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족의 계약 #0- 마족 계약을 맺다 "오홋홋호~!" 이런 역사적인 날에 어찌 웃지 않고 배길쏘냐. 내 나이 이제 겨우 610살이다. 무한의 생명을 지닌 마족의 경우를 보면 아직 꼬마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탁월한 재능과 뛰어난 능력을 보였던 나는 드디어 1차 각성에 성공했다. 1차 각성이란 마족이 본신의 힘 중 1/3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의식을 말한다. 하급 마족이나 중급 마족은 겪지 않는 상급 마족만이 거치는 독특한 절차였다. 상급 마족은 워낙 강한 힘을 가지고 태어나다 보니 자신의 힘에 자신이 휘둘리지 않도록 이런 각 성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 이유도 없이, 예를 들어 분수도 모르는 놈이 먼저 덤볐거나 시비를 거는 경우를 제외하고 자신의 힘을 조절 못해서 차원계 하나 말 아먹으면 신과 천사 놈들이 얼마나 땍땍거리는지 아는가. 지들은 심판이라고 해서 잘 도 차원계를 통째로 소멸시키더니만 우리가 가끔씩 하나 박살내면 무고한 영혼이 어쩌 고저쩌고 라는 별 웃기지도 않은 이유를 들고 나오는 놈들이었다. 그 놈들은 자기들만 잘난 줄 안단 말이야. 그 고귀한 척 하는 상판도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나마 지금은 소강 상태긴 하지만 예전에는 정말 박 터지게 싸우던 때가 있었다고 한 다. 그러나 예전에 마계와 천계와 싸우다가 그 여파로 차원계 여럿이 날아간 바람에 그 후로는 상대가 먼저 건드리지 않는 한 자신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성립되 었다. 한두개라면 몰라도 한꺼번에 박살이 나버리자 전체 차원계가 삐걱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그거 수습하느라고 죽어라고 고생한데다 서로에게 타격이 심해서 그런 불문율이 성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인간들에게 신탁이랍시고 내려 '마족은 모든 악의 근원이며 반드시 척결해야만 할 존재들이다.' 라는 말을 하고는 있다고는 하지만 인간을 이용하는 것말고는 별다른 행동은 없으니 우리도 가만히 있었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인해 마신 마르케스 님의 힘으로 인해 각성이라는 것이 생기게 되었고, 이런 각성을 3차례 겪어야만 자신의 모든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아, 한가지 예외가 있기는 하다. 열받아서 완전히 빡 돌면 그렇게 되긴 한다. 대개 1차 각 성은 700-2000년 사이에 이루어진다. 그런데 나는 1차 각성기간을 무려 100년 가까이 나 단축시킨 것이다. 이런 위대한 일을 해내다니! 역시 난 천재였던 거야! 아침부터 아빠와 엄마를 비롯해 우리 성에 있는 살아있는 모든 존재를 붙잡고 자랑을 늘어놓은 데다 다른 마왕 아저씨들과 아줌마, 아는 마족이란 마족은 모조리 찾아가 자 랑을 늘어놓았더니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만은 즐거웠다. 정확히 말하면 돌아다녀서라 기 보다는 내 말에 '마신이시여! 어찌 이런 재앙을 내리시나이까!' 라고 주절거리던 몇 놈을 살짝, 정말 살짝 손봐주는 일 때문에 피곤했다. 그러나 이런 괘씸한 마족들조 차 안면에 강펀치를 먹여주는 가벼운 응징만으로 끝낼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평소라 면 죽음밖에 없었는데 그들에게는 정말 운이 좋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건 단순히 각성을 빨리 해서만은 아니었다. 바로 1차 각성을 할 때부터 인간과 계약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수정구를 통해서나 책에서 보긴 했지만 항상 궁금하기 그지없는 존재 들이었다. 가끔 성에서 부모님이나 다른 마족들과 계약을 맺은 사람들을 보긴 했지만 하나같이 음침한 것이 내가 기대해오던 인간들과는 많이 달랐다. 다른 마족들의 말로 는 보통 인간들도 우리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을 지닌 종족이라고 한다. 당연히 마족처럼 멋진 날개와 강력한 힘을 가진 근사한 종족이란 말은 아니었다. 평소에 날개 를 감추고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고만 들었다. 그리고 무척이나 약하니까 만나게 되면 되도록 손대지 말고 보기만 하라는 주의도 들었다. 그 뒤에 나처럼 말이 안되면 우선 패놓고 보는 성격 파탄자는 특히 조심하라나 어쩐다나. 인간들은 마족들과는 달리 마을이란 것을 이루고, 그 마을들이 모여 도시가 되고, 그 도시들이 모여 한 나라가 된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얼마나 인간들의 세상을 보 고 싶어했는지 모른다. 마법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날개도 없고, 힘도 없는 존재 들이 어떻게 지상에서 그렇게 세력을 떨치는지 궁금한데다 소설책에서 본 인간들의 세 계는 너무 재미있어 보였다. 그러나 어느정도 나이를 먹은 마족이라면 인간 세계에 자유롭게 나갈 수 있었고, 아직 어린 나는 자유롭게 인간 세계에 내려갈 수 없었다. 다른 마족들은 계약이다, 인간 세계에 놀러간다, 하고 돌아다니건만 그들의 이야기만 들어야하는 현실에 얼마나 슬퍼했던가. 그러나 계약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계약에 대한 공부 를 하기 시작했다. 계약을 맺은 적이 있는 마족을 찾아가 사전조사를 하는 건 물론이 고 서재란 서재는 다 뒤져 계약에 관한 책도 모조리 읽었다. 이 얼마나 학구적인 마족 이란 말인가. 이제 남은 건 어서 빨리 계약을 맺는 것이다. 이번에는 첫 계약이니까 대가도 조금만 받고 계약도 충실히 이행해줘야지. 그러니까 얼른 아무나 불러 줘! 세상은 역시 생각한 것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벌써 1차 각성을 한지 4달이 지났건만 ...... 왜 아무도 마족을 소환하지 않는 거야?! 다른 마족들이 벌써 계약을 다 해버렸 나? 아니면 요즘 인간 세상이 너무 평화로워서 그런가? 하지만 인간들은 호전적인 종 족이라 끊임없이 싸우고 죽이고 한다고 들었는데. 정말 이상하다. 비록 1차 각성을 한 다고 바로 계약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들었지만 그동안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 이럴 수가. 기껏 공부까지 했는데, 계약맺을 때 입을 옷도 준비해놨는데, 근엄한 표 정을 짓는 연습도 했는데 왜 아무도 안 부르는 거야! 아무리 목을 빼고 기다려도 소환은커녕 소환 비슷한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얼 마나 기다려야 인간 세상에 갈 수 있는 거야? 확 몰래 빠져나가 버릴까보다! 할 수 만 있다면 진작에 했을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후에라 도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짓은 할 수 없었다. "짜증나. 언제부터 인간 세상이 이렇게 조용해졌을까? 이번에 불러주면 특별히 대가도 조금만 받으려고 했는데." 투덜거리던 나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뒹굴거리기 시작했다. 너무 실망한 것인지 다 른 일이 할 의욕이 사라져버렸다. 그 많은 차원계 중에 마족을 소환하는 사람이 하나 도 없다는 게 말이 돼? 이건 분명 무슨 음모가 있는 거야. 어떤 망할 마족이 인간들이 랑 몽땅 계약을 맺어버렸나? 아니면 천계 놈들이 무슨 수작을 부린 걸까? 그렇게 하루 종일 침대 위에서 베개를 끌어안고 구르고 있을 때였다.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그 때까지 불만이 거의 줄지 않았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웠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사소한 일에 놀랄 때가 아니었다. 희미하게 누군가 도움을 청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여자의 목소리인 듯 했다. 마족은 마법진을 통해서도 소환되지만 아주 강렬한 의지로 부르면 역시 응한다. 지금 의 경우는 후자인 듯했다. 소리가 들리자마자 발딱 일어선 나는 계약을 위해 준비해두 었던 옷들 중 하나를 집어들고 순식간에 갈아입었다. 지금 체면 따질 땐가. 다른 놈한 테 뺏기기 전에 얼른 가야지.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쫘악 달라붙는 검은 색의 드레스로 갈아입은 나는 냉큼 달려갔다. 즐겨 입는 옷은 아니었지만 인간들의 기준에 맞춘 것이다. 인간들은 대개 남자 마족하면 검은 색의 옷에 검은 망토를 걸친 모습을, 여자 마족은 너나 할 것 없이 검은 색의 쫘아악 달라붙고 종아리가 트인 드레스를 입 고 나타나리라 생각했다. 첫 계약자인데 그런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지. 일종의 서비 스였다. 도착하기 직전에 옷차림새를 단정히 하고 표정을 가다듬는 것은 잊지 않았다. 인간에 게 얕보이면 안되지. 기대에 부풀어 목소리가 들려온 곳에 도착한 나는 고개를 갸웃거 렸다. 마법진을 통해 소환을 한 것이 아니니 뭔가 굉장히 급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 을 줄 알았다. 예를 들어 자신이 죽을 위험에 처해있거나 정조를 잃게 생길 상황에 처 했거나 그 것도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구가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경우 말이 다. 그런 급박한 상황을 생각하고 왔던 나는 전혀 생각지 못한 공간으로 나오자 주변 을 둘러보았다. 검은 빛과 흰 빛이 주위를 감싸고 쉴새없이 움직이고만 있을 뿐 그 외 의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 놈이 이 딴 곳에서 부른 거지? 아니면 내가 잘못 왔나?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 온 것 같았다. 공간을 넘어왔는데도 잘못 올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이었다. 나는 실망해서 어깨가 추욱 쳐졌다. 이번에는 꼭 계약해서 인간계에 놀러가려고 했는 데. 내 꿈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실망해서 돌아가려고 몸을 돌리던 나는 내 뒤쪽에 웬 여자가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게다가 그 여자의 몸이 투명해서 희미하다면 누군들 놀라지 않겠는가. 헉, 심장 멈추는 줄 알았 네. 저 여잔 또 뭐야? 새로운 마물의 일종인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생물 중 하나인가 ? 그러나 아직 어리다고는 해도 마족인 내가 놀랄 수는 없었다. 놀라면서도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수도 없이 무표정을 연습해왔기 때문이었 다. 잠시 후에는 죽은 인간의 영혼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말이다. 이미 죽은 영혼도 마 족을 불러낼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당신이 마족인가요?" 역시 그 목소리는 내가 이 곳까지 달려오게 만든 바로 그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저 여 자가 여기로 나를 불렀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계약자? 그 순간부터 그 여자의 정체가 확실하지도 않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게 되었다. 정체가 뭐면 어때? 중요한 건 바로 나를 불렀다는 것이다. "날 이 곳으로 부른 것이 그대인가?"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멋있게 나지막하게 깔렸다. 표정연습과 함께 연습한 보람이 있 었군. 내 말에 그 여자(?)는 약간 흠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제가 당신을 불렀습니다. 마족은 계약을 하면 뭐든지 다 들어준다고 하 던데 사실인가요?" 물론이지. 뭐든 다 들어줄 수 있지. 대가만 낸다면 말이지. 당장에라도 달려가 키스를 퍼붓고 '뭘 들어줄까? 말해봐' 라고 호들갑을 떨고 싶었지만 꾸욱 참고 고개만 끄덕 였다. 계약시 지켜야할 200가지 조항이라는 책에서 읽은 대목이 떠올랐지 때문이다. 어떤 순간에라도 냉정한 모습을 잃지 마라. 그러면 열에 아홉은 넘어오게 돼있다. 쿨한 모습을 유지하면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내게 원하는 게 뭐지?" "제 대신 살아주세요." 그 여자의 말에 나는 어벙해졌다. 엥,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계약 내용 베스트 50이라 는 책에도 이런 내용은 없었다. 세계 정복이나 복수를 위해 힘을 빌려달라거나, 누군 가를 살려달라는 흔한 내용을 기대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계약 내용이었던 것이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이상한 소리를 하는지 궁금해서 그 여자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물론 겉으로는 철저히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게 무슨 소리지? 자세히 말해보도록." 강압적이고 위협적으로 나가야 상대가 얕보지 못하는 법이다. 잔뜩 가라앉은 내 목소 리가 공간을 울렸다. 목소리는 공간에서 계속 울리면서 다시 내 귀로 들어왔다. 음산 하고 무미건조한 목소리. 내가 스스로의 목소리에 만족하는 동안 여자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거 너무 겁을 줬나? 이러다 계약을 맺지 않겠다고 하면 안 되는데 말이야.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리자 여자가 잠깐 몸을 흠칫 떨었다. 그러나 곧 얼굴 가 득 오만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전 페드인 왕국의 제 1공주지요. 페드인 왕국은 아시겠지요?" "아니, 모르는데...." "네?! 소피린 대륙의 3대 강국 중 하나를 모른단 말이에요?!" 참내. 차원이 한둘도 아닌데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아냐? 전투라면 어렸을 때부터(지 금도 어리지만) 자신이 있었지만 그 외의 것을 내게 기대하진 마라. 난 아직 어리다. 참고로 난 꼬마라는 말을 가장 싫어한다. 그나저나 저 것이 지금 나한테 화를 내는 것 이야?! 확 엎어버려......아, 아니지. 참자. 몇 대 쥐어박았는데 죽어버리면 곤란해. 마음 넓고 착하고 너그럽고 인자한 내가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 번 째려봐줌 으로써 여자의 난동을 막았다. "그래. 너 공주야. 내가 뭐라고 했어? 하던 말이나 계속해." "그게...사실은 전 독살을 당했단 말이예요. 이 모든 게 왕비인 오펠리우스 그 천한 계집의 짓이 틀림없단 말이예요! 그러나 이대로 죽는 건 너무 분하고 억울해요!" 여자는 정말 분하고 억울한지 이를 뿌드득 갈고 있었다. 성질이 보통이 아님에 틀림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족 앞에서 저러고 있을 수 있겠는가. 자기 혼자 길길이 날 뛰는 여자를 보자 왠지 무시당하는 것 같아 이마에 힘줄이 하나 돋았지만 꾸욱 참았다 . 어떻게든 계약을 맺고 인간 세상에 나가서 구경을 하고 싶었다. "잠깐! 진정해! 그래서 내가 널 다시 살려주면 되는 거지?" "아까 말씀 드렸잖아요. 제 대신 살아달라고요. 마족도 별 것 아니군요. 방금 말한 것도 잊어버리고 말이죠." 저, 저 것을...이마에 힘줄이 하나 더 돋았다. 당장에 마물들 먹이로 줘버리고 싶었 지만 꾸욱 꾸욱 참았다. 계약을 해야 한다는 마음이 마족으로서의 자존심마저 이기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는 살기어린 내 모습에 기가 질려 더 이상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 지 않았다. 성질이 그 모양이니 독살 당한 거다! "잠시 우리 상황을 정리해보도록 하지." 간신히 살심을 억누르고 억지로 무표정을 만든 후에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넌 공주란 말이지." "당연하죠!!!" "그런데 왕비한테 독살 당했단 말이야?" "네. 하지만 왕비가 아니라도 의심 가는 사람은 많아요. 그 왕비가 낳은 천한 것들이나 다른 후궁의 딸도 있으니까요!" 에휴, 니 성질을 보아하니 용의자가 한두 명이 아니겠다. "아까부터 궁금해서 묻는 건데 그래도 왕비면 너희 엄마 아니야? 제 1공주면 왕비의 소실일텐데. 그렇게 욕해도 돼는 거냐?"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세요! 저희 어머니는 제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단 말이예요! 그런 천한 핏줄의 여자가 내 엄마일리가 없잖아.......요!" 다시 흥분하려는 여자. 죽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이쯤 되자 상 황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 시작했다. 어떻게 마법진도 없이 마족을 소환했나 했더니 . 저 여자는 분명 무의식 속에서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다. 마족은 마법진을 통해서도 소환이 되지만 아주 강렬한 욕망을 가지고 부른다면 역시 응한다. 지금도 간신히 분을 삭이고 있는 여자의 성격을 보니 부르고도 남았다. 결론은 내가 저 여자의 인생을 대신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토록 계약을 원했 던 나로서는 거절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만세 삼창을 부르고 싶었 지만 냉정, 침착, 이라는 말을 되뇌면서 참았다. "이왕 물어보는 거 하나 더 물어보지. 차라리 살려달라는 소원이 더 낫지 않겠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요. 만약 내가 산다고 해도 복수를 할 수 있다는 보장 은 아무 것도 없어요. 분하지만 왕비의 세력은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게다가 왕자 까지 낳은 왕비를 아무리 나라도 쉽게 이길 수 없잖아요. 하지만 교활하고 사악하 다고 알려진 마족이라면 가능하잖아요. 그리고 어차피 살아난다 해도.......반겨줄 사람은 없으니까......." 교활하고 사악한, 이란 말에 간신히 화를 내리눌러 참던 나는 공주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다. 아무튼 계약자의 성격이 아무리 더러워도 계약은 하고 싶었기에 마족의 자존심을 애써 외면했다. 인내심 기르기에는 딱 좋은 상황이었다. "좋아! 너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그런데 독살 당했다면서? 벌써 장례식 치른 거 아니야?" "걱정 말아요. 죽기 직전에 당신을 부른 거니까요. 근데 마족이란 거 의외로 쉽게 부를 수 있군요." 마, 마족이란 거!!! 또다시 억제할 수 없는 살심이 일었지만 초인적인(?) 인내력으 로 참았다. 계약이란 말에 완전 넘어가 마족의 자존심을 저 멀리 내팽개치고 있는 나 였다. 훗, 난 너무도 너그러운 마족이야, 라는 표면상의 이유를 들긴 했지만. 행여나 저 여자가 물릴까봐, 또 내가 여자의 오만한 말에 확 돌아서 없애 버릴까봐 황급히 말 했다. "네 이름이 뭐지?" "마리엔 오페나 드간 페드인이...예요." "좋아. 나 유리시나는 마리엔 오페나......" 그 뒤에가 뭐였더라? 이름이 뭐가 이렇게 길어! 인간들은 원래 이렇게 이름이 다 긴 가? 자신의 이름 하나만 가지고 있는 마족과는 달리 인간들 이름 뒤에는 성이라고 하 는 것들이 줄줄이 따라온다. 도대체 뒤에 그런 것은 왜 붙이는 거야? 약간의 생각 끝 에 겨우 이름을 생각해낸 나는 행여나 잊어버릴 새라 빠르게 계약의 말을 내뱉었다. "나 유리시나는 마리엔 오페나 드간 페드인 그대와의 계약을 받아들인다. 내 이름을 걸고 그대와의 약속을 지킬 것이다!" "참, 그 천한 것들 혼내주는 거 잊지 말아요!" "알았다." 자신을 죽음으로 내몬 천하고 무식하고 괘씸한 것들의(마리엔의 입장에서) 복수까지 다짐받은 후에야 여자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사라졌다. 영혼이 완전히 육체를 벗어 난 모양이다. 그럼 나도 슬슬 마리엔의 몸 속으로 들어가야겠군. 그런데 뭔가 나의 걸 음을 잡는 것이 있었다. 굉장히 꺼림칙한 무언가가 있었다. 아주 중요한 걸 빠뜨린 것 같은데. 뭐지?........ 으아악!!! 대가를 받는 걸 잊어버렸다!!! 첫 계약이라는 기대 와 마리엔의 성질 긁는 소리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나는 황당하게도 공짜 계약을 맺고 말았다. "이봐! 아직 안 갔으면 잠깐 나와봐! 대가는 내놓고 가야할 것 아냐! " 의미없는 짓이란 것을 알면서도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젠장, 진짜 갔나보네. 하긴 나라도 그냥 가겠다. 마족이랑 공짜 계약을 맺었는데 어느 미친 인간이 다시 오겠어. 아무리 후회해봐야 이미 마리엔 공주의 영혼은 떠나고 없었다. 게다가 스스로 맹약 의 말을 내뱉은 이상 취소도 불가능했다. 으, 천재라 불리는 내가 이런 초보적인 실수 를 하다니. 잠시 고민해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인 간 세상에서 신나게 놀고 오겠어!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으면서 대가가 없어서, 라는 핑계를 들어 계약의 내용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그럼 마리엔 공주의 몸으로 들 어가 볼까나. 으쌰! 드디어 인간 세상에 간다! #1- 공주가 되다 나는 주위에서 소곤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원래 시끄럽게 떠드는 것보다 소근소 근거리는 게 신경에 거슬리는 법이다. 조용히 하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내 입은 그런 나의 의지를 배반하고 엉뚱한 소리만을 내뱉었다. "으~~." 온몸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기에 나도 모르게 그런 신음소리를 낸 것이다. 그리고 그 소리로 나는 모든 이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몇몇 여자들이 나를 뚫어지게 쳐 다보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꺄아아악! 공주님께서 깨어나셨다." "어서 어의를 모셔와라!" 여기저기서 접시도 충분히 깨뜨릴 수 있을 것 같은 소음이 들려왔다. 환자에겐 안정이 필요하단 것도 모르는 것인가. 손을 들어 귀를 막고 싶었지만 당장은 손가락 하나 까 닥할 수 없었기에 얌전히 인상만 찌푸리고 있었다. 잠시 후 누군가 다급히 뛰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아까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여자들의 말을 유추해 보건대 어의 일 것이다. 그런 당연한 소릴...... 비록 인간 세상에 나와본 적은 없었지만 이 때를 위해 인간에 관한 책은 많이 읽었던 나다. 아, 나처럼 학구적인 마족이 또 어디 있을까.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있던 나는 어의라는 사람의 인상이 상상해오던 것과 많이 다르지 않다는 것에 만족했다. "공주마마! 정신이 드십니까? 허허허!!!"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인자한 얼굴의 노인네였다. 마계에는 노인이 없기에(마족은 늙지 않는다) 약간 생소하긴 했지만 인간은 금방 늙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얼굴이 쭈글쭈글하네. 신기하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되지? 처음 보는 인간의 모습은 신기 그 자체였다. 어의의 주위에는 몇몇 사람이 더 있었다. 어의와 비슷한 옷을 입고 있는 몇몇 사람과 마법사...신관!!! 어떻게 알았냐면 로브와 신관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급스럽 긴 했지만 로브와 신관복이었다. 신관이 있다는 사실에 약간 움찔하긴 했지만 몇 백년 동안 표정연기를 연습해왔기 때문에(계약시 멋있게 보이기 위해서) 다행히 놀란 표정 은 짓지 않았다. "공주마마, 괜찮으십니까? 허허허." 재차 물어오는 어의. 말할 기운이 없었기에 간단히 고개만 끄덕였다. "오오! 그거 정말 다행이군요! 공주마마는 일주일동안이나 의식이 없으셨답니다. 허 허허." "다행입니다. 어서 폐하께 전해드려야겠군요." "이 모든 게 생명의 신 바르셀님의 은총이십니다." 뭐시라! 그 고귀한 척만 하는 신의 은총이라고! 그러나 따질 상황도, 힘도 없었기 때문에 불만을 안은 채 그냥 넘어갔다. 그렇게 마리엔 공주로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한편 마리엔 공주가 깨어나면서 활기차진 제 1 공주궁과는 달리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 있었다. 아름답게 꾸며진 방 안에는 한 명의 여자와 남자가 있었다. 여자 는 옅은 금발 머리에 갈색 눈을 하고 있었다. 금색과 갈색. 그냥 듣기에는 서로 어울 리지 않는 색상처럼 느껴졌지만 옅은 금색과 갈색은 모두 따스한 느낌을 줘서 잘 어울 렸다. 그 여인은 매우 아름다웠으며 어딘지 모르게 기품이 넘쳐흘렀다. 그 여자의 앞 에 근심 어린 얼굴로 앉아있는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여인과 닮았지만 좀 더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그래서 마리엔이 깨어났단 말인가요?" "후우, 설마하니 팡세를 마시고도 무사할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왕비전하." "아니에요. 그게 오라버니의 잘못일 리가 없잖아요." 이 두 사람은 페드인 왕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오펠리우스 트로인 페드인. 처음에는 별 볼일 없는 남작의 딸이었으나 뛰어난 미색으로 후궁으로 들어왔다 정식 왕비인 이리아 왕비가 죽자 왕비가 된 여인이었다. 오펠리우스가 후궁 으로 들어간 이래 그라냔 가문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 이리아 왕비기 죽은 시점에는 이 미 막강한 힘을 가진 백작가로 자리 매김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탈 없이 왕비가 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유일하게 왕자를, 그 것도 둘이나 낳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눈 앞에 있는 사람은 그녀의 오빠인 하인리스 그리폰 그라냔으로 넘치는 카리 스마로 뭇 귀족들의 신망을 얻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남부러울 것 없는 이 두 사 람에게 눈엣가시 같은 인물이 있었다. 바로 이리아 왕비의 유일한 자식인 제 1공주 마리엔 오페나 드산 페드인. 이리아 왕비 를 닮아 페드인 왕국의 제일 가는 미녀로 꼽히고는 있지만 특유의 오만한 성격 때문에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마리엔은 남작가문 출신인 왕비와 그 자 식들을 출신 성분이 천하다고 매우 무시했다. 심할 경우에는 무도회장에서 그녀의 딸 인 데미나를 공개적으로 망신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남자들에게 꼬리치는 마리엔 공 주를 왕비가 예쁘게 볼 리 만무했다. 그녀의 이런 성격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단 한 명 국왕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국왕 은 누구보다도 이리아 왕비를 사랑했기 때문에 마리엔 공주를 무척이나 아꼈다. 그래 서 같은 17살이지만 생일이 더 빠른 데미나 공주를 제쳐두고 마리엔을 제 1공주로 삼 았던 것이다. 만약 페드인 왕국이 다른 나라처럼 여자가 왕이 될 수 없다면 왕비나 하 인리스도 큰 걱정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페드인 왕국은 남녀평등까지 는 아니어도 만약 공주의 능력이 왕자보다 뛰어나다면 왕비가 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리아 왕비의 가문은 페드인 왕국의 3대 공작가 중 하나였다. 다행히 현 가주 인 아스티에 공작은 공과 사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남자에게 꼬리치는 것 빼 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마리엔 공주가 왕비가 될 확률은 거의 없었지만 혹시 모 르는 일 아닌가.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차에 팡세를 탔건만 공주는 죽을 것이라는 사 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깨어났다. 물론 결정적인 계기가 된 건 두 달 전에 열린 무도회 에서 마리엔이 데미나 공주를 비롯한 오펠리우스 소생의 자식들을 모욕한 일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까요? 다시 한번......" "아니예요. 오라버니. 당분간은 지켜보기로 하죠. 또 이런 일이 일어나면 국왕 폐하도 의심을 할거예요. 그리고 마리엔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 우리 라이언과 르 미엘의 방해가 될 정도의 인물도 아니예요.그저 폐하의 총애를 믿고 날뛸 뿐이죠." 어의 패거리들이 자기들끼리 뭐라고 수군거리고 사라진 후에야 나는 내가 누워있 는 방을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다. 아직까지는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없었기 때문에 침 대 위에 누워 눈동자만을 굴려서 본 것이기에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언뜻 본 것만 으로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엄청나게 넓은 방은 바닥에 차마 밟기가 아까울 정도의 최고급 융단이 쫘악 깔려 있었 고, 벽과 천장은 화려한 금박 장식이 되어 있었다. 벽난로조차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고풍스러운 가구들도 딱 봐도 가격이 장난 아니게 생겼다. 게다가 내가 누워 있는 침대는 두 명이 충분히 누워서 잘 수 있는, 얌전히만 잔다면 3-4명도 문제없을 정도로 널찍했다. 또한 침대 옆에 있는 장식장 위에는 보물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장 식품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나 역시 부모님들이 모두 마왕이기 때문에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살아온 몸이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마리엔 공주의 방을 호화찬란하기 그 지없었다. 하,하,하. 아주 금을 쳐발랐구만. 공주들 방은 다 이런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마리 엔의 사치가 심해 이정도지 다른 공주들 방도 이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하여튼 여기 있는 거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평생 놀고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참 마리엔 공주의 방이었으면서, 앞으로는 내 방이 될 방을 살펴보고 있는데 시녀가 식사를 들고 왔다. 어의가 앞으로 일주일동안은 절대 안정을 취하라고 해서 그런지 현재 내 방에는 지금 식사 시중을 하러 들어온 2명의 시녀들 밖에 없었다. 갈색머리의 내 나이또래(마리엔 공주또래다. 진짜 내 나이 또래면 이미 호호백발이 된 건 물론이 거니와 땅에 묻힌지도 오랜 사람이다) 여자아이 한 명과 풍만한 몸매를 자랑하는 아줌 마 한 명이었다. 두 사람은 무척이나 어려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직 정상적인 식사를 할 정도는 아니어서 밥은 죽이었지만 상당히 맛있었기 때문에 배가 허하다는 것 빼고는 별다른 불만은 없었다. 하나 더 불만을 들자면 분위기가 맘 편히 밥 먹을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 정도. 저 것들이 밥 먹는데 왜 자꾸 힐끔힐끔 쳐다보는 거지? 한참 식사 중일 때 누군가 자 구 쳐다보면 기분 좋겠는가. 당연히 어색하고 기분 안 좋다. 밥 먹을 때는 오크도 안 건드리건만. 그래서 주의도 줄 겸 살짝 흘겨봐 주었다. 이젠 됐겠지......라고 생각했 건만 오히려 역효과가 난 모양이다. 시녀들의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한 것이다. 헛, 저 것들이 왜 또 저래? 황당하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했다. 뭐야? 난 그냥 한 번 흘겨본 것밖 에 안 했는데. 갑자기 오한이라도 든 건가? 그녀들은 내가 식사를 마치자 황급히 나가 버렸다. 내가 이유를 물어볼 틈도 없었다. 그 사이에 인사까지 다하고 간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한동안 시녀들이 나간 문을 황망히 쳐다보던 나는 투덜대기 시작했다. 참내. 뭐야? 내 가 무슨 괴물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뭐 인간은 아니지만 이제부터는 인간 노릇을 하게 될텐데. 흠, 마리엔 얼굴이 그렇게 무섭게 생겼나? 째려본 것만으로 그런 효과가 나다니. 앞으로 이 모습으로 살아야 할텐데 그건 좀 문제가 있는데 말이야. 시녀들의 이상한 반응의 원인을 유추해보려고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다시 누 군가가 들어왔다. 흘낏 보니 좀 전에 나갔던 어의가 다시 들어왔다. "식사는 잘 하셨습니까? 허허허." 말할 힘도 별로 없고, 말하기도 귀찮아 고개 한번 까닥여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공주니까 상관없겠지. 지가 설마 공주를 상대로 화를 내겠어, 어쩌겠어? "그럼 약을 드시지요. 제가 특별히 공주님께서 빨리 회복하실 수 있도록 직접 제조해 온 겁이다. 허허허." 빨리 몸을 움직여 이 곳 상황을 알고 싶었던 나는 두말없이 약을 받아 마셨다 ???!!! 우욱! 입으로 다시 넘어올 것 같았지만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간신히 참았다. 하지 만 얼굴이 푸르죽죽해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보지 않고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쓰지요? 허허허." 닥쳐! 이게 조금 써?! 니가 한 번 먹어봐!!! 이게 어딜 봐서 약이야. 독약이지...... 헉. 설마 저 영감이 날 독살하려고? 의심과 분노에 가득 찬 시선을 어의에게 보냈지만 어의는 그저 허허허, 하고 웃을 뿐이었다. 몸에 무슨 반응이 없어 독약이라는 의심은 좀 수그러들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왜냐면 너무 너무 너무 쓰니까! "독약은 아닙니다. 원래 좋은 약일수록 쓴 법이죠. 그나저나 놀랍습니다. 그 약을 한 번에 마신 분은 공주님이 처음이십니다. 대부분 몇 번 토한 후에야 먹곤 했는데. 허허 허" 이제는 저 영감의 수염을 쥐어뜯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힘이 없기 때문에 다 음을 기약했다. 결코 잊지 않겠어. 그 수염을 몽탕 뽑아주겠어어-!!! 처음에는 허허허 , 하는 웃음소리가 인자한 할아버지의 웃음소리처럼 들렸지만 지금은 천사의 웃음소리 로 들린다(마족과 천사는 철천지 원수다). 다 나으면, 다 나으면 두고보자. 영감. 마리엔 공주로서의 첫 날은 독약이 아닐까 의심되는 약 때문에 그리 좋은 출발은 보이 지 못했다. 일주일정도 되자 어느 정도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었다. 밖을 나다닐 정도는 아니 었지만 적어도 내 방은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그래도 이 정도까지 회 복된 걸 보니 어의가 준 약이 독약은 아니었나 보군(아직도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는 먹고 싶지 않아. 그건 인간이 먹을만한 수준이 아냐. 마리엔 공주의 방은 뛰어다녀도 될 정도로 넓었기 때문에 그렇게 지루하지는 않았다. 심심하면 방에 있는 가구나 장식품들을 구경했다. 밖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마리엔 공주가 독을 마시고 쓰러진 이후에 경비가 강화돼서 몰래 나갈 수 조차 없었다. 마침 침대 옆에 있는 비취색 도자기를 감정하고 있을 때 이제는 친숙해 진 얼굴이 하나 들어왔다. "그동안 옥체 평안하셨는지요? 허허허." '바로 어제 봤으면서 무슨........' "네." 짤막하게 대답하는 나를 어의가 약간 이상하다는 듯이 봤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뒤에 있던 시종 손에 있던 쟁반을 받아냈다. 그리고 쟁반 위에는 일주일동안 지겹도록 본 푸르죽죽한 약이 담긴 그릇이 놓여있었다. 그걸 본 내 얼굴은 당연히 일그러졌다. 윽, 또 저 약을 먹어야 하는 거야? "이젠 다 나았는데 꼭 그걸 먹어야 하는 건가?" "물론입니다! 마리엔 공주님은 아직 다 나으신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한 달 정도는 드셔야 합니다." 왠지 저 인간이 날 실험용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느끼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아, 정말 내가 왜 저따위 약 같지도 않은 약을 먹어야 되는 거람. 속으로 열나게 투덜거리긴 했지만 별 수 없는 일이었다. 젠장. 어서 낫는지 해야지. 인간의 몸은 잘 회복이 안 되는군. 진짜 내 몸이었으면 벌써 펄펄 날아다녔을 텐데. 내가 뭐라고 한다고 해서 저 영감이 받아줄 리 만무했다. 예의 '허허허' 라는 웃음으 로 때우겠지. 그래. 우선 낫고 보자. 그 수염 내가 기억해둔다! 얼굴을 찡그리면서 약 사발을 받아들었다. 푸르죽죽한 약이 이제까지 봐온 어떤 마물보다 소름끼치게 보인다 . 마족이 마물을 소름끼치게 볼 리 없지만 말을 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약과 잠시 눈싸움을 벌인 후, 눈 딱 감고 한 입에 마셔버렸다. 그동안의 경험상 차라 리 한꺼번에 마시는 게 낫지 괜히 조금씩 마시면 입맛만 버린다. 언제나처럼 끔찍한 맛이 입안을 감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적응이 돼서 처음 마셨을 때처럼 구토증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장하다! 정말 이건 마족 승리야! 하지만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이봐. 어의......" 내가 부르는 호칭이 이상한지 어의가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곧 입을 열었다. "말씀하시지요. 공주마마. 허허허" "인간적으로 말이야 이런 약을 가져오려면 사탕이나 초콜릿은 들고 와야하는 거 아냐? "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어의나 어의 뒤에 있던 시종이나 모두 침묵을 고수했다. 그 래도 반성은 하나 보군. 하긴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당연히 그래야지. "앞으로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공주마마." 어의의 입가가 실룩이는 게 깊이 반성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게다가 평소처럼 허허허 , 라는 웃음이 뒤따르지 않는 걸 보니 확실한 것 같았다. 뭐 그 정도 가지고 울려고 그래. 마음 넓은 내가 너그러이 넘어가줄테니 울지 말라고. 그 나이에 울면 얼마나 보 기 흉하겠어. 안그래? 스스로의 너그러움에 흐뭇해하고 있는데 어의와 시종이 고개를 팍 숙이고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저런. 내가 봐준다니까...... 근데 뭔가 이상한데 . 가만히 살펴보던 나는 드디어 두 인간들이 반성은 하지 못할망정 웃음을 참기 위해 저 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 것들이! 정녕 죽고 싶은 것이구나! 안그래도 공짜 계약 맺어 속 쓰리고, 쓰디 쓴 약을 먹어 언짢고, 시녀들이 이상한 반응을 보여 열 받 는데 아주 죽여달라고 하는군! 좋아! 어디 한 번 죽어봐라! 마침내 폭발 직전까지 갔을 때였다.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문 쪽 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친절하게도 상황을 설명해주는 말이 들려왔다. "국왕폐하 드십니다!" "국왕폐하 드십니다!" 국왕? 그럼 이 나라 왕? 그리고 마리엔 공주의 아빠? 들어오는 사람은 갈색머리의 푸른 눈을 가진 강인한 인상의 남자였다. 굵은 선과 곧게 뻗은 콧날, 굳게 다문 입술은 그를 더욱 위엄있게 보이게 만들었다. 옷에는 마리엔 공주의 방에 있는 가구에 새겨져 있는 표식이 금색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두 개의 검 이 마주 세워져 있고 사자가 뒤에서 울부짖는 모양이었다. 분위기만 봐도 그가 국왕이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그의 뒤에 있는 사람들이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 었으니까. 국왕이군. 근데 왜 머리에 왕관이 없지? 소설책에서 보면 왕은 다 왕관을 쓰고 있던데 . 팔아버렸나?........그랬을 리가 없잖아! 원래는 왕관 같은 거 안쓰는 건가? 이 것 이 바로 소설과 현실의 괴리란 말인가. 나중에 특별한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이상 왕 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당시의 난 매우 진지했다. 왕관의 유무에 모든 관심의 초점을 두었던 나는 국왕이 뚫어지게 보고 있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뒤에 서 있는 두 사람도 뭔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나마 안면이 있는 어의를 슬쩍 보니 어서 서두르라는 눈치였다. 흠, 인사하길 바라 는 건가? 하긴 일단 마리엔의 아빠라니까 인사를 해볼까. "안녕하세요?" 으흠, 이게 아닌가벼. 내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창문이 열려있을 리 없을 방 안에 쌀랑한 바람이 휘몰아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국왕을 포함한 사람들도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왜 저럴까? 내가 뭐 잘못이라고 했나?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 못한 건 없는 것 같았다. 국왕이라고 해서 고개도 많이 숙였는데 말이다. 저마다 장난이지요?, 라는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잘못이 뭔지 알 길이 없었다. 잠시 후 가장 먼저 석화 상태에서 풀린 국왕이 굳은 얼굴로 어의에게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해보실까?" 과연 국왕이다. 카리스마가 풀풀 풍긴다. 게다가 저 위압적인 태도. 그러나 감탄하는 나와는 달리 다른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특히 시선을 받은 어의는 식은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오호, 어의라도 국왕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는군. 국왕이 높긴 높은가봐. 잠시동안 이 리저리 생각해보던 어의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이건 미천한 저의 소견입니다만 마리엔 공주마마께서 독의 영향으로 부분적인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이 아닐까 사료되옵니다. 폐하." "흠, 그럴 수도 있겠군." 국왕은 고개를 끄덕인 후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뭔지는 몰라도 내가 잘못을 한 것 같 아 단단히 쫄아있던지라 국왕의 강렬한 시선에 움찔했다. "마리엔." 혼을 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제서야 긴장이 조금 풀린 나 는 이번엔 실수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말씀하세요." "내가 기억나지 않느냐?" 이 상황에서 뭐라고 해야 할까? 사실대로 기억 안 난다고 할까, 아님 대충 둘러댈까? 당황해서 무슨 대답을 할지 몰라하고 있는데 국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사실인 것 같군. 이 일을 어찌할꼬?" 국왕이 한숨을 푹푹 쉬어대자 그 뒤에 있던 남자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금발 머리에 가는 선을 가진, 한 마디로 젊었을 때 여자 꽤나 울릴 만한 얼굴이었다. "다행히 이 사실은 저희들말고 모르는 일입니다. 차라리 잘된 일입니다. 만약 마리엔 공주마마께서 저희들이 아닌 귀족들 앞에서 이런 행동을 하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부터라도 다시 가르쳐드린다면 금방 익히실 겁니다. 게다가 배우다보면 예전 기억 이 금방 돌아올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귀족들은 공주마마께서 아프신 것으로 아니 당 분간 마리엔 공주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을 겁니다." "역시 그러는 게 낫겠군. 라디폰 공작." 이 난처한 상황에서(눈치상) 바로 해결책을 내는 것을 보니 그는 아주 머리가 비상한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라면 난 공부를 해야한다는 말이다. 으, 내 가 이 나이가 되도록 공부를 해야겠어! 괘씸한 놈. 그런 생각에 라디폰 공작을 째려보 고 있는데 갑자기 라디폰 공작이 고개를 돌려 시선이 마주쳤다. 헉, 혹시 노려보는 것 을 알아챘나? 재빨리 표정을 수습했지만 라디폰 공작이 씨익 웃는 걸로 봐서 이미 본 모양이다. 왠지 앞으로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 것 같다. #3- 공주 수업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남에게 보이는 모습을 알고 싶어한다. 그것이 설령 좋은 모습 이든 그렇지 않은 모습이든 알고 싶어하는 건 어쩌면 인간들의 공통된 특징일지도 모 른다. 그래서 거울이라는 물건이 만들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현재 나는 그 거울 이라는 물건 앞에 서있다. 인간처럼 외모로 누군가를 판단하는 종족은 매우 드물다. 그러하기에 앞으로의 생활이 편해지기 위해서는 일단 어느 정도 외모가 받쳐줘야 한다 는 결론이 나온다. 약간은 긴장된 마음을 안고 이번에 새로 장만한 거울 앞에 섰다. 여기서 잠깐! 그럼 일주일동안 거울도 안보고 뭐한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도 할 말이 있다. 마리엔이 독을 마시고 쓰러지기 전에 히스테리를 부렸다. 원인은 시녀가 실수로 찻잔을 떨어뜨린 사 소한 일이었지만 마리엔에게는 그게 아니었는지 온갖 난동을 부렸다. 결국 거울은 마 리엔이 던진 꽃병에 맞아 장렬히 깨어졌다고 한다. 워낙 자주 있는 일이라 시녀나 병 사들 누구도 놀라지 않았지만, 새로 내온 차를 마시고 마리엔이 갑자기 쓰러졌다고 한 다. 그동안은 마리엔을 간호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지금은 마리엔이 회복되었기 때 문에 거울을 바꿀 정신도 생긴 것이다. 흠, 거울도 사치의 극을 달리는구만. 이거 부담스러워 어디 거울을 볼 수나 있겠어. 거울은 금으로 테두리가 둘러져있고, 세밀하게 세공되어 있는 다이아몬드가 곳곳에 박 혀있었다. 유리도 반들반들거리는게 더러운 것이 묻지 않도록 마법이 걸려있는 모양이 었다. 장인의 손을 거친 것이 분명한 거울은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이거야 모습을 비 쳐보라고 있는 건지 아니면 거울을 감상하라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해도 너무하네 . 너무 번쩍대고 화려하자 오히려 거부감이 들었지만 거울이라고는 이 것 뿐이라 내키 지 않았지만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울에 비친 소녀는 굉장한 미인이었다. 칠흙같이 검은 생머리가 허리까지 찰랑이고 있었고, 피부는 검은 머리색과는 대비되게 티 하나 없이 새하얗다. 얼음을 연상시키는 차갑게 가라앉은 푸른 눈은 총기와 고집을 머금고 있었고, 붉은 입술은 매혹적인 분 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옥에 티라면 눈꼬리가 올라간 것이 성깔이 있어 보이는 모습 이었다. 으흠, 괜찮네. 이 정도면 사는데 지장은 없겠군. 간단히 감상을 끝내는 나였다. 요리 조리 모습을 돌려보고 있는데 시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 마리엔 공주마마......." 전에 봤던 내 나이 또래의 갈색머리 시녀였다. 이름은 미나라고 하는데 귀엽게 생긴 아이였다. 미나는 내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자 겁을 집어먹은 듯 몸을 움추렸다. 마 리엔이 얼마나 성격이 더러웠길래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거냐? 에구. "무슨 일이지? 그리고 내가 널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긴장 좀 풀지 그래?" 미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긴장이 풀린 모양으로 자신의 용무를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레이스 남작님이 오셨습니다.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레이스 남작?" "앞으로 공주님의 교육을 책임지실 분으로 특별히 라디폰 공작님께서 부르셨다고 들었 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라디포온-!!! 갑자기 능글맞은 미소를 짓던 라디폰 공작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놈이 진심이었군. 주제에 재상이라니 어떻게 해볼 수도 없구. 공주의 공부라면 뻔했다. 딱 딱한 예법에 쓰잘데기 없는 역사나 문학 같은 걸 배우리라. 공부는 정말 하기 싫었지 만 국왕이라는 사람이 직접 엄명을 내렸으니 별 도리가 없었다. "들라하라." 미나는 울상이 돼서 말하는 마리엔을 보면서 불경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웃음이 나왔 다. 숨을 죽여 킥킥대던 미나는 우연히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마리엔이 볼이 퉁퉁 부은 채 미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요즘의 마리엔이 예전과 달라지긴 했지만 이런 행동은 무례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미나의 얼굴에 서 핏기가 싹 가셨다. 선배들에게 몇몇 시녀들이 마리엔 공주에게 찍혀서 죽어 나갔다 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나, 내가 공부하게 된 게 그렇게 좋냐? 나라고 하고싶어서 하는 줄 아는 거야. 쳇. " 눈 앞에서 교수대가 왔다리 갔다리 하던 미나는 마리엔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마리엔 은 투덜거리긴 했지만 크게 화가 난 눈치는 아니었다. 정말 다행이야. 미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마리엔의 말이 들려왔다. "뭐해? 레이스 남작이 기다리고 있잖아." "...네? 네! 금방 모셔오겠습니다!" 혹시나 마리엔의 마음이 바뀔까봐 미나는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날카롭고 신 경질적인 인상의 레이스 남작이 들어왔다. 레이스 남작은 라디폰 공작의 측근 중 한 명이었다. 라디폰 공작은 공주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보낸 것이다. 또한 그는 학식이 풍부하고, 상대가 누구라 하더라도 자신이 생각한 것을 반드시 말하 고 마는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공주의 교육을 담당하는데 제격이었다. 물론 그 혼자 모 든 것을 가르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라디폰 공작의 심복이 몇 명 더 투입될 예정 이었지만, 일단 레이스 남작이 대표자였다. 레이스 남작은 조금은 긴장해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마리엔을 보았다. 직접 만난 적 은 없지만 마리엔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은 바 있었다. 물론 좋은 평판의 것과는 거리 가 아주 먼 소문들뿐이었다. 시녀를 손찌검했다거나 데미나 공주를 공개적으로 망신줬 다는 현실적인 소문에서부터 밤마다 오펠리우스 왕비를 저주한다는 소문까지 마리엔 공주에 대한 온갖 소문이 돌고 있었다. 아무런 근거없이 소문이 돌 리 없었다. 그래서 레이스 남작은 라디폰 공작에게 공주를 교육시키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단단 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공작이 예전 소문과는 많이 다를지도 모 른다는 위로의 말을 해주었지만. '과연 어떻게 나올까?' "당신이 레이스 남작?" '드디어 시작이군. 처음부터 져서는 안 된다. 라디폰 공작님이 믿고 맡겨주신 일. 반 드시 해내고 말리라. 비록 저 마녀라 하더라도 난 이길 수 있다.' 이미 마리엔을 마녀로 판단한 그였다. 그는 등으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지만 겉 으로는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저 마녀의 화술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정 신을 바짝 차릴 뿐이었다. 혼자서 상상하고 판단하는 것이 레이스 남작의 결점 중 하 나였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앞으로 공주님의 교,육,을 맡은 레이스입니다. 비록 많이 부족하지만 신 은 공주마마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공주마마의 교육에 힘쓰겠습니다. 염려마십시오. 작은 지식이나마 공주님께 모두 전해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긴장하면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또한 레이스 남작의 결점 중 하나였다. 어차피 같은 말을 바꿔서 계속 말하는 레이스 남작을 잠시 바라보던 마리엔은 입을 열었다. "안 물어봤어요." 한 마디였다. 그러나 그 한 마디에 남작은 입을 다물었다. '강적이다! 한 마디로 날 궁지에 몰아넣다니. 역시 소문이 거짓은 아니었나보군. 긴장 하자. 다음엔 무슨 수작을 해올지 모른다. 정신을 차리자. 레이스! 넌 할 수 있다!' 다시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레이스 남작. 아까부터 혼자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휘 젓는가 하면 얼굴을 굳히는 등 정상적인 모습이 보이지 않는 레이스 남작을 보면서 마 리엔은 속으로 라디폰 공작의 욕을 해댔다. '망할 인간. 붙여주려면 좀 정상적인 인간으로 붙여주지. 어디서 저런 이상한 놈을 불 러와 가지고는. 하여간 맘에 드는 곳이 없어.' 그러나 앞으로 저 인간이 교육을 맡을 것은 확실해 보였다. 정신적으로는 약간 문제가 있어 보이지만 의외로 학식은 뛰어날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흠. 으 흠. 마리엔이 헛기침을 하자 그제서야 레이스 남작은 혼자만의 생각에서 벗어났다. "레이스 남작, 그럼 앞으로 당신이 날 가르친단 말이죠?" "네. 그렇습니다." "좋아요...... 앞으로 예쁘게 봐줘요~~~." 선생에게 잘 보여야 공부가 쉬운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엔은 선견지명을 가진 자 라 할 수 있었다. 문제라면 자신의 신분을 자각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공주의 애교 아닌 애교에 레이스 남작은 얼어버렸다. 그리고 사정은 방에 있던 시녀들 도 마찬가지였다. 싸늘한 정적만이 그들을 감쌀 뿐이었다. 내가 인간 세상에 내려온 목적은 인간 세상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계약 이라는 방법을 사용해 인간 세상에 내려온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지금 나의 현실은 어떠한가. 하늘은 너무도 청명하고, 햇빛이 온 세상을 따스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리고 만지면 녹색의 물이 묻어 나올 것 같은 나뭇잎이나 형형색색의 꽃들의 모습은 밖으로 뛰쳐나 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나는 밖으로 나가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가 없었다. "공주마마! 지금 어딜 보시는 겁니까! 집중하십시오!" 무서운 놈. 어떻게 내가 딴 생각만 하면 바로 알아내는 거야. 저 인간 혹시 독심술하 는 거 아냐! 그러나 난 곧 고개를 내저었다. 설령 인간이 독심술을 할 수 있어도 어떻 게 마족의 마음을 읽냐구! 그렇다. 마족은 인간보다 높은 정신수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마족의 마음을 엿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 저 인간은 뭐야! 그러나 불행히도 레이스 남작은 내 가 딴 생각을 하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맞혔다. "얼굴에 다 써져 있습니다. 지루해 죽겠다고." 흠, 하도 지루해서 표정 관리하는 것을 잊었군. 하지만 이런 화창한 날씨에 방 안에 틀어박혀서 이게 뭐하는 짓이냐. 정말이지 내가 왜 인간들의 역사를 배워야 하는 건데 !!! 밖에서 지저귀는 새들이 부럽다. 너희들은 내 마음을 아니? 슬픈 내 마음을 너희 들만은 알아주겠지? 알아준다고? 고마워. 창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너희처럼 나도 자유로웠으면 얼마나 좋을...... "공주님! 듣고 계십니까?!" 아, 애들아, 이제 너희들과 잠시 작별을 해야겠다. 레이스 남작이 오늘만 벌써 다섯 번째 폭발하려고 하고 있으니까. 레이스 남작은 소녀의 감성을 너무 몰라주는군. 아무 튼, 더 이상 레이스 남작을 건드렸다간 폭주를 할 것 같아 다시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 이렇게 된 게 모두 라디폰 공작 그 작자 때문이다. 공작은 철두철미하게도 두 달동안 특훈 계획을 모두 짜놓았다. 공주로서의 기본적인 지식을 두 달동안 익혀야 한다나 뭐 라나. 즉, 나는 앞으로도 두 달 동안 계속 이런 공부를 해야한다는 말이다. 하아, 한숨이 나오지 않을래야 안 나올 수가 없다. 배우는 거라고는 페드인 왕국의 역 사나 예법, 신학, 사교술 같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것뿐이다. 게다가 전용 가정교사가 세 명이나 된다. 한 명은 지금 앞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는 레이스 남작. 그는 주로 지식적인 부분을 가르친다. 그리고 춤과 사교술을 가르치는 사람과 예법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 제길. 라디폰 공작 어디 두고보자! 저주해 줄거야! 쾅!!! 이제 레이스 남작은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다. 감히 공주 앞에서 책을 탁자 위에 세게 내리치질 않나, 공주를 노려보질 않나. 이럴 땐 공주로서 한 마디 해줘야 되겠지. "하하하, 레이스 남작. 계속해. 듣고 있었어." 비굴한 나의 인생.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됐을까? 레이스 남작은 심히 의심스럽다는 표 정이었지만 더 이상 공주를 꼬투리 잡아서 좋을 것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계속 페드인 왕국의 역사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페드인 왕국은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에 생겨난 역사 깊은 왕국입니다. 사자 왕이라 불리고 있는 라이어드 국왕께서 이 곳에 터를 잡으신 후 페드인 왕국은 기사들 의 나라로 이름을 떨쳐왔습니다. 비록 200년 전에 일어났던 하레난과의 전쟁으로 국력 이 예전보다 쇠퇴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소피린 대륙의 강국 중 하나입니다. 페드인 왕 국은 해안가에 위치해서 교역이 발달했으며........소피린 대륙 역사상 가장 많은 소 드 마스터를 배출한 곳입니다."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나는 소드 마스터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소드 마스터? 소드 마스터가 얼마나 많이 나왔는데?" 지금껏 하품을 억지로 참던 기색이 역력하던 내가 처음으로 수업에 관심을 가지자 레 이스 남작의 얼굴은 활짝 펴졌다. "500년 동안 모두 4명의 소드 마스터를 배출했습니다. 굉장하지 않습니까?" "겨우 네 명?" 몇십 명을 기대했던 나는 겨우 네 명이라는 말에 실망했다. 그러자 레이스 남작이 뭘 몰라도 한참을 모른다는 식으로 부연설명에 들어갔다. "겨우 네 명이라니요? 소드 마스터란 보통의 기사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입니다. 그들 은 힘은 혼자서 수백 명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9서클 마도사처럼 인간을 초월 한 사람들이 바로 그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게다가 그들의 검기는........" "아, 나도 알아. 소드 마스터의 검기는 쇠도 간단히 잘라버리고, 어지간한 방어마법으 로 막을 순 없지. 검기라는 건 체내에 있는 기를 다룰 줄 알아야만 가능하고, 그 기라 는 건 마나와는 약간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같다고 할 수 있어. 또한 검기는 사람마 다 색깔이 달라. 대략 인간들이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는 나이는 적어도 30대 초반 정도. 이정도면 됐지? 그러니까 진정해." 다른 건 몰라도 전투에 관한 한은 마족보다 잘 알고 있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혼 자서 흥분하던 레이스 남작은 내가 상세한 것까지 알자 입을 헤 벌리고 쳐다봤다. 나 중에야 안거지만 소드 마스터는 숫자가 적어 그만큼 알려진 바가 적었다. 그런데 기사 도 아니고 공주가 이런 것까지 알고 있다니 누구나 놀랄만했다. 그러나 레이스 남작은 곧 정신을 차리고 수업을 진행시켰다. 쳇, 계속 놀라고 있을 것 이지. #4- 춤은 싫어!!! "아닙니다. 좀 더 우아하게 원을 그리십시오." 앞에서 시범을 보이는 춤 선생 테스의 동작을 그대로 따라했다. 손 모양은 뭔가를 가 볍게 안는 모양을 잡고, 치맛자락이 가볍게 들리도록 원을 돈다. 처음 테스가 시범을 보일 때 난 웃었다. 원 도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하지만 막상 해보니 그게 아니 었다. 조금만 천천히 돌아도 반주되는 음악의 리듬에 맞지 않고, 너무 빨리 돌아도 안 된다. 또한 아무리 많이 돌아도 어지러워서 비틀거리지 않을 수 있는 요령이 필요한 고도의 테크닉이었다. 춤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인간들이 즐겨하는 여가 57가지' 라는 책에서 춤에 대해 읽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어렵다는 말은 없었다. 남녀가 서로 부둥켜안고 뱅 글뱅글 도는 행위라고만 읽었단 말이다. 책을 읽을 당시도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 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더욱이나 그렇다. 머리 속으로 박자 생각하고, 리듬 생각하고, 동작 하나하나 생각하고, 표정은 물론이 고 춤 출 때 해야할 말까지 생각해야 하다니. 하나 생각하기도 바쁜데 이 모든 걸 계 산해서 행동하는 인간이란 동물은 의외로 머리가 좋을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그런 머 리로 마법을 익히면 좋을텐데 왜 이렇게 뱅글뱅글 도는 것을 좋아하는지 정말 모르겠 단 말이야. 노래에 따라 춤도 달라진다니 너무 어려워. 내가 춤 때문에 머리 아파하고 있을 때, 테스의 사정도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다. 도대 체 뭔가. 저 뻣뻣하기 그지없는 행동은. 저 상태에서 뭘 어떻게 가르쳐야할지 머리가 아파온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곤 하지만 이건 너무 심했다. 마리엔에게 춤을 가르치 라고 했던 라디폰 공작이 새삼 미워졌다. "마리엔 공주님, 그게 아닙니다. 머리 속으로 계산하려 하지 마시고 몸으로 느끼십시 오." 몸으로 느끼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하여간 인간들은 이상한데만 신경 쓴다니까. 그래도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고, 다시 한번 원을 돌았다. 하도 많이 돌았더니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돌아. 내 방이 돌고 있었다. 이젠 내가 돌고 있는 건지, 아니면 어지 러워서 방이 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네! 바로 그겁니다! 몸에 힘을 빼시고 가볍게 도는 겁니다!"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갑자기 테스가 외쳤다. 하도 많 이 돌아서 어질어질한 머리를 간신히 굴려서 그 뜻을 파악했다. 아! 아주 어지러울 정 도로 돌면 된다구. 진작 말하지. 테스가 지금의 내 생각을 알았다면 다시 수백 번 돌 아야 했겠지만 다행히 그는 이런 나의 생각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물론 당시의 나는 내 생각이 정확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테스는 내가 40분만에 우아하게 도는 것에 성공하자 재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그 도 내가 도는 것이 뭔가 어설프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지만, 더 이상 언급 하지 않았다. 거의 한 시간동안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자, 제가 이제부터 밟는 스텝은 춤의 가장 기본적인 스텝입니다. 잘 보고 따라 하십 시오." 말을 다한 춤 선생은 간단한 스텝을 밟았다. 춤 선생의 발을 자세히 살펴보던 나는 발 놓는 순서를 그대로 외웠다. 춤의 스텝은 검술이나 무술의 복잡한 스텝보다 훨씬 간 단하고 쉬웠다. 이건 정말 간단하네. 훗, 이 정도쯤이야. 우아하게 도는 법을 배울 때 도 처음에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는 걸 깨끗이 잊어버린 나였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스텝을 밟았다. 한 번에 다 외웠으니까 틀림없이 감탄하고 있을 거야. 그러나 슬쩍 본 테스의 얼굴은 예상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한 손을 이마에 짚고 한숨을 푹푹 쉬어대고 있는 춤 선생. 자기가 보여준 데로 그대로 했는데 뭐가 불만인 거야. 아까부터 계속 핀잔만 주고 말이야. 으, 지가 잘하면 얼마나 잘해?! (엄 청 잘한다) "휴우, 마리엔 공주님. 발을 밟는 순서는 완벽했습니다." 당연하지. 날 뭘로 보는 거야. 그정도는 식은 죽 먹기라구. 나는 그럼 그렇지, 란 얼 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말입니다.......그 뻣뻣하다 못해 목석 같은 동작은 뭡니까? 춤은 검술이나 무술이 아닙니다. 노래의 리듬에 맞춰서 움직이는 거란 말입니다. 좀 더 가볍고 율동 감있게 움직이십시오. 자! 다시 한 번 해보시지요!" 목석 같다고?! 내가 왜 인간 따위한테 그런 말을 들어야돼! 확 날려버릴까보다. 그러 나 이런 속마음과는 달리 몸은 다시 한번 스텝을 밟고 있었다. 목석 같다기에 이번엔 무릎을 가볍게 구부렸다 폈다 해봤다. 근데 저 인간은 왜 식은땀을 흘리고 있지? 어디 아픈가? ".......저, 저번보다는 확실히 낫군요. 하지만 무척이나 어색하......(죽일 듯이 노 려봐줬다. 뭣이 어쩌고 어째!) 음, 으흠. 약간, 아주 약간 어색하군요." 춤 선생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말을 바꾸었다. 나는 테스의 말에 만족해서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확실히 나아졌다는 먼저의 말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보다는 나아졌다는 거지 잘한다는 말은 절대 아니었다. "아닙니다. 좀 더 허리를 펴십시오. 밑은 보시지 마시고, 시선은 정면을 향하십시오. 제 박자에 맞춰서 스텝을 밟으십시오.......원 투 쓰리 돌고 다시 원 투........" 인간들이란 정말 이상한 종족이다. 왜 이런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어려워. 차라리 레이스 남작이랑 공부하는 게 더 낫겠어. 물론이다. 레이스 남작이랑 공부할 때는 책 보는 척하면서 딴 짓을 해도 됐지만 이건 직접 해야 하니까 몸이 고달프다. 그 주제에 너무 어렵다. "휴우, 오늘은 이정도만 하지요." 테스는 골치가 아프다는 식으로 말했다. 춤 수업이 끝나자 시키지도 않았는데 시녀들 이 재빨리 차와 쿠키를 가져다 주었다. 몇 시간동안 움직였으니 배가 고플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마침 배가 고팠던 참이라 절로 군침이 돌았다. 그런데 먹을 것을 보고 좋아하던 내 귀에 테스가 나가면서 중얼거리는 말이 들려왔다. "도대체 예전에는 그렇게 춤을 잘 추시던 분이 어쩌다 저렇게 되신 거람. 내가 수많은 귀족 영애들을 가르쳐왔지만 이렇게 못 추는 사람은 또 처음이군." 저, 저런 썩을 놈을 보았는가! 그러나 슬픈 것은 그 말에 반박할 수 없는 내 자신이었 다. 크윽, 어디 두고보자! 너도 찍혔어! 기억해두겠어! #5- 세린과의 만남 "이걸로 오늘 수업은 마치겠습니다." 아잣! 좋았어! 드디어 지겨운 역사 공부가 끝났다. 내가 이제까지 소금을 뿌려놓은 배 추마냥 축 쳐져 있다가 화색이 화악 돌면서 되살아나자 레이스 남작은 한숨을 푸욱 쉬 었다. 그러나 매일 보는 광경이라 그냥 넘어갔다. 나는 레이스 남작이 돌아가자 싱글 거리면서 방을 나왔다. 수업이 끝났다는 것만으로도 날아갈 듯이 기분이 좋았다. 비록 라디폰 공작의 훼방 때문에 왕족으로서 알아야 할 기본적인 것을 습득할 때까지 는 마리엔 공주궁을 벗어날 순 없었지만 공주궁이 워낙 넓다보니 큰 상관은 없었다. 앞으로 살 곳인데 여러 가지 알아두는 게 좋겠지. 무엇보다 마리엔 공주의 적수인 오 펠리우스 여왕 패거리들에 대해 알아보아야 했다. 그들에게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지 만 마리엔과 그들을 혼내주기로 약속한데다 무엇보다 오펠리우스 그 여자의 행동이 아 주 얄미웠기 때문이다. 내가 회복되었을 즈음에 국왕이나 각 귀족들의 회복 축하 선물이 도착했다. 물론 내가 왕비가 선물을 보내지 않아서 꽁해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펠리우스 왕비도 선물을 보냈으니까. 문제라면 보낸 선물의 내용물이 문제였다. 그 여자! 감히 리하덴(물고기의 일종. 길이는 약 10cm정도, 금빛 비늘과 무지개빛 꼬 리를 가지고 있어 관상용으로 사랑받고 있음. 한 마리당 5골드. 한 마디로 매우 비싸 다)을 보내다니! 난 물고기가 정말 싫단 말이야! 오펠리우스 왕비가 내가 물고기를 싫 어한다는 것을 알 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골탕먹이기 위해 보낸 것이라고 확신 하고 있는 나였다. 내가 지나가자 복도에 있던 병사들과 시녀들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인간들은 자 기보다 나이든 사람한테는 공손해야 한다고 했었지. 외견상 나보다 나이가 어려보이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역시... 나는 책에서 보던 대로 허리를 45도 각도로 숙 이고 인사를 했다. 그런데 고개를 들고 보니 사람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경악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가 하 면 눈을 비비거나 허벅지를 꼬집는 등 의아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왜 저러지? 곰곰 이 생각해보던 나는 내가 허리를 많이 숙이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그럼 다 시 인사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 중인데 며칠 전에 자신을 시녀장이라고 소개한 풍만 한 몸매의 여자가 충격에서 벗어나서 황급히 다가왔다. 이름이 아마 캐롤이었지. "마리엔 공주마마.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미천한 저희들에게 허리를 굽히다니요. 왕 족은 평민에게 허리를 굽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계속 그리해선 안된다고 주저리 주저리 설교를 늘어놓는 캐롤. 이상하네. 분명 히 책에선 나이든 사람을 공경하라고 나왔는데. 진짜 봤는데. 같은 계급의 사람 사이 에는 나이든 사람을 먼저 공경하고.......아! 같은 계급! 그게 이런 뜻이었구나. 같은 계급도 아닌데 인사해서 화난 건가? 슬쩍 얼굴들을 보니 화가 난 것은 아닌 모양이다 . 그저 황당하고, 당황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그리고 눈치 빠르기로 유명 한 내가 보기론 경계하고 있었다. 저 여자가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라고 생각하 고 있는 눈치였다. 아무튼, 같은 계급이 아니면 허리를 숙이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엔 고개만 숙 여서 인사해야지. 새로운 사실을 머리 속에 집어넣고 정보 수집에 들어갔다. 물론 '오 펠리우스 왕비에 대해 아는 거 모두 말해봐!' 라고 했다가는 당장에 의심을 받을 것이 뻔했기에 교묘한 화술로 대답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하도 쫄아서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네, 아니오 라는 식으로 간단히 대답을 마무리지을 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자기 가 뭔가 잘못을 한 게 있나 생각하는지 고심하는 눈치였다. 마리엔의 성질이 굉장했나보군. 앞에 멈춰서기만 해도 얼굴이 시퍼래지는 걸 보면. 하 지만 이럼 정보 수집에 큰 차질이 생기는데. 어쩐다. 몇 시간동안 공주궁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고 다녔는데도 알아낸 것은 거의 없었 다. 그저 오렐리우스 왕비말고도 아리란드라는 후궁이 있고, 그 후궁의 소생으로 플로 라 공주가 있다는 것밖에 알아내지 못했다. 이제 어쩌지? 더 이상 물어봐도 뭔가 나올 것 같지도 않고.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마리엔의 성격이 보통이 아니었으며, 사람들 은 마리엔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 별로 기분 좋은 정보는 아니었다. ================================================================================ 이래선 정보도 못 모으겠잖아. 차라리 레이스 남작한테 물어볼까? 하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내가 남작에게 물어본다면 그 사실은 바로 라디폰 공작의 귀로 들어갈 것이고, 공작이 정확히 내 편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는 그리 유리한 상황이 펼 쳐지지 않을 것이다. 이래뵈도 책을 통해 정권 다툼은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확 두들겨 패서 알아낼까 보다!" 한껏 소리치고 낫더니 훨씬 개운해졌다. 뭔가 방법이 생기겠지. 아니면 국왕한테 직접 물어보든지. 그 사람은 적어도 마리엔의 적은 아닌 걸로 보이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 궁으로 돌아가 볼까. 슬슬 어두워지는 것 같아 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아니, 옮기려 했다. "얼래. 여기가 어디야?" 아무리 궁궐에 있다지만 정원은 정원이지란 생각으로 우습게 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 것 같다. 앞으로 어디로 가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한 마디로 길을 잃어버렸 다는 소리다. 주위에 누군가 있을까 둘러보았지만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나 마 건물이 어느 쪽에 있는지 알면 그 쪽으로 가겠지만 건물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저 정원수와 꽃들만 눈에 보일 뿐이었다. 큰일났다! 길을 잃어버렸잖아! 어쩌지? 어떻게 하지? 아니야. 우선 침착하자. 드래곤 레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어. 마음을 가라앉히고 오른쪽을 방향으로 잡고 계속 걸어보았지만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한참을 가도 여전히 정원을 벗어나 지 못하자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에이, 여긴 어디야? 다리 아파 죽겠네. 배도 고파. 이럴 줄 알았으면 도시락이나 싸 올걸." 땅바닥에 주저앉아 나뭇가지를 주어들고 배가 고프다!, 라고 적고 있는데 누군가 숨죽 여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보았을 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배가 고프니까 이제 헛것이 들리네. 하아, 이러다 여기서 굶어죽는 건 아니겠지? 다 른 건 몰라도 굶어죽는 건 정말 싫은데." 고픈 배를 부여잡고 투덜거리는데 이번엔 훨씬 더 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좀 전이 숨 죽여 웃는 소리였다면 이번엔 박장대소하는 소리였다. "하하하! 아이고, 배야. 큭큭큭!!!" 이번엔 확실히 들렸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확 들어보니 파랑머리의 여자가 나무 위에 걸터앉아서 죽어라 웃고 있었다. 나무라기보다는 고목에 가까웠다. 밑둥이 둘레는 장정 3명이 손을 맞잡아야 겨우 감쌀 수 있을 정도였고, 하늘을 향해 쭉 뻗어 있었다. 그리고 여자가 앉아있는 위치는 떨어지면 죽지는 않아도 확실히 몇 달은 침대 에 누워있어야 할 높이였다. 저 여잔 뭐야? 그렇지 않아도 길을 잃어버려서 기분도 별로인데 이젠 미친 X까지 걸리 네. 미친 사람처럼 웃어제끼는 여자를 잠시 바라보던 나는 바닥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 로 자리를 옮겼다. 미친 사람은 피하는 게 최고지. 쯧쯧. 젊어보이던데 어쩌다 저렇게 됐을까. 혀를 끌끌 차며 자리를 피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이봐 잠깐만! 마리엔 공주! 잠시 멈춰봐!" "잠깐만요! 이봐, 잠깐만! 마리엔 공주님! 잠시 멈춰보라니까요!" 바보임에 틀림없어. 서란다고 서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무시하자. 무시해. 미친 x 와 얽혀서 좋은 일이 생길 리 만무하지 않은가. 물론 처음 보는 여자가 궁궐에 있는 것이 이상하긴 했다. 이 점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넘어간다고 치더라도 왜 하필이면 나무 위에 있었는지(웃음소리가 아니었다면 있는지조차 알아챌 수 없었 을 것이다) 이상했지만 무시했다. 미친 x는 상대하지 않는 게 제일이다. 난 아무 것도 못 봤어. "마리엔 공주님, 그 쪽은 궁으로 가는 방향이 아닌데요." 정체불명의 여자의 말에 그 자리에 멈춰섰다. 별 수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언제 궁 에 도착할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돌아서자 여자는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나무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헉, 저 것이 미쳤나! 나약한 인간의 몸으로 죽으면 어쩔려구 ! 그러나 나의 염려와는 달리 그녀는 아주 가뿐히 착지했다. 그녀가 땅에 내려서자 그제서야 그녀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 는 찰랑이는 푸른 머리와 물빛 눈동자, 곧게 쭉 뻗은 콧날과 붉은 입술. 피부가 약간 그을리긴 했지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위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키가 여자치곤 컸다. 말할 때는 위를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펑퍼짐한 옷을 입고 있어서 그렇 게 커보이지는 않았다. "이런. 혹시 저의 멋진 모습에 반하신 겁니까?" 나는 그녀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누구한테 반했다는 거야?! 그 것도 같은 여 자한테 반할 리가 없잖아! 근데 멋진? 보통은 예쁜, 이라는 말을 쓰는 거 아닌가? 하 긴 뭐 자기 마음이겠지만 좀 이상한 여자네. "이상한 소리하지 말아요. 그보다 당신 누군데 여기 있는 거죠?" "제 이름은 세린스입니다, 마리엔 공주님. 그냥 세린이라고 불러주세요." 세린인지 뭔지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잖아. 말을 돌리려고 하다니. 뭔가 찔 리는 구석이 있는 게 틀림없어. 다시 한번 물으려 했지만 세린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이런 곳에 혼자 돌아다니시다 또 암살 기도라도 있으면 어쩌시려구 그러십니 까?" 그녀의 말에 내가 하려던 말도 잊고 세린을 노려보았다. 혹시 이 여자가 암살자 아닐 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말을 들어보니 전부터 아는 사이도 아닌 것 같은 데 공주궁에 몰래 숨어있고, 나무 위에서 가뿐히 뛰어내리는 솜씨로 봐서 몸도 날렵한 것 같다. 내가 자신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면서 한 걸음씩 떨어지자 세린이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전 암살자가 아닙니다. 게다가 오펠리우스 왕비전하와 만난 적은.......있지만 아무 튼, 아닙니다. 만약 제가 암살자였다면 공주님께 말을 거는 대신 그 사이에 처리했겠 지요." 그것도 그렇군. 하지만 방심은 금물. 우선 안심시키고 기습을 가할지도 모르는 일이었 다. 그나저나 역시 왕비가 독사건의 배후에 있었군. 그런데 저 여자 뭘 믿고 저렇게 다 말하는 거지? 혹시 뭔가 알아낼지도 모르니까 한 번 떠봐야 되겠어. "그게 무슨 소리지요! 그 말은 마치 왕비전하께서 날 노리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당신 이런 말을 했다간 당장 사형이란 것도 몰라요!" 일부러 화난 척하며 말했는데 세린은 태연히 말했다. "공주님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그럴 확률은 적지만 라이언 왕자님과 르미엘 왕자님이 태자가 되기 위해서는 마리엔 공주님이 가장 걸림돌이 될 수도 있으 니까요. 왕비님과 공주님의 사이가 나쁘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게다가 마리 엔 공주님께서는 데미나 공주님을 별로 마음에 들어하시지 않는 걸로 아는데요." 오! 좋은 정보다. 그 여자 내가 왕위 계승권을 가로챌까봐 그랬군. 라이언과 르미엘, 데미나라. 기억해둬야지. 좀 더 떠봐야지. "그건 억지예요. 만약 그렇다면 아리란드 전하도 용의자 선상에 올라가는데요" "그건 다르지요. 야심 많고 대범한 왕비 전하에 비해 아리란드 전하는 마음이 여리신 편입니다. 그리고 플로라 공주님과는 데미나 공주님보,다,는, 사이가 좋기 때문에 아 리란드 전하가 그런 강경책을 쓸 이유가 없죠." 그래. 더 불어라. 아주 좋았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겉으로는 믿기 힘들다는 표 정을 지으면서 계속 정보를 캐나갔다. 세린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여러가지를 가르 쳐주었다. 들키지 않고 정보를 알아낸 내 자신이 너무 대견스러웠다. 역시 난 천재였 어! 후후후!!! "그런데 공주님 이제 돌아가셔야 되지 않습니까?" 음흉한 미소를 짓던 나는 세린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둑어둑 해져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배 고파!!! 시간이 꽤 지났다는 것을 알 자 갑자기 배가 너무 고파졌다. 배가 고파 울상을 지었지만 다행히 세린은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제가 궁까지 안내해 드리지요." 배가 고픈 관계로 군말없이 세린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세린은 이 곳이 익숙한지 거 침없이 걸었다. 주인이 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 궁의 주인은 엄연히 난데 나도 모르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고 있다니. 묘한 기분이었다. 세린은 길을 안내하는 중에도 묻지도 않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라이언 왕 자는 검술이 뛰어나고, 르미엘 왕자는 알아주는 바람둥이며, 데미나 공주는 청순가련 한 모습 때문에 많은 귀족 자제들의 선망을 받고 있다, 내지는 플로라 공주는 비록 나 나 데미나 공주보다는 1살 어리지만 활발하고 귀여워서 인기가 좋다는 그런 내용들이 었다. 어디서 저런 걸 알았을까? 뭐 덕분에 나는 좋지만. 세린 덕분에 정보를 알아내러 돌아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자세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대강의 궁궐 정세 같은 것은 알 수 있었다.한 20분 정도 세린을 뒤따라서 걷자 공주궁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 이만 가봐야 되겠습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서도 가실 수 있을 겁니다." 당연하지 않은가. 바로 앞에 있는데. 잠시 들렸다 가라고 해야하나 그냥 내버려둬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세린은 인사를 하고 다시 정원 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봐요. 잠시 차라도......." 역시 난 너무 예의바르고 착하다. 아, 마족이 이렇게 착해도 되는 건가. 엉겁결에 말 했다가 순간 후회한 사실은 무시했다. 그러나 세린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살짝 흔 들면서 말했다. "조만간 다시 만나겠지요." #6-시험 통과 대작전 그 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하루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시녀들이 가져다준 밥 먹고, 차례대로 수업을 받는다. 지루한 하루였다. 그러다 드디어 마지막 예법 수업 시간에 일이 터진 것이다. 일이 어떻게 된 것인고 하니....... "공주마마! 도대체 그 말투는 뭡니까! 제 1공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할 분이 그렇게 행 동하셔서 되겠습니까? 게다가 듣기로는 시녀들과 친하게 지낸다면서요? 공주님께서 위 엄을 보여야지 아랫사람들도 행동을 바르게 하지요. 예전에는 조용하고 정숙하던 궁이 요즘은 시끌법쩍해졌다는 거 아십니까?" 오늘도 시작이군. 이 아줌마는 바로 나에게 예절과 법도를 가르치는 사람이다. 자기 말로는 페드인 왕국에서 자신보다 더 정숙하고 현숙한 귀부인은 없다는 말라게니 여사 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라깽이처럼 마른 사람이다. 이름 하나는 잘 지었다. 그러나 잔소리가 얼마나 많은지 이 수업만 끝나면 진이 다 빠질 지경이다. 오죽하면 쿠키 먹는 것 하나도 트집을 잡겠는가. 소리를 내서 드시면 안됩니다. 한 입 에 다 드셔도 안됩니다. 흘리고 드셔도 안됩니다. 쿠키만 드셔도 안됩니다. 다 드시지 말고 남겨야 합니다. 도대체 쿠키 하나 먹는데 왜 이렇게 복잡하냔 말이다. 그냥 맛 있게 먹으면 그만이지. 이 소리했다가 몇 시간동안 공주로서 자각이 덜 됐다면서 잔소 리만 들었다. 이번에는 요즘에 시녀들과 사이가 조금 좋아진 것 때문에 이러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 곳에서 이야기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은 시녀들과 병사들뿐이데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내가 예전의 마리엔의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도 모르면서. 아침 마다 거울을 보면서 최대한 선량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연습도 했고, 말도 나긋나 긋하게 하고 다녔다. 처음에는 나의 변화에 불안해했지만 조금씩 친해지고 있었다. 예 전처럼 나를 공포의 대마왕 보는 듯한 시선도 사라졌다. 모든 게 나의 피나는 노력탓 아니겠어. 그러나 말라게니 여사는 그 것이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여사의 잔소리는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할 거야? 이럴 때 누구 안 오나? "공주마마, 죄송하지만 라디폰 공작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그래! 어서 들어오시라 해라!" 평소 같으면 반갑지 않은 사람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공작의 호감도가 조금 올라갔다. 말라게니 여사도 라디폰 공작의 지시로 나를 가르치 고 있는 것이니 별 말은 없었다. 언제나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공작이 들어 왔다. "신 로드릭 루이 라디폰이 마리엔 공주마마를 뵙습니다. 그동안 옥체 평안하셨습니까? " "저야...아니, 나야 잘 있었지요. 공작은 어떻습니까?" 내가 반가워 어떨 줄 모르자 라디폰 공작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옆에 있는 말 라게니 여사를 보고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주님께서 항상 염려해주시는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평소 같으면 내가 언제 댁을 염려했다는 거야?, 라는 생각을 했겠지만 지금은 마냥 좋 았다. 그동안은 공부를 시킨 것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다 나 를 위해서 였던 것 같다. 라디폰 공작 의외로 좋은 사람일지도 몰라. 내가 그동안 오 해를 했던 거야. "이거 내가 방해를 한 게 아닌지 모르겠군요, 말라게니 여사."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끝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신경쓰지 마십시오." 거짓말. 언제 끝내려고 했다는 거야! 공작이 안 왔으면 몇 시간이고 잔소리를 늘어놓 았을 거면서. 저 마른 체구에서 어떻게 몇 시간이고 떠들 체력이 나오는 건지 궁금하 단 말이야. 말라게니 여사는 대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면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평소 라면 절대 짓지 않을 미소를 지으면서 공작을 보았다. "제가 이렇게 찾아 뵌 것은 바로 공주님의 수업 때문입니다. 듣기로는 열심히 공부하 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한 순간 표정이 허물어질 뻔했지만 재빨리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다. 난 또 매일 공부 안하고 노는 것 때문에 온 줄 알았네. 라디폰 공작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계속 말 을 이었다. "그래서 수업이 끝난 후에 시험을 볼까 합니다. 그동안 수업의 성과를 볼 수 있겠지요 . 시험은 그동안 배우셨던 내용에 관해 문답식으로 행해질 겁니다. 참, 그리고 설마 그러실 리는 없겠지만 아직 부족하다 판단되면 다시 두 달 동안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 그 말을 듣고도 여전히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시험이라는 말에 굳어버렸기 때문 이었다. 잠시 공작에게 호의를 가졌던 내가 바보지. 그래. 저 인간은 저런 인간이지! 웃으면서 사람 곤란하게 만드는 행동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 그리고 다음 말에 나는 공작을 저주했다. "그리고 그 날은 국왕폐하도 친히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두 공주님께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으니 부디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하필이면 국왕까지 온단 말이야! 공작이 돌아간 후 나는 방에 불도 켜놓지 않고 혼자만의 고민에 빠져들었다. 굳이 불을 끌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현재 내 상황을 잘 대변해주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암담한 현실. 이제 한 달도 안 남았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야. 시험을 본다는 말을 지금하면 어떻게 하냐구! 라디폰 공자아악-!!! 다 당신 짓이지! "이 나쁜 인간! 그럴 수 있어! 그럴 수 있냐구!" 눈 앞에 공작이 있는 것처럼 허공에다 대고 소리쳤다. "저,저기 공주님......." "뭐야?!" "히익, 아무 것도 아니예요!" 시녀 중 하나가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다가 갑자기 머리카락을 쥐어뜯는가 하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다 벌떡 일어나서 소리치는 내가 걱정되어 다가왔다. 그러나 화 가 잔뜩 나 있는 사람에게 괜히 접근하면 날벼락 맞는 법이다. 콰앙, 책상을 힘껏 내 리치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흠칫했지만 내가 알 바 아니었다. "라디폰 공작...지금 해보자 이거지........? 좋아.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 아주 박살을 내주겠어. 감히 이 몸을 건드려! 두고 보라구. 후후후." 라디폰 공작이 무릎 꿇고 싹싹 빌게 만들어주겠어. 얼마나 멋진 일이야. 기다려라! 음 하하하! 나중에 시녀들의 말을 들어보니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음침한 미소를 지으면 서 살기를 풀풀 날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 모습이 말로만 듣던 마족이 이런 모습이 아 닐까 했다는 말에는 약간 찔리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중 일이고. 넓디 넓은 방 안에는 내 웃음소리만 울렸다. 나는 한참 후에야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 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게 아닌가. 어라, 다들 어 디 갔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있던 시녀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바빠서 나갔나? 나의 광기어린 모습에 기가 질려 몰래 빠져나갔다는 사실은 결코 알 수 없었다. 결코 이대로 라디폰 공작의 술수에 당할 수는 없다는 일념 하에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 기간은 앞으로 15일. 통과하면 드디어 공부에서 해방된다. 실패하면 다시 공부해야 된다. 완전히 천국과 지옥이군. 국왕까지 온다니 절대적으로 통과해야 된다. 차라리 마법 이론이나 검술 같은 전투에 관한 것을 물어본다면 자신있는데. 문제는 공주가 하 는 공부에는 그런 것이 전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놀지 말고 공부 좀 할걸. 모든 학생들이 시험기간에 임박해 서 하는 내용의 후회를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차라리 후회할 시간에 뭔가를 행동에 옮기는 것이 백배는 낫다. 흠, 컨닝을 해볼까? 아주 좋은 생각이었지만 곧 고개를 내저었다. 필기 시험이라면 몰 라도 문답식이면 컨닝하기가 힘들다. 게다가 컨닝했다가 걸리면 무슨 망신이야. 그럼 그 날 꾀병을 부려볼까?.......이 것 역시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다. 시간은 벌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시험은 봐야 된다. 뭐야. 그럼 결론은 공부해야 한다는 거잖아. 별 수 없지. 오늘부터 공부한다. 기필코 시험을 통과해서 공작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어주겠어. 제인드력 426년 5월 2일 *시험보기 14일전* 날씨: 무척이나 화창함. 공작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어제 시녀들에게 시켜 왕궁 도서관 에서 빌린 책이 책상 위에 쌓여있다. 엄청나다. 저걸 다 언제 할까? 책상 다리 부러지 겠네. 그래도 멀쩡한 걸 보면 비싼 값을 한다. 최고급 원목으로 만들어진 책상은 얼굴 이 비칠 정도로 반들반들거린다. 아까워서 앉기도 아깝다. 게다가 책상 하나에 백골드 라니. 너무 비싸. 어차피 잘 쓰지도 않는데.......앗! 책상 감정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어서 공부하자. 오늘은 각 나라에 대해 공부했다. 이 세계는 내가 공주로 있는 페드인 왕국이 속해있 는 소피린 대륙과 아드린 대륙으로 나뉜다. 한 대륙에서 다른 대륙으로 가기 위해서는 배로 적어도 한 달 이상은 가야한다. 소피린 대륙은 아드린 대륙의 3배 정도의 크기 다. 하지만 아드린 대륙에는 3개 나라가 모여있는 반면에 소피린 대륙은 자치도시까지 포함해서 20여 개의 크고 작은 나라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가 소피린 3대 강 국인 하이덴 제국와 토르, 페드인 왕국의 영향을 받고 있다. 하이덴 제국은 타 국가에 비해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토르, 페드인 왕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다. 하이덴 제국은 드워프들 과 사이가 좋은 편이라 드워프가 만든 물건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고 한다. 토르는 마법의 나라로 불릴 정도로 마법이 가장 발달한 나라다. 마법사들만의 대회도 존재하 고, 마법 부대라는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조직이 있다. 그리고 페드인 왕국은 해안에 접해있어 온화한 기후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무역이 가장 발달한 나라답게 해군이 막강하고 기사의 나라로 유명하다. 나머지 작은 나라들은 과감히 제끼기로 했다. 시간이 없으니 큰 나라부터 공부하는 거 야. 다음은 아드린 대륙편을 읽어볼까. 아드린 대륙은 류온, 스피린, 세를리드 이 3개 의 나라로 이루어졌다. 류온은 가장 독특한 문화를 지니고 있는 나라다. 들리는 말로 는 소수의 사람들이 마법도 사용하지 않고 하늘을 날아다닌다지만 믿기 힘들다. 스피 린은 다른 국가와는 달리 여자가 남자들보다 권리가 강하다. 왕도 모두 여왕이었고, 기사들도 남자보다 여자들이 많다고 한다. 세를리드는 지식과 학문의 나라로 유명하다 . 그만큼 유명한 아카데미가 많이 존재하고, 수많은 학자와 연금술사를 배출한 나라다 . 열심히 각 나라의 특징을 종이에 정리했다. 시녀들이 눈에 불을 켜고 공부하는 것을 보고 놀랐지만 상관없다. 이 모든 게 시험을 통과하긴 위한 것이거늘 무엇인들 못하리 . 이제 그만 쓰고 다시 외워야겠다. 제인드력 426년 5월 9일 *시험 보기 7일전* 날씨: 내 마음처럼 우중충하다. 눈꺼풀이 너무 무겁다. 잠시라도 정신을 놓으면 잠이 들 것 같다. 하루에 4시간 자고 공부를 해서 그런가보다. 인간의 몸은 너무 금방 지친다. 겨우 이정도에 지치다니. 하 지만 포기할 순 없다. 책상 밑에 놓여있는 책들은 모두 외웠다. 어느새 책상을 뒤덮었 던 책 중 거의 절반 분량이 밑으로 내려갔다. 이럴 때는 드래곤까지는 아니어도 인간 보다는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마족이란게 감사할 따름이다. 며칠 전부터 어의 영감이 몸이 상한다고 피로 회복제를 갖다 주고 있다. 시녀 중 한 명이 말했나 보다. 처음에는 써서 죽을 것 같았지만 이젠 이것도 적응이 되어 간다. 이런 것에 적응하면 안되는데 나도 큰 일이다. 입맛 버리는데. 아무튼 이러다가 시험도 보기 전에 쓰러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공작의 능글 맞은 미소를 떠올리면서 꿋꿋이 버티고 있다. 더 이상 쓸 힘도 없다. 내일이 오기 전 까지 책 한 권 또 끝내야겠다. 누가 책이란 걸 만들었는지 원망스럽기만 하다. 제인드력 426년 5월 10일 *미나의 일기* 날씨: 햇빛이 반짝반짝 요즘 마리엔 공주님은 식사 시간과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공부만 하신다. 처음에는 공주님께서 공부하시는 게 너무 신기해 보였지만(공주님께는 죄송하지만 그랬다) 지금 은 어찌됐든 어서 시험이 끝났으면 좋겠다. 퀭해진 눈으로 책을 보시는 모습은 무섭기 까지 하다. 폐인이 되어 가시는 것 같다. 오늘만 해도 교대 시간이 지나 황급히 가고 있는데 공주님께서 대리석으로 만든 기둥 앞에 가만히 서 계시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신가 싶어 다가가는데 공주님께서 중얼 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리석, 석회암이 높은 열과 강한 압력을 받아 재결정한 암석. 흰 빛깔의 순순한 것 은 건축이나 조각용 석재 따위로 널리 쓰임. 토르의 체아 지역의 대리석이 가장 우수 하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리고 확 고개를 돌리시더니 날 뚫어져라 보는 게 아닌가.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 못 해 부스스하고 멍한 모습이었지만 눈만은 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인간, 사람이나 인류. 평균 수명 70세 안팎. 성별은 남녀로 나뉘고 일반적으로 남자 가 강하고 여자가 섬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음. 성격은 각양각색이고 능력도 각양각색 이다. 대개 집단을 이뤄서 살고, 뛰어난 능력은 없지만 숫자가 많은 걸로 유명....... " 뒤에도 뭐라고 중얼거리셨지만 무서워서 듣지 못했다. 내가 정신이 들었을 때는 마리 엔 공주님은 이미 쪽지를 보면서 어디론가 걸어가고 계셨다. 그래도 처음에 공부할 거 라면서 가져오신 책 중에 삼분의 이를 끝내셨다. 내가 모시는 분이라 그런 게 아니라 정말 굉장하다. 이거 다 쓰면 쏘냐 고 계집애에게 가서 자랑해야지. 고 것이 자기가 모시는 데미나 공주님은 우아하고, 자상하시고, 똑 똑하시고, ....... 너무 많아서 생각도 잘 나지 않지만 얼마나 자랑을 늘어놓는지 모 른다. 흥, 우리 마리엔 공주님이 훨씬 더 예뻐! 그리고 우리 공주님도 자상하단 말이 야! 지금은 공부하시느라 바쁘지만 평소에는 얼마나 자상한 미소를 지어주시는지 모른 다. 우리 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공주님께 빠져 버렸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공주님이 성격이 나쁘다고 소문을 낸 거지? 틀림없이 데미나 공주궁 사람들일꺼야. 제인드력 426년 5월 14일 *시험 보기 2일 전* 날씨: 무슨 날씨인지 판단이 가지 않는다. 그냥 파란 하늘에 해가 떠 있다. 일기장, 재료 종이, 재질로 봐서 최고급, 종이는 질에 따라 가격이 나뉨, 원산지 페드 인 왕국의 파렌 지역으로 추정. 만드는 과정은.......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 고개를 흔들고 손등을 꼬집어서 겨우 정신차렸다. 이것만 봐도 내가 얼마나 피눈물나 는 노력을 했는지 알수 있으리라.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다. 그러나 집념 하나로 버 텨냈다. 이건 마족 승리다. 내 평생에 이렇게 공부를 해본 적이 있던가. 없는 걸로 안 다. 머리 속에서는 온갖 지식들이 왔다 갔다 한다. 몸은 천근만근이다. 처음에는 돌아다니 면서 외우기도 했지만 지금은 움직일 힘도 없어 책상에 엎드려서 쓰고 있다. 그래도 오늘로 범위 내 공부는 모두 마쳤다는 것 아닌가. 후후후. 공작도 내가 설마 책을 다 외웠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겠지. 15일 동안 수업도 열심히 들었다. 말라게니 여사는 잔소리는 많지만 질문을 하면 자세히 일러주는 사람이라 편했다. 시녀장인 캐 롤의 도움도 받았다. 참, 어의의 약도 한 몫 한 것 같다. 피로를 풀어주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한 번 먹으면 정신이 번쩍 든다. 아, 갈수록 글씨가 이상해진다. 내가 뭘 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 이제 그만하고 자야지. 이게 얼마만의 휴식인지 모르...겠....ㄷ ============================================================================== 마리엔이 지쳐 잠이 들었을 때, 마리엔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 원망해 마지 않는 라 디폰 공작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이 나라 최고의 권력을 가진 공 작이면서 재상이기에 그가 처리해야 할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건강 하게(마리엔에게는 무척이나 아쉬운 일이지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다른 사람보 다 뛰어난 정신력을 가진 점도 있지만 그의 옆에 있는 마법사 때문이었다. 하인드 이블로. 평민 출신이지만 7서클 마도사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페드인 왕국에서 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마법사였다. 그가 공작의 친구이자 오른팔로 공작을 보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하이덴 제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국경 내에 있는 군사 까지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는 것으로 봐서 제국 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조사에 따르면 국경 수비대 3000명 정도가 수도로 이동했고, 귀족들도 훈련을 핑계삼아 군사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왕족과 귀족의 갈등이 가시화되고 있습니 다. 조치를 취할까요?" 하인드의 보고를 가만히 듣던 공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우려해 왔던 일이 드디어 일어날 모양이군. 하인드 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왕권이 강하기 때문에 갈등이 심한 편이지. 일단은 각 도시의 경계를 강화하고 조용히 관망하 는 것이 좋겠군. 그럼 업무는 이걸로 끝인가?" "네. 공식적인 업무는 끝이 났고 아직 사적인 업무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하인드는 얇은 보고서를 손에 들고 빙글 웃었다. 라디폰 공작 역시 자신을 보면서 이 를 갈던 한 소녀를 떠올리면서 웃었다. 현재 하인드의 손에 쥐어져 있는 보고서는 다 름아닌 마리엔 공주의 수업 보고서였다. 수업 시간에 졸았다거나 딴 짓하다가 혼났다 는 등 모든 내용이 상세히 적혀있는 보고서였다. 보고서를 건네받은 공작은 한 번 훑 어보고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약간은 실망어린 얼굴로. "흠, 요새는 열심히 하고 계시다는군. 역시 시험 때문이겠지." "국왕폐하께서도 오시는데 열심히 하시겠지. 자네도 짖궂어. 원래 시험은 볼 계획이 없었잖아" 이제부터는 공작과 부하간의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라 친구간의 사적인 자리이기 때문 에 하인드는 편한 말투로 말했다. 공작도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동안 놀 기만 해서 골치를 썩히던 마리엔도 국왕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거야 공주님께서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거든. 레이스 남작 말로는 머리가 보통이 아 니라고 하더군. 물론 공부하는데 사용하지는 않으셨지만. 게다가 간혹 놀랄 정도의 식 견과 판단력을 보여준다고 하니 직접 확인해보는 것도 좋겠지." "그런데 자네 요새 마리엔 공주님께 신경을 많이 쓰더군. 설마 마리엔 공주님을 다음 왕위 계승자로 밀려는 건 아니겠지?" 하인드의 말에 공작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오! 그런 방법이 있었군. 자넨 천재야. 내가 왜 진작에 그 생각을 못했지?" "이봐. 농담이 아니라구. 설마 진짜로 마리엔 공주님을 지지할 생각이야?" 하인드의 말에 공작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 "못할 것도 없지. 단 공주님께서 내가 인정할 만한 사람이라면 말이지. 그건 차차 두 고보면 알게 되겠지. 그 것보다는 며칠 후에 있을 시험이 기대되는군." 공작은 과연 짧은 기간동안 마리엔 공주가 뭘 어떻게 했을지 기대가 되었다. 예전에 알던 마리엔 공주와는 분명히 달랐다. 예전이라면 포기하고 말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기 싫어하는 마리엔 공주님은 싫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필사적으로 공부를 하겠지. 이거 앞으로 재미있어지겠어. 오랜만에 숙면을 취하고 났더니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빨갛게 충혈되었던 눈도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정도 제 색을 찾았고, 시체가 형님하고 달려올 것만 같던 얼굴도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이틀동안 죽은 듯이 잔 보람 이 있군. 내가 눈을 떴을 때 처음 본 것은 창가로 스며드는 햇살이었다. 오랜만에 맞아보는 평 화로운 아침이었다. 그동안 두문불출하고 공부에 정진했던 탓에 참으로 오랜만에 하늘 을 올려다보았다. 글썽. 역시 삶이란 아름다운 것이야. 해님이 이렇게 고마운 존재였 어. 역시 과도한 스트레스는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 공작이 오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마음을 진정시켰다. 혹시라도 외운 것을 잊 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왜냐면 난 천재니까. 마음의 여유를 너무 과도하게 찾은 것 같군. 시험 보기를 기다리는 동안 든든하게 아침을 먹고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치장을 했다. 국왕까지 오는데 신경 좀 써야지. 이 기회에 국왕에게 잘 보이면 여러모로 편할 꺼야 . 인간들은 권력에 약하니까. 잔뜩 신경을 쓴 내 모습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이제 국왕에게 점수도 따고, 라디폰 공작도 놀래켜줘야지. 내가 겨우 시험 하나 통과 못할 까봐. 잠시 후 기다리던 사람들이 도착했다. 국왕폐하, 현재 나의 아버지로 되어있는 사람과 그동안 나를 가르쳤던 선생들, 그리고 여전히 능글맞은 미소를 짓고 있는 라디폰 공 작. 국왕의 호위로 보이는 기사들은 문밖에서 대기했다. "아바마마, 어서 오시어요. 그동안 옥체 평안하셨는지요?" "그래. 마리엔도 건강해 보이는구나." "모두 아바마마께서 신경써주신 덕분입니다." 드레스 자락을 잡고 다소곳이 무릎을 굽혀 인사를 했다. 오! 내가 봐도 기품이 철철 넘쳐. 착한 딸을 연기해야했기 때문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닭살맞은 말을 남발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건 어딜 봐도 아버지를 사랑하는 딸로 밖에 안보여. 역시 내 표정 연기는 알아줘야 된다니까. 속으로야 무슨 음흉한 생각을 하든 겉으로 보기에 나는 사랑스러운 딸 내지는 나무랄데 없는 공주로 보였다. 카드란 국왕은 나의 마수 를 벗어나지 못하고 무서운 일을 겪은 가엽고 사랑스러운 딸을 한없이 자상하게 대해 주었다. 뒤에서 기가 막혀하는 라디폰 공작이나 레이스 남작, 말라게니 여사, 테스는 내 알 바 아니었다. 어차피 국왕에게만 잘 보이면 돼. 이 세상은 약육강식 아니겠어. 약한 인 간은 빠져. "역시 공주마마는 언제 보아도 아름다우십니다. 그럼 슬슬 시험을 시작하도록 했으면 합니다만." 내가 국왕을 홀리고 있을 때 라디폰 공작이 헛기침을 하며 중간에 끼어 들었다. 끼어 들었다는 표시가 나지 않게 끼어드는 것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리고 공작은 눈을 빛내 며 뒤에 있던 세 명에게 눈짓을 보냈다. 나머지 세 사람도 그동안 내가 논 것 때문에 쌓인 것이 많았는지 기다렸다는 듯이 각자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펴들었다. 아마 저 것이 기출 문제집이겠지. 안타깝게도 문제는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있었다. 나와 네 사람(라디폰 공작, 레이스 남작, 말라게니 여사, 테스) 사이의 공기가 심상치 않게 변했다. 저 쪽도 자신 있다는 태도다. 그러나 내가 거기에 당할쏘냐. 난 자유를 쟁취하고 말겠어. 처음에는 레이스 남작이 나섰다. 최근 대륙의 정세를 말해보라는 간단한 문제였다. 그러나 표면의 상황만 봐서는 안되고 두 번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였 다. 한 번 놀려줘야지. "현재 대륙은 다른 어떤 때보다 평화로운 상태예요. 소피린 대륙은 하이덴 제국, 토르 , 페드인 왕국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나라 간의 충돌이 생기지 않고 있죠 . 아드린 대륙의 경우는 류운은 자기들에게 큰 영향이 없는 한 별다른 관여를 하지 않 기 때문에 대부분의 일은 묵과하는 형편이죠. 또 스피린은 그 독특한 문화 때문에 다 른 국가와 교류가 활발하지 못한 편이고, 세를리드는 평화를 숭상하는 나라이기 때문 에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죠." 내가 여기까지 말하자 공작 이하 사람들의 눈에 묘한 빛이 서렸다. 입꼬리도 살짝 올 라갔다. 가소롭다는 눈치다. 그러나 내 말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물론 표면적인 상황만 보자면 말이죠. 몬스터가 많았던 것은 항상 있어왔던 일이고, 최근에 하이덴 제국 내에서 그동안 문제되어왔던 왕족과 귀족간의 갈등이 가시화되고 있죠. 물론 감추려고 하고 있지만 말이예요. 토르 역시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어 불안 감을 주고 있고. 류운과 스피린은 독특한 문화 때문에 다른 나라와 충돌이 잦은 편인 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두 나라가 결코 약하지 않다는 거죠. 세를리드는 국가 내 에서 현 왕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력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죠. 50년 전 구왕조를 따르는 기사들이 아직도 시위를 계속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저희 나라도 그리 조용 하지만은 않잖아요." 마지막의 의미심장한 말에 공작의 눈빛이 날카로워졌지만 모르는 척했다. 정작 국왕은 내 대답에 만족해서 웃고 있었고. 내가 첫 문제를 완벽하게 답하자 선생들의 얼굴에 의외라는 빛이 떠올랐지만 옆에 있는 국왕을 의식해서인지 곧 사라졌다. 그리고 서서 히 선생의 탈을 쓴 악마.......참, 악마는 나였지. 하여튼, 못된 인간들이 질문을 시 작했다. 다른 건 몰라도 예법이나 춤은 직접 해야 하는 것이 있다. 예법이야 암기한 대로만 하 면 되지만 춤은 리듬감이 필요하다. 나비같이 날아서 벌처럼 쏜다........이게 아니었 지! 나비같이 움직인다, 였지. 나비같이 움직인다, 를 속으로 되뇌면서 정신을 집중해 서 춤을 추었다. 다른 사람들 멀쩡히 서있는데 혼자서 춤춘다는 게 무척이나 창피하고 쪽팔렸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 했다. 표정 관리하자. 미소. 미소. 조심에 조심을 기 한 탓에 춤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내가 무사히 모든 시험을 통과하자 국왕은 무척이나 흡족해하면서도 자랑스러운 표정 을 지었다. 책을 달달 외워서 말한 게 효과가 컸군. 이에 반해 내가 두껍디 두꺼운 책 내용을 몽땅 암기한 것을 안 공작 일당들은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 얼굴들이 아주 맘에 드는군. x씹는 표정의 그들을 보면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통과할 것은 생각도 안하고 다음 수업 내용을 준비했겠지. 이제 지겨운 수업은 듣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이제부터는 내가 살고 있는 공주궁을 벗어나도 된다. 이 모든 게 내가 피땀 흘 려서 노력한 결과 아니겠어. 그동안의 고생을 생각하면.......흑흑,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정도면 될까요?"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하자 공작 일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모습은 절대적으로 믿 었던 사실(내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는)이 와장창 깨진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라디폰 공작은 금새 표정을 수습했다. "시험을 통과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열심히 하셨군요." 그럼. 열심히 했지. 거의 폐인이 되기 직전까지 갔으니 열심히 한 거지. 더불어 당신 에 대한 원한도 키웠지.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으로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러나 강렬 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라디폰 공작은 여전히 웃고만 있었다. 얄미운 인간. #7-기사단을 방문한 마리엔 시험을 통과했다는 것은 내가 공주로서 지녀야 할 기본적인 지식과 덕목을 모두 지니 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14일 간의 강행군을 견뎌냄으로써 스스로에게 자신감 을 지닐 수 있게 해주는 사건이었고, 라디폰 공작에게 한 방 먹인 사건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의 궁을 벗어나서 궁궐 어디든지 돌아다닐 수 있는 통행증을 부여받은 것과 같았다. 마리엔 공주궁이 워낙 넓다보니 그동안 답답함을 느끼진 않았지만 호기심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더 이상 졸음을 참으며 수업을 들을 필요도, 내 궁에서만 머물러야할 이 유도 없었다. 오호호! 이제야 맘대로 돌아다닐 수 있겠군! 한 나라의 궁궐은 왕족이 살고 정사가 이루어지는 장소이면서, 다른 나라의 귀빈을 맞 이하는 즉, 그 나라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읽은 '인간들 역사의 공통 점' 이라는 책(마계에서 출판된 책)에서도 아무리 가난한 나라라도 왕궁은 번지르하게 지어놓는다고 했다, 하물며 이 곳은 소피린 대륙의 3대 강국 중 하나인 페드인 왕국 이다. 크기가 좀 크겠는가. 과거 정원에서 길을 잃고 헤맨 점으로 미루어 봐 내가 길을 잘 찾으리란 확신이 들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 자기 궁을 못 찾아 헤매는 공주의 모습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그 럴 순 없지. 그래서 지금 이렇게 미나를 대동하고 왕궁을 구경하고 있는 것이다. 공주 가 자기 나라의 왕궁을 구경하는 게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난 겉만 공 주인 가짜다. "공주님! 어서 오세요!" 신이 나서 앞장서는 저 여인이 예전에 내가 무서워서 제대로 말도 못하고 부들부들 덜 던 그 여인이 맞는지 의심이 간다. 하긴 변한 인간이 비단 미나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 니다. 마리엔 공주궁의 대부분 사람들이 서서히 미나를 닮아가고 있다. 미나가 가장 정도가 심하지만. 인간들은 역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잘한다. 나로서는 이해가 안가 는 점이지만 종족마다 차이가 있겠지. 하지만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웃는 모습이 더 보기 좋은 점도 있지만 일단 내 편은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이 그 이유였다. "미나, 그렇게 좋니? 어차피 같은 왕궁인데 뭘 그렇게 호들갑이니?" 자연스럽게 부드러운 말투가 나왔다. 나를 아는 마족들이 이 모습을 봤다면 거품을 물 고 기절하겠지. 말하는 나 역시 팔뚝에 소름이 돋았지만 14일간의 맹훈련으로 습관이 돼버렸다.원래대로 돌아가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내가 내 말투에 괴로워 하는 동안 미나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계속 종알거렸다. "공주님과 함께 있어서 너무 기뻐요! 전 마리엔 공주님이 너무 좋아요!" "호호호, 고마워. 나도 미나가 좋아." '난 여자 취향 없어. 남자가 더 좋아.' 미나는 시녀로 얼마되지 않아 진짜 마리엔 공주의 횡포를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하긴 그러니까 내 앞에서 방방 뛸 수 있겠지. "......앗! 이제 제 1 공주궁에서 벗어났어요. 여기서부터는 다른 나라에서 오시는 귀 빈들이 머무시는 곳이예요. 그리고 조금만 더 가면......." 분명히 미나는 내가 기억상실증이라는 것을 모른다. 이 사실을 아는 건 카드란 국왕, 라디폰 공작, 어의영감, 선생들(레이스 남작, 테스, 말라게니 여사) 외 소수이다. 물 론 기억상실증이라는 것도 사실이 아니지만. 그렇다면 미나는 내가 왕궁의 지리나 각 건물의 용도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공주에게 왕궁 구조 를 설명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건지. 얼굴을 귀여운데 너무 쾌활한게 탈이라니까. 결과적으로 나한테는 좋았다. "어머, 아주 잘 알고 있네. 그럼 서쪽에 보이는 하얀 건물은 뭔지 아니?" "네! 그 곳은 기사님들이 머무르는 곳이예요! 기사단장님들이 각종 군업무를 보시기도 하고 훈련장도 있어요. 하지만 겨울철이나 우천시를 제외하고는 저 건물 앞에 있는 훈련장에서 훈련을 하세요. 전에 한번 시녀장님 심부름으로 가본 적이 있었는데 갑옷 을 입고 검을 휘두르는 기사님들 모습이 정말 멋있었어요." 조금만 떠봐도 아주 상세한 설명이 뒤따랐다. 기사들이 머무는 곳이라. 재미있겠다! 미나도 가보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꿈이 많을 나이긴 하지. 미나가 '가고 싶어요' 라고 써져있는 얼굴로 애원의 눈초리를 보내왔다. 마침 나도 한번 가보고 싶었던 터라 못이기는 척 하고 기사들의 훈련장으로 갔다. 페드인 왕국은 기사의 나라로 유명한 만큼 기사들의 실력은 대륙제일이었다. 과연 최 강의 기사라 불리는 기사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다. 훈련장으로 가까워질수록 힘찬 기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훈련장에 도착하자 장관이 펼쳐졌다. 단장으로 보이는 자의 지시에 따라 동시에 휘둘러지는 수십개의 검날이 햇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은빛의 물결이 치고 있는 것 같았다. 멋있다. 눈이 부시긴 했지만 계속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옆에 서 있는 미나는 표정관리를 하는 나 와는 달이 완전히 눈이 풀려서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여기 오고 싶어하는 이 유를 알겠어. 대다수의 기사들이 기사단장으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훈련을 받고 있었지만 소수의 사 람들은 2명이 짝을 이루어 대련을 하고 있었다. 진검이 아닌 목검을 들고 상대하고 있 었기 때문에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단체 훈련을 받는 기사들은 검의 감각 을 익히기 위해서 진검을 들고 있었다. 그럼 저 쪽(대련파)는 그정도는 할 수 있는 실 력인가 보지. 확실히 실력차가 있긴 하군. 적어도 한두 수는 위야. 기사들은 훈련에 열중한 나머지 우리의 등장을 눈치채지 못했다. 나도 그들의 훈련 을 방해하기 싫어 조용히 훈련장 안으로 들어갔다. 단체 훈련을 받는 쪽의 모습이 겉 보기에 더 멋있어 보였지만 실력있는 자들의 대련을 보고 싶었던 나는 대련하는 기사 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갔다. 우리는 가장 바깥 쪽에 있는 기사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대련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두 명의 기사가 격렬히 맞붙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금새 실망을 하고 말았다. 뭐랄까 공격이 화끈한 맛이 없다고나 할까. 뒤 로 텔레포트해서 갑자기 기습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검기를 쓰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건 결투가 아니라 살초는 오가지 않았기 때문에 박력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 았다. 피 튀기는 전투만 봐온 나로선 답답하기 그지없는 전투 광경이었다. 거참, 답답하네! 방금 전 찌르기를 피하지 않고 그대로 상대편 목을 향해 휘둘렀으면 이겼을텐데.......왜 저렇게 큰 동작으로 피라는 거지? 옆으로 살짝만 비켰으면 충분 히 피할 수 있었는데. 그럼 상대편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돼서 이겼을 꺼 아냐. 한참 후에 두 사람의 대련은 끝이 났다. 별로 움직인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두 사람 모 두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대련을 하는데 방해가 될까봐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던 나 는 대련이 끝나자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대련을 그렇게 힘없이 한 이유를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내게 등을 돌리고 있던 기사가 다가가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 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이봐, 미안한데 물 좀 집어주겠어?" 그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말했기 때문에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물을 찾았 다. 근처에는 기사들이 훈련을 마치고 잠깐 쉴 수 있도록 마련된 휴식공간이 있었고, 그 곳에 물통과 수건도 있었다. 물통에는 특별히 보존 마법이 걸려 있어서 하나를 집 어들자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기사들이 쓰는 물통에는 보존마법까지 걸어놓다니. 기사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주는 기사의 나라라고 할 만했다. 물통을 들고 소매로 이마 에 흐르는 땀을 닦고 있는 기사에게 전해주었다. "자, 여기......." 기사는 대련이 무척이나 힘들었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깨 너머로 물통을 받았다. 그리고 기사는 물통을 열고 한 모금 마신 후에야 뒤를 돌아보았다. "고마워." "아니, 뭐 이정도 가지고." 생긋 웃으며 말한 나는 갑자기 기사가 물병을 툭 떨어뜨리자 생각없이 그 것을 주워 다시 건네주려 했다. "이거 떨어뜨렸네요." 그는 멍하니 내 얼굴과 물병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크아악!!!" 나는 난데없는 괴성에 깜짝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넋놓고 기사들을 바라보던 미나도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눈 앞의 기사는 뭔가에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검게 그을린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자세히 보니 입가에 미세한 경련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혹시라도 내가 잘못한 게 있나 생각해보았지만 나는 물을 전해준 것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설령 물을 전해주는 과정에서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저렇듯 처절한 비명을 지를 이유까지는 없었다. 혹시 물에 독이라도 타져있던 게 아닐까? 너무나도 충격받은 모습의 기사 때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통 입구로 안에 담긴 물을 보았다. 보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이지만 기사의 반응으로 봐서 무색의 독이 섞어져있는 모양이 다. 평소에 원한관계에 있던 사람의 소행일까? 하지만 목표하는 사람이 반드시 이 물을 마 시리란 보장은 없을텐데. 그렇다면 무차별 살인??? 특별히 기사를 싫어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우리 왕국의 명예를 손상시키기 위한 타국가의 짓일까? 누구든간에 정말 대범 한 행동이군. 우리 왕국에서 기사를 독살하려 하다니. 만약 타국가의 짓이라며 나라간 에 충돌이 일어나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사실...... 마침내 대륙전쟁으로까지 상상을 넓혀가고 있을 때였다. "공주마마! 제가 공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크나큰 불경을 저질렀습니다! 죽여주십시 오!" 그는 땅에 무릎을 꿇고 외쳤다. 한참 '대륙전쟁이 일어나면 어느 나라가 이길까'를 생 각하고 있던 나는 의외의 사태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죽여달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비록 두려움에 떨고있으나 아직 죽지 않은 것 으로 보아 독에 당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대륙전쟁은 일어나지 않는 건가? 왠 지 아쉬운 생각이 드는건 왜일까.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그는 내가 화가 단단히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 는 것이라 생각하는지 얼굴이 더욱 새하얗게 질렸다. 그 검던 얼굴이 분을 바른 새색 시의 얼굴마냥 하얗게 변해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변할 수가 있지? 전쟁에 대한 관심 은 기사의 얼굴색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신기하네. 신기한 마음에 그의 얼굴을 뚫어져 라 쳐다보았다. 어느새 주변에는 다른 기사들이 훈련을 중단하고 몰려들어 있었다. 저마다 '쯧쯧쯧, 어쩌다 저 마녀에게 걸렸을꼬.' 내지는 '정말 운도 없지. 불쌍하게시리' 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마리엔이 얼마나 고약한 심보를 가졌었는지 알 수 있었다. 오 죽하면 기사들까지 이렇게 두려움에 떤단 말인가. 딱히 화가 난 것도 아니었지만 상대가 이렇게 나오자 괜히 골려주고 싶었다. 후후후. 재미있겠다. 어떻게 골려줄까나? 헤죽헤죽 웃음이 나오려했지만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 그리고 아주 근엄한 얼굴로 무게를 잡았다. 이런 거야 마족이라면 다 할 수 있는 것 이기에(생각해보라. 계약할 때 실실 웃으면 어느 인간이 계약을 하려고 하겠는가) 별 로 어렵지는 않았다. 한껏 분위기를 잡자 여기저기서 긴장해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 앞에 무릎 을 꿇은 기사는 모든 것을 체념했는지 그저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옆에 서 있는 미나 는 갑자기 돌변한 내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경의 잘못은 알고 계시겠지요?" 오랜만에 목소리를 깔고 말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웠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는 침울한 어조로 대답했다. 자기가 잘못을 했어도 전혀 죄책감을 가지지 않고 뻔뻔 하게 구는 마족들만 봐오던 나로서는 그의 반응은 신선 그 자체였다. 새로운 장난감을 얻은 기분이랄까. "그럼 경의 잘못을 말해보세요." "감히 아름다우시고 고귀하신 공주마마를 알아보지 못한 죄입니다. 대륙에서 제일가는 미인이신 마리엔 공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다니! 정말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 손이 아닌 우아하시고 자,비,로,우,신, 공주님의 손에 죽는다니 오히려 영 광입니다." 다시 한번 마리엔의 성격이 나오는군. 틀림없이 이렇게 부추겨주면 방방 떠서 '그럼 자비로운 내가 한번은 용서를 하지요' 라고 넘어갔을꺼야. 하지만 그에게는 불행하게 도 나는 모습만 마리엔이지 전혀 다른 인물인 것이다. 방긋 한번 웃어주자 모두들 내가 그의 아부에 넘어간 줄 아는 모양이다. 주변에 있던 기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무릎을 꿇고 있던 기사도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 했다. 한껏 띄워주었다가 다시 나락으로 떨구었을 때야말로 가장 재미있지. 캬하하하. 역시 나는 마족이 맞는 모양이다. "흠, 제가 아름답다고요?" "물론이지요! 저는 공주님처럼 아름다우신 분은 본 적이 없습니다! 미의 화신이라는 엘프들조차 공주님 앞에서는 추녀와 다름없죠! 공주님의 아름다움은 결코 미와 순결 의 여신인 로디테님에게도 뒤지지 않을 겁니다!!!" 기사는 나의 아름다움에 대해 줄줄이 늘어놓았다. 인간이 저렇게 망가질 수도 있구나. 난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마침내는 내가 로디테가 잠시 인간 세상에 내려온 것이라 는 말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모여든 기사들도 옆에서 맞장구치고 있었다. 얼굴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공주님처럼 아름다우신 분은 없을 겁니다!!!" 드디어 그의 길고 길던 나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은 끝이 났다. 어차피 진짜 내 얼굴 로 아닌지라 별 감흥이 없었지만 미나는 달랐다. 마치 자신이 칭찬 받은 마냥 좋아하 고 있었다. 닭살맞기 그지없는 찬양을 하던 기사의 얼굴에는 어느새 위기를 모면했다 는 안도감이 스며있었다. 비록 속이 좋아 보이지 않지만 주변에 모여있던 기사들도 그 다지 걱정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자! 이제 나락으로 떨어질 차례야! 오호호홋!!! 어떻게 이 인간을 골탕먹일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왕이면 평생동안 기억에 남을 만한 신선하고 충격적인 그런 게 없을까? 아! 방법이 너무 많이 떠오른다. 그래. 그게 좋겠어. "그 말 정말인가요?" 정말로 기쁘다는 듯이 말했더니 가스톤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거참, 표정관리 좀 하 라구. 얼굴에 드디어 넘어왔군. 역시 내 말빨은 대단하단 말이야. 신이시여! 너무도 뛰어난 제가 두렵나이다!.......이건 아닌가? 아무튼 이걸로 위기를 모면했다는 생각 이 그대로 나타났다.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가스톤을 향해 상큼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사람을 골탕 먹이기 직전의 기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긴장 감과 이후 상대방의 반응을 상상할 때의 유쾌함, 자연스러움을 끌어내기 위한 혼신의 연기. 세상만사 쉽게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이 삼박자가 맞아야 골탕먹이는 것도 할 수 있다. 당연히 가스톤은 내 음흉한 속셈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과분한 칭찬이네요. 그렇지만 기뻐요." 얼굴에 홍조를 띠며 수줍은 듯이 말하는 나. 내 말투에 몸서리쳐지긴 했지만 대를 위 해 소를 희생하자. 이제 가스톤을 포함한 기사들은 완전히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그 렇지 않아도 조금씩 안심해오던 터라 지금의 그들은 거의 무방비 상태라고 해도 과언 이 아니었다. 나는 물을 마시고 있는 사슴의 뒤를 노리는 사냥꾼과 비슷한 기분을 느 꼈다. 이제 사냥감을 사냥해보실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경이야 말로 용모가 출중하군요. 정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어 요. 어째서 주신이신 제르마 님께서 이런 실수를 하셨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하 긴 저로선 제르나 님의 작은 실수가 고맙지만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경의 외모는 제 가 봐온 어떤 사람보다도 뛰어나요. 그렇죠, 여러분?" "네, 네. 물론입니다." 기사들은 '제르마 님의 실수' 라는 말은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얼떨결에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자신들의 말이 동료의 무덤을 파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못한 체. "역시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군요. 같은 생각이라니 정말 기뻐요. 가스톤 경, 정말 부러워요. 어쩜 피부가 이렇게 매끄럽고 부드러운 거죠?" 피부가 곱긴 뭐가 고와. 나이도 나이지만 힘든 수련 덕분에 그의 피부는 나무껍질처럼 꺼칠꺼칠했다. 이봐. 그렇다고 그런 이상한 눈으로 볼 건 없잖아. 나도 저렇게 굳은 살 박히고 거친 피부는 싫다구. 시선이야 이 여자가 지금 제 정신인가 하는 시선이었 지만 내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차마 말은 못하고 어색한 웃음만을 짓고 있었다. 역시 권력이란 좋은 것이야. "그 침묵은 긍정이라는 뜻이겠죠? 그럴꺼예요. 게다가 경의 눈은 어쩜 저렇게 아름다 울 수 있죠? 좀 봐요. 사람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것 같지 않아요? 완벽하게 유연한 곡 선을 그리며 오똑 선 코에다 호감을 주는 미소까지! 덤으로 어떤 여자의 입술보다도 매혹적인 저 입술! 가히 예술이라고 할 수 있군요! 그동안 미인들은 많이 봐왔지만 경 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아름다워? 천만에 말씀. 사람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눈? 그냥 평범한 갈색 눈이다. 유 연한 곡선의 코? 곡선은 무슨 놈의 곡선. 매부리 코다. 호감을 주는 미소라. 하긴 웃 을 때마다 윗입술이 말려 올라가는 가스톤 특유의 웃음은 보는 사람이 웃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긴 하지. 그는 호탕하게 생겼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럼 내가 왜 이런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것인가? 내가 한 순간 미쳐서? 마족이 미치 는 것 봤는가. 그럼 정말 내 눈에 가스톤이 정말 그렇게 보여서? 내 미적 감각은 정상 이다. 그러니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기사들과 내 옆에서 조금씩 멀어지려는 미나 가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솔직히 내가 공주만 아니면 벌써 미친 사람 취급받았 을 것이다. 이 모든 게 가스톤에게 일생일대의 신선한 경험을 하게 하려는 나의 배려 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그렇게 괴로운 얼굴들 하지마. 듣는 너희들이 그런데 말하는 난 오죽하겠어. 그리고 당신! '나의 외모가 그정도였다니. 진정으로 몰랐어. 신이시여, 어쩌자고 저에 게 이런 미모를 주셨나이까?' 하는 표정은 집어치워 주겠어. 본능적으로 주먹이 나갈 것 같아서 말이야. 한 방 날리고 싶어서 근질거리는 주먹을 간신히 참으면서 말했다. "하아, 가스톤 경이 여자로 태어났다면 좋았을 걸. 안타까워요. 그래서 말인데 경께 부탁이 하나 있어요. 큰 일은 아니니그렇게 긴장하지 말아요. 경이 여장만 한 번 해주 면 돼요. 너무 쉽죠?" 그제서야 내 속셈을 눈치챈 사람들은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그런 그들에게 다시 한번 상큼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기사란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이상한 족속이라고 들었다. 그런 기사가 여장이라니? 기절하고 싶겠지. 하지만 이게 재미있잖아. "공주마마, 전......" "경의 아름다움을 이대로 보아 넘기자니 가슴이 너무 아파서 그래요. 해줄꺼죠?" "아니......" "옷이라면 걱정말아요. 내가 다 알아서 준비할테니까요. 고맙다구요? 이정도 가지고 뭘 그래요. 괜찮아요." "그게 아......." "설마 제 부탁을 거절하려는 건 아니죠? 나도 경의 부탁을 들어줬잖아요. 아- 물통이 너무너무 무거웠어요. 팔이 빠질 것 같아. 어의가 절대 안정하라고 했는데. 하지만 경 의 잘못은 절,대, 아니예요." 어의가 절대 안정을 취하라고 말한 건 사실이다. 다만 그 기간이 지났을 뿐이지만. 굳 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최대한 귀여운 미소를 지었다. 이 른바 필살 큐티 어택. 지금까지 넘어오지 않은 사람이 없는 나만의 필살기이다. 여기 에 순진함을 가장한 협박까지 첨가하면 그야말로 천하무적이다. "어머, 이 여름에 웬 식은땀을 그렇게 흘리는 거죠? 어디 아픈가요, 가스톤 경?" "아, 아닙니다." 가슴을 부여잡고 절망스런 얼굴로 힘없이 말하는 가스톤. 그러나 그와는 달리 처음에 는 여장이라는 전대미문의 부탁 겸 협박에 놀랐던 다른 기사들은 여유를 되찾았다. 어 차피 자기 일 아니라 이거지. 게다가 좋은 구경거리고 말이야. 인간이란 이런 존재다. 남자의 의리와 우정도 이렇게 허망한 것이다. 오늘의 교훈을 바탕으로 가스톤 경은 더욱 성숙하겠지. 한 명의 기사마저 챙기는 이 훌륭한 정신. 이제 공주가 해야 할 일이지. 그런데 왜 모두들 그렇게 가증스러운 눈으 로 보는 걸까? "제 부탁을 들어주실꺼죠?" 순진무구한 얼굴로 묻자 가스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나를 외면했다. 가스톤도 고개 는 돌리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으리라. "......" "웃, 팔이, 팔이. 아바마마께 좋은 약이 있을지 모......."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흑흑."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가축마냥 축 쳐져서 뒤를 따라오는 가스톤은 마지막으로 내게 애 원의 눈길을 보냈지만 모르는 척했다. 이런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 수는 없는 노릇이지 ! 호호호! 나와 같은 생각인지 다른 기사들도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뒤를 졸졸 따라 오고 있었다. 역시 우정이란 이런 것이군. 가스톤은 배신감과 절망에 빠져 예전의 친 구였고 지금의 웬수들을 노려보았다. "어이, 가스톤 그런 뜨거운 눈으로 바라보면 어떻게 해?" "우리가 너한테 반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크윽, 네 놈들 두고보자!" 만약 멀리서 우리들을 바라본다면 참으로 멋진 광경일 것이다. 아름다운 공주와 귀여 운 시녀 뒤를 따르는 멋진 기사들. 소설 속에서나 나오는 모습이리라. 하지만 좀 더 가까이에서 보면 이런 난장판도 없을 것이다. 공주라는 작자는 그 희생양에게 어떤 옷 을 입힐까, 라는 생각으로 혼자 히죽거리고 시녀는 자신의 주인이 기분이 좋아보이자 덩달아 방글거리고 있다. 뒤를 따르는 기사들은 평소의 근엄함과 품위를 벗어던진 채 자기들끼리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앞에 있는 사람이 왕족이며 제 1공주라는 것은 이미 그들의 머리 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서서히 내 궁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단 한 명 죽을 상을 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언제나 소수의 의견은 다수의 의견에 묵살되 는 법이니까 큰 상관은 없었다. 공주궁 앞에 있는 공터는 넓어서 거구의 기사들이 모 두 늘어서고도 남았다. 왁자지껄한 소리에 무슨 일인가 싶어 나와본 사람들은 모두 의 아한 얼굴로 나와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나갈 때는 분명히 미나 한 명만 데리고 갔던 내가 기사들을 줄줄이 끌고 왔으니 그럴 만도 하지. "공주마마, 이 분들께서는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서로간의 친목을 도모해보자는 차원이지요. 그렇죠?" "물론입니다!!!" 캐롤의 말에 한 쪽 눈을 찡긋하며 대답하자 가스톤을 제외한 기사들은 우렁찬 목소리 로 대답했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귀가 울릴 정도였지만 그만큼 그들의 기대가 크다는 것이겠지. "캐롤, 모두 안으로 들어가는 건 무리일 것 같으니 이 곳으로 탁자와 의자를 가져다줘 요. 간단한 차와 다과도 준비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몸집이 큰 여자가 입을만한 옷 은 뭐든지 이리로 가져다줘요." 차와 다과는 그렇다 치더라도 옷을 가져오라는 말에 의아한 눈치였지만 캐롤은 곧 시 녀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가 앉을 수 있는 탁 자와 의자가 공터에 설치되었고, 곧 이어 공주궁의 모든 시녀들이 총동원되어 차와 다 과를 날라왔다. 그 신속한 솜씨에 감탄할 만도 하건만 우리들의 관심은 다른 곳에 쏠려있었다. 바로 내 앞에 수북히 쌓여있는 여성이 입는 옷. 간단히 말해서 드레스라고 불리는 것들을 보고 있었다. 간간히 보이는 메이드 복에 눈을 빛내는 기사들도 있었지만 각자의 취향 까지 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런데 저 옷 무척이나 맘에 드는걸. 내가 보고 있는 옷 은 목이 깊게 파이고 몸에 쫘악 달라붙는 붉은 색 드레스였다. "공주님, 뭘 그렇게 보시는 겁니까? 맘에 드시는 거라도 있습니까?" 어느덧 나와 기사들은 가스톤이라는 하나의 희생양의 힘으로 사이가 상당히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말없이 내가 보고 있던 드레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기사들은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우하하하!!!" "공주님의 안목에 저는 감탄했습니다!!!" "가스톤, 정말 어울리겠다!!!" 기사들이 내 앞이라는 것도 잊고 박장대소하자 캐롤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뭔가 말하 려 했지만 막았다. 나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고 허벅지를 꼬집고 입술을 깨물 고 있으니까 이해가 가지. 만약 여기서 입이 벌어지면 나도 저들 못지 않게 웃으리라. 참자. 참자. 난 공주다. 난 공주다.......자기 암시가 어느정도 효과를 발휘했는지 어느정도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나는 간의 탈의실까지 설치되자 기사들을 제외한 사람들을 모두 물렸다. 같이 훈련하 는 제 4 왕궁 기사단 동료들이라면 몰라도 시녀들 앞에서 그런 모습을 하고 싶지 않 겠지. 가스톤은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얼굴이었다. 그나마 시녀를 물려주는 내게 감 사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누구 때문에 여장을 하게 됐는지 잊은 모양이군. 뭐 나야 좋지만. 잠시 후. "가스톤 양, 여기도 봐주세요!" "오! 그대의 아름다움에 난 반해버렸다오!" "꺄악! 누님 너무 멋있어! 사랑해요!" "아이고, 나 죽네! 푸하하하!!!" -------------------------------------------------------------------------- 오랜만에 소설을 올리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게임에 푹 빠져서 놀던 작가입니다. 기다리셨던 몇 안되는 분(있을까? ㅠ.ㅠ)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상이나 비평은 많이 적어 주세요. 전에 쓴 글들을 읽어봤더니 양이 너무 적더군요. 그렇다고 전부 다 뜯어고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지금부터라도 잘 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우선 분량부터 늘리 생각입니다. 그럼 재미있게 봐주세요. #8-마리엔 vs 오펠리우스 왕비 기사들이란 정말이지 단순한 존재들이다. 이렇게 잘 속아넘어가는 존재는 처음이군. 그동안 그렇게 당했으면서도 또 당하다니. 멍청한 건지 순진한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 후추 한 통을 몽땅 탄 물을 마시고 길길이 날뛰던 마르크의 모습이 떠오르자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가스톤 여장 사건' 이후로 제 4 왕궁 기사단은 내 전용 장난감이 되었다. 나는 그들 을 놀려먹는 재미에 푹 빠져버렸고, 미나는 매일 멋진 기사들을 볼 수 있어서 행복해 했다. 그러나 누구보다 즐거워했던 사람은 다름아닌 가스톤이었다. 이미 당한(?) 몸. 혼자서만 당할 수는 없다는 생각인지 내 음모에 적극 동참했다. 이 렇게 되면 '공주가 할 일도 없나보군' 이라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겠지. 만약 그 사람들이 내 앞에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그래. 할 일이 너무 없다." 기사단에 놀러가거나 궁 안을 돌아다니는 일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공주가 하는 일 은 귀족영애들과 수다를 떨거나 유명한 디자이너와 보석상을 불러 최신 유행에 뒤떨어 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일이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궁전이나 귀족가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참석해 열심히 춤을 추고 가끔 시간이 나면 책을 읽는다. 여기서 말하는 책 이란 알아듣지도 못할 말만 늘어놓는 철학책이나 따분하기 그지없는 역사책 같은 것이 다. 비록 페드인 왕국이 공주도 왕위 계승권을 가진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공주가 대륙 전체에서 알아주는 천재일 경구나 재수없게도 왕자들이 몽땅 천치일 경우에 해 당되는 것이다. 고로 내가 읽을 책이란 교양서적이지 제왕학에 관련된 책들이 아니었 다. 제왕학에 특별히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런 책들은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 . 실생활에 써먹을 수 없는 건 쓰레기에 불과해. 그렇다고 최신 유행옷이나 다른 사람 험담에만 관심이 있는 고귀하신 귀족 영애분들과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 그 여자들이 마법에 관심이 있을 리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인간과 춤을 추는 것도 절대 사절이다. 시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춤을 마스터하긴 했 지만 춤이란 말만 들어도 어지러워진다. 인간들은 왜 그런 걸 좋아하는 걸까? 시간 낭 비야. 시간 낭비. 평범한 공주의 일상생활에 나까지 동참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런 건 내가 아 니어도 다른 공주들이 잘하고 있겠지. 이런 지루한 일을 제치고 나니 마땅히 할 일이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다행히 가스톤의 희생으로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 뭐 제 4 기사 단도 내 총애를 받고 있다는 소문 덕에 대우가 좋아졌으니 서로 좋은거 아니겠어. 다음 번엔 누구를 놀려줄까? 순진한 듀? 덩치만 산만한 버크? 아니면 죠안? 행복한 고 민을 하며 내 궁으로 돌아가던 나는 점심때가 가까워오자 발걸음을 더 빨리했다. 오늘 은 뭘 먹을까? 역시 행복한 고민이었다. 말만 하면 알아서 음식을 대령하니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침내 점심 메뉴를 정한 나는 궁에 도착하자 캐롤부터 찾았다. 오늘의 메뉴를 일러주 기 위해서였지만 곧 그럴 필요는 사라졌다. 캐롤이 나를 향해 맹렬한 속도록 달려오고 있었으니까. 걸기적거리는 치마를 입고도 잘도 뛰어오네. 어느새 내 앞까지 달려온 캐롤은 멈춰서서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후 입을 열었다. "마리엔 공주님, 어딜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기사들의 훈련장에 다녀왔어." "또 가신 겁니까? 가끔 방문하시는 건 좋지만 그렇게 매일 찾아가시면 위엄이 서지를 않습니다. 기사들과 그렇게 어울리시는 것보다 귀부인들과 담소를 나누시거나 무도회 에 참석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전에도 슈레인 백작가에서 있었던 무도회 초대를 거절 하시고....... 벌써 다섯 달 동안 어떤 무도회에도 참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시면. ......" 또 시작이군. 캐롤은 다 좋은데 한 번 말이 다른 곳으로 새면 한정없이 빠지는 게 문 제란 말이야. 겨우 무도회에 가지 않은 걸로 그렇게 뛰어왔을 리도 없고. 나는 더 이 상 잔소리가 길어지기 전에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만. 설마 그 것 때문에 뛰어온 건 아니겠지?" "아!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깜박했습니다." 알면 됐어. 캐롤은 불량학생을 지도하던 선생님 같은 표정을 재빨리 지우고 말했다. "국왕전하께서 점심 식사를 같이 하자고 전갈을 보내셨습니다." "아바마마께서?" "네, 어서 준비하십시오." 뭣 때문에 부른 거지? 가끔 찾아오던 걸로 봐서 한가한 것 같던데 자기가 올 것이지 누구를 오라 가라야. 나 혼자만 먹는다면 어떻게 먹든 무슨 상관이 있겠냐만 국왕의 앞에서 게걸스럽게 먹을 수도 없지 않은가. 식사 예절에 신경 써야지, 얼굴 표정에 신경 써야지, 국왕이 좋아할 만한 화제를 골라야지. 오늘 점심은 바쁘겠군. "공주님, 지금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응? 아바마마께서 같이 식사하자고 부르신다면? 당연히 그 곳에 가는 거지." "그 옷으로 말입니까?" 캐롤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보았다. 이 옷이 뭐가 어때서? 그 새 더러워졌나?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깨끗하기만 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눈길 로 보자 캐롤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국왕전하를 뵈러 가시는데 그런 초라한 옷을 입고 가시려는 겁니까? 공주님께서 우기 셔서 장식이 하나도 없는 옷을 준비하긴 했지만 국왕전하 앞에까지 입고 가시는 건 안 됩니다. 어서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십시오." 100% 실크로 만들어진 옷이 초라하다고? 그럼 레이스가 줄줄이 달리고 나풀거리기만 하는 옷이 정상이란 말이야? 그런 건 옷감 낭비야. 활동하기도 얼마나 불편한데. 그런 데도 인간 여자들은 그런 걸 잘도 입고 다닌단 말이야. "캐롤." "네. 말씀하십시오." "이 옷 만든 사람이 슬퍼할 거야." "......." 한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해 어벙한 얼굴로 서있던 캐롤은 곧 잔소리를 해댔다. "지금 그런 말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오늘 점심 식사는 공주님 뿐만 아니라 다른 공주님과 왕자님, 그리고 왕비 전하까지 참석하신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초라한 입 을 입고 가시면 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으실 겁니다. 어서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십시오 ." 뭐? 다른 사람도 온단 말이야? 게다가 마리엔 공주의 최대 라이벌인 오펠리우스 왕 비가지 온단 말이지. 그렇다면 별 수 없지. 시녀들의 도움으로 재빨리 화려함의 극치인 드레스로 갈아입고 간단한 치장을 한 후 가끔 왕족들이 함께 모여 식사하는 식당으로 향했다. 말은 많니 들었지만 실제로 만나 기는 이번이 처음이군. 어떤 사람들일까? ------------------------------------------------------------------------------- 드디어 마리엔의 천적인 왕비와 만나게 됩니다, 이로써 앞으로 마리엔의 평화로운 왕궁 생활이 조금은 변할 듯 합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많이 봐주세요. 시종의 안내를 받아 식당으로 들어선 나는 식당의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있는 힘껏 달려도 몇 분은 족히 걸릴 것 같이 어마어마하게 넓은 공간이 몇 명 되지도 않는 왕족들을 위한 식당이라니. 더군다나 날마다 여기서 먹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 게 크게 지어놓은 거람. 역시 인간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종족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사랑하면서도 배신하는 자가 있다. 자신의 재산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내놓는 자가 있는가 하면 돈을 위해 서슴치 않고 다른 사람을 짓밟는 사람도 있다. 이 것만이라면 '인간이라고 다 똑같겠냐? 가끔 이상한 인간도 있는가보다' 라고 넘어가겠지만 정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대부분 의 인간이 선함과 악함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아직 어렸던 나는(지금도 어리지만) 아빠에게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그럼 인간이란 영혼을 두 개나 가지고 있는 거야? 와! 신가하다! 아빠, 나 그거 가지 고 싶어. 가져다 줘." 8대 마왕 중에서도 냉혹하기로 유명한 아빠지만 나에게만은 언제나 다정한 존재다. 솔 직히 말해 다정함이 지나쳐 푼수끼마저 보이지만 아무튼, 내가 기억하기로 당시에 아 빠는 이렇게 말했었던 것 같다. "인간은 영혼이 두 개가 아니라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거란다. " "그럼 인간은 다중 인격체야? 재미있겠다." 아직 어린 아이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지만 마침 여러 개의 영혼을 같은 육체에 넣 어 만드는 키메라에 관심이 있었던 터라 그렇게 말했다. 인위적으로 만든 것도 아니고 태어나면서부터 영혼이 여러 개라니 얼마나 신기한가. 얼마지나지 않아 착각이란 것 을 알았지만. "그게 아니라 하나의 영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떤 때는 바보같이 선하면서 때로는 우리보다 더 잔인해지는 종족이란다. 흠, 이해가 안가는 모양이구나. 그럼 그냥 변덕 이 심한 존재라고 알아두거라. 그리고 유나(나의 애칭)는 아직 어려서 인간은 못 가지 고 놀아요. 약한 존재라 유나가 힘 조절을 잘못하면 죽어버린단다. 인간은 나중에 커 서 계약을 할 때 보고, 대신 아빠가 더 좋은 걸 선물로 줄게." 그래서 받은 게 다크 엘프였다. 가야라는 이름의 남자 엘프였는데 지금쯤 거의 뛰쳐나 오다시피 한 나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을 것이다. 가야는 침착한 성격 때문에 몇 백년 간 내 보호자 겸 친구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내가 일을 저지르면 뒷수습은 모두 가야 몫이었다. 걔중에는 나를 따라다니는 가야를 존경하는 자들도 있다지만 이 이야기는 나중에 시간이 나면 천천히 하기로 하고....... 어라? 어쩌다 이야기가 이렇게 샜지? 아무튼, 단순히 식사만 하기에는 무척 넓은 공간 이었다. 한 쪽 벽에는 벽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유리창이 있어 햇빛이 식당 내부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 창문 좌우로는 금빛의 속이 비쳐다 보이는 커튼이 햇빛을 받아 아름다운 금빛을 뿌리고 있었다. 천장에는 주신인 제르마, 생명의 신 바르셀, 빛 의 신 아드네리, 자애의 여신 세리자드, 정령의 신 가하브의 모습이 정교하게 조각되 어 있었다. 천장에 새겨진 조각을 누가 보느지 모르겠지만 표정 하나하나까지 세세하 게 조각되어 있는 것이 모르긴 몰라도 장인의 손을 거친 것 같았다. 그리고 새하얀 벽에는 예술에는 문외한인 내가 봐도 값 꽤나 나가게 보이는 그림과 장 식품들이 걸려있었다. 그 중에서도 아름다운 풍경을 그린 다른 그림과는 달리 정원에 앉아있는 여인의 그림이 눈에 띄었다. 풍성한 검은 머리는 허리까지 내려와 그녀의 가 녀린 등을 덮었고, 정면을 주시하는 푸른 눈은 그 속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비록 그림이라지만 살짝 미소를 머금은 흑발의 미녀는 쉽게 범접하지 못할 기품과 품 위가 느껴졌다. 단 한 가지 흠이라면 지나치게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그 또한 묘한 매 력을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미녀이긴 했지만 아름답기로 유명한 마족들 틈에서 자라온 내라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아름답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그 그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뭐랄까.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눈물나게 보고 싶은 그런 기분. 갑작스런 기묘한 느낌에 나는 이 자리에 있는 다 른 사람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뭐지? 이 기분? 말로 표현하기는 힘든 기분이었다. 기쁘면서도 슬프고 원망스럽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한, 여러 가지 상반된 기분이 뒤섞여서 뭐라고 찝어서 말할 수 없 었다. 설마 내가 그림만 보고 여자에게 반했다거나 그런 어이없는 일이 생긴 건 아니 겠지?......그, 그럼. 난 남자가 좋아! 난 지극히 정상적이고 건전한 마족이야! "마리엔, 왔느냐?" 국왕의 부름에 혼자만의 생각에서 깨어난 나는 그제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긴 식탁 의 가장 상석에 국왕이 앉아있었고, 그의 오른쪽에 옅은 금발 머리의 미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가 앉아있는 자리나 예리한 나의 직감으로 보건데 바로 그녀가 오펠리우 스 왕비임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금발 머리를 위로 틀어올려 아름답게 세공된 은색핀으로 고정해서 단정하게 다 듬었고, 핀과 한 쌍으로 보이는 은색의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었다. 입고 있는 드레스 는 수수하지만 목 부분이 깊게 파여 천박하지 않으면서도 매혹적이었다. 그림에 정신 이 팔려 미처 알지 못했는데 그녀의 갈색 눈은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따스한 빛의 눈 동자에서 나오는 시선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녀 옆에는 왕비보다 약간 젊어보이는 30대 초반의 여인이 앉아있었다. 곱슬 거리는 붉은 머리가 어깨까지 닿아있고, 머리빛보다 옅은 붉은 눈동자가 무척이나 아 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강한 인상의 왕비에 비해 가녀린 인상의 소유자로, 내게 신경을 집중하는 왕비와는 달리 국왕을 살짝 훔쳐보면서 볼을 붉히고 있었다. 인상착 의로 보아 그녀가 후궁인 아리란드인 모양이다. 그나저나 자기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소녀의 꿈에서 벗어나지 못했군. 두 여인의 옆으로는 내 나이 또래의 아름다운 소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황금을 녹여 뽑아만든 듯한 진한 황금빛 머리가 물결치는, 바람이 세게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 뭇남성들의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소녀와 아리란드를 닮은, 커다란 눈망울이 귀여운 소녀였다. 금발머리가 데미나고 붉은 머리가 플로라겠지. 데미나 공주는 어딘지 모르 게 주눅이 든 모습으로 나를 보고 있었고, 플로라 공주는 자신의 엄마와 마찬가지로 나에게는 관심이 없고 오랜만에 만난 잘 생긴 오빠들에게 더 관심이 많았다. 모녀가 어쩜 저렇게 똑같을까. 그리고 플로라 공주의 시선을 받고 있는 두 명의 잘 생긴 청년들은 국왕의 왼쪽 편에 앉아 있었다. 국왕의 바로 왼쪽 편, 즉 오펠리우스 왕비의 맞은편 자리는 비어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자리부터 왕자들이 앉아있었다. 짧은 금발에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의 라이언 왕자와 검은 장발의 르미엘 왕자가 바로 그들이었다. 라이언 왕자는 페드인 왕국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뛰어난 기사라고 했었지. 딱 보기만 해도 근육이 균형적으로 발달한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저 놈은 왜 아까부 터 살벌하게 노려보고 난리야. 옆에 있는 르미엘 왕자 본을 받아라. 