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의아내-1 새로운 시작 "세아야! 윤세아! 빨리 학교가지 못해!" 익숙한 목소리가 고함을 지르면서 세아는 달콤한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막 일어나서 현재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났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싫든 좋든 학교로 가기 위해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세아의 집안은 당대 무술 집안으로서, 검도, 합기도, 태권도 등 각 5단 이상은 따야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랬기에 세아는 어렸을 때부터 각종 무술을 연마해서 뛰어난 체력과 기술을 지니게 되었다. 또 IQ 150 이상이었기 때문 어느 곳에 가나 각광받는 존재였고, 학교도 최상위 성적을 가진 자만이 입학 가능한 T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게다가 뛰어난 두뇌로 세계에서 천재들만 모아놓은 집단인 멘사에 들어서 모든 이들의 부러움을 샀다. 어렸을 때부터 세아의 꿈은 인생 편하게 살다가 도장이나 하나 차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학교 측에서는 IQ 150 이상의 두뇌로 꼭 XX대학에 입학해서 박사가 되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결국 그녀도 할 수 없이 학자가 되보는 것이 어떨까하고 생각했지만, 머리와는 달리 그런 쪽으로 게으른 천성을 어찌할 수 없어 관두는 쪽으로 생각을 해두는 중이었다. 17살인 그녀는 2살 위인 상급생들만 모아 놓은 교실에서 고 3 과정을 공부하고 있으며, 거기에서도 단연 전교 1등으로 상급생들의 선망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알았어요. 간다니까요!" 시계를 보면서 정신없이 준비한 끝에 그녀는 가방을 메고 대문으로 나설 수 있었다. 찬 바람이 얼굴을 정신없이 때리고 지나갔지만 여전히 머릿속은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다. 앞이 어디고 옆이 어디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지각을 해도 상관 없었다. 담임이나 다른 선생님들이 그녀를 너그럽게 봐주기 때문이었다. 사실 거기에는 이유가 다 있었는데, 사실 세아가 전국 대회에 나가서 대상이란 대상을 다 휩쓸어와서 학교의 명예를 드높이는 큰 공을 세우기 때문이었다. `지루하다...` 혼잡한 경적 소리와 삭막한 아스팔트 속에서 세아는 하품하는 자신의 입을 손으로 가렸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 타이밍 좋게도 버스가 멀리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버스가 알아서 멈추자 그녀는 버스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버스표를 집어 넣고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학생들의 대열에 스스로의 몸을 맡겼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서 창 밖을 가만히 응시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뒤로 지나가는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과 하늘을 가릴 정도로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건물이 끊이질 않고 계속 이어졌다. 이러한 광경은 그녀에게 있어서 언제나 똑같은 패턴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졸고 있을 때, 뒷자석에서 여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그녀의 신경을 건드려서 잠을 깨기에 충분했다. "혹시... 저 애가 그 애?" "응, 그렇대. 저 애 아버지와 동생이 죽었다지, 아마?" "몇 년 전에 교통 사고로..." "어머, 정말 안 됐다 얘." "학교에서는 그렇게나 유명하면서..." 그녀는 그들의 대화가 바로 자신을 가리키는 것임을 깨닫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생각 같았으면 당장 그들의 입을 막아버렸을 것이지만 참기로 했다. 가족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미 세아에게 있어서 익숙해져 있었다. 처음에는 저런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다른 생각도 해보고 딴 행동도 해보았으나 그러면 그럴 수록 더 생생하고 또렷하게 들려와서 포기한지 오래였다. 어차피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지 오래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여학생들의 말은 세아의 아픈 기억을 꺼내기에 충분했다. 저주하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러운 기억이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아빠, 윤이야! 눈 좀 떠 봐...` 그 당시에 세아는 한창 어리광을 피울 나이인 7살이었다. 그 때 그녀는 자신의 실수로 아버지와 동생 윤이를 잃었다. 자신이 아버지에게 쓸데 없이 장난치고 말을 거는 바람에, 아버지가 제대로 브레이크를 밟지 못하고 고속도로 난간을 들이받은 것이다. 그 바람에 차가 산비탈을 굴렀고... 결국 유리와 차가 엉망진창으로 찌그러진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팔과 다리가 이상한 각도로 꺾여서 죽어 있는 아버지와 목이 부러져서 죽어 있는 어린 5살의 윤이의 모습이 아직까지도 생생한 연상처럼 머릿속에서 재연되었다. 그녀가 말만 걸지 않았으면 가족이 죽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후회와 연민의 감정이 들자 스스로가 혐오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머리가 좋은 그녀였기 때문에 다시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어버린 지금 또 다시 저들의 말로 인해 심기가 어지럽게 되었다. `이미 다 잊은 일이다. 다시는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세아는 어느 곳에서도 더 이상 울거나 힘들어하지 않았다. 세월이 과거의 감정을 무감각하게 만든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녀는 강인했기 때문에 이제 객관적이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지 오래였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는 게 있다면, 바로 그 사고를 당한 이후로 걸린 이상한 병이었다. 새빨갛게 모여 있는 오로지 자신의 피를 보면 - 아주 많은 양을 - 갑자기 심장이 아파오고 이상할 정도로 혈액이 빨리 순환되는 증상이 있었다. 심하면 이성을 잃고 폭주하기도 하는데 사실 한국에 살면서 피를 보면얼마나 많이 보겠는가. 이 지역의 병원이란 병원은 다 뒤지고 최고로 권위 있는 병원의 의사를 찾아가서 진료를 상담해 봐도, 모두 한결같이 그녀에게 걸린 병명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사는 데 그리 큰 지장이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 병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씁쓸하게 웃은 그녀는 삑- 소리가 나면서 버스가 서서히 멈추자 자동적으로 일어섰다. 그리고 숨막힐 정도로 문에 많이 모여 있는 학생들 사이를 뚫고 버스에서 내렸다. [xx고등학교] 금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는 학교 정문의 간판을 보고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언제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눈에 보여지는 간판을 보는 게 그녀에게는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때였다. 그녀가 정문 바로 앞에 놓여 있는 푸른 빛을 띄고 있는 투명한 구슬을 발견한 것은. 주먹만한 크기에 이상한 빛을 뿜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마치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눈에 띄는데 왜 아무도 줍지 않는 거지?" 그렇게 중얼거린 그녀는 얼른 정문 앞으로 다가가서 푸른 돌을 집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때 뒤에서 거센 경적이 울렸고, 거기에 놀란 그녀는 행동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차 한 대가 그녀를 향해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빠르게 돌진하고 있었다. 피해야 할 상황이었으나 몸과 머리가 미처 인식하기 못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눈을 꼭 감았다.- 그 때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몸이 위로 붕 떠지는 것을 느낀 세아는 황급히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놀랍게도 그녀 자신의 몸이 공중에 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구슬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상한 기운이 그녀의 몸을 위로 들어 올리게 만들었던 것 같았다. 학생들이 모두 정지해 있다는 사실과 차가 막 1m를 남겨두고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아주 부드럽고 강한 빛에 쌓여서 서서히 정신을 잃어갔다. 수면제가 몸 속에서 퍼지는 것처럼. 마왕의아내-2 새로운 시작 차가운 공기 때문에 세아는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서 이불을 몸 위로 덮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불의 촉감이 매우 좋았다. 동시에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도 오늘따라 느낌이 좋았다. 굉장히 푹신해진 기분이랄까. "내 침대가 이렇게 푹신했었나..." 중얼거린 그녀는 휘청거리면서 일어났다. 머리가 더 이상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세아는 아무 생각없이 하품하면서 기지개를 폈다. 오늘 하루도 역시 똑같은 생활의 반복이었다. 어서 준비하고 학교에 가야 했다. 그 때 그녀의 시야로 커다란 거울 같은 것이 흐릿하게 잡혔다. 둥근 타원형으로 길쭉하게 아래로 뻗은 거울은 굉장히 커보였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커보이는 걸까하고 생각한 그녀는 오랜 세월 함께 했던 자신의 방이 낯설게 느껴짐을 깨닫고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아직까지 머리가 아파서 그런 것 같았다. 그녀는 거울을 응시하면서 가만히 중얼거렸다. "붉은 머리카락이 참 길구나..." 약 일각 정도를 아무 생각없이 거울만 쳐다보다가 뭔가가 크게 달라져 있음을 깨달은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경악했다. "뭐야! 내 머리카락이 붉고 길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자신의 말 같지 않았다. 분명히 한국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 나왔다. 거기에 나는 적지 않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목소리 또한 한층 더 가늘고 예뻐졌다. 그녀는 손으로 세게 눈을 비비면서 거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거울 속의 여인이 매우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세아는 허리까지 오는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정신없이 만져대다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할 말을 잃을 정도로 황당하고 이상한 광경에, 그녀는 이게 꿈이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차가운 공기가 살갗을 시리게 만드는 것으로 보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침에 그녀의 방에 있는 거울 속의 여자는 간편한 줄무늬 잠옷에 참한 흑색 단발의 여학생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오늘은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머리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몸을 응시하면서 아무 생각없이 중얼거렸다. "몸이 참 하얗고 아름답네." 그녀는 그렇게 홀린 듯이 거울 속의 몸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아까처럼 경악했다. "내 몸이 저렇게 하얘? 게다가 저 노출이 심한 잠옷은 또 뭐야!" 거울 속의 여자가 막 소리를 지르면서 정신없이 손으로 몸을 더듬었다. 학교에 다닐 때 글래머들만 보면 은근히 부러워지는 자신이 싫었던 세아였다. 그런데 지금은 모델이라고 생각될 만큼 남부러울 게 없는 몸매를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어색하게 두 손을 펴서 응시했다. 그리고 손을 들어서 팔을 조금 문질러보았다. 눈처럼 한없이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세아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의 피부는 분명히 황토색을 지니고 있었고 약간 거칠었다. 그러나 그녀의 피부는 깨끗하고 매끈하기만 했다. "도대체 거울 속의 넌 누구야? 이게... 나야? 정말 아름다워." 믿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 거울 속에서 움직였다. 한국의 미녀 연예인도 이보다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분명 그녀의 얼굴은 평범하고 수수해야만 했는데, 거울 속의 여자는 감탄사를 내뱉을 정도로 아름다워다. 이 모든 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그녀는 혼란에 빠졌다. 밤새 누군가가 자신을 성형 수술이라도 해서 이렇게 바꿔 놓은 것일까? 그러나 신체나 얼굴 어디에도 성형 수술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세아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이 확 깨자 모든 사물이 눈에 정확하게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속해 있는 방이 어떤지를 인식하는 순간, 그녀는 또 다시 경악했다. "세상에! 마치 중세 시대같아!" 그녀가 생각하고 있던 딱딱하고 낡은 침대 대신에 화려한 실크로 만들어진 서양식의 거대한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방의 넓이도 거실만한 것이, 무슨 원룸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벽에 걸려 있는 화려한 액자들과 서양식으로 된, 옷장, 화장대, 쇼파, 탁자 등 모든 게 중세 시대를 연상케 하는 가구들만 모여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다 낯설고 고가로 보였다. 세아는 창가로 얼른 다가가서 창문을 활짝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거대한 빌딩들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심어져 있는 나무, 혼잡한 차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이 이상한 공간으로 왔음을 깨닫고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히 밖은 밝았지만 한국의 하늘과는 달리 어두운 색을 띄고 있었다. 저 멀리 거대한 산이 흐릿하게 보였고, 그 바로 앞에는 밀림을 연상케 하는 숲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사람들이 사는 곳이 있었는데 처음보는 모양의 집들이 불규칙적이면서도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전혀 다른 공간이라는 인식을 하는 순간, 신선하고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충격이 전류가 흐르듯 몸에 퍼졌다. "그래. 이제 생각났다. 분명히 나는 학교 교문 앞에서 이상한 돌을 봤었지. 그리고 그것을 주우려고 했는데 뒤에서 차가 달려왔고... 순간 몸에 이상한 기운이 휩싸이면서 정신을 잃었지. 그리고 눈을 떠보니 전혀 다른 공간과 모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그녀는 아직까지도 자신이 왜 여기에 왔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미칠 지경이었지만, 일단 차분하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그리고 모든 사실을 종합, 판단, 분석한 결과 그녀는 결코 비현실적인 결론을 내렸다. "환상의 세계. 드래곤과 정령, 엘프, 드워프, 온갖 종류의 몬스터, 국왕과 귀족들이 사는 계급 제도가 존재하고 마법사와 용병, 마족 또는 천족들이 존재하는 그 곳." 언젠가 `환상 마법` 이라고 불리우는 책을 읽었을 때, 다소 흥미를 느꼈던 그녀는 그런 것들에 대해 자세하게 읽어 두었고, 현재까지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이 곳이 다른 차원의 세계라는 건, 아직까지 너무나도 당혹스러운 감정 때문에 믿기가 힘들었다. 세아는 추운 나머지 창문을 닫고 거울로 달려갔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눈동자의 색을 관찰했다. 예상대로 눈동자의 색깔이 짙은 보라색이었다. 언젠가 그녀는 책에서 마족의 눈 색깔이 보라색이라는 것을 언뜻 읽은 적이 있었다. "설마 마족? 내가? 사람인 내가 마족의 몸에 들어왔다는 건가?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그녀는 마족이 인간보다 몇 십 배의 전투력과 6000살이나 되는 엄청난 생명력, 그리고 타고난 마법 능력을 지닌 종족이라고 알고 있었다. 실제로 지상, 즉 이 세계를 기준으로 했을 때 중간계에서 모든 생명들을 지배하는 것이 드래곤이라면, 그 바로 아래의 마계에서는 마족들이 이 곳을 지배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마족과 드래곤이 팽팽한 경계선을 그어놓고 여태까지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도 기가 찬 그녀는 다시 방을 둘러보았다. 만약에 어떻게 된 이유인지는 몰라도 자신이 마족의 몸에 들어왔다면, 그리고 이렇게 좋은 방에 있는 마족이라면, 그녀는 필시 마족들 중에서도 상류층에 해당할 것이다. 그것도 엄청난 부와 권력을 지닌. 하지만 여전히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 그녀는 경각심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그러던 찰나 갑자기 문이 열렀다.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날카롭게 문을 응시했다. 혹시나 그녀의 정체가 사람이라는 게 알려지면... 문을 열고 들어온 평범한 얼굴의 여자는 하녀라고 추정되는 수수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한숨을 쉬면서 질린다는 듯이 세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루린 님! 또 그 잠옷 입으시고 몸매 감상하세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러 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우시니까." 이루린. 분명히 눈 앞에 있는 하녀는 분명히 세아 자신을 향해 이루린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자신은 정말로 다른 마족, 그것도 이루린이라고 불리우는 여자의 몸 속에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그, 그래..."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아 어색하게 대답한 세아를 향해 이상하게 쳐다본 하녀가 재촉하듯이 입을 열었다. "이루린님! 왜 그러고 서 계세요? 빨리 준비하셔야죠. 어서 마왕성으로 가셔야 하잖아요!" `마왕성? 마왕이 사는 성인가? 거기엔 왜?` 세아는 스스로 의문을 품으면서도, 최대한 상황에 맞게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마음대로 잘 되지 않았지만. 세아, 아니 이제 이루린이 된 그녀는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몇 시간 남았는데?" "3 시간 밖에 남지 않았어요." 하녀는 옷장으로 가더니 문을 열고 옷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루린은 뒤에서 옷장 속에 든 옷들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것을 깨닫고는 속으로 경악했다. 하녀가 초조함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카란델 님과 마리엔 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일단 제가 마왕성으로 갈 간편한 드레스를 준비해오지요." `카란델? 마리엔? 아무래도 대충 이 이루린이라고 하는 마족의 부모 같은데...` 이윽고 하녀가 드레스를 하나 꺼내 왔을 때, 이루린은 싫었지만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억지로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드레스처럼 활동하기 불편한 옷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옷을 입어야 하나? 정말 끔찍하군!` 속으로 온갖 불평을 다 늘어놓은 그녀는 약간 가슴 쪽이 파이고, 하늘하늘하면서도 화려한 기품을 지니고 있는 드레스를 못마땅한 마음으로 응시했다. 아름답긴 했지만 그녀의 취향은 결코 아니었다. 결혼식에서나 입을 줄 알았던 드레스를 이제 매일 입어야 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이루린은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될지 막막하기만 했다. `왜 내가 이 곳에 오게 되었을까? 정문 앞에 놓여진 그 푸른 구슬 때문에 여기에 온 걸까? 하지만 마치 그 구슬은 나를 대리고 가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내가 이 곳에 오자마자 사라졌다. 어쨌든 앞으로 이 이루린이라는 마족으로 살아가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다시 내가 살던 세계로 돌아가야 하는 거지? 그 푸른 구슬을 다시 찾아야 하는 걸까? 하지만 어떻게? 그리고 윤세아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는 내 몸은 어디로 간 걸까? 사라졌다면 왜? 지금 내가 살던 곳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까. 내가 없다고 난리가 났을까, 아니면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을까. 그나저나 엄마가 보고 싶어...` 온갖 끔찍한 상상들이 머릿속을 괴롭혔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그녀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곧 생각을 바꾸고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속으로 다짐했다. `에라, 모르겠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일단 상황을 지켜보자.` 이루린은 현재만을 기억하려고 애쓰면서 하녀가 특이한 방식으로 자신에게 옷을 입히는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윽고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구두까지 다 신었을 때, 이루린은 본의 아니게도 최대한 상냥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맙군요. 드레스 마음에 들어요." 그러자 하녀가 놀라는 듯한 눈동자로 입을 열었다. "제게 존댓말을 쓰시다니... 그리고 평소에는 너무 조용하고 얌전하셔서 거의 말이 없으셨던 분이..." 이루린은 원래 이 몸의 주인의 성격을 파악하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원래 이 이루린이라는 마족의 성격은 매우 조용하고 말이 없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답답하게 말 없고 얌전한 생활을 할 그녀가 아니었다. `오늘 부로 주인이 바뀌었으니 역시 내 성격대로 살아야겠지? 그리고 존댓말을 쓰면 안 되는 거였구나.` 그렇게 생각한 이루린은 적당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냥 한번 쯤은 항상 날 도와주는 네게 격식을 차리고 싶었어. 그리고 앞으로는 말도 많이 하고 밝게 살아가려고." 하녀가 처음으로 감탄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 미소에 이루린은 처음으로 자신이 마치 진짜 이루린이 된 듯한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스스로가 연기를 잘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고마워요, 이루린 님. 이렇게 사려가 깊으신 분이었다니..." "괜찮아. 이만 난 가보겠어." 그렇게 말한 이루린은, 한 번도 잡아 본 적이 없는 문의 손잡이를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 직후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먼저 중세의 성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천장의 높이가 눈에 들어오고, 그 다음으로 복도에 깔린 붉은 카펫이 눈에 들어왔다. 복도에 세워진 무기와 방어구 세트가 주인없이 사람 형상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서 세워져 있었다. 다소 위협적이게 보이는 창을 응시하면서 그녀는 낯선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한참 진귀한 문화 유산이라도 되듯이 복도를 구경하다가,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까먹었다는 사실을 뒤늦게서야 깨닫고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런. 길을 잃었잖아! 마왕성에 왜 가는지는 모르지만 3시간 밖에 안 남았다면서... 아까 그 하녀에게 이루린의 부모님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물어봤어야 하는 건데." 이루린은 잘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그리고 이 곳에서도 그녀의 치명적인 약점은 한 가지 있었다. 바로 방향치라는 점이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마왕의아내-3 새로운 시작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발이 아플 정도로 헤맨 지 벌써 1시간이나 지났다. 그 마왕성에 가야 한다는 시간까지 앞으로 2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슬슬 짜증이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욱 더 필사적인 심정이 되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여전히 낯설고 처음보는 곳만이 눈앞에 펼쳐질 뿐, 아까 자신이 나왔던 방은 보이지 않았다. 처음 입어보는 드레스도 불편했지만, 무엇보다도 불편한 것은 이 성의 크기였다. "쓸데 없이 부피만 커가지고!" 원래의 이루린이라면 이렇게 고생해도 대놓고 불평을 늘어 놓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진짜 이루린이 아니었으므로 대놓고 불평하면서 신경질을 부렸다. 한껏 말해놓고 주위를 둘러본 그녀는, 경악하고 있는 한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나서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그 할아버지 마족이 조심스러게 물음을 던졌다. "이, 이루린 님?" 난처한 상황이었다. `젠장, 어째서 일이 이렇게 꼬일까.` 이루린은 곧바로 연기에 돌입하기로 했다 .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아 보이니까 경어를 써도 상관 없겠지?` "어머, 집사. 요즘 들어서 머리가 너무 아파요. 막 만사가 싫고 기분이 좋지 않아요. 그래서 요즘에는 상스러운 말이나 행동 등을 자주해요. 어떻게 하죠?" 마음대로 집사라고 칭했던 게 통했던지, 그는 그제서야 납득이 간다는 표정을 보였다. 그제서야 이루린은 속으로 안도했다. 이루린은 억지로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그리고 1시간 동안 성을 헤맸던 끔직한 처지를 벗어나기 위해 집사에게 간절히 말했다. "집사, 나 부모님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줄 수 있어요?" 집사의 얼굴에 있는 주름살이 깊어졌다. "좀처럼 까먹지 않으시는 분이... 오늘은 길을 찾지 못하신 모양이군요." 이루린은 또 임기응변식으로 자연스럽게 둘러댔다. "오늘은 머리가 좀 아파서요." 집사가 걱정스런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더니, 곧 앞장서서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 따라오십시오, 이루린 님." "알았어요, 집사." 이루린은 이 처지를 벗어난 사실에 대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렇게 약 10분 정도를 쉬지 않고 걷자, 그녀는 은색으로 칠해져 있는 거대하고 화려한 문을 볼 수 있었다. 이루린은 자신이 1시간이나 헤맨 것에 비해 집사는 마치 이 성을 다 꽤뚫어보는 것처럼 약 10분 만 투자해서 간단하게 이 곳으로 왔다는 사실에 약간의 허무함을 느꼈다. 그녀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부부로 추정되는 두 마족이 탁자에 앉아서 비싼 컵으로 뭔가를 마시고 있었다. 서양식 이름으로 추정해 보건데 마리엔이라는 마족이 어머니인 것 같고 카란델이라는 마족이 아버지인 것 같았다. 조금 기품 있는 분홍빛 드레스를 입고서 새침떼기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의 어머니 마리엔과, 다소 단색으로 이루어진 고풍스러운 옷을 입고서 인자하지만 조금 준엄한 인상을 주고 있는 아버지 카란델이 그녀를 향해 공통적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현실 세계에서는 어머니만이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었는데, 이렇게 이루린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신을 향해 애정어린 미소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만 느껴졌다. "또 길을 잃었느냐?" 카란델이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가벼운 어조로 그녀에게 말하면서 마리엔을 응시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을 정말 어찌 저리도 빼닯았는지." 마리엔이 장난스럽게 인상을 쓰면서 부정했다. "무슨 소리예요! 저건 당신의 어릴 적 모습이라구요." 저들의 대화로 봤을 때 이 이루린이라는 여자는 확실히 방향치인 것 같았다 . 그 점이 닮았다는 것은, 굳이 방향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없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녀가 안도하는 사이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엔, 이루린도 왔고 하니 이제 출발하는 게 어떻겠소? 2시간 밖에 안 남았소." "그렇게 하죠." 아직까지 적응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노력할 수 밖에 없었다. 아까 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한참을 그렇게 복도를 따라 나서다가 문득 성의 입구까지 왔다는 사실에 이루린은 큰 호기심을 품었다. 입구 밖에는 과연 뭐가 있을지, 그녀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느 정도 안정을 취하자 어떤 일이 펼쳐질지에 대한 기대감이 마음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녀는 카란델과 마리엔을 따라 불편한 구두 때문에 인상을 쓰면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또 다시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오늘 정말 많이 놀라는군. 그나저나...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 막대한 부를 소유하고 있는 모양인데...` 성의 앞뜰에는 없는 게 없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넓은 공터 한 가운데에 거대한 분수대를 장식하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의 조각상에서 물이 빛나는 은색 실처럼 뿜어져 나오더니, 사방으로 잔잔하게 흩어졌다. 처음보는 각종 꽃과 특이하게 생긴 나비도 눈에 띄었는데, 전체적으로 봤을 때 색이 알록달록하고 다양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주위를 둘러보다가, 카란델과 마리엔이 손짓하는 곳으로 다가갔다. 카란델이 손으로 처음 보는 마차를 가리켰다. 이루린은 순간 타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마차가 조금 이상하게 만들어져서 주저했다. 딱히 설명할 수 없었지만, 하여튼 그녀의 눈에는 조금 이상하게 보였다. 이루린은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다. "이 마차 꼭 타야 하나요?" "그러면 날아서 가겠느냐? 넌 아직 성년식도 치르지 않았으니, 날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성년식? 그건 또 뭐지?` 마리엔이 단호하게 그녀를 마차 쪽으로 밀면서 말했다. "이루린? 군소리말고 타거라." 이루린이 인상을 쓰고 가만히 있자, 카란델이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인간의 나이로 아직 18세이긴 하지만, 아직도 귀여운 면을 지니고 있구나." `인간의 나이로 쳤을 때 이루린은 나보다 한 살 더 많았구나.`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결국 마차에 올라탈 수 밖에 없었다. 마차는 비교적 작고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어, 겉모습과는 달리 별 부담감 없이 앉을 수 있었다. 마차가 덜컹거리며 출발하자, 몸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창 밖을 바라보면서도, 귀는 카란델과 마리엔에게 집중시켰다. 가능한 한 이 곳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한창 사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다른 주제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기왕 말하는 것이지만, 군주님은 참으로 냉정하오. 언제나 군주님을 모셔왔지만 항상 대하기가 어려운 건 변하지 않았소." 약간은 씁쓸한 어조가 묻어 나오는 카란델의 말에 마리엔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말했다. "그런 소리 마세요, 카란델. 적어도 군주님은 역대 군주들보다도 더 강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카란델, 언젠가 당신이 말했었지요? 정말 미청년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수려한 외모를 지니고 있다고 말입니다. 성격이 차갑다는 것만 제외하면 정말로 완벽하신 분이긴 하지만... 여태까지 그의 마음에 든 여성 마족이 없었다는 사실이 걱정이군요. 우리 이루린도 이번에 군주님의 눈에 띄어야 하는데..." 이루린은 마지막 대목에서 마리엔의 기대감어린 강렬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에 그녀는 태연한 척 창 밖을 바라보는 시늉을 계속했다. 카란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제 이루린도 999살이니 성년식을 치뤄야 할 것이오. 신부의 조건이 모두 성년식을 치르기 이전의 나이여야 하니까, 이루린에게는 충분히 자격이 있소." 그 말에 이루린은 그게 무슨 말이냐고 큰 소리로 물어볼 뻔한 자신을 가까스로 제어했다. `신...부? 신부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마리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군주님께서는 아내를 맞이하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으실 겁니다. 아마 장로들이 형식적으로라도 필요하다고 거세게 요구해서 성년식을 치르기 이전의 모든 여성 마족들이 한꺼번에 마왕성에 모이는 것이겠죠. 물론 서열 100위 이내의 가문이라는 조건을 달고서." 마리엔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999살이면 치를 시험이 굉장히 많겠죠. 예를 들어, 성년식을 치른 후에 비행 시험을 본다던가, 아니면 마법이나 어느 정도의 일정한 전투 능력 등등 여러가지를 보겠죠. 물론 카란델, 당신의 딸이 2써클의 마력밖에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조금 의외이긴 하지만 말이죠. 하지만 우리 이루린은 많은 사람들에게 천상의 미를 지녔다는 소리를 들으니 상관 없어요." 그 말에 이루린은 확신하게 되었다. 자신이 마왕성에 가는 이유를. 그러니까 즉, 마왕인 군주의 아내가 되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닌가. 한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누군가와 결혼할 생각을 하니 한기가 들이닥치는 것처럼 오싹했다. 자랑스러워하는 마리엔의 말에 카란델이 조금 감정적인 어조로 소리쳤다. "2써클이라니? 마력이라면 몰라도, 마법 이론만큼은 적어도 5써클 정도는 되야 하오. 그런데 2써클이라니... 2써클은 카넬리안 가에서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소! 서열로 따지면 나보다 위인 마레니아의 딸인 엘리세아는 마법 이론만해도 벌써 6써클이라고 들었소. 외모로 따지자면 이루린이 훨씬 위긴 해도 말이오. " `다 들린다, 들려.` 마리엔이 나무라듯이 말했다. "이루린은 여성이니까 당신들 남성 마족들처럼 서열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왜 벌써부터 마법 이론 운운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마법 쪽은 성년식을 치른 이후부터 두각을 나타낼 수도 있는 거예요." 순간 이루린은 생각했다. 이 이루린이라는 마족이 굉장한 돌머리라서 마법 이론을 배우는 것에 소질이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한 번도 써보지 못한 마법에 대해 일종의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마력이라면 몰라도 이론을 공부하는 것 쯤이야, 그녀에게는 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왕의 신부... 거기에 대해 생각하자 이루린은 머리가 아파져서 관두기로 했다. 복잡한 심정으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으니 갑자기 덜컹거리던 마차가 멈췄다. 카란델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려야 하겠지." 집사가 문을 열어주자 카란델이 먼저 내려서 마리엔의 손을 잡고 내려주고, 그 뒤를 이루린이 따라서 내렸다. 마계의 땅을 밟고 어색하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녀는 눈 앞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성을 보고 헛숨을 들이켰다. 이 성의 크기는 정말 상상을 초월할 만큼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었다. 고층 빌딩을 세 겹 정도 쌓아 놓은 모습이었기에 놀라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녀는 어두운 마계의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웅장하고 위엄이 넘치는 건물 구조에 압도당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곤 할 말을 잃었다. 그 때 마리엔의 웃음기 섞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루린? 거기서 뭐하니? 이리 오렴." 카란델과 마리엔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공터로 연결되는 부분으로 들어갔다. 그러한 태도로 보아 이 성을 많이 가본 게 확실했다. 이루린은 어색하게 주위를 둘러보면서 카란델과 마리엔 뒤를 따라갔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지?` 그 때 바로 옆에서 카란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왕성에 온 걸 환영한다, 이루린." 그랬다. 여기가 바로 마왕성이었던 것이다. 마왕의아내-4 새로운 시작 “이루린은 마왕성에 처음 와보니까 좀 놀랐겠구나. 하기야 원체 이 마왕성이 커야 말이지.” 이루린이 마왕성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 카란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루린? 우리는 마왕성에 가서 할 일이 있으니 우리가 나올 때까지 성을 돌아다니면서 지리를 익혀두고 구경도 했으면 하는구나. 그러면 이만 가겠다. 나중에 여기서 보자." 카란델은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후에 손으로 마리엔의 어깨를 감싸고 마왕성으로 들어갔다.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이 현재 혼자이며,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카란델과 마리엔이 돌아올 때까지 마왕성 주변의 공터를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마왕성만 보며 걸었다. 이 정도면 수천 명이 살아도 가능할 것 같았기에 그녀는 여전히 놀라고 있었다. 중세의 베르사유 궁전과 흡사하다라고 할까. 그렇게 오랫동안 걸은 후에, 그녀는 다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이런! 또 길을 잃었네." 이루린은 어쩔 수 없는 방향치인 자신이 조금 한심스러워 짧게 한숨을 내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 낮선 환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공터 바로 옆에 작은 숲이라고 생각될 만큼의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숲의 끝은 마왕성의 담벼락이었다. 혹시나 마왕성의 입구가 어딘지 알고 있는 마족을 만났으면 하고 기대했으나, 그런 마족은 흐릿한 영상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삭막하고 한적한 공간을 알고 보니 자신만이 걷고 있었던 것이었다. 문득, 작은 숲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숲에 어떤 것이 있을까하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녀는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한 채로 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런데 그녀는 거기서 신기한 꽃을 하나 발견했다. 커다랗고 넓적한 붉은 꽃잎을 지닌 처음 보는 꽃들이 즐비하게 심어져 있었던 것이다. "정말 예쁘다." 그녀는 꽃의 아름다움에 잠시 현혹되어 손을 뻗어서 꽃을 만져 보려고 했다. 사람으로 치자면 굉장히 청순하고 가련해 보인다고나 할까. 그녀가 그 꽃에 손을 댈 때까지만 해도, 그 꽃의 이미지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곧 그녀가 그 꽃을 건드리는 순간, 갑자기 노란 봉우리가 송곳 이빨로 변하더니, 그녀의 손목을 물어뜯으려고 재빨리 줄기를 늘어뜨렸다. 그녀는 다행히 한국에서 무술을 연마한 덕분에 그 갑작스러운 공격에도 상처를 입지 않고 피할 수 있었다. "뭐야, 이 꽃은?" 정신 없이 송곳 이빨을 들이대는 꽃의 모습에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 이루린은 발로 그 꽃의 굵은 줄기를 차버렸다. 그러자 그 꽃은 그 한 방에 매우 괴로운 듯이 몸을 꼬더니, 곧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머리 부분을 아래로 내려뜨렸다. 계속 대들었을 때의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아주 영리한 꽃인 모양이었다. "착하기도 하지. 그런데 마왕성에서는 이런 엽기적인 꽃도 키우나?" 마왕성의 위용과는 한참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그녀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숲을 거닐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걸었을 때, 그녀는 작은 푯말을 보고 나서 깜짝 놀랬다. [식인 핌피아 꽃. 주식은 인간이며 부식은 몬스터임. 군주의 개인 애완동물이라 할 수 있으니 건들지 말 것.] `애완동물...` 그녀의 머릿속에 강한 이미지로 잡혀 있는 마왕이 이런 엽기적인 꽃을 키우다니. 새삼 의외라는 기분이 들어 굉장히 묘한 느낌을 받은 이루린이었다. 푯말을 지나쳐서 계속 걷었는데도 숲은 끝없는 시계처럼 계속 이어졌다. 성의 앞문은커녕 아는 장소 하나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20분 정도 지나서 슬슬 걷는 것에 지치고 슬슬 짜증이 날 즈음 그녀는 마왕성의 거대함에 새삼 질릴 수밖에 없었다. 그냥 돌아다니지 말고 제자리에 있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다리가 너무 아프잖아!" 점점 다리가 저려왔을 때, 그녀는 한 그루의 나무를 볼 수 있었다. 엄청나게 커다란 - 둘레가 4m정도 되는 - 굵기의 나무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몇 천년 동안 그 자리에서 우뚝 세월과 함께 살아온 흔적이 드러나는 신비한 나무는 붉은빛을 띄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이런 나무가 주위에 널리고 널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한참 나무의 보이지 않는 무게를 느끼면서 그녀는 서서히 위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족…? 누구지?" 높이 옆으로 뻗어 있는 굵은 나뭇가지 위에서 누군가가 몸을 맡기고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그 마족의 길다랗고 매끄러운 흑발이 햇빛에 반사되나 무척이나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서 자고 있었기 때문에 아래에서도 충분히 얼굴이 보였는데, 눈, 코, 입이 매우 절묘하게 자리잡고 있는 이목구비가 정말로 매력적이라고 할까. 편하게 자는 모습은 정말로 평온하고 그림 같았다. 이렇게 멋진 미남이 이 성에 살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그 마족의 얼굴을 계속 응시했다. 그러다가 자신이 왜 여기에 와 있는지를 깨닫고 나서야 시선을 거두었다. 현재로서는 마왕성의 입구가 어디인지 물어보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길을 잃었으니 물어보는 건 당연한 거야.` 그녀는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울 생각을 하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 또한 나름대로 자는 도중에 깨우는 것을 무척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위에 마족이라곤 이 남자 밖에 없는 상태에서 길을 물어보지 않으면 하루종일 헤맬지도 모르기 때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한번 심호흡을 하고 나서 나무 위를 향해 크게 외쳤다. "이봐! 자는데 미안하지만 길 좀 물을 수 없을까?" 계속 불렀는데도 그 마족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목소리가 작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카란델과 마리엔을 떠올리며 초조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좀 더 크게 불렀다. "이봐! 정말로 자는데 미안하지만 길 좀 물을 수 없어? 마왕성 입구로 가려고 하는데..." 이루린이 악을 쓰듯이 외치자, 그제서야 그 마족의 눈이 뜨여졌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루린을 응시하더니, 귀찮다는 듯이 반대편으로 고개를 획 돌리고는 그 자세 그대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의 냉랭한 처사에 당황하면서도 은근히 기분이 상했던 그녀는 팔짱을 끼고 인상을 심하게 찌푸렸다. "야! 사람… 아차, 마족 말에 대답해야 할 것 아냐!" 그녀는 순간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 마족의 행동을 주시했다. 아직 사람이 아니라 마족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조심해야겠다고 느꼈다. 그가 혹시나 벌떡 일어나서 다른 행동이라도 한다면… 그러나 그는 똑같은 자세로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어떠한 말조차도 하지 않고서. 그녀가 계속해서 부르자, 그 마족은 고개를 들더니 잠시 이루린을 응시했다. "정말 시끄럽군." 무척이나 아름다운 목소리가 그 마족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다르게 들어보면 굉장히 차갑고 듣기 힘든 목소리였다. 잠시 그 마족의 목소리에 빠져 있던 그녀는, 곧 정신을 차리고 그 마족을 쏘아보았다. 그 마족은 그 말을 한 직후에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던 것이다. 그녀는 당연히 자신을 무시한 그 마족를 용서할 수 없었다. "내 말을 끝까지 무시해?" 그녀는 사악한 미소를 짓고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돌덩이를 찾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발에 꼭 맞는 돌덩이 하나가 눈에 들어오자,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그 돌덩이를 옮겨서 적당한 위치에 놓았다. 이제 다 준비가 된 것이다. `날 무시한 댓가는 톡톡히 치르게 하겠어.` 그리고 잠시 후에 세 가지의 소리가 났다. 첫번째 소리는 그녀가 돌덩이를 발로 차는 소리였고, 두번째 소리는 그 커다란 돌덩이가 그 마족의 머리에 직격할 때의 소리였다. 세번째 소리는 그 커다란 돌덩이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조금 위험하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녀는 마족이 이런 돌덩이로 죽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인간이라면 뇌출혈로 죽겠지. 그 마족이 다시 고개를 돌려서 그녀를 응시했다. 사람을 압도하고도 충분히 남을 만한 깊고 차가운 눈동자에 그녀는 약간의 긴장감을 느꼈지만, 곧 마음을 단단히 먹고 흑발의 마족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는 스스로 잘못한 게 없다고 판단했으니까. "이봐, 마족. 남자가 여자의 길 안내를 하는 게 도리잖아?" 그녀는 화를 풀었다는 쾌감에 밝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그 남자가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는 건가." 매서운 눈이 그녀를 향했지만, 그런 눈빛은 한국에서도 많이 받아 봐서 매우 익숙했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단순하게 생각하면서 말했다. "당연히 이 성에 사는 마족 중 하나겠지." 그 흑발의 마족은 그녀를 빤히 응시하더니, 갑자기 일어서서 가뿐하게 아래로 뛰어 내렸다. 이루린은 의외로 자신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키를 가진 그 마족에게 약간의 위화감을 느끼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안내해 주겠다." 그가 차갑고 딱딱하게 말하면서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루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는 그 남자의 태도에 적응이 되지 않아서 당황했다.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대한 사람은 이 마족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걷는 그 마족과 나란히 걷기 위해 발을 빠르게 굴렸다. 이루린은 삭막하고 어색한 관계를 조금이라도 개선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만 했다. "이름이 뭐야?" "......" "왜 대답하지 않는 거야?" "……." 시종일관 묵묵부답으로 대하는 마족의 태도에 그녀는 다시금 적지 않게 당황했다. `뭐 이런 마족이 다 있어? 마족은 원래 다 이런 성격을 지닌 건가?` 이루린은 걸으면서 그 마족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러자 그 마족이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관심 없다는 듯이 앞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왠지 시체를 잡고 있는 기분이 들어 무안했다. 하지만 곧 당당하게 말했다. "네가 말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말하겠어." 이루린은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리느라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떠올랐을 때야 비로소 말할 수 있었다. "카란델의 딸인 이루린이라고 해." 그러자 잠시 그가 걸음을 멈춰서고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루린은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동생이라 이건가." 그가 중얼거리듯이 말문을 열자, 이루린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며 서 있었다. 뜬금없이 동생이란 말이 왜 나온단 말인가. 그녀가 눈살을 찌푸리며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는 다시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얼른 그의 옆에 나란히 서서 걸었다. 그리고 왜 그가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루린은 어깨 너머로 흔들거리는 그의 흑발을 가만히 응시했다. 굉장히 자연스럽고 아름다웠다. "흑발이 굉장히 잘 어울리네." 그는 걸으면서 다시 그녀를 응시했다. 착각이었는지는 몰라도 차갑기만 한 그의 눈에 드리워진 얼음이 조금 걷혀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상관없다는 얼굴로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이루린은 그런 그 마족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다가 앞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마왕성이다!" 이루린은 그녀의 부모와 헤어졌던 장소를 응시하면서 잡고 있었던 그의 팔을 놓았다. 마왕의아내-5 새로운 시작 그리고 성큼성큼 마왕성의 입구로 다가섰다. 아직 마왕성의 입구에는 아직 그녀의 부모가 나와 있지 않았다. 그녀는 마왕성을 구경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앞선 나머지 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입구 근처에 왔을 때, 그녀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아야..." 인상을 한껏 쓰면서 무릎을 쓰다듬은 그녀는 주위에 이 쪽팔리는 모습을 본 마족이 있는지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마침 다행이게도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아팠지만 가까스로 참을 수 있었다. "무릎이..." 흉터 하나 없는 하얀 무릎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그녀는 그 흑발의 마족을 도와달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서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 마족은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볼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정신 구조가 제대로 된 사람, 아니 마족이라면 아무리 친하지 않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넘어졌으면 두와주는 것이 상식인데 이 마족만큼은 예외였다. 혹시나 마족이 다 이렇게 예의가 없고 차가운지 생각해봤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아까부터 보아온 이 마족의 행동으로 보아 모든 게 다 성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였다. 그 사실은 그녀를 은근히 화나게 만들었다. 그냥 빤히 지켜보고 있다니. "넘어졌으면 일으켜 세워주는 것이 남자의 도리잖아! 왜 가만히 보고만 있어!" 이루린이 불쾌하고 조금은 서운한 마음으로 응시하자 그 흑발의 마족은 얼굴하나 변하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난 마왕성의 안내만 부탁 받았지, 널 일으켜 세우라고는 부탁 받지 않았다." 그렇게 말해 놓고는 그냥 가만히 서서 그녀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 그녀는 기가 막히는 마음으로 그 흑발의 마족을 응시했다. 허탈하게 고개를 저은 후에 몸에 묻은 먼지를 털고 벌떡 일어섰다. `뭐 이런 마족이 다 있어?` "난 너같이 매너 없는 마족은 사양하겠어. 도대체 넘어졌는데 일으켜 세워주지는 않고!" 이루린이 한껏 비꼬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적어도 남자라면 여자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보여야 했다. 그런데 이 마족은 그 모든 예의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 또한 차갑게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말했다. "나도 너 같이 돌덩이를 발로 차서 남의 머리에다 맞추는 그런 마족은 사양하고 싶군." 이루린은 언성을 높였다. "뭐야! 나도 정말 너 같은…." 여차하면 싸움이 날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루린은 절대로 이 마족에게 지지 않으리라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그 때였다. "이루린! 이게 무슨 짓이냐!" 위엄이 깃들어있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이루린은 힘을 주었던 눈을 풀고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자신의 아버지 카란델이 노기가 띈 표정으로 마왕성에서 부리나케 달려나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이루린은 잠시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세계에 온 이후로 카란델의 다른 표정을 본 게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도대체 잘못한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나름대로 완벽하게 행동했는데도. "정말 혼자 놔 두는 게 아니었는데..." 카란델의 목소리에 이루린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몰라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흑발의 마족에게 노골적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아까부터 계속 어떠한 표정도 짓지 않고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이분은..." `이분?` `이분`이라고 할 정도면 적어도 카란델보다는 높은 서열을 지녔다는 뜻이 아닌가.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흑발의 마족을 응시하며 잘못 건드렸다는 생각을 떨치려고 애썼다. 이 곳에 와서 함부로 굴었다가 죽고 싶진 않았다. 이루린은 긴장하면서 조심스럽게 카란델을 향해 물었다. "이분이... 누군데요?" 이루린은 속으로 필사적으로 제발 아니기를 빌었다. 그러는 사이, 그 흑발의 마족이 카란델에게 가까이 가더니 그의 귀에 뭐라고 몇 마디 했다. 그러자 카란델이 잠시 그녀와 흑발의 마족을 찝찝한 표정으로 번갈아보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런 후에 카란델이 조금 망설이면서 뭐라고 말하자, 그 흑발의 마족이 빠르게 몇 마디 했다. 결국 흑발의 마족은 카란델이 완전히 입을 다문 후에야 그의 곁에서 조금 떨어졌다. 이루린은 최대한 주변의 소리를 죽이고 무슨 말을 하는지 들으려고 했으나, 워낙 목소리가 작아 들을 수 없었다. 카란델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이루린을 응시하더니 - 이루린은 자신이 뭔지는 몰라도 하여튼 잘못을 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기에 얌전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 곧 마왕성을 향해 걷기 시작하면서 차갑게 말했다. "이루린, 따라오너라. 마왕성을 안내해주겠다." 카란델에게는 얌전한 모습으로 비춰지도록 했지만, 흑발의 마족에 대한 불만은 사라지지 않았기에, 카란델을 따라가기 전에 고개를 돌려서 혀를 쏙 내밀었다. 그녀는 그가 약오르기를 기대했으나, 그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차갑게 그녀를 응시하더니 몸을 돌려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 시선이 어찌나 냉정했던지 오히려 이루린이 더 약오를 정도였으니. 카란델과 함께 마왕성으로 들어간 이루린은 정신없이 주위를 돌아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사치에 가까울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마왕성의 내부에 그녀의 눈은 매우 즐거웠다. 밖과는 달리 아늑하고 조금 밝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입구에 깔린 붉은 카펫부터 시작해서 화려한 조각상, 갑옷과 검, 엄청나게 복잡한 복도와 수 많은 방, 벽에 걸린 거대한 액자 등 없는 게 없을 정도였다. 어떻게 지었는지는 모르나 중세의 건축 양식과 상당히 흡사하면서도 확실히 다른 모습은 좀 특별하다고나 할까. `마왕성이라면 말 그대로 마왕이 혼자 사는 집일텐데 이렇게까지 거대하게 지을 필요가 있나?` 뭔가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이루린은 일단 카란델의 눈치를 살폈다. 아까 일로 그가 화가 났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예상 외로 그는 그다지 화가 난 듯한 눈초리는 아니었다. 이루린은 조심스럽게 그의 팔을 잡고 물었다 . "아빠, 마왕성이 총 몇 층이죠? "음?" 카란델은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는지, 조금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잠시 후에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총 10층이란다." `10층!" 이루린은 경악하면서, 매우 높은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만약에 그녀가 마왕이라면 자신은 방 하나로 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혹시 각 층마다 따로 하는 일이 있나요?" "1층에는 연회장이 있고 시중들이 살고 있지. 2층은 순전히 무도회장으로만 사용되고... 3층은 중급 마족들이 자잘한 업무를 맡아서 하는 곳이고, 4,5,6층은 고위 마족들이 사는 곳이란다. 7층은 마왕성의 서고지. 8층은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사용하는 공간으로, 평소에는 상급 마족들이 자신들의 수련을 위해 사용하곤 하지. 9층은 군주만이 들어갈 수 있는 방인데 내가 알기로 거기에는 잡다한 보물 창고 같은 곳으로 강력한 마법검이나 마법서가 있단다. 10층은 유일한 군주님의 방이지." `혼자서 다 쓰는 게 아니었구나.` 그녀는 자세한 설명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물었다. "우리집은 바깥인데 그건 왜 그렇죠?" 그녀는 자신의 집이 마계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상기했다. 분명히 집에서 나와 마차를 타고 마왕성까지 오지 않았던가. "바깥은 서열 10위에 든 마족들만이 개인 저택을 수여받을 수 있지. 그리고 서열 10위 안의 고위 마족들만이 유일하게 군주님의 얼굴을 직접 뵈면서 정책을 심의하고 결정할 수 있단다. 그 외에는 아무도 군주님의 얼굴을 모른다고 할 수 있지." 끝없이 계단을 올라가는 게 점점 힘들어지자, 그녀는 카란델의 팔에 의존하다시피 해서 올라갔다. 카란델은 그런 그녀의 행동을 너그럽게 봐주고 있는지 말없이 웃을 뿐, 행동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계단이 끝나고 한참 카란델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가 드디어 걸음을 멈추었다. "자, 여기가 네가 생활할 공간이란다. 6층이지." 그는 손가락으로 어느 문을 가리켰다. 마왕의아내-6 새로운 시작 그리고 성큼성큼 마왕성의 입구로 다가섰다. 아직 마왕성의 입구에는 아직 그녀의 부모가 나와 있지 않았다. 그녀는 마왕성을 구경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앞선 나머지 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입구 근처에 왔을 때, 그녀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아야..." 인상을 한껏 쓰면서 무릎을 쓰다듬은 그녀는 주위에 이 쪽팔리는 모습을 본 마족이 있는지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마침 다행이게도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아팠지만 가까스로 참을 수 있었다. "무릎이..." 흉터 하나 없는 하얀 무릎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그녀는 그 흑발의 마족을 도와달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서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 마족은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볼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정신 구조가 제대로 된 사람, 아니 마족이라면 아무리 친하지 않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넘어졌으면 두와주는 것이 상식인데 이 마족만큼은 예외였다. 혹시나 마족이 다 이렇게 예의가 없고 차가운지 생각해봤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아까부터 보아온 이 마족의 행동으로 보아 모든 게 다 성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였다. 그 사실은 그녀를 은근히 화나게 만들었다. 그냥 빤히 지켜보고 있다니. "넘어졌으면 일으켜 세워주는 것이 남자의 도리잖아! 왜 가만히 보고만 있어!" 이루린이 불쾌하고 조금은 서운한 마음으로 응시하자 그 흑발의 마족은 얼굴하나 변하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난 마왕성의 안내만 부탁 받았지, 널 일으켜 세우라고는 부탁 받지 않았다." 그렇게 말해 놓고는 그냥 가만히 서서 그녀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 그녀는 기가 막히는 마음으로 그 흑발의 마족을 응시했다. 허탈하게 고개를 저은 후에 몸에 묻은 먼지를 털고 벌떡 일어섰다. `뭐 이런 마족이 다 있어?` "난 너같이 매너 없는 마족은 사양하겠어. 도대체 넘어졌는데 일으켜 세워주지는 않고!" 이루린이 한껏 비꼬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적어도 남자라면 여자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보여야 했다. 그런데 이 마족은 그 모든 예의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 또한 차갑게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말했다. "나도 너 같이 돌덩이를 발로 차서 남의 머리에다 맞추는 그런 마족은 사양하고 싶군." 이루린은 언성을 높였다. "뭐야! 나도 정말 너 같은…." 여차하면 싸움이 날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루린은 절대로 이 마족에게 지지 않으리라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그 때였다. "이루린! 이게 무슨 짓이냐!" 위엄이 깃들어있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이루린은 힘을 주었던 눈을 풀고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자신의 아버지 카란델이 노기가 띈 표정으로 마왕성에서 부리나케 달려나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이루린은 잠시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세계에 온 이후로 카란델의 다른 표정을 본 게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도대체 잘못한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나름대로 완벽하게 행동했는데도. "정말 혼자 놔 두는 게 아니었는데..." 카란델의 목소리에 이루린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몰라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흑발의 마족에게 노골적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아까부터 계속 어떠한 표정도 짓지 않고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이분은..." `이분?` `이분`이라고 할 정도면 적어도 카란델보다는 높은 서열을 지녔다는 뜻이 아닌가.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흑발의 마족을 응시하며 잘못 건드렸다는 생각을 떨치려고 애썼다. 이 곳에 와서 함부로 굴었다가 죽고 싶진 않았다. 이루린은 긴장하면서 조심스럽게 카란델을 향해 물었다. "이분이... 누군데요?" 이루린은 속으로 필사적으로 제발 아니기를 빌었다. 그러는 사이, 그 흑발의 마족이 카란델에게 가까이 가더니 그의 귀에 뭐라고 몇 마디 했다. 그러자 카란델이 잠시 그녀와 흑발의 마족을 찝찝한 표정으로 번갈아보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런 후에 카란델이 조금 망설이면서 뭐라고 말하자, 그 흑발의 마족이 빠르게 몇 마디 했다. 결국 흑발의 마족은 카란델이 완전히 입을 다문 후에야 그의 곁에서 조금 떨어졌다. 이루린은 최대한 주변의 소리를 죽이고 무슨 말을 하는지 들으려고 했으나, 워낙 목소리가 작아 들을 수 없었다. 카란델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이루린을 응시하더니 - 이루린은 자신이 뭔지는 몰라도 하여튼 잘못을 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기에 얌전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 곧 마왕성을 향해 걷기 시작하면서 차갑게 말했다. "이루린, 따라오너라. 마왕성을 안내해주겠다." 카란델에게는 얌전한 모습으로 비춰지도록 했지만, 흑발의 마족에 대한 불만은 사라지지 않았기에, 카란델을 따라가기 전에 고개를 돌려서 혀를 쏙 내밀었다. 그녀는 그가 약오르기를 기대했으나, 그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차갑게 그녀를 응시하더니 몸을 돌려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 시선이 어찌나 냉정했던지 오히려 이루린이 더 약오를 정도였으니. 카란델과 함께 마왕성으로 들어간 이루린은 정신없이 주위를 돌아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사치에 가까울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마왕성의 내부에 그녀의 눈은 매우 즐거웠다. 밖과는 달리 아늑하고 조금 밝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입구에 깔린 붉은 카펫부터 시작해서 화려한 조각상, 갑옷과 검, 엄청나게 복잡한 복도와 수 많은 방, 벽에 걸린 거대한 액자 등 없는 게 없을 정도였다. 어떻게 지었는지는 모르나 중세의 건축 양식과 상당히 흡사하면서도 확실히 다른 모습은 좀 특별하다고나 할까. `마왕성이라면 말 그대로 마왕이 혼자 사는 집일텐데 이렇게까지 거대하게 지을 필요가 있나?` 뭔가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이루린은 일단 카란델의 눈치를 살폈다. 아까 일로 그가 화가 났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예상 외로 그는 그다지 화가 난 듯한 눈초리는 아니었다. 이루린은 조심스럽게 그의 팔을 잡고 물었다 . "아빠, 마왕성이 총 몇 층이죠? "음?" 카란델은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는지, 조금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잠시 후에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총 10층이란다." `10층!" 이루린은 경악하면서, 매우 높은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만약에 그녀가 마왕이라면 자신은 방 하나로 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혹시 각 층마다 따로 하는 일이 있나요?" "1층에는 연회장이 있고 시중들이 살고 있지. 2층은 순전히 무도회장으로만 사용되고... 3층은 중급 마족들이 자잘한 업무를 맡아서 하는 곳이고, 4,5,6층은 고위 마족들이 사는 곳이란다. 7층은 마왕성의 서고지. 8층은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사용하는 공간으로, 평소에는 상급 마족들이 자신들의 수련을 위해 사용하곤 하지. 9층은 군주만이 들어갈 수 있는 방인데 내가 알기로 거기에는 잡다한 보물 창고 같은 곳으로 강력한 마법검이나 마법서가 있단다. 10층은 유일한 군주님의 방이지." 그녀는 자세한 설명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물었다. "우리집은 바깥인데 그건 왜 그렇죠?" 그녀는 자신의 집이 마계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상기했다. 분명히 집에서 나와 마차를 타고 마왕성까지 오지 않았던가. "바깥은 서열 10위에 든 마족들만이 개인 저택을 수여받을 수 있지. 그리고 서열 10위 안의 고위 마족들만이 유일하게 군주님의 얼굴을 직접 뵈면서 정책을 심의하고 결정할 수 있단다. 그 외에는 아무도 군주님의 얼굴을 모른다고 할 수 있지." 끝없이 계단을 올라가는 게 점점 힘들어지자, 그녀는 카란델의 팔에 의존하다시피 해서 올라갔다. 카란델은 그런 그녀의 행동을 너그럽게 봐주고 있는지 말없이 웃을 뿐, 행동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계단이 끝나고 한참 카란델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가 드디어 걸음을 멈추었다. "자, 여기가 네가 생활할 공간이란다. 6층이지." 그는 손가락으로 어느 문을 가리켰다. 이루린은 먼저 열라는 식으로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카란델에게 어색하게 웃어준 후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넓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넓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루린이었다. 현재 처음 그녀가 이루린이라는 마족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있었던 방보다 훨씬 더 넓었다. 꿈에 그리던 이상의 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세의 황족이 쓸 것 같은 고가품들만 눈에 들어왔다. 침대 앞에 놓여 있는 금테가 둘러진 거울, 기품있는 레이스가 달려 있는 침대 등 어느 것 하나 평범하게 만들어진 것이 없었다. 할 말을 잃은 그녀는 침대에 살며시 앉으며 카란델에게 와서 앉으라고 손짓했다. 아직까지도 조금씩 카란델이 아버지라는 사실이 적응되지 않아서 동작이 어색하긴 했지만 말이다. "아빠, 질문을 계속해도 되죠?" 카란델이 그녀의 옆에 앉으면서 말했다. "얼마든지." 그녀는 질문을 하려다가 잠시 그만두었다. 마왕성에 대한 질문이라면, 이루린이 이 곳에 한 번도 온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물어봐도 별 의심을 받지 않겠지만 그 외의 질문이라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가령, 말을 할 줄 아는 마족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을 내용을 묻는다는 사실은 확실히 이상하지 않은가. 결국 그녀는 말을 돌려 말하기로 했다. "지위 계층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물어보는 김에 한꺼번에 물어보고 싶네요. 뭐, 다 알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혹시나 모르는 내용이 있을까봐서요." 카란델이 흔쾌히 말하자 이루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내 딸이 공부를 다 하려고 하다니, 정말로 놀랍구나. 그리고 가끔 내 딸이 아니라는 생각도 드는구나." "어머, 아빠. 별 말씀을." 카란델의 아슬아슬한 마지막 문장에 이루린은 뜨끔했지만 겉으로는 자연스럽게 넘겼다. 아무래도 마지막 문장은 그도 아무 생각을 하지 않고 한 말인 듯 싶었다. 어차피 그런 질문을 한다고 해도, 이루린이라는 껍데기 속에 든 알맹이가 무엇인지는 결코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일단 고위 마족이 가장 우선이고, 그 아래로 상급 마족, 중급 마족, 하급 마족, 악마의 순으로 있단다. 일단 고위 마족은 500명 정도 있는데, 서열 10위에 드는 고위 마족들을 제외한 모든 고위 마족들은 마왕성에 들어와서 살지. 그들은 직업을 아예 갖기 않거나 중간계에서 누군가가 소환하면 계약을 하거나 소원을 들어주지. 머리고 좋은 마족들은 경제나 정치 쪽에 종사하고 있고... 상급 마족들은 주로 군사력 쪽에 종사하고 있는데, 이들은 선천적으로 마법보다는 검술 쪽에 재능이 있단다. 그래서 마왕성과 관련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상급 마족들은 마왕성에 자유로이 출입이 가능하지. 그 외의 상급 마족들은 마계에 출입이 불가능하단다. 중급 마족은 대체로 성에 살면서 하급의 일을 도맡아서 처리하고, 하급 마족은 거의 다 마계 곳곳에서 살고 있는데, 인간으로 치자면 평민이라고 할 수 있지. 성에 살고 있는 하급 마족은 마왕성에 직업을 두고 있는 시중이란다. 이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하면서 인간의 혼을 빼앗거나 물자를 약탈하는 짓을 일삼지. 이제 머릿속에 다 정리가 되니?" 이루린은 아까 전과 마찬가지로 카란델이 했던 말들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하나 하나 정리를 해보자, 어떤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 수 있었다. 바로 카란델이 서열 10위 이내의 고위 마족이라는 점이었다. 그녀는 성에서 살고 있으니 당연히 서열 10위 이내의 마족일 것이다. 이루린은 어렵지 않게 카란델이 한 말들을 요약하서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서열에 대해서도 다시 듣고 싶네요." 그러자 카란델이 조금 미심쩍어 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정말로 모르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이론에 재능이 없다지만 이런 것도 모르면 안 된단다. 알겠니? 이루린은 속으로 심하게 뜨끔하면서도 카란델이 의심하는 이유가 순전히 머리 때문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마력과 마법, 전투력과 두뇌 등 고위 마족들 중에 능력을 따져서 가장 강한 순서대로 순위를 정하는 것이란다. 만약에 서열이 10위안에 들게 되면 기존의 고위 마족들 보다도 더 많은 혜택이 주어지게 되는데 총 3가지가 있지. 군주님의 얼굴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점, 경제와 정치에 결정권과 투표권 가지고 회의를 진행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굳이 마왕성에 살 필요 없이 밖에서 성을 짓고 살 수 있다는 점이다. 10위 이외의 고위마족들 중 경제나 정치 족에 종사하고 있는 자들은 의견만 반영할 수 있지. 혹은 군주께서 중요한 임무를 맡기시기도 한단다. 이제 다 정리가 되었겠지?" 이루린은 카란델이 한 말의 핵심을 머릿속에 넣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나 하나 다시 끄집어내서 퍼즐을 짜 맞추듯이 정리를 해보니 한 가지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심상치 않다고 느끼긴 했었지만, 카란델이 서열 10위 이내의 고위 마족들 중 하나라는 사실까지는 몰랐었다. 그 정도로 대단한 마족이었다는 사실에, 이루린은 새삼 카란델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그러자 카란델이 다소 엄하게 입을 열었다. "너도 이제 준비해야 하지 않겠느냐. 곧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여성 마족 300명이 무도회장에 모일테니 말이다. 심사는 연로하신 장로들이 하겠지." 그녀는 속으로 관심 없다고 투덜거렸다. "그 300명 중에 후보생은 겨우 9명이다. 그러니 너도 준비해야 하지 않겠니?" 현재 그녀의 소원은 적어도 후보생에는 포함되지 않는 것이었다. "알았어요." 그는 잊었던 것을 생각하듯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녁에 무도회가 있으니, 꼭 참석해야 한다. 알겠지? 이번 무도회는 마왕의 신부를 고르는 시험을 치는 시기와 비슷하게 겹치는 바람에 대규모의 행사로 돌변했지. 모든 고위마족 참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고 알고 있다. 나중에 시녀를 보낼 테니 그 동안 좀 쉬고 있거라." `무도회라고?` 이루린은 그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는 참담함에 사로잡혀서 잠시 그대로 굳어 있었다. 마왕성에 대한 놀라움과 혼란스러움으로 그냥 하루를 끝내고 싶은 이루린이었다. "네, 알았어요." 이루린은 마지못해 대답한 후에 더 이상 할 말이 카란델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자 그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잘 있으라는 몇 마디의 말을 건넨 후에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웃고 있었던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이 드레스는 내가 활동하기에는 너무 불편해! 구두도 마찬가지야!" 마왕의아내-7 무도회 이루린은 아까부터 계속 참아왔던 말을 내뱉은 후, 신경질적으로 구두를 벗은 후에 퉁퉁 부은 발을 손으로 마사지하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처음 신어보는 굉장히 굽 높은 구두였기에 발이 아픈 게 당연했다. 이러다가 발에 물집이라도 생기는 건 아닐까. 그녀는 침대 위에 몸을 날리면서 창 밖을 응시했다. "아직 저녁은 아닌 것 같은데. 오후 4시쯤? 에라, 모르겠다. 피곤한데 좀 자자." 태평스럽게 최대한 푹신한 침대에 몸을 편안하게 한 그녀는 눈을 감았다. 모든 게 꿈만 같았다. 그녀가 살았던 한국과는 전혀 다른 세계. 컴퓨터나 tv가 없다는 사실이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부모님이 모두 살아 계신다. 그 사실은 그녀를 충분히 만족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한국에 계실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했다. 하루종일 황당하고 대단한 일만 겪어서인지, 이상하게도 슬프다거나 그립다는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서서히 달콤한 어두운 의식의 늪으로 빠져 들어갔다. "정중하게 시중들고 오너라." "네, 시종장님. 777번 방의 이루린님이 머무시는 방으로 가겠습니다. 아이나는 기계적으로 대답하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그녀는 하급 마족으로서, 현재 마왕성에서 시녀로 일하면서 여성 고위 마족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감정의 기복이 별로 없어서 시종장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금 고위 마족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겁게 가라 앉았다. 그들의 대부분은 - 특히 엘리세아라는 마족은 - 성격이 좋지 않았었는데, 시중을 들 때마다 얼굴과 몸에 채찍으로 맞은 상처가 났었다. 물론 감정의 기복이 별로 없기 때문에 심하게 상처를 입는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꿋꿋하게 견뎌내고 생활하고 있었다. 한참 계단을 올라간 끝에, 어느덧 그녀는 777번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녀는 최대한 정중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이루린님, 계십니까?" 방에서 대답이 없었기에,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조용히 들어갔다. 그리고 한 마족을 보았다. 붉고 긴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 마족이었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과 창백한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백지장같이 하얘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해주고 있었다. 카란델의 딸이 굉장히 아름답다는 소문을 상기한 그녀는 홀린 듯이 그 마족을 응시했다. 옷은 고위 마족의 딸답지 않게 조금 간편했다. 그녀가 알기로 침대 위에서 자고 있는 마족의 이름은 이루린일 것이다. 아이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래로 시선을 점점 내렸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살짝 터뜨렸다. "아직 어리신가봐." 신발을 벗고 있었는데 발이 퉁퉁 부어 있었던 것이다. 침대 아래에 내팽겨쳐진 굽 높은 신발이 원인인 듯 싶었다. 아무래도 이루린은 굽이 높은 구두를 처음 신는 것 같았다. "이루린님, 얼른 일어나세요." 간신히 웃음을 참은 아이나는 침대 쪽으로 가서 이루린의 몸을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그러자 인상 하나 찡그리지 않을 것 같던 이루린의 양 미간이 심하게 모아졌다. "누가 내 잠을 깨워?" 억눌린 듯한 가느다란 고성이 신경질적으로 들려오자, 아이나는 잠을 잘못 깨웠다고 따귀를 맞을까봐 얼른 말했다. "이루린님, 곧 연회와 무도회가 있으니 준비하셔야 합니다." 이루린은 눈을 비비고 나서 아이나를 올려다 보았다. 반쯤 뜬 그녀의 눈이 한참 그대로 있더니, 곧 크게 뜨여졌다. 아이나는 그런 이루린의 행동을 주시하면서 혹시나 때리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 밖이게도 이루린은 그녀를 때리지 않았다. "뭐? 연회와 무도회? 무도회만 하는 것 아니었나?" "보통 무도회가 열리면 연회도 겹쳐서 열립니다." 이루린은 그대로 어리둥절하게 있다가 잠시 후에 뭔가가 생각났는지,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이나를 응시했다. "네가 날 도와주러 왔구나?" 보통 고위 마족들이 시녀들을 대할 때 `도와준다` 라는 표현은 쓰지 않기에 아이나는 조금 당황하면서 어색하게 대답했다. "네? 네..." 이루린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창 밖을 응시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나?" 이루린이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마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금방 어두워졌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마계가 금방 어두워진다는 사실은 지극히 일상적일텐데 어째서 저런 행동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는 아이나였다. "저녁입니다. 이제 어서 치장하셔야 합니다." 연회가 열리기까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나는 이루린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거울이 달린 화장대 앞에 앉힌 다음, 설레는 마음으로 서랍을 열어서 치장할 도구를 준비했다. 원판이 너무도 예뻤기 때문에 치장을 한다면 정말 누구라도 반할 만한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다. "머리카락이 좀 기니 자르겠습니다." 이루린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조금 거추장스러운 듯이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루린이 미소짓자, 그 모습에 아이나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잠시 머리카락이 잘리는 소리만이 주위에 울려퍼졌다. 잠시 후에 그녀의 머리카락은 허리까지가 아니라 어깨 너머 정도로 짧아졌다. 이루린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짓자, 아이나 또한 잘 웃지 않았던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이번에는 시원하게 머리를 틀어 올리겠습니다." 아이나는 능숙한 손길로 이루린의 매끄러운 머릿결을 만졌다. 그렇게 약 몇 분 정도 지났을 때, 그녀는 화장대 위에 얹어 놓았던 다이아몬드가 박힌 빛나는 머리 장식으로 이루린의 머리를 고정시켰다. 그러자 순식간에 소녀의 이미지에서 성숙된 여인의 이미지로 탈바꿈했다. 아이나는 순간 여자는 꾸미기 나름이라고 생각했다. "드레스를 입히겠습니다. 붉은 머리카락의 이미지로는..." 확실히 튀려면 보색의 이미지를 살펴서 녹색 계통으로 해야겠지만, 청순하고 단아한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하얀색이 훨씬 더 잘 어울렸다. 매혹적인 마족의 모습으로 나타내려면 붉은색과 검은색 계통이 잘 어울렸다.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할지 고민한 그녀는, 이루린의 자는 모습이 굉장히 청순해 보였던 점을 상기해서 은은한 하얀색 드레스를 골랐다. "그러면 이제 입히겠습니다." 아이나는 재빨리 이루린의 하늘색 짧은 드레스를 벗기고, 거기다가 치장이 좀 더 화려한 하얀 드레스를 입히기 시작했다. 왠지 이루린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아이나는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복잡한 모양으로 만들어진 드레스를 별 무리없이 이루린에게 입혔다. 아이나는 드레스를 다 입은 이루린을 보고 감탄사를 터뜨렸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그래?" 이루린은 쑥쓰러운 듯이 웃으면서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아이아는 그런 이루린을 보면서 옷이 날개라고 생각했다. "이제 구두를..." 아이나는 옷장 맨 밑의 서랍을 열어서 아까 이루린의 발이 부었던 점을 상기해, 굽이 낮으면서도 예쁜 구두를 많이 골라왔다. 그리고 하나씩 이루린의 발에 신겨 주었다. 이루린은 아무거나 괜찮다고 말하면서 끝에 고맙다고 말했다. 아이나는 분명 작은 목소리였지만, 고맙다고 말하는 이루린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 한동안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한낮 하급 마족에게 고위 마족이 감사를 표하나는것 자체가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몸에 보석을 치장하겠습니다." 아이나는 드레스가 갑갑한지 자꾸 눈살을 찌푸리는 이루린을 화장대 앞에 다시 앉혔다. 아이나는 그런 이루린의 드레스를 다른 것으로 바꿔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난처해했다. `불편하신가봐. 하지만 그게 제일 편한 건데...` 아이나는 조금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서랍을 열어서 장신구들을 꺼냈다. 그리고 생각한 데로 실행에 옮겼다. `하얀 드레스에는 붉은 루비 목걸이가 어울려. 그리고 은색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은은한 팔찌를 착용하고... 반지는 사파이어로 해서 약간 큰 것으로. 귀걸이는 약간 매혹적인 분위기를 위해 검붉은색이 좋겠지.` 다 끝냈다고 생각한 아이나는, 뭔가가 빠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로 마지막으로 얼굴에 화장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얼른 서랍을 뒤져서 화장 도구를 꺼냈다. 이 부분에서 이루린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는데, 아이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검은색의 작은 통에 든 검은 약물을 가느다란 막대기에 묻혀서 자연스럽게 이루린의 속눈썹에 발라주고 입술에는 마찬가지로 색만 바꿔서 더 매혹적이게 보이도록 붉은색을 발랐다. 마무리로 얼굴에 화장할 때 쓰는 하얀 가루를 발랐다. 이 정도만 해야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묻어나오는 법이라고 아이나는 생각했다. "다 되었습니다, 이루린님." 