼들의 입 속에서는 기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사이로 보이는 날카로운 이빨들은 맹수의 그 것보다 더욱 날카로웠고, 숲에서 나는 빛에 인해 더욱 번뜩였다. 저기에 목을 물리면 바로 목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그들의 목표는 히크리트 신관이었 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둘러쌌다. "실프!" 영혼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코앞까지 다가오자 바로 옆에서 가녀린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와 함께 바람의 정령인 실프들이 10여 마리 나타났다. 그리고 실프들은 우리의 주위를 맴돌며 실드를 쳤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실프를 불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시이라였다. 그동안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녀는 정령술 사인 모양이었다. 정령술사는 보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그녀의 존재는 상당히 뜻밖이었 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감탄할 틈이 없었다. 영혼들은 실프가 만들어낸 막에 계속 몸을 부딪쳤고, 그럴 때마다 실드는 불안하게 흔 들렸던 것이다. 아마 이 상태라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하지요?" 리카가 여전히 실드를 향해 달려드는 영혼들을 경계하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누구도 이 상황을 확실히 타개할 만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 히 있을 수도 없었기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방법은 두 개 있어요." 내가 입을 열자 모두의 시선은 나에게 쏠렸다. 그들의 시선을 확인한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첫째는 이대로 이 안에 있는 거예요. 그리고 루시와 로즈, 내가 계속 방어막을 치고, 실드가 하나씩 깨질 때마다 다시 방어막을 치는 거예요. 요정들이 밤에만 나타났던 것을 보면 아마 요이체로스도 낮에는 활동하기 힘든가봐요. 그 때까지 버티면 뭔가 방 법이 나오겠죠. 그러나 이렇게 되면 저 밖에 있는 사람들의 목숨은 보장하기 힘들죠. 둘째는 우선 히크리트 신관과 루시, 로즈, 내가 주문을 외웁니다. 그리고 주문을 모두 외우면 실프를 걷어낸 후에 싸우는 거예요. 하지만 싸울 힘이 없는 사람들은 나오지 말고 실드 안에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방법이 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때요?" "위험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우리만 살자고 저들을 내팽개칠 수는 없잖아." "사람이 한번 죽지 두 번 죽나." 결국 나가서 싸우기로 결론을 내린 우리는 각자 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기 시작 했다. 히크리트 신관과 로즈, 루시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고, 겐지오 아저씨는 단검 을 여러 개 꺼내 손에 들었다. 리카도 여러 개의 화살을 한꺼번에 활에 재우기 시작했 다. 나도 주문을 외우는 척하면서 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모두 준비됐어요?" 시아라의 질문에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실드를 풉니다. 조심하세요!" 시이라의 외침과 동시에 실프가 만들어내고 있던 실드가 흩어졌다. 때를 노리고 있던 영혼들은 한꺼번에 달려들었고, 중앙에 있던 히크리트 신관의 굳은 목소리가 터져나왔 다. "정화!" 다시 한번 히크리트 신관의 손에 들고 있던 메이스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오며 주변 을 환하게 밝혔다. 다시 한번 몇몇 영혼들이 사라졌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히크리트 신관이 사용한 신성 마법이 사라지자 세 개의 마법이 동시에 주변을 휩쓸었 다. 거대한 불꽃이 드래곤의 브레스처럼 뿜어져나갔고, 차가운 얼음의 바람이 주변을 휩쓸었고, 여러 개의 전격의 구가 영혼들을 향해 쏘아졌다. 한차례 마법이 휩쓸자 로즈와 루시는 각자가 부를 수 있는 최대한의 정령을 불러낸 후 에 다시 실프가 만들어낸 실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주위를 나와 겐지오 아저 씨, 리카가 감쌌다. 내가 들어가지 않고 남을 줄은 몰랐는지 모두 놀란 기색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구경만 할 수는 없잖아. 오랜만에 놀아보자구. 조금 전의 생각을 취소하겠다. 오랜만에 놀아보기에는 이 인간의 몸은 너무 약했다. 그동안은 세린들이 알아서 다 해결했었기 때문에 자각을 못했던 사실이 새삼스럽게 떠 올랐다. 이 몸은 내 몸이 아니었지...이런, 뭐같은 일이 있나! 인간은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이간은 살살 만지기만 하고 가급적 손대지 말라는 말이 진짜일 줄 은 몰랐다. 그냥 약하다는 것만 알려주려고 약간의 과장을 거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는 말이 정말일 줄이야. 그런데 지금 내 몸이 느끼는 체력의 한계로 보아 이건 '귀엽 다 귀엽다' 하고 몇 대 쥐어박아도 비실비실거릴 것 같았다. 그나마 리카와 마법사들이 지쳐나가 떨어진 지 한참이 지난 후에도 버티고 있을 수 있 는 이유는 오직 하나, 오기뿐이었다. 내가 인간보다 못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먼저 지쳐서 헥헥거리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겠어! 몰려드는 괴이한 영혼들을 가르면서 스스로 다짐했다. 그러나 곱게 자란 공주의 몸은 내 의지를 배신해도 한참을 배신했다. 게다가 요이체로 스의 지시로 우리를 공격하던 영혼들은 히크리트 신관이 실드 안에서 나올 기미가 보 이지 않자- 이 여자도 정화 몇 번 쓰고 나가떨어졌다. 역시 인간들은 너무 허약하다- 목표를 만만해 보이는 나로 바꾸고 집요하게 달려들고 있었다. 진짜 내 몸이라면 요이 체로스인지 요리체인지 뭔지를 벌써 구워다가 해부하고 있을 시간이건만. 그나마 내가 마법을 난사하는 데다 무기가 워낙 좋다보니 지금껏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이런 망할 것들에게 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 것도 히크리트 신관이 보고 있는 앞에서. 벌써 숨이 차오르는 내가 한심스러웠지만 한가지 위안이 되 는 것은 지금껏 잘 싸워주고 있는 나를 보는 일행들의 시선이 예전의 짐짝보는 듯한 시선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것에 있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을 것이라고 예상되 어지는 내가 아주, 그 것도 아주 많이 잘 싸우자 감탄어린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나 를 악의 화신쯤으로 치부하던 히크리트 신관의 눈매가 조금이지만 부드러워졌다. 이제야 이 몸의 위대함을 조금 알아보는군, 실드 안에 있는 히크리트 신관의 표정을 힐끗 쳐다본 나는 흐뭇한 마음에 약간이나마 힘이 났다. 그리고 더욱 멋진 모습을 보 여주고자 창을 쥔 손에 힘을 주고 횡으로 그었다. 그러자 잔상을 남기며 허공을 가른 창은 앞에서 얼쩡거리던 영혼들의 한꺼번에 흩어버렸다. 하지만 물질화되지 않은 영혼 이라 크게 충격을 받은 몇 영혼들을 제외하고는 마치 안개를 휘저어놓은 것처럼 흩어 졌다 다시 모여들었다. 영혼들의 힘이 점점 감소되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치열한 싸움을 벌이면서도 가끔씩 뒤에서 활개치고 있는 마리엔을 보는 사람들 의 마음은 감탄 이외의 감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분명히 힘들텐데도 저 가녀린 팔로 힘든 내색하지 않고 표정까지 전혀 변하지 않는 마리엔을 보면 이런 생각이 먼저 들 수밖에 없었다. '독한 것.' 그들은 마리엔의 모습에 치를 떨면서도 저렇게 가녀린(?) 소녀까지 버티고 있는데 우 리가 먼저 쓰러질 수는 없다는 오기로 끝끝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 들을 보는 요이체로스도 치가 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이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강한 것은 알겠지만 벌써 1시간이 넘도록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만 들어내고 있는 것이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영혼들을 베고 찌르고 발로 차고 있는 마리 엔이라는 것을 그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영혼들은 쉽게 사라지거나 하지는 않지만 마리엔의 맹공에 점차 힘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요이체로스는 느낄 수 있었 다. 하지만 요이체로스는 이 독한 것들이 점차 힘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벌써 골칫거리였던 신관과 마법사들은 나가떨어지고 후방에 남은 인원은 여전히 팔팔한 검은 머리 꼬마 여자아이와 배불뚝이 남자 한 명뿐이었다. 영혼들이 마 리엔과 겐지오를 상대하면서 상대적으로 에릭과 세린에게 여유가 생겼지만 그 때마다 요이체로스가 마법을 효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기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가장 먼저 행동이 둔해지기 시작한 것은 사라였다. 실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에릭과 세린처럼 로얄 기사단에서 1,2 위를 달리는 실력은 아니었고, 엔젤과 페르처럼 이런 마물을 상대로 한 실전경험이 많 은 편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가스톤과 죠안처럼 목숨을 담보로 한 죽음의 대련을 여러 번 해본 적도 없었다. 비록 자신이 여자취급을 받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 하기는 했지 만 무의식중에 '여자니까 이정도면 대단한 거야' 라고 생각하고 스스로의 훈련에 만족 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런 체력적인 문제와 함께 무엇보다 전갈의 입에서 나온 독무가 호흡을 통해 체내로 스며들면서 피로감이 더욱 축적되고 있었다. 사라는 자꾸 쳐지려는 팔에 힘을 주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연습을 하고 대련을 했는데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자신이 못내 원망스럽고 한심했다. 그러나 사라는 자신이 알게 모르게 요이체로스가 내뿜는 독에 중독됐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 고 있었다. 글로리 라이언에서는 가스톤과 그렇게 심각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 았는데 지금 보니 가스톤 뿐만 아니라 죠안도 자신과 비교할 수 있는 실력이 아니었다 . 무슨 수로 저렇게 빨리 요이체로스의 공격을 예측하고 빠르게 대응하는지 부럽기만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의 팔은 착실하게 공격을 하고 있었다. 이 것은 사라가 의 식했다기보다는 그동안 수백번의 훈련을 통해 형성된 하나의 습관과 같은 것이었다. 뒤쪽에 있는 수풀까지 흔들릴 정도로 강한 바람을 일으키며 쳐오는 집게를 허리를 숙 여 피한 사라는 바로 앞에 전갈의 검은 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전갈이 어찌나 큰지 눈이 거의 사라의 키만 했고, 눈동자가 없이 온통 검은 색이라 기이한 느낌마저 들었 다. 그러나 검이 전갈의 왼쪽 눈을 찌르자 아무런 막힘없이 검자루까지 들어갔다. 끼에엑. 전갈은 눈을 찔린 아픔 때문인지 입에서 독무를 더욱 진하게 품어내면서 몸부림쳤다. 요이체로스는 전갈과 몸이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전갈의 고통을 느끼지는 않는지 전 갈의 제어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전갈은 눈에서 하얀 점액을 흘린 채로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재빨리 눈을 찌르고 뒤로 물러서서 그 모습을 보던 사라는 뒤에서 들 려오는 소리에 전투 도중 처음으로 한눈을 팔았다. 뒤쪽에 있던 마리엔과 겐지오는 요이체로스가 영혼들을 제어할 정신이 없는 틈을 타 서 이제는 영혼이라고도 불리기 뭐한 것들을 열심히 공격하고 있었다. 특히 마리엔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마리엔의 손에 들린 창이 한번 휘둘릴 때마다 영혼들은 고통스러 운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가기 일쑤였다. 요정들의 빛의 가루로 인해 숲 속에서 나는 빛들은 마리엔과 그녀의 손에 들린 창을 환상적인 빛으로 비춰내고 있었다. 마리엔의 검은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휘날리고 있었지만 차가운 빛을 발하는 푸른 눈동자는 지 금까지와는 다른 매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항상 밝고 부김살이 없다고 생각했던 공주 님은 지금 이 순간 심판을 내리는 사신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 마리엔을 보는 사라는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상의 고귀한 존재를 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가장 약하다고 생각했던 마리엔이 지 금은 자신보다 더 일행에서 도움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자신이 해왔던 것이 왠지 허무해져버렸다. 넋을 놓고 현란하게 움직이는 마리엔의 창을 보던 사라는 우연히 마리엔과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지금까지와는 달리 마리엔의 얼굴에 다급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미처 마리엔의 입이 열리기 전에 먼저 그녀의 귀청을 때린 목소리가 있었다. "사라경! 위험합니다!" 가스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고개를 돌린 사라는 자신을 향해 무서운 속 도로 날아오는 전갈의 꼬리를 보았다. 전갈은 자신에게 이런 생소한 고통을 준 이가 눈앞의 녹색 머리의 여자라는 것을 알고 꼬리를 휘둘렀다. 사라는 피하려고 했지만 어 떻게 된 일인지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라는 생각에 사라는 눈을 감고 말았다. 그러나 기다리던 아픔이 느껴지는 대신에 누군 가 자신을 안고 옆으로 몸을 날리는 것이 느껴졌다. 당연히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 상했던 사라는 아무런 통증이 없자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가스톤경." "사라경, 괜찮으십니까? 다친 곳은 없으시고요?" "아...네. 괜찮아요. 가스톤 경 덕분에......" 그러나 사라는 말을 하다 말고 이상한 느낌이 들어 가스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평범 한 중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의 옆구리에는 낯선 상처가 나있었다. 날카로운 것이 훑고 지나간 것 같은 상처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피는 땅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가스톤은 사라가 놀란 얼굴로 자신의 상처를 보고 있자 윗입술이 말려 올라가는 특유의 웃음을 지으면서 넉살좋게 말했다. "별 거 아닙니다. 그냥 조금 긁혔지 뭡니까." 하지만 그 상처가 가스톤의 말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것은 말하는 가스톤도, 사라 도, 주변에서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는 일행들도 알고 있었다. 옆구리가 너덜 너덜해졌는데 멀쩡할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전갈의 꼬리에 독이 묻어있었는지 상 처가 마치 불에 데인 것처럼 화끈거리면서도 싸한 느낌이었다. 그나마 평형을 유지하던 힘의 균형은 가스톤의 부상으로 깨져 버렸다. 사라가 어찌된 영문인지 넋을 빼고 나를 쳐다볼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아무리 내가 잘 싸우 기로서니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한 눈을 팔면 어쩌자는 거야! 만약 가스톤이 몸을 날 려 구하지 않았다면 사라는 저 무지막지한 전갈의 꼬리에 꿰여 예전에 먹어본 적이 있 는 꼬치 비슷한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눈을 찌른 것까지는 정말 좋았는데 말이다. 그나마 바로 옆에 있던 가스톤이 몸을 날려 구했으니 아무런 상처도 없이 끝날수 있었 던 것이다. 하지만 가스톤이 대신 부상을 입어버렸다. 가스톤이 사라를 구한 것은 의 외였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큰 일 날 판이었다. 요이체로스가 전갈을 진정시키는 사이 주위에서 싸우던 사람들이 가스톤을 부축하고 사라와 함께 재빨리 우리쪽으로 다가왔 다. 시이라는 재빨리 실드를 거두어들이고 히크리트 신관이 가스톤의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생각보다 상처가 심각했다. 게다가 상처 부위가 시꺼멓게 변한 것이 전갈의 꼬리에 독이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괘, 괜찮을까요?" 사라는 자신 때문에 가스톤이 다쳤다는 생각에 녹색의 눈동자에 눈물을 한가득 담고 울먹거렸다. 저 사라가 울먹이는 모습을 보이다니.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라의 모습에 뭐라고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라의 반응에 신경을 쓸 수 있을 만큼 가 스톤의 상처가 가벼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단 상처는 신성력이나 마법으로 치료하면 되겠지만 독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 그럼 어떻게 해요?" 사라는 히크리트 신관의 말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보니 영락없는 여자였다. 사라가 계속 울먹이자 가스톤은 무진장 아플 텐데도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괜찮습니다. 별로 아프지 않아요." "가스톤, 사라 앞이라고 폼 잡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겠는데 그러다 진짜 죽을지도 몰 라." "마리엔님!!!" 심각한 분위기를 바꾸고자 농담 한마디 한 것이었는데 사라가 눈물이 그득 담긴 눈으 로 째려보면서 소리를 빽 질렀다. 엉겁결에 '-님'자를 붙여 불렀지만 지금은 그 것보 다 사라가 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 중요했다. 여자는 사랑 앞에서 강해진다고 했던가. 그동안 말을 놓긴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선을 두고 있던 사라가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는 것은 나에게 작지 않은 충격이었다. 흔히들 이런 상태를 바로 눈에 뵈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겠지. 눈을 치켜 뜨고 나를 보는 사라의 모습에 다른 사람 들도 모두 놀란 눈치였다. 제길,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 잘못이야 한눈 판 네 잘못 이잖아! 하지만 사라의 갑작스런 변화와 사생결단이라도 낼 것 같은 사나운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랑이 뭔데 한 사람을 저렇게 변화시킬 수도 있단 말인가. 내가 도와준 은혜를 잊고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마리엔이 일부러 그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사라양도 그만해요." "그래요. 마리엔도 걱정이 되니까 그런 거겠지요." 세린과 에릭이 나서서 말리자 사라는 여전히 화가 난 얼굴로 가스톤에게 고개를 돌렸 다. 히크리트 신관은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신성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힘에 부치는지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그녀의 손에서 나오는 작 은 빛은 가스톤의 상처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지만 상처가 심해서 아물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하죠?" 루시가 심각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이미 요이체로스는 전갈을 거의 진정시키고 있었 다. 그리고 전력을 정비하는 것인지 영혼들이 키히히, 웃어대면서 요이체로스의 주변 을 돌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틀림없이 공격을 해올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될까? 저 무식하게 힘만 넘치는 마녀를 제외하고 모두 체력이 떨어진 상태였다. 마법사들의 마법은 저 괴상한 영혼들 때문에 먹히지도 않았고, 마법 주문을 외우는 사 이 당할 위험이 컸다. 결국 남은 방법은 그 것뿐인가? 정말 이런 방법은 사용하고 싶 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 수를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동료들 의 굳은 얼굴을 둘러보다 이미 공격 태세에 들어간 요이체로스를 보고 마음을 굳혔다. 어쩔 수 없는 상황. "그럼 이 방법 밖에 없겠군요." "무슨 방법 말이야?"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거야?" "어서 말해봐." "역시 마리엔이라면 뭔가 해결책을 가지고 있을 줄 알았어." 동료들의 시선에는 하나같이 이 상황을 타개할 획기적인 방안이 내게 나오길 바라는 기대로 가득 차있었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두......튀어!" 그 말과 동시에 나는 근처에 있는 루시와 로즈를 끌고 재빨리 뒤로 방향을 틀어 냅다 뛰었다. 로즈와 루시는 지친 데다가 마법사라 걸음이 빠르지 않을 것 같아 직접 한 팔 씩 잡고 뛰었다. 비겁하다고 하지마라. 싸움이란 물러날 때와 나설 때를 잘 알아야 하 는 법이다. 이길 가능성도 없는데 계속 싸워봤자 죽기 밖에 더 하겠는가. 설령 요행이 이긴다 하더라도 피해가 너무 클 것이다. 게다가 가스톤까지 다친 마당에 싸운답시고 알짱거리다가 가스톤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느니 후일을 다짐 하며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는 것이 제일이었다. 잠시 그런 나를 어이없이 보던 동료들도 곧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가스톤은 죠안이 업고 뛰어왔고, 에릭과 페르, 엔젤이 걸음이 느린 시이라와 리카, 히크리트 신관을 옆에 끼고 뛰어왔다. 요이체로스는 우리가 죽음을 각오하고 덤빌 줄 알았던지 갑자기 냅다 도망가버리자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쫓아오기 시 작했다. 그러나 죽어라 도망가는 우리를 쫓아오기에는 전갈의 몸은 너무 크고 무거웠 다. 그리고 우리가 도망치기 시작하자 위쪽에서 파닥거리며 날아다니던 요정들이 다시 아 래로 내려와 빛의 가루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숲의 입구로 향해 달리던 나는 붉은 색 요정이 앞쪽에서 보이자 루시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재빨리 그 요정을 낚아챘다. 아 무래도 우리보다는 이 요정이 요이체로스에 대해 많이 알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망칠 때 치더라도 할 건 하고 도망쳐야하지 않겠는가. 요정을 한 손에 쥐고 숲의 입구에 도달한 나는 히크리트 신관이 뭐라고 하든 말든 숲 에 결계를 쳐버렸다. 결계를 풀기 전까지는 절대 안에 있는 사람은 밖으로 나오지 못 할 것이다. 촌장집에 도착한 우리는 가스톤의 상처부터 살폈다. 상처는 마치 칼로 베인 것처럼 절 단면이 깨끗했다. 다행히 내장에는 손상이 가지 않았지만 독 때문에 식은땀을 비 오듯 이 흘리고 있었다. 땀을 너무 많이 흘리면 체온을 잃기 마련이다. 가스톤도 땀이 식으 면서 추위가 느껴지는지 몸을 자꾸 떨고 있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사라는 평소의 당찬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끊임없이 울먹이고 있었다. 사라의 눈에 고 인 눈물은 녹색의 눈동자 때문에 연두색으로 보였다. 투명한 물에 물감을 풀어놓은 것 처럼 연두색을 띠는 눈물은 조금만 건드리면 주르륵 흘러내릴 것처럼 눈에 가득 차있 었다. 사라는 옆에 있는 누군가가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상황에 처해 본적이 없어서 더욱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가스톤은 호흡이 거칠어진 와중에도 입을 열어 계속 사라의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해주고 있었다. 만약 가스톤이 조금만 힘든 기색을 했어도 사라는 펑펑 눈물을 쏟 고 말았을 것이다. 이건 도대체 누가 다쳤는지 알 수가 없었다. 히크리트 신관과 로즈는 기진맥진한 상태에서도 억지로 기운을 짜내 가스톤을 치료하 기 시작했다. 아직 4서클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나는 그저 히크리트 신관과 로즈의 행 동을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무리한 보람이 있었는지 끊임없이 흘 러내려 하얀 침대 시트를 붉은 색으로 물들이던 피가 서서히 멎기 시작했다. 출혈이 멎자 나를 비롯한 일행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다행이군요." "이거 십년감수했군." "할아범이 십년 감수했으면 땅 밑에 묻어있어야 할 꺼야. 하지만 큰 일이 없어서 다행 이군." 하지만 가스톤의 옆구리는 여전히 죽은 살처럼 까맸다. 과다 출혈로 사망하는 일은 없 어졌지만 전갈의 꼬리에 묻어있던 독이 아직 해독되지 않았던 것이다. 히크리트 신관 이 해독의 주문을 사용했기 때문에 당연히 해독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우리는 뒤늦게서 야 그 사실을 눈치챘다. "독이 남아있는 모양인데." "분명히 히크리트 신관님이 해독의 주문을 외웠잖아요. 고위 신관의 신성력이라면 어 지간한 독은 다 해독될텐데. 이상하네요." "어디 제가 한번 보도록 하지요." 우리들이 불안한 얼굴로 웅성거리자 루시가 나섰다. 루시는 굉장히 박식하니 어쩌면 해독이 되지 않는 이유를 알지도 모른다. 그런 희망을 가지고 우리들은 루시가 가스톤 의 상처를 살피는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가 하는 데로 지켜보기만 했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상처를 이리저리 살펴본 후에 손가락으로 꾸욱 찌르면서 가스톤 에게 물었다. "아픕니까?" "그,그렇지는 않은데 좀 춥군요." 가스톤은 새파래진 입술을 부들부들 떨면서 힘겹게 대답했다. 가스톤의 말에 루시는 뭔가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아이시클이라는 독인 것 같습니다. 보기 힘든 독 중에 하나지요. 그런데 이 게 어째서 전갈의 꼬리에 묻어있는 건지 모르겠군요." "아이시클? 그게 뭔데요?" 내 질문에 루시는 가스톤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 환자가 바로 옆에 있는데 이 독은 이 런 효과가 있고, 중독되면 얼마만에 죽는 거랍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스톤은 눈치빠르게 그 낌새를 알아차리고 어렵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하하. 괜찮습니다. 저도 무슨 독인지 알아야 나중에 죽어도 무슨 할 말이 있지 않겠습니까? 세상에 자기가 뭣 때문에 죽었는지도 모르면 나중에 쪽팔려서 제대로 죽 지도 못할 겁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말해보십시오." "그러시다면...아이시클은 중독되면 중독된 자는 고통을 거의 느끼지 못합니다. 처음 에는 극한의 추위 때문에, 얼마 후에는 고열로 의식을 잃기 때문이지요. 독이 몸으로 퍼지면 퍼질수록 검은 부위가 확산되었다가 한달 후에는 사망하게 됩니다. 고통은 느 끼지 않지만 그동안 느끼는 추위가 정말 견디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런 독이라면 나도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어." "페르말대로 저도 들은 기억이 나요. 아이시클에 중독되면 십중팔구는 죽는다고 하던 데. 가스톤 아저씨는 괜찮겠지요?" 리카의 걱정스러운 말에 우리들은 순간 굳어버렸다. 특히 사라와 죠안의 얼굴은 흑빛 이 되어버렸다. 십중팔구면 거의 죽는다는 소리지 않은가. 보기 힘든 독이니 해독 방 법도 어려운 모양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놀라서 가스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식은 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입술을 파들파들 떠는 모습이 불안감을 더욱 가중시켰다. 내 시 선을 느낀 가스톤이 살짝 고개를 돌리더니 씨익 웃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바보 같은 놈. 자기가 죽게 생겼는데 지금 웃음이 나오냐! 옛 여자를 잊지 못하고 있 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정말 바보다. 전갈의 공격 하나 제대로 못 피한단 말이야? 그동 안 훈련을 제대로 하긴 한 거냐? 투덜거리면서도 저 깊숙한 곳에서 말로 표현하기 힘 든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가슴 속에 누가 무거운 납덩어리를 얹어놓은 듯한 그 런 기분이었다. 자기 처지도 모르고 꼴에 나를 위로한답시고 억지로 웃는 가스톤이 보기 싫어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때마침 루시가 입을 열어서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린 꼴이 되어버렸지 만 말이다. "해독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쉬우면서도 어렵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루시 를 쳐다보았다. 내 얼굴 표정을 본 것인지 아니면 애초부터 설명을 하려고 했는지 루 시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섯 명의 신관이 동시에 해독주문을 사용하면 아이시클은 금방 해독이 됩니다. 빛의 신 아드네리님의 신관, 생명의 신 바르셀님의 신관, 자애의 여신 세리자드님의 신관, 정령의 신 가하브님의 신관, 미와 순결의 여신 로디테님의 신관까지 해서 다섯의 다 른 신성력이 필요합니다." 루시의 설명에 나는 그가 왜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렵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 일단 중독이 되면 신관의 치료를 받는 것이 정석이었다(물론 돈이 있는 사람의 이야 기이고, 평민들은 의사의 치료를 받는다). 따로 해독해 필요한 재료를 구할 필요없이 정석대로 신성력을 퍼부으면 되니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신관 다 섯명, 그 것도 각기 다른 신을 섬기는 신관 다섯 명이 한 사람을 치료하려고 모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세상에 넘쳐나는 건 사람이고, 그런 사람 중에서 한 명이 죽는 건 그렇게 큰 일도 아니었다. 그 한 명이 왕족이나 대귀족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섯 신관의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방법 이었다. 세리자드의 신관은 히크리트 신관이 있으니 그렇다쳐도 나머지 네 명이 비었다. 시장 의 부탁을 들어주다 생긴 일이라고 하지만 신전의 세력이 워낙 세서 어지간한 귀족들 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시장이 부탁한다고 신관들이 모일 턱이 없었다. 여기 까지 생각이 미친 도키오 할아버지들은 실망해서 어깨가 추욱 쳐졌다. 하지만 어두운 얼굴의 루시와 도키오 할아버지들에 비해 나와 다른 사람들의 얼굴은 약간이나마 밝아 졌다. 내가 누군가. 페드인 왕국의 제 1공주이며, 현재는 레리이나 여왕의 부탁으로 여행 중 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모든 책임은 레리이나 여왕에게 있으며-순 억지였다- 나와 여왕 사이에서 발언권이 센 것은 당연히 나였다. 여왕이니까 신관 4명 정도야 금방 모을 수 있겠지. 게다가 내가 원하는 건 히크리트 신관같은 고위신관이 아니라 단순히 해독의 주문을 사용할 수 있는 신관이었다. 한달이라면 충분히 치료할 수 있었다. 만약 레리이나 여왕이 내 부탁을 거절한다면 여행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귀국하는 건 물론이고 스피린과의 외교회의란 회의는 모두 쫓아다니면 방해해주리라. 레리이나 여왕은 현명해서 알아서 잘 판단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확인차원에서 다시 한번 물었 다. "그냥 다섯 명의 신관만 있으면 되는 거죠, 루시?" "그렇긴 하지만 그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잖아요." "그럼 됐어요! 당장 위험한 건 아니니까요. 힘들겠지만 로즈가 내일 그녀에게 마법으 로 연락을 해줘요. 제 부탁이라면 들어줄 거예요. 그리고 엔젤과 히크리트 신관이 가 스톤을 서델피로 데려가줘요. 그 곳은 세리자드님의 신관뿐만 아니라 다른 신의 신전 도 있으니 신관을 구하기가 쉬울 거예요. 뭐하면 시장의 도움도 많을 수 있고 이 곳에 서 가장 가까운 도시니까요." "알았어. 내일 당장 길드로 연락하지. 그럼 알아서 전해줄 꺼야." 내 신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한시름 놓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렇 지 못한 루시와 도키오 할아버지들은 일사천리로 돌아가는 상황에 어리둥절해졌다. 결 국 겐지오 아저씨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지금 말을 들어보면 마리엔이 신관들 정도는 쉽게 모을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 으로 들리는데. 내 짐작이 틀렸나? 하지만 내 머리는 나의 판단이 옳다고 부르짖고 있 어." "내가 대단하다기보다는 알고 있는 여자...분이 대단한 거예요." 여자라고 말하려던 나는 순간 엔젤의 안면이 꿈틀거린 것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저 충성심이 철철 넘쳐나는 여기사가 자신의 주군을 존칭을 붙이기는커녕 여자라고 불렀다가는 무슨 난리를 칠지 몰랐다. 그리고 내 정체가 알려져 봤자 좋을 일은 없었기 때문에 대충 얼버무렸다. 잘못해서 이 사실이 오펠리우스 왕비의 귀로 들어간다면 얼씨구나 하고 암살자들을 선물꾸러미로 잔뜩 보내겠지. "하지만 그런 분을 안다는 것 자체가 보통 신분이 아니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혹시 귀족인가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시이라가 끼어들었다. 시이라의 얼굴은 베일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로 들어보아 내가 높은 신분이라는 것이 의외인 눈치였다. 하긴 나처 럼 잘 놀고 싸움 잘하는 귀족이 그렇게 흔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급한 것은 이게 아닌데도 자꾸 신분을 물고 늘어지자 약간 짜증이 났다. 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 것이지 뭘 꼬치꼬치 캐묻고 그러는 거야. "귀족은 아니지만 돈도 무지무지 많고 빽도 엄청 막강해요. 됐어요?" "됐습니다." 시이라는 내가 이죽이는데도 담담한 어조였다. 역시 신기한 여자다. 계속 캐물었다가 는 내가 더 이죽일 것 같아서인지 아니면 그동안의 말을 통해 내 신분을 자기들 나름 대로 유추했는지 더 이상 신분에 관한 질문은 없었다. 대신 에릭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마리엔 너는 서델피르에 가지 않을 거야?" "어쩔 수 없어. 결계를 쳐놓긴 했지만 임시방편이라 그 마녀가 몇 번 난리를 치면 깨 질지도 몰라. 가스톤이 치료를 받는 동안 나랑 몇몇 사람은 남아서 요이체로스를 어떻 게든 상대해야지."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좋은 수가 있었으면 아까 써먹었지 쪽팔림을 무릅쓰고 도망쳤겠어? 지금부터 생각해 봐야지 뭐." 그런 당연한 걸 왜 묻는 건지. 내 말에 에릭은 잠시 말없이 쳐다보더니 고개를 설래설 래 저었다. 그 제스처에는 정말 어쩔 수 없다는 그의 생각이 아주 잘 드러나 있었다. 원래도 나에 대한 존경심같은 것이 없었던 놈이지만 요즘 들어는 더욱 그 정도가 심해 지고 있었다. 어떠냐 하면 내가 무슨 말을 하면 꼭 말을 걸고 넘어지는 것이다. 여러 모로 골치아픈 일이 많아지는 여행이었다. 우리들은 때아닌 책읽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내 말에 따라 요이체로스에 대한 글이 적어져있는 문헌은 모조리 수집해서 읽어대고 있었다. 내가 데려온, 본인은 납치라고 우기는 시끄러운 요정은 다른 방에 가둬놨다. 그 상황에서까 지 요정을 챙겨왔건만 자신은 요이체로스가 봉인된 후에 만들어진 생물이라 잘 모른다 고 한다. 그런데 이 요정이 도움도 안되는 주제에 얼마나 빽빽거리는 지 치가 떨릴 정 도였다. 그래서 다른 방에 먹을 것을 놔두고 방문을 잠가버렸다. 아마 지금쯤 먹을 것 에 파묻혀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으리라. 한 방에 모여 끙끙대면서 고문과 책들을 읽고 있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모두 일곱 명( 나, 세린, 에릭, 페르, 리카, 겐지오 아저씨, 시이라)이었다. 엔젤과 히크리트 신관, 로즈, 도키오 할아버지, 사라, 죠안은 가스톤과 함께 5일 전에 서델피로 출발했다. 원 래는 사라와 죠안은 갈 계획이 없었지만 이 둘의 걱정이 워낙 심해 함께 동행시킨 것 이다. 그리고 도키오 할아버지는 맨 몸으로 싸우는 무술이 요이체로스에게 먹히지 않 기 때문에 이 곳에 있어봤자 도움도 되지 않고, 혹시나 있을지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호위역으로 갔다. 며칠 전에 로즈가 보낸 서신을 보면 이미 레리이나 여왕의 허락이 떨어졌다고 하니 그 쪽은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책을 읽은 것은 라디폰 공작의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궁전 도서관 에 있던 책을 섭렵한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그러나 벌써 몇 권의 책을 읽었는데도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대부분이 요이체로스의 악행을 나열하고 그런 나쁜 사람이 되 어서는 안된다는 설교였다. 그나마 알아낸 새로운 사실이라면 요이체로스가 과거에는 작은 나라의 궁전 마법사의 제자였다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이 나라는 이미 멸망한 지 옛날이었다. 그 것도 요이 체로스의 손에 의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 왕국의 멸망을 기점으로 요이체로스가 전갈 의 마녀라고 알려지기 시작했다. 뭔가 이유가 있을 것도 같았지만 아쉽게도 그런 내용 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계속 책을 붙들고 있던 나는 잠시 책에서 눈을 떼고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아침부터 계속 책을 읽고 있어서 눈도 피곤하고 목도 뻐근했다. "마리엔, 피곤해?" 역시 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세린이 자신이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면서 물었다. 세 린도 피곤하긴 피곤한 모양이었다. "응. 조금 눈도 아프고." "그럼 쉬었다가 하는 게 어때? 벌써 몇 시간째 책만 읽었잖아." "역시 그러는 게 좋겠지?"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책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얼굴이 헬쓱해진 것이 며칠동안 책만 읽은 부작용인 모양이었다. 특히 왜 이런 일을 해야하 는지 모르겠다며 끊임없이 투덜거리던 겐지오 아저씨의 얼굴은 완전히 진이 빠진 얼굴 이었다. "아이고, 이럴 줄 알았으면 도키오 할아범이랑 서델피르로 갈 것을. 이게 무슨 고생이 람." "겐지오 아저씨, 아저씨 옆에 있는 책을 보고 그런 소리를 해요." 겐지오 아저씨의 옆에는 이 곳에 있는 누구보다 가장 적은 양의 책이 쌓여있었다. 그 나마 그 것도 대충 뒤적이다 던져버린 것이었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겐지오 아저씨 는 내 말에 갑자기 헛기침을 하며 난리를 쳤다. 나라고 이런 짓을 하고 싶겠는가. 그 것도 일상 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이런 책을 말이다.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달콤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 어디선가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봐!......다 알아! 빨리 좀 와......" 그 목소리는 이제는 귀에 익다못해 박혀버린 목소리였다. 이 놈의 요정인지 날파리인 지가 또 뭣 때문에 저 난리를 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먹을 것이 있으면 입을 꾸욱 다물고 먹기만 하기 때문에 이 점을 노려 방에다 먹을 것은 모조리 나뒀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무시하면 계속 시끄럽게 쨍알거리면서 책을 읽는데 방해를 하기 때문에 나는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옆방으로 갔다. 그리고 그런 내 뒤를 에릭을 선두로 해서 다른 사람들이 따라왔다. "왜 따라오는 거야?" "그거야 너랑 그 요정이 하는 이야기는 재미있으니까." 에릭의 말에 나는 인상을 약간 찌푸렸다. 재미있기는 뭐가 재미있어? 그냥 확 파리채 로 잡아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은데 말이다. 그러나 별 말하지 않고 요정을 가둬 놓은 방문을 확 열었다. "야! 왜 또 난리야? 가만히 있지 못하겠어!" "어머, 날 납치했으면 책임을 져야할 것 아니야? 먹을 것 줘!" 숲에서 봤던 요정들은 모두 순하디 순하건만 어디서 저런 요정같지도 않은 것이 걸려 가지고 골치 아프게 하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방 안에 가득한 게 먹을 건데 뭘 더 가 져오란 말인가. 나는 아니꼽다는 얼굴로 톡 쏘듯이 말했다. "납치하긴 뭘 납치해? 내가 숲으로 가라고 했잖아! 먹을 것에 눈이 뒤집혀 버티고 있 는 게 누군데 그래! 그리고 방에 넘치는 게 먹을 건데 뭘 더 달라는 거야?!" "흥, 조금만 먹고 갈 거야. 그리고 딸기가 떨어졌단 말이야." "그냥 먹어! 딸기말고도 과일 많잖아. 주는 대로 먹을 것이지 뭘 이것저것 따지고 그 래?" 그러나 이 빨간 요정은 지지 않고 대들었다. "난 딸기가 좋단 말이야. 딸기 줘! 딸기 줘!"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자기면서 어쩜 저렇게 식충이처럼 굴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생각같아서는 모기 잡듯이 손바닥을 마주 쳐서 잡아버렸으면 좋겠지 만 주위의 재미있다는 반응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내 뒤에 있는 동료들은 뭐가 그 렇게 재미있는지 나랑 요정이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고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내가 미 쳤지. 저걸 왜 데려왔을까? 결국 딸기 몇 개를 가져다줌으로써 시끄러운 요정의 입을 막을 수가 있었다. 자기 몸 의 절반 만한 딸기를 안고 있는 방글거리는 요정의 모습은 귀여웠다. 그래서 동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웃고 있지만 내 눈에는 가증스러워 보였다. "맛있어?" "응. 맛있어." 리카가 묻는 말에는 헤헤거리며 말하는 것이 정작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나에게는 '이 거 가져와, 저거 가져와' 라는 명령조였다. 한참만에 딸기를 다 먹은 요정은 기분이 좋은지 붉은 빛의 가루를 뿌리며 방안을 날아다녔다. 그리고 별 웃기지도 않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난 항상 슬퍼요. 그대가 내 곁에 없어서. 하지만 내가 운다면 당신은 슬퍼하겠지요.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대신 울게 만들지요. 그들의 비명과 울음이 바로 내 목소리랍니다. 그대, 들리나요? 브리탠의 마지막 왕자여, 내 울음이 들리나요? 나는 산만하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려다 우연히 브리탠의 마지막 왕자라는 말에 귀 가 번쩍 트였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나라 이름이었다. 바로 요이체로스가 멸망시켜버 린 자신의 조국이었다. 나는 허공을 날아다니는 요정을 잽싸게 낚아챘다. "꺄악! 뭐야! 뭐! 날개 구겨져! 구겨진단 말이야, 내 날개!" "그런 건 금방 펴지잖아. 그보다 브리탠의 마지막 왕자라니. 그거 너 어디서 들었어?" 내가 의외로 심각하자 요정은 더 이상 쨍알거리지 않았다. 그리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 지만 그래도 성실하게 대답해주었다. "요이체로스가 가끔 노래부르는 것 들었어. 그리고 브리탠의 마지막 왕자는 요이체로 스의 연인이었어. 이건 날 만들어준 마법사님이 해주신 말이었어." "뭬야? 연인? 그런 게 있었어? 그 악녀에게?" 이번에는 나뿐만 아니라 동료들까지 눈이 등잔만해졌다. 요이체로스가 하는 행동이나 문헌으로 보면 도저히 연인이 있을 여자로 보이지 않았다. 지금 모습을 보면 믿어지지 않지만 과거에는 절색의 미녀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워도 같이 있으면 목 숨이 위험한 여자 옆에 있고 싶어하는 남자는 거의 없었다. 요이체로스가 일방적으로 옆에 둔 남자라면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사람에게는 노예라고 하지 연인이라 하지 않 는다. 우리들이 전혀 몰랐다는 반응을 보이자 요정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거드름을 피웠다. "에헴, 이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지. 나는 요이체로스와 브리탠의 마지막 왕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아." "하지만 요이체로스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했잖아." "응. 몰라. 하지만 브리탠의 마지막 왕자와 있었던 일은 알아." 이 바보같은 요정. 그런 걸 두고 알고 있는 거라고 하는 거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했 다가는 이야기해주지 않을 것 같아 속으로 삼켰다. 처음으로 이 요정을 데려오길 잘했 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이 요정이 먹은 수많은 음식들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똑똑하구나. 우리한테도 그 이야기 좀 해주라. 딸기 더 줄게." 나는 상냥한 웃음을 지으면서 살살 요정을 구슬렸다. 사람과 같이 지낼 일이 거의 없 어 약간 성깔은 있지만 순수한 요정은 보통 사람이라면 '왜 그런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는데?" 와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다만 딸기라는 말에 붉은 눈동자를 반짝 빛내 며 말했다. "진짜? 딸기 더 줄 거야?" "그럼. 먹고 배 터져 죽을 정도로 많이 줄게." 딸기가 그렇게 좋은지 요정은 탁자 위에서 폴짝폴짝 뛰며 좋아했다. 한참동안 탁자 위 를 뛰고 날아다니고 뱅글뱅글 돌던 요정은 요이체로스의 연인이라는 브리탠의 마지막 왕자인 페우니아 왕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요정의 이야기가 계속 될 수록 동료들의 얼굴이 처음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 것은 안타까움이라고 불리는 감정에 지 배된 모습들이었다. 그리고 요정이 완전히 이야기를 끝마쳤을 때는 방금 전까지만 해 도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마녀로 여겼던 요이체로스를 동정했다. 에릭과 시이라는 별 반응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 말에 눈을 반짝 빛냈다. 요이체로스를 이길 수 있는 묘안이 떠오른 것 이다. 딸기 달라고 매달리는 요정에게 딸기를 주고 조용히 시킨 나는 내 생각을 이야 기했다. "......어때요?" "하지만 좀 불쌍하지 않아?" "맞아. 아무리 나쁜 여자라고 해도 그건 좀 그렇다." 요이체로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 고 있었다. 하지만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해서 이긴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는 나 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그 것도 다 자기 운명이지. 원망하려면 날 건드린 자신의 박복함을 원망해야한다. "그럼 요이체로스때문에 고통스럽게 죽은 수많은 사람들은 불쌍하지 않다는 거예요? 어떤 이유가 있던 간에 상관도 없는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줄만한 권리는 그 누구에게 도 없어요.아무리 해도 요이체로스가 인륜을 저버리는 악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변함 이 없어요." 마족인 내가 이런 모범 답안 같은 말을 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 마음 약한 인간들 의 마음을 다잡아주기 위해서는 이런 말이 제일이었다. 역시나 그들은 잠시 생각에 잠 기더니 내 의견에 찬성했다. 어둠에 휩싸인 숲의 한구석에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오고 있었다. 밤 에 숲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늑대의 발걸음소리와는 사뭇 달랐다. 전자가 소리를 죽 이고 조용히 움직이는 가벼운 발걸음 소리라면 지금의 경우는 무게가 많이 나가 풀을 밟는 소리가 거의 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무척이나 귀에 거슬리는 소리 가 함께 들려오고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방치한 갑옷을 입고 움직이면 나는 끼긱, 하 는 소리와 무엇인가가 품어져 나오는 듯한 쉬이익, 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이 소리를 내는 존재의 위험성을 알고 있는 동물들은 숨을 죽이고 자신의 보금자리에 고개를 쳐 박고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리저리 움직여 색색의 빛의 가루를 털어내는 거대한 전갈의 붉은 껍데기는 달빛을 받아 요사스러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전갈의 몸체 위에는 인간이 있 었다. 그 것도 여자가 말이다. 하지만 잔뜩 흐트러진 모습과 광기어린 눈을 보면 절대 정상이 아니었다. 요이체로스는 자신의 힘을 모두 찾기 전까지는 이 숲을 벗어날 수 없었다. 요정들이 숲에 들어온 사람들을 죽이는 것까지는 막지 못하더라도 아직은 숲을 벗어나지 못하도 록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것도 몇 명의 영혼만 흡수하면 끝이었다. 그렇게 되면 저 지겨운 날파리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자신을 봉인한 인간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잔 뜩 선사해주리라. 요즘에는 숲에 사람들이 잘 들어오지 않지만 예전에 도망쳤던 일행들이 다시 올 것임 을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사실 그들이 갑자기 도망쳐버렸을 때는 정말 당혹 스러웠다. 한 명이 다치긴 했지만 그래도 나머지 인간들은 제법 쌩쌩했다. 그런데 그 렇게 순식간에 내빼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만약 계속 싸웠다면 특별한 일이 일어나 지 않는 한 전투는 요이체로스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그 것을 미리 눈치채고 도망 친 것은 비겁하다기보다는 냉정하고 현명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유를 말로 설명할 수 없었지만 요이체로스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은근히 성질을 긁어놓던 소녀는 그냥 내뺄만한 인간으로는 보이지 않 았다. 당한 것은 반드시 갚아준다. 어딘지 모르게 자신과 비슷한 점이 있는 소녀였다. 자신에게서 페우니아를 앗아간 인간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살육을 시작했던 그녀와는 스케일이 달랐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지 그녀조차 알 수 없게 돼버렸다. 너무 많은 살육을 경험했기 때문일까? 이미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양심이나 도덕심 같 은 건 죽어버린 지 오래였다. 심장이 아직 팔딱팔딱 뛰는 인간의 몸에서 흐르는 붉은 피가 그렇게 향기롭고 아름다울 수 없었다. 사람들의 고통에 찬 비명소리를 듣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다. 이미 원래의 목적은 희미해져버렸다. 지금 그녀를 움직이는 것은 오직 증오와 살심, 광기뿐이었다. 예전의 기억도 흐릿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뚜렷이 생각나는 기억은 있었다. 아주 먼 과거, 살육의 즐거움을 몰랐을 때 행복했던 작은 기 억의 파편이 아직은 남아있었다. ------------------------------------------------------------------------- 지금 요이체로스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바로 몇 시간 전에 마법 실험을 한다고 이 시 약, 저 시약을 섞어보다가 폭발이 일어나 버린 것이다. 다행히 큰 폭발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사용하는 실험실은 엉망이 되어버렸고, 그녀의 스승인 죠네스가 그 소리를 듣 고 달려왔다. 죠네스는 궁전 마법사로 8서클 마스터라는 경지를 코앞에 두고 있는 브 랜트가 자랑하는 인재 중에 한 명이었다. 그는 요이체로스의 마법적 재능을 알아보고 아직 9살에 불과한 그녀를 자신의 제자로 거두었다. 다른 나이 많은 제자들도 많았지 만 죠네스는 손녀뻘 되는 요이체로스를 가장 귀여워했고, 요이체로스도 그를 매우 따 랐다. 그녀에게 죠네스는 우상이었고, 살아있는 신이었다. 그런데 그 스승에게 꾸중을 들은 데다 엉망이 된 실험실을 자신의 손으로 모두 청소하라는 벌까지 받았으니 기분 이 좋을 턱이 없었다. 그래도 요이체로스는 죠네스에게 깨끗이 치웠다는 칭찬을 듣고 싶은 마음 하나로 몇 시간동안 낑낑대면서 실험실을 청소했다. 그녀에게 죠네스의 칭찬은 이 세상 어떤 것 보다도 소중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험실은 광이 날 정도로 깨끗해진 반면에 요이체로 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예쁜 요이체로스의 얼굴은 검댕이가 여기저기 묻어있었고 ,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은 바닥에 있는 먼지를 모두 쓸고 다닌 탓에 며칠은 갈아입지 않은 것처럼 되어버렸다. 영 찜찜했지만 그래도 어서 자신의 스승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요이체로스는 정처없이 죠네스를 찾아 나섰다. 실험실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 는 것이 넓디 넓은 궁전 안을 헤매며 조네스를 찾는 것보다 시간이 덜 걸리겠지만 아 직 어린 그녀에게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다는 것은 고역이었다. 그래서 스승을 찾아나선 것까지는 좋았는데 조금 전부터 지저분한 남자 아이 하나가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별로였던 요이체로스는 생전 처음 본 소 년이 자꾸 자신을 부르며 따라오자 그나마 바닥을 기던 기분이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 치는 느낌이었다. 소년은 요이체로스보다 한두 살 많아 보였고, 무얼하고 있었는지 옷 에는 잔뜩 흙이 묻어있었다. 그러나 입고 있는 옷은 굉장히 고급스러웠고, 어딘지 모 르게 귀티가 흘러 넘쳤다. 그러나 요이체로스는 이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봐, 거기 너." "......" "내 말 안 들려? 잠깐만 서보라니까!" "......" "야! 요리체!" "뭐!!!" 사내아이의 말을 계속 무시하던 요이체로스는 요리체라는 말에 고개를 확 돌리고 그 소년을 째려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요리체라고 부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하지만 백작가문의 영애이고 궁전 마법사 죠네스의 총애를 받고 있는 그녀를 요리체라고 부를 정도로 간이 배밖으로 나온 인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녀의 아킬레스건을 눈앞의 소년이 건드려버린 것이다. 부드러운 남색 머리를 가진 소년은 요이체로스가 거의 잡 아먹을 듯이 노려보는데도 빙긋 웃기만 했다. "이제야 뒤를 돌아보네." "너 뭐야? 왜 귀찮게 따라오고 그래?!" 궁전에서 10살 정도의 소년이 돌아다니는 일은 무도회가 열리는 날을 제외하면 거의 불가능했다. 요이체로스는 궁전 마법사의 제자라는 특이한 케이스였기 때문에 이렇게 자유롭게 궁전을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오늘은 무도회가 있는 날도 아니었다. 그런데 소년은 궁전을 돌아다니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고 소년은 요이체로스가 요리 체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이쯤되면 뭔가 이상함을 눈치챌 만도 하건만 요리체라는 말에 흥분한 요이체로스는 평소의 총명함을 잃어버렸다. "가까이에서 보니까 더 예쁘다. 얼굴에 묻은 검댕이는 빼고." "너 뭐야! 지금 시비거는 거야?" "아니. 그냥 나랑 같이 놀자고." "싫어! 내가 왜 너같은 애랑 놀아야 되는데?!" "그러지 말고 같이 놀자. 내 여자친구 해라." 요이체로스는 아직은 또래의 남자보다는 마법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이런 남자 아이보다는 죠네스 스승님이 백 배는 더 좋았다. 때문에 요이체로스의 대답은 좋게 나 올 수가 없었다. "누구 맘대로! 내가 왜 네 여자친구가 돼야 되는데?" "내가 좋으니까. 이야~ 너 머릿결 되게 좋다. 만져봐도 돼?" 이제 요이체로스는 눈앞의 소년보다는 이런 반쯤 정신나간 사람을 궁 안으로 들인 경 비병에게 화가 났다. 그리고 자신이 말이 없자 진짜로 머리카락을 만져보려고 하는 소 년에게는 말이 통하지 않음을 통감했다. 이런 미친 놈에게는 그저 매가 제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보다 키도 크고 힘도 세 보이는 소년을 때려눕힐 만한 힘도 기술도 없었다. 대신 요이체로스는 마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약하게만 하면 죽지는 않을 것 이다. 그러나 요이체로스는 그녀의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전하!!!" 그녀가 막 주문을 외우려고 하는 그 순간,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이쪽으로 달려온 것이다. 평소에도 기사라면 약간 주눅이 들던 요이체로스였지만 지금은 그들의 등장보다는 그들이 내뱉은 말이 문제였다. 이 곳에서 전하라고 불릴 만한 남자는 현 재 11살인 페우니아 왕자뿐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왠지 눈앞의 소년에게서 기품 비 슷한 것이 흐르는 것도 같았다. "전하! 또 이런 모습으로. 그러다 다치시기라도 하면 큰일납니다." "괜찮아. 그런데 뭐때문에 그렇게 허겁지겁 뛰어오고 그래?" "...그거야 페우니아 전하께서 수업 시간에 몰래 빠져나가셔서 오지 않으시니까 그렇 지요! 지금 왕자궁에서는 난리가 났단 말입니다!" 기사는 거의 애원조로 외쳤지만 소년, 아니 페우니아 왕자는 어디의 무슨 개가 짖나, 하는 식으로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기사들은 애가 탔지만 요이체로스 는 애가 타다 못해 눈앞이 캄캄했다. 아무리 귀족이라고 해도 왕족에게 반말을 한 것 도 모자라 큰 소리를 쳤으니 처벌을 면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녀는 속으로 죠네스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그녀에게 가장 위대한 존재는 조네스였기 때문에 무의식적 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열심히 죠네스의 이름을 부르던 요이체로스는 페우니아 왕자가 자신에게 고개를 돌리 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페우니아 왕자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고, 입가에 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요이체로스의 눈에는 그 모습이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능글맞 게 웃고 있는 마족의 모습으로 비춰졌다. "너 아까 나한테 반말했지?" "죄,죄송합니다! 전하신 줄 몰랐어요!" "좋아. 용서해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이요? 말씀만 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면 다 할게요." 요이체로스는 어쩌면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황급히 대답했다 . 그러나 페우니아 왕자의 다음 말에 그녀는 물론 기사들마저 굳어버렸다. "나랑 결혼하자." "역시 요이체로스양 만한 여자는 없군." "아름다운 외모도 외모지만 이제 17살인데 4서클 마스터라면서. 정말 굉장하지 않아?" "저런 여자와 춤 한번 쳐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궁전 무도회에 모인 젊은 귀족청년들이 나누는 화제는 단연 요이체로스에 관한 것이었 다. 어렸을 때부터 심상치 않더니 지금은 브랜트의 제일 가는 미녀라면 모두 입을 모 아 그녀의 이름을 말할 정도였다. 붉은 색의 머리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진분홍빛의 드레스를 입은 요이체로스의 모습은 흡사 한송이의 만개한 장미꽃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귀족 청년들은 요이체로스를 선망의 눈초리로 바라보기만 할 뿐 감히 그녀에게 춤을 신청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 것이 요이체로스로서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그녀가 춤을 신청하는 사람에게 딱히 냉대를 한 적도 없었고, 바로 한 달 전에 열린 어떤 백작가의 무도회에서는 정 신이 없을 정도로 많은 춤 신청이 들어왔다. 그런데 왜 궁전 무도회만 참석하면 아무 도 접근하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런 기이한 현상은 요이체로스가 사교계에 데뷔했 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귀족가의 무도회에 가면 그렇게 바글거리며 몰려들던 사람들이 궁전 무도회만 가면 근처에도 오지 않는 것이다. 지금도 눈치로 보면 분명히 가까이 오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접근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지만 천재라고 불리는 그녀의 머리로도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요이체로스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요이체로스에게 접근 할 기미만 보이면 페우니아 왕자가 눈치를 팍팍 주는데 감히 어느 인간이라고 접 근할 수 있겠는가. 차기 국왕이 될 것이라고 확실시되고 있는 페우니아 왕자에게 밉보 이고 싶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페우니아 왕자의 모습을 보는 요이체로스의 아버지인 데노자 백작과 죠네 스는 참으로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페우니아 왕자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딸과 제자의 행복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표정은 결코 기쁨과는 거리 가 먼 표정이었다. 도대체 페우니아 왕자가 요이체로스를 좋아하는 데도 흐뭇한 미소를 짓지 않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그 이유는 현재 페우니아 왕자가 다,른, 귀족 영애와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뭐하자는 플레이인가. 요이체로스가 좋다면 그 곁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는 누가 자신에게 춤을 신청해오면 결코 거절하는 경우없이 넙쭉 넙쭉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요이체로스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보기에는 귀족 청 년들에게 향한 눈빛이 너무 강렬하고 날카로웠다. 때문에 데노자 백작과 죠네스는 이 일을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무도회가 종반으로 흘러갈 무렵 예상치 못한 이변이 일어났다. 한 귀족 청년이 굳게 결심한 얼굴로 요이체로스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순간 페우니 아 왕자의 눈빛이 차가워졌지만 그는 이미 각오했는지 왕자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요이체로스에게 다가갔다. 사람들은 용감하다면 용감하다고 볼 수 있는 이 청년의 행 동을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레이디, 그대의 아름다운 모습은 제 눈을 멀게 하는군요. 그대와 한순간을 함께 할 수 있다면 어떤 위협이라도 감당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이체로스는 위협이라는 부분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말하는 사람의 자유려니 하고 그냥 넘어갔다. 어느새 뒤까지 온 페우니아 왕자는 다시 한번 눈치를 주었지만 귀족 청년은 단단히 마음을 먹었는지 물러나지 않았다. 페우니아 왕자로서는 화가 나지 않 을 수 없었다. '감히 내 앞에서 누구에게 꼬리를 치는 거야?!' 마침내 귀족청년은 입을 열고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말을 내뱉었다. "저에게 아름다운 그대와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당연히......" "당연히 안돼!" 요이체로스는 자신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말이 뒤에서 터져 나오자 확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늘상 실험실로 들이닥쳐서 남의 마법수련을 방해하는 페우니아 왕자가 서있 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달리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의 얼굴이 굳든 그 렇지 않든간에 요이체로스로서는 참으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왕자도 남의 사생활에 이렇게 끼어들 권리는 없었다. 요이체로스와 같은 생각인지 귀족 청년 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왕 찍힌 것 춤이라도 쳐봐야 덜 억울하지 않겠는가. "페우니아 전하, 이 일은 저와 요이체로스양의 문제입니다. 전하께서 신경쓰실만한 일 도 아닙니다." 한마디로 니가 뭔데 참견이냐는 소리였다. 요이체로스는 그의 말에 깊이 공감하며 고 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페우니아 왕자는 눈초리가 사나워지면서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 다. 귀족 청년의 말에 동감하지 않는다는 뜻이 역력했다. 페우니아 왕자의 입장에서는 11살 때부터 찍어둔 자기 여자에게 남이 찝쩍대니 기분이 나쁠 만도 했다. 페우니아 왕자의 그런 생각에 요이체로스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 것이 문제였지만 자기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어쩌겠는가. 그 것도 유일한 왕자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상관있다." "어째서입니까?" "그녀는 내 여자다! 건드리면 용서 못해!" 페우니아 왕자의 말에 무도회장에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입을 쩌억 벌렸다. 멍청하 게 벌어진 입과 커다랗게 확장된 동공은 그들의 놀라움이 얼마나 큰지를 단적으로 보 여주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놀란 것은 바로 요이체로스였다. 누가 누구 여자란 말인가 . 사실 페우니아 왕자가 말한 뜻은 반드시 내 여자로 만들고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었지만 듣는 사람들은 이미 내 여자, 그러니까 지금 현재 매우 깊은 사이라는 말로 해 석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언젠가는 그렇게 만들겠다는 말이 쏙 빠져있으니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다. 이런 상황이나 요이체로스는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남의 혼사길을 막아도 되는 건가? 딱히 결혼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되고 보니 억울했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침묵을 가장 먼저 깬 사람 은 바로 죠네스와 데노자 백작이었다. "하,하,하. 다른 사람에게라면 몰라도 적어도 내게는 귀뜸을 해주지 그랬느냐." "부족한 딸년이지만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페우니아 전하." "아니예요! 아버지와 스승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니까요." 그러나 요이체로스의 필사적인 말은 페우니아 왕자에 의해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 다. "걱정마십시오. 제가 반드시 행복하게 해줄 테니까요." "전하!!!" "에이~, 로스(페우니아 왕자는 요이체로스의 이름을 자기 멋대로 줄여서 부르고 있다) , 새삼스럽게 왜 그래? 설마 예전에 나와 한 약속을 잊은 건 아니겠지? 나랑 결혼하기 로 했잖아." 그렇게해서 요이체로스와 페우니아 왕자는 공식적인 연인이 돼버렸다. 당연히 그동안 요이체로스에게 들어왔던 혼담 이야기는 모두 사라져버렸다. 페우니아 왕자의 어거지로 약혼을 하게 된 몇 년 동안은 요이체로스에게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페우니아 왕자에게 관심을 갖기로 해서인지 예전에는 몰랐던 그만의 매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렸을 때부터 만나는 횟수 가 많아서-물론 여기에는 페우니아 왕자의 눈물겨운 노력이 숨어있었다-정이 든 상태 였는데 페우니아 왕자가 전폭적인 사랑과 지지를 쏟아주니 당연한 일이었다. 페우니아 왕자는 보는 사람마다 부러워할 정도로 요이체로스를 아껴주었고, 시간을 쪼개서 항 상 그녀를 찾아가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이체로스와 페우니아 왕자는 누구나 부 러워할 정도로 잘 어울리는 연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국왕이 가장 신임하고 브랜트의 거의 모든 군대를 통솔하고 있던 사리젠 공작이 반역을 꾀한 것이다. 절대적인 우방으로 믿었던 사리젠 공작의 반역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요, 아닌 밤 중에 홍두깨였다. 궁궐을 지키던 기 사단 중 일부가 사리젠 공작에게 동조한 바람에 그는 당당하게 군대를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갔다. 그 것도 대낮에 말이다. 국왕의 충성스러운 기사들과 궁전 마법사들이 목숨을 바쳐 막았지만 반역자들의 검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 아름다웠던 브랜트의 궁궐은 수 많은 사람들의 피와 살점으로 더럽혀져갔다.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강했지만 너무 갑작 스러운 일이라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반역자들의 발걸 음을 늦추는 일뿐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죽을 줄 알면서도 잔혹한 검날에 몸을 내던 진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리젠 공작은 마침내 옥좌를 거머쥐게 되었다. 죠네스와 요이체로스는 페우니아 왕자를 억지로 끌다시피 하면서 본궁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아버지를 그대로 놔두고 도망갈 수 없다고 페우니아 왕자가 외쳐댔지만 이미 국왕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나마 페우니아 왕자를 데리고 도망칠 수 있다 면 운이 좋은 것이다. 그들의 주위에는 몇 명의 기사들만이 따르고 있었다. 이 상태로 적과 마주치게 된다면 보나마나 전멸이었다. 제발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길 바랬지만 그들의 소망은 곧 산산조각내버렸다. "페우니아 왕자전하, 어딜 그렇게 급히 가시는 겁니까?"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테지반 기사단의 단장인 토헤리였다. 그리고 그의 뒤로는 테지반 기사단의 기사들이 서있었다. 그들의 몸에는 작은 생채기조차 나있지 않았다. 다른 기사단이 목숨을 걸고 싸울 때도 사리젠 공작에 동조한 그들만은 안전한 곳에서 그 모습을 보면서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가슴에 달려있는 왕국 기사를 상징하는 금빛의 표식과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네 놈들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것이냐!" 페우니아 왕자는 분노에 찬 일갈을 터뜨렸다. 그는 사리젠 공작과 지금 눈앞에 서있는 기사들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 이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가 신뢰하고 의지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자신의 잘못을 고쳐주고 지적해주는 사리젠 공작을 아버지처럼 따랐건 만 그가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어제까지만 해도 웃으면서 같이 이야기를 한 사 리젠 공작이지 않은가,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의 검술을 봐주던 기사들이지 않은가. 그 의 가슴은 분노와 믿었던 자들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과 아픔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페우니아 왕자의 심정을 요이체로스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 는 신에게 지금의 상황이 꿈이기를, 어서 이 악몽에서 깨어나기를 빌고 빌었지만 신이 란 존재의 도움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죄송하군요. 하지만 저희들은 사리젠 공작님이 국왕이 된다면 브리탠이 더욱 발전할 것이리라 믿고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죽어주십시오." "닥쳐라! 그러고도 너희들이 기사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냐?!" "욕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 것도 저희들의 애국심입니다. 그저 여러분과는 그 길 이 다를 뿐입니다. 브리탠을 사랑하는 마음은 다른 사람들에 절대 뒤지지 않다고 생각 합니다." 지금의 왕은 성군까지는 아니어도 그래도 충분히 좋은 왕이었다. 그리고 페우니아 왕 자는 성군이 될 자질이 충분히 있었다. 게다가 브리탠은 강대국인 스피린과 국경을 접 한 것도 아니고 스피린의 국토 안에 있었다. 스피린인들은 그들의 성지인 히폴리테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브리탠을 항상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다만 브리탠이 작은 나라지만 단결이 잘 돼있어서 건드리지 않은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하나로 똘똘 뭉 쳐도 모자랄 판에 나라를 위해서 반역을 저질렀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죠네스는 마치 더러운 오물을 보는 것처럼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역겹구나. 자신의 욕망을 애국심으로 포장하려 들지 마라. 그건 스스로의 더러운 행 위를 감추려는 것에 불과하다. 그따위 알량한 생각으로 어제까지만 해도 너희들의 주 군이셨던 분을, 동료였던 사람들을 배신한 것이냐! 아무리 미물이라도 주인에 대한 충 성심을 가지고 있거늘 네 놈들은 이익에 눈이 멀어 그 분을 배신하다니! 이 개만도 못 한 놈들! 차라리 부귀영화를 위해 반역을 꾀했다고 해라! 네 놈들이 애국심을 들먹이 는 것은 죽어간 다른 사람들에 대한 모독이다!" "이 늙은이가 뚫린 입이라고 마음대로 지껄이는군!" 토헤리는 죠네스의 말에 얼굴을 있는대로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그건 토헤리의 뒤에 서있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의 마음을 들킨 것 같아 금방 흥분해버린 것이 다. 아무리 반역을 했다고는 하지만 자신들을 믿고 있던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만큼 마음 한구석이 편하지 않았다.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 합리화해서 괜찮다고 위안했건 만 죠네스는 자신들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말해버렸던 것이다. 평소에는 궁전 마법사의 수장인 죠네스에게 굽실거리던 그의 모습을 아는 요이체로스 는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넘어왔지만 꾸욱 눌러 참았다. 지금은 이 곳을 벗어날 방법 을 생각하기도 바빴다. 토헤리와 테지반 기사단의 기사들은 이들을 빨리 죽여버려야만 죄책감이 덜어질 것 같았던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검을 빼들었다. 페우니아 왕자 일행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도 재빨리 대응했지만 수적으로 너무 불리했다. 한 사람당 5명을 상대해야할 정도였다. 페우니아 왕자까지 가세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패색이 짙어졌다. 그 모습을 초조하게 지켜보던 요이체로스는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아 마법을 외웠다. 하 지만 그 것이 화근이었다. 파이어볼이라도 제대로 맞으면 즉사라는 것을 아는 토헤리 는 주문을 완성하기 전에 그녀를 베어버리려 했다. 요이체로스는 자신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토헤리를 보았지만 마법사인 그녀가 그 공격을 피할수는 없었다. 마 법 주문을 외우던 입은 죽음의 공포로 굳어버렸고, 몸은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번뜩이는 검날을 보자 요이체로스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렸다. "로스!!!" 페우니아 왕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저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리라. 이제는 그의 따뜻한 말을 들을 수 없으리라.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은 두려웠다. 그녀는 죽음을 기다리면서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제 목숨을 가져가신다 해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부디 페우니아 전하와 죠네스 스승 님의 목숨만이라도 구해주세요. 제발. 이렇게 빕니다.' 그러나 요이체로스의 간절한 기도에 돌아온 것은 잔인한 현실이었다. "큭!" 요이체로스는 느껴져야 할 고통은 느껴지지 않고, 낯익은 목소리가 내뱉는 신음소리만 이 들리자 놀라서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처음 봤을 때처럼 따뜻한 느낌을 주는 남색 머리를 가진 남자의 뒷모습이었다. 자주 보던 그의 뒷모습. 하지만 페우니 아 왕자의 등을 뚫고 나온 검날은 너무도 낯설었다. 붉은 핏방울이 한 방울씩 하얀 검 날에 미끄러져 떨어지는 모습은 너무나 현실감이 없었다. 페우니아 왕자를 찌른 토헤리는 설마 왕자가 요이체로스를 감쌀 줄은 몰랐기 때문에 이 사태에 당황했다. 그리고 토헤리가 멍청하게 있는 틈을 타 한 기사가 기합을 터뜨 리며 달려들었다. 그 공격에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울분과 슬픔이 섞여있었다. 어 찌 그렇지 않겠는가. 어제까지만 해도 동료였던 자가 주군을 검으로 찔렀는데 말이다. 그 무시무시한 기세에 토헤리는 검을 회수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물러났다. 그리고 토 헤리가 물러남과 동시에 허물어지듯이 페우니아 왕자의 신형이 쓰러졌다. 요이체로스는 급하게 달려들어 그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눈에 피로 범벅이 된 그의 가슴이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요이체로스의 눈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투명 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 눈물은 한 방울씩 떨어져 페우니아 왕자의 옷을 적시고 있 었다. "저, 전하! 왜? 왜? 왜 그러신 거예요?" "하...하하, 내 여자를......내가 지켜야지......누가 지키겠어." 페우니아 왕자는 치명상에 가까운 상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 은 자신의 가슴에 박힌 검이 아니라 무사한 요이체로스의 모습이었다. '다행이야. 널 구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러나 그런 페우니아 왕자의 모습을 보는 요이체로스는 울음이 터져나왔다.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넘칠 듯한 사랑을 베풀어준 것은 페우니아 왕자였다. 그에 비해 자신 은 그저 그 사랑을 받기만 했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요이체로스." 그녀는 페우니아 왕자를 안은 채로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을 들었다. 스승인 죠네스가 굳은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나 의지가 되었던 스승의 모습에서 뭔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가슴은 이제 너무 답답해서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제 발 이게 꿈이라면. 그렇다면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부 르짖어도 인간을 사랑한다고 그렇게 떠들어대던 신들 중 어떤 신도 도움을 주지 않았 다. "페우니아 전하를 부탁한다. 부디 살아남거라. 너는 강한 아이니 뒷일을 맡기겠다. 너 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워주는 것 같아 미안하구나." "그게 무슨 소리세요? 스승님!" 이제 요이체로스의 목소리는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자지러졌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죠네스의 눈빛에는 사랑과 신뢰가 가득 담겨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이 상황과는 어울 리지 않는 부드러운 미소가 죠네스의 얼굴에 걸렸고, 미소를 지은 채로 그의 입술이 열렸다. "텔레포트!" 죠네스는 그 상황에서도 남모르게 텔레포트 주문을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거의 8서클 마스터에 도달한 그였기에 입으로 주문을 외우지 않고도 머릿속으로 마법을 완성할 수 있었다. 비록 늦은 감이 있지만 말이다. 죠네스는 요이체로스와 페우니아 왕자와 함께 갈 수 없었다. 죠네스의 마력으로는 그가 좌표로 잡은 곳까지 2명 이상을 한꺼번 에 텔레포트할 수 없었다. 되도록 브랜트에서 떨어진 곳으로 보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저 늙은 자신의 희생으로 사랑하는 그들이 살아날 수 있다면 그 것만으로 된 것이었다. 그 것으로 말이다. 요이체로스는 빛에 휩싸이는 순간까지 미소를 짓고 있는 죠네스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하얀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스승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죠네스뿐만 아니라 페우니아 왕자를 지키기 위해 상처입은 몸으로 싸우던 기사들도, 토헤리도, 테지반 기사단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빽빽이 들어선 나무들뿐 이었다. 이 곳은 스피린의 로마니 숲이었지만 요이체로스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아니, 관심조차 없었다. 이 곳이 어디인지 생각할 정신따위는 그녀에게 남아있지 않았 다. 스승을 잃었다는 충격이 그녀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것도 잠시. 요이체로스는 페우니아 왕자에게 황급히 눈을 돌렸다. 검이 그 대로 박혀 있어 출혈은 심하지 않았지만 상처가 너무 깊었다. 요이체로스는 치료 주문 을 외우려 했지만 어떻게 된 게 주문이 생각나지 않았다.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머릿 속이 새하얗게 변해서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주문만이 아니었다. 어떤 말도 나 오지 않았다. 그저 입만 벙긋거리면서 쉴 새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와닿는 부드러운 손길을 느꼈다. 페우니아 왕자는 고통 으로 일그러진 얼굴이었지만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상처의 고통보다는 요이체로 스가 슬퍼하는 모습은 보는 게 더 고통스럽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페우니아 왕자의 심정은 그랬다. 그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죽고 싶지는 않았 다. 살고 싶었다. 자신을 위해서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살고 싶었다. 살아서 국왕 을 살해하고 충성스러운 신하들을 죽인 반역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아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눈앞에 있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살고 싶었다. 살아서 그녀와 행복해지고 싶었다. 살고 싶었다. 살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죽음의 그림자 는 조금씩 그의 몸으로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 예쁜 얼굴이......다 망가질 거야." 페우니아 왕자는 거칠어지려는 호흡을 간신히 가다듬으며 말했다. 요이체로스는 그의 말에 입을 벙긋거렸다. 말은 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리라. 하지만 펑펑 쏟 아지는 눈물이 지금 그녀의 기분을 그대로 나타내주고 있었다. "미안하다. 행복......하아, 하게 해주려고......했는데......." "......." "울지마. 네가 울면......내 가슴이, 큭 너무 아프거든." "......" "로스, 네 웃는 모습이, 쿨럭......쿨럭, 크윽." "......전하! 전하!! 괜찮으세요? 조금만, 조금만 참으세요. 제가 치료 마법을, 치료 마법을......" 페우니아 왕자가 격하게 기침을 하면서 피를 토해내자 그제서야 요이체로스의 말문이 터졌다. 그러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머리를 쥐어짜내다시피 해서 간신히 주문을 떠올린 요이체로스는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였다. 그러나 한 덩이의 검 붉은 피를 토해낸 페우니아 왕자는 계속 말을 이었다.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요이체 로스에게 못 다한 말을 해야만 할 시간이었다. "나는 너의 웃는......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 그러니까 웃어줘. 울지 말고 웃어줘. 네 미소를 보고 싶어. 그리고....... 사랑했어......너만 사랑했어. 날 잊지마라..... .사랑......해......로스......" 요이체로스는 계속 주문을 외웠다. 더 이상 페우니아 왕자의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것 을, 그가 이제 자신을 봐주며 웃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그가 영원한 잠에 빠져 버렸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인정할 수 없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했는데 그럴 수는 없다. 요이체로스는 치료 마법을 페우니아 왕자에게 시전했다. 자신의 모든 마력이 떨 어질 때까지 미친 듯이 치료 마법을 썼다. 그리고 마력이 남아있지 않는 와중에도 기 절할 때까지 계속 치료 마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한번 차가워진 페우니아 왕자의 몸은 다시 따뜻해지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할 때였다. 이대로 사라지기 가 아쉬운지 하늘을 붉은 색으로 물들이는 해가 보이자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사라져 가는 해의 모습에서 소중한 사람들의 뒷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족, 스승,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 하루만에 요이체로스는 소중한 사람을 모두 잃어버렸다 .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의지할 사람도, 같이 울 사람도, 함께 할 사람도 없었다. "욱......흐흑. 전하, 페우니아 전하......우욱" 요이체로스는 페우니아의 이름을 부르면서 숨죽여 울었다. 억눌린 그녀의 울음은 너무 나 구슬퍼서,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가련해 보여서 하늘을 물들이던 노을은 그녀의 작 은 몸을 감싸안았다. 누가 빼앗아갈 새라 페우니아 왕자의 몸을 꼭 끌어안고 있는 요 이체로스의 몸은 노을빛을 받아 붉은색으로 변했다. 그녀는 목놓아 울고 싶었지만 울 수 없었다. 페우니아 왕자가 자신의 우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고 했으니까. 마 치 금방이라도 그가 눈을 뜰 것 같아 억지로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참으면서 웃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억지로 웃었다. 그가 마지막까지 보지 못한 웃는 모습을 보 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웃었다. ----------------------------------------------------------------------------- 요정의 안내를 받아 로마니숲을 이 잡듯이 뒤진 우리들은 마침내 목표물을 찾을 수 있 었다. 요이체로스라는 사냥감을 잡기 위해서는 미끼가 필요했다. 다행히 요이체로스는 힘을 완전히 되찾기 전까지는 낮에는 활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주치지는 않았다. 미로처럼 길이 이리저리 얽힌 숲에서 목표물을 찾아내기는 힘들었지만 끈기와 인내를 가지고 탐색에 임한 끝에 성공할 수 있었다. "여기가 확실하겠지?" "내 기억이라면 여기가 맞는 것 같은데." 나는 눈앞에 있는 거대한 고목 나무를 보면서 눈을 빛냈다. 주위의 다른 나무에 비해 약간 크긴 했지만 그 점을 제외하면 다른 점을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나무였다. 하지 만 정말로 평범한 나무인지 아닌지는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루시!" 내가 고개를 까닥이며 어서 해보라는 식으로 재촉을 하자 루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 "저기...정말로 할거야? 그래도 이건 좀 비겁하지 않아?" "그럼 그냥 싸워서 죽어줄까요? 그래서 불쌍한 요이체로스에게 영혼을 자진 납세하고 힘이 돼줄까요? 네?" "아니. 내 이야기는 그런 건 아니고. 굳이 이런 방법까지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가스 톤씨의 치료가 끝난 후에 신전에 요청을 하면 신관들을 보내줄 거 아니야. 아무리 신 관이 할 일이 많다고 해도 마녀가 부활한 이상 도와줄거라구." 물론 나도 그 방법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는데 굳이 신관의 힘을 빌릴 필요는 없었다. 신관 따위의 도움이 없어도 충분히 요이체로스를 상대할 수 있는데 내가 왜 그런 것들에게 손을 벌려야 되는데? 그리고 신관들이 도착 할 때까지 요이체로스가 힘을 완전히 되찾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흉흉한 소문 때문에 사람들이 로마니 숲에 들어가지 않고 있지만 언제 얼빠진 인간이 들어갈 지 모르는 일이었다. 특히 이름을 얻으려고 하는 모험가들은 우리가 말린다고 해도 들을 인간들 이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기다릴 수는 없잖아요. 그 사이에 희생자들이 늘어날지도 모른다구 요. 그리고 이 방법이든 저 방법이든 죽인다는 건 같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루시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페우니아 왕자의 시체를 이용한다는 나의 계획에 찬성은 하긴 했지만 영 내키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물론 그 시체가 진짜일리는 없었다. 페 우니아 왕자가 죽었을 당시 요이체로스는 5서클 마스터였다. 즉, 보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찾아 헤맸던 페우니아 왕자의 몸이 라는 것은 후에 요이체로스가 자신만의 독특한 마법으로 만들어낸 환영과 같은 것이었 다. 내가 처음에 페우니아 왕자의 몸을 이용할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성격이 비뚤어진 자일수록 집착이 강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악취미를 가지고 있 는 녀석 중에 한 명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자들의 패턴을 어느정도 알 고 있었다. 그 놈은 마음에 드는 상대일수록 더욱 괴롭히고 싶어하는 이상한 놈이었다 . 좋아하면 더 잘해줘야 상대도 나를 좋아해 줄텐데. 아무튼 이해할 수 없는 놈이다. 결국 나한테 알짱거리다 죽어라고 얻어맞은 후로는 나에게 그런 적은 없었지만 다른 자에게는 종종 그런 행동을 하곤 했다. 내 마생(魔生)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라고 생각했던 놈이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런 류일수록 자신이 소중히 하는 것에 손을 대면 이성을 잃어버린다. 이 점을 철저히 이용하는 것 이다. "여기 없을 수도 있으니까 얼른 해봐요." 루시는 하기 싫어서 억지로 하는 기운을 풀풀 풍기면서 주문을 외웠다. 천천히 주문을 외우는 것이 진짜로 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달갑지 않아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의견을 내놓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의견을 못 내놓겠으면 내 말에 따르는 것이다. 주문을 외운 루시의 손에서 하얀 빛이 품어져 나오더니 평범해 보이는 나무를 감쌌다. 빛이 너무 눈부셔서 잠시 앞이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빛이 사라진 후에도 얼마동안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 었지만 시력이 회복되자마자 나무가 있었던 곳을 살폈다. 예상한 데로 그 곳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나무는 온데간데없고 남색 머리의 남자가 들어있는 수정이 있었다. 고도의 환상 마법으로 사람의 눈뿐만 아니라 만지면 나무의 촉감이 느껴지게 만들어 촉감마저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 엄청난 미남은 아니 었지만 이마를 부드럽게 덮고 있는 남색 머리가 매력적인 남자였다. 마치 잠들어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가 입고 있는 고급스러운 옷은 오른쪽 가슴부분이 날카로운 무엇인 가에 의해 찢긴 것처럼 구멍이 나있었다. 하지만 옷의 틈새로 얼핏 보이는 그의 가슴 은 깨끗했다. 요이체로스가 죽은 페우니아 왕자에게 치료 마법을 퍼부었기 때문에 상 처는 나은 것이다. 어차피 진짜 페우니아 왕자의 몸은 이미 흙으로 돌아간지 오래였다. 그리고 수정 안에 있는 페우니아 왕자의 몸은 요이체로스가 만들어낸 환상이었다. 이왕 만들 것이라면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도 될텐데도 죽을 당시와 똑같이 만들어 놓다니. 무서운 것. 그러나 동료들은 다른 의미에서 요이체로스의 무서움을 느끼고 있었다. 페우니아 왕자 의 몸을 완전히 감싸고 있는 투명한 수정은 지면에서 약 30cm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 리고 중앙에 떠있는 수정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이 널려 있었다. 마법을 사용했 는지 부패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금방 잘라낸 것처럼 목 주변에 묻어있는 피조차 굳어있지 않았다. 저마다 공포와 고통에 가득 찬 얼굴들이었다. 단번에 죽어버린 사람 은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없었다. 아마 조금씩 고통스럽게 죽어갔을 것이다. 잠들어있 는 듯한 페우니아 왕자의 고요한 모습과 금방이라도 비명을 터뜨릴 것처럼 끔찍한 표 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의 목은 대조적인 그림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짐작이지만 저기서 굴러다니고 있는 사람들의 목은 페우니아 왕자 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반역자들의 목일 것 같았다. 반성하라는 의미였을까. 아니면 페 우니아 왕자에게 반역자들의 최후를 보여주는 것이리라. 그 목들의 눈은 너나 할 것 없이 페우니아 왕자의 몸이 들어있는 수정을 향하고 있었다. 세리젠 공작이 왕이 된 지 정확히 10년째 되는 날, 브리탠은 영원히 역사에서 사라졌 다. 그 날은 세리젠 공작과 그 일당들이 새로운 왕조가 시작된 지 10년째를 기념하는 축제를 열고 있었다. 우습지 않은가. 수많은 사람들의 비명과 눈물을 토대로 만들어진 왕조의 시작을 기념한다는 것 자체가. 하지만 결국 그들은 망자들의 분노를 피해가지 못했는지 희대의 마녀 요이체로스에 의해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요이체로스는 시체로 만들어진 각종 키메라와 생전 처음 보는 마법을 사용하면서 닥치 는 대로 사람들을 죽였다. 페우니아 왕자의 죽음으로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던 그녀는 죠네스와 데노자 백작을 비롯한 자기 가족들의 목이, 나라를 좀먹은 간신배라는 명목 으로 수도 입구 앞에 걸리자 완전히 미쳐버린 것이다. 다른 귀족들과 사람들에게 본보 기를 보이기 위해 모두가 쉽게 볼 수 있도록 수도의 입구에 목을 내건 것은 실수였다. 비록 수도 안에는 들어가지 못해도 입구 앞에 걸려있는 목들은 요이체로스도 볼 수 있었으니까. 그 목들은 까마귀가 눈을 파먹고, 구더기가 들끓고, 썩어서 진물이 흐를 때까지 방치되었다. 미쳐버린 요이체로스는 힘을 얻기 위해서 보이는 대로 사람들을 죽였고, 그렇게 얻은 힘의 위력은 대단했다. 단신으로 브리탠을 멸망시켜버렸을 정도 니까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십 년동안 브리탠의 국력이 절반 가량으로 줄어든 탓도 있었다. 자신 에게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자는 모두 죽여버리는 사리젠 공작의 공포정치와 그를 도왔 던 무리들의 지나친 사치와 향락은 브리탠을 십 년만에 빛 좋은 개살구로 만들어버렸 다. 겉은 그럴 듯했지만 속은 썩을 대로 썩어 지독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요이체로 스가 아니었으면 5년 안에 스피린에게 멸망했을 정도로 말이다. 요이체로스에 의해 국 가의 기능을 상실해버린 브리탠은 자연스럽게 스피린에게 흡수되었다. 간신히 살아남 은 브리탠인들은 사상과 문화가 다른 스피린인들의 지배를 큰 저항없이 받아들였다. 적어도 '내일 떠오르는 해를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리고 브리탠인들은 근 200년만에 완벽하게 스피린 사람이 되어버렸다. 자신들의 핏 줄이 브리탠이었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채로 말이다. 아무튼, 수정의 주위에 있는 수십 개의 목들은 동료들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과거야 어쨌든 현재 요이체로스는 살인마에 불과했다. 모든 준비를 끝마친 후, 나는 페우니아 왕자의 몸이 들어있는 수정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섰다. 이 렇게 환상 마법까지 걸어놓은 것치고는 누가 왔었던 흔적은 거의 없었다. 그동안 완전 히 미쳐버려서 처음 자신이 사람들을 죽이게 된 원인을 잊어버린 것 같았지만 마음 깊 숙한 곳에는 아직도 페우니아 왕자에 대한 감정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것이다. 그걸 자극하는 것이 내 역할이고 말이다. "세상을 이루는 근원 중의 하나인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하얀 숨결이여, 지금 얽매여 있는 굴레의 속박을 끊고 흐르는 피조차 얼려버리는 얼음의 화살로 내 앞의 적을 섬멸 하라. 아이스 에로우(Ice arrow)!" 얼음화살들은 수정을 깨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무서운 기세로 날아갔다. 그러나 수정의 둘레에 보이지 않는 보호막이 있는 것처럼 얼음 화살이 수정에 닿기도 전에 무엇인가 에 부딪쳐 폭발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요이체로스가 결계를 쳐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결계와 마법이 부딪치면서 일어난 폭발을 요이체로스가 눈치채 서 달려오기만 하면 됐다. 나는 혹시 요이체로스가 이 폭발음을 듣지 못했을까 싶어 목청을 돋우어 소리쳤다. "요이체로스! 전에는 잘도 날 물먹였겠다! 그 댓가로 네 낭군의 몸을 날려버리겠어! 각오해라! 이 마녀야!" =================================================================== 그 외에도 온갖 협박을 늘어놓으며 마법을 사용하는 마리엔의 모습은 왕실에서 곱게 자란 공주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협박을 너무 잘해 정말로 그렇게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이야 마리엔의 신분을 모르니 조금 덜했지만 마리엔이 공주라는 사실을 아는 세린과 에릭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동안 같이 여행하면서 공주와는 거리가 먼 모습을 많이 봐오긴 했지만 말 이다. 그들이 과거에 알고 있던 마리엔은 자기밖에 모르는 오만한 공주였다. 하지만 마리엔 을 처음 만나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이미지는 점점 변해갔다. 처음에는 그런 대로 괜찮은 공주, 그 다음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주, 스피린과 있었던 외교회의 이 후에는 그동안은 능력을 숨기고 있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똑똑한 공주, 그리고 지금 은 현실을 잘 아는 공주였다. 곱게 자란 여자라면 대부분 요이체로스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깊이 동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리엔은 오히려 그 점을 이용해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궁전에서만 자란 공주가 그렇게 냉정한 판단을 하기란 하 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에릭과 세린은 라디폰 공작이 마리엔을 지지하 기로 한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리엔의 협박때문인지 요이체로스는 금방 나타났다. 요이체로스는 걸기적거리는 나무 는 꼬리나 집게로 쳐버리면서 급하게 달려왔다. 때마침 여섯 번째 마법을 쏘아보내려 고 했던 마리엔은 요이체로스가 나타나자 마법을 거두어들이면서 생글거렸다. "어머, 좀 늦었네. 아, 그 무거운 몸을 이끌고 온 거니까 빨리 온 건가?" "이...네 년을 반드시 죽여서 씹어먹고 말겠어!!! 죽어라! 이 재수없는 계집애야!" 요이체로스를 이를 빠드득 갈면서 소리쳤다. 이제는 페우니아 왕자와의 기억은 거의 남지 않았지만 그래도 본능적으로 저 것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계는 무사했지만 그 주위로 여기저기 패인 흔적이 보이자 왠지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요이체로스는 금방이라도 마리엔을 짓뭉개버릴 기세로 달려들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한쪽 발을 까닥거리면서 피식거리고 있었다. 저렇게 달려든다는 것 자 체가 벌써 이성을 잃었다는 증거였다. 사실 요이체로스의 입장에서는 영혼을 사용해서 공격하면 더욱 수월하게 싸울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냥 달려드는 이유는 아마 자기 손으로 직접 찢어 죽이고 싶어서이리라. 하지만 모든 것이 마리엔의 생각대로 이루어 지고 있다는 사실을 요이체로스는 알지 못했다. 요이체로스가 달려들자 마리엔은 잽싸게 뒤로 물러나고, 대신 에릭과 세린, 페르가 검 을 빼들고 그녀를 막았다. 전보다 검사의 수가 적은데다 요이체로스가 광분한 상태라 상대하기가 힘들었지만 뒤에서 겐지오와 리카가 잘 보조를 해주고 있어서 버틸 수 있 었다. 그리고 루시도 마법을 펑펑 쏘아대고 있어 많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요이체로스는 흥분한 와중에도 루시가 마법을 마구 사용하는 점이 이상했다. 미리 주 문을 외워두었던 모양이지만 저렇게 막무가내로 사용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마력을 모 두 사용하고 말 것이다. 지금 마력을 다 써버린다면 나중에 정말 위급할 때 마법을 사 용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도 루시는 마치 빨리 마력을 써버리려고 하는 것처럼 마구 마법을 사용했다. 결국 요이체로스는 루시를 마법을 제대로 활용할 줄 모르는 초보자 로 간주하고 그냥 넘어가 버렸다. 루시의 이상한 행동에 대한 의문보다는 앞에서 얼쩡 거리는 것들을 빨리 없애버리고 마리엔을 죽여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절대 쉽게 죽 이지는 않을 것이다. 천천히, 그리고 가장 고통스럽게 죽여버릴 것이다. 이미 미쳐버 린 요이체로스는 그 것이 아주 깊숙한 곳에 조금 남아있는 페우니아 왕자에 대한 애틋 한 감정때문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동료들이 요이체로스를 막고 있는 사이 마리엔은 주문을 외웠다. "모든 어둠의 어버이며 안식의 아버지, 공포와 두려움의 근원이여, 그대의 위대한 힘 을 나에게 빌려다오. 나 어둠의 존재로 명하나니 시간이여, 그 흐름을 멈추고 자연의 순리에 역행하라!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근원이여, 사라져라! 에테르 프리즈(Ether Fr eez)!" 순간 마리엔의 몸에서 검은 빛이 품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리엔은 히크리트 신관도 없기 때문에 흑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이 마법은 인간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마법이었 다. 신족과 마족만이 알고 있지만-물론 힘을 빌리는 대상은 다르다. 예를 들면 신족은 모든 빛의 어버이며 영광의 아버지, 자비와 성스러움의 근원이여, 라고 시작을 한다- 사실 사용하는 경우은 거의 없었다. 이 마법을 사용하게 되면 그 주위 100미터 안으 로는 누구도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되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천사들의 신성력과 마족 의 마력은 마법과는 약간 다른 것이기에 사용해도 별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요이체로스는 신이나 마족이 아니었던 것이다. 루시와 마리엔도 마법을 사용할 수 없 게 되지만 그 점을 감수하고서라도 요이체로스의 마법을 봉하는 쪽이 더 유리했다. 검은 빛은 마리엔을 중심으로 서서히 주변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중심에 서있는 마리엔의 주위로 바람이 일어나고 있어 그녀의 검은 머리가 휘날렸다. 바람에 말려 올 라간 흙들이 시야를 어지럽혔고, 나뭇잎들이 요동쳤다. 소리없이 조용히 퍼져나가는 그 빛은 너무나 어두웠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는 것 같았다. 파도처럼 물결치는 검은 빛을 보면서 마리엔 일행과 요이체로스는 싸우던 것도 잊고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계속 퍼져나갈 것 같던 검은 빛은 주변을 가득 메운 후에 사라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오직 의기양 양한 웃음을 짓고 있는 마리엔만이 보일 뿐이었다. "이 전갈 마녀야. 이제는 마법을 사용하지 못할 걸!" 마리엔의 말에 검은 빛이 세상을 휩쌌던 모습을 생각하며 여운에 젖어있던 요이체로스 는 놀라서 정신을 차렸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녀의 가슴을 요동쳤다. 요이체로스 는 황급히 마법을 사용해보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던 마나가 얼어버린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몰라도 저 소녀가 한 짓임 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때야 요이체로스는 루시가 마법을 펑펑 써댔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루시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이 마법을 사용하려고 했던 것 이다. 마나가 움직이지 않자 당황하는 요이체로스를 보면서 마리엔이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제 2라운드를 시작해볼까?" 요이체로스가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그녀를 상대하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비록 요이체로스가 마법 주문을 외우면서 자신이 마법을 사용하겠다는 티를 팍팍 내긴 했지 만 날파리처럼 달려드는 영혼들과 전갈의 공격을 피하기도 바쁜 와중에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쓸 정신은 없었다. 그래서 예상하지 못한 마법 공격이 더 이상 이루어지 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한숨 쉴 수 있는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천하의 내가 겨우 인간을 상대로 이런 수까지 써야한다는 것이 엄청 자존심 상하고 짜 증나는 일이었지만 현실은 현실. 이번 전투가 끝나면 꼭 수련하고 말겠어. 아빠랑 엄 마가 능력을 향상시켜줬는데도 이 모양이라니.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떼를 써서라도 더 강하게 만드는 건데. 하지만 이미 마차는 지나가버린 뒤였다. 사실 그동안은 현재 이 몸에 대해 큰 불만은 없었다. 인간들은 약하니 이정도 실력으로도 가뿐히 이길 줄 알았다. 당연히 그동안 은근히 '내가 최고야!!!' 라는 생각을 가지고 놀았었다. 마법 이 여전히 4서클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도 바로 이 이유때문이었다. 그런데 인간 중에 도 가끔 이렇게 강한 인간들이 몇몇 나오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러니까 드래곤 슬레이 어라는 말도 생겼겠지만. 더 이상 인간들을 얕잡아봐서는 안되겠어.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된 요이체로스는 전처럼 이길 가능성이 전무한 상대가 아니라 한 번 해볼만한 상대로 바뀌어 있었다. 우리들이 맹공을 퍼붓기 시작하자 루시는 안전 한 곳으로 몸을 숨겼다. 루시는 나처럼 마법 이외의 자신의 몸을 방어할 수단을 가지 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루시가 빠지긴 했지만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된 요이 체로스가 우리 6명의 공격을 한꺼번에 받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6명 이 한 명을 한꺼번에 다구리놓는다고 욕하지 마라. 따지고 보면 요이체로스 본인과 전 갈, 수십개의 영혼까지 모두 합하면 우리는 거의 여섯 배에 달하는 인원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원래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다. 탓을 하려면 우리를 건드린 요이체로스 본인을 탓해야만 하는 것이다. 상황이 급반전하자 당황한 요이체로스는 제대로 우리들의 공격에 대처하지 못했다. 때 문에 나는 쉽게 창을 찔러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카앙. 힘을 줘서 찌른 창은 요이체로스에게 조금의 타격도 주지 못하고 갑주에 부닺치면서 되튕겨나왔다. 어찌나 갑주가 단단한지 창을 쥐고 있던 팔이 쩌엉 울렸다. 손바닥에서 시작된 찌릿한 느낌은 팔을 통해 어깨까지 전해졌다. 하마터면 창을 놓칠 뻔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여 기서 창을 놓친다면 내 꼴이 뭐가 되느냔 말이다. 전에는 요이체로스 근처에는 와보지 도 못하고 영혼들만 상대하다가 처음으로 부딪쳐본 것이라 갑주가 얼마나 딱딱한지 모 르고 전력을 다해서 공격을 한 대가였다. 내 창이 좋긴 하지만 전갈의 갑주를 단번에 꿰뚫어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정확 히 말하면 내가 창의 능력을 완전히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무기 가 아무리 좋아도 사용하는 사람의 능력이 거기에 따라주지 못하면 그 것은 조금 더 날이 잘 드는 무기에 불과했다. 반대로 무기가 아무리 나빠도-설령 이가 다 빠져서 겉 보기에는 사과 껍질조차 깍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검이라도-실력자가 사용한다면 바위 정도는 간단히 잘라버릴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재의 나는 창을 완벽하게 다 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한다? 저리는 팔을 주물거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물 론 요이체로스가 내가 생각을 다 마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생각을 하면 서도 무시무시한 기세로 휘둘러지는 꼬리를 피하고 있었다. 전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 이었지만 우리의 접근을 막기 위해 무작정 휘두르는 단순한 공격이라 피하는 것은 그 렇게 어렵지 않았다. 요리조리 꼬리를 피하면서 재빨리 요이체로스를 살펴본 결과 공 격할 수 있는 곳은 딱 두 군데였다. 한 곳은 전갈의 눈이었다. 눈은 딱딱한 갑주로 뒤덥혀있는 것도 아니고 약한 곳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창으로 한 번 쿡 찔러주기만 하면 됐다. 그럼 전갈은 모든 눈이 멀어 버릴 것이고 고통에 미쳐서 요이체로스의 지시를 듣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다 른 곳은 바로 요이체로스 본인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전갈의 몸체 위에 있어 공격하기 가 까다로웠지만 그 몸을 쓰러뜨리기만 하면 요이체로스의 조정을 받고 있는 전갈도, 영혼도 자연히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갈은 한쪽 눈을 사라에게 잃은 후로 남은 한쪽 눈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었 다. 독무를 쉴 새없이 뿜어내고 있어 그 쪽으로는 접근하기조차 힘들었다. 전갈의 입 에서 나오는 독은 꼬리의 독과는 달리 움직임을 둔화시키는 정도였지만 저 정도 양이 면 몸이 마비되고도 남았다. 조금만 틈을 보여도 영혼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고, 집게와 꼬리가 그대로 몸을 찢어버릴 것 같은데 몸이 마비되면 정말 곤란했다. 운이 나쁘면 즉사요, 운이 좋아도 중상이었다. 그럼 역시 인간의 몸쪽을 노리는 것이 좋겠 지? 좀 위험하긴 하지만 시도해볼 만은 했다. 팔의 저림도 어느정도 가셨기 때문에 공격하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요이체로스의 빈틈 을 노리는 동안 이제는 영혼들까지 떼거지로 달려들었다. "이 꼬마계집! 가만두지 않겠어! 네 년을 잡으면 뼈마디를 부셔버리고 다리를 잘라버 리겠어. 다리를 자른 후에는 서비스로 팔도 잘라주지. 그리고 사지를 모두 잘라버리면 귀와 코도 네 몸에서 떼어내주마. 그 다음에는 네 년의 반반한 얼굴이 어떻게 되었는 지 거울을 보여주겠어. 마지막으로는 목에 구멍을 뚫어서 매일 피를 쪽쪽 빨아마셔주 마! 과연 네 년의 피맛은 어떨지 궁금하구나! 아하하하!" 요이체로스는 그 흉측한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 독설을 퍼부었다. 쪼잔하다. 내가 자 기한테 뭘 어쨌다고 그렇게 원독어린 눈으로 쳐다본다냐? 내가 한 거라고는 얼굴에 대 해 한소리한 것 하고, 페우니아 왕자를 향해 마법을 난사한 것밖에는 없구만. 아, 마 법을 못쓰게 해버린 것도 있었구나. 약간 약을 올린 것 조금하고. 아무튼 요이체로스 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을 나로 단정지었는지 유난히 공격이 내게 집중되었다. 그녀의 지시로 한꺼번에 달려들던 영혼들은 어느 순간에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완 전히 하나로 합체한 그 것은 윤곽이 뚜려하지 않은 흐릿흐릿한 몸체에 아우성치는 여 러 개의 얼굴이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것은 나 정도는 완전히 집어삼켜버릴 정 도로 컸다. 하나씩 달려드는 모습도 보기 좋지 않았지만 저렇게 합체해서 달려드는 모 습은 더 보기 좋지 않았다. 차라리 거대한 크기에 하나의 얼굴만 있다면 낫겠지만 그 합체 영혼은 여러 개의 얼굴들이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키히히히. 크흐흐흑. 기기기긱. 캬캬캬캬.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들은 내는 소리마저도 달랐다. 합체 영혼은 밀물이 밀려오 는 것처럼 맹렬한 기세로 덮쳐왔다. 하나의 몸체에 있는 수많은 얼굴들은 서로 먹이( 나)를 차지하기 위해서 모두 입이 찢어질 정도로 크게 입을 벌리고 있었고, 그 안에 자리잡은 이빨은 맹수의 그것보다 더 날카롭고 뾰족했다. 잘못하면 여러 개의 입에 물 려 갈가리 찢길 것만 같았다. 하지만 피하지 않았다. 다만 질이 떨어지는 영혼들이라 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나는 합체 영혼을 피하는 대신에 앞으로 뛰어들었다. 드래곤을 잡으려면 드래곤 레어 로 들어가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아무리 내 처지가 변했다고는 하지만 저런 허 접같은 것들한테까지 도망쳐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수면을 스쳐 날아가는 제비처럼 미끄러지듯이 내달리면서 창을 들고 있는 팔을 휘둘렀다. 그 동작은 여행자의 얼굴을 살며시 매만지며 지나가는 봄날의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웠지만 무릎과 허리의 반동을 이용해서 몸 전체의 힘을 담았기 때문에 그 속에는 겉만 보고는 절대 알 수 없는 패도 적인 기운이 담겨 있었다. 부드러움 속에 강함이 있다. 이 말을 그대로 보여주는 공격 이 지금 내가 시전하고 있는 플라워 드러였다. 제 4기사단을 지도할 때 사용한 적은 있었지만 인간계에 와서 실전에 사용해보기는 처 음이었다. 허공에서 춤을 추는 창은 화려한 꽃을 피워냈다. 머리와 몸이 기억하는 순 서대로 움직일수록 눈 앞에 피어나는 꽃의 수는 늘어갔다. 창대를 잡고 있는 손목의 움직임은 작았지만 창대를 통해 전해진 그 진동은 창 끝에 이르러서는 복잡하고 다양 한 움직임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검의 변칙적인 변화를 따를 수는 없었다. 원래 창은 검보다 길이가 긴 만큼 시 전자의 세세한 움직임을 그대로 전달하는데는 문제가 있었다. 때문에 창을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처음에는 공격범위가 넓어서 편해보일지 몰라도 다 양하게 활용할 수 없고 길이가 길어 근접전에는 매우 불리했다. 하지만 창도 쓰기 나 름이었다. 때문에 내 공격은 미첼로보다는 덜 화려해보이겠지만 위력은 한 수, 아니 몇 수 위였다. 사실 나와 미첼로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고, 나로서는 기분 나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비교할 사람이 없어서 어디서 그런 바람둥이에게 비교를 하냔 말이다. 몇 개의 은빛의 꽃들이 내 앞에 수놓아졌을 때, 나와 합체 영혼간에 충돌이 일어났다. 영혼에 둘러싸이는 순간 불투명한 막에 갇힌 것처럼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보 법을 더욱 빨리 밟으면서 앞으로 치고 나갔다. 키에엑. 캬아악. 으헤엑. 사정없이 물어뜯을 것처럼 덤벼들던 합체영혼은 꽃모양을 그리며 움직이는 창날과 부 딪치자 과일 쥬스를 만들기 위해 과일을 갈 때처럼 창날에 의해 잘게 갈아졌다. 영혼 이 물어뜯어 뭉개질 것처럼 보였던 꽃들이 그 예상을 뒤엎고 영혼들을 뭉개버린 것이 다. 하나로 합체되어 있던 영들이 산산히 흩어지자 시야를 방해하고 있던 불투명한 막 도 사라졌다. 그리고 흩어지는 영혼들 사이로 요이체로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 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뛰었다. 요이체로스는 내가 강행 돌파를 할 줄은 몰랐는지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하고 쳐다보 기만 했다. 때문에 그녀는 내가 전갈의 다리를 발판으로 삼아 전갈의 등 위로 올라서 는 것을 막지 못했다. 전갈의 갑주는 약간 미끄럽긴 했지만 움직이는데는 지장이 없었 다. 그 위는 상당히 넓어서 올라서자 나와 요이체로스간의 간격은 꽤 됐다. 여기서 저 기 있는 요이체로스를 싸악 베어버리면 끝나는 거겠지? 각오해라, 이 마녀야. 의외로 쉽게 끝내버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요이체로스를 향해 창을 찔러 들어갔다. 역 시 창은 공격 범위가 넓다는 점이 좋았다. 그 것 때문에 내가 검이 아닌 창을 사용하 는 것이지만 말이다. 뭐 머리 위에서 창을 휘두르고 그대로 일직선으로 그어버리는 모 습이 멋있어보였다는 점이 더 큰 이유였지만 말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가면 충분히 찌를 수 있을 정도로 나와 요이체로스간의 사이가 좁혀 졌을 때, 오른쪽에서 대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쉬이익.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나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오는 붉은 꼬리를 보았다. 요이체 로스가 위험에 처하기 전에 재빨리 대처한 것이다. 벌써부터 풍압이 느껴질 정도로 강 한 일격이었다. 쳇, 조금만 더 하면 이길 수 있었는데. 그러나 꼬리를 피해 몸을 날리 는 와중에도 창을 휘두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왼쪽으로 뛰면서도 약간 위쪽, 즉 대각 선 방향으로 뛰었기 때문에 공격은 먹혔다. 피하느라 제대로 겨냥을 할 수 없었지만 느낌상 어딘가를 벤 것만은 틀림없었다. 땅에 착지한 후에 몇 바퀴 굴렀지만 그런 것에는 신경쓰지 않고 발딱 일어나 요이체로 스를 보았다. 그녀의 오른쪽 소매는 전과는 달리 거의 잘려서 가까스로 로브에 붙어있 었다. 그리고 로브의 빛과 똑같은 색의 피들이 그녀의 팔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치명타는 아니었지만 요이체로스를 분노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크아아!!!" 요이체로스는 다른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빠르게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지면을 박차고 달려드는 전갈의 모습은 흡사 멧돼지가 달려드는 모습과 비슷했다. 크기가 훨 씬 크긴 했지만 무작정 달려드는 모습이 너무 똑같았다. 죽어라고 뛰어 옆으로 피한 나는 굴러서 요이체로스를 피한 겐지오 아저씨의 등을 그대로 밟고 공중으로 뛰어올랐 다. 마침 일어서려던 겐지오 아저씨는 내덕분에 지면과 키스를 하게 되었다. 약간 마 음이 걸리긴 했지만 이기려면 모든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고 자위하면서 애써 무시했다 . 그 근처에 눈에 띄이는 발판은 그 것뿐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 달려오던 기세 때문에 바로 멈추지 못했던 요이체로스가 옆에서 약간 위쪽에 있었다. 여기저기에 나뭇잎이 묻어있는 머리와 요이체로스의 엉망인 옆얼굴이 보였다.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고개를 돌린 요이체로스는 나를 보고 얼굴 가득 낭패한 기운을 뜨긴 했지만 육중한 전갈의 몸을 완전히 돌리지는 못했다. "타앗!" 한차례 기합을 지르며 공중에서 창을 회전시킨 후에 그대로 내리그었다. 그러나 요이 체로스도 만만치 않았다. 순식간에 영혼들로 방어막을 쳐서 나는 별 성과도 없이 전갈 의 등 위에 내려섰다. 내가 내려서자마자 요이체로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영혼들을 쏘 아보냈다. 아직 방어를 하지 못했던 나는 놀라서 옆으로 굴렀다. 이거 장난아닌데. 읏 , 따라오지마, 이 것들아. 나는 너희같이 비정상적인 영혼들은 싫어! 나는 영혼들을 피해 열나게 뛰어나녀야만 했다. 그리고 영혼들은 내 뒤를 줄줄이 따라 다녔다. 만약 영혼들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지만 않았다면 달리기 시합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 다. 다행히 전갈의 등이 넓어 피어다닐 곳은 많았다. 사방팔방으로 뛰어 다니는 내 눈에 얼핏 당황하는 동료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내가 전 갈의 등 위에 있자 동료들은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화살이나 단검은 잘못해서 내가 맞을 가능성도 있었고, 검은 갑주 때문에 제대로 된 공격을 하기가 힘 들었다. 이왕이면 전갈이 멈춰있는 동안 모두 올라와서 공격하면 좋겠지만 나 혼자 도 망다닐 공간은 충분해도 여러 명이 올라오면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뒤에서 열 심히 ?아오는 영혼들 때문에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에잇! 따라오지마! 밑에 다른 인간들도 많은데 왜 나를 따라오는 거야?" 동료들을 팔아먹는 발언마저도 서슴치않았지만 몇몇의 영혼들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나 를 뒤?아오고 있었다. 역시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더니 지독 히도 공격 대상을 나만 고집하고 있는 요이체로스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전갈에게 동료들을 상대하게 하는 치밀함을 보이고 있었다. 한동안 도망다니던 나는 이대로는 아무 것도 되지 않을 것 같아 그대로 몸을 회전하면 서 창으로 영혼들을 베어넘겼다. 처음에는 그냥 도망가기만 했는데 내가 저런 요상한 영혼들에게까지 당할 수는 없다는 오기 비슷한 것이 생겼다. 질 수 없다. 이래뵈도 마 족인데 저런 것들에게 질 수 없다. 나는 두 발로 단단하게 버티고 서서 눈앞의 영혼들 을 째려보았다. 조금씩 머리가 차가워지면서 덩달아 표정마저 차가워졌다. 술래잡기를 하던 내가 갑자기 분위기가 변하자 영혼들은 잠시 주춤했다. 본능적으로 내 주위로 품어져나오는 마족의 기운을 느낀 모양이다. 물론 미약하기 그지없었고 실력은 더욱 따라주지 않았지만 정신체인 영혼이다 보니 그런 쪽으로 느끼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 ----------------------------------------------------------------------------- 저희 집 이사했어요 *^-^* 그동안 짐정리하는라 글을 쓸 시간이 없었답니다. 하지만 어제로 짐정리도 모두 끝났고. 다시 열심히 올리렵니다. 이번에 아파트로 이사갔는데 11층이예요. 높은 곳을 좋아하는 저로서는(물론 안전이 보장될 경우만입니다 -_-;)아주 기분이 좋 아요. 게다가 무엇보다 제 방이 무지 넓어졌거든요 ^.^ 넘 기분 좋아여~ 기다리셨던 분들께는 너무 죄송합니다. 그럼 전 이만요. "뭐하는 거야? 당장 공격해!" 영혼들이 공격을 하지 않자 요이체로스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녀의 명령에 영혼들 은 잠시 주저하다 일제히 달려들었다. 미약하게 느껴지는 내 기운보다는 요이체로스가 더 무서운 것이다. 예전이라면 정말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인간의 영혼이 다 뭔 가. 마족들도 나와 싸우는 건 꺼리는데 말이다. 그 이유가 우리 부모님때문인지, 아니 면 싸우고 나서 나중에 나한테 당할 해코지때문인지, 그 것도 아니면 내 외모때문인지 는(나도 한 미모한다) 모르겠지만 말이다. 너무도 변한 상황에 나도 모르게 절로 냉소 적인 미소를 지었다. 상황이 이렇게도 변할 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슬쩍 베어 넘기는 걸로는 잠시 시간은 벌 수 있지만 없애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안 나는 창을 빠른 속도로 내찔렀다. 원래 정상의 영혼은 물리력을 사용할 수도 없고, 신성력이나 마법이 아닌 다음에는 없앨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들 은 이미 요이체로스에 의해 많이 변질된, 이제는 영혼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존재들이 었다. 때문에 치명타를 먹이면 없앨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 번에 한 개씩 확실히 꿰뚫어 버렸다. 창대의 절반이 통과할 정도로 확실히 말이다. 그러자 효과가 있었는지 창에 찔린 영혼들이 괴로운 비명을 지르면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동안 다른 영혼들이 달려들었기 때문에 더욱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창은 하 나에서 두 개로, 두 개에서 네 개로, 네 개에서 여덟 개로, 여덟 개는 다시 열여섯 개 로 늘어갔다.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다 보니 힘이 많이 들었다. 어느새 땀 이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닦을 틈도 없었다. 땀을 닦는 중에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 다. 영혼을 없애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는 탓에 요이체로스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내 귀는 그녀가 이빨을 사정없이 가는 소리를 그대로 잡아서 내게 전해 주었다. "마리엔! 위험해!" 에릭의 목소리에 쉴 새없이 움직이던 나는 그제서야 바로 근처까지 날아든 꼬리를 발 견할 수 있었다.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기 때문에 재빨리 창을 가로로 들고 그 꼬리를 막았다. 그렇게 막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창을 잡은 팔뿐만 아니라 온 몸이 쩌엉 울리 면서 몸이 붕 떴다. 그 상황에도 들고 있던 창을 놓치지 않은 것은 그야말로 마족 승 리였다. 무, 무식하게 힘만 센 전갈!!! 날아가서 어딘가로 처박힐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곧 이어 느껴질 충격에 대비해 눈을 꼭 감았다. 그러나 내가 예상했던 충격 대신에 누가 나를 받아 내는 느낌이 들었다. 워낙 내가 세게 날려온 탓에 날 받은 사람은 그대로 버티지 못하고 뒤로 넘어졌지만 덕분에 다친 곳은 없었다. "끄응, 마리엔. 괜찮아?" "엇? 세린, 그러는 너야말로 괜찮은 거야?" 날 받아낸 사람은 바로 세린이었다. 몸을 일으키자 내 밑에 깔려 있는 세린의 모습이 보였다. 황급히 비켜서자 세린은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고개를 붕붕 돌리는 것이 상당히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았다. 은근히 걱정이 된 나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괜찮아?" "난 괜찮아. 그러는 너야말로 어디 다친 데 없어? 꼬리에 맞은 것 아니었어?" "창대로 막았어. 덕분에 정신이 하나도 없지만." "훗, 재주도 용하네. 그걸 어느 틈에 막은 거지?" 세린은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아주 쪼오끔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보니 날 받 느라 무리를 한 모양이었다. 꼬리에 부딪치는 순간 약간 몸을 뒤로 날려서 충격을 완 화하긴 했지만 느껴지는 통증이 장난이 아니었다. 다만 세린이 멀쩡한 척하자 그의 도 움으로 크게 다치지 않을 수 있었던 내가 엄살을 부릴 수도 없어서 이를 악 물고 참고 있을 뿐이었다. 세린이 받아주지 않았다면 어디 한군데는 확실히 부러졌을 것이다. 나와 세린이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이 다른 동료들이 요이체로스를 막고 있었다. 그들도 나처럼 요이체로스의 몸을 노리고 공격하고 있었다. 그 곳을 공 격해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겐지오 아저씨의 단검과 리카의 화살은 빗나가는 일없이 요이체로스를 향해 쉬익, 날 아갔다. 하지만 아쉽게도 영혼들이 몸을 던져 막아내는 바람에 요이체로스까지 가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영혼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물론 가장 많이 영혼들을 처치한 사람은 나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에릭과 페르도 분전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에릭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최고의 검사라는 칭호는 거저 얻은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어느새 전갈의 위로 올라간 에릭은 내가 힘들게 없앤 영혼들을 나 보다 더 수월하게 상대하고 있었다. 남이 싸우는 거라 덜 힘들어 보이는 건지는 몰라 도 약간 벨이 꼬였다. 쳇, 마법만 사용할 수 있었으면 나도 그정도는 할 수 있어. 난 9서클 마도사란 말이야. 뭐 흑마법만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러나 나는 곧 투덜거리던 것을 멈추고 입을 쩌억 벌렸다. 에릭이 자신을 향해 달려 드는 영혼들의 해일을 단칼에 양단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흩어진 영혼들이 다시 모이 기 전에 갈라진 틈으로 빠져나가 쏘아지듯이 요이체로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모습 에 요이체로스의 얼굴이 흙빛이 되면서 영혼들을 무작위로 쏘아 보냈지만 에릭은 속도 를 전혀 줄이지 않고 검을 휘둘러 앞을 가로막는 상대를 모조리 베어냈다. 아니면 고 개를 살짝 젖혀 피해버렸다. 에릭이 약간의 움직임으로 영혼들의 공격을 모두 피해내 자 요이체로스는 재빨리 방어막을 쳤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에릭은 빠른 속도로 거리 를 좁혀 가고 있었다. "꺄아아악!" 숲을 쩌렁쩌렁 울리는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 눈에 팔뚝 아래 부분이 사라지고 없는 왼쪽팔을 부여잡고 있는 요이체로스의 모습이 보였다. 에릭이 방어막이 모두 형 성되기 전에 검을 휘둘러 그녀의 팔을 베어버린 것이다. 물론 에릭의 무서운 속도도 이유 중에 하나였지만 요이체로스가 접근하는 에릭을 막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팔을 내 민 결과였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잘린 것은 팔이 아니라 그녀의 목이 되었 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팔 하나를 잃은 대가로 에릭의 발걸음을 약간 늦출 수 있었 기 때문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이체로스의 팔을 베어버린 에릭은 영혼 들이 일제히 달려들자 나처럼 버팅기지 않고 재빨리 밑으로 뛰어내렸다. 혼자 전갈 위 에 있다가 공격이 집중돼서 내 꼴이 나지 않을까 염려한 것이리라. 아무튼 나와 에릭 덕분에 우리쪽의 기세는 한층 달아올랐다. 세린도 에릭에 질 수 없 다는 듯이 어느 정도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자 공격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나라고 가만 히 있을 수는 없는 법. 아직 팔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요이체로스를 직접 공격하 기는 힘들었지만 영혼들을 상대할 수는 있었다. 요이체로스는 에릭에게 당한 후로 영혼들로 만들어진 막을 거두어들이지 않고 그 안에 서 독기어린 눈초리로 우리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광기와 분노가 그녀의 눈동자 안에 서 활화산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 번 된통 당한 뒤라 방어막을 거두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미쳐 날뛰는 것이 아니라 전갈과 영혼들을 제법 냉정하게 조정하 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썩어도 준치라는 말을 떠올리게 했다. 현재 요이체로스는 우리 들의 체력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요이체로스와 우리들의 치열한 싸움은 계속되었다. 아직 유리한 것은 우리였지만 시간 이 갈수록 초조해졌다. 그 이유인즉슨 눈치없는 몸에서 신호가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힘들어! 우리 쉬자!' 라고 말이다. 하긴 요이체로스가 방어막 안으로 숨은 지 거의 20분이 다 돼가고 있었다. 아직은 버틸만했지만 언저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어쩌지? 계속 방어막 안에서 안 나올 것 같은데. 이러다 저번짝 나는 것 아냐? 그럼 애써 마법을 성공시킨 보람이 없잖아! 그렇다고 요이체로스가 치사하다는 것은 아니다 . 요이체로스와 같은 입장에 있다면 나라도 상대가 힘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단 번에 숨통을 끊어 놓을 목을 것이다. 뭐니뭐니해도 이기는 것이 중요하니까. 비겁하 게 이기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는 자들도 있지만 적어도 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배워 왔고, 그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획기적인 방법이 없을까? 방어막을 만들고 있는 영혼들을 분산시킬 만한 그런 것 말이야. 그러던 내 눈에 우연인지 아니면 필연인지 페우니아 왕자가 들어있는 수정이 들어왔다. 그 순간 머리를 번뜩이며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사실 이 방법이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는 나도 확실히 모른다. 과연 요이체로스가 그런 짓을 한다고 동요할 지는 미지수였다. 페우니아 왕자가 그녀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고는 하지만 지금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을 보면 이미 과거의 일이 된 것도 같았 다. 만약 내가 페우니아 왕자의 몸에 무슨 위해를 가할까 걱정이 돼서 왔다면 적어도 수정을 보호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어디서 저런 돌덩이(?)를 봤냐는 듯이 눈길도 주지 않았고, 한 술 더 떠 마구 꼬리를 휘둘러 대고 있었다. 그 무지막지한 꼬리에 맞으면 수정은 그대로 바스라져버릴 텐데도 말이다. 이 곳에 달려 온 이유도 거의 본능적인 이유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이 순간에 과연 본능적으로 뭔가 느껴진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데로 움직여줄 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밑져봐야 본전이었다. 반응이 없으면 그냥 삽질 한 번 했다고 생각하고 말지. 별다른 방법도 떠오르지 않는데 어쩌겠어? 그렇게 마음을 먹은 나는 겐지오 아저씨와 리카의 곁으로 가서 내 생각을 말했다. 과연 그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지금의 요 이체로스는 과거의 감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보기에는 힘들어 보였다. 그저 단편 적인 기억만 가지고 있을 뿐. 그녀는 이미 브리탠의 마법사인 요이체로스가 아니라 전 갈의 마녀인 요이체로스였다. "정말 그런 방법에 요이체로스가 넘어올까?" "내 생각에도 별로인데."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끝이 안나요. 그냥 한 번 시도나 해보자구요. 혹시 알아요? 운이 좋아서 요이체로스가 빈틈을 보일지." "......마리엔." "왜?"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른 리카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리카가 매 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도 느꼈지만 마리엔은 좀 뭐랄까 비겁...아니, 전혀 생각지 못한 방법을 잘 찾아 내는 것 같아." 리카는 황급히 비겁하다는 말을 정정했지만 이미 들을 건 다 들은 뒤였다. 아마 비겁 하다는 것도 아는 사이라고 순화해서 말한 것이 틀림없었다. 약간 울컥하긴 했지만 인 간과 마족의 생각은 다르다고 애써 자위하면서 대꾸했다. "비겁이라니? 이건 훌륭한 전략 중에 하나라구. 그리고 그렇게 본다면 요이체로스도 방어막 안에서 나오지 않고 우리 힘을 빼고 있으니까 똑같이 비겁한 거라구.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비겁에는 비겁. 당한대로 갚아 준다. 알겠어?" "우하하하, 그거 참 명언이네. 마리엔 말대로 다른 방법도 없잖아. 한 번 해보자구." 역시 겐지오 아저씨는 마음에 든다. 다른 인간들처럼 명예니 정의니 하는 것에 덜 얽 매이니까. 리카도 그냥 말을 해 본 것에 불과했는지 더 이상 왈가부가하지 않았다. 다 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우리는 여전히 요이체로스를 상대하고 있는 에릭과 세린, 페 르에게도 이 계획을 알렸다. 잠시 후, 우리들은 동시에 요이체로스에게 떨어졌다. 그 녀는 한참 공격하던 우리들이 갑자가 물러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까지는 주도권 을 쥐고 있는 건 우리였으니까. 그러나 요이체로스의 반응을 무시한 채 우리들은 계획 대로 움직였다. "하앗!" "이얍!" "간닷!" 에릭과 세린, 페르가 동시에 기합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기합소리에 요이체로스가 바짝 긴장했지만 그들이 향하고 있는 곳은 요이체로스가 아니었다. 그들의 공격 목표 는 바로 페우니아 왕자의 몸이 들어 있는 수정이었다. 겐지오 아저씨와 리카만 요이체 로스를 견제하고 있었지만 적극적인 공세는 가하지 않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요이체로스는 그냥 멍하니 서있었다. '그동안 잘 싸우더니 갑자기 획 돌아버렸나?' 하 는 의문이 얼굴에 가득 묻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한 짓을 한 것 같았지 만 이미 세 사람은 수정 앞에 도착한 뒤였다. 그들은 결계 때문에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고 그냥 허공에 대고 검을 휘둘렀다. 남들 이 봤다면 무슨 짓인가?, 하겠지만 세 개의 검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마법이 소멸되었 던 부근에서 공간이 흔들렸다. 그 것을 본 세 사람은 힘을 얻었는지 더 힘차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작았던 흔들림이 이제는 확연히 보일 정도로 거세졌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니 머지않아 결계가 깨질 것 같았다. 재빨리 요이체로스 의 반응을 살폈지만 그녀는 어리벙벙한 모습이었다. 저 것들이 뭐하는 짓이래냐? 라고 생각하는 듯한 모습. 세 사람의 계속된 공격에 마침내 소용돌이가 치는 것처럼 결계를 중심으로 세찬 바람 이 휘몰아치더니 결국에는 결계가 깨졌다. 페르가 시험삼아 검을 휘둘러보았고, 검은 어떤 것에도 막히지 않고 허공을 갈랐다. 그러나 요이체로스는 약간 눈썹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기기만 했지 여전히 다른 반응은 없었다. 나는 그녀의 시큰둥한 반응에 실망 했다. 실팬가벼. 그래서 나는 요이체로스가 아주 조금씩, 마치 기억 상실자가 예전에 알았던 것을 보고 뭔가 미심쩍어하는 것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 지 못했다. 세 사람이 수정을 향해 검을 휘두를 때까지도 말이다. 채앵. 수정과 검이 부딪치자 마치 유리잔을 스푼으로 두드릴 때처럼 맑은 소리가 났다 . 그 것보다 훨씬 큰 소리긴 했지만 말이다. 수정은 단단해서 검을 휘둘러도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았지만 한 번 검이 왔다 갔다 할 때마다 조금씩 깨져서 그 파편들이 날 렸다. 실력이 있는 세 사람이 몇 차례 그런 식으로 검을 휘두르자 수정에는 여기저기 금이 가기 시작했다. 깨끗하던 수정은 퍼즐을 맞춰 놓은 것처럼 여러 조각으로 선이 나뉘어졌다. 괜히 남의 무덤을 건드렸나벼(진짜 인간의 몸은 아니었지만 페우니아 왕 자가 죽을 당시와 같은 모습이라서 자연히 시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 는 동안 마침내 수정은 쩌저적, 갈라지고 말았다. 수정이 깨지자 수정 파편들이 우수 수 떨어졌고, 안에 들어있던 페우니아 왕자의 몸도 털썩 떨어졌다. "이젠 어쩌지?" "효과가 없나 보네요. 어쩔 수 없죠. 그만 물러나야죠." 겐지오 아저씨의 질문에 답을 한 나는 세 사람에게 그만하라고 소리치려 했다. 아무리 진짜는 아니라고 하지만 시체를 난도질하기는 좀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무엇인가 빠 른 속도로 그들에게 날아가자 나는 소리치려던 입을 다물고 말았다. 설마......요이체 로스를 보니 그녀는 뭔가 굉장히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이 왜 그런 짓 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 에릭과 세린, 페르는 더 이상 뭘해야 될지 몰라 가만히 서있던 터라 영혼들의 기습을 미리 눈치채고 대비했다. 요이체로스가 무슨 생각으로 방어막을 형성하고 있던 영혼까지 동원해서 에릭과 세린, 페르를 공격했는지 알 수 없 었지만 기회인 것만은 확실했다. 나는 요이체로스가 멍하니 있는 틈을 타 재빨리 전갈의 위로 펄쩍 뛰어 올라갔다. 나 를 발견한 그녀가 다시 영혼들을 불러들였지만 내가 조금 더 빨랐다. 나는 빠르게 창 을 내찔렀고, 쭉 뻗어가던 창은 그녀의 오른쪽 가슴을 꿰뚫었다. 살아있는 생명체를 찌를 때면 느껴지는 감촉이 창대를 통해 느껴졌다. 진로를 막는 듯한 그 것의 속으로 더 들어가기 위해 손에 더 힘을 줄수록 그 느낌은 더욱 커져갔다. 나는 창날이 요이체로스의 등을 뚫고 나오자 창을 다시 회수했다. 가슴에 박혀있던 창 이 빠져 나오자 요이체로스의 오른쪽 가슴에는 꼭 창날의 둘레만큼 되는 구멍이 휑하 니 뚫려 있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런지 요이체로스는 처음에는 멍하니 구멍 이 난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피도 나지 않던 그 상처에서 피가 한 방울 뚝 떨어 져 내렸다. 그리고 두 방울, 세 방울, 네 방울...얼마지나지 않아 구멍이 나버린 가슴 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끼아아악!!!"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피를 보면서 고통때문인지 아니면 충격때문인지 요이체로스가 비명을 울렸다. 계속되는 그녀의 비명에 나는 빨리 숨을 거두어주기 위해 창을 고쳐 잡았다.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닌데 빨리 목숨을 끊어주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자비로운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갑자기 요 이체로스의 몸에서 붉은 전류가 파박 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전류는 요이체로스의 몸 을 감싸더니 점점 커져만 갔다. 위험을 감지하고 밑으로 뛰어내리고 보니 어느새 전류 는 전갈의 몸까지 퍼져가고 있었다. 뭐야? 마법인가? 하지만 에테르 프리즈가 시전되면 누구도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데. 위협적으로 파지직거리는 전류는 점점 붉은 기운이 짙어지면서 주변으로 방출되고 있 었다. 우리들은 혹시라도 생길지 모르는 불상사를 대비해 재빨리 루시가 있는 곳으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 그 때까지도 요이체로스의 비명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 것은 고통스러운 기운보다는 왠지 슬픈 기운이 묻어나는 비명이었다. 알 수 없는 현상에 절 로 긴장됐지만 두려운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전류가 마지막 발악으로 보이는 것 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남은 생명력을 품어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 전류에 휩싸여 요이체로스의 모습도, 전갈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영혼 들은 자신들을 얽매고 있던 줄이 풀린 것처럼 자유롭게 위로,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계속 파지직거리던 전류는 한순간 주위를 모두 붉은 빛으로 물들일 정도로 확 밝아졌 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어느 정도 빛이 사라진 듯 하자 다시 살며시 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어느새 전류는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대기 중에 흩어지고 있는 붉은 색의 입자가 보이고 있었다. 그 입자들은 시간이 지나자 주변의 대기에 동화되 는 것처럼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입자가 모두 사라진 곳에는 요이체로스가 서있었 다. 하지만 전갈과 연결돼있던 흉측한 여인네는 온데간데없고 단아한 얼굴의 여인네만이 보였다. 만약 그녀의 오른쪽 가슴에 구멍이 뚫려있지 않았다면 나는 절대 그 두 사람 이 동일인임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가 있냐? 그 추 녀가 바로 저 여자였단 말이야?! 믿을 수가 없어. 그녀를 봉인에서 풀어줬던 사람이 임의로 만들어준 몸이 죽을 때가 되자 사라지고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신기한 점이라면 봉인 전 마법사들과 싸우다 생긴 얼굴의 흉터도 사라지고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 이유를 심각하게 생각하기도 전에 요이체로스는 스르륵 쓰러져버렸다 . 나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쓰러져있는 요이체로스를 향해 살살 다가갔다. 갑자기 일어나 공격을 할지도 몰랐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하면서 말이다. 하지 만 내가 바로 지척까지 다가갔음에도 불구하고 요이체로스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 았다. 저거 죽었나? 허리를 숙이고 살며시 살펴보던 나는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요이체로스의 눈은 더 이상 전처럼 광기에 사로잡혀있지 않았다. 그리고 맑은 그녀의 두 눈에서는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긴 슬프기도 하겠지. 얼마나 기구한 인생이었는가. 한순간에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미쳐버렸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기 손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버린 후라니. 나 는 약간 안된 마음이 들어 고통없이 단번에 보내주기로 마음먹었다. 본인도 더 이상 구차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겠지. 나는 창을 위로 치켜들고 그녀의 심장을 내리찍으려 했지만 누군가 내 손을 꽉 붙잡았다. "그만둬요!" 나를 막은 사람은 시이라였다. "왜요? 어차피 이대로도 죽어요. 그냥 고통없이 끝내주는 게 낫잖아요." "하지만 그녀의 눈을 보셨나요?" 어느새 다가온 다른 사람들도 시이라의 말에 요이체로스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은 저편에 떨어져있는 페우니아 왕자쪽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짜증이 밀려왔다. 요 이체로스가 딱한 여자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어차피 죽을 거 다. 이 곳에는 치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그럼 고통스럽게 죽는 걸 보 는 것보다 빨리 끝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불만어린 내 얼굴을 본 시이라는 가만히 입 을 열었다. "최소한 죽음 정도는 자신이 원하는 죽음을 택하도록 해주세요." 시이라의 말이 무슨 소리인지 몰라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죽은 듯이 가만히 있던 요 이체로스가 갑자기 움직였다. 그녀는 우리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오직 앞으로 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일어설 힘은 없었는지 그대로 땅을 기어서 갔다. 그녀가 향하고 있는 곳은 페우니아 왕자가 있는 곳이었다. 사랑하던 사람 곁에서 죽고 싶다는 것인가. 우리들은 그런 요이체로스를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녀가 지나간 곳으로 길게 핏줄기들이 이어졌다. 요이체로스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조금씩 조금씩 페우니아 왕자를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한참만에 페우니아 왕자의 앞까지 기어간 요이체로스는 힘겹게 페우니아 왕자의 몸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 것은 애정 표현이라기보다는 그를 보호하려는 몸부림에 가까웠 다. 우리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사이 요이체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작아서 하마터면 듣지 못했을 정도였다. "전하는...페우니아 전하의 몸에는 손대지 말아주세요." 우리가 수정을 깨버리자 그의 몸에 무슨 위해를 가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제정신이 돌아온 그녀는 거의 간청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모습에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특히 '페우니아 왕자의 몸을 이용해서 저 마녀를 없애버리는 거야!' 라 고 주장했던 나는 죄책감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우리의 침묵을 다르게 해석한 요이체로스는 다시 한번 힘겹게 말을 이었다. "여기 있는 목들은 모두 반역자들의 목이예요. 용서할 수 없었어요. 나에게서 모든 것 을 빼앗아간 자들이니까. 정말 미웠어요. 그리고 아직도 이들을 죽인 건 후회하지 않 아요. 하지만, 하지만 다른 사람까지......제,제가 죽인 거예요. 페우니아 전하는 제 발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염치없다는 거 알지만 제발요. 이렇게 부탁드릴께요." 요이체로스는 페우니아 왕자만은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울먹거리면서도 그렇게 사정하는데 차마 '안돼!' 라고 할 수 없었다. "페우니아 전하는......전하는......" "알았어. 손 안 댈게.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리지 않을게." "가,감사해요. 전......전......." 요이체로스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광기에 젖어 날뛰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그동안 저 여자를 죽이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던 것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 반역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 저런 모습으로 살아갔으리라. 그나마 죽기 전에라도 자신을 되찾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 수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로서 는 자신이 죽고 있는데도 다른 사람, 그 것도 이미 죽어버린 사람의 몸을 걱정하는 그 녀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인간과 마족의 차이일까? 아니면 사랑을 해본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일까? 그 것이 어떤 이유이든 마지막 가는 길이나마 편하게 보내주자는 마음에 나는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서 말했다. "걱정마. 같이 묻어줄게. 그리고......아마 페우니아 왕자도 기다리고 있을 거야." 방금까지만 해도 피튀기며 싸우던 상대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낯간지러운 일이었지만 이제 곧 죽는데 이정도는 해줘도 되지 않겠는가. 내 말에 서서히 눈이 감 기던 요이체로스의 얼굴에 처음 보는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어째서 그렇게 행복 해 보이는 미소를 생전에 짓지 못하고 죽어가면서 짓는 것인지 안타까웠지만. 인간들 틈에 있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면이 많아지는 모양이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 요이체로스는 말이 채 마치지 못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너무 평안해 보였다 . 드디어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모든 증오와 살심, 슬픔에서 벗어나 페우니아 왕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사람은 죽으면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낙원에서 다시 만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태초의 법칙에 따 라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가끔 신이나 마족의 마음에 든 몇몇의 영혼만이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게다가 차원계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았다. 다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전무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잠자고 있는 것 같은 두 연인을 땅에 함께 묻어 주면서 그 두 사람이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빌어주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 다. 모든 생명들이 잠들어있는 이 시간, 숲의 한 곳에 잠들지 않은 한 명의 사람이 있었다 . 그는 후두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그렇지 않아도 어두운 숲 속에서 그의 모습을 확인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무덤 앞에 서있었다. 약간은 큰, 마치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 이 한꺼번에 묻혀 있는 듯한 그 무덤 근처에는 이제 막 딴 것 같은 꽃들이 놓여있었다 .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는 원래의 모습으로 그의 곁에 갈 수 있었으니 기쁘시지 않습니 까?" 후두에 가려서 다른 부분은 보이지 않았지만 하얀 달빛은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있는 그의 입술을 비추고 있었다. 로마니 숲의 괴사건을 해결한 우리들은 로마니 마을 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며 서델피르 로 갔다. 가스톤과 다른 일행들도 찾고 이 일을 부탁했던 서델피르의 시장에게 일의 경과를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시장은 우리가 요이체로스를 처치하고 나타나자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고 달려와 열렬히 환영했다. 그는 우리들을 지원하기 위해 신관들과 병 사들을 모으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도 없이 우리끼리 알아서 해결을 해버린 것이다. 희 대의 마녀를 아무런 인명 피해도 없이 처리하자 시장은 엄청 놀라워했다. 그리고 내 활약이 가장 컸다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극찬을 해댔다. 뭐 그정도 실력이 되니 까 에릭이나 세린 같은 미남들을 데리고 다닐 수 있었다나 어쩐다나. 그리고 가스톤은 레리이나 여왕의 도움으로 신관들에게 치료를 받고 깨끗이 완쾌해있 었다. 그는우리를 돕지 못해서 무척이나 미안해했지만 있었다고 해도 큰 도움은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내 말에 기가 팍 죽어서 구석으로 가서 뭐라고 궁시렁됐다. 물론 내 가 한 번 째려봐줌으로써 그의 입을 막아버렸지만. 그리고 장난을 치는 나와 가스톤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은 오랜만에 마음껏 웃었다. 서델피르에서 이틀동안 머물면서 피로를 푼 우리 일행은 베리언트로 향했다. 그 곳에 서 가하브의 신관인 도로시라는 여자를 만나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쉽게 도 도키오 할아버지들과는 서델피르에서 헤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이번에 세를리드로 갔다가 그 곳을 어느 정도 돌아다닌 후에 소피린 대륙으로 건너갈 계획이었다. 함께 요이체로스를 상대하면서 정도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헤어져야 한다니 정말 많이 아쉬 웠지만 서로의 길이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떠나오면서 토비에게 마지 막 인사를 하고 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냥 콱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위험할지도 모 르는 곳에 그런 어린애를 데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중에 꼭 한 번 찾아온다는 약 속을 하고 헤어졌다. 다행히 베리언트로 가는 동안은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 우리들을 방해하는 것이 없자 자연히 여행 속도는 빨라졌고, 예정보다 조금 일찍 베리언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 베리언트는 규모가 약간 큰 것을 제외하고는 남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도시였다. 베 리언트에 도착한 우리들은 우선 가하브의 신전을 찾아갔다. 그리고 신관 중 한 명을 붙잡아서 도로시 신관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려 했다. 그러나 우리가 뭐라고 하기도 전 에 한 신관이 먼저 우리를 알아보고 반색하며 말했다. "앗! 마리엔님 일행이시지요? 레리이나 여왕폐하께서 이 곳에 들르신다고 해서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오셨군요! 정말이지 이렇게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여러분들을 꼭 한 번 뵙고 싶었어요. 페하의 말씀으로는 모두 실력자라고 하시던데 모두 미남미녀들이시 네요. 저기 그런데 마리엔님이 어떤 분이세요?" 주황색 머리를 길게 땋아서 등허리로 늘어뜨린 신관은 평생에 한번이라도 만나기 힘든 사람을 만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희열에 가득 차있었고, 입술은 쉴 새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콧등에는 깨를 뿌려놓은 것처럼 주근깨가 자리하 고 있었는데 실례일지는 몰라도 그녀의 이미지와 잘 어울렸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평 범해 보이는 여자였다. 그리고 평범하게 생긴 이 신관은 기대감에 가득찬 얼굴로 우리 들을 둘러보면서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나는 조금 전의 질문을 통해 그녀가 열렬히 찾고 있는 사람이 나임을 알 수 있었다. "제가 마리엔인데 무슨 일이지요?" "아! 이 분이 그 훌륭하신 마리엔님이셨군요! 소문은 많이 들었어요! 사악한 마녀인 요이체로스를 혼자서 물리치셨다면서요?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만나 뵙고 싶 었는지 몰라요. 게다가 이렇게 아름다우시다니. 정말 존경스러워요! 저기 손 한번 잡 아봐도 될까요?" 그녀는 경탄어린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여기도 소문이 그렇게 난 건가? 거의 나를 떠받들다시피 하는 신관의 반응에 기분은 좋았지만 티를 내지 않고 슬쩍 동료들의 눈 치를 살폈다. 어떻게 그렇게 퍼진 것인지는 몰라도 요이체로스를 나 혼자서, 그 것도 아주 가뿐히 이겨버렸다는 소문이 스피린 전역에서 돌고 있었다. 물론 내 활약이 가장 두드러지긴 했지만 모든 공이 내게 돌아오자 동료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 게다가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내 신분도 모조리 드러나 버렸다. 지금 항간에 떠도는 수많은 소문을 대충 간추려보면 이렇다. [페드인 왕국의 제 1공주이신 마리엔 오페나 드간 페드인 공주님께서 마물들 때문에 어려워하는 스피린인들을 위해 직접 이 곳까지 오셔서 그 고귀하신 몸을 돌보시지도 않으시고 열심히 우리를 도와주고 계신다. 그 공주님은 자기들만 아는 귀족들과는 달 리 평민들의 삶에도 아주 관심이 많으셔서 돌아다니실 때는 평민의 복장을 입고 다니 신다. 그리고 마리엔 공주님은 성녀님에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계신데다 문 무를 겸비하고 계시는 이 시대의 영웅이다. 그런 분을 한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당 장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다행이라면 생김새까지는 알려지지 않아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 다. 이렇게 나를 추켜세우는 소문은 베리언트까지 오면서 골백번은 더 들은 바 있었다 . 두 사람만 보여도 '위대하시고 아름다우시며 현명하신 마리엔 공주님'에 대한 화제 로 시끌법쩍했기 때문에 자연히 우리들의 귀에까지도 이 소문이 들어온 것이다. 그리 고 그 소문을 들으면서 은근히 기분이 좋았던 건 사실이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칭찬하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단지 문제라면 같이 싸웠던 다른 사람들의 활약상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나에 대한 소문만 계속 부풀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뭐 가스톤과 죠안, 엔젤, 히크리트 신관은 별로 도움도 되지 않았으니 상관이 없지만 에릭과 세린에제는 쪼오끔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러나 슬쩍 살펴보니 두 사람 모두 언짢은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에릭은 원래 무관 심한 놈이라 시큰둥했고, 세린은 빙글거리고 있었다. 하긴 소문이 쪼오끔 과장된 면이 없잖아 있긴 했다. 세린은 그 것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우리들끼리만 있을 때면 나에 대한 소문을 곱씹으면서 한바탕 웃곤 했다. 에릭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 지만. 특히 마리엔 공주님은 마음이 비단결같이 고우셔서 우리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 신답니다, 라는 대목에서는 거의 숨이 멎을 정도로 웃어제꼈다. 이 말에는 에릭마저도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이제는 면역이 됐는지 자신들을 싸그리 무시하고 오로지 나만 보면서 눈을 빛 내는 신관을 보면서도 동료들은 그다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당연히 나는 매우 기분 이 좋았다. 다른 인간도 아니고 신관이라는 작자까지 나를 존경한다지 않는가. 나는 생긋 웃으며 친히 기특한 신관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해주었다. 그러자 신관의 주위로 감격의 물결이 치는 것이 아닌가. "정말 영광이에요! 마리엔님과 악수를 하다니! 이 손은 절대 씻지 않을 거예요. 그리 고 앞으로 마리엔님과 함께 여행을 할 수 있게 돼서 너무너무 기뻐요! 제가 마리엔님 의 곁에 있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가하브님께 얼마나 감사드렸는지 몰라요!" "같이 여행한다니? 그럼 혹시 도로시 신관이세요?" "네. 맞아요. 제가 도로시예요. 제 이름을 마리엔님이 직접 불러주시다니. 정말 기뻐 요!" 도로시 신관은 내가 자신을 이름을 불러주자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감격해했다. 그리고 그녀의 격렬한 반응에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당황했다. 그동안 소문을 듣고 나 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몇 명 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정도가 심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이건 거의 광신도 수준이었다. 나도 도로시 신관의 그런 모습에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레리이나 여왕이 붙여준 사 람이니 내가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렇듯 존경한다는 시 선을 마구 보내고 있으니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가하브의 신관들은 거의 중립 에 가깝지만 저건 정도가 좀 심하지 않은가. 하지만 은근히 기분이 좋고 안심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동안 도로시 신관도 히크리트 신관처럼 꽉 막힌 사람이면 어떻게 할까하고 걱정했었다. 겁이 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되면 앞으로의 여행이 더욱 고 달퍼질 것은 자명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가장 예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래요? 그럼 앞으로 같이 다니게 되겠군요. 우리 서로 잘 지내봐요." "물론이지요! 아, 이러고 계실 것이 아니라 신관장님께 안내를 해드릴게요. 그 분도 마리엔님을 보고 싶어하세요." 도로시 신관은 잔뜩 들떠서 앞장서기 시작했고, 우리들은 그 뒤를 따라갔다. 신관장은 여왕이 직접 잘 대접하라고 명령한데다 내 신분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극진히 대접 했다. 그리고 신관장 역시 나에 대한 소문을 듣고 호감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신관장 과 인사를 하는 동안에도 도로시 신관은 옆에서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 었다. 신관장도 도로시 신관의 남다른 나에 대한 존경심을 알고 있었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관장과 신전 내의 주요인물과 인사가 끝나자 도로시 신관의 안내를 받아 우 리가 머물 방으로 갔다. 모두 각방을 주긴 했지만 신도들이 머무는 방이라 그런지 작 고 단촐한 방이었다. 그러나 내 방만은 꽃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이 누군가 일부러 꾸 며놓은 모양이었다. "마리엔님, 마음에 드세요? 