하긴 마치 십 년 만에 만난 연인을 보는 것 같은 시선도 정상은 아니다만 이왕이면 반겨주는 쪽이 좋겠 지. 라이언 왕자가 뛰어난 검술 실력으로 유명하다면 르미엘 왕자는 현자의 탑에 있는 현자에 뒤지지 않는 학식과 지혜로 유명하다. 하지만 난 안 믿는다. 저 나이에 현자 를 뛰어넘어? 말도 안돼. 지가 무슨 천재라도 돼? 의심스러운 눈길로 르미엘 왕자를 보던 나는 재빨리 시선을 돌려버렸다. 바, 방금 저 자식이 나한테 윙크했지? 저거 미친 거 아니야. 마리엔과 오펠리우스 왕비 사이가 나 쁘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왕비의 친아들인 자기가 저래도 되는 거야? 아무 튼 적대감을 역력히 드러내는 라이언 왕자와 반겨주는 르미엘 왕자는 묘한 대조를 이 루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라이언 왕자가 르미엘 왕자에 비해 단순하다는 것이다. 적 의를 그렇게 드러내면 상대방이 경계하게 마련. 경계하는 상대를 이기는 것은 안심하 고 있는 상대의 뒤통수를 때리는 것보다 배는 어렵다. 게다가 원래 항상 웃고 있는 놈 들이 뒤에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법이다. 설령 저 웃음이 연기가 아니라 하더 라도 자기를 싫어하는 마리엔에게 저렇게 웃어줄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르미엘 왕자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상대방에 대한 파악을 끝낸 나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 미소는 내가 가장 잘 사용하는 표정 중 하나다. 내게 호감을 가진 상대에게는 호감을 최대한 끌어내고, 적의를 가진 상대에게는 잔뜩 긴장하고 있던 마음을 맥 풀리게 만들어 왠지 자신이 손 해본 듯한 느낌을 가지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역시나 왕비 일당은 황당하다는 표정이 었고, 국왕과 르미엘은 예뻐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국왕은 이해가 가지만 저 자식(르 미엘)은 아까부터 왜 저래? 다른 때였으면 한 방 날려주는 건데. "제가 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우리들도 방금 도착했단다. 그렇지 않소?" "네, 전하. 마리엔 염려말고 어서 앉으렴." 국왕의 시선을 받은 오펠리우스 왕비는 우아한 미소를 지으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부 드러운 표정과 다정한 말투 때문에 나를 무척이나 사랑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그 표정이 상당히 어설프다고 생각했다. 거기선 환하게 웃는 것보다는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짓는 게 더 효과적이야. 눈웃음도 약간 섞고 손동작도 약간 섞어주면 더 좋 지. 무엇보다 살짝 올라간 그 눈썹 때문에 실패야. 표정 연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정 말로 내가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에게 암시를 거는 거야. 그럼 진심에서 우 러나오는 듯한 표정이 나오거든. 인간치고는 잘하지만 아직 멀었어. 내가 표정연기의 진수를 보여주지. 여기는 마계다. 그리고 저 여자는 우리 엄마다. 눈 앞의 여인과 지금쯤 마계에서 놀고 있을 엄마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그리고 나는 아까의 환한 미소가 아닌 약간은 응석어린 미소를 지 었다. "네에. 감사합니다, 어마마마." 식당에는 한순간 정적이 흘렀다. 오펠리우스 왕비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 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나와 왕비를 번갈아 보았다. 시종들은 너무 놀라 나르던 음식 을 떨어뜨릴 뻔했지만 지금은 누구도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쓰지 않았다. 몇몇은 자기 가 본 장면이 믿을 수 없는지 눈을 비비고 있었다. 상당히 충격이었나 보군. 하지만 상대를 속이려면 이정도는 해야겠지. 어마마마라는 말은 얼마든지 써줄 수 있어. 그러나 오펠리우스 왕비는 금새 정신을 수습하고 어머니다운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제법이야. 하지만 날 이기려면 아직 멀었어. 시종의 안내를 받아 국왕의 바로 왼쪽 자리에 앉게 될 때까지도 나와 왕비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훗, 고민하고 있군.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 고민하고 있어. 왕비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 는지 알아보기 위해 내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래봤자 소용없지. 내 생각을 읽을 수 있 을 리 없지. "허허허, 왕비와 마리엔 사이가 정말 좋아졌구려." 국왕은 나와 왕비가 서로의 생각을 읽기 위해 탐색전을 벌리고 있다는 것도 모른체 즐 거워했다. 바보. 하긴 모르는 게 낫겠지. 아리란드와 플로라 공주는 왕실의 걱정거리 였던 나와 오펠리우스 왕비의 불화가 사라지자 기쁜 표정이었다. 데미나 공주와 라이 언 왕자는 돌변한 자신의 어머니와 내 모습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고........르미 엘 왕자는 좀 전보다 더욱 진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보고 있었다. 역시 르메엘 왕자 는 상대를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자리에 앉자 시종들이 갖가지 음식들을 날라왔다. 그 것들은 왕비와 신경전으로 한창 바쁜 내가 시선을 돌리게 만들만큼 훌륭한 것들이었다. 오오! 오랜만에 왕족들이 같이 먹는다고 신경 좀 썼나본데. 내 궁에 돌아가면 주방장한테 나도 이런 음식 만들 어 달라고 할까?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은 종류만 수십 가지가 넘었고, 내가 처음 보는 음식들도 많았다 . 수 십 개의 음식은 차마 손대기가 아까울 정도로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나야 음식 이란 맛만 있으면 재료나 완성된 모양이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모든 게 용서 된다는 주의지만(예를 들어 요리의 재료가 슬라임이라 할지라도 몸에 해가 없고 맛만 있다면 먹어줄 수 있다) 이왕이면 보기에 좋은 게 좋겠지. 그런 의미에서 보기도 좋을 뿐더러 먹음직한 빛깔로 저마다 '날 먹어주세요' 라고 호소하는 저 음식들은 100점 만 점에서 110점이었다. 10점은 뭐냐고? 가산점이다. 사람이 마음을 넓게 쓰면서 살아야 지. 게다가 아까부터 고귀하신 이 몸의 코를 간질이는 음식들의 냄새 때문에 입 안에는 벌 써 군침이 돌고 있었다. 꼴깍. 뭐부터 먼저 먹어야 할지 모르겠네. 이거 남으면 싸갈 까? 음식을 남기면 그 건 죄라구! 죄! 평민들 중에는 굶어죽는 사람도 있다고 하던데 음식을 남기면 안되지. 절대 안되고 말고. 이런 훌륭한 식사에 초대해준 국왕에게 포옹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조금 전 에 '누구를 오라 가라야' 라고 투덜대던 일은 이미 내 머리 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 아버지, 감사하나이다. 국왕에서 아버지로 호칭이 바뀌었다. 소녀가 비록 친아버지 는 아니지만 당신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거 아시지요? 제가 절대로 음식에 혹해서 이러 는 건 아니랍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거랍니다. 그런데 아버지, 이왕이면 저 여자는 빼고 부르지 그러셨습니까? 당신은 당신 옆에 앉 아서 웃고있는 여인이 아까부터 저를 노려보면서, 저밖에 눈치챈 자는 없지만 아무튼, 얌전하고 착한 제 성질을 건드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시는 겁니까? 여기서 오펠리우스 왕비만 사라져준다면 최고의 식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저 여자만 빼면 나머진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겠다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여자 앞에서 맘놓고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쭈구리. 이젠 아예 입이랑 눈이 따로따로 노는구만.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노려보고 있어. 하지만 진정한 고수는 노려보지 않 으면서도 상대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거지. 이렇게 말이야. 나는 표정 연기 중에서도 고난이도에 속하는 '웃음 속에 감춰진 가시' 라는 기술명을 가진 표정을 지었다. 성공하긴 했지만 이건 아직 어렵단 말이야.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상대가 반드시 보통 이상의 눈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껏 어렵게 성공시켰는데 상대가 둔해 빠져서 눈치를 못 챈다면 이 표정을 짓기 위해 고 생한 내 얼굴 근육들이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그런 면에서 왕비는 그 상대로 전혀 손 색이 없었다. 대부분은 몇 초 지난 다음에 눈치채는데 바로 눈치채는걸. 하긴 그래야 내가 보람이 있지. 오펠리우스 왕비는 아직 이런 고난이도의 기술까지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지라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다만 입술을 꽉 깨물고 있을 뿐이었다. 아프게 입술 은 왜 깨물고 난리야? 이 걸로 1라운드는 이 몸의 승리군. 오홋홋호~!!! 조용히 이루 어진 나와 왕비의 첫 신경전은 나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국왕이 먼저 식사를 시작하자 우리들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생각 같아서는 이 것 저 것 먹어보고 싶었지만 왕비의 시선이 내게서 떠날 줄을 몰랐기에 이 생각은 생각만 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얌전히 먹는 내 모습을 본다면 말라게니 여사가 눈 물을 흘리며 기뻐할텐데. 우아하게 먹기 위해서 신경 쓰다보니 당연히 먹는 속도는 느렸다. 게다가 밥 먹는데 무슨 말을 그렇게 많이 하는지. 식사에 초대했으면 밥을 먹게 해달란 말이야! 속으로 '어서 날 먹어주세요' 라고 외치는 음식들을 보며 피눈물을 흘렸지만 표면상으로는 묻 는 말에 대답 잘하는 딸이며 여동생이며 언니였다. "요새 마리엔은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 "아바마마께서 염려해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보다 아바마마께서는 전에 뵈었을 때보다 젊어 보이세요. 무슨 방법을 쓰신 거예요? 갈수록 정정해지시는 것 같 아요." "이런. 그럼 그 전에는 늙어 보였다는 거냐?" 말은 그렇게 하지만 껄껄껄, 웃는 모습이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인간은 나 이를 먹은 사람일수록 젊다는 말에 약하지. 하긴 슬슬 아저씨라는 말에 민감해질 나이 지. 어차피 식사는 물 건너갔고 이 기회에 국왕에게 점수나 왕창 따놓자. 40대 인간 남성들이 좋아할 만한 말을 재빨리 찾아낸 나는 열심히 국왕의 기분을 띄어주었다.'인 간들은 이런 말을 좋아한다' 라는 책에서 보았던 내용들이 정말 딱딱 들어맞았다. 책 에서 본 지식을 직접 몸으로 체험해보는 기분. 좋은데. "아바마마께서 건강하셔야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죠." "저도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아니,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전하 의 몸은 전하 혼자의 몸이 아니라는 걸 잊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마리엔이 다시 건강 해져서 너무 기쁘답니다." 한참 건강 문제로 국왕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오펠리우스 왕비가 끼여들었다. 게다 가 현숙한 왕비이면서 자애로운 어머니다운 발언을 함으로써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주도권도 빼앗아갔다. 역시 너그럽고 우아하신 왕비라는 소문이 나려면 이 정도는 해야겠지. 그런데 말로는 내가 건강해져서 기쁘다면서 눈은 전혀 아닌데? 건강해져서 유감이라고 생각하고 있군. 어쭈, '그 때 확실히 보내버리는 건데' 라고 생각했지? 역시 네 짓이 었군. 마리엔과 계약한 것도 있고 넌 이제 나한테 찍혔어. 앞으로 궁 생활이 좀 고달 플 꺼다. 나와 왕비는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상대방에게 미소 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 마리엔이 기사단을 자주 방문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맞니?" 저 여자가 갑자기 무슨 꿍꿍이지? 기사단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오는 건데? 앗! 혹시 가스톤한테 드레스 입힌 것이 들킨 건가? 경계는 철저히 섰는데. 이건 나와 제 4 기사 단 밖에 모르는 사실인데. 아무리 그래도 제 1공주가 기사에게 여장시켰다는 소문이 나는 건 별로 좋은 게 아닌데.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어떻게 해야 무난히 넘어갈 수 있을까, 머리를 열심히 굴리면서 대답했다. "네, 그런데 그게 왜요?" "그저 그런 소문이 들려서 궁금해서 그렇단다. 그런데 들리는 말로는 최근 들어 무도 회에 참석도 하지 않고 귀족 영애들과 티타임도 가지지 않는다면서. 어떻게 하든 네 자유지만 공주가 다른 일은 하지 않고 기사들만 만난다면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을 거 라고 생각하는데. 공주로서 위엄을 지켜야지. 게다가 만나는 사람들이 제 4 기사단이 라며? 왕궁 기사단 중에도 가장 실력이 떨어지고 무례하기로 소문난 치들 아니니. 하 긴 다른 기사단들은 바빠서 만날 수 없다지만 그래도 그들과 너무 자주 만나는 건 자 제하려무나." 따뜻한 말투와는 달리 말에 가시가 있었다. 그 것도 아주 많이. 기사들의 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왕궁 기사단에 드는 것이다. 가장 실력 있는 자들로만 구성된 왕 궁 기사단은 귀족들의 사병 형식으로 있는 기사들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특히 기사의 나라라고 불리는 페드인 왕국의 왕궁 기사단은 소피린 대륙뿐만 아니라 아드린 대륙 에서도 알아주는 최강의 기사단이다. 하지만 왕궁 기사단이라고 모두 같은 실력은 아니다. 왕궁 기사단은 가장 뛰어난 실력 자들만이 모인 로얄 기사단부터 제 1기사단에서 7기사단까지 있는데, 기사의 실력에 따라 들어갈 기사단이 결정된다. 이 중에서 로얄 기사단은 제 1 기사단 기사를 혼자서 3명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최강의 실력을 가진 기사이면서 세력 있는 귀족들 이 대부분이다. 평민이라도 실력만 있다면 로얄 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지만 하 루 벌어서 먹고 살기도 힘든 평민들이 어렸을 때부터 훈련을 받아온 귀족을 능가하는 실력을 가지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기사들의 선망을 한 몸에 받는 왕궁 기사단 중에서도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기사단을 뽑으라면 단연 제 4 기사단이다. 물론 이들도 보통 기사와 비교하면 강한 자들이지만 비교 대상이 같은 왕궁 기사단이니 어쩌겠는가. 항상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하지 못하 고 있었다. 여기서 이상한 점 하나. 순서대로라면 제 7기사단이 가장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처음에는 제 4 기사단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제 4기사단이 어쩌다 이 모양이 된 것인지를 알려면 우선 그들의 출신 성분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이 하급 귀족의 자제거나 집에서도 내놓은 망나니, 이도 저도 아니면 부 유한 상인의 자제들이었다. 그렇다보니 당연히 주위에서 보는 시선들이 곱지 않았고, 실력보다는 출신을 따지는 현실에 절망한 이들은 연습은 농땡이치고 놀다보니 그 모양 그 꼴이 된 것이다. 게다가 이제 들어온 새내기 기사들은 주위 환경이 이 모양이니 연습할 맛이 나겠는가. 다른 기사들은 죽어라고 연습하는데 놀고 있으니 당연히 뒤쳐질 수밖에. 이런 일이 계 속되다보니 이제는 실력이 가장 떨어지는 기사는 바로 제 4기사단 행이다. 게다가 4 기사단 소속 기사 하나가 몇 년 전에 있었던 무투회에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기사에 게 간신히, 정말 간신히 이긴 사건 이후로 완전히 찬밥 신세였다.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대놓고 말하다니. 나와 친한 사람들인데 그들을 험담하자 기분 이 언짢아졌다. 게다가 자세히 들어보면 나에 대한 욕도 들어있다. 공주로서 위엄도 지키지 않고 뭐하고 다니는 거냐, 끼리끼리 논다더니 다른 기사단도 아니고 제 4기사 단과 어울리느냐, 하긴 다른 기사단이 너를 상대해 줄리 없으니 별 수 없겠지만. 이런 식이다. 저 여자! 정말 맘에 안 들어!!! 당신이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생각이 있어. 오늘은 처 음 보는 거라 적당히 해주려고 했는데 이젠 나도 못 참아. 웃으면서 봐줬더니 눈이 뵈 는 게 없구나. 딸에게 훈계하는 어머니 같은 모습을 연기하고 있는 왕비를 쳐다보았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지금까지 억지로 만든 환한 미소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 는 비웃음이었다. 어느새 눈빛도 차갑게 가라앉았다. 인간 세상에 내려와서 이런 표정 지어보기는 처음이군. 훗, 뭘 그렇게 놀라지? 설마 내가 다소곳이 '죄송합니다' 라고 할 줄 알았나? 방금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처럼 얼어붙었다. 이걸로 국왕에게 딴 점수가 모두 날아간다 하더라도 상관없어. 어차피 국왕에게 점수 따는 건 다른 때 해도 되니까. 시간은 아주 많거든.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무례하다고 하셨습니까? 실례지만 왕비전하께서는 그들을 만나 본 적이 있습니까? 설마 소문만 믿고 당당한 왕궁 기사단의 일원인 그들을 그렇게 말 씀하신 겁니까? 제가 만나본 그들은 호탕하긴 했지만 제게 무례를 범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실력이 떨어진다고 하셨습니까?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실 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실력이란 훈련을 하면 얼마든지 키울 수 있는 겁니다. 그런 걸로 그들과 만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건 옳지 않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야! 이 x 같은 것아! 니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어?! 너 오크 한 마리 라도 죽일 수 있어? 못하지? 적어도 걔네가 너보단 백배는 더 나아. 할 줄 아는 거라 고는 입만 나불거리는 것밖에 없으면서 왜 까불고 난리야! 너 그러다 한 대 맞는 수가 있다! 조심해!' 라고 소리쳐주고 싶었지만 지켜보는 눈들이 있으니 그건 참고. 그러 나 언젠가는 말해주리라. 방실방실 웃던 내가 돌변해서 싸늘한 눈초리로 말하자 분위기는 이제 얼어붙다 못해 살벌해졌다. 오펠리우스 왕비는 설마 내가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는지 처음에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어렵게 다시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미안하구나. 내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구나." 입술이 파들파들 떨리는 게 어지간히 분한 모양이군. 하긴 내 말이 백 번 맞는 말이니 별 수 없이 사과를 해야겠지. 하지만 표정 관리 좀 하지 그래. 그 얼굴은 분해 죽겠 다는 표정이 다 드러나거든. 내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여전히 냉랭한 얼굴로 왕비를 쳐다보자 다른 사람들이 어 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화기애애한 모녀간의 모습을 보여주다 이 렇게 됐으니 당연한가. 훗, 라이언과 데이나라고 했던가. 웬만하면 입 좀 다물지 그래 . 아무리 놀라워도 그렇지 그런 얼굴들은 왕자와 공주가 짓기에는 무리가 있는데 말이 야.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계속 되면 나도 손해겠지. 여기서 왕비가 울어버리면 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고 소문날 테니까.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좋겠어. "아니에요. 저도 말이 좀 심했어요. 어마마마께서는 저를 생각해주셔서 그런 말을 한 건데. 죄송해요." 활짝 웃으면서 왕비에게 사과하자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그렇게 걱정했었나? 그것도 많이 순화해서 말한 거였는데. 오펠리우스 왕비도 오히려 자신이 잘못했다면서 다시 한번 사과했다. 잠시동안 서로의 잘못이라고 우기는 우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이걸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와 왕비의 미소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는 사실을. 이걸로 오펠리우스 왕비와는 완전히 적이 된 건가. 나야 상관없지만. 쨍그랑~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비취색의 도자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미 산산이 부서져 원 래의 모양은 알 수 없지만 은은한 광택이 도는 것이 고급스러운 물건이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것이 무엇이든지 비취색 물건은 소피린 대륙에서는 구하기 힘 든 물건이었다. 녹색과는 미묘하게 다른 이 비취색은 그 은은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색상으로 물건의 수 준을 한 단계 높이 끌어올린다. 하지만 어떻게 이 색을 만드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 았다. 이 색의 비밀은 아드린 대륙의 류온에서도 몇몇 장인들만 알고 있었고, 그들은 제자들에게만 이 독특한 색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전수했다. 특히 이들의 손에서 만들 어진 비취색 도자기는 귀족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류온의 사람들은 이 도자기를 청자(靑瓷)라고 부르고 있지만, 발음하기가 힘든 관계로 다른 나라 사람들은 청자를 블루 파터리(Blue Pottery) 또는 세라돈 퍼서린(Celadon Porcelain)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푸른 도자기라는 뜻의 블루 파터 리(Blue Pottery)라는 말을 사용한다. 어째서 비취색의 도자기를 청자라고 표현하는지 알 수 없지만 류온의 사람들도 대대로 그렇게 불러왔다고만 말하지 다른 말은 없는 걸로 보아 별다른 의미는 없는 모양이었다. 한 개의 블루 파터리 가격이 평민 네 명을 한 가구로 잡아서 대략 100가구가 한 달은 놀고 먹을 수 있는 고가품이지만, 이도 없어서 못 팔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도자기를 보는 안목이 있는 사람이 방금 깨진 도자기를 살펴본다면 이 도자기가 블루 파터리 중에서도 최상품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고이고이 모셔놓고 매일 닦아서 광을 내도 모자랄 판에 돈이 있어도 없어서 못 사는 이 도자기를 내던져서 깨버린 사람은 넓은 방 한가운데에서 씩씩대고 있었다. 블루 파 터리 수집가들이 봤다면 예술품을 이렇게 무식하게 다룰 수 있냐고 항의라도 했겠지만 지금 방에는 도자기를 던져버린 여인 혼자만 서 있었다. 설령 다른 사람이 있더라도 그녀의 신분으로 보아 아무 말도 못 하고 넘어갈 것 같지만. 그 여인은 과격하게 도자기를 던져버릴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어깨 너머로 내려온 그녀의 옆은 금발머리는 여인의 움직임에 따라 출렁이고 있었고, 다정해 보이는 갈색 눈이 긴 속눈썹 아래 자리하고 있었다. 쭉 뻗은 콧날과 앙 다물어진 붉은 입술은 자칫 여려보일 수도 있는 그녀의 인상을 강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전 대륙에서 보기 힘 든 미색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미녀였다. 그러나 현재 그녀는 분노에 몸을 떨면서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눈 앞에 오늘 자신에게 망신을 준 검은머리의 아름다운 소녀가 있는 것처럼. "마,리,엔~!" 여인은 한 단어 한 단어 씹어 내뱉듯이 말했다. 그녀는 바로 조금 전까지 마리엔과 신 경전을 벌인 오펠리우스 왕비였다. 오펠리우스 왕비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아침까지만 해도 그녀의 기분은 매우 좋았다. 오랜만에 국왕 전하와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왕족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에서 전보다 더욱 훌륭해진 라이언 과 르미엘을 전하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언제나 마리엔의 그림자에 가려 국왕의 관심 을 얻지 못한 데미나도 예전보다 더욱 아름다워지고 우아해졌다. 그에 반해 마리엔은 어떠한가? 들리는 소문으로는 예전에는 그렇게 즐겨가던 무도회도 가지 않고 귀족 영애들과 만나지도 않는다고 한다. 틈만 나면 기사들의 훈련장으로 놀러가고, 가끔은 궁으로 기사들을 끌어들인다니 왕비로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나는 기사들도 하필이면 왕궁 기사단 중에서도 골칫거리로 소문난 제 4기사단이라 니. 이번 기회에 마리엔에게 향한 전하의 관심을 데미나에게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철부지 같은 마리엔은 자신을 보면 스스로 화를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난리를 칠 것 이다. 예전에도 자신이 하급귀족의 딸이라는 이유로 천한 신분이 감히 왕비 자리에 앉 아 있다며 얼마나 시끄럽게 굴었는가. 자신의 어머니가 앉았던 자리에 다른 여인이 앉 아 있으니 심통이 날만도 했다. 게다가 이번엔 독 사건도 있었으니 왕비가 범인이라고 더욱 시끄럽게 굴 것이다. 아직까지 큰 소동이 없었던 게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마리엔의 오만한 성격을 떠올리 며 오펠리우스 왕비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마리엔이 날뛰면 날뛸수록 마리엔은 고 립되어가고, 자신의 입지는 강화된다. 성격이 고약한 공주에게 시달리면서도 사랑으로 감싸안으려는 자애로운 왕비로 말이다. 처음에는 어머니를 일찍 여윈 마리엔을 동정 하는 사람도 몇 명 있었지만 오만하고 건방진 그녀였기에 그런 사람들도 사라져버렸다 . 이제 마리엔에게 남은 건 아버지인 국왕의 사랑과 주위 사람들의 경멸뿐이었다. 라이언이나 르미엘이 차기 국왕으로 결정되기만 하면 모든 게 끝이 난다. 그럼 국왕의 관심에서 벗어났던 데미나도 제 1공주가 될 것이다. 하긴 국왕이 모든 관심을 마리엔 에게 쏟았기에 귀족들이 데미나를 동정했고, 오만한 마리엔보다 수줍음이 많지만 상냥 한 데미나를 마음 속의 레이디로 삼은 것이겠지. 그 후에는 마리엔을 지켜줄 국왕도 없을 것이고, 그럼 마리엔을 어떻게 하든 누구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하급귀족의 딸이라고는 하나 현재 그녀는 이 나라의 왕비였다. 그런 그녀를 국 왕 앞에서 모욕한다면 아무리 국왕이라도 마리엔을 감싸줄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잘 하면 이번 기회에 국왕의 마리엔에 대한 사랑도 식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오펠리우스 왕비는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식당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정면에 걸려있는 전 왕비인 이리아 왕비의 초상화였다. 죽기 1년 전에 그린 것이라 안색이 창백했지만 아름다운 모습이 었다. 만약 이리아 왕비가 몸이 약해 일찍 죽지만 않았다면 자신은 평생 국왕의 관심 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국왕은 이리아 왕비가 죽은 후에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그녀 의 초상화를 곳곳에 걸어놓았고, 그녀에 대한 사랑을 그녀가 낳은 유일한 자식인 마리 엔에게 쏟았다. 가끔 이 곳에서 식사를 할 때마다 무심히 지나치던 이리아 왕비의 초상화가 오늘따라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 그림 속의 이리아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느낌이었다. 뭐지? 이 꺼림칙한 기분은? 그녀가 갑작스레 드는 이상한 기분에 불안해하고 있을 때 마리엔의 도착을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당으로 들어서는 마리엔은 그림 속의 이리아 왕비와 놀랄 정도로 닮았다. 푸른 빛이 감도는 검은 머리와 속내를 알 수 없는 짙은 눈동자, 핏빛처럼 붉은 입술, 심지어 사 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한 눈매까지 똑같았다. 분명히 마리엔이 이리아 왕비를 닮 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오늘처럼 이리아 왕비와 겹쳐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 오만 과 경멸로 가득 차있던 두 눈에 알 수 없는 당당함이 서려있었다. 그리고 마리엔은 웃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오펠리우스 왕비를 향해 웃었다. 비웃음이 아닌 호감이 담긴 미소였다. 왕비는 뭐가 잘못돼가고 있음을 느꼈다. 마리엔은 여기 서 웃어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 화를 내고 모욕을 주어야 하는데. 그리고 마리엔에게 등을 돌리고 자신의 편을 들어주어야 할 사람들이 마리엔의 미소에 넋이 나가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분명히 마리엔이 자신을 보고 ' 어,마,마,마' 라고 부른 것이다. 그 단 한마디로 마리엔은 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그 후에도 마리엔은 유창한 화술로 국왕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관심 을 한 몸에 받았다. 예전처럼 사리판단을 하지 못하고 자신을 제어할 줄도 모르는 마리엔이 아니었다. 분 명히 웃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눈으로 이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내려다보면 서 반응을 시험해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리엔의 변화는 그야말로 파격적이었다, 마리엔이 성격이 변했다는 소문을 들을 적은 있었지만 설마 정말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아무리 마리엔의 얼굴을 살 펴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능숙하게 넘어가고 방긋 웃 고 있었다. 그리고 끝까지 지워지지 않을 것 같던 미소가 드디어 사라졌다. 예전 같으면 자신이 먼저 나서서 험담을 했을텐데 제 4기사단에 대한 험담이 나오자 언제 웃었냐는 듯 싸 늘하게 변했다. 마리엔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형의 기운을 정면으로 받은 왕비 는 숨쉬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마치 사냥감을 노려보는 맹수의 눈처럼 차갑게 번뜩이 던 눈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위압감과 공포 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오펠리우스 왕비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한 순간이나마 그 어린 것에게 압도당했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어떻게 그런 꼬마 계집이 기사도 내뿜기 힘 든 예리한 기운을 내뿜었단 말인가. 우연이겠지. 그런 주제에 금새 웃으면서 사과하는 모습이라니. 쨍그랑. 결국 분을 참지 못한 왕비는 다시 탁자 위에 있던 꽃병을 내던졌다. 꽃병은 조금 전 도자기와 같은 신세가 돼서 방바닥을 나뒹굴었다. "왕비전하, 무슨 일이옵니까?!" 오펠리우스 왕비가 국왕과 함께 식사를 하고 돌아온 후 언짢아진 얼굴로 지금부터 방 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만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계속 들리자 시녀들은 방문을 열 었다. 그리고 그녀들이 본 장면은 여기저기에 꽃병이 깨져서 나뒹굴고, 그 가운데에 서 있는 자신들의 주인이 무서운 눈초리로 허공을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뭐야!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 나가! 당장 나가!" 언제나 아랫사람들에게 따뜻했던 왕비가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자 시녀들은 도망치듯 이 황급히 방을 뛰쳐나왔다. 자신들의 주인의 저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녀들이 도대 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된 것은 다음날 식당 안에 있던 시종들이 그 날 있었던 일 을 소문내고 다닌 다음이었다. 하지만 왜 마리엔 공주님이 오펠리우스 왕비님을 어마 마마라고 부르고 잘 따랐던 일이 그렇게 화를 낼 만한 일인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9-첫 부하들 하늘은 도화지 위에 파란 물감을 칠해놓은 것처럼 파랗고, 몇 점의 새하얀 뭉게구름 이 떠다녔다. 하늘 위에 떠 있는 태양은 지상을 환한 햇빛으로 내리쬐고 있었고, 간간 이 시원한 바람이 불 때마다 짙은 녹색의 나뭇잎들이 사라락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 었다. 한여름이지만 해안가에 위치한 페드인 왕국의 여름 더위는 못 참을 정도로 덥지 않았 다. 대륙 한가운데 위치한 것도 모자라 소피린 대륙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베두 산맥 이 서쪽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버려 무덥기 그지없는 토르에 비하면 축복 받 은 환경이 아닐 수 없었다. 하긴 토르는 워낙 마법이 발달돼 있다고 하니 더위쯤 컨드 롤 웨더(Control Weather) 한 방으로 해결해버릴지도 모른다. 9서클 마법을 파이어볼 처럼 쉽게 쉽게 생각하는 나였다. 그러나 현재 소피린 대륙과 아드린 대륙을 모두 합 쳐 8서클 마도사만 다섯 명 있지 9서클 마법사는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 린 나는 잠시 마리엔이 토르가 아닌 페드인 왕국의 공주였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아무튼 오늘은 소풍 나가기 딱 좋은 날씨였다. 그러나 좋은 날씨와는 별도로 내 기분 은 그렇게 썩 좋지 못했다. 어제 오펠리우스 왕비와 기념할 만한 첫 대면을 한 후, 저 조한 내 기분은 좋아질 줄 몰랐다.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오펠 리우스 왕비에게 보여준 것까지는 좋았다. 굳이 어제 있었던 첫 대결의 승패를 따지자 면 내 판정승 일것이라는 것도 좋았다. 그럼 뭐가 문제냐구? 당신은 요망한 계집이 당신 앞에서 당신 욕을 해대면 기분 좋겠 는가? 그 것도 살살 웃으면서, 다른 사람은 알아듣지도 못할 말만 골라서 하면 당연히 열 받지. 아무리 내가 말빨에서 우세했다고는 하나 면상에서 자기 험담을 듣는 것은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다. 머리가 너무 좋아도 문제라니까. 단순한 사람이었다면 어제 왕비의 말 속에 감춰진 속 내를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이 몸의 머리는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바로 바로 해석 해냈다. 설령 그 뜻을 알아채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 욕을 하는 건 귀신같이 알아 맞출 자신이 있다. 천재가 일찍 죽는 이유는 이런 정신적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일까? 틀 림없이 그럴꺼야. 헉, 그럼 나도 일찍 죽어야 되는 건가? 말도 안돼! 내가 일찍 죽는 건 국가적, 아니 대륙적 손실이라구! 젊은 나이에 죽는 건 너무 억울해!, 라고 외치던 나는 내가 마족이란 것을 떠올리고서야 진정할 수 있었다. "흠...흠...크흠..." 방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혼자 난리친 것이 무안해서 헛기침을 해댔다. 잠시 엉뚱한 곳 으로 샜던 나는 다시 어제 식사시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자기가 왕비면 다야! 다 라고 말하면 할 말이 없지만 아무튼 마음에 안 들어. 어제 하는 꼴을 보니 성격도 썩 좋지는 않을 것 같던데 말이야. 이건 짐작이라기보다는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어제 보는 눈만 없었다면 왕비의 머리채를 잡고 '야!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하면 되는 줄 알아! 그래. 오늘 너 죽고 나 살자!' 라고 외쳤을 테지만 아쉽게도 그럴 상 황은 아니었다. 뭐 하려면야 못 할 것도 없었지만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는 내가 손 해였다. 예전에 마리엔이 워낙 밉보여놔서 처음에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잘 먹히지 않았다. 과거 마리엔의 이미지를 벗어 던지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했던가. 하루종일 웃으면 서 다니다보니 밤에는 얼굴이 펴지지 않은 적도 있었고, 무리한 운동으로 얼굴 근육들 이 경련을 일으킨 적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익숙해져서 하루 내내 웃고 다녀 도 아무렇지 않은 걸로 봐서 인간들은 역시 적응을 빨리 한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비록 내가 몸 속에 대신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몸은 인간이다. 그러므로 내가 낼 수 능력도 이 몸의 능력에 비례해서 변한다. 이런 나의 노력으로 나에 대한 이미지는 차츰차츰 쇄신되어갔고, 어제의 사건으로 과 거 마리엔이 쌓아올린 악녀로서의 위명을 어느 정도 희석시킬 수 있었다. 이미 어제 일은 식당에 있었던 시종들의 입을 통해 궁궐 전체로 퍼졌을 것이다. 원해 소문이란 윗사람보다는 아랫 사람들의 입을 통해 더 빨리, 더 넓게 전달되는 법이거든. 그런 통로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면 훨씬 빨리 이미지 쇄신이 이루어지겠지. 그러나 점점 나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오펠리우스 왕비와 정면 대결하기에는 일렀다. 왕비에 대한 주위의 소문은 주로 자애로우시고 사랑이 넘 치는 왕비님이란 내용으로 '언제나 아랫 사람들에게 상냥하시죠', '그 성질 고약한 마 리엔 공주님마저 감싸안으려는 요즘 보기 힘든 고운 마음씨를 가지신 분이죠' 와 같은 칭찬 일색이었고, 뒤에는 빵빵한 세력까지 버티고 있지 않은가. 그에 비해 나는 어떠한가. 내 편이라고 있는 건 아무도 없잖아! 이리아 왕비의 가문이 3대 공작가 중 하나라지만 그럼 뭐해. 이리아 왕비의 아버지이자 나의 외할아버지인 망할 공작은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외할아버지라는 인간이 손녀가 독 마시고 쓰러졌다는데 병문안은 커녕 쾌유 선물도 안 보내냐구! 그런 인간이 날 도와줄 리 없 고. 혈육인 외할아버지라는 작자도 나 몰라라 하는 판국에 어느 얼빠진 인간이 내 편 이 되고 싶겠어? 나라도 싫겠다. 이렇게 내 옆에 아무도 없는 상황에 무작정 왕비 일 당과 정면 대결을 벌인다면 나만 깨지기 밖에 더 하겠는가. 난 그런 짓을 서슴없이 할 만큼 바보가 아니다. 뒷공작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그나저나 마리엔(진짜 마리엔) 고 것은 부하도 하나도 안 만들고 뭘 한 거야?! 막강한 빽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명색이 공주면서 폼으로라도 부하 하나가 없냐! 떼거지로 우글거리는 왕비 일당과 잘난 나밖에 없는 마리엔 공주파. 조금, 아주 조금 내가 불 리하다. 아니야! 이 내가 그 정도 인간을 감당 못할까봐? 이내 고개를 내저은 나는 확 신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부하들이 줄줄이 생길 꺼야. 그럼 그 까짓 왕비 일당은 내 상대가 못돼." ......그러나 지금은 없다. 나중에 부하들이 줄을 서든, 발에 채이도록 많아지든, 너 무 많아서 정리 해고를 하든 그건 어디까지나 미래의 일이고 현재는 부하 0명인 상태 였다. 우~ 부하 하나 없는 공주라니. 듣기로는 데미나 공주조차 그녀를 레이디로 받드 는 기사들이 꽤 된다던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렇지 않아도 성질 급하기로 유명한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 기 시작했다. 쥐 한 마리 지나가도 "꺄아아악~!" 이라는 상당히 닭살스러운 비명을 지 르며 당장 기절이라도 할 것 같은 데미나도 있는데 내가 없다니. 이건 뭔가 잘못된 거 라구. 힘을 제일로 추구하는 마족인 내가 위험할 때마다 기사들 뒤에 숨어 기사를 응 원하는 연약한 레이디가 되고자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기사를 지켜주는 레이디 라면 또 모를까. 그러나 써먹을 데 없는 기사라도 있는 게 없는 것보다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예로부 터 이런 말이 전해져 온다. 양피지라도 맞들면 낫다. 머릿수만 많으면 장땡이라는 심 오한 뜻을 가진 말이다. 일단 왕비 일당의 절반 정도 머릿수는 맞춰야 뭘 해도 하겠지 . 그리고 무엇보다 폼 나지 않은가. 잠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모양새를 살펴보았다. 방 에는 불까지 꺼놓고 음침하게 책상 앞에 앉아서 중얼거리는 모습이라니. 혼자서 스트 레스 받으면서 뭐 하는 짓이지? 이렇게 앉아서 고민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닌데 말이야 . 게다가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구. 나는 계속 방 안에서 혼자 궁상맞게 고민하는 것도 보기 좋지 않고 기분도 전환시킬 겸 기사들의 훈련장으로 찾아갔다. 아마 지금이면 제 4기사단이 훈련할 시간이지. 열 심히 하고 있으려나? 또 놀고 있는 건 아냐? 하긴 요즘에는 훈련을 열심히 하긴 하다 만. 그들은 생각하자 기분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제 4기사단의 사람들을 생각하면 항 상 즐거워지고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된다.......그렇게 잘 속아넘어가는 놈들은 찾기 힘들지! 캬캬캬! 어떻게 내가 장난칠 걸 뻔히 알면서 속는지 이해가 안 간단 말 이야. 단순한 건지 멍청한 건지. 어느 쪽이든 나는 좋지만. 반응들도 결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아주 기특한 인간들이지. 특히나 오늘은 그 장난이 조,금, 과격할 것 같다. 오늘은 장난 위에 덤으로 스트레스 해소라는 목적이 붙을테니까. 내 오늘을 영원히 잊지 못하게 만들어주지, 흐흐흐. 정 말이지 건전하고 정상적인 마족다운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남의 불행을 보면서 스트 레스를 푼다. 정말 좋은 방법이다. 그들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지. 기대하시라. '가 스톤 여장 사건'을 능가하는 사건이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거든. 훈련장에 가까워질수록 절로 새어나오는 음흉한 미소를 제어하기가 힘들었다. 부디 날 원망하지마. 스트레스를 풀지 않으면 나중에 병이 생긴다잖아.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조금 후에 나의 스트레스를 말끔히 없애줄 사랑스러운 인간들이 어느 때와 다름없이 훈련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가 아니었다. 그들은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지 자기들끼리 모여 수군거리고 있었다. 최근에는 훈련을 열심히 하더니 다시 놀기로 작정한 건가? 그러나 조금 가까이 다가가 서 본 그들의 분위기는 놀려고 모인 가벼운 분위기가 아니라 진지하고 엄숙한 분위기 였다. 아니, 이 것들이 안 어울리게 왜 무게를 잡고 난리람. 설마 내가 오늘 하루 거 하게 일 벌일 걸 눈치채고 미리 대비한 건가? 아니야. 그걸 알 리가 없는데. '전원 여 장시키기' 라는 나의 원대한 계획을 이들이 알아낼 방법은 없었을텐데. 그럼 도대체 무슨 일이지? 나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원통한 마음과 어제와 사뭇 다른 그들의 분위기에 바로 다가가지 못하고 있을 때, 제 4기사단 기사들이 나를 발견하고 우루루 몰려들었다. 뭐,뭐야? 그동안 나한테 당한 게 열 받아서 항의라도 할 작정인가? 그게 그렇게 열 받 을 만한 일이었나? 빠른 속도로 내가 그동안 저지른 일을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나는 금새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친근함의 표시인 나의 가벼운 장난은 인간 기준으로는 화낼만한 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 명만 대표로 말하면 되지 우르르 몰려들 건 또 뭔가. 나처럼 연약한(?) 소녀를 협박하겠다는 거야, 뭐야? 덩치는 산만해 가지 고는 소심하기는. "마리엔 공주님, 오셨습니까?" "아, 네에." 기사단장인 보나인이 대표로 나서서 말했다. 평소에는 잔뜩 헝클어져있던 그의 반백머 리가 오늘은 단정히 뒤로 넘어가 있었다. 뭘 바른 건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햇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그의 머리를 봐 무슨 기름의 한 종류를 바른 것 같았다. 그뿐만 아니 라 차라리 내가 빨아주고 말지 계속 입고 다니는 모습은 못 봐주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후줄근하던 옷 대신에 단장이 입는 정식 제복을 입고 있었다. 전직이 용병이 아 니었을까 의심스럽던 평소의 모습에서 깔끔한 중년신사로 변한 보나인의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아저씨가 웬 일이지? 내가 옷 좀 바꿔 입으라고 할 땐 그게 편해서 좋다고 하더니 무슨 바람이 불어 제복까지 빼입은 거지? 그러나 이런 놀라운 변화는 보나인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었다. 보나인 뒤에 서있는 다른 기사들도 모두 은색의 갑옷을 입고 허리에는 검까지 차고 있었다. 다른 기사들이 야 검을 차고 다니는 게 기본이지만 이들은 '어떤 간 큰 놈이 왕궁에 침입하겠어? 침 입해도 우리말고 다른 기사도 많은데 검은 무슨 검' 이라고 주절대며 마음 내킬 때만 검을 차고 다니던 제 4기사단이었다. 검이야 돼지라도 잡아 잔치를 벌일 생각인가 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갑옷까지 차려 입은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전투용이 아닌 의례용이라 그리 무겁지는 않겠지만 바람 이 잘 통하지 않을텐데 무슨 생각으로 입고 나온 거지? 한여름에 갑옷 입고 쪄죽으려 고 작정했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심경에 무슨 변화라도 생겼는지 강한 의지라고는 놀 때를 제외하고는 보이지 않았던 기사들의 눈빛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가스톤이 붉은 드레스를 입고 우 리 앞에 섰을 때를 제외하고는 이만큼 눈을 빛내는 이들을 본 적이 없었다. 누가 지금 의 이들을 보고 '월급도둑 제 4기사단' 내지는 '망나니 제 4기사단' 이라고 부르겠는 가. "무슨 일이죠? 갑자기 갑옷까지 차려입고?" 정말 궁금하다. 인간들이 하루만에 왜 이렇게 돌변한 건지 정말 궁금하다. 오늘 무슨 특별한 행사가 있나 생각해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만한 일은 없었다. 그럼 역시 단체로 뭘 잘못 먹었나? 상당히 신뢰가 가는 생각이다. 설마 하루만에 한두 명도 아니고, 기사단 전원이 마음을 잡았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이유가 될 리는 없었다 . 내 질문을 받은 보나인은 평소와는 전~혀 달리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저희 기사단에 있어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저의들이 가장 원하던 일이 이루 어질지도 모르는 날입니다." 원하는 거? 내가 알기로 4기사단 기사들이 원하는 건 노는 건데. 그럼 계속 놀 수 있 게 됐다는 말? 일이야 원래 잘 하지도 않았으면 새삼스럽게 무슨......잠깐! 그 말인 즉슨 짤렸다는 말? 그동안 훈련은 농땡이치고 시도 때도 없이 놀던 그들의 모습을 생 각해보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이제까지 없어지지 않고 존속해온 게 신기할 정도였다. 왕궁 기사단이 생긴 것은 페드인 왕국의 건국 초기부터였다. 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 있는 왕궁기사단의 일원인 제 4기사단이 월급도둑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은 지 금으로부터 200년 조금 못된 시기부터였다. 그동안 큰 전쟁도 없었으니 월급만 타먹는 제 4기사단이 존속해온 건 가히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기적도 끝인 가 보군. 그러게 평소에 잘하지, 쯧쯧쯧. 이 걸로 아까운 장난감들을 잃게 되겠군. 이만큼 단순 한 사람들을 찾기도 힘든데. 또 어디서 이만한 사람들을 찾지? 차라리 국왕에게 없애 지만 말라고 부탁해볼까? 월급을 절반으로 줄이면 가능할지도 모르는데. 내가 이제 이 실업자들을 어떻게 구제해야 할까, 라는 생각에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보나인 의 말은 계속되었다. "공주님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저희 기사단은 왕궁 기사단 중에서도 가장 실력이 떨 어지는 집단입니다. 여기 있는 기사들 모두 고,귀,하,신, 출신의 다른 기사들에 비해 미천하기 그지없는 신분입니다. 몰락귀족의 후예도 있고, 평민도 있고, 서출이라는 이 유로 집에서 내놓은 자들도 많습니다. 사람들이 저희를 가리켜 월급도둑이니 구제불능 이라느니 하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다. 이왕 쫓겨나는 거 신세 한탄이라고 하 고 나갈 생각인가? 보나인의 말이 계속됨에 따라 분위기가 점점 숙연해졌고, 나도 덩 달아 진지한 얼굴로 보나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설마 퇴직금을 나에게 달라는 건 아 니겠지? 난 돈 없어! 이런 상황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보기 드물게 진중한 모습 의 그들이 어색하게 느껴져 혼자서 별 생각을 다 해보았지만 그런다고 분위기가 나아 질 리 만무했다. "저희도 처음에는 실력으로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실력만으로 모든 게 해결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부터인가는 저희들부터 이런 대 우는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우습지 않습니까? 어차피 저희에게 기대하는 사 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자조적인 웃음을 짓는 보나인을 지그시 바라보던 나는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 고 보나인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주고, 오른손을 들었다. 갑작스런 나의 행동에 어안이 벙벙해진 보나인을 향해 더욱 진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머리를 한 대 후려갈겼다. 보나인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전혀 방어를 할 수 없었고, 나는 모든 힘을 오른손에 집중시켰기에 그가 아무리 기사라도 다음 순간 머리 를 부여잡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으윽, 왜 이러십니까? 남은 기껏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머리를 치다니요. 비겁 하십니다. 이건 기사도 정신에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어머, 나는 기사가 아닌데." "그,그건 그렇지만.......있는 힘껏 치다니 너무하십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던 보나인은 맞은 자리를 손으로 문지르면서 일어섰다. 얼굴에 '해도 해도 너무하십니다' 라는 불만이 가득 써져있는 모습으로는 아무리 폼을 잡아도 좀 전과 같은 진지한 분위기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미 진지하고 숙연한 분위기는 내가 보나인의 머리를 후려갈길 때부터 깨졌고, 보나인의 뒤편에 서 있던 기사들은 가녀려 보이는 내가 생각도 못한 파괴력을 보이자 놀란 눈으로 나의 오 른손을 주시하고 있었다. "내가 왜 때렸는지 알아?" "모릅니다! 차라리 왜 맞았는지나 알면 이렇게 억울하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 " "보나인경, 지금 나한테 대드는 거예요?" "......아닙니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어디서 감히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어. 고귀하신 이 몸이 친 히 때려줬으면 감격해서 머리통을 다시 내밀지는 못할망정 어디서 감히. 괘씸한지고. 한동안 아바마마께서는 일개 기사가 이 공주에게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 건 아실까, 라고 중얼거리면서 처량한 모습을 하는 나를 보나인 이하 기사들은 참으로 가증스럽다 는 눈으로 보았다. 이제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야겠군. 더 이상은 나의 착한 이미 지가 조금 손상이 갈지도 몰라. "내가 왜 때렸는지 궁금해요? 너무 한심해서 그랬어요. 남들이 무시를 하면 그들이 감 히 무시를 못할 정도로 실력을 키우면 되는 거 아니예요? 그런 건 나중에 두 배로 갚 아주면 돼요. 자꾸 놀기만 하니까 더 나쁘게 보는 거라구요. 그리고 기대하는 사람이 없긴 왜 없어요? 여기 있잖아요." 나는 집게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럼 내가 얼마나 기대를 하고 있는데 . 오늘은 무슨 장난을 쳐서 놀라게 해줄까? 오늘은 무슨 반응을 보여서 날 즐겁게 해 줄까? 이런 거 말이다. 응? 말을 잘못했나? 당당하게 외친 것까지는 좋았는데 내 말에 기사들의 분위기가 다시 변했다. 이번엔 아주 감동을 받은 모습이었다. 그 말이 그렇 게 감격스러운 말이었던가? 기사들은 저마다 감격한 눈으로 나를 보았고, 그들 사이로 감동의 물결이 치는 것이 보였다. 개중에는 눈물까지 글썽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 말을 해주시길 기다렸습니다. 사실은 어제 마리엔 공주님께서 오펠리우스 왕비님 께 저희들을 변호하는 말씀을 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도 시 종을 통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공주님처럼 저희를 허물없이 대해주신 분은 없었습니 다. 저희에게 기대하고 있다는 말을 하신 분도 공주님이 처음입니다. 출신 성분에 상 관없이 저희를 봐주신 것도 공주님이 처음입니다." 보나인은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혀 그럴 의도는 아니었던 나로서는 심히 찔 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한 일이 그들에게는 이렇게 기쁜 일인지 몰랐다. 언제나 무시당하고 외면당했던 그들은 별 생각 없이 말한 내 한마디에 감동을 받은 것이다. 어쩌면 제 4기사단의 기사들은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출신성분과 같은 환경에 얽매 이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봐주는 사람을 말이다. 그런 거라면 나도 출신에 얽매이지 않고 장난을 치고 같이 놀았으니 상관없어, 상관없겠지, 상관없을 거야, 상관없는 거 맞지? 읏, 제발 그런 눈으로 보지마. 내가 아무리 뻔뻔하다지만 그런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 면 나라도 양심의 가책을 받는 건 당연하잖아! 내가 스스로 양심에 찔려 그들의 눈을 피하고자 갖은 몸부림을 치고 있을 때, 보나인의 회색 눈이 나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 보면서 말했다. "저희를 거둬주시겠습니까?" 헉, 설마 이건 소설에서 많이 보던 충성 맹세 비스무레 한 건 아니겠지? 이봐, 보나인 . 당신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당신 자유지만 당신 뒤에 있는 기사들을 한 번 보라구. 모두 동의하는 눈초리잖아.......이게 아닌데! 당신들 모두 미쳤어? 골탕먹이기만 한 내가 어디가 좋다고! "저기.......진심이야?" "물론입니다!!!" 젠장, 그렇게 단체로 입맞춰서 말할 건 없잖아. 이렇게 되면 거절하기도 정말 힘든데. 여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불연듯 의문이 들었다. 잠깐! 내가 왜 거절을 해야하지? 방 금까지만 해도 부하 0명이라고 성질내고 있었잖아. 자기들이 좋다는데 내가 어쩌겠어. 대신 앞으로 잘해주면 되잖아. 그럼 그렇고 말고. 앞으로 잘해주자고 자기 합리화를 한 나는 슬슬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원래 이런 식으로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 절 대 배신을 하지 않거든. 봉 잡았어~!!! 대신 앞으로 잘 해줘야지. "저라도 좋다면요." 내가 그들을 받아들이겠다는 말을 흔쾌히 하자 기사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곧 보나인 이 내 앞에서 한 쪽 무릎을 꿇고 나를 올려다보았고, 다른 기사들도 자신의 단장을 따 라 같은 자세를 취했다. 소설에서 많이 보던 장면이다. "저희들은 앞으로 마리엔 오페나 드간 페드인 공주마마를 저희들의 주인으로 섬길 것 이며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만약 저희들이 이 맹세를 어길 시 제르마님께 내 리시는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기사들의 은빛 갑옷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이 은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아름다 웠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기사들이 이구동성으로 충성을 맹세하는 모습은 더욱 아름 다웠다. 이런 우락부락한 인간들이 아름답게 보이다니. 드디어 나도 콩깍지가 쓰이기 시작한 건가. 훗, 아무렴 어때. 첫 부하란 말이지. 이제는 혼자가 아니니 왕비랑 어느 정도는 해 볼 수 있겠는걸. -------------------------------------------------------------------------------- 드디어 연참 약속을 지켰습니다. 잘 했죠? 칭찬해주세요.... 헉, 그렇다고 칼을 던지면 어떻게 해요. 차라리 돌을 던지세요. 읏, 그렇게 많이 던지시면 안됩니다. 헛소리만 늘어놓는군요. 이제 마리엔도 슬슬 부하들이 생길 겁니다. 곧 새로운 등장인물도 등장할 꺼구요 재미있게 읽으셨으면 좋겠네요. #10-수련의 시작 내가 서있는 곳은 낯선 숲 속이었다. 어딘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무엇인가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숲이었다. 주변에 있는 나무는 고개를 젖혀야만 간신히 꼭대기가 보일 정 도로 컸다. 이런 나무가 한두 그루도 아니고 모든 나무들이 기이할 정도로 큰 나무들 뿐이라 하늘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또 나무들의 무성한 나뭇잎 때문에 숲에 햇빛이 거의 들지 않아 낮임에도 불구하고 밤처럼 어두컴컴했다. 갑자기 낯선 숲 한가운데 나 혼자만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한참동안 내가 왜 여 기에 있나 고민해보았지만 머리만 아파 올뿐이었다. 도대체 어디야? 왜 내가 여기 있 는 거람. 한동안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우거진 나무들뿐이었다. 다시 생각해 잠겼던 나는 계속 고민한다고 뭐가 변하는 것도 아니라 우선은 발길이 가 는 데로 걷기 시작했다. 아무나 만나 이 숲이 어딘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몇 분밖에 안 걸은 것 같기도 하고 몇 시간 동안 걸은 것 같 기로 했다. 나는 문득 이 숲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숲에서는 당연히 들려 야할 생명체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새소리도, 곤충 울음소리도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내가 걸으면서 풀을 밟을 때마다 나는 소리뿐이었다. 마 치 이 숲에서 살아있는 존재라고는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마계에 있는 숲 중에서도 이렇게 음침한 숲은 없었는데. 도대체 여긴 뭐 하는 곳이지? 인간은 마계에 있는 숲이라면 무조건 음침하고 어둡고 생명력이 없는 곳이라는 선입 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생명력이 넘치는 아름다 운 곳이다. 각양각색의 꽃-향기나 가시에 독이 있기 마련이다-에서부터 아름다운 호수-수면 아래 에 뭐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나무-나무의 정인 드로이안을 조심하자. 특히 남자 는! 정기를 모두 빨려 죽을 수도 있다-, 숲 속의 귀여운 생물들-오크, 미노타우루스, 길이가 10m는 넘는 거대뱀, 좀비-까지 보통의 숲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 게다가 마계의 숲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생물도 많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무지개 빛깔의 꽃-향기를 오래 맡으면 영원한 환각에 빠진다-, 길을 알려주는 친절한 괴물 나무-단 싸워서 이겨야 한다. 지면 이 나무의 양분이 된다-,호수에 사는 워닝-정령과 비슷한 존재로 매우 아름답게 생겼다. 친절해서 호숫가에 있는 생물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끌려간 대부분의 생물은 물 속에서는 숨을 못 쉰다는 것 정도-, 귀여운 화엔-갑옷도 꿰뚫어버리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강력한 힘과 마법 저항력을 자랑하는 맹수의 제왕. 상위 마물 중에서도 상당히 급수가 높고 평상시에는 작은 고양이 같은 모습으로 생활한다. 이마에 박힌 보석이 붉을수록 강하다- 등을 들 수 있다. 인간에게는 조금 위험하겠지만 마계에 사는 생물에게는 극히 자연스러운 환 경이었다. 이 숲은 활기찬 마계의 숲과 너무나 달랐다. 엄청 조용하군. 아무 것도 없나? 하다 못 해 흔해빠진 오크 한 마리 안 보이네. 마계의 숲에서 오크란 인간 세상의 숲에서 토끼 와 비슷한 존재였다. 비록 멍청하고 힘도 약하지만 번식력만은 뛰어나 없는 데가 없는 마물이었다. 항상 취익, 거리면서 시끄럽게 굴던 돼지머리도 없으니 영 이상하군. "인간이다! 취익!" 옛 성현들을 존경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드래곤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딱 들어맞 는군.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고요하던 숲이 취익, 거리는 소리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 옆쪽에 있던 덤불이 잠시 흔들리는가 싶더니 오크 10여 마리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저마다 넝마인지 천인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것으로 하반신의 중요부위를 가리고 한 손에 무기를 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기라는 것들은 차마 무기라도 부르기도 민망한 것들이었다. 이가 다 빠져 쇠몽둥이 역할밖에 못하는 칼은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고, 대부분이 녹이 슬다못해 애 초부터 색이 붉은 색이 아니었는지 의심이 갔다. 나 같으면 쪽팔려서 차라리 맨 손으 로 다니겠다. 어디서 저런 골동품들을 주웠는지 궁금하군. 그나마 제일 덩치 큰놈이 들고 있는 도끼가 가장 낫군. 어디까지나 상대성의 원리에서지 절대성의 원리는 아니 었다. 그러나 놈들은 자기 손에 들린 무기가 어떤 모습인지 모르는 듯 살기 등등하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자 인간 취익, 가진 거 다 칙 내놔라! 그 옷도 비쌀 것 같다. 벗어라! 취익." 이마에 앙증맞은 힘줄이 여러 개 돋았다. 감히 오크 주제에 나를 보고 인간이라고 부 른 건 넓고 자애로운 마음으로 이해해 줄 수 있다. 그런데 뭘 벗어?! 아주 죽여달라고 하지 그러냐! 그동안은 얼굴도 못생겼지, 머리도 멍청하지, 힘도 없지, 해서 인생이 불쌍하다고 여겨 건드리지 않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 불쌍한 인생을 여기서 끝내주 마! "뭐시라! 이 돼지머리들이 드디어 미쳤군!" ".......돼...돼지 치익 머리?! 말 다 취익 했나, 인간?" "그래. 다했다. 솔직히 돼지머리 맞잖아. 아, 돼지들이 좀 더 잘생겼나?" 그래도 지들 생긴 거는 알아서 돼지라는 말에 유난히 민감한 오크들이었다. 평소라면 내가 돼지 머리라고 부르든 돼지 족발이라고 부르든 찍소리도 못할 것들이 오늘따라 뭘 잘못 먹었는지 평소와는 반응이 사뭇 달랐다. 쭉 찢어진 작은 눈에서 불똥이 튀었 다. 그래봐야 제대로 보이지도 않지만. 오크들 주위로 분노의 오라가 보이는 성싶었지 만 오크 주제에 뭘 할 수 있겠는가. "크악! 못 취익 참는다! 쳐라! 취익." 유난히 몸집이 큰 오크가 대장이었는지 그 소리에 주위에 있던 오크들이 살기 등등하 게 달려들었다. 대장 오크도 도끼를 높이 쳐들고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완전히 미 쳤나보군. 하급 마물 중에서도 슬라임 다음으로 약한 놈들이 감히 개겨? 다시는 이런 하극상을 저지르지 못하게 해주지. 죽으면 다시 볼 일도 없겠지만 말이야. 나는 오른손을 가볍게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내 손에 죽는 걸 영광으로 알아라. 내 의지에 따라 오른손에서 형성된 검은 색의 광선은 빠른 속도로 오크들을 덮쳐갔다. 맨 앞에 달려오던 오크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은 색의 광선을 피할 생각도 하지 않 고 손에 든 쇠고랑을 광선을 향해 휘둘렀다. 용기야 가상하다만 그 대가는 참혹했다. 파공성을 내며 날아가던 검은 색의 광선은 오크가 휘두른 쇠고랑에 감겨 올라갔다. 그 리고 쇠고랑을 든 오크의 오른손을 따라 올라가면서 오크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워 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오크는 반항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있었고, 오크를 완전 히 감싼 검은 색의 광선은 검은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음도 나지 않았고, 규모도 크지 않았지만 폭발력은 대단해서 오크의 몸은 산산이 부서졌다. 팔다리의 모양도 남기지 못하고 피와 함께 살점들이 여기저기 튀었다. 검은 색의 광선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다시 다른 오크를 향해 날아갔고, 그런 광 선이 수십 개는 됐다. 겨우 10여 마리에 불과했던 오크들은 반항을 해보기도 전에 사 신의 낫에 걸려 죽음을 맞이했다. 그 중 운 좋게도 모양을 유지한 눈알이 내 발 앞까 지 굴러왔다. 피가 몰려 붉게 변한 눈은 공포에 찌들려있었다. 나는 오른쪽 발을 들어 발 앞에 있는 눈동자를 지그시 밟았다. 눈동자가 터지면서 점액질이 신발에 묻었지만 상관하지 않고 발로 여러 번 비볐다. 고개를 들어보니 죽은 고깃덩어리들이 뒹굴고 있었다. 비릿한 혈향을 폐부 속 깊이 들이마시며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이래야만 하는데, 이래야만 하는데 왜 마법이 안 써지는 거야?! 앞으로 내민 오른손 주위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오크들은 내가 자신만만하게 미소를 지으며 팔을 앞으로 내밀자 주춤했다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의아한 눈치 였다. 이럴 리가 없는데. 다신 한번 시도해보았지만 역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 다. 차근차근 원리를 생각하면서 마법을 시전해도, 직접 마법 주문도 외워봐도 여전했 다. 어떻게 된 거야? 왜 마법이 안 써지는 거야! 마법이 써지지 않는 경우는 처음이라 당 황하는 나와는 달리 오크들은 계속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내가 개폼을 잡았다고 판 단, 아까보다 더욱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비록 쇠몽둥이로 전락한 무기들이지만 맞으면 아플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더 이상 되지도 않는 마법 가지고 매달릴 여유가 없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나중에 천 천히 생각하고 우선 저 빌어먹을 오크 놈들부터 처리하자. 내가 마법밖에 못 하는 줄 알면 천만의 말씀. 흑마법 하나만 잘한다고 훌륭한 마족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뛰 어난 머리와 강력한 육체. 이 세 개를 모두 갖춘 자야말로 진정한 마족이라 할 수 있 다. 육체를 단련하는 일을 소홀히 여기는 멍청한 마족도 몇 명 있지만 전투를 위해 타 고난 최적의 신체 조건을 썩인다는 것은 죄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건 내 주위에 마계의 천재라고 불리는 최고의 책략가 센, 검술 실력만으론 마계 최강인 다크리언, 흑마법 응용능력만은 마왕도 인정한다는 제 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부하인 그들이 어렸을 때부터 내 주위에서 저마다 자 기가 잘났다고 티격태격됐는데 어린 내 눈에는 세 사람 모두 다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 지금은 아쉽게도 항상 사용하던 창이 없었지만 오크 정도야 맨 손으로도 얼마든지 요 리할 수 있었다. 나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대장 오크의 앞에 섰 다. 그리고 오른손을 편 상태로 대장 오크의 목을 쳤다......가 아니고 그러려고 했다 . 이상하게 몸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 속으로는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공 격할지 떠오르는데 몸이 생각에 따라주지 않았다. 뭐냐? 몸이 왜 이렇게 무겁지? 내가 생각해도 속이 터질 정도로 느려터진데다 맞아도 간지럽기만 할 정도로 힘이 들어가 지 않았다. 황당해서 멈춰 서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사이에도 오크들 은 달려들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대충 오크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짐작이 간다 는 것 정도였다. 간신히 피해내곤 있었지만 급속도로 떨어지는 체력이 느껴졌다. 으악! 평소에는 몇 일을 창을 휘둘러도 멀쩡하더니 몇 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왜 이래! 속으로 절규하는 내 마음을 모르는지 호흡은 자꾸 거칠어지기만 했고 안 그래도 느려터진 행동이 더욱 느려졌다. 최대한 적게 움직이면서 피해냈지만 벌써 체력이 다 떨어졌는지 숨이 턱까지 차 올랐다. 헥헥, 나 죽네. 왜 이렇게 힘든 거야? 이러다 진 짜 오크한테 당하는 거 아냐? 차라리 미노타우루스가 낫지. 오크 따위에게......오크 따위에게.......오크 따위에게....... 대장 오크는 도끼를 맹렬한 기세로 휘둘렀다. 웃, 이 짜식들 두고보자! 내가 조금만 다치면 우리 성이 발칵 뒤집힌단 말이야! 그럼 니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그 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말을 할 상황이 아니라 왼쪽으로 살짝 피해냈다. 휴우, 간신히 피했네. 안심해서 가슴을 쓸어 내리던 나는 왼쪽에서 뭔가가 접근해오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인 건 나를 향해 날아오는 쇠몽둥이였다. 예전에는 느리게만 보이던 오크의 동작이 오늘따라 빛의 속도로 느껴졌다. 퍼어억~~~!!! "헉!" 깜짝 놀라 잠이 깬 나는 재빨리 주위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이상한 숲이 아니라 왕궁 에 있는 내 침실이었다. 밖이 비쳐 보이는 얇은 하얀 천 너머로 이제는 익숙해진 화려 한 방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새벽이라 어두컴컴했지만 방의 모습을 확인하는데는 문 제가 없었다. 혹시 방안에 오크가 들어왔나 둘러보았지만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다, 다행이다. 오크에게 맞는 꿈을 꾸다니. 이런 재수 없는 꿈은 내 평생 처음이야. 잠시 끔찍하던 꿈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다. 눈앞에서 보이던 쇠몽둥 이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다. 비록 꿈이라지만 마족으로서 수치스럽기 그지없었다. "으, 어디 두고보자! 이 놈의 오크들! 다 죽여 버린다!" 한차례 베개를 오크로 생각하고 던지고 때리고 물어뜯고 별 짓을 다 하던 나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아 이를 갈면서 오크들을 모조리 없애버릴 것을 결심하고 또 결심했다 . 그동안은 인생이 불쌍해서 상관하지 않았지만 날 친 이상(꿈속에서라도) 무슨 수단 을 동원해서라도 없애버린다. 몇 시간 동안 베개를 가지고 난리를 피우던 나는 제 풀에 지쳐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 다. 그나저나 왜 그런 꿈을 꾼 거지? 정말 재수도 없군. 마법도 써지지 않고 몸도 생 각대로 움직이지 않던 꿈이 생각나자 고개를 내저으면서 잊어버리려 애를 썼다. 뭔가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오크에게 당한 사실이 화가 나서 그런 것이리라 생각하고 넘 어갔다. ------------------------------------------------------------------------------- 내일이면 설날입니다. 이번엔 세뱃돈을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이제는 좀 컸다고 돈도 별로 안 줍니다. 이런 생각하는 게 좋지 않은건지 모르겠지만 일년에 몇 번 없는 돈 받는 날인데... 여러분도 설 재미있게 보내시고 세뱃돈 많이 받으시길 빕니다. 새해는 벌써 지났지만 그래도 설날이니까... 2002년에는 복 많이 받으세요!!! "마리엔 공주님, 스테이크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다른 것으로 바꿔올까요?" "응? 괜찮은데. 왜 그래?" "그거야......." 미나는 말을 하다 말고 내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바라보았고, 나도 미나를 따라 스테 이크를 내려보았다. 그리고 내 눈에 보인 것은 나이프로 이리저리 난자 당한 스테이크 였다. 하도 많이 나이프로 찔러 너덜너덜해진 스테이크는 본래의 먹음직스러운 모습을 잃은 체 잘게 잘려 접시 위를 나뒹굴고 있었다. 이런. 아까 꿨던 꿈이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나 보네. 다 른 마물도 아니고 약해빠진 오크에게 당했던 사실이 너무 분해서 나도 모르게 죄 없는 스테이크에 분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테이크를 먹지도 않고 이를 갈면서 나이 프로 난자하고 있으니 미나의 눈에는 먹기가 싫어서 그런 것으로 보일 지도 몰랐다. 오메, 아까워라. 이 맛있는 걸. 천천히 먹으면서 맛을 음미해도 모자랄 판에 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가! 후회스러운 감정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꿈은 어디까지나 꿈. 그런데 꿈 때문에 계속 열을 내고 있다니 한심하군. 이건 꿈속에 서 빵을 먹다 체하고는 깨어나서 소화제를 먹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음. 아닌 가? 아무튼 꿈속의 일을 가지고 깨어나서도 잊지 못하고 화를 내는 것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은 현실의 반대라는 말도 있잖아. 잊자. 잊어. 나중에 언제 한 번 오크들을 방문해서 정신 교육을 시키면 되잖아. 그런 거야. 그럼 된 거야. 이런 말도 안 되는 개꿈 따위는 기억할 가치도 없어!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자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진작에 이럴걸 별 일도 아닌 것 가지 고 끙끙대고 있었네. 개꿈 따위는 잊어버리기도 결정한 나는 아침식사에 집중하기로 했다. 오늘은 부하들이 된 제 4기사단을 모조리 뜯어고칠 계획이었기 때문에 배가 든 든해야 했다. 어떤 식으로 뜯어고칠지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했다간 당장에 캐롤의 잔소리와 미나의 감탄, 다른 시녀들의 한숨소리를 들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디어 스테이크를 먹기 위해 다시 식탁 위로 눈을 돌렸던 나는 허망한 눈으로 접시 위에 놓인 고기 조각들을 보았다. 그 건 이미 스테이크가 아니라 말 그대로 고 기 조각이었다. 크윽, 내가 미쳤나벼! 최고급 키르(소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소의 2배 정도 크기로 날카로운 발톱을 가지고 있다. 성질이 사납고 난폭해서 잡기가 힘들지만 그 고기 맛은 한번이라도 먹어본 사람은 그 맛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고기로 주방장 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음식인데 이렇게 만들어버리다니! 부드럽게 씹히는 육질과 입 에서 살살 녹는 맛, 씹을 때마다 배어 나오는 진한 육수. 내가 그런 음식을 망쳐버렸 어! 아까워! 아까워!! 아까워!!! 잠시 스테이크를 보던 나는 결심을 하고 스푼을 들었다. 그리고 잘게 잘라진 스테이크 를 스푼으로 떠먹기 시작했다. 포크로 먹기엔 사이즈가 너무 작아서 찍어지지 않는 관 계로 선택한 방법이었다. 내가 아까워서라도 기필코 다 먹고 만다. 옆에서 시녀들이 다시 내온다고 극구 말렸지만 마지막 고기 한 점까지 깨끗이 먹어치웠다. 이름 값을 하는지 그 모양이 됐어도 맛은 그런 대로 괜찮았다. 캐롤이 있었다면 스테이크는 나이프와 포크로 먹는 건데, 스푼은 스프를 먹을 때 쓰는 건데, 라고 잔소리를 한참 늘어놓았겠지만 다행히 그녀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어 제 내린 특명 때문에 지금쯤 자기 방에서 내가 사오라고 한 물건을 보고 과연 이 것을 순순히 건네줘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녀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조 건을 내걸었으니 반드시 올 것이다. 지금 내 방에 있는 시녀들은 미나를 포함해 대부분이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의 젊은 아이들 뿐이라 누구처럼 고정관념에 잡혀있지 않았다. 역시 젊음이란 좋은 거야. 개 방적이고 싱그러운 나이지. 왠지 늙은이 같은 말을 주절거렸군. 하지만 나도 610세의 땡땡한 나이란 말이야. 마계에서는 나보다 나이가 적은 이가 아무도 없었는데 인간 세 상에서는 내가 최연장자라니 기분이 상당히 묘했다. 물론 오래 살기만 하고 성질 더러 운 도마뱀들은 제외다. 나는 현재 내 모습을 보면서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캐롤은 무엇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렇게 인상 쓰면 주름살 생겨. 이 말을 직접 해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평소라면 분명히 아무 거리낌없이 말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쪼,끔, 안 좋은 관계로 생략하겠다. 캐롤은 아침 식사가 끝난 지 한참 후에야 손에 꾸러미를 들고 내 방으로 왔다. 그리고 그 꾸러미 속에 든 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는 나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속에서 나온 것은 검은 색의 상의와 바지들이었다. 약간 디자인이 다르긴 했지만 내 주문대로 심플한 옷들이었다. 탐탁치 못한 얼굴의 캐롤을 무시한 채 그 중에서 아무 옷이나 집 어들어 갈아입어 본 나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약간 달라붙는 상의와 조금 펑퍼짐한 바지는 이제까지 입어온 드레스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활동하기 편했다. 그동안 치맛자락에 걸려 넘어질 뻔한 적이 몇 번이던 가. 입고 있으면 거치적거리기만 하는 주제에 가격은 또 얼마나 비쌌던가. 이렇게 편 한 걸 인간 여자들은 왜 안 입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드레스 한 벌 가격이면 이런 옷 대여섯 개는 살수 있겠다. 처음에 내가 바지를 구해달라고 했을 때 캐롤은 절대 안 된다고 극구 말렸다. 예전에 는 내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더니. 세상 참 좋아졌지.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기다 몇 가지 요구사항을 추가시켰다. 첫째, 괜히 돈 아깝게 비싼 옷 사지말고 시장 에서 몇 벌만 사와라. 그리고 가게주인에게 확인증 받아와. 내가 확인 해보겠어. 둘째 , 위아래 모두 검정색으로 통일해. 검은 색이 때도 덜 타고 멋있어 보이잖아. 셋째, 옷에 장식이 달린 옷은 절대 사오지마. 그런 거 사오면 당장 던져버릴 거야. 만약 이 말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은 페드인 왕국의 수도인 아렌테 에서도 제일로 잘 나가는 디자이너가 만든 비싸디 비싼, 레이스가 줄줄이 달린 블라우 스와 움직이지 않고 서있으면 치마로 보이는 나풀나풀 거리는 나비 바지일 것이다. 요 즘 귀족 영애들 사이로 유행하는 옷으로 소풍을 나갈 때 입는다고 하지만 그런 옷은 천 낭비라는 나의 생각은 변함이 없다. 나는 말을 모두 마치자 울상이 돼서 움직일지 모르는 캐롤을 달래기 위해 한 가지 조 건을 내세웠다. 무조건 밀어붙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채찍과 당근을 잘 사용해야한 다. 그래서 내가 내건 조건은 한 달 후에 플로라 공주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열릴 궁전 무도회에 참석한다는 것이었다. 예전부터 이번에야말로 무도회에 꼭 참석하라고 말해왔으니 그녀로서는 거부하기엔 너무 먹음직스러운 미끼였을 것이다. 결국 그녀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울며 후주 먹기 식으로 내가 주문한 옷들을 사왔다. 하지만 캐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 달 후에 있을 무도회를 대비해 벌써 유명한 디자이너와 보석상에 드레스와 악세사리를 주문했고, 피부미용에 좋다는 것은 모조리 싸들고 왔다. 괜한 조건을 내건 듯한 기분이 드는걸. 하지만 내가 이정도도 양 보하지 않았다면 캐롤은 절대 바지를 사오지 않았을 것이다. 미나라면 시키기만 하면 바로 사 가지고 왔을 텐데. 틀림없이 어디서 쓰실려구요?, 라고 눈을 빛내면서 냉큼 사왔을 꺼야......으악! 미나에게 시키면 되는 거였잖아! 내가 미쳤지! 미쳤어! 무도 회에 나간다는 약속을 하다니! 한동안 내가 이렇게 멍청했던가, 라는 자괴감에 빠져있던 나는 공주로서 한번쯤은 무 도회에 참석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다시 부활했다. 동생을 생각해주 는 언니라는 설정도 나쁘진 않지. 생일 파티에 참석해서 모두 깜짝 놀라게 해주는 거 야. 그 때는 귀족들도 많이 참석할테니 그동안의 이미지를 벗어버릴 수 있는 좋은 기 회일지도 몰라. 그리고 플로라 공주에게 잘 대해주면 자연히 후궁인 아리란드와도 사 이가 좋아지겠지. 한 사람이라도 내 쪽으로 끌어들이는 게 중요하지. 춤이라면 질색을 하고, 쓸데없이 시간 죽이려고 무도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절대 이 해할 수 없는 내가 무도회에 참가한다는 조건을 내걸면서까지 바지를 구한 이유는 단 지 치마가 불편해서라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치마 입은지가 언젠데 새삼스럽게 이제야 바지를 구할 이유가 없었다. 이건 순전히 이번에 생긴 나의 사랑스러운 부하들 때문 이었다. 일단 내 부하가 된 이상 월급도둑이라든지, 왕궁 기사단의 수치라는 말을 듣는 건 절 대 용납하지 못한다. 그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내 부하라면 애초부 터 수준이 다른 로얄 기사단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제 1기사단 정도는 여유롭게 이 겨야만 한다. 그들도 충성을 맹세한 이후,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검을 잡는데 투자하고 있지만 그동 안 원체 많이 놀았어야지. 벌써 7기사단과도 상당한 실력차가 나는데 어느 세월에 제 1기사단을 제치고 로얄 기사단에게 도전하겠어. 그 시간에 다른 기사단이 노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래서 그들의 빠른 실력 성장을 위해서 이 몸이 직접 지도에 나서기 로 한 것이다. 비록 마법과 창술이 주특기지만 어렸을 때부터 다크리언이 연습하던 것 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지도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나도 어느 정도 수준은 되니까 상관없겠지. 어차피 창술이나 검술이나 근본은 비슷한 거 아니겠어. 창과 검은 모두 팔의 연장선일 뿐이니 창술을 변형해서 가르쳐도 상관없 었고, 그 것도 아니면 같이 대련하면서 실력을 키워줄 수도 있었다. 마족과 대련하는 사람은 너희들이 처음일 꺼다. 영광으로 알라구. 허리까지 내려오는 치렁치렁한 머리를 목 뒤에서 한 번 묶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미 나만 데리고 훈련장으로 향했다. 내가 바지를 입은 것도 모자라 기사들과 검을 섞는 것을 본다면 캐롤은 거품을 물고 쓰러질지도 모른다. 미나는 옆에서 나를 열심히 응원 할테니 상관없었다. 자꾸 왜 바지를 입은 것이냐고 물어오는 미나에게 나중에 직접 보 라는 말을 해주고 계속 길을 재촉했다. 훈련장에 도착해보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농땡이를 가장 잘 치던 기사들이 열성적으로 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힘찬 기합소리와 함께 은빛의 빛을 뿌리며 휘둘러지는 검의 모습이 보였다. 은빛의 파도 속에 땀을 흘리며 연습에 열중하고 있는 낯익은 기사들의 모습도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이 나는군. 그 때도 지금과 거의 비슷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 금은 희망이 없는 현실에 실망하고 포기한 눈이 아니라 뜨거운 열정과 희망을 가지고 있는 눈을 하고 있었다. 이거 짐이 무거워지는데. 그럴 리는 없지만 내가 왕비에게 당 하게 되면 이들도 제거되거나 쫓겨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럴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확실히 교육시켜주지. 내가 페드인 왕궁의 제일의 기사단으로 만들 겠어. 내게 충성을 맹세한다고 한 이상 조,금, 힘든 훈련을 시킨다고 뭐라고 할 수도 없을걸. 우선 실력 있는 몇 명은 내가 직접 지도를 하고, 다른 기사들은 내게 지도 받 은 사람들에게 훈련을 받는 식으로 하는 거야. 지금처럼 단장 혼자서 모든 기사를 훈 련시킨다는 건 능률이 오르지 않아. 기사단 내에 몇 개의 조가 존재하면 서로 경쟁을 하면서 빠르게 실력을 키울 수 있을 꺼야. 그리고... 내가 앞으로의 훈련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나와 미나를 발견한 기사들이 훈련 을 멈추고 반갑게 인사를 해왔다. "마리엔 공주님, 어서 오십시오!" "아니! 웬 바지를 입고 오신 겁니까! 쩝, 치마가 좋았는데." "이번엔 무슨 짓을 하려고 옷까지 빼 입고 오신 겁니까?!" "설마 자기 기사들을 죽이진 않으시겠죠?" 말을 정정하겠다. 반갑게 맞아준 사람은 단장인 보나인 하나이고 나머지는 실망, 의심 과 의혹에 찬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이 놈의 자식들을!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입 고 온 건데. ------------------------------------------------------------------------------- 내일은 설날이라 글을 못올릴 것 같아요. 대신 설연휴가 끝나면 연참하겠습니다. 모두 즐거운 설 되시기 바랍니다. 내가 친절히 교육시켜주려는데 그따위 망말이나 늘어놓다니. 이거 열,받,네! 너희들 을 위해 무도회에 나간다는 약속까지 했건만 니들이 나한테 이럴 수 있는 거냐. 알 수 없는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을 때, 내 불만을 깨끗이 씻어주는 소리가 들려왔다. 퍽! 퍼억! 퍼버벅! 보나인이 헛소리를 늘어놓는 인간들의 안면을 향해 솥뚜껑 같은 주 먹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날리고 있었다. 참으로 듣기 좋은 소리로세. 바스타드 소드 를 가볍게 사용하는 보나인의 주먹을 정면으로 맞았으니 참으로 아플 것이다. 그러나 말릴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기사인데 그 정도 주먹에 맞았다고 무슨 일이 생 길 리도 없었고, 무슨 일이 생긴다해도 왕궁에는 궁전 마법사들이 있다. 비록 토르의 마법사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치유주문 정도는 사용할 수 있는 실력이었다. 그리고 정 급하면 내가 나서도 된다. 회복마법에는 자신이 없지만 설마 보나인이 자기 부하들을 심하게 패겠는가. 내 예상대로 보나인에게 한 대씩 맞은 자들은 고통을 호소하긴 했지 만 모습은 멀쩡했다. "아이고, 나 죽네." "단장님, 그런 주먹으로 때리면 어떻게 합니까?" "코뼈가 부러진 것 같아." 보나인이 주먹을 날릴 때 고개를 약간 젖혀 충격을 완화했으면서 엄살은 심했다. 그러 나 보나인은 그들을 깨끗이 무시하고 내게 사죄를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공주님. 제가 부하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탓입니다." "아니예요. 제가 이해해야죠. 보나인 경이 힘드시겠어요?" "그래도 공주님은 알아주시는군요." 보나인은 힘들었던 과거를 회상하는 얼굴로 말했고, 나는 그런 보나인의 두 손을 꼭 잡은 채 격려했다. "제가 아니면 누가 알아주겠어요. 힘내요, 보나인 경."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엄살을 부리던 기사들은 이야기가 점점 엉뚱한 곳으로 흐르자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 었다. 그들의 주군과 단장의 호흡은 너무나 잘 맞고 있었다. "어이, 언제 단장님이랑 공주님이 저렇게 친해진 거냐?" "나도 몰라. 하지만 왠지 모를 배신감이 드는 걸." "단장님, 그러시는 거 아닙니다. 몇 년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저희들을 그렇게 말씀하시다니요." 준수한 용모와 화려한 말솜씨로 여자들 꼬시는 게 취미이자 특기인 미첼로가 나서서 말했지만 보나인도 만만치 않았다. "주군께 충성하는 게 기사로서 당연한 도리 아니겠나. 거기에 비해 네 놈들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내가 아름다우신 공주님 대신 너희 편을 들겠냐." 미첼로는 말문이 박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버버거렸고, 나는 우아하게 손으로 입 을 가린 채 웃음을 터트렸다. 오홋홋호~!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예쁜 건 알아요. 보 나인을 제외한 다른 기사들이 보나인의 말에 긍정한다는 뜻을 다분히 내포한 웃음소리 에 괴로워하는 건 내가 알 바 아니었다. 모두들 장난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속아넘어가는 척하며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공 주병 연기도 상당히 재미있군. 넌 원래 공주병이야,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 겠지만 그렇지 않다. 공주병이란 사실이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자신감을 가지는 것이지만 내 경우에는 사실이니 공주병이 아니라 타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 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왜 바지를 입고 오신 겁니까?" 한동안 장난을 친 다음, 보나인이 의아한 얼굴로 질문을 했다. 다른 사람들도 궁금한 눈치였다. 처음부터 내가 검술을 가르쳐준다는 말을 했다가는 절대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대충 대꾸했다. "나도 여러분과 같이 대련하려고요." 내 말에 모두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쩌억 벌렸다. 내 눈이 진심이라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반응은 더욱 극적이었다. 웬만하면 입 좀 다물지 그래. 그러다 턱 빠지겠어. 같이 대련하겠다는 말에 이 정도 반응이니 지도해준다고 했으면 어떤 반 응을 보였을지 안 봐도 눈에 선했다. "자, 장난이시죠?" 진심이란 것을 알면서도 가스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제발 장난이라 고 해주세요, 라고 애절한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분명히 말했다. "아니요. 진심이에요." ".......말도 안됩니다!" "공주님이 저희와 함께 대련을 하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절대 안됩니다!"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시면 큰일납니다." 저마다 말도 안 된다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공주님께 그런 과격한 운동은 어울리지 않 습니다, 보기보다 힘이 듭니다, 나중에 국왕 전하께서 아시면 큰일납니다 등등. 갖가 지 이유를 들어 그들은 필사적으로 나를 말렸다. 내가 기사와 대련을 못 하는 이유가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내가 다칠 리 없지만 그들이 보기에 나는 검도 제대로 들지 못할 것 같은 가녀린 소녀니 당연한 반응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짧은 기간에 이들의 실력을 대폭 향상시키기로 한 이상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내 부하라면 제 1기사단 정도는 이길 수 있어야 돼. 그리고 제 1기사단을 이길 수 있 는 기회가 3개월 후에 생긴다. 아니, 3개월 후에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꼴등은 절대 안 된다. 이게 무슨 소리인고 하니 대충 상황은 이렇다. 3개월 후인 10월 달에 페드인 왕국의 건국을 기념해 수도인 아렌테에서 축제가 한 달 동안 벌어진다. 이 때 무투 대회가 열리는데 이 대회는 매우 유명해서 다른 나라 사람 들도 참가하기 위해 엄청난 수가 몇 달 전부터 몰려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대회에 서 상위권에 든 사람은 엄청난 상금과 함께 왕궁 기사나 궁전 마법사가 될 수 있는 특 권이 주어진다. 무투 대회는 5년 전부터 왕궁 기사단이나 궁전 마법사는 참가할 수 없 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나와는 상관이 없지만 이 경기 이틀 전에 열리는 대회는 상관이 있다. 상관이 있어도 아주 많이 있다. 일명 글로리 라이언(Glory Lion : 영광의 사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대회는 왕궁 기사단 중 각 기사단을 대표하는 세 명의 기사들이 다른 기사단 소속의 기사들과 시합 을 벌여 자웅을 겨루는 대회였다. 원래는 왕궁 기사단도 무투 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 지만 인재를 발굴하자는 취지로 열린 무투 대회가 왕궁 기사의 독무대가 될 수도 있다 는 우려와 5년 전 제4기사단 소속의 누구(그 사람의 사생활도 있으니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젊디 젊은 기사에게 간신히 이긴 사건이 생긴 이후 참가할 수 없도록 규정을 만들었다. 내 생각에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자는 취지도 있겠지만 왕궁 기사가 보통 사 람에게 지는 쪽팔리는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듯 하다. 하긴 자 랑해마지 않는 왕궁 기사가 같은 왕궁 기사도 아닌 보통 사람에게 지면 체면이 말이 아니겠지. 대신 무투 대회 이틀 전에 왕궁 기사단의 기사들이 서로 실력을 겨루는 대회를 따로 만들었다. 왕궁 기사단의 위용을 보여줌으로서 참가자들이 자신도 이 곳에 소속되고 싶다는 생각에 분발하게 하고, 다른 나라에서 온 축하 사절단에게 페드인 왕국의 저력 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글로리 라이언은 사람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왕궁 기사들을 볼 기회가 거의 없 는 평민들은 제법 입장료가 비쌈에도 불구하고 매년 엄청난 숫자가 모여들었고, 다른 나라에서도 구경하려고 온 사람들이 넘쳐났다. 비록 생긴 지는 5년 밖에 되지 않았지 만 벌써 무투 대회와 더불어 건국 축제의 명물이 되었다. 여기서 우승한 기사는 페드인 왕국의 최고의 검사라는 명예로운 칭호와 함께 국왕에게 한 가지 청을 올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던지, 아니면 이 때를 위해 궁전 마법사들 이 밤낮으로 만든 마법검을 하사 받던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까 지 국왕에게 직접 청을 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현재 페드인 왕국의 최고의 검사는 에릭 리트 뭐라고 했는데 관심이 없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들었다. 내가 관심이 있었던 것은 뒤에서 세 명이 모두 제 4기사단 소속의 기사였다는 점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들은 쪽팔리게도 5년 연속 글로리 라이언에서 꼴등을 맡아놓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월급 도둑과 같은 오명을 모두 벗어버 리고 엘리트 부대가 되는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고 말겠어! "모두 조용히 해요. 이건 명령이에요." "그, 그렇지만......." 급기야 명령이라는 말까지 나오자 기사들은 내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진작에 말을 들었으면 시간도 낭비하지 않고 좋았잖아. 기사들이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자 나는 무기가 준비되어 있는 선반으로 가서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연습용 목검이 무게와 길이별로 따로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진검도 레이피어, 롱소드 , 바스타드 소드 등 종류별로 준비되어 있었지만 부하와 목숨 걸고 싸울 일은 없었기 때문에 중간 정도 무게의 목검을 하나 집어들었다. "공주님, 역시 그만 두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보나인이 옆에 와서 다시 조심스럽게 설득하려 했지만 지금 내 귀에는 어떤 소리도 들 리지 않았다. 응? 이럴 리가 없는데. 바스타드 소드도 어렵지 않게 다루던 내가 목검 이 무겁다고 느끼고 있었다. 한 번 휘둘러보자 묵직한 목검의 무게가 그대로 느껴졌다 . 불안한 생각이 들어 기본동작을 해보던 나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검에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데 미세한 흔들림이 느껴졌다. 놀라서 들고 있던 목검을 내던지고 다른 목검을 들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목검이라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차례로 레이피어와 롱소드도 휘둘러보 았지만 영 신통치 않았다. 바스타드 소드는 휘두르기는커녕 들고 있기조차 힘이 들었 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검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가 없잖아. 마치 오늘 꾼 꿈속에서처 럼......!!! 서,설마 그 꿈이 미래를 예시했다는 거야? 말도 안돼! 그래. 마법. 마법 을 써보자. 불길한 생각이 들어 평소라면 외우지 않았을 주문까지 외웠다. 물론 보는 눈들이 있으니 속으로 외웠다. '어둠에 속하는 존재여, 내 힘을 받아 깨어난 존재여. 나 어둠의 힘을 가진 자의 한 사람으로서 명하나니 모든 것을 가르는 그대의 힘으로 내 앞의 모든 존재를 멸하라. 호프리스 윈드!'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절망의 바람은 고사하고 산들바람조차 불지 않 았다. 우악! 뭐야! 왜 안 되는 거야! 다른 주문도 외워보았지만 기본 중의 기본인 파 이어 볼도 성공하지 못했다. 진정하고 차근차근 생각해보자. 저주를 받아서 그럴까? 하지만 어둠 그 자체인 마족이 저주에 걸릴 리가 없잖아. 그럼 내가 바보가 돼버린 건 가? 말도 안돼! 마법 공식도 다 생각난단 말이야! 아무리 신이라도 마족을 이렇게 완벽하게 무력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럴 수 있는 존재라면 신과 마족을 만들었다는 위대한 혼돈, 카오스뿐이다. 하지만 이미 셀 수도 없는 시간동안 보이지 않았다던 카오스가 갑자기 나타날 리 없었다. 게다가 차원의 균 형을 깨버릴 만한 일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내 능력을 봉할 이유도 없었다. 그럼 도대 체 이유가 뭐냐구!!! "저기 공주님, 무슨 일이세요?" 한참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던 나는 미나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주위에 있는 기사 들이 아주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걸로 봐 혼자서 난리를 친 모양이다. 하지만 지 금은 이들의 시선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마족에게 있어 힘이 사라진다는 일은 차라지 죽는 것이 더 나을 정도라고 생각되어지는 일이었다. 이게 일시적인 현상이라면 다행 이지만 진짜로 능력이 사라진 것이라면......생각하기도 싫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아무 것도 아니야. 어서 궁으로 돌아가자.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 오늘은 그만 가야겠어요." 나는 어리둥절해하는 미나의 손을 잡고 냅다 궁으로 뛰었다. 기사들 교육이나 시키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나보다 나이 많은 마족의 도움이 필요하겠어. 오늘밤에 집으로 다시 돌아간다. 밤이 되길 기다렸던 나는 한밤중이 되자 마계로 돌아갔다. 마족이 마계로 돌아가는 일 은 의지만으로도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손쉽게 마계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내가 없어진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베개를 이불 속에 넣어놨으니 당분간을 들킬 염려가 없었지만 시녀들이 깨우러 오기 전까지는 돌아가야 했다. 내가 도착한 곳은 마계에 있는 우리 성의 내 방이었다. 내가 급히 뛰쳐나왔을 때와 변 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잠시 내 방을 둘러보던 나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떠올리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이 기이한 현상을 설명해 줄 마족을 찾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 그러나 왕궁 못지 않게 큰, 아니 더 큰 성에서 내가 원하는 자를 찾아내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오늘따라 넓은 성이 원망스러웠다. 젠장. 엄 청나게 크네. 평소라면 공간이동으로 간단히 이동할 수 있었을 텐데. 이 인간의 몸은 불편하기 짝이 없어서 뛴 지 10분도 되지 않았건만 벌써 숨이 차기 시작했다. 성에는 누군가 들어오면 알려주는 마법이 걸려있었지만 그건 이 성에 살지 않는 다른 자의 경우이고 내 경우에는 이 성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내가 왔다는 것을 누구도 알 지 못했다. 예전에 아빠가 추적장치가 걸린 팔찌를 선물로 줬을 때 모르는 척 하면서 순순히 받는 건데. 괜히 사생활 침해 어쩌고 저쩌고 해서 던져버린 일이 후회스러웠다 . 숨이 가쁘긴 했지만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일이 보통 다급한 일이 아니라 차 오르는 숨을 꾹 참으며 성의 복도를 열심히 뛰었다. 어떻게 된 게 성에서 일하는 수많은 하 급 마족들도 보이지 않았다. 아, 내가 내 방이 있는 층에는 아무도 오지 말라고 했지. 시끄럽다고. 이번 계약 끝나면 개방한다. 씨이~. 간신히 계단 앞까지 도착한 나는 날듯이 계단을 뛰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내 방 이 맨 꼭대기에 있어서 다행이야. 적어도 계단을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게 덜 힘 들잖아. 아니다. 1층에 있었으면 하급 마족이나 다섯 명(아빠, 엄마, 센, 제스, 다크 리언)과 계약해서 부하가 된 인간들이 많이 다니니까 아무나 잡고 불러달라고 했으면 되는 건데. 1층으로 이사라도 갈까보다. 그래도 내 방 밑에 가야 방이 있으니까 그나 마 다행이지. 계단을 내려온 나는 복도에 깔린 붉은 융단을 무참히 짓밟으며 어렸을 때부터 나는 돌 봐준 가야의 방으로 뛰었다. 내가 가야의 방문 앞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휘청거리는 다 리를 주체하지 못해 잠시 벽에 기대서야만 했다. 인간들의 성도 엄청나게 큰데 8대 마왕 중 2명의 마왕이 거주하는 성이니 얼마나 크겠 는가. 참고로 나는 어렸을 때 성에서 조난 당해서 몇 일만에 발견된 전적이 있었다. 마족이니 창조마법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어서 아무 일도 없었지만 인간이었다면 자기 집에서 굶어죽는 황당한 일이 생겼을 것이다. 또 마족은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관계로 아무리 가족끼리라도 날마다 보는 경우는 거 의 없었다. 만약 가야가 날 찾아다니지 않았다면 나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혼 자의 힘으로 내 방을 찾느라 꽤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 성을 전력 질주했으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혹시 내가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이 유가 이 약한 인간의 몸과 관계가 있는 걸까? 하지만 체내에 산소를 공급하고 체외로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기 바빠서 더 이상의 생각은 무리였다. 마법을 쓸 수 없다는 게 이렇게 불편한 거였구나. 새삼 마법의 고마움을 느꼈다. 다시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정말 유용한 일에 사용할텐데. 마족에게 있어 유용한 일이 무엇인지는 각자의 상 상에 맡기겠다.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면서 방문을 열었다. 원목나무로 만들어진 갈색 방문이 마찰음도 내지 않고 조용히 열렸다. 그리고 방문 저편으로 깔끔하고 정갈 하게 정리된 방의 모습이 들어왔다. 항상 나를 주눅들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양의 책들 이 왼쪽 벽면을 모조리 차지하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가녀린 가야는 책장이 넘어지면 압사 당할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할 때가 아니었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가야를 찾던 나는 이 넓은 방 어디에도 가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를 따라다니며 돌봐주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자신의 방에서 책을 읽거나 정령과 이야기를 나누는 가야였다. 내가 놀러가자고 조를 때만 억지로 밖에 나가던 가야가 오늘따라 자신의 방에 있지 않았다. 그럼 나는 가야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차라리 아 빠나 엄마를 만나러 가야할까? 아니면 센이나 제스, 다크리언 중 한 명을 찾아야 할까 ? 누구든지 좋았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내가 알게 뭔가. 자신의 방에 없으면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내가 그들을 찾을 방법은 없었다. 재수가 없으면 성을 이 잡듯이 뒤지고도 아무도 만나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들이 성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그게 아니더라도 그들의 방까지 뛰어갈 일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나는 곧이어 암담한 현실을 느끼고 절규했다. "가야아-!!! 아빠! 엄마! 센! 제스! 다크리언! 아무도 없어요?!" -------------------------------------------------------------------------------- 넓은 응접실에는 다섯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인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들이 앉아있는 소파는 침대가 울고 갈 정도의 푹신함과 안락함을 자랑했고, 신성동물 셀오린의 가죽으로 만들어져 흠집 하나 생기지 않았다. 그들 앞에 놓여있는 탁자는 드 래곤본을 깍아서 만든 것으로 헬파이어를 난사해도 절대 망가지지 않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은 흔히 볼 수 있는 두꺼운 찻잔이 아니라 어떻게 구웠는 지는 모르지만 두께가 매우 얇은 이색적인 분위기의 찻잔이었다. 만약 누군가 찻잔을 뒤집어본다면 이상한 문자가 써져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Made In Korea >> 이뿐만 아니라 이 방에 있는 물건 중 어느 것 하나 값나가지 않는 것이 없었다. 심지 어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꽃병조차 은은하고 영롱한 청색의 빛을 띠고 있는, 어느 차원 계에서 과거에 존재했다고 하는 한 나라의 이름을 딴 고려청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 는 보물이었다. 신성동물, 드래곤본, 고려청자. 한 차원계에서 같이 볼 수 있는 물건들이 절대 아니었 다.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 위를 드래곤이 날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그 것도 아니면 마법사에게 기관총을 난사하는 람보를 생각해 보라. 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인 가. 그런데 이 방에 있는 물건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은 둘째 치더라도 여러 차원계의 물건을 모아 놓은 것이었다. 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존재는 고위신과 상급 마족 정도 로 몇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방의 주인은 신이거나 마족이라는 결론이 나올 것이 다. 그리고 지금의 경우는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방은 크루엘티 마왕과 레이지 마왕 부부가 함께 사는 성에 있는 응접실 중 하나였 다. 널린 게 방이다 보니 응접실도 한두 개가 아니므로 이 곳은 8층의 3호 응접실이 되겠다. 마족은 드래곤 정도는 아니라도 개인적인 성향이 짙은 종족이다. 좋게 말하면 그렇고 나쁘게 말하면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연인이라는 건 흔히 볼 수 있지만 부부라는 것은 마계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특히 이들 부부는 그냥 보기에도 절대 어울리지 않는 커플 중 하나였다. 냉혹하고 차 갑기로 유명한 크루엘티와 신경에 거슬리면 마신에게도 개긴다는 레이지. 얼음과 불. 냉정한 참모와 화끈한 행동대장. 두 사람의 모습을 묘사하자면 대충 이렇다. 그런 둘이 무슨 일로 눈이 맞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몇 만 년 전에 두 마족이 결혼했 을 때 마계는 한바탕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을 때도 마 찬가지였다. 본명은 유리시나요, 애칭은 유나라는 이름의 이 어린 마족은 크루엘티의 은발머리와 레이지의 붉은 눈동자를 쏙 빼닮은 아름다운 마족이었다. 아직 어림에도 불구하고 뛰 어난 미색과 애교로 다른 마왕은 물론이고 마신도 특별히 귀여워하는 마계 최고의 미 소녀였으며, 부모를 닮아서인지 어렸을 때부터 능력이 뛰어났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 을 안다는 이 천재 마족 소녀는 정말 나무랄 데 없는, 장래가 촉망되는 마족이었다. 단 하나, 성격만 빼면 말이다. 그녀는 크루엘티와 레이지의 외모만 닮은 것이 아니라 성격도 닮았다. 냉혹함과 과격 함을 모두 물려받은 데다 힘까지 세다면, 덤으로 장난도 심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다만 뚜껑 열린 유나에게 덤비느니 8대 마왕에게 덤벼라, 라는 말이 은연중에 마계에 전해져 온다는 것만 알아두었으면 한다. 그러나 평소의 유나는 꽉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소녀였다. 벌써부터 나중에 컸을 때를 기다린다는 마족이 있으니 말다하지 않았는가. 물론 유나의 실력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상급 마족에 한해서이다. 그러하니 유나의 애교를 매일 보고 지내는 자들은 어쩌겠는가.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항상 안고 지내고 싶을 정도 였다. 이런 걸 바로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고 하는 것이다. 예쁜 모습만 보이고 성질 더러운 모습은 보이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런 유나가 몇 달 전에 계약을 맺는다고 뛰쳐나갔을 때만 해도 크루엘티와 레이지, 가야, 센, 제스, 다크리언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직 어리고 연약한(천인공 노할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유나가 험난한 인간 세상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그러 나 유나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들이기에 곧 안심했다. 그래도 아주 걱정이 되 지 않는 건 아니라 이렇게 모여 차를 마시면서 유나가 잘 지내고 있을까, 에 대한 화 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유나가 잘 있을까? 역시 내가 찾아가 봐야 되지 않을까? 사악한 인간들이 순진한 우 리 유나를 꼬드기고 있을지도 몰라." "크루엘티 님, 진정하십시오." "맞습니다. 유나 님이 그렇게 쉽게 인간에게 휘둘릴 리가 없습니다." 센과 제스는 크루엘티를 달래면서 그가 유나를 찾아간다고 소동을 피우던 것을 간신히 뜯어말리던 두 달 전 일이 생각났다. 다크리언과 가야도 같은 생각을 하면서 피식 웃 었다. 그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다른 마족 앞에서는 차갑기 그지없는 크루 엘티가 유나 앞에서는 푼수가 돼버리는 모습은 언제 봐도 신기했다. 마족이 저렇게 변 할 수도 있는 건가. 그에 비해 유나의 어머니인 레이지는 조,금,은, 나은 편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 다. 그리고 곧이어 예상하지 못한 말이 들려왔다. "마왕님, 유리시나 님이 돌아오셨습니다." "뭐! 어서 들어오라고 해라!" 크루엘티는 마왕의 체통도 잊어버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말에 따라 응접실에 들어온 자는 은발의 아름답고 귀엽고 깜찍한 소녀가 아니라 검은 머리에 그럭저럭 생긴 여자였다(그들의 시선에 미친 모습이었다). 하지만 유나라면 사 족을 못 쓰는 자들답게 유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유나가 거의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점이 의아할 뿐이 었다. 유나가 마침 지나가던 하급 마족에게 발견되어 간신히 이 곳까지 오게 된 것을 모르는 그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공간 이동은 공간을 이동할 때 쓰라고 있는 것 이므로. 유나는 마침내 자신이 찾던 사람들을 찾았다는 기쁨도 느끼기도 전에 호흡에 신경을 써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숨이 막혀 버릴 것 같은데 무슨 방법이 있으리요. 가야가 없는 걸 확인하고 하급 마족을 만나기 전까지는 계속 뛰어다녀서 지금은 서 있 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도대체 그냥 방에 얌전히 있을 일이지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이런 데 한꺼번에 모여있는 이유가 뭐냔 말인가.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었지만 그녀는 곧 자신이 이 곳에 온 이유를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유나의 말을 모두 들은 후, 크루엘티는 싱긋 웃었다. 너무도 당연한 일을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딸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기 때문이다. 유나가 이렇게 당황 해하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라 그는 일부러 뜸을 들인 후 입을 열었다 . "우선 진정하고 아빠 말을 들어. 네가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건 능력이 사라져서 가 아니라 그 인간의 몸 때문이란다. 영혼은 네 영혼이지만 몸은 인간의 몸이니 네 능 력을 모두 사용할 수 없는 건 당연한 거란다. 네가 검을 잘 다룰 수 없는 이유나 마법 을 사용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인간의 몸이 그런 일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란다. 당 연히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조건도 갖춰져 있지 않지. 혹시 그 인간의 몸에 마나가 축 적되어 있는지 확인해봤니?" 크루엘티의 말에 유나는 황급히 자신의 몸을 점검해보았다. 마족이었을 때는 체내에 마나가 넘치도록 있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보니 마나가 전혀 축적되어 있지 않았다. 마리엔이 검을 잡아본 일도 없을 테니 자신이 아무리 기를 써도 검을 잘 다루지 못하 는 것도 당연했다. 아무리 머리로만 알면 뭐 하는가. 몸이 안 따라주는데. 도대체 그 동안 뭘 했기에 이 모양인지. 유나는 마리엔의 몸이 전투할 수 있는 몸이 아니라는 사 실을 알고 투덜거렸다. 마나에 대한 걱정 없이 마법을 펑펑 사용할 수 있는 마족의 몸 과는 너무 달랐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네요." "그거 보렴. 보통은 자신이 계약자의 모습으로 변하는데 네 경우는 인간의 몸으로 직 접 들어가서 이런 일이 생긴 거란다. 만약 네가 마법을 사용하고 싶다면 그 인간의 몸 에 마나를 쌓아야하고, 검을 사용하려면 몸을 단련시켜야겠지." 크루엘티의 말에 유나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앞으로 3개월 후면 글로리 라 이언이 열리는데 우선 마리엔의 몸을 단련시키고 다음에 기사들을 훈련시킬 시간이 없 었다. "에엑, 그럼 너무 늦어요! 어느 세월에 그걸 다해요! 세 달 후에는 대회가 열리는데 그 때까지는 어떻게든지 해야 한다구요." "물론 보통의 경우에는 그렇지만 우리 귀여운 유나가 곤란해하는데 내가 도와줘야지. 암, 그렇고말고." 크루엘티의 말에 유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그 대신 뽀뽀해줘야 한다는 크 루엘티의 다음 말에 아빠의 푼수기가 어디 가겠는가, 라는 참으로 효성스러운 생각을 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유나가 별 거부감 없이 크루엘티의 볼에 뽀뽀를 하려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레이지가 갑자기 끼어 들었다. "잠깐만! 유나야, 엄마도 해줄 수 있어. 엄마가 해줄 테니 엄마한테 뽀뽀해 줘~~~." "아니! 당신, 이럴 수 있는 거야? 유나는 내 딸이란 말이야." "어머, 유나는 내 딸이기도 하다구요." 딸의 뽀뽀 하나를 두고 말다툼을 시작하는 마왕 부부를 보면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마족과 다크 엘프 하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보다못한 유나가 모두에게 뽀뽀를 해준다 고 말했을 때에야 그 말다툼은 멈췄다. 잠시 후 유나의 뽀뽀를 받은 두 마왕은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집게 손가락 을 유나의 이마에 댔다. 손가락에서 검은 빛이 빛나더니 그 빛은 유나의 이마로 스며 들었다. 유나의 이마에 기이한 모양의 문양이 나타났지만, 잠시 그 문양에서 눈부신 빛이 나더니 곧 사라졌다. 크루엘티와 레이지가 손가락을 떼자 유나는 자신의 몸을 둘러보고 입을 열었다. "별로 변한 것은 없는 것 같은데요?" "보기에는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제법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이 엄마가 힘 좀 썼지. 흑마법은 모두 사용할 수 있어. 하지만 다른 마법은 4서클까지만 쓸 수 있을 거 야. 9서클 마법까지 쓸 수 있던 네게는 좀 불편하겠지만. 그리고 지금의 육체의 체력, 스피드, 근력을 4배정도 강화시켰어." 레이지의 말을 크루엘티가 받아 말을 이었다. "물론 예전처럼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도 가능하지만 계약이란 것은 원래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야한다. 넌 아직 어리니까 이 정도는 도와줘도 상관없겠지만 말 이다." 유나도 크루티엘의 말에 수긍했다. 자신의 일은 자신이 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 었다. 능력은 그대로라니 몸만 잘 단련하면 아무 문제없을 것이고, 흑마법도 사용할 수 있으니 당장 불편한 점은 없을 것이다. 유나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새벽이 될 때까지 그 자리에 끼어 그동안 있었 던 일을 모두에게 이야기했다. 가야에게 갑자기 뛰쳐나가서 혹시 무슨 일이라도 벌인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오랜만에 진짜 자신으로 돌아가 이야기 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이제 돌아가 봐야겠어요." "유나야, 빨리 돌아와야 된다. 아빠는 유나가 없으면 쓸쓸해." "엄마도~~~." "유나님, 두 분은 신경 쓰시지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참, 선물 잊지 마십시오." "......다녀올께요." 그리 감동적이지 못한 작별을 하고 응접실에서 나온 유나는 왕궁으로 돌아가기 전에 자신의 방에 들러 몇 가지 물건을 챙겼다. 마리엔과의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서 다시 마계에 오는 것은 싫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필요한 것들을 모두 가져갈 생각이었다. 첫 번째 계약인데 자신의 힘만으로 성공하고 싶었다. 그녀는 가죽 주머니에 각종 보석과 악세사리를 쓸어 담은 후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애 무기인 창을 집어들었다. 레드 드래곤 본으로 만들어진 이 창은 평소에는 팔 길이 정 도의 짧은 봉으로 보이지만 마나를 주입하면 봉이 길어지면서 끝에 60cm 정도, 창치고 는 긴 세 개의 날을 가진 독특한 창으로 변한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아름답게 세공되 어 있는 장식용의 봉 정도로 보이기 때문에 들고 가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 설 잘 지내셨나요? 전 잘 지냈습니다. 세뱃돈은 얼마 못 받았지만요...(이런 불순한 생각만...) 원래는 설 연휴는 놀고 글을 올리려고 했는데 놀면 뭐합니까? 재미있는 프로도 안 하고 해서 글을 올립니다. 재미있으셨으면 좋겠군요. 다행히 시녀들이 깨우러 오기 전에 도착한 나는 베개를 다시 원위치 시키고 보석이 들어있는 가죽 주머니를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 았던 나는 미연의 사건을 방지하기 위해 서랍에 잠금 주문까지 걸었다. 설마 공주의 책상을 뒤질 간 큰 인간이 어디 있겠냐만 미리 대비해둬서 나쁠 건 없었다. 사람들을 인품과 능력만으로 끌어들일 수 있으면 좀 좋겠냐만 현실은 소설과 달라도 엄청 달랐다. 가끔 그 사람의 재능을 보고 모이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 나 소수이고, 대부분의 다수는 그 사람의 부나 권력, 세력 등을 보고 모여들기 마련이 다. 그런 의미에서 그라냔 백작가가 뒤에 버티고 있는 오펠리우스 왕비에 비해 나는 빈털터리였다. 그라냔 백작가 같은 막강한 세력이 버티고 있길 해? 아니면 사람들을 끌어모을 돈이 많길 해? 바로 어제까지는 말이다. 능력도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지. 사람들을 끌어 모을 보석도 잔뜩 가져왔지. 일이 술술 풀리는군. 이제 부하들의 수준만 끌어올리면 되겠어. 부하들이 잘나야 그 위에 있는 사람도 잘나 보이거든. 마리엔의 몸이 약하디 약하다지만 체력, 근력, 스피드가 4배로 좋아졌다면 보통을 훨씬 웃도는 능력이었다. 엄청 강한 사람에게 이기기는 힘들 겠지만 이 몸으로도 제 4기사단을 지도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동안의 전 투경험과 그 전투 속에서 극도로 발달된 본능, 다른 말로 하면 눈치가 체력적인 문제 점을 보안해 줄 것이다. 그리고 내게는 인간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다는 드래곤 본으로 만들어진 창이 있었 다. 몇 백년 전부터 사용해서 이제는 내 몸의 일부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무 기였다. 지금은 창이라기보다는 봉에 가까운 모습이지만 이대로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었다. 단단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드래곤 본으로 만들어졌으니 맞으면 얼마나 아프겠는가. 맞아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이 창으로 두들겨 맞아 본 한 마족의 말 을 들어보면 뼈와 살이 깎이는 고통이라고 했다. 창도 되고 봉도 되고 보기에도 예뻐서 장식용으로 들고 다녀도 되니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었다. 창을 쓰다듬으며 감촉을 느끼고 있을 때, 그제야 시녀들이 나를 깨우러 들 어왔다. 일이 잘 풀려서 기분이 매우 좋았기 때문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좋은 아침~." "......네, 네. 아, 안녕하세요." 시녀들은 잠시 멍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잘 익은 토마토처럼 얼굴이 빨개져서 더듬더 듬 거리며 인사를 했다. 거참. 안녕하세요, 란 말이 그렇게 힘들었나? 그거 말하는데 더듬거리면서 말할 필요 까지야. 그러나 나에게 쉽다고 다른 사람까지 쉬우라는 법은 없다. 설령 그 말이 안녕 하세요, 라는 일상 생활에서 자주 사용되는 기초적인 말이라도 사람에 따라 아주 어렵 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나는 사람마다 다르니까 그럴 수도 있겠 지, 하며 넘어갔다. 다른 사람의 입장까지 생각하는 자세. 이 얼마나 훌륭한가. 나는 스스로에게 감탄하느라 시녀들이 한 쪽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오늘따라 공주님이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웃는 것 좀 봐. 꺄아~, 너무 귀엽다아~." "마리엔 공주님의 미소가 날이 갈수록 업그레이드되는 것 같아." "내가 남자였으면 바로 프로포즈하는 건데. 우~ 꼭 껴안아주고 싶어." "요새 병사들이 멋을 내고 다니는 이유가 다 저기에 있었다니까." 이들의 말을 들었다면 서로에게 좋지 않은 방향으로 일이 전개되었겠지만(특히 껴안는 다는 말)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 캐롤이 말림에도 불구하고 바지를 입은 나는 다시 미나를 이끌고 훈련장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미나에게 이 일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누설해서는 안 되는 극비라는 것을 누누이 강조했다. 아마 캐롤이 알면 쓰러지고 말 거야. 이제 슬슬 건강에 신경 써야 할 나이지. 시녀장의 건강까지 신경 써주는 착한 공주......는 아니고 단지 그녀의 넘 치는 잔소리가 듣기 싫은 나였다. 미나는 나에 대한 충성심 때문인지, 아니면 손에 들린 금빛의 동전 때문인지 목에 칼 이 들어와도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무래도 후자 같지만 미나의 입을 막았다는 데 의의가 있기 때문에 이 점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훈련장에 도착해보니 기사들은 한창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오오! 저 모습을 보라! 과연 저 모습이 예전에 월급도둑이라는 휘황찬란한 이름으로 불리던 자들이 맞단 말인 가. 예전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었던 진지함과 열정이 묻어나는 모습이었 다. 암, 내 부하라면 저 정도는 돼야지. 저런 열정이 있어야 내가 훈련을 시켜도 실력이 쑥쑥 향상될 것이 아닌가. 물론 열정이 없어도 실력을 키울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매에 장사 없다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그러나 매에 못 이겨 훈련에 참여하는 사람보 다는 자발적으로 나서는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훨씬 재미있었다. 내가 온 것을 눈치챈 보나인은 잠시 훈련을 멈추고 10분간의 휴식에 들어갔다. 그 사 이에 기사들은 내 쪽으로 몰려와서 오늘도 바지를 입고 오셨네요, 치마만 입으시면 얼 마나 불편하시겠어요, 자주 보니 바지를 입으신 모습도 어울리시네요, 라는 어제와 사 뭇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아무래도 어제 내가 돌아간 이후 보나인의 교육을 한 차례 받 은 모양이다. 그들과 인사를 나눈 다음 여기 온 목적을 상기하고 무기들이 놓여있는 선반으로 걸어 갔다. 창을 사용해도 되겠지만 비장의 무기는 감춰두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창을 가져오긴 했지만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암살자가 암살을 시도하려했다가 갑자기 장식용 봉이 무시무시한 창으로 변하면 얼마나 놀라겠는가. 안 심하고 있는 사람의 뒤통수를 치는 건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왕비의 성질을 보아 하니 암살 시도가 한 번쯤은 있을 테니 그 때 놀라게 해줘야지. 놀라는 왕비의 모습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다음으로 미루고 지금은 사랑스런 부하 1호들의 실력을 키워줘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어제 맨 처음에 집어들었던 목검을 집어들고 몇 번 휘둘러보았다 .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내며 내 팔의 움직임에 따라 검 끝이 꽃의 모양을 그렸다. 다 크리언이 '매아검법' 이라는 참으로 발음하기 힘든 이름을 말해주었으나 혀가 굴러가 지 않은 관계로 편하게 '플라워 드러(Flower draw)'라고 부르고 있다. 느낌 좋고~. 약간 어색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마음먹은 대로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 었다. 기사들을 훈련시키면서 나도 같이 수련할 수 있으니 이 걸 바로 '닭 먹고 닭발 먹고' 라고 하는 거지.......??? 흠, 다크리언이 한꺼번에 두 가지 소득을 볼 때에 쓰 는 말이라고 말해줬는데 뭔가 좀 이상하네. 분명히 날짐승 중에 하나를 먹는 거였는데 . 오리였나? 참새? 와이번? 에이, 아무 거나 먹으면 어때.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 잖아. 계속 검을 휘두르면서도 헛생각을 하던 나는 손을 멈추고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기사 들은 전혀 검을 다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능숙하게 검을 다루자 눈을 커다 랗게 뜨고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몇몇은 손에 들고 있던 검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나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각종 무도회에 춤추러 가기도 바쁜 공주가 언제 검을 배울 시간이 있겠는가. 당연히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검을 잘 다루니 놀랄 만도 했다. 이왕 보여주는 거 멋있게 보이려고 제일로 화려한 검법을 해 보였는데 효과가 상당한 것 같았다. 하긴 나도 다크리언이 이거 하는 걸 보고 한동안 넋을 빼고 그 모습만 보 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그 모습이 참으로 예뻐 보여 가르쳐달라고 졸랐더니 '기'가 몸에 있어야 되는데 그게 마나랑 비슷하네, 마나와는 달리 단전이란 곳에 축적해둬야 하네, 라는 전혀 알아듣지도 못할 말만 늘어놓으면서 가르쳐주길 회피했지만 몇 달 동 안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조른 결과 다른 몇 개(역시 발음하기 엄청 힘들었다)와 같이 배웠던 과거가 있었다. 아무튼, 이 검법의 화려함과 내가 예상외로 능숙하게 검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에 모 두 넋이 나간 상태였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검술에 대해 잘 모르는 미나였 다. "꺄아! 공주님, 그거 너무 예뻐요! 어떻게 하는 거예요? 저도 가르쳐주세요, 네?" "읏, 미나 너 뭐 하는 거야? 떨어져. 당장 떨어져. 징그럽게 뭐 하는 짓이야?" "싫어요. 저도 가르쳐주신다고 할 때까지 절대로 안 떨어질 거예요." 미나는 찰싹 붙어서 아무리 떼어내려 해도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힘이 4배정도 강해 졌는데 어떻게 안 떨어질 수가 있는 거야! 이거 완전히 괴물이잖아! 헉, 야! 부비적 거리지마! 소름끼친단 말이야. 결국 미나의 부비부비 공격에 두 손 든 내가 가르쳐준 다고 해서야 미나는 떨어졌다. 무서운 것. 아무리 착한 공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만 시녀가 이럴 수 있는 거야? 하긴 가르쳐준다고 해도 이거 배우기가 좀 힘들어. 나중에 지가 알아서 떨어지겠지. 미나를 간신히 떨군 나는 보나인과의 대련을 신청했다. 아무리 상당한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고는 하지만 그냥 검을 휘두르는 것과 직접 싸우는 것은 천지차이다. 그렇기 때 문에 이 정도 가지고 이들을 가르칠 만한 실력이란 것을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집단에서 가장 강한 사람과 싸워 이겨서 내가 그들보다 월등한 실력이라는 것을 확 실히 주지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나중에 불만도 없을 것이다. 내 짐작대로 보나인은 펄펄 뛰었다. 비록 왕궁 기사단 중에서는 제일 뒤쳐지는 실력이 라지만 보통 기사에 비하면 뛰어난 실력을 지닌 그를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른 기사들도 반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보나인이 오히려 내 손에 완전 개박살 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왜 못할까? 선입견을 가지는 건 좋지 않다. 비록 보나인이 나보다 덩치고 크고 힘도 세 보인다지만 그건 겨뤄봐야 아는 거야. 그 들의 반대가 거세어지자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입을 열었다. "내가 보나인과 겨뤄서는 안 되는 이유가 뭐죠?" "당연하지 않습니까. 보나인이 지금은 저래 보여도 예전에는 꽤나 날리던 놈이었습니 다. 그런데 공주님이 직접 보나인과 겨루시겠다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방금 공주님께서 보여준 실력은 분명히 상당한 수준이었지만 대련은 그냥 검술을 펼쳐 보이 는 것과는 다릅니다. 다칠 수도 있습니다."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그리고 내가 언제 방금 그게 내 실력의 전부라고 했나 요? 당장 나랑 겨뤄요. 그렇지 않으면 로얄 기사단 훈련장으로 가서 아무나 잡고 대련 하자고 할 거예요." 결국 마구 우겨대는 내 고집을 꺽을 수 없었던 보나인은 대련을 받아들였다. 내가 로 얄 기사단에 가서 창피를 당하느니 차라리 부하인 자기 손에 지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고 받아들였음에 틀림없었다. 뭐 로얄 기사단이랑 싸워도 내가 이길 게 뻔하지만 그 대들의 충성심에 답하는 뜻으로 전력을 다하지. 그런 의도가 아니어도 처음에는 강하 게 나갈 필요가 있었다. "공주님, 힘드시면 언제든지 그만두셔도 됩니다."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마지막 당부를 마친 보나인이 목검을 집어들고 자세를 취했다. 아 예 처음부터 몰아붙여서 빨리 끝을 낼 생각인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장 난이 아니었다. 보통 사람이 그 기운을 정면으로 받는다면 제대로 서있지도 못할 정도 였다. 좋아. 그렇게 나와야지. 그래야 내가 이겨도 나중에 다른 말이 없겠지. 위대하 신 주군의 능력을 보여주지. 나는 말없이 보나인을 응시했다. 단번에 끝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보나인 역시 그렇게 호락호락한 자는 아니라 단번에 끝내기 위해서는 집중해야 했다. 손끝으로 딱딱한 목 검의 감촉이 느껴지자 지금까지 짓고 있던 미소가 싹 사라졌다. 비록 목숨을 걸고 싸 우는 건 아니지만 전투에 미소 같은 건 필요 없기 때문이다. 보나인의 기운에 몸이 저절로 반응해서 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달라진 내 모습에 사 람들이 동요했지만 현재 내 모든 관심은 앞쪽에 서 있는 보나인에게 쏠려있었다. 보나 인도 내가 만만치 않다고 느낀 것인지 강하기만 하던 기운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보나인의 회색 눈과 내 눈이 마주치면서 우리들 사이의 공기가 점점 심상치 않게 변했 다. 단번에 끝내는 거야. 단번에. 누구도 감히 토를 달지 못할 정도의 확실한 승리가 필요했다. 먼저 움직인 사람은 내가 아니라 보나인이었다. 아직 이 몸으로 전투해본 적도 없으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보나인은 빠른 속도로 내게 접근해왔고, 그 기 세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다른 사람이 파고 들 수 없게 방어하고 있었지만 약간 왼 쪽이 허술했다. 보나인의 공격을 피하려면 피할 수도 있었지만 한 번에 끝내기로 작정한 나는 그대로 보나인을 향해 뛰어들었다. 비록 진짜 내 몸처럼 재빠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인간들 이 보기에는 상당한 속도였다. 게다가 보나인은 달려오던 속도가 있어 더욱 빠르게 보 였을 것이다. 보나인이 목검을 휘둘러 접근을 막았지만 슬쩍 옆으로 목검을 피한 후 멈추지 않고 보나인의 왼쪽으로 파고들었다. 체구가 작은 여자였기에 보나인의 품으로 쉽게 파고들 수 있었던 나는 목검을 휘둘렀 다. 아무리 목검이라도 목에 정통으로 맞으면 아플 것이 뻔했기 때문에 목덜미 바로 근처에서 검을 멈췄다. 무표정한 얼굴로 보나인을 올려다보자 낭패한 표정을 짓고 있 었다. 말없이 계속 쳐다보자 보나인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졌습니다." 그제야 목검을 내린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위, 위험했다. 하마터면 검 을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칠 뻔했네. 긴장해서 그런가? 다음부터는 조심해야지. 잘못 하면 부하 잡을 뻔했네. 내가 이길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지 모두 경악한 모습이었다. 쯧, 그러게 이런 건 재봐야 아는 거야. 순식간에 결판이 나자 나와 보나인의 대련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놀라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멋, 뭐야, 그 눈들은? 나의 위대한 능력에 너무 감탄해서 말도 못하고 있구나. 하 긴 내가 좀 잘나긴 했지. 오홋홋호~." 아니, 이럴 때 감격, 감탄의 눈빛을 보내지 못할망정 그 황당함과 어이없음이 혼재하 는 눈빛은 뭐지? 왜 식은땀을 삐질 삐질 흘리고 있는 거지? 나는 '너희들이 왜 이러는 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당당히 그들을 보았고, 그들이 흘리던 식은땀의 양은 방금 전 보다 많아졌다. 잠시 후, 패닉 상태에서 벗어난 보나인이 입을 열었다. "후, 아주 놀랐습니다. 설마 공주님이 그렇게 강하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정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보나인을 제압하신 겁니까?" "보나인이 봐준 것 같지는 않던데 굉장합니다!!!" "요즘은 공주 수업으로 검술도 배우는 모양이지요?" 그러나 누구보다 열렬한 반응을 보인 건 내 움직임을 모두 지켜본 기사들이 아니라 바 로 미나였다. 내가 이 걸 다시 떨어뜨리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는 따로 말하지 않 겠다. 으휴, 이 웬수 같은 것. 모든 사람들이 내 실력에 감탄해 마지않자 나는 슬슬 본론에 들어갔다. 앞으로 내가 훈련을 담당하겠으니 불만이 있는 사람은 나와서 겨루자는 말을 했더니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혹시라도 진짜로 나오는 사람이 있을까봐 아주 약간, 정말 약하게 살기를 내 보였을 뿐이다. 정말 아주 약하게. 정말이다. 미나가 내 살기에 놀라 그 자리에 주저 앉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주저앉지 않았다. "그럼 모두 찬성인 거죠?" "공주님, 그렇게 죽일 듯이 노려보지 않으셔도 모두 찬성할 것 같은데요. 모두들 그렇 지 않아?" "물론이지. 조금이라도 실력 있는 사람에게 배우는 건 반길만한 일이지. 그동안 가르치는 일은 보나인이 맡아서 했기에 그가 조금은 기분 상해하지 않을까,하 고 흘깃 보나인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좀 전에 있었던 대련을 골똘히 생각하느라 정신 이 없었다. 공주님이 먼저 움직이는 것을 기다려야 했나?, 그 때는 이렇게 움직였어야 했나, 하면서 혼자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에구, 귀여워라. 가서 머리를 쓰다듬어주 고 싶어.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내 나이의 2배는 넘어 보이는 다 큰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으 면 상당히 부자연스러운 그림이 연출될 것 같아 그 것만은 꾹 참고 가까이 다가가 잘 못된 점을 지적해주었다. "보나인, 거기에서는 말이죠 검을 휘두르기보다는...... 상대가 파고들면 뒤로 피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달려드는 게 좋아요. 그럼 상대가 타이밍을 잘 못 잡거든요......." "그렇군요. 그럼 여기서는 이렇게 하는 게 좋겠군요. 그런데 말이죠 이상한 게 있는데 ......" ------------------------------------------------------------------------------- 아, 전투하는 모습은 멋지게 쓰고 싶었는데. 마리엔의 강함을 강조하려고 한 방에 끝낼려고 하다보니 이상하게 써진 것 같아요. . . . 어디서 그따위 변명을...--;;; 전투신 잘 쓰시는 분들이 부러워요. 나두 글 잘 쓰면 좋을텐데. 이상 한탄만 하다가는 모험가입니다 #11-무도회 나는 이주일 동안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기사들을 각자의 특성에 따라 A, B, C, D, E 조로 나누랴, 조장 뽑으랴, 각 조에 맞는 훈련 방침을 짜랴, 내 수련에 집중하랴, 덤으로 플라워 드러(Flower Draw)를 배우겠다고 우기는 미나에게 기초훈련부터 시키랴 .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판이었다. 그래도 기사들이 내 지시대로 잘 따라줘서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하루만에 힘들다고 포기할 줄 알았던 미나도 제법 열심히 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이들의 훈련 방침은 대강 이렇다. 제목: 제 4기사단 엘리트 부대 만들기 부제: 제 1기사단을 이기자!!! < A조 > -교과서적인 검술을 사용하는 전통파로 조장은 가스톤이다. -기본이 충실히 되어있기 때문에 힘, 스피드, 기술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적 인 검술을 구사. -그러나 특출 나게 뛰어난 부분이 없는 게 단점. -어느 한 쪽을 집중적으로 키우는 것은 지금까지의 검술을 망가뜨릴 수 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수준을 올리는 게 좋을 것 같음. < B조 > -강한 힘을 앞세워 상대를 몰아붙이는 파워파로 조장은 보나인이다. -전원이 바스타드 소드나 양손검을 사용함. -1대 1에서는 강한 면을 보이지만 기술이 떨어짐(보나인 제외) -힘을 이 상태로 유지하면서 기술을 보완해야 할 것으로 보임. < C조 > -주로 치고 빠지는 작전을 많이 사용하는 스피드파로 조장은 죠안이다. -몸놀림이 빠르기 때문에 단기전에는 유리하지만 계속 빠른 스피드로 움직이다보면 체 력이 떨어져 장기전으로 가면 불리해짐. -끝까지 스피드를 유지하는 게 관건. -장기전에서도 버틸 수 있는 체력을 만드는 것이 중요. < D조 > -변칙기술을 사용해서 상대의 허를 찌르는 기술파로 조장은 미첼로다. -각종 검술을 다룰 수 있고 제법 머리도 굴러감. -좋은 말로는 '응용능력이 뛰어나다', 나쁜 말로는 가만히 놔둬도 될 검술까지 바꾸려 는 걸 보니 '개멋만 들었다' -한 가지 검술만 집중적으로 가르쳐 마스터하게 하는 것이 중요. -플라워 드러가 적당할 듯. 화려하지 않은 검술은 자신들의 미학에 어긋난다고 주절거 리는 걸 보니 딱 맞음. < E조 > -검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초보자들이 모인 집단. -조장은 미나, 조원도 미나 혼자. -다른 거 필요 없다. 오로지 기초 훈련만 있을 뿐이다. 내 나름대로 보완해야겠다고 생각한 점을 보고서로 만들어 여기에 맞춰 조별 훈련을 시켰다. 당연히 훈련하는 것을 보고 틀린 점을 고쳐주어야 되기 때문에 하루종일 훈련 장에서 지내야만 했다. 훈련을 위해 손목 보호대와 무릎 보호대에 마법을 걸어 무게를 늘렸더니 비리비리했지만 나도 하는 마당이라 불만은 할 수 없었다. 미나는 검을 잡 아본 지 몇 일 되지 않은 초보자라 보호대차는 것은 면했지만 그나마도 헥헥거리고 있 었다. 모든 사람을 나 혼자 훈련시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주로 각 조의 조장만 나와 대련을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조장이 지도하는 식이었다. 방금도 나와의 대련을 끝마 친 미첼로가 흐느적거리며 자신의 조원들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조원들이 모두 미첼로에게 몰려들어 뭐라고 시끄럽게 떠드는 걸로 봐서 그들도 나와 대련을 하고 싶 은 모양이지만 내 몸은 하나 뿐이라 그들까지 직접 훈련시켜줄 수 없었다. 흑, 모두 미안해. 내가 너무 잘나서. 미첼로를 마지막으로 오늘의 대련을 모두 마친 나는 열심히 하라는 말을 남기고 궁으 로 돌아갔다. 평소라면 남아서 나 혼자 훈련을 하던지 구석에 쪼그려 앉아 마나를 쌓 겠지만(이 무식한 인간들은 조는 것이라 주장하지만) 캐롤이 오늘은 빨리 오라고 나가 기 전에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이다. 등뒤로 기사들이 뭐라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늦게 도착했다가는 캐롤에게 무 슨 잔소리를 들을지 몰라 발걸음을 서둘렀다. -------------------------------------------------------------------------------- 마리엔이 오늘은 일이 있다며 일찍 돌아가자 제 4기사단은 그럴 리 없지만 혹시라도 마리엔이 자신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다시 올까봐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야, 야. 가셨냐?" 제 4기사단에서 눈이 가장 좋은 아인은 마리엔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후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왠지 마리엔이 숨어 있다가 무슨 말이라도 하면 '오홋홋호~, 너희들 딱 걸렸어!' 라며 나타날 것만 같은 불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응. 이제 안 보이셔. 이제는 맘놓고 말해도 돼." 마리엔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한 사람들은 저주받은 운명의 조장들이 하고 있 는 몰골을 보면서 동정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조장이 되지 않은 것을 감사 드리며 신 께 기도를 드리는 자들로 간혹 보였다. 네 명의 조장들의 얼굴은 멀쩡했다. 그러나 신 음하는 모습과 일그러진 표정으로 보아 옷에 가려 보이지 않는 부분이 어떻게 됐는지 는 안 봐도 뻔했다. 자신들의 주군이자 제 1공주인 마리엔 공주는 참으로 악랄하게도 때리면 맞은 티가 팍팍 나는 얼굴은 절대 건드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부분만 골라서 패고 있었다. 그건 대련을 빙자한 폭력이라는 게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불쌍한 우리 조장. 오늘도 복날에 개 맞듯이 맞았구나. 내가 조장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토록 감사할 줄은 몰랐다." "요새 난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맞는다는 말이 뭔지 절실히 실감하고 있다. 저 가녀린 몸으로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게다가 사랑의 매라는 말을 하면서 그 번뜩이던 눈. 난 무슨 일이 있어도 공주님과 대련하지 않을 거야." "동감이다. 참, 미리 준비해놨던 약초가 어디 있더라? 이 근처였는데." 한동안 조원들의 격려를 받으며 약초를 씹던 네 사람(가스톤, 보나인, 조안, 미첼로) 은 다시 검을 잡았다. 조장이라는 직분을 가진 불쌍한 이 네 명의 사나이들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내일이라도 덜 맞기 위해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그래도 첫 날에 비 하면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지 않는가. 첫 날에는 다른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야만 간 신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반해 지금은 혼자서도 움직일 수 있었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은 맞으면서 배워야 빨리 배운다는 마리엔 공주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긴 하지만......그래도 너무 아프다.' '남자로서의 자존심이...체면이...단장으로서의 권위가.... 크흑. 어떻게 덜 맞는 방 법이 없을까?' '정말이지 공주님은 괴물이야. 어떻게 전력으로 도망쳐도 따라붙어서 팰 수 있는 거지 ? 나도 그 정도 스피드를 낼 수 있다면 덜 맞으련만.' '마리엔 공주님은 너무하셔. 그런 깜찍한 얼굴로 사람을 이렇게 두들겨 패다니. 아~ 그래도 얼굴은 건드리지 않으시니까 좋지만.' 참으로 눈물겨운 생각을 하는 네 사람이었다. 오로지 생각하는 거라고는 어떻게 해야 덜 맞을까, 어떻게 맞아야 덜 아플까, 라는 생각뿐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 날 의 대련을 다시금 되새겨보는 것은 지금은 느끼지 못하지만 장차 실력 향상에 크게 도 움이 되는 것이다. 눈에 불을 켜고 연습에 몰두하는 조장들과 마찬가지로 조원들도 자신의 모든 힘을 다 해 훈련에 참여했다. 가장 뒤쳐지는 조는 실력 향상을 위해 특별히 날을 잡아 그 조 전원과 대련을 하겠다는 마리엔의 배려 아닌 배려 때문이었다. 3개월 후에 모든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 '글로리 라이언의 기적' 또는 '제 4기사단의 반란' 이라고 불리는 사건은 이런 눈물겨운 사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도대체 무슨 일로 오라고 한 거지? 의문을 안고 궁으로 돌아간 나는 도착하자마자 캐 롤의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다른 날은 캐롤의 눈을 피해 몰래 숨어들어 재빨리 샤 워를 하곤 했는데 오늘은 재수 없게도 캐롤이 궁 앞에서 턱하니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 그동안 내가 엉망이 돼서 들어와도 눈감아주던 쟈니가 옆에서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었다. 캐롤은 처음에는 땀에 푹 절어서 들어오는 나를 보고 입을 딱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 지 못했다. 부지런한 내 모습에 감탄했구나. 하긴 시시하게 무도회에 나가서 춤이나 추는 다른 공주에 비하면 얼마나 훌륭한 모습이야. 그러나 내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캐롤의 잔소리가 터졌다. "세상에! 세상에! 이게 무슨 꼴입니까? 바지를 입으신 것도 모자라 뭘 하도 다니시기 에 이런 모습으로!! 미나 넌 도대체 공주님을 말리지 않고 뭘......미나! 넌 또 왜 그 런 모양이야?! 도대체 뭘 하고 있으셨기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계시는 겁니까?" "그게......산책을 했는데 좀 과격하게 하다 보니 이렇게 됐어. 그렇지, 미나?" "네! 산책하고 왔어요!" 캐롤은 '나 지금 그 말 믿지 않소' 라는 얼굴로 나와 미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나와 미나가 당당한 얼굴로 계속 산책을 했다고 주장하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 였다. 별 수 없이 속아준다는 뜻이다. 캐롤이 잔소리는 많아도 이래서 좋다니까. 캐롤의 손에 끌려 목욕탕에 들어간 나는 두 시간 넘게 목욕을 한 후에야 겨우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목욕은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지만 마사지하고 피부 미용에 좋다는 것을 발라보느라 상당히 시간이 지체되었다. 캐롤이 아름답다고 주장하는 거 치적거리는 드레스까지 갈아입자 캐롤이 드디어 본론에 들어갔다. "제가 오늘 공주님께 일찍 돌아오시라고 하신 건 바로 이 것 때문입니다. 이리로 가져 오너라." 캐롤의 말에 시녀들이 수많은 상자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가져온 붉은 색 의 작은 상자까지 합쳐서 모두 수십 개는 될 것 같은 상자가 내 앞에 놓였다. "이게 다 뭐죠?" 내가 정체불명의 상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묻자 캐롤이 내 의문을 풀어주었다. "이건 플로라 공주님의 생일 파티에 입고 가실 드레스와 악세사리입니다. 전에 주문했 었는데 얼마 전에 완성이 돼서 어제 도착했습니다. 이 중에서 공주님께 가장 어울리시 는 드레스와 악세사리를 고를 예정입니다." 저게 조금? 캐롤 눈에는 저게 조금으로 보인단 말이야? 옷장에 쌓인 게 드레스고, 악 세사리 상자 안에서 뒹굴고 있는 게 모두 악세사린데 뭐하러 저걸 다 주문한 거야? 기 가 막혀서 수북히 쌓인 상자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캐롤은 내 시선을 잘못 이해하고 변명을 했다. "공주님께서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셔서 전보다 적게 주문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으시 면 다시 주문할까요? 무도회에 맞출지는 모르겠지만 힘써보면 가능할 겁니다." 뭐시라! 저게 줄어든 거야? 마리엔 그 것이 미쳤었구만. 나라를 말아먹으려고 작정한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사들일 수가 없어. 국왕은 뭘 한 거야? 딸내미 가 이 모양인데도 예뻐하기만 했단 말이야? 나 같으면 두들겨 팬다. 저 것이 줄어든 것이란 말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나는 캐롤이 시녀들에게 당장 디 자이너들을 부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잠깐! 내가 놀란 건 양이 너무 많아서야. 그러니까 더 주문할 필요 없어. 예전에야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많아. 주문해버린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는 주문하려 면 한 벌만 주문해. 그렇지 않아도 드레스가 쌓여있는데 저런 낭비라구. 낭비!" 캐롤은 잠시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 가 그렇게 기특한가? 이게 정상 아니야? 아무튼, 좋은 인상을 보여준다는 것은 좋은 일이기 때문에 오늘도 점수 땄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나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아주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럼 지금부터 이 것들 중에 뭐가 어울리는지 한번 입어보 셔야 되겠습니다. 설마 이 비싼 것들을 입어 보시지도 않고 아무 거나 입으시겠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시겠죠?" 캐롤은 마족인 내가 봐도 악마는 이렇게 웃어야 한다는 예시를 드는 것 같은 참으로 악마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갑자기 한기가 든다. 왠지 오늘 이후로 드레스가 더욱 싫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은 왜 일까? 플로라 공주의 생일 파티가 열리는 날, 참석하게 된 계기에 어떻든 처음으로 무 도회에 참석한다는 생각에 약간 마음이 들떴다. 소설에서 많이 읽어 봤는데 진짜도 소 설하고 똑같을까? 멋진 남자와 첫 눈에 사랑에 빠진다는 시덥지 않은 내용들이었지만 남의 사랑놀이를 지켜보는 것도 상당히 재미있지. 방해할 때의 쾌감도 끝내주고. 일주일 동안 수많은 드레스와 악세사리를 맞춰보느라 오후에만 나갔던 훈련장을 오늘 은 나갈 수 없었다. 미나도 옆에서 시중을 드느라 연습을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무도회는 저녁 6시에 열리기 때문에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지만 시녀들은 분주하게 움 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바쁘게 오가면서도 얼굴은 환한 게 어째 나보다 더 들떠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나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그동안 내가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은 것에 대해 이상한 소문이 돌았었다고 한다. 독약의 영향으로 바보가 돼버렸네, 자신이 데미나 공주나 플 로라 공주에게 미치지 못하는 걸 깨닫고 조용히 지내고 있다든지, 저주를 받아 추녀가 됐다는 소문까지 내용도 가지각색이었다. 캐롤이 입단속을 시켜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지만 이런 소문을 듣고 내 궁에서 일하는 시녀들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한 번 은 이런 소문을 쑥덕거리던 다른 궁의 시녀와 크게 싸움이 날 뻔했다고 한다. 시녀들이 나를 위해서 싸움까지 했다는 사실에 기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그동안 미소를 뿌리고 다닌 보람이 있었군. 그런데 그런 소문이 났었단 말이지. 누가 퍼뜨렸 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오펠리우스 왕비말고 누가 있겠어. 하지만 오늘 이후로 그런 소문은 깨끗이 사라질 것이다. 비록 오늘 무도회에 페드인 왕국의 실세들은 참석하지 않는다지만 제법 많은 귀족들이 참석할 것이다. 여기서 잘 보일 필요가 있지. 내가 결코 예전의 마리엔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해주겠어. 날 우스운 상대로 봤다면 큰 코 다칠걸. 귀족들을 놀라게 만들 물건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금색의 보석상자 안에 담긴 물건 을 보고 있자니 이 것을 보고 경악할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상자 안에 있는 물건은 플로라 공주에게 줄 축하 선물이었다. 원래는 무도회 시작 전에 건네주는 게 관례이지만 귀족들의 주목을 받기 위해서는 직접 전해주는 게 좋았다. 이 걸로 오늘 무도회는 발칵 뒤집히힐 것이다. 그저 그런 선물이 아니었다. 마계에서 가져온 보물 중에서 레디안으로 만들어진 목걸 이와 그 목걸이와 한 세트인 반지를 플로라 공주에게 선물할 예정이었다. 레디안은 홍 염의 눈물이라고 불리는 팔각형의 결정에 타오르는 듯한 붉은 색의 보석이었다. 루비 와 같은 붉은 색의 보석이지만 그 강렬한 색은 루비와 비교할 수 없었다. 레디안에 비 하면 루비는 색이 바랜 돌멩이에 불과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보석 안에서 불꽃이 춤 을 추며 일렁이는 착각이 들게 만드는 이 진귀한 보석은 같은 크기의 다이아몬드 200 개의 가격과 같았다. 그런데 내가 선물로 건네줄 목걸이는 지름이 7cm가 넘는 레디안이 정중앙에 박혀있고, 그 주위를 불꽃모양의 백금 세공이 감싸고 있었다. 그 옆에는 작은 다이아몬드들이 촘촘히 박혀 레디안의 강렬한 붉은 빛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목걸이와 한 세트인 반지는 레디안으로 링을 만든 특이한 반지였다. 그러나 강화마법이 걸려있어 깨질 염려는 없었다. 이 정도 보물이라면 한 나라의 왕이라도 구하기 힘든 보물이었다. 이런 선물을 덥석 준다면 사람들은 나의 어마어마한 재력에 놀랄 게 뻔했다. 그리고 그 것이 내가 노리 는 것이었다. 어차피 가죽 주머니 안에는 이 목걸이와 반지보다 훨씬 좋은 보물들이 잔뜩 있기 때문에 플로라 공주에게 선물로 준다고 해도 아깝지 않았다. 여자 치고 보석 좋아하지 않는 여자 없으니 플로라 공주에게 선물을 건네면서 따뜻한 말을 조금 해주면 끔뻑 넘어오겠지. 덤으로 아리란드까지 넘어오면 더욱 좋고. 무도회가 시작할 시간이 가까워지자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고심 끝에 고른 드레스를 입었다. 