이루린은 자신도 믿기가 힘든지 놀란 듯이 거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나 자신이 보기에도 부럽다고 생각할 만큼 그녀는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마족이 마왕성에 있기는 한 것일까. `없는 건 아니었지. 엘리세아님이 있긴 했으니. 내게 채찍을 휘두를 정도로 악한 성격을 제외하곤.` 씁쓸하게 생각한 아이나는, 이루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예의 그 사무적으로 말했다. "이제 무도회장과 연회장으로 가셔야 합니다, 이루린 님." "정말 고마워. 다음에는 너도 같이 연회에 참석하자. 무도회도 좋고." 웃으면서 말하는 이루린의 말에 순간 아이나는 작게나마 감동했다. 얼음같은 호수를 녹여주듯, 이루린의 말은 따스함 그 자체였다. 고위 마족 중에 이렇게 순수하고 너그러운 마족이 다 있었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시간 다 되었지? 이만 가보겠어." 이루린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이나 앞에서 순진한 마족처럼 행동하느라 조금 힘들었던 이루린은 6층에서 힘들게 계단을 밟으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왕의아내-8 무도회 6층에서 1층까지 내려간다는 건 여간 쉬운 게 아니었다. 계단에 보이는 마족이 아무도 없었기에, 그녀는 모두들 마법을 써서 1층의 연회장으로 내려간 것이라고 추측했다. 허전하고 삭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계단을 밟으면서 투덜거린 그녀는 좀 더 보폭을 크게 해서 계단을 내려갔다. 계속 내려가자 마족들의 웅성거림이 잔잔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이제 1층에 다 왔다고 생각하면서, 조금 긴장하고 몸가짐을 달리 했다. 그리고 식탁과 마족들이 분주하고 움직이고 다니는 모습이 보이자 그녀는 더 이상 빨리 계단을 밟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본 그녀는 연회장 입구에 걸려 있는 작은 표지판을 하나 발견했다. [마왕성 내에서는 마법 사용을 금지한다.] `...금지였구나.` 괜히 오해했다고 생각한 그녀는 거울 같이 깨끗한 대리석을 밟으면서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세로로 길다랗게 놓여 있는 식탁과 그 위에 차려진 휘황찬란한 음식들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이 곳으로 넘어올 때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그녀였기에, 비어 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웅성웅성- 이루린은 아까부터 마족들의 한결같은 시선을 받으면서 작은 부담감을 느꼈다. 그리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이 그녀의 의사와는 다르게 음식을 우아하게 먹게 만들었다. "정말로 아름답군요." "그래요. 천상의 미도 저 정도는 아니죠." "조각상을 깎아 놓은 것 같군요." 한 마디씩 말하는 마족들에게 애써 부드러운 미소로 답한 이루린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러다가 한 마족과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굉장히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마족이었는데, 당혹스러웠던 것은 이루린, 바로 자신을 매우 좋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 시선을 받고 기분이 좋을 리 없는 이루린은 자신도 똑같은 시선으로 그 마족을 응시했다. 시선을 피할 이유는 없었다. `저 마족은 누구지?` 평소에 얌전했다는 예전 이루린의 성격으로 보아 원한 살 만한 일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저 금발의 마족은 무엇 때문에 자신을 이리도 좋지 않게 쏘아보는 것일까. 외모는 수려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기의 흐름을 살펴보니 마력만 높았지 전투력은 영 떨어지는 것 같았다. 왠지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저 마족과는 나중에 싸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남성 마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으로 보아, 혹시 마왕의 아내가 되기 위한 시험을 치를 때 그녀를 경쟁 상대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이루린은 일단 몹시 시장했기 때문에 그 시선을 무시하고 음식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재료를 사용했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화려한 모양과 맛있게 느껴지는 냄새는 그녀의 식욕을 부추겼다. 일단 그녀는 목을 축이고 싶어서 앞에 놓인 유리잔을 들었다. 잔에는 핏빛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액체가 넘실거리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포도주인 것 같았다. 그녀는 유리잔을 들고 아무 생각없이 가볍게 들이켰다. "오늘은 카르가닌과 포우먼의 피를 섞었다고 하죠? 아마도 오늘은 제일 고급스러운 피를 먹게 되는군요." 이루린은 그 말에 먹고 있었던 것을 다 토해낼 뻔했다. 무슨 동물인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고급스러운 `피`라는 사실이 그녀의 신경을 자극한 것이다. "그렇죠. 온순한 동물인 카르가닌은 주로 마계에서 볼 수 있는데 거의 몇 백년에 한 마리 정도 볼 수 있죠. 그 만큼 마물로서 뛰어난 이 카르가닌의 피를 먹게 되면 본래 있었던 마력이 증폭됩니다. 마족들은 먹어도 그게 그거지만 인간들은 엄청난 능력을 갖게 되죠." "맞아요. 포우먼은 마계에는 잘 없는 생물이지만 인간계에서는 널리고 널린 것이 이 포우먼이라는 마물이죠. 이 포우먼의 피를 먹게 되면 엄청난 회복과 기적이 있어 수명이 짧은 인간들에게는 만병통치약이나 다름이 없는데도 어리석게도 그걸 모르죠. 역시나 우리 마족들에게는 필요 없지만... 안 그래요?" "마지막으로 특별하게 인간의 피도 섞였죠. 정말 환상적이군요." 인간의 피란 말에 이루린은 지금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먹었던 것을 토해내고 싶었다. 카르가닌과 포우먼이라는 마물의 피가 몸에 좋다는 말에 어느 정도 참고 있었지만, 인간의 피가 섞였다는 사실은 그녀의 머릿속을 휘저어 놓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고위 마족들이 떼거지로 모여 있는 곳에서, 그것도 그녀를 주시하고 있는 마족들이 많은 곳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 후에 굉장히 곤란한 일이 생길 것이기에 간신히 참았다. 몸을 떨면서도 그녀는 그 주를 억지로 다 마셨다. "어? 이루린 양, 속이 좋지 않은가요?" 이루린이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며 고개를 살짝 숙이자 옆에 있던 마족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루린은 최대한 미소를 지으면서 밝게 말했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오늘 좀 피곤한가봐요." `너희가 한번 같은 종족의 피를 처먹어봐.` 겉 다르고 속 다르게 생각한 이루린은 음식으로 눈을 돌리기로 작정했다. 절대로 이상한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일단 그녀는 육류 쪽으로 눈을 돌렸다. 사실 한국에서 무술을 배울 때는 채소만 고집해 왔지만 천성이 육식을 하는 탓에 자연스럽게 육류 쪽으로 손이 갔다. `오크의 고기라도 먹어주지.` 이루린은 언젠가 한국에서 읽었던 환상 마법 사전에서 오크의 고기가 얼마나 맛이 없는가에 5장이나 서술해 놓은 부분을 상기하면서 허기진 배를 손으로 살짝 문질렀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포크로 고기 조각을 찍어서 입에 넣었다. 그 때 또 타이밍 좋게도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이 고기는 최상의 맛이로군요. 이 고기의 재료가 뭐죠?" 이루린은 순간 아주 맛있게 씹고 있는 고기를 넘기지 않고 긴장해서 그대로 굳었다. 혹시나 하는 불안한 마음에서였다. "인간이죠. 그것도 겨드랑이 살로 만들었다고 하네요. 얼마나 연하고 부드러운지 몰라요." 이루린은 순간 뇌에 큰 충격을 받아서 쓰러질 뻔했다. 그러나 강한 정신력으로 버티면서 맛있게 음식을 들고 있는 마족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의심스러운 마음을 식탁 위에 깔려 있는 겉만 화려한 음식들을 빤히 응시했다. `아무리 몸이 마족이라곤 하지만 인간의 고기를 먹는다니. 하는 수 없이 과일을...` 마지막 희망이라 할 수 있는 빨간 과일을 집어든 그녀는 힘없이 베어먹었다. 그녀의 정서에 맞는 음식다운 음식을 먹지 못한 게 한이라고 하면 한이랄까. 어쨌든 다행이게도 그 과일은 새콤달콤하고 과즙이 부드러워서 입안의 감각을 자극했고, 우여곡절 끝에 그렇게 해서 저녁을 때울 수 있었다. 마족들이 후식을 먼저 먹는 이루린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만 제외하면. 결국 그녀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서 몸을 뒤로 빼고 일어서려고 했다. "음?" 그때였다.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골반 쪽에서 느껴진 것은. 그 이상한 느낌 덕분에 그녀의 신경은 순식간에 무엇이든 베어버릴 것처럼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일단 마족들에게 태연한 표정을 보이면서 은밀하게 고개를 돌려서 뒤를 응시했다. 어느 마족의 손이 그녀의 엉덩이에 가 있었다. 그녀는 그 손을 따라 점차 고개를 들어 올려, 자신의 몸을 만지고 있는 그 손의 주인공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짧은 흑발에 젊은 청년의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마족은 자신을 향해 묘한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하겠지만, 이루린은 그 상황에서 전혀 당황하지 않고 같이 미소롤 화답해 주었다. 그리곤 여유 있게 몸을 숙여서 그 마족에게 살벌하게 속삭였다. "치우시죠." "싫은걸? 난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 말이지." 그 마족이 능글맞게 웃으면서 그녀에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루린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마족들이 많이 모여 있는 장소였기 때문에 분을 삭이면서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빌었다. 하지만 그녀가 앉아 있는 위치가 구석인 관계상 누군가가 이 상황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결국 혼자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원래 바로바로 반응에 충실하는 그녀로서는 무척이나 대단한 인내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괜한 소동을 피워서 일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d에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그런 이루린의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마족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말로 하는 게 안 된다면, 행동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이루린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더 낮게 속삭였다. "치워. 다시 한번 말하겠다. 정말로 이제는 치우는 게 좋을 텐데." 그녀는 살기어린 시선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마왕의아내-9 무도회 이루린이 아무리 노려봐도 그 마족의 입에서는 미소가 거둬지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그녀가 이렇게 노려보면 제대로 쳐다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는데, 이 마족은 뭔가가 달랐다. 탐욕스럽다기보다는 은근히 재미있다는 눈동자. 직감적으로 그녀는 그 눈동자가 싫었다. 그는 굉장히 편안하고 노골적인 시선으로 그녀의 몸을 훑어보면서 말했다. "이런, 이런. 잘못하다가는 비명횡사하겠는데? 단번에 반말로 바뀌니까 말야." 이루린은 주위 마족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강하게 말했다. "그 입 닥쳐!" 그가 비꼬는 듯이 말하면서 그녀의 몸에서 손을 느긋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아름다운 입술에서, 그렇게 험한 욕이 나오는 것도 얼마 걸리지 않는군?" 이루린은 으름장을 놓듯이 말했다. "닥치라고 했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것이 마지막이 될 거다. 손 치워." 그녀는 냉정하고 차갑게 그를 응시했다. 항상 그녀는 싸움 직전에 냉정하게 상대를 평가하도록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일말의 흔들림이 없이 그 자세 그대로 있었다. 그러자 그 마족의 의외라는 표정을 짓다가, 돌연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군주의 노리개보다는 내게 오는 것이 더 좋을 거야." 그의 속삭이는 말이 너무나도 은밀하고 차갑게 들려왔다. 이루린은 감히 군주의 노리개라고 말할 정도로 마왕에 대해 은연중에 좋지 않게 말하고 있는 그를 조금은 새롭게 응시했다. 그러나 손이 계속 몸에서 움직이자, 거기에 대해 생각할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오른쪽 손에다가 조심스럽게 기를 불어넣었다. 기절시킨 다음 변태다라고 소리쳐서 유유히 연회장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한국에서도 자신의 기를 제대로 맞받아 친 마족은 드물었기 때문에 그녀는 승리를 확신했다. `나가떨어지길 빈다.` 이루린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외쳤다. "살풍(殺風)!" 현재 쓴 기술은 이루린이 한국에서 아버지에게 무술을 전수받을 때 배웠던 기술 중 하나였다. 이 기술이 최고는 아니었지만 상대방이 잘 맞는다면 10m까지 날아가서 기절할 수 있는 것으로 그녀는 알고 있었다. 사실 죽이는 기술이야 얼마든지 있긴 하지만 이런 곳에서 마족을 죽여서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이루린이었기에, 조금은 강도가 약한 기술을 쓰는 것이었다. "아니?" 그녀는 양미간을 심하게 모았다. 그 마족은 자신의 손에 모이는 기의 양을 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변함 없는 표정으로 여유 있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곧 오른쪽 손에서 휘몰아치던 기가 거센 바람으로 바뀌면서 매섭게 손 주위를 휘감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식탁 밑으로 낮추고 있었기 때문에, 마족들은 기, 그러니까 이 세계에서는 마력이라고 불리는 게 일고 있다는 사실만 알아보고 그녀가 있는 곳을 힐끗 볼 뿐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고 했지 `마력`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쓰는 기술은 마법과는 별개의 종류였다. 마족들이 점차 그녀가 있는 곳을 자주 힐끗거릴 때, 그녀는 그 마족의 복부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녀는 곧 그 마족이 자신이 쓴 기술을 맞고 볼품 없이 나동그라지리라고 생각했다.- "이럴 수가..." 이루린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리고 그 마족을 놀란 마음으로 응시했다. 그녀가 기술을 막 쓰자 그 마족이 재빠른 손놀림으로 막아버린 것이었다. 그 덕분에 그녀의 기술은 그의 손에서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아무렇지도 않다니." `강적이다.` "매서운 기술이었어, 이루린. 이름이 굉장히 독특한 마법이로군." 그는 그 기술을 마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여전히 능글맞은 표정을 짓고 있긴 했지만, 아까와는 달리 입술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덕분에 그 마족의 손이 그녀의 몸에서 치워지기는 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그의 상태에 그녀는 내심 경악했다. 아무런 상처 없이 막아낼 정도면 고수로 통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가 전혀 동요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당당하게 말했다.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이름을 모르는 마족이 있긴 했나?" 능글맞게 말한 그는 갑자기 표정을 바꾸었다. "그런데 이상하군. 한낮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고위 마족의 딸이 이 정도의 강력한 기술을 쓴다라..." 어울리지 않게 중얼거리는 모습에서 이루린은 조금 당황했다. 아까와 태도가 전혀 딴판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그런 혐오스러운 행동을 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그녀는 순간 자신이 `세아`가 아닌 `이루린`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그 기술을 쓴 것을 후회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알아차린다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널 죽일 수 있다." 그녀가 단호하면서도 주위를 의식해서 낮게 외치자, 그가 아까 전과 똑같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과연 그럴까?" 그 모습이 눈에 거슬려도 한참 거슬렸던 이루린은 그 얼굴을 노골적으로 매섭게 쏘아보면서 말했다. "이제 내 눈앞에서 사라져. 원한다면 대결을 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은 성질을 죽이지. 그러니 사라져라." 이루린은 마음 같아서는 공격해서 때려눕히고 싶었으나, 이 남자가 미심쩍게도 강한 능력을 지니고 있어서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게다가 주위에 마족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고위 마족은 의외라는 눈초리로 그녀를 응시하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좋아, 사라지지. 하지만 말야, 넌 내 신부로 제일 어울리는 마족이야. 군주의 노리개로 주기에는 너무 아까워." 그 마족으 손을 들어서 그녀의 턱을 강제로 잡고 자신의 눈앞으로 돌리며 말했다. 그의 행동에 다시 잠재웠던 용암이 용솟음치는 듯이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녀는 묵묵히 참기로 했다. 붙어도 승산이 있는지초자 가늠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난 너 같은 변태한테 볼 일 없다." 갑자기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완전히 나쁜 마족으로 찍혔군. 난 루시안이라고 한다. 앞으로 언젠가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루시안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대결을 신청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쩐지 다시 만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강력하게 들긴 했지만. "재수 없는 자식..." "연회가 끝났나?" 이루린은 마족들이 의자에서 일어나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는 것을 말 없이 응시하다가, 곧 자신도 2층으로 올라가는 무리에 합류했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그녀가 머물고 있는 방으로 돌아가서 잠이라도 자고 싶었지만, 분명 카란델이 왜 무도회장에 오지 않았냐고 물어볼 것이기에 억지로 가야만 했다. 당연히 무도회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은 아예 없었다.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루시안이라는 마족이 그렇게 강했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수련이 부족한 현상의 결과라고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한국에서처럼 수련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도 한국에서는 머릿속으로만 그려야 했던 마법이란 것을. 어쨌든 한국에서 배웠던 기술을 여기에서 쓰면 아까 전과는 달리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마법은 필수로 배워둬야만 했다. 이루린은 무도회장로 들어갔다. 거대한 크기의 홀을 비추고 있는 불빛이 그녀에게로 강하게 비춰졌다. 그리고 무도회장의 입구를 시작으로 해서 빨간 카펫이 군주가 앉을 단상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감탄했지만 가급적 신기한 것을 처음 보는 마족처럼 놀라는 행동은 좋지 않았기에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걷기만 했다. 아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여성 마족들은 각종 드레스와 화려한 장신구를 걸치고서 서로의 옷을 평하고 있었다. 그녀가 다가가자 그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떤 마족들은 그녀를 응시하면서 감탄하고 있었다. 불빛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들의 시선에 이루린은 은근히 볼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 때 옆에서 마족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사단은 언제 모습을 드러내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오늘이라고 하던데..." `심사단? 그게 뭐지?`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루린은 심사단이 뭔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꾹 참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무도회장으로 들어오는 거대한 철문이 닫혔다. 아무래도 모든 고위 마족들이 다 참석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그것을 아는지는 몰랐지만. 그 때 철문 맞은 편의 작은 문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주름살이 짙게 그려져 있는 나이든 마족이었는데,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자세한 건 볼 수 없었다. 그 마족이 단상 옆까지 걸어가자, 소란스럽게 웅성거리던 마족들의 소음이 점차 줄어들면서 그 쪽으로 시선이 집중했다. "자, 이제 무도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군주님께서 나오시기로 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의 경악과 흥분에 가까운 목소리가 전염되듯이 퍼지기 시작했다. "군주님이?" "한번도 이런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으셨던 그 분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거세어졌다. 마족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서열 10위 내의 고위 마족이 아니면 군주의 얼굴을 볼 수 없었기에 더욱 그런 것 같았다. 그 이유가 뭘까, 하고 생각을 해 봤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나오진 않았다. 나이든 그 마족이 단상에서 손으로 오른쪽에 있는 조금 큰문을 가리켰다. 그러자 마족들의 시선이 화살처럼 일제히 거기에 꽂혔다. 모두들 이번 기회가 아니면 군주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알기로, 군주는 일반 마족들에게 모습조차도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이들이 얼마나 흥분하겠는가. 이루린은 못미더운 마음으로 군주가 나올 문을 응시했다. 어차피 그녀와는 무관한 일이었고, 그의 신부가 되기 위해 시험을 열심히 치를 마음 따위는 없었다. 문이 열리는 작은 소음이 들리면서 마족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폭발하듯이 형성되었다. 모두들 군주의 모습을 보기 위해 저마다 고개를 빼고 있었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서 문이 완전히 열렸다. 이루린은 군주의 모습을 보려고 했지만, 마족들이 워낙 앞을 가로막아서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마족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분이 군주님?" "가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 없어.' 이루린은 간신히 마족들 사이를 헤치고 군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눈과 코를 가리는 흑색의 가면을 쓴 군주는 검은 흑발의 청년이었다. 게다가 흑색의 멋진 코트를 입고 뒤에는 망토를 걸치고 있었는데, 머리색깔과 굉장히 잘 어울리면서도 함부로 굴 수 없는 위압적인 분위기를 형성했다. 한번이라도 군주와 눈을 마주치고 싶어하는 마족들에게, 군주는 단 한번의 눈길조차도 주지 않고 걸었다. `설마 오늘 낮에 만났던 그 마족은 아니겠지. 마왕이 보란듯이 나무에서 낮잠이나 즐기고 있겠어?` 군주가 단상 앞에 서자, 나이든 마족이 머리를 조아리더니 곧 허공을 향해 짧고 강하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난로가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듯, 실내에 음악이 부드럽게 퍼지기 시작했다. 이루린은 그 음악 소리를 감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서 이 지루한 무도회가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족들은 제각기 짝을 지어서 음악을 기다렸다는 듯이 정 중앙으로 쏟아져 나와 무도회장의 빈 공간을 가득 메웠다. 몇 몇 마족들은 홀의 벽쪽에 놓여 있는 작은 테이블에 앉아서 잔에 정체불명의 붉은주를 부어서 마시고 있었다. 대기하고 있는 여성 마족들은 모두 군주의 얼굴을 바라보고 흥분과 기대가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모두들 선망어린 눈동자로 군주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루린은 왠지 그게 그리 좋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그 때 누군가가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갑옷을 입은 훤칠한 키의 마족이었다. 이루린은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마족에 대해 묘한 감정을 느끼면도, 웃으면서 딱 잘라 거절했다. "죄송하지만 선약이 있어서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춤을 추기가 싫었고, 오늘 무도회 내내 춤을 추지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춤을 추지 않고 서 있는 많은 남성 마족들이 그녀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는데, 마치 별 볼일이 없는 것 같은데도 기회를 노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다리 아픈 건 딱 질색이야.` "저랑 한곡...." 또 다시 누군가가 말하자, 그녀는 아예 쳐다도 보지 않고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선약이 있습니다." 더 힘들었던 것은 중후한 마족들까지도 그녀에게 접근했다는 것이었다. 분명 춤 신청은 아니었지만서도. "평소에 즐겨 읽는 책이 있소?" 이루린은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예의를 갖춰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어, 없어요..." 마계에 존재하는 책에 대해 단 한 권이라도 알았다면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마족이 다소 불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날카롭게 물었다. "흠, 좋소. 그럼 즐겨 하는 일은?" 이루린은 애써 얼버무렸다. "주로 여성적인 일들을 하죠. 춤을 배우거나..." "좋소." 그 이후에도 몇 차례 중후한 마족들이 그녀에게 접근해와서 몇 가지의 질문을 던지고는 사라졌다. 왠지 계속해서 춤 신청을 받을 것 같은 예감이 든 그녀는 결국 벽에 붙어서 놓여 있는 대기하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머리를 벽에 살짝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도 몸이 나른해서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갑자기 마족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반쯤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단상 위에서 꿈쩍도 하지 않던 군주가 걷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루린은 그가 누군가에게 춤 신청을 하는가보다라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그러는 사이에 음악이 흐르는 소리가 좀 더 커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아무래도 마족들이 삭막할 정도로 조용하게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누구와 춤추려고 그러나..." 이루린은 중얼거리면서 계속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음악이 흐르는 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아까부터 규칙적으로 들려오던 발자국 소리가 점점 더 강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에 발자국 소리가 끊어졌을 때,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낀 그녀는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눈을 살짝 떴다. 흑색의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그녀는 놀란 나머지 잠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끼면서 고개를 위로 들어올렸다. 거기에는 군주가 서 있었다. 마왕의아내-10 무도회 "한 곡 추시겠습니까." 기계적인 음성에 이루린은 놀라면서 일어섰다. 그리고 옆으로 뒷걸음질 쳐서 물러나려고 했으나, 그 전에 군주의 차가운 손에 잡혔다. 이루린은 자신의 손목을 잡은 군주를 놀란 마음으로 응시했다. 이런 현실 같지 않은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놀랄 만한 일이었다. 이루린은 애써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마족들의 시선이 그녀와 군주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부러움과 시샘, 경악어린 감정이 뒤섞인 듯한 표정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거절하면 안 되겠지?` 이루린은 어색하게 대답했다. "네, 추겠습니다." 그녀는 갑자기 닥쳐온 돌발 상황에 침착하게 대응하기로 마음 먹고, 그가 자신의 손목을 잡고 이끄는 방향으로 우아하게 걸었다. 마족들은 대체로 놀라고 있었는데, 그녀는 왜 그들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그리고 너무나도 확실히 느껴지는 시선에 낯이 절로 뜨거워졌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마족들이 은연 중에 길을 비켜주었다. 이윽고 정 중앙 부근에 왔을 때, 이루린은 고개를 돌려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저 마족은...` 아까 연회장에서 자신을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있었던 금발의 아름다운 마족이었다. 그 마족 주위에는 아까 전처럼 멋진 남성 마족들이 서 있었다. 그런데 아까와는 사뭇 다른 표정으로 이루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바로 지독하게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그 시선을 받은 이루린은 자연히 눈살을 찌푸리면서, 절로 기분이 얼떨떨해지고 나빠져서 똑같이 응시해 주었다. 그리고 일부로 묘하게 웃은 후에 군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잘 어울리는군요." "그래요, 마치 한 쌍의 새같아요." 부드러운 음악이 약간 느린 곡으로 바뀌자, 군주와 이루린은 거기에 맞춰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춤을 추고 있는 다른 여성 마족들이 어떻게 하는지 관찰한 후에 그녀는 어색하게 한 손을 군주의 어깨에 얹고 다른 한 손을 군주의 허리 부근에 갖다 대었다. 아까 연회장에서 먹었던 술 때문에 취기가 돌아서인지는 몰라도, 하여튼 그녀는 낯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춤을 추면서 그녀는 조용히 물었다. "왜 저를 선택하셨죠?" 이루린은 아까부터 왜 군주가 자신을 선택했는지에 대해 자문자답을 해보았다. 외모가 뛰어나서?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루린 자체의 외모는 정말 뛰어났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따진다면 아까 자신을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던 그 금발의 마족 또한 뒤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군주가 자신을 고른 기준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말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의 예상과는 다른 차가운 대답에 그녀는 속으로 당황했다. 정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태도. 군주의 성격이 굉장히 냉정하고 차가운 사람이라는 건 카란델에게서 들었었다... "좋아요, 뭐, 어차피 당신이... 아차, 아니 군주님께서 절 선택하셨으니 최선을 다해 추겠어요." 이루린은 속으로 군주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은 자신의 입을 탓하면서 겉으로는 자연스럽게 무마시켰다. 그런 다음 노래가 좀 더 정열적인 곡으로 바뀌자 본격적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예전에 한국에서 여러 가지 곡에 맞춰서 다양한 춤을 추는 방법을 모조리 외웠기에 그녀에게는 그게 그리 어려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적당히 군주가 이끄는 대로 맞춰나갔다. 군주의 춤 실력은 프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뛰어났다. 강하면서도 유연하고 절제된 동작이 빨리 흐르는 물처럼 움직였다. 그 덕분에 많은 여성 고위 마족들이 춤을 추는 중간 중간에 군주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고, 그녀에게는 부러움이 가득 담긴 시선을 보냈다. 정작 그녀 자신은 전혀 부럽지 않았지만. 이루린은 자신과 군주 사이에 흐르고 있는 삭막함을 없애보고 싶었다. "정말로 춤을 잘 추시는군요. 누구에게서 배웠죠?" 그가 차갑고 빠르게 말했다. "유년 시절에 익히 알고 있는 여성 마족에게서 배웠습니다." 여성 마족이라는 말에 이루린은 고개를 들어서 그의 가면을 응시했다. 여자와 별로 접촉한 적이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어렸을 때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이루린은 혹시라도 군주가 말하고 있는 상대가 있는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 마족은 지금 어디 있죠?" 그는 아무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10년 전에 죽었습니다." "아… 죄, 죄송해요." 당사자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있는데 이루린 자신만 쓸데없는 말을 꺼냈다고 생각하면서 후회했다. 그녀는 군주의 눈치를 살피려고 했으나, 가면이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눈동자를 볼 수 없었다. 단지 굳게 닫힌 입술만이 그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죽었는데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것일까. `가면만 벗으면...` 얼굴을 직접 마주할 수 없어 답답한 마음이 들었지만, 계속해서 말을 걸기로 했다. "좀 웃어보세요, 저처럼 말이죠." "......" 그녀는 그의 얼굴을 향해 좀 과장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서릿발같이 차가운 그의 입술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루린은 괜히 자신만 말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좀 무안했지만, 다시 한번 용기를 내고 말했다. "언젠가 춤을 정식으로 배워보고 싶네요." 이루린은 언제부터인가 그의 손에 이끌려 춤을 추게 된 자신을 발견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노래가 끝나고 잠깐의 휴식 시간이 찾아왔을 때 그녀는 그의 품에서 멀어지면서 예의를 갖춰서 인사했다. 그가 마족들 사이로 지나가면서 어디론가 사라지자 그녀는 잔이 놓여 있는 어느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오랫동안 춤을 춰서인지 갈증이 일었던 것이었다. 일단 그녀는 숨을 고르게 내쉬면서 병에 든 붉은 액체를 잔에 따랐다, 그러자 그 액체가 넘실거리면서 소용돌이치듯이 원을 그렸다. 분명 피가 섞인 정체불명의 술이겠지만 눈을 딱 감고 먹기로 한 이루린이었다. 그 때였다. 옆에서 높은 톤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당신이 이루린이라는 마족, 맞나요?" 이루린은 잔을 든 채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자신을 눈여겨보았던 금발의 아름다운 마족이 팔짱을 끼고서 서 있었다. 그 마족은 자신을 삐딱한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이루린은 그 마족이 대충 언젠가는 만나리라고 직감적으로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올 줄을 몰랐기에 의외라고 생각했다. 이루린은 적당한 어조로 물었다. "누군가요?" 그녀는 사적인 말은 일체 꺼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내 소개를 하죠, 난 마네리아 가의 엘리세아라고 해요." 순간 이루린은 이 마족이 카란델이 언급했던 마법 이론만 비이상적으로 배운 그 마족이라고 생각했다. 이 마족이 자신에게 온 행동이 결코 좋은 이유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이루린은, 엘리세아라고 소개한 그 마족이 말하기를 묵묵히 기다렸다.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린과 엘리세아의 주변으로만 삭막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윽고 엘리세아가 톡 쏘듯이 빠르게 말했다. "긴 말 하지 않겠어요, 더 이상 함부로 행동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요." 엘리세아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다 알고 있었지만, 이루린은 능청스럽다는 표정을 과장되게 지어 보이며 느릿느릿하게 반문했다. "뭘 말이죠?" 도발적인 이루린의 태도에 엘리세아의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 눈엣가시라도 여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협박하듯이 말했다. "다 알고 있잖아?" 금방 반말로 바뀌는 엘리세아를 향해, 이루린은 일부러 더 느긋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행동해야 하는 법이었다. 게다가 엘리세아의 행동으로 보아, 그녀는 굉장히 시기심과 질투심을 강하게 느낀 것 같았다. "꺼지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 너 같은 게 넘볼 수 있는 분이 아냐, 군주는." 그 말에 신경이 살짝 거슬리긴 했지만 주위에 마족들이 많은 관계상 그녀는 못 들은 척하고 넘어갔다. 그리고 만면에 미소를 띄면서 엘리세아에게 가볍게 한 마디 던졌다. "참 가관이로군. 그것 병 아닌가?" "난 분명히 너보고 꺼지라고 했어. 여기서 당장!" 엘리세아는 은밀하게 분노를 속삭이면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물론 다른 마족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것도 드라마 각본대로 말하면서. 여기서 엘리세아가 악역이라면, 이루린은 주인공이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해야 정상이겠지만, 그녀는 주인공도 아니고 착하지도 않았다. 이루린은 냉소적인 태도로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싫다면?" 팔짱을 끼고 도도하게 이루린을 내려다보는 엘리세아가 표정을 풀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나 갑자기 이루린의 손에 들려 있는 잔을 거칠게 빼앗았다. 그리고 방심하고 있었던 그녀의 머리 위로 엘리세아가 잔을 이용해서 들이부었다. 차가운 느낌이 얼굴을 휘감았다. 그리고 잠깐 동안 사고가 정지되었다. 그러고 있는 동안에 엘리세아의 걱정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미안해요. 괜찮아요? 실수로..." 대부분은 무도회를 즐기느라고 현재 심각한 상황을 만들고 있는 엘리세아와 이루린을 쳐다보지 않았지만 몇 몇의 마족들은 붉은 액체를 뒤집어쓴 그녀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증스럽게도 엘리세아가 자신의 머리 위로 잔을 들이붓는 장면을 아무도 보지 못한 모양인지, 그들 모두 엘리세아를 응시하고 있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기에, 이루린은 당연히 기가 찰 수 밖에 없었다. 모두들 그녀의 보복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지만 일단 그녀는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본 후에 손으로 이마를 뒤로 쓸어 넘겼다. 엘리세아는 손수건을 꺼내서 이루린에게로 밀착해서 몸을 닦아주고 있었다. 연신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와 입술은 승리의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엘리세아는 다른 마족들이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말을 거역하면 다 이렇게 되는 거야, 이루린." 엘리세아는 다른 마족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처럼 겉으로만 열심히 닦아준 후에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난 자기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마족이 제일 싫어. 바로 너 같은." 엘리세아는 그녀에게 악의에 찬 미소를 지어준 후에 몸을 돌려서 테이블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순간 이루린은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모두 냉정하게 삼켰다. 굉장히 화가 났을 때 그녀가 항상 냉정해질 수 있었던 이유였다. 이루린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루시안이라는 마족이 자신의 몸을 만졌을 때와는 전혀 다른 경우였다. 그리고 그 때는 정도가 심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위를 의식하느라 크게 대응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는 침착하게 엘리세아의 뒷모습을 응시하면서 낮고 차가운 저음으로 말했다. "멈춰." 엘리세아는 그 말을 듣기는 했는지 살짝 돌아보면서 입가에 비웃음을 띄워주더니, 곧 다시 고개를 돌려서 앞을 걷기 시작했다. 들을 가치도 없다는 태도였다. 이루린은 다른 마족들이 놀랄 정도로 힘을 강하게 실어서 외쳤다. "멈추라고 했다!" 엘리세아가 멈칫하더니, 몸을 돌려서 조금 놀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런 식으로 행동해도 내가 여전히 다른 마족들의 시선을 신경 쓴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루린은 짧게 말을 끊었다. 부드러운 음악은 계속 흐르고 있었으나, 많은 고위 마족들이 그녀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느라고 더 이상 춤을 추지 않고 있었다. 적당히 손과 목을 푼 그녀는 그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그 생각, 바꾸게 해주지." 마왕의아내-11 무도회 이루린은 액체에 젖어 들러붙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다음 주위를 둘러본 후에 엘리세아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약간 당황한 빛을 보인 엘리세아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이루린 양." 이루린이 묵묵히 다가가자, 그녀는 노골적으로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주위를 향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위험에 처했으니 도와달라고 하는 것처럼. 이루린은 일단 자신에게로 향하는 시선을 없애기 위해 웅성거리고 있는 마족들에게 힘을 실어 외쳤다. "별 일 아니니 신경쓰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자 마족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더니, 곧 다시 음악에 맞춰서 무도회를 즐기기 시작했다. 엘리세아 또한 주위를 힐끗 쳐다보면서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얘긴 다 끝났을 텐데? 카넬리안 가에서 태어났으면서 타고난 능력도 없는 너 따위가 감히 내게 뭘 하겠다고? 외모를 믿고 그러는 거라면 착각하지 마. 많은 마족들이 네 외모가 아름답다고 말하곤 하지. 그러나 내 눈에는 역겹게 보일 뿐이야." 엘리세아는 은밀하게 악의에 찬 미소를 지으면서 - 그것도 다른 마족들의 눈에 띄지 않게 - 그녀를 응시했다. 이루린은 그런 엘리세아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뭔가를 크게 착각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이루린은 잠시 숨을 고른 후에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 "실력이 없다느니, 타고난 재능이 없다는 소문을 아무런 증거도 없이 믿을 수 있나?" 그 말에 신경이 거슬린 듯, 눈이 가늘어진 엘리세아가 당연하다는 듯이 비웃음을 띄면서 말했다. "난 네가 나보다 재능이 없다는 것쯤은 잘 알아. 어리석다고 생각할 만큼 지나치게 순수하고 얌전해서 그리 강한 체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잘 알지. 난 너 같은 마족을 보면 먼저 짜증나. 온실 속에서 곱게 자라도 너무 곱게 자라서, 지근지근 밟아 버리면 곧 죽을 꽃과도 다름이 없으니까. 안 그래?" 이루린은 신경이 거슬리는 것을 느꼈지만 일단 절제해서 참기로 했다. 생각 같아서는 뺨이라도 한 대 치고 싶었지만, 이 곳은 고위 마족들의 집합이라 할 수 있는 거대한 무도회가 열리고 있는 곳이다. 여기에서 눈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간 어쩌면 쓸데 없는 일을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 그 때였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발에서 느껴진 것은. "윽!" 이루린은 무도회장이라는 의식이 머릿속에 남아 있어 최대한 신음 소리를 죽였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리며 발을 내려다 보았다. 엘리세아가 허벅지에 달라 붙는 드레스를 - 중국식으로 보이는 - 걷어 올린 후에 그녀의 발을 보이지 않게 밟고 있었던 것이다. "난 널 이렇게 해주고 싶어." 엘리세아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이루린은 더 이상 자제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고통과 함께 치솟는 분노가 전신을 휘감았을 때 그녀는 억지로 엘리세아를 밀쳤다. 그런 다음 손에 마력을 불어 넣고 엘리세아만이 들을 수 있을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살풍." 그러자 미친듯이 손을 휘감는 마력이 엘리세아의 배로 향했다. 그러나 그냥 제 자리에서 바닥에 쓰러질 수 있을 정도로만 마력을 불어 넣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녀의 예상대로 엘리세아는 바닥에 쓰러졌다. "꺄악!" 그녀가 비명을 지르자 많은 고위마족들이 다시 이루린을 응시했다. 엘리세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리곤 손을 들어서 눈물을 닦았다. 그러자 엘리세아의 추종자라고 할 수 있는 남성 마족들이 달려와서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놀란 듯이 이루린을 응시하면서. "무슨 일이야?" "모, 모르겠어요. 그냥 발을 잘못 밟았는데 갑자기 날 공격했어요. 이루린 양은 내가 싫은가봐요." 엘리세아를 둘러싼 마족들이 이루린을 기가막힌다는 듯이 응시했다. 정작 기가막힌 것은 이루린 자신이었는데도. 그녀는 이 상황에서 잘못 행동하면 자신의 이미지가 크게 실추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벌써 실추되었는지도 모른다. `대충 저렇게 나올 것이라는 예상은 했었지.` 이루린은 순진하게 눈을 뜨고 자신을 올려다 보는 엘리세아를 향해 미소를 던져 주었다. 그러자 슬픈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의 표정이 조금 기묘하게 변했다. 많은 마족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연신 이루린과 엘리세아를 번갈아보고 있었다. 이루린은 그들을 응시하면서 홀 전체를 두리번 거렸다. 그리고 바로 자신이 앉았던 테이블 위에 적당한 검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곤 거기로 갔다. 엘리세아 주위에 있는 마족들은 모두 이루린, 자신의 행동을 주시하고있었다. 이루린은 검을 들고 다시 엘리세아가 있는 곳으로 오자, 많은 마족들이 당황하면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엘리세아는 더 이상 울고 있는 표정이 아닌, 뭔가가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루린은 그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엘리세아 주변에 있는 남성 마족들에게 검을 겨누며 말했다. "멀리 떨어지십시오." 처음에는 꿈쩍도 하지 않던 그들이, 이루린이 강압적으로 응시하자 엘리세아의 눈치를 살피면서 물러났다. 엘리세아는 그들의 행동에 당황했는지 멀리 떨어진 남성 마족들에게 독촉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오! 무도회장에서..." 한 마족이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이루린이 그 마족을 향해 검을 겨누자, 그가 다소 움찔하면서 뒤로 살짝 물러났다. 그녀는 비단 그 마족만이 아니라 전체를 향해 외쳤다. "개인적인 일이니 신경 끄셨으면 합니다." 이루린은 자신과 엘리세아를 중심으로 한 마족들이 벌떼같이 모여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까 전보다도 더욱 많이. 엘리세아는 그런 마족들의 시선에 다소 당황하는 듯 싶었지만, 침착하게 이루린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루린은 바닥에서 일어날 줄 모르는 엘리세아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그녀의 얼굴 정면으로 검을 겨누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실력이 없다느니, 재능이 없다는 이상한 말을 하던데." 엘리세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지금 당장 겨뤄보는 게 어떨까. 설마 너무 마법을 잘해서 검술을 못하니 할수 없다는 소리는 하지 않겠지." 엘리세아의 얼굴에 당황하는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곧 엘리세아가 손으로 얼굴을 살짝 감싸며 말했다. 흐느끼려는 듯이. "너무해요, 이루린 양.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죠? 난, 난 실수를 저지른 것 밖에 없는데..." 눈 앞에 펼쳐지는 연기에 신물이 난 이루린은 그녀의 말을 거칠게 잘랐다.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야. 난 네게 정식으로 대결을 신청하는 거야. 설마 피하진 않겠지? 뛰어난 실력을 소유하고 있는 네가, 실력도 없는 내 대결을 피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망신이겠지. 아닌가?" 엘리세아는 심각해 보이는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 보며, 무릎을 털고 일어섰다. 뭔가를 극도로 경계하는 듯한 눈동자가 이루린의 손으로 향하고 있었다. 분명 아까 그녀가 쓴 기술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싫어요. 이런 옷을 입고 대결을 한다구요? 오늘은 무도회를 즐겨야 해요. 그리고 왜 뜬금없이 내게 이런 대결을 신청하는 거죠?" 엘리세아는 교묘하게 말을 돌려서 대결을 피하려고 했다. 어쩌면 그녀는 모든 것을 영악하게 판단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왜 이루린이 불리한 상황에서 대담하게 나오는 것인가, 그리고 아까 그 기술은 무엇인가에 대해 벌써 자문자답을 끝냈을 것일 수 있었다. 이루린이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검을 겨누며 앞을 향해 다가가자, 엘리세아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로우! 크렌!"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엘리세아의 앞으로 두 마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둘 다 검은 망토를 두른 음침한 분위기를 지닌 마족이었다. 그들은 금방이라도 이루린을 공격할 것 처럼 자세를 잡고 서 있었다. 이루린은 엘리세아의 표정이 그제서야 다시 자신만만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 원한다면, 내 대신이라고 할 수 있는 자들과 대결하면 좋겠군요. 먼저 크렌!" 두 마족 중 키가 작은 마족이 그녀에게로 다가가자, 엘리세아는 이루린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재빨리 뭐라고 속삭였다. 소리가 작았기 때문에 다른 마족들은 들을 수 없었지만, 가까이 있는 이루린만은 들을 수 있었다. 바로 `없애 버려`라고. 엘리세아가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 "공격해!" 그러자 크렌이 이루린을 향해 마왕성에서 말고 밖으로 나가서 대결을 해야 한다는 말을 할 틈조차 주지 않고 공격해왔다. 물론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검을 쓰진 않았다. 먼저 크렌이 그녀의 복부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자, 이루린은 그것을 재빨리 포착한 후에 여유롭게 피했다. 크렌은 놀란 듯이 이루린을 응시하면서, 다시 빠른 속도로 어깨를 공격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리 힘든 공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역시 가뿐하게 옆으로 피했다. 마족들의 비명 소리와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더 거세어졌다. 아까보다 더 많이 모인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면서 가지각색의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다칠세라 걱정하는 마족, 즉흥적인 대결이 펼쳐지는 광경에 흥분하는 마족, 이 상황에 충격을 먹은 마족, 불만을 터뜨리는 마족 등 다양한 마족의 표정이 그녀의 눈에 비춰졌다. "이럴 수가... 내 공격을 다 피하다니!" 크렌이 중얼거렸다. 이루린은 아직 시작조차도 하지 않고서 그를 응시했다. "왜 검을 쓰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군요." 크렌이 그녀에게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같은 상급 마족이 너같은 고위 마족에게 검을 쓰다가 다치게라도 한다면 징계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소 무례한 태도에 이루린은 일단 인상을 썼다. `상급 마족이 함부로 고위마족에게 반말로 말할 수 있나?` "반말이 무척 거슬리는군요."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원래부터 네 가문은 내가 섬기고 있는 가문과 적대적인 관계였으니 상관 없다." 이루린은 그가 더 말하기 전에 앞서서 말했다. "어쨌든." 그녀는 조금 멀리 떨어진 후에 다른 마족들이 다 들을 수 있을 만하게 큰 목소리로 말했다. "징계를 먹는다.... 다쳐도 상관 없습니다. 검을 들고 싸우시죠." "....!" "뭐라고?" 모두들 믿을 수 없다는, 경악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흥분한 얼굴로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이루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크렌과 엘리세아, 그 주위를 둘러싼 마족들을 향해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이며 자세를 잡고 검을 겨누었다. 그리고 매섭게 크렌을 응시했다. "시작하겠습니다." 마왕의아내-12 무도회 아름다운 선율이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실내의 분위기와는 달리, 이루린과 엘리세아 주변의 분위기는 극도의 긴장감으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이루린이 적당히 팔과 다리를 풀고 검을 세우자, 크렌 또한 다소 심란한 표정으로 이루린을 응시하더니 품 속에서 검을 꺼냈다. 이루린이 여유있게 미소를 지으며 자세를 좀 더 낮췄다. "먼저 덤벼도 상관없습니다." 그러자 크렌이 눈을 가늘게 뜨며 탐색하듯이 그녀를 응시했다. "특이한 자세로군. 그런데 어디에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실력인가, 아니면 고위 마족이라는 신분을 믿는 것인가?" 크렌 또한 적당히 자세를 잡고 검을 세우면서 그녀를 무게 있는 눈동자로 응시했다. 이루린은 피식 웃으면서 그의 질문을 가볍게 얼버무렸다. "글쎄요." 그 때 곁에 있던 엘리세아가 몸을 낮춰서 뭐라고 말했다. 다른 마족이라면 몰라도 가까이 있었던 이루린은 들을 수 있었다. "쓸데 없는 대화는 필요없으니 얼른 공격이나 해요!" 엘리세아를 응시하는 크렌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이루린을 향해 공격해 왔다. 그는 먼저 그녀의 목을 향해 수평으로 휘둘렀다. 그의 검을 끝까지 주시하고 있었던 이루린은 무릎을 굽혀서 아래로 몸을 숙인 다음 손잡이 부분으로 크렌의 복부를 찔렀다. 크렌이 그 공격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잠시 움찔하더니, 곧 아슬아슬한 동작으로 피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로 비스듬이 검을 휘둘렀다. 이루린 또한 그의 검에 대응하기 위해 세게 검을 휘둘렀다- 갑자기 격렬한 소음이 울려퍼졌다. 순간 이루린은 이 정도의 소음이라면 아무리 넓은 무도회장의 마족이라도 모두 다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치의 양보도 없이 두 검이 신경전을 펼쳤다. 그러나 이윽고 이루린의 검이 미세하게 흔들리면서, 조금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검술에 능숙하다고 해도, 여자의 몸으로는 검술 부분에 타고난 재능을 이어받은 상급 마족에게 덤벼서 승산이 없었다. 이루린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그녀는 검에 일시적으로 큰 힘을 줘서 크렌의 검을 쳐낸 후에 뒤로 몸을 뺐다. 그리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섰다. 크렌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하면서 경계는 눈초리를 보냈다. "대단하군.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고위 마족의 몸으로 그 정도의 검술을 펼칠 수 있다는 사실이." "이번엔 내 쪽에서 선제 공격을 가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즉시 그녀는 그에게 빠른 속도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그의 가슴을 목표로 삼고 수평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가 살짝 피하더니, 예리한 검끝으로 그녀의 복부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이루린은 적당히 피해서 검을 쳐낸 후에 왼쪽으로 피해서 어깨를 공격했다. "윽!"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크렌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천에 피가 비집고 나와 퍼지기 시작했다. 그는 눈살을 심하게 찌푸리면서 어깨를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이루린을 노려보았다. 자존심이 상해도 한참 상한 듯한 눈동자였다. 갑자기 그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기분나쁘게 웃었다. 이루린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그 즉시 보여지는 그의 행동에 의해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럴 수가..." 순식간에 그의 몸이 사라지자 마족들의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루린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가 다시 제자리에 나타났을 때, 그녀는 바로 뒤에서 강한 마력을 감지했다. 그가 뒤에서 뭐라고 중얼거렸다. 이루린이 그게 이 세계의 마법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예측할 수 없었던 행동에 그녀가 재빨리 피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그 마법을 고스란히 등 뒤에 맞았다. "윽!" 이루린은 짧게 신음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에 거칠게 몸을 돌려서 검을 휘둘렀으나, 이미 크렌의 모습은 사라지고 난 후였다. "마왕성 내부에서는 마법을 쓸 수 없을 텐데 어째서?" 이루린은 구경하고 있는 마족들을 둘러보았다. 그들 모두 표정이 경악으로 일그러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크렌이 마법을 썼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단지 마력이 감지되었다는 것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비겁한..." 이루린은 중얼거리면서 검을 고쳐 세우고 침착하고 냉정하게 마음을 가라 앉혔다. 몸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것 같다가 서서히 고통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름 모를 강력한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 `이 느낌은 뭐지?` 이루린은 인상을 쓰면서 몸을 앞으로 살짝 숙였다. 그러는 사이에 크렌이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더니, 빠른 속도로 공격해 왔다. 그녀는 뼈를 깎는 듯한 느낌 때문에 움직이기가 매우 괴로웠지만, 검을 휘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그녀는 의도적으로 크렌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검을 맞붙게 한 다음, 속삭이듯이 말했다. "비겁하군. 마법을 쓰다니." "이기기만 하면 상관 없다." 순간 이루린은 속으로 갈등했다. `마법이 지속되면 승산이 없다. 하지만 그 방법은...` 기사도 정신과는 거리가 먼 그의 단호한 말에 이루린은 고통과 숨가쁜 육체 때문에 땀을 흘리면서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이루린은 일부러 검에서 힘을 뺐다. 순간 그는 당황하면서 앞으로 나오다가, 다시 자세를 고쳐 잡고 세우더니 탐색하듯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리곤 복부를 향해 수직으로 베었다. 몸 속에서 흐르고 있는 강렬한 고통보다도 더욱 큰 고통이 배를 시작으로 해서 전신으로 퍼졌다. 그녀는 배를 손으로 감싸면서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피가 손을 타고 흘러서 바닥에 소리없이 홍건히 고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마족들의 비명소리와 함께, 크렌의 당황한 듯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루린은 눈에 담기 힘들 정도로 많은 양의 피를 보게 되면, 자신의 상태가 어떻게 변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럴 수가!" 엄청난 마력이 회오리를 치듯이 그녀의 몸을 휘감자 제일 먼저 마족들이 경악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거칠게 몸을 휘감고 있는 마력의 폭풍을 이용해서 검을 세웠다. 마력에 의해 머리카락과 드레스가 미친듯이 휘날리는 가운데, 크렌이 주저하며 뒤로 물러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실내를 감돌던 음악이 더 이상 흐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이루린은 그를 향해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아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그와 검이 격돌했을 때 그녀는 검에 마력을 집어 넣었다. 그러자 최초로 그의 검이 미세하게 떨리면서 뒤로 밀려자기 시작했다. 그가 눈을 부릅뜨면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여성 고위 마족이 소드 마스터의 실력이라니!" "그래?" 이루린은 짧게 반문하면서 상대가 긴장하도록 계속 미소를 지었지만, 점점 몸의 상태가 악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자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이성을 잃는 건 물론이고 누군가가 제어하지 않으면 죽는다. 그게 폭주 상태의 단점...` 크렌이 건 마법과 폭주 상태로 인해 복잡적인 고통으로 몸에서 매 순간 경련이 일었다. 위험한 방법이었으나, 크렌이 마법만 쓰지 않았다면 그녀 자신도 이 방법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점점 머릿속이 혼미해져 왔다. 과다 출혈 때문인지, 아니면 폭주 상태로 인해 점점 이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꼭 만신창이가 된 육체로 술을 마시고 나서 취한 듯한 기분이었다. 이루린은 마지막으로 끝을 내기로 마음 먹고, 온 마력을 검에 집중해서 크렌의 복부를 향해 내질렀다. "나의 승리다." 이루린이 중얼거리는 동시, 크렌의 몸은 엄청난 마력으로 인해 견디질 못하고 멀리 날아갔다. 그리고 묵직한 광음과 함께 벽에 충돌했다. 순간 크렌의 머리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아오르기 시작하더니, 곧 바닥에 흩어졌다. 마족들은 인간들처럼 피를 보고도 소리를 지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 오히려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 마족들도 있었다. - 대신 웅성거리면서 한결같이 믿기 힘든 표정으로 이루린과 크렌을 번갈아보고 있었다. 그것은 엘리세아도 마찬가지였다. 크렌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지만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루린은 자신이 점점 스스로의 육체를 제어하기가 힘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누군가가 저지해주길 바랬다. "저 마족은 카넬리안 가의 여식인 이루린 양이로군요. 그런데 어째서 마왕성 내부에서 이런 짓을...!" 보좌관인 데이비드는 분을 참지 못하고 중얼거리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마족들의 무리를 거칠게 헤치고 이루린에게로 다가갔다. 그런 다음 큰 소리로 고함쳤다. "이게 무슨 짓인가! 지금 이 곳에서..." 그녀의 이마에서는 땀이 흐르고 있었고, 복부에는 피가 고이고 있었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눈에는 촛점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당신도 죽고 싶습니까." 순간 데이비드는 당황했다. 실제로 그녀는 손에 강력한 마력을 휘감고 있었다. 아직 어린 고위 마족이 이 정도의 마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그는 적지 않게 놀라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시종관인 자신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실력을 행사하려고 하다니. 이 무슨 괴기한 상황이란 말인가. 그 때 데이비드는 자신의 어깨에 얹혀지는 어떤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구, 군주님.." "알아서 처리하겠다." "하, 하지만..." "알아서 처리한다고 하질 않는가." 언제나 싸늘했지만, 오늘따라 더욱 싸늘한 군주의 목소리가 데이비드의 행동을 저지했다. 많은 마족들이 이루린을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에, 군주는 가만히 서 있는 이루린을 향해 걸어갔다. 순간 주위의 시선은 모두 군주에게로 집중되었고, 묘하게도 팽팽한 긴장감이 형성되었다. 그 시각, 이루린은 자신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군주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이성을 잃었다. 마왕의아내-13 마왕의 서고 갑자기 이루린이 마력을 방출하는 것을 본 데이비드는 반사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군주가 조용히 손을 들면서 그의 행동을 막았기에 답답한 마음만 앞설 뿐이었다. 이루린의 막대한 마력에 대부분의 마족들이 모두 놀라워했다. 그러나 단 한 명은 놀라지 않고 시종일관 똑같은 행동을 취하고 있었으니, 그 자가 바로 군주였다. 군주가 그녀의 앞에 서서 서서히 마력을 끌어올리자, 모든 마족들이 살짝 비명 섞인 감탄을 지르면서 아까 전보다 훨씬 경악했다. 그의 마력은 역대 마왕들 중에서 최강이라는 말에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상상을 초월했다. 이루린과 군주의 마력이 부딪히자 거센 바람이 일었다. 잠시 두 마력의 기운이 서로 신경전을 벌이다가, 결국 이루린의 마력이 연기처럼 소리없이 소멸해 버렸다. 당연한 결과였다. 순간 모든 게 정지되어 버린 것처럼 주위가 정적에 휩싸였다. 오로지 이루린만이 어깨를 들썩거리더니 곧 입에서 미량의 피를 토해냈다. 그녀는 머릿속에서 뭔가와 갈등하고 있었는지, 어깨와 다리를 어색하게 움찔거리고 있었다. 군주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더니, 곧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짜악- 순간 긴장하고 상황을 지켜보던 모든 마족들의 표정이 다시 한번 변했다. 처음 무도회장에 나와서 마족들을 놀라게 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루린의 뺨을 세차게 때리는 의외의 행동을 한 것이다. 그것도 짧지만 강한 힘으로. `만약에 이 상황에서 카란델이 있었다고 해도 말릴 수 있었을까.` 데이비드는 어쩌나, 하는 심정으로 이루린을 응시했다. 그녀는 고개가 돌아간 채로 머리를 숙이고 있어서 그가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대신에 붉게 물든 뺨이 언뜻 머리카락 사이로 보였다. 데이비드는 이 상황을 모두 종합해서 분석을 해보았다. 얌전하고 내성적이며, 검술이나 마법 쪽에는 전혀 소질이 없다고 알려진 이루린이, 오늘 보여준 행동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단 말인가. 고위 마족이라면 마왕성의 규칙에 대해서 세세하게 잘 알고 있을 텐데 말이다. 그는 그 해답을 알아낼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이루린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혼이 빠져나간 듯한 그녀의 눈에 비로소 생기가 찾아든 듯 싶었다. "마왕성에서 난동을 부리는 게 무엇을 뜻하는 짓인지 알고 있나? 게다가 저 마족까지 죽였지 않은가." 군주가 싸늘하게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크렌이 쓰러진 곳을 가리켰다. 별로 좋지 않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루린의 고개가 천천히 그 쪽으로 돌아갔다. 데이비드는 모르고 있었으나, 군주는 마네리아 가에서 이름이 높은 마족인 크렌이 벌써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대답해라." "......" 이루린은 살며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고개를 들어서 군주를 올려다 보았다. 데이비드는 그러한 그녀의 행동에 또 다시 의문을 품었다. 다른 여성 고위 마족이라면 뺨을 맞고 나서 수치심에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루린은 그저 태연한 자세로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것이었다. 자세히 살펴 보니 피가 새어나오고 있는 배를 손으로 감싸면서 고통을 참고 있는 듯한 기색이 얼굴에 역력하게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군주가 몸을 돌려서 다른 마족들에게 넓게 시선을 두며 말했다. "마왕성에서, 난동을 피우는 것은 형법 214조의 중죄에 해당하고 마족을 죽이는 행위는 형법 제 1조의 소멸이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곧 이루린에게 군주가 벌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력한 고위 마족의 딸인 만큼 약간의 형을 감안해서. 마족들 또한 호기심과 불안한 시선으로 이루린과 군주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그 다음 이어지는 군주의 말은, 또 다시 많은 마족들의 생각을 혼돈 속으로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방금 내가 한 행동으로 용서하겠다." 곧 몇 몇 마족들의 항의의 목소리가 거세게 튀어 나왔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웅성거리는 마족들 사이에서 데이비드 또한 혼란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다. 언제나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공과 사를 구분할 수 있는 철두철미한 군주였다. 그런데 군주가 고작 이루린에게 가한 가벼운 행동이, 형법 제 1조의 소멸을 면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텐데...` 그는 끝내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루린은 과다 출혈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져옴을 느꼈다. 수면제를 먹은 것처럼 뇌가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정작 육체는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몰랐지만, 군주는 그녀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위험한 폭주 상태에서 이루린이 더 이상 마력을 끌어 올리지 못하도록 막아주었다. 그리고 제대로 이성을 되찾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가 다시 폭주 상태에 들어갈 수 없도록 뺨을 때렸고, 그 덕분에 그녀는 완전히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루린은 속이 울렁거리면서 동시에 땅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군주가 팔을 뻗어서 자신의 몸을 지탱해 주었을 때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안도했다... 그리고 의식이 죽은 듯이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군주는 눈을 감고 기절한 그녀의 몸을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할 말을 잃은 채로 서 있는 데이비드에게로 와서 예의 그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저 마족을 알아서 처리하고 지금 모든 고위 마족들에게 무도회를 중단한다고 알리도록. 그리고..." 항의하려는 몇 몇의 고위 마족이 돌아본 군주의 기에 눌려서 입을 다물었다.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에 대해 조사하겠다." 데이비드, 그 자신의 착각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순간 엘리세아와 그 옆에 있던 상급 마족 그로우의 표정이 상당히 좋지 않은 쪽으로 변한 것 같았다. 군주가 이루린을 든 채로 무도회장을 빠져 나가려고 하자, 몇 몇의 고위 마족이 두려움과 필사적인 심정이 섞인 표정으로 외쳤다. "어떻게 형벌을 감안해 주실 수 있습니까!"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군주가 고개를 돌려서 항의하는 그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차갑게 말했다. "감히 내 말을 거역하는 것인가." 그러자 그들 모두 언제 항의했냐는 듯이 얌전하게 입을 다물고 꼬리를 내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분명히 조사해 본다고 말했다." 데이비드는 그들이 왜 더 이상 항의하지 않고 얌전하게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군주에게 대항해서 살아남은 자가 단 한 명도 없었던 게 이유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 만큼 사리분별력이 뛰어나서 그릇된 방식으로 마계를 다스리지 않아왔던 이유가 컸다. 그리고 냉혹한 빛을 띄는 분위기에 누가 감히 용감해지겠는가. 군주는 이루린과 함께 어둠이 짙게 깔려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 버렸다. 머리가 부서질 듯이 아파옴을 느끼면서, 이루린은 흐릿하게 눈을 떴다. 제일 먼저 기묘한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는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열린 창가로 따스한 햇살이 스며 들어와 몸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여기가 도대체..." 이루린은 중얼거리면서 허리를 일으켰다. 이질적인 공간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는 잠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끼곤 눈을 제대로 떴다. 막 몸을 움직이자 복부에서 저릿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제서야 그녀는 복부의 드레스가 찢어져 있다는 것과, 그 사이로 붕대가 감겨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드레스를 벗기지 않고서 어떻게 붕대를 감은 것인지는 의문이었다. 무도회장에서 있었던 일들이 거의 모두 생각나지 않았다. 폭주가 막 시작되었을 때부터 자신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와 싸웠던 크렌이라는 마족이 결국엔 어떻게 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설마... 죽지는 않았겠지. 또 다시 누군가를 죽이기는 싫으니까. 그 때처럼.` 아버지와 동생이 교통 사고로 죽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건 모두 자신 탓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갑자기 기분이 저하되자, 그녀는 거칠게 고개를 저어서 생각을 지웠다. 이루린은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막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그런데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본능적으로 소리를 지를 뻔 했으나 가까스로 입을 막았다. 이루린은 열에 받친 어조로 강하게 말했다. "넌 그 때 그! 성질 더럽고 매너 없고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도 해주지 않는 나아쁜 마족!" 욕이 절로 나올 만큼 감정이 팍 상해 있었던 존재가 눈에 들어오자 이루린은 자연히 흥분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침대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밤새 붕대를 감아주고 간호를 해준 것 같았다. 그 사실은 그녀의 흥분을 조금 추스려주었다. "정말 의외인데?" 이루린은 그 마족이 여전히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자,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악감정이 있는 말들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간호하다가 탈진해서 죽었다고 해도 믿겠는데. 시체면 내가 육신이 썩는 것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까마귀 식량으로 바칠텐데 정말 아쉬워서 어쩌겠어." 예상대로 그는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이루린은 즐거운 마음으로 사악하게 웃으면서 농담에 가까운 어조로 가볍게 중얼거렸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시체는 너무 무섭단 말이지. 기왕이면 좀 아름답게 꾸미는 게 미관상 좋겠지?" 이루린은 머리카락으로 덮여 있는 그의 얼굴을 향해 악마의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그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지르면서 반사적으로 손과 몸을 뒤로 뺐다. "누, 눈이!" 그가 천천히 눈을 뜨고서 이루린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짓이지?"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왕의아내-14 마왕의 서고 그가 천천히 눈을 뜨고서 이루린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짓이지?" 눈꺼풀이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자고 있었던 게 아닌 것 같았다. 아니면 이루린이 말하는 도중에 이미 깨어 있었거나. "너! 너! 너!" "왜, 왜, 왜." "장난치지 말고..." 이루린은 괜히 그의 얼굴에다 낙서하려고 했던 짓을 무마시키기 위해 일부러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속지 않고 오히려 되받아서 그녀를 난처하게 했다. "장난은 네가 먼저 치지 않았나?" "....." 이루린은 싸늘한 느낌이 등을 쓰다듬는 것을 느끼면서 조금 억지에 가까운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최대한 당당하게 보이려고 애쓰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 어디서부터 알고 있는 거지?" 그는 딱 잘라서 말했다. "처음부터." 가뜩이나 차가운 느낌을 물씬 풍기는 그의 눈동자가 조금 가늘어졌다. 그의 시선은 달갑게 여길 만큼 가볍지 않았기에, 일부러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딴청을 피워야만 했다. 이루린은 조금 부끄러운 감정과 약간의 자존심 때문에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어, 뭐 그건 그렇고. 네가 날 간호해 준거야?" 그가 그녀를 힐끗 보더니, 다른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착각도 자유로군." "뭐, 뭐야?" 이루린은 그의 대답에 기가 막혀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밤새도록 간호해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일까. 악감정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지만, 이루린은 인상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최대한 우호적인 말투로 물었다. "그럼 여기에서 왜 자고 있는 건데?" "어젯밤에 왜 그랬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그는 어제 분명 그녀의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무도회장에서 있었던 일들이 떠오르자, 그녀는 자연히 인상을 쓰게 되었다. 머릿속에 담기 싫은 일이었기에 그녀는 의식적으로 차갑고 깊은 그의 눈동자를 피해버렸다. 그가 끈기 있게 기다리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이루린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어젯밤에 내가 사람을... 아차, 아니 마족을 죽이 건 아니겠지." 이루린은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사람`이란 단어 때문에 곤란한 지경에 빠질 뻔했지만 임기응변 식으로 자연스럽게 얼버무렸다. 다행히도 그는 그 문제에 대해 걸고 넘어가지 않았다. "알고 싶나?" 그가 조용하게 묻자, 이루린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렌이라는 마족은 죽었다. 네 손에 의해 완벽하게." 냉정하리만큼 감정이 실려 있지 않은 그의 말이 그녀의 마음 한 구석을 찔렀다.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은 직설적인 말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 말을 들은 이루린은 조금은 후회하면서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스스로의 손으로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이 그녀는 너무 싫었다. 하지만 같은 동족이 죽었는데도 이 남자는 전혀 괘념치 않는다... 그것은 굉장히 새롭지만 씁쓸한 느낌이었다. 그가 계속 그녀를 빤히 응시하고 있자, 그 시선이 무슨 뜻인지 뒤늦게서야 알아차린 그녀는 맥빠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하면.." 이루린은 그에게 무도회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빠짐없이 말해주었다. 말하는 게 조금 괴롭긴 했지만,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 밤새도록 자신이 깨어나길 기다렸던 그에게 어떻게 안 된다고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가 왜 그녀와 관련된 사건을 듣는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그는 모든 사실을 듣고 나서 잠시 가만히 있더니, 곧 한 마디 던졌다. "... 결국 네 성격의 문제로군." `성격이 문제`라는 말은 한국에 있을 때 제일 듣기 싫은 말 중 하나였다. 물론 그녀의 성격이 너무 순하고 착해서 완벽한 건 아니긴 했지만.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순전히 자신이 아닌 엘리세아 탓이었기에, 그녀도 감정이 격해질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그 쪽 성격은 뭐 좋은 줄 알아? 차갑고 무뚝뚝한 주제에... 그냥 내가 먼저 그 쪽이랑은 말다툼을 포기하겠어. 그러다가 아빠가 그 때처럼 나타나기라도 하시면 곤란하니까. 뭐, 하여튼..." 이루린은 그가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재빨리 말했다. "내 이야기는 이제 끝났어." 이루린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침대에 등을 던졌다. 그가 의자에 앉은 채로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더니, 날카롭게 질문을 던졌다. "아까 분명히 이성을 잃었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뭐지?" 이루린은 조금 심각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 이유는 나도 몰라. 어렸을 때부터 항상 이런 식이었으니까. 많은 양의 피를 보면 난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게 되었고, 그 순간 이성을 잃었지. 그 이후로는 생각이 잘 나질 않지만, 적어도 그 상태가 되면 비 이상적으로 강한 힘을 끌어낼 수 있다는 정도는 알 수 있지." 그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역시." 이루린이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반문했다. "뭐?" 그가 그녀의 반문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답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만 가겠다." 이루린은 갑작스러운 태도에 기가 막힌 나머지 한동안 할 말을 잃다가, 가까스로 외칠 수 있었다. "뭐야! 남은 기분이 나빠 죽겠는데 자기 볼일만 끝내고 가는 건 너무하잖아! 최소한 위로라도 해 줘야지! 연약한 마족에게 그런 식으로 밖에 하지 못해?" 이루린이 씩씩거리고 있어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글쎄. 내가 보기에는 연약해 보이지는 않는군." 그가 나가고 나면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었기에, 이루린은 그를 좀 더 잡아두고 싶었다. 그래서 거의 불만에 가까운 투로 말했다. "최소한 말로라도 위로를..." 그가 흐지부지하게 흐리는 그녀의 말을 딱 잘라서 말했다. "그런 게 네게 필요 있을까." "......" 카란델의 말을 상기하면서, 이루린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윽고 그가 더 이상 미련이 남아 있지 않은 듯,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런 그를 조금이라도 붙잡고자, 이루린은 아까 전부터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말했다. "잠깐! 왜 내가 그런 것들을 말해야 하는 건데?" "어리석으니까." "뭐, 뭐야! 이 자식이!" 결국 그녀는 참지 못하고 그에게 분노가 가득 실린 베개를 던졌다. 멋있게 날아가던 베개는 그가 재빨리 문을 닫자 부딪히면서 볼품 없이 바닥으로 내팽겨쳐졌다. 그 때 그녀는 그가 문 밖에서 말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위로도 때에 따라서 가려야 하는 법일 텐데. 고차원적인 배려가 뭔지 전혀 모르는군." 이루린은 그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속으로 불만을 터뜨렸다. `뭐가 고차원적인 배려야?` 이루린은 그가 들을 수 있을 만한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다음에 만날 때는 두고 보자!" "......" 그가 들었는지는 미지수였다. 아직까지 이름도 모르는 상대였지만 그녀는 그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했기 때문에 다음에 만난다면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루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로지 새 소리만이 정적을 깨고 들려오는 가운데, 그녀는 이불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배에서 유리에 의해 살이 날카롭게 베이는 듯한 느낌이 일었다. 그녀는 양미간을 모으면서 손으로 배를 부여잡고 탁자 위에 놓인 옷을 응시했다. 누군가가 갈아입으라고 갖다 놓은 옷인 것 같았다. 그녀는 힘들게 옷을 벗고 나서 무릎까지 오는 하늘색의 시원하고 활동적인 드레스로 갈아입은 후에 문으로 향했다. `도서관에나 가볼까. 앞으로 여기에서 생활하려면, 적어도 의심을 받지 않을 정도로 마계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하니까.` 이루린은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다가 걸음을 멈췄다. 문 바로 앞의 벽에 큰 종이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이게 뭐지?` 이루린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그것을 심각하게 읽어 내려갔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무도회를 중지함. 대신에 오늘 저녁에 고위 마족의 신부 후보 합격 발표가 있겠음. 그러니 어제와 같은 시각에 무도회장에 모여 주기 바람.] 이루린은 이 글의 의도가 무엇인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러워했다. 