제가 정원에 있는 꽃 중에서 제일로 예쁜 꽃들로 꾸며놓은 거랍니다. 방이 너무 누추하긴 하지만 그래도 깨끗이 청소도 해놓았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아닙니다. 이정도는 마리엔님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어요. 마리엔님은 제가 가하브님 다음으로 존경하는 분이세요!" 도대체 소문이 어떻게 퍼졌기에 이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 다. 약간 찔리긴 했지만 요이체로스를 없앤 것은 사실이고 내가 이런 소문을 퍼뜨린 것도 아니잖는가. 원래 소문이란 것이 사람의 입을 거칠수록 부풀려지고 과장되는 법 이다. 그리고 도로시 신관이 들은 소문은 이미 부풀려질 대로 부풀려진 소문 중에서도 가장 나를 찬양하는 소문이었던 것 같았다. 그래도 도로시 신관이 20대 초반이라 다 행이지 만약 히크리트 신관처럼 나이도 많은 사람이 그랬다면 조금 거북했을 것이다. 도로시 신관은 나를 방으로 안내해 준 후에도 한참동안 같이 있다가 다른 신관의 부름 을 받고 방을 나갔다. 영 내키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위가 높지 않은 도로시 신관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히크리트 신관이 고위 신관이라 도로시 신관도 한 재간할 줄 알았던 나는 처음에 도로시 신관이 보통 신관이라는 사실 에 약간 놀랐다. 물론 나를 존경해마지 않는 도로시 신관의 앞에서는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 하지만 가하브의 신관은 다른 신관과는 달리 그 수가 매우 적었기 때문 에 고위 신관 중에서는 짬을 낼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대신 보통 신관 중에서 도 그런대로 능력이 있는 도로시가 대타로 합류하게 되었다. 도로시도 장래가 촉망받 는 신관 중에 한 명이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가하브의 신관은 정령의 신을 모시는 신관인만큼 정령을 소환하지 않고도 정령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가하브에 대한 믿음이 강할수록 강한 정령의 힘을 낼 수 있고, 대 신관의 경우는 거의 정령왕에 준하는 힘을 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 신전은 워 낙 부패해서 그 정도의 힘을 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다른 신관들에 비해 공격력이 있다는 건 사실이었다. 대신 가하브의 신관은 치료쪽은 매우 약해서 고위 신관정도가 되야만 치료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고, 그 것조차 다른 신을 모시는 신관에 비해서는 효력이 약했다. 그렇기 때문에 가하브의 신관을 정령술사로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정령술사와는 엄연 히 다른 존재였다. 정령술사는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지만 가하브의 신관은 믿음만 있으면 됐다. 하지만 마법사가 되면 가하브의 신관보다 더 강력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고 정령도 어느정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굳이 가하브의 신관이 되려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가하브의 신전은 비교적 소박한 편이었다. 가하브가 자연에 깃들어 있는 정령을 관할 하는 만큼 인위적인 것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하 브를 모시는 신전이 장식으로 덕지덕지 꾸며져있을 수도 없지 않은가. 그리고 소박해 보이는 신전을 드나드는 신도의 대부분은 평민들이었다. 그 중에도 농민들이 많았다. 이는 농사가 그 해 기후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고 할만큼 자연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 문이었다. 풍년이냐 흉년이냐하는 건 모두 인간의 힘이 아닌 자연의 힘이 결정한다. 그래서 농민들은 자연에 깃들어있는 정령의 신인 가하브를 제르마 못지않게 우러러 보 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에는 한가지 맹점이 있었다. 정령들이 불, 물, 바람, 땅이라는 자 연의 거대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맞지만 그들이 자연 현상을 관장하는 것은 아니 었다. 땅의 정령이라고 해서 땅을 비옥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물의 정령이라고 해서 비를 내리는 것도 아니었다. 이론상으로는 정령들을 이용해서 그런 비슷한 효과를 낼 수는 있긴 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정령을 부리는 사람들이 한 일이고 광범위한 범위까지 영향력이 미치지 않았다. 즉 자연 현상을 조절하는 것은 정령이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모르는 사람들은-평민들 중에서도 배우지 못한 사람들- 가뭄이라도 나면 가하브가 진노했다고 말하곤 한다. 무지한 인간들은 어쩔 수가 없다 니까. 하지만 소박한 신전의 모습과 손에 항상 흙을 묻이고 사는 농민들의 모습은 잘 어울렸 다. 그래서 귀족들은 은근히 가하브는 평민들이나 믿는 신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신 도의 대부분이 평민인데다 신전의 모습도 간결 그 자체이니 귀족들의 마음에 들지 않 는 건 어찌보면 당연했다. 게다가 가하브는 주신 제르마를 제외한 5대 신 중에서 가장 튀지 않는 신이었다. 빛의 신 아드네리는 어둠과 가장 대비되는 위치에 있으면서 패도적인 빛의 힘을 지니고 있 었고, 생명의 신 바르셀은 생명의 탄생과 관여하며 엄청난 치유력을 가지고 있었다. 바르셀의 권능은 과거 몇차례 그의 신관을 통해 죽은 사람을 살려낸 것으로 잘 드러났 다. 그리고 자애의 여신 세리자드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절대적인 힘을 보내주 지만 어둠의 종족에게는 잔혹하기로 유명했다(마족들 사이에서는 피에 미친 년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미와 순결의 여신 로디테는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여신으로 여자들이 많이 믿는 신이었다. 그러나 가하브만은 유명한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면 신관들이라도 잘나야 될 것이 아닌가. 원래 신의 이름은 그를 따르는 신관들 이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유명해지냐 마느냐가 결정되는 것이다. 각 신을 모시는 신 관들의 특징을 한 번 보면 가장 강력한 신성력을 가진 아드네리의 신관, 엄청난 치유 력을 자랑하는 바르셀의 신관, 마물들을 상대로 가장 활약하는 세리자드의 신관, 아름 답기로는 엘프에 뒤지지 않는 로디테의 신관 이 얼마나 튀는가. 그러나 가하브의 신관 은 뭐하나 두드러진 면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은근히 5대 신중에서 가하브를 가장 낮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신전은 신전. 아무리 장식을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가하브의 문양이 여기저기 조각되어 있고, 유명한 신관들의 상도 종종 눈에 들어왔다. 건물 하나만 해도 집 여러 채가 들어갈 정도로 컸고, 그런 건물이 한두개가 아니었다. 그리고. "뭔 꽃들이 이렇게 많아?" 그렇다. 가하브의 신전은 건물이 평범한 대신에 아름다운 꽃밭이 있기로 유명했다. 가 하브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면서 신전 내에 꽃밭을 쫘아악 깔아놓은 것이다. 아마 가하브의 신전은 다른 신전이 건물을 멋지게 짓느라고 드는 건축비를 정원 유지 비로 쓰고 있을 것이다. 꽃밭으로 승부하겠다 이거냐? 꽃냄새가 진동을 하는구만. 건물 사이마다 꽃밭들이 향기로운 내음을 내며 펼쳐졌고, 그 곳에 있는 형형색색의 꽃 들은 살랑이는 바람을 따라 물결치고 있었다. 마치 꽃의 바다를 보는 느낌이랄까. 이 모습을 보고 가하브님은 역시 자연을 사랑하시네 어쩌네 하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인간 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바보같은 놈들은 어딜 가나 있기 마련이니까.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한다고 떠들어대는 것치고는 참 인위적이었다. 추운 지방에서 자라는 꽃도 , 따뜻한 지방에서 자라는 꽃도, 습한 지방에서 자라는 꽃도 한 곳에 모여있는데 이게 어딜봐서 자연스럽단 말인가. 그저 예쁜 꽃이라면 다 모아놨구만. 이렇게 꽃들이 기 후를 초월하면서까지 필 수 있었던 이유는 이 꽃들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신성력을 사 용한 탓이었다. 꽃 가꾸는데 신성력을 쓰다니. 역시 신관들치고 제정신인 인간은 없는 게야. 차라리 직업을 정원사로 바꿔라. 게다가 누구도 꽃밭 근처에는 얼씬도 않았던 것이 역력했다. 보아하니 꽤나 비싼 돈 주고 꽃을 구입해온 것 같은데 누가 밟아버리면 얼마나 속이 쓰리겠는가. 잠시 주변을 살펴본 나는 근처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슬며시 꽃밭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화사하게 피어있는 꽃들을 사뿐히 즈려밟아 주었다. 한 곳만 밟고 돌아다닌 것이 아니라 사방군데를 팔짝거리면서 돌아다녔다. 그 리고 누가 오기 전에 재빨리 꽃밭에서 나와 내가 이루어 놓은 위업을 감상했다. 너무 나 완벽한 상태로 피어있어서 인위적으로 보였던 꽃밭이 이제야 자연스러워 보였다. 꽃밭의 중간 중간에는 눈밭을 밝고 지나면 발자국이 남는 것처럼 움푹 패인 곳들이 생 겼다. 물론 그 곳에 있는 꽃들은 예쁘게 짓밝혀있었다. 훗, 이제야 자연스럽군. 솔직히 단 한송이의 꽃도 밝혀지지 않은 게 뭐가 자연 그대로 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는 거야? 숲 속에 피어있는 꽃들을 보란 말이다. 숲을 지나는 사람이나 동물들에게 수도없이 밟힌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가하브의 신관들에게 새로 운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근처에는 아무도 다가가지 못하고 신주단지 모시듯이 놔두 는 것보다 이렇게 몇 번 밟아주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말이다. 잠시 변한 꽃밭의 모습 을 바라보던 나는 다다다 뛰어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무리 도로시 신관이 나를 영웅 보는 듯이 한다지만 그래도 지들 잘난 맛에 사는 신 과 연관된 이 곳과 이 곳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했다. 완전히 정반 대의 입장에 있는 자들이니 좋아할래야 할 수도 없었고, 좋아하고 싶지도 않았다. 도 로시 신관은 예외적으로 마음에 드는 편이지만 이미 히크리트 신관의 영향으로 신관을 극도로 싫어하게 된 것이다. 솔직히 이 곳에 있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신관들의 면상을 보고 있느니 베리언트 시내에나 나가려고 했지만 동료들이 막았다. 차마 혼자서는 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내 안위를 걱정하는 갸륵한 마음때문이 아니라 내가 행여나 무슨 짓을 벌이지는 않을까 해서였다. 그렇다고 누가 따라가자니 모두 푸욱 쉬고 싶었기 때문에 함께 나가 고 싶은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절대로 신전 밖을 벗어나지 말란다. 가하브의 신관들이 내게 싫은 소리를 한 적은 없었지만 신관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모든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런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놓을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그래서 이렇게 작은 일로나마 신관에 대한 반감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쪼잔하다고 할지도 모르나 누가 내 입장이 되어 보아라. 정말 정말 싫은 놈을 떠받드는 놈들과 함께 있다고 생각해보란 말이다. 이런 짓이라도 하고 나니 조금 뿌 듯해졌다. 그 후로도 꽃밭에서 뛰어다니기도 하도 신관들의 상을 발로 차고 다녔다. 한참동안 해코지 아닌 해코지를 하며 돌아다니던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동료들 은 모두 자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누 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마리엔님, 도로시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와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면서 도로시 신관이 들어왔다. 도로시 신관은 들어 오자마자 내 맞은편으로 쪼르르 달려와 앉았다. "마리엔님, 혼자 심심하셨죠? 다른 분들이 피곤하셨는지 모두 주무시더군요." "그동안 제대로 쉴 틈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아까 나갔던 일은 다 끝났나 보죠?" "아니요. 사실은 제가 신도분들을 안내하는 역할입니다. 하지만 오늘만은 특별히 부탁 해서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왔습니다." 그 말을 하는 도로시 신관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거야 원. 나는 약간 쑥 스러워져 콧 등을 긁적였다. 내 평생 이런 시선을 받아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두려움 에 가득찬 시선은 많이 받아봤지만 말이다. 도로시 신관은 그동안 나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는지 쉴새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마리엔님은 페드인 왕국의 공주님이시죠?" "그렇긴 하죠." "그럼 형제들은 어떻게 됩니까?" "위로 오빠들이 2명이고 저와 동갑인 여자애하고 여동생이 한 명 있어요." "그럼 다른 공주님들도 마리엔님처럼 강하세요?" "그, 그렇지 않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럼 마리엔님이 나중에 여왕님이 되시는 건가요? 굉장해요!" 나는 흥분하는 도로시 신관을 붙잡고 페드인 왕국은 스피린과는 달리 보통 왕자들이 국왕이 된다고 길게 설명을 해주어야만 했다. 도로시 신관 역시 어쩔 수 없는 스피린 사람이었는지 자꾸 '왜 약한 남자가 왕이 되냐'고 묻는 바람에 진땀을 흘리긴 했다. 한참만에 문화의 차이를 설명하고 간신히 이해시키자 도로시 신관은 무척이나 낙담했 다. 공주도 여왕이 될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라디폰 공작이 나를 여왕으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지만 내 자신이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에 그 런 말은 생략했다. 왠지 이 여자가 그 사실을 알면 이런 소문을 퍼트릴 것 같았기 때 문이다. [마리엔 공주님은 페드인 왕국의 차기 국왕으로 가장 유력한 후보입니다] 나중에는 이 소문이 차기 국왕으로 결정났다고 퍼질 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 일은 절대 사양하고 싶었다. 다행히 도로시 신관은 이 문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 다. 대신 요이체로스를 쓰러드린 나의 활약상을 듣고 싶다며 졸랐다. 도로시 신관은 내가 한마디할 때마다 감탄성을 터뜨리거나 놀라는 등 즉각 반응을 보 여왔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으쓱해져서 내 활약상을 쪼오끔 부풀려버렸다. 원래는 다 른 동료들에게 미안해 그들을 띄어주겠다는 의도였으니 갈수록 그런 목적은 퇴색되었 다. 하지만 사실을 바탕으로 했으니까 상관없겠지. 때에엥. 마침 요이체로스를 어떻게 쓰러뜨렸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종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죠?" "이 소리는 한달에 한 번 있는 대예배를 알리는 종소리입니다. 대예배는 종소리가 울 리고 20분 후에 시작합니다. 이제 가봐야되겠군요. 늦게 가면 예배 시간에 늦을지도 몰라요." 그 말을 하고 도로시 신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아쉬운 기색이 없는 걸 보 니 그래도 신관은 신관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곧 착각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자 도로시 신관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마리엔님은 안 일어나세요?" "내가 왜요?" "그거야 당연히 대예배에 가야하잖습니까." 뭬라! 나보고, 이 나보고 예배에 참석하라고오~?! 차라리 그 시간에 잠을 자는게 백배 는 더 나았다. 나는 황당하고 어이없고 당혹스러워서 반문했다. "예배요?" "네. 대예배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빠질 수 없습니다." 그건 신관들의 이야기잖아! 민간인은 예배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잖아! 나는 인상을 팍 팍 구기면서 말했다. "다른 동료들은 자고 있잖아요." 무작정 싫다고 하기가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안가는데 왜 나만 가야 하느냐?'고 따지 려고 했지만 그런 내 의도는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다른 분들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른 신관들이 그 분들을 깨우고 있을 겁니 다. 신관장님이 어지간하면 참석하시라고 전하라고 했거든요. 이렇게 훌륭하신 분들이 예배에 참석해주시면 영광이라면서요." 영광같은 소리하고 있네. 겨우 그런 이유로 우리를 불렀을 리가 없었다. 나중에 우리 들이 이 곳에서 가하브에게 예배를 드렸다고 떠들어대면서 자기 신전의 이름을 유명하 게 하려는 수작이 틀림없었다.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찍힌 신관들이기에 당연히 나쁜 쪽으로 비춰졌다. 도로시 신관은 내가 인상을 찡그리며 머뭇거리던 이유가 동료 들도 참석해야 하는데 자고 있어서 걱정하는 것으로 아주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영락없이 예배에 참석해야 될 것 같아 딱 잘라서 '가기 싫다'라고 말하려고 했다. "한 번 예배를 참석하고 나면 마음이 깨끗이 씻기는 느낌입니다. 그러고 나면 좀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할 수가 있지요. 마리엔님은 이런 기분을 다른 분들에 게 맛보게 해주고 싶었던 거지요? 역시 마리엔님은 다르십니다! 전 정말 감탄했습니다 !" '난 가기 싫어!' 라고 외치려고 벌어졌던 입이 다시 다물어졌다. 도로시 신관은 내가 예배에 참석할 것은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게다가 내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좋 은 예배에 가지 않을까봐 걱정했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를 존경해마지 않는 도로시 신관을 실망시킬 수는 없어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사실 그 녀가 나를 계속 존경어린 눈으로 바라보길 바라는 마음이 마음 깊숙한 곳에 있었다. 그렇게 우물쭈물하던 나는 결국 그녀의 손에 이끌려 예배당에 가게 되었다. 예배당에 가보니 과연 도로시의 말대로 히크리트 신관을 제외한 모든 동료들이 와있었 다. 히크리트 신관은 다른 신을 모시는 사람이기에 강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들 을 보자 나 혼자만 이 지겨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약간의 위안이 됐다. 동료들은 한참 단잠을 자다가 끌려나왔는지 아직도 완전히 정신을 못차린 것처 럼 보였다. 그러나 잠이 덜 깬 눈으로 멍하니 있던 동료들은 내가 도로시 신관과 함께 오자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왜 저래? 나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마리엔이 순순히 왔어." "이럴수가!" "분명히 오기 싫다고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헉, 마리엔이 신을 믿었단 말이야?" 잠이 덜 깬 것이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 앞에서 저런 말은 할 수 없었다. 하지 만 이번만은 정말 그들의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라 살짝 흘겨 봐주는 것으로 넘어 갔다. 우리 일행은 도로시 신관에 이끌려 예배당의 가장 앞자리로 갔다. 보통 개인적 으로 기도를 할 때면 바닥에 그냥 무릎을 꿇고 하는데 지금은 대예배가 그런지 긴 의 자들이 놓여 있었다. 자리에 앉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배당은 신관들로 가득찼다. 기분이 무척이나 찜찜 했다. 신전 한가운데에서 신관들이 우글우글거리는 있는 곳에 있다는 생각이 들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내가 여기서 뭘하는 거야? 도로시 신관이 존경한다는 말 만 하지 않았어도 이런 기분 나쁜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리엔, 왜 그래?" 에릭이 정말 드물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내가 왜?" "별로 편해보이지 않아서." 별로 편하지 않다뿐이겠냐. 무섭진 않지만 그래도 무진장 묘한 기분이 드는 것이 영 좋지 않았다. 그러나 어설픈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괜찮아." "그래? 힘들면 가서 쉬어." 에릭의 말에 정말 힘들다고 하면서 가서 쉴까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순간에 신관장이 나타나서 빠져나갈 기회를 잃고 말았다. 신관장은 단상 위에 올라간 후에 주변을 한 번 쓰긋 훑어보고 입을 열었다. "모두 와줘서 고맙군요. 특히 이 자리에 자리해주신 마리엔님과 그 일행분들게 정말 감사드립니다. 다른 분들도 이분들에 대해서는 소문을 들어 익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 됩니다. 바로 마녀 요이체로스의 손에서 많은 사람들을 구해주신 고마우신 분들입니다 . 정말 환영합니다. 가하브님께서도 정말 기뻐하실 겁니다. 여러분들께 가하브님의 은 총이 영원히 함께 하기를." 신관장의 말에 주변이 약간 술렁거렸다. 우리가 왔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직접 본 적은 없는 신관들은 우리들을 보기 위해서 고개를 빼꼼이 내밀기도 했다. 우리들은 순식간 에 예배당에 있던 모든 신관들의 시선을 받게 되었다. "저 분이 마리엔님야? 굉장히 아름다우신걸." "성녀님에 뒤지지 않는다는 말이 정말이었나봐." "요이체로스도 저 분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 생쥐처럼 아무 힘도 쓰지 못했데." 내가 신관들에게 칭찬을 들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세상은 이래서 알 수 없는건가 보 다. 그리고 이번에도 동료들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것이 좀 찔렸다. 역시나 다른 인 간들은 상관이 없는데 고생은 많이 해놓고도 무시를 당하고 있느 에릭과 세린에게는 미안했다. 신관들의 소란은 신관장이 나서서 조용히 시킨 다음에야 진정되었다. 처음에는 신관장의 주도로 기도가 이루어졌다. 모든 사람들이 눈을 감고 엄숙히 기도 를 하고 있었지만 당연히 나는 눈을 뜬 채였다. 멀뚱히 옆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 기도 하고 신상을 한 번 ?어보기도 했다. 동료들까지 진지하게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 굉장히 의외였다. 특히 가스톤과 죠안. 틀림없이 기도하지 않고 놀 것이라고 생 각했는데 말이다. 그리고 의외의 인물이 나처럼 뺀질거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루시는 나처럼 애 초부터 아예 무시한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눈을 감았다가 나중에 슬며시 눈을 떴다. 나와 루시는 처음에 눈이 마주치고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이내 빙긋 웃었다. 루시도 억 지로 끌려오다시피 한 것일 것이다. 하긴 너도 지겹겠지. 나와 루시 사이에는 공감대 가 형성되면서 기도가 끝날 때까지 손짓으로 너무 재미없다는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 기도가 끝이 나자 나와 루시는 언제 킥킥대면서 놀았냐는 것처럼 정말 진지한 얼굴로 정면을 주시했다. 그리고 신관들 중 몇 명이 앞에 나와 가하브의 은혜를 찬양하는 노 래를 불렀다. 가사가 영 맘에 들지 않았지만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의 실력이 좋아서 그렇게까지 귀에 거슬리지는 않았다. 되도록 가사는 듣지 않고 리듬만 들으려고 하자 이 것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아름다운 선율은 30분 동안 예배당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그 후부터가 문제였다. 신관장의 설교가 시작되었는데 정말 대책이 서지 않았 다. 기도할 때는 놀면 되고, 노래부를 때는 그냥 노래를 듣고 있으면 됐지만 설교할 때는 모두 눈을 뜨고 있는 상태라 헛짓을 할 수 없었다. 내용 또한 가하브에 대한 찬 양 일색이라 마족 복장 뒤집는 소리밖에 없었다. 게다가 무슨 시간이 그렇게 가지 않 는지 시간이 꽤 지났다고 생각하고 보면 1분도 지나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다. 보아하 니 루시도 괴로워하고 있는 티가 역력했다. 신관들이야 그렇다쳐도 다른 동료들까지 얌전히 듣고 있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귀족들은 적어도 몇 번은 신전에 가본 적이 있 으니 어느정도 예상했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신관장의 말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렸다. 어느새 눈의 초점이 흐려지 면서 신관장의 모습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 자 제법 버틸만 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 순간에 보니 설교는 끝이 나있었다. 정말 기뻤다. 그 사이에 굉장히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지만 확실히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설교가 끝이 아니었다. 기나긴 기도가 다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 지만 그래도 기도는 나았다. 또 눈을 뜬 나와 루시는 신관장의 설교는 너무 지겹네, 이 예배는 언제 끝나나?,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이번에도 손짓과 눈짓을 이용한 의사 소통이었지만 뜻을 전하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루시라는 동지를 만나서 예배시간 은 아주 죽을 맛은 아니었다. 그러나 완전히 진이 빠졌다. 세상에 무슨 놈의 예배를 두시간이나 하냔 말이다! 전부 미친 게 틀림없어! 그러나 고난의 뒤에는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고 그 누가 말했던가. 예배가 끝이 나자 만찬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는 소박하게 먹는다지만(믿을 수 없다) 우리 일 행을 위해 틀별히 거하게 차린 것이라고 한다. 여행을 나온 이래 이렇게 거하게 차려 진 상은 받아보던 적은 서델피르 이후 처음이었다. 저녁 식사를 거하게 마친 나는 만 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역시 예배는 들을 게 못 되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 었다. 여자 세 명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 말이 있다. 이는 여자들의 끝도 없는 수다가 지 니는 무한한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는 말이었다. 이 말을 그냥 듣기만 했었을 때는 설 마 그정도로 말이 많은 여자가 있을까 했다. 로즈가 한 수다하긴 했지만 수다도 맞장 구쳐주는 사람이 있어야 오래 가는 법이다. 로즈의 수다는 대부분 자화자찬이 주를 이 루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대충 대꾸만 해주고 넘어가기 일쑤였다. 때문에 로즈의 수다는 한꺼번에 엄청난 말을 쏟아내긴 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경우는 달랐다. 수다는 베리언트를 떠나오면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었다. 예전에는 로즈 혼자 말하는 것이 다였지만 지금은 세 사람이 함께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로시 신관이 옆에서 치켜세워주자 나도 모 르게 말이 많아진 것이다. 가하브의 신전을 나오면서 나와 도로시 신관은 서로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했고, 나중에는 이 곳에 로즈가 끼어들었다. 설마하니 내가 이렇게 말이 많은 줄은 나도 몰랐다. 내가 과묵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 동안 이야기하지 못해서 한이 쌓인 사람처럼 쉴 새없이 이야기가 줄줄줄 나오고 있었 다. 나와 도로시 신관, 로즈는 조금만 더 떠들면 정말 접시라도 깰 기세였다. 우리들의 수다를 듣고 있는 다른 동료들은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간간이 맞 장구도 치면서 같이 이야기했지만 며칠 지난 지금은 조가비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 다. 아마 말할 거리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와 도로시 신관, 로즈가 너무 즐 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서 끼어들기가 그런 모양이었다.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우리의 주제는 어느새 이번 여행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 는 히폴리테 방문으로 바뀌어 있었다. "히폴리테는 세인트에서 하루 거리에 있는 곳이니 별 일이 없으면 3-4일 후에는 당도 할 수 있을거야. 그리고 세인트는 아마 이 속도로 가면 내일 오후쯤에나 도착할 수 있 을 것 같아. 내일이면 오랜만에 침대에서 잘 수 있겠는걸." "그렇군요. 그런데 히폴리테는 어떤 곳이죠? 로즈 언니. 단순히 성지라고만 알고 있는 데." "음, 나도 성인식을 치른 이후로는 처음이라 잘 모르겠지만 히폴리테는 단순한 마을이 아니라 아르테미스의 산을 수호하는 마을이야. 대대로 히폴리테어 사는 사람들은 성 지를 지키는 전사들이었어. 지금도 아르테미스의 산에 출몰하는 마물들이 다른 지역까 지 확산되지 않고 있는 건 그들의 활약 덕분이야." 나는 로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괜찮을까요? 이렇게 적은 인원으로 아르테미스 산으로 간다는 것이 조금 걱정 입니다. 마리엔님이 계시니까 큰 일은 없을 것 같지만요." 끝까지 존칭을 고수하면서 도로시 신관이 약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말을 놓 으라고 해도 감히 존경하는 분께 그런 깃은 절대 할 수 없다나. 존칭으로라도 존경심 을 드러내고 싶다는데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이번 여행도 거의 막바지로 접어 들고 있어서 강제로 반말을 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도로시 신관, 그렇게 신경쓰지 않아도 돼요. 에릭과 세린, 가스톤, 죠안도 굉장한 실 력자들이거든요. 모두들 페드인 왕국에서 자랑하는 기사들이지요." "흠, 저 분들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저희가 남자라 그런 생각을 하시는 거라면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페드인 왕국은 스피린과는 달리 일반적인 경우에는 남자가 여자보다 강하다고 여기고 있으니까요." 죠안은 도로시 신관의 노골적인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말에 가시가 돋쳐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도로시 신관이 당황해서 말했다.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마리엔님을 호위하시는 분들이시니 실력이야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하지만 히폴리테는 남자들의 출입이 금지돼있는 곳입니다. 그 러나 여러분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같이 갈 수 없으니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나는 도로시 신관의 말에 깜짝 놀랐다. 남자는 출입 금지라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고! 에릭과 세린, 가스톤, 죠안이 빠지면(루시는 세인트에서 헤어질 거니까) 나까지 해서 6명만으로 아르테미스 산에 올라야 했다. 마물들이 우글거리는 곳을 단 6명, 그 것도 2/3가 마법사와 신관으로 구성된 인원으로 간다는 것은 위험했다. 로즈와 엔젤, 히크리트 신관을 쳐다다보니 이미 알고 있었는지 담담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된거죠? 정말 에릭들은 들어가지 못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 원래라면 출입하지 못하지만 이번만은 예외일 거야." 예외면 예외지 예외일 거라는 말을 또 뭔가. 내가 여전히 미심쩍어하자 엔젤이 안심하 라는 투로 말했다. "걱정하지마. 레리이나 여왕 페하께서 우리들이 모두 들어갈 수 있도록 명령을 내리셨 으니 괜찮을 거야." "하지만 그 사람들 굉장히 고집이 세다고 들었는데." "도로시 신관도 너무 염려하지 말아요. 설마하니 여왕폐하의 명을 거역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세인트에 도착한 우리들은 루시와 헤어져야만 했다. 그동안 같이 다니면서 정도 많이 든데다가 루시가 재미있고 요리도 잘하기 때문에 이제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정말 아 쉬웠다. 루시도 우리 못지 않게 섭섭해하고 있었다. "여러분덕분에 이 곳까지 무사히 오게 됐군요.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저희야말로 루시퍼씨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대로 헤어져야 한다니 정말 섭섭 하군요." 엔젤이 대표로 인사를 하자 루시가 그녀와 악수를 하면서 말했다. "저도 그렇습니다. 이대로 계속 여러분과 함께 있고 싶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루시도 그만의 일이 있기 때문에 계속 함께할 수는 없었다. 우리들은 루시와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여러분의 일이 잘 풀리길 기원하겠습니다." 이때 루시는 우리들의 여행의 목적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리 주의한다고 해도 하루 종일 붙어있을 때가 많아서 자연히 알게 되었다. 루시는 믿을만한 사람이라 우리도 솔직히 사정을 털어놓았다. 물론 내가 공주라는 말을 뺐지만 말이다. "고마워요. 루시도 일이 잘되길 바래요. 그리고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아요. 루시같은 길치는 혼자서 돌아다니면 절대 안되니까요." "읏, 마리엔. 그래도 아주 심한 건 아니라구요. 그러는 마리엔이야말로 너무 다른 사 람들 속을 썩이지 말아요." "훗, 그러도록 해보죠. 루시, 몸 조심해요." 루시와는 맞는 점이 많아서 그의 당부에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4서클 초반 의 실력으로 혼자서 여행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 되었다. 스스로 이런 나에게 놀랄 정 도였다. 하지만 왠지 모르겠지만 루시에게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친근한 감정이 들 었다. 다른 동료들도 루시에게 한마디씩 했다. "세리자드님의 자애의 손길이 루시퍼씨의 뒤를 항상 따라다닐 겁니다." "루시퍼씨, 여행 잘 하십시오." "다음에 또 뵐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가하브님의 은총이 그대와 함께 하기를." "보고 싶을 겁니다." 루시는 부드러운 미소를 마지막으로 남기고 그의 길을 갔다. 루시가 보이지 않을 때까 지 그 자리에서 손을 흔들어주던 우리 일행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통행증을 발 급해주는 건물로 갔다. 세인트에서 동쪽 성문을 지나 외길을 따라 가면 히폴리테가 나 왔다. 그러나 이 성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통행증이 필요했다. 히폴리테는 스피린 여 자들이 성인식을 치른 후에 반드시 한번 들르는 성지였지만 동시에 유명한 관광 명소 이기도 했다. 그러나 성지에 아무나 들일 수 없는 법. 히폴리테에 가려는 사람들을 심 사해서 그들이 히폴리테에 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되는 경우에만 통행 증을 발급해주었다. 물론 그 사람들은 모두 여자였고, 스피린인이 아닌 다른 나라 사 람들은 아르테미스 산에 오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통과증을 발급해주는 건물은 그렇게 크지 않은 깨끗한 하얀 색의 아담한 건물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마물 때문에 사람들이 전보다 많이 줄었지만-도로시 신관의 말로는 평소에는 이 건물이 통과증을 받으려는 사람들로 가득 찬다고 한다-그래도 생각보다 는 많은 수가 있었다. 하긴 마물들이 출몰하는 지역은 히폴리테 마을에서 아르테미스 산으로 가는 길목이니까. 히폴리테에 가려는 사람들 수가 많아서인지 심사를 하는 곳 은 모두 다섯 군데나 있었다. 잠시 후 우리 차례가 되자 우리들은 첫 번째 방으로 들 어갔다. 그 곳에는 신경질적으로 생긴 여자가 책상에 앉아있었고. 책상 위에는 사람들 을 심사한 서류인지 종이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나는 우리들의 신분을 밝히면 심사관 이 금방 통행증을 발급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설마했던 사실이 현실로 드러나고 말았다. 엔젤은 무서운 기세로 눈앞의 심사관을 노 려보았다. 그러나 심사관은 매서운 엔젤의 시선에 움찔하긴 했지만 전혀 물러나지 않 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했는디 다시 듣고 싶은데." "엔젤 경, 정말 죄송하지만 제 대답은 조금 전과 같습니다. 남자분들은 성지에 들어가 실 수 없습니다." 이 곳에 있는 심사관들은 대대로 성지의 수호자인 히폴리테 사람들이 맡아하고 있었다 . 이 직위는 스피린의 건국여왕인 아테네 여왕이 영구적으로 히폴리테 사람들에게 부 여했고, 누구도 이들에게 강제로 성지의 문을 열게 만들 수 없다는 칙령까지 발표했다 . 그렇기 때문에 이 곳 세인트의 시장조차 이들에게 뭐라고 할 수 없었다. 히폴리테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치외법권이 존재하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설마하니 현 여왕 인 레리이나 여왕의 명령조차 거부할 줄은 몰랐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레리아니 여왕페하의 명을 따를 수 없다는 건가?!" "송구스럽지만 그렇습니다. 그 누구도 저희에게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건국여왕 이신 아테네 여왕님께서 정하신 율법입니다. 이를 어기는 사람은 왕족조차 처벌하도록 되어있는 것을 아시리라 믿습니다. 레리이나 여왕페하께서는 여러분을 통과하라는 명 령을 내리실 수 있는 권한은 있지만 저희가 그 명령을 따르도록 강제력을 행하실 수는 없습니다." "지금 사태가 어떤 줄은 잘 알고 있을 것 아닌가! 그런데 남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관 습 때문에 우리를 막겠다는 건가? 이 분들은 스피린을 도와주기 위해 먼 곳에서 와주 신 분들이란 말이야!"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남자분들을 제외하신 분들은 통과하셔도 좋다고 말 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엔젤이 화가 나서 고함을 쳤지만 심사관은 요지부동이었다. 그게 말이 되냔 말이다. 이들이 빠지면 전력에 큰 구멍이 날 것이 뻔한데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면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자기들을 도와주겠다는데 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거야? 그 후로 우리 들이 화도 내보고 설득도 해봤지만 심사관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안된다는 말만 반 복했다. "도대체 왜 안된다는 거죠? 고리타분한 관습때문인가요?" 내가 하도 답답해서 묻자 심사관은 진지하게 말했다. "단순히 관습 때문이 아닙니다. 남자가 성지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를 알려면 이런 관 습이 생긴 배경부터 아셔야 합니다. 저희 마을에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한 장의 고문서 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것은 아테네 여왕폐하께서 친히 내려주신 친서로, 여기에는 예언가 포카스트님이 그 분께 직접 하신 예언이 적어져 있습니다." 관리는 심각한 얼굴로 포카스트의 예언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성스러운 여인의 가슴이 해의 기운을 가진 자들에게 침범당했을 때, 대지는 푸른 피 로 적셔지리라. 그 피는 파괴의 서막이니 사람들의 비명과 눈물이 온 세상을 가득 채 우리라. 강은 울부짖으며 붉게 물들어 망자의 무덤이 되리라. 이 피는 절망의 서막이 니 사람들의 공포와 절망이 온 세상을 가득 메우리라. 하늘이 찢어지는 날 어둠의 강 림자가 죽음과 파멸이 이 땅에 내리리니......이미 잊혀진 어둠의 존재와 어둠의 존재 이며 아닌 존재는 만나......두 어둠은...... 파멸과 붕괴는...] "이 후의 예언은 문서가 훼손되어 알 수 없지만 그 이전의 내용만 봐도 뭘 말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남자가 아르테미스의 산에 올라가면 온 세상은 피가 범람하고 어둠에 휩싸이게 될 겁니다. 이를 아신 아테네 여왕폐하께서는 남자는 절대 들이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저희는 죽을 때까지 성지를 지킬 사명이 있습니다." 심사관의 말에 우리는 조용해졌다. 겨우 예언 때문에 그 고집을 부렸단 말이야? 그 것 도 몇 백년 전 예언을 가지고? 인간이 미래를 알 수 있는 일은 하루종일 신들이 마족 을 씹지 않을 가능성보다 더 희박하다고 보는 나로서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나와는 달리 다른 동료들은 조금 심각해졌다. 예언자 포카스트의 이름은 그만 큼 권위가 있었던 것이다. 포카스트는 당대 최고의 현자이면서 예언자로 그가 말한 예 언 중에 빗나간 것은 단 한 개도 없었다. 오죽하면 몇 백년 후에 일어날 페드인 왕국 과 하레난과의 전쟁까지 알아맞혔겠는가. 그 것도 승자와 패자까지 미리 예언했다. 그 러나 나는 그의 예언을 신용하지 않는다. 포카스트의 예언은 추상적인 것이 많아서 그 전에는 무슨 말인지 모르다가 나중에 그 일이 일어난 후에야 '아, 그거였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알고 있다면 바로 말하면 될 것이지 왜 알아듣지도 못할 어 려운 말만 나열한단 말인가. 나중에 예언이 맞았다는 것도 사람들이 대충 비슷하니까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것에 불과했다. 어찌 인간 따위가 미래를 내다본단 말인가. "하지만 이대로 마물들을 방치하는 건 위험할텐데요." 아무리 뛰어난 예언자가 예언을 했다고는 하지만(믿지도 않지만)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었다. 예언은 어디까지나 예언일 뿐 현실이 아니다. 예언에 얽매여 현실의 문제를 등한시한다면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두려워 해 현실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예언보다 더 비참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 을 것이다. 포카스트의 예언에 놀라긴 했지만 동료들도 나와 비슷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 심사 관은 사명이라는 거창한 이름에 현혹되어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단순히 마물들이 날뛰는 것과 차원이 다른 일입니다. 세계의 파멸과 관련된 일입니다 . 그러니 남자분들은 절대 통과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다 마물들이 당신들이 그렇게 자랑해마지 않는 성지를 차지해버리면 어떻게 하려 는 거죠?" 한껏 비꼬았지만 심사관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일은 목숨을 걸고 막겠지만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저희들이 성지를 지키는 이유는 성지 그 자체보다는 어둠의 존재의 강림을 막기 위해 서입니다. 그걸 막을 수 있다면 성지는 포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멍청한 놈들을 보았는가! 네놈들이 성지를 지키다 죽든 말든 상관없지만 여기 까지 와서 빈 손으로 털레털레 돌아가란 말이야? 도대체 예언 따위가 뭐라고! 아무리 그들의 사명이 중요한 것이라고 해도(틀림없이 자기들 딴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 것이 현실을 방해할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현실을 사는 존재이 지 미래를 사는 존재가 아니기에. 아무리 과거가 아름답다고 해도 과거에 대한 그리움 에 얽매여서, 아무리 미래가 암담하다고 해도 미래에 대한 걱정에 빠져서 현실을 보지 않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그런 기본적인 것조차 모르는 심사관의 반응에 한바탕 소리를 치고 싶었다. 이렇게 답 답한 놈들은 정말 싫다. 인간이든 드래곤이든 신이든 마족이든 지금을 살아간다. 어떻 게 보면 우리에게 미래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지금의 미래가 언젠가 지금이 되고 모 든 존재는 그 지금이라는 순간 속에서 살아가니까. "이봐! 당신, 읍." 로즈가 소리치려는 내 입을 재빨리 막았고, 엔젤이 다시 한번 심사관에게 물어봤다. "정말 안 된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이만 돌아가도록 하죠." "어오으 읍읍 오우오(저 놈을 그냥 놔두고)?" 동료들은 나를 끌고 그 건물을 나왔다. 여전히 내 입을 막은 채로 말이다. 우리들은 건물을 나와서 근처에 있는 여관을 숙소로 잡았다. 그리고 제대로 씻지도 않 고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나는 심사관에게 한마디하려고 했던 계획이 무산되자 약간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냥 온 거예요? 설마 에릭들을 빼놓고 갈 생각은 아니겠죠?" "물론 아니지. 하지만 그 곳에 계속 있어봤자 통행증을 주지 않았을 거야. 차라리 뭔 가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나온 거야." 로즈의 말이 맞긴 했다. 그 상황에서 뭐라고 한다고 해서 통행증을 줄 가능성은 눈꼽 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멍청한 인간에게 한마디하지 못하고 나왔다는 것 이 아쉬웠다. 그런 사람들은 꼭 한번 된통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니까. 나는 잠시 머리를 굴려봤지만 그 간이 크다못해 터져 버릴 것 같은 인간을 설득할 방 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생각 중인지 조용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가스톤이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입을 열었다. "그냥 몰래 성문을 빠져나가는 건 어떨까요? 밤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요." 그러나 도로시 신관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서부에 살아서 그런지 다른 사람보다 이 곳의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방법은 곤란합니다. 히폴리테를 들어갈 때로 통행증을 반드시 검사합니다. 만약 통행증이 없는 사람이 발견되면 몰매를 맞고 쫓겨납니다. 그 곳에서는 보통의 법이 통 하지 않으니 히폴리테 사람들 마음이거든요." 그 말을 한 도로시 신관은 잠시 주저하더니 한마디 더했다. 그리고 도로시 신관의 말 에 우리들의 얼굴은 새파래졌다. "이건 소문인데 예전에 몰래 숨어 들어간 남자가 있었는데 바로 처형해버렸다고 합니 다." "...그럼 성문을 통과해서 가는 길말고도 히폴리테나 아르테미스의 산으로 가는 길은 없습니까?" 세린의 질문에 이번에는 로즈가 대답했다. "없습니다. 히폴리테로 가는 길은 오직 이 길뿐입니다. 그리고 히폴리테를 거치지 않 고 아르테미스의 산을 가려면 완전히 빙 돌아 산의 뒤쪽을 올라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 부근이 류온과의 국경이라 그럴 경우에는 류온의 국경 수비대들이 우리를 바로 잡 을 겁니다." 이렇게 되면 정말 곤란했다. 다른 곳으로는 갈 방법이 없었고, 이대로는 통행증을 발 급해주지 않을게 뻔했다. 그렇다고 통행증 없이 몰래 숨어들자니 그 것도 문제가 있었 다. 신분이 있으니 설마 죽이기야 하겠나면 뭔가 보복이 뒤따를 것 같았다. 특히 남자 들에게. 운이 좋아 걸리지 않고 아르테미스의 산에 갈 수 있다고 해도 히폴리테 마을 사람들에게 그만큼 정보를 들을 수 없어 여러모로 어려운 점이 많을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군. 한참동안 고민을 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여러 가지 방법을 떠올려봤지만 모두 현 실적으로 문제가 있는 방법들이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고개를 들고 동료 들을 둘러 보았다. 무슨 의도가 있어서 한 행동이 아니라 별 생각없이 한 행동이었다 . 동료들은 진지하게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러나 신통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지 인상 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그러다 팔짱을 끼고 입술을 계속 삐죽이면서 생각에 잠겨있 는 가스톤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아무 생각없이 가스톤을 보던 나는 불연 듯 과거의 일이 하나 머리에 떠올랐다. 그리고 아주 괜찮은 방법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푸후후후." 내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자 모두 무슨 일인가 싶어,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머리 속에서 자꾸 그려지는 그림 때문에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킥킥킥." "마리엔, 왜 그래?" "큭큭큭." "피곤한 모양인데 가서 쉬는게 어때?" "꺄하하하." 에릭이 말을 하자 그나마 참아왔던 웃음이 크게 터져 나왔다. 에릭의 말이 웃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에릭을 보자 앞으로 있을 일이 재미있어서 웃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다. "마리엔님, 괜찮으세요? 한숨 주무시는 게 좋겠습니다." 도로시 신관이 내 손을 잡아당길 때가 돼서야 간신히 웃음을 멈춘 나는 입을 열었다. "하아, 그게 아니라 근사한 방법이 하나 떠올랐거든요. 그게 좋아서 웃었던 겁니다." "방법? 무슨 방법?" 나는 세린의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동료들은 방법이 있다는 말에 기 대에 차있었다. 과연 그 기대가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방긋 웃으면서 내 생각을 입 밖으로 내놓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가 이러고 있는 이유가 남자는 성지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렇지." "그럼 여자라면 상관이 없겠네요?" "그렇긴 하지만 우리는 남자잖아." 세린과 에릭은 내 말에 의아해했지만 가스톤과 죠안의 얼굴은 삽시간에 푸르죽죽해졌 다. 눈치가 빠른 것도 있었지만 이미 가스톤이 한번 겪은 적이 있는 일이라 쉽게 알아 챌 수 있었던 것이다. "맞아. 남자지. 하지만 여자로 착각하게 만들 수는 있잖아." "그게 무슨 말이지?" 세린과 에린은 이해는 못하고 있었지만 본능적으로 자기들에게 불리한 상황이 벌어질 것을 느끼는지 상당히 불안해했다. 그리고 가스톤과 죠안은 자신들의 예상이 적중하자 무척이나 낙담했다. 이제 내가 생각해낸 묘안을 말해줘야겠지. 웃음을 참기 위해 입 술을 꼬옥 깨문 나는 조금 후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여장하면 되잖아. 여장하면!" "뭐엇!" "......!!" "여,역시!" "이럴 줄 알았어." 네 남자들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세린은 지금 장난하느냐는 얼굴이었고, 에릭은 인상을 팍 쓰고 있었다. 반면에 가스톤과 죠안은 서글퍼하면서도 나를 말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어깨가 추욱 쳐졌다. 에이, 가스톤은 한번 해본 적도 있으면서 새삼스럽 게 무슨...하지만 이들이 누구인가. 기사다. 그 것도 페드인 왕국의 제일가는 왕궁 기 사들이다. 게다가 가스톤 때와는 엄연히 달랐다. 그 때는 제 4기사단만 있었지만 지금 은 그게 아니었다. 여자들도 내 말에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물론 스피린이 남녀의 역할이 바뀌어져 있고 남자가 치마 비슷한 옷을 입는 경우는 많았지만 완벽하게 치마를 입고 여장하는 경우 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상대로 여자들은 시간이 조금 지나가 침착함을 되찾 았다. "여장이라. 그 것도 괜찮겠군요." "좋은 생각이야!" "역시 마리엔님이세요! 그런 기발한 생각을 하시다니." 사실 그렇게 기발할 것도 없었다. 만약 에릭들이 기사나 귀족이 아니었다면 누구나 쉽 게 이 방법을 생각해냈을 것이다. 그러나 기사가 어떻게 여장을 할 수 있겠느냐?, 라 는 생각 때문에 여장을 떠올리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기사라는 직위는 하등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여론이 점점 여장을 하자는 쪽으로 흘러가자 에릭과 세린, 가스톤, 죠안은 아직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는 히크리트 신관과 사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쩌면 그들이 반대할 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말이다. "흠, 다른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군요. 그냥 희생하십시오." 히크리트 신관이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소리를 했다. 사라조차 에릭들에게 슬며시 고 개를 돌렸다. 침묵은 곧 긍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들은 믿었던 사라마저 내 의 견에 동조하자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자, 자. 이걸로 6:4로 결정났군요. 너무 그렇게 싫어하지 말아요. 새로운 경험을 한 다고 생각하면 되잖아요." "꼭 해야되는 거냐?" 세린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 방법말고는 다른 좋은 방법이 없잖아." "그렇긴 하지만 여장은 좀......" "괜찮아. 절대 비밀로 해줄테니까. 그리고 어쩔 수 없잖아. 이렇게 하지 않으면 히폴 리테는 가지 못할걸." 에릭과 세린은 망설였지만 계속 우리가 설득하자 어쩔 수 없이 여장을 하기로 했다. 물론 탐탁지 않아 했지만 말이다. 가스톤과 죠안은 애초부터 포기를 하고 아무 말도 없었기에 두 사람만 설득하면 됐다. 여장을 하기로 결정이 나자 여자들은 잘 됐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반면에 남자들은 얼굴이 어두워졌다. 특히 에릭과 세린. 너 희들은 이걸로 나한테 약점 잡혔어. 세린이야 워낙 예쁘니 여장이 어울릴 것 같지만 과연 에릭은 어떨까? 오홋홋호~! 그러나 그냥 여장을 하는 건 별로 재미없었다. 나는 싱글싱글 웃으며 한가지 제안을 했다. "그냥 여장을 하는 것보다 한 사람씩 한 명을 담당해서 완벽한 여자 모습으로 만드는 게 어때요?" "한 사람씩 담당하자고?" "네. 그렇게 하면 더 세심한 곳까지 신경 쓸 수가 있잖아요. 여장도 더 완벽해질 테고 말이에요. 그리고 나중에 가장 여장을 잘 시킨 두 사람에게 다른 두 사람이 밥을 사 는 겁니다." "오오! 그거 재미있겠네. 그냥 여장을 시키는 것보다 그런 내기가 있어야 의욕이 생기 지." "서로 경쟁이 붙으면 더 잘할 수 있을 겁니다." 내 말에 로즈와 도로시 신관이 적극 찬성을 해왔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는 태도였다. 여자의 경우에만. 네 남자들은 거의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모 든 일의 발단은 나였으니까. 내가 살짝 웃어주자 그들은 저마다 치를 떨었다. '이런 악독한 것' 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티가 팍팍 났다. 엔젤과 히크리트 신관은 빠진다고 했기 때문에 수도 딱 맞았다. 나와 로즈, 사라, 도 로시 신관이 한 사람씩 맡으면 됐다. 그리고 이 중에서 사라는 따로 뽑을 것도 없이 바로 가스톤 담당이 되었다. 요이체로스를 이긴 이후 두 사람 사이는 제법 가까워져 있었다. 가스톤은 아직도 사라를 여자로 보고 있지 않지만 이정도면 장족의 발전이었 다. 여기에는 가스톤이 부상당했을 때 사라가 한시도 쉬지 않고 간호한 영향도 컸지만 우리들이 무슨 일이 있으면 알게 모르게 두 사람을 자꾸 엮어준 탓도 있었다. 이번에 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가스톤 담당을 사라로 정했다. 물론 가스톤이 가장 여장시키기 힘든 외모라는 점도 큰 이유였다. 이제 남은 사람은 에릭과 세린, 죠안이었다. 나는 이들의 이름이 적어져있는 접어진 종이를 보면서 눈을 빛냈다. 반드시 세린을 골라야 한다. 세린만 걸리면 내기에서 이 기는 건 이미 확정된 사실이었다. 화장 조금하고 드레스만 입혀놓으면 어여쁜 레이디 의 탄생이었다. 세린. 세린. 세린아, 걸려라. 로즈와 도로시 신관도 세린을 힐끔거리는 폼을 보아하니 나와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졸지에 내기 대상이 돼버린 남자들-특히 번뜩이는 시선을 받고 있는 세린-은 비지땀 을 흘리고 있었다. "그럼 뽑도록 할까?" "좋습니다." "그래." 나와 로즈, 도로시 신관은 잠시 신경전을 벌이다 각자 종이를 집어들었다. 세린이어야 하는데.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살짝 종이를 펼쳐보았다. 제, 젠장!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는 거야! 내가 절규하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가하브님, 저의 기도를 들어주셨군요. 정말 갑사합니다!" 세린은 도로시 신관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도로시 신관은 마치 모든 승부가 끝이 난 것처럼 좋아했고, 그 모습을 보는 내 심정은 찹찹했다. 아마 로즈도 마찬가지 이리라. 그래도 너무 좋아하자 한마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좋아하지 마요. 승부는 겨뤄봐야 아는 거니까." "마리엔 말이 맞아. 얼굴만 예쁘다고 다가 아니야." 그러나 말을 그렇게 했지만 내가 이 세명 중에서 가장 불리했다. 사라야 가장 여장시 키기 힘든 가스톤을 맡았으니 처음부터 밥을 살 사람 명단에 들어간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본인이 싫다고 하지 않았으니 된 것 아닌가. 가스톤도 다른 나라 사람인 로즈 와 도로시 신관이나 과격한 나보다는 사라가 나은지 안심한 눈치였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사라 다음으로 여장을 못시킨 사람이 남은 건데 그 유력한 후보가 바로 나라는 거다! 젠장맞을. 저 무뚝뚝한 인간을 어떻게 여장시키냔 말이야. 저 놈, 틀림없이 드레스도 안입으려고 할텐데. 이런 제기랄! 빌어먹을! 마신이시여, 너무하십 니다! 솔직히 생긴 건 에릭이 죠안보다 훨씬 잘생겼다. 비교할 데다 비교해야지 어디 에릭과 죠안을 비교한단 말인가. 하지만 문제는 에릭이 풍기는 분위기였다. 그 놈이 풍기는 분위기는 아무리 봐도 여자의 기운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이걸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 던지, 스피린 여자들은 남자랑 비슷하니까 상관없다고 마구 우겨서 넘어간다고 쳐도 에릭이 시키는 대로 할 인물인가. 드레스를 입히려고 해도, 화장을 시키려고 해도 가 장 애먹일 상대라는 것이다. 반면에 죠안은 외모는 딸리지만 원래 유연한 인간이라 피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오히 려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원래 평범과는 거리가 먼 제 4기사단의 일원 아닌가. 반면 에 에릭은 대귀족이면서 로얄 기사였다. 이 점을 잘 아는 로즈는 나에게 동정을 시선 을 보내면서도 자기가 에릭을 맡지 않게 되어 다행이라는 눈치였다. "세린씨,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우선 세린씨에게 어울릴만한 옷을 보러 가야겠군요." "죠안씨, 걱정하지 마요. 원래 여자는 화장으로 다시 태어나는 존재이지요. 내가 화장 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겠어요." "가스톤 경, 저희도 갈까요?" 도로시 신관과 로즈, 사라는 자신이 담당한 사람과 나가버렸다. 엔젤과 히크리트 신관 조차 나를 보고 재미있다는 웃음을 한번 짓고는 나가버렸다. 이제 이 곳에 남은 사람 은 나와 에릭 뿐이었다. 에릭이 순순히 말을 들을까? 그런 일은 천지가 개벽해도 없을 거야. 아니야. 의외로 말을 잘 들을지도 몰라. 그래.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 좋은 쪽 으로. 얼굴은 괜찮잖아. 나는 잠자코 있는 에릭을 보면서 말했다. "우리도 갈까?" 여장이란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다. 옷에서부터 화장, 구두, 메리 세팅까지 챙길 것도 많았고 무엇보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여자다운 면모를 지니는 것도 중요 했다. 스피린이 남녀역할이 바뀌어 있긴 하지만 여자로서 지켜야할 건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하루만에 다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3일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동안 자기가 맡은 남자를 누구나 인정할 만한 여자로 만들어야했다. 그리고 여장의 첫 번째는 바로 옷이었다. 화장이나 악세사리같은 건 멀리서 보면 보이 지 않지만 옷은 멀리서도 한 눈에 보였고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에 릭과 함께 드레스 가게를 들렸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께서 드레스를 고르시는 모양이군요. 아가씨는 검은 머리니 밝 은 색이 어울릴 것 같습니다." 주인은 나를 보면서 말했다. 내가 옷을 사러 온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드레스를 사야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에릭이었다. 에릭이 보기 드물게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얼마나 치마를 입기 싫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여장의 기본 은 치마! 어쩔 수 없었다. "아니, 내가 아니라 여기 있는 이 사람에게 어울릴만한 옷을 좀 갖다줘요." "네? 이 분은 남자십니다만." "아...그게 이 사람의 쌍둥이 여동생이 입을 거예요. 가장 절친한 친구인데 갑자기 선 물해서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요. 하지만 아무 옷이나 선물할 수는 없잖아요. 어 울리는 옷을 선물하고 싶어서 같이 온 거니까 이 사람에게 어울리는 옷으로 가져다주 세요." 그러자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에릭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나의 재치가 그 진가를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에릭은 나의 재치에 감탄하기보다는 '이 불여우' 라는 의미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이리저리 에릭을 찬찬히 보면서 주인이 물었다. "그런데 치수는 어느 정도지요?" "이 사람과 똑같아요. 그냥 이 사람이 입을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여자치고는 덩치가 크군요." "좀 그렇긴 하죠." 나와 이야기를 하면서 주인은 줄자로 에릭의 치수를 쟀다. 얼마 후 치수를 모두 잰 주 인은 에릭에게 맞는 옷을 가지러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치수는 흔한 것이 아니라 안 에 따로 놓아둔 것이다. 주인이 없는 틈을 타서 살짝 에릭에게 말했다. "에릭, 인상 좀 펴." "너같으면 그렇게 할 수 있겠냐?" "난 남장해도 별로 기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오히려 재미있을 것 같아." "그거하고 다르잖아." "뭐가 달라? 똑같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하잖아." 내 말에 에릭이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주인이 나오자 입을 다물었다. 주인은 손에 드레스를 한아름 안고 나타났는데 모두 레이스가 나풀거리는 아주 예,쁜, 드레스였다. 정작 개수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워낙 레이스가 풍성하다보니 부피가 상당했다. "이 것들이 저희 가게에 있는 전부입니다. 그 치수는 흔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원하신 다면 새 드레스를 만들어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 괜찮아요. 이정도면 돼요." 새 드레스를 맞출 시간이 없었다. 그냥 있는 걸 사는 수밖에. 주인은 보기좋게 드레스 를 가지런히 놓은 다음 에릭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 "입어보시겠습니까?" "그게 좋겠......아니. 아뇨. 됐어요. 그냥 다 살테니까 배달해주세요." 나는 에릭이 살벌하게 노려보자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눈에 살기가 서려있었던 것이 다. 결국 이 중에서 제일 어울리는 옷을 사기로 한 계획은 취소하고 일단 모두 사기로 했다. 주인에게 우리가 묵고있는 여관을 알려주고 나온 나는 바로 다른 가게도 가려 고 했다. 그러나 에릭이 그런 나를 붙잡았다. "또 어딜 가는 거지? 그정도면 됐잖아." "무슨 소리야, 에릭? 넌 여자가 얼마나 위대한 동물인지 모르는구나. 화장하고 악세사 리는 필수야. 그리고 드레스에 맞는 구두도 있어야 하고 머리 세팅도 필요해. 하지만 에릭은 머리가 짧으니까 가발을 사야겠다. 이 모든 게 완벽하게 갖춰줘야 진정한 여자 라고 할 수 있어." "......" "귀찮으면 먼저 여관에 가있어. 이제 치수를 잴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자 에릭은 정말 가버렸다. 한번 말해본 것뿐인 나는 어이가 없었다. 으악!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러고 다니는데! 세린이었으면 이렇게 신경쓰지 않아도 됐을 텐데. 투덜 거리면서 나는 이 가게 저 가게를 다 돌아다녔다. 최고급 화장품에 목걸이, 브로치는 물론 구두도 몇 켤레 샀다. 그리고 가발도 색깔별 로, 머리 모양별로 모두 사왔다. 어떤 가발이 어울릴지 모르니 일단 보이는대로 사버 렸던 것이다. 그렇게 사다보니 짐이 엄청 늘어나버렸다. 낑낑대며 여관에 도착했을 때 는 벌써 저녁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에릭 리트 라디폰, 이 나쁜 놈. 연약한 여자를 혼 자 놔두고 저만 냉큼 와? 용서가 안된다. 용서가. 오늘 저녁에 두고보자. "왜 안 입겠다는 거야?" "지금 나보고 그걸 입으란 말이야?" "아까는 아무 말 없었잖아." "다른 사람들도 이런 옷 입는 줄 알았으니까 그렇지." 나와 에릭은 오늘 낮에 산 드레스를 사이에 두고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드레스 가게에 서는 별 말하지 않더니 이제 와서 이런 옷은 입지 못하겠다고 하면 어쩌란 말인가. 물 론 다른 사람들이 사온 옷과는 쪼오끔 다르다는 것은 인정한다. 솔직히 나도 다른 사 람들이 그렇게 평범하디 평범한 치마를 사올 줄은 몰랐다. 그에 반해 내가 사온 드레 스는 나조차도 입기 싫어하는 레이스가 난무한 드레스였다. 하지만 에릭은 보통 옷을 입으면 별로 여자티가 나지 않아서 일부러 그런 드레스를 고른 것이었는데 에릭은 그 런 나의 세심한 배려를 몰라주고 있었다. 평소에는 필요할 때가 아니면 말을 하지 않던 에릭과 티격태격한다는 것이 신기하긴 했지만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말빨이 센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주 핵심만 뽑아서 말 을 하는데 나처럼 유수와 같은 말빨로 밀어붙이는 타입에게는 천적과 같은 존재였다. 말빨로 밀어붙여도 잘 넘어오지 않는 타입이라고나 할까. 평소에 하는 행동을 보면서 나와는 맞지 않는 타입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나와 티격태격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럼 이 비싼 옷들을 그냥 버리겠다는 거야? 그건 낭비라구! 낭비! 돈이 하늘에서 떨 어지는 건 줄 알아? 이 옷을 살 돈이면 평민들 수십 명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돈이란 말이야. 그렇게 많은 돈을 주고 산 건데 아무 보람도 없이 버린다는 건 말도 안 돼." "아까우면 마리엔 니가 입어." "입고 싶어도 치수가 맞지 않아서 못 입어! 그렇게 큰 걸 나보고 어떻게 입으라는 거 야?" "그럼 버리던가." 에릭은 비교적 길게 말하는 나와는 달리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 말이 워낙 핵 심만 잘 짚어 말하는 거라 내 말을 모두 받아치고 있었다. 그래도 라디폰 공작의 아들 이 맞긴 맞는 모양이었다. 라디폰 공작이 능글맞은 말로 사람 복장을 뒤집어놓는다면 에릭은 최소한의 말로 사람 약올리는데 뭐 있었다. 본인 입장에서는 할 말만 하는 것 이겠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었다. 정말이지 말싸움으로 이렇게 오래 가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나는 에릭을 째려보았다. 그러나 에릭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나를 마주보았다 . 그 것이 더 열 받았다. 왠지 나만 당하고 있다는 패배감이 전신을 휩쌌던 것이다. 말싸움에서는 먼저 화를 낸 사람이 진다는 진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는 고개를 몇 번 휘휘 저으며 머리를 식혔다. 진정하자. 진정해. 전에도 저 놈이 보통 놈이 아 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잖아. 저 놈이 나랑 정반대 타입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잖아. 억 지로 진정한 나는 차분히 말하기 시작했다. "에릭, 그러지 말고 입어봐. 다른 사람들 옷이랑 틀리다고 해도 세린이 입을 옷이랑은 비슷하잖아. 세린도 거의 드레스였어. 그러니까 입어봐. 세린도 입는데 너라고 못 입 으라는 법은 없잖아." "나는 세린이 아니야." "그래도 그렇게 싫어할 이유는 없잖아. 세린도 그렇게 질색하지는 않았어." 물론 꺼려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도로시 신관이 없는 돈 털어서 사준 옷이라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세린을 걸고 넘어졌지만 에릭은 담담한 어조로 되 받아 쳤다. "세린은 어렸을 때 몇 번 입어봤으니까." "뭐?!" 몇 번 입어봤다고? 드레스를? 내가 놀라서 반문하자 에릭은 별 일 아니라는 투로 말했 다. "티스몬 백작 부인은 딸을 원했어." 대강 상황이 이해가 갔다. 딸을 원했는데 태어난 건 딸처럼 생긴 아들이었다. 그러자 티스몬 백작 부인은 딸보다는 못하지만 그와 비슷한 세린에게 평소에 딸이 태어나면 입혀주고 싶었던 드레스를 입혀봤으리라. 지금도 여자로 착각할 정도로 예쁜데 성별을 구별하기 힘든 어렸을 때는 얼마나 여자아이 같았겠는가. 티스몬 백작 부인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세린에게 그런 과거가 있었을 줄이야. 세린이 드레스를 입 었을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곧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라는 걸 떠 올리고 다시 에릭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내가 세린보다 더 예쁘게 만들어줄게. 이래봬도 시녀들이 하던 걸 매일 봐서 이런 거 잘해. 누구도 에릭이 히폴리테에 들어가는 가는 걸 막지 못하게 만들어줄게." "전혀 기쁘지 않아." "어차피 여장해야 되잖아.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야? 어차피 다른 옷들도 거의 비슷하단 말이야." "그러는 너야말로 왜 그렇게 드레스에 집착하는 거지?" 에릭의 날카로운 지적에 움찔했던 나는 드레스 중에서 그나마 가장 장식이 없는 투피 스를 집어들면서 말했다. "하나로 연결된 게 싫으면 이 투피스는 어때? 활동하기도 편해 보인다." 이왕 입힐 거면 꼭 드레스를 입혀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완전히 파 티복처럼 생긴 드레스를 입혀보고 싶었지만 에릭의 반발이 너무 거세 제일 드레스 같 지 않은 옷을 골랐다. 이걸로 만족해야 하는 건가. 그러나 에릭은 이마저도 싫다고 했 다. 그렇게 끝이 없는 공방전이 한시간 가량 계속되자 다시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길게 말하는데 에릭은 한마디로 대답하는 것도 거슬렸다. "에릭, 명령이야! 지금 입고 있는 옷 벗고 이걸로 갈아입어!" "싫어." "너 지금 내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거야?" "여행하는 동안에는 공주 취급하지 말라고 한 건 너였어." 내가 한 말을 이렇게 이용해먹다니. 아무리 내가 그렇게 말했어도 다른 사람들이라면 명령이라는 말까지 나오면 싫어도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에릭은 달랐다. 이제 나도 못 참는다! 이렇게 되면 오기로라도 이 투피스를 입히고 만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는 에릭에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준다는 생각으로 한번 더 물어보았다. "정말 이 옷으로 안 갈아입어?" "그래." "후회하지 않지?" "그래." 협상은 결렬되었다. 나는 더 이상 말로 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다. 마족 의 성질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마! 나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에릭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그라이드(Glide:미끄러져라)!" 에릭의 발 밑으로 마법을 건 것과 동시에 에릭을 냅다 밀쳐버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일에 에릭은 그대로 뒤로 넘어져버렸다. "홀드(Hold: 속박의 주술)" 에릭이 움직이지 못하게 속박의 마법까지 건 나는 씨익 웃었다. 각오해라. 평소라면 쉽게 마법에 걸릴 놈이 아니었지만 내가 불시에 기습을 한 거라 그대로 당했던 것이다 . 에릭이 뜻밖의 상황에 당황하는 사이 그의 배 위로 올라탔다. "무슨 짓이야?" 에릭이 소리쳤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나는 그 위에서 비키지 않았다. "그러니까 순순히 옷을 갈아입었어야지. 강제로라도 갈아 입히고 말테다." "제정신이냐?" "물론."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에릭의 상의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야? 그만두지 못해!" 에릭의 말을 깨끗이 무시한 나는 단추를 끄르는 손의 속도를 높였다. 에릭은 마법 때 문에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에 금방 단추를 모두 끄를 수 있었다. 진작 이렇게 할걸. 마족다운 과격함을 유감 없이 보여주는 나였다. 상의를 확 젖혀버리자 에릭의 맨살이 드러났다. 내가 배 위에 앉아있어 어깨와 가슴만 드러났다. "너!" 그냥 볼 때는 몰랐는데 에릭의 몸매는 상당히 근사했다. 탄탄하게 다져진 이상적으로 발달한 몸이었다. 그러나 그런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다크리언 몸매가 더 좋아. 에릭이 무섭게 노려보았지만 이제야 드레스를 입힐 수 있겠다는 생각에 씩 웃었다. "자, 이제," "에릭, 마리엔. 무슨 일이라고 있어? 시끄러운데......!!!" '이제 드레스를 입을 차례다' 라고 말하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방문이 열리면서 세린 이 들어왔다. 아마 에릭과 내가 티격태격하는 소리를 듣고 온 모양이었다. 그러나 세 린은 말을 하다 말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건 그의 뒤에 서있는 가스톤과 죠안도 마 찬가지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엄청 충격을 받았는지 거의 패닉상태에 빠져있었다. 그들의 상태가 어떻든 혼자서 갈아 입히는 것보다는 여러 명이 갈아 입히는 것이 빠를 것 같아서 말했다. "마침 잘 왔어. 좀 도와줘." "뭐, 뭘?" 세린은 경직된 얼굴로 말했다. 그 말 하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든건지 간신히 혀를 움직 인 티가 역력했다. "보면 몰라? 에릭 옷 갈아 입히게 도와줘." "옷?" "옷을 갈아 입힌다고?" "그냥 단순히 그 이유뿐이야?" 세 사람은 도와달라는 말에 바짝 긴장했다가 갑자기 긴장이 탁 풀린 것처럼 축 쳐졌다 . 하지만 그들의 모습에는 안심했다는 기운이 역력히 묻어 나오고 있었다. 도대체 아 까부터 왜 저래? 나는 에릭의 옷을 벗기던 그 자세 그대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세린이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리엔, 우선은 에릭 위에서 내려오는 게 어때?" "왜? 나 그렇게 안 무거워." 내가 위에 앉아 있는다고 숨쉬는데 지장이 생길 정도로 무겁지 않단 말이다. 세린의 말이 내가 무거우니까 얼른 비키라는 말 같아 약간 기분이 상했다. 더불어 과거에 에 릭에게 들었던 충격적인 말도 같이 떠올랐다. 새삼 에릭에 대한 원한이 떠오른 나는 빨리 에릭의 옷을 벗기고 투피스로 갈아 입히려고 손에 힘을 주었다. "너 진짜 이럴 거야?!" "그래. 이럴 거다!" 에릭이 소리쳤지만 그대로 받아쳤다. 에릭의 등이 바닥에 닿아있어 잘 벗겨지지는 않 았지만 조금 전보다 에릭의 맨살이 더 많이 드러났다. 이제 아름다운 레이디가 될 차 례다! "헉!" 그 모습을 본 세린들은 헛바람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갑자기 달려들어 나를 에릭에 게서 떼어놓으려 했다. "앗, 무슨 짓이야?" 나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에릭의 옷을 계속 붙들었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에릭에게 귀여운 투피스를 입힐 길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자 세린이 기괴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네가 에릭에게 옷을 입히려는 건 알겠는데 그 자세는 좀 그렇지 않아? 그러니까 우선 떨어지고 얘기하자." "내 자세가 어때서?" "그게......" 세린은 말하기 곤란한지 말끝을 흐리면서 가스톤과 죠안에게 대신 말해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가스톤과 죠안은 한참 눈치를 보며 미루더니 결국 가스톤이 입을 열었 다. "물론 사심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잘 알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오해의 소지가 약 간 있거든." "오해? 무슨 오해?" "그, 그러니까 생각해봐. 마리엔이 에릭의 위에 올라타고 옷을 벗기고 있고, 에릭은 굉장히 당황하고 있잖아. 그건 어디로 보나 강제로 옷을 벗기는 걸로 보이잖아. 그러 니까 에...좀 그렇게 보였거든. 그게 뭐냐면......" "뭐야? 빨리 말해! 나 지금 기분이 별로란 말이야!" 가스톤이 본론은 말하지 않고 계속 말을 질질 끌자 답답해서 소리쳤다. 조금만 더 있 으면 드레스를 입은 에릭을 볼 수 있었는데 방해를 해서 짜증이 나기도 했다. 내가 앙 칼지게 소리치자 가스톤이 황급하게 말했다. "마리엔이 에릭을 덮치는 것처럼 보인다고!" 가스톤의 말에 하도 어이가 없어 잡고 있던 에릭의 옷을 놓쳐버렸다. 누가 누굴 덮쳐? 내가 다른 인간도 아니고 에릭을 덮쳐? 여자가 남자를 덮친다고? 황당함에 허덕이는 사이 가스톤과 죠안이 나를 에릭에게 떼어놓고 세린이 에릭에게 다가갔다. "에릭, 괜찮아?" "제길." 에릭은 대답하는 대신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런 말을 할 정도면 괜찮군. 그런데 왜 가만히 있었어? 아무리 마리엔이 갑자기 그 랬다고 해도 네 실력이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잖아." "마법을 걸었단 말이야." 에릭의 말에 세린이 황당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 옆에 있는 가스톤과 죠안도 설마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 표정은 서서히 '무서운 것. 그렇게까지 드레스를 입히 고 싶더냐?' 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잠시 후, 세린이 관자놀이를 손으로 문지르면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잖아. 지금은 강제로 입힌다고 해도 다음에도 계속 그럴 거야? 얼른 마법이나 풀어." 나는 볼을 퉁퉁 부풀리면서도 마법을 풀어주었다. 내가 조금 흥분한 것도 있었고, 세 린의 말을 들어보니 정말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던 것이다. 그런 모습으로 계속 옷을 갈아 입힐 수는 없었다. 그러다 나중에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곤란했다. 에릭은 마법이 풀리자 일어나서 거의 벗겨진 상의를 입기 시작했다.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보니 엄청 화가 난 모양이었다. 쪼잔한 놈, 남자가 겨우 옷 조금 벗겼 다고 삐치기는. 하지만 은근히 내가 너무 심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에릭은 옷을 다시 입자 내 쪽을 쳐다봤다. 순간 한 대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릭이 지그시 쳐다보자 점점 불안감이 커져만 갔다. 설마 공주를 때리기야 하겠어? 그러나 평소 저 놈의 행동을 보면 때리고도 남았다. 에릭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숨 막힐 듯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약간 쫄긴 했지만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면서 에릭을 마 주 봤다. 그러나 에릭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획 돌아서 방을 나가버렸다. 나는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내가 강제로 에릭의 옷을 갈아 입히려고 한 사실을 알게 된 다른 동료들이 한차례 설교를 늘어놓았고, 사과를 하라고 은근히 압력 을 넣었던 것이다. 나도 내가 조,금, 과격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니잖아.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그냥 옷만 약간 벗긴 것뿐인데 너무하잖아. 사람들은 나 때문에 에릭이 화가 단단히 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에릭은 세린과 여관 을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후로는 본 적이 없지만 화가 난 것은 사실이라 고개를 푹 숙이고 설교를 들어야만 했다. 특히 사라는 '어찌 그러실 수 있단 말입니 까! 레프스터 국왕폐하께서 아시면 정말 실망하실 겁니다. 고귀하신 공주님께서 남자 의 옷을 벗기다니요! 다음부터는 그런 경박한 행동을 하시면 안됩니다!' 라고 강하게 나왔다. 스피린 사람들이야 과격한 여자들이 워낙 많아 갑자기 그런 것은 나쁘다는 식 이었지만 사라는 공주인 내가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이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사라도 어 쩔 수 없는 귀족인 것이다. 지겨운 설교야 얌전히 듣고만 있으면 됐지만 사과하라는 것은 나에게는 상당히 힘든 요구였다. 사과라는 것은 거의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마계에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라 내가 다른 상대를 죽어라고 패도 나보다 힘이 약한 상대의 잘못이었다. 물론 내 성격을 알면서도 건드린 잘못도 있다는 것이 대부분 의 의견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과라는 것은 거의 해본 적이 없었다. 들어본 적은 많 았지만. 그런데 그 사과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에릭에게 하라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 해도 무시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무시해버릴까 했 지만 도로시 신관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사과를 해야한다고 강요를 하고 있었다. 이 번 일로 사이가 갈라지면 앞으로의 일에도 지장이 있다는 것이다. 에릭을 담당할 때부 터 운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생각이 정확했다. "도대체 뭐라고 하란 말이야?" 밤이라 식당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 내가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 은 없었다. 에릭과 세린은 저녁에 여관을 나가서 꽤 시간이 지난 지금도 들어오지 않 고 있었다. 틀림없이 둘이 나를 씹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은 죄가 있는 나는 여관 의 일층에 있는 식당에서 두 사람을 기다려야 했다. 내 뜻은 아니었지만 주변의 상황 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밤에 웬 여자가 자지도 않고 혼자 나와있자 힐끔거리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내 생각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한 참동안 생각에 잠겨있을 때, 여관의 문이 삐걱, 열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 에릭과 세린이었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인가. 두 사람은 내가 식당에 버티고 앉아있자 내 쪽으로 걸어왔다. 재빨리 에릭의 얼굴을 살펴봤지만 어느새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간 이후라 무슨 생 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직도 자지 않고 여기서 뭐하는 거야?" 세린이 묻자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어." "우리를? 왜?" 이런 타이밍이면 당연히 사과를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면서도 세린은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일부러 시치미를 떼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사과를 할 것이라 고는 상상도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저들의 얼굴을 보니 연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고 후자의 경우인 것 같았다. 나는 말을 하기 전에 몇 차례 심호흡을 했다. 다른 마족도 아니고 인간에게 사과를 해야한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엄청 상했다. 그리고 익 숙하지 않은 일을 하기 때문인지 쑥스러웠다. "그러니까 아까 말이야 내가 에릭에게 마법을 건 것 있잖아......" 에릭은 그 말이 나오자 약간 얼굴을 찡그렸다. 그 때의 일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무시 하면 얼마나 쪽팔릴까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입을 다물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이 아 니면 더 사과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별 수 없이 움직이지 않는 혀를 억지로 움직였다. "미안해."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거의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만 나왔다. 그러나 내 말을 들 었는지 에릭과 세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런데 누구를 가지고 노는지 다시 물어보 는 것이 아닌가. "뭐라고?" 나는 반문하는 세린을 살짝 흘겨보았다. 또 그런 말을 해야한단 말인가. 속이 부글부 글거렸고 입은 꽉 붙어버린 것처럼 좀체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손으로 치맛자락을 쥐 어뜯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고. 아까는 내가 좀 흥분해서 말이지......에이, 나도 몰라! 미안하다! 됐지 ? 나 이제 잘 거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씩씩대면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인간에게 생전 처음 해보는 사과가 너무 어색했고 그냥 화가 났다. 사과는 했으니까 된 거야. 에릭이 받아들이든 말든 난 사과했어! 다음날 에릭은 더 이상 어제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만약 사과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를 계속 꺼냈다면 지지 않고 맞받아 치려고 했던 나는 아쉬움인지 안도감인 지 모를 애매모호한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에릭이 계속 드레스는 입을 수 없다고 해 서 새로운 옷을 조달해야만 했다. 덕분에 옷으로 튀려는 작전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 이렇게 되면 화장이나 가발로 승부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가장 어울리는 옷 을 골라야겠지만 말이다. "에릭, 옷 다 갈아입었어?" "......." 아직이군. 에릭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밖에서 기다린 지 어언 10분. 옷만 갈아입는 건 데도 후딱 갈아입지 못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재촉하지는 않았다. 생전 처음 치마를 입어보는 건데 금방 입을 수 있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게다가 지금 입으려는 옷은 상하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약간 타이트한 옷이라 혼자 입기에는 번거로운 옷 이었다. 그로부터 5분을 더 기다려서야 치마를 입은 에릭을 볼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드물게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에릭의 모습을 보자 웃음이 피식 나왔지만 입술을 앙 물고 참았다. 만약 여기서 생각대로 웃어버린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잘 알고 있으 니까. 에릭이 입고 있는 옷은 류온 사람들이 입는 옷을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입기 편하 게 변형시킨 비단옷으로 공작의 꼬리 깃털처럼 화려한 색감들이 보는 이의 시선을 어 지럽게 했다. 목부분에는 칼라가 있어 에릭이 남자라는 증거를 감춰주고 있었고, 치마 는 팔 길이만큼 트여져 있어 활동하기에 편했다. 그리고 치마의 틈새로 보이는 다리의 곡선미는 매혹적인 여성스러움을 창출해내고 있었다. "와아! 정말 잘 어울리네." 에릭의 주위를 돌면서 찬찬히 살피면서 칭찬을 해주었지만 에릭은 응당 따라야 할 감 사의 말 같은 것이 없었다. 하지만 남자치고는 호리호리한 몸이라도 여자라고 하기에 는 곡선미가 부족했다. 가슴이야 속에 뭘 넣으면 되겠지만 허리는 그렇지 못했다. 남 은 방법은 오직 하나. 허리띠로 꽈악 조여줘야겠지. 그래서 옷과 한 벌로 허리띠가 입 는 것만 골라오지 않았겠어. "이제 허리띠 찰 거니까 가만히 있어봐." 옷처럼 화려한 허리띠를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묶기 시작했다. 나는 두 손에 힘을 주고 허리띠가 끊어질 정도로 잡아당기면서 에릭의 허리를 조였다. 사실 이렇게 조일 것까 지는 없었지만 한번 당해보라는 생각에 온 힘을 다해 허리띠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예 상과는 달리 에릭은 숨 막히다는 둥 너무 조인다는 둥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나 를 보는 눈초리가 차가워졌지만. 마무리로 앞쪽으로 예쁘게 리본을 묶어준 나는 만족 스러웠다. 아직 화장도 하지 않고 가발도 쓰지 않아서 어색해 보이긴 했지만 잘만 가 꾸면 굉장한 미녀가 탄생할 것 같은 그런 예감이 들었다. "우와, 허리만 조인 건데 예쁘네. 하지만 여자다운 맛이 떨어진단 말이야. 그렇다면 화장으로 커버를 해야겠지. 에릭, 거울 앞에 앉아봐. 화장해줄게." "꼭 해야되냐?" "당연하지. 참, 눈썹도 다듬어도 되지?" "...맘대로 해라." 사각사각. 역시 눈썹은 초승달처럼 끝부분은 가늘고 중간은 약간 도톰해야 예쁘지. 내 손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칼날에 잘린 눈썹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다듬을 필요 는 없었지만 이왕 하는 거 완벽하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끝으로 얼굴에 있는 솜 털까지 없앤 후에 눈 화장용 화장품을 꺼내들었다. 최고급 화장품을 사서 그런지 종류 도 많았다. 무슨 색이 좋을까? 붉은 색? 파란색? 녹색? 갈색? 어떤 색이 어울릴까 고 민을 하던 나는 옷의 화려한 이미지와 어울리는 붉은 색을 골랐다. 볼터치도 조금 넣 고 입술도 빨갛게 칠하고 속눈썹도 살짝 올리는 거야. 시녀들이 하던 것을 기억한 보 람이 있었다. 하지만 보기만 하다가 직접 하자니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걸렸다. 그러나 조금씩 변해 가는 에릭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지루하거나 힘들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됐어. 이제 눈을 떠도 돼. 어때? 마음에 들지?" 내 말에 눈을 뜬 에릭은 처음에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약간 놀라더니 다시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어쩔 수 없이 여장을 하게 됐지만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세린과 죠안은 포기했다고 들었는데 끈질기군. 에릭이 싫어한다고 해도 여장을 해야하는 건 변하지 않지만 말이야. 나는 에릭이 싫어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싱글거리며 가발을 고르기 시작했다. 상 당히 많은 가발 중에서 내가 고른 것은 붉은 색의 곱슬거리는 머리였다. 입고 있는 옷 도 화장도 도발적인 여인의 이미지에 딱 들어맞았기 때문에 붉은 색이 어울렸다. 에릭 이 가발까지 쓰자 나는 감탄성을 터트렸다. "와아! 에릭, 진짜 예쁘다. 이정도면 어지간한 남자는 그냥 넘어오겠는데. 한번 시험 해볼까?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싫어." "에이, 농담한 것 가지고 그렇게 정색할 필요는 없잖아. 그런데 도발적이고 매력적인 여자스타일 괜찮지 않아? 내가 한 거지만 정말 잘 꾸민 것 같아. 치맛단을 조금 더 뜯 을까? 아, 가슴도 빵빵하게 만들어야겠네. 그럼 더 섹시해 보일 거야." "마음에 안 들어." 가슴에 넣을 걸 찾던 나는 에릭의 말에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곱슬거리 는 붉은 머리가 짤록한 허리 뒤에 늘어져 있었고, 반들거리는 입술은 장미꽃보다 더욱 붉게 빛나면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왜? 진짜 여자같이 보인단 말이야!"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들지 않는 거야." "마음에 안드는 이유가 뭔데?" "굳이 이렇게 달라붙는 옷을 입을 필요는 없잖아. 화장도 너무 요란해서 싫어." 잠시 논쟁을 벌였지만 결국 여장 스타일을 바꾸기로 했다. 에릭의 반대때문이기도 했 지만 생각보다는 요염한 이미지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염한 여자는 미소지으 면서 다른 사람을 꼬셔야 그 진가를 발휘하는 법인데 에릭은 전혀 웃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재미있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스타일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한참동안 이 옷 저옷 다 입혀보고 화장도 바꿔보고 가발도 바꿔써본 결과 가장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을 수 있었다. "오, 이게 제일로 잘 어울린다. 요구대로 했으니까 에릭도 불만없지?" "...그래." "그렇게 인상을 찡그리면 예쁜 얼굴이 망가지잖아. 살포시 웃어야지. 자, 웃어봐." "장난하지마." 현재 에릭은 검은 생머리 가발을 쓰고 옅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눈가는 이제 막 돋아 난 나뭇잎처럼 연한 연두색을 띠고 있었고, 볼은 분홍빛의 탐스런 복숭아처럼 불그스 름하게 물들어있었다. 입술은 처음보다는 연한 붉은 빛을 발랐지만 마치 별빛을 뿌려 놓은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위아래가 나뉜 하늘색의 투피스로 상의 위에는 조끼를 걸쳐 입었다. 치마는 달라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파티복처럼 펑퍼짐하지도 않은 형식으로 주름만 잡혀있을 뿐 별다른 장식은 없었다. 하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하늘거리는 모습이 아주 예뻤다. 단순미라고나 할까. "이제 악세사리를 해야겠는걸. 뭐가 좋을까나?" "또 해야되냐?" "그럼. 그럼. 여자들에게 악세사리는 기본이라고. 할려면 제대로 해야지. 음. 이게 좋 으려나? 너무 화려한가? 그럼 이건 괜찮을까?" 수차례 악세사리를 끼웠다 뺐다 한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드디어 에릭에게 딱 어울리는 악세사리를 고를 수 있었다. "머리에는 이 핀을 꽂고 목걸이는 진주 목걸이로 하고. 브로치는 사파이어가 좋겠어. 팔찌로는 수수한 은팔찌를 차면 딱이야." 마지막으로 팔찌를 채워준 나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요염한 미녀는 아니지만 어딘지 모르게 신비해 보이는 미녀가 내 앞에 서있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툴툴거리고 있지만 평소 때의 표정을 생각해본다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차가운 미녀가 될 것이다. 누가 저 여인을 남자라고 믿겠는가. 에릭의 남성다움을 모두 화장과 악세사리로 커버해낸 내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시녀들이 나를 꾸며주고 뿌듯해하는 이유를 오늘에서야 알 수 있었다. 이정도면 어디를 가도 꿀리지는 않으리라. 이제 여장의 마지막 단계는 얼마나 여자답게 행동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날 나는 싫다는 에릭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물론 여장을 한 채로 말이다. "이 꼴로 왜 나와야 한다는 거야?" "그래야 여장에 익숙해지지. 적어도 히폴리테에 도착할 때까지는 계속 여장을 해야될 텐데 지금부터 익숙해져야지." 그렇게 에릭과 이야기하면서 걷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번씩은 힐끔거리며 돌아보았다 . 에릭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여자가 아니라 남자들의 시선을 받자 적응이 안 되는 눈 치였다. 빠르게 걸어가는 폼이 어서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대로 가면 기껏 외출한 보람이 없었다. "좀 천천히 걸어. 그리고 그 발걸음은 고칠 데가 많은데. 전혀 여자같지 않잖아." "스피린에서는 이렇게 걷는 여자들이 더 많아." "나도 알아. 하지만 그 사람들은 딱 봐도 여자니까 상관없지만 에릭은 그게 아니잖아. 그러니까 하는 행동으로 불리한 점을 커버해야지.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무릎이 서로 스치도록 걷고 발바닥 전체보다는 발끝이 먼저 닿아야돼. 고양이처럼 사뿐사뿐 걸어 야 되는거야." 아주 재미있는 상황이었다. 라디폰 공작의 지시로 교육받은 것을 그의 아들인 에릭에 게 가르쳐주고 있다니 말이다. 이래서 부모는 잘 만나야 되는 것인가 보다. 만약 에릭 이 다른 사람의 아들이었다면 내가 이렇게 깐깐히 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라니까.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흘러야 한다고 했잖아. 눈은 밑을 보지 말고 똑 바로 앞을 봐야 돼. 치마가 끌리지 않게 조심하고. 돌아볼 때도 너무 느리지도, 빠르 지도 않게 돌아. 이왕이면 치마가 약간 붕 뜨도록 도는 게 예뻐." 물론 거리에서 대놓고 크게 말한 것이 아니라 에릭만 들을 수 있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릭은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시키는 대로 잘 하고 있었다. 귀족이라 예법에 익숙한지 잠시 후에는 그런대로 흉내는 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 후에도 에릭을 끌고 식당이나 옷가게에 들어가서 여자는 이래야 한다, 라는 주제로 계속 수업을 했다 . 그 수업은 저녁까지 계속되었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나와 에릭 모두 기진맥진해 있었다. 나보다 에릭이 훨씬 지쳤지만 말이다. 하지만 성과는 있었다. 이제 제법 여자 다운 행동을 하게 됐으니까. 나와 로즈, 도로시 신관은 서로를 보면서 기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바로 오늘이 에 릭을 담당한지 4일째 되는 날이었다. 즉, 누가 여장을 잘 시켰는가를 비교해보는 날이 었다. 사라야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으니 제외였지만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서 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마리엔은 어제 에릭과 함께 밖에 나갔다 왔다면서. 하루를 놀면서 보낼 정도면 굉장 히 자신이 있나봐." "자신이 있긴요. 그보다 죠안이 어떻게 변했을지 정말 기대되는데요." "세린씨는 여자인 제가 봐도 정말 예쁘답니다." 순간 나와 로즈는 동시에 도로시 신관을 째려보았다. 아무리 원판이 잘나도 노력이 존 재하지 않는 여장이란 아름다울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로즈가 했던 노력은 대 단했다. 로즈가 어떻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 자신감을 보면 상당히 애썼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들 사이의 기류가 이상해지자 사라가 재빨리 나섰다. "어서 여장이 얼마나 잘 됐는지 보도록 하는 게 어떨까요?" "그러는게 좋을 것 같군요. 이렇게 있어봤자 누가 가장 잘 했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저도 어떻게 됐을지 궁금하군요." 사라의 말에 엔젤과 히크리트 신관도 동의를 하자 우리들도 신경전을 멈추고 에릭들의 방으로 갔다. 아침에 여장을 다 해놨으니 지금쯤 어여쁜 아가씨 4명이 우리들을 기다 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들어간 우리들은 딱 굳어버렸다. 처음 보인 얼 굴이 가스톤이었기 때문이다.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가스톤의 모습은 완전히 변태 그 자체였 다. 치마도 입고 화장도 하고 악세사리도 했지만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딱 보기 만 해도 여장을 즐기는 남자였다. 그런 사람들을 변태라고 하지 않던가. 화장으로 떡 칠을 해서 새하얗게 변한 가스톤의 얼굴이 우리에게 향하자 저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고 보니 사라는 화장을 해본 적이 없었지. 자신도 가꿔본 적이 없는 사라에게 가 스톤을 맡겼으니 저런 해괴망칙한 인간이 나온 것이다. "오셨습니까?" 우리들은 가스톤의 질문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열고 말을 하면 목소리가 떨 릴 것 같아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가스톤을 보고 내린 결론은 오직 하나였다. 완전 변신이 필요하다. 나중에 나와 로즈, 도로시 신관이 합세해서 변신을 시켜야했다 . 그렇지 않으면 바로 여장했다는 사실을 들켜 심사하기도 전에 쫓겨날 것이다. 거의 기계적으로 가스톤에게서 고개를 돌린 우리들은 다시 한번 굳었다. 이번에는 가 스톤을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였다. 가스톤의 옆에는 푸른 머리의 아름다운 여자가 서있었다. 세린은 별다른 화장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뻤다. 나풀거리 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하얀 리본으로 묶은 세린은 소풍을 나온 귀족 영애처럼 보였다. 미안한 말이지만 여장을 시킨 도로시 신관보다 더 예뻤다. 그런 세린이 가스 톤의 옆에 있자 더욱 돋보였다. 하지만 안심이 되는 점이 있다면 세린의 외모를 믿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티가 난 다는 점이었다. 지금 이 상태로도 세린이 여자라는 것을 믿지 않을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약간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정도면 해볼 만하겠는데. 남은 건 죠안이 얼마나 변했냐 하는 것인데. 죠안을 찾던 나는 다음 순간 몇 번이나 내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저, 저 여자가 죠안 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어찌 인간이 이렇게 변할 수가 있단 말인가! 마법을 사용한 게 아닐지 의심이 갔다. 그러나 놀랍게도 마법의 기운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비 단 이런 놀라움은 나에게만 적용된 것이 아닌지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 경악성을 내뱉 었다. "저게 죠안씨라고?" "미, 믿을 수가 없군요." "이래서 화장빨을 조심하라는 말이 있었군." "하,하,하." 놀라움에 넋이 나간 사람에서부터 허탈한 웃음을 짓는 사람까지 반응도 각양각색이었 다. 이런 우리들의 반응을 보고 로즈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지요. 지금까지 제 화장술을 따라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답니다." 그녀의 말에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저게 화장이라고? 저건 화장이 아니라 변장이야. 변장!] 죠안은 평소의 날카로운 인상이 아니라 아주 다소곳한 숙녀로 바뀌어 있었다. 그 모습 을 보고 있자니 화장을 한 여자의 얼굴은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 었다.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바꿔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미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원래 죠안의 얼굴을 생각해본다면 가히 변신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화장의 무서 움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의상 선정도 화장과 잘 어울렸다. 죠안은 보랏빛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빛을 받을 때면 반짝이는 특이한 재질이라 외모가 딸리는 면 을 잘 덮어주고 있었다. 어느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강적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교육시킨 에릭이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약간 불안하긴 했다. 그러나 그런 불안도 주 위 사람들의 감탄에 모두 날아갔다. "오오오! 굉장하다!" "외모는 거의 그대론데 분위기가 정 반대잖아." "역시 마리엔님이시군요!" "이거야 여장한 것을 몰랐다면 영락없이 여자로 착각했을 것 같은데요." 에릭은 그냥 의자에 앉아있었을 뿐이지만 어제 내가 했던 수업의 결과로 분위기가 상 당히 부드러워져있었다.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얌전히 앉아있는 폼이 우아함 이 철철 넘쳤다. 어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한 보람이 있었다. 효과가 오래갈 것 같 지는 않지만 이번하고 심사 때만 넘어가면 되민 큰 상관은 없었다. "세린씨는 귀엽고, 죠안씨는 그 변화가 놀랍고, 에릭씨는 기품이 흐르는 것이 어느 쪽이 더 잘했다고 말하기 힘들군요." "이렇게 되면 완전히 삼파전인데." 여장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엔젤과 히크리트 신관이 자신들의 의견을 말했다. 하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 아무리 잘했어도 자리는 두 자리뿐이니 한 명은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엔젤과 히크리트 신관이 마음에 드는 사람을 한 명씩 고르기로 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사람을 고르면 다른 방법을 고려해봐야겠지만 다행스럽 게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사람을 선택했다. "음, 난 에릭씨가 제일로 여자같이 보이는군요." "그럼 전 죠안씨를 선택하지요. 세린씨도 예쁘지만 죠안씨의 변신은 가히 파격적이었 으니까요." 세린도 아름답긴 했지만 에릭과 죠안은 애초부터 여장시키기 힘든 사람들이라 점수를 많이 받은 것이다. 나와 로즈는 당연히 기뻐했다. 그러나 정작 여장을 한 에릭과 죠안 은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그도 그런 것이 남자인 그들이 여자 같다는 말을 듣고 좋아하기도 그렇지만 피나는 노력으로 여기까지 바꿔준 우리들을 봐 서라도 싫어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도로시 신관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투 덜거렸지만 그 날 저녁 식사는 사라와 도로시 신관이 사게 되었다. "이 집에서 제일로 비싼 걸로 가져다주세요." "마리엔, 아무리 사주는 거라지만 너무 비싼 건 시키면 안되지. 아, 저는 이 페이지에 있는 음식 다 가져다주세요." "그럼 저도 좀 먹어볼까요." "잘 먹겠습니다. 세리자드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나와 로즈, 도로시 신관이 달려들어 가스톤을 여장시킨 다음날 우리들은 다시 한번 통 행증을 받으러 갔다. 전에 심사했던 심사관이 우리를 알아볼지 몰라 미리 손을 쓴 뒤 라 마음놓고 갈 수 있었다. 특별한 건 아니고 세인트의 시장에게 그 심사관을 식사에 초대하게 만들 것뿐이었지만 말이다. 어차피 심사할 사람은 많았기 때문에 그 심사관 은 거절하지 않고 순순히 초대에 응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대로 이름을 사용하면 나 중에라도 덜미를 잡힐 것 같아 모두 가명을 사용하기로 했다. 나는 원래 애칭이었던 유나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로즈는 로잘린, 엔젤은 엔젤리나, 히크리트 신관은 리티나, 도로시 신관은 도나라는 가명을 썼다. 그리고 여자 이름이 없는 네 명의 남자들에게는 여장을 기념해서 이름을 지어주었다. 세린은 세데리아, 에 릭은 에셀로아, 죠안은 죠세핀, 가스톤은 가나였다. 심사관도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 고 통과시켜주었다. #26-잃어버린 조각 히폴리테는 남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 다른 마을과 다르지 않는 평 범한 마을이었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도, 타지인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상인들 도, 또래와 어울려 뛰어다니는 아이들도 모두 여자였다. 세상에 여자들만 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 외의 다른 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성지라고 해서 신전이 여 기저기 세워져있고 참배객들이 넘쳐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약간 실망했다. 마을이 라고 하기에는 크고 도시라고 하기에는 작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마을이 히폴리테 였다. "에게, 성지라고 해서 무슨 대단한 곳인줄 알았더니 그냥 그런 마을이잖아." "그러게 말이야." 내 말에 세린이 맞장구쳤다. 다른 사람들도 우리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곳 이 성지라니. 그냥 촌구석이구만. 우리들이 히폴리테의 모습을 보고 실망한 기색이자 엔젤이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곳은 보이기 위한 성지가 아니라 아테네님의 자취를 더듬고 느끼는 성지입니다. 우리들은 관광객들을 불러들이기 위한 장삿속으로 성지를 이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굳이 성지가 화려할 필요는 없지요." "그리고 진짜 성지는 이 곳이 아니라 아르테미스의 산입니다. 산 곳곳에 아테네님의 일생과 스피린의 건국에 관한 그림과 글들이 새겨진 비석들이 있고, 정상에는 아테네 님을 기리는 신전이 있습니다. 산 전체가 하나의 역사서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히 폴리테는 그 성지로 가기 위한 입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로즈가 엔젤의 말을 이어서 성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로즈가 설 명을 거의 마쳤을 때 '순례자를 위한 그늘'이라는 간판이 걸려진 여관 앞에 당도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 보니 몇몇 자리를 제외하고는 비어있어서 매우 한산했다. 비어있 는 자리로 가서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우리들은 현재 성지의 상황을 대강 알 수 있었다. 식당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에 가 만히 있어도 알 수 있었다. "이거야 원. 나는 아르테미스의 산을 보기 위해 세를리드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들어갈 수가 없다니. 완전 허탕이야." "자네만 그런가. 같이 온 나도 그렇지. 몇 백 년 동안 평화롭던 곳에 갑자기 마물들이 나타나다니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들리는 말로는 아르테미스의 산에 나타나는 마물 들은 보통 마물보다 훨씬 덩치도 크고 포악해서 가까이 가지도 못한다고 하더군." "아, 나도 그 말은 들었네. 그런데 정말 이상하지 않아? 아르테미스의 산과 히폴리테 는 반나절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 히폴리테에서는 마물들이 나타나지 않잖아. 이거 누가 일부러 아르테미스의 산에만 마물들을 풀어놓은 거 아닐까?" "에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그게 말이 되나? 요즘 들어 마물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어서 그런 것이겠지. 덕분에 나같은 모험가는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게 됐다니 까." "나도 그냥 해본 소리라구. 확실히 마물들이 예전보다 더 많아진 건 사실이야. 얼마 전에는 200년 전에 봉인됐다던 전갈의 마녀 요이체로스까지 나타나서 난리도 아니었잖 아. 페드인 왕국의 공주라는 마리엔님이 나서서 없앴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한바탕 피보라가 불었을 거야." 이렇게 온통 아르테미스의 산에 나타나는 마물들에 대한 이야기들뿐이었다. 만약 아르 테미스의 산에 과거부터 마물이 나왔다면 이렇게 화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르테미스의 산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스피린이 건국된 이래 단 한번도 마물 이 나타난 적이 없었다. 스피린 사람들은 그 이유를 건국 여왕인 아테네의 은혜라고 말들 하지만 이미 죽어버린 인간이 어떻게 마물들의 침입을 막는단 말인가.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인간들은 미신을 쉽게 믿으니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그리고 히폴리테 사람들은 예로부터 성지를 지켜온 사람들로 성지를 노리는 불순한 무 리들을 막기 위해 그에 걸맞는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조차 자신들의 성지 인 아르테미스의 산을 마물들로부터 지키지 못했다. 그러니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 릴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이상하죠?" 잠자코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나는 동료들에게 넌지시 말했다. 상위 마 물과 몇몇 중위 마물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마물들이 머리가 딸린다는 사실을 누구 보다 잘 알고 있는 나였다. 그러나 이성이 발달하지 못한 만큼 본능은 엄청나게 발달 한 존재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때문에 먹이가 잔뜩 모여있는 마을을 제쳐두고 별 볼일 없는 산에만 죽치고 있는 것은 평소 마물들의 행동과 비교해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 었다. 배가 고프면 같은 동족이라도 잡아먹을 정도로 먹는 것에 관해서는 엄청난 집착 을 가진 것들이 먹이를 몇 일도 아니고 몇 달동안 내버려둔다는 것은 정말 이상했다. 내 말에 엔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리엔의 말이 맞습니다. 아르테미스의 산과 히폴리테는 천천히 걸어도 하루 안에는 도착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습니다. 그런데 마물들이 마을에는 한번 도 내려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는군요." "혹시 이 곳에 있는 사람들의 실력이 뛰어나서 접근하지 않는게 아닐까요?" 도로시 신관의 말에 히크리트 신관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마물을 소탕할 때 몇 번 참가한 적이 있지만 마물들은 아무리 상대가 강해도 끊임없 이 달려듭니다. 그들에게는 세리자드님의 위대한 힘을 알아볼 정도의 인지력조차 없습 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마물들이 죽어도 계속 달려들지요. 어둠에 속한 존재가 지 닌 파괴시키고자 하는 더러운 본성 때문일 겁니다." 히크리트 신관의 어둠의 종족 전체를 비하하는 말에 기분이 상했다. 저 것이 잠잠하더 니 또 시비네. 멍청한 마물들과 같은 취급을 하지 말란 말이다. 마족을 모욕해도 유분 수지. 어디서 그따위 말을 하고 난리야. 언제 한 번 손을 봐줘야 하는 것 아냐? 하지 만 안타까운 것은 지금 나는 어둠의 힘을 사용하긴 하지만 어둠의 종족은 아니라고 알 려져 있기 때문에 어둠의 종족을 옹호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내가 속으로 이를 가는 사이에 세린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마물들이 마을에는 내려오지 않는 걸까요? 파괴 본능으로만 움직이 는 거라면 아르테미스의 산보다는 이 곳으로 내려와야 하지 않습니까. 역시 누군가가 마물들을 조종하고 있는 걸까요?" 세린의 말에 동료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흑마법사의 짓이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 리기는 했지만 직접 닥치고 보니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음, 흑마법사의 짓일 가능성이 더 많아졌네요. 하지만 마물을 조종하려면 직접 소환 을 하는 수밖에 없는데 소환술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알고 있는데. 게 다가 소환을 할 수 있는 수도 제한되어 있고. 그게 아니면 키메라 제조법으로 만들 수 도 있지만 그건 재료가 많이 들어서 대부분 기피하는데. 뭐 흑마법을 9서클까지 도달 한 사람이라면 약간 무리를 하면 어느 쪽이든 할 수 있기는 하지만 9서클 마도사가 흔 한 것도 아니고 이상하네." 내가 중얼거리자 동료들의 눈이 내 쪽으로 집중되었다. 이 중에서 흑마법사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많은 부분을 내게 의지할 수밖에 없 었다. 그러나 같은 흑마법사라도 다른 흑마법사가 사용한 마법을 완벽하게 알아내는 것을 힘들었다. 흑마법은 공격용 외에도 매우 다양한 용도-저주, 키메라 제조, 독극물 제조 등-가 있기 때문에 같은 흑마법사라도 주력 분야가 다르면 잘 모르는 경우가 허 다했다. 내 경우는 예외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흑마법사의 짓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이런 짓을 할 사람이 흑마법사 말고 또 누가 있단 말입니까?" 이 일의 원흉을 악독한 흑마법사로 단정짓고 있던 히크리트 신관이 불쾌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 일에 신관의 힘이 필요하지만 않았어도 그냥......나는 똑같이 맞받아치 는 대신 비뚜름하게 웃어주었다. 저런 인간과 똑같이 행동하면 내 품위만 떨어지지 않 겠는가.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이 왜 나서냐는 의미가 내포된 비웃음을 지었던 것이다. "내가 언제 그렇다고 했나요? 다만 상식선에서 말한 것뿐입니다. 상식 말이에요. 그 상식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뭐라구요? 방금 뭐라고 했죠?!" "어머, 나이도 별로 많이 먹은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가는 귀가 먹은 모양이네요. 좀 더 건강에 신경 쓰는 것이 좋겠군요." "이거 왜들 그래요? 지금은 서로 단결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서로 다투면 어쩌자는 거 예요? 두 사람 다 그만하고 화 풀어요." 나와 히크리트 신관 사이의 공기가 미묘해지자 로즈가 싸움으로 번지기 전에 재빨리 끼어 들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나서서 말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적을 눈앞에 두 고 같은 편과 불화가 생기는 것은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내 딴에는 부드럽게 순화해서 말한다고 한 거였는데 말이야. 더 이상 약올렸다가는 좋을 것이 없을 것 같아 순순히 물러났다. 히크리트 신관도 동료들까지 나서자 어쩔 수 없이 물러난다는 식으로 넘어 갔다. 진짜 붙었으면 누가 깨졌을 지도 모르면서. 잠시 후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엔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현재 아르테미스의 산이 마물들 때문에 폐쇄된 것은 알았지만 이 것만으로는 부족합 니다. 상대가 누구인지 확실히 모르는 상황이니 철저히 대비해야 합니다. 지금 상황을 정확히 알고 할 수 있는 준비는 모두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자면 좀 더 구체적인 정도가 필요하겠군요." "그럼 오늘은 지금 상황에 대해 정확히 알아보는 게 좋겠군요." 나는 동료들과 떨어져 혼자 거리를 걸어다니고 있었다. 아르테미스의 산에 대해 조금 이라도 더 자세히 알아내기 위해 각자 개인 행동을 하기로 한 것이다. 오랜만에 혼자 서 돌아다닐 기회가 생기자 나는 이 곳 저 곳 돌아다니며 구경을 했다. 볼만한 곳은 없었지만 그래도 시간을 때우기에는 충분했다. 원래라면 아르테미스의 산의 상황을 알 아봐야겠지만 나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있으니 나까지 나서서 알아낼 필요는 없겠지. 그런 생각으로 마음 편하게 돌아다니던 나는 우연히 어떤 할머니를 보게 되었다. 사실 할머니라고 하기에는 젊어 보였지만 그렇다고 아줌마라고 하기에는 늙어 보였기 때문에 그냥 할머니라고 생각했다. 그 할머니는 내 앞쪽에서 걷고 있었는데 머리가 하 얗게 샌 것을 빼고는 젊은이 못지 않게 정정했다. 앞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꼿꼿이 선 허리와 정확하게 걷고 있는 발걸음을 보면 매우 건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리고 무엇보다 왼손에 무거워 보이는 나무 상자 두 개를 가뿐히 들고 가고 있었다. 나 무 상자를 차곡차곡 쌓아 끈으로 고정해서 들고 가는데 전혀 힘들어하지 않고 있었다. 할머니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지팡이가 왜 필요한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힘도 센 할머니군. 이런 생각을 하면서 빠른 걸음으로 그 곁을 지나갔다. 나무 상자는 뚜껑이 없었기 때문에 옆을 지나가자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이 보였다. 상자 안에는 예전에 루시가 가지고 다니던 구슬과 비슷한 구슬들이 담겨있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 다면 루시가 가지고 있던 구슬은 주먹만했지만 이 구슬은 그 것의 3배정도 되는 크기 였다. 그런 구슬들이 상자에 가득 담겨 있어서 상당히 무거워 보였다. 그러나 내가 굳 이 도와줄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을 뿐더러 도와주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그 냥 스쳐지나갔다......가 아니라 스쳐지나가려고 했다. 따악! "악!" 난데없이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에 나는 머리를 감싸안았다. 머리를 마구 문지르면서 고개를 돌려보니 지팡이를 회수하고 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그 할머니가 지팡이로 내 머리를 가격한 것이다. 난데없이 한 대 맞은 나는 화가 나서 할머니를 노 려보았다. 멱살을 잡고 '이 할망구가 늙으려면 곱게 늙을 것이지 왜 지나가는 사람을 치고 난리야!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주위의 눈이 있어 그렇게 말은 하지 못하고 신경 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왜 때려요?! 할머니가 언제 날 봤다고 때려요?" 따악. 우씨. 이 놈의 늙은이가 미쳤나? 또 때려? 설마 또 때릴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나는 이번에도 피하지 못하고 지팡이에 머리를 맞았다. "왜 이래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자 이 늙은이가 띠거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래. 잘 물어봤다. 뭘 잘못했냐고? 늙은이가 무거운 짐을 힘겹게 들고 가고 있으면 와서 거들지는 못할망정 획 지나가려고 해? 요즘 것들은 왜 이렇게 버르장머리가 없는 건지 원. 내 때는 이런 일은 상상도 못했지. 암." 나는 그 할망구의 말에 기가 찼다. 그게 힘겹게 들고 간 거냐? 아주 가뿐히 들고 가더 구만. 그리고 말로 하면 되지 때릴 건 뭐란 말인가. 내가 노인 공경 같은 기특한 생각 을 가지고 있을 턱도 없었거니와 더군다나 내 머리를 가격한 이 늙은이에게는 그런 생 각은 생길 래야 생길 수가 없었다. 당연히 나가는 말도 좋지 않았다. "혼자서도 잘만 들고 가시더만 뭘 그래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왜 나한테만 그래요?" 따악. "이씨." "뭘 잘했다고 말대꾸야? 부모뻘 되는 사람이 힘들어 보이면 쪼르르 달려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어디서 말대꾸야?" "우리 부모님은 할머니보다 훨씬 젊어요." "이 것이 그래도 반성하지는 못하고 말이야. 너 한번 더 맞을래? 내가 지금은 늙었지 만 젊었을 때는 알아주는 전사였다 이거야. 지금도 너같이 비리비리한 애는 마음만 먹 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수 있어. 얼른 와서 이거 들어!" "싫어요!" 좋게 말했다면 도와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의 머리를 세 번이나 때린 저 늙은이는 도와주고 싶지 않았다. 지팡이에 맞은 머리의 통증으로 봐서 힘도 철철 넘치구만. 나 이만 아니었으면 가만히 있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늙은이를 때리는 것은 마음에 걸렸다 . 내가 단호하게 거부하자 그 할망구는 지팡이를 다시 한번 휘둘렀다. 그러나 그 것도 몇 번이지 계속 당할 내가 아니었다. 미리 대비를 하고 있었던 나는 가볍게 지팡이를 피했다. "어쭈, 피했냐? 얼마나 피하는지 보자." "헹, 때릴 수 있으면 때려봐요. 지금까지는 방심했지만 이젠 아니라구요." 확실히 이 놈의 늙은이는 보통 늙은이가 아니었다. 상자를 든 채로 잘도 지팡이를 휘 둘러대고 있었다. 그러나 괴물 늙은이도 인간이긴 했는지 한 10분이 지나자 헥헥거렸 다. 멍청하게 상자를 들고 움직였으니 더 빨리 지친 것이다. 마구 약올려주려던 나는 갑자기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길을 가던 사람들이 저마다 멈춰 서 나와 할머니를 보면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억울하게도 내 욕을 하는 사람들 이 많았다. "세상에.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뭐하는 거래니." "생긴 건 곱상하게 생겨서 성격 참 나쁘네." "그러게 말이야. 말세지. 말세. 새파랗게 젊은것이 버릇이 없군." 뭐야. 이 늙은이가 먼저 때렸단 말이야! 정말 억울했다. 폭력을 휘두른 괴팍한 할망구 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죄없는 나에 대해서만 궁시렁대다니 말이다. 늙으 면 다란 말인가. 그러나 사람들은 결과만 보고 나는 버릇없는 애로 몰아갔다. 내가 사 람들의 반응에 당황하자 그 놈의 할망구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그거 보라고! 그러게 좋은 말로 할 때 도와줬어야지." '언제 좋은 말로 했어?'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왔지만 꿀꺽 삼켰다. 이 말을 했다 가는 패륜아로 찍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보는 알아보지 않고 놀기만 해서 재앙이 닥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 말도 못하자 할망구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상자를 내게 떠넘겼다. 엉겁결에 상자를 받는 순간 상자를 받은 손이 아래로 푹 꺼졌다. 우, 무거 워. 이런 걸 들고 있었으면서도 낑낑대지 않은 할망구의 체력이 놀라울 뿐이었다. "얼른 따라와. 너같이 체력이 약한 애는 이런 걸 들으면서 체력을 길러야돼." 그래도 요이체로스를 없앤 이후로 시간이 나면 틈틈이 훈련을 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는 체력이 약한 축에 끼는 나로서는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내게 짐을 떠넘긴 할망구는 유유히 자기 갈 길을 걸어갔다. 그냥 튀어버릴까도 했지만 주위의 차가운 시선에 툴툴 거리며 그 뒤를 따라갔다. "언제까지 가야 돼요?" "조금만 참아라. 우리 집은 마을 변두리에 있거든." 양손으로 거의 껴안듯이 상자를 들고 간지 한참 만에야 할망구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 다. 할망구는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시냇가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제법 잘 사는지 평 민들의 대부분은 1, 2층 집에 사는데 반해 3층집에서 살고 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 만 항상 손질을 하는지 깨끗한 집이었다. "여기가 우리 집이다. 들어와라." 할망구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잽싸게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바닥에다 상자를 털 썩 내려놓았다. 상자를 든 손은 상자의 무게 때문에 빨갛게 상자의 밑바닥에 눌린 자 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망할 할망구. 투덜거리며 이제 간다고 말하려던 나는 집 안쪽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 다녀오셨어요?" 집안에서 나온 사람은 25살 정도 돼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그 여자는 할망구의 옆에 서있는 나를 보고 눈을 끔벅거리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할망구를 탓했다. "어머니, 또 모르는 분께 짐을 지운 거예요? 마을 사람도 아니고 타지인에게 그러시지 마시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느냐? 늙은이를 돕는 것은 젊은이의 의무다. 게다가 잴 봐라. 여자가 저렇게 부실하게 생겨서 어디다 써먹겠어? 그래서 체력을 길러주자는 차원에 서 짐을 들게 했지." 할망구는 별 일 아니라는 투로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했다. 그러자 젊은 여자는 한숨을 내쉬고 미안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이거 미안해. 우리 어머니가 좀 괴팍하셔서 말이야. 스펠 비드(spell bead)가 많이 들어 있어서 무거웠을텐데. 힘들었지?" 상대가 정중히 사과하자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 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스펠 비드라뇨? 그게 이 구슬의 이름인가 보죠?" "음? 스펠 비드를 몰라? 스펠 비드는 연금술사가 만든 마법 물품이잖아. 마법 주문이 새겨져 있거나 기타의 마법적 효과를 내는 건데... 이건 꼬마 애들도 다 아는 건데 말 이야." 젊은 여자는 이상한 애를 보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왕궁에서 그런 구슬에 대해 언급한 책이 있었던 것도 같았다. 사람이 모를 수도 있는거지 꼭 그렇게 꼬마들 도 다 알고 있는 걸 모른다고 말해야 되겠어?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스크롤만 알고 있 었던 나는 호기심이 생겨 물어보았다. "그럼 스크롤이랑 같은 건가요?" "아니. 기능은 비슷하지만 조금 틀려. 스크롤은 휴대하기가 편해서 여유만 있다면 몇 개든 가지고 다닐 수 있지만 스펠 비드는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양이 한정돼있지. 그래 서 크기가 작을수록 가격이 비싸. 대신 스크롤처럼 불에 타거나 하지는 않아. 그냥 겉 만 보면 하나같지만 두 개의 반구가 연결된 식이라 윗부분을 돌린 상태로 던지면 마법 이 시전돼. 스크롤에 비하면 효과가 떨어지지만 그래도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는 마 법 물품이야." 그렇다면 루시가 가지고 있던 구슬은 상당히 비쌌다는 말인데. 루시는 의외로 부자인 모양이었다. 구하기 힘들다는 성녀의 축복이 걸린 목걸이에 주먹만한 스펠 비드까지 가지고 다녔던 걸 보면 말이다. 힘겹게 운반해온 구슬의 정체까지 알자 더 이상 이 곳 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럼 이제 가볼게요." "여기까지 들고 와줬는데 식사라도 하고 가지. 마침 식사 준비 중이었거든." "그래. 처음에는 싹수가 노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까지 불평하지 않고 들고 온 걸 보면 의외로 끈기가 있는 것 같아서 특별히 상을 주지." 별로 받고 싶은 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거절하자 할망구가 '늙은이의 말은 무시 하는 거냐?'고 틱틱거리는 바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남았다. 사람은 늙으면 대체적으 로 성격이 둥글둥글해진다는데 이 할망구는 전혀 아니올시다 했다. 그나마 음식들이 맛이 있어서 자그마한 위안이 되었다. 가만히 밥만 먹고 얼른 가고 싶었지만 두 사람이 계속 말을 시키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놀랍게도 이 할망구는 세디언 중 한 명이었다. 세디언은 히폴리테에서만 사 용되는 고유 명사로 대표자와 비슷한 뜻이었다. 그리고 할망구는 나이가 먹은 지금도 손에 꼽히는 우수한 전사라고 한다. 어쩐지 무식하게 힘만 세더라니. 할망구의 넘치는 체력에 대한 원인을 알게 되자 갑자기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강한 사람이-자기 말로는- 저 많은 스펠 비드를 어디다 쓰려는 걸까? 할망구에게 먼 저 말을 걸고 싶지는 않았지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슬며시 물어보았다. "그런데 스펠 비드를 어디에 쓰려고 저렇게 많이 준비한 거죠?" 내 질문에 할망구의 얼굴이 약간 굳더니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요즘 아르테미스의 산이 마물들 때문에 폐쇄됐다는 것은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겠지? 진짜 이유는 마물들보다는 다른 곳에 있지만. 아무튼 선조 대대로 지켜온 성지를 마 물들의 손에 넘겨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마침 우리를 도와 줄 사람들이 오기 로 되어있으니 나중에 그들을 지원할 때 사용할 예정이다." "도와줄 사람?" "듣고 놀라지마. 너도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거야. 페드인 왕국의 마리엔 공주님이라 고. 요즘 소문이 자자한 분이시지." 젊은 여자의 말에 나는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과연 내가 그 마리엔이라는 사실을 안 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하지만 몰래 들어온 만큼 함부로 정체를 밝힐 수 가 없어서 잠자코 있었다. 지금 내 정체를 밝힌다 해도 믿지 않을 가능성도 많았고 말 이다. "상황이 심각한가 봐요?" "그런 편이지. 몇 번이나 소탕하러 갔지만 매번 실패로 돌아갔으니까. 이 곳 사람들과 멋모르고 산에 올라갔다 당한 타지인까지 합하면 벌써 100명이 넘는 수가 마물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지." "히폴리테 사람들은 모두 뛰어난 전사라고 들었는데 마물들이 엄청 강한가 봐요?" 내 질문에 할망구가 어울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것보다는 숫자가 너무 많아서 그렇지. 한 마리씩 생각하면 성지를 지켜온 우리들 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상대는 그렇게 많지 않아. 하지만 떼거지로 몰려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게다가 몬스터 도감에도 나와있지 않은 마물들이 종종 섞여있어 대항하기가 힘들어." 인간계에 있는 마물 중에는 단독으로 행동하는 마물은 거의 없었다. 집단으로 행동하 는 마물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크였다. 한 마리만 있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몇 십 마리 모이면 상대하기가 상당히 힘들어졌다. 압도적인 힘을 가지지 않는 한 숫자로 밀어붙이는데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마물들이 많으면 그만큼 우리가 아르테미스 의 산을 올라가는 것도 힘들어졌다. 나는 약간 어두운 얼굴로 할망구에게 물어보았다. "그렇게 많아요?" "정상까지 올라가 본 적은 없지만 현재 남아있는 마물들의 수는 대략 200마리 정도가 아닐까하고 추측하고 있다. 아르테미스의 산은 두시간만 올라가면 완전히 올라갈 수 있는 낮은 산이니 이 예상에서 그렇게 많이 차이가 나지는 않을 거다." "그런데 아르테미스의 산에 중요한 거라도 있어요? 갑자기 마물들이 그 곳에만 나타나 는 게 수상한데요." 그러나 할망구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테네님을 기리는 신전이나 비석만 있을 뿐이야. 마물들이 노릴 만한 물건은 없는데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할망구의 얼굴을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아르테미스의 산에 갑자 기 마물들이 나타난 이유가 뭘까? 상황을 보아하니 자연적으로 일어난 사건은 아닌 것 같은데. 뭔가가 일어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할망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동료들에게 말하자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200마리 면 장난이 아니었다. 슬라임이 200마리여도 힘들텐데 아르테미스의 산에 있는 마물들 이 모두 슬라임일리는 없었다. 아르테미스의 산은 그렇게 높지 않아 누군가 수작을 부 렸다면 금방 발견할 수 있겠지만 그러려면 산에 퍼져있는 마물들이 문제였다. 우리 일행은 나까지 포함해서 모두 9명이었다. 만약 우리들만으로 마물들을 상대한다 면 한 사람 당 적어도 20마리 이상을 쓰러뜨려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20마리. 듣기 에는 우습게 들려도 막상 싸워보면 그 게 아니었다. 마물만이라면 어찌저찌 상대한다 고 해도 배후에 누가 있다면 그 것도 신경 써야 했다. 애초부터 우리들끼리 싸운다는 것은 무리였다. 다행히 할망구의 말을 들어보니 히폴리테의 사람들이 도와줄 것 같았 다. 하지만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리는 정당한 방법으로 히폴리테에 들어온 것이 아니 었다. 지금도 세린과 에릭, 가스톤, 죠안은 여장을 하고 있었다. 만약 세인트에서 우 리를 통과시켰던 사람이 우리에 대해 보고를 한다면 할망구를 포함한 히폴리테의 사람 들은 의문을 가질 것이다. 왜 가명을 사용했을까? 당연히 우리들을 의심을 하게 될 것 이고 잘못하면 사기꾼으로 몰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에는 여장을 했다는 것까지 들킬 수도 있었다. "그 때 그 심사관이 보고를 하면 들키지 않을까?" "맞아. 만약 들킨다면 여러 가지로 골치 아파지는데." "마리엔이야 상관없겠지만 우리들은 걸리면 난리가 날텐데 말이야." 하지만 우리들의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가만히 우리들의 말을 듣고 있던 도로 시 신관이 방글거리며 말했다. "마리엔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알기로는 심사를 하는 사람들은 수상한 사 람이 아니면 보고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통과하는 사람들이 한두 명도 아닌데 그 많은 수를 일일이 보고한다면 너무 복잡하지 않겠어요?" "그럼 우리들의 신분은 어떻게 증명하지?" "그 점이라면 염려놔. 레리이나 여왕폐하께서 친히 써주신 편지가 있으니까. 여왕 폐 하의 친서만 있으면 우리들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어." 엔젤의 말에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우리들의 정체를 밝혀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 이다. 그럼 이제 마음 편히 그 할망구가 얼마나 당황하는지나 한번 볼까? 그런 기대를 안고 동료들과 함께 할망구의 집을 찾아갔다. 얼마 전에 갔던 내가 다시 돌아오자 할 망구와 그녀의 딸은 놀라서 눈을 뗑그랗게 떴다. 그러나 그런 모습도 엔젤이 레리이나 여왕의 친서를 내놓자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친서를 모두 읽고 얼굴색이 확 변한 그 들은 상당히 의심스럽다는 듯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젊은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마리엔 공주님이십니까?" "맞아." 내 신분이 완전히 드러난 상황이라 자연스럽게 하대를 했다. 할망구의 얼굴이 뜻밖의 상황에 당혹감으로 가득 찬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할망구는 고귀하신 이 몸을 지팡이로 가격한 것은 까맣게 잊어버렸는지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갔 다. "이런, 귀하신 손님이 오셨군요. 애야, 가서 마을의 세디언들을 모두 이 곳으로 모이 라고 전해라. 마리엔 공주님 일행이 도착하셨다고 하면 금방 달려올게다." 버릇없는 것이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귀하신 몸이라니. "네. 쏜살같이 다녀오겠습니다." 그녀는 정말 쏜살같이 다녀왔는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네 명의 세디언들을 이끌고 왔다. 세디언들은 다른 마을처럼 나이가 많은 사람들 중에서 뽑은 것이 아니라 무력으 로 뽑아서 그런지 할망구와 다른 한 명을 제외하고는 젊은 사람들이었다. "명망이 자자하신 마리엔 공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희들을 도와주시기 위해 이 곳까지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마리엔 공주님에 대한 소문이 익히 들었습니다. 이렇게 직접 뵐 수 있는 기회를 가지 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네 명의 세디언들은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이며 절했다. 그들의 얼굴은 이 제야 마물들을 제대로 처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활짝 펴져 있었다. 그리고 우 리들의 등장에 기뻐하는 사람들은 세디언들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할망구의 집 밖으 로 몰려든 사람들의 얼굴도 나라는 희망이 생기자 환해져 있었다. 전에 왔었던 조사단이 흑마법사의 소행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낸 이래로 접근조차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 흑마법사에 대한 두려움은 신전 측의 피나는 노력으로 인해 사람 들 사이에 깊게 뿌리박혀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섣불리 행동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 약 내가 아주 착한 인물로 소문이 나지 않았다면 이들은 나조차 꺼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도착하기 전까지 히폴리테 사람들이 손가락만 빨고 마물들을 보고 있었 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언제든지 싸울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할망구가 구입 한 스펠 비드도 그 준비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계획도 없이 우르르 몰 려갈 수는 없었다. "혹시 무슨 계획이라도 있나? 무턱대고 올라가면 피해도 커질 텐데." 내 말에 세디언들은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세디언 중에서 가장 연장자라고 할 수 있는 할망구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입을 열었다. "여러 가지 생각해보았지만 신통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오시면 같 이 의논해볼 작정이었습니다." "그래? 그럼 히폴리테에서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얼마나 되지?" "능숙한 전사들은 히폴리테의 230명의 사람 중에서 150명 정도입니다. 하지만 무리를 해서 끌어 모은다면 아마 180명 정도까지는 모을 수 있을 겁니다." 할망구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정도면 어린 아이들과 노약자들을 제외하면 대부 분의 사람들이 싸울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 마을이 성지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 전원이 전사일 줄은 몰랐다. 평소에는 평화롭게 지내 다가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마을 전체가 들고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멋모르고 산적 들이 쳐들어온다면 큰 코 다칠 것이 분명했다. "생각보다 많군. 이정도면 도움이 많이 되겠는걸." "저도 마리엔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히폴리테 사람들과 함께 싸우면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릴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저희 쪽에는 요이체로스를 쓰러뜨린 마리엔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상대가 흑마법사든지 마물이든지 마리엔님만 계시면 이길 수 있습니다. 틀 림없이 가하브님께서도 마리엔님의 앞길을 축복해주실 겁니다." 도로시 신관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요이체로스는 동료들과 함께 쓰러뜨린 것이라고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하니 낯이 뜨 거워졌다. 동료들도 나에 대한 도로시 신관의 찬양은 질리도록 들은 상태라 못 말리겠 다는 표정만 지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도로시 신관덕분에 분위기가 잠깐 변했지만 곧 진지한 분위기로 돌아왔다. 우리 일행 과 세리언들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를 생각하느라 모두 말이 없었다. 하지만 신통 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날아서 가볼까도 생각해봤지만 그렇게 되면 마법을 사용 할 수 없는 사람들까지 데리고 가야 하기 때문에 마나 소비가 많았다. 흑마법을 사용 하면 마나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지만 깐깐한 히크리트 신관은 걸어갈 망정 흑마법으 로 날아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히크리트 신관을 떼어놓고 갈 수도 없었기 때문에 이 방법은 젖혀두어야만 했다. 날아가는 게 조용히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인데 말이야. "양동작적을 벌이는 게 어떨까요? 히크리트의 전사분들이 몇 그룹으로 나뉘어서 아르 테미스의 산으로 올라가는 입구 부근에서 소동을 벌인다면 마물들이 그쪽으로 많이 몰 려갈 겁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마리엔 공주님과 저희들이 여러분들과는 다른 방향으 로 올라가는 겁니다. 한꺼번에 올라가는 것보다는 이쪽이 더 수월하게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세린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현재 마물들은 무엇인가의 목적으 로 사람들의 침입을 막고 있었다.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양동작전을 벌인다면 처음에 히크리트 사람들이 산으로 들어가면 그 곳으로 몰려들 것이다. 모든 마물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히크리트 사람들이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져 소동을 벌 인다면 그만큼 많은 마물들이 그 쪽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틈을 타서 그 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아르테미스의 산을 올라간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이동하다보면 마물들을 만나는 횟수도 줄어들 것이다. 단순한 방법이었지만 이 것말고는 다른 방법 이 없었다. "그 방법이 좋을 것 같군요. 혹시 다른 의견있어요?" "없습니다. 지금 상태로는 그 방법밖에 없군요." 너무나 푸르러 시원하다기보다는 이상한 느낌마저 드는 하늘 위에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기세로 새빨갛게 불타고 있는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바람에 몸을 맡 기고 방랑자처럼 떠돌아다니는 구름이 간간이 태양을 가리긴 했지만 그 강렬한 빛을 완전히 막아주지는 못했다. 태양의 입에서 나오는 후끈한 기운은 온 세상을 달아오르 게 했고 불어오는 바람마저 태양의 기운을 그대로 담고 있어서 화끈거렸다. 더워서 손 으로 부채질을 하는 우리 일행의 머리 위로는 눈이 부신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 빛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마치 그 것들이 살아있는 촉수처럼 피부 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따뜻하다 못해 따갑기까지 한 햇빛도 아르테미스의 산에서 느껴지는 음울한 기 운을 없앨 수는 없었다. 분명히 햇빛이 비치고 있는데도 그 곳만은 햇빛이 들지 않는 음지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기에 유난히 민감한 나는 처음 아르테미스의 산을 보고 산 의 둘레를 보랏빛의 연무가 감싸고 있다는 착각을 했다. 그러나 눈을 다시 비비고 봤 을 때는 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완만해서 어색하지만 나머지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산 의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산. 그러나 그 산에서 전해지 는 친근한 느낌이 결코 이 산이 평범하지 않음을 알려주었다. 아르테미스의 산에서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어둠의 기운은 코로, 피부로, 느낌으로 전 해져왔다. 이 기운을 확실히 느끼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공기 중에 퍼져있는 이질적인 기운을 확실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느끼고 있었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공기가, 아니 아르테미스의 산 근처의 모든 공기가 물을 먹은 솜 처럼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610년 동안 주위에서 너무나 쉽게 느낄 수 있어서 이제는 친근한 기운이 느껴지자 상 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은근히 즐거워졌다. 마기가 느껴진다는 것은 예상대 로 배후에 흑마법사가 있다는 뜻. 당연히 자연적으로 마물들이 생긴 것보다 상황이 좋 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오랜만에 피부로 전해져오는 육중하면서도 편안한 그 기운에 몸을 맡기고 깊게 숨을 들이 마셨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 다. 동료들이 심각해져있는데 나만 좋아서 싱글거리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미 어느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직접 맞닥뜨리자 동료들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특히 나 다음으로 마기에 민감한 히크리트 신관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단순히 마물들이 있다고 해서 느껴지기에는 마기가 강하군요." 에릭은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에릭의 말에 히크리트 신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히크리트 신관이 눈을 감은 채 집중을 하자 그녀의 주 위로 백색의 오로라가 흩뿌려졌다. 주변으로 성스러운 기운이 퍼져나가자 피부로 느껴 지던 마기가 사라졌지만 어디까지나 신성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만이었다. 잠시 후 히크리트 신관은 신성력을 거둬들이고 눈을 떴다. "산의 정상에서 마기가 뿜어져 나와 산 전체를 뒤덮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물들도 이 기운의 영향을 받아 더욱 난폭해진 것 같군요. 다른 곳은 미약하지만 정상에서 느껴 지는 기운은 조금만 집중을 해도 느껴질 정도로 강한 마기입니다. 전에 들렸던 조사단 의 말로는 미약한 기운만 느껴진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마기가 더욱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정상에는 아테네님을 기리는 신전이 있는데. 혹시 신전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 닐까요?" "그 것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상황으로는 정상에 마기의 근원지가 있다는 것밖에는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엔젤의 질문에 답을 한 히크리트 신관은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녀의 얼굴은 생 각보다 강한 마기 때문에 드는 걱정과 불쾌감, 이 일을 반드시 해결하고 말겠다는 의 무감이 한데 섞여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히크리트 신관이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무기 상태를 점검 하기도 하고 괜히 히폴리테 사람들에게 얻은 몇 개의 스펠 비드를 살펴보기도 했다. 가만히 있으면 슬며시 고개를 들고 일어나는 불안감 때문이리라. 그런 그들을 잠시 쳐다보던 나는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너무도 화창한 하늘과 어두운 기운이 묻어 나오는 아르테미스의 산은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그 낯선 화음 이 의외로 괜찮게 들려왔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을 히폴리테의 사 람들이 떠올랐다. "히폴리테 사람들은 잘하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걱정하지마. 그 사람들도 실력이 뛰어나니까 잘할 거야." 내가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는지 세린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러자 다른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도 우리들의 이야기에 끼어 들기 시작했다. "맞아. 대대로 성지를 지켜왔던 사람들이라잖아." "지금은 믿는 수밖에 별다른 길이 없어." "스펠 비드까지 몽땅 가지고 있는데다 시간을 끄는 것이 목적이니 별 문제없을 거야." "그렇게 벼르고 있었으니 잘하고 있을거야." 전투 전에는 누구나 긴장을 하기 마련이다. 특히나 지금처럼 승패가 어떻게 될지 모르 는 싸움에 임할 때면 평상시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긴장하게 된다. 적절한 긴 장감은 사람을 더욱 신중하게 만들고 전력을 다하게 만들지만 지나친 긴장감은 오히려 전투에 방해가 될 때가 많았다. 생과 사가 왔다갔다하는 싸움에서는 긴장을 해서 몸 이 딱딱해지거나 머리가 멍해지면 한순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때문에 노련한 전사나 마법사들은 긴장을 풀기 위해 전투 전에 일부러 농담이나 잡담을 주고 받는 경 우가 많았다. 그래서 동료들도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내 말에 반응을 보인 것이다. 사 실대로 말하자면 나도 약간 긴장이 됐다. 드디어 이번 여행의 목적이자 마지막 싸움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고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었다. 평소에는 느껴지지 않던 심장의 고동소리가 온 몸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이 감정은 분명 긴장이라고 불리 는 그 것이었다. 마족이라고 긴장을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 긴장을 즐겁게 받아들 이는 것이 다른 존재와는 다른 점이었지만. 나와 동료들이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 받는 사이 산의 한구석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사방에서 폭발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연쇄다발적으로 폭발음이 들려오자 우리들은 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이지는 않았 지만 히폴리테의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드디어 시작이군." 내 말에 동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들은 최초로 폭발음이 들린 시간으로부터 한 시간 뒤에야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올라가 보니 마물들의 모습이 별로 눈에 띄지 않 았다. 다른 방법이 없어서 사용한 양동작전이 의외로 잘 먹혀든 모양이었다. 하긴 마 물들 중에서 얼마가 양동작전을 예상할 만한 지능을 가지고 있겠는가. 대부분의 마물 들은 요란하게 폭발음이 들리고 사람들이 몰려들자 그 쪽으로 달려간 뒤였다. 그러나 모든 마물들이 히폴리테 사람들 쪽으로 몰려간 것이 아니라 몇몇 마물들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시간이 많다면 일일이 상대해도 상관없었겠지만 늦어도 1시간 안에는 산의 정상에 도 착해야만 했다. 히폴리테 사람들이 무한정으로 마물들을 붙잡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이었고, 세리언들과 10명의 전사들로 이루어진 다른 팀과 정상에서 만나기로 했던 것 이다. 바로 이 점이 처음 작전을 세웠을 때와 달라진 점이었다. 우리들만으로 흑마법 사에게 대항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히폴리테 사람들이 그들끼리 다른 팀을 만든 것이다 . 인원수는 많을수록 유리했다. 함께 올라가면 수월하게 올라갈 수도 있었지만 일망타 진 당할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었다. 때문에 한 쪽이 희생당하더라도 다른 쪽은 올라 갈 수 있도록 아예 처음부터 다른 길로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빠른 속도로 이동하면서 마물들이 있을 만한 곳은 피해 다녔다. 운이 나빠 마물들을 만나게 되면 속도가 느린 놈일 경우에는 그냥 냅다 뛰었고 속도가 빠른 놈일 경우에는 스펠 비드를 던지고 당황하는 틈을 타서 재빨리 도망쳤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을 경우에는 최대한 빠른 시간에 처치하기 위해서 전력을 다했다. 마물들을 피해 다 녀야만 하는 내 처치가 한심스러워 남모르게 한숨을 푹푹 쉬웠지만 이 것도 머리를 치 기 위한 작전이라고 되뇌면서 스스로를 위안했다. 대(大)를 치기 위해서는 소(小)를 무시할 수 있어야하는 법이야. 막무가내로 뛰었다가는 정상에 도착했을 때는 기진맥진해서 정작 전력을 다해야 할 때 제대로 싸우지 못할 것 같아 마물들을 만나지 않았을 때는 걸어갔지만 어디서 마물들 이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저절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소 (小)를 다시 만나게 돼서 발걸음을 멈췄다. 거의 정상에 도착할 무렵에 만나는 거라 정말 재수가 없다고 중얼거리던 나는 뒤늦게 그 것들의 모습을 알아채고 신음성을 냈 다. "젠장!" "빌어먹을." "재수 옴 붙었군." "저건 또 뭐야?" 골치가 아픈 것은 나만이 아닌 것 같았다. 우리 앞을 떠억 막고 있는 마물은 사람 주 먹의 2배 정도 크기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놈이었다. 마치 털실을 돌돌 말아놓은 것처럼 동글동글하게 생겨서 커다란 눈과 입이 몸뚱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발마저 털에 가려 보이지 않아서 이동할 때는 굴러서 다녔다. 발로 밟은 후에 한 번 비벼주면 끝일 것 같은 놈들이었다. 그러나 이 놈들의 숫자가 문제였다. 앞을 가로막 고 있는 놈들의 숫자는 수십 마리였다. 뭐가 이백 마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거야! 여기 수십 마리가 있잖아! 이럼 적어도 삼백 마리라고 해야 한다구! 어느새 우리 주위를 감싸고 있는 이 놈들 때문에 흙은 전혀 보이지 않고 몽실몽실한 마물의 하얀 털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면서 그 누구보다 골치 아파하는 이유는 내가 이 놈들 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동료들은 처음 보는지 이 놈들의 숫자가 너무 많다는 것 외에는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저 몽실몽실한 것들의 이름은 럼피. 이름도 귀엽고 생긴 것도 별로 위험하게 생기지 않았지만 의외로 위험한 놈이었다. 지금은 저렇게 눈을 말똥거리면서 보고 있지만 얼 마 지나지 않아 모습이 완전 돌변할 거다. 입을 쩌억 벌리면 눈 있는 데까지 찢어지는 데 그 모습은 볼 게 못됐다. 게다가 이빨은 얼마나 날카로운지 한번 물어뜯으면 살점 이 그대로 뜯겨 나가는 건 물론 아무리 질긴 고기라도 깨끗이 먹어치울 수 있었다. 한 마리면 별 것도 아닌 럼피가 수십 마리 떼를 지어서 돌아다니면 오우거조차 슬슬 피 해 다닐 정도였다. 생긴 건 작은 것이 식욕은 얼마나 많은지 한 무리의 럼피가 오우거 한 마리를 뼈만 남기고 발라먹는 시간은 3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겉만 보고는 알 수 없다는 말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었다. "모두 조용히 오른쪽으로 걸어가." "어쩌려고?" "잔말말고 어서 가. 갑자기 움직이지 말고 천천히 움직여. 천천히." 내가 심각하게 말하자 동료들은 별 말하지 않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천천히 오 른쪽으로 이동하자 럼피 무리들이 갸우뚱거리며 우리들을 쳐다보았다. 한 마리가 그랬 다면 귀여워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앞을 가득 메운 모든 럼피가 동시에 갸웃거리자 소 름이 돋았다. 이럴 때는 정말 인간의 나약함을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럼피 따위 예 전이면 발로 차고 놀았는데. 이 유리시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그렇게 한탄을 하면서도 럼피 무리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조심히 이동했다. 우리의 오른쪽에는 제법 키가 큰 나무들이 여러 그루 있었다. 일단은 나무에 올라가고 나서 대처방안을 생각해보자. 럼피는 굴러다니기 때문에 생각보다는 빠르게 움직이지만 몸 의 구조상 높이 뛸 수는 없었다. 최선을 다해 뛰어봤자 고작 1m가 한계였다. 럼피의 키를 생각해본다면 정말 엄청나게 많이 뛴 거지만 다른 존재들이 보기에는 주먹을 내 질러 한 방 먹일 수 있는 최적의 높이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럼피가 아무리 기를 쓴다고 해도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 버리면 그 걸로 끝이었다. 그 후에는 여유 롭게 마법으로 때려잡으면 되는 것이고. 그러나 럼피들은 우리가 나무에 오를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끼이익. 럼피들은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면서 입을 쩌억 벌리고 달려들었다. 완전히 벌어진 입 사이로 보이는 이빨들은 맹수의 이빨보다도 더 날카롭게 벼려져있었다. 입이 몸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채로 그대로 굴러오는 럼피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빨리 나무 위로 올라가!" 본능적으로 위험한 상황임을 깨달은 동료들은 내가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재빨리 나무 를 향해 뛰어갔다. 럼피들의 구르는 속도가 빨라서 금방이라도 따라잡힐 것 같았지만 목숨이 걸려있는 상황인지라 우리들의 속도도 만만치 않게 빨랐다. 목숨이 경각에 달 려있으면 잠재능력을 발휘하게 되지 않는가. "꺄악!" 거의 나무 앞에 당도했을 때 도로시 신관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뒤쪽에 도로시 신관이 넘어져 있었다. 어찌 이런 재수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이미 나무 위에 오른 동료들은 놀라서 어쩔 줄 몰라했다. 이대로 그냥 나무 위로 올라갈까? 아니면 가서 도와줘야 할까? 잠시 고민을 하긴 했지만 순식간에 결정을 내린 나는 도로시 신관이 있는 쪽으로 획 뛰어갔다. 사실 좀 더 생각할 시간이 있었다면 그냥 나무 위로 올라갔을 것이다. 지금 달려가면 나도 곤란해질 가능성이 큰데 인간 하나 살리자고 그런 위험을 자처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몇 초 만에 결론을 내리려고 하다보니 평소에 잘했잖아, 하는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다른 생각은 못하고 저절로 그 쪽으로 가게 된 것이다. 히크리트 신관이 넘어졌다면 생각 할 시간이 없어도 나무 위로 올라갔겠지만. "인새너티스 윈드(Insanity's Storm: 광기의 바람)" 다급한 상황이라 다른 마법보다는 평소 많이 사용했던 흑마법을 나도 모르게 사용하게 되었다. 인새너티스 스톰은 2서클 마법이라 공식도 간단하고 위력도 강한 편이라 적 절히 대응했다고 할 수 있었다. 순간 내 쪽에서부터 매서운 바람의 물결이 럼피 무리 를 향해 치기 시작했다. 바람의 물결은 곧 바람의 칼날로 변해 럼피 무리들을 깨끗하 게 양단했다. 중간에 도로시 신관이 있긴 했지만 인새너티스 스톰은 시전자가 원하는 상대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마법이라 무사했다. 그러나 럼피들의 숫자가 워낙 많아 몇 마리 죽어도 표시가 나지 않았다. 위력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2서클 마법. 한꺼번에 럼피들을 쓸어버릴 수는 없었다. "인새너티스 윈드!" 다시 한번 마법을 사용했을 때는 도로시 신관의 옆에 도착했을 때였다. 도로시 신관은 새파랗게 질려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넘어지는 순간 자신을 향해 굴러오는 럼피 무리들을 보고 공포를 느낀 모양이다. 자신을 먹이로 여기고 이빨을 온통 드러 낸 럼피들이 땅을 완전히 뒤덮은 채로 달려들었으니 온 몸이 얼어버린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 인간이라면, 아니 유한의 생명을 지닌 존재라면 누구나 느끼는 공포였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공포에 사로잡혀 이런 상황에 아무 것도 못하고 부 들부들 떠는 것을 보자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누구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온 건데-거의 반사적인 행동이긴 했지만-이렇게 맥없이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혼 자 죽는다면 별 말하지 않겠지만 지금 자신이 이러고 있으면 나까지 죽는다는 생각을 왜 못할까? "도로시 신관! 얼른 일어나요!" 내 외침에 도로시 신관이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빠진 모습 을 보자 멍청이라고 외쳐주고 싶었지만 그런 말을 할 여유는 없었다. 도로시 신관은 이번이 처음으로 신전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하니 이렇게 자신에게 악의를 가지고 달려 드는 것들은 본 적도 없을 것이다. 현실은 모른 채 꿈 속에서 살아온 순진하지만 바보 같은 신관이다. 도로시 신관이 그만큼 내게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도 그녀의 부풀 어진 꿈 속에서의 내가 모든 것을 쉽게 해내고 아름답고 성품마저 고운 그야말로 완전 무결한 존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가지고 있는 메시아 신드롬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강했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도로시 신관을 만난 후로는 격렬한 싸 움도 없었으니 그녀의 머릿속에서 마물이라는 것은 추상적인 존재였다. 그런 추상적인 존재가 실체를 가진 존재로 나타나자 오금이 저린 것이다. "얼른 일어나라니까! 도망쳐야할 것 아니야!" 팔을 잡고 끌자 일어서긴 했지만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후들거렸다. 이 상태로는 도망도 제대로 못 칠 것 같았다. 동료들이 안타까워서 소리쳤지만 그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꾸물거리고 있자 럼피들이 순식간에 다가왔다. 다시 한번 마법을 사용하긴 했지만 먹이를 눈앞에 둔 상태라 그런지 잠시 멈칫한 후에 다시 맹 렬한 기세로 굴러왔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놔두고 올라가는 건데. 