소설에서 여신이 입고 나타나는 옷과 비슷하게 생긴 옷으로 위아래 모두 약간 씩 주름이 있어 내가 움직일 때마다 나풀거렸다. 소매부분은 주름이 없었지만 폭이 넓 어 전체적으로 하늘거리는 느낌의 드레스였다. 하얀 색의 드레스는 심플하면서도 피부 에 닿는 감촉이 부드러워서 마음에 들었다. 비록 은실로 드레스 자락과 소매 끝에 수가 놓여져 있는 것을 제외하면 장식이 전혀 없었지만 드레스 위에 걸치는 숄이 워낙 화려해서 단순해 보이지 않았다. 숄은 재질을 알 수 없는 옷감으로 만들어졌는데 반짝반짝 빛나는 게 마치 별빛을 뿌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숄의 가장자리에 아주 작은 보석들이 박혀있어 움직일 때마다 사각거 리는 소리가 났다. 머리는 길게 늘어뜨려 붉은 색의 보석들이 박혀있는 서클렛을 썼고, 백은으로 만들어 진 목걸이와 팔찌를 찼다. 이보다 더 화려한 드레스와 악세사리들도 많았지만 그동안 마리엔이 사치스럽고 낭비가 심하다고 소문이 났으니 이 기회에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심산이었다. 그리고 화려한 이미지보다는 신비한 이미지가 뭔가 더 있어 보이지 않는가. 오늘의 컨 셉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한 여성이 되겠습니다. 화장도 연하게 해서 신비한 부위 기가 물씬 풍겼다. 그러나 입술만은 선명한 붉은 색이었다. 흰색과 은색으로 신비함을 강조하고, 그렇다고 너무 신비해 보이면 사람들이 거리감을 느끼니까 붉은 색으로 약 간 변화를 줬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신비하면서도 매혹적 인 분위기의 소녀가 나를 보면서 빙긋 웃고 있었다. "아주 마음에 드는 걸. 모두 수고했어. 어? 다들 표정이 왜 그래? 어디 이상해?" "......." "........???" 시녀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치장을 마친 나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내가 너무 아름 다워서 반했나? 음, 이건 내가 생각해도 너무 하는군. 갈수록 내 성격이 이상해지는 것 같단 말이야. 자신감이 많은 건 좋지만 요즘은 자신감이 너무 넘쳐나는 것 같단 말 이야. "꺄아아! 공주님! 너무 너무 아름다우세요!!" "저희가 해드린 거지만 너무 잘 어울리세요!" "오늘 무도회에서 마리엔 공주님이 가장 아름다우실 거예요!!!" 자신감이 넘쳐도 상관없겠어. 같은 여자들이 이렇게 꺄악, 거리는데 남자들이야 오죽 하겠어. 꺅꺅거리는 시녀들의 옆에서 캐롤까지 매우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 덕였다. 물론 가장 소란스러웠던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이 미나였다. 캐롤이 있어서 달라붙지는 않았지만 그 뜨거운 시선만으로도 충분히 식은땀이 흘렀다. 아, 너무 예뻐 도 문제라니까. 무도회가 시작하기 전에 준비를 모두 끝마쳤지만 일부러 뜸을 들이면서 앉아 있었다. 원래 주인공은 늦게 등장하는 법이다. 그리고 중간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모두 쳐다볼 것 아닌가. 주목은 확실히 받는 게 좋지. 무도회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 후에 도 1시간 동안 선물이 담긴 보석 상자를 열었다 닫았다 하던 나는 이제 올 사람들은 다 왔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무도회에 가지 않고 버티고 있자 안절부절못 하던 시녀들도 얼굴이 펴졌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오늘 무도회는 꼭 참석할 거라 구. 오늘은 귀족들에게 마리엔이 변했다는 것을 알리는 중요한 날이 될테니까 말이야. 한 손에 봉(원래는 창이지만)을 들고 보석함을 미나의 손에 들린 후에 시종의 안내를 받아 무도회가 열리고 있는 홀로 향했다. 홀까지 가는 동안 곳곳에 지키고 서 있는 사 람들의 모습이 낯익은 얼굴의 사람들이 아니라 낯선 기사들이었다. 당연한 소리였다. 이 곳은 내가 머무는 궁도 아닌데 내가 저 사람들을 어디서 봤다고 낯이 익겠는가. 무도회는 처음 참석하는 터라 지금 가고 있는 길은 익숙하지 않은 길이었다. 그러나 대놓고 이리저리 둘러보는 것은 조금 곤란한 관계로 눈동자만 재빨리 굴려 주변을 살 폈다. 복도에 서 있던 기사들이 내가 지나가자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것을 본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여 화답했다. 기사들은 잠시 내가 무슨 짓을 했는 지 생각하는 얼굴이더니 곧 내가 자신들의 인사에 대한 화답을 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기겁했다. 흠,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과는 반응이 전혀 딴판이군. 만약 여기 있던 사람이 제 4기 사단 중 한 사람이었다면 넉살좋게 내 인사에 답했을텐데. 바로 이렇게 말이지. "하하하, 무도회 가시는 겁니까? 제가 에스코트해드릴까요? 네? 경비나 열심히 서라구 요? 너무하세요. 전 공주님이 너무 아름다우셔서 잠시라도 곁에 있고 싶은 마음뿐이었 는데 제 마음을 몰라주시다니 너무하세요." 처음에는 반사적으로 인사를 했지만 이 것도 이미지 쇄신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 는 생각에 열심히 기사들의 인사에 답했다. 기사들의 수가 너무 많아 중간에 그냥 포 기할까, 도 했지만 불굴의 의지로 무도회가 열리는 홀 앞에 도착할 때까지 내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 무도회는 한창 분위기가 달아올랐는지 밖에까지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들어보니 제법 많이 보였나보군. 하긴 관중은 많을수 록 좋지. 왕비도 이 안에 있으렷다. 오늘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한 번 보도록 할까 나. 호호호~! 나는 무도회장에 들어가기 전에 시험삼아 살짝 미소를 지어보았다. 주변 사람들의 얼 굴이 빨개지는 것으로 보아 효과만점인 것 같았다. 그러나 너무 효과가 좋았는지 시종 이 내가 온 사실을 알릴 생각은 하지 않고, 멍하니 내 얼굴만 쳐다보는 상황을 초래하 고 말았다. 결국 나는 시종에게 사람이 온 것을 알리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라고 말하 기로 했다. 그러나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뒤쪽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요! 언제까지 마리엔 공주님만 보고 있을 거예요? 빨리 공주님이 왔다는 걸 알리 라구요!" 미나는 귀여운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멍해있는 시종을 노려보면서 소리쳤다. 애가 갈 수록 드세지는 것 같단 말이야. 교육을 잘못 시켰나? 예전에는 내 앞에서는 말도 제대 로 못하는 순진한 애였는데. 덕분에 시종이 정신을 차렸지만. 미나야, 잘하긴 했는데 그렇게 노골적으로 칭찬해주세요, 라는 얼굴로 보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가 좀 쑥스럽지 않겠니. 남의 눈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미나 때문에 머리가 조금 아파 왔지 만 때마침 시종이 내 등장을 알렸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 다. "마리엔 오페나 드간 페드인 공주전하 드십니다!"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내 이름을 들으면서 생각한 것은 역시 길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 각해도 이름이 길단 말이야. 그런데 저 남자, 여기 오는 사람들의 이름을 전부 말하나 ? 여기 오는 사람들의 이름은 최소한 3자 이상일텐데. 한두 명도 아니고 고생이 많군. 저러다 내일 목소리 안 나오는 거 아냐? 응? 근데 내가 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걱 정하고 있는 거지? 홀의 문이 열리자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했을까, 고민하던 나는 그런 생각을 머릿속 에서 지워버렸다. 아무렴 어떤가. 세상 편하게 살자고. 무도회장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홀은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 콩알처럼 보일 정도 로 넓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검은색의 바닥은 홀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칠 정 도로 반들반들했고, 바닥에 물이라도 있으면 당장 넘어질 것 같았다. 하얀 대리석 기 둥이 여기저기 서있고, 그 기둥을 페드인 왕국의 문장이 그려져 있는 금색의 커튼이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춤을 추는 공간 뒤편으로는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호화롭게 하려진 식탁들이 여러 개 있었다. 홀의 좌우로는 각각 남자와 여자가 쉴 수 있는 휴식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곳 역시 상당히 넓었지만 홀에 비하면 아담하게 보이는 넓이였다. 휴식 공간의 입구에는 커튼을 달아 밖에서 안을 볼 수 없도록 만들었고, 조명도 은은해서 편안히 쉴 수 있는 분위기였다. 휘황찬란하군. 사람들이 입고있는 옷도 다 번쩍거리고 말야. 무도회장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나의 등장에 술렁이고 있었다. 역시 중간 에 들어와야 시선을 끈다니까. 어라, 저 쪽에 오펠리우스 왕비가 저기 있군. 오펠리우 스 왕비를 발견한 나는 방긋 웃으면서 그 쪽을 향해 걸어갔다. 오펠리우스 왕비 주변 으로는 모르는 얼굴들이 잔뜩 모여있었다. 오늘은 국왕이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이 곳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오펠리우스 왕비였다. 굳이 인사를 할 필요는 없었지만 윗사람에게 예의바른 사람이란 설정은 다 른 사람들 눈에는 좋은 모습으로 보인다. 내가 오펠리우스 왕비에게 다가가자 사람들 이 더욱 술렁이기 시작했다. 예전에 식당에서 있었던 일이 소문이 나긴 했지만 실제로 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대부분이 헛소문으로 치부해버렸던 것이다. 오펠리우스 왕비는 내가 자신의 앞까지 걸어오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지만 '요 것이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지, 아 마. 자기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으면 가장 신경 써야하는 건 바로 눈이 다. 특히 사람들의 마이너스적인 감정에 민감한 마족 앞에서는 주의에 또 주의를 해야 한다. 왕비의 눈은 짙은 의심의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모르는 척 하고 입을 열었다. "그동안 건강하셨나요, 어마마마?" "...그래. 네가 염려해준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단다. 마리엔도 건강해 보여서 정말 기 쁘구나." 어머, 내가 언제 댁을 염려했다고 그래? 당신 바보지? 그러나 이런 생각을 드러내지 않은 채 미소를 지으면서 왕비와 대화를 나누었다. 내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그저 그런 내용이었지만 분위기가 워낙 화기애애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봤다면 정말 사이좋 은 모녀지간으로 착각할 판이었다. 전에는 '어마마마'란 말에 완전히 넋이 나갔는데 지금은 꽤나 능숙하게 대처하는군. 그래봐야 내 상대는 안 돼지만 일단 칭찬은 해주지. 왕비야 한 번 겪어본 일이라 담담 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예의범절을 지겹게도 따지는 귀족들이 다른 사 람들의 시선에 전혀 신경 쓰지 못하고 입을 쩌억 벌리고 생글거리는 나를 보고 있었다 . 이봐들. 그러다 침 떨어지겠어. 입 좀 다물어. 내 말이 홀 전체에 들릴 정도로 크지는 않았지만 나와 오펠리우스 왕비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 내가 한 말은 금새 홀 전체로 퍼졌다. 어느새 홀에 있던 귀족들은 자신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나와 왕비 쪽을 보고 있었다. 경악해하는 사람들의 시선 이 느껴지는군. 이럴 경우에는 사심이 있어 보이면 안되기 때문에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내 귀에 여기저기서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군." "마리엔 공주님이 왕비님을 어마마마라고 부르다니! 도저히 내 귀를 믿을 수가 없어!" "소문으로 듣긴 했지만 직접 보니 놀라운걸!" "어머머머!!!" 오늘 여기 모인 사람들의 숫자가 장난이 아니니 소문이 널리 퍼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 특히 수다를 떠는 것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귀부인들은 벌써부터 입이 근질거 리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에 레디안까지 꺼내면 소문이 아주 근사하게 나겠네. 귀족들의 반응에 신나하는 나와는 달리 오펠리우스 왕비는 상당히 곤혹스러워하고 있 었다. 나에 대해 좋은 소문이 나면 날수록 내 입지가 강해지기 때문이다. 나와 왕비는 속으로야 어떤 생각을 하던지 표면적으로는 참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대화를 마쳤다. 오펠리우스 왕비, 아직도 수련이 부족하네. 노려보는 게 느껴지잖아. 그런 건 혼자 있을 때 해야지. 쯧쯧. 뭐 왕비야 자기 혼자 놀라고 내버려두고 지금부 터는 이 무도회의 주인공을 만나러 가보실까. 주변을 살피던 나는 귀족 청년들에게 둘러 쌓여있는 플로라 공주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쪽에 있는 데미나 공주에 비해서는 그 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인기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플로라 공주를 발견한 나는 똑바로 플로라 공주를 향해 갔고, 지 날 때마다 사람들이 옆으로 물러서면서 길을 터 줘서 수월하게 목적하는 곳까지 도착 할 수 있었다. 플로라 공주는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나를 보고 있었는데 약간은 경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주변에 있던 귀족들은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 나와 플 로라 공주가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그럼 오늘의 메인 깜짝쇼를 시작하 도록 하지. 나는 플로라 공주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면서 축하 인사를 건넸다. "플로라, 생일 축하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친한 척하는 것도 상당한 기술이 요하는 일이었다. 우선 두꺼운 안면이 필수였고, 상대방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인상과 상대가 내 말을 듣다 보면 나와 친하다는 착각이 들게 만드는 화려한 화술도 중요한 요소였다. 나는 당연히 모든 걸 갖춘 자답게 별로 친하지도 않는 플로라 공주를 매우 친근하게 대했다. 사랑하는 동생을 보는 것 같은 언니의 모습으로 전혀 손색이 없는 훌륭한 모 습이었다. 내가 다정하게 나오자 한동안 눈을 깜빡거리며 쳐다보던 플로라 공주는 어 느새 경계하는 것을 잊고 금새 웃으면서 말했다. "고맙습니다. 축하하러 와주셔서 너무 기뻐요." 단순한 것. 이렇게 단순할 수가 있냐. 한 방에 넘어왔잖아. 경계심이 이렇게 없어서야 이 거친 세상 어떻게 살아갈 생각인지 원. 그만큼 내 연기가 뛰어나다는 뜻이겠지만 역시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답게 순순한 플로라 공주였다. 적어도 한 번쯤은 경계하는 것이 정상인데 플로라 공주는 어느새 긴장을 풀고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왠지 허무 한 생각이 들었다. 플로라 공주의 호감을 얻기 위해 어젯밤에 준비했던 말들이 다 소 용이 없어졌잖아. 그럼 그 말들 생각하느라 흘린 내 땀은 누가 보상해줄 거냐구! 한 번쯤은 의심해도 상관없는데. 쳇, 할 수 없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원래는 말로 좀 구슬리다가 선물을 줄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되면 중간 과정은 생략해 도 상관이 없었다. 미나에게 상자를 건네 받은 나는 한 번 정도는 의심해주는 게 예의 아냐?, 라는 별 웃기지도 않는 생각을 하면서 플로라 공주에게 상자를 건넸다. "플로라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특별히 준비한 거야. 마음에 들면 좋겠는데. 한 번 열어봐." "선물은 없어도 되는데 정말 고맙습니다." 플로라 공주는 내가 선물까지 준비해오자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살짝 상자를 열었다. 이제부터가 재미있는 순간이다. 나는 재빨리 플로라 공주의 얼굴 표정을 살폈 다. 상자 안을 확인한 플로라 공주의 눈동자가 급격히 커졌다. "이,이거......." 왕족이라 그런지 한 눈에 레디안을 알아보는군. 플로라 공주는 너무 놀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었다. 상자 안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 있던 귀족들도 플로라 공주가 상자를 연 것과 동시에 헛바람을 들이켰다. 내 날카로운 눈은 상자를 들고 있는 플로 라 공주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레, 레디안!!!" "이건 홍염의 눈물이잖아!!" "저 강렬한 빛! 틀림없는 레디안이야!" "저렇게 큰 레디안이 존재했단 말이야?!" 오~, 반응 좋고~. 그들의 입에서 나온 경악성들은 멀리 떨어져있던 귀족들까지 나와 플로라 공주 주위로 몰려들게 만들었다. 심지어 오펠리우스 왕비까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레디안이 인간 세상에서는 보기 힘들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는걸. 특히 여자들은 플로라 공주의 손에 들린 목걸이와 반지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 었다. 그동안 쌓아왔던 고귀하신 이미지가 모두 깨지는군. 이럴 때일수록 이미지 관리 에 신경을 써야한다는 걸 모르나보네. 감탄과 부러움, 시기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플 로라 공주는 어렵게 상자에서 눈을 떼고 내게 눈길을 돌렸다. 보석 하나에 감동하고 있군. 이럴 때 다정하게 대해주면 바로 넘어오게 돼있지. "마음에 드니, 플로라?" "이,이걸 저에게 주시는 거예요?" "물론이지. 플로라의 17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선물이야." "하,하지만 이렇게 귀한 걸........" 가지고 싶으면서 딴소리 하기는. 그러다 내가 '그래? 부담스럽다며 어쩔 수 없지' 라 면서 다시 가져가면 어쩌려고 그러냐? 누가 공짜로 뭘 주면 체면 따지지 말고 받아야 지. 인간들은 너무 그런 걸 많이 따진단 말이야. 준다고 할 때 냉큼 받아야지. 그러나 다시 가져가려면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받아서 어쩔 줄 모르는 플로라 공주를 향해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아. 내가 주는 거니까 이제 네 거야. 플로라의 머리색과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준 비한 건데. 마음에 안 드니?" "그럴 리가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이렇게 멋진 선물은 처음이에요." "그럼 다행이다. 애써 준비한 보람이 있었네. 그러지 말고 한 번 차보지 그러니? 목걸 이는 차기 힘드니까 내가 걸어줄게." 나는 목걸이를 상자에서 꺼내 플로라 공주의 뒤로 돌아갔다. 목걸이를 걸기도 쉽게 플 로라 공주는 머리를 위로 올려서 핀으로 고정시킨 머리를 하고 있었다. 이런 걸 바로 하늘이 돕는다고 하는 거지. 나는 남몰래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플로라 공주의 가는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앞으로 돌아와 보니 플로라 공주는 무척이나 기쁜지 얼굴 을 붉히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잘 어울린다면서 내가 아는 미사여구를 총동원해서 칭 찬해주었고, 주변에 있는 귀족들도 너무 너무 아름답다며 맞장구쳤다. 속이 거북해지 는 말도 적지 않았지만 얼굴에 철판은 깔고 그대로 들어주었다. 미리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보석의 위력은 대단했다. 플로라 공주가 눈을 초롱초롱 빛 내면서 쳐다보는 것은 물론이고 무도회장에 있던 귀족들이 갑자기 내 주위로 와글와글 몰려들기 시작했다. 왕비가 의혹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깨끗이 무시했다. 솔직히 자기가 뭘 어쩌겠어.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트집을 잡겠어? 시비를 걸겠어? 게 다가 보석의 위력과 나의 탁월한 연기에 힘입어 많은 귀족들이 내게 호감을 가지기 시 작했는데 이 상황에서 나선다면 스스로 무덤을 파기 밖에 더 하겠는가. 오펠리우스 왕비도 그 정도 사리판단은 하는지 나와 플로라 공주에게 떨어져서 가끔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는 것말고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았다. 얼마 후, 무도회장에 있 던 귀족들은 왕비와 데미나 공주가 있는 곳에 있던지, 아니면 나와 플로라 공주가 있 는 곳에 있던지 해서 두 편으로 나뉘었다. 뭐 이 구성이 장차 내 부하가 될 구성은 아 니지만 왕비의 속상하다는 시선은 나를 충분히 즐겁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플로라 공주는 존댓말 대신 '-요' 체로 말을 하기 시작했고, 언니라 는 호칭으로 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보석의 힘도 컸지만 내가 계속 친근하게 굴 면서 언니다운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리라. 어느새 친근하게 구는 플로라 공주의 모습에 귀족들이 두 공주님의 우애가 정말 부럽다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늘어놓았 다. 우애 같은 소리하네. 오늘 처음으로 이야기해봤는데 우애 같은 게 생길 시간이 어 디 있어? 댁들은 하루만에 우애가 생기나? 하지만 이런 생각을 전혀 드러내지 않은 채 나는 끝까지 동생을 아끼는 언니의 모습을 고수했다. 그러나 나는 무도회가 끝날 때까지 계속 남아있을 수 없었다. 신비한 이미지를 위해서 라는 생각도 없잖아 있었지만 무엇보다 얼마 후에 댄스 타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춤이라면 보는 것만으로 어질어질하고, 도대체 저렇게 빙글빙글 도는 행동을 왜 좋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무도회장을 빠져나왔다. 끝까지 남아있지는 않았지만 플로라 공주와 귀족들의 반응으로 보아 이미지 쇄신을 위 해 자행되었던 오늘의 계획은 대성공이었다. 이제 남은 건 제 4기사단이 글로리 라이 언에서 1기사단을 이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럼 가만히 있어도 내 명성은 널리 퍼지게 돼있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정말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재수가 너무 없어서 제 4기사단이 6년 연속 꼴등이라는 참으로 명예로운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면 망신도 그런 개망신이 없었다. 그럼 가장 좋아할 사람은 바로 오펠리우스 왕비였고, 위로한답시고 남의 속을 팍팍 긁 어댈 것이 분명했다. 아니, 오펠리우스 왕비가 비웃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내 자신이 남세스러워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을 것이다. 최소한 꼴등은 면해야 그래도 내 체면 이 선다. 작년에 비하면 실력이 향상되었다는 핑계를 들면 되니까. 그러나 꼴등은 무 슨 일이 있어도 용서할 수 없는 대역죄였다. 내일부터 특훈이다! 기다려라! 내가 주먹을 불끈 쥐고 결심을 다지는 동안 제 4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오한에 몸을 떨었다고 한다. #12-건국 기념일 다시 한번 제 4기사단의 훈련은 매우 중요하며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때로는 강 압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린 나는 기사들의 훈련을 위 해 내 애창을 하얀 천으로 닦았다. 드래곤 본이니 강도는 걱정 없을 것이고 어떻게 때 려야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플까? 시험삼아 창을 손에 들고 몇 번 휘둘러보니 오 늘따라 손에 딱딱 붙는 게 느낌이 아주 좋았다. 어제 무도회에서 있었던 일이 하루만 에 근사하게 소문이 퍼진 것을 직접 내 귀로 확인해서인지 컨디션도 좋았다. 오늘은 어떻게 상대해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처음에는 내가 아 무리 봐줘도 공격은커녕 제대로 피하지도 못했다. 그 날 나는 모두 피하는 것도 어렵 지만 모두 맞는 것도 그 것 못지 않게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연이라도 한 대도 피하지 못하다니.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이룬 성장은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처음에는 정말 먼지 나게 맞더니 요새는 그래도 제법 피한다니까. 기특한 것들. 이래봬도 나는 평화를 사랑한다. 가끔 말이 통하지 않는 녀석을 몇 번 쓰다듬어주는 것은 내 나름대로 친해보자는 의도이기 때문에 폭력이라고 주장하는 말도 안 되는 소 리는 깨끗이 무시하고 살아왔다. 그런 내가 도중에 재미가 들려서 기사들을 패는 건 절대 아니다. 단지 그들의 빠른 실력 향상을 위해 이 한 몸바치는 것뿐이다. 의자에 앉아 애창을 닦는 내 모습을 기사들이 자꾸 흘끔거렸다. 벌써부터 나와 대련을 하고 싶어하는구나. 그래. 너희들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니 나도 무척 기쁘구나. 기특한 마음에 나는 그들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내 미소를 받은 기사들 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굉장히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특히 내 지도를 직접 받는 네 명의 축복 받은 남자들은 허무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른 기사들은 그들의 주위로 몰려들어 손을 꼬옥 잡은 채 뭐라고 속닥이고 있었다. 왜 저러는 거지?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거 되게 궁금하네. 음, 살짝 엿들어볼까? 좋 아. 부하들의 생각을 잘 아는 것은 좋은 주군이 되기 위한 덕목 중 하나야. 좋은 주군 이 되기 위해서 라는 미명을 들어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나 목소리를 잔뜩 낮춰서 말 하고 있었기 때문에 뭐라고 말하는지는 들을 수 없었다. 쳇, 별 수 없지. 아무리 부하들이라도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는 것 또한 주군에게 필요 한 덕목 중 하나야. 그럼. 그렇고 말고.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다시 창으로 눈길을 돌 리던 나는 오랜만에 '100m 밖에서 욕해봐라. 다 들린다' 센서가 작동하는 것을 느꼈다 . 이건 내 욕이라면 100m밖에서도 들을 수 있다고 자부하는 내가 고도의 눈치와 집중 력으로 잠시동안 귀가 한계를 벗어나게 만드는 참으로 위대한 기술이었다. "가스톤, 힘내라. 설마하니 죽이기야 하시겠어?" "너, 넌 몰라. 공주님이 들고 다니시는 저 봉이 얼마나 단단한지 넌 모른다구!" "쯧쯧, 불쌍한지고. 난 죽어도 조장 같은 건 안 한다." "아까 몽둥이(어느새 내 애창은 저들 사이에서 몽둥이로 통하고 있었다)를 닦으면서 공주님이 짓던 그 사악한 웃음을 보니 오늘도 고생이 많을 것 같다. 부디 살아 돌아오 길 빈다." ......죽여버린다. 이 놈의 자식들을 내가 가만 두면 마족이 아니다! 감히 이 몸이 친 히 가르쳐주는데 그따위 망말이나 늘어놓았단 말이지. 그래. 내가 오늘 뼈마디가 쑤시 도록 맞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보여주지! 감히 잠자는 마족의 심기를 건드렸 겠다. 음하하하! 오랜만에 전의에 불타는 나였다. 비록 인정하지는 않지만 오늘만은 마족들이 왜 나를 성격 파탄자라고 부르는지 보여주겠어. 나는 기사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조용히 다가갔 다. 기사들은 내가 근처에 오자 움찔하며 하던 말을 멈췄지만 이미 들을 건 다 들은 뒤였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는 거죠?"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서 연습을 시작하시죠." 내가 살포시 웃으며 묻자 모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얼버무렸다. 그러나 예리한 내 눈은 그들의 눈동자가 슬며시 다른 곳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게 바로 뭔가 찔리는 것이 있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반응이었다. "그보다 말이죠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말이죠. 듣고 싶죠? 듣고 싶죠?"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귀여운 척하며 말했다. 한 번 선보인 바 있었던 필살 큐티 어택 이 다시 작렬하는 순간이었다. 미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절대 듣고 싶지 않습니 다' 라는 표정이었지만 초롱거리는 내 눈길을 외면하지 못하고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곧 아주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거야. 기대해도 좋아. 응? 다들 내 아름다운 미소를 보고 왜 흠칫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걸까? 난 정말 모르겠네. 알 수 없는 일이야~. "오늘은 아주 특별한 연습을 할 예정이랍니다. 그동안은 각 조의 조장들이 저와 직접 대련을 했지만 다른 사람들도 가끔은 직접 지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오 늘은 조장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과 대련을 해보도록 하겠어요. 아, 미나는 언제나처럼 제외야." 내 말이 끝나자 희비가 엇갈렸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가축 마냥 축 쳐져있던 네 명 의 사나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고, 그 외의 나머지 사람들은 마치 시한부 인 생을 선고받은 사람처럼 안색이 새파래졌다. 이래서 인생이란 모르는 것이라고 하는 거야. 이렇게 한 순간에 운명이 뒤바뀔 수도 있다는 걸 몸으로 직접 느껴보라구. 캬하 하하. 이런 식으로 훈련에 열중하는 사이 한 달이 금새 지나갔다. 이제 페드인 왕국의 건국 기념일 축제가 한 달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왕궁에서 어마어마한 금액을 들여 지원하 기 때문에 아렌테에서 열리는 축제는 그 규모와 화려함이 상상을 초월한다고 한다. 그 리고 축제와 때맞춰 왕궁에서는 다른 나라에서 온 축하 사절단과 귀빈들을 환영하는 무도회가 15일 동안 계속 열린다고 한다. 내가 이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낮에는 글로리 라이언과 무투 대회를 관람하고 밤에는 무도회에 참석한다. 무도회 하 나만 가도 지칠 텐데 이걸 모두 다 한단 말인가. 인간이란 의외로 강한 종족일지도 모 르겠다. 생각 같아서는 무도회 따위 그냥 제쳐버리고 축제나 보러 나갔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 도 페드인 왕국의 건국 기념 무도회에 페드인 왕국의 제 1공주가 빠질 수는 없는 노릇 이었다. 물론 무도회에 참석해서 귀족들의 호감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오는 건 반길만 한 일이지만 그런 건 다른 때 해도 되잖아! 난 축제에 가고 싶어! 인간 세상에 대한 책을 읽었을 때 가장 흥미 있던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축제였다. 마 계에는 축제는 고사하고 파티도 1000년에 한 번 열릴까 말까 하기 때문에 당연히 축제 라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책에서만 봐온 인간들의 축제는 내 호기심을 자극했 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마시고, 떠들고, 노래하고, 갖가지 물건들을 구경하고, 이 때 열리는 각종 대회도 나가고, 각지에서 올라온 유랑극단들의 공연도 본다. 얼마나 재미있을까. 처음 축제에 관한 글을 읽었을 때부터 종종 축제에 대한 상상을 해오곤 했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 나오면 반드시 축제를 구경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재미있지 도 않은 무도회 때문에 축제에 갈 수 없다니! 이럴 수 있는 건가. 내 꿈을 이렇게 짓 밟아도 되는 거야?! 그래도 다행인 점은 15일 동안 열리는 무도회를 모두 참석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무도회를 한 번만 참석하고 축제에 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자들도 나 올 것이다. 말 같은 소리를 해라. 말이 15일동안 무도회가 열리는 거지 이런저런 이유 를 들어 무도회는 한 달 내내 열린다. 그 많은 기간동안 한 번만 참석하는 것도 보기 좋지 않고, 이 모든 것을 무시한다고 하더라도 귀빈들이 많이 오다보니 궁궐의 경비가 강화되어 몰래 빠져나가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벌써부터 다른 나라에서 축하 사절단이 몰려들다보니 경비가 강화된 것은 물론이고 간 간이 다른 나라의 사신들과 그들을 호위하고 온 기사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제 4기사단을 직접 훈련시키는 일은 자제하게 되었다. 다른 나라 사신들이 간혹 기사들 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훈련장으로 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끔씩 이라면 몰라 도 계속 공주가 기사들과 대련하는 것도 보기 좋지 않을 것 같고, 언제까지고 내가 훈 련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 기회에 완전히 기사들이 자율적으로 훈련을 할 수 있도 록 했다. 이런 내 말에 제 4기사단 전원이 매우 매우 기뻐하자 상당히 아니꼽고 내가 한 말을 취소하고 싶었지만 넓은 아량으로 넘어갔다. 물론 전체적인 방향은 내가 잡아주고 가 끔 찾아가서 훈련을 지켜보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글로리 라이언에 서 좋지 못한 성적을 낼 경우 내 훈련이 부족하다고 판단, 재훈련에 들어간다는 말도 덧붙여주었다. 미나는 항상 내 옆에 있기 때문에 개인지도를 하고 있는데 성장 속도는 ......아무튼, 끈기만은 놀라웠다. 건국 기념일이 가까워오자 왕궁이 붕 뜬것처럼 분위기가 들뜨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각 국의 사절단과 선물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이미 도착한 사절단이 가끔 만나러 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내가 할 일은 많지 않았다. 미리 말을 해놓았기 때문에 드레스 와 악세사리도 최대한 적게 맞춰서 전에 있었던 무도회와는 달리 드레스 입어보느라 낑낑대는 일은 없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캐롤과 드레스를 많이 주문하는 건 낭비네, 그래도 너무 적네, 라면서 혈전을 벌였지만 결국 내가 이겼다. 공주라는 직함을 이용 하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아주 한가하게 지낸 것은 아니다. "마리엔 언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응? 플로라가 귀엽다고 생각했어." "어머, 몰라요. 하지만 난 언니가 부러운 걸요. 여자인 내가 봐도 너무 예뻐요." "호호호, 플로라는 마리엔이 좋은가보구나." 그렇다. 바로 이 여인네들 때문이다. 플로라 공주의 생일 파티에 참석한 이후로 플로 라 공주와 아리란드 전하는 이 몸을 너무도 좋아하게 돼버린 것이다. 솔직하게 댁들이 너무 엉겨붙는다고 생각했어, 라는 말은 못하고 넘쳐나는 재치로 대충 둘러댔건만 내 말에 플로라 공주는 살짝 볼을 빨갛게 물들이며 대꾸했다. 덤으로 아리란드 라는 여 자까지 플로라 공주 못지 않게 나오고 있었다. 내 연기가 정말 좋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는 바이다. 하지만 이렇게 친하게 나올 줄이 야. 이럴 줄 알았으면 무도회 끝나고 며칠 후에 같이 차나 마시자고 불렀을 때 그냥 튀는 거였는데. 아리란드의 청에 응해서 갔던 게 가장 큰 화근이었다. 가서 점수 좀 따자는 생각에 생글생글 웃으며 맞장구쳐줬더니 이렇게 발목잡히는 일의 원인이 되었 다. 물론 이들과 친해져서 좋은 점도 있었다. 후궁이라고는 하지만 친정이 그래도 잘 나가 는 백작가 중 하나인 나미르 가문이다. 적어도 나미르 백작가가 적이 될 일은 없어졌 으니 좋고, 나를 좋아해 주니 좋았다. 그동안 나와 친했던 사람들은 시녀들이나 제 4 기사단의 기사들처럼 나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었지만 이 두 사람은 나와 비슷한 신분의 사람들이라 그들보다 편하게 대하는 점도 괜찮았다. 아리란드와 플로라 공주가 만나는 귀부인들을 붙잡고 내 칭찬을 해주니 저절로 평판이 좋아지고 있는 것도 즐거 운 일이었다. 어라? 아리란드와 플로라 공주가 귀찮게 하긴 하지만 좋은 점도 꽤 많잖아. 그동안 너 무 엉겨붙어서 미처 생각을 못했군. 그럼 이대로 이들과 친해져버려? 아니면 약간은 거리를 둬? 어떻게 하는 것이 더 이익이지?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이해손실을 따지면서도 아리란드와 플로라 공주가 물어오는 말에 친절히 대답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순식간에 결론은 나왔다. 약간 귀찮은 것만 빼 면 이득이 많다. 잘만 이용하면 도움되는 점이 참으로 많을 것이다. 이런 결론을 도출 해 낸 나는 이제까지 선보였던 웃음보다 훨씬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제가 아리란드 전하와 플로라를 좋아하는 거 아시죠? "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하고 보자는 게 내 지론 중에 하나였다. 건국 기념일 축제와 왕궁 주최 건국 기념 무도회가 열리는 날이다. 무도회는 저녁 무 렵에 열리기 때문에 그 때가 될 때까지 아무도 몰래 공주궁 지붕으로 올라가 언뜻 보 이는 수도의 정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거리를 꽉 채운 사람들의 행렬과 다채로운 색의 노점상 지붕, 멀리 떨어져있는 콜로세움 경기장들이 보였다. 콜로세움 경기장은 무투 대회의 참가를 신청하려 모인 사람과 미리 표를 예매하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 었다. 워낙 멀리 떨어져있어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보였지만 엄청난 수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한창 축제로 활기가 넘쳐 보이는 아렌테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재미있겠다. 나도 축제에 가고 싶어. 히잉." 무도회가 열리려면 약간의 시간 여유가 있었지만 무도회에 가기 위해 꽃단장하려면 상 당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수도에 나갈 엄두는 내지도 못하고 이렇게 공주궁 지붕 위에서 구경하는 것이 전부였다. 뷰잉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이나마도 보지 못하 고 높디 높은 왕성의 성벽을 원망했겠지. 저기 있는 사람들은 정말 좋겠다. 지루한 궁전 무도회보다 축제에 마음이 가는 건 어 쩔 수 없었다. 글로리 라이언이 열릴 때 왕족들이 관람하려고 콜로세움에 가는 것을 제외하면 왕궁 밖을 나갈 일이 없었다. 그 때도 마차를 타고 수많은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가기 때문에 제대로 된 구경은 꿈도 못 꾸는 일이었다. 이대로 축제 구경은 못하고 끝나는 거 아냐? 이런 불길한 생각이 들자 나는 그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순 없지! 내가 뭣 때문에 인간 세상에 왔는데! 마리엔과의 계약을 이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 세상에서 신나게 놀자는 것이 아니었던가. 공짜 계 약 이행이 나에게 첫 번째가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인간 세상에 나가고 싶어 계약을 한 것이었으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축제 구경하고 말꺼야. 무도회는 며칠 만 나가고 마법을 써서라도 탈출해야지. 그렇게 다짐을 하면서 빛나는 눈으로 수도의 정경을 바라보던 내 귀에 시녀들이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준비하는 건가. 좀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늦으면 캐롤의 필 살 잔소리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순순히 내려갔다.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이동한 나 는 천천히 공주궁으로 걸어갔다. 마리엔 공주궁에 도착해보니 벌써 시녀들이 치장할 준비를 마친 채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목욕하는 동안 미나가 어디에 있었냐고 물어보았지만 대충 얼버무 렸다. 사실대로 지붕에 올라가서 수도의 모습을 보고 왔다고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때로는 진실을 모르는 편이 좋은 때도 있는 법이다. 오늘은 페드인 왕국의 실세들과 다른 나라에서 온 귀빈들까지 있어서인지 치장을 하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애쓴 보람이 있었는지 상당히 마음 에 드는 모습이었다. 원래 본바탕이 좋았고 시녀들의 몇 시간에 걸친 노력으로 내가 봐도 예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시녀들의 반응도 플로라 공주의 생일 파티 때보다 더욱 격렬했다. 내가 아름답다는 말은 듣기 좋은 말 중에 하나였지만 전보다 배 이상 으로 커진 그녀들의 성량은 내 귀를 따갑게 만들었다. 아가들아. 조금 소리를 낮춰주 겠니. 그렇게 시끄럽게 굴지 않아도 내가 예쁜 건 내가 알아. 무도회장에 도착해보니 내가 조금 늦었는지 벌써 무도회가 시작되어 있었다. 이번엔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늦었잖아. 역시 난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거야. 잠 시 이런 헛생각에 빠져있던 나는 홀의 문이 열리자 홀으로 들어섰다. 내가 들어서자 무도회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쏠렸다. 제 1공주라는 직함이 왕 자보다는 못하지만 꽤나 힘있는 직함이었다. 재빨리 장내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니 내가 아는 얼굴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이 워낙 많아 그 틈바구니에 끼어 보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원래 내가 아는 얼굴이래 봤자 얼마 되지도 않은데다 이번 궁전 무도회는 귀족이라도 모두 참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초대장을 받은 사람만 참석할 수 있었다. 남작이나 자작 같은 하급귀족은 올 수 없었고, 백작이라도 힘없는 사람은 올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럼 플로라 공주의 생일파티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떨거지들이었군. 하긴 거물들이 별로 중요하지도 않는 공주의 생일파티에 올 리가 없지.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 자리 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 하나 소홀히 대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페드인 왕국의 실질적 인 세력인 공작과 백작가문 사람들은 물론 다른 나라의 왕족들도 꽤 있을 것이다. 그 렇다면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사냥감??? 축제에 가지 못하는 게 아쉽긴 했지만 이 왕 온 거 최선을 다해서 점수를 따야지. 오늘은 홀릴 대상이 거물들이라 의욕이 많이 생겼다. 사냥감은 클수록 의욕이 생기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내 생각과는 달리 바로 작업에 들어가지 못했다. 내게 인사해오는 두 남 녀 때문이었다. 타오르는 듯한 목걸이가 인상적인 붉은 머리의 귀여운 소녀와 검은 장 발의 미청년. 내 앞을 가로막은 채 싱글거리는 이 두 사람은 바로 플로라 공주와 르미 엘 왕자였다. 플로라 공주는 이제 제법 친해져서 그렇다 치지만 넌 또 왜 이래? 르미 엘 왕자! 르미엘 왕자는 플로라 공주와 막상막하로 친하게 굴고 있었다. "마리엔, 어서 와. 왜 이렇게 늦은 거야?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아, 죄송해요. 어떻게 하다보니 좀 늦었어요." '누가 기다려 달랬냐, 이 인간아!' "미안할 것까지는 없지. 마리엔의 얼굴을 보는 걸로 나는 만족이야." "저도 언니를 봐서 너무 좋아요." '이 것들이 내가 없을 때 서로 작당을 했나? 왜 이렇게 친한 척 하고 난리야. 그리고 그런 묘한 시선들은 집어치워.' 르미엘 왕자는 귀여워죽겠다는 시선을, 플로라 공주는 존경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양 사이드에서 이렇게 강렬한 시선이 쏟아지니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세로 봐서 절대 순순히 안 놔줄 것 같은데. 이봐, 르미엘 왕자! 뒤에서 라이언 왕자가 댁을 탐 탁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게 느껴지지 않아? 저 인간 검술도 꽤나 잘한다며 한 대 맞 기 전에 그냥 가라. 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반가운 척하는 나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러나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플로라 공주와 르미엘 왕자는 의외로 금방 떨어 져나갔다. 정말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자의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플로라 공 주는 나미르 백작, 즉 그녀의 외삼촌이 되는 사람이 나타나자 별 수 없이 인사를 하러 갔고, 르미엘 왕자는 한 귀족영애에게 코가 꿰여 끌려갔다. 아름다우신 비엔나 아르페 마를로 백작 영애께서는 당당히 르미엘 왕자에게 다가와 에 스코트를 신청했고,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레이디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은 예의에 어 긋나는 일이기 때문에 르미엘 왕자는 그녀의 청을 받아들였다. 르미엘 왕자가 비엔나 의 청을 받아들이자 다른 여성들이 부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용기있는 자만 이 사랑을 쟁취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얼굴이 철판인 나로서도 상당히 부끄러 워할 일인데도 그녀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놀라운 눈으로 비엔나를 보던 나는 그녀가 르미엘 왕자의 에스코트를 받아 가면서 나 를 흘겨보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르미엘 왕자를 끌고 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용서가 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용서는 이번 한 번에 국한된 것이고 다음에 걸리면 죽음이었다. 두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나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 람들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 좀 아쉬웠지만 큰 상관은 없었다. 우선 말을 걸어보고 아는 척 하면 페드인 왕국 사람이고, 만나서 반갑다는 말을 하면 다른 나라 사람이겠 지. 다른 나라 사람이면 이름은 몰라도 상관이 없었고, 페드인 왕국 사람이면 교묘하 게 이름만 빼고 대화를 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찾아가기도 전에 벌써 귀족들이 몰려들었다. 이 것이 바로 권력의 힘이지 .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내게 몰려드는 가운데에도 몇몇 사람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 바로 저런 인간들이 진짜 알짜배기지. 굳이 공주에게 아부를 하지 않아도 자신의 지 위에 자신이 있는 사람들이다. 좋았어! 저놈들이 오늘의 사냥감이다. 그러나 주변에서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그들에게 다가가기란 쉽지 않았다. 여기 있 는 사람들은 모두 세력 있는 사람들이라 무시하지도 못하고 웃는 얼굴로 일일이 응해 주었다. 알짜배기를 만나야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상대가 좋아하는 화제를 재 빨리 파악해 대화를 주도해나갔다. 언제 어떻게 다시 만날지 모르는 것이 사람들 인연 이다. 이들도 언제 어떻게 만날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 최선을 다해 점수를 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 목표는 알짜배기였으므로 한 그룹 당 할애하는 시간은 3-4분 정 도였다. 이 시간만으로도 호감을 살 자신도, 실력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한 그룹을 벗어나고 알짜배기를 향해 가려하면 다른 그룹이 잡고 또 벗어나면 다시 다른 그룹이 잡는 것의 반복이었다. 그러나 어떠한 순간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거 이러다 알짜배기들은 못 만나는 것 아냐. 끈질기게 달라붙는 사람들 때문에 아무 도 몰래 투덜거리던 내 눈에 또 두 명의 남자가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 리고 그들이 내 앞까지 걸어오자 오늘 처음으로 내 미소가 사라졌다. 지겨워서가 아니 었다. 그런 하찮은 이유로 내 표정이 흔들릴 리 없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내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윽, 이 인간이 왜 여기 있는 거지? 라디폰 공작과 그의 옆에 서있는 라디폰 공작을 쏙 빼닮은 검은 머리의 청년을 보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금새 다시 미소를 짓긴 했 지만 바로 눈앞에 있던 이 두 사람이 그걸 못 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라디 폰 공작은 빙글거리며 인사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다, 마리엔 공주님?" "지금까지는 잘 지냈어요. 그러는 공작은 어떤가요?" '지금까지는' 이란 말은 방금까지만 해도 좋았는데 댁이 나타나서 좋지 않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능구렁이 같은 라디폰 공작이 비꼬는 것을 모를 리 없는데도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공주님 덕분에 아무 일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내가 댁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아, 하나 하긴 했다. 저주 를 하긴 했지. 그 것도 아주 많이 말이야. 내가 당신 덕분에 공부하게 된 것을 잊을 것 같아? 넓은 마음으로 이 점은 넘어간다고 해도 그 빌어먹을 시험을 어떻게 잊을 수 가 있겠어! 이 원한을 어찌 잊을쏘냐! 입은 웃고 있었지만 내 시선만은 이런 생각을 여과 없이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 러나 라디폰 공작은 원독에 찬 내 시선을 깨끗이 무시한 채 자기 할 말을 했다. 여전 히 재수없는 인간이다. "그리고 여기는 제 아들인 에릭이라고 합니다." "에릭 리트 라디폰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어쩐지 얼굴이 닮았다고 했더니 아들이었군. 하지만 나는 에릭이라는 미청년의 말에 기가 찼다. 무표정한 얼굴에다 느릿느릿한 어조로 만나서 영광이라는 그런 당치도 않 은 말을 했던 것이다. 열 번 참아 얼굴이 무표정한 거야 눈감아준다고 해도 느릿느릿 한 그의 어조에서는 '지금 굉장히 귀찮아' 라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은 나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적의를 가지고 있는 두 가지 부류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면서 관심이 없는 인간은 처음이었다. 왠지 내가 무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아비나 아들이나 어디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어! 라디폰 공작은 무슨 말을 해도 능수능란하게 넘어가고 항상 웃는 얼굴이라면, 그의 아들인 에릭은 무표정한 얼굴로 매사가 귀찮다는 식이었다.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냐? 얼굴만 닮지 않았으면 아무도 부자지간이라고 안 믿겠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점만은 똑같았다. 라디폰 공작 하나만으로도 열 받는데 이번에는 그 아들까지 속을 뒤집어놓는군. 에릭 리트 라디폰이라고 했지. 라디폰 공작과는 다른 의미로 재수 없는 인간이었다. 속으로 에릭의 이름을 되씹으며 망할 놈, 애비랑 똑같은 놈, 인간이 그러는 거 아냐, 너도 누가 무시하면 좋겠어, 라고 투덜거리던 나는 그의 이름이 왠지 낯이 익다는 것을 깨 달았다. 응? 에릭 리트 라디폰?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잠시 이리저리 생각을 해보던 나는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던 작년도 글로리 라이언 우 승자의 이름이 생각났다. 덤으로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은 3년 동안 계속 글로리 라이언 에서 우승한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의 검사라는 사실도 떠올랐다. 나와는 상관이 없다 고 흘려들었던 그 이름은 바로 에릭 리트 라디폰! 나는 이 놀라운 사실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아앗! 설마 페드인 왕국 제일의 검사라는 그 에릭? 로얄 기사라는 그 사람??" 내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놀라워하는데도 그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느릿 하게 입을 열었다. "네." 보통은 뭔가 뒤에 많은 말이 따르지 않았던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또는 '제가 맞 긴 하지만 제일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라는 겸양의 말이 따르는 것이 정상이 었다. 속으로는 하늘 아래 나만한 인간이 어디 있겠어, 라고 생각할지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겉으로는 겸손을 떤다. 그런데 이 인간은 어떻게 된 거야? 자신이 왕국 제일 의 검사라는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도 어이가 없어 에릭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지 만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무튼, 그가 글로리 라이언의 우승자라는 말에 다시 그를 보게 되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공작은 닮은 미남형 얼굴, 그리고 잘 다져진 몸. 분명히 상당히 잘 단련되어 있는 몸이었지만 내가 막연하게 생각해오던 사람과는 너무 달랐다. 바스타드 소드를 휘두르면서 껄껄거리는 체격 좋은 중년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딴판이네. 아무리 봐도 19-20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 나이에, 저 호리호리한 몸매에 로얄 기사에 다 페드인 왕국의 제일가는 검사란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저 눈을 보라. 날 카로운 기운이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눈. 잠 오는 사람의 눈과 비슷했다. 세상사는 알 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말이 실감이 갔다. 라디폰 공작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재상 자리에 있고, 에릭은 페드인 왕국의 제일 가 는 검술 실력을 지녔다. 둘 다 잘~ 나가는군. 하지만 그럼 뭐하겠는가. 두 사람 모두 성격이 아닌데. 우선 인간이 돼라. 이 사람들아(자신이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 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라디폰 공작과 에릭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나는 핑계를 들어 이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 그러나 라디폰 공작이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공주님께서는 모르시는 분들이 많으실 테니 제가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공작은 내가 기억상실증이라고 알고 있으니 여기 있는 사람들을 잘 소개해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공작의 뒤만 따라다니면 손쉽게 거물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왜 전혀 고마운 느낌이 들지 않는 걸까? 거절하고 싶었지만 냉철한 이성은 이 를 허락하지 않았다. 한 번만 참으면 된다. 이번만 참으면 저절로 세력가들과 알 수 있어. 참자. 참어. 나는 피눈물을 삼키면서 그들의 뒤를 따랐다. 물론 겉으로는 생긋 웃으면서. ------------------------------------------------------------------------------- "레이디, 저에게 그대와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지금 정중히 춤을 신청하는 사람은 하이덴 제국의 둘째 왕자 레이만 엘가브 유리에스 하이덴 이라는 외우기 힘든 이름의 소유자였다. 하이덴 제국이라면 요새 시끄럽긴 하 지만 그래도 소피린 3대 강국 중 하나였으며, 하이덴 제국의 둘째 왕자라면 뛰어난 능 력으로 황태자 후보로까지 거론되는 인물이었다. 얼굴도 잘생겨서 귀족영애들의 선망 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한 마디로 소설 속에 나오는 왕자와 딱 들어맞는 인물이었다 . 그런 사람이 내게 춤을 신청하는 것은 나의 가치가 올라가는 일이기 때문에 반가운 일이었다. 국왕 옆에서 째려보고 있는 오펠리우스 왕비를 봐서라도 거절하고 싶은 마 음은 없었다. 하지만. 또 춤이냐!!! 춤이라면 질색을 하는 나로서는 반갑지 않은 제안이었다. 이제 궁전 무 도회가 열린 지 7일째가 되었다. 그동안 다른 나라의 왕족도 많이 사귀었고, 페드인 왕국의 귀족들과도 제법 친해진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그들을 상대로 춤도 많이 추었 지만 여전히 춤을 좋아할 수는 없었다. 춤추면서도 틀리지 않으려고 신경 쓰고, 좋아 할 만한 화제를 고르느라 정신이 없어서 춤을 즐길 수 없었기 때문에 당연했다. 내게 있어 춤이란 신경 쓸 게 많은 귀찮고 무의미한 행동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런 거물 중의 거물의 신청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이상하게 남자들은 여자와 춤을 추고 나면 춤을 추기 전보다 훨씬 친하게 굴기 때문이다. 인간 남성들은 스킨쉽 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별 수 없이 나는 억지로 웃으면서 그의 청을 받아들였다. 억지 로 웃는 기색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미소짓는 게 힘들게 느껴졌다. 레이만 왕자와 춤을 추고 난 후, 다시 누군가 춤을 신청할까 두려운 마음에 재빨리 테 라스로 나갔다. 테라스로 나가자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와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하늘 을 올려다보니 새까만 밤하늘에 별들이 하얀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검은 빌보드 위에 보석을 뿌려놓은 것 같았다. 검은 하늘의 오른쪽에는 지상을 비추고 있 는 노란 달이 떠있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밤하늘 아래에는 페드인 왕국의 수도 아렌테 가 있었다. 축제 기간이라 여러 색의 불빛들이 빛나고 있는 아렌테의 모습이 밤하늘의 별 못지 않게 아름다웠다. 멍하니 수도의 야경을 바라보던 나는 유리창 너머로 무도회장의 모습을 한 번 뒤돌아 보고 생각에 잠겼다. 축제가 좋은가? 무도회가 좋은가? 당연히 축제 쪽으로 마음이 기 울었다. 좋아! 그럼 내일은 탈출한다! 7일 동안 나와줬으면 됐지. 더 이상 뭘 바래. 그동안 뛰어난 화술과 어떠한 순간에도 지워지지 않는 환상적인 미소로 사람들의 호감 을 잔뜩 얻었으니 이제부터는 빠진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오늘 하루만 참으면 내일부터는 축제에 간 다. 축제가 끝나려면 아직 2주일이나 남았으니까 구경할 시간은 충분했다. 그럼 무도 회도 오늘로 마지막이군. 오늘이 마지막이니 서비스로 원하는 대로 춤도 마음껏 춰주 고 온갖 아양을 떨어볼까. 우후후. 벌써부터 축제에 갈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내가 실실 웃으며 무도회장으로 돌아오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뭐가 그렇게 즐거우십니까, 공주님?" "라디폰 공작, 갑자기 말을 걸면 어떻게 해요? 놀랐잖아요! " "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마리엔 공주님이 너무도 즐거워 보이셔서 말입니다. 무슨 좋 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라디폰 공작이 물었지만 아무 것도 아니라면서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그리고 사 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가면서 공작을 씹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여간 인간이 맘 에 드는 데가 없어요! 심지어 아들도 마음에 안 들어. 그나마 에릭은 첫 날만 얼굴을 비추고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얼굴만 비춘 것이었다. 그렇게 무표정한 얼굴로 있 는데 어떤 여자가 감히 먼저 춤을 신청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디 폰 공작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가버렸다. 그러려면 왜 온 거야? 하여간 웃기는 인간이 다. ================================================================================ 이 것은 다름 아닌 왕궁을 몰래 빠져나가기 위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말들이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몰래 공 주궁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사람들 눈을 피해 으슥한 곳을 찾아다니면서 성문을 향해 한 걸음씩 전진하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가면 성문이야. 고지가 코앞이다. 힘내자. 여기만 통과하면 축제에 갈 수 있어. ".....그래서 말이야......." 나는 수풀 뒤에 숨어서 이동하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의 음성이 들리자 그대로 땅 바닥에 엎드렸다. 덤불이 앞을 가리고 있으니 사람들이 지나갈 때까지 쥐죽은듯이 있 으면 들킬 염려는 없었다. 저벅거리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심장이 콩닥거리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들킬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 쪽 에 불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소문을 들어보니까 마리엔 공주님 인기가 장난이 아니라더라. 왜 있잖아? 하 이덴 제국의 레이만 왕자님. 그 왕자님이 마리엔 공주님 옆에서 떠날 줄을 모른데. 이 건 내 친구가 직접 보고 한 말이니까 틀림없어." 숨죽이고 어서 병사들이 지나가길 기다리던 나는 내 이야기가 나오자 귀를 쫑긋 세웠 다. "뭐? 그 얼음덩어리 같은 왕자님 말이야? 한번 멀리서 본 적이 있었는데 엄청 차가운 인상이던데? 근데 그 왕자님 취향도 특이하다. 하필이면 성격 더럽기로 유명한 공주님 이 뭐가 좋다구. 차라리 우아한 데미나 공주님이 백 배는 낫겠다." 저 놈 이름 뭐냐? 이런 처지만 아니라며 슬그머니 나가서 쩔쩔매는 꼴을 보련만 안타 깝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병사의 말에 잔디를 그라고 생각하고 쥐어뜯었다. 아우, 열 받아! 취향이 특이해? 얌마. 이래봬도 내가 한 인기 한단 말이야.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나를 두고 얼마나 경쟁이 치열한데. 너 죽을래? "너 미쳤냐?! 조용히 해." "왜? 다 아는 사실 아니냐?" "으이구, 이렇게 소식이 늦은 놈은 처음이네. 너 그런 말 함부로 하다가 제 4 왕궁 기 사단의 기사님들이나 공주궁에서 일하는 사람들한테 걸리면 난리난다. 전에도 너처럼 함부로 말하다가 미나라는 여자애한테 걸려서 목검으로 반죽도록 맞은 사람도 있어. 너 조심해라." "헉! 정말이야? 그런 말을 이제 해주면 어떻게 해! 방금 내가 한 말 들은 사람 없겠지 . 앞으로 조심해야겠구먼." 본인이 직접 들었다네. 그나저나 미나야, 잘했어!!! 가르친 보람이 있었구나!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엎드려 있던 나는 발자국 소리까지 들리지 않게 된 후에 야 다시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사히 성문 근처까지 도착한 나는 나무 뒤에 숨 어 성문 쪽을 살펴보았다. 기사들과 병사들의 경계가 삼엄해 아무래도 정면 돌파는 힘 들 것 같았다. 음, 얼마 되지도 않은데 없애버릴까? 아니면 그냥 전부 다 세뇌시켜버릴까? 그러나 곧 고개를 내저었다. 이들을 없애버리면 일이 너무 커지고, 세뇌시키면 나중에 뒤처리하 는 것이 귀찮아진다. 되도록 아무도 몰래 조용히 나갔다 조용히 돌아오길 바라는 나로 서는 반길만한 방법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면 돌파가 힘들면 우회해서 가는 방법이 있었다. 우선 투명화 마법을 걸어 내가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도록 한 후에 그 상태로 하늘을 날아올라 성벽을 가 뿐하게 넘었다. 허공에서 잠시 두리번거리던 나는 인적이 드문 곳을 발견하고 그 곳에 내려섰다. 그리고 투명화 마법을 해제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유유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렌테의 모습은 절로 감탄성을 자아냈다. 축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화려하 고 구경거리도 많았다. 한 쪽에서는 음유시인이 공연을 하는가하면 다른 쪽에서는 수 인족들이 묘기를 부리고 있고, 또 다른 쪽에서는 얍삽하게 생긴 사람이 돈을 열 배로 뻥튀기 할 수 있는 기회라며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거리에 즐비한 노점상에서 는 처음 보는 물건들을 팔고 있었고,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먹거리를 파는 간이 음식 점들도 많았다. 그리고 넓은 도로를 꽉 채운 사람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보는 것은 처음 이었다. 게다가 용병, 모험가, 음유시인, 상인, 구경꾼, 아렌테의 시민 등등. 부류도 다양했고 간간이 엘프나 드워프 같은 이종족의 모습도 보였다. 격식을 따지며 자질구 레한 것에 신경을 쓰는 귀족들에 비해 여기 있는 사람들은 자유롭고 활기차 보였다. 거리에 있는 모든 것들이 새로웠다. 나는 왕궁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흥겨운 분위기에 휩쓸려 어린아이처럼 들떠버렸다. 와아! 굉장해! 전부 다 처음 보는 것들 뿐이야. 이 쪽을 봐도, 저쪽을 봐도 온통 신기한 것 투성이었다. 시골에서 갓 올라온 촌뜨기처럼 고개를 가만히 두지 못했지만 평생동안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나는 현재 내 모 습은 전혀 신경쓰지 못했다. 어차피 이 곳에는 잘 보여야 할 사람도, 적수도, 내가 공 주라는 걸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마음이 가는 데로 행동하면 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북적거려 이동하는데 어려움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모르는 사람과 살을 부대 끼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정신없이 거리를 쏘다니며 구경을 하던 나는 우연히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된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렇게 촐랑거렸나, 라는 생각 에 약간 쑥스러웠지만 어차피 다시 볼 사람들도 아니기에 그대로 안면을 깔았다. 지금 은 1분 1초가 아까웠다. 축제를 구경하는 데 온 정신을 쏟아도 부족할 판인데 다른 사 람들의 시선까지 신경 쓸 정신은 없었다. 한참동안 여기저기 구경을 다니던 나는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서야 아침도 먹지 않고 나왔다는 것이 생각났다. 정신 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벌써 점심때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배가 고픈 줄도 몰랐네. 주위를 둘러보니 대부 분 사람들은 음식점으로 들어가거나 간이 음식점에서 먹을 것을 사들고 먹으면서 돌아 다니고 있었다. 아무리 구경이 좋아도 다 먹고 살자고 사는 인생인데 먹을 건 먹어줘 야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근처에 있는 간이 음식점으로 걸어갔다, 인상 좋아 보이는 아줌마가 지붕이 없는 바퀴가 달린 작은 수레에서 음식을 팔고 있었 다. 그런데 저게 뭘까? 나무막대기 위에 양념한 고기를 꽂아 구워서 파는 음식이었는 데 나로서는 처음 보는 음식이었다. 처음 보는 음식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음식에서 풍기는 냄새가 너무나 좋아 열심히 요리를 하고 있는 아줌마 에게 말했다. "저기요 이거 하나만 주세요." 맛을 알 수 없으니 일단 하나 먹어보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여기에서 공주 행세를 할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높임말이 나왔다.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아가씨, 죄송하지만 아가씨께는 못 팔겠는데요." "네? 왜요? 저 돈 있는데요." 왕성에서 몰래 빠져나올 때 돈을 한 움큼 집어들고 왔으니 돈 걱정은 없었다. 그러나 아줌마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 이렇게 길거리에서 파는 꼬치는 귀족 아가씨 입에는 맞지 않아서 드 린 말씀입니다. 식사를 하시려면 저 쪽 모퉁이에 있는 식당으로 가세요." 귀족 아가씨? 신분에 관한 언급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아줌마가 그렇게 말하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은 수수하게 생긴 옷이지만 옷감이 워낙 좋다보니 저절로 고급스러운 티가 났다. 아줌마 입장에서야 이런 옷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은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뿐이고, 눈앞의 소 녀는 왠지 모르게 기품이 흐르니 귀족으로 단정짓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도 이게 내가 가진 옷 중에 제일로 수수한 건데. 역시 보통옷으로 보아 넘기기엔 무리였나? 그래서 아까 사람들이 그렇게 쳐다봤구나. 귀족으로 보이는 여자애가 수행 원도 없이 그렇게 싸돌아다녔으니 이상하게 볼 만했다. 이대로라면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돼 자유롭게 돌아다니기가 힘들었다. 이 기회에 왕성을 빠져나올 때 입을 만한 옷 좀 사야겠다. 되도록 눈에 안 띄는 평범한 걸로. 아줌마가 친절히 식당까지 알려주었지만 바락바락 우겨 기어이 꼬치를 하나 사먹었다. 아줌마의 불안해하는 시선을 뒤로 한 채 한 입 베어먹은 나는 꼬치가 의외로 맛있다 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짭짤하면서도 매콤한 맛이 일품이었다. 호오~, 이거 맛있네. 궁 궐에서 먹던 음식이랑은 또 다른 맛이야. 재빨리 꼬치를 다 먹어치운 나는 계속 쳐다보고 있는 아줌마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줌 마는 귀족 영애로 보이는 아리따운 소녀가 평민들이나 먹는 꼬치를 모두 다 먹자 놀라 움 반, 혹시나 뭔가 트집을 잡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반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아줌마를 지그시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줌마, 7개 추가요." 내 말이 그렇게 황당했던가. 꼬치를 파는 아줌마는 물론이요, 주변에 있던 장사꾼들과 구경꾼들은 매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의 내 모습이 그들이 봐왔던 보통의 귀족과는 많이 달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맛있는 걸 어떻게 해. 나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황당해하는 중에도 투철한 상인 정신으로 아줌마가 건네준 꼬치를 먹으면서 변 명을 늘어놓았다. "아줌마, 저 귀족 아니에요. 우리 아빠가 상인인데 이 옷은 다른 나라에서 사온 거예 요. 안 입으려고 했는데 아빠가 자꾸 우기시는 바람에 별 수 없이 입고 나온 거예요. 그리고 제가 귀족이라면 아줌마한테 존댓말을 쓰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확실히 귀족은 아니다. 왕족이지. 내 말에 아줌마와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그렇구나, 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어느 귀족이 평민에게 존댓말을 쓰겠는가. 나야 아직도 계급이나 신분이라는 관념이 잘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옆 집 여자애 처럼 굴 수 있는 것이지만. "아, 그랬구나. 네가 워낙 예뻐 보여서 실수를 했네. 그런데 이름이 뭐니? 이 근처에 서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우리 집이 이 근처거든. 다른 곳에서 구경 온 거니?" "....그건 아니고...우물우물, 아빠가 집 밖으로 못나가게 하는 바람에...쩝...오늘은 몰래 나온 거예요...우물, 이름은 마리엔이..." "다 먹고 말해라. 그러다 체하겠다. 너 얼굴은 예쁘장하게 생겨서는 하는 행동은 전혀 딴판이다. 참, 내 이름은 헤라야. 헤라 아줌마라고 불러. 피톤씨, 주스 좀 줘봐요. 어, 뭐예요? 지금 주스 한 잔이 아까워서 못 주겠다는 거예요? 남자가 그렇게 쫀쫀하 게 굴 거예요?! 얼른 내놔요!! 자, 이거랑 같이 먹어." 헤라 아줌마는 옆에서 주스를 파는 비쩍 마른 피톤 씨가 파는 주스를 거의 강탈하다시 피 해서 건네주었다. 나도 모르게 진짜 이름을 말해버린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어차피 평민들이 공주에 대해 뭘 알겠는가. 나중에 나에 대해 듣게 돼도 이름만 똑같 다고 우기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순식간에 꼬치 8개를 해치우고 사과 주스로 입가심 까지 한 나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입가를 닦았다. 나는 배도 든든해졌고 해서 헤라 아줌마가 알려준 옷가게로 가서 몇 가지 옷가지와 모 험가들이 흔히 입는 로브를 하나 샀다. 주인이 나를 철모르는 귀족아가씨로 보고 바가 지를 씌웠지만 넘쳐나는 게 돈이라 그냥 속아주었다. 좋은 일 했다고 생각하지 뭐. 난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위에 로브를 입자 원래 입고 있던 옷이 가려져 사람들의 시 선을 끄는 일은 없어졌다. 가끔 몇몇 사람들이 나의 빼어난 외모에 힐끔힐끔 쳐다보긴 했지만 말이다. 저녁 늦게까지 축제를 구경하면서 돌아다니던 나는 한밤중이 돼서야 궁으로 돌아왔다. 흑마법 외엔 아직 4서클 마법밖에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텔레포트 마법 대신 플라 이 마법으로 날아가야 했지만 별 탈 없이 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루 종일 보이지 않았던 이유를 묻는 캐롤에게 왕궁을 돌아다녔다고 둘러대고 방으로 들어온 나는 그대 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즐겁긴 했지만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보니 피곤했다. 그래도 재미있었어. 내일도 축제에 가야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생각보다 더 피곤했는지 나 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다. 오늘도 무사히 왕궁을 빠져나온 나는 언제나처럼 축제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캐롤이 내가 자꾸 사라지자 의심을 하기 시작했지만 증거가 없는데 뭘 어쩌겠는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나타나는데. 심증은 있으되 물증이 없도다. 축제라는 건 언제 봐도 재미있었다. 인간들은 다른 건 몰라도 노는 쪽으로는 고도로 발달한 건 같다. 이래서 다른 마족들이 인간 세상을 제집 드나들 듯이 다녀었군. 두리 번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간이 무대에서 구리빛 피부을 자랑하는 건장한 한 남 자가 갑자기 입에서 불을 뿜어내자 화들짝 놀랐다. 뭐, 뭐야? 저게 뭐야? 드래곤도 아닌데 입에서 불을 뿜었어! 인간들이 입에서 불을 뿜 을 수 있다는 건 금시초문인데. 앞으로 인간들이랑 싸우면 근접전은 피해야겠다. 화력 이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가까이 있다가는 눈썹이랑 머리카락 다 태워먹게 생겼다. 그 런데 제 4기사단 기사들은 나랑 싸울 때 왜 불을 안 뿜었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 었다. 나중에 내가 얼마나 순진했는지 알게 되었지만 당시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인간들의 새로운 능력을 알아냈다는 생각에 기뻐하며 걷던 나는 한 쪽에 유난히 사람 들이 많이 몰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길을 지나던 사람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그 쪽으로 몰려들었다. 나 역시 호기심 많고 시간 많은 인간답게 사람들을 따라 다가가 보았다. 억지로 사람들 틈을 해집고 간신히 맨 앞까지 와보니 뭔가 거창한 공연이 이 루어지고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두 사람이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말다툼은 거의 일방적이었는데 왼쪽 뺨에 흉터가 있는 것을 제외하면 평범하게 생긴 남자가 우락부락한 거구를 유수와 같은 말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거구의 사나이도 몇 마디씩 하긴 했지만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축제에서 싸움 은 자주 일어나는 상황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게 신기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보통의 정상적인(?) 말싸움과는 조금 달랐다. 우선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 것이 간이 무대 위라는 것, 그리고 말리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 싸울 곳이 없어 하필이면 무대 위에서 싸우는 것도 그렇고, 아무리 세상에서 제일가 는 구경이 싸움 구경과 불구경이라지만 한 명도 말리지 않는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가. "이봐, 브로드! 힘내라구! 저 입만 살아있는 녀석을 뭉개버려!!" "잭! 오늘도 너한테 걸었다! 절대 지지마!" "젠장! 한 싸움하게 생겨서 걸었더니 돈만 날리게 생겼잖아!" 말리기는커녕 누가 이길지 내기까지 걸고 있었다.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들어보니 흉터가 있는 사람이 잭이고,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덩치가 브로드 인가보다. 그러고 보니 싸우는 것치고는 분위기가 살벌하지도 않았고, 저 덩치가 상당한 파워를 자랑할 것 같은 주먹을 사용하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한 방 치면 잭이란 사람은 바로 다운 될 것 같은데도 말이다.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옆에서 열심히 잭을 응원하는 중년 아저씨를 붙잡고 물어보았다. "아저씨, 싸움이 났는데 왜 아무도 말리지 않죠?" "처음 보는 건가보지? 이건 누가 말빨이 센가 겨루는 시합이야. 저 두 사람도 정말로 싸우는 건 아니야." "네에? 그런 것도 있어요?" "뭐 축제의 명물 중 하나지. 저기 왼쪽 뺨에 흉터가 있는 사람이 잭인데 저 사람을 이 기면 참가비의 열 배를 받을 수 있어. 참가비는 자기 맘대로 내니까 잘만하면 큰돈을 벌 수 있지. 하지만 그만두는 게 좋아. 어제부터 계속 지켜봤는데 잭이 지는 건 한 번 도 보지 못했어."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여준 아저씨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참 예의가 바르기도 하지) 다시 무대 위로 시선을 돌렸다. 별게 다 있네. 하긴 입에서 불을 뿜는 사람도 있는데 뭔들 없겠어. 결국 브로드라는 덩치는 도저히 못 당하겠다며 스스로 패배를 인정했다. 하긴 저 잭이라는 인간이 실실 웃으면서 속을 긁다못해 후벼파더라. 시합이 잭의 승리로 끝나자 브로드에게 돈을 걸었던 사람들은 일제히 절규했다. 브로 드가 한 싸움하게 생기긴 했지만 그 싸움이라 것은 육체적인 싸움에만 국한된 모양이 었다. 원래 저 인간(잭)처럼 실실 웃고 다니는 인간들이 사람 염장 지르는 깃을 잘하 지. 멀리서 찾을 것도 없어. 바로 라디폰 공작이 그 대표적인 예잖아. 한 시합이 끝나 자 무대 옆에서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던 사람이 사회자였는지 앞으로 나와 소리쳤 다. "다음 도전자 없습니까? 잭을 이기면 자신이 낸 돈의 10배를 받을 수 있습니다! 단, 최소 금액은 1실버부터입니다! 자, 아무도 없습니까?!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누구든지 좋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원래 이런 장사는 무조건 이겨서는 안 된다니까. 가끔씩 몇 번 져줘야 사람들이 모이지. 얼마 보지 못했지만 잭의 말솜씨는 수준급이었 다. 하지만 나에 비하면 아직 멀었지. 잭과 브로드의 시합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나는 구미가 당겨 손을 번쩍 들었다. "저요! 제가 할게요!" 내가 외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여기저기서 웃 음이 터져 나왔다. 가당치도 않다는 뜻이었다. 진정한 실력자를 몰라보는군. 멍청하게 시 리. 그러나 사회자는 달랐다. 처음에는 어이없는 눈으로 보긴 했지만 더 이상 나설 사람이 없어 보이자 잽싸게 신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약은 놈. 하지만 이 행동으로 오늘 번 전재산을 날리게 될꺼다. 거는 돈이 커야 따는 돈도 크는 법이기에 나는 1골드를 선뜻 내놓았다. 금화의 황홀한 금빛에 이제까지 들리던 웃음소리가 싹 사라졌다. 1골드라 는 거금을 내놓은 것을 보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이리라 생각하고 있겠지.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이 맞다. 뛰어난 표정연기와 화술. 그 어느 누가 날 당하리. 사람들은 잠시 나와 잭을 비교해보더니 대부분의 사람이 잭에게 돈을 걸었고, 나에게 건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전 시합의 패자인 브로드도 분한 마음 때문인지 나에게 돈을 걸었다.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고, 상대를 노골적으로 모욕하는 행위를 하면 자동적으로 패하게 된다는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나와 잭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무대 위라 사람들 의 시선이 장난 아니게 집중되었지만 내가 그런 거 신경 쓰는 것 보았는가. 나는 잭을 향해 살포시 웃어주고, 그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곧 깨질텐데 선제공격은 양 보해줄게. 시작해보렴. "이렇게 곱~상~하게 생긴 아가씨께서 상대라니 영광이군요." "알고있으니 다행이군요." 나는 그런 당연한 말을 하는 의도가 뭐냐는 시선을 잭에게 보냈다. 잭은 내가 생각보 다는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천천히 살펴보더니 다시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하하하! 이거 당찬 아가씨군요. 하지만 성격이 그,모,양,이면 남자들이 좋아하지 않 을텐데요. 성격을 조금 고쳐보는 게 어떨까요?" 한 마디로 니 성격 더럽다는 말이다, 하지만 대놓고 성격 파탄자라는 말까지 들었던 내가(물론 그에 따른 응분의 대가를 내려주었다) 이 정도에 꿈쩍이라도 하겠는가. 보 통 소녀로 생각하면 큰 코 다치지. "사양하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남자들이 너무 쫓아다녀서 골친데 더 이상 불어나면 곤 란하죠." "근거 없는 자신감은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죠." 나와 잭의 치열한 말싸움은 계속 되었다. 하지만 전에 있었던 시합과는 달리 분위기는 매우 부드러웠다. 나와 잭 모두 방실방실 웃으면서 나긋나긋하게 말하고 있으니 당연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부드러운 말투로 하는 말치곤 말속에 가시들이 많았다. "아가씨 부모님들이 정말 존경스럽군요. 저 같으면 아가씨 같은 딸이 있다면 당장 쓰 러지고 말 겁니다. 화병으로 말이죠." 짜식, 부모까지 거들먹거리네. 하지만 넌 안 돼. 나는 생글거리던 표정을 지우고 정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잭을 보았다. 가히 연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생생한 표정연기였다. 이왕 하는 거 확실히 하자는 차원에서 눈에 눈물까지 고이게 만들었다. 기술명 '눈물과 함께 공격을'. 주로 여자들이 많이 애용하는 방법 중에 하나지만 사 용하는 사람에 따라 효력은 천차만별이다. 나? 후후후, 다 아는 건 묻지 마라. "어머, 그렇게 몸이 안 좋으세요. 그러게 평소에 운동 좀 하시지 그러셨어요. 입운동 만 하면 운동이 되지를 않는답니다. 그런 몸으로 나라에 충성하고, 가족을 부양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을지 심히 걱정이 되는군요." "하,하,하. 그래도 아가씨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데." 그는 억지로 일그러진 웃음을 띠며 대꾸했지만 이어지는 내 말에 침몰하기 시작했다. "지금 신체 건장한 성인 남자가 아직 어리고 가녀린 소녀와 비교해서 만족하는 건가요 ?" 그냥 들으면 묻는 말이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이렇다. '인간아, 아직 나 같은 소녀랑 비교하고 싶냐? 그렇게 살려면 왜 사니? 나 같으면 꽉 죽어버리겠다' 겉으로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말하면서 이 속뜻을 얼마나 잘 전달하느냐에 따라 말싸움의 승패 가 결정되는 것이다. 나는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도 말하는 속도와 어조, 강세, 그리고 눈빛만으로 이런 뜻을 120% 확실히 전달시켰다. 잭은 어버버거리며 뭔가 말은 하고 싶은데 말을 할 수 없는 답답한 얼굴을 하고 있었 다. 이 때가 바로 결정타를 날리기 가장 좋은 때다. 나는 생글생글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죠 세상에는 실실 웃으며 다른 사람들 열 받게 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요. 아직 어리다면 세상 경험이 없고 워~낙~ 순진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다 큰 사람이 그러는 건 보기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이 세상 혼자 사는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의 마음도 헤아려주는 게 인간으로서 기본도리죠. 그런 인간 이하의 행동은 참으로 나쁜 것 같아요. 그렇지 않나요?" 넌 인간으로서 기본도 안 되어있는 놈이야. 이런 말을 순화해서 들려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 어려서 경험이 없고 순진해서 그래, 라는 말을 중간에 넘음으로써 나에게 피해가 오는 것도 미연에 방지했다. 그렇지 않아도 정신적으로 혼란하던 잭은 인간 이하라는 말에 충격을 받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난 나쁜 놈이 아냐, 나는 착하게 살았어, 라고 중얼거리는 것이 심적으로 큰 타격을 받은 모양이다. 쬐끔 불쌍했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것이다. 뭐 웃으면서 사람 열 받게 하는 것도 훌륭한 기술 중의 하나지만 내가 이기기 위해서 부득이하게 이런 방법을 사용한 것이 다. 절대 좋게 끝내는 방법도 있는데 인간이하라는 충격적인 말을 한 건 아니다. 잭은 오늘의 좌절을 딛고 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의 말솜씨를 손에 넣게 될 것이다. 힘내 라! 잭! 나는 마음 속으로 그를 응원하면서 얼어있는 사회자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내가 이겼으니 돈 내놓으라는 소리였다. 내가 낸 돈이 1골드니 10배면 10골드였다. 10골드 면 굉장한 거금이었기에 돈을 꺼내는 사회자의 손이 알콜 중독자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 그러나 나는 냉정하게 그의 손에 들린 돈을 낚아챘다. 원래 세상은 약육강식 아니겠 는가. 내가 이기자 내게 돈을 걸었던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잭에게 몇 백 명이 걸었고 나에게 건 사람은 10명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 사람당 배당이 몇 백 배는 되 었던 것이다. 환호하는 그들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와 함께 하는 자는 축복이 있으리! 음하하하! 사이비 교단의 교주같은 생각을 하는 나였다. "여어! 예쁜 아가씨! 멋졌어~!!!" "덕분에 아까 날린 돈의 세 배는 벌었다구! 내가 한 턱 내지!!!" "크하하하!! 거기 아가씨, 사랑해!!!" "돈이다! 돈! 아가씨, 고마워!!!" 훗, 뭐 이 정도 가지고. 그들의 환호에 흐뭇해하며 돈벼락 맞은 몇 명의 운 좋은 사람 들과 필연적으로 질 수밖에 없었던 다수의 사람들의 대조적인 표정을 느긋이 감상했다 . 그러게 나한테 걸었어야지. 그러다 우연히 구경꾼들 속에 있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 쳤다. 득의양양하게 웃고 있던 나는 그 남자를 보자 웃음이 싹 가셨다. 검은 머리의 미청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으악! 에릭 리트 라디폰~!!!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에릭을 보고 패닉상태에 빠져있던 나는 에릭의 옆에 있 는 사람이 계속 손을 흔들자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선가 본 파란 머리의 여 자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아는 척 하고 있었다......세린스. 예전에 공주궁 정 원에 몰래 숨어있던 그때 그 여자다. 정말 재수도 없지. 어째서 여기서 저 둘을 만나 는 거야?! 나는 눈앞에 앉아있는 두 사람의 눈을 피해 이리저리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재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세린이야 그렇다 쳐도 하필이면 에릭을 만날 게 뭐란 말인가. 하늘이 날 버린 게야. 흑흑흑. 말빨을 겨루는 시합에서 이긴 장 면을 들킨 나는 에릭과 세린이 이상한 소리를 하기 전에 재빨리 근처에 있는 찻집으로 끌고 들어왔다. 하지만 이 후터가 문제였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까? 에릭이 라디폰 공작에게 찌르면 공작이 아바마마에게 말할 것이고, 그럼 끝장이었다.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영원히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릴까? 하지만 에릭이 페드인 왕국의 제일의 검사라는 점이 상당히 마음에 걸렸다. 재미있게 됐다는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 세린도 보통 이상의 실력은 되는 것 같은데. 만에 하나 둘 중에 하나가 도망치면 뒷수습이 어렵다못해 머리 빠개진다. "오랜만이군요, 마리엔 공......." "오홋홋호~~~!!! 세린도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냈나요? 얼굴이 반질반질거리는 걸 보니 잘 지냈나 보군요. 에릭도 오랜만은 아니고 얼마 전에 한 번 봤죠? 이런 곳에 서 만나다니 정말 기,막,힌, 우연이군요." 세린이 멍청한 건지 아니면 고의였는지 모르겠지만(어느 쪽이든 용서가 되지 않지만) 공주님이라고 부르려고 하자 생각을 재빨리 접은 채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말 그대로 기가 막힌 우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군요. 정말 기막힌 우연이죠? 이런 곳에서 마리엔님을 뵙게 되다니 말입니다. 그 렇지, 에릭?" "그렇군." 그래도 아주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는지 공주님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황 이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세린은 흥미롭다는 듯이 웃고 있었고, 에릭도 약간 놀라고 있었다. 물론 자세히 봐서 그렇다는 거지 언뜻 보면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두 잡것들 은 계속 말없이 쳐다보면서 이 상황을 설명해보라고 무언의 압력을 보내고 있었다. 도 대체 이 놈들이랑 무슨 원한이 있길래 넓은 아렌테에서 딱 마주친 거야?! 말싸움 시합 에 나가는 것이 아니었어. 계속 시선을 돌리며 차맛이 좋네, 찻집이 깔끔하네, 딴청을 피웠지만 그들의 시선은 집요했다. 결국 나는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끝까지 버팅기려고 했는데 에릭 이 아버지가 아시면 좋아하시겠군, 이라고 협박을 했던 것이다. 공주를 협박하는 것이 기사로서 할 짓이냐! 이 썩을 놈아! 나는 축제를 보러 나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며, 우연히 그 곳을 지나치다 우연히 참가 하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 에릭과 세린은 심히 의심스럽다는 눈치였지만 내가 그렇다 는데 지들이 어쩌겠어. 내가 그 전부터 축제에 왔었다는 증거 있어? 공주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지. 나는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방긋 웃었다. 그러자 세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리엔님, 그 시합 처음부터 다 봤습니다. 정,말, 놀랍더군요." 볼 거 다 봤다는 소리다. 그러니 가증스러운 연기는 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하여간 일 생에 도움이 안 된다니까. 나는 순진한 표정을 지은 채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돌아갔 다. 어떻게 에릭과 세린의 입을 막아버리는 방법이 없을까? 그러면서 앞으로 축제 구 경오는 것을 절대 방해하지 못하는 방법이 필요한데.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던 중에 한 가지 방법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그래. 그렇게 하면 아무 말도 못 할꺼야. 흐흐 흐. 나는 순식간에 불만스럽던 표정을 지우고 눈을 빛내면서 에릭과 세린을 조르기 시작했 다. "저기 있잖아 나 이런데 와보는 건 처음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구경나가자. 응? 이번 한번만 봐줘. 나 혼가 가는 게 불안하면 같이 가면 되잖아. 말도 잘 들을 테니까 나가 자. 응?" 에릭과 세린은 내가 갑자기 애교모드로 나가자 당황했다. 내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애 교를 떨었던 사람은 국왕밖에 없었으니 이런 모습은 처음이겠지. 에릭과 세린의 반응 에 더욱 힘을 얻은 나는 급기야 에릭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세린은 여자니 별 효과 가 없겠지만 남자에게, 특히 이렇게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인간들은 당황하게 마련이 다. "무슨...!" 에릭이 나를 떨구려했지만 이번 작전은 반드시 이 두 사람이 나와 동행해야 한다는 조 건이 붙기 때문에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같이 가자~.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겨우 나온 거란 말이야. 응? 내 부탁 들어줄 거 지? 그렇지? 내 부탁 들어주면 세린이 전에 몰래 정원에 숨어있었던 것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 내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당황하던 에릭은 세린이 몰래 정원에 숨어있었다는 말에 내가 자기 팔에 매달려있는 것도 무시한 채 세린을 노려보았다. "또 연습하지도 않고 거기 가 있었냐?" "이봐,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보지 말라구. 가끔은 휴식도 필요한 거야. 난 너처럼 검 에 미치지 않았거든." "휴식을 꼭 그런 곳에서 할 필요는 없을 텐데?" "아, 거긴 아무도 오지 않거든. 예전에는 마리엔님도 오지 않아서 마음놓고 갔지. 하 지만 덕분에 조난 당한 마리엔님을 구할 수 있었으니 된 거 아니냐." 그런 말은 할 필요 없잖아! 그 때는 마리엔이 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것 뿐이야! 다 행히 에릭은 더 이상 세린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자기 궁에 있는 정 원에서 길을 잃고 헤맸다는 어이없는 일은 알려지지 않았다. 결국 에릭은 내 끈질긴 설득과 체면을 완전히 무시한 애교를 이기지 못하고 못마땅해 하면서 동행할 것을 허락했다. 세린은 아까부터 재미있어하며 탐탁지않아 하는 에릭을 설득하는데 일조했으니 따로 설득할 필요도 없었다. 이제 너희들은 내가 친 덫에 걸 린 거야. 아무도 몰래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나는 두 사람의 안내를 받아 찻집을 나왔 다. 세린과 에릭은 내가 좀 전에 축제에 와보기는 처음이라고 우겼던 것을 기억하는지 앞 장을 서며 안내를 해주었다. 다 아는 것을 모르는 척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세린이 설명해주는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수업을 잘 듣는 학생이 예뻐 보 이듯이 내가 자신의 말에 일일이 동조를 해주자 세린은 신이 나서 물어보지도 않은 것 까지 떠벌거렸다. 전에도 이런 일이 한 번 있었지, 아마. 그러나 신이 나있는 나와 세린과는 달리 에릭은 우리 옆에서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행동 하나 하나에서 귀찮아하고 있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인생을 저렇게 무기력하게 사는 인간은 처음이군. 에릭은 놀랍게도 모자에서 비둘기를 만들어내는 신기한 능력을 보여주는 남자를 보고도 여전히 무표정을 고수했다. 아무 것도 없는 모자에서 비둘기 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그걸 보고도 관심이 없는 에릭이 더 신기했다. 내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에릭을 보자 세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마리엔님, 에릭은 원래 저렇습니다. 저 녀석이 관심이 있는 건 오로지 검뿐이죠. 평 소에는 저렇게 맹하다가도 칼만 잡으면 사람이 변하거든요. 그리고 옆에 이렇게 근사 한 남자가 있으니 저런 무뚝뚝한 놈에게는 신경 끄셔도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려고 했어. 세린의 동감이 가는 권유와 내 의지로 에릭에게 관심을 끄려던 나는 세린의 말 중에 이상한 말이 하나 생각나자 놀라서 소리쳤다. "잠깐! 남자라니? 세린 남자였어?" 그러고 보니 전에 만났을 때처럼 펑퍼짐한 옷을 위에 걸치고 있어 몰랐는데 자세히 보 니 가슴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세린의 가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다시 얼굴을 쳐다 보았다. 가슴은 없는데 얼굴은 여자다. 그럼 저 얼굴로 남자란 말이야?! 말도 안돼. 저 곱상한 얼굴 어디를 봐서 남자라는 거야? 내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보자 세린은 상처받은 얼굴로 말했다. "너무하세요. 이제까지 제 성별도 모르셨단 말입니까? 전 마리엔님이 별 말하지 않으 시기에 제가 누군지 아시는 줄 알았습니다. 저에게 그렇게 관심이 없으셨다니 너무 슬 픕니다. 저의 미모가 워낙 출중하다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아, 어머님, 왜 저를 이렇게 아름답게 나으셨나요?" 아주 쇼를 해라, 쇼를. 에릭은 많이 봐온 일인지 별 반응이 없었지만 나는 소름이 끼 쳤다. 말이 많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세린과 에릭을 반반씩 섞어놓으면 그 제야 정상적인 인간이 나올 것 같았다. "네가 누군데?" 물어봐주세요, 라는 세린의 시선을 무시하지 못한 채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움직 였다. "저는 세린스 제임 티스몬입니다. 티스몬 백작가의 장남입니다. 에릭과 같은 로얄 기 사이며, 마법도 조금 다룰 수 있습니다. 전에 말했다시피 세린이라고 불러주십시오" 티스몬 백작이라면 궁전 무도회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매우 진중한 사람으로 기 억하는데 어째서 아들은 저 모양일까? 그러고 보니 라디폰 공작과 에릭의 경우와 정반 대잖아. 무슨 남자가 이렇게 말이 많단 말인가. 한참동안 옆에서 이것저것 떠들어대던 세린이 뭔가를 발견하고 갑자기 그 곳으로 뛰어 갔다. 세린이 사람들 틈으로 사라지자 나와 에릭은 멀뚱히 그 자리에 서서 그를 기다 렸다. 잠시 후, 다시 사람들 틈을 헤집고 나오는 그의 손엔 몽실몽실한 털뭉치 같이 생긴게 막대기를 감싸고 있는 것이 세 개 들려있었다. 나와 에릭 앞까지 온 세린은 그 중 분홍색의 털뭉치 비슷한 것을 내밀며 말했다. "이런 축제에서는 역시 솜사탕이 최고죠. 한 번 드셔보십시오." "뭐? 솜을 먹어? 솜으로 어떻게 사탕을 만들지? 연금술사가 만든 건가? 이거 먹고 부 작용은 없는 거야?" 나는 솜사탕이라고 불린 것의 냄새를 맡으며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손가락으로 한 번 꼭 찔러보니 쑤욱 들어가는 게 솜이 맞는 것 같긴 했다. 그 솜뭉치에서는 달콤한 냄새 가 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먹어도 되는 걸까? 혼자서는 도저히 이게 뭔지 알아낼 수 없었던 나는 설명해달라는 눈으로 세린과 에릭을 보았다. 그들은 잠시 솜뭉치를 들 고 있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더니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아이고 나 죽네! 솜을 먹는데! 하하하!" "큭큭큭...푸웃...도저히 못 참겠어...하하하!!!" 에릭까지 숨이 넘어갈 듯이 웃자 황당해졌다. 이 놈들이 미쳤나? 사람들이 다 쳐다보 는데 창피하지도 않은 건가? 생각 같아서는 일행이 아닌 척하고 가버렸으면 좋겠지만 이들과의 동행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에 배를 움켜잡고 웃는 두 놈들의 옆에 어정쩡 하게 서있었다. 한참 후에야 간신히 웃음을 멈춘 에릭과 세린은 너무 웃어서 나온 눈물을 닦았다. 그 사이 이런 미친놈들과 다녀서 고생이 많겠다는 동정의 시선을 무수히 받은 나는 볼이 퉁퉁 부어있었다. 웃으려면 자기 집에나 가서 웃지 대로 한복판에서 웃다니! 덕분에 죄 없는 나까지 이상한 시선을 받았잖아! 아직까지는 원인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그러나 말하는 중간 중간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이어지는 세린의 설명에 나는 쥐구멍 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에이, 헷갈리게 왜 이름이 솜사탕이야? 그러나 이럴 때 부끄러워하면 할수록 더 놀린다는 것을 아는 나는 뻔뻔하게 그럴 수도 있지, 라는 표 정을 지었다. 그러나 약간 표정이 흔들렸는지 세린은 무엄하게도 귀여운 꼬마 다루듯 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릭마저 웃고 있으니 오쭉 하겠는가. 결코 오늘 일을 잊지 않으리. 에릭은 원래 찍혔 고, 세린 네 놈도 찍혔어. 솜사탕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긴 했지만 축제 구경은 순조로웠다. 나 혼자 있을 때는 한밤중까지 돌아다녔지만 오늘은 세린과 에릭 덕분에 해가 지기 시작하자 돌아 가야 했다. 이제 세린과 에릭이 오늘 일을 절대 발설 못하게 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이 순간을 위해 내가 너희들과 동행한 것이 아니더냐. 나는 왕궁까지 모셔다드린다는 세린과 에릭의 제안을 거절하고 가기 전에 한마디 해주었다. "이제 우리는 공범이야. 그거 알지?" 그 말인즉슨 너희들이 나와 같이 축제를 돌아다닌 이상 너희가 오늘 일을 발설하면 나 도 할 말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아바마마, 전 정말 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에릭 경과 세린스 경이 무도회보다 축제가 재미있다고 꼬셨어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두 사람이 저와 동행할 이유가 없잖아요 . 에릭 경과 세린스 경이 워낙 재미있게 말을 해서... 죄송해요! 모두 제 잘못이예요 ! 에릭 경과 세린스 경은 저를 축,제,에, 데,려,간, 죄밖에 없어요오~.' 국왕이 내 말을 믿겠는가? 아니면 우연히 말싸움 대회에 참가하신 공주님을 발견하고 같이 다니게 됐다는 두 사람의 말을 믿겠는가.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왕궁으로 돌려보 내야만 했던 것이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 에릭과 세린의 얼굴이 헬쓱해졌다. 불 여우라고 생각하고 있으리. 하지만 그 불여우를 당해낼 재간이 없는 그들은 오늘 일을 발설하지 못할 것이다. 내일도 즐거운 축제 구경을 해야지. 룰루루~. 오늘은 다른 날 보다 일찍 들어가게 됐지만 무사히 위기를 모면했다는 생각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 #13-글로리 라이언 짹짹짹. 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에 잠이 깬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창가에 다가가 밖을 보니 아직 어스름한 것이 평소보다 더 이른 시간에 깨어난 듯 했다. 하지 만 다시 침대로 기어 들어갈 마음은 없었다. 아니, 가슴이 두근거려서 더 이상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바로 오늘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글로리 라이언이 열 리는 날이다. 드디어 오늘이 오고야 말았군. 내가 출전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떨리네. 하긴 오늘의 결과에 내 체면과 자존심이 몽땅 걸려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동안 좀 바빠서 기사 단을 찾아가지 못했는데 잘하고 있었겠지? 축제 구경할 때는 그들에 대해 까마득히 잊 어버리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한 번쯤은 찾아갈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오늘 가서 격려를 해주면 되겠지. 이번 글로리 라이언에 참가할 사람은 가스톤, 죠안, 미첼로였다. 가장 실력이 뛰어난 보나인이 참가하지 않은 게 의외이긴 했지만 이 멤버로도 문제는 없었다. 그동안 내가 쏟아 부은 노력이 얼마인가. 질 리가 없어. 가스톤은 성실히 훈련에 참여해서 탄탄한 실력을 가지게 되었고, 죠안은 어지간한 상대와 싸울 때는 스피드를 끝까지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미첼로도 글로리 라이언에서 멋진 모습으로 여성들의 시선을 독차지 하겠다는 생각에 불타올라 플라워 드러를 익히는데 모든 정열을 쏟았다. 그들은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면 가히 놀랄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그들뿐만 아니라 제 4기사단 전원이 크게 실력이 향상되었다. 이 모든 게 나와 직접 대련을 한 덕분이지. 만약 내가 가진 창이 드래곤 본이 아니라 보통 창이었다면 수십 번은 벌써 부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게다가 하늘이 돕는 것인지 로얄 기사단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자인 에릭이 이번에는 참가하지 않는단다. 에릭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나를 도와준 격 이 되었다. 나는 현실주의자기 때문에 만년 꼴등이었던 제 4기사단의 기사들에게 우승 하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아무리 내가 가르쳤다지만 몇 달만에 우승할 실력이 되면 누가 검술을 익히는데 고생하겠는가. 내가 원하는 것은 단지 제 1기사단을 이기라는 것이다(무리한 요구이간 매한가지였다). 원래 생각은 4, 5, 6위를 하자는 생각이었지 만 에릭이 빠졌으니 한 명 정도는 3위 입상을 노릴만했다. 잘만 하면 될지도 몰라. 잘 만 하면. 마차 밖에서 어마어마한 환성소리가 들려왔다. 생각 같아서는 창 밖으로 고개를 빼고 왕가의 행렬을 구경하는 사람들을 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는 없었다. 공주 라는 지위가 뭔지. 나는 별 수 없이 창에 커튼을 치고 커튼 뒤에 숨어 눈만 내민 채 마차 밖의 풍경을 구경했다. 이러면 아무도 내가 눈에 불을 켜고 보고 있다는 것을 모 르겠지. 기사의 나라라고 불리는 나라라 그런지 이번 대회를 관람하기 위해 현재 국왕과 오펠 리우스 왕비, 아리란드 전하, 두 명의 왕자와 나를 제외한 다른 공주들까지 모조리 콜 로세움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나야 제 4기사단이 얼마나 잘하는지를 지켜보기 위해서 가는 거지만 데미나 공주와 플로라 공주까지 가는 것은 의외였다. 뭐 그 둘이 가든 말 든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었지만 오펠리우스 왕비의 경우는 달랐다. 그 여자가 제 4 왕 궁기사단이 다른 기사단에 비해 실력이 떨어지는 것을 빌미로 나를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줄 알아? 오늘 이 기회에 그 콧대를 꺾어주겠어. 글로리 라이언을 관람하러 가는 행렬은 비단 페드인 왕국의 왕족들뿐만이 아니었다. 페드인 왕국의 건국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서 온 사절단들도 많이 포함 되어 있었다. 그렇다보니 행렬은 화려하고 길 수밖에 없었다. 이 곳에 있는 사람이 최 소 백작 이상이니 화려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행렬을 호위하는 기사 와 병사만도 수백이 넘었다. 하긴 여기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이라도 다치면 난리가 나 니 당연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기사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어 행렬을 구경하러 온 사 람들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내 불만이야 어쨌든 길거리에 모인 사람들은 마차가 지날 때마다 꽃잎과 다채로운 색 의 종이조각을 뿌려댔다. 그 수가 몇 천명은 되었기 때문에 마치 하늘에서 꽃비가 내 리는 것 같은 장관이 연출되었다. 내가 그런 모습을 넋을 빼고 있는 사이 어느새 마차 는 콜로세움에 도착했다. 행렬의 마차들은 콜로세움 밖에 정지하는 다른 마차들과는 달리 콜로세움 안으로 바로 들어갔다. 콜로세움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여러 곳이 있었 는데 행렬이 들어간 입구는 가장 크고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입구였다. 이 곳은 삼 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는 기사들과 병사들 외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소란스러운 밖 과는 달리 조용했다. 기사들은 재빨리 움직여 국왕을 필두로 한 일행을 로얄석으로 안내했다. 그 곳은 시합 이 이루어지는 경기장이 모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로얄석이 라 그런지 의자부터 달랐다. 소파 비슷한 의자가 서로 널찍이 떨어져있었고, 의자 옆 에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작은 식탁이 있었다. 마법을 이용한 것인지 동그란 식탁의 위쪽에는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물이 나오는 관까지 달려 있었다. 게다가 시합을 보러 온 건지 실내장식을 보러 온건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실내장식은 호화찬란하기 그지없었다. 돈을 쳐 발랐군. 이런 돈이 있으면 차라리 먹을 걸 사먹겠다. 쓸데없이 왜 이렇게 꾸며놓은 거야? 그냥 경기만 보고 가면 되잖아. 국왕은 로얄석 중에서도 가장 푹신해 보이는 맨 앞줄의 중간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 리고 그의 오른쪽에 오펠리우스 왕비가 앉는 것을 시작으로 사람들은 시종들이 안내해 주는 자리로 가서 앉기 시작했다. 내 자리는 국왕의 바로 왼쪽 자리였다. 경기장도 잘 보이고 국왕 이하 거물들이 가까이에 있는 명당 자리였다. 자리에 앉은 후, 살짝 주변을 둘러보니 오펠리우스 왕비가 탐탁지 않은 눈으로 쳐다보 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오늘은 사냥감들이 너무 많아 왕비를 일일이 상대해 줄 시간이 없었던 고로 살며시 웃어주고 고개를 돌렸다. 물론 웃기지도 않는다는 뜻을 담 뿍 담아서 말이다. 데미나 공주와 플로라 공주가 화려하고 나풀거리는 드레스를 입고 온 반면에 나는 활 동하기 편한 간편한 옷을 입고 왔기 때문에 분위기부터 발랄한 분위기가 났다. 이럴 때 격식 따지고 새침떼기처럼 굴면 평생 보통 공주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보라구. 페 드인 왕국 사람은 마리엔의 악명이 있어 덜 그렇지만 다른 나라 사절단들은 눈에 보일 정도로 호감을 표시하고 있잖아. 이 모든 것이 내가 쏟아 부은 땀의 결정체가 아니겠 는가. 특히 레이만 왕자는 차가운 성격이라고 들은 것과는 달리 상냥하기 그지없었다. 애 나 한테 반한 거 아냐? 결과적으로 내게 좋긴 했지만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에게 반한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랑이란 걸 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인간 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 점 중 하나가 쉽게 사랑에 빠지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 을 희생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절대 이해가 안가. 그 사람 대신 죽으면 그 때야 슬퍼 해 줄지 몰라도 나중에는 다 잊고 다른 놈이랑 즐겁게 지낼걸. 그런 모습은 배아파서 절대 못 보지. 그리고 내가 미쳤다고 내 목숨 바쳐가면서 살릴 필요가 있겠어? 넘쳐나 는 게 사람인데. 절대 죽지 않는 마족이지만 내 목숨 아까운 것은 안다. 적당히 레이만 왕자와 기타 다른 나라 사절단들을 상대해주고, 슬슬 시합이 시작될 때 가 가까워오자 제 4기사단을 만나러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합에 나오는 기 사들이 있는 대기실로 내려가 보니 관계자 외 출입 금지였다. 하지만 권력이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기에 제 1공주의 힘을 유감 없이 발휘해 대기실로 들어갈 수 있었 다. 로얄 기사단까지 합쳐 8개의 기사단에서 출전하는 사람은 모두 24명밖에 되지 않 지만 각 기사단의 기사들이 응원 겸 코치하러 와있었었다. 게다가 기사들뿐만 아니라 시합 관계자,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사고를 대비해 신관과 마법사까지 있으니 북적거 렸다. 내가 들어서자 예의를 갖추긴 했지만 바쁜지 곧 자기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제 4기사단 외에는 볼 일이 없었기 때문에 바로 제 4기사단이 모여있는 곳으로 갔다. 그들은 내가 이 곳까지 올 줄은 몰랐는지 놀라움 반, 감격 반이 되어 있었다. "마리엔 공주님, 여기까지 어떻게 오신 겁니까?" "어떻게라뇨. 당연히 응원하러 왔죠. 그런데 가스톤와 죠안, 미첼로의 컨디션은 어때 요?" 나는 제 4기사단의 명성을 드높이는데 큰 역할을 할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얼굴 표정 을 보니 약간 긴장은 한 것 같지만 쫀 것 같지는 않았다. "긴장은 돼지만 이 정도쯤은 훈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죠." "훈련에 임하기 전의 긴장감에 비하면 참을 만 합니다." "설마하니 훈련 때만큼 죽도록 맞겠습니까?" 그들은 물론 제 4기사단 전원이 파란만장했던 과거를 회상하는 듯 멍하니 허공을 바라 보았다. 기분이 쪼오~끔 상했다. 누가 들으면 내가 진짜로 죽도록 팬 줄 알 거 아냐! 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그런 냉혹한 사람인 줄 알아? 상대가 힘들어 보이면 봐주면서 했다구! 너희들 그 정도면 엄청 봐준 거다. 마법도 안 썼지. 정식으로 창도 안 썼지. 어디까지나 마족 기준으로. 지금 여기서 한 차례 기합을 줘? 에이, 아서라. 아서. 시합 당일 날 그럼 안 돼지. 안 돼. 마음 넓은 내가 참는다.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왔으면 격려를 해줘야지. 격려 를.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창을 든(장식용 봉으로 위장해 항상 들고 다닌다) 손에 힘 이 잔뜩 들어갔다. "허억, 힘들긴 했지만 아주 아주 유익한 훈련들이었죠. 그렇지?" "무, 물론이지요! 그런 훈련들이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전 그런 훈련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신께 항상 감사 드리고 있습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그런 말해봐야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는걸. 오늘이 글로리 라 이언이 열리는 날이 아니었으면, 아니 하다 못해 여기에 다른 사람들만 없었으면 죽음 이었어. 내가 창을 쥔 손에 힘을 빼자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잠시 샛길로 새긴 했지만 대기실에 온 본연의 목적을 상기하고 그들을 격려하기 시작했다. "힘내요. 시합이 시작되면 내려올 수 없겠지만 다 보고 있을 테니까요." "마리엔 공주님께서 지켜봐 주신다면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공주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째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출전하는 가스톤이나 죠안, 미첼로가 아닌 다른 사람 이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열심히 하겠다는데.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제가 봤을 때 여러분의 실력은 예전에 비해서 못 알아볼 정도예요. 아마 이 곳에서 여러분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거예요." 진심이었다. 다른 기사들의 실력은 본 적이 없어서 확실하게는 말할 수 없었지만 내가 맘먹고 때리는 것을 1/2정도 피할 정도면 상당한 실력이었다. 특히 반사신경만은 내 가 다 놀랄 정도로 발달해버렸다. 매에 장사 없다는 말이 맞긴 맞나보다. 그러나 대기실에 있는 다른 기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내 말을 들었는 지 곳곳에서 비웃음소리가 들렸다. 공주 앞이라 차마 대놓고 비꼬지는 못하고 조용히 비웃기만 한 것이다. "아니, 저 것들이!" "어디서 감히......!" 제 4기사단의 기사들이 화를 내며 달려들려 했지만 손을 들어 그들을 막았다. 그들은 평소라면 먼저 나서서 두들겨 팼을 분이 평소답지 않게 왜 그러세요?, 라는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이 놈의 짜식들이 아까부터 보자보자 하니까! 내가 한차례 살벌하게 노 려봐 주자 제 4기사단의 기사들은 알아서 고개를 돌렸다. ================================================================================ 그렇다고 내가 다른 기사들이 감히 내 말을 비웃은 것이 기분 나쁘지 않은 것은 아니 었다. 그 증거로 현재 내 이마에는 힘줄이 여러 개 돋아있었다. 특히 제 1기사단 놈들 ! 다른 놈들은 그래도 내 눈치를 보면서 들키지 않으려는 노력이나마 하고 있지만 이 놈들은 바로 옆에 있으면서 대놓고 비웃고 있었다. 뭐? 검술에 대해 모르는 여자는 어쩔 수 없다고? 자기 기사를 닮아 허풍만 심하다고 ? 하,하,하! 니들이 감히 잠자는 마족의 심기를 건드리셨겠다. '100m 밖에서 욕해봐 다. 다 들린다' 의 위력을 모르는 이 놈들은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였고, 이 소리 를 다들은 나는 속이 부글부글거렸다. 어디까지나 실력이 좋기 때문에 제 1기사단을 목표로 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 놈들 에게는 절대 질 수 없어! 하지만 그냥 이기는 것만으론 성이 안 차! 그 근거 없는 자 부심을 산산조각 내주겠어! 다신 그 따위 버릇없는 짓을 못 하게 해주마. 으하하하! 나는 복수를 다짐하며 제 1기사단의 단장으로 보이는 백발의 노기사를 향해 똑바로 걸 어갔다. 단장으로 보이는 노기사는 다른 기사들보다 풍체도 좋고 경험도 많이 있어 보 였지만, 기사들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주도해서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이 망할 것!!! "당신이 제 1기사단의 단장인가요?" "...그렇습니다. 루드 크라스 모로라고 합니다." 루드라는 작자는 매우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무표정을 가장한 표정이었지 만 표정 연기의 대가인 내가 그 정도도 간파하지 못 할 리가 없었다. 멍청한 인간. 그 렇게 노골적으로 비웃는 눈매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하는데 누가 그걸 눈치 못 채겠냐. 나는 그에게 굳이 미소를 지어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아무런 표정도 띠지 않은 채 눈에 한가득 살기를 담아 쏘아보았다. 싸가지 없는 놈. 이걸 죽여, 살려? 살 벌한 눈길을 받은 루드와 제 1기사단의 잡것들이 몸을 흠칫거리는 것이 보였다. 별 것 도 아닌 놈이잖아. 제 4기사단 기사들은 이 정도 눈길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데 말이야 . 비단 이들만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내 눈길을 받지 않은 다른 기사단 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순전히 떨거지들밖에 없군. 그런 주제에 감히 내 게 싸움을 걸었겠다. 간이 크다 못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군. 용서가 안된다. 용서가. 나는 버릇없는 제 1기사단을 어떻게 묵사발을 내줄까 고민하느라 뒤에서 제 4기사단의 기사들이 그들에게 불쌍한 놈들, 어쩌다 공주님에게 찍혔을꼬, 라는 동정의 눈길을 보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 제 4기사단이 보기에 제 1기사단 놈들은 미친 게 틀림없었 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봐서 마리엔 공주님에게 찍히고 뒤끝이 깨끗한 놈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게다가 저 시선을 보라. 이미 적응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소름끼칠 정도 로 차가운 시선이었다. 가만히 루드를 노려보던 나는 좋은 생각이 떠오르자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 다. 제 1기사단을 박살내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으흠, 그래. 루드 경은 제 4기사단의 기사들이 제 1기사단의 기사들을 이길 수 없다 고 생각하는 모양이죠?" "...물론입니다. 저희는 연습도 하지 않는 저런 약한 놈들에게 질 정도로 약하지 않습 니다." 뒤에 있는 제 1기사단 기사들도 단장인 루드의 말에 동의하는 눈치였다. 자부심이 강 하다 못해 넘쳐나는 인간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걸 보 니 하나같이 성격이 더러운 놈들만 모인 것 같았다. "그래요? 저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군요. 나는 제 4기사단의 기사가 제 1기사단의 기사를 모,두,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내가 니들은 안 돼. 주제를 알아라, 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루드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내가 공주만 아니면 한 대 칠 기세였다. 싸움을 먼저 건 건 너희들이란 사실 을 잊지마. 아까 웃기는 여자라고 중얼거렸던 거 다 들었어~!!! 나는 아주 우습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제 1기사단을 한 명 한 명 훑어보았다. 그리고 모두 훑어본 후, 나는 어깨를 으쓱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어머, 이런 허접들이 왜 여기 있는 걸까? 제 4기사단이 백 배는 더 강하겠다. 애들아 , 혼나기 전에 짐 싸서 가는 게 어떠니?' 내 제스처에 담긴 의미는 이러했다. 이를 느낀 제 1기사단의 기사들은 눈앞의 소녀가 누구인지 잊었는지 이빨을 뿌드득 갈았다. 루드를 포함한 제 1기사단의 기사들은 씩씩 대면서 살벌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하, 공주만 아니었으면 넌 죽었어, 라고 생각하고 있지? 이 놈들아! "지금 저런 녀석들을 상대로 저희들을 무시하시는 겁니까? " 루드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리고 있었지만 나는 쾌재를 불렀다. 내가 해놓긴 했지만 너 무 잘 속아주는군. 나는 얄미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모습으로 말했다. "어머, 잘 아시는군요." "읏, 아무리 공주님이라도 그런 말씀은 지나치군요? 물론 제 4기사단이 공주님께 충성 을 맹세한 사실은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지만 실력 차이도 모르실 정도로 우둔하신 건 아니시겠죠? 하긴 마리엔 공주님께서 검에 대해 뭘 아시겠습니까. 제대로 알지도 못 하고 그런 말씀은 하시지 마십시오." '제 4기사단의 실력도 모르는 이 우둔한 여자야! 알지도 못하면서 나서면 재미없다!' 그래도 공주라고 이렇게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말 그 자체에서도 비이양거리는 투가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루드의 도발에 콧방귀만 뀌었다. 할려면 제대로 해라. 겨우 그정도냐? 말빨 대회에서 잭을 이긴 화제의 소녀가 바로 나다. 알 겠어? 나는 당연하다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둔하다니요? 전 사실을 말한 것뿐이에요. 오호호." 루드의 수염이 파르르 떨리는 게 화가 나도 많이 난 모양이다. 루드의 뒤에 있는 제 1 기사단의 얼굴도 일그러지다 못해 찌그러져 있었다. 신기하다. 수염이 떨려. 고슴도치 가 움찔거리는 것 같아. 잠시 버크리언의 수염이 떨리는 모습을 신기한 눈으로 보던 나는 지금의 상황을 떠올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우리 내기할까요?"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간단해요. 나는 제 4기사단이 이길 것에 걸겠어요. 루드 경은 제 1기사단이 이길 것 에 걸어요. 만약 내가 지면 내 말에 책임을 지지요. 제 4기사단이 제 1기사단에 지면 내가 무릎 꿇고 사과하죠." 내 폭탄 선언에 루드와 대기실에 있던 모든 기사들이 경악했다. 왕족이 무릎을 꿇겠다 는 말은 그만큼 엄청난 일이었다. 만약 이 일이 알려진다면 나는 평생 고개를 못 들고 다닐 것이다. 옆에서 보나인이 극구 말렸지만 내 말을 취소하지 않았다. "단, 내가 이기면 앞으로 제 1기사단은 시합이 끝나고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줘요. 부하 가 되라는 것과 같은 그런 허무맹랑한 부탁도 아니고, 기사로서 어긋나는 행동을 하라 는 부탁도 아니예요. 어때요?" 루드는 그 부탁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망설이는 눈치였다. 주저하는 그와 제 1기사단의 기사들을 보니 한 번 더 도발해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 서 나는 기꺼이 다시 한 번 속을 팍팍 긁어주었다. "아, 자신이 없나보죠? 하긴 내가 봐도 이건 내기가 되지 않는군요. 뭐 이거 내가 이 길 게 뻔하니 내기는 관두죠. 역시 제 4기사단이 이길 것을 그 쪽도 예상하고 있었군 요." 살살 성질을 건드려놨더니 드디어 폭발을 했는지 루드는 제 1기사단을 돌아보았다. 그 시선이 얼마나 살벌하던지 사람 하나 잡을 기세였다. 그 시선을 받은 제 1기사단의 기사들도 이에 못지 않은 눈빛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도 동의한다는 뜻이었 다. "마리엔 공주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공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이니 절대 잊지 마십시오. 사죄를 하시겠다는 말......" 루드는 씨익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뒤에 무릎을 꿇고 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었나 보 군. 제 1기사단 놈들도 앞으로의 일이 기대가 된다는 얼굴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마법 으로 한 번에 날려버리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들에게 처참한 패배를 안겨다주기 위해서 참았다. 누가 이길지는 해봐야 아는 거지. "아아~, 걱정 말아요. 내기에서 지면 내가 말한 데로 할 테니까. 경이야말로 기사가 한 입으로 두 말하진 않겠죠." "물론입니다!" 이 걸로 내기 성립! 이제 니들은 죽었어! 글로리 라이언이 끝나고 어떤 일이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해도 좋아. 나는 계획대로 내기가 성립되자 제 4기사단이 모여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모두들 왜 그런 일을 했냐는 책망이 담긴 시선을 보내고 있었 다. 아무렴 내가 승산도 없는 내기를 했을 것 같아? 날 믿으라구. 나는 아직도 당황하 고 있는 제 4기사단의 기사들을 향해 방긋 웃어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말했잖아요. 여기서 여러분들을 이길 사람은 거의 없다 구요. 내가 장담하는 거니까 믿어요. 난 여러분들을 믿어요." 내가 자신들을 믿고 내기까지 했다는 생각에 모두들 감동하는 듯했다. 특히 가스톤과 죠안, 미첼로의 얼굴은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였다. 덩치 큰 남자들의 초롱거리는 눈 빛은 과히 보기 좋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시합 전에 사기를 떨어뜨릴 수 없다는 생각에 꾹 참았다. 최선을 다하겠다는 세 사람의 다짐을 듣던 나는 어느새 글로리 라이언의 개회식이 시작될 시간이 되자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가기 전에 한 마디 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면 죽인다." 물론 진심임을 느낄 수 있도록 손에 들린 창을 몇 번 휘두르면서 말이다. 내가 인간에게 무릎 꿇고 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들도(제 4기사 단) 살고 싶으면 열심히 하겠지. 만약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지만 제 4기사단이 진다면 내 손에 작살나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졌을 때의 대처방 안도 생각해 두고 있었다. 아예 거기 있었던 인간들의 기억을 싸그리 지워버리는 거야 .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아예 보내버리는 거지만 한두 명도 아니니 어쩔 수 없지. 이기 면 제 1기사단은 내 손에 죽는 거고, 지면 제 4기사단이 내 손에 죽는 것이다. 기억만 지워버리면 내게 피해가 올 일은 전혀 없지. 흐흐흐. 미리 질 경우를 대비해 대처방 법까지 생각해 놓는 이 치밀함. 험난한 세상 편하게 살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자리로 돌아가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경기장 위로 올라왔다. 드디어 개 회식이 시작하는가 보네. 사회자가 경기장에 오르는 것과 동시에 콜로세움 상공으로 경기장의 모습이 거대한 영상으로 나타났다. 콜로세움으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도 관 람할 수 있도록 마법을 사용해서 경기장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는 것이다. 시합 모습을 영상 마법-마법석에 어떤 모습을 저장할 수 있도록 하는 마법-이 걸린 여러 개의 마 법석들이 공명해서 화면이 나타나기 때문에 실제보다 약간 시간차가 있고 박진감이 없 지만, 콜로세움에 올 수 없는 사람에게는 이 것조차 가까이에서 보이기 위해 콜로세움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사회자는 손에 음성 증폭 마법이 걸린 검은 막대기를 입에 가져가 대고 말하기 시작했 다. 글로리 라이언의 동시 상영에 음성 증폭 막대기까지. 인간들은 마법을 자질구레한 쪽으로 많이 발달시킨 모양이다. 마족의 경우는 공격마법과 정신계 마법에는 능숙하 지만 나머지 마법은 관심이 없었다. 마족이라고 모든 마법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이 렇게 보니 되게 신기하네. 마법을 저렇게도 쓸 수 있구나. 음성 증폭 막대기 때문인지 사회자의 목소리는 넓은 콜로세움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글로리 라이언을 관람하러 오신 여러분, 잘 오셨습니다! 글로리 라이언은 페드인 왕 국의 제일의 검사를 뽑는 시합으로 저희 왕국의 자랑인 왕궁 기사단의 기사분들이 자 웅을 겨루게 됩니다. 24명의 기사들은 한 차례 시합을 통해 12명의 승자를 가리게 됩 니다. 그리고 이 12명의 왕궁 기사분들은 2시간의 휴식시간 후에 다시 맞붙어 최종적 으로 승자인 6명이 남게 됩니다. 그리고 이 남은 6명의 자랑스러운 기사분들은 내일 있을 최종전에 출전하게 됩니다. 글로리 라이언의 우승자에게는 페드인 왕국의 제일의 검사라는 칭호와 함께 국왕 전하께 한 가지 청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질 수 있거나 국왕전하께서 친히 하사하시는 마법검을 소유할 수 있게 됩니다. 이 마법검으로 말할 것 같으면 5서클 공격마법 중에서......." 갑자기 분위기가 시장에서 '이 물건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이라고 말하며 사 람을 끌어모으는 장사꾼같이 변해버렸다. 그나저나 겨우 5서클 마법밖에 안 걸렸어? 그런 검이 무슨 마법검이래니. 내가 만들어도 그것보다는 좋은 검을 만들겠다. 사회자는 한참동안 상품인 마법검의 뛰어남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더니 국왕에게 차례를 넘겼다. 사회자의 긴 설명에 이어 국왕의 지루한 축사가 계속되었다. 아우, 뭐 가 이렇게 기냐? 그냥 열심히 하라고만 하면 되지 왜 페드인 왕국의 빛나는 역사가 어 쩌고 저쩌고 하는 거야? 그러나 콜로세움 상공에 떠있는 영상에 국왕 왼편에 앉아있는 내 모습까지 나오고 있어서 따분한 표정은 짓지 않았다. 표정관리. 표정관리. 한 번 웃어줄까? 마침내 국왕의 기나긴 축사가 끝나자 사회자가 글로리 라이언의 시작을 선언했다. 사 회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관중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콜로세움 밖에서 허공에 뜬 화면을 보던 사람들까지 함성을 질러 아렌테 전체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귀가 멍 멍해질 정도였지만 나도 기대감에 들떠있어 그 함성소리가 싫지 않았다. 제 4기사단, 힘내라! 지면 안돼! 나중에 제 1기사단의 기억을 지워버린다 해도 내기에서 지는 건 기분 나쁘단 말이야. 그리고. 나는 국왕의 오른쪽에서 현숙한 척하면서도 온갖 아양을 떨고 있는 오펠리우스 왕비를 힐끔 쳐다보았다. 내 시선을 느낀 것인지 왕비도 내 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눈치는 빨라 가지고. 웃지마. 이 여자야. 아마 제 4기사단이 다시 꼴등을 한 후에 내 모습을 상상하면서 웃고 있겠지. 오늘 필히 오펠리우스 왕비에게 한 방 먹이고 말겠어. "자, 그럼 글로리 라이언의 첫 번째 시합을 시작하겠습니다. 제 2기사단 소속의 노머 경과 제 5기사단 소속의 스튜드 경은 경지장으로 나와주십시오!" 사회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자 나와 오펠리우스 왕비는 동시에 시선을 경기장 위로 돌렸다. 드디어 시작이다!!! ================================================================================ 가스톤과 죠안, 미첼로는 대진표를 보면서 전의를 불태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처음부터 제 1기사단과 맞붙는 일은 없었다. 마리엔이 사라진 후 제 1기사단은 노골 적으로 우습다는 시선을 보냈지만 지금은 그들의 시선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지면 죽인다' 마리엔이 대기실을 나가면서 한 소리였다. 그 때 그녀가 지은 미소는 처음 보는 사람 이 봤다면 미의 여신의 강림이네 하는 소리를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마리엔의 미소를 본 제 4기사단의 기사들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절대 아름다워서 넋을 잃은 것 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에서 붉은 빛을 번뜩이는 마리엔 전용 몽둥이 때문이었다. 겉 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장식용 봉처럼 보이지만 한 번이라도 이 몽둥이와 친근한 스킨 쉽을 가진 자라면 이 것이 봉을 가장한 공포스런 흉기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마리엔이 진심임을 안 제 4기사단은 긴장했다. 실력이 향상된 것은 누구보다 자신들이 알고 있었지만 만에 하나라도 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졌을 때 그들을 기다리 고 있는 건 죽음뿐이었다. '지면 정말로 죽는다. 빌어먹을 1기사단 놈들.' '이게 무슨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란 말이야!' '망할 루드 놈! 하필이면 건드릴 사람이 없어 공주님을 건드려! 이 쳐죽일 놈들!' 진다면 출전하는 세 사람은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분풀이로 같은 운명이 될 수도 있었 다. 아니 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다. 제 4기사단의 기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가스톤과 죠안, 미첼로를 격려했다. 특히 처음으로 시합을 치르게 될 죠안의 어깨를 주물러주 고 물을 가져다주는 등 지극 정성이었다. 그의 어깨 위에 자신들의 목숨이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죠안의 상대는 제 2기사단의 디피트였다. 디피트는 죠안과 마찬가지로 빠른 스피드를 앞세워 치고 빠지는 유형의 기사였다. 그렇기 때문에 시합의 관건은 누가 더 오랫동안 더 빠른 스피드를 유지하냐는 것이었다. 죠안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그동안의 마리엔과의 대련을 떠올렸다. 그의 머릿속 에 처음 떠오른 영상은 그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날아드는 몽둥이였고, 다음으로 떠오 른 것은 사랑의 매라고 주장하며 쓰러져있는 기사들을 보면서 살포시 웃던 마리엔의 모습이었다. 헉, 그는 헛바람을 들이키면서 치를 떨었다. 그러나 곧 머리를 흔들어 이 공포스런 영상들을 지워버리려 노력했다. 여러 차례 고개를 내젓는 바람에 머리가 약 간 흐트러졌지만 덕분에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을 지을 수 있었다. 그가 그렇게 맞으면서 배웠던 것은 몸놀림이 빠르다고 다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최소 한의 동작으로 움직이며, 상대의 다음 동작을 예측하고, 항상 자신의 다음 공격을 염 두에 둔다. 간단한 것이지만 실제로 싸워본 사람은 전투 중에 이렇게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눈앞에 검이 다가오는데 침착하게 상대와 자신의 다음 동작을 미리 예측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줄 아는가. 피나는 훈련과 많은 전투경 험이 있을 때야 가능한 일이었다. 마리엔의 경우는 목숨의 위협을 가해 기사들의 생존 욕망에 불을 붙여 잠재능력을 끌어낸 것이지만 비슷한 효과는 가져왔다. 그가 자신의 시합을 기다리는 사이 앞의 시합이 끝났음을 알리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대기실 안까지 들려왔다. "두 번째 시합은 제 1기사단의 단장이신 루드 경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습니다. 역시 로얄 기사단의 다음 가는 실력자들의 집단답게 아주 강합니다. 정말 노련한 기사입니 다!" 사회자는 계속 루드의 실력을 칭찬했다. 그리고 사회자의 말에 대기실 내에 있던 제 4 , 5, 6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은 남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실력별로 기사단을 구성한 이유는 비슷한 실력자끼리 경쟁을 통해 서로의 실력을 빠르 게 향상시키자는 취지였다. 실력 차이가 너무 나는 사람에게는 부러움과 경탄의 감정 을 가지게 되지만 이기고자 하는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그 사람은 도저히 이길 수 없 다고 미리 포기를 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엇비슷한 실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경쟁심 리가 발동해 그 사람을 이기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런 면에서 페드인 왕국의 기사단 체계는 기사 스스로 훈련에 열중하게 하고, 기사의 실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 주는 합 리적인 체계였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게 마련이다. 어느새 사람들은 제 1, 2 ,3 기사단을 상위그룹으로 나머지 제 4, 5, 6 기사단을 하위 그룹으로 정하고 은근히 하위그룹을 무시하게 되었다. 로얄 기사단이야 다른 기사단 과 거의 관여하지 않는 독자적인 기사단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기 때문에 제외였지만, 상위그룹에 속한 기사들도 점점 자신들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하위그룹의 기사들을 우 습게 보기 시작했다. 게다가 상위그룹의 기사단 뒤에는 대개 막강한 세력이 버티고 있 기 마련이라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제 4기사단이야 원래부터 내놓은 기사단이었 지만 제5, 6 기사단에게 쏟아지는 무시도 상당했다. 그러니 당연히 제 4, 5, 6 기사단 이 상위 그룹의 기사단에 좋은 감정이 있을 리 없었다. 아까 제 1기사단이 마리엔의 말을 비웃은 것도 하위 그룹 중에서도 가장 실력이 떨어 지는 제 4기사단이 제 1기사단을 이기겠다고 호언장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리엔은 몰랐지만 제 1기사단의 뒤에 버티고 있는 자는 오펠리우스 왕비의 오빠인 하인리스 그리폰 그라냔 백작이었다. 루드 자신도 그라냔 백작과 절친한 사이였고, 오펠리우스 왕비의 추천으로 제 1기사단 단장이 된 인물이었다. 물론 그에 합당한 실력이 있었기 에 왕비의 추천이 통한 것이지만 왕비의 덕을 본 것은 사실이었다. 이렇게 보면 참으로 기막힌 우연이 아닐 수 없었다. 제 1기사단의 뒤에는 오펠리우스 왕비가, 제 4기사단 뒤에는 마리엔이 버티고 있으니 말이다. 제 1기사단과 제 4기사단 과의 싸움은 오펠리우스 왕비와 마리엔의 싸움으로도 이어지는 것이다. 잠시 후, 죠안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기장으로 가고 있을 때 맞은편에서 루드가 대기실로 오는 것이 보였다. 루드도 죠안을 보았는지 한 쪽 입 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이거 마리엔 공주님께서 총애하시는 죠안 경이 아니신가? 상대는 제 2기사단의 디피 트 경이라지? 스피드 하나만은 우리 기사단의 기사와 맞먹는다는 디피트 경과 시합을 하게 되다니 운도 없군. 하지만 힘내라구. 아름다우신 자네 주군께서 한낱 기사에게 사죄해야하는 일이 벌어지면 쓰겠어? 그 것도 무,릎,을, 꿇,고, 말이지." 죠안은 루드의 말에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자신을 무시하는 건 참을 수 있지만 마리엔을 무시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만약 빨리 경기장에 나타나지 않으면 실격처리 하겠다는 사회자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면 죠안은 루드에게 결투를 신청했을 것이다. 루드는 분해하는 죠안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며 대기실로 돌아갔다. 죠안은 루드가 사 라진 곳을 계속 노려보다 사회자의 재촉이 들리자 그제서야 경기장으로 발걸음을 옮겼 다. 죠안이 경기장 위로 올라서자 상대인 디피트와 사회자가 중앙에서 이미 자신을 기다리 고 있었다. 경기의 룰은 간단했다. 한 경기 당 소요되는 시간은 30분, 상대가 전투 불 능이 되거나 항복을 하면 승리. 경기장 위에서 떨어지면 장외 패로 인정이 된다. 자신 이 사용하는 무기 이외의 무기를 사용하면-예를 들어 갑자기 단검을 던지거나 마법 스 크롤을 사용하면-실격이었고, 살초를 사용해도 실격이었다. 디피트는 항상 꼴찌를 맡아하는 제 4기사단의 기사와 맞붙게 된 것을 행운이라고 여겼 다. 그는 제 1회전은 힘 뺄 것도 없이 낙승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죠안이 루드의 도발 때문에 불이 붙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디피트는 여유로웠다. 그리고 콜로 세움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디피트가 간단히 이길 것이라 예상했다. 그리고 지금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글로리 라이언 역사상 유래 없는 이변이 일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 시합시작을 알리는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뜻밖에도 죠안이 먼저 디피트를 공격했 다. 검을 꺼내지 않은 채 있다가 시작과 함께 발검하면서 디피트를 향해 달려든 것이 다. 잠시 방심하고 있던 디피트는 이미 죠안의 공격을 막기엔 늦었다고 직감하고 재빨 리 뒤로 물러섰다. '설마하니 나를 상대로 스피드로 승부를 걸어올 줄은 몰랐는걸. 그래봤자 처음뿐이지 만. 저런 스피드로 계속 움직이면 어마어마한 체력이 필요하지. 계속 저렇게 움직일 수 없어.' 디피트가 뒤로 물러서자 죠안은 휘두르던 검의 궤도를 변경해 디피트의 가슴을 찔러왔 다. 디피트도 이번엔 재빨리 죠안의 검을 자신의 검으로 막아 옆으로 밀어냈다. 빠른 스피드로 공격하면 할수록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균형이 깨진다는 것을 그도 경험해봐 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죠안은 그가 민 방향으로 회전을 해서 반대방향인 그의 왼쪽 허리를 베어왔다. 그가 민 순간 오른쪽 발을 축으로 한 바퀴 돈 것이다. 원심력과 디피트의 힘까지 이 용했기 때문에 죠안의 검은 순식간에 그를 향해 날아왔다. 그러나 디피트도 스피드하면 자신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재빨리 허리를 숙여 검을 피 하고 죠안이 검을 멈추지 못하는 사이 죠안이 회전하느라 균형이 오른쪽으로 쏠린 것 을 이용해 어깨로 죠안을 밀었다. 그리고 재빨리 뒤로 물러서 갸우뚱하는 죠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몸이 이미 오른쪽으로 기운 상태라 방어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던 죠안은 자신을 노리고 오는 검을 보고 균형을 잡기보다 아예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디피트의 검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갔고, 죠안은 바닥에 쓰 러지기 전에 손으로 바닥을 집고 그대로 부채꼴모양의 원을 그리며 상대의 뒤로 빠져 나갔다. 그리고 퉁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거리를 넓혔다. 두 사람 사이에 상당히 많은 공격이 오갔지만 정작 걸린 시간은 1분도 되지 않았다. 경기장 위의 두 사람이 마주보고 대치하자 콜로세움 내에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곧 이어 함성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의 공방이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함성을 지 를 틈도 없었던 것이다. 관중석에서 사람들이 내지르는 함성은 전의 두 시합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디피트는 빠른 스피드로 선제 공격을 점하고 그 후로 쉴새없이 몰아붙이는 타입의 실 력있는 기사. 상대는 월급도둑으로 유명한 제 4기사단 소속. 당연히 앞의 시합보다 더 일방적인 시합이 되리라 생각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놓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형편 없이 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죠안이 오히려 예리하고 날카로운 공격으로 디피트를 몰아 붙이고 있었다. 디피트는 맞은편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죠안을 바라보 았다. 마치 그 모습이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까 세심히 관찰하는 것 같았다. 인정 하고 싶지는 않지만 상대의 스피드가 자신보다 한수 위라고 생각한 디피트는 죠안의 체력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 것이 스피드를 앞세워 공격하는 검사 를 상대하는데 가장 적절한 방법이었으니까. 항상 다른 사람이 그를 상대로 사용하던 방법을 이제 그가 사용하려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가 모르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죠안은 인간 같지도 않은 마리엔과의 대련을 수도 없이 경험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한편, 죠안도 자신이 몸이 너무 가벼워 놀라고 있었다. 실력이 향상되었다는 것은 알 고 있었지만 항상 제 4기사단을 상대로 겨뤄보다 다른 기사단을 상대로 싸워보니 생각 보다 훨씬 쉬웠다. 상대의 실력을 알아보고자 가볍게 부딪친 것이었는데 그 것만으로 도 상대는 당황하고 있었다. 스피드가 주특기라고 하더니만 아주 기어다녀라. 기어다 녀. 마리엔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고, 자신의 조원들 중에서는 이 정도 스피드를 낼 수 있는 자는 수두룩했다. 게다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마리엔과는 달리 디피트 는 잘만 살펴보면 다음에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있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마리엔의 사랑의 매(?)가 효과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디피트가 계 속 자신의 체력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 정도에 체력이 떨어진다면 아마 이 곳에 서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미 저 세상에 가있겠지. '공주님, 대단하시군요. 이 정도까지 효과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디피트를 계속 몰아붙이면서도 마리엔이 앉아있는 로얄석을 힐끔 쳐다보았다. 얼굴까 지는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난간에 꼭 매달려있는 마리엔을 떼어내려고 시종들이 안 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틀림없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으리 라. 항상 몽둥이로 맞긴 하지만 그래도 미워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저런 것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 참으로 귀여운 주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디피트는 죠안이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리자 자신을 비웃는 것이라 생각했다 . 제 4기사단의 기사에게 몰리는 것도 모자라 우습게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 밀어 올라 이리저리 피해다니던 것을 그만두고 사나운 기세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러나 죠안은 이 맹렬한 공격을 간단한 풋스텝만으로 피해냈다. '넌 그렇게 마리엔 공주님에게 덤볐다가는 죽어. 전에 그렇게 덤비던 놈도 어디서 눈 에 불을 키고 덤비냐고 반죽여 놓으셨거든. 넌 제 4기사단도 아니니 얼굴도 맞겠구나. ' 죠안은 이런 헛생각까지 할 여유가 있는 자신이 놀라웠다. 작년에 비하면 얼마나 많은 발전을 이루었는가. 혹시 나에게 천재의 자질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갈수록 생각하 는 것까지 마리엔을 닮아가고 있는 제 4기사단의 기사들이었다. 이래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이 나온 모양이다. 디피트의 기세가 갈수록 사나웠지만 흥분해서 덤비는 만큼 허점도 많았다. 그의 공격 을 작은 동작만으로 피해내던 죠안은 슬슬 끝을 내기 위해 뒤로 물러나 통통 튀었다. 그리고 지면을 박차고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스피드로 거리를 좁혀갔다. 디피트 는 죠안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자 당황했다. 그러나 곧 검을 들어 죠안의 검을 막 았다. 의외로 죠안의 공격에 힘도 있어 검을 쥔 손이 찌르르 떨렸지만 이를 악물고 버 텨냈다. 죠안을 떨치기 위해 검을 준 손에 힘을 주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괜히 손목과 무릎 보호대까지 합쳐 20kg을 달고 다닌 것이 아니었다. 죠안은 디피트가 힘대결을 해오자 물러나지 않고 그대로 밀어붙였다. 점점 맞부딪친 검은 디피트 쪽으 로 기울기 시작했다. 디피트는 힘대결에서도 자신이 밀리자 재빨리 검을 떼고 뒤로 물 러섰다. 그러나 죠안은 디피트가 그대도 도망가게 놔두지 않았다. 상대가 틈을 보였을 대 가차없이 치고 들어가라. 죠안이 마리엔이 다칠 것을 염려하고 제대로 덤비지 못 하다 죽도록 맞고 얻은 교훈이었다. 그는 특유의 순간적인 폭발력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뒤로 물러나던 디피트는 죠안을 피하려 했지만 떨쳐버리기엔 너무 빨랐다. 결국 그가 방어하기 위해 검을 제대 로 들기도 전에 죠안의 검이 디피트의 가슴 앞에 멈췄다. 잠시 후, 어안이 벙벙해있던 사회자가 죠안의 승리를 선언하자 콜로세움이 떠내려 갈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5분 조금 넘는 짧은 시간에 승부가 나버린 것이다. 죠안의 압도적인 실력과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고도 힘들어하지 않는 모습에 함성소리는 더욱 커졌다. 콜로세움 밖에서도 대기를 찢어발길 듯한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경기 장 위를 관중석의 여성들이 던지는 꽃들이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러나 이 것이 시작이 었음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소리를 들어보니 죠안이 이긴 모양이군. 나도 질 수야 없지." "여성들의 시선을 혼자 받게 할 수는 없지. 후후후." 갈색 머리의 건장한 체격의 남자와 금발 머리의 준수한 얼굴의 청년이 나누는 말은 앞 으로 글로리 라이언에 불어닥칠 태풍을 예고하고 있었다. =========================================================================== "글로리 라이언의 12번째 시합은 제 4기사단의 가스톤 경의 승리로 돌아갔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제 2기사단의 케롯 경을 6분만에 쓰러뜨렸습니다. 지금껏 제 4기사 단 소속인 죠안 경, 미첼로 경, 가스톤 경은 모든 시합을 거의 5분대로 끝냈습니다. 그 놀라운 실력에 입을 다물 수가 없습니다." 사회자는 제 4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의 활약에 감동 받았는지 '놀랍습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를 연발하고 글로리 라이언의 1부가 끝났음을 알렸다. 앞으로 두 시간 동안 쉰 후에 처음 시합에서 승리한 6명이 다시 맞붙게 되는 것이다. 다음 시합에 나가게 될 12명은 각각 로얄 기사단과 제 4기사단 3명, 제 1기사단과 제 2기사단 2명, 제 3기 사단과 제 5기사단 1명이었다. 그리고 모든 기사들이 대기실로 내려간 후에도 관중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웅성대고 있었다. 이게 다 내 귀여운 부하들 때문 아니겠어. 아이고, 귀여운 것들. 그동안 내 가 가르친 보람이 있었어. 너무 감동적이야. 흑흑흑. 만약 옆에 세 사람이 있다면 부 둥켜안고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내가 좋아서 생글거리는 반면에 오펠리우스 왕비는 x씹는 표정이었다. 예전에 제 4기사단을 보고 가장 실력이 떨어지 는 무례한 치들의 집단이라고 했던 여인네가 어디의 누구였더라? 어디 다시 한 번 나 불거려보시지. 로얄 기사단을 제외하면 제 1기사단도 2명밖에 못 올라갔는데 월급도둑으로 위명이 드 높았던 제 4기사단이 전원 본선에 올라가게 되었다. 그 것도 압도적인 승리로. 놀랍겠 지? 그래. 놀라울 꺼야. 1년 전만 해도 꼴등을 맡아하던 기사들이 전원 진출했으니까. 지금쯤 그 루든지 루빈가 하는 밥맛 없는 놈도 조금은 당황하고 있겠지? 지들은 제 2 기사단 놈에게 한 명 졌지만 우리는 제 2기사단 2명과 제 3기사단 1명을 이기고 3명 모두 진출했잖아. 하지만 그 인간 성격으로 봐서 상대 놈이 멍청해서라고 우기며 아직 도 정신 못 차릴 것이 뻔했다. 그런 놈들은 한번 호되게 당해봐야 돼. "허허허, 마리엔의 기사들이 분발하는구나." 국왕은 놀라워하면서도 왕궁기사단의 일원인 제 4기사단의 실력이 일취월장하자 흡족 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자신들의 목숨과 내 자존심이 걸려있는데 . 그나저나 이건 좋은 기횐데? 국왕이 관심을 가지는 틈에 4기사단을 다시 보게 만들 어야지. 그래야 다른 놈들도 우습게 보지 않지. 나말고 다른 사람이 내 부하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떠드는 건 정말 싫거든. 나는 기회는 이 때다 싶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동안 모두가 열심히 훈련에 열중한 덕분이지요. 가끔 찾아가 보면 쓰러질 정도로( 나한테 맞아서이긴 하지만 맞는 말이잖아) 연습을 하는 모습이 어찌나 안쓰럽던지. 제 가 쉬어가면서 하라고 해도 그동안 아바마마의 성은에 보답하지 못했으니 이제라도 보 답하고 싶다며 막무가내로 연습하는 거 있죠? 정말 못 말리겠다니까요." "그러느냐?" 국왕이 기분이 좋은 듯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자! 슬슬 넘어오는데. 나는 웃 고 있는 국왕을 보고 '나 삐졌어요' 라는 얼굴로 약간 뾰루뚱해져서 투덜거렸다. "칫, 가끔은 저보다 아바마마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 제가 얼마나 질투 나는 줄 아세 요?" 국왕을 향해 귀엽게 살짝 흘겨 봐주었다. 내가 입술을 삐죽이며 삐친 것 같은 모습을 보이자 국왕은 설마 그렇겠냐며 달래주었지만 기분은 좋은 모양이다. 나의 의도된 깜 찍한 모습에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우아하고 어른스럽게 구는 두 공주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거든. 나는 주변 사람들이 웃자 당황하는 척하며 말했다. "왜, 왜 웃어요? 우~ 나 화났어요." 그리고 빽하니 고개를 돌리면서 얼굴을 살짝 붉혔다. 내가 부끄러워하는 것으로 착각 한 사람들은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이봐. 달래려면 제대로 달래 줘. 그렇게 '아이고, 귀여워죽겠네' 라고 써져있는 얼굴로 말하면 효과가 반감되잖아. 뭐 이런 반응을 유 도한 건 나지만. 