시험은 단 한번도 치르지도 않았는데 벌써 발표라니. 이런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혹시...?` 만약에 어제의 무도회 자체가 시험이었다면 이 공지는 당연한 결과가 된다. 머리가 아파 왔지만 그녀는 어제 있었던 일들을 필사적으로 기억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어제 몇 몇의 중후한 고위 마족들이 자신에게 접근에서 몇 가지의 사항에 대해 물었던 사실을 어렴풋하게 기억해냈다. 그 마족들이 말로만 듣던 신부를 평가하는 심사단이었단 말인가. 그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이루린은 싸한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아래로 퍼지는 것을 느꼈다. 막판에 무도회장에서 난동을 가장 심하게 부리고 제일 예의 없이 군것은 이루린 자신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모든 고위 마족들이 이루린을 가해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게다가 상급 마족까지 한 명 죽이지 않았는가. `엘리세아는 이런 경우를 생각해뒀겠지. 나를 일부러 도발해서 자기를 공격하게 만든 다음 심사단의 눈에 잘못 찍히게 만든다... 정말 완벽하군.` 이루린은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이내 속 편하게 생각하며 그러한 기분을 떨쳐 버렸다. `어차피 난 마왕의 아내가 되는 것에는 관심 없어. 될대로 되라지. 그나저나... 정령을 소환하는 방법이나 배워볼까? 똘마니로 두면서 엘리세아를 괴롭힐 때 쓰고 말이지. 그 다음에는 이 곳에서는 언제 다칠지 모르니까 신변 보호를 위해 마왕성 공터로 나가서 몰래 무술 실력도 쌓아 두고.' 정령을 똘마니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그녀는 사악하게 웃으면서 도서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도서관이 어디 있는지는 몰랐지만. 마왕의아내-15 마왕의 서고 "저... 서고가 어디에 있습니까?" 마왕성이 원체 큰 바람에 그녀는 역시나 성을 헤매고 있었다. 중간에 종종 만나는 중급 마족들이나 상급 마족들에게 물어가면서 길을 찾아가기도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들의 말대로 가면 꼭 예상과는 다른 장소로 와버리는 것이었다. 한참을 헤맨 끝에 그녀는 가까스로 거대한 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던 이루린은 이 곳이 도서관일지도 모른다고 예감하며 문 앞에 지키고 서 있는 상급 마족에게 물었다. "여기가 서고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수고하세요." 이루린은 기계적으로 말을 건내면서 속으로 방향치인 자신이 스스로 서고를 찾았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3시간 정도를 이 잡듯이 뒤졌는데도 찾을 수 없어 열이 머리 끝까지 받쳐 있는 상태였는데, 드디어 더 이상 고생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기쁜 미소를 지으면서 천족과 마족이 싸우고 있는 장면이 세겨져 있는 문을 손으로 밀었다. `두꺼운데.` 힘이 들어가지 않으면 열리지 않을 철문 같았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손에 마력을 살짝 주입해서 철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 철문이 길고 가느다란 소음을 내면서 아주 가볍게 열렸다. 창을 들고 있던 상급 마족이 놀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이루린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냥 신경 쓰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굉장히 아득하면서도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실내의 모습에 이루린은 자연히 조금 긴장했다. 질서 정연하게 세워져 있는 엄청난 수의 돌로 만들어진 책장과 그것들을 모두 수용하고 있는 서고의 넓이는 그녀가 다녔던 학교의 강당 만큼이나 넓었고, 아직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지 서고에는 정적만 감돌 뿐이었다. 그 주위에는 특이한 식물이 심어져 있는 화분이나 개인용 의자가 배치하고 있었다. 이렇게 넓을 줄 상상하지 못한 그녀는 눈으로 정신없이 썰렁한 서고를 둘러보면서 책장 사이로 걸었다. 분야를 적어놓은 종이에는 정치, 경제, 문화... 등등 없는 게 없을 정도였다. 한참 구경한 후에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이 곳에 온 사실을 상기해냈다. `정령에 관한 책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래, 종족에 관해 모아 놓은 책장으로 가면 되겠지.` 이루린은 한참을 둘러보다가, 종족이라고 쓰여진 책장으로 가서 열심히 뒤지기 시작했다. 한 책장에 책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찾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손가락으로 책들을 더듬었다. `찾았다!` 이윽고 [초급 정령술]이라고 적혀진 두꺼운 책을 찾았을 때, 그녀는 더 이상 찾을 필요가 없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그것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먼지가 묻어 있는 책의 겉면을 입으로 불면서 털어내고 이리저리 살펴 보았다. 두께가 사람의 세 손가락만큼이나 되었고, 표지는 붉은 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제목을 확인한 후에 주위를 둘러보고서는 아무 의자에나 앉았다. 그리곤 책을 펼쳐들어 빠르게 몇 장 넘겨가며 읽었다. [앞서 말하겠다. 내 책을 끝까지 다 읽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으니 알아서 하도록.] `시작이 왜 이래?` [그럼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겠다. 정령술사에 대해 알고 있나? 보통 정령술사는 각국에 많아봐야 두 명 밖에 없을 정도로 매우 희귀한 존재인 만큼 정령술사가 되는 길도 험난하다. 물론 정령은 상급이나 최상급정령, 정령왕이 아니면 - 참고로 정령왕을 소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겠다. 여태까지 선택받은 자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으니 - 전쟁이 터졌을 때 도움이 되기란 어렵다. 그러나 만약에 두 나라가 서로 전쟁을 한다고 했을 때, 어느 한 쪽에 정령술사가 아예 없다면 그 나라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이 완벽하게 지게 되어 있다. 그러니 정령술사는 일종의 보험과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녀는 책을 읽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책 좀 이상한데. 그리고 보험이라는 말이 왜 여기에서 쓰이는 거지? 하여튼...` 그녀는 조금 뒤로 몇 장 넘겨서 읽었다. [...정령의 종류에는 하급, 중급, 상급, 최상급 , 정령왕의 순으로 나누어진다. ....드래곤이나 마족이라면 몰라도, 일단 사람의 경우 정령왕과 계약을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하겠다. 좀 더 정령왕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정령왕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 만큼이나 정령술사의 마력을 지속적으로 흡수하기 때문에 몇 번 지상에 머무르게 하지도 못하게 하고 정령계로 돌려보내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정령왕의 힘을 조금도 발휘하지 못한다. 정령왕을 맺는 조건은 특이한데, 바로 시험을 치르는 것이다. 일단 그 시험을 통과하고 나면 나머지 아래 계급의 정령들은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다. 일단 이 책을 처음 접하는 그대는 하급 정령부터 맺는 게 어려울 것이다. 약오르지? 하지만 들어가는 방법은 쉽다. 단지 [정령계의 문이여, 열려라.] 라고 외치기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지간히 수련을 쌓지 않은 자는 그리 말해도 별반 소용없다. 실제로 필자는 이 방법이 너무 간단해서 억울한 나머지 엄청 어렵게 바꿔 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아, 이런 젠장.] `이 책.. 누가 쓴 거야?` 이루린은 인상을 한껏 쓰면서 책 표지를 훑어 보았으나, 글을 쓴 이에 대해서는 나와있지 않았다. 그녀는 책을 바닥으로 던지려다 말고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 [일단 그대의 정신이 정령계로 들어가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편하게 그대 쪽으로 다가오는 이와 계약을 맺으면 끝난다. 이 때 다가오는 정령의 계급은 그대의 종합적인 실력을 나타내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계약하려는 자를 평가하는 기준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으니 혹시 검술이나 마법을 하지 못한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아, 내가 앞에서 어지간이 실력을 쌓은 자가 아니면 정령계에 들어가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했는가? 미안하다. 일단 실력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제...] `다 필요 없어. 실전이 중요해.` 실전이 중요했기 때문에 필요한 것만 읽고 책을 덮은 이루린은 왠지 이 책이 은근히 읽는 자들로 하여금 분노를 사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없었다. 그리고 더 기가 막힌 것은, 책을 덮자 마자 책 표지에 짧은 문장이 떠올랐던 것이었다. [내가 저주를 받을 거라 했지?] "......." 그녀는 칼로 책 중앙을 무자비하게 뚫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그것을 제 자리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심장이 뛰는 느낌이 몸으로 전달되는 것을 느끼면서 심호흡을 했다. 정령계로 들어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연히 긴장해서였다. 이윽고 그녀는 나지막하게 허공을 향해 외쳤다. "정령계의 문이여, 열려라!" 처음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에, 갑자기 머리가 빙글 빙글 돌아가는 것처럼 어지러워졌다. 그리고 절로 몸에서 힘이 빠지면서, 그녀는 점점 서고의 모습이 아득해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강제로 눈이 감기는 것을 느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자신이 어둡고 침침한 공간에 있다는 것을 깨닫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꼭 꿈 속을 지나다니는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 그녀는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육체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지?` 말을 하려고 했으나 역시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둡기만 할 뿐, 정령으로 추정되는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이 곳이 정령계가 맞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으윽...!` 그 때였다. 갑자기 숨이 막힐 것처럼 강한 압력이 느껴졌다. 그녀는 힘겹게 그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 곳에는 이루린가 상상도 못할 엄청난 마력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력의 중심에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묘한 외모를 지닌 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자신보다도 훨씬 큰 키에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몸을 몇 군데만 남겨 두고 거의 바람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런데 주변이 어두워서인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설마 하급 정령이 그 정도는 아니겠지요.` 하급 정령이 현재 자신이 느끼고 있는 양의 마력을 지니고 있다면, 나머지 정령과의 계약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계약이 어려운 줄 미처 몰랐던 그녀는 적지 않게 당황하면서 바람으로 몸을 두르고 있는 정령을 응시했다. 정말인지 엄청난 존재였다. `그대는 누구이기에 내 마력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어떻게 나를 불러냈는가?` 그 정령이 그녀의 앞으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순간 이루린은 경악하면서 머릿속에 목소리를 전달하고 있는 자를 응시했다. 아까 사진으로 본 적이 있었기에 누구인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정령계에서 가장 막대한 마력과 힘을 소유한 자. 계약을 맺은 자가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능력을 지닌 자. `저, 정령왕.` 그 목소리를 지닌 자는 다름아닌 바람의 정령왕이었다. 마왕의아내-16 마왕의 서고 이루린은 혼란스러워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최강이라고 일컫는 자들도 정령왕과 계약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이 정령왕을 불러낼 수 있는 것인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정말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능력을 보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그렇다, 나는 바람의 정령왕 미네르바. 나와 계약을 하고 싶나?` 오랜 세월을 지내와서 그런지 대단히 깊이 있는 목소리였다. 이루린은 어색하게 그 이름을 되뇌었다. `미네...르바.` 이루린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실감하면서 잠시 가만히 있었다. 계약의 실현 유무를 놓고 망설인다기보다는, 너무 당황해서 마음을 추스르느라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마음을 가까스로 평온하게 만든 다음, 그녀는 미네르바에게 머릿속으로 생각을 전달했다. `계약하고 싶어요. 제 이름은 세아, 아니 이루린이라고 합니다.` 이루린은 재차 실수한 자신을 탓하면서 아무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야 상대방이 단지 실수라고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네르바는 그런 이루린을 빤히 응시하더니, 이윽고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계약하기에 앞서, 간단하게 질문을 하겠다. 그대는 바람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이루린은 중학교 수업 시간에 배웠던 사실을 고스란히 기억해 내며 아무 생각 없이 의사를 밝혔다. `대기 중에 분포하여 기압의 영향에 따라 흘러가는 공기의 흐름입니다.` 그러자 미네르바가 길게 침묵했다. 이루린은 자신이 뭘 잘못 대답했나 싶어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미네르바를 응시했다. 이윽고 미네르바가 다소 조용한 어조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루린은 그제서야 이 곳이 한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하고서, 재빨리 말을 바꾸기로 했다. 정령왕이 아무리 시간을 초월한 존재라고는 하나 절대적으로 차원을 넘을 수는 없지 않은가. 어쨌든 그녀는 이번에는 문학적인 대답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이 세상에 동화된 무 생명체.` 조금이라도 감성적인 성격을 지니지 않았으면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감성적이 편이 아니었던 그녀는 천신만고 끝에 의사를 털어놓을 수 있었다. 이루린은 미네르바의 얼굴이 처음으로 미소로 번지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짧은 시험을 하나 하겠다. 이 곳에서 그대의 마력을 최대한으로 이끌어 내도록.` `통과 기준은 무엇입니까?` `밝힐 수 없다.` 단호한 미네르바의 거절에 이루린은 더 이상 질문을 삼가 하기로 했다. 현재로서는 마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게 중요했다. 미네르바가 내건 과제는 언뜻 보면 쉬웠으나, 그녀는 그게 무엇보다도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신중을 기여해야만 했다. 이루린은 여태까지 갈무리해왔던 마력을 전부 다 끌어 올렸다. 그녀가 한국에서 일찍이 모아 왔던 마력이 그녀를 중심으로 나선을 그렸다. 아무 문제가 없었으나, 이루린은 이 상황을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째서 세아라는 인간의 몸 속에 있을 때나, 이루린이라는 마족의 몸 속에 있을 때나 마력의 크기가 똑같은 것일까. 힘도 순발력도 달라진 게 없었다. 이루린이라는 마족이 그만큼 세아라는 인간의 몸과 흡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일까. 마력을 전부 개방하자 미네르바의 조금 놀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놀랍구나. 고작 12년 정도 마력을 쌓은 것 같은데 그 정도의 마력이라...` 미네르바의 의혹이 깃든 목소리에 이루린은 속으로 뜨끔했다. 자신이 한국에서 5살 때부터 마력을 쌓는 수련을 했던 사실을 간파 당한 것이었다. 혹시나 그녀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사실을 미네르바가 알아차리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했지만 미네르바는 이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대의 몸 속에는 측정할 수 없는 마력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뭔가에 억압받고 있는 것 같군...` 이루린이 미네르바의 목소리에 뭐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공간이 일그러지는 것을 느끼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윽고 공간이 반정도 일그러졌을 때, 미네르바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려왔다. `나, 바람의 정령왕 미네르바가 그대와의 계약을 선언한다. 나와 계약한 것은 그대가 세 번째다.` 주위에 갑자기 흰 빛이 휩싸였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의식은 거기에서 끊어졌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루린은 힙겹게 눈을 뜨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머리가 굉장히 아파 왔는데, 알고 보니 의자에서 바닥으로 쓰러지면서 어딘가에 부딪힌 모양이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책장을 잡고 일어섰다. 땅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때, 그녀의 몸에서 작은 종이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루린은 인상을 쓰면서도 허리를 굽혀서 그것을 집었다. 그리고 읽었다. [지금 마왕성 뒤쪽의 공터로 나와라. 너와 대결을 신청하겠다.] 이루린은 그것을 구긴 다음 아무렇게나 던지면서 중얼거렸다. "나원 참. 누가 내게 대결을 신청하는 거지?" 아무래도 무도회장에서 난동을 부린 것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때문에 실력을 겨뤄보고 싶은 마족이 그녀에게 대결을 신청한 것일 수도 있었다. 만약에 대결을 거절하면 실력에 자신이 없다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적당히 응해야만 했다. 주변을 탐색하니, 마침 벽에 기대어 있는 검이 하나 보였다. 일반 검과는 달리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검이었다. 날카롭고 푸른 예기를 띄고 있는 날과 화려한 손잡이가 그러한 요인이 되었다. 어째서 이렇게 좋은 검이 서고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인지, 왜 아까 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녀는 혹시나 누가 있는지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 검을 품속에 넣었다. 조금 쓰다가 다시 제자리에 갖다놓을 생각으로. 그녀는 창가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작은 숲을 이루고 있는 곳에는 일전에 그녀와 좋지 않은 일을 만들었던 빨간 꽃들이 있었다. 그것만 봐도 그녀가 내려다보고 있는 곳이 마왕성 공터의 뒤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도 없는데. 귀찮은데 그냥 뛰어 내릴까.` 3층 이상의 높은 곳에서 잘못 떨어지면 죽는 게 당연했기에 이루린의 생각은 지극히 위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머리를 내밀어서 평평한 흙이 쌓여 있는 곳에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 창가로 올라가서 아슬아슬하게 섰다. 그리고 드레스를 잡고 아래로 뛰어 내렸다. 머리카락과 드레스가 미친듯이 휘날리는 것을 느끼면서 그녀는 재빨리 마력을 운용했다. 그러자 빠른 속도로 내려가던 몸이 마력에 의해 천천히 하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안전하게 부드러운 흙에 착지할 수 있었다. "내게 결투를 신청한 자, 어서 나왔으면 하는데." 이루린은 허공에 대고 힘있는 목소리로 외쳤으나, 들려오는 것은 미약한 메아리 뿐이었다. 한참을 기다려 보기도 하고 일부러 소리를 내보기도 했으나 쪽지를 남기고 사라진 마족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그 쪽지가 장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주저하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 때였다. 뒤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난 것은. 그녀는 거기에 반응해서 품속에서 검을 꺼내며 날카롭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아까 전과는 달리 검은 복면을 쓴 마족 10명이 작은 숲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볼 수 있었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검은색으로 도배한 그들의 모습은 암살자 그 자체였다. 그들은 모두 심상치 않은 기운을 그녀에게로 일제히 뿜으면서 그녀를 포위했다. 그녀는 벽에 몸을 기대면서, 그제서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루린은 검을 세우면서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죽이러 온 자들인가?" 이루린은 순간적으로 그들의 실력이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모두 몇 천살 이상의 고위 마족들인 것 같았다. 크렌과 싸울 때의 폭주 상태가 아니면 서로 대등하게 싸운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루린은 앞으로 나서려다가, 배가 저릿하게 아파 옴을 느끼곤 검을 바닥으로 내렸다. 그리곤 눈살을 찌푸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한 손으로 태연하게 배를 부여잡았다. 천에서 피가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저들에게 약점을 보이지 않기 위해 태연하게 행동했다. "왜 날 죽이려드는 거지?" 아무도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루린은 쓰게 웃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당연하겠지. 내가 목소리라도 알아 들으면 안 될 테니까.` 이루린은 배가 아파왔지만 더 이상 신경 쓸 수 없었다. 그들이 품 속에서 검을 꺼내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던 것이다. 10명이 넘는 숫자를 상대하는 것도 모자라, 몸을 크게 다친 상태에서 실력을 제대로 발휘한다는 게 가능이나 하겠는가. 게다가 그녀의 최대의 약점은 마법이었다. 무술 쪽이라면 관계 없었지만 마법은 한 번도 접하지 못한 학문이었다. `크렌이 마법이란 것을 내게 걸었을 때, 난 그걸 막을 방법을 몰랐지. 물론 그가 죽음으로써 마법이 풀리긴 했지만. 어쨌든 큰일인데.` 설령 폭주 상태가 된다고 해도, 그녀를 막아줄 사람은 현재 이 곳에 아무도 없었다. 물론 이길 수는 있을 테지만 죽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도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그들은 날카로운 검을 세우고 포위망을 좁혀왔다. 이루린은 날카롭게 주위를 둘러보며 검을 다시 세웠다. `잘못하면 여기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건가.` 마왕의아내-17 마왕의 서고 `잘못하면 여기에서 죽을 수도 있다.` 이루린은 한국에서 배웠던 강력한 기술을 쓰는 유무에 대해 망설였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저들이 의혹을 품고 그 기술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달려들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망설이는 사이에 한 마족이 검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이루린은 그 검을 교묘하게 피하면서 속으로 갈등했다. 어쩌면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인지도 몰랐기에, 그녀는 시간을 끌면서 좀 더 지켜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실력을 최대한 드러내지 말아야 했다. 만약에 저들이 그녀의 실력을 완벽하게 간파한다면, 적당히 맞춰서 죽이려들 것이다. 실력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는다면 저들도 섣불리 공격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칠게 움직여서인지 복부에 감긴 천이 풀린 동시에 피가 새어나오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검을 아래로 내리진 않았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배로 심한 고통이 뱀이 또아리를 틀들이 일었지만 신음 소리 한번 내지 않고 참았다. 이루린은 자세를 잡고 검을 세우면서, 자신에게 달려드는 마족들의 검을 날카롭게 주시했다. 이윽고 한 마족이 검끝으로 그녀의 목을 향해 찔러왔다. 그녀는 왼쪽으로 몸을 틀면서 최대한 힘을 아끼기 위해 비껴가듯이 검을 쳐냈다. 한숨 돌릴 시간도 없이 이번에는 뒤에서 기척이 느껴지자, 그녀는 재빨리 검을 뒤로 휘둘렀다. 그리고 그 순간 뒤에 있던 마족의 검과 격돌했다. 그러나 예상을 상회하는 그들의 힘에 의해 검을 제대로 쳐내지 못했다. 순간 어깨에서 살이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어깨에서 피가 흐르는 게 느껴졌지만, 그녀는 그것을 쳐다볼 시간도 없이,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윽!" 한 마족의 입에서 짧은 신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바닥에 쓰러져서 뒹굴었다. 그녀는 자신의 검끝에 묻이 있는 피를 보고 두려움을 느낄 시간도 없이 다른 마족들의 검을 쳐냈다. 그리고 암살자들과 어느 정도의 공간이 생겼을 때, 그녀는 그제서야 쓰러져 있는 마족을 제대로 응시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사람을 검으로 베어본 적이 없었기에, - 영창감이다.- 그녀는 적지 않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꿈틀거리고 있는 마족의 가슴에 길다란 선이 생겼는데, 그 사이로 붉은 액체가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만들어낸 그 끔찍한 광경에서 눈을 돌려 암살자들을 응시했다. 그들은 가만히 쓰러져 있는 마족을 응시하더니, 갑자기 일제히 검을 들어서 그녀에게 살기를 뿜으며 달려왔다. `그냥 적당히 피하는 건데. 그랬으면 지금처럼 동시에 공격하지는 않았을 것을.` 이루린은 벽에 몸을 기대면서 마왕성의 넓은 공터를 응시했다. 도망칠 수 있다면 진작에 도망쳤을 테지만, 저들의 실력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금방 포위당할 것이기에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9명의 암살자들이 검을 세우고 포위망을 점점 좁혀오고 있었다. 이루린은 그들이 숨막힐 듯이 가까이 달려왔을 때 재빨리 허공으로 도약했다. 최대한 힘을 내서 도약했기 때문에 3m나 뛰어졌고, 적당히 넓은 곳에 착지할 수 있었다. `이상한데?` 갑자기 그들은 이루린을 빤히 응시하더니, 서로를 응시한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루린은 그제서야 자신의 실력이 완전히 간파당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후회했다. 그러나 후회해 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내 그러한 생각을 버렸다. 이루린은 처음에 저들이 갑자기 검을 품 속에 집어 넣는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저들의 행동에 그녀는 비로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바로 마법을 시전하려는 것이었다. 마법의 시전은 그녀가 생각하고 있었던 최악의 결과였다. `크렌이 마법을 사용했을 때도 난 그걸 막지 못했지. 하물며 실력을 측정할 수 없는 저들이 쓰는 마법이라면... 아냐, 방법이 하나 있어.` 이루린은 심호흡을 하고서, 마법의 주문을 외우고 있는 9명의 암살자들을 향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바람의 상급 정령 소환!" 그러자 눈 앞의 바닥에 갑자기 화려한 마법진이 생성되더니,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면서 빛을 내뿜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어떠한 정령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마법진이 사라졌을 때 그 정령은 완전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내 이름은 진. 주인이여, 나를 불렀는가?-" 바람의 상급 정령 진의 모습은 남성체에 가까웠지만, 목소리는 여자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고음이었다. 무엇인가 배치가 맞지 않으면서도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느낌에 이루린은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저들을 최대한 막아줬으면 해." "-주인의 명령에 따르겠다.-" 진이 마법을 쓰려고 하고 있는 암살자들에게 천천히 다가가자, 몇 몇의 마족들이 다소 놀라면서 마법 시전을 그만두고 입을 열었다. 열면 안 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바람의 상급 정령인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리 조심해야 할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루린은 그 목소리를 듣고 누구인지 판별하려고 했지만,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목소리여서 그럴 수 없었다. 이 곳에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아듣지 못하는 게 당연하긴 했지만. `그리 조심해야 할 상황이 아니라고?` 이루린은 속으로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환상 마법 사전을 읽었을 때, 상급 정령 이상이면 굉장히 강한 축에 속한다고 알아두었었다. 그런데 저들에게는 거의 영향이 가해지지 않는다니. 원래부터 마족이란 존재가 강한 것인지, 아니면 암살자들의 실력이 강해서인지는 미지수였다. 이윽고 진이 마법을 짧게 시전했다. "-윈드!-" 그러자 진을 휘감는 바람이 거세어졌다. 그 바람은 허공을 찢으려는 듯이 가르는 소리와 함께 마법의 주문을 외우고 있는 마족들을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그러자 네 마족이 뒤에서 강력한 마법의 주문을 외우고 있는 마족을 보호하려는 듯이 앞으로 나오더니 짧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주문이 짧은 것으로 보아서 그리 강력한 마법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그녀는 저들이 가지고 있는 마력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충분히 강한 마법으로 돌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감했다. 그리고 그들이 재빨리 일으킨 마법과 진의 마법이 격돌하자, 마찰음과 비슷한 소리가 났다. 밀고 잡아 당기는 팽팽한 접전도 잠시, 그녀는 엄청난 광음이 울려퍼지자 반사적으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눈을 감았다. 거센 바람이 잠잠해지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진이 있던 자리에는 엄청난 깊이와 넓이를 자랑하는 구덩이가 파여져 있었다. 아무래도 진은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해 정령계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녀는 먼지가 황량하게 이는 광경에, 저절로 허탈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 사이 네 마족이 다시 검을 뽑아들더니, 그녀에게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그녀는 다시 검을 세우며 그 마족들을 상대했다. 그러나 바람의 상급 정령 진을 소환하는 바람에 마력이 소모된 상태여서, 아까 전만큼 빠르게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게다가 네 마족이 동시에 공격하는 데다가 배가 욱신거리는 상태이지 않은가. 이루린은 자신의 몸에 깊고 자질구레한 상처가 나는 것을 느꼈다. 드레스가 찢겨진 것은 물론이었고, 몸이 점점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때였다. 갑자기 네 마족들이 옆으로 몸을 멀리 피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곧 거대한 마력을 느끼곤 위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엄청나게 거대한 불구덩이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 그녀는 네 마족들의 뒤에 있던 다섯 마족들이 시전한 마법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반사적으로 검에 최대한 마력을 주입해서 검을 앞으로 휘둘렀다. 견딜 수 없을 만큼 뜨거운 느낌과 절대적인 힘이 검으로 전달되었다. 귀가 멍멍할 정도로 울리는 광음과 함께 그녀의 몸은 시체처럼 바닥에 엎어졌다. 그리고 손에서 이미 검이 빠져 나가 다른 곳에 내팽겨쳐졌다. 잠깐 정신을 잃었다 다시 고개를 든 그녀는 검을 줍기 위해 일어 서려고했다. 그러나 그 때, 그녀는 날카로운 검이 자신의 얼굴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벌써 암살자들이 그녀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근육과 뼈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녀는 고통을 느꼈지만 이를 악물고 일어나려고 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입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치밀어오름을 느끼곤 바닥으로 그것을 뱉었다. 검붉은 피였다. "죽어라."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그녀는 그 검이 자신의 심장을 향해 내려오고 있음을 깨닫고서 죽을 힘을 다해 그 검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기에, 오른쪽 가슴에 검이 꽂히게 되었다. 그녀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곤 비명을 질렀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소리를 질러봤자 소용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검이 뒤틀리듯이 몸 속에서 움직이자, 그녀는 정신에 큰 타격을 받을 만큼의 고통을 느끼곤 거칠게 몸부림을 쳤다. 이루린은 점점 정신이 혼미해져옴을 느꼈다. 폭주 상태로 가는 길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폭주를 하게 되면, 그녀의 목숨은 끝장이 날 것이다. 그랬기에 그녀는 최대한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몸 속에 박힌 검을 뽑아내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게다가 폭주 상태가 되는 것을 참고 있기 때문인지 몸에서 심한 경련이 일었다. "끝이다." 그녀는 자신의 귀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부정하고 싶었다. `왜 날 죽이려고 드는 거지? 왜?` 그녀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그 때였다. 갑자기 엄청난 폭풍이 느껴지면서 나무가 미친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나뭇잎이 폭풍을 이겨내지 못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뭔가가 싸늘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그녀는 짓눌려서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막대한 마력을 느꼈다. 그리고 그 마력에, 그녀는 암살자들이 먼 곳으로 물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면서 검을 세우면서 자세를 잡았다. 크게 말하면 안 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동요하는 듯한 눈치를 보이면서 빠르게 말했다. "이럴 수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마왕성 전체에 퍼질 만큼 강력한 마력이 좀 더 거세어졌다. 그녀는 쓰러진 상태에서 꼼짝도 할 수 없어 단지 눈을 감고만 있었다. 그러는 사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부터 나를 불렀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을. 어리석군.-" 질책하는 듯한 목소리. 그녀는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이루린은 대답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답답하기만 했다. 분노에 찬 목소리가 다시 그녀의 귓전에 울려퍼졌다. "-그대들은 나의 주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려고 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가진 자, 바람의 정령왕 미네르바가 그들에게 위압적인 몸짓으로 다가서며 눈을 번뜩였다. "-그 댓가는 죽음이다.-" 마왕의아내-18 마왕의 서고 미네르바가 마법을 시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자신이누워 있는 바닥을 중심으로 마법진이 생성되면서 몸이 공중으로 치솟는 것과, 끔찍한 고통으로 사라졌던 감각이 서서히 되돌아오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오른쪽 가슴에 꽂혀 있던 검이 빠져 나가면서 그 자리의 상처가 급속도로 아물기 시작했다. 자질구레한 상처들도 언제 생겼냐는 듯이 사라졌다. 그녀의 상태는 전투를 치르기 직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갔고, 폭주 상태를 아슬아슬하게 넘겼기 때문에 더 이상 몸에서도 경련이 일어나지 않아 안전하게 땅에 설 수 있었다. 피 묻은 드레스가 찢어진 것만 제외하면 모든 게 정상이었다. "죽일 여유가 있었는데 왜 죽이지 않았지?" 우두머리로 보이는 마족이 옆에 있는 한 마족을 내려다보며 격하게 질책했다. 그러자 그 마족이 머리를 조아리며 손가락으로 이루린과 검을 가리키며 황급히 말했다. "검이 더 이상 몸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뽑으려고 해도 뭔가에 걸린 것처럼 뽑아지지 않았고..."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분노를 감추지 않고 외쳤다. "그게 무슨 소린가!" "죄, 죄송합니다." 그들의 대화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별 문제가 아니라고 치부했다. 그러는 사이 미네르바가 그들에게 다가서며 강력한 마력을 발산했다. 그리고 마법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귀에 익은 주문인 것 같았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 주문인지는 몰랐지만. 그러나 곧 이어 외치는 미네르바의 목소리에, 이루린은 그 마법이 바람의 상급 정령 진이 썼던 마법과 똑같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윈드!-" 이루린은 순간 속으로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진이 썼던 마법의 위력과는 차원이 틀렸다. 미네르바의 손에 폭풍보다도 날카로운 기류가 모이기 시작했다. 나뭇가지가 거칠게 흔들리는 것은 물론이었고, 간간히 부러져서 바닥을 때리듯이 굴렀다. 머리카락과 드레스가 미친듯이 흔들린 것은 물론이었고, 몸이 뒤로 밀려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모래가 얼굴을 세게 때리자, 그녀는 자연히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같은 마법이었지만 정령의 계급에 따라 이렇게까지나 차이가 나다니.` 곧 번개가 친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의 폭풍이 여러개 생성되면서 당황하고 있는 고위 마족들을 향해 맹렬하게 날라갔다. 푸른 머리의 마족 자이크 렌턴은 군주가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을 응시하면서 서류를 철저하게 검토했다. 그는 평소에 말 수가 적고 지나칠 정도로 사무적이어서 군주와 많은 대화를 나눈 적이 별로 없었다. - 물론 군주는 어느 누구하고도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말이다. - 그리고 항상 군주의 행동을 높이 사고 있었다. 그 때였다. 군주가 서류를 정리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서열 10위 이내의 마족들 모두 회의 도중에 돌발적으로 행동한 군주의 행동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잠시 회의를 중단하겠다."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마족들 중에서도 실력이 굉장한 만큼 눈치가 빠르기로 소문난 제르비츠 마네리아가 평소의 잘 웃는 얼굴과는 달리, 표정을 굳히고서 조용히 일어섰다. 웅성거리고 있는 고위 마족들을 뒤로 하고. 영문을 몰랐던 자이크는, 옆에 앉아서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는 카란델에게 조용히 물었다. "카란델 님께서도 따라가실 겁니까?" 그는 별 일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난 지금 마왕성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네." 그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자이크는 마왕성 공터의 뒷쪽에서 강력한 마력을 느끼곤 흠칫했다. 보통 역대 마왕들이 가졌던 마력의 양 만큼이나 어마어마했다. 물론 현 군주의 경우 실력을 드러내는 경우가 없어 마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놀람을 감추지 못한 채로 말했다. "강력한 마력이로군요. 이 정도의 마력을 지닌 자가 성 안에 있다니... 무슨 일인지 가봐야겠습니다. 그런데 카란델 님께서는 어떻게 그것을 알고 계십니까?" 자이크가 일어서자 카란델이 나직이 말했다. "난 군주님의 유년 시절이 어떠하셨는지 잘 알고 있네. 설마 이 정도도 모르겠나?" 자이크는 새삼 카란델이 오랜 시간을 살아 온 중후한 마족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서둘러서 밖으로 나갔다. 자이크는 회의실에서 1층으로 뛰다시피 내려왔다. 막 공터로 나왔을 때, 그는 군주의 흑발과 제르비츠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공터 뒤쪽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자이크는 자신 또한 그 쪽으로 가면 갈 수록 마력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좀 더 속도를 빨리해서 군주의 뒤에 같이 따라 붙으며 말했다. "이 마력은 어떤 자의 것입니까?" 군주는 엄청난 마력을 느끼고 있는데도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막 자이크가 말을 이으려던 찰나,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군주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렇게 엄청난 마력은..." 뒤를 돌아보니 장로들이 허둥지둥 마왕성 입구에서 공터로 달려나오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믿을 수 없다는 흥분과 불안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하나같이 흰 머리카락에 중후한 주름살이 잡힌 얼굴들이었다. "걱정할 필요 없다. 도착할 때 쯤이면 모든 게 다 끝나 있을 테니." 의미 모를 군주의 말에 장로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질문을 삼가하고 묵묵히 군주의 뒤를 따랐다. 그 때였다. 갑자기 순간적으로 강한 마력이 느껴졌다가 사라진 것은. 그는 궁금해하며 걸음을 더 빨리했다. 이윽고 공터에 다다르자, 거기에 펼쳐진 광경에 군주를 제외한 모두가 경악하는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얼마나 강한 마력이 휘몰아쳤으면 나무가 다 부러졌겠는가. 게다가 물이 흔하게 뿌려진 것처럼 피가 아무렇게나 바닥을 적시고 있는 광경도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 주변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마족들이 모두 숨진 채로 쓰러져 있었다. 팔과 다리가 각기 다른 곳에 떨어져 있는가 하면, 얼굴은 가죽이 벗겨지거나 피와 살로 범벅이 되어 모두 알아볼 수 없었다. 가장 보기 힘들었던 것은 뇌수가 피와 섞여서 흘러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이크는 그 광경에 할 말을 잃다가, 그들 중심에 서 있는 한 마족과 정령을 볼 수 있었다. 그 마족은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카란델의 딸인 이루린이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조금 충격을 먹은 듯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가, 곧 태연하게 어디론가 걷더니 검으로 추정되는 것을 집어 들었다. 공격을 당했는지 그녀의 드레스는 피로 물들어 있거나 찢어져 있었다. 그러나 몸의 상태만은 멀쩡한 것 같았다. 그녀는 바람의 정령을 응시하면서 감탄하듯이 중얼거렸다. "정말 대단해. 정령왕의 실력이 이 정도였다니..." 정령왕이라는 말에 군주를 제외한 모두가 경악했다. 이루린은 미네르바를 응시하다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군주를 응시했다. 엄청난 마력을 지니고 있으니 마왕성의 실력있는 고위 마족들이라면 대충 마력의 기운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랬으니 이렇게 왔겠지. "큰일인데."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그녀는 망설였다. 10명의 암살자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고 설명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말하면 일이 복잡하게 꼬일지도 모른다. 일단 마왕성의 권위 있는 자들이 모인 만큼, 이 사건이 발생한 이유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하려고 들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은 현재 숨어서 그녀를 죽일 방법을 궁리하고 있는 마족들의 행동을 부채질할 뿐이다. 그들은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하루 빨리 그녀를 없애려고 들 것이다. 그건 막아야만 했다. `한 명은 남겨뒀어야 하는 건데. 그래야 심문할 수 있으니... 그런데 왜 마력이 느껴지지 않지?` 이루린은 아쉬워하면서도 천천히 고개를 돌려 미네르바를 빤히 응시했다. 이상했다. 다치기 전까지만해도 느껴졌던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몸이 막 치유되어서 그렇다고 생각했으나, 시간이 지나도 마력이 느껴지지 않자 그녀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뭐야. 왜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거지?` 그녀는 군주가 자신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황급히 마력을 끌어 올려 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사실은 그녀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 때 중후한 마족들의 거센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 "이루린! 또 그대인가! 이번에는 처벌을 면치 못할 것..." 군주가 손을 들어서 그들의 목소리를 잠재웠다. 대신에 이번에는 그가 직접 이루린의 앞에 다가와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가면 속에서 간접적으로나마 그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설명하도록." 이루린은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력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그녀의 혼을 빼 놓기에 충분했다. 한국에서 10년 넘게 쌓아 왔던 마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사실은 그녀를 허탈하게 만들었다. 이루린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럴 리가 없어." "-무슨 일이지?-" 미네르바가 조용히 물었으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갑자기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하면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솔직히 환상 마법 사전을 읽었을 때도 갑자기 마력이 사라진다거나 하는 이상한 일 따위에 대해서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0년 넘게 한국에서 마력을 다뤄온 그녀였기에 갑자기 몸 속에 존재하고 있는 마력이 사라지는 비이상적인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설마 이곳이라 해서 예외겠는가. "미안해, 미네르바."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녀는 미네르바에게 알아서 처리해 달라는 간절히 시선을 보낸 다음, 몸을 돌려서 어디론가 막 뛰기 시작했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았으면 으깨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마족들의 처참한 모습에 적응이 되지 않는 것도 모자라 마력이 끌어 올려지지 않는다니. 적어도 한국에서는 이런 일은 없었다. 누군가가 죽이는 일에 대해 법으로 금지하는 세계였으므로. 그러나 이 곳은, 특히 마계는 누군가를 죽여도 모두 당연하다는 듯이 행동했다. 그 이유로 그녀는 이 곳에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숨이 가빠져오면서 그녀는 뛰는 것을 멈춰서 나무에 기대서 섰다. 단지 숨만 차고 다리만 아플 뿐, 몸은 정상이다. 그러나 정신은 큰 타격을 받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검을 아무렇게나 세워둔 후에 머리를 나무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정신이 산란하기만 했다. "-이상하군. 계약자가 저런 행동을 보이는 이유.-" 미네르바는 이루린이 사라진 곳을 응시했다. 그러는 사이, 군주가 다른 마족들에게 손을 들어서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만든 다음 빠르게 말했다. "난 네가 왜 계약했는지를 더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유가 뭐지?" 미네르바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흐렸다. "-글쎄...-" 군주가 이루린이 사라진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난 네가 낸 시험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마족이 그것들을 모두 견뎌냈을 리는 만무할텐데." "-넌 한때 나의 계약자였으니까 잘 알고 있긴 하겠지.-" 미네르바는 잠시 거리를 둔 후에 진지하게 말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긴 했다. 일부러 시험도 간단하게 냈고. 하지만... 어떻게 설명한다는 건 어렵군. 단지 여태까지 만났던 자들과는 다른 느낌이 나의 현 계약자에게서 느껴진다는 것만 알 뿐이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른 후에도 이루린은 몇 번이고 마력을 끌어 올려보았지만 소용 없었다. 마력의 미약한 흐름조차 감지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제풀에 지쳐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돌연 눈밑이 뜨거워졌다. 뭔가가 울컥하는 참을 수 없는 느낌이 목에서 전달되었다. 이 곳에 와서 좋은 일보다는 힘든 일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도 있었는데, 바로 폭주에 관한 것이었다. 어째서 육체가 바뀌었는데도 폭주하는 상태가 되는 게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무도회장에서는 육체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폭주를 할 수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폭주를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꾹 참고 있는데 돌연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눈을 들어서 위를 응시했다. 전에 만났던 흑발의 마족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무에 기대어 놓았던 검을 들었다. 이루린은 끝까지 울음을 참고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검 네 것이었군? 검이 좋긴 한데 주인을 잘못 만났어." 예상대로 만만치 않게 반격이 날아왔다. "그 쪽이야말로 이 검을 30%도 활용하지 못한 주제에 말이 많군." 이루린은 그 말이 진짜인지 믿을 수 없어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순간 극도의 경계심이 일었다. 혹시나 저 흑발의 마족이 아까 암살자들과 그녀가 서로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은 아닐까. "뭐야? 너 설마 본 건..." "서고에서 검을 찾고 있는데 창 밖에서 10명 정도의 마족들과 싸우고 있는 모습이 보이던데." 이루린은 순간 그에게 싸우고 있는 모습으 들켰다는 사실보다도,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가 날 수 밖에 없었다. "빤히 보고 있었으면서 도와주지 않았던 건 무슨 행동이지?" "검이 없는데 어떻게 도와주나." "......" 그는 자기 알 바가 아니라는 듯, 피묻은 검을 한번 응시하더니 그대로 검집에 집어 넣었다. 별로 놀라지도, 크게 신경을 쓰지도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당연히 못마땅한 것은 그녀 쪽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궁금한 점이 있었기에 얌전하게 꾹 참았다. "궁금한 게 있는데." "......" 이루린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고 애썼다. "만약에, 이건 정말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지만. 마력이 전부 사라지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는 그대로 가려다가 다시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이루린은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없어 가만히 있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이번에는 슬픈 감정이 밀려왔다. 암살자들이 자신에게 가했던 고통스러운 행동과 참혹한 광경, 엎친데 덮친 격으로 마력을 느낄 수 없는 일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녀는 혹시라도 눈물을 흘릴까봐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곧 아까와 다른 없이 입을 열었다. "방법이 있다. 물론 네 경우에만 해당될 것이다." 예상 외의 대답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가 있는 곳으로 몸을 움직이며 다급하게 외쳤다. "방법이 있다니! 그게 뭐지? 그리고 내 경우에만 해당된다니?" 그는 차갑고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긴 말하지 않겠다. 네가 다시 마력을 느끼도록 도와줄테니 대신 거기에 관련된 질문은 일체 받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조건이 하나 있다." 이루린은 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을 다시 느낄 수 있으면 어떤 조건이라고 해도 상관 없었다. "내가 언제든지 원할 때마다, 넌 그 날 있었던 일과에 대해 빠짐 없이 내게 말해주면 된다. 그 뿐이다. 단, 네가 생각하기에 사사롭게 여겨지는 일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가 좀 더 강하지만 낮은 어조로 말했다. "반드시 말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평소와는 다르게 신체에 변화가 오거나 이상이 생긴다면.." 이루린은 그의 말을 재빨리 잘랐다. "가슴이 커지고 허리살이 빠졌을 때?" "......." 좋지 않은 기분을 없애기 위해 이루린은 일부러 짖?게 웃었다. 희망이 있다는 생각에 아까 전보다는 기분이 훨씬 좋아졌지만, 충격적인 영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검이 오른쪽 가슴을 뚫었을 때의 끔찍한 고통은 한국에서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미네르바와 같이 있었을 때는 몰랐었는데, 마음이 차분하게 안정되자 그러한 것들을 느낄 수 있었고, 그 때문에 그녀는 약간의 초조함과 두려움을 느꼈다. 이루린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째서 저 마족은 내 사생활에 대해 알아 내려고 하는 것일까.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가 물어보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함부로 물어볼 수도 없었다. 게다가 어차피 그녀가 훨씬 이득을 많이 보는 입장에 있었으므로 말을 잘못 꺼내지 말아야 했다. 그래서 얼른 그러한 생각을 지웠다. "...미안." 불만어린 이루린의 짤막한 말에 그가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조건을 받아들이겠나?" 충격적인 영상과 끔찍한 감각을 잊기로 결심한 이루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힘차게 말했다. "좋아, 받아들이겠어." 마왕의아내-19 악질 레드 드래곤 케디아니스 "좋아, 받아들이겠어." 자리에서 일어선 이루린은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디론가 가려고 하자 다시 불렀다. "잠깐만. 난 널 뭐라고 부르지? 너 이름이 있긴 한 거야?" 그러자 그가 잠시 멈추더니, 곧 차갑게 대답하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케실리온." 이루린은 좀 미덥긴 했지만 앞으로 그와 잘 지내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그건 그것이었고, 지금 그녀가 할 일은 그것과는 별개였다. 이루린은 마침 지나가고 있는 거미로 추정되는 마물 한 마리를 잡아서 케실리온의 머리에다가 힘차게 던졌다. `10점. 10점. 9점. 머리 위에 앉은 게 아니라 조금 뒤에 앉았군. 하지만 비교적 깨끗한 착지야.` 이루린은 소리없이 배를 잡고 웃으면서 몰래 그 자리를 빠져 나갔다. 저녁이 될 때까지 피곤해서 자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루린! 당장 일어나거라!" 이루린은 그 목소리에 인상을 쓰면서 이불을 머리 위로 끌어 올렸다. 그러나 곧 누군가가 거칠게 이불을 아래로 끌어 내리자, 그녀는 한기를 느끼면서 몸을 웅크렸다. 그리곤 실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카란델의 심상치 않은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는 잠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끼고 얼른 몸을 일으켰다. 이루린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 아빠.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이루린은 왜 카란델이 찾아왔는지 다 알고 있었으나 시치미 뗐다. "내가 없는 사이에 정말 상상도 못할 일을 저질렀더구나." 이루린은 여전히 어색한 미소를 거두지 않고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내게 다 털어 놓거라." 카란델의 진지한 표정에 눌려 이루린은 일부러 우물쭈물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야 잔소리를 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루린은 카란델이 혹시나 자신의 상황을 모두 지켜본 마족들에게 그 사실들을 말할까봐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에게도 말씀하지 않으실 거죠?" 카란델은 잠시 고민하더니, 곧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비밀을 보장하마." 이루린은 카란델에게 적당히 둘러대듯이 털어 놓았다. 이런 사태가 오는 것을 대비해서 미리 다 머릿속으로 생각해두고 있었기에 별로 의심을 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암살자들과 싸운 일에 대해서는, 단순히 이루린 자신을 건드리려는 변태들이어서 어쩔 수 없이 싸웠다고 말했다. 무도회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폭주를 했다는 사실만 쏙 빼고 모두 말했다. 하지만 한가지, 정령왕과 계약했다는 사실만큼은 감출 수 없었다. "저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요. 왜 정령왕과 계약할 수 있었는지." 실제로 그녀는 정령왕이 자신과 계약한 정확한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잘 알겠다. 그런데... 이제 저녁인 것을 보니 아이나가 들어올 시간이구나." 창 밖을 바라본 그는 해석하게 힘든 표정으로 일어서더니, - 대체로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 이루린에게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주고 나서 밖으로 나갔다. 이루린은 문이 닫히자 마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침대에 다시 누웠다. 연회가 시작되기 전 오후. 이 곳 만큼은 새까만 밤처럼 어둡고 탁한 공기가 흐르는 곳이었다. 서로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은 채, 단지 삭막하고 극도의 경계심을 갖게 하는 묘한 긴장감 속에서 그들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10명 남짓한 최고위 장로들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심각하게 고민하느라 서로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심사단이었다. 장로들 내에서 서열 1위인 마족 데리노가 주위를 둘러보며, 삭막한 정적을 깨뜨렸다. "후보는 정했소. 하지만 한 명은 누굴로 하겠소?" "그렇다면 이루린 양은..." 누군가의 조용한 목소리에 가르킨이 격렬하게 외쳤다. "당연히 포함시킬 수 없지 않소! 마왕성에서 난동을 부린 마족이 신부의 자질이 있다고 보는 거요?" 그 때 항상 조용하게 앉아 있으면서 인자한 마족으로 유명한 베르딘이 손을 들었다. 그는 항상 웃는 얼굴 때문에 헛점이 많아 보였지만, 사실 장로들 내에서 가장 날카롭고 치밀한 관찰력으로 명성이 높은 마족이었다. "난 이루린이라는 어린 마족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있소. 여러분들도 궁금하게 여기고 있을 것이오. 이루린이라는 어린 마족이 무도회장에서 내뿜은 기류에 대해서. 내가 봤을 때 그 기류는 분명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어린 고위 마족의 것이 아니었소. 처음에 어느 상급 마족과 검을 들고 싸웠을 때는 놀라긴 했어도, 그리 심하게 놀라지 않았소. 그러나 한번 검에 베이고 나서 완전히 다른 마족이 되어버린 듯이 바뀌더군. 그 때는 거의 경악했지." 몇 몇 장로들이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딘은 깊은 주름살을 그대로 보여주듯이 웃었다. "게다가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 또한 놀라는 사유가 되었소. 어째서 10명 정도의 실력이 있는 마족들이 이루린을 죽이려고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무도회장에서 있었던 일이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오. 그리고 또 한가지, 바로 정령왕과 계약을 맺었다는 건 정말로 믿을 수 없소." 무언의 침묵이 흘렀다. 베르딘은 주위를 둘러보며 편안하게 다시 말을 이었다. "허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봤자, 이루린 양은 입을 열 것 같지가 않소. 높은 서열을 지닌 카란델의 여식인 관계상 우리가 말하라고 강요할 입장도 아니고. 이 일에 대해서는 외부에 발설하지 맙시다. 어쨌든 난 이루린 양에게 한 표를 던지겠소. 그리고 저녁까지 결정해서 연회가 시작하면 발표해야 할 것이 아니오." 모두들 말이 없자, 베르딘은 답답하다는 어조로 외쳤다. "진실의 거울. 어떻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장로들이 모두 고개를 들어 베르딘을 응시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놀람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간혹 갈등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자들도 있었다. 베르딘은 짧게 한숨을 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회의실 구석에 있는 일반 침대만한 거울을 두 손으로 들고 와서 탁자 앞에 놓았다. 그들은 모두 입을 열지 않고 베르딘을 주시하고 있었다. `늦었다!` 이루린은 최대한 계단을 빨리 밟고 내려가면서 초조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아이나가 일부러 그녀에게 목욕을 강요하면서 좀 더 예쁘게 해주겠다고 늦게 치장하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지체된 것이었다. 허둥지둥하면서 그녀는 제발 연회가 시작되지 않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랬다. 아름답고 청순한 이미지를 완벽하게 깨는 행동이었지만 아무도 보는 마족이 없었기에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다. 그러던 차에 그녀는 굽 높은 구두 때문에 계단을 잘못 밟아서 앞으로 넘어졌다. "아야..." 이루린은 인상을 쓰면서 무릎이 아픈 것보다도 주위에 누가 있는지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면서 가만히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루린은 경직할 수 밖에 없었다. "케, 케실리온." 최악의 만남이라 할 수 있는 케실리온이 이루린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다지 감정이 실리지 않은 눈동자였지만, 그녀는 미약하게나마 그 눈동자에서 측은한 빛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루린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몸을 털고 일어났다. 그가 계속 자신을 쳐다본다는 사실이 고역이었지만 그녀는 무시하고 억눌린 어조로 말했다. "못 본 걸로 했으면 좋겠어." "리얼하게 소문내면 끝내주겠군." "......" 이루린은 잠시 케실리온과 무언의 신경전을 벌인 후에 계단을 밟고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루린은 다시 앞으로 넘어지는 짓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빠르지만 신중하게 계단을 밟았다. 그런데 막 3층까지 내려갔을 때, 그녀는 목 언저리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곤 짧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곤 꿈틀거리는 그것을 잡고 눈 앞에 들이댔다. 아까 케실리온에게 던졌던 거미였다. `완패로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비로소 파악한 이루린은 씁쓸하게 웃었다. 밤이 깊어진 것과 부드러운 선율이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벌써 연회는 시작하고도 남은 것 같았다. "장로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진실의 거울이 나타내는 마족으로 정하겠소. 진실의 거울은 어느 누구보다도 공정하니까 아무리 서열이 높다고 할지라도 거부할 수 없다는 규칙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 때 한 장로가 손을 들어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진실의 거울은 몇 천 년 동안이나 깨어나지 않고 있소. 벌써 여러 장로들이 시도해 보았지만 진실의 거울은 어떠한 것도 비춰주지 않았지. 이미 제 기능을 잃은 거울이라고 생각되오."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 않소. 혹시 모르니 시도나 해봅시다. 어차피 손해볼 것은 없으니." 베르딘은 말하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른 장로들에게 강요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장로들도 서로 눈치를 보더니, 이윽고 어색하게 손바닥을 펴서 팔을 들어 올렸다. 그들은 모두 곧 눈을 감았고, 베르딘 또한 그것을 확인한 후에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외쳤다. "진실의 거울이여,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라!" 그러자 잠시 빛이 일렁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잠잠해졌다. 베르딘은 눈을 뜨고서 진실의 거울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모습을 놀란 눈으로 응시했다. 설마하는 심정으로 외쳤던 것인데, 그게 정말로 기능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것은 반신반의하던 다른 장로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럴 수가! 몇 천년 만에 진실의 거울이 다시 깨어나다니!" 어두운 실내에 거울을 중심으로 강한 빛이 휩싸였다. 장로들은 모두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손으로 눈 위를 가렸다. 그리고 하나같이 거울에 휩싸인 빛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모두 누가 나타나게 될 것인가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었다. 연회장에 도착했을 때, 이루린은 많은 마족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주로 그녀의 모습에 찬탄하는 우호적인 시선이 많았으나 무도회장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지, 몇 몇의 눈동자에는 약간의 불신과 두려움, 그리고 의혹이 서려 있었다. 어제 폭주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혹은 호기심을 가지고 그녀를 응시하는 마족들도 있었다. 그들은 이루린이 가는 곳마다 목소리를 낮추고 수군거렸다. "엘리세아 양에게 그렇게 홀대했다면서요? 엘리세아 양이 불쌍해요." "그렇다니까요. 이루린 양이 얌전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하지만 정확한 내막을 모르니 우리야 알 수 없죠." 그들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귀에 거슬리긴 했지만, 이루린은 모두 무시했다. 그런 말에 상처를 받을 성격도 아니었거니와, 어제 무도회장에서 있었던 행동은 모두 정당하기만 했다. 그랬기에 죄수처럼 기죽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태도를 관찰하면서 그녀는 안도했다. `아침에 암살자들과 싸운 일이 알려지지 않은 모양인데. 어쨌든 다행이야.` 볼 때마다 남성 마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엘리세아는 어제와는 다르게 아주 즐거운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루린, 자신을 향하는 적대적인 시선이 늘어나서일 것이다. 하지만 약간의 경계심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했다. 정말로 그녀가 다행으로 생각했던 것은, 마족들이 폭주했다는 사실에 대해 물어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사실을 알렸는지는 몰라도, 누군가가 나서서 대충 억지로 끼워 맞추듯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처리한 것 같았다. 이루린은 아무 자리에나 가서 앉아서 음식을 들었다. 갈등을 많이 하긴 했지만 옆에 앉아 있는 어느 마족에게 지나가듯이 물어봐서 인간과 관련된 모든 음식은 피하면서 억지로 먹었다. 물론 주식은 과일로 했다. 연회가 무르익을 즈음,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회에 참석하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궁금하게 여기시는 분들에게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어제 열린 무도회 자체가 일종의 시험이었습니다. 어린 여성 마족들은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어제 누가 자신을 거쳐갔는지를. 앞서 공지에서 밝혔듯이, 후보는 총 10명으로 채택했습니니다. 자, 이제 발표하겠습니다." 그 목소리에 연회장은 순식간에 정적으로 감돌았다. 모든 마족들의 고개가 종이를 들고 단상 위에 올라가 있는 마족에게로 향했다. 이루린도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음식을 먹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 "마네리아 가의 엘리세아 양!" 모든 마족들의 시선이 엘리세아가 앉아 있는 곳으로 향했다. 붉게 상기되어 있는 그녀의 얼굴 위로 수줍어하는 듯한 가식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웃으면서 주위를 둘러본 후에 이루린을 승리로 가득찬 시선으로 잠깐 응시했다. 그러곤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 이후로도 몇 차례 마족들의 이름이 불리었다. 서열이 그리 높진 않고 특별한 것도 없지만 내성적이고 성품이 온화하다고 알려져 있는 시노아 카로노스, 엘리세아처럼 표독스럽고 성품이 좋진 않았지만 뛰어난 검술 능력을 가진 레이나 베를로트, 계산적인 일의 해결에는 거의 천재라고 알려진 다리아 자이로크, 마법에 있어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프리네 다이아노, 냉철한 성격으로 군주와 거의 똑같다는 알려진 세르리아 시벤, 화술이 뛰어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소문난 레이아 하르메스, 등등 어느 한쪽에 특별한 능력을 지닌 마족들이 후보로 채택되었다. 그 이후로도 2명 더 불렀고, 이제 남은 마족은 한 명이었다. 그 쯤되자 이루린은 적당히 먹고 숙소로 올라 가려고 했다. 어차피 후보가 되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고, 또 안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거울에 나타난 마족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마족이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시녀가 들어오자 일어나서 뭐라고 대화했다. 그러더니 욕실로 들어갔다. "저기에 있는 건... 이루린 양이 아니오?" 거울 속에 비춰지는 이루린이 옷을 하나씩 벗자 몇 몇 장로들이 당황해했다. 이윽고 노출 수위가 점점 높아지자 모두들 얼굴을 경직시키면서 일부러 헛기침했다. 보자 못한 베르딘이 거울은 다른 곳으로 돌렸다. 베르딘은 헛기침을 하면서 태연하게 말했다. "하필 이럴 때 거울이 비춰지다니 당혹스럽소." 모두들 작은 목소리로 웅성거렸다. 어떤 자들은 고개를 가로젓기도 했고, 어떤 자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인상을 쓰고 있었다. 또 다른 자들은 놀라거나 수긍한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의 없는 것으로 알겠소. 거울이 내린 결정을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을 것이오." 순간 모두 침묵했다. 데리노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조금 충격을 받았는지, 어느 한 곳에 시선을 계속 두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암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상하군. 어째서 거울이 이루린 양으로 결정했는지." 옆에 앉아 있던 자베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괜히 진실의 거울이겠소? 우리가 보지 못한 다른 면을 거울은 볼 수 있지 않소? 따지고 보면 이루린 양의 능력은 실로 놀랍소. 솔직히 정령왕과 계약을 한다는 게 군주님을 제외하면 가능이나 하겠소? 게다가 무도회장에서 보여 주었던 능력으로만 본다면 이루린 양이 되지 못할 이유는 없소. 단지 그릇된 행동을 했기에 그게 문제가 되었을 뿐이오. 그리고 이루린 양이 그런 행동을 한 이유도 우리는 아직 모르고 있지 않소?" 몇 몇 마족들은 수긍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대부분의 마족은 자베스의 말에 동의하는 눈치를 보였다. 베르딘은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이제 후보가 모두 결정되었소." 이루린은 이 믿을 수 없는 일에 연회가 끝날 무렵에도 가만히 있었다. 놀라기는 연회장에 있었던 몇 몇의 고위 마족들도 마찬가지였었다. 대부분은 이루린이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반면, 몇 몇의 고위 마족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이윽고 고위 마족들이 채택된 10명의 후보를 남겨두고 모두 연회장을 빠져 나가자, 이루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후보가 되다니! 어째서?` 원치 않는 일이 발생한 사실에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채택된 후보 10명 앞으로." 텅빈 연회장에 남은 어린 여성 고위 마족들은 데리노라고 불리우는 마족 앞에 나가 섰다. 싫은 마음 때문에 이루린은 제일 마지막으로 나가면서, 엘리세아의 분노에 찬 시선을 묵묵히 무시했다. "그대들은 이제부터 마왕성에서 제시하는 과제들을 통과해야만 한다. 몇 개인지는 알리지 않겠다. 중도에 탈락하는 경우는 없지만 점수를 매겨서 마지막에 종합적으로 한 명을 발표할 것이다. 그대들에게 이제 자유 시간은 없다." 마지막 말에 이루린은 참담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설마 지금 과제를 내주진 않겠지?` 데리노는 잠시 여유를 두더니,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 첫번째 과제를 내주겠다." `젠장.` 그녀는 속으로 온갖 귀찮은 상상을 다하면서도, 겉으로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쉰 후에 눈을 내리깔고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그대들은 이제부터 모든 관문이 끝날 때까지 어린 드래곤을 파트너로 맞이 해서 함께 생활해야 할 것이다. 첫번째 과제는 그대들이 한달 동안 자신이 맡은 드래곤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 올려서, 한달이라는 기한이 끝났을 때 드래곤들끼리 능력을 시험하는 하는 대회를 연다. 그리고 이긴 순서대로 순위를 정해 점수를 매길 것이다. 이것은 그대들이 얼마나 어린 드래곤을 잘 키울 수 있는지를 판별하는 시험하는 것이다. 자, 여기 이 통에서 종이를 하나씩 꺼내라." 데리노는 단상 위에 얹어 놓았던 원통을 들고 오더니 후보들에게 종이를 뽑게 했다. 이루린은 능력이 떨어져도 상관 없으니 제발 순하기로 알려진 그린 드래곤이 걸리기를 빌면서 종이를 뽑았다. "난 순하기로 알려진 그린 드래곤이야." "난 뛰어난 마법 능력을 지니고 있는 실버 드래곤이야!" 모두들 서로 좋아하고 있었다. 이루린은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어 종이를 펴지 않았다. "난 화이트 드래곤. 약하긴 하지만 그런 장점 때문에 훈련 시키기가 쉬워." "난 블루 드래곤이야. 차갑고 성실한 성격이라 말썽을 피우진 않을 거야." "나도 블루 드래곤이야!" "정말?" "난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는 골드 드래곤이야!" "나도 골드 드래곤이야." "난 그린 드래곤이야." "난 화이트..." 대부분은 다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물론 블랙 드래곤이 걸린 후보 한 명은 울상을 지으면서 걱정스러운 듯이 한숨을 쉬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이제는 가만히 있는 이루린으로 향했다. 시노아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루린, 너도 펴봐." 이루린은 마지 못해 종이를 폈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뜨고 종이에 적혀진 글자를 응시했다. "레드... 드래곤." 그러자 엘리세아가 다가오더니, 그녀에게 속삭이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안 됐다, 정말?" 다른 마족들이 알아차릴 수 없게 교묘하게 비꼬는 듯한 표정을 지은 엘리세아를 쏘아본 이루린은,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있었다. 그녀도 레드 드래곤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다. 레드 드래곤. 검술, 마법, 정령 등 모든 능력에서는 최강이었으나, 블랙 드래곤 만큼이나 성격이 포악해 통제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적어도 블랙 드래곤은 레드 드래곤보다 강하지 않아서 통제하기가 훨신 쉬울 게 아닌가. `고생 꽤나 하겠는데. 그래도 얌전하기만 하다면..` 그 때 들려오는 목소리들이 그녀의 희망을 깨뜨려 놓았다. "혹시 레드 드래곤이라면 드래곤 로드의 아들인 케디아니스 아냐?" "맞아! 헤츨링이라면 그 녀석 밖에 없다고 하던데..." "아하, 누군지 알겠다. 전에 성룡 드래곤과 싸워서 이겼다는 그 녀석 말하는 거지?" 엘리세아를 제외한 모든 후보들이 이루린을 연민으로 가득찬 눈동자로 응시했다. 블랙 드래곤이 선택된 시노아조차도. `성룡과 싸워서 이겨?` 이루린은 성룡과 싸워서 이긴 드래곤을 어떻게 훈련시켜야 할지 막막했다. 현재로서는 기술을 쓸 수도 없고, 검을 휘두르는 도중에 마력을 써야 할 때 쓸 수도 없으니 무슨 수로 훈련을 시킨단 말인가. `그래도 희망을 가져 보자.` 이루린이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데리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거기에 맞게 지금 배정해 주겠다." `왜 하필 지금이야!` 이루린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면서 데리노를 애원하듯이 응시했다. 데리노는 그런 이루린의 상황을 알았는지, 잠시 측은한 듯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피하면서 말했다. "지금 헤츨링들이 모두 대기중이니 소환하면 여기로 올 것이다." 일순간 모두들 데리노의 행동을 기다리느라 침묵했다. 그는 자세를 잡더니, 곧 짧지만 강한 목소리로 외쳤다. "소환!" 그러자 데리노의 앞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생성되자, 후보들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멋지게 빛나고 있는 마법진에 적혀진 알 수 없는 룬어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면서 이상한 안개를 생성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마법진이 사라지고 안개가 어느 정도 사라졌을 때, 이루린은 키가 작고 굉장히 귀엽게 생긴 꼬마들이 주위를 둘러보며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이루린은 후보 9명이 저마다 꼬마 드래곤들에게 가는 모습을 말 없이 응시했다. "붉은 머리카락은 한 명 밖에 없으니까... 아, 저기 있군." 이루린은 뚱한 표정을 짓고 못마땅한 듯이 마왕성을 둘러보고 있는 한 꼬마를 볼 수 있었다. 다른 헤츨링들이 입고 있는 옷보다 조금 더 좋아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다. 이루린은 반갑진 않았지만 겉으로라도 반가운 표정을 지으면서 최대한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고 싶었다.그녀는 그 레드 드래곤에게 다가가서 손을 내밀며 미소를 지었다. "안녕? 난 이루린이라고 해. 네 이름... 혹시 케디아니스라고 하니?" 그 꼬마는 이루린을 노골적으로 위 아래로 훑어 보면서 말했다. "뭐야, 이 아줌마는." 일순간 이루린은 몸을 굳혔지만 아직 어린 아이인 관계상 참기로 했다. "케디아니스 맞지? 반가워, 우리 앞으로 잘 지내보자." 이루린은 마지막 말에 힘을 주어 말하면서 가까스로 분노를 삼켰다. "맞긴 한데. 행동 한 번 진짜 밥맛 떨어지네." 이루린을 벌레처럼 응시하고 있는 케디아니스의 표정이 굉장히 일그러졌다. 순간 또 한번 열받은 이루린은 양 미간을 심하게 모았지만, 이번에도 참기로 했다. "왜 그러니? 우리 한번 잘 지내보자." `내 손에 맞아서 죽기 전에.` 이루린은 살벌하게 생각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 새 후보들은 자기의 드래곤들과 함께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데리노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연회장에는 자신과 케디아니스, 둘 뿐인 것 같았다. 이루린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케디아니스의 눈 앞에 다시 손을 내밀었다. 케디아니스는 자기 손으로 그녀의 손을 세차게 치면서 몸을 돌렸다. "뭐야, 네가 날 가르치겠다고? 하이고, 요즘에는 별 희안한 게 날 가르치려 들려 하네." 가뜩이나 기분이 좋지 않아 죽겠는데 케디아니스가 그녀의 속에 염장을 지르고 있었다. 이루린의 속은 화산이 폭발하기 직전의 상태까지 가고 있었다. 이루린은 눈을 부릅 뜨며 살벌하게 외쳤다. "이... 이! 빌어먹을 도마뱀이!" 그게 케실리온의 만남과는 비교도 안 되는, 레드 드래곤 케디아니스와의 끔찍한 만남이자 악연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마왕의아내-20 악질 레드 드래곤 케디아니스 "하아..." 이루린은 짤막하게 한숨을 쉬면서 묵묵히 이마를 짚었다. `저 꼬마를 어떻게 길들인다...` 이루린은 질린 마음으로 고개를 돌려서 침대 위에 `대` 자로 뻗어서 자고 있는 레드 드래곤 케디아니스라는 아주 발칙한 꼬마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이 못된 꼬마 녀석은 따라 오는 도중에도 자꾸 자신을 향해 아줌마라고 투덜거리면서 바꿔 달라고 때를 썼다. 이루린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꼈지만 꾹 참고 방으로 돌아왔다. 이루린은 케디아니스가 성룡을 쓰러뜨릴 만큼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만 따진다면 굳이 열심히 훈련시킬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능력이 좋다고 해도 훈련을 시키지 않으면 예외적인 상황에서는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제대로 길들여놓지 않으면 한 달 후에 싸우기 싫어서 일부러 기권할 수도 있지 않은가. 물론 이루린은 점수에 관심이 없었기에 가만히 내버려둬도 상관 없었다. 다른 마족들이라면 몰라도 그녀는 마왕의 신부가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케실리온과의 거래였다. 케디아니스가 심하게 횡포를 부리면, 아무리 중도에 탈락시키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겨날 수 있는 예외적인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건 `탈락`이 아니라 `강제`로 ?겨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까. 그렇게 되면 그녀는 더 이상 마왕성에 머무를 이유가 없어지게 되고, 결국 케실리온과의 거래를 끝낼 수 없게 되어 영영 마력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 매에는 장사가 없다. 설마 내가 어린 꼬마 한 명을 못 이길까?` 마력 때문에 기술을 쓸 수 없다면, 순수한 힘으로 상대하면 되는 것이다. 이루린은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비교적 편안하게 생각하면서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러나 그 다음날에 일어난 일은 그녀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게 만들었다. "이루린 님! 케디아니스가 마왕성 입구에 있는 거울을 깨뜨렸어요!" "이루린 님! 케디아니스가 시녀들의 방을 물바다로...." "이루린 님. 정말 힘들어서 못 살겠어요. 케디아니스를 어떻게 좀..." 이루린은 시중들의 원망섞인 목소리를 다 들어주느라 귀가 열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케디아니스의 횡포는 아침부터 시작해서 오후 늦게까지 끊이질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 얍삽하게도 고위 마족들이나 상급 마족들이 있는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고 주로 하급 마족들이 있는 곳만 노려서 기상천외한 일들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욕을 바가지로 얻어 먹는 것은 이루린 자신이었다. 이루린은 혈압이 머리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3일 동안 케디아니스의 꽁무니만 ?아 다녔으나 허사였다. 마력을 이용하지 못해 금새 체력이 바닥난 게 이유였는데, 그 때문에 케디아니스에게 느려터진 할망구라고 놀림을 받았다. "이 자식, 이리로 안 와? 잡히면 세상의 끝이 뭔지 보여주겠어!" 이루린은 주위에 마족들이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고함치면서 필사적으로 달렸다. 땀 때문에 등이 척척하게 달라붙은지 오래였고, 이마는 물인지 땀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엉망이었다. 그러나 속에서 끓어 오르는 오기만큼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째서 저런 드래곤이 걸렸는지 속으로 원통 안에 든 종이 쪽지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체력이 좋아서 그런지, 달리면서 아까부터 계속 땀조차 흘리지 않고 있는 케디아니스가 얄밉게도 혀를 쏙 내밀며 말했다. "나보다는 그 쪽이 세상의 끝을 먼저 보겠는데. 그리고 멈추라고 해서 내가 멈출 것 같아?" 케디아니스가 이루린의 몰골을 위 아래로 훑어 보면서 달렸다. 이루린은 자신과 케디아니스를 향해 응시하고 있는 마족들이 모두 경직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여기에서 멈출 수는 없었다. 케실리온이 굳이 떠벌리지 않아도 청순하고 얌전한 이미지를 아주 완벽하게 벗어던졌다는 사실은 조금 서글프긴 했지만 케디아니스를 교육시키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3일 동안 ?고 ?기는 추격전 끝에 이루린은 마왕성의 지리를 거의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마왕성의 구조를 이용해 교묘하게 케디아니스를 막다른 벽으로 밀어 넣었다. 