그러나 투덜댈 시간마저 없었다. 럼피들이 지척까지 굴러왔던 것이다. 땅을 완전히 뒤덮은 그 놈들이 일제히 굴러오자 땅 전체가 굴러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애비에이션!" 비행 마법을 사용하자 몸이 확 떠올랐다. 도로시 신관은 팔을 단단히 잡고 있어서 함 께 떠올랐다. 플라이 마법은 주문을 외울 시간이 없어서 역시 흑마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뭘 사용해야지, 하고 생각하기도 전에 익숙한 마법을 사용한 것에 불 과했다. 나와 도로시 신관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자마자 우리가 있던 곳은 럼피들에 의해 가득 채워졌다. 조금만 늦었어도 첫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지도 못하고 끝났을 것 이다. 럼피들이 우리들이 도망친 것을 알고 펄쩍펄쩍 뛰었지만 막 떠오르기 시작했을 때 이빨에 스친 것을 제외하고는 다치지 않았다. 나는 동료들이 올라가 있는 나무까지 날아가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무 사히 나무까지 도착하자 가슴을 쓸어내리는 동료들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1초만 늦 었어도 당할 뻔했으니 그 걸 보는 이들의 애간장이 오죽이나 탔겠는가. 럼피들이 나무 밑까지 굴러왔지만 작아도 원체 작은지라 이 곳까지 뛰어오를 수는 없었다. 그걸 확 인한 나는 그 때부터 마음놓고 화를 내기 시작했다. "도로시 신관, 정신이 있어, 없어? 당장 일어나서 도망가도 모자랄 판에 그렇게 꾸물 거리면 어쩌자는 거야?! 덕분에 나까지 죽을 뻔했잖아!" "그,그게......" "뭐야! 울먹거리면 내가 봐줄 줄 알았어?!" 그러자 도로시 신관이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것이 아닌가. 이 여자가 뭘 잘했다고 울 고 난리야!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울기만 하면 다냔 말이다. 더욱 열받은 내가 마 구 분풀이를 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왜 울어? 울고 싶은 건 나라고! 세상에, 이 내가 저런 허접한 것들한테 죽을 뻔했단 말이야! 이 모든 게 멍청히 있었던 도로시 신관 때문이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그렇게 계속 있었다가 내가 죽었으면 어쩔 뻔했어! 응? 뭐라고 말을 해보란 말이야!" 그나마 평소에 잘 보였기에 망정이지 밉보였다면 아주 험한 말까지 나갔을 것이다. 답 답한 도로시 신관의 행동에 너무 화가 났고, 인간 때문에 내가 죽을 위기에 처했었다 는 것에 기가 막혔다. 동료들은 처음에는 내 기분을 이해하고 그저 내가 하는대로 지 켜보기만 했지만 점점 말이 험악해지자 말리기 시작했다. "마리엔, 말이 너무 심하잖아!" "도로시 신관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그렇게 몰아세우지마." "자, 자, 우선 진정해. 네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 도로시 신관의 입장도 생각해보라구. 얼마나 놀랐겠으면 그랬겠어." "너답지 않게 왜 이렇게 흥분하는 거야?" 이 인간들이 자기 일 아니라고 함부로 말하네. 어차피 자기들이 죽을 뻔하지 않았다는 거지? 난 내가 죽을 뻔한 상황에서도 속으로는 '저 멍청한 년!'이라고 욕하면서도 '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하는 착,한, 자들과는 달랐다. 할 말 다하고 살았던 내게 그런 행동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리고 이건 정당한 행동이란 말이다 . 겉으로는 원만하게 넘어가고 속으로는 앙금이 남아있는 상황보다는 당장 풀어버리는 것이 낫다는 것이 내 생각이기도 했다. "죄송합니다." 동료들의 반응에 내가 나쁜 여자가 된 것 같아 항의하려던 나는 기어 들어가는 도로시 신관의 목소리에 그녀를 쳐다보았다. 울어서 엉망이 된 얼굴. 내가 계속 화를 내가 어떻게든 눈물을 멈추려고 애써서 더욱 안쓰럽게 보였다. 억지로 울음을 참으려고 입 술을 꼬옥 깨물고 있는 도로시 신관을 보자 치밀어 올랐던 화는 사라지고 한숨만 나왔 다. 그래. 화를 내서 뭐하겠냐. 대부분의 인간들이 그런 상황에서는 굳어버린다는 것 은 알고 있었잖아. "에휴, 됐어요. 화가 나서 아무 말이나 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제가 괜히 넘어져서......." "괜찮아요. 무사히 끝났으니까. 말이 심했다면 다시 한번 사과하죠." "마리엔님이 화를 내시는 것도 당연해요. 전 아무렇지도 않은 걸요." 상황이 무사히 수습되자 우리들의 관심은 아직도 밑에서 우리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 고 있는 럼피들에게 돌아갔다.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안전하다는 생각에 느긋하게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데 갑자기 우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글쎄. 하지만 별 일이야 있겠어? 이 위는 안전하잖아." 내 질문에 사라가 대답했다. 그러자 에릭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밑에를 봐." "밑? 밑은 왜?...헛! 저 것들이 나무를 물어뜯는다!" 럼피들의 강렬한 이빨 앞에는 나무의 딱딱한 껍질도 바나나 껍질처럼 잘만 까졌다. 럼 피들이 여러 마리다 보니 나무의 하얀 속살이 금방 드러났다. 조금만 있으면 나무를 완전히 부러뜨릴 기세였다. "어쩔 수 없다. 나와 로즈 언니는 마법을 쓸 테니까 다른 사람들은 남아있는 스펠 비 드를 써. 얼마 없으니까 잘 조준해서 던져." 다행히 럼피 무리들이 먹을 것에 홀려 우리가 앉아있는 나무 주변에 잔뜩 몰려있어 쉽 게 죽일 수 있었다. 결국 위에서 쏟아지는 마법을 견뎌내지 못하고 대부분의 럼피들이 죽었고, 나머지들은 황급히 도망을 쳤다. 도망친 럼피들의 숫자가 10마리 안팎이라 그 놈들이 다시 돌아온다 하더라고 나무 위로 도망칠 필요는 없었다. 얼마나 물어뜯었 는지 내려올 때 나무가 흔들릴 정도였지만 큰 피해없이 이길 수 있었다. ------------------------- 럼피 무리와 한차례 조우한 후 다시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도로시 신관은 아직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는지 걷는 폼이 영 불안했다. 하지만 이런 충격은 본인이 알아서 벗어나야만 하는 성질의 것이라 가만히 놔두었다. 지금의 모습을 보니 앞으로 있을 전투에서 도로시 신관의 활약은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나마 방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이걸로 전력 1명 감소. 어쨌거나 우리들은 행여나 또다시 마물들 을 만날세라 빠르게 올라갔고, 재촉한 보람이 있었는지 더 이상 마물들과 부딪치지 않 았다. 아르테미스의 산 정상에는 넓은 공터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공터의 중앙에는 노 란 색의 돌로 만들어진 신전이 보였다. 신전은 돌을 네모 반듯하게 잘라서 쌓아놓았을 뿐 기타의 어떤 장식도 되어 있지 않아 투박하면서도 간소한 느낌을 주었다. 아테네 를 기리는 신전은 직선적이고 실용적인 것을 좋아하는 스피린 사람들의 성향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주위에 몇 개의 비석들이 세워져있었지만 어마어마하게 크 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어서 뭔가 허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게까지 보이는 신전의 입구 앞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검은 빛을 품어내며 우리들을 반기고 있었다. 마법진의 정중앙에는 육각형의 흑수정이 있고, 그 수정을 중심으로 마법 수식들이 사방위로 펼쳐져 있었다. 그 수식들은 수정의 바깥에 그려져 있는 원에 닿을 때까지 길게 늘어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수레바퀴를 연상시켰 다. 그리고 수레바퀴와 흡사하게 생긴 원의 바깥에는 다시 하나의 원이 그려져 있었고 , 원과 원 사이에는 9개의 삼각형이 그려져 있었다. 그 삼각형의 안에는 대마왕과 8대 마왕을 상징하는 단어가 적어져 있는 투명한 수정이 놓여있었다. 예를 들어 우리 아빠의 경우를 보자면 차갑고 냉정한 성격 때문에 냉혹 의 마왕이라고 불리우고 있으니 상징하는 단어는 냉혹을 의미하는 트란센데어(카오스 가 신과 마족을 창조하면서 새어나간 기운이 모여 만들어졌다는 태초의 언어로 그 자 체에 힘이 깃들어있다고 전해지고 있다)인 '체몬시아르'였다. 엄마는 그와는 정반대의 뜻을 가진 '라브리에'이고 말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트란센데어를 단편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거의 모른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그 지식의 깊이가 얕았다. 그런데 이 곳에 서 트란센데어를 사용한 마법진을 보게 되니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마법진은 뭐지?" "저건 흑마법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 마법진입니다. 신성력으로부터 어느 지역을 지키 기 위해서 사용하는 수호의 용도와 그와는 반대로 어느 지역에 응집된 신성력을 없앨 때 사용하는 해제의 용도 두 가지가 있어요. 지금은 아무래도 후자의 경우 같은데요." 로즈의 질문에 흑마법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내가 찬찬히 설명해주었다. 실제 로 사용해본 적은 없었지만(내가 처음으로 신성력을 가까이에서 본 것은 인간 세상에 와서였다) 예전에 서로 다른 종류의 마법진을 합쳐서 새로운 마법진을 만들어본다고 마법책을 뒤적이면서 본 적이 있었다. 참고로 어떻게 됐냐면 애꿎은 실험실만 몇 번이 나 날아갔고, 성을 박살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포기했다. 지금 상황에서 하등의 상관 이 없는 과거는 넘어가고 이런 고급 마법진이 사용되었다는 것이 의외였다. 이 마법진 은 대마왕과 8대 마왕의 힘을 빌려 신성력에 대항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마법진이었 던 것이다. 마법진에서는 나오는 검은 빛은 허공까지 뻗어 나와서 마치 검은 장막이 쳐져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장막의 한가운데에 고고하게 자리하고 있는 흑수정은 너무 어두워 서 오히려 빛나는 검은 기운을 품어내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그 기운은 공기 중에 스며들어 보이지 않았지만 신전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그냥 온 몸으로 잔잔히 흐르고 있는 마기의 움직임이 전해져왔다. 틀림없이 부드럽 게 대기 사이를 흐르고 있는 마기의 강이 향하고 있는 곳은 보잘 것 없는 신전이었다. 도대체 이런 신전 따위를 차지해서 뭘 어떻게 하려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마족의 힘을 빌린 마법진을 사용한 걸로 봐서 마족은 아니었다. 마족이 할 일이 없어 서 다른 마족의 힘을 빌리겠는가. 자기보다 서열이 높은 마족의 힘을 빌린다고 해도 이런 마법진으로는 자신이 가진 힘보다 더 강한 힘을 얻을 수 없었다. 이런 건 괜히 번거롭기만 하지 본인이 직접 나서서 때려부수는 것보다 효과가 없었다. 물론 마족이 아닌 흑마법사라면 이득을 톡톡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정도의 마법진을 사용할 수 있는 수준 높은 흑마법사가 스피린 사람들 외에는 잘 쳐주지도 않은 신전을 눈독들일 이유가 없었다. 아테네를 기리는 신전은 딱 1층, 그 것도 규모도 얼마 되지 않은 단 출한 건물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마법진까지 동원해서 깨야할 정도로 강한 신성력으로 보호해야할 건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곳이라면 으리으리할 것이라는 생각과는 너무 다른 신전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이 신전 그냥 보기에는 별로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데 신성력으로 보호하고 있었던 건 가?"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이상하군. 히폴리테 사람들도 신성력으로 보호하고 있 다고 귀띔해주지 않았고. 아무래도 이 신전이 정말로 신성력으로 보호를 받고 있는지 조사를 해봐야겠군요. 그래야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기도 쉽겠지요. 죄송하지만 히크리 트 신관이 나서서 조사를 해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이 곳에 있는 누구보다 신성력을 가장 잘 느낄 수 있을 것 같은데." 도로시 신관도 있긴 했지만 가하브의 신관은 다른 신관과는 신성력이 전혀 달랐다. 오 죽하면 가하브의 신관을 신관이 아니라 정령술사로 보는 사람들이 있겠는가.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아직도 헬렐레한 도로시 신관이 차분하게 조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지 도 않았다. 그래서 엔젤은 그래도 믿음이 가는 히크리트 신관에게 부탁을 했다. "그러죠. 마침 저도 조사를 해보려던 참이었으니까요." 히크리트 신관은 엔젤의 말에 신전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참동안 뭔가를 느 껴보려는 것처럼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나 주위에서 넘쳐나는 마기 때문에 여의치가 않은지 눈을 뜨고 신전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히크리트 신관은 손을 신전의 벽에 대고 신성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신성주문은 온통 위대하신 세리자드님, 세리 자드님의 우주와 같은 사랑과 은혜와 같이 기분 나쁜 말들 투성이라 나는 궁시렁대지 않을 수 없었다. "놀고 있네. 그런 년이 뭐가 자애의 여신이야? 성질이 얼마나 더럽고 히스테리는 또 얼마나 많이 부리는데. 오죽하면 피에 미친 년이라고 부르겠냐. 그런 게 자애의 여신 이라니. 이건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거야."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잔뜩 목소리를 낮추고 말도 안 되는 사실에 대 해 불만을 토로하는 사이 히크리트 신관의 주문은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신성 주 문을 외우는 것이 끝나자 히크리트 신관의 양손에서 새하얀 빛이 새어나왔다. 주위에 온통 마기가 잔뜩 깔려 있었기 때문에 그 빛은 평소보다 더욱 눈부신 하얀 색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기분이 나빴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싫었다. 내가 뭐라 고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천적관계에 있는 그 힘을 알아보고 본능적으로 반감이 생기 는 것이다. 마법진에서 뻗어 나오는 마기도 신성력이 기분 나쁘다는 듯이 꿈틀꿈틀거 렸다. 물론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꿍해서 지켜보는 가운데 신성력은 신전의 벽으로 스며들었다. 그런 상태로 계속 신성 력을 사용하던 히크리트 신관은 잠시 후에 벽에서 손을 떼고 일어섰다. 그런 히크리트 신관의 좁은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악은 세리자드님의 이름으로 내가 응징하겠다!'라고 외치면서 이리저리 끼어 들던 평상시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아르테미스의 산을 완전히 가득 메우고 있는 마기때문 에 정반대의 힘을 가지고 있는 히크리트 신관이 행동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던 것이다. 그와 반대로 나는 아주 팔팔했지만. "마리엔의 말처럼 이 신전에 결계가 쳐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말이지요. 적어도 몇 십년 동안은 계속 지속되어왔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저 요사스 러운 마법진때문에 결계가 깨졌지만 약간씩 느껴지는 기운만 봐도 얼마나 강한 신성력 으로 결계를 쳤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럼 결계를 깨기 위해서 마법진을 사용했다는 건가요?" 내가 확인차 물어보자 히크리트 신관은 딱딱하게 말했다. "그래요. 강력한 신성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몇 달 동안이나 마법진을 사용한 것 같습 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누군가 그 것을 본다면 일이 틀어질 테니 사람들이 아르테미 스의 산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마물들을 풀어놓은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는 사람들이 드나들었잖습니까? 결계가 쳐져있으면 못 들어가는 것 아 닙니까?" "결계는 신전의 입구가 아니아 신전 안 어딘가에 쳐져있었던 것 같습니다." 죠안의 질문에 히크리트 신관은 단정적으로 말했다. 히크리트 신관의 확신에 찬 말에 나는 수긍을 했다. 사실 결계가 쳐져있었다는 것 외에는 이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변방의 작은 신전에 그토록 강한 결계 가 쳐져있었는지 하는 의문이 남았다. 결계가 적어도 몇 십년 동안 결계가 지속되려면 엄청나게 어려운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수고를 감수하고서라도 지켜야할 어떤 것이 이 신전에 있단 말인가. 다시 한번 신전의 초라한 모양새를 본 나는 설마 그럴 리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겉모습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이 곳은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그냥 그런 신전이라고 현혹시키려는 속셈일 것이다. 머리 좀 굴렸군. 그런데 도대체 뭘 감춰놓았길래 이 난리지? 전설 속에나 나오는 신보? 하지만 흑마법사가 신보를 얻 어서 어디다 쓰겠는가? 차라리 마검을 찾아다니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아니면 아주 중요한 것을 봉인해놓았나? 흑마법사에게 아주 중요한 거나 아니면 누군가를......그 러나 내 생각은 거기서 끝이 났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조금만 더 생각을 했다면 이 일 의 전모를 알아챌 수도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에 방해자들이 나 타났다고 할 수 있었다. 쿠와와아. 우리들의 말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던 공터가 찢어발기는 듯한 포효소리에 진동했다. 그 소리는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의 울음소리가 한데 섞여서 기묘하 기 그지없었지만 그만큼 강한 기세를 담고 있었다. 나는 놀라서 하던 생각을 멈추고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주의깊게 쳐다보았다. 동료들도 긴장한 눈으로 전방을 살피고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불길한데." 내 말에 동료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검을 빼들었다. 이제는 울음소리만이 아 니라 쿵쿵거리는 발걸음 소리까지 들려왔다. 마치 거인이 걷는 것처럼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떼거지도 몰려드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반갑지 않 은 손님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신전 앞에 서있는 우리들을 반구형태로 둘러싸고 있 는 수십 마리의 마물들. 트롤에서 오크, 리자드맨, 좀비까지 온갖 마물들이 섞여 있었 다. 원래 중요한 곳일수록 지키는 자들이 많다. 그러니 마물들의 등장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지키고 서있던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나타난 것을 보면 누군가가 이 곳으로 불러들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정이었던 것이다. 마물들은 마기의 영향때문에 실핏줄이 터진 것처럼 붉게 충혈된 눈에서 감출 수 없는 광기와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아직 할망구가 속해있는 다른 팀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힘겨운 싸움이 될 것 같았다. 잠시동안 우리 일행과 마물들은 꼼짝도 하지 않 고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불안한 정적이 공터 안에 가득찼 다. 누군가가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도, 마물들이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 적어도 다른 팀이 올라올 때까지라도 이 대치상태가 계속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었다. 신전 안으로 도망칠까, 하는 생각에 뒤쪽에 있는 신전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신 전의 얕은 벽으로는 마물들의 공격을 얼마 버텨내지 못할 것 같았다. 신전이 무너져서 깔려 죽을지도 몰랐고 마물들도 신전 안으로 들어오면 공간이 좁아서 더 불리했다. 남은 방법은 싸우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자 묘한 기대감이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심장 박동소리에서, 손끝으로 전해 지는 창의 감촉에서, 근질거리는 몸에서 짜릿한 흥분이 느껴졌다. 그동안은 도망이라 는 또다른 방법이 있다보니 싸울 때도 도망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었지만 오로지 싸우는 것밖에 남지 않아 되려 신이 났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마 족들이 싸움에 임할 때면 항상 즐거워하는 이유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마족인가. 나조 차 의미를 모를 미소를 지으면서 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끼에엑!" 한 마리의 리자드맨이 먼저 달려들자 그 것이 신호탄이 되어 다른 마물들도 일제히 덤 벼들기 시작했다. 마물들이 괴성을 지르며 다가오자 땅을 박차고 앞으로 뛰어갔다. 생 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몸이 먼저 반응을 한 것이다. 오른손에 들린 창은 어느새 봉의 모습에서 섬뜩한 날을 자랑하는 살인도구로 변해있었다. 앞으로 몇 걸음 내딛자 맨 처음에 움직인 리자드맨이 마치 덮치듯이 얼굴로 펄쩍 뛰어 올랐다. 리자드맨의 자랑은 빠른 스피드와 몸이 가볍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리자드맨 은 어렵지 않게 내 얼굴을 향해 몸을 날릴 수 있었다. 그 모습은 보는 것과 동시에 눈 으로 보이는 정보는 머리로 전달되었고, 머리는 창을 들고있는 팔을 휘두를 것을 명령 했고, 팔은 그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침착하게 창으로 횡을 긋자 그 궤적에 따라 불 그스름한 빛이 눈앞에 펼쳐졌다. 잔상 때문에 어떠한 색도 가지지 못했던 투명한 허공 은 한순간 창대의 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그 색은 보였다 싶은 그 순간에 사라 졌다. 붉은 색이 사라지자 그 자리를 대신하듯이 이번에는 푸른 색의 액체가 허공으로 쏟아 지면서 다시 한번 허공을 유채색으로 물들였다. 손에 고기가 잘리는 느낌이 드는 것과 동시에 리자드맨의 양단된 허리에서 마물 특유의 푸른 피가 쏟아졌다. 상대의 실력도 모르고 무작정 덤비는 놈들은 인간이든지 마물이든지간에 비참하고 허망한 최후를 맞 이하는 것이다. 나는 피가 튀지 않도록 뒤로 물러났다. 피는 처음에 닿을 때는 따뜻해 서 좋은데 식어버리면 끈적거려서 싫단 말이야. 피식 웃으면서 잔인하다면 잔인하다고 할 수 있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피는 생명의 상징. 그 피를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단 말인가. 아무리 더 러운 존재라도 피만은 깨끗하고 따뜻하다. 그리고 마물들의 푸른 피보다는 붉은 피를 좋아한다. 타오르는 듯한 생명의 상징으로 그 무슨 색보다 어울리는 색이지 않은가. 나는 그 피를 좋아한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마족들이 그렇다. 마족들이 피를 좋아 하는 것은 죽음과 파멸의 존재인 우리들과는 정반대의 것을 가진 자들에 대한 질투일 지도 모르겠다. 무한한 생명을 사는 우리기에 생명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다른 존 재의 생명을 느끼면서 한순간이나마 생명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할지도 몰 랐다. 눈에 보이는 대로 마물들을 쓰러뜨리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왠지 나답지 않게 진지해졌다는 생각에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렴 어떤가. 나는 이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 건데. 창에 꽂힌 오크를 발로 차서 떼어내던 나는 양쪽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잡생각을 지우고 재빨리 좌우를 살폈다. 좌측과 우측에서 각각 몽 둥이를 든 오크와 내 키를 훨씬 뛰어넘는 트롤이 덤벼드는 것이 보였다. 오크는 내 허 리를, 트롤은 내 머리를 노리고 있었다. 엉성하긴 했지만 제법 위협적인 협공이었다. 물론 의도한 것이 아니라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지만 말이다. 종족과 지능을 초월한 놀라운 합동 공격! 먹을 것이 없으면 오크라도 잡아먹는 트롤이 지금 오크와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러나 재미있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요이체로스는 워낙 강하고 영혼들을 부려서 고전을 면치 못했 지만 오크와 트롤 정도는 이길 수 있었다. 그동안 많이 봐왔고 약점도 꿰고 있으니까. "다크 에로우!" 나는 적당하다 싶은 거리에 놈들이 들어서자 마법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검은색의 날 카로운 기운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놈들은 머리가 나쁘다는 것을 광고라도 하 려는 건지 피하기는커녕 되려 달려들었다. 쉬익. 화살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갈 때처럼 파공성을 내면서 날아가던 마법 중 몇 개가 오크와 트롤에게 꽂혔다. "크와아!" "꾸에엑!" 오크와 트롤은 호흡도 딱 맞춰서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특히 오크의 돼지 멱따는 비 명이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누가 돼지 닮지 않았다고 할까봐 비명도 똑같았다. 그러 나 오크가 마법에 맞고 다치자 잠시 움찔했던 것은 결정적인 실수였다. 뒤이어 날아든 마법은 시끄럽게 비명을 지르는 오크의 얼굴로 날아가서 그 입을 막아버렸다. 그 다 음은 뻔했다. 머리통이 완전히 박살나서 뇌수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싸움 중에 한 눈을 팔면 이렇게 한순간에 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트롤은 재생능력이 뛰어나 상처가 금방 치료되었다. 그러나 아프긴 아팠는지 그 고통을 제공한 나에게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슬쩍 뒤로 물러나 피하자 트롤 의 두꺼운 팔이 바로 코앞으로 스쳐지나갔다. 얼마나 세게 휘둘렀는지 풍압 때문에 얼 굴이 절로 찌푸려질 정도였다. 그러나 흥분해서 막무가내로 하는 공격이라 어렵지 않 게 피할 수 있었다. 내가 계속 맞지도 않고 이리저리 피하자 트롤은 화가 났는지 괴성을 지르며 주먹을 깍 지껴서 위에서 내리쳤다. 몸집에 걸맞지 않게 빠른 공격이었지만 주의깊게 트롤을 관 찰하고 있던 나는 옆으로 피했다. 트롤은 너무 세게 내리치는 바람에 내가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팔을 회수하지 못했다. 옆에서 본 트롤은 허점 투성이었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트롤의 목을 그었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트롤의 몸이 앞쪽으로 기우뚱 해서 목이 아니라 조금 위인 얼굴을 그어버리고 말았다. "캬아악!" 다시 생각해보니 운이 나쁜 것 같았다. 목을 그었다면 한순간에 죽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얼굴을 다쳐서 죽지도 않고 그대로 고통을 겪고 있으니 말이다. 단번에 죽이려고 온 힘을 다해 창을 휘둘렀기 때문에 트롤의 얼굴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트롤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른 손을 마구잡이 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괜히 일이 어렵게 됐다는 생각에 칫소리를 내면서 뒤로 훌쩍 뛰어서 피했다. 그냥 죽었다면 저도 좋고 나도 좋고 얼마나 좋았겠는가. 트롤의 큼지막한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트롤의 얼굴은 작은 거품이 일어나면서 빠르게 재생하고 있었다. 가만히 놔두면 시간은 오래 걸려도 완전히 나을 것은 불을 보듯 뻔 했다. 게다가 마물이 이 놈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계속 이 놈하고만 놀 수는 없었 다. 목은 다시 노리기 어려울 것 같았고 남은 약점은 심장뿐인가. 트롤은 머리를 날려 버리거나 심장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는 한 계속 재생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트롤 이 마구 손을 휘젓는 바람에 심장이 자꾸 가려졌다. 우선 저 팔부터 없애야겠군. 일부러 소리를 내면서 접근하자 트롤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팔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 것과 거의 동시에 나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트롤의 팔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트롤의 팔과 부딪치자 창대를 쥐고 있는 손바닥이 찢어질 정도로 아팠지만 이를 악물고 버텨 냈다. 여기서 놓치면 아무 것도 되지 않았다. 내 창이 튕겨나가지 않자 아무리 질긴 트롤의 살갗이라도 날카로운 창날을 이겨내지 못했다. 보통 창이었다면 팔을 잘라버릴 수 없겠지만 내 창은 유난히 날이 길어 가능했다. 트롤의 팔이 떨어지자마자 창을 고 쳐쥐고 심장을 향해 힘껏 내질렀다. 살아있는 생명체의 속을 파고드는 특유의 느낌이 전해지면서 창날이 내부에 감춰져있던 무엇인가를 관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창 을 뽑아내자 트롤의 뻥 뚫린 가슴에서는 분수처럼 피가 쏟아졌다. 그리고 서서히 트롤 의 몸이 쓰러졌다. 꽤나 애먹이는군. 이마에 배어 나오기 시작하는 땀을 닦으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도 잘 싸우 고 있었다. 검사들은 뛰어난 검술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고, 로즈와 히크리트 신관, 도로시 신관은 뒤로 물러나 있었다. 로즈와 히크리트 신관은 후방에서 마법과 신성주문으로 보조를 해주고 있었는데 특히 좀비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좀비 란 게 물리적인 공격만으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였던 것이다. 도로시 신관은 전투에 큰 도움은 주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바람의 힘으로 뒤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래도 아주 바보는 아니었는지 위험한 상황이 되자 힘을 사용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더욱더 우리들에게 유리해졌다. 모두 보통 이상의 실력을 가 지고있었기 때문에 저번처럼 재수없게 요이체로스 같은 상대를 만나지 않는 한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었다. 마물들의 숫자가 많아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점점 그 생 명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는 마물들이 많아졌다. 어느새 공터는 마물들의 푸른 피로 본 래의 색을 잃은 채 푸른 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황은 할망구가 포함 돼있는 다른 팀이 도착하자 금방 끝이 났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쪽으로 기울고 있었기 때문에 몇 명이 더 가담하자 금방 결말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 오늘도 길지 않습니까? 오홋홋호~! 다음편은 저녁 한 7시에나 올릴 예정입니다. 그 때 와보시면 또다른 글이 올라와있을 겁니다. 마물들의 푸른 피로 보통 볼 수 있는 시원한 푸른 색이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음 습하고 기괴한 느낌을 주는 색으로 변해버린 성지 위에서 우리 일행과 할망구가 포함 된 히폴리테 사람들은 숨을 가다듬으며 전력을 재정비했다. 유리하게 싸웠다고는 하지 만 배 이상은 되는 마물들을 상대로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 했다. 죠안과 엔젤이 한쪽 팔을, 사라가 허벅지를 다쳤고 나머지 사람들도 잘자란 상 처를 입었다. 게다가 비교적 순탄하게 올라온 우리들과는 달리 히폴리테 사람들쪽은 피해가 컸다. 나처럼 웬만한 마물들은 거즘 알고 있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처음 출발했을 때는 15 명이었던 히폴리테 사람들은 그 절반도 되지 않는 7명으로 인원이 대폭 줄어있었다. 세리언 중 가장 젊었던 여자와 7명의 전사들이 죽은 것이다. 그들은 비록 이번 싸움에 서 다치긴 했지만 전원 무사한 우리들을 보고 거의 경의로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로즈와 히크리트 신관은 그런 사람들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며 부상자들을 치료 하고 있었다. "마리엔은?" 가스톤에게 치료 마법은 걸어준 다음 로즈가 나에게 물었다. 나도 전방에서 열심히 싸 웠기 때문에 어딘가 다쳤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다친데 없는데."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자 로즈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데도?" "응." 사실 육체적인 능력만 보자면 이 곳에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마법 을 적절히 섞어서 사용했기에 다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로즈는 내가 약한 모습 을 보이고 싶지 않아 거짓말을 하는게 아닐까 하고 찬찬히 살펴보았지만 정말 다친 곳 이 없자 꾸욱 다물고 있던 입을 열어 이런 말을 했다. "...너 정말 공주 맞아?" "공주라고 싸움을 못하라는 법은 없잖아." "그렇긴 하지만..." "로즈, 마리엔을 평범한 공주로 여기면 나중에 큰일납니다." "아무렴요. 그동안 여행하면서 느끼지 못했어요? 보통 상식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나와 로즈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가스톤과 죠안이 끼어 들었다. 그러자 동료들이 하나같 이 이해가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정말 가스톤과 죠안에게 이 주군에 대한 존경심이 있기나 한 건지 의심스러웠다. 말을 해도 저렇게 말할 필요는 없잖아. 예를 들어 '마리엔 공주님은 뛰어나신 실력을 지니고 계셔서 다치지 않으신 겁니다' 내지는 '마리엔 공주님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천재이십니다' 라는 좋은 말을 놔두고 말이다. 그러고보니 그들과 대련을 한지도 꽤 오래 전인 것 같았다. 인 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잊을만 할때가 되면 한번씩 두들겨줘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 닫게 되었다. 많이 컸구나, 가스톤, 죠안. 이 지엄하신 주군을 그런 식으로 말을 할 정도로 말이야. "이제 곧 페드인 왕국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잊지는 않았겠지?" ".......!!!" "허,허,허!" 내가 의미심장한 말을 하면서 웃자 가스톤과 죠안이 딴청을 부렸다. 나랑 눈이 마주치 면 무슨 일이라도 날 것처럼 이리저리 눈을 피하는 가스톤과 죠안. 그런 그들을 향해 눈을 한번 부라려 주고 히폴리테 사람들에게 눈을 돌렸다. 지금은 여건이 되지 않으니 봐준다. 물론 페드인 왕국으로 돌아가면 대련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런데 이 신전에 정말 특별한 것은 없어?" "그렇습니다만 왜 그러시죠?" "저 마법진 보이지? 저 것이 신전 내에 걸려있는 결계를 깬 것 같아." 내 말에 히폴리테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모습을 보아하니 전혀 몰랐던 모양이다. 하 긴 알았다면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잠시 후 할망구가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선조께서도 그런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알고 있었다면 바로 후손인 저희들에게 말씀하셨겠지요." "그런가? 하지만 히크리트 신관이 확인한 만큼 확실한 사실이야. 아마 누군가 이 결계 를 깨기 위해 소란을 벌인 것 같아." "그럴수가." 세리언들 중 할망구 다음으로 연장자인 40대 후반의 여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오랫동안 성지를 지켜온 자신들이 그걸 몰랐던 사실 이 충격인 것 같았다. 다른 자들도 상당히 동요하고 있었다. 그러나 생판 모르는 사람 의 머리를 지팡이로 때릴 만큼 간이 큰 할망구는 큰 소리로 그들에게 외쳤다. "진정해! 성지의 수호자인 우리들이 그렇게 동요를 하면 어쩌자는 건가? 의연한 이 분 들을 보기가 부끄럽지도 않은가! 지금부터라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는 것이 무엇 보다 중요해! 그리고 이유야 어떻든 소중한 성지를 이렇게 더럽힌 자를 가만히 둘 수 없다. 그러니 모두 정신 바짝 차리란 말이다!" 할망구의 외침에는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패기와 열정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평생 을 바쳐 지켜온 성지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놓은 자에 대한 분노도 담겨 있었다. 할망 구의 우렁찬 목소리에 동요하고 있던 다른 자들이 진정하기 시작했다. 한순간에 사람 들의 동요를 잠재운 할망구의 카리스마는 대단한 것이었다. 할망구를 자기 마음 내키 는대로 살아가는 늙은이로 여겼던 나는 할망구의 의외의 면모에 그녀를 다시 보게 되 었다. 어느새 히폴리테 사람들의 눈에는 지금은 어떻게든 성지를 지키겠다는 결의가 가득 차있었던 것이다. 히폴리테 사람들이 굳은 결의로 똘똘 뭉치자 덩달아 우리들도 힘이 솟았다. "그럼 이제 신전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지." 잔뜩 긴장하고 신전 안으로 들어왔던 우리는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신전 안으로 들어 가지 못하게 마물들을 동원한 만큼 신전 안에는 마물들이 쫙 깔려있을 것이라는 예상 과는 달리 신전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우리들의 발걸음 소리뿐이 었다. "뭐야? 아무 것도 없잖아?" 내가 투덜거리자 로즈도 볼멘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잔뜩 긴장하게 만들어놓고는 이게 뭐람? 맥 풀리는군." "그래도 혹시 기습을 할지 모르니 경계를 하는 것이 좋겠군요." 이미 된통 당한 할망구가 신중하게 말했다. 할망구의 말이 맞는지라 나는 주위를 조심 스럽게 살피며 걸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오랜 세월에 낡고 색이 바 랜 신전의 모습뿐이었다. 견고하게 만들어지긴 했지만 세월의 무게는 견디지 못하고 돌벽이나 석상의 모서리가 여기저기 부서져 있었다. 신전 안이라 바람의 영향은 적게 받지만 온도의 변화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햇빛이 비치느냐 비치지 않느냐에 따라 돌도 조금씩 팽창했다 수축했다 한다. 그런 변화는 너무 작아서 눈으로는 식별이 불 가능하지만 오랫동안 계속 되다 보니 풍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예전에는 이보다는 나았는데 관리를 못하다보니 금방 부서지는군요. 어떻게든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보존해보려고 그렇게 애썼는데 말입니다." 한 세리언의 말에 히폴리테 사람들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원래도 오래돼서 풍화되 던 것이 요 얼마동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자 급속도로 풍화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았다는 것은 허공을 떠다니는 먼지를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먼 지는 신전 내에 가볍게 내려앉아 있다가 우리가 지나가면서 일어나는 바람에 날려 떠 올랐다. 신전 안이 어두웠다면 먼지들이 떠오르든 말든 보이지 않았겠지만 창문으로 스며들어오는 햇빛 때문에 잘 보였다. 히폴리테 사람들은 먼지를 보고 예전에는 깨끗 이 청소를 하곤 했는데, 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 먼지들이 오랜 세월동안 이 자리를 지켜온 신전의 모습과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였다. 한참 복도를 걸어서 드디어 순례자들이 아테네의 신상 앞에서 기도를 하고 히폴리테 사람들이 미리 준비해놓는다는 단검을 들고 나오는 곳에 도착했다. 이 곳이 바로 이 신전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혹시 이 곳에 마물들이 왕창 모여있거나 이 일의 원흉인 흑마법사가 있지 않을까 했지만 의외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조용한 신 전 안의 모습은 너무 평화로워서 되려 우리가 침입자라도 된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히폴리테 사람 중 하나가 짧은 탄성을 질렀다. "앗!" "무슨 일이지?" 내 질문에 그녀는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신전을 받치고 있는 거대한 기둥이 있었다. 그 기둥은 어찌나 두꺼운지 세 사람이 감싸안아야 될 정 도였다. 별로 크지도 않은 신전의 기둥치고는 유난히 컸지만 지금까지 스쳐지나온 기 둥도 모두 그랬기에 쳐다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기둥은 다른 기둥과는 달리 한쪽 면이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여기까지였다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겠지 만 그 흔적은 억지로 부순 기색이 역력했고, 기둥 안이 텅 비어있어서 더욱 이상했다. 할망구가 제일 먼저 그 곳으로 달려갔고 우리들도 곧 그 곳으로 다가갔다. "입구?" "지하로 연결된 것 같은데. 이런 입구가 있었다는 걸 히폴리테 사람들은 알고 있었습 니까?" 엔젤의 말에 할망구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런 비밀 입구나 지하가 있다는 것은 듣지도 못했습니다." 놀랍게도 기둥이 있는 곳에는 지하로 연결되어 있는 좁은 계단이 있었다. 그러나 아래 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어둠에 휩싸여 그 모습을 완전히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히크 리트 신관은 그 기둥을 진지한 눈으로 살펴보더니 입을 열었다. "결계가 쳐져있던 곳이 이 곳이었습니다. 평소라면 어떤 수단을 써도 부서지지 않도록 완벽하게 보호를 하고 있었는데 밖에 있는 마법진의 영향으로 결계가 약해진 틈을 타 부셔버렸군요. 아무래도 성지를 이렇게 만든 자의 목적은 이 안에 있는 것 같군요." "도대체 이 안에 뭐가 있길래 이렇게까지 한 걸까요?" "글쎄요. 그건 이 안에 직접 들어가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런데 그 자는 이런 결계가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던 거죠?" 죠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자 우리들은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그 부분을 떠올리고 놀란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정말 그 자는 어떻게 이 사실을 안 것일까? 대대로 성지를 지켜온 사람들도 모르던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몇 달 동안 치 밀하게 행동을 했고 마침내 결계를 깨버렸다. "이거 벌써 목적을 이루고 도망간 것이 아닐까요?" 에릭의 말에 동료들과 히폴리테 사람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기껏 고생해서 이 곳까 지 왔는데 이미 도망가버린 뒤라면 아무런 보람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상대가 이미 도망가버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아닐 거야. 만약 이미 일을 끝낸 뒤라면 마물들을 그대로 나둘 필요가 없어. 침 입을 막기 위해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군대라도 온다면 이 정도 마물을 쓸 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야. 그렇게 되면 들키는 건 시간문제야. 그럴 바에야 이 기둥을 원래대로 복원하고 마물들을 불러들이고 조용히 사라지는 게 훨씬 나아." 내 말에 사람들의 표정은 조금 밝아졌다. 하지만 이렇게 결계가 깨졌다는 것은 위험한 상황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무작정 들어갔다가 함정이라도 있으면 전멸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로즈가 마 법으로 입구를 탐색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아주 천천히 주위의 마나가 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꼈다. 마나가 살아있는 것처럼 서서히 요동쳤다. 너무나 조용히 일어나는 일이라 나조차 놓칠 뻔한 반응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뜨끔거리면서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정신을 집중하고 마나의 흐 름을 탐지하던 하던 나는 지금까지 아주 조용히 움직이던 무형의 기운이 돌연 거칠어 지면서 회오리치자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뮤레케 프로텍션(흑마법 계통의 방어마법이다. 백마법의 실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보호의 능력이 대단하지만 특수한 마법이라 어지간한 흑마법사도 사용하지 못 한다)!" 검은 막이 나와 다른 사람들을 완전히 뒤덮자 기다렸다는 듯이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 다. 퍼어엉. 귀가 멍멍해질 정도의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우리를 덮쳤다. 얼마 후에 반사적으로 감았던 눈을 뜨자 아직도 불꽃들이 방어막 밖에서 새빨간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달려들고 있었다. 방어막에 전해지는 충격으로 봐서 가만히 있었다면 통구 이가 되기도 전에 폭발에 몸이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등뒤로 식은땀 이 주르륵 흘렀다. 그런데 웃긴 것은 절대 기세가 죽을 것 같지 않던 불꽃이 몇 초도 지나지 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그런 일 따위는 언제 일어났냐는 것처럼 불씨 하나 남 기지 않고 말이다. 불꽃이 사라지고 드러난 신전의 모습 또한 어느 곳도 불길에 상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우리에게만 향한 마법이었던 것이다. 한동안 눈을 떼굴떼 굴 굴리며 주위를 살피던 나는 더 이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방어막을 거둬들였 다. 물론 언제라도 다시 방어막을 형성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면서 말이다. 그 리고 방어막이 사라진 후에야 다른 사람들은 정신을 차렸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반응을 보이지 못한 것이다. "뭐,뭐야!" "죽는 줄 알았어!"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린다!" "통구이가 되는 줄 알았어." "마리엔이 조금만 늦었어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거야." 그러나 가스톤과 죠안의 반응은 역시 남달랐다. 그들은 처음에는 놀라서 멍해있더니 정신을 차리고 나를 껴안아댔다. "웃! 역시 우리의 주군은 다르셔!" "정말 감사합니다, 주군." 미남도 아닌 중년들이 나를 껴안아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주군이라는 말에 그들을 밀쳐내려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이제야 나의 위대함을 안 것 같군. 평소에 는 하지 않던 말을 할 정도로 살아난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가스톤과 죠안처럼 껴안지는 않았지만 무척이나 고마워했다. 잠시 후 놀란 가슴이 가라앉아 로 즈가 궁금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안 거야?" "그게 주변에 흐르던 마나가 이상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거든. 그러다가 갑 자기 마나가 격렬하게 움직이길래 나도 모르게 방어마법을 사용한 거야." 내 말에 로즈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말이 쉽지 공기 중에 퍼져있는 마나의 흐름을 느 낀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마족이다보니 그렇게 어렵지 않았지만 인간 들이 이정도까지 되려면 아무리 높은 서클의 마법사라도 무수한 수련을 해야했다. 마 나 감지력은 마법적 능력과는 조금 다른 것이니까. 사실을 말하자면 이번은 정말 운이 좋았다. 이 몸이 내 몸이 아니다보니 감각이 상당히 둔해져있었는데 본능이라는 것이 그 순간 꺼져있던 촛불이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확 살아난 것이다. 지금은 그 잔재로 조금 느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처럼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로즈 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려는 때에 낯선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후후후]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주위에는 우리말고는 누구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음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외쳤다. "누구냐?" [글쎄요. 여러분이 찾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군요] "뭐야? 그럼 방금 그 폭발도 네 놈 짓이지?" [물론입니다. 제 선물이 마음에 드셨습니까? 아깝습니다. 그 걸로 확실히 보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눈치가 빠르시군요] "잔말말고 당장 나와라! 비겁하게 숨어있지 말고!" [비겁이라. 비겁이라. 비겁이라. 후후후] 정체불명의 목소리는 비겁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다시 한번 낮게 웃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는 목소리 변조 마법이 걸려있는지 유리를 손톱으로 긁을 때 나는 소리처럼 날카롭고 거칠었다. 한동안 기분 나쁜 그 웃음은 계속 되더니 뚝 끊겨버렸다. 혹시 다 시 그 목소리가 들릴까 기다려보았지만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자는 어디선가 우리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패밀리어라도 사용하는 걸 까?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지. 계속 감시를 당하면 나중에 큰 낭패를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그런 생각을 드러내지 않은 채 동료들과 히폴리테 사람들을 둘러보 면서 말했다. "어서 지하로 내려가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로즈 언니, 혹시 함정 같은 게 있었어? " "아니, 샅샅이 조사해봤지만 그런 흔적은 없었어." "좋아. 그럼 어서 내려가도록 하죠. 내 짐작에는 아직 그 자가 있을 가능성이 아주 커 요." 우리들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한 명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이 좁아서 두 사 람이 함께 내려갈 수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 엔젤이 내려가자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일단은 마법사로 취급받고 있는 나는 로즈와 신관들과 함께 중간 즈 음에 내려가기로 했기 때문에 입구 근처에서 가만히 기다렸다. 그 와중에 내 눈은 빠 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주변에 패밀리어가 있다면 분명히 우리가 움직이면 따라올 것 이다. 열심히 패밀리어를 찾던 나는 천장 근처에서 팔랑거리고 있는 검은 색의 날개에 하얀 색 무늬가 있는 나비 한 마리를 발견했다. 패밀리어를 나비로 이용하는 사람은 생전 처음이었다. 하긴 나비라면 박쥐나 다른 동물보다 의심도 덜 받을 수 있고, 건물 내에도 쉽게 들어갈 수 있겠지만. 나비를 발견한 나는 미리 외워두고 있던 마법을 날 렸다. "파이어볼!" 내 손을 떠난 불의 공은 빠른 속도로 나비를 향해 날아갔다. 검은 나비는 피하려는지 날갯짓을 열심히 했지만 나비가 아무리 빨라봐야 파이어볼보다 빠를 수 없었다. 나비 는 의심을 받지는 않겠지만 한번 걸리면 없애기 쉬운 패밀리어이기도 했던 것이다. 나 비는 파이어볼을 맞고 금방 타죽어 버렸다. "마리엔, 무슨 일이야?" 맨 뒤에서 가기로 했던 에릭이 난데없는 내 행동에 질문했다. 나비를 보지 못했다면 내 행동은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마법을 날린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테니 이상하 게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반응은 에릭만이 아니라 아직 내려가지 않고 남아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저기에 나비가 있었거든." "그래서?" "그 나비가 아까 그 자의 패밀리어인 것 같아. 솔직히 패밀리어를 이용하지 않고는 우 리들의 행동을 알 길이 없어. 마법이야 미리 걸어놨다가 다른 곳에서 시전할 수도 있 지만 그건 다르거든. 그래서 찾아봤는데 이 신전 안에 우리를 제외한 다른 생명체는 나비밖에 없더라고. 계속 감시를 당할 수는 없잖아. 그래서 없애버렸어." 내 말에 동료들은 수긍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패밀리어를 없애버리면 감시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말고도 다른 이익이 있었다. 패밀리어는 마법사와 정신적으로 긴밀히 연결 되어 있기 때문에 패밀리어가 죽으면 마법사도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 그 충격을 이기 지 못하고 죽거나 미쳐버리는 마법사도 부지기수였다. 그만큼 패밀리어는 유용하지만 위험한 마법이었다. 어쩌면 그 놈 방금 그 것 때문에 죽어버렸을지도 몰라. 두 개의 라이트구에 의존해서 계단을 내려간지 10분만에 지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 위를 둘러본 나는 짧은 감탄성을 토해냈다. "와!" 이런 곳이 보잘 것 없는 신전 밑에 있을 줄 누구 짐작이나 했겠는가. 동료들과 히폴리 테 사람들도 감탄한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사람이 들어오면 자동적으로 빛 을 발하도록 마법이 걸려있는지 어두컴컴했던 계단과는 달리 대낮처럼 밝았다. 그 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넓은 공간은 아테네를 기리는 신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근사했다. "이거 굉장하군." "이런 곳이 신전 밑에 있을 줄은 몰랐는걸." "엄청나게 넓군." 계단이 끝나는 곳에는 넓은 공터가 존재했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네 개의 길이 존재 했다. 길 사이의 간격들은 마치 자로 잰 것처럼 한치의 더함도 덜함도 없이 똑같았다. 그리고 우리가 밟고 서있는 바닥에서부터 벽, 천장에 이르기까지 새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온통 새하얀 공간에 서있다 보니 마치 눈에 둘러싸인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눈은 살포시 지상에 내려와 모든 것은 감싸는 포근한 느낌의 눈이 아니라 꽁꽁 얼어버린 눈의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리석은 우리의 모습이 비칠 정도로 반들반들했던 했던 것이다. 그리고 각 길 사이마다 5대신의 상이 서있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신상을 이루고 있는 재료였다. 빛의 신 아드네리의 상은 수정으로, 생명의 신 바르셀의 상은 호박으 로, 자애의 여신 세리자드의 상은 사파이어로, 정령의 신 가하브의 상은 에메랄드로, 미와 순결의 여신 로디테의 상은 루비로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상들은 누 군가 일부러 파괴한 것처럼 하나같이 머리부분이 박살나 있었다. 덕분에 원래라면 고 고한 자태를 자랑했어야 할 신상들이 지금은 상 아래에 조각돼있는 문양만 아니라면 누구인지도 알아보지 못할 형태로 전락했다. 그 주변에는 파손된 보석 파편들이 나뒹 굴고 있었고 말이다. 말이 파편이지 주먹만한 것이 그냥 가져가도 고가에 팔릴 것 같 았다. 신상 따위를 보석으로 만들다니 미쳤군. 미쳤어. 보아하니 아까 우리에게 마법 을 날렸던 그 놈이 파괴를 한 것 같은데. 그 자가 성지에서 소동을 벌인 것은 제외하 고(이번 여행의 계기를 제공해주었으니까)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본 동료들과 히폴리테 사람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특히 자신들이 모 시는 신의 상이 처참하게 깨져서 나뒹굴자 히크리트 신관과 도로시 신관의 얼굴은 울 그락 푸르락 해졌다. "오, 깔끔하게 부셔버렸네. 이거 이거 그럼 안 돼지. 특히 자애의 여신상이 많이 훼손 됐네. 이거 만들려면 굉장히 힘들었을텐데. 쯧." 말은 그렇게 해도 내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내가 은근히 약을 올 리자 히크리트 신관은 분노에 가득 차서 소리쳤다. "감히 신상을 부수다니! 용서할 수가 없군요! 어서 그 자를 잡으러갑시다!" 신과 관련된 일이면 워낙 고지식해지는 여인네라 이정도만으로도 불같이 화를 내는 것 이다. 게다가 이 상을 부순 자는 흑마법사일 가능성이 농후하니 흑마법사를 발톱의 때 만도 못한 존재로 여기고 있는 히크리트 신관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외친 히크리트 신관은 네 개의 길 중 북쪽에 있는 길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길만이 누가 억지로 들어가려고 했던 것처럼 마법을 난사한 흔적이 있었던 것이다. 히크리트 신관 이 앞장서자 비슷하게 화가 나있던 도로시 신관도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무서워서 아무 것도 못할 때는 언제고 신상 하나 부서진 걸 보고 획 돌아버린 모양이다. 히크리트 신관도 그렇고 도로시 신관도 그렇고 정말 단순한 인간들이다. 꼭 저런 인간 들이 가장 먼저 죽곤 하지. 만약 흑마법사가 일부러 함정에 끌어들이기 위해서 한 쪽 길만 표나게 만들어놓았다면 가장 먼저 들어간 저 둘이 죽을 가능성이 아주 많았다. 그 다음으로 죽을 가능성이 많은 사람은 맨 뒤에서 따라오는 인간들이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있는 중간이 가장 안전했다. 비겁하다고 하지 마라. 비겁도 살아있을 때나 따질 수 있는 것이지 죽어버리면 비겁이고 나발이고 다 소용없는 것이다. 그리고 동료들이 중간에서 오라고 해서 따랐을 뿐이니 비겁하다고도 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내 예상과는 달리 함정은 없었다. 오히려 먼저 이 곳을 지나갔던 자가 곳곳 에 설치된 기관을 파괴해놓아서 수월하게 갈 수 있었다. 마법 때문에 부서진 돌무더기 를 피해 지나가면서 말했다. "완전 엉망이 돼버렸군. 만약 그 자가 이렇게 모두 파괴시키지 않았으면 상당히 힘들 었겠어." 내 말에 세린이 파괴된 기관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하지만 이 정도 기관에 걸려들지 않고 모두 파괴한 걸 보면 절대 만 만한 상대가 아닌 것 같아." 다른 사람들도 그 많은 기관들을 모조리 파괴시킨 것을 보고 기가 질려 있었다. 얼마 나 기관이 많은지 적어도 5m 간격으로 하나의 기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두 개의 기관이 동시에 발동하는지 한 곳에 두 개의 기관이 파괴되어 있기도 했다. "생각보다 강한 적이군. 주의해야겠어." 내 말에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많이 파괴된 그 길을 걸어오면서 나 는 그 자에 대한 결론을 한가지 더 내릴 수 있었다. 단순한 놈.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 갈수록 길이 미로처럼 얽히고 설켜 지금까지 본 것 중 최고는 11개까지 갈림길이 있었 다. 그러나 그 자가 걸어온 길은 오로지 일직선이었다. 길이 쭉 일직선으로만 파괴되 어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길이 막힌 경우에는 다른 길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벽을 부수고 지나간 경우도 있었다. 하긴 길을 못 찾겠으면 한 길만 계속 고수하는 것이 제 일이었다. 모든 길은 통하는 법. 그렇게 가다보면 언젠가는 목적한 곳에 도착하기 마련이었다. 설령 시간이 많이 걸릴지라도 말이다. 나만이 알고 있고 긍정하는 이 진리는 많은 이 들이 말도 안 된다고 부정하지만 의외로 잘 맞아떨어졌다. 지금도 일직선으로 가니까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았는가. 그 자의 흔적을 뒤따라 가자 마침내 길디 긴 길이 끝나고 둥근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 은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천장이 돔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실제보다는 크게 느껴졌다. 이 공간 역시 새하얗지만 분위기는 조금 전 공터와는 정반대였다. 처음 공터가 꽁꽁 언 빙판 위에 서있는 느낌이라면 이 곳은 부드럽고 포근한 눈에 감싸여 있는 느낌이었 다. 그리고 돌에 새겼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밀하고 아름다운 조각들이 벽과 천 장에 가득했다. 그러나 대강 훑어봤을 때 대부분의 조각들이 신을 찬미하는 내용들이 라 안타까웠다. 인간들은 그 위선자들에게 속고 있다니까. 그리고 광장의 중앙에는 제 르마신의 상이 턱하니 버티고 있었다. 이번에는 금이었다. 아주 돈이 넘쳐나는군. 그 상을 박살내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던 나는 신상 앞쪽에 검은 색의 후두를 입은 자 가 서있는 것을 보고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 자는 로브만 입은 것이 아니라 검은 색의 후두까지 쓰고 있어 손 외에는 어떤 부위 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선가 느낀 적이 있는 듯한 낯설면서도 친숙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어디였지? 분명히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생각이 날 듯 말 듯 했다. 나는 언젠가 저 자를 만난 적이 있던 가 하는 생각에 잠겼고, 동료들은 그들 나름대로 그 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특히 히크리트 신관은 거의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노려보 고 있었다.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보던 나는 시간이 얼마 지난 다음에야 눈앞에 있는 자와 동일인물로 추정되는 인물을 떠올릴 수 있었다. 서델피르의 그 놈! 잠깐 부딪혔 을 뿐이지만 하고 다니는 행색이나 전해져오는 느낌이 워낙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 그 자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자 확실히 서델피르에서 만났던 그 자 같 았다. "당신..." "당신이 신상을 부셨지?!" 나는 그 자의 정체를 확인해보려고 했지만 내 목소리는 히크리트 신관의 성난 목소리 에 파묻혀 버렸다. 히크리트 신관이 시뻘게진 얼굴로 물어보자 그 자가 픽, 웃으면 느 긋하게 말했다. "맞습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이, 감히 신상을 부셔놓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 고의로 신상을 부순 자는 신성 모 독죄로 손목을 자른다는 것도 모르는가?!" "그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결계를 부수고 들어와 보니 아 글쎄 그 신상들이 또 결 계를 형성하고 있지 뭡니까?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부셔버렸지요. 그리고 신상이라고 해봐야 원래는 생명이 없는 돌덩이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걸 신의 모습이랍시고 모 시는 건 인간들의 웃기지도 착각 때문입니다. 그 실체는 길가에 굴러다닌 돌덩이에 불 과합니다. 아, 조금 전 것은 보석들이라 좀 다른가요? 그리고 신상의 모습이 진짜 신 의 모습인지 알게 뭡니까?" 나느 그 자의 유들유들한 대답에 힘껏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훌륭해. 핵 심은 꼭 찝어 말하는 저 모습! 현재 그 자와 적대관계 비슷하지만 않았어도 그의 말에 찬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되지 않으니 마음 속으로나마 열렬한 박수를 쳤다. 그러나 나와는 달리 히크리트 신관은 그의 말에 더욱 분노했다. 하지만 신상문제는 할 말이 없는지 다른 곳으로 말을 돌렸다. "마물들을 조종해서 사람들을 죽이고 마법진을 이용해 신성한 결계마저 깨뜨리다니! 무슨 속셈이냐?!" "그렇게 물어보면 이런 목적으로 그랬습니다, 라고 말할 정도로 제가 멍청해 보입니까 ?" "이, 이놈이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러놓고도 반성은 못할망정 어디서 세치 혓바닥 을 놀리면서 사람을 희롱하려드는 것이냐!" 히크리트 신관은 정말 숨 한번 내쉬지 않고 열변을 토해냈다. 그러나 상대방은 히크리 트 신관의 설교 아닌 설교에 손을 들어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제 마음이지요." "뭐시라!" 히크리트 신관은 도저히 저 자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걸 느낀 나는 히크리트 신관 을 홱 밀치고 앞으로 몇 걸음 걸어나갔다. 그러자 그 자가 재미있다는 듯이 '오'라고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당신, 서델피르에서 나랑 부딪혔던 사람이지?" "이거 요이체로스를 물리친 위,대,하,신 마리엔 공주님께서 절 기억해주시다니 영광입 니다. 하지만 덕분에 애써서 봉인을 푼 요이체로스를 얼마 써먹지도 못하게 돼서 좀 씁쓸하군요." "뭐? 그럼 네 놈이?" "네가 요이체로스를 풀어준 거냐?"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거냐?" 그 자의 말에 동료들과 히폴리테 사람들이 놀라서 소리쳤다. 그리고 그를 더욱더 살벌 하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나도 의외의 사실에 약간 놀라긴 했지만 그건 놀라움보다는 '저 놈 봐라?' 하는 심정에 가까웠다. "그래?" "별로 놀라지 않는군요." "누군가 풀어줬으니 나타난 거겠고, 풀어준 사람이 당신이라는 게 뭐가 놀라워? 혹시 모르고 있었다면 모르지만 이미 누군가 풀어준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말이 야. 그나저나 멀쩡하네? 패밀리어랑 같이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좀 아쉽군." "죽지는 않았지만 충격은 상당하더군요. 덕분에 여러분이 도착했을 때면 일을 마무리 짓고 사라진다는 제 계획이 어긋나버렸습니다." "오호, 많이 아팠나봐? 이럴 줄 알았으면 한번에 죽이지 말고 잡아서 바늘로 콕콕 찔 러줄 걸 그랬네." "하,하,하. 제 입장이었다면 그런 말하지 못했을 겁니다. 머리가 깨지는 줄 알았거든 요." "어차피 내가 아픈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난 패밀리어 같은 건 없어서 말이야. 그런 위험한 마법을 사용한 당신이 바보지. 바보는 당해도 싸. 오홋홋호~!" 웃고 있는 나를 보고 그 자가 땀을 삐질거리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이 때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이겼다. 바로 대꾸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 문이 막혔다는 뜻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잠시 후, 내가 웃음을 멈추자 그 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훗, 역시 말로는 못 당하겠군요. 그럼 말장난은 그만두도록 하죠." "흥, 말이 아니어도 당신은 우리를 못 이겨." 그 자의 분위기가 장난을 치는 듯하던 분위기에서 점점 날카롭게 변해갔다. 그 변화를 느낀 나는 재빨리 창을 원래의 모습으로 바꾸고 그 자를 주시했다. 채앵. 동료들도 검을 빼들기 시작했고 로즈와 히크리트 신관, 도로시 신관은 뒤편으로 물러나 주문을 사용할 적절한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당장 마법을 날리면서 '다 죽어주셔야 하겠습니 다'라고 주저리거릴 줄 알았던 그 자는 의외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여러분들의 뜻대로 싸워드리고 싶지만 나비조차 인정사정없이 태워버리는 어떤 분 때문에 현재 몸상태가 말이 아니랍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 그래서 제 대신 다른 존재를 미리 불러놨습니다. 여러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존 재들이니 재미있게 노십시오." "무슨 헛소리냐? 비겁하게 굴지말고 정정당당하게 싸우자." 그러나 그 자는 내 말에 대꾸하지 않고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 자와 우리들 사이에 서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곧 그 바람은 강하게 회오리치면서 허공으로 치달아 올라 갔다. 바람 때문에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었지만 실눈을 뜨고 바라보니 뭔가 거대한 존 재가 회오리 사이로 언뜻 보이는 것 같았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미리 소환 주문을 외워두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에 바람이 걷히자 그 자가 소환해낸 존재들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골렘?" "스켈레톤?" "골렘과 스켈레톤?" 내가 본 거대한 형상은 골렘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돌로 이루어진 골렘은 거의 내 키 의 두배를 넘는 크기였다. 그리고 다섯 마리의 골렘 주위로는 스켈레톤들이 푸른 안광 을 빛내면서 흉흉한 기세로 서있었다. 골렘과 스켈레톤 모두 처리하기에 골치 아픈 존 재들이었다. 골렘은 검을 휘두르면 검만 박살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소드 마스터 가 아닌 다음에야 검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결국 골렘을 쓰러뜨리려면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리고 스켈레톤은 검으로 때려 부셔도 다시 몸을 조립하고 덤벼드는 놈이라 역시 물리적인 공격은 소용이 없었다. 이 놈을 처리하려면 신성 주문으로 아예 무로 돌려버려 다시는 덤벼들지 못하도록 해야 했다. "여러분, 힘내십시오. 그럼 저는 제 할 일을 해야겠군요." 그 자는 우리가 난감한 표정으로 골렘과 스켈레톤을 쳐다보자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리고 등을 돌려 제르마신의 상 앞으로 다가갔다. 저 놈이 뭘 하려는 것일까? 그 자는 팔을 뻗으면 신상이 닿을 정도까지 걸어가더니 신상의 머리 부분에 손을 가져가 댔다. 그 자의 손이 가까워지자 신상은 그의 접근을 거부하는 것처럼 하얀 빛을 품어 냈다. 그 빛은 방어막처럼 신상을 둘러싸고 그 자의 손을 튕겨냈다. "끝까지 애를 먹이는군." 말만 들어보면 그가 상당히 곤란해하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어조는 곤란한 기색이라 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태평한 어조였다. 저런 인간들이 꼭 큰 일을 내곤 하지. 내 예상이 맞았는지 곧이어 그의 오른손에 보랏빛의 기운이 맺히기 시작했다. 넘실거리는 그 기운은 그 자가 손을 다시 신상에 가져가 대자 하얀 빛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골렘과 스켈레톤이 달려드는 바람에 더 이상 그 자의 행동을 쳐다볼 수 없게 되었다. 왠지 저대로 나둬서는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빨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들을 없애버리고 그 자를 방해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지금 상황을 빨리 끝내려면 검사보다는 마법사가 더 필요했다. 그 걸 잘 알고 있는 나는 재 빨리 로즈들이 있는 곳으로 물러났다. 스켈레톤이야 히크리트 신관이 알아서 할 것이 니 내 목표는 골렘이었다. "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어둠의 영역인 심해 속에 잠들어있던 광기의 물결이여, 깨어나 나를 대적하는 모든 것들을 집어삼켜라. 이제 어둠의 물결은 차가운 광기의 검날이 되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존재를 말살하리라." 주문을 외우는 사이 동료들과 히폴리테 사람들이 골렘과 스켈레톤을 잘 막아내고 있었 다. 골렘과 싸우고 있는 자들은 맞서기보다는 이리저리 피하면서 그 것들을 유인하고 있었고, 스켈레톤과 싸우는 자들은 다시 덤벼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선은 목부터 날 리고 있었다. 어차피 그들의 역할은 우리들이 주문을 외울 동안 시간을 끄는 것이니까 . 가장 먼저 주문을 완성한 나는 마법을 날리기 전에 동료들에게 주의를 줬다. "모두 조심해!" 동료들까지 날려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동료들이 옆으로 비켜선 것을 확인한 나는 시 동어를 외쳤다. "매드니스 웨이브!" 내 손에서 작은 물결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물결은 순식간에 대해로 변해 모든 것 을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출렁였다. 그 물은 너무나 검어 얼마나 깊은지조차 알 수 없 었다. 그 거대한 검은 물결은 어느 순간 시퍼런 기운을 토해내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손을 앞으로 뻗자 기다렸다는 듯이 골렘과 스켈레톤을 덮쳐가기 시작했다 . 한순간 해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높다란 파도가 음산한 소리를 내면서 일어섰다. 그 리고 커다란 소리를 내지르며 앞쪽의 골렘과 스켈레톤에게 달려들었다. 결국 골렘 두 마리가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버렸고, 스켈레톤들도 바스라졌다. 그리고 먹이를 집어삼킨 물결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골렘 두 마리는 완전히 복구 불능이 되었고, 스켈레톤들은 꼴을 보아하니 조립되려면 한참이나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어떤 놈은 아주 바스라져 조립조차 되지 않을 것 같 았고 말이다. 뒤쪽에 있던 골렘과 스켈레톤은 무사했지만 곧이어 다른 사람들이 주문 을 완성하면서 운명을 달리했다. "정화!" 히크리트 신관이 신성 주문을 사용하자 그녀를 중심으로 거대한 흰 색의 오로라가 일 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기분 나쁜 기운이었지만 나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나마 나았다. 히크리트 신관의 몸에서 일어난 오로라는 천장에 닿을 정도로 높아지더니 조 용히, 하지만 빠른 속도로 주변으로 퍼졌다. 잠시동안 오로라는 광장을 맴돌다가 사라 졌다. 그리고 그 오로라가 사라지고 난 후에는 스켈레톤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누가 고위 신관 아니라고 할까봐 한 번에 보내버린 것이다. 그러나 신성주문은 골렘에게는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골렘은 어 둠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즈가 몇 분 후에 외운 마법 주문으로 인해 골렘들 역시 무로 돌아가고 말았다. 로즈가 생성해 낸 번개의 창들은 남아있는 골렘들에게 그대로 가서 꽂혀버렸던 것이다. 꽂힌 것으로 끝나지 않고 강력한 전기를 방출해내는 마법을 쓴 걸 보니 로즈도 의외로 잔인한 면이 있었다. 골렘과 스켈레톤을 모두 물리친 후에 재빨리 그 자를 쳐다보았다. 우리가 싸우고 있는 동안 그 자도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신상을 둘러싸고 있는 빛이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흔들흔들거렸다. 꼭 막아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기분이 드는 순간 빠지직, 하는 소리를 내며 신상을 보호하고 있던 빛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 자가 그대로 손을 가져가 대자 신상의 머리 부분이 퍼석, 부서져버렸다. 머 리를 이루고 있던 금덩이들이 지면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평소라면 저거 주어갈 까 하는 생각을 했을 텐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머리가 있던 부분에는 하나의 석판 조각이 붕 떠있었던 것이다. 신상의 머리부분에 석판 조각이 감춰져 있었던 것이 다. 부채꼴 모양의 볼 품 없이 생긴 조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저 것을 빼앗기 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그 쪽으로 뛰어갔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 르겠지만 저걸 넘겨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온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것도 고도로 발달된 본능 중에 하나였다. 그런 생각은 나만이 아니었는지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그 자에게 달려들었다. 그 자가 석판을 손에 쥐는 순간 가장 앞쪽에 있던 에릭이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여러분,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뵙지요." 그 말을 하고 그 자는 사라져버렸다. 에릭이 바로 앞에 도착했을 때 스크롤을 사용한 것이다. 아쉽게도 에릭의 검은 그 자를 베지 못하고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조금만, 정말 조금만 빨랐어도 없애버릴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아쉬웠다. 한동안 그 자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던 우리들은 결국 터덜터덜 걸어서 신전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자가 가져간 조각이 무엇인지는 우리는 물론이고 히폴리테 사 람들도 모르고 있었다. 하긴 지하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는데 그 조각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 자가 그렇게까지 손에 넣으려고 했던 것을 보면 매 우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도대체 그 조각은 뭐였을까? 내가 기억하는 것은 부 채꼴 모양에 기이한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 이제 스피린에서의 여행도 끝이군요. 인생무상(?) # 27- 왕비의 음모 정체를 알 수 없는 조각을 빼앗기긴 했지만 흑마법사가 만들어놨던 마법진을 해제하는 것으로 우리들의 임무는 끝이 났다. 흑마법사에 대한 걱정은 사라졌으니 우리들이 없 더라도 마음 놓고 마물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스피린에서 몇 달 동안이 나 지냈기 때문에 이제는 페드인 왕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아무리 내가 활약을 했다 고는 하지만 일국의 공주가 오랫동안 밖을 돌아다닐 수는 없다나 어쩐다나. 처음 스피 린에 도착했을 때는 이제 막 겨울이 지나고 봄의 문턱에 들어설 무렵이었는데 지금은 한창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이 되어 있었다. 우리들은 스피린의 수도인 가디스에서 엔젤과 로즈, 히크리트 신관, 도로시 신관과 헤 어졌다. 한 명을 제외하면 그런 대로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었지만 나라가 다른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다고 내가 스피린에서 평생 살 수도 없지 않은가. 레리이나 여 왕은 이번에 내가 도와준 것을 결코 잊지 않겠다면서 환송해주었다. 그 길로 클라이드 로 내려간 우리들은 대기하고 있던 해군들과 합류했다. 우리가 꽤 오랫동안 돌아다녔 지만 이들도 그 기간동안 스피린 사람들과 함께 바다 마물들이나 해적들을 소탕하느라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고 한다. 해군들은 우리 일행이 무사히 돌아오자 열렬히 환영했 다. 특히 나를 보는 그들의 시선에서는 처음 봤을 때에는 없었던 존경심 비슷한 것이 철철 넘치고 있었다. 그 정도는 지위가 낮으면 낮을 수록 심했는데 아마 잔뜩 부풀려 진 소문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배운 것도 많고 전투도 많이 겪어봐서 나 혼자 모든 활약을 다했다는 화려한 소문을 그대로 믿지 않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자기들도 모르게 뜬 소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페드인 왕국으로 돌아가는 내내 우리들의 항해는 순조로웠다. 내가 여행을 다니는 동 안 페드인 왕국과 스피린 양국 간에 채결되었던 '바다 괴물, 해적 공동 퇴치 작전'은 착실하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앞길을 막는 마물들이나 해적들도 없는 데다 딸내미가 너무 밖으로 나돌자 레프스터 국왕이 될 수 있으면 빨리 돌아오도록 명령을 내렸기 때 문에 전보다 더 서둘러서 항해를 했다. 그 결과 스피린의 클라이드에서 페드인 왕국의 제펠까지 가는데 걸린 기간이 예상했던 31일에서 22일로 무려 9일이나 단축되었다. 그러나 이런 대기록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내가 세운 것도 아니지만) 씁쓸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 바다 위에서 하는 항해가 그렇게 재미 있지는 않았지만 이제부터 다시 왕궁에 꼭 박혀 살아야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땡깡을 부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언젠가 다시 한번 더 제대로 된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말이다. 제펠에 도착하자 제펠의 영주와 이블로가 마중나와 있었다. 이블로는 라디폰 공작의 명으로 내가 아렌테에 도착할 때까지 호위로 붙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말로는 호위 라고 하지만 감시자로서의 역할이 더 크리라는 생각이 팍팍 들었다. 제펠에서 하루 쉰 우리들은 아렌테로 향했다. 이번에는 마차에 나와 시중을 들 시녀들밖에 타지 않았다 . 전에는 호위상의 문제를 들어 함께 마차에 탔던 이블로가 지금은 나도 공주로서 위 엄과 권위를 지닌 상태니 같이 탈 수 없다며 다른 마차를 타고 뒤따라 왔다. 그 말인 즉슨 예전에는 공주로서의 권위와 위엄이 없었다는 말? 이제는 권위가 있다는 말에 기 뻐해야 할지 아니면 과거에는 쥐뿔도 없었다는 말에 화를 내야할 지 참으로 애매한 말 이었다. 그 말에 내가 화를 낼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에 이블로가 물러났기 때문에 결 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마차를 타고 느긋이 가면서 창 밖을 쳐다보니 가스톤과 죠안이 바로 옆에서 호위를 하 고 있었다. 그들은 오랜만에 입는 갑옷이 어색한 눈치였지만 은빛 갑옷을 입고 검은 말에 올라탄 모습은 제법 멋있었다. 실로 '옷이 날개다' 라는 말의 산 예시라고 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품위와는 담을 쌓은 인간들이건만 말이다. 그리고 가스톤과 죠안의 주위로는 많은 병사들이 주위를 경계하면서 따라오고 있었다. 행여나 있을지 모르는 습격에 대비하는 것이다. 과연 공주 일행을 습격할 간 큰 무리들이 얼마나 되 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에릭과 세린, 사라도 찾아봤지만 무리의 앞쪽에서 가고 있 었기 때문에 마차 안에서는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잠시 호위병들을 쳐다보던 나는 다시 시선을 마차 안으로 돌렸다. 오랜만에 이런 호화 찬란한 마차를 타고 가는 기분도 괜찮았다. 게다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시녀들이 다 알아서 해주니 정말 편했다. 여행할 때와 비교해보면 극과 극을 달리는 대우였다. 음식을 못 만든다고 은근한 눈치와 구박을 받던 게 언제였던가. 그렇게 스피린에서 있었던 여행을 회상해보던 나는 마침내 여행 중에 보여주었던 가스 톤과 죠안의 태도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내가 말을 놓으라고는 했지만 그들의 행동은 주군을 대하는 태도로는 볼 수 없는 행동들이 많았다. 말을 놓는 것과 평소에 하는 행 동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말을 놓으라고 해서 싸가지없게 행동하라는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당연히 자기들의 본분을 잊고 천방지축 날뛰었던 놈들에게는 응분의 대가가 따라야 했다. 이는 여행 중에도 계속 생각해오던 것이었다. 그리고 가스톤과 죠안의 좋지 못한 태도가 다른 기사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아렌테에 도착 하면 오랜만에 대련을 해야할 것 같았다. 가스톤과 죠안에게 유감이 있는 건 절,대, 아니었지만 주군으로서 밑에 있는 기사들의 옳지 못한 행동을 바르게 잡아주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인 것이다. 아렌테에 도착한 것은 제펠을 출발한 지 6일이 지난 다음이었다. 햇빛을 받아 아렌테 의 하얀 성벽이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거의 백년에 가까운 세월을 소비 해서 완성되었다는 아렌테의 성벽은 그 어떤 성벽보다도 높고 견고했으며 아름다웠다. 햇빛이 하얀 성벽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지는 모습은 마치 성벽 자체가 하얀 빛으로 이루어진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물론 하이덴 제국의 수도를 감싸고 있는 무식하게 높은 성벽보다는 낮았고, 세를리드 의 성벽보다는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 정평이었다. 하이덴 제국의 성벽은 얼마나 높냐 면 하나의 도시가 작은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완벽하게 폐쇄되어 있었다. 만약 왕권이 강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분열되었을 나라였다. 현재 그런 조짐이 보이고 있기는 하지 만. 그리고 세를리드의 성벽은 성벽보다는 아예 예술품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 큰 성벽을 이루는 돌 하나하나에 세공을 했으니 말다했지 않은가. 높이와 아름다움만 놓고 보면 단연 하이덴 제국과 세를리드의 수도를 감싸고 있는 성벽이 제일이었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면 차라리 부족한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하이덴 제국과 세를리 드의 성벽은 극단적이다 보니 사람들로 하여금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 하이덴 제국의 경우는 높기만 하다보니 삭막하다는 느낌을, 세를리드의 경우는 확실 히 아름답긴 하지만 인위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에 비해 페드인 왕국은 높이 와 아름다움을 적절히 조화시키고 있어 두 나라보다 훌륭하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나는 모르고 있는 사항이었지만 시녀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니 처음 봤을 때는 그냥 평범한 성벽으로만 보였던 아렌테의 성벽이 지금은 제법 근사해 보였 다. 오랜만에 보는 아렌테의 모습이라 더욱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렌테는 인 간 세상에 와서 처음으로 본 도시였고, 가장 오랫동안 머문 곳이다 보니 다른 곳보다 친근감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그 성벽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아렌테의 남문에 는 많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평소라면 병사들만 보였을 텐데 외국 에 나갔던 내가 다시 돌아온다고 하니 기사들까지 경비를 서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우리 일행이 나타나자 경비병들이 그대로 통과시켜주지 않고 멈춰 세웠다. 멈 춰 세우긴 했지만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자기들도 세우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들의 입장에서야 지금이야 많이 변했지만 한때 유명했던 마리엔의 더러운 성격이 언 제 나올지 몰라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오랫동안 여행을 하고 지친 상태에 건드리면 신경질적으로 나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도 멈춰 세웠다는 것은 무슨 이유가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 사이에 아렌테에 무슨 일이라도 난 걸까? 아니면 오펠 리우스 왕비가 무슨 흉계를 꾸민 것일까? 여러 가지 추측을 해보는 사이에 세린이 경 비를 서고 있는 사람들 중 리더로 보이는 기사에게 다가가 뭔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 했다. 한동안 말을 주고 받던 세린은 다시 마차 쪽으로 다가와 말했다. "마리엔 공주님, 이 곳에서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내 말에 세린은 볼을 긁적이면서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애매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기는 있는데...나쁜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 다. 마리엔 공주님도 조금 후에는 아시게 되실테니 지금은 그냥 기다려주십시오." 세린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지금은 기다려보기로 했다. 나쁜 일은 아니라 고 하니 상관없겠지. 그러나 궁금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우고 주변의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나를 호위하고 온 사람들이나 성문을 지키고 서있는 사람들 모두 귓속말로 무슨 말을 하고 있었다. 서로 속닥거리고 있어 들리지는 않았지만 모두 웃는 듯 하면서도 우는 것 같은 해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성벽 너머로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성문 밖에서 한참을 기다리게 되었다. 마침내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내가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기다려야 하는지 물어보려고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성벽 위에서 푸른 깃발이 올라오면서 펄럭이자 성 문을 지키고 서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들도 나를 너무 오래 세워두어서 초조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엔 공주님, 감히 고귀하신 공주님의 발길을 붙잡아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모 든 것이 공주님의 안전을 위해서였다는 것을 믿어주십시오! 이제 성문을 열겠습니다. 마리엔 공주님, 다시 아렌테로 돌아오셔서 미천한 저희들은 기쁘기 할 량 없습니다!" 그 말을 하고 기사는 병사들에게 성문을 열 것을 명령했다. 거대한 성문이 서서히 열 리는 것을 본 나는 머리를 다듬기 시작했다. 이제 곧 왕궁에 도착할텐데 부스스한 머 리로 내릴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레프스터 국왕도 있고 다른 귀족들도 많이 모 여있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물론 머리가 엉망진창인 것은 아니었지만 약간 부스스 한 것은 사실이었다.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머리를 다듬던 나는 점점 사람들의 웅성거 리는 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별 일이야 있겠냐며 흘려 들었다. 무 슨 일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우선 머리를 정리하고 살펴봐도 늦지 않았다. 그러나 그 런 나의 생각은 곧 이어 들린 어마어마한 소리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우와아아!!! 와아아아!!! 갑자기 엄청난 함성 소리가 들리자 머리를 다듬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전 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 것은 시녀들도 마찬가지인지 그 녀들은 내 머리를 다듬던 손을 멈추고 놀라서 창 밖을 내다보았다. 얼떨결에 창 밖을 내다본 내 눈에 보인 것은 주변을 완전히 감싸고 있는 군중들의 모습이었다.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모였는지 우리가 지나가는 길을 제외하고는 온통 사람들로 빽빽하게 들 어차 있었다. 그나마도 기사들과 병사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 군중들의 앞에 서서 접근을 막고 있어서 생긴 길이었다. 그러나 평소라면 검을 차고 있는 병사들이 앞을 가로막으면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는 사람들이 오늘은 기사까지 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소리를 지르면서 조금이라도 앞으 로 나오려고 기를 썼다. 앞에 있는 사람들은 밀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뒤에서 자꾸 밀 다보니 의도하지 않게 계속 길을 막고 있는 기사들과 병사들을 밀어내게 되었다. 기사 들과 병사들이 최선을 다해 막고 있었지만 수에서 밀리는 터라 금방이라도 뚫릴 것처 럼 불안했다. "가스톤, 이게 무슨 소동이야? 설마 이 사람들이 나를 보러 왔을 리는 없고." 내가 마차 옆에 붙어서 개미떼처럼 모여있는 군중들을 질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가 스톤에게 묻자 그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아닙니다. 모두 마리엔 공주님을 보러 온 것이 맞습니다." "뭐? 어째서? 왕가의 행렬을 구경하기 위한 것이라면 너무 극성스러운데? 전에 글로리 라이언이 열릴 때는 아바마마까지 있었는데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아까 성문을 지키고 서있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이 곳까지 공주님에 대한 소문이 전해진 모양입니다. 그 것도 아주 거창하게 말입니다. 아까 저희들을 세웠던 것도 병 사들이 방어선을 치기 위해서였습니다." 말없는 말이 천리까지 간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설마 서로 다른 대륙까지 그 소문이 퍼질 줄은 몰랐다. 설령 소문이 전해졌다 하더라도 그냥 조금 활약을 하고 있다더라 하는 소문 정도만 퍼질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니 나는 거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극적으로 소문이 퍼지자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도대체 어떻게 소문이 났기에 이런 소동이 난 것일까? 알고 싶기도 하고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얼 마 지나지 않아 나는 소문이 어떤 식으로 났는지 알 수 있었다. "마녀 요이체로스를 단번에 이긴 마리엔 공주님 만세!" "스피린을 정복하려는 흑마법사의 계획을 와해시키고 아드린 대륙의 평화를 지키신 분 !" "스피린의 여왕까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분이 우리 왕국의 공주님이라니! 페드인 왕국의 복이야!" 요이체로스를 단번에 이겨? 도망쳤다가 간신히 이겼다. 스피린을 정복하려는 흑마법사 ? 단지 이상한 조각을 훔쳐갔을 뿐이다. 아드린 대륙의 평화를 지켰다? 마물 조금 없 애고 흑마법사 하나 쫓아낸 것이-그 것도 자기 발로 물러난 것과 비슷했다-대륙의 평 화를 지키는 일이었던가. 레리이나 여왕이 감히 고개를 못 들어? 그냥 고맙다고 인사 만 했을 뿐이다. 이정도면 기가 막힐 정도다. 어떻게 와해가 되도 이렇게까지 와해가 될 수 있단 말인 가. 아무리 사람들이 말을 부풀려서 하길 좋아한다지만 심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 가 정의감에 불타올라 요이체로스나 흑마법사를 상대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냥 자 꾸 걸기적거리니까 없애려고 한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들 멋대로 나를 영웅으로 만든 것이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라디폰 공작이 뒷공작을 벌였을 가능성이 많았지만 당시에 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이 점까지 생각해보지 못했다. 군중들의 어마어마한 호응에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잔뜩 긴장했다. 다른 사람들 은 행여나 이 중에 암살자라도 섞여 있으면 막기가 힘들기 때문에 경계를 하는 것이었 고, 나는 사람들을 막고 있는 기사들과 병사들이 자꾸 뒤로 밀리자 괜시리 불안해진 것이다. 만약 저 방어선(?)이 뚫리면 왕궁까지 갈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에게 무슨 해를 끼칠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뚫릴 듯 뚫 릴 듯 하면서도 버티고 있는 병사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불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는 기사들과 병사들이 대견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불안한 예감은 꼭 맞아떨어지지 않던가. 빠르게 이동하고 있는데 갑자기 앞쪽 에서 큰 함성을 터져 나와서 그 쪽을 쳐다보니 방어선 중 한 곳이 무너져버렸다. 그리 고 방어선이 무너지자 그 곳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죄도 없는 사람들에게 검을 휘두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소리를 쳐봐도 사람들의 함성 소리에 파묻혀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았다 . 방어선을 이루고 있던 사람들이 제압하기 위해 가면 다시 그 쪽이 뚫릴 것이 뻔하기 에 내가 타고 있던 마차를 호위하던 사람들 중 일부가 몰려가 막아냈다. 덕분에 마차 는 길 한복판에서 멈춰 섰다. 그래도 정예 중에 정예들만 모여서 그런지 잘 막아내고 있었다. 인기가 너무 좋아도 이런 문제가 있군. 과거의 마리엔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고민 이었지만 내가 뛰어나다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물론 소문의 영향이 아주 컸다. 그리 고 이 곳에 모인 사람들 중 대부분이 오랜만에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기자 몰려든 것 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소동도 일으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 니 그만큼 내가 뛰어나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기사들이 내 쪽까지는 사람들이 오지 못 하도록 막고 있었기에 편하게 지켜보면서 자기 도취에 빠져들었다. 기사들이 죽을 고 생을 하고 있었지만 이런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의외로 재미있었다. 사람들이 곤란해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즐기는 것을 보면 나도 성실한 마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참 그렇게 흥미로운 눈으로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동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꺄악!" 난데없이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소동 속에서 들릴 만큼 절박하고 찢어 지는 듯한 비명 소리였다. 고개를 내밀고 보니 사람들이 무너진 방어선 사이로 마구 몰려나오면서 그 틈에 여자아이가 넘어졌는지 사람들의 다리 사이로 작은 체구의 소녀 가 넘어져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워낙 사람들이 많아서 자세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 다. 저대로 놔두면 사람들에게 밟혀서 죽을 지도 몰랐다.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 을 보니 벌써 상당히 많이 밟힌 것 같았다. 그 소녀를 본 것은 나만이 아니라 기사들과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안타까워하고 있 었지만 최우선시해야 할 것은 나의 안전이라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까워 하는 사람들보다 적긴 했지만 개중에는 소녀가 넘어져있든 말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인간들도 많았다. 그리고 나도 그 곳에 해당했다. 멍청하게 누가 넘어지라고 했나? 안됐다는 식으로 혀를 차긴 했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내가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쩌겠는가. 운이 없는 자기를 탓해야지. 사람들도 누가 넘어진 것을 알 고 발을 멈추려 했지만 뒤에 있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계속 밀고 있어 소녀는 계속 사람들의 발에 짓밟혔다. "마리엔 공주님, 어떻게 좀 해보십시오." 내가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자 죠안이 절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죠안은 귀족 이 아니었기에 평민 소녀가 넘어져서 사람들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자 다른 사람 들보다 더욱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그 것은 귀족이라기보다는 평민에 더 가까웠던 가 스톤도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사람들을 보면 귀족 출신인 기사들은 안됐다는 표정만 지었지만 평민 출신인 병사들은 어쩔 줄 몰라했다. "내가 어떻게 저 많은 사람들 틈 속에서 저 애를 구한단 말이야? 마법이라도 쏴버릴까 ?" 내가 약간 차갑게 반문하자 죠안은 거의 발을 동동 구르면서 말했다.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모두 마리엔 공주님을 보기 위해 온 것이니 공주님이 말씀하시 면 물러나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렇게 시끄러운데 내 목소리가 들리겠어?" "그,그건 그렇지만......" 죠안은 풀이 죽어 고개를 푸욱 숙였다. 기대를 가지고 나와 죠안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들도 많이 실망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도대체가 도착하 자마자 이게 무슨 난리람. 확 모른 척 하고 싶었지만 만약 저 소녀가 죽기라도 하면 죠안이 며칠은 슬픔에 젖어 흐느적거리고 다닐 것 같았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죽는 것이 무슨 상관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인간들은 지나칠 정도로 감성적이니 분명 히 그럴 것 같았다. 결국 나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 마차 문을 열었다. 마차문이 열리면서 눈부신 빛이 망막을 자극했다. 창문을 통해 빛이 들어오긴 했지만 어두컴컴했던 마차 안에 있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오자 한순간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익 숙하지 않은 눈부심에 시력을 잃어버렸지만 몇 차례 눈을 깜빡거리자 다시 시력이 돌 아왔다. 손으로 차양을 만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짜증스러울 정도로 쨍쨍 내리쬐는 해와 붉은 아지랑이에 휩싸여 파란색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텁지근해 보이는 하 늘이 눈에 들어왔다. 더위 때문인지 아니면 번거롭게 나서게 된 것 때문인지 이상할 정도로 불쾌했다. 머리 위에 떠있는 해도,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있는 기사들도, 우글거리는 군중들도 주 위를 뱅뱅 맴돌기만 할 뿐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늘에서 쏟아 지는 더운 입김과 강렬한 빛을 받아 지면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뱀처럼 꿈틀거리며 모든 사물을 감싸고 있어 더욱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부조 화가 느껴졌다. 그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인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을 수 없 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짜증의 원인이 하늘 위에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드넓은 창공의 평원을 노려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혼자서 눈싸움을 벌이던 나는 불연 듯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작스런 나의 등장에 당황하 고 있는 사람들. 그들을 보자 내가 마차에서 나온 이유가 떠올랐다. 나에겐 멍청하게 이런 타이밍에 넘어진 소녀를 도와줘야 한다는 사명이 있었던 것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짜증을 가슴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은 나는 병사들과 사람들이 한 데 엉켜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 밀고 밀리고를 반복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그 자리에 발이 붙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놀란 사람들의 얼굴이 조금씩 눈앞으로 다가왔다. 이쯤 되면 뒤에 있는 기사들이 따 라오는 것이 정상인데 누군가 따라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너무 놀라서 움 직일 정신도 없는 것 같았다. 앞에서 사람들을 막고 있던 기사들의 표정만 봐도 내 등 장이 얼마나 충격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기사들의 놀라움은 군중들의 놀라움에 비 할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를 보고 싶어서 소동을 벌일 때는 언제고 정작 내가 마차 에서 나오자 완전히 얼어버린 것이다. 내가 바로 앞까지 걸어가자 사람들이 비척비척 옆으로 물러났다. 마치 마법에라도 걸 린 것처럼 조용히 길을 만들어준 것이다. 덕분에 사람들에게 깔려있는 소녀를 쉽게 발 견할 수 있었다. 벌써 사람들의 발에 많이 채였는지 정신을 잃은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소녀는 15,6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였다. 잔뜩 웅크리고 있어서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하늘거리는 몸매였다. 그제야 연약한 소녀가 넘어졌다는 것을 알았는 지 사람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동요가 일어났다. 쓰러져 꼼짝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 자 행여나 죽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가까이 다가갔다. 무릎을 꿇고 맥을 짚어보 려는데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기사 중 한 명이 소리쳤다. "공주마마!" 그대로 고개를 돌려 나를 부른 기사를 쳐다보니 제펠에서 이 곳까지 나를 호위해온 기 사 중 한 명이었다. 왕궁 기사는 아니지만 제법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는 수도 방위대 에 속해있는 쥬에란이었다. 회색에 가까운 은발머리를 목덜미까지 기른 미남 기사였는 데 은발머리는 보기 힘든데다 원래 내 머리색이 은발이라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 는 그를 바라보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로 부른 것인지 정말로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왕족이 사람들에게 밟혀 더러워진 평민 소녀에게 직접 손을 대려고 하니 말린 것이다. 얼마 보지 못했기에 그 를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평민들의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생각하는 사람 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역시 고귀한 왕족이 직접 평민을 만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는 틀에 박힌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 이상의 말은 꺼내지 못했다. 자기가 맥을 짚 을 것도 아니면서 쓸데없이 부르지마. 그런 뜻을 담아 한번 쏘아 봐주고 다시 소녀에 게 눈을 돌렸다. 실타래처럼 잔뜩 헝클어진 머리가 얼굴은 덮고 있었지만 가녀린 목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시꺼멓게 때가 낀 손발과는 달리 목은 대리석 조각상처럼 하 야서 그 위로 드리워진 몇 가닥의 붉은 머리카락이 혈선처럼 보였다. 그 목에 가만히 손을 가져가 대보니 맥박은 정상적으로 뛰고 있었다. "죠안." "네, 공주님." 내가 부르자 죠안은 금새 달려와 옆에 섰다. 이렇게 직접 나선 결정적인 이유는 죠안 에게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그를 호명했다. 살짝 올려다보니 죠안의 얼굴에는 안도감 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본 이 소녀가 그렇게 소중한 것일까? 인간들의 이해 가 가지 않는 면이 하나 더 늘었다. 하기는 인간이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어디 한둘 이었던가. 잠시 생각해본다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잠시 덮어두기로 했다. 지금은 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소녀의 안위였 으니까. "죠안, 이 소녀를 이블로가 타고 있는 마차로 옮겨. 그리고 이블로에게 회복마법이라 도 걸어주라고 전해. 지금은 의사가 없으니 일단 임시방편으로 그렇게 하라고 말하면 알아서 해줄거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내 말에 죠안은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대고 허리를 굽혀 공주에 대한 예를 갖췄다. 그 후에 바닥에 쓰러져있는 소녀를 안아들고 이블로가 있는 마차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별 생각 없이 죠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던 이블로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순간 그의 눈이 웃었던 것 같았 지만 금새 죠안에게 건네 받은 소녀를 살펴보기 시작해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었다. 이블로가 소녀를 치료하는 모습을 본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 보니 현재 나와 기사들은 완전히 군중들에게 둘러싸인 모양새였다. 내가 마차에서 나 온 것을 계기로 기사들이 만들고 있던 방어선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기사들이나 군중 들이나 자신들도 모르게 나와 아까의 소녀 주위로 몰려드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길이 사라져버렸다. 우리들은 이대로 폭동이라도 일어난다면 절대로 무사하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에워싸여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이 분노에 찬 눈이 아니 었기 때문에 그럴 일은 없어 보였다. 놀란 눈들이었지만 나쁜 의미의 놀람은 아니었다 . 이거 라디폰 공작이 지지도가 올라갔다고 좋아하겠는걸. 그러나 이들이 길을 막고 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내 눈에는 온통 사람들밖 에 보이지 않았다. 눈으로는 더 이상 식별이 불가능한 곳까지 쳐다보았지만 그 곳도 사람들로 가득했다. 희미한 점으로 보였지만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것이 사람이 확실했 다. 마치 사람들로 만들어진 바다 한가운데에 빠진 기분이었다. 이렇다보니 마차는커 녕 사람이 지나가기도 힘들었다. 사람들을 흩어지게 할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기사들이 칼을 휘두르면 죽기 는 싫을 것이니 자연히 도망칠 것이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나를 보러 온 사람들에 게 칼을 휘두르라는 무식한 명령을 내릴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가자니 어느 세월에 왕궁에 도착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이럴 때는 군중들이 스스로 물러나 주 는 것이 제일이었다. 나는 군중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데다 이렇게 열렬한 환영을 받으니 너무 기쁘군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것 같아요." 여기까지 말을 마친 나는 방긋 웃은 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길을 막고 있으면 제가 지나가지 못하죠. 지금 아바마마께서 기다리신 답니다 . 어서 가서 인사를 드려야죠. 벌써 몇 달 동안이나 뵙지 못했는데 조금이라도 더 기 다리게 해드리고 싶지 않답니다. 그러니 길 좀 비켜주시겠어요?" 차마 '왜 길을 막고 난리야? 난 지금 피곤하단 말이야! 얼른 비키지 못하겠어?' 라는 속마음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어서 약간 순화시켜서 말했다. 사실은 어서 왕 궁에 도착해서 편하게 쉬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생글거리며 말하자 사람들이 뭐에 홀 리기라도 한 것처럼 서서히 양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기를 써도 비켜서 지 않던 사람들이 내 말 한마디에 순순히 물러서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때로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보다 말 한마디가 더 강한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칼보다 펜이 강하다 는 말도 있지 않은가. 잠시 후 사람들만 바글거리던 거리에 길이 생겼다. 평소의 대로 와 비교해보면 턱없이 비좁은 길이었지만 마차가 지나가기에는 충분한 길이었다. "고마워요." 길이 생긴 것을 본 나는 살며시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다시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한동안 어안이 벙벙해있던 기사들은 곧 행렬을 전진시키기 시작했다. 조금씩 마차가 굴러가기 시작하자 시녀들을 독촉해서 머리를 다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단장 하는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와아아!!" "마리엔 공주님, 만세!" 천지를 뒤흔드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던 것이다. 처음에 들었던 함성 소리도 컸지만 이번에는 귀가 멍멍할 정도였다. 창 밖을 내다보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토끼처럼 눈을 크게 뜨고 멍하니 서있던 사람들이 모자나 겉옷을 위로 던지면서 환호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환호 작약하는 이유는 알고 있었다. 내가 평민 소녀 한 명을 구하기 위해서 친히 마차에서 내려왔다는 것 때문이었다. 아무리 비단결처럼 고운 심성의 공 주라 해도 기사들에게 도와주라고 말을 하지 직접 나서서 도와주는 일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왕족으로서 지켜야할 품위와 어렸을 때부터 평민은 왕족이나 귀족보다 천하 다는 교육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몸소 나서서 도와주자 군중들이 열광하고 있는 것 이다. 그렇지 않아도 과장된 소문 때문에 흥분해있던 사람들 앞에서 그런 행동을 했으 니 불난 집에 기름을 퍼부은 꼴이 되었다. 사람들이 내 속마음은 알 수 없으니까. 내가 한 말 때문인지 더 이상 길을 막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함성 소리만은 더욱 커 져갔다. 그 환호성은 왕궁에 도착할 때까지도 계속되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마차 안에 있는 내가 이 정도인데 밖에서 따라오는 기사들과 병사들은 오 죽 하겠는가. 그러나 왕궁에 도착한 다음 마차에서 내려서 본 그들은 괴로운 표정이 아니라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라면 다른 사람 때문에 그 고생을 했다면 짜증 을 팍팍 냈을 것인데도 말이다. 그런 대로 나와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라 싫은 내색은 하지 못하고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웃고 있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마리엔 공주님, 레프스터 국왕 폐하와 귀족분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를 따라와주 십시오." 그런 그들을 이상하게 쳐다보던 나는 시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따라갔다. 도 착하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만나야 한다는 것이 피곤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간단 한 인사만 하고 물러나는 의례절차였다. 미리 죠안에게 조금 전의 소녀를 내 궁으로 옮기고 의사에게 보이라고 명했기 때문에 내가 할 일은 국왕을 만나는 일뿐이었다. 국 왕이 있는 대전으로 통하는 긴 복도를 걸으면서 보이는 낯익은 풍경에 왠지 모르게 마 음이 푸근해졌다. 비록 1년 남짓밖에 지내지 않은 곳이지만 어느새 정이 든 모양이었 다. 복도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정원에 우뚝 서있는 나무가 나뭇잎을 살랑살랑 흔드 는 모습이 마치 나를 반겨주는 모습처럼 보여 기분이 좋아졌다. 정겨운 풍경들이 아까 느껴졌던 짜증을 한순간에 날려버렸던 것이다. "레프스터 국왕 폐하, 마리엔 공주님께서 오셨습니다." 내가 대전 앞에 당도하자 시종이 나의 도착을 알렸다. 그러자 거대한 문 너머로 친근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들라 이르라." 레프스터 국왕의 말에 시종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거대한 문이 서서히 열리면서 대전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레프스터 국왕이 화려한 옥좌에 근엄하게 앉아있었고, 그 옆에는 오펠리우스 왕비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이 앉아있는 자리는 단 위라 두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형상을 하고 있 었다. 그리고 단 바로 아래에는 라이언 왕자와 르미엘 왕자, 데미나 공주와 플로라 공 주가 각각 좌측과 우측에 서있었다. 그 후로는 많은 귀족들이 길게 서있었는데 그 중 에는 라디폰 공작을 비롯해서 아는 얼굴들도 있었다. 서있는 순은 서열상인지 라디폰 공작이 귀족 중에서는 단상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서있었고, 그의 옆에는 처음 본 사 람이 두 명 서있었다. 나는 귀족들 사이로 깔려있는 붉은 융단 위를 걸어 단상 앞까지 걸어갔다. 많은 사람 들의 눈동자가 내가 움직일 때마다 움직이고 사람들 사이를 혼자 걸어가야 한다는 것 이 어떻게 생각해보면 쪽팔리는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방금 전에 훨씬 많은 시선 을 많아봐서 그런지 아니면 천성이 그런 것인지 수줍은 모습 하나 보이지 않고 당당하 게 걸어갔다. 마침내 단상 앞까지 걸어온 나는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허리를 숙였다. "제 1공주인 마리엔 오페나 드간 페드인이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그동안 옥체 평안하 셨는지요?" 지금은 많은 귀족들이 지켜보는 자리라 아바마마라는 말 대신에 국왕폐하라는 말을 사 용했다. 레프스터 국왕도 평소처럼 자애로운 얼굴이 아니라 위엄이 넘치는 얼굴을 하 고 있었다. 그러나 목소리만은 부드러웠다. "그래. 공주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구나. 여행 중에 별다른 일은 없었느냐?" "국왕 폐하께서 염려해주신 덕분에 모든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내 말에 레프스터 국왕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에게 다시 한번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한 나는 오펠리우스 왕비를 응시했다. 레프스터 국왕에게 인사를 했으니 이제 오펠리우스 왕비에게 인사를 할 차례였다. 오펠리우스 왕비는 이 나라의 국모이니 이런 자리에서는 레그스터 국왕과 함께 반드시 인사를 해야만 하는 존재였 던 것이다. 오펠리우스 왕비는 기분이 좋은지 만면에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분 명히 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아렌테 사람들의 환호소리도 이 곳까지 들렸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펠리우스 왕비는 억지로 지은 미소가 아니라 정말로 웃고 있었던 것이다. 한순간 '너무 충격을 받아서 머리가 어떻게 됐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반 짝이는 왕비의 눈을 보니 그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지만 겉으로는 반색을 하며 말했다. "오펠리우스 왕비 전하, 그동안 옥체 평안하셨는지요?" "물론 잘 지냈습니다. 그러는 마리엔은 어땠나요? 공주의 몸으로 여행을 하자니 힘들 지 않았나요? 그동안 마리엔을 걱정하느라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제야 편안 히 잘 수 있겠군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오펠리우스 왕비가 정말로 나를 걱정했다가 무사히 돌아오자 안심 하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도 못지 않았다. "왕비 전하께서 걱정해주신 덕분에 모든 일이 순탄했습니다. 왕비 전하의 따뜻하신 관 심과 걱정, 마음 깊숙이 간직하겠습니다. 역시 왕비 전하는 아름다우신 외모만큼이나 마음씀씀이도 고우시군요." "그러는 공주야말로 보지 못하는 사이에 더욱 아름다워진 것 같군요. 아마 페드인 왕 국의 제일가는 미인은 공주가 아닐까 싶군요." "과찬이십니다. 어찌 제가 왕비 전하와 여러 분들을 제치고 제일가는 미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마음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다시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오펠리우스 왕비에 대한 인사는 끝 이 났다. 오펠리우스 왕비나 나나 하는 행동만 보자면 정말 기분이 좋은 것처럼 보였 다.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다해도 말이다. 오자마자 오펠리우스 왕비와 팽팽한 신경전 을 벌인 나는 아리란드 후궁이 없는 것이 의아했지만 모두 나오라는 법은 없었기 때문 에 몸이 안 좋은가보다 하는 생각을 하고 넘어갔다. "그동안 여행을 다니느라 피곤할테니 이만 가도록 쉬거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레프스터 국왕에게 공손히 인사를 한 나는 대전에서 물러났다. 내 궁으로 돌아가니 제 1공주궁에서 일하고 있는 많은 시녀들과 병사들이 열렬히 환영했다. 강행군은 아니었 지만 몇 달 동안 계속된 여행과 항해로 피로가 쌓여있었는지 내 궁에 도착하자 졸음이 물밀 듯이 쏟아졌다. 그러나 죠안이 데리고 왔던 소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기에 당장 씻고 잠자고 싶은 것을 참으면서 캐롤에게 물어보았다. "캐롤, 조금 전에 죠안이 어떤 소녀를 데리고 오지 않았어?" "그러셨습니다. 죠안경의 말씀을 들어보니 마리엔 공주님께서 사람들에게 깔린 것을 구해오셨다면서요. 방금 전에 어의가 다녀갔는데 타박상말고는 큰 상처는 없다고 합니 다. 조금만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하는 캐롤의 얼굴은 자부심이 가득했다. 직접 평민을 구해온 나를 섬긴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피곤했던 나는 그 소녀가 괜찮다는 말에 다른 말은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직행했다. 벽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유리창을 통해 공기 중으로 산산이 부서지고 있는 햇빛이 스며들어왔다. 색깔을 띌 리 없는 공기가 연한 황금빛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은 눈이 아 닌 또 다른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황금빛의 공기는 방 안을 맴돌면서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인위적인 빛이 아니라 우주가 생성되고 빛이 태어난 그 순간부 터 자연과 함께 해왔던 그 빛은 사람의 마음까지도 환하게 밝혀주는 이상한 힘을 지니 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빛이 가장 잘 드는 창가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창가에 앉아서 따뜻한 빛이 온 몸을 감싸고 도는 것을 느끼면서 마시는 차맛은 특별한 것이었다. 예전에는 그렇게 즐기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오랜만에 가져보는 평화로운 시간은 의외로 괜찮았다. 창 밖으로 보이는 낯익은 정경과 친숙한 사람들의 뒷모습이 지금 이 순간을 더욱 특별한 시간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창 밖을 내다보면서 우아한 포즈로 차를 마시고 있자니 내 자신이 굉장히 우아하고 얌전한 사람이 된 듯한 착각 마저 들었다. 그리고 시녀들도 차는 마시지 않고 쿠키만 집어먹던 과거와는 사뭇 다른 내 모습에 시녀들이 깜짝 놀라고 있었다. 가끔은 이렇게 색다른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도 이렇게 우아하게 보이자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던 것이 다. 스스로의 모습에 만족해하면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있을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미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엔 공주님, 전에 데리고 왔던 소녀가 깨어나서 데려왔습니다." "들어오너라." 내 말이 떨어지자 미나와 함께 한 명의 소녀가 들어왔다. 그 때는 몸에 잔뜩 때가 끼 고 옷도 허름해서 몰랐는데 지금은 시녀들이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갈아 입혀서 그런 지 제법 귀여운 소녀였다. 왼쪽 어깨 앞으로 내놓은 한 갈래로 땋은 머리와 종아리까 지 오는 흰색의 단정한 치마는 소녀의 귀여움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러나 소녀의 커다랗고 둥근 붉은 눈동자는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앙증맞은 얼굴도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소녀는 쭈뼛거리며 미나의 옆에 바짝 붙어서있었다. 그 모습이 처음에 미나를 만났을 때와 어쩜 그렇게 똑같은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웃자 소 녀는 약간 긴장이 풀렸는지 찢을 기세로 꼭 쥐고 있던 옷자락을 슬며시 놓았다. "벌써 돌아다닐 수 있는 거야?" "그,그게......." 소녀의 목소리는 긴장해서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소 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미나를 쳐다보면서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이 정도까지 무서워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긴장을 풀만한 이야기를 해주려 했지 만 미나가 조금 더 빨랐다. "캐스나, 긴장하지마. 마리엔 공주님은 좋은 분이셔서 우리들한테도 정말 잘 대해주 셔. 무서운 분이 아니야. 마리엔 공주님은 악당에게는 무서울지 몰라도 우리같은 평범 한 사람에게는 얼마나 착하신 분인데. 캐스나를 구해온 것도 공주님이셨어. 그러니까 긴장 풀고 공주님의 질문에 천천히 말해봐." 미나는 그 소녀에게 차분히 이야기해주었다. 평소에는 철없이 굴어서 선배 시녀들에게 혼도 많이 나더니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나타나자 자신이 선배라도 된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하기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약간의 우월감을 느끼는 것은 당 연했다. 어쨌거나 미나의 말에 소녀는 조금 진정이 됐는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께서 아직은 더 요양해야 한다고 했지만 돌아다니는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를 구해주신 마리엔 공주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저 같은 것 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마리엔 공주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 습니다." 이번에는 입술이 약간 떨리긴 했지만 그렇게 더듬거리지 않고 말했다. 내용은 시녀들 이 미리 이렇게 말하라고 일러준 것 같았지만 말이다. 평민 소녀가 이렇게 예를 갖춰 서 말을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애를 써서 말하는 소녀의 모습이 재미있기도 하고 기특 하기도 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다행이구나. 이름이 캐스나인가 보지?" "네, 네. 캐스나가 제 이름이 맞습니다." "그럼 나이는 얼마나 되지? 보기에는 그렇게 많아 보이지는 않는데?" "오, 올해로 17살입니다." 열입곱살이라는 말에 나는 약간 놀라서 캐스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15살 정도 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높게 봐줘도 16살 이상으로는 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곧 어렸을 때 제대로 먹지 못해서 발육이 늦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이 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았다.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사항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 "그래? 그런데 집은 어디지? 부모님들께 연락을 드려야 걱정을 하시지 않을 거 아냐." 걱정스러운 내 말에 캐스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입을 꾸욱 다물고 고개를 숙 이는 것이 좋지 않은 쪽으로 대답이 나올 것 같았다. 아무래도 캐스나가 말하기가 힘 든 것 같아 먼저 물어보았다. "혹시 집이 없니?" 끄덕끄덕. 내 질문에 캐스나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모님도 안 계시는 거야? 그동안 어디서 지냈는데?" 이번에도 캐스나는 조용히 서서 바닥만 쳐다보았다. 지금 처음 봤을 때의 모습을 떠올 려 보니 확실히 아무리 가난해도 집이 있는 아이라면 그보다는 덜 더러웠을 것 같았다 . 미나는 캐스나가 계속 가만히 있기만 하자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찌르면서 대답을 재 촉했다. 괜한 질문을 한 것 같아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는 순간 캐스나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제가 5살 때 전염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후부터는 계속 구걸하면서 살 았습니다. 일을 해보려고 했지만 어리다고 아무도 써주지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없어졌다고 걱정할 사람들은 없습니다. 연락할 곳도 없습니다." 대답을 한 캐스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 다. 만약 울었다면 동정심이 가지 않았을 것 같은데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자 약간 불 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랬구나. 쓸데없는 걸 물어봐서 미안해. 대신 몸이 나을 때까지 여기서 편하게 지내 ." "저, 정말로요?" 캐스나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을 크게 뜨고 물어봤다. 비록 며칠 밖에 아니지만 평민이 왕궁에서 지내게 됐으니 백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행운이었다. "그래. 부족한 건 옆에 있는 미나가 알아서 챙겨줄 거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캐스나는 연신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했다. 그런데 긴장해서 잔뜩 굳어있던 캐스나는 허리를 너무 많이 숙이는 바람에 마지막에는 앞으로 콰당 넘어지고 말았다. 물론 왕족 에게는 허리를 많이 숙여야하지만 캐스나처럼 균형을 잡지 못할 정도로 숙이는 것은 아니었다. 캐스나가 넘어지자 나와 미나는 처음에는 황당해서 가만히 보고만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웃음이 나왔다. "푸웃." "킥킥킥." 우리들의 웃음에 캐스나가 재빨리 일어났지만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익어있었다. 하는 짓이 상당히 귀여운 소녀였다. 캐스나는 우리가 계속 웃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 랐다. 더 이상 웃으면 울어버리기라도 할 것 같아 억지로 웃음을 참은 나는 캐스나를 보면서 말했다. "캐스나,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 나는 사람은 잡아먹지 않는다고. 다음에 볼 때 는 편하게 행동해. 미나를 봐. 얼마나 편하게 행동하고 있어. 너도 그래도 돼. 참, 저 녁때 같이 밥이라도 먹을까?" "네? 제가 어떻게 공주님과 식사를 하겠습니까? 말도 안됩니다." 캐스나가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괜찮아. 궁에는 모두 격식을 따지는 사람들뿐이라 같이 밥을 먹으면 재미가 없거든. 그리고 혼자 먹는 것보다 같이 먹는게 더 맛있잖아." "하지만......." 캐스나가 주저주저하자 옆에 있던 미나가 그녀의 등을 손바닥으로 치면서 말했다. "좋은 기회잖아. 마리엔 공주님이랑 같이 식사를 할 수 있다니 얼마나 영광이야! 공주 님과 함께 식사하고 싶어하는 귀족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넌 엄청난 행운아라고. 얼른 감사하다고 해. 나라면 마리엔 공주님이 그런 말을 하면 덥석 받아들일 거야. 물 론 캐롤 시녀장님 때문에 안되겠지만." 미나까지 나서자 캐스나는 여전히 빨갛게 익은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면...마리엔 공주님, 감사합니다." "아니.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럼 조금 있다 다시 와. 그동안은 몸조리 잘하고. 알았지 ?" "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캐스나와 미나는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그녀들이 나가는 것을 본 나는 이제는 식어버 린 차를 들어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캐스나라. 그 겁먹은 모습, 당황해서 버벅대는 모 습, 그리고 인사하다가 넘어지는 모습까지. 왠지 저녁에도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 날 저녁식사 시간에 나는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계속 웃음을 참느라 정신이 없 었다. 나이프와 포크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 버벅대는 것은 그냥 넘어가 줄 수 있었다.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찍어먹는 것도 그랬다. 그러나 손을 씻으라도 내온 물을 먹어버 렸을 때는 입술을 깨물면서 웃음이 참아야 했다. 스프에 샐러드를 넣고 비벼먹었을 때 는 입에 머금고 있던 포도주를 품어버릴 뻔했다. 후식으로 나온 푸딩을 포크로 찍어먹 으려고 애쓰다가 결국 접시에서 떨어뜨리고 울상을 지었을 때는 식탁에 엎어졌다. 내 가 웃으면 얼마나 상처를 받겠는가. 그래서 웃는 것을 감추기 위해 식탁에 엎드릴 수 밖에 없었다. 다음날 나는 캐스나와 미나를 데리고 제 4기사단의 훈련장으로 찾아갔다. 캐스나가 무 사하다는 것을 가스톤과 죠안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가스톤과 죠안을 제외 한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지 내고 있었을지 여간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훈련장에는 반가운 얼굴들이 많았다. 근 몇 달동안 보지 못했더니 예전보다 더 늠름해 진 것 같았다. 오랜만에 봐서 일어난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보였다. 내가 나타나자 가스톤과 죠안의 주위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기사들이 내 쪽 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내가 반가워하는 만큼 그들도 내가 반가웠던 것이다. "마리엔 공주님,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건강해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가스톤과 죠안만으로는 영 불안했답니다. 하기는 에릭 경과 세린경, 사라경이 있었으니 큰 일은 없었겠지만 말입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공주님 정도의 실력이라면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더군요." "오랜만에 뵈니 정말 기쁜데요. 예전보다 더 아름다워지신 것 같습니다." 기사들의 인사가 한꺼번에 쏟아져서 혼란스럽긴 했지만 그들의 목소리에 안도감과 반 가움이 잔뜩 담겨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나는 빙긋 웃으면서 그들의 인사에 일일이 응했다. 반가운 재회를 한 우리들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보나인경, 그동안 무슨 일은 없었나요?"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제 1기사단과 약간 충돌이 있긴 했지만 싸움으로는 번지지 않았습니다. 그 일을 제외하면 그다지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보나인의 말에 나는 알았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없었을 때 제 1기사단과 싸움이 붙었다면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 았던 것이다. 내가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미첼로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 다. "그런데 스피린 여자들은 어쨌습니까? 가스톤과 죠안의 말로는 드세다고 하던데. 정말 입니까?" 정말 미첼로다운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순간에마저 여자에 대한 질문을 하다니 . 한동안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보던 나는 씨익 웃으면서 말해주었다. "드세다 뿐이야? 남자들을 희롱하는 것은 물론 덩치도 우락부락해서 미첼로보다 훨씬 큰 사람들이 부지기수야. 근육이 얼마나 많냐면 가스톤과 죠안이 여리게 보일 정도야. 허벅지는 또 얼마나 굵은데. 그 발에 한번 채이면 한 일주일은 누워있어야 할걸. 그 리고 성깔은 얼마나 더러운지 알아? 허구한 날 시비 걸고 남자들을 쥐어 패는 건 예사 로 볼 수 있지. 스피린에서는 맞고 사는 남편들이 너무 많아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데. 그래도 미첼로는 덜 맞겠다. 미첼로같이 호리호리하게 생긴 남자들이 인기래. 대신 화장도 좀 하고 애교도 부려야돼." 내 말이 계속 될수록 미첼로의 얼굴은 일그러지더니 마지막에 내가 어떻게 애교를 부 려야한다는 예까지 보여주자 못들을 걸 들은 것처럼 얼굴이 완전히 구겨졌다. 그동안 여자에 대해 품어왔던 환상이 와장창 깨지는 말만 했으니 저 바람둥이가 오죽이나 하 겠는가. 아마 지금쯤 스피린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스피린에도 예쁜 여자들은 많았지만 미첼로를 놀려먹는 것이 재미있어서 약간 과장되게 말해버렸다. 그리고 미첼로가 충격에 빠져있는 사이 아인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마리엔 공주님의 활약이 대단했다면서요? 이 곳까지 소문이 쫘악 퍼졌습니 다." "사실은 소문처럼 대단한 건 아니야. 소문이 너무 부풀려졌거든." "하지만 요이체로스를 쓰러뜨린 것은 사실이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자 기사들이 저마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거 보라구. 공주님께는 희대의 마녀도 상대가 되지 않는 거였어." "흠, 요이체로스와 마리엔 공주님이라. 마녀 대 마녀의 싸움이었겠는걸." "흑마법을 사용할 줄 아신다며? 평소의 이미지와 딱 맞지 않아?" 제 4기사단의 최대 장점이자 최대 단점은 자기들이 생각한 것을 바로 입 밖으로 내놓 는 것이었다. 자기들 딴에는 작게 말한다고 하고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들리지 않을리 없었다. 나는 솔직한 사람을 좋아하지만 때로는 그 반대의 경우가 좋을 때도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지금 뭐하고 했죠? 마녀 대 마녀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말이지요." 내가 손을 턱에 가져가 대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자 계속되던 수군거림이 딱 멈췄 다. 한동안 침묵만이 우리 주위를 떠돌았다. 그러나 그 것도 잠시. 갑자기 기사들이 부산을 떨면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럴리가요!" "마녀라니요? 어느 무엄한 놈이 그 따위 소리를 했단 말입니까?" "저희들을 믿어주십시오!" 나는 여전히 턱에 손을 댄 채로 유심히 기사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믿어달라는 식으 로 웃고 있었지만 이마에는 한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찌하여 내 성격을 알면서도 건드리는 것일까? 참으로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었다. 내가 계속 의심스럽다 는 듯이 쳐다보기만 하자 마르크가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앗! 그런데 저 소녀는 누굽니까? 미나는 알지만 저 소녀는 처음 보는데요. 새로운 시 녀입니까?" 마르크는 일부러 과장되게 놀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캐스나를 보자 이 곳에 온 이유 가 떠오른 나는 일단 캐스나를 소개해주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마르 크의 속셈을 알면서도 넘어가 주었다. "아니. 죠안이나 가스톤에게 들었을 거야. 왕궁으로 돌아오다 사람들 틈에 넘어져 있 길래 구해온 거야. 이름은 캐스나. 몸이 나을 때까지는 이 곳에서 지낼 테니까 혹시 보면 잘 대해 줘." "알겠습니다. 이거 만나서 반가워. 내 이름은 아인이야." "네가 죠안이 말했던 소녀구나." "캐스나라고? 이름이 예쁜데. 생긴 것도 귀엽고 말이야. 조금만 있으면 아주 어여쁜 아가씨가 되겠어." "미첼로, 넌 좀 빠져. 많이 다친 것 같더니 이제는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구나." 캐스나는 나를 처음 봤을 때처럼 쭈뼛거리긴 했지만 그 때보다는 익숙해져서 그런지 떨지 않고 인사했다. 내가 자신을 구하는데 큰 공헌을 했던 가스톤과 죠안에 대해서도 미리 말해두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특히나 고마워했다. 수줍어하긴 했지만 정말로 고마워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캐스나의 반응에 가스톤과 죠안은 기분이 좋은지 어느새 싱글벙글이 되어 있었다. 한참동안 제 4기사단의 기사들이-특히 죠안이-캐스나 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어보는 것을 지켜보던 나는 그들이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 을 때쯤에서야 미나와 캐스나를 다시 궁으로 보냈다. 그리고 미나와 캐스나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가 되자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오랜만에 대련이나 할까? 원래는 몇 명하고만 할 생각이었는데 날 보고 반가워 하는 모습을 보니 모두와 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드는걸. 쪼끔 피곤하긴 하지만 며칠동안 하다보면 언젠가는 모두와 대련을 할 수 있겠지, 뭐. 그럼 누구부터 할까? 그래. 아까 마녀 대 마녀라고 한 사람 좋은 말로 할 때 나와. 목소리 기억하고 있어. 맞고 나올래? 그냥 나올래?" #27- 돌아온 페드인 왕국 #27- 돌아온 페드인 왕국 아침까지만 해도 새파랗던 하늘이 오후부터 구름으로 뒤덮이더니 급기야 잿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장마철이 시작되면서 날씨가 변덕을 부리는 경우가 많아졌던 것이다. 페드인 왕국은 내륙에 위치한 하이덴 제국이나 토르에 비교하면 정말 살기 좋은 곳이었다. 근처에 커다란 산맥이 가로막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드넓게 펼쳐진 땅은 비옥해서 소피린 대륙의 곡창지대 중 하나였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은 여름 더위를 시원하게 날려주고 겨울 추위의 매서운 기세를 한풀 꺾이게 해준다. 하지만 장마철이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해안가에 위치한 항구 도시들은 장마철만 되면 태풍 때문에 초비상 상태에 들어간다. 섬이라도 있으면 어느 정도 태풍의 위력이 감소될텐데 페드인 왕국은 유난히 섬이 없는 나라라 태풍이 불면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그저 비바람이 세게 치는 정도의 가벼운 태풍도 있었지만 사람이나 건물을 허공으로 감아 올려버릴 정도로 강한 태풍도 있었다. 이런 태풍이 한차례 지나가고 나면 부두에 정박해있는 배들은 어김없이 심해로 가라앉거나 부서져 선원과 어부들이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다. 특히 화베르틴이 불어닥칠 때면 사람들은 도시를 버리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야할 정도였다. 하얀 난봉꾼이라는 의미의 이 태풍은 역사에서 보면 지금까지 단 다섯 번 일어났다. 가장 최근에 일어난 것이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이었는데 삼일동안 분 화베르틴 덕분에 페드인 왕국의 항구 도시는 완전히 마비 상태가 돼버렸다고 한다. 나이츠라는 도시는 해일마저 일어나 아예 폐허가 되었다고 문헌에 전해진다. 다행히 요즘은 그렇게 큰 태풍은 일어나지 않지만 태풍의 영향은 페드인 왕국의 심장부인 아렌테까지 미치고 있었다. 왕국 내에서도 중앙에 위치한 수도가 이 정도인 것을 보면 항구 도시에는 얼마나 거센 태풍이 불고 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한번 꼭 보고 싶었지만 지나가는 말로 그런 말을 했다가 레프스터 국왕에게 혼난 적이 있었다. 장마철이 지나고 나면 뒷수습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말이다. 그동안은 레프스터 국왕이 딸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푼수인줄로만 알았기 때문에 약간 놀랐다. 마계에 있는 아빠도 그런 끼가 다분했기에 나도 모르게 레프스터 국왕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엔의 성격이 나빴던 것은 레프스터 국왕 앞에서는 아주 착한 냥 연기를 해서 국왕이 뭐라고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아무튼 이주일 전부터 태풍의 영향으로 오전에는 멀쩡하다가도 오후에는 도시를 완전히 수장시켜버릴 기세로 비가 쏟아졌다. 오늘도 한차례 쏟아질 예정인지 날씨가 우중충해졌다.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비에 홀딱 젖을 것 같아 서둘러 아리란드 전하가 머물고 있는 브테프궁으로 갔다. 내가 스피린에서 돌아왔을 때 대전에 나오지 않은 이유는 병석에 누워있기 때문이었다. 어의들이나 대신관이 몇 차례 진찰을 해보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애를 먹고 있었다. 병명조차 모르니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을 리 만무했고, 병세가 갈수록 심각해져 브테프궁과 플로라 공주궁은 찬물을 끼얹은 듯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오펠리우스 왕비가 병석에 누워있다면 만세 삼창을 부르고 잔치를 벌였겠지만 안타깝게도 왕비는 아프기는커녕 정정하기만 했다. 원래 미운 인간일수록 오래 살고 건강하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아리란드 전하와는 개인적인 친분이 제법 깊었기 때문에 직접 병문안을 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단 말이야. 내가 스피린에 가기 전까지는 그렇게 건강했는데. 가끔 라디폰 공작과 연락할 때도 아리란드 전하가 아프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인간들이 약하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한순간에 병에 걸리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고 알고 있었다. 예전에 몇 번 브테프궁에 가서 놀았을 때도 아픈 기색은 없었는데 어떻게 된 일이지? 걱정을 하면서 걷던 나는 차가운 빗방울이 머리 위로 한 방울 떨어지자 발걸음을 재촉했다. 갈수록 떨어지는 빗방울의 숫자가 늘어났지만 브테프궁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많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예전에 멋모르고 비가 올 때까지 정원에 있다가 맞아본 기억으로 봐서 지금 쏟아지는 비들을 고스란히 맞았다면 머리가 상당히 아팠을 것이다. 빗방울이 다른 때 내리는 비와는 달리 굵직한데다 바람도 거세서 매섭게 떨어지고 있었다. 낭떠러지에서 곧장 떨어지면서 비명을 지르는 폭포수처럼 빗방울이 추락하면서 내는 비명 소리는 다른 소리들을 묻어버렸다. 덕분에 브테프궁의 입구에 서있는 내 귀에는 쏴아아, 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보통 비가 내리면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게 마련인데 요즘은 자연의 거대한 눈물로밖에 보이지 않아 우울했다. 마치 불가항력으로 느껴지는 재앙을 미리 깨닫고 몸을 떨며 울부짖는 것 같다고나 할까. 이렇게 느끼는 이유는 특별히 없었다. 그냥 왠지 지금 내리는 비들은 괜히 기분을 가라앉게 하는 것뿐이었다. "마리엔 공주님, 그대로 계시면 옷이 젖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내가 잠자코 서서 하늘에 구멍이라 뚫린 것처럼 퍼붓는 빗줄기를 보고 있자 브테프궁의 시녀장인 제데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확실히 입구에 서있으면 바람의 영향으로 조금씩이지만 비를 맞았다. "그러도록 하지. 아리란드 전하의 병문안을 왔으니 안내해줬으면 고맙겠군." "알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제데린은 말을 마치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넓은 복도에는 메아리처럼 우리들의 발걸음소리만 울렸다. 요즘 아리란드 전하가 아프기 때문에 그녀의 방 근처에서는 정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데린은 조용히 안내만 하고 있어서 우리들의 뒤를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형식상으로라도 말을 걸게 마련인데 이 여자는 정말 입이 무겁네. 전에도 이러더니만 또 이러는군. 잔소리가 많은 캐롤과 극과 극을 달리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신중하고 아리란드 전하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해 존경받는 시녀장이라고 한다. 내 입장에서는 재미없는 사람이지만.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아리란드 전하의 방 앞에 당도하자 제데린은 내게 양해를 구하고 안쪽에 내가 왔음을 알렸다. 플로라 공주가 와있었던지 허락의 말을 한 목소리는 소녀의 목소리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역시 플로라 공주가 와있었다. 그녀는 아리란드 전하가 누워있는 침대가에 앉아 있다가 내가 들어오자 의자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마리엔 언니, 어서 오세요.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별 말을 다 하는구나. 아리란드 전하는 어떠시니?" "그냥 그래요." 말은 그렇게 해도 어깨가 축 늘어진 것을 보니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위로는 거의 해본 적이 없어서 어색했지만 뭔가 말을 해야될 것 같은 상황이라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려 위로의 말을 찾기 시작했다. "네가 걱정을 많이 했겠구나. 나도 아리란드 전하가 편찮으시다고 해서 걱정을 많이 했어. 어서 쾌차하셨으면 좋겠는데...틀림없이 괜찮아지실 거야." 말이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아! 이런 쪽은 내 전공이 아니란 말이야! 말을 잘한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뭔가 따지거나 말싸움할 때였고 위로나 사과처럼 감정적인 말을 할 때는 그다지 잘하지 못했다. 이런 걸 해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나는 주로 사과를 받는 입장이었고(수단이야 어땠든) 위로라는 것을 해줄만한 대상도 없었다. 그리고 나 자신도 별 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혼자 절망에 빠져 음침해져 있거나 비탄에 젖어있는 것을 보면 위로보다는 비웃음이 먼저 나오는 타입이라 더욱 이런 쪽은 못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알려지기에 착한 언니로 알려졌기에 '인간은 언젠가 죽게 마련이다. 어차피 100년 사나 40년 사나 둘 다 짧은 기간이니까 지금 죽어도 상관없잖아' 라고 말하지 못했다. 대신 진땀을 흘리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에 빠져들었다. 위로를 해야할 것 같기는 한데 더 이상의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축 쳐져있는 플로라 공주에게 해 줄 말을 찾고 있을 때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엔이 왔나요?" "네, 아리란드 전하. 몸은 어떠세요?" 아리란드 전하의 말에 나는 냉큼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이 하도 난리를 치기에 엄청난 중병인 줄 알았지만 베개에 기대서 앉아있는 모습은 병이 있어 보이긴 해도 그 정도까지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다. 아리란드 전하는 안색이 창백했지만 살며시 웃고 있었다. 하지만 겉은 멀쩡해도 속은 심각한 병도 있었기 때문에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리엔이 스피린에서 돌아왔다는 말은 들었어요. 마중 나가지 못해서 미안해요." 아리란드 전하는 미안한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아리란드 전하가 병석에 누워 계신데 바로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어서 자리에서 일어나셔야지요." "고마워요. 그런데 마리엔이 스피린에서 대단한 활약을 했다면서요? 소문이 이 곳까지 퍼졌답니다." "저도 그 소문을 들었어요. 마리엔 언니가 스피린을 악당의 손에서 구했다면서요? 정말 굉장해요. 스피린의 레리이나 여왕까지 언니를 존경한다면서요." 플로라 공주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말했다. 그 선망의 시선을 받자니 멋쩍어졌다. 만약 이 곳에 르미엘 왕자가 있었다면 양쪽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시선들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덤으로 라이언 왕자까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내가 느끼는 시선의 강도는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라이언 왕자의 눈초리는 플로라 공주나 르미엘 왕자의 시선과는 달리 적의가 담겨 있겠지만 뜨거운 것은 뜨거운 거니까. 하도 과장된 소문을 많이 들어서 이제는 적응이 됐지만 역시 부담스럽긴 했다. 요이체로스도 간신히 이겼고, 정체불명의 후드인은 놓쳐버렸는데 말이다. "아니야. 소문이 잘못난 거야. 레리이나 여왕께서 나를 존경한다니 말이 되니? 그리고 나 혼자 싸운 것도 아니고 모두 힘을 합쳐 싸운 거야." "그런데 스피린은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강하다면서요? 정말이예요? 가문의 수장들이나 기사들은 모두 여자들이라던데. 정말 신기한 나라예요. 스피린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세요." 내 말을 전혀 안 듣고 있구만. 플로라 공주는 상기된 얼굴로 재촉했다. 하지만 그래도 병문안 온 건데 내 이야기만 해도 되는 거야?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아리란드 전하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플로라가 요즘 우울했었는데 마리엔의 여행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군요. 사실은 나도 듣고 싶답니다. 스피린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봤지만 직접 가본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르겠지요." 아리란드 전하까지 이렇게 나오자 나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2월에 출발해서 8월 중순정도에 돌아왔으니 거의 반년을 돌아다닌 것과 다름없었다. 처음에는 금방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야기를 하다보니 할 이야기가 생각보다 많았다. 여행 도중에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 스피린의 독특한 풍습,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아찔한 순간들, 긴박한 싸움들,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을 늘어놓다 보니 반나절을 브테프궁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야기가 거듭될 때마다 플로라 공주는 한숨을 쉬기도 하고 환호를 하기도 했다. 아리란드 전하도 플로라 공주보다는 못하지만 내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내내 궁궐에 갇혀있었기 때문에 내 이야기가 더욱 자극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특히 실수로 에릭의 활약을 말했을 때 플로라 공주의 반응은 정말 대단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은근히 에릭에 대한 이야기만 듣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해서 종래에는 에릭이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생각 같아서는 그 인간이 얼마나 싸가지 없는지 자세히 일러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상기된 얼굴의 플로라 공주를 봐도 그렇고 그런 공주를 보는 아리란드 전하의 재미있다는 얼굴을 봐도 그랬다. 모두 그 놈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에릭이 얼마나 시비를 거는지 아는가? 그 인간은 공주고 뭐고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놈이었다. 게다가 그런 재미없는 인간이 어디가 좋단 말이야? 감상용으로는 좋을지 몰라도 연인으로 삼기에는 정말 따분한 인간이지. 남의 취향을 가지고 뭐라고 할 것은 아니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세린이 더 낫지. 암, 그렇고 말고. 한참동안 떠들어대던 나는 드디어 아르테미스의 산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끝으로 마무리했다. 하지만 아르테미스의 산에서 만났던 괴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마물들이 많아서 그 것을 처리했다고만 했다. 괴한에 대해서는 섣불리 말하는 것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레리이나 여왕 역시 그렇게 당부했었고 말이다. 자신들의 성지에 누가 침입했다는 소문이 나는 걸 좋아하는 왕은 없을 테니까. 쉴 새없이 이야기해서 목이 탄 나는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찻잔에 입을 가져가 댄 채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살펴보다가 이 방이 예전과 달라진 점이 한가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저 거울은 뭐죠? 전에 왔었을 때는 없었는데. 거울이 두 개나 필요한가요?" "그건 오펠리우스 왕비전하께서 한달 전에 선물해주신 겁니다. 무척 아름답죠?" "그렇군요." 그 여자가 무슨 꿍꿍이로 거울을 선물한 거지? 표면적으로 오펠리우스 왕비와 아리란드 전하는 사이가 좋았다. 하지만 왕비의 이중적인 면을 봐서 정말로 사이가 좋은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했다. 하긴 아리란드 전하는 자신에게 그렇게 방해가 되지 않으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한번 좋지 않게 비친 오펠리우스 왕비이기에 행동 하나 하나가 의심스러웠다. 원래 그런 여자일수록 뒤에서 무슨 짓을 할 줄 모르니까. 하지만 거울은 아리란드 전하의 말대로 아름다웠다. 내 방에 있는 거울이 사치의 극을 달린다면 이 거울은 번쩍거리지는 않지만 품격이 있어 보였다. 투명한 유리를 백옥이 감싸고 있는 거울은 장미 넝쿨과 장미꽃이 아름답게 피어있는 조각이 새겨져있었다. 정밀한 조각으로 인해 마치 정원의 한 부분을 떼어놓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너무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은 격조있는 흰색 덕분에 하얀 백조가 날갯짓을 하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거울은 전신을 비출 정도로 크지는 않았지만 허리까지는 보일 것 같았다. 나는 비가 그칠 때까지 아리란드 전하와 플로라 공주와 함께 수다를 떨다가 저녁 무렵에서야 내 궁으로 돌아왔다. 캐스나는 크게 다친 곳이 없었기 때문인지 금방 건강해졌다. 그동안 잘 먹어서 그런지 처음 봤을 때보다 통통해진 것 같은 느낌도 들었지만 그 모습이 더 보기 좋았다. 원래는 건강해지면 바로 내보낼 생각이었지만 장마기간과 겹치는 바람에 조금 더 머물게 되었다. 비가 쏟아지는데 갈 곳도 없는 애를 밖으로 내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페드인 왕국의 장마는 기세가 대단한 것과는 달리 그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짧으면 1주일도 되지 않아 그치고 길면 2주일정도 지속되지만 그 이상 계속되는 경우는 없었다. 장마철 기간이 더 이상 길어진다면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겠지만 그렇게 기간이 길지 않아 보수하는데 드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 절감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캐스나는 내 궁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많이 가까워졌다. 캐스나가 워낙 싹싹해서 모두 그녀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시녀들의 일도 종종 도와줘서 캐스나를 딸이나 여동생처럼 여기는 시녀들도 많아졌다. 내가 이 곳에 손님으로 왔으니 편하게 놀고 시녀들의 일은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밥값은 해야된다면서 막무가내였다. 나는 여전히 어려워했지만 긴장해서 치맛자락에 넘어지던 예전에 비하면 많이 나아진 편이었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사람들과는 오랫동안 알았던 사람들처럼 웃고 떠들고 했다. 하지만 캐스나는 왕궁에서 일하는 사람도 아니기에 내보내야 했다. 지금은 장마 기간도 지나고 보수도 어느 정도 이루어진 시기라 내보내기에 딱 좋았다. 그렇다고 그냥 보내기에는 사정이 딱해서 보석 몇 개를 준비했다. 사실 나는 별로 딱하다고 느끼지 못했지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하도 불쌍하다고 해서 특별히 준비한 것이다. 솔직히 캐스나처럼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 한둘은 아닐 것이다. 그런 아이들에 비하면 캐스나는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밟혀죽을 뻔한 것을 지나가던 공주가 구해준 데다 그 덕에 왕궁에서 한달 동안 지내게 되었고, 보석까지 얻게 되었으니 말이다. 가죽 주머니에 몇 개의 보석을 넣은 나는 시녀에게 시켜 방에 있는 캐스나를 불러오게 했다. 그러나 잠시 후 시녀는 캐스나와 함께가 아니라 혼자 돌아왔다. "공주마마, 죄송합니다. 캐스나는 방에 없었습니다. 지나가는 시녀의 말로는 시녀장님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빨래터로 갔다고 합니다. 당장 가서 불러올까요?" "빨래터? 그 곳이 여기서 멀어?" "빨래터는 시녀들의 숙소 근처에 있는 우물가에 있기 때문에 10분은 걸어서 가야합니다. 바로 그 곳으로 갔다가는 시간이 많이 지체될 것 같아 우선 공주님께 말씀을 드리려고요." 시녀의 공손한 말에 나는 보석이 들어있는 가죽 주머니를 손에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가도록 하지. 캐스나가 이 곳까지 오려면 적어도 20분은 걸릴텐데 귀찮은 일은 얼른 해치워버리는 게 낫지." "네. 그럼 따라오십시오." 시녀의 안내를 받으며 빨래터로 가는 동안 따사로운 햇볕이 머리 위를 맴돌며 춤을 추고 있었다. 햇볕의 투명한 치맛자락은 폭넓은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이 춤을 출 때처럼 넓게 펼쳐져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붉은 귀부인의 춤에 매혹된 나무와 꽃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장마철과는 정반대로 고개를 한껏 쳐들며 그녀를 숭배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쓸어버릴 것처럼 퍼붓는 비 때문에 고생한 인간들도 수줍은 듯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오랜만에 그 모습을 드러낸 그녀의 등장에 찬양의 노래를 불렀다. 살아있는 생명체들의 감탄과 찬양을 들으며 따스한 손길을 사방으로 펼치는 태양은 자연계의 귀부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따사로운 햇빛을 받으며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얼마 후에 빨래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마철동안 습기가 찬 침대 시트와 커튼을 걷어 빨래하고 있었기 때문에 빨랫감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더군다나 시트나 커튼은 부피가 컸기 때문에 하나에 여러 명이 달려들어 빨고 있었다. 그리고 빤 빨랫감을 널 때도 여러 명이 잡고 물기를 털었다가 널고 있었기 때문에 빨래터 주변은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들의 뒤편으로 줄에 널려 펄럭이는 하얀 천들이 보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하늘거리는 천들의 모습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무희같기도 했고 꽃의 향기에 취해 날갯짓을 하는 나비같기도 했다. 캐스나는 빨랫감들을 널고 있었기 때문에 펄럭이는 천자락에 가렸다 보였다 하고 있었다. "마리엔 공주님, 오셨습니까?" 캐롤이 손을 멈추고 내게 인사하자 다른 사람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수고가 많군." "아닙니다. 저희들이 당연히 해야할 일입니다. 그런데 공주님께서 이 곳까지 어인 일로 행차하셨습니까?" 캐롤은 내 말에 고개를 내저으며 말하다 질문을 던졌다. 공주가 빨래터를 찾아오는 것을 흔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조심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캐스나가 이 곳에 있다고 해서 찾아왔어. 전해줄 물건이 있어서 말이지. 캐스나, 이 쪽으로 와봐." "네, 공주님!" 캐스나는 내 말이 떨어지자 쪼르르 달려왔다. 그리고 뻣뻣하게 굳어서 내 앞에 섰다. 아무리 예전보다는 나아졌다고 하지만 지금은 이 정도가 한계였다. 