나는 계속 삐진 척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소문은 믿을 게 못되는군. 훈련을 게을리 한다더니 이제 보니 제 4기사단의 기사들도 아주 훌륭한 기사들이구나." 국왕이 내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하는 말임을 알면서도 속아넘어가 주었다. "그렇죠? 그렇죠?"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것과 함께 고개를 약간 기울이고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쥐었다 . 그냥 초롱거리며 보는 것과 이렇게 작은 몸짓을 섞어주는 것의 차이는 상당하다. 보 라! 꽈악 깨물어주고 싶다는 저들의 시선을. 하지만 이 기술을 시전할 때 주의할 점은 너무 귀여운 척하면 역겨울 수도 있으니 상황에 따라 적당히 하라는 것이다. 적당히. 적당히. 국왕은 사랑스런 눈길을 보냈고, 내 덕분에 이제 국왕은 제 4기사단에 대해 상당한 호 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원래 주인이 예쁘면 밑에 있는 기사도 예뻐보 이는 법이다. 덤으로 나도 점수도 따고 얼마나 좋은가. 이제 바로 '오리 먹고 오리알 먹고' 지. 응? 또 뭔가 이상하네. 이게 아니었던가? 뭐였지? 참새 먹고 메추리알 먹고? 오리 먹고 오리발 먹고? 내가 이렇게 아무 단어나 집어넣고 말을 만들어내고 있을 때,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 렸다. "하지만 전하, 루드 경도 대단하지 않나요? 최단 시간에 시합을 마무리지었잖아요. 루 드 경은 로얄 기사에 버금가는 검술 실력을 지니고 있는 훌륭한 기사라고 하던데요." "루드 크라스 모로 경 말이로군. 하긴 그의 실력도 대단하더군. 상대를 단번에 몰아붙 이는 실력에다 풍부한 경험까지 가지고 있으니 우리 왕국이 자랑하는 기사 중 한 명이 지. 그 정도 실력이면 로얄 기사에게도 쉽게 지지는 않을 것 같군." "그를 한 번 만난 본 적이 있는데 강렬한 눈빛이 기억에 남아있답니다. 작년에 그가 출전하지 않아서 확실한 건 알 수 없지만 제 생각엔 에릭 경보다 그가 더 강할 것 같 아요. 에릭 경이 강하지만 이제 20살의 젊은 나이잖아요." 아니, 저 여자가 왜 그 밥맛 없는 놈을 칭찬하는 거지? 만약 국왕의 관심을 돌리기 위 해서라면 로얄 기사단의 기사를 칭찬하는 게 더 나을텐데. 이유가 뭐지? 오펠리우스 왕비의 심중을 알아보기 위해 그녀의 얼굴을 살피던 나는 그녀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고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흠, 오펠리우스 왕비와 루드가 무슨 관련이 있음에 틀 림없어. 저 여자가 상관도 없는 사람을 칭찬할 리 없지. 루드가 왕비 패거리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상황이 들어맞았다. 오펠리우스 왕비가 적극 루드를 칭찬하는 거며, 루드의 오만하기 그지없던 태도하며, 재수없던 인상까지. 틀림없어! 나는 루드가 왕비 패거리 중 한 명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루드 그 놈이 잘되는 꼴은 절 대 못 보지! 나는 오펠리우스 왕비의 '루드 영웅 만들기' 계획을 저지하기 시작했다. "아무렴 에릭 경만 하려구요. 에릭 경은 거의 소드 마스터에 근접했다는 소리까지 듣 고 있잖아요. 또 제가 알기로 루드 경은 작년엔 출전하지 않았지만 제인드력 424년과 425년에는 출전했잖아요. 에릭 경은 제인드력 424년부터 3년 연속 우승했다고 알고 있 는데. 젊은 나이에 그 정도라니. 천재라는 말이 맞나봐요." 에릭을 띄워주긴 싫었지만 루드가 영웅이 되는 것보다 나았다. 나는 에릭은 페드인 왕 국의 제일가는 자랑이며, 모든 기사의 귀감이 되는 훌륭한 기사이며, 외모도 멋있고, 성격도 좋다는 되지도 않는 말을 주절거렸다. 내가 왜 에릭을 칭찬해줘야 되는 거야?! 이게 다 오펠리우스 왕비 때문이야! 나는 끊임없이 투덜거리면서도 있는 말 없는 말 지어내 에릭을 칭찬했다. 그런데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원군이 나타났다. "맞아요! 에릭 경은 정말 멋있어요! 페드인 왕국의 제일 가는 검사잖아요. 게다가 많 은 사람들이 장차 최연소 소드 마스터가 될 거라고 말하잖아요. 냉정하면서도 카리스 마있는 모습! 꺄아악! 그 쿨한 모습도 너무 멋있어요!" 에릭을 칭찬하던 나까지 수선을 피우는 플로라 공주를 보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플로 라 공주는 글로리 라이언에는 별로 관심이 없더니 에릭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눈을 빛 내다못해 광선이 발사될 것 같은 눈으로 꺄악거리며 계속 에릭은 멋있다며 난리를 치 고 있었다. "그보다 이번 글로리 라이언은 수준이 굉장히 높지 않아요? 그렇죠, 어마마마?" "에?...무, 물론이지. 모두 너무 잘하더구나. 역시 왕궁 기사단은 페드인 왕국의 자랑 이야." 나는 '에릭 경을 험담하는 자는 모조리 가만두지 않겠어요' 라는 모습으로 흥분해서 날뛰는 플로라 공주를 보고 재빨리 말을 돌렸다. 차라리 로얄 기사단의 다른 놈을 칭 찬할걸. 저 것이 저렇게 날뛸 줄 누가 알았겠어? 오펠리우스 왕비도 이번만은 나와 마 음이 맞았는지 재빨리 내 말에 맞장구쳤다. 그리고 우리는 플로라 공주가 다른 말을 할 틈도 주지 않고 재빨리 화제를 바꿔버렸다. 플로라 공주가 간신히 흥분을 삭이고 사그라져서야 한마음 한뜻으로 뭉쳤던 나와 오펠 리우스 왕비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오펠리우스 왕비는 최대한 로얄 기사나 에릭 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입을 열었다. "호호호, 이번 대회는 제 생각에 아무래도 루드 경이 우승하지 않을까 싶어요. 나이에 도 불구하고 갈수록 실력도 늘고, 노장다운 노련함까지 갖추고 있으니 말이예요." "어머, 그렇지만 로얄 기...아니, 다른 기사들도 굉장하던데요? 다른 기사가 우승할지 도 모르는 일이죠. 세상일은 알 수 없는 거잖아요." 로얄 기사단이 있는데 그렇게 쉬울까요?, 라고 말하려던 나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다 행히 플로라 공주는 에릭을 상상하고 있었는지 얼굴에 홍조를 띠고 혼자 웃고 있어서 내 말을 듣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도 빨갛고, 눈동자도 빨간 것이 얼굴까지 빨 갛게 물들이는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다. 그런 무뚝뚝한 놈이 어디가 좋다는 건지. 지 눈에 안경이라지만 정신차려라. 세상에 넘쳐나는 게 남잔데 그런 성격 나쁜 놈을 왜 좋아하는 건지. 내가 자신의 말에 반박하자 오펠리우스 왕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럼 마리엔은 누가 우승할 거라고 생각하니?" "글쎄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자 왕비 역시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마주 보았다. 나 와 오펠리우스 왕비의 눈동자가 마주치자 우리 둘 사이로 전류가 파지직거리며 튀었다 . 이럴 때는 검은 하늘에 벼락이 치는 배경이 딱인데. 그리고 그 벼락이 왕비에게 내 리치는 거야. 이 얼마나 좋은 생각인가. 비록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오펠리우스 왕비는 내가 누구를 우승자로 생각하는지 눈 치를 챈 모양이다. 나는 제 4기사단 사람 중 한 명이 우승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 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잘하면 3위라고 생각했지만 로얄 기사 3명의 시합을 본 순 간 잘하면 우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로얄기사라는 명성에 걸맞게 강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직 경험이 부족했다. 아마 로얄 기사단의 단장은 어차피 자신들이 이 길 것이라고 예상하고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 기사들의 경험을 늘려줄 생각으 로 그들을 출전시켰으리라. 이에 반해 가스톤과 죠안, 미첼로는 날마다 사투를 벌였지 않은가. 아주 승산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그럼 우리 누가 우승하나 지켜볼까?" "그렇게 해요. 어마마마." 한편 마리엔이 오펠리우스 왕비와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대기실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제 4기사단의 기사들은 제 1기사단을 아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고, 제 1기사단은 무시하는 척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상당히 경계하고 있었다. 아까 본 세 명의 실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제 4기사단의 기사들이 이렇게 적의를 드러내는 이유는 아까 죠안과 루드의 대화를 들 은 아인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루드가 한 말을 그대로 전했기 때문이다. 아인은 죠안이 경기장으로 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죠안과 루드가 서로 말을 주고받자 무슨 일인가 싶 어 다가갔다가 루드의 마지막 말을 듣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제 4기사단은 사나운 기세와는 달리 자세는 편하게 앉아있거나 드러누워 있었 다. '다음 시합에 힘 빠지게 굳이 서서 노려볼 필요는 없잖아. 편한 자세로도 얼마든지 노 려볼 수 있어.' 이 것이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어떠한 순간에도 자신이 손해보는 짓은 하지 않는 다는 마리엔의 신조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제 1기사단을 이기 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조용히 칼을 갈고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뿐이었 다. 한편 제 1기사단은 이 놈들이 지금 장난하는가 싶어 상당히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 다. 그리고 이런 이상한 대치는 두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두 시간의 휴식시간이 끝나자 사회자가 글로리 라이언의 2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소리가 대기실까지 들려왔다. 비록 사회자의 잡소리가 꽤나 길었지만 드디어 첫 시합 을 치를 사람들의 이름이 발표되었다. "여러분,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글로리 라이언 2부의 첫 번째 시합은 제 1기사단의 루 드 경과 제 4기사단의 미첼로 경의 시합이 되겠습니다. 루드 경은 탄탄한 실력으로 최 단 시간으로 시합을 끝낸 모두가 인정하는 실력자이고, 미첼로 경은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은 화려한 검술을 구사하는 기사입니다. 처음부터 아주 흥미진진한 시합이 될 것 같습니다. 두 기사분은 경기장 위로 올라와주십시오." 사회자의 말이 대기실까지 들려오자 루드는 미첼로를 향해 한 번 씨익 웃어주고 먼저 경기장으로 향해 걸어갔다. 루드가 보기에 미첼로는 겉멋만 든 애송이였다. 루드가 나 가자 미첼로도 그의 뒤를 따라 경기장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보나인이 그의 팔을 잡았 다. "자신은 있나?" "글쎄요. 자신이 있든 없든 이겨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제 플라워 드러를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무도 없습니다." 미첼로가 전혀 진지해 보이지 않자 보나인은 약간 걱정이 되어 한마디 충고를 했다. "나도 그 검술의 위력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신중하게 하도록." "네,네. 걱정마세요, 단장님. 저도 마리엔 공주님 손에 죽고 싶진 않거든요." 미첼로가 장난스럽게 대꾸하고 돌아서자 제 4기사단의 기사들은 응원의 말을 외쳤다. "미첼로, 루드 경을 이기면 수많은 여자들이 널 멋지게 볼 꺼야. 힘내라!" "조장, 아무리 세 봤자 공주님만 하겠어? 우리의 운명이 조장의 어깨에 달려있다는 걸 잊지마." 미첼로는 제 4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의 응원과 격려를 들으면서 대기실을 나갔다. 그리 고 뒤돌아선 채 오른 손을 어깨 위로 힘껏 들어올렸다. 걱정하지 말라는 제스처였다. '막강한 상대와 싸우러가면서도 담담한 이 모습... 역시 난 멋있어! 여성들이여, 기다 려라. 내가 간다!' 루드를 이겼을 때 쏟아질 여성들의 환호를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멀어 져 가는 미첼로의 뒷모습을 보면서 제 4기사단의 기사들은 한 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저 인간이 또 멋있는 척 하네." "저렇게 촐랑거리다 지는 거 아냐? 상대는 제 1기사단의 단장이라구." "저 자식 겉멋만 들어 가지고는......" "이거 걱정되네. 저 제비 같은 놈이 잘 할 수 있으려나?" ================================================================================ 히잉~엄마가 쓸데없는 짓 한다고 화냅니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꿋꿋히 계속 글 쓸꺼야~!!! 루드와 미첼로가 경기장에 나타나자 관중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 중에서 여자들의 환호성은 대부분 미첼로에게 향한 것이었다. "꺄아악! 미철로님! 힘내세요!" "너무 멋있어요!" "미첼로님! 사랑해요! 반드시 이기세요!" 준수한 용모와 깔끔한 매너-시합 끝나고 손 흔들어주기, 여자들이 던져준 꽃을 집어들 어 가슴에 꽂기, 미소 지어주기-, 화려한 검술 때문에 여자들의 모든 관심이 미첼로에 게 쏠린 것이다. 미첼도로 그녀들의 호응에 답해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반면에 남 자들의 응원은 대부분 루드에게 향한 것이었다. "루드! 저 제비를 뭉개버려!" "저런 겉멋만 든 자식에게 지지마라!" "저 바람둥이를 보내버려! 남자는 얼굴이 다가 아니란 걸 보여줘!" 어디서나 여자에게 인기가 많은 남성은 질투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루드는 여유롭 게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있는 미첼로를 보면서 얼굴 가득 비웃음을 띠웠다. 확 실히 검술이 화려한 건 인정하지만 검술이 화려한 것과 실력은 별개의 문제였다. '전의 놈은 검술의 화려함에 정신이 나가 침착하게 대처하지 못했지만 난 달라. 그 검 술은 너 같은 녀석에겐 오크목에 진주나 마찬가지다. 진정한 검술이 뭔지도 모르는 네 녀석에게는 말이지.' 그는 목숨을 잃을 뻔한 전투를 수십 번은 겪은 노장 중의 노장이었다. 사회자가 시합 의 시작을 선언하자 미첼로는 처음부터 전력으로 루드를 공격해갔다. 그는 자신이 배 운 '플라워 드러' 라면 어떤 적이든지 쓰러뜨릴 자신이 있었다. 미첼로는 부드럽게 앞으로 나가 몸을 한바퀴 회전하면서 검을 쥔 손을 휘감아 돌리기 시작했다. 마치 춤을 추는 듯한 현란한 몸놀림을 따라 검 끝에서 탐스런 꽃이 피어나 기 시작했다. 검날이 빛을 반사하고 있어서 그 모습은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그 아름 다움에 관중들은 함성을 질렀고, 그 반응에 더욱 신이난 미첼로는 손목을 더욱 빨리 움직여 꽃을 더 그려냈다. 미첼로가 그려낸 꽃송이는 루드를 에워쌌고, 멀리서 봤을 때와 직접 당해 본 차이가 엄청났기에 루드는 마치 꽃 속을 헤매는 것 같은 착각을 받 았다. 루드는 일단 뒤로 물러섰다. 뒤로 피하면서 미첼로가 바로 공격해 올 것을 염려해 방 어를 철저히 했지만 미첼로는 치고 올라오지는 않았다. 그리고 루드가 어느 정도 자세 를 잡자 그제서야 공격해 들어왔다. 검무를 추는 것처럼 사방으로 현란하게 움직이는 미첼로. 미첼로는 모든 방위를 시간차를 두며 검으로 찔러 들어왔고, 수십 개로 보이 는 검날이 루드를 위협했다. 루드는 사방이 막히자 검을 크게 횡으로 휘둘렀고, 운좋게 미첼로의 검을 쳐낸 루드는 미첼로의 가슴이 비어있음을 보고 공격해왔다. 그 상황 속에서도 상대의 허점을 빈틈 없이 찾아낸 그의 실력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나 미첼로는 재빨리 검을 회수해 루드 의 검을 막고 퉁겨지듯이 뒤로 물러났다. 여기서 루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루드의 검은 바스타드 소드이고, 미첼로의 검은 롱소드였다. 그 상황에서 다시 검을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미첼로였다. 물론 빨리 움직이지 못하면 루드의 검이 그의 목을 찔렀겠지만 루드가 보기에 몸놀림이 빠 른 제 4기사단의 기사라면 충분히 그 기회를 살릴 수 있었다. 만약 미첼로가 재빨리 공격해오면 허리를 숙여 옆으로 피하려던 루드는 한 가지 의혹이 생겼다. '설마 저 녀석...그 정도로 멍청한 인간일리가. 관중들에게 멋있게 보이기 위해 일부 러 피했다는 건 말이 안되잖아. 하지만 그럼 왜 피한 거지? 한번 확인해 봐야겠군.' 루드는 일부러 다리쪽의 방어를 허술하게 하고 검을 평소보다 높게 들고 미첼로를 공 격했다. 그의 검은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내며 빠르게 접근했지만 힘이 들어있지 않았 다. 그러나 미첼로는 루드의 속셈을 알아채지 못하고 검을 들어 막을 생각도 없이 현 란한 몸놀림으로 그의 검을 피해내기만 했다. 그리고 미첼로가 루드의 검을 피해내면 낼수록 관중들의 함성은 커져갔다. 혹시나 싶어 루드는 검을 높이 쳐들고 위에서 아래 로 강하게 내리그었고, 보통의 기사라면 반드시 반격해왔을 그 허술한 자세에서도 미 첼로는 옆으로 살짝 피했다. 루드는 관중들의 환호를 들으며 웃는 듯한 미첼로를 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놈 은 자신의 검술을 검술이 아닌 그저 묘기로 사용하는 얼간이일 뿐이었다. 분명히 기술 도 정확하고 실력도 있다. 아마 이 놈이 이 정도까지 실력이 성장한 것도 가르친 사람 이 잘 교육시켰기 때문이리라. 검술이 아무리 화려하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그 목적은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에 있는 것이지, 사람들의 함성을 들으려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르친 사람이 안 됐군. 저 정도까지 키워줬는데도 정신 상태가 글러먹었어. 루드는 조용히 방어자세를 잡았다. 몸놀림이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체력 소모는 극심하 다. 게다가 미첼로는 폼을 매우 중요시하기 때문에 공격하려면 몸을 한껏 낮춰야 하는 하반신은 공격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화려하지는 않지만 조용히 참고 기다리며 역습의 기회를 노리는 방법은 확실히 이길 수 있는 방법이었다. 루드가 이런 생각으로 물러난 것을 모르는 미첼로는 기세가 올라 다시 허공에 수십개 의 꽃잎을 그려냈다. 은빛의 꽃잎들이 단숨에 압박해오자 루드는 재빨리 몸을 최대한 낮춰 지면을 구르듯이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보기에는 꼴사나워 보이는 모습일지라 도 확실한 방어였다. 미첼로는 루드가 일어나는 동안 공격하면 절호의 찬스를 손에 넣 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일어나길 기다렸다가 서서히 압박해 들어갔다. 그는 화 려하게 승리를 장식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의 이 모습을 보면서 마리엔이 이빨을 뿌 드득 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럴 수 없었겠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관중들 의 환호성에 정신을 팔려 마리엔에 대한 생각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것이다. 미첼로의 노도와 같은 공격은 10분 동안 계속되었다. 그동안 루드는 몇 번 공격해보지 도 못하고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미첼로가 화려한 검술로 루드를 몰아붙이자 장내는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특히 여자들의 환호성은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 맹공 속에서도 루드가 상처 하나 없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거의 없었다. 미첼로는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하고자 공중으로 뛰어올라 그대로 검을 내리쳤다. 공중 으로 뛰어올라 하는 공격은 확실히 멋있고, 허공에서 지면으로 떨어지는 힘까지 더해 져 상당히 위력적이다. 하지만 그만큼 허점이 많아 반격 당할 위험이 많기 때문에 결 정적인 순간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 공격이기도 했다. 루드는 자신을 향해 내려오는 미첼로를 보면서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참아온 울분을 토하듯 허공에서 검을 힘차게 횡으로 그었다. 당연히 공중에서는 피하기가 힘든 법. 미첼로는 가만히 있던 루드가 갑자기 공격해올 줄은 몰 랐기 때문에 그의 검을 고스란히 맞고 경기장 저편으로 날아갔다. 나이답지 않은 힘이 었지만 그나마 날이 아닌 부분으로 쳤기 때문에 중상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갈비 뼈가 부러졌는지 움직일 때마다 맞은 부위가 욱씬거렸다. "쿨럭...쿨럭...제, 젠장..." 미첼로는 가슴을 움켜쥐며 재빨리 일어섰지만 투덜거릴 틈도 없었다. 미첼로와는 달리 루드는 상대의 허점을 봐줄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아직 일어서지 못한 미첼로를 공격해왔지 때문이다. '제길, 다친 곳을 노리고 오잖아. 인정머리 없는 인간 같으니라구.' 미첼로는 자신의 처지를 모르고 투덜거리며 옆으로 피했다. 그러나 그가 피하자마자 루드의 검은 궤도를 크게 변경해 원을 그리며 다시 그의 가슴을 노렸다. 기겁한 미첼 로가 검을 들어 막았지만, 검끼리 부딪친 충격이 가슴까지 전해지자 검을 놓을 뻔했다 . 그가 그 와중에도 이를 악물고 검을 놓지 않았던 것은 대련 중에 무기를 떨어뜨리면 인정사정없이 패던 마리엔을 몸이 기억하고 거의 본능적으로 행한 일이었다. 부상 때문에 맞대결이 힘들다고 판단한 미첼로가 루드의 검을 밀어내고 뒤로 물러났다 . 그러나 루드가 허리를 숙여 다리를 공격해오자 간신히 검으로 막았지만 다친 곳의 통증은 무시할 게 못되었다.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미첼로는 생각 없이 기술을 남발한 탓에 체력도 많이 떨 어졌고, 부상까지 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루드는 미첼로의 공격을 피하면서 힘을 축적 해왔기에 펄펄 날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대로 지는 건가? 마리엔 공주님, 정말 죄송합니다.' 자신의 패배를 예감하고 마음 속으로 마리엔에게 사죄를 하던 미첼로는 갑자기 예전에 마리엔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플라워 드러는 검술이지 멋있게 보이려는 수단이 아니라구. 미첼로는 무의식적으로 멋있게 보이려고 하다보니 몸에 힘이 들어간단 말이야. 플라워 드러에서 무엇보다 중 요한 건 유연함이야.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이어져야 한단 말이야. 제발 주변 사람들 시선은 신경쓰지 말란 말이야! 모든 정신을 승부에 집중해! 꼴사납게 이겨도 이긴 것 은 이긴 거고, 멋있게 져도 진 것은 진 거야." 그 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이제 마리엔이 무슨 말을 하고자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미첼로는 시합에서 이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승부욕 때문이 아니라 관중들의 환호성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란한 몸놀림도 이기기 위한 수단 중에 하 나일 뿐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더 이상 미첼로 의 눈에는 루드에게 환호를 보내는 관중도, 자신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여자들도 보이 지 않았다. 그저 눈앞의 루드만이 보였다. 미첼로는 루드의 검이 자신의 검을 노리고 오자 허리를 숙여 피한 것과 동시에 루드의 다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미첼로를 개멋만 든 애송이라고 판단하고 다리는 공격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다리쪽을 공격하려면 허리를 숙여야하는데 별로 멋있어 보 이지 않는 모습이다- 루드는 황급히 뛰어올라 피했다. 그러나 그가 다시 지면에 내려 서자 미첼로는 허리를 굽힌 자세에서 바로 뛰어올라 루드의 목을 찔러왔다. 이 것도 일명 개구리 점프라고 불리는, 그냥 보기엔 참으로 꼴사나운 모습이었지만 상대가 피 하기 힘들어 노련한 검사들은 종종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루드는 거의 본능적으로 몸 을 뒤로 젖혀 뒤로 피했다. 미첼로와 루드 사이에 얼마간의 거리가 벌어지자 미첼로는 물 위를 스치듯이 미끄러져 앞으로 나갔다. 플라워 드러를 사용하기 전의 동작이지만 아까의 모습과는 뭔가가 달 랐다. 거친 동작이 사라지고 모든 동작이 하나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플라워 드러의 위력을 백분 활용할 수 있는 자세였다. 루드가 재빨리 검을 휘둘러 접근을 막았지만 미첼로는 부드럽게 피하고 다시 검으로 꽃모양을 그려냈다. 루드는 지금까지의 패턴을 떠올리며 뒤로 재빨리 물러났다. 그런데 계속 플라워 드러를 고수하며 천천히 압박해 오던 것과는 달리 미첼로는 루드가 물러난 것과 동시에 루드의 목을 검으로 찔러 들어 갔다. 루드가 미첼로의 허리를 공격했지만 그의 검이 미첼로의 허리에서 20cm앞까지 왔을 때는 이미 미첼로의 검이 루드의 목에 와닿아있는 상태였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루드의 승리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루드는 계속 플라워 드러를 사용하던 미첼로가 갑자기 찔러 들어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반응이 느렸던 것 이다. 미첼로는 이 공격에 모든 힘을 다 쏟았기에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사회자 가 미첼로의 승리를 발표하자 장내는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나 미첼로는 여자들의 환호 와 꽃비가 내리는 것처럼 쏟아지는 꽃들에 전혀 관심을 기울일 수 없었다. 그저 어서 들어가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는 운이 좋지 않았다면 자신이 졌을 것을 알고 있 었다. 하지만 다음 번엔 반드시 실력으로 이기고 말겠어. 미첼로의 분전에 힘을 얻은 탓인지 죠안은 루드가 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제 1기 사단의 기사를 손쉽게 이겼고, 가스톤도 실력차이가 많이 나는 제 3기사단의 기사를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당장에 내려와 미첼로를 패리라 생각했던 마리엔도 왠일인지 대기실로 내려오지 않았다. 대신 시종에게 편지를 한 장 미첼로에게 전달하 라고 했는데, 그 편지에는 단 한 마디만 적어져있을 뿐이었다. [잘 했어!] 결국 글로리 라이언의 첫 날은 모든 사람들이 놀랄 만한 결과를 남기고 막을 내렸다. 결승전 진출자는 로얄 기사단의 짐, 사라, 핸스와 제 4기사단의 미첼로, 가스톤, 죠안 이라는 상상도 못한 결과를 남기고 말이다. 드디어 글로리 라이언의 마지막 날. 그래봤자 열린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지만 오늘은 어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수천 명을 넘게 수용하는 콜로세움이 미어터 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니 얼마나 많이 왔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이야! 어디서 이 많은 사람들이 온 거지? 아렌테에 있는 사람들이 다 온 거 아니야? 다행히 로얄석은 붐비기는커녕 한산하기만 했지만 고개를 돌려 바글거리는 사람들을 보는 것 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내가 저 틈에 끼어있다고 생각하면......히익. 그만큼 이 번 시합에 사람들의 관심이 많다는 소리겠지만 많아도 너무 많잖아. 하긴 내가 생각해도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만 했다. 로얄 기사단을 제외한 다른 기사 단에서 전원 올라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고, 그들이 바로 만년 꼴등의 위업을 달성한 제 4기사단이니 흥미가 생기지 않겠는가. 운좋게 그동안 로얄 기사와 만나지 않아 여 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들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도 많았다. 이 걸로 원래 목적은 달성한 거네. 그럼 오늘은 여유롭게 지켜볼까나. 잘 하면 셋 중에 한 명이 우승할지도 몰라. 사람들이 방심한 면도 없잖아 있지만 이 정도 면 잘한 거지 뭐. 후후후, 역시 난 대단해.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제 4기사단을 이 정 도까지 실력을 키운 건 기적에 가깝단 말이야. 매에 장사 없다는 말이 진실이었던 것 이야. 달라진 제 4기사단의 모습에 놀라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상당히 재미 있었다. 내 옆에 있는 국왕도 다른 사람처럼 놀라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가지 아 쉬운 점이 있다면 오펠리우스 왕비가 이 자리에 없다는 것 정도. 어제 루드가 진 게 충격이긴 충격이었나 보지. 그녀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오늘 대회는 보러 오지 않았 다. 그래. 아플꺼야. 배가 많이 아프겠지. 내가 잘되는 꼴을 배가 아파서 어떻게 보겠 어. 어제의 상황은 다시 떠올려보면 대충 이랬다. 사회자가 미첼로의 승리를 선언하자 오펠리우스 왕비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동안 루드가 맹공을 퍼부었으니 미첼로가 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겠지. 솔직 히 나도 미첼로가 질 줄 알았어. '지면 죽인다' 라는 텔레파시를 끊임없이 보낸 보람 이 있군. 미첼로가 비척비척 경기장을 내려갈 때까지도 오펠리우스 왕비의 벌어진 입은 다물어 지질 못했다. 동공도 크게 확장되어 있는 걸 보니 충격을 받아도 이만저만 받은 게 아 닌 모양이다. 원래는 대기실로 당장 내려가 멋 부리다가 질 뻔한 미첼로를 반죽여 놓 으려했지만 왕비의 모습을 보자 그런 생각이 사그라들었다. 만약 미첼로가 졌으면 내가 저런 모습을 하고 있었을 꺼야. 그래. 이긴 게 어디야. 미 첼로, 운 좋은 줄 알아라. 나는 이왕 봐주는 거 용기라도 북돋아 줄 샘으로 미첼로에 게 전해줄 편지를 한 장 썼다. 사투를 벌인 기사에게 친히 편지까지 써서 보내주는 공 주의 모습. 이 얼마나 멋있는가. 스스로의 모습에 감탄하면서 나는 펜을 빠르게 놀리 기 시작했다. 그러나 빨리 움직이던 펜은 금새 멈췄다. 잘 했어! 그 다음은 뭐라고 쓰지? 관중들 환성에 넋이 나가 정신을 못 차리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지 않았다, 이런 걸 바로 기사회생이라고 하는 거지, 운이 아주 좋았어 , 루드가 방심만 하지 않았어도 진작에 졌겠더구나. 아무리 좋게 써주려 해도 미첼로 가 시합에 임했던 자세가 떠올라 이런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생각나는 대로 썼다가는 충격을 받을 게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냥 달랑 잘 했어!, 라는 한 문장만 써서 시종 편으로 보냈다. 내가 직접 가서 격려해줄 수도 있었지만 아주 중대한 일이 남아있었다. 상심에 빠져있 는 어마마를 위로해드려야 착한 공주지. "어머, 루드 경이 져버렸네요. 정말 멋진 승부였는데 간발의 차로 졌군요. 하지만 지 긴 했지만 루드 경의 실력은 아주 훌륭했어요. 승패가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서로가 최선을 다해서 실력을 겨루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러니 지더라도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죠. 우리 모두 루드 경에게 박수를 보내자구요. 그는 절대 패자가 아니예요." 놀랍지 않은가. 졌다는 말을 5번이나 넣어서 말할 수 있다는 것이. 그리고 졌다는 말 을 티가 많이 나지 않게 강조해주었다. 내 선동에 따라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너나할 것없이 루드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가장 열렬한 박수를 보낸 사람은 바로 나였다. 짜식, 잘 졌어. 이제 글로리 라이언이 끝나고 죽었어! 진 것도 분해죽겠는데 내가 잘 졌다는 듯이 박수까지 쳐주자 오펠리우스 왕비는 거의 뚜껑 열리지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 라 어설픈 미소만 지었다. 입꼬리가 경련을 일으키는 걸 보니 많이 분한 모양이군. 하 긴 나라도 그럴 거야. 그러게 분수도 모르고 감히 누구에게 덤비는 거야? 자, 자. 크 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어 봐. 조금 마음이 진정될 거야. 내 마음이 통했는지 오펠리우스 왕비는 쉼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나 는 다시 위로를 가장한 약올리기를 계속했다. 남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 오홋홋호~! 참으로 건전하고 성실한 마족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어제 조금 과하게 놀려줬는지 오늘 왕비가 불참한 것이다. 에이, 이럴 줄 알았 으면 어제 조금만 약올릴걸. 오늘은 놀려줄 사람이 없잖아.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 라도 늦은 법이다. 결국 약올릴 사람도 없는 재미없는 상황이라 제 4기사단을 응원하 러 대기실로 내려갔다. 대기실로 가던 나는 대기실 밖에서 서성이는 아인을 보게 되었 다. 아인도 나를 봤는지 먼저 아는 척하며 인사했다. "마리엔 공주님, 어서 오십시오." "응. 그런데 아인은 여기서 혼자 뭐하는 거야?" "그게 제가 나가는 것도 아닌데 괜히 긴장이 돼서 마음도 진정시킬 겸 바람 좀 쐬려고 요." 아인은 창피한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렇게 창피하면 말하지 않으면 될텐데. 순진 한 녀석. 성질도 순한데다 얼굴도 동안이라 그런지 귀엽게 논단 말이야. 19살의 나이 에 16살 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으니 귀여울 수밖에. 하지만 내 경험상 이런 놈이 한번 눈 뒤집히면 아무 것도 안보이니 절대 주의해야 할 놈 중 하나였다. 원래 순한 놈이 화나면 더 무서운 거야. 나는 아인과 함께 대기실로 들어갔다. 무슨 일인지 한 곳에 사람들이 모여서 시끄럽게 굴고 있어서 내가 들어온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 쪽에는 관심이 별로 없 었던 나는 대기실에 있는 사람들을 한 번 쓰윽 훑어봤다. 그리고 내 시선은 한 여자 앞에서 멈췄다. 곱슬거리는 녹색머리와 신록을 연상시키는 녹색눈의 그녀는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답 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미녀 축에 속하는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깔끔하게 생겨서 만약 드레스를 입고 다소곳이만 있는 다면 남자 몇이 따라다니겠지만 현재 그녀가 입고 있 는 옷은 드레스가 아니라 경갑옷이었다. 어깨까지 오는 머리는 목 뒤에서 대충 묶고 있었고, 눈매도 상당히 매서웠다. 저 여자가 로얄 기사단의 유일한 여기사랬지? 이름은 사라였고. 사라가 싸우는 모습은 봤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느낌이 달랐다. 근육이 울퉁불퉁한 몸은 아니지만 탄 탄한 체격이 상당한 훈련을 했나보군. 여기사가 다른 나라에 비해서 많다고 들었지만 여자가 로얄 기사라면 만만치 않겠어. 나이도 20대로밖에 안보이는데. 오늘 최고의 강 적이 되겠어. 그녀는 사람들과 동떨어져 조용히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었다. 아니, 사라뿐만 아 니라 다른 두 명의 로얄 기사도 시합을 앞두고 생각에 빠져있었다. 로얄 기사는 다르 구나. 전혀 방심하고 있지 않아. 최강자다운 관록이 엿보이는....... "하하하! 그래서 제가 말이죠......" 아까부터 어떤 놈이 시끄럽게 난리야! 나는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고개를 획 돌려 유심히 살펴보았다. 꼭 저런 곳에는 이야기를 주도해 가는 인간이 있기 마련이지. 도 대체 누가 매너가 이렇게 없는지 얼굴이나 보자. 그리고 내 눈에 보인 것은 대회 관계 자와 신관, 마법사들을 모아놓고 뭔가를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는 미첼로였다. 관심이 없어 한 번 쳐다볼 때는 몰랐는데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사람은 미첼로가 맞았다. 그 는 어제 루드를 쓰러뜨린 자신의 무용담을 길게 늘어놓고 있었다. 자신을 조절하며 시합을 준비하는 로얄 기사와 얼마나 다른 모습인가. 그나마 가스톤 과 죠안이 진지한 얼굴로 무기를 점검하고 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제 4기사단 은 모두 애송이로 찍힐 뻔했다. 어제 제일로 힘들게 이긴 주제에 잘난 척은. 그래도 이겼으니까 봐준다. 오늘이 아니 면 언제 저렇게 잘난 척 할 수 있겠어. 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냥 보아 넘기려했다 . 이왕 온 거 격려라도 해줄 요량으로 다가가던 나는 미첼로가 자랑스럽게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는 이야기하는데 열중해 내가 온 것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 때 저는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마리엔 공주님의 목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나의 기사여, 부디 힘내세요. 제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답니다. 저를 위해 서라도 루드 경을 이겨주세요' 저는 공주님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 고 다시 자세를 잡고 루드 경을 노려보......" 미첼로는 내 목소리까지 흉내내면서 그런 닭살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나는 옆에 있는 아인이 말리기도 전에 내 손에 들고 있는 애창을 휘둘렀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 는 거냐! 창은 허공을 가르며 빠른 속도로 미첼로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퍼어어억~!!! 창은 정확히 미첼로의 머리를 쳤고, 그 반동으로 미첼로는 대기실 구석 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니가 지금 그렇게 여유를 부릴 군번이야! 그리고 뭐가 어쩌고 저째? 나의 기사여, 제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보자보자 하니까 눈에 뵈는 게 없냐! 역시 좋게 말로 하면 안 듣는다니까. 그저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패야 정신을 차린다니까. 한참을 씩씩대던 나는 주위의 묘한 분위기에 정신을 차렸다. 조용히 명상에 잠겨있던 로얄 기사까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고 있었다. 아차차! 여기에는 다른 기사들도 있 었지. 깜빡했군. 제 4기사단이야 다 아는 사실이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우아한 공 주일 필요가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하지? 그냥 장난으로 쳤다고 할까? 아니야. 이건 말 이 안돼. 장난으로 기사의 머리를 치는 공주가 어딨어? 게다가 장난으로 친 것에 그 기사가 날아가 버렸다면 더더욱 말이 안되잖아. 뭔가 좋은 방법이, 방법이 없을까? 머 리를 엄청난 속도로 굴리던 나는 묘안을 떠올리고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난처한 얼굴 로 아인을 보면서 말했다. "아인이 시키는 대로 하긴 했는데 정말 그래도 되는 거였어?" "네? 그게 무슨 말씀이......." 나는 눈치 없이 반문하려는 아인의 가슴에 슬며시 창 끝을 댔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히 갖다댔다. 허튼 소리하면 알아서 하라는 경고였다. 창 끝이 가슴에 와닿자 잠시 굳어있던 아인은 잽싸게 큰 소리로 자신의 죄(?)를 자백했다. "네! 제, 제가 공주님에게 미첼로 경을 한 번 쳐보시라고 했습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 다! 평소에 미첼로 경이 잘난 척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런 짓을 하게 됐습니 다!" 아인이 죄(?)를 저지른 동기까지 토설하자 나는 겨누었던 창을 다시 거두었다. 그리고 매우 걱정스러운 얼굴로 구석에 쓰러져있는 미첼로에게 뛰어갔다. "미첼로 경, 괜찮나요? 하지만 일부러 날아가는 척하며 놀래킬 필요는 없잖아요. 그게 얼마나 아프다고. 그렇죠?" 나는 미소를 지으며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성을 흘리던 미첼로 는 내 아름다운 미소를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기실이 쩌렁쩌렁 울리도 록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공주님이 때리시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제가 놀래켜 드리 려고 그랬습니다! 하나도 안 아픕니다! 진짭니다! 믿어 주십시오!" 이렇게 되자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인과 미첼로의 장난으로 이런 일이 생긴 것이라 생각했다. 솔직히 지금 내 모습을 보라구. 이렇게 가 는 손목에서 그런 힘이 나왔다고 누가 믿겠어. 가녀려 보이는 내 모습을 이용한 작전 은 사람들에게 그대로 먹혀들었다. 진실을 아는 제 4기사단의 기사들만이 아인과 미첼 로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낼 뿐이었다. 관중들의 어마어마한 함성 때문에 콜로세움이 무너지지 않을지 걱정이 된다. 게다가 밖에서도 콜로세움 위에 떠있는 영상을 보려고 모인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어서 정말 장난아니게 컸다. 그 소리에 콜로세움이 흔들리는 것 같다면 믿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느껴진다. 용케 그동안 무너지지 않고 버텨왔군. 이게 바로 마법의 힘이라는 것인가. 하지만 관중들의 열렬한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마 내 정체를 모르 는 사람들 틈 속에 끼어있다면 나도 저들을 따라 함성을 질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원래 이런 건 한 사람이 하면 다른 사람도 하게 되어 있는 거야. 게다가 지금 관중들 을 이렇게 흥분시키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내가 잘 아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지금이야 체면 차리는 높으신 분들과 있으니 참고 있지만 말이다. 지금이 바로 글로리 라이언의 마지막 시합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이럴 때 함성을 지르지 않으면 또 언제 지르겠는가. 이 시합에서 이기는 사람이 바로 제인드력 426년 글로리 라이언의 우승자가 돼 페인드 왕국의 최강의 검사라는 칭호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 명예로운 칭호를 가운데 두고 격돌하는 사람들은 바로 가스톤과 사라 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죠안은 3위였고, 미첼로는 5위였다. 오늘 시합은 우선 6명이 겨뤄 승자 3명을 뽑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3명이 제비뽑기를 해서 동그라미가 그려진 종이를 뽑은 사람은 바로 결승에 진출하고, 남은 두 사람이 다시 시합을 하게 된다. 이 시합의 승자는 결승전에 올라가고, 패자는 그대로 글로리 라이언의 3위가 되게 돼 있었다. 제비뽑기만 잘하면 힘을 덜 들이고 결승전에 올라갈 수 있으니 얼마나 편한가 . 운도 실력으로 보는 사람들의 이상한 생각 때문에 제비뽑기를 잘하는 것도 중요한 일 중에 하나였다. 마법을 써서 도와줄까도 했지만 안타깝게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 그 이유는 곧 나오니 기다려 봐라. 나는 첫 시합에 나가는 미첼로의 상대가 사라라는 말을 듣고 걱정이 되었다. 사라 같 은 여자들은 여자 취급하면 자신을 약하게 보는 걸로 생각해 매우 기분 나빠한다. 그 런데 미첼로의 성격으로 봐서 '아름다우신 레이디, 레이디께는 검보다 향기로운 꽃이 어울린답니다. 저도 레이디처럼 아름다우신 분과 싸우고 싶지 않으니 기권해주십시오. ' 라는 말을 할 게 뻔했다. 그리고 분위기 상 미첼로는 정말 그런 말을 한 모양이었다 . 아, 그 다음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분노한 사라는 미첼로에게 맹공격을 퍼부었고, 미첼로는 자기가 당하고 있는 와중에도 제대로 공격하지 못했다. 이런 미련 한 놈. 그래도 피하는 것만은 거의 신들린 경지였다. 하지만 공격을 해야 이길 것이 아닌가. 결국 미첼로는 멍청하게 판정패를 당했다. 솔직히 막말로 온힘을 다해 덤벼도 이길까 말까한 상대를 그렇게 상대했으니 지는 게 당연한 결과였다. 원래의 목적은 달성했기에 마음이 너그러워져서 '그래. 넌 평생 그렇게 살다가 죽어라' 하고 넘어갔 기에 망정이지 목적도 달성 못한 주제에 졌으면 죽음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미첼로가 어이없이 진 다음에 이루어진 가스톤과 핸스의 시합은 나를 흡족하게 해주었 다. 핸스라는 기사는 사라와는 달리 경험 부족을 역력히 드러내 가스톤이 시합 내내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경험이 부족해도 이름만 로얄 기사가 아닌 모양이었는 지 가스톤은 승부를 내는데 상당한 시간을 소요해야만 했다. 그러나 시간이 걸리긴 했 지만 핸스를 어렵지 않게 이겼다. 원래 정통적인 검술을 사용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수준까지 올라가면 가장 상대하기 힘들어진다. 그래서인지 가스톤은 자신의 실력을 마 음껏 발휘했다. 그리고 죠안과 짐이라는 로얄 기사의 시합이 바로 이어졌는데, 죠안도 내 기대를 저버 리지 않았다. 그동안 짐의 시합을 지켜본 바 파워를 앞세워 싸우는 타입의 기사였다. 하지만 스피드도 만만히 않았다. 죠안과는 정반대 타입으로 죠안과 짐 모두 가장 껄끄 러운 상대를 만나게 된 것이다. 힘과 스피드의 숨막히는 공방은 계속되었다. 내가 글 로리 라이언에서 본 시합 중 가장 박진감 넘치고 불꽃 튀는 시합이었다. 관중들의 호 응도 엄청났다. 시합이 거의 끝나가는 시간이 되서야 죠안이 짐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 하지만 짐과 죠안은 시합이 끝나자마자 경기장 위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두 사람 모두 체력의 한계까지 가서 싸운 모양이다. 비록 죠안의 승리로 끝났지만 다음 시합 을 시행할 힘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죠안은 3위로 남게 되었다. 죠안이 3위로 남자 자연히 결승전에는 가스톤과 사라가 올라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전에3위 이하 순위 결정전이 이루어졌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모두 결승전에 쏠려 있었 다. 그리고 이제 글로리 라이언의 하이라이트인 결승전이 시작되려고 하는 있었다. 가스톤, 2위만 해도 잘한 거지만 이왕 결승전까지 올라간 거 우승 한 번 해봐. 미첼로 처럼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말고. 저런 여자가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데. 너나 잘하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래봬도 나도 말 한마디에 상처받는 연약한 소녀였다.. 물론 슬퍼하면서 응분의 대가를 충분히 내려준다는 점이 보통 소녀와는 달랐지만. 가스톤은 앞에 서있는 사라를 주시했다. 겉보기에는 도저히 로얄 기사라는 것이 믿어 지지 않지만 그녀의 실력은 대단했다. 여자라고 제대로 상대하지 못한 미첼로와는 달 리 가스톤은 신중하게 자세를 잡았다. 사라보다 훨씬 가녀려 보이는 마리엔이 어마어 마한 실력으로 두들겨 패는데 이 여자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었다. 미첼로 같은 바 람둥이가 아닌 다음에야 아주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날마다 17살 의 어린 소녀에게 맞다보면 여자라고 도저히 얕볼 수 없게 된다. "당신도 내가 여자라고 얕볼 건가요?" 사라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유명한 기사 가문에서 태어난 검을 잡은 이 래로 또래 남자들에게 져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주위의 사람들은 사라가 여자 라는 이유로 다른 기사들과 똑같은 대우를 해주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서야 여 자라고 신경 써주는 것이겠지만 사라는 항상 그런 점이 불만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여 자가 아닌 기사인 사라로 봐주길 원했다. 그런데 아까 얼굴만 번지르하던 제비 같은 놈이 고귀하신 레이디께서 기권해달라는 소 리를 했으니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도 그 제비와 같은 생각이리라 생각했지만 가스톤의 대답은 그녀의 예상과는 달랐다. "사라 경,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로지 최선을 다해 당신을 이기고 싶을 뿐입니다." 사라는 가스톤의 눈을 들여다보았지만 그의 갈색 눈은 진심을 담고 있었다. 사라는 약 간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곧 시합에 몰두했다. 시합이 시작되자마자 가스톤은 바로 그 녀를 공격해갔다. 상대는 한 순간의 방심도 있을 수 없는 로얄 기사였다. 그리고 사라 는 가스톤이 먼저 공격해오자 상당히 놀랐다. 지금까지 사라와 겨룬 자들은 레이디에 대한 예우라며 선제 공격을 항상 그녀에게 양보하곤 했던 것이다. 만약 상대가 같은 남자라도 그랬을까? 아마 절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라는 자신에게 선제공격을 양보한 자는 가차없이 공격해서 이길 때까지 덤벼들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달랐다. 왠지 기분이 좋아진 사라는 자신의 허리를 베어오는 가스톤 의 검을 자신의 검을 세로로 들어 막았다. 가스톤은 사라가 검을 막자 상대가 자신보 다 힘이 약하다는 점을 이용해 힘으로 밀어붙였다. 여자라고 봐주는 것을 사라가 원하 지 않을 것이고, 마리엔을 겪어본 바 여자란 겉만 봐서는 절대 알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달은 그였다. 혹시 아는가. 사라가 괴력의 소유자일지. 그러나 사라는 가스톤이 생 각하는 것과는 달리 괴력의 소유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조금씩 뒤로 밀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의 녹색 눈은 희열에 가득 찼다. 검사란 검을 부딪쳐보면 상대를 알 수 있는 법이다. 사라는 가스톤이 자신을 여자가 아니라 로얄 기사의 한 사람으로 상대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사라는 자신도 가스톤의 힘에 맞대응하다 재빨리 뒤로 빠졌다. 갑자기 힘을 겨루던 상 대가 사라져 가스톤이 잠시 휘청하는 사이 사라는 빈틈을 찔러 들어갔다. 가스톤은 균 형이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검을 막았지만 그녀가 밀고 들어오자 주춤거렸다. 몸의 균 형이 앞으로 쏠려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자인 사라의 힘으로도 주춤 거리는 것이었다. 이대로 있으면 완전히 균형이 허물어질 게 뻔했다. 그는 검날을 비 스듬히 해 사라의 검을 흘렸고, 사라의 몸은 검을 따라 앞으로 쏠렸다.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찬스가 오면 주저하지 말고 잡으라는 마리엔의 가르침에 따라 가스톤은 사라의 가슴을 검으로 찔렀다. 그러나 가스톤의 검이 닿기 전에 사라는 왼발로 가스톤의 다리를 차 고, 그 힘을 이용해 뒤로 몸을 날려 피했다. 그리고 재빨리 몸을 일으켜 방어자세를 취했다. 관중들의 응원은 어느새 여자 대 남자로 나뉘어있었다. 여자들은 대부분 사라를, 남자 들은 가스톤을 열렬히 응원했다. "꺄악! 언니! 멋있어요!" "반드시 이겨서 잘난 척하는 남자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버려!" "가스톤! 여자에게 지면 수치다! 이겨라!" "힘내라! 가스톤, 당신은 할 수 있어!" "아내에게 맞고 사는 내 복수를 해줘어~!" 순식간에 장내는 여자 대 남자의 대결장이 되었고, 곳곳에서 말다툼이 일어났다. 평소 에 쌓인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상황이 점점 커지자 대회 진행요원들이 싸움을 말리러 다녔지만 이 소동을 일으킨 장본인들은 조용히 서로를 응시하기만 했다. 가스톤과 사 라의 눈은 상대의 허점을 찾아 재빨리 움직이고 있었다. 먼저 움직인 사람은 사라였다. 사라는 가스톤의 오른팔을 찔러 들어오는 척하다 그가 옆으로 피하자 때를 놓치지 않고 검을 횡으로 그었다. 가스톤은 재빨리 허리를 숙여 피했지만 이상한 느낌이 들어 거의 본능적으로 왼쪽으로 땅을 굴렀다. 그리고 그의 몸 이 지나간 곳으로 사라의 검이 꽂혔다. 처음과 두 번째 공격은 모두 허초였고, 마지막 공격이 진짜 공격이었다. 진짜 공격이 뭔지 모를 정도로 복잡하게 이루어진 사라의 가문인 제타 가문의 검법이었다. 가스톤은 절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군. 마리엔 공주님도 그렇고 이 여기사도 그렇고. 왜 내 주위에 있는 여자들은 이렇게 드센 거야! 여자는 외모로 봐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거야. 이 세상에서 제일로 무서운 건 역시 여자였어. 웃는 얼굴로 사람을 패질 않나, 누굴 죽이 려고 저렇게 위험한 공격을 하질 않나. 만약 피하지 못했다면......끔찍하군.' 가스톤의 여자들의 무서움을 새삼 깨닫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정신 팔고 있다가 언제 비명횡사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가스톤과 사라의 서로 번갈아가며 공격을 주고받았다 . 가스톤은 여자라고 봐주지 않았고-오히려 전력으로 공격했다-, 사라도 자신을 진심 으로 상대해주는 사람을 만나 모든 힘을 다하고 있었다. 내일이면 두 사람 모두 제대 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런 일에 신경 쓰지 않 았다. 글로리 라이언의 결승전으로 전혀 부끄럽지 않을 시합에 관중들도 어느새 숨을 죽이고 가스톤과 사라의 동작 하나하나를 지켜보았다. 이런 격렬한 대결은 20분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그리고 서서히 승패의 향방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사라는 조금씩 지치 는지 몸놀림이 느려지고 있었지만, 가스톤은 약간 숨만 거칠어졌을 뿐이었다. 물론 가 스톤도 지치긴 했지만 그냥 실력을 기른 자와 목숨을 건 사투를 통해 실력을 기른 자 는 정신력에서 차이가 났다. 사라는 오래 끌면 끌수록 자신이 불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번 공격에 모든 것을 걸었다. 제타가문의 검술 중 '노게스 사우전볼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벼 락이 날뛰는 것처럼 검의 진로를 예측할 수 없어서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검술이었다. 사라는 가스톤의 허리를 노리고 검을 휘둘렀지만 놀랍게도 가스톤은 그 검을 막아냈다 . 복잡하게 움직이며 진로를 알 수 없는 검을 쉽게 막아내자 사라는 검을 쥔 손의 힘 이 빠져버렸다. 하지만 가스톤은 알고 막았다기보다는 몸이 저절로 반응한 것이었다. 마리엔 덕분에 반사신경이 고도로 발달한 제 4기사단이었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가스톤은 사라의 검을 있는 힘껏 쳐 올렸고, 사라는 검을 놓쳐버렸다. 검은 경기장 저 편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검이 챙그랑, 소리를 내며 경기장 위로 떨어지자 잠시 콜로 세움에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그 정적은 곧 사라졌다. "와아아~~~!!!" 제인드력 426년 글로리 라이언의 우승자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귀가 멍멍해질 정도 의 함성에 사회자가 우승자를 발표하는 말조차 묻혀버렸다. 드디어 시합이 끝나자 가 스톤은 검을 다시 거두었고, 아직도 멍해있는 사라를 보았다. 자신의 검이 막혔다는 사실이 상당히 충격인 모양이었다. 가스톤도 무의식 중에 막은 자신이 놀라울 뿐이었 다. "만약 그분과 대련을 하지 않았다면 제가 졌을 겁니다. 당신은 제가 상대해온 어떤 기 사보다 훌륭한 기사입니다. 좋은 승부였습니다." 가스톤은 그렇게 말하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고, 잠시 그 손을 바라보던 사라의 얼굴 이 붉어졌다. 그리고 사라도 환하게 웃으며 가스톤의 손을 마주잡았다. "고마워요, 가스톤 경. 우승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제인드력 426년 글로리 라이언의 우승자는 제 4기사단의 가스톤 오드레 기암이 되었다 .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글로리 라이언의 2위는 유명한 기사가문인 제타 백작가문의 사라 유노 제타가 차지했고고, 3위는 제 4기사단의 죠안 헤크레가 되었다. 1위와 3위를 제 4기사단의 두 사람이 차지하고, 미첼로도 5위에 들자 제 4기 사단의 명성은 널리 퍼지게 되었다. 만년 꼴등이었던 제 4기사단이 상위 6위에 세 명 모두 들자 사람들은 경악했다. 이제 누구도 제 4기사단을 '월급도둑'이나 '왕궁 기사단의 수치'로 부르지 않았다. 1년 만 에 실력이 몰라보게 향상된 제 4기사단의 세 사람이 이룬 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 들 사이에서 '글로리 라이언의 기적' 또는 '제 4기사단의 반란'으로 불리게 되었다. 참고로 제 1기사단의 루드는 7위를 했고, 마리엔은 가스톤이 국왕에게 마법검을 하사 받는 동안, 죠안이 상금을 수여받는 동안 달려가서 안아주고 싶을 걸 참느라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고 한다. 이렇게 제인드력 426년 글로리 라이언은 끝이 났다. ============================================================================== 드디어 글로리 라이언이 끝났습니다. 제일로 힘들게 쓴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아~역시 전투씬은 너무 힘들어~ 원래는 1회분량으로 올리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길어졌습니다. 이 부분이 제일로 이상한 것 같아요. 흑, 죄송해요. 글로리 라이언이 끝나서 속이 시원합니다. 전투씬은 힘들다는거 다시 깨달았습니다. 그럼 다음 편 구상을 해야겠네요.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14-제 1기사단에게 응징을!!! 나는 지금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글로리 라이언 덕분에 제 4기사단의 주가는 하늘 높 을 줄 모르고 올라갔고, 덩달아 내 주가도 올라갔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오펠리우스 왕비에 대한 소식이 들리지 않는 것을 보면 분해서 자기 궁에서 나오지 않는 듯 하다 . 쪽팔리겠지. 그 것도 많이 쪽팔리겠지. 이제 남은 건 제 1기사단에 대한 응징뿐이군 . 응징을 빨리 끝내야 남은 축제를 구경갈 수 있기 때문에 빨리 끝내 버리자고 마음을 먹은 나였다. 어떻게 손봐줄지는 이미 생각해 놓은 게 있으니 행동으로 옮기기만 하 면 됐다. 응징을 가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져 실실 웃던 나는 미나가 점심식사를 들고 오자 재빨리 사악한 미소를 지웠다. 그리고 식사로 나온 흰 빵을 씹으면서 슬쩍 미나를 쳐 다보았다. 이번에 가장 큰 활약을 할 사람은 바로 미나였기 때문이다. 한 번 떠봐야지 . "미나, 검술 연습은 잘되고 있니?" "네. 이제는 제법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어제는 꽃모양을 3개나 그렸어요." 전에도 3개라고 들은 것 같은데. 아직도 그 부분에서 버벅대고 있군. 차라리 포기하면 좋을텐데 의외로 끈질기단 말이야. 아! 포기하면 안되지! 포기해도 3일 후에 포기해 라. 미나 정도면 자기 몸 하나는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실력이었지만 헬파이어가 몇 개 씩 날아다니는 전투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나로서는 당연히 눈에 차지 않았다. 그러다 마법사가 핀드스 투스(Fiend's Tooth : 악마의 이빨, 흑마법 최강의 마법 중 하 나. 검은 창들이 모든 공간을 에워싸고 상대가 죽을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시 전자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없다) 라도 사용하면 어떻게 하려구? 일개 시녀가 흑마법 최강의 공격마법 중 하나를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와 싸울 일이 전혀 없음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은 미나의 실력이 필요할 때였다. 우선은 띄어준 후 에 물어봐야겠군. 이런 생각에 나는 짐짓 감탄한 척하며 칭찬하기 시작했다. "굉장하다! 벌서 그 정도까지 할 수 있게 된 거야? 다른 사람보다 습득속도가 훨씬 빠 른데! 혹시 너 검에 소질이 있는 거 아니야?" "정말로요?" "그럼, 그럼. 잘만 배우면 기사정도는 우습겠다. 정말 놀라워!" "에이, 몰라요~" 미나야, 정신차리렴. 아무리 내가 띄어줬다지만 너무 하는 거 아니니? 그렇게 부끄러 워하는 건 내 말에 조금은 동의한다는 뜻이니? 의외로 뻔뻔하구나. 하긴 뻔뻔한 게 살 아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긴 하지만. 그러나 나는 칭찬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정말이야. 내가 다 놀랄 정도야. 이러다 대륙 사상 최초의 여자 소드 마스터가 나오 는 것 아냐? 미나는 충분히 그럴만한 자질이 있어." 역대 소드 마스터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니 그냥 넘어가자. 이제는 방방 뛰네. 순진한 건지, 뻔뻔한 건지 모르겠네. 뭐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나는 이 정도면 되겠다 싶어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런데 미나 너 실전 경험이 없지? 그래서 내가 적당한 대련 상대자를 하나 구해놨는 데 어떠니?" "대련 상대요?" 미나의 얼굴이 약간 딱딱해졌다. 만약 여기서 '그 정도야 별 것 아니죠. 심심하던 차 에 잘됐네요. 한 번 해보죠' 라고 나왔다면 미나는 마족에게 마족보다 뻔뻔하다고 인 정받는 첫 인간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미나를 뻔뻔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내가 사람 하나 망가뜨리는 거 아냐? 아니야. 아니야. 미나는 그냥 있어도 뻔뻔 해. "대련이라도 별 거 아니야. 검을 잡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이야. 네가 한 수 가 르쳐준다는 기분으로 가볍게 상대하면 돼. 솔직히 말하면 정말 실력이 형편없더라. 미 나라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꺼야." 내 말에 미나는 마음이 동했는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대로 말해버리면 틀림 없이 도망가버릴 테니 약간 진실을 왜곡해서 들려주었다. 모르는 게 서로에게 좋은 거 야. 미나가 조금씩 흔들리자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솔직히 이런 기회가 흔히 있는 것도 아니잖아. 실력은 별 것 아니어도 기사거든. 기 사와 겨뤄볼 기회가 그렇게 자주 오겠니? 이 것도 다 내가 너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거야. 생각해봐. 기사를 이기면 다른 사람들이 미나를 어떻게 보겠어? 완전히 영웅되 는 거지." "정말 제가 이길 수 있어요?" "물론이지! 나만 믿어." 미나야, 걱정하지마. 천지가 개벽해도 네가 질 일은 절대 없을 꺼야. 네가 이겨야 제 1기사단 놈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수 있거든. 내가 너의 승리를 위해 뒤에서 손을 쓸 테니 염려 붙들어매. 그러나 내가 뒤에서 도와준다고 해도 앞에 나서는 사람은 미 나였기 때문에 내 뒷공작 못지 않게 미나가 열심히 해주는 것도 중요했다. 나는 미나 가 이번 일에 의욕이 생기도록 오늘 아침 급하게 만든 마법 반지를 보여주었다. 두께가 약간 두꺼운 금으로 만들어진 링에 작은 다이아몬드들이 박힌 반지와 비슷한 두께의 링에 에메랄드가 하나 박힌 반지를 보여주자 미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 이걸 왜 보여주냐는 얼굴이군. 네가 나에게 해주는 것이 있으면 나도 해주는 게 있 어야 하지 않겠어? '오고가는 대가 속에 피어나는 의욕' 이란 말이 괜히 생겼겠니? 이 런 게 바로 세상 사는 이치 아니겠어.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는 파이어볼, 아이스 미사일, 버스트 프레아(3서클 화염계 공 격마법: 몇 개의 불덩이들이 동시에 적을 공격, 파이어볼이 여러 개 있는 것과 비슷하 다), 익스프로젼(4서클 화염계 공격마법: 화염 폭발을 일으켜 다수의 적을 공격하지만 범위가 커질수록 위력은 줄어든다), 윈드 레이브(4서클 풍계 공격마법: 바람의 칼날 이 다수의 적을 공격, 역시 범위가 넓을수록 위력이 반감된다) 이 다섯 개의 공격마법 이 걸려있었다. 다른 반지는 바리어, 힐링, 미스트(안개가 생겨 주변을 식별하게 힘들 게 만드는 특수마법. 바람만 불면 모두 사라지므로 별 효과는 없다)가 걸려있었다. 더 강한 마법을 걸어주고 싶어도 흑마법을 제외한 마법은 아직 4서클까지 밖에 사용하 지 못하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흑마법을 걸어주는 건 너무 눈에 튀었다. 사람들 이 흑마법을 주로 사용하는 흑마도사를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는데다 신관들이 또 깽판 칠 걸 생각하면 차라리 걸어주지 않는만 못했다. 깨끗하고 고귀한 척 하는 신관 놈들 은 침도 없는 주제에 떼거리도 몰려다니면서 머릿수로 승부하기 때문에 매우 귀찮은 족속 중에 하나였다. 말똥이 무서워서 피하는가, 더러워서 피하지. 뭐 여긴 토르도 아니니까 이 정도만 해도 귀한 축에 속하겠지. 그렇다. 이 곳은 기사 에게는 최고의 대우를 해주는 기사의 나라이지만 그만큼 마법사들의 숫자가 적고 수준 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페드인 왕국 최고의 마법사라는 궁전마법사도 이제 겨우 7서클 초입정도라고 하니 대충 그 수준을 알 만했다. 대개가 궁전마법사는 7서 클 마스터이거나 8서클 마도사인 다른 나라에 비해 얼마나 뒤떨어졌는가. 내가 만든 마법 반지는 시동어만 외우면 무한정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 었다. 나는 미나를 앉혀놓고 이 반지들이 얼마나 유용하고 훌륭하며 비싼지를 누누이 설명해 주었다. 예상대로 내가 열심히만 한다면 두 개의 반지를 모두 주겠다는 말에 미나는 의욕에 불타올랐다. 미나는 잘해야지, 다짐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미나가 단순히 내 칭찬과 마법 반지들 때문에 의욕에 불타는 것은 아닐 것이다 . 만약 그렇다면 이 얼마나 단순한 인간인가. 내 생각에는 미나는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순순히 대련에 응했을 것이다. 검을 배우면 자신 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미나 주변에는 비교 가 되지 않는 실력자들만(나와 제 4기사단) 있었으니 다른 사람과 대련하고 싶기도 하 겠지. 아니면 말고. 이제 남은 건 미나의 대련 상대에게 통보를 하는 것뿐이군. 점심식사를 마친 나는 누구도 대동하지 않고 제 1기사단의 훈련장으로 향했다. 훈련장 은 제 4기사단이 사용하는 훈련장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더 깨끗했다. 글로리 라이언에 서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해서인지 침울한 분위기였지만 훈련은 열심히 하고 있 었다. 제 4기사단과는 여러모로 다른 기사단이었다. 제 4기사단은 지금쯤 파티 준비로 한창 바쁠 텐데 이쪽은 훈련이라. 오늘 제 4기사단은 기념비적인 가스톤의 우승과 죠안, 미 첼로의 상위 입상을 자축하고자 저녁 즈음에 파티를 열기로 했다. 재미있을 것 같아 나도 참석해서 같이 놀겠다고 말을 해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제 1기사단은 바로 어제 글로리 라이언이 끝났는데 쉬지도 않고 바로 연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 정말 재미없게 사네. 앞으로 열심히 하자는 차원에서 술 마시고 놀기는커녕 하루도 안 쉰단 말이야? 살아봐야 100년도 못사는 짧은 인생을 즐겁게 살아야지. 저렇게 아둥바둥 살 면 뭐가 좋을까? 그러나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니 굳이 같이 놀면서 살자, 라는 말은 하지 않 았다. 자신이 선택해서 살아가는 삶이니 삶에서 오는 책임도, 즐거움도 모두 자신이 짊어지는 것이다. 마족이 다른 마족의 일에 거의 상관하지 않는 이유도 이런 이유에서 였다. 하얀 도화지 위에 무슨 그림을 그리든지 그 것은 화가의 자유인 것처럼 자신의 삶에 무슨 사건을 채워나가는지는 자신의 자유였다. 설령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어리 석어 보일지라도 말이다. 오랜만에 진지모드로 갔군. 하지만 이 곳에 온 이유를 상기한 나는 루드를 찾아 훈련 장을 살펴보았다. 내가 혼자 조용히 왔기 때문에 내 등장을 눈치챈 사람은 거의 없었 지만 눈이 마주친 몇몇 사람들은 목례를 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예의바른 모습이 었지만 하나같이 눈빛들이 곱지 않았다. 그런 시선에 전혀 개의치 않고 루드를 찾던 나는 드디어 한 쪽에서 기사들을 지도하고 있는 루드를 발견했다. 열심히 어린 기사의 실수를 지적해주는 루드의 성실한 모습에 마음이 약간 흔들렸지만 다시 굳게 마음을 먹었다. 제법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을 당신에게는 미안하지만 다른 사람 편까지 신경 써줄 정도로 착한 마족이 아니라서 말이야. 그래도 이게 여장하는 것보다는 백 배 나을 꺼야. 루드에게 다가간 나는 생긋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건넸다. "루드 경, 잘 있었나요?" "마리엔 공주님...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되게 딱딱하게 구네. 내가 잘난 척하러 온 걸로 생각했는지 루드는 안색을 굳혔고, 나 를 본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봐. 나 그렇게 치사한 마족 아니야. 그저 정당 한 응징을 가하려 왔을 뿐이야. 당연한 말이지만 잘난 척하는 것보다 복수하러 온 것 이 더 치사한 행동이었다. 내 계획대로 상황이 전개되면 제 1기사단의 권위는 산산조 각날 것이다. "내기에서 이겼으니 부탁을 하러 왔어요." "벌써말입니까?" 루드가 반문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별 것 아닌 부탁이었다. 그 부탁이 가져 올 파장이 아무리 커도 부탁 자체는 단순했다. 루드는 내가 혹시라도 무리한 것을 요 구할까봐 조건을 다시 말했다. "좋습니다. 하지만 말도 안되는 부탁이나 기사도에 어긋나는 부탁은 안된다는 것을 아 시겠죠?" "물론이죠. 그렇게 힘든 것도 아니예요. 내가 추천하는 사람과 대련을 해줬으면 해요. 상대는 제 1기사단 기사라면 누구라도 좋아요." 내가 대련이라는 아주 평범하고 힘들지 않은 요구를 해오자 루드는 안심하면서도 의아 해하는 눈치였다. 내가 드래곤이라도 잡아오라고 할 줄 알았나 보지? 그 것도 썩 나쁘 진 않지만 겨우 말실수 조금 했다고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힘든 부탁을 할 정도로 심보가 고약하지 않았다. 비록 뭘 모르는 마족들이 '성격파탄자', '마계의 시한폭탄' 이라고 부르지만 나도 알고 보면 착한 마족이라구, 그런 내가 그렇게 힘든 일을 시키 겠어? 쪼끔 창피한 일이 되겠지만 이 정도면 별 것도 아니잖아. 그러고 보니 기사들은 목숨보다 명예를 더 소중히 여긴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진짜일까? 나중에 반응을 보면 알 수 있겠지. 캬하하하. 이들의 명예를 실추시키다 못 해 짓밟을 나는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야, 라고 말하는 듯한 선량한 미소를 지으면 서 루드를 보았다. "대련말입니까?' "네. 제 1기사단을 동경하는 아이를 한 명 아는데 한 번이라도 꼭 대련을 하고 싶다고 해서요. 시간도 별로 걸리지 않을 거고 장소도 이 곳으로 할 거예요. 들어주실 거죠? " 약간 의심스럽다는 눈치였지만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나였기 때문에 루드는 선선히 승낙했다. 니들 딱 걸렸어. 앞으로 이틀 뒤에 이 시간, 이 곳에서 대련을 하기로 정 한 후,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제 4기사단이 있는 곳으로 가기 시작했다. 응징을 내릴 준비로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으니 놀러나 가야지. 지금쯤 완전히 축제 분 위기겠는걸. 아직 할 일이 남아있긴 했지만 내일 해도 충분한 일들이었다. 그럼 오늘 은 한바탕 신나게 노는 거야! 무도회랑은 다르겠지? 후훗, 파티다! 파티!! 나는 파티 에서 신나게 놀 것을 생각하며 그 자리에서 깡충깡충 뛰며 좋아했다 "맙소사! 고, 공주님! 도대체 어디서 그렇게 술을 드신 거예요?" "어어~, 캐로올이다아~. 캐로, 안녕? 헤헤헤." 말하는데 자꾸 혀가 꼬여서 말을 마치는데 약간 힘이 들었지만 기분만은 아주 좋았다. 허공에 떠있는 기분이랄까. 맥주도 의외로 맛있구나. 처음에는 시큼해서 상한 줄 알 았는데. 좀 과음한 것 같긴 하지만 난 말짱하다구우~. 괜히 기분이 좋아져 실실거리며 웃고 있는데 캐롤이 옆에서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귀염둥이들을 노려보았다. 캐롤의 시선을 받은 귀염둥이 세 사람(보나인, 가스 톤, 죠안)은 고양이 앞에 서있는 쥐 마냥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캐롤과 시선을 마주 치지 않으려고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세 사람을 보니 캐롤에게 뭔가 크나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 틀림없었다. 무슨 잘못을 했길래 저러고 있을까아~? 딸꾹.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세 사람을 보고 있는데 드디어 캐롤이 입을 열었다 .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죠?! 왜 공주님이 술에 취해서 들어오신 건지 말을 해보세요!" 와아! 캐롤 목소리 진짜 크다아~. 게다가 캐롤의 기세는 눈앞에 드래곤이 있으면 드래 곤도 때려잡을 기세였다. 캐로올, 멋있어. 풍만한 몸에서 흘러나오는 위압감과 광폭함 은 내가 캐롤에게 선망의 눈초리를 보내게 만들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술에 취해도 단단히 취했던 상태였지만 이때의 나는 내가 말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내가 카리스마 넘치는 캐롤의 모습에 감탄하고 있을 때, 나와는 정반대로 세 명의 기사들은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제 4기사단의 제일가는 실력자들도 캐롤의 넘치는 박력에는 당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보나인은 그녀의 무시무시한 눈길에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고 몇 시간 전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보나인이 말한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훈련장 한가운데에서 벌어진 파티는 시간이 갈 수록 흥겨워졌다. 기사들은 미리 공수해온 맥주를 마시면서 즐겁게 놀고 있었다. 이 때 돼지 통바베큐를 먹고 있던 내가 맥주를 마시고 즐거워하는 기사들에게 관심을 가 지게 된다. 평소에 보던 포도주와는 사뭇 다른 액체를 보고 그게 뭐야, 라고 천진하게 물어오는 나를 외면할 수 없었던 그들은 맥주라는 음료수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 었다. 호기심에 한모금 마셨던 내가 시큼한 맛에 인상을 찌푸리자 그들은 맥주와 포도 주의 차이점을 비교, 분석해서 설명해주면서 마지막으로 맥주의 묘미는 바로 이 시큼 한 맛에 있다고 강조한다. 이에 호기심이 생긴 나는 맥주를 한모금씩 홀짝이기 시작한 다. 그들은 저마다 말렸지만 나를 말릴 수는 없었다. 저마다 자신이 드리는 술도 마셔보라며 한잔씩 건네주었던 사실과는 좀 달랐지만 그 때의 나는 그 차이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보나인의 말이 계속될수록 캐롤의 인상은 일 그러졌다. 그리고 보나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이 지경이 되실 때까지 말리지 않고 뭘 하신 겁니까?!" 이쯤 되자 나는 캐롤이 화를 내고 있는 이유가 나 때문이란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취 한 줄 아나봐. 나는 안취했어~. 보라구. 이렇게 멀쩡하잖아. "캐로올, 나 아안 취했어. 이거 봐봐. 이렇게 멀~쩡하잖아. 응? 캐로올, 가만히 좀 서 있어. 왜 그렇게 비틀거리는 거야?" 술 취한 사람이 꼭 자신은 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나도 절대 취하지 않았다고 우 겼다. 내 말에 캐롤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마리엔 공주님, 비틀거리고 있는 건 제가 아니라 공주님이세요. 우선 공주님을 안으 로 모셔야겠군요. 미나야, 다나랑 같이 공주님을 방으로 모셔다 그려라." "네, 시녀장님." 캐롤의 말에 시녀들이 비틀거리며 다가오더니 내 옆에서 나를 부축하기 시작했다. 자 기들이 그렇게 비틀대면서 나를 어떻게 부축하겠다는 거야? 진짜로 안 취했다니까 그 러네. 지인짜라니까~.우웅. 자꾸 감기는 눈 때문에 비몽사몽간이었지만 뒤에서 캐롤의 목소리가 들린 것만은 확실했다. "도대체 생각이 있으신 분들이세요?! 저희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공주님에 대해 뭐라고 하시겠어요? 술을 마신다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 것도 정도껏해야죠! " 언제 캐롤이 기사에게 큰 소리칠 수 있을 정도로 신분이 높아졌지? 난 몰랐는데. 캐롤 은 잔소리가 심한데 우리 귀염둥이들 고생 좀 하겠다. 그런데 캐롤이 왜 화를 내고 있 는 거지? 이미 방금 전에 내가 했던 말조차 잊어버린 나였다. 아침에 눈을 뜬 나는 일어나자마자 머리를 감싸안고 신음성을 흘렸다. "아이고, 머리야."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아야, 왜 이러지? 오늘따라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억 지로 굴려서 그 원인을 찾던 나는 파티에서 기사들이 건네준 맥주를 마셨던 일이 떠올 랐다. 하지만 마시던 것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어떻게 침실까지 왔는지는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좀 과음했나? 이게 말로만 들었던 필름이 끊긴다는 건가? 그러나 신기한 경험을 했다는 기쁨도 잠시였다. 으, 머리 아파 죽겠다. 살짝 움직여도 골이 흔들리 는 것 같아 침대에서 일어난 그 자세 그대로 머리를 감싸안고 있었다. 누군가 들어오 는 소리가 들렸지만 머리가 아파서 신경 쓸 정신도 없었다. "휴우,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캐롤?"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쟁반에 뭔가를 담아들고 온 캐롤이 못 말리겠다는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흑, 그러지마. 제 4기사단 그 웬수같은 것들이 자꾸 권 하는 바람에 그랬단 말이야. 시큼한 맛이 맥주의 묘미 어쩌고 하면서 한 번 마셔보라 고 했단 말이야. "그렇게 불쌍한 눈으로 보지 마세요. 그러게 무슨 술을 그렇게 마신 거예요?" "난 안 마시려고 했는데 자꾸 제 4기사단 기사들이 권하는 바람에......" 내 말에 캐롤은 뭔가를 생각하더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우리 착하신 공주님께서 술을 먼저 드시겠다고 할 리가 없지. 그 런데도 어제는 잘도 그럴듯한 말로 변명을 늘어놓았겠다. 다음에 두고 보도록 하죠." 무슨 변명? 난 이제 깨어났는데. 어제 일이 기억이 나지 않는 나는 캐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엉? 그게 무슨 소리야?"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일어나시면 숙취로 고생하실 것 같아 꿀물을 좀 타왔습 니다. 쭉 마시세요." 역시 캐롤밖에 없어. 나는 캐롤에게 감사의 눈길을 보내며 꿀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달콤한 꿀물이 들어가자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골이 흔들리는 것은 마 찬가지였다. 내가 다시는 술 마시나 봐라. 아이고, 머리 아파 죽겠네. 그렇게 숙취로 오전 내내 고생한 나는 정오가 지나서야 낑낑대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침보다는 많 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나는 내일 있을 행사를 위해 할 일이 있 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어제 다 끝내놓는 건데. 괜히 오늘 로 미뤄 가지고 이게 무슨 고생이야.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다. 나는 되도록 머리에 충격이 가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으면서 로얄 기사단의 훈련장으로 향했다. 로얄 기사단의 훈련장은 대전과 가까운 곳에 있는데다 조심하면서 가다보니 훈련장에 도착했을 때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였다. 로얄 기사단의 훈련장은 이제까지 봐온 제 1기사단이나 제 4기사단의 훈련장보다 훨씬 넓었다. 그리고 로얄 기 사들의 훈련을 돕기 위해서인지 견습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평 소라면 활기가 넘치는 그 모습에 감탄했겠지만 현재 내 몸상태는 내게 그런 여유를 허 락하지 않았다. 이, 이것들아, 조용히 해! 머리가 울린단 말이야! 여기저기서 들리는 검이 부딪치는 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가 평소의 배 이상으로 크게 들렸다. 가만히 있어도 머리가 아 픈데 이런 소음(?)들까지 들리니 어쩌겠는가. 나는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어서 이 소음에 적응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이 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나는 이 곳에서 반드시 해야할 일이 있었다 . 내일은 제 1기사단의 기사와 미나의 대련이 있는 날이다. 그런데 그런 역사적인 일 에 관중이 없으면 안되지. 그 것도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어야 했다. 그래야 제 1기사단 녀석들의 자존심에 강력한 일격을 가할 수 있었다. 관중이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라면 제 1기사단도 쪽팔리기는 하겠지만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 만 도저치 무시할 수 없는 인물들이라면 자존심이 얼마나 상하겠는가. 그렇게 보면 제 1기사단이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는 로얄 기사단이 관중으로서 적격이었다. 게다가 로얄 기사 한 명 한 명의 지위는 보통 기사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자신들이 언젠가는 넘어서겠다고 벼르고 있는 인물들에게 그 모습을 보이면 그 오만한 성격들도 조금은 누그러들겠지. 게다가 제 1기사단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은 오펠리 우스 왕비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과 마찬가지니 얼마나 좋아. 마침 아는 사람도 있으 니 그 녀석들을 잘 꼬시면 될 거야.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에릭과 세린을 잘 구슬리면 로얄 기사단을 관중으로 초청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이 걸로 모든 게......아야야! 흥분해서 웃는 바람에 머리가 아프다는 걸 잊고 있었어. 다시는 술 마시나 봐! 그렇게 내가 아픈 머리를 감싸안고 다시는 술 마시지 않으리라 결의를 다 지고 있을 때였다. "혹시 마리엔 공주님 아니십니까?" 힘겹게 고개를 들자 시원한 느낌의 물빛 눈동자가 바로 눈앞에서 보였다. 그리고 그 물빛 눈동자와 잘 어울리는 파란 머리의 아름다운 남자가 턱에 손을 괴고 유심히 내 얼굴을 살펴보고 있었다. 머리가 아파서 누가 다가오는 줄도 모른 모양이었다. 저리가 . 이 인간아. 왜 그렇게 얼굴을 들이미는 거야? 나는 바로 코앞에 있는 세린을 피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세린의 얼굴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에릭도 보였다. 무표정한 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마에 땀이 흐르는 걸 보니 훈련을 하다 말고 온 것 같았다. 뭐 에릭이 자의로 훈련을 중단하고 온 것이 아니라 세린이 끌고 왔다는 것이 더 신빙성 이 있게 들리지만 온 건 온 거니까. "아~, 에릭, 세린. 그동안 잘 지냈죠?" "네." "에릭, 며칠만에 마리엔 공주님을 보는 건데 그렇게 무뚝뚝하게 굴면 안되지." 그러나 세린의 말에 에릭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어. 아무튼 정말 라디폰 공작과는 전혀 딴판이라니까. 그렇게 라디폰 공작과 에릭을 비교 하면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세린이 다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니, 이 놈이 왜 이래? 내가 무슨 짓이냐는 시선을 보내도 세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내 얼굴만 살 폈다. 잠시 후, 세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공주님, 술 드셨습니까?" "에?" 아니, 이 놈이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기는요. 눈이 퀭한데다 피부도 푸석푸석하지 않습니까." 그 정도인가? 세린의 말에 얼굴을 쓰다듬어 보았지만 손에 눈이 달리지 않은 이상 피 부가 푸석푸석한지는 알 수 없었다. 흠, 돌아가면 마사지라도 해야 하려나? 여자의 생 명은 깨끗한 피분데. 피부가 상하면 안되지. 오이 마시지가 좋을까? 진흙 마사지가 좋 을까? 아니면......앗! 이게 아니지!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내 피부가 상했나, 안 상했 나를 확인하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잠시 피부가 상했다는 말에 이 곳에 온 목적을 잊었던 나는 다시금 목적을 상기하고 에릭과 세린에게 말했다. "그보다 두 사람 내일 시간 있어요? 사실 내일 아,주, 재미있는 일이 있는데 꼭 와줬 으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들도 데려와요. 그리고 그냥 노는게 아니라 대련 관람이니까 도움도 될 거예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거절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에릭을 보고 재빨리 대련 관람 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에릭과 세린은 관심이 생겼는지 좀 더 설명해달라는 눈치였다. 이 때부터 내 장광 연설은 시작되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대련이 될 것이며, 구 경한다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가끔은 다른 사람들의 대련을 지켜보는 것도 훈련의 한 일환이다. 대련할 사람은 한 명은 제 1기사단의 기사이고, 다른 사람은 와서 보면 정말 놀랄만한 인물이다. 확실히 미나를 보면 누구나 놀랄 것 이다. 머리가 아픔에도 불구하고 열성적으로 설명을 한 덕분에 에릭과 세린은 상당히 긍정적 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이 참석하면 다른 로얄 기사들도 올 거야. 자타 가 공인하는 최고의 검사라는 에릭이 온다는 건 상당한 영향력이 있으니까. "어때요? 시간도 1시간도 걸리지 않고, 장소는 제 1기사단 훈련장이예요. 1시간 정도 면 잠깐 쉰다는 기분으로 올 수도 있잖아요, 올 거죠?"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두 사람의 답을 기다렸다. 세린은 별 문제없을 것 같은 데 역시 에릭이 문제란 말이야. 설득하려면 꽤나 힘들겠지? 그러나 내 생각과는 달리 에릭은 내 제의를 선뜻 받아들였다. "딱히 할 일은 없으니까......" "오~, 에릭이 왠일이야? 난 네가 거절할 줄 알았는데. 덕분에 널 설득하느라 애먹을 일은 없지만 무슨 바람이 분 거냐?" "그냥." 에릭은 그 한마디하고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정말 다행이야. 의외로 쉽게 승낙하는 걸. 가장 공략하지 힘들 것이라 생각했던 에릭이 별 말없이 온다고 하니 기뻐할 일이 었다. 세린은 다시 아무말도 하지 않는 에릭을 잠시 보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예상보다 쉽게 에릭과 세린의 승낙을 받아낸 나는 다시 공주 궁으로 돌아가려 했다. 두 사람을 제외하면 아는 사람도 없는데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붙잡고 내일 재미있는 일이 있으니 보러오라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은 에릭과 세린에게 맡기고 이제 돌아가야지. 에릭에게는 별로 믿음이 안가지만 옆에 세 린이 있으니까 괜찮겠지. 돌아가기 전에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데려오라고 당부하려했 지만 나보다 세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마리엔 공주님, 이왕 오신 거 저희들이 대련하는 모습이라도 보고 가시는 게 어떻습 니까?" "대련? 에릭과 세린이?" 내 말을 네가 감히 페드인 왕국 최고의 검사인 에릭과 대련한다는 말이야!, 라고 이해 한 세린이 금새 침울해졌다. 그리고 세린은 내가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설명하고 나서 야 얼굴을 폈다. 에릭과 세린은 대련을 위해 공터를 찾아갔고, 나는 그 뒤를 졸래졸래 따라가서 두 사 람과 어느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에릭과 세린의 실력을 볼 수 있다는 생각 에 흥분이 됐다. 좋아, 얼마나 잘하나 볼까? 특히 에릭! 얼마나 뛰어난 실력이길래 소 문이 그렇게 요란한지 똑똑히 지켜봐주겠어. 과연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니면 대부분의 소문이 그렇듯이 과장된 건지 말이야. 세린이 검을 빼자 에릭도 검을 손에 들고 자세를 잡았다. 본격적인 대련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어버버. 저, 저 인간이 아까 멍하던 그 에릭이란 말이야?! 평소에는 졸린 듯이 멍해보 이던 눈이 날카롭게 빛나면 세린을 주시하고 있었다. 더불어 에릭의 주위의 기도가 싸 악 변했다. 마치 날카롭게 벼려진 한 자루의 검을 보는 느낌이랄까. 에릭의 날카로운 기운이 내가 있는 곳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매사에 관심이 없어 보이던 의욕부족증 인 간이 어떻게 저럴수가! 평소의 무표정한 모습과 세린의 빈틈을 참고 있는 지금의 모습 은 완전히 다른 인물 같았다. 차라지 에릭에게 성격이 다른 쌍둥이 형제가 있다는 말 을 믿는 게 낫지. 검을 쥐자마자 사람이 저렇게 변하다니 놀라워! 내가 에릭의 변한 모습에 놀라고 있을 때, 에릭이 먼저 세린을 공격했다. 여기서 나는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에릭이 제법 떨어져있는 세린에게 다가가 검을 휘두 르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만약 한눈을 팔고 있었다면 놓쳐버렸을 지도 몰랐다. 그리고 소름끼치도록 깨끗한 동작이었다. 동작에 군더더기가 전혀 없었 던 것이다. 셀 수도 없는 훈련으로 다져진 것도 있지만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난 인간 이었다. 저 자식 완전히 타고났잖아. 사람들이 에릭을 왜 검의 천재라고 부르는지 이 해가 갔다. 20살의 나이에 5년 안에 소드 마스터가 될 가능성이 보인다는 게 말이나 돼! 하지만 내 눈엔 분명히 그렇게 보였다. 내가 창을 잡은 지 20년이 지났을 때는 어땠더라? 창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오히려 창에 휘둘려 휘청휘청거리던 예전 일이 불연 듯 떠올랐다.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 솔 직히 지금의 몸으로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에릭과 붙으면 내가 질 것 같았다. 아무리 능력이 증폭됐다고는 하지만 원래의 마리엔이 워낙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저런 괴물 같은 놈을 육탄전으로 이기는 것은 무리였다. 다음부터는 에릭이 검을 들고 있으면 조 심해야지. 무서운 놈이었어. 하지만 세린도 만만치 않았다. 실력은 에릭보다 떨어지지만 스피드만은 에릭보다 나았 다. 에릭이 군더더기가 없는 최소한의 동작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대련에서는 유리했지 만 단순한 동작만으로는 세린이 더 빨랐다. 우~, 죠안보다 더 빠르잖아. 전에 봤던 사 라보다 조금 더 나은 실력이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은 멋지게 빗나가버렸다. 지금의 제 4기사단 중에서는 에릭과 세린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없겠어. 이 일을 계기로 에릭 과 세린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두 사람의 대련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 다. "에릭 경과 세린스 경의 실력은 정말 굉장하지 않나요?" 에? 누구야?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사라가 내 옆에 와있었다.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직접 말을 해본 적은 없었다. 얼이 나간 상태였던 나는 사라의 말에 바로 감탄성을 터트렸다. "정말 굉장하네요! 로얄 기사가 이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내 말에 사라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에릭 경과 세린스 경은 로얄 기사단에서도 최고의 실력자들이죠. 저같은 사람과는 비교도 안되죠." 나와 사라는 에릭과 세린을 주제로 계속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눈으로는 두 사람의 대련을 지켜보면서 말이다. 이런 멋진 장면을 안 볼 수야 없지. 세린도 뛰어낫지만 에릭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소문이 과장된 것이라 여겼던 나는 자 꾸 벌어지는 입을 단속하느라 애를 먹었다. 대련은 내내 우세를 점하던 에릭의 승리로 끝이 났다. 세린이 아무리 빨라도 체력의 한계가 있으니까. 하지만 에릭을 상대로 이 정도까지 버틴 것을 칭찬해주고 싶었다. 로얄 기사단은 역시 얕볼 수 없는 집단이었어 . 그리고 로얄 기사 중에도 에릭은 더더욱 얕볼 수 없어. 에릭과 세린의 대련이 끝난 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옆에서 에릭을 부러운 눈으로 보고 있는 사라에게 관심을 가졌다. 이렇게 바로 옆에서 본 약간 떨어져서 봤을 때보다 더 예뻐 보였다. 왠지 호감이 가는 여자라 편하게 사 라를 대할 수 있었다. 사라에게도 내일 와달라고 해볼까? 그게 좋겠어. 사람은 많을수 록 좋아. "그런데 사라 경, 혹시 내일 시간 있어요? 괜찮다면 말이죠......." 나는 사라에게 내일 있을 대련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내 말을 들은 사라는 잠시 주 저하며 내 눈치만 살폈다. 왜 저러지? 내일 못 오나? 하지만 그게 그렇게 눈치 볼 일 인가? 사라의 반응에 의아해하고 있을 때, 사라가 잠시 주변을 살펴보더니 살짝 물었 다. "저...마리엔 공주님...혹시 가스톤 경도 오시나요?" "아마도 그럴걸요. 그런데 그건 왜요?" "아무 것도 아니예요." 사라는 볼을 긁적이면 멋쩍은 듯이 말했다. 이거 혹시 사라가 가스톤을 좋아하는 거 아냐? 글로리 라이언에서 자신을 한 명의 기사로 인정해준 가스톤의 모습에 반한 거야 . 그럴 때 제 4기사단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내가 오자 일부러 접근해서 가스톤에 대 해 알아내려고 한 게 아닐까? 하지만 나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 각해?! 가스톤이 아직 결혼은 안했다고는 하지만 벌써 30대 중반이라구! 거기에 비해 사라를 봐. 저 탱탱한 피부를 보란 말이야. 어디로 보나 싱그러운 20대라구. 혼기 적령기는 약간 넘은 것 같지만 저정도면 어디에다 내놔도 뒤지지 않는 용모야. 게다가 가문도 제법 빵빵한 사라가 뭐가 아쉬워 가난하기 그지없는 가스톤을 좋아하겠어. 그래. 아니 겠지.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그저 같은 기사로서 동경하는 거겠지. 그럴 꺼야 . 아침식사는 마친 나는 미나에게 그동안 사용했던 목검을 가져오게 했다. 미나 실력으 로는 아무리 운이 좋아도 제 1기사단의 기사를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내 힘이 필요 한 것이다. 미나에게 목검을 건네받고 살펴보니 매일 천으로 닦는지 광택이 나고 있었 다. 그러나 손잡이 부분에는 손모양을 따라 손때가 묻어 있었다. 그동안 열심히 연습 한 모양이네. 기특한 것. 미나에게 잘했다고 한 번 웃어준 다음 목검을 손으로 쓸면서 아무도 모르게 마법을 걸었다. '암흑보다 더 어두운 존재, 모든 어둠의 어버이인 마신 마레보렌트 데이티의 권능으로 영혼도 가르는 광기의 검이 만들어지리라. 그 검에 담긴 분노와 절망을 이 곳에 투영 하니 이제 그 앞을 막는 모든 자의 살을 가르고 뼈를 부수고 피를 마셔라. 블랙니스 베니딕션(Blackness' Benediction : 암흑의 축복).' 백마법에 있는 웨폰 스트렝써닝(Weapon Strengthing : 무기 강화) 과 비슷한 효과를 가져오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자연의 마나를 재구성해 힘을 발휘하는 백마법과는 달리 그 힘을 어둠에서 빌린다는 것이었다. 백마법을 사용하고 싶어도 흑마법 외에는 높은 서클을 사용할 수 없으니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거 여러모로 불편하네. 나중에 마 법 수련이라도 해야할까? 목검에 강화마법을 걸어준 후, 미나에게 다시 건네주었다. 미나는 마법을 거느라 목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냥 살펴본 시늉 만 했다. "깨끗하네. 관리를 잘했나봐." "제 검이니까 매일 헝겊으로 닦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반들반들해지더라구요." "자신의 무기를 소중히 하는 건 좋은 자세야. 그보다 여기 좀 앉아볼래? 사실은 오늘 을 위해 내가 특별히 준비한 차가 있어. 류에서 직수입된 인삼차에 연금술사가 만든 마법약을 섞어서 만든 아주 귀한 차야. 이걸 마시면 오늘 하루는 평소보다 힘이 넘칠 거야." 물론 거짓말이었다. 나는 발음하기도 힘든 인삼차라는 차를 본 적도 없었다. 그리고 마법약도 섞여있지 않았다. 지금 탁자 위에 놓여있는 것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씀바귀 뿌리를 다려만든 차였다. 인삼차가 쓰다고 했으니까 대충 맛은 비슷하겠지. 그 리고 내가 마법을 걸어주면 마법 효과도 날 테니까 상관없겠지. 미나는 내 말에 눈을 반짝였다. 미안해, 미나야. 그거 인삼차도 아니고, 마법약도 전 혀 안 섞여있어. 하지만 몸에 나쁘진 않을 거야. 미나는 씀바귀차를 한 모금 마셔보더 니 인상을 찡그렸다. "에엑, 너무 써요." "호호호, 좋은 약이 입에 쓰다는 말도 있잖아." '설탕을 좀 더 넣을 걸 그랬나?' 미나는 인상을 썼지만 내 말이 맞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잽싸게 미나에게 마법을 걸었다. '핀드스 그래스핑 파워(Fiend's Grasping power: 악마의 악력, 말그래도 악마의 힘처 럼 강한 힘을 얻게 된다), 블랙니스 윙(Blackness' wing: 어느 곳에나 순식간에 번지 는 암흑처럼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 된다).' 그냥 마법만 걸 수도 있었지만 그럼 자신의 힘과 스피드가 좋아졌다는 것을 모를게 아 닌가. 하지만 마법적인 효과를 내는 차를 마셨다고 생각하면 설령 그것이 가짜라고 힘 이 넘친다는 착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의지는 전혀 효과가 없는 씀바귀차를 귀 하디 귀한 인삼차와 마법약을 섞은 특수한 차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니까. 무기 도 강화했고, 미나의 능력도 올려줬으니 남은 건 대련 중간 중간에 적절히 마법을 사 용하는 일뿐이군. 미나는 시험삼아 목검을 휘둘러보고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마법이 효과가 좋긴 좋 지. 마법반지까지 본 미나는 그 어느 때보다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 반응 좋고. 이 정 도면 충분하겠어. 미나의 자신감은 대련을 하기로 한 약속시간까지 지속되었다. 물론 옆에서 계속 이번 대전자의 실력은 정말 형편없다고 용기를 북돋아준 내 덕분이었다. 미나를 데리고 제 1기사단의 훈련장에 가보니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주변 을 훑어보니 아는 얼굴도 있었지만 모르는 얼굴들이 더 많았다. 제 1기사단과 제 4기 사단은 당연히 와있었고, 내가 친히 홍보에 나섰던 로얄 기사단도 적지 않게 와있었다 . 그러나 다른 기사단의 기사들과 궁궐에서 일하는 시종, 병사들도 소문을 듣고 몰려 왔다. 관중들은 많을수록 좋지. 미나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자 약간 긴장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오기 전에 내가 잔뜩 용기를 불어 넣어준 데다 마법약을 먹었다는 사실 때문에 일에 지장이 생길 정도로 많이 긴장하지는 않았다. 나는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제 1기사단이 모여있는 곳으로 갔다. 루드는 내가 다가 가자 재빨리 예를 갖춰 인사했다. 예전과는 전혀 다른 아주 예의바른 모습이었고, 표 정조차 과거의 가소롭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아니, 이 자가 갑자기 왜 이래? 그 사이 에 마음을 고쳐먹고 이 훌륭하신 마리엔 공주님을 존경하기로 했나? 아니야. 이건 내 가 생각해도 아니야. 내가 잘난 건 맞지만 오펠리우스 왕비 일당 중 한 명인 이 인간 이 갑자기 안면을 바꿀 이유는 아닌데. 무슨 속셈인가 싶어 유심히 그의 얼굴을 살피던 나는 그가 유난히 내 뒤쪽을 신경 쓴 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국왕이라도 왔나? 어디 한 번. 그러나 뒤를 돌아보았을 때, 국 왕은 없었다. 대신 제 4기사단의 기사들과 에릭, 세린, 사라, 그 외 기사들이 줄줄이 서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까지 시건방진 태도를 취할 수는 없었 던 모양이다. 특히 루드의 시선은 로얄 기사들, 그 중에서도 에릭에게 집중되어 있었 다. 오호~, 에릭을 신경 쓰나 보지. 하지만 내가 보건대 댁은 에릭을 절대 못 이겨. 나도 순수한 검술만으로는 못 이기는데 당신이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의 우월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한다. 특히 라이벌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 것은 비록 상대는 안중에도 없는데 자기 혼자 라이벌로 생 각하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라이벌 앞에서 개망신을 당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뭐 그 뒤야 뻔하지. 한동안 자기 혐오에 빠져 헤어 나오질 못하겠지. 그리 고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일도 그런 일 중에 하나였다. 오만한 제 1기사단 놈들의 코 를 납작하게 해 줄 근사한 일을 착실히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나는 앞으로 권위가 실추되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 얼마동안은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을 일을 당할 제 1기사단의 기사들을 보았다. 불쌍한 것들. 오늘 나는 기사들이 명 예라는 것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한 번 확인해봐야겠어. 그리고 너희들이 그 실험 대상이 되어줬으면 좋겠어. 아, 그리고 당신들의 의사는 내가 조금 바빠서 들어줄 시 간이 없을 것 같아. 그러니 그냥 실험대상이 돼 줘. "루드 경, 대련 상대자는 정했나요?" "그렇습니다, 알베르가 나설 겁니다. 그는 저희 기사단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실력자 이니 상대로는 전혀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루드의 말에 그의 뒤에 서있던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알베르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는데 미남은 아니었지만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윗입술이 말려 올라가 교활해 보였다. 알베르의 인사를 받은 나는 아름다운 미 소를 지었다. 내가 알베르의 상대로 미나를 소개하면 얼마나 놀랄까? 아주 재미있을 거야. "공주님이 또 저런 음흉한 미소를......" "마리엔 공주님이 저런 미소를 지을 때는 사람을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짓밟으 려 할 땐데. 불쌍한 놈들." "오늘 사람 하나 죽겠구나. 부디 편히 눈을 감기를." 아니, 이 놈들이 내 이미지에 흠집이 가는 말만 하고있잖아. 명색이 부하라는 것들이 이럴 때 우리 공주님은 너무 착하시고 훌륭하시답니다, 라고 칭찬은 하지 못할망정 그 런 말을 해야되겠어!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심각한 오해를 할 것 아니야! 나는 고개를 획 돌려 저마다 동정의 시선을 하고 있는 제 4기사단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러나 그 웃음 속에는 살기가 담겨있었다. 정녕 너희들이 죽고 싶은 것이냐? 제 1기 사단 다음에는 너희들로 해줄까?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평범한 미소였지만 그동안 나 와 제법 많이 부딪쳐본 사람들은 웃음 속에 감춰진 가시를 느꼈다. 그러니까 저렇게 일제히 웃음을 터트리며 화제를 바꾸려고 몸부림치는 것이겠지. "하,하,하!!!" "이야! 오늘 날씨 정말 좋군!" "전 마르크라고 합니다. 처음 뵙는 분이군요. 이름이 뭡니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 인데 앞으로 친하게 지냅시다." 그런 그들을 잠시 지긋이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알베르에게 돌렸다. 오늘은 제 1기사 단이 목표니까 봐준다. 뒤쪽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주위의 사람들 은 제 4기사단의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하긴 그냥 보기엔 자기들끼 리 수군대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며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가 싶더니 다시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으로 보였을 테니 이상할 만했다. 그 사정을 아는 사람은 나와 제 4기 사단, 그리고 미나 뿐이었다. "그런데 공주님, 제 상대는 누구입니까?" 알베르는 약간 굳은 얼굴로 말했다. 글로리 라이언에서 상위를 차지한 가스톤과 죠안, 미첼로는 아직 피로가 풀리지 않아 나오지 않는다 해도 다른 사람들의 실력을 모르니 긴장을 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아, 알베르 경의 상대라면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이에요. 이름은 미나라고 해요. 미 나, 알베르 경께 인사해." "안녕하세요, 알베르 경. 공주님의 시중을 들고 있는 미나 샤베로라고 합니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미나는 내가 일러준 대로 예의바르게 알베르에게 인사했다. 그러나 알베르는 미나의 인사에 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는 손가락으로 미나를 가리키며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뭔가 말은 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는 상태로 보였다. 그리고 그런 반응은 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이 곳에 모여있던 모든 사람들이 알베르와 거의 비슷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와 닿았지만 살짝 미소를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역시 제 4기사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정신을 차리 자마자 공주님이 이번엔 또 무슨 흉계를 꾸미시려고 저러시나, 라는 의혹의 시선을 보 냈다. 저 것들이 도대체 나를 뭐로 보는 거야?! 이래봬도 비단결 같이 고운 마음을 가 지고 있다구! 나의 천재성을 시기한 어리석은 자들이 성격 파탄자니 뭐니 하는 유언비 어를 터트리긴 하지만 난 아주 착해! 시간이 지나자 다른 사람들도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고, 정적이 흐르던 조금 전과는 달 리 주변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마리엔 공주님,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지금 장난하시는 겁니까?" "아니요, 전 진심이랍니다. 분명히 내가 추천하는 사람과 대련을 해달라고 했을 겁니 다. 그리고 내가 추천하는 사람은 옆에 있는 미, 나, 예요." 루드가 흥분해서 소리쳤지만 내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이 걸 위해서 사람들을 끌어 모았는데 그렇게 노려본다고 관둘 것 같아. 내가 다시 한 번 힘줘서 말하자 모든 사람 들이 완전히 벙찐 얼굴이 돼버렸다. 저마다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특히 제 1기 사단의 기사들은 제 4기사단의 기사가 대련 상대로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나오자 어이없는 눈으로 미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저런 소녀가 제 상대가 될 수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알베르가 눈썹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그럼 나는 이렇게 대답해줘야겠지. "그거야 싸워봐야 알겠죠." 내가 배시시 웃으며 말을 하자 알베르는 내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인상을 구겼다. 확실히 싸워봐야 알지 않겠어. 어떤 미,지,의, 힘,에 의해 지게 될지 어떻게 알겠어. 저 가녀린 소녀를 상대로 말이지. 미래는 한 치 앞도 모르는 거야. 미나가 알 베르를 상대로 이기는 것이 아무리 적은 확률이라도 이길 확률이 아주 없는 건 아니잖 아. 게다가 그 뒤에 뛰어나고 훌륭하고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좋은 내가 있다면 더욱 그렇지. 알베르는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미나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알베르의 시선을 받 은 미나는 약간 움찔하긴 했지만 크게 겁을 먹지는 않았다. 역시 내가 교육 하나는 잘 시켰다니까. 별로 한 것도 없으면서 모두 내 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였다. 당시 미나의 생각은 이러했다. '예전에 마리엔 공주님이 시험 기간에 공부하셨을 때나 라디폰 공작님을 저주하시던 때에 비하면 저 정도는 약과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미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내가 전혀 물러날 기미가 없어 보이자 루드는 경고했다. "저희는 저 소녀가 어떻게 되도 모릅니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말아요." 너희들이나 걱정하는 게 좋을 거야. 루드는 알베르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알베르도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구 경온 사람들은 제 1기사단의 기사가 정말 시녀와 대련을 할 것 같자 더욱 수군거렸다. 그래, 많이 떠들어라. 대신 대련이 끝나면 소문을 많이 내라구. 나는 힘내라고 미나 의 등을 한번 두드려주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관중석으로 갔다. 심판은 로얄 기 사 중 한 사람이 맡아서 했다. "공주님, 정말 괜찮겠습니까? 알베르 경은 날카로운 일검으로 정평이 나있는 인물입니 다. 그런데 저런 소녀가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눈을 빛내며 미나와 알베르를 보던 나는 세린의 말에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세린 의 옆에 있는 에릭과 사라도 내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훗, 천재의 생각은 오묘하고 심오한 것이라 뭇 범민들이 이해하기에는 힘들겠지. 다 이해해. 나는 자신감에 찬 목소리고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그보다 곧 대련이 시작되려는 모양인데 지켜보도록 할까요?" 나는 방긋 웃으며 시선을 훈련장으로 돌렸다. 이제부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한 눈 팔았다가는 언제 알베르에게 당할지 몰랐다. 그리고 적절한 때에 마법을 써서 미나 를 도와주려면 두 사람의 동작 하나라도 놓칠 수 없었다. 심판이 시작을 알리자 알베 르는 단숨에 끝내버리려고 생각했는지 전력으로 미나에게 달려들었다. 자존심이 상했 나보군. 저렇게 막무가내로 달려들면 빈틈이 드러나기 마련이었지만 알베르는 미나를 아주 우습게 봤는지 그대로 공격해왔다. 비록 미나가 실력이 떨어진다고는 하지만 내가 직접 가르친 아이 아닌가. 미나는 알베 르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들자 당황했지만 곧 침착을 되찾고 그를 주시했다. 실력 이 떨어지는 사람은 가만히 있다가 상대의 허점을 노리는 게 최선이었고, 미나는 그 법칙을 착실히 지키고 있었다. 알베르가 바로 앞까지 오게 되자 미나는 자신도 앞으로 나섰다. 끝까지 알베르의 검을 지켜본 미나는 허리를 숙여 검을 피해내고, 그대로 알 베르의 허리를 베어갔다. 기겁한 알베르가 재빨리 몸을 틀어 피하지 않았다면 대련은 시작한지 일분도 되지 않 아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게 방심은 금물이라는 말도 있잖아. 미나가 의외로 어느 정도 실력이 있자 대련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나타나기 시작 했다. 그러나 그 놀람이 직접 당해본 알베르만 하겠는가. 알베르는 미나와 거리를 넓 히고 놀란 눈으로 미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미나는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내게 배웠던 플라워 드러를 사용했다. 여자라 남 자보다 몸이 더 유연했기 때문에 모든 동작이 물 흐르듯이 하나도 이어졌다. 지면을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는 미나를 본 사람들은 글로리 라이언에서 미첼로가 선보인바 있 었던 플라워 드러를 떠올리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녀가 이런 고급검술을 익혔으리라 고는 상상도 못했을 거야. 미나는 전신의 힘을 검을 통해 발산했다. 그에 따라 미나의 손에 의해 그려진 꽃은 위력적인 기세를 자랑하며 알베르를 덮쳐갔다. 그려진 꽃의 수가 적으면 상대를 혼란하게 할 수는 없었지만 그만큼 힘이 집중되어 강력한 위력을 보이는 것이다. 알베르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지만 마법에 의해 스피드가 향상된 미나는 쉽게 그를 따 라잡았다. 결국 알베르는 미나의 검을 막았지만 그가 생각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미나는 스피드뿐만 아니라 힘도 좋아졌다는 것이다. "윽." 알베르가 신음성을 흘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더욱 놀랐다. 이게 바로 마법의 힘 아니겠어. 음하하하. 그러나 알베르도 엘리트 부대라 불리는 제 1기사단의 일원이었다 . 그는 검을 일부러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가 재빨리 옆으로 빠졌다. 경험이 없어 무 작정 밀어붙이던 미나는 중심이 앞으로 쏠려 기우뚱했지만 알베르는 한번 호되게 당해 서 그런지 공격은 하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미나의 실력으로는 여기까지군. 알베르가 경계하기 시작한 이상 실력이 떨어지는 미나가 이길 수 없지. 힘과 스피드만 좋다고 이기는 게 아니니까. 알베르는 신중한 자세로 미나는 노려보았다. 미나는 자신의 생각보다 자신이 훨씬 유 리하게 싸워나가자 자신감이 붙었는지 먼저 알베르를 공격했다. 미나야, 허리가 비었 어. 알베르도 이를 눈치챘는지 미나의 검을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미나의 허리 를 노리며 검을 휘둘렀다. 이 때다! '그라이드(Glide :미끄러져라).' 나는 알베르의 발 밑에 마법을 걸었고, 이를 전혀 대비하지 못한 알베르는 왼발이 미 끄러져 주춤거렸다. 그리고 미나는 알베르가 갑자기 발을 헛디디자 때는 이때다 싶었 는지 가슴을 찔러 들어갔다. 알베르는 피하려 했지만 발이 계속 미끄러지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결국 미나의 검이 코앞까지 오자 지면을 굴러 피했다. 아깝다. 조 금만 빨랐어도 이기는 거였는데. 뭐 상관없어.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 후로도 알베르의 불운은 계속되었다. 느닷없이 바람이 불어 앞을 못 보게 하는가 하면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발이 걸려 넘어져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을 교묘히 피해 마법을 걸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알베르가 방심을 해서 실 수를 하고 있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알베르가 이렇게 허둥대자 신이 난 건 미나였다 .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나게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잠시 열심히 공격하는 미나와 계속되는 이상한 현상에 당황하고 있는 알베르를 보던 나는 슬슬 끝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판정으로 해도 미나가 이기겠지만 판정패보다는 그냥 이기는 게 훨씬 인상에 남지 않겠는가. 나는 결정적인 순간만을 기다렸다. 그리 고 얼마지나지 않아 그 때는 왔다. 미나가 알베르를 향해 검을 휘둘르자 알베르는 재 빨리 검을 들어 막았다. 그리고 퉁기듯이 뒤로 물러난 그를 보면서 나는 눈을 번뜩였 다. 이제 끝이야. '홀드(Hold : 속박의 주술).' 알베르는 내 마법에 의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고, 미나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마법에 걸린 것을 모르는 알베르는 갑자기 움직여지지 않는 자신의 몸 을 어찌하질 못하고 미나가 공격하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미나의 검이 가만 히 서있던 알베르의 가슴 앞에 멈추자 주변은 조용해졌다. 설마 했던 결과가 사실로 드러나 버린 것이다. 나는 심판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미나의 승리를 선언하자 재빨리 마법을 풀었다. 계속 마법을 걸어놨다가 들키면 난리나지. 증거인멸이 가장 중요한 거 아니겠어. 뜻밖의 결과에 주변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기사들이야 알베르가 컨디션에 좋지 않았 나 보다,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시종들과 병사들까지 그럴 리가 있겠는가. 흥미 로운 이야깃거리를 찾았다고 빛나는 눈들을 보건대 내일이면 소문이 아주 근사하게 날 것이다. 제 1기사단의 기사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시녀에게 졌다고 말이다. 이걸로 제 1기사단의 위신은 땅을 기게 되겠지. 나는 미나에게 잘했다고 격려를 해주고 아직도 얼이 빠져있는 알베르를 쳐다보았다. 알베르 주위로는 제 1기사단의 기사들이 몰려들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고 있 었다. "그게 갑자기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어." 알베르의 변명에 나는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머, 지금 변명하시는 거예요?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시죠. 그런데 제 1기사단이라면 굉장한 실력일줄 알고 대련을 한 건데 실망이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제 4기사 단의 기사와 대련을 하는 게 몇 배는 나을 뻔했어요." 내 말에 루드와 제 1기사단 놈들이 살벌하게 노려봤다. 그러나 그러면 뭐하겠어? 니들 졌잖아! 그것도 미나 같이 가녀린 소녀에게 졌잖아! 그런 주제에 어디서 눈을 부라려 ! 나는 그런 시선을 그들에게 보냈고, 그들은 반박할 말이 없어 입술만 깨물었다. 나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보았다. 그러게 왜 까불었어? 가만히만 있었으 면 괜찮았잖아. 아니, 왜 오펠리우스 왕비 일당이었니? 그렇지만 않았으면 이렇게 공 개적인 망신은 안 당했을 거 아냐. 제 1기사단의 기사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두 얼굴이 시뻘개져서 씩씩대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나는 미나를 돌아보며 짐짓 미안한 척하며 말했다. "미나야, 미안해. 다음 번에는 네 수준에 맞는 상대를 찾아줄게." 일부러 다른 사람도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아마 내일 소문에 제 1기사단은 미나 라는 소녀의 수준도 되지 않는 약한 놈들이었다는 말도 추가될 것이다. 이 소식을 들 으면 오펠리우스 왕비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길길이 날뛰겠지. 그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하는 게 정말 안타깝군. 대신 제 1기사단의 분해하는 모습을 보는 걸로 만족하는 수 밖에. 뒤에서 제 4기사단의 기사들이 역시 마리엔 공주님께 찍혀서 뒤끝이 좋은 놈은 없어, 라고 속닥이고 있었지만 기분이 좋으니 봐준다. 내일 어떻게 소문이 날지 기대 가 되는 걸. 후후후. 나중에 '제 1기사단의 알베르가 미나라는 가녀린 소녀와 제대로 겨뤄보지도 못하고 단 번에 졌다', '제 1기사단이 자신들이 최고인양 떠들더니 별 것도 아니었네', '마리엔 공주님의 시녀가 그 정도면 기사들은 어느 정도일지 생각만 해도 놀랍군' 과 같은 소 문을 듣고 내가 땅을 치며 웃었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리고 미나는 그 일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내게 받은 반지도 소중히 차고 다녔다. 그리고 들리는 말로는 오펠리우스 왕비가 방에 있던 집기들을 내던지며 한바탕 소동 을 벌였다고 하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 월요일부터는 학교에 가야하기 때문에 글 올리는 시산이 바꿀 것 같아요. 아마도 늦은 오후나 저녁이 되지 않을까 하네요. 그래도 매일 빠짐없이 올리도록 노력할게요. 참, 제 멜주소는 patron12@hanmail.net 하고 yuna4444@yahoo.co.kr이예요. 가끔 멜도 날려주고 해주세요. 정말 학교나가지 싫지만 어쩌겠어요 ㅠ.ㅠ 한달만 더 놀았으면 좋겠어어~!!! #15-세 남자 제 1기사단에 대한 응징을 내린 후 나는 다시 축제를 구경하러 궁궐을 빠져나가려 했다. 식사를 마치고 몰래 빠져나가는 게 좋겠어. 지난 번에는 에릭과 세린에게 들통 이 났지만 이번에는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그나저나 오늘은 나가서 뭘 하지? 재 미있는 것이 너무 많아서 무엇을 할지 고민이 되었다. 내가 그렇게 궁궐을 빠져나간 후 무엇을 할지 행복한 상상에 빠져있을 때였다. "공주님, 무슨 좋은 일이라고 있으세요?" 내가 밥 먹다말고 실실 웃자 캐롤이 물었다. 이런, 생각이 표정으로 그대로 드러난 모 양이네. 만약 캐롤이 내가 축제를 구경하러 나가려고 한다는 사실을 눈치챈다면 결사 적으로 막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럴 수야 없지. 나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변명거리를 늘어놓았다. "어제 미나가 알베르 경을 이긴 일이 생각나서 말이야. 기사를 이기다니. 미나가 정말 대견하지 않아?"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하는 법이다. 괜히 어색한 웃음을 짓거나 섣불리 화제를 바꾸 는 행위는 상대의 의심을 사게 마련이니 해서는 안 된다. 인간 세상에 대해 공부한답 시고 읽은 소설책 중에서는 이럴 경우에 어색한 행동을 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무덤 을 파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의 반응을 생각해보면 대강 이랬다. A는 B의 질문에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하,하,하, 아무 것도 아니야. 그보다 정말 날씨가 좋지?" 이 얼마나 어색한 행동인가. 이건 완전히 나 지금 찔리고 있으니 계속 캐물어 달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평이한 어조로 말하면 대부 분의 사람들은 더 이상 그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넘어간다. 그런데도 그렇게 티 가 나는 행동을 하는 점이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것 중에 하나였어. 이 것에 못지 않게 더 이해가 가지 않았던 점은 마법사가 악당과 싸우고 있을 때 왜 악당이 마법사가 주문을 외우는 동안 공격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악당을 무엇을 하고 있느냔 말이다. 마법사가 그 기나긴 주문을 외우는 동안 악당은 잠이라도 자고 있단 말인가? 아니면 마법사가 마법을 외우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단 말인가? 인간 마법사는 우리와 달리 주문을 외울 때는 꼼짝도 하지 못한다고 들었다. 그렇다고 주문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외우는 것도 아니었다. 갖은 폼은 다 잡으면서 주문도 느리작 느리작 외운다. 내가 읽은 소설책 중에서 어떤 것은 마법주문만 한 페이지가 넘었다. 악당은 주문을 외우는 동안 마법사를 공격하면 이길 수 있다는 것도 모르는 바보들일까? 어찌하여 마법이 완성되길 기다렸다가 그거 맞고 나가떨어지면서 "분하다 아~!",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처음 소설책을 읽었을 때는 아마도 마법사가 사람을 착각하고 착한 사람과 싸우게 됐던지 아니면 인간이란 종족은 매우 예의가 바른 생물들이라고 생각했었다. 뭐 나중에야 현실과 소설 사이의 괴리를 알게 되었지만. 아무튼, 나는 캐롤의 질문에 태연히 대꾸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캐롤이 더 이상 이 문 제에 깊이 생각하지 못하도록 질문까지 덧붙였다. 캐롤은 내 예상대로 내가 웃던 것을 축제와 연관시키지 못하고 화제를 미나에 대한 것으로 바꾸었다. "대견하기도 하지만 얼마나 놀랐는 줄 아세요? 그동안 가끔 목검을 들고 다닌 것을 봤 지만 장난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미나가 갑자기 기사님을 이겼다는 소문이 들렸을 때는 제 귀를 의심했어요. 게다가 보나인 경께 직접 배웠다니 놀랄 수 밖에요." 현재 미나를 가르친 사람은 보나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사실대로 내가 가르쳤다고 하 기에는 약간 시기적으로 이른 감이 있었다. 이런 건 결정적인 순간에 밝혀야 하는 법 이지. 덕분에 미나는 보나인의 제자로 생각되어져 시녀임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가 돼버렸다. 만약 공주의 제자라고 하면 지위가 어떻게 될까? 궁금하긴 했 지만 아직은 내 능력을 모두 드러낼 상황이 아니었다. 몇 % 정도는 숨기고 있어야 상 대방의 방심을 유도할 수 있었다. 또 상대는 나를 실제보다 아래로 생각하고 있기 때 문에 직접 맞부딪쳐도 쉽게 지지 않는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조금 더 기다려야 하겠 지. 제 1기사단의 참패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미나는 일약 스타가 되었고, 제 1기사단은 망신살이 뻗치게 되었다. 귀족들이나 기사들은 알베르가 방심해서 졌다고 생각하고 크게 마음에 두지 않는 것 같았지만 이들의 몇 배나 되는 시종들과 병사들은 전혀 그 렇지 않았다. 원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무척이나 재미있지. 아마 머지않아 수도 전 체로 소문이 퍼질걸. 직접 보지 못한 모습이라 믿지 않는 사람도 많겠지만 이런 소문 이 났다는 것 자체가 제 1기사단으로서는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 내가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기사들은 명예를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하던데 모두 거짓말이었다. 명예가 땅바닥으로 떨어진 이 마당에 자결하는 인간이 하나도 없는 걸 보면 분명해. 물론 그런 인간이 있었다면 실 컷 비웃어줬겠지만. 역시 말로는 명예가 가장 소중하다고 해도 목숨이 더 소중하겠지. 살아있어야 명예도 다시 얻을 수 있으니까. 그럴 바에야 차라리 그런 말이나 하지 말 던가. 인간들의 말 중 절반은 믿을 게 못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지금쯤 제 1기사단 녀석들 내가 자신들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이를 갈고 있겠는걸. 훗, 아예 축제 구경 나갈 때 내가 소문을 내고 다닐까? 이왕 하는 거 화끈하게 해야지. 오~, 생각해보니 그거 괜찮은데. 축제기간이라 사람도 많을테니 소문도 삽시간에 퍼지 겠고 말이야. 축제를 구경하는 것 말고도 축제에 갔을 때의 또다른 즐거움을 찾아낸 나는 미트볼을 우물거리며 반드시 왕궁을 빠져나가리라 마음먹었다. 놀러가세. 놀러가. 젊어서 놀지 언제 놀겠어. 마족은 늙지 않는다 해도 이 인간의 몸은 늙을 테니까 미리 많이 놀아둬 야지. 날 막을 수 있는 자 그 어디의 누구뇨? 막을 수 있으면 막아보시지. ------------------------------------------------------------------------------- 나를 막은 자는 하이덴 제국의 레이만 왕자였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이럴수가! 괜히 막아보라고 한 것 같았다. 오늘은 축제 구경 종친 거야? 그럴수가!!! 나는 속으로 절 규했지만 현실은 냉혹한 법이다. 내가 막아보라고 생각한 것 때문에 그런지 아니면 우 연의 일치인지 레이만 왕자는 내가 나가려고 채비를 하는 찰라 들이닥쳤다. "제가 방해한 것은 아닐지 모르겠군요, 마리엔 공주님?" "괜찮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방해돼. 사실을 말할 수 없는 현실이 슬플 뿐이다.' 나는 속마음을 내색하지 않은 채 미소를 지으며 레이만 왕자를 맞았다. 레이만 왕자는 다행이라는 듯이 웃었지만 그런 왕자를 보는 나는 불안감에 떨어야만 했다. 아무리 봐도 금방 갈 것 같지 않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일로 온 거 람, 쳇. "저는 3일 후에 저희 나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 마리엔 공주니 을 만나 뵙고 싶어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건국 축하 기념 기간은 아직 10일이나 남았는데 벌써 돌아가시게요?" 대부분의 사절단은 기념 기간이 끝날 때까지 머물다 가고, 염치없는 몇몇 사람들은 한 두 달 정도 더 머물면서 좋은 밥 얻어먹고 좋은 숙소에서 편하게 지내다 간다. 더 남 아있으면 남아있지 이렇게 기간이 끝나기 전에 돌아가는 일은 거의 드물었다. 축하하 러 왔다가 일이 틀어져 대판 싸웠거나 자기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도중 에 돌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제국 내 국왕파와 귀족들의 마찰이 심하다고 들었는데 그 일 때문인가? "조금 급한 일이 생겨서 일정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마리엔 공주님께서 신경쓰 실 정도로 큰 일은 아니니 걱정마십시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자세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회피했다. 역시 가르쳐주지 않는군. 자국내의 일을 타국의 왕족에게 말하긴 좀 그렇겠지. 나도 내가 살고 있는 페 드인 왕국에서 일어난 일도 아니고 여기서 한참 떨어진 대륙 내부에 있는 하이덴 제국 내에서 일어난 일은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떠나기 전에 보고 싶어 찾아왔다는데 박정하게 쫓아낼 수도 없었다. 나는 시녀들에게 차와 다과를 가져오라고 명하고, 창가에 있는 탁자로 가서 레이만 왕자에게 자리를 권했다. 레이만 왕자가 맞은편에 앉자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게 되었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그의 가는 금발을 황금빛으로 빛나게 하고 있었다. 하지 만 데미나 공주와 같은 순금을 녹여만든 듯한 진한 황금빛이 아니라 햇빛을 닮은 따스 한 느낌의 황금빛이었다. 그리고 레이만 왕자의 붉은 눈동자는 보통의 붉은 눈동자와 는 달리 진홍색에 가까워서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은 아름다운 눈이었다. 게다가 샤 프하게 뻗은 콧날까지. 천재 조각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조각 같은 얼굴이었다. 피 부가 약간 까무잡잡해 이지적인 이미지뿐만 아니라 남자다운 강인한 인상도 동시에 풍 기고 있었다. 여자들이 왜 레이만 왕자를 보고 그렇게 난리를 치는지 이해가 가는 순 간이었다. 가까이에서 보디 더 잘생겼네.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을만하군. 나는 레이만 왕자를 지 그시 바라보았다. 외모만 보면 상급품(?)정도? 아니야, 최상급품이야. 특히 진홍색에 가까운 붉은 눈동자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내가 자신을 유심히 쳐다보자 레이만 왕자 가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레이만 왕자님께서 굉장히 잘생기겨서요. 특히 눈이 너무 멋있어요."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쳐다본 게 무슨 죄라고 감출 필요가 있겠어. 솔직히 여자 입장 에서 미남에게 눈길이 가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나는 보통의 귀족 여성이라면 부끄 러워서 하지 못할 말을 당당히 말했다. 그 것도 레이만 왕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면 서 말이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레이만 왕자는 잠시 당황해하다 말했다. "그러십니까? 하지만 전 다른 사람들이 제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는 건 싫어합니다." 그래서 보지 말라는 소리냐? 잘생겼다고 봐주면 좋아하지는 못할망정 쳐다보는 게 왜 싫다는 거야? 내가 음흉한 시선으로 본 것도 아닌데 말이야.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 자존심은 세 가지고 구경거리는 되기 싫다 이거군. "아, 죄송해요." 하지만 내가 사과하자 레이만 왕자는 슬며시 웃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방금 전까지는 그랬는데 지금은 기분이 좋군요. 상대가 마리엔 공주님이 라 그런 것 같은데요." 레이만 왕자의 얼굴은 살짝 붉어져있었다. 설마 이 사람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 거 아 냐? 혹시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접근한게 아닐까 싶어 생각해보았지만 현재 나는 그렇 게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 의도에서였다면 라이언 왕자나 르미엘 왕 자에게 접근했어야 했다. 게다가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봐. 관찰력이 뛰어난 나만 알 아챌 정도로 미미한 반응이었지만 말이다. 이거 참 귀엽게 구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사랑에 빠 질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의 감정 체계' 라는 책에 나온 것처럼 역시 인간의 감정은 이해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변화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레이만 왕자를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나는 그를 매우 친절하게 대하고 있 었다. 이왕이면 나를 싫어하는 것보다 좋아해 주는 게 낫겠지. 그렇게 나와 레이만 왕 자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시녀들이 차와 다 과를 들여왔다. "고마워." 고개를 돌리고 시녀들에게 말하던 나는 보았다. 캐롤의 눈이 U자를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으로 웃고 있는 모습을 말이다. 읏, 저 표정은 뭐지? 굉장히 재미있어 하고 있잖 아. 그러고 보니 다른 시녀들의 눈도 캐롤의 눈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게다가 그들 의 옷은 여기저기 구겨져 있었고, 가끔 중간에 단추가 떨어져나가 단추를 꿰맸던 실만 외로이 남아있었다. 혹시 서로 이 방에 차와 다과를 들고 오려고 싸웠다거나 하는 게 아닐까? 상당히 신빙성이 가는 생각이었다. 그럼 혹시......? 나는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문이 열린 아주 작은 틈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많은 시녀들과 병사들을 보았다. 그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 자리를 차지하려고 밀치고 밀리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혹시 라도 안에 들릴까봐 말소리는 내지 않고 있었지만 그냥 보기에도 상당히 치열한 몸싸 움이었다. 이 것들이 무슨 구경이라도 났어?! 차마 레이만 왕자가 보는 앞에서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으이그. 다행히 레이만 왕자는 우리가 구경거리로 전락한 이 상황을 알아채지 못한 모양인지 아무 말도 없었다. 시녀들은 차와 다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도 가지 않고 계속 뭉그적대고 있었다. 말 하지 않으면 절대 가지 않을 기세였다. U자를 엎어놓은 듯한 모양으로 웃고 있는 눈도 , 눈과는 반대로 U자로 웃고 있는 입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인간들을 그냥......! 나는 어서 나가라는 무언의 시선을 그녀들에게 보냈다. 그녀들은 처음에는 어떻게든 남아 있으려고 했지만 점점 내 시선이 날카로워지자 결국 입맛을 마시며 물러났다. 그 러나 나가면서 한마디씩 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천~천~히~ 이야기 놔두세요."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내가 못살아. 나는 시녀들이 모두 나가고 문틈 사이로 몰래 엿보는 사람도 없다는 것 까지 확인하고 나서 한숨을 쉬었다. 레이만 왕자가 날 찾아온 게 그렇게 놀랄만한 일 이었던 말이야? 나와 레이만 왕자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상상이 간다. 가. 우리 둘의 핑크빛 사랑을 상상하고 있었겠지. 레이만 왕자가 내게 마음이 있다는 소문이 난 상태라 더욱 그런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가 가고 나면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꼬치꼬치 캐물을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설령 묻지는 않는다 해도 괜히 이상한 웃음을 지으며 자기들끼리 소설 하나 지을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그렇게 시녀들의 열광적인 반응에 골치 아파하고 있을 때,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레이만 왕자가 실소를 머금고 있었다. 에? 설마... "재미있는 시녀들이군요." 역시 눈치채고 있었구나. 아랫사람들의 잘못은 윗사람의 책임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 남사스런 행동을 했던 시녀들의 윗사람은 나였기 때문에 참으로 민망하지 않을 수 없 었다. 나는 재빨리 레이만 왕자에게 사과를 했다. "죄송해요. 앞으로 주의시키겠습니다." "아니,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재미있었습니 다. 게다가 공주님의 훌륭한 인품을 알 수 있었으니 소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지 않 습니까?" "에? 인품이 훌륭해요? 누가요?" 솔직히 자랑은 아니지만 나도 내 자신이 인품이 훌륭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단순 히 성격이 좋다는 것과 인품이 훌륭하다는 것은 달랐다. 별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 성격이 좋다고 하면 들고 일어설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성격이 좋다는 것만 으로도 논란이 분분한 내가 인품이 훌륭하다고? 당신 지금 제정신이야?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마리엔 공주님 말입니다. 시녀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은 공주님이 편하다는 뜻이겠죠. 그리고 그만큼 당신을 좋아하고 따른다는 말도 되고 말입니다. 한두 사람 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하는 이유가 따로 뭐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러니 제가 공주님의 인품이 훌륭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요." 레이만 왕자의 말을 듣고 보면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지만 그건 아니라고 생각되어진 다. 그러나 굳이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니 나를 칭찬해주고 있는데 반박하면 서 나는 그렇게 인품이 훌륭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 따스한 햇빛이 만물을 포근하게 감싸안고, 선선히 부는 바람이 장난치듯이 머리카락 을 살짝 흔들어놓고 가는 날이었다. 따뜻하고 화창한 날이라 밖에 나가서 놀기에는 딱 좋은 날씨였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축제에 나가는 대신 레이만 왕자와 궁내를 산책 하고 있었다. 오늘도 어제처럼 그는 날 찾아왔고, 덕분에 오늘도 축제에 나간다는 내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축제에 관한 것은 모두 잊고 즐겁게 지내는 거야. 이러다 저러나 축제에 가지 못하는 것은 똑같은데 괜히 꿍얼대고 있으면 나만 손해지 않은가. 또 내 가 계속 그러고 있으면 레이만 왕자도 미안해할 것이다. 지금 이 시간을 즐겁게 보내 면 되는 거야. 어차피 오늘로 축제가 끝나는 것도 아닌데다 내일이면 갈 사람이니 마 지막 서비스를 베푸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뭐. 그런 생각에 나는 레이만 왕자와의 산책을 나름대로 즐기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지금 상당히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게 에스코 트를 잘 받아보긴 처음이었다. 제 4기사단은 에스코트는커녕 나에게 쥐어터지기 일쑤 였고, 설령 에스코트를 하라고 해도 이렇게 말할 인간들이었다. "아니, 에스코트요? 마리엔 공주님을 건드릴 간 큰 놈이 이 세상에 있단 말입니까? 공 주님을 호위하느니 차라리 그런 놈들을 붙잡고 왜 세상을 버리려 하느냐고 묻겠습니다 ." 이런 인간들이다. 그나마 안면이 있는 에릭과 세린에게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에릭 은 내 말이나 무시하지 않으면 다행이었고, 세린은 보통의 기사와 달리 날 너무 편하 게 대하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 나오는 것처럼 공주의 말 한마디에 얼굴을 붉힌다거나 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레이만 왕자는 달랐다. 조심스럽게 대하면서도 매우 친절했다. 이런 대우를 내가 언제 받아봤겠는가. 기쁘기 할 량 없었다. 내가 공 주라는 실감이 든다고나 할까. 그런 그의 행동은 그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기에 충분했 다. 그리고 남이 나에게 잘 대해주면 나도 그만큼 상대편에게 잘 대해주게 된다, 오는 정 이 있어야 가는 정이 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레이만 왕자가 잘 대해주는데 내가 그 를 박정하게 대할 리가 없었다. 겉으로는 잘 대해주면서도 속으로는 칼을 품고 있는 사람이나 정말 첫 인상이 아니었던 사람의 경우라면 조금 달라졌겠지만 레이만 왕자는 그 어느 쪽도 아니었으니 나도 그를 잘 대해주었다. 물론 그의 뒷배경이 만만치 않다 는 점도 그 이유였지만 그에게 호감이 가는 건 사실이었다. 이러하니 그와 나 사이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 모습을 시녀들 이 봤다면 또 수선을 피웠겠지만 그럴 줄 알고 미리 밖으로 나왔지. 날씨가 좋아서 방 에만 있는 것보다 바람이나 쐴 겸 산책하자는 생각도 있었지만 시녀들의 난리를 피하 자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산책을 나갈 때도 주의할 점이 있었다. 제 4기사 단의 기사들이 있는 곳은 가급적 피할 것. 어제 시녀들의 반응으로 보건대 제 4기사단 의 반응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더한 반응을 보이면 보였지 절대 덜한 반응을 보일 사람들이 아니지. 아마 하루만에 나와 레이만 왕자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소문까 지 퍼트릴걸. 그렇기에 지금 나와 레이만 왕자가 걷고 있는 방향은 왕궁 도서관 쪽이었다. 제 4기사 단 녀석들이 왕궁 도서관 쪽에 있을 리 없지. 책의 주요한 기능을 지식 전달이 아닌 수면제로 알고, "책을 왜 읽어? 책을 읽으면 밥이 생겨? 돈이 생겨?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족속이 바로 학자들이야' 라는 참으로 무식무쌍한 발언을 서슴 지않는 그들이 왕궁 도서관 근처에 있을 턱이 없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제 4기사단 의 기사들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내 선택은 탁월했어. 나는 스스로 한 선택에 매우 흡족해했다. 그러나 그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와 레이만 왕자가 왕궁 도서관 앞에 거의 와갈 때였다. 왕궁도서관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지상의 5층과 중요한 책이나 읽는 것이 금지된 책을 보관하는 지하 1,2층까지 해 서 총 7층의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왕궁 내의 화려한 다른 건물과는 달리 수수한 건물이었지만, 그런 점 때문에 수많은 지식과 이 지식을 찾는 자들의 장소다운 분위기가 나고 있었다. 회색의 중후한 느낌의 이 건물은 각층마다 스피린 대륙과 아 드린 대륙의 양 대륙에서 모아온 수만 권의 책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와 레이만 왕자는 막 도서관에서 나오는 어떤 인물과 마주치게 되었다. 손에 책을 든 것으로 봐서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은 굉장 히 낯이 익은 모습이었다. 르미엘 왕자는 나와 레이만 왕자를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는지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만약 나만 있었다면 못 본척하고 바로 뒤로 돌아 냉 큼 다른 곳으로 가버렸겠지만 지금은 레이만 왕자가 옆에 있어 그럴 수 없었다. "이거 마리엔과 레이만 왕자님 아니십니까?" 르미엘 왕자는 잠시 놀라다가 금새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언제나처럼 반기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처럼 별로 반갑지 않았다.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을 만나는 것은 그렇게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르미엘 왕자시군요. 무도회에서 몇 번 뵌 적이 있었지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야말로 명망 높으신 레이만 왕자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과찬이십니다. 르미엘 전하야말로 유명하시지 않습니까? 20대의 나이로 현자의 탑의 현자들과 대등한 학식을 지니셨다는 소문은 저희 제국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레이만 왕자와 르미엘 왕자는 서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옆에서 레이만 왕자가 르미엘 왕자를 칭찬할 때마다 반박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다. 그거 다 헛소문일 거야. 레 이만 왕자, 당신도 그런 소문에 휘둘리지마. 그냥 무시하면 돼는 거야. 이렇게 말해주 지 못하는 현실이 슬플 뿐이었다. 그렇게 소문의 위력을 한탄하던 나는 르미엘 왕자의 시선이 내게 와있는 것을 눈치챘 다. 자기는 인사했는데 나는 아직 안 했다는 건가? 그냥 계속 레이만 왕자랑 이야기하 지. 나는 언제나처럼 별로 반갑지 않은 그에게 반가운 척하며 인사를 건넸다. "오라버니,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책을 빌리러 오신 모양이죠?" "......!!!" 뭐야? 내가 인사를 했으면 뭔가 답이 있어야 할 것 아냐. 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 보기만 하는 거야? 지금 내 말을 무시하는 거야? 그러나 나는 곧 그가 내 말을 무시하 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르미엘 왕자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다가 다시 평소의 귀여워죽겠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니다. 평소보다 그 표정이 더 강렬했다. "우읏, 귀여워. 오라버니라니! 다시 한 번 말해봐!" "왜, 왜 이래요? 이거 놔요!" 이 놈의 인간은 학문 쪽에 종사하는 사람은 힘이 약하다는 통상의 예가 적용되지 않는 지 아무리 밀쳐도 떨어지지 않았다. 예전에 미나가 플라워 드러를 가르쳐달라고 달라 붙었을 때와 거의 비슷했다. 떨어져! 징그러워! 나는 한참의 사투 끝에 간신히 르미엘 왕자를 떨굴 수 있었다. 그나마 레이만 왕자가 옆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 다면 더 많은 시간을 소요해야했을 것이다. 이봐, 레이만 왕자 당신도 그래. 그런 일 이 옆에서 일어나고 있으면 르미엘 왕자를 나에게서 뜯어내야지! 그렇게 황당한 눈으 로 보기만 하면 어쩌겠다는 거야? 게다가 자기가 아무리 황당해봐야 직접 당한 나보다 황당할 리가 없지 않은가. "왜 그러세요?"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르미엘 왕자를 보았다. '무슨 짓이야, 이 인간아? 한 번 맞아볼 래! 누구를 안고 난리야? 응? 너 죽고 잡냐?! 내가 죽여줄까?'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왔다. 면상에다 주먹을 내리꽂고 싶군. 난데없이 무슨 짓이야? 게다가 반성의 기 미라고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잖아. 내가 속으로 열불이 나든 말든 르미엘 왕자는 씨 익 웃으면서 능청맞게 대답했다. "그게 오라버니라고 부른 마리엔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말이지. 나도 모르게 꼬옥 안아주고 싶은 것 있지. 그렇지 않습니까, 레이만 왕자님?"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르미엘 왕자는 레이만 왕자에게 화살을 돌려버렸다. 역시 방심할 수 없는 인간이다. 갑자기 질문을 받은 레이만 왕자는 마땅히 힐 말이 없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긴 저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겠어. 네, 라고 대답하면 내 눈 총을 받을 것이고 아니다, 라고 대답하면 내가 귀엽지 않다는 말이 돼버리는데. 르미 엘 왕자는 그의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는지 굳이 대답을 듣지 않고 다른 말을 했다. 그런데. "레이만 왕자님께서는 마리엔의 어디가 마음에 드셨습니까?" "네? 그게 갑자기 무슨?" 한 술 더 뜨는 르미엘 왕자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는 거야? 본인이 바로 옆에 있 는데 그렇게 대놓고 물으면 되겠어? 세상 사람이 다 당신 같은 줄 알아. 당신 혼자 사 는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라구. 봐. 레이만 왕자가 당황했잖 아. 당황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거라구. 레이만 왕자는 짖궂은 질문에 얼굴을 빨갛 게 물들였다. 도대체 저 모습 어디를 봐서 레이만 왕자가 얼음 왕자라고 불린다고 생각하겠어? 피부 가 약간 그을려서 그렇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얼굴이 붉어진 것은 확실했다. 부끄러 워 하는 건가. 정말 귀여워 죽겠네. 귀엽게 생겼다기보다는 멋있게 생긴 레이만 왕자 였지만 내 눈에는 귀엽게 보이는데 어쩌겠는가. 내가 나이도 30배 정도나 많으니 그를 귀엽게 봐도 상관없잖아? 르미엘 왕자도 레이만 왕자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상당히 흥미롭다는 눈빛이었다. 아주 사람을 가지고 노는군. 이래서 실실거리며 웃는 놈들이 싫다니까. 웃으면서 사람을 가지고 놀거든. 그는 빙글거리면서 말했다. "어? 전 레이만 전하께서 마리엔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까?" "그건......" 르미엘 왕자, 너 강적이었구나. 저렇게 정말 의외라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 누구나 그 가 장난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거야. 그러고 보니 저 점만은 오펠리우스 왕비를 닮았군. 인간치고는 연기실력이 뛰어나다는 것 말이야. 레이만 왕자는 르미엘 왕자의 질문에 난감해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가. 여기서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좋아 하지 않는다고 그렇고. 레이만 왕자는 판단력이 뛰어나고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을 잃 지 않는 인물로 유명했지만 이런 경우에는 그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내가 도와 줘야겠군. "저희는 이만 가봐야 될 것 같아요. 오라버니도 할 일이 있으신 것 같은데 저희가 계 속 방해를 하는 것 같네요. 레이만 왕자님, 이만 가죠." 나는 르미엘 왕자가 '나 안 바빠' 라던가 '전혀 방해되지 않아' 라는 소리를 하기 전에 재빨리 레이만 왕자의 팔을 끌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르미엘 왕자의 마수에서 벗어난 후 나와 레이만 왕자는 조용했다. 나는 그를 씹기에 바빴고, 레이만 왕자는 그는 그 나름대로 생각에 잠긴 듯 했다. 틀림없이 르미엘 왕자 를 씹고 있을 거야. 나도 그러고 있잖아. 르미엘 왕자 때문에 분위기 다 깨졌군. 다음 에 두고보자. 흥, 언제 여자랑 같이 있는 모습만 눈에 띄어봐라. 시간과 장소에 상관 하지 않고 가서 철저히 방해해주겠어. 그렇게 산책을 하는 사이 어느새 빨갛게 타오르던 태양이 서편 너머로 지면서 하늘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태양에서부터 번져 나온 불그스름한 빛은 하늘을 뒤 덮은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지 그 아래에 있는 세계까지 붉게 물들였다. 노을이 지기 시작하자 나와 레이만 왕자는 마리엔 공주궁으로 돌아왔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 작한데다 레이만 왕자도 내일 떠날 채비를 해야했기 때문이다. 하긴 레이만 왕자를 따 라온 수행원들이 다 준비하니 그가 따로 준비할 게 뭐가 있겠냐만 그래도 수행원들의 보고도 듣고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같이 계셔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예요. 저야말로 즐거웠는걸요." 중간에 르미엘 왕자를 만나 건 별로 즐겁지 않았지만 말이야. 그 것만 빼면 그런대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나는 궁으로 들어가려다 레이만 왕자가 계속 빤히 쳐다보자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그의 붉은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저건 완전히 예술이야. 예술. 마족 중에는 레이만 왕자보다 잘 생긴 자들도 심심치 않게 있지만 레이만 왕자의 특이한 색의 눈동자는 그 것과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저 눈 너무 예쁘다. "이제 당분간은 보지 못하겠군요. 굉장히 섭섭합니다." "저도 그래요." "그 말이 정말이라면 기쁘겠군요. 사실 공주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받아주시 겠습니까?" 뭐? 선물? 그런 건 물어볼 필요가 없지. 당연히 받아야지! 준다는데 굳이 마다할 필요 는 없잖아. 나는 그의 말에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부자든 가난하든 선물을 받는다 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 중에 하나였다. 레이만 왕자가 기대에 가득 찬 내게 내놓은 것은 반지였다. 정밀하게 세공되어 있는 반지는 중앙에 푸른빛을 은은하게 내는 진주 가 박혀있었다. 진주는 티 하나 없이 깨끗한 색을 띠고 있고, 링에는 문양들이 조각되 어 있는 심플하면서도 아름다운 반지였다. 진주가 푸른빛을 띠다니 굉장히 특이하네. 나중에 알아보니 가진 자에게 물의 정령의 수호를 비는 부적 비슷한 것으로 연금술사가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반지라니...... 어떤 곳에서는 결혼할 때 결혼반지를 준다고 들었는데 설마 그런 뜻은 아니겠지? 음, 생각해보니까 그 곳은 마법이 없는 곳이라고 들었어. 하지만 여기도 그런 게 없으란 법은 없잖아? 차원계가 한둘이 아니라 아무리 공부를 해도 헷갈린단 말이야. 만약 받 았는데 뭐 청혼한다거나 그런 뜻이면 무슨 낭패인가. 레이만 왕자가 싫은 건 아니지만 아직은 결혼하고 싶지는 않거든. 내가 잠시 반지를 보며 망설이자 레이만 왕자가 말했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마리엔 공주님께 어울릴 것 같아서 샀는데 마음에 드시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헤어지기가 아쉬워 선물을 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그 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니에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 레이만 왕자님." 내가 기뻐하자 레이만 왕자도 다행이라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는 직접 내 손가락에 반지를 끼어주었다. 반지가 마치 맞춘 것처럼 딱 들어맞아 다시 한번 고마워 할 수밖에 없었다. 난 선물을 준비 못했는데 조금 미안한걸. 에이, 지금 와서 어쩌겠 어. 대신 반지를 소중히 간직하면 되잖아. 선물은 다음에 만나면 그 때 주면 되겠지. 나는 왼손의 약지손가락에서 푸른빛을 은은하게 발하는 반지를 내려다보면서 살짝 웃 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그를 만나게 될 때까지 이 반지를 손에서 뺀 적이 없었다. 왜 냐구? 이게 얼마나 비싼지 알기나 하는 거야? 잊어비리면 어떻게 해! 레이만 왕자가 하이덴 제국으로 돌아가자 나는 다시 축제를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 다. 이제 축제 기간도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열심이었다.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을지 모르는데 있을 때 실컷 놀아둘 생각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다 니다보니 어느새 축제 기간은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동안 열심히 돌아다녔 기 때문에 후회는 없었다. 스스로도 최선을 다해 축제를 구경하고 다녔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 소문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도대체 야시장이 뭐야?! 축제 기간도 다 끝나 가는데 왜 이제야 그런 소문을 들은 거 야! 야시장은 무투 대회, 말싸움 대회와 더불어 페드인 왕국의 건국기념 축제의 명물 중 하나였다. 내가 모르는 명물이 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오늘까지 내가 들은 것은 이 세 개였다. 그런데 축제는 빠짐없이 보고 돌아다녔다고 자부하던 내가 축제의 명물 중 하나가 있는 줄도 몰랐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는 당연했다. 나는 수도로 빠져 나온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항상 저녁을 먹기 전에는 돌아갔기 때문에 한밤중에 열리는 야시장에 대해 알 수 없었 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동안 소문도 듣지 못하다니! 왜 이제야 그런 재미있는 것을 알게 된 거야?! 그나마 오늘부터 야시장이 열리는 장소에서 축제를 마감하는 의미에서 한밤중에 열리 는 불꽃 축제가 많은 사람들의 입을 오르고 내리고 있어 야시장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야시장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축제를 보냈겠지. 그런데 밤 에 열린다는 불꽃 축제가 뭐지? 주변에 불을 질러놓고 노는 건가? 그러다 불이라도 나 면 어쩌려고? 