케디아니스는 막다른 벽이라는 사실에 잠시 주위를 두리번 거리더니, 곧 벽에 몸을 기대고 이루린을 응시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움직일 듯한 낮은 자세로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이루린이 조금이라도 틈을 주면 그 사이로 도망칠 계획을 짜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스피드는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굉장했기 때문에 - 성룡을 쓰러뜨렸다는 말이 괜한 소문이 아니었다는 게 판정났다. - 긴장하면서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케디아니스는 연신 시선을 틈새로 주면서 반항적으로 외쳤다. "왜 자꾸 날 방해하는 거야? 난 편하게 마왕성에서 지내다가 집에 돌아갈 거란 말야!" 그도 숨이 차긴 했는지, 가슴이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그의 두 반항적인 눈동자는 이루린을 불만스럽게 향해 있었다. 그러한 모습이 어이 없었던 이루린은, 절로 기운이 빠지는 것을 느끼면서 조용히 말했다. "우리 이제 끝내야 하지 않겠니? 넌 내게 가르침을 받아야할 의무가 있어." 이루린은 이 순간 간절하게 떠오르는 악마같은 생각을 모조리 감추면서 애써 착한 소녀처럼 미소를 지었다. 일단 무조건 달래서 설득해야만 했다. 그러한 생각은 이루린의 성격을 잠시나마 잠재워 놓았다. 케디아니스의 표정이 독약을 먹은 것처럼 변했다. 그는 손으로 일부러 입을 틀어 막더니, 실컷 보라는 듯이 부풀려서 행동했다. "우욱! 그런 표정 짓지 마! 정말 올라온다는 것 몰라?" 이루린은 순간적으로 주먹이 앞으로 나가려던 것을 막으면서 마음 속을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호수로 만들기로 했다. `참자.` 그가 다시 악의에 가득찬 어조로 말했다. "난 순진한 표정을 지으면서 착하게 구는 여자가 제일 싫어." `참자, 참자. 제발!` 그러나 마음 속과는 행동과 입은 정반대로 나갔다. 이루린은 팔을 걷어붙이고 손을 허리에 갖다 대며 따지듯이 외쳤다. "이제 더는 못 참겠군. 착하게 구는 여자가 싫어? 그래, 그렇단 말이지? 네 소원대로 해 주마." 이루린이 목과 손을 풀자 경쾌하지만 위협적인 소리가 또렷하게 울려퍼졌다. 그러자 그가 잠시 당황하는 듯한 기색을 보이면서 주춤했다. 그는 이루린을 경계하는 듯이 위 아래로 훑어보더니, 애써 당당하게 보이려는 듯이 큰 소리로 외쳤다. "뭐야! 뭘 하려는 거야!" 케디아니스는 재빨리 도망치려고 했으나, 양 미간을 심하게 모으고 있는 이루린의 위압적인 손길에 의해 붙잡혔다. 케디아니스는 도망가려고 격렬하게 발버둥쳤으나, 이루린은 더욱 더 거칠게 옷깃을 휘어잡으며 말했다. "너 죽고 나 살자. 망할 도마뱀!" "이 손 놓지 못해? " "나 학교다닐 때 별명이 죽음의 흑장미였어, 알아?" 이루린이 소리내며 손목을 계속 풀자, 케디아니스의 기세 등등한 표정이 아까 전보다 사라졌다. 그는 심줄이 튀어나올 만큼 세게 쥐고 있는 이루린의 주먹을 놀란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흐... 흑장미? 그게 무슨 뜻..." "뜻을 모르겠으면." 이루린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몸으로 느껴 봐." 그 이후, 마왕성 하층부에 있는 마족들이라면 모두 들었을 정도로 큰 비명소리가 한 시간이나 공기를 찢듯이 울려퍼졌다. 마족들은 인상을 쓰면서 귀를 틀어막고 업무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어느 누구 하나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시끄럽긴 했어도 비명소리의 근원이 어디인지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누가 비명을 질렀는지도 말이다. 이루린은 케디아니스를 한껏 때려준 후에 승리를 예감하며 즐겁게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의 서막에 불과했다. 마왕의아내-21 악질 레드 드래곤 케디아니스 케디아니스의 고약한 잠버릇 덕분에 그녀는 10살 짜리가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바구니 안에다가 침낭을 마련해 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밤새도록 그녀를 침대 밖으로 밀어내기 위해 발로 차거나 손을 아무 부위에다 얹어 놓으면서 누군가가 옆에서 칼을 갈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잤다. 정말로 아무것도 몰라서인지, 아니면 철저한 계획 하에 이루어진 것인지는 몰라도 덕분에 그녀는 밤새도록 잠을 설쳐야만 했다. 이루린은 피곤했지만 케디아니스가 혹시라도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 때문에 자연히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 그녀는 제일 먼저 일어나서 바구니 안에 케디아니스가 있는지 살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이루린은 바구니 안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황급히 창 밖을 응시했다. 아직 새벽이라고 해도 될 만큼 어두운 시각이었다. 그런데 아직 잠이 많을 시기인 어린 드래곤이 이렇게 이른 시각에 모습을 감추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그러나 이루린은 그가 아직 소년이기 때문에 일어나자 마자 나가서 노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생각하고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제 그렇게 많이 얻어 맞았는데, 설마.` 이루린은 일어나서 기지개를 편 후에 옷장을 열어서 간편한 드레스로 갈아 입었다. 케디아니스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기분이 과히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골치 아픈 케디아니스의 반항적인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이렇게 세상이 편할 줄은 몰랐던 그녀였다. "케디아니스도 안 보이니 오늘은 케실리온에게 가 볼까?" 오늘은 케실리온에게 가서 특별히 마력을 느끼기 위해 도움을 받을 작정이었다. 관찰을 해 본 결과, 케실리온은 항상 똑같은 장소와 시각에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대체로 아침에 항살 볼 수 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는 마왕성 공터에서 가장 큰 나무에서만 낮잠을 즐겼다. - 아마도 굵은 만큼 안전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 이루린은 왜 그가 자주 낮잠을 즐기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의혹을 품기도 했으나 물어봐도 허사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러려니 넘어가기로 했다. 그는 항상 그녀가 사적인 질문을 하기만 하면 바로 입을 다물어 버렸으니까. `밤 늦게까지 무엇을 하기에? 뭐, 거기에 대한 건 그만 잊기로 하고. 그런데 어젯밤에는 정말 끔찍했지...` 이루린은 마왕성 1층으로 내려가면서 어제의 일을 상상했다. 그 상황 속에서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옷을 몽땅 벗고 있었고, 케디아니스는 옷을 벗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면서 그녀의 힘에 대항했다. 물론 이루린은 강제로라도 옷을 벗겨서 - 불쌍해서 속옷은 입게 해 주었다. - 같이 목욕하려고 했다. 이루린은 인상을 험하게 쓰면서 그에게 자신의 옷을 들이밀었다. `케디아니스, 오늘은 누나랑 씻고 자야지? 너 때문에 내 옷이 똥물에 목욕했잖아!` 그가 이루린의 옷을 바닥으로 던지면서 바락바락 대들었다. `나한테 누나라는 단어를 주입시키지 마!` `이런, 이런. 주먹이 아우성을 치는군. 널 때려달라고.` `......` 이루린이 노골적으로 주먹을 앞으로 내밀며 속삭이듯이 말하자 그가 움찔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불만이 가득한 동작으로 묵묵히 욕실으로 들어갔다. 그 이후로 그녀와 케디아니스는 목욕탕에서 서로 물을 튀겨가며 어렵사리 목욕을 할 수 있었다. 어젯밤의 일을 모두 떠올리자 그녀는 절로 한숨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이루린은 마왕성의 거대한 입구에 달린 문이 오늘따라 닫혀 있다는 것을 알곤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다. 입구의 문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항상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없이 두 손으로 문을 천천히 열고 앞으로 나아갔을 때였다. 순간 그녀는 바늘이 뇌를 파고들듯이 정신을 확 깨게 만드는 차가운 느낌이 전신을 휘감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짧게 소리를 질렀다. 그것도 피부로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기체나 고체도 아닌 액체였다. 바닥에 뭔가가 부딪히면서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이루린은 이 갑작스런 사태를 맞이하기에 급급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리곤 손으로 머리카락을 위로 걷어 올린 다음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자신이 물벼락을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도 인위적으로 조작된 물벼락을. 더 열받는 것은 굴러가고 있는 통에 적혀 있는 이름이었다. [오크 오줌] "오크 오줌이라니!" 그제서야 그녀는 심하게 인상을 찌푸리면서 어색하게 두 팔을 들어 올려 냄새를 맡아 보았다. 메주 ?는 냄새가 몸에서 진하게 풍겨져오고 있어 오랫동안 냄새를 맡을 수도 없었다. 어젯밤에 목욕했기에 당연히 더 열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이루린이었다. 물론 주위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긴 했지만. 이루린은 이를 갈면서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둘러보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케디아니스... 이 망할 도마뱀!" 이루린은 그의 꼬리를 잘라 회를 뜨거나 가죽을 벗겨서 비싼 값에 팔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끝까지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묵묵히 참았다. 그 때, 이루린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곤 고개를 들었다. 그 누군가는 바로 케실리온이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그는 1m까지 다가오지 않고 3m이상 떨어져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사실은 그녀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그는 오늘따라 일찍 잠에서 깬 모양인지 벌써 마왕성으로 들어가려고 한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밤새도록 잔 것 같기도 했다. 이루린은 그가 구세주라는 생각이 들어, 황급히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케실리온, 나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마력이 좀 필요하데..." 이루린은 말하면서 그를 불만스럽게 응시했다. 보통 마족 같았으면 달려와서 닦아주는 게 정상이었는데, 그는 단지 묵묵히 그녀의 몰골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화가 났지만 그럴 입장이 아니었으므로 참기로 했다. 이윽고 그가 짧게 물었다. "댓가는?" 순간 차가운 액체 때문에 몸이 떨려와서인지 더 억울한 심정이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나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치사하군. 조건을 안 달면 안 되나?"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자원 봉사는 싫다. 다시 묻도록 하지. 댓가는?" 이루린은 입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는 자신을 저주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어." 그 날 오후. 그녀는 케디아니스를 골탕먹일 방법으로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지만, 케실리온에게서 팔뚝만큼의 서류를 안겨 받게 되었으므로 상황은 전혀 호전되지 않았다. 서류의 내용을 살펴 보면서, 그녀는 그가 하는 일이 도대체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서류 때문에 밤 늦게까지 일하고 낮에 부족한 수면을 보충하는 것 같았다.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시중이 직업인 하급 마족이나 전투력이 월등히 높은 상급 마족은 아니라는 것이다. `중급 마족인가? 아니면 고위 마족? 아냐, 초기에 아빠가 케실리온을 대한 태도로 봐선...` 이루린은 서류를 가지런하게 화장대에 올려 놓으면서 이제 케실리온에 대한 문제를 잊기로 했다. 현재 중요한 것은 케디아니스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받은 그 서류의 양만큼이나 케디아니스에게 복수할 방법을 알고 있었기에 크게 불평을 하지 않고 묵묵히 욕실로 들어갔다. 벌써부터 기대되기 시작했다. "마왕성의 지붕은 그렇게 나쁘지 않군." 케디아니스는 지금 쯤이면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을 찾아다니고 있을 이루린의 몰골을 떠올리면서 사악하게 웃었다. 분명 어젯밤에 목욕을 했기 때문에 더 열이 오른 채로 그를 찾고 있을 것이다. `이른 새벽이면 마왕성 입구를 지나다니는 마족은 거의 없으니까. 있다고 해도 주위를 줘서 거의 ?아냈지만.` 그 때였다. 케디아니스는 즐거운 기분을 만끽하다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아야!" 팔에서 난데없이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케디아니스는 영문도 모른 채 평평한 부분의 지붕 위를 뒹굴었다. 뭔가가 따끔한 게 피부 속을 뚫고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팔을 시작으로 해서 세균이 퍼지듯이 통증도 늘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황급히 팔을 걷어 붙이고 손으로 고통이 이는 지점을 문질렀으나 예상과는 달리 어디에도 상처는 없었다. 당연히 있어야 할 상처가 없다는 사실에 그는 당황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비명을 지르기만 할 뿐이었다. `그 마족의 소행이다. 악랄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케디아니스는 필시 이루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승리를 만끽한 기분은 어느 새 날아가고 난 후였다. 이루린은 주술을 건 인형과 못을 들고 흥얼거렸다. 욕실에서 구한 케디아니스의 머리카락과 밀짚으로 만들어 마력을 주입시킨 아주 귀한 인형이었다. 사주단지 모시듯, 그녀는 그 인형을 소중히 다루면서 날카로운 바늘을 들고 이번에는 어디를 꽂아 넣을지 즐거운 고민을 했다. `다리에도 했고, 팔에도 했지. 눈동자에 꽂아 넣고 싶긴 싶긴 하지만 나중에 그 꼬마가 자발적으로 방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라도 참아야 해. 콧구멍이나 손톱 밑은 만들기 귀찮고... 남성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그 곳 역시 만들기 귀찮고. 그렇다면 가장 만들기 쉽고 괴로운 부위는?` 이루린은 인형의 부위를 놓고 곰곰히 생각하다가, 이윽고 절묘한 장소를 생각해 냈다. 사악하게 웃은 그녀는 얼른 바늘 대신에 준비한 못을 집어 들고 그 장소를 향해 세게 꽂았다. `치질 걸린 드래곤의 말로라고 할 수 있지.` 이루린은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비명소리가 음악소리로 바뀌어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케디아니스느 눈을 부릅뜨면서 이루린의 방이 있는 마왕성 복도를 어기적거리며 걸었다. 그는 충격을 먹어서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는 상태로, 많은 마족들의 의혹과 불안해하는 듯한 시선을 받으면서 말하기 민망한 곳을 한 손으로 틀어 막으며 걸었다. 꼭 술에 취한 듯한 자세로. 이윽고 이루린의 방에 힙겹게 당도했을 때, 케디아니스는 거의 죽을 맛이었다. 가장 중요한 부위 중 하나이고 음식물의 출구라고 할 수 있으며, 가장 더러운 곳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곳이 팔이나 다리에서 느껴지는 고통과는 비교도 안 되게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그를 화나게 했던 것은, 바로 이루린이 문 앞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를 향해 승리의 미소를 지으면서 사악하게 웃고 있었다. "너, 너 따위가 나를... 윽!" 그는 그 순간 그녀의 눈앞에서 기절했다. 마왕의아내-22 악질 레드 드래곤 케디아니스 다음 날 이른 새벽이었다. 이루린은 일어나자 마자 침대 위에 엎어져서 자고 있는 - 바구니 속에 넣으려고 했으나 불쌍해서 봐 주었다. - 케디아니스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는 어제부터 계속 기절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고 있는 것인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현재로서는 얌전한 상태였다. "싸가지없는 성격 때문에 이 귀여운 얼굴이 트롤로 보인단 말야." 이루린은 케디아니스의 부드러운 피부를 손으로 쓰다듬은 후에 간단하게 옷을 갈아 입었다. 그리곤 한숨을 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른 마족들은 다 드래곤들을 가르치고 있던데 난 뭐지? 좋아, 혹시나 모르니...` 이루린은 창 밖을 응시했다. 오늘은 상급 마족들이 정기적으로 공터에서 훈련을 하는 날이어서 그런지 항상 정적이 흘렀던 공터는 생기로 넘쳐 있었다. 이루린은 창을 들고 서로 대련하고 있는 상급 마족들을 향해 웃은 후에 밖으로 나갔다. 날이 밝았다. 이루린은 두 개의 칼을 들고서 케디아니스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나가는 도중에 입이 한 말이나 튀어나와 가지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걷기만 했다. 마왕성 공터로 막 나왔을 때, 그가 아주 지루하고도 불만에 가득 찬 어조로 물었다. "왜 나온 거야?" 이루린이 즐거운 마음으로 말했다. "야외 수업. 일단 이론보다는 실전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케디아니스가 그런 그녀를 노려보더니, 비꼬듯이 한 마디 던졌다. "너에게서는 마력이 느껴지지 않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날 가르치겠다고? 웃기는 소리로군." 이루린은 케디아니스의 어깨에 얹은 손에 세게 힘을 주며 말했다. "바늘이 부족하니? 이번에는 눈동자에도 꽂아 줄까?" "......" 그녀는 케디아니스의 악에 받친 얼굴을 응시하다가 어느덧 케실리온이 자고 있는 나무까지 당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이 곳으로 온 이유는, 만약에 케디아니스가 횡포를 부려 통제할 수 없을 경우 케실리온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였다. 물론 케실리온과는 이미 말을 다 해 두었다. 그녀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나무 위에서 여전히 낮잠을 즐기고 있는 케실리온을 응시하면서 어제의 대화를 상기했다. `케실리온, 내 부탁 들어줄 거지?` `어제의 두 배.` `...꼭 그렇게 치사하게 나와야겠어?` 그런 식으로 해서 그녀는 케디아니스가 기절해 있을 당시에, 어마어마한 서류 뭉치를 받고 방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이루린은 케디아니스를 가르치는 것 말고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같은 사실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앉기 싫은 눈치를 보이는 케디아니스를 강제로 바닥에 앉히면서 조용히 물었다. "오늘은 수업을 해야겠지?" "......" 이루린은 눈을 부릅 뜨면서 주먹을 치켜 들었다. "대답 안 해? 맞을래?" 케디아니스는 오로지 이루린의 주먹에만 시선을 주더니, 억지로 말을 내뱉었다. "난 안 한다고 하진 않았어." 그제서야 이루린은 표정을 풀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잡고 있던 케디아니스의 손과 어깨를 놓아주었다. 사실 케디아니스가 도망칠까봐 마왕성 공터로 나올 때 까지 두 손으로 그의 어깨와 손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였다. 케디아니스는 아까부터 계속 이와 같은 상황이 되기만을 노렸는지, 부리나케 일어나서는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이루린은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여유가 있었기에 가만히 있었다.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할 것 같아? 이 악녀야!" 그가 악을 쓰듯이 외치며 멀리 달아나자, 이루린은 천천히 일어서면서 부드럽게 외쳤다. "또 발악이니?" 그가 인상을 험하게 구기며 외쳤다. "아냐! 폴리모프!" 이루린은 폴리모프란 단어에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녀가 알기로 마왕성 내에서는 함부로 폴리모프를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만약에 드래곤의 모습으로 마왕성 내부를 휘젓는다면, 더 확인할 것도 없이 ?겨날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조금 의외인데?` 이루린은 느긋한 마음으로 케디아니스의 몸이 눈부실 정도로 흰 빛으로 휩싸이는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는 한 번도 드래곤의 모습을 실제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케디아니스의 모습이 어떨지 굉장히 궁금했다. 물론 현신하게 되면 솔직하게 인정해서 그녀는 그를 통제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어리다고는 하지만 성룡을 쓰러뜨릴 만큼 강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그였고, 게다가 그녀 자신은 현재 마력이 없는데 무슨 수로 마법 종족을 이긴단 말인가. `그래서 케실리온이 있는 곳으로 오긴 했지. 물론 케실리온의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현재의 나보다는 낫겠지?` 이윽고 3m정도의 커다란 몸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고 단단해 보이는 강한 날개와 위협적인 발톱이 빛에 번들거렸다. 작은 나무 정도는 손쉽게 부러뜨릴 수 있을 만한 길고 두꺼운 꼬리와 압도하고도 남을 만한 붉은 안광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오로지 그 두 눈동자는 이루린, 자신을 향해 있었다. 이루린은 분명히 웃지 못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발악 맞네." "-아니라니까!-" 굵고 커다란 목소리가 마왕성 외부에 구석 구석 울려퍼졌다. 이루린은 혹시나 그 목소리를 듣고 케실리온이 깨어나지는 않았나 싶어 위로 고개를 들어올려 보았지만, 그는 아까 전과 다름 없이 미동도 하지 않고 곤히 자고 있었다. "-그리고 난 내 머리 위에 있는 그물에 걸려들 만큼 어리석지 않아! 이런 걸 빤히 보이는 장소에다가 놔두다니 정말로 아둔하군!-" 언제 발견했는지 케디아니스가 그 짧은 팔로 자기 머리 위에 있는 거대한 그물을 가리켰다. 마왕성의 벽과 거대한 나무 사이에 달아두었던 그것은 이루린이 케디아니스가 일어나기 전에 설치해 놓았던 그물이었다. 이루린은 짐짓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이런, 들켜 버렸네." 케디아니스는 조소를 머금으면서 그 짧은 다리로 오리처럼 뒤뚱 뒤뚱 걸어 그물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리고 다섯 번 더 걸었을 때, 그는 그 그물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난 속을 정도로 그렇게.... 아악!-" 그 때였다. 그녀의 예상대로 케디아니스가 서 있는 땅이 흔들리기 곧 거대한 광음을 내며 아래로 꺼졌다. 그녀는 메케한 먼지 때문에 손으로 코를 살짝 막으면서 재빨리 구덩이 옆의 위에 달려 있는 그물을 아래로 잽싸게 내렸다. 그런 다음 구덩이에 그물을 깔고 풀숲에서 들고 온 망치와 말뚝을 이용해서 그것을 박았다. 케디아니스가 절대로 빠져 나올 수 없을 만큼 단단하게. 이루린은 즐거운 마음으로 케디아니스의 말을 이으며 말했다. "어리석다는 것이지." 구덩이 속에서 악에 받친 그의 외침이 메아리가 되어 들려왔다. "-내가 그 그물 하나 못 뚫은 것 같아?-" 이루린은 즐거운 마음으로 말뚝을 다 박으면서 약올리듯이 케디아니스를 향해 말했다. "당연히 못 뚫지. 이 그물은 특수 제작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뚫을 수 없어." 그녀는 쓰게 속으로 생각했다. `아까 케실리온의 힘을 빌려서.` 새벽에 그녀는 케실리온과 그물을 놓고 거래를 한 후에 상급 마족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그들은 서로 창을 들고 땀이 나도록 대련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자 상급 마족들이 창을 내리곤 그런 이루린을 향해 수근거렸다. 이루린은 이 기회를 이용해서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상급 마족들은 이 추운 새벽에도 수련을 하고 있군요." 무슨 이유에선지는 몰랐지만, 상급 마족 하나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렇지요, 저희는 더 강해지기 위해서 수련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들어줄 수 있나요?" 그들이 갑자기 불안한 듯한 시선을 교환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엇입니까? 이루린 님." 이루린은 그 마족에게 그물을 보여주면서 손가락으로 마왕성 벽과 나무 사이를 가리켰다. "그냥 저기에 이 그물을 아주 잘 보이게 설치하시고, 바로 그 옆에 5m정도 되는 깊이와 3m정도의 넓이를 자랑하는 구덩이를 파줘요. 미리 파여져 있으니까 하기 어렵지 않을 거예요." 이루린은 깊게 파여져 있는 구덩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전에 그녀가 암살자들과 싸웠을 때 생겼던 구덩이였다. 상급 마족들은 이루린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주더니 잠시 곤란하다는 듯이 머뭇거렸다. 물론 이루린은 이런 반응을 예상하긴 했었다. "그건 안 됩니다. 함부로 공터의 땅을 파는 일은 옳지..." 이루린은 재빨리 그의 말을 잘랐다. "당신은 무슨 마족이죠?" "상급 마족입니다만..." "그러면 나는?" "그야 당연히 고위 마족이죠." "상급 마족은 고위 마족의 명령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죠?" 상급 마족 중 하나가 힙겹게 입을 열었다. "무조건... 복종입니다." 이루린은 추궁 조로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불복종 시에는...?" 그가 난처하다는 듯이 말했다. "처...척살..." "그 말 듣기 좋군요. 당장 구덩이 파세요." 이루린의 질서 정연한 논리에 밀린 상급 마족들은 하는 수 없이 미리 파여진 구덩이를 더 깊게 파기 시작했고, 동이 트고 나서야 구덩이 위에 나무를 깔고 흙으로 교묘하게 덮을 수 있었다. 이루린은 케디아니스를 향해 머리를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말했다. "이 어리석은 도마뱀아, 싸움은 오로지 힘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머리로도 하는 거야. 네가 그 곳에 절로 빠지지 않았다고 해도 난 널 그 구덩이 속으로 유인했을 거야. 널 유인하는 방법 쯤이야 아주 간단하니까." 그는 흥분했는지 그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 같았다. "-이익! 시끄러워! 날 당장 꺼내!-" 이루린은 그의 말을 흘려 들으며 기분 좋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좋아하지마. 그리고 널 위해 선물을 하나 준비했는데..." 광분하던 케디아니스가 그녀의 말에 갑자기 짧게 침묵하더니 곧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지?-" "발 아래를 봐.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이야. 어때, 끝내주게 아름다운 광경이지?" 이루린은 케디아니스의 발목으로 거미가 기어 올라가는 것을 즐겁게 응시했다. 그의 주변에는 쌔까만 거미가 필사적으로 나가려는 듯이 득실대고 있었는데, 셀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숫자였다. 케디아니스의 표정은 거의 기절에 가까울 만큼이나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거의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아래로 정신없이 공포로 질린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거의 발작에 가까울 만큼 격렬하게 움직이면서 그물을 뚫고 나오려고 했지만, 예상대로 그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돈 주고도 못 볼 광경이라고 이루린은 생각했다. "-자, 자이언트 거미! 아악! 저리 가지 못해! 이 빌어먹을! 젠장!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게 자이언트 거미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냈지?-" 케디아니스가 거의 이성을 잃을 만큼 거미와 함께 날뛰자 이루린은 더욱 더 화사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알고 보니 넌 이 곳에 오기 전에도 꽤 유명했다고 하던데? 덕분에 네 비밀을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지. 그리고 미안하지만 네가 밟고 있는 구덩이에 자이언트 거미들이 좋아하는 특수한 물질을 발라 놨으니까 아마 조금 있으면 땅 밑으로 수 백마리 더 기어 나올 거야, 기뻐하라고." 전혀 기쁘게 여겨지지 못할 말이었다. 마왕의아내-23 악질 레드 드래곤 케디아니스 그 다음 날 아침이었다. 이루린은 케실리온이 준 서류를 밤 늦게까지 하느라 피곤한 나머지 늦게 일어나게 되었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케디아니스의 바구니를 응시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케디아니스가 없었으므로 그녀는 아침에 서류를 잡고 씨름을 했다. 그러기를 약 한 시간.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잠시 후에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들어왔다. "이루린 님, 아침 식사입니다." 이루린은 익숙한 목소리에 펜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몸을 돌렸다. "아이나로구나. 오늘 아침 음식은?" 이루린은 기대에 찬 마음으로 아이나가 들고 온 음식을 응시하면서 입맛을 다졌다. 아이나는 스프와 숟가락이 놓여있는 받침대를 책상에 내려 놓으면서 머리를 숙였다. 그리곤 이루린의 식성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스프예요. 물론 과일이 주로 들어갔어요." 많은 마족들이 그녀가 거의 과일만 먹고 사는 것에 대해 - 이루린도 자신이 주로 과일만 먹고 사는 것에 대해 신기하게 여겼다. - 궁금하게 물어보았다. 이루린은 `미식가`라는 단 한 단어로 그들의 질문 공세를 압축해 버렸고, 현재로서는 영양 실조도 걸리지 않고 잘 살고 있었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먹었던 과일에 비해 많은 영양소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안 쓰러지고 잘 살고 있지. 이루린은 오늘 따라 더욱 감미로운 향기를 풍기고 있는 스프를 응시하면서 숟가락으로 먹어 보았다. 어제와는 다른 독특한 느낌이 입 안에서 퍼졌다. 이루린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이나를 응시했다. "아이나는 요리 솜씨가 좋구나." "아니에요. 과찬의 말씀이세요." 아이나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수줍게 웃었다. "오늘 스프에 뭘 넣었는지는 몰라도 정말 독특한데?" 그러자 예상과는 다르게 아이나가 조금 이상하다는 듯이 그녀를 응시했다. 적지 않게 당황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스프와 이루린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제와 다른 걸 넣진 않았는데.." "뭐?" 이루린은 짧게 반문하면서 다시 숟가락으로 스프를 떠 먹어 보았다. 그러나 역시 어제와는 다른 맛이었다. 스프를 응시하던 아이나의 표정이 갑자기 심상치않게 변하자,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낀 이루린은 황급히 숟가락으로 스프를 깊숙히 떠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노란 스프 위에 검은 물체가 떠올랐다가 다시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둘 다 무언의 침묵이었다. "......" 이루린은 잠시 먹던 것을 넘기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손으로 입을 틀어 막으면서 천천히 숟가락으로 그 검은 물체를 들어 올렸다. 주먹막한 자이언트 거미였다. 이루린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욕실로 향했다. "이루리 님! 괜찮으세요? 어머, 어떻게 해!" 그녀의 귓전으로 아이나의 어쩔 줄 몰라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독종을 봤나. 감히 내가 먹는 음식에 거미를 처넣어?` 이루린은 이를 갈면서 케디아니스를 찾아다니기로 했다. "당장 이리로 오지 못해?" 화창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는 공터였다. 그 곳에서 이루린은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케디아니스의 꽁무니를 ?았다. 그러나 그는 콧방귀만 뀔 뿐, 이루린의 말에 제대로 응하지 않고 열심히 달리기만 했다. "미치지 않은 이상 네 말을 들을 이유는 없어!" "한 번 미치게 해 줄까? 응?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오면 묵사발이 되는 수가 있어!" 점점 케디아니스의 속력이 느려지는 것을 확인한 이루린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이의 몸인 관계상 아무리 빠르다고는 해도 체력에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물론 이루린도 지치긴 했지만 케디아니스보다 훨씬 더 많이 뛰어다닌 바람에 - 케디아니스는 위험하다 싶으면 치사하게 항상 마법으로 도망쳤다. - 하루가 다르게 속력이 붙었다. 갑자기 케디아니스가 달리면서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달리고 있는 이루린 앞으로 정령으로 추정되는 생명들이 소환되었다. 모두 바람, 땅, 불, 물의 4원소에 속해 있는 하급 정령들인 듯 싶었다. 케디아니스가 이루린을 향해 입가에 노골적으로 조소를 띄며 말했다. "저 악랄한 마족을 공격해라!" 이루린은 자신에게 적대적인 몸짓으로 다가오고 있는 네 하급 정령을 응시하다가 그 틈을 이용해서 도망치고 있는 케디아니스를 올려다 보았다. 그리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여유 있게 말했다. "미네르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앞으로 미네르바가 모습을 드러냈다. 적대적인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하던 네 하급 정령들이 굳어진 채로 미네르바를 응시했다. 원래 정령은 소환자의 마력이 없으면 마음대로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 그러나 정령왕이라면 마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자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어 소환자를 도울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계약에 위배되는 방법이긴 했지만, 마력이 없으니 순수의 힘을 빌리게 해 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미네르바가 거절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대로 소환이 가능했던 것이었다. 미네르바가 이루린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계약자여, 무슨 일로 나를 불렀나?-" "미네르바, 이 하급 정령들 좀 처리해 줘." 이루린이 손가락으로 네 하급 정령들을 가리키자, 미네르바의 흥미롭다는 시선이 그 쪽으로 향했다. "-흐음? 드래곤 로드의 아들과 계약한 특별한 정령들이로군.-" 미네르바는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네 하급 정령들을 하나 하나 노려봐 주었다. 위협적인 미네르바의 눈빛에 네 하급 정령들이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곧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며서 우물 쭈물 했다. "-실력도 없는 풋내기 드래곤의 말을 들어서 정령계로 돌아가기 전에 내 손에 죽을 테냐, 아니면 너희들에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내 명령을 들어서 앞으로를 편하게 살 테냐?-" 그들은 위축된 모습으로 잠시 머뭇거리더니, 미네르바의 사나운 눈빛을 받고 나서야 하나 둘 씩 사라졌다. 이루린은 그런 미네르바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도 보통내기는 아니구나." "-모두 계약자의 영향이 아닌가. 어쨌든 이만 난 돌아가겠다.-" 미네르바가 사라진 후에 이루린은 케디아니스를 확실하게 잡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늦은 새벽이었다. 거의 모든 마족들이 자고 있을 시각에, 케디아니스는 이루린의 방 문을 살짝 열면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하루종일 마왕성을 돌아다니며 중급 마족들의 업무를 방해하다가 새벽녁이 되어서야 지쳐서 방으로 돌아왔던 것이었다. 이루린은 어둡고 삭막한 공간을 둘러보았다. 침대 위에 이루린의 머리카락으로 추정되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자고 있다고 확신한 케디아니스는 최대한 소리를 죽이면서 들어갔다. 들키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짜릿한 긴장감이 몸을 타고 흘렀다. `오늘 낮의 일은 고소했다.` 케디아니스는 연신 이루린의 침대를 응시하면서 바구니 속에 들어 있는 침낭으로 들어갔다. 내일 아침 새벽이 되면 다시 몰래 밖으로 나가서 이루린의 시선을 피해 도망다닐 생각이었다. 만약에 낮의 기온에 비해 새벽이 월등하게 춥지만 않았더라도 이루린의 방으로 지금처럼 들어오진 않았을 것이다. 케디아니스는 작은 이불을 목 위까지 끌어 올리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 때였다. "케디아니스!" 어디선가 들려오는 고함소리와 함께 케디아니스는 자신의 바구니 전체가 또 다른 이불로 가려졌음을 깨달았다. 그는 당황하면서 바구니를 가리고 있는 이불을 걷어 내려고 했으나 누군가의 힘에 의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누, 누구야!" 케디아니스는 뭔가가 자신의 몸을 간질이고 있다는 느낌에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설마하는 심정으로 바구니 안을 응시했다. 한 마리도 아니고 수십 마리의 자이언트 거미가 이불을 헤치고 스멀 스멀 기어나오고 있었다. "아아악! 치워줘!" 케디아니스는 순간적으로 마법을 쓰려고 했으나, 이 좁은 공간에서 마법을 쓰면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가만히 있었다. `마법 금지라는 규칙에 얽매이는 것도 아닌데.... 젠장!` 케디아니스는 혐오스러운 심정으로 거미를 바라보면서 소리를 질렀다. 어느새 거미는 그의 목덜미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그는 차라리 기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바구니를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내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케디아니스? 누나가 자고 있는데 방에서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니? 넌 예의도 없니?" 능글맞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케디아니스는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을 받았다. 모든 게 저 사악한 이루린의 짓이었던 것이다! 케디아니스는 저절로 눈에서 눈물이 찔끔 나오는 것을 느끼면서, 거미의 숫자가 점점 불어나는 것을 경악하면서 응시했다. 거의 혼비백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살려주세요! 누님, 엄마, 황비 마마! 여왕 폐하!" 그의 울음섞인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은 이루린의 가벼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오는 날 주먹으로 먼지나게 흠씬 두들겨 패고 싶다만, 오늘은 이 정도로 참기로 하지. 해가 뜨고 나면 아주 특별한 수업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 특별한 수업이 현재 당하고 있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끔찍하다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763번째 질문이야, 케디아니스. 네가 검을 바닥에 떨어뜨린 상태에서 상대방이 검으로 공격해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했지?" 이루린이 추궁조로 묻자, 케디아니스는 사색이 된 표정으로 아래를 응시하면서 입을 달싹거렸다. 그는 격렬하게 몸부림을 쳤으나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을 것이다. 현재 이루린과 케디아니스와의 관계는 아주 미묘했다. 이루린은 아주 느긋하게 아이나가 가져다 준 과일을 먹어가며 굵은 밧줄을 잡고 있었고, 케디아니스는 굵고 단단한 밧줄에 애벌레처럼 묶여서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자기 머리 아래의 거대한 거미 구덩이를 망연자실하게 응시할 뿐이었다. 이루린이 잡고 있는 밧줄은 굵은 나뭇가지에 걸쳐지면서 케디아니스를 묶고 있는 부분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그 말은 즉, 이루린이 손만 놓으면 케디아니스는 거꾸로 매달린 채로 거미 구덩이로 직행한다는 것과 같았다. 이루린은 구덩이 밖으로 기어나오고 있는 거미들을 발로 밀어 넣으며 다시 물었다. "대답 안 해? 아니, 고작 1000개의 문제를 내는데 대답을 못 한다는 게 말이 돼? 드래곤이라면 다 외울 수 있을 것 아냐?" 케디아니스의 표정이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그는 인상을 험하게 구기면서 악을 쓰듯이 외쳤다. "내가 천재야? 1분 안에 1000개의 문제에 해당하는 이론을 다 외우라는 게 말이 돼? 도대체 왜 불가능한 걸 시키고 난리야! 난 아직 헤츨링이란 말이야! 성룡이 아니라고!" 그는 손도 발도 묶인 채로 격렬하게 몸부림을 치면서 구덩이로 떨어질 수 있는 범위 밖으로 벗어나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이루린은 그의 떽떽거리는 목소리를 듣는 게 지겨워서 줄을 확 놓았다. 순간 그가 비명을 지르면서 구덩이 속으로 막 빠졌을 때, 그녀는 줄을 다시 잡았다. 물론 끌어 올리진 않았다. 구덩이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 악! 저리가지 못해! 이 망할 거미들! 내가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다 불살라 버릴 거야! 내가 로드가 되면 너희들부터 멸종시켜 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라구!" 케디아니스가 거미들과 씨름을 벌이는 사이, 이루린은 컵에 담긴 과일주를 느긋하게 들이키면서 다음 문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케디아니스가 힘이 다 빠져서 지친 목소리로 신음하고 있을 때, 그녀는 다시 줄을 끌어 당겼다. 그러자 온통 거미의 액체를 뒤집어쓴 케디아니스의 혼이 빠져 나간 듯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루린은 사악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거미 소굴을 탐방해서 화끈한 애정 공세를 받은 기분은?" 케디아니스는 그녀의 말에 대답할 기운도 없는지 입을 벌리고 오로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정신이 퍼뜩 들었는지, 이루린을 향해 분노의 시선을 던지면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이 악녀야, 너 같으면 기분 좋겠냐? 감히 로드의 아들에게 이게 무슨 행패야! 당장 이 마왕성을 떠날 거야!" 그러자 이루린은 인상을 쓰면서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교육이 덜 됐구만. 내가 아무리 널 위해 `성격 개조 5단계`를 실시해도 넌 변한게 없구나." 이루린은 전혀 미련없는 태도로 자연스럽게 줄을 놓았다. 그것도 중간에 잡지도 않고 완전히. 당연히 케디아니스를 묶어 놓은 밧줄은 완전히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거미 속에 파묻혀서 몸을 거칠게 움직였다. "날 다시 올려줘!" 이루린이 구덩이 속을 내려다보며 두 손을 가뿐하게 쫙 펴보였다. 그리고 한 마디 던졌다. "미안, 널 끌어올릴 밧줄이 없어." 그가 있는 힘을 짜내서 다시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자, 이루린이 사악하게 웃으면서 다시 한 마디 던졌다. "주먹만한 거미는 우습다, 이거지? 좋았어. 내일부터는 크기가 내 몸의 반 만한 스페셜 특제 변종 거미로 교육시켜 주지." 그의 비명소리가 더 커졌다. 마왕의아내-24 악질 레드 드래곤 케디아니스 "케디아니스? 얼른 일어나!" 케디아니스는 얼굴에 차가운 느낌을 받고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짜증스럽게 외쳤다. "이게 어떻게 된... 악!" 그는 하마터면 심장마비로 기절할 뻔했다. 이루린이 바로 옆에서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도 이유였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이루린의 부드러운 손길을 받으며 앉아 있는지 서 있는지 분간이 되지 않는 물체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 새까맣고 거대한 물체에 케디아니스는 입을 벌리면서 미친 듯이 뒤로 물러섰고, 이루린은 그런 그를 여유가 있는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케디아니스는 입에서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아 그냥 손가락으로 덜덜 떨면서 엄청난 크기의 검은 물체를 가리쳤다. 그것을 보고 있는 두 눈이 공포와 혐오로 썩어 들어가는 기분이랄까. 그것은 정말로 이루린의 허벅지까지 올 만큼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다. "자, 자이언트 거, 거미..." 케디아니스는 반사적으로 뒤로 도망가려고 했으나, 이루린이 그의 허리를 이상한 보호대와 함께 새로운 밧줄로 묶어 놓았다는 것을 깨닫곤 기겁한 나머지 거세게 저항했다. 그러나 이루린은 한 손으로 밧줄을 단단히 잡은 후에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렇게 큰 거미는 본 적이 없는데 어디서 구한 거야! 아악! 정말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군." 순간 우연이었는지는 몰라도, 이루린의 옆에 얌전히 있던 거미의 발이 위협적으로 꿈틀거렸다. 그는 그 미묘한 변화를 포착하면서 더욱 더 기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긴장하면서 파악했다. 이루린은 두 밧줄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하나는 자이언트 거미의 몸통을 묶은 밧줄과 나머지 하나는 보호대를 착용한 그의 허리를 묶은 밧줄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마족 한 명이 족히 들어갈 정도의 낮은 통이 놓여져 있었다. 이루린은 거의 농담에 가까운 어조로 그 거미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자, 인사해, 뷰리풀. 앞으로 네 낭군이라고 할 수 있는 케디아니스야." 뷰리풀이라는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이름에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게다가 낭군이라는 단어에 더더욱 혐오스러운 감정이 짙어지는 그였다. 케디아니스는 현재의 상황에서 탈출하려고 애쓰며 비꼬았다. "무슨 이름이 그래? 작문 실력이 영 꽝이로군. 그리고 지금 어울리지 않게 암컷을 대려온 거야? 또 저 리본은 뭐야?" 그는 거미의 머리에 노골적으로 달린 붉은 리본을 어이없이 응시했다. 이루린이 싸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자이언트 거미의 암컷은 교미할 때 수컷을 잡아 먹어 영양분으로 보충한다고 하지? 그리고 지금 우리 뷰리풀이 딱 그 시기인데..." "......" 그 말에 케디아니스는 뼛속까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을 맛보아야만 했다. 위협적으로 꿈틀거리는 8개의 다리는 오로지 케디아니스를 향해 있었다. 그는 거의 울고 싶은 감정을 끝까지 감추면서 이루린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녀는 뻔히 다 알고 있었는데도 일부러 암컷을 선택했던 것이다. 케디아니스가 굳은 상태로 가만히 있자, 이루린은 밧줄을 잡은 상태로 통에 들어가서 앉았다. 그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정신이 퍼뜩 들어 거칠게 물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단기간에 체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이지. 규칙은 간단해.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넌 오로지 마왕성 공터만을 돌아야 하고, 만약에 숲으로 잘못 들어가는 날이면 난 거미를 잡고 있는 줄을 기꺼이 놓을 거야. 그 다음엔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겠지?" 그는 기가 막혀서 가만히 있었다. 그러는 사이 이루린이 가볍게 말을 이었다. "뷰리풀과 아름다운 경주를 한다고 생각해. 물론 넌 선두로만 달리게 될 거고, 뷰리풀은 바로 네 뒤를 바싹 따라서 달리게 될거야. 내가 그런 구조로 줄을 잡고 있을 테니까." 케디아니스는 얼이 빠져서 망연자실하게 허리에 단단히 묶인 밧줄을 응시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루린이 그의 말을 싹 무시하고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네 속력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난 뷰리풀을 묶어 놓은 줄을 잡고 있는 손을 느슨하게 만들거고, 뷰리풀은 널 어떻게 하기 위해 네 뒤를 ?겠지. 그럼 언젠가는 뷰리풀의 날카로운 다리에 의해 더 달리지도 못하고 끝나겠지? 참고로 말하자면 뷰리풀은 너보다 훨씬 빠르니까 허튼 수작 부리지 마. 뷰리풀에게 일단 성장 촉진 마법을 건 다음 스피드 향상 마법을 걸어 두었으니까." 순간 케디아니스는 왜 저 자이언트 거미가 비정상적으로 커졌는지 알 수 있었다. 이루린이 갑자기 인상을 쓰면서 중얼거리듯이 말을 이었다. "...그 덕분에 팔이 빠질 만큼 어마어마한 서류를 끝내게 생겼지만. " 케디아니스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사이, 이루린이 위협적으로 웃으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자, 어쨌든 시작해 볼까? 산타와 루돌프의 묘한 관계로군. 크리스마스 같은데?." 산타와 루돌프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그리고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지 그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더불어 크리스마스라는 단어까지도. 그 날 하루종일 상급 마족들은 공터에서 수련하지 못했다. 바로 이루린과 케디아니스의 엽기적인 행각 때문이었다. 케디아니스는 옷이 등에 달라붙는 것도 모른 채 오후 내내 거의 쉬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죽을 힘을 다해 미친듯이 뛰었고, 그 뒤를 엄청나게 거대한 거미가 뒤?고 있었다. 반면에 이루린은 그들을 각각 묶어 놓은 밧줄을 잡으면서 통 속에서 재미를 만끽했다. 그녀는 간간히 입구에 모여 있는 상급 마족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날 상급 마족들은 이루린이 마왕성 입구와 공터로 들어가는 입구에 `애완용 거미 뷰리풀에게 잡아 먹히고 싶지 않으면 오지 마세요`라고 달아 놓은, 경고에 가까운 푯말을 읽고 나서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마왕성 입구 근처에서 할 말을 잃은 채 이루린과 케디아니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악! 도와줘! 이 아줌마가 이 빌어먹을 거미를 이용해서 지금 날 죽이려고 해! " 그는 거의 사색이 된 얼굴로 뛰면서 뒤를 바싹 ?아오고 있는 자이언트 거미를 연신 돌아보곤 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루린은 예상한 결과에 만족스럽게 웃었다. 케디아니스의 달리기 속도가 하루가 다르게 빨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케디아니스의 달리기 속도가 아주 빨라져서 더 이상 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되면 그 다음 단계를 실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파 놓은 구덩이를 최대한 우려먹기 위해 이론 수업을 함께 병행하면서 체력 단련을 골고루 했다. 물론 이루린은 힘 하나 들이지 않고 편안하게 하루 하루를 보냈지만 케디아니스는 매일 밤 녹초가 된 상태로 바구니 속에 들어갔다. 그리고 만족할 만큼 그가 체력을 충분히 단련했을 때, 그녀는 드디어 케디아니스의 허리에 항상 묶어 놓았던 줄을 풀어주었다. 케디아니스는 처음에 그녀의 눈치를 살피느라 태연하게 있었다. 그러나 곧 그녀가 3m이상 떨어지자 곧 바로 돌변하더니 인상을 험하게 찌푸리면서 말을 거칠게 내뱉었다. "날 풀어준 걸 후회하게 만들겠어! 이젠 넌 날 잡지 못해!" 이루린은 뷰리풀의 등에 `애완용 동물이니 건드리지 말 것` 이라고 적어 놓은 종이를 단단히 붙였다. 그런 다음 그런 케디아니스에게 느긋하게 웃어주면서 말했다. "누가 너만 풀어 준다고 했어?" 갑자기 케디아니스의 얼굴이 혐오로 질리기 시작했다. 그는 거의 경악과 공포에 가까운 눈빛으로 뷰리풀의 응시하면서 입을 달싹거렸다. 갑자기 그는 문을 연 후에 도망갈 태세를 갖추며 말했다. "풀면 이 빌어먹을 거미가 마왕성을 헤집고 다닐 텐데도?" "너만 쫓아 다닐 거야.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나? 이 거미는 널 남편으로 생각하고 있어." 케디아니스가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남편이라니? 그런 터무니 없는 소리를 어떻게 믿어?" 이루린은 웃으면서 뷰리풀의 몸통에 묶어 놓았던 줄을 풀기 시작했다. "터무니없는 소리인지 아닌지는 이 거미를 풀어 놓으면 알 수 있을 거야." "뭐야?" "자, 우리 재미있는 놀이를 해 볼까? 규칙은 간단해. 마왕성의 내,외부에서 너와 뷰리풀이 서로 공격하는 거야. 한 쪽이 쓰러지거나 죽으면 이기는 거지. 어떤 수를 쓰든 상관 없고, 시간은 무제한이야. 하지만 난 어제 뷰리풀에게 물리적인 공격을 받으면 몸이 점점 커지는 마법을 걸어 놓았으니까 검을 들고 공격할 생각은 하지 마. 그리고 함부로 마법을 풀 수는 없을 거야. 네 수준과는 다른 아주 강력한 마법이니까." 케디아니스가 불만을 터뜨렸다. "그럼 뭐야, 약점이 없다는 거잖아!" "약점이 없긴 왜 없어? 오로지 마법으로만 죽일 수 있지. 하지만 원래부터 자이언트 거미는 마항력이 높아서 지금 네 수준인 4써클로는 어림도 없어. 최소한 6써클은 되어야 타격을 받지. 조금 전략을 가르쳐 주자면, 뷰리풀이 다가 올 때 넌 워프 마법으로 도망치면서-" 케디아니스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마왕성 내에서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잖아!" "넌 마족이 아닌 드래곤이니까 굳이 지키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어. 게다가 원래부터 규칙이란 규칙은 모조리 지키지 않았으면서 무슨 그런 소릴 하니?" 이루린은 신랄하게 말하다가 다시 설명했다. "어쨌든. 넌 마왕성 내에서 거미가 언제 공격할지 모르니 항상 경계하면서 마법을 공부해야 할 거야. 참고로 말하자면 뷰리풀이 못 가는 곳은 없어. 거미줄로 모든 게 가능하거든. 게다가 자이언트 거미는 원래 머리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 그럼 이제 지능적인 대결을 기대하지. 난 네가 나가고 나서 1분 후에 뷰리풀을 풀 거야." 그가 분통을 터뜨렸다. "도대체 이런 짓을 하는 이유가...!" "오늘부터는 종합적인 능력을 판단하는 날이야. 거미가 달려들 때 체력면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또 얼마나 지능적으로 도망다니면서 마법을 공부할 수 있는지, 또 거미가 공격할 때 순발력을 어느 정도 발휘할 수 있는지를 판단할 거야. 물론 최종 목적은 네 마법 능력을 단기간에 올리는 것에 있지." 케디아니스는 거의 질린 표정이로 이루린을 응시했다. 그는 할 말을 잃은 듯 싶었다. 이루린은 웃으면서 뷰리풀의 몸통에 묶어 놓았던 줄을 완전히 풀엇다. "죽기 싫으면 공부해야 할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잘 알겠지? 자, 그럼 이제 시작 할테니 어서 밖으로 나가. 뷰리풀은 너보다 빠르니까 조심해야 할 거야." 케디아니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뷰리풀이 앞으로 나가려는 듯이 그녀의 손에서 격렬하게 버둥거리자 소리를 지르면서 문을 닫고 모습을 감추었다. "행운을 빌어, 케디아니스." 이루린은 문을 연 다음에 거미를 잡고 있던 손을 완전히 놓았다. 그 날 저녁, 케디아니스는 이루린의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들어올 수 없었다는 말이 옳았다. 그는 지금쯤 뷰리풀과 아름다운 사랑을 키워가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대신에 이루린은 케디아니스가 나간 후, 시간이 남는 틈을 타서 케실리온이 준 서류를 왕창 끝내야만 했다. 한국에 있을 때도 이렇게까지나 고생한 적이 없었기에 힘든 게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너무 지루해서 불태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했다. 그렇게 점심도 먹지 않고 오후 내내 서류만 잡고 씨름한 결과 어두워질 무렵에 다 끝낼 수 있었다. 그녀는 케디아니스가 어디에 있을지 상상하면서, 줄로 단단히 엮어서 묶은 서류를 품에 한무더기로 안고 케실리온이 있을 장소로 갔다. 막 그렇게 마왕성 밖으로 나왔을 때 그녀는 온 몸을 엄습하는 한기를 느꼈다. 잘 때 입는 얇은 옷을 입고 있었기에 빚어진 결과였다. 그녀는 아무 생각없이 막 보랏빛으로 어두워지고 있는 마계의 하늘을 응시하면서 걷다가,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닫고 멈춰섰다. "아, 맞아. 케실리온은 항상 아침이나 오후에 있었지... 그렇다면 지금 없을 텐데."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여기까지 나온 수고가 아까워서 일단 그가 항상 사용했던 나무로 가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그 나무에 달린 나뭇가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이루린이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검을 검집에 집어 넣었다. 아무래도 수련을 하다가 막 쉬려는 듯 했다. 어두워서인지 그의 얼굴이 조금 흐려 보였다. "마침 있었네. 자, 여기 서류." 그가 나무 옆에 갖다 놓으라는 듯이 고개를 움직이자 그녀는 서류를 넘기려다 말고 큰 나무 옆에 세워 놓았다. 그녀는 그가 나무에 몸을 기대며 서류 뭉치 옆에 앉는 모습을 응시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이렇게 늦게까지 있는 거지?" 그가 조용히 물었다. "수련. 그리고 특별한 일은." 이루린은 그의 말뜻을 재빨리 파악하고 대답했다. "별 일 없었어. 그리고 이제서야 시간이 나서 물어보는 건데 날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거지? 음? 이 소리는..." 그 때였다. 이루린은 이상한 기척을 느끼곤 날카롭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뭔가가 숲에서 미미하게 움직이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작고 큰 간격으로 들리더니, 곧 자주 들리기 시작했다. 분명 마물이 아니라 엄청난 숫자의 마족이었다. 이루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날카롭게 정신을 집중하며 검을 뽑아들었다. 날카로운 검날이 빛에 의해 번뜩였다. 그리고 그 순간, 언젠가 그녀를 공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검은 복면을 쓴 마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20명이 넘을 것 같은 머릿수를 자랑하고 있는 그들은 섬뜩한 예기를 띄고 있는 검을 앞으로 치켜 들고서 순식간에 케실리온과 이루린을 포위했다. 이루린은 긴장하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뭐야, 당신들은?" "정령왕을 불러낼 수 있는 마족이니 다치지 않게 생포하도록." 이루린은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한 그 말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녀가 정령왕을 불러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군주와 카란델, 그리고 장로라고 불리우고 있는 중후한 고위 마족들을 제외하곤 아무도 모르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냐, 어쩌면 내가 잘못 알고 있는지도 모르지...` 이루린은 세우고 자세를 낮췄다. 이들은 매우 강해 보였기에, 마력이 없는 상태로 이긴다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무려 20명이 넘는 숫자를 자랑하지 않은가. 이루린은 케실리온을 응시했다. 순간 그는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매일 낮잠만 자고 검을 든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루린으로서는 그의 실력이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케실리온을 볼 때 그냥 평범한 마족이라는 생각이 들 뿐 검사라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었다. 그 때 갑자기 그가 일어섰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그가 검을 뽑는 모습을 말 없이 응시하다가 하마터면 짧게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그가 뽑은 검은 예전에 그녀가 한 번 사용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그냥 평범한 위력만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뽑아들자 검이 눈에 띌 정도로 푸른 예기를 띄기 시작한 것이다. 한 눈에 봐도 그게 강력한 마법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순간 복면을 쓴 마족들이 주춤하더니, 모두 그를 향해 검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가 검을 세우며 짤막하게 입을 열었다. "저 여자를 생포해서 날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런 게 내게 통할 것 같나?" 숨이 멎을 만큼 차갑고 위협적인 케실리온의 말에 이루린은 자신도 모르게 경계심이 생겨났다. 그의 표정은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루린." 그가 이름을 제대로 불러준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그녀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어떻게 도와주겠냐고 물었나? 지금부터가 바로 그 해답이다." 그녀는 순간 믿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케실리온의 속도에 경악했다. 마왕의아내-25 악질 레드 드래곤 케디아니스 "저 여자를 생포해서 날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런 게 내게 통할 것 같나." 숨이 멎을 만큼 차갑고 위협적인 케실리온의 말에 이루린은 자신도 모르게 경계심이 생겨났다. 그의 표정은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루린." 그가 이름을 제대로 불러준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그녀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어떻게 도와주겠냐고 물었나. 지금부터가 바로 그 해답이다." 그녀는 순간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케실리온의 속도에 경악했다. 그는 정말로 믿을 수 없을 만큼 절제되고 날카로운 동작으로 얼굴에 검은 복면을 쓴 마족들을 공격해 나갔다. 몇 몇 마족들이 이루린에게 공격할 새도 없이 케실리온의 검에 베여서 죽어나갔다. 너무나도 손쉽고 정확하게 급소를 노려 한 번에 죽이는 케실리온의 기술에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게다가 여전히 누군가가 죽는다는 게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죽은 이를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자신에게 달려드는 몇 몇 마족들의 검을 받아쳐냈다. 그러나 그녀가 별로 힘을 쓸 필요도 없이 케실리온이 순식간에 검으로 목을 베어버렸다. `말도 안 돼. 단신으로 20명을 상대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불가능해.` 그녀는 그가 어쩌면 전투력이 월등한 상급 마족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이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카란델이 그를 대한 태도는 뭐란 말인가. 불과 약 10분만에 복면을 쓴 마족들은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두. 그녀는 짙고 푸른 예기를 띄고 있는 그의 검에 묻은 피가 점점 사라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랬다. 그녀는 쓰러져 있는 마족들 사이에 서 있는 케실리온의 등을 응시했다. 그의 검술 실력은 그녀의 상상을 초월했다. 마족 중에서 케실리온처럼 강한 자가 많은 것인지, 아니면 흔하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갑자기 그가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쓰러진 마족들을 둘러싼 거대한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발 아래에 생성된 마법진을 보고 잠시 당황하다가, 이내 쓰러진 마족들과 함께 마법진과 빛이 사라지자 그제서야 안심했다. 그는 어디론가 마족들을 보낸 것 같았다. "어디로 보낸 거지?" 그러자 그가 검을 검집에 넣으며 딱 잘라서 말했다. "알 것 없다." 이루린은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 성격을 왜 모르겠어. 그건 그렇고 정말 믿을 수 없는 실력인데. 어쨌든 그 해답이란 뭐지?" 갑자기 그가 허리춤에 찬 검을 풀어서 그녀에게 던져 주었다. 그녀는 얼떨결에 그 검을 받으면서 조금 당황해 했다. 그녀가 검과 그를 묵묵히 번갈아 보았다. 그러자 그가 그 검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 검의 이름은 가우드다. 검이라는 신분에 맞지 않게 눈이 매우 높아서 자신이 인정할 수 없는 상대에게 잡히게 되면 아무 능력도 발휘하지 않는다. 단지 평범한 검일 뿐이지." 이루린은 떨떠름하게 그 검을 응시하면서 인상을 썼다. "그럼 날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잖아." "현실이니 받아들이도록." "뭐야?" 그는 험악한 그녀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설명했다. "그 검은 중성으로 나이는 측정 불가능하다. 성격은 나중에 그 검과 의사소통이 가능할 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검을 가지고 수련하면서 시간이 있을 때마다 내게 오면 된다. 이 검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되면 자연스럽게 마력이 돌아올 것이다. 거기에 관한 지도는 직접 해 주겠다." 그녀는 미덥지 못한 마음으로 검을 응시하다가 품 속에 넣으면서 물었다. "지도를 어떻게 해 줄 건데?" "대련하거나 여러가지 과제를 내서 수행하는 방식으로." 그녀는 그의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앞으로 수행할 과제가 결코 쉽지 않을 거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만약에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녀가 너무 힘들어서 가녀린 눈물을 흘린다고 해도, 그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케디아니스는 2일 동안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긴장감이 흐르는 공간에서 지내야만 했다. 그 덕분에 몸에 피로가 누적되고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 정신도 헤이해졌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뷰리풀이 나타날 지 몰랐기 때문에 한 순간도 긴장을 놓쳐서는 안 되었다. 때때로 고위 마족들에게 마왕성 내를 돌아다니고 있는 뷰리풀을 없애 달라고 했으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뷰리풀의 등에 붙여 놓은 종이 때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뷰리풀이 그를 제외한 모두에게 우호적으로 대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가 마왕성 내에서 말썽을 일으킨 문제가 어디 한 둘인가. 정말로 이루린의 말이 맞는지는 몰라도 - 그는 결단코 그 말을 믿을 생각이 없었다. - 뷰리풀은 8개의 끔찍한 발을 꿈틀거리며 달려들었다. 2일 동안 ?고 ?기는 추격전 끝에 그는 뷰리풀의 특징과 공격 양식에 대해 어느 정도 꽤뚫 수 있었다. 첫번째 방법은 높이 점프하면서 다리로 가두는 것이다. 두번째 방법은 틈만 나면 거미줄로 그의 몸을 감으려고 하는 것이다. 세번째 방법은 그냥 평범하게 앞 다리를 치켜들며 ?아오는 것이다. 그가 마법으로 도망칠 때까지. `제일 마음에 안 드는 건 따로 있지.` 뷰리풀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서고에서 마법책을 가지고 나온다는 것을 깜빡한 그는 얼른 서고가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서고의 문에는 경악스럽게도 뷰리풀이 창을 들고 서고를 지키고 있는 상급 마족들에게 애교인지 공격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행동을 하며 앉아 있었다. 상급 마족들이 귀엽다며 손으로 뷰리풀의 등을 쓰다듬는 것으로 보아 믿을 순 없었지만 애교인 것 같았다. 처음에 그는 그 광경을 보고는 발걸음을 돌려 몇 시간 동안 서고 외의 방을 돌아다니면서 마법책을 빌려달라고 호소했으나, 고위 마족이 아니면 가지고 있을 마족이 없다는 이유로 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고위 마족들도 마법책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함부로 빌려 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모퉁이 부근에서 뷰리풀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이를 갈았다. `젠장, 내가 서고로 올 줄 알고 있었구나. 다리를 하나씩 뜯어서 검으로 사용해 버릴까? 몸통을 파내서 갑옷으로 사용해도 되겠지. 머리는 투구로 사용해도 되겠고. 그나저나 어째서 난 인간의 성격을 닮은 거지? 마왕성 내의 마족들은 다 뷰리풀이 귀엽다고 난리인데 왜 내 눈에는 어울리지 않게 머리에 단 리본을 풀어주고 싶은 빌어먹을 거미로 밖에 보이지 않느냔 말이다.` 케디아니스는 심각하게 한숨을 쉬면서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일단 옥상으로...아악!" 언제 발견했는지 뷰리풀이 빠른 속도로 그에게 기어오고 있었다. 그는 기겁을 하면서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체력이나 속도가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향상된 상태였기 때문에 지치지 않고 잘 달릴 수 있었다. "다가오지 마!" 그는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지르면서 유리처럼 반짝이는 마왕성 복도를 달렸다. 언뜻 뒤를 돌아보니 벌써 뷰리풀이 그의 뒤를 바싹 ?고 있었다. 그리고 당혹스럽게도 뷰리풀이 갑자기 그를 향해 점프했고, 그는 혐오와 공포의 감정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반사적으로 검을 빼들었다. 살고 싶다는 생존 욕구가 이성을 흐리게 만든 것이었다. 뷰리풀의 갑옷처럼 딱딱한 몸통과 검이 맞붙는 순간, 그는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닫곤 크게 후회했다. 그러나 그럴 시간도 없이 뷰리풀의 몸이 순식간에 커지더니 상처 하나 없이 그를 향해 뛰듯이 기어왔다. 아까보다 부피가 더 커져버린 뷰리풀의 모습에 케디아니스는 처음으로 울고 싶었다. 그는 마법을 쓰려다가 손을 거두었다. 어제도 마법을 써 보았지만 뷰리풀은 타격을 전혀 받지 않았던 것이다. `현재로서는 마법도 소용 없어. 일단 뷰리풀을 1층으로 따돌린 다음 서고의 문 앞으로 공간 이동해야 해. 그래야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까. 만약에 서고 안에 한 번이라도 들어가 봤다면 이렇게 필요없는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그는 지독하게 후회하면서 서고 안으로 바로 공간 이동 마법을 써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곳으로 어떻게 공간 이동 마법을 쓴단 말인가. 1층의 계단을 가까스로 밟았을 때 그는 재빨리 마법 시전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 방어 마법을 쓴 다음 공간 이동 마법 주문을 외웠다. 방어 마법을 깨뜨리려는 뷰리풀의 행동 때문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았지만, 살고자하는 욕구가 그를 서고의 문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그리고 그는 그 날 가까스로 마법책을 얻을 수 있었다. 이루린은 케실리온에게서 얻은 가우드라는 검을 들고 심각하게 한숨을 쉬었다. 검이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게 매우 신기했지만, 현재로서는 그런 감정보다도 검에게 어떻게 인정을 받느냐에 대한 심각한 감정이 앞섰다. "음?" 그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가 이상한 소리였기에, 그녀는 조금 경계하면서 문을 살며시 열고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밖에 있는 게 누군지 확인한 그녀는 반갑게 문을 완전히 열고 미소를 지었다. "뷰리풀!" 그녀는 왜 뷰리풀이 자신의 방에 찾아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뷰리풀은 지금 케디아니스를 ?고 있어야 했으므로 이 방에 올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 조금 이해가 가긴 갔다. 벌써 이틀이나 지났는데도 어느 누구 하나 다치지 않고 멀쩡했다. 변한 게 있다면 뷰리풀의 몸뚱아리가 전보다 더 커졌다는 것이다. 뷰리풀이 찾아온 김에 그녀는 서로 간의 추격전이 좀 더 재미있고 긴박해 지도록 높은 능력을 부여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야 케디아니스가 더 이상 도망만 치지 않고 대결하려고 결심할 것이다. 이루린은 창 밖을 응시하면서 뷰리풀의 몸을 쓰다듬었다. "날이 어두워졌으니 내일 나랑 마왕성 공터로 나가자. 내가 네 마항력과 지능을 올려주지." 그녀는 내일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항력은 그렇다 치고 다 큰 인간보다 낮았던 뷰리풀의 지능을 다 큰 인간의 수준만큼이나 올려준다면 과연 어떤 식으로 서로 싸우게 될지 정말로 궁금했던 것이다. 물론, 머리가 아플 정도로 엄청난 서류를 받아야 하는 대가는 감수해야겠지만. `내일부터는 도망다니지 못할 거야, 케디아니스. 기대하겠어.` 그녀는 사악하게 웃었다. 마왕의아내-26 악질 레드 드래곤 케디아니스 살고자 하는 욕망 때문인지 그의 마법 실력은 시간이 흐를 수록 늘어갔다. 뷰리풀을 죽이지 않으면 그가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날 판인데 마법을 공부하지 않고 어떻게 처신하겠는가. 그는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이루린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혐오스럽게 이를 갈았다. `레어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러면 로드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젠장! 빌어먹을 마족. 내가 로드가 된다면 거미부터 싸그리 전멸시켜 버릴 게 아니라 그 마족부터 가만두지 않을 거야.` 케디아니스는 마왕성 꼭대기의 평평한 지붕에서 뷰리풀이 오는지 자주 감시했다. 그리곤 두꺼운 마법책을 들고 미친듯이 주문을 외웠다. 밤새도록 한숨도 자지 못하고 눈에 불을 켜가며 공부한 결과 그의 마법 능력은 벌써 1써클하고도 반 정도 올랐다. 이 정도면 드래곤들 사이에서도 매우 빠른 발전이었다. 이제 반 정도만 더 채워서 6써클로 만들면 그 빌어먹을 거미의 몸통을 날려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다가올 기쁨에 싫은 공부가 즐겁게만 느껴졌다. 어느덧 해가 중천에 뜨고 훤한 대낮이 되었을 때, 그는 앉아서 계속 인사하듯이 머리를 떨구면서 졸았다. 원래 드래곤은 오랫동안 자지 않아도 생활에 그다지 지장을 주진 않지만 그는 성룡식을 치른 드래곤이 아니었으므로, 오랫동안 잠을 자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타격을 받는 게 당연했다. 그 때였다. 갑자기 차가운 줄이 팔에 감겨진 것은. 차가운 물을 얼굴에 뒤집어 쓴 것처럼 놀란 그는 날카롭게 일어서며 미친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제일 보기 싫었던 거미인 뷰리풀이 그의 팔에 거미줄을 감고 마왕성 꼭대기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다급히 거미줄을 풀려고 했지만 질긴 밧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뷰리풀의 모습이 점점 확대되어 보이자, 기겁한 그는 얼른 칼을 꺼내서 거미줄을 잘랐다. 순간 그는 뷰리풀이 마왕성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뷰리풀은 오히려 벽에 딱 달라붙어서 빠른 속도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짜증을 한껏 내면서 뷰리풀을 향해 외쳤다. "젠장! 네 신랑감이 왜 나냔 말야! 내가 그렇게 영양가있게 보여? 응?" 그는 재빨리 품 속에 넣고 워프 마법을 시전해서 뷰리풀이 올라오기 직전에 마왕성 3층으로 이동했다. 이동한 순간, 그는 마왕성 내부의 익숙한 정경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뷰리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것이다. 마족들은 갑자기 나타난 그에게 눈길을 주더니, 곧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태도로 어디론가 각자 걷기 시작했다. 그는 초조한 발걸음으로 복도를 지나가서 거대한 홀에 놓여 있는 의자에 힘없이 주저 앉았다. 그리곤 마법책을 펴들고 뷰리풀이 올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면서 정신없이 주문을 외웠다. 그 이후로 그는 여러 번 뷰리풀에게 ?겨 다니면서 마법을 공부할 장소를 옮겼다. 이상한 것은 어제까지만 해도 뷰리풀은 그를 찾는데 시간이 한참 걸렸었는데, 오늘은 그 시간이 매우 많이 단축되었다. 게다가 어제까지만 해도 공격 양식도 비교적 단순했었는데 오늘은 거미줄을 이용해서 묘기에 가까운 공격을 하는 둥 굉장히 달라진 모습을 많이 보였다. 그 때문에 그는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겨야만 했다. 거의 오후가 되어서야 그는 드디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드디어 이룩했다. 6써클을!" 그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면서 전과는 다르게 자신이 뷰리풀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머지 않아 그는 복도의 끝의 창문에서 거미줄을 이용해서 들어오고 있는 뷰리풀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지만, 이제 더 이상 당할 게 없었기 때문에 자신있게 주문을 외웠다. 잠시 후에 그의 예상대로 손에서 강한 마력이 휘몰아치더니 어마어마한 불기둥이 생성되었다. 그 불기둥은 뷰리풀을 향해 매우 빠른 속도로 돌진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뷰리풀의 몸은 불기둥 속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승리를 예감했다. "드디어 불에 구워지는 순간인가. 응?" 그는 불기둥을 응시하고는 기가 막혀서 입을 벌렸다. 뷰리풀은 몸통이 불에 의해 조금 그을렸을 뿐, 거의 멀쩡한 상태로 불기둥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거의 쓰러진 게 아니라 살짝만 타격을 받았는지, 뷰리풀의 다리가 조금씩 꿈틀거렸다.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는 잠시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진 채로 침묵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 허공을 향해 악을 쓰듯이 외쳤다. "6써클이라며? 도대체 뭐야!" 뷰리풀은 분명히 어제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속도나 공격하는 힘은 그대로였지만 확실하게 눈에 띌 정도로 공격하는 수법이나 마항력이 높아졌다. 그는 그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젯밤에 무슨 수를 쓴 것 같기도 한데...` 그는 의혹을 품으면서 뷰리풀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얼른 그 자리를 떠났다. 이루린은 해가 뜨기 전에 뷰리풀에게 좀 더 강력한 마법을 걸어주도록 한 후에 하루종일 케실리온과 검을 겨누고 대련했다. 쉬지 않고 오랫동안 대련을 계속한 탓에 쉬고 싶다고 호소했으나, 그 때마다 그는 그녀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묵묵히 검을 휘둘러왔다. 결국 그녀는 1분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헐떡이며 검을 휘두를 수 밖에 없었다. 드레스가 등에 달라붙을 만큼 그녀가 땀을 많이 흘리는 반면에 케실리온은 땀은 커녕 거친 숨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서 있었다. 전혀 지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악을 쓰고 덤벼도 그는 절제된 동작으로 유연하게 피하곤 했다. 아무래도 그는 적당히 간격을 두고 봐주는 것 같았다. 그가 몇 시간 동안 입을 열지 않고 있다가 그녀의 검을 받으면서 처음으로 짧게 말했다. "특이한 검술이로군." 그 말에 당황한 이루린은 차마 한국에서 배웠다고 말할 수 없어 적당히 둘러댔다. "내가 스스로 만든 거야." 그 때였다. 케실리온의 차갑고 날카로운 눈동자가 그녀의 어깨너머로 향했다. 그녀가 무슨 일인가 싶어 가만히 있자, 갑자기 케실리온이 한 손으로 그녀를 강제로 끌어 당겼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너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 순간 놀랍게도 등 뒤에서 무엇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루린은 케실리온에게서 떨어진 후에 고개를 돌려서 소리를 낸 물체를 응시했다. "케디아니스의 검이잖아." 다행히 검집이 끼워져 있는 검이었다. 그녀는 케실리온에게 짤막하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 후에 고개를 들어 잔뜩 화가 나 있는 얼굴로 다가오고 있는 케디아니스를 응시했다. 그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목에 핏대를 올리며 그녀에게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이 악녀야! 6써클이라며? 6써클이라고 할 때는 언제고? 왜 망할 뷰리풀이 6써클의 마법에 당했는데도 다치지 않는 거야?" 이루린은 능청스럽게 딴청을 피우며 한마디 던졌다. "시끄러워, 케디아니스. 그리고 뷰리풀의 능력을 올리는 건 널 교육시키는 내 자유야. 네가 계속 도망치니까 실력이 안 오르잖니?" 그는 화를 더 내려다가, 그녀 옆에 있는 케실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 "뭐야? .....음? 그런데 저 남자는..." 더 화를 내려던 그의 표정이 점차 풀어졌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케실리온을 빤히 응시했다. 케실리온도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케디아니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케디아니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잘 생각이 나질 않아..." 그들의 광경에 중요한 사실이 막 생각난 이루린은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아, 그러고보니 케실리온과 넌 처음 만나는 사이였지? 이 마족은 케실리온이라고 하는데, 네 교육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지." 그러자 케디아니스의 눈동자가 가늘어지더니 곧 이루린을 향했다. "마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 여자가 어떻게 각종 물건에 마법을 걸었는지 의문이 갔었는데... 그 원인이 여기에 있었군." 케디아니스는 케실리온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노려보던 그의 눈동자가 점차 떨리기 시작했다. 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케디아니스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커졌다. 그 반면에 케실리온은 아까 전과 다름없는 표정으로 케디아니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케디아니스가 착 가라앉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루린에게 쏘듯이 말하면서 돌아섰다. "오늘이나 내일 안에 그 빌어먹을 거미를 죽여서 바칠 테니까 그리 알라구." 이루린이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나이에 맞지 않게 갑자기 왜 우울한 표정을 지어?" "몰라." 그는 신경질적인 태도로 검을 주우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루린은 화를 내려다 말고 얌전히 돌아서는 케디아니스의 태도를 알 수 없어 케실리온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설명을 해달라는 눈빛을 보냈으나 그는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어떠한 표정도 짓지 않았다. 케디아니스는 마법책을 바닥에 내려 놓으며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밖이 어두워지고 있는 저녁 쯤에 드디어 7써클을 통달한 것이다. 그는 인간과는 다른 드래곤이었고, 게다가 로드의 피를 이어받은 드래곤이었으니 이 정도의 수준까지는 얼마든지 올릴 수 있었다. 8써클부터는 아마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할 것이다. `이제 그 거미만 눈에 띄면... 응? 어딜 저렇게 가는 거지?` 케디아니스는 이루린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빠른 속도로 걷고 있는 모습을 보곤 본능적으로 숨었다. 그리곤 그녀의 뒤를 몰래 밟았다. 그 후, 그녀는 숙소로 돌아와서 땀에 젖은 드레스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했다. 게다가 오늘은 각 개인의 방에 딸린 욕조에 물을 받을 수 없는 날이라 목욕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아이나가 웃으면서 그녀에게 한 가지 제의했다. "마왕성 2층이 무도회장이라는 건 아실 거예요. 그 커다란 홀에서 북쪽을 향해 보시면 왼쪽에 황금으로 만들어진 문이 하나 있거든요. 그 문을 열면 긴 복도가 하나 나오는데, 그 끝에 남녀 혼탕이 있어요. 저녁에는 모두들 연회를 즐기느라 혼탕에 마족이 한 명도 없을 거예요. 그러니 오늘은 거기에서 목욕을 하세요." 아이나의 권유에 따라 이루린은 2층으로 내려가서 2층 무도회장의 북쪽에 있는 황금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펼쳐진 긴 복도를 지나 문을 여는 순간, 그녀는 숨이 막힐 만큼 뜨거운 수증기가 얼굴을 뒤덮는 것을 깨달았다. 들어간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하나의 숲에 온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울창한 나무가 눈에 띄었다. 그들 나무 대부분은 물에 잠겨 있었는데, 마치 아마존 강을 연상케했다. 뜨거운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는 호수같이 깊고 넓은 부피를 자랑하는 물에는 거대한 바위들이 듬성듬성 놓여져 있었다. `마왕성 내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자연적인 면이 굉장히 강한데.` 이루린은 혹시나 보는 마족이 있을까봐 주위를 둘러본 후에 옷을 벗었다. 그리곤 살짝 몸을 풀어준 후에 뜨거운 물 속에 발부터 담그기 시작했다. 그리고 몸이 완전히 물에 잠겼을 때, 그녀는 하루종일 케실리온에게 혹사당했던 몸이 풀리는 것을 느끼곤 만족스럽게 눈을 감았다. 그녀는 숨을 곳이 많은 나무와 바위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몸을 씻었다. 그리고 그렇게 약 1시간 동안 들고 왔던 거품 액체로 머리와 몸을 씻으면서 쌓였던 피로를 풀었다. 그리고 목욕을 완전히 다 끝냈을 때, 그녀는 물가에 벗어 놓았던 드레스와 들고 왔던 수건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런데 그 장소에 수건만 있을 뿐 드레스는 없었다. "내 옷!" 그녀는 짧게 비명을 지르면서 미친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드레스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수건을 들어보았을 때, 그녀는 수건 속에 감춰진 한 장의 종이를 발견했다. 그 종이에는 짤막한 글씨로 뭐라고 적혀 있었다. [오늘 밖으로 나가서 몸매 자랑 한 번 하는 게 어때?] "이 자식이..! 케디아니스!" 이루린이 화를 낼 새도 없이 누군가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물 속으로 다시 뛰어들었다. 그리곤 부리나케 나무 뒤로 가서 몸을 물 속으로 잠기게 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미친듯이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하필 이럴 때 마족이 한 명 들어오다니. 이루린은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천천히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뿌연 수증기 사이로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는데, 운이 없게도 남자인 듯 싶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남자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케... 케실리온.` 그녀는 이 최악의 상황에 경악했다. 마왕의아내-27 악질 레드 드래곤 케디아니스 `케... 케실리온.` 그녀는 이 최악의 상황에 경악했다. 이루린은 고개를 뒤로 빼서 다시 벽에 기댔다. 그리고 이 상황을 어떻게 넘겨야 할지 고민하면서 들리지 않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만약에 이 곳에서 무사히 나간다면 케디아니스를 잡아서 족치리라고 마음먹으면서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케실리온이 여기로 오면 큰일인데. 설사 그가 나간다고 해도 내게는 옷이 없으니 나갈 수 없잖아. 그렇다고 해서 옷을 빌려 달라고 말할 수도 없고... 젠장!` 그 때 그녀의 귀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카트레스를 어떻게 찾아내야 할지 걱정입니다." 언뜻 듣기에는 ?은 마족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리고 경어체를 쓰는 것으로 보아 케실리온을 상관으로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예카트레스라는 이름에 이루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름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은 마족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막아야 합니다. 