이건 내가 긴장을 풀라고 말해도 본인이 스스로 마음을 편하게 먹어야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차피 이제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굳이 긴장을 풀어줄 필요도 없었다. "자, 이 것 받아." 내가 가죽 주머니를 건네자 캐스나는 뻣뻣해져서 양손을 동시에 들면서 받았다. 그 모습이 상당히 우스웠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마 이 상태로 걸게 하면 손과 발이 동시에 나갈 것이다. 그러나 캐스나는 긴장을 해서 내가 웃어도 웃는 지도 모르는지 굳어있었다. 캐스나는 침을 한번 꼴깍 삼킨 후에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이건 뭐죠?" 물어볼까 말까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 예전에는 미나도 이랬는데 지금은 완전히 제 세상이란 말이야. 미나나 캐스나나 반응이 재미있긴 하지만 미나쪽이 약간 당황스러운 것이 사실이지. 내가 미나와 캐스나를 비교해보면서 씨익 있자 캐스나는 안절부절했다. 자신이 말을 잘못한 것이 아닐까 고민하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시간을 끌면 캐스나가 울어버릴 것 같아 재빨리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안에 보석이 몇 개 들었어. 밖에 나갈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제법 비싼 것들이니까 보석상에 가면 후하게 쳐줄 거야." "네..." 내 말에 캐스나의 얼굴은 울상이 돼서 대답했다. 내가 무슨 말을 잘못했나? 기뻐서 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보석을 받게 됐으면 좋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저래?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자 캐스나의 커다란 눈동자에 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러고 보니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뭔가 간절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건 설마. 그런 내 예상이 맞았는지 캐롤이 슬그머니 다가와 말했다. "마리엔 공주님, 캐스나는 일을 정말 잘하거든요. 성격도 좋아서 다들 좋아합니다. 캐스나는 부모님이 없으니 갈 곳도 없고...17살인데 이렇게 어려 보이는 것도 제대로 못 먹어서일 겁니다. 어린 것이 너무 가엾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공주님께서 조금만 더 보살펴주시면 어떨까하는데......"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자기도 이런 말하기 곤란한지 캐롤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오래 놔두면 나중에 내보내기가 힘들어 일부러 일찍 말한 건데 이 것도 늦어버렸다 보다. 이미 캐스나와 정이든 시녀들은 드러내놓지는 못하고 은근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괜히 주워온 것 아냐? 확실히 일은 잘하는 것 같긴 했지만... "흠." 내가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기자 캐스나가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세 번째 입을 오물거리다가 마침내 네 번째에 입을 연 것이다. "정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뭐든지 시켜주세요. 마리엔 공주님께서 거둬주시면 배심(背心)으로 모시겠습니다." 배심(背心)? 날 배반하겠다고? 아마 누군가 일러준 말을 따라하다가 헷갈린 모양이었다. 하긴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애가 그런 어려운 말을 어떻게 알겠어? 나는 이 황당한 말에 놀리는 어조로 말했다. "배심(背心)? 혹시 충심(忠心) 아냐? 배심을 가지고 있으면 거두기 힘든데." "앗! 추, 충심이었어요. 배심(背心) 아닙니다. 충심(忠心)이예요." 캐스나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배심(背心)이라. 무의식적으로 하는 말은 그 사람의 내면을 그대로 비추고 있다고 하던데. 이거 어떻게 할까나?" "배심(背心)이 아니고 충심인데..." 캐스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한마디한다고 금새 울먹거리면 놀리는 사람으로서는 멈추기가 힘든 법이었다. 재미있으니까. 더 놀려주고 싶었지만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을 펑펑 쏟을 것 같은 기세라 입맛을 다시며 그만 놀렸다. 지금 하는 모습을 보니 데리고 있으면 적어도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내가 반대한다고 해도 시녀들이 며칠을 두고 계속 나를 설득하려고 할 것이다. 만약 강경하게 나간다면 결국 캐스나를 내보내겠지만 섭섭해할 것은 분명했다. 시녀들이 워낙 많아서 이제 한 명 늘어난다고 크게 차이가 생길 것 같지도 않았다. "캐스나, 시녀라도 좋다면 남아도 좋아." 내 말에 캐스나가 눈을 크게 떴다. 그렇지 않아도 눈물이 가득 차있었는데 눈을 크게 뜨자 눈물이 뚝 떨어졌지만 지금은 누구도 그 것에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다. 캐스나는 처음에는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더니 나중에야 내가 한 말을 깨달았는지 펑펑 울면서 말했다. "가,감사합니다. 정말 열심히 할게요. 공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열심히 모실게요." "그래. 배심(背心)으로 열심히 보필해봐." "그건...실수였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캐스나는 내 말에 훌쩍이면서 말했다. 자신의 결정적인 말실수가 창피한지 울면서도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아까 억눌러놓았던 장난기가 발동해서 계속 놀려댔다. 결국 캐스나가 으앙, 하고 크게 울어버린 후에야 내 장난은 멈췄다.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왜 순진한 애를 울리냐는 주위의 매서운 시선 때문이었지만. -------------------------------------- 냐냥~ >_< 여러분 방가~방가~ 이야~정말 오랫만이지요? 시험때문에 그동안 잘 안왔어요. 결과는 묻지 마시구요.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지 않습니까...그래요! 다 망쳤어요. 이제 성적표가 왔을 때 뒤따를 부모님의 심판만 기다리는 처지랍니다 ㅠ_ㅠ 그래도 끝나니까 좋긴 좋네요. 게다가 우리가 4강 진출을 했잖아요! 놀라워라. 누가 우리 축구팀이 4강까지 갈 줄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역시 대단해~ 여기까지 온거 독일도 이기고 결승전에 갔으면 좋겠지만 져도 선수들이 최선을 다했다는 것만은 변함없어요. 우리 모두 선수 여러분들께 박수를 보내자구요. 짝짝~짝짝짝. 대~한민국~ #28- 음모 #28- 음모 시녀가 된 후 캐스나는 베테랑 시녀들 못지 않게 일을 잘했다. 어렸을 때부터 먹고 살기 위해서 안 해본 일이 없다던 본인의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빨래, 청소는 물론 자질구레한 심부름도 눈 깜짝할 새에 해치워서 미나와 함께 내 방을 전담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미나와 캐스나가 몇 년 동안 궁궐에서 일해온 베테랑 시녀들보다 일을 잘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 나이에 비하면 잘한다는 것이지 경력에서 하늘과 땅 차이가 나는 다른 시녀들과 비교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캐롤이 나이가 많은 시녀들보다는 또래의 두 사람이 나와 취향도 비슷하고 마음이 맞을 것 같아 배려해준 것이다. 그래봤자 겉보기만 그렇지 실제로는 전혀 아니올시다지만. 최연장자인 시녀조차 내 나이의 1/10도 되지 않는데 말이야. 인간 중에서 내 또래를 찾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르는 캐롤은 미나와 캐스나에게 내 시중을 맡겼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많이 시중을 들긴 하지만 완전히 시중을 드는 것도 아니고, 교대로 일을 하기 때문에 미숙한 두 사람에게 맡겨도 다른 시녀들이 충분히 커버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녀들 중에서 미나와 캐스나의 얼굴을 가장 많이 본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덕분에 지금도 캐스나가 쭈뼛거리면서 옆에 서있었다. 미나와 캐스나는 항상 같이 시중을 드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렇게 둘 중에 한 명이 시중을 드는 경우도 있었다. "마리엔 공주님, 막 구운 초콜릿 쿠키인데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다른 걸로 바꿔올까요?" "응? 상관없는데. 왜 그러지?" 나는 캐스나의 말에 반문했다. 쿠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 중에 하나였다. 특히 막 구운 쿠키는 너무 딱딱하지도 않고 바삭바삭해서 한 접시는 금방 다 해치워버리는데 마음에 들지 않냐고 물어본 것이다. 내 궁에서 일하는 시녀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아는 사실을 모를 리는 없을 텐데. 캐롤의 성격으로 봐서 캐스나가 시녀가 된 그 순간부터 교육에 들어갔을 텐데 이상하군. 저 것이 수업(?) 시간에 졸았나? 걸리면 적어도 한시간은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캐롤 앞에서 그런 대담한 짓을 하다니. 정말 놀랍군. 물론 나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캐스나는 그 정도로 간이 크지는 않았나 보다. "공주님께서 조금 전부터 쿠키에는 손도 대지 않으셔서요. 차라리 다과라도 들여올까요?" "아!" 캐롤의 말에 나는 양손바닥을 부딪치면서 탄성을 질렀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 때문에 본의 아니게 캐스나가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너라면 이런 상황에서 쿠키를 먹을 정신이 있겠어? 내 주위를 둘러보고 그런 말을 해. 책상 위에는 빽빽하게 필기된 종이들과 조금 끄적거리다 말고 버린 종이들이 널려있었다. 그리고 한가운데는 검정색 표지의 두꺼운 책과 막 마법 수식을 베끼기 시작한 종이가 놓여져 있었다. 간만에 불이 붙었는데 쿠키를 먹으면서 공부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쿠키를 먹으면서 했다가는 집중력이 떨어질 것은 뻔했다. 그리고 그동안의 경험상 처음에는 공부하다가 가끔씩 집어먹지만 나중에는 아예 쿠키만 집어먹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공부를 다 마치고 먹을 생각이었다. 다른 공주들처럼 드레스나 입고 히히덕거리는 것이 아니라 마법 공부에 전념하는 학구적인 공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내가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스피린에서 겪은 일 때문이었다. 흑마법을 제외하면 내 자신의 힘이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흑마법도 아무 때나 펑펑 써대기에는 아직은 주위의 시선이 따가웠다. 비상시라면 사용해도 상관없겠지만 평상시에 사용하기에는 확실히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흑마법이 아닌 다른 마법을 익혀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공격 마법이나 특수 마법은 흑마법으로 어찌 대치한다고 쳐도 회복마법만은 그럴 수 없었다. 물론 흑마법에도 회복 효과를 발휘하는 마법이 있었다. 효과도 상당해서 회복계열 마법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단지 문제라면 그 마법은 다른 생물의 생명력을 빨아들여 치료한다는 점이지만 말이다. 상당히 번거로운 방법이지만 마족의 몸은 회복이 빨라서 어지간한 상처는 그 자리에서 나아버리기 때문에 굳이 회복계열 마법을 만드는 마족은 없었다. 본성도 창조보다는 파괴, 치료보다는 공격에 가까웠기 때문에 새로운 공격 마법을 만드는 마족은 있어도 대부분이 회복 마법은 따분하다고 취급하지도 않았다. 그에 비해 나는 센 덕분에 다방면에 걸쳐서 마법을 익혀놓는 것이 전투시에 유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회복계 마법을 포함한 다른 마법도 익혔다. 마법은 크게 나누면 흑마법과 백마법으로 나뉘지만 그 것만으로 모든 마법을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백마법만 해도 화(火)계열, 수(水)계열, 뇌(雷)계열, 풍(風)계열, 토(土)계열, 회복계열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종류가 많았다. 그리고 각 계열의 마법은 거의 독자적인 마법과 같았다. 비록 서클별로 마법이 구분되어있는 것은 같지만 서클이 된다고 해서 해당 서클의 모든 계열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3서클 마법사라도 토(土)계열의 마법은 2서클 짜리도 간신히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고, 반대로 수(水)계열 마법은 4서클 짜리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경우도 있었다. 사람마다 잘하는 것이 있으면 못하는 것이 있는 것처럼 마법에도 잘하는 마법이 있으면 못하는 마법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차가 크지 않아 대부분 해당 서클에서 1서클 정도의 범위 안에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은 특정 계열만 잘 다루거나 정반대로 특정 계열만 완전히 꽝인 경우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특정 계열이 완전히 꽝인 경우였다. 그 것도 회복계 마법이. 덕분에 내가 아는 회복 마법은 몇 개 없었다. 마족이 다른 마법보다 회복계 마법이 유난히 약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나는 그 정도가 심해서 같은 마족들조차 혀를 찰 정도였다. 개중에는 그 성격에 회복계 마법을 잘 다루면 모순이라는 말까지 하는 놈들도 있었다. 아무튼 예전에는 얼마 안 되는 회복 마법으로도 생활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지만 지금은 문제가 심각했다. 왜냐면 내가 알고 있는 회복계 마법 중에서 가장 낮은 서클의 마법은 5서클이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서클이 아니었다. 4서클과 5서클의 차이는 엄청났다. 서클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피땀을 흘리는 노력이 필요했다. 아무리 마법의 천재라고 해도 한 서클이 올라가기 위해서 적어도 몇 년은 걸렸다. 그런 실정인데 마법에는 문외한이었던 마리엔의 경우를 들면 뭐하겠는가. 스피린에서도 틈나는 대로 수련을 했지만 획기적인 진척은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일단 4서클 내에 있는 유용한 마법은 모조리 익혀두자! 회복계 마법은 익히기 가장 어려운 마법이라 5서클 미만의 마법은 없었지만 많이 익혀둘수록 좋았다. 하지만 마법의 종류가 워낙 많다보니 그 것을 모두 다 익힐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마법서를 보고 쓸만하다 싶은 마법은 이렇게 종이에 필기를 했다가 나중에 정리를 해서 익히고 있었다. 그런데 마법서 한 권이 얼마나 두껍던가? 급할 때면 흉기로 사용해야 될 정도로 두껍지 않던가. 그 두꺼운 책으로 온 힘을 실어 머리를 때리면 어느 인간이라고 멀쩡할 수 있겠는가? 특히 모서리로 때리면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두꺼운 책이 왕궁 도서관에 깔렸으니 아무리 고르고 골라도 적어야 할 양이 장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 익히고 넘어가는 식으로 읽었다가는 마법서를 너무 오랫동안 가지고 있게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야말로 팔이 빠져라 책을 베끼고 있는데 당연히 쿠키를 먹을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중에 먹으려고 한 것인데 캐스나는 이 걸 보고 내가 쿠키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손을 대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지금은 조금 바빠서 말이야. 이 책에 있는 건 다 종이에 옮기고 먹으려고 했을 뿐이야. 그러니까 다른 걸 내올 필요는 없어." 나는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말했다. 계속 사용했더니 손이 뻣뻣해져서 풀어주기 위해서 움직였다. 캐스나는 그런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가 다시 펜을 잡고 마법 공식을 적기 시작한지 얼마 후에 캐스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리엔 공주님." "왜?" 나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그대로 대답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캐스나에게서 돌아오는 말이 없자 손을 멈추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바빠 죽겠는데 아까부터 자꾸 방해하고 있어. 그런 생각에 약간 인상을 찌푸리자 우물쭈물하던 캐스나가 입을 열었다. "도와드릴까요?" "뭘?" "그 책을 종이에 옮기는 거요. 글도 쓸 줄 알고 책 내용을 그대로 쓰기만 하면 되니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계속 그러고 계셔서 힘드실 텐데 도와드리겠습니다." 오호, 대필을 해주겠다고? 그거 괜찮은 방법인데.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소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쉬고 싶었던 나는 캐스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내 대신 고생하겠다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지. 본인이 좋다고 했으니 좋은 것 아니겠는가. 펜을 캐스나에게 건네준 나는 내가 적다만 곳을 손가락으로 짚어주면서 말했다. "여기까지 적었으니까 다음 장까지 종이에 적으면 돼."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캐스나는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하고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캐스나의 옆에 앉아서 그녀가 쓰는 것을 보던 나는 탄성을 질렀다. "와! 캐스나, 글씨 잘 쓰는구나." "감사합니다. 가게에서 장부를 정리하는 일을 한 적이 있었거든요. 다른 것 못해도 글씨는 잘 쓸 자신이 있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의 글씨도 흉내낼 수 있어요." 내 칭찬에 캐스나는 쑥스러운지 콧잔등을 긁적이면서 말했다. 글씨를 흉내낼 수 있다고? 흥미가 동한 나는 전에 적어놨던 종이를 캐스나에게 내밀었다. "그럼 한번 내 글씨를 흉내내봐." 종이 위에 적힌 내 글씨를 한참동안 뜯어보던 캐스나는 새 종이에 끄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전혀 다른 글씨체였는데 캐스나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점점 비슷해졌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신기하게 느껴져 나는 캐스나의 옆에 바짝 붙어 지켜보았다. "굉장해. 진짜 내 글씨랑 똑같네. 전혀 구별이 안가잖아." 잠시 후 나는 내 글씨체와 캐스나의 글씨체를 번갈아 보면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내 글씨체만 아니었어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거의 흡사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항상 사용하는 글씨체다 보니 두 개의 글씨체에서 전해지는 느낌은 달랐다. 캐스나도 그걸 아는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비슷하게 쓴다고 했는데 잘 안되네요. 마리엔 공주님의 글씨체는 변화가 심해서요. 보통 다른 사람들은 글을 쓸 때면 획일적인 체를 사용하는데 공주님은 자꾸 변하네요. 그리고 둥근 글씨체가 아니라 딱딱 끊어지는 글씨체라 따라하기가 힘들어요. 특히 '를' 자를 이렇게 쓰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그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는 글씨를 못쓴다는 소리냐? 미나랑 지내더니 간이 많이 커졌군.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캐스나를 지긋이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책을 옮겨 적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런 내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한번 혼 좀 나봐라. 원래 계획은 오늘은 지금 보고 있는 책만 정리할 계획이었지만 괘씸한 생각에 계획을 변경했다. 책상 위에 있던 다른 마법서를 집어든 나는 빠른 속도로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마법을 고르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많은 마법들을 고른 나는 그 부분은 일일이 체크를 해두었다. 이걸 오늘 중으로 다 끝낼 수 있는지 보자. 다그닥 다그닥. 때아닌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몇 십 마리의 말이 한자리에 모여있었지만 사냥터가 워낙 넓어서 많이 모여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10월은 지척에 먹을 것이 널려 있고 그동안 가꿔왔던 농작물의 결실을 추수하는 달이라 은혜의 계절이나 추수의 계절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유난히 10월에 행사가 많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마을이나 도시에서는 추수를 마칠 시기 즈음에 축제를 여는데 이 것은 추수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항구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왕실에서도 매년 10월이 되면 사냥 대회를 열어 서로간의 친목을 도모해왔다. 흉년이나 재앙이 닥쳤을 때는 생략하기도 했지만 올해는 풍년이라 이렇게 사냥 대회가 열린 것이다. 사냥. 어떻게 보면 경험이 있을 수도 있었고 없을 수도 있었다. 마물들을 마법으로 잡은 것도 때에 따라서는 사냥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여행할 때도 동물들을 마법으로 때려잡긴 했지만 활이나 창을 사용하는 사냥은 처음이었다.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내게 기회는 없었다. 사냥을 하는 것은 남자들이고 여자들은 그런 남자들을 응원하거나 한 곳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다였기 때문이다. 여자들의 입장에서는 소풍을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덕분에 드레스를 입고 나온 귀족 영애들도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파티에서 입는 드레스에 비하면 심플한 편이었지만 말을 타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젊은 귀족들과 기사들이 많이 있어서 그런지 힘든 기색 하나 내지 않고 여유로운 얼굴인 것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나머지 여자들은 대부분 나비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나 역시 나비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나풀거리긴 했지만 치마보다 움직이기 훨씬 편했던 것이다. 그리고 스피린에 있을 때 말을 타본 적이 있어 제법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다. 타고 있는 말도 온순해서 사람 말을 잘 따르기 때문에 애를 먹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런 대대적인 사냥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자꾸 주변을 살펴보게 되었다. "마리엔 공주님, 왜 그러십니까?" 호위 기사로 붙은 보나인이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사냥 대회가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이런 건 처음이라 신기해서 말이야." "네? 하지만 재작년에도 나오지 않으셨습니까? 그 때 뵌 것 같은데요." 이런, 실수했다. 나도 모르게 내 경우를 그대로 말해버린 것이다. 보나인과 가스톤, 죠안, 미첼로는 그런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변명했다. "내 말은 경들과 같이 온 것이 처음이라고." "그런 말씀이셨군요. 저는 또 무슨 말씀이신가 했습니다."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저희들도 누군가를 모시고 나온 적은 없군요. 예전에는 주변 경비를 서는 것이 다였는데 말입니다." 과거의 댁들을 봐서 주변 경비를 세우는 건 당연해. 농땡이나 치는 기사에게 중요한 인물의 호위를 맡길 수는 없잖아. 분명히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과거와 비교해보면 지금은 정말 출세한 것이었다. 찬밥신세에서 이 몸을 호위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 거셨습니까? 저는 또 공주님께서 손수건을 줄 사람을 찾느라 그러신 줄 알았습니다." 제 4기사간의 과거와 오늘을 떠올리며 '이제 인간 됐지'라고 중얼거리던 나는 미첼로의 말에 그를 쳐다보았다. 손수건을 주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게 무슨 소리지? 손수건을 주다니?"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애틋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남녀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멋있는 프로로즈를 어떻게 모르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렇게 연애쪽으로 관심이 없으셔서 나중에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네?" 미첼로는 내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자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 놈은 연애 이야기만 나오면 이렇게 사람이 돌변한다. 미첼로는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으며 손수건 주기가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 행동인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이 것을 어떻게 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지금 이 인간이 누구한테 대드는 거야? 내가 요즘 너무 착하게 군 걸까? 그렇다고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는 이 곳에서 내가 손을 쓸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보나인경." "알겠습니다." ------------------------------ 여기까지... (읽었음.<열심히)---------- 보나인은 입을 다문 것과 동시에 주먹을 휘둘렀다. 그리고 보나인의 주먹은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던 미첼로의 정수리에 정확히 내리꽂혔다. 이제 눈빛만 봐도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경지에까지 이른 것이다. 보나인도 침까지 튀겨가며 말하는 미첼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인지 주먹에는 조금의 인정도 들어있지 않았다. "크윽." 미첼로는 머리를 감싸쥐고 신음성을 흘렸다. 그러나 누구 하나 동정의 눈길을 보내지 않는 것으로 봐서 미첼로의 '사랑 예찬론'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자를 꼬시든 양다리를 걸치든 내 알 바 아니지만 그것도 정도껏 할 수 없어? 아니, 내 앞에서만큼은 티 좀 안낼 수 없는 거냐? 자기 말로는 풍류를 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미첼로는 단순한 바람둥이에 지나지 않았다. "보나인 경, 그런데 손수건 주기가 뭐죠?" 나는 미첼로를 외면한 채 보나인에게 질문했다. 보나인은 왜 이런 걸 모를까, 하는 얼굴이었지만 미첼로처럼 땍땍거리지 않고 차분히 설명해주었다. "우선 남자는 자신이 사냥한 동물 중에서 가장 좋은 동물을 고릅니다. 물론 상처도 거의 없고 상태도 아주 양호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것을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주는 겁니다. 주로 털이 부드럽고 아름답게 생긴 여우나 담비를 주는데 멧돼지 같은 것을 주면 바로 따귀 맞습니다. 그래서 여우나 담비를 사냥하지 못하거나 상태가 좋지 않으면 아예 이 자체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선물을 받은 여자는 만약 남자가 마음에 들면 자신의 손수건을 건네주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선물만 받고 맙니다. 원래 손수건을 주는 것은 땀을 닦으라는 의미였는데 그게 변질돼서 요즘에는 프로포즈를 받아들이겠다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어라? 그거 싸우게 된 기사에게 손수건을 건네주는 거랑 비슷하네. 순서는 다르지만 손수건을 받은 기사가 이기고 여자가 마음에 들면 레이디로 모신다는 것도 프로포즈를 받아들인다는 소리잖아." "아닙니다! 다릅니다!" 미첼로가 다시 한번 나섰다. 그는 그런 심각한 오해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정말이지 이런 걸로 정색을 하는 인간은 미첼로뿐일 거다. 만약 이 세상에 여자가 사라진다면 가장 먼저 죽을 인간은 바로 미첼로일 것이다. 미첼로는 진지한 얼굴로 차이점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레이디로 모신다고 해서 반드시 결혼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많은 기사와 레이디가 결혼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레이디는 사랑뿐만 아니라 존경심이나 지위 때문에 모시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연인으로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하지만 사냥 대회에서 손수건을 준다는 것은 완전한 연인으로 삼는다는 소리입니다. 나중에 헤어질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레이디와는 질적 으로 다릅니다." "그,그래."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엄숙한 목소리로 말하는데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맥빠진 목소리로 맞장구쳤다. 차라리 사랑 노래를 하는 음유시인이 되지 왜 기사가 됐을꼬.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물론 보나인, 가스톤, 죠안, 그리고 내 시중을 들 세 명의 시녀들도 같은 생각인지 너나할 것 없이 황당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나는 특별히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는데?" "안됩니다. 손수건을 준비하는 여자로서 당연히 해야할 준비입니다. 반드시 지참하셔야 나중에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건 한순간에 올 수도 있습니다. 첫눈에 보고 반할지 누가 압니까?" "하지만 안 가져왔는데." 내 말에 미첼로는 눈을 크게 떴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심정이 눈을 통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미첼로는 마치 내가 무지 중요한 것을 빠뜨리고 온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되니 약간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손수건이 필요한가? 그러고 보니 다른 여자들은 손수건을 가지고 있던 것 같은데. 남에게 줄 것이 아니어도 땀 닦을 때 필요할 지도 모르고. 그런데 캐스나가 그런 내 심정을 알아차렸는지 조심스럽게 운을 띄었다. "마리엔 공주님, 제가 가서 가져올까요? 궁궐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으니까 대회 중간 정도에는 올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럼 네가 힘들지 않겠어? 그리고 엄청 중요한 것도 아닌데 뭐." 흔들리긴 했지만 아직 손수건의 필요성을 실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캐스나를 고생시킬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캐스나는 고새를 살레살레 저으면서 말했다. "아닙니다. 별로 힘들지 않아요. 이래봬도 달리기도 잘하고 금방 지치지도 않거든요. 제가 가서 가져오겠습니다. 손수건을 주지 않더라도 혹시 필요할 상황이 생길 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가?" "네. 그러니까 저한테 맡겨주세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내가 됐다고 했지만 캐스나는 이상할 정도로 손수건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다. 미첼로에게 바보 세균이 옮은 것일까? 역시 가까이 놔두면 안 되는 거였는데 실수했군. 캐스나를 말릴 수 없었던 나는 결국 손수건을 가져오게 했다. #28- 음모 #28- 음모 깊숙한 숲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곁을 스쳐지나가면서 뺨을 간질였다. 풋풋한 숲의 향기를 담고 있는 바람은 후끈한 열기를 식혀주고 있었다. 이 열기는 단순히 하늘 위에 떠있는 태양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열기가 주변의 공기를 후끈 달구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왕실 소유의 숲에서 사냥할 수 있는 기회가 흔한 것이 아니니 흥분하는 것은 당연했다. 왕실 소유의 숲은 왕족이 아니면 사냥이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어서 이런 기회가 아니면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산림관이 항상 정성을 다해 가꾸는 왕실 소유의 숲은 굉장히 아름답고 많은 동식물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사냥이 없을 때는 숲에 있는 생물들을 보살피고 때에 따라서는 진귀한 동물을 풀어놓기 때문에 사냥감도 풍부했다. 사냥감도 하나같이 진귀한 것들 뿐이라 사냥을 하면 할수록 신이 나는 곳이 왕실 소유의 숲들이었다. 아렌테에서 동쪽으로 1km정도 떨어져 있는 이 봄베르숲도 그런 곳 중 하나였다. 그리고 레프스터 국왕은 물론 왕국의 최고 실권자들이 모인 자리이다 보니 아부하기에도 딱 좋은 장소였다. 높은 사람들과 같이 사냥하면서 이야기하다보면 친해질 수도 있고 아주 귀한 짐승을 발견하고 양보하면 바로 점수 따는 거였다. 무도회와 마찬가지로 윗사람들에게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기회라고나 할까. 오옷, 전의에 불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데. 하긴 튈 때는 팍 튀어야 출세하지. 내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인사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남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거 마리엔 공주님 아니십니까?" 싱긋 웃으면서 내게 걸어오는 사람은 금발의 호남이었다. 네모난 얼굴이고 어깨가 떡 벌어졌지만 이 점만 제외하면 내가 아는 누군가와 아주 닮은 인물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옅은 금발에 부드러운 듯 하면서도 날카로운 갈색 눈, 산맥처럼 얼굴의 중앙에 자리잡은 코,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비트는 것 같지도 한 입술. 달갑지 않은 사람과 쏙 빼닮은 인물이었다. "그라냔 백작님이시군요." 비록 티는 내지 않았지만 떨떠름했다. 저 인간이 무슨 일로 말을 건 거지? 얼굴은 몇 번 본적이 있지만 실제로 이야기해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상하게 오늘은 오펠리우스 왕비가 살며시 웃기만 하고 시비를 걸지 않는다 했더니 오누이간에 바톤 터치한 것인가? 나는 웃으면서 재빨리 눈동자를 굴려 그라냔 백작의 얼굴을 살폈다. 웃으면 자연적으로 눈이 좁혀지다 보니 눈동자의 움직임을 감추기에 딱 좋았다. 그라냔 백작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두 눈동자만은 강렬한 눈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마리엔 공주님께서 저를 기억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별 말씀을 다하시는군요. 명망 높으신 그라냔 백작님을 기억하지 못하면 누구를 기억하겠습니까?" "공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무리 명망이 높다고 해봐야 공주님만 하겠습니까. 요즘은 가는 곳마다 들리는 소리를 공주님에 대한 소문뿐이랍니다. 하도 많이 들었더니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외울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잠꼬대도 공주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지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하하하." "어머,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호호호." 나와 그라냔 백작은 웃으면서도 서로를 관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자기 여동생을 닮아서 표정 관리 끝내주는데. 오펠리우스 왕비보다는 못하지만 수준급이야. 적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상당히 괜찮은 인물인 것만은 분명했다. 우직해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건 끝까지 밀고 나가는 외골수이며 평민이라고 차별하지도 않고, 강한 리더쉽을 가지고 있었다. 오펠리우스 왕비와 더불어 좋은 소문 듣는 것으로는 두 번째라면 서러워할 정도였다. 특히 기사들의 신망을 받고 있어 무력으로 싸우게 된다면 가장 큰 장애물이 될 인물이었다. 내 편이었다면 좋았을 걸 하필이면 오펠리우스 왕비편이란 말이야. 그렇게 보면 오펠리우스 왕비 그 여자가 인복은 있다니까. 오빠는 인망이 두터운 사람이지, 아들들은 뛰어난 인재들이지, 딸은 보기 드문 미녀지. 하지만 아무리 인복이 있어도 상대를 잘못 만나면 완전히 박살나는 경우가 있지 않겠어?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나와 그라냔 공작은 담소를 주고 받고 있었지만 찌를 듯한 시선들을 보면 속마음까지도 결코 화기애애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 이런 소문이 나돌더군요. 마리엔 공주님께서 금빛의 성배를 받게 될 거라고 말입니다. 공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으로 재미있는 소문이지 않습니까?" 금빛의 성배란 진리의 관, 지배의 검과 함께 왕을 나타내는 세 가지 상징 중 하나였다. 대체로 진리의 관은 현명한 왕을, 지배의 검은 강한 무력을 소유한 왕을, 금빛의 성배는 나라의 빛이 되는 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정말 금빛의 성배나 진리의 관, 지배의 검을 받는 것은 아니었지만 항상 이런 말을 앞에 붙임으로서 국왕이나 차기 국왕 후보들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다. 참고로 레프스터 국왕과 라이언 왕자는 지배의 검, 르미엘 왕자는 진리의 관이라는 말이 항상 따라다녔다. 금빛의 성배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최고의 왕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다르게 보면 내세울 것이 없는 왕을 가리킬 수도 있었다. 나라의 빛이 된다. 어떤 행동이 빛이 되는지 일정한 기준도 없고 당시에는 비난받던 행동이 후대에는 칭송받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더더욱이나 애매모호한 말이었다. 이왕이면 지배의 검이 마음에 드는데 금빛의 성배라니. 그럴 생각은 없지만 만약 내가 여왕이 된다면 강한 군대를 손에 넣고 강압적으로 밀고 나가는 폭군이 될 것 같은데 말이야. 물론 그럴 생각이 있다면 말이다. 아무튼 그 말은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차기 국왕 후보로 인정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라냔 백작은 장난하는 것처럼 물어보면서 슬며시 내 의중을 떠본 것이다. 아마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접근한 것이겠지. "그렇군요. 정말 재미있는 소문이군요. 누가 그런 말을 한 걸까요?" "그건 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유도 없이 그런 소문이 떠돌겠습니까? 뭔가 그럴 만한 행동을 하셨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과연 소문이 난 이유가 뭘까요? 정말 궁금하네요." 내가 빙긋 웃으며 말하자 그라냔 백작도 웃으면서 맞장구쳤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소문이 나돌고 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아무렴 나만큼 궁금하겠냐? 영웅이라는 소문은 낯간지럽긴 해도 나돌아도 크게 상관이 없지만 차기 국왕 후보 어쩌고 하는 소문은 상관이 있었다. 내가 그럴 마음도 없는데 어째서 그런 소문이 나는 거냐고? 지금이야 그라냔 백작 앞이라 웃으면서 대응하고 있지만 의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소문이 너무 과장된 것도 그렇고 어떤 놈이 고의로 퍼뜨린 것 같단 말이야.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어떤 놈'일 것 같은 가장 유력한 후보가 나와 그라냔 백작 쪽으로 다가왔다. "두 분께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시는 겁니까? 실례가 아니라면 저도 끼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라디폰 공작." "그냥 요즘 나돌고 있는 재미있는 소문에 대해서 공주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요. 원래 그런 가십거리가 재미있지 않소? 참, 라디폰 공작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소문을 들었소이다. 낯선 사람들이 공작가를 자주 드나든다고 하던데?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그렇게 정체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을 자주 들이면 억울한 의심을 받을 수도 있소." 그라냔 백작이 날카로운 어조로 일침을 가했지만 라디폰 공작은 여유롭게 받아쳤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저도 재미있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라냔 백작께서 자주 해결사들을 찾아간다고 말입니다. 그런 행동은 왕비전하께도 누가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군요.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소. 두 분이서 즐거운 시간을 가지셨으면 좋겠소이다." 라디폰 공작의 말에 그라냔 백작은 잘못을 들킨 어린아이처럼 움찔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으며 뒤로 돌아섰다. 그러나 그 미소 뒤에 감춰진 차가운 기운은 나한테까지 전해져왔다. 비장의 수를 상대에게 미리 들킨 사람 같았다. 역시 그라냔 백작도 라디폰 공작의 상대가 아니었다. 저 능구렁이를 상대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나 정도는 되어야겠지. 그라냔 백작의 넓은 등을 보며 사람은 등빨이 아무리 좋아도 무력을 사용할 상황이 아닌 다음에는 말빨이 따라주지 않으면 단순히 덩치 큰 곰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그라냔 백작이 돌아서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불순한 무리들이 많으니 마리엔 공주님께 신경을 쓰시는 것이 좋을 거요. 소중한 공주님이지 않소?"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라냔 백작은 마지막으로 내게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하고는 사람들 틈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의미심장한 말에 긴장을 해도 되련만 라디폰 공작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 같은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마리엔 공주님, 오랜만입니다. 스피린에서 돌아오셨을 때 뵙고 처음 뵙는 거지요? 건강하신 것을 보니 정말 기쁩니다." "그래요? 그렇게 기쁘면 진작에 찾아와도 됐을 텐데요?" 나는 라디폰 공작의 입에 발린 소리에 한 소리했다. 라디폰 공작이 찾아오길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코빼기도 안 비추고 그런 소리를 하니 한 마디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라디폰 공작은 그답게 전혀 동요하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 "너무 자주 찾아뵈면 다른 사람들이 의심을 할 것 같아서 자제를 한 겁니다." "그래요? 난 또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느라 바빠서 그런 줄 알았지요?" "하하하. 그 이유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역시 이 인간이었군. 어쩐지 소문이 너무 빠르게 너무 널리 퍼진다 했다. "역시 공작이 그랬군요. 소문을 퍼뜨려도 정도껏 해야될 것 아니예요. 그리고 낯선 사람들이 공작가를 드나든다는 것 또 무슨 소리죠?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면 관여하지 않겠지만 왠지 나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마리엔 공주님의 놀라우신 혜안에 감탄을 금할 수 없군요. 하지만 지금 알려드리는 건 시기상조입니다. 머지않아 그들을 만나게 해드릴 테니 지금은 기다려주십시오. 모두 공주님을 어서 만나 뵙고 싶어한답니다. 이거, 이제 사냥 대회가 시작하려고 하는군요." 그게 무슨 말이야? 나를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니. 그리고 나도 관련된 일인데 왜 지금은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 거야? 당장 불만을 터뜨리려던 나는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가 다가와 레프스터 국왕이 부른다는 말을 하자 도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오펠리우스 왕비와 함께 레프스터 국왕을 따라다니며 사냥 구경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쳇, 할 수 없지. 다음에는 꼭 알아내겠어. 사방에서 사냥개가 컹컹대는 소리와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놀라서 키가 큰 관목들 사이로 아름다운 빛깔의 새들이 후드득거리며 날아다녔지만 그 곳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큰 짐승들을 사냥하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 작은 새들의 몸짓이 들어올 리 없었다. 레프스터 국왕과 라디폰 공작, 나인 공작, 그리폰 백작은 대화를 나누면서 가고 있었지만 새에게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우리 일행을 호위하고 있는 로얄 기사들도 주위를 경계하느라 새들을 살펴볼 여력은 없어 보였다. 왕족과 페드인 왕국의 최고 권력자들이 있다 보니 호위는 철통같다 못해 살벌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로얄 기사들의 틈에는 에릭과 세린도 보였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임무에 집중하고 있을 뿐 아는 척 하지 않고 있었다. 나와 오펠리우스 왕비만이 간간이 푸드득거리며 날아오르는 새들을 쳐다볼 뿐이었다. 자세히 들으면 뿔피리 소리도 조금씩 달랐다. 국왕의 사냥에 이용하는 뿔피리는 다른 뿔피리와 확연한 차이가 있었지만 다른 뿔피리들도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조금은 다른 뿔피리 소리가 여러 곳에서 동시에 들리니 하나의 협주곡을 듣는 것 같기도 하고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소리들이 제멋대로 날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소리야 어떻든 사냥 대회가 열린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제법 많은 뿔피리 소리가 들린 것을 보니 전체적으로 사냥이 잘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 쪽도 가장 능숙한 몰이꾼과 사냥개들이 짐승을 몰아주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짐승을 잡았다. 그리고 가장 많은 짐승을 잡는 사람은 레프스터 국왕이었다. 다른 팀과 비교하면 모르겠지만 결국에는 국왕이 가장 많은 짐승을 잡게 되어있었다. 국왕보다 더 많이 잡지 말라는 법은 없었지만 은연중에 사람들이 국왕의 사냥 정도에 맞춰 자신의 사냥감 숫자를 조절하는 경향이 있었다. 국왕의 성격이 좋으면 상관없지만 포악하거나 속이 좁으면 자기보다 더 많은 짐승을 잡았다는 이유만으로도 목이 날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하가 국왕보다 적게 잡는 것이 충성심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항상 국왕이 사냥 대회에서 일등을 하는 이유 중에 하나였다. 국왕이 잡은 사냥감의 숫자는 뿔피리 소리를 통해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실수로라도 더 많이 잡는 사람은 없었다. 뿔피리는 사냥감을 발견했을 때, 사냥에 성공했을 때 두 번 부는데 각자 소리가 달랐다. 사냥감을 발견했을 때는 한번 길게 부르고, 사냥에 성공했을 때는 처음 박자는 길고 다음 두 박자는 첫 박자의 반, 그리고 네 번째 박자는 첫 박자와 같은 길이로 불었다. 때문에 짐승을 발견했는지 짐승을 잡았는지 소리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국왕이 사냥할 때 사용하는 뿔피리는 다른 뿔피리보다 훨씬 소리가 크고 웅장하게 퍼지기 때문에 누구나 식별이 가능했다. 그 소리를 듣고 귀족들은 국왕의 사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만약 국왕의 성과가 저조하면 귀족들은 진귀한 짐승을 발견해도 피눈물을 흘리면서 지나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사냥을 잘하는 사람일 경우에는 이 것만큼 고역인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눈치보지 않고 마음껏 사냥해도 될 것 같았다. "폐하, 굉장하십니다. 아직 대회가 시작된 지 2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여섯 마리 째입니다. 좀 살살해주십시오. 저는 문관이라 사냥은 약합니다." 말머리를 같이 하고 걷는 라디폰 공작이 엄살을 부리자 레프스터 국왕은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누구나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기 마련이었다. 그 것도 뭐든지 잘할 것 같은 라디폰 공작이 봐달라는 식으로 말하면 하늘에 붕 뜬 기분일 것이다. 그 것이 과장되게 표현된 말이라고 해도 말이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사냥운이 따르는군. 행운의 여신이 함께 와서 그런가?" 레프스터 국왕은 양어깨를 으쓱하면서 내 쪽을 쳐다보았다. 국왕이 말한 행운의 여신이란 것을 나를 두고 하는 소리였다. 지금 이 행동만 봐도 국왕이 나를 예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펠리우스 왕비도 있는데 굳이 나를 행운의 여신이라고 지칭한 것을 보면 말이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내가 스피린에서 활약한 이후 더욱 심해졌지, 아마. 전에도 약간의 차별이 있던 애정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한 편애가 되었다. 그렇다고 레프스터 국왕이 다른 자식들에게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왕치고 보기 드물게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잘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칭찬해주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지적해주었다. 그리고 한 달에 한번은 반드시 가족들이 모여서 식사를 했는데 이 것은 왕족 사이에서는 드문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국왕과 왕비, 또는 국왕과 후궁이 함께 식사를 하는 경우는 많지만 왕자와 공주까지 한꺼번에 모여 하는 식사는 몇 달에 한번 있을까 말까했던 것이다. 하지만 레프스터 국왕은 아무리 바빠도 한 달에 한번은 꼭 모여서 식사를 할 정도로 가족에게 시간을 투자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인간인지라 많이 예뻐하는 사람도 있고 상대적으로 소홀한 사람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상대가 가장 사랑했던 이리아 왕비의 딸이라면 자연히 마음이 가기 마련이었다. 플로라 공주는 나와 친하고 성격이 워낙 쾌활하다 보니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데미나 공주는 달랐다. 나와 나이가 같다보니 더욱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예전이라면 국왕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데미나 공주의 편이라 보상이 됐겠지만 지금은 그 것도 아니었다.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내 인기도 상당히 높단 말이야. 데미나 공주가 젊은 귀족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면 나는 폭넓은 연령층을 섭렵하고 있다고나 할까. 얼굴만 예쁘다고 다가 아니란 말씀이야. 얼굴이 못생겨도 마음이 맞는다는 느낌을 상대에게 주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유난히 수줍음이 많이 데미나 공주로서 그건 무리였다. 그런 성격인데 내 앞에서 고개 빳빳이 들고 시비 거는 대담한 일은 절대 못하지. 그러나 본인은 못해도 그녀의 어머니인 오펠리우스 왕비는 할 수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오펠리우스 왕비는 무슨 생각인지 나를 보고도 인상 한번 쓰지 않았다. 내가 보지 않고 있을 때 째려보면서 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앞에서는 그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라냔 백작이 대신 약간의 시비조의 말을 건넸다 하더라도 저 오펠리우스 왕비가 가만히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혹시 사람이 바뀐 것 아냐,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생각은 잘못된 것임을 방금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종종 대화에 끼어 들던 오펠리우스 왕비의 눈썹이 국왕의 말에 꿈틀거린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음침한 기운이 도는 두 눈이 잠깐동안 내게 향했다. 나는 왕비의 바로 옆에서 말을 타면서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잠깐을 포착할 수 있었다. 노려보면 어쩔 거야? 지금 해보자는 거냐? 나는 왕비를 향해 한번 웃어주고 입을 열었다. "어머, 아바마마도 참. 제가 무슨 행운의 여신이라고 그러세요. 그런 말은 여기 계신 어마마마께 해드리셔야죠. 어마마마의 아름다움에 반해 동물들이 몰려드는 거잖아요." 그냥 들으면 오펠리우스 왕비에 대한 명백한 칭찬이었다. 그러나 왕비에게 향하고 있는 두 눈 속에 은근히 감춰져있는 기운까지 보면 명백한 약올리기였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놓칠 수 있는 사소한 것이었지만 가까운 곳에 있는 왕비는 놓치지 않았다. 물론 일부러 놓치지 않도록 한 거지만 말이다. 내 말에 국왕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하하. 마리엔의 말이 맞군. 왕비, 미안하오." "아닙니다. 제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모두 폐하의 뛰어나신 사냥 실력 덕분이지요." 오펠리우스 왕비는 나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지만 그 것도 잠시. 금새 레프스터 국왕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화답한 것이다. 그리고 그 후로도 오펠리우스 왕비는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국왕과 대귀족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그런 와중에도 한 나라의 왕비로서 위엄과 자상함, 기품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을 보면 확실히 여걸이긴 했다. 그나저나 의외로 쉽게 물러나네. 한참 물고늘어질 줄 알았는데. 아까 노려보는 것을 보면 개과천선한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조금 전에 그라냔 백작이 한 말도 그렇고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이 틀림없어. #28- 음모 #28- 음모 몇 시간 동안 레프스터 국왕을 따라다니던 나는 보나인들과 함께 일행에서 빠져나왔다. 처음에는 사냥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그 것도 계속 보다보니 시시해지기 시작했다. 역시 그런 건 직접 해야 재미있는 법이다. 오펠리우스 왕비마저 아리란드가 아픈데 자기만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이유로 돌아가자 사냥하지 않고 노는 사람은 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레프스터 국왕이나 다른 사람들도 모두 사냥하느라 나에게 신경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그냥 나 혼자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국왕은 내가 따로 간다고 하자 로얄 기사들 다섯 명을 떼어주었다. 어차피 로얄 기사단 전원이 동원됐다고 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로 많은 호위 인원이었으니 몇 명 사라진다고 해서 티도 나지 않았다. 이왕이면 안면이 있는 에릭과 세린을 딸려줬으면 했지만 보기에는 그래도 로얄 기사단에서 내노라 하는 실력자들인지라 그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따라왔다. 보나인들도 상당한 실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굳이 딸려줄 필요는 없었지만 말이다. 이왕이면 조용한 곳에 있고 싶었던 나는 뿔피리 소리가 들려오는 곳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냥을 하는 곳에 가까이 가면 위험하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상대방이 이쪽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경우 사냥감인 줄 알고 활이나 창을 날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근처에 쉴 만한 곳이 없을까?" "제가 한군데 알고 있습니다. 작은 호숫가인데 사냥하시는 분들은 그 쪽은 자주 오지 않으시기 때문에 쉬기에는 좋은 곳입니다." 내가 혼자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로얄 기사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런 곳이면 쉬기 좋겠군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거죠?" "사냥 대회가 열리면 매년 왔기 때문에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혹시 있을지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대회가 열리기 전에 로얄 기사단 전원이 봄베르숲의 지리를 숙지하고 왔기 때문에 이 정도는 기본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 나는 처음으로 봄베르숲에 가게 되자 자신들이 사냥할 것도 아니면서 어떤 짐승을 잡는 것이 좋을까, 서로 토의를 하던 보나인들을 떠올리면서 감탄성을 터트렸다. 역시 로얄 기사는 뭔가 달라도 다른 모양이었다. 내가 은근히 본 좀 받으라는 눈총을 주자 보나인들은 헛기침을 하면서 난데없는 경치 구경에 나섰다. 그동안 빈 궁궐만 지키고 있었으니 그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그런 토의를 하기 전에 나를 어떻게 보호해야할지 토의해야하는 것 아닌가. 로얄 기사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작은 호수가 황금실을 자아내고 있는 곳이었다. 햇빛 아래 황금처럼 반짝이는 호수는 살며시 물결치면서 하늘의 파란빛과 여울져 현란한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주변에 커다란 나무가 있어 짙은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어 잡을 수 없는 금으로 이루어진 호수를 구경하면서 시원하게 쉴 수 있었다. 말들을 근처에 묶어놓은 후 호숫가에 발을 담그고 참방거리며 놀던 나는 몸이 차가워지자 그늘로 들어갔다. 만약 보나인들만 있었다면 같이 놀겠지만 로얄 기사들과 함께 있어서 기사들은 약간 떨어져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늘에 앉아서 그런 보나인들과 로얄 기사들을 바라보던 나는 문득 이 상황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이 곳에 있으면 캐스나가 손수건을 가지고 왔을 때 나를 어떻게 찾지? 아마 캐스나는 손수건을 가지고 오면 봄베르숲의 입구 근처에 있는 공터로 올 것이다. 사냥 대회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전에 사람들이 모여있던 곳으로 지금도 거의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 곳에 있을 것이다. 데미나 공주도 그 곳에 남았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다. 공터에는 쉴 수 있는 천막과 함께 호위병들이 있었기 때문에 편하게 놀 수 있는 장소였던 것이다. 다시 돌아가야 하나? 지금쯤이면 슬슬 올 때가 되긴 했는데 어쩌지? 가만히 생각해보던 나는 조금 더 이 곳에 있다가 가기로 했다. 어차피 사냥이 끝나면 모두 그 곳으로 모일 테니 약간 늦게 가도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미나도 그 곳에 남겨두고 왔으니 캐스나와 만난다면 내가 갈 때까지 둘이서 놀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안해져서 가만히 나무에 기대섰다. 향긋한 나무 내음이 코로 스며들었다. 그늘이라 햇볕은 들지 않았지만 따스한 공기가 피부에 닿자 절로 눈이 잠겼다. 몇 시간이고 말을 타고 다녀서 그런지 약간 노곤했다. 눈을 감자 빛이 눈꺼풀에 와닿으면서 주위가 온통 선홍색으로 바뀌었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어놓고 가는 소리만이 들리는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누군가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별 것 아닌 일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이 떠졌다. 내가 눈을 뜬 것과 동시에 경계를 서고 있던 기사들 중 몇이 다급한 표정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위험합니다!" 반사적으로 그들의 눈길이 향하고 있는 곳을 바라보자 서슬 퍼런 단검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고 있었다. 만약 내가 기사들의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면 단검이 목에 박혔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놀란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비켰지만 완벽하게 피하지는 못했다. 그나마 급소를 피한 것만도 다행이었다. "윽." 단검이 팔에 박히면서 나도 모르게 신음성이 흘러 나왔지만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팔에서 싸한 느낌이 전해지는 것을 시작으로 마치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검이 꽂힌 부분만 그랬는데 갈수록 그 고통은 팔 전체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어디서 다시 단검이 날아올지 몰라 상처를 볼 정신이 없었다. 아니, 일부러 상처를 외면했다. 상처를 직접 눈으로 보면 아픔이 여과없이 그대로 느껴질 것이다. 내가 다음 공격에 대비하는 사이 기사들이 내 쪽으로 몰려왔다. 처음에는 단검이 날아오던 정반대 방향에 있는 기사들만 알아차렸지만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다른 기사들도 달려왔다. 그들은 나를 가운데 두고 둥굴게 원을 그리고 주변을 경계했다.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그런 것 같아요." 보나인의 질문에 그렇게 답했지만 괜찮을 리 없었다. 피가 팔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지는데, 풀 잎 위로 붉은 핏방울들이 똑똑 떨어지는 것이 보이는데 괜찮을 리 없지 않은가. 유혈사태란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인간계에서 피가 나기는 처음이었다. 내 몸이 아니라 아픔에 약한 건지 아니면 그동안 편하게 지내서 약해진 건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팠다. 차마 단검을 뽑을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다만 조금이라도 아픔을 덜어 보려고 상처 입은 부위의 아래를 다른 손으로 있는 힘껏 부여잡았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피할 때 잘못해서 발목이 접질린 것 같았다. 나는 꺾인 오른쪽 발목을 제대로 하고 섰다가 아릿한 통증에 놀라서 황급히 왼쪽 발로만 섰다. 오른쪽 발을 땅에 대긴 했지만 힘을 주면 금방 꼬꾸라질 것 같아 살며시 대고만 서있었다. 위급한 상황이면 무리를 해서라도 뛸 수는 있겠지만 제 속도는 내지 못할 것 같았다. 하필이면 이럴 때 발목을 삐다니! 그런 내 상태를 알아차렸는지 기사들도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상대는 일류였다. 재빨리 단검이 날아온 쪽을 바라보았지만 그 곳에는 이미 사람의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단검을 던지고 재빨리 자리를 이동한 것이 틀림없었다. 우리가 소란을 피운 사이를 틈타 소리 없이 이동한 것이겠지만 그 후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 것을 보면 대단한 실력임에 틀림없었다. 로얄 기사들과 보나인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단검을 던진 녀석들이니 실력이야 말해야 무엇하겠는가. 조금 전에 공격을 봐서 상대가 노리는 것은 나였다. 하지만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소리는 물론 살기까지 감출 수 있을 정도면 암살자 중에서도 일류에 속했다. 그런 상대가 나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털이 쭈뼛쭈뼛 설 정도로 긴장이 됐다. 정면 대결이라면 이렇게까지 긴장하지는 않겠는데 상대가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으니 절로 긴장해서 몸이 떨렸다. 누가 암살자를 보낸 것일까? 순간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암살자를 보낸 자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 위기를 무사히 모면할 수 있느냐가 가장 중요했다. 설마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암살자를 보낼 줄은 몰랐기 때문에 완전히 허를 찔린 꼴이었다. 암살자를 보내려면 내가 잠들었을 때 궁으로 보낼 줄 알았던 것이다. 이래서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나온 모양이었다. 불리한 상황이었다. 상대는 우리를 훤히 볼 수 있지만 우리는 상대가 어느 방향에 있는지조차 짐작이 가지 않았다. 곧바로 나를 향해 날아오던 단검을 떠올려보면 섣불리 움직이면 단번에 단검에 목이 꿰일 수도 있었다. 상대의 공격이 위협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공격을 당해야만 하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었다. 상대가 공격을 해야 위치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나무 위를 살펴봐도 우거진 나뭇잎 덕분에 상대의 위치를 찾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무거운 침묵이 양어깨를 짓눌러왔다. 다음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왼팔에서 전해져오는 고통은 자꾸 정신을 분산시키고 있었다. 단검 하나 박혔다고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내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내가 이렇게 약했나, 하는 회한이 들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울상을 짓거나 엄살을 피우는 것은 마족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니, 내 자신이 용납할 수 없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대신해 짐을 지는 것도 싫었지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되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마족이라면 이 정도 아픔은 참을 수 있어야 한다고 되뇌자 조금은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상처의 아픔 때문에 마음먹은 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몸을 긴장시키려고 노력했다. 숨막힐 듯한 침묵 속에서 기사들 중 누군가가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순간의 실수로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비록 그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뒷모습만으로도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없었다. 쉬이익. 마침내 짓눌려버릴 것 같은 적막을 깨고 단검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왔다. 그런데. "한 명이 아니잖아!" 미첼로의 비명과 같은 말처럼 날아오는 단검은 한 개가 아니었다. 얼른 봐도 대여섯 개는 될 것 같은 단검이 동시에 날아들고 있었다. 실력도 장난이 아닌지 그 빠르기도 빠르기였지만 모두 쳐내기 힘든 각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하나같이 손목 아니면 다리를 노리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피할 수 있다면 어렵지 않겠지만 나를 보호하기 위해 가만히 서있어야만 하는 기사들로서는 막기 힘든 공격이었다. 그러나 기사의 나라라 불리는 페드인 왕국에서도 당당히 왕궁 기사들을 하는 그들이었다. 채앵. 기사들의 실력도 하나같이 대단해서 날아오는 단검들을 모두 쳐내고 있었다. 손목을 노리고 오는 경우는 검을 다른 손으로 바꿔 잡아 막았고, 다리를 목표로 날아오는 경우는 허리를 숙여 쳐냈다. 그러나 몇 명이 허리를 숙이는 순간 나를 완전히 감싸고 있던 보호막에 빈 틈이 생겼다. 그리고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단검과 화살이 쏜살같이 날아왔다. 기사들이 이렇게 막을 줄 알고 일부러 다리 쪽을 노린 것이다. "만물에 깃들어 있는 정들이여, 그대의 친구인 나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라. 가드(Guard)!"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주문을 외웠다. 그동안 4서클 이내의 마법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큰 낭패를 봤을 것이다. 가드는 2서클 풍계 마법으로 주문이 간단해서 위험한 순간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물리 공격에만 통용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에 비해 실드는 4서클 풍계 마법으로 주문이 긴 대신에 물리 공격은 물론 마법 공격까지도 막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리고 가드는 강도도 약해 실력있는 검사가 공격하면 여지없이 깨지고 말아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 마법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사페겔드(흑마법 중에서도 흔하지 않는 방어마법이다. 서클로 보자면 7서클이라고 할 수 있다)가 부럽지 않았다. 가드만으로도 단검이나 화살은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주문을 외운 순간 형성된 보랏빛의 투명한 막은 주위로 번져나가 나와 기사들을 보호했다. 단검과 화살들도 가드에 막혀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가드가 형성되자 기사들은 약간 안심한 듯 했지만 여전히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다들 상대의 위치는 파악했습니까?" 조금 전에 이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던 로얄 기사가 여전히 주위를 경계한 채 입을 열자 다른 사람들이 짧게 대답했다. "대강은." "방향은 잡았지만 아직도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은폐술이 대단하군요." "일단 대여섯 명은 파악했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나무 위에 있습니다. 어떻게 공격을 할 겁니까?" 보나인의 날카로운 지적에 다른 기사들은 입을 다물었다. 상대는 여유롭게 단검이나 화살을 날리면 되겠지만 우리들은 나무 위를 공격할 수단이 없었다. 역시 내 마법밖에 없겠군. 언제까지고 가드를 형성한 채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목구멍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올 것 같아 다시 입을 다물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진정이 됐다 싶은 후에 내 생각을 말했다. "그럼 내가 마법으로 어떻게 해볼까요?" "마리엔 공주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상처가 있는데......" 갈색 머리의 로얄 기사가 말끝을 흘렸다. 그의 눈이 잠깐 왼쪽 팔에 난 상처에 머물다 갔다. 나도 보고 싶었지만 보지 않는 것이 지금 상황에는 좋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아래로 내려가려는 고개를 억지로 한껏 치켜세웠다. "괜찮아요. 마법은 쓸 수 있어요." "공주님, 무리하지 마십시오. 얼굴색이 좋지 않습니다." 미첼로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차라리 다른 곳에 신경을 쓰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마법이 아니면 나무 위에 있는 상대를 공격할 방법이 없었다. 아마 이대로 버티면 누군가 지나가다가 우리를 발견할 가능성이 컸다. 사냥할 때는 화살과 창을 사용하니 그들이 도와준다면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 나는 기사들이 보호해주니 별 탈이 없겠지만 기사들은 달랐다. 몇 명은 이 곳에서 목숨을 잃을 것이고, 대부분이 부상을 당할 것이다. 내가 언제부터 인간들을 이렇게 신경썼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이 의문을 뒤로 하고 암살자들을 쓰러트리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그런 의문은 나중에 실컷 해도 되니까 말이다. "방법이 없잖아. 지금 화살을 가진 사람도 없고. 다른 사람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우리들이 당하고 말 거야."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마법사들은 마법을 외울 때면 무방비상태가 된다고 하던데요." "그러니까 내가 마법을 외울 때 당신들이 날 보호해야지? 주문은 되도록 짧은 걸 외울 테니 조금씩만 버텨봐." "그래도......" "말하기 힘들어...흐읍, 죽겠는데 자꾸 말시킬래? 그러다 맞는다. 좋은 말로 할 때 그런 줄 알아." 이들이 자꾸 토를 달자 나도 모르게 원래 말투가 나왔지만 지금은 그런 곳까지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남은 기껏 아픔을 참고 억지로 입을 열어 말하고 있는데 계속 곤란하다고만 하면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짜증보다는 초조해진다는 말이 맞겠지만 말이다. 이들도 내 말투가 바뀌었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하고 결국 내 말에 동의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럼 가드를 해제할 테니까 자기 실력껏 버텨요. 해제!" 가드가 걷히자 기다렸다는 듯이 단검과 화살이 날아왔다. 기사들이 검으로 쳐냈지만 금방 또 다른 것이 공격해왔다. 이제 슬쩍 공격하기보다는 밀어붙여서 없애버리겠다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는지 비 오듯이 쏟아졌다. 덕분에 몇 개는 쳐냈지만 부상을 입는 기사들의 수가 늘어났다.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라 어떻게 급소는 피하고 있었지만 시간을 오래 끌면 끌수록 목숨은 보장할 수 없었다. 그런 기사들과 어김없이 예리하게 급소를 노리고 오는 날카로운 무기들을 보면 다급해졌지만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속으로 주문을 외워갔다. 주문을 외우는 티를 내서 내가 마법을 사용할 것을 가르쳐줄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조금 전 이야기들도 우리들끼리 작게 말한 거라 상대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어려운 마법보다는 빠르게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 필요했기 때문에 비교적 쉬운 마법을 외웠다. 그래서 속으로 외워도 큰 지장은 없었다. 원래 마법은 굳이 입으로 외울 필요는 없었다. 다만 입으로 외울 때 집중이 더 잘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지 반드시 입으로 외워야지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 중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문 것으로 알지만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파이어 에로우!" 나는 손을 높이 치켜들고 시동어를 외웠다. 그와 동시에 내 머리 위쪽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의 공이 생겨났다. 그리고 자궁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처럼 불의 화살들이 튀어나와 암살자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원래 파이어 에로우는 시전자의 전방에 있는 적을 공격하지만 마법이란 시전자의 마나 응용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었다. 어디의 마나를 움직이느냐에 따라, 어느 정도의 마나를 움직이느냐에 따라, 마나를 어떻게 형성화하느냐에 따라 같은 마법이라도 천차만별이 될 수 있었다. 그만큼 마나를 이해하고 계산도 복잡해지지만 그렇게 생겨난 마법은 본래의 마법보다 훨씬 위력적인 공격을 할 수 있었다. 사방으로 튀어나간 불의 화살이 부딪힌 곳에서 비명이 들리는 것이 그 증거였다. 하지만 암살자들도 만만치 않아 치명상을 입은 사람은 없었는지 아니면 죽을 때 죽더라도 절대 잡히지 않으려는 의지 때문인지 나무 위에서 떨어지는 사람은 없었다. 한 번에 이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결과물(?)이 안보이니까 맥 풀리는걸. #28- 음모 #28- 음모 마법을 사용했으니 조금은 움츠러들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암살자들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서두르지 않으면 자신들이 당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상황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도대체 단검을 몇 개나 가지고 다니는 거야? 지금까지 몇 차례 단검이 날아왔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상황이 좋지 않아서 유난히 상대의 공격이 더욱 길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 공격으로 곤경에 몰린 것은 사실이었다. 일류 암살자들의 공격을, 그 것도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막아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부담이 되게 마련이었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팔이나 다리에 단검 또는 화살을 맞은 적이 있고, 이제 내 상처는 상처축에 들지 않을 정도로 부상을 입은 사람들도 나타났다. 내가 계속 마법을 쏘아대고 있었지만 처음 공격 외에는 이렇다할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암살자들이 마법을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방금 날린 얼음 화살도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나뭇가지에 부딪혀 하얀 얼음 조각을 날리며 산산이 부서졌다. 어쩌면 생각보다는 많은 피해를 주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당장 상대방이 보이지 않으니 얼마나 내 공격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가끔 마법에 명중 당해 외다리 비명소리가 들리거나 붉은 꽃잎처럼 피가 후드득 떨어져 내리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가 더 많았던 것이다. 정말 거의 피해가 없는 건지 마법에 맞아도 우리에게 피해 상황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티를 내지 않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거의 피해가 없으면 상상 이상으로 솜씨가 좋은 놈들이고 피해를 감추기 위해 티를 내지 않는 거라면 정말 독한 놈들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기사들의 목숨은 물론 내 목숨까지도 위험해 질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레프스터 국왕을 따라가는 건데. 남들은 평화롭게 사냥하고 있을 텐데 나는 이게 무슨 꼴이람.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도 너무나 다른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약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스 미사일!" 다시 한번 마법을 사용했지만 이번에도 암살자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나를 노리고 날아오는 날이 선 무기들의 수가 그렇게 많이 줄지 않은 것을 보면 말이다. 이대로는 끝이 없겠어. 이렇게 되면 역시 흑마법밖에 없었다. 살상능력이 뛰어나면서도 다른 마법보다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마법이 필요했다. 되도록 흑마법을 자제해왔지만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흑마법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이제는 이미지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크게 심호흡을 한 나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영혼 속에 잠들어있는 어둠의 조각이여. 이제 때가 되었으니 태초에 각인된 그 기억을 떠올려 일어나라. 어둠의 자식으로 다시 태어나 온 세상을 피와 공포로 물들여라. 크리베서크!' 크리베서크의 목표는 근처에 있는 나무였다. 손을 들어 옆에 있는 키 큰 나무를 가리키자 주변의 공기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사막 위에 서있는 것처럼 모든 것들이 흔들리며 춤을 췄다. 동시에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모든 생물은 처음부터 빛과 어둠, 양과 음이 조화를 이루면서 태어난다. 그러나 어둠이 없으면 태어날 수조차 없는데 그 것은 언제나 두려움과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생물들은 어둠의 조각이 자신의 안에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게 되었다. 이 울음은 잊혀진 어둠의 울음, 깊은 내면으로 잠겨버린 또 다른 모습의 생물의 오열. 마법의 영향으로 깊이 잠들어있던 어둠의 조각들이 깨어나 낮게 울기 시작한 것이다. 불쌍한 것들. 이제 깨어나려무나. 생명을 불태워 일어나거라. 내 손짓을 받은 자, 어둠으로 물들어라. 우우우. 대기를 뒤흔들며 퍼지는 낮은 울음소리에 새들이 놀라서 퍼덕거리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형형색색의 새들이 날아오르면서 하늘을 예쁘게 물들였지만 그런 모습마저 일그러진 공간과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낮은 울림소리 때문에 기괴하게 보였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 역시 놀라서 암살자의 존재도 잊은 채 두리번거렸다. 암살자들의 지겹던 공격도 멎은 걸 보니 그들도 적지 않게 놀라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야 그 소리가 어디서 나오는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어둠을 사랑하지 않는 존재는 영혼 속에 잠든 어둠의 몸부림을 느낄 수 없을 테니까. 내 손가락에서 밤의 날개를 닮은 검은 안개가 피어올랐지만 당황하고 있는 기사들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검은 안개는 조용히, 하지만 빠르게 퍼지더니 살아있는 연체동물처럼 흐물거리며 내가 가리킨 나무를 감싸기 시작했다. 나무가 서있는 곳에 구멍이라도 뚫려있는 마냥 빠르게 빨려가던 검은 안개는 마침내 한 장의 나뭇잎도 보이지 않게 되자 그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나 번데기처럼 나무를 완전히 감싸버린 검은 안개는 끊임없이 흐느적거리고 있어 살아있는 불꽃처럼 보였다. 이제 낮은 흐느낌 소리는 더욱 커져 귀로 들리는 건지 아니면 머리로 그대로 전달되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까지 되었다. 내가 마법을 사용한 것은 알고 있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 겪어본 기사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도 이런데 나중에 마계에 떨쳐놓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짓궂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금새 정신을 집중했다. 도중에 마법이 깨지면 무지 곤란해져. "흑마법이다! 막아라!" 뒤늦게 사태를 눈치챈 암살자 중 한 명이 소리치자 숨어있던 암살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통은 갑작스런 변화에 놀라서 마법이 완성될 때까지 멍하니 손놓고 있다가 당하기 일쑤인데 뒤늦게라도 반응하는 것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는지 알 수 있었다. 지면에 사뿐히 내려선 암살자들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공격해왔다. 이 때가 처음으로 비명을 제외한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이었고, 처음으로 상대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암살자들은 모두 복면을 하고 있어 모습은 확인할 수 없었다. 숫자는 열 명 내외. 대여섯 명이라는 짐작보다 더 많은 숫자였다. 나머지는 숨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만약 흑마법으로 이들을 끌어내지 못했다면 여지없이 뒤통수를 맞았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약간 오싹해졌다. 하지만 상대도 당황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원래 상대방이 방심하는 틈을 타 기습하거나 몰래 숨어서 공격하는 것이 암살의 정석임에도 불구하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 그 증거였다. 그 말은 아직 우리에게 기회가 있다는 말이었다. 암살자들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절도있는 동작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들의 손에는 어느새 리쇼르가 쥐어져있었다. 리쇼르는 단검보다 약간 긴 50cm 정도 길이의 검으로 날이 약간 휘어있어 검집에서 뽑자마자 휘두르기에 적합했다. 때문에 암살자들이 자주 애용하는 검이었다. 초보가 사용하면 단검만도 못한 검이지만 숙련된 사람이 사용하면 단번에 목을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위력있는 검이었다. 암살자들은 미리 호흡이라도 맞춘 것처럼 동시에 리쇼르를 휘둘렀다. 동시에 10개의 리쇼르가 공기를 가르며 날아드는 소리는 위협적이어서 평범한 마법사였다면 단번에 집중이 깨져 마법을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크리베서크는 한번 시전되면 중간에 멈출 수 없는 마법이라 사실상 암살자들의 공격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나를 죽이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러나 암살자들의 검날은 내게 오지 못하고 중간에 차단당했다. 기사들이 일제히 검으로 리쇼르를 가로막은 것이다. 숫자상 기사들이 한 명 모자랐지만 어찌된 이유인지 암살자 중 한 명이 뒤에 가만히 서있기만 해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비록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몸의 굴곡으로 봐서 여자였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격돌하고 있는 기사들과 암살자들을 지켜보았다. 만약 자신이 합세한다면 기사들의 방어막이 완전히 흔들릴 것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절대로 나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거 기분 나쁘네.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단 말이야? 마법이 거의 완성되자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를 되찾은 나는 그 여자의 행동이 눈에 거슬렸다. 물론 그 여자가 합세하면 불리해진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존심이 강한 나로서는 나를 쉽게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공주를 노려라!" 뒤에 서있는 여자가 우두머리였는지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암살자들이 성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사들은 부상당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격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 암살자가 두려운 것은 언제 어디서 공격을 해올지 몰라 그런 것이지 이렇게 버젓이 눈앞에서 공격하면 용병만도 못했다. 만약 기사들이 나를 보호할 의무만 없었다면 시간은 약간 걸리더라도 이들은 죽은 목숨이었다. 하긴 지금도 죽은 목숨이지만. 나는 씨익 웃었다. 마법이 완성된 것이다. 이로서 아군이 한 명 늘어났다. 그 것도 아픔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 어둠의 자식이. 스스스. 무엇인가가 땅 속을 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뢰를 완수하기 위해 검을 세우고 달려드는 암살자도, 그 공격을 막고 있는 기사들도 이 소리를 듣지 못했다. 설령 들었다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첫 희생자는 미첼로에게 단검을 던지던 암살자였다. 정면 대결은 아무래도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약간 떨어져 단검을 던지던 암살자는 미첼로가 단검을 검으로 쳐내는 순간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힉, 이게 뭐야?" 난데없이 땅을 뚫고 나온 나무 뿌리가 그의 발을 잡았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뿌리들도 튀어나와 그를 감쌌다. 암살자가 나무 뿌리에 완전히 감겨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리고 내 의지에 따라 나무 뿌리들은 먹이를 질식사시키려는 거대한 구렁이처럼 안에 감긴 남자를 꽉 조였다. "으아악!" 딱딱한 나무 껍질 안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소리가 몇 초 동안 계속 들려오다가 무엇인가 박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박살나는 것이 아니라 으깨지는 거지. 뿌리 사이로 조금씩 새어나오는 붉은 피가 으깨진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역시 나무 뿌리가 다음 먹이를 찾아 움직인 순간 드러난 것은 이미 으깨져버려 인간의 형체는 남아있지 않은 검붉은 고깃덩어리였다. 성인 인간 한 명을 다져놓으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은 고깃덩어리로 바뀐다는 사실이 의외였다. 인간이 이렇게 작았나? 여기 있는 사람을 모두 으깨버려도 얼마 되지 않겠어. 크리베서크. 하나의 생명을 어둠으로 물들여 조종하는 것이다. 시전자의 명령대로 움직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기 때문에 충실한 부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번에 단 한 명만 조종할 수 있었고 아무리 어둠의 자식이 됐다 하더라도 본질은 그대로였다. 예를 들어 늑대에게 크리베서크를 걸면 보통 늑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고 잔혹하지만(마법사가 조종하니까 당연하지만) 그래도 늑대인 것만은 변함이 없었다. 즉 불사신이 아니기 때문에 한계에 부딪히면 금방 죽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까짓 검같은 걸로는 절대로 이 나무를 죽일 수 없을걸. 크리베서크에 걸린 나무는 어느새 나뭇잎은 말라서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그 가지들은 원래보다 몇 배는 부풀어올라 괴물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더구나 가지와 뿌리들이 꿈틀거리며 움직이니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 자들의 눈에는 흉측하게 보일 것이다. 마계에는 이런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숲이 있어 내 눈에는 별로 이상하게 보이지 않지만. 내가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나무는 도저히 식물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암살자들을 덮쳐갔다. "아악!" "우아악!" "젠장, 이 괴물은 뭐야?" 비명소리와 당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옆에서 동료들이 나뭇가지에 관통돼 대롱대롱 매달리기도 하고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뿌리에 의해 으깨지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어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암살자 중 몇몇은 벌써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가 되었고, 살아남은 나머지도 생전 처음 받아보는 나무의 습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아무리 냉정한 암살자라도 꼼짝도 할 수 없는 나무가 난데없이 자신들을 공격하고 있으니 당황하는 것이다. 침착만 한다면 몸놀림이 빠른 암살자들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겠지만 한번 공포로 물든 마음을 다잡는 것은 아무리 사선을 많이 넘나드는 암살자들이라도 어려운 일이었다. 이대로라면 스스로 자멸하겠군. 잘 됐어. "진정해! 우선 모두 떨어져!"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복면의 여자가 소리쳤다. 그러자 놀랍게도 암살자들의 몸놀림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저 여자 제법 신뢰를 받는 모양이군. 다 돼가는 밥에 재를 뿌리다니. 아, 재수 없어. 복면의 여자의 말에 따라 암살자들은 나무 가지들이 밀집해서 공격해오는 곳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암살자들은 등을 보이면 무슨 공격을 해올지 몰라 뒷걸음질치면서 물러났다. 그런데 그 속도가 가히 놀라웠다. 뒤에 눈이라도 달린 건가? 그러나 쉽게 놔줄 수는 없지. 나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암살자를 노렸다. 나뭇가지 중 하나가 허공에 일직선을 만들며 암살자를 쫓아갔다. 이를 본 암살자는 리쇼르를 들어 막았지만 그 때를 틈타 지면을 뚫고 나온 뿌리까지는 피하지 못했다. 좋았어, 잡았다. 암살자가 발이 묶인 것과 동시에 나뭇가지들이 쏜살같이 먹이감을 향해 달려들었다. "으악!" 굵은 나뭇가지가 암살자의 어깨를 관통했다. 그리고 덮치듯이 달려든 나뭇가지들이 암살자의 몸에 꽂히기 시작했다. 머리만 남겨두고 멀쩡한 곳이 없을 정도였다. 총 일곱 개의 나뭇가지가 관통했군. 그래도 살아있는 것이 용하군. 하긴 인간의 생명력은 잡초와 같다고 하잖아. 그러나 즉사하는 것이 더 나았을 텐데 말이지. 바늘에 꽂힌 애벌레처럼 암살자는 꿈틀거리며 비명을 울리고 있었다. 표본은 이렇게 만든다고 하지. "크아악!" 고통을 이기지 못한 암살자가 비명을 질러댔지만 복면 때문에 그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 비명이 들릴 때마다 기사들과 다른 암살자들의 몸이 경직되고 있었다. 특히 암살자들은 주춤거리는 모습이 여간 놀란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게 왜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덤비고 난리야? 하지만 역시 그냥 놔두는 것은 할 짓이 못되겠지. 나뭇가지는 다시 한번 내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 촤아악. 서로 다른 방향으로 힘차게 움직인 나뭇가지는 인간의 약한 몸을 갈가리 찢어놓은 채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인간의 몸에 그렇게 많은 피가 있었는지 분수처럼 피보라가 일어났다. 피보라가 가라앉았을 때 그 곳에 보인 것은 본래의 형체를 잃고 땅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살점들이었다. "잔인하군." 침묵을 깨고 복면의 여자가 입을 열었다. 약간 갈라졌지만 예쁜 목소리였다. 목소리야 어떻든 상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을 내가 아니었다. "흥, 암살자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자기들도 사람을 죽이면서 성인군자처럼 말을 하는 게 아니지." 내 말에 복면의 여자가 낮게 웃었다. 기분 나쁜 여자. "우후후, 그 말이 맞군. 벌벌 떨 거라고 생각했는데 당돌한 공주님이시군.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일찍 죽는 법이지. 그러니까 이렇게 암살 의뢰도 들어오는 것 아니겠어? 과연 죽을 때도 그렇게 당당하게 굴 수 있는지 궁금하군." "도대체 누가 사주한 거냐?!" 보나인은 의뢰라는 말에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하지만 물어본다고 다 불면 암살자로서 자격 미달이지. 복면의 여인은 쿡쿡거리다가 대답했다. "바보같은 질문이군. 의뢰주에 대해 발설하지 않는 게 우리의 규칙이다. 정 궁금하면 죽은 후에 신에게 물어보시지." "지금 상황을 잘 모르나 본데 위험한 건 너희야." 내가 코웃음을 치면서 말하자 복면의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글쎄. 정말 그럴까?" 무슨 헛소리야? 이제 숫자도 딸리는 주제에 입만 살아 가지고. 그 입을 다시는 놀리지 못하도록 틀어 막아주마. 이런 내 마음을 느꼈는지 나뭇가지들이 앞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잡는다고 해도 이들의 반응으로 봐서 의뢰주를 불 것 같지도 않았다. 생포할 필요 따위는 없었다. 모조리 죽여버리겠어. 뒤이어 일어날 일을 생각하니 즐거운 미소가 얼굴 전체로 번져갔다. 그러나 바로 공격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막 공격하려는 순간 복면의 여자가 둥근 물체를 크리베서크에 걸린 나무쪽으로 던진 것이다. 스펠 비드! "피해!" 크리베서크가 걸린 나무는 바로 우리 옆에 있었다. 스펠 비드에 걸려있는 마법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옆에 있는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끼칠 것은 분명했다.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스펠 비드를 본 우리들은 동시에 호수쪽으로 몸을 날렸다. 발이 삐끗거렸지만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그런지 아픔을 느낄 경황은 없었다. 그러나 상대가 워낙 기습적으로 던진 것이라 채 피하기도 전에 스펠 비드가 나무에 부딪히면서 터졌다. 퍼어엉. 큰 폭발음이 난 후 뜨거운 불길이 한차례 훑고 지나갔다. 눈을 꼭 감고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불길과 함께 터진 나무 파편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폭발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눈을 뜬 나는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되자 재빨리 일어났다. 호수에 떨어져 흠뻑 젖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일어나서 보니 나무는 몸체가 날아가 까맣게 타버린 그루터기만 남아있었고, 나무 가지와 조각들은 사방에서 뒹굴고 있었다. 만약 조금만 늦었어도 저 나무처럼 내 몸도 산산이 부서졌을 것이다. 불에 그을려 엉망이 되고, 나무 조각에 긁혀 여기저기 피가 배어 나왔지만 이 정도인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피하는 것이 비교적 빨랐고 피한 쪽이 호수쪽이라 큰 부상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기사들 중에는 심하게 다친 사람도 있었다. 제대로 피하지 못한 로얄 기사 두 명 모습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까맣게 타서 죽어버렸고, 그 시체 근처에 무릎을 꿇고 한쪽 어깨를 잡고 있는 로얄 기사는 심하게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가 잡고 있는 쪽의 어깨 밑으로는 당연히 보여야할 팔이 보이지 않았다. 죠안과 또 다른 로얄 기사는 나무 파편이 몸에 깊게 박혀 몸을 신음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내가 가장 멀쩡한 사람이었다. 단순히 내가 잘 피해서 다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피하면서도 기사들이 나를 감싼 모양이었다. 한순간 까불다가 바로 공격하지 않은 대가였다. "으." 한동안 할 말을 잃고 서있던 나는 팔을 잃은 로얄 기사가 신음하자 그 쪽으로 다가갔다. 내가 회복마법을 걸어주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온 몸을 지배했다. 한순간 내가 회복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내가 회복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내 실력으로는 이렇게 심하게 다친 사람은 살릴 수 없었다. 희망을 걸자면 에니그마로 나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지만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러나 아마도 시도는 해봤을 것이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다친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계에서 주위에 있던 자들은 나보다 더 강한 마족들이라 내가 다쳤으면 다쳤지 그들이 다칠 일은 없었다. 그리고 인간계에서는 가스톤이 크게 다친 적이 있었지만 적어도 당장 죽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팔을 잃은 로얄 기사는 물론 죠안과 다른 로얄 기사도 금방 죽을 것처럼 심하게 다쳤다. 나는 마족이니 옆에 있는 인간이 죽든 말든 아무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알고 있던 사람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상상 이상으로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인간들은 수명이 짧아서 오래보지도 못할텐데 그것마저도 끝까지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것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예전에도 위험한 상황이 있었지만 오늘처럼 마음이 급해진 적은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인간의 몸으로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물러진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 4기사단 쪽은 죠안을 제외하면 목숨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나도 감정이 있다보니 아무래도 정이 들었던 보나인들이 더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로얄 기사들은 죽어도 별 상관없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 암살자들과 직면하게 됐을 때는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지만 생전 처음 본 로얄 기사들이 나를 보호하느라 죽을 힘을 다하는 것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러나 내가 로얄 기사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단검이 날아왔다. 단검은 정확히 로얄 기사의 목을 꿰뚫었고, 목이 뚫려버린 기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고꾸라졌다. 흉하게 화상을 입은 몸으로 땅에 고개를 박고 쓰러진 로얄 기사의 모습 어디에서도 생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기사들의 최고 영광의 자리라는 로얄 기사에 있던 자가 지금은 얼굴도 알아보지 못할 모습으로 죽어있었다. 왠지 모르게 서러워져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왜 내가 이 상황을 서러워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리고 싶었다. 이럴 때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꼬마인가보다. 나는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울 수는 없었다. 바보같이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마족이니까. #28- 음모 #28- 음모 애써 시체에서 눈을 뗀 나는 빠르게 기사들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죠안과 다른 로얄 기사는 도저히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남은 사람은 보나인, 가스톤, 미첼로, 그리고 남은 한 명의 로얄 기사. 하지만 이들도 정상은 아니었다. 있는 힘껏 싸우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스펠 비드가 좋긴 좋군. 하지만 이건 내 손으로 죽인 것 같지 않아 찜찜하단 말이야." 복면의 여자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저 갈아 마실 년! 정말 뒤지게 패고 싶었다. 나 혼자만 있었다면 이렇게 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흑마법을 난사하면 지들이 무슨 재간으로 버티겠는가? 지금이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기사들의 몸상태가 좋지 않았다. 내 몸은 지킬 자신이 있지만 이들까지 보호해줄 자신은 없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흑마법을 사용했어야 했다. 그 때라면 자신의 몸은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이 기사들에게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듭된 전투와 부상으로 힘이 많이 떨어진 지금은 과연 그럴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큰 부상을 입은 죠안과 로얄 기사는 암살자들이 확실히 죽일 것이다. 그동안 일이 너무 잘 풀려서 한순간의 방심이 죽음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순순히 죽어준다면 고통 없이 끝내주지." 미친 년. 너 같으면 그렇게 하겠냐? 나는 죠안과 로얄 기사가 쓰러져있는 곳으로 물러서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느새 일어난 기사들도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럼 별 수 없군. 죽여라!" 여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암살자들이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복면의 여자는 뒤쪽에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숫자상으로는 비슷해졌지만 부상을 입은 이쪽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이제 이미지고 뭐고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나 어둠에 속하는 존재로 밤의 안식 안에서 보호받기를 원한다. 그 안에서 나의 뜻과 밤의 날개가 하나되어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의 존재를 부정하리라. 메드윈!' 나는 순간적으로 메드윈을 머릿속으로 완성시켰다. 그동안은 대강대강이라도 주문을 외웠는데 한순간에 모든 주문과 공식 계산을 끝낸 것이다. 역시 사람이나 마족이나 위험에 처하면 놀라운 힘을 발휘하는 것은 똑같은 모양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마법을 완성시킨 나는 다가오는 암살자들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 것과 동시에 나와 기사들을 중심으로 거친 회오리가 몰아쳤다. 하지만 그 바람은 우리에게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들을 가운데 두고 불어서 암살자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어떻게? 그 순간에 마법을 외웠단 말이야?! 말도 안 돼!" 처음으로 복면의 여자가 당황해서 외쳤다. 그 여자가 보기에는 내가 주문도 외우지 않고 마법을 사용한 것처럼 보였을 테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무슨 수를 쓴 거냐?" "너 같으면 순순히 말하겠냐? 이 xxx같고 yyy해서 zzz해버릴 여자야!" 악감정이 폭발한 나는 마구 욕을 퍼부어댔다. 그런데 그 욕들이 하나같이 공주가 사용하기에는 매우 상스러운 욕들이라 한동안 욕을 먹은 복면의 여인은 물론 기사들과 암살자들까지 굳어있었다. 잠시 후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린 복면의 여자가 입을 열었다. "입이 거칠군. 그런 욕설은 용병들도 입에 잘 담지 않는데. 뭐 어쨌든 좋아.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상관없어. 방어막을 뚫어라!" "넷!" 복면의 여자가 방어막을 가리키며 명령하자 암살자들이 리쇼르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걸 평범한 실드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었다. 회오리의 칼날은 방어막인 동시에 공격 수단이었다. 하지만 이걸 모르고 가장 빨리 접근해온 암살자가 리쇼르를 휘둘렀다. 그러나 암살자의 검은 바람을 뚫지 못했다. 그리고 암살자가 검을 내리치는 동시에 회오리는 일순간 커져 암살자를 집어삼켰다. "우왁!" 광풍(狂風)은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온 어리석은 생물을 용서하지 않고 그대로 갈라버렸다. 처음에는 암살자의 팔이 날카로운 바람에 잘리는 것이 보였지만 이내 회오리에 휩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다만 바람의 색이 몇 초 동안 붉은 색으로 변한 것을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구토를 했겠지만 나는 그 모습을 담담하게 지켜보았다. 기사들도 잠자코 있었지만 무감정하게 있는 나와는 달리 기가 질려있었다. 사람이 죽는 것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완전히 분해돼버리는 모습은 보지 못했을 테니까. 이번에 무사히 살아나간다면 나를 어떻게 볼 지는 대강 짐작이 갔다. 하지만 이미지보다는 목숨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물러서!" 한 명이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지자 복면의 여자가 소리쳤다. 그러나 여자가 소리치기 전에 이미 남은 암살자들은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다시 한번 동료가 내 손에(직접 죽인 것은 아니지만 일단 마법을 사용한 사람은 나니까) 처참하게 죽자 원독에 찬 눈으로 노려보았지만 나를 감싸고 있는 매서운 바람때문에 다가오지 못했다. "끈질기군. 징그러울 정도로!" 복면의 여자가 드디어 여유로운 모습을 잃고 이를 갈면서 말했다. 그러나 그녀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징그러운 것. 빌어먹을 것. 잡것. 그냥 순순히 죽어주면 좋잖아. 그러나 복면의 여자는 순순히 죽어줄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멀리서 석궁을 쏴라. 계속 마법을 유지할 수는 없을 거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몇 명의 암살자들이 소형 석궁에 화살을 재기 시작했다. 보통 석궁보다 작게 개조한 소형 석궁은 가지고 다니기도 편하고 위력도 쓸만한 무기였다. 석궁보다는 못하겠지만 계속 쏘아댄다면 실드를 깨뜨리지는 못해도 마법사가 오랫동안 마법을 유지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 있었다. 도대체 무기를 몇 개나 가지고 다니는 거야? 징그러운 대장 밑에 징그러운 부하들이었다. 암살자들은 석궁을 조준해서 쏘았다. 그러나 무서운 기세로 날아온 화살은 회오리치는 바람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약간 흔들리긴 했지만 바람의 방어막은 여전히 굳건하게 버티고 서서 나와 기사들을 보호했다. 그 후로도 암살자들은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석궁을 쐈고, 그 때마다 메드윈은 화살들을 모두 막아냈다. 그렇게 시간은 조금씩 흘러갔다. 마침내 이대로는 끝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복면의 여인이 움직였다. 가만히 있던 그녀가 움직인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상당한 부담을 주었다. 얼마나 셀까? 나는 경계어린 눈으로 복면의 여자를 바라보았고, 기사들도 긴장해서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복면의 여자가 눈부신 속도로 리쇼르를 뽑아들고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을 때였다. "아앗, 여기예요! 여기!" 우리들은 동시에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캐스나가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캐스나의 손에는 손수건이 들려있었다. 저 바보, 그렇게 소리치면 표적이 되잖아! 그러나 캐스나는 자신의 신변에 닥친 위험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큰 소리로 도움을 청했다. "도와주세요! 누가 좀 도와줘요!" 캐스나의 외침에 암살자 중 하나가 뛰어나갔다. 캐스나의 입을 막기 위해서이리라. 그러나 캐스나는 꺄악거리며 비명만 지를 뿐 겁에 질려서 피하지도 못했다. 대개의 사람들이 암살자가 자기를 노리고 달려든다면 그럴 것이다. 나는 도와주러 가지도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암살자들을 봤으면 슬며시 빠져나가 다른 사람들을 불러와야 할 것 아닌가. 자기 몸도 지킬 실력이 없으면서 막무가내로 소리부터 치고 보면 어쩌자는 말인가. 암살자가 코앞까지 왔을 때도 캐스나는 비명만 질렀다. 이제 틀렸어. 죽고 말 거야. 나는 캐스나를 구하기는 이미 늦었고 구할 여력도 없다고 생각했다. 암살자의 리쇼르가 캐스나를 향해 휘두르려는 순간 돌멩이가 날아왔다. 그리고 캐스나에게 정신이 팔려있던 암살자는 그 것을 피하지 못했다. 빠악. 박 깨지는 소리와 함께 암살자는 머리를 감싸쥐고 휘청거렸다. 그 반응은 당연했다. 예상치 못한 공격이 가져다주는 충격은 상상을 초월하지 않던가. 게다가 주먹만한 돌을 머리에 맞았는데 멀쩡할 인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암살자가 정신이 없는 틈을 타 옆덤불에서 뛰쳐나온 사람은 미나였다. 캐스나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돌을 집어들고 힘껏 던진 모양이다. 미나는 겁에 질려있는 캐스나의 손을 잡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암살자는 생각보다 빨리 정신을 차리고 미나와 캐스나를 노려보았다. 짱돌을 머리에 맞고도 이토록 빨리 회복한 것은 정말 놀라울 만한 일이지만 이왕이면 좀 더 그러고 있지 그랬어. 미나는 돌을 던진 이 후의 일은 생각해본 적이 없는지 머뭇거리며 뒷걸음질치기만 했다. 그런 미나를 바라보는 암살자의 눈에는 멀리 떨어진 나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살기가 가득 차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발을 동동 굴렀다. 이 일을 어쩌지? 이러다 둘 다 죽는 것 아냐? "이 계집애가...가만두지 않겠어." 암살자는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미나와 캐스나를 한꺼번에 없애버릴 생각인지 리쇼르를 높이 쳐들었고, 그 것을 본 두 사람은 비명을 질렀다. "꺄악!" "엄마야!" "죽어라." 그러나 암살자는 다시 한번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영원히. 암살자가 리쇼르를 내리치려는 순간 숲 속에서 한 자루의 창이 날아와 암살자의 가슴을 관통한 것이다.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암살자는 쓰러졌다. 그리고 창이 날아온 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갑자기 폭발음이 들리기에 달려와 봤더니 이게 무슨......마리엔 공주님!" 무리의 맨 앞에서 백마를 타고 오던 중년의 남자가 말하다가 나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그는 금새 상황을 파악하고 노기에 찬 목소리로 호령했다. "무엇들 하느냐! 당장 저 역적놈들을 없애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를 뒤따르던 사람들이 일제히 암살자들에게 달려들었다. 경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있는 기사와 가벼운 옷만 입고 있는 암살자. 승패는 누가 봐도 뻔했다. 게다가 암살자들은 우리와 싸우느라 지쳐있었기 때문에 이대로 있으면 몰살당한다. 복면의 여인도 이를 파악했는지 재빨리 소리쳤다. "제길, 의뢰는 실패했다. 실력껏 도망쳐라!" 그녀의 말에 암살자들은 일제히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 중에는 기사들에게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었고, 요령껏 피한 사람도 있었다. 암살자들이 모두 도망치자 나는 마법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갑자기 밀려오는 발목의 통증 탓도 있었고, 안심이 된 탓도 있었다. 싸움이 끝나자 상처가 욱신거리기 시작했지만 눈을 돌려 기사들을 살펴보았다. 이들에 비하면 나는 크게 다치지 않은 축에 속했던 것이다. 적어도 목숨에 지장이 있을 정도의 부상은 아니니까. "한 놈도 놓치지 말고 뒤쫓아라!" 암살자들의 추격을 명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보다는 중후한 목소리가 곁에서 들려왔다. "마리엔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이런, 심하게 다치셨군요." 고개를 돌려보니 조금 전에 명령을 내렸던 중년의 남자였다. 그리고 미나와 캐스나도 그의 옆에 서있었다. 세 사람은 걱정 어린 눈으로 내 팔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안심하십시오. 제 부하들이 역적놈들을 쫓고 있으니 반드시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나저나 이 상처를 어떻게 해야할지?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제가 조금만 일찍 달려왔어도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아니예요. 음." 내가 물끄러미 쳐다보자 이름을 몰라서 그런다는 것을 눈치챈 중년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케스메 남작입니다." "아, 케스메 남작 덕분에 살았어요. 고마워요." "아닙니다. 저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케스메 남작은 사방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자 말을 멈췄다. 그들 역시 폭발음을 듣고 달려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숫자가 한둘이 아닌지 호수의 수면이 흔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숲은 사람들을 토해냈다. 그 중에는 레프스터 국왕도 보였다. 레프스터 국왕은 이 곳으로 오면서 내가 습격을 받았다는 전갈을 받았는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나를 보자 체통을 잊어버렸는지 서둘러 달려왔다. "마리엔, 괜찮느냐?" "괜찮습니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이 다 빠진 나는 힘없이 대꾸했다. 그런 내 모습과 상처를 본 레프스터 국왕은 불같이 화를 냈다. "도대체 어떤 놈이냐?! 감히 왕실 소유의 숲에서 왕족을 습격하다니!" "폐하, 진정하십시오. 우선은 공주님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사, 없나?" 라디폰 공작의 차분한 말에 레프스터 국왕은 조금 진정하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씩씩댔다. 사냥하는 중에 다칠 수도 있기 때문에 사냥 대회에는 항상 몇 명의 의사가 배치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여자들이 남아있는 공터에서 대기하고 있지만 가끔 한두 명은 사냥하는 사람들과 함께 움직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의사가 호수 주변으로 모여든 무리 중에 있었는지 한 남자가 달려왔다. 의사는 내 상처를 먼저 살펴보려고 했지만 죠안과 로얄 기사가 훨씬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말했다. "나보다는 이 기사들을 먼저 봐줘요." "하지만......" 의사는 레프스터 국왕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 그도 죠안과 로얄 기사의 상처가 더 급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노한 국왕 앞에서 나를 제쳐놓고 다른 사람을 먼저 치료할 용기가 나지 않는 것 같았다. #28- 음모 #28- 음모 "난 괜찮으니 이들을 먼저 치료해줘요. 내 상처는 그렇게 심한 것이 아니니까." "마리엔 공주님의 말씀을 따라라. 우선 저 두 사람을 먼저 치료하고 공주님을 살펴보도록." 라디폰 공작의 말에 주저하던 의사는 쓰러져있는 죠안과 로얄 기사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내가 고집이 엄청 세다는 것을 아는 라디폰 공작의 현명한 판단이었다. 레프스터 국왕도 두 사람의 상태가 위중하다는 것을 알고 별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케스메 남작에게 사정을 들은 레프스터 국왕은 근위 대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당장 기사들에게 케스메 남작의 부하들과 협력해서 역적놈들을 잡아들이라고 전해라! 한 놈도 봄베르숲을 벗어나지 못하게 해! 생포가 불가능하면 사살해도 좋다! 감히 왕족을 습격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말겠다." 레프스터 국왕은 차가운 분노에 휩싸여있었다. 하기는 작년에 독을 마시고 간신히 살아난 딸이 이번에는 암살당할 뻔했으니 정상적인 아버지라면 누구나 불같이 화를 낼 것이다. 국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프스터 국왕은 눈을 돌려 나를 살펴보고 있는 의사를 지켜보았다. 죠안과 로얄 기사는 나무 파편이 깊게 박혀서 절개 수술을 해야했기에 진찰이 끝나자 바로 후송됐다. 피를 더 흘리기 전에 빨리 치료에 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상처는 괜찮은가?" 레프스터 국왕의 말에 의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상처가 깊습니다. 더군다나 그 상태로 움직이셔서 상처가 커졌습니다. 지금 당장 단검을 뽑고 응급 치료를 해야합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이대로 잘못 움직이시면 상처가 덧날수도 있습니다." 의사의 말에 나는 살짝 눈을 내려 팔을 쳐다보았다. 그동안은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의사의 말에 어느 정도이기에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어 쳐다본 것이다. 헛, 상처를 본 나는 생각보다 깊은 상처라 깜짝 놀랐다. 스펠 비드를 피하려고 몸을 날리는 도중에 부딪혔는지 상처는 위에서 아래로 쭈욱 벌어져있었다. 단검을 뽑기는 좋아졌지만 피가 하얀 옷을 붉은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괜히 봤다. 보고 나니까 더 아프다. "공주님, 뽑겠습니다. 아프셔도 참으십시오." 의사는 조심스럽게 단검에 손을 댔다. 나는 뒤이어 닥칠 아픔을 대비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대비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역시 아팠다. 더군다나 이 놈의 의사는 상처가 더 벌어질 것을 걱정하는지 천천히 뽑는 바람에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이런 건 잽싸게 뽑아야 덜 아프잖아, 이 돌팔이 의사야! 그 와중에도 신음소리를 내지 않은 내가 대견스러웠다. 불굴의 의지로 버텨내고 있는 얼마나 대단한가. 인상이 써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의사는 상자에서 뭔가를 꺼내 그 것을 상처에 뿌렸는데 이번에도 장난 아니게 아팠다. 역시 마법사가 제일이다. 이럴 때는 회복 마법으로 금방 낫게 하는데. 내가 회복 마법만 쓸 수 있었어도. 물론 내 마법이 그 정도 위력을 발휘한다는 전제 하에서이긴 하지만. 그 약은 지혈 효과가 있었는지는 흘러나오던 피가 약간 멈췄다. 의사는 그 외에도 약초를 으깨서 상처에 갖다대기도 하는 등 나를 심히 괴롭게 했다. 마지막으로 붕대를 감는 것으로 의사의 응급 치료는 끝이 났다. "지금은 이 정도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나머지는 궁으로 모셔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 공주를 궁으로 데리고 가라." 국왕의 명령에 근처에 있던 로얄 기사들이 다가와 부축하려 했다. 나는 그 손을 뿌리치면서 혼자 일어서려 했다. 다른 사람들이야 그렇다 쳐도 에릭과 세린이 있어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여행하는 도중에 나는 엄청 강하다고 자랑해댔는데 암살자들 하나 이기지 못하고 뭘하는 거란 말인가. "혼자 일어날 수 있어. 괜찮아. 난 괜찮아." 힘겹게 일어서자 발목이 다시 지끈거렸다. 의사가 발목에도 압박붕대를 감긴 했지만 무리가 가는 것은 사실이었다. 더구나 일어나다 팔을 건드렸는지 끔찍하게 아팠다. 얼마나 아픈지 절로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였다. 이렇게 된 건 암살자뿐만 아니라 의사의 탓도 크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약을 사용한 것은 알지만 쓰라리고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아서 절로 욕이 나오려 했다. 그러나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심각한 오해를 했다. 어느새 치료가 끝난 보나인이 다가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연 것이다. "공주님,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죽이지 않았으면 우리들이 죽었습니다. 게다가 상대는 암살자들입니다. 그들의 손에 많은 자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니 죄책감 느끼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지금 보나인은 내가 암살자들을 죽인 죄책감과 충격으로 떨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공주님이 아니었으면 저희들은 진작에 죽었을 겁니다. 죽은 동료들도 공주님을 지키다 죽을 수 있어서 기뻐하고 있을 겁니다." 이번에는 로얄 기사가 말했다. 가스톤과 미첼로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봐, 다들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어. 난 단지 아파서 몸을 떤 것 뿐이야. 암살자들이 죽은 것으로 내가 충격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지금 나는 그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지 못해 분해하고 있는데 이 무슨 황당한 소리란 말인가. 착각은 자유라지만 어떻게 이야기가 그렇게 될 수 있단 말인가. 덕분에 나는 잔인한 마녀라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되어 좋았지만 말이다. 결국 그 날 사냥 대회는 중단되었다. 귀족들은 대부분 돌아가거나 암살자들의 추격에 가담했고, 나는 철통같은 호위를 받으며 궁궐로 호송되었다. 다시 암살자들이 덤벼들지 몰라 기사들이 몇 겹이나 둘러쌌던 것이다. 궁궐에 돌아온 나는 궁전 마법사의 치료를 받았다. 상처는 깨끗이 아물었지만 혹시 모르니 당분간은 오른쪽 팔은 사용하지 말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암살자 추적은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 되었다. 도망친 여섯 명 중 다섯 명이 끝까지 저항하다가 사살되고 한 명은 놓쳤다고 한다. 사실된 자들은 모두 남자들이라고 한다. 봄베르숲에서 암살자의 습격을 받은 후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그 때 왜 그렇게 인간들에게 신경을 썼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마족이라고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보다 제멋대로고 조금 더 냉정할 뿐이다. 예전에 아빠에게 왜 마족들은 인간계에 놀러가서 인간들이랑 결혼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물론 상대 인간은 마족인 것을 모르고 어느 순간이 지나면 마족은 그 때의 감정을 잊어버리지만 그 순간만은 정말 진지해 보여서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째서 마족이 인간과 얽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자 아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마족은 누구보다 자기 뜻대로 행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사랑하는 감정을 가졌다고 해서 애써 외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사랑을 솔직하게 받아들이지. 그런 감정을 품기 힘들지만 정을 준 상대에게는 헌신적이니까.] 그래서 마족들이 인간계에 내려가면 동료들과 모험을 떠나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기도 하는 것인가 보다. 그럼 나도 그런 단계에 들어서고 있단 말인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돼서 아양을 떠는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닭살이 돋았다. 역시 나는 그런 것보다 남을 괴롭히는 게 더 좋아.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몰라도 지금 내 생각은 그랬다. 물론 그 때 감정이 진심이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마족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존재니까. 그래서 천사놈들이 사악하고 평화와 균형을 유지하는데 해가 되는 놈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마음에 안 들면 싸그리 날려버리고 마음에 들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주기 때문이다. 자기들도 그러고 싶은데 질서에 얽매여 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들이 마음대로 하니까 질투를 부리는 것임에 틀림없다. 샘 나면 지들도 그러면 될 것 아냐. 하지만 다음에도 그렇게 할 지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솔직히 그 때 잠깐 머리가 어떻게 됐었던 게 분명해, 라는 마음도 조금 있었던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가. 보나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세상에 넘치는 것이 인간들인데 다시 사귀면 되지 않겠는가. 내가 인간들에게 정이 들었나보다, 라는 마음과 잠시 미쳤었지, 라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어쩌면 이 두 마음이 모두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나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넘어갔다. 그 때의 일을 되짚어보던 나는 시종의 말에 정신을 퍼뜩 차렸다. "마리엔 공주님, 라디폰 공작님께서 오셨습니다." "모셔라." 그 때 일이 있은 후 많은 귀족들이 병문안 차 찾아왔다. 찾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귀족들이었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오펠리우스 왕비는 아니꼽게도 암살 시도가 있었던 다음날 찾아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나를 껴안았다. 다행이라는 말을 되풀이하는 왕비를 걷어차 버리고 싶었지만 부르르 떨면서 참았다. 당연히 화를 참기 위해서였지만 오펠리우스 왕비는 얼마나 무서웠겠냐는 소리를 했다. 그러나 오펠리우스 왕비를 제외하면 병문안 와서 남의 속을 긁는 사람은 없었다. 르미엘 왕자마저도 말이다. 라디폰 공작 역시 병문안 차 온 것이겠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다른 이유도 있었다. 뭐라고 해도 그는 일단 내 편이니까. 라디폰 공작은 의례상의 인사를 건넨 후 입을 열었다. "몸은 어떠십니까?" "이제는 괜찮아졌어요." "다행입니다. 공주님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저도 난처해집니다. 그라냔 백작이 벌써 제가 공주님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니까요." 라디폰 공작의 말이 나를 걱정한 이유가 순전히 자신이 위험해질 것 같다는 이유때문인 것 같아 뾰로통해졌지만 원래 그런 인간인지라 그냥 넘어갔다. 그래도 자기 딴에는 걱정했다는 말이겠지. 아니면...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디폰 공작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벌써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미처 공주님의 신변에 신경쓰지 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 "아닙니다. 나도 예상하지 못했는 걸요. 아마 배후는 그들이겠지요." "그렇겠지요. 하지만 증거가 없으니 몰아붙이기도 그렇고. 그라냔 백작이 암살 길드와 접촉한 것은 포착했지만 그 걸로는 부족합니다. 다른 일을 의뢰했다고 잡아떼면 이쪽에서 할 말이 없습니다. 더구나 며칠 전에 오펠리우스 왕비께서 찾아오셔서 열연을 하고 가셔서 그런 말을 하기가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라디폰 공작은 오펠리우스 왕비 이야기를 하면서 싱긋 웃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나는 다시 그 때의 일이 떠올라 인상을 팍팍 썼다.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괘씸하다. 암살을 의뢰한 사람은 분명히 오펠리우스 왕비나 그 패거리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날 그라냔 백작이 그런 경고를 할 수 있겠는가. 너무 타이밍이 딱 들어맞지 않은가. 하지만 심증은 있어도 물증이 없으니 이만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으르렁거리면서 말했다. "그 때 일은 말하지 말아요.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요." "분부대로 합죠. 그리고 폐하께서 케스메 남작과 기사들에게 상을 내리기로 하셨습니다. 케스메 남작은 백작으로 지위가 올라갔고, 죠안 경은 자작의 작위를 수여하기로 했습니다. 나머지 기사들은 모두 작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후한 포상금과 함께 향후 10년은 세금이 면제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죽은 기사들의 가문에는 위로금이 주어지고 50년 간의 세금 면제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요?" 나는 라디폰 공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를 구했으니 그 정도 포상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다행히 죠안과 다른 로얄 기사의 상처는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건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마어마한 포상금을 받게 됐으니 잘된 일이었다. 죽은 사람들에게는 안됐지만. "참, 그리고 폐하께서 앞으로 공주님께 호위 기사를 붙이기로 하셨습니다." "네?" 나는 뜻밖의 말에 놀라서 반문했다. 호위 기사라는 것은 항상 붙어 다니면서 언제 생길지 모르는 불상사에서 왕족을 지키는 기사들이었다. 왕족의 호위 기사들은 대부분 로얄 기사들이 맡아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붙어 다니면 마음놓고 행동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나는 난감해져서 말했다.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설마 궁궐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기려고?" 내 말에 라디폰 공작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다른 곳보다는 안전하겠지만 궁궐이라고 해서 완전히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잊으셨습니까? 마리엔 공주님께서 독을 마시고 쓰러지신 곳이 바로 궁궐이지 않습니까? 물론 그들이 다시 암살자를 보낼 가능성을 희박하지만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습니다." "나도 내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어요. 호위 기사 같은 건 필요 없어요. " "송구스럽지만 저에게 그런 말씀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이 건 폐하께서 결정하신 일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지금 공주님께서 폐하께 달려가 호위기사는 필요없다고 하셔도 호위 기사는 붙을 겁니다. 전에 있었던 일로 폐하께서 단단히 화가 나셨습니다." "그런..." 내가 힘없이 중얼거리자 라디폰 공작이 부드럽게 타이르기 시작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아마 몇 달 정도만 참으시면 될 겁니다. 폐하께서 이제 안전하다고 생각되시면 호위 기사를 붙이지 않으시겠지요." 몇 달? 그럼 나보고 몇 달 동안 기사들을 줄줄이 달고 다니란 말이야? 나는 라디폰 공작을 설득도 해보고 레프스터 국왕을 찾아가 넌지시 호위 기사는 싫다는 뜻을 내비쳤지만 소용없었다. 라디폰 공작이 다녀간지 이틀 후에 나에게는 세 명의 호위 기사가 붙게 되었다. 그리고 그 호위 기사들을 본 나는 마음 속으로 라디폰 공작을 씹을 수밖에 없었다. 라디폰 공작, 당신이 수작부린 거지? 어떻게 에릭하고 세린이 여기에 끼어있냐고! #29- 그 후 #29- 그 후 내가 움직일 때마다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세 사람이 자꾸 신경이 쓰였다. 호위기사라 하더라도 물러가라고 명령을 내리면 근처에서 대기한다 하더라도 사라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호위기사로 붙은 세 사람은 달랐다. "왜 자꾸 따라오는 거야?" "저희는 공주님의 호위기사입니다. 따라다니는 것이 당연합니다." 에릭이 딱딱하게 대답했다. "나도 그건 알지만 솔직히 너무 따라다니는 것 아냐? 하루 종일 따라다니면 피곤하지도 않은 거야?" 나는 안데리사를 제외한 에릭과 세린에게는 반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같이 여행하면서 계속 반말을 썼기 때문인지 이 쪽이 더 편했다. 에릭과 세린도 안데리사가 없으면 말을 놓았지만 평소에는 이렇게 깍듯이 대했다. 지금은 안데리사가 있었기에 에릭은 존칭을 했다. "피곤합니다." 에릭의 말에 한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대개는 이런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대체로 '전혀 피곤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마십시오'라고 한다. 누가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겠는가. 평범하지 않은 건 알고 있지만 질문은 던지자마자 그렇게 말하는 건 너무한 것 아냐? 나뿐만 아니라 세린과 안데리사도 멍하니 에릭을 쳐다보았다. 특히 안데리사는 당황해서 에릭을 나무랐다. "에릭경, 그 무슨 말이오? 그렇게 사실대로 말하면 어떻게 하오?" "......" "앗, 그게 아니라 제 말은 그러니까 너무 솔직한 것도 좋지 않다는,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안데리사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치면서 자책했다. 그러나 이미 입 밖으로 낸 말을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당신도 그렇게 생각했군. 귀찮았지만 상대가 이렇게 나오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나랑 있는 게 그렇게 싫더냐? 나는 팔짱을 끼고 이 무례한 호위기사들을 보면서 비꼬았다. "오호, 그렇게 피곤하면 오늘은 그만 따라오지 그래요? 누가 궁궐까지 들어와서 습격하겠어요? 안그래요?" 안데리사는 자신의 발언 덕에 일이 꼬이자 쩔쩔매며 말했다.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요? 그럼 무슨 뜻이었죠?" "그건...에릭경이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뜻이었습니다." 안데리사는 손에 고인 땀을 바지춤에 문지르면서 말했다. 그래도 내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안데리사는 곤란한 듯 양미간을 찌푸렸다. "마리엔 공주님, 안데리사경도 무슨 다른 뜻이 있어 그런 말을 하신 것은 아닐 겁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해도 충심으로 말한 것이니 넓으신 아량으로 넘어가 주십시오." 안데리사가 난감해하자 세린이 대신 입을 열었다. 안데리사는 이 일이 아니더라도 나를 어려워해서 세린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내가 기분이 좋으면 먼저 다가가서 말도 걸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도망친 여자 암살자를 생각하면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다. 그 때 본때를 보여줬어야 하는 건데. 그 여자 앞으로도 나를 우습게 볼 거 아니야! 그리고 당한 것은 그대로 돌려줘야 되지 않겠는가. 항상 이런 생각을 하고 다니다보니 안데리사와 친해지기 위해 일부러 접근할 여력은 없었다. 그래서 안데리사는 호위기사가 된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나를 어려워했다. 내가 항시 골이 나있으니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안데리사를 잠시 바라보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안데리사경, 내가 오해했다면 미안해요." "아닙니다. 저야말로 무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아뇨. 계속 따라다니는데 피곤한 것은 당연하죠. 그래서 말인데 오늘은 이만 물러가는 게 어때요? 이제 조금만 있으면 저녁도 될텐데." 내 말에 에릭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우, 나도 할 일이 있단 말이다. 나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어째서?" "잠시라도 공주님께 눈을 떼지 말라는 것이 폐하의 분부셨습니다." 명령이라고 나오면 할 말이 없지. 나는 입맛을 다셨다. 이들은 오전 9시에 와서 저녁 9시가 돼서야 돌아갔다. 그 사이 이들이 내게 떨어질 때는 옷을 갈아입을 때나 목욕할 때, 화장실에 갈 때뿐이었다. 그나마도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시간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바로 무슨 일이 있냐는 질문이 따라왔다. 이들도 사람인지라 계속 붙어있을 수는 없지만-밥도 먹고 화장실도 가야하지 않겠는가- 그럴 때면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다가 서로 교대하곤 했다. 결국 나는 하루의 절반을 호위기사들과 붙어있어야 했다. 말이 절반이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의 대부분을 같이 있는 격이 되었다. 자유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럼 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언제하냔 말이다? 오늘도 잠자는 시간을 줄여야겠군. 부족한 잠은 낮잠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요즘 부쩍 낮잠을 많이 주무시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세린의 예리한 질문에 찔끔했지만 시치미를 뚝 뗐다. "그냥 피곤해서." "설마 이상한 짓을 하고 계시는 건 아니겠죠?" 에릭이 미심쩍어하며 물었다. 세린보다 더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그러나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했다. "이상한 짓? 그게 뭔데?" 내 말에 안데리사도 동조했다. "에릭경, 말을 가려서 하시오. 공주님께 이상한 짓이라니? 무례하지 않소." "아니라면 다행입니다." 나는 에릭의 말에 별 일도 아닌데 수선을 피운다는 식으로 행동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항상 무표정한 얼굴이라 나에 대해 잘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에릭, 너무 걱정하지마. 우리가 항상 붙어있고 병사들도 지키고 있으니까." 안데리사와는 달리 에릭의 말을 알아들은 세린도 마찬가지였다. 잠을 설쳐 의자에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자 에릭이 깨웠다. "졸리면 침대에서 자지 그래." 안데리사가 오늘은 사정이 생겨 없는 관계로 에릭은 오랜만에 말을 놓았다. 한참 졸다가 깨어난 나는 잠이 덜 깬 눈으로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니 다시 스르륵 눈이 잠겼다. 잠결에 에릭의 목소리가 웅얼거리며 들리자 뭔가 대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과는 달리 고개는 앞으로 고부라지기만 했다. 결국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였다. "히익." 나는 벌떡 일어나 손으로 목덜미를 감쌌다. 갑자기 목덜미에서 소름이 돋은 것이다. "어때, 에릭? 확실히 깨웠지?" "그렇군." "역시 목덜미에 입김을 불면 대부분은 일어난다니까." 세린의 말에 나는 내가 깨어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깨우려면 좋게 말로 깨울 것이지. 한참 단잠에 빠져 있다가 거의 강제로 깨어나다시피 나는 소리쳤다. "세린! 무슨 짓이야?" "아니. 침대에 가서 자라고. 그대로 잠들면 나중에 몸이 찌뿌드드하잖아." "네 덕분에 완전히 깨버려서 이제 잠이 안 와!" "그래? 미안." 지금 말 한마디로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었다. 그 것도 진정으로 미안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나는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인 후 입을 열었다. "지금 정말로......" "마리엔 공주님, 플로라 공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막 말을 쏟아내려던 나는 플로가 공주가 왔다는 말에 멈칫했다. 그동안 내가 찾아간 적은 많았지만 그녀가 먼저 나를 만나러 온 것은 처음이었다. 나와는 달리 플로라 공주는 귀족 영애들과 티파티를 가지거나 귀족가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참석하느라 바빴던 것이다. 사실 이 것은 공주라면 기본적으로 하는 것이지만 나는 귀찮다는 이유로 이리저리 내빼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아리란드 전하까지 아파서 더욱 바쁠텐데 찾아온 것이다. "플로라가 무슨 일이지?"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중얼거리자 세린이 말했다. "플로라 공주님을 계속 기다리게 할거야?" 세린은 플로라 공주덕분에 위기를 모면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싱글거렸다. 플로라 공주를 데려오라고 말한 후에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운이 좋군." "하늘의 도움이지." 세린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플로라 공주가 들어왔다. 플로라 공주는 예전보다 핼쑥해졌지만 여전히 밝았다. 밝다는 것이 플로라 공주의 최대 장점인 것이다. 우리는 발코니에 있는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고, 금새 차와 쿠키가 앞에 놓여졌다. 나는 플로라 공주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플로라, 오랜만이네." "그렇네요. 계속 찾아온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아프셔서 발걸음하지 못했어요. 죄송해요," "아니야. 이렇게 찾아와 준 것만도 고마워." 내 말에 플로라 공주는 안심했다는 듯이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저...그런데 몸은 괜찮으시죠?" 플로라 공주는 얼마 전에 있었던 암살시도 때문에 괜찮냐는 질문을 했다. 내가 암살자의 습격을 받았다는 소문은 날개 돋친 듯이 펴져 나가 플로라 공주는 물론이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플로라 공주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그 일이 걱정되어서였나보다. 아리란드 전하가 여전한 와중에도 늦게나마 찾아와 준 성의가 고마웠다. 나는 걱정이 가득한 플로라 공주를 향해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멀쩡해. 건강 빼면 시체라 금새 나았어." "하지만 놀라셨죠? 너무해요. 마리엔 언니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누구인지는 몰라도 절대로 용서하지 못해요. 아마 천벌을 받을 거예요. 그리고 도망친 암살자도 분명히 잡힐 거예요." 그 말을 오펠리우스 왕비에게 그대로 전해주겠니? 네가 암살자를 찾아가기는 힘들테니까 말이야. 플로라 공주는 마치 자신이 공격을 받은 것처럼 화를 냈다. 그 후에도 나와 플로라 공주는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아리란드 전하의 상태에 대해 대화를 주고 받았지만 다른 이야기도 많이 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거 돌아가기 싫어하고 있구만. 나는 플로라 공주의 시선이 자꾸 내 뒤쪽으로 쏠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내 뒤에는 호위기사인 에릭과 세린이 있었다. 플로라 공주의 볼은 처음 왔을 때와는 달리 상기되어 있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호라, 에릭이 그렇게 좋나? 에릭이 있어서 온 것은 아니겠지만 보고 나자 의식이 되는 모양이었다. 플로라 공주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것이 서툰지 에릭을 좋아한다는 것이 한 눈에 보였다. 아마 에릭도 느꼈으리라. 세린도 알아차렸는데 시선을 받고 있는 본인이 모를 리 없었다. 이러면 자구 놀려주고 싶은데 말이야. 하지만 아리란드 전하가 아파서 처져있다가 간만에 들뜬 것 같은데 찬물을 끼얹을 수 없었다. 입이 근질거렸지만 아리란드 전하가 나으면 몰아쳐서 놀려주리라 마음먹고 살며시 고개를 드는 사악한 마음을 내리눌렀다. 내가 요즘 너무 착해지는 것 같아. 정말 걱정이야. 걱정. 저녁을 먹은 후에도 일부러 플로라 공주를 잡아두었다. 그녀도 기뻐하는 듯 했다. 비록 놀리지는 못했지만 눈을 반짝이면서 플로라 공주와 에릭을 쳐다보았다. 플로라 공주는 에릭과 세린이 돌아가는 시간이 되어서야 자신의 궁으로 돌아갔다. 플로라 공주가 사라지자 그동안 참아왔던 웃음이 새어나왔다. "후후후." 웃음소리는 점점 커져 나중에는 참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오홋홋호~!" 에릭은 반응이 없었지만 세린은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신나게 웃던 나는 빛나는 눈으로 에릭을 보면서 말했다. "에릭은 좋~겠~네~." "......" "뭐야? 왜 아무 말도 없어? 쑥스러워하는 거야? 그런 거야?" "......" 에릭이 대꾸를 하지 않자 더욱 신이 난 나는 세린이 말림에도 불구하고 계속 놀려댔다. "에릭은 플로라를 어떻게 생각해?" "...생각해본 적 없어." 에릭은 마지못해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으래? 플로라, 되게 인기 많아. 에릭은 애인 없지?" 잠시 말을 끊은 나는 에릭이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을 이었다. 그동안 하는 걸로 봐서 절대 애인이 있을 리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잘됐네. 아예 이참에 사귀어 보는 게 어때?" 다음 순간 나는 입을 다물었다. 에릭이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껏 티격태격해도 이렇게 살벌하게 쏘아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 시선에 찔끔했다. 에릭은 잠시 차갑게 노려보더니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거칠게 닫히는 방문소리에 움칫하던 나는 가슴에 손을 대고 투덜거렸다. "뭐,뭐야? 왜 화를 내는 거야?" 내 말에 세린이 동조해주길 바랬지만 그조차도 여느 때와는 달리 쌀쌀맞게 말했다. "너는 사람의 마음을 알고 잘 처세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니야. 넌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몰라.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은 감정은 믿지조차 않아. 그래서 넌 에릭의 마음을 몰라." 세린이 차갑게 구는 것 역시 처음이라 당황했다. 세린은 말을 마치자 등을 돌리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문 앞에서 멈춰서서 다시 한마디했다. "그리고 내 마음도." 곧이어 문은 닫혔다. 방에 혼자 남은 나는 황당한 눈으로 에릭과 세린이 나간 문쪽을 보았다. 얼마 후 나는 정신을 차리고 불평했다.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뭐 그런 걸 가지고 화를 내는 거야? 그리고 내가 사람 마음을 모르긴 왜 몰라! 자기들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따위 말을 하는 거야?" 한참동안 화를 내다가 다시 문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다시 열릴 것 같은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풀이 죽은 나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화를 낼 것까지는 없잖아." -------------------------------- 캬캬캬캬~푸하하 지금 모험가는 광인버전입니다. 캬하하하 #29- 그 후 #29- 그 후 다음날 에릭과 세린은 평상시처럼 호위임무에 임했지만 먼저 말을 거는 경우는 없었다. 그렇다고 자존심 숙이고 내가 먼저 말을 걸기도 싫었다. 이틀 전만 해도 자신만 소외감이 들 정도로 화기애애하게 이야기하던 우리들 사이에서 냉기류가 흐르자 안데리사는 어리둥절해했다. 그리고 갑자기 내가 자신에게만 말을 걸자 당황했다. 그래도 나는 세린과 에릭을 옆에 두고 여보라는 듯이 안데리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일부러 그와의 대화가 무척이나 재미있는 것처럼 굴면서 말이다. "안데리사경, 그 때 가스톤경이 앞으로 나가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어땠을 것 같아요?" "그,글쎄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 "힌트를 줄게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할 말을 잃었어요." 내 말에 안데리사는 손가락을 부딪쳐 딱소리를 내며 말했다. "아, 알았습니다. 굉장히 노래를 잘 불렀다 보군요. 모두 넋을 잃을 정도면요." "틀렸어요. 그 반대였어요. 끔찍하게 못 불러서 사람들이 정신이 나가버린 거예요." "네? 아무렴 그 정도로 노래를 못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나는 에릭과 세린쪽을 힐끔 쳐다봤다가 다시 눈을 돌리고 말했다. "하지만 정말인 걸요. 내 평생 그런 음치는 처음이었어요. 그건 이미 노래의 수준을 넘어서 정신 공격이었다니까요. 아마 적군들 앞에서 가스톤이 있는 힘껏 노래를 부르면 싸울 필요도 없이 우리가 이길 걸요. 적군들이 모두 거품을 물고 쓰러질 테니까요." "하하하, 설마요." 나는 안데리사를 따라 웃으면서 다시 한번 옆눈질을 했다. 그러나 에릭과 세린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사실 두 사람 중 아무라도 말을 걸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하다 못해 이야기에 끼고 싶어하거나 안절부절못하는 낌새가 느껴지면 선심 쓰는 척하며 말을 걸어보려고 했던 것이다. 오늘 아침까지 두 사람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 투덜거리던 나는 누군가 이 억울한 사정을 알고 맞장구쳐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캐롤을 붙잡고 늘어졌다. 내 말을 모두 들은 캐롤은 그들의 행동을 괘씸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잘못도 있다고 말했다. 도대체 내 잘못이 뭐란 말인가? 그거 하나 놀린 것 가지고 그렇게 잘못했다고 할 수 있는가? 당연히 나는 항변했다. 그러자 캐롤은 놀리는 것 자체는 매번 있어왔던 일이니 상관없지만 남녀관계에 대해 말하기 전에는 항상 심사숙고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면 장난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고 넘어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상당히 기분 나빠한다는 것이다. 특히나 에릭과 세린의 행동으로 미루어 봐 따로 좋아하는 인물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연륜과 경험이 풍부한(본인의 주장이다) 캐롤의 주장이었다. 그러면서 눈에 불을 켜고 나를 설득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라는 둥, 남녀관계는 한번 소문이 나면 사실이 아니어도 치명타라는 둥, 정말 좋아하는 사람과의 사이가 잘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그런 말을 들으면 누구든지 화를 낸다는 둥 온갖 소리를 늘어놓았다. 역시 남의 연애이야기를 하는 것은 무척이나 재미있기 때문인지 급기야 자기 멋대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에릭은 평소의 냉담한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지 못해 혼자 괴로워한다. 그리고 그 상대는 약혼자가 이미 있는 아리따운 귀족 영애다. 그녀 역시 에릭을 좋아하지만 가문의 명예 때문에 파혼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 약혼자는 바로 세린이었던 것이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가 사랑의 라이벌이 돼버렸다. 세린은 약혼녀의 마음이 에릭에게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너무 사랑하기에 순순히 물러날 수가 없다. 두 사람은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지내지만 사실 너무 가슴이 아프다. 우정이냐? 사랑이냐? 그 것이 문제로다] 바로 이 것이 캐롤이 지어낸 '로얄 기사의 사랑'이라는 제목의 소설이다. 정말이지 유치찬란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캐롤은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 그녀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지만 두 사람에게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부분은 맞는 것 같았다. 캐롤은 사랑은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떠버리면서 나보고 그냥 이해하라고 했다. 사람은 사랑이라는 감정과 관련되면 평소 자신의 페이스를 잃는 경우가 많다고 말이다. 처음에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나도 캐롤의 열성적인 설명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쬐끔 잘못하기도 했으니 넓은 마음으로 넘어가 주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솔직히 에릭과 세린 이 두 사람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회복시켜 좋아하는 상대가 누군지 캐묻고 싶은 욕망이 밑바닥에 깔려있었다. 세린이야 그렇다 쳐도 에릭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니, 후후후. 엉큼한 것. 관심이 없는 척해도 그런 사람이 있었구나. 그러나 내가 먼저 말을 거는 것은 쑥스럽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내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면 은근슬쩍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했다. 다시 한번 에릭과 세린의 눈치를 살폈지만 여전히 냉담했다. 도대체 내가 왜 눈치를 봐야하나, 하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예전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예전이라고 해봐야 아주 오래 전도 아니었다. 바로 16개월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 때 이런 상황이 벌어졌으면 아주 사생결단을 냈을 것이다. 싸우고 나서 눈치를 보는 건 언제나 내가 아니라 상대였다. 물론 나와 친한 다섯 마족(부모님, 센, 제스, 다크리언)과 한 명의 다크 엘프(가야)의 경우는 달랐다. 이들 중 한 명과 싸우게 되면 처음에는 버티다가 결국 내가 먼저 숙이고 들어갔다. 그들과 사이가 나빠지길 원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지금 내가 인간을 상대로 먼저 말을 걸어볼까, 하고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설마 이들과의 관계가 망가지길 두려워하는 걸까? 그러나 나는 곧 그 생각을 부정했다. 아니다. 그냥 에릭과 세린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한 것뿐이다. 나는 계속 안데리사의 옆에 찰싹 붙어서 쫑알거렸다. 그러나 안데리사가 늦은 점심을 먹으러 자리를 비우자 혼자서 멀뚱거리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에릭과 세린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얼굴로 서있기만 했다. 먼저 상대의 마음을 알아채고 거기에 맞게 대처했던 나인지라 생각을 전혀 읽을 수가 없자 초조해졌다. 보통은 이 정도로 불안해하지 않지만 항상 상대의 마음을 먼저 읽고 행동했기에 지금 상황이 어색했다. 더군다나 왠지 내 마음을 에릭과 세린이 알고 있는 것 같아 골이 났다. 나는 벌떡 일어나 정원으로 나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뒤따라오는 두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자 더욱 걸음을 빨리 했다. 한번 당해보라는 생각에 갈수록 더욱 빨리 걸어갔다. 그러나 에릭과 세린은 힘든 기색도 없이 잘만 따라왔다. 빌어먹을 것들. 내가 발을 멈추자 에릭과 세린도 딱 멈춰 섰다. 다시 움직이자 두 사람도 따라 걸어왔다. 내가 움직이는 대로 그대로 따라오는 것이다. 한참동안 걷던 나는 홱 뒤로 고개를 돌리고 소리쳤다. "따라오지마!" 심통이 난 나는 그대로 뛰었다. 에릭과 세린이 뛰어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 역시 있는 힘껏 뛰는지라 쉽게 따라잡지 못했다. 이대로 떨쳐버리고 혼자 놀테다. 그런 생각으로 뛰던 내 눈에 옆쪽에서 뭔가 날아오는 것이 언뜻 보였다. 정신을 다른 곳에 쏟고 있던 터라 피하기 힘들 때가 돼서야 알아차린 것이다. 이대로 맞는 건가? 그러나 날아오는 거무스레한 물체가 무엇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시야가 바뀌었다. 정원 대신 검은 색의 옷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등 쪽에서 충격이 느껴졌다. 내가 갑작스런 상황이 정리가 되지 않아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괜찮아?" 걱정스런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에릭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뒤에서 따라오던 에릭이 나를 안고 몸을 날린 모양이다. "어...괜찮아." 내가 기계적으로 대답하자 에릭이 빤히 쳐다보았다. 나도 눈을 깜빡이며 에릭을 보았다. 의도했다기 보다는 앞에 그가 있기에 자연스럽게 바라보게 된 것이다. "어이,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세린의 말에 정신을 차린 나는 그 때서야 비로소 현재의 상황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나는 땅바닥에 누워있었고, 에릭은 내 머리맡에 손을 짚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과거 내가 에릭에게 드레스를 입히기 위해 취했던 자세와 정반대였다. 에릭도 이제야 자신의 모습을 깨달았는지 황급히 일어났다. 에릭답지 않게 당황하는 바람에 쓰러져있는 나는 일으켜줄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긴 이게 소문이 나면 에릭이 좋아한다는 사람이 오해하겠지. 아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저 놈은 그런 이유가 아니어도 나를 일으켜줄 친절 따위는 없는 놈이다. 그런 인간성에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특수 상황까지 더해졌으니 이건 당연한 반응이야. 혼자 힘으로 일어나면서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드레스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자 세린이 다가왔다. "다친 곳은 없어?" "응, 에릭 덕분에 멀쩡해." "다행히 암살자는 아니었던 모양이야. 방금 날아온 건 돌멩이였거든. 하지만 돌멩이가 날아온 쪽으로 가보니까 아무도 없었어. 그새 도망친 것 같아." 돌멩이? 세린이 가리키는 물체를 보니 과연 돌멩이였다. 그 것도 회색의 짱돌. 도대체 어느 놈이야? 단검이 아닌 돌멩이를 던진 것을 보니 궁전 내부에 있는 사람의 소행이 틀림없었다. 어느 암살자가 고생 고생해서 궁전에 숨어 들어와 놓고 목표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물론 맞으면 아프기야 하겠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감히 이 나에게 돌멩이를 던진 간 큰 놈은 누구일까? 시녀? 시종? 병사? 그러나 용의자가 너무 많아 그 중에서 범인을 찾아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누굴까? 누구지? 누구야?" "미안하지만 놓쳐버려서 잘 모르겠는데. 나한테 그렇게 화를 내면서 물어봐도 소용없어. 대신 앞으로는 절대 혼자 다니지마." "나도 몰라." 나는 세린과 에릭의 말에 수긍했다. 돌멩이를 던지자마자 내뺐는지 얼굴도 보지 못했는데 그들이라고 어찌 알겠는가? 그러던 나는 불연 듯 한가지 사실을 깨닫고는 돌멩이에 대한 것은 잊어버리고 말았다. "어? 너희들, 오늘 처음으로 나한테 말걸었어." 내 말에 세린은 어색한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네가 화가 나있는 것 같아서 말을 걸 분위기가 아니었잖아." "뭐? 내가? 무슨 소리하는 거야? 너희들이 화내고 있었잖아." "아침부터 계속 노려봤잖아." 이상하다는 듯이 세린이 말하자 에릭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언제 노려봤다고 그래? 난 곁눈질밖에 안했는데. 혹시 눈매가 매서워서 그런가? 생각해보니 그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엔의 눈매는 사나운 쪽에 속하니 옆눈질을 하면 노려보는 것으로 보일 지도 몰랐다. "노려보지 않았어. 그냥 옆눈질한 것뿐이야. 눈꼬리가 올라가서 그렇게 보이나?" 손가락으로 눈꼬리를 위로 치켜올리며 말하자 에릭과 세린이 피식 웃었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봤다는 것이 우습기도 했지만 어찌되었든 좋았다. 그렇게 불만스러웠던 마음이 스르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놀려서 오늘까지도 화가 나있는 줄 알았지. 캐롤이 이런 문제는 상당히 오래 간다고 했거든." "사실 너에게 화를 낼 것까지는 없었던 일이야. 둔한 것 가지고 몰아세울 수는 없으니까." 세린의 말에 나는 눈을 부라렸다. 뭐? 둔해? 흥, 너희들이 오기 전까지 캐롤에게 교육받았단 말이다. 그리고 이 몸은 사랑의 전령사 역할을 해본 적이 있어. 비록 실패했지만. 나는 두 사람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보이자 당차게 말했다. "날 무시하지마. 너희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 내가 둔하지 않다는 걸 증명할 겸 너희들을 도와주겠어." "도와줘? 어떻게 말이야?" 세린이 반문하자 나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좋아하는 사람과 다리를 놓아줄게. 