그러나 매년 축제가 끝나기 이틀 전부터 불꽃 축제라는 것이 열렸다고 하니 불이 주위로 번지지 않게 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나 는 다시 야시장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야시장은 밤 10시부터 시작해서 다음날 새벽 5시까지 열렸다. 페드인 전역의 상인들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 온 상인들도 많이 몰려오기 때문에 어마한 규모를 자랑한다고 한 다. 이 야시장에는 옷에서부터 악세사리, 무기, 장식품, 다른 나라의 특산물까지 없는 게 없다고 한다. 이처럼 물건도 다양한데다 알짜배기 물건과 불량품을 고르는데 이 야시장의 묘미가 있어서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고 한다. 물건마다 가격이 원가의 1/2에서부터 5배에 이르기까지 제멋대로였고, 원래 물건의 배 는 질이 좋은 물건에서부터 한 번 쓰면 망가지는 불량품들도 많이 있었다. 잘만 사면 적은 금액으로도 다른 곳에서는 살 수 없는 질이 좋은 물건을 구입할 수 있지만 운이 나쁘거나 상인의 상술에 걸려들면 바가지를 쓰고도 쓸만한 물건 하나 구입하지 못한다 고 한다. 그러나 불량품을 사도 불량품을 고른 사람의 운을 탓하지 다시 환불해달라거 나 다른 물건으로 바꿔달라고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완전히 확률 게임이었다. 물건 감정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보통 사람은 물건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비교하고 사야만했다. 그러고 불량품을 고르지 않고 좋은 물건을 사려고 살펴보는 이 과정이 상당히 재미있어서 해매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이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이제야 알게 된 것이 너무 안타까웠지만 지금이라도 안 게 어디인가. 반드시 가고 말리라. 나는 야시장에 가고 말겠다는 생각에 불타올랐다. 그 래서 지금 내가 이렇게 몰래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밖에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입자니 상당히 시간이 걸렸지만 무사히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문으로 나가면 당연히 문 옆에서 지키고 있는 병사들에게 들키기 때문에 살며 시 발코니 쪽으로 나갔다. 혹시라도 발소리가 들리면 안되니까 조심, 조심. 뒤꿈치를 들고 몇 발자국 가다가 행여나 소리가 새어나갔을까 동태를 살피고 다시 발코니를 향 해 전진하는 행동을 반복했다. 방이 어두컴컴했지만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 때문 에 행동하는데는 크게 지장이 없었다. 발코니로 나온 나는 유리창 너머로 방에 아무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마법을 사용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밤이라 검은색 로브를 입은 내 모습이 눈에 띌 리 없었지만 만일 의 경우를 대비해 투명화 마법을 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곳곳에 화롯불이 설치되어 있어 성벽 위는 대낮처럼 밝았다. 덕분에 불빛에 비쳐서 병 사들의 모습도 보였지만 그들은 내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왕궁 을 빠져나온 나는 발걸음도 가볍게 야시장으로 향했다. 야시장을 처음 본 감상은 '놀랍다' 였다. 상점마다 등불을 걸어놓아서 거리는 대낮처 럼 밝았다. 사람들도 낮과 다를 바 없이 넘쳐났고, 여기저기서 물건을 흥정하는 소리 가 들려왔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 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성 을 높이는 사람은 볼 수가 없었다.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자신의 운에 모든 것 을 거는 특이한 방식을 가진 야시장다운 모습이었다. 대신 열띤 토론을 하는 사람들 의 모습은 눈에 많이 띄었다. "얼마든지 구경하십시오! 한 번 보기만 해도 바로 사게 됩니다! 값도 싸고 보석상에서 사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는 고급 악세사리들이 있습니다!" "아, 이 것 좀 봐요. 물건에 흠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조금만 깎아줘요." "골라! 골라! 싸다! 싸! 거기 아가씨 한 번 보고가!" 활기찬 야시장의 모습에 덩달아 나까지 흥분이 되었다. 역시 빠져나오길 잘했어. 돈은 제대로 가져왔겠지? 돈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평생에 있을까 말까한 재미를 놓치게 된 나는 절규했겠지만 다행히 돈주머니는 허리춤에 매달려있었다. 돈주머니를 확인한 나 는 인파에 휩쓸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야시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물 건을 팔러 왔던지 사러 왔던지 그 것도 아니면 단순히 구경을 왔던지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나 생김새는 조금씩 틀려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괜히 이것저것 살펴보기도 하고, 사지도 않을 거면서 가격만 물어보고 마치 살 것처럼 굴다가 막판에 '그냥 물어봤어요' 라고 말하고 튀는 재미도 상당했다. 그렇게 야시장 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니던 내 눈에 우연히 한 노점상이 눈에 들어왔다. 무기를 파는 노점상으로 다른 노점상과 크게 다를 바 없었지만 무기를 팔고 있는 사람이 특이했다 . 아니, 사람이 아니었다. 바로 드워프였다. 축제기간동안 가끔 스쳐 지나가는 드워프 를 본 적이 몇 번 있었지만 이렇게 자세히 살펴볼 기회는 없었다. 오옷, 정말로 작네. 잘해야 내 허리정도나 오겠다. 저렇게 작으면 불편하지 않으려나? 다리가 짧아서 같은 거리를 걸어도 힘들다거나 높은 곳을 올려다볼 때면 고개를 젖혀 야만 한다거나 하지 않을까? 키는 인간의 어린 아이정도이면서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모습도 우스웠다. 꼭 수염을 붙이고 어른 흉내를 내는 꼬마를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하이덴 제국에서야 드워프들이 만든 물건들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페드인 왕국에서는 드워프들이 만든 무기를 구하기는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곳보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드워프의 반응이 남달 랐다. "에이, 무기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는 인간들은 저리 꺼지라구! 무기가 운다! 울어! 당 장 꺼져! 그렇지 않으면 머리를 박살내놓을 꺼야!" 팔려고 내놓았으면서 손님을 반기지는 못할망정 몰려드는 사람들을 향해 자기 키만한 배틀 엑스를 휘두르면서 쫓아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모여있던 사람들이 비리비리한 사 람들도 아니었다. 모두들 한 체격하는 건장한 남자들로 개중에는 뒤에 거대한 대검을 메고 있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듣던 대로 드워프의 성격은 더러웠다. 저건 위협이 아 니라 정말로 죽이려는 것 같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머리에다 대고 휘두르는 게 어디 있냐? 역시 드워프들은 잘하는 것은 광물을 잘 다루는 것밖에 없으면서 자기만 잘난 줄 알고 성격도 더럽다는 말이 사실이었군. 하지만 드워프가 만들었다는 무기에 관심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괜찮은 것이 있으면 하나 장만해보자는 생각에 사람들을 쫓아낸 뒤에 허리에 손 을 얻고 잘난 척하고 있는 드워프에게 다가갔다. 또 배틀 엑스를 휘두르면 두들겨 패 서 내가 누군지 몸으로 느끼게 해주면 되는 것이었다. 불빛을 받아 항상 들고 다니는 창이 번들거렸다. 손님에게는 친절하라는 장사의 기본도 모르는 드워프는 한참 잘난 척하는 전형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다가 내가 다가가자 거의 반사적으로 배틀 엑스를 휘둘렀다. "또 어느 놈이 머리가 박살나고 싶어서 오는.......!!!" 드워프는 말을 하다말고 말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우락부락한 남정네일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내가 가녀린 소녀였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 의 배틀 엑스가 너무도 쉽게 내 창에 의해 가로막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물론 후자 의 이유가 더 큰 이유였으리라. 드워프는 자신의 환상적인 무기를 막은 내 창을 뚫어 져라 쳐다보았다. 무기를 보는 눈만은 정확하다는 말이 맞는 말이었는지 그(?)의 얼굴 은 점점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아니! 이건 우리의 동족이 만든 거잖아! 드워프가 아니면 이토록 훌륭한 무기를 만들 수가 없지! 암, 그렇고 말고! 이 세상에 이 정도로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자가 드워프 를 제외하면 누가 있겠어!" 이 창은 선물을 받은 거라 드워프가 만들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드워프가 그 렇다니 그런 모양이었다. 그러나 꼭 자기 입으로 이런 훌륭한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사 람은 나 같은 위대한 드워프 뿐이다, 라고 말하고 싶을까? 아예 얼굴에 금칠을 하지 그러셔. 그는 배틀 엑스를 거두고 내가 들고 있는 창을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 기를 보고 저런 눈을 하다니. 이거 변태 아냐? 내가 자신을 아주 이상한 놈 보듯이 바 라보자 드워프가 큰 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니, 그 눈은 뭐냐?! 난 다만 이 무기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본 것 뿐이야! 어느 드 워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훌륭한 무기는 오랜만이군. 네가 이런 무기를 가지고 있는 걸 보면 우리 드워프와 무슨 관련이 있는 모양이군. 좋다! 내가 인심써 서 너한텐 무기를 팔도록 하지! 이 바크라인이 만든 무기를 살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 하라구! 음하하하!" 공짜로 주는 것도 아니고 돈주고 사는 건데 뭘 감사하냐. 그러나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 같은 바크라인에게 그렇게 말했다가는 구경도 하지 못하게 할 것 같아서 아무 말 도 하지 않았다. 바크라인은 계속 옆에서 자신의 무기는 아무리 써도 날이 전혀 상하 지 않는다고 시끄럽게 떠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본 무기들은 바크라인이 충분히 자랑스러워 할만한 걸들이었다. 손을 살짝 가져가 대어도 베일 정도로 날카로운 것은 물론이고 무기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무기라기보다는 차라리 하 나의 예술품에 가까웠다. 나는 바크라인이라는 이 드워프를 다시 보게 되었다. 얼굴도 못생기고, 키도 작고, 잘 난 척도 심하지만 무기 하나만은 잘 만드는군. 여전히 옆에서 시끄럽게 자화자찬하는 바크라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면서 무기들을 살펴보던 나는 옆에 따 로 놓여있는 단검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공주가 허리에 롱소드를 차고 다니거나 철 퇴를 들고 다닐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단검이라면 품에 넣으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테니 가지고 다녀도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단검은 차마 아까워서 제대로 쓰지도 못할 것 같은 다른 단검들에 비해 아무런 장식도 없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무 기에 덕지덕지 장식이 붙은 것은 별로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무기는 심플한 게 제일 이지. "바크라인, 저 단검 얼마예요? 저게 제일로 마음에 들어요." "으하하하! 이 몸이 만든 단검이니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 단검으로 말하자면, 엥? 저 단검은 안되겠는데." 바크라인이 한참 자신의 위대함과 자신이 만든 무기의 훌륭함을 늘어놓고 아주 비싸게 팔아먹을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왜 안 된다는 거야? 기껏 마음에 들었는데. 나는 마음에 든 물건을 팔지 않는다는 그의 말에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왜 안돼요? 돈 때문에 그래요? 내가 이래봬도 돈 많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 저건 이미 임자가 있어. 어제 어떤 남자에게 팔기로 했어. 그 때 는 돈이 없다고 오늘 준비해오기로 했거든. 검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사람 같아 나도 흔쾌히 받아들였지. 그거말고 이 단검은 어때? 가볍고 세공도 잘되어 있어서 여자가 쓰기에는 안성맞춤 아닌가!" "싫,어,요. 그냥 저거 나한테 팔면 안돼요? 그 사람이 내기로 한 금액의 두 배를 줄게 요." 그러나 아무리 떼를 써도 바크라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뭐 드워프 같이 훌륭한 종족은 한 번 한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킨다나 어쩐다나. 쳇, 어떤 놈이 벌써 새치기를 한 거야? 저 단검이 마음에 드는데 말이야. 나는 투덜대면서 별 수 없이 다른 단검을 뒤적였다. 어떤 놈인지 얼굴이나 한 번 봤으면 좋겠군. "아, 저기 그 단검을 사기로 한 사람이 오는군. 정 가지고 싶으면 저 사람에게 말해봐 ." 드래곤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딱 맞춰서 오는군. 나는 나보다 먼저 그 단검을 새치기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기 위해서 바크라인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향해 고개 를 돌렸다. 어지간하면 그 단검을 팔라고 해야지. 다른 단검도 많은데 돈을 많이 주 면 팔지도 몰라. 그러나 그 단검을 사기로 한 사람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은 쏙 들어갔다. 얼굴만 봐도 쫄아버릴 정도로 험상궂은 인상의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미남이었다. 내가 그 사람을 멍하니 보는 것처럼 나를 놀란 눈으로 보고 있는 사람은 나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으악! 에릭이다! =============================================================================== 지금 학교예요. 요새는 집에서 글을 쓰면 눈치가 너무 보여서 차라리 학교에서 그 날 분량을 쓰고 가 고 있습니다. 참, 어제 글 뎃글 달아주신 분들 제가 답이 너무 늦었죠. 읽기는 다 읽었는데 수업 때문에 답을 적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거 올리고 바로 써드릴게요. 참, 어제 글 마지막이 좀 마음에 들지 않아 끝에 두 문장 첨가했습니다. 한 번 봐보세요. 넘 진지하게 끝이난 것 같아서요. 참, 멜 보내주신 죽음의 사자님과 graderial님 감사합니다. 제가 답멜 보내드렸는데 받으셨나요. 항상 글을 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 등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예전에 축제를 구경하러 나온 것을 에릭과 세린에게 들킨 것보다 더 심각했다. 그 때는 최소한 낮이었지만 지금은 자정이 가까워 오는 한 밤중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 야밤에 제 1공주라는 여자가 왕궁을 빠져나와 거리를 헤 매고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에릭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예전에 한 번 써먹었던 '물 귀신 작전' 에 다시 걸릴 리가 없었다. 만약 에릭이 이 일을 국왕에게 고자질하기라도 하면 난리가 나는 것은 물론이고 다시는 수도로 나오지 못할지도 몰랐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도대체 에릭과는 무슨 악연이 있기에 또 이런 곳에서 마주친단 말이야! 며칠 전에 한 번 걸린 걸로 충분하잖아! 야시장은 축제의 명물 중 하나인 만큼 규모도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그 넓은 곳에서 어떻게 이렇게 마주칠 수가 있단 말인가. 아까 바크라인이 사람들을 쫓아버릴 때 그냥 지나쳐야만 했어. 아니, 하다 못해 저 망할 단검에 관심을 가지지 말고 그냥 아무 단검이나 사서 다른 곳으로 가야만 했어. 그러나 아무리 후회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떻게 여기에 계시는 겁니까? 마리엔 님." 에릭은 처음에는 나 못지 않게 당황하더니 곧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차라리 심하게 추궁을 했다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 것이 정상적인 반응이니까 그나마 덜 불안하지 . 어조가 너무 조용하잖아. 어조가. 마치 폭풍이 불어닥치기 전의 고요 같았다. 보통 의 사람이라면 흥분해서 길길이 날뛸 일인데도 에릭은 미심쩍다는 얼굴로 약간 인상만 찡그리고 있었다. 차라리 흥분해서 막 따져 줘. 그렇게 빤히 쳐다보기만 하면 더 불 안하잖아!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던 나는 곧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렇게 당황하고만 있는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되든 안되든 무조건 잡아떼고 보는 거야. 내가 아 니라고 우기면 자기가 어쩌겠어. 나는 에릭의 말이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 로 딱 잡아뗐다. "마리엔이라니요? 사람을 잘못 보신 모양인데요." 일명 오리발 작전.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불지 않으리. 이렇게 나가면 보통 사람들은 당황하던지 무슨 소리냐고 난리를 치겠지만 역시나 에릭은 눈을 날카롭게 빛나기만 했 다. 으, 그만 봐. 저게 계속 살 떨리게 하네. 하필이면 왜 에릭을 만난 거야? 다른 인 간이었다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텐데.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심장 이 콩닥콩닥 뛰었다. 에릭의 시선을 피하면 '나 지금 사정없이 찔리오' 라고 말하는 것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래서 나는 슬그머니 돌아가려는 눈동자에 힘을 줘서 억지 로 에릭과 눈을 맞췄다. 야! 에릭 리트 라디폰! 차라리 뭔가 말을 해라. 그렇게 쳐다 보기만 하지 말고 말이야. 아무런 말이 없는 에릭의 반응에 불안해할 때 마침내 에릭 의 입이 열렸다. "정말 아니란 말입니까?" "물론이지요.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네요. 저는 바빠서 이만 실례해야겠군요." 나는 뒤로 돌아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너무 서둘러도 이상한 눈치를 주기 때문에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는 속도로 걸었다. 그러나 나는 뒤쪽에서 들려고는 에릭 의 말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가서 확인해봐야겠군요." 저 말인즉슨 지금 왕궁으로 가서 내가 있나 없나 확인해본다는 말? 에이, 설마. 아무 렴 그럴 리가 있겠어? 아무리 그래도 이 밤중에 왕궁에 가서 진짜로 확인을 해보겠어? 말이 안되잖아. 하지만 내 확신에 약간, 정말 아주 약간 믿음이 가지 않았던 나는 슬 며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내 눈에는 어느새왕궁 쪽으로 걸어가고 있 는 에릭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를 겁주려고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긴 했지만 그의 뒷모습에서는 왠지 정말로 왕궁으로 가서 확인해볼 것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무서운 놈. 독한 놈. 인간이 그렇게 사는 거 아냐! 가끔은 다른 사람의 입장도 생각 을 해보고 살란 말이야. 하필이면 저런 독종에게 걸릴 게 뭐야! 나는 잽싸게 에릭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왜 앞을 막냐는 듯한 시선을 보는 에릭 을 보면서 치를 떨었다. 역시 만만한 놈이 아니야. 라디폰 공작과는 또 다른 의미로 우습게 볼 인간이 아니었다. "이런 데서 만나다니 정말 놀랍네요, 에릭. 아, 저 단검을 사려고 했나보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제가 사드릴게요." 놀랍다 못해 기절하고 싶지. 나는 에릭이 사려고 했다던 단검을 집어들고 바크라인에 게 집히는 대로 돈을 던져주었다. 그리고 에릭의 팔을 잡고 끌고 가기 시작했다. 얼마 를 던져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뒤에서 바크라인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서 내가 얼 마나 많은 돈을 날렸는지를 알 수 있었다. "어이, 돈이 너무 많아! 그 단검은 1골드라구! 4골드마 주면 어떻게 해?!" "그냥 가져요!" 바크라인이 불러 세웠지만 대충 대꾸하고 계속 에릭을 끌고 갔다. 돈이 아까웠지만 뭘 어떻게 하겠는가. 그저 돈은 날려도 에릭을 잘 설득할 수만 있다면 대만족이었다. 사 람이 북적대는 곳을 피해 뒷골목으로 간 나는 그 때서야 에릭의 팔을 놓았다. 지금부 터가 문제였다. 과연 에릭을 어떻게 구슬려야 한단 말인가. 일단 칭찬을 해볼까? "자요, 여기 단검 받아요. 이 단검을 에릭이 고른 건가 보죠? 무기를 고르는 안목이 대단하네요. 검술 실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군요." 나는 억지로 에릭의 손에 단검을 쥐어주고는 지을 수 있는 미소 중 가장 호감을 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 돌리지 마십시오." 역시 안 통한다. 좀 봐주면 어디가 덧나나? 나는 살살 구슬리는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 는 것을 깨닫고 그를 쏘아보았다.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실망스럽군. 제 4기사단 중 누군가와 만났다면 구슬릴 것도 없이 같이 돌아다니며 놀았을 것이고, 세린도 어떻게 말로 구슬려보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말로 구슬리는 것이 통하지 않는다면 정공법으로 나가기로 했다. "이제 어떻게 할거죠?"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군요. 도대체 여기는 어떻게 오신 겁니까?" 조금은 의외였다. 왕궁으로 가주셔야겠습니다, 라고 나올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럼 아직 희망이 있다는 말이잖아. 어쩌면 그가 눈감아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절로 얼굴 이 펴졌다. 나는 에릭의 질문에 성심 성의껏 대답했다. 혹시 아는가. 이렇게라도 예쁘 게 보이면 그냥 넘어가 줄지. "에, 그게 전에 나왔을 때 야시장에 대해 들었는데 꼭 와보고 싶었거든. 그래서 한 번 와보려고 했는데 내 입장 알잖아. 그동안 계속 왕궁에만 있다가 이제 곧 축제가 끝난 다기에 한 번 나와봤어. 야시장은 오늘이 처음이란 말이야. 야시장이 뭔지 꼭 한 번 보고 싶었단 말이야." 내 말투는 금새 예전에 축제에서 만났을 때 칭얼대던 말투로 바뀌었다. 그러고 보니 그 때도 반높임을 하다가 중간부터는 반말로 나갔는데도 에릭과 세린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나도 이 쪽이 더 편했기 때문에 친구에게 말하는 것처럼 계속 반말로 말하기 시작했다. 상황을 설명한 나는 살짝 에릭의 표정을 살폈다. 에릭은 나를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고민한다. 고민해. 나는 에릭이 계속 고민하자 조르기 시작했다. "에릭, 나 야시장을 꼭 구경하고 싶어.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구경하다 조용히 돌아갈게. 이번 한번만 더 눈감아줘. 그럼 내가 그 은혜 절대 잊지 않을게. 응? 부탁 할게. 부탁해. 이번만. 제~발~." 에릭을 설득하기 위한 애교 전법과 연설 전법은 한참동안 이어졌다. 다른 건 뭐 없을 까? 협박을 해볼까? 아니다. 이건 역효과가 날지도 몰라. 그럼 뭐가 좋을까? 잠시 이 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중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물론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평민들의 삶을 돌아보는 것은 왕족의 의무라는 연설은 계속되고 있었다. 야시장과 페드인 왕국 의 경제의 연관관계를 설명하고 내가 야시장을 구경하는 행위가 왕국의 경제에 얼마나 좋은 효과를 가져오는지 논리적으로 말해서 에릭을 설득하는 거야. 이번에는 모두 야 시장과 페드인 왕국의 경제의 연관관계를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에릭이 내 말을 가로 막았다. "그만하십시오. 마리엔 님께서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습니다. 결론은 야시장을 구경 하고 싶다는 것 아닙니까?"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에 에릭은 매우 드물게 한숨을 내쉬 며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두 가지 결론 중 하나가 나올 줄 알았던 것이다. 앞으로 30분 동안 더 설득해서 에릭이 나의 끈질김을 이기지 못하고 마지못해 눈감아주던지 아니면 당장에 왕궁으로 끌고 갈 줄 알았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반문했다. "뭐? 정말?" "제가 돌아가라고 해서 들으실 실 분이면 애초에 왕궁을 빠져 나오지도 않으셨겠죠." 무슨 말을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라. 조금 기분이 나쁘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여기서 반박했다가 그럼 당장 궁으로 돌아가시죠, 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야시장을 계 속 구경할 수 있기는 했지만 왠지 찜찜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나는 야시장을 계속 구경해도 된 것이다. "그럼 나는 계속 구경하다 갈 테니까 에릭은 공작가로 돌아가던지 할 일 해."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야시장 쪽으로 걸었다. 그런데. 응? 저 것이 왜 따라오지? 길이 같은 방향인가 싶어 다른 방향으로 틀어 걸어보았다. 또 따라오네. 어디 다시 한번. 다시 방향을 틀어 보았다. 따라오네. 어디 이번엔. 이 번엔 뛰어보았다. 역시 따라왔다. "자꾸 왜 따라오는 거야?" "마리엔 님 혼자서 돌아다니게 할 순 없습니다." 에릭의 말에 나는 반대했다. 에릭과 함게 행동하면 여러 가지로 불편할 것 같았기 때 문이다. "나도 내 앞가림 정도는 해. 혼자 다닐 수 있어." "그게 싫으시면 궁으로 돌아가시던지요." 여러 말도 필요없었다. 그 한마디로 에릭과의 동행은 결정되었다. "아저씨, 이 인형 50쿠퍼에 줘요."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해야겠어요? 1실버 짜리 인형을 50쿠퍼에 달라니 그게 말이 돼 요? 이 인형은 1실버도 싼 거라니까요. 인형 재질을 봐요. 이건 최고급 원단인 벨베티 로 만들어진 인형이란 말입니다.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인형이 아니라니까 그러시네." 현재 나와 틴그라는 이름의 아저씨는 빗자루를 타고 있는 마녀 인형을 사이에 두고 혈 전을 벌이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스피린 대륙과 아드린 대륙에서 통용되는 화폐에 대 해 알아보자면 1쿠퍼는 가장 작은 단위의, 구리로 만든 동전으로 날개를 활짝 펼치고 포효하는 드래곤의 모습이 양각되어 있었다. 1실버는 100쿠퍼의 가치가 있는 금액으로 수염을 길게 기르고 로브를 입고 있는 대마법사의 모습이 양각되어 있는 은화로 주조 된 동전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단위의 돈은 금화로 1000실버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 황홀한 노란빛을 발하는 금화에는 주신인 제르마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인간 들이 제르마의 실제 모습을 보고 조각했는지는 미지수였다. 아무튼 1실버나 되는 인형 을 절반 가격으로 깎으려 하자 틴그 아저씨는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처음 이 인형을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다. 매부리코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마녀 가 아니라 검은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고깔 모자를 쓰고 있는 귀여운 마녀 인형이었다 . 들고 가려면 두 손으로 안아야 할 정도로 크기가 커서 더욱 눈에 띄었다. 틴그 아저 씨의 말대로 감촉도 보드럽고 재봉도 꼼꼼하게 되어 있어 1실버 값은 충분히 하고 있 었다. 이렇게 큰 인형을 일일이 꿰매려면 얼마나 힘이 들겠어. 그런 의미에서 가격이 1실버라는 게 이해가 가. 그러나 이 야시장의 묘미가 무엇인가? 물건 고르는 재미와 가격을 흥정하는 재미였다. 나는 한사코 가격을 깎으려 했고 주인인 틴그 아저씨는 어떻게든 그런 나를 저지하려 고 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비단 내 경우만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다른 상점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옆에 서있는 에릭은 내가 이런 일에 상당히 능숙 해 보이자 놀라움 반, 신기함 반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가격을 깎아본 적은 없지만 이 런 류의 말씨름은 자신있지. "인형이 1실버나 된다구요? 1실버는 100쿠퍼예요. 100쿠퍼면 얼마나 많은 걸 할 수 있 는지 아세요? 헤라 아줌마네 꼬치를 무려 20개나 먹을 수 있고, 피톤 씨네 주스를 마 시면 25잔이나 마실 수 있어요. 그리고 제가 입은 로브를 3개나 사고도 10쿠퍼가 남는 단 말이에요." 그러나 동부 자치도시에서 왔다는 틴그 아저씨도 만만치 않았다. 자치도시는 나라와 나라간의 중개무역을 통해 이득을 보는 전형적인 상업 국가였다. 그 중에서도 동쪽 자 치도시는 페드인 왕국와 토르를 잇는 중간 지점에 있는 도시들이 모여 만들어진 곳이 었다. 이 곳은 대국인 두 나라의 교역을 도와주면서 중간에서 짭짤한 이득을 얻고 있 는 자치지구로, 그만큼 상인들의 상술도 뛰어났다. "귀여운 아가씨, 저 인형은 벨베티로 만들어졌지요. 벨베티 한 단이 5실버 정도라는 건 알고 있겠죠? 한 단이면 10m 정도의 길이고, 저 인형을 만드는데 무려 2m의 벨베티 가 필요했단 말입니다. 그럼 그 가격이 1실버죠. 그리고 저 큰 인형을 만드는데 들어 가는 인건비가 1실버 이상이 든다구요. 그럼 총 2실버라는 가격이 나온 답니다. 1실버 면 반값입니다." 역시 야시장에서 이득을 남기려면 이 정도 말발은 돼야겠지. 그렇다고 나만 하겠냐만. 나는 말싸움 대회에서 잭을 이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러나 틴그 아저씨는 점차 말발에서 밀리면서도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할 수 없지. 마지막 수단을 사용하 는 수밖에. 나는 마녀 인형을 들고 살펴보는 척하면서 살짝 몸을 돌려 내 손과 인형을 가렸다. 그리고 마녀가 입고 있는 치맛자락을 찌익 찢었다. 이정도 찢어진 것은 시녀 들에게 맡기면 금방 새 것처럼 고쳐주기 때문에 나의 행동에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 다. 주변이 워낙 시끄러워서 천이 찢기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러나 에릭은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하는 행동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 다. 쉬잇, 조용히 해. 아껴야 잘 살지. 나는 집게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가 조용히 하 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그 인형을 틴그 아저씨에게 내보이며 말했다. "아저씨, 여기 봐요. 여기 찢어졌어요. 아니, 거기 말고 내가 가리키는 데요. 이렇게 찢어진 인형을 1실버에 팔 거예요? 50쿠퍼에 줘요." "아니! 이게 언제 찢어진 거지?" "사람들이 몰려들어 구경할 때 찢어졌나보죠. 아무튼, 이렇게 흠집이 간 제품을 그대 로 판다는 건 말도 안돼요. 아마 아무도 안 사려고 할 걸요. 내가 50쿠퍼 하고도 5쿠 퍼를 더 드릴 테니 그냥 파세요." 에릭이 내가 찢어놓고도 뻔뻔하게 가격을 내려 부르자 황당한 눈으로 보았다. 한 푼이 라도 아껴야 잘 산다니까 그러네. 그리고 5쿠퍼나 더 준다고 했잖아. 결국 틴그 아저 씨는 인형이 찢어진 원인은 알아내지 못한 채 나의 끊임없는 설득에 넘어와 마녀 인형 을 55쿠퍼에 팔았다. 역시 사람은 머리가 좋아야 된다니까. 후후후. 나는 마녀 인형을 두 손으로 안고 방실거렸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에릭은 틴그 아저씨의 노점상에서 멀어지자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신 겁니까?" "뭐가?" "1실버라면 충분히 지불하실 수 있었을 텐데요. 그런데 굳이 그렇게 가격을 깎으실 필 요가 있으셨습니까?" 나는 에릭을 돌아보았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하긴 한 나라의 공주에 게 1실버는 정말 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난 보통의 공주가 아니잖아. 나는 에릭을 보면서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잖아." 순간 에릭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오, 에릭의 포커페이스가 무너지다니. 놀라워. 에릭 은 자신의 표정이 허물어졌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약간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겨우 그 것 때문이었습니까?" "에? 겨우라니? 재미가 없으면 세상 사는 맛이 안나잖아. 아! 에릭은 뭐 가지고 싶은 거 없어? 내가 옆에서 가격을 팍팍 깎아줄게. 말만 해." 내 말에 에릭은 표정이 허물어진 것도 모자라 이마에 한 손을 짚고 상당히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 = 오늘 너무 늦었죠? 죄송합니다. 오늘 친구들이랑 시내에 나갔다 와서 올리다보니 늦었습니다. 내일은 늦지 않도록 주의할게요. 그런데 저녁에 올리니 여러가지로 불편한 것 같네요. 차라리 아침 일찍 올릴까 생각중이에요.한 아침 7시 반에서 8시정도요. 여러분들은 밤이 좋으세요? 아니면 아치이 좋으신가요? 의견을 남겨주시면 여러분이 좋다는 쪽으로 바꾸겠습니다. 야시장을 구경하던 나는 어느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느 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두 어디를 가는 거지?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나보다는 계속 아 렌테에서 살았을 에릭이 이 상황을 더 자세히 알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그에게 물었다 . "에릭, 사람들이 모두 한 곳으로 가는데 무슨 일인지 알아? " "불꽃 축제를 보러 가는 사람들일 겁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불꽃 축제가 뭐야?" "중앙 광장에서 불꽃놀이를 터트리는 행사입니다." 그러니까 그 불꽃을 어떻게 퍼트리며 사람들이 어떻게 노는 거냐고? 부연 설명이 거의 없는 에릭의 설명은 궁금증을 부추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래서 불꽃을 어떻게 터트리며 노는 건데?" "그냥 터트립니다." "...그럼 어떻게 행사에 참여하는 건데?" "그냥 불꽃을 보고 놉니다." 내가 말을 말자. 말을 말어. 그는 내 질문에 아주 간단하게 답했고, 당연히 그 대답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웠다. 에릭에게 물어보느니 차라리 직접 보는 게 낫겠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직접 보는 것이 낫다는 말도 있잖아. 나는 사람들을 따라 가기 시 작했다. 내가 그들을 따라가자 에릭은 군말없이 내 뒤를 따라왔다. 사람들이 워낙 많아 자칫하면 일행을 잃어버릴지도 몰랐지만 난 일행을 잃어버려도 상 관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 거리낌없이 걸었다. 그저 사람들 틈바구니를 헤집고 다니는 나를 놓치지 않고 잘만 따라오는 에릭이 신기할 뿐이었다. 저 녀석 대귀족이잖아. 그 런데 왜 이렇게 능숙한 거야? 귀족이 지나가면 대부분의 평민들은 한 쪽으로 길을 비 켜서기 마련이었다. 뭐 간이 붓다 못해 배 밖으로 튀어나왔거나 자살하기 전에 귀족에 게 한 번 개기고 싶었던 사람이라면 길 한복판에서 버티고 서있겠지만 그 수는 어디까 지나 소수이니 그냥 넘어가기로 하겠다. 사람들이 길을 알아서 터 주는데 언제 귀족이 사람들 틈바구니를 헤집고 다녀본 적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에릭은 별 어려움없이 따 라오고 있었다. 물론 뒤에 바로 따라붙어 내가 애쓰고 터놓은 길을 이용하는 것뿐이었 지만 그래도 이 정도라도 어디인가.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기만 하면 금새 길이 만들어 지는데도 그냥 따라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결국 죽어라고 고생한 것은 나였다. 이 가녀리고 연약한 몸으로 사람들 틈을 파고 다 니는 일이 그렇게 쉬운 줄 아는가. 이런 일은 남자가 해야하는 거 아냐? 북적대는 사 람들에게 이리저리 밀린 나는 뒤에서 편하게 따라오는 에릭을 보고 골이 났다. 기사도 정신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어! 양심이 있는 남자라면 그럴 순 없 는 거야. "에릭! 이제 에릭이 길을 터!" 만약 딴소리를 하면 한바탕 쏟아 부으리라 마음먹었지만 에릭은 아무 말없이 앞장섰다 . 그런데 나는 그렇게 힘들여서 길을 뚫었는데 왜 저 녀석은 저렇게 쉽게 가는 거야? 쳇, 요리저리 잘도 빠져나가네. 어? 야! 너 혼자만 가면 어떻게 해? 에릭은 내가 뒤에 서 따라오는 것도 확인하지 않고 혼자서 앞장서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에릭이 만들어 놓은 공간이 사라지기 전에 잽싸게 뛰어야만 했다. 나아쁜 놈, 여자를 챙겨야지! 너만 가면 다냐! 내가 누누이 말했지. 우선 인간이 되란 말이야. 나는 끊임없이 투덜거리 면서도 에릭의 뒤를 잘만 따라갔다. 그렇게 사람들을 헤집고 다니는 사이 나와 에릭은 중앙 광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으 휴, 무슨 놈의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거람. 중앙광장에는 이미 광장에 모여있던 사람 들과 우리와는 다른 방향에서 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나마 중앙 광장이 넓어 충분한 공간이 있어서 그렇게 북적거리는 느낌은 없었다. 중앙광장은 아 름답게 꾸며져 있고 쉴 곳도 많아 평소에도 연인들의 산책장소로 각광을 받아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평소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처음에 중앙 광장을 봤을 때는 광장이 쓸데없이 왜 이렇게 큰가, 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광장이 커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광장이 조금만 좁았어도 사람들에게 눌려 압사했을 거야. 그런데 여기서 불꽃을 터트리고 논단 말이지. 도대체 불꽃놀이가 뭐지? 불로 만든 꽃? 그런 것도 있었나? 그런 진귀한 꽃이 있으면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아니면 불로 꽃 모양을 만들어서 불을 피우고 노는 건가? 그럼 터트린다는 말은 또 뭐지? 폭탄의 일종 인가? 머리 속으로 사람들이 불꽃이라는 진귀한 꽃을 밟아서 터트리는 모습과 폭탄을 던지고 노는 모습을 떠올려보았지만 어느 쪽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인간은 과격 한 면도 있구나. 그럼 나도 그렇게 놀아야 하나? 그런 위험한 짓은 별로 하고 싶지 않 은데. 잠시 걱정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이 들렸다. 피이잉~! 사람들은 일제히 하늘을 쳐다보았고, 나도 사람들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밤하늘에 자신의 자취를 남기기라도 하는 양 하얀 꼬리를 길게 남기며 하늘로 치솟고 있는 정체 불명의 작은 불덩이가 보였다. 에? 저게 뭐야? 무슨 불같은데. 혹시 정말 폭탄이었나? 그런 내 생각은 다음 순간에 확실해졌다. 밤하늘의 검은 색과는 너무도 대비되는 하 얀 색의 꼬리를 남기며 하늘로 올라가던 작은 불덩이는 한계점까지 올라가자 더 이상 오르지 못하고 퍼어엉, 폭발음을 내며 사방으로 터졌다. 하나의 불덩이는 여러 파편으 로 나뉘어 밤하늘의 곳곳으로 퍼졌다. 폭발이 일어나면 표면이 산산이 부서져 치명적 인 피해를 주는 폭탄의 원리와 같았다. 이건 어디로 보나 폭탄이야! 그런데 왜 피하지 않고 있는 거야? 죽으려고 환장했나? 어서 피해야 한다니까! 사람들은 파편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재빨리 피해야함에도 불 구하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사방으로 퍼진 파편이 연쇄폭발을 일 으킬 듯이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빛을 품어내고 있었다. 이건 보통 폭탄이 아니라 마 법으로 누군가 조종하고 있는 건가 봐. 그럼 그냥 폭탄보다 훨씬 위험한데. 나는 이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판단하고 재빨리 옆에 있던 에릭의 손을 잡 고 뛰기 시작했다. 에릭이 끌려오면서 뭐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수 도 한복판에서 마법을 쓰다니. 어지간히도 자신이 있는 놈인가 보군. 하늘을 가득히 메운 불의 파편들이 언제 떨어질지 모르니까 되도록 여기서 멀리 가야돼. 그러나 에릭 은 이 상황의 위험성을 파악하지 못했는지 우선 나를 멈춰 세우려 했다. 지금 그럴 때 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억지로 에릭을 끌고 달렸다. 내가 위험을 감지하고 사람들과 떨어진 곳까지 뛰어오는데는 5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 러나 여전히 위험 지대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재빨리 빠져나가려던 중 허공에서 빛이 번쩍였다. 순간적으로 주변이 대낮처럼 밝아졌고, 사람들이 그 것을 보고 일제히 소리 를 질렀다. 이제야 위험을 감지한 모양이다. 벌써 터진 거야? 할 수 없지. 나는 근처 에 있던 나무 밑으로 재빨리 뛰어들었다. 적어도 이렇게 하면 위에서 떨어지는 폭탄의 파편을 직격으로 맞지는 않겠지. 폭발은 마법으로 막는 수밖에. 나는 긴장한 채 어서 폭발이 일어나길 기다렸다. 그런데. 왜 폭발이 안 일어나지? 이상하다. 지금쯤이면 터질 때가 됐는데.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달리 지면으로 떨어지는 파편들은 없었다. 살짝 하늘을 올려다보니 폭탄은 어디로 사 라졌는지 보이지 않고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빛들만이 검은 밤하늘을 빛내고 있었다. 검은 밤하늘을 수놓으면서 사방으로 퍼지는 아름다운 빛들의 물결에 나는 할 말을 잊 고 멍하니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밤하늘은 항상 입고 있던 검은 색의 옷을 벗어 던지 고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빛들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렇게 아렌테의 하늘을 가득 수놓던 무지개빛의 빛들은 마지막 힘을 다하는 것처럼 한순간 찬란하게 빛을 뿜어내더 니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검은 밤하늘에는 마치 환상처럼 방금 전의 모습의 여운이 남아있었다. 이미 빛이 사라져버린 밤하늘을 보면서 아름다운 오색으로 물들었 던 하늘의 모습을 떠올리던 나는 에릭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갑자기 왜 자신을 끌고 뛰었는지를 묻는 것이다. "아! 그런데 폭탄이 어디로 갔지? 혹시 알고 있어, 에릭?" "폭탄?" "그래. 아까 작은 불덩이가 하늘로 올라갔다가 갑자기 터졌잖아. 그 폭탄은 어디 갔지 ? 게다가 방금 전에 그건 뭐지?" 내 말을 들은 에릭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그도 폭탄이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 이었다. 나밖에 몰랐었나 보군. 역시 난 대단하단 말이야. 넌 내가 아니었으면 죽을 뻔했어. 감사하게 생각해. 뭐 중간에 폭탄이 어디로 사라져버렸지만 그게 터졌으면 어 쩔 뻔했어. 에릭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를 참으로 애 매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왜 에릭이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건 폭탄이 아니라 불꽃놀이였습니다. 마법사가 마법으로 만든 것을 하늘로 쏘아 올 리면 방금처럼 터지면서 여러 가지 색으로 하늘을 물들이죠. 그 모습이 마치 아름다운 꽃 같다고 해서 불꽃놀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방금처럼 그냥 터지는 것도 있지만 새 나 드래곤의 모양과 같이 모양을 만들면서 터지는 것도 있습니다. 마법사들이 많은 토 르의 불꽃놀이는 훨씬 아름답고 굉장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방금 그게 불꽃놀이였단 말이지. 하늘로 쏘아 올렸던 것도 폭탄이 아니고 불 꽃놀이고 말이야......그럴 수도 있는 거지! 난 인간계에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란 말 이야. 불꽃놀이에 대해 설명해놓은 문헌도 없었어.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러나 자기 합리화를 시켜도 쪽팔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으, 창피해. 나는 그 것도 모르고 괜히 설쳤잖아. 솜사탕을 보고 한 말과 거의 맞먹는 발언이었다. 그래도 이번 엔 웃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말이다. 나는 창피한 마음에 소리쳤다. "나, 나도 알아! 그냥 한 번 해본 말이었어!"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망할 놈. =============================================================================== 어제는 신입생과 대면식이 있다고 해서 여러모로 바빴습니다. 그래서 어제는 글을 못 올렸어요. 죄송해요. 날마다 한 편씩 올리기로 했었는데... 이제부터는 빠지지않고 올리도록 할게요. 그리고 앞으로 글 올리는 시간 7-8시 사이로 바꿨어요. 아침이 좋으시다는 분들이 많으셔서요. 대개 7시 30즘에 올릴 예정이예요. 아침에는 다들 바쁘니 시간까지 적어서 올려요.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아쉽게도 건국기념 축제는 막을 내렸다. 축제 구경은 내가 인간계에 와서 한 일 중 가장 재미있는 일이었다. 뭐 약간 즐겁지 못한 일이 몇 번 일어났지만 제법 즐거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즐겼다고 생각해도 축제가 끝나버리 지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아쉬운 마음도 마음이었지만 축제가 끝나버리자 할 일이 없어졌다. 당분간은 궁전 무도회도 없고, 글로리 라이언도 끝나 제 4기사단을 특훈시킬 필요도 없었다. 지 금은 자기들끼리도 잘하고 있으니 내가 나설 필요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오늘 도 수도로 놀러나갔다가는 덜미를 잡힐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이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캐롤의 감시가 심해져 당분간은 수도 시찰은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오늘은 또 뭘 하지? 책이나 읽어볼까? 그러나 곧 고개를 내저었다. 책이라면 시험 때 문에 질리도록 본 적이 있었고, 지금은 읽고 싶지 않았다. 한참동안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지만 마땅히 할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인간 세상에 와서 이렇게 할 일이 없어 고민하는 경우는 처음일 것이다. 처음에는 공주가 지녀야 할 덕목을 배우느라 바 빴고, 다음은 제 4기사단을 훈련시키느라 바빴다. 그 후에는 궁전 무도회를 착석하느 라, 바로 며칠 전까지는 축제를 구경하느라 바빴던 것이다. 결국 도통 할 일이 생각나 지 않은 나는 방에서 할 일도 없이 가만히 앉아있느니 차라리 산책이나 하자는 생각에 정원으로 나왔다. 정원은 정원사들이 정성껏 돌보고 있어서 그런지 잘 가꾸어져 있었다. 여름에 봤을 때 는 한창 신록이 우거져 파릇파릇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느낌이었는데 가을에 보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계절마다 한창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는 꽃들도 달랐다. 여름에는 붉은 장미가 탐스럽게 피어 궁 전체에 향기로운 내가 진동을 했는데 지금은 하얀 테리 락이 피어있었다. 테리락은 일곱 장의 하얀 꽃잎의 가장자리에 연한 보랏빛이 도는 꽃 으로 주로 9월에서부터 11월에 피는 꽃이었다. 장미처럼 매력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지는 못했지만 깨끗하고 청조한 느낌의 꽃이라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꽃이었다. 향기도 오랫동안 맡으면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진한 장미와는 달리 약하지만 은은한 향이 나고 있었다. 테리락은 하나의 꽃만 있으면 향기가 너무 약해 향기가 나 지 않지만 여러 개의 테리락이 함께 있으면 장미에 뒤지지 않는 좋은 향기가 났다. 테리락은 한창 절정에 달해 꽃잎을 활짝 펼쳐 보이며 자신의 자태를 자랑했다. 장미가 유혹적인 여성의 이미지라며 테리락은 하얀 치마를 입고 수줍게 웃고 있는 소녀의 이 미지와 같았다. 테리락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정원에 심어져있는 나무들도 형형색색 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하얀 테리락과 울긋불긋하게 단풍이 든 나무들, 그 나무 위에 앉아서 노래를 부르는 작은 새들. 정원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이런 정경에 정신이 팔려 산책하던 나는 어느새 궁과 상당히 떨어진 곳까지 오게 되었다. 산책 나오길 잘했어. 이런 모습의 정원을 보지 못했다면 후회했을 거야. 눈처럼 새하얀 잎에 연보라빛을 띠고 있어 신비로워 보이는 테리락도 그렇고, 형형색색으로 단장한 나무들도 그렇고, 파란색의 나뭇잎도 그렇고 정말 멋있......파란 나뭇잎? 파란색의 나뭇잎도 있었나? 나는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 하고 파란색의 잎을 보았던 지점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살펴보니 그 것은 파란 잎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지 않고 한 번 쓰윽 보기만 해 서 착각을 한 것이다. 그렇다고 아주 잘못 본 것은 아니었다. 나무 위에서 파란색이 보이는 것은 여전했다. 세린, 너 거기서 뭐하니? 예전에 세린을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올라가 있던 나무 위에 기대어 앉아있는 세린의 모습이 보였다. 세린의 파란 머리카 락을 얼핏 보고 나뭇잎으로 착각한 것이다. 세린은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올려다보니 세린은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편해 보이던지 나무 위에서 자는 게 의외 로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러고도 떨어지지 않는 게 용하군. 저런 것도 기술이지. 그런데 세린은 왜 남의 정원 에서 저러고 있는 거야? 내 허락도 받지 않고 남의 나무에 오르다니 괘씸하군. 내 정 원에 있으므로 저 나무는 당연히 내 것이었다. 잠을 자려면 다른 곳도 많잖아. 잘 곳 이 없으면 허락도 받지 않고 내(?) 나무 위에서 자는 게 이해가 간다만 그런 것도 아 니잖아. 처음 만났을 때도 나무 위에 있었지, 아마? 높은 곳을 좋아하는 건가? 이상한 녀석이야. 이번에도 연습을 하던 도중에 온 것인지 허리춤에는 검을 차고 있었다. 저 모습을 보 면 에릭이 또 뭐라고 하겠군. 하지만 저런 곳이라면 운이 아주 나쁜지 않는 한 들키지 않겠어. 나야 나무의 단풍을 구경한다고 나무들을 보고 있었으니 알아낸 것이지만 보 통은 그냥 스쳐지나갈 것 같았다. 그나저나 정말 편하게 자네. 저렇게 무방비 상태로 자고 있는 세린을 보아 넘길 내가 아니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돌멩이를 발견하고 그 것을 주어 들었다. 세린에게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으므로 맞 아도 다치지않고 아플 정도의 세기로 돌멩이를 던졌다. 돌멩이는 완만한 포물선을 그 리며 허공을 날았다. 그러나 돌멩이의 비행은 세린이라는 장애물을 만나 그 짧은 비행 을 마감해야 했다. "아야!" 세린은 돌멩이를 머리에 맞고 짧은 신음성을 냈다. 오옷! 정확했어! 돌멩이는 조금도 빗나가지 않고 세린의 머리에 맞았다. 나는 두 손을 불끈 쥐고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좋았어! 그러나 좋아하는 것은 나 혼자일뿐 난데없이 돌에 머리를 맞은 세린은 인상 을 찡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마도 자신의 머리를 가격한 돌멩이의 출처를 찾는 것이리라. 아직 잠이 덜 깬 건지 나무 아래는 보지 않고 자기 눈높이만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사람이 보일 턱이 없었다. 현재 세린이 있는 곳은 적어도 건물 3층 높이는 되 는 곳인데 그런 곳에 사람이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마법사가 플라이 마법으로 허공 에 떠있지 않는 한은 말이다. 저렇게 힘들여 찾는데 도와줘야겠지. "세린, 여기야! 여기!" 나는 손을 흔들면서 세린을 불렀고, 세린은 그제서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당 연한 말이지만 내가 돌멩이를 던졌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를 발견한 그는 나무 위 에서 훌쩍 뛰어내려 내 앞에 섰다. 에릭과 대련하고 있을 때도 느낀 거지만 몸놀림이 정말 가볍단 말이야. "혹시 마리엔 공주님이 돌멩이를 던지신 겁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분명히 내 짓일 것이라고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하긴 이 근처에 있 는 사람이라고는 나뿐이니 당연한 건가. 나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의심스러워하는 세린 을 보았다. "돌멩이?" "네. 돌,멩,이, 말입니다." 내가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이자 세린은 돌멩이라는 말에 힘을 줘서 말했다. 한 손을 턱에 가져가 대고 아주 신중하게 생각하는 태도를 보이자 세린은 이보다 더 가증스러 울 수는 없다는 시선을 보냈다. 잠시동안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그 때서야 생각이 났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그 돌멩이. 그런데 그게 뭐 어떻다는 거죠?" 세린은 돌멩이라는 말까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말을 할 듯 하더니 그 후 이어진 말에 어이가 없어 입만 벌리고 있었다. 그동안 겪어본 바 세린도 제법 뻔뻔한 축에 들 었지만-그렇지 않고서야 남의 정원에 무단침입해서 잘 수 있으며, 예전에 에릭이 훈련 을 빼먹은 것에 대해 화날 때 그렇게 느긋할 수 있었겠는가- 얼굴에 철판을 깐 나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세린, 넌 죽어라고 팬 다음에 '어머, 몸이 아픈 모양이구나. 너무 무리하면 안 돼' 라고 말해줄 수 있니? 못하겠지. 나도 이거 하는데 꽤 많은 시 간이 걸렸지. 하늘 위에 하늘이 있는 법이란다. 잠시 후, 세린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여전히 고수한 채 말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거리낌도 없이 그런 말을 하실 수 있는 겁니까?" "하지만 세린을 깨우려면 어쩔 수 없었어요. 세린이 있던 곳은 너무 높아 손이 닿지 않거든요." 내가 세린이 자고 있던 곳을 가리키며 곤란한 표정으로 말하자 세린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따졌다. "절 깨우시려면 그냥 큰 소리로 부르셔도 됐을 텐데요. 굳이 돌을 던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짜식, 그러게 누가 남의 정원에 무단침입 하래? 아니, 무단침입한 건 상관이 없는데 왜 하필이면 내가 심심해서 몸둘 바를 모를 때 턱하니 자고 있는 모습을 보인 거니? 나는 한 손으로 다른 손을 내리치면서 정녕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제스처 를 취했다. 그와 더불어 앞으로는 되,도,록, 그 방법을 쓰도록 고려해보겠다는 말도 해주었다. 세린, 왜 어이가 없다못해 기가 막힌다는 그런 표정으로 나를 보는 거야? "그런데 세린은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죠?" 정말 궁금하다. 하고 자기 편한 곳 놔두고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나무 위에서 잔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리고 오랫동안 나무 위에 앉아있으면 엉덩이도 아프잖아. 닿는 표 면적이 좁으면 좁을수록 힘이 분산되지 않고 좁은 면적에 집중되기 마련이다. 폭이 좁 은 가지 위에 앉아있으면 평지에 않을 때보다 엉덩이에 받는 충격이 커서 더 아플 것 은 당연했다. 그런데도 그런 곳에서 자고 있던 이유가 궁금했다. 그리고 내 질문에 세 린은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다. "여기가 편해서 말입니다." 여기? 나는 세린이 자고 있던 키 큰 고목 나무를 가리켰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 람마다 취향이 다른 거니 나무 위가 편하다고 말했다고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엘프라면 또 몰라도 사람이 나무 위가 편하다라?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시군요." 나는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고, 세린은 피식 웃더니 자신이 이 나무를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시작했다. "저 나무는 저래 보여도 200년은 넘게 산 나무죠. 나무 위에 있으면 이 나무가 200년 동안 봐온 왕성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서 자주 찾곤 합니다. 그리고 아래에서 보면 위태로워 보여도 막상 위로 올라가보면 공간이 꽤나 넓습니다. 높은 곳이라 사 람들 눈에 띌 염려도 없고 여러 가지로 편한 장소입니다. 저만의 비밀 장소입니다. 마 리엔 공주님께 들키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자주 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바로 걸려 버렸군요." 하긴 다른 건 몰라도 저기에 있으면 사람들 눈은 피할 수 있겠지. 진짜 마리엔은 여기 까지 오지 않았던 것 같으니 누구 눈치볼 필요도 없고 말이야. 그럼 내가 마리엔이 돼 서 피해를 본 모양이네? 이 기회에 인심 한번 써봐? 하긴 내가 날마다 정원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나무도 많이 있는데 저 나무 하나 정도는 세린이 마음대로 쓰게 해도 상 관없겠지. "세린, 저 나무는 내 정원에 있는 나무니까 내 나무란 것은 알고 있겠죠? 하지만 어차 피 관상용밖에 되지 않으니 세린에게 저 나무를 주죠. 오고 싶으면 마음대로 와요. 물 론 다른 사람들 눈에 걸리면 세린의 책임이지만요." 세린은 자유롭게 와도 된다는 말에 매우 기뻐했다. 그렇게 에릭의 눈이 무서웠단 말인 가. 하긴 표정 없는 얼굴로 째려보면 좀 무섭긴 하겠군. 세린이 앞에 한 말을 전혀 듣 지 않은 나였다. 마침 할 일이 없었던 나는 세린을 붙잡고 늘어졌고, 세린도 훈련하지 않고 잠이나 자러 온 신세라 기꺼이 응했다. 세린은 자신의 옆에서 재잘거리는 마리엔 공주를 보고 있자니 그녀를 이 곳에서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세린은 어느 때와 다름없이 항상 즐겨찾던 나무를 다시 찾았다. 마리엔 공주의 정원에 있는 나무였지만 마리엔 공주는 각종 무도회에 참석느라 바빠서 이런 곳까지 올 리 없었고, 가끔 사람들이 지나칠 때도 있었지만 높은 곳에 있는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여기에는 세린이 미리 사람들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조심하는 점도 작용했다. 그 날도 나무 위에 걸터앉아 푸르디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곳에서 이렇게 한가롭게 하늘을 보고 있으면 절로 마음이 편해졌다. 바람을 타고 실려오는 오래된 나 무 냄새와 풋풋한 나뭇잎 향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그 때 타박거리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발걸음 이 가벼운 것이 아무래도 여자인 모양이었다. 발걸음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마침내 나무 아래까지 당도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그냥 지나가리라고 생각하던 세린은 털썩 , 누군가 땅바닥에 주저앉는 소리에 약간 긴장했다. 들킨 건가? 하지만 그 것도 이상 했다. 만약 자신을 봤다면 굳이 땅에 앉을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무슨 일인가 싶어 궁금해하는 그의 귀에 짜증이 섞인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이, 여긴 어디야? 다리 아파 죽겠네. 배도 고파. 이럴 줄 알았으면 도시락이나 싸 올걸." 짜증이 가득 섞이긴 했지만 맑고 깨끗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름다운 목소리와는 달 리 말하고 있는 내용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새로 온 시녀가 길이라도 잃은 건가? 궁 금증이 생긴 세린은 슬며시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땅바닥에 주저앉아있는 검은 머리의 아름다운 소녀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대로 그녀는 시녀가 아 니라 훨씬 고귀한 신분의 소녀였다. 세린은 현재 땅바닥에 주저앉아 신세한탄을 하고 있는 소녀가 이 정원의 주인인 마리 엔 공주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예전에 무도회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몇 번 본 적이 있 는데다 전왕비인 이리아 왕비와 쏙 빼닮아서 금새 알 수 있었다. 마리엔 공주는 자신 이 나무 위에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대로 땅에 주저앉아 있었다. 왕족이, 그 것도 외모에 관심이 지대하기로 소문난 마리엔 공주가 땅에 주저앉아 있는 모습은 매우 신기했다. 그러나 그녀가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끄적이는 글을 보는 순간 세린은 방금 전에 느꼈던 감정을 훨씬 뛰어넘는 놀라움을 느꼈다. <<배가 고프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저기다 저렇게 적고 있겠는가. 왠지 모를 집념까지 느껴졌다. 아까 분명히 여긴 어디야?, 라고 말했지? 그럼 설마 길을 잃어버렸다는 소리야? 세상 에! 자기 궁에 딸린 정원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공주도 있단 말이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세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황급히 입을 틀어막아 큰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마리엔 공주는 자신의 웃음소리를 들었는지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땅에 주저앉아 두 리번거리고 있는 그녀가 귀엽게 보였다. 전에 봤을 때는 오만하고 버릇이 없는 공주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배가 고프다고 칭 얼대고 있는 마리엔 공주는 귀엽기 그지없었다. 마리엔 공주가 저런 성격이었나? 역시 사람은 몇 번만 봐서는 모르겠군.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악의 찬 소문을 들을 만한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세린은 소문이란 믿을 것이 못된다는 생각을 하며 계속 마리엔 공주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리엔 공주는 계속 두리번거리다 도저히 소리의 진원지를 찾지 못하겠는지 포기하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배가 고프니까 이제 헛것이 들리네. 하아, 이러다 여기서 굶어죽는 건 아니겠지. 다 른 건 몰라도 굶어죽는 건 정말 싫은데." 정말 진지하게 굶어 죽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마리엔 공주를 보자 세린은 자신도 모르 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아이고, 배야. 큭큭큭!!!" 이렇게 웃으면서도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많이 이 나무를 오르고 내린 경험 때문이었다. 한동안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던 세린은 강렬한 시선을 느끼고 시 선의 근원지인 마리엔 공주를 보았다. 마리엔 공주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도 별로인데 이젠 미친 X까지 걸리네' 잠시 자신을 그런 시선으로 보던 마리엔 공주는 마지막으로 참으로 불쌍한 인생이군, 이라는 시선을 남기고 자리를 툭툭 떨고 일어나 다른 곳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녀의 모습에서는 미친 x는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그녀의 생각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었다. 순식간에 미친 사람이 되어버린 세린은 자신도 모르게 마리엔 공주를 불렀다. "잠깐만! 이봐 잠깐만! 마리엔 공주! 잠시 멈춰봐!" 그러나 마리엔 공주는 그의 말을 깨끗이 무시했다. 미친 x와는 얽히고 싶어하지 않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렇다면. "마리엔 공주님, 그 쪽은 궁으로 가는 방향이 아닌데요." 자신의 생각대로 마리엔 공주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믿기지 않았지만 정말 길을 잃 어버린 모양이었다. 독을 마시고 얼마 전에 깨어났다던데 그 일 때문인가? 하지만 확 실한 것은 알 수 없었다. 대신 세린은 마리엔 공주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하는 행 동이 왠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흥미를 끌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세린은 나무 위에 서 훌쩍 뛰어내려 그녀 앞에 섰다. 마리엔 공주는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노골적으 로 관찰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세린은 그동안 자신의 외모 덕에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받아봤지만 이렇게 대놓고 구경하는 사람은 또 처음이었다. "이런. 혹시 저의 멋진 모습에 반하신 겁니까?" 장난기가 발동한 그의 말에 마리엔 공주의 아름다운 얼굴은 일그러졌다. 네가 제 정신 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그렇게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이면 상 처받는데 말이야. 전혀 상처받지 않은 그였다. "이상한 소리하지 말아요. 그보다 당신 누군데 여기 있는 거죠?" "제 이름은 세린스입니다, 마리엔 공주님. 그냥 세린이라고 불러주세요." 세린은 은근히 말을 돌렸지만 마리엔 공주의 얼굴로 봐서 자신의 질문을 무시한 것이 마땅치 않은 모양이었다. 세린은 그녀가 뭐라고 하기 전에 재빨리 먼저 말했다. 이 곳 에 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조금은 곤란해질 거란 말이야. 공주궁에 허락도 없이 숨어든 것도 문제고, 무엇보다 에릭 녀석 은근히 눈치주는 게 상당하단 말이야. "그런데 이런 곳에 혼자 돌아다니시다 또 암살 기도라도 있으면 어쩌시려구 그러십니 까?" 마리엔 공주는 그 말이 나오자마자 세린을 노려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길들여지지 않은 고양이 같았다. 마리엔 공주의 눈은 점점 의심의 빛을 띠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위아래로 자신을 평해보더니 슬금슬금 뒷걸음질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내 가 암살자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생각해보니 자신이 조금, 아니 매우 많이 의심 스러워 보이긴 했다. 난데없이 나무 위에서 뛰어내린 정체불명의 괴한인데다 암살 기 도 어쩌고 하는 소리를 했으니 의심하지 않는게 더 이상했다. 세린은 의심스러운 눈길 을 보내는 마리엔을 향해 황급히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전 암살자가 아닙니다. 게다가 오펠리우스 왕비전하와 만난 적은.......있지만 아무 튼, 아닙니다. 만약 제가 암살자였다면 공주님께 말을 거는 대신 그 사이에 처리했겠 지요." 마리엔 공주의 독살 미수사건에는 오펠리우스 왕비가 버티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마리 엔 공주와 왕비의 사이가 나쁘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오펠리우스 왕비는 마리엔과 친해져보려고 노력하지만 마리엔 공주는 그녀를 굉장히 싫어했다. 왕족과 공작가의 피가 섞인 그녀가 보기에는 몰락귀족인 남작가 출신인 그녀가 천해 보였던 것이다. 그런 점이 아니고도 그녀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당연히 마 리엔 공주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은 나빴고, 항상 마리엔 공주에게 모욕적인 말을 들으 면서도 미소를 잊지 않고 그녀를 따뜻하게 대하려는 오펠리우스 왕비에 대한 평판은 좋았다. 그러나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보다 마리엔 공주를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그녀임 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페드인 왕국은 남녀가 평등한 것은 아니지만 공주가 여왕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보면 국왕이 자신의 자식 중 가장 사랑하는 마리엔 공주가 라이 언 왕자와 르미엘 왕자의 걸림돌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세린은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공주도, 검은 속내를 숨기고 가면을 쓰고 있는 왕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로 지금까지는 말이다. "그게 무슨 소리지요! 그 말은 마치 왕비전하께서 날 노리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당신 이런 말을 했다간 당장 사형이란 것도 몰라요!" 마리엔 공주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오펠리우스 왕비 이야기만 나오면 치를 떨던 그녀가 왕비를 옹호하는 말을 하다니. 이거 놀라운데. 직접 이야기 해보니 소문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잖아. 세린은 태연한 척 말을 했지만 소문과는 전혀 다른 마리엔 공주의 모습에 내심 당황했다. "공주님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그럴 확률은 적지만 라이언 왕자님과 르미엘 왕자님이 태자가 되기 위해서는 마리엔 공주님이 가장 걸림돌이 될 수도 있으 니까요. 왕비님과 공주님의 사이가 나쁘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게다가 마리 엔 공주님께서는 데미나 공주님을 별로 마음에 들어하시지 않는 걸로 아는데요." "그건 억지예요. 만약 그렇다면 아리란드 전하도 용의자 선상에 올라가는데요" "그건 다르지요. 야심 많고 대범한 왕비 전하에 비해 아리란드 전하는 마음이 여리신 편입니다. 그리고 플로라 공주님과는 데미나 공주님보,다,는, 사이가 좋기 때문에 아 리란드 전하가 그런 강경책을 쓸 이유가 없죠." 마리엔 공주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지만 눈빛으로 보아 그녀도 오펠리우스 왕 비가 사건의 배후임을 직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세린은 그녀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으 면서 절로 위축이 드는 자신을 느꼈다. 마리엔 공주의 눈빛은 그가 본 누구보다도 강 한 힘과 범접하지 못할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 눈앞에서 마치 속내를 모두 꿰뚫 어보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소녀와 예전의 마리엔 공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 다. 세린은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마치 맹수 앞에 맨 몸으로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 다. 그는 긴장을 떨구고자 평소보다 많은 말을 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마리엔 공주 에 대한 호기심은 계속 생겨났다. "세린! 뭐하는 거예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아무리 불러도 말이 없어......요." 반말이 나가려 하자 재빨리 뒤에 '-요'자를 붙였다. 이크, 조심하자, 조심. 에릭에게 도 반말을 자주 했는데 괜찮을지 모르겠군. 앞으로는 조심해야겠다. 내가 좀 더 이미 지 관리에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세린이 씨익 웃었다. "괜찮습니다. 그냥 편하신 대로 말씀하십시오. 이미 볼 건 다 보지 않았습니까?" 축제 때 말싸움 대회에서 이긴 것을 말하는 모양이군. 하긴 이미 에릭이나 세린은 나 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지. 본인이 그렇게 하라면 그렇게 해야지 뭐. 나는 마치 기다 렸다는 듯이 바로 말했다. "그럴까? 그런데 세린, 아까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네. 길을 잃고 헤매는 소녀를 처음 만났을 때를 잠깐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뭐? 길을 잃어? 제대로 다닐 것이지 어디다 정신을 팔고 다니기에 길을 잃고 다니는 거지? 근데 왜 이렇게 기분이 찜찜하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상황인데 말이야. 어디 서였지? 잠시 후, 세린이 말한 상황에 있던 인물이 나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그를 한껏 째려보 았다. 그러는 넌 첫 인상이 어땠는 줄 알아? 축제에서 만나기 전까지는 여자로 알았다 구! 여자 말이야! 그렇게 헷갈리게 생겼으면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펑퍼짐한 옷은 입 지 말아야 할 것 아니야. ============================================================================ 평소에는 한글 97로 한회분량이 3장은 넘었는데 이건 딱 맞춰져서 좀 양이 적군요. 죄송해여... 생각해보니 요즘 이야기를 너무 길게 끄는 것 같아서요. 갈수록 이상해지는 기분이네요. 여러분은 괜찮다고 생각하세요? 아음, 그래도 연참 약속은 지켰네요. 토요일이면 원래 늘어져라 자지만 글때문에 발딱 일어났어요. 세린의 이야기는 외전으로 넣을깨 했는데 본문으로 나와버렸습니다. 재미있으셨으면 좋겠고, 좋은 주말 되세요. 그런데 그림을 올리려면 어떻게 하죠? 제가 거의 컴맹에 가까워요.^^ 죽음의 사신님이 천사 금렵구 그림을 축전으로 보내주셔서 올리려는데 어떻게 올리는 지 모르겠어~요~!!! 컴퓨터 잘하시는 분 좀 가르쳐주세요~ #16-라디폰 공작 도서관에 빽빽이 들어차 있는 마법서들을 훑어보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찾는 책은 한 권도 없잖아. 전부 다 '마나의 이론', '마법의 체계', '흑마법의 폐해' 와 같은 이론이 쓰여져 있는 책이거나 찾고 있는 마법이 아닌 공격 마법이다 회복계 마법이 쓰여져 있는 책이었다. 글로리 라이언에서 음성증폭 마법을 보고 관심이 생겨 서 음성 증폭 마법과 같이 생활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마법들을 익혀보려고 큰 마음먹고 도서관까지 왔건만 어째서 그런 책들은 눈에 띄지 않는 거야? 한시간 넘게 뒤져서 내가 얻은 것이라고는 음성 증폭 마법과 시간이 되면 노래가 울리는 알람노래 마법의 주문뿐이었다. 음성 증폭 마법과 알람노래 마법을 빼면 그런 류의 마법은 없는 건가? 결국 포기하고 책장에서 물러나서 아쉬운 눈으로 책들을 대충 훑어보던 나는 우연히 책장 맨 아래쪽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절대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곳에서 회 색 표지의 책을 하나 발견했다. 처음 보는 책이네. 제목도 안 적어져 있잖아. 저 책만 확인하고 저 것도 아니면 그냥 돌아가야지. 별 기대도 하지 않고 그 회색의 책을 책장에서 빼내고 내가 처음으로 한 말은 이렇다. "으윽! 먼지! 먼지!" 책을 잡은 손이 모양 그대로 책에 찍혔다. 책에서 손을 떼고 손바닥을 보니 먼지가 잔 뜩 묻어서 까맣게 변해버린 상태였다. 워낙 먼지가 많이 쌓여서 표지가 회색인 줄 알 았는데 먼지가 조금 떨어지고 나니 검은 표지가 드러났다. 그러나 내가 손을 잡은 부 분만 검은색의 표지가 약간 모습을 드러냈을 뿐 다른 부분은 여전히 회색 표지라고 해 도 믿을 정도로 먼지가 수북히 쌓여있었다. 그 책은 몇 번을 먼지를 손으로 털고 입으 로 불고 해서야 겨우 본래의 색을 되찾을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책이기에 이렇게 먼 지가 많은 거야? 마법사들은 지적 호기심이 굉장해서 마법서라면 일단 읽어보는 습성 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손길이 자주 닿은 흔적이 있는 다른 책들과는 달리 그대로 방치된 지 꽤나 오래돼 보이는 책이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어졌다. 오랜만에 자유를 찾아 떠돌아다니는 게 기쁘다는 듯 허공을 배회하는 먼지를 손으로 날려버리면서 표지를 넘겨보니 첫 장에 휘갈겨진 글씨체로 "생활 마법 개설"이라고 쓰 여져 있었다. 오! 드디어 찾았다! 그렇게 구석에 있었으니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지. 제목을 봄과 동시에 밀려오는 기쁨과 함께 왜 이 책을 보는 사람이 없었는지 알 수 있었다. 마법사들은 지금보다 위력적인 마법을 사용하길 원하고, 빨리 한 단계 높은 서클로 올 라가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 욕망은 너무도 강해 때로는 스스로 리치 가 되어 삶을 연장해서 계속 마법을 연구하던지, 마족과 계약을 맺어 강한 힘과 방대 한 지식을 얻으려 한다. 우리 종족과 계약을 맺은 사람은 마법적 지식에 대한 열망이 너무 강렬해서 빛을 등지고 어둠을 택한 마법사가 대부분이고, 어떤 인물에 대한 복수 심에 타올라 계약을 맺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우리와 계약한 자들이 죽은 후에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꽃 속에서 억겁의 세월동안 고통을 받는 건 아니다. 마족이 인간들의 붉은 피를 마시고 그들이 외치는 비명소리에 즐거워한다는 헛소문의 출처는 틀림없이 자기들만 잘난 줄 아는 신들과 천사들일 것이다. 뭐 그런 취향을 가 진 자가 없다고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일부가 그렇다고 전체가 모두 그러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렇게 따지면 인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보다 약한 인간을 짓밟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는 인간들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 적어 도 마족은 서로 죽이고 죽는 싸움이 많이 일어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두 마족의 승인 하에 이루어진 전투이며, 승자는 패자를 자신의 아래도 두던지 상대가 그 제안 을 거절할 시 죽인다. 하지만 적어도 죽이려면 단숨에 죽이지 조금씩 괴롭히면서 죽이 지는 않는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계약을 모두 이행한 뒤 계약자를 괴롭힌다는 말은 잘 못 알려진 사실이었다. 이왕 영혼을 얻었으면 유용하게 써야지 쓸데없이 괴롭히면 뭐 가 생긴단 말인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런 취향을 가진 자가 없는 것은 아니고, 마 족들은 자신에게 피해가 오지 않는 한 서로의 일에 간섭하지 않기 때문에 개인적인 취 향을 가지고 뭐라고 하지도 않지만 모든 마족들이 사디스트는 아니다. 하지만 내가 나 서서 이런 사실을 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무튼, 세상에 알려지길 잔혹하고 냉정하고 끔찍한 존재인 마족과 계약을 해서라고 힘과 지식을 얻고자 하는 마법사들이 자기들이 보기에는 별 대단하지도 않은 잡일에 마법을 쓰는 생활마법에 관심을 가질 턱이 없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수련을 더해 다 음 서클로 넘어가려고 하겠지. 솔직히 생활 마법을 익히느니 공격 마법이나 회복계 마 법을 익히는 쪽이 소득도 많았다. 예를 들어 스스로 움직여 청소를 하게 하는 걸레를 만들었다고 치자. 그 걸레의 가격은 1실버가 넘기 힘들 것이다. 아무리 마법이 걸려있 어도 걸레는 걸레일 수밖에 없고, 1실버라는 돈을 들여 효과가 어떤지도 모르는 걸레 를 사느니 가정부를 한 명 고용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렇다고 너무 가격을 낮게 책 정하면 마나를 모두 탕진해가며 걸레를 만든 수고비로 나오지 않는다. 이에 반해 공격 마법이나 회복계 마법을 익혔다면 마법사로 대성하지 못해도 용병이 돼서 몬스터를 처리하거나 부상자를 치료하는 일을 하면 짭짤한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실정인 데 누가 '생활 마법 개설'이란 책을 볼 시간이 읽겠는가. 어지간한 괴짜이거나 이미 다른 쪽으로는 통달해서 할 일이 없는 대마도사급 정도 되지 않는 한 그 시간에 공격 마법이나 회복 마법을 하나라도 더 익히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난 이런 책을 원했다. 공격 마법은 굳이 더 배워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지금은 다 쓸 수 없는 상황이지만 마법은 이미 알고 있다-회복계 마법은 체질에 맞지 않는다. 공격 마법 4개 익히는 것보다 회복계열 마법 하나 익히는 게 더 힘이 들었다 면 믿겠는가? 참고로 공격 마법은 모두 7서클이었고, 치유 주문은 5서클 마법이었다. 각 계열 마법은 마법사와의 상성이란 것이 있어 사람에 따라 어떤 마법은 빨리 익히는 반면에 어떤 마법은 다른 마법보다 배우는 속도가 느렸다. 공격계는 딱히 흑마법, 수 계열, 뇌계열처럼 계열을 가지리 않지만 회복계는 익히는데 많은 시간을 소요해야만 했다. 개인적으로도 회복계 마법보다는 공격 마법을 좋아한다. 더 멋있잖아. 결국 힐 링, 리커버리, 큐어, 안티 포이즌, 에니그마(Enigma) 이 다섯 가지만 익히고 그만둬버 렸다. 이 정도만 알고 있어도 사는데 지장없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실험해보지 않아서 장담하지 못하겠지만. 이런 상황이니 공격마법도 회복마법도 딱히 흥미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관심을 돌린 것은 생활하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에 도움이 되는 생활 마법이었다. 고생한 보람이 있었는지 결국에는 생활 마법에 관련된 마법서를 구할 수 있었다. 어떤 괴짜 마법사가 지은 건지는 모르겠지만-첫 장에 '생활 마법 개설' 이라고만 달랑 적어져 있 었다- 고맙게 보도록 하지. 책을 들고 궁으로 돌아온 나는 책장을 넘겨보았다. 색이 노랗게 바랜 종이가 드러나면 서 퀴퀴한 냄새가 나긴 했지만 생각보다는 보존 상태가 좋았다. 특별히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생각은 없고 개인적으로 정리한 책인지 글씨가 휘갈겨져있고, 여기저기 썼던 글 위에 줄을 긋고 다시 썼지만 보는데 큰 지장은 없었다. 나는 색다른 마법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천천히 책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 고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갈 때마다 내 입에서는 절로 감탄성이 새어나왔다. "오오~!" "이런 마법이 있었단 말이야?" "종이, 종이. 이건 적어놔야겠어." 이 책을 쓴 사람은 천재가 틀림없어. 이런 마법들을 생각해내다니 존경스럽다. 하나하 나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내용들이었다. 음성증폭마법은 물론 물건을 공중으로 부양 시켜 편하게 운반할 수 있는 마법에서부터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움직이는 구두까지 수많은 마법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마법은 '춤추는 펜' 이 었다. 이 마법은 펜에 마법을 걸면 시전자의 생각을 자기가 알아서 써내려 가도록 하 는 마법으로, 펜이 혼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춤을 추는 것 같다고 해서 그런 마법명을 붙였다고 저자는 적었다. 이 얼마나 편리한 마법인가. 이 마법만 있으 면 팔 빠지게 글을 쓰지 않아도 되겠어. 문관이나 기타 글 쓰는 사람들에게 크게 환영 받을 만한 마법이야. 신기해 보이는데 한 번 해볼까? 이 특이한 마법에 흥분해있던 나 는 밑에 조그맣게 써진 글을 읽지 못했다. <<주의! 이 마법은 아직 불완전하므로 사용할 때 조심하자! 벌써 10번이나 실험했는데 9번이나 실패했어. 무슨 다른 방법이 없을까?>> 지은 당사자가 성공확률이 10%였는데 나라고 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를 전혀 모르 는 나는 책상 위에 종이와 펜을 하나 올려놓고 책에 적인대로 주문을 외웠다. "그대는 생명이 없는 존재,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존재. 그러나 한번쯤은 자유를 느 껴봄이 어떠하겠느냐? 이제 얽매던 속박의 굴레는 사라지고 텅 빈 육체에 생명이 가득 하리니 나의 의지와 함께 움직이길 바라노라. 춤추는 펜!" 주문이 틀리지 않도록 한자 한자 주의해서 읽은 다음 긴장한 눈으로 펜을 보았다. 정 말 움직일까? 펜이 정말로 혼자서 움직일 수 있을까? 침을 꼴깍 삼키고 초조하게 펜을 지켜보던 내 눈에 정말 놀라운 모습이 들어왔다. 페, 펜이 움직였다! 새의 깃털로 만 들어진 펜은 마치 막 깨어나 기지개를 펴는 것처럼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나는 곧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지. 머릿속으로 쓸 말을 생각해야 한다고 했지? 무슨 말을 적어볼까? 나는 머릿속으로 '나는 천재다' 라는 말 을 떠올렸고, 부르르 떨리던 펜은 서서히 똑바로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얀 종 이 위를 왔다 갔다 하며 종횡무진하기 시작했다. 저절로 그려지는 검은 색의 글씨를 보며 신기해하던 나는 갑자기 펜이 움직임을 멈추자 의아해졌다. 펜은 막 '재'가를 쓰 고 있던 참이었다. 이게 잘 나가다가 갑자기 왜 이래? 계속 '나는 천재다' 라는 말을 떠올리고 있었는데. 나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이 가만히 서있는 펜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펜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주문을 틀리게 외웠나? 아니면 마법 자체가 불완전한 마법이었나? 결국 포기하고 주문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려 던 내 눈에 갑자기 펜이 다시 심하게 떨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처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격렬해서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혹시 펜이 미쳐버렸나? 음. 생각해보니 그건 아니다. 생명을 불어넣은 것도 아닌데 미칠 리가 없잖아. 마법이 어디서 잘못됐 나? 다음 순간 그런 내 생각이 맞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펜은 날뛰기 시작했다. 좌우상하로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순식간에 하얀 종이 위에 까만 줄들이 여러 개 생겨났다. 펜이 폭주했다! 아앗! 책상은 안돼! 이제 종이 위를 벗어나 책상 위를 휘젓고 다니는 펜을 향해 재빨리 손을 뻗었다. 펜을 회수하긴 했지만 손안에서 계속 움직이는 것이 영 기분이 찜찜했다. 나는 더 이상 펜이 날뛰지 못하도록 펜을 쥔 손에 힘을 줬고, 펜 은 콰직하고 부러지면서 움직임을 멈췄다. 다행이 책상에는 큰 피해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주문을 잘못 외웠던가? 다시 한번 주문을 읽어보던 나는 그 페 이지 맨 아래쪽에 작게 써져있는 주의사항을 보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편리한 마법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 생각났다. 펜의 폭주 때문에 실용화에 실패했군 . 하지만 조금만 다듬으면 될 것도 같은데. 나는 부러진 펜과 까맣게 변해버린 종이를 버리고 주문을 고치기 시작했다. "에...여기는 마나 배열이 어긋났으니까 마나를 재배열할 수 있도록 '속박의 굴레는 사라지고' 보다는 '속박의 굴레를 끊고' 라고 고치고......펜에 작은 마법진을 그려넣 는 것이 성공확률이 높아질 것 같은데......음, 여기도 틀렸네." 열심히 책에다 줄을 긋고 끄적이고 있을 때였다. "공주마마, 라디폰 공작께서 드셨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해." 일단 들어오라고 하긴 했지만 공작이 나를 찾아올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라디폰 공작 이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온 거지? 찾아올 이유가 없는데. 내가 라디폰 공작이 갑작스레 나를 방문한 원인을 열심히 유추하는 사이 그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가 들어오자 하 던 생각을 멈추고 그를 맞이했다. 생각 같아서는 별로 보고 싶지 않았지만 무시해버리 기엔 너무 배경이 좋은 인물이었다. *힐링(Healing): 회복계 마법 중 가장 기본적인 마법으로 시전자에 따라 효력은 천차만별이다. 외상만 치유가 가능하다. *리커버리(Recovery): 힐링의 강화판 *안티 포이즌(Anti-poison): 독을 해독하는 마법이지만 아주 강렬한 독일시에는 효과 가 별로 없다. 안티 포이즌보다는 더 강한 위력의 Antidotal이 많이 사용되어진다. *큐어(Cure): 모든 상태이상을 회복하지만 역시 시전자의 능력에 따라 효과는 달라 진다. 참고로 마리엔(유나)의 큐어는 수면제를 먹고 졸린 상태를 정신 이 들게 하는 정도다. *에니그마(Enigma): 회복계 마법 중 가장 익히기 난해한 마법이고, 사용하기도 가장 난해한 마법이다. 더 이상 회복계 마법을 익히기 싫었던 마리엔(유 나)가 죽자살자 매달려 겨우 익힌 마법으로, 어떤 회복 효과가 나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때로는 거의 죽어가는 사람도 완전히 치유 할 수 있는가하면, 때로는 긁힌 상처도 낫게 하지 못한다. ============================================================================ 올리는 것이 조금 늦었죠? 죄송해요. 늦잠 잤어요 ^^; 알람을 맞춰놓긴 했는데 일어나보니 어느새 꺼져있던 상태였습니다. 무심결에 꺼버린 건가? ^^ 기다리셨다면 죄송해요. 앞으로는 시간 엄수하도록 할게요! 일요일 즐겁게 보내세요. "라디폰 공작, 어서 오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마리엔 공주님?" "항상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신 거죠?" 나는 궁금한 얼굴로 라디폰 공작에게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 야. 문안을 올 정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무슨 생각으로 온 거지? "무슨 일이 있소 온 것은 아닙니다. 그저 마리엔 공주님께 문안인사를 여쭐 겸 들렀습 니다." 문안? 댁이 단지 내가 잘 지내는가를 보러 왔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그걸 나보고 지 금 믿으라고? 절대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친하다고 문안 인사를 한 다고 왔단 말인가. 뭔가 속셈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의 속셈이 심히 의심스러웠다. "단순히 문안인사를 하러 바쁘신 공작께서 들리셨단 말인가요? 믿어지지 않는데요." "이런! 저의 충정을 몰라주시는군요." 방금 라디폰 공작이 충정이라고 했어?...에라이, 이 뻔뻔한 인간아. 충정같은 소리하 고 있네. 댁이 내 기사라도 돼? 무슨 놈의 충정을 따지는 거야? 단지 그가 시험을 보 게 했다고 그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저렇게 속내를 알기 힘든 사람은 확실한 자 기 편이 아닌 한 경계하는 것이 좋다. 머리도 뛰어난데나 부와 권력도 페드인 왕국에 서 1,2위를 다툰다면 적으로 만나면 상당히 골치 아파지는 것이다. 미리 조심해서 나 쁠 건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온 것이겠죠? 말하세요." 괜히 말 돌리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바로 하라는 소리였다. "우선 마리엔 공주님의 기사들이 글로리 라이언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것을 축하드 립니다. 정말 놀랐습니다. 아마 다른 기사들에게 신선한 자극제가 됐을 겁니다." 공작의 말에 나는 수긍했다. 당연하지. 누가 가르친 건데. 내 부하라면 그정도는 돼야 지. 하지만 라디폰 공작이 그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축하인사를 건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글로리 라이언이 끝나고 충분한 시간이 있었고, 서신으로 보내도 충분한 내용이었다. 내 생각대로 그게 끝은 아니었는지 라디폰 공작은 계속 말 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1년 만에 그정도로 실력이 향상될 수 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아무리 훈련에 매진했다해도 다른 기사들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을텐데 단번 에 그들을 이길만한 실력을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죠. 그런데도 제 4기사단의 기사들 은 그 일을 해냈습니다. 그래서 저는 누군가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 하고 있습니다. 미첼로 경의 '플라워 드러'가 그 증거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알 기로 그런 검술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제 4기사단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까요. 과 연 그 사람이 누굴지 정말 궁금하군요. 혹시 마리엔 공주님은 그가 누군지 아십니까?" 라디폰 공작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예리하다. 다른 사람들은 제 4기사단의 일취월 장한 실력에만 놀라고 있는데 그런 곳까지 생각했단 말이야? 너무 실력이 뛰어났던 것 이 화근이 될 줄이야. 아슬아슬하게 이겼어야 했나? 그러나 지금은 제 4기사단의 너무 뛰어난 실력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그저 이럴 때는 모르는 척 하는 게 제일이지. 나는 딱 잡아뗐다. "글쎄요. 모르겠군요." "그러시군요. 저는 마리엔 공주님이라면 아실 줄 알았습니다. 참, 얼마 전에 이런 소 문을 들었습니다." 이 인간이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러는 거야? 심히 불안하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지-알고 있을 것 같다-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알베르 경과 공주님을 모시는 미나라는 시녀가 대련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미나 라는 소녀가 완승을 거두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또 이런 소문도 들었습니 다. 그날 알베르 경이 이상할 정도로 실수를 많이 했다는 소문을 말이지요. 저희 가문 의 마법사말로는 정말 운이 나쁜 날이었던지 아니면 누군가 뒤에서 마법으로 방해한 것 같다고 하더군요." 빌어먹을! 지금 당신 시비거는 거지? 그 마법사라는 놈은 또 누구야? 왜 쓸데없는 말 을 하고 난리야! 그러나 증거가 없었다. 증거가 없는데 자기가 뭘 어쩌겠어. 이럴 때 당황하면 그야말로 도둑이 제 말 저리는 격이 된다. 나는 아주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요? 그럼 알베르 경은 정말 운이 없었던 모양이군요." "그렇군요. 그런데 책을 읽고 계시던 중이었나 보군요. 실례가 아니라면 무슨 책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는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마법서를 보고 말했다. 여타의 마법서들은 허약한 마법사 들이 무기 대용으로 사용해도 될 만큼 어마어마한 두께와 무게를 자랑했지만, 이 책은 그렇게 두껍지도 않았고 표지에는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아 내용을 보지 않는 한 마 법서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제목이 겉에 적어져있지 않아 다행이야. 나는 책상에서 일어서면서 은근슬쩍 책을 덮으며 말했다. "소설책이에요. 공작이 관심을 가질만한 책은 아니랍니다." 라디폰 공작은 내 말에 수긍을 하는 눈치였다. 나는 공작이 빨리 가길 바랬지만 그가 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아 별수 없이 소파로 자리를 권했다. 자리를 권하면서도 '바 쁘지 않나요? 할 일이 참 많을텐데 저와 이야기할 시간은 없지 않을까요?' 라고 말하 면 눈치를 줬지만 그의 대답은 이랬다. "괜찮습니다. 저희 가문의 마법사에게 모두 맡겨두고 왔습니다." 자랑이다, 이 인간아. 나는 맞은편에 앉은 라디폰 공작을 주시했다. 뭔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 틀림 없어. 무슨 일일까? 역모를 꾀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암살을 계획 중일까 ? 그 것도 아니면 세계 정복이라도 꿈꾸고 있나? 평소에 라디폰 공작을 어떻게 보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내가 속으로 라디폰 공작이 무슨 짓을 하려고 저러나 생각 중일 때 공작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 없었다. 우리 사이에는 잠시 정적이 흘 렀고, 그 정적을 먼저 깬 사람은 라디폰 공작이었다. "축제 구경은 즐거우셨습니까?" 이게 무슨 소리야? 축제 구경? 설마...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불길한 예감은 맞아 떨어졌다. "에릭에게 마리엔 공주님께서 축제를 구경하러 나오셨던 일을 모두 들었습니다. 글로 리 라이언이 열리기 전에 거리에서 보았다고 하더군요. 말싸움 대회 일은 조금 의외였 지만 말입니다." 모든 상황은 확실해졌다. 에릭이 축제에서 날 만난 일을 공작에게 발설한 것이다. 야 시장 건은 말하지 않은 것 같지만 축제에 놀러갔다는 것을 들켰다는 사실은 같았다. 크악! 에릭 리트 라디폰! 내가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니가 그랬단 말이지? 협 박과 부탁의 차이를 혼동하고 있는 나였다. 네가 그렇게 나오면 나도 생각이 있다 이 거야. 국왕게게 말만 해봐. 가만두지 않겠어! 그렇게 속으로 에릭을 향해 이를 갈고 있을 때였다. "국왕 전하께는 고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그 일을 말한다면 공주님께서도 가만히 계시지 않겠지요. 그리고 고하려 했다면 벌써 고했을 겁니다. 제가 오늘 이렇게 찾아 온 이유는 공주님께 여쭤보고 싶은 말이 있어서입니다." 일단 국왕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말에 안심했지만 공작이 뭘 물어본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겨우 물어볼 게 있어서 날 찾아왔단 말이야? 무슨 음모를 꾸미려는 게 아 니구? 왠지 약간 허무해진 나는 물어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승낙하자 라디폰 공작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신중한 어조로 질문을 했다. "남루한 옷을 입고 있는 아이가 있다고 가정해보십시오. 그 아이는 며칠동안 굶었는지 매우 수척해진 모습입니다. 만약 그 아이가 구걸을 하고 있고, 당시 공주님의 수중에 는 많은 돈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뭐야? 진지하게 물어보기에 뭔가 심오하고 어려운 문제일 줄 알았더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뭐야? 너무 단순한 문제였다. 다른 여자들이라면 너무 불쌍해, 하면서 돈을 쥐어주겠지만 나는 달랐다. "나는 그 아이에게 돈을 주지 않겠어요."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라디폰 공작은 의외의 대답에 흥미있다는 반응이었다. 당연하잖아. 내 돈을 왜 남을 줘? 돈을 원한다면 구걸할 시간에 일을 하라고 해. 그리고. "돈을 줘봤자 소용이 없으니까요. 내가 돈을 주면 당장은 배가 부르겠죠. 하지만 그 후는요? 내가 그 아이를 평생 보살펴 줄 수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어요. 설령 내가 도와준다고 해도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해요. 그 돈을 모두 쓰고 나서 그 아 이는 다시 구걸을 해야하는 비참한 삶을 보낼 것이고, 돈을 준 사람은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었다는 자기 위안을 받으면 스스로 만족해하겠죠. 어쩌면 내가 준 돈을 다른 사 람에게 빼앗길 지도 모르죠. 내가 돈을 주는 것을 목격한 건달에게 빼앗길 수도 있고 그 아이가 앵벌이 집단에 있는 아이일지도 모르죠. 그 돈은 그 아이 손에 남는 것이 아니라 결국 힘있는 사람이 차지할 겁니다. 그럼 내가 돈을 준 보람이 없잖아요. 그리 고 그걸 알면서도 돈을 주는 건 자기 만족을 위한 위선일뿐이예요." 대부분의 왕족이나 귀족은 '세상은 정말 아름다워'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 태어나면서부터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자라왔으니 당연했다. 그런 특급계급 중에서도 가장 높은 왕족인 내가 '너무 불쌍해요. 돈을 모조리 주겠어요. 어쩜 어린 것이 너무 안됐어요' 라는 보통 공주나 귀족 여성들의 모범적인 대답과는 상당히 어긋난 말을 하자 라디폰 공작의 눈이 이채를 띠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신기하냐? 눈을 빛내면 서까지 보게. 나는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라도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사 람에게는 돈을 줄 생각은 없어요." 그 정신상태가 마음에 안 들어. 병신도 아니고 늙어서 일을 할 수 없는 상황도 아닌데 일해서 돈을 벌 생각은 안하고 무슨 놈의 구걸이야. 구걸이. 일을 하지 않으면 먹지 도 말라는 말도 있잖아. 내 말에 라디폰 공작은 반문했다. "그럼 그 아이가 굶어죽도록 방치하실 생각입니까? 마리엔 공주님께서는 그 아이를 충 분히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말입니까?" 하긴 이 몸의 뜻을 어찌 평범한 사람이 알 수가 있겠어. 나는 깊은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공작을 위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돕지 않는다고는 하지 않았어요. 다만 아무런 대가 없이 돈을 줄 수는 없다는 거죠. 그 아이가 할 수 있을 만한 일을 시키고, 그 대가로 돈을 지불할 생각이예요. 일을 제 대로 하느냐, 못하느냐는 상관이 없어요. 내가 보는 건 결과가 아니라 얼마나 노력하 는가 하는 거죠. 그리고 남은 돈으로는 가게를 만들어 일이 많이 생기도록 할 거예요. 그들을 돌봐줄 수는 없지만 일이 생긴다면 굳이 구걸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을 테 니까요." 라디폰 공작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고, 나도 지지 않고 마주보았다. 쳐다보면 어쩔 건데? 그렇게 눈싸움 아닌 눈싸움이 벌어졌다. 그리고 라디폰 공작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는 웃는 눈을 하면서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오늘따라 이상한 질문만 하네. 앞으로가 내일인지 아니면 한 달 후인지, 십 년 후인지 , 어떻게 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가리키는지 알 수 없었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 다. 무슨 소리냐는 내 시선에 리디폰 공작이 부연설명에 들어갔다. "앞으로 여왕이 되고 싶으신 겁니까?" 이 사람이 뭘 잘못 먹은 게 틀림없었다.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것도 모자라 여왕이 되 고 싶냐니?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란 말인가. 여왕이 되고 싶다는 생각 해본 적은 없었기에 약간 당혹스러웠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그런 말을 한단 말 인가. 나는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어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라디폰 공작?" 어느새 평소의 얼굴로 돌아온 라디폰 공작은 여유로운 어조로 말했다. "그렇지 않으시다면 어째서 귀족들과 타국의 왕족들과 친분을 쌓으신 겁니까? 단순한 친분을 위해서라기에는 그 대상들의 권력과 배경이 너무 막강하군요. 그리고 제 4기사 단으로 하여금 글로리 라이언에서 우승하게 한 것도 이상하군요. 그 일로 많은 기사들 이 제 4기사단과 공주님을 다시 보신 것을 알고 계시겠지요. 또 오펠리우스 왕비전하 의 무력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제 1기사단의 위신을 떨어뜨린 점도 그냥 보아 넘기기 에는 심상치 않군요." 단순히 왕비 패거리를 뭉개버리려고 한 것뿐인데 그게 또 그렇게 되나? 명성이야 내가 원체 뛰어나다보니 오른 거지 여왕이 될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야. 너무 뛰어나도 쓸 데없는 의심을 사서 귀찮다니까. 어쩌겠어? 원망을 하려면 너무 잘난 나를 원망해야지 . 결국 나는 너무 잘났다, 라는 결론을 내리고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하던 말이나 계속해봐. 스스로의 잘났음에 감탄하던 나는 라디폰 공작의 다음 말에 입을 헤 벌렸다 . "아무리 봐도 마리엔 공주님은 왕비전하의 세력을 누르고 여왕이 되고 싶어하시는 걸 로 보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제가 공주님이 여왕이 되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 겠습니다." 하,하,하. 저 인간이 미쳤나? 여왕이 되도록 도와줘? 난 생각도 없는데 자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네. 나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설마 댁이 말하는 공주라는 게 나야? 라디폰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황당함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 는 그냥 놀려고 인간 세상에 온 건데. 마리엔과의 계약대로 오펠리우스 왕비에 대한 복수가 끝나면 모험가나 되려고 했는데. 나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내가 여왕이 되기 싫다면요?" 내가 이렇게 나온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지레짐작하고 말한 자신이 창피해서 당황할텐 데도 라디폰 공작은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싫다고 하셔도 제가 공주님을 여왕으로 추대하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아예 작정하고 온 모양이다. 그의 얼굴에는 나를 기필코 여왕으로 만들고야 말겠 다는 굳은 결의가 서려있었다. 막말로 귀족들과 친분이 있고, 기사들의 실력이 좋다고 여왕이 되면 데미나 공주나 플로라 공주도 여왕이 되겠다. 한 나라의 왕이 되려면 카 리스마있고 정치에도 뛰어나고 그래야 하는 것 아냐? 나는 이보다 더 황당할 수 없다 는 얼굴로 말했다. "왜 나죠?" 그렇다. 라이언 왕자나 르미엘 왕자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망나니도, 바보도 아닌 데 공주를 왜 추대하느냐는 말이다. 둘 다 평균 이상은 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다고 내가 어마어마한 능력을 보여준 적도 없었다. 도대체 어디를 보고 나를 여왕 으로 밀겠다는 말을 했는지 궁금했다. "물론 라이언 왕자님이나 르미엘 왕자님이 국왕이 되셔도 될 겁니다. 하지만 저는 두 왕자님들보다 공주님이 차기 국왕이 되었을 때, 페드인 왕국이 더 발전하리라 판단했 기에 마리엔 공주님을 밀기로 결정한 겁니다. 그리고 공주님도 그렇게 야망이 없는 분 이시라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에릭의 말을 듣고 조사해보니 아렌테의 시민 중 마리엔 공주님을 알고 있는 사람은 꽤 되더군요. 모두 공주님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두 왕자님은 뛰어나신 왕은 되도 사랑받는 왕은 되지 못하겠지만 공주님은 다르지요." 여왕이라. 생각치 못한 일이라 나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여왕이 되면 좋은 점이 없 는 건 아니다. 아니, 좋은 점은 넘쳐난다. 어마어마한 부와 권력을 손에 넣는 것은 물 론 사람들의 위에 선다는 것은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이 되고자 하는 야심가들에 의해 끊임없는 암투와 모략,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의 책임이 뒤따르는 자리이기도 했다. 한 나라의 모든 백성의 삶을 좌지우지한다는 것 은 그만큼 그들의 삶의 무게까지 짊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 그 날따라 국왕이 심 기가 불편하여 세금 인상 정책을 제대로 검토하지 않거나 귀족들의 입발림에 넘어가 그냥 승인했다면 국왕에게는 한순간의 실수에 불과하지만 그 정책에 많은 사람들이 고 통받을 것이다. 또 왕이 된다면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고, 항상 나랏일을 처리하 느라 바쁠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 한 몸 희생해서 이 나라 모든 백성을 구제하고자 하는 웃기는 정의 감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내가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건 나의 행복, 나의 즐거운, 나 의 이익이다.이기적이다고 생각하지 마라. 솔직히 자신을 희생해서 다른 사람을 도울 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누군가를 돕는 것도 다 자기 형편이 좋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 었다. 그리고 나는 마족이었다. 우리를 미사여구로 미화시킬 생각은 없다. 마족은 자 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백의 생명을 죽이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존재,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존재다. 그 모습이 다른 존재에게는 악하 고 잔인해 보일지라도 말이다. 인간이 다른 이종족을 죽이고 잡아다 노예로 팔아도 죄 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어차피 우리가 죽인 자들과 우리 는 다른 존재이기에. 하지만 마족보다 더 악한 존재는 없다, 라는 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다. 마족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다른 생명을 죽인 적은 없고, 한 번 믿은 상대 는 그가 배신하기 전까지는 믿어주는 것이 우리들이다. 그 믿는다는 행위를 하기가 힘 들지만 말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여왕이 돼서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비교해가며 저울을 쟀고, 추는 귀 찮다, 쪽으로 기울었다. "거절하죠. 귀찮아요." 인간들 눈에야 절대 권력의 자리로 보이겠지만 내 눈에는 그저 조금 높은 자리로 보였 기 때문에 별 망설임없이 거절할 수 있었다. 그러나 라디폰 공작은 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 여유로운 얼굴로 곤란한데요,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전혀 곤란해 보이지 않아! 그런 말을 하려면 최소한 인상을 쓰는 시늉이라고 하라고. 그는 잠시 생 각에 잠긴 얼굴이 되더니 곧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하죠. 마리엔 공주님께서는 무슨 이유에선지 오펠리우스 왕비 전 하를 꺾고 싶어하시는데 제가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왕비 전하는 라이언 왕자님과 르미엘 왕자님의 뒤에 많은 귀족들이 버티는 한 막강한 힘을 발휘하실 수 있습니다.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라디폰 공작가의 재력과 힘을 이용하신다면 어 느 정도는 대등한 선에 이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 공작에게 돌아가는 이익은?" 공짜로 이런 일을 도와줄 리 없었다. 만약 내 편에 섰는데 내가 진다면 라디폰 공작가 의 세력으로 봐서 풍지박살은 면해도 상당히 곤란한 지경에 처할 것이다.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나를 도울 때는 그에 상응하는 이익이 있을 것이다. 충성 때문에 이 런 짓을 한다고는 믿지 않는다. "투자입니다. 공주님께서 여왕이 되셨을 때를 대비해서 말입니다." "난 여왕이 될 생각이 없다니까요." 그런 귀찮은 일을 왜 하겠어? 난 이 일이 끝나면 놀러갈 거야. 그러나 라디폰 공작은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미래의 일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겁니다. 그리고 저는 도와드리는 동안 공주님께서 마음을 돌리시고 여왕이 되고자 하게 만들 겁니다. 만약 제가 공주님의 마음을 돌리 지 못한다면 제 능력 부족으로 여기고 물러나겠습니다, 어차피 공주님을 도와드린다고 해도 라디폰 공작가를 공주님을 도왔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 다. 어떻습니까?" 내가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라디폰 공작 같은 거물이 내 편이 되어준다면 지금보다 훨씬 든든해지겠지. 성격에 문제가 있다해도 그가 능력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결국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과연 그가 내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였지만 그렇게 나와 라디폰 공작의 협력관계는 시작되었다. 라디폰 공작과 협력관계가 구축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다시 찾아왔다. 예전이라 면 그의 방문이 그렇게 달갑지 않았겠지만 나중에야 어떻든 지금은 협력자였기 때문에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세상 일이란 역시 알 수 없는 거다. 내가 라디폰 공작을 반갑 게 맞이할 줄 그 누가 알았겠어.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르던 때가 바로 며칠 전인데 말 이야. "공주마마, 그동안 별고 없으셨는지요." "잘 지내고 있답니다. 그러는 라디폰 공작은 어떤가요?" "공주님이 염려해주신 덕분에 아무 탈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 만났는데도 오랜만에 만나는 것처럼 인사를 하는 이유는 그게 예법에 맞기 때문이다. 공주로써 예법에 신경써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가끔은 왜 이런 불필요한 일을 하나 의문이 들었다. 격식을 갖춘 인사가 끝나자 나는 라디폰 공작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가 이렇게 찾아왔다는 것은 나에게 뭔가 유용한 정보를 주기 위해 서거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설명해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간단히 몇 분만에 후딱 해 치워버릴 사안이 아니었기에 자리에 앉은 후 차와 다과를 들여왔다. 나는 시녀들을 모 두 물린 다음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오신 거죠? 제게 당부할 말이라도 있나요?" 내 말에 라디폰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맞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인지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왔습니다."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그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페드인 왕국의 3개밖에 없는 공 작가의 가주이며, 국왕의 오른팔인 재상자리에 있는 라디폰 공작이었다. 그의 말은 무 시할 게 못됐다. "우선 저희 측 진영에 다른 귀족들을 끌어들여야 합니다. 라디폰 공작가와 제 4기사단 으로는 왕비 전하를 이기기 힘듭니다. 비록 공주님의 지지도가 올라갔다고는 하나 대 부분이 타국의 왕족이나 귀족들입니다, 그들은 위협은 될 지 몰라도 직접적인 도움은 되지 않습니다." 타국 사람이 왕국의 내부 일에 끼어 들 수도 없고, 끼어 들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외국의 세력을 잘못 끌어들이면 속국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었다. 아무리 내가 마법 에 능통하다고는 하나 오펠리우스 왕비의 뒤에는 라이언 왕자와 르미엘 왕자가 있었다 . 그리고 이 두 왕자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왕비의 힘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결론은 나 도 그만한 수의 귀족들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나는 왕국 내의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야 하는 건가요? 어마마마가 많은 귀족들 의 힘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무래도 두 오라버니들 때문이겠죠. 그렇다면 내가 두 오라 버니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해야겠군요." "그렇습니다." 라디폰 공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현재 정세가 돌아가는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 했다. "현재 라이언 왕자파와 르미엘 왕자파 간의 알력이 서서히 생기고 있습니다. 같은 어 머니 태생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큰 충돌은 없지만 점점 두 세력 간의 견제가 심해질 겁니다. 그렇게 되면 상대적으로 왕비 전하도 공주님에게 관심을 쏟을 수 없게 될 겁 니다. 두 세력이 서로 다투는 동안 저희는 다른 귀족들을 포섭하면 됩니다." 아무리 같은 오펠리우스 왕비의 자식이라고 해도 그 이유만으로 웃으며 포기하기에는 옥좌는 너무도 달콤한 자리였다. 종종 일어나는 왕자간의 암투나 이긴 자가 진 자를 없애는 것과 같은 극단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서로 경쟁할 것은 틀림없었다. 그 리고 이 때가 오펠리우스 왕비에게 쏠린 힘이 분산되는 시기였다. 이 때를 잘 노리면 한 방 먹일 수 있겠어. 일단은 귀족들을 포섭하는 게 급선무인가? "어느 세력에도 들지 않은 귀족들이 어느 정도나 되지요?" "꽤 됩니다. 젊은 신흥 귀족들이나 세력자들 중 몇몇도 중립파입니다. 공주님의 외할 아버지인 아스티에 공작과 나인 공작은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어느 쪽에도 끼지 않 을테니 우선 두 사람은 제쳐두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디프 백작가와 레미프 백작가, 제오라 백작가를 저희 측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라디폰 공작은 자기 휘하에 있는 남작과 자작들의 명단도 넘겨주었다. 일단 자기 편은 알고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그나저나 아스티에 공작,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괘씸하네. 아무리 예전에 마리엔이 말썽을 부렸다고는 하지만 피가 섞인 혈육인데 코빼기도 안 비칠 수 있는 거야? 틀림없이 인정머리라고는 없는 냉혈한일거야. 나름대로 아스티에 공작의 상을 그리고 있던 나는 라디폰 공작의 이어지는 말에 우선 아스티에 공작에 관 한 생각은 제쳐두었다. 지금은 외할아버지라는 작자를 생각할 때가 아니지. 다음에 언 제 한번 얼굴이나 보자. 얼마나 잘났는지. "마침 보름 후에 스피린에서 지아 대사가 이끄는 외교관들이 도착할 예정입니다. 이번 에 그들이 저희 왕국을 방문하는 이유는 스피린에서 나는 목재의 수입 때문입니다. 스 피린은 대부분이 산지인 만큼 생산되는 목재도 대륙에서 가장 우수한 품질을 자랑하기 때문에 배를 많이 제조하는 저희 나라의 입장에서는 스피린산 목재의 수입은 매우 중 요합니다. 최대한 저희 나라에 유리한 조건으로 체결해야만 하지요. 페드인 왕국에 이 득이 되도록 계약을 체결하지 못한다면 상당한 손해가 예상되기 때문에 이번 담판에는 외교관뿐만 아니라 몇몇 귀족들도 참석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스피린 쪽에서도 소수의 참석은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외교 경험을 미리 보고 배우라는 형식적인 차원 이지만 왕족의 참석도 가능합니다." 라디폰 공작이 여기까지 말하자 나는 그가 좋은 기회라고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일 단 형식적인 참석이지만 외교 담판에 끼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리고 내가 좋은 조 건을 이끌어내면 내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라디폰 공작은 그 날 참석하는 귀족들 중 중요인물에 대한 리스트를 넘겨주었다. 언제 준비해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꼼꼼한 보고서였다. 그가 말한 사람들 중 디프 백작과 제오 라 백작은 없었지만 레미프 백작과 그 외 힘있는 세력가들이 몇 있었다. "따로 분부하실 일이라도 있습니까?" "네. 외교관 일행중 리더라는 지아 대사에 대한 정보를 모을 수 있는 데까지 모아주시 겠어요?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다면 정보를 모아주세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우선 상대를 알아야 여러모로 유리했다. 적을 알아야 백전백승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 가. 특히 다른 사람보다는 일행의 리더를 공략하는 쪽이 좋은 조건을 얻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였다. 공작이 그들에 대해 조사하는 동안 나는 도서관에서 스 피린에 대해 조사를 해봐야겠군. 라디폰 공작은 내가 정보를 모아오라고 한 바로 이틀 후에 보고서를 들고 와 나를 놀 라게 했다. 양이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알아야 할 것들은 모두 나와있는 훌륭한 보고서였다. 잘도 핵심만 골라서 왔군. 그가 가져온 보고서를 훑어보던 나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한 사람만 제외하고 다섯 명의 외교관이 모두 여자인데다 호위 기사들의 절반이 여자 라구요?" 내가 놀라서 묻자 라디폰 공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정도오 스피린의 사정과는 다른 페드인 왕국의 실정을 고려한 것입니다. 스피린의 기사중 남자 기사는 전체 수의 1/5도 되지 않습니다." 물론 스피린이 남성보다는 여성의 권익이 보장되는 나라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 지만 설마하니 남자는 달랑 한 명에 나머지는 모두 여자가 올 줄 몰랐던 것이다. 하긴 그동안 도서관을 뒤져본 바 스피린은 다른 나라와는 정반대로 여성과 남성의 역 할이 완전히 뒤바뀌어있다고 하니 어찌 보면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런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부분의 병사들의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내가 얼마나 놀랬던가. 대부분의 남자들이 집에서 외모 치장에 많은 시간을 쏟는 다는 것을 알았을 때 뒤로 넘어갈 뻔하지 않았던가. 남자가 거울 앞에 앉아서 화장을 하는 모습을 상상해보고 소름끼쳐하지 않았던가. 다 그 나라만의 독특한 문화겠지. 억 지로 거부감이 들려는 마음을 억누르고 스피린은 그런 나라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스피린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남자들이 수다를 떨고 화장을 하는 모습 을 생각하면 절로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여자들이 모든 일선에 나선다는 점은 같은 여 자로서 상당히 마음에 드는 점이었다. 라디폰 공작이 가져온 보고서를 찬찬히 읽어보던 나는 스피린 외교관 일행들이 모두 뛰어난 사람들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이들을 이끌고 온 지아라는 여자는 유 능한 외교관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말솜씨는 다른 나라의 어느 남자 외교관들도 당해내지 못했고, 덕분에 스피린은 많은 이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녀가 성공시킨 외교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세하인 철광석 외교'와 '금소금'이라고 불리는 외교 담판이었다. '철광석 외교 담판'은 지아 대사가 하이덴 제국의 세하인에 서 열린 외교회의에서 대륙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하이덴 제국의 철광석을 1kg 당 원래 가격 30실버에서 18실버로 낮춰서 사는데 성공한 일화이며 그녀의 첫 외교회의였다. 그리고 '금소금'은 말그대로 금처럼 비싼 소금이라는 뜻으로 스피린산 소금을 토르에 원가의 2배 이상의 가격으로 판 일을 말한다. 이런 화려한 경력을 가진 그녀가 이번 외교 사절단으로 온다고 하니 귀족들이 바짝 긴장하는 것은 당연했다. 잘못하면 바가 지를 써도 보통 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에 대한 보고서를 대강 간추려보면 이렇다. * * * * * 이름은 지아 티프리 온으로 제인드력 392년 4월 17일 스피린의 작은 항구도시 유스에 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전설적인 외교관으로 이름이 높았던 테스 이네즈 온 남 작으로 아마도 그녀의 뛰어난 외교적 능력은 테스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생각되어진 다. 현재 테스 남작은 젊은 외교관들을 양성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지아의 아버 지인 멜 로즈 온은 스피린에서는 매우 드물게 관직에 있지만 그렇게 영향력이 있는 자 리는 아니다. 지아는 어렸을 때부터 탁월한 언변 능력으로 유명했고, 그녀의 재능을 파악한 테스의 교육을 어려서부터 받았다. 15살의 나이에 스피린 최고의 교육기관인 자하스 아카데미 에 입학해서 22세의 나이로 수석 졸업한 인재이다. 23세에 외교관으로 등용되었지만 어머니때문이라도 소문들이 떠돌았다. 그러나 그녀는 3달 후에 열리는 하이덴 제국과 의 외교 담판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그런 소문을 잠식시켰다. 그 일은 지금 도 '세하인 철광석 외교' 라고 불리며 외교관 사이에서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맨손 격투에 능하고, 그 실력은 상당하다.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제프 백작 가문 의 막내 아들인 크로드루 파오스 제프와 약혼한 상태이다. 크로드루는 상당한 미남이 며 음유시인 못지 않게 노래를 잘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 그의 아버지인 멜이 선물로 준 고양이를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 오르라는 이름을 가진 이 고양이는 금색 눈의 검은 고양이로, 지아 외의 사람 은 잘 따르지 않는다. 지아는 어디를 가나 이 고양이를 데리고 다니기 때문에 이번에 도 오르를 데려올 것이다. 지아는 오르를 굉장히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오르가 잘 따 르는 사람에게는 호감을 가질 것으로 예상되어진다. 아마도 이 점을 이용해 미리 친분 을 쌓아놓는 것이 좋을 듯하다. * * * * * 이상이 라디폰 공작이 수집해온 정보를 요약한 글이었다. 고양이 이름까지 조사해 올 줄은 몰랐어. 게다가 어떻게 해야할지도 미리 계획해놓다니. 역시 라디폰 공작이야. 그는 외교 사절단에 포함된 사람들의 정보뿐만 아니라 이번 외교 회의의 대략적인 내 용과 현재 스피린 내의 상황도 자세히 알려주었다. 내가 스피린 사람들의 전반적인 정 서를 조사하고 이들의 정서를 어떻게 이용할 지를 연구했다면 라디폰 공작은 현재 대 륙의 정세와 스피린 내의 상황을 연관지어 연구해왔다. 그 때부터 나와 라디폰 공작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해야 이번 외교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지 의논을 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스피린의 외교 사절단이 도착했다. 외교관만 6명이고, 호위 기사와 병사들이 50명 안팎인 대규모의 인원들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들이 도착하는 날 환영 무도회 가 성대히 열려야만 했다. 그러나 지아는 이를 정궁히 거절하면서 외교회의가 모두 만 족스럽게 끝났을 때에나 파티를 열자고 했다. 그 말이 내 귀에는 페드인 왕국에서 뜯 어낼 것은 모두 뜯어내고 기쁜 마음으로 무도회에 참석하겠다 내지는 우리는 일에는 집중하지 않고 쓸데없는 일에 정신을 쏟는 남자들과는 다르다는 말로 들리는데. 나만 의 착각이려나? 아무튼 내 생각보다 훨씬 당찬 여성임에는 틀림없었다. 덕분에 현재 왕성은 모든 무도회 준비는 취소되고 부랴부랴 외교회의를 준비하느라 법 석이었다. 결국 자신들이 이 곳에 온 이유는 외교 회의를 위해서라는 스피린의 외교 사절단들 때문에 상당히 나중에나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외교 회의는 3일 후에 열 리게 되었다. 나는 우선 지아라는 여자를 한 번 만나보고 싶어 그들이 도착한 다음날, 그들이 머물 고 있는 숙소로 찾아갔다. 첫 날은 스피린에서 이 곳까지 온 외교 사절단들이 피곤할 것 같아 찾아가지 않았지만 외교 회의 전에 한 번 만나보고 과연 어떤 인물인지 알아 보는 사전 탐색이 필요했기 때문에 숙소를 찾아갔다. 스피린 외교 사절단이 머무느 숙소에 도착해보니 낯선 기사들과 병사들의 모습이 많이 눈에 띄었다. 듣던대로 여기사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사라를 본 적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 많은 여기사들을 한 자리에서 본 적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 기세가 결코 페 드인 왕국의 남자 기사들에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스피린에서 온 남자 기사들이 여기 사들보다 더 주눅이 든 모습이었다. 이거야 원. 말로는 듣기는 했지만 직접 보니 기분 이 묘하군. 남자 기사들이 주위를 약간씩 두리번거리며 호기심 어린 모습이라면 여기 사들도 타국의 왕성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지만 주변을 경계하는 것은 잊지 않고 있었 다. 사라도 딱딱한 편이었지만 저 여기사들 비하면 완전히 숙녀네. 숙녀.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마치 남자들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근육이 울퉁불 퉁한 저 탄탄한 체격 좀 봐. 우리 왕국의 남자 기사들에게도 지지 않겠는데. 거기다 검도 전부 롱소드 아니면 양손검이잖아. 놀랍다. 놀라워. 여자들은 대부분 가벼운 레 이피어를 선호하는 편인데 이들의 검은 그렇지 않았다. 간간이 바스타드 소드까지 보 여서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정말 놀랐다. 거기에 비해 스피린에서 온 남자 기사들은 어떠한가. 완전 기생오라비들이 따로 없다. 구리빛으로 그을린 탄탄한 체격을 자랑하는 여기사들에 비해 비리비리해서 멀리서 보 면 정말 여자인 줄 알 판이었다. 하, 정말 기가 막히네. 왜 남자들이 레이피어를 쓰는 거야? 물론 남자라고 레이피어를 쓰지 말란 법은 없지만 레이피어는 여성들의 무기라 는 고정관념이 박혀있던 나로서는 참으로 신기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가끔 롱소드 를 차고 있는 남자 기사들도 보였지만 여기사에 비하면 박력이 떨어진다고나 할까. 여기사들의 갑옷이 상반신과 하반신이 따로 떨어져있고, 가슴의 굴곡을 드러내고 하반 신의 갑옷이 치마 형식으로 되어 있지 않았다면 누가 남자고 여자인지 구별하는데 상 당히 애를 먹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여자들이 여자같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아 니었다. 아무리 화장을 하지 않고 무거운 검을 들고 다닌다고 해도 여자들은 타고날 때부터 외모가 여성스럽게 태어나지 않는가. 하지만 묻어 나오는 분위기들이 완전히 남자인데 어떻게 헷갈리지 않고 배기겠어? 이 진풍경을 구경하며 외교단들이 머물고 있는 숙소 안으로 들어간 나는 시종에게 지 아의 행방을 물었다. 이 넓은 건물 안을 한정없이 찾아 헤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 종은 조심스럽게 그녀가 정원을 산책 중이라고 고했다. 시종의 말에 정원으로 나가보 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 이 숙소는 외국에서 귀빈들이 올 때 제공하는 것으로, 건물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딸려있는 정원의 넓이와 아름 다움도 대단했다. 결론은 정원이 넓어서 바로 지아를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한동안 정원을 돌아다니며 그녀의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어디에 숨어있는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이거 골치 아프네. 계속 이러고 있을 수도 없고, 그대로 돌아가 자니 사전 탐색을 물 건너가게 되고. 그냥 조금 있다가 다시 찾아올까? 저녁 시간이 되면 자기도 밥은 먹어야 할 테니 있을 꺼 아냐. 내가 지아를 찾지 못하고 그냥 돌아 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왼쪽 편에 있는 덤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덤불 속에 뭐가 있는지 계속 덤불이 흔들리면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내가 가만히 지켜보는 가운데 갑자기 덤불 속에서 검은 물체가 튀어나왔다. 그 것은 고양이였다. 짧은 털에 윤기가 흐르고 고고하게 꼬리를 세우고 있는, 번들거 리는 금빛의 눈이 영악하게 빛나고 있는 검은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부르르 몸을 떨어 자신의 몸에 묻어있는 나뭇잎들을 털어 냈다. 그리고 앞발로 얼굴을 부비적거려 사람 들이 흔히 말하는 고양이 세수란 것을 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워 보이던지 나는 검은 고양이가 계속 얼굴을 부비적거리며 세수를 하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런 내 시 선을 느꼈는지 검은 고양이가 하던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들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잠 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쳐다보는 모습 또한 귀여움의 극치였다. "미야옹~~~" 너무 귀여워. 나는 손을 내밀면서 고양이를 불렀다. "야옹아, 이리 온. 착하지?" 내가 손을 까닥이며 부르자 잠시 내 손을 보던 검은 고양이는 발치 앞까지 걸어와 몸 을 비벼댔다. 내가 허리를 숙이고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자 기분이 좋은지 가르릉, 소리를 내며 울었다. 품에 안고 일어섰지만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가만히 있었다. 귀 엽다. 고양이를 얼굴에 대고 부비거리며 비비자 매끄러운 털의 감촉이 느껴졌다. 한동 안 고양이를 안고 난리를 치던 나는 부드러운 털이 아니라 차가운 금속의 감촉을 느끼 고 얼굴을 뗐다. 어? 목걸이가 있네. 목에는 검은 가죽띠가 둘러져 있었는데 은빛의 동그란 금속이 달려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오르라는 이름이 적어져 있었다. 생긴 모습으로 보나 목걸이에 써진 이름으로 보나 지아의 애완동물인 고양이가 틀림없었다. 고양이가 여기 있으면 지아도 이 근처에 있겠군. 그런 내 생각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 는 듯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르, 어디 있니? 오르!" 오르는 지아의 목소리를 듣고 귀를 쫑긋 세웠다. 드디어 지아를 찾았다는 생각에 나는 오르를 안고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어갔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원에 있는 정 자 근처에서 오르를 찾고 있는 지아를 만날 수 있었다. 어떻게 지아인 줄 알았냐고? 지아 외에는 다른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는 오르가 내 품에서 뛰어갔다. 그것이 아니라 도 느낌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저 여자가 지아라는 필이 딱 꽂혔던 것이다. 지아는 그렇게 크지 않은 키에 적당한 체격의 여자였다. 그녀는 갈색 머리를 대충 동 여맸고, 하얀 색의 단순한 디자인의 치마를 입고 있었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약간 찢어져 신경질적으로 보였지만 제법 예쁜 축에 속했다. 그리고 그녀의 검은 눈은 방금 전부터 갑자기 나타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럴 때는 그저 웃는 게 제일이다 . 처음 보는 사람에게 호감을 주는 방법은 별 것 없었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친한 척 하면 그만이었다. 물론 친한 척도 봐가면서 적당히 해야지 정도를 넘어서면 상대가 의 심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이 것이 바로 '즐거운 첫 만남'을 만드는 비법인 것이 다. 나는 생글거리며 친근한 어조로 말했다. "그 고양이의 주인이신 모양이죠?" 약간의 경계를 하고 있던 지아는 내가 자신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금새 표정을 풀 었다. "네. 오르를 찾아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이 녀석이 워낙 천방지축이라서 말이지요." "미야아~." 오르는 지아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항변하는 것처럼 지아의 말이 끝나자 울었다. 고양 이가 설마 사람 말을 알아들을 리 없으니 우연이겠지. 나는 오르를 장난식으로 살짝 때리는 시늉을 하고 있는 지아의 정체를 모르는 척하고 물었다. "그런데 처음 뵙는 분이신데 누구시죠?" "아, 그렇군요. 저는 스피린에서 온 지아라고 합니다. 이번에 있을 외교 회의 때문에 페드인 왕국에 오게 됐습니다, 공주님." 그녀가 나를 공주라고 부르자 혹시 그녀가 나를 알고 있나싶어 물었다. "혹시 절 아세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공주님께서 입고 계시는 옷이나 어투를 보고 상당히 높은 지위의 사람일 거라고 짐작한 겁니다. 그리고 외국의 귀빈들이 머무는 이런 곳을 자유 롭게 다닐 수 있는 소녀라면 그냥 귀족이 아니라 이 나라의 왕족 정도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맞았나보군요." 역시 소문대로 날카롭군. 외교 회의에서 상당히 애먹일 상대야. 그,러,나 나와 라디폰 공작이 머리를 모아 짠 계획을 과연 깰 수 있을까? 난 없다고 봐. 나는 제쳐두고라도 라디폰 공작도 상당하거든. 나는 빙긋이 웃으며 내 소개를 했다. "제 이름은 마리엔 오페나 드간 페드인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네. 저도 이렇게 아름다우신 공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는 그녀와 이야기하면서 그녀의 당찬 모습과 자부심이 마음에 들었다. 지아도 오르 가 나를 따르자 나에게 호감을 보였다. 물론 호감이 있다고 해서 외교 회의에서 봐줄 정도로 무른 인간이 아니었지만 친해져서 나쁜 건 없었다. 한참동안 이런저런 이야기 를 하면서 나는 지아라는 여자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스피린의 전형적인 여 자들처럼 드세고 고집스러웠으며, 자기가 한 번 추구하고자 하는 일은 끝까지 밀고 나 가는 추진력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뛰어난 외교관답게 현재 대륙 정세에 밝고 매우 유 식하다는 점도 알 수 있었다. 물론 요즘 대륙의 경제 추세는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대 화를 한 것은 아니지만 은연중에 그녀의 말 속에서 이런 점들이 느껴졌다. 얼마 후, 시간이 너무 지났다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고 빠져 나온 나는 다시 한번 계획 을 점검해 보았다. 지아가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 었지만 게획은 완벽했다. 이제 남은 건 누가 내일 있을 외교회의에서 주도권을 쥐고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 외교회의가 열리고 있는 방 앞에 선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외교 회의가 시작하기 바 로 직전이었다. 라디폰 공작은 미리 가 있는다고 했으니 나만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내가 외교 회의에 참석한다고 했을 때, 캐롤 이하 다른 사람들의 표정은 여린 내 마음 을 아프게 했다. 이 것들이 죽을라고! 그 말도 안된다는 표정은 뭐야? 그러나 시간이 없었던 관계로 마땅한 처벌은 내리지 못하고 올 수밖에 없었다. 외교 회의가 무사히 끝나면 두고보자. 문 앞에 서있던 대부분의 기사들과 병사들도 나를 보고 케롤 이하 다른 사람들과 거의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공주가 이런 곳에 참석하는 일은 거의 전례가 없는 일이기 때 문일 것이다. 과거 페드인 왕국에 있던 단 한 명의 여왕인 로위나 여왕을 제외하면 말 이다. 그러나 스피린의 기사들은 내가 참석하는 것에 대해 크게 놀라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참석한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는 기사들을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여 기서 두 나라의 차이점이 드러나는군. 여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페드인 왕국과 여자가 모든 일에 나서서 주도하는 스피린. 나라간의 문화가 다르 니 사람들의 생각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느 쪽이 우리 나라 기사인지 모르 겠군. 자기 나라 공주가 참석하겠다면 환영을 하고 격려를 해주지는 못할 망정 대다수 가 그런 황당하다는 시선을 보내다니 말이야. 하여간 나를 알아주는 인간은 왜 이렇게 없는 거야? 그렇게 격려라고는 조금도 되지 않는 페드인 왕국 소속의 기사들의 반응을 뒤로 한 채 방으로 들어서니 안에 있던 사람들도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 이보시게들. 다른 나라의 외교관들이 보고 있는데 그런 표정은 좀 그렇지 않아? 침 흘 리겠어. 우선 입부터 다물라구. 라디폰 공작과 스피린의 외교 사절단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져 있었다. "마리엔 공주님, 어서 오십시오." 라디폰 공작이 침착하게 내게 인사를 하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귀족들은 저마다 자 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빠진 표정이 완전히 수습된 것은 아니 었다. 당황하는 페드인 왕국의 귀족들과는 달리 스피린의 외교 사절단들은 예상치 못 한 인물의 등작에 약간 의외라는 반응만 보이고 있었다. 특히 지아가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지아가 좀 봐줄 기미가 보이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절대 사적인 감정으로 봐주지 않겠다는 생각이 여기까지 느껴지는군. 하긴 나도 그런 편이 훨씬 더 좋지. 누 가 자신의 나라에 이익을 가져다주는지 한 번 해보자구요, 지아. 그런 내 시선을 받은 지아도 한 번 웃어주고 나만 볼 수 있도록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란 말이야. 모여있는 사람들을 보니 스피린 외교 사절단을 제외한 페드인 왕국 사람들은 라디폰 공작과 라이언 왕자, 공작이 중요인물의 리스트로 뽑아준 몇몇과 그 외 등등이 있었다 . 어? 르미엘 왕자가 없네. 현자에 버금가는 지식을 지녔다면 이런 외교 회의에도 능 통할텐데 왜 오지 않았지? 덕분에 나는 르미엘 왕자가 내가 너서기도 전에 외교 회의 를 마무리지어버리지 않아 좋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때 르미엘 왕자는 한 남작 영 애와 즐거운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고 한다. 그 남작 영애의 이름은 개인의 프라이버 시를 위해 밝히지는 않겠다. 르미엘 왕자가 없는 지금 이곳에 있는 왕족은 나와 라이언 왕자뿐이었다. 라이언 왕자 는 다른 나라 사람들도 있는데 차마 콩가루 집안을 연출할 수는 없었는지 적당히 인사 를 건넸다. "마리엔도 왔구나. 이리 와서 앉으려무나." 그는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고, 나 역시 타국의 사람들에게 흠이 잡히고 싶지 않다는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그의 옆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여보라는 듯이 방실방실 웃으 며 라이언 왕자에게 싹싹하게 말을 붙였다. "라이언 오라버니도 오셨네요. 가시려면 저랑 같이 가시지 혼자 오시다니 너무하세요. " "네가 올 줄은 몰랐다. 만약 올 줄 알았다면 같이 왔을 거 아니겠니." 아마 나와 라이언 왕자 모두 속으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가증스러운 것. 자기가 언제부터 나하고 친했어? 그러나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더라도 페 드인 왕국의 같은 왕족이었다. 괜히 페드인 왕국의 왕족들은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난 리더라, 라는 소문을 돌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아마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이 렇게 할 것이다. 물론 생각없는 것들이 타국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도 피터지게 싸우지 만 라이언 왕자도 아주 형편없는 왕자는 아니었기에 눈치껏 행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라이언 왕자는 인사를 하고 나서는 말을 걸지 않았다. 틈만 나면 귀찮게 구는 르미엘 왕자보다 라이언 왕자 쪽이 편하단 말이야. 더 단순하기도 하고. 어느 정도 주변 사람들의 놀라움이 가라앉자 페드인 왕국과 스피린 양 국가 사이에 외 교회의가 시작되었다. 외교 회의는 목재에 대한 협상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처음 에는 두 나라 사이의 무역을 늘릴 것과 최근 출몰하고 있는 바다 괴물과 해적들의 퇴 치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두 나라 사이의 무역은 국가 차원의 무역보다는 개인의 무역을 장려해주는 방향으로, 바다 괴물과 해적의 퇴치는 페드인 왕국이 군함과 기사 를, 스피린이 궁사와 마법사를 지원해 합동으로 퇴치하는 방향으로 마무리지어졌다. 아직 세세한 것은 결정이 되지 않았지만 대충의 큰 골자가 결정되자 가장 중요한 안건 이라 할 수 있는 목재 수입에 대한 논쟁으로 넘어갔다. 어차피 오늘 하루만에 모든 것 을 협상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첫 날 외교회의는 대충 큰 흐름만 결정하고 세부항 목은 다음날부터 조정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저희 스피린의 목재가 어느 목재보다 품질이 좋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나무라는 것은 한순간에 자라는 것이 아니기에 목재로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키우기 위해서는 많은 손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그만큼 가격이 올라갈 수밖 에 없습니다. 특히 페드인 왕국에서 수입하는 목재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에 프라임 나무는 도끼로도 잘 베어지지 않아 애로사항이 많은 나무입니다. 그렇기 때문 에 이번에 페드인 왕국에서 함선 350척 분량의 목재들을 구입하실 때 금화 25만 골드 를 지불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에프라임 나무 한 그루 당 3골드 이상은 쳐 주셔야 합니다." 지아의 말에 회의장에 모여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무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금 화 25만 골드면 페드인 왕국의 1년 재정의 1/10을 넘는 거액이었다. 물론 350척 분량 이면 어마어마한 양이긴 하지만 한 나라의 재정의 일부를 그렇게 축낼 만큼 엄청난 금 액은 아니었다. 게다가 나무 한 그루 당 3골드라니 말이 되는가. 하이덴 제국에서 매 년 수입하는 철광석 10kg의 가격이 3골드인데 나무 한 그루 당 3골드라면 누구나 뒤로 넘어갈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상대가 이렇게 무리한 요구를 해와도 페드인 왕국의 입장에서는 스피린 산 목재를 반드시 수입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도 목재를 상당량 수입하 고 있지만 해양국가인 페드인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전력인 군함 같은 것을 만드는데 는 소금에 절어도 휘어지지 않고 거친 풍랑에도 끄덕하지 않는 스피린의 에프라임 나 무가 필요했다. 에프라임 나무는 다른 나라에서도 자라지만, 다른 나라의 나무들은 스 피린산 나무만큼 훌륭한 품질을 자랑하지 못했다. 스피린은 국가 차원에서 에프라임 나무를 기르고 페드인 왕국과 같은 해양국가에 나무를 팔아온 지 벌써 백년이 넘기 때 문에 좋은 에프라임 나무를 기르는데 자신들만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지 아의 요구에 페드인 측의 귀족 중 한 명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건 너무 무리한 요구가 아닙니까? 25만 골드라니요? 이렇게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 국의 사정에는 상관하지 않고 무리한 요구를 한다는 것은 외교 관례에 어긋나는 일입 니다. 만약 여러분들의 제안을 그대로 맡아들인다면 그만큼 세금을 더 거둬들어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라 사정이 말이 아니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피린의 외교관들 중 마른 체격의 여자가 입을 열 었다. "너무하다니요? 요즘은 바다 괴물과 해적들의 수가 급증하고 있어 페드인 왕국까지 목 재를 운송하는데도 엄청난 인력과 돈이 소비됩니다. 마물들의 수가 급증하고 있는 것 은 여러분들도 알고 계시겠죠? 에프라임 나무를 한 그루 성장시키는데 드는 비용과 노 고, 페드인 왕국까지 안전하게 운송해오는데 드는 비용까지 합하면 25만 골드는 절대 말도 안 되는 가격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자꾸 그렇게 나오면 더 올려버릴 수 있다는 눈치까지 주었다. 은근히 협박하는 모습이었다. 저쪽 멤버들은 모두 수준이 높은걸. 이에 비해 우리는 라디폰 공작이 가장 뛰어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아까부터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페드인 왕 국의 귀족들이 점점 밀리는 걸. 곤란합니다, 라는 말만 반복하면서 그렇게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이면 상대가 더 신이 나서 달려들텐데. 역시 우리 쪽에서 별다른 대항을 못 하자 신이 난 것은 스피린의 외교관들이었다. 얼마나 밀어붙이던지 나는 우리가 에프 라임 나무를 비싸게 사야하는 이유가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다. 에프라임 나무는 키우는 게 힘들어 손이 많이 간다, 너무 단단해서 도끼로 자르는데도 몇 시간은 걸린다, 급증하는 바다 괴물과 해적들 때문에 운송이 어렵다, 최근 대륙의 물가가 올라가는 것을 보면 이 정도 올리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요즘 스피린 내 에 가뭄이 들어 사정이 어려우니 우리도 어쩔 수 없다 등등. 가만히 듣고 있으면 그 목재를 반드시 스피린 쪽에서 제시한 가격에 사야만 할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페드인 왕국의 귀족들도 간간이 반론을 제기하기는 했지만 말하는 즉시 스피린 측의 논리 정연한 말에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옆에 있는 라이언 왕자도 참으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잘못하면 나라 살림 거 덜나게 생겼는데 어찌 왕자 되는 입장에서 걱정이 되지 않겠는가. 얼굴을 보니 절대 2 5만 골드에는 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마땅히 할 말이 없나보군. 하긴 괜히 나섰다가 망신만 당하고 있는 귀족들을 보면 나서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시겠지. 그렇게 한 쪽은 밀어붙이고 한쪽은 밀리는 형세는 한 시간 넘게 지속되었다. 페드인 왕국의 귀족들은 어떻게든 가격을 깎아보려 했지만 스피린 쪽에서는 한 걸음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결국 라이언 왕자는 굳은 얼굴로 강하게 나갔다. "그렇게 나오시면 저희도 스피린 산 목재를 구입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스피린 산 목재를 많이 사용하는 만큼 스피린도 많은 재정을 페드인 왕국에 나 무를 팔아서 마련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가 나무를 사지 않으면 우리보다는 못해 도 적지 않은 손해가 예상되어졌다. 둘이 같이 망해볼래? 아니면 가격을 내리고 둘이 같이 잘 살까? 이 중에 하나를 고르라는 뜻이었다. 가끔은 강하게 나가는 것도 필요했 다. 하지만.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닌데. 다른 나라라면 이렇게 나가면 한 발 물러설 수도 있겠지만 페드인 왕국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했다. 페드인 왕국의 가장 큰 전력은 바로 뛰어난 기사들과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이었다. 해군의 힘의 원쳔력은 뭐니뭐니해도 강력 한 군함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군함을 만들 목재를 사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것인가. 물론 다른 나라의 목재를 사서 만들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군함의 수준이 떨어지 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아드린 대륙과는 달리 소피린 대륙에는 수십 개의 크 고 작은 나라가 있었고, 저마다 대륙의 패권을 쥐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이럴 때 조금의 틈이라도 보인다면 바로 다른 나라에게 뒤질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이 사실 을 지아를 비롯한 스피린의 외교관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그럼 협상이 결렬되었으니 저희는 이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시나 물러나지 않는군. 스피린의 외교관들은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고, 이들이 한 걸음 정도는 물러날 줄 알았던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스피린 인들의 태도는 반드시 우리 쪽이 자신들을 잡을 것이라는 확신이 담겨있었다. 스피린 의 외교관들이 문 쪽으로 걸어가자 결국 라이언 왕자는 그들을 불러 세웠다. "좋습니다. 그 쪽에서 제시하는 조건을 받아......." "받아들이지 못하겠습니다!" 내가 있는 한 그런 바가지는 쓸 수 없지. 나는 받아들이겠다는 말이 나오기 전에 재빨 리 말을 잘라버렸다. 국제간의 외교에서는 말실수를 했다고 해서 한 번 내뱉은 말을 취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난데없이 내가 나서서 반대하자 귀족들은 놀라서 쳐다보 았고, 스피린의 외교관들도 내가 다 된 밥에 재를 뿌려버리자 인상을 쓰면서 쳐다보았 다. 귀족들의 표정이 놀라움에서 어이없음으로 바뀌는 것을 보니 내가 철없이 나섰다 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곧 나에게 감사하게 될 거야. 나는 스피린의 외교관 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말했다. "우선 자리에 앉는 것이 어떨까요? 그렇게 급할 게 뭐가 있나요? 차분히 제 말을 들어 보시죠." 내 생각대로 그들은 회의장을 나가지 못했다. 페드인 왕국보다는 못한다고 하지만 이 협상이 결렬되면 스피린 역시 적지 않은 피해를 볼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 다. 이런 상대는 밀어붙이는 것보다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서 찍소리고 못 하게 만들어야 돼. 그들이 모두 제자리에 앉자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 제가 여러분들의 조건을 모두 수락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드리겠습니다. 우선 여러분이 25만 골드라는 거액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바로 이 곳까지 운송해오는데 어려 움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운송이 어려운 이유는 요즘 늘어난 바다 괴물과 해적들 때 문이겠지요? 맞습니까?" "그렇습니다만 그게 어쨌다는 거죠?" 지아는 그런 당연한 질문을 왜 하느냐는 식으로 물었다. 왜 하냐니? 다 필요해서 하는 것 아니겠어. 나라의 이익을 위해 공주인 내가 나서야지 않겠어? 나는 빙긋 웃으며 차근 차근 따지기 시작했다. "운송하는 과정이 힘들다는 것은 저희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운송비를 그렇게 갑자기 높인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합니다. 방금 전에 바다 괴물과 해적을 합동으로 퇴 치하는데 동의할 때에 이런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두 나라가 공동으로 또는 각자 가 이들을 퇴치해서 양 대륙간 사람들의 안전과 평,화,를 수호하자. 그렇다면 운송하 면서 바다괴물과 해적을 처리하는 것도 평화를 위해서 하는 행동 중에 포함되는 것이 아닌가요? 평화를 위해 하는 행동에 돈을 따로 받는다는 것은 순수하게 평화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회의장에 있던 사람들은 내가 전에 합의했던 협정을 들고 나올 줄은 몰랐는지 눈을 동 그랗게 뜨고 있었다. 특히 페드인 왕국 쪽의 사람들은 내가 논리적으로 들리는 말을 했다는 것 자체에 굉장히 놀라워하는 반응이었다. 이봐, 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냐? 말솜씨 하나만은 일가견이 있는 몸이라 이거야. 외교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우선 상 대가 한 말은 최대한 이용해서 트집을 잡으면 되는 것 아니겠어. 이제야 나는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라고 생각해봤자 늦었다구. 원래 처음 생각해내는 것이 어렵지 누 가 말을 하고 나면 쉽게 들리는 거야. 놀라워하던 페드인 왕국의 귀족들은 어쩌면 25만 골드를 그대로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는 생각에 얼굴이 조금씩 펴졌다. 이에 반해 스피린 쪽은 생각지 못한 문제를 들고 나 오자 약간 곤란하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괜히 유능한 외교관이 아니었는지 지아는 곧 반박을 했다. "물론 평화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무조건 평화를 위해서 모든 위험을 감수하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 아닙니까? 