그런 자를 마계에 내버려 둔다는 건 위험합니다. 하지만 현재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니 걱정입니다. 게다가 언제부터인가 신계, 마계, 천계의 균형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습니다. 졸지에 신들의 일에 마계까지 휘말리게 생겼으니... 혹시 알고 계시는 사실이라도 있으십니까?" 갑자기 물이 출렁거리는 느낌과 함께 - 아무래도 물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 케실리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계가 신계의 일에 개입할 필요는 없다. 신계와 마계는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라 독립적인 관계라는 것을 잊었나." "하지만..." 케실리온의 목소리가 젊은 남자의 말을 잘랐다. "몇 년 전에 예카트레스로 추정되는 자를 우연히 만났다. 1000년이라는 형벌이 거의 다 끝나갔기 때문인지 그 자는 모든 것을 기억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내 공격으로 인해 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젊은 남자의 크고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카트레스를 만났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면 그 자는 지금 어디에?" 케실리온이 딱 잘라서 말했다. "알 수 없다. 어디에 있는지는." "예카트레스가 마계에 있는 목적은..."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다가 말았다. 그 때 물이 다시 잔잔하게 출렁거리는 느낌이 들면서 삭막한 정적이 시작되자, 이루린은 갑자기 불안해져서 몸을 물 속에 완전히 집어 넣었다. 왜 그러면서 예카트레스라는 자에 대해 생각했다. 굉장히 위험한 자인 것 같았다... 그리고 대화 내용으로 추정해 보았을 때, 케실리온은 상당히 고위급의 직책을 가진 마족인 것 같았다. 그것도 서열 10위 이내에 드는. `그런데 왜 갑자기 말을 하다가 마는 거지?` 잠시 후에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둘 다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 직후 하마터면 숨이 멎을 뻔 했다. "나오도록." 케실리온의 목소리가 그녀가 있는 곳을 향해 들려왔던 것이다. 아무래도 젊은 마족만 나가고 그는 남아 있는 듯 싶었다. 어떻게 가만히 있었는데 케실리온이 알아차린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그녀였다. 이루린은 안절부절하지 못하면서도 시치미를 떼기로 결심했다. 케실리온과 서로 옷을 벗은 상태에서 볼 자신이 도저히 없었기 때문이다. 묘한 긴장감이 온몸을 타고 흐르면서 심장의 박동 수가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몸이 굳어져서 움직일 수도, 또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잠수한 후에 다른 바위나 나무로 옮겨가기로 마음 먹고, 몸을 지탱하기 위해 손으로 바위를 집었다. 그 때 차가운 손에 의해 손목이 잡히는 느낌이 들었다. 이루린은 짧게 비명을 지르면서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강제적으로 차가운 손에 의해 구석에서 중앙으로 끌려 나갔다. 물론 몸은 물 속에 넣은 채로. 그에게 완전히 들킨 것이다. "숨어 있었던 이유가 뭐지?" 그의 목소리가 추궁조로 조용히 들려왔지만 그녀는 얼굴이 화끈해져서 제대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오만가지의 상상이 머리를 헤집는 가운데, 뜨거운 수증기 때문에 얼굴이 따끔따끔했다. 이루린은 케실리온이 바로 자신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는 민망해서 고개를 숙인 채로 말했다. "너, 넌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게 설 수 있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회피하지 말고 내 말에나 대답하도록." `마족들은 옷을 벗은 모습이 익숙한건가? 굉장히 개방적일지도 모르겠군.` 이루린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케실리온의 하반신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경악스럽게도 그는 하반신을 완벽하게 가려주는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이루린은 입을 벌리면서 케실리온을 올려다 보았다. 물기에 젖은 그의 머리카락과 함께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표정없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한 나머지 벌떡 일어서서 외쳤다. "뭐야? 왜 바지를 입고 있는 거야? 어째서?" "벗고 있길 바랬나." "......"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케실리온의 시선이 훑어 보듯이 목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이루린은 그 시선이 향했던 곳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그리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았을 때, 그녀는 짧게 비명을 지르며 다시 물 속으로 몸을 던졌다. 얼굴이 아까 전보다 훨씬 더 화끈거렸다. 이루린은 모기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잊어줬으면 좋겠어. 넌 이 순간을 아예 보지 못한 거야." 그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정신연령이 낮은 여자의 몸에는 관심없다." 이루린은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그 말에 다시 부끄러웠던 감정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뭐야? 내 정신연령이 왜 낮은데?" "어린 마족들은 개념이 없어서 옷을 다 벗고 탕에 들어가지." "......" 반박할 수 없게 만드는 그의 말에 이루린은 불만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던 차에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어왔다. "소문을 내면 마족들이 아주 좋아하겠군." 이루린은 그 말에 당장이라도 큰 소리로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으며 조금 애원조로 말했다. "치사하게 그럴 거야?" "서류 한 묶음." "......" 그가 문 쪽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옷이 없으니 나가지 못하겠군. 원한다면 빌려줄 수도 있다." 뜻밖의 호의에 이루린은 잠시 의혹을 품었지만 곧 단순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 "서류 세 묶음." "......" "그리고 비싼 옷이니 두 묶음 추가." "......" 이루린은 입가에서 미소를 지웠다. 그녀는 고개만 내밀고 케실리온을 노려보며 단단히 못을 박듯이 말했다. "너한테는 안 빌려!" 그는 전혀 아쉬울 게 없다는 태도로 물 속에 몸을 담그며 말했다. "마음대로. 그리고 지금쯤이면 연회가 다 끝났겠지. 참고로 말하자면 상급 마족들이 공터에서 훈련을 다 끝내는 시각이 연회가 끝나는 시각과 일치한다. 힘들게 훈련을 했으니 그 다음에는 단체로 어딘가에 가겠지." 분명히 몸은 뜨거웠지만 그 말에 속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낀 그녀였다. 그녀는 남자들이 혼탕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오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옷을 벗은 상태에서 남성 마족들에게 둘러싸인다는 상상은 정말인지 끔찍했다. 그녀는 항상 케실리온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강적이다.` 이루린은 불만스럽게 말했다. "좋아, 하면 될 것 아냐?"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케디아니스는 뷰리풀이 있을 만한 곳을 다 뒤져봤으나 소용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이루린의 옷을 빼돌려서 한창 기분이 좋은 상태였는데 유독 뷰리풀의 모습만 보이지 않아 괜히 불안해지는 그였다. 막 마왕성 2층의 무도회장에 도달했다. 거의 모두 연회장에 갈 시간이었기 때문에 무도회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공허하게 흐르고 있는 무도회장의 거대한 홀을 천천히 걷자 그의 발걸음 소리가 조용히 퍼졌다. 막 중앙에 왔을 때, 그는 불빛을 받고 있는 유리처럼 맑은 대리석을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몸을 굳을 수 밖에 없었다. 대리석 안에서 뷰리풀의 모습이 점점 확대되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놀란 그는 고개를 들어서 천장을 응시했다. 엄청난 거미줄로 도배한 천장 속에서 뷰리풀이 빠른 속도로 내려오고 있었는데, 불빛에 의해 검은 색깔이 대조되어서인지 더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뷰리풀은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린듯,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할 사이에 입에서 그물처럼 거미줄을 펼쳤다. 그는 도망치려고 했으나 질기고 하얀 거미줄에 갇혀서 허우적거렸다. 그는 미친듯이 비명을 질렀다. "사, 살려줘!" 뷰리풀과 만났을 때 지금처럼 공포스러웠던 적은 없었던 케디아니스는, 칼을 꺼내서 자르려고 했으나 워낙 거미줄이 두꺼워서 제대로 잘리지 않았다. 기절할 만큼 놀랐던 것은 뷰리풀이 그의 몸 위로 올라오더니, 거미줄를 만들어서 그를 칭칭 감기 시작한 것이었다 물론 무슨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얼굴은 남겨 두었다. 뷰리풀은 거미줄을 이용해서 검과 함께 둘둘 말린 그를 질질 끌고 갔다. 끌려가면서 그는 고래 고래 소리를 질러보았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들려오는 것은 연회장에서 흘러나오는 선율 뿐이었다. 그는 이성을 잃을 뻔 했지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분하게 가라앉힐 수 있었다. `침착하자, 침착해야 해.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로군. 머리가 상당히 좋아. 얼굴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감긴 상태이기 때문에 검도 쓸 수 없어. 그렇다면...` 그는 끌려가면서 그는 바닥에 가까운 벽의 위치에 가로로 날카롭게 만들어진 부분을 보고 한가지의 묘책이 떠올랐다. 그것은 홀이 끝나고 복도가 시작되는 지점부터 만들어져 있었다. 일단 그는 빠른 속도로 끌려가면서 몸을 틀어서 가까스로 날카로운 부분이 시작되는 그 부분에 몸을 밀착했다. 그러자 처음에는 거미줄이 끄덕도 하지 않더니 잠시 후에 하나 둘씩 끊어지기 시작했다. 희망이 보인다고 생각한 케디아니스는 팔이 아팠지만 더 세게 몸을 밀착시켰다. 그리고 막 복도의 끝에 왔을 때, 그는 팔을 시작으로 해서 허리, 그 다음에는 다리까지 모두 거미줄에서 탈출시킬 수 있었다. 그는 적당히 기회를 본 후에 거미줄에서 빠져나갔다. 그러자 갑자기 무게가 사라진 느낌 때문인지 뷰리풀이 뒤를 돌아보더니, 그가 검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달려왔다. 그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공포라는 감정 때문에 정신이 집중되지 않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서 물 계열의 7써클의 마법을 시전했다. 그러자 엄청난 물줄기가 맹렬하게 뷰리풀의 몸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그의 소망대로 뷰리풀의 몸통 한 가운데가 뚫리면서 녹색의 액체가 바닥에 흩어졌다. 뷰리풀은 몸이 뒤집힌 채로 미동을 하지도, 일어나지도 않았다. 단지 축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 주위의 바닥에는 물이 흩어져 있었다. "드디어 이 빌어먹을 짓이 끝났어! 내가 죽였어! 죽였다구!" 그는 혐오스러운 뷰리풀의 모습을 보다가 기쁨의 함성을 지르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시각, 이루린은 옷을 갈아 입고 나서 책상에 놓인 종이 한 장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그게 무엇인지 궁금해하면서 소리내어 읽어 보았다. "1주일 후에 대회가 있으니 각 드래곤들을 데리고 마왕성 입구로 오기 바람." 이루린은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생각했다. `드디어 1주일 후면 케디아니스를 교육시킨 성과를 볼 수 있겠군. 그나저나 날기를 가르쳐야 하는데... 어쨌든 이 자식, 방에 들어오기만 해 봐라. 감히 내 드레스를 훔쳐?` 마왕의아내-28 대회 이루린은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생각했다. `드디어 1주일 후면 케디아니스를 교육시킨 성과를 볼 수 있겠군. 그나저나 날기를 가르쳐야 하는데... 어쨌든 이 자식, 방에 들어오기만 해 봐라. 감히 내 드레스를 훔쳐?` 1주일이라는 시간은 흐르는 강물처럼 고요하면서도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 기간 동안 그녀는 케디아니스를 잡고 여러 가지를 교육시켰다. 좋았던 것은 케디아니스의 태도가 눈에 띄게 얌전해졌다는 것이었다. 물론 가끔 가다가 신경에 거슬리는 말을 내뱉는 행동은 달라지지 않았기에, 여전히 스트레스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이루린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대회가 시작되는 마지막날 밤이 되었다. 그녀는 이상하게도 새벽까지 잠이 오지 않아 케디아니스가 잘 때까지 눈을 뜨고 있었다. `왜 이렇게 몸이 뜨거운 거지?` 그녀는 심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기를 반복했다. 술을 여러 잔 마신 것 같이,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독감에 걸려서 몸이 펄펄 끓는 느낌이었다. 혹은 사우나에 막 들어갔을 때의 느낌인 것 같기도 했다. 대회가 시작하는 전날 밤인 탓에 오는 긴장감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이마에서 땀이 너무 많이 흘렀다. 손으로 압박을 주는 것처럼 머리가 아파옴을 느낀 그녀는 바구니 속에서 자고 있는 케디아니스를 한 번 응시한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해 비틀거려서 바닥에 넘어질 뻔 했다. 그녀는 아무 물건에 손을 짚으면서 창가로 갔다. 그리고 뜨거움을 식히기 위해 그녀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순간 머리 위로 샛노란 보름달이 들어왔다. 어두운 하늘에 홀로 고고히 빛나고 있는 보름달의 모습에 굉장히 아름답다고 생각한 그녀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오른쪽 가슴 부근에서 심각할 정도로의 통증을 느끼곤 바닥에 주저 앉았다. "욱!" 이루린은 목구멍에서 치밀어오르는 뜨거운 것을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내뱉었다. 그것은 처음에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으나, 자세히보니 검붉은 액체였다. 놀란 시간도 없이 통증은 계속되었다. 그와 동시에 입에서 피도 조금씩 쏟아져 나왔다. 왜 그런지는 몰랐지만 하여튼 고통 때문에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케디아니스가 깨어날 것을 고려해서 그러지도 못했다. 대신에 어깨를 들썩이면서 고통과 맞서 싸워야만 했다. "무슨 일이야?" 뒤에서 놀라는 듯한 케디아니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그녀가 격렬하게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일어난 모양이었다. 그녀는 창틀에 손을 얹고 가까스로 일어서면서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단호하게 말했다. "별 일 아니니까 내일 시합에 대비해서 어서 자, 케디아니스." 그녀는 케디아니스가 알아차리지 못했으면 하고 바라면서 태연하게 있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다가 바닥에 피를 쏟았다. 적은 양의 피가 쏟아져 나온 것으로 보아 상태가 점점 호전되어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괜찮아?" 케디아니스가 처음으로 걱정스럽게 물으면서 달려왔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매우 일그러진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슬프고 괴로운 빛이 어려 있는 듯한 눈동자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다행스럽게도 오른쪽 가슴에서 밀려오던 고통이 사라지고 뜨거웠던 몸이 정상적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하자, 그녀는 그에게 안심하라는 뜻으로 미소를 지어보이서 화장대 위에 있는 손수건으로 피묻은 입가를 닦았다. 케디아니스는 처음으로 손수건 하나를 들고와서 그녀의 입가를 직접 닦아 주었다. 그가 재촉하듯이 말했다. "무슨 일인데? 누구한테 공격받기라도 했어? 병에 걸린거야? 도대체 피를 쏟고 난리야? 평소에는 날 그렇게나 잘 괴롭히면서." 처음에는 친절하게 묻다가 막판에 거칠게 변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어둠 속에 드러난 케디아니스의 불만에 가득찬 표정을 응시했다. 그녀는 손을 들어서 묵묵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가 조금 억눌린 듯한 어조로 물었다. "죽는 건... 아니지?" 이루린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을 멈추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를 빤히 응시했다. 인간으로 치자면 아직 10살 정도의 어린 꼬마 드래곤이 뭐가 무서울 게 있어서 죽음에 대해 걱정한단 말인가. 게다가 케디아니스는 드래곤들 사이에서도 악질로 소문이 나 있던 터였다. 그런 꼬마일수록 죽음이란 단어와는 무관한 게 정상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그의 등을 치면서 가볍게 말했다. "내가 아직 널 구제하지 못했는데 왜 죽니?" 그는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갈등을 겪고 있는 듯이 그의 눈빛이 차츰 흔들리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는 전처럼 그녀를 쏘아보더니 비꼬듯이 한 마디 던졌다. "흥, 구제 좋아하시네! 구제 여러 번했다간 신도들한테 돌 맞아 죽어." 그는 그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신경질적인 발걸음으로 바구니 속에 들어갔다. 이루린은 그런 케디아니스를 향해 작게 한숨을 쉬면서 미소를 지었다. `최초로 10살짜리 아이처럼 보인 날이로군. 그나저나 아까는 왜 그랬을까. 창문을 열고 보름달을 구경하려다가 피를 쏟다니, 뭔가가 이상해. 분명히 폭주와 관련된 일인 건 확실한데 왜 그런지 알 수 없어... 한국에서도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꼭 일이 잘못되어 간다는 느낌이 들어.` 그녀는 케디아니스가 완전히 잘 때까지 심각하게 환한 달빛이 은은하게 새어들어오고 있는 바닥을 응시하다가, 창문을 닫은 후에 밖으로 나갔다. 마왕성 공터는 오늘따라 유난히 보름달에 의해 어둡지만 꽤 밝았다. 새까만 나무들이 바람에 의해 힘없이 흔들리고, 침묵하고 있는 공터 뒤에는 싸늘한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시린 온도가 그러한 것들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엘리세아는 케실리온을 가만히 응시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달빛을 등지고 서 있는 케실리온의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그늘이 져서 그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무슨 용무지?" 그의 조용한 목소리에는 여차하면 죽일 지도 모른다는 위협이 서려 있었다.그것을 잘 알고 있었던 엘리세아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난 대충 당신의 정체를 알아요." 순간 싸늘한 바람이 불어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었다. 그녀는 그가 반응을 보이기를 기대했으나, 그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용무는 그것 뿐인가." 그가 가려고 하자 당황한 엘리세아는 조금 격양된 어조로 외쳤다. "밝혀지는 게 두렵지 않나요?" 그는 엘리세아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묵묵히 지나가려고 했다. 그녀는 마음을 굳게 먹고 그의 앞길을 막았다. 그러자 그가 나지막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시치미 떼는 건가요?" 그녀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그가 재빨리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목적이 뭐지?" "글쎄요... 어쨋든 뭐, 케실리온이라고 해 두죠." 엘리세아는 그제서야 안도의 미소를 지으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하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그 곳을 노려보았다. 이루린이 허공을 향해 시선을 두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꼴도 보기 싫은 여자가 나왔군, 그래. 좋아, 그렇다면...` 그가 다시 차가운 빛을 띄며 물었다. "목적이 뭐냐고 물었다." 그의 눈빛에 잠시 주춤한 엘리세아는 먼저 대답을 하기 행동을 취하기로 정했다. 그리고선 자조적으로 웃으면서 이루린이 딴 곳을 쳐다보고 있는 사이, 대담하게 발끝을 들어서 두 팔로 케실리온의 목을 끌어 안았다. 마왕의아내-29 대회 그의 눈빛에 잠시 주춤한 엘리세아는 먼저 대답을 하기 행동을 취하기로 정했다. 그리고선 자조적으로 웃으면서 이루린이 딴 곳을 쳐다보고 있는 사이, 대담하게 발끝을 들어서 두 팔로 케실리온의 목을 끌어 안았다. 엘리세아는 이루린을 의식하면서 일부러 큰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가만히 있어만 준다면 저도 더 이상 이 일에 대해 입을 열지 않겠어요, 케실리온." 그녀의 예상대로 이루린이 그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추더니 놀란 표정으로 케실리온이 있는 곳을 응시했다. 그녀는 잘 보이지 않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 엘리세아와 케실리온이 있는 곳을 응시하면서 천천히 다가왔다. 엘리세아는 이루린의 표정이 분명히 심상치 않게 일그러지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뭐야, 둘이 사랑하는 사이?" 이루린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 이 부분에서 엘리세아는 그녀가 연극을 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했다. 동시에 매우 눈에 거슬렸다. - 케실리온과 그녀를 번갈아 보았다. "심상치 않은 성격끼리 잘들 노는구만." 이루린은 엘리세아를 못마땅한 듯이 응시하다가 케실리온을 향해 하품하며 말했다. "항상 아침이나 오후에만 보이더니 늦은 시각에도 잘 다니잖아. 그리고 네 취향이 저런 여자였다니 의외인걸." 순간 엘리세아는 이루린의 기분 좋은 모습에 알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혔다. 엘리세아에게는 이루린의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웃고 있는 모습보다는 좌절감에 빠진 모습이 더 좋았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 "말 조심하세요, 이루린 양." 이루린은 굉장히 험악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리고 협박하듯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시끄러워, 넌 입 다물고 빠져 있어." 이루린은 당황한 그녀에게 일말의 시선도 던지지 않고 오로지 케실리온을 보며 말했다. "만난 김에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이루린은 잠시 엘리세아를 못마땅한 듯이 응시하다가 다시 케실리온을 응시했다. "나중에 해야겠군. 신체의 변화... 알지?" 엘리세아를 의식해서인지 이루린은 얼버무리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자뭇 심각하게 말하다가 갑자기 표정을 가볍게 바꾸었다. "이번에는 내가 소문을 낼 차례로군, 안 그래?" 그녀는 사악하게 웃으면서 새파랗게 질린 엘리세아와 여전히 묵묵부답하고 있는 케실리온을 번갈아 보았다 . 그러자 처음으로 케실리온이 반응을 보였다. "조건이 뭐지?" "내일 서류 한 묶음, 고스란히 처리하지 않고 들고 올테니 그렇게 알아." 엘리세아는 그들이 도대체 무슨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영문도 모른 채, 이루린이 화가 나지 않았다는 사실만을 견딜 수 없을 뿐이었다. 이루린은 가기 싫어하는 케디아니스를 억지로 끌고서 마왕성 입구로 나갔다. 거기에는 어젯밤까지 분명히 없었던 거대하고 낮은 판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무래도 판 위로 올라가서 경기를 진행하는 듯 싶었다. 워낙 입구가 넓었기 때문에 마족들이 앉을 수백 개의 의자도 넉넉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후보들이 대기하는 곳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이루린은 후보들이 데리고 있는 꼬마 소년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들은 의연한 태도로 후보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조금 있으면 시합이 시작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케디아니스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악을 썼다. "시합 안 해! 안 할 거야!" 이루린은 자신과 케디아니스에게로 집중되는 시선을 막을 도리가 없어 그냥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점점 정도가 심해지자 그녀는 케디아니스를 잡고 있는 팔에 힘을 주며 말했다. "뷰리풀을 한 마리 더 만들어 볼까?" "......" 비로소 케디아니스가 조용해지자,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억지로 그의 옷덜미를 잡고 후보들이 모여 있는 대기하는 장소로 향했다. 그녀가 다가서자 후보들이 의례적으로 인사를 건내는 반면, 엘리세아만이 이루린을 노려보았다. 따끔하고 날카로운 그 시선이 좋을 리 없었지만 그녀는 시합을 위해서라도 기분 좋게 생각했다. `눈에 힘주고 있으면 피곤하지도 않나? 오오, 안구에 핏줄이 보이는군. 저러다가 튀어 나올지도 모르겠어.` 이루린이 의자에 앉아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 한 마족이 후보들에게 모두 대진표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종이를 받은 이루린은 세심하게 글을 읽어 보았다. 그녀는 소문대로 다른 순진한 드래곤들을 협박하고 있는 케디아니스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곤 그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세게 친 후에 말했다. "이것 봐, 케디아니스." "뭔데?" 손바닥으로 머리를 문지르는 케디아니스가 잔뜩 인상을 쓰면서 거칠게 대진표를 빼앗았다. 이루린은 그가 보고 있는 사이에 가볍게 말했다. "우린 총 세 번을 싸우게 될 거야. 첫번째 상대는 꽤 카르아스라고 하는 드래곤인데 서류에 보니 검술이 특기라고 적혀 있군." 케디아니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럼 마법으로 상대하면 되겠네. 아니면 현신해서 몸으로 치고 박고 싸우던가. 난 검술의 검자도 모르니까." 이루린은 서류를 꼼꼼히 훑어 보았다. 이윽고 조금 곤란한 마음으로 말했다. "아니, 종목은 추첨해서 채택하는 방식을 한다고 적혀 있어. 그러니까 만약에 `현신 금지, 검술`이 걸리게 되면 신이 널 버렸다고 생각해." 그제서야 케디아니스가 심각하게 표정을 짓더니 소리를 질렀다. "뭐야? 난 검술 못한단 말야! 내게 검술 한 번 가르쳐준 적이 없었으면서 나보고 어떡하라고?" "네가 매일 도망만 다니니까 검술을 가르칠 기회나 있었니? 이론 수업만 했잖아!" 이루린은 소리를 지른 후에 마음을 가다듬고 그에게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설마 드래곤인데 검을 들고 싸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곤 말하지 않겠지?" 그러자 케디아니스가 조금 주저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어. 물론 검을 들고 싸우긴 했지만 그건 단순히 도구로만 사용했지. 물론 거기에다가 순수하게 힘을 밀어붙쳐서 이긴 적은 많아." 이루린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하는 거야. 내가 가르쳐 준 이론은 잊지 말고 항상 머릿속으로 기억해, 알겠지?" 그가 못마땅한 듯이 그녀를 응시했다. "이기는 건 불가능해. 난 조금이라도 힘들면 바로 장외로 떨어질 거야." 이루린은 그에게 협박하듯이 천천히 말했다. "말 한 번 잘했어, 케디아니스. 만약에 진다면 넌 이 대회가 끝날 때까지 거미 구덩이 속에서 생활하게 될 거야." 그 말에 케디아니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시작하겠습니다!" 케디아니스는 무척이나 불만이 가득한 마음으로 경기장을 둘러싸고 있는 마족들을 응시했다. 저마다 다른 옷과 머리 모양을 자랑하고 있었다. 게다가 바글바글 모여 있는 모습들이 그에게는 모두 싫게만 비춰졌다. 마족들의 환호하는 소리가 점차 줄어들자, 심판자가 대기하는 의자를 가리키며 외쳤다. "첫번째 경기는 레드 드래곤 케디아니스와 블랙 드래곤 카르아스의 경기가 되겠습니다!" 심판자가 외치자 케디아니스는 허리춤에 챙겨 놓았던 검을 찼다. 그리곤 카르아스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당당하게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망설였다. 그 때 이루린이 손으로 그의 등을 밀면서 말했다. "안 나가? 내 손에 거미가 하나 있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그 소름끼치는 단어에 케디아니스는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나갔다. 그는 마족들이 환호하면서 일제리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느끼며 묵묵히 경기장 위로 올라갔다. 그리곤 카르아스와 마주보며 섰다. 카르아스는 검은 머리카락에 그보다 키가 조금 컸다. 성룡식을 치르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그의 태도에서는 자신만만한 무엇인가가 서려 있었다. 그가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밟아 주겠어, 풋내기 차기 로드 드래곤." 카르아스의 나지막한 말투에 케디아니스는 살벌하게 말했다. "너도 카이란스 꼴이 나고 싶지 않으면 입을 다무는 게 좋아." 그러자 카르아스의 표정이 굉장히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경계하는 듯한 눈동자로 그를 응시했다. "그럼 종목을 정하겠습니다." 일순간 모든 마족들의 환호성이 줄어들었다. 정적이 흐르고 있는 가운데, 모두 심판자의 행동 하나 하나에 시선이 가 있었다. 이윽고 심판자가 날개를 펴셔 추첨대 위로 날아가더니 주먹만한 원통 - 케디아니스는 그게 소환당해서 마계에 처음 왔을 때 보았던 물건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 속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그가 이윽고 쪽지 하나를 집어들어서 꺼낸 다음, 그것을 폈다. 케디아니스는 순간 긴장했다. 제발 최악의 상황은 아니기를 빌었다. 만약에 이 시합에서 진다면 그는 이루린의 손에 잡혀 거미 구덩이 속으로 자살하러 가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현신 금지, 종목은 검술입니다!" 케디아니스는 순간 빌어먹을 우연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왕의아내-30 대회 "현신 금지, 종목은 검술입니다!" 케디아니스는 순간 이 빌어먹을 우연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카르아스가 묵묵히 검을 뽑아들자, 케디아니스도 어색한 동작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곤 속으로 긴장하면서 각자 자세를 잡았다. 그가 보기에 카르아스는 확실히 안정되어 있는 자세였는데 자신은 조금 불안정했다. "시작!"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동시, 카르아스와 케디아니스는 빠른 속도로 상대편의 검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르아스의 매서운 눈동자는 오로지 케디아니스의 검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서로의 검은 격돌했다. "윽!" 케디아니스는 카르아스보다 몇 백살 정도 차이가 났기 때문에 키 차이가 어느 정도 있었다. 그래서 검을 내리 누르기에는 조금 불리한 위치에 있어, 금새 케디아니스의 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로의 검이 맞물려서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카르아스가 억눌린 듯한 어조로 말했다. "카이란스가 꿈에 나오지 않던가? 널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말야." "아, 나오긴 했지. 죽여줘서 고맙하고 하던데." 그가 조금 크게 소리를 질렀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케디아니스는 자조적으로 웃으면서 이를 악물고 검을 쳐내려고 했다. "헤츨링한테 죽은 성룡은 살아 있을 가치도 없지." 도발적인 케디아니스의 말에 카르아스가 갑자기 몸을 숙이더니 어깨로 복부를 향해 감정적인 검을 날렸다. 케디아니스는 검술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피하는 거라면 몇 일 동안 수련을 많이 한 탓에 가뿐하게 피할 수 있었다. 케디아니스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를 향해 분노의 검을 날렸다. 순간 그가 눈을 크게 뜨더니 그의 검을 제대로 받지 못해 뒤로 물러났다. 카르아스는 매섭게 눈을 뜨면서 자세를 달리했다. "네 어머니인 세피로스가 왜 죽었을까? 응? 한 번 말해보지, 그래." 케디아니스는 그 말에 가슴 깊이 숨겨 놓았던 상처가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고 있는 카르아스의 말에 케디아니스는 자신도 모르게 과거의 상황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바로 이성을 잃고 카이란스를 무참하게 살해했던 그 상황으로. 케디아니스는 낮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 "지금 입 다물지 않으면 내가 널 어떻게 할지 몰라." 그러나 오히려 카르아스는 독하게 외쳤다. "종족의 배신자! 아니었던가? 네 어머니인 세피로스는 네 아버지인 로드의 손에 죽었지. 아주 처참하게. 그 상황을 모르는 드래곤이 지금도 있던가? 넌 배신자의 아들이지..." "닥치지 못해!" 케디아니스의 고함 소리에 일순간 환호하던 마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마족들은 웅성거리면서 서로 고개를 돌리고는 무슨 말을 하면서 케디아니스를 주시했다. 케디아니스가 검을 세우고 달려들자 카르아스가 묘하게 웃으면서 검을 받아냈다. "그 낙인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아." 그의 의미심장한 말이 심장이 정통으로 꽂치는 것 같았다. 케디아니스는 현재 스스로를 최대한 억제하면서 과거를 떠올렸다... 그는 과거에 모든 사건의 피해자였다. 자신이 카이란스를 죽인 것도 그의 행위가 용서가 되지 않았기에 이성을 잃고 저지른 짓이었다. 카이란스가 모든 것을 다 가지는 반면에 케디아니스는 모든 것을 다 가지지 못했다. 그리고 카이란스가 자신의 모든 행복의 권리를 빼앗아 갔을 때, 그는 다시는 어느 누구도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 때 마음 속에서 무슨 말이 울렸다. -왜 또 참고 있는 거지? `안 돼, 난 더 이상 어느 누구도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저들이 과거에 네게 어떤 짓을 저질렀지? `하지만...` -참지 마, 넌 당연한 권리를 내세울 수 있어. `그래, 맞아.` 케디아니스는 자신이 점점 더 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화려하고 거친 검술을 이용해서 그를 유린하고 있었고, 케디아니스는 거기에 무조건적으로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넌 원래부터 살아 있을 가치도 없었어.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나?" 그 말이 결정타였다. `그 상황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케디아니스는 검을 다르게 고쳐 잡았다. `왜 저러는 거지?` 이루린은 뭔가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케디아니스의 눈동자가 인형처럼 초점없이 흐려져 보이는 것은 그녀의 착각이었을까. 케디아니스가 조금 밀리긴 했지만 힘에서 밀리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루린 양의 드래곤은 참으로 문제가 많군요, 꼭 그 마족에 그 드래곤이라더니." 엘리세아의 조용힌 비꼼을 싹 무시한 채, 그녀는 케디아니스만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 때, 갑자기 케디아니스의 표정과 자세가 바뀌었다. 그녀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던 굉장히 살벌하고 차가운 느낌이었다. 순간 이루린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뭐야, 저 자세는 안정적이잖아. 검술의 검자고 모른다더니...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일부러 형식을 갖춘 것처럼 보이지 않아.` 이루린이 심각하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사이,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는 것을 깨닫곤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웬 남자였다. 붉은 머리카락에 심상치않은 옷을 입고 있는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굉장히 아름다운 얼굴의 소유자였다. 군주만큼이나 굉장히 위압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이루린을 향해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케디아니스라는 드래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 이루린은 손가락으로 경기장을 가리켰다. 그는 그녀가 가리킨 곳으로 기대에 찬 눈동자를 굴리며 고개를 돌리더니, 갑자기 심각하게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그녀가 말릴 새도 없이 경기장 근처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많은 마족들이 그의 출현에 당황해 하고 있던 찰나에, 그가 굉장히 엄격하고도 절제된 말투로 케디아니스를 향해 외쳤다. "케디아니스! 경거망동하지 마라!" 케디아니스는 매우 놀란 표정으로 - 그녀가 보기에는 굉장히 웃겼다. - 검을 휘두르다 말고 그 남자를 응시했다. 카르아스도 마찬가지로 놀란 눈동자로 그 남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주위를 뒤로하고 그 남자는 태연히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다른 마족들의 시선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이루린에게 물었다. "군주의 방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 "저, 저분은..." 이루린은 마족들을 제외한 드래곤들이 모두 그 남자를 보고 놀라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후보들은 그런 드래곤들의 반응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루린은 잠시 당황하다가, 그 남자가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자 황급히 대답했다. "맨 꼭대기 층에 있습니다만... 누구신지요? 또 어떻게 케디아니스를 알고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니다." 그러자 그가 반갑다는 듯이 중후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그대가 케디아니스를 맡고 있었군. 난 전 지역에 살고 있는 드래곤들의 지배자 케이트레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이루린이라고 합니다만... 혹시 드래곤 로드?" 그 남자, 케이트레스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케디아니스는 아버지가 이루린과 대화하다가 어디론가 사라지는 모습을 말 없이 응시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마계에는 한 번도 가지 않던 드래곤 로드가 왔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믿겨지지 않았다. 뭔가가 심각한 일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넌 산 줄 알아." 케디아니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하마터면 로드가 물려준 힘을 이용할 뻔한 자신을 탓했다. 로드는 일전에 그에게 힘을 물려준 적이 있었는데 사실상 그 힘이 있었던 덕분에 성룡을 쓰러뜨릴 수 있었던 것이다. "넌 날 검술로 이기지 못해, 케디아니스." 그가 검을 세우며 그를 깔보는 듯한 거만한 눈동자를 굴리더니, 노골적으로 몸을 돌려서 자기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원래 시합 도중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상대방에게 몸을 돌려서는 안 되는 게 원칙이었는데, 그는 대담하게도 케디아니스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 뜻은 즉, 등을 돌려도 자신을 이길 수 있다는 것과도 같았다. "날 감히 무시해?" 케디아니스는 순간 화가 난 나머지 검을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그리고 그 순간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검이 익숙하지 않은 나머지 손에서 빠져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 빠져 나간 검은 카르아스의 뒷통수를 향해 허공을 가르고 원을 그리며 빠르게 전진했다. 순간 그는 실수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놀란 것은 마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원을 그리면서 맹렬히 돌진하던 검은 아래로 하강하기 시작하더니, 카르아스의 엉덩이 사이에 그대로 꽃혔다. 그것도 검끝이 엉덩이와 정확하게 수직을 그리면서. 순간 마족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경악했다. 놀란 것은 케디아니스도 마찬가지였다. 일순간 싸늘한 정적이 흐르고, 카르아스만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엉덩이에 검이 꽂힌 채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동자에 힘을 주고 케디아니스를 응시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았으나 입술이 떨리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푸훗!" 그 때 어느 마족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냈다. 이어 연쇄적으로 경기장 근처에 있던 모든 마족들이 배를 잡고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다. 카르아스의 모습은 경악 그 자체였다. 이루린도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너, 너, 너... 이, 이 자식!" 그는 그 말만 하고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한참이 지나도 일어나지 않자, 심판자가 올라와서는 카르아스의 상태를 이리저리 살펴 보았다. 그리곤 엉덩이에 꽂힌 검을 뽑아야 할지 망설였다. "더러울텐데..." 케디아니스는 심판자가 그 말을 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 잠시 후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결론을 내린 듯, 날개를 펴고 허공으로 치솟으면서 외쳤다. "이 경우에는 승자를..." 마왕의아내-31 대회 "이 경우에는 승자를..." 카르아스를 응시하던 심판자의 입가가 절로 실룩거렸다. "케디아니스 승!" "와아아!" 마족들의 함성 소리가 들리자 케디아니스는 기절한 것 같은 카르아스의 비참한 말로를 지켜보면서 묵묵히 검을 넣었다. "그만 좀 웃어." 케디아니스가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하면서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이루린은 배를 잡고 웃으면서 입을 다물 수 없어 미칠 지경인 것 같았다. 카르아스는 검이 엉덩이에 꽂힌 채로 마족들에 의해 경기장 밖으로 끌려나가고 있엇다. 이루린은 눈물을 찔끔거리며 말했다. "정말인지 완벽한 기술이야, 케디아니스. 검의 회전 횟수와 고차원적인 각도의 측정, 그리고 조금의 오차도 용납되지 않는 힘의 조절이 요구되는 기술이었어." 케디아니스는 이루린을 쏘아보다가 아예 몸을 돌려버렸다. 웃는 얼굴을 더 이상 보기 싫어서였다. 이루린은 웃음 때문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 경기까지는 넉넉한 시간이 있다고 하니까 머리식히고 와." 케디아니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일어섰다. 그리고 그러던 차에 이루린이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그 방법을 사용해 볼까." 순간 케디아니스는 자신의 엉덩이에 검이 꽂히는 끔찍한 상상을 했다. 이루린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마족이었다. 그러자 기분이 싸늘해지는 것 같아, 그는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렇게 마족들의 환호하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즈음, 그는 긴장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따라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는 기쁨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끼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두 팔을 벌리며 하늘을 향해 외쳤다. "드디어 나는 자유다! 이 빌어먹을 마왕성을 벗어나느 것은 물론이고 로드의 레어에서 가출하는 것도 시간 문제야!" 케디아니스는 로드인 케이트레스가 현재 마왕성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은 곧 자신의 거주지인 로드의 레어가 완벽하게 비어 있다는 것을 뜻했다. 또 그 사실은, 자신이 로드에게 들키지 않고 가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나타내 주었다. 사실 기회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중간계로 공간 이동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로드 때문이었다. 그가 아는 곳이라곤 로드의 레어를 포함하고 있는 산맥 뿐이었으므로, 만약에 공간 이동을 했다간 바로 로드에게 적발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4써클로는 중간계로 공간 이동 하기도 어려웠는데... 이제는 가능해!` 그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텔레포트!" 그리고 그 순간 기대와는 달리 그는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비명을 질렀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스스로 무덤을 파는 구나." 이루린은 거미 구덩이 옆에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케디아니스는 거의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미친듯이 구덩이 속에서 날뛰고 있었다. 그의 몸에는 새까만 거미들이 덕지 덕지 붙어 있었다. 이루린은 케디아니스가 왜 저렇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공간 이동 마법을 썼기 때문이었다. 일전에 이루린은 케디아니스가 혹시 마왕성을 탈출하는 과오를 저지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케실리온과 모종의 거래를 한 적이 있었다. 케디아니스가 텔레포트 마법을 쓰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거미 구덩이 속으로 워프되는 손톱만큼 작은 링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 전에 그녀는 그의 머리카락 깊숙히 달아 놓았다.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매듭을 짓고서. "사, 살려줘!" 이루린은 그런 케디아니스를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다 들리도록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이름을 `그레이트`로 짓는 거야. 종류는 수컷으로 하는 거지... 크기는 전보다 더 크게 만들고... 아예 끊을 수 없는 밧줄을 서로 연결해서 달아두는 거야... 먹이를 제때 주지 않거나 화나게 하면 아마도 잡아먹히겠지... 이번에는 케디아니스의 애완용으로 만드는 거야. 아냐, 그레이트의 애완용이 되는 건가.. 으음.." 케디아니스의 목소리가 구덩이 속에서 악을 쓰듯이 들려왔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데? 날 좀 풀어달란 말야! 내가 저주할 거야!" 이루린이 여유 있게 웃으면서 말했다. "뷰리풀 2세를 만들고 있었어." 케디아니스의 기겁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공포에 질린 것같았다. "웃기지 마! 그런 소리 따위, 난 안 믿어! 헛소리하지 말고 날 여기서 꺼내기나 해!" 이루린은 몸을 털고 일어서면서 가볍게 말했다. "다음 경기가 시작되기 5분 전에 꺼내 주겠어." 이루린은 기어나오고 있는 거미를 발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그 거미는 곧장 케디아니스의 얼굴 정면에 떨어졌다. 순간 그의 입에서 짧고 강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루린?" 누군가가 부르는 목소리에 이루린은 뒤로 돌아보았다.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케디아니스의 완성판인 남자가 서 있었다. 드래곤 로드 케이트레스는 거미 구덩이를 유심히 응시하더니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들의 이 모습을 보면 좋아하진 않겠지. 아냐, 케디아니스의 성격으로 봐서는 좋아할 수도 있을 거야. 어쨌든 상황을 모르니까...` 이루린은 케디아니스의 비명소리를 무시한 채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무슨 일이신지요?" "아들이 정말로 얌전해졌더군." 그 목소리가 들리자 마자 구덩이 속에서 케디아니스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로드! 로드!" 케이트레스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이루린은 그런 케디아니스의 목소리를 싹 무시한 채 얼른 앞으로 나섰다. 케이트레스가 구덩이 근처로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케이트레스가 구덩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방금 구덩이 속에서..." 이루린은 재빨리 케이트레스의 말을 잘랐다. "거미들의 서식지입니다. 눈으로 보는 건 해로워요." "그런 게 아니라..." "마왕성을 안내해 달라구요? 절 따라오세요. 그런데 피부가 상당히 고우시네요. 평소에 어떻게 관리하셨는지..." 이루린은 과감하게 케이트레스의 팔짱을 끼면서 앞으로 전진했다. 물론 로드인 만큼 예의에 어긋나게 행동하지 않게 교묘한 수법으로 자연스럽게 유도했다. 고함을 치는 듯한 케디아니스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렇게 케이트레스와 함께 한적한 곳으로 왔을 때, 이루린은 비로소 그의 팔을 놓으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케이트레스는 비교적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이루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놀라셨는지요?" 케이트레스는 헛기침을 하며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니, 그건 아니지만... 어쨌든 아들을 제대로 교육시켜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군." 이루린은 순간 구덩이를 보여줘도 별 상관이 없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별로 한 것도 없는 걸요." 그 순간 이루린은 속으로 케디아니스에게 했던 갖가지 행위들의 목록을 나열하고 있었다. 엄청 길었다. 케이트레스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아니, 케디아니스는 조금이나마 변했다. 경기장에서 내 말을 듣는 모습을 봤겠지? 전에는 대꾸조차도 하지 않던 아이였지. 물론 내 아내가 죽은 후부터는 말이다." 이루린은 케이트레스의 말에 조금 충격을 먹었다.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중요한 사실은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대의 파트너인 만큼 몇 가지의 사항에 대해서는 알려줄 필요가 있어서 이렇게 왔지. 간단히 말하자면, 아내가 죽기 전에 그 아이는 굉장히 성실하고 착했다." 마지막 말에 이루린은 비명을 지르다시피했다. "지금 성실하고 착했다고 말씀하셨는지요?" 케이트레스가 조금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다. 어쨌든 아내가 죽은 이후로 케디아니스는 걷잡을 수 없이 변했지. 그리고 아들의 파트너가 잘못되면 어쩌나하고 걱정하기도 했다. 그런데 돌아다니면서 소문을 들어보니 파트너인 그대는 케디아니스를 아주 효과적으로 다룬 것 같더군. 난 아들을 통제할 수 있는 자가 있다는 사실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이루린은 어색하게 웃었다. 케디아니스에게 그런 과거가 있다는 사실이 조금 놀라울 따름이었다. "어쨌든 하고 싶은 말은 아들을 따뜻하게 대해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이미 아들에게 호의적으로 대하고 있는 것 같군. 아들도 그대에게 호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고." 이루린은 결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케이트레스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내가 죽은 이후로 케디아니스는 놀라울 만큼 강한 힘을 지니게 되었지. 물론 케디아니스는 아직도 내가 자기에게 강한 힘을 물려줬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은 그런 게 아닌데도 말이지. 케디아니스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대의 혼자 힘만으로는 통제가 불가능하다. 그대는 성인식을 치르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케디아니스가 얌전하게 따르는 것으로 봐서는 결코 그대를 싫어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군... 아, 이런. 이제 군주를 만나러 갈 테니 아들을 잘 부탁한다. 아까는 돌아다니면서 구경한다고 만나러 갈 시간이 없었으니까." "네." 이루린은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케이트레스는 군주의 방을 둘러보았다. 거대한 창문으로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고, 그 앞에는 큰 책상이 있었다. 앉아 있는 책상만큼이나 엄청나게 쌓인 서류가 눈에 띄였고, 그 옆에는 다시 어느 방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었다. 아무래도 침실인 것 같았다. 옆에 앉아 있는 군주를 묵묵히 응시하며 아무 의자에나 앉았다. 군주는 잡고 있던 펜을 놓고서 케이트레스를 응시했다. "용건은?" 군주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케이트레스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주신 다음으로 신계에서 최강이라 일컫는 자에 대한 소문이 들려오더군." "......" "약 1500년 전 쯤에 일어났던 대륙 전쟁을 기억하고 있나? 하필 중간게에서 천계, 신계, 마계의 패권 다툼이 치열하게 일어나서 자고 있는 내가 방해받을 정도였으니까." "왜 중간계에서 일어났는지는 잘 알고 있을 텐데." "잘 알고 있지. 중간계 말고는 천족, 신족, 마족이 모두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없으니까. 어쨌든 그 때 난 신계에서 최강이라 일컫는 검의 신 예카트레스를 보았다. 금발의 굉장히 아름다운 여신도 봤었는데 이름이 잘 생각 나지 않는군. 정말로 아름다웠지. 어쨌든 검의 신이라는 자에 관한 건데... 왜 지금 그 자는 마계에 있나? 분명히 원칙대로라면 신계로 귀환했어야 하는 건데." 케이트레스는 날카롭게 물으면서 군주를 응시했다. 군주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알고 있었나." "모르는 게 이상하지. 그 자가 노리는 게 뭔가?" 군주는 대답 대신에 케이트레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일어서서 창 밖을 응시했다. 케이트레스는 그가 누구를 응시하고 있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바로 이루린이었다. 마왕의아내-32 대회 이루린은 심각하게 서류를 넘기면서 한숨을 쉬었다. 시합 상대의 실력이 보통이 넘었기 때문이었다. 마법은 케디아니스와 비슷할 정도의 실력을 지녔지만 문제는 그 다음 시합 상대자가 나이의 차이가 가장 심하다는 것이었다. 몇 년만 지나면 성룡식을 치를 정도였으니깐 말이다. `차분하고 조용하며 침착하다. 마법에 뛰어난 재능이 있으며 마력이 상당히 높다. 모든 드래곤들 중 가장 연령이 높으며 뛰어난 지혜의 소유자인 골드 드래곤이다. 이런... 케디아니스는 마법 수준만 올렸지 마력을 쌓는 수련은 하지 않았는데 어쩌지?` 이루린이 어떻게 전략을 짜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우연찮게도 심판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신 가능, 종목은 마법입니다!" 이루린이 말할 틈도 없이 케디아니스는 앞으로 나아갔다. 이루린은 반사적으로 뻗은 손을 내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케디아니스가 지나가려는 길목에 케실리온이 있었다. 이루린은 큰 목소리로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그를 불렀다. "어이, 케실리온! 케디아니스에게 격려의 말 좀 해줘!" 이루린의 목소리에 케디아니스는 힐끗 돌아보다가 다시 앞을 향해 걸었다. 그 때 케실리온이 불쑥 나타나더니, 그에게 나지막한 어조로 말했다. "격려를 원하나?" 케디아니스는 경계하는 마음으로 그를 응시했다. 자신을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괜히 오한이 드는 것 같았다. "이루린의 얼굴을 상기하도록." 순간적으로 케디아니스는 몸 속 깊은 곳에서 힘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한과 분노가 더해져서 자신감도 생겼다. 정말인지 자신도 모를 놀라운 반응이었다. 케디아니스가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는 힘찬 발걸음으로 경기장 위로 올라갔다. "케디아니스에게 무슨 말을 했기에 저러는 거지?" 케실리온이 다른 마족들이 있는 곳에 섞여 들어가려고 하자, 이루린은 그를 따라 후보들의 대기실에서 일어섰다. "생각나는 대로 말했지." "무슨 말?"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그가 아무 관람석에 앉자 그녀도 따라 앉으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그 사실이 뭔데?" "......" 그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고 묵묵하게 있을 뿐이었다. 이루린은 답답했지만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골드 드래곤 가이리스가 자신만만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마법에는 소질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 케디아니스." 케디아니스는 이루린과 함께 했던, 지나칠 정도로 감동 깊었던 나날들을 떠올리면서 쓰게 웃었다. 끔찍한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리본을 달고 다녔던 뷰리풀의 공포스러운 추격전을 펼쳤던 기억이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시작!' 심판자의 목소리와 함께 가이리스가 재빨리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어린 드래곤 답지 않게 가이리스에게서는 마법을 다루는 태도에서부터 노련미가 풍기고 있었다. 반면에 케디아니스는 단기간에 마법을 올린 탓에 아직 경험이 많이 없는 상태엿다. 그의 손에서 20개가 넘는 화살들이 불길을 내뿜으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것들은 서로 원을 그리며 돌더니, 이윽고 케디아니스에게로 빠르게 던져졌다. 케디아니스는 뷰리풀과의 끔찍한 사투를 떠올리면서, 비교적 유연한 동작으로 20개가 넘는 그것들을 모조리 피해버렸다. 물론 옷깃을 스치는 건 막을 수 없었지만. "이럴 수가! 내 마법을 다 피하다니! 그렇다면 이번에는 좀 더 강력한 마법이다!" 그가 다시 빠르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시전 속도는 케디아니스가 놀랄 만큼 빨랐다. 그래서 그가 잠시 당황하는 사이 가이리스의 손에 마력이 휘몰아치더니, 이번에는 아까 전과는 다른 거대한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케디아니스가 시전을 중지시키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가이리스가 좀 더 빨랐다. 케디아니스가 다가오자마자 그는 바람 속성의 마법을 완성시켰다. 가이리스를 주변으로 생성된 강력한 폭풍은 점점 더 원을 크게 그렸고, 케디아니스는 그 거부할 수 없는 힘에 빨려들어가는 자신의 몸을 제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는 폭풍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전에 재빨리 공간 이동 마법을 시전했다. "텔레포트!" 가이리스에게서 멀리 떨어진 경기장 구석으로 이동했다. 한 순간의 위기는 모면했지만 폭풍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케디아니스는 일단 방어 마법을 시전한 다음에 마력을 최대한 아껴서 생각나는 대로 물 계열의 고등 마법을 시전했다. 그러자 손에서 강력한 물기둥이 생성되면서 그의 앞을 가로 막았다. 잠시 후에 물과 폭풍이 격돌하더니, 곧 너나 할 것 없이 동시에 소멸해 버렸다. 가이리스는 처음으로 동요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건 6써클의 마법이었는데 어떻게 막았지?" 그가 불안해 보이는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해도, 케디아니스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가이리스는 마법을 많이 썼는데도 전혀 지치지 않은 반면 자신은 6써클의 마법을 딱 한 번 썼는데도 등에 땀이 나고 숨이 거칠어진 것이다. 분명 이것은 마력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이대로라면 가이리스에게 질 확률이 매우높았다. 순간 머릿속으로 한 가지의 방법이 떠올랐다. `현신하자!` 케디아니스는 완전히 숨을 고른 다음에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몸에서 붉은 빛이 휩싸이더니, 곧 그를 원래의 모습으로 변신하게 만들었다. 마족들은 그런 케디아니스에게 놀라운 시선을 던졌다. 가이리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잠시 갈등하는 듯이 인상을 쓰더니, 곧 자신도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이내 케디아니스처럼 완전한 드래곤의 모습으로 현신했다. 그러나 케디아니스에 비해 가이리스의 크기는 훨씬 컸다. 황금색의 비늘과 위압적으로 펄럭거리는 날개와 굵은 꼬리가 눈에 띄었다. 날카로운 발톱과 눈동자의 색깔도 황금색이었다. 가이리스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난 현신하면 아주 강력한 마법을 쓸 수 있지. 아무리 로드의 아들이라고는 하지만 넌 절대로 이 마법을 막지 못해-" 가이리스가 짧은 두 팔을 모으고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케디아니스는 육탄전을 치룰 생각으로 얼른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가이리스의 몸에서 갑자기 방출하는 강력한 마력에 그는 당황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 틈을 타서 가이리스가 주문을 빠르게 외우기 시작했다. 주문이 굉장히 길어지자 케디아니스는 더욱 더 필사적으로 가이리스에게 다가서려고 했다. 주문이 길다는 것은 그 만큼 마법의 수준이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때 갑자기 먹구름과 비슷한 무엇인가가 생성되더니 하늘을 가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케디아니스는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했으나, 너무나 빠르게 하늘이 이상한 것들로 뒤덮이는 모습에 나중에는 마법의 일부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그는 가이리스가 쓰려는 마법이 굉장히 유명하다는 것을 깨닫고 비명을 질렀다. "서, 설마... 유성 소환!" 그는 절대로 꿈도 꾸지 못할 마법이었다. "저 바보!" 이루린은 케디아니스가 당황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한 손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그녀가 보기에 가이리스를 공격할 틈은 많았는데도, 정작 케디아니스 자신은 아무런 공격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 드래곤이 쓰기에는 강력한 마법인가." 케실리온의 중얼거리는 말에 이루린은 사색이 되었다. 그리고 필사적인 심정이 되어 외쳤다. "강력하다면 경기장에 있는 마족들에게 피해를 주잖아. 어째서 시전하게 내버려두는 거지?" 이루린은 태평하게 앉아 있는 심판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경기장에 보이지 않는 방어 마법이 쳐져 있기 때문에 피해는 경기장 안에 있는 자만 입는다." 이루린은 가만히 망설이다가, 마침 다리 사이로 지나가고 있는 거미 한 마리를 아무도 모르게 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케실리온에게 넘기면서 무언의 눈빛을 보냈다. 케실리온 또한 이루린에게 묵묵히 시선을 보냈다. "...위치는?" 이루린은 손가락으로 목 뒷덜미를 짚었다. "...댓가는?" 이루린은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을 작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 역시 물러서지 않고 그녀를 노려보더니, 아쉬울 게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이루린은 험악한 어조로 말했다. "부르는 게 값이야." 케디아니스가 두려운 마음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하늘에 끼인 이상한 먹구름이 폭풍처럼 원을 그리더니, 곧 그 사이에서 불에 휩싸인 거대한 유성이 경기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응?" 케디아니스는 목덜미 근처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곤 잠시 몸을 굳혔다. 그리고 그 이상한 느낌이 지속되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그게 무엇인지 확인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유성의 위협으로 인한 신변 보호 보다도 목덜미에서 꼼지락거리는 그 물체가 더 두렵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성을 잃고 미친듯이 날뛰었다. "아악! 저리가지 못해!" 계속해서 날뛰어도 목덜미에 붙은 새까만 무엇인가가 떨어지지 않자 자신도 모르게 날개를 펴서 하늘 높이 날아 올랐다. 그 순간 어린 드래곤이 아무런 연습도 하지 않고 날았다는 사실에 놀라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럴 수 없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이 새까만 물체가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지배했다. 그러던 찰나에 그는 격렬하게 움직이면서 경기장 판에 박치는 거대한 유성들을 모조리 다 피해버렸다. 그 순간 가이리스와 마족들 모두가 경악했다. "무, 무서워..." 가이리스는 엄청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케디아니스를 보고 처음으로 겁에 질렸다. 붉게 충혈되어 있는 두 눈동자는 오로지 가이리스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고, 천재적이게도 어린 나이에 벌써 날개를 펴고서 자유 자재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위협적이게 꿈틀거리는 몸짓이 가이리스에게는 사뭇 위협적이었다. "드, 드래곤 로드가 되어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충분한 자질을 지녔어." 그 때 케디아니스가 고함을 질렀다. "저리 가란 말이야!" 아무래도 자신에게 하는 말인 것 같았다. 가이리스는 너무 무서워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이것이 케디아니스의 힘이었던 것이다. 현재 케디아니스는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몸이 허공에 떠 있다는 것 뿐이었다. 오로지 목표는 목덜미에 붙은 거미를 떼어내는 것 뿐이었다. 두드러기가 날 정도로 싫었던 거미가 다시 몸에 달라 붙어 있는 끔찍한 촉감은 상상도 하기 싫은 것이었다. 갑자기 날았기 때문인지 그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아래로 추락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머리에 딱딱한 무엇인가가 부딪히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번쩍 뜨일 정도로 머리에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아악!" 심판자는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케디아니스와 가이리스의 광경을 빤히 응시했다. 그는 관람자들과 함께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케디아니스가 조금 불안정한 자세로 날다가 갑자기 균형을 잃고 거꾸로 떨어지더니, 그대로 머리끼리 서로 충돌했다는 것을. 가이리스는 현재 갑작스럽게 케디아니스의 머리에 부딪혀서 바닥에 쓰러져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반면에 케디아니스는 연신 머리를 부여잡으면서도 손으로 목덜미를 짚어 보곤 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이 경우에는..." 심판자는 가이리스보다 머리가 좀 더 단단한 케디아니스의 승리라고 판정을 내려야 했다. 마왕의아내-33 대회 하루 만에 결승전을 앞두고 경기가 모두 끝나자, 이루린은 케디아니스를 데리고 숙소로 돌아왔다. 물론 돌아가는 길에 그녀는 마왕성 내에서 가장 유명한 마화가를 찾아갔다. 그 마화가의 방은 화려하지만 다소 마계에 걸맞게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그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 주시면 되요. 아셨죠? 아, 그리고 방으로 갖다 주세요." 마화가 라스첸은 조금 이상한 듯이 이루린을 응시하더니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연신 이루린이 주문한 내용물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보곤 했다. 옆에서 그걸 지켜보는 케디아니스는 당연히 뭐가 뭔지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야? 뭘 만드는 건데?" "두고 보면 알아." 이루린은 웃으면서 케디아니스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 케디아니스가 이런 식으로 상대편을 이길 줄 몰랐던 이루린은 저번 시합 때처럼 배를 잡고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역시나 케디아니스는 그런 이루린을 보더니 삐진 듯이 고개를 다른 곳으로 홱 돌려버렸다. "그만 좀 웃으라니까!" 이루린이 웃음을 멈추지 않고 몸을 떨고 있자, 케디아니스는 신경질적으로 일어서더니 어디론가 가려고 했다. 이루린은 그제서야 웃음을 멈추고는 대진표를 응시하면서 다음 경기에 대해 설명했다. "결승전인 만큼 아마 가장 어려울 거야. 교육자의 실력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긴 하지만 파트너인 드래곤이 워낙 뛰어나거든. 평가를 하자면 모든 드래곤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다고 할 수 있지." 마지막 말이 눈에 거슬렸는지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루린은 이제 마지막 경기인 결승전을 앞두고서 상대편인 엘리세아의 이름을 응시했다. 우연찮게도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더니 바로 지금이 그 꼴이었다. 그녀가 알기로 엘리세아가 데리고 있는 실버 드래곤 세르카스는 평판이 아주 좋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침착하고 냉철하며 마법이나 검술에 뛰어나 다재다능하다는 소리를 들은 것은 예사였다. 그러니까 즉, 케디아니스의 평판과는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초기에 실버 드래곤 세르카스가 파트너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겠는가.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말이다. 세르카스에 대한 소문을 들어서인지, 그가 다 알고 있다는 투로 비꼬듯이 말했다. "혹시 세르카스? 그 뭐든지 잘난 드래곤?" "그래, 이 깡패 드래곤아. 말 좀 곱게 써." "......" "어쨌든 결승전은 모레야. 그 날을 대비해서 오늘은 푹 쉬자. 그러는 기념으로 오늘 밤에는 나랑 내기를 하는 거야." 그가 인상을 쓰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내기?" 그러던 차에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자, 이루린은 큰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오세요." 그러자 한 시녀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천으로 감싼 주먹만한 무엇인가를 들고 왔다. 이루린은 그것을 받은 후에 시녀에게 돌아가라고 손짓했다. 그 시녀는 머리를 조아리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케디아니스가 눈을 크게 뜨면서 그녀의 손에 든 것을 응시했다. "그게 뭐야?" 이루린은 케디아니스를 침대 위에 앉힌 후에 서로 마주보면서 앉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넓게 펼치기 시작했다. "우리가 할 재미있는 놀이야. 두뇌가 향상되는 건 물론이며 예지력도 기를 수 있지. 운도 좀 따라줘야 하며, 판단력이 요구되는 놀이야." "그러니가 그게 무슨 놀이인데?" 그가 인상을 쓰며 묻자, 이루린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며 가볍게 말했다. "규칙을 설명하지. 네가 지면 내 심부름을 하나 들어주는 거야. 물론 내가 지면 네 심부름을 하나 들어주겠어. 그리고 덧붙여서, 점수가 1점이면 심부름 한 개야. 알겠지?" 몇 시간 후. 벌써 마계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모두들 꿈 속에서 헤메고 있을 시각에도 두 생명체만은 열을 올리면서 창문 밖의 광경이 어두워진 것도 모르고 정신 없이 놀이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 서로 피 튀길 만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케디아니스가 비명을 질렀다. "이씨, 또 쌌잖아! 뭐야? 이번이 세 번째란 말야!" 이루린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마지막 카드를 바닥으로 쳤다. 그리고 망연 자실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케디아니스에게 승리의 미소를 날리면서 말했다. "자 자, 점수 계산을 좀 해 보실까? 일단 보자... 이번 패가 최고였군. 광박, 피박, 쓰리고에 흔들어서 두 배. 알지? 나 이번에 똥 폭탄이었어." 이루린이 케디아니스 패를 들여다 보면서 손가락으로 점수를 계산했다. 카드 세 개를 케디아니스의 눈 앞에 노골적으로 흔들었다. 그런 후에 그녀는 뭔가를 또 발견했다. "이런! 아름다운 새들이 눈에 보이네. 그것도 다섯 마리가." "......" "점수로 계산하면... 장난 아닌데?" 케디아니스는 한참 동안 가만히 있다가 손가락으로 두꺼비가 그려져 있는 카드를 불만스럽게 가르쳤다. "이건 뭔데?" "피 두 개와 똑같지. 일명 축하피라고도 하지." 이루린이 의미심장하게 웃자, 케디아니스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험악하게 그녀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케디아니스의 눈빛을 받으면서, 이루린은 능청스럽게 말했다. "왜 쳐다 봐?" 그가 그녀를 한참 째려보더니 이윽고 낮은 어조로 조용하게 말했다. "섞어." 그 날 새벽까지 케디아니스와 이루린은 아주 재미있는 놀이를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사실 그녀는 평소에 가족들과 동양 카드를 자주 즐겼기 때문에 그 놀이에 대해서는 아주 꽤뚫고 있었다. 그림을 기억한 덕택에 그녀는 마화사에게 특별히 동양 카드를 그려달라고 주문했던 것이다. 그녀가 놀랄 정도로 케디아니스는 도박에 소질이 있었다. 아직 어린 소년에게 이런 놀이를 가르치는 게 찝찝하긴 했지만, 뭐 어떻겠는가. 큰 돈을 걸고 하는 행위가 아닌 이상 - 그리고 이 곳에서는 돈이라는 개념이 그리 크게 작용하지 않는 것 같았다. - 별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어쨋든 그 다음날 이루린은 케디아니스를 하루종일 부려 먹으면서 편안하게 보냈다. 케실리온이 가져다 준 그 무거운 서류를 나르는 역할을 전부 케디아니스에게 떠맡긴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부르는 게 값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이루린은 대회가 지난 다음에서야, 그 말을 했던 스스로를 크게 탓했다. 다급한 나머지 아무렇게나 말했던 것이다. 그건 마계로 와서 최초이자 최고의 큰 실수였다. 팔이 빠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 망발을 하다니. 스스로가 생각을 해 봐도 그 당시에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합리적으로 해 주겠지? 설마 평생 동안...` 이루린은 케실리온이라면 당연히 합리적으로 처리하리라고 생각했지만, 왠지 그럴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하기만 했다. 마왕의아내-34 대회 `합리적으로 해 주겠지? 설마 평생 동안...` 이루린은 케실리온이라면 당연히 합리적으로 처리하리라고 생각했지만, 왠지 그럴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하기만 했다. 결승전 당일. 이루린은 이제 슬슬 결승전을 시작할 시간이 되자, 기지개를 펴면서 창 밖을 내려다 보았다. 저번 경기보다 더욱 더 많은 마족들이 떼를 지어서 경기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계급을 가릴 것 없이 아주 많이. 그녀는 이불을 몸에 둘둘 말아서 일어나지 않고 번데기처럼 자고 있는 케디아니스를 응시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보는 눈들이 많아 오늘은 그에게 좀 부담이 될 것 같았다. 이루린은 하늘에 날아다니고 있는 까마귀처럼 생긴 새를 응시했다. 그게 뭔지 도통 몰랐지만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일부러 미리 알고 있어도 까먹은 것처럼 물었다. "저 하늘에 날아다니고 있는 마물이 뭐였더라? 생각이 잘 나지 않네. 간단하게 설명 좀 해 봐." 아이나는 케디아니스의 이불을 뺏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대답했다. "로우라고 불리는 저 마물은 마왕성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침입자가 있는지 정찰하는 역할을 하죠. 뭐든지 가리지 않고 골고루 먹긴 하지만 주로 먹는 음식은 따로 있어요. 바로 자이언트 거미랍니다." 아이나는 이불에 매달린 케디아니스를 침대 위로 떨어뜨려 놓으려고 그것을 잡고 흔들었다. 그러나 케디아니스는 끝까지 이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아이나가 힘겨운 투로 말했다. "로우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먹은 즉시 배설을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관리하기가 아주 편해요." 이루린은 현재 창 밖에 날아다니고 있는 여러 마리의 로우를 굉장히 신기하게 응시했다. 그러다가 케디아니스가 매달려 있는 이불을 넘겨 받았다. "그래, 그렇구나." 이루린은 긍정적으로 끄덕이면서 이불로 케디아니스를 완전히 말아버렸다. 아이나가 놀란 듯이 그녀를 응시했다. 하지만 그녀도 이런 이루린과 케디아니스와의 관계에 이미 익숙해진 상태였기에 그리 놀라지는 않은 듯 싶었다. 이루린이 이불을 들쳐매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아이나가 눈을 크게 뜨고 손가락으로 이불을 가리켰다. 이루린은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면서 짧게 대답했다. "깨워야지." 밖으로 나간 이루린은 케디아니스가 들어 있는 이불을 거미 구덩이 속에 던져 버렸다. 케디아니스가 확실하게 잠에서 깨어난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었다. 시합 전, 케디아니스는 이루린이 마족들을 향해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면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다른 마족들 때문에 평소에 케디아니스에게는 하지 않던 말들을 잔뜩 해주었다. 이루린은 처음으로 친근하게 웃으주면서 케디아니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케디아니스, 승패는 중요하지 않아. 네가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야." 케디아니스의 귀에는 다르게 들렸다. `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확 그냥 거미 구덩이 속으로....` 이루린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전처럼 너무 황당하게 이기지 말도록 해. 그건 시합에서 옳지 않은 행동이야." 역시 케디아니스의 귀에는 다르게 들렸다. `전처럼 아주 끝내주게 이기면 걸작이지. 그건 우울한 마족들을 구제할 수 있는 행동이야.` 케디아니스는 이루린이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는 것을 느꼈다. 격려를 가장한 협박이었다. 심판자가 올라오자, 그는 거의 쓴 미소를 지으면서 경기장에 올라갔다. 사형장에 끌려가는 기분이라 참담하기만 했다. 그리고 오늘따라 왜 그리 보는 시선들이 많은 것인지. 이윽고 세르카스가 올라오자, 심판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제한 종목은 없습니다. 두 선수 자유롭게 경기에 임하면 됩니다. 자, 이제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케디아니스는 세르카스에게 검을 겨누었다. 처음으로 긴장이 되는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세르카스는 예전에 그가 동경했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죽였던 카이란스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대단한 실력을 지닌 드래곤이었다. 케디아니스가 한때 차기 로드감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시절에, - 드래곤 로드의 아들이라고 해서 다 로드가 되는 건 아니었다. - 카이란스는 그리 뛰어난 평을 받지 못했지만 세르카스는 차기 로드감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모든 분야에서 완벽하다고 평을 받았다. 하지만 모든 게 바뀌어버린 지금은 아니었다. 그러한 동경은 케디아니스, 자신이 너무나도 어리석었던 시절의 추억일 뿐이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케디아니스는 그를 향해 검을 겨누며 말했다. "덤벼, 세르카스." 세르카스는 은색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면서 그에게 돌진했다. 케디아니스는 긴장하면서 그의 검을 받았다. 예상대로 힘에서는 케디아니스가 훨씬 우세였기에, 세르카스의 검이 흔들리면서 차츰 밀리기 시작했다. 세르카스는 이를 악물면서 그런 케디아니스의 검을 쳐내려고 했다. 그의 두 눈동자는 케디아니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만 아니었다면 내가 차기 로드가 될 수도 있었어." 케디아니스는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면서 더욱 더 검에 힘을 주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로드의 피를 이어받은 드래곤과 일반 드래곤들의 능력은 어렸을 때는 같아도 성룡식을 치르면 바로 차이가 나. 물론 난 어렸을 때는 약해 빠졌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나?" 케디아니스는 그의 검을 세차게 쳐냈다. 그가 인상을 쓰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케디아니스를 응시하더니, 곧 검을 고쳐 잡으면서 묘하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널 힘으로 이길 수 없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그 밖의 것이라면 자신 있지." 케디아니스는 그가 마법을 검에다가 쓰는 모습을 보고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이루린은 엘리세아의 거만한 표정이 자신을 쏘아보고 있다는 것을 알곤 약간의 부아가 치밀었다. 케디아니스가 조금만 밀리도 곧 노골적으로 그녀에게 보란듯이 미소를 짓곤 했던 것이다. `가끔 가다가 저 가죽을 칼로 긁어내거나 아예 벗겨내고 싶어진단 말야.` 이루린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세르카스의 행동을 날카롭게 주시했다. 세르카스는 예상대로 어린 드래곤들 내에서는 매우 대단한 실력을 지닌 드래곤이었다. 상황에 따라서 적절하게 판단하는 대처하는 능력과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는 순발력 등 어느 것 하나 케디아니스의 실력과 처지는 게 없었다. 놀랍게도 그는 검에다가 마법을 걸어서 케디아니스를 공격하는 전술까지 펼쳐 보이면서 케디아니스를 궁지로 몰아 넣고 있었다. 아마도 검의 강도를 올려주어 케디아니스의 힘에 대응할 작정인 것 같았다. 때때로 고등 마법을 적절하게 활용하면서 케디아니스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케디아니스가 경험이 많았더라면 충문히 이길 수 있을 텐데.` 케디아니스의 문제점은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경험 부족으로 인해서. `케실리온도 오늘은 보이지 않네. 그리고 저 마족은 이제는 아예 날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있군.` 이루린은 엘리세아의 부담스러운 눈동자를 못마땅하게 응시하다가, 바닥으로 고개를 숙였다. 마침 바닥에 거미 한 마리가 지나가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이루린은 속을 좀 후련하게 만들기 위해 그 거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 사이에, 그것을 경기장 위로 높이 던져 올렸다. 의외로 거미의 무게가 가벼웠는지, 아니면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의 세기가 강했는지는 몰라도 거미는 풍선처럼 가볍게 하늘 위로 떠올랐다. 어디까지 날아가나 싶어서 그것을 지켜본 이루린은 입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마왕성 상공을 배회하던 새, 로우가 경기장 한 가운데에 떠 있는 거미를 발견하더니 재빠른 동작으로 잡아 먹은 것이었다. 그 직후에 로우는 주먹 둘을 합쳐 놓은 것 같은 배설물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제일 경악스러웠던 것은 그 배설물이 때마침 세르카스의 머리에 정통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어째서 로우가 배설물을..." 순간 마족들을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돌렸다. 대부분 고개를 돌린 이들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기 보다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이루린은 순간 자신의 아무 의미 없던 행동이 세르카스의 망신살을 톡톡히 치르게 했다는 것을 깨닫곤, 웃음을 참으면서도 반성했다. `미안해, 세르카스. 고의가 아니었어.` 한편 세르카스는 당황해하면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그는 마른 하늘에 떨어진 날벼락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케디아니스는 손가락으로 코를 집은 후에 인상을 쓰면서 그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마침 정신이 퍼뜩 들었는지, 검을 품 속에 집어 넣었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기회다!` 케디아니스는 두 손을 모았다. 일단 5써클의 땅 계열에 속하는 포위 마법을 쓸 작정이었다. 그가 알기로 그 마법을 쓰면 약간 모가 나 있는 바위들이 경기장을 뚫고 나와 상대방을 완벽하게 둘러싼다고 알고 있었다. `쓴 적은 없지만.` 케디아니스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여기면서 지정한 장소에다가 마법을 시전하려고 하다가, 세르카스의 웃긴 모습이 떠올라서 그만 정신을 제대로 모으지 않은 상태에서 외치게 되었다. `아뿔싸!` 그는 외친 순간 후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만 세르카스가 서 있는 장소에 돌이 솟아 나오도록 마법을 써버린 것이었다. 한 번도 이 마법을 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세르카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손으로 배설물들을 훔쳐내고 있는 사이, 케디아니스는 마법을 시전하다가 중도에 그만두었다. 그 바람에 땅을 뚫고 생성되는 바위들은 전부 다 1m 이하의 높이를 자랑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바위가 땅을 뚫고 솟아 나오다가, 그만 세르카스가 서 있는 자리에도 바위가 땅을 뚫고 솟아나온 것이었다. "욱!" 세르카스의 눈동자가 크게 뜨여졌다. 그는 몸을 심하게 떨면서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순간 모든 마족들이 짧은 탄성을 지르면서 경악한 것은 물론이었다. 바로 솟아나오던 바위가 세르카스의 중요한 그 곳을 정면으로 친 것이었다. 케디아니스는 그 곳이 굉장히 아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너, 너, 너! 케디아니스... 이 이 자식..." 힘겹게 말한 그는 손으로 그곳에 갖다 대더니 케디아니스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그러더니 비틀거리다가 곧 바닥에 그대로 허무하게 쓰러졌다. "......" 순간 정적이 흘렀다. 오직 심판자만이, 미친듯이 웃음을 참으면서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해하고 있었다. 마왕의아내-35 동거 생활 시합이 끝나고 나서 케디아니스는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온갖 도구들을 이용해서 거미들을 괴롭히면서 지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끌어 모을 수 있는 게 거미였기 때문에 그녀는 눈에 거슬리긴 했어도 케디아니스의 행동을 자유롭게 해 주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점수만 따지고 본다면 현재 그녀가 1위라고 했다. 그 사실에 그녀는 어느 정도 안도하긴 했지만 이제 머지 않아 두 번째 관문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에 한 순간도 긴장감을 놓지 말아야 했다. 한적한 시간이 흐르다 보니, 그녀는 한국이 조금 그립다는 생각을 했다. 최소한 한국에서는 이 곳에서처럼 누군가가 죽임을 당하는 위험한 사건도 없었고, 걱정해야 할 일도 없었다. 