걱정하지마. 전에도 이런 일 해본 적이 있어. 말만 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야? 에릭부터 말해볼래?" 사실 에릭쪽이 더 궁금했다. 이 얼음같은 놈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굴까? 그러나 에릭은 대답 대신 엉뚱한 말을 불쑥 했다. "둔하군." 지금까지 나는 맹세코 둔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스스로도 눈치가 빠르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자존심에 타격을 받은 나는 목소리가 커졌다. "아니야! 난 둔하지 않아!" "둔해." "둔하지 않다니까!" "둔해." "이~" 나와 에릭이 유치한 말다툼을 벌이자 세린이 끼어들었다. "에릭 말이 맞아. 왜냐면 네가 다리를 놓기에는 곤란한 사람이거든." 세린마저 나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자 항변하려던 나는 멈칫했다. 다리를 놓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혹시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야?" "아니, 아주 잘 아는 사람." 나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안색을 굳혔다. 설마...내 얼굴이 조금씩 굳어가자 에릭의 표정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역시 내 짐작이 맞은 것 같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난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고민하던 나는 결국 결심을 하고 입을 열었다. "에릭, 안돼! 사라경은 안돼!" 사라는 가스톤을 좋아한다. 그런데 에릭이 사라를 좋아하다니. 내가 에릭을 밀어주면 불쌍한 가스톤을 어쩌란 말인가? 에릭은 집안도 좋고 젊고 잘 생겼으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여자를 구할 수 있지만 가스톤은 아니었다. 아마 사라를 놓치면 평생 독신으로 살다 죽을 것이다. 사라처럼 눈에 뭐가 씌인 여자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 한은 말이다. 내 마음은 부족할 것 없는 에릭보다 인생이 불쌍한 가스톤에게 기울렷다. "에릭, 마음을 돌려. 사라경은 가스톤을 좋아하는 거 알잖아. 솔직히 가스톤이 사라가 아니면 장가를 갈 수 있겠어? 그리고 사라경은 너보다 나이도 많잖아. 내가 훨씬 좋은 여자를 구해줄게. 그러니 포기해." "...사라경을 좋아하는게 아냐." 한참 후 에릭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면서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말했다. "진짜? 거짓말하기 없기야. 정말이지?" "그래." 에릭에게 다시 한번 다짐을 받은 나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에릭이 라이벌이면 가스톤이 불리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시합 자체가 안 된다. 사라도 처음에야 가스톤에게 쏠리겠지만 객관적으로 봐서 에릭이 가스톤에게 밀리는 것이 하나라도 있어야 말이지. 그런데 사라가 아니면 누구지? 어제 반응으로 봐서 플로라 공주는 아니었다. 그럼 누구지? 로즈? 엔젤? 미나? 데미나 공주? 닥치는 대로 아는 여자들을 떠올려봤지만 확실히 이 사람이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나는 골치 아픈 쪽은 잠시 뒤로 미뤄두고 비교적 손쉬워 보이는 세린쪽에 손을 댔다. "그럼 세린은 누구야?" 내 질문에 세린은 쓴웃음만 지었다. 뭔가 이 쪽도 복잡한 것 같았다. 이 인간들이 왜 전부다 곤란한 사람만 좋아하는 거지? 손쉬운 여자들도 많잖아. 나는 분위기를 조금 가볍게 해보려고 농을 던졌다. "설마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 "......" "......" 서로를 바라보던 세린과 에릭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눈을 돌렸다. 나는 의외의 사태에 당황했다. 허억,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한다냐? 이런 걸 두고 삼각관계하고 하지, 아마? 설마 캐롤의 그 유치찬란한 추측이 맞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세린이 약혼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는 것을 떠올리고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복잡한 관계. 친구끼리 같은 여자를 좋아하게 되다니. 캐롤이 들으면 좋아할 상황이군. 어느 한쪽을 밀어주면 다른 한쪽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격이 되었다. 이 와중에도 과연 이 두 사람이 좋아하는 여자가 누굴까, 하는 호기심이 무럭무럭 피어났다. 그러나 차마 물어보지는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그러자 세린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밝게 말했다. "하하, 에릭과 나는 선의의 경쟁자야.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돼. 그리고 그 여자는 너무 둔해서 절대 모를거야."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여자들의 인기를 한 몸에 지닌 에릭과 세린이 동시에 좋아하는 사람이. 궁금했지만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 #29- 그 후 문이 열리자 정보 길드에서 건네준 몽타주와 꼭 닮은 장신의 여자가 들어왔다. 차돌처럼 야무진 체격의 여자는 오자마자 헤라 아줌마에게 인사를 건넸다. 전에 보았을 때는 냉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부드러운 분위기는 아니고 메마르고 황량한 느낌이었다. 수제노의 인사에 헤라 아줌마는 빵을 굽던 손을 멈추고 반갑게 맞이했다. "수제노, 어서 와. 피곤하지? 지금 먹을 걸 만들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참, 너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어." "나를?" 의아한 얼굴로 집 안을 둘러보던 수제노는 이제는 파이를 다 먹고 우유를 마시고 있는 나를 보더니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우유는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지 오래였지만 막 젖소에서 짜낸 것처럼 고소했다. 아마도 기분이 좋기 때문이겠지. 흥분과 긴장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감정이 지배하는 몸은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우유를 흡수했다. 마지막 한 모금까지 마시고 턱을 타고 주르륵 흐르는 우유 한 방울을 손으로 닦아내기 전까지 수제노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지간히도 놀랐나 보군. "너, 너." 나를 가리킨 수제노의 손가락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어나는 호수처럼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그동안 너무 보고 싶었어. 수제노는 내가 보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너라니? 나를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라고. 하지만 봐줄게. 우리 사이에 그 정도도 못해주겠어, 안 그래?" "무슨 속셈이야?!" 수제노가 소리치자 주방에 있던 헤라 아줌마가 놀라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그러나 헤라 아줌마를 제외하면 이 모든 상황을 예상했던 나는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딱딱한 나무의 서늘한 감촉이 들을 통해 전해져왔다. 그동안 나를 무겁게 짓눌려왔던 마음의 짐이 조금은 벗겨져서 숨을 쉬기가 편했다. "우선 앉지 그래? 올려다보기가 힘들어서 말이야. 그 때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몰랐는데 정말 키가 크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만족스럽게도 여유로웠지만 차분했다. 수제노는 홀로 떨어져서 사자를 만난 늑대처럼 경계를 풀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여차하면 나를 베어버릴 기세로 허리춤에 매달린 검집에 가있었다. "헤라 아줌마 말로는 짐을 호위한다던데 오늘도 일이 있었나 보니? 데사스미 남작가로 갔지?" 내 말에 수제노는 헤라 아줌마와 나를 번갈아 보면서 어쩔 줄 몰라했다. 헤라 아줌마에게 자신이 암살자라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알리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내가 암살자라는 것을 불어버린다는 식으로 협박하자 기세가 한 풀 꺾이고 말았다. 헤라 아줌마에게 수제노가 가장 소중한 것처럼 수제노에게도 헤라 아줌마가 가장 소중한 모양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악당이라고 손가락질해도 언니인 헤라 아줌마에게만은 착한 아이로 남고 싶을 정도로. 나는 그 약점을 붙잡고 말했다. "자, 앉지 그래?" 이 곳은 분명 수제노의 집임에도 불구하고 맞은편에 와서 앉는 그녀의 동작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경계심 때문인지 암살자로서의 습관 때문인지 손은 여전히 검집 근처에 가있었다. 수제노는 놀란 얼굴로 이 쪽을 보고 있는 헤라 아줌마를 쳐다보았다. 놀랍게도 그 눈이 애처로워 보였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대강 짐작은 갔다. 왕족에게 해를 가하는 자는 신분을 막론하고 일가 전체가 몰살을 당한다. 귀족마저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하물며 평민이면 어쩌겠는가. 기르는 개마저도 이 황금빛 심판의 낫을 비켜갈 수는 없었다. 수제노의 얼굴은 치열하게 여러 개의 가정을 생각해보며 고민하고 있는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급작스런 상황에 표정을 감출 정신도 없는 모양이다. 여기서 내 입을 막아버리면 무사할 지도 모르지만 수제노는 망설이고 있었다. 설마 공주가 호위 기사도 없이 혼자 찾아왔냐 싶겠지. 이 근처에 그들이 숨어있다면 나를 처치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편하게 죽지도 못하고 실컷 고문당하고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자신의 정체를 알면서도 병사들을 끌고 와 덮치지 않자 더욱 머리가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행여나 살려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군. 수제노가 계속 인상을 찡그리자 헤라 아줌마가 살며시 물어봤다. "무슨 일이니? 두 사람 서로 사이가 나쁜 거야?" "아뇨. 오랜만이라 수제노가 당황해서 그런 거예요. 그렇지?" 수제노는 뭔가 말을 할 것처럼 입을 벙긋거렸지만 곧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나란 말이야. 헤라 아줌마는 안심했는지 큰 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난 또 싸움이라도 나는 줄 알았지. 수제노와 마리엔이 싸우면 어느 쪽을 응원해야할지 곤란하다고. 그러니까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 "언니, 마리엔 공...이 애를 어떻게 알지?" 헤라 아줌마의 말에 수제노는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기묘한 얼굴로 물었다. "어머, 내가 자주 이야기해줬잖아. 부상의 딸이 종종 놀러와서 엄청 먹고 간다고 말이야." 내가 그렇게 많이 먹었나? 나는 헤라 아줌마의 말에 볼을 긁적이기만 했고 수제노는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설마 마리엔 공주와 이름이 같다던 여자애가 이 애였어?" "응. 그런데 재미있는 우연이네. 너도 마리엔을 알고 있다니. 그런데 마리엔 말로는 빚을 갚으러 왔다던데 돈을 빌려줬니? 많은 액수가 아니면 천천히 갚으라고 하지 그래? 올 때마다 매상을 톡톡히 올려놓고 가거든. 앗! 이 냄새는...빵이 타잖아!" 헤라 아줌마는 부리나케 주방으로 달려들어갔다. 거실에 남은 사람은 나와 수제노 뿐이었다. 수제노는 빚을 갚으러 왔다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 아주 심각해졌다. 어느새 충격에서 벗어났는지 침착해져 있었다. 표정도 당황해서 시시각각 변하던 것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도 고요한 바다처럼 덤덤해졌다. 그 것이 숙련된 암살자이기 때문인지 조금만 방심하면 목숨이 바람에 날려가 버릴 먼지처럼 사라져버릴 수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여길 알아낸 거지?" "돈 좀 썼지. 정말 힘들었어. 덕분에 보석도 상당히 많이 날려버렸지." 나는 이 여자를 얕잡아보지 않는다. 이 여자만 아니었으면 크리베서크만으로 암살자들을 없앨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여자의 재치로 수세에 몰렸다. 지금도 상황이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단번에 내 목을 그어버릴 과감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초조함을 이기고 함부로 검을 꺼내지 않을 신중함도 지니고 있었다. 몸은 언제든지 수제노를 공격할 수 있도록 긴장하고 있었고, 가장 간단하면서도 타격을 줄 수 있는 마법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나 심적으로 유리한 것은 나였다. 난 지켜야 할 사람이 없지만 수제노는 헤라 아줌마가 있으니까. 수제노는 눈동자를 굴려 나를 탐색하면서 작게 말했다. "어쩔 셈이지?" "훗, 어쩌다니? 당연히 정당한 복수를 해야지." "복수?" 검집에 가있는 수제노의 손이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처럼 꿈틀거렸다. "맞아. 하지만 이 이상은 나가서 이야기하도록 할까? 헤라 아줌마가 있는 곳에서 싸우고 싶지는 않을테지?" 내가 일어서자 수제노가 잠시 망설이다 일어섰다. 이게 함정이라 하더라도 헤라 아줌마가 있는 한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물론 먼저 문 쪽으로 가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암살자에게 등을 보이는 건 죽여달라고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으니까. 나와 수제노가 나란히 서서 문을 향해 걸어가자 헤라 아줌마가 다시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둘 다 어디를 나가니? 이렇게 늦었는데. 그리고 조금만 있으면 음식이 다 될 거야." "됐어. 금방 나갔다 올게." 수제노의 말에 나는 씩 웃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집을 나온 나와 수제노는 한동안 말없이 걷기만 했다. 서로를 경계하느라 어깨를 같이 하고 걷는 모습이 절친한 친구가 꼭 붙어있는 것과 비슷해서 우스웠다. 어쩌면 친한 친구마냥 붙어 다니는 사람 중에도 나와 수제노처럼 서로에게 칼을 겨루고 있는 경우가 있을지도. 사람이 없는 곳에 도착하자 우리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멈춰 섰다. 수제노는 재빨리 주변을 살펴보며 기사나 병사들이 숨어있는지 알아보려고 했다. "병사들은 없어."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믿거나 말거나 당신 자유지만 난 사실을 말했어. 이래봬도 난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야. 당신에게 당한 것이 억울해서 이렇게 온 거지만 다른 사람들의 도움은 받고 싶지 않아." "그럼 혼자 날 상대하겠다는 거냐? 마법사 주제에?" 수제노는 어이가 없는지 비아냥거렸다. 마법사 주제에? 마법을 너무 우습게 보는군. 허약한 마법사들은 우습겠지만 난 그렇지 않은데 말이야. "맞아. 혼자 상대할 거야. 하지만 날 우습게 보지마. 그 때는 짐들이 있어서 제대로 싸우지 못했을 뿐이야." 내가 차갑게 대꾸하자 수제노의 손이 움직이려 했다. 성질도 급하지. 당장이 아니어도 실컷 싸우게 될 거야. 나는 장난스럽게 한 쪽 눈을 찡긋하면서 말했다. "서두르지마. 여기서 싸우면 피차 곤란하잖아? 밖으로 나가도록 하지." "나는 아직 싸운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 그럼 당장 군대를 끌고 올까? 왕족에게 해를 가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알고 있겠지? 당신은 물론이고 헤라 아줌마도 무사하지 못할걸. 내 입을 막아야할 필요가 있잖아. 그러니 싸워야지." 내가 웃음을 띄운 채 말하자 수제노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상황은 싸움만으로 해결을 봐야하는 것이다. "좋다. 그런데 어디서?" 얼마 후에 수제노의 입술이 열렸다. "현명한 선택이야. 일단 근처에 아무 것도 없어야 싸우기 편하겠지? 수도 밖으로 나가지." 우리는 다시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이미 출입 시간이 지나 성문을 지키는 경비병이 세웠지만 금화 한 닢을 건네자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었다. 돌아가면 저 놈 자르라고 말해야겠어. 성문을 빠져나오자 불빛이 은은하게 밝혀진 수도와는 다른 세상이 드러났다. 밤의 정적 안에서 나무도, 새도, 바람도 잠들어 있었다. 잠들지 못한 귀뚜라미의 노래만이 공허한 공간을 울리고 있었다. 그 위를 달빛이 모든 것의 위에 군림하는 밤의 여왕처럼 넘실거렸다. 행동하는데는 상관없지만 싸우려면 좀 어둡군. 성벽에서 멀어질수록 주위는 조용해졌다. 그리고 평화로웠다. 우리들은 침략자들처럼 밤의 정적과 평화로움을 깨고 걸어갔다. 더 이상 성이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멈췄다. 싸우는 것을 보고 병사들이 몰려오면 곤란했던 것이다. 이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너른 들판과 달빛을 받아 기묘한 모습으로 변한 나무들뿐. "여기가 좋겠군." 수제노는 내가 혼자 왔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그런 의심이 목숨을 오래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긴 하지. 그러나 의심한다고 해서 없는 매복자들이 생겨날 리는 없었다. 잠시 후 수제노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정말로 매복은 없는 건가?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군." "말했잖아. 내 일은 내가 해결해. 특히 복수는 직접 해야 상쾌하지 않겠어?" 내가 봉을 빙빙 돌리며 말하자 수제노는 완벽하게 검손잡이에 손을 가져가 댔다. "왕족은 모두 너처럼 소름이 돋을 정도로 끈질기나?" "아니, 나는 특별한 경우지. 지금까지 나를 건드리고 아무 이유도 없이 무사한 자는 없었어." "그래? 그럼 내가 첫 번째로 무사한 자가 되겠군." 건방진 것. 누구 맘대로. 평화로운 들판은 나와 수제노의 살기가 얽히고 싸우면서 전쟁터가 되었다. 서로간의 찌를 듯한 살기가 느껴졌다. 나는 자존심을 걸고, 수제노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다. 대치상태가 계속되는 가운데 수제노가 입을 열었다. "그럴 리는 없지만 만에 하나 내가 진다면 헤라 언니는 건드리지 마라. 어차피 목표는 나 하나 아닌가? 언니는 내가 암살자라는 것도 모른다." "그러도록 하지. 그런데 시간이 없으니 얼른 본론으로 들어가는게 어때?" "무슨 소리지? 달의 위치를 보면 이제 새벽 3시 정도다. 해가 뜨기 전까지는 시간이 많은데.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거냐?" 수제노의 말에 나는 빈 손의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면서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당신이야 상관없을지 몰라도 나는 한밤중에 몰래 빠져나온 걸 들키면 끝장이야. 특히 호위기사놈들이 난리를 칠 거야. 그러니까 시녀들이 깨우기 전에는 가야돼. 여기서 성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리는 줄 아는 거야? 그리고 증거인멸 할 시간도 있어야지. 그러니까 한 시간 안에 끝내야돼. 네가 늦게 와서 이렇게 됐잖아." 내 말에 수제노의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약간의 황당함이 섞여 들려왔다. "나를 한 시간 안에 끝내겠다고? 우습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물론. 만약 1시간 동안 싸웠는데도 살아남으면 살려주지."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빛의 구가 생겨나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싸우기에 딱 좋은 밝기야. 수제노는 갑자기 생긴 빛의 구를 잔뜩 경계하면서 자세를 잡았다. "걱정마. 이건 그냥 빛일 뿐이니까. 아마 한 시간 후면 꺼질걸. 시계 대신이라고 생각하면 돼." 차가운 교교한 달빛이 공기 중에 깨지면서 나와 수제노를 감쌌다. #29- 그 후 #29- 그 후 스산한 밤바람이 불어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부드럽게 쓸어갔다. 풀들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던 바람은 자신의 앞길을 막아선 나와 수제노의 지친 몸까지도 살며시 안아주었다. 마치 어린 짐승을 가슴에 품는 어미처럼. 한참 싸우던 중간에 불어온 바람은 힘을 불어 넣어주는 생명수와 같았다. 때로는 시퍼런 어금니를 드러내고 달려드는 하얀 괴물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는 어머니의 손길과 같은 바람의 마법이었다. 하늘에서 불어오는 투명한 파도는 옷자락을 흔들고 장난치듯이 머리카락을 흩트려 놓고 잽싸게 도망쳤다. 수제노는 생각보다는 어려운 상대였다. 검술 실력만 본다면 보나인들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실전에서 다져진 예리한 감각과 날카로운 공격은 순식간에 상대를 죽음으로 이끄는 상어의 날카로운 이빨과 같았다. 하지만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나였다. 체력이 약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최소한의 동작으로 움직이고 적절한 때에 마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다지 심하게 지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온 탓도 있었다. 반면에 수제노는 전혀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싸우는 것이라 체력 소모가 심했다. 암살자의 특기인 기습이 소용없어진 지금 그녀는 감각이 뛰어난 검사에 불과했다. "어때? 내 실력 괜찮지?" 나는 또다시 대치 상태에 들어간 틈을 타 씩 웃으면서 질문을 던졌다. 결정적인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승리는 확정적인 것이기에 말을 걸 여유도 생긴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긴장을 푼 것은 아니다. 한순간의 방심이 손바닥 뒤집듯이 승패를 순식간에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내 질문에 수제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입은 열지 않았다. "무언의 의미는 긍정인가? 역시 내가 대..."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말하는 사이에 수제노가 달려든 것이다. 몸을 낮추고 빠르게 달려오는 모습은 흡사 수면 위를 비행하는 제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녀의 리쇼르는 정확하게 내 목을 노리고 휘둘러졌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터라 쉽게 막을 수 있었다. 리쇼르가 창대에 막히자 수제노는 튕기듯이 물러났다가 다시 지면을 박차고 뛰어왔다. 예리하게 찔러 들어오는 검을 창대로 막을 수는 없는 노릇. 그렇다고 창을 휘두르기에는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피해야하겠지만 미리 피해버리면 진로를 바꿔 다시 공격해올 수도 있기에 끝까지 정신을 집중하고 리쇼르를 보았다. 리쇼르가 거의 코앞까지 왔을 때 옆으로 빠진 나는 창을 휘둘렀다. 뭔가 걸리는 느낌이 창대를 타고 전해져왔다. 수제노가 복부에 창을 맞고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창대에 맞아 치명타는 아니었지만 잠시 동작을 멈춘 작은 틈이 생긴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충격으로 상체를 숙이고 있는 수제노에게 창을 내질렀다. 수제노는 황급히 몸을 옆으로 비키며 피했지만 이 것은 내가 원하던 것이었다. 애초에 힘을 주지 않은 창을 짧게 끊고 다시 내지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창날은 달빛을 받아 섬뜩하면서도 아름다운 빛을 흩날리며 허공을 갈랐다. 그러나 정확히 수제노의 양미간을 노리며 갔던 창날은 아쉽게도 그녀의 뛰어난 반사신경으로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완벽하게 피하지는 못했는지 수제노의 하얀 뺨 위로 붉은 핏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수제노는 반사적으로 피한 것인지 피하고도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호호호, 어떠냐? 라고 뻐기는 대신에 다시 한번 창을 쥐고 있던 팔을 움직였다. 이번에는 회전까지 넣어서 아주 강력하게 말이다. "윽!" 수제노는 신음성을 내며 어깨를 감쌌다. 창이 오른쪽 어깨를 관통했다. 충분한 힘과 회전력까지 더해진 창은 무서운 위력을 발휘하는 법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비명을 지를 정도로 심한 상처였는데도 수제노는 항상 조용히 움직이는 암살자답게 입술을 깨물며 비명을 삼키고 있었다. 이제 슬슬 끝내볼까? 제법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인지한 나는 약간 서두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정신을 차릴 틈도 주지 않고 수제노의 품으로 뛰어들면서 창을 쭉 뻗었다. 보통은 당황해서 피하지도 못하는데 수제노는 수세에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당황하지 않고 재빨리 몸을 숙여 피했다. 그러나 미리 피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지라 바로 공격을 이어갔다. 나는 막 내딛던 발을 축으로 회전하면서 그대로 옆차기를 먹였다. 발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신속한 대응에 수제노는 몸을 채 일으키기도 전에 발차기를 맞고 옆으로 날아갔다. 그녀는 땅을 몇 바퀴 구르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지친 상태에서 맞았으니 상당한 타격이 됐을 것이다. 얼굴에 맞은 것인지 입술이 찢어지며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수제노는 그 피를 닦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닦을 틈이 없었던 거지만. 내가 제대로 자세를 잡기도 전에 또 공격을 퍼부었으니까. 나는 짧게 끊으면서 창으로 여러 번 찔렀다. 힘이 들어있진 않았지만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공격하고 있어서 그 때문에 일어난 작은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창은 허공에 몇 개나 되는 분신을 남겨놓으면서 빈 공간을 온통 붉은 빛과 은빛으로 수놓았다. 하나하나 쭉 뻗고있는 창의 그림자들은 쉴 새없이 수제노를 압박했고 그 모습은 마치 은빛의 폭포를 보는 것 같았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와는 달리 내 쪽에서 수제노 쪽으로 붉지만 한편으로는 은빛으로 날개치는 물결이 치고 있는 것이지만. 내가 하는 거지만 멋있단 말이야. 나중에 팔이 약간 뻐근하다는 것이 최대의 단점이긴 하지만. 수제노는 고고하지만 싸늘한 폭포 안에 갇혀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모든 공격을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철저하게 급소만 보호하고 있었다. 현명해. 그러나 때로는 정적으로 흐르는, 때로는 역동적으로 꿈틀거리는 창의 물결에 수제노의 몸은 조금씩 상처가 늘어갔다. 하지만 끈기있게 버티면 길이 생기는 법. 결국 나는 수제노를 끝장내지 못하고 손을 멈췄다. 빠른 공격을 쉴새없이 퍼붓는 만큼 금방 지치게 되는 것이다. 수제노도 이 때를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벗어날 수가 없어서 막기만 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누군가와 싸울 때는 상대를 대단한 실력자로 여겨야 유리한 법이다. 설령 예상이 상대의 진짜 실력보다 높더라도 방심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지금은 수제노의 실력을 높게 보고 생각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내가 팔을 멈추자마자 어깻죽지를 찔러왔다. 양손을 쓰는 창을 사용하는 경우에 가장 막기 힘든 부위였다. 비록 짐이 있었더라도 나를 밀어붙였던 상대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허무해진다. 빠르게 쇄도해오는 리쇼르를 피해 뒤로 물러났지만 수제노는 나를 놔주지 않고 그 상태로 뛰어들면서 공격했다. 창의 단점을 최대한 이용한 훌륭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쉽게 당해줄 수는 없지 않은가. 재빨리 허리를 숙여 피해낸 나는 수제노의 발목을 향해 있는 힘껏 창을 휘둘렀다. 뛰어오다 막 발을 멈췄던 수제노는 피하지 못했다. "꺄악!" 수제노는 어울리지 않게 여성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나는 일어서려는 수제노를 재빨리 발로 걷어차 다시 눕혔다. 그리고 무기를 가지고 있는 상대에게 멋모르고 접근하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잽싸게 오른팔의 손목을 밟았다. 다른 무기가 없는 지금, 리쇼르가 쥐어져있는 손이 나에게 봉쇄된 지금, 그리고 창날이 목에 겨눠져있는 지금 수제노가 할 수 있는 공격은 더 이상 없었다.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수제노를 내려다보면서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거 봐. 내가 이긴다고 했잖아." "죽여라." "말하지 않아도 그러려고 했어. 그럼 잘 가라고." 마지막으로 화사한 미소를 지어준 나는 창을 높이 들어 수제노의 심장에 내리꽂으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환하던 주변이 어둠으로 뒤덮였다. 달빛 덕분에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정도는 되었지만 갑자기 어두워져서 적응이 되지 않았다. 깜짝 놀라 주변을 살펴보니 이미 빛의 구가 사라진 뒤였다. 그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조금 전에 내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 만약 1시간 동안 싸웠는데도 살아남으면 살려주지 ] 순간 나는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약속을 지켜야 하나? 아니면 이대로 모른 척하고 창을 내리꽂아야 하나? 설마 진짜로 한 시간을 버틸 줄은 모르고 그런 말을 한 것인데 그 것이 현실로 나타나자 난감했다. 적어도 내 입으로 한 말은 지키는 주의라 더욱 고민스러웠다. 그런 내 갈등을 눈치챘는지 수제노가 입을 열었다. "이봐, 한 시간 넘었잖아. 자기 입으로 내뱉은 말을 어길 셈이냐?" "조용히 해봐! 지금 고민 중이니까." "왕족이 한 입으로 두 말할 거냐?" 수제노는 여전히 무미건조하지만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녹아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말에서 기쁨과 수치, 걱정이 동시에 느껴졌다. "뭐야! 죽여라고 할 때는 언제고 딴소리하는 거야?"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한 시간이 넘었으니 내게는 이런 말할 자격이 충분해. 그리고 나는 살 수 있는데도 굳이 죽음을 택할 정도로 대단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말이야." 수제노의 말이 의외였기에 나는 눈을 깜빡이면서 말했다. "그래? 나는 암살자들은 다들 자존심이 강한 줄 알았는데. 암살자들은 잡히거나 싸우다 지면 그대로 자살하는 경우가 많잖아." "그건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대로 불고 풀려난다면 길드에서 배반자라고 해서 척결하려고 드니까. 그렇다고 아무 말하지 않으면 심하게 고문당할게 뻔하지 않은가. 어차피 암살자들은 사람을 죽여서라도 돈을 벌어야하는 사람들뿐이니 도망친다해도 문제지. 때문에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어차피 죽는다면 깨끗이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는 게 낫기 때문에 많은 암살자들이 자결하는 것이다." 수제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암살자들의 비애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감동적인 말이었지만 여전히 창을 치켜세우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씩 궁지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밀어붙일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나는 수제노를 살려주는 것이 내키지 않아 툴툴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 살려줬다가 나중에 복수한답시고 덤비면 곤란하잖아. 암살자를 어떻게 믿어?" "어차피 길드에서는 더 이상 너에 대한 암살 의뢰는 받지 않는다. 일류 암살자 9명이 너 하나 때문에 희생됐어. 그 중에서 절반을 네 손으로 죽였잖아. 넌 길드에서 괴물로 불리고 있단 말이다. 나도 더 이상 너처럼 끔찍한 애는 보고 싶지도 않다. 복수하러 가봐야 더 크게 당할텐데 그런 걸 시도할 정도로 나는 한가하지 않다." 수제노는 약간 언성을 높였다. 크윽,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 씨가 된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내가 계속 주저하자 수제노가 소리쳤다. "난 살아야 돼! 헤라 언니만 놔두고 죽을 수는 없단 말이다! 정 죽이고 싶으면 헤라 언니가 죽은 후에 죽여!" 나는 발악하는 수제노를 내려보다가 발을 치웠다. 그녀의 '심금을 울리는' 말 때문은 아니고 오늘 일을 빌미로 다시 덤비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수제노는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리쇼르를 땅에 내려놓고 일어났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자 질렸다는 식으로 말했다. "암살자인 나조차도 그 정도는 아닌데 정말 철두철미하군. 아예 다른 인간을 믿지 않는 건가?" "글쎄. 그럴 지도 모르지. 인간이란 언제 변할지 모르는 존재니까." "마치 자신은 아니라는 것처럼 말하는군." 수제노의 말에 나는 대꾸하지 않고 빙긋이 웃었다. 수제노는 내가 자신을 살려줄 것이라고 믿는지 어깨의 상처를 지혈하는데만 온 정신을 쏟았다. 그러나 상처가 깊어서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피가 멎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던 나는 응급처지가 끝나자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경고하는데 나에게 해를 가할 것처럼 보이면 당신보다는 헤라 아줌마가 먼저 목숨을 잃게 될 거야. 그러니 의심받을 만한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내 말에 수제노는 인상이 험악해지더니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내가 무표정하게 마주 바라보기만 하자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분부대로 하도록 하죠. 공,주,마,마. 이러면 됐습니까?" "응. 그런데 오늘 일은 비밀이야. 들키는 날에는 엄청난 잔소리가 쏟아지고 말 거야." 내가 금새 표정을 바꾸고 장난치듯이 말하자 수제노의 얼굴이 묘해졌다.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되는군. 도대체 어디가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닌 영웅이라는 거지? 이렇게 잔인하고 끔직한 영웅이 어디 있다는 거야?" "칭찬으로 듣지. 그런데 지금 시간이...앗, 늦었다! 네가 말을 자꾸 하는 바람에 시간가는 줄 몰랐잖아 만약 들키면 모두 네 탓인 줄 알아!" 나는 바닥에 떨어진 리쇼르를 손에 쥐고 수도 쪽으로 뛰어갔다. 혹시나 내가 뛰어가는 도중에 공격할까봐 리쇼르까지 챙겨 갔다. 앞쪽으로 보이는 들판에 하얀 달빛이 산산이 부서져 내려 풀잎 위에는 신비한 하얀 이슬이 서려있었다. #30- 드러나는 음모 #30- 드러나는 음모 호위기사들 덕분에 성밖으로 나가는 것은 꿈도 못 꾸게 되자 나는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그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말을 많이 나누게 되었고 상당히 친해지게 되었다. 에릭과 세린은 원래 친분이 있었지만 안데리사는 처음보다는 딱딱한 면이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공주에게 해야할 예우는 깎듯이 하는 자였다. "안데리사 경, 막아보시죠." "읏. 이런 작전을!" 나와 안데리사는 워스트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워스트라는 가상 전쟁을 벌이는 게임으로 기사들이 즐겨하는 놀이 중 하나였다. 어찌 보면 체스와 비슷할지도 모르겠지만 훨씬 복잡한 게임이었다. 우선 말이 30개인데 체스와는 달리 하나의 말이 100명이나 1000명의 군대를 나타내고 보병, 기병, 창병 등 종류도 다양했다. 그리고 워스트라 판은 색깔별로 산, 계곡, 평야 등의 각기 다른 지형을 나타내고 있어 말의 움직임이 지형에 따라 변하게 된다. 판의 종류도 100여가지가 넘어서 때로는 여러 가지 판을 연결해 하나의 나라를 나타내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도 나라 대 나라의 전쟁이었다. 안데리사는 기사이긴 하지만 전략가보다는 무장으로서의 자질이 뛰어난지 군대 운용은 거의 모르는 나도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었다. 워스트라는 중요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으로 나뉘어 있어서 훨씬 현실감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안데리사의 중요지역을 공격하는 척하다가 미리 빼돌려놓은 병력으로 전혀 엉뚱한 곳을 치고 있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곳이라도 상대에게 계속 먹히면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안데리사는 중요지역에 밀집 배치해둔 군대를 뒤늦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아마 도착하기 전에 내 군대가 적진을 마구 유린할 것이다. 중요한 곳에는 전력이 밀집되지만 그렇지 않은 곳은 상대적으로 수비가 허술한 점을 이용한 공격이었다. 내 워스트라 실력은 중상 정도였다. 안데리사보다는 뛰어나지만 세린보다는 못하고 에릭과 비슷한 실력이었다. 세린에게는 처음 몇 판을 이긴 이후로는 내리 깨지고 있었다. 실력이야 어쨌든 나는 만족스럽게 워스트라 판을 내려다보았다. 조금만 더하면 수도까지도 공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안데리사는 내 군대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지만 시기가 늦어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바깥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안됩니다! 지금 공주마마는 쉬고 계십니다. 난데없이 들이닥쳐서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미안하군. 하지만 이쪽은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몸이다. 어서 썩 비켜라." "다른 분들도 아니고 무장한 기사 분들이 이렇게 많이 몰려왔는데 어떻게 그냥 들여보낼 수 있단 말입니까? 폐하의 명으로 마리엔 공주님의 안전을 철저히 지키고 있는 만큼 무장을 해제해주십시오." 캐롤과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들은 워스트라 판을 내려다보고 있던 눈을 문 쪽으로 돌렸다. 한참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는지 점점 더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개 시녀와 병사들이 기사의 발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무장한 기사들과 궁정 마법사 한 명이 들이닥쳤다. 궁전 마법사는 내가 처음 보는 얼굴로 코밑에 달린 쥐꼬리만한 수염을 계속 비비적거리며 거들먹거리고 있었다. 문을 강제로 연 것인지 캐롤과 병사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그러나 상대가 상대인지라 노려보기만 할 뿐 섣부른 행동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무리를 보자 호위기사들이 벌떡 일어나 검을 빼들었다. 마법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무장하고 있는 데다 분위기로 봐서 좋은 목적을 가지고 온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세 명의 로얄 기사가 동시에 검을 빼들자 기사들은 긴장하는 듯 했지만 함께 온 마법사는 숫자가 많은 것을 믿는지 여전히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여차하면 창을 쓸 생각으로 슬며시 창을 손에 쥐고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죄송합니다, 마리엔 공주님. 하지만 이 것에 제 임무라서 말입니다." 쥐꼬리 수염 마법사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의 태도가 워낙 불손한지라 나는 물론 그를 따라온 기사들마저도 인상을 찌푸렸다. 저절로 '이 싸가지 없는 놈'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오만불손한 인간은 루드 이후 처음이었다. 기분이 나빠진 나는 날카롭게 말했다. "임무? 그게 뭐지?" "공주님의 방을 수색하라는 명령입지요." "내 방을? 누구 맘대로? 그리고 수색하려는 이유는 뭐지?" "폐하의 허락이 떨어진 상태입니다. 이유는 모르셔도 됩니다." 죄꼬리 수염 마법사의 건방진 말에 눈에 불이 났다. "지금 당신 앞에 서있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갑자기 들이닥쳤으면 사죄하고 이름부터 밝혀야 예의가 아닌가. 그런데 이름은 고사하고 내 방을 뒤지려는 이유조차 밝히지 않는 건 나를 무시하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는군. 나는 무시한다는 건 곧 아바마마를 무시한다는 뜻. 왕족에게 무례를 범하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는 모양이지? 정녕 그 목이 몸뚱이에서 떨어져나가야 정신을 차릴 인간이군! 안데리사 경, 당장 저 요망한 혀를 잘라버리시오." 물론 위협이었다. 아무리 공주라도 궁전 마법사를 즉결 처분할 수는 없었다. 평민은 죽여도 상관이 없지만 귀족은 안 된다는 불합리한 불문율 때문이었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따지면 가능한 일이었고 안데리사가 정말로 움직이자 쥐꼬리 수염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안데리사는 위협식으로 움직인 것인데 지레 겁을 먹은 것이다. 이런 놈들이 힘있는 자에게는 알랑거리고 힘이 없는 자에게는 가혹하지.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마법사 뒤에 서있던 기사 중 가장 나이든 기사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공주님, 부디 노여움을 푸십시오. 이렇게 느닷없이 찾아뵙게 돼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워낙 중요한 일이라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뵌 것입니다." "경의 이름은?" "왕궁 기사 제 2기사단 소속 네오진 아메 바도린입니다." "좋아요. 앞으로는 예절조차 모르는 사람을 내세우지 말고 경이 말하시오. 우선 지금 이게 무슨 일 때문에 일어난 것인지 설명을 듣고 싶은데." 내 말에 쥐꼬리 수염의 얼굴이 벌개졌지만 목숨이 아까운 건 아는지 나서지는 않았다. 네오진의 말에 따르면 아리란드 전하의 병이 저주에 의한 것이라고 여기 있는 양켄센(쥐꼬리 수염의 이름이다)이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저주를 건 사람이 나라고 알려준 사람이 나타났다고 한다. 무시무시한 음모도 꾸미고 있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나는 네오진의 말을 다 듣고 어이가 없어서 맥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황당한 말을 믿는 겁니까? 내가 무엇 때문에 아리란드 전하에게 저주를 건단 말이죠?" "저도 잘은 모르지만 제보자가 무시하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현재 공주님뿐이시라..." 네오진은 말끝을 흐렸다. 이래서 흑마법사들은 고달프다. 무슨 안 좋은 일만 생기면 모조리 흑마법사 탓으로 돌리니까 말이다. 공주인 나도 이러는데 보통 흑마법사들은 어떨까? 흑마법사라도 이런데 내가 마족이란 게 알려지면 얼마나 큰 일이 벌어질지 눈에 선했다. 내가 이제 황당함을 넘어 불쾌감마저 느끼고 있을 때, 네오진이 매우 송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명령을 수행해야만 하는 몸입니다. 부디 방을 수색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네오진의 말에 양미간을 찡그리던 나는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레프스터 국왕의 허락까지 받았다지 않은가. 그리고 지금 여기서 수색하지 못하게 하면 더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느니 차라리 수색하게 해서 억울한 누명을 벗는 것이 좋았다. 내가 방을 뒤져봐도 좋다고 허락하자 호위기사들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여전히 경계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수색이 시작되자 양켄센은 눈을 감고 중얼 중얼거리며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었다. 그리고 기사들은 그와는 별도로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호위기사들과 시녀, 병사들의 얼굴에 불쾌감이 가득 피어올랐다. 당연히 나도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도대체 제보자라는 인간은 누구야? 걸리면 가만두지 않겠어. 그런데 갑자기 눈을 감고 있던 양켄센이 크게 소리쳤다. "찾았다!" 그 말을 하는 양켄센의 얼굴은 의기양양하게 빛나고 있었다. 방금 전에 내가 한 말 때문에 원한을 품은 모양이었다. 다 큰 인간이 말 한마디에 이토록 원한을 품다니. 얼마나 속 좁은 인간인지 대강 짐작이 갔다. 그는 화장대 앞까지 걸어가 그 위에 놓인 황금색 보석함을 열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 함 안에는 수를 놓을 때 필요한 바늘과 실, 천과 같은 도구들이 들어있었다. 말라게니 여사가 여성스러움을 키우는데는 수놓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며 구해준 것들이었다. 함은 이단 형식으로 되어있어 맨 위에는 바늘과 실이 꽂혀있고 그 밑에는 여러 종료의 천들이 놓여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하지만 저 안에는 바늘 도구말고는 아무 것도 없을 텐데 무슨 헛소리람? 그러나 잠시 후 윗단을 들어낸 양켄센은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들었다. 저런 병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던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게손가락 길이 만한 병 안에는 붉은 머리카락 다발과 투명한 액체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병 위에는 핏빛의 글씨들이 깨알같이 적어져 있었다. 그 것을 자세히 본 나는 더욱 당황했다. 저주할 때 사용하는 도구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저주의 종류는 여러 가지라 사용하는 재료 또한 다양했다. 지금 양켄센이 보라는 식으로 높이 쳐들고 있는 병은 상대의 기력을 약하게 해 시름시름 앓게 하는데 사용되는 것이었다. 머리카락과 액화린수만 있으면 되는 간단한 저주라 죽이지는 못해도 확실히 저주가 맞았다. 양켄센은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병을 보자 다시 함으로 조심스럽게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이건 작은 악동이라고 불리는 저주에 사용되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제보가 맞았던 모양이군요." "잠깐! 난 그런 거 본적도 없어." "그런 말씀은 '예절도 모르는' 제게 아니라 국왕 폐하와 여러 귀족 분들께 하십시오. 하지만 이렇게 물증이 있으니...이런 건 깊숙한 곳에 감추셨어야지요. 아무튼 이 함은 증거품으로 가지고 가겠습니다. 영웅이라 불리시는 공주님께서 이런 일을 하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정말 애석하게 됐습니다." 양켄센은 안타깝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계속 수염을 비비는 손 때문에 약올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약올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약올리는 것일지도. 속이 좁다못해 이런 빌어먹을 놈은 처음이다. 루드는 최소한 배포는 크지 않았던가. 이런 놈이 궁전 마법사라고 있는 현실이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한차례 태풍이 지나간 것처럼 양켄센이 돌아가고 나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아리란드 전하에게 저주를 사용했다는 혐의로 거의 방에 갇히다시피 했다. 양켄센과 같이 왔던 기사들이 문 밖에서 지키고 서서 시녀들의 출입조차 제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방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캐롤과 미나를 포함한 몇 명밖에 되지 않았다. 말이야 행여 이 일이 새어나가 오해를 해서 엉뚱한 짓을 하는 사람들을 막는다고 하지만 감시자로 붙은 것은 분명했다. 행여나 내가 시녀들에게 시켜 증거인멸을 꾀하거나 다른 이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이리라. 그나마 다행이라면 호위기사인 에릭, 세린, 안데리사는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 기사들은 이들도 몰아내려고 했지만 세 사람이 필사적으로 저항한 탓이었다. 아직 암살 위험이 있으며 자신들의 임무는 나를 위험에서 지키는 것이므로 물러설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기사들이 보호하겠다고 했지만 세린이 자신보다 뛰어난 실력이라면 맡기겠다며 검까지 빼들자 물러났다. 급기야 에릭과 안데리사도 검을 빼든 것이다. 결국 이길 자신이 없었던 기사들은 세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었다. 비록 전년 글로리 라이언에서 제 4기사단에게 많이 고전하긴 했지만 여전히 로얄 기사는 대단한 존재임에 틀림없었다. 그 중에서 최강자라는 에릭이 호위기사에 속해있었다는 것은 나에게는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라디폰 공작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걸까? 양켄센과 기사들이 물러간 후에도 내가 우두커니 서있기만 하자 안데리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공주님." 안데리사의 말을 듣고 그들을 돌아본 나는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과연 세 사람은 날 믿을까? 어떻게 보면 확실히 내가 저주를 건 것으로 보였다. 궁내에 있는 흑마법사는 나 하나였고 증거라는 것이 나오지 않았는가. "세 사람도 내가 했다고 생각해요?" "아니." "나도 그래. 계속 붙어있었는데도 이상한 점은 없었어. 출처도 확실하지 않는 그런 헛소문은 믿지 않아. 누군가 모함한 게 틀림없어." "맞습니다. 공주님은 그런 비겁한 분이 아니십니다." 나를 위로해주기 위해서 일부러 하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조금은 기뻤다. 이런 누명을 쓰면 믿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죄를 뒤집어쓰지 않더라고 의심을 받고 있는 지금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억울하고 분했다. 도대체 날 누구라고 생각하느냔 말이다. 저주를 걸 거였으면 확실히 골로 가는 것으로 걸었다. 그리고 증거 같은 건 흔적도 없이 없애버렸을 것이다. 아니면 절대 찾지 못할 곳에 숨겨놓았다. 겨우 이런 일로 덜미를 잡힐 내가 아니었다. 솔직히 저주를 걸었단 누명보다는 저주를 사용했다가 들켰다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주를 걸려면 못 걸 이유도 없었다. 다만 저주를 사용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을 뿐이다. 저주는 사용하려면 여러 가지 재료가 있어야 하고 효과도 바로 드러나지 않으며 주문이 깨지면 시전자에게도 피해가 오는 유용하지 못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마족이었을 때는 설령 주문이 깨져도 아무 영향이 없지만 지금은 인간의 몸이기에 타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멍청하게끔 효과도 시원찮은 저주를 사용했겠는가? 이 일의 배후가 누군지는 대강 짐작이 갔다. 오펠리우스 왕비일당 빼고 또 누가 있겠는가? 어째 그동안 너무 조용하다 했다. 그동안 조용했던 것은 이런 함정을 파기 위해서였던 모양이다. 그걸 눈치채지 못한 내가 한심하기도 하고 왕비 패거리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젠장, 정면으로 대결하기가 두려우니까 이따위 짓을! #30- 드러나는 음모 장내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이 자리에 자리한 사람들 모두가 침묵이라는 병에 감염되어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눈빛을 통해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강 알 수 있었다. 고소해하는 사람, 안타까워하는 사람, 그럼 그렇지 라고 여기는 사람, 실망한 사람. 저마다 자신의 본심을 속이고 안타까움과 이해로 뒤덮인 가면을 쓰고 있었다. 저 중에 얼마나 많은 자들이 속으로 웃고 있을까, 하고 생각하니 역겹기까지 했다. 질식할 것 같은 무거운 눈총들이 와 닿았지만 나는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여기서 고개를 숙인다면 내가 저주를 사용했다고 시인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곳에는 아리란드 전하를 제외한 모든 왕족들과 몇몇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내가 아리란드 전하에게 저주를 건 일, 아니 걸었다고 알려진 일 때문에 비밀리에 모인 것이다. 워낙 일이 커지다 보니 귀족들도 라디폰 공작, 아스티에 공작, 나인 공작과 그라냔 백작, 갈렉트 백작, 케이틴 백작, 알노르도 백작과 같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입김이 많이 작용하는 귀족들만 모였다. 그리고 아리란드 전하의 외가 측인 나미르 백작도 보였다. 대개 왕족은 잘못을 해도 그냥 넘어가는 게 보통이지만 피해자가 같은 왕족이다 보니 그냥 덮어놓고 넘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나미르 백작이 진상을 밝혀달라고 끊임없이 주장하고, 입단속을 시켰음에도 삽시간에 퍼진 소문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양켄센 경, 말해보시오." 레프스터 국왕은 며칠만에 초췌해진 얼굴로 지시를 내렸고, 쥐꼬리 수염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섰다. "폐하의 윤허를 받고 마리엔 공주님의 방으로 찾아가 마법으로 탐색해 본 결과 저주의 매개체를 찾았습니다. 탁자 위에 놓인 이 함에 들어있는 유리병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아시다시피 저주란 매개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찾아낸 병 안에는 아리란드 전하의 머리카락으로 보이는 붉은 머리카락이 들어있었습니다. 이 병 위에 적힌 주문은 '작은 악동' 이라는 저주의 주문으로 상대를 시름시름 앓게 하는 악독한 저주입니다. 소신은 바로 이 것이 아리란드 전하께서 몸져누우신 결정적인 이유가 됐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이오!" 양켄센의 선동적인 말에 나미르 백작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아직 확실한 것이 아닌데도 양켄센은 내가 범인이 확실하다는 식으로 교묘하게 말하면서 사람들의 분노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나미르 백작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고 다른 사람들의 눈빛도 차가워졌다. 감히 국왕 앞에서 할 행동이 아니었으나 그동안 쌓였던 울분이 한꺼번에 터졌는지 나미르 백작은 분노에 몸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레프스터 국왕도 이를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간간이 미간을 찡그렸다. "나미르 백작, 진정하시죠. 아직 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차분한 티스몬 백작이 나미르 백작을 달랬지만 오히려 그 것이 그의 화를 돋군 모양이다. "증거가 바로 눈앞에 있지 않소! 그리고 이 성에서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마리엔 공주님 외에 또 누가 있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찌 진정하게 생겼소? 지금 아리란드 전하께서는 생사의 기로에 서 계신단 말입니다. 바로 이 간악하고 더러운 방법 때문에 말이오!" "나미르 백작!" 분통을 터트리던 나미르 백작은 물론 나까지도 놀라서 르미엘 왕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항상 짓던 온화한 미소를 지우고 나미르 백작을 차갑게 응시하고 있었다. "말을 조심하시오." 르미엘 왕자가 으르렁거리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 지경이 됐느냔 말이다(아직 증거는 없지만 틀림없이 오펠리우스 왕비가 꾸민 일일 것이다). 그런데 오펠리우스 왕비의 아들인 르미엘 왕자가 나를 옹호해 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저 인간이 머리가 어떻게 됐나? 그동안 친한 척 하며 살갑게 굴긴 했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그렇게 친했던 플로라 공주마저 나를 외면하고 있고, 레프스터 국왕도 침묵을 지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경계 대상 2호였던 르미엘 왕자가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우스운 일이었다. 정을 많이 줬던 사람들은 냉랭한데 탐탁지 않게 여겼던 르미엘 왕자가 감싸주다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곧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연극일 것이다. 내가 맘을 놓게 한 뒤에 뒤통수를 치려는 거짓 행동. 하지만 마음 한 쪽에서 르미엘 왕자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한 짓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상황에서 나를 도와주니 조금은 경계의 끈이 느슨해진 것이다. 르미엘 왕자가 눈을 부라리자 나미르 백작은 뭔가 항변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무리 화가 나도 상대는 왕자니까. 일전에 라디폰 공작이 르미엘 왕자파라고 일러주었던 케이틴 백작이 분위기를 수습하려는지 화제를 돌렸다. "그 병이 확실히 저주를 걸 때 사용하는 것이 맞소? 행여 착각한 것은 아니오?" "아닙니다. 확실히 저주를 걸 때 사용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는 프란시아 대신관님께서도 확인하신 겁니다. 여러분도 프란시아 대신관께서는 절대 거짓을 입에 올리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 양켄센의 말에 몇몇 사람들이 신음성을 흘렸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알 고 있었는지 크게 놀라지 않았다. 프란시아 대신관이 누군지는 몰라도 상당한 권위를 지니고 있는 자인 모양이었다. 그의 이름이 나오자 나를 완전히 범인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로 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공주님이라 하셔도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이는 왕실의 기강과 관련이 있는 중차대한 일입니다." "갈렉트 백작의 말이 맞습니다. 공주님이 아리란드 전하께 저주를 걸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우리 나라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게 될 겁니다. 묵과할 수 없습니다. 케이틴 백작의 생각은 어떻소?" 알노르도 백작이 지목해서 묻자 케이틴 백작은 르미엘 왕자의 눈치를 살짝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글쎄요. 정말로 마리엔 공주님께서 그러셨다면 그래야 하긴 하겠지만 아직 확실한 건 잘 모르지 않습니까?" "그 정도면 증거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주의 매개체가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마리엔 공주님의 방에서 나왔습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번 일은 페드인 왕국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머지않아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질 겁니다. " 그라냔 백작은 눈에 띄게 나서지는 않았지만 의혹이 제기되자 그 쪽으로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도록 다른 쪽으로 말을 몰아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 나를 함정으로 몰아넣어서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표시가 많이 나지는 않았지만 내 눈은 속이지 못했다. 욕이 절로 나왔지만 지금 내가 나서면 더욱 상황이 좋아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쥐꼬리 수염이 증거랍시고 올려놓은 함 안에는 버젓이 저주가 걸린 병이 들어있었고, 모여있는 귀족 중 라디폰 공작과 티스몬 백작만이 내 편이었다. 갈렉트 백작과 알노르도 백작은 라이언 왕자파였고, 나미르 백작은 계속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케이틴 백작은 르미엘 왕자 때문에 중립을 지키고 있었지만 은근히 이들에게 동조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외할아버지라는 아스티에 공작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르미엘 왕자를 제외한 왕족들도 내가 저주를 사용했다고 생각하는지 술렁이는 귀족들을 진정시키려고도 하지 않았다. 레프스터 국왕만이 간간이 한숨을 쉬어댔다. 그나마 모든 사람들이 나를 추궁하지 않는 이유는 라디폰 공작과 티스몬 백작이 계속 나를 옹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머리카락이 아리란드 전하의 것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붉은 머리는 흔합니다.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누군가 마리엔 공주님을 모함하기 위해 꾸민 일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라디폰 공작의 반론을 제기하자 갈렉트 백작이 맞받아 쳤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타이밍이 잘 맞아 떨어집니다. 만약 이게 아리란드 전하의 머리카락이 아니라면 어째서 전하께서 편찮으시다는 겁니까?" "그건 저도 모르지요. 하지만 마리엔 공주님이 저주를 거셨다고 보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습니다. 우선 마리엔 공주님이 아리란드 전하에게 저주를 걸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나미르 백작도 아시겠지만 두 분의 사이는 굉장히 좋았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저주를 건단 말입니까? 그리고 아리란드 전하께서 아프시기 시작한 7월에 공주님은 페드인 왕국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전부터 스피린에 계셨는데 저주를 걸 틈이 어디 있으며 머리카락은 어떻게 구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말이 되지 않습니다. 병이 너무 찾기 쉬운 곳에 있었다는 점도 이상하군요. 만약 공주님이 정말로 저주를 거셨다면 들키지 않은 곳에 숨겨놓으셨을 겁니다. 아니면 기사들이 방을 뒤지려고 할 때 방해했겠지요. 하지만 공주님은 방을 수색해도 좋다고 쉽게 허락하셨습니다. 이번 일은 이상한 점이 너무 많습니다." "라디폰 공작의 말을 들어보니 정말 그렇군." 중립을 지키고 있던 나인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자 장내는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확실히 라디폰 공작의 말을 들어보면 누군가의 모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라디폰 공작. 그러나 그라냔 백작이 슬며시 나섰다. "하지만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입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 저주는 상당히 기간이 지난 후에야 효과가 나타난다고 하더군요. 마리엔 공주님이 스피린으로 가시기 전에 저주를 건 것이겠지요." 그라냔 백작의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사람들이 너도나도 꼬투리를 잡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저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 설마 공주의 방을 뒤지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아무 곳에나 병을 둔 것일 겁니다." "저주란 것이 아무나 걸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흑마법사를 제외하면 말입니다." 잠자코 있던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했다. "잠깐만요. 저주는 분명히 흑마법이지만 반드시 흑마법사만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재료와 주문만 있으면 흑마법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은 사람도 걸 수 있습니다." 흑마법은 일반에게 거의 공개되지 않아 주문이 알려져 있지 않고 마나 운용도 백마법과는 달라서 흑마법사가 아닌 다른 사람이 저주를 걸려면 매우 힘들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정보를 은폐하거나 확대하는 것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 조금 전 양켄센도 그런 식으로 나를 범인으로 확정짓지 않았던가. 내 말에 사람들의 눈이 양켄센에게 향했다. 양켄센은 이 자리에 있는 유일한 마법사이기에 내 말이 맞는지를 묻는 것이다. 쥐꼬리 수염은 시선이 집중되자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이론적으로는 맞지만 저주는 흑마법 중에서도 특별한 마법이라 공격마법처럼 쉽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흑마법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저주를 걸 수 없다는 것이 정론입니다. 그리고 다른 마법사의 소행이라면 이 병이 어떻게 공주님의 방에서 나왔겠습니까? 요즘에는 제 1공주궁의 경비가 매우 삼엄한데 몰래 숨어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건 억지입니다.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모두들 합심해서 마리엔 공주님을 범인으로 몰아가려는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제 눈에는 두려운 상대는 미리 없애자고 서로 모의한 것처럼 보이는군요." 티스몬 백작이 냉소적으로 쏘아붙이자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무슨 소리요! 그럼 우리가 이번 일을 계획하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모의라니? 정말 어의가 없군요." "하, 티스몬 백작이 마리엔 공주님을 밀고 있는 걸 누가 모를 줄 아시오! 그런데 공주님의 죄가 드러날 것 같으니 괜히 심통이 나신 것이군." "심통이 난 건 오히려 그 쪽이겠지요. 그동안 마리엔 공주님이 너무 두각을 나타내시다 보니 겁이 난 것이겠지요." 라디폰 공작이 씩 웃으며 말하자 몇몇 다혈질 귀족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다. "헛소리하지 마시오! 누가 두렵다는 거요?" "아무리 공작이라 해도 너무 말이 심하지 않습니까! 내 평생 이런 모욕은 처음입니다." "그럼 어째서 제대로 상황이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공주님을 범인으로 취급하는 겁니까?" "상황이 드러나지 않긴 뭐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겁니까? 증거가 나왔습니다. 이 마당에 더 발뺌할 생각입니까?" "발뺌이라니 무슨 소립니까? 그 쪽이야 말로 이번 사건의 전말을 확실하게 하려는 생각은 없고 이 기회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마리엔 공주님을 몰아내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한바탕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욕설은 오가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주먹질을 할 것처럼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라디폰 공작과 티스몬 백작은 많은 사람들의 반론을 막기 위해서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얼굴만은 빨갛게 변해있었다. 설전이 오가는 한가운데 앉아있는 나는 초조한 기분으로 옷자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내가 나서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참고 있지만 내 문제를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야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처음에는 주로 '내가 저주를 걸었네, 아니네'로 벌이던 논쟁은 어느새 정권 다툼으로 바뀌어 있었다. 싸움 구경은 확실히 재미있는 일이지만 그 일이 나와 관련되면 전혀 재미가 없었다. 가시 방석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나는 귀족들이 침을 튀기며 싸우는 사이에 왕족들이 앉아있는 곳을 슬쩍 쳐다보았다. 나와 왕족들이 앉아있는 자리는 맞은편에 위치해있고, 그 사이에 양쪽으로 귀족들이 앉아있었다. 완전히 심문하는 분위기가 나는 배치였다. 레프스터 국왕은 찹찹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오펠리우스 왕비는 근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그 것이 가면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라이언 왕자는 노골적으로 나의 불행을 비웃고 있었고, 데미나 공주는 귀족들 사이에서 일어난 격렬한 싸움에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리고 플로라 공주는 내가 정말로 아리란드 전하에게 저주를 걸었다고 생각하는지 냉랭한 얼굴로 외면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사람은 르미엘 왕자뿐이었다. 어깨가 추욱 쳐졌다. 다른 사람들이야 그렇다 쳐도 국왕과 플로라 공주도 나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에 실망스러웠다. 가슴이 무거운 것에 짓눌려진 것처럼 답답하면서도 화끈거렸지만 이 것이 무슨 감정인지 몰라 그냥 실망했다고 생각했다. 그 사이에도 설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어느새 말투도 깎듯이 존대를 하던 것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솔직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라디폰 공작과 티스몬 백작을 제외하고 얼마가 공주님이 저주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소이까? 그러니 그만 우기시오!" "반드시 다수의 의견이 맞으라는 법은 없지요!" "하지만 다수의 의견이 타당성이 있는 경우가 많소! 설마 그런 걸 모르는 건 아니라 믿소!' "거참, 말 한번 잘하셨소. 그렇게 다수의 의견이 타당성이 있다면 아예 귀족들을 모두 모아서 회의를 엽시다. 10명 정도밖에 되지 않은 수도 타당성이 없는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끼리 이러고 있지 말고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봅시다." 라디폰 공작의 말에 귀족들이 주춤했다. 라디폰 공작을 따르는 귀족들의 수도 꽤 되고 내가 워낙 예쁘게 보인 탓에 내 편을 들어줄 사람도 많았던 것이다. 원래 왕족들 간에 암투란 흔한 일이기에 설령 내가 저주를 걸었다고 믿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편을 들어줄 사람은 많았다. 그런데도 지금 내가 곤경에 처한 것은 이 곳에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라이언 왕자파와 르미엘 왕자파이기 때문이다. 만약 라디폰 공작의 말처럼 많은 귀족들을 모아놓고 의견을 묻는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었다. 당연히 나미르 백작과 다른 사람들은 완강히 반대했다. "왜 그렇게 반대하는지 모르겠군요. 처음에 다수의 의견이 타당성이 있다고 한 것은 그 쪽이 아니었습니까?" 티스몬 백작까지 나서서 일침을 가하자 갈렉트 백작이 꾸물거리면서 말했다. "그,그건 그렇지만...이런 일이 알려지면 왕가의 위신은 어떻게 된단 말이오?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이미 소문이 난 일입니다. 차라리 모든 것을 공개하는 것이 감추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리고 마리엔 공주님이 저주를 거신 것이 아니라면 왕가의 위신이 떨어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증거는 확실하오. 아무리 우겨도 진실은 변하지 않소. 이토록 이번 일을 길게 끌려는 것은 무슨 생각에서요?"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이토록 이번 일을 감추려는 이유는 무엇이오?" 귀족들간의 말다툼은 계속 평행선을 그리고 있었다. 의미 없는 말이 끊임없이 오갔다. 그 것을 지켜보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침묵을 지키고 있어야만 했다. 내가 나서면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나미르 백작이 흥분해서 날뛸 테니까. 그럼 간신히 다수를 상대로 버티고 있는 라디폰 공작과 티스몬 백작에게 미안해진다. "이제 그만들 하시오!" 한참 언쟁을 벌이던 귀족들은 그라냔 백작의 외침에 말을 멈추고 그 쪽을 쳐다보았다. "지금은 모두가 흥분한 상태라 서로의 의견을 전달하는 것이 힘들 것 같군요. 그러니 계속 차분히 사태를 관망하고 계시는 아스티에 공작님께 의견을 물어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오, 그거 좋은 방법이군." "어차피 이대로는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으니 그게 좋겠소." 많은 사람들이 흔쾌히 동의했지만 라디폰 공작만은 드물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라디폰 공작이 그런 표정을 지었다는 것에 놀랄 사이도 없이 그라냔 백작의 말이 들려왔다. "아스티에 공작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공작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느끼시는 대로 말씀해주십시오." 그라냔 백작이 정중하게 묻자 아스티에 공작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죄를 지었다면 응당 벌을 받아야겠지." 순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스티에 공작의 멱살을 쥐고 싶은 걸 참았다. 아무리 원리원칙주의 적인 사람이라도 자기 혈육에게는 너그러운 법이다. 자식이 극악무도한 살인자라도 부모는 자연히 자식을 감싸게 된다. 그 것은 손자나 손녀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아스티에 공작이 단 한번도 찾아온 적이 없다고는 하지만 이런 순간에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정말 너무했다. 비록 진짜 외할아버지는 아니지만 울화통이 터졌다. 이미 죽어버린 마리엔이 안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말 다급한 순간에 혈육조차 도와주지 않다니. 아스티에 공작의 말은 내가 저주를 걸었다면 처벌 쪽에 서겠다는 말이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하지만 약간 애매한 것이 죄를 지었다면, 이라는 말이 붙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다시 한번 귀족들 사이에서 혈전이 일어났다. "그만!" 한참동안 지속되던 언쟁은 레프스터 국왕이 입을 염과 동시에 깨끗이 멈췄다. "오늘은 도저히 결론이 나지를 않을 것 같군. 서로 흥분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 이번 일은 다음에 다시 논하도록 하지." 국왕의 명령에 많은 귀족들이 내키지 않는 듯 머뭇 머뭇거렸다. 그러나 오펠리우스 왕비가 나서자 깨끗이 물러났다. "이제 그만하세요. 마리엔이 무슨 짓을 했든 제 친딸과 같은 아이입니다. 그렇게 몰아붙이지 말아줬으면 좋겠군요. 그리고 폐하께서도 피곤하실 테니 오늘은 이만 물러가세요." 만약 라디폰 공작이 눈짓으로 제지하지 않았다면 당장 달려가 머리채를 휘어잡았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가만히나 있으면 덜 미울 것이다. 어쩜 저렇게 가증스럽게 나올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다. 친딸 같아서 함정을 파놓느냔 말이다. #30- 드러나는 음모 #30- 드러나는 음모 회의 겸 추궁회가 끝나자 귀족들은 썰물 빠져나가듯이 밀려나갔다. 패거리로 뭉쳐서 나가는 것으로 봐서 이대로 헤어지지 않고 어딘가에서 이번 일을 논의할 모양이다. 레프스터 국왕은 나에게 피곤할 테니 가서 쉬라는 말만 남기고 가장 먼저 회의장을 빠져나가 버려서 보이지도 않았다. 어느새 회의장에는 라디폰 공작, 티스몬 백작, 케이틴 백작과 르미엘 왕자만이 남아있었다. 케이틴 백작은 르미엘 왕자의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모인 왕비 패거리 중에서 유일하게 나를 감싼 인물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나중에 무슨 말을 들을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르미엘 왕자는 백작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내 눈은 거기에 비례해서 커져만 갔다. 의문과 놀라움이 교차했다. 그리고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지자 더 이상 크게 뜰 수 없을 정도로 눈을 크게 떴다. 르미엘 왕자는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다가 내가 놀라서 쳐다보자 장난스럽게 머리를 흩트려 놓고 가버렸다. 뭔가 물어볼 겨를도 없었다. 나는 르미엘 왕자의 손길이 닿았던 곳을 만지며 멍하니 서있었다.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공주님." 라디폰 공작의 부름에 나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를 보니 걱정스러운 얼굴이긴 하지만 옆에 서있는 티스몬 백작에 비하면 한결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라디폰 공작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할 때는 세상의 종말 직전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는 그런 모습이 얄미웠는데 지금은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티스몬 백작과 함께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런데 한가지 여쭤보겠습니다. 정말로 마리엔 공주님께서 아리란드 전하께 저주를 거신 겁니까? 추궁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야 저희들도 대처를 할 수 있기에 드리는 질문입니다." 티스몬 백작이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살며시 물어봤다. 조금 전이야 급한 불부터 끄기 위해 무조건 아니라고 우겨댔지만 이들도 내가 저주를 사용했는지의 여부는 확신하고 있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무거운 한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사용하지 않았어요, 만약 저주를 걸었다면 그런 저주 같지도 않은 저주가 아니라 훨씬 강한 저주를 사용했을 겁니다. 물론 대상도 바뀌었겠지요." 내 말에 라디폰 공작과 티스몬 백작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두 사람에게 거짓말할 이유가 없기에 내 말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저주 같지도 않은 저주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주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공주님께서 설명해주십시오." 어느새 라디폰 공작은 침착함을 되찾고 질문했다. "아까 쥐꼬리 수염...이 아니고 마법사가 말한 것은 들었지요? 병에 새겨져있던 저주는 '작은 악동'이라는 저주예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저주라기보다는 악질적인 장난에 불과하죠. 대부분의 저주는 상대를 서서히 죽음으로 내몰거나 고통을 주는 게 목적입니다. 하지만 '작은 악동'은 시름시름 아프게는 하지만 절대 죽지는 않아요. 다른 저주에 비해서 상대가 겪는 고통도 별 것 아니라 흑마법사들은 '작은 악동'을 저주로 취급하지도 않아요." 내가 차근차근 설명하자 티스몬 백작은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지만 라디폰 공작은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오호, 의외로 위력이 약한 저주였군요. 그렇다면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목적이 죽이는 것이 아니면 어떻게 무마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저주를 걸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도록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렇군. 죽이려한 것과 단순히 아프게 한 것은 차이가 많으니 기회일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여전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라냔 백작이 말했다시피 저주는 장기간에 걸쳐 일어나는 것이 대부분이라 상대가 오래 전부터 계획한 일이라고 우겨대면 짤도 없이 누명을 쓰게 된다. 도대체 그 병이 왜 내 방에 있었단 말인가? 분명히 스피린에 가기 전까지는 그런 물건을 본 적이 없었다. 스피린에서 돌아온 후로는 함을 열어본 적이 없으니 그 사이에 누군가 몰래 가져다놓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내 방에 몰래 숨어들 수 있을 만큼 경비가 허술하지 않았다. 게다가 최근에는 경비가 더욱 강화되어 궁에 숨어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아무래도 내통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이건 함정입니다." 나는 두 사람의 의견에 수긍했다. 별로 믿고 싶지는 않았지만 분명했다. 그 것도 시녀들 중 한 명이었다. 병사들은 유사시가 아니면 내 방에 들어올 수 없으니 남은 건 시녀들뿐이다.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가장 가까운 곳에 내통자가 있다는 사실과 그걸 눈치채지 못한 나에게. 양켄센이 말했던 제보자라는 것이 시녀들 중 한 명이었던 모양이다. 나를 모시고 있는 시녀의 말이라면 확실히 신빙성이 있긴 했다. 내가 점점 씩씩대자 라디폰 공작이 차분히 말했다. "진정하십시오. 흥분하면 오히려 저 쪽의 의도대로 되는 겁니다. 어떤 순간에서라도 냉정함을 잃지 마십시오. 반드시 기회는 올 겁니다." "알았어요, 공작." 나는 라디폰 공작의 말에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어떻게든 이 누명을 벗어야하겠지만 설령 누명을 쓰게 된다 하더라도 조용히 기다리다보면 찬스는 온다. 그 때를 놓치기 않기 위해서라도 냉정해야 했다. 그리고 내 주위에 있을 내통자에게 더 이상 정보를 흘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평정심을 잃지 않아야 했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금방 마음을 가라앉히자 라디폰 공작과 티스몬 백작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네, 공주님은 평상시처럼 행동하시면 됩니다. 연락은 저희들이 드리겠습니다. 마침 에릭과 세린이 공주님의 호위기사로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럼 두 사람에게 맡길게요." 우리들은 회의장을 빠져나온 후에 그대로 헤어졌다. 오래 있으면 의심을 받을 것이라는 라디폰 공작의 말 때문이었다. 회의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호위기사들이 내가 나오자 바로 뒤를 따라왔다. 내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세 사람의 반응으로 봐서 그리 좋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걱정하는 그들을 향해 웃어줬지만 웃음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리했다. 젠장맞을 것들이 나를 몰아내려고 작당한 것이다. 물증이 있고 결정적으로 믿어주는 사람이 너무 적었다. 아무리 라디폰 공작과 티스몬 백작이 뛰어난 사람들이라고 해도 큰 기대는 가지지 않았다. 이미 '작은 악동' 에 사용된 병을 너무 많은 사람들이 봤다. 내가 저주를 걸었든 걸지 않았든 그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증거가 있고 내 무죄를 입증해줄 확실한 알리바이가 없었다. 이 정도면 죄가 없더라도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도 일단은 공주니 함부로 벌은 내리지 못하겠지만 불이익이 따를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경치가 좋은 곳에서 지내라는 핑계로 멀리 외딴 성으로 보내버릴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마리엔과 했던 계약은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그 렇다 치지만 제 4기사단은 어떻게 되는 걸까? 나와 함께 유배를 갈까? 아니면 강등되는 걸까? 라디폰 공작과 티스몬 백작은? 온갖 상념들이 머리 속을 가득 채웠다. "마리엔 언니." 나는 낯익은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나는 복도를 걷고 있었고, 걷고 있는 길 앞쪽에는 나미르 백작과 함께 플로라 공주가 버티고 서있었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걸로 봐서 좋은 목적을 가지고 부른 것 같지는 않았다. 나미르 백작은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지만 플로라 공주가 옆에 있어서 그런지 소동은 피우지 않았다. 그래도 명색이 내가 공주인데 너무 노골적으로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쏘아붙일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그런 행동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니까. 나는 조용히 플로라 공주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이 곳에서 서있었다는 것은 할 말이 있어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일 테니까.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래." "그런데 꽤 늦었네요. 안에서 라디폰 공작님과 티스몬 백작님과 이야기를 나눈 모양이군요. 무슨 이야기를 하셨기에 이렇게 늦으신 거죠?" 플로라 공주가 추궁하는 것처럼 묻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정말이지 쉽게 변한다, 인간은. 눈앞의 소녀가 내가 좋다며 따라다니던 플로라 공주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다.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 입장에서야 믿던 사람이 뒤통수를 친 것이니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 속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야속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유리시나라는 것을 알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마리엔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유리시나로서 정을 주었든 마리엔으로서 정을 주었든 플로라 공주에게 정을 주었다. 내가 왕족 중에서 레프스터 국왕 다음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는. 약간은 씁쓸한 슬픔과 달콤한 허망함, 차가운 원망이 가슴 속에서 피어나 바람에 날리는 연기처럼 혈관을 타고 퍼져갔다. 웃음은 점점 자조적인 웃음으로 바뀌고 있었다. "너에게 말할 의무는 없어." 차가운 내 목소리가 넓은 복도를 울리며 퍼졌다. 이런 식으로 말했던 적은 오펠리우스 왕비가 제 4기사단을 망나니 취급했을 때 이후로 처음인 듯했다. 플로라 공주와 나미르 백작이 당황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다. "알았어요. 더 이상 묻지 않겠어요. 하지만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정말로 어머니에게 저주를 건 거예요?" 나는 플로라 공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건 진위를 알기 위해 묻는 질문이 아니라 확신을 가지고 묻는 확인사살에 불과했다. 그녀의 차가운 눈빛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상당히 기분이 나빠졌다. 회의장에서부터 지금까지 참아온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 하에 묵묵히 참았지만 플로라 공주의 얼굴을 보자 발끈 해버렸다. 그동안 얼마나 잘해줬는데 이렇게 나올 수 있는 걸까?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는 걸까? 밑바닥에서 뭔가 끓어오르는 것과 함께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랬다면 어쩔 건데? 날 죽일 셈이야?" 내가 냉소적으로 말하자 플로라 공주의 얼굴이 빨갛게 변하더니 팔을 번쩍 쳐들었다. 플로라 공주의 하얀 손이 빠르게 휘둘렸지만 가만히 서있었다. 약간 흥분한 바람에 피할 생각을 못한 것이다. 그러나 플로라 공주의 하얀 손은 의도대로 내 뺨을 치지 못하고 중간에 멈췄다. "아." 플로라 공주는 자신의 손을 잡은 사람이 에릭이라는 것을 알자 신음인지 감탄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남자가 눈에 들어오나 보군. 정말 대단하셔. 에릭은 플로라 공주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그만 두십시오." "이, 이게 무슨 짓이죠?" "제 임무는 마리엔 공주님을 지키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지만...어머니에게 저주를 걸었다구요! 정말 좋아했는데...마리엔 언니도 나를 좋아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어요! 모두 연극이었어! 나에게 접근한 것도, 상냥하게 웃어주던 것도 모두 거짓이었어! 날 속인 거야!" 플로라 공주는 그 큰 눈동자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소리쳤다. 에릭이 슬며시 손을 놓자 얼굴을 감싸고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나미르 백작은 플로라 공주를 달래면서 나를 향해 원독 어린 시선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가 저주를 걸지 않았다고 말할까? 달래줄까? 그냥 모른 척 할까? 내가 어떤 행동을 해야하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플로라 공주가 받은 상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큰 모양이다. 하지만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믿어줄 것 같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잠시 흐느끼는 플로라 공주를 쳐다보던 나는 손을 뻗었다. 무슨 생각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나도 모르게 뻗은 것이다. 그 뒤의 일은 모르겠지만 일단은 무슨 행동이라도 해야한다는 의무감에 플로라 공주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내 손을 나미르 백작이 짜악, 소리나게 쳐냈다. 얼마나 세게 쳐냈는지 손등이 얼얼했다. 내가 빨개진 손을 다른 손으로 감쌌자 나미르 백작이 차갑게 쏘아보면서 말했다. "앞으로는 플로라 공주님께 접근하지 마십시오." 경고의 말을 내뱉은 그는 아직도 훌쩍이는 플로라 공주를 데리고 사라졌다. 나는 멍하니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갈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왜 이런 일을 겪어야한단 말인가? 그동안 그렇게 친한 척 한 주제에 믿어주지도 않는단 말이야? 함정을 판 오펠리우스 왕비도 싫었지만 플로라 공주도 싫어졌다. 한 대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다. 나는 씩씩대면서 울분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야? 내가 하지도 않았는데 왜 성질을 부리고 난리야?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호위기사들에게 묻는 말이었지만 이들은 계속 침묵을 지켰다. 더욱 열통이 터진 나는 마구 씨부렁댔다. "흑마법을 사용한다고 저주를 건 게 모두 나라는 법이 어딨어? 그리고 믿었으면 끝까지 믿어야할 것 아냐! 자기가 무슨 비극 속에 주인공인 줄 아나보지? 누가 누구를 배신했다는 거야? 혼자 분위기에 젖어서 괜히 생사람 잡고 난리야?" 평소라면 안데리사 앞에서는 말조심을 했겠지만 지금은 나오는 대로 쏟아내고 있었다. 호위기사들이 맞장구를 쳐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꾸짖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계속 그들을 상대로 말했다.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기에 바람이라도 쐬고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이 것도 쉽지 않았다. 열변을 토하던 나는 눈앞에 돌멩이가 보이자 홧김에 그 것을 냅다 걷어찼다. 그러나 그 것이 헛발질로 끝이 나자 모든 잘못이 돌멩이에 있는 것처럼 발로 밟아댔다. 지금 내 얼굴이 어떤 얼굴인지는 몰라도 호위기사들이 안됐다는 식으로 보고 있어 더 화가 났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다. #30- 드러나는 음모 #30- 드러나는 음모 그 후로 나는 보이지 않는 족쇄를 찬 죄수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 제 1공주궁을 돌아다니는 것은 허용이 되지만 그 이상은 신변 보호라는 명목 하에 금지되었다. 그나마 궁내를 돌아다니는 것도 마음놓고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누가 내통자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마음놓고 활개치고 다닐 수는 없었다. 내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곳은 내 방 한 곳으로 축소되었다. 안데리사가 잠깐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나는 에릭과 세린을 통해 지금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 대해 들었다. 처음에는 나도 회의에 참석했지만 그 뒤로는 부르지 않아서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눈뜬장님이 따로 없었다. 에릭과 세린이 없었다면 답답해서 무슨 짓을 저지르고야 말았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다른 귀족들을 포섭해서 계속 항소하고 있어. 의외로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귀족들이 많아서 일단은 서로 대등한 것 같아. 머지않아 마리엔의 누명도 벗어질 거야."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던데? 바깥에서 뭐라고 해봐야 직접 회의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왕비 일당이야. 아버지가 난감해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점이고. 이번 문제는 회의를 통해서 결정되니 바깥에 아무리 편이 많이 있어도 소용없다고 하셨어." 세린은 내가 걱정할까봐 낙관적으로 말했지만 에릭이 바로 부정했다. 대개는 말만이라도 괜찮다고 하는데 에릭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나와 세린은 에릭을 빤히 쳐다보다 동시에 고개를 내저었다. 훗, 정말 에릭답다니까. 에릭은 무표정하게 있다가 우리가 자신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었다 싶을 때 다시 입을 열었다. "현재 아스티에 공작과 나인 공작은 중립을 지키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달라. 모두 그라냔 백작의 선동에 따르고 있어. 케이틴 백작은 표면적으로는 중립이지만 은근히 그 쪽 편을 들고 있으니 그도 역시 반대파라고 볼 수 있지. 아버지와 티스몬 백작 님을 빼면 모두 적이나 마찬가지야. 차라리 공개적으로 터놓으면 훨씬 유리해질텐데 그라냔 백작이 막는 모양이야." "아마도 그럴 테지. 라디폰 공작이 다른 말을 하지 않았어?" "내통자를 알아 봐줬으면 좋겠다고 하셨지만 무리는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어." 에릭의 말에 나는 끙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몇 번 떠봤는데 반응이 안 오더라고. 누군지 잡히기만 하면 정말 가만두지 않을 거야." "혹시 그 캐스나라는 시녀가 내통자 아닐까? 일부러 이번 일을 위해서 접근한 걸 수도 있잖아." 세린의 말에 나는 힘없이 대답했다. "처음에는 나도 의심했는데 갠 아니야. 일부러 미끼까지 던졌는데 걸리지 않았어. 내통자라면 절대 놓치지 않을 먹음직한 미끼였는데도 말이야." "그게 뭔데?" "미끼?" 나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그 때 했던 말을 그대로 재연했다. [쳇, 수색하러 올 줄은 몰랐는걸. 그래도 다행이지 뭐야. 진짜로 저주를 걸려고 했던 인형이 아니라 그 병이 걸려서. 인형에는 데비롱 주문까지 적어놨는데 그게 들켰으면 끝장이었어. 역시 속옷 속에다 숨겨놓길 잘했어. 병은 누가 가져다놨는지는 몰라도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왕비 그 여자가 저주로 나왔으면 나도 저주로 맞서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어? 어디 한번 죽어봐라. 오늘은 보름달이 뜨는 날이라 저주 걸기에는 정말 좋은 날이야. 오홋홋호~] 나는 몸짓은 물론 웃음소리까지 그대로 흉내냈다. 데비롱이란 내장이 조금씩 썩어가 결국은 뇌까지 썩은 후에 죽게 만드는 저주였다. 이 저주에 걸리면 차라리 깨끗이 자결하는 게 낫다 싶을 정도로 끔찍한 고통을 받기 때문에 철천지원수라도 불쌍해서 사용하지 않는다. 그만큼 사람들 사이에서 그 위명을 널리 떨치고 있어서 어지간한 사람들은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정도로 대중적인 저주라고 할 수 있었다. 에릭과 세린도 데비롱이 뭔지는 아는지 표정이 영 이상해졌다. 나는 이에 그치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을 하고 나서 보니 캐스나가 들어와 있더라고. 물론 계획적이었지. 그래서 화들짝 놀라는 척하면 대충 얼버무렸어. 캐스나도 못들은 척 했지만 침대를 정리하는 손이 떨리는 것이 틀림없이 들었어.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옷장을 뒤지는 사람이 없었어. 일부러 방을 뒤질 수 있는 기회까지 만들어줬는데 말이야." 내가 말을 마치자 에릭과 세린은 아예 입을 딱 벌렸다. 그리고 놀라움이 어느 정도 가시자 나를 책망하기 시작했다. "너 제정신이냐?" "만약 그 말이 새어나갔으면 지금이랑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곤란해지는 거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왜 그렇게 무모한 거야?" 그러나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나는 전혀 꿀리지 않고 대답했다. "무모한 게 아니라 대단하다고 말해 줘. 대를 위해서는 소를 희생해야 하는 법이야. 그 리고 방을 비울 때도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으니까 걱정 없었어. 미리 준비해놓은 인형도 가짜였어. 나중에 그런 가짜를 가지고 어디서 모함하는냐고 하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캐스나는 아니었어." "아무리 그래도..." 세린이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때마침 안데리사가 들어오자 입을 다물었다. 안데리사를 완전히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동안 하던 것으로 봐서 내통자는 아닌 것 같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다. 이번처럼 안심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을 수 있었다. 안데리사가 내통자가 아니라는 보증이 어디에도 없었기에 계속 조심하고 있었다. 안데리사 뿐만 아니라 궁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조심했다. 나는 에릭과 세린을 제외한 모든 자를 잠정적인 내통자로 여기고 있었다. 캐롤과 미나도 의심하고 있는 마당에 그가 의심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나와 세린이 워낙 순발력이 뛰어난지라 안데리사는 우리가 자신을 경계하고 말을 멈춘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도 내통자 용의자 리스트에 올라있다는 것은 모르는 것이 본인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었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천천히 걸어갔다. 대전의 좌우에는 회의라는 표면적인 이유를 들어 '방해되는 왕족을 몰아내자'라는 기치 하에 모였던 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시립하고 있었다. 라디폰 공작과 티스몬 백작, 그 외에도 내 편을 들었다는 귀족들도 보였지만 분위기에서부터 밀리고 있었다. 어제 들은 말과 라디폰 공작들의 어두운 얼굴을 보니 결국 내가 누명을 뒤집어쓴 모양이다. 숫자에서 밀리는데 라디폰 공작이라도 어떻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대전이 무척이나 크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너무도 빨리 국왕 앞에 도착한 것 같았다. 나는 굴러가지 않는 혀를 억지로 움직여 말했다. "마리엔 오페나 드간 페드인이 레프스터 국왕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오늘 내가 너를 부른 이유를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레프스터 국왕은 침통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모를 리 없었다. 누명을 뒤집어썼으니 그 다음은 뻔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상황이 더 나빠지더라도 라디폰 공작이나 귀족들에게 맡기지만 말고 나도 나서볼 걸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너무 늦었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고, 국왕의 안타까운 시선이 느껴지는 듯 했다. 비록 내 무죄는 믿어주지 않았지만 지금의 괴로운 표정으로 그에 대한 원망은 조금은 사그라졌다. 어찌 레프스터 국왕이라고 나를 도와주고 싶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귀족들이 워낙 강경하다 보니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르미엘 왕자의 표정도 국왕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을 제외한 왕족들은 고소하다거나 당연한 결과라는 표정이었다. 물론 오펠리우스 왕비는 가장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눈이 웃고 있었다. 저절로 이가 갈렸지만 그걸 드러낼 수는 없었기에 죄 없는 입술만 깨물어댔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서 무척이나 슬프구나. 하지만 네가 악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 믿는다. 저주에 대한 호기심에 한 번 해본 것이겠지. 하지만 그렇게 믿지 않는 자들이 너무 많구나. 마음은 아프지만 네 신변을 위해서도 이 방법이 제일이라고 생각한다." 레프스터 국왕의 말을 조용히 들으면서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말이 의례상 해보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귀족들이 내 죄를 가볍게 여기도록 하기 위해 하는 말임을 알 수 있었다. 나미르 백작이 욱하는 것이 보였지만 국왕의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언뜻 보였다. 처음에는 주위에 보이는 인간들은 흔하디 흔한 인간 중에 한 명이었다. 하지만 그 것이 조금씩 색을 가지게 되고 의미를 가지게 되고 결국에는 인간 중에 하나가 아니라 또 다른 존재로 다가온다. 마족이 인간계에 자주 놀러 가는 것도 이런 색다른 경험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그런 경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슬프기도 하고 분하기도 했다. "그래서 소동이 가라앉을 때까지 너를 사헤트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사헤트는 대대로 우리 나라와는 형제의 나라였고, 교류도 활발하니 좋을 거라 생각한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놀랐다. 다른 곳으로 보낸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 곳이 사헤트라는 것 때문에 놀랐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확실한 내용은 몰랐는지 깜짝 놀랐다. 말이 소동이 가라앉을 때까지지 그 때가 언제인지는 모른다. 눈치로 봐서 2,3년은 죽치고 있어야할 것 같았다. 게다가 사헤트는 페드인 왕국의 정반대 쪽, 즉 소피린 대륙의 동쪽 맨 끝에 위치한 나라였다. 거리가 엄청 떨어져 있어서 내륙을 가로지르면 4개월, 배를 타고 빙 돌아가면 6개월이었다. 이 것도 제대로 쉬지도 않고 가장 빠른 속도로 간다는 가장 하에 나오는 숫자였다. 만약 유람 삼아 서서히 구경하면서 가다보면 1년이 걸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사헤트는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으로 되어있어 문화나 풍습도 많이 달랐다. 아드린 대륙의 류온이나 스피린만큼은 아니어도 충분히 이질적인 나라였다. 그런데 그 곳으로 가란다. 이건 거의 유배 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최악의 상황. 아니, 최최악의 상황이었다. 적어도 페드인 왕국 내 일줄 알았는데. "폐하! 사헤트는 너무 멀지 않습니까?" 라디폰 공작이 대표로 항의했지만 레프스터 국왕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니 보내는 것이오. 이 곳에서 멀수록 안전하지 않겠소." "정 그러시다면 스피린으로 보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마리엔 공주님도 낯선 곳보다는 그 곳이 나을 겁니다." "아바마마,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사헤트는 이 곳과는 너무 다릅니다. 마리엔이 적응하지 못할 겁니다." 르미엘 왕자마저 거들자 잠시 레프스터 국왕이 말을 없었다. 그 틈을 타 티스몬 백작과 다른 귀족들도 너무한 처사라고 항변하기 시작했다. 비록 스피린은 다른 대륙에 위치한 나라라 멀게 느껴지지만 거리 상으로 보면 토르와 비슷했다. 때문에 맘만 먹으면 쉽게 돌아올 수 있었기에 귀족들은 기왕 다른 곳으로 가게 된다면 그 곳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다. 게다가 레리이나 여왕은 나를 잘 알고 있으니 많이 도와줄 것이다. 잘하면 전화위복의 기회를 맞을 지도 모른다. 나 역시 한번도 가보지 못한 사헤트보다는 스피린이 백 배는 나았다. 그 곳은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은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느 나라로 가든 쫓겨나는 것이 너무너무 자존심 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먼저 오펠리우스 왕비를 치는 건데. 하지만 오펠리우스 왕비는 내가 스피린으로 가면 금방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슬며시 끼어 들었다. "그만들 하세요. 폐하께서 신중히 생각하시고 결정하신 겁니다. 사실 저도 스 피린보다는 사헤트가 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헤트가 멀다고는 하지만 비상시에 사용할 수 있는 이동 마법진이 있으니 급하면 돌아올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새로운 문물을 접하는 것이 마리엔에게도 좋을 겁니다." 참고로 그 이동 마법진은 200년 전 하레난과 전쟁이 일어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사용된 적이 없었다. 그러니 마법진의 안전성을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잘하면 빠른 시간에 안전히 이동할 수 있지만 잘못하면 전혀 엉뚱한 곳으로 떨어져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오펠리우스 왕비는 이동 마법진이 있으니 걱정 없다는 식으로 말한 것이다. 나는 레프스터 국왕에게 사헤트가 좋겠다고 넌지시 말한 사람이 오펠리우스 왕비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좋았다. 그러나 오펠리우스 왕비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저라고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마리엔을 그렇게 먼 곳으로 보낼 걸 생각하면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걱정이 됩니다. 하지만 꾹 참고 있습니다. 저는 주신 제르마님과 다섯 신께서 마리엔을 지켜주실 거라 굳게 믿고 있답니다." 저 xxx같은 년이! 분명히 잠을 자다가 벌떡 일어날 것이다. 너무 좋아서. 나는 속이 뒤집어진다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그냥 웃어라! 상냥한 척 하지 말고. 정말로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고 싶다. 나는 갈등했다. 지금 오펠리우스 왕비와 그 패거리들을 죽여버리고 튈까, 정말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차피 복수의 방법은 다양하다. 평생 짓밟아주는 것도 복수지만 죽여버리는 것도 복수다. 그래. 그냥 싸그리 없애버리는 거다. 저따위 인간들 없애버리고 나는 인간세계에서 노는 거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주문을 외웠다. 호프리스 윈드의 주문이 거의 완성돼갈 즈음 이 곳에 모여있는 사람들 태반은 자신이 마법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것도 모르고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오펠리우스 왕비의 의견에 동조하느라 바쁜 것이다. 오펠리우스 왕비는 가장 늦게 죽여주겠어. 눈앞에서 부하와 오빠, 자식들을 모두 죽여줄 테다. 르미엘 왕자는 빼고. 절대 가만 안 둘 거야. 그런데 내통자는 어떻게 하지? 그래. 그냥 다 죽여버리자. 그 중에 한 명은 있겠지. 서서히 살기가 피어올라 내 주위를 감쌌지만 멍청한 인간들은 나를 스피린으로 보내느냐, 사헤트로 보내느냐 싸우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꿇고 있던 무릎을 펴고 일어서려던 나는 우연히 에릭과 눈이 마주쳤다. 지금 에릭과 세린은 라디폰 공작과 티스몬 백작의 곁에 있었던 것이다. 역시 실력이 좋아서 그런지 은은한 살기를 느낀 것 같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검은 눈동자가 걱정으로 물든 것처럼 보였다. 내가 사헤트로 가면 라디폰 공작이 곤란해질까 봐 그러는 걸까? 평소 같으면 졸린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을 텐데. 신기해서 그를 계속 쳐다보았다. 보통은 이렇게 빤히 쳐다보면 시선을 회피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빤히 쳐다보다 보니 끓어오르던 분노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유는...모른다. 약간은 머리가 차가워진 나는 다시 격렬히 말싸움을 하고 있는 귀족들을 보았다. 내 운명이 저 말싸움에 달린 것인가? 그러나 말싸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레프스터 국왕이 입을 연 것이다. "그만. 이제 됐소! 마리엔은 사헤트로 보내겠소. 1년 정도 사헤트로 여행 보냈다는 생각으로 보낼 테니 그리 아시오. 마리엔도 알겠느냐?" 나는 레프스터 국왕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분하다. 억울하다. 꼭 쥔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이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썼지만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조금 전에 치솟던 물불 가리지 않는 분노는 사라졌지만 얼음처럼 차갑게 얼어붙은 분노가 텅 빈 가슴을 가득 메웠다. 이대로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절대로 오펠리우스 왕비의 뜻대로 맥없이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30- 드러나는 음모 #30- 드러나는 음모 사헤트로 가는 것이 결정되자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고요하고 움직임이 없던 제 1공주궁 내의 시계가 빠르게 돌아갔다. 다른 곳보다 시계가 배는 빨리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더 이상 나를 감시할 필요가 사자졌다고 판단했는지 출입을 통제하던 기사들도 사라졌다. 덕분에 예전처럼 귀족들이 자유롭게 찾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라디폰 공작과 티스몬 백작이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마리엔 공주님, 정말 죄송합니다." 티스몬 백작이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사과하자 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함정에 빠진 내 잘못이니까요. 하지만 이대로 쉽게 물러가 주지는 않을 겁니다." 순순히 물러날 내가 아니었다. 오펠리우스 왕비만은 처리하고 가겠어. 이 상황에서 왕비가 죽으면 내가 의심을 받겠지만, 이성은 지금은 참고 나중에 개박살 내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대전에서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려고 했을 때의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던 분노는 가라앉았지만 지금도 밑바닥에서 언제 터질지 모를 화산이 증기를 내뿜으며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언제 이렇게 맥없이 당해본 적이 있었는가? 단연코 없었다. 처음으로 감정이 이성을 누르고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그동안은 아무리 화가 나도 항상 내가 유리한지, 어떤 방법이 있는지 생각해보고 움직였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제멋대로 날뛰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언제나 '이렇게 행동해도 내게 올 피해는 없을까? 있으면 어느 정도인가? 내가 막을 수 있을까?'를 계산하고 괜찮겠다는 이성의 승인 하에 감정대로 행동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성의 조절도 소용없었다. 무엇보다 화가 나는 건 인간 따위에게 당했다는 것이다. 호감이 가는 상대는 인간 따위가 아닌데 싫은 상대는 인간 따위라니 정말 모순적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인간에게 지다니 정말 싫다. 이럴 줄 알았으면 부모님께 떼를 써서라고 완전히 힘을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할 걸. 사용할 수 없는 힘은 있으나 마나한 것이었다. "공주님!" "예?" 상념에 젖어 복수의 칼을 갈던 나는 라디폰 공작의 부름에 그제야 현실로 돌아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신 겁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이런 저런 생각을 했을 뿐이에요." 사실대로 '왕비를 어떻게 없애버릴까?' 생각했다고 말하면 틀림없이 라디폰 공작이 반대할 것이라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라디폰 공작은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설마 사헤트로 떠나기 전에 오펠리우스 왕비께 복수하실 생각이십니까?" 라디폰 공작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았다. 평소 같으면 딱 잡아뗐겠지만 지금은 머리가 복잡해서 시치미를 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 기색을 별로 드러내지 않았다고 여겼는데 어떻게 안 건지 궁금했다. 의문을 제기하는 듯한 내 모습을 보고 라디폰 공작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역시나 그러셨군요. 공주님 성격에 조용히 넘어갈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제 예상이 맞은 모양이군요. 하지만 지금은 곤란합니다. 왕비께 무슨 일이 생기면 당장 의심을 받을 사람은 바로 마리엔 공주님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참으십시오." "그럼 나보고 그냥 이대로 사헤트로 가라는 건가요? 적어도 분풀이는 하고 가겠어요." 나는 톡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그러나 그 것은 라디폰 공작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하고 대처하는 나에게 다른 내가 솔직한 기분을 전한 것이다. "분풀이라면 얼마든지 하셔도 좋습니다." 라디폰 공작의 말에 티스몬 백작은 물론 정작 말을 한 나까지도 놀랐다. 당연히 그가 말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눈을 깜빡 깜빡거리는 사이 티스몬 백작이 당황함을 감추지 않은 채 그대로 말했다. "공작? 어찌 그런 말을?" "단, 사헤트를 다녀와서 하십시오." 라디폰 공작의 말에 티스몬 백작은 안심하는 기색이었지만 나는 그럼 그렇지란 생각에 입술을 삐죽였다. 지금 당장 처리하고 싶은데 어떻게 1년을 넘게 기다리란 말이야? 왔다 갔다 하는 기간까지 합하면 거의 2년이 되는데. 내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가만히 있자 라디폰 공작이 얼굴을 약간 굳히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 왜 마리엔 공주님께서 누명을 쓰신 줄 아십니까?" "...방심해서요."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라 한참만에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라디폰 공작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아닙니다. 방심한 이유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바로 마리엔 공주님의 태도에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기분이 약간 상한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하지만 라디폰 공작은 내가 기분이 상하는 것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문제라고 생각하는지 직설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아무리 누명을 썼다 해도 이 쪽에 지지자들이 많았다면 충분히 뒤집을 수도 있었습니다. 한데 왜 많은 귀족들이 중립을 지켰는지 아십니까? 마리엔 공주님께서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오펠리우스 왕비를 적대시하면서도 한 번도 왕위에 관심이 있는 모습을 보여주신 적이 없습니다. 때문에 많은 자들이 망설인 겁니다." 라디폰 공작의 말에 티스몬 백작이 동감이라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틀린 말이 아니라 나는 속으로 궁시렁대면서도 조용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말을 끊었던 라디폰 공작은 다시 말을 이었다. "구심점이 확실해야 귀족들이 모여듭니다. 만약 이번에 공주님 편을 들었다가 두 왕자님들 중 한 분이 왕위에 오르게 되면 상당한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꽤 많은 수의 귀족들이 공주님께 호감을 가지고 있고 그 이유로 저희 진영에 합류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정치는 호감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확실한 미래가 있다는 것을 주지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왜 이번 일의 결과가 이렇게 된 건 줄 아시겠습니까?" "그래요. 내가 왕위에 도전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이니까 많은 수가 지지해주지 않았다는 말이죠?" 라디폰 공작의 날카로운 말에 나는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던 것이다. 까딱하면 세력을 잃을 수도 있는데 누가 왕위에 관심도 없는 내편을 들어주겠는가? 그동안은 방심해서 사헤트에 가게 생겼다고 생각했지만 라디폰 공작의 말이 맞았다. "맞습니다. 이제는 태도를 확실히 하셔야 할 때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라디폰 공작은 이 기회에 내가 마음을 다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씨익 웃으며 물었다. 여기서 '기필코 여왕이 되고 말겠어!' 라고 말하면 오죽이나 좋겠냐만 그렇게 확답할 수는 없었다. 불연 듯 내가 인간계에 온 이유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기필코 인간세계에서 놀고 말리라, 라는 결심을 하고 오지 않았던가. 이런 순간에도 그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노는 것에 대한 집착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컸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마리엔과의 계약도 있지 않은가.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는 것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결심하고 대답을 기다리는 라디폰 공작과 티스몬 백작을 향해 말했다. "솔직히 확실히 말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오펠리우스 왕비가 잘 되는 모습은 절대로 못 봐요." "그건 왕위를 노리시겠다는 말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왕비께서 잘 되는 일이라면 두 왕자님 중 한 분이 왕위에 오르시는 것일 테니까요." "필요하다면 하겠어요." 내 말에 두 사람의 얼굴이 오랜만에 밝아졌다. 노는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나중에 계약 나왔다는 핑계로 마계에 돌아가지 않고 돌아다닐 수도 있었기에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빨리 놀고 싶다는 조급한 마음을 조금만 참으면 된다. 물론 반드시 될 필요가 없다면 여왕이 될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공주마마." "이로서 저희도 구심점이 확실해졌습니다. 저희들이 공주님께서 떠나 계시는 동안 준비를 해놓겠습니다. 복수는 그 때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최고로 화려하게 말입니다. 그러니 1년 동안은 참으시면서 준비하십시오. 이 위기를 절호의 찬스로 만드는 겁니다." 라디폰 공작의 자신만만한 말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던 감정이 다스려졌다. 분노와 슬픔, 허망함이 한데 섞여 덩어리진 감정의 덩어리는 가슴 깊숙한 곳으로 침전되었다. 다시 떠오를 때를 기다리며. 내가 냉정함을 되찾자 라디폰 공작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인간이야말로 진정으로 강한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것이 제가 공주님께 끌린 이유이기도 합니다." "훗,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디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목표가 생긴 나와 라디폰 공작들은 후일을 준비하기 위해 새롭게 마음을 다잡았다. 오펠리우스 왕비, 어디 두고보자! 반드시 땅을 치고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 물론 날 이 꼴로 만든 다른 인간들도 용서할 수 없었다. 왕비에 대한 복수를 뒤로 미루자 나도 사헤트에 갈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대부분은 시녀들이 알아서 해주지만 내가 따로 챙겨야할 것도 있었다. 창은 기본이고 마계에서 가져온 보석과 캐스나의 도움으로 간단하게 정리한 마법책도 챙겼다. 그리고 남은 시간은 호위 기사들과(내가 사헤트에 갈 때까지는 붙어 있는다고 한다) 잡담을 나누거나 제 4기사단을 찾아가 검술을 지도해주었다. 제 4기사단을 찾아갈 때면 내가 마음놓고 이야기할 시간을 마련해주기 위해서인지 고맙게도 호위기사들은 약간 떨어져 있어서 직접 대련까지는 못해도 구두로 여러 가지를 일러줄 수 있었다. 이젠 내가 지적해줄 것도 별로 없이 자기들끼리 서로 지적해주곤 하지만 말이다. 제 4기사단의 기사들이 말로는 자신들도 가보지 못한 사막 나라에 갈 수 있게 돼서 좋겠다고 하지만 내 기분을 띄워주기 위해서라는 것을 안다. 스피린에 갈 때와는 달리 왠지 마음이 무거웠지만 그래도 웃었다. 축 쳐져서 떠나는 모습이 아니라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기사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우리들은 어느 때보다 웃고 떠들고 놀았다. 정말로 즐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흉한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건 마계에 있는 다섯 마족(부모님, 센, 제스, 다크리언)과 한 명의 다크 엘프(가야)뿐일 것이다. 그 외는 내 자존심이 허락치를 않으니까. 시간은 정말 빨리 지나갔다. 누가 고의로 우주의 시계를 빨리 돌려버린 것처럼. 이번에는 스피린에 갈 때와는 달리 쓸쓸한 출발이었다. "공주님, 너무 천방지축 구시면 안됩니다. 밥도 거르지 마시고 사헤트는 일교차가 심하다고 하니 잘 때는 이불을 꼭 덮고 주무세요. 아셨죠?... 감기 걸리시면 안되잖아요. 그리고 쓸쓸해지시면 고양이를 키우세요. 사헤트의 고양이는 무척이나 예쁘데요. 그리고 이건...사헤트에서 먹고 싶으신 것이 있으시면 사서 드세요." 캐롤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금화 10개를 건네주었다. 웃는 낯으로 나를 보내려고 애쓰는 그녀의 모습이 슬퍼 보였다. 아무리 쫓겨나다시피 해도 명색이 공주인데 사헤트에서 괄시할 리 없었다. 그러나 캐롤은 내가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낯선 사람들에게 부탁하지 못할까봐 걱정이 돼서 돈을 쥐어주는 것이다. 그 때 왜 눈물이 핑 돌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흐느낌 소리에 감염이 된 걸까? 하지만 나는 일부러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활짝 웃으면서 돈을 받아들었다. --------------------------- ------------------------------- "고마워. 꼭 맛있는 거 사먹을게. 나중에 돌아오면 어떤 맛인지도 가르쳐줄게. 너무 걱정하지마. 나는...말을 잘하잖아. 사헤트에서도 맛있는 것 많이 얻어먹고 올게." "네. 그러셔야죠. 그러셔야 공주님답..." 캐롤은 결국 말을 끝마치지 못한 채 오열했다. 내가 누명을 쓴 게 자신이 관리를 잘못해서라고 무던히도 죄스러워하던 캐롤이었다. 캐롤이 눈물을 흘리자 여기저기서 숨죽여서 울던 소리가 커졌다. 목에 뭐가 걸린 것처럼 말이 잘 나오지 않았지만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 억지로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마. 미나도 같이 가잖아. 난 괜찮아." "네, 시녀장님, 염려 마세요. 제가 공주님을 잘 모실게요." 미나가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이번에 나를 따라오는 시녀는 미나 혼자였다. 사헤트에 가면 그 곳 시녀들이 붙게될 테니 굳이 많은 수가 필요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미나가 따라와서 다행이었다. "거봐. 미나도 이렇게 말하잖아. 금방 돌아올 테니까...기다리고 있어." "네. 부디 몸조심하세요." 울먹이는 시녀들을 놔둔 채 나는 미나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계속 있으면 내가 그들에게 웃어주지 못할 것 같아 서둘렀다. 이번에 나를 호위하는 기사들의 책임자인 제 6기사단의 단장인 우드랜의 명령과 함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마차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보고 싶지 않았다. 이 곳에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밖을 보면 그들이 떠올라서 납덩이를 매단 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져버릴 것 같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마차가 멈추자 감정을 조절하느라 여념이 없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커튼을 걷지는 않았다. 아직 아렌테의 모습이 보일 것 같아서. 잠시 후 우드랜이 마차의 문을 열고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주었다. "공주님, 아스티에 공작님께서 뵙고 싶으시답니다." "여기서?" "네." 마차문 밖으로 살짝 보이는 풍경은 아렌테의 성문 근처였다.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며 나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마차 밖으로 나왔다. 아스티에 공작이 내 편을 들어주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하는 철부지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나를 도와줬다 해도 뒤집을 수 없었다는 것을 알지만 냉정한 행동이 조금이지만 야속했다. 놀랍게도 아스티에 공작은 한 명의 수행원만을 데리고 나타났다. 아스티에 공작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리 없었던 나는 시녀들 앞에서처럼 애써 미소를 지으려하지는 않았다. "이제 떠나십니까?" "네." 나는 힘없이 대답했다. 아스티에 공작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내린 시선으로 공작의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공작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낡은 신발. "몸조심하십시오." 신발을 멍하니 보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스티에 공작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부드럽게 울리고 있었다. 올려다본 아스티에 공작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서글퍼 보였다. 그의 얼굴에서 초상화에서 본 이리아 왕비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나는 말이 없었지만 아스티에 공작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듯 계속 말했다. "이리아와 무척이나 닮았군요. 하지만 이리아처럼 이 늙은이를 두고 일찍 가지는 마십시오. 그 것이 두려웠지요. 정을 주었다가 이리아처럼 떠나가 버리면 어쩌나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후회가 되는군요. 왜 그 때 당신의 손을 들어주지 못했나 하고 말입니다. 못난 늙은이의 고집이었지요. 쓸데없는 고집이었지요. 이렇게 후회할걸." "......" 아스티에 공작의 눈이 물결치고 있었다. "제가 공주님과 가까이 하면 왕비가 위해를 가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것이었지요. 내가 지켜주어야 하는 것을...사헤트에서 돌아오시면 아스티에 공작가에 들려주시겠습니까? 공주님의 외할머니도, 외삼촌도, 이모도, 사촌도... 그리고 저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나는 잠시 그의 얼굴을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재빨리 마차에 올라탔다. 이번에도 목구멍으로 뭔가 올라오려고 한다. 나는 그 것을 다시 삼킨 후 마차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서서히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 아스티에 공작이 밖에 있을까? 아스티에 공작은 내 생각처럼 차가운 사람이 아니었다.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말도 걸어보지 못했나 보다. 바보 같아. 그런 이유로 말을 걸지 못하다니. 잃을 것이 두려워서 말도 걸어보지 못할 정도면 소중히 생각하고 있다는 거잖아. 정말 바보 같아. 한참만에 내다본 바깥은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점점 환해지고 있는 하늘인데 쓴 웃음을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가운데로 붉은 빛기둥을 내리꽂으며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어둠에 물든 회색의 구름이 해를 집어삼키고 있어 하늘의 빛은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 불행은 잡초와 같아. 처음에는 그 것이 불행의 씨앗인 줄 누구도 모르지. 그리고 눈치챘을 때 불행은 다른 생명이 뿌리내려야할 터전까지 집어삼켜 버리고 말지. 침략자의 칼은 연약한 짐승을 너무도 쉽게 무너뜨린다네. 잡초가 물결치는 초록의 바다는 희망과 미래라는 배를 침몰시켜버려. 불행의 씨앗은 누구에게 나는지 몰라. 친구에게, 연인에게, 원수에게. 누구도 알 수 없어. 불행의 잡초가 초원을 뒤덮어야 우리는 불행의 그림자를 보게 되지. 아무리 베어도 끊임없이 자라는 무서운 불행의 풀. 그러나. 그러나. 두려워하지마. 포기하지마. 비웃는 자들을 향해 크게 웃어주겠어. 나는 불행의 잡초를 자르는 농부가 되리라. 풀의 내음이 밸 때 우리는 보게 되리라. 우리의 몸을 망토처럼 휘어 감는 찬란한 황금빛 태양을. 우리는 같은 것을 보게 되리라. #30- 드러나는 음모 #30- 드러나는 음모 아렌테를 출발한 지 열흘째가 되는 날 우리 일행은 페드인 왕국의 동쪽 국경선을 코앞에 두게 되었다. 이렇듯 국경선에 일찍 도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렌테가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우리들이 길을 재촉한 탓도 컸다. 아무리 내 여행(?)을 비밀에 부치고 귀족으로 위장했다지만 오랫동안 여행하는 것은 위험했다. 공주라는 것이 알려지지 않더라도 돈 많은 귀족은 산적들의 주목표가 될 수 있었고, 여행 중간 중간에는 예상치 못한 여러 가지 위험이 풀숲에 숨은 독사처럼 똬리 틀고 있었다. 때문에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 여행 며칠만에 마차를 평범한 마차로 바꾸었지만 1 5명의 검사(기사들은 검사로 변장했다)들이 보호하는 마차가 절대 평범해 보일 리 없었다. 사실 기사들의 수가 많으면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었지만 현재 인원은 많지도 적지도 않은 애매한 숫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기사들이 모두 제 4, 5, 6 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이라는 것이다. 아마 빽 좋은 다른 기사단은 쫓겨나다시피 한 내 호위를 맡기 싫어서 빠진 모양이다. 하긴 지금 기사들은 페드인 왕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나를 호위하게 되니 그럴 수도 있었다. "마리엔 님, 오늘은 국경 근처에 있는 잔노모랑이라는 도시에서 쉬어간다고 합니다." 아인이 창가로 말을 몰고 와 말했다. "잔노모랑? 얼마나 가야 나오는데?" "아마 점심때쯤이면 도착할 겁니다." "그래?" 현재 15명의 기사 중 제 4기사단 소속의 기사는 아인과 마르크, 씨베라스 이 세 사람이었다. 기왕이면 제 4기사단 소속의 기사가 많았으면 했지만 며칠 지내본 바 다른 기사들도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제 1기사단처럼 자기들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도 아니고 내 처지가 좋지 않다고 우습게 보는 사람도 없었다. 덕분에 금방 친해진 것은 아니지만 그런 대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처음 그들이 의외를 나를 경멸하거나 우습게 보는 눈이(현재 나는 아리란드 전하에게 저주를 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니라 담담하지만 약간의 존경어린 눈으로 보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마르크의 말을 들어보니 망나니 제 4기사단을 지금까지 끌어올린 것이 나라는 것 때문에 하위 그룹에 속한 기사들이 좋게 보는 것이라고 한다. 내가 직접 가르친 것은 모르나 내게 충성을 맹세한 후 제 4기사단이 급속도로 변했기에 변화의 원인이 나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영향은 꽤나 커서 내가 사헤트로 가게 된 이 순간에도 그들이 비교적 우호적인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위 그룹에 속하는 기사와의 차별대우가 꽤나 심했다고 한다. 다른 기사들의 눈에는 선망의 대상인 이들도 상위 기사단에 대해서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어떤 환경에 처해있느냐에 따라 사람은 변하는 것인가 보다. 그리고 아무리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나름대로의 고민과 불행을 껴안고 살아가는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마차는 잔노모랑에 들어서고 있었다. 잔노모랑은 국경선을 넘어가는 사람과 넘어오는 사람들 때문에 여관과 술집이 많은 도시였다. 잔노모랑의 대로를 지나는 동안 다른 마을에서처럼 길을 가던 사람들이 검사들의 호위를 받고 나타난 마차를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곧 자신들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우리와 같은 무리들이 흔한 것은 아니지만 볼 수 없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창가에 붙어서 거리를 구경했겠지만 지금은 커튼을 치고 마차 안과 밖을 연결해주는 작은 통로를 차단해버렸다. 아무리 미래를 후약하기로 했다지만 아무 거리낌없이 도시를 구경할 정도로 무신경하지 않았다. 그만큼 씁쓸하고 화가 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감정을 수습할 수 있는 정도가 늘어나고 기분도 나아지고 있지만 적어도 페드인 왕국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계속 우울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 티내고 싶지도 않고 티낼 수도 없어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명랑하게 굴었다. 커튼이 내려온 마차 안으로 빛을 담은 새벽의 어둠과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어둠은 그의 자식인 나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이러고 있으면 기분이 조금 좋아진다. 어둠의 달콤한 향기와 상쾌한 숨결이 폐부로 스며들 때면 안식의 마법이 살며시 내려온다. "공주님, 아니 마리엔 님, 곧 국경선이네요. 저는 지금까지 페드인 왕국을 벗어나 본 적이 없어서 너무너무 두근거리는 것 있죠." 위로의 노래를 불러주던 침묵의 검은 새가 미나의 말에 놀라 푸드득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미나는 여행 내낸 말도 많고(원래도 많은 편이었지만) 작은 일에도 즐거워했다. 나를 위로해주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성격이 낙천적이라서 그런지 모르겠다. 어쩐지 둘 다 일지도. 나는 신나서 떠드는 미나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미나와 있으면 우울해질까 하다가도 금새 회복된다. 생각이 없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미나가 싫지는 않다. 미나의 호들갑에 맞장구쳐주는 사이 마차가 오늘 머물 숙소로 들어갔다. 꽤나 고급스럽고 깨끗한 3층 짜리 여관이었다. 마부가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마구간으로 마차를 몰고 가는 동안 우리들은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국경선 근처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여관 안에 있었지만 우리들이 앉을 자리는 있었다. 17명이라는 대인원이 한꺼번에 들이닥치자 종업원의 얼굴이 활짝 피면서 잽싸게 자리로 안내했다. 비록 한꺼번에 앉을 수는 없었지만 세 개의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서 먹을 수 있었다. 나는 미나와 함께 아인, 마르크, 씨베라스와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친분을 쌓기 위해서(싫든 좋든 이제는 함께 지낼 테니까) 다른 기사들과 함께 앉아본 적도 있었지만 딱딱하게 굳어서 제대로 밥을 먹지도 못하는 것을 보고 그만 두었다. 친해지면 그 때 같이 먹어봐야지. 그 때 가면 내가 사과 파이를 달라고 해도 거절할 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이다. "씨스(씨베라스에게 내가 애칭을 지어주었다), 그 사과 파이 나 주라." "싫습니다." 그러면서 씨스는 두 손으로 사과 파이를 가리면서 사수에 들어갔다. 그의 그런 행동에 옆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다른 기사들이 놀라서 쳐다보았다. 감히 기사가, 그 것도 나를 주군으로 모셨다던 기사가 쫀쫀하게 사과 파이 하나 가지고 반항하고 있으니 당황한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예상했던 나는 크게 놀라는 것 없이 말했다. "왜? 먹지도 않으면서?" "나중에 먹으려고 아껴둔 겁니다." "흐응, 그래서 못 주겠다고?" "넵. 마리엔 님께서는 다른 파이가 있지 않습니까?" 나와 씨스가 파이 가지고 티격태격하자 우드랜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리엔 님, 제 걸 드십시오. 제 것도 사과 파이입니다만." 우드랜의 말에 잠시 우드랜의 파이를 쳐다보던 나는 손가락을 흔들면서 말했다. "아뇨. 됐어요. 역시 먹을 건 뺏어먹는 것이 제일로 맛있지요." "네에?" 우드랜의 반문과 다른 기사들의 황당하다는 시선을 뒤로 한 채 나와 씨스는 사과 파이 쟁탈전을 벌였다. 아인과 마르크는 그 사이에도 열심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사실 그렇게 사과 파이가 먹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정 먹고 싶다면 새로 한 개 주문하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렇게 구는 것은 명랑하게 굴수록 겉으로는 그런 척하지 않지만 뒤에서는 기사들이 안심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특히 미나, 아인, 마르크, 씨스) 내가 상심하고 있을까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내가 명랑하게 행동하면 일행 전체의 분위기가 살아나지만 우울해있으면 착 가라앉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웃음으로써 내가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 수 있었다. 난 즐거워라고. 식사를 마친 우리는 오후에는 그동안 쌓인 피로를 풀거나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는 등의 자유시간을 가졌다. 별로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미나의 권유로 잔노모랑을 구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인과 마르크, 씨스도 호위를 위해 함께 따라왔다. "어? 미나, 어딜 그렇게 보는 거야?" 앞서 가며 즐겁게 떠들던 미나가 우뚝 멈춰선 채 어느 한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미나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니 작은 무기점이 하나 보였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무기점인데 미나는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저길 가고 싶은 거야?" 내 말에 미나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뭐. 한 번 가보자."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자 미나가 활짝 웃었다. 무기점에 들어가 보니 역시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무기점이었다. 무기점에는 손님이 없었는지 우리가 들어가자 주인이 무척이나 반가워하며 달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무슨 물건을 찾으십니까?" 주인은 마르크를 보고 말했지만 마르크는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주인이 나를 쳐다보자 나는 다시 미나를 쳐다보았다. 이 곳에 오고 싶어했던 사람은 미나였으니까. 마침내 주인은 진짜 손님이 누군지 알아차리고 미나를 기대에 찬 눈으로 보았다. "아가씨, 뭘 원하십니까? 여성용 활도 있고 단검도 좋은 것이 있습니다. 특이하신 분들을 위한 채찍도 있습니다." "검을 보러 왔는데요. 살 건 아니고 그냥 구경 좀 해보려고요." 미나의 말에 주인은 약간 실망하는 듯 했지만 그래도 친절하게 검을 진열해놓은 곳으로 우리를 안내해주었다. "검이라면 이 곳에 있습니다. 바스타드 소드에서 롱소드, 레이피어, 리쇼르까지 검 종류는 빠지지 않고 모두 있습니다. 같은 종류라도 손잡이나 길이, 검신이 차이가 있기 때문에 휘둘러보고 자신에게 맞는 것을 고르시면 됩니다." 미나는 신기한 지 이 것 저것 살펴보기도 하고 휘둘러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미나에게 검이 없다는 사실이 그 때야 떠올랐다. 그동안은 계속 목검만 사용했지 진검은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미나가 진짜 검에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다. 검을 배운 자라면 누구나 진짜 검을 휘둘러보고 싶은 테니까 말이다. "미나, 마음에 드는 걸로 하나 골라봐." "네? 왜요?" 미나가 반문하자 나는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생각해보니까 미나는 아직 검이 없잖아. 검을 배우는 사람이 검이 없으면 안될 것 같아서. 그러니까 하나 골라봐. 선물로 사줄게." "정말이세요?" "그래. 고르지 못하겠으면 나나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 다른 사람들도 검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까 좋은 검으로 골라줄 거야." 그러나 미나는 자신이 직접 고르고 싶었던지 만면에 웃음을 지은 채 검을 휘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동안 미나가 사용했던 목검의 정도나 미나의 실력으로 봐서 롱소드나 레이피어가 제격이었다. 그러나 미나는 욕심이 많은 것인지 검을 휘둘러보는 것이 재미있는 것인지 아무 검이나 집어보고 있었다. 리쇼르나 단검은 물론 도, 시미터, 양날검, 서드(날이 톱날처럼 돼있는 검)까지 휘둘러보았다. 심지어 바스타드 소드까지 들려고 하는 것을 내가 말렸다. "미나, 바스타드 소드는 대부분 남자들이 사용하는 거야. 미나의 힘으로는 제대로 사용하지 못할 테니까 다른 검을 골라보지 그래?" "으음." 내 말에도 미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겠는지 자꾸 바스타드 소드 쪽으로 눈이 돌아가고 있었다. 무리를 한다면 휘두르지 못할 것은 없지만 미나가 내게 배운 '플라워 드러'를 사용하기에는 무리였다. 유연함이 생명인 플라워 드러인데 힘에 부쳐 동작이 제대로 연결되지 못하면 아무 소용도 없었다. 아인도 미나에게 조언해주었다. "그 검보다는 롱소드나 레이피어 쪽이 어떨까요?" "그래요?" "왜 그러지? 바스타드 소드가 마음에 드는 이유라도 있나?" 씨스의 질문에 미나가 말을 할까 말까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결심했는지 입을 열었다. "그게 보나인 님이 바스타드 소드를 사용하시잖아요. 그런데 한 번 휘두르면 휭, 하는 소리가 나서 멋있어 보이기에 저도 해보고 싶어서요." "으하하하. 그건 좋아할 게 못되지. 나이를 먹었으면 점잖아지지는 못할망정 힘만 남아돌아서 마구 휘두르는 게 뭐가 부럽다고 그래? 사람이란 자고로 나잇값을 해야하는 법. 늙었는데도 그 정도 힘이면 힘이 좋은 수준을 넘어서 괴물 수준이지. 그러니 정상적인 우리는 그걸 보고 따라하려는 시도는 애초에 하지 않는 게 좋아." 마르크는 미나의 말에 웃음을 터트리면서 말했다. 보나인이 없어서 막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마르크가 보나인 앞에서도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원래 제 4기사단이 좀 그렇지 않은가. 미나는 마르크의 반응이 무안한지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씨스가 그런 미나가 안 돼 보였는지 입을 열었다. "마르크는 원래 이러니까 신경 꺼. 하지만 바스타드 소드를 사용하는 것은 좀 무리인 것 같군. 차라리 롱소드가 어때? 롱소드는 가장 평범한 검인만큼 다른 검처럼 특별하게 사용될 수는 없지만 여러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어. 미나가 썼던 목검도 대충 롱소드 정도 무게였을 거야." "그래요?" "그래. 그러니까 롱소드 중에서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봐. 그리고 롱소드도 잘만 휘두르면 휭, 소리가 나." 씨스가 윙크를 하면서 말하자 미나가 기쁜 얼굴로 롱소드로 눈을 돌렸다. 그렇게 한참을 고른 후에 미나가 선택한 검은 약간 검신이 좁아서 가벼운 것을 제외하면 평범한 검이었다. 하지만 미나의 마음에는 쏙 드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휘두른 다른 검보다도 가장 소리가 좋은 것으로 봐서 손에도 맞는 것 같아서 나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검을 산 김에 손을 보호하기 위한 가죽 장갑과 여분의 단검, 부분 갑옷도 사주었다. 갑옷은 미나의 사정상 기사들처럼 차려입을 수 없어서 부분 갑옷을 골랐지만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치고는 제법 괜찮은 것 같았다. 미나는 그 짐을 손에 한아름 안아들고 함박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니 오랜만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 오늘은 연참~ 아스티에님, 어제 보내주신 그림 정말 잘 받았습니다. 넘 예뻐요~ ^-^b 그리고 신선짱님이 보내주신 겜 해봤습니다. 쫌 짧은 것이 흠이지만 잘 만드셨더군요. 근데 에리의 아틀리에의 인물을 잘라서 하신 거데요. 처음에 누구지? 어디서 봤는데? 생각하다가...앗! 더글라스다! 뒤에 시아도 나오고 많이 나오더군요 ^-^ 이번에 만드실 겜은 좀 길었으면 합니다. 겜 정말 잘했어요. 제가 만들어 본 적이 있어서 만들리가 얼마나 힘든지 알지요 ㅠ_ㅠ #31- 이별 #31- 이별 숲은 고요했다. 바람 한 점 일지 않았다. 바람의 발자국을 찾기 위해 기울인 귓가로 낮 동안 우짖던 새의 울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땅의 눈이 닫히고 나무와 꽃들마저 깊은 잠에 빠진 듯 했다. 모닥불이 탁탁거리며 타는 소리만이 동무가 되어 어울려 주었다. 나무 타는 그윽한 냄새에 누운 자세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너울거리는 불꽃의 그림자가 불침번을 서고 있는 기사들을 집어삼키고 저희들끼리 어울려 희롱하고 있었다. 불꽃의 그림자에 검붉게 그늘진 기사들의 얼굴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던 나는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나뭇가지로 멀리 떨어진 별들이 보였다. 작은 요정들이 나뭇가지 사이를 날아다니며 장난을 치고 있는 듯한 모습. 빛을 뿜어내는 힘이 지나쳐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떨리고 있어 그 별들을 담고 있는 내 눈도 같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 서쪽 하늘에서 흘러나와 숲 위에 비스듬히 걸린 큰 별 하나가 눈에 와서 박혔다. 잠시 생각한 뒤 나는 그 별이 사람들 사이에서 이방인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언제나 별 무리에서 홀로 떨어져 하늘을 밝히지만 어떤 별보다 환한 빛을 뿜어내는 별. 봄의 문턱에 들어서면 별 무리와 조금씩 가까워졌다가 겨울이 시작되면 어느새 처음의 위치로 돌아간다. 끊임없이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지만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 이방인이라는 별이었다. 나는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별빛 중에서도 이방인의 빛을 망막에 새기고 눈을 감았다. 땅에서 서늘한 기운이 모포를 뚫고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노숙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 숲의 기운은 유난히 차가웠다. 이 숲은 페드인 왕국과 접해있는 센트라의 서쪽 국경선에서 사흘 거리 정도 떨어져 있는 시우리스 숲이었다. 하지만 시우리스 숲이라는 이름보다 묘지의 숲이라고 불렸다.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에 이 곳은 큰 도시였다고 한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 성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단 한사람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몰살당하고, 그 후로 이 곳에 나무가 자라나 숲이 되었다는 것이다. 밤에 유난히 서늘한 것도 억울하게 죽은 원령이 여행자의 몸 위에 올라타 서라고들 하지만 믿을 수 없다. 정말로 이 밑에 시체가 있는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유난히 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는 터라 빛이 잘 들지 않았다. 아마 그 때문이겠지. 그렇게 묘지일지도 모를 숲에서 보내는 밤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선잠을 자던 나는 오싹한 기분에 벌떡 일어났다. 뱀이 전신을 휘감은 것처럼 차갑고 섬뜩한 냉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 것과 동시에 어둠 속에 숨겨진 숲 속에서 이상한 기류가 전해져왔다. 아무도 없을 때와 동물이 있을 때와는 달리 공기 중으로 팽팽하게 조여진 음울한 기척이 느껴졌다. 잠들기 전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기운이었다. 그 적대적인 기운은 자신의 존재를 감출 생각이 없는지 모든 것을 발산하듯 강하게 뿜어져 나와서 미나마저도 깼다. 나는 재빨리 창을 집어들고 전방을 주시했다. 기사들도 전투 태세를 취했고, 미나도 얼마 전에 산 검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그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뭇잎을 밟는 소리가 과녁을 노리는 화살처럼 고막에 꽂혔다. 그와 함께 푸른색의 안광이 숲의 그늘 안에서 쏘아져 나왔다. 유령처럼 윤곽 전체가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는 것도, 공중에 덩그러니 두 개의 작은 원만 떠올라 있는 것도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은 점점 다가왔고, 동시에 발자국 소리도 가까워졌다. 간간이 발자국 소리에 섞여 짐승의 낮은 울음 같은 소리도 섞여서 들려왔다. 순간 좀비와 스켈레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인간의 뼈는 어두운 곳에서 보면 약간 푸르스름한 빛을 발한다. 그리고 어둠을 뚫고 나타난 자들의 모습을 본 나는 예감이 빗나가지 않았음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크르르." 낮게 울면서 썩은 내를 풍기는 인형의 정체는 좀비였다. 하나 죽은 지 오래된 시체들인지 살점이 대부분 썩어나가 절반 정도는 뼈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눈은 있으되 코에서 아래턱까지 썩어서 사라진 시체, 앙상한 뼈 위에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 같은 천조각을 걸친 시체, 뻥 뚫린 눈으로 나무의 잔뿌리가 삐죽 튀어나와 있는 시체 등 가지각색이었다. 숫자도 공터를 가득 메울 정도로 많았다. 대충 어림짐작해봐도 적어도 40마리 이상이었다. 그 모습을 본 미나의 얼굴이 새하얘졌지만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간신히 서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러나 나와 기사들은 인상만 구겼다. 지금 중요한 것은 좀비의 끔찍한 형상이 아니라 저 것들이 적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좀비?" "어떻게?" "이 곳에서 좀비가 나온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기사들이 놀라서 수군거렸지만 여전히 좀비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좀비가 있다면 틀림없이 조종하는 사람이 있을 터. 나는 재빨리 빛의 구를 만들어냈다. 갑자기 주변이 환해지자 한순간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몇 번 눈을 깜빡이자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시력이 돌아오자 재빨리 주변을 살핀 나는 금세 수상해 보이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의 살점이 썩어나가 좀비와 스켈레톤의 중간 형태를 하고 있는 괴물들 사이에서 정상적인 인간을 찾아내기는 너무 쉬웠다. 사람들은 대략 20명 정도 됐다. 그런데 몇 명을 제외한 사람들 또한 이상했다. 조금 전에는 좀비들에 가려 보지 못했는데 그들의 눈은 피가 몰려 빨갛게 변해있었다. 그리고 그 눈에선 증오와 살의만이 엿보일 뿐 이성의 조각은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드러난 새하얀 이가 빛을 받아 소름끼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광기에 젖은 그들은 오직 피를 갈구하는 듯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버서커?" "그래. 꼬마 계집이 잘 아는구나." 내가 중얼거리자 비교적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그는 검은 로브를 입은 깡마른 노인으로 얼마나 피골이 상접한지 로브만 아니었다면 좀비로 착각할 판이었다. 그 노인과 옆에 서있는 다른 사람들은 온통 검은 색으로 통일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팔뚝 부분에는 금실로 수놓아진 다리 네 개의 새가 활개치고 있었다. 영광의 색이라는 금빛이 재앙을 몰고 오는 사자의 색으로 보였다. 금색의 새는 검은 색과 대조되어 왠지 모를 섬뜩함을 자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네 놈들은 누구냐?" 우드랜이 대표로 소리치자 조금 전의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죽고 나서 신에게 물어보아라. 만약에 신이 있다면 말이지. 히히히." 노인은 실성한 것처럼 웃어댔다. 기괴한 웃음소리와 핏발이 선 눈 때문에 절로 소름끼치는 늙은이였다. 그러나 미나를 제외하고 그 걸 겉으로 드러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 계시는 이 분이 누구신지 아는 것이냐? 당장 물러나라!" 우드랜이 호통치자 노인의 웃음이 딱 멈췄다. "물론 알지. 마리엔 공주가 아니더냐? 평민들을 벌레 취급하는 그 위대하신 왕족 중 한 분을 내가 모를 리 없지." "뭐? 그걸 알면서도 이런 짓을 한단 말이냐?" "목적이 마리엔 공주니 당연한 것이 아니더냐! 네 놈들이 벌레로 여기고 밟아 죽이는 평민인 내가 왕족을 죽여보려고 그런다. 재미있지 않겠느냐? 붉은 피바다에서 꿈틀대는 왕족을 직접 짓뭉갤 수 있다는 것이. 히히히." 노인은 숨이 멎을 정도로 낄낄댔다. 그 웃음에서 진득한 살의와 광기가 느껴져 우리들은 더욱 긴장했다. 이렇게 반쯤 정신이 나가버린 인간이 완전히 돌아버린 인간보다 더 무서운 법이다. 하지만 난 평민은 죽인 적이 없는데?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숲 속을 울리며 퍼지던 기분 나쁜 웃음이 갑자기 뚝 그쳤다. 어느새 웃음을 그친 노인은 진지한 얼굴로 기사들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네 놈들에게도 기회를 주지? 너희가 대신 공주를 처치해준다면 목숨을 살려주마. 어떠냐?" "피드라 님, 명령은 몰살이었습니다." 노인의 옆에 서있던 자 중 하나가 끼여들며 말하자 노인이 매섭게 노려보았다. "시끄럽다! 감히 내 말을 거역하겠다는 거냐? 당장 이 자리에서 죽고 싶나?" 피드라가 번들거리는 눈을 독사처럼 치켜세우며 화를 내자 그 자는 두려운지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어찌 피드라 님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실언을 용서해주십시오." "흥, 쓸모 없는 놈. 네 놈 때문에 아까 다른 놈들에게 우리의 정체가 발각됐다는 것을 잊지 마라. 추적자들이 그 놈들을 처리하지 못하면 네 놈은 내 손으로 죽여주겠다." 피드라의 말에 그 자가 잠시 몸을 떨었다. 그러나 피드라는 언제 그 자에게 말을 했냐는 듯이 금세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겠지? 어떠냐?" "미친 놈, 헛소리는 작작해라!" 마르크가 인상을 구기며 소리치자 피드라가 다시 낄낄대기 시작했다. "그래? 그럼 너희들도 죽어줘야겠다. 어릿광대들이 추는 피의 춤을 보고 싶구나. 히히히." 피드라가 다시 미친 듯이 웃어 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것이 신호가 되어 좀비와 버서커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크와와!" 버서커들은 광기로 가득 찬 붉은 눈을 빛내며 달려들었다. 좀비들은 행동이 느려서 잘 대처하면 별 탈 없이 이길 수 있겠지만 버서커들은 달랐다. 생명력을 모두 쏟아 부으면서 덤벼드는 만큼 두려움도 고통도 몰랐다. 목숨을 바치는 대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기에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까다롭기 그지없는 존재였다. 버서커들을 물리치려면 오로지 죽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상처를 내도 숨을 쉴 수만 있으면 언제고 어디까지고 덤벼든다. 버서커의 존재 이유는 살육 하나뿐이었다. 거기에 좀비들까지 합세해서 상대의 숫자는 우리의 두 배가 넘었다. 이럴 때는 초반에 어떻게든 숫자를 줄여놔야 한다. "트웨브 다이어!" 나는 피드라가 낄낄대는 사이 외워놨던 마법을 재빨리 사용했다. 곧 넘실거리는 지옥의 불꽃이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릴 기세로 앞으로 쏘아졌다. 염화가 토해내는 뜨거운 열기가 나에게까지 전해져왔다. 검붉은 불꽃의 해일 사이로 몸부림치는 사람의 형상이 언뜻 보였지만 금세 탐욕에 찬 붉은 괴물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숲은 허공에 떠있는 빛의 구가 아니라 불의 혓바닥에 의해 환하게 밝혀졌다. 기사들은 내가 갑자기 마법을 사용하자 눈을 크게 뜨고 돌아봤지만 이내 살아남을 적의 다음 공격을 대비했다. 미나의 공포와 놀라움, 존경심이 어우러진 시선이 느껴질 뿐이었다. 미나는 실전은 처음이라 단순히 검을 들고 있지 그 이상은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불길이 걷히자 동장이 느린 좀비들은 몇 마리를 제외하고는 재로 화해버렸다. 목이 잘려도 끊임없이 덤벼드는 좀비지만 아예 존재 그 자체가 사라져버렸으니 다시 덤벼드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버서커들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재빨리 피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피드라의 조종이 있었기 때문인지 대부분 무사했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이들이 무슨 이유로 공격하려 하는지 보다는 어떻게 이겨야할지가 고민이었다. "치,칠 서클? 분명히 6서클이라고 했을 텐데. 썩을 자식. 돌아가면 그 자식을 목을 따서 돼지들 먹이로 주고 말겠다." 한꺼번에 40명 정도의 인원이 사라져버리자 피드라가 이를 뿌드득 갈면서 누군지 모를 자를 저주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낄낄대면서 말했다. "하지만 마법을 연속으로 사용할 순 없지. 마지막 발악이구나. 죽여버려라. 낄낄낄." 화를 내다 웃다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곤란했다. 어느 정도 정신이 박힌 자라면 7서클만 봐도 줄행랑을 칠 텐데 계속 덤비지 않는가. 확실히 피드라의 말처럼 7서클마법을 주문도 없이 연속으로 사용할 수만 있다면 세상 천지에 마법사의 적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인상을 구기는 사이 버서커와 좀비들이 다시 몰려왔다. 인간이라면 겁을 먹기라도 했겠지만 이들은 두려움을 모르기에 지체 없이 공격해왔다. 버서커들이 굉장히 빨라 기사들은 내 주위를 둘러쌀 틈도 없이 그 놈들을 막기 바빴다. 나는 재빨리 창을 원래 모습으로 바꾸고 팔을 휘적거리며 달려드는 좀비를 상대했다. 이 놈의 좀비는 그냥 보면 흐느적 흐느적거리면서 느려 터졌는데 먹이(인간)만 앞에 있으면 정말 빨라진다. 객관적으로 보면 여전히 굼뜨지만 평소에 비하면 많이 빨라진다. 좀비는 일반적으로 조종자를 없애든지 신성마법을 사용해야 퇴치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이, 이럴 줄 알았으면 신관이라도 하나 붙여달라고 할걸. 아니꼽긴 하지만 언데드를 상대할 땐 신성마법이 효과가 좋긴 했다. "제길! 공주님!" "왜 불러?" 씨스가 버서커의 검을 능숙하게 막으면서 나를 불렀다. 마침 창을 휘둘러 좀비의 목을 잘라낸 나는 그 목을 멀리 차버리면서 대꾸했다. 목을 그냥 놔두면 나중에 발을 물어뜯기 때문에 그냥 둘 수 없었다. 옆눈질로 이 모습을 본 씨스는 여전히 다급하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많이 진정이 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열심히 싸우십시오." "알았어. 다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잘 싸워요!" 처음에는 걱정스러워하던 기사들도 상황이 다급해지고 내가 예상외로 잘 싸우자 각자 막고있는 상대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내팽개쳐둔 것은 아니고 수시로 내 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주위를 맴돌면서 버서커들이 내 쪽으로 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좀비는 버서커처럼 센 놈들이 아니라 비교적 여유가 생긴 나는 재빨리 주변을 확인해보았다. 버서커가 11마리, 좀비가 6마리였다. 미나와 마부는 싸움이 시작되자 저 뒤쪽으로 피해서 현재 싸우고 있는 사람은 나까지 해서 모두 16명이었다. 한 명씩 상대하면 수는 그런 대로 맞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버서커들이 물 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기 때문에 두 명씩 짝을 지어 상대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나와 좀비를 상대하고 있는 기사들은 모두 두 마리씩 상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버서커를 상대하는 기사들처럼 힘들지는 않았다. 아무리 공격해도 죽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31- 이별 조종자로 보이는 피드라를 노리려고 했지만 워낙 얽히고 싸우는 난전이라 접근하기가 용이치 않았다. 마법을 사용하려 해도 앞쪽에 있는 기사들이 맞을까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신성 마법 따위를 사용할 수도 없었다. 설령 누가 신성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고 당장 거절할 것이다. 별 쓸모도 없이 반짝거리기만 하는 신성 마법이 없어도 얼마든지 좀비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좀비가 동작이 느린데다 움직이면 집중이 깨질 정도로 정신력이 약하지 않았기에 수월하게 마법을 완성할 수 있었다. "디스펠!" 마법으로 깨어난 좀비인 만큼 마법이 사라지면 그냥 시체에 불과했다. 역시 좀비들은 휘적거리며 달려들던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좀비들이 짚단처럼 쓰러진 것을 본 나는 즉시 근처에 있는 아인에게 가세했다. 아인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실력으로 버서커를 혼자 막고 있었지만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려움도 모르고 초인적인 실력을 발휘하는 버서커를 상대하는 것은 아무리 노련한 기사라도 버거운 일이었던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를 벌이던 싸움에 내가 가세하자 금방 균형이 깨졌다. 나도 아인도 서로의 실력을 잘 알고 있어서 처음 협공한 것치고는 손발이 맞았다. 내가 심장을 향해 창을 짧게 찌르자 버서커가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공포가 없어도 심장이 뚫리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피한 것이다. 내가 전진하면서 틈을 주지 않고 계속 몰아붙이자 버서커는 주춤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재빨리 뒤로 돌아간 아인이 버서커의 등을 힘껏 찔렀다. 왼쪽 가슴 을 뚫고 삐죽이 튀어나온 검 끝이 보였다. 그리고 아인이 검을 뺀 것과 동시에 버서커의 몸이 앞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쓰러졌다. 재빨리 옆으로 비켜선 나는 죽어 가는 와중에도 광기에 젖은 붉은 눈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 눈도 바람에 촛불이 꺼지는 것처럼 빛을 잃었다. 트웨브 다이어에 타죽은 놈들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죽은 버서커였다. 나와 아인은 마주보고 씨익 웃은 후에 각자 다른 사람을 도우러 갔다. 