저희는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운송하는데 드는 위험 수당을 가격에 조금 포함시켜 달라는 것 뿐입니다." 그래. 평화를 위해서라는 미명 하에 모든 위험을 감수하라는 건 정말 말도 안되지. 잘 말했어. 그녀는 이제는 어떻게 하겠냐는 시선을 보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녀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렇군요. 평화를 위해서라지만 그렇게 위험한 일에는 당연히 위험수당이 따라야겠군 요." "......? 그렇지요." 내가 평화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 위험은 당연히 감수해야하며, 이 세상에 평화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식의 말을 할 줄 알았던지 지아는 내 말에 긍정을 하면서도 이상 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 희망을 걸고 있던 페드인 왕국의 귀족들은 내가 순순히 돈을 준다는 말을 하자 허탈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우리가 그 쪽 에 위험수당을 지급한다면 우리 쪽도 받을 건 받아야겠지? 우리라고 이럴 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세상은 원래 주고 받고 하는 것 아니겠어. "그럼 저희 쪽도 계산을 해보도록 할까요? 이번 바다 괴물과 해적의 공동 퇴치에 저희 왕국의 군함이 적어도 30척 정도는 동원될 것으로 예상되어지고 있습니다. 군함 한 척을 만드는데 드는 비용이 적어도 3-4천 골드이니 30척이면 최소한 9만 골드의 가치 가 있는 군함이 사용되어집니다. 그리고 합동작전에 동원되어질 기사들을 살펴보면 한 기사 당 그 능력과 생명의 소중함, 훈련비에 든 비용을 최소가로 잡으면 2000골드라 는 액수가 나옵니다. 그런 기사들이 한 배당 5명이 탄다고 가정했을 때, 그 가치는 30 만 골드입니다. 군함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선원과 해군들의 경우는 한 명당 1500 골드의 가치가 있으며 한 척 당 최소한 20명 이상은 탈 것이니 90만 골드의 가치가 있 습니다. 이들의 가치를 모두 합하면 129만 골드입니다. 자! 그럼 '바다 괴물과 해적 공동 퇴치 작전'에 이만한 가치를 가진 것들이 파손되거나 사망할 수 있는 상황에 처 하게 되니 그에 상응하는 위험 수당을 요구하겠습니다. 전부를 요구할 수는 없으니 1/ 3에 해당되는 43만 골드를 요구하는 바입니다." 나의 장황한 계산에 회의장에 있던 사람들은 입을 쩌억 벌렸다. 그 누가 합동 작전에 참여하는데 위험수당을 받는단 말인가. 특히, 졸지에 43만 골드를 내놓아야 할 입장에 처란 스피린 외교관들의 얼굴은 걸작이었다. 얼마 후, 황당함과 당혹감이 적절히 섞 어진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던 지아는 날카로운 어조로 소리쳤다. "그게 말이 됩니까! 합동 전선에 참가하는데 무슨 수당을 받는단 말입니까?! 우리들이 무슨 용병이 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는 여유로운 얼굴로 방긋 웃으며 조금 전 그녀가 한 말을 그대로 읊어주었다 . "평화를 위해서 모든 위험을 감수하라는 건 무리한 요구 아닙니까? 저희는 단지 위험 수당을 조금 받으려는 것뿐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한 말인데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한 술 더 떠서 미리 준비를 할 수 있 도록 스피린 측도 지금 위험수당을 계산해서 알려달라고 말했다. 그렇게는 절대 못하 겠지? 솔직히 궁수와 마법사 몇 명이 얼마나 값이 나가겠어? 군함도, 기사도, 군함을 조종할 해군도 대부분이 페드인 왕국에서 지원하니 위험수당을 받게 되면 목재를 25만 골드에 사도 거의 20만 골드가 이익이었다. 여기서 스피린 쪽의 위험 수당을 쳐주면 거의 본전치기. 즉, 우리는 거의 공짜로 목재를 살 수 있다는 말이었다. 지아도 이를 알고 있었기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런 수로 목재를 산다면 이번 에는 편하겠지만 다음에 목재를 살 때는 크게 바가지 쓸 염려가 있었다. 이럴 때는 인 심 쓰는 척 하면서 물러나는 게 제일이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평화를 위해서 모인 협정의 원래 색이 퇴색될 것이 분명합니다. 지아 대사님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알아서 선택해. 그냥 이대로 43만 골드 내놓을래? 아니면 좋게 말할 때 운송비 뺄래? 결국 지아는 운송비는 목재 가격에서 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운송비는 제하더라 도 최고의 목재인만큼 그만한 대가는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녀는 다시 20만 골 드를 제시했지만 이 값도 예전에 비하면 5만 골드나 비싼 가격이었다. 그대로 살수야 없지. 가격은 깎으라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 '인간계에서 편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 는 방법 베스트 30'이라는 책에 나와있었거든. 지아는 그렇지 않아도 약간 찢어진 눈 이 더욱 찢어져 현재 매우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온 몸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외교에서는 사적인 감정이 절대 개입해서는 안 되는 법. 눈물을 머금고 가격을 깎도록 할게. 나는 라디폰 공작과 미리 계획을 짠 대로 공작을 돌아보며 말했다. "라디폰 공작, 전에 보여주었던 그 거 가져 오셨겠죠?" "물론입니다." 이제부터가 본론이지. 라디폰 공작은 작은 상자를 내게 건넸고, 나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그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보물도, 극비문서도 없었다. 단 지 있는 것이라고는 팔뚝만한 나무 조각뿐이었다. 하지만 이 나무 조각이 오늘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나무 조각을 꺼내 탁자 한가운데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에프라임 나무가 가장 품질이 좋은 나무라고 했는데 그럼 이 나무를 봐주시겠습니까? " 내 말에 스피린의 외교관들은 나무 조각을 살펴보면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슬슬 반 응이 올 때가 됐는데 말이야. 오! 드디어 시작이군. "말도 안돼! 이런 재질의 나무가 있단 말이야!" "이 광택은 에프라임에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어." 그렇다. 내가 준비한, 정확히 말하면 라디폰 공작이 준비해온 저 나무는 굉장히 희귀 한 나무였다. 얼마나 단단한지 에프라임 나무와 비교해서 전혀 손색이 없었고, 손질만 조금 하면 마치 기름을 발라놓은 것처럼 광택이 나는 나무였다. 이오네스코라는 나무 로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가 아니었다. 아주 깊은 계곡에서 죽은 나무들이 집 단으로 있는 곳이라면 그 중에서 간혹 한두 그루가 자라는 나무였지만 죽은 나무들이 한두 그루도 아니고 집단으로 모여있기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죽은 나무가 썩 으면서 나오는 특별한 액을 영양분으로 하기 때문에 보통 땅에서는 자랄 수 없는 나무 였던 것이다.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오네스코를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도대체 라디폰 공작은 저 나무를 어떻게 구해왔는지 궁금하군. 자기도 우연히 한그루 얻었다고는 했지만 그런 것도 실력이지 뭐. 덕분에 스피린 쪽이 내세울 것이 사라져버 린 상태였다. 훨씬 좋은 나무를 알고 있는데 굳이 비싼 가격을 내고 에프라임 나무를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저 것이 이오네스코라는 것이 들키면 말짱 꽝인데 말이야. 이오네스코는 흔한 나무가 아니라 에프라임 나무대신 수입하기는커녕 한 그루 발견하기도 힘들었다. 지금 나와 라디폰 공작은 이오네스코를 이용해 우리는 이런 좋은 나무를 알고 있으니 가격을 내리라는 무언의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다행히 이오네스코를 아는 사람은 없는지 스피린의 외교관들이 앉아있는 쪽이 시끄러 워졌다. 역시 준비성이 투철해야 뭘 해도 할 수 있다니까. 나와 라디폰 공작은 스피린 인들이 빨리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약속되어 있던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공작, 저 나무는 정말 훌륭하군요. 에프라임 나무와 어느 쪽이 더 훌륭하지요?" "당연히 제가 가져온 나무입니다. 단단하기는 하지만 결을 따라 가공하면 쉽게 가공할 수가 있지요. 가공하기가 극악스러운 에프라임 나무에 비하면 정말 훌륭한 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공작의 말에 정녕 놀랐다는 듯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리고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페드인 왕국의 귀족들이 이오네스코를 보면서 놀라워하자 다급해진 것 은 지아 이하 스피린의 외교관들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25만 골드는 고사하고 한 푼 도 건지지 못할 것 같은 상황이었다.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이오네스코를 수출할 만 한 나라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렇게 바람을 잡아주다보면 가격은 절로 내려가게 되 어있었다. 나와 라디폰 공작은 서로 이오네스코의 장점을 이야기하면서 이보다 더 좋 을 수는 없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좋습니다. 목재를 18만 골드에 넘기겠습니다." 지아는 인상을 쓰면서 말했지만 이미 물 건너 간 뒤였다. 그런 말은 내가 나서기 전에 했어야지. 나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라디폰 공작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 "라디폰 공작, 저 나무를 수입할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물론 이 것은 내 희망사항이었고 실제로는 수입할 수 없는 나무였다. 그러나 굳이 말 할 필요는 없겠지. 페드인 왕국의 다른 사람들도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 "그렇군. 에프라임 나무보다 저 나무가 훨씬 좋겠어. 저 나무를 수입하는게 어떨까?" 왠지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나와 라디폰 공작의 주도로 대화를 이끌어 나가자 라 이언 왕자가 중간에 끼어 들었다. 이런 무식한 인간. 조용히 좀 해. 수입하겠다, 라고 했다가 이게 이오네스코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땐 어떻게 수습할 꺼야? 라디폰 공 작이 타국와의 협상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치명적이라고 주의를 줬는데. 초를 치려 고 작정했어, 이 답답한 인간아?! 그나마 수입한다고 단언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라이언 왕자까지 나서자 스피린의 외교관들이 더욱 급해졌다는 점 하나만은 좋 았다. 다시 한 번 자기들끼리 수군거린 후, 지아는 큰 결단을 내린 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15만 골드에 팔겠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무리는 무슨 놈의 무리. 깎으면 그만이지. 나는 라이언 왕자가 '됐소. 우리는 에프라 임 나루가 아니라 여기 있는 이 나무를 수입할 꺼요' 와 같은 말을 내뱉기 전에 재빨 리 입을 열었다. "11만 골드!" 자신의 예상치보다 낮게 불러서 상대와 흥정을 하면서 점점 희망 가격으로 올려나가는 것은 가격을 깎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었다. 그렇게 되면 나도 희망했던 가격에 살 수 있어서 좋고, 상대도 처음보다는 가격을 올렸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을 것이다. 내 가 11만 골드에 사겠다고 하자 스피린의 외교관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아는 그들 에 비하면 표정 관리를 잘하고 있었지만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만은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면 14만 골드로 하죠?" "흠, 12만 골드요." 지아는 x씹는 표정이었지만 공작이 가져온 나무가 이오네스코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한 유리한 건 우리였다. 한참동안 눈썹을 미간 사이로 모으고 고민을 하던 지아는 무 겁게 입을 열었다. "13만 골드로 하지요. 하지만 더 이상은 안됩니다. 13만 골드 이하로는 저희 쪽이 손 해라서 차라리 팔지 않느니만 못합니다. 그러니 그냥 13만 골드로 하시지요." 더 이상 오기를 부렸다가 열 받아서 정말로 팔지 않으면 곤란해지기 때문에 나는 내키 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나와 라디폰 공 작의 활약에 힘입어 스피린산 목재는 25만 골드에서 12만 골드나 깎은, 예전보다 2만 골드나 싼 13만 골드에 수입하기로 체결되었다. 라이언 왕자가 상당히 불만스러운 얼 굴이었지만 그렇다고 있지도 않은 이오네스코를 수입할 수도 없잖아. 그러나 라이언 왕자와는 대비적으로 대부분의 귀족들은 흐뭇한 표정들이었다. 더불어 나를 새로운 눈 으로 보고 있었다. 하긴 머리가 텅 비고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마리엔이 외교 회의를 훌륭하게 성사시킬 줄 누가 짐작했겠어?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라디폰 공작도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대충 대약적인 협상의 흐름이 잡히자 오늘의 외교 회의는 끝이 났다. 하루만에 모든 협상을 완성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머지 세세한 부분은 내일 이루어질 것이 다. 그리고 그 부분은 전문적인 외교관들나 귀족들이 알아서 잘할 테니 더 이상 내가 참석할 필요는 없었다. 이정도 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내 역할은 다한 거야. 이 걸로 외교 회의 건은 마무리지어진 건가? 귀족들의 '정말 훌륭하십니다','국왕 페하께서 정 말 자랑스러워하실 겁니다' 라고 칭찬을 하고 있는 도중에 지아가 다가왔다. 나에게 당한 것이 억울하기도 하련만 그녀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웃고 있었다. 그녀는 옆으로 다가와 호탕하게 말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를 그렇게 애먹인 사람은 라디폰 공작 이후 처음이군요. 이거 앞으로 페드인 왕국과는 외교 회의를 하고 싶지 않은데요." 보통 사람이라면 이를 빠드득 갈텐데 자연스럽게 농담을 하는 지아는 확실히 여장부다 웠다. 어지간한 남자보다는 훨씬 나은걸. 지아의 농담에 나도 웃으며 화답해주었다. "별 말씀을요. 저야말로 말하는 중에도 얼마나 진땀을 흘렸는지 모른다구요." "훗, 진땀을 흘리신 것이 그 정도면 자신있으셨을 때는 어떨지 궁금한데요. 그런데 저 나무는 도대체 무슨 나무입니까? 저런 나무는 생전 처음 보는데 말입니다." 지아는 궁금한 얼굴로 이오네스코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궁금하겠지. 최고급 목재를 취급한다는 스피린에서도 보지 못한 나무라니. 이제 목재도 13만 골드에 사기로 결정 이 났으니 이오네스코의 정체를 밝혀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나는 빙긋이 웃으며 그 녀의 질문에 답했다. "이오네스코예요. 무슨 나무인지는 아시겠죠?" 잠시 이오네스코라는 낯선 이름을 곱씹어보던 지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오네스코가 무슨 나무인지를 떠올리고 어벙한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것은 스피린의 다른 외 교관들은 물론 라이언 왕자와 페드인 왕국의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 나무를 수입하고 싶다고만 했지 수입하겠다는 말은 안 했어. 사람 말을 똑바로 들어야지. 멋 대로 착각한 건 당신들이라구. 나는 다만 진실을 약간 감추었을 뿐이지 거짓말은 하지 않았어. 이 사실을 잘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 이미 협상의 주요 골자 는 체결되어 버렸는데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겠는가. 다만 지아가 한마디했을 뿐이다 . "이거 완전히 당했군요. 생글생글 웃으시면서 이렇게 사람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습니 다. 왠지 라디폰 공작을 상대한 기분이 드는군요." 흠, 그건 싫은데. 어라? 이봐들, 당신들은 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거야? #17-가스톤 & 사라 페드인 왕국과 스피린 양자간에 이루어졌던 외교 회의는 원만히 마무리지어졌다. 지 아 일행은 다시 스피린으로 돌아갔고, 나는 오랜만에 제 4기사단의 훈련장을 찾아갔다 . 그동안 훈련은 잘하고 있었겠지? 실력도 조금은 늘었을까? 훈련장에 가까워질수록 기사들의 우렁찬 기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았지만 역 시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예전에 하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농땡이를 치고 놀고 있나? 아니면 오늘이 무슨 날인가? 예를 들어 누구 생일이라고 축하해주기 위해 조촐한 파티를 벌이고 있다거나? 하지만 직접 봐야 알 수 있지 혼자서 생각해본 다고 과연 농땡이인지, 아니면 무슨 날인지, 그 것도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지 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발걸음을 재촉하며 훈련장에 도착해보니 예상 외로 제 4기사단의 기사들은 훈련을 하 고 있었다. 어? 훈련하고 있잖아? 나는 노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 훈련 중에 필연적으로 나기 마련인 기합소리라거나 검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의아한 눈으로 기사들을 보던 나는 그들의 시선이 전혀 엉뚱한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훈련을 하면서도 간간이 힐끔힐끔 쳐다보거나 아예 고개와 손이 따로 놀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기사들이 쳐다보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스톤 경, 대련을 신청하겠습니다. 오늘이야말로 승부를 가리고 말겠어요." "하지만 어제도 대련을 하지 않았습니까, 사라 경?"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곳에는 사라와 가스톤이 있었다, 사라는 가스톤에 게 대련을 신청하고 있었고, 가스톤은 그런 그녀를 보며 난감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제도 제가 졌다구요! 이번에는 반드시 이기고 말겠어요!" "그래도......" 사라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로얄 기사단은 원래 실력이 뛰어난 집단이니 검술 연습은 대개 개인적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각 기사단마다 맡은 일이 있을 것이고, 개인마다 경비를 서야하는 곳이 있었다. 이렇게 맡은 일 하랴, 짬날 때 훈련하랴, 바쁜 기사들 이 다른 기사단의 훈련장을 일부러 찾아와서 대련 신청을 하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 다. 가스톤이 최강의 실력자라면 모르지만 로얄 기사 중에는 더 강한 자들도 많을텐데 굳이 여기까지 올 이유가 있나? 설마 모든 로얄 기사들이 사라의 대련 신청을 거절했 을 리는 없었다. 게다가 말을 들어보니 어제도 온 모양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내 중얼거림에 답한 것은 잠시 후, 내가 온 것을 안 제 4기사단의 기사들이었다. 그들 의 말을 모두 종합해보면 대충 이런 상황이 그려진다. 사라는 글로리 라이언이 끝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훈련장으로 찾아와 가스톤에게 대 련 신청을 했다고 한다. 가스톤은 선뜻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 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대련은 글로리 라이언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스톤의 승리로 끝이 났고, 사라는 다음 번에는 반드시 이기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 때에는 누 구도 그녀의 말이 이길 때까지 온다는 의미인지 몰랐다고 한다. 다음날 사라는 다시 찾아와서 가스톤에게 대련을 신청했고, 이번에도 가스톤이 사라를 이겼다. 그리고 그 다음날도, 그 다음 다음 날도, 그 다음 다음 다음 날도 사라는 계속 찾아왔다. 처음에는 가스톤도 흔쾌히 대련을 받아들였지만 이쯤되자 난색을 표하게 되었다. 그는 사라에게 예전에 나에게 한 번 선보인바 있었던 닭살맞은 칭찬을 하며, 자신의 실력 이 그녀의 실력에 미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사라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리고 그런 상 황은 바로 오늘까지 계속되었다. 그럼 그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가스톤에게 대련 신청을 해왔단 말이야? 독한 것. 그렇 게 지기 싫더냐? 저러다 계속 오는 것 아냐? 내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나는 그 날 이후 일주일동안 꼬박꼬박 제 4기사단의 훈 련장을 찾아갔다. 과연 오늘도 올 것인가?, 하는 기대 아닌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그 리고 사라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거의 날마다 찾아왔다. 어떻게 가스톤이 일을 마치고 훈련을 할려고 하면 딱 맞춰서 오는지 참으로 궁금했다. 가스톤도 일이 끝나고 튀어보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항상 사라에게 걸려서 어쩔 수 없이 대련을 하게 되었다. 사라가 기사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이기겠다는데 차마 거절할 수 는 없겠지. 기사가 자신의 명예를 걸고 하는 일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였고, 만약 가스톤이 '난 귀찮단 말이야! 당신 혼자 대련해!' 라고 했다가는 칼부림이 날지도 모 르는 일이었다. 남들이 보면 사라가 로얄 기사가 아니라 제 4기사단 소속의 기사인 줄 알 판이었다. 로얄 기사가 로얄 기사단 훈련장에는 가지도 않고 저래도 되는 거야? 나는 다시 대련 을 하고 있는 가스톤과 사라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제 4기사단의 기사들도 이제 는 하루 일과가 되어버린 가스톤과 사라의 대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머리가 헝클어지고 옷도 너저분해져서 용병같던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보나인 에게 슬며시 말을 걸었다. "보나인 경, 계속 오는데 쫓아내지 않을 건가요?" "하지만 쫓아낼 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어차피 기사들의 훈련은 자유이니 사라 경이 로얄 기사단의 훈련장에 가지 않는 일은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무 슨 피해를 입히는 것도 아니니 오지 말라고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나는 일리가 있는 보나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스톤에게 대련을 신청하는 일 말 고는 다른 일은 하지 않으니 쫓아낼 이유가 없군. 가스톤이 눈 한번 딱 감고 져주면 끝나는데 말이야. 하긴 가스톤도 마음같아서는 져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겠지. 사라 가 보통 눈치가 아니라 일부러 져주는 것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지만. 대련을 지켜보던 나와 제 4기사단 일동은 가스톤이 또 이기자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 하니 가스톤도 약간 실망한 기색이었다. 이 얼마나 우스운 모습인가. 남들은 기를 쓰 려고 이기는데 지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라니. 내일 또 오는 건가? 그래. 마음대로 해라. 언제까지 올지 정말 궁금하군. 우리의 한숨은 싫다는 의미의 한숨이 아니라 이 미 포기한 의미의 한숨이었다. 그와 반면에 사라는 오늘도 졌다는 사실에 상당히 분해하고 있었다. 가만히 서서 뭔가 를 생각하는 폼이 오늘 있었던 대련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우리들은 저마다 속닥였다. "승부욕이 정말 대단하다니까." "실력도 굉장하지 않냐? 가스톤이 저 나이 때 어땠는지 생각 안나? 가스톤이 이긴 것 도 다 나이 때문 아니겠어?" "맞아, 같은 나이였으면 졌을 거야." 다른 사람들이 봤으면 과연 같은 기사단 동료가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이야 기들이었지만 이런 말을 쉽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서로 친하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사라 경이 이해가 안가는 데요. 날마다 대련을 하면 가스톤의 검술에 익숙해 지는 하겠지만 가스톤 역시 사라의 검술에 익숙해지잖아요. 나라면 몰래 특훈을 해서 깜짝 놀라게 해줄텐데 말이에요. 찾아오는 건 대련말고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요? ." 내 말에 미첼로가 웃으면서 말했다. "에이, 설마요. 그럼 사라 경이 가스톤 경에게 반해서 매일 찾아오기라도 한단 말입니 까? 이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하하하." "......!!!" 미첼로는 농담으로 말했지만 그 말을 듣고 보니 불현듯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 다. 다른 사람도 미첼로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고, 그 말을 한 미첼로 본인도 자신 의 말을 잠깐 생각해보더니 기겁했다. 하지만 이 생각에는 약간의 문제점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솔직히 사라 정도면 절세 미색은 아니어도 미녀 축에 속하는 미모였다. 그리고 현재 25살로 보통 여자에 비하면 혼인 적령기를 놓쳤지만(보통 여자들은 19-22살 사이에 결혼을 한다) 33살인 가스톤 에 비하면 싱그러운 나이였다. 그렇다고 가스톤이 나이를 초월한 절정의 미남도 아니 고 중후한 중년(?)의 멋을 풍기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봐도 잘생긴 얼굴은 아닌데 말이야. 가스톤의 얼굴은 굵직한 선에 잘생기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평범한 얼굴이었다 . 호탕하게 생겼다고 볼 수는 있지만 반할 정도의 매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 데 말이야. 그렇다고 배경이 빵빵하냐면 그 것도 아니었다. 사라가 가스톤을 좋아할 만한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작정 말도 안 된다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이 사라가 날마다 찾아오는 이유가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 오는 것도 아니고 날마다 오는 건 어디로 보나 이상 해. 가스톤을 이기고 싶으면 더 실력이 있는 로얄 기사들과 대련해서 실력을 쌓은 후 에 겨루면 되는 거잖아. 서얼마 사라가...... 얼굴들을 보아하니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기묘한 표정이었다. 우리는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대련을 마친 가스톤과 사라를 보았다. 가스톤은 사라에게 그녀의 문제 점을 지적해주고 있었고, 그녀는 그의 말을 열심히 경청하고 있었다. 한번 눈에 색안경을 쓰면 모든 행동이 왜곡되어 보이는 법이다. 어떤 사람에 대해 나 쁜 소문을 듣고 '저 놈은 나쁜 놈이야' 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 사람이 아무리 착한 행 동을 해도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되고, 모든 행동이 나쁘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한 번 의혹을 가지자 사라의 모든 행동이 그런 쪽으로 비쳐 보였 다. 대련을 하면서 몸을 움직여 열이 나서 빨갛게 변한 볼도 가스톤 앞이라 수줍어서 볼을 붉히는 것처럼 보였다. 으흠, 수상해. 매우 수상해. 가스톤과 사라를 지켜보는 여러 쌍의 눈동자들에는 점점 깊은 의혹이 스며들었다. 나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건 내가 뭔가 깊이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습관이었다. 매끄러운 머리카락의 감촉을 느끼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어떻게 보면 좋아하는 것도 같고, 어떻게 보면 아닌 것도 같고......사라가 정말 가스 톤을 좋아하는 걸까? 에이, 나이가 있는데 설마......아니야. 사랑에는 종족도 없다잖 아. 8살의 나이 차이에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도대체 어딜 보고? 느낌상 좋아하는 것도 같은데 머리로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별로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였 다. 사랑이 아무리 이성적이지 못한 감정 중 하나라지만 그래도 그렇지. 남녀간의 사 랑이라는 감정에 익숙하지 못한 나로서는 과연 사라가 가스톤을 좋아하는지, 그런 감 정은 아닌지 결론을 내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것 참 아리송하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인간들이 마법을 익힐 때 9서클의 벽을 넘지 못하고 막막해할 때와 비슷한 감정이 아닐 듯 했다. 인간처럼 알기 쉬운 존재도 없지만 100% 알기에는 이들보다 더 어려운 존재는 없다는 말이 맞긴 맞나봐. 마족인 내가 아무리 생각한들 인간인 사라의 감정을 모두 이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 는 일이었다. 다음날, 나는 다시 훈련장에 가서 가스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감정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관찰해서 조금이라도 사라의 감정이 무슨 감정인지 알아보고자 함이었다. 가스톤이 왼쪽으로 움직이면 내 고개도 왼쪽으로 움직였고, 오른쪽으로 움 직이면 내 고개도 오른쪽으로 움직였으며, 그가 몸을 풀기 위해 제자리에게 가볍게 뛰 면 내 고개도 위아래로 왔다갔다했다. 나는 오로지 내가 모르는 가스톤의 매력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를 열심히 지켜보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관찰하다보면 뭔가 알게 되겠지. 가스톤은 내가 뚫어져라 쳐다보자 불안한지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를 품평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만약 사라가 가스톤을 좋아한다고 가정하면 어느 부분 이 좋은 걸까? 키가 커서? 가슴이 넓어서 안기기 편해서 그런가? 그 것도 아니면 칭찬 해주는 말에 넘어갔나? 어떤 점이 마음에 든 걸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사라가 훨 씬 아까운데 말이야. 내가 아까부터 가스톤에게서 눈을 떼지 않자 사람들이 수군거렸 다. "가스톤, 너 뭐 잘못했냐?" "아닌데...아닌 것 같은데..." "그럼 마리엔 공주님이 왜 가스톤 경을 노려보고 계시는 거죠?" 노려보는 게 아니라 관찰하는 거야. 자세히 관찰하려고 눈을 가늘게 뜨고 있어서 그런 거야. 내 시선을 의식하고 이리저리 움직여보던 가스톤은 끝내 내 시선이 떨어지지 않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공주님, 제게 하실 말씀이라고 있으십니까?" "아니요. 나는 신경쓰지 말고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해요."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니면 관찰한 보람이 없어. 가스톤에 대한 관찰은 계속되었지만 여전히 특별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이상하네. 아무리 봐도 특별한 매력은 느껴지지 않는데. 역시 사라가 가스톤을 좋아한다는 것은 착각이었나? 차라리 사라를 한 번 떠 볼까? 인간은 평소에는 돈이나 권력을 추구하면서 굉장히 단순한 면을 보이는데 가끔 은 이해할 수 없는 면을 보인다는 제스의 말이 이렇게 공감이 갈 줄이야.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나를 이렇게 고민하게 만든 장본인이 나타났다. 사라 는 오늘도 어김없이 가스톤에게 대련을 신청하러 온 것이다. 이제는 거의 하루 일과처 럼 되어버린 가스톤과 사라의 대련에 제 4기사단의 기사들도 처음처럼 놀라워하지는 않았지만 그 끈질김에 감탄했다. 그리고 어제부터 생긴 의혹에 사라와 가스톤을 살펴 보고 있었다. 가스톤은 사라가 오자 죽을 상이 되었지만 차마 사라 앞에서는 그런 표 정을 지을 수는 없었는지 웃는 것도 같고 우는 것도 같은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스톤, 오늘도 수고해. 그 날도 다른 때처럼 가스톤의 승리로 대련은 끝이 났고, 사라는 다음에는 반드시 이 기겠다는 같은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그런 사라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익숙하 지 못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끙끙되느니 차라리 그녀를 떠보기로 한 것이다. 보 통 여자였다면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꺄아~ 너무 멋있어!!!' 라는 반응을 보일테니 금새 알아챌 수 있었겠지만 사라는 대련을 신청하러 오는 것 빼고는 특별히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판단하는데 애로사항이 많았다. "사~라아~경." 나는 친근한 목소리로 제 4기사단의 말을 빌리자면 무슨 꿍꿍이가 있을 때 짓는다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를 불렀다. 사라는 내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마리엔 공주님이시군요." 훈련장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사라는 그렇게 어려워하는 기색은 없었 다. 그리고 나의 친근한 미소도 그녀가 나를 어려워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 다. 나는 사라가 나를 아는 척 하자 가까이 다가가서 생글거리며 말했다. "요즘 자주 보네요. 훈련에 굉장히 열심인 것 같은데 너무 무리는 하지 말아요."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가스톤 경을 반드시 이기고 싶어서요. 그리고 그렇 게 무리하는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가스톤의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옳다구나 싶어 그녀가 가스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아보기 위해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혹시 가스톤을 좋아해요?, 라고 물어볼 수는 없어서 말을 약간 돌렸다. "혹시 사라 경은 좋아하는 사람 없어요? 사라 경 같은 분이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사 람인지 궁금해요. 틀림없이 같은 기사겠지요?" 나는 질문을 하고 사라의 얼굴을 재빨리 살펴보았지만 사라는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다 . "아쉽게도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 그렇군요." 사라는 전혀 당황하는 기색없이 자연스럽게 내 질문에 답했다. 자연스러운 반응인데? 일단 이렇게 보면 가스톤을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 것 하나만으로 판단할 수 는 없지. 좀 더 떠봐야지.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 이런저런 사소한 이야기 를 했다. 그리고 대화 도중 짐짓 갑자기 뭐가 생각난 것처럼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아! 맞아! 사라 경 그것 아세요?" "뭐가 말씀이십니까?" 내가 호들갑을 떨며 말하자 사라는 호기심이 생겼는지 관심을 보였다. 나는 마치 비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실은 며칠 전에 가스톤 경에게 웬 여자가 찾아온 것 있죠? 놀랍지 않아요?" "네에?! 하지만 가스톤 경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요!" 헉, 이 것이 왜 소리를 치고 난리야. 내가 그 여자도 아닌데 왜 나한테 성질이야? 얼 굴이 빨개져서 소리치는 사라의 모습은 확실히 차분했던 좀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짐작해오던 사실이 정말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진짜로 좋아하고 있었을 줄이야. 놀랍다. "가스톤 경은 결혼하지 않았잖아요. 여자 형제도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설마 그.... ..연인이라거나 그런 사람인가요?" 나도 모르는 사실(여자 형제가 없다)을 알고 있는 것을 보니 평소에 관심이 있었군. 그러면서 사람을 감쪽같이 속이다니. 요 앙큼한 것. 넌 바로 걸렸어. 나는 씨익 웃으 며 말했다. "가스톤 경의 어머니셨어요. 그러니 진정하세요. 그런데 말이죠 왜 그렇게 흥분하시나 요? 서얼마......" "그런 것 아닙니다!" 사라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재빨리 손을 내저으며 말했지만 그런 모습이 더 욱 의심스러웠다. 당황하고 있다. 당황하고 있어. 나는 매우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그녀를 보면서 말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요. 그런 것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아직 본론도 꺼내지 않았는데 혼자 당황해서 말실수를 한 사라 는 어쩔 줄 몰라했다. 이건 자기 스스로 시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랬던 것이야. 그랬었군. 그래서 뻔질나게 찾아왔던 것이야. 우후후. 나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사 라에게 말했다. "사~라~경,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은데요." 좋게 불어.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한테 다 말해버린다. 어서 말해봐. 사라는 내 눈빛을 보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내 웃음이 점점 짙어지자 결국 포기를 하고 솔직히 말하기 시작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게 무슨 감정인지......하지만 가스톤 경과 함께 있으면 굉장히 편안한 기분이에요. 그래서 자꾸 찾아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살짝 볼을 붉히는 사라. 이건 어디로 보나 좋아하는 거야! 단순한 호감을 가 진 정도로 여자가 찾아왔다는 말에 그렇게 흥분할 리가 없잖아. 이럴 수가! 예상은 하 고 있었지만 직접 사라의 입으로 들으니 놀라웠다. "사라 경,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사라 경은 가스톤 경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가스톤 경에게 여자가 찾아왔다고 했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그 때 경의 반응으로 봐서 단순 한 호감은 아닌 것 같은데." 사라는 잠시 아무 말이 없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정말 가스톤 경을 좋아하는 건가요? 그동안 저도 계속 그런 게 아닐까 생 각은 해왔지만 한번도 누구를 좋아해 본 적이 없어서 이런 감정이 사랑이라는 건지 몰 랐어요. 하지만 가스톤 경에게 여자가 찾아왔다는 말에 왠지 모르게 화가 났어요. 제 가 화를 낼 만한 입장이 아닌데도 말이에요. 우습죠?" "아니예요! 그럴 리가 있겠어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좋은 일이라구요!" 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앞으로 재미있겠어. 사라가 가스톤을 좋아한단 말이지. 우 후후후. 앞으로 상당히 즐거운 일들이 일어날 것 같아 웃음이 절로 새어나왔다. 나의 천진한 웃음, 다른 사람들은 사악한 웃음이라는 그 웃음을 용기를 가지라는 격려하는 의미의 미소로 위장하는 일은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었지만 성공했다. 미소를 지으면서 나는 가장 궁금한 점이고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을 물어보았다. "저기 사라 경, 도대체 가스톤 경을 왜 좋아하게 된 거죠? 솔직히 그렇게 잘생긴 것도 아니고, 검술실력도 뛰어난 편이지만 최강은 아니고,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저를 여자라고 특별하게 대하곤 했지요. 저는 그런 점이 싫었어요, 그 들은 저를 신경 써준다고 그랬겠지만 저는 여기사가 아니라 같은 기사로 대우를 받고 싶었어요. 그런데 가스톤 경은 저를 같은 기사로 대해주었습니다. 그 때 얼마나 기뻤 는지 몰라요. 처음에는 훌륭한 기사로 생각했었는데 저도 모르게 점점 좋아하게 돼버 린 모양이예요." 자신을 인정해준 남자에게 마음을 허락한 건가. 그럴 수도 있겠구나. 사라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다 갑자기 안색을 바꾸고 약간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가스톤 경이 잘 생긴 건 아니지만 얼마나 남자같이 생겼어요? 얼굴은 허애서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다른 남자들에 비하면 얼마나 멋져요! 그리고 실력도 그 정도면 훌륭한 편이지요. 게다가 실력은 앞으로도 계속 늘 수 있는 문제잖아요." 하아, 지금 나한테 따지는 거야? 내가 가스톤이 별로라고 말해서? 니가 완전히 눈에 콩깍지가 씌였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공주를 흘겨 보면서 말할 수 있는 거야! 요 즘 내가 너무 부드러운 이미지로 나갔나? 한 번 이미지 변화를 줘봐. 나는 가스톤이 모자라다는 말이 나오자 흥분하는 사라를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가스톤이 좋다지 만 그렇게 따질 건 또 뭐란 말인가. 아주 감싸고 도는데? 이거 나중에 가스톤에 대해 말할 때 조심하지 않으면 된통 당하겠어. 내 시선을 느끼고 자신이 지금 얼마나 천인공노할 짓을 했는지 사라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지만 이미 째려본 후였다. 한동안 도대체 사랑이란 감정이 무 엇이기에 별 말도 아닌 말에 그런 반응을 보이나 생각해보았지만 이성간의 사랑을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었던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사항이었다. 에이. 어차피 내 가 누구를 사랑하는 것도 아닌데 아무렴 어때? 사랑하면 다 저러나 보지 뭐. 나는 대 충 사라의 반응을 편한대로 이해하고 앞으로 이일을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해보았다. 이대로 가만히 놔둘 것인가.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이런 재미있는 일을 가만히 지켜 보기만 할 수는 없지. 나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사라를 쳐다보았다. "왜, 왜 그러시죠?" 내 강렬한 눈빛에 사라가 당황했는지 약간 불안한 얼굴이었다. 애는 겁먹지 마. 내가 다 널 위해서 이러려는 것 아니겠니. 짝사랑을 한다는데 도와줘야지 않겠어. 이래봬도 나는 아주 착,한, 마족이야. 단순히 재미있을 것 같아서였지만 그래도 도와주는 건 도와주는 거였다. "사라 경, 도와줄게요." "뭐,뭘요?" "에이~ 다 알면서......걱정말아요. 내가 팍팍 밀어줄 테니까요. 오홋홋호~." 손으로 우아하게 입을 가린 나는 신이 나서 웃었다. 앞으로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 같 은 예감이 들었다. 사라를 도와주기로 결정한 나는 다음날도 어김없이 훈련장을 찾아갔다. 운이 좋았는 지 가스톤의 모습이 바로 보여 나는 냉큼 그 곳으로 달려갔다. 가스톤은 언제나처럼 머리도 새집처럼 부스스하고 옷도 여기저기 구겨져 있는, 전체적으로 털털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언제나 깔끔하게 하고 다니는 사라가 대비되어 보였다. 아무리 제 눈에 안경이라지만 왜 좋아진 걸까? 가스톤을 보자 자연스럽게 사라가 떠올랐고 내 입술은 곡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나는 씨익 웃음 그를 불렀다. "가스톤 경, 사실은 경에게 몇 가지 물어볼게 있거든요. 물어봐도 되죠?" "네? 뭐를 말입니까?" 유난히 기분이 좋아보이는 내 모습에 가스톤은 움찔했다. 지금 내 모습을 볼 수는 없 지만 가스톤의 반응으로 봐서 눈이 반짝이다 못해 광선이 나갈 정도로 번쩍이나보다.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후후후. 계속 웃음이 새어나왔지만 바짝 긴장하는 가스 톤을 보고 더 이상 약한 존재를 괴롭히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어렵게 표정을 수습했다. 그리고 필살의 의지로 웃음을 꾹 참고 가스톤이 사라를 어떻게 생각하나 알아보고자 질문을 던졌다. 물론 직설적인 질문은 피했다. 사라가 가스톤에게는 절대 말하지 말라 고 했기 때문이다. 어울리지 않게 부끄러움은...... "가스톤 경도 이제 나이도 제법 됐는데 결혼할 생각 없어요?" 내가 자신을 보고 실실 웃다가 표정을 수습했다가 다시 히죽거리자 불안해하던 가스톤 은 의외로 평범한 질문을 하자 안도한 기색이었다. 도대체 무슨 질문을 할 줄 알았던 거지? 가스톤은 냉큼 내 질문에 답했다. "물론 하고 싶지요." "에? 그럼 왜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은 거예요?" 내 말에 가스톤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평소의 유쾌하고 털털하던 모습과 는 달리 굉장히 쓸쓸해 보여서 왠지 실수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런 표정 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러나 내 생각이 얼마 가기 도 전에 가스톤은 금새 평소의 얼굴로 돌아와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을 혼자 하는 겁니까? 상대가 있어야지요! 어째서 저 같은 나이스한 남자를 여자 들은 몰라주는 걸까요? 도대체 이유가 뭐냔 말입니까! 아! 혹시 이런 질문을 하시는 이유는 마리엔 공주님께서 제게 멋진 여성을 소개시켜주기 위해서입니까?! 역시 너그 러우시고 아름다우신 주군밖에 없어!" 오랜만에 가스톤의 닭살스럽기 그지없는 찬양이 작렬했다. 결혼에 이렇게 처절해지다 니. 100년도 못사는 인간에게는 역시 자손을 남긴다는 일은 큰 의미였던 모양이다. 조 금 전에는 내가 잘못 본 게 틀림없어. 지금 치맛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는 인간의 어디 를 봐서 그런 우울한 표정을 지을 인간 같아? 간신히 가스톤을 떨쳐낸 나는 그 덕분에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어야만 했다. 어찌나 달라붙던지 몇 번이나 손에 들린 애창 으로 두들겨 패고 싶었지만 물어볼 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정말 사 라를 말리고 싶은 충동이 느껴진다. 어찌저찌해서 소동이 가라앉은 후, 나는 그에게 못 다한 질문을 했다. "그럼 혹시 좋아하는 사람은 없나요? "여자이라면 모두 좋은데요." 가스톤은 계속 추궁해도 여자라면 모두 좋아, 라는 이야기만 했지 진지함은 보이지 않 았다. 왠지 대답을 회피하는 기분도 들었다. 대답하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더 이상 뭘 알아내겠는가. 나는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물어 보았다. "요즘 사라 경이랑 자주 대련을 하던데 경은 사라 경을 어떻게 생각해요?" "그거야 훌륭한 기사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거 말고는요?" "장래가 촉망되는 기사라고 생각하는데요. 성격도 여자치고는 털털한 것 같다고 생각 하는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에게, 겨우 그 것뿐이야? 아직은 좋아하지 않는 건가? 나는 왜 이런 걸 물어보냐는 가 스톤에게 대충 대꾸해주고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 이번에는 제 4기사단의 기사들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가스톤이 거짓말을 했는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하지만 오랫동안 가 스톤을 봐온 제 4기사단의 기사들이라면 가스톤이 과연 오리발을 내밀었는지, 아니면 가스톤의 이상형이 어떤 여자인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쓸데없이 눈치만 늘어 쉽게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가스톤이 사귀는 여자가 있냐고요? 그런 건 왜 물으십니까?" "그냥 궁금해서요. 나이가 있으니까 혹시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죠." "공주님께서 왜 가스톤에게 여자가 있는지 없는지를 궁금해하는 겁니까? 혹시 가스톤 을......" 나는 헛소리를 하고 있는 죠안을 노려보았다. 이 인간이 못하는 소리가 없네. 뭣이 어 쩌고 저째? 그리고 너희들은 죠안의 입을 막지는 못할망정 왜 그렇게 동감이라는 얼 굴이야?! 어째 갈수록 뻔뻔해진단 말이야. 처음에는 그래도 순진했는데. 누가 애들을 이렇게 물들인 거야? 제 4기사단이 들었다면 '누구긴 누굽니까? 공주님이시지요.' 라 고 말했을 것이지만 일어나지 않은 사실은 뒤로 제쳐두기로 하겠다. 나는 그리 유쾌하 지 못한 오해를 벗고자 어제 있었던 일을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잠깐 모두 이리 모여봐요. 사실은 어제 말이죠......" 내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그들의 놀라움은 커져갔다. 충분히 놀랄만한 일이지. 하지만 놀라운 만큼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지. 나와 같은 생각인지 사정을 모두 들은 그들의 눈은 처음 놀라워할 때와는 달리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건 정말 말도 안됩니다. 저같은 미남이 있는데 어째서 가스톤 경이죠? 또 가스톤 경이 저와 나이가 비슷하다면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젊고 근사하고 매너좋은 절 제쳐 두고 이럴 수 있습니까?" 아, 미첼로를 잊고 있었군. 여전히 모든 여자들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착각에 빠져있군 . 저것도 병이야. 병. 우리는 하소연을 하는 미첼로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동시에 고개를 돌리고 그를 무시했다. 미첼로의 말이 큰 중요성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현명한 판단이었다. "이제 이유를 알았겠죠? 그러니 가스톤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지 말해봐요." "제가 알기로 만나는 여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하는 걸로 봐 서 따로 좋아하는 여자는 없어 보이던데요. 아, 이것도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는데 예 전에 아주 글래머한 몸매의 뒷골목 여자가 가스톤을 유혹했는데도 넘어가지 않았습니 다. 그 때 어땠냐하면 말입니다." "커흠! 흠흠!!" 마르크가 뒷골목 여자의 경우까지 들어 아주 자세히 설명해주려 하자 보나인이 크게 헛기침을 하며 눈치를 주었다. 고상하지 못한 내용의 말이 더 이상 나오지 못하게 하 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인간 남성들은 욕구를 분 출할 수 있는 상대가 없을 때 가끔 그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여성을 찾아간다고 들 었다. 하지만 '아, 나도 알아.' 라고 나서기에는 분위기가 이상해 가만히 있었다. 그 게 나쁜 일인가? 서로의 합의 하에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들었는데. 왜 말하길 기피하 지? 그렇게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인간들의 가치관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마르크의 말 그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기사들은 안심하는 반면 마르크에게 가공할만한 눈치를 주었다. "그럼 이상형은 어떤 여자인지 아세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가스톤이 여자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없어서 말입니다." 나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기사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가스 톤은 여자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인간들은 이성에 대한 호기 심이 굉장하다고 들었는데 왜 그러지? 가끔 동성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던데 가스톤 도 그 부류인가? 언젠가 인간 중에는 가끔 이상한 취향을 가진 인간들이 있으니 주의 하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내가 나중에 생각하면 황당해할 생각을 진지하게 하 고 있을 때, 말실수를 해서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마르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스톤의 이상형이라면 제가 알고 있는데요." 우리의 시선은 동시에 그에게 쏠렸다. "제가 가스톤과 벌써 8년지기 친구가 아닙니까. 예전에 둘이 술을 잔뜩 마시다가 그 녀석이 술에 취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자기는 새하얀 얼굴에 찰랑거리는 금발 과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좋다고요. 아무래도 가녀려 보이는 여자를 좋 아하는 것 같던데요." 마르크의 도움으로 우리는 가스톤의 이상형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발 생했으니......사라랑 전혀 딴판이잖아! 사라가 우락부락한 덩치는 아니었지만 훈련 때문에 탄탄한 체격이었고 피부도 약간 그을린 상태였다. 머리색도 눈색도 틀렸다. 이 거 완전히 청순가련형을 좋아하고 있었잖아. 이 일을 어쩐다. 머리색이랑 눈색은 마법 으로 어떻게 바꿔본다고 해도 나머지는 곤란한데. 그러나 이 정도로 물러설 생각은 없 었다. 반드시 이상형만 사랑하라는 법은 없잖아!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지! 나는 주먹 을 불끈 쥐고 스스로 결심을 다졌다. "이상형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어. 반드시 사라를 좋아하게 만들겠어!" 내 말에 제 4기사단의 기사들도 덩달아 외치기 시작했다. "저희도 공주님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가스톤 녀석은 그대로 놔두면 평생 총각 귀신으로 늙어죽을 겁니다! 도저히 친구로서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제가 아닌 가스톤 경을 좋아한다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저는 모든 여성들의 편입 니다. 당연히 사라 경을 도와드려야지요." 시큰둥하던 미첼로까지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기로 했다. 나와 제 4기사단은 저마다 ' 가스톤을 위해서' 라는 기치를 내걸고 똘똘 뭉친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모 두의 눈은 깜깜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었고, 약간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누군가 를 도우려는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음흉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마리엔 공주님, 갔습니다." 아인의 말에 나는 재빨리 준비해왔던 로브를 입었다. 그리고 제 4기사단의 기사들이 준비해온 후두를 써서 얼굴을 가렸다. 제 4기사단의 기사들 중 몇 명도 눈에 잘 띄지 않는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금 뭐하고 있는고 하니 바로 가스톤 몰래 그의 뒤를 밟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뒤를 밟으면서 평소에 가스톤 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아내어 사라에게 일러줄 생각이었다. 그리 고 혹시라도 말로는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고 해놓고 뒤에서 여자와 만나는 것은 아닐 까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일에 당연히 내가 빠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건 가스톤의 뒤를 밟기 위해서는 들키지 않고 무사히 궁궐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나 혼자 였다면 예전처럼 마법을 써서 빠져나갔겠지만 이번에는 제 4기사단의 기사들도 함께 행동하기 때문에 부득이 이런 변장을 해야했다. 그렇다고 제 4기사단의 기사들이 우루 루 다 몰려가면 '지금 우리는 수상한 일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라고 광고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선택된 몇 명만이 나와 함께 가기로 했다. 이 몇 명을 고르는 과정은 정말 치열했다. 누구라고 이런 재미있는 일에 빠지고 싶겠 는가. 서로 자신이 가겠다고 주장해 결국 공평하게 가위바위보로 함께 갈 다섯 명을 선정했다. 그렇게 뽑힌 축복받은 다섯 명의 사람은 죠안, 미첼로, 아인, 보나인, 엔도 우였다. 그러나 선택받지 못한 다른 기사들의 반발이 워낙 심해 가스톤의 추적을 맡은 일행은 추적이 끝난 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고해야했고, 왕성 안에서는 다른 사 람들이 가스톤을 감시하기로 했다. 물론 이렇게 정하지 않아도 바로 달려와서 그 날 있었던 일을 재잘거릴 것 같았지만 말이다. 그 날부터 왕성 내에서는 알게 모르게 수 많은 눈들이 가스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왕성을 나가려는 이 순간, 드디어 우리 팀(나, 보나인, 죠안, 미첼로, 아 인, 엔도우)이 활약할 차례가 온 것이다. 다른 기사들의 응원을 뒤로 한 채 나와 다섯 명의 기사는 가스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의 뒤를 따라갔다. 가스톤은 우리 가 자신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발걸음을 옮 기고 있었다. 조심하자. 여기서 들키면 안되지. 우리는 최대한 기척을 지우고 조심에 조심을 하고 있었다. 가스톤의 뒤를 계속 따라가던 우리는 가스톤이 성문을 빠져나가 자 우리도 따라 나가려했다. 그러나 성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 중 한 명이 우리를 불러 세웠다. "잠깐 기다려주십시오! 저 분은 누구십니까?" 경비병은 나를 수상하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왕성 안에서 후두 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니 수상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지. 하지만 미리 생각해둔 것 이 있었기에 우리 일행은 여유로웠다. "이 쪽은 내 여동생인데 무슨 불만이라도 있나?" 미첼로는 계획대로 띠거운 표정을 지으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우리를 불러 세운 경 비병은 감히 기사를 화나게 했다는 생각에 쩔쩔매긴 했지만 그래도 내 쪽을 보면서 물 었다. "미첼로 경의 여동생이십니까? 그런데 왜 후두를 쓰고 계시는 거죠? 말을 하면 목소리 때문에 들킬 염려가 있어 잠자코 있었다. 그런 나를 대신해서 나선 사람은 미첼로였다. "내 동생이 너무 예뻐서 남자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미첼로는 위압적인 태도로 짜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미첼로, 힘내라! "이봐. 우린 바쁘다구! 언제까지 세워둘 참이야!" 덩달아 가장 인상이 험악한 엔도우가 소리를 치고, 다른 사람들도 현재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는 표정을 짓자 경비병들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더니 결국 통과시켜주었다. 그 러게 좋게 통과시켜줬으면 오죽이나 좋아. 때로는 너무 열심히 일을 해도 이렇게 고생 을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성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자 나는 얼굴을 가리던 후두를 벗어 버렸다. 이곳에서는 내가 공주인 것을 알아볼 사람은 없었고, 오히려 후두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면 더 눈길을 끌기 때문이다. 우리 가스톤 추적 팀은 임무에 충실해 다시 가스톤의 뒤를 밟았다. 왕 성과는 달리 거리에는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어 가스톤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 멀리 떨어져서 가면 많은 사람들 중에 목표(?)를 식별하기가 힘이 들었으므로 위험 을 무릅쓰고 가까이 접근했다. 사사삭. 우리는 재빨리 움직이면서 거리에 있는 지형를 적극 이용해 몸을 숨겼다. 거 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은 다섯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소녀가 살금살금거리며 이동하다가 갑자기 나무 뒤나 벽 뒤에 숨었다가 다시 나와서 이동하는 식으로 움직이자 이상한 눈초리로 보았다. 그러나 일행 중 누구도 그런 시선에 신경을 쓰는 인물은 없었다. 주위의 사람들의 묘한 시선을 받으며 전진한지 어느덧 한시간이 지날 무렵 드디어 가 스톤이 어느 가게로 들어가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우리는 순식간에 가스톤이 들어간 가게 앞으로 뛰어갔다. 그 가게는 술집이었다. 그런데 보통의 주점이 아니라 상당히 고급스러운 술집이었다. 오호, 오호. 이런 술집에 뭐하러 들어갔을까? 이런 곳에는 예 쁜 여자들이 많아서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는데 말이야. 이런 데를 다니면 서 여자에 관심없는 척 했단 말이지. 나는 씨익 웃었고, 함께 온 다섯 명의 기사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휘익~ 가스톤, 딱 걸렸어." "분위기 좋을 때 나가서 방해해줄 테다." "넌 오늘 약점 잡혔다." "이런 곳을 다니다니......" 이 가게 안에 들어가면 가스톤이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가스톤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후두를 다시 썼고, 나머지 사람들은 순식간에 근처에 있는 옷가게에서 후드를 사왔다. 전원 후두를 쓴 일행은 확실히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정체 를 감추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후두를 뒤집어쓴 우리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나무로 만들어진 문은 약간의 마찰음을 내며 열렸고, 열린 틈 사이 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들어서자 술집 안에 있던 많은 사람들의 눈이 일순간 우리 일행에게 집중되었다. 하긴 내가 봐도 수상해 보이긴 한다. 후두를 쓴 음침한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여섯 명이나 되니까 말이다. 우리는 일단 구석에 있는 테이블로 가 앉았다. 간단한 음식을 주문하고(이런 곳에서 음식도 주문하지 않고 앉아있으면 더욱 수상해 보인다) 주변을 둘러보니 예상대로 몸 매 좋고 예쁜 여자들이 주문을 받고 있었고,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음유시인들도 있었다. 눈요기거리가 많은 탓인지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그 속에서 가스톤을 찾아 헤매던 12쌍의 눈동자는 바 앞에서 서서 주인과 이야기하고 있는 가스톤을 발견 했다. 주인은 섹시하고 요염한 미녀......가 아니라 우락부락한 덩치를 자랑하는 40대 후반의 남자였다. 여기저기 흉터가 있고 한쪽 팔이 의수인 것으로 봐서 퇴역 용병인 것 같았다. 그와 가스톤은 서로 안면이 있는지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술집 안에 사람들이 많아서 그들의 대화는 이 곳까지 들리지 않았다. 으,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거지? 시끄러워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 쪽을 살짝 쳐다보면서 계속 관찰했다. 도대체 여기 온 이유가 뭐야? 계속 주인이랑 이야기만 하고 있잖아. 한동안 가스톤이 이 곳에 온 이유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나는 가스톤이 일어날 기미를 보이자 약간 의외였 다. 어? 벌써 가려는 거야? 제법 오래있을 줄 알았는데 20분 정도밖에 안 있네. 그나 저나 저 남자랑 이야기한 것 빼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잖아. 그냥 저 남자랑 이야기 하려고 온 건가? 하지만 미남도 아닌 저런 남자를 만나러 굳이 올 필요가 있단 말인가 . 그러나 그 의문은 금새 풀렸다. 가스톤은 주인에게 붉은 액체가 든 술병을 받아들고 가게를 나섰다. 아마 술을 사러 온 모양이었다. 겨우 술을 사러 이런 고급 술집에 온 거야? 술이라면 다른 데서도 사 도 되잖아. 그런 생각에 나는 작게 투덜거렸다. "에게? 겨우 저거 살려고 여기 왔단 말이야? 아무데서나 사면 되는 것 아냐?" 그러나 나와는 달리 다섯 명의 남자들은 수긍이 간다는 눈치였다. 그리고 이해하지 못 하는 나를 위해 설명해주었다. "저 술은 보통 술이 아니라 훼르디낭이라는 술입니다. 만년설이 내리는 지역에서 자라 는 아베 열매를 담아서 만든 술이지요. 아베 열매는 구하기도 힘든데다 3-4년 동안 열 매를 알코올에 담아서 만들기 때문에 손이 많이 갑니다. 훼르디낭을 만들 수 있는 사 람도 많지 않습니다. 술 자체도 도수가 높지만 특유의 화한 맛 때문에 귀한 술 중에 하나입니다. 아마 미리 주문을 해서 찾으러 온 모양입니다." 왠지 맥이 풀리네. 여자를 만나는 거였으면 잔뜩 골려줄려고 했는데. 아니야. 사라를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잘된 거야. 나는 허탈하면서도 다행이라는 표정을 동시에 지었다 . 다른 사람들도 거의 비슷한 표정이었다. 그런 복잡다단한 감정을 느끼면서 우리는 재빨리 돈을 지불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있다가 가스톤을 놓칠 수는 없는 일 이었다. 가스톤은 술집을 나와 빵집에 들어서 빵을 하나 사서 입에 물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돌 아다니다가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오늘 알아낸 것은 가스톤이 모카빵과 훼르디낭 을 좋아한다는 것,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가스톤의 뒤를 밟아 저택 앞까지는 왔지만 경비병들 때문에 저택 안까지는 들어갈 수는 없었다. 죠안의 말 로는 원래는 수도 변두리에 있는 허름한 저택에서 살았지만 글로리 라이언에서 우승한 상금으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저택을 샀다고 한다. 저택은 왕성에서 지내는 내가 보기에는 작아 보였지만 객관적인 기준으로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저택 이었다. 하얀 색의 깔끔한 저택의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계속 배회했지만 가스톤은 다시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늘 은 이만 돌아가야 하나? 그래도 수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잖아. 일단 만나는 여자는 없는 것 같고, 좋아하는 것도 알았으니까. 결국 우리는 오늘의 추적은 이만 끝내기로 하고 돌아서려 할 때였다. "혹시 보나인 경 아니십니까? 아, 맞군요. 왜 여기서 이러고 계십니까? 가스톤 님을 만나러 오셨으면 안으로 드시지 그러십니까?" 갑자기 누군가가 말을 걸자 우리 일행은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 는 벗져긴 머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대머리 노인이 서있었다. 젊었을 때 고생을 많이 했는지 얼굴은 주름투성이였지만 워낙 머리가 눈에 띄어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 았다. 읏, 눈부시다. 사람 머리가 저렇게 반들거릴 수도 있구나. 모습을 비쳐보면 거 울처럼 비칠 것 같았다. 내가 대머리 노인의 머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보 나인이 그를 알아보고 말했다. "바르 집사군. 됐네. 단원들과 함께 이 부근을 지나다 우연히 들러본 걸세." 보나인이 대충 핑계를 대고 바르라는 이름의 가스톤이 살고있는 저택의 집사의 제안을 거절했다. "기사분들요? 이런!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죠안 경과 엔도우 경, 미첼로 경, 아 인 경도 와 계셨군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저 소녀는 누구입니까? 처음 보는 분인데요." 우리 일행을 둘러보던 바르는 낯익은 얼굴 속에 끼어있는 낯선 사람을 보고 물었다. 당연히 그 낯선 사람은 나였다. 보나인은 바르의 질문에 행여나 누가 들을세라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놀라지 말게. 바로 이 분이 제 1공주이신 마리엔 오페나 드간 페드인 공주님이실세." 바르는 보나인의 말에 눈을 왕방울만하게 뜨고 나를 보았다. 그리고 공주를 직접 본 놀라움이 너무 컸는지 패닉상태에 빠져버렸다. 이거 참, 그렇게 온 몸으로 놀라움을 표현할 것까지는 없는데 말이야. 하긴 제 1공주나 되는 여자가 이런 차림으로 이런 곳 에 왔다는 것 자체가 놀랄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게다가 바르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주인인 가스톤의 주군인 공주를 처음 보는 것이니 그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 니었다. 하지만 나이도 드신 분이 그런 모습을 하는 건 좀 그렇군요. 어서 표정을 수 습하시지요. 보기 참으로 민망합니다. 머리만도 보기 민망한데 말이지요. 내 마음이 통했는지 바르는 곧 패닉 상태에서 벗어나서 큰 소리로 외쳤다. "마리엔 공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서 저택으로 드시지요! 당장 가스톤 님께 연락하겠습니다!" 아주 동네방네 소문을 내라. 기겁한 기사들이 그의 입을 막지 않았다면 아마 이 근처 에 사는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모두 몰려왔을 것이다. 나는 혹시나 바르의 말을 들 은 사람이 있을까봐 주위를 살펴보았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주위에는 우리를 제외하고 는 아무도 없었다. 눈치없게 무슨 짓이야! 옷차림을 보면 지금 잠복 근무(?) 중인 것 몰라?! 나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바르를 보았고, 바르는 입이 막힌 가운데에서도 자신 이 내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것을 알고 사죄를 했다. "저아 이오아이아(정말 죄송합니다)." 물론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대충 눈치껏 죄송하다는 내용의 말이려니 생각했다. "바르, 지금 마리엔 공주님께서는 평민들의 삶을 친히 시찰하시고 계신 걸세. 그러니 이 일을 절대 함구하지 말게나. 물론 가스톤에게도 말해서는 안되네. 자네만, 오직 자 네 혼자만 알고 있게. 알겠나?" 보나인이 약간 위협조로 말하자 바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나인은 바르에게 오늘 일 을 발설하지 않을 것을 다짐받고 나서야 비로소 그를 풀어주었다. 가스톤 추적은 그만 큼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보나인의 손에서 벗어난 바르는 바짝 긴장 해서 내 눈치를 슬슬 살폈다. 자신이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는 않았나 걱정하는 모양 이었다. 나는 경직돼있는 바르에게 별로 화나지 않았다는 뜻으로 생긋 웃어주었다. 당 시의 내 속마음은 이랬다. 집사라니까 가스톤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거야. 구슬려서 알 아봐야지. =============================================================================== 의도하지 않은 연참을 해버렸습니다 ^^ 어떻게 하다 보니 어제 두 편을 썼습니다 그냥 비축분으로 남겨둘까 했는데 그냥 올립니다. 어제 비평을 보면서 저런 문제점이 있구나 생각했답니다 ^^ 가장 걱정되는 건 다른 캐릭이 죽는다는 것과 진행속도가 느리다는 것. 그래서 이 쳅터 끝나면 외전을 좀 넣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앞부분 수정도 좀 하구요. 수정은 아마 있는 글을 고치는 것일테니 연참이 가능할 듯 ^^ 앞으로 진행속도도 좀 빨리 할 생각입니다. 너무 왕성에서만 있었던 듯 하네요. 참, 그런데 환생판타지 카인하고 이타라(확실히는 모르겠어요)의 상자 읽으신 분 계시 나요? 제 글이 그것과 좀 비슷하다고 해서 궁금해요. 혹시 읽으신 분이 계시면 어느 부분이 비슷하고 어느 부분이 다른지 좀 알려주시면 감 사하겠습니다. 연참했으니까 대신 제 부탁 조옴~ 들어주심 안돼요~? 아무리 가스톤의 뒤를 밟아 그에 대해 알아낸다 해도 이 정보를 써먹지 않으면 의미 가 없다. 그래서 나와 제 4기사단의 기사들은 각각 사라와 가스톤을 책임지고 피크닉 에 데려오기로 했다. 이번 기회를 통해 가스톤이 사라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만들 생 각이었다. 피크닉은 가스톤의 뒤를 따라가면서 알아낸 그가 자주 가는 언덕으로 가고 싶었지만 내 사정상 부득이 내 궁에 딸린 정원으로 가게 되었다. 그 곳에만 가면 가스 톤이 폼을 잡아서 거기가 더 분위기있을 것 같았는데 현실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비록 그 장소에는 갈 수 없다고 하더라도 수도 외곽에 있는 그 곳까지 쫓아간 나와 가 스톤 추적팀원들의 무서운 집념은 길이 새길만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정원이 피크닉 장소로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다. 정원은 마침 낙엽이 지고 있 고, 겨울이 오기 전에 자신의 아름다움을 모두 뿜어내려는 듯이 마지막 아름다움을 선 보이려는 꽃들로 인해 한결 운치있는 장소로 변모했다. 다만 피크닉은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약간의 불만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제 4기사단의 기사들과 말해둔 대로 사라를 찾아가서 피크닉에 대해 말했다. 사 라는 나와 제 4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이 가는 피크닉에 자신이 왜 끼는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그래서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이번 피크닉이 그녀를 위해 계획된 것 이며, 든든한 우방이 아주 많다는 이야기도 덧붙여주었다. 내 말을 통해 많은 사람이 자신이 가스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라는 볼을 붉혔다. "그런 이야기는 왜 하신 거예요?" 나를 원망스럽다는 눈으로 보는 사라. 왜냐니? 가스톤에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지 다 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는 말은 없었잖아. 그리고 제 4기사단 외의 사람에게는 말하 지 않았다 뭐. 또 제 4기사단 기사들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도움도 받지 못했을걸. 나 는 후자의 이유만 말해주었다. 어찌 재미있을 것 같아서 말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 랬다가는 당장에 칼이 날아오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어쩔 수 없었어요. 가스톤이 따로 만나는 여자가 있는지 알아보려고 물어봤는데 이유 를 가르쳐주지 않으면 말해주지 않겠다고 했거든요. 그리고 그들의 도움으로 가스톤이 좋아하는 것이나 싫어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구요." 열에 일곱이 추적해서 얻은 정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가 공주인데 이미지 관리를 해야지. 만나는 여자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았다는 말에 사라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재빨리 물어보았다. "그래서요?" 성질도 급하지. 성격이 호탕한 건 좋은데 가스톤은 청순가련한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 던데 괜찮으려나? 그러나 성격을 한순간에 바꿀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나는 우선 사라 의 궁금증부터 풀어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알아본 바로는 현재 만나는 사람은 없었어요. 그리고 모두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열심 히 해야해요.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내일 있을 피크닉에 꼭 나와요. 알았죠?" 사라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은 건 그녀를 가스톤이 좋아할 만한 여성으 로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가스톤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미리 숙지시켜두는 일이었다. "사라 경, 그래서 말인데요......." 같은 시각, 제 4기사단의 훈련장에서는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보나인과 미첼 로, 죠안, 마르크는 가스톤을 둘러싸고 그에게 피크닉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었 다. 기사단 전원이 권하면 의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수의 사람만이 나선 그들의 치밀함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피크닉? 기사단 전원이 참석하는 겁니까?" 가스톤의 말에 보나인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설마...이 많은 수가 어떻게 다 피크닉에 가겠어? 여기 있는 우리 4명만 갈거야. 가 스톤, 너도 가는 게 어때?" '많은 수가 몰려가면 분위기가 살지 않지. 그리고 피크닉에 가는 건 네 명뿐이지만 주 위에서 훔쳐보는 놈들까지 합치며 꽤 될걸.' 보나인의 속마음을 알 수 없었던 가스톤은 상당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 그렇지 않아도 요즘 우울해있던 참이었다. 일의 발단은 요전에 마리엔이 그에게 좋 아하는 여자가 있냐고 물어봤을 때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래 서 몇 년 동안 가지 않았던 추억이 담긴 언덕에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하는 일이 많아 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언덕 위에 있는 나무에 기대서서 멍하니 있는 자신 을 발견하곤 했다. 이제는 괜찮다고, 모두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러나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선명히 떠오르는 얼굴이 있 었다.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자 가스톤은 자신도 모르게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가스톤을 피크닉에 데려가야 한다 는 생각에만 사로잡혀있던 그들이 눈치채기에는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간 표정이었다. "가스톤 경, 마땅히 할 일이 없으면 오지 그러십니까?" "재미있을 것 같은데 오지 그래?" "가스톤, 비록 왕궁 정원이지만 요즘 굉장히 멋있다구. 게다가 공주님이 아주 반가운 사람도 데리고 오신다고 하셨고, 음식도 준비해오실 테니 그냥 몸만 가면 돼.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몽둥이가 무섭지 않더냐?" 누구보다 가스톤을 설득하는데 열성적인 사람은 가스톤의 8년 지기 친구인 마르크였다 . 정원의 아름다움, 맛있는 음식, 마리엔 전용 몽둥이까지 이유란 이유는 모두 들고 있었다. 이런 마르크를 가리켜 대개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친구가 아니라 웬수다 . 겉만 그럴싸하지 정작 진심으로 가스톤을 위해 이러는지 생각해 보라. 그렇게 불리 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간도 남아도는데 어때? 오랜만에 재미있게 놀자구." 마르크에 이어 보나인까지 이렇게 나오자 결국 가스톤은 피크닉에 가기로 했다. 사람 들과 어울리다보면 이런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사라를 이끌고 피크닉 장소에 도착해보니 벌써 보나인과 미첼로, 죠안, 마르크가 와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가스톤도 보였다. 보이기에는 이들만 보이지만 틀림없 이 곳곳에 많은 눈들이 숨어있으리라. 마리엔의 몸으로는 작정하고 숨은 기사들의 기 척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사라도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니 잘 숨어있는 모양이다. 내 가 사라와 함께 도착하자 모두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마리엔 공주님, 오셨습니까?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사라 경 아니십니까? 어서 오십 시오!" 보나인이 유난히 사라의 이름을 강조하며 반기자 다른 사람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는 듯이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누가 오시나 했더니 사라 경이셨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아름다우신 사라 경이 오시다니 기쁩니다." 가스톤은 사라를 열렬하게 환영하는 사람들을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보았지만 곧 사라 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의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같이 대련을 하면서 사라에게 제법 정 이 든 것이다. "사라 경, 어서 오십시오. 설마 사라 경이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가스톤과 사라가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자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의 눈은 샛별처럼 반짝였다. 이 경우는 아무리 봐도 가스톤에게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 경우였다. 행여나 가스톤이 호박을 차버리지 않도록 옆에서 보조를 해줘야 좋은 주군이 아니겠는 가. 다른 사람들도 좋은 주군이라는 부분을 좋은 단장, 좋은 친구, 좋은 후배라고만 바꾸었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우리는 잔디에 자리를 깔고 앉으면서도 은근슬쩍 가스톤의 옆자리에 사라를 앉혔다. 사라는 너무도 단합이 잘되는 우리들의 모습에 약간 당황하는 듯 했지만 이 모든 게 그대를 위한 일이 아니겠는가. 잠깐 자리의 배치를 보면 가스톤, 사라, 보나인, 나, 미첼로, 죠안의 순으로 둥글게 앉아 있었다. 나와 사라는 자리에 앉자 각자 들고 온 바구니에서 음식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내가 가져온 음식은 애플 파이와 샌드위치, 구 운 오리, 우유였고 사라가 꺼낸 음식은 모카빵과 쿠키, 훼르디낭이었다. 당연히 사라 가 꺼낸 음식은 모두 가스톤이 좋아하는 것들뿐이었다. 예상대로 가스톤은 사라가 가 져온 음식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했다. "이거 모두 제가 좋아하는 것들뿐인데요" 아는 것이 바로 힘이다. 미리 가스톤이 좋아하는 음식만 골라온 보람이 있었다. 그러 나 나는 전혀 몰랐다는 듯이 가스톤의 말에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그래요? 그건 모두 사라 경이 만들어온 거예요. 사라 경은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오겠다고 했는데 두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이 같은 모양이죠? 재미있는 우연이네 요." 당연히 사라가 만든 것이 아니다. 검술 하나만 하기도 바쁜데 언제 요리를 배울 시간 이 있었겠는가. 모두 내 궁에서 일하는 주방장이 심혈을 기울려 만든 작품이었다. 그 러나 이 순간에 주방장의 노고는 사라가 만든 음식으로 탈바꿈했다. 사라도 내가 미리 일어둔 바가 있어 어색한 미소만 지을 뿐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나와 보조를 맞춰 짐짓 놀라는 척했다. "정말이십니까? 검술만 뛰어나신 것이 아니라 요리도 잘하시는군요." "대단하십니다! 특히 모,카,빵은 단순한 듯하면서도 심오한 빵이지요." "나중에 좋은 아내가 되시겠습니다." "오! 이 맛 끝내주는군요! 가스톤, 너도 먹어보지 그래?" 그렇지 않아도 갓 구운 빵에서 나는 맛있는 냄새에 침을 꼴깍이던 가스톤은 마르크의 말에 사양하지 않고 빵을 하나 집어들었다. 빵은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락모락 김 이 나고 있었다. 잠시 손에 들린 빵을 보면서 즐거운 미소를 짓던 가스톤은 한 입 베 어먹고 나서는 탄성을 질렀다. 주방장에게 특별히 신경을 써서 일생일대의 작품을 만 들어보라고 했더니 정말 그렇게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가스톤은 순식간에 팔뚝만한 모카빵을 해치워버렸다. 빵을 다 먹은 후에도 가스톤은 눈을 감고 빵의 맛을 음미하는 것 같더니 곧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옆에 앉아있는 사라의 손을 덥썩 잡고 외치기 시작했다. "이런 맛있는 모카빵은 처음입니다! 사라 경도 이 빵을 좋아하셨군요! 게다가 이 싸하 면서도 깊은 맛. 모카빵에 대해 뭘 하시는군요!" 아잣! 모카빵 작전 성공! 모카빵의 위력은 예상 외로 강했던 듯 가스톤은 끊임없이 사 라에게 칭찬을 퍼붓고 있었다. 물론 계속 사라의 손을 잡은 채로 말이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나는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어머, 두 사람이 그러고 있으니까 꼭 연인처럼 보여요!" "네?" "네?" 가스톤과 사라는 동시에 고개를 돌리고 같은 말을 내뱉었다. 오호. 호흡 좋고. 그런 그들의 모습에 다른 사람들도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서로 호흡이 딱딱 맞는데요." "이야! 이제 보니 가스톤과 사라 경 너무너무 잘 어울리는군요." "두 사람이 같이 있으니까 보기 좋은데요." "이 기회에 사귀어버리지 그래?" 얼마나 협동이 잘되는 모습인가. 우리는 순식간에 가스톤과 사라를 하늘이 내려준 인 연으로 만들어버렸다. 사라는 우리가 휘파람을 불면서 계속 천생연분이라고 바람을 넣 자 부끄러운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땀을 삐질거렸다. 갑옷을 입고 검을 휘두르는 사라의 모습이 멋있어 보인다면 이렇게 당황하고 있는 사라의 모습은 귀여워 보였다. 평소에는 느낄 수 없었던 여성스러움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이에 반해 가스톤은, "하하하! 그렇습니까? 사라 경 같이 미인이 저와 어울린다니 기분이 좋은데요." 가스톤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래도 그 모습이 사라가 아주 싫은 것 같지는 않아 마음이 놓이는 우리들이었다. 이 분위기 아주 좋은데. 이런 분 위기에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나는 분위기를 더욱 살리고자 다시금 입을 열었다. "맞아요! 정말 잘 어울리네요." "하하하!" "두 사람은 서로 비슷한 점도 많은 것 같은데요?" "음하하하!" "진짜 연인처럼 보여요." "푸하하하!" 에라이, 이 푼수같은 인간아. 마음 같아서는 '너 자신을 알라' 라는 아주 유명한 격언 을 들려주고 싶었지만 스스로 띄어놓은 분위기를 망가뜨릴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나 중에 생각해보면 이 때의 가스톤은 진지함이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제대로 말도 못하고 웃지도 못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당시에 는 아무도 이런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가스톤은 우리가 계속 띄워주는 데다 훼르디낭까지 몇 잔 마시자 흥이 올라 노래를 부 르겠다고 자청했다. 분위기 띄우는데는 또 노래만한 것이 없었기에 우리는 흔쾌히 가 스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자신이 지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기 때문에 약간의 놀라움과 기대를 가지고 귀를 기울였다. 나는 새소리에 일어난다오. 아침 식사는 계란 후라이! 팬케익도 있다오! 여기에 닭고기 구이만 있다면 바랄 것이 없다네. 에에에! 크윽! 음정, 박자, 리듬 뭐 하나 맞는게 없어! 저건 노래가 아니라 괴물의 울음소리야 . 나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능가하는 가스톤의 노래를 피하기 위해 귀를 틀어막았다. 그리고 그건 가스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집어치워!" "누굴 죽일 작정이냐!" "누가 저 자식 입 좀 막아!" 폭언과 폭력으로 간신히 가스톤을 잠재운 우리는 아직도 끔찍한 노래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시는 가스톤에게 노래를 시키면 내가 마족이 아니다. 내 평생 저런 음치는 처음이다. 그래도 자기 잘못은 아는지 가스톤은 괴로워하는 우리를 보면서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이상했습니까?" 니가 한번 들어봐라. 그건 인간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니었어! 나와 그 자리에 있 던 사람들은(심지어 사라까지) 그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다시 한번만 노래를 부르면 죽인다는 의미가 가득 담겨있는 살벌한 눈초리들이었다. 사라는 이보다는 덜했 지만 심기가 불편하다는 사실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너무하세요. 저는 분위기를 띄우려고 했는데. 날 알아주는 사람은 왜 없는 거지?" 짐짓 슬픈 척하며 절규하는 가스톤. 사라만 없었으면 저 가증스러운 가스톤을 어떻게 해버리련만 그럴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가스톤은 자신의 주변으로 분노의 오 로라가 밀려오자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목숨이 아까운 줄은 아는 인간이었다. "자! 이번에는 사라 경의 노래를 들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사라 경은 노래를 잘하 실 것 같은데요." "네? 저요? 노래는 잘 못하는데요." 사라가 갑자기 화살이 자신에게 향하자 손을 내저으며 사양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대 환영이었다. 아직도 가스톤의 노래가 귓가를 떠나지 않고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대 로 가면 오늘밤에는 틀림없이 악몽을 꿀 것이다. 가스톤의 노래를 머릿속에서 지우기 위해서는 다른 노래로 그 노래의 여운을 희석시킬 필요했다. 그리고 이런 이유가 아니 더라도 한번 사라의 노래가 듣었다. 사라는 계속 못한다고 뒤로 뺐지만 우리들의 열렬 한 반응에 어쩔 수 없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약간은 긴장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연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조용히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람이 불어오면 나는 항상 귀를 기울이지요. 그대의 말이 바람을 타고 전해질까 봐. 부디 당신의 행복한 목소리가 들리기를 기도해요. 바람이 불어오면 나는 항상 숨을 들이마시지요. 그대의 숨결이 바람을 타고 전해질까 봐. 부디 당신의 편안한 숨결이 느껴지길 기도해요. 바람이 불어오면 나는 항상 눈을 감지요. 그대의 미소가 바람을 타고 전해질까 봐. 부디 당신의 환한 미소가 보이길 기도해요. 바람이 불어오면, 바람이 불어오면 나는 행복하게 미소짓는답니다. 바람 속에 있는 당신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지요. 바람이 불어오면, 바람이 불어오면 나는 눈물을 흘린답니다. 바람 속에 있는 당신은 내게서 너무 멀리 있으니까요. 가늘지는 않지만 깨끗하고 힘있는 중성적인 매력이 돋보이는 목소리였다. 사방으로 울 려 퍼지는 아름다운 음색의 노래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라가 노래를 저렇게 잘했던가. 대단해. 이 정도면 가스톤도 완전히 반해버리겠는걸. 아닌게 아니라 내 우 측에 있는 미첼로는 사라의 노래에 완전히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그러나 슬쩍 가스톤 쪽을 쳐다본 나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그의 모습을 보았다. 가스톤은 금방이라도 울 듯한 눈으로 사라를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노래에 감동을 받아서 그렇다고 하기엔 그 모습은 너무나 슬퍼 보였다. 나로서는 가스톤이 왜 그렇게 슬퍼 보였는지, 왜 그렇게 무엇인가를 그리워하는 모습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시, 실례하겠습니다." 결국 사라의 노래가 끝나자 가스톤은 그 한마디만 남기고 도망치듯이 사라져버렸다. ------------------------------------------------------------------------------ 두개의 비평을 들었답니다. 도움이 아주 많이 됐어요 ^^ 그래서 이번화는 마리엔의 감정표현을 좀 자제해봤습니다. 서술식으로 고치기도 하고 해봤는데 어쩌시나요? 이번 챕터끝나면 앞부분은 전면적인 수정에 들어가려고 해요. 뒤에 부분까지 하려면 너무 진도가 나가지 않을 것 같아 뒷부분은 출판본 수정할때 할 려구요. 아마도 글분량이 짧은 부분까지 수정하지 않을까 해요. 그럼 여러분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나는 지금 멀리 보이는 아담한 저택의 모습을 보면서 고민에 잠겼다. 현재 내가 서있 는 곳은 바로 가스톤의 저택 앞이었다.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이유는 바로 어제 가 스톤의 이상한 반응때문이었다. 피크닉은 갑자기 돌아가버린 가스톤 때문에 흐지부지 하게 끝나버렸다. 애초에 가스톤과 사라를 위해 열린 피크닉이었는데 주인공인 가스톤 이 가버렸으민 우리끼리 뭘 하겠는가. 음식만 대충 먹고 헤어져버렸던 것이다. 제 4기 사단의 기사들도 황당해하던 것을 보면 가스톤이 돌아간 이유를 모르는 것 같았다. 이 몸이 친히 마련한 자리를 엉망으로 만들었겠다, 가스토온~. 괘씸한지고. 확 마계로 떨어뜨려버릴까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가스톤 의 쓸쓸해보이던 표정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원인을 알 수 없었던 나는 이 렇게 오랫동안 가스톤을 보아온 사람을 찾아온 것이다. 아마 바르 집사라고 했지. 그러나 나는 한가지 난관에 부딪치고 만 것이다. 어떻게 바르 집사를 만나지? 경비병 에게 '나 공주야' 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마법으로 어찌 저택에는 들어간다해도 그 후가 문제였다.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찾지! 저택 근처에서 얼쩡거리며 이 생각 저 생각 해보던 나는 결국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우선 저택으로 몰래 숨어들어 아무나 붙잡는다. 그리고 바르의 방이 어디인지 묻는다. 이 때 약간의 협박을 섞어 묻 는다면 어렵지 않게 그의 방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기억을 지운다 . 약간 복잡하긴 했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은 나는 이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 다. 그리고 계획을 실행으로 옮기려는 순간,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놀라서 뒤를 돌 아보니 보나인이 내 어깨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편으로는 미첼로, 마르크, 죠 안, 사라가 보였다. 너나할것없이 상당히 놀란 얼굴이었다. 아마 그 이유는 나 때문이 리라. "마리엔 공주님?!" "호,호,호." 나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도 다른 사람에게 들킨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어차피 과거에 같이 나와본 적도 있는데 새삼스래 들켜봐야 그게 그거였다. 서로 알 것 다 아는 사이면서 저들이 놀라는 이유는 내가 왕성을 빠져나온 것 때문이 아니라 내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빠져나왔다는 그 사실 하나때문일 것이다. 사라는 예외였지 만 말이다. "어떻게 왕성을 빠져나오신 겁니까?" 사실대로 마법으로 빠져나왔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후두를 뒤집어쓴 채 혼자 있는 수상한 사람을 통과시킬만큼 왕성의 경비는 허술하지 않았다. 나는 진지 한 얼굴로 그들을 보았고, 덩달아 그들도 진지해졌다. 그리고 나는 입을 열었다. "비밀이예요." 뭔가 거창한 말을 기다렸던 그들은 허탈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그런 그들에게 한마디 더 덧붙여주었다. "여자는 비밀이 많아야 아름다운 법이에요. 너무 많은 걸 알려하지 말아요." 내 말에 어이없어하던 제 4기사단의 기사들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못말리겠다는 뜻 과 함게 체념의 의미가 담겨있었다. 이들이 너무도 쉽게 넘어가자 당황한 건 사라였다 . 그녀는 공주인 내가 거리를 홀로 돌아 다니는 모습에 놀라고 있었다. "이런 곳을 호위도 없이 나오시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시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내가 밖에 나가서 가스톤을 추적한다고 했을 때 만세삼창을 부르던 누구들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자유분방한 제 4기사단과 어울리다 이런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 람을 보니 신선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감격에 젖어있을 수는 없었다. "걱정마요, 사라 경. 내 몸정도는 지킬 수 있어요." 사라는 내 말을 변명으로 치부하는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팔짱을 끼고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같으면 공주님을 건드리는 자살행위는 하지 않 겠어' 라고 중얼거리는 그들을 나와 사라는 동시에 노려보았다. 나는 이미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그들의 망언(?)때문이었고, 사라는 주군이 나쁜 길(몰래 왕성을 빠져 나온 것)로 빠졌는데도 말리기는커녕 동조하는 그들의 반응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라는 이왕 나오신 분을 다시 돌려보내기도 그러니 돌아갈 때 같이 돌아가자는 기사들의 말 에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 돌려보냈다가 어티로 튈지 모르는 일 아닌가. 사 라가 별 말을 하지 않게 되자 나는 의아한 얼굴로 질문을 했다. "그런데 모두 여긴 어떻게 온 거죠? 나는 바르라는 사람을 만나러 왔는데." "네에? 공주님도요? 저희들도 바르 집사를 만나러 왔습니다." 서로 마음이 통했는지 이들도 가스톤의 반응이 마음에 걸려 바르 집사를 찾아왔다고 한다. 원래는 사라까지 올 예정은 없었지만 오는 도중에 만나서 같이 오게 된 것이다. 이들과 함께 있으면 방금 전에 생각해두었던 다소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손쉽 게 바르 집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목적이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하 고 바로 바르 집사를 만나러 갔다. 바르 집사는 느닷없이 우리가 들이닥치자 거의 뒤로 넘어가려고 했다. 로얄 기사에 공 주까지 이런 화려한 멤버들이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 겠는가. 그는 거의 코가 땅이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이면 인사했다. 그가 허리를 숙이 는 바람에 나는 반짝이는 그의 머리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여전히 반들거리는 그의 머리에 내 모습이 검슴푸레 비치자 나는 기겁했다. 인간의 머리가 저렇게 반들거릴 수 도 있단 말인가. 탈모가 없는 마족인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집사의 머리를 눈을 동그 랗게 뜨고 보던 나는 미첼로가 살짝 건드리자 그제야 눈을 뗄 수 있었다. 일단 지위가 가장 높은 사람은 나였기 때문에 내가 대표로 그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가스톤이 노래를 불렀다는 대목에 바르 집사가 무한한 동정이 담 긴 얼굴로 바라본 점으로 비루어바 가스톤의 노래실력은 만인이 인정하는 모양이었다. 이보다 더한 음치는 없다로 말이다. 그리고 사라의 노래에 가스톤이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는 말에 약간 어두워진 얼굴로 말했다. "그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바람이 불어오면, 이라는 노래였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 거지?" 그러나 바르 집사는 사라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눈에 띄게 수심에 잠긴 모습이 되었다 . 우리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 노래가 어때서? 무슨 문제라도 있나? 궁금했지만 왠지 말을 걸어서는 안될 것 같은 분위기라 혼자서 가스톤과 바르 집사가 왜 그 노래 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건지 생각해보았다. 물론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내가 마족이 어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꿰고 있는 건 아니었다. 한참동안 방 안에는 무거 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리고 얼마 후, 바르 집사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군요. 가스톤 님은 아직도 그 사람을 잊지 못하고 계시는 모양이군요. 그동안 아 무런 말도 하지 않으셔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그 사람? 내 관심은 바르 집사의 말 중 그 사람이라는 말에 쏟아졌다. 나는 한숨을 내 쉬고 있는 바르 집사가 어서 다음 말을 하길 기다렸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였다. 한참 뜸을 들이던 바르 집사는 다시 입을 이었다. "예전에 가스톤 님이 좋아하던 여자분이 있었지요. 새하얀 얼굴에 금발머리와 푸른 눈 이 잘 어울리는, 아리엘이라는 이름의 여자였습니다. 아리엘 님과 가스톤 님은 서로 좋아했지만 마지막은 좋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오면, 이라는 곡은 아리엘 님이 즐겨 부르던 곡이었습니다" 뭐시라! 좋아하는 여자? 서로 좋아하는 사이? 가스톤에게도 그런 과거가 있었다니 놀 라울 따름이었다. 게다가 그 여자의 생김새는 가스톤의 이상형과 꼭 들어맞았다. 이상 형이라 그녀를 좋아한 것이 아니라 아마 그녀가 그렇게 생겼기 때문에 아마도 그 모습 이 가스톤의 이상형이 됐으리라. 하지만 끝이 않좋았다는 말이 상당히 의미심장했다. "끝이 안좋았다니 죽었나보죠?" "공주님!" 내가 죽었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자 보나인이 나무랬다. 다른 사람들도 책망어린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죽었나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왜 저래? 그러 죽었냐고 물어보 지 뭐라고 물어봐. 그런데 이 것들이 지금 누구한테 이러는 거야? 그러나 따지기에는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아있었다. 바르 집사는 무겁게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느 살아있다는 말에 의아했다. 서로 좋아하고 살아있다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우리의 의문을 느낀 탓인지 바르 집사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 가스톤은 오랜만에 보는 수도의 활기찬 모습에 덩달아 흥이 나는 것 같았다. 그의 저 택도 수도에 있었지만 중심부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작정하고 나오지 않는 한 아렌테의 번화한 모습을 보기는 힘들었다. 신이 나 휘파람을 부르며 걷던 가스톤은 우연히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생긴 건가? 이런 구경거리에 내가 빠질 수는 없지.' 가스톤은 느긋하게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왜, 왜 이러세요?" "이봐, 울기는 왜 울어? 그냥 같이 놀자고 한 것뿐인데 이거 너무하는 것 아냐?" "아가씨 때문에 상처받았다구. 그러니 오늘 하루 종일 나를 위로해줘야겠어!" "킥킥킥, 나도 그래!" 척봐도 험악하게 생긴 남자 3명이 한 여자를 에워싸고 추근거리고 있었다. 우유처럼 새하얀 색을 띠는 얼굴의 여자는 아름다운 눈이 겁에 질려 눈물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녀의 엹은 금발은 울먹히면서 조금씩 떨리는 몸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주 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동정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나서 는 사람이 없었다. 가스톤은 그런 주변의 반응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어딜 가나 저런 바보들이 있다니까. 그리고 그런 바보들에게 한 마디 못하는 비굴한 사람들도 말 이야. "이봐! 그만두지 그래?" 가스톤의 말에 일제히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놀라워하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건달들의 시선에도 가스톤은 여유만만했다. "내가 아무리 잘생겨도 그렇지. 그렇게보면 좀 창피하다구." 사람들은 이런 순간에도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가스톤의 강심장에 할 말을 잃 어버렸다. 물론 굵은 선을 가진 얼굴에서 남자다움이 느껴지긴 했지만 미남은 아니었 다. 잠시 다른 사람들처럼 황당하다는 눈으로 가스톤을 보던 건달들은 자신들이 놀림 을 받았다는 생각에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넌 또 뭐야?!" "난 가스톤인데." "그따위 걸 묻는 게 아냐! 왜 끼어들고 난리야?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꺼져!" "글쎄...왜 끼어들었냐고 묻는다면 내 맘이라고 말해주지." 건달들은 가스톤이 살살 약을 올리자 화가 머리 끝까지 솟았다. 오랜만에 보는 이쁘장 한 먹이감을 노리고 있는데 어디서 저런 개뼈다귀같은 놈이 굴러왔는지 모르겠다. 그 들은 재빨리 저 입만 산 놈을 처리하고 다시 작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가스톤은 건달 중 한 명이 물불가지지 않고 자신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자 고개를 젖혀 주먹을 피했다. 이래봬도 또래의 기사들에게는 져본 적이 없는 가스톤이었다. 이런 시정잡배들이 그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주먹을 간단히 피해낸 가스톤은 그대로 그 놈의 복부에 주먹을 정확이 꽂아넣었다. 어렸을 때부터 검을 휘둘러온 그의 주먹을 견 디지 못한 건달을 배신음성을 흘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저 자식, 죽여버려!" 자신의 동료가 쓰러지자 남은 두 명이 동시에 주먹을 휘두르면서 달려들었다. 가스톤 은 빈틈이 너무 많은 그들의 동작에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 건달들이 더욱 광분했음 은 말할 것도 없었다. 허리를 굽혀 주먹을 피해낸 가스톤은 두 명의 사이로 빠져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오른발로 한 명의 등짝을 냅다 걷어찼다. 걷어차인 놈은 달려들던 속도에 걷어차이기까지 하자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결국 땅바닥에 헤딩을 하고 말았다 . 그리고 가스톤은 순식간에 두 명이 쓰러지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남은 놈에 게 달려들어 팔꿈치로 얼굴을 가격했다. 코피를 흘리며 쏟아진 놈을 마지막으로 건달 퇴치에 성공한 가스톤은 아직도 울먹이고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놀라셨습니까? 이제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너무 놀라서인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가스톤은 그녀가 잔뜩 얼어 있자 긴장을 풀어주고자 자신이 생각하기에 멋있는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러자 그의 예상대로 그녀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멋있어서가 아니라 윗입술이 말려올라 가는 가스톤 특유의 웃음이 우스웠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그는 평생 몰랐을 것이다. "이야! 웃으시니까 정말 아름다우시군요. 전 가스톤 디포티드 허스라고 합니다. 레이 디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아, 전 아리엘 모리카 드레이느이라고 합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가스톤, 이 것도 먹어봐요." 가스톤은 아리엔이 건네는 빵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 빵은 아리엘이 가장 좋아 하는 빵이라는 모카빵이었다. 가스톤은 싸한 맛이 나는 이 빵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 았지만, 그렇다고 먹지 않았다가는 언제나처럼 아리엘이 울먹일 것 같아 순순히 받았 다. 그래도 계속 먹다보니 먹을 만 하기는 했지만 즐길 정도는 아니었다. 아리엘은 가 스톤이 자기가 직접 만들어온 빵을 받아들자 생긋 웃었다. 이들이 서로 만난 지도 벌써 2년이 지났다. 건달에게서 아리엘을 구해준, 약간은 흔한 첫 만남을 가진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리엘을 도와준 그 다음날, 그녀는 감사의 표시라며 자신이 만든 모카빵을 싸들고 가스톤을 찾아왔다. 가스톤은 창피해하면서도 은혜는 반드시 갚아야한다며 빵을 건네던 아리엘을 차마 물리칠 수 없어 울며 겨자 먹 기로 모카빵을 받아들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른 귀족 영애들과는 달리 요리 솜씨 가 뛰어나다는 점이었다. 도저히 혼자 바구니 안에 수북히 쌓인 모카빵을 해치울 엄두 가 나지 않았던 가스톤은 아리엘을 어거지로 붙잡았다. 아리엘은 병약하게 생긴 외모처럼 성격도 소심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가스톤 이 워낙 쾌활하다 보니 대화를 나누는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가스톤이 아리엘을 편하 게 해주려고 갖은 애를 쓴데다 두 사람 모두 몰락 귀족의 자제라는 점에서 동병상련을 느꼈기 때문에 얼마 후에는 친밀감을 가질 수 있었다. 아무튼, 두 사람은 그 후로 가 끔 만나게 되었고, 그 것이 어느새 2년이나 계속되고 있었다. 만나는 횟수가 많아짐에 따라 아리엘도 다른 사람 앞에서라면 몰라도 가스톤 앞에서는 수줍어하지 않고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리엘의 부모님도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가스 톤은 검술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장차 왕궁 기사가 될지도 모른다고 기대받고 있는 유망주였기 때문이다. 가스톤을 모카빵을 베어먹으면서 슬쩍 아리엘을 쳐다보았다. 하얀 피부에 시리도록 푸 른 눈동자는 너무 잘 어울려서 자꾸만 보게 된다. 언덕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아 리엘의 머리를 살며시 흔들어 놓고 있었다. 바람에 머리가 나부끼는 그 모습이 너무 예뻐 보였다. "가스톤, 왜 그래요?" 언덕 아래의 경치를 내려다보던 아리엘이 자신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리자 가스 톤은 당황해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리엘은 갑자기 볼을 붉히는 가스톤의 모습이 싫 지는 않았다. 언덕 위에 앉아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는 좋은 분위기, 즉 슬며시 키스하 기 딱 좋은 분위기가 흘렀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는 익숙하지 않았던 가스톤은 딴전 을 피웠다. "하하하! 오늘 날씨 좋은데! 이런 날에 노래 한 곡조 빠질 수 없지." 마침 아리엘은 '이런 기회는 놓치지 않아도 되는데. 가스톤, 바보'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가스톤을 말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컸다. 나는 새소리에 일어난다오. 아침 식사는 계란 후라이! 팬케익도 있다오! 여기에 닭고기 구이만 있다면 바랄 것이 없다네. 에에에! 언제나처럼 듣는 사람을 괴롭게 하는 노래였다. 아리엘은 혹시라도 가스톤이 상처를 받을까봐 귀를 막지는 못했지만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점은 사 랑만으로 감당하기에도 너무 힘든 일이었다. 가스톤도 아리엘의 얼굴을 보고 1절만 부 르고 그만두었다. 참고로 그가 지은 이 노래는 5절까지 있었다. 내용은 똑같고 음식 이름만 바뀔 뿐이었지만 그는 나름대로 훌륭한 노래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가스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정말 노래못해요." "너,너무해. 아리엘까지. 나 같은 놈 살아서 뭣하겠어? 그냥 콱 죽어버릴까보다." 가스톤이 풀이 팍 죽자 아리엘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2년 동안 이들의 모습을 지켜온 자가 있다면 이 순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놀고 있네" 2년 동 안 계속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도 여전히 당황하는 것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오지 않고 배기겠는가. 역시 연인들의 모습은 뭇사람들이 보기에는 닭살이라고 치를 떨만한 행동 들로만 이루어졌다는 진리가 딱 들어맞았다. 하지만 자기들은 좋다는데 뭐라고 하겠는 가. "미안해요, 가스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아리엘의 노래를 듣고 싶었던 가스톤의 연기에 그녀는 감쪽같이 넘어갔다. 가스톤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겉으로는 여전히 처량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아리엘이 노래 불러주면 용서해줄게." 그제서야 자신이 또 속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리엘은 눈치챘지만 역시 미워할 수 없 는 사람이었다. 바람이 불어오면 나는 항상 귀를 기울이지요. 그대의 말이 바람을 타고 전해질까 봐. 부디 당신의 행복한 목소리가 들리기를 기도해요. 바람이 불어오면 나는 항상 숨을 들이마시지요. 그대의 숨결이 바람을 타고 전해질까 봐. 부디 당신의 편안한 숨결이 느껴지길 기도해요. 바람이 불어오면 나는 항상 눈을 감지요. 그대의 미소가 바람을 타고 전해질까 봐. 부디 당신의 환한 미소가 보이길 기도해요. 바람이 불어오면, 바람이 불어오면 나는 행복하게 미소짓는답니다. 바람 속에 있는 당신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지요. 바람이 불어오면, 바람이 불어오면 나는 눈물을 흘린답니다. 바람 속에 있는 당신은 내게서 너무 멀리 있으니까요. 아리엘의 가는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멀리 퍼졌다. 가스톤은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가스톤과 아리엘, 두 연인은 그들에게 닥칠 불행을 지 금은 알지 못했다. 첫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처럼 말이다. 바르의 말이 끝나자 우리는 조용해졌다. 가스톤에게 그런 과거가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아니, 서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하긴 가스톤이 아 주 못생긴 얼굴도 아니니까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게다가 각자의 취향이라는 것이 있고, 이미 지난 일인데 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수긍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가스톤과 아리엘이 왜 헤어졌는가에 대해 듣고 나는 인간의 권력욕 을 다시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 권력이 왜 그렇게 소중한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권력 에 눈이 멀어 딸을 팔아치우는 인간들도, 윗사람들의 변덕에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그런 권력에 아둥바둥 집착하는 인간들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마족이기 때문인지 는 몰라도 나라면 10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동안 후회없이 즐길 것 같았다. 아무튼, 가스톤은 아리엘이라는 여자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바보 아 냐? 벌써 10년도 더 넘은 일인데 왜 잊지 못하고 있는 거지? 나라면 어떤 이유에서든 지 먼저 떠난 사람을 가슴속에 품어두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돌아서는 순 간 잊어버리고 말지. 분하지도 않은가. 평생 후회하도록 깨끗이 잊어버리고 여보라는 듯이 훨씬 더 좋은 여자를 만나서 오순도순 살겠다. 비록 그 여자가 원해서 헤어진 것 이 아니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감정에 끌려 다니는 어리석은 종족이니 감정을 끊고 맺는 것이 확실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가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점이 가장 인간다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내가 별 것도 아닌 일에 갖은 폼은 다 잡았던 가스톤을 비웃고 있는 반면에 다른 사람 들은 너무 안 됐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시 인간들을 모두 이해하기란 너무 어렵 다. 왜 그런 사소한 일에 집착하는 것인지......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의 절반이 여자 인데 말이다. 그나저나 그럼 사라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 상황에서 가스톤이 사라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더라도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아리엘이라는 여자를 잊고 사라를 만나는 것이 훨씬 이익인데 말이다. 인간은 어째서 이익도 되지 않는 일에 그토록 매달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가스톤은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고 피크닉을 빠져나온 점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한순 간 사라와 아리엘의 모습이 겹쳐 보여 혼란스러웠다고는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사 람들이 보기에는 무례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더군다나 그 자리에 마리엔 공주까지 있었다면 더욱 그러했다. 그는 그 자리를 뛰쳐나온 지 한참 만에야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과연 마리엔이 내일 어떤 방법으로 응징을 해올 지 심히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말로 몰아붙여 정신적인 공황상태로 몰아갈 수도 있었고, 다시 한번 여장 을 해야만 할지도 몰랐다. 최악의 경우에는 대련하자는 명목으로 복날에 개 패듯이 두 들겨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무리 피눈물을 흘리고 후회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저 마리엔의 선 처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그의 예상과는 달리 마리엔은 조용했다. 그저 불 만스러운 눈으로 위아래로 훑어보다 '역시 이해하지 못하겠어'라는 난해한 말만 남기 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하지만 그 점이 더욱 불안했다. 마리엔의 씀씀이가 소설 속 에 나오는 공주처럼 비단결처럼 고우냐? 절대 아니었다. 소설 속에 나오는 마녀와 비 슷하다면 또 모를까. 그런 마리엔이 그냥 넘어가니 더욱 불안했다. '혹시 한순간에 응징을 가하는 것보다 오랫동안 불안에 떨게 만들려는 것이 아닐까?' 상당히 신빙성이 가는 생각이었다. 그의 생각은 보나인과 미첼로, 죠안, 마르크가 안 됐다는 시선을 보내자 더욱 확실해졌다. 게다가 매일 오던 사라가 아무리 기다려도 오 지 않고 있었다. 매일 보던 얼굴이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발길을 끊어버리자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처음에는 마리엔의 음모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오지 않는 건가 생각했 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걱정이 되기 시 작했다. 몇 번이나 로얄 기사단 훈련장 근처에서 얼쩡대봤지만 사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리엔이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없는 데다 사라까지 오지 않고 그동안 잊고 있었던 아리엘까지 생각이 나자 가스톤은 싱숭생숭해졌다. 답답한 마음에 바람이나 쐬려고 나 온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요즘 들어 자주 찾게 되는 언덕으로 가게 되었다. 이 언 덕은 과거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정상에 있는 거대한 고목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시 원한 그늘을 제공하고 있었고, 군데군데 피어있는 꽃들과 풀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살 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항상 있던 사람이 한 명 없다는 것 뿐이었다. 아리엘과 자주 왔었고, 그녀와 헤어졌던 추억의 장소. 어느 날 갑작스런 아리엘의 결혼하게 되었다는 말에 얼마나 놀랐던가. 아리엘의 부모 도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그를 신랑감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가스톤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장난이길 바랬지만 울먹이는 아리엘의 모습을 보니 사실인 것 같았다. 아리엘에게 프랑 백작이 청혼을 했는데 이를 드레이느 자작이 받아들인 것이 다. 프랑 백작은 세력 있는 재력가였고, 라이언 왕자의 추종자이기도 했다. 만약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몰락 귀족가문에 불과한 드레이느 가문은 단번에 프랑 백작을 등에 업고 위세를 떨칠 수 있을 것이다. 드레이느 자작에게는 프랑 백작이 지독한 색 마이고, 자신의 딸 아리엘이 따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가 스톤이 검술이 뛰어나긴 하지만 그저 평범한 기사였고, 설령 왕국 기사가 된다해도 프 랑 백작보다 더한 권력을 쥘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제로였다. 그 때 가스톤은 아리엘에게 같이 도망가자고 했었다. 어차피 이름만 귀족일 뿐 평민과 비슷하게 살아왔으니 멀리 가서 신분을 숨기고 산다고 해도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또 자신의 실력이라면 용병이 된다면 풍족하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먹고사는데 지장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꺼이 따라올 것이라고 믿었던 아리엘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 그녀도 가스톤을 따라가고 싶었다. 죽을 망정 다른 사람과 결혼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도망가버리면 자신의 부모들은 프랑 백작에게 무슨 보복을 당 할지 몰랐다. 마음 약한 그녀로서는 도저히 자신의 부모를 버릴 수가 없었다. 설령 그 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게 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가스톤은 또다시 떠오르는 쓰린 기억에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말지 그랬어. 그랬으면 나도 널 잊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슬픈 눈으로 절대 잊지 않겠다고 말하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 야? 그냥 나 같은 건 좋아하지 않았다고 말해줬으면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도 않을텐데 . 아리엘, 잘 지내고 있니? 프랑 백작이 아껴주고 있겠지?" 가스톤의 가슴아픈 독백은 공허하게 허공을 울렸다. 가슴 한쪽이 아련하게 아려오는 것을 보니 아리엘을 잊기에는 11년이라는 기간도 짧았던 모양이다. 한참동안 멍하니 나무에 기대앉아서 과거의 행복했던 시간을 회상하던 그는 누군가 올라오고 있는 모습 을 보게 되었다. 녹색 머리에 날렵해 보이는 여성이었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사라가 난데없이 수도에서 제법 떨어진 이 곳에 나타나자 가스톤은 약간 놀랐다. 잠시 후, 그 의 앞까지 올라온 사람은 예상대로 사라였다. 간단한 평상복을 입은 그녀는 갑옷을 입 었을 때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사라 경, 여긴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가스톤 경이 여기에 계실 것 같아서요. 정말 경치가 좋은 곳이네요. 옆에 앉아도 되 죠?" 사라는 가스톤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의 옆자리에 털썩 앉아버렸다. 사라는 자리에 앉고는 주변 경관을 둘러보았고, 가스톤도 그런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 잠시 두 사 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런 정적을 깨고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사라였다. "가스톤 경, 할 말이 있어요. 사실은 저번에 있었던 피크닉에서 제가 가져왔던 모카빵 은......" "사라 경이 만드신 게 아니라구요." "예? 어떻게 알았죠?" "그거야 빵에서 김이 나고 있었거든요. 사라 경이 만들어오셨다면 들고 오는 중에 식 었을 테니 사라 경이 만드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라는 가스톤의 말에 눈을 똥그랗게 떴다. 큰 마음먹고 말했는데 가스톤이 이미 알고 있자 그동안 고민했던 것이 바보 같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마리엔의 말대로 하면 확실히 더 호감을 살수 있었겠지만 그 건 자신을 속이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설령 그렇게 해서 잘된다해도 가스톤이 좋아하 는 사람은 꾸며진 자신이지 진짜 자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가스톤은 사 라가 쑥스러워하는 기색이자 다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말했다. "보나마나 마리엔 공주님께서 사라 경에게 억지로 시키신 거겠죠. 공주님께서 좀 엉뚱 하신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분이시니 그냥 장난으로 생각하고 넘어가 주세요." "어, 억지로 시킨 것 아닌데요." 사라가 마리엔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자 가스톤은 그새 마리엔이 그녀에게 무슨 위협 을 가했으리라 지레짐작했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 얼마나 맞았던가. 맞으 면서 마리엔에게는 기사가 아니라 그 성격을 여성스럽게 고쳐줄 남자가 필요하다는 것 을 절실히 느낀 제 4기사단의 기사들이었다. 특히 조장으로서 마리엔과 대련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던 그로서는 누가 마리엘을 데려갈지 걱정이 되었다. 그런 마리엔이기 에 로얄 기사 협박하는 건 눈 깜빡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 4기 사단의 기사들이 마리엔을 어떻게 보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다 압니다. 사라 경,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저희들도 다 겪은 일 이랍니다!" 가스톤은 진심으로 사라를 위로했다. 그러나 정작 사라는 가스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들도 겪은 일이라니? 그럼 제 4기사단의 기사들도 만들지도 못하는 빵을 다른 곳에서 조달해서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자랑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가스톤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 사라는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그게 아니라 제가 좋아서 한 거예요!" "네에? 왜요? 사라 경은 기사니까 요리를 못해도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누가 사라 경 이 요리를 못한다고 그래서 그러셨습니까? 제가 대신 혼내드릴까요?" 사라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어제 집에서 몇 번이나 거울 을 보고 연습해봤는데도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검을 잡고 처음으로 다른 기사와 대련을 해볼 때처럼 가슴이 뛰었다. "그건...가스톤 경이 모카빵을 좋아한다고 하셔서요." 가스톤은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눈치가 빠르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사라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일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솔직히 나이 차를 봐 도 그렇고, 자신이 가진 것을 봐도 그렇고 사라가 좋아할 만한 점을 한 가지고 있지 못했다. 한동안 자신의 머리가 어떻게 돼서 환청을 들은 게 아닐까 고민하던 가스톤은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사라를 보고 그녀의 말이 진심이었음을 알 수 있 었다. 자신의 머리가 정상인 것은 좋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을 당해서 어안이 벙벙했 다. "저를 말입니까? 저의 어디를 보고요?" "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좋은 걸 어떻게 해요!" 사라는 얼굴이 빨갛게 상기돼서 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녀에게 있어 처음 해보는 고백 이었기 때문에 몸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가스톤은 사라가 얼마나 프라이드가 높은지 그동안 의 대련과 만남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먼저 고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가스톤 자신도 사라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 솔직히 말하자면 호탕하고 자부심이 강한 사라의 모습에 호감이 갔다. 그러나 그 이상이 되어서는 안되었다. 가스톤은 아직도 자신이 몰락귀족가문의 후계자만 아니었어도, 조금만 더 힘이 있었어 도 아리엘을 지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팠다. 그런데 어떻게 울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그녀를 잊고, 다 른 여자를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사람들이 과거의 사랑을 잊지 못하는 자신을 보고 아무리 어리석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그런 일은 자신이 용서할 수 없었다. 가스톤 은 자신의 말을 기다리면서 잔뜩 긴장해있는 사라를 향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나는 로얄 기사단의 훈련장에 와서 죽치고 앉아있었다. 로얄 기사들이 흘끔흘끔 쳐다 보았지만 현재의 나는 매우 심각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다. 심지 어는 에릭과 세린도 인사만 하고 더 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이 곳에 발걸음을 한 이유 는 요 며칠 사이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을 사라에게 알려주려고 온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사라가 어디를 나갔다고 해서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 다. 내가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강제로라도 엮어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리엘이라는 여자를 잊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과거에 사로잡혀 있어봤자 남는 것은 없었다. 사라를 위해서도, 가스톤을 위해서도 이 방법이 가장 좋으리라 생각했다.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제일이야. 쓸데없는 감정에 계속 치여 사는 건 있는 건 정말 멍청한 짓이라구. 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며 현명한 내 판단에 만족해했다. 그리고 기다린 지 한참 후에 사라의 모습이 나타나자 냉큼 달려갔다. "사라 경!" "에? 마리엔 공주님? 여기서 뭐하시는...... 고, 공주님, 지금 어디 가시는 거예요?" 나는 사라의 팔을 잡고 냅다 뛰어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갔다. 이런 이야기는 으슥한 곳에서 하는 것이 제격이었다. 나는 훈련장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까지 오자 사라의 팔을 놓았다. 그리고 결의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사라 경,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스톤 경의 마음을 돌려놓겠어 요." 패서라도 말이지요, 라는 말은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말을 듣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강제력을 행사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스톤의 행동을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어리석어 도 그렇게 어리석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나였다. 그러나 내 말에 사라는 이상한 미소 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은 방금 전에 고백해버렸습니다." "뭐라고요?!" 뭬야? 뭐시 어쩌고 저째? 고배액?!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상태로는 차일 것 같았다. 하지만 사라의 표정이 썩 나빠 보이지 않아 긍정적인 쪽으로 해결이 난 게 아닐까 해 서 다급히 물어보았다. "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하하, 그게 깨끗하게 차인 거 있죠." 가스톤 그 놈이 기어이 굴러온 복을 차버렸다. 도대체 이미 지나버린 사랑을 잊지 못 한다는 게 뭐하자는 알 길이 없었다. 현실을 직시하란 말이다. 나는 당장에 가스톤에 게 달려가 멱살을 흔들려고 했다. "내가 가만두나 봐라! 어디예요? 당장 가스톤에게 따질 거예요!" 그러나 사라는 흥분하는 나를 말렸다. 그리고 방금 차인 사람이 지은 표정이라고 믿기 에는 어려운 예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전 괜찮아요. 가스톤 경께서는 정말 미안하다고 하셨지만 아무렇지도 않답니다. 오히 려 제 마음을 모두 말해서 속이 다 시원한 걸요. 그리고 전 포기한다는 말을 하지 않 았어요. 자랑은 아니지만 첫 사랑인데 쉽게 포기할 수야 없죠. 가스톤 경이 과거의 상 처를 잊고 저를 선택하도록 만들 거예요." 여자는 사랑을 하면 아름다워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말은 정말인 모양이었다. 절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겠다는 말을 하는 사라의 모습은 이제까지 봐 온 그녀의 어떤 모습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다. 사라가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가스톤 에게 달려가 따질 수도 없었다. 아마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가스톤의 사랑을 얻고 싶 은 것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나서서 강제로 가스톤을 사라와 엮어주면 두 사람 사이가 어색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사라도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고 과연 가스톤 이 내 협박에 넘어올지도 미지수였고 말이다. 앞으로 내가 가스톤과 사라를 위해 할수 있는 일은 가끔씩 뒤에서 도와주고 그저 지켜보는 일 뿐이었다. 사라가 가스톤의 상 처를 따뜻하게 감싸주고 치료해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 #18-스피린으로 요즘 들어 괜히 계약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대가를 받지 못한 것은 내 잘못도 있으 니 그렇다 쳐도 마리엔의 신분은 내가 행동하는데 상당한 제약이 되고 있었다. 인간 세상에 와서 신나는 모험을 하겠다는 나의 원대한 계획에는 공주라는 신분은 큰 짐이 되고 있었다. 인간세계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구경도 하고 신나게 놀겠다는 생각과는 달리 지금의 나의 현실은 어떠한가. 나간다고 해봐야 성을 빠져나와 그 주변만 돌아 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맘 편히 돌아다닐 수 있으면 내가 말을 안 한다. 이 눈치, 저 눈치 다 살펴 야만 했다. 성을 빠져나오는 과정에도 전방 100m마다 서있는 병사들과 여기저기 돌아 다니는 시종들과 시녀들의 눈을 요령껏 피해야 했다. 그리고 성을 빠져나와도 행여나 마리엔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마음을 졸여야만 했다. 마음 한 구석에 불안한 구석 이 있으면 그렇지 않을 때보다 즐거움은 반감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다시 성으로 돌아 오면 말도 없이 어디에 있었냐고 묻는 시녀들의 질문에도 그럴듯한 답변을 해줘야만 했다. 이 짓도 얼마나 힘들고 신경 쓸 일이 많은지 모른다. 최근에는 오펠리우스 왕비와 마주칠 일이 거의 없어 왕궁 안에서는 특별한 재미를 찾 지 못했다. 티격태격하던 상대를 내가 이겼을 때의 기분이란 직접 겪어보지 못한 사람 은 얼마나 재미있고 통쾌한지 모를 것이다. 궁전 무도회도 일부러 참석해보았지만 개 미떼처럼 몰려드는 귀족들만 있을 뿐 별다른 일은 생기지 않았다. 심심해서 후궁인 아 리란드 전하와 플로라 공주를 찾아가 보기도 했지만 하는 일이라고는 차를 마시며 수 다를 떠는 일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이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었지만 한달 내내 그런 일을 했더니 이제는 할 말도 없어져버렸다. 그런 나와는 달리 날마다 보면서도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할 말이 전혀 떨어지지 않는 그녀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한번은 자수라는 것을 놓아본 일이 있었다. 당연히 얼마가지 못했다. 가만히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한 뼘 한 뼘 바느질을 하고 있는 것도 답답해서 못하겠고, 자수를 다 놓기도 전에 바늘에 찔려 과다출혈로 세상 하직할 것 같았게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이 다 보니 내가 성을 빠져나와 수도를 배회하고 다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 물론 여기에는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다는 오묘한 진리가 담겨있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수도를 구경하는 일도 점점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날마다 같은 풍경만 보면 아무리 멋있는 모습이라도 질리기 마련이다. 계약이고 뭐고 확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급기야 '오펠리우스 왕비를 암살해버리고 튀어?'라는 생각까지 들게 되었다. 사실 그동안 그렇게 하지 않았던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한가지 이유는 재수없 게 왕비 주변에 어마어마한 실력의 기사나 신관이 지키고 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 때문 이었다. 현재 내가 믿을 것이라고는 흑마법 하나밖에 없었다. 마리엔의 몸은 약해빠져 서 능력을 증가시켰어도 겨우 평균을 웃도는 실력이었다. 제 4기사단과 대련을 할 때 는 많은 전투경험과 제 4기사단의 기사들이 은연중에 살수를 피해왔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소드 마스터 급이나 교황정도의 신성력을 가진 신관과 부딪치 게 되면 여러 가지로 골치 아파졌다. 역시 둔한 몸이 문제였다. 그리고 다른 이유는 한순간에 죽이는 것이 훌륭한 복수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순간의 죽 음보다 오랫동안 자존심을 짓밟아주는 것이 더 멋진 복수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 여자 성격에 내가 콧대를 뭉개줄 때마다 잘도 웃으면서 넘어가겠다. 길길이 날뛰겠지 .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런 내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냥 처치해버리는 것도 괜 찮을 방법일 것 같았다. 만약 그 일이 조금만 뒤에 일어났어도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라도 오펠리우스 왕비 암살을 시도했을지도 몰랐다. 그 일은 지금으로부터 3일전에 일 어났다. 왕비가 머물고 있는 궁에 기사들이 얼마나 되더라? 다른 놈들이야 상관없지만 로얄 기 사들은 좀 문젠데. 현재 나는 오펠리우스 왕비가 머물고 있는 궁의 경비를 떠올려보고 있었다. 그래도 일국의 왕비라고 물샐틈없는 경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 극단적 인 일까지 벌일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미리 방법을 세워둘 생각이었다. 마음 한구석에 서 진정한 복수란 이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럴 때도 있다며 자위했다. 그렇게 내가 왕비 암살이라는 음모를 꾸미고 있을 때였다. 국왕이 나를 찾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말이다. 왜 부르나 싶어 가보니 국왕은 손에 들고 있던 양피지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예의바르게 인사하고 국왕을 따라 소파에 앉았다. 시종들은 나와 국 왕이 소파에 앉자 재빨리 차와 다과를 내왔는데 그 속도가 가히 놀라웠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동안 바빠서 자주 보지를 못했는데 잘 지내고 있었느냐?" "아바마마께서 염려해주신 덕분에 아무 탈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아바마마도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한참동안 나와 국왕은 차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그러나 국사로 바쁜 국왕이 일 부러 차나 같이 마시자고 불렀을 리는 만무했다. 뭔가 할 말이 있어서 불렀을 것이라 고 생각한 나는 조용히 국왕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국왕이 본론을 꺼내 놓았다. "예전에 네가 외교회의에 나선 일을 듣고 스피린의 레리이나 여왕이 널 한 번 만나고 싶어하는 모양이더구나. 지아 대사라면 스피린뿐만 아니라 타국에서도 알아주는 뛰어 난 외교관인데 네가 그녀를 외교회의에서 눌렀다는 소문을 듣고 호기심이 생긴 것 같 다만." 그런 말을 하는 국왕은 매우 자랑스럽다는 얼굴이 되었다. 자신의 딸이 그런 일을 해 냈다는 사실이 기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반응은 어디까지나 페드인 왕국의 사람 입장 이었고, 스피린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다된 밥에 재를 뿌린 내가 얄미울 만도 했다. 그런데도 레리이나라는 여왕은 내게 호기심을 가지고 만나고 싶어한다니 지아 못지 않 게 호탕하고 대범한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지아도 그렇고 그 때 함께온 일행들도 그렇 고 스피린은 정말 여걸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여걸 중 한사람이 나를 만나 보고 싶다니 이거 기분 괜찮은데. 역시 내가 또 한 잘남하지. 한창 레리이나 왕비의 대범함과 나의 뛰어남에 감탄을 하던 중 국왕의 말 중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예에? 날 만나고 싶어해? 설마 이런 말을 나에게 하는 의도는......?!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국왕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국왕은 놀라는 나를 보고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스피린에서 3월에 있을 레리이나 여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궁전 무도회에 너를 초대한다는 초청장이 왔다. 아까 내가 보고 있던 양피지가 그 초청장이란다. 처음에 는 어린 너를 멀리 떨어진 스피린으로 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라디폰 공작이 타 국의 왕족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하더군. 라디폰 공작의 말도 일리 가 있고 공주도 다른 나라를 둘러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들던데 네 생각은 어떤지 듣고 싶구나." 그 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아버님! 그 순간 내 눈에는 국왕의 뒤에 후광이 비쳐 보였 다. 그렇지 않아도 호감이 가던 국왕이었는데 이 일로 그는 사랑하옵고 존경하는 아바 마마로 완연히 자리 매김을 하였다. 그리고 라디폰 공작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가 무슨 꿍꿍이가 있어 이런 일을 꾸몄는지 아니면 순수한 마음에 우러나와서 그랬 는지는(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 같지만) 모르겠지만 그동안 서운하던 마음을 희석 시키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나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가고 싶어요! 보내주시면 정말 잘할게요! 보내주세요!" "이거 그렇게 가고 싶은 거냐?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보내줄 테니 진정하거라." 국왕의 말은 솜사탕보다 달콤했고, 아이스크림보다 부드러웠으며, 아름다운 선율의 노 래보다 듣기 좋았다. 나는 난데없이 찾아온 이 행운에 너무 기뻤다. 스피린은 아드린 대륙의 중앙에 위치한 나라로 배를 타고 적어도 한 달 동안 항해를 해야했다. 그 말은 왔다갔다하는 시간까지 합쳐 적어도 두 달은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바 다라는 것을 직접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아바마마! 너무 감사해요!" 나는 기쁜 마음에 국왕의 옆으로 가서 왼쪽 볼에 쪽소리가 나도록 뽀뽀를 했다. 방안 에 있던 시종들이 재빨리 눈을 돌렸지만 국왕은 기분 나쁘지는 않은지 웃기만 했다. 그리고 티타임이 끝날 때까지 나는 온갖 아양과 애교를 떨어 댔다. 나중에 흥분이 가 라앉은 후에 생각해보면 내가 생각해도 닭살이 돋을 정도였지만 당시에는 그저 좋기만 했다. 그 일이 있은 다음 나는 날아갈 것 같다는 기분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 분이 좋아졌다. 축하 선물과 함께 갈 사절단을 뽑는 과정은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축 하 사절단은 나말고도 상당히 많은 수가 가게 되었다. 물론 대부분이 호위하는 기사와 병사들이었고, 나와 함께 사신으로 가는 사람은 궁전 마법사 중 한 명인 프리트 한 사람이었다. 프리트는 50대 후반의 마법사로 7서클 초반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내 가 여기서 다시 한번 느낀 사실은 페드인 왕국은 마법쪽이 상당히 취약하다는 사실이 었다. 다른 나라의 궁전 마법사는 대부분이 7서클 마스터이고, 토르의 경우는 8서클 마스터까지 있다는데 7서클 초반이 뭐야? 7서클 초반이. 프리트를 따라나선 휠이라는 그의 제자도 5서클 초반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실력이 없다는데 내가 뭐라 고 하겠는가. 그저 위험한 일이 생기면 내 능력에서 알아서 해결하는 수밖에. 그러나 마법사의 실력이 떨어지는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인지 기사들은 40명이나 따라 왔고, 병사들의 수는 이보다 더 많았다. 이 많은 수가 모두 스피린까지 가는 것은 아 니었고, 우선 페드인 왕국의 남쪽 항구인 제펠에 도착하게 되면 이 중 절반은 제펠에 남게 되었다. 아무리 호위상의 이유라고는 하지만 타국에 기사와 병사들을 바리바리 끌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뭐 한바탕 붙고 싶으면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리 권장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제펠에 남는 병력을 제외한 나머지는 페드인 왕국의 자랑인 군함을 타고 스피 린으로 출발하게 된다. 이 때에 호위선으로 2척의 군함이 더 따를 예정이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어찌나 기가 막혔던가. 그냥 이동하는데 군함까지 동원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이 건 해적들에게 이 배는 건드리면 재미없다는 무언의 암시이기도 했지만 타 국에 페드인 왕국의 군사력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군함이 스피린의 클라이드에 도착하면 스피린의 호위단과 합류해서 수도인 가 디스로 출발하게 되어 있었다. 가디스까지 나를 호위할 기사 중 여섯 명이나 내가 이 미 알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에릭, 세린, 사라, 보나인, 가스톤. 죠안이 바로 그들이었다. 에릭과 세린의 경우는 걱정이 심한 국왕이 어거지로 붙인 경 우였고, 나머지는 자의 반, 타의 반에 의한 것이었다. 솔직히 이 정도나 끌고 가는데 에릭과 세린까지 따라올 필요가 있나하는 생각이 들긴 들었다. 에릭은 페드인 왕국의 최고의 검사이고, 세린도 로얄 기사단에서 상위권에 속하는 실력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절단에 낀 사람 중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은 바로 이블로라는 마법 사였다. 라디폰 공작가의 마법사인데 실력이 뛰어나서 특별히 사절단에 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감시원으로 붙은 것 같단 말이야. 라디폰 공작, 에릭만으 로 모자라서 이제는 자기 가문의 마법사까지 붙이다니. 하지만 이번에 국왕을 설득하 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으니 특별히 봐준다. 그리고 마침내 국왕으로부터 스피린의 축 하 사절단으로 가도 좋다는 말을 들은 한 달 후에 나를 포함한 거대한 규모의 사절단 은 아렌테의 왕성을 출발했다. ------------------------------------------------------------------------------ 제펠을 처음 본 소감은 놀랍다, 였다.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바다의 모습은 바다 를 처음 보는 내게는 신기하기 그지없는 장면이었다. 짙푸른 색의 파도는 끊임없이 치 면서 항구로 밀려왔다 다시 빠져나가고 있었고, 하늘에는 갈매기들이 끼룩거리며 날아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해상 무역이 발달한 나라답게 항구에는 많은 배들이 정박해있 었다. 들리는 말로는 하루에도 수십 척의 선박들이 제펠을 거쳐 나가거나 들어온다고 한다. 당연히 뱃사람들이 항상 제펠의 거리에는 넘쳐났고, 다른 나라에서 온 상인들이 나 여행자들도 많았다. 제펠의 주민들은 직접 무역에 종사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 분은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여관업이나 식당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임없 이 계속 되다보니 제펠과 제펠 사람들은 항상 활기에 넘쳤다. 물론 이런 곳일수록 음 지에는 창녀나 도둑, 거지같은 사람들이 다른 곳보다 많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듣던 대 로 생동감이 넘치는 도시였다. 기세좋게 발전해 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런 제펠의 모습과 바다는 내가 놀라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바다를 단순히 매우 큰 강이라고 생각했던 바다는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규모를 보이고 있었다. 마치 매우 큰 강이 몇 천 개는 합쳐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바다를 처음 봤으니 당연히 항 구를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하늘과 맞닿아있는 바다로 눈을 돌렸다가 처음 보는 거대 한 배들로 눈을 돌렸다가 분주한 항구의 모습으로 눈을 돌렸다가 하는 동작을 반복했 다. 바쁘다. 바뻐. 하지만 색다른 모습의 제펠을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보고 싶었다. "공주님, 항구는 처음이십니까?" 내가 두리번거리며 창 밖을 바라보자 맞은 편에 앉아있던 이블로가 질문을 했다. 현재 마차 안에는 나와 궁전 마법사인 프리티와 이블로, 내 시중을 들 시녀 몇이 타고 있 었다. 꽤나 많은 인원이었지만 마차가 워낙 넓다보니 누워서 자도 될 정도였다. 위험 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이블로의 주장에 따라 마법사들도 같은 마차에 탄 것이다. 도대체 기사들과 병사들이 몇 겹으로 둘러싸고 있는데 어떤 정신나간 인간이나 마물 들이 덤비겠는가. 그러나 미래의 일은 알 수 없다나 어쩐다나. 나도 혼자 가는 것보다 는 덜 심심하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지만 말이다. "그래요.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군요." "이거 참, 해상 무역이 발달한 페드인 왕국의 공주님께서 항구를 처음 보시다니 아이 러니한 일입니다." 내 말에 프리티가 껄껄거리면 말했다. 이 사람아,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래? 맨날 성에만 놔두고 감싸고 도니까 그런 거지. 그러니까 마리엔 성격이 그 모양이었던 거다 . 사람이란 자고로 여러 곳을 다니면서 여러 가지 일을 겪어봐야 사람이 된다고 했다. 하여간 사람들이 너무 걱정이 많다니까. "그럼 페드인 왕국의 5대 항구 중 하나인 곳을 본 소감이 어떻습니까, 공주님?" "굉장히 놀랐어요. 아렌테와는 또 다른 분위기네요. 더 활기차다고나 할까요." 내 말에 이블로는 고개를 끄덕이면 말했다. "제펠은 특히 아드린 대륙의 나라들과 소통이 잦은 곳입니다. 소피린 대륙의 나라와는 다른 문화를 볼 수도 있고, 사람들도 많이 모이는 곳입니다. 매우 활기찬 도시지요. 하지만 양지가 밝은 만큼 음지가 어둡다는 사실은 잊지 마십시오." 마차가 지날 때마다 사람들은 양쪽으로 갈라섰고, 우리는 별 어려움없이 호텔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일단 여기서 하루 묵고 내일 배를 타고 스피린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을 호위하고 갈 해군들이 이 곳에서 기다리기로 되어 있었다. 보나인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려서자 환영인파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나는 호텔의 지배인과 종업원들이고, 다른 한 편은 페드인 왕국의 해군 복장을 입고 절도있게 서있는 군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지휘관의 복장 을 하고 있는 세 사람이 서있었다. "에피 폰타네 호의 지휘관인 샤크 퀸터 그라스가 마리엔 공주님을 뵙습니다." 세 사람 중 백발의 노신사가 제일 먼저 다가와 무릎을 꿇고 인사했고, 뒤이어 다른 사 람들도 따라서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엘류시온 호의 지휘관인 노먼 메일러 히트가 마리엔 공주님을 뵙습니다." "베스 크레이지 호의 지휘관인 뒤라스 페터 바이스가 마리엔 공주님을 뵙습니다." 샤크 선장은 보기에는 60대로 보였지만 건장한 풍체와 날카로운 눈빛 때문에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는 젊어 보이는 노먼 선장은 깔끔하게 넘긴 머리 와 멋들어지게 기른 갈색 콧수염이 매우 인상적인 인물이었다. 무관보다는 문관으로 생각할 정도로 깔끔하고 단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뒤라스 선장은 노먼 선장과 비슷 한 나이로 보였지만 인상은 전혀 정반대였다.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묶은 그는 제복도 여기저기 구겨져 있었고, 왼쪽 눈에서 볼까지 길게 흉터가 나있었다. 샤크 선장이나 노먼 선장은 딱봐도 귀족 같은데 뒤라스는 완전히 해적이었다. 저 모습을 보고 누가 해군으로 생각하겠는가. 하지만 이런 사람도 있으면 저런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이 사 람들이 스피린까지 같이 갈 사람들인가. "만나서 반가워요. 스피린에 도착할 때까지 잘 부탁해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앞으로 얼마동안 함께 할 세 명의 지휘관들과 상견례를 마친 후, 우리 일행은 각자 배 정받은 방으로 들어갔다. 제펠까지 호위하느라 수고가 많았던 기사들과 병사들은 오늘 하루 푹 쉬고 대신 해군들이 경비를 맡게 되었다. 나야 마차 안에서만 편안히 왔으니 쌩쌩하다 못해 힘이 철철 넘치지만 기사들이 피곤하다니 어쩌겠는가. 참아야지. 생각 같아서는 구경하러 나가고 싶었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 몰래 빠져나갈 수도 없어 아 렌테를 벗어난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공작의 감시원인 이블로가 있는데 경거망동할 수는 없지. 다음날, 아렌테에서 함께 온 병력의 절반만 이끌고 배에 올랐다. 군함은 선체가 다른 배보다 더 컸지만 기동성을 위해 전체적으로 날렵한 모습으로 제조되어 있었다. 비록 군함이었지만 축하하러 가는데 무장을 잔뜩 하고 가면 '우리는 이렇게 세다. 한판 붙 을래?' 