컴퓨터, 텔레비젼... 등등 유일하게 피로를 풀 수 있는 곳도 많았다. 그러나 이 곳에는 그런 것이 없지 않은가. 신기한 것은 이상하게도 어머니의 얼굴이 시간이 흐를 수록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7년을 같이 살아 온 어머니인데 어떻게 그렇게 될 수가 있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조금 심란했다. 또 한국에서 친구들과 재미있게 보낸 추억도 점차 잊혀져 갔다. 하지만 소중하게 여기던 것이 점점 사라지게 되어도, 슬픈 감정이 전혀 들지 않았다. 역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 곳에는 텔레비젼도 없고..." 케디아니스는 연구가처럼 동양 카드를 이리 저리 만지작 거리다가 물었다. "텔레비젼이 뭔데? 먹는 것?" 이루린은 애써 당혹스러움을 감추면서 대충 둘러댔다. "그래. 나중에 내가 아이나를 불러서 만들어 주지." 케디아니스가 기대감에 찬 눈동자로 이루린을 응시하면서 물었다. "정말?" 이루린은 그가 말을 꺼내지 못하게 단단히 못을 박았다. "그런데 주 메뉴가 거미야." "......" "먹고 싶어?" 케디아니스는 유령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동양 카드를 만지작 거렸다. 그는 거의 시체에 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루린은 책상에 쌓인 서류를 응시하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맞아!" 이루린은 케디아니스의 손에 든 동양 카드를 응시하면서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 "... 네가 엘리세아랑 있던 날 밤에 그런 일이 있었어. 상황이 나빠진다는 뜻일까?" 이루린은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케실리온에게 심각하게 물었다. 케실리온은 처음으로 뭔가를 생각하는 듯이 허공을 바닥을 응시했다. 한참 후에 그가 입을 열었다. "두 가지의 경우인가. 하나는 상황이 호전되는 경우..." 케실리온의 계곡처럼 깊은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마지막 하나는 상황이 악화되는 경우. 가능성은 전자에 가깝겠지만 아직까지는 단정지을 수 없군. 좀 더 상황을 지켜보도록 하지. 이제 시간이 많이 남을 테니 수련이나 하도록." 케실리온의 눈동자가 이루린의 허리춤에 차여져 있는 검, 가우드로 향했다. 이루린은 가우드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언제 쯤이면 마력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일까. 케실리온의 말처럼 그녀는 자신의 상황이 호전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만약에 그렇다면 빠른 시일 내에 마력을 되찾을 수 있을 테니까.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 오겠어. 지도나 해 줘." 이루린은 말하면서도 내심 그가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는 말을 꺼낼까봐 불안했다. 만약에 그가 지금 그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그녀는 영영 자신이 했던 그 말을 완전히 묻어버릴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얼른 케실리온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이만..." 이루린은 얼른 고개를 돌려서 빠른 속도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나 케실리온의 느릿느릿한 말이 그녀의 발을 붙잡았다. "서류 한 묶음 추가." 이루린은 속으로 뜨끔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최대한 인상을 펴려고 애쓰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곤 태연하게 보이려고 노력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가 자르듯이 말했다. "부르는 게 값일 텐데." "......" 그는 손가락으로 마침 나무 기둥 옆에 있는 어마어마한 서류 묶음을 가리켰다. 이루린은 속에서 희망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면서 그것을 망연자실하게 응시했다. 그리고 경거망동하게 그 말을 한 사실을 엄청 후회했다. `믿은 내가 바보지. 케실리온이라면 평생 시키고도 남아.` 기분이 결코 좋을 리 없었지만 이루린은 희망에 가득찬 미소를 지으며 - 굉장히 과장된 - 친근하게 물었다. "당연히 이것으로 끝이겠지?" "글쎄, 과연." "......" 그의 간단한 말은 그녀의 속이 타들어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결국 이루린은 쓰게 웃으면서 비장의 수법을 쓰기로 했다. 그녀는 케실리온을 노려보면서, 품 속에서 동양 카드를 천천히 꺼냈다. 케실리온이 항상 눕던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거렸다. 강한 햇살이 보석처럼 나뭇잎 사이에 박혀서 눈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늘에 있었기 때문인지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그러나 몸에서는 열기가 마구 뿜어져 나왔다 . "이건 무효야!" 이루린은 동양 카드를 꺼내서 케실리온과 도박에 가까운 내기를 했다. 그녀가 이기면 해야 할 서류를 모두 무효로 돌리고 앞으로도 아무런 조건 없이 부탁을 들어주는 쪽으로 했다. 그러나 케실리온이 이기게 되면 그녀는 그가 서류에 관한 모든 것을 군소리 없이 해야만 했다. 마력을 되찾아도 말이다. 너무나도 위험성이 짙은 게임이었으나, 그녀가 했던 말을 무효로 돌리느 방법은 이것 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바로 케실리온의 실력이 케디아니스와는 비교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부진하는 듯 싶다가, 언젠가 그녀와 막상막하로 케실리온의 실력은 그녀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또 케디아니스는 심리적으로 당황하거나 화가 나면 얼굴에 표시가 나는데, 케실리온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표정을 읽고 카드를 내기란 불가능했다. `하지만 승리할 거야.` 이루린은 손에서 땀이 나는 것을 느끼면서 운명을 결정 지을 카드를 만지작 거렸다. 어떤 것을 내야 할지 고민했다. 피를 하나만 더 모으면 3점으로 끝이었다. 그녀는 케실리온의 표정 없는 얼굴을 힐끗 본 후에 결정적인 카드를 냈다. 그리고 그녀는 벌써부터 승리를 만끽하면서 카드를 뒤집었다. "악! 쌌잖아!" 판을 엎고 싶은 생각이 간절히 드는 그녀였다. 더 열받았던 것은 그 쌌던 카드 종류 중 하나를 케실리온이 쥐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묵묵히 카드를 내고는 이루린의 피를 가져가 버렸다. 그도 피를 하나만 더 모으면 3점이 되기 때문에 결국은 그녀가 패배하게 되었다. 갑자기 오기가 생기는 그녀였다. "지금까지는 연습이었어." 케실리온은 그런 그녀를 빤히 응시하더니, 아무 말도 하지 ?고 패를 섞기 시작했다. 연습이라는 그녀의 뻔한 수법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하지만 케실리온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절대로 그럴 마족은 아니었다. `몇 번이고 덤벼라, 이건가? 날 만만하게 보는군. 좋아, 내가 반드시 이겨 주지.` 그리하여 그녀는 다시 한 번 케실리온과 카드를 잡고 혈투를 벌였다. 그 결과는 역시 무참한 패배였다. 이루린은 자신이 내건 조건을 상기하면서 필사적으로 외쳤다. "삼 세 판이라는 거 몰라?" 그리하여 그녀는 다시 한 번 더 케실리온과 카드를 잡고 혈투를 벌였다. 그 결과는 또 역시 무참한 패배였다. 이후의 두 판도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이루린은 자신이 내건 조건을 상기하면서 필사적으로 외쳤다. "이번 판은 무효야! 내 카드 한 장이 없어." 이루린은 자신이 숨긴 카드가 있는 장소를 힐끗 본 후에 태연하게 굴었다. 케실리온은 그런 그녀를 묵묵히 보더니 다시 패를 섞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또 다시 한 번 더 케실리온과 카드를 잡고 혈투를 벌였다. 그 결과는 또 역시나 무참한 패배였다. 이루린은 자신이 내건 조건을 상기하면서 필사적으로 외치고 싶었다. "......" 그 때 그녀는 케실리온의 말을 듣고 경악했다. "추가로 네 번 해서 이겼으니 네 배로군." "뭐?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마지막 한 판이 진짜란 말야!'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습이란 말에 대꾸한 것은 아니지 않나." 기가 막히는 그녀였다. "그럼 패를 왜 섞었는데?" "이미 진행된 조건이 바뀌는 것 봤나. 난 변형된 조건에 합의한 적 없다. 단지 처음에 걸었던 조건을 받아들였을 뿐이고, 그 쪽이 몇 번만 한다는 제한을 걸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 둬야 할 이유는 없었을 텐데" "......" 이루린은 케실리온의 논리정연한 말에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 이루린에게 케실리온은 묵묵히 손가락으로 나무 기둥 옆에 세워져 있는 서류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배라고 했으니까 해야 할 양이 조금 더 많아지겠지." 이루린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서류를 응시했다. `신에게 버림 받았어. 아니면 신이 이 마족에게 권한을 떠넘긴 거야.` 밤이 깊었는데도 케디아니스는 자지 않고 홀로 6층의 작은 홀에 앉아 있었다. 이루린이 시끄럽게 군다는 이유를 ?아냈던 것이다. 그녀는 굉장히 기분이 좋지 않은 표정으로 어디서 들고 왔는지 엄청난 양의 종이를 들고 씨름하고 있었는데, 정작 케디아니스는 침대 위를 방방 뛰어다니면서 아주 시끄럽게 놀았던 게 화근이었다. 케디아니스는 자이언트 거미를 잡고 신나게 괴롭히고 있었다. 이루린에게 당했던 수모를 거미에게 모두 풀고 있었는데, 가장 재미있는 방법은 바로 거미의 다리를 하나씩 떼어버리는 것이었다. 꿈틀거리는 모습이 징그럽긴 했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거미가 괴로울 수 있다면 그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간 거미에게 당했던 수모를 - 특히 뷰리풀 - 생각하면 이가 갈리는 그였기 때문이었다. `죽을 뻔했던 때를 생각하면 정말... 이가 갈리지.` 케디아니스가 막 거미의 다리를 모두 떼어냈을 때, 갑자기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었다. 이윽고 그 소리는 케디아니스 바로 앞에서 멈췄다. "이루린 양의 방이 어딘지 알고 있나?" 처음보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흑색의 망토를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짧은 흑발에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그 남자는 허리를 숙이며 케디아니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케디아니스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경계했다. 젊어 보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함부로 굴 수 없는 느낌이 서려 있는 남자였기에, 케디아니스는 자신도 모르게 높여서 말했다. "바로 윗층에 있어요. 그런데 왜 찾는데요?" "별 것 아니란다." 웃으면서 몸을 세우는 남자를 케디아니스는 이상하게 응시했다. 이루린에게 사적으로 볼 일이 있는 남자인 것 같았다. 케디아니스는 날카로운 꼬챙이로 거미의 몸통을 뚫으면서 말했다. "계단으로 올라가면 홀이 나올 거예요. 거기에서 2시 방향으로 간 다음 복도의 끝에서 세 번째에 문에 있어요. 참고로 벽이 두 개니까 문도 두 개라는 건 알죠? 두 개 중에 횃불에 불이 붙여져 있는 쪽을 확인하고 들어가요." "고맙구나." 남자가 끝까지 사라지는 모습을 케디아니스는 아무 생각없이 응시했다. 밤이 얼마나 깊었는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서류를 끝내고 있는 이루린이었다. 속으로는 케실리온에게 저주를 내리고 또 내리면서. 그러다가 문득 그녀는 뒤로 돌아서 케디아니스가 잘 바구니를 응시했다. 바구니 속은 텅 비어 있었다. `왜 아직도 들어오지 않는 거지?` 이루린은 나중에 서류를 어느 정도 끝내고 나면 케디아니스를 붙잡아 오리라고 마음 먹었다. 한숨 돌리는 차원에서 펜을 놓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차에 갑자기 문에서 정적을 깨는 소리가 왔다. 이루린은 밖에서 떨면서 서 있을 손님의 모습이 케디아니스라고 생각했다. "케디아니스? 얼른 들어오지 못해!" 한참을 케디아니스가 들어오기를 기다렸으나, 이상하게도 문을 열리지 않았다. 이루린은 케디아니스가 밖에서 잠들었나, 하고 생각하면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 곳에는 그녀보다 키가 큰 낯선 남자가 서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이루린은 야심한 시각에 찾아온 남자에게 경계의 마음을 품을 수 밖에 없었다. "누구신지..." "언젠가 만나리라고 말하지 않았나, 이루린?" 특유의 느글느글한 말투에 이루린은 그가 누군지 대번에 생각났다. 일전에 첫날 연회장에 갔을 때 만났던 루시안이라고 하는 변태 마족이었다. 그 때 그녀는 그 마족을 마음껏 공격하지 못했던 게 한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지금은 마력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공격한다면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이루린이 마력을 가지고 있을 때도 힘에서 별로 밀리지 않은 마족이지 않은가. "사람 잘못 보셨군요." 이루린이 문을 세게 닫으려고 하자, 그가 재빨리 문이 닫히는 것을 막으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 이루린은 당황하면서도 위험하다는 생각에 다급하게 말했다. "마족이라고 했어요! 어쨌든 얼른 나가시죠!" 그제서야 그가 다시 특유의 느긋한 표정을 지으면서 안간힘을 쓰는 이루린의 손목을 잡고 강제로 안으로 밀었다. 그녀가 그를 밀어서 밖으로 내보내려고 했지만, 문은 그의 손에 의해 완전히 닫힌 후였다. 그는 그녀가 경계하면서 뒤로 물러나는 사이, 나지막하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놀랍게도 그의 발밑에 마법진이 생성되었다가 이윽고 사라졌다. 눈에 보이는 게 없었기 때문에 무슨 마법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이루린." 그가 천천히 발을 옮기기 시작하자, 이루린은 상황이 굉장히 위험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뒤를 힐끗 응시했다. 마침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잘만 한다면 창문으로 도망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6층에서 뛰어 내린다는 건 자살이나 다름 없어.` "기분 나쁘니까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그런데 마왕성 내에서는 마법 사용 금지일 텐데?" 이루린은 품 속에서 가우드를 꺼냈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차가운 검의 감촉이 긴장으로 인해 축축해진 손에 예민하게 잡혔다. 이 순간 마력을 쓸 수 있다면 창문으로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이루린이 검을 꺼내면서 점점 뒤로 물러나자, 잠시 그 검을 응시하던 루시안의 눈동자가 가늘어지면서 이윽고 입가에 미소가 피어 올랐다. "굉장히 좋은 검이로군. 하지만 네게는 어울리지 않아." 이루린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창문을 열려고 했다. 밑에 누군가가 있다면 무모하게라도 마법을 써달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이상한 벽 때문에 창문을 열 수 없었다. 순간 그녀는 당황하면서 손으로 투명한 벽을 미친듯이 두드렸다. 그리고 급기야는 소리를 질렀다. "아무도 없어요? 도와주세요! 거기 누구 없나요? 귀가 먹었어? 대답 좀 해 보란 말야!" 그 때 뒤에서 그런 이루린을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공간에 있는 자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지. 그리고 창문으로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한 결계이기도 하다." 갑자기 루시안이란 마족이 그녀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그녀는 소리를 지르는 데 집중한 나머지 당황하면서 검을 세웠다. 그 또한 품 속에서 검을 빼들었다. 순간 두 검이 격돌했다- "윽!" 신음 소리를 낸 것은 다름아닌 이루린이었다. 루시안의 강한 힘 때문에 그녀의 검이 큰 타격을 받아 고스란히 몸에 전달된 것이었다. 루시안은 느긋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가볍게 힘을 주었다. 순간 그녀의 검이 흔들리면서, 점점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어차피 내 것이 될 바에야, 이렇게 저항할 필요는 없을 텐데." 루시안의 말에 놀란 이루린은 순간적으로 힘을 내서 검을 쳐냈다. 그리고는 재빨리 침대 위로 올라갔다. "단단히 미쳤군. 난 너 따위하고는 상종 안 해." 루시안이 침대 아래에서 조소하면서 가만히 서 있자, 이루린은 재빨리 문 쪽으로 향했다. 혹시나 문은 열리지 않을까 하는 심정애서였다. 그러나 문에도 결계가 쳐져 있어서 나갈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루시안은 여유가 넘치는 듯, 검을 이루린에게 겨누면서 문으로 걸어왔다.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군. 연약한 힘만을 소유하고 있는 마족이라... 제압하기가 상당히 쉽겠군." 도망칠 곳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루린은, 검으로 아예 승부를 내기로 마음 먹었다. 이 결계를 없애려면 저 마족을 죽이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긴장이 되기는 처음이었다. 이루린은 검을 세우고 루시안에게 달려들었다. 루시안은 여전히 여유만만한 태도로 그녀를 응시하더니, 곧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루시안의 검을 살짝 피한 후에 그의 어깨를 공략했다. 그러나 그는 가볍게 그녀의 검을 피해버렸고, 그 이후의 공격들도 모조리 피해버렸다. 복부, 다리, 허벅지, 가슴, 목, 팔, 등 거의 모든 부분을 공격해도 그는 매우 간단하게 피해버렸던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다 보니 자연히 숨이 거칠어지는 그녀였다. 그녀는 땀을 훔친 후에 후들거리는 팔에 힘을 주면서 그를 응시했다. `마력이 없으면 불가능해.` 단순히 검술만 가지고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공격하지 않으면 그의 손에 잡히게 될 것이기 때문에 멈출 수도 없었다. 이루린은 숨을 추스른 후에 - 그 시간에도 루시안은 그녀에게 공격하지 않았다. 한 번 해 보라는 태도였다. - 검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그의 복부를 향해 몸을 숙이면서 허벅지를 향해 수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표정이 진지해지더니, 갑자기 엄청난 힘으로 그녀의 검을 쳐버렸다. 순간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았고, 검은 원을 그리며 빠른 속도로 어디론가 날아가다가 바닥에 박혔다. 박힐 정도로 강한 힘이었기에 그녀는 당연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검을 빼려고 움직이는 순간, 팔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다. "이 손 놔!" 그녀는 루시안이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 막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느 새 그는 그녀의 몸에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그녀가 거칠게 저항해도 그의 손은 마치 강철 같아 소용없었다. 누군가가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는 차가운 손이 자신의 허벅지를 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격렬하게 몸부림을 쳤다. 속에서 무엇인가를 이루고 싶은 강한 욕구가 샘솟았다. 마력이 있었다면 이런 수모를 겪지 않을 텐데. 마력만 있었다면! 그 때였다. 순간 그녀의 몸으로 익숙한 느낌이 폭발적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느낌으로 인해, 바닥에 박혀 있던 검이 기계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바닥에 박혀 있던 검이 그녀에게로 빠르게 날아오기 시작했다. `마력이...` 마왕의아내-36 동거 생활 "이런, 이런. 검을 쓰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루시안은 기분 나쁘게 웃으면서 그녀에게로 날아오고 있는 검을 재빨리 쳐냈다. 그 순간 이루린의 몸 속에 흐르던 마력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졌다. 이루린은 혹시나 마력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을 집중해 보았다. 그러나 예전처럼 마력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케디아니스는 잘 시간이 되어도 이루린이 자신을 부르지 않자 무척이나 이상하게 생각했다. 아무리 서류를 오랫동안 붙잡고 있어도 그렇지, 추운 밤에 내버려 둔다는 건 - 사실 마계의 낮과 밤의 온도 차이는 매우 극심했다. -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케디아니스는 거미를 내버려 두고 6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이루린이 있을 방으로 다가가서 문에다가 귀를 댔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케디아니스는 그녀가 자신을 부르는 것을 잊고 자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 열어줘." "......" "이제 조용히 한다니까." "......" 케디아니스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안에서는 역시 대답이 없었다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케디아니스는, 더욱 더 세게 문을 두드렸다. 소리가 6층 복도에 다 울릴 정도로.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손잡이는 단단히 잠겨져 있어 열리지 않았다. "서류를 처리하다가 죽었어?" "......" "장난치는 거지?" 점점 더 그 불안한 느낌은 가속화되었다. 그는 설마하는 심정으로 주문을 외우려고 하다가, 방 안에서 뭔가가 강력한 느낌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곤 멈칫했다. 그가 풀지도 못할 엄청나게 높은 수준의 마법이 쳐져 있는 것 같았다. 이루린에게 마력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부술 기세로 문을 두드렸다. "이루린!" 느낌이 좋지 않았다. 방 안에서 분명히 그녀의 신변을 위협하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순간 케디아니스의 머릿속으로 단 한 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라면 이루린의 방에 쳐져 있는 마법을 풀어줄 것이다. `군주!` 데이비드는 군주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군주는 항상 그렇듯이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7층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는 군주의 하루 일과가 적혀 있는 서류를 넘기면서 사무적인 투로 말했다. "이제 새벽 회의만 남았습니다. 새벽 회의에서는 현재 마계에 자주 출몰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문제를 다루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때였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키가 작은 소년이었다. 그는 매우 다급한 듯 숨을 몰아쉬면서 목에서 소리를 쥐어 짜내듯이 말했다. "위험해요. 이루린이... 이루린이!" 데이비드는 소년이 그 유명한 케디아니스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군주의 망토를 잡고 끌어 당기려고 하자, 데이비드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엄하게 말했다. "무례하게 무슨 짓이냐? 그리고 이런 야심한 시각에..." 군주가 조용히 그를 향해 손을 들었다. 데이비드는 더 말하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어야만 했다. 군주가 데이비드를 응시하면서 빠르게 말했다. "그 서류는 내 방에 갖다 놓도록. 잠시 어딘가에 볼 일이 있으니." "하지만..." 데이비드는 더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케디아니스와 군주의 모습은 이미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그는 케디아니스가 무슨 말을 했는지 떠올리려고 애쓰며 막막한 심정으로 서 있었다. `내가 이대로 당할 것 같아?` 일단 이루린은 격렬하게 몸부림을 치는 것을 그만 두었다. 공격하고 싶은 마음에 몸에서 경련이 일었지만 그녀는 그가 하는 데로 꾹 참고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면서 그를 차갑게 응시했다. 그리고 말했다. "왜 내게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루시안은 웃으면서 그녀의 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거기에는 아주 긴 사연이 있지. 들려주길 바라나?" 순간적으로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루시안의 손이 느슨해졌다. 그녀는 그 기회를 노려 재빨리 팔을 뺀 후에 구두 굽으로 그의 다리를 세게 밟았다. 그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확인한 이루린은 몸을 일으켜서 그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방심은 금물이지, 안 그래?" 루시안이 몸을 털면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일어서면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제법이로군..." 이루린은 문 근처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는 검을 응시했다. 마법을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이기고 싶다는 마음과 합쳐져서인지 그녀의 소망이 간절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아까 전과 마찬가지로 몸에서 미약한 마력이 일었다. 그녀는 놀랐지만 루시안의 시선 때문에 그리 내색하지 않았다. "이제 대려가는 게 좋겠군, 이루린. 원하는 대로 슬슬 장난은 그만 두도록 하지." 그 말에 이루린은 몸이 자연히 긴장으로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루시안이 손을 모으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도 마법을 쓰고 싶었으나 아는 주문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가 당황하는 사이, 루시안의 주변으로 생성된 거대한 마법진이 사라졌다. 어느 덧 그의 손에는 거대한 불구덩이가 폭발할 듯이 떠 있었다. 그 불구덩이는 굉장히 컸기에 그녀는 자연히 뒤로 물러섰다. "끝이다." 그가 몇 마디 더 중얼거라지 거대한 불구덩이가 그녀에게로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그녀는 자신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눈을 감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시 한 번 더 가우드가 자신에게로 날아왔으면 하고 간절히 바랬다. 잠시 후, 엄청난 폭발음이 실내를 뒤흔들었다. 그녀는 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로 몸을 바닥으로 숙였다. 폭발음이 잠잠해지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방 안이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흡사 폭격을 맞은 듯한 광경이었다. 두 쪽이 나 있는 침대와 완전히 불에 그을리거나 부서진 가구들, 그리고 바닥에 흩어져 있는 몇 몇의 물건들. 도저히 살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다 부서졌는데 난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이루린은 앞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놀랍게도 검이 스스로 날아와서는 그녀 앞에 세로로 둥둥 떠 있었던 것이다. 그 검에서는 미약하게 빛이 일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 빛이 방어의 한 종류라고 생각했다. `신기하군. 검이 어떻게 제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거지?` 이루린은 검이 빛을 잃고 바닥에 다시 놓이는 것을 응시했다. 그러던 차에 루시안의 목소리가 그녀의 의식을 상황에 맞게 돌아오도록 만들었다. 루시안은 매우 날카롭게 가우드를 응시했다. "그 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군. 마법을 쓰면 막아준다는 건가? 좋아, 그럼 마법을 쓰지 않고 무력으로 해결하도록 하지." 루시안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번졌다. 순간 불길한 마음이 든 이루린은, 검게 그을려져 있는 가구들 사이를 지나치면서 뛰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가구에 걸려 넘어졌기에 곧 루시안에게 잡힐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그녀의 손목이 부러질 정도로 세게 잡고서는, 강제로 일으켰다. 손목에서 오는 고통 때문에 그녀는 심하게 몸부림을 쳤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몸에서 점점 감각이 없어지면서, 이윽고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어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루시안에게 안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지... 이러면 안 돼.` 이루린은 힙겹게 말했다. "지금 내게 무슨 술수를... 부린 거지?" "마취향이 효과가 있긴 하군." 그의 웃음소리가 그녀의 귀에 몽롱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지금 꿈 속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력을 끌어 올려 보려고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또 사라진 것 같았다. 그 때였다. 갑자기 뭔가가 사라지는 듯한 소리가 그녀의 귀에 날카롭게 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시야가 흐릿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 남자가 흑발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눈을 흐릿하게 뜨고 다시 보니 이번에는 확실하게 보였다. "군주...` 그 순간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마왕의아내-37 동거 생활 케디아니스는 이루린이 정말로 위험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그가 처음 보는 이상한 남자에게 잡혀 있었는데, 이루린을 기절하게 만든 것으로 보아 하니 굉장히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케디아니스는 이루린에게 달려가려고 했으나, 군주가 자신의 팔을 잡는 바람에 갈 수 없었다. 그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군주를 응시했다. 그 때 남자에게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불청객이 둘 씩이나." 군주가 앞으로 천천히 나서며 차갑게 말했다. "쓸데 없는 짓을 하고 있다고 봐도 되겠나, 루시안." 루시안이라고 불리우는 남자의 입가에 의미 모를 미소가 걸렸다. 그는 손가락으로 이루린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저도 처음에는 이루린을 보고서 놀랐습니다. 성격은 딴판인데 얼굴은 이렇게 생겼으니... 마치 몇 백년 전을 보는 것 같군..." 케디아니스는 루시안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때 군주가 위압적인 태도로 검을 반쯤 빼들었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귀에 조용히 들려왔다. "내가 지금 어떻게 하리라고 생각하나." 루시안의 얼굴에서 드디어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굳어진 표정으로 군주를 응시하다가, 다시 기절해 있는 이루린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더니 이루린을 바닥에 드러 눕게 한 다음, 군주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좋습니다, 저도 이 자리에서 죽기는 싫습니다. 하지만 기회가 있겠지요..." 루시안은 다시 묘한 미소를 띄더니 이루린을 한참 응시했다. 이윽고 그는 마법을 이용해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제서야 군주가 자신의 팔을 놓자, 케디아니스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루린에게 달려갔다. "이루린? 이루린!" 그는 이루린을 흔들었으나 그녀는 깨어날 줄 몰랐다. 다시 군주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으나, 이미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케디아니스는 혹시나 이루린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하기만 했다. 매일 이를 갈고 틈만 나면 공격할 만큼 사이가 좋지 않은 이루린에 대해 걱정하는 마음을 품는 게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그는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바로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이루린의 모습과 어머니가 죽었을 때의 모습이 겹쳐 보였던 것이다... 이루린은 배에서 극심한 압력이 느껴지는 견디지 못해 일어났다. 그녀는 처음에 자신이 이 곳에 왜 누워 있는지, 그리고 이 곳이 어디인지 몰라 한참 머리를 흔들었다. 정신이 차차 돌아오고 난 후에야 그녀는 이 곳에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전쟁인가..." 폐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부서져 있는 가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는 케디아니스의 머리가 자신의 배에 얹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인상을 썼다. 그래서 배가 아파왔던 것 같았다. "머리가 왜 이리 무거워? 케디아니스! 얼른 일어나."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는 하늘을 응시한 이루린은 케디아니스의 머리를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이 깨져 있어서인지 찬바람이 쌩쌩 불어들어오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혹독한 추위 때문에 얼어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큰일이네. 아이나가 남은 방이 이제 없다고 했는데..." 졸지에 집을 잃은 거지 신세가 된 이루린은 막막하게 한숨을 쉬다가 책상 근처를 응시했다. 책상 위에 전혀 찢어지지 않고 깨끗하게 쌓여 있는 서류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이루린은 할 말을 잃었다. 어째서 다른 가구들은 모두 부서졌는데 책상은 부서지지 않았단 말인가. 그리고 왜 서류는 정상적으로 가지런히 쌓여져 있단 말인가.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 이루린이었다. 이루린은 다음에 루시안이 공격하러 오면 그 때는 책상 옆에 서 있으리라고 단단히 마음 먹으면서 케디아니스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가 일어나지 않자, 그녀는 동요를 이용한 노래를 불러서 깨워주기로 마음 먹었다. "거미야, 거미야. 이리 기어오너라. 호랑 거미 흰 거미, 이리 기어..." 그녀의 예상대로 케디아니스가 벌떡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방금 굉장히 소름끼치는 소리를 들을 것 같은데... 뭐였지?" 그는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인상을 쓰다가, 이윽고 이루린을 보더니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언제 일어났어?" 이루린은 케디아니스가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면서 말했다. "네 머리가 내 배를 살해하려고 하는 순간에." 그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미안." 이루린은 서류를 챙긴 다음 케디아니스에게 걱정스럽게 말했다. "방이 없으니 어디에서 자지?" 케디아니스는 심각하게 한숨을 쉬며 부서진 바구니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어서 바람이 불어 들어오고 있는 깨진 창문을 응시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이루린은 케디아니스를 끌고 마왕성 공터로 나갔다. 바로 케실리온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 ".... 그래서 당분간 신세를 지고 싶어." 이루린은 케실리온에게 서류를 들이밀면서 무언의 침묵을 지켰다. 케디아니스는 굉장히 불만에 가득 찬 표정으로 서 있었지만, 그도 잘 곳이 없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케실리온은 나무에서 내려오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장 서서 걸었다. 이루린은 케디아니스와 서로 눈을 마주치면서 묵묵히 걸었다. 케실리온이 나지막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식지를 잃은 기생충 두 마리가 방에 추가 되는군." 케디아니스가 케실리온의 뒤를 바싹 따라가며 외쳤다. "난 기생충이 아냐!" 이루린은 그런 케디아니스의 어깨를 잡고 뒤로 당기면서 말했다. "엄밀히 따지면 너나, 나나 기생충 맞아." 케디아니스가 뭐라고 더 말하려고 하자, 이루린이 재빨리 속삭였다. "쫓겨 나고 싶어? 얼어 죽고 싶은 거야?" "......" 이루린의 이 말에 케디아니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걷기만 했다. 이루린 또한 화가 났지만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걷기만 했다. 최소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는 것은 면해야 하지 않겠는가. 케실리온의 방은 놀랍게도 이루린이 있는 곳 바로 윗층인 7층에 있었다. 그의 방은 본 순간 케디아니스는 삭막한 공기에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고, 그것은 이루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의 방은 그녀의 방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가구였다. 케실리온의 방에 있는 가구들은 성격에 걸맞게 장식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볼 수가 없었다. 냉랭한 기운이 돌고 있기는 했지만 색깔의 배치가 절묘하게 이루어져 어느 정도는 아늑했다. "음, 적어도 전에 지냈던 방보다는 마음에 드는데?" 이루린은 그제서야 케디아니스가 소년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적어도 케디아니스에게는, 이루린의 방같은 여성 취향보다는 케실리온의 방같은 남성 취향이 맞을 것이다. 그가 침대 위에 올라가서 뛰어 놀고 있는 차에, 이루린은 케실리온의 뒷모습을 보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의 생활이 막막하기만 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긴 했으나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침대가 하나잖아." 마왕의아내-38 동거 생활 케실리온이 하루종일 밖에 나가 있는 사이, 이루린은 케디아니스와 노닥거리며 할 일 없이 빈둥거렸다. 서류를 처리해야 한다는 마음이 앞서긴 했지만 오늘 하루는 그냥 보내기로 했다. 마음이 편치 않아서 제대로 뭔가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침대 사이에 발목이 끼었어!" 비명을 지르는 케디아니스를 무시한 채, 이루린은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그가 방에 들어오면 뭐라고 말할 것인가. 침대의 주인이니 바닥에서 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바닥에서 잔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윽고 밤이 깊어가고 새벽이 찾아왔다. 케디아니스는 그녀가 낮에 구해 온 바구니에 들어가서 이불을 덮어 쓰고 자고 있었다. 그가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이루린은 자신도 케실리온의 침대에 누웠다. 그냥 자고 있으면 알아서 할 것이라고 생각한 이루린은 - 사실은 바닥으로 쫓겨나기 싫었다. - 얼른 침대에 누웠다. 그 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가슴이 아래로 내려 앉는 느낌을 받았다. 어둠 속에서 흑발을 지닌 남자가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이루린은 그가 케실리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는 척을 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그는 잠시 이루린에게 시선을 두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상의를 갈아 입기 시작했다. 다 갈아 입은 후에 그는 침대로 다가왔고, 이루린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숨죽이고 가만히 있었다. 이윽고 케실리온이 침대 위로 올라오자, 이루린은 최대한 창가 쪽으로 몸을 밀착시켰다. 순간 이루린은 자신이 그와 이렇게 가까이 앉아 본 적은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케실리온이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루린은 완전히 누운 후에 이불을 몸 위로 끌어 올리며 말했다. "침대 밑으로 내려가라고?" "...말과 행동이 다르군." 그는 그 이후에도 그녀를 한참 응시하다가 이윽고 침대 위에 누웠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순순히 침대 위에서 자도록 무언의 허락을 하는 그의 태도가 신기하기만 한 그녀였다. 그녀의 예상대로라면 케실리온과 침대 하나를 놓고 사투를 벌이고도 남을 상황이 벌어졌어야 했다. 어쨌든 그녀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새벽 내내 침대가 좁아서 그의 팔이 자신의 팔에 닿았다. 게다가 추운 바람에 케실리온과 붙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예상 외로 그의 등은 굉장히 따뜻했기에, 그녀는 될 수 있으면 그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이루린은 케디아니스를 꽉 껴안으면서 즐겁게 놀았다. 그녀가 있는 곳은 꽃이 형형색색의 꽃이 화려하게 만발하고 있는 봄철의 장소였다. 그런데 그의 몸은 이상하게도 부피감이 있었다. 그 때였다. 갑자기 장면이 바뀌면서, 그녀는 자신이 낯선 곳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옷은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푸를 예기를 띄고 있는 가우드 또한 피로 붉게 변해 있었다. 발 아래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서 죽어 있었다. 검사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그녀에게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피를 흘리면서도 악착같이 구는 이들에게, 이루린은 잔혹하게 검을 휘둘러서 죽여버렸다. 이루린 자신도 경악할 만큼 빠르고 강한 검술이었다. 그녀는 멈추고 싶었으나 몸은 제멋대로 움직이면서 많은 이들을 학살해 나갔다. 그들의 모습은 상상도 하기 싫을 정도로 끔찍했다. 이윽고 행동을 멈추었을 때 그녀는 황량한 바람을 등지고서 홀로 서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제멋대로 말이 튀어 나왔다. [다 처리했어.] 누군가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긴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였는데, 흐려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돌아갈 시간인 것 같아. 그렇지 않아도 빨리 돌아오라는 전갈이 있었어.] 이루린은 가우드를 검 속에 집어 넣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안개가 낀 것처럼 흐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 전멸인가?] 그 남자가 다소 걱정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난 너와 그 자를 보면 정말 놀랍다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 능력이 너무 두려워.] 이루린은 환멸에 가까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난 이 전쟁을 끝내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마계로 가야겠지.] [마계에는 가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현재 마계는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태이니까. 소문에 의하면 현 마왕의 아들이 대단한 검술 실력을 구사한다고 하던데. 아직 어리기야 하겠지만...] 이루린은 딱 잘라서 말했다. [상관없어. 난 어서 이 전쟁을 끝내고 싶을 뿐이야. 그건 그렇고 예카트레스는?] [벌써 돌아갔을 거야.] 갑자기 이루린은 가우드를 다시 뽑아서 자세를 취했다. 그것은 눈 앞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가우드의 푸른 빛이 더욱 차갑게 타올랐다. [돌아가긴 글렀군. 아직 처리해야 할 것들이 남았어.] 이루린은 주위에서 일어서고 있는 사람들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그리고 이윽고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친듯이, 인정사정 봐 주지 않고 검으로 베어 나갔다... 순식간에 그녀는 다시 피를 뒤집어 썼다... 이루린은 눈을 번쩍 떴다. 등에서 식은 땀이 차갑게 흘러서 온 몸을 전율로 떨게 만들었다. 생생할 만큼 잔혹하고 충격적인 영상이 사진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잔혹하게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이 눈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이, 이런..." 이루린은 몸에 따스한 기운이 전달되자, 자신이 케실리온의 몸을 껴안고 있었다는 사실을 금새 알아차렸다. - 분명히 꿈에서는 케디아니스를 안고 있었는데.- 평소 같았으면 황급히 팔을 놓고 침대 위에서 내려 오는 게 정상이었으나, 방금 전에 꾸었던 꿈 때문에 팔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히 악몽이었어. 그런데 잘 생각나지 않아...` 이루린은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끼면서 인상을 썼다. 확실하게 기억나는 것은 꿈 속에서 자신이 가우드를 들고 서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 춤에 채워둔 가우드를 응시했다. 어쩌면 방금 꾼 꿈은 가우드의 기억일지도 몰랐다. 자기의 옛 주인과의 기억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 밖은 새벽이었기에, 이루린은 좀 더 잠을 자기로 마음먹었다. 케디아니스는 잠에서 깨어나서 눈을 반쯤 뜨고 일어났다. 그리고 막 기지개를 펴고 주위를 둘러보던 찰나, 그는 하마터면 침대를 보고 짧게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케실리온과 이루린이 너무나도 가까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케실리온은 가만히 누워 있는데 이루린이 그의 상반신을 껴안고 있었다. 케디아니스는 그것을 응시하다가, 갑자기 창가로 새가 날아들자 깜짝 놀랬다. 마왕성의 정찰새라고도 할 수 있는 마물 로우였다. 거대한 몸집의 로우의 입에는 작은 편지 있었다. 케디아니스는 잠시 로우의 매서운 눈을 경계하듯이 응시하다가, 편지를 빼내서 폈다. 그리고 그것을 읽었다. [4일 해가 뜰 때 각 파트너와 정문으로 나오기 바람. 두 번째 관문이 기다리고 있음. 이 번 관문은 마왕성 밖으로의 짧은 여행이 되겠음. 자세한 규칙은 정문으로 나오면 설명하겠음. 안 나오면 국물도 없음.] 케디아니스는 편지를 내려 놓고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창가에 로우가 날아가지 않고 가만히 케디아니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케디아니스는 그런 로우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편지를 다시 달라는 거야?" 로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까악! 깍!" 로우는 날개를 펄럭이면서 입을 연신 벌렸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릉 후에야 케디아니스는 그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창가에 가서 아래를 응시했다. 그런 다음 거미 구덩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로우는 아주 빠른 동작으로 아래로 하강했다. "어쨌든 그건 그렇고." 케디아니스는 이루린과 케실리온을 응시하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루린에게 가볍게 보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는 이루린의 입술과 케실리온의 입술이 많이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붙여 둬야지. 깨어 났을 때의 반응이 궁금하군.` 마왕의아내-39 마왕성 밖으로 "어디 한 번 느껴 보라구. 키스하는 기분을." 케디아니스는 악마의 미소를 지으면서 침대 위로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그리고 두 손으로 이루린과 케실리온이 자고 있는지 확인한 다음 두 손으로 이루린의 머리를 살며시 잡았다. 그런데 그 때였다. "으음... 케디아니스." 이루린이 갑자기 중얼거리더니 손을 뻗어서 케디아니스의 목을 감은 것이다. 그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해 의해 침대에 눕게 되었다. 그는 너무 놀라서 당황한 나머지 심하게 몸부림을 치려고 했으나, 이루린이 갑자기 자신을 꼭 끌어안자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케디아니스... 맛있어?" 그녀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케디아니스는 비로소 그녀가 아직도 잠꼬대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에서 빠져 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워낙 이루린이 자신을 단단히 껴안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이루린은 과일이 마구 열려 있는 곳에서 케디아니스와 소풍을 즐기고 있었다. 케디아니스는 그녀가 따준 과일을 먹으면서 행복하다는 듯이 웃고 있었고, 이루린 또한 붉은 과일을 맛있게 먹으면서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평화로움 속에서, 아무도 그들을 방해하지 않았다. `케디아니스, 뭐 먹고 싶은 것 없어?` `저걸 줘.` 케디아니스가 손가락으로 이루린의 뒤에 있는 노란 과일을 가르켰다. 이루린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알았어.` 케디아니스는 창문으로 거미가 허공에 떠서 내려오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거미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를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그 거미는 작게 열려 있는 창문을 비집고 들어오더니, 이윽고 벽을 타고 이루린의 근처로 향했다. 그 때였다. 갑자기 이루린이 한 손을 뒤로 뻗더니 거미를 잡는 것이 아닌가. 경악스럽게도 그녀는 그 거미를 케디아니스의 입 속에 재빨리 넣었다. 케디아니스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놀라면서 미친듯이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그녀의 나머지 팔에 깔려서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맛있지? 케디아니스..." "욱!욱!" 케디아니스는 거미가 입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이루린의 팔을 치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케디아니스가 뱉으려고 하면 오히려 더 힘을 주어서 그의 입 속에 밀어 넣었다. 케디아니스는 정신을 잃을 것 같아 미칠 지경이었다. "멋지군." 케디아니스는 눈으로 겨우 케실리온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일어나서 옷을 갈아 입고 있었는데, 케디아니스를 도울 생각을 눈꼽 만큼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는 아무래도 케디아니스가 하려고 했던 짓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케실리온이 나간 후에 케디아니스는 정신을 잃었다. 후에 그는 `거미의 맛`에 대해 10장 이상이나 서술할 수 있게 되었다. 마왕성 정문. 이루린은 마왕성 밖을 여행할 수 있다는 기쁨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반면에 케디아니스는 두 번째 경기가 시작될 때까지 오랜 시간 동안 창백한 얼굴로 연신 입을 가리면서 헛구역질을 했다. 이루린은 당연히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유를 물을 때면 케디아니스가 신경질을 부리며 날뛰곤 했던 것이다. 이루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엘리세아를 비롯한 여러 마족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누군가가 작은 통을 - 대회 때 사용했던 - 들고 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각 여성 마족들에게 다가서며 통에서 종이를 하나씩 집으라고 명령했다. 이루린도 통에서 종이를 하나 꺼냈다. 그는 여성 마족들이 모두 작은 종이를 들고서 펼친 사이 엄격한 투로 말했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그 종이에 적힌 곳으로 가야 한다. 소요 시간은 약 3일이고, 해가 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한다. 그 종이에는 도달해야 할 장소와 가져와야 할 물건이 적혀 있다. 물건은 얻기란 쉽지 않을 것이디 각별히 유의하도록." 이루린은 종이를 펴서 케디아니스와 읽어 보았다. "파르텐 신전, 리베라." 케디아니스가 비명을 질렀다. "리베라는 악마의 꽃이잖아! 구하기가 힘들텐데..." 설명을 하고 있는 마족이 날카롭게 케디아니스를 향해 지적했다. "거기! 조용히 하도록!" 케디아니스가 입을 다물자 그 마족이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도나 책을 들고 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처음에 네 갈래의 길이 나온다.." 그는 각 길에 가야 할 마족을 지정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엘리세아와 이루린은 두 번째 길을 가도록. 이상이니 지금 출발해라." 그 말이 마쳐지자 해가 산에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마족들이 모두 있을 때, 엘리세아가 이루린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열심히 해요. 서로 정정당당하게 행동하자구요. 이루린 양도 그게 좋죠?" 다른 마족이 옆에서 말했다. "엘리세아 양은 친절하시군요." 엘리세아가 수줍은 듯이 얼굴을 붉히며 - 이루린의 눈에는 그게 무척이나 가증스러워 보였다. - 상냥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당연한 말을 한 것 뿐이랍니다." 마왕성 입구를 나서자 마자, 여성 마족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신속하게 흩어졌다. 모두들 길이 다른 모양이었다. 마왕성 입구를 지나자, 이루린은 새로운 기분을 느꼈다. 항상 마왕성 안에 갖혀서 살았던 탓이었다. 마왕성 밖에는 숲이 주를 이루고 있어 마을의 모습 대신에 사방으로 울창한 나무들이 눈에 띄었다. 아무도 없는 사이 엘리세아가 앞서가며 독하게 말했다. "그렇게 서로 맞지 않아서 잘 갈 수 있을까나? 바보같은 팀이로군? 1등은 우리가 하겠어." 엘리세아는 자신만만하게 그녀를 향해 비웃어준 후에 앞질러서 걷기 시작했다. 이루린은 돌변한 그녀의 태도에 화가 나는 것을 느끼고 한 마디 하려고 했으나, 이미 엘리세아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엘리세아는 한참 걷다가 두 갈래가 나오는 것을 깨닫곤 멈춰섰다.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지점에 거대한 나무 화살표가 세워져 있었다. 그것은 왼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엘리세아는 자신의 드래곤과 시선을 교환하며 교활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 다음 왼쪽으로 가리키고 있는 표지판을 오른쪽으로 향하게 했다. 많은 마족들이 오랫동안 가기 두려워하고 있는 길이었기에, 오른쪽 길은 왼쪽 길과는 확연히 분위기가 틀렸다. `그 길로 들어서서 살아 남은 자는 단 한 명도 없지.` 엘리세아는 시체와 유령, 마물들로 들끓는 그 곳에 대해 딱 한 번 소문을 들을 적 있었다. 서열 10위 이내의 한 마족이 그 곳으로 들어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어느날 마왕성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말이다. 그 곳에 어떤 강력한 존재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넌 죽어야 해, 이루린. 난 네가 정말로 싫어.` 엘리세아는 마음껏 웃으면서 이루린이 있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가급적이면 이루린이 시체로 발견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니면 이루린이 고통 속에서 죽어가거나. 그녀는 왼쪽으로 향했다. 케디아니스는 이루린과 함께 두 갈래로 갈라지는 지점에 섰다. 화살표가 오른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른쪽 길은 이상하게도 안개가 끼여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오른쪽 길로 향했다. 서로 묵묵히 주변만을 살피며 걷다가, 이루린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진 것을 깨달은 케디아니스가 물었다. "왜 그래?" 그녀는 주위를 살피며 날카롭게 말했다. "느낌이 좋지 않아." "뭐?" "윽...!" 갑자기 그녀가 인상을 쓰더니 손으로 가슴 부근의 옷자락을 쥐었다. 케디아니스는 그런 그녀를 향해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무것도 아냐." 이루린의 표정이 마치 장난이었다는 것처럼 밝아졌다. 케디아니스는 그런 이루린에게 이상한 느낌을 가졌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잠시 후, 케디아니스는 정말로 심상치 않은 기운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십 개의 발자국 소리가 느릿하지만 점점 강하게 들려오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케디아니스가 이루린은 응시했다. 그녀 또한 케디아니스를 불길하다는 눈동자로 응시했다. 그녀가 쓰게 웃으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 새 그녀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다 해치울 수 없겠지?" 케디아니스 역시 쓰게 웃으면서 검을 뽑았다. "당연히. 그런데 정말로 이 길이 맞는지 의심스러워." "정확하게 몇 마리 쯤?" 케디아니스는 침을 목구멍 뒤로 삼키며 말했다. "최소한 300마리 이상. 최대로 잡으면 500마리 정도. " 이루린과 케디아니스를 잠시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짧은 침묵이 흐른 후, 케디아니스와 이루린은 동시에 외쳤다. "뛰어!" 그 순간 엄청난 숫자의 마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왕의아내-40 마왕성 밖으로 이루린과 케디아니스를 잠시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짧은 침묵이 흐른 후, 케디아니스와 이루린은 동시에 외쳤다. "뛰어!" 그 순간 엄청난 숫자의 마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루린과 케디아니스는 미친듯이 달렸다. 위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물들이 안개를 뚫고 그녀와 케디아니스를 쫓아서 내려오고 있었다. 길은 아래로 뻗어 있었는데 급경사여서 힘을 조절하려고 해도 제대로 멈춰지지 않았다. 케디아니스가 달리면서 외쳤다. "조심해, 앞에도 있어!" 중간 중간에 튀어나와서 그녀를 곤혹스럽게 하는 마물들이 도끼눈을 치켜 뜨고서 위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루린과 케디아니스는 거의 동시에 검을 휘두르면서 마물들을 쓰러뜨렸다. 대체적으로 달리면서 가속화된 이루린의 검에 모두들 속수무책이었다. 굳이 힘을 쓸 필요도 없이 그냥 살짝 휘두르기만 해도 죽었다. 단지 급경사를 내려가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안개가 차차 걷히기 시작할 즈음, 가파른 길은 사라지고 평지가 나오기 시작했다. 먼 곳에 절벽과 절벽을 이어주는 긴 다리가 눈에 띄었다. 이루린은 힘이 들어서 멈추고 싶었지만, 뒤에서 살기를 내뿜으며 달려오고 있는 마물들을 돌아보았을 때 그러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다. 마물들과의 거리가 좁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루린은 아예 케디아니스의 손을 잡고 더욱 세게 달렸다. 케디아니스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다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이 다리는 건널 수 없어! 건넌다는 건 불가능해!" 이루린은 더 크게 고함쳤다. "하지만 건너야 해! 건너지 않으면 끝장이야!" 다리는 확실히 오랫동안 쓰지 않아서 낡아 있었다. 줄도 여러 차례 닳아서 끊어져 있었고, 지나갈 수 있는 판자도 군데 군데 부서져 있는 채로 바람에 황량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나가기에는 너무 위험한 다리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거칠게 흐르고 있는 강이 있었는데, 높이를 보아하니 떨어지면 바로 즉사였다. 이윽고 이루린과 케디아니스는 다리 위로 올라섰다.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굉장히 귀에 거슬렸지만, 엄청난 무리의 마물들 때문에 천천히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냥 무작정 위험한 다리 위를 달렸다. 그리고 그 결과는 케디아니스의 다리가 나무 판자 사이에 끼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리가 끼었어! 침대에서도 끼이더니..." 마물들이 다리를 막 건너려고 하고 있었다. 이루린은 줄이 서서히 끊어지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케디아니스를 놔 두고 혼자 갈 수는 없었다. 일단 그녀는 마물들이 다리를 건너지 못하게 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마물들을 향해 사정없이 검을 휘둘렀다. 다리가 점차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루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내가 시간을 벌고 있을 테니 얼른 건너편으로 가!" 그녀는 마물들의 머리를 베고 복부를 베었다. 마물들의 푸른 액체가 그녀의 검에 묻었다. 처음에는 좁은 다리였기에 어느 정도 힘들지 않고 대등하게 상대할 수 있었으나, 마물들이 한꺼번에 밀려오자 그러기도 힘들었다. 케디아니스가 그녀를 향해 고함쳤다. "뺐어! 얼른 건너 와!" 그 때였다. 갑자기 그녀 바로 앞에 있는 판자가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이루린은 얼른 검을 거두고 전속력으로 케디아니스가 있는 곳으로 뛰었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막 다른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 케디아니스가 절묘하게도 검으로 다리를 지탱하고 있는 두 줄을 잘라버렸다. 그 순간 다리 위에 있는 엄청난 숫자의 마물들이 모두 강물 속으로 떨어지더니, 곧 순식간에 물살에 의해 자취를 감추었다. 다리를 건너지 못한 마물들은 광분하면서 이루린과 케디아니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케디아니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제 어떻게 돌아오지?" 이루린은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나중에 현신하면 되잖아. 그런데 아까는 위급해서 현신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할 수 있지 않나?" 이루린은 케디아니스의 등에 타고 편안하게 날아가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케디아니스는 주위를 둘러보며 딱 잘라서 거절했다. "안 돼. 내가 잘 날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그리고 지금 그런 식으로 힘을 썼다간 나중에 움직이지도 못해." 케디아니스는 낮게 중얼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10톤 짜리를 어떻게 태워? 허리가 부서지겠군. 몸이 안 뜰 거야." 이루린은 주먹을 들이밀면서 그의 입을 다물게 했다. 안개를 이제 없었지만 숲은 계속되었다. 중간 중간에 과일 나무가 있어 휴식을 취하면서 과일을 따먹기도 했다. 혹은 케디아니스와 스무 고개를 하며 재미있게 놀았다. `누구지?` 이루린은 길 근처의 나무에 기대어 서 있는 자를 발견했다. 어째서, 이렇게 위험한 곳에 저기에 홀로 서 있단 말인가. 그 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천과 옷으로 두르고 있어서 어떤 자인지 제대로 판단할 수 없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루린은 지나가면서 그 자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지만 무시하려고 애썼다. 굉장히 뒷통수가 따끔거리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는 도중에 또 오른쪽 가슴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심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입을 다물고 꾹 참았다. 그렇게 약 1시간 정도 걷자, 숲이 사라지고 광활한 대지가 나왔다. 그 곳에는 반갑게도 마을이 있었는데, 마계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집들의 모양이나 색깔, 크기가 매우 독특했다. 모두 일정하지 않고 제각각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길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집이 깨끗한데도 말이다. 단지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만이 그 곳의 삭막함을 그대로 드러내어 주었다. 이루린이 조금 경계하면서 말했다. "마을인가?" 케디아니스도 조금 심각하게 말했다. "그런데 좀 이상해. 왜 아무도 없지? 마치 모두 떠나버린 것처럼." 이루린과 케디아니스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검을 집어넣지 않고 있었다. 단지 그렇게 발자국 소리만 들으면서 거대한 분수대가 세워져 있는 광장까지 걸어갔을 때, 케디아니스가 말했다. "저 분수 안에 인간이 죽어 있어." 이루린은 그 말에 황급히 작동하지 않는 분수대를 들여다 보았다. 자세히 보니 분수대의 물은 모두 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속에 인간으로 추정되는 여자가 무더기로 죽어 있었다. 이루린은 마계로 와서 처음으로 사람을 보았다는 사실에 기쁘하기 보다는 참혹한 광경에 먼저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물러섰다. 케디아니스는 그런 이루린에게 이상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왜 놀라?" 이루린은 어린 케디아니스가 사람이 죽은 모습을 보고도 그리 놀라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넌 왜 안 놀라는 거야? 끔찍하지도 않아?" "저게 뭐가 끔찍해? 인간은 단지 하등 동물일 뿐이야. 이상하네, 마족들은 인간과 계약을 하면서 영혼을 빨아 먹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혹은 인간을 잡아 먹기도 하지 않아?" 그제서야 이루린은 케디아니스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는 인간을 다른 마물들과 똑같이 취급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루린도 스스로 마족이라고 상기하면서 애써 태연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그, 그래. 맞아. 그런데 왜 이렇게 죽어 있는 거지? 피를 보아하니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어." 케디아니스는 주위를 날카롭게 주시하면서 말을 이었다. "분명히 이 조용한 곳에 뭔가가 있다는 뜻이겠지." 그 때였다. 갑자기 광장 군데 군데에서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루린은 몸이 제멋대로 흔들리자 당황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케디아니스 주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윽고 그 사이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물들이 솟아 나왔다. 혹은 집에서 문을 열고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모두 방패와 갑옷, 투구를 착용하고 검을 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경악스럽게도 그들의 숫자는 약 300마리였다. 그들의 안광이 모두 이루린과 케디아니스를 향하고 있었다. 이루린이 케디아니스의 등에 기대면서 조용히 말했다. "케디아니스, 당장 현신해." "알았어." 그러나 잠시 후에도 케디아니스의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이루린은 아까 전보다 훨씬 강력해진 마물들을 불안하게 응시하면서 재촉하듯이 외쳤다. "왜 현신 안하는 거야?" 케디아니스의 당황해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해! 이 곳에서는 마법이 통하지 않아! 현신도 불가능하고!" 그 충격적인 말에 이루린이 비명을 질렀다. "뭐야? 말도 안 돼!" 마물들이 광장을 에워싸면서 이루린과 케디아니스에게로 접근했다. 이루린은 분수대 안에 있는 죽은 시체들을 두려운 듯이 응시했다. 아마 이 곳에서 살아 남지 못한다면 그녀도 그 꼴이 나게 될 것이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하늘로도 날아가지 못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마을을 벗어나는 방향에 있는 마물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해서 벗어나야만 했다. 그러나 현재 돌아가는 상황으로 봤을 때 그러기란 불가능했다. 그렇게 전투는 시작되었다. 이루린과 케디아니스는 곧 엄청난 마물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었다. 이루린은 마력이 없어도 기술만으로 어느 정도 자기 보호가 가능했으나 케디아니스는 불가능했다. 그는 검술에는 거의 젬병이었다. 그랬기에 이루린은 케디아니스를 보호하면서 검을 휘둘러야만 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죽이는 건 매우 어려웠다. 그들은 놀랍게도 마물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대로 계속 상대한다는 건 어려웠다. 그 때 이루린은 상대를 죽이는 것에만 열중한 나머지 케디아니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빨리 깨닫지 못했다! "케디아니스!" 그녀는 소리를 지르면서 검을 휘두르다가, 케디아니스가 한쪽으로 몰려서 공격을 받는다는 것을 깨닫곤 그 쪽으로 향하려 했다. 그러나 마물들이 너무 많은 탓에 그 쪽으로 가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이루린은 케디아니스의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매우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연신 이루린의 이름을 부르면서 손을 뻗었다. 어떤 마물의 칼이 케디아니스의 복부를 찔렀고, 이루린은 그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는 힘없이 비틀거리다가 곧 그렇게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모습은 마물들에게 파묻혀서 보이지 않았다. "케디아니스!" 이루린은 분노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케디아니스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켜 놓기에 충분했다. 케디아니스가 죽는다는 건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이루린은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케디아니스의 죽음.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두려운 일과도 같았다. 마물들을 남김없이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검을 고쳐 잡고 자세를 좀 더 낮췄다. 어느 새 가우드가 폭발할 것 같은 푸른 예기를 띄기 시작했다. 갑자기 언젠가 꾸었던 꿈의 내용이 생각났다. 그 꿈 속의 주인공은 대량 학살을 자행하고 있었다... 그 때는 그 광경이 매우 끔찍하다고 생각했었다... 이성이 서서히 마비되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는 분노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마물들이 갑자기 그녀를 보고 뒤로 조금씩 물러서는 기색을 보였다. "다 죽여버리겠어." 피를 부르는 학살이 시작되었다. 마왕의아내-41 마왕성 밖으로 언제까지 검을 휘두르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검이 이끄는 대로 휘두르고 있을 뿐이었다. 이성이 마비되어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판국이었음에도 몸은 자유 자재로 움직이고 있었다. 온기가 남아 있는 액체를 뒤집어쓰고 그 냄새를 맡으면서 그녀는 서서히 정신을 되찾아갔다. 어느 정도 시야가 눈에 잡혔을 때, 그녀는 자신의 발 아래에 무수히 많은 마물들이 쓰러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살짝 비명을 질렀다. 케디아니스는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이루린을 놀란 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이루린은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검을 거두었다. "......" 서 있는 마물은 단 한 마리도 없었다. 이루린은 이미 푸른 예기가 사라진 가우드를 응시하다가 거두었다. 그리곤 검을 검집에 넣고 얼른 케디아니스에게로 다가갔다. 케디아니스가 그녀를 빤히 응시하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원래 그렇게 검술을 잘했어?" "뭐?" "실력이... 눈에 띄게 달라진 것 같아." 이루린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잘못 본 거겠지." "아냐! 분명히..." 케디아니스는 더 말하려다가 통증이 왔는지 입을 다물었다. 이루린은 케디아니스가 자신의 몸이 아픈 것에는 신경 쓰지 않고 이상한 주제로 말을 꺼내는 것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케디아니스가 갑자기 피를 토해내자, 그녀는 그를 부축해 주었다. 그리고 다친 곳이 어디인지 살폈다. 케디아니스가 웃으면서 말했다. "몸에 큰 타격을 받은 것 같아. 팔이 좀 부러진 것 같은데...윽!" "괜찮아? 어서 일어나자. 이 곳에 더 있다가 봉변을 당할 순 없잖아." 케디아니스는 팔을 움직이려다가 심하게 인상을 썼다. 이루린은 그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씁쓸하게 여기며 그를 부축해 주었다. 죽을 정도의 큰 부상을 입은 게 아니라서 천만 다행이었지만 마법을 쓸 수 없으니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이루린은 그렇게 그 마을을 벗어났다. 케디아니스는 이루린을 경외로 가득찬 마음으로 응시했다. 그가 알기로 이루린에게는 마력이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이루린의 몸에서 마력이 미약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력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모아지고 있었다. 안개가 끼이고 마족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이 길은 확실히 이상했다. 그리고 이 길목에 있는 멀쩡한 마을은 더 이상했다. 그 이상한 마을에 모인 마물들은 더욱 더 이상했다. 200마리가 넘는 그 이상한 마물들을 순식간에 없애버린 이루린은 정말로 이상했다. 모든 게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실력이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괴물같진 않았는데. 그리고 이루린의 검술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독특해. 그런데 마을에서 보여주었던 그 검술은... 뭐지?` 케디아니스는 이루린이 붕대로 감아준 팔을 응시하며 묵묵히 걸었다. 데이비드는 창 밖을 응시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의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군주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은 자릭스가 죽은지 1년이 되는 날이로군요." 군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그런 군주를 응시하다가 서글픈 심정으로 밖을 응시했다. "자릭스와는 정말로 친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리석게도 아무도 들어서지 않는 그 길을 가는 바람에..." 그 때 군주가 느릿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자릭스가 왜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 말에 놀란 데이비드가 군주를 빤히 응시했다. 군주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현재 아무도 가지 않는 그 길의 끝에는 어둠의 드래곤이 살고 있다. 중간계에서 멸시를 받아 쫓겨난 드래곤 말이다." "저도 그 드래곤이 왜 마계에 있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군주가 빠르게 그의 말을 잘랐다. "문제는 그 드래곤의 몸 속에 있는 존재이다." 데이비드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 드래곤의 속이 곧 드래곤이지 몸 속에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주신 다음으로 강력한 세 명의 신들 중 파괴의 신, 테리아베스가 현재 이 곳 마계에 있다." 데이비드는 그 말에 경악했다. 그는 태연한 군주의 말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00년 전 그 자는 신계에서 ?겨나서 10000년 동안 마계에 강금당하는 형벌을 받았다. 그는 스스로 어둠의 드래곤의 몸 속에 들어갔고, 현재 그 드래곤의 몸을 지배하고 있다. 신이기는 하나 결코 그 장소에서 나올 수 없도록 되어 있었기에, 그 자가 마계에 오는 날 나는 어느 누구도 그 길로 더 이상 다니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자릭스는 그것을 어겼고, 그에 합당한 결과를 받게 되었다." 데이비드는 괜히 심장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럼... 지금도 그 곳으로 들어가면 살아남을 수 없겠군요." 이루린은 케디아니스를 가까스로 부축하고 걸었다. 평지가 끝나고 숲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숲은 지나치게 울창해서 안이 밤처럼 굉장히 어두웠다. 마법을 쓸 수 없었기에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들어가야만 했다. 다행히 마물의 낌새는 느낄 수 없었다. 한참 그렇게 들어가자, 그녀는 서서히 숲이 끝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길은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지 울퉁불퉁하고 험난하기만 했다. `마력이...` 이루린은 마력이 점점 되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째서 그런 것인지는 몰랐지만. 숲이 끝나자 평평한 평지가 나오고, 이어 거대한 동굴이 나왔다. 이루린은 엄청나게 큰 그 동굴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째서 이렇게 거대한 동굴이 생성되었단 말인가. 그것은 케디아니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케디아니스의 두 눈동자는 어딘가 모르게 날카로웠다. "굉장한데?" "대단해!" 그 때였다. 갑자기 숲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케실리온처럼 긴 흑발을 지니고 있는 멋진 남자였다. 그 남자는 친근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이루린과 케디아니스에게 다가왔다. 남자는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누구지? 날 찾아온 손님인가?" 이루린은 그에게 정중히 물었다. "이 동굴을 지나가면 길이 나옵니까?" 남자는 이상하다는 듯이 이루린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 동굴은 막혀 있다." 그의 말에 케디아니스와 이루린은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뭔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길은 분명히 아까 전부터 계속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그 길의 끝이 바로 이 동굴이었다. 그런데 이 동굴이 막혀 있다면 도대체 길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루린은 하늘을 응시했다. 이제 해가 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하니, 저녁일 듯 싶었다. 빨리 노숙할 곳을 찾아야만 했다. 그녀는 특히 밤이 되면 마계의 마물들이 낮보다 3배 이상이나 들끓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케디아니스가 망연자실하게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길이 없잖아." 이루린은 다시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는 뭐든지 들어줄 것처럼 굉장히 부드러운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이 주변에 잘 곳이 있습니까? 집이라든가..." 그 남자가 불쑥 이루린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이 주변에 그대들이 잘 곳은 없어." 낭패였다. 이루린은 다시 한 번 심각한 마음으로 케디아니스와 시선을 교한했다. "하지만 재워줄 수 있지. 날 따라와라." 남자가 몸을 돌리더니 동굴로 들어갔다. 이루린은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 주변에는 집도 없고, 오로지 있는 거라곤 들끓는 마물 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저 남자는 집도 없는 이 곳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일까? 왜 거의 찾아오지 않는 이 곳 - 길이 울퉁불퉁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었다. - 왜 저 남자만큼은 살고 있는 것일까. 이루린과 케디아니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 남자를 따라서 동굴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도중에 케디아니스가 말했다. "나... 저 남자, 어디선가 본 적이 있어. 그런데 생각이 잘 안 나." 이루린은 일이 꼬인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하기만 했다. 마왕의아내-42 마왕성 밖으로 "나... 저 남자, 어디선가 본 적이 있어. 그런데 생각이 잘 안 나." 이루린은 일이 꼬인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하기만 했다. 이루린은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들어가자 동굴의 벽에 달린 횃불의 불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면서 어두웠던 주위가 환하게 비춰졌다. 그녀는 한 순간도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여차하면 검을 뺄 자세를 취했다. 재워준다는 말에 솔깃해서 따라 들어가긴 했지만 처음 보는 남자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놀랍게도 동굴 안에는 아늑한 분위기가 연출되어지고 있었다. 횃불이 많아 밝은 것은 물론이었고, 침대와 식탁, 그리고 책장이 넓은 공간의 한 구석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루린은 동굴의 끝지점이 지나치게 넓고 크다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섰다. 뭔가가 이치에 맞지 않았다. "앉아." 남자가 의자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이루린은 케디아니스와 시선을 교환한 후에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남자도 의자에 앉으며 한참 이루린과 케디아니스를 번갈아 보았다. "둘 다 내게는 아주 특별한 손님이로군. 음식을 들겠나?" 음식이라는 단어에 케디아니스가 외쳤다. "오크 고기요!" 이루린은 그런 케디아니스를 응시한 후에 마지못해 말했다. "무조건 과일이면 됩니다. 그런데 이름이?" 남자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글쎄... 날 아는 사람들은 날 케이라고 부르지. 그냥 케이라고 간단하게 불러." 이루린은 남자가 본명을 밝히기를 교묘히 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케이라고 밝힌 남자와 이루린과 케디아니스는 즐겁게 - 물론 상황 파악이 조금 느린 케디아니스만 - 음식을 들면서 몇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밤이 깊어져가고, 마물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숲에서 들려올 즈음, 케디아니스는 식탁 위에서 아예 곯아떨어져 버렸다. 요인은 어린 그가 먹었던 액체가 바로 술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다행히 이루린은 술을 몇 병씩 먹어도 취하거나 하지 않았기에 잠들지는 않았다. 케디아니스는 자다가도 부러진 팔 때문에 아픈지 고통에 가득 찬 신음 소리를 흘리곤 했다. 이루린은 케이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련히 기억이 떠오르는군. 그런데..." 케이의 시선이 갑자기 그녀의 가슴 부근에 머물렀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으로 빤히. 이루린은 뭐가 묻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가슴 부근을 응시했으나, 시선이 머문 그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른쪽 가슴에 뭔가가 있군." 이루린은 눈살을 찌푸리며 연신 가슴을 응시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무엇... 말입니까?" "정말로 이상해. 하지만 재미있군." 이루린은 케디의 눈동자가 순간적이지만 가늘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건 그대의 몸은 점점 파괴시킬 것이다." 이루린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오른쪽 가슴만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피를 토하는 이유가 그가 말하는 게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재빨리 물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더 빨랐다. "왜 그런지는 묻지 말도록. 그냥 내가 해줄 말은 한마디 뿐이다. 몸 간수를 잘하라는 것이다." "......" 케이의 시선이 뒤척이고 있는 케디아니스에게로 향했다. "저 꼬마도 나와 사연이 깊지. 아마 그 사연이 무엇인지 기억해낸다면... 저 꼬마는 날 세상 끝까지 ?아가서라도 죽이려고 들 것이다." 이루린은 놀란 마음으로 케이를 응시하다가 곤히 자고 있는 케디아니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과거에 케디아니스와 케이 사이에 어떠한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이루린은 케디아니스를 두 손으로 들어 올린 후에 침대를 응시하며 말했다. "이제 자도 되겠습니까?" 케디아니스는 술 때문에 깜빡 잠이 들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깼다. 그는 자신의 몸이 침대 위에 있다는 것을 깨닫곤 옆을 응시했다. 이루린이 바로 옆에서 자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는 조금 놀라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케이가 있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케이가 없는 것을 확인한 케디아니스는 곧바로 이루린의 몸을 흔들었다. 케디아니스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자고 있어?" 놀랍게도 이루린은 깊게 잠들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눈을 뜨면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잠이 올 리가 없잖아." 케디아니스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천천히 말했다. "마물들이 들끓는 숲 속에 덩그러니 있는 커다란 동굴.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커다란 동굴 속에 있는 작은 가구들과 물품들.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 홀로 살고 있는 그 남자. 뭔가가 이상하지 않아?" 날카로운 케디아니스의 말에 이루린은 왠지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확실히 이상해. 어쩌면 이 곳이 제일 위험한 곳인지도 몰라." 갑자기 케디아니스의 얼굴이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금새 그 표정은 후회의 것으로 바뀌어갔다. 그는 주먹으로 침대를 내리치면서 속삭이듯이 말했다. "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이루린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케디아니스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이루린을 응시하며 말했다. "케이가 마족으로 보여?" 이루린은 케이의 모습을 하나 하나 떠올리며 단순하게 결론을 내렸다. "아니, 사람으로 보였어." 케디아니스는 불안한 듯이 주위를 둘러본 후에, 이루린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은 이 곳, 마계에서 살 수 없어. 마물들이 들끓는 것 몰라?" 이루린도 그 말에 충격을 먹었다. 그녀도 케디아니스처럼 주위를 둘러보며 황급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케디아니스도 이불을 걷어차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둘 다 불안한 마음은 똑같았다. 그녀는 모퉁이 부근에 서서 동굴 밖을 응시했다. 