버서커들이 완전히 살기에 젖어 날뛰는 지라 기사들이 제법 다치긴 했지만 아직 크게 다친 사람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나와 아인, 그리고 좀비를 상대하던 기사들까지 합세하자 흔들거리면서도 평형을 유지하던 저울이 조금씩이지만 우리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버서커들이 눈이 뒤집혀 달려드는지라 쉽게 이길 수는 없었지만 어느 정도 여유는 찾을 수 있었다.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자 피드라의 경악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도 안 돼!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어. 이럴 수는 없는 거야. 흐흐흐, 평민은 왕족을 이길 수 없는 거야? 결국 개같이 죽어야 하는 거야?" "피드라 님, 진정하십시오. 아직 버서커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좀비들도 아직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갑자기 피드라가 다시 웃기 시작했다. "맞아. 그랬지. 아직 끝난 게 아니지. 끝난 게 아니었어. 낄낄낄." 나는 좀비가 더 남아있다는 말에 긴장했다. 피드라가 킥킥대는 걸 무시한 채 재빨리 눈동자를 굴려 좀비들이 어디 있나 살펴보았다. 그러나 바닥에 쓰러져있는 시체들을 빼면 좀비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 있다는 거지? 좀 더 주의 깊게 숲 속을 살펴보려던 나는 공기를 가르며 다가오는 검을 보고 기겁해서 몸을 옆으로 비켰다. 잠시 한 눈을 팔았던 것이 위험한 행동이었다. 다른 상대도 아니고 완전히 증오와 살의, 광기로 뭉친 버서커를 상대로 딴 생각을 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검을 피해낸 나는 숲을 살피던 시선을 거둬들여 눈앞의 버서커를 주시했다. 아무리 봐도 좀비는 찾아볼 수 없었기에 허풍이라고 단정지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자꾸 불안감이 피어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씨스와 손을 맞추면서 속으로 다콜저 라스톰을 외우기 시작했다. 설마 했지만 그래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리 마법을 외워두었다. 상대는 내가 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이면서도 주문을 외울 수 있다는 것을 모르니 혹시라도 일어날 지 모르는 불상사에 대비할 수 있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마법을 외워두는 것으로 약간 마음이 편해졌다. 되도록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고 이대로 끝이 났으면 했지만 그런 내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망자들이여, 이제 일어나서 내 뜻을 따라라! 모든 것을 죽음으로 물들여버려라." 피드라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창을 휘둘러 버서커를 떨쳐낸 나는 뒤로 물러나 주변을 살폈다. 나뿐만 아니라 싸우고 있는 사람들도 긴장하는 기색이 역 력했다. 지금이야 상관없지만 여기서 좀비까지 가세한다면 곤경에 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몇 초가 지나도 좀비는 나타나지 않았다. 피드라라는 늙은이가 너무도 당당히 외쳐서 허풍은 아닐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하지만 그런 생각은 땅에서 솟아 나온 것이 내 발목을 잡는 후로는 싸악 사라졌다. "앗!" 놀라서 발을 동동 굴러 떨쳐낸 그 것은 사람의 팔이었다. 썩어서 진물이 흘러나오는 손은 내가 발로 차자 끊어졌는지 손만 까닥거리며 땅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게처럼 타닥타닥 움직이며 다가오는 손이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못하게 멀리 차버렸지만 그 것과 거의 동시에 수많은 손들이 땅을 뚫고 나왔다. "으아!" "이게 뭐야?" 나처럼 발목을 잡힌 기사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와중에도 버서커들은 끊임없이 광기를 뿌리며 검을 휘둘렀다. 덕분에 여기저기 부상자들이 속출했다. 다른 사람들이 재빨리 가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몇 명은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가 허둥대는 사이 아우성치는 손들은 달빛을 받아 노랗고 하얀 꽃을 피워냈다. 하지만 진짜 꽃들과는 달리 향기가 아닌 악취를 풍겼다. 그 괴기한 꽃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줄기가 쑥쑥 뻗어 나와 땅 속에 감춰져있던 원래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서서히 줄기와 함께 괴화의 큰 암술이 드러났다. 암술은 전에 봤던 좀비들처럼 퀭하니 뚫린 눈으로 나와 기사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쳇." 나는 주위를 살펴보고 잇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상대의 수가 배 이상으로 늘어난 것이다. 거의 포위되다시피 한 우리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미리 마법을 외워뒀다는 것때문에 안심이 됐다. "뒤로 물러나요!" 내 말에 기사들이 힘겹게 버서커들을 떨치고 뒤로 물러났다. 버서커들이 쏜살같이 쫓아왔지만 이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으면 상관없었다. "다콜저 라스톰!" 콰르릉. 하늘을 가리키던 손을 사선으로 내려긋자 하늘에서 찢어질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맑은 밤하늘이 울음을 터트리면서 검은 벼락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여러 줄기의 굵직한 벼락은 짐승의 목을 찍어내는 도끼처럼 무서운 기세로 내리쳤다. 하나의 벼락이 버서커들과 좀비들 사이로 떨어졌고, 이에 질세라 다른 벼락들도 머리 위로 떨어졌다. 잠시 후 드러난 공터의 모습은 폐허가 따로 없었다. 움푹 패인 구덩이와 고열에 녹은 돌의 잔해가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이제 막 나왔던 좀비들은 운 좋게 우리 일행과 섞여 있던 몇몇을 제외하고는 시커멓게 타 죽었다. 원래 좀비란 아무리 상처를 입어도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아예 형상만 남고 모조리 타죽었기에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 것도 직격으로 맞지 않은 놈의 경우이고 벼락에 직격으로 맞은 놈들은 그나마도 남지 않았다. 좀비들이 죽은 후에도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어둠의 힘 때문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한 어둠의 힘을 가하면 근본을 잃고 사라지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주어야만 가능하지만 내 특기가 흑마법 아닌가. 무엇보다도 8서클의 마법은 이름만 8서클이 아니었다. "이 빌어먹을 년아! 죽어버리란 말이다. 그렇게 죽기가 싫으냐? 다른 사람은 죽어도 상관없고 고귀한 네놈들은 죽으면 안 된다는 거냐!" 좀비들이 죽자 피드라는 눈에 핏줄을 세우고 소리쳤다. 그 외침은 나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 같았다. 무언가 왕족과 원한이 있기라도 한 건가? 횡설수설하는 피드라를 보면서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뭔가 말을 붙여볼 시도를 하기도 전에 피드라는 입술을 비뚤게 올리고 말했다. "죽여버릴 테다. 갈가리 찢어 버리겠어. 너는 피비를 본 적이 없겠지? 보여주지. 망 자들이여, 깨어나라!" 그리고 다시 땅 속에서 괴화들이 피어났다. 좀비의 손들이 다시 땅을 뚫고 나오자 나는 물론 다른 사람들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까지 없앤 좀비만 해도 마을 하나는 괴멸시키고도 남을 숫자였다. 그런데 또 있단 말이야? 설마 150년 전에 여기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게 정말이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들은 다시 좀비들에게 포위되다 시피 했다. 이번에는 주문을 외울 틈도 없었기에 나는 해일처럼 밀려오는 좀비들을 막느라 정신이 없었다. 좀비라도 수가 많아지니 부상을 입는 기사들이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까의 벼락을 피하고 살아남은 버서커들도 공격에 가세해 우리들은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버서커들 덕분에 다친 사람들은 많은 수의 좀비들을 막는 것이 버거워 보였다. 기사 중 한 명이 좀비 무리에 파묻히는 것이 보였지만 우글거리는 좀비 때문에 다가갈 수가 없었다. 부지런히 디스펠을 외워 사용하자 좀비들이 다시 풀썩 쓰러졌지만 이번에는 피드라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 때부터 나와 피드라의 대결은 시작되었다. 내가 디스펠을 외워 좀비들을 쓰러뜨리면 피드라가 다시 일으켜 세우고, 마법을 써서 없애버리면 다시 땅 속에서 좀비들이 꾸물거리며 기어 나왔다. 도대체 땅 속에 얼마나 많은 시체들이 있는지 끝이 없었다. 나중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으로 나도 좀비를 조종하려 했지만 허사였다. 시체를 불러일으키려 했지만 몇 마리를 제외하고는 좀비들이 생기지 않았다. 덕분에 내가 어리둥절해지자 피드라가 입을 열었다. "소용없어. 여기 묻힌 시체들은 모두 파내서 내가 좀비로 만들어버렸지. 덤으로 다른 곳에서 데려온 좀비까지 모조리 묻어놨지. 그까짓 몇 마리로는 내 좀비들을 이길 수 없어. 낄낄낄. 이대로 죽는 거다." 피드라의 말에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다. 계획적이었다. 우리가 이 곳을 지날 것을 알고 미리 좀비들을 묻어둔 거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는데. 어떻게? 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떻게, 왜 우리들을 습격하는지는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 이들을 물리친 후에 얼마든지 말이다. 기사들이 한두 명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도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지금은 모두가 다른 사람을 도와줄 정신이 없었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좀비들을 베고 찔렀다. 이런 식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가만히 서서 잡아먹힐 수는 없지 않은가. 이렇게 되니 버서커가 차라리 좀비보다 나았다.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지만 머리를 잘라버리면 죽기라도 하지 않은가. 내가 깨웠던 좀비들은 다른 좀비들에 의해 완전히 분해된 후 버둥거리고 있어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디스펠을 걸어도 끊임없이 일으켜 세우니 공격을 할 수밖에 없었다. 좀비가 다시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만들기 위해서는 적어도 7서클 후반에서 8서클 흑마법을 써야 했다. 어느새 솜털 사이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마법도 여러 번 사용하다 보니 슬슬 지치는 것이다. 이대로는 안되겠어. 되든 안되든 조종자를 노려볼 수밖에. 이대로 가다가는 피해가 너무 커진다. 모든 것을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뜨려 소멸시키는 마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땅 속에 시체가 남아있는 한 좀비는 계속 나올 것이다. 프라임 라인으로 일직선에 서있던 좀비들을 잠시 머뭇거리게 한 후에 재빨리 피드라를 향해 뛰었다. 이 정신나간 늙은이만 없애면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뻗으면 피드라의 정수리에 구멍을 뚫을 수 있을 거리까지 왔을 때 그의 옆에 있던 네 사람이 움직였다. 두 사람은 검으로 창을 내리쳐 막고, 다른 두 사람은 내 허리를 노리고 덤볐다. 창을 회수해 휘둘렀지만 옷자락만 찢어놓았을 뿐이다. 잠시 두 사람이 주춤거리는 사이 신속하게 손을 움직였다. 한 남자의 배에 창을 꽂아주긴 했지만 그 걸로 만족하고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좀비들이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싸움은 달이 산 너머로 숨으려고 기울어질 때까지 계속됐다. 물량공세로 나오는 상대 때문에 기사들마저 호흡이 거칠어졌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데 몸이 먼저 지친 것이다. 벌써 기사 3명이 희생되었다. 더 이상의 싸움은 무리일 정도로 다친 사람도 있었다. 설령 오늘 여기서 살아나간다 해도 말이다. 반면에 좀비와 버서커에게 거의 모든 걸 맡겼던 피드라들은 말짱했다. 피드라만 약간 지친 기색이었지만 디스펠을 사용한 경우를 제외하면 이미 부하로 만든 좀비를 부르기만 하면 해서 크게 힘든 것 같지는 않았다. 어느새 미나와 마부가 있는 곳까지 밀려난 우리들은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곳에 서있었다. 상대는 이미 우리를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하는지 당장 덤비지 않고 느긋하게 포위망을 좁혀왔다. 더불어 피드라의 기분 나쁜 웃음도 커졌다. "마리엔님." "왜요?" 우드랜이 속삭이듯 말을 걸자 나도 작게 중얼거렸다. "아직 마법을 사용하실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긴 하지만 죽여도 죽여도 기어 나오니..." "이번엔 죽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한순간이라도 앞을 못 보게 하실 수 있습니까?" 우드랜은 도망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지금 오기를 부리며 싸웠다가는 사상자의 수가 늘어날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조문을 외웠다. '창공을 밝히는 황금빛 태양의 힘을 빌어 속박의 굴레를 끊고 떠도는 존재들에게 빛을 부여하니 이제 나타나 찬란한 날개를 태워라.' 득의 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피드라를 한번 본 다음 나는 마법을 완성했다. "라트레 브라인!" "으악!" "누, 눈이!" "제기랄!" 미리 눈을 감은 우리와는 달리 피드라들은 혼란에 빠져버렸다. 라트레 브라인을 정면으로 받았으니 당분간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은 타오르는 듯한 새하얀 빛이 사라지는 듯 하자 숲 속으로 뛰어갔다. #31- 이별 #31- 이별 피드라들의 외침을 뒤로 한 채 우리들은 숲 속을 정신 없이 달렸다. 싸울 때는 신경도 못쓴 치마가 자꾸 발에 차여서 귀찮았다. 나무나 덤불도 길을 방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무작정 뛰었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말이지 머릿수만으로 밀어붙이면 해결방법이 없다. 다친 기사들은 거의 끌려오다시피 했지만 누구도 이 상황을 불평하지 않았다. 상처의 고통보다는 목숨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한참동안 달음박질하던 우리는 당장 쫓아오는 사람이 없자 발을 멈췄다. 부상자들의 상처에서 떨어지는 핏방울들이 추격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었고,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적을 만나기도 전에 과다출혈로 죽는 사람들이 나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약간의 부상을 입었지만 그래도 비교적 말짱한 사람들이 부상자들의 상처를 치료했다. 마차에 있던 약을 챙겨올 시간이 없어서 옷을 찢어 상처를 봉하는 일밖에 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나는 치마를 무릎 부분까지 잘라냈다. 그나마 붕대로 쓸만한 천으로 보이는 것은 이 치마였던 것이다. 기사들이 옷의 팔 부분을 찢어냈지만 역시 폭이 넓은 치마가 제일로 보였다. 내가 치마를 쭉 찢자 당황하는 듯 했지만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달리는 데 방해가 돼서도 치마를 짧게 찢어야 했다. 상처를 대강 봉했지만 그 정도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당장 치료가 필요한 사람도 두세 명이나 됐다. 이럴 때는 회복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정말 아쉽다. 과연 이들이 끝까지 버틸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벌써 상처를 동여맨 천은 꽉 묶었음에도 불구하고 흘러나오는 피로 벌겋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나마 나는 친분이 많지 않아 이 정도지 같은 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의 얼굴에는 그늘이 져있었다. 특히 기사들을 지휘하는 입장인 우드랜은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만에 우드랜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일행을 둘로 나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드랜의 말에 사방을 살피며 추격자가 있나 없나를 가늠해보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내 말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모두 함께 행동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두 패로 나눠서 행동하는 것이 효율적입니다. 적도 그만큼 분산될 테니 그 편이 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사히 숲을 빠져나가면 처음 계획했던 대로 아페다의 <음유시인의 눈물>이라는 여관에서 만나기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각개격파 당할 수도 있잖아요." "그렇겠지요. 하지만 지금 이대로 있다가 한꺼번에 당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리고 우드랜은 인원을 두 패로 나누기 시작했다. 둘로 나뉜 기사들의 구성을 듣는 순간 나는 그가 왜 그렇게 괴로운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포함된 조에는 실력이 뛰어난 자들과 부상의 정도가 심하지 않은 자들로만 구성되어 있었고, 다른 조는 중상을 입은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말이 두 패로 나뉘어 행동하자는 것이지 실상은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그걸 알아듣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나뉘도록 하겠습니다." 우드랜이 말을 마치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과 안타까운 시선들이 오가고 있었다. 나와 함께 삶을 위해 뛰는 자도, 죽음으로 가는 자도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동료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삼아야한다는 것이, 동료들을 위해 희생당해야 한다는 것이 괴로운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입을 열었지만 그 이상은 말하지 못했다. 이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기에. 지금 중상자들을 데리고 간다면 다른 사람들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되느니 지금 떨쳐버리고 가는 것이 나았다. 이성적으로 이 것이 가장 현명한 판단이었다. 나는 냉정하게 다른 생각들을 떨쳐버렸다. 어쩔 수 없다면 빨리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것이 제일이었다. 솔직히 내가 인간이 아니다 보니 충격을 덜 받은 것도 있었다. "다른 할 말이 있는가?" 우드랜이 기사들을 향해 낮게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다른 조로 포함된 기사 중 한 명이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음유시인의 눈물>에서 만나는 것이죠? 알겠습니다. 대신 먼저 도착하시거든 영양가 높은 음식을 시켜놓고 환영 준비를 해주십시오. 저 끈질긴 놈들을 따돌리려면 기운 좀 빠질 테니까요." 우드랜의 아래에 있는 제 6기사단 소속의 기사였다. 우드랜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오, 약속하신 겁니다. 그럼 이만 헤어지도록 하죠. 솔직히 너무 많은 수가 뭉쳐 있으면 들키기도 쉽지 않습니까? 특히 단장 님처럼 덩치 큰 사람과 있으면 금방 발각되고 맙니다." "맞습니다. 저희들의 안전을 위해서도 단장 님은 어서 마리엔 공주님과 함께 가십시오." "우드랜 님, 이만 가십시오. 저희들은 좀 쉬었다 가겠습니다. 저희야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으니 걱정 없지만 그 쪽이 걱정되는군요. 그러니 어서 서두르십시오." 남은 자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 웃음은 미안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서 지어진 거짓 웃음이었다. 자신들이 희생당할 것을 알면서도 왜 초연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나 같으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당하는 것은 꿈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반대라면 몰라도 말이다. 무엇이 저들을 이렇게 만드는 것일까? 차라리 혼자 도망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미 부상을 입어서 숲을 빠져나가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다른 자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일까? 의문과 씁쓸함을 안고 남게 될 자들을 보던 나는 우드랜의 독촉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이 좋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그들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본 후에 뒤돌아 섰다. 그러나 다른 기사들은 나처럼 냉정하게 돌아서지 못하고 자꾸 뒤를 돌아봤다. 귓가로 뒤에 남는 사람들의 중얼거림이 들리는 듯 했다. "부디 살아남으시길." 여섯 명의 기사들을 남겨둔 채 우리들은 다시 서둘러 숲을 헤쳐 나갔다. 서로 말이 없었지만 단순히 추격자들에게 들킬 지도 모른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닌 듯 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매정하다면 매정하다고 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린 우드랜이 가장 괴로워 보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은 채 남은 사람들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들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 하지 않았다. 뛰어가던 나는 주춤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왠지 뒤에서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그들과 상당히 많이 떨어졌다. 말로는 자신들도 도망친다고 하지만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추격자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은 뻔했다. 조금이라도 우리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 그런데 그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리가 없었다. "공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따라오지 않자 마르크가 물었다. "아니에요. 아무 것도." 나는 다시 몸을 돌려 기사들의 뒤를 따라갔다. 지금은 우리 생각을 할 때였다. 뛸 때마다 바람이 얼굴을 때리면서 스쳐지나갔다. 나뭇가지로 보이는 별들이 금방이라도 산산이 깨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숨이 턱에 차도록 뛰었지만 미나도 마부도 불평 한마디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그런 사소한 걸로 불평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나에게는 엄청난 충격은 아니었지만 그 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는지 말을 잃어버린 것이다. 좀비와 버서커들의 습격이, 기사들의 죽음이, 기사들의 희생이. 무거운 침묵의 망토에 둘러싸여 움직이던 우리들은 어느 순간에 딱 멈춰 섰다. 앞쪽에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발소리가 거의 나지 않게 뛰고 있었지만 잔뜩 경계하고 있었던 지라 어렵지 않게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금방 완성할 수 있는 마법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고, 기사들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미나도 부들거리면서 검을 들고 있었다. 마부만이 뒤쪽에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바스락. 나뭇잎 밟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어둠 속에서 나뭇가지와 덤불이 흔들리자 나는 그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흔들리는 덤불이 서서히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검은 인형들이 덤불을 헤치고 뛰어나오자 기사들이 검을 휘둘렀다. 막 뛰어나온 사람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재빨리 몸을 피했다. 상당히 민첩하고 절제된 동작이었다. 공격을 피한 그들은 반격을 위해 검을 빠르게 찔러왔다. 여러 번 찔러오는 공격은 모두 급소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기사들은 물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공격들을 피해내고 상대를 포위했다. 상대는 어찌된 일인지 단 세 명뿐이었던 것이다. 상대의 숫자가 의외로 적다는 것이 이상해서 유심히 살펴본 나는 소리를 지르려다 재빨리 입을 막았다. 그러나 다시 손을 떼고 입을 열었다. 왜냐면 아는 사람이 기사들에게 포위되어 있었으니까. "잠깐 멈춰요." 내 말에 당장이라도 머리통을 부셔버릴 기세로 강하게 내리치던 검들이 정확히 상대의 머리 위에서 멈췄다. 기사들은 갑자기 내가 말리자 일단 공격은 그만 뒀지만 여전히 검을 상대에게 겨누고 있었다. 기사들의 공세가 느슨해지자 상대도 나를 알아봤다. "너는?" "수제노? 당신이 어떻게 여기 있는 거죠?" "우선 기사들에게 검이나 치우라고 하지." 수제노가 반말을 하자 기사들의 안면이 꿈틀거렸지만 이미 예전부터 들어왔던 말투라 새삼스럽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대신 약간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당신이 또 나를 노리고 왔을지도 모르는데?" "시끄러워. 계속 이대로 있다가는 버서커들이 쫓아온단 말이다." 이번에는 기사들의 검이 움찔했지만 나는 수제노의 다급한 말에 깜짝 놀라서 말했다. "뭐? 수제노도 그 미친 영감탱이한테 쫓기고 있단 말이야?" "그래. 그러니까 얼른 검이나 치우라고 해." 그러고 보니 수제노와 그 일행은 여기저기 작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심한 상처는 아니었지만 나뭇가지에 긁혔다고 보기에는 예리한 상처였다. "모두 검을 치워요. 적은 아닌 듯 하니까." 내 말에 기사들은 내키지 않는다는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살벌한 시선을 수제노들에게 날렸다. 이런 순간에도 왕족을 모욕하는 자에게(이들 입장에서) 불쾌감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지만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니 그냥 넘어갔다. 언제라도 베어버릴 기세로 겨눠져있던 검들이 치워지자 수제노들도 리쇼르를 내려뜨렸다. 그러나 여전히 경계하는 눈치였다. 그 것은 기사들이 아니라 다른 상대에 대한 경계심이었지만. "우선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숨지. 이대로 서있다가는 금방 들키고 말겠군." "그보다는 숲을 벗어나는 게 우선 아닌가?" 기사 중 한 명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수제노가 빈정거리면서 말했다. "지금 이 숲에는 그 빌어먹을 놈들이 쫘악 깔렸다. 그걸 뚫고 갈 수 있으면 그렇게 해. 하지만 겨우 9명으로 뚫을 수 없을 거다. 무리해서 뚫고 가느니 차라리 완벽하게 숨어있는 게 낫지." 사실 수제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기척이 느껴져서 이동 방향을 바꾼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가 주저하자 수제노 옆에 있는 남자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함정이 아닙니다. 사실 지금 저희도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 쪽도 공주님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몇 명이라도 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수제노가 처음부터 너무도 자연스럽게 반말을 했기에 암살자들은 모두 삐뚤어진 성격에 반말을 찍찍 해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가 보다. 우리들은 그 암살자의 말에 서로 마주보다 결국 우선 그들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이 숲을 빠져나가면 좋지만 그렇지 못했을 경우에 계속 뛴 다음이라 적과 마주쳤을 때 싸울 힘조차 남아있지 않으면 곤란하지 않은가. 사실 나와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미나와 마부는 거의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리고 상대의 경황도 알 필요가 있었다. 우리들은 앞장 선 수제노들을 따라 움직였다. 암살자가 우리보다 숨을 수 있을 만한 곳을 잘 찾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생각은 적중했다. 암살자들은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용케도 작은 것도 놓치지 않고 잘 탐색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 장소는 그냥 봐서는 찾기가 굉장히 힘든 곳이었다. 갈림길에 걸쳐 생긴 수많은 덤불들이 가운데 공간을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위쪽에 나무들이 우거지고 크게 자란 덤불로 뒤덮여 있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스쳐 지나갈 것이다. 덤불 속으로 파고든 우리는 밤이슬에 젖은 풀 위로 주저앉았다. 그동안은 느끼지 못했는데 이렇게 앉고 보니 다리가 상당히 피곤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언제라도 싸울 수 있도록 창을 쥐고 있었다. 그 사이에 암살자들은 주변에 있는 나뭇가지로 공간을 위장했고, 그 것이 끝나서야 자리에 앉았다 #31- 이별 #31- 이별 한숨 돌린 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경계하고 있는 수제노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수제노? 그런데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내 질문에 수제노와 암살자들은 잠시 주춤거리다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떤 대부호의 암살을 의뢰 받았었지. 그런데 그 인간이 센트라로 여행을 간다는 바람에 이 곳에서 잠복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 때 이상한 놈들과 마주치게 된 거다. 숨어 있다가 놈들이 브러버드라는 걸 들어버려서 이렇게 쫓기고 있는 거지." "브러버드?" 나는 처음 듣는 말에 끝을 올려서 되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처음 듣는 말인지 설명을 요구하는 듯 수제노의 얼굴을 보았다. "브러버드는 암살자들 사이에서 그들을 부르는 이름이다. 진짜 이름은 모르지만 항상 팔뚝에 금색 새가 수놓아져있는 옷을 입고 다녀서 그렇게 부르고 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인함에는 누구나 혀를 내두를 정도야. 당신들도 그들이 한 일은 들어본 적이 있을 거야. 10년 전에 토르의 한 도시가 완전히 죽음의 도시가 돼버린 걸." 처음에는 수제노의 당당한 반말에 인상을 구기던 기사들은 말이 계속 될수록 눈이 등잔만해졌다. 아무래도 상당히 유명한 사건인 모양이다. 그러나 공주에게 과거의 끔찍한 사건을 알려줄 리가 없었기에 나는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멀뚱히 수제노와 기사들을 번갈아 보았다. "설마 십 년 전의 그 살인마들이 우리를 쫓고 있는 브러버드란 말이오?" 우드랜이 경악해서 외치자 수제노를 포함한 암살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우드랜들은 충격을 받았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떤 이는 하도 기가 막혀 허무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우리를 습격한 사람들이 대륙 전체를 들썩이게 했던 그 살인마들의 집단이라는 말이군. 어쩐지 평범한 암살자로 보기에는 이상하다 했지." "좀비와 버서커들을 그렇게 많이 거느리고 있는 게 수상쩍긴 했지만 설마 그들이라고는..." "그럼 그 좀비들은?" 아인의 중얼거림을 들은 수제노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확실한 건 모르지만 절반은 이 곳에 묻힌 시체고 절반은 그들이 죽인 사람들이겠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였기에 좀비가 그렇게 많단 말인가? 게다가 그렇게 죽여놓고도 아직까지 존재조차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다들 같은 생각인지 말이 없었다. 의외로 상대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자 겁을 먹거나 풀이 죽은 사람도 있었다. 희대의 살인마 집단, 게다가 정신이 이상한 사람까지 있는데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었다. 두려워하는지 아니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는지 입을 꼭 다물고 있는 사람들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한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우리는 그들을 상대로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나서 도망쳤다. 그나마도 내 마법이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워낙 떼로 덤벼야 말이지. 그런데 어떻게 수제노들이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당신들 어떻게 지금까지 멀쩡한 거지? 우리도 절반 정도가 희생됐는데." 좀비나 버서커는 암살자들의 기습공격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것이다. 물론 수제노가 상당한 실력의 암살자라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암살자의 한계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내가 의심스럽다는 눈치로 말하자 노란 머리의 젊은 암살자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건 저희들이 싸움을 회피했기 때문입니다. 버서커 20마리를 상대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힘든 점이 많았으니까요. 그래도 4명이 죽었지만요." 그 말인즉슨 처음부터 도망쳤다는 말? 하긴 실력이 안되면 튀는 수밖에 더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암살자들을 흘겨보았다. "그럼 지금 버서커 20마리가 당신들을 쫓고 있다는 말이잖아? 으, 좀비만도 골치 아픈데 버서커까지. 그래도 최소한 절반은 없앴어야 할 것 아냐! 우리 쪽은 버서커라면 몇 마리를 제외하고 다 해치웠단 말이야. 그런데 당신들이 해치우지 못해서 20마리가 추가됐잖아." 내 말에 두 암살자들은 움찔했지만 수제노는 눈살을 찌푸리며 반론을 폈다. "그렇게 따지면 이 모든 사태가 너 때문이잖아. 네가 이 숲만 지나가지 않았어도 그런 녀석들이 매복해 있었을 리도 없고, 우리가 그 녀석들의 대화를 엿들어서 쫓길 일도 없잖아." 수제노의 말에 찔끔한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마르크가 성을 냈다. "그 무슨 소리요? 이게 어찌 공주님 때문이란 말이오? 모든 것은 그 미친 늙은이와 불순한 무리들 때문이오." 마르크의 말에 수제노가 코방귀를 뀌었다. 이에 마르크와 다른 기사들까지 화를 내려하자 내가 말렸다. 지금 상황에서 분열된다면 더욱 상황이 나빠질 것은 분명했다. "모두 그만 둬요. 그리고 수제노도 그만 둬. 지금은 누가 잘했나 잘못했나를 따질 때가 아니잖아. 그리고 사람 죽이러 왔으면서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큰소리가." 물론 마지막에 수제노를 향해 나다운 말을 해주었지만 말이다. 순간 수제노가 발끈하려 했지만 다른 암살자들이 그녀를 말렸다. 솔직히 막말로 우리보다 아쉬운 것은 그 쪽이 아닌가. 잠시 동안 나와 수제노는 서로를 흘겨보았다. 악연이라면 악연이라고 할 수 있는 사이였다. 처음에 수제노가 나를 암살하러 와서 기사들이 몇 명이나 죽었고, 그 다음에 내가 수제노의 집을 급습해서 단단히 혼을 내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런 다급한 순간에 딱 마주치다니 무슨 인연인지 모르겠다.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대판 싸울 수도 있는 사이였다. 물론 수제노가 헤라 아줌마를 포기한다는 결심을 한 후에야 싸움이 일어나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재빨리 시선을 거두고 덤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덤불에 가려 그 너머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이러고 있는 것이 가만히 있는 것보다 마음이 편했다. 여러 개의 발자국 소리가 공기를 진동시키며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바짝 긴장했다. 행여나 소리가 날까봐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었다. 이대로 그냥 지나가라. 그냥 가. 나는 풀잎 사이로 검은 색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면서 혀로 입술을 축였다. 좀비도 있는지 악취와 함께 가래 끊는 듯한 소리가 사방을 진동했다. 얼른 주위를 살펴보니 미나와 마부를 제외하면 긴장하긴 했지만 혹시 생길지 모르는 전투를 대비해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미나와 마부는 바짝 쫀 모습이었지만 입을 틀어막아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었다. 마침내 검은 인형이 바로 옆까지 다가오자 누구나 할 것 없이 숨을 멈췄다. 좀비들이 하도 시끄럽게 굴어서 숨을 멈출 필요는 없었지만 왠지 상대가 숨소리를 들을 것 같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절로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누군가 잘못 움직였는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 흠칫했지만 다행히 상대는 듣지 못한 모양이다. 우리가 일제히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있을 때 갑자기 상대가 멈춰서는 것이 느껴졌다. 그 것도 바로 앞에서. 덤불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게 된 것이다. 설마 들킨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이 쥐새끼 같은 것들이 모두 어디로 간 거지? 그 놈들 때문에 공주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했잖아." 쥐새끼라는 것은 수제노들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럼 이 자는 피드라와 함께 있던 사람이 아니라 수제노를 뒤쫓던 사람일 것이다. 그 자는 한동안 투덜거리더니 덤불을 발로 걷어찼다. 덤불을 뚫고 나온 발을 보고 일순간 가슴이 철렁했지만 간신히 소리는 내지 않았다. 차는 것까지는 뭐라고 하지 않겠는데 왜 내 쪽으로 차는 거냐고! 하마터면 차일 뻔했잖아. 그러나 궁시렁대면서도 그냥 지나가 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내 맘이 통했는지 그 자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사히 넘어갔다는 생각에 우리들이 안도의 한숨을 쉴 때였다. "아아악!" 귀청이 찢어질 정도로 높은 톤의 비명이 들렸다. 놀라서 고개를 확 돌려보니 미나가 벌벌 떨고 있었다. 그녀의 발목은 푸른 살점이 조금 붙어있는 앙상한 손에 잡혀있었다. 미나의 옆에 있던 씨스가 재빨리 손을 떼어줬지만 이미 늦었다. 이렇게 큰 소리를 상대가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겨우 발목 하나 잡혔다고 그렇게 큰 비명을 지르다니. 게다가 입까지 막고 있지 않았는가. 그러려면 왜 입을 막고 있었던 거야? 나는 속으로 절규하면서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고, 다른 사람들도 신속하게 전투 태세를 갖췄다. 그 사이에 좀비들과 버서커들이 달려들어 덤불을 완전히 걷어냈다. 덤불이 사라지자 나는 상대방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나를 보고 놀란 듯 하더니 씨익 웃으며 말했다. "오호, 이게 웬 횡재야? 쥐새끼들을 쫓다가 고양이를 잡게 생겼으니. 피드라 님이 잡으러 갔다는데 용케도 살아있었군. 덕분에 나는 좋지만. 이 기회에 내가 공을 세우면 상부에서 상을 내리겠지." 그는 낮게 웃으면서 눈을 빛냈다. 내가 고양이로 비유된 데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전에 좀비와 버서커들이 움직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번에는 좀비는 몇 마리 없고 버서커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평소 같으면 좀비와 버서커를 비교하는 말도 안 되는 짓 따위는 하지도 않을텐데 지금은 비교를 넘어 버서커가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미 좀비에게 호되게 당한 기사들도 마찬가지 생각을 하는지 딱딱했던 표정이 약간 펴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안심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무려 버서커가 20마리에 가까우니까.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많은 버서커들을 만들어 냈는지 알 길이 없다. 버서커가 된다고 자청하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니 아마 납치를 하거나 속여서 만든 것이겠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다. 하긴 지금은 버서커를 어떻게 만들어냈냐 보다는 어떻게 없앨까를 생각할 때이긴 했다. "쳐라!" 명령이 떨어지자 버서커들이 눈에서 붉은 광기를 뚝뚝 떨어뜨리면서 달려들었다. 숫자상으로 밀리고 있었지만 이보다 더한 열세를 경험해본 적도 있어서 차분하게 상대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미나와 마부도 싸웠다. 물론 버서커가 아닌 좀비였지만 그들이 막아주고 있어서 버서커들을 상대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걱정이 돼서 버서커를 피해 다니면서 살짝 쳐다보니 그런 대로 잘 싸우고 있었다. 미나는 뻣뻣하게 굳어있었지만 배운 대로 검을 쓰고 있었고, 마부는 굵직한 나뭇가지를 주워들고 휘두르고 있었다. 그동안 많이 봐서 적응이 약간 되기도 했거니와 우리를 조금이라도 도와야한다는 생각 때문에 나서는 것이리라. 게다가 미나는 자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더욱 도와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들을 보던 나는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 바로 위로 검이 휭,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찌나 세게 휘둘렀는지 풍압으로 머리카락이 날릴 정도였다. 역시 싸움 중에 한 눈을 팔아선 안 된다니까. 나는 그대로 창을 휘둘렀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대로 나자빠질 텐데 버서커는 땅에 뿌리를 내린 거목처럼 굳건히 버티고 섰다. 그뿐만 아니라 등으로 검을 내리꽂았다. 지면은 박차고 옆으로 빠진 나는 한 손을 버서커를 향해 뻗었다. "인새너티스 윈드(Insanity's Storm: 광기의 바람)" 이 것이 당장 주문을 외우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주문 중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이다. 바람의 칼날은 버서커의 피부를 가르고 파고들었지만 괜히 미친 죽음의 전사라고 불리지 않는지 버서커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피를 보고 더욱 흥분해서 검을 휘둘렀다. 제 정신이었을 때 제법 검을 다뤘는지 예리한 솜씨였다. 그러나 한순간의 틈이 전장에서는 생과 죽음을 가른다. 목을 뚫은 창을 빼낸 후에도 버서커는 덤벼들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운 바닥으로 쓰러졌다. 수제노를 포함한 몇몇은 잘 싸우고 있었고, 마르크를 포함한 소수는 신기에 가까운 몸놀림으로 버서커의 공격을 피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유리하게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먼저 암살자 중 한 명이 무너졌고, 그 뒤를 이어 몇몇이 쓰러졌다. 그 중에는 마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 이런 싸움에서 오래 버티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그리고 마부는 그 행운의 화살이 빗나갔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을 슬퍼할 사이도 없었다. 자칫하면 자신이 그 뒤를 따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남은 사람들은 상당한 실력자들이라 조금씩 버서커의 수를 줄여나가고 있었다. 나는 좀비에 둘러싸여 정신이 없는 미나를 보고 재빨리 검은 옷의 남자에게 다가갔다. 이 자를 죽이면 적어도 좀비는 행동을 멈출 테니까. 그 자는 느긋이 싸움을 구경하고 있다가 내가 덤비자 기겁해서 피했다. 갑자기 내가 공격하자 놀라서 피한 것이겠지만 차라리 막았다면 나았을 것이다. 그 자의 입장에서는. 곧 이어 창은 내 손을 벗어나 뒷걸음질치고 있는 그 자를 향해 날아갔다. 마치 활이 활시위를 떠났을 때처럼 빠르게 목표에게 접근하는 창. 상대는 피하려했지만 창의 속도보다는 빠르지 못했다. "크억!" 그 자는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가슴에 박힌 창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너무 허무한 죽음에 대한 반발심이 번져가고 있었지만 죽음의 날개는 그의 어깨에 사정없이 내려앉았다. 마치 모래성이 무너지듯이 서서히 쓰러지면서도 그는 부릅뜬 눈으로 창을 노려보았다. 이렇게 죽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와 거의 동시에 다른 존재들이 풀썩 쓰러졌다. 좀비들이 조종자가 죽자 원래의 썩은 시체로 돌아간 것이다. 허무하게 죽어버린 상대에게 다가가 창을 빼든 나는 다시 버서커들과 어울렸다. 피드라 그 미친 늙은이가 오기 전에 어서 끝내고 튀어야 할텐데. 초조함에 자꾸 뒷머리가 근질거렸지만 애써 정신을 집중했다. 어느새 버서커의 수도 우리 쪽과 비슷해졌다. #31- 이별 #31- 이별 수에서 어느 정도 균형이 맞게 되자 약간은 여유 있는 싸움이 됐다. 피드라들이 이 곳으로 오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생각은 될 수 있으면 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좁은 숲 속에서 버서커들을 따돌리고 도망가려 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목을 내주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도망친다고 등을 보이는 순간 평소 힘과 스피드의 세 배를 낼 수 있는 버서커들에게 당할 것이 뻔했다. 결국 이들을 쓰러뜨릴 때까지 싸워야만 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버서커의 수를 차근차근 줄여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약간 안심하고 있던 우리들의 마음을 섬뜩하게 하는 비명이 울렸다. "아악!" 어느새 버서커의 검이 미나의 몸을 뚫고 지나가고 있었다. 놀란 나는 재빨리 상대하고 있던 버서커를 찌르고 그 쪽으로 달려갔다. 근처에서 싸우던 수제노가 미나를 공격한 버서커의 목을 베어버렸기에 내가 다가갔을 때는 미나 혼자만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미나의 배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피를 흘리는 사람들을 꽤 많이 봤음에도 불구하고 그 피가 바닷물처럼 온 세상을 가득 메운 것처럼 보였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던 나는 수제노가 다가가서 미나를 살펴볼 때서야 정신을 차렸다. 미나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보니 얼굴 가득 고통스러운 표정이 가득했다. 그러나 내가 보는 것을 눈치챘는지 웃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모습이 기묘하게 일그러져 우스운 모습이 됐다. 하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공주님, 죄송해요." 미나가 입술을 바들바들 떨면서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해주지 못하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이상하게 평소에는 그렇게도 잘 들던 잡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왜 그럴까? 그런 의문만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저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도움이 못됐어요." 미나는 상처의 고통 때문인지 아니면 죄책감 때문인지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아니라는 식으로 고개를 흔들었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고개만 흔들어 댔다. 그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남은 버서커들을 처치했는지 주위로 몰려들었다. "이런, 심하군요. 어떻습니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수제노의 무미건조한 목소리도 들렸다. "당장 치료를 받으면 살겠지만 아무래도 힘들겠군." 나는 수제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아무 것도 알 수 없을 걸 알면서도 어리석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미나의 상처는 당장 마법사나 신관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깊었다. 내가 사준 부분 갑옷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찢어졌고, 그 밑으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예전에 수제노가 스펠 비드를 가지고 있던 것을 떠올리고 어쩌면 그녀가 회복 마법이 담긴 스펠 비드를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내 눈길을 느낀 수제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공격용 스펠 비드는 비상용으로 하나 가지고 있지만 회복계열 마법은 없다. 회복계열 스펠 비드는 거의 구할 수 없어." 수제노의 말에 고개가 절로 떨궈졌다. 실망해서나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왜 일까? 이상하게 머리 속이 텅 빈 기분이었다. 지금 이 것이 피부로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수정을 통해 다른 곳의 영상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저 몸이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기억하고 내가 뭔가 느끼기도 전에 고개를 떨군 것이다. 기사들의 안타까운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일단 수제노가 능숙한 솜씨로 상처를 봉했지만 그런 보람도 없이 피는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다. 미나는 자신의 상처를 한 번 보고 새파랗게 질렸지만 두렵다거나 겁난다는 소리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다만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 상태에서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고 수제노가 말했지만 우리들은 그럴 수 없었다. 숲 저편에서 환한 빛이 이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이보다 덜 다친 기사들도 버려 두고 왔는데 마르크가 미나를 업은 것이다. 나 때문일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죽었을 기사가 서운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이상의 생각은 들지 않았다. 머리 속이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변해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빛을 피해 뛰는 동안 미나가 상처가 아픈지 신음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미나의 뒷모습이 마르크와 비교돼서 그런지 무척이나 작고 연약하게 느껴졌다. 호흡이 가빠왔다. 달려서 숨이 차서 그런 것일까? 하지만 아까는 이보다 더 빠르게 달렸어도 이렇게 숨쉬기가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열심히 뛰었다.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이 욱신거릴 때까지. 뛰는 동안 일초 일초가 너무 더디게 갔다. 뛰고 있는 것도 내가 아닌 것 같았다. 발로 느껴지는 돌의 감촉도, 뺨을 스치고 가는 나뭇잎의 감촉도 느껴지는데 내가 느끼는 것 같지 않는다. 뒤를 돌아보며 멀어져 가는 빛을 보는 눈도, 미나의 신음소리를 듣는 귀 도 모두 내 것인데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얼마나 뛰었는지는 모른다. 몇 시간을 뛴 것 같기도 하고 몇 분도 뛰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더 이상 뒤로는 빛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멈췄다. 대강 덤불 뒤에 숨기는 했지만 조금 전 숨었던 곳에 비하면 공터와 다름없는 곳이었다. 마르크가 조심히 미나를 내려놓는 동안 보니 마르크의 등은 어느새 새빨갛게 물들어있었다. 마치 그 자신이 등에서 피를 흘린 것처럼. 미나의 얼굴색은 아까보다 더 안 좋았다. 뛰어서 상처가 벌어진 것 같았다. 미나는 괴로운 듯 인상을 쓰고 있었지만 용케 발악은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이렇게 갑자기 죽음에 가까운 상황을 접하게 되면 발악한다. 죽고 싶지 않아서. 그렇지 않은 경우는 이미 자신이 다해야할 일을 했거나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것을 지켰을 때다. "마리엔 공주님, 다치신 곳은 없죠?" "...응." 나는 대답했다. 이제는 머리 속이 하얗다 못해 시야까지 뿌옇게 변했다. "다행이다. 저 때문에 공주님이 다치셨으면... 정말 후회했을 거예요." 미나는 말을 잇기가 힘든지 띄엄띄엄 말했다. 그녀의 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있었다. 이렇게 중상을 입은 사람은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데 이상하게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미 포기한 것인지도 모른다. "공주님의 시녀가 돼서 너무 좋았어요." 미나의 얼굴이 지금 상황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환한 웃음을 지어냈다. 갈색 눈가에서 출렁이는 물결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되는지 몰라 그저 미나의 손만 잡아주었다. "그래서 사헤트에 같이 갈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공주님은 사헤트로 가는 것이 싫으셨을지 몰라도 저는...둘이 여행하는 기분이라 즐거웠어요. 이기적이죠?" "아니야. 나도 즐거웠어." 나는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왠지 지금은 이 말을 해야할 것 같았다. 내 말에 미나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그녀의 호흡은 어느새 조금씩 가다듬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조용함이 두려웠다. 내가 뭔가를 두려워할 수도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슬펐다. "거짓말...공주님은 기분이 나쁘실 때면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요. 그래도 말이죠...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기뻐요." "......." "공주님, 정말...... 좋아했어요...정말로." 미나가 말하는 도중에 말을 끊는 것이 늘어났다. 내 손에 잡힌 손의 딱딱하게 굳은살이 서글프게 느껴졌다. 나는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끝내 입이 열리지 않았다. "언제나... 잊지 않을 거예요. 마리엔 공주님을...공주님도 절 기억해주실 건가요?" "응. 응. 그렇게 할게." 나는 계속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 바람에 미나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웃고 있었던 것 같다. 아주 예쁘게. "꼭 행복해지세...미나가 빌게요......제 몫까지 행복......" 미나의 목소리는 가늘어지더니 나중에는 들리지 않았다. 미나의 손이 힘을 잃은 것이 느껴졌다. 나는 미나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희미한 웃음이 번져있었다. "미나?" 나는 작은 목소리로 미나의 이름을 불렀지만 언제나 쾌활하게 돌아오던 대답이 오늘은 없었다. 그제야 멍하던 머리가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이 상황이 피부로 느껴졌다. 차가운 것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 방울씩 조금씩 떨어지던 그 것은 미나의 얼굴 위로 똑똑 떨어졌다. 항상 내 뒤를 따라다니던 미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검을 배우겠다고 기를 쓰던 미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끔 지나가는 투로 칭찬이라도 한 마디 해주면 좋아하던 미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엇보다도 환하게 웃으며 내 이름을 부르던 미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 영원히. 미나는 죽었다. 목을 막고 있는 것을 삼켜 넘기려고 하니 목구멍이 아팠다. 가슴이 찡하게 울렸다. 이미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야도 뿌옇게 변했다. 안개가 낀 건가 보다. 아주 짙은 안개가. 하늘을 올려다보자 시야가 조금은 환해졌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길이 보여서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마. 그렇게 불쌍한 눈으로 나를 보지 마란 말이다. 묵묵히 미나를, 아니 이제는 숨을 쉬지 않는 인형을 내려다보던 나는 우연히 미나의 손에서 반짝이고 있는 반지 두 개를 발견했다. 예전에 알베르와 싸워서 이긴 대가로 준 반지. 두 반지 모두 어디 하나 흠이 간 곳 없이 깨끗했다. "바보. 마법 반지를 한 번도 사용해보지도 못하고 죽다니. 이게 얼마나...... 비싼 건데. 다시는 너한테 이런 거 안 만들어줄 거야." 입술이 떨리면서 억눌린 울음이 흘러나왔다. 서서히 손을 뻗어 반지들을 빼낸 나는 내 손가락에 끼웠다. 손이 떨려 그 걸 내 손에 끼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반지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은 달빛을 받아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그러나 나는 반지를 오랫동안 볼 수 없었다. 어느새 발자국 소리가 주변을 가득 메운 것이다. 미나에게 정신이 팔려 누구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누구나 할 것 없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드디어 찾았다. 숨바꼭질을 다 하셨나, 우리 공주님? 역시 불을 끄고 찾은 보람이 있군. 히히히." 피드라의 비아냥거리는 말과 함께 좀비들이 나타났다. 그렇게 없앴는데도 아직도 많았다. 피드라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짓다가 내 꼴을 보고 너무나 기분이 좋다는 투로 말했다. "이런, 시녀가 죽었나 보지? 얼마나 슬프겠어? 하지만 걱정하지마. 내가 곧 같은 곳으로 보내줄 테니. 이래봬도 난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거든. 낄낄낄." 그러나 우리 중 누구도 자신의 말에 대꾸하는 자가 없자 피드라는 웃음을 멈추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동안 정말 잘 싸웠어. 다른 기사 놈들이 발악하는 바람에 부하들이 모조리 죽었지. 뭐 그 기사 놈들도 무사하진 못했지만 말이야. 오다가 보니 다른 놈도 죽어있더군. 하지만 이 지겨운 숨바꼭질도 이 걸로 끝이다. 드디어 내 손으로 고귀하신 몸을 죽일 수 있겠군." 피드라의 눈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증오가 물 속에 떨궈진 잉크 방울처럼 번져갔다. 그의 말대로 사람이라고는 그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좀비들이 있었다. 이게 다일까? 어쩌면 더 있을지도 모른다. 엉뚱하게도 이 인간이 묘지란 묘지는 다 돌아다니며 시체를 끌어 모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피드라의 갑작스런 등장에 흔들리던 마음도 차갑게 가라앉았다. 비록 그 것이 억지로 내려 누른 것이라 해도, 언제 다시 터질지 몰라 불안해도 말이다. 이젠 모르겠다. 그냥 박 터지게 싸우고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는 거다. 그런 마음으로 남아있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기사는 우드랜과 아인, 마르크, 씨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죽었다. 암살자들은 수제노와 젊은 암살자가 살아남았지만 그 암살자는 허벅지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멀리 떠나버린 사람이 너무 많다. 그들은 나대신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데도 아무런 후회도 미련도 없었을지 궁금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미나는 괴로워하면서도 죽지는 않은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다. 죽는 건데 왜 그렇게 웃을 수 있는지 난 정말 모르겠다. 만약 지금 남아있는 사람들은 죽는다면 어떤 마음으로 죽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우드랜이 수제노에게 눈짓을 보내는 것이 보였다. 워낙 순식간이었지만 수제노가 잠시 그를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인 듯 했다. 아인과 마르크, 씨스는 나를 향해 빙긋 웃고 있었다. 나를 위로해주기 위해서일까? "미친 늙은이, 제 4기사단이 어떻게 해서 망나니에서 벗어났는지 보여주마." "생긴 것부터가 해골같이 생겨서 정말 마음에 안 들었어. 그 얼굴은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도 사라져야 한다. 이 내가 정의를 위해 널 처단해주마." "심장마비로 뻗지나 말아라." 세 사람이 말을 한 것과 동시에 수제노가 품속에서 스펠 비드를 하나 꺼내 던졌다.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붉은 불길이 우리와 상대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리고 누가 내 손목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당황해서 돌아보니 수제노가 나를 끌고 뛰고 있었다. "뭘 하는 거야? 아직 기사들이 남아있잖아!" 나는 여전히 버티고 서서 작은 미소를 짓고 있는 기사들을 가리키면서 발악하듯이 소리쳤다. "이게 그들이 원하는 거다." 수제노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그대로 뛰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우드랜이 수제노에게 눈짓으로 말한 게 뭔지, 세 사람이 내게 보낸 웃음이 무슨 의미인지. 나는 발버둥치면서 수제노를 따라가지 않으려 했지만 그 행동에는 힘이 없었다. 자꾸 멀어져간다. 나의 기사들이. 미나의 마지막 흔적이. 그들이 입을 달싹이면서 뭔가를 전한다. [부디 살아남으시길] 피드라를 가로막은 그들을 위해서도 도망쳐야하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질질 끌려가다시피 했지만 어느새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암살자들이 빠르긴 빠른가 보다. 이미 나무와 덤불밖에 보이지 않는데도 계속 그 쪽을 쳐다봤다. 혹시라도 그들이 뒤따라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곧이어 피드라의 분노한 목소리가 들릴 뿐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하늘로는 옅은 빛을 뿌리며 텅 빈 숲을 비치는 별들이 보였다. 해가 떠오르려면 얼마나 남은 것일까? 악몽 같은 밤이 지나고 있었다. #31- 이별 #31- 이별 아페다의 <음유시인의 눈물>이라는 여관. 평범한 곳. 어느 여관처럼 많은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만나고 헤어지는 곳. 1층의 식당을 꽉 채운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고 있는데 난 이 여관이 왜 이렇게 텅 비어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있어야 할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건 머리도 몸도 가슴도 모든 것을 허전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15명의 빈 공간이 이렇게 크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기계적으로 수프를 떠먹으면서 자꾸 문 쪽을 쳐다보았다. 이 곳에서 모두 만나기로 했는데 어째서 나만 혼자 있는 것일까? 하다 못해 한 사람이라도 저 문을 열고 와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웃으면서 '이거 혼났습니다'라고 나타나는 사람은 없었다. 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질없는 미련이 계속 남아 끊임없이 문만을 바라보는 내가 멍청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눈은 여전히 날 찾아올 자를 찾고 있었다. 한심하다. 하지만 보고 싶다. 수제노도 나와 마찬가지로 문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와 그녀의 시선의 의미는 달랐다. 내가 덧없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면 수제노는 혹시 피드라가 이 곳까지 쫓아오지나 않을까, 아니면 그 잔당들이 이 곳으로 온 것은 아닐까,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암살자인 수제노는 죽음을-그 것이 동료의 죽음이든 아니든-너무 많이 접하다보니 어느새 죽음에 대한 대처법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에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 처음으로 사람이 죽는 것을 본 것도 아닌데 바보같이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아니다. 나라면 약간은 미안해하는 감정을 가질망정 이렇게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에 집착하지 않는다. 당연히 현실을 생각하고 행동해야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나는 수프만 먹고 난 후 방으로 올라갔다. 이 여관에 머문 지 5일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자는 없다. 침대 위에 걸터앉은 나는 그저 무릎 위에 놓인 손만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무기력하게 느껴져 멍하니 앉아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수제노가 밥은 먹어야 한다며 끌고 가지 않으면 하루종일 이러고 시간을 보낼 것이다. 복수를 위해서 억지로 마음을 추슬러 본 적도 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예전이라면 며칠 밤낮을 새서라도 반드시 복수할 방법을 찾아내고야 마는 나였는데 말이다. 얼마동안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었을까? 문이 삐걱 열리는 소리와 함께 어둠침침한 방으로 약간의 빛이 새어 들어왔다. 아마 수제노겠지. 그녀와 나는 같은 방을 쓰고 있으니까. "또 멍하니 있는 거냐?" 수제노의 덤덤한 목소리가 어둠과 적막을 찢고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들어 수제노를 쳐다보았다. 지금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무척이나 불쌍한 모습일까? 그건 싫은데. 이런 상황에도 자존심을 세우려는 내가 우습기도 했지만 인간에게 얕잡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내 모습에 픽, 힘없는 웃음을 터트리자 수제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게 있는 다고 죽은 사람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야. 너라면 알텐데?" "알고 있어." 내가 작게 중얼거리자 수제노의 딱딱한 얼굴에서 약간의 변화가 일어났다. 동정도 연민도 경멸도 아닌, 같은 것을 느껴본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잔잔한 애상이 떠올랐다. 잠시 후 수제노는 물기에 촉촉이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처음에 동료가 죽었을 때 그랬다. 그래서 너보고 모든 걸 잊어버리라거나 그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힘을 내라는 소리는 하지 않겠다. 그런 소리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놈들의 입에 발린 소리일 뿐이지. 며칠 전만 해도 같이 있던 사람들의 존재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은 그따위 위로 가지고는 채워지지 않을 정도로 넓은 빈 공간을 남긴다는 걸 안다." "......." 내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자 불을 켜지 않은 방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 적막은 편안한 적막이 아니라 언제 깨질지 모르는 불안한 적막이었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수제노는 전혀 상관이 없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나는 누가 울고불고하는 것은 싫어하지." 그 말에 약간의 불만이 생겼다. 나는 그렇게 난리를 피운 적이 없었다. 단 한번도. 그저 조용히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마치 내가 그랬다는 식으로 말하니 기분이 상한 것이다. 이런 내 기분을 눈치챘는지 수제노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너처럼 무표정하게 있는 것은 더 싫다. 곁에 있는 사람이 죽었는데 슬픈 것은 당연해. 슬프면 울면 된다. 너처럼 속으로 삭이려고 해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아. 진심으로 그들의 죽음을 슬퍼해 주면 돼. 이럴 때 우는 것은 흉이 아니고 당연한 거다. 슬픔을 외면하려 하지말고 직접 맞부딪치는 것이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얻은 교훈이다." 나는 수제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주 깊은 곳에 오래 전부터 쌓여왔을 슬픔의 탑이 보였다. 하나하나 슬픔의 조각을 쌓아 온 탑은 굳건히 서있었지만 그 것이 수제노를 무너뜨릴 것 같지는 않았다. 슬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초연함마저 느껴졌다. 그렇다. 슬픈 사람이 나만 일 리가 없다. 나만 가까운 사람이 잃은 것이 아니다. 수제노 역시 동료들을 잃은 것이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나만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이 아니라는 이기적인 안도감이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슬픔을 직시할 마음이 생겼다. "난 술이나 마시련다. 그러니 오늘은 혼자 자라." 따뜻한 위로는 아니었지만 이 것이 수제노의 배려라는 것을 안다. 수제노는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다. 나 혼자 생각하며 슬퍼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 나는 등을 보이고 휑하니 나가버리는 수제노의 등을 향해 살짝 웃어주었다. 수제노가 나가자 방에는 나와 어둠만이 남았다. 어둠은 내 모습을 다른 이들로부터 감춰주는 좋은 친구였다. 손등으로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미나가 죽은 후로 처음으로 흘러내린 눈물이었다. 그동안은 메말라버린 것 같았던 눈물이 눈가로 넘치기 시작했다. 눈이 감당할 양을 넘어선 눈물은 서서히 바깥으로 흘러 나왔다. 그동안 억지로 참아왔던 눈물이 한 방울씩 한 방울씩 손등으로 떨어져 내렸다. "우." 꼭 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소리 없이 울었다. 입에서 뭔가 나오려 할 때마다 어깨가 들썩였다. 아직은 소리내서 운다는 것은 창피하다는 생각에 조용히, 조용히 울었다. 그동안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자들의 모습이 서서히 눈앞에 펼쳐졌다. 미나, 아인, 마르크, 씨스, 그리고 많은 다른 기사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죽어 가는 모습도 떠올랐다. 죽음이란 이런 것인가? 마족이기에 절대 느낄 수 없었던 죽음이라는 것이 그제야 어떤 것인지 손에 잡혔다. 죽음이란 영원한 이별. 남은 자에게는 너무나 큰 상처가 된다. 그리고 그 것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면 더더욱 잊을 수 없는 것이 된다. 나는 그들이 겪었을 고통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불행을 동정하기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팔이나 다리가 잘리고 평생 불구로 사는 것보다는 깨끗이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 것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충성 어린 아름다운 죽음이었다면 더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그들이 죽을 때까지 고통받더라도 살아있기를 원한다. 너무나 이기적이고, 추한 욕망이지만 난 원한다. 그들의 평안한 휴식보다는 고통스러운 삶을. 적어도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뭔가를 해 줄 수 있으니까. 이제는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 없는 존재가 돼버렸다. 가까운 자들의 죽음이 슬픈 이유는 다시는 볼 수 없기 때문인가 보다. 남은 자의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슬픈 것인지는 몰라도...난 슬프다. 틀어막은 입술 사이로 점점 억눌린 울음이 많이 흘러나왔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내 손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안개의 늪 속에 빠진 느낌이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자 이 세상에 나 혼자 인 것 같아 더욱 눈물이 나왔다. 마계에 있을 나의 가족들과 친구들도 지금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떠오르는 것은 죽어간 자들뿐이었다. "흑흑." 한 사람 한 사람과의 추억이 떠올랐다. 추억은 아름답기도 한 것이지만 가슴 아픈 것이 될 수도 있는 양날의 검과 같았다. 미나. 처음 만났을 때 잔뜩 겁에 질려있더니 어느새 친구 비슷하게 돼버린 시녀. 아인과 마르크, 씨스. 내가 대련하자고 하면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어있던 기사 같지 않은 기사들. 우드랜과 기사들. 제대로 이야기해본 적도 없는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 이 곳까지 오기 전에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도 생각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잘 해줄 걸 하는 후회가 물밀 듯이 몰려왔다. 왜 이렇게 돼버린 걸까? 흐느끼던 것은 큰 울음소리로 변해갔다. "으...으아앙!" 밖에서 들릴 지도 모르지만 실컷 울고 싶었다. 어느새 목놓아 우는 것은 창피하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없었다. 죽어간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 말이라도 직접 해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나는 산 자, 그들은 죽은 자이므로. 인간들의 말처럼 낙원이 있어서 착한 사람들은 그 곳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나는 마족이기에 갈 수 없다. 다 무시하고 쳐들어간다고 해도 낙원이란 없으니 그럴 수조차 없다. 이걸로 영영 이별인 것이다. 인간이란 정말 한 순간에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아무리 강한 자라도 조금만 방심해도 곁에서 없어질 수 있는 거구나. 이렇게 덧없이 사라져버릴 수 있는 존재들이구나. 그들과 지냈던 기간은 내가 살아온 날에 비하면,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에 비하면 먼지와도 같은 가벼운 기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 속 깊이 각인되었다. 마족은 냉정한 존재다. 그렇기에 이번 계약이 모든 것이 끝나면 나는 그들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인간을 사랑했다가도 그 인간이 죽거나 도저히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으면 깨끗이 돌아서 버리는 다른 마족들처럼. 하지만 그들이 그 때만은 모든 열정을 다하는 것처럼 나도 지금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다. 얼마나 울었는지는 모른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초승달이 검은 하늘에 박혀있었다. 태양은 내 마음과는 달리 너무도 활기차 보여 싫었지만 은은한 빛을 뿌리는 밤의 어머니는 나를 포근히 감싸주었다. 밤의 안식. 죽은 자들이 가진 안식과는 다른 안식이지만 조금은 비슷한 것을 겪고 있다는 생각에 약간은 기뻤다. 고개를 들어 살며시 미소지어주는 밤의 여왕을 쳐다보았다. 모든 슬픔과 걱정을 덮어주는 어둠이 너무 좋았다. 나의 어둠, 우리들의 어둠, 모든 이의 어둠, 그 것은 마족에게 끊임없는 힘을 준다. 그야말로 체면이고 염치고 뭐고 마음가는 대로 울어댔던 나는 그제야 약간 진정이 되었다. 그리고 온 세상을 뒤덮은 어둠을 보자 내가 누구인지 떠올랐다. 난 마족인 것이다. 마족인 내가 인간 때문에 울었다는 것은 창피하지 않았다. 그 때에 모든 마음을 다하기에 제멋 대로이고 사악하다고까지 불리는 우리들이기에 말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과거에 얽매여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마족의 행동이 아니었다. 마족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은 잊어버리려 노력한다. 그리고 어떤 존재보다도 빨리 잊는다.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해 타산적이니까. 집착하는 것은 오로지 인간뿐이다. 나는 눈물을 소매로 쓰윽 닦았다. 그렇다고 그들의 죽음이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슬프다. 지금이라도 다시 눈물이 나올 정도로. 하지만 슬퍼만 한다고 다가 아니다. 지금껏 슬픔에 눌려있던 머리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럴 때일수록 차가워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 실컷 울고 나자 조금씩 변했다. 지금 그들의 죽음에 매달리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방해가 된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 이 슬픔이라는 감정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크다. 어째서 인간계에 어린 마족들이 나가지 못하게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인간들과의 감정은 너무 자극적이다. 사랑이나 즐거움 같은 감정은 몰라도 죽음에 대한 감정은 확실히 너무 크다. 나는 끊임없이 '나는 마족이다'를 되‡l다. 그렇게 하니 마족과 인간이라는 벽이 생겨 조금은 슬픔이 덜해졌다. 나는 그들을 인간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미나라는, 아인이라는, 그런 존재로서가 아니라 수많은 인간들 중에 하나로. 어디서든지 볼 수 있는 흔한 존재로 말이다. 그리고 슬픔을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많은 인간 중에 몇이 죽은 것이다. 워낙 수가 많은 인간들이라 그들이 죽었다고 표도 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이야 어디서든지 다시 사귈 수 있는 그런 존재들인 것이다. 마침내 터져 버릴 것 같던 슬픔이라는 이질적인 감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인간 몇 명이 죽은 것이 나에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그렇다고 내가 죽으라고 한 것도 아니고 본인들이 자청한 일이지 않은가? 내가 슬퍼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눈에서는 다시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내 생각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식으로. 나는 높은 하늘에 매달려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달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지금은 너희들의 존재를 잊겠어. 많은 인간 중에 하나로 기억할거야. 하지만, 하지만... 다시 떠올렸을 때 고맙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슬픔을 감당할 수 있을 때 다시 울게. 지금은 내가 너무 힘들거든. 미안. 모두 미안해." 다시 한번 울컥하고 가슴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올라왔다. 하지만 눈을 꼭 감고 그 것을 잔인하게 짓밟았다. 떨리는 입술 사이로 과연 내가 말하고 있는지 분간이 가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마족이야." 그 목소리는 너무 차가워 더욱 슬프게 느껴졌다. 턱을 타고 차가운 액체가 또르르 흘러내리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액체가 떨어진 바닥은 황토색의 다른 나무와는 확연히 드러나게 진한 갈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주위로 진한 갈색으로 변해 가는 곳은 점점 늘어났다. -------------------------------------------------------------------------- 늦었지요? 요즘 새로 산 게임에 푹 빠졌답니다. 으흐흐흐~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며칠이 그냥 지나가버렸더군요. 그래서 서둘러 글을 썼답니다. ^-^; 참, 그리고 코멘트에 가끔 제 이름으로 글을 남기는 사람이 있는데 불쾌하군요. 물론 제가 적은 것도 있지만 상당히 기분 나쁩니다. 발견 즉시 족족 지우고 있으나 그런 일이 계속되면 절 위해서라도 코멘트에는 글을 남길 수 없게 됩니다. 진짜 제가 적은 것과 그 것이 헷갈리는 수가 있으니까요. 장난으로 그러셨다면 그만두시고 시비를 걸기 위해서라면 글을 보내주십시오. 비공개적으로. 이런 어쩌다 보니 말이 험악해졌네요. 그럼 재미있게 읽으세요 ^-^ #32- 브러버드 #32- 브러버드 슬픔이 지나간 빈자리를 채운 것은 분노였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염이 일어나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때때로 답답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가장 먼저 분노의 대상이 된 자는 피드라였다. 뭐라 해도 지금의 상황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은 그였기 때문이다. 좀비만 그렇게 많지 않았어도 네크로맨서에게 질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죽을 일도 없었을 것이고... 나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무리 마음을 바꿨다고 해도 당장 모든 슬픔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인간' 몇 명 때문에 침울해 있을 때가 아니다. 감히 날 건드린 대가를 피눈물 흘리며 후회하게 만들고 말 것이다. 나를 죽이려 했다는 것은 수제노도 마찬가지인데 그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센 분노의 불길이 일었다. 하지만 복수를 생각하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었다. 과연 피드라는 내가 그 곳을 지날 것을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내가 사헤트로 간다는 것은 아렌테 근방의 귀족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니 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어느 길로 갈 줄 알고 시우리스 숲에서 진을 치고 있었단 말인가? 사헤트로 가는 길은 시우리스 숲을 거치지 않고도 많았다. 육로도 셀 수 없이 많았고 해로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런데 피드라는 당연하다는 듯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것도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 봐 근래에 안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알고 준비한 것 같았다. 내가 어느 곳을 통해서 사헤트로 갈 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나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렇게 되면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길게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누군가 정보를 흘린 것이 분명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다름 아닌 오펠리우스 왕비였다. 나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여자니 여행 도중에 습격하라고 지시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피드라의 왕족에 대한 증오로 미루어 보아 그가 정말로 왕비의 지시를 받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후일을 위해 지금은 오펠리우스 왕비의 비위를 맞춰주고 있을 지도 몰랐다. 아니면 피드라의 윗사람이 그녀와 손을 잡고 지시를 내렸을 수도 있었다. 브러버드 중 한 명이 분명히 상부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왕비 다음으로 의심 가는 사람은 그라냔 백작과 그 일당들이었다. 왕비가 직접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들이 독자적으로 움직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사헤트에서 1년, 그리고 여행기간까지 합하면 총 2년의 기간동안 나는 페드인 왕국에 없다. 그 기간이라면 충분히 자신들의 세력 기반을 다져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라디폰 공작이라는 막강한 전력이 내 편에 있는 만큼 한 치의 방심도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플로라 공주나 아리란드 전하와 관련된 사람도 믿을 수 없었다. 내가 비교적 가벼운 처벌(그들의 입장에서)만 받고 끝난 것에 불만을 품고 이런 일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 이렇게 되니 모든 사람에게 의심이 갔다. 의심이 많이 가든 조금 가든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라디폰 공작마저 믿을 수 없었다. 평소 그의 행동으로 보아 내가 불리해졌다고 등을 돌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혹시 아는가? 오펠리우스 왕비가 라디폰 공작에게 왕자들이 차기 국왕이 되면 절대적인 권력을 줄 테니 협력하고 했을지. 그동안 붕 떠있던 마음을 다잡자 누구에게도 믿음이 가지 않았다. 인간은 자신의 입으로 내뱉었던 말을 뒤돌아서면 바꾸는 종족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지금은 지켜봐야 한다. 누가 내 편인지 아닌지를 말이다. 그리고 피드라와 그 일당들도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 살려두면 언제 어디서 다시 노리고 달려들지 모를 일이다. 언젠가 싸워야 한다면 내 쪽에서 먼저 선수를 치는 편이 나았다. 설마 내가 직접 치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겠지. 마족이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고 말리라. 그 후에 앞으로의 여정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해보았지만 구체적인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문제는 피드라들의 본거지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일단 어떤 놈들인지 알아야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다 나는 수제노가 그들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기대는 가지 않지만 브러버드라는 것도 수제노가 일러주었지 않은가. 그리고 수제노의 생각에 따라 앞으로의 일정도 바뀔 수 있었다. 이대로 헤어질 수도 있고 당분간 동행할 수도 있다. 일단은 수제노와 이야기를 해봐야했다. 점심 무렵 즈음에 식당으로 내려가 보니 수제노가 의자에 발을 꼬고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재빨리 수제노에게 다가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수제노, 안녕?" "......어? 그래." 내가 쾌활하게 인사하자 수제노가 당황의 빛을 내비치며 대꾸했다. 그녀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알고 있는 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뭘 그렇게 놀래? 혹시 내 이름으로 무지 비싼 음식을 시켜먹은 건 아니겠지?" 내가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수제노의 위아래를 훑어보자 발끈한 대답이 돌아왔다. "웃기지 마! 여관비를 낸 것도 나였어." "그럼 왜 그렇게 당황하는 거야? 그런 눈으로 보면 누구나 의심을 할 수밖에 없지." "그야 뭐...예상보다 너무 빨라서 약간 놀랐을 뿐이다." 수제노의 말에 나는 생긋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수제노는 금방 무미건조한 모습으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눈만은 특이한 동물을 보는 것 같이 나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담담히 받아넘기며 점심 식사를 시켰다. 조금 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약간 의외라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은 수프만 깨작거리던 내가 오랜만에 풍성하게 음식을 시켰으니 말이다. 테이블을 가득 메운 음식들이 도착하자 나는 예의상 물었다. "수제노도 같이 먹지 않겠어?" "됐다. 나는 조금 전에 먹었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 권하지 않고 스푼을 집어들었다. 역시 거사를 치르기 위해서는 체력이 뒷받침해줘야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동안 거의 굶다시피 했던 배가 오랜만에 음식들이 들어가자 무척이나 즐거워하며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빠르게 음식을 먹어치운 나는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먹는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얌전하게 마무리하는 모습에 식당 내에 있던 사람들이 황당하다는 시선을 보냈지만 깨끗이 무시했다. 자기들이 사준 것도 아니면서 내가 어떻게 먹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게다가 여기는 굳이 예의를 차리고 먹을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 수제노마저 반쯤 남은 맥주를 마시지 않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웃어주자 얼떨결에 맞받아 웃어주었지만 그 웃음에는 어이가 없다는 뜻이 다분히 내포되어 있었다. "역시 넌 예측할 수 없는 인물이야." "어머, 왜?" "너처럼 빨리 회복하는 사람은 처음이다. 나도 처음에는 일주일은 걸렸는데 어떻게 하루도 안돼서 그럴 수 있는 거지?" 수제노는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원상 복귀한 내가 신기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나와 수제노는 그 존재부터가 달랐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단지 내가 해야할 일을 깨달았을 뿐이야." "해야할 일?" 수제노의 반문에 나는 목소리를 낮춘 채 말했다. "복수지." 내가 그렇게 당하고도 복수하겠다는 말을 하자 수제노는 처음에는 기가 막힌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내가 끝끝내 자신을 추격해서 본 때를 보여줬던 것을 떠올렸는지 나중에는 너라면 족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다만 너무도 빨리 슬픔을 잊고 복수를 생각해내는 내가 탐탁지 않은지 거북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다시 페드인 왕국으로 돌아갈 건가?" "아니." 내 말에 수제노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지? 설마 혼자 쳐들어가겠다 거나 하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맞았어. 어떻게 알았어?" 내가 손뼉을 치며 말하자 수제노가 말문이 막혔는지 가만히 있다가 언성을 높였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정신이 이상해진 거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그렇게 소리치지 마.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 그리고 난 진심이야." 나는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나와 수제노는 서로의 눈을 마주보며 눈싸움 아닌 눈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잠시 후 수제노가 맥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장난이 아니군. 하지만 어째 서지? 왕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나을텐데." "그렇지도 않아." 나는 뭘 모른다는 식으로 손가락을 흔들면서 말했다. 언뜻 생각하면 페드인 왕국으로 돌아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복수하는 것이 쉬울 것처럼 생각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그렇지도 않다. 이제 왕국 내 사람 중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내 손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이 것을 기회로 삼아 배후에 누가 있는지 반드시 캐낼 생각이다. "수제노도 알고 있겠지? 내가 사헤트로 가는 진짜 이유." "아." 그제야 수제노가 이해가 간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대로 돌아가면 아무 것도 변하는 것이 없다. 난 여전히 저주를 건 악독한 공주로 남을 것이고 당연한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생겨날 것이다. "지금 돌아가면 내 입장이 난처해지지. 사헤트로는 가지 않아도 될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볼지는 뻔하잖아. 그리고 수제노도 내가 시우리스 숲을 지날지 몰랐는데 그 자들은 알고 있었어. 어떻게? 뻔하잖아. 내통자가 있을 거야. 내가 무사히 페드인 왕국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내통자가 연락하겠지. 그럼 끝이 없어." 그렇다. 만약 내가 그 곳을 지날 줄 알았다면 어쩌면 수제노는 그 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잠복했을 지도 모른다.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만 해도 나와 수제노는 목숨을 빼앗으려고 싸운 사이였기에 날 보면 거북할 것은 뻔했다. 그리고 나는 씩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기회에 걸러내야지. 쓸만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걸러낸다? 그럼 쓸모 없는 자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당연히 없애야지. 날 이렇게 물 먹이고 무사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야." 순간 수제노의 얼굴이 굳었지만 이내 평상시의 덤덤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러기 위해서는 브러버드가 누구인지 알 필요가 있어. 그래서 혹시나 수제노가 알고 있을까 해서 말이야." "나도 자세한 것은 모른다. 하지만 브러버드의 본거지로 예상되는 곳이 하이덴 제국의 수도에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다. 마스터가 한 말이니 아마 분명할 거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하이덴 제국으로 간다. 페드인 왕국으로 돌아가도 해결되는 것은 없다. 내통자는 있을 것이고 나는 여전히 누명을 쓴 채이다. 그리고 만약 배신자가 있다 해도 알아낼 방법이 없다. 그리고 브러버드의 조심스러운 행동으로 봐서 대대적으로 현상금을 걸면 음지로 완전히 숨어버릴 가능성이 컸다. 이럴 때는 조용히 몸을 감춘 채 관찰해야한다. 누구를 살려야 하나, 죽여야 하나를. 수풀에 몸을 감춘 채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말이다. 당연히 내가 무사하다는 것을 연락할 생각도 없었다. "앞으로 하이덴 제국으로 갈 생각이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수제노가 입을 열었다. "그럼 당분간은 같이 동행하겠군." "응? 수제노는 왜 돌아가지 않는 거지?" "브러버드들은 자신의 정체를 안 사람은 절대 살려두지 않아. 아마 지금쯤 우리를 찾아내려고 혈안이 됐을 거다. 이럴 때 돌아가면 죽여달라고 하는 것과 다름없어. 살려면 나를 본 존재는 모조리 없애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브러버드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지. 사실 네가 왕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면 곤란해져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군." 지금까지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것은 바로 집요할 정도의 끈질김 때문이라고 한다. 숨어 지낸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찾아낸다고 하니 남은 것은 반격뿐이었다. 만약 정체가 발각되면 전 대륙적으로 토벌작전이 벌어질 테니 브러버드도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들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알게 된 나와 수제노를 살려둘 턱이 없었다. 나와 수제노는 자의든 타의든 한동안은 운명을 같이 하게 되었다. 하지만 수제노의 무모함에는 황당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나야 마법이라도 능통하니 그렇다 쳐도 수제노는 도대체 뭘 믿고 브러버드를 찾아갈 생각을 했단 말인가? 나는 마음에 품을 생각을 그대도 입 밖으로 냈다. "만약 내가 왕국으로 돌아가면 혼자 갈 생각이었어? 무슨 배짱이야?" "너에게만은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다. 피차마찬가지 아닌가? 그리고 나는 적어도 길드라는 조력자가 있으니 너보다는 낫다." 수제노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그러나 나는 수제노의 반응보다는 암살 길드에서 도와준다는 말에 구미가 당겼다. "암살 길드에서 도와준다고?" "당연하잖아. 브러버드 입장에서는 내가 연락했을지도 모르니 길드 전체를 노릴 거야. 그들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아. 그러니 길드에서도 좋든 싫든 나를 도울 수밖에 없어. 사람을 보내주는 것은 아니지만 정보나 그 외의 조사는 그 쪽에서 맡기로 했지. 솔직히 지원하러 와줄 정도로 간 큰 사람도 없고." "그래? 그럼 내가 한가지 의뢰해도 될까? 지금부터 라디폰 공작을 포함해서 내가 일러주는 사람들을 철저히 감시하라고 전해 줘. 금액은 나중에 원하는 대로 지불할게." 내가 암살이 아닌 감시를 의뢰하자 수제노는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정보길드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은 아쉬운 대로 암살 길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입장에서도 길드의 사활이 걸린 문제에 나 같은 마법사가 끼여든다면 도움이 많이 될 테니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대강 앞으로 어떻게 할 지는 정해졌다. 남은 것은 이 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뿐이었다. 흡족해하며 식당을 둘러보던 내 눈에 건물 안으로 스며드는 햇살이 들어왔다.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지는 않지만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는 어둠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부드러운 빛이었다. 마치 황금 가루로 만들어놓은 강을 보는 것처럼 햇빛이 공기 중에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그 황금의 강에 몸을 담고 있으니 오랜만에 마음이 훈훈해지는 기분이었다. 신들이 제일로 생각하는 빛은 싫지만 이런 빛은 나름대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 나의 감수성을 이해 못하는 수제노는 기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 오늘은 안들어긴다고 하더니 들어와지네요;; #32- 브러버드 #32- 브러버드 사박사박. 나뭇잎이 밟히면서 부스러지는 소리가 조용한 숲을 정적에서 깨우고 있었다. 휘영청 달이 밤을 밝히고 있어 걷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조금쯤은 구름이 끼어서 걷는 것이 힘들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그 곳에 늦게 도착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달은 어느 때보다 환한 빛을 뿌리며 웃고 있었다. 몰래 여관을 빠져나온 나는 시우리스 숲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마지막 남은 네 명의 기사들이 피드라와 싸웠을 곳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아직도 그들에게 얽매인 것은 아니다. 그저 시체라도 어떻게 수습해줘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실은 올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다.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나는 내일 아테다를 떠난다는 말에 거의 충동적으로 빠져나오고 말았다. 어쩌면 지금 내 행동은 모순일지도 모른다. 피드라가 아직 시우리스 숲을 지키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일행의 시체를 찾으러 간다는 것은 위험했다. 그런데도 인간 몇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가는 것이다. 하지만 일주일 동안 조용했으니 벌써 다른 곳으로 갔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도박을 걸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험에서 최대한 멀어지려고 정신 없이 먼 곳으로 도망친다. 피드라는 그런 우리들을 찾기 위해 먼 곳으로 갔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수제노는 허를 찔러 시우리스 숲 근처에 있는 아테다에 숨었다. 수제노가 속한 암살 길드에서도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 페드인 왕국 쪽으로 도망을 쳤다는 소문까지 냈다. 그러나 만에 하나 피드라가 여전히 있다면 지금 나는 정말로 위험천만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 자신도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몸은 여전히 그 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적어도 그들의 시체가 짐승들에게 먹히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피드라가 좀비로 만들지나 않았을까 걱정이 됐다. 그 따위 시체를 좀비로 만들든 말든 상관은 없다. 그냥 확인만 하고 싶었다. 그저 그 것뿐. 내 마음과는 달리 점점 가까워져 갔다.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싶지만 마력에 이끌린 것처럼 난 계속 걸어가고 있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어렴풋이 보인다. 환영처럼 그 때의 상황이 떠올라 인상을 찡그렸다. "상관없어. 적어도 부하들이었는데 시체가 있으면 묻어주려고 온 것뿐이니까." 매몰차게 말한 나는 큰 소리를 내며 걸었다. 마치 곰이 다가오는 것을 막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 사냥꾼처럼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내 경우에는 곰이 아니라 가슴속에 깊이 박아둔 기억이 떠오르지 않기 위해서였지만. 심장이 뛰는 소리가 쿵쿵거리며 혈관을 통해 전해졌다. 어찌나 크게 들리던지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마침내 덤불 하나만 헤치면 목표한 곳에 도착할 수 있게 되자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 후에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멈춰 섰다. 있다. 그들이 있다. 비록 전혀 달라진 모습이지만 알 수 있었다. 다행히 살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만약 지금 살아 움직이고 있다면 내가 직접 없앴을 것이다. 좀비는 아닌 것이다. 한동안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쳐다보기만 하던 나는 한 걸음씩 다가갔다. 꿀꺽. 침을 삼키는데 목이 막힌 것처럼 잘 넘어가지 않았다. 갈가리 찢긴 시체를 보고 몇 명의 시체인지 구분해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이 장소에 사람이 얼마나 있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의 풀은 붉은 색으로 물들어있었다. 그래도 심하게 찢기지는 않아 몸의 형태는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것들을 바라보다 하나씩 주섬주섬 모으기 시작했다. 겨울철이 가까워 오는 데다 숲은 다른 곳보다 기온이 낮아 아직 썩지는 않았다. 약간의 비린내가 나긴 했지만 이 것은 피비린내였다. 의외로 눈물이 흐르지 않아 나는 무척이나 만족했다. 이제 정말 괜찮은 건가 보다. 사실 마음과는 달리 울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울어도 상관이 없을 것도 같았지만 왠지 울기는 싫었다. 내가 인간들을 위해서 울어줄 이유가 없으므로. 조각난 부위들을 하나하나 맞춰보자 서서히 내가 알고 있던 모습을 되찾아갔다. "무슨 인형놀이를 하는 것 같군."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와 쿡쿡거렸다. 좀비가 온 숲을 휩쓸어 짐승이 없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조각이 모자라 완전하게 조립을 끝낼 수 없었을 테니까. 처음으로 완벽하게 조립이 끝난 것은 아인이었다. 그런데 순진한 얼굴이 웃고 있었다. 살짝 만져보았다. 조금 전부터 느껴지던 싸늘한 기운이 손가락을 타고, 피를 타고 전해져왔다. "불쌍해라. 아직 여자친구도 사귀어본 적이 없던 것 같던데." 아인의 피에 젖어 굳어버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리던 나는 다른 사람들의 시체도 모으기 시작했다. 가끔은 엉뚱하게 맞춰져 그 모습을 보고 웃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왜 웃으면 웃을수록 기분이 나빠지는 건지 모르겠다. 정말이지 불쾌하다. 내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어야 하는가? 누가 보면 미친년으로 볼 것 아닌가? 그래도 꾹 참았다. 아무리 그래도 한데 몰아서 묻어버리는 것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한참동안 모으고 맞춰보는 동안 다섯 명의 모양이 만들어졌다. 그제야 내가 알고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나왔다. 만족한 마음에 그들을 훑어보던 나는 한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모든 사람들이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것을 본 나는 그만 울컥했다. "어째서 웃는 거야?! 너희들 미쳤어? 죽는데 왜 웃는 거냐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뭐야? 왜 대답을 안 해? 내가 묻잖아. 뭐라고 말 좀 해보라고!" 그들이 말을 할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화가 났다. 그렇다고 시체를 발로 찰 수도 없어서 한 쪽 발을 쿵쿵 굴리며 화를 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한참동안 씩씩대며 발로 땅을 힘껏 차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근처의 나무를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날 무시하는 거야? 모두 날 무시하는 거지? 용서 못해. 모두다 죽여버릴 거야!" 정확히 누구에게 화를 내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가슴이 들끓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걷어찼는지는 모른다. 발이 얼얼한 것을 보니 상당히 오랫동안 이러고 있었던 것 같다. 제 풀에 지쳐 나는 나무 아래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무 움직여서 그런지 볼을 타고 물방울이 하나 떨어졌다. 그리고 또 한 방울. 다시 한 방울. 짭짤한 이슬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손을 들어 물방울을 훔치던 나는 그 것이 눈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상하다. 슬픈 생각도 들지 않은데 왜 눈물이 나올까? "너무 화가 나서 그런가?" 그럴 것이다. 너무 화가 나면 눈물이 나오지 않던가. 틀림없이 지금도 그런 경우다. 그렇게 분했던?눈물은 쉴 새없이 흘러내렸다. 대답이 없는 사람들에게 화가 난다. 나를 공격했던 브러버드에게 화가 난다. 멍청하게 누명을 쓴 나에게 화가 난다. 무엇보다도 솔직할 수 없는 나에게 화가 난다. 나는 재빨리 눈물을 훔쳤다. 나는 울지 않는다.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는 절대로 울지 않는다. 절대로 슬퍼하지도 않는다. 인간이란 어차피 일찍 죽는 존재다. 그런 존재가 약간 일찍 생을 다한 것뿐이다. 지금은,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크게 한숨을 토해낸 나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벌써 시체의 피들은 굳어버렸는데 내가 자꾸 만지자 손에 묻어있었다. 다섯 사람의 피. 생명의 상징이었던 붉은 피가 지금은 어두운 검붉은 색으로 변해있었다. 묻은 것도 굳어버린 물감을 만진 것처럼 드문드문 얼룩이 진 모양이었다. 그래도 냄새는 피 냄새였다. 피 얼룩을 지그시 바라보던 나는 손을 입으로 가져가 댔다. 비린내가 입안을 감돌았다. 도대체 피를 빨아먹는 마물들은 무슨 맛으로 이걸 먹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끝내 손은 빼지 않았다. 손이 깨끗해질 때까지 말이다. 그 후에 시체를 묻으려던 나는 멈칫했다. 이런 좀비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나는 시체에 어둠의 힘을 부여했다. 어둠이 계속되는 한, 내가 마법을 풀지 않는 한 영원히 썩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한참동안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허공에 검은 소용돌이가 생겨나 다섯 명을 집어삼키고 사라졌다. 내가 다시 역주문을 외우면 그들을 토해낼 것이다. 이러면 페드인 왕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다. 이 마법은 다른 공간에 있는 정령이나 신보를 불러내는 것과 비슷한 원리의 마법인 것이다. 이제 이 곳에는 붉은 색으로 물든 풀을 제외하면 그들이 있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잠시 붉은 풀을 바라보던 나는 좀 더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죽은 사람들이 더 있었다. 적어도 시체는 찾아줘야지. 이건 의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단순한 의무. 거의 새벽까지 숲 속을 뒤지고 다니다가 돌아온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다행히 시체는 처음에 죽은 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찾을 수 있었다. 역시 퍼즐 맞추기 아닌 퍼즐 맞추기를 해야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오늘은 아페다를 떠나 하이덴 제국을 향해 출발하는 날이었다. 부스스 일어난 나는 대강 여행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 행인 점은 페드인 왕국을 떠나올 때 챙겨온 보석들을 품속에 지니고 있었기에 지금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강 아침을 먹고 여관을 나온 우리는 말을 사서 아페다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바로 여행길에 오르지 않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운 좋게도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제 의논한 결과 외모를 약간 바꾸기로 한 것이다. 이대로 여행을 하면 브러버드에게 들킬 수도 있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우리는 어제 정해놓았던 대로 외모를 바꾸기 시작했다. 바꿔야할 것은 머리색과 눈 색이었다. 이 두 가지만 달라도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다. "준비됐어?" "그래." 수제노의 말에 나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모든 질서와 규칙을 깨고 무로 돌아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 한없이 자유롭지만 한없이 속박된 것, 그 위대한 힘을 빌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리라. 체인지." 내 손에서 뻗어 나온 보랏빛의 기운이 감싸자 수제노는 한순간 움찔했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곧이어 드러난 수제노의 모습은 확실히 전과는 분위기가 달라져있었다. 단순히 머리와 눈을 녹색으로 바꿨을 뿐인데도 딱딱하던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진 느낌이었다. 거기다 덤으로 내가 가지고 다니던 예쁜 핀을 하나 꽂아주자 조금은 여성스러워진 것도 같았다. 수제노는 핀을 찔러주자 인상을 구기긴 했지만 별다른 저항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같은 방법으로 머리와 눈의 색을 바꾸었다. 처음에는 원래 내 모습대로 은발에 붉은 눈을 할까 했지만 은발은 너무 눈에 띈다는 수제노의 의견에 따라 갈색으로 바꾸었다. 갈색이 가장 무난한 색이기 때문이다. 손거울에 비친 나는 야무진 인상이 많이 사라진 모습이었다. 거기에 머리를 땋아서 리본까지 묶자 전혀 분위기가 딴판으로 변했다. "그럼 이제 갈까, 수잔?" "그렇게 하지, 유나." 여행하는 동안 사용할 서로의 이름을 확인한 우리는 말에 올라탔다. 이제 정말 출발인 것이다. 뒤를 돌아보자 아테다와 그 뒤로 조금 비치는 시우리스 숲의 모습이 보였다. 잠시 나와 수제노는 같은 모습을 보다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이랴!" 말이 히이잉, 울음소리를 내며 앞으로 내달음 치기 시작했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매서웠지만 휙휙 변하는 경치 때문에 기분이 좋았다. 이제 당분간 이 곳에 올 일은 없을 것이다. 슬며시 뒤를 돌아보니 수제노가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우리는 내기라도 하듯이 빠른 속도로 말을 몰았다. 점점 아테다가, 시우리스 숲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 뒤로 나와 수제노는 계속 동쪽을 향해 달렸다. 말이 지친 것 같으면 새 말로 바꿔 탔다. 내가 보석을 가지고 있고 체르만 암살길드의 지원도 있었기에 돈 문제는 전혀 없었다. 처음에는 체르만 암살길드에서 제대로 지원을 해주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 것은 아니었다. 수제노를 보내는 것도 혼자 쳐부수라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정보를 알아오길 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했던 의뢰도 받아들였다. 가끔 만나는 길드원의 말로는 현재 아렌테는 완전히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5일에 한번씩 연락을 취하던 우리 일행이 한 달이 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비밀리에 많은 사람들이 동원돼서 우리들을 찾고 있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더군다나 얼마 전에 시우리스 숲에서 파괴된 마차와 아직도 조금 남아있는 전투의 흔적을 발견하고 부정적인 의견이 확산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하지만 아직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것에 희망을 걸고 수색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긴 내가 남아있는 시체를 다 수거했으니 찾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현재 나는 유나로서 여행하고 있었다. 그새 나는 머리를 단발로 잘라버려 쉽게 알아보기 힘들었다. 외모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지만 분위기가 많이 바뀐 것이다. 수제노도 내가 가르쳐준 화장을 조금씩 하고 있어 가끔은 예전의 수제노 모습이 헷갈릴 때도 있었다. 오죽하면 체르만 길드에서 나왔던 사람이 처음에 수제노를 보고 버벅댔겠는가. 그리고 그동안 전해들을 라디폰 공작의 반응은 내가 그에게 품었던 의심을 풀어주고 있었다. 그는 독자적으로 나를 찾고 있었고, 왕비 일당과의 접촉도 없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그에게만은 연락을 할 생각이었다. 의심을 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려 그 사이 우리는 센트라와 하이덴 제국의 국경선까지 왔다. 이 부근은 상당히 어수선했다. 내가 습격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이덴 제국에서 내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황족과 귀족들 사이의 갈등이 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설마 가장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하이덴 제국은 강대국 중 하나인 토르와도 맞닿아있어 약간의 시위 정도로 끝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내전이 터지자 온통 가는 곳마다 그 이야기뿐이었다. 게다가 내전을 일으킨 자가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권력에 대한 집착이 없고 백성을 가장 소중히 생각한다는 스타인베 백작이 이번 내전을 일으킨 핵심인물이었다. 하이덴 제국의 내전 소식을 듣고 레이만 왕자가 떠올랐지만 지금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쓸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하이덴 제국과의 국경 부근은 전쟁에 참가해서 한 몫 벌려는 용병들과 전쟁을 피해 도망쳐온 피난민들도 북새통을 이루었다. 우리도 용병을 가장해서 하이덴 제국으로 넘어갈 셈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용병증이 필요했다. 그 것은 체르만 길드에서 구해주기로 했기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용병증이 도착할 때까지는 센트라의 국경 도시인 미트컨리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왕 시간이 남은 김에 나는 처음 와보는 도시를 구경하고 있었다. 곳곳에 용병들이 깔려 있어 사람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수제노는 복잡한 곳은 싫다며 여관에 남아서 혼자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여자 용병들도 많아 그렇게 눈에 띄지는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누군가 나를 주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32- 브러버드 #32- 브러버드 혹시 브러버드의 일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방망이질 쳤다. 하지만 이럴 때 당황하면 도둑이 제발 저린 격이라 태연하게 근처에 있는 잡화점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시선이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물건을 고르는 척 하면서 뒤를 보니 웬 노인이 뜨거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주위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쑥 빼고 나를 훑어보고 있었다. 볼에 살이 통통하게 찐 덩치가 큰 노인이었는데 인자한 웃음으로 짓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날카로웠다. 어느 정도냐 하면 살펴보는 것과 노려보는 것의 중간 정도의 시선이었다. 하는 행동으로 봐서는 브러버드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저런 노인은 모르는데. 누구지? 내가 은밀하게 살피는 사이 노인은 대놓고 나를 위아래로, 좌우로 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손바닥을 짝, 치더니 성큼성큼 걸어왔다. 생긴 것이나 뒤뚱뒤뚱 걷는 폼으로 봐서 도저히 악의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혹시 몰라 허리춤에 매달린 장검을 흘낏 쳐다보았다. 창은 눈에 띄는 것 같아 근래에 장만한 평범한 검이었다. 장검을 확인한 나는 눈을 들어 천천히 다가오는 노인을 주시했다. 노인은 풍만한 몸집처럼 행동도 굼떠 내 앞에 설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 다. 노인의 싱글거리는 통통한 얼굴을 보면 도저히 긴장이 되지 않았지만 억지로 긴장하려고 노력했다. "꼬마야,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 "네?" 나는 엉뚱한 소리에 힘이 쫙 빠져 멍청하게 반문했다. 그러자 노인은 인상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물건 고르고 있는데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맥없이 대답했다. 그 이상의 대답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난데없이 나타나서 한다는 소리가 여기서 뭐하냐니? 그런 거야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자 노인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네가 있을 곳이 아닌데 있어서 하는 말이다." 노인이 활짝 웃자 살 속으로 눈이 감춰져 나는 그 것을 티 나지 않게 보면서 입을 열었다. "제가 있을 곳이 아니라니요? 그게 무슨 소리죠?" "라디폰 공작의 말대로라면 페드인 왕국에 있어야하는데. 왜 센트라에 있지?" 노인은 라디폰 공작이라는 말을 나만 들을 수 있게 작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노인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눈사람같이 생긴 것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단 한가지 뭔가 낯익은 냄새가 난다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그런데 그 냄새가 아주 강렬한 것도 아니고 아주 약한 것도 아니라 상당히 거슬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그를 아세요?" "물론이지. 이럴 게 아니라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라도 이야기할까?" 뚱뚱한 사람은 대체로 성격이 좋아 보이지만 반드시 실제도 그러라는 법은 없었다. 하지만 라디폰 공작과 알고 있다는 말에 솔깃해서 뒤를 따라갔다. 수상한 짓을 하면 베어버리면 되니 밑져도 본전이었다. 노인이 나를 데리고 들어간 곳은 아이스크림 가게였다. 아이스크림은 얼음을 가지고 만드는 것이라 겨울에 가장 많이 만들어졌다. 추운 겨울에 웬 아이스크림이냐는 생각이 들지만 왕족이나 마법사나 여름철에도 얼음을 쉽게 구할 수 있지 그 외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보존 마법이 걸린 창고를 만들면 되겠지만 그 것이 또 돈이 상당히 많이 들어서 겨울철에 문을 여는 아이스크림 가게도 꽤 많았다. 그래서 평소에는 아이스크림이라는 고급 음식을 접할 길이 없는 사람들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가게에 많이 있었다. 그 중에는 귀족이나 상인처럼 유복해 보이는 사람들도 많았다. 가게는 일층과 이층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위층에서 아래층을 내려다볼 수 있는 구조였다. 당연히 이층이 전망도 좋고 조용해서 돈 많은 사람들은 주로 그 쪽에 있었다. 노인은 이층으로 올라가서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려 오자 노인은 메뉴판의 한 부분을 퉁퉁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초콜릿 아이스크림과 바닐라 아이스크림, 소다 아이스크림을 두 개씩 가져다주게. 마리엔은 뭘 먹을 테냐? 나랑 같은 걸 시킬까?" "아니요. 전 딸기 아이스크림 하나면 돼요." "그래? 이제 성장기일텐데 그렇게 조금 먹어서 어떻게 키가 크려고 그러지? 뭐 본인이 싫다면 할 수 없지만. 아까 말한 것에다 딸기 아이스크림 하나 추가해서 가져다주게. 참, 되도록 빨리 가져다주게. 이건 팁일세." 노인이 은화를 하나 건네주자 종업원은 쏜살같이 사라졌다. "허허허, 활기찬 젊은일세." 그게 아니라 돈을 줘서 기뻐서 빨리 가져다주려고 그런 거겠지. 게다가 무슨 아이스크림을 6개나? 아무리 아이스크림이 날마다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가게 안은 따뜻하다지만 찬바람이 쌩쌩 부는 날에 아이스크림을 무려 6개나 먹으려는 노인에게 놀라서 보던 나는 조금 전에 그가 나를 마리엔이라고 부른 것을 기억해내고 흠칫해서 물었다. "그런데 제 이름을 어떻게 알았죠?" "그건 라디폰 공작이 가르쳐줬지. 총명한 공주가 있으니 지원해달라나 어쩌나. 대충 그런 내용이었지." 그는 전혀 진지하지 않는 투로 물을 마시며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변장을 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못 알아봤지. 직접 본 적도 없고 기껏해야 그림을 통해 본 거니까. 하지만 희미하게 익숙한 냄새가 나기에 혹시나 해서 따라다니다가 그 생각이 난 거야. 흑마법의 냄새는 아무에게나 나는 것이 아니거든. 그래서 찬찬히 뜯어보니까 그림의 인상착의하고 똑같더라고." 노인의 말에 나는 그제야 아까 맡았던 익숙한 냄새가 뭔지 깨달았다. 하지만 아무리 같은 흑마법사라도 냄새를 쉽게 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예로 나도 노인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흑마법사라는 것까지는 알아채지 못했다. 나는 더욱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어떻게 안 거죠? 나도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고는 생각했지만 흑마법사라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는데요." "별 것 아니야. 나는 흑마법사라고 해도 마법보다는 저주가 특기라서 말이야. 주로 약품과 여러 가지를 다루다보니 나도 모르게 영향을 받아서 잘 느끼게 된 것 뿐이야. 그런데 나야 그렇다 쳐도 놀랍군. 대부분은 느끼지 못하는데 말이야. 과연 라디폰 공작이 대단한 흑마법사라고 할 만하군." 노인은 다시 한번 활짝 웃었고 이번에도 눈이 매우 가늘어졌다. 그걸 힐끗 쳐다본 나는 수상하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그런데 흑마법사가 어떻게 라디폰 공작을 알고 있는 거죠?" "응? 몰랐나? 라디폰 공작이 흑마법사들을 포섭하고 다녔는데? 자신이 모시는 공주도 같은 흑마법사니 자신들을 도와주면 흑마법사들의 권익을 신장시켜준다고 호언장담했지. 그래서 아마 꽤 많은 수가 붙었을 걸." 그러나 아이스크림이 나오자 노인의 말은 거기서 끝났다. 노인은 앞에 놓인 아이스크림을 번갈아 가며 떠먹느라 바빴고 나는 한 숟갈씩 먹으면서 그 모습을 힐끔거렸다. 살이 통통하게 쪄서 얼굴에 주름도 별로 없어 그냥 보면 중년으로 보일 정도였다. 머리만 하얗게 세지 않았다면 중년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뭔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노인은 아이스크림을 먹느라 바빠 결국 질문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다시 입을 열 수 있게 된 것은 노인이 아이스크림을 깨끗이 먹은 뒤였다. 그러나 내가 아직 덜 먹은 관계로 계속 가게에 있을 수 있었다. "이제야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누구시죠?" "나 말이냐?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흑마법사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옵스크리티의 장로 중 한 명인 로튼이다. 네 소개는 하지 않아도 돼. 라디폰 공작에게 들은 적이 있지." 생전 처음 듣는 말이었다. 라디폰 공작이 흑마법사를 포섭하고 다닌 것하며, 옵스크리티라는 집단도 말이다. 도대체 라디폰 공작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라디폰 공작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것은 알았지만 귀족에만 한정된 줄 알았더니 음지에 숨어있는 흑마법사들에게까지 손을 뻗친 모양이다. 그나저나 무슨 흑마법사가 이렇게 무게가 없는 거지? 물론 육체적인 무게가 아니라 정신적인 무게다. 로튼은 내가 흔히 봐왔던 음울하고 약간 광기에 젖은 듯한 흑마법사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이런 작자가 흑마법사들의 우두머리 중 하나에다 더군다나 저주가 특기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은 외모만 봐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니 속은 전혀 다를 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자가 과연 내 편이냐 아니냐, 였다. "그럼 로튼도 라디폰 공작에게 붙었나요? 아니면 그 반대인가요?" 내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묻자 로튼이 껄껄거리며 말했다. "붙었지. 숨어사는 것도 괜찮지만 왕위 싸움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증거는요?" "아직 어린것이 이렇게 사람을 의심해서야 쓰나? 하긴 그래야 목숨이 오래 붙어있긴 하지만 말이야. 허허허." 그래도 내가 여전히 거리를 두자 로튼이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라디폰 공작이 나에게 통신용 수정을 준 적이 있지. 정 의심스러우면 조금 있다 연락해보면 되지 않겠니. 하지만 나도 질문 하나 하지. 어째서 네가 이런 곳에 혼자 있는 거지? 궁전에 있어야 하는 것 아냐?" 로튼의 말이 이상함을 눈치챈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라디폰 공작에게 듣지 못했어요?" "뭘? 중요한 일이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거의 맡기니 공작과 이야기해본 적도 처음 만났을 때 뿐이라 난 잘 모르겠는데. 지금이야 미친 늙은이 하나 잡으러 가느라 어쩔 수 없이 움직이고 있지만 별로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야." 그런 건 몸만 봐도 알 수 있겠네요.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도 날씬한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대부분 먹는 것도 귀찮아한다. 그러나 로튼은 먹는 걸 귀찮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해 그 이야기를 해주는 대신 그가 움직이는 이유를 이야기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로튼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그 것도 나쁘지 않지. 사실 옵스크리티에 속한 마법사 중 네 편을 들겠다고 한 사람은 삼분의 일정도지. 다른 삼분의 일은 상황을 지켜보고 있고, 나머지는 완전히 돈 놈들 뿐이라 세계 정복 외에는 흥미가 없거든." 내가 왠지 남의 일 같지 않아 웃음을 터트리자 로튼은 자신의 말을 농담으로 여긴다고 생각했는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했다. "장난이 아니다. 돈 놈들 중에 대부분은 연락이 안되지. 지금쯤 극비리에 세계 정복을 추진하고 있을 지도 몰라. 어둠에 잡아먹힌 놈들이지. 쯧쯧, 어둠을 너무 우습게 본 대가야. 아무튼 그 중에도 피드라라는 놈은 정도가 심한 놈이지. 그런데 그 놈이 몇 년 전에 종적을 감췄다가 이번에 하이덴 제국의 수도 근처에서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별 수 없이 움직이고 있는 거야." 나는 피드라라는 말에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로튼은 그런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피드라는 실력도 없는 주제에 악의만 가득 차서 좀비만 잔뜩 만들고 다닌다고 한다. 솔직히 피드라가 무슨 짓을 하다 죽든 말든 상관이 없지만 괜히 자신 같은 선량한 흑마법사들이 피를 볼 수도 있다며 확인 겸 퇴치 겸 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런 미친 늙은이가 다른 사람과 함께 있었다는 말도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딱딱하게 되물었다. "피드라를 없애요?" "어라? 갑자기 왜 그러냐? 살기를 뿜을 정도로 아이스크림이 맛이 그렇게 맛이 없었냐? 아니면 내 이야기가 재미없었나?"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동안 있었던 일을 천천히 말해주었다. 입가에 잔잔한 웃음을 머금은 채. 로튼이 첩자로 접근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만약 여기서 나간 후에 라 디폰 공작과 연락을 못 하면 죽여버리면 그만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내 말을 모두 들은 로튼이 골똘히 생각에 잠기며 중얼거렸다. "브러버드라. 그 놈이 드디어 완전히 돌았군. 내가 예전부터 일을 벌이려면 눈에 띄지 않게 해치우라고 그렇게 누누이 강조했건만. 어이구, 덕분에 이 몸이 골치 아프게 됐군." 한참 움직이는 것이 싫다며 투덜거리던 로튼은 이번에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런데 네가 누명을 썼던 작은 악동이라는 저주 말이다......" 로튼의 긴 설명이 끝나자 나는 입을 쩍 벌렸다. "내,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허허허, 당연하지. 듣기로는 공격 마법이 특기라면서? 원래 공격 마법이 특기인 자들은 성질이 급해서 저주같이 오래 걸리는 수단은 관심이 없으니 잘 모를 거다. 그리고 이 건 내가 저주를 걸려고 했다가 잊어먹고 놔두는 바람에 우연히 알게 된 거다. 그런데 볼수록 신기한 꼬마군. 알고는 있었던 모양이네." 나는 로튼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눈을 반짝 빛냈다. 앞으로 재미있어지겠군. 하지만 우선은 피드라부터였다. #32- 브러버드 #32- 브러버드 우리는 로튼과 동행하게 되었다. 만약 공작과 연락하지 못하면 바로 없애버리려고 준비하고 있던 나와 수제노는 수정구에서 공작의 모습이 보이자 검에서 손을 뗐다. 라디폰 공작은 나를 보고 그답지 않게 당황했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사정 이야기를 들은 그는 너무 위험하다며 말렸지만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 지원할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지만 움직이기 힘들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 대신 브러버드의 본거지를 찾으면 바로 연락하기로 했다. 공작은 내가 바로 연락을 하지 않고 뜸을 들인 이유를 어렴풋이 눈치챈 모양이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로튼이 해주었던 말도 했지만 지금은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등장은 최대한 화려하게 해야겠지. 공작에게 연락을 취한 다음 로튼과 함께 움직이게 되었다. 덕분에 로튼의 용병증을 준비하는 동안 미트컨리에서 더 기다려야했지만 말이다. 그 후에 우리는 쉽게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워낙 어수선한 때이고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검문할 수 없어 용병증만 확인하고 통과시켜준 것이다. 국경을 넘자 단순히 혼잡한 분위기가 아니라 언제 깨질지 모를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분위기가 곳곳에서 넘쳐났다. 그나마 스타인베 백작과 그 일당이 북부의 데칸 지방을 본거지로 두고 있어 아직 이 곳에는 전화의 불길이 미치지 않았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놀랍게도 황실 측이 불리하다고 한다. 거의 대등하긴 하지만 조금씩 스타인베 진영 측으로 승기가 기울고 있다는 것이다. 황실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지만 스타인베 백작이 반란을 일으킬 것은 예상하지 못하고 북부에 대한 방어를 허술히 해서 생긴 일이었다. 우리는 바로 수도인 비라이턴으로 향했다. 비라이턴은 어수선하기 했지만 다른 도시에 비하면 동요가 심하지 않은 편이었다. 하긴 궁전이 있는 곳이라 국외 다음으로 안전한 곳이었다. 그러나 최근 계속되는 황실 측의 패배로 감출 수 없는 불안감이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비라이턴의 분위기보다는 브러버드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기에 우리는 그 때부터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체르만 암살길드의 다른 사람들까지 동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쓸만한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10년 간이나 꽁꽁 숨어있었을 브러버드를 쉽게 찾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때때로 초조해졌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가빠오는 기묘한 초조함. 애가 타지만 흥분과도 비슷한 감정이었다. 그럴 때면 크게 심호흡을 하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이제 멀지 않았다. 조금만 참자'라고.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사방이 어수선하고 용병들이 넘쳐 나는 덕에 수색은 여전히 제자리 걸음이었다. 오늘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우리는 한밤중에 숙소로 모였다. "이대로는 일년이 지나도 못 찾겠어!" "그렇게 안달하지 말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려무나. 가끔은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있는 법이란다." 로튼의 느긋한 말에 부아가 치밀었다. 나와 수제노는 하루 종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데 그는 하루의 절반을 먹는데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제노도 같은 생각인지 양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지금 내가 편하게 생겼어요? 누가 허구 한날 먹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있으니 나라도 열심히 해야할 것 아녜요!" "동감이다." 그러나 나와 수제노의 불만 어린 말에도 로튼은 불룩한 배를 앞으로 내밀며 웃기만 했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기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포기했다. 이미 이 눈사람이 열심히 뛸 거란 기대는 버린 지 옛날이었다. 그건 수제노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나는 이 이야기는 대강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어떻게 하죠? 좀처럼 찾을 수가 없으니. 로튼 할아버지도 뭔가 생각이라도 해봐요. 이 중에서 피드라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할아버지잖아요." "그래서 내가 생각해놓은 것이 있긴 하지. 내가 만날 먹고만 있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건 열심히 돌아가는 머리에 영양분을 공급하기 위한 행동이었을 뿐이다. " 로튼은 의기양양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아주 먹기만 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나와 수제노는 반색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곧이어 기대는 실망과 황당함으로 바뀌었다. "그게 말이 돼요? 그런 방법이 먹혀들 리가 없잖아요!" "아니야. 피드라의 귀족, 특히 왕족에 대한 증오는 상상을 초월하지. 틀림없이 걸려들 거야." "아무리 그래도 이 방법은 우리에게도 위험합니다. 덜미가 잡히면 끝장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까?" 수제노의 말에 로튼의 통통한 얼굴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어차피 다른 방법도 없잖아. 잡혀도 죽기밖에 더하겠어? 그냥 한번 화려하게 논다고 생각하면 돼. 그 정도야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그게 어떻게 노는 걸로 생각될 수가 있어?! 생긴 건 멀쩡한데 속은 전혀 아니올시다 인 것 같았다. 그 후로 나와 수제노는 로튼을 무시하고 우리끼리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이름 모를 사람의 집 지붕에 엎드린 채 반대편을 보았다. 나와 거의 같은 모습을 한 수제노가 보였다. 우리는 지붕과 똑같은 색의 옷을 입고 납작 엎드려있었다. 점점 가까워져오는 행진곡 소리와 말발굽 소리를 들으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정말이지 이런 방법이 통할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가능성도 없는 일 때문에 이러고 있어야 한다니 정말 한심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아무런 성과가 없자 밑져야 본전이라는 로튼의 주장에 따라 그의 의견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나와 수제노는 이렇게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터로 나갈 군대의 행렬을 습격하기 위해서. 로튼의 계획은 이렇다. 우리가 계속 행군하는 무리를 습격하면 황실 측의 사기는 땅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기를 위해서, 백성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 황족 중 한 명이 행군의 지휘자로 나설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언제 습격 당할 지 모를 상황에 나타날 황족이 어디 있겠냐만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그 것도 아니었다. 괴집단의 습격에도 겁먹지 않고 황족이 친히 나서서 습격을 막아낸다. 연이은 패전으로 침체된 군대에 활력을 불어넣고 황족의 놀라운 무용을 보여줌으로써 상대의 기를 꺾을 수 있다. 물론 그 때는 어마어마한 호위병을 끌고 오거나 대리를 시키겠지만 말이다. 여기까지는 그런 대로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대로 말이다. 군대 전체를 습격하는 것도 아니고 선두에 선 자들만 공격하고 도망치면 되니 잡힐 위험도 적었다. 그런데 황족이 나오는 시점에 피드라가 나타날 것이라니 말이 되는가? 로튼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습격이 계속되면 중간에 피드라가 우리와 같은 패거리인 것처럼 끼여든다는 것이다. 브러버드로서는 경거망동할 수 없지만 우리가 날뛰면 나중에는 피드라가 습격해도 우리로 생각할 테니 아마 움직일 거라는 말이다. 솔직히 너무 가능성이 없는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아무리 왕족에 대한 증오로 미쳐있다고 해도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는가.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습격을 대비해 잔뜩 경계할 테니 습격도 힘들어진다. 그런데 하는 말이 그냥 가벼운 기분으로 즐기다 보면 피드라는 정신이 나간 놈이니 분명히 나올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고 로튼이 너무도 자신 있게 호언장담해서 지금의 상황에 이른 것이다. 행군하는 무리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나는 생각을 접었다. 지금은 지금의 일에 몰두할 때였다. 행렬의 앞쪽에는 백마를 탄 반백의 기사와 함께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가까워질수록 거리에 모인 사람들의 함성소리는 커졌다. 그들은 영웅이다. 데칸 지방에서는 악당일지라도 이 곳에서만은 쌍두 독수리의 깃발을 내세운 그들은 영웅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 우리는 영웅을 습격하는 악당이 되는 것이다. 파란 색의 깃발에 새겨진 쌍두 독수리가 매서운 눈을 부라리며 가까이, 가까이 날아들었다. 일부러 잘못된 범인의 상을 만들기 위해서 코부터 가린 붉은 천 아래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진짜 목적은 이 것이 아니지만 우리는 1만 대군을 습격하려는 것이다. 흥분과 긴장을 숨과 함께 몸밖으로 내보내면서 조용히 기다렸다. 마침내 쌍두 독수리가 아래까지 날아들자 반대편에서 번쩍이는 섬광이 일었다. 수제노가 던진 단검이 빛에 반사돼 허공에 은빛 줄기를 남기며 날아갔다. 은빛의 뱀은 순식간에 쌍두 독수리의 날개를 꺾어 버렸다. 난데없이 날아온 단검이 제국의 상징인 쌍두 독수리 깃발에 꽂히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나와 수제노는 벌떡 일어났다. 온통 붉은 색 옷을 입은(지붕이 붉은 색이었다) 나와 수제노가 나타나자 밑에서는 고함 소리와 함께 소란이 일어났다. 기사들은 검을 빼들었고 병사들도 각자의 무기를 꽉 움켜쥐고 우리를 쳐다봤다. 구경 나온 사람 중 일부는 집으로 쏙 들어가 버렸지만 대부분은 두려운 빛을 비치면서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아마 많은 수의 기사와 병사들이 쉽게 우리를 잡을 거라고 믿는 것이겠지. "너희는 누구냐?!" 선두의 중간에 서있던 기사가 검으로 나를 가리키면서 소리쳤다. "말할 의무는 없다. 죽어라!" 음산하게 대답한 나는 그를 향해 단검을 던졌다. 옆에 있던 기사가 방패를 들어 막자 나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스크롤을 찢었다. 스크롤은 로튼이 가지고 있던 것으로 범인이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한 도구였다. 얼음가루가 여기저기 날리며 차가운 숨결을 토해냈다. 밑에서는 얼음창을 피하려는 사람들로 인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진정해라! 밀집해서 방패로 막아라!" 지휘관으로 보이는 기사의 말에 당황하던 사람들이 진정하고 방패를 들었다. 훌륭한 대응이었지만 너무 진부했다. 수제노는 나와는 달리 말없이 스크롤을 찢었고, 푸른 번개 대발이 쏟아져 내렸다. 번개가 엎드린 군중에게 떨어질지, 아니면 갑옷을 입거나 검과 방패를 들고 있는 병사들에게 떨어질지는 뻔했다. "으악!" "사람 살려!" "으갸갹!" 게다가 명령으로 서로 뭉쳐있었으니 한 발에 여러 명을 잡을 수 있었다. 특히 중무장한 기사들의 피해가 컸다. 쇠로 인해 번개의 파괴력이 증폭되었기에 사람들이 픽픽 쓰러졌다. 죽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일주일은 몸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이 악독한 것들이!" "어머, 우리는 아직 한번씩 밖에 공격하지 않았어. 그렇게 멍청하니 계속 지는 거다. 이 미련한 것들아, 흐흐흐." 내 말에 기사는 이를 갈면서 소리쳤다. "궁수들은 뭐하나? 당장 저 반역자들을 공격해라!" 이미 준비하고 있던 궁수들은 그의 지시가 떨어지자 일제히 활시위를 당겼다. 나와 수제노를 향해 화살들이 비 오듯 쏟아졌고, 우리는 재빨리 다른 집 지붕으로 옮겨가며 스크롤을 사용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방어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요리조리 지붕을 옮겨다니거나 현란한 몸놀림으로 피했지만 계속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상대는 금방 우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공격에 박차를 가했다. 바로 그 때였다. "큭!" "우웩!" 갑자기 병사들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쓰러지거나 토하기 시작했다. 로튼은 그 몸 때문에 나와 수제노처럼 전면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어젯밤 은밀히 거리에 저주를 걸어놓은 것이다. 그 것은 로튼이 마법을 걸어야 발동하기에 엉뚱한 사람이 당한지 않았다. 여러 가지의 저주가 계속 발동됐다. 그러나 로튼의 짓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누구나 아는 저주만 사용했다. 사람을 갑자기 기절시키는 페인팅, 구토를 하고 쓰러진 후에 한 달은 누워있어야 하는 병자 흉내내기, 몇 분 동안 정신이 나가 저주를 건 자의 말에 복종하는 꼭두각시, 환상에 시달리는 악몽 등 여러 가지였다. 갑자기 동료들이 쓰러지거나 같은 편을 공격하자 당황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지붕들이 일어났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처럼 지붕으로 위장한 암살자들이 가세한 것이다. 군대를 습격한다는 말에 기겁했지만 우리처럼 별 수 없이 참여하게 된 10명이었다. 그들이 화살을 쏘아대고, 나와 수제노가 스크롤을 사용하자 일대 대혼란이 일어났다. 살상이 목적은 아니지만 재수 없게 마법을 정통으로 맞거나 화살이 머리에 꽂혀 죽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워낙 사람들이 모여있는지라 아무리 피해를 감소시키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사상자들이 나왔다. 기사와 병사들은 지시에 따르려고 애썼지만 정신 없이 도망가는 민간인들 때문에 상황이 수습되지 않았다. 그 상황에도 지휘관은 최선을 다해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빗발치는 화살을 피한 나와 수제노는 거의 동시에 단검을 던졌다. 내가 던진 단검은 지휘관이 검으로 내리쳐 막았지만 이런 방면에는 대단한 실력을 보이는 수 제노의 단검을 목표를 정확하게 맞췄다. 단검은 지휘관의 손목에 박혀 반대편으로 날의 대부분이 보였다. 그리고 그 것을 신호로 우리들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제길! 놓치지 마라! 반드시 잡아라!" 다시 화살이 쏟아졌지만 날쌘 자들 뿐이라 잡히는 사람은 없었다. 부상은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그리고 모두 투명화 스크롤을 가지고 있으니 도망치는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뒤따라오는 병사들을 따돌리기 위해 지붕에서 지붕으로 뛰어가면서 나는 한숨을 쉬었다. 다음에는 호위도 많아질 텐데 걱정이군. 정말 피드라가 걸려들긴 걸려드는 거야? 헛수고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네. #32- 브러버드 #32- 브러버드 오늘로 습격을 시작한 지 이 주일이 지났다. 매일 전쟁터에 군대가 나가는 것도 아니고, 행군이 있을 때마다 습격하면 잡히기 쉬워서 지금까지 총 5번의 습격을 감행했고, 지금 6번째 습격을 감행하려는 참이다. 왠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지만 로튼의 적극적인 주장으로 아직까지 이 짓을 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군대는 여기서 봐도 철통같은 수비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매번 습격하는 장소가 변하니 항시 긴장해야한다는 것은 알지만 이 건 정도가 심했다. 거의 대부분의 병사가 궁수로만 이루어진 군대였다. 이건 어디로 보나 우리를 끌어내기 위한 미끼였다. 그러나 미끼인 줄 알면서도 습격해야 하는 것이 현재 내 처지였다. 나는 한숨을 폭폭 내쉬면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오늘도 여전히 붉은 색 일색으로 통일한 옷을 입은 습격 동지들이 보였다. 이제는 제법 능숙해져서 처음보다 호흡도 잘 맞지만 본래 우리의 목적이 무엇인지 떠올려보면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제 슬슬 황족이 나올 만도 하건만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만약 끝끝내 황족이 나오지 않거나 황족이 지휘를 해도 피드라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로튼은 나나 수제노 손에 끝이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무사하지만 습격 동지들은 부상을 당해서 처음과는 많이 물갈이 됐던 것이다. 그걸 제하더라도 들키지 않게 숨어서 모든 준비를 하는 것도 상당히 고역이었다. 매일 이런 일을 했을 수제노에게 그 인내심 하나만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행여나 습격 장소를 들켰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우리가 습격하는 장소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피드라에게 습격 장소를 알리기 위해 규칙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 단순하면 황실 측에서 알고 일망타진 당할 가능성이 있고, 너무 배배 꼬이면 피드라가 눈치채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너무 직선적이지는 않지만 단순한 규칙을 전제로 습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것을 황실 측에서 눈치채면 우리가 상당히 곤란해졌다. 만약 눈치챘다면 위장하기 전에 뭔가 조치가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약간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지붕의 떨림이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온 것인가? 많은 수의 사람들과 말들의 행렬로 인해 그 주변은 항상 미미한 진동이 일어나곤 했다. 이제 어느 정도 진동이면 어디까지 왔겠다 정도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짐작이 틀릴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맞아떨어졌다. 슬며시 고개를 빼고 보니 분위기가 흉흉한 것이 마치 당장이라도 전투를 벌일 군대 같았다. 역시 노리는 것은 우리였어. 지금까지 우리가 대부분 지붕 위에서 습격했기에 사람들은 건물 위를 살피며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우리가 미리 설치해놨던 인형들 덕분에 주의가 많이 산만해진 상태였다. 암살자 중 한 명의 연락으로는 이 군대는 인형을 우리로 착각하고 3번 멈춰 섰다고 한다. 그러니 지칠 만도 하겠지. 그리고 습격을 하지 않을 때도 인형을 설치해놔서 헷갈리게 만드는 경우가 있어 어쩌면 오늘은 습격이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침내 선두가 완전히 밑을 지나자 준비해놓았던 스펠 비드를 던졌다. 스크롤보다는 위력이 없지만 정확성만은 뛰어나서 이럴 때는 유용한 것이었다. 콰앙. 희뿌연 연기와 함께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놀란 말들이 날뛰기 시작했고, 기사들은 말을 달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폭발의 피해를 받지 않은 병사들은 재빨리 주위에 있는 모든 집 지붕으로 활을 쏘아댔다. 미리 준비해간 방패로 몸을 가린 나는 남은 스펠 비드를 던졌다. 다른 사람들도 거의 동시에 스펠 비드를 던져서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병사들의 비명소리와 이들을 진정시키려는 고함소리가 한데 어울려 머리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우리가 꽁꽁 숨어서 스펠 비드만 던지니 상대도 당황스럽긴 할 것이다. "붉은 뱀, 비겁하게 숨어있지 말고 나와라!" 화살이 어지간히 날아와야 몸을 드러내지 아주 폭포수처럼 쏟아지는데 어떻게 모습을 드러내겠어? 황실 군대에게 붉은 뱀이라고 불리는 우리 중 누구도 그 외침에 응해 일어나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여러 개의 스펠 비드만 소리가 들린 곳으로 던질 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밑에서 거대한 불길이 뱀처럼 치솟아 올랐다. "아악!" "불이다!" "뜨거워!" 이 것이 오늘 로튼의 작품이었다. 당장 효과가 일어나는 저주는 극히 드물었다. 그렇기에 사용할 수 있는 저주는 한정되어 있었다. 그렇게 되자 황실 측에서도 그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하게 되었다. 우리야 어떻게 공격할지 모르니 궁수를 잔뜩 데리고 다니는 것밖에 못하지만 저주는 달랐다. 우리의 목적이 선두임을 간파한 황실 측에서는 선두에 선 기사들에게 성수를 뿌린 모양이었다. 확실한 것은 모르지만 로튼의 말로는 그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성물을 주는 것보다 돈도 덜 들고 하루 동안은 웬만한 저주는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튼도 명색이 옵스크리티의 장로인데 마법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직접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고 근처에 숨어서 마법진만 발동시킨 것이지만 말이다. 이번에도 위협적으로 보이는 것치고는 사상자는 얼마 없는 것 같았다. 부상자는 상당했지만. 그래도 양심이 있는데 죄 없는, 그 것도 아는 사람의 군대를 박살내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하루라도 빨리 황족이나 그 대리가 나타났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래야 피드라가 나타나든 나타나지 않든 이 짓도 그만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갈수록 위험 부담이 커지고 있었다. 방패를 쥐고 있는 손을 통해 이미 화살이 빽빽이 꽂혔음이 느껴졌다. 5분 동안 이루어진 접전은 역시나 우리의 승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꽁꽁 숨어서 스펠 비드만 던지고 있으니 당연했다. 이렇게까지 마법 도구가 넘쳐나는 것은 전적으로 로튼의 덕이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스펠 비드 하나만 해도 몇 골드인데 이렇게 펑펑 던질 수 있는 양은 쉽게 구할 수 없었다. 대신 옵스크리티에서 마법으로 이동해준 스펠 비드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계속 있다가는 화살 받이가 되거나 반대쪽으로 돌아간 병사들에게 잡힐 것 같았다. 수제노도 슬슬 후퇴하자는 수신호를 보내왔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처절한 비명소리가 고막을 때린 것은. "크악!" "우아악!" 마지막으로 지휘관에게 단검을 던지는 것으로 끝을 내려던 나는 놀라서 방패에 뚫린 구멍을 통해 밑을 내려보았다. 어느새 지면에서 수많은 암석의 창들이 솟구쳐 올라왔다. 딱딱한 바위로 이루어진 울퉁불퉁한 창은 예리하게 번뜩이며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그 창은 갑옷 따위는 우습다는 듯 위에 서있던 사람들을 그대로 뚫고 계속 솟구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숨어있는 지붕 근처까지 사람들을 꾄 채 올라왔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꼬치처럼 암석의 창에 꽂혀있었고, 흙색의 창 위로 붉은 피들이 강을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런 것은 계획에 없었다. 로튼이 사용하기로 한 마법은 조금 전 그 폭발로 끝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까지 최소한의 인명 피해로 최고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 화려한 공격만 주로 했다. 그런데 이번 공격은 상대의 목숨이 그 목적이었다. 나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 마법을 사용한 자가. 우리의 습격 횟수가 많아지면서 군대의 행렬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어 주변에 민간인들은 별로 없었다. 황급히 두리번거리던 나는 작은 샛길로 사라지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저 스쳐지나가듯이 보았기에 확실한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가슴이 쿵쿵거렸다.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장님이 맹수를 때려잡을 가능성보다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장님이 맹수를 때려잡았다! 그렇다. 상대는 미친놈이니 정상적인 생각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증거는 없지만 확실히 그일 것이다. 알 수 없는 희열이 온 몸을 집어삼켰다. 찾았다. 드디어 찾았다. 살아남은 몇몇의 기사와 병사들이 도망치듯 사라지는 그를 보았는지 그 쪽으로 뛰어가려 했다. 나는 품에 있던 모든 것을 집어던졌다. 너희들에게 뺐길 것 같으냐? 내가 그 놈을 너희들에게 줄 것 같으냐? 절대로, 절대로 넘겨줄 수 없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너희 손에는 넘기지 않는다. 아니, 이 세상 누구에게도 넘겨줄 수 없다. 반드시 내 손으로. 나는 모습을 감추는 것도 잊고 마구 공격했다. 내 모습을 발견한 사람들은 이미 도망쳐버린 그보다는 내게 더 관심을 쏟았다. 다시 화살이 쏟아졌다. 검으로 대부분의 화살을 쳐낸 후 재빨리 몸을 뒤로 날려 피했다. 여기서 죽을 수 없다. 난 해야할 일이 있다. 그런데 이 따위 화살로 날 죽일 수 있을 성 싶더냐! 웃기지 마라. 내가 인간 따위에게 당할 것 같으냔 말이다. 나는 살기를 뿌리며 단검을 던졌다. 평소라며 어김없이 막히거나 빗나갔을 단검이 너무나도 정확하게 지휘관의 머리에 박혔다. 지휘관이 말에서 굴러 떨어지자 한순간 병사들이 얼어버렸다. 흥분과 긴장이 호흡을 빠르게 했다. "뭐해? 어서 가자!" 수제노의 외침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뒤에서 기사들의 외침과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화살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화살은 내게 당도하지 못했고, 간간이 나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은 검으로 쳐냈다. 병사들이 죽은 적은 있어도 지휘관이 죽은 적은 처음이었다. 아마 다음에는 오늘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대군이 올 것이다. 암살자에게 지휘관이 살해당했다는 것은 전체군의 사기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를 방해하는 녀석은 누구라도 용서 못한다. 그 인간에게 손을 댈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오직 나뿐이다. 그 것을 방해하는 자는 모조리 없앤다. 마침내 마지막 습격의 순간이 내일로 다가왔다. 역시나 예상대로 지금까지와는 달리 사상자가 많이 나오고 지휘관마저 당하자 드디어 황족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반드시 우리를 잡으려는 것인지 아예 황족이 이번 군을 지휘한다는 소문을 고의로 퍼트리고 있었다. 그러나 진짜 황족인지 아니면 대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피드라만 나오게 할 수 있다면 그 것이 누구든지 상관없었다. "마리엔, 알았어? 이번에 저번처럼 날뛰지 말아!" 수제노의 책망에 나는 고개를 숙였지만 마음만은 붕 떴다. 제발 피드라가 나왔으면 좋겠다. 제발 말이다. 나는 전의 일로 인해 이번 습격에는 빠지게 되었다. 대신 피드라가 나타나면 절대 놓치지 않고 추격하는 임무였다. 그렇기에 크게 눈에 띌 일은 없었지만 전처럼 내가 갑자기 날뛸까봐 수제노가 주의를 주고 있었다. 내가 빠지는 데다 이번에는 로튼도 피드라를 추격하는 역할이라 전력이 상당히 감소됐지만 어차피 피드라를 끌어내기만 하고 바로 철수할 예정이라 큰 위험은 없었다. "너무 그러지 말라고. 마리엔도 반성하고 있잖아. 그리고 사람이 가끔은 흥분도 하고 실수도 해야 재미있는 법이지. 그런 의미에서 아가씨는 너무 재미없어. 에잉, 그렇게 감수성이 메말라서야 어디다 쓰겠어?" "로튼 씨는 왜 그렇게 느긋합니까? 잘못하면 잡힐 뻔했단 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감수성이 메마르든 말든 상관하지 마세요!" 로튼의 말에 수제노가 차갑게 대꾸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면 무안해할 상황인데도 로튼은 여전히 느긋이 웃고만 있었다. 어찌 보면 라디폰 공작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런 로튼을 보고 수제노는 인상을 썼지만 더 이상 말하지는 않았다. 분위기를 바꾸기도 하고, 전부터 궁금하기도 해서 나는 로튼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어째서 피드라는 그런 무모한 짓을 한 거죠? 나는 나타나준 것이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지만 너무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예전에 말했잖아. 피드라는 제정신이 아니다고." 로튼은 집게손가락을 머리 근처에서 빙글빙글 돌리면서 말했다. "그래도 너무 이상하잖아요. 브러버드에 속해있다면 좀 더 신중해야하지 않을까요? 만약 그 때 잡혔다면 브러버드가 노출될 수도 있잖아요." "그렇진 않아. 잡히자마자 자결하면 브러버드에 대한 건 알려지지 않지. 아마 우리와 한 패로 생각했을 걸. 그리고 피드라에게는 브러버드란 하나의 수단이었을 거야. 왕족을 죽인다는 목적을 위한 수단." "그 자는 왜 그렇게 왕족을 증오하는 거죠? 평민 중에 귀족이나 왕족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지만 피드라는 그 정도가 심하던데요." 내 질문에 로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의 가족들이 왕족의 손에 죽었기 때문이겠지. 지금 피드라의 모습을 보면 믿어지지는 않지만 그의 어머니는 절세 미인이었던 모양이야. 피드라네 가족은 당시에 알도란 왕국의 수도에서 살고 있었지. 그런데 재수도 없게 하필이면 그 어미가 왕자의 눈에 들고 만 거야. 푸릇푸릇한 귀족 영애도 있는데 그 왕자 취향이 연상 쪽이었나 봐. 성질도 아주 더러워서 강제로 궁으로 끌고 가려고 한 모양이야." 로튼은 말을 끊고 나와 수제노를 둘러보았다.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고, 수제노고 안 그런 척 하면서도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우리들의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로튼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때 피드라는 멋도 모르고 왕자에게 돌을 던졌던 거야. 그것도 정확히 머리를 맞혀서. 당연히 열 받은 왕자는 피드라를 죽도록 패고 여자를 끌고 가버렸어. 그리고 그 다음날인가 군대가 나와서 그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고 하더군. 피드라의 아버지는 물론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 내외와 그 주변에 살던 이웃까지 모두 죽여버렸지. 당시 그 곳은 빈민촌이었으니 누구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어. 오히려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어. 결국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빈민촌 사람들은 하루만에 모조리 몰살당했지." 