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래서 샤크 선장은 평상시보다는 무장 을 많이 해제했다고 했지만 여전히 묵빛의 대포들이 햇빛을 받아 반들거리고 있었다. 나와 사절단은 세 척의 군함 중 샤크 선장의 배에 올랐다. 밝은 크림색의 배는 흰색의 제복을 입은 샤크 선장의 모습과 잘 어울렸다. 배 위에 올라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 어온 것은 널찍한 선상의 모습이었다. 밖에서 볼 때도 상당히 크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올라와서 보니 생각보다 더 컸다. 사절단과 샤크 선장, 해군들까지 해서 많은 사람들 이 한꺼번에 몰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비좁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출항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나는 선실로 들어가지 않고 그대로 갑판에 남았다. 내가 여러 가지 질문을 하면 옆에 있는 샤크 선장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배의 지휘는 샤 크 선장 대신 부선장이 하고 있었고, 선원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 고 있었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나고 다른 두 척도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를 보내오 자 샤크 선장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닻을 올려라! 출항한다!" 드디어 출발이구나. 제대로 된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기대감으로 가슴이 뛰었다. 인간계에 나온 지 어언 1년이 다 되어가건만 왕궁에서만 갇혀 지냈던(가끔 외 출을 하긴 했지만) 답답했단 나날들이여. 이 걸로 안녕이다. 안녕! 어디까지나 놀러 나온 나였기에 웃음이 나오지 않을래야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으흐흐. 출항한지 한 시간이 지나자 더 이상 제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그렇게 많이 떨어진 곳이 아니라 다른 배들도 간간이 보였지만 육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 고 출항할 때와는 또 다른 의미로 선원들은 바빠졌다. "공주님, 위험합니다." "너무 가까이에 서 계시면 안됩니다. 어서 떨어지세요." "마리엔 공주님! 조심하세요!!" 뱃전에서 몸을 내밀고 바다를 보고 있는 나를 말리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거참, 말 많네. 저기 옆에 조용히 있는 보나인들을 본받으라구. 얼마나 조용히 있어. 봄이나 여름에는 물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보일 정도로 물이 투명하다고 하지만 지금은 겨울이라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바다를 처음 보는 내게는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선체에 부딪쳐 하얀 포말이 생기는 모습도 그렇고, 쉴 새없이 출렁이는 모습도 그렇 고, 간간이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의 모습도 내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그 래서 이렇게 열심히 보고 있는 건데 다른 사람들은 그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 이다. 지금도 보나인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사색이 돼서 나를 뱃전에서 뜯어내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었다. 혹시라도 바다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런 일이 생길 턱이 없잖아. 내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아무 이유도 없이 바다로 왜 떨어져? 쓸데없이 걱정만 많다니까. 세상은 즐겁게 살아야지 걱정거리를 안고 살면 금 방 늙는다는 것도 몰라? 그러나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배 위에서는 한바탕 난리 가 나고 있었다. 선원들만 아니라 기사들과 프리티까지 나서서 뜯어말리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그러나 나는 손을 내저으며 다시 바다 감상에 심취했다. 결국 설득하기를 포기한 사람 들은 항상 내 곁에 있었던 보나인들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보나인들은 어떻게 좀 해보라는 그들의 시선에 씨익 웃었다. 그리고 나를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공주님, 바다는 처음 보셔서 신기하시지요. 이럴 때는 그저 질릴 때까지 구경하는 것 이 제일입니다." "보나인 경! 그 무슨 말씀이시오. 저렇게 바짝 몸을 내미시면 위험하단 말입니다." "하하하, 하지만 주군이 원하시는 일을 하실 수 있도록 해드리는 것이 기사의 도리 아 니겠습니까?"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제 4기사단의 기사들은 매우 자유분방한 사람들이었다. 좋게 말 하면 그렇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왕궁 기사보다는 용병으로 보인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보나인들은 틀림없이 이 상황을 재미있어 하고 있었다. 보나인들이 기사의 도 리를 들고 나오면서 자신들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자 다른 사람들은 황망 한 눈으로 나와 보나인들을 보았다. "마리엔 공주님, 모두 걱정하는데 조금 주의를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엉? 이 목소리는.......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막 갑판 위로 나오고 있는 세린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있는 에릭과 이블로도 보였다. 소란스 러워서 무슨 일인지 나와본 모양이었다. 저렇게 점잖게 나오면 또 할 말이 없다. 내가 위험하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말라는데 어쩌리요. 계속 실 랑이를 벌여도 좋을 것 같지는 않아 이번엔 별수 없이 물러나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 은 많으니까 말이야. ========================================================================= 제펠에서 출발한 날로부터 꽤나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 원 없이 바다를 구경 했던 나는 이번에는 에피 폰타네 호와 선원들에게 관심을 돌렸다. 배를 타보는 것도 처음이었으니, 선원들이 일하는 것을 보는 것도 생전 처음이었다. 게다가 에피 폰타 네 호는 크기는 엄청 커서 구경할 곳도 많았다. 공주라는 직권을 이용해 선실은 물론 식당, 선장실, 식량 창고까지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공주라는 이름으로도 딱 한군데 가보지 못한 곳이 있었다. 그 곳은 바로 망루였다. 샤크 선장을 협박도 해보고, 좋은 말로 설득도 해보았지만 그 는 위험하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위험하긴 뭐가 위험해! 나 마족이라니까. 그 정도 떨 어져도 마법으로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어! 그러나 마족이라고 밝힐 수도 없는 일이었 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처럼 갈수록 망루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더해 만 갔다. 반드시 올라가고 말겠어! 죠안이 망루에서 보는 풍경이 정말 좋다고 했단 말 이야! 배를 탔으면 반드시 망루에 올라가 봐야만 한다고 나를 부추긴 인물이 누구인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왠지 그 곳에서 보는 바다는 밑에서 보는 바다와는 완전히 다를 것 같았고, 불어오는 바람도 완전히 다를 것 같았다. 하지만 항상 기사들이 줄줄이 따라다니는 데다 망루에 사람이 있으니 망루를 뚫어져라 쳐다만 보다 다시 선실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완전히 그림의 떡이군. 한 번 잽싸게 올라갔다가 내려오면 좋을 텐데. 밤중에 몰래 올 라가 봐? 하지만 밤에는 어두워서 주변이 잘 안보일텐데. 어쩐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아니, 마족이니 지성이면 마신도 감동하신다고 해야하려나. 아무튼, 마침내 그 기회가 온 것이다. 그날따라 점심을 빨리 먹고 나와보 니 망루에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이게 왠 떡이야! 재빨리 갑판 위를 살펴보니 몇 명 의 선원들이 있긴 했지만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느라 내가 온 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런 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었다. 으흐흐, 이런 황금 같은 기회가 올 줄이야. 오늘따라 시 도 때도 없이 나를 따라다녀야만 하는 기사들이 안 돼 보여 2시간의 자유시간을 준 것 이 이렇게 잘한 일이라고 생각될 줄은 몰랐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떨치기 위 해 자유시간이라는 핑계로 떨쳐버린 걸지도 몰랐다. 후자가 더 신빙성이 가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드디어 망루에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선원들이 모여있는 쪽을 보고 아직도 그들이 대화에 열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소매를 걷어붙였다. 치렁거리는 치맛자락도 오른쪽으로 끌어 모아 움직이기 편하게 한 번 묶었다. 언제 사람이 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지만 이럴 때 일수록 침착해야만 한다. 괜히 흥분하다가 치맛자락에 넘어져서 선원들이 이 곳을 보 게 할 필요는 없겠지. 망루를 한 번 올려다보고 실실 웃으면서 나는 망루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소리가 안 나게 조심하자. 올라가는 중간 혹시라도 들키지 않았을까 눈치를 살피며 올라가기를 계속한지 잠시 후 , 마침내 망루에 오를 수 있었다. 아자! 드디어 올라왔다! 내 앞을 가로막는 자 누구 메뇨. 비록 밑보다는 바람이 많이 불긴 했지만 이 곳에서 내려다보는 모습은 죠안의 말대로 멋있었다. 엘류시온 호와 베스 크레이지 호의 모습은 물론 수평선 너머까지 한 눈에 들어왔다. 이런 멋진 모습을 못보고 넘어갈 뻔하다니. 나중에 알았으면 얼마나 땅을 치고 후회했겠어. 햇빛에 반사돼서 보석처럼 반짝이는 바다의 모습은 정말 아름 다웠다. 마치 배가 빛의 물결 속에 떠있는 기분이었다. 한참 멍하니 바다를 내려다보던 나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밑을 내려다보았 다. "고, 공주님! 거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사라는 무엄하게도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로 봐서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올라와 있는 걸 어쩌 겠어. 설마 공주를 치겠어? 그리고 잠깐 눈이 뒤집혀 치려고 해도 가만히 맞아줄 내가 아니었다. 어느새 망루 밑에는 사라 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와 선원들이 몰려와 있었다. 동작 한 번 잽싸네. 시끄럽게 뭐라고 소리를 치고 있었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외치 는 거라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대강 유추해보건데 이 곳은 위험하니 어서 내려오라는 소리일 것이다. 그들의 말을 자세히 듣고자 약간 몸을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제각각 떠들던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한소리를 외 쳤다. "공주님!!!" 한마음 한뜻으로 외친 그들의 말은 배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작지도 않지만 넓지도 않은 방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침대가 두 개 놓여있었다. 탁자와 의자 같은 간단한 가구만 있었지만 삭막하다는 느낌보다는 깨끗하다는 느낌이 먼저 드는 방이었다. 희미하게 들리는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와 가구들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배 안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 선실의 작은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 이 세 사람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검은 머리에 잘생긴 얼굴의 청년과 푸른 머리를 어깨까지 기른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 그리고 갈색의 로브를 입은 마법사는 마주 앉아 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왜 이블로까지 이 곳에 보낸 거지? 마법사가 필요하다면 궁전 마법사 중 한 명을 보내면 될 텐데......" 에릭의 질문에 이블로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물론 이번 축하 사절단은 단순한 축하 사절단이었다면 그래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나라의 여왕이 특별한 친분 관계도 없는 사람을 직접 초청한다는 것은 그 만큼 그를 중요한 인물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그 것도 두 왕자님을 제치고 말입니다 ." "그럼 스피린의 레리이나 여왕이 마리엔 공주님을 차기 국왕 후보로 인정하고 초대한 것이란 말인가?" 세린의 반문에 이블로는 계속 말을 이었다. "확실한 속은 알 수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많습니다. 국왕 폐하께서도 외교회의의 일 로 인해 마리엔 공주님을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이번 일 을 승낙하신 겁니다. 이번 기회에 마리엔 공주님을 타국의 왕족들이나 왕국 내의 귀족 들에게 단순한 공주가 아닌 차기 국왕 후보로 부각시키자는 것이 라디폰 공작님의 생 각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공작님의 명을 받고 따라온 것입니다." 에릭과 세린은 그의 말에 적지 않게 놀랐다. 라디폰 공작이 마리엔을 차기 국왕 후보 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두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라디폰 공작의 아 들이고, 다른 사람은 그의 절친한 친구인 티스몬 백작의 아들이니 당연했다. 그렇기에 이블로가 직접 따라오자 라디폰 공작이 무슨 생각이 있는 것이라 짐작했지만 그런 생 각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다. 이블로는 공작의 오른팔인데다 마법사이기 때문에 수 시로 연락하는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에릭과 세린이 아는 고집 세고 놀기 좋아하는 말괄량이 공주님이었다. 결코 외 교 회의를 성공적으로 이끈 화제의 주인공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말싸움이야 논리적으 로 말하는 사람이 이긴다기보다는 우선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큰 목소리와 끝까지 우 길 수 있는 철판을 가진 사람이 이긴다. 물론 말싸움 대회에서 본 바로는 마리엔은 그 런 수준이 아니었지만 설마 외교회의에서도 그런 말솜씨가 통용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 과연 어느 쪽이 진짜 마리엔의 모습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라디폰 공작님께서 두 분께서 특별히 마리엔 공주님의 호위에 신경을 써달라 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왕비의 측근들이 움직일 가능성이 아주 없 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알았소. 아버지께서 따로 하신 말씀은 없......" "공주님!!!" 그 순간이었다. 처절한 절규 소리가 들린 것은 말이다. 에릭은 말을 하다 말고 멈칫했 다. 그리고 그 것은 세린과 이블로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던 그 들은 순식간에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설마 이런 바다 한가운데에서 무슨 일이 일 어날까, 라고 방심했던 것이 실수였다. 오펠리우스 왕비가 벌써 움직인 것일까? 미리 스파이나 암살자를 심어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그러나 다급하게 뛰쳐나간 그들이 본 것은 암살자도 아니요, 해적도 아니요, 괴물도 아니었으며 마리 엔이 갑자기 쓰러진 것도 아니었다. 마리엔은 무사해 보였다. 다만 문제라면 그녀가 현재 있는 장소가 문제였지만 말이다. 마리엔은 망루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보는 기사들과 선원들은 거의 뒤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떨어지면 즉사는 아니어도 중상은 입을 것 같은 높이 인데도 마리엔은 겁도 없이 뚤래뚤래 주변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에릭은 절로 머리가 아파옴을 느낄 수 있었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면서 그는 과연 마리엔이 어떻게 저기까지 올라갔는지 고민해보았지만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어디 덧나냔 말이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말은 바로 마리엔을 두고 하는 말임에 틀림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세린도 당황스럽긴 했 지만 우선 이 일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자 주위에 있는 기사 중 아무나 붙잡고 물어 보았다. 기사의 말인즉슨 갑자기 공주님이 보이지 않아 이리저리 찾아다니고 있는데 망루 위에서 어디서 많이 본 여자가 서있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바람 에 검은 머리를 나풀거리며 서있던 여자는 마리엔이었다. 전후사정 설명을 들은-그래 봤자 찾다보니 망루 위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소리였지만- 세린과 에릭은 동시에 한 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부터 망루를 유심히 보는 모습이 이상했지만 설마하니 올라갈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블로도 황당한 눈으로 마리엔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다 른 사람들과는 달리 제법 여유있어 보이는 3명의 인물이 있었다. "죠안 니가 괜히 바람을 넣어서 이렇게 됐잖아." "누가 진짜로 올라가실 줄 알았냐?" "그래도 그동안 너무 조용하셨던 것이 더 불안했어. 차라리 뭔가 일을 벌이는 것이 마 음 편하지." 명색이 마리엔의 기사이면서도 너무도 태평한 보나인들. 그들은 마리엔은 무슨 일이 생겨도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다수의 사 람들은 그런 보나인들이 얄미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너희들은 뭐하고 있었던 거냐! 공주님께서 망루에 올라가도록 놔두다니!" 평소에는 침착한 샤크였지만 이런 순간에까지 침착함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만약 자 칫 잘못해서 마리엔이 다치기라도 하면 당장 불벼락이 떨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선원들도 그걸 잘 알고 있게 때문에 아무런 말도 못하고 가만히 고개만 숙이고 있었 다. 그런 선원들의 모습에 더 부아가 치민 샤크가 다시 소리를 치려하자 이블로가 그 를 말렸다. "샤크 선장님, 침착하십시오. 지금은 어떻게 공주님을 밑으로 모셔오는 것이 급선무입 니다. 일단 공주님을 밑으로 모시고 온 다음에 책임을 물어도 늦지 않습니다." "내가 잠시 흥분을 해서 가장 중요한 일을 잊을 뻔했군. 하지만 무슨 수로 공주님을 저기서 모시고 온단 말이오. 혼자서 내려오시게 할 수도 없지 않소." 흥분을 간신히 삭인 샤크는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마법사가 있으니 마법을 사용해도 될 것 같았지만 만에 하나 중간에 집중이라도 깨지면 공중에서 그대로 떨어질 것이 뻔 했다. 그러느니 차라리 직접 안고 내려오는 것이 더 안전한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누 가 올라가느냐가 문제였다. 일단 해군들이 올라간다면 다른 사람들보다는 능숙하겠지 만 기사도 아닌 그들이 공주를 안고 내려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 고 나이든 샤크가 직접 올라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기사들 중 한 명이 올라가야 한 다면 그 중에서도 가장 실력있는 자가 올라가는 것이 제일 안전했다. 모두의 시선은 에릭에게 쏠렸다. 에릭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순순히 망루로 올라갔다. 망루에 올라가서 마리엔을 직접 본 에릭은 기가 찼다. 소매는 걷어붙이고 치맛자락은 거치적거리지 않게 한쪽으로 묶어놓았다. 이건 어디를 보나 작정하고 올라온 모습이었 다. 조용히 침묵을 고수하면서 빤히 쳐다보는 에릭의 모습에 마리엔은 진땀을 흘렸다. 화를 내야할 때 화를 내지 않으면 더 불안한 법이다. 에릭이 화를 내면 어떤 행동을 하리라 마음먹었던 마리엔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금방 내려가려고 했어. 지금 내려갈께." 마리엔은 재빨리 내려가려고 했지만 어느 순간 자신의 몸이 붕 뜨는 것을 느낄 수 있 었다. "에? 뭐야?" "가만히 계십시오." 마리엔이 뭐라고 하든 말든 에릭은 그녀를 허리에 안은 채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기서 움직이면 둘 다 떨어진다는 것을 알기에 마리엔은 가만히 있었지만 어색했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사람하며, 내려가는 방법하며 창피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리고. .....조심히 에릭의 눈치를 살피던 마리엔은 살며시 물어보았다. "저기...안 무거워?" 마리엔의 질문에 에릭은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대꾸했다. "알면 묻지 마십시오." 뭬야? 알면 묻지 마십시오, 라고! 에릭, 가만 안 둔다. 기필코 절대 가만두지 않 으리. 여자에게 가장 상처를 주는 말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넌 성격은 좋은데 나랑 맞지 않는 것 같아, 라고 겉은 예쁘게 포장되어 있지만 실상은 '난 성격은 더러워도 예쁜 여자가 좋지. 너 같은 호박은 질색이야', 라는 속내를 내포한 말이다. 그리고 다 른 하나는 너 정말 무겁구나. 살 좀 빼는 게 어때?, 라는 말이다. 여자에게 살쪘다는 말을 하는 것은 죄악이다. 여자들이 그 말에 얼마나 상처를 받는지 아는가. 겉으로는 웃으면서 넘어가도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리는 것이 여자란 말이다. 그런데 뭣이 어쩌 고 저째? 아무리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는 여자라도, 살이 쪘건 안쪘건 간에 살쪘다거 나 무겁다는 말은 모든 여성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런 말을 어려워하면서 말하는 것도 아니고 장난으로 말하는 것도 아니고 담 담하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왜 무겁다는 거야? 이걸 보라구. 날씬하잖아.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남자에게 그런 말을 들을 몸매는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듯했던 에릭의 어조. 저주해주겠어. 낮에 있었던 일은 나를 분노하게 만드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만약 여기가 마계였 다면 그 놈은 틀림없이 내 손에 죽었을 것이다. 한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면 내 기분이 매우 저조해 보이자 다른 사람들이 망루에 올라간 것에 대해 별 말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차라리 주의를 듣고 무겁다는 말따위는 듣지 않는 것이 나았다. 그 런 주제에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평소와 별다를 바 없는 얼굴이라니. 에릭, 너는 모 든 여자들의 적이다! 두고봐! 네가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해 한다. 후회하게 만들어주겠어. 겨우 말 한마디에 속이 좁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대부분 남자이거나 자신의 외모에 너무나도 자신감이 넘쳐나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라고 생각하는 소수의 여자들일 것이다.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여성이 라면 지금 내가 느끼는 분노를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콰앙~! 갑자기 뭔가 세게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혼자 씩씩대던 나는 간신히 옆에 있는 화장대를 붙잡고 균형을 잡았다. 얼마 후 흔들림이 멈추긴 했지만 밖은 매우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그 때 문이 벌컥 열리고 보나인들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죠? 설마 군함이 있는데 해적들이 덤비기라도 했나요 ?" 내 말에 보나인은 어두워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차라리 해적이라면 낫겠군요. 바다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다른 기사들은 모두 바다 괴물과 싸우러 가고 보나인들이 나를 호위하러 온 것이다. 갑자기 바다 괴물이라니 이게 무슨 일이냐? 아까 그래서 흔들렸던 거구나. 그동안 단 한번의 장애물도 없이 순탄하기만 했던 항해에 난데없는 바다 괴물이 습격해온 것이다 . 항상 여유롭던 보나인과 가스톤, 죠안의 얼굴이 어두워진 것으로 봐서 상당히 센 놈 임에 틀림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라 여러모로 불리했다. 이럴 때 손놓고 있을 수 는 없지. 바다 괴물 주제에 내가 타고 있는 배를 습격했겠다. 나는 보나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갑판 위로 달려갔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마법사들이 마법으로 주위를 밝혀 괴물의 모습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바다 괴물은 거의 10m는 될 것 같은 거대한 몸체를 자랑하고 있었다. 보라색 의 미끈한 몸에 뾰쪽한 가시들이 줄줄이 박혀있었고, 날카로운 이빨들이 박혀있는 입 에서는 뾰족한 둥근 물체를 뱉어내고 있었다. 그 둥근 물체는 성게의 확대판이라고 하 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다행히 군함은 튼튼하게 만들어져 괴물의 입에서 나온 것을 맞아도 큰 손상은 없었지만 계속 맞다보면 틀림없이 구멍이 뚫리고 말 것이었다. "저게 뭐야?" 마족이라고 모든 마물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마물들이 몇 천 마리도 훨씬 넘는데 그 걸 언제 다 세고 있겠는가. 아마 모든 마물을 아는 것은 마신뿐일 것이다. 그래도 상 당한 마물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처음 보는 괴물이었다. "플큐렘이란 것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골데미를 주의해야합니다. 굉장한 속력으로 날 아드니 피하지 못하면 즉사입니다. 하필이면 이런 밤에 공격해오다니. 그보다 어서 선 실로 들어가십시오! 여기는 위험합니다!" "내 실력 알잖아. 혼자 뒤에 숨어있기는 싫어." 내 말에 가스톤이 내 팔을 끌면서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플큐렘은 혼자서 상대할 수 없습니다. 바다라 대공 무기나 마 법으로 상대해야 합니다. 그러니 어서 피하십시오!" 나와 보나인들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가는 배가 망가지는 것은 물론 즉사였다. 플큐렘은 쇠를 긁는 듯한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면서 끊임없이 골데미라는 것을 뱉어내고 있었다. 크기도 상당해서 피해가 커지고 있었다. 아무리 마법으로 주위를 밝혔다고 해도 대낮처럼 밝 은 수는 없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마법사들의 수가 부족했다. "모두 침착해라! 대포만 장전하면 끝난다! 대포를 준비해라!" 샤크 선장의 명령에 선원들은 분주히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다른 두 척의 배들도 급히 선회해서 플큐렘의 우측과 좌측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과연 그동안 훈련이 잘 되어 있었는지 끊임없이 골데미가 날아오는 와중에도 누구 하나 도망치는 사람이 없었다. 기사들과 병사들도 검 대신 활을 들고 화살을 장전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수많은 화살 들이 비 오듯이 플큐렘을 향해 날아갔지만 워낙 거구라 맞아도 큰 효과는 없었다. 오 히려 플큐렘은 화가 났는지 뾰족한 가시가 박힌 꼬리를 휘두르면서 더욱 격렬하게 움 직였다. "으앗!" "위험하다! 피해!" 어떻게 된 게 머리는 하난데 꼬리는 5개나 됐다. 다섯 개나 되는 꼬리는 계속 세 척의 군함들을 내리쳤다. 그 위협적인 공격에 사상자와 부상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워낙 큰 꼬리라 대충 휘둘러도 한두 명은 꼬리에 맞고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가시가 없는 부분에 맞으면 나았지만 가시가 박힌 부분에 맞은 사람은 그대로 가시에 꿰여 사라져 버렸다. 골데미가 날아오고 꼬리까지 이리저리 왔다갔다하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사정은 다른 배들도 마찬가지인지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그래 도 저 플큐렘이라는 괴상한 마물보다는 그동안 며칠이라도 얼굴을 본 인간들에게 정이 더 가게 마련이었다. 저런 거구를 대포 하나로 처리하기는 힘들었다. 또 괜히 섣불리 맞았다가는 미쳐 날뛸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플큐렘을 에워싸고 일제히 포격을 시작하려 했지만 그 렇다 보니 모든 배가 준비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이럴 때 마법사들이 마법 으로 공격을 했으면 좋겠지만 현재 그들은 이 일대를 밝히고 있었다. 마법사들의 수가 너무 모자랐던 것이다. 하긴 3명의 마법사만으로 세 척의 거대한 군함과 플큐렘의 행 동 범위까지 모두 밝힐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이 제법 실력이 있는 마법사였기 때문이었 다. 그걸 알면서도 계속 당하고 있자 절로 투덜거리게 되었다. 쳇, 마법도 동시에 사 용하지 못하는 건가. 내가 마법을 써야 하는 건가? 하지만 4서클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데. 그런 마법은 도움도 되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야. 그렇다고....... 흑마법을 사용한다면 어떻게 될 것도 같았지만 흑마법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이 보통 심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계속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플큐렘도 아주 돌대가리는 아니었는지 대포가 서서히 장전되어 가자 어서 이 먹음직스러운 먹이들을 처리해야됨을 느꼈다. 그리고 이상한 빛으로 주위를 밝히고 있는 마법사들을 향해 골 데미를 날렸다. 빛이 사라지면 플큐렘이야 상관없겠지만 우리들은 플큐렘이 어디서 어 떤 공격을 해올지 몰라 심각한 피해가 생길 것이다. 골데미는 보기에도 허공에 떠있는 빛의 구의 빛을 받아 섬뜩한 빛을 발하며 세 명의 마법사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기사들이 재빨리 그 앞을 가로막았지만 막을 방법 은 없어 보였다. 소드 마스터라면 검기로 골데미를 잘라버리겠지만 보통의 기사라면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맹렬한 속도로 날아오는 골데미를 막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방 패가 될 뿐. 쳇, 쳇, 쳇. 저 것은 왜 하필이면 이런 밤중에 덤벼들어서 열 받게 하는 거야?! 마법 사는 왜 이렇게 적은 거야?! 대포는 왜 이렇게 늦게 장전되는 거야?! 끊임없이 투덜거 리면서도 내 입은 마법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심연의 어둠 속에 잠든 위대한 힘이여, 이제 그 깊은 잠에서 깨어나서 내게 오라. 너 는 나의 검이며, 나의 방패이며, 나의 몸이라. 위대한 어둠에 저항하는 존재에게 그 미약함을 깨닫게 하고 그 육신을 갈가리 찢으라. 레이지 윈드!" 가스톤을 떨구고 앞으로 내민 양 손에서 검붉은 기운의 날카로운 바람이 쏘아졌다. 바 람은 칠흙보다 더 어두운 검은 색이면서도 핏빛과 같은 붉은 색이었다. 무서운 기세로 쏘아져간 마법은 기사들과 마법사들의 앞까지 다가온 골데미와 충돌하였다. 충돌하자 마자 골데미를 둘러싼 마법은 쓰각,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면서 골데미를 잘라버렸다. 기사들이 눈을 떴을 때는 골데미는 주먹만한 크기로 잘려 있었다. 저걸 사람에게 썼다 고 생각해 보라. 흑마법은 잔혹한 방법으로 사람을 살상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꺼려하 는 것이었다. 하지만 효과만은 백마법이나 정령 마법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갑판 위에 있던 사람들은 현재 상황도 잊어버리고 나를 돌아다보았다. 이 사람들이 지 금 어디다 정신을 파는 거야? 아무리 놀라워도 그렇지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이 마당에 말이야. "뭐하는 거예요?! 정신차리고 다음 공격에 대비해요!" 내 일갈에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그제야 플큐렘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 고 다시 방어에 들어갔다. 이왕 마법 써버린 것 어쩌겠는가. 아까부터 쌓였던 분노를 모두 쏟아내 버리겠어. 에릭의 몫까지 니가 맞아라! 대포가 장전될 때까지 플큐렘은 내 마법의 화살받이가 되었다. "쏴라!" 샤크 선장의 신호에 따라 세 척의 군함에서 동시에 포격이 이루어졌다. 세 척의 배에 서는 대포를 쏠 때 나는 하얀 연기들이 거의 동시에 올라왔다. 퍼버벙! 제 아무리 거 구라 하더라도 대포를 수십 발 맞고 무사할 턱이 없었다. 오히려 그만큼 맞히기가 쉬 었다. 플큐렘은 마지막 저항이라도 하듯이 격렬하게 꼬리를 휘둘렀지만 이미 승기는 우리 쪽으로 기운 상태였다. 마침내 플큐렘의 푸른 피가 바다를 가득 메우고 거대한 몸체가 서서히 바다로 가라앉을 때에야 주변을 수습할 수 있었다. 사상자는 18명이었 지만 부상자는 거의 없었다. 다행히 배들도 항해에 지장을 줄 정도로 큰 손상은 입지 않았다. 뒷수습이 끝나자 샤크 선장과 마법사들, 기사들까지 모두 내 주위로 몰려들었 다. "마리엔 공주님, 흑마법을 쓰실 줄 아셨습니까?" 프리티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하긴 마법사라면 방금 내가 사용한 마법이 흑마법 중에 서도 6서클 중반에 속하는 마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흑마법 자체가 타마법 에 비해 살상력이 뛰어난데다 마족이 흑마법을 사용했으니 당연히 효과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무난히 플큐렘을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토르의 공주도 아니고 마 법이 취약한 페드인 왕국의 공주가 마법을, 그 것도 흑마법을 익히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그리고 흑마법이라는 말에 마법사들을 제외한 사람들은 흠칫거렸다. 역시 여기도 무지한 인간들이 넘쳐나는구나. 틀림없이 흑마법을 쓰는 사 람들은 인간의 공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음이라. 오호라, 통재로세. "흑마법을 사용한다고 해서 모두 마족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흑마법사라고 모두 사악한 것도 아닙니다. 흑마법사들의 대부분은 마법에 대한 열정이 강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흑마법사들에 대해 왜곡된 소문이 나돌았던 것은 신전 측의 잘못 된 선전 때문이었습니다. 마법사들이나 학자들은 흑마법이 반드시 나쁘다고 보지는 않 습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흑마법사들의 권익을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주장도 많이 일고 있습니다. 하지만 흑마법사들을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데 어떻게 익히신 겁니까? " 이블로가 설명을 하자 무슨 마녀 보듯 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결 누그러들었다. 으흠 , 근데 마족과 연관은 없어도 내가 마족인데 말이야. 아무튼, 지금은 이블로의 질문에 설명을 해주어야만 했다. 궁전 마법사 중에는 흑마법사가 없으니 그들에게 배웠다고 할 수도 없었고, 언제 밖을 나와 본 적이 있어야 흑마법사를 만날 기회도 있지 않겠는 가. 이럴 경우에는 그저 이런 방법이 최고였다. "그거야 내가 너무 잘났기 때문이지요. 오홋홋호~!" 허리에 두 손을 얹은 채 이 하늘 아래 나만큼 잘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라는 포즈 를 취하며 웃자 저마다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야기의 초점을 흐리는데는 이렇게 하는 게 제일이지. 본심이 전혀 섞여져 있지 않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플큐렘의 습격이 한 번 있은 후, 우리의 항해는 매우 순조로웠다. 플큐렘으로 인해 사상자가 난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앞을 가로 막는 장애물도 없고 순풍까지 불어 우리는 예상보다 빨리 클라이드에 도착할 수 있었 다. 세 척의 군함들이 항구에 정박하자 미리 마중 나와있던 스피린의 기사단들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잘 오셨습니다, 마리엔 공주님. 저는 가디스까지 여러분들을 호위하고 갈 엔젤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저희 스피린의 기사단이 공주님을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엔젤? 작명센스하고는. 누가 지었는지 얼굴이나 보고 싶다. 만약 그녀가 인간들이 생 각하는 천사의 이미지처럼 아름답고 고상하고 우아하다면(어디까지나 생각이다) 별 말 하지 않을 것이다. 엔젤은 근육이 보기 싫을 정도로 울퉁불퉁한 것은 아니지만 덩치 가 보통 여자들보다 컸다. 게다가 번쩍이는 검은 빛의 갑옷과 허리에 찬 환도는 보통 의 천사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이름과 외모가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했다. "열렬한 환영 감사합니다." 멀리서 보면 우리들은 상당히 재미난 모습을 연출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사로만 구성 된 스피린 쪽과 사라를 제외하면 모두 남자기사로 구성된 페드인 왕국 쪽. 그런 두 일 행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으니 무슨 여와 남의 대결 장소 같았다. "그동안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피곤하실 테니 숙소로 가시지요. 가디스는 여 러분이 푹 쉰 후에 출발하겠습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신 데다 다른 나라의 사절단 은 아직 많이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유가 있습니다." 엔젤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기사가 숙소로 앞장을 섰다. 그리고 그동안 긴 항해로 지친 심신을 푹 쉰 후에 우리 일행은 스피린의 기사단과 함께 가디스로 출발했다. 해군들 은 그대로 클라이드에 남아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하긴 해군들이 한 두 명도 아닌데 그 사람들 몽땅 데리고 가면 스피린 쪽에서도 숙식 제공하고 하려면 상당히 골치 아플 것이다. 클라이드에서 가디스까지는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었고, 길이 잘 뚫려있어 수월하게 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디스에 도착해서 본 스피린의 궁전은 화려하고 섬세한 페 드인 왕국의 궁전에 비해 심플하고 깨끗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페드인 왕 국의 궁전에 비해서였지 화려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궁전에 도착해보니 스피린 대륙에 있는 나라 중에는 우리 일행이 가장 빨리 도착했지 만, 세를리드와 류에서는 이미 사절단이 와있었다. 다른 나라의 사절단과는 친하게 지 내는 것이 좋다는 라디폰 공작의 주장에 따라 그들과 자주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어 떻게 라디폰 공작의 주장을 알게 되었느냐 하면 이블로를 통해 그의 전언을 들었다. 역시 이블로는 감시 겸 명령 하달 겸으로 붙은 것이었다. 두 사절단을 보면 세를리드에서는 다섯째 왕자가, 류에서는 백왕(百王) 이라는 참으로 발음하기 힘든 사람이 와있었다. 베아, 배오, 베그아, 바그와. 여러 차례 혀를 굴려 보았지만 도저히 그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하지 못하자 그냥 화이트라고 불러달라 고 했다. 자신의 이름을 이 곳 언어로 바꾸면 화이트와 비슷하다고 한다. 진작에 화이 트라고 가르쳐줄 것이지. 사람(?)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아무튼, 화이트라 는 이름은 새하얀 백발과 길게 기른 흰 수염을 가진 그와 매우 잘 어울렸다. 그리고 그는 이름뿐만 아니라 외모와 복장에서도 눈에 띄었다. 이 것은 화이트뿐만 아 니라 다른 류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류인은 약간 노란 피부에 대부분이 검은 머리 와 검은 눈을 가지고 있었으며 눈도 약간 위로 올라갔고, 코도 뭉툭했다. 그리고 입고 있는 옷도 류의 특산물인 비단으로 만들어진 특이한 형식의 옷을 입고 있었다. 게다 가 자기네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발음은 엄청 어려우면서도 톡톡 튀는 것 같은 대륙 공용어와는 달리 같은 톤으로 쭈욱 이어지는 말을 했다. 스피린도 많이 다 른 면이 있지만 류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세를리드도 류와 스피린만큼은 아니어도 페드인 왕국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그런 그 들을 만나는 것은 신선한 즐거움이었다. 라디폰 공작의 말이 없었어도 내가 먼저 찾아 다닐 정도였다. 역시 오길 잘했어. 인간이라고 모두 같은 것은 아니었구나. 그렇게 틈만 나면 세를리드와 류의 사절단을 찾아다닌 지 나흘째, 뜻밖의 인물이 찾아 왔다. 마침 밖에 나가려고 했던 나는 예상치 못한 지아의 방문에 일정을 취소하고 그 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마리엔 공주님, 오랜만입니다." "그렇군요, 지아. 만나서 반가워요. 그런데 저기......그 남자분은 누구시죠?" 그녀는 혼자 온 것이 아니라 처음 보는 갈색머리의 남자와 함께 왔던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뭐냐! 무슨 남자가 옷을 저렇게 입고 다니는 거냐! 멀리서 보면 여자인 줄 알겠다. 갈색머리의 남자는 바지는 입었지만 그 위에 속이 비치는 치마 비슷한 것 을 입고 있었다. 치마와는 달리 한쪽이 완전히 터져 있었지만 그 것만 제외하면 완전 히 치마였다. 게다가 뭐냐! 악세사리야 그렇다 쳐도 왜 얼굴에 분칠을 하고 다니는 거 야! 물론 연한 화장이었지만 나를 경악하게 만드는데는 충분했다. 스피린에서도 여자 가 화장을 하고, 악세사리로 치장하고, 치마를 입었기 때문에 더욱 여자로 착각할 가 능성이 많았다. 이 것이 바로 문화의 차이란 말인가. 분명히 남자도 화장을 한다고는 들었지만 집접 보는 것과 단순히 듣는 것은 천차만별이었다. 여자들이 갑옷입고 다니고 그런 것은 별 로 이상해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가 이런 모습으로 다니는 것은 매우, 매우 이상해 보 였다. 그러나 지아와 그 남정네는 이런 모습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 다. 무서운 것들. 나는 어렵사리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폈다. "이 쪽은 제 약혼자인 크로드루 파오스 제프입니다. 제가 공주님께 한바탕 당한 일을 이야기해줬더니 꼭 뵙고 싶다고 해서요.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군요." "천만예요. 실례라뇨. 잘 오셨어요." 실례야! 그 것도 엄청난 실례라구! 아무리 나라도 남정네가 그런 옷에, 그런 치장을 하는 것은 정말 보기 힘들었다. 이왕 데려오려면 정상적인(?) 옷으로 입히고 오던가. 그나마 크로드루가 가는 선을 가지고 미남이라 그럭저럭 봐줄 만 했지만 만약 우락부 락한 남자가 저 옷을 입었다면......괜히 상상했다. 뇌가 썩을 것 같아. 그저 근육이 울퉁불퉁한 남자가 크로드루가 하고 있는 데로 꾸미고 호호호, 하고 웃는 모습을 떠올 려버린 내 자신이 저주스러울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크로드루라고 합니다. 지아에게 많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야말로 만나서 반가워요. 우선 자리에 앉으시죠." 거의 기계적으로 인사를 건넨 나는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되 도록 그에게는 시선이 가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의 모습이 보기 심히 괴로울 정도는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상당히 어울렸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모습인데다 그만 보 면 조금 전의 끔찍한 영상이 떠오를 것 같아 티나지 않게 외면하고 있었다. 한참 그들 과 담소를 나누던 중, 지아가 어디서 들었는지 플큐렘 습격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듣기로는 클라이드로 오시는 중간에 플큐렘을 물리쳤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플큐렘 은 상대하기가 까다로운 마물 중에 하나인데 대단하십니다. 모두 마리엔 공주님의 뛰 어난 마법 실력 덕분이라고 칭찬이 자자합니다. 정말 굉장하십니다. 외교에만 능한 것 이 아니라 마법까지 정통하셨군요." 지아는 정녕 감탄했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그녀의 옆에 있던 크로드루도 마찬 가지였다. "아니예요.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었어요." 내가 손을 내저으며 말하자 지아가 다 안다는 식으로 말했다. "겸손하시군요. 하지만 다 들었습니다. 흑마법을 6서클 중반까지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은 대단한 일입니다. 무지한 인간들이야 흑마법이 마족의 힘이네 어쩌네 하지만 흑마 법은 어둠의 힘만 이용할 뿐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위력도 다른 마법보다 훨씬 강하죠 . 흑마법사들은 보기가 힘든데 직접 눈앞에서 보니 영광입니다."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까지 소문이 나다니. 누군가 소문을 퍼트렸음이야. 심증 이 가는 인간이 하나 있긴 했다. 이블로, 그 인간일 것 같단 말이야. 며칠 전부터 다 른 사람들에게 흑마법이 6서클이면 굉장하다고 떠들고 다닐 때부터 알아봐야 했어. 무 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과연 그 인간이 무슨 일을 벌이려고 이러 나 생각에 잠겨있을 때, 지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여왕 폐하께서......" "네?"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하고 반문했다. 그러자 지아는 재빨리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크로드루의 노래를 한 번 들어보시겠어요? 굉장히 노래 를 잘한답니다." 뭔가 말을 하려다 만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쪽에서 말을 하지 않겠다는데 이쪽에서 재 촉할 필요는 없었다. 정말 급하면 그 쪽에서 먼저 말하겠지. 나는 크로드루가 노래를 잘한다는 것은 과거 라디폰 공작의 보고서를 통해 들은 바 있었기에 기꺼이 응했다. 크로드루는 처음에는 쑥스러워하는 것 같았지만 지아와 나에게 떠밀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스톤과는 차원을 달리 하는 노래실력이었다. 가스톤의 노래가 즐거워하는 사람을 순식간에 분노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의 노래는 분노한 사람마저 즐겁게 만들 수 있는 실력이었다. 그리고 저녁 무렵에나 돌아가는 두 남녀를 보면서 나는 한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자기 약혼자 자랑하고 왔구만! 내가 가디스에 도착한지 일주일만에 다른 나라의 사절단들도 모두 도착했다. 하이덴 제국의 사절단이 가장 늦게 도착한데다 대부분 왕족이나 공작이 온데 반해 백작이 와 서 눈총을 받긴 했지만 말이다. 최근 들어 하이덴 제국 내의 분위기가 살벌하다는 소 문이 사실인 듯 축하 사절단으로 왔으면서도 조바심을 내는 눈치였다. 그러나 하이덴 제국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모두 이 행사를 즐기는 분위기였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고 말이다. 그리고 내가 레리이나 여왕을 보게 된 것은 그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무도회가 열린 첫 날이었다. 수도에서 열리는 축제와 때를 같 이해 열린 무도회에서 그녀가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레리이나 여왕은 붉은 곱슬머리 위에 은빛의 왕관을 쓰고 있었고, 가슴이 움푹 파인 하얀 드레스 위에 은빛의 숄을 두르고 있었다. 드레스는 장식 하나 없는 단순함의 극 치를 보여주었고, 악세사리도 전혀 화려하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레리이나 여왕의 모습에서는 빛이 났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전혀 꿀리지 않는 당당함 때문이리라. 그렇게 뛰어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힘이 담긴 눈동자에서는 한 나라의 지배자다운 면모 를 볼 수 있었다. "여왕 폐하, 감축드리옵니다. 저희 파르마의 페인 국왕 폐하께서도 축하드린다고 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고맙소. 페인 국왕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주시오." 파르마의 사신이 그녀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물러나자 이번에는 내가 앞으로 나섰다 . 이런 식으로 각 나라의 사절단이 그녀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나서야 무도회가 열 리는 것이다. 상당히 번거로운 절차였지만 하는 사람보다야 듣는 사람이 더 지루하겠 지. 게다가 사람 한 명 한 명 응수를 해줘야하는데 얼마나 골치 아프겠는가. 속으로 얼마나 지루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레리이나 여왕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페드인 왕국에서도 레리이나 여왕 폐하의 생신을 축하드리옵니다." 그러나 레리이나 여왕은 다른 사람에게 한 것처럼 인사를 받지 않고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살피고 있었다. 으잉? 지금 저 여자가 노려보고 있는 것 맞지? 초대를 했으면 환 대는 하지 못할망정 어디서 그따위 눈으로 보는 거야! 상당히 매서운 눈초리였지만 그 정도에 굴할 내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웃으면서 잘도 환대하더니 나만 째려본다 는 사실에 괜히 기분이 나빠져서 나도 똑같이 그녀를 쏘아보았다. 파티장에 있던 사람 들은 나와 여왕 사이의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프리티는 옆에서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었다. "풋. 재미있는 아이군." 한창 레리이나 여왕을 노려보던 나는 그녀가 갑자기 웃어버리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여왕은 사람들 앞이라는 것도 잊었는지 아니면 원래 사람들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것인지 한바탕 웃어 제켰다. 그리고 간신히 웃음을 멈춘 레리이나 여왕은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지아에게 듣던 대로 당돌하시군요, 마리엔 공주. 하지만 마음에 듭니다. 그 것은 군 주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 중에 하나니까요.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신념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앞으로는 만날 일이 많아질 것 같군요." 그녀의 의미심장한 말에 파티장은 다시 한번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들으면 그 냥 그 당돌함이 마음에 든다고 해석할 수 있지만, 어떻게 들으면 군주로서의 자질이 충분하다고 해석할 수도 있었다. 아이고, 저 여자까지 왜 저러는 것이야. 혹시 라디폰 공작과 뭔가 짜기라도 했나. #19-여행의 시작 레리이나 여왕이 나를 자신의 집무실로 부른 것은 축하 파티기간이 거의 끝나갈 즈음 이었다. 첫 대면 이후 무도회에서 몇 번 대화를 나눠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부 른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이런 야밤에 말이다. 지금은 검은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 히 박혀 흰빛을 뿌리고 있고, 노란 달이 은은한 빛을 품어내는 늦은 시간이었다. 내가 막 잠자리에 들려는 찰나 레리이나 여왕의 비서관이 찾아와서 그녀가 나를 찾는 다는 말을 전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할 말이 있다면 내일 해도 될텐데 굳 이 지금 부른다는 것은 뭔가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냥 같이 이야기나 하자고 불렀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비서관의 뒤를 따라가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왜 불렀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참 비서관을 따라가자 그녀는 활을 당기고 있는 여인의 상이 양각된 갈색의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여왕 페하. 모셔왔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해라." 문 안쪽에서 레리이나 여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비서관은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문 이 열리자 여왕의 집무실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집무실은 화려했지만 보통 생각 하는 화사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벽면에는 번쩍이는 검과 단검, 갖가지 무기들이 걸려 있었고, 정면에는 레리이나 여왕 그녀 자신이 갑옷을 입고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그려 진 그림이 걸려있었다. 보통 꽃이나 보석들로 장식된 공주나 왕비의 방과는 달리 레리 이나 여왕의 집무실은 무기와 갑옷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암살자가 침입해도 벽에 걸린 것 하나만 집고 싸워도 될 것 같았다. 레리이나 여왕도 기사 못지 않은 실력이라고 하니 암살자에게는 매우 위협적인 방이었다. 내가 색다른 분위기의 집무실을 둘러보고 있자 레리이나 여왕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신기한 모양이군. 하긴 페드인 왕국은 스피린과는 달리 여자들이 무기를 들고 싸우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하니까. 그보다 우선 자리에 앉으시오. 서서 이야기 할 수는 없잖 아." 레리이나 여왕의 권유에 따라 그녀의 맞은편에 앉자 시녀들이 갈색의 술과 간단한 음 식들을 들고 왔다. 대부분 차와 다과를 권하는데 반해 대접하는 음식도 독특했다. 방 에 있는 장식들도 그렇고, 내온 음식도 그렇고 보통 호탕한 여자가 아니었다. 하긴 스 피린에서는 여자들이 오히려 술을 잘 마신다고 하니 그녀의 입장에서는 이 쪽이 더 당 연해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는 내게 술을 한잔 따라주고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그리고 단번에 쭈욱 마 셔버렸다. 페드인 왕국에서였으면 품위가 어쩌고, 예의가 어쩌고 할 만한 일이었지만 그런 그녀의 동작은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였다. 술동무로 부른 건가. 뭐 이런 것도 좋 겠지. 페드인 왕국에서야 이렇게 편하게 술을 마실 수 없었다. 한 번에 다 마시면 안 되고, 우아하게 마셔야만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었다. 물론 혼자서 몰래 홀짝거리면 상 관없지만 말이다. 나는 오랜만에 격식을 따지지 않고 편하게 술을 마셨다. 상당히 독 했지만 목구멍이 타는 것 같은 다른 술과는 달리 끝맛이 아주 깨끗했다. 그런 나를 보 던 레리이나 여왕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꼭 페드인 왕국 사람이 아닌 것 같소. 너무 자유분방하거든." 예리한 것. 딱 맞혔어. 약간 찔리긴 했지만 태연하게 행동했다. "그런가요?" "그렇소. 마치 같은 스피린 사람을 보는 느낌이오. 그런 면이 마음에 든 것인지도 모 르겠지만 말이오. 내가 사람을 제대로 본 모양이군." 그녀는 계속 내게 술을 권했고, 딱히 술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어서 계속 받아 마셨다. 다만 술을 먹이고 방심한 틈을 타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정신은 차리고 있 어야 했다. 그동안 봐온 레리이나 여왕은 그런 방법을 사용할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 지만 사람 속은 모르는 것이다. 나를 보라구. 그냥 겉만 보면 누가 속에 마족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겠어. 그러나 레리이나 여왕은 별다른 의도는 없었는지 자신도 신나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을 마시던 가운데 레리이나 여왕이 지금까지와 는 달리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리엔 공주도 내가 오늘 당신을 부른 이유를 매우 궁금하게 여기리라 생각하오. 사 실 짐이 이렇게 그대를 부른 것은 중요한 부탁을 할 게 있어서요." 부탁? 나한테? 과연 한 나라의 여왕이 부탁을 할 정도로 내가 실권이 있는 사람이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페드인 왕국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국왕에게 직접 말하는 것이 훨씬 빨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매우 심각해 보였다. 그녀가 그 렇게 나오자 방금까지만 해도 붕 뜨던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우선 내 이야기를 들어주시오. 스피린에는 히폴리테라고 부르는 성지가 하나 있다오. 히폴리테는 스피린의 초기 여왕이신 아테네님의 고향이며, 성인식을 치르는 여자들이 의무적으로 한 번씩 순례를 해야하는 곳이오. 16살이 된 여자는 그 곳에 있는 '아르 테미스의 산'의 정상에 있는 비석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소. 그 런데 최근 그 지역에서 마물들이 출몰해서 상당히 곤란해하고 있던 참이오." 그녀의 말에 나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마물들이 출몰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무슨 이야기야. 그리고 마물들이 극성이면 군대를 보내서 쓸어버리면 그만 아니야? 그런 이야기를 타국의 공주인 내게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 내 생각을 읽었 는지 레리이나 여왕은 설명을 덧붙였다. "아르테미스의 산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과거부터 마물들이 나타나지 않 았던 곳이오. 그런데 갑자기 많은 마물들이 나타난 것이오. 그 것도 흔히 보는 마물들 보다 더 강하고 흉폭한 마물들이오. 그래서 신관들을 보내 조사를 해보았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는 얻지 못했소. 다만 산의 정상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진다고 하더군. 그리고 그 힘이 어둠의 힘 같다는 말과 함께......" 어둠의 힘이 느껴지고 마물들이 갑자기 나타난다라. 집히는 게 있긴 있었다. 흑마법사 중에 누가 일을 벌린 건가? 흑마법 중에는 키메라 제조나 마물 합성 같은 것도 포함 되어 있었고, 그런 게 아니라도 흑마법으로 결계를 친다면 그 안에서는 마물들이 더욱 흉폭해진다. 나는 과연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물어 보았다. "그럼 흑마법사의 소행으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확실한 것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짐작하고 있소. 그렇다고 군대를 끌고 갔다가는 그 자가 눈치를 채고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니 소수의 실력자들이 필요한 형편이오. 그래 서 당신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오. 사실 흑마법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어서 흑마법사가 아니면 눈치채지 못하는 것도 많다고 들었소." 그렇지. 특히 저주 같은 건 죽을 때까지 모르지. 주문을 거는 과정이 복잡하고 위험하 긴 했지만 한 번 제대로 걸리면 증거도 없이 보내버릴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마법사라도 흑마법은 잘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레리이나 여왕의 말의 요점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었다. 상대가 흑마법사라면 이 쪽도 흑마법사 란 말인가? 분명히 좋은 방법임에는 틀림없지만 문제는 흑마법사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고심하고 있던 중에 내가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럼......" "그래요. 당신이 이번 일을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무리한 부탁인지는 알지만 플큐렘을 처리할 수 있는 실력자들을 구하는 것은 어렵죠. 당신과 당신의 호위 기사들의 도움 이 필요하오." 그녀의 제안은 상당히 뜻밖이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거절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 그 걸 도와준다고 하면 그동안은 더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입장에서도 나만큼 실력 있는 사람을 구하기 어려울 테니 서로 좋은 일이었다. 냉큼 승낙하고 싶 었지만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왜 내가 다른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단 말인가. 내가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보면서 같이 마음 아파하고 남을 도와주지 못해 사족을 쓰지 못하는 인간도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현재 내 신분 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기 곤란했다. 공주나 되는 사람이 자기 나라도 아니고 다른 나 라 마물들 퇴치에 앞장을 선다면 무슨 말들이 나오겠는가. 게다가 국왕의 명으로 온 것이니 일정이 미리 정해져있었다. 멋대로 빠져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승낙하면 당장 에는 좋겠지만 나중에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한순간의 쾌락에 밝은 미래를 망칠 수는 없었다. "글쎄요. 지금 당장은 뭐라고 말씀을 드릴수가 없겠습니다. 잠시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 레리이나 여왕과의 면담이 끝난 후 나는 프리티와 이블로를 불렀다. 미인의 아름다운 눈썹을 보는 듯한 초승달이 새까만 밤하늘의 한쪽편에 떠서 정적에 잠긴 가디스를 비추고 있었다. 이렇게 도시 전체가 잠들어 있을 때도 잠들지 않은 자 들이 몇 있었다. 늦게까지 공부하는 학생, 사랑의 고민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청춘, 한푼이라도 더 벌어보려고 일하고 있는 상인 등 각양각색이었다. 그리고 화려하게 치 장된 방 안에서 통신용 수정구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있는 남자도 그 중에 한 사람이 었다. 그는 짙은 청색 머리를 짧게 기른 평범하게 생긴 인물이었다. 그러나 마른 얼굴 에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그는 마법사들이 흔히 입는 평범한 로 브를 입고 있는 것으로 봐서 마법사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예상이 맞는 듯 그는 통신용 수정에 한 손을 가져다대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짧은 주문이 끝내자 수정 구에서는 눈부신 빛이 새어나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그 빛은 순식간에 사라 졌다. 그리고 빛이 사라진 투명한 수정구 속에는 라디폰 공작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 "이블로, 오랜만이군. 이번에는 무슨 일인가. 설마 마리엔 공주님이 검기라도 사용하 셨나?" 라디폰 공작은 이블로를 보자 장난스럽게 말했다. 클라이드에 도착하면 연락하기로 되어 있었던 이블로가 도착할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연락했을 때, 라디폰 공작은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라디폰 공작의 예상대로 일은 일어났다. 플큐렘의 공격. 하지만 이블로는 겨,우, 그런 일을 전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마리엔이 흑마법을, 그 것도 6서클의 고위마법을 사용했다는 놀라운 사실 을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백마법을 6서클까지 익혀도 놀랄 판인데 하물며 흑마법이라 니. 제아무리 라디폰 공작이라 해도 이 순간만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블로는 이 사실을 비밀에 붙일까 했지만 라디폰 공작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은 흑마법사라면 무조건 악에 물든 자라는 생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학계에서는 흑마법을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하는 소수의 마법사들이 나쁜 것이지 흑마법 자체가 나 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오갔고, 심지어 흑마법은 백마법이나 정령 마법보다 더 효율 적이고 편리한 마법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흑마법사들은 몸을 사리고 있었다. 과거 신전 측의 선동으로 일어난 피비린내 나는 '흑마법사 학살'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흑마법사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처형했던 일 때문에 흑마법사들은 모조리 음지로 숨어버렸다. 하지만 언제나 마음 졸이며 살아 야하는 도망자의 신세가 아니라 자유롭고 떳떳하게 살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럴 때 페드인 왕국이라는 강대국의 공주가 흑마법사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어떻게 될까? 든든한 보호막을 원하는 흑마법사들에게 그녀는 빛이요, 등불이요, 희망이었다. 소수의 완전히 미쳐버린 자나 원한에 사무친 자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흑마법사들은 음지에서 양지를 찾아 몰려들 것이다. 그들을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막강한 힘을 얻 을 수 있었다. 또한 페드인 왕국의 입장에서도 적어도 십년은 투자해야만 얻을 수 있 는 마법사들을 얻을 수 있으니 모두에게 좋았다. 신전 측이야 과거 증거도 없이 흑마 법사들을 학살한 비도덕적인 일을 들먹이면 알아서 입을 다물 것이다. 그래서 라디폰 공작은 이 일이 되도록 널리 퍼지도록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과연 마 리엔이 어떻게 흑마법을 익혔는지는 궁금했지만 본인이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밝히 고 싶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이럴 때 괜히 캐물으면 반감만 살 뿐이었고, 그녀가 그 힘을 잘못 사용할 것 같지도 않았다. 라디폰 공작은 만약 마리엔이 흑마법을 잘못 사 용한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을 잘못 본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라 디폰 공작의 조치로 이 일이 레리이나 여왕의 귀에도 들어갔던 것이다. 흑마법사들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편으로 만든다. 라디폰 공작이 아니면 누구도 쉽게 시도하 지 못할 발상이었다. 현재 아렌테에서는 흑마법사들을 포섭할 준비가 은밀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 치밀한 공작과 십 년 넘게 함께 해온 이블로인 만큼 그의 장난에도 능숙하게 답할 수 있었다 . "아쉽게도 검기는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또 사람을 놀라게 한 건 사실입니다 ." 이블로는 레리이나 여왕이 마리엔에게 도움을 청한 일을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이블로의 말에 라디폰 공작은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블로 는 그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기다렸다.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후, 마침 내 라디폰 공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마리엔 공주님께 받아들이시라고 전하게나."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인데도 말입니까?" 라디폰 공작은 자신의 오른팔이자 절친한 친구인 이블로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대신 에릭과 세린을 붙여드리게.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큰 걱정은 없을 거야. 그리 고 마리엔 공주님이 가신다면 보나인 경들도 따라갈 건 뻔하지 않은가. 스피린 쪽에도 마법사와 신관들을 요청하도록 하게. 자신들이 먼저 꺼낸 말이니 기꺼이 승낙할 걸세 ." 위험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이번 일이 성공하면 마리엔은 유명인사가 될 것이다. 그 리고 그녀가 유명세를 탈수록 흑마법사에 대해 남아있는 편견도 많이 희석될 것이다. 이런 소문으로 귀족들의 지지는 얻지 못하더라도 민심은 얻을 수 있었다. 민심이 천심 이란 말도 있었다. 라디폰 공작의 말에 이블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대로 하겠습니다. 달리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당분간은 마리엔 공주님의 신분을 숨기도록 하게나. 지금 오펠리우스 왕비의 심 기가 매우 불편하거든. 무슨 짓을 할지 모르지. 에릭과 세린이 있으니 괜찮겠지만 미 리 대비해서 나쁠 건 없지." 라디폰 공작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최근 오펠리우스 왕비는 히스테리를 부리는 일이 부쩍 늘었다. 우습게 봤던 마리엔이 갈수록 두각을 나타내니 애간장이 탈만도 했다. 그리고 페드인 왕국의 귀족들 사이에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새로운 세력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마리엔은 현재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나는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물었다. "그게 정말인가, 이블로?" "네. 라디폰 공작님께서 폐하의 허락을 얻으셨습니다. 레리이나 여왕 폐하의 청을 받 아들이셔도 됩니다." 세상에! 세상에! 이게 꿈이야, 생시야?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굴러 들어왔다. 그 것도 이번에는 호위기사를 줄줄이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몇 명만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 당장 만세 삼창을 부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주위의 눈때문에 그 것만은 참 았다. 하지만 자꾸 웃음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대신 히폴리테로 가시는 동안은 신분을 숨기시라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마리엔 공주 님이 몇 명의 사람만 데리고 여행하신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불순한 생각을 품는 사람 들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요." 갈수록 라디폰 공작이 예쁜 짓거리만 한다. 신분을 숨기고 다닌다면 공주라서 하지 못 했던 수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다. 인간세상에서 재미있게 놀겠다고 다짐했던 꿈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어찌 기쁘지 않겠으며, 어찌 여행이 기다려지지 않 겠는가. 누가 일을 벌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한한 감사를 보내는 바였다. 레리이나 여왕은 내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매우 기뻐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든든한 아군을 얻은 것이고, 내 입장에서도 이번 일은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이런 기 회가 아니면 언제 자유롭게 여행다닐 수 있겠는가. 기회란 있을 때 빨리 잡아야 하는 법이다. 나중에 그 때 이렇게 했어야 하는 건데, 라고 후회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또한, 원래라면 대가없이 남을 도와줄 리 없는 내가 레리이나 여왕에게 대가를 요구하 지 않은 이유는 이런 기회를 제공해준 고마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자원봉사를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였기 때문이다. 마족들도 각양각색의 경험을 하고 싶 어한다. 무한한 생명을 누리는 동안 계속 악의 화신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도 처음에는 몰라도 나중에는 지겨워지니까 말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연륜이 있는 마족이라면 한 번쯤은 인간들에게 영웅으로 불렸던 적이 있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아둔한 인간들은 자손대대로 그 영웅의 이야기를 하며 존경하지만 말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영웅이라고 추앙하고, 성자라고 칭송해도, 그 자의 속내까지는 모르 는 것이다. 세상에 아무런 대가도 없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모두가 뭔가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민 심을 얻어 왕이 되고자 하는 인간, 명성을 원하는 인간, 단순히 사람들의 추켜세움이 좋아 봉사하는 인간, 스스로 자기만족에 빠져 허우적대는 인간. 다 이런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영웅은 선이고, 영웅을 대적하는 사람은 모두 악이다라는 단순한 이분법은 정말 기가 막힌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영웅일지 몰라도 적어도 그의 상대편 과 상대편의 가족에게 그는 평화를 위협하는 악당이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영웅 의 행동은 무엇이든지 선이라고 말한다. 과연 자신들이 영웅이라고 추앙하던 사람이 사실은 마족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도 계속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아마 인간들이 이토록 한 사람의 영웅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들의 깊은 잠재의식 속에 '메시아 콤플렉스'가 깊게 뿌리박혀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은 이 답답한 현실을 일거에 쓸어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가져다 줄 영웅을 기다리는 것이 다. 그리고 그의 힘으로 자신의 현재의 상황을 벗어나 더 나은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생각이 마음 깊은 곳에 잠들어 있다. 자신이 노력해서 바꿀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말이 다. 그저 다른 사람이 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정작 자신이 앞장서면 당장 주위에서 날아 올 냉담한 반응들이 두려워 몸을 사리는 모습은 껍데기 속에 숨어있는 거북이와 다를 바 없었다. 인간들은 더없이 약했다. 그리고 너무나도 모순적인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을 비웃으면서도 마족들이 끊임없이 인간들과 계약을 맺고 , 인간 세상에 내려온다. 무엇 때문일까? 그저 드래곤의 유희처럼 단순히 신선한 체험 을 하기 위한 놀이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생각은 곧 머릿속에서 지워져버렸다. 지금은 여행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범인으로 추정되는 흑마법사가 눈치를 채고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모르고, 라 디폰 공작의 말처럼 불순한 생각을 품는 무리들이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에 준비는 비 밀리에 이루어졌다. 이번 여행에 나와 함께 동행할 사람들은 에릭, 세린, 사라, 가스 톤, 죠안이었다. 원래는 보나인도 함께 갈 예정이었지만 단장이 기사단을 너무 비워두 는 것도 좋지 않다며 이블로가 사라로 대신 교체한 것이다. 솔직히 제 4기사단을 통솔 할 사람도 없이 오랫동안 방치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나도 이 것에 대해 별다른 이 의는 제기하지 않았다. 보나인도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여행을 따라가는 대신에 페드인 왕국으로 돌아갔다. ---------------------------- 여기까지...(열심히 읽음)........ ------------------------------- 그렇게 우리 쪽의 준비가 거의 끝나갈 무렵, 레리이나 여왕이 우리를 자신의 집무실로 불렀다. 집무실에 도착해보니 여왕 외에도 세 명의 여자들이 더 우리를 기다리고 있 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우리도 아는 얼굴이었다. 검은 갑옷을 입고 허리에 환도를 차고 있는 여자는 우리를 가디스까지 호위하고 온 엔젤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옆에 서 있는 나머지 두 사람은 처음 보는 인물들이었다. 두 사람 중 단발머리를 하고 있는 여자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였지만 매우 귀여운 얼 굴이었다. 그녀의 보랏빛 머리는 어깨까지 닿아있었고, 마치 호박을 박아놓은 듯한 커 다랗고 노란 눈동자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선명한 붉은 색의 로브를 입은 그녀는 어느새 입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 마법사 옆에는 마치 지푸라기처럼 윤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푸석푸 석한 머리를 모두 위로 틀어 올린 여자가 서있었다. 다른 사람보다 큰 키를 가진 그 여자는 깡마른데다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있어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굳게 다문 입술 은 그녀의 완고한 성격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그리고 두꺼운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녀 의 초록색 눈은 번뜩이면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녀가 오늘 처음 본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유는 금새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새하얀 옷에는 자애의 여신 세리자드 의 문양이 곳곳에 수놓아져 있었던 것이다. 쳇, 신관이잖아. 물론 신관이 일행에 포함될 것이라는 사실은 미리 들어서 알고 있었 다. 하지만 상대가 처음부터 저렇게 나오면 그렇지 않아도 신관을 좋게 보지 않는 나 로서는 밸이 꼬일 수밖에 없었다. 저 쪽에서 나를 마치 더러운 것을 보는 것처럼 보는 것도 내가 흑마법을 익혔다는 사실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둠의 힘은 더럽고 추 악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신관나리가 보기에 나는 악에 물들은 인간으로 보이겠지. 흑 마법사라는 것에도 저런 반응을 보이는데 과연 내가 마족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어서 오시오. 마리엔 공주. 그 사람들이 이번에 그대와 함께 갈 사람들인가?" "네, 그렇습니다." 신관을 남몰래 흘겨보던 나는 레리이나 여왕의 질문에 시선을 그녀에게 돌렸다. 내 말 에 여왕은 내 뒤편에 서있는 사람들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정말 이들만으로 되겠는가? 스피린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더 붙여줄 수도 있는데... ..." 그녀가 걱정하는 이유는 숫자가 적다는 것보다는 이런 중요한 일에 사라를 제외하면 모두 남자인 페드인 왕국의 기사를 데려간다는 데에 있었다. 아무리 여왕이 다른 나라 의 문화를 인정한다고 해도 은연중에 페드인 왕국의 기사보다는 자국의 여기사들이 더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래서 자라난 환경이 중요하다. 우리 쪽에서 는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그녀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더 이상 인원이 늘어나면 움직이기가 불편해지거든요. 그리고 제가 아는 사람들과 행동하는 편이 더 편합니다." 이번 일은 무엇보다 내 힘이 필요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내 발언권은 커질 수밖에 없 었다. 내가 거절하자 레리이나 여왕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오늘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앞으로 함께 여행을 하게 될 사람들을 소개해주기 위해서요. 우선 이쪽은 엔젤 루바 까뜨리안. 엔젤 경은 가디스까 지 여러분을 호위하고 온 사람이니 모두 알고 있을 것이오. 그녀는 스피린에서도 손꼽 히는 뛰어난 기사이니 큰 도움이 될 것이오. 그리고 이쪽의 마법사는 로즈 베리 샤론 느. 수도에 있는 마법사 길드의 간부로 6서클 마스터요. 실력도 있고 아는 것도 많으 니 동행으로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오." 엔젤은 여왕의 소개에 간단한 인사만 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가디스까지 같이 오면 서도 느낀 거지만 그녀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하긴 여자가 과묵하다는 것은 스피린 에서는 미덕으로 칭송받지만 말이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엔젤이 아무리 과묵해도 언제나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에릭을 당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로즈 는 엔젤과는 달리 여자들은 말이 많아서는 안 된다는 스피린인들의 통념을 와장창 깨 버렸다. "전 로즈라고 합니다. 함께 동행하게 돼서 너무 기뻐요. 남자분들이 모두 잘생겨서 너 무 좋은 것 있죠. 여행 내내 정말 즐겁울 것 같아요. 그런데 마리엔 공주님께서는 흑 마법사시라면서요? 흑마법사를 직접 보게 되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그들은 좀처럼 보 기가 힘들거든요.그런데 흑마법사는 모두 음침할 줄 알았는데 이 로즈 못지 않게 화 사한 분이시네요. 참, 공주님은 몇 서클이십니까? 정말 궁금합니다." 로즈는 정말 말이 많았다. 왜 저렇게 수다스러운 거지? 스피린에도 저런 여자가 있긴 있었군. 마구 쏟아지는 로즈의 수다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간신히 정신을 차린 나는 재빨리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로즈의 수다를 원천봉쇄하기 위해서는 질문에 빨리 답해주는 게 제일이었다. "6서클 후반까지 익혔어요." 내가 이렇게 말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우선 17살 먹은 소녀가 9서클이라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그렇다고 궁전 마법사격인 8서클을 말할 수도 없었고, 7서클도 나이 에 비해 너무 높았다. 20대의 마법사들은 대부분 4,5서클인데 반해 6서클도 높은 감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이미 6서클 마법을 써버린 후였고, 너무 낮게 말해도 앞으로 불편할 것 같아 그냥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6서클만으로도 로즈의 눈이 휘둥 그레졌다. "6서클 후반? 17살이라고 들었는데 맞죠? 그렇죠? 그런데 6서클이라니! 굉장합니다! 마리엔 공주님은 천재임에 틀림없어요! 정말 놀라워요!" 그리고 제법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찬물을 쫘악 부어버리는 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그런 사악한 마법 따위가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는 겁니까?! 그런 어둠의 힘 따위는 세리자드 님의 성스러운 힘 앞에서는 태풍 앞에 등불보다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추한 어둠에 의지한 자는 반드시 세리자드님의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신관은 로즈의 감탄사들을 잘라버리고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본인이 바로 앞에 있 는데 신관의 말에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누가 누구를 심판한다는 거야? 정말 웃기 지도 않았다. 나는 신관을 쏘아보았고, 그녀도 지지 않고 마주 쏘아보았다. 마치 추악 한 것을 보는 듯한 시선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게 아까부터 열 받게 하네. 한 번 죽어볼래? 그 잘나신 세리자드 양반께서 댁을 구원해줄지, 안 해줄지 한 번 해볼 까? 점차 나와 신관 사이의 공기가 심상치 않게 변하자 레리이나 여왕이 재빨리 중재 에 들어갔다. "히크리트 신관, 말이 지나치오. 그녀는 우리를 도와주려는 것이란 걸 알고 있지 않소 . 다음부터는 그런 말은 하지 마시오. 그리고 마리엔 공주에게는 정말 미안하오. 히크 리트 신관도 나쁜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시오." 지금 신경 안 쓰게 생겼어? 너 같은 건 사라져야 된다고 전신으로 말하고 있는데. 한 바탕 엎어버리려던 나는 나머지 사람들까지 나서서 달래자 일단은 참았다. 그동안 나 도 성질이 많이 죽은 모양이었다. 옛날 같았으면 벌써 작살을 내버렸을 텐데 말이다. 너 앞으로 조심해! 그러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다. 첫 대면에서부터 찍힌 신관의 이름은 히크리트로, 자애의 여신 세리자드의 대신전에서 고위 신관으로 있는 사람이었다. 신앙심이 매우 독실해서 흑마법을 좋게 생각하지 않 아 그런 말을 한 것이라고 말들 하지만 열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신념에서 어 긋나면 모두 악이란 말이야? 겨우 100년도 못사는 주제에 선과 악을 판별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잘났어? 자신의 신념이 중요한 만큼 다른 사람에게도 중요한 신념이 있 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을 것이다. 남보고 뭐라고 하기 전에 자신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떳떳한지 한번 자신을 되돌아보라구! 당연히 히크리트 신관의 첫인상 은 최악이었고, 더불어 신관에 대한 이미지도 더욱 나빠졌다. 게다가 베리언트라는 도 시에서 가하브의 신관이 한 명 더 합류한다고 한다. 하나만으로도 머리 아픈데 둘씩이 나. 아이고. "자자, 앞으로 계속 얼굴을 보게 될 건데 친하게 지냅시다. 가디스에서 히폴리테까지 는 아주 멀다구요. 계속 이런 상태로 지낼 수는 없잖아요. 마리엔 공주님도 화 푸세요 . 히크리트 신관이 좀 고지식해서 그렇지 근본은 착한 사람입니다." 로즈가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애썼지만 한 번 살벌해진 분위기는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 다. 처음부터 삐걱거리는 여행이었다. 히폴리테를 향해 출발한 지 첫 날, 우리 일행은 여전히 수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왕 성은 벗어났지만 왕성 주변으로 크고 작은 마을이 생겨 하나의 거대한 지역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또다른 이유는 말을 처음 타본 나를 위해 말타는 법을 가르쳐주고, 다 른 사람들도 내 속도에 맞춰서 길을 갔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굳이 상세히 설명하지 않겠다. 다만 내 경험상 그냥 날아다니는 것이 훨씬 안정감이 있고, 속이 울렁거리지 도 않더라는 점만 밝혀둔다. 내가 능숙하게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말을 모는 것에 익숙해지자 처음부터 무리할 필요는 없다는 엔젤의 말에 따라 근처 마을에서 여장을 풀었다. 마을이 계속 이어지고 말을 타는 것에 정신을 집중한 나머지 아직은 진정한 여행의 묘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이 정도면 만족이었다. 궁전 한번 빠져나오려고 이 눈 치, 저 눈치 살피던 것에 비하면 훨씬 좋은 상황 아닌가. 우리가 머문 숙소는 귀족이나 거상이 머무는 고급 여관이었다. 방도 한 방에서 2-3명 은 충분히 지낼 수 있을 정도로 넓었고, 식당도 거의 레스토랑에 버금갔다. 여관에 머 무는 사람들도 모두 돈 꽤나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숙박비는 엔젤이 지불했기 때 문에 얼마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각 방까지 썼으니 상당히 많은 금액을 지불했음은 틀림없었다. 이 곳 말고도 여관이 많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이런 으리으리한 곳을 숙소로 잡 은 이유는 아마도 나 때문일 것이다. 딴에는 내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겠 지만 나는 푹신한 침대가 아니면 잠들지 못하는 그런 철없는 공주가 아니었다. 하여간 사람들이 공주는 몸이 약하고, 우아하고, 힘든 일은 전혀 하지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 에 빠져있다니까. 오늘만 해도 일행들은 행여나 내가 힘들어 할까봐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공주에 대한 선입견을 제거할 필요성을 느꼈다. 신경 써주는 것은 좋지만 이런 선입견을 가지고 있을 경우, 나중에 내가 무슨 일을 할 때 '공주님 ! 체통을 지키십시오!' 라고 딴지를 걸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었다. 저녁 즈음에나 모두 불러놓고 한번 정신 교육을 시켜야겠군. 그러나 내가 따로 부를 필요도 없이 저녁 식사 후에 우리 일행은 모두 내 방으로 모였 다. 앞으로 있을 여정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일단은 가장 신분이 높은 내가 리 더 비슷하게 되어 있었지만, 스피린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전무한 상태라 거의 상징 적인 리더라고 할 수 있었다. 대신 실질적인 리더는 엔젤이었다. 엔젤은 탁자 위에 지도를 올려놓고, 가디스와 히폴리테의 지명에 붉은 색으로 표시를 했다. 지도상에서 보면 가디스는 약간 동쪽으로 치우쳐져 있고, 히폴리테는 서쪽에 있 는 류와 국경을 마주한 국경선 근처에 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두 지역은 서로 많이 떨어져 있었다. 엔젤은 여행할 경로를 손가락으로 따라가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지금 있는 가디스에서 북쪽으로 출발해서 체벤 지역을 경유한 다음 베리언트에 들릴 예정입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도로시 신관과 합류를 한 후에 곧바로 랑데르 지 역을 통과해 히폴리테로 갈 겁니다. 최대한 빨리 가도 다섯 달은 걸릴 것으로 예상하 고 있습니다." "잠깐만요. 궁금한 게 있는데 왜 체벤 지역을 경유해서 가는 겁니까? 지도를 보면 베 리언트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이 곳에서 바로 일직선으로 가는 것인데요." 가스톤의 질문에 스피린인들을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체벤 지역을 경유하게 되면 베리언트까지는 반원을 그리는 형식으로 빙 돌아가야만 했다. 때문에 시간이 더 오래 걸리는데도 불구하고 체벤 지역을 경유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 러자 엔젤 대신 이번에는 로즈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도상으로 보면 분명히 일직선으로 가는 게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테오라신 산맥을 넘어야만 합니다. 테오라신 산맥은 산세가 험하고 벼랑이 많은 곳입니다. 이 곳을 넘어가면 시간이야 단축할 수 있겠지만 체벤 지역을 경유하는 것보다 더 힘든 여행이 될 겁니다. 우리들이야 그렇다 쳐도 아무래도 마리엔 님까지 계신데 테오라신 산맥을 넘어가는 것은 좀......" 로즈의 말마따라 지도에는 가디스와 베리언트 사이에 테오라신 산맥이라고 표기된 산 맥이 떡 버티고 서있었다. 테오라신 산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스리핀의 동과 서를 양분하는 대산맥으로, 과거에 는 이 산맥에 가로막혀 동부와 서부가 서로 왕래가 없었다고 한다. 그 과거의 영향으 로 지금도 스피린의 동부와 서부는 약간씩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항구도시가 밀집 한 동부는 타국과 왕래가 빈번해서 스피린 특유의 색은 많이 퇴색되었지만 타국의 문 화와 스피린의 문화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에 반해 항구 도시가 거의 없고 산지 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서부는 동부보다는 가난하지만 스피린 고유의 모습을 아직도 많 이 간직하고 있었다. 지금은 길이 뚫렸다고 하지만 역시 산맥을 넘어가는 일은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왜 힘든 이유가 나여야만 하지? 내가 그렇게 약해 보인단 말이야? 누누이 말하 지만 날 보통의 공주로 생각하지 말란 말이다. 로즈의 설명에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은근히 나를 무시하는 이 분위기. 그냥 넘어 갈 순 없다. "그냥 테오라신 산맥을 넘어서 가도록 하죠. 날 생각해서 그러는 것이라면 그럴 필요 는 없다고 말해주고 싶군요. 그 이유는 가스톤과 죠안이 잘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하, 하지만 등반은 대...아니, 아무튼 그 것과는 많이 다른데요." "그 것도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랍니다. 불만이 있으면 다시 한 번 해볼까요? 과연 내가 산맥을 넘어갈 만한 힘이 있는지 없는지 말이예요." 내가 생글거리면서 말하자 죠안과 가스톤이 동시에 움찔했다. 다른 사람들은 과연 그 일이 무엇이길래 두 사람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매우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그 러나 두 사람이 절대 물어보지 말아 주십시오, 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어 보지는 않았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산행을 우습게 보시면 안됩니다. 평지를 걷는 것보다 배는 힘이 들고, 위로 올라갈수록 기온도 떨어집니다. 그리고 밤에는 산짐승의 습격에도 대 비해야 합니다. 특히 테오라신 산맥은 험준하고 숲이 울창하기로 유명한 곳이라 더욱 그렇습니다." 엔젤이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괜찮다고 우겼다.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 나 때문에 지장 이 생겼다는 소리는 듣기 싫었던 것이다. 내가 마구 우기자 엔젤은 가스톤과 죠안을 돌아다보았다. 그 일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산행을 해도 괜찮을 것 같냐고 두 사람의 의견을 물어보는 것이다. 엔젤의 시선을 받은 가스톤과 죠안은 나의 협박 아닌 협박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우리 일행은 체벤 지역을 경유하지 않고 바로 테오라신 산맥을 넘어가기로 했다. 산맥을 넘어가면 히폴리테까지는 세 달에서 네 달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물론 최대 한 빨리 갔을 경우에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는 이보다 더 지체될 가능성도 많았다. 하 지만 체벤을 경유하는 것보다 빠르다는 것은 분명했다. 앞으로의 여행 경로가 정해졌으니 이제 공주에 대한 선입견을 깨트릴 차례였다. 선입 견이란 좋지 않은 법이다. 선입견에 사로잡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경 우가 얼마나 많은가. 뭐 내 경우에는 이런 이유와는 하등의 관련도 없지만 말이다. 선 입견 깨기의 첫 단계는 바로 호칭을 바꾸는 것이었다. 부를 때부터 XX님하고 부르면 은연중에 거리감을 느끼게 마련인 법이다. 나는 미리 생각해놓았던 말을 입 밖에 냈다 . "할 말이 있으니까 들어줘요. 호칭 문제 때문에 그러는데 모두 언제까지 나를 마리엔 님이라고 부를 거죠? 너무 눈에 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만 해도 얼마나 많은 사 람들이 이상하게 봤는 줄 알긴 아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 일행의 구성원들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다. 에릭과 세린, 둘 다 귀티가 흘러 넘친다. 엔젤과 사라, 어딘지 모르게 기사인 티가 팍팍 난다. 로즈와 히크리트 신관, 복장 덕분에 가만히 있어도 마법사와 신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스톤과 죠 안, 개중에 가장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지만 역시 나이 어린 소녀에게 '-님'자를 붙이 면 이상하게 보인다. 아직 처음이라 어색해서 그런 것일 줄은 모르겠지만 귀족인 티가 팍팍 나는 것이 보통 모험가 일행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나이 어린 소녀에게 존칭을 사용하면 튀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뭐 히크리트 신관은 존칭을 사용해도 상관없지만 말이다. "그럼 뭐라고 부릅니까? 밖에서 공주님이라고 부를 수도 없지 않습니까?" 세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하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마리엔." "......!!!" "호,호,호. 농담도 잘하셔라." "어찌 그런 패악무도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맞습니다. 어찌 공주님의 이름을 그대로 부를 수 있단 말입니까!" 시끄럽다. 그렇게 소리치면 밖에서 당신들이 하는 말이 모두 들릴 텐데. 그럼 내가 공 주라는 것도 알려질 것 아냐. 조용히 좀 말하지 그래. 예상대로 반발이 심했다. 그리 고 예상외는 그런 반응이 페드인 왕국 사람들보다는 스피린인들에게서 더 보이고 있다 는 사실이었다. 특히 엔젤이 가장 반발이 심했고, 에릭이 가장 반발이 적었다. 물론 놀라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세린마저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이 때에 그 는 눈만 크게 뜰 뿐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여기서 나에 대한 충성도가 드러나는 것 아니겠는가. 충성도의 정도를 따져본다면 스피린 사람들을 제쳐두면 가스톤과 죠안, 사라, 세린 그리고 에릭 순이었다. 예상했던 반발이었기 때문에-솔직히 말놓으라고 했 는데 전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놓아버린다면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이다- 침착하게 말 했다. "모두 생각을 해봐요. 모두 나를 마리엔님 이라고 부르면 얼마나 눈에 띄겠어요. 그리 고 앞으로 계속 볼 사람끼리 너무 거리감이 느껴지잖아요. 우리 친하게 지냅시다. 공 주라는 건 나를 이루는 구성요소 중에 하나지만 내 자신이 아니잖아요. 나를 공주가 아니라 그냥 마리엔으로 봐줬으면 좋겠어요." 소설을 보라. 다 이렇게 말들 한다. 내 껍데기가 아니라 내 자신을 봐줘. 이런 말 말 이다. 현실에서는 당연히 껍데기도 중요하다. 껍데기가 자신의 전체는 아니라고 해도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소설에서였다면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내 말에 따랐겠지만 역시 현실은 소설과 다른 법이다. 그러나 그들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었다. 이럴 때가 공략하기 가장 좋은 때였다. 한 사람만 말을 트면 자연스럽게 트게 되어 있거든. 그리고 가장 유력한 후보가 에릭이었다. 나는 일부러 에릭을 지명해서 말했다. "나도 반말할 테니까 말 놓도록 해, 에릭." "곤란합니다." 저기, 그런 말은 좀 더 곤란하다는 얼굴로 말해주겠어. 뭐 네 입장에서야 곤란한 얼굴 일지 몰라도 내가 보기엔 그냥 약간 찡그리는 얼굴로 밖에 안보이거든. "내가 하라는데 뭐가 어때서 그래? 어차피 나이도 비슷하잖아. 안 그래?" "그래도 곤란합니다." "괜찮아. 괜찮아. 그냥 말놔." "......" 이 정도 반응은 이미 예상했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몇 번이나 에릭을 설득 했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나이도 비슷한데 뭐 어때서 그래? 그러니까 말 트고 살자." "......알았어." 몇 번이 아니라 한 번이었다. 내가 하라고 하긴 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적어도 다섯 번은 거절해야 예의 아냐? 나에 대한 충성심이 눈꼽만큼도 없다는 건 알고 있었 지만 솔직히 인간적으로 이건 너무하다고 생각지 않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을 해봐 . 그렇다고 내가 시켜놓고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뻔뻔한 얼굴로 반말을 하는 에릭을 보면서 어이없는 웃음만 흘리는 나였다. "이런! 무례한! 어찌 그러고도 기사된 자라 할 수 있단 말이오!" 화를 내주는 엔젤이 고마웠다. 그런데 어째서 오히려 스피린 사람들이 더 말을 못 놓 겠다는 입장인지 모르겠다. 원래라면 그 반대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역시 세상사 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던 마을이 점차 뜸해지고 대신 그 자리에 드넓은 들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들판 너머로는 여러 개의 산봉우리들이 어슴푸레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몇 달 전만 해도 모든 것을 얼려버릴 것처럼 매섭게 불던 겨울의 차가운 숨결 이 사라지고, 지금은 봄의 따스한 숨결이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봄의 따스한 기 운은 우리 일행만 느끼는 것이 아닌지 곳곳에서 푸른 새싹들이 조금씩 땅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들판은 어느새 회색의 황량했던 모습을 벗어 던지고 서서히 연녹색의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이렇게 조금씩 봄의 따스한 손길에 변하는 들판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신기한 체험 중에 하나였다. "마리엔은 이런 모습 본 적이 거의 없지?" 내가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자 세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응. 세린도 알다시피 내가 아렌테 외에는 나와본 적이 없잖아." 어느새 우리 일행은 나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에릭이 말을 놓은 이래 나의 계속된 설 득과 에릭도 하는데 나라고 못하겠느냐는 군중 심리에 의해 하나둘씩 말을 놓게 되었 다. 그 중에서도 가스톤과 죠안, 사라는 이번만 부득이하게 말을 놓겠다면서 계속 사 죄를 했다. 처음에는 모두 굉장히 어색해하면서 되도록 나와의 대화를 기피하더니 이 제는 제법 익숙해진 상태였다. "어머, 그럼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겠네? 처음 하는 여행이라 기대되지? 이 언니도 처 음으로 여행할 때는 얼마나 두근거렸다구. 그 때가 내가 15살이었으니까 벌써 14년 전 이네. 그 때는 지금처럼 마물이 많지 않아서......" 내가 여행이 처음이라는 말에 로즈가 자신의 첫 여행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녀는 비교적 과묵한 엔젤과는 달리 과연 같은 스피린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말이 많았다. 그런 것이야 개인차겠지만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말이 많은 사람 중에 하나 였다. 현재 나는 그녀를 로즈 언니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왕 할거면 철저하게 하는 편 이 좋았다. 괜히 어중간한 상태라면 차라리 말을 놓지 않느니만 못한 경우가 많았다. 사라와 엔젤의 경우에는 말을 놓는 것만도 죄송스러운데 그런 일은 목에 칼이 들어와 도 있을 수 없다고 우기는 바람에 그냥 이름을 부르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활달한 로즈는 기꺼이 이를 받아들였다. 덤으로 세린과 에릭에게도 누님이라고 부르라고 했지 만 이는 두 사람의 거부로 실현되지 못했다. 나는 자신이 첫 여행에서 어떤 훌륭한 일을 했으며 무수한 남자들이 자신에게 빠져 정 말 골치가 아팠다고 말하고 있는 로즈를 보았다. 말이 많은 것만 빼면 성격도 시원시 원하고 참 좋은 사람인데 말이야. 말이 많은 것만 빼면. 신나게 자신의 활약을 늘어놓는 로즈를 포함해서 우리 일행은 크게 세 가지 모습을 보 이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대화를 나주며 노는 로즈, 세린, 가스톤, 나. 앞 집단에 비해 정말 말이 없는 엔젤, 에릭. 그리고 그 중간인 죠안, 사라, 히크리트 신관. 하 지만 서로 사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 그저 개인차가 있다는 것이다. 의외로 히크리 트 신관이 지금껏 시비를 걸지 않아 우리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의 여행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저녁까지는 말이다. 처음에 야영을 하게 될 때 일행들은 내가 과연 야영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야영을 한다는 사실에 들떠있었고,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지금 우리는 생존의 위기에 직면해있었다. 무시무 시한 마물들이 나타났느냐? 아니다. 그럼 짐을 몽땅 도둑맞아버렸느냐? 역시 아니었다 . 오늘 우리가 만난 사람들이라고는 들판에서 일을 하고 있는 몇몇 사람들과 수도로 올라가는 상인들뿐이었다. 도둑맞을 틈도 없었던 것이다. 그럼 문제가 무엇이냐?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가장 최소한의 것은 바로 더위와 추위를 막아주고 미적인 효과도 가져다 주는 의복, 비와 눈을 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거처, 그리고 매일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이 중에서 하나라도 부족하게 되면 우리들은 기본적인 생활을 영 위하는데 상당한 애로사항을 겪게 된다. 그리고 우리들은 지금 식(食)이라고 하는 부 분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를 직면하게 되었다. "어서 집으시지요." "하하하, 저희보다는 그 쪽 분들이 더 나을 듯 하군요."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의 풍습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모르시는 겁니까?" "진리는 어디를 가나 변하지 않는 법입니다." 현재 가스톤, 죠안, 에릭, 세린과 엔젤, 로즈, 히크리트 신관은 두 패로 나뉘어서 서 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있는 것은 냄비와 국자, 감자를 비롯한 야 채들이었다.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알려면 바로 한시간 전으로 돌아가야만 했 다. "벌써 해가 지려고 하는군요.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야영할 곳을 찾도록 하죠." 엔젤이 어느새 서쪽으로 서서히 모습을 감추면서 다홍색으로 하늘을 물들이고 있는 해 를 보면서 말했다. 아직은 초봄이라 해가 떨어지면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데다 금 방 어두워지기 때문에 우리 일행은 그녀의 말에 따라 야영할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은 30분을 더 가서 작은 숲에 여장을 풀었다. 숲은 그렇게 울창하지 않아서 공터를 찾는 일은 힘들지 않았다. 공터는 넓지는 않았지만 우리 일행이 모두 지내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약간 시냇가와 떨어져있는 것이 불편하긴 했지만 이 점을 제외하면 공터 주변을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어 바람도 막을 수 있었고, 땅도 돌 멩이가 없고 풀들이 자라고 있어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족해하며 짐을 풀던 나는 사람들이 가만히 서서 나만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 렸다. "왜요?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요?" "괜찮으시겠...아니, 괜찮겠어? 야영은 처음이라 힘드실 텐데...아니, 힘들 텐데." 가스톤이 여전히 평대가 익숙하지 않은 듯 버벅대긴 했지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 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주위 사람들의 걱정 어린 눈 속에서도 가스톤과 거 의 같은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아무 문제없어요." "침낭에서 자는 것은 침대에서 자는 것과는 아주 다른데. 괜찮겠어?"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되게는 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마. 모두들 공...아 무튼 그런 신분이면 이런 일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은 반드시 맞다고 할 수 없어. 사람들이 모두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나같은 사람들은 몸이 약하고 연약하게 나오는 소설에 문제가 있다니까." 내가 혀를 끌끌 차며 말하자 세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들도 소설과 현 실은 다르다는 내 주장에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힘들다고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돌아갈 수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이 상황에 적응하는 것 이 제일이었다. 그들은 내가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하면서 직접 겪어봐야 적응도 빨리 된다는 생각에 내 문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슬슬 야영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엔젤과 가스톤이 말들을 돌봤고, 로즈와 히크리트 신관이 주변에서 땔감을 주어왔다. 나와 사라는 공터를 돌아보면서 잠자기 편하도록 풀을 미리 밟아두었고, 에릭과 세린이 혹시라도 위험한 동물이 있을 까 싶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에릭과 세린이 주변을 모두 둘러보고 오자 하루종일 말을 타고 여행하느라 고픈 배를 달래기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하려 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 곳이 어딘가. 스피린이었다. 그럼 스피 린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무엇인가? 바로 다른 나라와는 남녀의 역할이 다르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 아니었던가. 스피린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대부분의 경우에 검술이 나 사냥은 여자가 하는 것이고, 바느질이나 요리는 남자가 하는 것이라고 박혀있었다. 그렇기에 엔젤과 로즈, 히크리트 신관은 요리는 당연히 약하고 섬세한(?) 남자들이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페드인 왕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네 명의 남자들은 정반 대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두 집단은 서로 사냥을 하는 일은 자신들이 할 테니 스프를 끓이고 요리를 준비하는 일은 상대편이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은 네 명의 남자들과 같지만 여자인 나와 사라는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하고 중간에서 돌아 가는 상황만 지켜보았다. 회상을 끝낸 나는 아직도 서로 자신들이 사냥을 해오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황당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누가 이런 일로 문제가 생길 줄 알았겠는가. 여 기서 다시 한번 문화의 차이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호호호, 스피린에서는 요리는 대부분 남자들이 한답니다. 어서 국자를 잡는 게 어때 요?" "페드인 왕국에서는 대부분 여자들이 요리를 한답니다." "그럼 이 기회에 색다른 경험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요리를 익혀두면 나중에 아내 에게 사랑받는 남편이 될 겁니다." "설마 히크리트 신관님까지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같은 말을 그대로 들 려드리고 싶습니다." 페드인 왕국의 남자들과 스피린의 여자들은 서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저기 말리는 게 좋지 않을까?" "괜찮아요. 보니까 심각하게 싸울 것 같지는 않은데요 뭐. 사라도 마음을 편히 가지고 구경해요.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이 싸움구경과 불구경이라잖아요. 얼마나 흥 미진진해요." 사라는 말릴 생각은 전혀 없고 초롱거리는 눈으로 서로 말싸움을 벌이는 사람들을 구 경하는 나를 보고 식은땀을 흘렸다. 오, 세린의 방금 그 말 상당히 예리했어. 하지만 로즈도 만만치 않은데. 엄청나게 많은 말들을 한번에 쏟아 부어 상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고 있어. 가스톤은 닭살맞은 칭찬을 퍼부으며 엔젤들의 마음을 돌리려 하고 있군. 그러나 나의 구경은 오래가지 못했다. 배에서 먹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무리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배가 부른 다음에야 재미있는 것이다. 이봐, 언제까지 싸울 꺼야? 이러다 오늘 저녁밥은 물 건너가는 것 아냐? 아무나 좋으니까 음 식 좀 만들어! 나는 도저히 말다툼이 끌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나섰다. "모두 그만해요! 언제까지 그럴 거예요? 이러다 식사는 고사하고 날 새겠어요. 서로의 생각이 다르니 어쩔 수 없잖아요. 그냥 서로 돌아가면서 음식을 만들기로 하죠. 그럼 서로 공정할 것 아니예요?" "그래요. 그렇게 하도록 하죠. 그게 좋을 것 같네요." 내가 나서자 사라도 냉큼 내 말에 찬성했다. 결론이 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 데다 나와 사라가 이렇게 나오자 다른 사람들도 결국 내 의견에 찬성했다. 남자와 여자가 일주 일동안 돌아가면서 음식을 만들기로 결정이 났고, 이번 주에는 여자들이 요리를 만들 기로 했다. 엔젤들은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각자 국자와 냄비를 들었다. 그리고 나와 사라도 한 손에 감자와 당근을 들고 다른 손에는 칼을 들었다. 그리고. "스프를 끓이려면 물을 먼저 길러와야 되는 것 아닙니까?" "야채는 먼저 물에 씻는 걸로 알고 있는데 바로 깍는 거야?" "왜 가만히 있습니까?" "뭐 하는 거야?" 네 명(가스톤, 죠안, 세린, 에릭)의 질문을 받은 우리는 잠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 다. 그리고 서로의 얼굴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상황암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요리하는 겁니까?" "호호호, 물에다 조미료를 넣고 끓이면 되는 건가요?" "으흠......신관 수업에는 이런 게 없었는데 말이지요." "죄송합니다. 요리는 해본 적이 없어서요." "나한테 뭘 바래? 이번이 처음 여행인데." 남자가 요리하는 것이 보편적인 스피린에서 엔젤들이 언제 요리를 해봤겠는가. 당연히 없었다. 그리고 사라도 검술 연습하느라 요리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그동안 마법이 나 창술은 배웠어도 요리를 배운 적은 없었다. 특별히 선발된 요리사가 요리를 해서 갖다바치는데 굳이 내가 요리를 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인간계에 와 서도 공주라는 신분 덕에 과도 한 번 쥐어본 적이 없었다. 서로 다른 사람이 요리를 하면 그 때 물어볼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우리들의 모습에 가스톤과 죠안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에릭과 세린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들에게 요리를 기대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남자들이라도 요리를 잘해야 하는데 기사인 이들이 언제 요리를 해봤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 가능 성은 전무했다. 그럼 앞으로 식사는 어떻게 하지? 계속 건량으로 때워야 하는 거야? 말도 안 돼. 이러다 나중에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것 아냐? 우리 일행은 의식주 중에 하나인 식(食)이 해결이 되지 않을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곤란하군요." 무표정의 대가인 에릭마저 이런 소리를 했다. 우리들이 매우 곤란해하고 있을 때, 예 상하지 못한 곳에서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쩔 수 없군요. 저희들이 요리를 할 테니 사냥을 해오시죠." "에? 가스톤과 죠안은 요리할 줄 알아요? 내가 놀라서 묻자 죠안은 약간 쑥스러운 듯 말했다. "그냥 가끔 간식 정도는 만들어먹었지. 하인들을 많이 쓸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하지 만 이런 때에 도움이 될 줄은 몰랐는데." 오, 이런 감격스러운 일이! 영락없이 건량으로만 때워야 할 줄 알았던 식사는 가스톤 과 죠안 덕분에 무사히 끝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두 사람에게만 전적으로 요리를 맡 길 수 없어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이 요리를 할 때 옆에서 지켜보면서 배우기로 했다. 솔직히 그렇게 맛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이것도 어딘가. 아무래도 요리사를 한 명 데려올 것을 잘못했어. #20-히크리트 신관 스피린은 산이 많아 수도를 벗어난 처음 며칠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산을 오르고 내리 는 일의 반복이었다. 현재 우리가 오르고 있는 산도 그런 수많은 산 중에 하나였다. 길 주변에는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있어서 우리가 지나고 있는 길 이외에는 다른 곳은 보이지 않았고, 새들의 울음소리를 제외하면 적막함만이 감도는 곳이었다. 그동안의 여행은 거짓말처럼 평화로웠다. 마물도 만난 적이 없었고, 산적이 많기로 유 명한 스피린에서 단 한 명의 산적도 만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온 길이 수도와 가까운 곳이라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앞으로의 여행도 그렇게 순 탄할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지방까지 치안이 완벽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런 여행은 재미가 없어서 할 맛이 나지 않는다. "엔젤, 다음 마을까지는 얼마나 걸려요?" "삼사일 정도가면 델피르라는 중소도시가 나올걸. 그렇게 특이한 점은 없지만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서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도시야. 이 산만 넘어가면 길이 뚫려있으니까 그렇게 힘들지는 않을 거야." 내 질문에 앞쪽에서 가던 엔젤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이제는 제법 입에 익은 평대 였다. 그리고 엔젤의 말을 들은 내 눈이 반짝였다. 도시가 나온단 말이지. 도시가. 우 후후. 모험의 묘미가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 예를 들어 산적이나 마물을 처리하고 다 니는 것이라면 여행의 묘미는 뭐니뭐니해도 여러 지역을 들러서 구경하는 것이었다. 아마 우리 일행은 델피르에서 여장을 풀 것이다. 계속 야영을 하면서 쌓인 피로도 풀 고, 정보도 수집하고, 필요한 물품도 그때그때 충당해야 했다. 그리고 그런 이유가 아 니라도 오랜만에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머물 이유는 충분 했다. 아무리 급한 여행이라도-사실 그렇게 급할 것도 없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먹을 건 먹어가면서 해야하지 않겠는가. 비단 이런 생각은 나만이 아니었는지 엔젤의 말에 일행들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번져있었다. 우리는 오르막길이라 말은 타고 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말을 끌고 가고 있었다. 두런 두런 이야기를 하며 길을 가고 있을 때, 갑자기 맨 앞에서 가던 에릭이 멈춰 서자 덩 달아 뒤에 따르던 우리들도 발걸음을 멈췄다. 에릭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주변을 두리 번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에릭?" 내 말에 에릭은 여전히 주위를 살피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싸울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에릭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검을 빼들었다. 평소의 멍하던 분위기가 순식 간에 날카롭게 벼려진 하나의 검을 보는 것 같은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런 에릭의 변 화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언제까지 놀라고 있을 여유 는 없었다. 쿠와아아!!! 어디서 많이 들은 울음소리와 함께 갑자기 앞쪽의 굵은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마냥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엄청난 성량만 자랑하는 목소리는... ...다른 사람들도 그 것이 무엇인지 눈치를 챘는지 순식간에 긴장상태로 들어갔다. 나 와 로즈, 히크리트 신관은 겁을 먹고 날뛰는 말을 진정시키며 뒤에 물러났다. 그리고 사라와 가스톤, 죠안이 그런 우리들의 주위를 둘러싸고 긴장된 눈으로 흔들리는 숲 쪽 을 지켜보았다. 맨 앞쪽에서는 에릭과 세린, 엔젤이 검을 빼들고 전투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내가 뒤쪽으로 물러난 것은 결코 자의가 아니었다. 로즈가 자연스럽게 애창을 손에 들 고 앞으로 나서려던 내 옷덜미를 잡고 뒤쪽으로 끌고 갔던 것이다. 이거 놔라. 이거 놔. 발버둥을 치던 나는 세 사람이 앞으로 나서자 그들의 실력이나 한 번 지켜보자는 생각에 발버둥치는 것을 멈췄던 것이다. 숲을 헤치고 나타나는 생물들은 털북숭이의 원시인 같은 모습을 한 괴물이었다. 약 2 미터정도의 신장을 가진 거대한 오우거들은 각자 굵은 나무 몽둥이를 한 손에 들고 있 었다. 첫 판부터 오우거라니 운이 좋다고 해야하나? 운이 나쁘다고 해야 하나? 싸울 맛이 나는 상대가 나타났으니 운이 좋다고 볼 수도 있었고, 처음부터 흔하게 불 수 있 는 오크가 아니라 오우거를 한 마리도 아니고, 3마리나 만나게 됐으니 운이 나쁘다고 볼 수도 있었다. 세 마리의 오우거는 오랜만에 맛난 먹이를 본다는 듯한 눈빛으로 우리 일행을 보고 있 었다. 가래가 끓는 듯한 울음소리를 내면서 벌어진 입 사이로 드러난 날카로운 송곳니 는 보는 것만으로도 주눅들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 송곳니에 옷으로 추정되는 옷감이 걸려있다면 더욱 그러했다. 핏빛처럼 붉은 오우거의 눈은 광기로 번뜩이고 있었고, 거 대한 나무 밑동이의 둘레 만한 우락부락한 몸뚱이에서는 악취가 나고 있었다. 그 놈들 이 들고 있는 내 허벅지보다 더 두꺼운 나무 몽둥이도 상당한 위협이 되고 있었다. 마계에서는 취급도 안 하는 마물이지만 인간에게는 제법 위험한 마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우거를 본 에릭과 세린, 엔젤은 긴장을 해서 검을 고쳐 쥐었다. 마법사와 신 관의 보호를 맡고 있는 세 사람도 언제든지 뛰쳐나가 도울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 역시 마계와 인간 세상은 정말 다르군. 마계였다면 감히 오우거 따위가 내 앞을 가 로막을 수 있었겠는가. 설령 그런 일이 있다하더라도 바로 즉결 처분이었다. 하지만 이 곳은 인간 세계였고, 이 몸도 내 것이 아니니 오우거 따위가 감히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그러나 마족인 내 눈에는 오우거가 우습게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팔짱을 낀 나는 가 소롭다는 눈으로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오우거들을 쳐다보았다. 꼴깝을 하네. 꼴깝 을 해. 솔직히 마계에서 보던 오우거보다 몸집도 작았고, 기세도 흉포하지 않았다. 그 런 주제에 기세등등해서 달려드니 모습이라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몽둥이를 높이 치켜들며 달려드는 오우거를 에릭과 세린, 엔젤이 각자 한 마리씩 막았 다. 에릭은 보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정말 위험해 보이지만 가장 확실하게 오우거의 공 격을 피하고 있었다. 그는 거대한 몽둥이가 눈앞에서 왔다갔다하는데도 그저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 공격 범위만 벗어나고 있었다. 아무리 안전하다는 것을 알아도 심리상 되도록 멀리 피하려고 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말이다. 에릭은 최소한의 동작으로 오우 거의 공격을 모두 흘려버린 후에 빈틈을 잘도 찾아서 공격하고 있었다. 당하는 입장에 서는 약이 오를 정도로 침착하고 냉정한 공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거의 그 자리에서만 움직이는 에릭과 달리 세린은 빠른 스피드로 이리저리 헤 집고 다녔다. 오우거는 세린의 스피드를 따라잡지 못하고 계속 허공에 몽둥이를 휘두 르고 있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센지 윙윙거리는 소리가 내가 서있는 곳까지 들렸다. 하지만 아무리 강한 공격도 상대가 맞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법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우거의 몸에는 가벼운 상처들이 늘었고, 엔젤도 두 사람에 못지 않게 잘 싸우고 있었다. 과연 레리이나 여왕이 자랑할만한 솜씨였다. 세린과 에릭처럼 눈에 띄 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차분하게 오우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보다 이들이 오우거의 공격을 잘 막아내자 지켜보는 자들은 한결 여유있어졌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잘 싸워도 동료된 자들이 그냥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 보기에는 유리해 보여도 한순간만 방심해도 바로 부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었다. 그 점을 잘 아는 로즈는 어느새 마법 주문을 외우고 있었고, 히크리트 신관도 메이스 를 꺼내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라고 빠질 수는 없지. "심연의 어둠 속에 잠든 위대한 힘이여, 이제 그 깊은 잠에서 깨어나서 내게 오라. 너 는 나의 검이며, 나의 방패이며, 나의 몸이라. 위대한 어둠에 저항하는 존재에게 그 미약함을 깨닫게 하고 그 육신을 모두 불살라......" 그러나 나는 주문을 끝까지 외울 수 없었다. 히크리트 신관이 나를 옆으로 세게 밀쳐 버렸던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에 나는 그대로 떠밀려 넘어져버렸다. 땅을 한바탕 뒹군 후, 고개를 들어보니 히크리트 신관은 내가 서있던 자리에 서서 신성 주 문을 웅얼거리고 있었다.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그 얼굴 어디에서도 히크리트 신관이 실수로 나를 밀친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고의로 나를 밀친 것임에 틀림없었다 . 나는 너무 갑자기 당한 일이라 화를 낼 경황도 없었다. 그 사이세 로즈와 히크리트 신관의 주문은 완성되었다. "모두 비켜요!" 사라의 외침에 오우거를 상대하고 있던 세 사람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 때를 맞 춰 로즈의 손에서 거대한 화염줄기들이 오우거들을 향해 뻗어나갔고, 두 마리에 그대 로 적중했다. 뜨거움을 참지 못한 오우거들이 미쳐 날뛰었지만 그 것도 얼마가지 못 하고 새까만 숯덩이로 화해서 쓰러져버렸다. 매캐하게 살이 타는 냄새가 주변을 진동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신관의 메이스에서 하얀 빛이 터질 듯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을 보 고 있자니 절로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그 빛은 남은 한 마리의 오우거를 완전히 감싸버리더니 한동안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었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진 곳에는 오 우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것도 없었 던 것처럼 말이다. 히크리트 신관이 신의 힘을 빌려 어둠의 종속인 오우거의 육신을 완전히 분해시켜버린 것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는 사람도 극히 제한적이었고, 오크나 오우거 같은 하급 마물에게만 통용되는 힘이었다. 하지만 썩 기분이 좋은 힘은 아니었다. 물론 마족인 내게 그런 힘이 통용될 리 없었지만 전혀 상반된 힘을 바로 옆에서 보고 있자니 속에서 뭔가가 부글거리는 느낌이었다. 로즈와 히크리트 신관의 활약으로 첫 전투는 아무런 피해도 없이 끌날 수 있었다. 그 때까지 땅바닥에 넘어져서 있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이 시큰거 려 소매를 걷어보니 살갗이 벗겨져 피가 나고 있었다. 아마도 넘어질 때 긁힌 모양이 었다. 그러나 그런 상처보다는 갑자기 밀쳐졌다는데 더 화가 났다. 나는 바로 히크리 트 신관에게 따졌다. "도대체 뭐예요?! 왜 밀고 난리냐구요?!" 별 이유도 없이 밀었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그러나 히크피트 신관은 화를 내는 나를 보면서도 전혀 미안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오히려 웃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비틀 린 입술은 그녀가 나를 비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앞에서 오우거와 싸우 던 세 사람은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히크 리트 신관의 난데없는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들이었다. 솔직히 생각해 보 라구. 같은 일행이 싸우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방해를 해?! 그게 무슨 경우 야? "방금 흑마법을 쓰려고 했지요?" "그래요. 그게 어쨌다는 거죠?" 내가 흑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다 알고 있을 텐데 새삼스럽게 말하는 이유를 알 수 없 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히크리트 신관은 냉랭한 말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런 사악한 마법을 아무렇게나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흑마법은 아르테미스 의 산에서 다른 흑마법사의 힘을 탐지할 때나 쓰십시오. 흑마법사의 음흉하고 간교한 속내는 같은 흑마법사만이 알 수 있으니 그 때는 어쩔 수 없다고 쳐도 그 외의 경우에 는 절대 흑마법을 쓰지 마십시오! 어둠의 힘 따위에 의존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난관을 해쳐나갈 수 있습니다!" 하,하,하. 그러니까 사악한 마법을 쓰는 것은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아서 내가 마법을 쓸 수 없도록 밀어버렸다는 거지. 히크리트 신관이 흑마법을 싫어하는 것은 알고 있 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뭐가 어째고 저째? 음흉하고 간교 한 흑마법사는 같은 흑마법사만 알 수 있다고? 그 말은 바꿔 말하면 내가 음흉하고 간 교한 흑마법사라 말이 되었다.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내려 누르며 그녀에게 질문했다. "누가 사악하고 사악하지 않다는 기준을 정한 거지요? 그리고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흑마법은 절대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 "물론입니다. 그런 어둠의 힘으로 목숨을 건지느니 차라리 깨끗하게 죽겠습니다. 그런 사악한 힘에 더럽혀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흑마법이 사악하다 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그런 사악한 존재는 결국 신의 성스러운 심판을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당신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마음 을 고쳐먹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런 더러운 힘 따위에 의지하는 꼴사나운 일은 이제 그만두십시오." 하도 어이가 없으면 화도 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방금 까지만 해도 목 구멍까지 욕지거리가 올라왔는데 지금은 기가 막혀서 화도 나지 않았다. 신관들이 꽉 막힌 종자들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멍청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렇게 말 도 안되는 말은 바락바락 우기는 꼴통들은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듣지 않는다. 누가 누구를 심판한다고? 온갖 깨끗한 척은 다하면서 빛이라는 이름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차원계는 싹 쓸어버리는 그런 미친놈들이 누구를 심판한다는 건지 기가 막혔다. 내가 그녀의 말에 기가 막혀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말에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녀의 말은 흑마법사를 비방하는 말이었고, 동시에 나를 비방하는 말이기도 했다. "말이 심하지 않습니까! 마리엔 공주님께 너무하시는 것 아닙니까?!" "마리엔 공주님이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죄인 취급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 "이거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무례하군요!" 가스톤, 죠안, 세린, 그리고 에릭은 연이어 소리치면서 히크리트 신관을 살벌하게 노 려보았다. 사라도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너무도 화가 난 그들 은 자신도 모르게 공주님이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지금은 누구도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히크리트 신관, 왜 또 이래요? 어서 공주님께 사과 드려요." "공주님, 죄송합니다. 히크리트 신관도 나쁜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너 그러우신 마음으로 용서해주십시오!" 로즈와 엔젤도 어쩔 줄 몰라하면서 이 상황을 무난히 해결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 나 히크리트 신관은 한쪽 입술을 삐뚜름하게 위로 올리고 돌아서 가버렸다. 평소와 달리 우리 일행은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 원인은 나와 히크리트 신관 때문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너무 기가 막혀 화조차 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면서 그녀의 행동을 곱씹어보던 나는 말 그대로 획 돌아버렸다. 그냥 보통 사람이 나 에게 그런 이유로 그랬다해도 화가 날 판이데 신관이 그랬으니 화가 나지 않겠는가. 완전히 엎어버리려던 나를 가스톤과 죠안이 온 몸을 던져 막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유 혈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다. 제발 이번만 참아달라고 애걸 복걸을 하는 그들과 문제 일으키지 말라는 에릭과 세린 덕분에 나는 인내심이란 인내심은 모두 끌어내서 참았다 . 한번만 더 시비를 걸면 아주 엎어 버리려고 기다렸지만 히크리트 신관은 미리 눈치 를 채기라도 했는지 더 이상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저 것이 왜 가만히 있지? 한마디만 하면 작살을 내버리는 건데. 이런 상황이다 보니 우리 일행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가는 것과 같았다. 내 힘도 필요했지만 만에 하나 정말 흑마법사의 짓이라면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신관의 힘도 반드시 필요했다. 때문에 우리 둘 중에 한 명이라도 빠진다면 일에 큰 지장이 생길 수 있었다. 그래서 동료들은 행여나 나와 히크리트 신관이 다시 시비가 붙었다가 두 사람 중 한 명이 감정이 상해 '이 인간이랑은 도저히 같이 못 다니겠어! 이 인간 을 빼던지 아니면 내가 빠지겠어!' 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었 다. 그녀가 앞에서 엔젤과 로즈와 함께 가면 나는 뒤에서 에릭과 세린과 함께 그 뒤를 따 랐고, 그 중간에 가스톤과 죠안, 사라가 서서 나와 신관이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했다 . 야영할 때도 나와 히크리트 신관은 맨 끝과 끝에서 잠이 들었다. 며칠 지나다보니 화를 낼 타이밍을 놓쳐버린 데다 계속 마주칠 일이 없어 처음에 당장 죽여버리겠다고 벼르던 때와는 달리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지만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가 왜 신관 따위에게 그런 소리를 들어야한냔 말이다. 그렇게 우리 일행은 침체된 분위기로 델피르에 도착했다. 델피르는 수도로 가는 길목 한가운데 있어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 중소도시라지만 매우 번화했다. 우리 일행은 제 법 깔끔해 보이는 여관에 방을 잡았다. 여기서도 나와 히크리트 신관이 부딪치는 일이 없도록 나는 사라와, 히크리트 신관은 엔젤과 로즈와 같이 다른 방에 머물렀다. 원래 라면 여자들의 방이 붙어있고 맨 가에 남자들의 방이 있겠지만 이번에는 두 방 사이에 남자들의 방이 있었다. 어떻게든 덜 마주치게 하려는 동료들의 생각이 엿보였다. "마리엔, 오늘은 각자 개인 행동이래. 나하고 엔젤, 히크리트 신관님은 밖에 나갈 테 니까 마리엔도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밖에 나갔다 와. 오랜만에 들리는 도시잖아. 델 피르는 크기는 별로 크지 않아도 볼 게 많은 곳이니까 기분도 풀릴 꺼야." 로즈는 나와 사라가 머무는 방으로 와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오늘 하루종일 히크 리트 신관과 마주칠 일이 없으니 마음껏 놀면서 기분을 풀라는 소리였다. "그래요! 아니, 그래! 오랜만에 도시에 왔으니까 어서 밖에 나가자! 아까 오면서 보니 까 사람들도 많아서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 가스톤 님이랑 모두 함께 같이 나가서 재 미있게 노는 거야! 마리엔은 이렇게 놀아본 적 없을 것 아냐?" 맨날 아렌테에서 놀았네, 이 사람아. 그러나 여관방에서 죽치고 있는다고 바닥을 기고 있는 기분이 다시 좋아질 것 같지도 않고 놀다보면 그런 대로 기분이 풀릴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분을 풀어주려는 로즈와 사라의 노력도 가상했던 것이다. 히크리트 신관이 그녀들의 반만, 아니 반에 반만 닮았어도 이런 사태가 벌어지지는 않 았으리라. 우리는 세린들이 머무르고 있는 방으로 건너갔다. 그들도 우리의 제안을 흔 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기분이 저조한 와중에도 나는 참으로 장한 일을 했다. "난 에릭하고 세린, 죠안하고 갈 테니까 가스톤과 사라는 따로 어디 나가서 놀아요." "에? 어째서 나하고 사라 양은 떼어놓고 가는 거야?" 내 말에 가스톤이 반문했다. 사라도 뜻밖의 말에 내 얼굴만 쳐다보았다. 이런 눈치없 는 사람들을 보았는가. 얼굴을 많이 보고 같이 다녀봐야 정이 드는 법이다. 그렇기에 나는 사라와 가스톤이 따로 다닐 기회를 제공해 준 것이다. 나머지는 사라가 알아서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런 세심한 배려까지 해줬으니 나머지는 자신이 알아서 해야지. "사람들이 많으면 귀찮단 말이야. 그렇지 않아요, 죠안?" "물론. 가스톤 넌 따로 놀아. 사라양, 가스톤을 잘 부탁합니다." 내 의도를 파악한 죠안도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사라의 가스톤에 대한 감정을 알지 못하는 세린이 이상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자! 그럼 당장 나가죠!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별로였는데 오늘은 한번 신나게 놀아보 자구요!" 나는 세린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한쪽 팔을 끌고 나와버렸다. 그 뒤를 죠안과 에릭 이 뒤따랐다. 영문을 모르는 에릭과 세린에게 대강의 사정 설명을 하면서 우리들은 여 관을 빠져나왔다. 에릭은 전혀 몰랐다는 반응만 보이고 있었지만 세린은 흥미롭다는 표정이 되었다. 만약 평소라면 그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두 사람을 떨쳐놓고 오자 약간의 만족감은 들었지만 다시 언짢아졌다. 여러 군데를 돌아다녔지만 도시 구경에도 흥미가 일지 않았다. 부루퉁해져서 앞만 보고 걷 던 나는 마침 모퉁이에서 나온 사람을 보지 못하고 부딪쳤다.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제 일행이 옆을 보지 못했군요." "괜찮소. 나도 앞을 보지 못한 건 사실이니까." 서로 어깨가 부딪치자 세린이 나대신 사과를 했다. 상대는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어 딘지 모르게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였다. 그는 까만 색의 로브와 후드로 온몸을 감싸고 있어서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에게서 어디선가 느껴본 듯한 느낌이 느껴졌다. 이상하다. 어디서 많이 느껴본 분위긴데. 어디였지? 나는 그를 유심히 살펴 보았고, 후드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도 나를 살펴보는 것 같았다. "그럼 이만......" 내가 뭔가 떠오르려 할 때, 그는 짤막한 말을 남기고 사람들 틈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덕분에 막 떠오르려던 생각은 다시 망각의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뭐 별 일이야 있겠어. 그냥 아는 사람이랑 분위기가 비슷했나보지. 나는 이 날 있었던 사소하다면 사소하다고 볼 수 있는 이 일을 잊어버렸다. 점심시간이 되자 우리 일행은 근처에 있던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음식만 파는 것 이 아니라 술도 파는지 술에 취한 사람들의 모습도 종종 보였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비어있는 테이블로 걸어가는데 주변 사람들의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은 대부 분 세린에게 쏠려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 미녀가 나타나면 시선이 집중되는 것과 비슷 한 이치였다. 뭐라고 해도 이 곳은 스피린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그런 시선을 무시하 고 자리에 앉았다. "돼지 통구이와 야채 스튜 4개, 먹을만한 빵 조금 하고, 음료수도 4잔 가져다 주십시 오." 죠안의 말에 종업원은 주방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이 모락모락 나 는 음식들이 도착했다. 그리고 나는 음식이 도착하자마자 마구 먹어대기 시작했다. 스 트레스를 푸는 방법 중에 가장 좋은 방법은 분풀이 상대로 하나 잡고 죽어라고 패는 것도 있었지만 음식을 마구 먹어대는 것도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히크리트 신관을 마 물 먹이로 던져주거나 몰래 없애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으니 이렇게 라도 스트레 스를 푸는 것이다. 앞에 놓인 음식들을 히크리트 신관이라고 생각하고 꽈악 꽈악 씹어 먹었더니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네 이년 언제 한번 제대로 걸려봐라. 이 세상에 태 어난 걸 후회하게 만들어주겠어!!! "마, 마리엔. 그러다 체하겠어. 좀 천천히 먹어." "물이나 마시고 먹어. 목도 안 막혀?" ".......그렇게 배가 고팠냐?" 그러나 나는 손을 내저으면서 관심 끄고 너희들도 밥이나 먹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고 다시 먹는데 정신을 집중했다. 일행의 눈에는 과연 저 가녀린 몸에 어떻게 저 렇게 많은 것들이 들어가는지 신기하다는 눈치였다. 그리고 식탁 위에 있는 음식이 절 반 정도 줄어들었을 때였다. "으하하하! 그래서 내가 말이지 그 놈에게 겁을 줬더니 고고한 척 다하던 놈이 벌벌 떨면서 우는 모습이라니......" "그 남자 꽤나 예쁘던데. 다른 여자가 이미 있었던 것 아니야?" "그럼 뭐해! 임자가 있다고 차지하지 못하라는 법은 없잖아. 같이 잔 사람이 임자지." 식당 한구석에서 왁자지껄하며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다가 말하는 내 용들이 음담패설에 가까웠는데도 식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들릴 수 있도록 큰 목소 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별로인데 저것들이 신경이 거슬리게 하네. 일행들도 그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남자를 꼬시는데는 몇 번 겁을 주면 그만이라는 말을 지껄이고 있는 그녀들은 정말 여 자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우락부락한 얼굴들이었다. 덩치도 보통 남자들보다 훨 씬 컸고, 근육도 울퉁불퉁해서 가슴이 없었다면 영락없이 남자로 오해했을 것이다. 그 녀들은 술이 얼큰하게 취했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가장 덩치가 큰 여자의 말 에 식탁을 치면서 낄낄대고 있었다. 어디를 가도 저런 인간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도 그녀들을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지만 감히 나서서 말하는 사 람들은 없었다. 그런데 막 한창 자신의 자랑을 늘어놓던 가장 덩치가 큰 여자가 내 시 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마침 별 웃기는 것들을 다 보겠다는 눈으로 그녀들을 보고 있던 나와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야! 뭘 봐! 눈 안 깔아? 여자주제에 곱상하게 생겨 가지고 여자 망신은 다 시키고 있 네! 난 너같이 얼굴만 만만한 년들을 보면 속이 느글거려! 한 대 맞기 싫으면 구석에 찌그러져 있어, 이 계집애야!!!" 요즘 따라 일진이 왜 이러냐? 허구헌날 보이는 것들이라고는 시비를 거는 놈들뿐이군. 아니 여자들이니까 년이라고 해야 하려나. 막 약간 기분이 풀리려던 나는 다시 기분 이 저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 껄이고 있었다. 내가 그런 소리를 듣고 멀쩡했겠는가. 나는 겁대가리를 상실한 여자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저 년이 죽으려고 작정을 했나! 어딜 꼴아 봐?! 저런 것들은 꼭 한 번 맞아봐야 정신 을 차린다니까!!!" 내가 겁을 먹고 움츠러들길 기대했던 여자는 여전히 자신을 우습다는 듯이 보자 화가 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똑바로 선 그녀의 키는 적어도 나보다 머리 두 개는 더 커 보였다. 얼굴은 험상궂게 일그러져 있었고 허리에 찬 롱소드가 그녀가 움직일 때 마다 흔들렸다. 식당 안은 그녀가 일어선 것과 동시에 고요만이 감돌았다. 모든 사람 들이 괜히 나섰다가 자신에게까지 불똥이 튈까봐 몸을 사리고 있었다. 우리들이 앉아있는 탁자까지 성큼성큼 걸어온 여자는 주먹으로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쿠앙! 뭔가가 부서지는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탁자 위에 있던 음식들은 대부분 땅으 로 떨어졌다. 그 소리에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흠칫했다. 그러나 나는 입술 한쪽을 비뚜름하게 위로 올리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한마디로 나는 그녀의 무식한 행 동을 비웃었다는 말이다. 그런 나의 반응에 그 여자는 꼭지가 돌기 일보 직전까지 갔 다. 무식한 것들은 한 번 긁어놓으면 돌아버리는 것은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인 모양이 었다. "그만하시지요. 제가 대신 사과를 드릴 테니 서로 얼굴을 붉히는 일은 하지 맙시다." 세린은 일이 커지기를 원하지 않았는지 그 여자에게 대신 사과했다. 그의 말에 주먹을 폈다 쥐었다 하던 여자는 이 건 또 뭐야, 라는 눈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그러나 세 린을 보더니 표정이 확 변했다. 손을 턱에 가져가 댄 채 세린의 위아래를 훑어보는 그 녀의 눈에서는 끈적끈적한 탐욕이 느껴졌다. 바로 옆에 있던 나는 그 노골적인 시선에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오호~ 이거 보기 드문 미남이군. 섬세하게 생긴 것이 딱 내 취향이야. 좋아. 널 봐서 이번만은 특별히 용서를 해주지. 하지만 사과는 밤에 내 방에 와서 하라구." "낄낄낄. 레베카의 못된 버릇이 또 나왔군." "어이, 너만 재미보면 안 돼지. 우리한테도 차례를 넘기라구!!!" "레베카! 너무 겁주지 마라! 불쌍하잖아!" 레베카라고 불린 여인은 환호하는 자신의 일행들에게 한차례 손을 흔들어준 후 내 멱 살을 잡았다. 어찌나 힘이 센지 의자에 앉아있던 몸이 붕 들렸다. 물론 내가 전혀 저 항을 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레베카는 내 얼굴을 자신의 얼굴 가까 이 가져가 되더니 으르렁거리면서 말했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저 남자 때문에 이번에는 목숨을 부지한 줄 알란 말이다. 하지만 다음 번에 걸리면 팔다리 부러지는 건 각오해야 될 꺼다. 그리고 저 남자는 나한테 넘기는 거다. 네 주제에 저런 남자는 어울리지 않지. 하지만 남자는 내가 귀여워해 줄 테니까 걱정하기 마라." 그리고 슬쩍 세린에게 눈을 돌려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탐욕에 찬 느글거리는 모습을 보니 속에서 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리고 그동안 간신히 억눌러왔던 화가 폭발 해버렸다. 레베카가 마리엔의 멱살을 잡고 협박하자 에릭과 죠안이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 단숨 에 마리엔을 들어올린 것을 보면 상당히 힘이 센 모양이었지만 기사인 그들이 당하지 못할 정도로 실력 있는 자는 아니었다. 그런 자라면 이런 곳에서 술이나 마시고 깽판 을 칠 것이 아니라 왕궁의 기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세린도 자신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는지 잠시 어안이 벙벙했지만 금새 정신을 차리고 전투 태세를 취했 다. 그런데 그들이 손을 쓰기도 전에 먼저 마리엔이 입을 열었다. "눈 돌려." 그 목소리는 평소에 듣던 마리엔의 목소리와는 정반대로 감정이라고는 전혀 실려있지 않은 극히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또한 듣는 사람이 소름이 끼치도록 차가운 목소리 였다. 과연 저 목소리가 정말 마리엔이 낸 것인지 궁금할 정도였다. 세린과 에릭, 죠 안은 현재 상황을 잊어버리고 놀라서 마리엔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런 점은 레베카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리엔은 여전히 레베카에게 멱살이 잡혀있었지만 푸른 눈동자에서는 전에 볼 수 없었 던 푸른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핏빛처럼 붉은 입술은 한껏 비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완전히 변해버린 주변의 공기에 몸이 흠칫거렸고, 심장이 꽉 조여드는 느낌이 었다. 마리엔은 발을 들어 꼼짝도 못하는 레베카의 복부를 걷어차 버렸다. 불시의 일 격을 당한 레베카는 멱살을 잡던 손을 놓치고 뒤쪽으로 넘어졌다. 땅에 내려선 마리엔 은 마치 더러운 것이 만지기라도 한 것처럼 레베카가 잡은 로브를 그대로 잡아당겨 던 져버렸다. 어깨 부분이 찢어진 로브가 팔랑거리며 지면으로 내려앉는 것과 동시에 식 당 안에는 둔탁한 타격음이 들렸다. 빠악! 마리엔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넘어져서 콜록거리는 레베카를 걷어차 버렸다. "한번만 더 세린한테 눈 돌리거나 입을 나풀거리면 죽여버린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마리엔은 계속 레베카를 발로 짓밟았다. 살 벌한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레베카의 일행들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일제히 달 려들었다. 덩치가 소만한 여자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자 마리엔은 레베카를 걷어차던 발 을 멈추고 가볍게 뒤로 피했다. "레베카, 괜찮아? 일어날 수 있겠어?" "으윽......혼자서도 일어날 수 있어! 손 치워! 당장 그 년을 죽여버리겠어!!!" 자기 일행의 손을 뿌리친 레베카는 씩씩대면서 일어났다. 그녀의 몸은 곳곳에 푸른 멍 이 들어있었고, 입술은 터져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레베카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건지 일어나자마자 무서운 기세로 마리엔을 노려보았다. 곱상하게 생겨서 얕본 것이 화근이었다. 아무리 비리비리해도 여자인데 너무 방심을 했던 것이다. 본능적으 로 방금 전의 마리엔의 기세 때문에 움츠러들었지만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레베카는 이를 무시해버렸다. "죽여버리겠어!!!" "너 같은 인간에게 죽을 것 같아? 분수를 알아라." 마리엔의 냉랭한 말에 레베카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무슨 생 각을 한 것인지 곧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기서 싸우면 식당에 피해가 갈 테니 밖으로 나와라! 설마 비겁하게 도망치지는 않 겠지?" "도망칠 만한 상대도 아닌데 내가 왜 도망가지? 당신이나 도망가지마." 잠시 마리엔을 무섭게 노려보던 레베카는 몸을 회 돌려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나 가자 그녀의 일당과 식당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도 따라서 나갔다. 뭐라고 해도 싸움 구경은 당사자들을 제외하고는 재미있는 구경이었다.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하면 도 와주지 않는 주변 사람들의 비겁함을 욕하지만 정작 자신이 그 주변 사람이 되게 되면 자연스럽게 구경을 하는 것이다. 자신만 괜찮으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 하지만 과 연 다음에 구경을 당할 사람이 자신이라도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나 설마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 라는 생각으로 자기 위안을 한다. 불운의 화살에는 눈이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어쩌려고 그래?" 세린이 걱정이 돼서 다급하게 물었지만 마리엔은 느긋하게 대답했다. "뭘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 한 번 싸우면 될 것 아니야." "속 편한 소리하지마. 방금은 상대가 방심을 해서 그렇지만 지금은 단단히 벼르고 있 단 말이야. 그리고 네가 어떻게 싸우겠다는 거야? 마법은 실전에서는 거의 사용할 수 없다는 것 알고 있잖아." "글쎄. 싸움은 해봐야 아는 거지." 마리엔은 대충 대꾸하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손에는 그녀가 항상 들고 다니는 장식용 봉이 들려있었다. 그런 장식용 봉으로 검을 찬 사람들을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말이다. 죠안은 정밀하게 세공된 봉을 보자 잠시 잊고 있었던 악몽이 떠올랐다. 동시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이 아주 되지 않 는 건 아니었지만 한결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사정을 모르는 세린과 에릭은 죠안의 한숨을 걱정의 한숨으로 판단했다. 그들은 행여라도 마리엔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봐 재빨리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다른 한 명이 마리엔이 아닌 다른 이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마리엔은 뒤따라오는 세 사람을 흘깃 쳐다보고 밖으로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둥글게 반원을 그리며 모여있었고, 그 중앙에는 레베카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서있었다. 