케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루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케디아니스에게 말했다.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잘 알겠어. 하지만 마계에도 살고 있나?" 케디아니스가 답답하다는 듯이 이루린을 응시하며 황급히 말했다. "마계에 살고 있는 자들은 대부분 동족에게 지나친 살육을 행해서 중간계에서 ?겨난 자들이야. 그렇다면 과연 그들이 가장 죽이고 싶어하는 게 무엇일까?" 이루린은 핏기가 가신 케디아니스의 표정을 응시하며 말했다. "바로 너." 케디아니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루린과 마찬가지로 동굴 밖을 응시했다. "그들은 마계의 마왕에 의해 영원히 한 장소에 같혀 지내도록 되어 있어. 그리고 그들이 있는 곳에는 아무도 가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지. 우리가 이 곳에 왔다는 건, 그들에게 오랜만에 아주 재미있는 놀이감이 왔다는 것을 의미해. 그들은 평생 어떠한 이들도 볼 수 없을 테니까." 이루린은 차가운 물이 온 몸에 쏟아지는 것 같았다. 케디아니스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우리를 보자마자 죽이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거야." 이루린은 케디아니스의 손을 단단히 잡으며 말했다. "어서 나가야겠어." "그래, 지금이 기회야."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몸이 저절로 떨려왔다. 심장이 급하게 뛰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오는 것을 느끼면서 동굴 입구까지 간 이루린은, 케디아니스와 함께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마물이 들끓고 있을 이 숲을 빠져 나간다는 건 거의 지옥에 제발로 걸어가는 것과도 같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막 입구를 지나 숲으로 들어갈 즈음, 뒤에서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를 그렇게 가는 중이지?" 이루린과 케디아니스는 빠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상황이 굉장히 난처해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케이가 어둠 속에서 차갑게 눈을 빛내며 그들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마왕의아내-43 마왕성 밖으로 그녀는 난처한 상황이 어떤 것인지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짐을 다 챙긴 상태에서 케이를 만난다는 것은 고역이었다. 특히, 속을 읽을 수 없는 케이의 깊은 눈동자를 응시하는 건 더욱 고역이었다. 이루린은 연신 케디아니스와 시선을 교환하면서 할 말을 필사적으로 생각해내야만 했다. 그러나 쉽게 말이 떠오를 리 없었다. "그냥... 잠시 운동 좀 하려고 했어요." 이루린은 케디아니스가 얼토당토않은 말로 둘러대는 것을 응시하면서 속으로 후회했다. 그의 입을 틀어막았어야만 했다. 케이가 묘하게 웃으면서 다가오자, 이루린은 케디아니스의 어깨를 잡고 뒷걸음질을 쳤다. "운동이라고? 이렇게 늦은 시각에 말인가?" 섬뜩한 그의 말투 덕분에 그녀는 주위의 온도가 더 내려가는 것 같았다. 이루린은 케디아니스의 말에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적당히 말했다. "그냥... 악조건 속에서 수련을 하면 더 효율적이지 않습니까?" 케이가 바로 말을 받아쳤다. "아예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검을 휘두른다고?" "......" 더 이상 말문이 막히자, 주위에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케디아니스는 다치지 않은 팔로 이루린의 팔을 강하게 감쌌다. 케이는 미소를 거둔 후에 살벌하게 그녀와 케디아니스를 쏘아보았다. 이루린은 긴장하면서 그런 케이를 진지하게 응시했다. 더 이상 그에게 거짓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이루린은 솔직하게 시인하기로 했다 . "좋습니다, 좋아요. 우린 도망치려고 했어요. 당신에게서 말입니다." 케이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왜? 내가 그대들에게 무슨 영향을 끼친다고 그러지? 특히... 이루린, 그대는 더더욱." 케이가 눈으로 이루린을 지목했다. 이루린은 그가 공격할 때를 대비해서 검을 뽑을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케디아니스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당신은 블랙 드래곤이잖아요?. 그것도 어둠의 드래곤으로 분류되는.... 앗!" 그때였다. 케디아니스의 표정이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그는 케이를 뚫어져라 응시하더니, 갑자기 무섭게 표정을 지었다. 이루린은 그가 그렇게 무섭게 변할 줄은 상상도 못했기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는 한참 케디아니스를 응시하더니, 곧 살벌한 투로 말했다. "당신이었군." 케디아니스가 실성이라도 한 것일까. 그는 무자비하게 검을 빼들며 케이를 응시했다. 케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케디아니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만 아니었어도 죽지 않았어!" 케디아니스가 의미 모를 말을 하면서 케이에게 덤벼들었다. 이루린이 말릴 틈도 없이, 케이다니스는 검으로 케이의 복부를 향해 휘둘렀다. 그는 케이가 성룡이라는 것도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런, 이런." 케이는 가볍게 웃더니 아주 간단하고 빠르게 그 검을 피해버렸다. 그리고 아주 손날로 그의 목덜미를 가격했다. 놀랍게도 케디아니스는 그 일격에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언뜻 보기에는 별 볼일 없지만 주도면밀하게 살펴보면, 정확하게 상대방의 급소를 노릴 만큼 대단한 솜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루린의 예상과는 다르게 케이는 기절한 케디아니스를 이루린에게 넘겨주었다. "왜 살려주는 겁니까? 케디아니스가, 당신이 우리를 가지고 놀다가 죽일 거라고 하던데..." 케이가 웃으면서 갑자기 검을 빼들었다. 이루린은 달빛 속에서 날카롭게 빛나고 있는 그 검을 응시하다가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런 태도와는 달리 여전히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원래라면 그렇게 돼야겠지. 하지만 난 이 꼬마나 그대를 죽일 생각은 없다. 그리고 그대들을 가지고 놀 생각도 없고. 자... 그렇다면 이제 시험을 한번 해볼까. 일단 그 꼬마를 다치지 않을 장소에 내려놓아라."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목숨이 왔다갔다할 상황이었기에, 이루린은 군소리하지 않고 케디아니스를 동굴 근처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그가 말을 이었다. "검을 빼들어라. 나와 검술로 대결을 벌이는 거다. 그대가 이기면, 난 그대가 원하는 것을 세 가지 들어주겠다. 물론 내 능력에서의 범위여야 하고 합리적이어야 하는 것만 가능하다. 최선을 다하도록. 그러나 그대가 진다면..." 이루린이 망설이면서 검을 빼들자, 그가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 "난 그대들을 남김없이 죽여버릴 것이다. 물론 첫 번째 순서는 저 꼬마가 되겠지." "......." 이루린은 기절한 케디아니스를 응시했다. 절박한 심정이었으나, 도움을 청할 곳은 없었다. 순간 케실리온의 얼굴이 떠오르긴 했지만 그가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리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죽을힘을 다해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이기는 게 거의 불가능하더라도. 모든 게 알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케이와 케디아니스를 비롯해 이런 이상하게 흘러가는 상황들이. 테리아베스는 누군가가 동굴에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낮잠을 즐기다말고 일어나서 동굴 밖으로 나갔다. 거기에는 온통 검은 옷을 두른 수상한 자가 서 있었다. 비록 얼굴도 알아볼 수 없었지만, 테리아베스는 그 자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자의 몸에서 익숙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예카트레스! 여긴 왜 왔지? 형벌이 풀리지 않은 건가? 왜 온통 검은 옷으로 두르고 있지?" 예카트레스는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파괴의 신 테리아베스여. 물론 저는 형벌이 끝났습니다. 바로 몇 달 전에." 테리아베스는 충격적인 예카트레스의 발언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뭐라고? 지금 신계의 명을 거역하고 있는 건가? 형벌이 다 끝났는데도 귀환하지 않다니...!" 검의 신, 예카트레스의 입에서 차가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도 그러길 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테리아베스." 테리아베스는 잠시 말을 하지 않고 묵묵히 예카트레스를 응시했다. 검은 두건 때문에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는데, 왜 그녀가 이곳에 있는 건가. 이곳에 없어야 할 자가 있다는 것은 모두 그쪽 작품인가?" 예카트레스는 잠시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건 당신이 관여할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하나입니다." 예카트레스가 다시 의미 모를 웃음 소리를 흘리면서 말했다. "저와 함께 손을 잡겠습니까" 예카트레스의 놀라운 발언을 신계 측에서 들었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테리아베스가 입을 다문 사이 예카트레스가 말을 이었다. "주신 다음으로 최고의 능력자 중 하나인 당신의 능력이면 충분합니다. 어떻습니까, 전 당신이 결코 이런 곳에서 10000년씩이나 썩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 당신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당신이 저와 손을 잡는다면, 전 바로 당신을 풀어드릴 수 있습니다." 그 발언에 테리아베스는 다시 한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날 풀어준다는 건 불가능하다. 신의 힘을 되찾지 않는 이상." "전 몇 백년 동안 그 힘을 거의 모두 되찾았습니다. 잊었습니까? 전 검의 신입니다." 테리아베스는 잘 알고 있었다. 검의 신이 갖는 특권이 자신 못지 않다는 것을. 사실 예카트레스는 주신 다음으로 최강의 실력을 지닌 3명의 신들 중 하나였으니까. 테리아베스는 자조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 좋아, 너와 손을 잡겠다." 테리아베스는 자신이 풀려난다면 신계가 뒤집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마왕의아내-44 마왕성 밖으로 이루린은 케디아니스를 응시하면서 공격 자세를 안정적으로 잡았다. 어느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검술을 배운 적이 없었기에 그녀는 자연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 현재 그녀가 그런 위치에 놓이고 있었다. 먼저 케이가 아무 말도 없이 공격해왔다. 이루린은 그 빠른 속도에 순간 당황했지만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검을 휘둘렀다. "윽!' 그 순간 이루린은 짧게 신음하면서 바닥에 넘어졌다. 강철로 된 쇠가 온몸을 강타하는 기분이 들만큼 상상을 초월하는 그의 힘에 이루린은 속으로 크게 놀랐다. 분명히 그가 살짝 쳤는데 그녀가 받은 힘은 그 행동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 `드래곤들은 폴리모프한 상태에서도 원래 이렇게 힘이 센 건가?` 케이가 여유 있는 태도로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일어나라고 손짓했다. 이루린은 묵묵히 일어나면서 케이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방심하면 죽음만이 그녀를 반길 뿐이었으므로. 그렇게 약 1시간 동안 그녀는 케이를 상대로 죽자살자 싸웠다. 그러나 그녀는 케이를 털끝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 그는 거의 움직이지 않고 그녀가 공격하는 검을 모조리 받아냈으며 전혀 힘들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반면에 이루린은 거의 죽을 맛이었다. 케이가 본격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힘을 많이 소진하고 있었다. 케실리온과 싸울 때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실력을 가늠하기란 어려웠다. 몸이 만신창이가 되기까지 싸우지 않는 이상. 갑자기 케이가 입가에서 미소를 거두었다. 그는 이상하리만큼 차가운 눈동자로 이루린을 쏘아보더니 자세를 달리했다. "약하군. 역시 그대는 아니었어." 케이의 태도가 달라진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는 그녀가 비틀거리며 일어서자마자 아까 전과는 비교도 안될 만한 속도로 달려오더니, 곧 검으로 그녀의 복부를 휘둘렀다. 그녀는 손 한번 쓰지 못하고 당해야만 했다. 참기 힘든 고통이 배에서 밀려왔다. 피가 염색하듯이 옷으로 퍼지면서 그녀는 검을 땅에 박고 몸을 지탱했다. 다리가 후들거려왔지만 쥐어짜는 듯한 아픔 때문에 정신은 멀쩡했다. 케이의 검이 언제 복부를 스쳤는지 몰랐던 사실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웠던 것은 많은 양의 피를 보고도 더 이상 폭주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마력이 돌아왔지. 이제 없어지지도 않잖아? 그건 그런데, 어째서 이제 정상으로 되돌아온 거지?` 한국에서부터 그녀를 괴롭혀왔던 병이 사라진 것일까? 이루린은 혼란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아쉽다고 생각했다. 위험하긴 하지만 폭주라도 하지 않으면 이길 방법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물을 300마리씩이나 없앴을 때의 감각을 떠올리려고 무진장 애썼으나 소용없었다. 그녀가 간신히 일어나서 검을 다시 들었다. 복부가 아파서 제대로 정신을 집중할 수 없는 찰나, 케이가 다시 검을 휘둘러왔다. 그녀는 이번에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케이의 검이 노른 곳은 검을 들고 있는 그녀의 오른쪽 어깨였다. "윽!" 그녀는 깊게 베인 오른쪽 어깨를 나머지 한 손으로 부여잡으면서 양미간을 모았다. 복부보다는 아니었지만 상당한 고통이 전염병처럼 어깨에서 몸 전체로 퍼지고 있었다. 검을 잡은 손이 미친 듯이 떨려왔지만 끝내 검을 놓치지는 않았다. 검을 놓치면 지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그 이후로 그녀는 케이의 무자비한 검에 한번도 일격을 가하지 못했다. 얼굴과 옷이 찢기면서 난 자질구레한 상처부터 시작해서 팔, 허벅지, 복부, 등에 깊은 상처를 입어야만 했다. 이미 육체는 정신과는 달리 고통을 부르짖고 있었고, 시간이 지나자 고통만 남겨둔 채 몸의 감각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정신도 같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과다출혈 때문이었다. `이길 수 없어.`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이미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녀가 상대하기에 그는 너무 강했다. 그렇긴 해도 그러한 생각이 들 즈음에는 그의 공격 방식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한 후였다. 그는 기술보다는 비정상적으로 강한 힘과 속도만으로 그녀를 상대하고 있었다. 아니, 기술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시야가 흐릿해지자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땅이 흔들렸다. 만신창이가 된 이후에도 그녀는 이기기 위해 다시 검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둔탁한 일격을 맞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일어나라. 내 옷자락이라도 베어보긴 했나?" 케이의 목소리에 그녀는 육체를 일으켜 세웠다. 아니, 그랬다고 생각했다. 마음만이 앞섰을 뿐 육체를 따로 놀고 있었다. 몸에서 힘이 빠지고 지독한 고통이 정신을 죄여오는 바람에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조차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지조차도....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는 건가. 패배의 뜻으로 받아들이겠다." 이루린은 잡고 있는 검, 가우드를 끝가지 놓지 않고 희미하게 눈을 떴다. 케이는 더 이상 그녀를 공격하지 않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향하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차리는 순간,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그는 기절해 있는 케디아니스에게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퍼런 검을 여전히 세우고서. 이대로라면 케디아니스는 물론, 그녀까지도 죽을 상황이었다. 이윽고 케이가 케디아니스 앞에 섰을 때, 이루린은 오로지 정신력만으로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그러던 차에 케이의 검이 케디아니스의 복부로 향하고 있었다- "안 돼!" 이루린의 비명소리보다도 더욱 빨리, 케디아니스의 배에 검이 꽂혔다가 다시 뽑혔다. 케디아니스는 미동도 하지 않고 널브러져 있었다. 단지 배에서 피가 흘러나와 바닥에 적실뿐이었다. 가차없는 케이의 태도에 이루린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달려나갔다. 가우드가 폭발적인 푸른 예기를 띄었다. 케이의 검이 다시 위로 들어올려졌다. 이번에는 케디아니스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그만두지 못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몰랐다. 이루린은 거칠지만 신속한 동작으로 오로지 케이의 검에 정신을 집중했다. 케이가 소리를 느끼고 돌아보더니, 재빨리 자세를 취하며 그녀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리고 그 순간 두 검이 격돌했다. 챙!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몸에 강한 힘이 전달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단지 있는 힘을 모조리 끌어내어 검을 쳐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케이의 검이 그녀의 검에 의해 먼 곳으로 날아가더니 바닥에 꽂혔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케이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닥에 꽂힌 검을 응시하더니, 이윽고 그녀가 들고 있는 검을 응시했다. "내가 졌군. 그 검은 가우드인가. 그대의 것인가?" "이 검의 주인은 따로 있습니다. 당신은 이 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 같군요." 그는 조금 재촉하는 투로 물었다. "그 검의 소유자가 누구지?" "케실리온이라고 하는 남자의 것입니다." 검에 맺히는 푸른 기류가 점차 사라지면서 이루린은 바닥에 쓰러지듯이 주저앉았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면서 말했다. "자, 어쨌든 이제 제가 이겼으니 세 가지의 소원을 들어줄 차례입니다." 케이와의 작별 이후, 모든 것은 순조롭게 풀리게 되었다. 그녀는 첫 번째 소원으로 케디아니스와 자신의 상태를 완전히 회복하게 해달라고 했다. 두 번째 소원은, 관문을 통과할 때 쓰이는 리베아의 꽃을 달라는 것이었다. 세 번째 소원으로는 간단하게 원하는 지역으로 이동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케이는 이 곳에서 마법을 쓸 수 있었다. - 그 결과 그녀는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지역으로 바로 공간 이동할 수 있었다. 경악했던 것은 바로 그 순간, 엘리세아가 그녀가 갔던 길의 반대편인 왼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이었다. 이리하여 이루린은 어째서 엘리세아는 왼쪽으로 갔는데 자신만 오른쪽으로 갈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고, 크게 분노하여 검을 빼들었다. "어리석게도 다른 길로 간 주제에 날 잡겠다고?" 비웃음을 터뜨린 엘리세아가 자신의 드래곤과 손을 잡고 뛰기 시작하자, 이루린과 케디아니스도 이를 갈면서 그들을 쫓아갔다. 이리하여 서로 살벌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어느 정도 뛰자, 마왕성 입구가 눈에 띄었다. 놀랍게도 몇몇은 벌써 도착해 있었다. 이루린은 반드시 엘리세아보다는 먼저 입구로 들어가리라고 마음먹으면서 끈질긴 집념으로 달렸다. 그러나 케디아니스가 뒤처지는 바람에 점점 차이는 벌어졌다. `두 명이 다 들어가지 않으면 완전히 도착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에잇! 케디아니스, 잡을 준비해!" "뭐?" 케디아니스가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헐레벌떡하는 사이, 이루린은 달리면서 그의 몸을 잡아 들어올렸다. 그리고 불굴의 의지를 발휘하며 엘리세아보다 조금 뒤쳐져 있는 드래곤 세르카스를 향해 던졌다. - 어느덧 입구까지 5m정도 남겨두고 있었다. - 케디아니스는 비명을 지르면서 날아가다가, 점차 세르카스와 가까워진 것을 깨달았는지 손을 뻗었다. 그런데 조금 거리가 모자랐고, 결국 케디아니스는 세르카스의 바지를 붙잡았다. 그 사이, 이루린은 먼저 마왕성 입구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순간, 상상치도 못할 일이 벌어졌다. 이루린은 뒤를 돌아보다가 헛숨을 들이켰다. 세르카스는 케디아니스와 함께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문제는 케디아니스가 세르카스의 속옷과 함께 바지를 벗겼다는 점이었다. 엘리세아가 놀라면서 세르카스에게 가려고 하자, 이루린이 검을 빼들고 살벌하게 막았다. 그녀는 화를 꾹 참은 눈동자로 이루린의 검을 응시하다가 세르카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이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일어나지 마!` 그러나 세르카스는 자신이 어떤 상태인줄도 모르고 머리를 흔들면서 일어섰다. 케디아니스는 여전히 바지를 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에, 마왕성 입구 근처에 있는 여자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웃긴 것은 그들이 민망하다는 듯이 두 손으로 눈을 완전히 가리면서도, 손가락을 벌려서 세르카스의 하반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세르카스는 하반신을 내려다보다가 주위의 많은 마족들의 시선에 충격을 먹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정신력이 꽤 약했는지 기절한 모양이었다. 보통 기절하기보다는 날뛰는 게 정상이었는데. 케디아니스는 유유히 마왕성 입구로 들어왔고, 이루린은 엘리세아의 일그러진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순위에서 조금 밀려나긴 하겠지만 엘리세아보다는 먼저 들어왔으니 그걸로 됐어.` 마왕의아내-45 동화 속 세상 두 번째 관문의 일들은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물론 이루린은 엘리세아에게 계속 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그 결과 세르카스는 모든 마족들이 다 입구로 들어올 때까지 엎어져 있었다. 그 말은 즉, 엘리세아 팀이 꼴찌로 들어왔다는 결과가 된다. 그녀는 분통을 터뜨리면서 이루린의 손에 들린 리베아의 꽃을 뚫어져라 노려보면서 전전긍긍했다. 이루린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어째서 다른 방향으로 갔는데 리베아의 꽃을 들고왔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후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엘리세아는 이루린이 사라진 이후에 억지로 세르카스를 안고 들어왔다고 한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녀는 혹시 비어있는 방이 없나 모색해 보았지만 별반 소용이 없었다. 다행스러웠던 점은 케실리온이 거의 방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루린은 자신의 마력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점차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불규칙적으로 마력이 사라졌다가 없어지는 바람에 완전히 상태가 회복되었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케실리온의 말에 따르면 검에게서 완전히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걸 확인하는 방법은 검과 대화하는 것인데, 그녀는 한번도 그 검의 목소리를 들을 적이 없었다. 한가하게 세 번째 관문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독서를 하고 있었다. 제목은 `상대를 잘 괴롭히는 방법`이었고, 그녀는 현재 있는 곳이 케실리온의 방이라는 것을 싹 잊은 채, 열심히 웃어젖히면서 침대 시트를 뭉개고 있었다. "[거기 애송이.]" 이루린은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무시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목소리가 조금 더 크게 들려왔다. "[거기 책보고 있는 애송이!]" 그제서야 이루린은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폈다. 책을 보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이 아니던가. 그러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이루린은 다시 책을 읽으려고 했다. "[네 주인도 몰라봐? 위대하고 멋지고 아름답고 강한 내 말을 무시해? 이 시건방지고 남의 말 무시하고 성질 더럽고 인정머리 없는 마족아! 네 허리에 있잖아. 난 이래서 여자가 싫단 말야.]" 이루린은 허리춤에 단 검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곤 황급히 일어났다. 그리고 얼른 진동하고 있는 검을 빼들었다. 검에서 그녀를 두고 불평불만이 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은근히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마력을 되찾았다는 건가? 그만큼 성장했다는 뜻이겠지.` "[착하고 너그러운 내가 널 이해하겠다. 네가 내 하녀인가? 이런, 정말로 피곤한 하녀로군.]" 웬만하면 넘어가려고 했던 이루린이었다. 그러나 검의 태도는 그녀로 하여금 은근히 화를 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검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 웃으며 말했다. "네 말이 이제야 들리는군. 내가 널 뭐라고 부르지?" "[가우드님이라 불러!]" 가우드의 목소리는 여성보다는 남성에 가까웠다. 게다가 종소리처럼 귀에 은은하게 울렸다. 이루린은 검을 침대에 내려놓고 말했다. "좋아, 가우드. 그런데 난 네 하녀가 아냐. 그건 그렇고 네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날 인정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웃기지 마라. 넌 인정할 수 없어.]" 순간 그녀는 당황했다. 케디아니스는 현재 서고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마족들이 어렸을 때부터 어떤 동화를 알고 자랐는지에 대해 알려고 연구 중이었다. 오랫동안 서고를 뒤진 결과, 그는 마족들이 알고 있는 동화의 내용이 상당히 잔인하며, 대부분 나쁜 결말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디 한번 당해봐라." 케디아니스는 묘하게 웃으면서 품속에서 구슬을 하나 꺼냈다. 그 구슬은 그가 서고의 새벽에 몰래 방을 빠져나와 마법책을 뒤져가며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것이었다. 주먹만한 크기에 푸른빛이 돌고 있는 신비스러운 구슬이었다. 케디아니스는 묘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책을 덮었다. 그리고 이루린의 방으로 향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분명히 케실리온의 말에 의하면..." 갑자기 가우드의 불만에 찬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두 번째 주인을 말하는 건가? 항상 숨막히면서 살았는데 벗어난 건 다행이군. 평소에 입이 근질근질해도 말도 제대로 붙이지 못했는데 말야. 하지만 두 번째 주인은 정말로 강한데 말이지. 이 뭣한 하녀와는 달리.] 이루린은 망치로 검을 신나게 때려부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침착하게 말했다. "두 번째 주인? 그럼 내가 세 번째 주인이 되는 건가?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첫 번째 주인은 어떤 자였지?" 이루린은 언젠가 자신이 가우드의 꿈을 꿨던 것을 상기해냈다. 그녀는 그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었다. "[감히 첫 번째 주인에 대해서 묻는 거냐? 그 분은 정말로 아름다웠고, 적어도 그 분이 살던 곳에서는 모두의 우상이었다. 그 분은 검의 여제라고 불리었고, 후에 나의 주인이 되었다. 안타까웠던 점은 그 분의 의도와는 다르게 검의 여제라고 불리었다는 점이다.]" 이루린은 자신의 꿈에 나왔던 자가 상당히 높은 지위를 가진 자라고 생각했다. 검의 여제라고 불리 울 정도라면 도대체 얼마나 강한 것일까. 그리고 이 성격 더러운 검이 그렇게까지 예우를 갖추는 것을 보면.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사이, 가우드가 불만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째서 내 주인들은 하나같이 특이하군. 평범한 자들은 하나도 없어.]" "그게 무슨 소리지?" 딱 잘라 말하는 가우드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울렸다. "[이유는 말해줄 수 없다. 왜 네가 아직 인정받을 수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 그 때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순식간에 가우드를 감싸던 이상한 빛이 사라졌다. 그녀는 가우드가 다시 평범해진 것을 보곤 그대로 허리에 찼다. 그리고 들어오고 있는 작은 키의 소년을 응시했다. 케디아니스였다. 그의 표정은 이상하게 밝아보였다. "어렸을 때 동화 읽었지?" 이루린은 그가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용을 다 기억해?" "그래." 갑자기 그는 주머니 속에서 주먹만한 구슬을 꺼내더니 이루린에게 들이밀었다. "이 구슬에 손을 얹으면서 동화의 내용을 생각나는 대로 떠올려봐." 이루린은 뭔지는 몰랐지만 일단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녀는 구슬에 손을 얹으면서 어렸을 때 자주 읽었던 동화책인 신데렐라, 헨젤과 그레텔, 인어공주, 백설공주의 내용을 떠올렸다. 거기에다가 장난삼아 상상을 좀 가미해서, 케실리온, 케디아니스, 아이나, 엘리세아가 동화 속의 인물이 되는 것을 떠올렸다. 그러자 갑자기 구슬에서 엄청난 마력이 뿜어져 나오더니 이윽고 그녀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빛에 놀라면서 케디아니스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상하게도 케디아니스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게 무슨 빛이야, 케디아니스!" "두고 보면 알 거야." 케디아니스는 이루린이 빛에 휩싸이면서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는 분명히 끔찍한 동화 속에서 고생을 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케디아니스는 자신의 몸이 빛에 휩싸이는 것을 깨닫곤 비명을 질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난 도대체 왜!' 케디아니스는 끝까지 발버둥쳤지만, 이미 그도 이루린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루린은 힙겹게 눈을 뜨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딘가에 부딪힌 듯, 머리가 심하게 아파 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웬 낯선 주방장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식탁과 요리 도구들과 야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는 평범한 하녀복을 입고 있었다. `여긴 도대체 어디지?` 그녀가 당황해 하면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 때 어디선가 문이 열리면서, 깐깐해 보이는 웬 젊은 부인이 그녀에게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신데렐라! 당장 청소해!" 그 말에 이루린은 경악했다. 마왕의아내-46 동화 속 세상 이루린은 처음 보는 젊은 여자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질 않았다. 그녀가 당황해하고 있는 사이 젊은 여자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문을 세게 닫고 사라졌다. 이루린은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뚫어져라 응시해도 알고 있는 공간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대신에 깨진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황급히 그 곳으로 가서 거울을 응시했다. 분명히 외모는 그대로였는데, 입고 있는 옷은 허름한 하녀복이었다. `저 여자가 분명 나보고 신데렐라고 그랬나? 믿을 수 없어! 내가 신데렐라라니!` 이루린은 어째서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결과, 그녀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이 케디아니스라고 결론지었다. 그녀는 단지 속으로 화를 삭히면서 원래대로 돌아가기만 하면 그를 가만두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케디아니스는 낯선 환경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허름한 집안에 경악스럽게도 레이스가 달린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 경악했던 것은 그의 머리에 붉은 리본이 - 갑자기 뷰리풀이 생각났다. - 달려 있다는 점이었다. 그 사실은 그를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어째서 내가 여자애가 된 거지? 여긴 분명 이루린의 의식이 지배하는 곳일텐데. 이상해, 왜 잔인한 장면이나 마계는 나오지 않고 중간계가 나오는 거야? 도대체 어렸을 때 뭘 읽었던 거야!` 케디아니스가 씩씩거리고 있는 사이, 문이 열리더니 키가 작은 남자아이가 들어왔다. 금발의 머리카락에 흰 피부를 지니고 있는 소년이었다. "그레텔,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레텔? 그게 누구지?` 케디아니스는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집안에는 현재 그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더욱이 소년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아무래도 그를 향해 그레텔이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그 때 젊은 여자가 묘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들어왔다. "헨젤, 어서 그레텔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자꾸나. 나무를 하러 가야지?" 헨젤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걱정스럽게 케디아니스를 응시하며 말했다. "어떻게 여자애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요?" 그 즈음 케디아니스는 거의 폭발할 지경이었다. 그는 자신의 머리에 리본을 달고,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를 입힌 행위가 모욕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손에 마력을 모으려고 했다. "감히 인간 주제에 날 여자애로 만들어? 마법으로 다 없애버릴 거야! 감히 드래곤에게 그 따위 망발을 하다니!" 이루린은 속으로 케디아니스를 원망하면서 열심히 집을 청소했다. 생각을 해보니 정말인지 너무나도 억울했다. 정말 팔이 떨어지도록 거실을 청소하고 있을 즈음, 갑자기 젊게 생긴 깐깐한 부인 - 동화의 내용으로 추론해보아 그녀는 분명 신데렐라의 새엄마였다. - 이 거실로 들어오면서 신데렐라의 두 언니에게 말했다. "드디어 오늘밤이로구나. 왕자님의 결혼 상대를 고르는 성대한 무도회가 열리는 날이. 오늘부터 좀 바빠지겠구나." 깐깐해 보이는 신데렐라의 첫째 언니가 그녀에게 땀에 절인 옷을 떠넘겼다. 둘째 언니도 귀찮다는 듯이 이루린에게 옷을 떠넘겼다. 이루린은 새엄마의 째진 눈 때문에 인상조차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순순히 그 옷들을 빨아야만 했다. "신데렐라! 넌 그 옷들을 포함해서 2층에 있는 옷들을 빨고 집을 구석구석 청소해!" 신데레랄의 첫째 언니가 그녀를 향해 비웃음을 띄면서 말했다. "넌 무도회장에 못 가." 순간 열이 뻗쳤지만 이루린은 가급적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기에 얌전히 입을 다물면서 동화의 내용대로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날 밤이 되었다. 이루린은 모두 집을 비웠을 때, 가까스로 청소를 다 끝내고 의도적으로 저택 밖을 어슬렁거렸다. 저택 밖은 확실히 마계와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는데, 훨씬 더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저택의 마당 근처에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찬바람이 얇은 옷을 관통하는 바람에 도저히 잠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 알고 있었다. "소녀여, 이름이 무엇인가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루린은 뒤를 돌아보았고, 그 순간 소리를 지를뻔 했다. 바로 매일 그녀의 시중을 들던 아이나였던 것이다. 아이나는 중세의 마녀를 연상케하는 보라색의 옷을 입고서 이상한 지팡이를 하나 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나는 이루린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루... 아니, 신데렐라라고 해요." "당신이 착하다는 소문을 많이 들어서 소원을 들어주고 싶어요. 무엇이든지 제게 말해보세요." 생각 같아서는 `당장 마계로 돌려보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말이 목구멍으로 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전 무도회장에 가고 싶어요. 그러나 입을 옷도 없고, 마차도 없어요. 어쩌면 좋죠?" "그런 문제라면 걱정 마세요, 신데렐라." 이루린은 아이나가 이상한 지팡이를 흔들어서 쥐가 말로 변하고 호박이 마차로 변하는 뻔한 과정을 지켜보았다.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기에 놀라진 않았지만 동화의 내용상, 애써 놀라는 척 해야했다. "와! 정말로 대단해요!" 마지막으로 아이나는 이루린에게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이루린이 입고 있는 허름한 옷이 금새 아름다운 드레스로 탈바꿈했다. 아찔할 만큼 아름답고 황홀한, 은은한 빛을 내고있는 자수정이 달려있는 하얀 드레스였다. 게다가 머리에는 다이아몬드로만 박혀있는 화려한 왕관이 쓰여졌다. 눈으로만 보다가 직접 체험하는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이번에는 감탄하면서 놀랐던 그녀였다. "자, 어서 마차를 타고 가세요. 행운을 빌어요, 신데렐라." 이루린은 어색하게 화려한 마차에 올라타면서 미소를 짓고 있는 아이나에게 말했다. "잘 가요, 아이나. 아, 아니 친절하신 분." 아이나는 미소를 짓더니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이윽고 이루린이 탄 마차는 어디론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이루린은 낯선 광경에 최소한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무도회장에 가게 되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곤란했다. 특히, 왕자와의 만남은 더욱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동화의 내용에 따르면 왕자는 신데렐라에게 반하도록 되어 있지 않은가. 그렇게 약 1시간 동안 마차는 쉬지 않고 질주했다. 이윽고 군데군데 불빛을 뿜고 있는 거대한 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화처럼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마차가 서자 그녀는 어색하게 땅을 밟았다. 마차는 다시 움직이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루린은 왠지 불안하기만 하는 마음을 억누르면서 활짝 열린 성문으로 들어갔다. 경비병들의 시선을 느끼면서, 그녀는 마당을 지나 성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이루린 쪽으로 집중되었다. 넓은 성안에는 각양각색의 옷을 입은 귀족들이 무도회를 즐기고 있었다. 이루린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단상에 낯이 익은 누군가가 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무척이나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고, 긴 흑발을 지니고 있었다. 순간 그녀는 아이나를 만났을 때보다 더욱 크게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케, 케실리온!` 케실리온이 그녀를 가만히 주시하고 있었다. 바로 왕자의 신분으로. 마왕의아내-47 동화 속 세상 이루린은 침을 삼키면서 앞을 응시했다.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젠장, 강물에 확 뛰어들고 싶다.` 이루린은 자신을 응시하는 수많은 시선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무도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문이 닫히자, 다시 부드러운 선율이 무도회장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루린은 케실리온의 시선을 피해서 적당히 아무 곳에나 숨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러기도 전에 케실리온은 이미 단상에서 내려와 있었고, 발걸음은 다름 아닌 이루린에게 향해 있었다. `제발 오지마.` 이루린은 간절히 빌었다. 그러나 케실리온의 시선은 오로지 그녀에게로 향해 있었다. 곧 그녀는 우려대로 케실리온의 손에 잡혔다. 그가 놀랍게도 그녀의 손을 들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이루린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감탄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케실리온의 손을 잡고 무도회장의 정 중앙으로 나섰다. 케실리온은 주로 단색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기에 - 혹은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거나 - 현재 입고 있는 화려한 옷이 적응이 되지 않는 그녀였다. 그녀는 어색하게 케실리온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춤을 추었다. 그녀는 제발 아이나처럼 그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길 바랬다. 어색하게 춤을 추면서 이루린은 케실리온의 시선을 피해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아름다운 여인이여." 놀랄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에 이루린은 순간 속으로 경악의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더 경악했다. 한번도 웃은 적이 없는 케실리온의 입가에 미소가 감돈 것이다. 이루린은 그 장면을 본 후에 더 상황을 따지지도 않고 바로 단정지었다. `날 기억하지 못해.` "이루린, 아, 아니 신데렐라라고 해요." `다행이긴 한데, 신데렐라의 동화 내용에 따르면 마지막은 분명 결혼이잖아. 젠장, 차라리 날 알아봤다면 일이 더 쉽게 풀렸을 수도 있어. 케디아니스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이 동화 속에서 나가는 조건이 뭔지 알아야 해!` 이루린은 말하면서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케실리온이 친절하게 대해주었으면 어땠을까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즉시 이어지는 케실리온의 말에, 이루린은 가슴에 납덩이를 얹었다가 들어올린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다. "신데렐라, 왠지 당신에게 그 이름보다는 실수로 말한 이루린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완전하진 않지만 날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어!` 갑자기 케실리온이 그녀를 빤히 응시하면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로군요. 혹시 날 알고 있습니까?" 이루린은 더 듣지도 않고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전 당신을 오늘 처음 봐요." 이루린은 항상 움직이지 않았던 케실리온의 안면근육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을 빤히 응시했다. 그녀는 그의 행동이 좀처럼 적응이 되질 않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춤을 추고 있을 때, 갑자기 12시가 울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이루린은 아이나가 12시가 되면 마법이 풀린다는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어쨌든 지금 더 이상 춤을 추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죄송해요, 케실리... 아니, 왕자님. 전 이만 가봐야 해요. 다음에 또 뵐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루린은 유연하게 케실리온의 손을 뿌리쳐서 무도회장 밖으로 달렸다. 달리면서 그녀는 속으로 많은 갈등을 했다. .발에 끼워진 유리구두를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유리구두를 놓고 가야하나?` 결국 그녀는 계단의 중간쯤에 왔을 때 의도적으로 오른쪽 구두를 발에서 뺐다. 그리고 일부러 빠진 것처럼 연기하다가, 그녀는 케실리온이 벌써 계단으로 나왔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유리 구두 때문에 아파서 더 달리기가 힘들 즈음, 그녀는 자신이 성에서 조금 떨어진 바닷가의 절벽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둠이 깔려 있는 바닷가의 절벽은 굉장히 높고 무섭게만 보였다. 문제는 케실리온이 아직도 그녀를 신데렐라라고 부르며 뛰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앞에는 절벽, 뒤에는 케실리온. 동화의 내용대로라면 이쪽으로 와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이루린은 절벽 아래를 응시했다. 뛰어내리면 죽을 수도 있는 높이였다. 케실리온의 얼굴은 어둠 속에 가려져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단지 묵묵히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치면서 말했다. "왕자님, 왜 절 쫓아오신 거죠?" 케실리온를 경게하는 마음을 응시하면서 계속 뒷걸음질쳤다. "왕자님이라고?" 차갑게 반문하는 케실리온의 말투에 이루린은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 사이 케실리온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면서 말했다. "연극은 그만하지, 이루린." `기억이 되돌아왔어!` 이루린은 케실리온의 태도가 전과 똑같이 변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난처한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 번 더 뒷걸음질쳤다. 그리고 그 순간, 이루린은 발을 잘못 움직여서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그레텔, 왜 그러는 거야? 너답지 않게 왜 그래? 이상한 소리만 하고. 오빠와 놀고 싶어서 그러는 거로구나?" 케디아니스는 순간 힘이 쫙 빠지는 것을 느꼈다. 저 헨젤이라는 남자아이는 자신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공격할 틈을 주지 않고 갑자기 꽉 껴안는 게 아닌가. 케디아니스는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드래곤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니! 인간인 이들이 나보다도 더 강하다는 말인가? 맞아, 여기는 이루린의 의식 세계와도 같은 곳이지! 그렇다면 이 곳은 내가 예상했던 대로 굉장히 무서운 자들이 판치는 공간인가?` 케디아니스는 덤비면 어떻게 될지 몰라 묵묵히 있었다. 그러는 사이, 헨젤이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오늘은 새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너와 내가 사냥을 하러 가는 날이야." 젊은 여인이 묘하게 웃으면서 밖으로 나갔다. "어서 준비하거라." 문이 닫히자, 헨젤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제 부모님이 우릴 버린다고 했어. 모두 새엄마 때문이야. 이제 어쩌면 좋지? 아마 우릴 산 속에 버릴 거야." 케디아니스는 순간 이루린이 확실히 이상한 동화를 읽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행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정말이야?" "그래. 사실 집의 형편이 좋지 않거든." 케디아니스는 왠지 마음 고생을 꽤나 한 듯한 남자아이가 딱하다는 생각이 들어 도와주기로 했다. 현재로서는 이 동화 속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으니까. 게다가 상황을 보아하니, 그는 헨젤의 동생으로 되어 있는 것 같았으니 어쩌면 도와주는 게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좋은 방법이 있긴 해.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비둘기 모이를 뿌리는 거야. 만약에 길을 잃으면 그 모이를 따라 오면 되는 거지." 좋은 방법이긴 했지만, 조금 평범한데다가 뿌려둔 비둘기 모이를 짐승이 먹어버리면 길을 잃게 될 것이다. 자신의 입장으로 비추어보았을 때 그러지 않고도 충분히 찾아올 수 있는 케디아니스였다. 케디아니스는 은근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도와 줄게." 이루린은 서서히 눈을 떴다. 정신을 잃고 나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는 그녀였다. 대신에 그녀는 차가운 무엇인가가 온 몸을 감싸고 있다는 것과, 다리가 굉장히 불편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위에 파란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속을 유유히 떠다니고 있는 물고기와 각종 바다 생물들이 눈에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직후에 다리를 내려다본 그녀는 깜짝 놀랐다. 다리가 지느러미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상반신의 중요한 부위만 조금 아슬아슬하게 이상한 해조류로 가리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눈앞의 현실에 정신이 번쩍 들어 다시 주위를 둘러보니, 그녀는 만화에서나 봤던 바다 왕국을 볼 수 있었다. 거대한 모양으로 이루어진 그 곳에는 그녀를 비롯한 수많은 인어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공주님! 오늘은 공주님의 생일날이니 일찍 들어오세요!" 이루린은 자신을 향해 부르는 그 목소리를 듣고 몸을 굳혔다. `설마 이번에는 인어공주? 어째서 이야기가 이렇게 전개되는 거야!` 이루린은 그제서야 자신이 그 외에도 헨젤과 그레텔, 백설공주의 이야기도 같이 떠올렸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경악했다. 마왕의아내-48 동화 속 세상 이루린은 침착하도록 노력하면서 어색하게 물 속을 헤엄쳤다. 발 대신에 지느러미로 헤엄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 가봐야 할 곳은 바다 속의 왕궁이 아니라 물 위였다. 동화의 내용에 따르면 인어 공주는 생일날 바다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바다 속에서 숨을 쉴 수 있다는 사실에 묘한 기분이 든 그녀는 어색하게 헤엄쳐서 수면 위로 올라갔다. 밤이었기 때문에 물 속이나 수면이나 거의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수면 위로 고개를 든 순간, 그녀는 배를 한 척 볼 수 있었다. 화려하고 거대한 배였는데, 갑판에 화려한 옷을 입은 누군가가 올라타 있었다. 이루린은 당연히 왕자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배 쪽으로 좀 더 가까이 갔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그 왕자가 케실리온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한 번 더 놀랬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케실리온을 부르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만나! 거의 반라에다가 지느러미인데. 좋아, 동화의 내용에 따르면 분명 마녀를 찾아가라고 했어.` 이루린은 혹시나 케실리온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나 뒤집혀서 자신이 인공호흡을 해야 하는 경우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왕자도 왕자 나름이어야지, 그게 케실리온이라면 분명 물에 빠져서 죽는 경우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안심한 그녀는 일단 물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마녀를 찾아가서 다리를 얻을 차례였다. 그녀는 물 속으로 깊게 헤엄친 후에, 자신과 같은 지느러미를 가진 여성 인어에게 물었다. "마녀가 살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나요?" '마녀가 살고 있는 곳은 이 곳에서 서쪽으로 오랫동안 헤엄치면 동굴이 하나 나올 거예요. 거기에 있답니다." "고마워요." 이루린은 최대한 빨리 헤엄쳐서 서쪽으로 향했다. 물살이 빠르지 않아서 계속 서쪽으로만 향하다 보니, 얼마 가지 않아 작은 동굴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곳에는 인어나 물고기는 아예 없었고 간간이 수면 근처로 떠돌아다니고 있는 상어가 있었다. 굉장히 기분 나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곳이었다. 그녀는 망설임없이 그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을 들어가자, 어디선가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빛을 따라 계속 들어가니 작고 아담한 공간이 나왔다. 그 곳에는 화학 약품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선반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마치 부엌처럼 어질러진 이상한 광경에 커다란 냄비도 있었다. 그 냄비를 만지고 있는 금발의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선반에서 약을 찾고 있었다. 이루린은 주위를 둘러보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바다 위로 가고 싶은데요. 당신은 그 방법을 알고 있나요?" 금발의 여자가 행동을 멈추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이루린을 응시했다. 그 순간 이루린은 소리를 지를 뻔했다. `엘리세아!` "누구지? 오호라, 바다 왕국의 인어 공주로군. 그래, 무슨 일로 날 찾아왔다고?" 엘리세아는 정말로 눈뜨고는 보지 못할 정도로 검은 색의 뇌쇄적인 옷을 입고서 묘하게 웃고 있었다. 다행이게도 엘리세아는 전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루린은 태연해지려고 애쓰며 말했다. "바다 위로 가고 싶어요." 이루린은 엘리세아의 입에서 목소리를 내 놓으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물론 이루린은 엘리세아가 자신의 목소리를 달라고 한다면 절대로 주지 않을 것이다. 만약에 그랬다가 마계로 돌아가서도 목소리를 되찾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낭패가 아닌가. 엘리세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선반 위의 몇 가지의 이상한 약품을 집더니 뚜껑을 열고 그대로 거대한 냄비 속에 넣어버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냄비 속에 넣은 그 물질들이 혼합되어 소용돌이치더니, 이윽고 금빛의 가루로 추정되는 이상한 물질이 되었다. 빈 병의 뚜껑을 연 엘리세아가 냄비에 손을 가까이 하자, 그 금빛의 물질은 그대로 병 속에 빨려들었다. "이 병에 든 것을 먹으면 네 지느러미는 다리로 변할 수 있지. 하지만 대가가 필요해." 이루린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난 네 목소리가 아름답다고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들으면 들을수록 귀에 거슬려." 이루린은 그 말에 은근히 화가 나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엘리세아도 자신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네 외모는 정말로 탐낼 만해. 네 외모를 나에게 줘." 이루린은 그 예상치 못한 조건에 순간 당황했다. 목소리가 아니고 외모라니. "나와 당신의 외모를 바꾸자는 말인가요?" "아니, 네 외모의 형체만 병 속에 담을 거야." 이루린은 그게 과연 가능한 것인지 묻고 싶었다. "그럼 내 얼굴은 어떻게 되는 거죠?" 엘리세아가 사악하게 웃으면서 그녀에게 다가왔다. "당연히 흉측하게 변하겠지." 이루린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렸다. 굳이 타협할 생각이 싹 사라진 것이었다. "이런, 정말로 그럴 생각이라면... 말로 해서는 안되겠군요." 타협이 불가능하면 강제적으로 협박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녀는 벽에 장식용으로 걸려 있는 칼을 잡은 후에 표정이 변하고 있는 엘리세아에게 겨누었다. 케디아니스는 헨젤과 함께 묵묵히 밤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헨젤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안쓰럽게 응시했다. 낮에 헨젤의 부모와 함께 외출하면서 모든 건 그의 예상대로 되었다. 헨젤이 뿌린 과자는 집에 돌아갈 즈음 순식간에 사라져 있었고, 더불어 그의 부모도 온데 간데 사라졌다. 졸지에 헨젤과 케디아니스는 미아가 되었다. "어쩌지, 그레텔? 과자가 없어졌어! 우린 이제 어떻게 하지?" 케디아니스는 한숨을 쉬며 헨젤의 묵묵히 헨젤의 옷을 잡고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한시간도 채 되지 않아 집에 도착할 수 있엇다. 그 평범한 집에서 자는 건 매우 어려웠다. 거추장스러운 드레스와 머리에 달린 리본 - 풀어지지도, 벗을 수도 없었다. -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던 케디아니스였다. 단지 그는 지금 속으로 이루린을 떠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다음날 저녁, 케디아니스와 헨젤은 또 한번 미아가 되었다. 이번에 헨젤이 뿌린 돌은 조약돌이었기에, 케디아니스는 조약돌이 없어진 게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헨젤의 말대로 정말로 부모가 버린 것이었다. 케디아니스는 헨젤과 어두운 밤길 속을 거닐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그는 헨젤의 겁에 질린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떡해, 늑대야!" 케디아니스는 왜 헨젤이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놀라고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했다. 아무리 늑대라고는 하나 별다른 마력이나 살기가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숲의 어디선가 마물로 추정되는 10마리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안광이 어둠 속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 형체는 잠시 케디아니스와 헨젤의 주위를 감돌다가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케디아니스는 허무한 기분을 느꼈다. 한눈에 봐도 지나치게 약했던 것이다. `뭐야, 마물이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로 지나치게 약하잖아.` 겁에 질려 있는 그레텔 또한 이상하게 여겨졌다. 분명히 드래곤을 무서워하지 않는 인간이라면 자신만큼이나 강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보통 인간들보다도 더 나약한 모습은 웬 말인가. 갑자기 10마리의 형체가 케디아니스를 향해 돌진했다. 케디아니스는 본능적으로 발을 뒤로 빼서 몸을 지탱한 후에 손목을 풀었다. 그런 다음 그것들 중 한 마리가 자신을 머리 위로 뛰어올랐을 때, 그는 재빨리 주먹으로 그 마물의 급소를 찔렀다. 그러자 정말로 시시하게도 바로 죽어버렸다. `이상한데.` 케디아니스는 경악하는 듯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헨젤을 더 이상하게 응시했다. 그는 비교적 여유 있는 태도로 나머지 마물들을 모조리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않고 주먹으로만 죽여버렸다. 그는 태어나서 이렇게 약한 마물들은 처음 보았기에 머릿속이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 그레텔... 너..." 헨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케디아니스를 응시했다. 케디아니스는 그런 헨젤이 이상하게만 느껴?다. "주, 죽여버리겠어! 인어공주!" 이루린은 헐떡거리고 있는 엘리세아를 응시하면서 가볍게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는 병을 들었다. 언젠가 엘리세아를 흠씬 두들겨 패주는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자리에서인 줄은 꿈에도 몰랐던 그녀였다. 굳이 검을 쓰지 않고도 주먹으로만 엘리세아에게 폭력을 행사한 다음, 그녀는 간단하게 그녀의 손에 든 병을 빼앗았다. "잘 있어, 마녀." 이루린은 웃은 후에 병을 들고 헤엄치기 시작했다. 일단 그녀는 육지로 가서 병에 든 것을 마실 생각이었다. 육지가 어디쯤인지 몰랐기에 그녀는 연신 수면 위로 고개를 들면서 헤엄쳐야만 했다. 밤이어서 그런지 몸에 한기가 느껴졌지만 멈출 겨를이 없었다. 어서 이 상태를 벗어나야만 했기에 그녀는 밤새도록 헤엄쳤다. 그렇게 차차 태양이 산에서 고개를 들 즈음, 그녀는 겨우 육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곳이었다. 분명히 현재 신데렐라가 나오는 배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의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뭐, 좋아. 일단 마시자." 그녀는 그 병에 든 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잠시 후에 그녀는 몸에 뜨거운 것이 퍼지는 것을 느꼈고, 다음으로 머리가 강제적으로 무거워져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병을 떨어뜨리고 쓰러졌다. 이루린은 눈을 떠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떤 공간이 눈에 들어왔는데 굉장히 작고 아늑해 보였다. 그녀는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있었으며,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어떤 곳으로 이동되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드워프로 추정되는 키 작은 난쟁이들이 그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로 믿기 힘들게도 숫자는 모두 7명이었다. "어디를 가셨던 건가요? 당신이 물가에 쓰러져 있어서 걱정했어요. 백설공주 님."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드워프가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이루린은 그 순간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백설공주야?` 마왕의아내-49 동화 속 세상 3일째 되던 날, 케디아니스는 역시 길을 잃고 헨젤과 함께 산 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는 어느 곳에 집이 있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계속해서 같은 내용을 반복만 하지 않았던가. 동화의 내용을 몰랐지만 그레텔은 이쯤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길을 잃은 척 하기로 했다. 케디아니스는 자신과 함께 걷고 있는 헨젤을 응시하며 물었다. "마법 쓸 줄 알아?" 헨젤은 눈을 크게 뜨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처음 듣는 언어라는 듯이. "마법? 마녀를 말하는 거야?" 뜻밖의 대답에 이번에는 케디아니스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마녀라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 어?" 그 때, 케디아니스는 뭔가가 코끝을 예민하게 자극하는 어떤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처음 맡아보는, 굉장히 부드럽고 향긋한 냄새였다. 냄새가 점점 강해지자, 그는 자연스럽게 속이 쓰려옴을 느꼈다. 음식을 먹을 시간이 꽤 지났기 때문이었다. "그레텔, 왜 그래?" 헨젤은 냄새를 맡지 못하는 것 같았다. 케디아니스는 냄새의 유혹에 자신도 모르게 헨젤의 옷깃을 잡고 강제적으로 끌었다. 숲 어딘가에서 풍겨져 오는 냄새는 황홀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기를 1시간, 숲이 끝나고 넓은 공터가 나오자 그는 기가 막힐 만큼 화려한 집을 볼 수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집이었다.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환상적이고 먹음직스러운 집이라고나 할까. 놀라기는 헨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얼른 그 심상치 않은 집으로 달려가더니 코를 들이대면서 냄새를 맡았다. 그는 굉장히 흥분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레텔, 먹어봐! 정말 굉장해!" 케디아니스는 특이한 그 과자 안에 혹시나 독극물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배가 고픈 욕망이 앞섰기에 자신도 모르게 달려가서 과자로 만들어진 집을 뜯어서 먹었다. 집을 뜯어먹는다는 사실이 굉장히 새로운 그였다. 개중에는 처음 보는 정체 불명의 과자들도 있었고 맛도 특이했다. 그 때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그 속에서 할머니라고 생각될 만큼 얼굴에 주름이 많이 진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케디아니스와 헨젤은 즉각 행동을 멈추었다. "내 집을 먹고 있는 게냐?" 헨젤이 난처해하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노인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다. 더 먹고 싶은 게로구나. 그렇다면 날 따라 오렴. 마음껏 주겠다." "정말이요?" 헨젤이 아무른 의심도 하지 않고 노인을 따라 집으로 들어간 후, 케디아니스는 잠시 가만히 서서 그 노인을 주시했다. 그 노인에게서는 강한 마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는 왠지 불안했지만 동화의 내용이라고 생각하고는 그러려니 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한숨만 나왔다. 드워프, 아니 7명의 난쟁이들이 모두 밖으로 나갔을 때 이루린은 어찌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동화의 내용이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그녀였다. 그녀는 일단 일어나서 1층으로 내려왔다. 7명의 난쟁이들이 부산하게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케실리온은? 케디아니스는 어디에 있을까. 왜 이렇게 일이 꼬이는 거지?` "도와 드릴 일이 없나요?" "그냥 편하게 쉬세요, 백설공주님." 이루린은 호칭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꾹 참았다. 일단 동화의 내용대로 왕비가 사과를 들고 찾아와서 사달라고 하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에 아무나 잡고 실컷 대화나 나누어야만 했다. 동화의 내용이 어떻게 튈지 몰랐지만 말이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왕비는 자신의 방에 걸린 거울을 바라보며 기대에 찬 마음으로 물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거울이 보여준 모습은 왕비가 아니라 백설공주였다. 백설공주는 현재 7명의 난쟁이들이 사는 집의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게 자신이 아니라 백설공주라는 사실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더불어 심한 질투심도 느꼈다. 기껏 쫓아냈는데 아직도 백설공주가 예쁘다니. "왕비님, 누군가가 찾아왔습니다." 왕비는 화가 나서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들여보내!" 놀랍게도 방으로 들어온 것은 그녀가 잘 알고 있는 바다 왕국 근처에 살고 있는 마녀였다. 같은 마녀의 신분이었기에 서로 어느 정도의 안면이 있었다. "여긴 왜 왔지?" 그런데 바다 마녀는 굉장히 안색이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얼굴이나 몸은 온통 멍으로 흉측하게 변해 있었다. 옷도 성하지 않고 군데군데 찢겨져 있었다. 마치 전쟁터에서 살아 나온 전사같았다. . "하소연을 하러 왔어요." 그녀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진정시키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이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요." "누구?" 그런데 돌아가던 고개가 갑자기 한 곳에서 멈추었다. 그녀의 표정이 급속도로 변했다. "저 거울 속에 있는 여자 말이에요." 언제까지 이 곳에 있어야 할지 몰라 지루하기만 찰나 - 겨우 이틀이 지났지만 -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모두들 2층에 올라가 있었기에, 그녀가 문을 열어야만 했다. 문을 열자 예상대로 깊게 두건을 쓴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나 그 노인의 손에는 사과가 잔뜩 든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이루린은 그 노인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사과를 하나 집어들었다. "이 사과, 공짜죠?" 두건을 쓴 모습의 노인이 조금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루린은 노인을 두들겨 패고 사과를 먹지 않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동화의 전개대로 하지 않고 깽판을 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그녀였다. `연기를 잘해야 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니까. 넘어질 때 아프지 않아야 할텐데.` 이루린은 일단 사과를 씹었다. 물론 처음에는 깊게 이빨로 베다가, 사과를 떨어뜨릴 즘에는 아주 조금만 입 속에 넣었다. 두건으로 눈을 가린 노인의 입가에서 회심의 미소가 감도는 게 보이면서, 그녀는 일부러 비틀거렸다. 그리고 사과를 떨어뜨리면서 괴로운 듯이 몸부림을 쳤다. 그런 다음 천천히 벽을 짚으면서 아프지 않게 바닥에 쓰러졌다. "백설공주님!" 실눈을 뜨고 문밖을 바라보니 마녀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완전히 눈을 감고, 난쟁이들이 2층에서 내려오는 무수한 발자국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잠시 후에 그들은 울면서 그녀의 몸을 안아들면서 흔들었다. `일단 이 부분은 무사히 넘겼는데 그 다음 부분은 뭐였지?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네...` 이루린은 고개를 옆으로 떨구어서 자연스럽게 씹다 만 사과를 뱉었다. 이대로 죽은 척만 하고 있으면 끝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한가지의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곧 깨닫곤 경악해야만 했다. `마, 맞아. 백설공주가 죽음에서 깨어나는 방법은 키스. 그것도 왕자... 설마!` 이루린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처음부터 깽판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인어공주, 신데렐라 등 신체의 접촉을 해야만 하는 위험한 요소가 잔뜩 들어있었으나 교묘하게 피한 그녀였다. 당연히 이번에도 피해야만 했다. 멀리서 난쟁이들이 회의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밖에 놔두다가 관에 넣읍시다." 잠시 후에 이루린은 자신의 몸이 7명의 난쟁이들에게 들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바람이 불어오는 느낌에 한기를 느끼면서 자신의 몸이 집밖에 놓여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쟁이들이 잠시라도 그녀를 놔두면 도망칠 수 있을 텐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루린은 난쟁이들이 사라지기를 바라면서 그들을 심하게 원망했고, 잠시 후에는 자신의 몸이 커다란 상자에 담겨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눈을 떠보니 그녀는 투명한 유리관에 닫혀 있었다. 다행이게도 숨을 쉴 수 있게 뚜껑을 닫혀져 있지 않았다. "왕자님이다!" 한 난쟁이의 목소리에 이루린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오한이 들면서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왕자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모르는 사람과 키스해야 한다는 건 정말로 끔찍했다. 물론 알고 있는 사람과 하는 것은 더더욱 끔찍했다. 이루린은 실눈을 뜨고 어렵게 앞을 응시했다. 난쟁이들이 한 남자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남자는 백마를 타고 있었으며 긴 흑발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보았다. `맙소사! 케실리온.` 피할 수 없는 상황이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거였다. 마왕의아내-50 동화 속 세상 이루린은 갖가지 상상을 다했다. 케실리온이 말을 타고 오다가 갑자기 땅이 꺼져서 빠지는 상상, 모든 난쟁이들이 벼락을 맞고 죽는 상상, 그녀가 직접 동화 작가를 찾아가서 내용을 바꾸라고 협박하는 상상 등 가급적이면 모든 상황을 떠올렸다. `젠장, 이제 어쩌지?` 그녀는 후회하면서 속으로 케디아니스를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그를 만나면 꼭 고문을 가하리라고 다짐하면서, 그녀는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손에서 땀이 베어 나오고 몸이 긴장한 탓인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아냐, 케실리온은 동화의 내용을 몰라! 꼭 키스를 하란 법도 없잖아?` 이루린은 속으로 일말의 희망을 가져보면서 점점 가까워져오는 말발굽 소리를 들었다. 한 난쟁이가 굉장히 구슬픈 어조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백설공주님은... 벌써 운명하셨습니다." 케실리온이 백마에서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죽었다고?" 의혹에 섞인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 그녀는 시치미떼고 죽은 척 하면서도 케실리온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기가 조금 힘들었다. 그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는 바로 그녀 앞에서 멈췄다. 순간 그녀는 코끝에서 케실리온의 차가운 손가락의 감촉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크게 후회해야만 했다. `아뿔싸. 숨을 멈추고 있었어야 하는 건데. 그럼 내가 일부러 죽은 척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있을 텐데..?` 갑자기 그녀는 케실리온의 손이 자신의 머리를 받치고 들어올리는 것을 느끼곤 속으로 놀랬다. 그러는 사이 케실리온은 나머지 한 손으로 자연스럽게 얼굴에 덮인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녀는 이마에서 머물다가 사라진 차갑지만 부드러운 감촉에 눈을 크게 떴다. 케실리온이 그녀의 이마에 키스한 것이었다. "케실리온?" 그녀는 몸을 벌떡 일으키고 케실리온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무표정 덕분에 그녀는 더욱 당혹스러움과 민망함을 느껴야만 했다. 그녀가 난처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어색하게 주위를 둘러보자 난쟁이들이 멍한 표정으로 서로를 응시하더니 갑자기 매우 기쁜 표정을 지으며 소리를 질렀다. "공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 "정말로 고마워요, 왕자님!" 그들이 떠들고 있는 사이 케실리온이 그녀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일단 가도록 하지." 갑자기 케실리온이 두 팔로 그녀의 몸을 안았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케실리온의 행동에 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의 태도가 평소와는 다르게 정말로 신사적으로 변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어색하게 머리를 기대면서 그가 동화의 내용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게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다시 기억을 잃은 건가?` 케실리온이 그녀를 말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가 자세를 잡고 있는 사이 케실리온도 그녀의 바로 뒤에 올라탔다. "고마웠어요, 모두들." "잘 가세요, 백설공주님. 왕자님과 행복하게 사세요!" 이루린은 그들과 마치 오랫동안 같이 있었던 것처럼 친근하게 웃어주었다. 그게 예의였는데, 예상대로 케실리온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난쟁이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온통 푸른 나무로 뒤덮인 울창한 숲에 뚫려 있는 길이 계속될 즈음, 케실리온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무거우니까 머리 좀 치웠으면 좋겠군." 그 말에 은근슬쩍 화가 난 이루린이 일부러 머리에 힘을 주어 기대며 말했다. "내 머리가 좀 무거워야 말이지. 무거울수록 비싸게 받는다는 것도 몰라?" 케실리온은 단지 미동도 하지 않고 나지막하게 말할 뿐이었다. "돌머리였군." "......" 이루린은 그 순간, 케실리온의 신사적인 행동이 단순히 목적을 위한 겉치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짧게 한숨을 쉰 그녀는 처음보다는 비교적 편안하게 그에게 등을 기댔다. 그도 그런 그녀를 피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주었다. 한참 더 말을 타고 천천히 걷자 케실리온이 물었다. "...케디아니스는?" 그녀는 깊게 한숨을 토해냈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날 찾아낸 거지?" "절벽으로 떨어진 직후 배로 바다를 수색해 보았다. 그러던 도중, 어떤 자가 네 정보에 대해 간접적으로 알려주었지. 성으로 돌아간 후에 말을 타고 이 근처를 찾았다." 케실리온은 잠시 말을 끊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특이한 세계관이로군. 마법은 없는 데다가 배경이 중간계. 인간 외에는 강한 게 아무것도 없는 평화로운 곳인가. 도대체 어렸을 때 뭘 읽었을까." 이루린은 은근슬쩍 그의 말을 돌리며 말했다. "아, 그건 그렇고, 왜 우리가 이 곳에 있는지 알고 있어?" "그 어린 드래곤이 만든 물건은 네 의식을 이용해서 얼마든지 악용할 수 있는 구슬이다. 그리 위험하지 않지만, 당사자들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는 조금 위험할 수도 있다. 가령 이 곳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 이루린은 케실리온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케실리온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 곳은 특정한 자의 의식으로 이루어진 세계인데, 구슬 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구슬 밖으로 나가는 방법은 구슬을 지배하고 있는 자가 만든다. 구슬을 지배하는 자는 기준이 없이 아무렇게나 생기는데, 나가려면 그 자를 잡아야겠지." 그제서야 납득이 가는 이루린이었다. 그러나 이 세계를 관장하는 자가 생기는 기준이 랜덤하니 어떻게 찾아낸단 말인가. 이렇게 넓고 넓은 세상인데. 그 때였다. 갑자기 먼 곳에서 사람의 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의 형상이 점점 가까워지자, 그녀는 그 형상이 작은 남자아이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작은 남자아이는 굉장히 다급한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도 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도와주세요! 제 동생이, 동생이!" 이루린이 작은 남자 소년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제 동생인 그레텔이, 지금 마녀에게 잡혀 있어요! 언제 잡아먹힐지 몰라요! 저 대신 자기가 잡히겠다고..." 이루린은 그 순간 그 남자 아이의 이름이 헨젤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곤 속으로 실소를 금하지 못했다. 헨젤과 그레텔의 이야기가 언제 나오나 싶었는데 드디어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헨젤의 말은 뭔가가 이치에 맞지 않았다. 분명히 동화의 내용에 따르면 헨젤과 그레텔은 같이 감옥에 갇혀서 탈출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레텔은 분명히 나이가 어린 여자아이일텐데, 사랑하는 오빠를 위해 자기가 대신 잡히겠다고 나설만한 사고가 있을까? 이루린은 케실리온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가 손을 느슨하게 풀자 이루린은 말에서 내린 다음 헨젤을 향해 물었다. "케디아니스는 어디에 있지?" 이루린은 헨젤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동화 속의 헨젤의 얼굴이 이렇게 바뀐다는 생각에 순간 그럴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헨젤이 다급하게 외쳤다. "저를 따라오세요! 어떡하죠? 동생이 죽을 지도 몰라요!" 이루린은 마녀의 목숨을 걱정했다. 케디아니스는 헨젤이 나간 이후 자신이 작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헨젤이 없어야 마음대로 현신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적당하게 때를 봐서 좁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현신해 버렸고, 그 결과 감옥은 그의 힘에 의해 부서지게 되었다. 그가 마당으로 나간 후에 노인은 깜짝 놀라면서 지팡이를 들고 쫓아왔다 그는 노인을 지독하게 노려보았다. 한 손에는 검을 들고, 나머지 한 손에는 과자를 잔뜩 들고서. "이 엽기적인 할망구야. 그 남자아이와 날 잡아먹으려고 해? 취향도 별나시군. 그리고 감히 인간 따위가 내게 덤비려고 하는 거야? 죽고 싶나?" "이, 이런! 건방진 꼬마!" 노인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지팡이를 들면서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케디아니스는 이 세계의 인간들이 모두 겁을 상실했다고 생각했다. 드래곤으로 현신했는데도 무서워하지 않는다니. 그 이후 다시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온 케디아니스는 집이 부서지도록 노인과 약 1시간 동안 티격태격하며 싸웠다. 예상외로 마녀의 실력은 상당했고, 전혀 그에게 뒤쳐지지 않았다. 이상했던 것은 마법이 아닌 마법을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역시 케디아니스는 지지 않았다. 아니, 드래곤이 인간에게 진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케디아니스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뒤질 수도 있었으나, 노인이 굉장히 나이가 들고 공격 속도가 느렸기에 이기는 게 가능했던 것이다. 케디아니스가 쓰러진 노인에게 검을 겨누었다. "자, 이제 항복하시지!" 그 때 갑자기 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그레텔! 나 왔어!" 헨젤은 케디아니스가 검을 든 모습을 보고 굉장히 놀란 듯이 몸을 굳혔다. 그러나 헨젤보다도, 헨젤 뒤로 다가오고 있는 자들을 보고 케디아니스는 더 많이 몸을 굳혔다. 순간 호흡이 정지된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신변의 위협을 알리는 신호음이 머릿속에서 웅웅거리고 있었다. 이루린이 화사하게 미소를 띄면서 - 그러나 살기가 감춰진 - 말했다. "케디아니스, 반갑구나." 케디아니스는 얼른 이 장소에서 도망치려고 했다. "도망치면 동반 자살이 뭔지 가르쳐주지." 그 말에 발이 그대로 땅에 붙어버린 케디아니스는 그 자세 그대로 헨젤을 원망스럽게 응시했다. 헨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연신 주위를 두러보다가 이루린의 손에 의해 기절했다. 이루린이 손으로 그의 목을 가격한 것이었다. 헨젤이 바닥에 쓰러지자, 케실리온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너로군." 케실리온이 마녀에게로 다가서자, 케디아니스는 그런 그를 이상하게 응시했다. 이루린도 마찬가지였다. 노인은 비틀거리며 일어서더니, 점차 뒤로 조금씩 물러서며 말했다. 케실리온을 몹시도 경계하는 눈치였다. 하기야 그의 눈빛을 받고 함부로 대할 자가 그리 많지 않기는 했지만 말이다. "네가 구슬을 지배하는 자로군." 갑자기 노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다가 몹시도 당황해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어, 어떻게 알았지?" 노인의 폭언에 이루린의 표정이 놀람으로 바뀌었다. 놀란 건 케디아니스도 마찬가지였다. "이 곳에서 나가는 방법을 말해라." 노인은 케실리온의 검을 두려운 듯이 응시하면서 애써 용감하게 외쳤다. "흥,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죽일 테면 죽여라! 그러면 영원히 나가지 못할 테니." 케디아니스는 이루린의 살벌한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필사적으로 외쳤다. "어서 말해! 난 네 창조주란 말야!" "흥, 애송이 주제에." 노인의 입에서 방법을 말할 의사가 도저히 나오지 않자, 일단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케디아니스와 이루린, 그리고 케실리온이 순식간에 노인을 포위하면서 모였다. "말할 때까지 손톱과 발톱 밑으로 바늘을 하나씩 꽂는 거야." "아냐, 그것보다는 그냥 하나씩 빼는 거야. 소금을 뿌려가면서." "검으로 아무 곳에나 깊게 그어주는 방법도 괜찮지." "바늘을 눈에다 꽂았다가 빼는 것을 반복하는 거야." 서로의 의견이 쏟아져 나오자, 노인의 표정이 굉장히 새파랗게 변했다. 노인은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몸을 움츠렸다. 눈동자에는 이루린과 케실리온, 그리고 케디아니스를 향한 공포가 서려 있었다. 노인은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노인의 몸에 들어온 게 한이로구나. 어쨌든 이 곳에서 나갈 방법을 말해주겠다. 이 방법은 참고로 창조주의 의식 속에서 가져온 방법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노인의 시선이 이루린과 케실리온에게 향했다. "서로의 키스다." 마왕의아내-51 황태자와 가출 이루린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노인의 어깨를 잡고 세게 흔들면서 조금 과격하게 외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장난하지 말고 빨리 불어!" 이루린은 이성을 잃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면 술을 잔뜩 마셔서 취하고 싶기도 했다. 그녀는 노인은 입에서 어서 다른 대답이 튀어나오기를 굳게 믿으면서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노인은 놀랍게도 몽롱한 시선으로 이루린을 응시하더니, 곧 눈을 감고 그녀의 손에서 축 늘어졌다. 이루린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뭐, 뭐야? 왜 죽은 척 하는 거지?" 케실리온이 짤막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구슬을 지배하는 자가 이 구슬 속으로 들어온 자들에게 나가는 방법을 말하게 되면 자연히 소멸한다. 즉, 이 노인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자가 사라졌다는 뜻이겠지." 이루린은 노인을 잡고 있는 손을 놓고 케실리온을 빤히 응시했다. 지금이나 전이나 다를 바 없는 표정이었기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홱 돌려 이번에는 케디아니스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모든 분노를 쏟을 작정이었다. "창조주의 생각에서 나온 거라고?" "아냐, 난 일부러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냐! 난..." "생각 한 번 참 잘 했구나, 케디아니스. 날 물 먹일 작정으로 이런 짓을 저질러?" 애써 변명하기 위해 손짓 발짓 사용한 케디아니스는 입술을 떨면서 어린 새끼 양처럼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는 노인과 이루린, 케실리온을 번갈아 본 후에 뒤로 냅다 검을 던지곤 숲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루린은 그런 그를 잡을 생각으로 앞으로 뛰었다. 그런데 그 즉시 그녀는 손목에서 강한 힘을 받고 뒤로 당겨졌다. "케, 케실리온..." 이루린은 그가 옆에 있다는 것을 잠시 잊었다는 사실을 후회하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케디아니스가 멀리 숲 속으로 사라진 후에 주위에 긴 침묵이 흘렀다. 케실리온은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고, 이루린은 연신 케디아니스가 사라진 곳과 케실리온, 그리고 노인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이런 침묵이 흐른 적이 물론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현재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좋아, 케디아니스는 어차피 마계로 돌아가면 잡을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이 황당한 탈출법은..." 이루린이 말하기를 망설이는 사이, 케실리온이 짧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돌아가야 한다는 건 잘 알고 있을 텐데." 