로튼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군대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 곳 사람들은 아이들만은 수도 밖으로 탈출시키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물론 대신 그들의 목숨을 바쳐야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버림받은 빈민촌의 아이들이 살아갈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여자아이들은 창녀로 팔려갔고, 남자아이들은 그 정도 효용가치도 없어 대부분이 굶어죽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아이가 바로 피드라였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피드라는 그 소문을 듣고 버려진 엄마의 시신을 찾으러 갔다가 망나니 왕자의 명령으로 지키고 서있던 병사에게 큰 상처만 입고 도망을 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때 우연찮게 지나가던 흑마법사가 쓰러져있는 피드라를 주워 구해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흑마법사의 뒤를 따라다니며 수발을 들던 피드라는 지금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뭐, 진부한 복수극이지. 그런데 문제는 나중에 그 왕자를 죽이러 갔는데 벌써 그 왕자는 다른 놈의 손에 죽고 없었던 거지. 결국 복수도 제대로 못한 피드라는 왕족이라면 죄다 죽이려고 덤비게 된 거지. 자신의 가족과 이웃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말이야." 로튼은 어깨를 으쓱 이면서 말했다. "진짜 진부하네요." "그렇지? 그래도 곁에서는 진부해도 그 놈에게는 살아가는 의미지. 복수가. 아마 그 목표가 없으면 살 의미를 찾기 못할 거야. 그래서 더더욱 그 곳에 매달리는 것이겠지. 브러버드도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된 것 일거야, 아마." 내가 냉소적으로 말하자 로튼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무슨 이유로 그런 짓을 했든 상관없다. 나만 건드리지 않았으면 피드라가 세상 천지를 어떻게 하든 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내 소중한 것에 손을 댄 이상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왕족을 죽이는 것이 일생일대의 목표이듯 당장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목표는 그를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겁니까? 마치 본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군요." 조용히 있던 수제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다. 그런 이야기를 피드라가 아무에게나 떠벌릴 리는 없다. 나까지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쳐다보자 로튼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이봐, 너희들 왜 이렇게 의심이 많은 거야? 내가 자세히 아는 것은 피드라를 구해준 흑마법사가 바로 나였기 때문이지. 그리고 지금은 저 모양이지만 그래도 예전에는 나를 생명의 은인으로 알고 잘 따랐거든." 로튼의 말에 나와 수제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도 차지 않는다는 듯이 보았다. 지금 피드라는 거의 70살 정도로 보인다. 아무리 젊게 봐준다 해도 60세. 그 이하는 절대 있을 수 없었다. 만약 로튼이 피드라를 구해주었다면 지금 그의 나이는 몇이란 말인가? 적어도 70살은 넘었다는 뜻인데 외견상으로는 절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하는 행동도 힘이 철철 넘친다. 아무리 인간의 수명을 100년으로 치지만 대부분은 70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물어봤다. "그럼 올해 로튼 나이가 얼마죠?" "나? 음, 94살 정도는 됐을 거다." "말도 안 되는군요. 어떻게 그 모습으로 94살이라는 겁니까?" 수제노가 더 이상 듣기도 싫다는 듯이 쌀쌀맞게 말했지만 로튼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 모습 말이야? 우연히 만든 시약을 마셨더니 이렇게 됐어. 지금 몸 상태로 봐서는 150살까지는 너끈히 살 수 있을 것 같아. 하하하. 대단하지 않아? 그런데 문제는 그 후로 그 것과 똑같은 약을 만들려고 해도 당시에 뭘 넣었는지 모르겠다는 거야." 로튼은 참으로 아깝다는 식으로 혀를 찼다. 그 모습에 나와 수제노는 할 말을 잃었다. 아무래도 진짜인 모양인데. 인간에게 있어 장수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꿈이었다. 이 곳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는 놀랍게도 100년은 기본으로 산다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100살을 넘기 힘들었다. 그런데 그 놀라운 일을 실수로 달성한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잠시동안 나와 수제노는 로튼을 계속 훔쳐보다가 고개를 절래 절래 젓고 내일 있을 일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로튼에게 있어 장수의 좋은 점은 그만큼 오랫동안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다는 것 하나뿐일 것 같았던 것이다. #33- 브러버드 2 #33- 브러버드 2 붉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로 바꾸었던 모습 대신 원래 모습으로 밖을 나왔다. 그 모습도 진짜 모습이 아니지만 몇 달 동안 갈색으로 지냈기에 이 쪽이 더 편했다. 무엇보다 가장 평범한 색이라 사람들 틈 속에서도 눈에 띄지 않아 좋았다. 그동안 우리의 습격으로 구경꾼 숫자는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군대행렬을 보려고 모였다. 조심한다고는 하지만 민간인이 소동에 말려들어 죽는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설마 나에게 그런 일이 있겠어?'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불행은 언제나 자신을 빗겨갈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이들을 이 자리로 이끌고 온 것이다. 그리고 황족의 등장은 흔한 일이 아니라 거리를 메운 사람들은 습격 전보다는 못해도 상당히 많았다. 나는 혹시나 피드라가 있을까 싶어 모여있는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피드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피드라가 우리의 습격 장소를 눈치채지 못하고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러나 전에 있었던 습격에 끼여든 것을 보면 그는 습격 법칙을 알고 있을 것이라며 자위했다. 우리의 습격 규칙은 간단했다. 군대가 지나갈 길목을 알게 된 후 처음에는 성문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서 습격한다. 그 다음에는 군대가 처음 출발한 곳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서 습격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성문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서 습격한다. 그 다음은 출발지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습격한다. 대략 간단하게 그려보면 이렇게 된다. 성문 *----|----|----|----|----|----|----|----|----* 성 ⓛ ③ ⑤ ⑦ ⑧ ⑥ ④ ② 기본적인 것은 이런 식이다. 대인원이 이동하는 만큼 샛길은 이용하지 못하고 대로만 이용해야만 하기에 가능한 습격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습격하면 대충 그림만 그려봐도 쉽게 다음 습격 예정지를 추측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여기서 순서를 약간 바꾼 것이다. 성문 *----|----|---{-|----|---<-|----|->---|-}---|----* 성 ⓛ ③ ⓛ ③ ⓛ ② ② ② 우선 처음에서 세 번째까지의 습격은 규칙을 그대로 따른다. 그 후에 남은 거리를 새로운 것으로 보고 다시 규칙을 따라서 습격한다. 그 것을 세 번 더한 다음 새롭게 다시 규칙을 따라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인형을 배치하거나 사소한 공격을 함으로써 그림을 그리더라도 예측하기가 힘들도록 했다. 만약 사소한 공격까지 모두 표시한다면 전혀 규칙을 찾아볼 수 없는 엉망진창 습격이 돼버린다. 하지만 사소한 것을 과감하게 젖히고 본격적인 공격만 표시하면 규칙이 나온다. 부디 이 것을 황실 측이 아닌 피드라가 먼저 알아채길 바랬는데 다행히 피드라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제정신이 아니긴 해도 그래도 머리는 굴러가는 모양이었다. 만약 피드라가 아니라 황실 측에서 먼저 눈치챘다면 잡히지는 않아도 여러모로 곤란해졌을 것이다. 부디 오늘도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나오기를. 수상하지 않을 정도로만 주위를 살피던 나는 멀리서 들리는 함성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주인공인 군대는 보이지 않건만 벌써부터 다른 이의 환호에 전염된 사람들이 덩달아 소리를 질렀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소리치는 것이라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굉장히 흥분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꽤나 인기 있는 황족이 나온 모양이었다. 황족이 나왔다면 엄청난 호위병이 그를 보호하고 있을 것은 뻔했다. 수제노들이 걱정이 된 나는 슬쩍 지붕 쪽을 쳐다보았지만 곧 시선을 돌렸다. 모두 실력 있는 사람들이고 이번은 싸우는 척만 하고 도망갈 것이니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지금 내가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피드라를 놓치지 않는 일이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함성 소리와 함께 말발굽 소리와 사람들의 힘찬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저편으로 행렬의 선두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멀어서 도대체 누가 나왔고, 얼마나 많은 호위병들이 동원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의외로 바글바글 거리지는 않는 것 같았다. 군대 행렬은 빠르게도 느리게도 아닌 적당한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분위기가 습격에 대한 걱정은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아 더욱 의외였다. 이럴 때는 어디서 습격 당할지 몰라 사방을 살피고 오는 것이 보통인데 선두는 곧장 이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황족을 앞세웠을 행렬이 가까워짐에 따라 내 눈동자는 빠르게 움직였다. 주위를 살피고 피드라의 흔적을 찾으면서도 지휘하는 황족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행렬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렬이 앞에 선 자의 얼굴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흑마를 타고 당당하게 앞장서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레이만 왕자였다. 대리나 피가 섞였을까 말까한 먼 친척을 내보낼 줄 알았던 예상은 보기 좋게 무너졌다. 이제야 왜 그렇게 사람들이 열광했는지 알 수 있었다. 차기 황제로 유력시되는 왕자가 나타났으니 흥분할 만했다. 어느새 사람들의 눈은 선망과 존경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확실히 눈동자만 제외하면 온통 흑색의 말 위에 탄 레이만 왕자의 모습은 근사했다. 햇빛을 받은 레이만 왕자의 금발은 말의 움직임에 따라 허공에서 춤추고 있었고, 진홍빛 눈동자는 두려움도 과용도 아닌 담담함만을 담고 있었다. 복장도 수수한 제복일 뿐 화려하지도 않고 습격을 염두에 둔 옷차림도 아니었다. 허리춤에 매달린 장검과 주변에 있는 기사들만 아니었다면 산책이라도 나온 것으로 생각할 자세였다. 그리고 레이만 왕자의 담담한 태도뿐만 아니라 호위병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에도 놀랐다. 물론 분위기로 봐서 최고의 기사들만 선발해서 온 것 같지만 단순히 수만 보자면 전에 있었던 습격 때보다 사람수가 적었다. 만약 이런 자리가 아니었다면 아는 척이라도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의든 아니든 그동안 그의 편이었을 군대를 습격한 것에 대해 상당히 찔리고 있었다. 그래서 자꾸만 레이만 왕자를 보게 되었다. 이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정말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우연인지 그 순간 레이만 왕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슴이 철렁했지만 설마 알아보겠냐 싶어 뻔뻔하게 그대로 마주봤다. 여기서 고개를 황급히 돌렸다가 수상하다고 잡으면 어떻게 할건가? 그런데 적당히 시선을 돌리리라 생각했던 레이만 왕자가 무안해질 정도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레이만 왕자의 진홍빛 눈동자가 의아함을 내비치며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시선을 돌렸으면 모르데 한참 마주 보는 상황에서 시선을 돌리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설마 날 알아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분위기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자세히 보면 외모는 그대로였던 것이다.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구원의 소리가 들려왔다. 쉬익. 화살들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나는 절묘한 타이밍에 공격을 시작한 수제노들에게 고마움마저 느꼈다. 레이만 왕자는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고, 덕분에 나는 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진정하고 궁수와 마법사를 가운데 두고 보호해라!" 레이만 왕자의 침착함 때문인지 군대는 그 어느 때보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역시 우리를 잡기 위한 군대였는지 이번에는 마법사까지 있었다. 마법사는 전장에서 가장 당하기 쉽지만 잘만 보호하면 그만큼의 힘을 낼 수 있었다. 레이만 왕자의 지휘는 좁은 공간-대로라도 군대를 운용하기에는 좁다-에서도 빛을 발했다. 방패를 든 병사들이 궁수와 마법사를 보호하고, 스펠 비드로 한꺼번에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서로 떨어져 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근처에 있는 가게 앞에 숨은 나는 슬며시 돌아가는 상황을 살폈다. 각각 두 명씩 배치된 마법사 중 한 명은 공격 마법을, 한 명은 방어 마법을 사용하면서 공격과 방어를 적절히 섞어서 하고 있었고, 궁수들은 타이밍을 맞춰 몇 군데서 활을 쏘면 그 뒤를 이어 다른 곳에서 공격함으로써 수제노들이 공격할 틈을 주지 않았다. 사실 이렇게만 하면 소수인 우리를 막기는 쉬웠다. 하지만 언제 자신이 당할지 모를 상황에서 서로 호흡을 맞춰 공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료와 지휘자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했다. 내 목숨을 맡길 수 있다는 그런 믿음 말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의 습격이 성공할 수 있었다. 처음에 사람들이 많은 곳을 공격함으로써 공포심을 심어주면 무의식적으로 자신들도 당하지 않기 위해 제멋대로 공격하기 마련이었다. 지시를 내려도 미묘하게 서로의 호흡이 차이가 생겼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지휘자를 믿는 것인가? 나는 공격이 주로 자신에게 집중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황하지 않고 지휘하는 레이만 왕자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대로 가다가 수제노들이 당하는 거 아니야? 어서 피드라가 나타나야 할텐데. 레이만 왕자도 수제노도 어느 쪽도 다치지 않았으면 했기에 무척이나 애가 탔다. 그렇게 수제노 쪽이 수세인 채 몇 분이 지났다. 바로 그 때였다. 갑자기 난데없이 구경꾼들 사이에서 커다란 불길이 일었다. 일렁이는 붉은 악마는 군대는 물론 민간인까지 집어삼켰다. 붉은 악마의 손은 보통 불길과는 달라 금세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단말마 비명을 지르고 쓰러졌다. 운 좋게 살아남은 자들도 화상으로 흉측한 몰골로 변해버렸다. 만약 병사들이 분산되어 있지 않았다면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이런, 마법 공격에 대비해라!" 레이만 왕자의 다급한 외침을 들으면서 정신 없이 주변을 살폈다. 다시 한번 마법을 사용하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휘이잉, 하는 거센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재빨리 고개를 돌려보니 흙먼지를 날리며 작은 회오리 바람이 일고 있었다. 그리고 바람은 회전할수록 빠르게 몸집을 키워갔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풍마의 입 속으로 빠져들었다. "으악!" "꺄아악!" "사람 살려!" 난 사람들의 아우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대로가 아닌 건물에 가려 그늘이 진 작은 길들을 살펴봤다. 마법이 주로 레이만 왕자 부근에서만 일어나는 걸로 봐 누구의 소행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처음 마법을 사용했을 때 유심히 봤지만 대로 근처에는 없었다. 하긴 그렇게 눈에 띄게 움직일 리가 없었다. 샛길에는 도망치려는 사람들로 우글거렸지만 그 중에 검은 로브를 입은 사람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눈을 깜빡거리는 한순간에 스쳐본 것이지만 분명했다. 몸이, 가슴이 말하고 있었다. 그라고 말이다. "도망치지 마라!" 수제노들은 재빨리 도망치고 있었다. 이미 피드라가 나타난 이상 그를 쫓는 것은 나와 로튼의 몫이었다. 오래 버티고 있으면 개죽음밖에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는 그들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투명화 마법이 걸린 스크롤이 있으니 걱정은 없으리라. 수제노들이 도망치자 검은 로브의 사람도 금방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급히 일어나 샛길 쪽으로 뛰었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앞쪽에 로튼의 모습이 보였다. 피드라가 그의 모습을 알고 있으니 어디선가 숨어있다 재빨리 나타난 것이다. 로튼의 경우에는 체형 때문에 머리나 눈 색을 바꿔도 금방 식별이 가서 숨어있었던 것이다. 이미 내 머리 속에는 레이만 왕자도, 수제노도 사라진 후였다. 잡아야 한다. 반드시 본거지를 알아내야 한다. "잠깐!" 나는 그 외침을 무시한 채 계속 뛰었다. 나를 부른 것인지 안다. 그러나 지금은 레이만 왕자의 부름에 응할 때도 아니고, 응할 생각도 없었다. 사람들이 가로막고 있으면 세게 밀쳐버리고 뛰었다. 잠시 후 저 멀리 검은 로브를 입은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그리고 들키지 않게 살며시, 그렇지만 빠르게(그 몸으로도 빠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움직이는 로튼의 모습도 보였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 있어 나와 로튼이 피드라의 뒤를 따라가도 그렇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 잠깐만 멈추시오!" 뛰면서 돌아보니 웬 기사들이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기겁해서 더욱 힘차게 뛰었다. 지금 잡히면 안 된다. 그리고 이들이 따라오면 피드라에게 들킬 염려도 많았다. 그러나 내가 속력을 높이자 이들도 속력을 높였다. "잠시만 멈추시오!" 나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뛰었다. 뒤를 힐끔 쳐다보니 전보다 거리가 좁혀져있었다. "해를 가하려는 것이 아니오!" 타다닥. "왜 도망치는 겁니까?" "왜 따라오는 거야?" 그러나 나는 기사들의 대답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그대도 내달렸다. 하필이면 이럴 때 따라올 것이 뭐람? 피드라를 추격해야하는 중대한 순간인데 말이다. 그리고 더욱 큰 문제는 점점 기사들과 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뛰어가면 길을 비켜주지 않으면서 기사들에게는 길을 비켜주는 행인들 때문이었다. 나를 무슨 범죄자쯤으로 생각하는지 고의로 발을 걸어 넘어뜨리려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의 발을 힘껏 밟아주고 전속력으로 뛰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점점 좁혀들었다. 나는 앞쪽에 가는 로튼을 향해 어떻게 하냐는 시선을 보냈다. 로튼은 소란 아닌 소란이 일어 뒤돌아보고 있었다. 그는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자기한테 맡기라는 뜻인가? 내가 손가락으로 로튼을 가리키며 확인하자 그는 뛰면서 가슴을 탕탕 치는 시늉을 했다. 그와 동시에 내 어깨를 잡는 손이 있었다. 잡혀서 멈춰서는 순간에도 나는 로튼에게 눈길을 보냈다. 절대로 놓치지 말라는 눈길을. 로튼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여준 다음 사라졌다. "왜 이래요?" 비록 로튼에게 맡기긴 했지만 직접 피드라를 쫓지 못한 것이 화가 나서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자 내 어깨를 잡은 기사가 슬며시 손을 내려놓으며 정중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하지만 꼭 뵙고 싶다는 분이 계셔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따라온 것입니다." "그게 누군데요?" "레이만 전하이십니다." 역시나. 수제노들이 일찍 철수하고, 내가 사람들 틈에 섞여 갈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레이만 왕자의 눈에 띈 모양이었다. 설마 그 사이에 날 알아본 걸까? 아니면 나를 습격자 중 한 명으로 간주한 것인가? 나는 기사들을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았지만 그들은 묵묵히 내 답을 기다리기만 했다. 그다지 따라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런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말했다. "그럼 앞장서요." "감사합니다." 기사들은 고개를 숙여 고마움의 뜻을 전하고 앞장섰다. 나는 그 뒤를 따라가면서 불쾌한 심정을 숨지기 않고 그대도 드러냈다. 자연히 발걸음도 거칠어졌다. 만약 로튼이 피드라를 놓친다면 절대 가만 두지 않겠어. 피드라를 쫓아 뛸 때는 몰랐는데 다시 원래 장소로 돌아가려고 걷자 제법 먼 곳까지 온 것 같았다. 입술을 삐죽이며 기사들을 따른 지 한참만에 원래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고 근처에 사는 사람들만 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이리저리 움푹 패인 대로 위에 시커멓게 타죽은 시체들의 냄새가 진동했다. 코를 찌르는 냄새 사이로 들리는 부상자들의 신음소리는 화려한 비라이턴의 거리를 황폐한 전쟁터의 한 곳으로 착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중앙에 굳건히 서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레이만 왕자는 기사들의 보고를 받고 있다가 우리가 다가가자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전하, 모셔왔습니다." "무슨 실례가 되는 일을 했나?" 내가 영 기분 나쁘다는 얼굴이자 레이만 왕자가 냉기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항상 이런 식인지 나를 잡은 기사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하지만 계속 도망치시기에 어쩔 수 없이 상황을 제대로 설명을 드리지 못한 점은 있습니다." "그래. 그럼 물러가 보라." 레이만 왕자의 말에 기사들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후 물러갔다. 나는 그들이 사라지자 남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나를 알아봤든 아니면 붉은 뱀으로 생각했든 어느 쪽이든 좋을 것이 없었다. "오랜만이군요." 레이만 왕자를 살짝 올려다봤던 나는 황급히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소녀가 어찌 전하를 뵌 적이 있겠습니까? 다른 분과 착각하신 듯 합니다." "착각했다?" 묘한 여운을 남기는 레이만 왕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너무 많이 해도 목소리를 들킬 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내 행동에 레이만 왕자의 뒤에 서있던 기사들이 발끈했다. 내가 레이만 왕자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만 까닥인 것이 그를 무시한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감히 나서지는 못하고 부리부리한 눈초리로 노려보기만 했다. 반면에 레이만 왕자는 화도 내지 않고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내가 그의 시선이 무지 부담스러워질 즘에 한 걸음 다가왔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레이만 왕자가 다시 다가왔고, 나는 또 물러났다. 그런 것이 몇 번 반복되자 레이만 왕자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달리 무지 빠르게 접근해서 내 손목을 턱 잡았다. "뭐, 뭡니까?" 그러나 레이만 왕자는 내가 당황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내 손을 자기 눈앞으로 가져갔다. 레이만 왕자가 유심히 내 손을 보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제야 아차 싶었다. 내 손가락에는 그가 선물로 줬던 반지가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동안 반지를 계속 끼고 있어서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가지고 계시는군요." "아, 네." 더 이상의 발뺌은 무의미하다는 것은 깨달은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뭐라고 변명을 해야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까 골머리를 앓던 나는 레이만 왕자의 눈이 머리에 가있다는 것을 알았다. 단발에서 제법 자랐지만 예전에 비하면 짧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검은 색에서 갈색으로 변해있었다. "사정이 있어서 좀..." 내가 말끝을 흐리자 레이만 왕자가 입을 열었다. "무슨 사정으로 하이덴 제국까지 오신 건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게다가 호위 기사들은 어디 있는 겁니까?" 어찌 들으면 추궁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레이만 왕자가 살며시 웃고 있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순간 나는 머리를 엄청 굴려 쓸만한 변명거리를 찾았다. 그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아마 레이만 왕자는 내가 사헤트로 가는 도중에 사라졌다는 것은 알고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남모르게 찾았지만 몇 달이 지나도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하자 아예 까발리고 수색하고 있는 탓이다. 그러니 아무리 내전으로 정신이 없어도 소문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다. "그게......" 나는 쩔쩔매며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사실대로 말한다고 해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페드인 왕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릴 생각이 없었기에 이런 곳에서 시선 집중을 받는 것은 사절이었다. 그런데 레이만 왕자가 계속 나를 잡고 있자 주위에서 시체를 수습하던 병사들이나 부상자를 치료하던 마법사들의 눈이 이 곳으로 모이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부터 창으로 바깥을 쳐다보던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도 느껴졌다. "여기서 말하기 곤란한 일입니까?" "네." "그럼 저와 함께 황궁으로 가시지요. 이런 곳에 당신을 혼자 놔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내가 됐다는 시선을 강렬하게 보냈지만 레이만 왕자는 단호했다. 로튼과 수제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가는 것도 그렇고, 피드라에 대한 문제도 마무리하지 못한 것 때문에 걸리는 점이 많았다. 나는 자유로운 한 손을 붕붕 저으며 말했다.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는데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혼자 있는 것은 위험합니다." 나는 몇 번 사양의 뜻을 내비쳤지만 레이만 왕자의 뜻은 변하지 않았다. 의외로 그가 강하게 나오자 나는 할 수 없이 황궁으로 따라가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러고 있다가는 내 정체가 드러나기 십상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손 좀 놔주시면 안될까요?" 레이만 왕자는 아직까지도 내 손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도망이라도 칠 줄 알았던 모양이다. 사실 손이 자유로웠다면 정말로 도망쳤을 지도 모르지만. "아, 죄송합니다." 레이만 왕자가 쑥스러워하며 손을 놓자 그의 뒤에 서있던 기사들의 눈이 커졌다. 어느새 나를 째려보던 그들의 시선은 경탄과 호기심으로 물들어있었다. 되도록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지 않았던 나는 이왕 황궁으로 가야한다면 빨리 가고 싶었다. 그런 내 마음을 읽은 것인지 레이만 왕자는 뒷수습을 기사 중 한 명에게 맡기고 황궁으로 향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선을 받고 싶지 않다던 나의 작은 소망은 처참히 깨졌다. "저도 말 탈 줄 아는데요." "하지만 이 곳은 위험합니다. 붉은 뱀은 지금껏 돌아가는 군대를 습격한 적은 없지만 그러지 말란 보장은 없습니다." 그 붉은 뱀이 바로 나란 말이야! 이제 절대 습격하지 않는단 말이다. 레이만 왕자와 함께 말을 탄 나는 그야말로 쏟아지는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 기사들의 시선은 돌아가는 내내 나에게 박혀 있었고, 우연히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의 눈은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33- 브러버드 2 #33- 브러버드 2 처음 와보는 하이덴 제국의 황궁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암석처럼 묵직하고 웅장했다. 페드인 왕국의 궁전이 밝고 화려한 꽃이라면 제국의 궁전은 어떤 비바람에도 그 곳을 지키고 서있는 회색의 돌이었다. 그러나 그 돌은 볼품 없이 이리저리 채이는 자갈이 아니라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였다. 보는 사람을 절로 압박하는 절도 있는 위용이 풍겨 나오는 곳이었다. 레이만 왕자의 궁도 그런 중후한 멋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유난히 높은 천장에는 전장을 누비는 기사의 천장화가 그려져 있었고, 이를 여러 개의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었다. 이 기둥들은 천장과 닿아있는 부분이 활짝 핀 꽃잎들이 겹쳐있는 것처럼 생긴 것을 제외하면 다른 장식은 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세로로 여러 개의 홈이 파여 있었는데 그 것으로 인해 단조롭지 않으면서도 탄력적인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습들은 반들거리는 바닥에 투영되어 두 개의 똑같은 공간이 서로 접해 있는 것 같은 환각적인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기둥 사이사이로 보이는 병사들과 시녀들의 모습은 이 웅장한 공간과 어울리지 못하고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특히 부러움과 시기에 가득 찬 시녀들의 모습은 나로 하여금 현실을 느끼게 했다. 아무리 멋있고 으리으리한 곳이라도 여기는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 일단 따라오긴 했지만 노심초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군거리며 눈총을 주는 시녀들도 그렇고 이미 내가 레이만 왕자와 함께 있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의 반응을 봐도 몇 시간 후면 소문이 비라이턴 전체에 퍼질 것이다. 특히나 이런 남녀간의 문제는 더욱 빨리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사실 소문이 나도 큰 상관은 없지만 거기에는 내 정체가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따랐다. 만약 내 정체를 피드라가 눈치챈다면 일이 어렵게 꼬일 것은 자명했다. 다행히 지금까지 레이만 왕자가 내 정체를 드러낼 만한 직접적인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만에 하나 그런 말을 한다면 큰 낭패였다. 나는 정체를 드러내서도 안되며, 레이만 왕자에게 내 처지도 요령껏 설명해야 하는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한단 말인가?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내가 표정을 굳히고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레이만 왕자가 물었다. "아닙니다." 반사적으로 괜찮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속마음만은 절대 그렇지 못했다. 레이만 왕자를 오랜만에 만난 것은 반갑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마음도 모르는 시녀들은 내가 레이만 왕자와 이야기를 나누자 더욱더 날카롭게 흘겨보았다. 그렇게 부러우면 너희들이 나 대신 레이만 왕자를 따라가면 되잖아! 그렇게 되면 서로가 좋으련만. 질투와 호기심 어린 눈들과 가득한 근심들로 인해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리고 내가 끈질기다 못해 집요할 정도의 시선에서 해방된 것은 레이만 왕자의 방에 도착해서였다. 레이만 왕자의 방은 화려했지만 그의 취향이라기보다는 밝은 크림색의 벽지와 방 자체에서 나오는 화려함이었다. 레이만 왕자처럼 화려하긴 하지만 현란하지도 않고 삭막하지도 않은 깔끔한 화려함이 돋보이는 방이었다. 그리고 나와 레이만 왕자는 장식은 전혀 없지만 그 것만으로 품위 있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게 되었다. "이제 무슨 사정인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레이만 왕자의 정중한 요청에 나는 기사들에게 잠시 눈을 주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죄송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물려주시겠습니까?" 그러자 레이만 왕자는 의중을 알아보기 위해서인지 잠깐 나를 바라본 후에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나가라." "전하, 외람 되오나 두 분만 계시는 건 좀...다시 생각해주십시오." 기사들은 우리만 남겨두고 나가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았다. 일단 레이만 왕자가 나를 알고 있고, 보기 드물게 친절하지만 내가 흑심을 품고 접근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 했다. 사실 단 둘만 남게 되면 내가 암살시도를 하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사들의 선택은 옳았다. 그러나 레이만 왕자는 재고의 여지도 없다는 듯이 바로 입을 열었다. "나가라고 했다." "하지만..." "내 말을 거역하겠다는 거냐?" "...그러시다면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꽤나 오래 버틴 후에야 나갈 줄 알았던 기사들은 의외로 쉽게 물러났다. 은근히 걱정이 되는 눈치였지만 레이만 왕자를 믿는 듯 했다. 그리고 레이만 왕자가 워낙 단호해서 설득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고 물러난 점도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남모르게 감탄했다. 오호, 레이만 왕자는 은근히 폭군의 기질이 있는걸. 하지만 그 폭군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조리 죽여버리고 나라 말아먹는 미련한 폭군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는 현명한 폭군이었다. 카리스마가 있다고나 할까. 기사들과 시녀들까지 모두 나가고 넓은 방에 나와 그만이 남게 되자 레이만 왕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됐습니까?" "네.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부탁이 더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레이만 왕자는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 저를 마리엔이라고 부르지 마시고 유나라고 불러주세요. 그리고 제 신분을 나타낼 만한 말씀은 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그 이유는 당신께서 이 곳에 있는 것과 상관이 있겠지요?" 나는 과연 레이만 왕자를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보았다. 변명거리가 몇 개 떠오르긴 했지만 그렇게 신통한 것들은 아니었다. 어설픈 거짓말을 하는 바에야 차라리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나았다. 그러려면 레이만 왕자가 내 말을 발설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했다. 마침내 일단은 믿어보자는 생각을 한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다시 내쉬었다. 그리고 서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내 이야기는 창가로 스며드는 햇살이 밝은 오렌지색으로 변할 때가 돼서야 끝났다. 모든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사헤트로 가세 된 이유와 나를 습격한 자들이 오펠리우스 왕비와 손을 잡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첫 번째는 창피해서였고, 두 번째는 왕국 내의 치부를 다른 나라의 왕족에게 보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내가 다스릴 지도 모르는 나라에 대한 흠을 다른 나라 사람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왕위 다툼은 많이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자랑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드라가 브러버드란 사실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내전 중이라도 조사를 하거나 병사들을 파견할 것이다. 그럴 수야 없지. 복수란 어디까지나 자신의 손으로 해야 의미가 있는 법이다. 그래도 중요한 내용은 거의 말한 셈이었다. "그런 자들이 있었단 말입니까? 이 비라이턴에!" "네." 콰앙.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갑자기 레이만 왕자가 탁자를 세게 내리치자 화들짝 놀랐다. 그가 거의 부술 기세로 내리치는 바람에 탁자가 한차례 심하게 흔들렸다. 내가 그의 눈치를 살피는 동안 레이만 왕자는 낮게 말했다. "이 일은 저희가 어떻게든 하겠습니다. 그러니 마리, 아니 유나 양께서는 이 곳에 계 십시오. 그 사이에 페드인 왕국에 연락하겠습니다." 그 말을 하는 레이만 왕자의 눈동자가 붉게 타올랐다.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었다. 단순히 사정 이야기를 하고 비밀을 지켜달라는 약속만 받으려던 나는 그의 과격한 반응에 어리둥절했다. 그래도 같은 왕족이니 어느 정도 화를 낼 줄은 알았지만 이건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이었다. 그들의 본거지가 이 비라이턴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들은 다 이런가? 생각해보았다. 과연 부모님(마계에 계시는)이 습격을 받았다면 나는 이 정도로 화를 낼까? 답은 '아니다' 였다. 내가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당장 그 놈들을 찾아서 피의 응징을 가할 정도로 사랑한다. 그 때까지 그 자들이 살아있다면 말이다. 내가 그 상황에서 보일 수 있는 반응은...분노가 아니라 비웃음이다. 부모님이 누구에게 질 마족들도 아니고, 어차피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따라서 그런 행위는 자신들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일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나와 친한 자들은 대부분 죽음과는 거리가 먼 자들뿐이다. 그렇다면 관점을 바꿔서 인간처럼 금방 죽는 자 중에 습격을 당한다면? 인간처럼 약한, 인간처럼 쉽게 사라지는 자라면...순간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가슴이 뻥 뚫 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인간, 소중한 것, 습격, 죽음, 그리고 이별. 지금은 떠올릴 수 없는 기억의 파편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소모적인 생각은 필요 없다. 도움이 되지 않는 감정은 필요 없다. 당장 해야할 일은 복수. 그 것에 방해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필요 없다. 지금은 죽은 자들을 위한 진혼곡을 불 때가 아니었다. "괜찮습니까? 얼굴색이 좋지 않은데." 내가 오만상을 짓자 어느새 레이만 왕자의 얼굴에는 분노보다는 걱정이 더 가득했다. 나는 금세 빙긋 웃었다. 감정을 접었던 그 때처럼 금방 웃었다. 인간이라면 할 수 없겠지. 자신의 감정을 버리는 일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왕국에는 연락하지 말아주세요. 그 이유는 제 행선지를 '그들'이 쉽게 알 수 있었던 점을 떠올려보시면 쉽게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 레이만 왕자의 입에서 신음과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사여부를 알리지 않은 겁니까?" "그렇습니다." "냉정한 판단이군요. 하지만 혼자서 그들을 뒤쫓은 건 현명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발각됐다면 어떻게 됐을 것 같습니까? 레이만 왕자가 질책하는 투로 말했지만 나는 태연하게 답했다. "그 점이라면 걱정 없답니다. 기사들이 분발해준 덕분에 절 직접 본 사람은 단 한 명만 남았거든요. 그리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그 자는 약간 정신이 이상한 관계로 이런 변장으로도 충분히 속일 수 있습니다. 참, 혼자가 아니라 동료들도 있답니다." "동료라면?" "지금쯤 절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연락도 없이 이 곳에 와버렸으니까요." 내 말에 한동안 레이만 왕자는 침묵을 지켰다. 골몰히 생각에 잠긴 듯 했다. 나도 그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보기 위해 침묵을 깨지 않았다. 그런 침묵이 계속되는 가운데 얼마 후 레이만 왕자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 복수입니까?" "맞아요." 나는 박수를 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그러자 그런 내 모습에 레이만 왕자가 화를 냈다. "안됩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설마 죽을 생각인 겁니까?" "그럴 생각은 없는데요." "그럼 이 일에 손 떼십시오. 제가 병사들을 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페드인 왕국에 연락하면 그 쪽에서도 수색에 나설 겁니다." 레이만 왕자의 말은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천천히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전 레이만 왕자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를 노린 자를 가만히 놔둘 정도로 자비롭지도 않습니다. 전 당한 것은 그대로 되돌려주는 사람입니다. 왕자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사람이 아닐 지도 모르겠군요. 그리고 상대는 드러내놓고 수색하면 쉽게 잡힐 자들이 아닙니다." 내 말에 레이만 왕자가 내 눈을 직시했다. 나도 피하지 않았다. 내 눈동자와 그의 눈동자가 한참동안 서로를 들여다보았다. 몽롱한 새벽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빛을 찾는 것처럼 레이만 왕자는 오랫동안 내 눈에 담긴 마음을 찾았다. 어느 순간 레이만 왕자의 눈동자가 심하게 요동치는 강물처럼 흔들렸다. 그는 과연 내 눈에서 무엇을 봤을까?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레이만 왕자가 더 이상 나를 말릴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그를 향해 예쁘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레이만 왕자가 천장을 보고 긴 숨을 토해낸 후 씁쓸하게 말했다. "난 당신을 말릴 수 없는 겁니까?" "네. 하지만 레이만 왕자님이 아니라도 누구도 절 말릴 수 없습니다." "그거 약간은 위안이 되는 말이군요." 그 말을 하고 레이만 왕자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조용히 레이만 왕자를 보다가 창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서쪽 하늘에서 따뜻한 주황색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태양이라는 밝은 오렌지색의 빛이 대기라는 유리를 통과하면서 만들어진 하나의 장엄한 그림이었다. 노을은 서서히 저물어 가는 해의 몰락을 나타내는 쓸쓸한 색이었다. 하지만 어둠을 준비하는 아름다운 색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일 떠오를 해를 위한 준비의 색이기도 했다. 나는 그 노을을 보며 상념에 젖어들었다. 서서히 기울어 가는 해는 피드라, 다가오는 어둠은 나다. 그럼 내일 다시 떠오를 해는 누구일까? 그런 엉뚱하다면 엉뚱하다고 볼 수 있는 생각을 하던 나는 레이만 왕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다시 시선을 돌렸다. "한 가지 약속해주시겠습니까? 절대 무리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잠시 눈을 깜빡이던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원하신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정도는 해도 되겠지요?" "그럼 한가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창문을 통해 들어온 노을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우리를 감쌌다. 조금씩 퍼져 가는 노을은 방을 오렌지색으로 물들이며 노을의 방으로 만들었다. 대기 중을 떠돌며 마침내는 망막에 각인되는 노을은 서서히 스며드는 어둠을 피해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는 것처럼 폭발할 듯이 쏟아져 내렸다. ----------------------------------- 갑자기 레이만 왕자의 인기가 올라갔어요. 아니면 그동안 숨어계시던 레이만 왕자의 팬들이 이제야 나타나신 건가? ^-^ #33- 브러버드 2 #33- 브러버드 2 여관으로 돌아가자 로튼과 수제노가 달려와서 나를 반겼다. 내가 레이만 왕자와 함께 사라졌다는 말을 듣고 걱정한 모양이었다. 로튼도 내가 기사와 함께 간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왕자가 직접 데려갈 줄은 몰랐는지 상당히 놀란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에게는 찔리는 것이 있지 않은가. 전쟁터에 나가려는 군대를 습격한 것도 모자라 며칠 전에는 꽤나 유명한 기사를 하나 죽여버린 것이다. 이 정도면 스타인베 패거리의 스파이로 몰려 반역죄로 참수를 당해도 전혀 모자라지 않는 죄목이었다. 거리에 나도는 소문은 그런 살벌한 내용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지만 일단 찔리는 것이 있는 그들로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괜찮은 거냐?" "물론." 수제노의 질문에 나는 힘차게 말했다. "얼마나 놀란 줄 알아? 갑자기 레이만이라는 왕자가 널 데려갔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고. 더군다나 넌 하루 종일 오지 않지. 우리가 한 일이 완전히 들킨 줄 알았다니까." 로튼이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린다는 식으로 퉁퉁한 손을 가슴에 대고 말했다. 나는 조금만 더 충격적인 소문이 나돌았다면 로튼은 심장 마비로 세상 하직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정을 설명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이래봬도 내가 공주 아녜요? 그래서 레이만 왕자와 안면이 있었거든요. 날 알아보고 데려간 거지 우리가 붉은 뱀이라는 것은 몰라요." "참, 너 공주였지. 깜박했다." 내 말에 수제노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농담인가 하고 봤지만 그 모습이 너무도 진지했다. 정말로 내가 공주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단 말인가? 내가 그렇게 품위가 없단 말인가? 방금 까지만 해도 레이만 왕자에게 공주 대접을 잔뜩 받고 왔다가 동료라는 여자에게 이런 말을 듣자 절로 자괴감이 들었다. 수제노가 나를 공주로 대하지 않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것은 처음 봤을 때부터 반말 조로 나와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로튼마저 수제노의 맞장구는 치는 것이 아닌가. "맞아. 공주니까 서로 알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겠군.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 "너무한 거 아녜요? 나도 알고 보면 무척이나 존경받는 공주라고요." 내가 볼멘 목소리로 투덜거리자 수제노와 로튼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중얼거렸다. "존경? 다들 미쳤군. 너의 진짜 모습을 모르는 게 틀림없다." "사람들이 참 많이 변했구만." 두 사람의 말에 나는 그들을 살포시 흘겨봤다. 그러자 로튼이 자신의 손으로 내 등짝을 펑펑 치면서 말했다. "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우리를 놀라게 한 벌로 잠깐 장난 좀 쳐봤지." 로튼의 손이 한번씩 등에 닿을 때마다 그 반동으로 몸이 앞으로 쏠렸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왠지 장난치고는 진심이 들어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굳이 짚고 넘어가지는 않았다. 어차피 나도 이들에게 그렇게 공주 행세할 생각도 없었고, 이들도 공주라고 크게 신경 쓸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당장 궁금한 것이 있어 순순히 넘어갔다. "그만 치고 말 좀 해봐요. 피드라는 끝까지 쫓아간 거예요, 로튼?" 내 말에 그때서야 손을 멈춘 로튼은 손으로 수염도 없는 턱을 쓸면서 뜸을 들였다. 나는 한참동안 그의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더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말을 해봐요. 답답하잖아요." "사실, 끝까지 쫓아가지 못했다." "네에?!" 나는 비명이라도 지르는 것처럼 소리쳤다. 로튼이 끝까지 피드라를 쫓아가지 못했다면 브러버드의 본거지가 어디인지는 알아내지 못했다는 말이다. 괜히 브러버드 전체를 물 먹이려 했다가 피드라마저 놓친 꼴이 돼버렸다. 그렇다고 다시 군대를 습격할 수도 없었다. 설령 다시 습격한다고 해도 피드라가 또 걸려들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나는 원망 어린 시선을 로튼에게 보냈다. 그러자 로튼이 킥킥대기 시작했다. 수제노도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피식피식 댔다. "뭐가 그렇게 좋아요?" 내가 성을 내며 말하자 로튼이 여전히 만면에 웃음기를 띤 채 입을 열었다. "아니, 금방 네 표정이 귀여워서. 너도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었군. 아, 그렇게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지 말라고. 나는 끝까지 쫓아가지 못했다는 말만 했지 놓쳤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로튼의 말에 나는 화를 내는 것도 잊은 채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마법사의 친구! 마법사의 부하! 마법사의 분신!" 로튼은 마치 연설이라도 하는 것처럼 한 마디 할 때마다 높이 치켜든 팔을 강하게 움직이면서 우렁차게 외쳤다. 그 말에 나는 손뼉을 치면서 탄성을 질렀다. "아! 패밀리어!" "바로 그거야. 나는 머리가 나빠서 몸을 고생시키는 사람이 아니란 말씀이야." 로튼은 한 손을 허리에 얹고 으스댔다. 그 모습을 보며 당신은 몸을 좀 고생시켜야 한다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수제노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남모르게 로튼의 눈사람 같은 몸집을 내려다봤다. 그러나 로튼은 우리의 의미심장한 눈길을 느끼지 못했는지 여전히 살집이 많은 얼굴에 곡선을 그리며 웃고 있었다. 어찌됐든 브러버드의 본거지가 가장 궁금했던 나는 사소한 문제는 거론하지 않고 로튼에게 물었다. "그럼 브러버드의 본거지가 어디죠?" "비라이턴의 외각 지역이더군. 그냥 보기에는 평범한 음식점인데 피드라를 포함한 수상한 놈들이 그 곳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어. 그리고 남모르게 비밀 입구를 통해 지하로 내려가던걸." "브러버드가 얼마나 있는 줄은 알아요?" 그러자 로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확인한 바로는 적어도 30명 이상이야. 하지만 더 있을지도 모르지. 지하는 확인하지 못했거든. 어쩌면 피드라의 유일무이한 무기인 좀비들이 있을지도 몰라." 생각보다 인원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우리보다야 많지만 본거지치고는 너무 적다는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지하에 다른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전처럼 무수한 좀비들이 진을 치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좀비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겠군요." "그렇지. 그리고 우리만으로는 부족하니 수제노네 길드에서도 좀 도와줄 거야. 그렇지?" 로튼의 말에 수제노가 긍정하며 말했다. "길드에서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문제가 있습니다. 일단 우리들은 암살자들이다 보니 마음놓고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요즘 우리가 군대를 습격하는 바람에 수상한 자는 무조건 잡고 보는 추세라 위험하지요. 그리고 자칫 잘못하면 우리도 관군에게 잡힐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치 준비한 원고를 읽듯 여기까지 단숨에 말한 수제노는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가 브러버드의 본거지를 공격하면 신고를 받은 관군들이 몰려들 겁니다. 설령 그들을 납득시킨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에 브러버드들이 도망쳐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은밀히 공격해서 없애버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수제노의 말에 로튼은 그 문제는 생각해보지 못했는지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나는 그런 두 사람에게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내가 레이만 왕자에게 부탁한 부분이 바로 이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라면 염려하지 말아요. 내가 레이만 왕자에게 부탁했거든요. 내가 연락한 날에 일어나는 모든 소동은 눈 감아주기로 했거든요. 덤으로 병사들도 원하는 만큼 빌려준다고 했어요. 우리가 먼저 습격한 다음에 병사들이 출동하면 다른 사람들도 브러버드들을 붉은 뱀 정도로 생각할 걸요." "설마 레이만 왕자에게 그 자들이 브러버드란 말을 한 거야?" "아니. 그냥 날 습격한 자들이라고만 했어." "그럼 그 말만 했는데 도와주겠다고 했단 말이야? 보통은 말리거나 하지 않나?" 로튼의 말에 나는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다 내 능력이죠. 처음에는 말렸지만 내가 설득시켰어요." "우리야 좋긴 하지만 그 왕자도 좀 불쌍하군. 너한테 얽혀서 이런 일까지 신경 써야 되고. 한참 내전 중이라 골치 아플 텐데. 하여튼 너랑 연관이 되면 잘 되는 일이 없단 말이야." 수제노의 동정이 간다는 투의 말에 나는 발끈했다. 그러나 로튼이 절묘한 타이밍으로 끼어 드는 바람에 얼굴만 찡그렸다. 나와 연관이 돼서 잘 안 되는 일이 뭐가 있다는 거야? 수제노야 운이 나빠서 나를 습격했다 실패하고, 그 후에 나한테 협박받고, 우연찮게 브러버드와 마주친 것이지 그 것이 내 책임은 아니었다. 순전히 자기 운인 것이다. 제 4기사단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었다. 망나니 집단에서 엘리트 기사단으로 거듭하지 않았는가. 이번에 죽은 몇 명을 제외하면 운이 좋은 것이다. "자, 자. 지금은 우리끼리 눈싸움할 때가 아니잖아. 어떻게 브러버드를 일망타진할지 생각해보도록 하지. 일단 관병 문제는 마리엔 덕에 아무 문제없이 넘어갔으니 이제 어떤 식으로 습격할 지를 의논해보는 게 어때?" 로튼의 말에 나와 수제노도 투덜거리던 것을 그만두고 각자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서로가 그동안 이때를 위해 생각해왔을 여러 가지 의견들이 오갔다. 그 의견들은 서로 합쳐지고 수정되면서 점점 구체적인 방법이 손에 잡히기 시작했다. 우리의 회의는 그 날 밤 늦게까지 계속되었다. ---------------------------------------------------------------------- 어둠과 여명이 교차하는 새벽의 검푸름 속에서 그믐달 빛이 핏빛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늘을 뒤덮은 짚은 먹구름처럼 <새들의 둥지>라는 이름의 음식점을 덮은 어둠 밑으로 자욱한 안개가 피어올랐다. 자욱한 안개는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뱀처럼 건물을 휘감아 올라가고 있었다. 안개와 어둠이 소용돌이치는 물결 안에서 음식점은 낮과는 다른 기괴한 모습으로 태어났다. 마치 밤에 보는 나무는 빛이 있을 때와는 달리 괴물로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음식점은 입을 쩌억 벌리고 먹이를 기다리고 있는 짐승 같기도 했고, 몸을 잔뜩 오그린 갑충 같기도 했다. 그리고 벌레의 딱딱한 껍질 같은 건물의 외피는 새벽 안개에 흠뻑 젖어있었다. 물기는 모이고 모여 마침내 하나의 물방울이 되어 스르르 흘러내렸다. 마치 건물이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음식점에서 약하게 새어나오는 불빛은 안개를 뚫지 못하고 주변밖에 비추지 못하고 있었다. 안개는 소리 또한 완벽하게 가둬버려 일대는 고요함만이 존재했다. 간간이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정적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러나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고요는 말발굽이 땅을 짓밟고 수레바퀴가 땅을 부수는 소리에 의해 깨졌다. 어둠 속에서 하나의 짐마차가 움직이고 있었다. 짐칸을 보호하기 위해 지붕을 이루고 있는 풀 먹은 빳빳한 가죽 천의 양쪽 옆구리에는 큰 글자로 '비라이턴 상회' 라고 씌어 있었다. 마차의 마부석에 탄 사람들은 새벽바람이 추운지 잔뜩 몸을 웅크리고 부르르 떨고 있었다. 언뜻 보이는 수레 안으로는 상자가 가득 들어있었다. 아마도 그 것들 때문에 이들은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이 곳에 옹기종기 앉아있는 듯 했다. 어둠에 가려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들은 서로 몸을 밀착시키며 칼날 같은 바람을 조금이라도 피하려고 애썼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입김은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보였다. "이제 완전히 겨울이군." 그 중에 한 사람이 추위를 잊기 위해서인지 입을 열었다. 그와 함께 수증기처럼 보이는 입김의 양이 많아졌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손을 호호 불면서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그래도 여긴 너무 추워. 이 곳 지부 녀석들은 뭘 하고 있었기에 우리까지 이 곳에 오게 만든 거야?" 그의 목소리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는지 목소리가 약간 갈라져 나왔다.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은 그는 다시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비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매우 작았다. "그렇다고 이 일을 하지 않자니 먹고 살 일이 걱정이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지, 별 수 있겠어?" 그의 말에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사람의 인형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추워서 딱딱 부딪치는 이 소리나 손을 비비는 소리는 들려오지만 더 이상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이윽고 짐마차는 <새들의 둥지>라는 음식점에서 멈춰 섰다.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니 깨어있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가볍게 마차에서 내린 사람 중 한 명이 음식점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십니까?" 노크소리가 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 안에서 약간 앳되게 들리는 청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비라이턴 상회입니다." 문을 두드린 사람이 말하자 곧 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이 열리자 흐릿하게 보였던 불빛이 갑자기 환해져 마차를 타고 온 사람들은 잠시 눈을 깜빡거려야만 했다. 그들 앞에 나타난 사람은 갓 성인식을 치른 것 같은 청년이었다. 청년은 갑자기 나타난 자들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날카로움이 서려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늦게 오셔서 안 오시나 했습니다." "설마 그럴 리 가요. 저희 비라이턴 상회는 고객 분을 위해서라면 폭우가 쏟아져도, 태풍이 닥쳐와도, 폭설이 불어도 굴하지 않고 운송을 합니다. 게다가 이런 음식점 같은 곳은 하루라도 늦으면 가게에 엄청난 적자를 가져다주므로 항상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상대가 열성적으로 상회 선전을 하자 청년은 잠시 다른 곳을 보았다. 그러나 말이 끝나자 눈치채지 못하게 다시 앞을 보았다. 그런 청년의 외도(?)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상대는 만족스런 얼굴이었다. "정말 좋은 상회군요." 청년이 예의상 칭찬을 하자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 비라이턴에서 제일가는 상회는 바로 이 비라이턴 상회입니다. 요즘 페디어 상회라는 곳이 조금 이름을 떨치고 있지만 오랜 전통과 수많은 실적을 자랑하는 저희 상회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 <새들의 둥지>도 저희 상회의 단골이 되시면 어떻겠습니까?" 청년은 얼마 후에 있을 행사를 대비해 익숙지 않은 비라이턴 상회를 이용한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겉모습만은 예의바른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다행히 청년의 걱정과는 달리 비라이턴 상회의 사람들은 더 이상 상회의 자랑을 늘어놓지 않고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큰 나무 상자를 두세 명이 달려들어 옮기는 사람들 앞에 청년이 앞장섰다. "가게와 연결돼 있는 창고에 저장하려고 합니다. 따라와 주십시오." 창고는 가게의 뒤편과 바로 연결된 큰 방이었다. 자물쇠가 달려있긴 하지만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는지 녹이 슬어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가게와는 달리 쌀랑한 바람이 돌았다. 그 것을 감지한 상회 사람들의 눈이 번쩍였다. 청년은 이들이 이 곳에 냉각 마법이 걸린 것을 눈치챘다는 것을 알고 난감했다. 음식점 중에 냉각 마법이 걸린 창고를 이용하는 곳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냉각 마법을 사용하는 음식점은 상당히 돈을 잘 버는 가게였다. 그런 음식점을 상회에서 놓칠 리가 없었다. 역시나 상회 사람 중 한 명이 웃으며 말했다. "넓군요. 게다가 냉각 마법까지. 보기에는 그렇게 큰 가게로 보이지 않는데 매상이 상당한가 보군요." "아닙니다. 단지 아는 분들이 많이 찾아와서 그렇습니다." "오호, 단골까지." 상회 사람들의 눈에 이채가 일었다. "한 얼마 정도 됩니까? 주문하신 양만 봐도 상당하겠군요." "글쎄요. 한 50명 정도?" 청년이 잠시 생각했다 확실치 않다는 듯이 말했지만 상회 사람들은 그것만으로 충분한지 굉장히 만족해했다. 짐을 옮기면서도 그들의 눈은 가게를 샅샅이 살펴보기에 바빴다. 먹이를 노리는 짐승의 눈이 이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청년의 머리를 스쳐갔다. 짐이 워낙 부피가 크고 많다보니 옮기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동안 상회 사람들은 청년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거나 가게를 음흉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마침내 마지막 큰 상자까지 옮기는 것이 끝난 상회 사람들은 손을 탁탁 털며 청년에게 씨익 웃어주었다. 청년은 어설픈 웃음으로 그들에게 화답해주었다. 상회 사람 중 가장 나이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 허리춤에 달린 종이에 <새들의 둥지>라는 이름에 붉은 색으로 체크를 하는 것을 청년은 슬쩍 본 것 같았다. "돈은 선불로 지불하셨습니다. 내용물은 돼지고기, 양고기를 비롯한 각종 식료품입니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잠깐..." "그럼 확인합시다!" 내용물을 확인하겠다고 말하려던 청년은 상회 사람이 큰 소리로 외치자 하던 말을 꿀꺽 삼켰다. 상회 사람들은 각자 상자 하나씩에 달라붙어 뚜껑을 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약간의 긴장감만이 감돌면서 청년의 눈치를 살짝 살피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이 양고기는! 바로 어제 들어온 신상품입니다." "좋군요." "그럼 이 돼지고기는 어떻습니까? 맛있다고 소문이 자자한 세돈에서 난 겁니다." "훌륭합니다." "그렇지요! 이 사과도 끝내줍니다. 저희들이 이걸 구하기 위해 다른 나라까지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는 것 아닙니까? 한 번 먹어보시겠습니까?" "됐습니다." "그럼 이 건 어떻습니까? 괜찮지 않습니까? 저희 상회라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괜찮은 상회입니다. 아무쪼록 애용해주십시오." 청년은 20개의 상자 중 막 11개째 상자를 열어 보여주려는 상회 사람을 만류했다. 이들의 상회애(商會愛)에는 찬탄을 금할 수 없었지만 그 때마다 쏟아지는 단골이 되라는 말은 질릴 지경이었다. 그는 위에서 상회의 자랑을 따로 외우게 하고 다니지 않는지 의심이 갔다. "이제 그만 됐습니다. 내용도 훌륭한 것 같고. 그러니 그만 확인합시다." "아직 더 남았는데..." 상회 사람 중 한 명이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상자에 가있던 손을 뗐다. 청년은 재빨리 이 열성적인 상회 사람들을 이끌고 가게로 나왔다. 상회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단골이 되라는 말을 하며 마차에 올라탔다. 짐이 사라진 마차는 올 때와는 달리 빠른 속도로 아직 어둠이 쌓여있는 거리로 사라졌다. #33- 브러버드 2 #33- 브러버드 2 푸른 새벽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마차의 뒤를 따라 눈길을 돌리던 나는 이윽고 마차가 어둠 속에 파묻히자 음식점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불투명한 담요에 덮인 것처럼 희미한 불빛만이 흘러나오는 음식점에서는 한참을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잠시 더 기다려본 나는 몇 분이 지나도 고요를 깨트리는 것이 없자 수제노와 로튼을 돌아보았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본 우리는 거의 동시에 씨익 웃었다. 드디어 목표에 도착한 것이다. 차가운 겨울 바람이 몸을 움츠리게 했지만 지금은 흥분과 긴장으로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구부려졌던 등도 일자로 펴졌다. 우리들은 <새들의 둥지>라는 이름의 음식점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2층 건물 위에 정찰을 하는 까마귀처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대로 밤을 지샐 모양인지 음식점에서는 불이 꺼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건물 안의 동태를 살피던 나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매서운 겨울 추위가 절로 몸을 떨게 하는 새벽인데도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벽에 기대서 노상방뇨 하는 사람, 술에 취해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사람, 거적을 뒤집어쓴 부랑자, 이른 새벽부터 돈을 벌기 위해 짓누르는 잠을 억지로 쫓아내는 사람, 때늦은 영업에 나선 밤의 여인.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날씨를 생각한다면 꽤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잠시 그들을 내려다보던 나는 무거운 안개를 뚫고 날아오는 그 것의 작은 소리가 들리자 눈길을 수제노에게 보냈다. 수제노는 재빨리 화살을 받아 그 곳에 묶인 종이를 풀어서 읽고 내려가고 있었다. 나도 수제노 곁으로 다가갔지만 어둠 때문에 글씨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우리들은 재빨리 지붕에 엎드려 천으로 덮어놓은 등불을 살짝 비춰 짧은 메모를 읽었다. 간간이 <새들의 둥지> 주위를 순찰하듯이 돌고 있는 사람들은 이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우리와 거의 비슷한 상황에 있을 것이다. 수제노는 우리들이 모두 메모를 읽자 등불 덮개를 벗겨 흔들거리는 불에 종이를 가져가 댔다. 종이가 타면서 한순간 밝은 빛이 생겼지만 검은 천으로 가리고 있어 새어나가지는 않았다.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곧이어 대기 중으로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붉은 그믐달이 아름다운 빛을 검은 밤하늘에 퍼트리고 있었다. 나는 그 달을 망막에 새기려는 것처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조금씩 달의 위치가 변하고 있었다. 서서히 움직이는 달이 우리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한동안 달을 지켜보던 나는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멀리 보이는 1층 건물을 향해 섰다. "어둠 속에 잠든 정이여, 깊은 잠에서 눈을 뜨고 지독한 고독의 사슬을 끓고 기어 나와라. 여기 너의 친구들이 있으니 그들과 함께 죽음의 춤을 추어라. 나의 적은 너의 적, 나의 적은 너의 친구. 위선된 영혼을 지금 이 자리에서 공허한 어둠으로 정화시켜라. 엑스위니션." 주문을 외우는 동안 그나마 조금씩 불어오던 바람이 멈췄다. 사방은 고요했다. 그러나 안개에 소리가 막힌 것과는 다른 고요함이었다. 마치 세상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지독한 고요와 침묵이었다. 그리고 그 것은 나를 중심으로 깨졌다. 쉬이이이. 갈라진 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의 소리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번져갔다. 그러나 그 소리는 우리 주위만 맴돌아 다른 사람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 곳까지 깔렸던 안개는 바람에 휘말려 깨끗이 사라졌다. 손을 타고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느낌이 전해졌다. 팔을 감싸듯이 휘감은 그 것은 손으로 모여 검은 구로 형성되었다. 그 구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자기들끼리 충돌하기도 하고 빙그르르 원을 그리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아래로 보이는 음식점을 가리키자 검은 구들은 분주히 오가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 해파리처럼 후물거리며 안개를 타고 움직였다. 검은 구들은 어둠에 동화되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지 못하겠지만 처음부터 그 것들을 따라 눈을 움직인 우리들은 알 수 있었다. 검은 구들은 건물의 벽에 닿자 마치 연기처럼 아주 작은 틈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창틀이나 문틈과 같은 아주 작은 사이로도 충분했다. 검은 구들은 인간의 냄새를 맡으며 이 곳 저곳 스며든 것이다. 마침내 검은 구가 보이지 않게 되자 로튼이 목소리를 잔뜩 낮춰 물었다. "저게 뭐지?" 로튼은, 아니 인간은 모르는 흑마법 중에 하나였다. 로튼의 질문에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별 건 아니고 정신을 파고드는 거예요. 외상은 없지만 정신을 파괴해 죽일 수가 있죠. 하지만 이 마법은 여러 가지 조건이 따라줘야 하는 거라 평소에는 실효성이 떨어져요. 하지만 오늘 같은 날에는 아주 편리한 마법이지요. 무엇보다 좋은 건 소리소문 없이 죽일 수 있다는 거죠." "그럼 우리 편은?" 수제노가 걱정스런 눈으로 구가 사라진 곳을 보자 나는 걱정 말라는 식으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괜찮아요. 여러 가지 조건이 따른다고 했죠? 그 첫째가 그믐달이 뜨는 밤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상대가 무방비 상태라야 한다는 거죠. 잠든 자들이나 좀비같이 의식이 없는 존재에게는 효과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리고 세 번째는 마법사에게는 효과가 없다는 거예요. 이유는 마법사들이 보통 사람들보다 정신력이 강해서죠." "하지만 좀비는 원래 정신이 없잖아?" 로튼이 의문을 제기하자 나는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건 좀 설명하기가 복잡한데. 간단히 말하면 몸이 아닌 내부에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고나 할까요? 마법적인 힘도 예외는 아니죠. 대강 그런 원리지만 지금 설명하기는 시간이 없네요." 달이 이미 약속한 시간대로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다음에 자세히 설명하겠다고 말한 후에 창을 손에 쥐었다. 수제노도 리쇼르를 점검했고, 로튼은 준비해왔던 스크롤을 펴보고 있었다. 마침내 달이라는 시침이 움직였다. 붉은 시침이 약속한 때를 가리켰을 때 우리는 움직였다. 땅으로 가볍게 뛰어내린 우리는 그대로 안개에 휩싸인 가게를 향해 돌진했다. 어둠 속에서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몇몇의 그림자들이 보였다. 그들은 <새들의 둥지> 주위를 돌던 인형에게 소리 없이 접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형들이 땅으로 풀썩 쓰러졌다. 힐끗 그 모습을 본 나는 가게의 문 옆에 바짝 붙었다. 반대편에는 수제노가 있었다. 수제노는 손가락을 하나씩 펴 보였고, 나는 그녀의 가는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세 개째 손가락이 펴졌을 때 나와 수제노는 동시에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카운터에 앉아 있던 청년은 우리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소리치기 위해 벌린 입은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한 채 스르르 닫혔다. 수제노가 던진 단검이 청년의 목에 정확하게 명중했던 것이다. 가게 안에 있던 다른 세 사람도 놀라서 재빨리 일어섰지만 채 검을 꺼내지도 전에 한 명은 내가 던진 단검에 의해 쓰러졌다. "네 놈들은 누구냐?!" "젠장! 습격이다!" 남은 두 사람이 소리치면서 달려들었지만 단단히 준비를 해온 우리와 엉겁결에 공격하는 그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창으로 가볍게 심장을 찔러 한 명을 다가오기도 전에 쓰러뜨리자 남은 한 명이 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검은 수제노의 리쇼르에 의해 막혔다. 그리고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창을 찔렀다. 간단히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을 없애자 문이 열리면서 검은 옷을 입은 10명의 사람과 로튼이 들어왔다. "바깥에 있는 놈들은 처리했습니다." 복면을 한 사람 중 한 명이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이 쪽도 가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없앴어. 하지만 이 놈들이 소리를 치는 바람에 곧 몰려들 거야." 내 말과 함께 몸을 부르르 떨면서 나타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추운지 몸을 비비면서 가게 뒤편에서 걸어나왔다. "이 추운 날에 냉장 창고에 있었더니 아주 죽겠습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땡땡 얼어버릴 뻔 했습니다요." "추웁다. 추워. 한바탕 몸을 움직여서 몸을 녹이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그들이 과장되게 투덜대자 나에게 보고한 사람이 그들의 상관인지 입을 열었다. "모두 수고했다. 창고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확실히 처치했겠지?" "물론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지하에 숨어있는 자들뿐이었다. 아까 보고에 따르면 약 50명 정도의 인원이 이 곳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가게에 있던 네 명과, 바깥에서 순찰을 돌던 다섯 명, 창고 근처에 있던 세 사람까지 합해서 12명을 해치웠다. 남은 인원은 38명 정도다. 그 중에서 잠을 자고 있던 자는 지금쯤 빈 껍데기만 남았을 것이다. 지금 우리들은 나까지 포함해 모두 23명이니 해볼 만 했다. 우리들이 단단히 준비하고 있는 사이 창고와 이어지는 곳의 반대편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습격 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나타난 것을 보니 평소에 훈련이 잘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대략 20명 정도로 보였지만 지하에 얼마나 남아있는 지는 몰랐다. 그 중에서 삼십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누구냐?" "너희들이 찾던 사람." 내 말에 브러버드 사이에서 아주 작은 동요가 일어났지만 그렇다고 경계가 느슨해진 것은 아니었다. 이 정도는 돼야 내가 기대했던 브러버드라고 할 수 있겠지. 나는 비웃음과 만족이 섞인 묘한 미소를 지었다. "마리엔 공주냐?" "정답. 너희들을 위해 특별히 원래 모습으로 왔는데 못 알아보면 섭하지. 그런데 의외로 일찍 일어나는군. 아니면 밤을 새운 건가? 이 정도나 살아있을 줄은 몰랐는걸." "뭐라? 그럼 죽은 자들이 네 년 짓이란 말이냐?" 우두머리로 보이는 브러버드가 이를 갈며 소리치자 나는 코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렇다면 어쩔 거지? 그리고 네 년이라니? 말버릇이 고약하군. 못된 애들은 혼이 나야 정신을 차리는 법이지." 그 말과 함께 대치하고 있던 우리와 브러버드들이 서로를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가운데에서 격돌한 우리들은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가게는 꽤나 넓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싸우기에는 좁았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무려 40명이나 되는 대인원이 싸우니 처음이 승패를 좌우했다. 창을 사용하는 나는 근접전이 불리했다. 그래서 접전이 벌어지는 곳에서 약간 떨어져 싸웠다. 내가 배를 향해 빠르게 창을 내지르자 브러버드 중 한 명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 걸 기다리고 있었던 나는 창을 다시 회수해 다른 손으로 창대의 중간을 잡고 남은 팔은 창대에 바짝 붙인 채 힘껏 질렀다. 상대는 처음에는 간신히 몸을 틀어 피했지만 다음 번 공격은 피하지 못했다. 그 브러버드는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쓰러졌다. 한 명을 처리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수가 엇비슷해 대부분 한 명씩 상대하고 있었다. 그 틈에 끼어 서로 검을 마주하고 있는 브러버드들에게 창을 박아주었다. 다음 목표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피드라가 보이지 않는 사실을 알았다. 아직 지하에서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수제노, 지하로 내려가겠어!" "나도 간다." "그럼 나도 같이 가지!" 나와 수제노, 로튼은 앞을 가로막는 브러버드들을 찌르고 베고 피하면서 비밀 입구를 향해 뛰었다. 비록 죽이지는 못했지만 남은 사람들이 알아서 처리해줄 것으로 믿고 지하로 발을 내딛었다. 비밀 입구는 마법으로 위장되어 있었지만 이미 로튼이 확인한 적이 있어 아무 문제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처음 지하에 발을 내딛자 나타난 것은 넓은 거실이었다. 계단이 왼쪽에 위치한 거실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양탄자가 깔려있었고, 여러 개의 식탁과 의자들이 놓여있었다. 가장자리에 금박이 입혀진 벽지가 지하와는 어울리지 않는 밝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브러버드의 상징이 수놓아진 커다란 천이 벽면을 하나 가득 차지하고 있었다. 다른 벽에는 마법등이 박혀있어 이 공간을 대낮처럼 밝히고 있었다. 지하라기보다는 부잣집 거실에 들어온 것처럼 아늑하고 깨끗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거실은 하나의 넓은 복도와 연결이 돼있었다. 그 복도의 양옆에는 여러 개의 방문이 닫힌 채 안의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어디에서 숨어있는 자들이 튀어나올지 몰라 주변을 경계하며 걸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막 스쳐지나가던 방문이 확 열렸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하나의 인형이 튀어나왔다. 언제나 피할 수 있도록 몸을 긴장시키고 있던 우리는 재빨리 흩어졌다. 그리고 로튼을 제외한 나와 수제노는 상대의 검을 피하면서 신속하게 다가갔다. 수제노는 허리를 낮춰서, 나는 몸을 옆으로 비켜서 연이은 공격을 피한 후 팔을 움직였다. 손쉽게 이겼다고 생각했던 나는 반대쪽 문이 열리면서 다섯 사람이 튀어나오자 황급히 물러났다. 방금 처리한 시체를 가운데 두고 나와 수제노는 긴장하면서 전방을 주시했다. 다섯 명이 우리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상대를 살피며 살짝 곁눈질하니 다행히 로튼은 다른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 뒤였다. 사실 로튼이 있으면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 건 물론 인질로 잡힐 가능성도 있어 내심 걱정했는데 알아서 피해서 다행이었다. 로튼의 행동을 비겁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나는 무척이나 현명하고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웬 년들이냐?!" 브러버드 중 긴 얼굴을 가진 사나이가 목에 핏줄을 세우고 소리쳤다. 그러나 나와 수제노는 대꾸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발을 내딛었다. 내 창은 그 자의 머리를 노리고 뱀처럼 쭉 뻗어갔고, 수제노의 단검은 심장을 노리고 날아갔다. "으헉." 단검을 옆에 있던 사람이 쳐내고 내 창을 허리를 젖혀 피한 사나이는 기겁해서 비명 비슷한 소리를 냈다. 다시 몸을 꼿꼿이 세운 그의 이마에는 길게 일직선으로 상처가 나있었다. 살이 갈라진 곳에서는 조금 시간이 지나자 피가 흘러나왔다. 그 자는 소매로 피를 쓰윽 닦아낸 다음 으르렁거렸다. "감히 우리가 누구인 줄 알고! 죽여버리겠다." "웃기는군. 죽을 사람은 바로 너희들이다." 이럴 때면 항상 내가 나섰는데 드물게 수제노가 나섰다. 수제노가 티는 내지 않았지만 동료들을 잃어 나 못지 않게 이들에게 원한이 깊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서로 말이 필요 없음을 느꼈다. 원하는 것은 서로의 목숨. 남은 것은 누가 살아남을지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하던 우리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움직였다. 창을 크게 휘두른 나는 상대가 몸을 숙여 피하는 것을 보고 뛰어오던 기세 그대로 뛰어들었다. 몸을 숙인 자의 어깨를 밟고 올라선 나는 뒤쪽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창을 내질렀다. 그 자는 갑자기 앞이 뻥 뚫린 데다 창이 다가오자 검을 휘둘렀다. 마구잡이로 휘두른 검은 운 좋게도 창을 쳐냈다. 아주 쳐낸 것은 아니었지만 균형이 흔들려 공격이 빗나가버렸다. 나는 스치기만 한 창을 거두어들이고 밟고 있던 상대의 몸에서 뛰어내렸다. 그 것과 동시에 옆에서 갑자기 다른 브러버드가 검을 휘두르며 튀어나왔다. 나는 칫소리를 내며 창대를 세로로 세워 그 것을 막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나에게 밟혔던 자가 허리를 노리고 들어왔다. 미끄러지듯이 옆으로 피했지만 이번에는 개구리처럼 엎드려있던 자가 달려들었다. 적만 아니라면 칭찬해줄 정도로 서로간의 연계가 훌륭했다. 상대에게 합동 공격을 당했을 때의 철칙은 가장 약한 놈만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쓰러뜨리는 것이다. 세 사람에게 둘러싸인 나는 처음에 날 공격했던 자만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남은 두 사람의 공격은 대부분 그냥 놔둬서 여기저기 상처가 늘어났지만 급소만은 철저히 보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보람은 있어 공격받고 있는 브러버드의 호흡을 뺐을 수 있었다. 그 자도 가끔 공격해오기는 했지만 오히려 내게 반격의 기회만 만들어줄 뿐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 자의 몸에도 작은 상처가 곳곳에 늘어났다. 하지만 아무리 급소는 보호하고 있다지만 나머지 상처들이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위험했다. 나는 결정타를 먹이기 위해 어지럽게 쏟아지는 검들을 피하거나 막으면서 조용히 기다렸다. 상대는 갑자기 내 공세가 누그러지자 한 시름 놓은 기색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호되게 당한 것 때문인지 남은 두 사람을 믿는 것인지 아니면 둘 다 인지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물러나면서 본능적으로 살짝 눈을 돌려 뒤에 장애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피고 있었다. 그걸 놓치지 않은 나는 고개를 젖혀 검을 피하면서 창을 쭉 뻗었다. 살짝 스쳤는지 볼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창은 일순간 길이가 길어진 것처럼 여전히 뻗어나갔다. 상대는 위험을 감지하고 반사적으로 앞으로 눈을 돌렸지만 그 때는 이미 창날이 왼쪽 가슴에 박힌 뒤였다. 역시 단번에 죽이려면 심장이나 목, 머리를 노리는 것이 제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상대가 죽었는지 어땠는지를 확인할 사이도 없이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 원래 내 머리가 있었을 자리로 부웅, 하고 무언가가 휘둘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사이에 일어난 바람이 머리를 흩트려 놓았다. 브러버드들의 다리와 함께 한 명이 쓰러지면서 생긴 빈 공간이 보였다. 나는 그 곳으로 몸을 굴려 포위망에서 빠져나왔다. 시체에 걸려 몸을 멈춘 나는 살짝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바닥에는 절명했는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인간의 빈 껍데기가 보였다. 천장을 보고 있는 갈색 눈이 초점이 맞춰져있지 않아 이상했다. "감히 하난을! 용서하지 않겠다!" 내가 싸우는데 시체가 걸리는 것 같아 발로 옆으로 밀어내자 한 남자가 이를 뿌드득 갈며 소리쳤다. 자기 동료가 죽는 것에는 분노할 줄 알면서 어째서 자신들에게 당한 자들의 친구가 분노한다는 것은 모르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이기적인 인간들. 자신들만 화가 나는 것이 아니다. 동료들을 잃으면 말이다. 처음에는 이기적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감정은 점점 분노로 변해갔다. 마른 풀밭에 떨어진 작은 불씨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불의 물결로 번져가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들을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몸이 찌릿찌릿했다. 쓰레기 같은 것들. 벌레만도 못해. 너희 친구만 죽은 게 아니란 말이다. 절로 이가 갈렸다. 내가 살기를 한가득 담고 응시하자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던 사람들이 주춤거렸다. "죽여버리겠어." 왠지 이 말을 하지 않으면 못 배길 것 같아 결국에는 입 밖에 내놓았다. 가슴에 품은 생각을 말로 하면 진정이 되기 마련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활활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부어버린 것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화산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것처럼 분노와 증오가 확 올라왔다. 방금 전 브러버드 중 한 명이 동료의 죽음에 화내는 것을 보고 묻어놨던 감정이 분출한 것일지도 모른다. 너만 화가 나는 게 아니다! 너만 슬픈 게 아니다! 몸을 감싼 기운이 점점 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상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이익, 누가 질 줄 아느냐!" "죽어버려라! 이 마녀야!" 상대가 발악하듯이 달려들었다. 그들이 아주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무표정하게 그 모습을 보다 옆으로 비켜섰다. 그리고 거의 동시라고 할 수 있는 때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자를 향해 창을 휘둘렀다. 내 창이 다른 창과 다른 점은 날이 길어 베기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악!" 몸과 떨어져 공중으로 떠올랐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팔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꿈틀거리며 움직일 것 같은 팔과 허공으로 튀는 핏방울이 망막에 아로새겨졌다. 팔이 잘린 브러버드는 고통스러운지 잘려나간 부분을 손으로 감싸쥐며 비명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의외로 인간의 몸이라는 건 쉽게 떨어져나가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뒹굴고 있는 팔을 쳐다보던 나는 갑자기 분해되다시피 해서 숲에 버려졌던 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은 팔만 떨어진 것이 아닌데 겨우 이 정도로 엄살을 부리다니.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야? 아픈 거야? 그들은 웃고 있었는데 넌 인상을 쓰는 거야? 너도 팔 다리 모두 떨어져 나가면 웃을 거야?" "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상대가 고통을 참고 입을 열었다. 무의식적으로 시간을 벌려는 것이다. 그래. 조금이라도 살고 싶겠지. 그렇겠지. 누구나 살고 싶어한다. 누구나. "너 따위가 알 필요 없어." 냉소를 머금은 나는 한 걸음 다가섰다. --------------------------------------------------------- 요새 설문조사가 불이 붙었더군요 ^-^; 레이만 왕자의 인기 급상승에 저도 놀랐습니다. 단 2번 출현에 그정도라니;; 그래서 얼마 후에 재설문 조사를 할 생각입니다. 그런데 전에 했던 설문 조사를 마감할 수도 있나요? 어떤 분이 마감하는게 어떠냐고 하시는데 마감법을 몰라서요;; 아시는 분이 계시면 말 좀 해주세요 ^-^ #33- 브러버드 2 분노란 싸움 중에는 자제해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분노가 숨겨진 힘을 이끌어내 주긴 하지만 그 대신 냉철한 이성을 빼앗아간다. 그렇게 되면 막무가내 공격 밖에 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싸우는 중에는 최대한 감정을 죽여왔다. 그런데 의외로 감정이란 기폭제의 도움을 받아 싸우는 것도 재미있었다. 상대의 공포에 질린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냉정하게 생각해서 싸우면 상대를 단숨에 쓰러뜨린다. 언제 상대방이 의외의 반격을 해서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것도 전의가 꺾이지 않은 상대에게만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 살려줘." "아직 팔이 하나 남았잖아. 목도 남았고." 나는 빙글거리며 바닥을 기어가는 상대를 쫓아갔다. 천천히, 천천히. 물이 고여있을 리가 없건만 내딛는 발걸음에 질퍽거리는 액체가 밟혔다. 액체는 점액질인지 발을 뗄 때마다 약간씩 끈적거렸다. 붉은 색의 액체는 예쁜 빛을 발하며 웅덩이처럼 고여있었다. 이미 다른 한 명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부릅뜬 눈에는 분노도 증오도 아닌 공포가 담겨있었다. 인간은 정말 약하다. 아무리 의지가 강한 자라도 몸을 잘라 내주는 것만으로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냥 죽이면 당당히 죽는 녀석들도 눈앞에서 토막내주면 울고 불고 애원한다. 하긴 죽음보다는 고통이 더 참기 힘든 것이라고들 하니까. 약한 고통이라면 그렇지 않겠지만 자기 눈으로 자기 몸이 토막 나는 것을 보는 것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상당히 고통스러운가 보다. 단 한 명 살아남은 브러버드가 남은 팔로 힘겹게 기어가는 바닥 위로는 핏줄기가 하나의 길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융단처럼 깔리는 그 붉은 길을 밟으면서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브러버드가 부들부들 떨었다. 대륙적으로 유명한 살인마라고 해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아니, 죽음으로 가는 과정 중에 겪는 고통이 두려운 건가? 죽으면서 웃는다는 것은 역시 말이 안 되는 것이었나 보다. 이미 한 명에게 실험해본 결과 팔다리를 토막내주면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았는데. 이 사람은 어떨까? 지금 하는 꼴을 보면 웃지는 않을 것 같지만. "제발 살려줘." "위대하신 브러버드께서 목숨을 구걸해서야 쓰겠어? 당당히 죽어야지. 하지만 나도 인정이 있으니 최대한 늦게 죽여줄게." 말을 마친 나는 창을 든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으아아악!" 아직 찌르지도 않았건만 비명이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시끄럽다는 생각을 하며 팔을 내리려던 나는 멈칫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단검이 그 자의 정수리에 가서 박힌 것이다. 그나마 팔로 상체를 세우고 있던 브러버드가 축 늘어져서 뒤로 넘어갔다. 나는 도끼눈을 하고 단검이 날아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짓이야?" "너야말로 뭐 하는 짓이냐?" 수제노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뭘 하긴? 토막내고 있잖아. 내 먹이를 중간에서 가로채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죽이려면 그냥 죽이면 되잖아. 굳이 가지고 놀지 않아도 됐을 텐데." "흥, 암살자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내가 비꼬자 수제노는 이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얼굴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나는 눈을 치켜 뜨고 수제노를 노려보았다. 브러버드들이 죽어버린 지금 정적만이 감돌았다. 잠시 후 수제노를 째려보던 나는 등을 돌리고 투덜거렸다. "쳇, 할 수 없지. 죽어버린 놈 가지고 같은 편이랑 싸우고 싶지는 않으니까." 내가 한 발 물러서자 수제노도 더 이상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나는 괜히 시체를 발로 툭툭 차다가 창으로 눈길을 주었다. 시간을 끄는 바람에 피가 엉겨있었다. 아직은 굳지 않았지만 조금만 지나면 굳을 것 같았다. 나는 허리를 굽혀 죽어버린 자의 옷에다 대고 창을 쓱쓱 문질렀다. 창을 닦고 있는데 방문이 달칵,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보니 방문이 열리며 로튼이 걸어나왔다. 로튼은 피로 물든 복도를 보고 여자의 속옷을 훔쳐본 남자처럼 휘파람을 불렀다. "휘익, 이거 거하게도 싸웠군. 역시 내 도움이 없어도 잘 싸우는구만. 혹시 내가 숨어서 서운한 건 아니겠지?" "로튼 씨는 별로 도움도 안되니 숨어있는 게 도와주는 겁니다." 수제노의 냉정한 말에 로튼은 기가 죽기는 커녕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머리를 잘 쓰는 사람은 육체 노동에는 약한 법이거든." 로튼의 능청맞은 말에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수제노도 그를 보았다. 로튼이라면 충분히 우리들의 시선에 담긴 뜻을 이해할 수 있을텐데도 여전히 태연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못 말리는 인간이다. 그 자리에서 다친 곳을 치료한 우리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피드라를 찾지 못한데다 혹시 비밀 탈출구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나중에는 거의 뛰다시피 하며 이 방 저 방을 들여다보았다. 방문을 열었다 닫는 소리와 가벼운 발걸음 소리,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한 방만이 남게 되었다. 그냥 보기에는 지금까지 지나쳐온 방과 별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나는 수제노와 로튼이 벽에 바짝 붙는 것을 보고 문을 발로 힘껏 차서 연 후에 재빨리 벽 뒤로 숨었다. 혹시 있을지 모를 기습 공격에 대비한 것이다. 그러나 계속 기다려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 고개를 빼고 방을 들여다보았다. 다른 방의 두 배 정도는 되어 보이는 방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다급하게 종이뭉치들을 태우고 있었고, 다른 사람은 문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걸 본 우리들은 신속하게 뛰어들었다. 나는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피드라에게, 수제노는 다른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나는 재빨리 몸을 옆으로 날렸다. 피드라가 가볍게 손을 까딱이자 얼음 창들이 앞을 가득 메우며 날아왔기 때문이다. 조금만 늦었어도 꼬치 신세가 됐을지도 모른다. 아슬아슬하게 얼음 창들을 피한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수제노는 그 사이 종이를 태우고 있던 사람을 제압해서 불붙은 종이를 발로 끄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없애려는 것을 보면 중요한 서류인 모양이었다. 양이 많았는지 타다만 종이부스러기가 바닥을 뒹굴었고, 방에는 탄 냄새가 가득했다. "용케도 여기까지 왔구나. 흐흐흐." 피드라는 자신의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음침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본 나도 지지 않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잘 찾아왔지. 그나저나 습격 법칙을 알아내느라 고생이 많았겠어." "설마 네 놈들이 붉은 뱀이었냐?" "물론. 널 끌어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 나와 피드라는 조용히 서로를 노려보았다.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이 이 때를 위한 것이었다. 얼마나 이 때를 기다려왔던가? 줄곧 내 머리 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생각이 현실로 다가왔다. 그 때가 되면 어떻게 할까 생각하며 즐거워했던 일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 시우리스 숲에 놔뒀던 선물들은 잘 받았나?" 피드라가 광기에 젖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잘 받았지. 아주 멋진 선물이었어. 보답을 해주려고 여기까지 왔지. 사양은 하지마." "선물이라면 네 목이면 된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목을 가지고 싶구나. 히히히." 나는 피드라의 말에 피식 웃었다. 허세인지 아니면 완전히 미쳐서 상황 판단이 되지 않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미 도망칠 곳은 없었다. 조금 전의 여흥으로 인해 달아오른 몸이 근질거렸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리고 절로 웃음이 나왔다. 흥분과 긴장이 적절히 교차하는 정말로 기분 좋은 상황이었다. 어떻게 해줘야 좋을까, 하는 생각이 하니 정말 행복해서 견딜 수 없었다. 드디어 복수의 때가 온 것이다. 그런데 내가 나서기도 전에 로튼이 옆으로 다가와 피드라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야." "네 놈도 왔었더냐?" 피드라가 눈을 번뜩이며 물었지만 로튼은 여전히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이래봬도 스승인데 네 놈이라니? 하긴 너도 많이 늙었으니 상관은 없다만. 이봐, 이쯤에서 그만 두는 게 어때? 내가 장담하건 데 더 이상 덤비면 너는 분명히 죽는다. 하지만 물러난다면 목숨은 살려주마. 대신 앞으로 왕족을 노린다고 설치고 다니지 마라. 너 때문에 괜히 애꿎은 우리들에게 불똥이 튈 지도 모르니까." "로튼!" 나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로튼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러나 로튼은 요동도 하지 않은 채 오직 피드라만을 보고 있었다. 피드라도 뜻밖의 제안인지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나 곧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절이다, 히히히. 너희는 친구의 살을 먹어본 적이 있어? 너희는 어머니의 시체를 남들이 토막내고 있는 걸 본 적이 있어?!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 비참하게 죽어 가는 걸 보면서도 끝까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친 적이 있냐고!!" 피드라의 말은 처음에는 질문이었지만 나중에는 한 맺힌 외침으로 바뀌어갔다. 피드라는 온 힘을 다해 소리쳤는지 잠시 헉헉대다 씩 웃으며 말했다. "없지? 그럴 거야. 그렇겠지.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버린 친구의 살을 먹어본 적이 있을 리가 없지. 그러면서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자신이 얼마나 저주스러운지 모르겠지. 안 그래? 흐흐흐." 피드라는 울음인지 웃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그의 눈은 까닭 모를 눈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로튼은 그런 피드라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튼 내 제안을 거절하겠다는 거군. 그럼 별 수 없지. 아무리 정신이 나간 놈이라도 일단 흑마법사는 많으면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 말한 거였는데. 본인이 죽고 싶다는데 내가 말릴 수는 없지. 마리엔, 마음대로 해도 돼." 로튼은 내 등을 살짝 두드리며 뒤로 물러났다. 혹시나 로튼이 끝까지 피드라를 두둔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었다. 사실 물어본 자체도 거의 의무에 가까웠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찌되었든 로튼은 피드라의 처리를 내게 맡겼다. 수제노도 한 손에 타지 않은 종이 몇 장을 들고 가만히 보기만 했다. 나는 창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신세 타령은 다 했냐? 네 놈이 그랬든 말든 내가 알게 뭐야? 내가 아는 건 네 놈이 날 건드렸다는 거야. 알겠어?" "왕족들은 모두 없애버려야 해. 그 놈들만 없으며 모두 돌아올 거야. 그래. 네 년만 없으면 모든 게 좋아질 거야! 히히히." 피드라는 혼자서 마구 중얼거리며 광소를 터트렸다. 좀비도 사용하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 뭘 믿고 까부는 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재빨리 피드라 앞으로 다가가 발로 그의 복부를 걷어찼다. 순간 피드라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지만 그 것도 잠시였다. 피드라는 바닥에 널브러진 상태에서 낄낄대며 말했다. "없애버리는 거야. 모조리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버리는 거야. 그 걸로 피의 축제를 열어야지." "네 처지를 알고 지껄여라." 나는 넘어진 피드라를 향해 창을 내리꽂았다. "크억...죽이는 거야... 고귀한 척 하는 그 놈들을 모두..." 피드라는 완전히 미쳤는지 팔이 잘려나가도 계속 중얼거렸다. 힘도 못쓰는 주제에 내 발을 물어뜯어서 걷어 채인 지도 수십 번이었다. 벌써 바닥은 피로 흥건히 젖었고, 잘려나간 인간의 몸이 까맣게 타버린 재 속에서 널브러져 있었다. 한 번에 너무 많이 잘라버리면 나중에 베어낼 것이 없을까봐 손가락부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놈은 공포에 질리기는커녕 갈수록 광기에 사로잡혀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그 때마다 두들겨 맞고 널브러졌지만 끝이 없었다. 수제노와 로튼은 그저 묵묵히 보고만 있었다. 방에 가득 찬 혈향과 살이 잘려나가는 소리, 피드라의 정신 나간 웃음소리가 눈, 코, 귀를 통해 온 몸으로 전해졌다. 피드라가 원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아 신경질이 난 나는 바닥에 뒹굴고 있는 피드라의 허리에 창을 내리꽂았다. "큭!...화, 화가 나나 보지? 하긴 기사 놈들이 모두 죽었으니 화가 날 만도 하군. 그 놈들도 참 웃겼어. 팔이 뜯겨나가도 비명을 지르는 놈이 한 놈도 없더군. 숨이 멎을 때까지 끊임없이 앞을 가로막더라고. 히히히." 고통에 잠시 정신이 돌아왔는지 피드라가 낄낄대며 당시의 상황을 말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놈이 죽으면서 네 이름을 중얼거리더라고. 아주 눈물겨운 충정이었지...으윽. 정말 웃겨서 말이 다 안나오더라고. 킥킥킥" "이게!" 나는 피드라를 짓밟았다.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지렁이라도 되는 냥 끊임없이 짓밟았다. 그러나 피드라는 미친 듯이 웃기만 했다. 정신 없이 피드라를 밟던 나는 이번에는 창으로 마구 찔렀다. 그러자 웃음이 좀 잦아들긴 했지만 여전히 붉게 충혈된 눈이 나를 비웃고 있었다. 한참동안 날뛰던 나는 손을 멈추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피드라는 내장이 파열되었는지 피를 토해냈지만 그 와중에도 웃고 있었다. 정말이지 소름끼치도록 끈질긴 놈이었다. 처음에는 잘게 잘게 토막내서 죽여주려고 했는데 죽여도 이 놈은 웃으면서 죽을 것 같았다. 절대 그럴 수는 없다.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어줄 테다. 가장 고통스럽게 죽어버릴 거다. "켁켁...크억.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지. 그 때에 비하면 말이야." 그 때? 아마 가족들과 이웃이 죽을 때를 말하는 건가 보다. 거칠게 숨을 내쉬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피드라를 노려보았다. 피드라는 무릎 아래가 잘려나가고 팔 하나가 어디론가 사라졌는데도 별로 괴롭지 않은지 활짝 웃고 있었다. 간간이 인상을 찡그리기도 했지만 내 눈에는 그가 끊임없이 웃는 걸로 보였다. 옷도 피에 물들어 붉은 색으로 변했고, 입 주위는 피로 범벅이 됐는데도 그 번뜩이는 눈들이 날 보면서 웃고 있었다. 과거에 받은 정신적인 충격이 너무 커서 육체적인 고통은 잘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입술을 깨물며 씩씩댔다. 어떻게 해야할까? 지금 이렇게 복수하고 있는데도 전혀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왜 일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러다 우연히 하나의 생각이 번뜩 들었다. 스쳐지나가다시피 든 생각을 다시 잡아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나는 깔깔대기 시작했다. "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한참동안 웃어대던 나는 눈물을 쓰윽 닦고 피드라를 향해 말했다. "처음부터 잘못 생각했어. 죽이려고 한 게 잘못이었어. 죽이는 것이 복수라는 것은 내 신조와는 너무 맞지 않잖아? 그렇지. 죽이는 것만으로는 복수가 아니지. 그렇고 말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도 미쳤냐? 응?" 피드라의 비웃음에도 나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 웃음이 얼마나 가나 두고보자. 나는 언제 웃었냐는 냥 딱 웃음을 멈추고 입술을 움직였다. "환상의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라. 환상은 환상이데 현실인 것. 지금 내 힘으로 환상을 현실로 바꾸니 가장 깊숙한 곳에 감춰진 곳을 비추어라. 봉인된 기억을 끌어내어 그대를 끊임없이 따르리라." 내가 주문을 외우자 피드라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래. 내가 원한 건 바로 이런 거지. 피드라도 명색이 흑마법사니 이게 무슨 마법인지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피드라는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너..." "맞아. 뭔지는 너도 알겠지?" "안 돼!" 피드라가 발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불구의 가여운 노인이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을 마구 휘저으며 뒤로 물러나려고 애썼다. 하지만 다리가 없어 힘들어 보였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현실 속에서 예쁘게 웃어주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판타즘!" "으아악!" 피드라는 몸을 웅크리며 소리쳤다. 내 손에서 뻗어 나온 일곱 가지 빛은 핑글핑글 돌며 피드라에게 쏘아졌다. 빛은 피드라에게 흡수된 것처럼 그와 부딪치자 연해지더니 사라졌다. 판타즘. 인간의 내재된 기억 속에서 가장 끔찍한 기억을 끌어내서 환각을 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그저 보기만 할 수 있다.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기억을 말이다. 나는 피드라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공포에 젖은 것을 보고 웃었다. 배가 아플 정도로 웃었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 환상을 볼 것이다. 내가 풀어주지 않는 한은 말이다. 이대로 죽을지, 아니면 이 몸으로도 살아남을 지는 모른다. 그러나 충분했다. "어떻게 한 거야?" 수제노가 다가와 물어보자 나는 생글거리며 말했다. "그냥 과거 속에서 살게 해줬을 뿐이야." "과거?" 수제노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나는 굳이 설명해주지 않았다. 말을 해주면 즐거움이 반감될 것 같았다.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 속에 남겨두기 위해 두려움에 떠는 작은 짐승처럼 몸통을 남은 한 팔로 가리고 움츠려있는 피드라를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얼마 후 빙글거리며 피드라를 쳐다보던 내 눈에 수제노의 손에 들린 종이가 들어왔다. 나는 몇 장의 종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 종이는 뭐야?" "나도 모르겠어. 암호로 써져있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너 가져라." "그래도 돼는 거야?" 내가 종이를 건네 받으며 묻자 수제노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이런 걸 가지고 있으면 괜히 귀찮은 일에 말려들 뿐이다." 나는 수제노에게 받은 종이를 훑어봤지만 수제노의 말대로 알 수 없는 문자와 도형들이 배열되어 있을 뿐이었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로튼에게도 보여봤지만 그도 모른다고 한다. 며칠은 연구해봐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혹시 이 것이 브러버드에 대한 단서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품속에 넣고 방을 나왔다. 이제 관병들이 곧 들이닥칠 것이다. 이들이 누군든 살인을 한 마당에 서로 마주쳐서 좋을 건 없었다. 수제노와 로튼도 아무 말 없이 따라왔다. 피드라는 그냥 남겨두었다. 이미 피드라는 더 이상 현실 속에 사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조용한 지하에는 나와 수제노, 로튼의 발걸음 소리만이 울렸다. 뚜벅거리는 발걸음을 제외한 다른 소리들은 모두 집어삼킨 듯한 이 적막이 좋았다. 시끄럽게 떠들고 축하하는 것보다 혼자서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는 정적이 좋았다. 이제 끝난 것이다. 피드라를 죽이지 않은 건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로 잘한 일이었다. 한순간에 죽이는 것보다 평생 환상 속에서 살다가 죽게 하는 것이 더 멋진 복수였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을 느껴봐. 두 눈 벌겋게 뜨고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지독한 무력감이 어떤 것인지 느껴보라고. 나는 빙그레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동녘이 서서히 남자줏빛 눈을 뜨면서 대지와 하늘, 그 속에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벗어나 저마다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로 물든 채 새로운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 차갑지만 상쾌한 새벽 공기를 허파 깊숙이 빨아들이며 나는 밝아오는 여명 속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 재설문 조사 들어갑니다. 이번에는 남자 캐릭만 인기 투표 하겠습니다. 총 3번에 걸쳐 할 예정이고, 마감은 내일 제가 인터넷 접속하기 전까지입니다. 제가 접속하는 시간이 거의 정해져있다는 것은 아시죠? 대략 12시가 되지 않을까 하지만 더 빠를 수도 늦을 수도 있습니다. 3개 설문 조사 평균을 내서 발표할게요. 참, 마우스 노가다는 하지 말아주세요 ^-^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_-; <-왠지 축 쳐지는 기분의 모험가 #34- 반격의 시작 #34- 반격의 시작 창문이 차가운 바람에 몸을 내맡긴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창문을 보니 폭풍이 불 경우를 대비해 바깥쪽에 달아놓은 이중 창문에 가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물을 잔뜩 머금어서 짙은 갈색을 띄는 이중 창문의 거친 표면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문과 창문을 두드리는 눈들의 행렬 소리는 끊임없이 들려왔다. 아마 바깥은 두툼하게 입고 나가지 않으면 발걸음을 당장 집으로 돌릴 만큼 추울 것이다. 하지만 여관 1층에 딸린 식당은 봄과 같은 포근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치 형태의 벽난로에서는 이글거리는 거대한 불덩이들이 강렬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열기가 넓은 식당을 모조리 따뜻하게 데워주지는 못했다. 벽난로 근처는 따뜻했지만 이 곳에서 조금만 멀어져도 냉기로 인해 옷으로 몸을 단단하게 감싸야 했다. 때문에 벽난로 근처에 앉아있는 우리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은 각자의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사실 페드인 왕국의 겨울 날씨는 그렇게 혹독하지 않았다. 따뜻한 해안에 위치하고 있어서 내륙에 위치한 하이덴 제국이나 토르에 비하면 춥다고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 것은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말이고, 이미 이 지역의 풍토에 가장 알맞게 적응해버린 페드인 왕국 사람들에게는 그 것이 아니었다. 다른 나라 출신의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페드인 왕국 사람들에게 이 겨울은 매서운 추위를 가져다 주는 강적이었다. 그러나 어디를 가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나와 수제노는 춥긴 하지만 그렇게 벌벌 떨 정도의 추위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을 에는 듯하던 바람이 부는 하이덴 제국에 있다가 와서 그런지 오히려 푸근한 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페드인 왕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이 눈이라는 것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페드인 왕국 사람도 아닌 로튼은 조금 전부터 벽난로 앞을 몽땅 차지하고 앉아서 약한 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벽난로 앞에서만 벗어나면 추워 죽겠단 말이야. 이래서야 어디 살 수나 있겠어? 이런 겨울은 나 같은 약한 노인네들에게는 천적이나 다름없어." 지금의 로튼은 얼마 전에 그가 자신은 적어도 150살까지는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호기롭게 말했던 그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난로를 뒤로 하고 다리를 벌린 채 앉아 기분 좋게 불을 쬐고 있었다. 너울거리는 불에 비친 그의 그림자는 잔뜩 부풀어올라 식당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난로의 불빛은 로튼의 덩치에 가로막혀 가까스로 새어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로튼은 조금 전부터 편한 자세로 앉아서 낮은 목소리로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난로 앞에 턱하니 버티고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죠.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정정해 보이기만 하는데 무슨 걱정인 거예요?" 내 말에 로튼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른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래서 젊은 것들은 안 된다니까. 건강은 있을 때 지켜야하는 법이야. 나중에 건강을 잃고 나서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거야. 그래서 나는 이 추운 겨울철에 행여나 동상이 걸릴까봐 이 곳에 있는 거야" 나는 진실을 이야기해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진실은 정말로 건강을 걱정한다면 동상을 걱정하기보다는 음식량을 줄이던지 아니면 운동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먹기 위해 사는 것 같은 로튼을 향해 차마 그런 말은 하지 못하고 대충 알았다는 식으로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든 그 것은 그 사람의 즐거움이며 사는 목적이었다. 본인이 좋다는데 내가 굳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해댈 필요는 없었다. "그나저나 마중 나오기로 한 사람들은 언제 오는 거냐?" "글쎄. 약속은 오후 5시에 만나기로 했지만 눈 때문에 약간 늦게 도착할 모양이야." "그런데 정말 내가 남아있어야 하는 거냐?" 수제노가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리면서 물었다. 아무래도 수제노로서는 공작가에서 나올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따지고 보면 수제노는 범죄자였던 것이다. 그 것도 도둑 같이 사소한 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청부 살인이라는 대죄(?)를 저지르는 죄인이었다. 하지만 라디폰 공작은 수제노가 나를 도와줬던 것을 높이 사서 그녀를 한 번 만나보고 싶어했다. 라디폰 공작이 암살자라고 색안경을 쓰고 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나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려는 수제노를 붙잡았다. 예전에는 나를 암살하려고 한 인물이지만 몇 달 동안 생사를 같이 하다보니 정 아닌 정이 들었던 것이다. 수제노도 내가 그렇게 싫지는 않은지 말은 그렇게 해도 여전히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었다. 나는 그런 수제노에게 살포시 웃어주면서 말했다. "괜찮아. 따지고 보면 수제노는 나를 구한 생명의 은인이잖아. 포상을 받을지도 몰라." "그건 사양하겠어. 널 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사실 나 혼자서는 위험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으니까." 수제노는 그녀답게 무뚝뚝하게 말하고 입을 닫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이른 저녁을 먹는 두세 명과 여관 주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곧 문이 열리고 라디폰 공작이 보낸 사람들이 텅 비다시피 한 한산한 식당 안으로 들어설 것이다. 이미 약속 시간이 30분을 넘어가고 있으니 나타날 시간이 거의 된 것이다. 눈 때문에 걷기가 힘들다고는 하지만 이 곳에서 라디폰 공작가는 그렇게 많이 떨어져있지 않았다. 바로 우리들이 찾아가도 되겠지만 문지기나 지나가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 나에 대한 소문이 날지도 몰라 조심하고 있었다. 때문에 라디폰 공작이 보내는 사람도 에릭과 이블로였다. 무슨 일이든지 조심하고 치밀하게 계획하는 라디폰 공작의 성격이 여실히 드러나는 결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라면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난로에서 나오는 온기에 몸을 맡긴 채 하릴없이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로튼은 기분 좋게 불을 쬐느라 정신이 없었고, 수제노도 말이 많지 않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따뜻함에 시간 관념을 잊어버리고 서서히 졸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태아가 그 엄마의 속에서 따뜻이 보호받는 것처럼 포근한 공기에 감싸여 있던 식당 안으로 불청객들이 들이닥쳤다. 차가운 바람들은 열린 문틈으로 몰려들어와 이 계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따뜻함을 내쫓아냈다.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갑작스런 온도 변화에 일제히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축축하게 젖은 로브를 입은 두 사람이 서있었다. 그들의 뒤로는 흐트러진 눈이 바람에 휘몰려 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재빨리 문을 닫았지만 한 번 침입해온 냉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나마 우리들은 오랫동안 벽난로 앞에 진을 치고 있어 몸에 열기가 묻어있어서 괜찮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팔을 오그리고 팔뚝을 비벼댔다. "이거 죄송합니다." 이제 막 들어온 사람 중 한 명이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로브에 달린 후드를 뒤로 젖히면서 말했다. 그는 다름 아닌 이블로였다. 그렇다면 그의 옆에 서있는 사람은 에릭일 것이다. 역시 후드를 벗은 후 드러난 얼굴은 내가 잘 아는 에릭의 얼굴이었다. 두 사람은 아직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옷에 묻은 눈을 털어 내고 있었다. "야! 여기야!" 내가 소리쳐 부르자 그들은 고개를 들어 우리 쪽을 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함께 쳐다봤지만 같은 일행인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지 곧 자신들의 일에 몰두했다. 내 부름에 우리를 발견한 에릭과 이블로는 한동안 조각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입이 벌어졌다가 황급히 닫히는 것을 보니 내 이름을 부르려다가 주위의 눈을 생각해 그만둔 것 같았다. 거의 뛰어오다시피 벽난로로 다가온 두 사람은 앉을 생각도 하지 않고 나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마리엔?" "어떻게 여기 계시는 겁니까?" "어라? 라디폰 공작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내 말에 에릭과 이블로는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나는 라디폰 공작이 대단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반응으로 봐서 이들은 오늘 여기서 만날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고 나타난 것 같았다. 아들인 에릭과 오른팔인 이블로에게까지 내 생존사실을 비밀로 하다니. 무서운 것. "그런 말 못 들었어! 괜찮은 거야?" "얼마나 난리가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그래도 무사하시니 다행입니다." 에릭과 이블로는 목소리를 낮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다시 내게로 쏠렸다. 아무래도 이 곳에서 차분히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말했다. "자리를 옮기는 것이 낫겠네. 방으로 올라가자." "따뜻하고 좋은데 그냥 여기서 이야기하면 안될까?" "그럼 로튼 씨는 여기 계십시오. 저희들끼리 올라가지요." 수제노의 말에 로튼은 그 때서야 비로소 뭉그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릭과 이블로는 아직도 놀람이 가시지 않았는지 멍하니 따라왔다. 방에 도착한 나는 우선 짐을 뒤져서 찾아낸 수건을 에릭과 이블로에게 건넸다. "우선 몸이나 닦고 이야기하지." 두 사람은 당장 묻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묵묵히 수건으로 젖은 몸을 대강 닦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것마저 끝나자 드디어 하고 싶은 질문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긴. 잠시 여러 가지 일로 인해 떠돌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온 거야." "그런 말이 아니잖아. 그동안 왜 연락도 하지 않은 거야?!" "에릭 님의 말이 맞습니다. 도대체 아렌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지금 마리엔 공주님의 국상 이야기가 오가고 있단 말입니다." "에? 국상? 그거 재미있겠네." 내가 피식거리며 말하자 에릭이 소리쳤다. "재미있긴 뭐가 재미있어!" 에릭이 느닷없이 소리치자 나는 놀라서 그를 보았다. 사실 생각해보면 재미있지 않은가?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의 국상이라니. 국상을 치를 때 짠하고 나타나면 왕비 패거리가 어떤 얼굴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에릭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에릭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지만 흔들리는 등불의 빛 때문에 그런 것이리라 생각했다. 어쨌든 이 이상 재미있다거나 하는 소리를 하면 에릭이 화를 낼 것 같아 변명조로 말했다. "하지만 라디폰 공작에게는 연락하고 있었는데. 나는 에릭과 이블로도 아는 줄 알았지." 그러자 에릭과 이블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곧 이어 에릭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는 알고 계셨다고?" "응. 못 들었어? 이상하네. 훨씬 전부터 연락하고 있었는데." 나는 라디폰 공작과 로튼의 통신 구슬로 계속 연락하고 있었다는 말도 덧붙이려 했다. 그러나 옆에 앉은 수제노가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살짝 찌르자 엉겁결에 입을 닫았다. 무슨 일이냐는 시선으로 수제노를 보던 나는 난데없이 거칠게 내뱉어지는 말에 다시 앞을 보았다. "제길!" 에릭은 내가 본 바로 그의 아버지를 무진장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저 '제길' 이라는 말은 라디폰 공작에게 향하고 있었다. 이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쉽게 알 수 있었다. 라디폰 공작이 나와 연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긴 것이 그렇게도 분한 일이었던가? 생각해보았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약간 섭섭할 지는 몰라도 화를 낼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라디폰 공작의 편을 들고 말았다. "아니. 뭐, 그럴 수도 있지. 공작 입장에서는 말이야. 비밀이 새어나갈 수도 있잖아. 아! 그렇다고 에릭이 말한다는 건 아니지만 그...엿들은 사람이 있다거나 뭐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겠어?"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하지만..." 나는 에릭이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어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혹시나 그들의 얼굴에서 뭔가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로튼은 그 비대한 몸집을 좀 더 편하게 하려고 의자에 고쳐 앉고 있고, 수제노는 이 일이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듯 무심한 얼굴이었다. 다만 이블로만이 달래는 어조로 말할 뿐이었다. "에릭 님, 진정하십시오. 마리엔 님도 무사하시니 다행이지 않습니까? 라디폰 공작님께서도 나쁜 뜻이 있어 그러신 건 아닐 겁니다." "맞아. 적을 속이려면 자기 편을 먼저 속이라는 말도 있잖아." 이 말을 하면서도 내가 왜 라디폰 공작을 변호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와 이블로의 말이 어느 정도 먹혀들었는지 에릭이 조금은 진정한 것 같았다. 아마도 존경하는 그의 아버지가 자신을 믿지 않았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입 밖에 내서 라디폰 공작과 에릭의 불화를 부추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라디폰 공작님께서 가보면 알 거라고 했을 때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말입니다." 이블로는 라디폰 공작의 짓궂은 장난에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블로는 에릭처럼 라디폰 공작이 이 일에 대해 어떠한 언급을 해주지 않은 것에 큰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처음에는 놀라긴 했지만 나중에는 그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면 라디폰 공작에게 미리 들어놓고 능청맞게 연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들자 왠지 마지막 추측이 가장 신빙성 있게 느껴졌다. "그래도 무사하신 것을 보니 마음이 놓입니다. 최근 들어 갈렉트 백작을 비롯한 여러 귀족들이 공주님의 국상을 치러야한다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충돌이 많았답니다." "하긴 나를 어서 죽이고 싶었겠지." 이블로의 말에 나는 비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봐라. 내가 죽나. "그런데 호위 기사들은?" 마음을 가라앉힌 에릭은 내 주위에 수제노와 로튼 밖에 없는 것을 보고 의문을 제기했다. 에릭의 말에 이블로도 정말 그렇군요, 라고 중얼거렸지만 그건 이미 어떠한 가정을 머리 속에 두고 내뱉는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다 죽었어. 중간에 여기 있는 수제노와 로튼을 만나서 큰 도움을 받았지. 그러고 보니 서로 인사도 하지 않고 있었잖아. 여기는 수제노. 체르만 길드의 촉망받는 암살자. 그리고 여기 풍만한 체구를 자랑하는 사람은 로튼. 옵스크리티의 장로래. 옵스크리티는 두 사람이라면 알고 있겠지?" "공주님을 도와주셨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일세. 사실 목적이 겹치기도 했고 말이야." 이블로와 수제노, 로튼은 서로 인사를 주고 받았다. 그러나 에릭은 인사를 할 생각도 하지 않고 묘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보았다. "죽었다고?" "응. 좀비들이 떼거지로 덤비는데 어쩔 수가 있어야지 말이야." "...괜찮냐?" 에릭의 뜻밖의 걱정 어린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곧 알통을 내보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그럼. 내 실력 알지? 상처 하나 없어." 그러자 에릭이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중얼거리는 것처럼 말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나는 이야기가 묘하게 어두운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 그의 등을 살짝 치면서 말했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복수도 깔끔히 했고. 나는 지금 기분이 아주 좋아." 내 말에 에릭은 무슨 말을 할 것처럼 하다가 곧 아무 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렸다. 그 후로 잠시동안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마치 건드려선 안 될 이야기를 실수로 건드린 것 같은 태도를 취하는 에릭과 이블로 덕분에 나는 기분이 묘해졌다. 왜 저럴까? 나는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피드라에게 복수도 하고 이제 남은 건 누명을 벗고, 반격하는 일이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는 마당에 에릭과 이블로가 왜 저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내 편이니 마땅히 기분이 좋아야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에릭과 이블로를 보았다. 그러자 침체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인지 로튼이 경쾌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 꿀꿀한 분위기는 뭐야? 그래! 이럴 때는 비라이턴에서 이 몸이 행했던 활약을 들으면 분위기가 뜰 거야. 특히 거기 잘 생긴 젊은이와 마법사는 잘 듣게나. 내가 어땠냐 하면 말이지......" 로튼은 자신의 활약상을 아주 과대포장해서 늘어놓았다. 당연히 나와 수제노는 중간중간 끼어 들어 사실을 들려주곤 했다. 덕분에 우리 방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어났다. 비록 그 꽃이 이 겨울과는 어울리지 않고, 있어서도 안되며 속은 꿀은 고사하고 텅텅 비어있다 해도 말이다. ------------------------------------------------------------ #34- 반격의 시작 티스몬 백작과 세린이 소식을 듣고 라디폰 공작가로 찾아온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두 사람은 라디폰 공작에게 연락을 받고 와서 에릭이나 이블로처럼 얼이 빠지지는 않았다. 대신 처음 들어왔을 때 보였던 설마 설마 하는 얼굴이 활짝 펴졌다. 평소에 말이 없던 티스몬 백작은 흥분해서 말이 많아졌고, 세린은 정반대로 말이 없어졌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무척이나 밝은 얼굴이었다. 그 것은 라디폰 공작이나 에릭도 마찬가지였기에 응접실에는 절로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다. 마치 이 곳에만 일찍 봄이 온 듯했다. 나도 오랜만에 만나는 이들로 인해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로튼과 수제노의 얼굴에도 만족스런 웃음이 만연했다. 로튼은 융숭한 대접과 맛있는 음식 덕분이었고, 수제노는 상당한 액수의 금화를 준다는 것과 헤라 아줌마에게 음식점을 차려준다는 라디폰 공작의 약속 때문이었다. 덕분에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그리고 한참동안 차를 마시며 정답게 나누던 우리의 담소는 라디폰 공작이 헛기침을 하고 찻잔을 완전히 비우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끝이 났다. "이제 마리엔 공주님께서 돌아오셨으니 해야할 일이 많아지겠군요." "같은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마리엔 공주님의 실종을 빌미 삼아 기가 산 왕비 진영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어야지요." 라디폰 공작의 말에 티스몬 백작은 깊은 동감을 표하며 말했다. "하지만 저 쪽에서 다시 저주를 문제 삼아 나올 것이 걱정입니다. 아직도 아리란드 전하의 병세는 전혀 차도가 없으니 틀림없이 그럴 겁니다. 물론 처음에는 마리엔 공주님의 복귀를 환영하는 척 하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미르 백작을 부추겨 들고 나올 겁니다." 티스몬 백작의 얼굴에 어두운 기운이 졌다. 하지만 이미 이 일에 대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 그 말에도 느긋했다. 티스몬 백작과 함께 걱정하는 사람은 에릭과 세린뿐이었고, 라디폰 공작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점이라면 걱정 마십시오. 여기 계시는 로튼 님은 저주 계열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자이십니다. 이 분의 지적으로 공주님께서 뒤집어쓰셨던 누명의 허점을 알아냈습니다. 당연히 그에 대한 대책도 마련된 상태입니다. 로튼 님께서 직접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그럼 내가 간단히 말해보도록 하지." 라디폰 공작의 칭찬에 로튼은 물고 있던 쿠키를 마저 넘긴 다음에 입을 열었다. 라디폰 공작은 너무 방방 띄워주지 않으면서도 남들이 좋아할 만한 말을 골라서 하는데는 일가견이 있었기에 로튼은 상당히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로튼은 예전에 내게 해줬던 말을 그대로 들려주었고, 이내 티스몬 백작과 에릭, 세린의 얼굴이 펴졌다. "작은 악동이라는 저주에 그런 점이 있을 줄 몰랐군요." "잘 됐군요." "이제야 누명을 벗을 수 있겠군요. 마리엔 공주님, 축하드립니다." 세린은 자신보다 연배가 높은 라디폰 공작과 티스몬 백작이 있기 때문인지 존칭을 하면서 말했다. 나는 그런 세린에게 생긋 웃어주면서 말했다. "고마워, 세린." "그런데 체르만 암살 길드의 덕을 많이 봤군요. 브러버드 소탕에 함께 해줬으니 말입니다." 티스몬 백작의 말에 나는 살짝 수제노의 얼굴을 살폈다. 수제노는 귀족이 암살 길드를 치켜 세워주는 이 묘한 상황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약간 당황하는 듯 했다. 이유야 어떻든 도움을 많이 받은 것은 사실이라 나는 티스몬 백작의 말에 맞장구쳤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레이만 왕자님도 상당히 많은 도움을 주었어요." "레이만 왕자님이라면 하이덴 제국의 왕자님을 말하시는 겁니까?" 이 일만은 라디폰 공작도 알지 못했기에 그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 브러버드를 습격하기 전에 연락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아마 그 때쯤 지원해줄 사람들을 보낼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과감하게 연락하는 것을 무시하고 바로 체르만 길드 사람들과 쳐들어간 것이다. 덕분에 어제 라디폰 공작에게 엄청난 잔소리(웃으면서 하는 것이라 기분이 묘했다)를 들어야했고, 방금 전만 해도 티스몬 백작에게 경솔했다는 말까지 들어야했다. 결과가 좋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두 사람에게 굉장히 시달려야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레이만 왕자와 만난 일부터 해서 그의 도움을 받은 일까지 소상히 말해주었다. 그가 표면적으로 도와준 것은 아니지만(내가 거절했기에) 뒷수습을 몽땅 맡아주었기에 많은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직접 도와주겠다고 까지 했단 말씀입니까? 하지만 내전 중이라 상당히 정신이 없을텐데." 티스몬 백작의 의문이 바로 내가 궁금해하는 것과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를 도와주는 진정한 이유를 잘 모르겠다. 호감이 있어서라고 생각하면 간단할지 모르지만 세상에 내전이 일어나고 있는 도중에 단순히 호감 때문에 도와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병사 몇을 풀어서 도와준다면 전쟁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레이만 왕자의 반응으로 보아 그런 소소한 수색으로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 불확실하나마 내 짐작을 말해주었다. "나와 안면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보통은 단순히 안면이 있다는 걸로 그 정도까지 도움을 주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왕국으로 돌아갈 동안 보호해주는 정도입니다." "그럼 내 호감을 사서 페드인 왕국의 원조를 받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아니면 나에게 호감이 있어서 일지도?" 나는 마지막에 장난스럽게 스스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잠자코 생각에 잠겼던 라디폰 공작이 입을 열었다. "아마 둘 다 이겠지요. 하지만 마리엔 공주님을 도와준다고 해서 반드시 우리 왕국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레이만 왕자님 정도라면 귀족들이 우리 파와 라이언 왕자파, 르미엘 왕자파로 나뉜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당연히 다른 두 파의 방해도 예상할 수 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돕겠다고 했던 걸 보면 진정한 이유는 역시 두 번째가 아닐까 합니다." 장난을 라디폰 공작이 너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자 나는 당혹스러워하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호감이 있다고 도와주지는 않아요. 그 것도 다른 나라의 왕족을.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호감이 어느 일정 선을 넘어서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그 말을 하는 라디폰 공작의 눈이 잠시 에릭에게 쏠렸던 것 같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세린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 레이만 왕자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두 사람을 갑자기 쳐다보는 것이 이상했지만 지금은 그 것보다 라디폰 공작의 말을 부정하는 것이 먼저였다. "하지만 레이만 왕자는 날 잘 모르는데요." "그 반지는 레이만 왕자가 준 것이라며. 아무 감정도 없는 여자에게 반지를 주지는 않아. 그렇지 않나, 수제노?"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십니까?" 수제노가 냉랭하게 대답했지만 로튼은 끈질기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결국 로튼의 끈기에 두 손 든 수제노가 한 마디 내뱉었다. "대개 반지는 좋아하는 사람한테 준다고 하더군요." 수제노까지 그런 말을 하자 나는 이 사람들이 나를 놀리려고 한꺼번에 작당한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레이만 왕자가 내게 호감을 가진 것은 알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으니까. 하지만 백 번 양보해서 그 호감이 사랑이라고 해도 그건 단순히 잠깐 설레이는 정도 일뿐이다. 솔직히 레이만 왕자와 나는 오랫동안 같이 지내본 적도 없지 않은가. 내가 눈을 번쩍이며 인상을 쓰자 라디폰 공작이 다시 입을 열어 질문했다. "그럼 공주님은 왜 레이만 왕자님께서 반지를 선물로 줬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나는 그가 이 일을 상당히 재미있어한다는 것을 깨닫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주고 싶으니까 줬겠죠." "어째서 반지를 주고 싶었을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이제 그런 이야기는 관둬요. 아무튼 이유가 뭐든 레이만 왕자에게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니까 나도 나중에 도와주겠어요." 내 말에 티스몬 백작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어떻게 말씀입니까?" "그건...당장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도와줄 거예요. 나는 누구에게 빚지는 것도 당하는 것도 싫으니까요." 어째서 이야기가 이렇게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후 이야기는 다시 요즘 궁궐 정세로 돌아왔다. 라디폰 공작과 티스몬 백작의 말로는 요새 오펠리우스 왕비는 날이면 날마다 기도를 한다고 한다. 소문은 나와 아리란드 전하에게 생긴 불행을 어서 거두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고 하지만 내 생각에는 아마 기도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기도를 한다면 '어서 이 두 년들이 죽게 해주십시오' 라고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속내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 슬픈 척 하는 탓에 왕비에 대한 평판이 날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왕비 패거리들도 겉으로는 기뻐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자중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갈렉트 백작들이 내 국상을 열자고 주도한다고 들었는데요?" 나는 당연한 의문을 제기했다. 슬퍼한다는 사람들이 아직 시신도 찾지 못했는데 국상을 하자고 주장할 리는 없었다. 은근히 지지하기는 하겠지만 대놓고 말할 리는 없었다. 그러자 나와 로튼, 수제노를 제외한 사람들이 움찔거렸다. 그리고 대답을 하기 꺼려지는지 자꾸 우물거렸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이상한 눈으로 보다가 지금 나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해보았다. 잠시 후 나는 그들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혹시 나미르 백작인가요?" "그렇습니다." 내 말에 라디폰 공작만 간략하게 답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난처한 기색을 떠올렸다. "그럼 플로라도 알고 있겠네요?" "그 것이......." 티스몬 백작이 손으로 이마를 훔치며 쩔쩔맸다. 그의 태도로 보아 플로라 공주도 국상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확실한 답을 듣고 싶어 계속 맞은편에 앉은 자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엄청난 침묵이 응접실을 무겁게 덮고 그들의 입술까지도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한참만에 입을 연 것은 라디폰 공작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결연한 의지마저 떠올라 있었다. "물론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국상을 열자고 주장하는 유일한 왕족이시기도 합니다. 그래야 마리엔 공주님의 영혼이 떠돌지 않고 평안히 잠들 수 있다고 말하고 계시지만 속마음이야 어떨지는 모르겠군요." "공작!" "아버지!" "라디폰 공작님!" 라디폰 공작의 말에 나머지 세 사람은 공작에게 원망 어린 눈초리를 보냈다. 너무도 솔직하게 털어놓아 행여나 내가 충격을 받지 않을까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사실 남들이 보기에 나와 플로라 공주는 우애로운 자매지간이었다. 나는 데미나 공주와는 거의 왕래가 없는 반면 플로라 공주와는 자주 만나고 함께 어울리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플로라 공주가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났으니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충격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겨우 그 정도 이야기 가지고 뭘 시간을 끌고 그러냐는 시선을 보내면서 말했다. "그래요?" 내 목소리가 잔잔한 호수처럼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담고 있지 않자 응접실에 있던 사람들이 일순간 당황했다. 로튼과 수제노를 빼고 말이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도 무엇을 떠올린 것인지 이내 조용해졌다. 다만 그들의 눈이 나를 안쓰럽게 보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솔직히 아무리 플로라 공주와 친해봐야 제 4기사단 소속의 기사들만 하겠는가? 나를 지키려고 목숨을 바친 기사들만큼 정이 가겠는가? 그런데 지금 나는 그들의 죽음에 대해 전혀 슬퍼하지 않고 있었다. 적어도 남들의 눈에 비추기에는 그랬다. 그러니 플로라 공주의 변화 정도에 놀랄 턱이 없었다. 사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자기 엄마의 원수인데 나라도 그렇게 하겠다. "그건 좀 의외네요. 플로라 공주가 유일하게 내 국상을 추진하는 사람이라니. 나는 적어도 라이언 오라버니도 같은 반응을 보일 줄 알았는데. 역시 어마마마가 막은 건가? 하긴 그렇지 않으면 그 단순한 오라버니께서 가만히 계실 리 만무하지." 나는 플로라 공주의 반응보다는 라이언 왕자의 반응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사실이 또 그러했다. 나의 배배 비틀어져 꼬인 말에 라디폰 공작이 말했다. "겉으로는 그렇지만 사실상 라이언 왕자님은 국상 찬성 쪽입니다." "그럼 르미엘 오라버니는요?"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분은 절대적인 반대입장입니다." 호기심에 물어본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의외였다. 도대체 르미엘 왕자는 무슨 생각일까? 정말로 나를 돕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단순한 연기인가? 만약 연기라면 그는 엄청난 연기자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이번 일이 무사히 넘어가면 반드시 르미엘 왕자를 찾아가 그의 속내를 알아보고자 다짐했다. 내가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티스몬 백작이 특유의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배어있었다. "이제 공주님께서도 돌아오셨으니 나미르 백작들이 뭐라고 해도 소용이 없어졌군요." "그런데 궁금해서 묻는데 내가 만약 지금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 것 같아요?" 내 말에 라디폰 공작이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미리 준비해놓은 것처럼 바로 대답했다. "저희들이 아무리 막아도 오래 가지 않아 국상이 치러졌을 겁니다. 벌써 몇 달째 아무런 소식도 없었고, 시우리스 숲에 전투 흔적이 남아있었으니까요." "오호, 그거 재미있군요. 국상이라. 자신의 장례식을 보는 것도 남다른 재미가 있을 것 같군요." "무슨 생각이라도 있으십니까?" 라디폰 공작이 웃으며 물었다. 라디폰 공작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니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와 라디폰 공작은 장난을 모의하는 장난꾸러기들처럼 소리 없이 웃었다. #34- 반격의 시작 #34- 반격의 시작 시녀를 따라 환하게 밝혀진 복도를 지난 후, 그라냔 백작은 오펠리우스 왕비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방은 복도와는 달리 어둠에 잠겨 있었다. 창문을 가린 두꺼운 커튼 덕분에 넓은 방을 채우고 있는 빛이라고는 흔들거리는 촛불과 벽난로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빛 뿐이었다. 촛불의 작은 빛은 방 전체를 비추지 못하고 어떤 물체는 밝게 비추고 있지만 다른 물체는 어둠 속에 남겨두었다. 그리고 촛불의 움직임에 따라 빛을 받아 어둠 속에서 솟아났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녹아드는 하나의 인형이 있었다. 뒤에서 보는 검은 그림자의 어깨는 가늘게 떨리고 있어 더욱더 가냘프게 보였다. "왕비님, 그라냔 백작님께서 오셨습니다." 시녀가 다시 한번 주의를 환기시키자 그제야 등을 돌리고 있던 여인의 고개가 들렸다. "오라버니, 오셨군요." 그 목소리는 실날 같이 가늘어 절로 애처로운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고개를 돌려 살포시 미소를 짓는 오펠리우스 왕비의 얼굴도 억지로 웃고 있는 기색이 역력해 절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시녀는 절로 가슴이 아파 오면서도 감동에 몸을 떨었다. 이 마음 여리고 착한 왕비는 마리엔이 행방불명됐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버린 것이다. 그 후로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마리엔의 무사 귀환을 빌고 있었다. 그러나 야속한 신은 왕비의 타는 마음을 재로 만들어버리려고 작정했는지 공주에 대한 소식은 전혀 없었다. 시녀는 오랫동안 모시고 있는 주인이 걱정됐지만 그라냔 백작이 가보라는 손짓을 하자 순순히 물러났다. 그라냔 백작이 왔다 가고 나면 그 날 만은 오펠리우스 왕비의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몇 번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시녀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그라냔 백작은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걷었다. 그러자 눈부신 빛이 방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며칠 동안 내린 눈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며 눈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그 빛은 햇빛과 함께 방까지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어두컴컴했던 방은 순식간에 밝아졌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한 몸에 받으며 그라냔 백작은 등을 돌렸다. 그의 눈에 그 사이에 소파에 자리를 잡은 오펠리우스 왕비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만 슬픔에 젖어있던 오펠리우스 왕비는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라냔 백작은 그 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신도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어느새 백작의 얼굴에도 오펠리우스 왕비의 그 것과 비슷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요즘은 기분이 어떠십니까?" "마리엔 덕분에 아주 슬프답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하는 오펠리우스 왕비의 얼굴에는 만족스런 웃음이 만연해있었다. 그 것은 그라냔 백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를 통해 두 사람의 속마음이 말과는 전혀 다름을 알 수 있었다. "그러십니까? 그럼 제가 아주 기쁜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왕비님께서도 이 말을 들으시면 정말 힘이 나실 겁니다." "무슨 소식인데요?" 오펠리우스 왕비의 질문에 그라냔 백작은 일부러 뜸을 들였다. 사람들이 아주 감동적이거나 놀라운 일을 말할 때면 바로 말하지 않고 잠시 시간을 두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왕비의 얼굴이 호기심으로 잔뜩 물들었을 때에야 그라냔 백작은 입을 열었다. "드디어 마리엔 공주의 국상이 결정되었습니다." "세상에!" 다른 경우였다면 오펠리우스 왕비가 절망에 빠져 비명을 질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왕비의 목소리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담뿍 담겨있었고, 눈은 새까만 밤하늘에 떠있는 별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애로운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 두 명의 왕자와 '한 명'의 공주를 둔 왕비로 변해있었다. 정말로 마리엔이 죽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국상을 치른다는 것 자체는 큰 의미가 있었다. 그 것은 백성들에게 마리엔은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각인시켜주는 것으로 그 상징적 의미는 굉장했다. "어떻게 된 거죠? 그동안은 라디폰 공작을 포함한 귀족들이 지독하게도 방해했잖아요." "그게 이상하게도 오늘은 라디폰 공작이나 티스몬 백작이 많이 나서질 않더군요. 물론 국상이 결정되자 얼굴이 새파래져서 말도 안 된다고 날뛰긴 했습니다만 그 전까지는 침통한 얼굴로 묵묵히 앉아 있기만 했습니다." 그라냔 백작의 말에 오펠리우스 왕비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혹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마리엔에 대한 소식을 들은 것이 아닐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여러 가지 조사를 해보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별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에 그 자들에게서는 아직도 소식도 없습니까? 아무래도 이번 일은 그 자들이 잘 알고 있을 듯 한데요." "전에 왔던 연락 이후로 아무런 소식이 없군요." 오펠리우스 왕비가 불만스러운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아직까지 마리엔이 어떻게 됐는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몇 달 전에 '그들'을 통해 전해들은 말로는 기사들은 모두 죽고 마리엔만 웬 여자와 함께 도망쳤다고 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마리엔이 살아있을 리 없었다. 만약 살아있다면 당장 연락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마리엔이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해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는 '그들'의 손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안했다.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사람이란 자신이 보지 못한 것은 믿지 못하는 고약한, 하지만 현명한 습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오펠리우스 왕비는 어느 날이고 갑자기 마리엔이 나타나서 모든 것을 망쳐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그라냔 백작은 오펠리우스 왕비의 찌푸려진 표정을 보고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정말 그런 자들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정체도 알 수 없는 자들을 믿었다가는 나중에 큰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이번만 해도 그렇습니다. 자기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달라고 하고서는 확실하게 처리하지도 못했지 않습니까?" "하지만 마리엔을 사헤트로 보내는 데는 그들의 덕을 봤지요. 물론 완전히 신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일이 끝나면 없애버려야지요. 라이언이나 르미엘이 다음 대 국왕이 된다면 그런 자들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지요. 단지 나중을 위해 잠시 키우고 있는 개입니다." 잠시 오펠리우스 왕비와 그라냔 백작은 서로를 마주보고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라이언 왕자와 르미엘 왕자 중 한 명이 왕위에 오르면 괴집단과 잡고 있던 손을 자를 것이다. 그리고 그 손의 주인도 영원히 입을 다물게 할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괴인의 힘과 달콤한 말을 듣고 일시적으로 손을 잡긴 했지만 믿은 적은 없었다. 그 것은 괴인도 마찬가지인지 그는 매번 만날 때마다 후드를 벗은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왕비가 괴인의 모습 중 본 것은 후드 속에서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뿐이었 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라냔 백작은 안색을 굳혔다. 오늘 있었던 일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백작은 자신의 누이이자 이 강대국의 왕비인 여인을 향해 은밀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르미엘 전하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건지 아십니까?" "왜 그러죠? 그 애가 무슨 일을 벌이기라도 했나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번에도 마리엔 공주의 국상을 절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화를 내셨습니다. 덕분에 르미엘 왕자님을 지지하고 있는 귀족들은 오늘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라냔 백작은 그 때를 떠올리는 것인지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그리고 오펠리우스 왕비의 아름다운 얼굴도 살짝 구겨졌다. 그녀는 한숨을 토해낸 다음 자신의 치부를 말하는 사람처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도대체 그 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르미엘처럼 총명한 애가 나와 마리엔 사이를 모를 리가 없어요. 그런데도 무조건 마리엔을 싸고 도니, 원." 오펠리우스 왕비의 말에 그라냔 백작의 얼굴은 한층 어두워졌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같은 기억을 떠올렸다. 마리엔이 아직 어렸을 때, 아직 왕위가 뭔지 왕비가 뭔지 모를 때, 마리엔은 유난히 르미엘 왕자를 따랐다. 아마 자신과 같은 검은 머리라 친근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검은 머리는 르미엘 왕자말고도 많지만 어린 마리엔의 눈에는 그가 무척이나 특별하게 보였던 것 같다. 르미엘 왕자도 아장아장 걸음으로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는 여동생을 귀여워하곤 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턴가 마리엔은 르미엘 왕자에게 초롱거리는 눈빛이 아니라 경멸 어린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그 후부터 르미엘 왕자와 마리엔은 마치 어렸을 때의 일은 깨끗이 잊어버린 것 같은 사이가 되었다. 물론 마리엔의 일방적인 외면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팡세를 마신 이후 마리엔은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르미엘 왕자를 외면하지 않았다. "르미엘을 위해서라도 마리엔은 없어져야 해요." 오펠리우스 왕비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른 말을 중얼거렸다. 과거에도 르미엘 왕자는 라이언 왕자와는 달리 제멋 대로인 면이 많았지만-여자를 줄줄이 달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아직 약혼을 하지 않은 것도 그렇다- 요즘 들어서는 더욱 그랬다. 오펠리우스 왕비는 이 모든 것이 마리엔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예전부터 마리엔은 거머리와 같은 존재였다. 거머리는 들러붙어서 피를 빨아먹기 전에 박멸해야하는 존재다. 오펠리우스 왕비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얀 커튼 사이로 햇살이 쏟아졌다. 며칠 동안 눈이 펑펑 내린 후라 그 기운은 약했지만 마음에 한줄기 빛을 가져다줄 정도는 충분했다. 그 빛은 침대 위에 누워있는 여인의 얼굴에도 내려왔다. 여인은 눈이 부신 지 눈을 가늘게 떴지만 오랜만에 보는 맑은 하늘이 반가운지 빙그레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빛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창백한 얼굴이 이제는 새하얗게 보였다. 때문에 그녀의 머리맡에 앉아있는 플로라 공주는 침울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창가를 보던 여인이 다시 고개를 돌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밝게 웃었다. "오랜만에 날씨가 맑구나.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플로라 공주의 말에 아리란드는 생긋 웃었다. 아리란드는 병자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가 아니라 밝고 깨끗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녀의 루비 같은 눈은 여전히 희망에 차있었고, 머리는 한데 묶어 길게 늘어져 있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붉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것은 아리란드를 어리게 만든 것 같은 플로라 공주도 마찬가지였다. 아리란드는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는 플로라가 고마웠다. 그러나 이 방을 나가면 플로라 공주의 붉은 눈동자가 빛이 꺼진 촛불처럼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걸 직접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육감과 같은 것이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래서 아리란드는 적어도 플로라 공주 앞에서는 힘든 척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아리란드의 천성이 그렇게 만들었다. "눈이 쌓여서 예쁘구나. 건강하다면 당장 달려가서 눈 속에 놀고 싶을 정도야. 눈이 녹기 전까지 반드시 나아야겠어." 아리란드의 말에 플로라 공주는 피식 웃었다. 플로라 공주는 오랜만에 억지 웃음이 아니라 진짜 웃음을 지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어머니가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웃음이 나왔다. 아리란드는 나이가 들어도 소녀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아리란드는 아쉬운 눈으로 밖을 내다보다가 플로라 공주에게 밖에 나갈 것을 권했다. "우리 나라는 눈이 잘 오지 않으니 이 기회에 밖에 나가보는 것이 어떠니?" "괜찮아요. 여기 오는 길에 많이 봤는걸요." 플로라 공주는 거짓말을 했다. 사실은 쌓여있는 눈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여러 가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기에 눈을 볼 정신이 없었다. 바로 1월 14일인 오늘 국상이 전면적으로 결정되었다. 예상대로 라디폰 공작을 포함한 많은 귀족들이 엄청나게 반발했다. 르미엘 왕자도 시체가 발견되지도 않았는데 그럴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미르 백작의 강력한 주장과 암묵적인 동의를 표하는 많은 귀족들 덕분에 결정은 변경되지 않았다. 이미 뒤집을 수 없는 상황임을 감지한 라디폰 공작은 마리엔의 장례식을 2월 1일과 15일에 두 번 해야한다고 말했다. 2월 1일은 여러 신들께 마리엔의 평안과 안식을 위해 기도해야하며, 15일에야 비로소 백성들에게 국상을 공표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국상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이 주장은 받아들여졌다. 이제 얼마 후면 마리엔의 장례식이 이루어진다. 플로라 공주는 자신도 모르게 한쪽 입술을 비뚜름하게 올렸다. 우연이었을까? 그 때 아리란드가 마리엔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요즘은 마리엔이 오질 않네." 그녀의 어조에는 약간의 섭섭함이 섞여있었다. 그 말에 플로라 공주의 눈이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몸이 좋지 못한 아리란드가 진실을 알고 너무 큰 충격을 받을까봐 계속 마리엔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있었다. 