그리 고 그런 그녀를 보는 구경꾼들의 얼굴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막 마리엔이 레베카에게 걸어가려 할 때, 뒤쪽에서 에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위험해!"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마리엔은 쓴웃음을 지었다. 문의 좌우에 숨어있던 레베카의 일당들이 자신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몽둥이를 휘둘렀던 것이다. 그래서 구경꾼들의 표 정이 이상했던 것이다. 차마 레베카들이 무서워서 말은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애초부 터 이들은 남의 식당이 부서지든 말든 전혀 상관하지 않을 인간들이었다. 처음부터 이 것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에릭은 재빨리 뛰쳐나갔지만 이미 몽둥이는 마리엔을 향 해 날아오고 있었다. '제기랄.' 에릭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마리엔의 손에 들린 장식용 봉이 일순간 길어지더니 특이한 모양의 창으로 변했다. 길이가 긴 창대로 두 개의 몽둥이를 모두 막아버린 마리엔은 그대로 한바퀴 회전해서 창대로 몽둥이를 밀었다. 그녀가 막을 것 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여자 건달들은 그대로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마리엔은 그 빈 틈을 놓치지 않았다. 창대로 좌측에 있는 여건달의 목젖을 찌른 그녀는 반대편의 여자 를 찔러 들어갔다. 우측에 있던 건달은 순식간에 접근하는 섬뜩한 창날을 보면서 난생 처음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으윽!" 창날에 손을 관통당한 그녀는 몽둥이를 놓치고 피가 흘러나오는 손을 움켜잡았다. "이익! 죽어라! 이야아아!!!" 순식간에 두 사람이 당하자 레베카가 검을 높이 쳐들고 달려들었다. 그 기세가 사나웠 지만 레베카는 마음 한구석에 드는 불안감을 떨쳐버리려고 과장된 동작으로 달려들었 던 것이다. 자꾸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시나리오와는 다른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고 있 었다. 그리고 레베카의 뒤를 이어 다른 여건달도 검을 빼들었다. 괴상한 창을 든 소녀 에게 친구들이 당했던 것이다. 자신들이 다른 사람에게 무수히 한 행동인데도 정작 자 신들이 피해자가 되자 여건달은 분노했다. 급기야 상대가 검까지 빼들자 세린과 에릭은 놀라서 검을 빼들었다. 자칫 잘못하면 마 리엔이 크게 다칠 수 있었다. 그런 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했다. 그러나 죠 안은 검을 빼드는 대신 마음 속으로 빌었다. '신들이시여, 부디 저 가여운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목숨만은 살려 주소서.' 죠안은 레베카들이 검을 빼들자 마리엔의 눈이 번뜩이던 것을 놓치지 않았다. 마리엔 이 그런 눈을 하면 대련을 빙자한 폭력의 강도가 훨씬 세진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그 였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잠시 후, 세린과 에릭은 빼들었던 검을 다시 검집으로 집어넣었다. 지금 눈 앞에서 네 명의 거구의 여인들을 패고 있는 마리엔에게는 도움따위는 전혀 필요없어 보였다. 매 우 능숙한 솜씨로 창을 다루고 있는 그녀가 정녕 공주라는 고귀한 신분인지 믿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공주가 창술을 어디서 배웠단 말인가. 창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사들이 창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 랜스를 사용하긴 하지만 그건 어 디까지나 기마상에서 사용하는 무기였다. 때문에 현재 현란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마리엔의 창술과는 엄연히 달랐다. 설령 같다 해도 감히 공주에게 창술을 가르칠 만큼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사람은 없었다. "야! 너 다시 한 번만 세린한테 찝쩍거리면 진짜 죽을 줄 알아!" 이제는 싸움이 아니라 거의 구타에 가까웠다. 마리엔의 손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레 베카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소리에 주변 사람들의 몸이 움찔거렸다. 얼굴은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가 설마 이렇게 위험 인물인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마리엔은 사 악하게도 맞으면 가장 아픈 부위만 골라서 때렸고, 그 한 대 한 대는 뼈를 깎는 고통 을 레베카들에게 가져다 주었다. '마리엔 공주님이 저런 성격이었을 줄은......' '볼 때마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군.' '불쌍한 여인네들이여, 그러게 왜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게요. 그렇지 않아도 잔뜩 화가 나있었는데. 부디 목숨만은 부지하기를.' 세린과 에릭, 죠안이 열심히 두들겨 패는 마리엔을 보면서 저마다의 생각에 잠겼다. 요조 숙녀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성격일 줄은 이미 겪어본 죠안 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몰랐던 것이다. "넌 뭐가 그렇게 잘났어! 신관이면 다냐! 신관이면! 흑마법이 왜 나쁘다는 건데? 말해 봐!" 어느새 마리엔은 레베카들을 히크리트 신관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레베카 들이 피가 나든 어디가 부러지든 전혀 상관이 없었다. 오로지 히크리트 신관에 대한 분노를 그녀들에게 쏟고 있었다. 그런 마리엔을 보면서 세 사람(세린, 에릭, 죠안)의 등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만약 오늘 걸린 사람이 레베카가 아니라 히크리트 신관이었 다면......어쩌면 히크리트 신관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었을지 도 몰랐다. 그리고 레베카들은 정신없이 얻어맞으면서 속으로 절규했다. '우린 신관이 아니란 말이야!' 상대를 잘못 고른 잘못을 톡톡히 치르고 있는 레베카들이었다. 그리고 신나서 패고 있 는 마리엔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검은 후두 속에서 빛을 발하는 한 쌍의 검은 눈동 자는 마리엔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룰루루~" 콧노래를 부르며 앞장서서 걷는 마리엔을 보는 세 명의 남자들은 매우 찹찹한 심정이 었다. 마리엔이야 모든 스트레스를 레베카들에게 풀었으니 속이 시원하겠지만 뚜껑 열 린 마리엔의 모습을 직접 본 사람들은 근심만 늘었다. 물론 그동안 마리엔이 받은 스 트레스가 상당했던 점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사람을 그 지경까지 팰 수 있단 말인가. 그러고도 죄책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마리엔의 모습. 게다 가 갑자기 차갑게 변해버렸던 모습도 그렇고 마리엔을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더욱 그 녀를 모르고 있다는 생각만 들었다. "저...마리엔?" "왜에?" 세린의 부름에 마리엔은 너무도 기분이 좋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생긋거리며 웃 는 모습이 귀여워 보이자 세린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천사의 탈을 쓴 악 마였다. 마리엔은 갑자기 고개를 내젓는 세린을 의아한 눈초리로 쳐다보았지만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건방진 여인네들의 마수에서 세린을 구해줬더니 너무 기분이 좋 았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이유였고 진정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잠 시 후 정신을 차린 세린은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창술은 어디서 배운 거야? 마리엔이 창을 다룰 줄 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 "궁금해?" 마리엔의 말에 에릭과 죠안도 귀를 쫑긋 세웠다. 그녀는 그런 세 사람의 얼굴을 한 번 씩 쳐다보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알려고 하지마. 다쳐. 그리고 여자는 비밀이 많아야 아름다운 법이야. 하지만 첫 이 니셜이 D 자로 시작하는 이에 배웠다는 것만은 말해주지." 마리엔은 그 자가 인간이 아니며, 현재 마계에 있다는 상세한 설명은 붙이지 않았다 . 세 사람은 D자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자가 누군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마땅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았다. 몇 번이나 마리엔을 추궁해보았지만 그녀는 그 이외 의 말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아무리 해도 알아낼 수가 없자 그들은 당장 알아내는 것은 포기했지만 반드시 알아내리라 생각했다. 그들이 숙소로 돌아가자 다른 사람들은 벌써 먼저 와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나갈 때만 해도 기분이 좋지 않았던 마리엔이 생글거리며 돌아오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세 사람 에게 은밀히 물어보았다. 그러나 사실 그대로 어떤 사람을 죽어라고 패고 기분을 풀었 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델피르 구경이 재미있으셨던 모양입니다. 하하하." 다른 이들은 세 사람의 웃음이 어딘지 모르게 어설퍼 보였지만 마리엔이 마음을 풀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21-산맥을 넘어 델피르를 출발한 우리 일행은 마침내 테오라신 산맥 밑에 도착했다. 올려다보니 과 연 엔젤의 말대로 테오라신 산맥은 까마득한 높이의 산봉우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자유롭게 창공을 누비는 새라도 한 번은 쉬어야만 정상을 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 직 하늘에 떠있는 하얀 구름만이 산맥의 정상을 배회하고 있었다. 푸른 나무들로 뒤덮 인 산의 중간 중간에 보이는 깎아지는 듯한 절벽의 모습은 푸른 색 일색인 다른 산에 서는 볼 수 없는 장관이었다. 그러나 보기에는 멋있어 보이지만 직접 산을 올라갈 때 는 절벽은 조심해야 했다. 한순간의 실수로 천길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질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산을 올라가는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마을에 머물렀다. 앞으로 테오라 신 산맥을 넘어가려면 고생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하루 정도는 푹 쉬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모두의 의견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에게 산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서이기도 했다. 적어도 약초를 캐기 위해 산을 자주 오르는 이 마을 사람들이라면 우 리보다 산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현지민들의 조언 한마디가 나중에 크게 도움 이 될 수도 있었다. 마을은 종종 산맥을 넘나드는 사람들이 있어서인지 작지만 여관이 하나 있었다. 마을 사람에게 물어 여관을 찾아가 보니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은 눈에 띄지 않고 마을 주민 들만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마도 이 여관의 매상은 대부분 마을 주민에게 술이나 음식을 팔아서 버는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와서 그런지 사람들의 시선은 우 리 일행에게 쏠렸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와서 그런지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우리 일 행에게 쏠렸다. 그중 세린과 에릭에게 가장 많은 시선이 쏠렸는데-특히 세린- 로즈언 니가 내게 말하기를 세린은 스피린에서 매우 보기 드문 미인(美人)으로 절로 보호 본 능을 일으키는 타입의 남자라고 한다. 그리고 에릭은 얼음같이 차가운 모습이 매력인 미인(美人)으로 '미소를 지으면 어떤 얼굴이 될까?'하는 호기심을 절로 불러 일으키는 타입의 남자라고 한다 "어서 오십시오. 외지 사람이 찾아온 건 오랜만이군요. 자고 가실 겁니까?" 우리에게 질문을 한 사람은 카운터에 앉아있던 30대의 여성이었다. 허리까지 닿는 머 리를 땋아서 등뒤로 늘어뜨리고 있는 여관 주인은 여성미가 넘쳤지만, 그녀의 손에서 번뜩이는 단검은 그녀 역시 전형적인 스피린 여자임을 알려 주었다. 단검을 손질하고 있었나? 손질하는 거야 누가 뭐라고 하겠냐만 손님에게 말하는데 왜 단검을 들고 그래 ? 협박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주인의 말에 엔젤이 나서서 말했다. "그렇소. 4인용, 3인용, 2인용 방을 하나씩 주십시오." "그럼 따라오시죠." 주인은 벽에 걸려있던 열쇠 꾸러미를 들고 앞장을 섰다. 그녀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 자 그녀는 복도 중간에 있는 204호라고 적어져있는 방 앞에 섰다. "여기는 3인용 방입니다. 그리고 이 옆에 있는 205는 4인용 방이니 같이 쓰십시오. 2 인용 방은 206호 맞은편에 있는 207호를 쓰십시오." "206호는요? 206호는 2인용 방이 아닌가보죠?" 내 질문에 열쇠로 방문을 열고 있던 주인은 내 쪽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아, 206호. 2인용이 맞긴 한데 이미 어떤 손님이 묵고 계시지요. 그러고 보니 이런 초봄에 한꺼번에 손님이 오는 건 처음이군요. 그래봤자 206호에는 한 사람만 묵고 있 지만요. 그 손님이 조금은 여유있는 방이 좋다고 해서 2인용 방을 드린 겁니다." 주인의 말을 들어보니 이런 계절에 테오라신 산맥을 넘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는 모양 이었다. 봄이라고는 해도 아직 완연한 봄은 아니라 산을 계속 올라가다 보면 중턱 이 후부터는 제법 쌀쌀했다. 그런 계절에 넘어가느니 완전한 봄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넘 어가는 편이 나았다. 그래서 이 계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사라와 함께 207호실에 들어간 나는 우선 짐부터 풀었다. 그 후에 여행하느라 더러워 진 몸을 씻고 식당으로 내려가 보니 다른 일행들은 벌써 내려와 있었다. 우리들이 남 은 의자에 앉자 로즈가 음식을 주문했다. 메뉴가 몇 개 없어서 특별히 음식을 고르느 라 골머리를 썩힐 필요는 없었다. "그대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또 필요하신 것이 있나요?" 주문을 받은 주인이 묻자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혹시 산맥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나요? 이번에 산맥을 넘어갈 건데 도움이 될 만 한 정보를 알아보려고 하거든요." 그러자 호기심으로 우리 일행을 힐끗힐끗 쳐다보던 사람들이 자신들이 나설 때가 된 것이 기쁜지 저마다 떠들기 시작했다. "그런 거야 이 마을 사람들이라면 다 알지." "뭐 궁금한 것이라도 있나? 뭐든지 말해보게!" "테오라신 산맥이라면 다섯 살 때부터 내 집 드나들 듯이 하던 곳이지. 산맥의 길이라 면 다 내 손바닥 안에 있지." 내가 주인을 쳐다보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산맥에 대해 궁금하신 것이 있다면 저들에게 물어보면 자세히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206호에 묵고 계시는 손님도 이번에 넘어갈 거라고 하던데요. 뭐 이곳 에 온 사람들이 대부분 산맥을 넘어 가려고 온 것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206호? 그 사람도 산맥을 넘어가나 보지? 그런데 혼자 가는 건가? 사람들 말로는 혼자 넘어가기는 굉장히 힘들다고 한다. 그렇지 않다면 동료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206호 에 머물고 있다는 사람에게 호기심이 생긴 나는 주인에게 물어보았다. "그 사람도 산맥을 넘어가요? 206호에 묵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요?" 내 말에 주인이 막 입을 열려 할 때, 계단 쪽에서 부드러운 미성이 들려왔다. "206호라면 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막 1층으로 내려오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외모 중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여자들보다 더 아름다운 검은 머리였다. 허리까 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는 비단결처럼 고왔고, 그가 계단을 내려올 때마다 물결치고 있 었다. 그러나 칠흑같이 검은 머리와는 달리 피부는 잡티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였다. 그려진 것 같은 눈썹 아래 자리잡은 검은 눈동자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고, 핏빛처럼 붉은 입술은 어딘지 모를 섬뜩함과 함께 알 수 없는 매력을 풍겼다. 그렇다 고 그가 엄청난 미남이라는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이 자리에 있는 세린이나 에릭이 저자보다 미남이었다. 그는 미남이라기보다는 깔끔하게 생겼다고 하는 편이 더 어울렸 다. 그러나 그에게서 풍기는 묘한 분위기는 사람들이 눈을 떼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다 . "제 이야기를 하고 계셨던 겁니까?" 그자는 우리 일행이 앉아있는 탁자까지 걸어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자 같지도 않 지만 남자 같지도 않은 중성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는 그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검은 눈동자와 내 눈동자가 마주쳤다. 그의 눈에서 이채가 이는 것 같았지만 워낙 순식간에 사라져서 나는 내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네. 당신도 테오라신 산맥을 넘어간다면서요? 사실은 우리 일행도 산맥을 넘어가기 때문에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그렇군요. 여러분도 산맥을 넘어가시는군요." 그는 뜻밖이라는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잠시 뭔가 궁리를 하는 것 같더니 곧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실례가 아니라면 산맥을 넘는 동안만 동행해도 될까요? 사실은 혼자서 산맥을 넘을 일 때문에 골머리를 썩던 중이었습니다." "아니, 그럼 산맥을 혼자 넘을 생각이셨던 말입니까? 동료들을 기다리고 계신 것 아니 었습니까?" 죠안이 놀라서 반문하자 그는 볼을 긁적거리면서 더욱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게 그렇게 됐습니다. 별 수 없이 이 마을에서 산맥을 넘어갈 사람들을 기다린 건데 운 좋게도 여러분을 만난 겁니다. 사실 이런 계절에 산맥을 넘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 어서 여러분을 놓치면 영락없이 혼자 넘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저는 일주일도 못 가서 마물들의 먹이가 되거나 길을 잃고 헤맬 겁니다. 제가 좀 길치거든요. 하하하." 자랑이네, 이 사람아. 그의 제안에 우리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우리가 망설 이는 것처럼 보이자 그는 금새 기가 팍 죽어서 말했다. "안됩니까? 만약 중간에 짐이 되면 버리고 가셔도 됩니다. 그럼 나중에 고혼이 되도 여러분을 쫓아다니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 말은 중간에 버리는 건 상관없지만 그냥 가면 나중에 죽어서 우리를 쫓아다닌다는 말??? 일행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그런 시선이 자기에게 집중되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하하하,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말이. 제가 이래봬도 4서클 초반이지만 마법은 조금 사 용할 수 있습니다. 또 마법사치고는 몸도 날쌔서 방해가 되는 일은 거의 없을 겁니다. 부탁드립니다. 이 것 하나만 믿고 가기는 불안해서요." 그리고 그는 품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품속에서는 별의별 잡다한 것들이 다 나왔지 만 정작 원하던 것은 아직도 찾지 못했는지 계속 뒤적였다. 급기야 그는 겉옷을 벗어 탈탈 털기 시작했다. 땅으로 떨어지는 물건들은 도대체 여행에 왜 그런 것이 필요한 지 궁금할 정도의 물건들이었다. 그는 기묘한 색깔의 구슬들이 바닥에서 뒹구는 틈 속 에서 금빛의 목걸이를 찾아서 집어들었다. 목걸이의 중앙에는 축복의 글귀가 적힌 자 수정이 달려있었다. 그 목걸이를 본 히크리트 신관이 놀라서 말했다. "그건 성녀님의 축복의 기운이 담긴 목걸이군요. 상당히 구하기 힘든 물건일텐데요." 성녀라는 말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성녀라. 이름부터가 마 음에 들지 않는 인물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확실히 뭔가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어 둠의 힘도, 신성력도, 극한에 이를 정도로 강하지 않으면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는 느 끼기 힘들었다. 물론 진짜 내 몸이라면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현재 마리엔의 몸으로 보 자면 9서클 급의 흑마법사의 기운이나 교황정도의 기운만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신성 력은 쥐뿔도 없고 돈으로 교황디 됐다면 아무리 나라도 느낄 수 없었다. 히크리트 신 관의 말을 듣고 자꾸 보니 처음에 봤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신성력이 조금씩 느껴졌다 . 성녀라는 인물도 제법 강한 신성력을 가진 자인 모양이었다. "제 전 재산을 날려서 힘들게 구한 겁니다. 여행을 자주 다니는 편이라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하지만 이걸로는 마물을 모두 피할 수 없을 것 같아서요." 그럼 축복 하나만 믿고 산맥을 넘어가려고 했단 말이야? 우리들은 기가 막힌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한번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잠시 후, 우리 일행은 서로 머리를 모으고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이다. "난 별로 나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게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도 않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법사라니 도움도 될 것 같군요." "나도 괜찮아." "나도. 마리엔은 어때?" 다른 사람들이 다 좋다고 하면 싫다고 하고 싶은 고약한 심보 때문일까? 그를 동행시 키는 것이 왠지 꺼림칙했다. 신성력이 담긴 목걸이를 가지고 있어서인지 그에게서는 기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뭔가에 희석돼서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아주 연하지만 뭔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냥 마음에 걸린다는 점만 빼면 딱히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찬성하는데 느낌이 좋지 않다는 이유만으 로 나만 반대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나까지 고개를 끄덕이자 만장일치로 그와의 동행이 결정되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제 이름은 엔젤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일행들입니 다." 엔젤이 차례로 우리들을 소개하자 그는 매우 기쁜 얼굴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제 이름은 루시퍼입니다. 좀 특이하지요? 그냥 루시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디로 가십니까?" "저희는 히폴리테까지 갑니다. 루시퍼씨는 어디까지 가십니까?" "히폴리테요? 거기는 요새 마물 때문에 극성인 지역 아닌가요? 무슨 일이 있으신 모양 이죠? 참, 저는 히폴리테를 가기 전에 있는 세인트라는 도시까지 갑니다." 루시는 의외라는 얼굴로 말했지만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그는 다른 탁자에서 의자 를 끌고 와 우리들 틈에 끼어 앉았다. 루시는 토르 사람으로 여행차 스피린에 들렀다 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동안 자신이 했던 여행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가 워낙 재미있고, 성격도 좋은 것 같아 나는 금새 그에 대한 반감을 지워버렸다. 주민들에게 테오라신 산맥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 우리 일행은 마을을 출발했다. 한나절을 걸었는데도 아직까지는 힘든 것을 느낄 수 없었다. 중턱 아래까지 는 마을 사람들이 약초를 캐러 많이 다니기 때문에 길이 평평하게 뚫려 있었다. 그리 고 말을 헐값으로 팔아버리고 왔기 때문에 우리들의 속도가 느려져 마을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탓도 있었다. 루시는 합류한지 하루도 되지 않아 우리들과 친해졌다. 항상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여러 가지 신기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그는 금새 인 기를 얻었다. 특히 루시는 사람들이 모르는 비화를 잘 알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950년전에 있었던 성전은 사람들 말로는 과거에 존재했던 비틴스 신성 제국에서 악에 노출되어 있는 수많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라고 합니다 . 당시에는 다크 엘프와 흑마법사들이 보통 사람들과 함께 살았거든요. 하지만 비틴스 신성제국에서는 제르마님의 '악에서 그들을 구하라'라는 계시를 받고 악의 자식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죠. 이 것이 이로부터 600년후에 일어나는 '흑마법사 학살 사건'의 시 발점이 됩니다. 특히 비틴스 신성제국이 반드시 척결해야할 대상으로 지정한 것은 같 은 시대에 있었던 이트리라는 나라였습니다. 이 나라는 마신 xxx의 신전도 존재했고, 흑마법사들이 다른 곳에 비하면 월등하게 많았습니다." 루시는 950년전에 있었던 세리발 성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이 전쟁이 세 리발 성전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세리발이 바로 주신 제르마의 문양이었기 때문이다. 세리발은 두 겹으로 된 마름모의 중앙에 성화가 그려져있고, 성화의 바로 위에 제르마 를 비롯한 다섯 명의 신을 나타내기 위한 다섯 개의 성뇌가 그려져있었다. 그리고 성 화의 중앙에는 제르마의 눈이자 모든 악을 꿰뚫어본다는 진리의 눈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세리발 성전이 일어날 당시 제르마의 이름으로 이트리를 공격한 병사들의 갑옷 에는 세리발이 새겨져있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인지 그렇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 는 귀를 쫑긋 세우고 루시의 말을 들었다. 라디폰 공작 때문에 보게 된 시험을 준비하 면서 읽은 적은 있었지만 '단순히 제르마님의 계시를 받아 성전이 일어났다' 라고만 적어져 있었던 것이다. 특히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이트리라는 나라였다. 마신 xxx 님의 신전까지 있었단 말이지. 그런데로 정신이 제대로 박힌 인간들이 모여 만든 나라 인가 보군. 열심히 듣고 있는 나를 보고 루시는 한 번 웃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렇게 일어난 세르발 성전은 처음부터 비틴스 신성제국에게 우세했습니다. 악을 물 리치자는 사람들의 진심을 제르마님이 아시고 돌봐주신 것이지요. 특히 지금까지도 이 름이 전해지는 미오노 성기사의 활약은 눈이 부실 정도......마침내 비틴스 신성제국 은 모든 인류에게 해가 되고 사악함에 물들었던 이트리를 주신 제르마님의 이름으로 단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루시가 그렇게 말을 마치자 내 얼굴은 불만으로 가득찼다. 악은 반드시 정의의 이름 아래 무릎을 꿇게 되어 있다. 흔하디 흔한 말. 하지만 정말 비틴스 신성제국이 선이라 서 이긴 것일까? 이겼기에 선이 된 것이 아니고. 만약 세르발 성전에서 이트리가 이겼 다면 비틴스 신성제국이 악이 되었고 어쩌면 마신 xxx 님이 지금의 제르마처럼 추앙받 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쳇, 괜히 신경써서 들었네. 그러나 루시의 말은 여기서 끝이 난 것이 아니었다. "여기까지가 전해지는 문헌에 의한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읽은 어떤 책에서는 조 금 다른 내용이 나와있더군요. 이트리의 강대한 힘은 항상 비틴스 신성제국을 위협하 는 싹이었고, 이트리가 버티고 있어 비틴스 신성제국은 서쪽으로 진출할 수가 없었다 고 합니다. 또한 당시 비틴스 신성 제국의 내부에서는 민란이나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 났고, 외국와의 전쟁을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했다는 이유도 여 러 이유 중의 하나였지요. 그리고 상인들도 전쟁을 무기를 팔기 위해 이 전쟁을 지원 했다고 합니다. 특히 이트리라는 나라는 성전이 있기 전까지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인 적도 없었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매우 평화로운 나라였다고 합니다. 이 책에서 세르 발 성전은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더러운 '침략 전쟁'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히크리트 신관은 '침략 전쟁'이라는 말에 불같이 화를 냈다. 저 꽉 막힌 신관이 그런 이야기를 들었으니 가만히 듣고 넘겼다면 그 것이 더 이상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 말은 처음 듣는지 어느새 루시의 말을 귀기울여 듣고 있었다. 루시는 히크리트 신관이 화를 내는 건 보이지 않는지 아니면 일부러 무시하는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런 글귀도 있었습니다. 성전이라는 미명 하에 힘으로 주변 나라를 억누르고 ,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나라를 무조건 악의 나라로 밀어붙이는 것이 정의인가. 그렇 게 해서 생긴 평화가 진정한 평화인가. 그런 거짓된 평화는 불의에 항거하는 폭력보다 못하다. 참, 미오노에 대해 이런 비화도 있었습니다. 그가 이트리의 도세 장군과 결 투를 할 때,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비겁한 술수 때문이라구요.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도 세 장군의 눈에 미리 준비해간 모래를 뿌렸다는 말도 있고, 스파이를 통해 전날 밤에 차에 독을 탔다고도 하더군요." "뭐라구요! 미오노 성기사는 역사에 길이 남는 훌륭한 성기사입니다. 지금도 모든 성 기사들의 귀감이 되는 전설적인 안물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비겁한 수로 이겼다니 말이 되나요?" 히크리트 신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화산처럼 시벌겋게 달아올라 있 었다. 씩씩대는 폼이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한 대 칠 기세였다. 하여간 이래서 천사놈 들이나 신관들은 싫다니까. 자기들 생각과 조금만 틀려도 전부 이단으로, 악으로 치부 해 버리거든. 히크리트 신관의 사나운 기세에 루시는 진땀을 흘리면서 말했다. "그렇게 화내지 마십시오. 이건 제 말이 아니라 제가 읽은 책에 나온 내용입니다." "다시는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아요!"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러니 이만 화를 푸시죠." 루시는 열심히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히크리트 신관도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고 생 각했는지 화가 가라앉자 사과를 했다. 하지만 나는 곰곰히 루시가 한 말을 곱씹어 보 았다. 위장된 평화보다는 불의에 항거하는 폭력이 아름답다. 맞는 말이었다. 폭력이 나쁘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다면 세상은 언제나 그 자리에만 머물 것이다. 내가 알기로 폭력이나 유혈이 없는 변화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모든 일에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족인 내 입장에서는 이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손쉬운 방법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루시가 읽었다는 그 책은 뭐지? 마치 어둠을 옹호하는 듯한 뉘앙스가 느껴지던데. 테오라신 산맥을 오른 지 일주일정도 되자 왜 산행이 힘들다고 했는지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중턱을 넘지 않았는데도 점점 숲이 울창해지고 있었다. 더불어 산짐승 과 마물을 만나는 경우도 많아졌다. 아직까지는 일행들의 실력이 뛰어나다보니 버틸 만했지만 중턱을 넘고 정상에 가까워지면 힘든 여행이 될 것은 분명했다. 이거 괜히 산맥을 넘자고 했나? 어차피 그렇게 급한 일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하지만 후회는 아 무리 빨라도 늦는다는 말이 있다. 지금의 경우가 바로 딱 그 경우였다. 하지만 나는 가장 양호한 편이었다. 전투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기사들은 서서히 지치고 있었다. 그나마 히 크리트 신관이 신성력으로 그들의 체력을 회복시켜주고 있어서 아직까지는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여기서 놀란 것은 히크리트 신관이 보기와는 달리 뛰어난 신 관이라는 점이었다. 요즘에는 돈을 주고 신관직을 사는 인간들이 많아 고위 신관이라 고 해서 반드시 신성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히크리트 신관의 경우에는 고 위신관이 될만 한 신성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아직까지 고위 신관이라는 점이 이상할 정도였다. 거의 대신관 정도는 될 것 같았다. 그러나 히크리트 신관의 깐깐한 성격을 상기한 나는 아직까지 고위 신관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을 가진 그녀가 돈으로 신관이 되는 인간들을 곱게 볼 리 만무했다. 아마 한바탕 난리를 피웠으리라. 신관직을 파는 것으로 자기 잇속을 챙기던 다른 신관들이 그녀를 높은 직위에 올릴 리 없었다. 그렇게 되면 당장 자기들 목부터 날아갈 것이 뻔하니까. 그러나 그냥 신관으로 두기에는 너무 뛰어난 능력이라 고위 신관직에 앉혀두기만 한 것이다. 너무 깨끗한 물에는 물고기가 살 수 없다고 하 지 않는가. 주변과 맞춰가면서 살아야지 저만 잘났다고 굴면 어떻게 살겠어? 아무튼, 아니꼽긴 했지만 히크리트 신관의 능력도 제법 도움이 되었다. 오늘도 다섯 차례 전투를 치른 우리들은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야영할 준비를 했다. 산이라 해가 지면 바로 어두워지고 기온이 뚝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계곡 근처에 자 리를 잡은 우리들은 모닥불을 피우고 저녁준비에 들어갔다. 오늘 식사 당번은 나와 세 린이었다. 원래는 남자, 여자 따로 했는데 무슨 편 가르는 것도 아니고 저마다 요리 습득 속도가 달랐기 때문에 균등하게 섞었던 것이다. 잘한 사람끼리라면 상관없었지만 못한 사람끼리 식사 당번이 걸리면 그 날 하루는 매우 괴로웠다. 참고로 세린은 요리 실력이 뛰어난 축에 속했고, 나는 못하는 축에 속했다. "마리엔, 그렇게 깎다가는 나중에 남는 건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세린은 내가 감자를 깎는 모양새를 보고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아닌게 아니라 벌써 절반 이상이 껍질과 함게 사라지고 없었다. 스프를 끓이고 있는 세린을 본 나는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봐. 이번 여행에 처음으로 요리한 것 아니지? 집에서도 해봤지?" "아니. 이번이 처음인데. 왜?" 처음인데 그렇게 요리를 잘한다 말인가. 그게 사실이라면 세린은 기사보다는 요리사가 적성에 맞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만든 음식이 극악이라는 것은 아니었다. 난 단지 처음 만든 스프에 소금을 한 통 다 넣은 것밖에 하지 않았다. 양이 많으니 싱겁 지 않도록 조,금, 많이 넣은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누가 그렇게 짤 줄 알았겠어. 그 후로 간혹 그런 적이 몇 번 있었지만 말이다. "난 왜 항상 조미료 조절에 실패하는 거지? 그 것만 빼면 나도 요리 잘하는데." 내 말에 세린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걸 두고 요리를 못한다고 하는 거야. 하지만 굳이 요리를 잘해야 할 필요는 없 잖아. 대신 넌 다른 걸 잘하잖아." "뭘?" 나는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세린을 보았다. 요리도 못하고, 싸움이 나면 뒤에만 있자- 의도적이었지만-조금씩 나를 짐덩이로 생각하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번에 합류 한 루시도 싸움이 나면 대부분 나와 함께 뒤로 물러나지만 요리 솜씨가 너무 뛰어나 이제는 소중한 동료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린의 말은 내 기대를 산산히 부서놓았다 . "설거지." 내가 설거지를 잘하게 된 이유는 다른 비결이 없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마법 으로 쓱삭 해치워버리니 마치 새 것처럼 반짝일 수밖에 없었다. 이 설거지 전용 마법 은 예전에 <<생활 마법 개론>>이라는 책에서 본 마법 중에 하나였다. 저 놈도 갈수록 뻔뻔해진단 말이야. 내가 저 놈을 어떻게 해야 잘 처리했다는 말을 들을까 생각하는 와중에 갑자기 죠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큰일났습니다! 루시퍼씨가 없어졌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루시가 없어져? 음식을 만들고 있던 나와 세린은 물론 다른 일 을 하던 사람들도 손을 멈추고 죠안을 쳐다보았다. 죠안과 루시가 함께 땔감을 주워오 겠다고 숲속으로 들어간 것이 바로 20분 전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죠안, 우선 진정하고 차근차근 말해봐요." 내 말에 죠안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더니 상세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땔감을 줍다가 어느 정도 모인 것 같아 돌아오려고 보니 옆에 있던 루시퍼씨의 모습 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 주변에 있나 돌아다녀봤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 다. 이 일을 어떻게 하지요?" 죠안의 말을 들은 우리들은 안색을 굳혔다. 밤에 산 중에서 길을 잃어버린다면 운이 좋아서 산짐승에게는 걸리지 않는다 해도 추위는 피할 수 없었다. 특히 새벽녘에는 옷 을 잔뜩 껴입고 모포를 덮어써야 할 정도로 쌀랑했다. 우리 일행은 2인 1조가 되어 루 시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혼자씩 찾아다녔다가 루시를 찾기는커녕 자신도 길을 잃어 버리면 조난자만 늘어나는 꼴이 되었다. "머리 조심해." 세린이 길을 가로막는 나뭇가지를 치우고, 그 옆에서 내가 횟불을 들고 따라갔다. 우 리들이 돌아다니고 있는 곳은 죠안과 루시가 땔감을 주우러 갔던 곳과 정반대 방향이 었다. 이런 곳에 있을 리 없지만 혹시나해서 이 쪽도 찾아보고 있었다. 그러나 한참동 안 찾아보았지만 루시는커녕 그의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마리엔, 뭐가 보여?" "아니. 세린은 뭔가 찾았어?" "전혀." 하긴 정반대 방향에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길치라 해도 말이다. 지금쯤이면 다른 사람들이 그를 발견해서 야영지로 돌아왔을 지도 몰랐다. 5분 정도를 더 찾아보던 나 는 세린에게 이만 돌아가자고 할 참이었다. 어차피 있지도 않을 곳을 돌아 다니는 것 은 시간 낭비였다. 그런데 바로 옆에 있던 덤불이 갑자기 부스럭거리기 시작했다. 그 리고 무슨 대처를 하기도 전에 덤불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확 튀어나왔다. 세린이 재 빨리 검을 빼들며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 검은 그림자는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왔다. "와아! 드디어 찾으러 와주셨군요!!" 이 목소리는......나는 재빨리 횃불을 비춰보았다. 검은 그림자는 어둠에 익숙해져 있 다가 갑자기 빛이 비춰서 그런지 눈을 가늘게 떴다. 검은 그림자는 다음아닌 루시였다 . 루시는 숲을 한참동안 헤맸는지 옷이나 머리에 나뭇잎들이 붙어 있었다. 절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곳에서 그를 보자 찾았다는 기쁨보다는 황당함이 먼저 들었다. "루시퍼씨, 여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세린의 목소리에도 황당함이 묻어있었다. 그러자 루시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죠안씨가 보이지 않는 것 있죠. 한참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기에 먼저 돌아간 것이 아닌가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야영장으로 돌아가려고 했는 데 그만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헤매고 있는데 마침 빛이 보여 이쪽으 로 와봤더니 세린과 마리엔이 있더군요." "하지만 여기는 땔감을 주우러 갔던 곳과 정반대잖아요?" "제가 좀 길치라서 말입니다. 하하하." 그건 좀이 아닌 것 같은데. 그정도면 심한 길치 아닌가? 연신 싱긋거리고 있는 루시의 얼굴에서는 길을 잃어 긴장했다는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항상 여유가 철철 넘치는 건지,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는지, 아니면 얼빵한 건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무사히 루시를 찾은 우리는 그를 데리고 야영장으로 돌아갔다. 다른 사람들도 정반대 방향에서 루시를 찾았다는 말에 어이가 없는 얼굴이었다. 그런 방향감각으로 그동안 어떻게 여행을 다녔는지 궁금했다. 테오라신 산맥의 정상에 가까스로 도착한 우리 일행은 완전히 지쳐있었다. 중턱을 넘어서면서부터 그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길이 험해졌고, 산짐승들의 공격 도 많아졌던 것이다. 다행히 마물들은 별로 없었지만 늑대나 들개 같이 무리로 돌아다 니는 동물을 만나게 되면 여간 골치 아픈 것이 아니었다. 한눈을 팔면 이것들의 놀라 운 협공에 당하기 십상이었다. 히크리트 신관의 신성력도 무한정있는 것이 아니라 신 성력에 의한 체력 회복에도 한계가 있었다. 루시나 로즈의 경우도 잦은 전투로 마력이 딸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나는 전투가 벌어지면 뒤에서 구경만 했기 때문에 이들보다 는 훨씬 나았다. 그러나 빌어먹을 몸은 전투도 하지 않았건만 산맥을 오르는 것만으로 도 힘들어했다. 때문에 정상에 도착했을 때, 우리 일행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그래서 그런지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정말 멋있었다. 끝없이 이어진 테오라신 산맥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고, 예전에 들렸던 마을의 모습도 아스라이 보였다. 우 리들의 발 아래로는 뭉게구름이 떠다녔고, 그 자리에 점프를 하면 그대로 하늘에 닿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보고 있는 사람의 마음까지 탁 트이게 해주는 광경이었다. 정상에서 하루 머문 우리들은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산을 올라올 때보다는 비교적 덜 힘이 들었지만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워낙 험한 산이라 내려갈 때 넘어지기라도 하면 산밑까지 굴러 내려올 것 같았다. 확실히 이 방법이 시간도 단축하고 노력도 덜 들겠지만 밑에 도착할 때까지 살아있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따라왔다. 미끄러지지 않 도록 조심해서 내려오다 보니 그만큼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테오라신 산맥을 완전히 넘었을 때, 우리들의 몰골은 거의 거지에 가까웠다. 먼지를 뒤집어쓴 옷은 본래의 색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고, 오랫동안 씻지 못한 탓에 얼굴도 꼬질꼬질했다. 이 것이 여간 찝찝한 게 아니었다. 우리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 람이 가까이 와서 맡아본다면 냄새가 날지도 몰랐다. 내가 이렇게 망가질 줄 누가 알 았겠는가. 그나마 나만 이런 행색이 아니라 조금의 위안이 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 나 이렇게 망가진 보람이 있었는지 우리들은 예상보다 빨리 테오라신 산맥을 넘을 수 있었다. 테오라신 산맥을 넘으려면 보통은 두 달에서 세 달이 걸리는 반면에 우리들은 43일만에 넘어온 것이다. "이 근처에 마을이나 도시는 없어요?" 나는 산을 내려오자마자 엔젤에게 물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잠을 편안 히 잘 수 있는 침대와 지친 몸을 푹 담글 수 있는 따뜻한 물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 른 사람들도 궁금했던 점인지 모두의 시선이 엔젤에게 쏠렸다. "여기서 한나절을 꼬박 가면 델피르라는 도시가 나올 겁니다." 뭐시라! 한나절! 한나절이나 더 가야 한단 말이야? 당장 침대에 몸을 날리고 싶은 나 에게 한나절이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였다. 차라리 이 곳에서 하루 쉬고 갈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도시가 나올 때까지 갈 것인가? 고민했지만 결국 바로 도시로 향했다. 어차피 쉴 것이라면 조금 더 고생하고 마음 편하게 쉬는 편이 나았다. 얼마 동안 터덜터덜 걷던 나는 그제야 델피르라는 도시 이름이 예전에 우리가 들렸던 도시의 이름과 같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한나절은 가야 한다는 말에 실망해서 도시 이 름에는 신경쓰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옆에서 헝클어진 머리를 다듬고 있는 로즈에게 물었다. "로즈 언니, 지금 가고 있는 도시 이름이 예전에 들렀던 델피르와 같은데? 내가 잘못 들었나?" 내 질문에 도시에 간다고 단장을 하고 있던-그래봐야 그게 그거였지만-로즈는 손을 멈 추고 말했다. "아니, 제대로 들었어. 두 도시의 이름은 모두 델피르가 맞아. 같은 이름을 가진 이유 는 두 도시가 서로 쌍둥이 도시기 때문이야. 동부와 서부의 화합을 위해서 80년 전에 두 지역에 각각 1개씩 만들어졌거든. 과거에는 동부와 서부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 거든.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모습이 달라지고는 있지만 전체적인 구조는 아직도 똑 같아." "그럼 부를 때 헷갈리지는 않아요? 둘 다 델피르라고 부르면 혼동하기 쉬울 것 같은데 요." 만약 3월 3일 델피르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면 한 사람은 동부에 있는 델피르로, 다른 한 사람은 서부에 있는 델피르로 착각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로즈는 집게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면서 말했다. "아, 그 점이라면 문제없어. 우리들은 동부에 있는 델피르를 동델피르, 서부에 있는 델피르를 서델피르라고 부르고 있거든." 그리고 로즈는 화합을 위해 세워진 뜻깊은 도시인만큼 스피린인들은 이 쌍둥이 도시를 매우 자랑스러워한다고 덧붙였다. 우리가 스피린인들이 자랑해 마지않는다는 쌍둥이 도시 중 하나인 서델피르에 도착한 것은 저녁이 되어서였다. 과연 서델피르는 동델피르와 분위기만 약간 다를 뿐 거의 똑 같은 모습이었다. 산맥을 잘못 넘어와 다시 동델피로 돌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가게의 갑판 이름이 예전에 기억하던 것과는 다른 점으로 보아 서델피르가 맞는 모양이었다. 만약 동델피르였다면 그처럼 불행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고생고생해서 간신히 테오라신 산맥을 넘었는데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면 말이다. 똑같이 생긴 도시가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지만 제대로 둘러보지도 않고 눈에 띄는 여관 중 한 곳으로 들어가 버렸다. 서델피르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도 좋지만 이 는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이었다. 지금은 호기심이라는 조금 더 고차원적인 욕구보다는 쉬고 싶다는 기본적인 욕구가 절실한 때였다. 여관주인은 우리 일행의 행색을 보고 돈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매우 퉁명스럽게 굴었다 . 그러나 금화 한 개를 꺼내서 보여주자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아이구, 어서 오십시오. 미처 귀한 손님들을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방은 3개가 필요 하시다구요? 마침 저희 여관에서 가장 좋은 방들이 비었습니다. 그 곳으로 드시죠. 이 봐! 어서 손님들을 모시지 않고 뭐해?!" 돈의 위력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여관 주인은 좋은 말로 하면 뛰어난 상인 정신을 지닌 프로였고, 나쁜 말로 하면 돈을 보고 사람에 대한 대우가 바뀌는 사람이었다. 주 인의 고함에 종업원 중 한 명이 냉큼 달려왔다. 주인은 우리들이 방으로 올라가기 전 에 다시 한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참, 뭐 또 필요한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목욕 준비를 좀 해주시겠어요? 되도록 빨리요." "물론이죠. 5분 안에 모든 준비를 마쳐놓겠습니다." 종업원을 따라 올라간 방은 보통 여행자들이 머무는 여관에 있는 것치고는 널찍하고 깨끗한 방이었다. 그러나 방이 좋으면 어떻고 나쁘면 어떠리. 중요한 것은 침대에서 잘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방을 대충 한번 훑어보고는 메고있던 짐을 한 구석에 던져 버렸다. 어찌나 먼지가 쌓였던지 짐을 던지자 먼지가 풀풀 일었다. 아마 내가 입고 있 는 옷도 탈탈 털면 저 정도의 먼지가 일 것이다. 완전 먼지 인간일세. 창문을 열고 먼지를 밖으로 내보낸 다음 오랜만에 욕조에 몸을 담갔다. 과연 주인의 호언장담대로 금새 목욕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았다. 계속 이러 고 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밖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사라 때문에 계속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먼저 목욕하라고 양보한 정성이 갸륵해서라도 이만 비켜줘야 지 않겠는가. 욕실에서 나온 나는 사라가 욕실로 들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바로 침대로 직행했다. 이 놈의 몸은 너무 빨리 지친다니까. 예전 같았으면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는데. 훈련을 하던지 해야지...... 나는 침대에 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내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방안을 환하게 밝히고 있을 때였 다. 창 밖을 보니 벌써 오후가 다 지나가고 있었다. 거의 하루 종일 잔 격이 되었다. 그러나 죽은 듯이 잔 덕분에 몸은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사라는 벌써 일어나서 나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대충 세수를 하고 1층으로 내려가 보니 동료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와 로즈, 히크리트 신관을 제외한 사람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그러나 지금에서야 식사를 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도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 었다. 어제 막 여관에 도착한 모습과 비교를 해보면 가히 변신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깔끔해졌군. 하긴 나도 마찬가지겠지만 말이다. 세린이 가장 나를 먼저 발견하고 아 는 체 하자 다른 사람들도 인사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마리엔, 일어났어?" "아, 일어났구나. 깨울까 했는데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그냥 내려왔어." "배고프지 않아? 이리 와서 뭐라도 먹지 그래?" 나는 엔젤의 옆자리에 앉아서 간단한 음식을 주문했다. 식사를 하고 있자니 히크리트 신관이 내려왔지만 로즈는 내려오지 않았다. 히크리트 신관의 말로는 깨웠지만 이런 말을 하고 다시 잠들었다고 한다. '미인은 잠꾸러기야' 라고. 대강 스프와 빵으로 식 사를 때운 나는 그제서야 식당에 유난히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지금 생각 해보니 처음 서델피르에 도착했을 때도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았다.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이틀 후에 있을 포우먼 축제 때문일 걸. 일주일동안 축제가 계속 열리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거든." 오옷! 축제! 엔젤의 말에 나는 흥분했다. 나라마다 풍습이 다르니 스피린의 축제는 페 드인 왕국의 축제와는 무언가 다를 것이다. 이름부터가 뭔가 다르지 않은가! 포우먼(F or Women)이라니! 여자들을 위한 축제라는 말이 아닌가! 역시 스피린다운 이름이지 않 은가! 한참 좋아하던 나는 축제의 이름과 관련해서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여자들을 위한 축제라면 여자들만 참여하는 건가? 그런 내 의문이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이번에 는 루시가 포우먼 축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포우먼 축제는 처음에는 여자만을 위한 축제였습니다. 그래서 활쏘기 대회라던가 팔 씨름 대회, 단검 던지기 대회 같은 것이 주를 이루었죠. 하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남자 들도 참여가 가능해졌답니다. 때문에 새로운 행사도 많이 생겼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포우먼 축제에는 다른 축제와는 달리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음, 이 건 잘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루시의 말 중 특이한 점이라는 말에 엔젤과 히크리트 신관의 표정이 묘해졌지만 기대 감으로 부푼 나는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축제라. 축제가 열린단 말이지. 가고 싶다. 가고 싶어. 나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엔젤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내 뜨거운 시선에 고 개를 돌렸다가 움찔해서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건 아 니었다. 나는 축제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시선에 가득 담아 엔젤에게 쏘아보냈다. 다 른 사람들도 스피린의 축제가 궁금한지 나를 말리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우리 축제 구경하고 가요. 당장 급한 일도 아니라면 서요. 들어줄 거죠? 그렇죠?" "산맥을 넘어오느라 힘들었으니까 이 기회에 푹 쉬고 재충전을 하는 게 어때요? 좋죠? " "에~엔제~엘, 어쩜 이름도 이렇게 멋있을까! 게다가......" "됐어! 이제 그만해! 같은 여자끼리 징그럽게 뭐 하는 거야? 어차피 조금 머물고 가려 고 했어!" 결국 엔젤은 질렸다는 얼굴로 외쳤다.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아있었는데. 어쨌든 축제 다! 축제! 나는 승리의 브이자를 해보였고, 다른 사람들도 기쁜 표정을 지었다. 로즈가 나와 사라가 묵고 있는 방으로 찾아온 것은 우리가 막 축제 구경을 나가려 고 했을 때였다. 그녀는 나와 사라의 옷차림새를 보고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때맞춰왔네. 셋이 같이 축제 구경하러 가자." "다른 사람들은요?" 내 질문에 로즈는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엔젤은 축제 구경에 관심이 없다고 했고, 히크리트 신관님은 델피르에 있는 세리자드 님의 신전에 갔어. 그리고 가끔은 여자들끼리 노는 것도 좋잖아.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놀라고 하고 우리끼리 놀러가자." 그 때 나는 로즈의 사악한 미소의 진의를 눈치챘어야 했다. '엔젤이 왜 축제 구경이 싫다고 했겠는가, 히크리트 신관이 느닷없이 왜 신전을 갔겠는가, 로즈가 왜 여자끼리 가자고 했겠는가.' 에 대한 생각을 해봤어야 했다. 모든 일에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무 것도 몰랐던 나와 사라는 별 저항없이 로즈와 함께 여관을 나섰다. 축제의 거리는 흥겨웠다. 비록 페드인 왕국의 건축 기념 축제만큼 규모가 큰 것은 아 니었지만 색다른 볼거리들이 많았다. 거리에는 온갖 물건을 파는 노점상으로 넘쳐났고 , 활쏘기에 능한 스피린이어서 그런지 유난히 활쏘기 대회 같은 것들이 많았다. 악세 사리 가게에서 기웃거리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남자들이고, 활쏘기 대회의 참가자의 대 부분이 여자였다. 뭐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것보다는 이렇게 조금씩 다른 것이 좋겠지 . 그래야 재미있잖아. 포우먼 축제는 외국까지 알려진 축제는 아니었기 때문에 축제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은 대부분 스피린 사람들이었다. 류인처럼 생김새가 다른 것은 아니었지만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스피린 사람들이 색다른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넘어간다고 쳐도 이상한 점은 하나 더 있었다. "아이, 자기야. 나 저거 가지고 싶어." "그래? 좋아. 내가 널 위해서 이런 것 하나 못 사주겠어?" "자기, 과녁의 중앙을 맞춰야 돼!" "아니야! 우리 그녀가 이길 꺼야!" 이 것들이 지금 뭐하자는 수작이야? 이리로 고개를 돌려도, 저리로 고개를 돌려도 보 이는 것은 연인들로 추정되는 남녀뿐이었다. 물론 좋아하는 사람끼리 축제 구경을 오 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은 아니다. 서로 좋아하게 되면 한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다 는 말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거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 다면 이건 뭔가 이상했다. 연인들의 타입도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 보는 이로 하여금 느끼함으로 몸둘 바를 모르게 하는 사람들에서부터 아직은 어색한 듯 약간 떨어져서 머뭇거리는 사람들까지 다양했다. "이야~좋을 때지. 그렇지 않아?" 왠지 신이 난 듯한 로즈의 질문에 나와 사라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글쎄요." "완전히 연인들의 축제인 것 같네요." "호호호!!! 모든 걸 이 언니에게 맡겨. 귀여운 남자들을 구해줄 테니까. 어서 따라와! " 이 때 눈치채고 냉큼 여관으로 갔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순진하게도 로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그녀를 따라갔다. 로즈는 가장 사건 사고가 많은 곳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시장이라며 우리를 끌고 시장으로 갔다. 그리고 시장 안 에 있는 많은 찻집 중에서 가장 비싸 보이는 찻집을 골라 자리를 잡았다. 이 가게는 상당히 고풍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가게로, 가게 밖에서도 차를 마실 수 있도록 바깥에 차양이 쳐져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앉은 자리도 바깥에 있는 자리 중에 하나였다. 안에 자리가 텅텅 비었는데도 굳이 바깥 자리를 택한 로즈의 심중을 알 수 없었다. 아 니, 찻집에 온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리가 오랫동안 돌아다녀 지쳐서 잠깐 쉬 려고 왔다면 모르겠다. 우리가 여관에서 나온 지 아직 2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 고 차를 마시고 싶어서 왔느냐. 천만의 말씀이었다. 로즈는 비싼 차를 시켜놓고도 차 는 마시지 않고 시장만 살펴보고 있었다. "로즈씨, 차는 마시지 않나요?" 사라의 질문에 로즈는 집게 손가락을 흔들면서 말했다. "후후후, 이건 과시용이에요. 이렇게 비싼 차를 시켜 마실 정도의 사람이라면 제법 능 력이 있는 사람이란 뜻이죠. 그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호감을 가지게 된답니 다." "누가 호감을 가지는 데요?" 그러나 로즈는 기묘한 웃음만 짓고 다시 시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까부터 이상한 소 리만 하고 있었다. 축제를 구경하러 왔으면 축제를 구경해야지 왜 이런 곳에 죽치고 있는 거야! 불만스러운 얼굴로 차를 홀짝이던 나는 갑자기 로즈가 박수를 치는 바람에 사래에 걸릴 뻔했다. 이 여자가 아까부터 왜 저래! 로즈에게 한마디하려던 나는 앞쪽 길거리에서 뭔가 소란 스러운 소리가 들리자 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로즈는 그 모습을 보고 박수를 친 모 양이었다. 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광경은 보고 나서 박수를 칠만한 모습이 아니었다. 시장 한복판에서 한 인상하는 여자가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남자의 앞을 가로막은 채 건들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연한 금발 머리를 허리 너머까지 기르고 있었고, 금색의 긴 속눈썹 아래에는 푸른 눈동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얼굴선도 가늘고 몸매도 호리호리한 것이 완전히 여자였다. 가슴만 있었다면 말이다. "이봐, 나와 함께 축제 구경을 하는 것이 어때?" "시, 싫어요. 비켜주세요." 남자는 겁에 질린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비켜줄 거였으면 애초부터 건들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가 거절하자 여자는 인상을 일그러뜨리면서 말했다. "이봐! 그렇게 싫은 얼굴을 할 필요는 없잖아. 이게 얼굴 좀 예쁘게 생겨서 좋게 대해 주니까 사람 열 받게 하네!" 흔한 광경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바뀌어 있긴 했지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장 면이었다.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를 가나 똑같다더니 정말이네. 하긴 세린에게 찝쩍거 리는 것들도 있었으니까. 여자가 윽박지르자 금발의 남자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 굴로 움츠러들었다. 멀리서 보면 윽박지르고 있는 것이 남자고 움츠러드는 것이 여자 로 착각할 것이다. 이야기의 전개상 이쯤에서 "멈춰라!" 하고 소리치면서 나타나는 정 의의 용사가 있을 법도 한데 말이야. "멈춰라! 싫다는 사람에게 너무하는 것 아닌가!" 말이 끝나기가 무서웠다. 이미 누군가 나설 것이라 예상했던 나는 크게 놀라지는 않았 다. 그러나 그 누군가가 로즈였다는 사실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수를 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정의의 용사 흉내야?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우리들이 있는 곳으로 쏠 렸다. 그러나 로즈는 그런 시선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야기의 전개상 정의의 용사 가 나타나는 것처럼 이대로 '죄송합니다. 그럼 저는 사라지겠습니다' 라고 사라지는 건달 역시 없었다. "넌 또 뭐야! 비실비실 하게 생겨 가지고 좋게 말할 때 꺼져!" "훗, 비실비실이라니! 진정한 미(美)가 뭔지를 모르는군. 무식한 네 놈과는 상관하고 싶지 않으니 아름다운 분은 그만 놔두고 좋게 사라져라!" 로즈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남자들은 로즈에 게 선망의 눈초리를 보냈다. 여유로워 보이는 로즈의 모습에 더욱 화가 치민 여건달이 씩씩대며 우리가 앉아있는 곳으로 다가오려 할 때였다. 로즈는 간단한 주문을 외우더 니 파이어볼을 만들어냈다. "그만 사라지지 그래? 그렇지 않으면 이걸 맞고 사라지겠어?" 로즈가 마법을 사용하자 여기저기에서 감탄사들이 터져 나왔다. 마법사는 어디를 가나 흔한 존재가 아니었다. 마법의 위력을 잘 아는지 건달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그리고 로즈가 손을 움직여 불덩이를 움직이자 이를 갈면서 사람들 틈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건달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시장에 있던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박수를 치면서 로즈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로즈는 사람들의 환호에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금발의 남자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아...예. 괜찮아요." 남자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거의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수줍어하는 남자 에게 로즈는 방긋 웃어주면서 말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요. 놀라셨을 텐데 차라도 한잔하시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 어떨까요? 이왕이면 포우먼 축제 구경을 같이 하고 싶은데 설마 저같은 미인의 제안을 거절할 생각은 없으시겠죠?" "네... 조, 좋아요!" 으윽, 도저히 더 이상 못 보겠어. 느끼해! 로즈가 저 금발의 남자를 꼬시는 것이야 그 렇다 쳐도 마치 여자처럼 얼굴을 붉히고 있는 남자의 모습은 정말 참기 힘들었다. 로 즈가 조금 전의 여자처럼 덩치가 있었다면 그나마 어울렸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로즈 는 자신의 외모에 자신감이 넘쳐나는 여자였고, 이는 아주 근거없는 자신감은 아니었 다. 물론 자신감 과잉이긴 하지만 아무튼 꽤나 귀여운 여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로즈가 가슴이 없는 것만 빼면 여자라고 해도 상관이 없을 정도의 남자와 나란히 있으 니 여자끼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라도 같은 생각인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로즈 와 금발의 남자를 쳐다보는 표정이 과히 좋지 않았다. 그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테인즈라고 소개했다. 로즈는 그에게 우리도 소개시켜주었는 데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려고 나와 사라는 안간힘을 썼다. 그나마 표정 연기에 능숙 한 나는 괜찮았지만 사라는 힘겨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테인즈는 모든 관심 을 로즈에게 쏟고 있어 이런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다. 로즈의 수다에도 질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는 것을 보니 완전히 반한 모양이었다. 나는 어이없음과 당혹감, 놀라움의 여러 감정이 복합된 심정으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우 연히 나와 눈이 마주친 로즈는 테인즈가 보지 않는 틈을 타서 한쪽 눈을 찡긋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계획적이었어! 사건 사고가 많이 나는 곳이 시장이라 는 말이 이런 뜻이었단 말이야?! 그 말은 곤경에 처한 남자를 꼬시기 더없이 좋은 장 소라는 말이었다. 찻집에서 안에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 자리를 잡은 것도 그런 소란이 일어나는 것을 재빨리 알기 위해서였다. 처음에 테인즈가 곤란에 처한 모습을 보고 박수를 쳤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이 얼마나 치밀한 계획인가. 찻집에서 대화를 나누던 우리는 한참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축제를 구경하는 동 안 로즈의 옆에는 테인즈가 방글거리며 서있었고, 나와 사라는 되도록 두 사람에게서 떨어져서 가려고 했다. 테인즈가 둘이 있고 싶다고 눈치를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오 히려 나와 사라에게도 호감을 가지고 자꾸 말을 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우리가 꺼려졌 다. 테인즈가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생각해 보라. 아무리 여자 같다고는 하지만 남자 가 '아이, 몰라요.' 라고 생긋 웃으며 말했다고 생각해보란 말이다. 아무리 머리로는 문화의 차이이며 스피린에서는 이 것이 지극히 정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가슴으 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와 사라는 되도록 로즈와 테인즈에게 신경쓰지 않 도록 주변에 있는 것들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이렇게만 끝이 났다면 나는 그냥 로즈의 놀라운 남자 꼬시기 실력만 기억하고 넘어갔 을 것이다. 그러나 왜 엔젤과 히크리트 신관이 축제를 구경하러 오지 않았는지 곧 드 러나고야 말았다. 나는 거리에 있는 무기점에서 단검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페 드인 왕국의 건국 기념 축제에서 눈독들였던 단검은 현재 에릭이 자알 보관하고 있었 다. 여러 가지 무기가 있었지만 다른 무기는 괜히 짐만 되고 사용할 기회도 없었다. 반면에 단검은 품에 지니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할 수 있었다. 사라도 기사인 지라 옆에서 무기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로즈와 테인즈는 큰 관심은 없어 보였 지만 심심풀이로 무기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한참동안 단검을 살펴보던 나는 무언가가 등을 살짝 치는 것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 다. 그 곳에는 15살 정도로 되어 보이는 갈색 머리의 소년이 서있었다. 긴 갈색 머리 를 목 뒤에서 한번 묶은 소년은 굉장히 귀여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왜 그러니?" 뭐라도 팔려는 것으로 생각한 나는 최대한 친절하게 말했다. 아마 이 소년은 생전 처 음으로 장사를 해보는 것일 것이고, 많은 사람 중에서 가장 착해보이는(?) 나에게 물 건을 팔려고 온 것일 것이다. 그러나 창피해서 나를 불러놓고도 말을 못하고 있는 것 이리라. 어차피 돈은 부족하지 않으니 아주 비싼 물건이 아니라면 사 줄 생각이었다. 한참동안 소년이 망설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아직 어 린 나이에 상처를 줄 수 없지.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기특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미소를 지으면서 기다려주자 소년은 용기를 얻었는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러 나 그 소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저...같이 축제 구경하실래요?" 나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멍하니 소년을 쳐다보았다. 지금 재가 뭐라고 했지? 같이 축 제 구경하자고? 그걸 왜 나랑 하는데? 재네 부모님은 어디 가고? 내가 도대체 소년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몰라 가만히 있자 로즈가 재빨리 나를 한쪽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나는 로즈가 해준 말에 경악했다. --------------------- 포우먼 축제. 서델피르에서 봄날 열리는 축제로, 처음에는 여자들만이 참여가 가능 했지만 근래에는 남자들도 참여가 가능해졌다. 이런 변화로 인해 축제가 일어나는 거 리에는 연인들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게 되었다. 화창한 봄날 연인끼리 나와서 축제 를 구경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게다가 스피린은 겨울철에는 혹독한 추위가 계속되기 때문에 연인끼리 밖으로 놀러 나오는 일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날이 풀리 자 그동안 같이 외출하지 못했던 한을 풀기라도 하려는 듯 거리는 연인들로 넘쳐났다. 당사자들이 좋다니 다른 사람들이 간섭할 일은 아니었지만 그 모습을 보는 짝없는 사 람들이 느끼는 부러움과 질투, 한탄은 대단했다. 그렇다 보니 즐거워야할 축제가 전혀 즐겁지 않게 되었고, 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괜히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많아졌 다. 이런 일로 축제가 본래의 취지와는 많이 달라지자 서델피르의 시장은 참으로 획기적인 방안을 내놓게 되었다. 그 내용은 바로 포우먼 축제기간 중에는 마음에 드는 이성에 게 자유롭게 말을 거는 것이 허용된다는 것이었다. 이 날만은 이성에게 말을 거는 것 이 절대 창피한 일이 아니며-설령 퇴짜를 당했다 하더라도-, 오히려 말을 걸지 못하는 것이 창피한 일이 되었다. 위와 같은 로즈의 설명에 나는 유달리 남녀가 같이 다니는 모습이 눈에 띄었던 것이 이해가 갔다. 아마 루시가 말한 특이한 점이 바로 이 점이 었으리라. 하지만 여기까지였다면 약간 놀랍긴 하지만 경악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경악한 이유는 상대가 '같이 축제 구경을 하지 않으시겠어요?'라고 물은 후에 보 여야 하는 반응 때문이었다. 남자의 경우는 그 여자가 마음에 들면 승낙하면 되고, 마 음에 들지 않으면 거절하면 됐다. 그런데 왜 여자는 남자의 청을 거절할 수 없는 거야 ! 왜! 왜! 왜! 여자는 미리 선약이 돼있거나 아무 특별한 경우가 아닌 다음에는 반,드 ,시 남자의 청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유라는 것은 우습게도 마음이 여린 남자들에게 상처를 줘서는 안 된다는 취지에서란다. 그 말은 내가 그 소년과 함께 축제를 구경해 야한다는 말이 되었다. 이건 남녀차별이다. 차라리 축제 이름을 포맨(For Man)으로 바 꿔라! "그럼 내가 그 애랑 같이 축제 구경을 해야 한단 말예요?!" 기가 막혀서 외쳤지만 웬수같은 로즈는 느긋하게 대답했다. "아마 그럴걸. 저 쪽에게 먼저 자신의 말을 취소하지 않는 한은 말이지." "그게 말이 돼요?! 로즈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죠?!" 이제야 엔젤과 히크리트 신관이 축제에 나오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거절할 수 없다면 애초부터 그런 제의를 받지 않도록 피하는 것이 제일이었다. 이 여자들아! 미 리 알고 있었으면 귀뜸을 해줬어야 할 것 아냐! 그랬으면 누구를 데려왔거나 뭔가 조 치를 취했을 것이다. 자신들만 쏙 빠진 두 여인네들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을 때, 로즈 는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아까 그 소년 정말 귀엽던데. 역시 마리엔이야. 내가 구해주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 구해주긴 뭘 구해줘? 나는 로즈를 확 째려보았다. 남자들이 있으면 다른 남자들이 접 근하지 않을까봐 일부러 여자끼리 나오자고 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우리와 함 께 있으면-나와 사라는 모두 평균 이상의 외모였다-뭇남성들의 접근이 많을 것이라는 사실도 미리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에릭이나 세린에게 친하게 굴 때부터 로 즈가 남자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남자를 꼬시는 데 유리하다고 해도 설마 우리를 이런 식으로 이용해먹을 줄은 몰랐단 말이다 ! 솔직히 로즈의 말대로 그 애가 귀엽다는 것은 인정한다. 외모만 보면 내가 이렇게 질 색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오는 남자 안 막고 가는 남자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자는 신 조를 가진 만큼-이용해먹을 인간은 많을수록 좋다-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할 상황이었 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여자처럼 구는 남자를 달고 다니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게다가 아직 나이도 어려서 그런지 드레스만 입혀놓으면 귀여운 소녀로 보일 아이였다. 그리고 나보다 나이도 적은 남자애를 데리고 뭘 하겠냐 고! 나는 볼이 퉁퉁 부어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나이를 봐요! 나보다 어리잖아요! 키도 나보다 더 작고." "어리다니? 뭐가? 그 정도면 좋은 나이지. 그리고 그러는 마리엔도 17살이잖아. 나이 차이도 별로 나는 것 같지도 않구만.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래? 키도 남자들은 나중에 쑥쑥 크니까 상관없잖아." "그,그치만......" "설마 거절할 생각은 아니겠지? 여자가 남자의 청을 거절하면 절대로 안된다는게 이 축제의 불문율이야! 그리고 그 아이가 얼마나 가슴을 졸이면서 말했겠어. 그 아이의 여린 마음에 상처를 줄 생각은 아니겠지? 그렇지, 마리엔? 마리엔은 얼굴이 예쁘니까 마음도 고울 꺼야. 암, 그럼 나는 그렇게 믿어." 이 세상 어디에도 얼굴이 예쁘다고 성격이 좋으라는 법은 없었다. 주변을 살펴보라. 마녀라고 불리는 여자 중에서 못생긴 여자 봤는가? 다 한 미모 하는 여자들뿐이다. 오 히려 예쁜 것들이 더 하는 경우가 많았다. 뭐 나는 예외지만 말이다. 비록 가끔 약간 의 신경질을 부릴 때도 있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성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내 생각을 알았다면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자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질 것이 분명했 지만 그들로서는 알 방법이 없었다. 아무튼, 내가 그 소년의 청을 거절할 수는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내가 거절할 수 없 다면 남은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그 소년이 먼저 자신의 제안을 취소하게 만드는 것. 로즈에 대한 응징은 다음으로 미루고 당장은 급한 불부터 꺼야했다. 나는 로즈를 다 시 한번 흘겨봐 주고 그 소년에게 걸어갔다. 최대한 싸가지없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 다. 내가 자기 앞에 서자 갈색머리의 소년이 내 눈치를 슬슬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랑 축제 구경을 하고 싶다고?" "네." 고개를 푹 숙이는 폼이 자기도 쑥스럽긴 한 모양이다. 악감정은 없지만 그래도 적응이 안되는 걸 어쩌겠니. 그냥 포기해라. 나는 팔짱을 끼고 소년의 위아래를 훑어보면서 짤막하게 말했다. "난 좋아하는 남자가 따로 있는데. 그래도 상관없어?" 보통 이 정도면 자기가 알아서 물러난다. 더군다나 상대가 고압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더더욱이나 그렇다. 이렇게 귀여운 소년에게 상처를 줘야 한다는 게 안타까웠지만 현 실이 그러한 것을 어쩌겠는가. 나중에 더 크고 남자다워지면 페드인 왕국으로 찾아오 렴. 그 때는 기꺼이 거둬주마. 그러나 울먹이며 사라질 것이고 예상했던 소년은 쭈뼛 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 그런 건 상관없어. 축제에서 같이 다니는 사람들 중 90%는 진짜 연인이 아니거 든. 대부분 축제기간동안 즐겁게 지내다가 헤어지지. 그러니까 또래의 친구가 생겼다 고 생각하고 같이 다니는 게 어때?" 어느새 다가온 로즈가 눈을 빛내며 끼어 들었다. 이 여자가 옆에서 도와주지는 못할망 정 초를 치고 있었다. 같은 남자라 그 아이의 심정을 알겠는지 테인즈도 나에게 제안 을 받아들이라는 간청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가 먼저 청한 경우는 드물 었는지 어느새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할지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 다. 이대로는 물러날 수 없어. "그래? 그럼 그 점은 그렇다 쳐도 난 별로 성격이 좋은 편이 되지 못하거든. 같이 다 니려면 네가 좀 그렇지 않겠어?" 사람을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쳐다보면서 내가 생각해도 정말 재수없는 말투로 말했다. 평소 관리해오던 아름답고 착한 이미지와는-여행하면서 조금씩 흔들리고 있지만-거리 가 멀었지만 연기하는데 힘들지는 않았다. 계약시나 기타의 경우로 인간을 만나게 되 었을 때 위압감을 주기 위해 거울을 보면서 여러번 연습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나는 절대 원래 본성이 그렇다는 주위의 말도 안되는 모략과 시가에 굴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짜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말 싸가지없고 오만한 여자로 보였을 것이다. 어라, 그러고 보니 이건 예전 마리엔의 이미지잖아. 그러나 이런 내 모습에도 갈색 머리의 소년은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자기가 나쁘다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은 정말로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들었어요." "맞아! 누가 그런 소리를 했어?! 감히...누구야? 내가 당장에 요절을 내버릴 거야!" 내가 일부러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라도 화가 나서 소리쳤다. 그런 자가 있 긴 있었지만 아주 오래 전에 요절을 내버린 상태인데다 마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 녀에게 말해줄 수 없었다. 성격이 더러워 보이면 알아서 물러날 줄 알았던 소년이 이 렇게 나오자 참으로 난감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말이야. 내가 잠시 우물쭈물하자 주 위의 시선들이 더욱 강렬해졌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 시선들이 어서 청을 받아들이라 는 무언의 압력으로 다가왔다. 절대 거절해서는 안될 분위기였다. 몇 번 더 싸가지없 게 틱틱거려 봤지만 소년은 보기와는 달리 상관하지 않는 눈치였다. 내가 어떻게 떨굴 다른 방법이 없을까 고심하고 있자 로즈가 입을 열었다. "마리엔, 혹시 거절하려는 건 아니겠지?" 망할 로즈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잘못하면 몰매 맞을 분위기였 다. 로즈! 다음에 두고보자! 절대, 가만 안 둔다! 로즈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며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내가 언제 그런다고 했어! 안 그래도 같이 구경가자고 하려고 했어!" "진짜? 진작 그렇게 말하지 그랬어. 그럼 방해가 되지 않도록 우리들은 다른 곳으로 갈게. 재미있게 놀다와." 로즈는 손바닥을 치면서 좋아했다. 틀림없이 의도적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너무 시 간을 끌어서 의심을 사는 것보다는 같이 돌아다니면서 싫은 행동을 해서 떨구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었다. 내가 승낙을 하자 그 소년은 굉장히 기뻐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여간 찔리는 것이 아니었지만 굳게 마음을 먹었다. 로즈가 어리둥절해있는 사 라까지 끌고 사라지자 남은 것은 나와 그 소년뿐이었다. 잠시 우리들은 서로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서있었다. 어색하다. 무진장 어색하다. 나는 이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 하고자 입을 열었다. "에...그럼 어디를 갈래? 서델피르는 처음이라 잘 모르거든." "그러세요? 저는 여기 살고 있어서 잘 알거든요. 저 쪽에서 음유시인들이 공연을 하고 있는데 그 쪽으로 가봐요." 내가 먼저 말을 해주길 기다린 모양이었다. 내가 말을 걸어주자 확 살아나더니 기쁜 듯이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귀,귀엽다. 일단 남자답지 못하다는 것은 그렇다 쳐도 소년 의 모습은 너무 귀여웠다. 저런 동생 하나 있으면 매일 데리고 놀텐데. 아우, 귀여워.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올려다보는데 귀엽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자기가 말 을 해놓고도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할까봐 살짝 내 눈치를 살피고 있는 소년의 머리 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내 손길이 느껴지자 화들짝 놀라서 쳐다보는 모습 역시 한 귀여움 했다. 나는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럼 거기로 가자. 그런데 너 이름이 뭐니? 난 마리엔이거든. 마리엔 누나라고 불러. 알았지?" "네. 전 토비예요. 마리엔 누나." 아이고, 귀여운 것. 말도 잘 듣지. 어떤 놈들 이랑은 차원이 다르구만. 처음에는 축제 구경을 하다 중간에 떨구려 했지만 저렇게 깜찍하게 나오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 뭐 하루 정도는 상관없겠지. 한번 귀엽게 보이니 남자답지 못한 면도 아직 어려서 그런 것으로 보였다. 토비는 과연 이 곳에서 살고 있어서 그런지 재미있는 곳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맞장 구를 쳐주면 얼굴이 환해져서 조잘거리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나도 저런 동생 하나 가지고 싶어! 왜 마리엔에게는 저런 동생이 없는 것인지 참으로 안타까웠다. 플로라 가 있긴 하지만 나이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데다 공주라고 애교를 부리는 일도 거 의 없었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애교만 부려왔지 직접 받아본 적은 처음인 나로서 는 토비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 없었다. "토비야, 너 너무 귀엽다!" "에?......누나도 귀여워요." 귀여워! 저 것을 어째 버릴까나. 확 내 동생 삼고 싶다. #22-새로운 만남 토비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광장이었다. 분수대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 었고, 그 가운데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한 사람이 아닌 듯 여러 악기 소 리와 함께 가냘픈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혼자 돌아다니는 음유 시인은 많이 봤지 만 이렇게 여러 명이 함께 있는 음유시인은 처음이라 호기심이 동했다. 억지로 사람들 틈을 헤집고 들어가려하자 사람들의 짜증스러운 시선이 와닿았지만 깨끗이 무시했다. 내가 가겠다는데 지들이 뭐라고 하겠어. 토비가 사람들에게 자꾸 죄송하다는 말을 하 고 있었지만 끌고 맨 앞자리로 갔다.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음유시인들은 모두 5명이었다. 가운데에서 노래를 모르고 있는 여자는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확실한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베일 너머로 얼핏 보이는 윤곽으로 봐서 상당한 미녀인 것 같았다. 그리고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피 리를 불고 있었고, 중년의 배불뚝이 아저씨가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었다. 내 나이 또 래로 보이는 푸른 머리를 짧게 기른 남자아이는 줄이 5개 달린 현악기를 연주하고 있 었는데 토비의 말로는 기에라라고 하는 악기라고 한다. 그리고 그 옆에는 빨간 머리의 소녀가 하프를 켜고 있었다. 페드인 왕국의 건국 기념 축제에서도 음유시인의 연주를 들은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함께 화음을 맞춰서 연주하는 경우는 처음 들어보았기 때문에 나는 음유시인 일행을 계속 주시했다. 이렇게 여러 명이서 연주를 하니까 색다른 느낌이 드는걸. 음유시인 일행은 서로 오랫동안 여행을 해왔는지 호흡이 딱딱 맞았다. 실력도 상당한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금새 그들의 연주에 푹 빠져버렸다. 그건 나와 토비도 마찬가지였다. 연주되고 있는 노래는 대체로 빠른 템포로 이루어져있고 톡톡 튀는 느낌이라 듣는 것 만으로도 신이 났다. 나도 어지간한 노래는 알고 있는데 생전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다 . 그러나 상당히 마음에 드는 노래였다. 구경하는 사람들 중 몇몇은 발로 박자를 맞추 거나 어깨를 들썩이기까지 했다. 노래가 끝이 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 왔다. 음유시인들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인사를 했다. 음유시인이라. 이 것도 꽤 멋있 구나. 노래를 부르면서 돈을 번다라. 나중에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되면 한 번 해봐야 지. 그런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뒤쪽에 있는 사람들이 슬슬 다른 곳으로 가버리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래를 들었으면 돈을 내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그나마 앞쪽에 있는 사 람들은 그대로 남아있었지만 상당수가 사라지고 없었다. 하, 돈 내기 싫어서 튀었구만 . 그러면 노래를 듣지 말던가. 별 웃기는 것들일세. 음유시인 일행들의 얼굴을 살펴보 니 이런 일이 제법 많이 있는 듯 덤덤했지만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여기는 파렴치한 인간들이 너무 많네. 노래를 들으면서 즐거움을 느꼈으면 그에 대한 대가는 지불해야하는 것 아닌가. 돈도 자기가 알아서 내는 건데 말이야. 세상이 어떻 게 되려는 건지 원." 나는 날씨가 참 좋네, 라는 말을 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키웠다. 순간 주위의 시선들이 내게 집중되었지만 방긋 웃어주는 것 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내가 정의의 사도나 그런 웃기는 놈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 다. 다만 이제까지 노래를 들어놓고 돈을 낼 때가 되니까 내빼는 인간들이 마음에 들 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수가 한둘이라면 상관없지만 절반 이상이 이렇게 내빼버리면 저 음유시인들은 뭘 먹고 살겠는가? 무슨 짓을 하던지 댁들 자유지만 그에 대한 책임 은 지란 말이다. 내 말에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다른 곳으로 가려던 사람들이 움찔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속이 좁아서 뭘 하겠어? 동전 하나에 벌벌 떠는 인간이 나중에 잘도 성공하겠 다." 나는 냉소적인 말과는 달리 매우 평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구경꾼들만이 아니라 음유시인들까지도 나를 쳐다보았지만 괜히 내가 철판인가. 나는 이 모든 시선 을 싸그리 무시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누,누나." 옆에서 토비가 그런 나를 보고 어쩔 줄 몰라했다. 주변을 살피면서 내 팔을 자꾸 끄는 것이 시비라도 붙을까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토비야. 걱정하지마. 이 누나가 질 리가 있겠니? 정 안되면 마법 난사하고 튀면 그만이란다. 그러나 토비의 걱정과는 달리 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돌아서던 사람들 중 몇몇이 다시 돌아와 바닥에 놓여있는 모 자에 돈을 넣어준 일을 빼면 말이다. 사람들이 제법 사라지자 나도 모자에 돈을 넣고 다른 곳으로 가려할 때였다. "거기, 꼬마 아가씨!" 꼬마? 마계에서 항상 어린애 취급 받아온 나였기에 꼬마라는 말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도 그 것이 사실인지라 아무 말도 못하고 살아왔지만 지금은 그렇 지도 않았다. 몇 달 후에 있을 생일이 지나면 나도 어엿한 18살이란 말이다. 이정도면 성인이 아니고 뭐야. 인상을 찌푸리고 확 돌아보니 꼬마 아가씨라는 말을 한 것은 조 금 전에 피리를 불고 있던 노인이었다. 나는 그 영감탱이를 잠시 쳐다보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말했다. "꼬마 아가씨? 꼬마 아가씨가 어디 있을까?" "여기 내 앞에 있는 사람말고 또 누가 있겠어?" "어머, 눈이 안좋으신 모양이네요. 할아버지 앞에 꼬마 아가씨는 없는데요." 내 말에 영감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글쎄. 이 나이가 되면 아가씨 나이 정도는 꼬마지. 뭘 그러나? 그리고 아직 앳돼 보 이는 것이 꼬마 맞고만." 이 영감이 정말......돈까지 더 벌게 해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이대 로 넘어갈 수만은 없었던 나는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나이가 많은 게 무슨 자랑이라고 그러시는지 모르겠네요. 젊으면 젊을수록 좋은 것 아닌가요? 비 오는 날 허리 쑤시다고 한탄할 일도 없고 피부도 주름살 하나 없이 팽팽 하잖아요. 역시 세상을 이끌어가는 것은 패기넘치는 젊은이들이지요." "허허허, 세상 경험도 없는 애송이들이 뭘 할 수 있겠나? 다 나같이 경험이 많고 노련 한 사람들이 젊은이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것이지." 영감도 만만치 않은지 바로 치고 들어왔다. 오펠리우스 왕비가 잠시 잠잠해진 이후로 누군가와 이렇게 티격태격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나면 나는 영락없는 꼬,마, 아가씨가 되는 것이었다. 인간 세상에까지 와서 내가 꼬마 취급을 받아야하겠 는가! 나는 즉시 반격에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나와 영감을 말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누나. 그만해. 할아버지신데......" "도키오 할아범. 또 시작이군. 이제는 손님하고도 싸우나? 그러니까 할아범이 욕을 먹 는 거라고." "뭐야! 이 놈이! 할아범이 뭐냐! 도키오 할아버님이라고 불러야 할 것 아냐!" 배불뚝이 아저씨의 말에 도키오 할아버지가 잔뜩 흥분해서 소리쳤다. 영감과 한참 말 씨름을 하던 나도 어이가 없어서 배불뚝이 아저씨를 쳐다보았다. 적어도 자기보다 20 살은 많아 보이는 사람에게 저렇게 직설적으로 말할 수 있다니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 로는 존경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광분하는 도키오 할아버지를 무시하고 나를 보 면서 말했다. "이거 참, 미안하네. 보시다시피 이 할아범이 갈 때가 다 돼서 그런 거니 그냥 잊어버 려. 내 이름은 겐지오라고 하는데 아름다운 아가씨 이름은 뭐지?" 당사자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갈 때가 다 됐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하는 걸로 봐서 두 사람은 항상 이러는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또 시작이라는 얼굴을 봐서 확실했다. 오호, 이런 인간도 있었군. 마음에 들었어. 나를 꼬마라고 부른 도키오 할아버지를 능수 능란하게 다루는 그를 보자 왠지 재미있어져서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리엔이예요. 아저씨는 저 분보다 뭔가 아시는군요." "우하하하!!! 아가씨도 보는 눈이 높구만." "그렇죠? 오홋홋호~!!" 나와 겐지오 아저씨는 한참을 웃었다. 나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겐지오 아저씨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말이다. "젠장, 겐지오 같은 놈이 또 있을 줄이야." 도키오 할아버지가 투덜거렸지만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한동안 서로를 띄워주면서 웃 던 우리는 주위의 시선을 어느 정도 감안해서 웃음을 멈췄다. 토비는 물론 다른 음유 시인들까지 땀을 삐질 거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그들에게는 과히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중에서 파란 머리의 남자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겐지오 아저씨, 혹시 숨겨놓은 딸이세요?" "맞아. 외모는 전혀 닮지 않았는데 하는 행동이 너무 똑같아." 옆에 있던 빨간 머리 여자까지 맞장구를 쳤다. 이래봬도 내가 페드인 왕국 제일의 미 녀라고 불리던 이리아 왕비의 딸이며, 데미나 공주와 미를 겨루는 사람이라구. 그런데 저런 배불뚝이 아저씨가 아버지일 리가 없잖아. 성격은 정말 딱딱 맞는데 말이야. "안타깝게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아쉽지만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나와 겐지오 아저씨는 동시에 말했다. 어쩜 이렇게 타이밍도 딱딱 맞는지 신기할 정도 였다. 그러자 도키오 할아버지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서 수군거리기 시 작했다. "역시 딸이었어." "외모만 보면 정말 남남인데. 역시 세상사란 알 수 없다니까." "마리엔 누나의 아버지이신 줄은 몰랐어요." "내 저럴 줄 알았다니까. 말 한마디하면 바락바락 대드는 것이 어디서 많이 봤다 했지 ." 그들은 내 일행이 들으면 기가 막혀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 말을 들으면 고지식 한 엔젤은 분노하면서 "감히 어디서 평민 따위와 마리엔 공주님을 비교한단 말이냐!" 라고 호통을 칠지도 몰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작 그런 반응을 보여야할 페드인 왕 국의 기사들은-사라는 제외다- 오히려 흥미를 가지고 맞장구를 칠지도 몰랐다. 특히 가스톤과 죠안이 가장 가능성이 많았다. 그만큼 나와 겐지오 아저씨는 죽이 척척 맞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는 한참동안 계속되었고, 무슨 결론을 내린 것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의미 심장한 눈으로 나와 겐지오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에 선하다. 선해. 가만히 놔두면 그들의 망상이 끝없이 계속 될 것 같아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저는 왜 부르신 거지요?" "아. 깜빡했군." 내 말에 도키오 할아버지가 손뼉을 마주치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늙은 것이 자랑이 아 니라고 했잖아. 내가 혀를 끌끌 차자 도키오 할아버지가 다시 한번 분노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나와 겐지오 아저씨의 협공에 그대로 침몰되었다. "할아버지, 인상쓰시면 주름이 더 생겨요. 이제부터라도 관리를 하셔야지요." "도키오 할아범. 그러다 혈압 올라 쓰러지면 버리고 갈 꺼야." 감히 이 몸을 꼬마라고 부른 대가렸다. 도키오 할아버지는 내가 조금만 젊었어도 저 것들을 어떻게 해버리는 건데 라고 중얼거렸고, 다른 사람들의 눈은 짙은 의심으로 가 득찼다. "틀림없이 부녀지간이야. 도키오 할아버지의 속을 긁는 모습이 똑같잖아." 사람들의 심각한 오해를 받으면서 겐지오 아저씨가 도키오 할아버지 대신 나를 부른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면서 골치 아파하는 도키오 할아버지는 아무래도 내 질문에 대답하는 게 여의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네 덕분에 오늘은 수입이 짭짤해서 고맙다고 말하려고 했지. 평소의 두 배 이상은 번 것 같단 말이야. 그래! 고맙다는 뜻으로 점심이나 같이 먹는 게 어때? 다들 괜찮지?" "상관없어요. 덕분에 상당히 여유돈이 생겼거든요." "그거 좋은 생각인 것 같네요." "뭐 그 것도 괜찮겠지." "맘대로 해." 만장일치로 점심식사를 함께 하기로 결정이 나자 음유시인들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해봤자 들고 있는 악기를 짐꾸러미 안에 넣는 것 뿐이라 시간은 얼마 걸리 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식당으로 안내한 것은 토비였다. 자신들도 서델피르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어느 식당이 맛있는 줄 모른다고 해서 이 곳 토박이인 토비가 앞장을 선 것이다. 토비가 안내한 식당에 도착한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식당의 모습만 바라보았다. 과연 저 것이 식당인지, 폐가인지 알 수 없었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그 대로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았다. 나는 그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물었다. "토비야, 저기 식당 맞아?" "겉은 저래도 이 곳 토박이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많은 곳이에요. 맛은 제가 보장할 게 요." 아무리 맛이 있어도 저런 위험한 곳에서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고 하지만 일부러 위험을 자처할 필요는 없잖아. 나뿐만 아니라 음 유시인 일동도 매우 불안한 눈으로 식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폐가를 쳐다보았다. "내가 여러 곳을 여행하고 다녔지만 저런 식당은 처음이군." "색다르긴 하지만 좀 그렇지 않을까요?" "동감이야. 밥먹다가 건물이 무너져서 죽었다고 하면 얼마나 황당하겠어." 우리들이 이렇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토비가 피식 웃더니 앞장서서 그 안으로 들 어가 버렸다. 저 녀석 생긴 것과는 다르게 간이 크잖아. 그러고 보니 처음에 내가 엄 청 싸가지없게 굴어도 상관없다고 했었지. 토비의 안위가 걱정이 된 나는 잽싸게 안으 로 들어갔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갔던 나는 재빨리 밖으로 뛰쳐나와 다시 한번 건물의 모양새를 살펴보았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던 나는 다시 한 번 식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밖에서 보면 거의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데 안에서 보 면 낡긴 했지만 견고했다. 역시 사람은, 아니 건물은 겉만 보고는 모르는 것인가 보다 . 어떻게 안과 밖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단 말인가. 천하의 드워프라도 이런 오묘한 신비를 담은 건물은 지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계속 식당의 안과 밖을 왔다갔다하면서 같은 건물인지 확인하기에 바빴다. 그리 고 그런 반응은 어쩔 수 없이 따라 들어왔던 음유시인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우 리들을 보면서 토비가 말했다. "여기 처음 들어온 사람들은 항상 그런 반응을 보여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이 상태로도 벌써 몇 년을 버텼는 걸요." 그리고 아직도 어리둥절해있는 우리를 자리로 끌고 갔다. 주변을 둘러보니 역시 위험 천만해 보이는 겉모습 때문인지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신기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 는 사이 토비가 음식을 주문했다. 건물이 후지면 친절하기라도 해야하련만 주인은 주 문을 듣고 고개만 끄덕이고 사라져버렸다. 우리들은 음식이 나올 때까지 상대방에게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도키오 할아버지가 일행의 리더였고, 겐지오 아저씨와는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한다. 그리고 파란 머리의 페르라는 소년이 도키오 할아버지의 손자였고, 빨간 머리의 소녀는 리카, 베일로 얼굴을 가린 여자는 시이라 라고 했다. 그들은 모두 세를리드에서 이 곳까지 여행하면서 왔다고 한다. "여러분들만요? 요즘은 마물들이 많아졌잖아요. 위험하지 않았나요?" "하하하. 이래봬도 저기 도키오 할아범만 빼면 모두 자기 몸은 지킬 실력은 되거든." "뭐야! 내 무술을 당해낼 인간은 아무도 없어!" 도키오 할아버지가 흥분해서 외친 말에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검을 사용하는 사람은 많아도 무술을 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지 때문이다. 검을 사용하는 것보다 공격범위도 좁고 검과 손이 부딪친다면 손이 불리한 것은 뻔한데 누가 무술을 배우려고 하겠는가 . 그래서 소피린 대륙과 아드린 대륙에서 무술을 사용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에? 무술을 하세요? 무술은 실전에서는 사용하기가 힘들지 않나요?" "아니지! 무술도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가면 맨 손으로 바위도 박살낼 수 있단 말씀! 나도 당연히 바위정도는 박살낼 수 있지!" "도키오 할아범. 저번에 바위 박살낸다고 난리치다가 미친놈으로 오해받고 마을에서 쫓겨난 걸 벌써 잊었나? 할아범이 쫓겨난 건 상관없지만 덕분에 우리까지 피해를 봤잖 아." 역시 그랬군. 인간이 어떻게 맨 손으로 바위를 박살내겠어? 마족이라면 또 몰라도 말 이다. 내가 그럼 그렇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도키오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좋아! 그렇다면 당장 따라와! 바위를 박살내는 걸 직접 보여줄 테니까!" "할아버지, 너무 무리하시면 안돼요." "할아범, 이 근처에 바위가 어디 있다고 그래? 그걸 미리 알고 이러는 거지?" 나와 겐지오 아저씨는 정말 죽이 척척 맞았다. 겐지오 아저씨를 스카우트해가서 협공 으로 오펠리우스 왕비를 상대하면 정말 재미있을 텐데. 토비까지 옆에서 킥킥대는 것 이 여간 재미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당사자는 그렇게 재미가 없는지 다시 한번 도키오 할아버지가 열을 내려했다. 그러자 페르가 나서서 그를 진정시켰다. "도키오 할아버지, 진정해요. 할아버지가 강하다는 건 모두 아는 사실이잖아요. 겐지 오 아저씨랑 마리엔이 장난치는 걸 가지고 다 크신 분이 그러실 거예요?" 페르는 도키오 할아버지에게 말하면서 한쪽 눈을 찡긋했다. 맞장구를 쳐달라는 소리였 다. 더 이상 놀렸다가 나이도 있으신 분이 혈압으로 쓰러지면 곤란하지.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한 나는 페르의 말에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맞아요! 장난이었어요. 무술가라니 정말 대단해요!" "도키오 할아범이 옛날에는 한 끗발 날렸지. 지금도 혈기왕성한 것이 젊은이 못지 않 다니까." 도키오 할아버지도 처음 만났을 때 보니 제법 말솜씨가 있는 것 같았지만 나와 겐지오 아저씨의 합동 작전에는 당해낼 수 없는지 금새 화를 풀었다. 양 사이드에서 찬양의 목소리가 줄줄 나오는데 당연했다. 나와 겐지오 아저씨가 너무 비슷해서 그런지-어디 까지나 성격이 그렇다는 것이다. 외모는 절대 아니다-금새 그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특히 페르와 리카는 또래라 그런지 어느새 편하게 말을 놓았다. "그런데 마리엔은 스피린 사람은 아닌 것 같던데 어디서 왔어?" "나? 난 페드인 왕국에서 왔어. 아는 사람(레리이나 여왕) 생일을 축하하러 왔다가 잠 깐 둘러보고 있는 거야. 다른 일행들은 지금 여관에 있을 거야."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저 약간의 진실을 감췄을 뿐이다. 내가 생각보다 먼 곳에 서 왔기 때문인지 약간 놀라는 것 같았지만 수긍하는 눈치였다. 그들은 이번이 첫 여 행인 나와는 달리 오랫동안 여행을 다녔는지 대륙의 여러 곳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여행담을 열심히 듣고 있는 와중에 음식이 나왔다. 이야기가 재미있어 그렇게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음식이 모두 나오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렇다고 음식이 정말 특이한 것들도 아니었다. 어느 식당에서도 볼 수 있는 흔한 음 식들이었다. 주인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음식만 갖다주고 한마디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건물이나 친절도나 뭘로 봐도 아직까지 망하지 않은 게 이상했다. 손님은 왕이다라는 말도 모르나. 그러나 음식을 한 입 먹어본 나는 그 생각을 정정할 수밖에 없었다. 맛있다! 조금 과 장해서 말하면 궁전에서 먹던 음식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생긴 건 그냥 그렇게 생긴 음식이 왜 이렇게 맛있는지 정말 미스테리였다. 건물도 그렇더니 음식도 겉만 보면 알 수 없는 참으로 신비한 식당이었다. 아직까지 망하지 않은 이유 는 싼값으로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군. 식사를 마친 나는 그들과 아쉬운 작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숙소를 잡아야했고 , 나는 토비와 함께 축제 구경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특히 겐지오 아저씨와 헤어지는 것은 정말 아쉬웠다. 저렇게 호흡이 잘 맞는 사람은 드문데 말이야. 내가 그들과 헤어 진 후에도 계속 아쉬워하는 기미를 보이자 토비가 말했다. "마리엔 누나, 그냥 그 사람들이 숙소를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놀까?" 나를 걱정해주는 토비가 너무 귀여워서 머리를 마구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괜찮아. 오늘은 토비랑 놀기로 했잖아. 그리고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 뭐." "난 괜찮은데......" 토비가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애 왜 이렇게 귀엽냐? 진짜 내 동 생으로 삼아버릴까 보다. 처음에 봤을 때와 달리 토비는 여자 같다기보다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때문에 처음에는 여자애랑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지금은 귀여운 꼬마애랑 같이 있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마계에서나 궁전에서나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귀여워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자 기랑 함께 있는 것이 싫지는 않은지 더 이상 도키오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내가 자기랑 있어줘서 기뻐하는지도 모르겠다. 꽤나 늦은 시간까지 토비랑 같이 다니던 나는 급기야 내가 묵고 있는 여관이름까지 알 려주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귀여운 애랑 다시 못 만난다는 것은 너무 아깝지 않은가. 그렇다고 내가 토비를 이성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귀여운 남동생이 하나 생긴 기분이었다. 시간이 늦어서 돌아가려고 하는데 토비가 내 옷자락을 슬며시 잡더 니 나를 불렀다. "저기...누나......." "왜?" "나......내일 놀러가도 돼?"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토비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여관 이 름을 가르쳐주었다는 것은 놀러와도 된다는 소리인데 순진한 토비는 내 허락을 받으려 고 하고 있었다. 크윽, 귀여워. 확 페드인 왕국으로 데리고 가버릴까 보다. 귀여워서 꽉 깨물어 주고 싶은 것을 참으면서 말했다. "그럼. 내일 놀러와." "응!" 내 말에 토비는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좋을까? 귀여운 것. 토비를 돌려보내고 여관에 도착할 때까지도 기분이 좋았다. 나중에 크면 여자 꽤나 달고 다닐 꺼야. 흠, 플로라한테 소개시켜 줘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숙소로 들어오는데 꽤나 낯익은 사 람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낯익은 사람들은 꽤나 많았다. 우선 한쪽에는 어느새 돌아온 로즈와 함께 앉아있 는 일행들이 나를 보고 아는 척을 하고 있었고, 그 반대쪽에는 낮에 헤어졌던 음유시 인 일행들이 역시 나를 보면서 아는 척 하고 있었다. "마리엔, 이제 온 거야? 늦었네." "축제 구경은 재미있었어?" "이게 누구야? 마리엔 아니야?" "역시 겐지오 네 놈 딸이지? 여기에서까지 만나는 것을 보면 이건 우연이라고 볼 수 없어." 한꺼번에 쏟아지는 질문에 나는 어느 곳부터 대답을 해줘야할지 망설였다. 역시 인기 가 많은 사람은 여러모로 힘들다니까. 결국 나는 우선 동료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나서 바로 반대손을 들어 도키오 할아버지들에게 인사를 했다. "응. 축제라는 게 꽤나 재미있더라구-동료들을 보면서-......또 만났네요. 반가워요- 도키오 할아버지들을 보면서-." "마리엔, 아는 사람들이야?" "누구야? 전에 말했던 일행들이야?" 나는 여전히 손을 든 채로 몸만 약간씩 돌려 대답했다. "응. 오늘 축제에서 만난 음유시인들이야. 인사해-역시 동료들을 보면서-.......네, 제 일행이예요. 서로 인사하세요-이번에는 도키오 할아버지들을 보면서-." 바쁘다. 바뻐. 그나마 늦은 시간이라 식당에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망정이지 이 얼마 나 웃기는 모습인가. 내 말에 서로를 쳐다본 사람들은 각자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마 침 빈자리가 많았기 때문에 우리들은 탁자를 2개 붙여서 함께 앉았다. 내 주도 하에 서로의 소개가 끝나자 사라가 도키오 할아버지를 보면서 물었다. "죄송하지만 아까 마리엔이 누구의 딸이라고 하신 것 같은데. 제가 잘못 들었나요?" 내가 공주인 것을 아는 사라로서는 도키오 할아버지의 발언이 상당히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지 도키오 할아버지를 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그 시선을 느낀 도키오 할아버지가 너털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자면 미안하군. 하지만 두 사람이 하는 행동이 너무 닮아서 말이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이도 젊은 사람들이 나같이 나이먹은 사람을 노려보면 쓰겠나." 도키오 할아버지의 말에 사라를 비롯한 일행들이 너무했다고 생각했는지 사과를 하려 고 입을 열려했다. 그 순간 나와 겐지오 아저씨는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누가 누구를 닮았다고 그러세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도키오 할아버지는 눈이 좋지 않으신 모양이네요." "도키오 할아범, 왜 젊은 사람들 기를 죽이고 그래? 자기가 늙어서 심통이 난 거야?" "이 놈들이 또 시작이네! 말 한마디하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는 그 모습이 똑같 다는 거다." 음유시인 일행들은 이미 낮에 본 모습이라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이는 도키오 할아버지에게 막말을 하는 겐지오 아저씨 의 모습에 놀라고 있었다. 게다가 나까지 합세하지 않았는가. 그동안 얌전한 모습만 보이던 나의 색다른 모습에 엔젤과 로즈, 히크리트 신관은 눈을 휘둥그래 뜨고 있었다 . 도키오 할아버지의 말에 나와 겐지오 아저씨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그저 사실을 말씀드린 것뿐인데요." "영감, 누누이 말하지만 제발 철 좀 들라고. 그럼 내가 이렇게 말을 걸고 넘어지지도 않을 테니까." 도키오 할아버지는 참으로 얄밉게 구는 나와 겐지오 아저씨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우 리들은 느긋한 얼굴로 씨익 웃어주었다. 이런 걸 바로 승리의 미소라고 하는 것이지. 이번에도 페르가 상황을 진정시키려고 애썼고, 리카도 옆에서 그를 돕고 있었다. 시이 라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조용히 앉아있기만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동료들은 어이없 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이 두 명 있기는 했다. "세상에! 이 세상에 마리엔 같은 사람이 또 있을 줄은 몰랐군." "진짜 부녀지간 같잖아. 하는 행동이 어쩜 저렇게 똑같을 수가 있냐!" 가스톤과 죠안은 너무 놀라운 건지 목소리를 낮추는 것도 잊은 채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에릭과 세린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같은 생각인지 나와 겐지오 아 저씨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겐지오 아저씨도 나처럼 두꺼운 안면을 가지고 있 는지 그저 싱글거리고만 있었다. "그런데 페드인 왕국에서 왔다면서?" 한동안 나와 겐지오 아저씨를 쳐다보던 사람들은 겐지오 아저씨의 질문에 정신을 차렸 다. "아. 내가 아는 사람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스피린에 왔다고 했었거든." 내 말에 내가 대강 무슨 말을 했는지 눈치챈 세린이 대답했다. "저희들은 페드인 왕국에서 온 것이 맞지만 여기 세 분들은 이 곳을 여행하면서 만난 분들입니다." "그렇군. 그런데 자네들은 어디까지 가는 건가? 설마 목적지도 없이 가는 건 아니겠지 ?" 도키오 할아버지는 그동안 겐지오 아저씨에게 많이 당해봤는지 금새 평정심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도키오 할아버지의 질문에 동료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과연 히 폴리테로 가는 것을 말해도 되는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무슨 사정이 있으면 말하지 않아도 되네." 도키오 할아버지는 연륜이 있어서 그런지 우리들이 망설이자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런데 음유시인들이라고 하셨죠? 연주를 한 번 듣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눈치가 빠른 세린이 재빨리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고, 도키오 할아버지들도 흔쾌히 청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낮에 들었던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이 곡은 도키오 할아버지가 직접 만든 곡이라고 한다. 광장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그들은 연주 실력은 굉장했다. 떠돌이 음유시인으로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실력들이었다. 식당 안에서 흥겨운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자 위층에 있던 사람들이 한두 명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 부근을 지나다 연주소리에 이끌려 여관으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연주소리에 취해 같이 발을 구르기도 하고 음을 따라서 불러보기도 했다. 사람들은 모두 신이 났지만 가장 신이 난 사람은 다름 아닌 여관 주인이었다. 그냥 연주만 듣기에는 심심했던 사람들이 맥주나 먹을 것들을 주문했기 때문이다. 어느새 식당은 연주소리에 이끌려 온 사람들도 가득 찼다. 도키오 할아버지들도 우리 들이 자신의 연주를 듣고 즐거워하자 흥이 나서 한 곡으로 끝내지 않고 계속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점차 분위기는 달아올랐고, 페르가 소리쳤다. "나와서 노래 부르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 나오세요!" 페르의 말에 몇몇 사람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이 노래를 부르면 도키오 할아버지들 은 그 노래에 맞춰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역시 음유시인들이라 그런지 처음 듣는 곡 도 금방 멋있는 연주를 해주곤 했다. 음유시인이란 직업도 정말 멋있네. 나중에 꼭 한 번 해봐야지. 노래만으로 사람을 매료시킨다는 일이 얼마나 멋있는가. 내가 그렇게 넋 을 빼고 있는 사이 그만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럼 다음은 제가 부르겠습니다!" 한참 아름다운 선율에 빠져있던 나는 낯익은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노 래를 부르려고 폼을 잡는 사람을 보자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가스톤, 너 거기서 뭐하는 거야?! 가스톤이 그가 작곡했다던 '그 노래'를 부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 렇게 좋은 분위기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반응은 그의 노래를 한 번 들어본 적이 있던 죠안과 사라도 마찬가지였다. "안돼!" "멈춰!" "그만두세요!" 그러나 사람들의 박수소리에 파묻혀 우리들의 소리는 가스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다 만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만이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도 우리가 왜 이런 반응을 보였는지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가스톤의 입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귀를 막았다. "마리엔, 왜 그래? 죠안과 사라까지? 무슨 일이예요?" 세린이 물어보았지만 나는 고개만 도리도리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귀를 막고 있는 나와 죠안, 사라를 의아한 눈으로 보던 세린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드 디어 시작됐구나. 불쌍한 것들. 그러니까 얼른 귀를 막았어야지. 귀를 막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스톤의 노래는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이 정도는 참을만했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웃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점점 괴로워하는 얼굴로 바뀌고 있었다. 오죽하 면 에릭마저 인상을 썼겠는가. 도키오 할아버지들도 어느새 연주하는 것을 잊어버린 채 가스톤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번엔 상당히 길군. 5절까지 다 부르는 모양인데. 방금까지만 해도 절로 어깨가 들 썩일 정도로 신이 나는 노래를 듣다가 갑자기 가스톤의 음정, 박자, 리듬 모두 무시한 노래를 듣고 있으니 더욱 힘들 것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은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 괴로워 보지 못했겠지만 지금 가스톤의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다. 다 큰 남자가 두 손 을 모아 쥐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지. 거기다 얼굴은 진지 그 자체였 다. 내가 제 4기사단이 전부다 범상치 않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 일 줄이야. 나와 죠안, 사라는 드디어 가스톤이 노래를 다 부르고 입을 다물자 그제서야 귀에서 손을 뗐다. 사람들은 너나할것없이 넋이 나간 듯한 반응이었다. 노래만으로 사람을 이 렇게 만들 수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가. "내 노래가 그렇게 놀라웠어?" 가스톤은 주변을 살펴보고 멀쩡해 보이는 우리 세 사람에게 질문을 했다. "그럼! 난 이렇게 놀라운 노래를 다시는 듣지 못할지도 몰라!" "가스톤, 다음에 누구랑 싸우게 되면 네가 앞장서서 노래를 불러라." "수고하셨어요." 이제 포우먼 축제도 내일이면 막을 내리게 된다. 그동안 나와 로즈, 사라는 각자의 파 트너와 함께 이 독특한 축제를 마음껏 구경했다. 나와 로즈는 토비와 테인즈와 함께 다녔지만 사라는 가스톤과 함께 다니게 되었다. 가스톤이 사라와 함께 다니게 된 것은 여자는 남자의 청을 거절할 수 없으니 가스톤이 옆에서 지켜주라는 내 주장 때문이었 다. 이렇게 둘이 같이 다니다보면 언젠가는 정이 들 것이다. 토비와 테인즈는 대부분 숙소로 먼저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다른 일행들도 두 사람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나와 로즈도 두 사람과 만나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그들 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토비는 농사일을 하는 부모님과 사냥꾼이셨던 할 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토비의 할머니의 사냥 실력은 서델피르에서도 손에 꼽히는 실력이었고, 토비도 가끔 할머니를 따라 사냥을 가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테인즈는 확실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입고 다니는 곳이나 하는 행동으로 보아 평민은 아닌 것 같 았다. 축제의 마지막날 우리 일행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제는 많 이 친해진 도키오 할아버지들도 우리와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관 문이 열리더니 갑자기 테인즈와 낯선 여자 몇이 함께 들어왔다. 그동안 테인즈가 찾아오던 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간인데다 처음 보는 여자들까지 함께 오자 우리 일행 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런 우리에게 테인즈가 사과를 하면서 말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찾아와서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급한 일이 생겨서 실례를 무릅 쓰고 찾아왔답니다. 로즈님 일행과 도키오 할아버님들도 모두 저를 따라와 주셨으면 좋겠어요." "갑자기 무슨 일인데 그러시죠?" 에릭의 질문에 테인즈는 난색을 표하면서 말했다. "여기서 말씀드리기는 곤란한 일이라서요. 하지만 저를 따라오시면 자연히 알게 된답 니다. 사정은 그 때 설명해 드리도록 할테니 지금은 저를 따라와주세요." 테인즈가 이 곳에서는 말하기 곤란한 기색이자 우리들은 잠시 쑥덕거리다 우선은 그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그동안의 친분이 있어 무작정 거절하기도 힘들었고, 그가 무슨 꿍꿍이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가자 여관 밖에는 테인즈가 준비 한 것인지 마차 두 대가 서있었다. 하나의 마차가 7-8명이 정원이었기 때문에 나와 사 라, 루시가 도키오 할아버지 일행과 같은 마차를 타고 나머지 일행들은 테인즈와 같은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안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갈색의 소 가죽으로 만들어진 시트에서는 동물 가죽 특유의 냄새가 나고 있었지만 그 냄새가 썩 나쁘지는 않았다. 그리고 시트 위에는 색색실로 꾸면진 방석이 놓여져 있었고, 바닥에 는 카페트가 깔려 있었다. 때문에 걸을 때마다 잔디를 밝는 것처럼 발이 푹푹 가라앉 았다. 마차 안에는 우리말고 테인즈와 함께 왔던 여자 중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자도 함께 올라탔다. 마차가 출발하는지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차의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하자 그 여자가 대상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렇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여러분을 모시게 되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소문이 나서 좋을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사실 테인즈님은 이 곳의 시장 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그 분을 통해 여러분 중에 마법사와 신관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도움을 요청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도키오 연주단분들은 소문으로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들어 같이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도키오 할아버지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시장이 나서서 도움을 청할 정도면 그들은 상당한 실력자들일 것이다. 원래 소문이란 것이 사실보다는 과장되기 마련이지만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실력이 있다는 말이 되었다. 사실 늙은 도키오 할아버지와 배불뚝이 겐지오 아저씨, 언제나 조용하기만 한 시이라 를 보면 뛰어난 실력을 보유한 사람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이래서 사람이란 겉만 보고 는 알 수 없는 것인가 보다. 하긴 나만 봐도 겉만 보면 누가 속에 마족이 들어있는 줄 상상이나 하겠는가. 내가 의외의 사실에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도키오 할아버지가 어 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그러게 내 무술 실력은 따라올 자가 없다고 했잖아." "할아범, 익은 벼일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과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이 있어. 본인 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뭐 노망이 들어서 모른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야." 겐지오 아저씨는 도키오 할아버지에게 일침을 가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앞에 앉아있는 여자에게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른 겁니까?" "그건 제가 말씀드리기보다는 직접 시장님께 듣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말에 겐지오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장이 잘 알지도 못한 사람에게 도움 을 청할 만큼 중요한 일이라면 이런 부하들이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런가? 그럼 시청까지는 얼마나 걸리나?" "마차로 15분 정도만 더 가면 나옵니다. 그런데......" 그녀는 겐지오 아저씨를 살벌하게 노려보는 도키오 할아버지를 힐끗 쳐다보고 말끝을 흐렸다. 이런 장면이 익숙한 우리와는 달리 그녀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막 말을 하는 겐지오 아저씨가 이상하게 보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얼굴에는 ' 벌써부터 이렇게 분열이 되면 앞으로의 일에 지장이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저렇게 티격태격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이가 좋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나와 다른 사람들은 큰 염려를 하지 않았다. 물론 본인들은 말도 안 된다고 부정하겠지만 말이다. 그녀의 염려스러운 시선을 따라가던 겐지오 아저씨는 그 끝에 있는 도키오 할 아버지를 보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하하하, 걱정말게나. 저 영감은 가만히 놔두면 혼자 날뛰다 수그러들거든. 신경쓰지 마." "뭐라! 오늘 내가 반드시 네 놈의 못된 버릇을 고쳐놓고 말겠다! 어른을 공경하라는 말도 모르냐?!" "과연 죽을 때만 기다리는 할아범이 그럴 수 있을까? 그리고 어른도 어른 나름이지." 도키오 할아버지와 겐지오 아저씨는 시청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소란을 피웠다. 얼마 나 시끄럽게 굴던지 나는 마차가 멈춰 서자마자 바로 내려버렸다. 나는 아직도 울리는 귀를 손으로 비비면서 시청 관사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마차는 시청 건물 바로 앞에 멈춰서있었는데, 시청은 짙푸른 감청색을 띠고 있었다. 대리석은 아니지만 반들반들한 돌들로 만들어져 있어 햇빛을 받을 때마다 마치 거울처 럼 반사광을 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울처럼 눈이 부실 정도의 반사광은 아니고 주변 만 은은하게 빛이 비취고 있어 마치 건물 자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반사광의 중 심에 있는 시청의 벽에는 시청 내에 있는 정원과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 그 모습은 이 곳과 같은 감청색의 세계가 이 세계가 맞닿아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잠시 감청색의 특이한 건물을 쳐다보던 나와 일행들은 테인즈의 독촉에 그를 따라 건 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깔끔하게 꾸며져 있어 이 곳의 주 인의 소탈한 성격을 알 수 있었다. 응접실 역시 상당히 넓긴 했지만 별다른 장식이 없 이 필요한 가구들만이 배치가 돼있었다. 하지만 황량하다기보다는 깔끔하고 정갈하다 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이미 한 여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희 어머니세요. 어머니, 저 분들이 제가 말씀드린 분들이에요." 테인즈의 소개로 우리는 그녀가 테인즈의 어머니이며 서텔피르의 시장임을 알 수 있었 다. 노란 머리 사이로 히끗히끗 보이는 흰머리는 그녀의 나이가 생각보다 많음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간간이 보이는 흰머리가 보기 싫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녀를 노련하고 경험이 풍부해 보이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마른 체형과 쓰고 있는 안경 때문에 어딘지 모르게 날카로운 느낌을 주었지만 테인즈를 보는 시선만은 따뜻했다.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자리에 앉으시지요." 시장의 권유에 따라 우리가 자리에 앉자 곧 시종들이 간단한 술과 안주를 내왔다. 보 통 이런 경우에는 차를 내오는 페드인 왕국과는 다른 모습이었지만 이미 스피린이 페 드인 왕국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 다른 반응은 없었다. 처음 부터 일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했는지 맞은편에 앉아있던 시장은 로즈를 보면서 말했다. "자네가 로즈인 모양이군. 테인즈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처음 보는 것 같지 가 않군." 자신의 아들이 관심이 있는 여자이니 절로 눈이 가는 모양이었다. 시장의 말에 테인즈 가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했지만 로즈는 별 동요 없이 말했다. 하긴 남자들을 능숙하게 꼬시는 걸로 봐서 이런 경우도 몇 번 겪어봤을 것이다. "저야말로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시장님. 테인즈가 시장님을 닮아 아름다운 모 양이군요." "별 말을 다하는군." 시장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기분은 나쁘지 않은지 빙긋 웃었다. 잠시 시장과 로즈의 쓸데없는 이야기를 듣던 나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렇게 질질 끄는 건 정말 딱 질색이었다. 할 말이 있으면 바로 할 것이지 빙빙 돌리는 건 또 무슨 심사란 말인 가. "로즈 언니를 보러 부르신 것은 아니실 테고, 실례가 아니라면 저희를 부른 이유를 들 을 수 있을까요?" 내 말에 한참 로즈와 이야기를 나누던 시장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 무슨 일이 있 긴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시장은 머릿속으로 뭔가를 정리하는지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하긴 언젠가는 말을 해야할 일이지. 사실 몇 달 전부터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골머리를 썩던 참입니다. 이 곳 서델피르에서 서쪽에 있는 케란를 가려면 로마니 숲 이라는 곳을 거쳐야 한다는 것은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이 로마니 숲은 위험한 마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미로처럼 길이 얽히고 섞여 예전부터 숲에서 길을 잃 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하지만 잠시 길을 헤매더라도 실종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 근 들어서는 실종자들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시장은 목이 타는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녀의 말에 따르면 몇 달 전부터 실종자들이 속출하자 처음에는 단순히 길을 잃고 헤매 는 것이라 생각하고 가볍게 넘어갔다고 한다. 하지만 실종자들이 계속 생기자 이상하 다 싶어 병사들을 몇 명 보냈지만 어찌된 게 그 병사들마저 소식이 끊어져 버렸다. 그 후로 몇 번이나 병사들을 보내보았지만 역시 돌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로마니 숲 근처에 있는 마을 주민들은 밤마다 숲에서 이상한 빛들이 허공에서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악령이 사람들을 납치 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입단속을 시키고 있 긴 하지만 그 것도 어느 정도지 계속 사람들이 사라지자 점차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들어가는 족족 사람들이 모두 사라져버리자 계속 병사를 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 만히 놔둘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에 처해있을 때, 때마침 우리들이 나타난 것이다. 마 법사와 신관도 있고, 소문대로라면 용병들 못지 않은 실력이라고 하니-도키오 할아버 지들의 소문이다-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우리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악령쪽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었던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히크리트 신관에게 쏠렸다. "그런 일이 가능한 겁니까, 신관님?" 세린이 의아한 얼굴로 묻자 히크리트 신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뭔가 강한 원한에 사무쳐있거나 어둠의 계약을 한 자라면 가능할 겁니다. 무슨 사정 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선량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피해를 주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군요. 그런 어둠에 물들은 영혼은 제가 책임지고 정화시키겠습니다." 여기서 어둠의 계약이라는 것은 마족과의 계약을 뜻하는 것이었다. 마족과 계약하면 살아날 수도 있는데 뭐하고 영혼인 채로 있는단 말이야? 그렇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어 떻게 아냐고 물으면 곤란했기 때문에 속으로 무식한 것이라고 투덜거리기만 했다. 히 크리트 신관이 나선다는 말을 하자 시장의 얼굴은 금새 환해졌다. "악령이든 아니든 그냥 지나칠 수 없군요. 게다가 어차피 저희들도 그 곳을 지나쳐야 하니 도와드리겠습니다." "하긴 우리들도 그 곳을 지나치긴 해야하니 돕기로 하지." 엔젤과 도키오 할아버지까지 나서자 다른 사람들도 악령 퇴치에 나설 것을 동의했다. -------------------------------------------------------------------------- 드디어 제가 돌아왔습니다~!!! 많이 기다리셨죠?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할께요. 그럼 재미있으셨으면 좋겠어요 *^-^* 시장에게 의문의 실종 사건 해결을 부탁받은 우리 일행은 다음날 문제의 로마니숲을 향해 출발했다. 서델피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탓에 우리들은 며칠 걸 리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로마니숲에 처음 본 우리 일행은 정말 이 곳이 악령이 출몰한다는 그 곳인지 의문이 갔다. 보통 악령이 나오는 숲이라면 빽빽이 들어찬 나무들로 인해 전혀 빛이 비치치 않고 어 둠침침한 분위기의 숲일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로마니숲은 평화롭기 그지없는 모습 이었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크기의 나무들이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 었고, 연두빛의 덤불은 색색의 꽃들과 함께 봄날 숲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사이로 마치 뱀이 지나간 흔적처럼 구불구불 나있는 오솔길은 여행객들의 발길을 숲 으로 이끌고 있었다. 마치 장난치듯이 나뭇잎을 흔들어놓는 살랑바람에는 향긋한 꽃내 음과 함께 잔뜩 경계하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봄의 숨결이 느껴졌다. 행여나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싶어 주변을 날카롭게 살피던 나는 너무도 평화 로워보이는 숲의 모습에 맥이 풀렸다. "정말 여기가 실종자들이 속출한다는 그 숲 맞아요? 악령은커녕 오크 한 마리 한보이 는데요." 내 말에 루시도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도를 보면 맞긴 한데. 소문과는 달리 너무 평화로운데요." "나도 같은 생각이야. 잔뜩 긴장했던 것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야." 나와 몇몇 사람들이 긴장을 풀어버리자 에릭이 말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 에릭도 약간은 맥이 풀린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였다. 그리고 그 의 말에 엔젤도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게다가 이런 대낮에 열명이 넘는 인원을 상대하기는 힘들겠지요. 상대가 악령이든 아니든 말입니다." 그들의 말에 우리들은 긴장이 풀려버린 마음을 애써 다잡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한번 풀려버린 마음을 다시 경계 태세로 바꾸기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귓가를 스치는 새 들과 곤충들의 훌륭한 합주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절로 소풍 나온 기분이 들었다. "이봐. 자네 신관이잖아? 뭐 느껴지는 것이라도 없나?" 눈을 감고 무엇인가를 살피는 듯하던 히크리트 신관은 도키오 할아버지의 말에 눈을 떴다. 그녀의 얼굴이 약간 찌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결과가 영 신통치 않은 모양이 었다. 역시 히트리트 신관의 말은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특별한 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럼 악령이 사람들을 납치한다는 건 헛소문인가?" 세린이 중얼거리자 그 소리를 들은 히크리트 신관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건 아직 모릅니다. 어둠의 힘이라도 모두 느껴지는 건 아니니까요. 만약 정말 악령 의 짓이라면 상대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자신의 기운을 드러내지는 않을 겁니다." 히크리트 신관이 신중한 어조로 말하자 우리는 다시금 악령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었던 것이다. 세상천지에 대낮에 나타나는 유령이 있다 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게다가 어서 퇴치되고 싶지 않은 다음에야 자신의 기 운을 풀풀 풍기고 다닐 리 없었다. 우리 일행은 숲 속 깊이 들어가지 않고 대강 숲 주변만 살펴보았다. 비록 겉보기에는 전혀 위험해 보이지도 않고 대낮이라 악령이 나타나지도 않을 것 같았지만 경솔하게 행동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30분 정도 돌아보았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다 만 출입 금지라고 써진 푯말이 부러져서 근처 덤불 사이에서 뒹굴고 있는 것을 발견했 을 뿐이었다. 누군가 고의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자연히 부러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 지만 말이다. 다시 푯말을 세워놓은 후, 로마니 숲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로 발길을 돌렸다. 지금은 악령 소동으로 발길을 하지 않고 있지만 항시 로마니 숲을 드나들었던 마을 주 민들이라면 숲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밤중에 숲 속을 떠다 닌다는 기이한 불빛을 최초로 본 사람들도 그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 게 로마니 숲과 유령으로 추정되는 빛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둘 필요가 있었다. 마을은 로마니 숲에서 10분 정도 걸어가자 나타났다. 특별한 이름도 없이 그저 로마니 마을이라 불리는 작은 마을이라 전체 가구 수는 20여 가구도 채 되지 않았고, 마을 입구에서 보면 마을의 전체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드문드문 들어서 있는 집들은 약 간씩 다르긴 했지만 대체로 하얀 벽 위에 붉은 지붕이 얹혀있는 모양이었다. 그 주위 로는 낮은 돌벽들이 집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그건 누군가의 침입을 막는다기보다는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는 경계선에 가까웠다. 집들 사이로 난 여러 개의 길들은 모두 마을의 중앙 공터로 모여있었다. 그리고 공터 한가운데에는 마을 주민들의 생명수라고 할 수 있는 우물이 하나 있었다. 작은 우물이었지만 감싸고 있는 돌이 잘 다듬어져있 고, 이끼가 끼어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관리가 잘 되어있는 것 같았다. 공터에는 물을 기르러 온 아낙에서부터 공터 가장자리에 있는 평평한 바위에 앉아 이 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청년, 옷이 더러워진지도 모른 채 열심히 흙장난을 치고있는 아 이들까지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하지만 천진하게 웃으면서 자기들끼리 뒹굴 고 있는 아이들을 제외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음울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자신들의 삶의 터전과 다름없는 로마니숲에서 불미스런 일이 계속 생기고 있으니 걱정 이 되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로마니 마을은 숲에서 5-1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고, 마 을에서 보면 로마니숲의 모습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곳이었다. 그런 가까운 곳에 알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 두려워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다만 그동안 정든 터전을 버리고 가기도 서운하고, 이 곳을 떠나면 마땅히 갈 곳도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마을에 남아있는 것에 불과했다. 그들은 낯선 우리들의 등장에 약간의 호기심과 경계심을 가지고 쳐다보고 있었다. 그 러나 아이들만은 우리 주위로 쪼르르 몰려와 의심 한 점 없는 맑은 눈으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터에 있던 사람들에게 물어 찾아간 촌장의 집은 주위의 다른 집들 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평범한 집이었다. 집밖에 있는 작은 야채밭이 그나마 다른 집 들과 다른 점이었다. 촌장은 험한 일은 겪어본 적 없이 곱게 늙은 모습의 온화한 인상 의 할머니였다. 그러나 그녀의 눈가에도 공터에서 본 사람들처럼 수심이 가득했다. "저를 찾아오셨다구요? 무슨 일로 이렇게 많은 분들이 찾아오신 겁니까?" "사실은......" 촌장의 정중한 질문에 가장 연장자인 도키오 할아버지가 나서서 우리가 이 곳에 온 이 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촌장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전투라고는 해본 적이 거의 없는 순박한 시골 사람들이 직접 해결하기에는 너무 위험 한 일이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가 우리들이 나타난 것이다. 아마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곳을 헤매다가 한 줄기 빛이 비취는 기분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서델피르 시장 의 소개장까지 본 촌장은 반색하며 우리를 집안으로 맞이했다. "여러분이 도와주신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몇 달 전부터 사람들이 계속 사라지는 바람 에 모두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도와주시겠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사 실 저희 마을에서도 벌써 몇 명이나 로마니숲에 들어갔다가 소식이 끊겼답니다." 촌장은 우리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불쌍할 정도로 얼굴에 그늘이 졌다. 자신과 알고 지내던 사람들까지 사라져버리자 보통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정의감이 강한 엔젤과 히크리트 신관은 촌장의 말에 덩달아 표정을 굳혔다. 자기 나라 내에서 일어난 이 괴이한 사건 때문에 희생자가 자꾸 생기는 점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반면에 페드인 왕국 내이 일도 아니고 직접적으로 나와 연관이 없는 일이라 나는 '사람들이 많이 사라졌구나' 하고 가볍게 넘어갔다. "그런데 유령을 봤다는 사람이 있다고 하던데요?" 페르의 말에 촌장은 마치 눈앞에 악령이 나타난 것처럼 얼굴이 새파래졌다. 인간들에 게 정체를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었다. 인간들은 자신 이 잘 알고 있거나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대상에 대해서는 안정감과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전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나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알게 모르게 거부감 과 불안감을 느낀다. 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것이 자신에게 해가 될 지도 모른다 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이런 점은 무식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일수록 더욱 심했다. 그렇기 때문에 평범한 노인에 불과한 그녀는 악령이 무슨 위해를 가할까 싶어 무서워하고 있는 것이다. 촌장이 두려워하자 로즈는 촌장을 안심시키기 위해 히크리트 신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걱정마세요. 여기 히크리트 신관님은 고위 신관이시니 설령 상대가 악령이라 해도 충 분히 상대하실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촌장은 조금 안심이 되는지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의 노 안은 불안하게 흔들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이 유령의 모습을 처음 본 것은 지금으로부터 두 달 전일입니다 . 당시에도 사람들이 사라지긴 했지만 지금처럼 심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보름 달이 뜨는 어느 날 로마니숲에서 그 것이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여러 색의 빛들이 숲 속 여기저기에서 보이기 시작하더니 멋대로 돌아다녔습니다. 다행이 그 빛들은 숲을 벗어나지는 않지만 그 후로 실종자들이 급증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밤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빛들이 숲에서 보인다면 확실히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 다. 사람들이 지나다 횃불을 들고 있는 것이라면 여러 색이 아니라 붉은 빛이 보여야 했고, 짐승들의 안광이라면 마을까지 보일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 것을 무조건 악령 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나는 촌장의 말에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그 빛들이 유령이라는 증거는 없지 않나요?" "아닙니다. 유령이 아니라면 그렇게 감쪽같이 사람들이 사라질 게 할 수 없습니다. 게 다가 처음 빛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이를 이상하게 여긴 몇이 로마니 숲에 가봤는데 숲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사방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고 누군가 자 신들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아 황급히 도망쳐왔다고 합니다." 촌장은 이미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이 유령에 의한 짓이라고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하 지만 유령을 직접 본 사람은 없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가 운데 오직 루시만이 촌장의 말을 곱씹어보고 있었다. "유령이라......그럴 수도 있겠군요." 손을 턱가에 가져가 댄 채 중얼거리는 루시의 말에 우리는 동시에 그를 쳐다보았다. 루시는 시선이 자기에게 집중되자 멋쩍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냥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요." "마음에 걸리는 것? 그게 뭔데요?" "아니,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고 저도 어디서 그냥 들은 말이라." 그러나 이럴 때는 말 한마디가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우리들은 계속 말해보라고 독촉했고, 결국 루시는 우리의 성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입을 뗐다. "여러분, 모두 요이체로스라는 인물에 대해서 아시겠지요?" 당연히 모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안색이 약간 굳어지는 걸로 봐서 그리 평판이 좋은 인물은 아닌 모양이었다. 루시는 자신의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눈을 말똥말똥 뜨고 다른 사람들의 표정만 살피고 있는 나를 보고 의외라는 얼굴로 말했다. "마리엔은 요이체로스에 대해 듣고도 별로 놀라지 않는군요." "요이체로스가 누구인데요?" 내 질문에 이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몸이 휘청거렸다. 설마하는 그들의 얼굴을 보니 꽤나 유명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었다. 하지만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었다. 내가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이자 루시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말했다. "정말 모르십니까?" "네." 내가 당당하게 말하자 모든 이들의 얼굴은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점 차 '저런 기본상식도 없는 여자를 보았는가' 하는 얼굴로 변하기 시작했다. 난 아직 인간계에 온지 1년밖에 안됐어. 이 인간들아! 내 표정은 불편한 심기의 영향으로 서서 히 변해갔다. 그러자 루시가 나를 살살 달래는 어조로 말했다. "요이체로스는 끔직한 살인마로 알려져 있는 여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에 실 존한 희대의 마녀로, 수천 명의 피를 손에 묻혔다고 합니다. 그녀는 전갈의 마녀라고 불렸습니다. 그 이유는 그녀의 붉은 머리와 붉은 눈, 항상 입고 다니는 붉은 로브 때 문이었지요. 원래 그 로브는 붉은 색이 아니라 흰색의 로브였는데 사람들의 피로 붉은 색으로 물이 들어졌다고 합니다. 요이체로스는 사람의 피나 신체를 마법 재료로 사용 하곤 했는데 사람들을 단숨에 죽이지 않고 서서히 고통 속에서 죽어가게 했답니다." 루시는 자신의 얼굴을 조금 내 얼굴에 가까이 가져가되더니 언제나처럼 호감을 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선 사람을 잡으면 두 발을 잘라서 도망치지 못하게 하죠. 그리고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버린 후에 몸 곳곳에 꼬챙이를 박아놓는다고 합니다. 그럼 피가 조금씩, 아주 조 금씩 흘러나온답니다. 그리고 피를 어느 정도 받았다싶으면 다리부터 조금씩 잘라간답 니다. 사람이 너무 고통스러워 쇼크로 기절하면 다시 깨우고 그 일을 계속하죠. 그런 데 왜 요이체로스가 눈과 혀를 그대로 두는지 아십니까? 눈이 있어야 자신의 몸이 어 떻게 되는지를 똑똑히 볼 수 있고, 혀가 있어야 비명을 지를 수 있으니까요. 그녀에게 사람들의 비명과 신음소리는 감미로운 노래와 마찬가지이니까......" "루시퍼씨! 그만하십시오!" 내가 루시의 말에 멍하니 있자 세린이 그의 말을 잘라버렸다. 그가 사람을 어떻게 죽 이는지 아주 세세히 설명하자 그 말에 충격을 받은 걸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세린은 내가 너무 놀란 것이 아닐까 싶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보았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내가 놀란 건 그 것 때문이 아니었다. 나도 사람들이 괴로워하 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는 정신나간 놈들이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 말을 하던 루시의 입가에 걸려있는 미소가 너무나 부드럽고, 검은 눈동자에서 나오는 기묘 한 빛에 당황한 것뿐이었다. 언제나 따뜻한 빛을 발하던 그 눈은 먹이감을 바라보는 독사의 눈처럼 번뜩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