플로라 공주 본인은 물론 가끔 찾아오는 나미르 백작과 시녀들도 마리엔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은 금기에 가까웠다. 플로라 공주는 아무 것도 모르는 자신의 어머니가 가엾고 동시에 한 여자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냉정을 되찾고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리엔...언니도 바쁘겠죠." 플로라 공주는 언니라는 말을 하면서 얼굴을 심하게 찡그렸다. 하지만 아리란드는 때마침 마리엔이 오지 않는 이유를 생각하느라 이런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아리란드가 다시 플로라 공주의 얼굴을 봤을 때는 이미 플로라 공주는 미소짓고 있었다. "그런가? 하지만 몇 달 동안 전혀 보지 못했는걸. 무슨 일이라고 있니?" 아리란드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말했다. 아무리 마리엔이 바빠도 몇 달 동안 시녀를 통해서 안부를 전해온 적도 없었다. 마치 마리엔의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처럼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자도 없었다. 나미르 백작은 아리란드가 마리엔이 친 딸 같다는 말을 할 때마다 한없이 불쌍하고 한없이 불타오르는 눈을 하곤 했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아리란드는 매번 마리엔에 대한 소식을 물어보려다가도 그만 입을 닫고 마는 것이다. 아리란드는 이번에야말로 무엇인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플로라 공주를 보았다. 그러나 플로라 공주는 헤헤 웃으며 말했다. "전혀요. 너무 건강해서 문제죠." "그래?" 플로라 공주의 자연스러운 태도에 아리란드는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굴었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 아리란드는 이번에는 플로라 공주의 모습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그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빠졌다는 허전함이 느껴졌다. 한참 들여다보던 아리란드는 그 것이 무엇임을 알아냈다. "응? 목걸이는 어디 갔니, 플로라?" "목걸이요?" "예전에 네 생일에 마리엔이 선물해준 목걸이 말이야. 맘에 든다고 매일 하고 다니더니 요즘 들어서는 못 본 것 같구나." 아리란드가 이상하다는 듯이 보자 플로라 공주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뱅뱅 말아 올리면서 말했다. "아까워서요. 눈이 그치긴 했지만 언제 내릴지 모르잖아요. 물을 묻히고 싶지 않아서요." 플로라 공주의 순진한 말에 아리란드는 웃고 말았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아낀다는 소리겠지. 그러나 정작 플로라 공주의 생각은 달랐다. 이제는 그 목걸이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왠지 그 목걸이를 하고 있으면 마리엔의 손바닥에서 노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 목걸이를 건네주면서 보여주었던 마리엔의 미소가 떠올라 기분이 상했다. 그런 것이 모두 연기였다는 것에 분통마저 터졌다. 어쩌면 처음부터 어머니를 노리고 자신에게 접근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처음에는 정말로 마리엔 언니가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필이면 왜 어머니를 노렸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동안 아껴주었던 것이 떠올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때 외삼촌인 나미르 백작이 그녀를 다잡아주었다.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원래부터 마리엔의 평판은 좋지 않으며 그녀로 인해 불행해진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그래도 긴가 민가 했다. 하지만 처음 저주에 대한 것이 알려지고 냉랭했던 마리엔의 태도를 보고 확신했다. 내가 속았다고 말이다. 따사로운 미소를 보여주던 언니는 없었다. 냉기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냉소를 머금고 있는 마리엔 공주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되자 모든 것이 나쁘게 보였다. 한 번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라고 단정지으면 그 사람이 아무리 착한 행동을 해도 삐뚤어지게 보이는 것처럼 플로라 공주도 그랬다. 그리고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질투라는 감정도 생겨났다. 에릭은 우연인지 아니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언제나 마리엔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플로라 공주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어쩌면 자신의 마음을 알고 비웃었을지도 모른다는 피해망상에 가까운 생각마저 들었다. 마리엔이 행방불명됐다는 사실에 플로라 공주는 기뻐했다. 신은 존재했다. 분명히 천벌을 받은 것이다. 레프스터 국왕이 빼돌리다시피 사헤트로 보냈지만 결국은 하늘이 용서하지 않은 것이다. 잘 된 일이다. 시체가 없다는 것이 약간 마음에 걸렸지만 설마 살아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플로라 공주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아리란드가 마리엔을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플로라 공주는 진실을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내다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잿빛이었던 하늘이 청명하게 개어있었다. 온갖 더러운 것을 눈과 함께 씻어버린 것처럼 너무도 맑고 투명한 하늘이었다. 그러나 플로라 공주는 그 아름다운 하늘을 보면서 남모르게 한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34- 반격의 시작 #34- 반격의 시작 제인드력 428년 2월 1일. 그 날은 왕국의 수도 근처에 사는 귀족들은 물론 지방에 터를 잡고 있는 영주들까지 왕궁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귀족들의 행렬에 많은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왕궁을 바라보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투명한 하늘을 향해 뾰족 솟아있는 궁전의 지붕밖에 없었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 다만 무언가 한바탕 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으로 화려한 귀족들의 행렬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페드인 왕국을 손에 쥐고 뒤흔드는 모든 사람들이 궁 내에 있는 신전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웅장한 문을 지나면 정면으로 보이는 벽의 위쪽에는 주신 제르마와 5대 신의 부조가 새겨져있었다. 금방이라도 벽에서 튀어나와 살아 움직일 것처럼 생동감 넘치는 이 부조의 아래쪽에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선단과 왕족들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 곳에는 페드인 왕국의 최고 지배자인 레프스터 국왕과 오펠리우스 왕비, 라이언 왕자, 르미엘 왕자, 데미나 공주, 플로라 공주까지 모든 왕족들이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너나할 것없이 침통한 표정이 띄어져 있었다. 다만 라이언 왕자와 플로라 공주의 눈이 뜻 모를 작은 환희에 차있었지만 이는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 아래에는 왕족들과 마찬가지로 우울한 얼굴로 서있는 귀족들이 있었다. 신전은 이들로 인해 꽉 찼다. 그러나 아무도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검은 옷을 입은 귀족들은 자물쇠로 잠가버린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바로 마리엔 공주의 죽음을 애도하는 예배를 올리는 날이었다. 어색하고 경직된 분위기는 침묵과 함께 사람들을 내리눌렀다. 우는 사람은 없었다. 레프스터 국왕은 왕이기에 눈물을 보일 수 없었고, 마음이 여린 오펠리우스 왕비는 그렁그렁한 눈물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라이언 왕자와 플로라 공주는 거의 무표정에 가까웠고, 르미엘 왕자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아예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참석하지 않으려는 것을 억지로 이 자리에 오게 했다는 것을 아는 국왕은 그런 르미엘 왕자에게 어떠한 꾸중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자신도 그의 아들처럼 이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이런 마음도 모르는 대신관은 천천히 입을 열어 죽은 자에 대한 애도와 평안한 휴식을 노래하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것은 마리엔 공주님에게 마지막 이별의 말을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한없이 자비로우시고 부드러우신 제르마 님께서는 그의 품으로 자신의 손으로 지은 마리엔 공주님을 불러들이셨습니다. 이제 마리엔 공주님은 영원함과 고결함이 가득한 천상에서 행복하게 살아가실 것이라 믿습니다." 대신관의 말은 계속되었다. 대신관의 앞에는 시신이 없는 관이 뚜껑이 열린 채 알록달록한 속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 안에는 꽃들로 가득 했던 것이다. 겨울이라 구하기 힘들었지만 제 1공주궁의 시녀들이 정성스레 아름다운 꽃들만 모아 만든 화환들이 구슬픈 예식과는 어울리지 않는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향기는 관에 배어드는 것은 물론 신전 전체로 퍼져나갔다. 강렬한 향기는 신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코를 간질였다. 오펠리우스 왕비도 꽃의 정들이 뿌리고 다니는 은은한 향을 맡을 수 있었다. 순간 슬픔에 젖어있는 것 같던 그녀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꽃의 향기는 너무도 강렬하고 너무도 활력이 넘쳐 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생명의 끝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시작, 용솟음치는 생명력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 향기 속에서 마리엔의 모습이 느껴지는 것은 그녀 혼자만의 착각은 아닌 듯 했다. 레프스터 국왕의 파리한 얼굴은 애상에 잠겨있었고,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리고 있는 르미엘 왕자는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꽉 깨물고 있었다. 라이언 왕자와 플로라 공주는 꽃의 장례식을 치르는 것처럼 꽃만 든 관을 살짝 흘겨보고 있었다. 이미 두 패로 나뉜 귀족들도 그러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든 사람들이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 절반만 진정으로 안타깝고 슬픈 얼굴이 되었다. 나머지는 지독한 향기에 미미하게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그러나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그런 티를 낼 수 없어 잠자코 대신관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만 했다. 그리고 꽃의 향기에 익숙해졌을 때, 예식은 거의 끝으로 치닫고 있었다. 상석에 자리한 오펠리우스 왕비의 눈에 고개를 숙이고 고인을 애도하는 자들이 보였다. 하지만 저 중에 절반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고개를 숙이고 남모르게 웃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펠리우스 왕비도 웃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꾹 참았다. '언제까지고 착하고 자애로운 어머니로 남아야해. 날 저 멍청한 꼬마애나 나미르 백작과 같이 보면 곤란하지. 자신의 본마음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은 맨 몸으로 전장에 서있는 것과 마찬가지지.' 오펠리우스 왕비는 여전히 슬픈 얼굴로 살짝 플로라 공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플로라 공주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나마 짓던 슬픈 표정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는 오히려 기쁜 감마저 느껴졌다. 만약 레프스터 국왕이 크게 상심하고 있지만 않았어도 상당히 질책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귀족들 사이에서 평판이 나빠질 것은 뻔했다. 아무리 마리엔이 저주를 걸었다고는 하나 장례식에서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결코 좋지 않았다. 그리고 나미르 백작도 플로라 공주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 그는 노골적으로 비웃으면서 빈 관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오펠리우스 왕비는 장례식이 끝나면 두 사람을 불러 질책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사이에 대신관의 말은 끝이 나고 구슬프고 잔잔한 음색의 음악이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과연 마리엔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는지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도에 열중했다. 이 음악이 끝나면 바로 왕족들이 마리엔의 관에 키스를 하고 이별의 인사를 나누게 될 것이다. 원래는 시신의 이마나 입술에 하는 것이지만 시신이 없는 관계로 관에다 하기도 결정되었다. 그 다음은 귀족들이 꽃을 바치거나 '부디 평안하시길' 과 같은 말을 하며 마지막 인사를 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끝나면 다시 한번 대신관의 주도로 기도를 하고 관은 15일까지 다른 곳으로 옮겨진다. 그리고 15일에 정식으로 국상이 치러지게 되는 것이다. 그 때는 관을 담은 마차로 아렌테를 한 바퀴 돈 후 왕족들의 묘지에 매장된다. 기도를 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가지각색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눈을 감자 더 이상 자신의 표정을 감출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확연히 변한 것은 아니지만 슬픈 얼굴 일색이던 얼굴들이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즐거운 듯 입술이 곡선을 그리고 올라간 얼굴, 무표정한 얼굴, 안타까워서 인상을 찌푸린 얼굴, 슬픔에 젖어 일그러진 얼굴. 많은 얼굴들은 조용한 현악기의 음률에 몸을 맡긴 채 손을 모은 채 신을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 평화롭다면 평화롭고 슬프다면 슬픈 기도의 순간은 깨지고 말았다. 누군가 육중한 문을 벌컥 열고 들이닥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기도하던 것을 멈추고 눈을 반짝 떴고, 음악 소리도 멈췄다. 모든 사람들의 눈은 이 무례한 침입자에게 쏠렸다. 일순간 시선을 한 몸에 맡게 된 기사는 당황해서 얼굴이 벌개졌다. 그러나 이미 그 이전에도 기사의 얼굴은 흥분과 놀라움으로 들떠있었다. "이 무례한 짓인가!" 그라냔 백작의 호통에 기사는 어쩔 줄 몰라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기사는 손짓 발짓을 해가며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전하려 했지만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기사가 말을 더듬거리는 것이 그라냔 백작의 호통이나 이 후 내려질 무시무시한 처벌 때문이 아니라 너무도 놀라서 말이 엉키는 것 때문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기사의 말보다는 그의 몸짓에 더 주의를 기울였다. 기사는 바깥쪽을 가리켰다 다시 신전을 가리키면서 계속 소리치고 있었다. "갑자기 그 분이 나타나셨단 말입니다!" 기사도 답답한지 자신의 가슴을 쳤지만 도통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듯 했다. "차근차근 말해보게." 라디폰 공작이 당황하고 있는 기사를 향해 말했다. 그 옆에 있던 귀족들은 라디폰 공작이 그 말을 하면서 살짝 웃었다고 생각했다. 공작의 타이르는 듯한 말에 기사는 두 볼을 불룩하게 부풀렸다가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가슴 속에 가득 들어찼던 흥분과 당황, 놀라움이 숨을 통해 빠져나가는 듯했다. 한결 진정이 된 기사는 이번에는 제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마리엔 공주님께서...!" "그 다음은 내가 말하지." 그러나 기사의 말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누군가 그의 말을 가로채서 말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열려진 문을 통해 당당히 들어왔다. 바깥에 경비를 서고 있던 기사들 중 누구도 그 사람을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새로 들어온 사람의 목소리와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엷은 자줏빛 드레스 위에 두툼한 겨울 외투를 입고 있는 소녀는 비웃음인지 기쁨으로 인한 웃음인지 알 수 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은빛 갑옷을 입고 있는 에릭과 세린이 뒤따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검은 색 일색의 사람들 틈에서 확연히 눈에 띄었다. 내가 들어서자 신전 내는 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한 겨울철 새벽의 고요와도 같은 조용함이 휘몰아쳤다. 모든 사람들은 감추려는 기색도 없이 넋을 잃고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관을 향해 걸어갈 때마다 그들의 시선도 따라서 움직이고 있었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내 발걸음 소리와 뒤를 따르고 있는 에릭과 세린의 발걸음 소리뿐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짜릿한 쾌감과 통쾌함이 몸을 뚫고 지나갔다. 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발걸음이 이보다 가벼울 수는 없었다. 내가 관 앞에 당도할 때까지도 입을 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관에는 딴 지 얼마 안된 듯한 꽃으로 엮은 화환들이 은은한 향기를 풍기며 누워있었다. 나는 그 중에 하나를 집어들어 코로 가져가 댔다. 진한 향기가 코를 통해 전해져왔다. "향기 좋은데요." 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이 화환은 나의 시신을 대신하는 꽃이 아니라 나의 귀환을 환영하는 꽃이 되었다. 그러자 그제야 사람들이 경악에 찬 사람들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나는 화환을 손에 든 채 앞을 보았다. 위쪽에 앉아있는 나의 가족들이 보였다. 레프스터 국왕은 믿어지지 않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고, 르미엘 왕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라이언 왕자는 너무 놀라 멍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고, 플로라 공주는 의자 손잡이를 부셔버릴 것처럼 올려놓은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오펠리우스 왕비는 입술이 경련을 일으키며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그동안 건강하셨는지요?" 희극의 배우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를 굽히고 일어났지만 여전히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너무도 놀라서 굳어버린 사람들을 보면서 실실 웃음이 나왔다.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기쁨과 환희에 찬 사람들, 그리고 허탈감과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 끼리끼리 노는 것인지 양편으로 나뉘어 서있었다. 때문에 내 왼쪽에 선 사람들은 기뻐하고, 오른쪽에 선 사람들은 부들부들 떠는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났다. 떠는 것이 두려움 때문인지 분함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마리엔 공주님,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능청맞게 장례식에 참가했던 라디폰 공작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러자 티스몬 백작도 한 걸음 걸어나와 고개를 숙였다. "잘 돌아오셨습니다." "환영해주시니 고맙습니다." 나도 두 사람을 오늘 처음 본 것처럼 예의바르게 답했다. 그리고 우리들의 대화에 정신을 차린 많은 귀족들이 달려와 환영했다. 물론 뒤편으로 물러나 이를 가는 인간들도 있었다. 나는 그런 자들을 향해 서슴없이 비웃음을 날려주었다. 어차피 내 편이 아닌 자에게 좋게 보일 이유가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동안 쌓였던 것이 있어서라도 그렇게는 못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내 주위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물러났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레프스터 국왕이 서있었다. 그의 뒤에는 왕비와 왕자, 공주들이 따르고 있었는데 저마다 표정이 달랐다. 레프스터 국왕의 두 눈에는 기쁨이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살아있었구나." 레프스터 국왕은 그 말을 하고 나를 안았다. 등을 토닥여주는 국왕의 큰 손이 무척이나 따뜻했다. 레프스터 국왕은 나를 금방 풀어주었지만 한 손을 꼭 잡은 채였다. 그동안 상심이 컸는지 얼굴이 무척이나 안 돼 보였다. 레프스터 국왕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했지만 어느 말부터 해야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여러 번 입을 열려다 그만두었다. 대신 따뜻한 눈길을 계속 보냈다. "마리엔, 살아있었구나. 정말 다행이야." 울먹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오펠리우스 왕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커다란 눈물 방울이 왕비의 두 눈 끝에서 양쪽 입가로 스르르 떨어졌다. 나는 자유로운 한 손을 꽉 쥐었다. 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번에는 기쁨과 통쾌함 때문이 아니었다. 만약 증거만 있었다면, 증거가 단 한 개만 있었다면 당장에 뺨을 올려쳤을 것이다. 그러나 끓어오르는 분노를 다스렸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말이다. 나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살아있었지요. 반드시 살아남아서 할 일이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나는 레프스터 국왕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국왕은 기꺼이 나를 안아주었고, 나는 그의 팔 사이로 오펠리우스 왕비에게 분노에 찬 시선을 보냈다. 진심으로 살기를 담아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오펠리우스 왕비가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정말이지 내가 이렇게 살의와 악의로 똘똘 뭉쳐있는데 웃을 수 있다면 그 자는 인간이 아니라 마족일 것이다. 오펠리우스 왕비는 한동안 얼이 빠진 것 같더니 이내 입술을 깨물며 두려움을 누르려고 애썼다. 두려움은 우리의 존재 속에서 존재하며, 우리의 생각을 물들이고, 우리의 심장 속에 도사리고 있다가 심장을 옭아매는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느끼지 않으려 해도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던 본능은 그 것을 느끼고 자연스럽게 반응한다. 나는 몸서리치는 오펠리우스 왕비에게 차가운 시선을 다시 던진 다음 국왕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오펠리우스 왕비는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나도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진짜 싸움은 여기서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 후에 나는 자연스럽게 르미엘 왕자에게 다가갔다. 다른 왕족들은 나를 반기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르미엘 왕자는 연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실감나게 기뻐했다. 나는 처음으로 르미엘 왕자에게 지어낸 표정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를 지어주었다. 내가 르미엘 왕자와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자 내키지 않은 듯한 걸음으로 라이언 왕자가 다가왔다. 그러나 그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싫은 기색은 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그가 나를 어떻게 보는 것을 알고, 은연중에 풍기는 분위기 때문에 얼떨떨해한다고 느꼈다. 그의 뒤에는 플로라 공주가 서있었는데 그녀는 냉랭한 태도를 보였다. 이미 예상을 한 일이기에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나는 반겨주는 사람과 얼떨떨해하는 사람,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들 틈 속에서 그제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돌아온 것이다. ------------------------------------------------------------ 장례식 날짜를 바꿨습니다. 2월 1일과 15일로, 국상이 결정된 날은 1월 14일로 변경했습니다. #34- 반격의 시작 #34- 반격의 시작 넓은 홀은 화려한 샹들리에의 빛으로 가득 찼다. 빛들은 사람과 사물에 부딪쳐 투명한 분말을 만들어냈고, 이 분말들은 망토라도 되는 냥 나를 휘감았다. 악단의 흥겨운 연주와 많은 사람들의 축하인사 또한 나를 꾸며주는 하나의 부속품이었다. 이 무도회의 주인공은 나. 당연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환한 조명을 받고 있는 주연 배우처럼 그 어느 때보다 주목을 받고 있었고, 들리는 말은 거의 대부분 듣기 좋은 달콤한 말뿐이었다(간혹 배배 꼬인 말을 하는 사람도 있긴 했다). 심지어 파티에 나온 음식조차 내가 좋아하는 고기 요리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맛있는 식사는 긴 귀족들의 행렬이 끝나기 전까지는 할 수 없었다. "폐하, 이 경사스런 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리옵니다. 마리엔 공주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셔서 소신도 정말로 기쁘옵니다." "고맙소, 세반 남작." 나의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귀족들이 선물을 한 보따리씩 싸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만에 준비하기가 힘들었을텐데도 불구하고 귀족들은 제각각 푸짐한 선물을 준비해왔다. 대부분 시간이 부족해서 질보다는 양으로 승부하는 추세였지만 간혹 진귀한 선물을 들고 오는 자도 있었다. 이렇듯 귀족들의 축하말을 듣고 먼저 국왕이 답한 후 내가 간단히 감사의 말을 전하는 사이 선물이 들어오곤 했다. 물론 나보다는 레프스터 국왕에게 향한 말들이었기에 나는 비교적 한가한 편이었다. 아무리 무도회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절대 권력을 지닌 국왕 앞에서는 환한 등불 앞의 반딧불과 같은 존재였다. 레프스터 국왕은 장례식에 참석하려다 졸지에 나의 귀환 축하 무도회에 착석하게 된 수많은 귀족들을 일일이 대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 같으면 그 긴 행렬에 질려서 짜증을 팍팍 낼텐데 레프스터 국왕은 이 상황을 지겨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딸네미가 살아 돌아왔으니 무슨 일인들 기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저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살아있다는 실감이 팍팍 들텐데 어찌 즐겁지 않으리요. 레프스터 국왕은 그야말로 만면에 희색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의 옆에 앉아있는 나도 마찬가지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나에게 바쳐지는 선물만으로도 기분이 좋았고, 국왕의 왼편에 앉은 오펠리우스 왕비와 플로라 공주의 얼굴을 한번씩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했던 것이다. 플로라 공주는 얼마나 기분이 나쁜지 무도회에 잘 나오지 않는-거의 나오지 않는-에릭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시선조차 보내지 않았다. 어떠한 순간에도 굴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거늘 아직 그 정도까지는 사랑이 깊지 못한 것인가? 그러나 오펠리우스 왕비는 그녀답게 전혀 빈틈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레프스터 국왕보다 더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얄밉긴 하지만 대단한 여자라는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내가 씨익 웃어주면 조금 어색한 미소를 띄우긴 했다. 그 모습이 감추고는 있지만 왕비의 동요를 보여주는 것 같아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귀족들의 인사가 끝난 후의 일이 미리부터 나를 즐겁게 하고 있었다. 곧 일어나게 될 대소동에 대한 기대가 절로 마음을 들뜨게 했다. 한참동안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긴 귀족들의 행렬이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마지막 사람의 순서까지 끝나자 레프스터 국왕이 힘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레프스터 국왕이 이렇게 활기에 넘치는 것은 이 근래에 볼 수 없었던 일이라는 라디폰 공작의 말이 떠올랐다. "이 자리에 자리한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바이오. 짐은 어제 잃어버렸던 소중한 딸을 다시 되찾게 되어 말로 이루 다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고 있소. 마리엔이 돌아온 것은 세계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제르마 님과 다섯 분의 위대하신 신들의 은총이자 축복이오. 때문에 2월 1일을 축복의 날로 정하고, 매년 이 날을 기려 위대하시고 존귀하신 신들께 경배하도록 하겠소." "폐하의 지엄하신 분부 그대로 받들겠습니다." "그럼 모두들 이 무도회를 마음껏 즐기기 바라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홀에 모인 사람들이 허리를 숙이고 입을 모아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말을 마친 레프스터 국왕은 내게 이들에게 답례 인사를 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이는 생일파티 때나 기타 선물을 받는 무도회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모두에게 고맙다는 내용의 짤막한 말을 건네는 식의 의례였다. 이 때를 기다리고 있던 나는 진한 웃음을 머금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문득 사람들의 눈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내가 바로 말을 하지 않고 시간을 끄니 무슨 중요한 말이라도 하려는 것이 아닐까 궁금해하고 있었다. 라디폰 공작과 눈을 마주치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저를 위해 주시고 아껴주시는 분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너무도 기뻐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군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 약소하나마 준비한 것이 있답니다.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합니다." 내 말에 사람들의 호기심은 더욱 강렬해졌다. 귀족뿐만 아니라 내 옆에 앉아있는 왕족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런 경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이따금씩 귀족이나 왕족이 무도회에 유명한 음유시인이나 배우, 무희, 어릿광대들을 부르는 경우가 있었다. 문제는 그 중 어떤 자들을 불렀냐는 것이다. "연극 좋아하시나요?" 내 말에 그제야 귀족들은 내가 꾸민 일이 뭔지 알겠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곳곳에서 내 말이 호응하는 말들이 터져 나왔다. 예상했던 반응. 공주가 직접 준비했다는데 '연극은 아주 싫어합니다' 내지는 '잠자기에 딱 좋겠군요'와 같은 발언을 할 용감(?)한 인간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는 '배우들은 들어오세요'라는 당연한 말을 생략한 채 계속 말을 이었다. "저도 연극을 아주 좋아합니다. 특히 주인공이 곤경에 처했다가 상황을 확 뒤집는 반전 부분을 좋아하지요." "저도 공주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훌륭하신 식견입니다." "반전이야말로 연극의 백미입지요." 내가 자신들의 호응을 원하는 것을 아는지 아니면 편한 분위기로 이끌어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맞장구를 쳤다. 그들의 말 속에는 '과연 어떤 연극이기에 이렇게 거창하게 소개하는 건가?'하는 의문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내가 보여줄 것은 그들이 원하는 연극이 아니었다. 연극과 아주 비슷하지만 연극은 아닌, 현실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도 연극과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연극이란 현실의 일 중 한 부분을 약간 각색해서 보여주는 것뿐이잖아요. 그럼 지금 이 순간이 여러분에게 있어서 희극인가요? 비극인가요?" 나는 지금까지의 말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듯한 말을 꺼냈다. 사람들의 얼굴의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관이 있었다. 그 것도 아주 많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홀로 내려섰고,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낀 귀족들은 조용히 내 입이 다시 열리기를 기다렸다. "반전을 좋아한다고 하셨죠? 그럼 보여드리죠. 각본도, 연습도 없는 바로 이 순간의 반전을." 나는 가슴을 활짝 펴고 말했다. 나를 짓눌러왔던 오명을 벗어 던지고, 뒤따라 다니 던 재앙의 꼬리표를 떼어내려는 지금 이 순간, 내 가슴이 고동쳤다. 하지만 생각보다 심하지는 않았다. 아직은 끝이 아닌 시작이기에. 아직 가슴 속에 풀어야할 실타래들이 남아있기에. 수많은 눈들이 나에게 날아와 꽂혔다. 어색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흥분과 기대만이 존재할 따름이었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나는 출입문을 가리켰다. "아주 중요한 두 분을 모셨답니다. 제가 보여줄 연극에서는 빠져서는 안 될 분들이랍니다." 내가 문을 가리키고 사람들의 눈이 문으로 돌아간 순간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내가 왜 통쾌한 순간을 자꾸 뒤로 미루며 말을 늘어놓았겠는가? 이 모든 것이 시간을 맞추기 위한 일련의 애드 리브였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기가 막히게 시간을 맞췄다. 능숙하게 시간을 끈 내 자신이 대단하도다. 의기양양하게 웃고 싶지만 그건 모든 일을 마친 후로 미루기로 했다. 그 사이 밖의 소란스러움은 어느 정도 잦아들었고, 얼떨떨한 시종의 목소리가 문 사이로 새어 들어왔다. "아리란드 전하와 로톤...네? 로톤이 아니고 로튼이라고요? 실례했습니다. 로튼 님이 오셨습니다." 그 말과 함께 열리기 시작한 문 틈 너머로 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과 또 다른 의미로 풍성한 로튼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 어떻게?!" "어떻게 아리란드 전하께서 이 곳까지 오실 수 있지?!" "저 남자는 도대체 누구야?" "귀족 중에 저런 사람은 본 적이 없는데." 순식간에 사람들이 술렁였다. 한순간에 세계를 일주하는 바람처럼 불안과 의문이 삽시간에 퍼져갔다. 살짝 사람들을 살펴보던 내 눈에 누구보다 놀란 나미르 백작의 모습이 비췄다. 어제까지만 해도 병석에 누워있던 사람이 병색이 완연하긴 하지만 자기 몸을 가누게 된 상황과 누구도 아닌 내가 이들을 부른 지금의 상황이 혼란스러울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뒤쪽에 앉은 왕족들의 반응도 구경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 두 사람에게 환영한다는 의미로 팔을 활짝 펼쳐 보이며 말했다. "아리란드 전하, 어서 오십시오. 로튼도 잘 왔어요." "이게 무슨 행동이십니까? 아리란드 전하는 몸이 불편하시단 말입니다."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온 나미르 백작이 눈에 칼을 세우고 말했다. 뒤에 앉은 레프스터 국왕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말이다. 그나마 레프스터 국왕이 버티고 있고, 무도회의 흥겨운 분위기 덕에 이 정도지 만약 단 둘이 있었다면 상당히 험악한 말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아리란드 전하가 대신 그의 물음에 답했다. "어머, 마리엔의 잘못이 아니랍니다. 단지 오늘 파티가 있다는 것을 이 분을 통해 알려주었을 뿐이에요. 그런데 어째서 저만 무도회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거죠? 게다가 마리엔이 몇 달만에 다시 돌아온 거라고 하던데. 그런 말은 처음 듣는군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아리란드 전하는 창백한 얼굴 가득 섭섭한 기색을 드러내면서 나미르 백작을 추궁했다. 정확히는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추궁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눈은 나미르 백작에게 향하고 있었지만 질문은 모든 사람에게 던진 것이다. 나미르 백작은 아리란드 전하가 드물게 매섭게 쏘아붙이자 쩔쩔매며 말을 돌렸다. "몸이 불편하신 듯해서 알리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아리란드 전하는 오는 도중에 단단히 마음을 먹었는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생각해 보라. 모든 사람이 자신을 '왕따'시킨 격이니 어찌 화가 나지 않으리요. "좋아요. 무도회 건은 그냥 넘어가지요. 하지만 어째서 마리엔이 여행을 떠났다는 얘기를 나만 모르고 있을 수 있었단 말입니까? 제 귀를 막아서 어쩌려는 생각들이셨습니까?" 나는 계속 추궁하는 아리란드 전하를 보면서 상당히 놀랐다. 그녀의 얼굴은 잘못한 아이를 꾸짖는 어머니의 엄격한 얼굴과 비슷했다. 언제나 웃으며 연약하기만 할 줄 알았던 아리란드 전하에게도 단호한 면이 있었던 것이다. 평소의 모습은 몰라도 지금의 아리란드 전하는 외유내강이라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오랫동안 밖을 나가지 못해 하얗게 변한 얼굴이 아리란드 전하를 더욱 여리게 보이게 만들었지만 단호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속에 감춰진 강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이런 식의 추궁과 변명이 아니었기에 아리란드 전하를 말렸다. "아리란드 전하, 제가 설명해드리겠으니 진정하세요." "이런. 제가 흥분한 나머지 실례를 범한 것 같군요." 비로소 레프스터 국왕과 수많은 귀족들의 눈을 생각한 아리란드 전하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상냥하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일러주기 시작했다.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아리란드 전하께서 어째서 아프셨는지 아셔야한답니다. 사실은 아리란드 전하는 저주에 걸리셨어요. 매우 악,독,한 '작은 악동'이라는 저주에 걸리셔서 아무리 어의들이 진찰을 해도 원인을 알 수 없었던 거랍니다. 이 저주는 아~주 오래 전부터 걸렸던 것으로 조금씩 전하의 몸을 갉아먹고 산 기생충과 같은 존재랍니다." "저주?" 아리란드 전하는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본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옆에 있던 나미르 백작이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나를 막으려 했지만 내 입이 먼저 열렸다. "그런데 그 저주를 건 배은망덕하고 사악하고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려야 할 악의 근원은 바로 저랍니다." 나는 아주 재미있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고, 동시에 아리란드 전하의 하얗던 얼굴이 이제는 표백이 된 것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아리란드 전하는 약한 햇볕에 금방이라도 녹아버릴 눈사람처럼 보였다. 그녀는 너무도 충격적인 말에 멍하니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이제 홀은 술렁이는 것으로 모자라 해일이 일어나는 바다처럼 거세게 일렁였다. 지금까지 혐의를 부정하던 내가 죄를 전격 시인하는 발언을 했으니, 그 것도 나의 귀 환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입에 담았으니 이 정도 반응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이제야 시인하시는군요!" "...라고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나미르 백작의 말을 깨끗이 무시한 나는 손바닥을 뒤집어 보이며 말했다. 옆에서 나미르 백작은 물론 사람들 틈 속에서 말도 안 된다는 식의 말이 튀어나왔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리란드 전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에 대해 아리란드 전하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가 정말로 저주를 걸었다고 생각하시나요?" 내 질문에 아리란드 전하의 티 없이 맑은 두 눈이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곧 이어 아리란드 전하는 크게 숨을 들이셨다 내쉬며 말했다. "놀랐잖아요, 마리엔. 당신이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당신이 보내준 로튼이라는 분이 주신 약을 먹으니 이상하게 힘이 나는 것 같아요. 만약 내게 저주를 걸었다면 이 분을 보냈을 리도 없겠죠. 그리고 우리는 가족이잖아요." 아리란드 전하의 마지막 말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은은하게 번지는 따뜻함이 뭔지는 모르겠다. 하지는 나는 아리란드 전하를 향해 웃어 보였던 듯 하다. 잠시 나와 아리란드 전하는 말없이 서서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대치도 나미르 백작의 방해로 곧 끝이 났다. "전하, 믿지 마십시오. 이미 증거가 나와있습니다." 나미르 백작은 나를 착한 사람을 꼬여 악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악마 정도로 보는 것 같았다. 그런 그를 보니 분노에 앞서 한숨이 나왔다. 엄밀히 말하면 악마가 맞긴 하지만 사람이 저렇게 단순해도 되는 걸까? 가족인 아리란드 전하가 변을 당할 뻔했으니 격렬한 반응을 보일 수도 있지만 남의 손아귀 위에서 놀고 있다는 사실은 아는 건지 모르겠군. 만약 내 무죄를 입증해 보일 방법이 없었다면 나미르 백작을 한심하게 여길 여유도 없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자 나미르 백작 외에도 과거 나를 몰아붙이는데 일조했던 갈렉트 백작과 알노르도 백작도 은근히 나섰다. 나는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레프스터 국왕이 일어서려 하고 있었다. 옥좌에서 천천히 일어서려는 국왕의 모습에서는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어서도 나를 지켜내겠다는 결연한 의지. 그러나 나는 그를 향해 괜찮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레프스터 국왕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언제든지 다시 일어서겠다는 듯이 팔걸이에 놓인 팔에 힘을 주고 있었다. 레프스터 국왕에게 희미하게 웃어 보인 나는 한바탕 술렁이는 홀로 눈을 주었다. "그럼 지금부터 제가 준비한 연극을 보여드리죠. 주연은 저와 라디폰 공작이랍니다." #34- 반격의 시작 #34- 반격의 시작 내 말과 함께 라디폰 공작이 걸어나왔다. 라디폰 공작이 내 옆으로 다가오는 동안 귀족들은 긴장과 흥미, 의심이 잔뜩 묻어나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러나 라디폰 공작은 사람들이 보든 말든 전혀 상관하지 않고 나미르 백작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나미르 백작께서는 공주님께서 건 '작은 악동' 때문에 아리란드 전하께서 병환이 드셨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럼 하나 묻겠습니다. 어째서 저주의 매개체가 알려진 지금까지 아리란드 전하께서 병석에 누워 계셨던 겁니까? 저주를 깨기만 하면 금새 나으셨을텐데요." 그러자 나미르 백작이 이를 드러낸 채 말했다. "물론 저도 그렇게 하려고 했지요. 하지만 워낙 지독한 저주라 프란시아 대신관 님마저도 고개를 내저으셨습니다. 이 정도 되면 시전자 정도나 저주를 풀 수 있을 거라 말씀하시더군요." "오호, 지독? 여기 계시는 로튼 님은 저주 해제의 달인이십니다. 나미르 백작의 말에 대해 로튼 님의 견해는 어떻습니까?" 라디폰 백작은 매우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고, 지적을 받은 로튼은 웃기지도 않는다는 식으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작은 악동'이 지독한 저주? 지나가던 개가 다 웃겠군. 여기 계시는 마리엔 공주께서는 흑마법을 6서클 후반까지 사용할 수 있는 실력자야. 흑마법은 분야가 여러 가지라 같은 흑마법사라도 내가 아는 마법을 공주가 모를 수도 있고, 내가 모르는 마법을 공주가 알 수도 있지. 하지만 분명한 건 6서클 정도면 다른 저주 두세 개 정도는 알고 있었을 거라는 거야." 어느새 사람들은 로튼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주위로 몰려들어 조금이라도 그의 말을 자세히 들으려고 할 정도였다. 로튼은 이 상황이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지 콧대를 세우며 계속 말했다. "아무리 못해도 다른 저주들이 '작은 악동'보다는 나을걸. 흑마법사 사이에서 '작은 악동'이란 건 저주로 취급받지도 않아. 말 그대로 장난일 뿐이야." "그런 당치도 않은 소리를! 그럼 어째서 장난에 아리란드 전하께서 그렇게 심하게 앓는다는 말이오?" 비교적 젊어 보이는 백작이 소리치자 로튼은 직접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면박을 주었다. "거기 자네, 나이를 먹은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끝까지 들어야할 것 아닌가? 하여간 요새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어. 다음부터는 조심하게. 아무튼, 작은 악동을 깨는 건 간단해. 저주의 매개체를 깨뜨리기만 하면 돼. 그리고 하나 말하지. 작은 악동은 두통이나 허리가 심하게 결리는 정도의 증상밖에 나타나지 않아. 그러니 마리엔 공주가 걸었다는 저주 때문에 그렇다는 건 말이 안 돼. 그리고 진짜로 저주를 걸 생각이었으면 다른 저주를 걸었을 거야." 로튼이 입을 다물자 나미르 백작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의 말이 맞다는 걸 우리가 어떻게 알지? 당신도 보아하니 흑마법사 같은데 같은 흑마법사라고 감싸는 것 아닌가?" 그러나 로튼은 그의 말을 무시했다. 대신 뒤편에 차려진 휘황찬란한 식탁들을 보면서 눈을 빛낼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 것은 로튼과 지내본 적이 있는 나만 알아챌 뿐 다른 사람들은 로튼이 아예 고개를 돌리고 비웃는 것으로 생각했다. 나미르 백작은 정체도 알 수 없는 노인에게 농락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성을 내려했지만 라디폰 공작이 말을 할 기회도 주지 않고 나섰다. "그러실 줄 알고 객관적인 증거를 준비했습니다. 에릭, 미안하지만 프란시아 대신관님을 모셔 오너라. 지금쯤 기다리고 계시겠구나." 에릭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보인 다음 무도회장을 빠져나갔다. 귀족들은 급기야 프란시아 대신관의 이름까지 거론되자 더욱 웅성거렸다. 프란시아 대신관은 매우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며 언제나 신의 뜻을 따라 살아왔다. 당연히 이는 내 생각이 아니라 세상의 평가였다. 잠시 후 에릭은 프란시아 대신관과 함께 돌아왔고, 대신관이 들어오자 사람들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라디폰 공작도 그에게 정중하게 인사말을 건넸다. "프란시아 대신관님, 이렇게 발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오. 이는 신의 뜻이기도 하니 말이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죄송하지만 프란시아 대신관님께서 보관하시고 계셨던 작은 악동이 걸린 병을 보여주시겠습니까?" 라디폰 공작의 요청에 프란시아 대신관은 작은 유리병을 하나 꺼내서 건네주었다. 그 것을 받아든 라디폰 공작은 그 병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높이 치켜들었다. 분명히 내 방에 있던 병과 같은 크기에 같은 글귀가 적어진 유리병이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안에 들어있던 붉은 머리카락이 사라지고 붉은 빛의 액체만 들어있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이 것은 마리엔 공주님의 방에서 나온 병이며, 이 것으로 인해 공주님께서는 억울한 누명을 쓰셨습니다. 제가 공주님께서 사라지신 후 증거품으로 프란시아 대신관께서 보관해달라고 요청한 것을 나미르 백작을 포함한 여러 백작 분께서는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지 못하시겠다면 이 자리에 계신 아스티에 공작님이나 나인 공작님께 여쭙도록 하지요." "기억합니다." "물론이오." "그러고 보니 그런 적이 있었군." 그들은 내키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누구도 저 병이 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은 표하지 못했다. 그만큼 프리란드 대신관의 명성은 대단했고, 그에 걸맞은 성품을 지닌 자였다. 라디폰 공작은 그들의 말에 매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좋습니다. 프리란드 대신관님, 이번에는 제가 맡겼던 것들을 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라디폰 공작이 돌려 받은 것은 다섯 개의 유리병이었다. 다섯 개의 유리병에는 내 방에서 나왔던 유리병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었다. 대신 안에 담긴 액체의 색은 달랐다. 붉은 색, 흰색, 회색, 노란색, 갈색의 액체가 안에서 찰랑이고 있었다. "이 병에도 작은 악동이 걸려있습니다. 프리란드 님, 제가 전해드릴 때 이 병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기억하신다면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라디폰 공작의 요청에 프리란드 대신관은 흔쾌히 입을 열었다. "내가 처음 받았을 때 그 병들에는 색색의 털들이 들어있었소. 붉은 색, 흰색, 회색, 노란색, 갈색의 털이었지. 그런데 4개월이 지나면서부터 투명하던 액체가 색을 띠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안에 있던 털들이 녹아버렸다오." "그렇습니다. 저는 이 곳에 동물들의 털을 넣고 저주를 걸어 프란시아 대신관님께 드렸습니다. 액화린수는 특이하게도 머리카락이나 손톱과 같이 특정 물질로 이루어진 것에만 반응을 보입니다. 유리병은 전혀 부식되지 않을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갈렉트 백작의 반박에 라디폰 공작은 먹이를 낚아채기 전의 맹금류처럼 눈을 날카롭게 치켜 뜨고 말했다. "분명히 전 아리란드 전하께서 아프시기 시작한 7월에 공주님은 스피린에 계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분들이 그 전에 저주를 걸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억지로 죄명을 갖다 붙이셨지요. 그럼 묻겠습니다. 어째서 당시에 병에는 붉은 머리카락이 있었던 걸까요? 7월 전에 저주를 거셨다면 분명히 붉은 액체만 들어있어야만 되는 것 아닙니까? 설마 스피린에서 돌아온 다음 저주를 걸었다고 하실 분은 없겠죠. 그 때는 이미 아리란드 전하께서는 병석에 누워 계셨을 때니까요." 라디폰 공작의 매서운 말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특히 나를 사헤트로 보내는데 큰 힘을 발휘했던 나미르 백작과 갈렉트 백작, 알노르도 백작은 식은땀마저 흘리고 있었다. 결국 붉은 머리카락이 들어있던 병은 만들어진 지 4개월이 지나지 않았던 것이고, 그 기간에는 이미 아리란드 전하는 아픈 상태였다. "하, 하지만 머리카락이 녹는 기간을 잘못 알았을 수도 있지 않소?" 궁여지책으로 나미르 백작이 말을 끄집어냈지만 실수였다. 그 말은 그 기간을 알려준 프란시아 대신관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었으니까. 그 말에 프란시아 대신관이 불쾌하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도 그럴 것이 당대의 현인으로, 선인으로 불리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냐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 말이었던 것이다. "그럼 나미르 백작께서는 이 늙은이가 거짓말이라도 했단 거요? 분명히 말해두건 데 나는 라디폰 공작의 부탁으로 매일 그 병들을 확인했소. 이는 다른 신관들에게 확인해도 될 것이오. 그들은 나와 함께 병을 관찰했으니 말이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지금 매우 심기가 불편하오. 확실하지도 않은 증거로 한 나라의 왕족을 몰아 부친 것도 모자라 타국으로 보내려했으며, 덕분에 마리엔 공주님께서는 목숨을 잃을 뻔하셨소. 이 죄를 어찌 사죄할 것이오!" 프란시아 대신관의 노기 띤 호통에 홀 안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움찔했다. 프란시아 대신관이 바로 자신에게 질책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속으로 프란시아 대신관에게 박수를 열심히 쳐주었다. 그가 그렇게 강하지 나가지 않았다면 계속 인정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나미르 백작은 완전히 수긍하지 않았다. 아니, 수긍할 수가 없다는 것이 맞다. 그 사실을 수긍하면 나를 몰아내는데 가장 큰 공헌을 했던 그는 어떻게 되겠는가? 갈렉트 백작과 알노르도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싱긋 웃었다. 이 정도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나는 앞으로 나서서 입을 열었다. "이제 라디폰 공작의 차례는 끝났군요. 이번엔 내가 나서죠. 세린, 좀 부탁해도 되죠?" "벌써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그럼 그를 불러주시겠어요?" "맡겨주십시오." 세린은 성큼성큼 걸어 문을 열었다. 그러자 조금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양켄센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양켄센의 뒤로는 그를 감시하는 것처럼 버티고 서있는 제 4기사단의 기사들이 보였다. 사실 그가 구금된 것은 바로 어제 내가 장례식 도중에 쳐들어간 것과 거의 같은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양켄센은 제 4기사단이 사용하는 건물에서 감시를 받다 시간에 맞춰 데려온 것이다. 세린은 거의 양켄센을 끌어오다시피 데려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시끄럽다." 세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양켄센의 복부를 강하게 주먹으로 쳤다. 양켄센은 허약하기 그지없는 마법사답게 한 방 맞고 캑캑거리면서 허리를 굽혔다. "세린 경, 궁전 마법사에게 그 무슨 행동입니까?" 오펠리우스 왕비는 벌떡 일어나서 세린을 탓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이제야 나서시는 건가? 나는 오펠리우스 왕비가 세린을 계속 책하기 전에 세린의 앞에 서며 말했다. "어마마마, 제가 시켰사옵니다. 세린 경을 책하지 마시옵소서. 만약 제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면, 그리고 양켄센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면 제가 벌을 받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그냥 보고 계십시오." 나는 똑바로 오펠리우스 왕비를 올려다보았다. 이미 상황은 서서히 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오펠리우스 왕비는 과연 머리가 영민한 자답게 상황을 판단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그 모습이 평소와는 달리 매우 불안해 보였다. "감사합니다." 나는 오펠리우스 왕비에게 인사한 후 다시 몸을 돌렸다. 언뜻 새파랗게 질려있는 플로라 공주의 모습이 보였던 듯 하다. 이제야 상황 판단이 되신 건가?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오펠리우스 왕비나 플로라 공주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눈앞의 양켄센을 노려보았다. 이제 주위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누군가 목이 타는지 음료수를 벌컥 들이키는 소리가 넓은 홀에서 들리는 유일한 소리였다. "당신이 여기에 왜 있는지 압니까?" 내가 싸늘하게 묻자 양켄센이 잠시 주저했다. 아무리 공주라도 궁전 마법사를 이렇게 험하게 다룰 수는 없었다. 그런데 누구도 이를 말리는 자가 없었다. 오펠리우스 왕비마저도 지금은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양켄센은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는지 눈동자를 굴려 바삐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곧 고개를 꼿꼿이 세웠다. "소인은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제게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겁니까? 전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두고봐야 알겠죠." 그 때 보나인과 가스톤, 죠안, 미첼로, 덴이 양켄센의 앞에 섰다. 그들의 손에는 내 방에 있던 함과 똑같은 형태의 황금색 함이 하나씩 들려있었다. 양켄센과 다른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 함들을 바라보았다. "그 때 당신은 내 방에서 유리병을 찾아낸 사람입니다. 그건 에릭 경과 세린 경, 안데리사경도 본 것이니 부인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런데 기억하나요? 다른 기사들이 직접 방을 뒤지는데 반해 당신은 눈을 감았지요. 어떻게 눈을 감고도 찾을 수 있었나요?" "그건 마법으로 탐색했기 때문입니다! 전 단지 명령을 받고 저주의 매개체를 찾은 것뿐입니다. 그런 이유로 벌하려 하시는 것이라면 그 때 함께 있던 기사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양켄센은 억울하다는 듯 거세게 항의했다. "물론 그건 죄가 아닙니다. 명령을 따르는 것은 신하된 자로서 칭찬 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그럼 어째서?" "이 함 중에 '작은 악동'이 걸린 유리병이 들어있습니다. 찾아내십시오. 참, 저주가 걸린 병이 2개 일수도 있고, 아예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법으로 탐색하면 그 정도는 쉽게 알아낼 수 있겠죠?" "그건......" 양켄센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고, 자꾸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원군을 찾는 것처럼. 그러나 그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매정하게도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왜 마법을 사용하지 않죠? 그 때처럼 하면 간단하잖아요. 설마 못하는 겁니까?" 내가 날카롭게 말하자 양켄센이 어떻게 하나를 지켜보던 귀족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심스럽다는 눈빛들이 양켄센에게 쏟아졌다. 결국 양켄센은 쩔쩔매다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웅얼 웅얼거리던 양켄센은 한참만에 눈을 떴다. 나는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어떤 함에 저주가 걸린 병이 들어있나요?" "그건...세 번째 함입니다." 그러나 양켄센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죠안이 들고 있는 함을 가리키는 손가락도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양켄센을 내려다봤다 죠안에게 고갯짓했다. 죠안은 들고있던 함을 열었고, 그 안에는 예쁜 상아 빗이 놓여있었다. "이, 이럴 리가 없습니다! 다시 한번 해보겠습니다!" 양켄센은 내 팔을 잡으며 소리쳤고, 나는 다시 해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양켄센은 다시 눈을 감았다. 양켄센의 몸은 마치 흔들리는 땅 위에 선 것처럼 떨렸고, 볼로 땀방울이 하나 뚝 흘러내렸다. 과연 알아낼 수 있겠어? 응? 알 수 있으면 해보라고. 정말이지 당시에는 내가 당황했었던 것 같다. 어째서 이 생각을 하지 못했단 말인가?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바보 같다. 하긴 당시에 깨달았어도 그 때는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 양켄센도 곤경에 처했겠지만 내가 사헤트로 가는 것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금 전보다 훨씬 지체한 후에야 양켄센이 살짝 눈을 떴다. "어떤 함인가요?" "저,저기 있는 함입니다." 양켄센은 아주 천천히 미첼로가 들고 있는 함을 손가락질했다. 계속 이대로 시간을 끌었으면 하는, 이 다음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진 사람처럼 모든 동작이 아주 느렸다. 미첼로는 내가 신호를 보내자 함을 열었고, 서서히 함의 황금빛 뚜껑이 열렸다.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붉은 색의 글씨가 적힌 작은 유리병이었다. 양켄센은 기뻐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내가 유리병을 꺼내자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붉은 색의 깨알같은 글씨로 써진 것은 '바보. 이건 저주가 걸린 병이 아니야.' 라는 글귀였다. 한번은 실수이거나 긴장해서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두 번째는? 홀 안에 있던 사람들이 양켄센에게 보내는 눈길이 매서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손에 든 유리병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저주란 건 말이죠 그 느낌이 아주 모호해서 흑마법사라도 잘 느끼지 못해요. 아주 강한 흑마법사나 저주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말이에요. 그리고 저주는 마법으로 탐색할 수 없어요. 그저 느낌으로 느낄 뿐이랍니다. 다음부터는 좀 알고 연기를 해요. 알았어요?" 내가 말을 마치자 양켄센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해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주를 탐지하지도 못하면서 유리병을 찾아냈다. 답은 하나다. 이미 유리병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유리병이 어디에 있는지 알았을까? 설마 있는지도 모르는 내가 일러줬을까? 이 병을 내 방에 가져다놓은 인간이 바로 양켄센이거나 아니면 그 인간을 통해 들었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감히 네 놈이 은혜도 모르고 그 따위 짓을 했단 말이더냐!!!" 뒤쪽에서 레프스터 국왕의 노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나는 물론 모든 사람들이 레프스터 국왕을 올려다봤다. 그의 눈이 어찌나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지 불똥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꼭 쥐어진 손이 분을 참지 못하고 부르르 떨렸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누명을 썼고, 그 걸로 인해 죽을 뻔했으니 어찌 화가 나지 않겠는가. 레프스터 국왕이 당장 양켄센을 때려죽이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리고 르미엘 왕자와 오펠리우스 왕비도 그에 못지 않게 분기팽천한 모습이었다. 물론 그 중 한 명은 확실히 연기지만 말이다. 라이언 왕자는 얼굴을 구기고 있었고, 데미나 공주는 양켄센을 경멸 어린 눈초리로 흘겨보고 있었다. 그리고 플로라 공주는 입가에 가져간 손을 파르르 떨면서 어쩔 줄 몰라했다. 다행히 레프스터 국왕은 분노로 몸을 떨면서도 성급하게 벌을 내리지는 않았다. 대신 엄청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기사들은 뭐하나! 당장 저 역적 놈을 감옥에 처넣어라! 내 이 일을 결코 그냥 넘어가지는 않겠다!! 저 꼴도 보기 싫은 반역자를 눈앞에서 끌어내라!" 레프스터 국왕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홀의 거대한 문이 벌컥 열리면서(오늘따라 굉장히 많이 열린 듯하다) 밖에서 지키고 서있던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국왕은 양켄센을 삿대질하면서 화를 버럭 냈고, 기사들은 일제히 달려들어 그를 제압했다. 사실 제압할 것도 없었다. 양켄센은 두려움에 벌벌 떨고만 있었으니까. 기사들이 끌고 가려하자 양켄센은 그때야 정신을 차리고 보기 추하게 버둥거리며 외쳤다. "폐,폐하! 전 결백합니다! 살려주십시오! 저는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레프스터 국왕은 더 이상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자 양켄센은 나에게 손을 뻗으며 애걸복걸했다. "마리엔 공주님, 살려주십시오!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저를 공주님의 부하로 삼아주십시오. 아니, 시종으로 삼아주십시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이거 놔!" 양켄센이 얼마나 세게 소매를 잡고 늘어지는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하긴 목숨이 걸려있으니 죽을 힘을 다했을 것이다. 이 질긴 놈. 이러다 소매가 찢어지겠다. 게다가 미친 듯이 매달리는 양켄센의 얼굴이 얼마나 끔직한 지 일초라도 더 빨리 떨어지고 싶었다. "살려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이, 이거 놓으란 말이야." 내가 팔을 움직이며 떨어지려 했지만 이 놈은 거머리라도 된 것처럼 필사적으로 꽉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양켄센을 혐오를 느끼는지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 손 놔." 그 짤막한 말과 함께 세린이 양켄센의 복부에 주먹을 퍽 내질렀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순간적으로 숨이 막힌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때를 틈타 세린이 양켄센을 내게서 떨쳐 놓았다. 나는 질려서, 그리고 혹시나 양켄센이 다시 들러붙지나 않을까 걱정이 돼 세린의 뒤로 숨었다. 여러 명의 기사에게 잡혀 질질 끌려가는 양켄센이 보였다. 그는 이제 아무나 잡고 늘어졌기에 모두들 멀찌감치 떨어졌다. 양켄센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며 급기야 고래고래 소리치기 시작했다. "전 죄가 없습니다!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잠깐!" 레프스터 국왕의 말에 기사들이 양켄센을 끌고 가던 것을 멈췄다. 양켄센은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애원했다. "폐하, 저는 정말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자가 누구냐? 너에게 사주한 자가 누구냔 말이다. 만약 사실대로 말한다면 정상참작을 하겠다." "그건..." 양켄센은 무척이나 고민하는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말끝을 흐렸다. 나는 오펠리우스 왕비의 얼굴을 살폈다. 어딘지 모르게 무척이나 불안해 보이는 모습. 평소의 여유있는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마침내 양켄센은 결심했는지 레프스터 국왕을 올려다보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양켄센은 발작이라도 일으킨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거품을 뿜어냈던 것이다. "크윽." 눈이 뒤집혀 떠는 쥐꼬리 수염의 모습은 꿈에 나타날 까 두려울 정도로 끔찍했다. 두려운 의미의 끔찍함이 아니라 그 추함에 의한 것이었다. 여자들은 모두 고개를 돌렸고, 귀를 막는 자들도 있었다. 남자들 중에서도 몇몇 마음이 약한 자들이 눈을 돌리고 외면했다. 그리고 양켄센은 발작을 일으킨 지 1분 정도 되자 갑자기 푹 고꾸라졌다. 기사들이 툭툭 건드려봤지만 깨어나지 않았다. 다행히 숨은 붙어있었지만 의식이 없었다. "데리고 가라. 어의에게 반드시 살려내라고 해라." 레프스터 국왕도 못 볼 것 같은 얼굴로 명령했다. 기사들만 불쌍했다. 그러나 명령은 명령인지라 기사들은 축 쳐진 양켄센을 질질 끌고 갔다. 나는 오펠리우스 왕비를 다시 훔쳐보았다. 조금 전과는 달리 상당히 많이 안정되어 있었다. 역시 오펠리우스 왕비의 짓인가? 아니면 왕비 일당 중 하나의 짓인가? 양켄센의 반응으로 보아 남모르게 특수한 약을 먹였던 것 같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의 상황으로는 오펠리우스 왕비를 끌어들일 만한 증거가 없었다. 하지만 로튼이 아리란드 전하의 방을 조사해서 뭔가 알아낸다면 달라질 수도 있었다. 그 때를 기다릴 것이다. 홀은 흡사 폭풍우라도 만났던 것처럼 썰렁해졌다. 사람들은 허탈한 눈으로 양켄센이 사라진 문 쪽을 보다 이내 나에게 시선을 보냈다. 눈에 놀라움과 감탄, 불안 등의 여러 가지 감정이 녹아들어 있었다. 나는 그런 그들을 향해 한 마디 했다. "어때요? 내가 준비한 연극이 재미있었나요? 멋진 반전이었죠?" #34- 반격의 시작 #34- 반격의 시작 무도회가 있었던 다음 날 나와 로튼은 브테프 궁으로 발걸음 했다. 로튼이 살펴본 바에 따르면 아리란드 전하는 저주에 걸린 것이 맞다고 한다. 어제는 자세히 살펴볼 시간적 여유가 없어 그냥 발걸음을 돌렸지만 저주와 관련된 물건이 그녀의 방에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고 한다. 예전과 달리 브테프 궁사람들은 나를 무진장 어려워했다. 그동안 얼마나 욕을 해댔을지는 안 봐도 눈에 선했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범인이 아니고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 밖에 없다고 하니 민망하기도 하고 죄스럽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할 것이다. 시녀들은 찔리는 것이 많았던 지라 먼저 말을 걸지도 못하고 걸음만 바삐 재촉했다. 어서 나를 안내해주고 한시라도 빨리 이 불편한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굉장히 딱딱하게 행동했다. 궁궐을 떠나기 전까지 받았던 경멸 어린 시선을 떠올리면 당장이라도 한방씩 먹여주고 싶지만 이는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싸늘한 시선만 보낼 뿐이었다. 덕분에 아리란드 전하의 방에 도착할 때까지 오간 대화는 극히 의례적인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방으로 들어가 보니 나보다 먼저 와있는 인물이 있었다. 오펠리우스 왕비가 여긴 웬 일이지? 나는 피어오르는 의혹을 감춘 채 두 사람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오펠리우스 왕비와 아리란드 전하는 무척이나 반가워하며 나를 맞아들였다. 두 여인은 마치 몇 년 만에 만난 것처럼 소란을 떨었고, 그 과장된 행동에는 안쓰러움이 숨어있었다. 이 두 사람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요즘 들어 나를 굉장히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대하고 있었다. 물론 진심이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말이다. "마리엔이 나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하다니..." 끝내 아리란드 전하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기에 그녀는 죄책감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금새 침울해진 아리란드 전하를 부드럽게 달랬다. 원래는 두 사람이 나를 달래야 하는 것인데도 마음 약한 아리란드 전하가 울먹이는 바람에 역할이 뒤바뀐 것이다. "아닙니다. 그 것이 어찌 아리란드 전하의 탓이겠습니까? 모든 것이 누군가의 간교한 계략에 의한 것이니 자신을 책망하지 마십시오." "그래요. 무엇보다 마리엔은 이렇게 무사하지 않습니까? 아리란드는 어서 몸이 낫는 것만 생각하세요." "역시 어마마마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물론이란다." 나와 왕비는 정말로 사이 좋은 모녀 마냥 빙긋이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으르렁거리며 송곳니를 드러내는 짐승의 입술처럼 위협적으로 올라간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우리의 속마음을 모르고 본다면 단순한 웃음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아리란드 전하는 우리가 상대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눈물을 훔치고 말했다. "두 분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힘이 나는군요. 어서 힘을 내서 건강해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왕비님과 마리엔이 예전에 비하면 거리가 많이 좁혀든 것 같네요. 사실 예전에는 사이가 안 좋은 듯 해서 걱정이었는데 이렇게 정다워 보이니 다행입니다." 당신 미쳤어? 정답긴 뭐가 정다워? 나도 오펠리우스 왕비도 잠시 말이 없었다. 과거에는 마리엔만 적의를 드러냈지만 지금은 나와 오펠리우스 왕비 모두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겉으로는 그런 기색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이리도 눈치가 없다는 것에 어이가 없었다. 하긴 아리란드 전하의 경우는 눈치가 없기보다는 심성이 곱고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보는 성격 때문일 것이다. 지금 왕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왜냐면 나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절정의 연기자답게 금세 본연의 자세로 돌아왔다. "호호호, 아리란드가 나와 마리엔 사이를 질투를 하시나 보네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이제 거리감 같은 건 없답니다." 그렇다. 거리감이 너무 없어 탈이다. 뒤엉켜서 싸우는 판에 거리감이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잠시 잡담을 나누던 나는 옆에서 묵묵히 다과를 들고 있는 로튼에게 남모르게 눈짓을 보냈다. 그만 먹으라는 의미도 있었지만(각자의 잔에 든 차를 제외하면 남은 것이 거의 없었다)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의미도 있었다. 로튼도 알았다는 듯이 눈짓했다. "그런데 아리란드 전하께서 오늘은 컨디션이 좋으신 모양이네요." 내가 넌지시 운을 띄우자 아리란드 전하는 핑크빛이 도는 얼굴에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어제 여기 계신 마법사 분이 주신 약을 먹었더니 한결 낫네요." "사실 거기에 대해 로튼이 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내 말에 오펠리우스 왕비와 아리란드 전하의 시선이 로튼에게 쏠렸다. 마지막 남은 과자를 입에 털어 넣은 로튼은 수염도 없는 턱을 손으로 쓸면서 말했다. "어제 드린 약은 다름이 아니라 이 몸이 직접 제조한 약으로 어떤 저주든 효력을 희석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것은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지요. 일시적인 처방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오늘 찾아뵌 것입니다. 제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아마 저주에 사용된 물건이 이 방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로튼의 말에 오펠리우스 왕비와 아리란드 전하는 거의 반사적으로 방을 둘러보았다. 저주에 사용되었다던 물건이 어떤 것인지 찾아내려는 무의식이 반응한 행동이었다. 그 러나 두 사람의 표정은 사뭇 달랐다. 아리란드 전하는 가장 가까운 곳에 그런 무서운 물건이 있다는 것에 대해 겁이 질린 모습이었고, 오펠리우스 왕비는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빳빳하게 굳어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본 들 그녀들이 알아낼 재간은 없었다. 그렇기에 나와 로튼은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물건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내가 맨 처음 다가간 것은 다름 아닌 오펠리우스 왕비가 선물로 주었다던 거울이었다. 전부터 묘하게 마음에 걸리는 거울 위로 내 모습이 비쳤다. 이제는 익숙해진 타인의 모습. 타인이지만 또 다른 나. 하지만 껍데기를 둘러쓰고 있는 나. 가만히 손을 들어 낯익은 소녀의 얼굴을 쓰다듬던 나는 할 일을 떠올리고 다시 팔을 내렸다. 그리고 나는 눈앞의 거울이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노려보았다. 정신을 날카롭게 세우려고 눈을 부릅뜨고 보니 뭔가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 것이 정말로 느껴져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오펠리우스 왕비를 의심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내가 계속 거울 앞에서 서성이는 사이 로튼은 반대편에 있는 창문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는 품평이라도 하는 것처럼 멀리서 떨어져서 보기도 하고, 코가 닿을 정도로 눈을 갖다대기도 했다. 나와 로튼이 관심을 두는 것은 달랐지만 공통점은 있었다. 거울이나 창문이나 유리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개는 누가 일부러 배치해놓은 것처럼 마주보는 자리에 위치해있었다. 나는 거울과 창문을 번갈아 보았다. 창 너머로 황금빛으로 너울거리는 태양이 보였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햇살이 넘봐서는 안될 성역을 엿본 대가로 침처럼 눈에 꽂혔다. 겨울의 햇살이 이렇게 강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햇살을 피해 고개를 돌리던 나는 문득 드는 생각에 다시 창으로 눈을 주었다. 유난히 강렬한 빛은 금빛의 전 중량을 다해 거울을 향해 똑바로 내리꽂혔다. 심판자의 날카로운 창과 같은 햇살은 거울과 부딪치면서 더욱 강렬한 기세를 더했다. 우연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창문과 거울의 위치가, 너무도 강렬한 햇살이 투명한 유리로 쏟아진다는 것이 이상했다.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다시 한번 방을 살펴보았다. 그런 내 눈에 오펠리우스 왕비의 모습이 들어왔다. 금빛의 찬란한 빛을 뿌리며 물결치는 머리 사이로 이글거리는 눈과 산처럼 우뚝 솟은 코, 단호하게 닫힌 입이 있었다. 언제나 앞을 보는 여자. 그렇기에 나와 부딪칠 수밖에 없는 여자다. 당당해 보이지만 여느 때와는 달리 차를 마시는 동작이 어색했다. 내가 볼 때면 웃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꽉 닫혀진 모습이었다. 나와 로튼 중 한 명은 상당히 답에 근접해있는 것 같았다. 그 것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구름보다 더 높은 곳에 있으려고 제자리에서 계속 뛰어오르는 고집 센 아이와 같이 햇살에 지지 않으려고 눈싸움을 벌였다. 왠지 해답은 그 안에 있을 것 같았다. 그 사이 로튼은 창문 앞에서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더니 유리창에 손을 댔다. 로튼이 애무하는 듯한 부드러운 손길로 유리창을 더듬는 가운데 달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펠리우스 왕비가 찻잔을 받침대 위에 내려놓으면서 생긴 소리였다. 평소에는 아주 조용히 내려놓던 왕비가 이번에는 두 개를 맞부딪쳐 깨버릴 정도로 세게 내려놓았다. 그러나 본인의 의도라기보다는 손이 제멋대로 흔들려서 그런 것 같았다. 재빨리 탁자 아래로 손을 내려서 알 수는 없었지만 왠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비님, 괜찮으신가요?" 아리란드 전하는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손이 미끄러졌군요. 별 일 아니랍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몰라도 그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로튼은 정신이 완전히 쏠린 사람처럼 여전히 창문만 더듬고 있었다. "그랬구만. 그랬어." 한참만에 로튼이 창에서 손을 떼고 중얼거렸다.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려고 했지만 로튼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그 쪽에서 보면 햇살이 어떻습니까?" "굉장히 눈부셔요. 마치 여름처럼 찌르는 듯한 느낌인 걸요." 내 말에 로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가와 이번에는 거울을 이리저리 봤다. 무얼 알아냈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피어올랐지만 방해가 될까봐 그가 거울에서 눈을 뗄 때까지 기다렸다. "뭔가 알아냈어요?" "물론이지요. 상대가 누군지는 몰라도 상당히 뛰어난 놈이군요. 저주를 건 것이 아니라 걸리게 했으니 말입니다." 의미심장한 로튼의 말에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내가 어서 말해보라는 재촉의 눈길을 보내자 로튼이 불룩한 배를 앞으로 내밀며 오른팔을 들었다. 거상처럼 많은 반지를 끼고 있는 손가락이 맞은편에 있는 창문을 가리켰다. "저 창문과 이 거울의 절묘한 하모니가 이뤄낸 아주 훌륭한 저주입니다. 그냥 만질 때는 모르겠지만 정신을 집중해서 창문을 만져보면 올록볼록한 것이 느껴지더군요. 정확히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으나 저주의 발현에 필요한 글귀일 겁니다. 그리고 창문의 재질이 보통 유리가 아니더군요." "그게 무슨 소리죠?" 아리란드 전하의 질문에 로튼은 간단히 말했다. "케로탈입니다." 케로탈은 수정을 가공해서 만든 것으로, 겉보기에는 유리와 비슷하지만 겉표면에 이물질이 묻지 않고 훨씬 깨끗해 보여서 귀족들이 거울이나 악세사리로 애용하곤 한다. 그리고 햇빛을 비추면 돋보기처럼 투과된 햇빛은 원래의 것보다 강하게 만드는 물질이었다. 로튼의 말로는 오펠리우스 왕비가 선물한 거울도 케로탈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케로탈이 아니라 케로탈의 원재료였다. 수정은 마법 도구를 만들 때 많이 사용되는데 그 이유는 여러 물질 중 마나를 잘 받아들이고 어느 정도의 증폭 작용을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케로탈로 만들어진 유리창과 거울은 서로 상호작용을 해서 증폭 작용을 활발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죄송하지만 혹시 잉크 있으십니까?" 로튼의 요청에 아리란드 전하는 얼떨결에 책상 위에 높인 붉은 잉크를 건네주었다. 로튼은 그 것을 창문에 뿌렸다. 잉크는 유리창 표면에 그대로 방울져 매달렸다. 그런데 잉크가 균일하게 퍼진 것이 아니라 어떤 곳은 많게, 어떤 곳은 적게 분포되었다. 과연 로튼의 말대로 그 것은 어떤 글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것이 저주 발동의 첫 시작입니다. 햇빛을 통해 이 글귀가 적힌 창문은 그대로 거울에 가서 비칩니다. 그리고 두 개의 케로탈은 서로의 모습을 비추면서 그 증폭 작용을 무한정으로 커지게 만듭니다. 그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곳이 바로 저 곳입니다." 로튼이 가리킨 곳은 거울과 창문의 중간정도에 놓인 작은 탁자였다. 탁자 위에는 하얀 색의 도자기 위에 꽃잎을 활짝 펴고 웃고 있는 장미꽃이 있었다. 계절과 맞지 않는 장미꽃은 매력적인 자태를 뽐내며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었다. 핏빛처럼 붉은 꽃잎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로튼이 장미꽃을 뽑아들자 갈색으로 변해 흐물거리는 줄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꽃병 위로 드러난 곳은 기이할 정도로 아름다운데 그 아래는 온통 썩어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란 것은 갈색의 줄기를 타고 툭툭 떨어지는 액체였다. 그 것은 투명한 액체가 아닌 진한 심홍색의 액체였다. "아앗!" "아리란드, 진정해요." 아리란드 전하는 그 것을 피로 생각했는지 작게 비명을 질렀고, 오펠리우스 왕비가 침착하게 달랬다. 그러나 왕비의 얼굴은 아리란드 전하의 얼굴보다 더 하얗게 질려있었다. 놀라서 질린 것은 아니겠지? 어쩌면 오늘 온 것은 증거 인멸을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그럴 줄 알고 바로 온 거다. 나는 재빨리 다가가 꽃병 안을 들어다보았다. 그 곳에는 물이 아니라 붉은 색의 액체가 잔뜩 들어있었다. 피는 아닌지 아무런 냄새로 나지 않았다. 그 불투명한 액체 속에 작은 인형과 다른 작은 물건이 보였다. 그러나 자세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장식용으로 놓여있는 납작한 도자기를 가져와 그 곳에 액체를 부었다. 액체의 양이 줄어들면서 꽃병 밑에 그려진 특이한 문양의 그림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것을 보는 오펠리우스 왕비가 나지막한 신음소리를 내면서 몸을 움츠렸다. 마침내 꽃병 안에 든 액체를 모두 따르자 두 개의 덩어리가 뚝 떨어졌다. 그 것은 붉은 머리의 작은 솜인형과 큼지막한 회색의 쥐였다. 쥐는 죽어있었지만 그 것을 본 두 여인은 비명을 질렀다. 내가 쥐를 손가락으로 뒤집어 보는 사이 항시 대기하고 있던 기사와 병사들이 비명을 듣고 들이닥쳤다. 그들은 도자기 안에 출렁거리는 액체가 피인 줄 알고 잔뜩 긴장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누구도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어 주저했다. 나는 인형과 쥐를 뒤집어보고 있었고, 로튼은 꽃병 입구에 얼굴을 들이대고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오펠리우스 왕비와 아리란드 전하는 새파랗게 질려 살짝 몸을 떨고 있었지만 계속 우리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리란드 님, 이 꽃병을 따로 담당하는 시녀가 있습니까?" "네. 지나르라는 시녀가 하고 있어요." 아리란드 전하는 놀라서 정신이 없는지 기사들 앞에서 로튼에게 높임말을 사용했다. 이런 무시무시한 일을 알아낸 사람이니 절로 몸을 사리게 되고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잡아들이십시오. 쥐가 아직 썩지 않았습니다. 이건 수시로 갈았다는 증거입니다." 병사들은 어떻게 할까요?, 라는 시선을 아리란드 전하에게 보냈다. 그러나 아리란드 전하는 믿었던 시녀가 설마 그럴 리가 있냐는 얼굴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평소라면 나섰을 오펠리우스 왕비도 꽃병 안에서 나온 것들을 보고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 여자를 당장 잡아와요. 물론 생포해서." 내가 명령을 내리자 기사들은 순순히 따랐다. 오펠리우스 왕비와 아리란드 전하가 패닉 상태에 빠져 명령을 내릴 수 없어 보였기 때문이리라. 반드시 생포해야한다. 그래야 오펠리우스 왕비와의 연관을 알아낼 것이 아닌가. 나는 딱딱하게 굳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왕비를 향해 차디 찬 미소를 보냈다. ------------------------------------------------------------ 늦어서 죄송합니다 -_-; 그리고 저 라다에는 글을 올리지 않았답니다. 누군가 제 이름을 사칭한 것은 처음있는 일이라 기분이 매우 묘했답니다. 어제 지워달라고 하니까 지워주시긴 했지만요 ^-^; 아무튼, 늦어서 죄송하옵니다. 부디 선처를...쿨럭;; #35- 산 자와 죽은 자 #35- 산 자와 죽은 자 요즘의 궁궐 분위기를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살얼음판을 발가벗은 채 걷고 있는 분위기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가 누명을 썼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바로 그 다음날 나와 로튼에 의해 아리란드 전하의 저주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시녀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건의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양켄센은 살아나긴 했지만 완전히 백치가 돼버렸다. 한번 찾아가 봤더니 감옥에 딸린 의자에 앉아 위엄 있게 호령하고 있었다. 벽에 낀 이끼를 상대로 말이다. 그리고 지나르라는 시녀는 기사들이 들이닥쳤을 때는 이미 목을 맨 뒤였다. 그런데 자살이 아니라 타살인 듯했다. 스스로 목을 맸다면 목에 줄 모양이 비스듬하게 생겨야 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목을 조른 것처럼 똑바로 자국이 났던 것이다. 그렇기에 안타깝게도 오펠리우스 왕비의 음모는 밝혀지지 않았다. 왕비가 거울을 선물한 것은 창문을 갈기 전으로 그 유리창은 예전에 한 번 깨져 새로 단 것이었다. 아마 그 때 케로탈로 된 창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리창을 만들었다던 장인도 이미 살해당한 후라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 게다가 케로탈 거울을 선물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이런 이유로 오펠리우스 왕비의 죄상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일을 계기로 오펠리우스 왕비와 그 일당들이 몸을 사릴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비록 범인이라고 낙인찍히지는 않았지만 의심은 받고 있었다. 만약 오펠리우스 왕비가 평소 행실이 좋지 않았다면 당장 무슨 조치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의심받는 것은 둘째 쳐도 이번 일 때문에 권위가 실추된 귀족들은 대부분 왕비 패거리였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자중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르미엘 왕자파는 중립을 지키고 있어서 그나마 무사할 수 있었지만 라이언 왕자파는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그러게 멍청하게 누가 그렇게 날뛰라고 했는가?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나미르 백작가였다. 큰 처벌은 받지 않았지만 주위의 따가운 시선과 한번 찍힌 것은 영원히 간다는 만고불변의 진리에 의해 앞으로 권력을 쥐기는 힘들어졌다. 이렇게 사건은 대강 마무리되었고, 나에 대한 보호는 한층 강화되었다. 암살 시도에 누명, 다시 이어진 암살 시도. 누군가 나를 노리고 있다는 것은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덕분에 귀족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은근히 좋아하는 라디폰 공작을 제외하면 이 상황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내 관심사는 자연히 죽은 자들에게 쏠렸다. 복수도 했고, 처리할 일도 대부분 해결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것뿐이었다. 나는 궁궐에 돌아온 지 일주일째 되는 날에야 비로소 제 4기사단 훈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고 싶지 않은 마음과 그 반대되는 마음이 지금까지도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다. 어젯밤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면서 고민했지만 언제까지 미뤄둘 일이 아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지 않으니 죽은 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언제까지 묻어둘 수는 없었다. 다른 건 다 넘어간다 해도 포상 문제가 있어서 꼭 매듭지어야 했다. 나는 한 발짝씩 내딛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는 했지만 그래도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었다. 발에 쇳덩이라도 매단 것처럼 발자국 하나 옮기는데 보통 힘이 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련장에 도착했을 때는 궁에서 이 곳이 이렇게 가까웠나 싶었다. 드디어 멀리서부터 희미하게 보이던 낯익은 사람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들은 나를 보자 환한 얼굴로 몰려들었다. 어지럽게 쏟아지는 인사말 어디에도 죽은 자들에 대한 말은 없었다. 사실 제 4기사단과 이야기하게 될 기회를 가진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전에 양켄센을 잡으라는 명령도 세린을 통해 전달했을 뿐 직접 대면하는 것은 무도회 이후 처음이었다. "공주님, 어서 오십시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돌아오셔서 한시름 놓았습니다." 나는 기꺼워하는 기사들을 향해 활짝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을 계속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세 개의 빈자리가 너무도 커 보였기 때문이다. 겨우 세 자리뿐이니 눈에 띄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하게 느껴졌다. 이 것을 모르는지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제 4기사단 기사들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그동안 공주님의 아리따우신 모습을 뵙지 못해 밤마다 잠을 설쳤습니다." "미첼로, 거짓말은 작작해라. 네가 그 사이에 꼬신 여자들이 줄을 선다. 서." "훗, 인기 없는 남자의 질투는 추하죠." "뭐야? 난 이미 결혼한 몸이야!" 미첼로와 죠안이 티격태격하자 다른 사람들이 두 사람을 무시하고 말했다. "저 두 놈들에게는 아예 신경을 끄십시오." "그렇습니다." "저 두 사람만 빼면 다들 잘 지냈습니다." 이들이 지금 가장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세 사람의 행방이 무엇보다 궁금할 것이다. 아마 어떻게 됐을 지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직접 들어야 그제야 믿는 법이다. 그 전까지는 설마 설마 하며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가지지 않는다. 묻고 싶지만 나 때문에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본인들도 묻는 것이 두려울 지 모른다. 그래서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 받으며 심하다 싶을 정도로 흥겨워하는 것이리라. 내가 먼저 말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세 사람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한차례 심호흡을 한 나는 입을 열었다. 오늘따라 입술이 무겁게 느껴져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데려왔어." "네?" 뜬금 없는 내 말에 기사들이 반문하자 나는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데려왔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누구를 데려왔단 말씀입니까?" 보나인이 대표로 의문을 표했다. 나는 그런 보나인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복수다 뭐다 하는 것이 끝나자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라 무척 슬펐다. 보나인과 기사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 내가 누구를 데려왔는지. 오직 나만 알고 있었다. 그 생각을 하니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걸 알고 있는 건 즐거운 일이다. 그러니까 웃는다. 웃어야만 했다. "아인이랑 마르크, 씨스를 데려왔어." 내 말에 사람들은 못들을 걸 들은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얼굴을 보이든 말든 나는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우드랜과 다른 기사들도 데려왔어. 하나도 빠짐없이." "공주님." 보나인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그의 회색 눈이 애처로운 빛을 띠면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현실을 부정하려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정신이 이상해졌거나. 그러나 나는 그 정도로 무너질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나는 마족이 아닌가. "뭐야? 나는 정신이 말짱해. 보라고. 다들 데려왔어." 기사들이 뭐라고 말했지만 나는 귀를 막은 채 중얼거렸다. 내가 쉬지 않고 긴 주문을 외우는 동안 기사들이 당혹스럽고 슬픈 얼굴로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이윽고 생겨난 검은 소용돌이가 안에 든 것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내가 데려온 자들이 한 명 한 명 나타나자 기사들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창백해졌다. 16명의 마지막 사람까지 토해낸 검은 소용돌이는 이내 사라졌다. 제 4기사단은 완전히 굳어버렸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들을 향해 자랑스럽게-설령 자랑스럽지 않더라도 그렇게- 말했다. "그것 봐. 내가 데려왔다고 했잖아." 차갑게 식은 시신들을 바라보던 얼 빠진 눈들이 나에게 향했다. 그 눈동자 안에는 깊은 슬픔과 경악, 불신감이 뒤범벅돼 있었다. 나는 뭔가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계속 종알거렸다. "봐봐. 내가 다 맞춘 거야. 원래는 팔이고 다리고 모두 떨어져있었는데 내가 원래대로 만들었어. 잘못 맞춰서 이상하게 된 적도 있었지. 어떤 것은 주변에 안보여서 한참 찾아 헤맸다니까." 그러나 내가 조립할 때 일어났던 우스운 일과 여러 가지를 들려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횡설수설 아무 말이나 늘어놓았다. "미나는 검술을 배워놓고도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다니까. 게다가 내가 만들어준 마법 반지를 한번도 써보지 못하고 죽은 거 있지. 역시 마법 도구는 수동이라 불편한 것 같아. 자동으로 공격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아? 우리 나라는 마법이 너무 취약해서 모르지만 토르에는 그런 도구가 있을까?" "마리엔 공주님." 누군가 고뇌와 비통에 찬 어조로 나를 불렀다. 그러나 나는 못들은 것처럼 계속 떠들어댔다. 무척이나 활기차게. 나 혼자 웃고 떠들고 하는 것은 꽤나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주위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쳐다보기만 하자 흥이 깨져 입을 다물었다. 게다가 그 눈빛들은 뭔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묘한 눈빛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침묵을 지켰다. 그 것은 기사들도 마찬가지라 나와 제 4기사단 사이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침묵의 시간이 지속되었다. "나 잘했지?" 한참만에 나는 입을 열었다. 나도 무엇을 잘했냐고 묻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시체를 주워온 것을 잘했냐고 묻는 것인지, 이들이 죽고도 흔들리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을 잘했냐고 묻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을 묻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냥 묻고 싶었다. 나는 잘한 건가? 그렇다. 내 행동은 아주 현명한 판단이었다. 무엇이 현명했냐고 묻는다면...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현명했다. 나는 현명했다. 말을 마친 입술이 경련이라도 일으킨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들리는 것은, 느껴지는 것은 가슴을 오르락 내리락 하며 숨을 쉬고 있는 나 자신이었다. 슬픔을 호흡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처량하고 따뜻하며 어찌하기 힘든 침울한 분위기가 깊게 스며들었다. 나는 원망스러웠다. 왜, 어째서 누구도 답을 해주지 않는가? 너희들이 답을 해주지 않고 시간을 끄니까 눈이 이상해졌잖아. 부옇게 흐려져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잖아. 어깨가 들썩이는 것은 무시당한 분노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무리 기다려도 제 4기사단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자 홱 돌아섰다. "갈 거야." 심통이 난 나는 궁으로 뛰어갔다. 뒤에 죽은 자들의 잔해를 남겨두고 온 것이 걸렸다. 아마 기사들이 잘 처리하겠지만 자꾸 뒤로 눈이 돌아갔다. 내가 혼자서 뛰어들어오자 캐롤과 시녀들이 놀라서 붙들었지만 그 손들을 뿌리치고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기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있으니 한결 기운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품에 안겨있는 베개를 꼭 끌어안으니 알 수 없는 만족감이 들었다. 나는 얼굴을 파묻은 채 베개를 꽉 끌어안았다. 얇은 이불이 나와 주위의 경계선이 되었다. 이 하얀 공간에서는 나만 존재했다. 기뻐해야 할 일도 없고, 두려워해야 할 일도 없다. 그리고 슬퍼해야 할 일도 없다. 나는 그 안에서 '빌어먹을'을 연발했다. 제 4기사단에게 향한 것이기도 하고, 오펠리우스 왕비에게 향한 것이기도 하고, 이 세상 모든 존재에게 향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에게 향한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숨어있어 봐야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어느새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어둑어둑해진 뒤였다. 고맙게도 시녀들이 나를 가만히 놔두었던 것 같았다. 저녁을 걸렀지만 그다지 배는 고프지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나자 창 밖으로 줄지어 떨어져 내리는 검은 것들이 보였다. 다가가서 보니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페드인 왕국에서 2월 달에 눈이 오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멍하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떨어지는 눈들의 행렬을 보던 나는 황급히 방을 나섰다. 훈련장에 시체를 놔두고 온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치웠겠지만 혹시나 그냥 놔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체가 눈 좀 맞는다고 큰 일이야 있겠냐만 차가운 곳에 내버려두는 것은 싫었다. 그 때처럼 놔두는 것은 싫었다. 병사들이 따라오려 했지만 그렇게 하면 당장 목을 쳐버린다고 엄포를 놓아 떼어놓았다. 밖으로 나와보니 궁궐은 온통 눈에 뒤덮여 있었다. 밤부터 내리기 시작했는지 발자국 하나 남지 않고 소복이 쌓인 그대로였다. 건물도 나무도 조각상도 하얀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칠흑 같은 밤하늘에서 눈송이들이 소리 없이 원을 그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눈송이들이 몸에 닿자 그 때서야 추위가 느껴졌지만 외투를 가져오기 위해 다시 궁으로 들어가는 것은 싫었다. 그래서 나는 입고 있는 옷을 단단히 여미며 그대로 훈련장으로 걸어갔다. 넓은 훈련장은 달빛을 받아 눈만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을 뿐 내가 찾는 것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숨은 하얀 입김이 되어 위로 올라갔다. 만월의 비극적인 빛으로 어렴풋이 비춰진 훈련장은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워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 이제 돌아가도 되는데 이 차가운 평화로움에 마음이 끌려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큰 눈송이들 속에서 낯익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환영인지 눈의 착각인지는 몰라도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지었던 웃음과 똑같은 미소가 눈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냉기를 머금은 눈이 볼을 적셨지만 꼼짝도 하지 않고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놓치기 않기 위해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그러나 바람이 불자 그 미소들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바람에 흩날리는 은빛 먼지밖에 없었다. 그 모습이 생각나게 했다. 이제 그들은 이 곳에 없었다.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볼 수 없는 존재가 돼버렸다. 복수를 하고 나면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복수를 하고 나니 확실히 마음의 응어리는 풀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답답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볼 수 있다면, 만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어서 슬펐다. 눈가에서 눈물이 한 방울 스르르 떨어져 내렸다. 재빨리 눈물을 훔친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렇지 않으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모든 것을 해결한 지금은 쉽게 흔들리게 된다.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았다. 복수를 해야한다, 페드인 왕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누명을 벗어야 한다, 증거를 잡아야한다. 이런 생각들이 사라진 빈 틈으로 꾸욱 눌러놓았던 생각들이 올라왔다. -------------------------------------------- 여러분, 요새 날이 우중충하죠? 힘내시고 여름 감시 조심하세요. 제가 아는 분이 여름 감기에 걸려 엄청 고생하신 모양이예요. 참, 마녀 홈에 연재하냐고 물어보신 분, 저는 그 곳에는 글을 올린 적이 없답니다. 쿨럭;;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 #35- 산 자와 죽은 자 #35- 산 자와 죽은 자 그러다 생각이 났다. 멍청하게도 지금에야 깨달은 것이다. 울어도 된다. 지금은 미래의 일을 걱정해야할 처지가 아니었다. 이제 나는 슬퍼해도 된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고맙다고 말해야하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와 함께 뜨거운 것이 발 밑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눈물이 닿은 눈이 녹아 깊은 홈이 파였다. 이런 작은 우물들은 갈수록 많아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게 되었다. 눈도, 건물도, 나무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눈에 낀 뿌연 안개와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세상의 윤곽이었다. 나는 눈물을 훔치지 않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누구도 없는 곳이라 그런지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리엔?" 나는 낯익은 목소리에 흠칫했다. 어째서 세린이 아직도 여기 있단 말인가? 당직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나는 뒤돌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울고 있는 것을 들키고 말 테니까. "왜?"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한 것이 먹혀들었는지 세린이 가까이 다가오면서 말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그 것도 외투도 입지 않고 혼자서." "눈 구경." 나는 나오는 대로 말하면서 눈물을 훔쳤다. 세린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계속 들렸기에 들키기 전에 재빨리 닦아냈다. 눈물 같은 건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세린은 이미 낌새를 챈 것 같았다. "...울었어?" "아니야! 잠깐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래." 정말이지 난 왜 마음놓고 울지도 못하는 건지 모르겠다. 세린이 그냥 가주길 바랬지만 그러기는커녕 나를 강제로 돌려세웠다. 생긴 것은 여자 같아도 남자라 그런지 힘은 셌다. 거의 강제로 세린과 마주보게 된 나는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래도 볼 건 다 봤겠지만. 세린은 무척이나 놀랐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쳐다보기만 했다. 나도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눈만 맞고 서있었다. 가슴에 차 올랐던 슬픔은 갑작스런 상황에 잠시 얼어버렸다. 부담스러운 시선이 계속 전해졌다. 그래도 나는 고집스럽게 세린과 시선을 맞추지 않고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눈이 바람에 날려 시야를 어지럽혀주면 좋을 텐데 어느새 바람은 잠들어있었다. 아무튼 나는 되는 일이 없어. 이제야 마음놓고 울 참이었는데. 속으로 마구 투덜거리던 나는 머리에서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지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세린은 부드러운 시선을 띠고 살며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세린의 손을 쳐내야할지, 아니면 가만히 있어야할지 몰라 당황했다. "울고 싶으면 울어."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나는 톡 쏘듯이 말했다. "운 게 아니야!" "그럼 왜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짓는 거야?" 입을 열었지만 막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추워서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가만히 있으면 내가 운 것을 인정하는 것 같아 나지막하게 대꾸했다. "울지 않았어. 안 울었어. 안 울었어. 난 울지 않았어." 그 것은 내 자존심이었다. 남 앞에서는 울지 않는다는 자존심, 인간에게 약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다는 고집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리듯 말하던 나는 갑자기 따뜻함을 느꼈다. "뭐야?" 나는 버둥거리며 세린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세린이 더욱 더 강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강한 척 할 필요는 없어. 혼자서 괴로워하지 않아도 돼. 네 주위에는 널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많잖아. 그들에게 조금씩 짐을 나누어줘도 돼.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려고 하지마." "......" 나는 여전히 벗어나려고 했지만 조금 전에 비하면 미약한 행동이었다. 혼자서 모든 걸 짚어지려고 하지 말라는 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어깨와 허리를 감싼 세린의 두 팔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말하지 않으면 모르잖아. 네가 괴로운지, 슬픈지 제대로 알 수가 없어. 그러니까 말을 해줘." "......" 추워서, 슬픔에 젖어서 나는 약간 제정신이 아니었다. 때문에 다정하게 위로해주는 세린의 옷을 꽉 부여잡았다. 넓은 세린의 가슴이 무척이나 편하고 따뜻했다. 용수철은 내리누르면 누를수록 뒤에 많이 튀어 오르는 것처럼 깊은 곳에 묻어놓았던 것들이 팍 치솟아 올랐다. 입술을 비집고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리 없이 울 때가 슬픔에 떠는 것이라면 지금은 슬픔에 아득해질 정도였다. 세린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한몫해서 나는 펑펑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그동안 세린은 말없이 감싸주었다. 인간의 체온이란 정말로 따뜻했다. 추위에 떨고 있어서였는지, 아니면 그동안 혼자 버티고 있었던 것이 서러워서 그랬는지 더욱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는 세린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먹이면서 말했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죽어버렸어. 다들...죽어버렸어. 그런데도 웃고 있어서, 흑, 그래서 미안해." "그래." 세린은 네 탓이 아니라거나 울지 말라는 둥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다만 슬픔으로부터 지켜주려는 듯 더욱 깊숙이 안아주었다. 한 번 말문이 트이자 그 뒤부터는 마음 속에 담고 있던 말들이 줄줄이 나왔다. "미안해서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어. 훌쩍,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잘해줄걸." "계속 말해봐." "보고 싶은데...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이제 없어. 다들 이 곳에 없어." "......." "나만 먼저 생각했는데, 흑, 복수는 나를 위해서였는데." 그 후에도 세린은 잠자코 내 말을 들어주었다. 누군가가 내 말을 조용히 들어준다는 것이 엄청난 위안이 되었다. 예전에는 위로는 약한 존재들이나 찾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그걸 받고 있었다. 나는 약해진 것인가? 인간들 틈 속에서 나쁜 물이 들어버린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 아무튼 나는 평소라면 절대 할 수 없는 말까지 했다. "나는, 나는 정말로 슬퍼해 줄 수가 없었어...지금도 내가 정말로 슬퍼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어쩌면 슬프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건지도 몰라." 내 말은 훌쩍이면서 하는 데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라 알아듣기 힘들었다. 나조차도 세린이 내 말을 들을 수 있는지 들을 수 없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세린이 들을 수 있든 없든 가슴을 무겁게 짓눌러오던 짐들을 털어놓고 싶었다. "그렇지 않아." 나는 조용히 들려오는 세린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려했다. 그러나 세린에게 안겨있는 상태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안긴 그대로 세린의 말을 들었다. 세린이 말을 할 때마다 그의 따뜻한 숨결이 목 언저리에서 느껴졌다. "슬프니까 우는 거야. 슬프니까 이렇게 떨고 있는 거야." 나는 내가 추워서 떨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세린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 말이 다른 긴 위로보다 훨씬 기뻤다. 나는 그들을 생각하면서 울고 있었다. 미안하고, 고맙고, 죄스러운 여러 가지 감정이 한데 섞여 나조차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그들을 위해서 울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수많은 인간으로서 하나가 아니라 하나 하나의 존재로서 다시 되새겨졌다. 미나가, 아인이, 마르크가, 씨스가, 우드랜이, 모두가 나를 향해 작은 미소를 보내주고 있었다. 나는 그 미소를 떠올리면서 다시 서럽게 울었다. 세린은 한참동안 어린애처럼 펑펑 울다가 정신을 차린 마리엔을 품에서 풀어주었다. 눈이 토끼 눈처럼 빨갛게 변해있었지만 금방이라도 고집스럽게 참고 있는 것 같은 조금 전보다는 훨씬 안정된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자꾸 힐끔힐끔 거리는 것을 보니 안심이 됐다. 마리엔은 세린에게 안겨서 울어댄 것이 창피했는지 계속 눈치를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강한 어조로 말했다. "세린, 오늘 일을 말하면 가만 두지 않겠어. 그럼 난 바빠서 이만 가보겠어." 한밤중에 무슨 바쁜 일이 있겠냐 싶지만 마리엔은 빠른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쑥스러워하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에 세린은 실소를 머금었다. 마리엔은 강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약했다. 마리엔은 지면에 뿌리를 단단히 박은 고목처럼 굳건히 버티고 서있다. 하지만 폭풍이 불면 힘이 없는 갈대가 아니라 고목이 부러지는 법이다. 혼자서 모든 짐을 보듬어 안고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 그녀이기에 가끔은 안쓰러울 때가 있었다. 항상 힘차게 살아가는 모습은 보기 좋지만 고집스럽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모습은 서글플 정도였다. 그만큼 주위에 믿을 사람이 없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확실히 예전의 마리엔과는 많이 변했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점만은 똑같았다. 때문에 주위에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아도 기대려하지 않았다. 세린은 그런 생각이 들자 약간은 씁쓸했다. 세린은 마리엔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움직였다. 그러나 그는 훈련장 근처에 있는 나무 앞에서 다시 걸음을 멈췄다. 밝은 낮이었다면 알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어두운 밤인데다 눈까지 내리고 있어서 마리엔은 알지 못한 것이다. "이제 나와, 에릭." 세린의 말에 어두운 그늘 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달빛과 눈이 발하는 약한 빛 때문에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바로 에릭이었다. 에릭은 변함 없이 흔들림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세린은 에릭이 자꾸 제 1공주궁 쪽으로 시선을 주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정말로 괜찮은 거야?" "나보다는 네 위로가 더 도움이 되겠지." 에릭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사실 에릭과 세린이 이 시간까지 남아있는 이유는 마리엔의 생각처럼 당직이어서가 아니었다. 에릭이 무작정 오늘은 궁궐에 남자고 했던 것이다. 뜻밖이긴 했지만 에릭이 쓸데없는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귀찮으니까) 사실을 잘 아는 세린은 잠자코 그 뜻에 따랐다. 그리고 해가 지기 시작하자 에릭은 제 4기사단의 훈련장으로 발걸음 했다.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그러나 그 이유를 머지 않아 알 수 있었다. 한참이 지나자 마리엔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세린은 꼼짝도 않고 서있는 마리엔이 걱정돼서 에릭의 팔을 끌고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에릭은 이를 거절했다. 자신보다는 세린이 더 잘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때는 몰랐지만 이제야 에릭이 말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마리엔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마리엔이 올 걸 어떻게 안 거야?" "아까 보나인 경이 와서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해줬잖아." 에릭의 말에 세린은 보나인을 만났을 때의 일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나도 같이 있었으니까 그건 알고 있어. 하지만 밤에 마리엔이 여기로 올 거라는 말은 없었잖아." 세린의 의문에 에릭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입을 열어 간단하게 말했다. "마리엔이라면 절대 사람들 앞에서는 울지 않으려고 할 테니까." "그럼 네가 위로를 해주지 그랬어?" 세린은 마리엔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에릭도 좋아했다. 에릭은 어렸을 때부터 사귀어온 둘도 없는 친구였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걸렸다. 마리엔이 이번 일을 말하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네 어쩌네 해도 굉장히 고 마워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마리엔의 속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은 자신이 아니라 에릭이었던 것이다. 관심 없는 척하고, 차갑게 대해도 그런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을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다는 증거였다. 에릭의 마음을 알고 있는 세린은 여러 가지로 복잡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에릭은 짤막하게 답했다. "나보다는 네 위로를 좋아할 테니까." 에릭은 그 말을 하고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런 에릭을 보고 세린은 남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지 못하는 에릭이 답답했다.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서로 상대방을 제치고 환심을 사려했겠지만 두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진실한 친구란 그런 것이다. 세린은 마리엔의 밝은 모습이 좋았다. 때문에 자신의 옆에서 그런 모습이라면 정말로 좋겠지만 에릭의 옆이라도 상관은 없었다. 에릭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두 팔에 마리엔을 안았을 때의 부드러운 감촉이 남아있었다. 윗옷이 마리엔의 눈물로 아직도 축축했다. 세린은 에릭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에릭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갈망하는 것처럼 눈 내리는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아직도 무엇을 망설이는 걸까?' 세린은 에릭의 옆얼굴에서 아무 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친구를 비겁한 방법으로 제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난 기다려 주지 않을 거야." 세린은 자신의 말에 에릭이 움찔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봤을 때 에릭은 언제나 그랬듯이 똑바로 서있었다. 달빛이 구름에 가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 #35- 산 자와 죽은 자 다음날 나는 팅팅 부은 눈을 원상태로 돌리기 위해 얼음으로 눈을 비비고 있어야만 했다. 그러고 있으니 자연히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니 굉장히 창피했다. 그 때는 잠시 뭐에 쓰였던 것 같았다. 하지만 고맙기는 했다. 세린에게 모조리 털어놓았더니 훨씬 개운해졌다. 이제 다른 사람에게도 마음의 한 페이지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세린에게처럼 전부 보여줄 수는 없지만 조금은 솔직한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감정에 충실한 마족임에도 불구하고(그렇다고 우리가 멋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성적인 존재라 감정 자체도 이성에 바탕을 두고 생겨난다) 인간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모순된 감정이지만 둘 다 내가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 나는 무의식 중에 좋아하는 사람들까지 은근히 '인간 따위'라고 무시하고 있었다. 그 것은 사람이 애완 동물을 귀여워하지만 의지하지는 않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어제를 경계선으로 마족과 인간이 아니라 존재 대 존재로서 주변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마족. 인간은 인간. 몇 천년의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사실. 수많은 인간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단순히 무료함을 달래주는 장난감들이다. 하지만 그 중에도 드물게 인간이 인간을 넘어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나는 벌써 그 것을 발견한 것 같았다. 어쩌면 지금 내가 인간의 몸을 사용하고 있어서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나는 얼음 주머니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오자 캐롤과 많은 시녀들이 근심 어린 얼굴로 서 있었다. 어제 내 행동이 온통 이상한 것 투성이라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들이 생각하기에도 미나와 기사들의 죽음은 단순한 일이 아니었을 테니까. 나는 전처럼 억지로 웃지 않았다. 감정에 휘둘리는 것은 아니지만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미안, 모두들 걱정했지?" 내 말에 캐롤이 다가와 다정하게 물었다. "이제 괜찮으십니까?" "음, 괜찮지 않은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냥 들으면 캐롤이 나를 약 올리고 있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캐롤의 진심을 알고 있기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누군가 나를 걱정해준다는 것은 그 것이 마족이든 인간이든 기분 좋은 일이었다. 캐롤은 나에게 억지로 아무렇지 않은 척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그녀들을 안심시켜주고 제 4기사단을 만나러갔다. 어제까지만 해도 눈이 제법 쌓여있었는데 지금은 깨끗했다. 대신 길이 아닌 곳은 치워버린 눈까지 쌓여 하얀 언덕들이 작은 봉우리를 내밀고 있었다. 훈련장의 눈은 치워졌지만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일 때문인지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세린에게 안겨서 울었던 곳을 잠시 쳐다보다가 앞쪽 건물로 걸어갔다. 그 곳은 훈련장에 딸린 건물로 업무를 보는 곳, 악천후를 대비한 실내 훈련장, 휴식을 위한 장소, 침실 등 기사들을 위한 모든 것이 마련된 장소였다. 시설도 잘 돼있어 이 곳이 집보다 더 좋다는 기사들도 있었다. 이 곳에 들어와 본 적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만나려는 사람을 찾기는 쉬웠다. 출입구로 들어가자마자 거실에 모여있는 기사들이 보였던 것이다. 기사들은 저마다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지 내가 온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도 등을 돌리고 서있는 가스톤에게 다가가 그를 조용히 불렀다. "가스톤." "으앗!" 가스톤이 화들짝 놀라자 단순히 부르기만 했던 내가 더 놀랐다. "왜 그래?"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물었다. "그렇게 소리도 없이 접근해서 부르면 누구나 놀라지 않습니까?" 가스톤의 하소연을 들은 나는 피식 웃었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때도 가스톤은 뒤를 확인하지 않고 있다가 된통 당했다. 나는 아직도 놀람이 가시지 않은 듯한 가스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소심하기는." "누구나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놀랍니다. 제가 특별히 소,심,해서가 아니라구요." 가스톤은 소심이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자신은 소심하지 않다고 그렇게 힘줘서 말하는 것부터가 소심하다는 증거였다. 대담한 자라면 모름지기 타인의 말에는 큰 신경 쓰지 않는 법이다. "가스톤은 역시 소심했구나. 그리고 앞으로는 뒤를 조심해야겠어. 누가 뒤통수를 쳐도 모르겠던걸." "그건...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서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가스톤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말대답하는 것 하고는. 직접 뭐라고 하지는 못하고 투덜거리는 모습을 보니 전적으로 내 판단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더 이상 '소심한' 가스톤을 놀리지 않고 화제를 바꿨다. "그럼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내가 다가가도 몰랐죠?" "그건......" 가스톤은 말하기가 곤란한지 안색을 흐렸다. 그 모습을 보니 대강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짐작이 갔다. "죽은 사람들에 대한 생각?" 내 말에 가스톤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가스톤은 사라 경에 대한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그렇지 않아!" 가스톤이 말을 더듬자 죠안은 이 때다 싶었는지 싱글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왜 말을 더듬는 거지? 그러고 보니 어제 사라 경이 찾아왔었군. 연애 중인 사람들은 좋겠어." "그런 게 아니야. 나만 찾아온 게 아니잖아. 모두를 위로해주기 위해 온 거였잖아." 여기까지 말한 가스톤은 아차 싶었는지 허둥거렸다. 위로라. 약간은 미안해졌다. 나 때문에 동료들의 죽음을 드러내놓고 슬퍼하지도 못하고 밝은 척해야 하는 처지니까. 나는 괜찮다는 식으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마. 사실은 나도 그들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내 말에 기사들은 놀란 기색이었다. 그런 그들을 본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하니까 생각하는 건 당연하잖아." 그러자 기사들의 눈길이 변했다.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는 걸 느낀 모양이다. 더 이상 슬픔을 억누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답답하던 가슴이 펑 뚫린 것처럼 시원해졌다. 기사들은 움직이던 그대로 멈춰선 채 나를 쳐다보았다. 놀란 듯한, 촉촉이 젖어 평소보다 짙은 색을 띠고 있는 눈들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마리엔 공주님." 보나인이 조용한 어조로 불렀다. 그의 눈은 슬픔에 젖어있었지만 어제와는 달리 약간의 감동이 담겨 있었다. 나는 보나인의 입술이 다시 열릴 때까지 잠자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들을...좋아하셨습니까?" 보나인은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는지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지만 그 안에는 어떤 간절함이 담겨있었다. "물론이지. 아인도, 마르크도, 씨스도, 우드랜도 모두 좋아해.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도 좋아해." 내 말에 보나인의 몸이 떨렸다. 어쩌면 내 눈이 흔들려서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 것이 아니면 나와 보나인이 같이 흔들렸는지도 모른다. 나를 바라보던 보나인의 눈은 어느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보나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낮은 목소리의 말은 나에게 향한 것이었다. "그럼, 그럼 된 겁니다. 그들도 기사이기에 공주님을 구한 것이 아닐 테니까요. 기사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서 행동한 겁니다. 충성심 때문이 아니라 공주님을 좋아했기 때문에 아낌없이 목숨을 내던질 수 있었던 겁니다." 여기까지 말을 마친 보나인은 말을 잇기가 힘든지 탄식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오랫동안 참아왔을 그 한숨이 이제야 나왔다. 보나인은 한동안 천장만 묵묵히 바라보다가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그들은 최고로 행복한 자들이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을 자신들의 손으로 지켰고, 그 사람이 좋아한다고 해주었으니 말입니다. 잊지 말아 주십시오. 그들의 죽음을, 그들의 마음을." 보나인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굉음처럼 들렸다. 보나인의 주먹은 너무 꽉 쥔 나머지 하얗게 변해서 떨리고 있었다. 기사들도 이를 악물고 있었다. 이제야 그 들도 죽음을 정면으로 보고 있었다. 나 때문에, 그리고 그들 자신의 망설임 때문에 말이다. 우리는 닿을 수 없는 곳에 선 자들의 모습을 지금에야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최고의 찬사입니다. 용감한 자들이었다는 말보다도, 충성스런 기사들이었다는 말보다도 더욱...세상의 모든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찬양해도 그들에게는 공주님의 단 한마디가 가장 기뻤을 겁니다." 보나인의 눈에서 두 줄기의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가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그동안 참아왔을 슬픔이 모두 담긴 가슴 저린 눈물이었다. 그리고 나도 울었다. 눈물이 방울 방울 떨어져 내렸지만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이 정도는 해줘도 되겠지. 이 정도는 울어도 되겠지. 소리 없는 울음은 조용히 사람들의 가슴 속에 숨겨져 있던 비탄의 덩어리를 밖으로 끄집어냈다. 사람들의 어깨가 물결쳤다. 그리고 그 안에 나도 있었다. 오열하는 자, 소리 죽여 우는 자, 끝끝내 울음을 속으로 삼킨 자. 하지만 우리는 함께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다. 마음 속의 장례식을. 모두들, 듣고 있어, 우리의 진혼곡을? 듣고 있어, 우리의 외침을? 정말로 좋아해. 사랑하는 나의 인간들. 좋아해. 미나와 15명의 기사들의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장례식에는 그들의 친지는 물론 모든 왕궁 기사들이 참석했다. 그리고 나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라는 이유로 레프스터 국왕도 함께 자리했다. 그가 나오니 다른 왕족들도 나오고 싶지 않아도 나와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왕족들이 앉아있는 자리가 아니라 제 4기사단과 함께 서있었다. 그리고 제 4기사단을 포함한 왕궁 기사단들이 16개의 관 좌우로 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원래라면 로얄 기사단과 제 1,2,3기사단이 차례로 선 다음에 그 끝에 제 4,5,6기사단이 선다. 상위 그룹과 하위 그룹의 차별은 이런 곳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로얄 기사단을 제외하면 제 4,5,6기사단이 선두에 섰다. 바로 이들이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내 앞쪽에는 세 줄로 가지런히 놓인 네 개의 관들이 있었다. 그 안에는 죽은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썩지 않은 시신들이 담겨있었다. 어떻게 했는지 사지도 제대로 붙어있었다. 하긴 단순히 붙이기만 하는 것이라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잘린 팔과 다리가 다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지만 시체는 이 점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니 그냥 붙여놓기만 하면 됐다. 아마 대강 연결했겠지. 그래도 이 모습이 더 좋긴 했다. 그들의 마지막 모습은 온전한 모습으로 기억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들은 생전에는 입어보지 못했을 근사한 옷을 입고 실크 천 위에 누워있는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살짝 미소짓고 있는 모습이 이 대단한 장례식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을 내려다보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한참 그들의 위업과 그에 대한 포상을 설명하고 있는 참이라 조용히 눈물짓는 사람은 있어도 크게 우는 사람은 없었다. 16명의 가족들로 보이는 무리에 눈을 주었던 나는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우리와 마주보고 있는 기사단은 로얄 기사단이었다. 역시 안타까워하긴 해도 자신들의 일이 아니라 담담했다. 세 명을 제외하면 말이다. 비교적 제 4기사단과 친분이 있고 나와 가까웠던 에릭, 세린, 사라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라는 중간쯤에 서있어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선두에 서있는 에릭과 세린의 얼굴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무척이나 걱정스러워하는 모습들이었다. 죽은 자보다는 나에 대한 감정이었다. 나는 에릭과 세린에게 살짝 미소를 보내주었다. '걱정마'라고. 그리고 세린에게 다시 한번 웃어주었다. 이번에는 '고마웠어' 라고. 창피하지만 나는 그의 위로에 많은 위안을 받았다. 얼마 후 대신관이 한사람 한사람에게 축복을 해주고 물러나자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원래라면 가족들이 먼저겠지만 지금은 왕실에서 주관하는 장례식이었다. 덕분에 가장 먼저 꽃을 바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나였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무수한 시선들이 나를 따라 움직였다. 동정 어린 눈, 안타까운 눈,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 그리고 원망 어린 눈. 유족들의 입장에서 보면 누구인지도 모르는 암살자보다는 내가 화살을 던지기 쉬운 대상이었다. 드러내놓고 원망할 수는 없지만 시선에서 그들의 마음이 느껴졌다. 아인과 마르크, 씨스, 미나처럼 나와 직접 연관이 있는 사람들의 유족은 그렇지 않았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 시선 속에 가시가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담담히 관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앞에 놓인 꽃 중 하나를 들어 아인의 가슴 위에 올려주었다. 순진해 보이는 어린 얼굴이 상냥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아인의 얼굴에 가까이 눈을 가져가 댔다. 그리고 차가운 이마에 키스해주었다. 내가 허리를 펴고 일어서자 사람들이 당황하고 있었다. 왕족은 왕족 이외의 상대에게는 손등에 키스한다. 이 것도 어쩌다 한 번 한다. 이마에 하는 키스는 이 사람은 나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뜻이다. 그런데 내가 이마에 키스를 했으니 사람들이 술렁이는 것이다. 아인이 내 연인이라도 되는 줄 알고 착각하는 듯 했다. 하지만 내가 마르크에게도, 씨스에게도, 우드랜에게도, 모두에게 키스하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가득했지만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미나의 이마에 키스해준 나는 관 가장자리에 팔을 얹고 미나를 들여다보았다. 한동안 그러고 있으니 주위에 서있는 기사들의 존재도, 유족들의 존재도 머릿속에서 잊혀져갔다. 있는 것이라고는 미나와 나. 두 사람뿐이었다. [공주님, 정말......좋아했어요...정말로] 이 말이 환청처럼 귀를 맴돌았다.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래. 나도 좋아했어. 넌 인간이고, 나는 마족이지만. 내가 처음으로 마음을 준 인간은 지금도 앞으로도 네가 될 거야.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 줄 아니? 요래봬도 마족은 무척이나 냉정해. 그래서 아무나에게 마음을 주지 않아. 아무나 믿지 않아. 넌 운이 좋은 거야. 그럼 그렇고 말고. 마족은 잘 믿지 않지만 한 번 믿은 사람은 끝까지 믿어주거든. 인간과는 정 반대지? 너는 내가 마족인 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마족이야. 그리고 널 좋아해. 나는 마음 속으로 미나에게 말을 걸었다. 미나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지만 살며시 짓고 있는 미소만으로 충분했다. 나는 한참 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돌아서면 이들과는 완전히 안녕이었다. 오늘이 지나면 난 울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는 것은 괜찮다. 세상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온 세상을 뒤덮는 그 비는 내 작은 눈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 #35- 산 자와 죽은 자 미나와 기사들의 장례식이 끝나자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제 4기사단의 훈련장에서 보내게 되었다. 나는 어느새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것은 제 4기사단의 기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리들은 언제나처럼 시끌벅적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나와 기사들간에 오가는 많은 대화 중 죽은 자들에 대한 말은 한 토막도 없었다. 그 것은 암묵적으로 형성된 하나의 금기와 같았다. 제 4기사단의 기사들은 조금씩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슬픔에 젖어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런 말을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는 약간 달랐다. 나는 이들과는 달리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가 되어있었다. 장례식이 있던 날 나는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울었고, 궁에 돌아가서도 펑펑 울어댔다. 눈물이 세상을 많이 덮을수록 무거운 한탄과 슬픔들이 세상 밖으로 쏟아졌다. 그렇게 가슴속에 담고 있던 감정들이 밖으로 표출되자 나를 답답하게 만들던 것들이 조금이지만 정리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살아있었다. 나는 정말로 미나와 아인들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은 죽었다. 나와 그들 사이에는 경계선이 그어져 누구도 그 선을 넘을 수 없다. 아직 많은 자들이 그 경계선 근처에서 서성이며 주저하고 있다. 제 4기사단의 기사들이 바로 그러했다. 하지만 나는 경계선과 그 너머에 있는 자들을 남겨두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아무리 해도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는 경계선을 넘을 수 없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전진하는 것이다. 언제까지고 경계선 너머의 그들 주위를 배회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자들이 그 곳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죽은 자들로 인해 울지 않는다. 그런 일은 티끌만큼의 이익도 없었다. 어찌 보면 냉정하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많은 자들과는 다르기에 그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과 그 죽음에 얽매이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나도 슬프다. 처음으로 사귀었던 인간들이 죽었는데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그 것도 자연사가 아니라 사고였다면 더더욱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늦어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앞으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나를 갈고 닦는 일이다. 나는 잊지 않는다. 언제까지고 그들을 기억할 것이다. 언제까지고 그들과의 추억을 가슴에 안고 살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얽매이지는 않는다. 나는 살아있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나는 더욱 강해져야했다.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분노도 나를 부추기는 것들 중 하나였다. 어쩌면 나는 그들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교묘하게 이용해 나 자신의 발전을 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 렇다. 나는 슬픔을 분노로 바꾸어 수련에 집중하고 있었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가만히 놔두면 아무런 쓸모도 없지만 이렇게 변형시켜놓으면 무한한 힘의 원천이 된다. 슬프지만 슬픔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 나와 다른 이들의 차이였다. 솔직히 말하면 또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죽은 자들을 가슴 속에 담고 사는 것은 살아남은 자로서 할 일이다. 나는 무엇보다 내 몸을 단련할 필요성을 느꼈다. 스피린을 다녀온 이후 틈틈이 훈련을 하고 있다가 누명 사건이 터진 이후 뜸해져있었다. 그러나 이번 일을 계기로 내 최대 약점인 체력을 보완해야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단시간에 승부를 가린다면 나는 누구 못지 않게 잘 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사정이 달라졌다. 그래서 나는 제 4기사단을 상대로 열심히 대련을 하고 있었다. 이런 내 덕분에 제 4기사단의 기사들도 어느 정도 슬픔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우아악!" "공주님, 살살하세요!" "에이, 시끄럽다. 잔말말고 덤벼." 이렇게 내 창을 피하느라 온 정신을 쏟아야했기 때문이다. 슬픔을 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곳에 정신을 쏟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련은 참 좋은 방법이었다. 그 순간만은 죽은 자들에 대한 생각을 접을 수 있으니까. 나는 빠른 시간 안에 체력을 강화하고 싶어 한꺼번에 두 명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며칠 사이에 엄청난 향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육체를 강화시키기 가장 힘든 이유는 힘이 들기 때문이 아니라 효과가 아주 서서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매일 꾸준히 하는데도 아무런 성과가 없다면 누구나 맥이 풀려 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조급한 나로서는 이런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도 두 명을 함께 상대하면 더 많이 움직여야 될 테니 조금이라도 빨리 강해질 것이다. "좋아. 다음." 가스톤과 필립이 비척거리며 기사들 틈 속으로 들어지자 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3월이 다가오고 있지만 아직도 제법 쌀쌀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한바탕 뛰고 났더니 늦겨울 추위가 모두 도망가버렸다. 나는 열기가 어느 정도 식자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나와 이미 대련을 하고 파김치가 된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팍 숙였다. 나와 절대로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몸짓이었다. 나는 비딱하게 서서 발로 바닥을 탁탁 치면서 말했다. "뭐야? 왜 안 나오는 거야? 그럼 내가 지적한다. 그럴 때는 내가 조금 과격해지는 것 알지?" 내 말에 기사들은 서로의 어깨를 툭툭 치며 눈짓을 보냈다. 그들은 서로 상대에게 대련을 미루고 있었다. 왜들 이러는 건지, 참. 나랑 대련을 하고 나면 실력 향상에 참으로 많은 도움이 될텐데. 그러나 이 것을 알면서도 기사들은 니가 하라는 눈짓을 교환하기에 바빴다. 한참을 기다려도 나서는 사람이 없자 나는 대련 상대를 직접 고르기 위해 기사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러자 기사들 사이에서 급한 의사소통이 오갔고, 마침내 죠안과 미첼로가 죽을 상을 하고 걸어나왔다. "오, 두 사람이 나랑 대련하겠다고? 좋지." "...잘 부탁드립니다." "살살 해주세요." 그들이 대표로 나온 이유를 대강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장이라는 이유로 나와 맞부딪칠 일이 많았던 두 사람이라면 나에게 적응이 돼있을 것이라는 다른 기사들의 생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오게 된 것이다. 죠안과 미첼로는 끝까지 버티려고 했지만 주위의 강압적인 분위기 때문에 자원 아닌 자원을 하게 되었다. 죠안과 미첼로는 침을 꿀꺽 삼키고 목검을 들었다. 그리고 나도 어깨에 대고 있던 창을 원위치 시켰다. 그럼 가볼까. 나는 훈련장에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하늘이었다. 겨울 동안 우울한 회색 빛을 띠던 하늘이 지금은 파란 색을 머금고 있었다. 이제 슬슬 봄이 오려나보군. 이번 겨울은 여러모로 나에게 힘든 계절이었다. 그 겨울이 서서히 물러가고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생명의 계절. 그 계절이 오면 겨울동안 일어났던 어두운 일들이 조금은 밝게 느껴질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나는 파란 하늘 속에 작은 미소를 던졌다. "공주님, 좋으십니까? 저를 두들겨서 그렇게 기분이 좋으시다니 정말 슬픕니다." 나처럼 바닥에 벌렁 누워있는 미첼로가 헥헥거리며 말했다. 이 것 역시 암묵적인 룰이었다. 누군가가 침울해 보이거나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 보이면 이렇게 장난을 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슬픔의 늪에서 건져주고 있었다. 그 것은 슬픔에 빠져 허우적대는 자에게도, 슬픔을 발판으로 삼아 자력으로 일어서고 있는 나에게도 적지 않은 힘이 되고 있었다.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죽은 자들도 우리들이 침울해있는 것보다 활기차게 지내는 것을 원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누운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려 미첼로를 보았다. 그리고 무지 슬프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미첼로의 실력 향상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이러고 있는 거라고. 섭하게 시리 그렇게 말하면 안되지." 내 말에 미첼로의 잘생긴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동시에 수많은 기사들의 말도 안 된다는 시선이 내게 날아왔다. 그러나 내가 자리에 일어나서 앉자 그 시선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내가 손으로 땅을 짚고 몸을 일으키자 팽팽한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기사들은 혹시나 내가 조금 전 시선에 대한 응징을 내릴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보다는 내 다리에 시선을 주었다. 일어나자 다리가 후들거리는 느낌이었지만 실제로는 잘 버티고 서있었다. 그러나 영 불안한 것이 더 이상의 훈련은 무리일 것 같았다. "아쉽게도 오늘은 이만 해야겠는걸." "아자." 내 말이 끝나자 누군가의 작은 환호소리가 들렸다. 원래는 입 모양만 낸다는 것이 너무 흥분해서 목소리를 내고만 그런 경우였다. 나와 다른 기사들은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 곳에는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한 그 자세 그대로 굳은 조나단이 보였다. 조나단은 보나인이 조장으로 있는 2조의 조원으로 제법 괜찮은 실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이런 식의 행동을 하고도 무사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다. 나는 조나단에게 강렬한 시선을 보냈고, 다른 기사들은 서서히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들의 눈은 하나같이 '드디어 네 놈이 미쳤구나. 건드릴 사람은 건드려야지.' 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받고 있는 조나단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어쩔 줄 몰라했다. 나는 조나단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가 입을 열었다. "무슨 급한 일이 있나봐? 그럴 수도 있는 거니까 너무 긴장하지마, 조나단." 내 말에 사방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정녕 그 말을 한 사람이 나인가 하는 식으로 나를 쳐다보거나 자신의 귀가 어떻게 됐나 싶어 귀를 후비고 있었다. 그리고 조나단은 예상치 못한 반응에 더욱더 굳어버렸다. 그러나 나는 이 소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나단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럼 난 이제 가봐야겠네. 모두들 내일 봐." 나는 힘이 없는 다리를 움직여 돌아섰다. 뒤통수에서 아주 강렬한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나는 그대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무릎이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팍 접힐 것 같았지만 신경 써서 걸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걸음걸이였다. 그렇게 다리에 힘을 주며 걸은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뒤쪽에서 놀라움과 두려움에 가득 찬 어조의 말들이 들려왔다. "우오오오! 공주님이 그냥 넘어가셨어!" "분명히 죽음의 대련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럴 수가! 드디어 사람이 되신 거야!" "아니야. 이런 틀림없이 무슨 꿍꿍이가 있으신 거야. 조나단 조심해라. 잘못하면 쥐도 새도 모르는 새에 죽는 수가 있어." "이,이게 더 무서워!" 나는 걸음을 멈췄다. 이 것들이 맞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창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이 놈들을 어떻게 해버릴까, 고민하던 나는 그대로 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조나단의 행동을 보고도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씨스의 가장 친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당분간은 그에게 손을 대지 않을 것 같았다. 아치형의 남색 철문이 묵직한 무게 때문에 서서히 열렸다. 문은 쇠창살이 여러 개 모여 만들어진 식이라 그 사이로 철문 너머의 모습이 보였다. 살짝 보이는 그 모습을 보던 나는 문을 지키고 서있는 병사들의 시선에 약간 머쓱해져 고개를 다시 마차 안으로 집어넣었다. 철컹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아스티에 공작가문의 문이 완전히 열렸고,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 밖으로 나를 호위하고 있는 제 4기사단의 모습이 보였다 안보였다 했다. 그리고 정원 사이에 난 큰 길가에 늘어선 기사들과 병사, 시녀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은 내가 탄 마차가 지나갈 때마다 깊숙이 허리를 숙여 인사함으로써 나를 환영했다. 그 환영의 물결은 마차가 정원을 완전히 지나 저택 앞에 설 때까지 계속되었다. 나는 조용히 마차 안에서 기다렸다. 이윽고 마차문이 열렸고, 이를 기다리고 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미첼로의 에스코트를 받아 땅에 발을 딛은 나는 앞을 보았다. 그 곳에는 푸른빛을 가득 머금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얗게 솟아있는 아스티에 공작가의 저택이 있었다. 잡다한 장식은 없지만 식물과 꽃 모양 장식으로 자연스런 우아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건물이었다. 그리고 날개를 활짝 펼친 드래곤이 조각된 중앙 현관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있었다. 그 가운데 서있던 아스티에 공작은 내가 마차에서 내려서자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공주님." "이렇게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진작에 모셨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합니다." 내 말에 아스티에 공작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나는 예전에 그와 한 약속대로 아스티에 공작가를 방문한 것이다. 처음으로 와보는 아스티에 공작가는 나를 감상에 젖게 만들었다. 이 곳은 이리아 왕비가 태어나 자라난 곳이었고, 마리엔의 외가였다. 그리고 마리엔이 끝내 와보지 못한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이 곳에 와있었다. 초상화에서 본 이리아 왕비를 닮은 얼굴들이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그 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묘한 경험이었다. 하나 하나의 얼굴을 볼 때마다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참으로 오랜만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듯했다. 진짜 내 친척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저 밑바닥에서부터 들뜬 즐거움이 올라왔다. 이리아 왕비의 초상화를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이런 감정이 왜 생기는 걸까? 그러나 결코 기분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포근한 깃털들이 나를 보듬어 안는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기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사이 아스티에 공작이 한사람씩 소개해주기 시작했다. "여기 이 사람이 제 아내이며 공주님의 외할머니입니다. 비시아, 공주님께 인사드리게." 아스티에 공작의 말에 그의 옆에 서있던 나이든 귀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세상에. 정말 많이 크셨군요. 어느새 이렇게 성인이 다 되시다니. 누가 이리아의 딸이 아니랄까봐 쏙 빼닮았군요. 제가 바로 공주님의 외할머니랍니다." 아스티에 가문의 안주인인 비시아는 갈색머리와 흰머리가 절반씩 섞인 머리를 위로 틀어 올리고 있었다. 호수처럼 푸른 눈은 눈물을 머금고 있으면서도 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그 주위로 잔주름이 보였다. 입가에 진 잔주름도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나이에 걸맞는 현숙함과 기품을 몸에 지니고 있는 여자였다. 그러나 현재 비시아는 그런 우아함을 지키는 것보다는 처음으로 보는 딸의 자식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런 물기 젖은 시선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스티에 공작의 두 아들인 빈셀러스 공작과 마크빌 백작도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아마도 기쁨과 함께 자신들의 누이인 이리아 왕비가 떠올라 그런 것일 것이다. 빈셀러스 공작은 아스티에 공작가의 후계자이기에 이 곳에서 지내고 있지만 마크빌 백작은 다른 곳에 살고 있다가 내 방문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른 지방에서 사는 이리아 왕비의 언니, 즉 마리엔의 이모 되는 사람도 멀리서 찾아왔다. 처음 그녀를 본 순간 나는 딱 굳을 수밖에 없었다. 이리아 왕비와 너무나 닮아 마치 그녀가 초상화에서 나온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더 많아서 그렇지 머리색만 같았다면 쌍둥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내 기색을 눈치챈 아스티에 공작이 잔잔한 미소를 띄운 채 말했다. "티타니아는 이리아의 언니지요. 공주님께는 이모가 됩니다. 보시다시피 이리아와 많이 닮았습니다." "말씀은 들었지만 정말 이리아와 닮았군요. 그동안 계속 뵙고 싶었는데 이제야 뵙게 되는군요. 어쩜 이렇게 예쁘게 크셨을까? 공주님에 대한 멋진 소문들을 들으면서 항상 이런 순간을 꿈꿔왔답니다." 아스티에 공작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티타니아의 말이 쏟아졌다. 호들갑스런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처음 봤을 때의 이미지가 와장창 깨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초상화로밖에 보지 못했지만 이리아 왕비는 조용하고 정적인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리아 왕비의 언니라는 티타니아는 굉장히 밝고 쾌활했다. 이리아 왕비의 이미지와 판이하게 다른 티타니아를 보자 왠지 모르게 실망감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나는 곧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내 말에 티타이나는 조용한 어조로 나를 불렀다. "공주님." "네?" 내가 왜 그러나 싶어 되묻자 티타이나가 다시 한번 야단스럽게 말했다. "어머, 어머. 너무하세요. 그렇게 생판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시다니. 딱딱하게 굴지 마시고 그냥 티타이나 이모라고 불러주세요." "어허, 티타이나! 이 무슨 무례한 행동이냐?" 아스티에 공작이 티타이나를 꾸짖었지만 그녀는 당당하게 말했다. "왜 그러세요? 저는 마리엔 공주님께 꼭 이모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구요. 그리고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잖아요. 모두들 예의를 지킨다고 말도 못하고 있는 걸 제가 말한 겁니다." 티타이나의 말에 아스티에 공작은 얼굴이 빨개져서 헛기침을 해댔다. 빈셀러스 공작과 마크빌 백작도 눈동자를 굴려 엉뚱한 곳을 보는 것이 상당히 무안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티타이나의 말대로 나에게 외할아버지나 외삼촌이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듯했다. 비시아와 티타이나만이 조금의 기대를 가지고 나를 보고 있었다. 이런 그들의 모습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다 큰 어른들이 쑥스러워하는 모습이라니. 왠지 그들이 귀엽게 느껴졌다. 아스티에 공작도 그렇고 이 가문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솔직하지 못한 타입이군. 물론 이모라고 못부를 것도 없었다. 생판 처음 본 오펠리우스 왕비를 어마마마라고 부른 나였다. 그 정도쯤이야 얼굴에 철판을 깔고 감정 이입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실제로도 이모가 없지만 그 정도쯤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하지만 그러기는 싫었다. 이들이 싫은 건 아니다. 하지만 약간 고집이 생겼다. 진짜 마리엔이었다면 이들의 반응이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제야 이렇게 받아준 것이 조금은 원망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나는 빙긋이 웃으며 티타이나를 보았다. "그건 좀 곤란한데요." "그렇습니까." 내 말에 티타이나는 풀이 죽어 말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작 필요했을 때는 없었으면서. 진짜 내 경우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그 때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이런 생각과 약간의 장난기(사실 이게 가장 큰 이유였다)가 동한 나는 그들의 반응을 감상했다가 입술을 뗐다. "하지만 앞으로 20번만 더 만나면 이모라고 부를게요. 그 때까지는 싫더라도 계속 나를 만나야 돼요. 아셨어요?" "네?" "싫으세요?" "아, 아닙니다. 좋습니다." 내 말에 티타이나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리고 이 모습을 보는 공작 가문의 사람들은 놀라움과 기쁨이 한데 뒤섞인 얼굴이 되었다. 아마 그때쯤이면 나도 이들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 이모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심통 아닌 심통이 났다. 이들이 없었기에 마리엔이 나와 계약을 맺은 것이지만 조금은 괘씸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들의 감정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다. 진심이 아닌 사람이라면 무슨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 기꺼이 이모라는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이런 짓궂은 장난을 쳐도 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벽을 쌓고 지내왔던 마리엔과의 재회를 기뻐하는 그들을 보니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처럼 마냥 기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씁쓸한 기분도 들었다. 이들이 만나고자 하는 진짜 마리엔은 이미 죽었다. 그 때를 떠올려보면 마리엔은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아끼는 자들이 꽤나 많았다. 문제라면 그들이 그들의 애정을 표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을 하지 않으면 알게 뭔가. 그렇게 생각하면 마리엔의 죽음은 이들의 책임도 컸다. 아마도 마리엔도 이 곳에 오고 싶었을 것이다. 당시의 엄청 싸가지 없고 무례한 모습 속에 감추고 있는 진실을 알고 있는 자는 계약을 맺은 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마리엔이 살아있다면 이렇게 행동했겠지. "그럼 저택 구경 시켜주세요. 그리고 이야기도 많이 하고 싶어요." "네. 그래야지요. 당연히 그렇게 해드려야지요." "잘 오셨습니다. 이 곳이 공주님의 외가랍니다." "앞으로는 자주 찾아오십시오. 여기는 공주님의 다른 집이기도 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오래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 말에 모든 사람들이 감격해서 말했다. 혈육이란 것은 인간들에게는 참으로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의 촉촉이 젖은 목소리들은 잃어버렸던 전재산을 찾은 사람처럼 설렘과 두근거림이 함께 담겨있었다. 나는 따뜻한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 속에서 살며시 웃었다. 마리엔이라면 이렇게 했겠지. 그 속마음은 항상 이런 순간을 꿈꿔왔겠지. 그러나 마리엔은 죽었다. 하지만 아스티에 공작과 다른 사람들에게 마리엔은 살아있었다. 나는 마리엔을 대신해서 살아가고 있었다. 마리엔이 이미 다른 생명을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맡긴 그녀의 몸은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그 육체의 영향 때문인지 나도 행복했다. 사람들의 인연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누군가가 떠나간 자리는 다른 사람들이 채워주는 그런 것인가 보다. 하지만 그들이 똑같을 수는 없었다. 죽어간 자들은 죽었지만 나는 기억한다. 그리고 새로운 인연을 찾아, 앞으로의 나날을 위해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