그 말이 끝나자마자 케실리온은 그녀 앞에 서더니 자연스럽게 두 어깨를 잡았다. 이루린은 놀랐지만 벌써 만반의 준비를 다 하고 있던 터라 별다른 행동을 하진 않았다. 대신에 자연스럽게 심장이 뛰고 긴장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케실리온이 행동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 케실리온이 두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녀는 부드러운 입술에서 감촉을 느꼈다... 그녀는 왠지 자신만 어색한 동작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손으로 조심스럽게 케실리온의 허리를 감쌌다... 그녀는 실눈을 떠서 케실리온의 눈동자를 본 후에 도로 감았다... 편안하기는 했지만 굉장히 묘한 기분이었다.... 그와 키스를 나누는 도중에도, 그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하고 의문을 가졌다.... 그 날 마왕성에 훈련받으러 나온 상급 마족들이 모두들 경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들은 모두 마왕성 꼭대기에 서 있는 붉은 머리의 한 젊은 여자가 - 너무 높아서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 키가 작은 붉은 머리의 한 꼬마가 밧줄에 꽁꽁 매달려서 일명 `번지점프`라는 것을 - 물론 아무도 뜻을 몰랐지만 - 하면서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가끔 가다가 마왕성 상공을 날아다니는 정찰새 로우가 거미인줄 알고 케디아니스의 머리를 삼켜버리다가 목에 걸려 죽는 웃지 못할 불상사도 벌어지곤 했다. 케디아니스는 그 날 이루린에게 혹사당했던 것을 떠올리면서 성큼성큼 걸었다. 언젠가 꼭 그 자신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는 방향으로 이루린을 곤경에 빠뜨리게 만들리라고 다짐했다. 괜히 화가 나서 그는 케실리온을 방으로 통하는 문을 세게 열었다. 방에는 마침 아무도 없었다. "에잇!" 그는 침대 근처로 가자마자 몸을 날려서 침대 위로 엎어졌다. 그런데 그 순간,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침대의 정 중앙이 갈라지면서 반으로 쪼개진 것이었다. 그는 이 빌어먹을 사태에 어찌해야 할지 몰라 잠시 입을 다물지 못했다. "......" `내가 이루린이야? 아니면 이 침대가 낡아서? 어쨌든 큰일이야. 이제 난 죽었다.` 케디아니스는 연신 불안한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 방에 머물러 있는 자는 딱 세 명이지 않은가. 이루린이라면 당연히 그라고 생각할 것이고, 케실리온도 상황을 종합한 다음에 이루린의 말을 듣고서 그라고 판단을 내릴 것이다. 그 다음에는 거의 지옥을 돌아다니는 기분을 맛보게 될 것이다. 사실 이루린이 그에게 육체적인 고통을 가했다면, 케실리온은 그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가했다. 더군다나 침대가 케실리온의 것인 관계상, 그가 그 숨막히는 눈동자를 바라보는 정신적인 피해는 상당히 심할 것이다. `방법은 단 하나.` 그는 속으로 쓰게 생각하면서 침대에서 내려와 간단하게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멀리 가출하는 거야. 마계로.` 이루린은 세 번째 관문에 관한 편지를 읽으면서 마왕성 복도를 걷고 있었다. 마침 세 번째 관문에 관한 글을 읽고 있던 차였다. 내용에 따르면 이번에는 마왕성 내부에서 관문을 치른다고 했다. 물론 케디아니스도 같이 와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좋아, 몇 일 남지 않았군. 그 동안 푹 쉬어볼까...` 편지를 주머니 속에 넣은 이루린은 문을 열고 케실리온 방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대로 정지했다. 마치 나무를 손으로 격파한 것처럼 침대가 두 동강이 난 것이었다. 그녀는 이런 짓을 할 자가 단 한 명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마왕성 복도를 뛰어다니면서 고함을 질렀다. "케디아니스! 당장 이리 나와!" 그녀는 케디아니스를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밤 어디서 케실리온과 함께 어디서 자야할지 고민하면서 - 물론 바닥에서 자게 된다면 당연히 케디아니스의 바구니를 없앨 생각이었다. - 힘들게 뛰어다녔다. 데이비드는 회의실에서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 없는 군주를 대신해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 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한 상급 마족이 들어왔다. 그는 굉장히 급했는지 회의실 내부에는 들이지 말아야 할 창을 한 손에 그대로 들고 있었다. "큰일났습니다, 데이비드님!" 데이비드는 서류를 보다 말고 인상을 쓰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인간들이... 인간들이 대군을 끌고 마계로 쳐들어왔습니다!" 카란델이 그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반문하면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라고? 마계의 문이 분명히 닫혀 있을 텐데 어떻게 들어온단 말인가! 인간들이 열 수 있는 성질이 아니지 않나! 누군가가 마계의 문을 건드리지 않는 한!" 주위가 어수선해지는 틈을 타 카란델는 불안한 눈으로 데이비드를 응시했다. 데이비드 또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고 여겨 카란델과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요즘 그는 각 차원계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군주에게서 들은 바 있었기에, 이번 일도 분명히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데이비드는 심각하게 한숨을 쉬면서 물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현재 그들은 라르시크 마을 입구 주변에 포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첩자가 현재 마왕성 근처로 침입했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일단 나가서 그들의 행동거지를 주도면밀하게 살펴라. 이상한 낌새라도 있으면 상부에 알리고. 그리고 즉시 마왕성 근처에 마족들을 풀어서 엄밀하게 감시하라고 일러라. 나는 곧 군주님께 보고하러 갈 테니." "알겠습니다! 바로 명령을 수행하겠습니다!" 상급 마족이 문을 닫고 사라지자, 데이비드는 어수선한 고위 마족들의 분위기에 잠시 침묵했다. 뭔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알카서스 제국의 황태자 리안은 현재 마왕성의 풀숲에서 한 여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여인은 제국 내에서는 정말로 볼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고, 현재 그의 가슴에 잔잔하게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어째서 마족들이 득실득실한 이런 마왕성에 있단 말인가. `인간이겠지. 잡혀온 건가?` 그는 연신 `케디아니스.`라고 부르는 여인을 응시하면서, 갑자기 아내로 삼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충동적인 생각일지 몰랐지만서도. 마왕성 내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는 몰랐지만, 입고 있는 옷이 굉장히 간단한 것으로 보아 그리 높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인간일 테니 결코 높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는 주위에 마족이 있는지 경계하면서 자신을 호위하는 두 기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생포해." 그는 그 여인을 자신의 막사로 대려갈 생각이었다. 마왕의아내-52 황태자와 가출 케디아니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걷기만 했다. 이루린이 금방이라도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쫓아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그는 넉넉하게 여행할 수 있는 돈과 검만을 챙긴 상태였다. 언제까지 이 여행이 지속될지 몰랐지만 살고 봐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것까지 계산하진 않았다. 전에 이루린과 함께 갔던 쪽의 오른쪽 길말고 - 거의 악몽에 가까운 추억이었다. - 다른 길을 선택해서 한참 걷자 어느덧 숲이 사라지면서 광활한 평야가 눈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마물들의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었고, 대신에 황량한 바람만이 흙을 쓸어 넘기고 있을 뿐이었다. 다리가 아프고 쓰리며 힘들겠지만 마을이 나올 때까지 걸어서 가야만 했다 . 라센트 마을. 오늘도 어김없이 동이 트자마자 물건을 파는 가게 점원들이 치열한 경쟁을 하기 시작했다. 손님들을 한 명이라도 더 유치하기 위해, 모두들 눈에 핏줄이 보일 정도로 일하면서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마족들은 가게를 지나면서 물건을 고르고 흥정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라센트 마을은 시끄럽고 조용한 날이 없는 마을이었다. 그런데 손님들을 제외한 모든 가게의 각 점원들의 행동이 갑자기 멈췄다. 그들은 마을의 입구에서 걸어오고 있는 한 소년을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면서 경쟁자들마다 눈을 부라렸다. 그들은 몇 백년간의 노하우로 지나가는 자들의 복장이나 생김새를 보면 어느 만큼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가, 또 지위는 어느 정도 되는가, 등등 거의 모든 것을 빠르게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소년이 평생 자주 보지 못할 대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최고급 여관을 운영하고 있는 가르스는 방금 전에 정보원의 말을 듣고 - 이곳의 정보원이란 주로 경영의 모든 것을 조사하는 마족을 말한다. - 벌써 문 앞까지 간 상태였다. 그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거의 최고의 손님이라 할 수 있는 소년이 현재 막 길가를 걸어오고 있었다. 가르스는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면서 소년을 날카롭게 평가했다. 입고 있는 상의, 하의, 신발, 치장 도구, 등 소년의 몸에 걸치고 있는 모든 게 심상치 않았다. 모양만으로 봤을 때 옷의 재질은 거의 최고의 값에 팔려나가는 것으로 만든 게 분명했고, 신발은 그의 전 재산의 반을 내놔야 겨우 살 수 있을 만했다. 옆에 차고 있는 칼의 검집에 박혀 있는 보석만 해도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값진 것이었다. 몸이나 허리에 걸려 있는 장신구들은 가르스 자신은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물건들일 만큼 엄청난 값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머지는 값을 측정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냥 상류층도 아니고 최상류층이로군. 고관대작의 아들인가?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홀로 나온 거지? 뭐, 어쨌든...` 가르스는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소년에게 다가갔다. 그는 벌써 자신이 비싼 돈을 주고 고용한 정보원들에게 다른 여관을 운영하고 있는 자들이 소년 근처에 가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요? 작은 손님." 굉장히 귀여운 외모를 지닌 소년은 경계하는 눈동자로 가르스를 올려다보며, 잠시 망설이는 듯이 가만히 있었다. "케디... 아니, 아니스. 아니스라고 하는데... 그런데 내게 무슨 볼일이지?" 가르스는 아니스라고 소개한 소년의 말투 또한 일반 소년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반말로 말하는 것을 보면, 소년은 분명히 명령을 내리는 위치에 있는 대단한 신분임에 틀림없었다. "손님, 손님 같은 분은 처음 만나봅니다. 정말로 멋지군요. 하지만 웬일인지 피곤해 보이는군요. 그럴 때는 `흐르는 여관`으로 가야 합니다." 가르스는 자연스럽게 아니스의 경계심을 풀도록 그의 손을 잡고 자신의 여관으로 이끌었다. 아니스는 당황한 듯이 가르스를 응시하며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난..." "손님, 저희 여관은 철저한 비밀 보장을 전제고 하고 있으며, 최고급의 요리를 맛보실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숙박하는 게 가능하며, 목욕도 할 수 있습니다. 깨끗한 시설을 구비하고 있지요." 아니스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가르스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철저한 비밀 보장이라고?" 가르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누구를 그렇게 찾고 있습니까?" 이루린은 어디에선가 걸어오고 있는 두 남자를 날카롭게 돌아보면서 처음에는 경계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들은 굉장히 낯익은 얼굴처럼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들이었다. 잠시 후에 그녀는 그들이 사람이라고 판단을 내리면서 신기하게 그들을 응시했다. 어떻게 사람이 이 곳에 들어온 것일까? 이루린은 살아 있는 사람을 만난 것은 처음이라 그들에게 굉장한 호기심을 가졌다. "케디아니스라는 꼬마입니다." 두 남자들은 서로를 짧게 응시하더니, 그 중 한 남자가 친근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케디아니스라는 꼬마는 우리가 잘 보살피고 있습니다." 이루린은 그 말에 드디어 몸을 풀 때가 왔다고 생각하면서 황급히 물었다. "그래요? 케디아니스는 어디에 있죠?" "저희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이루린은 인상이 좋아 보이는 두 남자에게 아무런 거리낌없이 물었다. "당신들은 어떻게 왔죠? 인간들은 마계에 자주 오는 건가요?" 그러자 두 남자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이루린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이 뭔가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하면서 그냥 넘어갔다. 그들 중 한 남자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마왕성에 볼 일이 있어서 잠깐 찾아온 것뿐입니다. 어쨌든 저희를 따라오십시오." 이루린은 남자들을 따라 마왕성 입구로 나섰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함부로 나간다는 게 불안하긴 했지만, 케디아니스를 잡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 숲을 지나고 있을 즈음, 이루린은 그들이 굉장히 친절하고 정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알기로 기사들은 모두 다 순결하고 기사도 정신이 뛰어났다. 막 숲을 벗어날 즈음, 데자일이라고 밝힌 기사가 그녀의 허리춤에 찬 검을 응시하며 말했다. "검이 굉장히 독특하군요. 잠깐 봐도 되겠습니까?" 이루린은 아무 생각 없이 그에게 검을 내주었다. "[이 빌어먹을! 날 함부로 주면 어떻게 해!]" 검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루린은 그냥 무시했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녀는 갑자기 주위에 침묵이 돌기 시작한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녀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그들보다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그들이 더 이상 걸어오지 않자, 이루린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데자일이 재빨리 자신의 등뒤에 와서는, 천으로 자신의 코를 틀어막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이상한 냄새가 코를 타고 머릿속을 마비시켰고, 그녀는 그 순간 기절했다. 케디아니스는 부담스러운 여관장의 대우에 조금 적응이 되지 않아 가만히 있었다. 그는 거의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최고급의 요리를 시켜먹었고, 품속에서 보석 한 개를 꺼냄으로서 여관 안에 있는 마족들을 모두 흥분시켰다. 그는 왜 다들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다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짐도 내려놓았으니 밖의 동향을 살피자.` 케디아니스는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와 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는 세 남자와 낯익은 한 여자를 볼 수 있었다. 보아하니 세 남자는 말을 타고서 한 여자를 밧줄로 묶어서 안장에 얹어 놓고 빠르게 마을을 벗어나고 있었는데, 케디아니스는 그들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문을 세게 닫았다. `이루린이잖아! 저들은 인간인데 어떻게 들어온 거지? 아직 이 곳의 마족들은 저들이 인간이라는 것을 모르는 모양인데. 하급 마족이니 인간들을 자주 본다는 건 불가능하겠지. 어쨌든, 이루린이 어째서 인간 같은 종족에게 잡힌 거야? 이건 말도 안 돼!` 케디아니스는 그들을 ?아가기로 했다. 마왕의아내-53 황태자와 가출 황태자 리안은 곤히 기절해있는, 이루린이라고 하는 여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제국 내에서도 드물었다. "황태자 전하." 리안은 기사단장인 데자일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다소 심각해 보이는 표정으로 이루린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저 여자... 인간이 아니라 마족인 것 같습니다." "뭐라고?" 리안은 놀라면서 이루린을 응시했다. 데자일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리안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눈동자를 봤을 때, 처음에는 단순히 검은색인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말을 꼭 인간이 아닌 것처럼 하더군요. 그래서 다시 살펴보니, 짙은 보라색을 띄고 있었습니다. 인간 중에 조금이라도 보라색을 띄고 있는 자는 없습니다." 리안은 그 말에 충격을 먹고 데자일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이루린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후회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이루린의 외모에 반해 인간이 마왕성을 버젓이 돌아다닌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데자일은 이불을 걷어 손가락으로 그녀의 몸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십시오. 저 옷들은 분명히 간편하게 보이지만, 분명히 절대로 심상치 않은 옷입니다. 옷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어떤 견해를 비출 순 없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검." 리안은 데자일이 품속에서 꺼내든 검을 응시했다. 손잡이 부근에 보석이 박혀있는 것만 빼면 분명히 평범한 검이었다. "이런 검은 처음 봅니다. 굉장히 섬세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졌더군요. 날카롭기로 따지면 제국에서 이만한 검을 찾기도 어려울 정도입니다. 드워프가 만든 것보다 훨씬..." 리안은 눈을 크게 뜨고 데자일이 들고 있는 검을 응시했다. 평범하게만 보이던 그 검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순간, 그는 이루린을 불안한 마음으로 응시했다.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저 여자는 상급 마족 이상인가?" 데자일이 굳은 표정으로 이불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최소한 고위 마족일 겁니다. 하지만 고위 마족 중에서도 그리 높지 않은 축에 속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리안은 그의 말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 잠시 그대로 있었다. 데자일이 확고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게 권한을 넘겨주십시오. 어차피 인간이 아닌 이상, 없애버리거나 풀어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친김에 저 마족에게서 모든 정보를 알아내겠습니다." 데자일은 잠시 말을 끊었다. "적절히 고문을 가해서라도 말입니다." "일어나라." 이루린은 자신의 얼굴에 끼얹어지는 찬물에 고개를 들었다. 흐릿하게 데자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게도 그는 한 손에 채찍을 들고서, 다른 한 손에는 이상한 도구를 들고 있었다. "데자일, 여기가 어디죠?" 데자일은 그녀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차갑게 쏘아보더니,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이상한 도구를 옆의 병사에게 넘겨주었다. 그 모습에 이루린은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자신은 현재 이상한 밧줄에 의해 양팔이 어딘가에 매달려 있었다. 데자일이 밖으로 나가자 이루린은 그를 향해 크게 외쳤다. "데자일, 데자일!" 그러나 그 즉시 병사가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날 어떻게 할 작정이죠?" 병사가 채찍을 위로 들며 말했다. "내가 하는 말에 대답하기만 해라." 이루린은 자신이 그들에게 속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녀는 두려운 마음으로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채찍을 응시했다. 격렬하게 움직여보았지만 밧줄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마력을 이용해보기도 했으나 이상하게도 밧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후로 그녀는 그들이 묻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해 끔찍한 고문을 맛보아야만 했다. 케디아니스는 그들을 쫓다가 그만 놓치는 큰 실수를 범했다. 그들이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갑작스럽게 속력을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몇 개의 마을을 더 거치고 거쳐서, 그들을 목격한 마족들에게 물어가면서 추적해야만 했다. 그러기를 이틀이나 걸렸다. 케디아니스는 막사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을을 이룰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막사들이 마계의 입구 근처에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상대가 인간이긴 했지만 수적으로 많으면 불리할 수도 있으므로 신중의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한참 막사 사이를 이리저리 피하면서 걷다가, 케디아니스는 거대한 나무 십자가에 누군가가 걸려 있음을 깨달았다. 그 자를 보는 순간 그는 입을 틀어막고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간신히 막았다. 그녀는 다름 아닌 이루린이었다! 그는 병사들이 어디론가 사라진 틈을 타서 얼른 십자가 근처로 향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마음으로 그녀를 보고 또 봤다. 이루린은 피투성이가 된 채로 현재 기절해 있었다. 참혹한 모습이었다. 옷이 다 찢겨지고 피에 얼룩진 살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채찍을 몇 번이나 맞았는지, 등 부분은 피로 범벅되어 있었다. 피로 얼룩진 입가와 이마에서 흐르는 피는 그녀가 어느 정도의 고통을 당했는지 알 수 있었다. 모습과는 다르게 얼굴은 죽은 듯이 평온해 보였다. "제길, 알려야 해." 케디아니스는 자신이 가출했다는 사실을 이미 잊고 있었다. "누구냐!" 케디아니스는 그제서야 상념에서 깨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자신은 수많은 병사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다. 막사에서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는 그들의 수는 최소한 700명은 될 듯 싶었다. 그는 아무리 자신이라고 해도, 성룡이 아닌 이상 그들을 모두 없앤다는 건 불가능했다. 어떤 병사가 허탈한 듯이 창을 거두며 말했다. "제길, 마족이 아니라 어린 꼬마였군. 사람인가? 어떻게 들어온 거지?" 갑옷을 입고 붉은 망토를 걸친 자가 검을 뽑아들며 외쳤다. "마계에 어떻게 인간의 아이가 들어와서 버젓이 다닐 수 있나! 저 아이는 뭔지는 모르나 인간은 아닐 것이다!" 케디아니스는 그들이 마족은 구분할 수 있어도, 드래곤은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사실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이루린이 고작 인간에게 그렇게 당했다는 것이. 어쩌면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화가 극도로 치밀었지만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케디아니스는 자신을 압박해오고 있는 병사들을 응시하며 검을 빼들었다. 위기의 상황이었다. "뭐라고? 이루린이?" 카란델이 놀라면서 일어섰다. 그는 굉장히 상급 마족이 전달해온 사실을 듣고서 굉장히 분노한 상태였다. 자신의 소중한 딸인 이루린이 인간에게 잡혀갔다는 것을 그는 믿을 수 없었다. 군주와 다른 서열 10위 이내의 다른 마족들이 모두 모여있는 자리였으나, 딸이 잡혀갔다는 사실에 그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어 숨을 거칠게 쉬면서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는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군주에게 황급히 말했다. "군주님, 저를 보내주십시오. 제가 갔다 오겠습니다. 소규모의 병력을 데리고 제가 가서 모두 없애고 오겠습니다." 그러자 마네리아가 그런 카란델의 팔을 잡으며 날카롭게 말했다. "비록 인간이긴 하나, 아직 어느 정도의 병력이 있는지도 파악되지 않은 상태요. 그건 좀 성급한 판단이오만." 카란델이 마네리아의 팔을 뿌리치며 격렬하게 말했다. "그럼 내 딸이 그대로 당하는 꼴을 지켜보란 말이요? 저들이 어떻게 할 것 같소? 내 딸을 고이 보내줄 것 같소?" 마네리아가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일단 상황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지 않소!" 카란델이 마네리아와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옆에서 군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가겠다." 서열 10위 중 가장 젊은 마족인 세런스가 군주의 갑작스러운 말에 놀라며 외쳤다. "군주님!" 군주가 갑자기 사라진 직후에 세런스가 일어나려고 하자, 마네리아가 그런 그를 잡으며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네. 군주님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지 않나?" 세런스는 불안한 투로 외쳤다. "하지만 단신으로는 무리입니다! 아직 정확한 정보를 얻지 않은 상태에서는!" 마네리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는 아직 젊으니 잘 모르겠군. 과거에 군주님께서는 서열이 높은 마족들에게 단신으로 살육을 자행했지. 홀로 강한 그들을 모두 죽였네. 그게 우리들로서는 가능하기나 하겠는가." 세런스는 그 말에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로 강하단 말입니까?" "그래. 군주님께서 나서면 아무리 인간들의 숫자가 많다고는 하나, 모두 전멸이네. 빠른 시간 내에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두." 그 즈음, 인간들은 마왕의 출현에 모두 경악하고 있었다. 마왕의아내-54 케디아니스&세이젠 몇 백년 동안 평화가 지속되면서 마계와 중간계 사이의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었다. 근래에 들어 마족도 중간계에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인간들이 마계로 넘어갈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그 때문에 마족에 대한 정보는 단순히 오래 전에 있었던 대규모의 전쟁의 기록에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데자일은 이루린을 만나면서 마족이 그리 강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계의 토벌을 무사히 끝마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한 병사가 그의 막사 안으로 혼비백산해서 들어오기 전까지는. "큰일났습니다! 상상도 못할 정도로 강한 마족이 출현했습니다!" "뭐라고?" 데자일은 그 말에 놀라 얼른 밖으로 나갔다. 그는 마족들이 얼마나 강한지 직접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병사의 말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수백 명의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 마족을 보는 순간,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낼 수 없는 속도로 병사들을 죽여나가고 있었고, 현재까지도 수백 명의 병사들이 그의 거침없고 날카로운 검에 의해 식물처럼 베어졌다. 수적으로 월등한 병사들이 덤비려고 하기는커녕 단 한 명을 대상으로 주춤한다는 게 말이 되겠는가. 데자일은 일말의 자비도 없는 남자의 가면을 응시하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너는 누구지? 난 황실 제 1소속의 기사단장 데자일이다!" 그제서야 남자가 행동을 멈추고 데자일을 응시했다. 검은 흑발이 묘하게 어울리는, 굉장한 위압감을 가지고 있는 남자. 그 자가 주위를 한 번만 둘러봐도 모두 너나할 것 없이 뒤로 물러섰다. 데자일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허리춤에 가져갔다. 그 남자는 데자일에게 다가오더니 적당한 거리에서 섰다. "인간이여, 지금 당장 중간계로 돌아가라." 가면 속에 가려진 남자의 눈이 데자일의 허리춤에 차여져 있는 검으로 향했다. "그 검은 네 것이 아닐텐데." 데자일은 이루린에게서 빼앗은 검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만졌다. 그는 자신의 심장이 이상하게 뛰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강한 상대를 만났어도 이렇게까지 긴장한 적은 처음이었다. 왠지 검을 넘겨주지 않으면 심각한 일이 일어날 분위기였다. 그러나 일단은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혀야만 했다. "마족인가? 대답해라!" 그러자 그 때 한 병사가 붉은 머리카락의 한 아이를 안고서 나타났다. 그는 한 손에 날카로운 검을 아이의 목에 들이대고 있었다. "다, 당장 거, 검을 내, 내려 놔! 안 그러면 이, 이 소년을 주, 죽일 것이다!" 검을 든 병사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용감하게도 소년은 상황에 맞게 무서워하기보다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소년은 남자를 보고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루린은 큰 막사 뒤에 있어요!" 검을 든 남자가 거칠게 팔을 흔들며 말했다. "조용히 해!" "감히 인간 따위가 날 이렇게 농락하다니 다 일러바칠 거야!" 누구에게 일러바친다는 건지 데자일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그 소년과 남자는 서로 알고 있는 사이인 것 같았다. 병사들의 시선이 모두 소년에게로 집중되어 있는 틈을 타,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남자에게 나지막하게 명령했다. "저 꼬마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검을 내려놔!" 당혹스럽게도 남자는 소년을 힐끗 보더니,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죽여도 상관없다. 하지만 죽인 후에 중간계의 대륙의 절반이 사라지는 것이 소원이라면 마음대로." 남자의 폭언에 잠시 데자일은 가만히 있었다.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병사의 손을 깨물어서 비명소리가 들리게 만드는 소년과 냉혹하게 그를 응시하고 있는 남자를 번갈아 응시했다. 소년을 죽이면 대륙이 사라진다. 참고로 소년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감안하면, 소년은 마족이거나 다른 종족에 속한다. 그러나 대륙이 날아갈 정도라면... 데자일은 황급히 병사에게 외쳤다. "당장 놓아주지 못해!" 병사는 당황하더니, 주저하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드래곤이다! 모두 건드리지 마라!" 그 말에 경악한 병사가 황급히 손을 놓았다. 소년은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손으로 목을 쓰다듬더니 얼른 남자에게로 와서 뒤로 숨었다. 그러는 사이, 드래곤이라는 사실 때문에 현재 그 자리에 있는 병사들은 모두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인간들에게 내줄 시간은 없다. 번복하지 않겠다. 그 검을 내려놓고 당장 중간계로 돌아가라." 그 때 그의 옆으로 자신과 같은 기사단장인 로크가 흥분한 상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럴 순 없다! 감히 마족 따위가 지금 누구에게 명령을 하는 것이냐! 이 검은 이제 우리의 것이다!" 남자는 냉혹하게 주위를 둘러보면서 다시 검을 빼들었다. "융통성이 없고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잘 들어라. 그대들의 병력은 약 7천. 그 정도면..." 남자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5분이다." 데자일은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러나 옆에 있던 로크가 눈을 크게 뜨고 경악하자, 데자일은 비로소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허무맹랑한 말이었고, 신빙성이 없는 남자의 자만심일 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 때였다. 남자가 말을 끊는 것과 동시에, 갑자기 소년이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뒤로 멀리 떨어졌다. 그러자 갑자기 남자의 몸에서 폭발적인 마력이 방출되면서 전 병사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경악하면서 그 폭풍 같은 마력을 견뎌내지 못해 뒤로 물러서야 했고, 그러기는 데자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마법진과 함께 점점 공중으로 몸을 치솟고 있는 그 남자를 두려운 듯이 응시했다. "너, 넌 누군가! 왜 밝히지 않는 건가!" 로크가 악을 쓰듯이 외치자, 공중에 뜬 남자의 고개가 그 쪽으로 향했다. 남자의 몸에서 강한 마력이 휘몰아쳤다. "마계의 지배자를 알고 있나." 그 순간 데자일은 그가 마왕이라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놀라기는 처음이었다. `이루린이라는 여자가 마왕과 아는 사이였나? 단순히 서열이 낮은 쪽에 속하는 고위 마족인 줄 알았는데 그 여자가 그렇게 대단했었나? 마왕이 나설 정도라면... 왜 하필 전하께서는 그 여자를 택하셨단 말인가.` 로크는 자신의 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강한 힘에 입을 제대로 다물지 못했다. 그가 마왕이었다니! 마족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마족이었다니. 그가 쓴 단 한 방의 마법에 죽은 병사들의 숫자는 거의 경이적이었다. 널브러진 병사들은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 주위는 거의 피바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살아 남은 병사들은 100명 안쪽이었다. 그렇지만 그들도 대부분 정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막사의 대부분은 바람에 날리거나 찢겨져서 뭉개져 있었다 마왕이 지상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분명히 강력한 마법이었는데도 마왕은 지쳐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검을 빼들고 로크, 자신에게로 다가왔다. 이미 데자일은 목이 잘려서 죽은 후였기 때문이다. 그 남자의 능력은 그를 점점 두렵게 만들었다. "떠나라. 더 이상 힘을 낭비할 가치도 없다. 더 강한 마법으로 전멸시켜버리면 편하겠지만 다시는 마계에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오늘은 경고의 뜻으로 살려두겠다. 난 자비라는 단어를 모른다. 그러니 이쯤에서 알아서 하도록." 로크는 다리가 후들거려서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마왕이 가면을 벗어서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였다. 마왕이 함부로 덤빌 수 없는 절대적인 강자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그였다. 다행이었던 점은, 황태자 리안이 안전하다는 점이었다. 그가 죽는다면 큰일 중의 큰일이었으니까. 결국 제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루린은 몸이 고통으로 욱신거리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흐릿하게 눈을 떴다.... 누군가가 자신을 안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선가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이루린은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현재 어느 방에 누워 있었는데, 이때까지 본 방중에서 제일 화려했다. 그녀는 이곳이 어디인가 싶어 한참 주위를 둘러보면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몸에서 잠들어 있던 고통이 날뛰는 바람에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이불을 걷어서 몸을 훑어보았다. 어느새 그녀는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는데, 속을 보니 전신에 붕대로 감겨져 있었다. "이루린 님. 깨어나셨나요?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답니다. 어째서 그렇게 많이 다치셨는지요? 아직 일어나지 마세요." 이루린은 젊은 하녀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았다. 왜 매일 들어오던 아이나가 아니란 말인가. "아이나는? 여긴 어디지?" "아이나는 요즘에 자주 쓰러져서 현재 자기 방에 누워 있습니다. 과로인 것 같더군요. 어제도 쓰러졌고... 이루린님이 두 번째 관문을 치르기 위해 멀리 성 밖에 나가셨을 때도 그랬어요. 원래부터 몸이 허약한 아이여서... 제가 잘 타이르겠습니다." 하녀의 손에는 쟁반이 들려 있었는데, 그 위에는 정체불명의 주스와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하녀는 이루린의 몸에 다시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 "카란델 님께서 이루린 님을 정말로 많이 걱정하고 계십니다. 아까도 오셨다가 가셨습니다." 이루린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날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자신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병사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한국에서 그러한 고통 없이 자랐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잊을 수 없는 끔찍한 악몽이었다. 그 때 살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채찍에 그녀는 비명을 지르고 또 질렀다... 또 믿었던 자들에게 속았다는 배신감도 조금은 느껴서 씁쓸했다. 그들은 마족을 적대시하고 있었고, 그녀는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마족이라는 사실을 또 한 번 상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요... 그런데 아까도 물었지만 여기는 어디죠?" 하녀는 생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맨 꼭대기 층이죠. 군주님의 침실입니다." 케디아니스는 마음이 착잡하기만 해서 견딜 수 없었다. 이제는 가출이 문제가 아니라 이루린이 회복하는 게 문제였다. 그는 왠지 자신 때문에 이루린이 다쳤다는 느낌이 들어 견딜 수 없었다. 그가 알기로 그녀는 심각하게 다친 상태였고, 어쩌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살아났다는 사실에 그는 안도하고 또 안도해야만 했다. "안녕, 케디아니스? 정말로 오랜만이야." 낯익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무척이나 귀에 거슬리면서도 생각하기 싫은 목소리. 케디아니스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풀숲을 응시했다. 그 곳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꽤 오랜만에 본 것 같은데... 안 그래? 넌 잘 지내는 것 같다? 나와는 달리." 케디아니스는 믿을 수 없는 마음으로 그 소녀를 응시했다. 은발의 머리카락이 넘실거렸다. 케디아니스는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졌다. 마왕성에 온 이후로 처음 잇는 일이었다. "세이젠... 여긴 왜 왔지? 너 같은 여자가 올 곳이 아냐, 이 곳은. 당장 꺼져!" 자신의 약혼녀, 세이젠 피리오드가 의미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왕의아내-55 케디아니스&세이젠 케디아니스는 세이젠을 보고 악몽을 떠올렸다... 그것은 지독하고 끔찍한 악몽이었다. 중간계는 오늘도 평화롭기만 했다. 보석을 뿌려놓은 것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호수의 수면이 넘실거리고, 은빛의 실같은 폭포도 상쾌한 소리를 내었다. 그 주변을 노닐고 있는 작은 요정들은 이러한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켜 주었다. 그러나 단 한 명, 케디아니스는 전혀 평화로울 수 없었다. 그들 중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드래곤, 카이란스가 주먹을 내보이며 외쳤다. "얼간이. 못생기고, 약하고, 무엇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머저리. 매일 울기나 하고. 그게 바로 너야, 케디아니스!" 케디아니스는 현재 많은 소년, 소녀들에게 둘러싸여 심하게 얻어맞고 있었다. 그들은 그의 머리를 향해 잔인하게 돌을 던져댔고, 케디아니스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들에게 대항하기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케디아니스는 자신이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불행했다. 로드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능력도 없어 찬밥 신세였고,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아이들과 어울리지도 못했다. 무엇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했고, 외모는 드래곤들 사이에서 가장 못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심적으로도 약한 아이여서 매일 괴롭힘을 받고도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지만. "그만해! 내 아들에게 무슨 짓이지! 못된 것들 같으니라고!" 눈물이 앞을 가려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닦은 후에 도망치는 소년, 소녀들을 응시하면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얼른 달려오고 있는 어머니를 응시했다. 어머니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그녀는 자비롭고 아들인 자신에게 무엇이든지 다 해주었다. 케디아니스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정신적인 지주나 다름없었다. 언제나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받고 있으면 어머니가 다 막아주었다. 어느 누구에게서도 사랑 받을 수 없는 케디아니스에게, 어머니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해주었다. "어, 엄마... 저 애들이 또 나를 때렸어... 나 너무 힘들어. 난 저 애들과 친구가 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 내가 너무 못생기고 약하대. 나 어떡하면 좋지?" 케디아니스는 어머니, 세실리아의 품에 안겨서 펑펑 울었다. 세실리아는 그런 케디아니스를 가만히 안으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케디아니스, 넌 너무 여려서 탈이야.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좀 더 강해져야 한단다. 저들에게 언제까지나 당할 수는 없잖니. 강해져야 한다, 케디아니스." 케디아니스는 세실리아의 마지막 말을 가슴 깊이 새겨들었지만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해가 바뀌어도 아이들은 그를 두고 계속 괴롭혔다. 돌을 던져서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은 예사였고, 노골적으로 모욕을 주는 방법부터 시작해서 집단적으로 폭행하기 일쑤였다. 어떤 날에는 손가락이 부러져서 낫기까지 숨기느라 고생한 적도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 씩 죽고싶다는 생각을 했으나 무서워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앞으로 한 여자가 나타났다. 세이젠이라는 밝고 명랑한 소녀였다. "나와 친구가 되어주는 거야?" "그래. 앞으로 내가 널 대신해서 나쁜 애들을 막아줄게. 내가 보기에 넌 너무나도 착한 아이니까." "고마워, 세이젠." 세이젠이 환하게 웃으면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그 애들처럼 나쁜 애들은 저승으로 가야 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케디아니스는 시간이 흐를수록, 세이젠에게 빠져들었다. 그와는 대조적인 그녀의 행동은 케디아니스에게 조금이나마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순수했고, 그만큼 세이젠을 좋아하게 되었다. 어머니 다음으로 소중한 상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소중한 아이였다. 세이젠은 매일 많은 양의 보석을 요구했고, 케디아니스는 그녀를 위해 매일 많은 양의 보석을 갖다주었다. 보석을 주지 않으면 그녀가 자신을 떠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보석 들고 왔지? 일단 그것부터 내놔." "으, 응...." 뭔가 잘못되어간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어머니 세실리아는 그런 세이젠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얼마 가지 않아 케디아니스의 약혼녀로 정해주었다. 케디아니스는 그 소식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쁨을 맛보았고, 얼른 그 소식을 알리기 위해 세이젠이 있는 곳까지 달려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세이젠은 언젠가 자신을 괴롭혔던 아이들과 같이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그는, 나무 위로 조심스럽게 올라가서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너도 참 불행하겠구나? 그런 애의 약혼녀가 되다니." 이어 세이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하지마. 어차피 너희들과 가출할 거잖아? 그 대신에 그 우둔한 케디아니스에게서 보석을 뜯어냈거든? 나도 그런 애와 같이 지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야. 그 애는 너무 짜증날 정도로 재수 없어." 카이란스의 말이 들려왔다. "그 애는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할걸? 매일 남의 눈치나 실실 보는 비겁한 약골로 말야. 그 애는 아마 지금쯤 네가 약혼녀가 됐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좋아하고 있을 거야. 하여튼지 정말로 어리석어." 세이젠의 불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끔찍한 소리는 하지도 말아! 정말 그 애의 얼굴을 보고있으면 역겨워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 감히 자기 주제를 모르고 날 반려로 삼겠다고? 미친 것 아냐?" "그 앤 원래부터 정신이상자였을 거야. 앞으로 상종하지마." 케디아니스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충격을 먹었다. 세이젠의 잔인한 말은 그의 심장을 칼로 잘게 써는 것과도 같았다. 그는 자신이 그들에게 농락 당했다는 것을 어이없고 허탈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너무 괴로웠다. 좋아했던 세이젠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삶이 저주받았다고 생각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 받지 못하고 사랑할 자격도 없는... 어느 날, 세이젠이 어머니 세실리아가 없는 틈을 타서 동굴로 찾아왔다. 그녀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케디아니스는 그게 불안하기만 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응시하면서 물었다. "왜, 왜 온 거야?' "케디아니스, 할 말이 있어. 왜 그래? 왜 날 그렇게 보는 거야? 난 네 친구잖아." 케디아니스는 그 날의 대화를 떠올리면서 세이젠에게서 멀어졌다. 세이젠은 그에게로 계속 다가오면서 그를 동굴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난 네 약혼녀가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하고 있어. 이건 마지막 부탁인데... 약혼녀가 된 기념으로 네 드래곤 하트를 내게 줄 순 없니?" 청천벽력과도 같은 그 말에 케디아니스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드래곤 하트를 준다는 것은 곧 자살을 의미했다. 그는 세이젠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케디아니스는 목소리를 떨며 외쳤다. "그건... 무리야. 난 죽을 거야!" 세이젠이 처음으로 그에게 짜증이 섞인 화를 냈다. 그녀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케디아니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친구인데 그 정도도 들어줄 수 없니? 정말 실망이야, 케디아니스. 난 네가 그럴 줄은 몰랐어." 죽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지만, 그는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그만두었다. 차라리 자살하면 편하겠지만 그를 사랑해주는 어머니가 있다. 아직까지는 그럴 순 없었다. "무슨 말로든 안 돼. 난 죽을 수 없어." 갑자기 세이젠의 표정이 무서워졌다. 그녀는 동굴 밖을 한 번 응시하더니, 한쪽 입꼬리를 홀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케디아니스? 난 네 어머니에 관한 아주 재미있는 비밀을 알고 있는데... 네 어머니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고는 있니?" 세실리아가 잘못을 저질렀을 리는 없다. 케디아니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발 아니기를.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이 말을 로드님께 하게 되면, 네 어머니는 바로 죽어. 네 어머니는 현재 횡포를 많이 부려서 쫓겨난 블랙 드래곤과 서로 사랑하고 있는 사이야. 누구든지 그 자와 만나게 되면 로드가 엄격히 법을 적용해서 죽이겠다고 했어. 아, 네 잘난 어머니가 지금 오고 있는 구나." 세이젠은 동굴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어머니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더니, 고개를 돌려서 케디아니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잘 생각해 봐. 네가 나를 위해 드래곤 하트를 내놓는 게 좋을지, 아니면 후자의 경우가 되던지." 세이젠은 그렇게 완전히 그에게서 사라졌다. 케디아니스는 인자하게 웃으면서 다가오고 있는 어머니를 불안한 마음으로 응시했다. 세이젠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어머니가 죽는다는 건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었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세실리아를 죽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엄마! 정말로, 그게 사실이었나요?" 케디아니스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어 가만히 있었다. 그는 현재 안타깝고 지독한 불안감과 여러 감정이 겹치는 바람에 굉장히 좋지 않은 상태였다. 세실리아는 그의 물음에 순순히 답했다. 그녀는 과거에 한 블랙 드래곤을 사랑했었다고 밝혔다. 그런데 세실리아는 어른들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로드의 약혼녀가 되었다고 한다. 광분한 그 블랙 드래곤은 - 어머니는 끝까지 그 드래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 몇 몇의 드래곤들을 살해했고, 보다못한 로드가 그를 추방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그 드래곤은 세실리아를 만나러 왔고, 어머니는 그를 잊지 못해 계속 만났다고 한다. 들키면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함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그 사실을 세이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세실리아는 처음으로 너그럽고 부드러운 모습을 벗어 던지고 그의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케디아니스는 어머니가 이대로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바램과는 다르게 끔찍한 사건은 그대로 벌어지게 되었다. 케디아니스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세실리아가 아직도 레어로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이상한 불안함에 휩싸여 전전긍긍하면서 세실리아를 기다렸다. 그러나 저녁이 될 즈음에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세이젠이 미소를 띄면서 레어로 들어왔다. 그녀의 출현에 케디아니스는 먼저 겁에 질렸다. "왜, 왜 왔어?" "오늘 아주 멋진 일이 일어났지. 난 아침에 로드에게 모든 사실을 말했어. 네 어머니와 그 자가 만나는 사이. 그 자는 로드에 의해 마계로 추방되었고, 영원히 그 곳에서 살아야 할거야." 케디아니스는 속이 얼음처럼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머릿속에서 세실리아가 위험하다는 신호를 알렸다. 그래도 로드가 자기의 반려를 죽이리라고는 결코 믿지 않았다. 아무리 로드가 자신에게 차갑게 대하고 심지어 세실리아까지 차갑게 대했다고는 하지만, 그녀를 죽인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 말일까. "어, 엄마는? 그럼 엄마는 어떻게 되는 건데!" "죽겠지. 아마 저녁이 되면." 케디아니스는 자신도 모르게 격하게 외쳤다. 처음으로 그는 분노라는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언제나 억눌러서 살았던 그에게 그런 변화는 조금 놀라운 것이었다. "왜 말한 거야! 어째서! 내가 죽으면 되잖아!" 세이젠이 비열하게 웃었다. "마음이 바뀌었어. 네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더 보고 싶어서. 넌 내가 네 친구라도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거니? 내가 네 약혼녀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솔직히 죽고 싶었어! 그리고 네가 죽으면, 널 더 괴롭힐 수 없잖아? 차라리 이런 재미있는 방법으로 괴롭히는 게 훨씬 더 흥미롭지 않겠어?" 케디아니스는 세이젠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상처는 받을 대로 받은 상태였고,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태였다. 세실리아를 제외하고는. 그런데 그 세실리아가 지금 위험해 처해 있다! 그는 세이젠이 미워서 견딜 수 없었지만 장난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완벽하게 어긋났다. 케디아니스는 로드의 레어에 도착하자마자, 그 자리에 모인 수십 명의 드래곤과 그 중심에 있는 로드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있는 세실리아까지... 엄숙한 분위기 속에, 모두들 냉소적인 태도로 세실리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케디아니스가 어머니의 이름을 외치기도 전에, 로드의 손에 들려 있는 날카로운 검이 지는 태양에 의해 은은하게 빛났다. 그는 무조건 어머니를 죽이는 것을 말려야 한다는 생각에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그러나 로드의 검이 더 빨랐다. 그의 검은 갑자기 섬광처럼 빛을 뿜더니 그대로 세실리아의 심장을 관통했다. 세실리아의 심장에서 흐르는 피가 옷을 적시고 순식간에 바닥을 적셨다... 그녀의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마치 케디아니스, 자신을 부르는 것처럼. 케디아니스는 걸음을 멈추고 그 광경을 응시했다. 머릿속이 비어지는 것 같았다. 마치 그 장면이 꿈이라고 생각될 것처럼 비현실적이었다. 마음 속에서 솟구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분노였다. 세실리아가 죽는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는 드래곤들과, 자기의 반려를 무참하게 살해하는 로드에 대한 분노였다. 그리고 케디아니스, 자신을 멸시하고, 깔보고,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모든 이들에 대한 분노였다. 그 순간 죽이고 싶었다. 저들을. 유일하게 그를 사랑해주었던 세실리아를 빼앗아간, 저들 모두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 로드도 죽이고 싶었다. 케디아니스는 로드에게로 다가갔다. 로드를 비롯한 수많은 드래곤들이 당황하는 듯한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누가 케디아니스를 이 곳에 부르게 했나?" "이런 모습은...." 케디아니스는 오로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로드만을 응시하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서 꿈틀거리고 있는 어머니를 세게 껴안았다. 로드는 한참 그렇게 서 있더니, 많은 드래곤들에게 외쳤다. "집행은 끝났다. 이제 모두들 돌아가도록." 드래곤들이 모두 마법으로 사라진 직후, 로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피묻은 검을 그대로 검집에 넣었다. 그리고 자기의 레어로 들어가 버렸다. 케디아니스는 로드의 뒷모습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자기의 자식이 이 모습을 보았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비정하게 사라지는 로드를. 케디아니스는 견딜 수 없었다. 어머니를 살리고 싶었지만 이미 어머니의 손은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숨이 막혀왔다. 어머니와 함께 했던 모든 슬픔이 순식간에 밀려오고 있었다. "케디아니스... 강해져라... 꼭... 넌 강해져야 해... 스스로... 꼭....." "어, 엄마!" 케디아니스는 울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한없이 볼을 타고 흘러나오고 있는 눈물을, 세실리아가 힘겹게 손을 들어서 닦아 주었다. "미안하다... 케디아니스... 널 두고 이렇게 떠나서..." 세실리아는 그대로 고개를 떨구었다. 케디아니스는 세실리아의 시신을 잡고, 시간이 가는줄도 모르고 미친 듯이 오열했다. 그게 순진하고 착했던 케디아니스를 결정적으로 바뀌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카이란스와 세이젠, 그리고 몇 몇의 드래곤들은 케디아니스의 레어 앞에 모여 있었다. 케디아니스가 마지막 동면기에서 깨어날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으레 그렇듯, 헤츨링들이 동면기에서 깨어나게 되면 외모가 바뀌고 능력이 좋아지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케디아니스가 어떻게 변할지, 서로 내기를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각자 손에 돌을 들고서. "앗, 저기 케디아니스! 이럴 수가!" 무리 중 한 명이 레어에서 걸어나오고 있는 케디아니스를 보고 경악했다. 그것은 카이란스, 세이젠도 마찬가지였다. 못생겼던 케디아니스의 외모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굉장히 멋지고 아름답게 바뀌었던 것이다. 그들 중 소녀들은 얼굴을 붉히며 케디아니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잠시 주춤하다가, 서로의 눈을 교환하며 케디아니스에게로 다가갔다. 먼저 레티스가 빈정거렸다. "어이, 못생긴 게 이렇게 변하다니, 놀라운 걸? 하지만 약골은 약골이지, 안 그래?" 레티스가 손으로 케디아니스의 몸을 세게 밀쳤다. 그러나 케디아니스의 몸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케디아니스는 대신에 귀찮은 게 달라붙었다는 식으로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 순간, 레티스가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다. "소, 손목이 부러졌어!" 케디아니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그들을 모두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면서 인상을 썼다. "이것들이 단체로 미쳤군. 오늘 나한테 죽고싶어서 환장했나? 기분 더러운데 한 번 먼지나게 패줄까? 그래, 레티스. 너 오늘 잘 걸렸다." 그가 굉장히 험악한 표정으로 레티스를 잔혹하게 발로 밟았다. 레티스의 비명 소리에도 불구하고 케디아니스의 폭력은 계속되었다. 모두들 그 광경에 잠시 얼이 빠진 듯이 서 있었다. 그가 결정적으로 발로 레티스의 몸을 차자, 믿을 수 없게도 그의 몸이 몇 미터나 날아가서 벽에 부딪혔다. 그들은 케디아니스가 완전히 변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했다. 마왕의아내-56 케디아니스&세이젠 케디아니스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머리 뒤로 쓸어 넘기더니,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세이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케디아니스의 위력을 본 후였기에 모두들 주춤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세이젠은 그런 그들은 한심하다는 듯이 응시하다가 표독스럽게 케디아니스를 응시했다. "뭐야, 너? 감히 네까짓 게 날..." 케디아니스는 여유 있게 웃으면서 빠르게 손을 들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세차게 세이젠의 뺨을 때렸다. 순간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음이 들리면서, 세이젠이 바닥에 넘어졌다. 모두들 그 모습을 보고 완전히 얼어붙어서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단지 그들은 케디아니스가 완전히 변했다고 믿을 뿐이었다. 세이젠의 얼굴이 모욕을 받은 것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케디아니스는 그런 세이젠을 묵묵히 응시하면서 말했다. "난 네 모습이 마음에 안 들어. 네가 그따위 눈으로 날 쳐다보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케디아니스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세이젠과 그 자리에 있던 소년들 모두 당황했다. "만약에 네가 나와 결혼하게 된다면, 차라리 난 널 죽일 거야." 세이젠이 막 비틀거리며 일어서자, 카이란스가 앞으로 나서며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그는 걱정이 서린 표정으로 세이젠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세이젠은 널 원하지 않아. 어째서 그렇게 변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카이란스는 적대적인 시선을 케디아니스에게 보내더니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덤벼. 승부를 가르는 거야." 케디아니스가 입가에 엷게 미소가 번졌다. 전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냉소적인 미소가. 로드는 현재 많이 놀란 상태였다. 케디아니스가 반쯤 미쳐서 카이란스라는 성룡을 죽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얼른 레어에서 나와 케디아니스와 카이란스가 서로 다투고 있는 곳으로 마법을 이용해서 날아갔다. 그는 케디아니스가 그저 어머니의 죽음으로 조금 충격을 받은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 강도가 그렇게 높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그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도착했을 때, 그는 케디아니스의 레어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검을 드는 것조차도 무서워하던 케디아니스가, 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것도 모자라 카이란스를 공격하고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그는 현재 피투성이가 되어서 쓰러져 있었다. 그 자리에 모여 있는 소년 중 한 명이 그에게 외쳤다. "로, 로드님! 케디아니스가 지금...." 로드는 케디아니스를 응시하면서 다가갔다. 그는 쓰러진 카이란스에게 시선을 한 번 주더니, 검을 그대로 검집에 넣었다. 항상 붉었던 그의 눈동자가 은색으로 빛나는 것을 보고 로드는 생각했다. `아내 세실리아의 능력을 받은 건가? 죽기 전에?` 케디아니스의 눈동자도 차츰 붉은색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로드는 그의 능력이 비정상적으로 강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언제나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던 케디아니스가, 이제는 당당하게, 그리고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로드는 카이란스의 심장에 손을 얹었다. 처음에 그는 당연히 카이란스가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놀랍게도 그는 죽어 있었다. 그 사실에 로드는 한동안 케디아니스를 강하게 응시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헤츨링이 성룡을 죽였다. 역사상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드래곤들 사이에서 크게 논쟁거리가 생길 것이다. 로드는 혼란스러운 심정을 감추지 못한 채로 외쳤다. "케디아니스, 이게 무슨 짓이지? 죽이다니! 어떻게 로드의 아들이 함부로 드래곤을 죽인단 말이냐! 그것도 성룡을! 케디아니스는 전처럼 고개를 숙이고 반성하지 않았다. "약혼녀가." 케디아니스는 손가락으로 세이젠을 가리키며 말했다. "카이란스와 노닥거리고 있더군요. 그것도 눈에 거슬리는데, 카이란스가 마침 겨루자고 하니 거절할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싸웠습니다. 물론, 거의 현신해서 싸웠죠." "케디아니스, 자기 잘못은 인정하지 못할망정...!" 케디아니스가 강경하게 반박했다. "로드께서는 어머니를 죽이셨으면서 저는 죽이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요?" 로드는 세실리아의 이름이 거론되자, 그에게 차갑게 쏘아붙였다. "법은 법이다! 그건 당연한 결과이지 않느냐?" 케디아니스의 눈동자에는 환멸과 불신이 섞여 있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로드에게서 멀어졌다. "사랑하는 남자를 두고 다른 남자와 강제로 약혼한 게 죄라면 죄겠지요." 케디아니스는 마법을 쓰더니, 그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일은 두고두고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 일의 주인공인 케디아니스는 말썽을 부리는 소년들보다 더 거칠게 놀았으며, 모두들 그런 케디아니스를 보고 경악했다. 케디아니스는 동면기를 거치기 전이나 후나 항상 화젯거리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로드의 아들이 모든 면에서 형편없어서였고, 나중에는 케디아니스가 완전히 다르게 변화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변한 케디아니스에 대해 걱정과 믿기 힘들어하는 말들을 쏟아냈지만, 적어도 능력으로 걸고넘어지진 않았다. 그만큼 케디아니스가 로드의 자질을 갖출 만큼 성장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케디아니스의 악행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다른 어른들이 야단치고 달래보아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드래곤들의 사회에서 단숨에 무법자로 떠올랐으며, 모든 헤츨링들은 그를 경계했다. 그는 로드의 말도 듣지 않고 갖은 말썽은 혼자 다 피우고 다녔다.... 그러다가 로드의 꾐에 빠져 강제적으로 마계로 온 것이다. 회상을 마친 케디아니스는 세이젠을 노려보았다.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네가 감히 카이란스를 죽여?" 케디아니스가 그녀의 말을 비꼬았다. "그래서, 내게 복수라도 하겠다는 건가?" 묘하게 웃는 세이젠의 입에서 독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그러고 보니, 이루린이라는 여자, 세실리아와 상당히 비슷하던데... 너와 많이 가까운 사이인가?" 그 말에 케디아니스는 갑자기 불안감을 느껴 큰소리로 외쳤다. "차라리 날 건드렸으면 건드렸지, 주위에 있는 자들은 건드리지마!" 세이젠이 격한 목소리로 외쳤다. "두고봐. 내가 그 여자를 어떻게 하나. 난 네가 결코 행복해하는 꼴을 못 봐." "그 여자를 건드리면..." 세이젠이 먼저 그 말을 가로챘다. "소중하게 여길 만큼 사랑하나보지?" 케디아니스는 입을 다물고 대신에 속으로 생각했다. '네가 어떻게 될지 몰라. 내가 뷰리풀에게 당한 만큼 너도 똑같이 당할 거야.` 세이젠이 비웃듯이 말했다. "표정이 좋지 않네. 그렇게나 연약한가?" `연약하긴 개뿔이. 오히려 네가 연약한 거지.` 케디아니스는 가급적이면 세이젠을 말리고 싶었다. 좋아서 말리는 게 아니라 이루린이 어떻게 나올지 상당히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말하기도 전에 세이젠은 풀숲으로 사라졌다. 이루린은 일어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일어날 수 없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따로 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가까스로 손을 뻗어 탁자 위에 놓인 종이를 잡고 읽었다. 세 번째 관문이 시작되기까지 3일 정도 남았다고 적어 놓은 것 같았다. 필체를 보니 딱 케디아니스였다. `그건 그런데... 분명히 오늘이나 내일은 일어나지도 못할 거야. 그렇다면 여기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인가? 하필 군주의 방이라니... 상당히 거북한데.` 그리고 그렇게 밤이 되었다. 마왕의아내-57 케디아니스&세이젠 밤이 깊어가도 그녀가 우려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침실 밖으로 나가면 군주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으나, 일어날 수 없었기에 가만히 있었다. 대신에 속으로 여태까지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상기하고 보니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녀는 불을 끄고 잠을 청했다. 이루린은 이상하게 오늘따라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는 케디아니스를 응시했다. 그는 자꾸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고, 뭔가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루린이 손가락으로 건드려보아도,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이루린은 그런 케디아니스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케디아니스, 무슨 일 있구나?" 케디아니스는 이루린을 응시하다가 다시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마치 한 달에 한 번씩 마법에 걸리는 그 날 같군.` 그 때 갑자기 누군가가 침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굉장히 귀엽게 생긴 여자 아이였다. 은빛의 머리카락을 지닌, 묘한 분위기의 소녀였다. 눈동자가 보라색이 아닌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마족은 아닌 것 같았다. 인간이나 드래곤이란 소린데, 그 둘 중에서 이 곳에 들어올 수 있는 자는 드래곤 뿐이었으니 아무래도 케디아니스와 같은 종족인 것 같았다. 케디아니스보다 조금 작은 키로 미루어보아 10살 정도 먹은 것 같았다. 소녀의 입가에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갑자기 케디아니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무서운 얼굴로 - 케디아니스의 그러한 표정은 이루린을 놀라게 했다. - 소녀를 응시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서 당장 나가, 세이젠. 너만 보면 역겨워." 세이젠이라고 불리는 소녀가 상처받은 표정으로 머뭇거리더니, 케디아니스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왜, 왜 그래... 난 단지 군주님의 허락을 받고 이 곳에 들어왔을 뿐인데...." 세이젠은 길을 잃은 강아지처럼 가냘픈 모습으로 케디아니스에게 두려워하는 시선을 보냈다. 이루린은 즉각 케디아니스가 전에 다른 드래곤들을 괴롭혔을 때처럼 세이젠을 괴롭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루린은 친근하게 물었다. "무슨 일로 왔니?" 세이젠의 표정이 밝아지더니, 침대 위로 올라가서 - 침대가 4사람은 충분히 누울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 그녀 옆에 앉으며 미소를 지었다. "이루린, 당신을 만나러 왔어요. 전 꼭 당신을 만나고 싶었거든요. 정식으로 소개할게요. 제 이름은 세이젠이고, 현재 케디아니스의 약혼녀예요." 마지막 말에 놀란 이루린은 케디아니스를 빤히 응시했다. 그의 표정은 굉장히 못마땅해 보였다. 이루린은 당연히 그가 쑥스러워서 그런 행동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케디아니스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아 보였다. "너 여기서 당장 나가지 않으면..." 이루린이 그의 말을 잘랐다. "넌 가만히 있어, 케디아니스. 세이젠은 날 만나러 왔다고 하잖아? 널 보려는 게 아니야." 케디아니스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잠시 서 있다가 의자에 앉아 몸을 돌렸다. 밖으로 꼭 나가고 싶어하는 듯 했으나 그럴 작정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세이젠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말이 쉽게 통해서 어떤 주제로든 대화가 자연스럽게 풀렸다. 대화를 나누고 보니, 세이젠은 굉장히 착하고 순진한 소녀인 것 같았다. 물론 현재까지는 말이다. 세이젠이 가고 난 후에, 이루린은 즐거운 기분으로 침대에 누웠다. 케디아니스는 밤까지 그녀 곁에서 여전히 심각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있다가, 갑자기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만약에 가깝게 지닌 자가 어느 날 돌변해서 널 죽이려고 공격한다면 어떻게 할거지?" 이루린은 케디아니스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일단 그 상황이 오면 과연 자신이 어떻게 변할지 생각했다. 그러다가 웃으면서 가볍게 대꾸했다. "어떻게 하긴. 죽지 않을 만큼 밟아야지." 그 이후로 군주는 이상하게도 그녀가 누워 있는 방에 한 번도 들어오지 않았다. 어떻게 자기 방인데도 불구하고 들어오지 않는 것일까. 혹시라도 그가 배려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으나 이내 거두었다. 소문에 의하면 군주는 업무에 파묻혀서 살아서 제대로 자지도 않는다고 했다.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 사실은 그녀를 한결 편하게 해주었으나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 관문이 시작되기 전날, 군주는 처음으로 자기의 방에 들어왔다. 그는 그녀가 있는데도 쳐다보지도 않고 묵묵히 자기 할 일만을 할 뿐이었다. 이루린은 마계의 지배자인 만큼 예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절 구해주셨다고 들었어요. 정말로... 어떻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 그는 대답하지 않고 역시나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숨막혀 죽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양쪽 다 침묵하고 보니 삭막한 느낌이 들었다. 군주는 망토를 벗고 침대 안으로 들어왔다. 이루린은 그의 망설이지 않는 행동에 놀라 가만히 있다가, 몸을 최대한 침대 바깥쪽으로 이동시켰다. "내일이면 어차피 나갈 거예요. 신세 많이 졌습니다." "몸은?" "거의 다 나았어요. 아직 팔이 아프기는 하지만... 움직이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거예요." 그는 눕다 말고 그녀를 빤히 응시하면서 물었다. "그 태도는 뭐지. 내가 두렵기라도 한 건가?" 직설적인 그의 말에 이루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 왠지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 이불을 몸 위로 끌 올리며 솔직하게 말했다. "네, 솔직히... 편하다는 기분을 가질 수 없군요." 그녀는 일개 마족과 마계의 마왕과는 분명히 격차가 크다고 생각했다.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불을 껐다. 순식간에 환한 빛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 어둠이 밀려왔다. 창가로 비춰지는 달빛만이 군주를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이루린은 살짝 몸을 일으켜서 군주를 응시했다. 그는 잘 때도 가면을 쓰고 자는 것 같았다. 가면 뒤에 어떤 얼굴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고 생각하니 호기심이 밀려왔다. `너무 못생겨서, 자괴감에 가리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 보는 건 실례야. 하지만... 서열 10위 이내의 마족들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잖아? 난 어차피 여성이니까 평생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겠지.` 이루린은 속으로 많이 갈등했다. 만약에 그의 가면을 벗겨서 어떤 얼굴인지 확인하고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한다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 군주가 깊게 잠들지 않아서 들키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가면 한 번 벗겼다고 사형을 받지는 않겠지만, `점점 케디아니스 성격을 닮는 것 같아.` 다시는 이 방에 올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아내가 되지 않는 이상. 그러나 그녀는 그럴 생각이 없었기에,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좋아, 해보자.` 그녀는 시간이 30분 정도 더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그가 자고 있는지 확인했다. 손으로 그의 팔을 살짝 흔들어 보고 그가 자고 있음을 확인했다. 일단 그녀는 자다가 실수로 가면을 벗긴 것처럼 만들기 위해 그의 옆에 붙어서 누웠다. 자연히 긴장되었다. 그리고... 그의 가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왕의아내-58 케디아니스&세이젠 이루린은 천천히 손을 뻗다가 말았다. `들키면 그 난처한 상황은 어떻게 할거지? 뭐라고 변명할 건데? 그냥 관두자.` 이루린은 일단 손을 거두고 침대 밖으로 나왔다. 몸이 아직도 욱신거렸지만 일어서서 걸을 수는 있었다. 자고 있을 군주를 응시한 후에, 이루린은 침실 밖으로 나갔다. 어둠이 녹아 있는 큰방이 눈에 들어왔는데 책장과 책상, 그리고 그 위에 쌓여 있는 서류가 눈에 띄었다. 서류를 보니까 갑자기 케실리온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에게 침대가 케디아니스에 의해 박살나고 자신 또한 많은 고초를 겪었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달빛이 들어오고 있는 창가에서 그녀는 낯익은 검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우드잖아!` 이루린은 반가운 마음에 그 검을 집었다. 그리고 그 순간, 엄청난 잡음이 머릿속에서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이 빌어먹을 주인아. 그렇게도 생각이 없어? 날 내팽개쳐? 주인 맞아? 너 때문에 내가 졸지에 미아가 될 뻔 했잖아! 이 위대하고 똑똑한 나를 그런 무능한 것들에게 넘기다니! 평생 저주할거야!]" 이루린은 가우드의 목소리 때문에 인상을 쓰며 의식적으로 군주가 자고 있을 방을 응시했다. 그리고 정중하게 사과했다. "미안해, 마족인 사실을 잊고 사람을 믿는 오류를 범하다니... 확실히 그건 내 잘못이야." 그 이후로도 이루린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가우드의 목소리가 한참 이어졌다. 거친 욕설과 함께. "시끄러워. 한 번만 더 그러면 쥐도 새도 모르게 매장해버리는 수가 있어. 아니면 한 명 잡아다가 널 이용해서 엉덩이 사이를 계속 찌르는 고문을 할 수도 있지." "......" 가우드가 드디어 조용해지자, 그제서야 그녀는 주위의 고요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잠이 오지 않아 산책이라도 하기 위해 잠옷 차림으로 문을 열고 살금살금 밖으로 나갔다. 겨울을 연상케 하는 한기 덕분에 몸에서 두드러기가 났다. 복도를 걸으면서, 그녀는 머리가 바늘로 찌르듯이 굉장히 쑤셔오는 것을 느끼곤 손으로 이마를 만졌다. 열이 꽤 높은 것 같았다. 그렇게 어둡게 드리워져 있는 삭막한 복도를 한참 걸었을 때, 그녀는 작은 홀 구석에 놓여져 있는 거대한 거울을 볼 수 있었다. 주위는 어두웠지만 유독 그것만큼은 창가로 스며드는 빛에 의해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라도 단정하게 만들려고 그 거울 앞에 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랬다. 비추는 부분이 갑자기 수면처럼 넘실거리더니 부드럽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 거울 속에는 이루린이 아닌 다른 여자가 서 있었다. `뭐지, 이 여자는?` 그녀는 적지 않게 당황하면서 여자를 빤히 응시했다. 거울 속의 그 여자는 이루린이 자신이 움직이면 똑같이 움직였다. 마치 이루린인 것처럼. 외모는 청순가련 그 자체로 이루린이라는 겉면만큼이나 아름다웠다. 게다가 얼굴에 어느 누구도 가질 수 없는 강한 매력이 있었다. 인간인지 마족인지는 어두워서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단지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오고 곱슬머리라는 것만 인식할 뿐, 머리 색깔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당혹스럽게도 나체였기에 민망한 기분이 든 그녀는 얼른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정말로 완벽한데? 몸매도 좋고, 얼굴은... 이렇게 생긴 여자가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군. 내 소망을 나타내어주는 거울인가? 물론 그런 소망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루린은 춥고 갑자기 이제 군주의 방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그 자리를 얼른 떠났다. 그리고 군주의 방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한 소녀를 볼 수 있었다. "언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죠? 내일이 세 번째 관문을 치르는 날이라고 들었는데 푹 쉬어야 하잖아요." 세이젠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걸렸다. 이루린은 군주의 가면을 벗기려다가 잠이 오지 않아 나왔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어 대충 둘러댔다. "아니, 긴장해서인지 잠이 오질 않네." 세이젠이 갑자기 그녀의 팔을 잡더니 어디론가 강제로 끌었다. "그럼 저랑 난간으로 가요." 난간에 가서 더 몸을 사릴 생각을 하니, 이루린은 잠이 오지 않는다는 말을 취소하고 싶었다. 세이젠은 이루린이 난간에 서서 보름달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을 묵묵히 응시했다. 확실히 그녀는 세실리아와 많이 닮았고, 그 사실은 그녀를 즐겁게 만들었다. 과거에 자신이 일부러 죽인 여자와 이루린이 닮았다는 건 왠지 모르게 희열감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역겨웠다. 외모 자체가 세실리아와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었지만 머리카락 색이라던가 모습에서 풍기고 있는 분위기 등이 거의 똑같았다 `그 멍청하고 어리석을 정도로 순해빠진 성격도 닮았겠지.` 세실리아는 분명히 순했다. 과거의 일들을 생각하니 갑자기 즐거워졌지만, 항상 반항적인 표정으로 살았던 케디아니스의 얼굴에 미소가 감돈 것, 그리고 그렇게나 이루린이라는 여자를 감싸고 있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분했다. 자신이 사랑했던 소중한 존재인 카이란스를 죽였으면서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다니는 모습이 뻔뻔하고 안하무인해 보였던 것이다. 세이젠은 일단 생각을 접고 이루린에게 가까이 붙었다. "언니는 케디아니스 좋아해요?" 이루린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상냥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 세이젠의 눈에는 가식적으로 비춰졌다. - 대답했다. "글쎄, 좋아한다고 해야하나? "언니, 잠시 난간 위로 올라가 주시면 안 될까요? 난간 위로 올라가면 주변이 어떻게 보이는지 궁금해요." "그, 그래... 뭐, 좋아." 10층인데도 그 여자는 주저하지 않고 올라갔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개념이 없는 게 분명할 것이다. 달빛에 드러난 그녀의 몸을 이루고 있는 선이 은근히 비춰졌다. 그리고 그 순간, 세이젠은 그녀의 허리춤에 검이 차여져 있다는 것을 깨닫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옷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게나 검을 차고 다닌다는 걸 자랑하고 싶었니? 검술도 못하는 여자가 별로 잘난 것도 없는 주제에... 아하, 얼굴이 반반하니까 혀영심과 자만심이 극에 달한 모양이로군? 이런 여자, 정말로 재수없어.` 세이젠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이루린을 드러난 발목을 응시했다. 그리고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꺄악! 벌레야! 징그러워!" 벌레가 없는 것을 확인한 세이젠은 있는 힘껏 난간에 몸을 부딪혔다. 그 충격이 난간에 전달되자 이루린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당황한 듯, 짧게 소리쳤다. "세이젠!" "이, 이루린 언니. 괜찮아요? 제 손을 잡아요!" 세이젠은 다급하게 행동하면서 팔을 조금 느리게 움직였다. 그리고 이루린에게 거의 손이 다 닿을 즈음, 그녀는 10층 난간에서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세이젠은 이루린이 땅에 떨어져서 죽을 광경을 즐겁게 떠올리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저 남자는!` 세이젠은 이루린의 몸이 거의 땅에 다다를 즈음, 누군가가 무서운 속도로 어디선가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그 남자는 군주도 아니었고, 성인인 것으로 보아 케디아니스는 더더욱 아니었다. - 세이젠은 드래곤이었기에 시력이 좋고, 밤에도 잘 볼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다 - . 절묘한 때에 이루린을 가볍게 받으면서 사라지는 것으로 보아 측정할 수 없는 실력을 지닌 굉장한 자인 것 같았다. `왜 저런 자가 마계에...? 이상하군. 그리고 운도 좋군, 이루린. 능력도 없으면서 운으로 살아온 게 뻔할 거야. 어쨌든 다음 번에는 확실히 끝내겠어.` 마왕의아내-59 케디아니스&세이젠 이루린이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현재 처음 보는 어떤 공간에 있었는데, 아무래도 어느 마족의 방인 것 같았다. 벌써 새벽인지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떨어질 때 그녀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했기에, 죽은 게 아닐까하고 생각했으나 몸은 멀쩡했다. 다친 곳은 하나도 없었다. "괜찮습니까?"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녀는 얼른 그 쪽을 응시했다. 낯선 남자가 걱정스럽게 그녀를 응시하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한 손에 두 개의 잔을 받친 쟁반을 들고서. 남자의 피부나 외모는 굉장히 희고 깨끗했으며 뭔가가 다른 이질감이 있었다. 남자는 케실리온과는 정반대로 굉장히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고, 황금처럼 빛나는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다. "여긴 어디죠? 난 분명히 떨어지고 있었어요. 어떻게 된 거죠? 당신이 날 구해준 건가요?" "그렇습니다. 높은 곳에서 난데없이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가까스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무엇입니까?" "이루린입니다. 그건 그렇고... 먼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군요. 사실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가, 어떤 소녀가 벌레에 놀라 난간에 부딪혀서 그 충격으로 떨어졌습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군요. 그런데... 왠지 당신은 마계에 살고 있는 마족이 아닌 것 같군요. 당신은 이름이 뭐죠?" 남자는 이루린이 누워있는 침대에 앉으며 쟁반을 탁자 위에 얹었다. "하른입니다. 사실 전 이 곳의 군주를 볼 일이 있어 이렇게 머무르고 있는 중에 우연하게 당신을 발견했습니다. 정말이지 다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이루린은 하른이라고 밝히는 남자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낯선데도 이상하게 낯익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당신은... 마족은 절대로 아니고, 그렇다고 인간은 더더욱 아닌 것 같군요. 드래곤인가요?" 하른은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루린의 손에 잔을 쥐어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더 이상의 답변을 해드릴 수 없습니다. 이해해주십시오." 수수께끼 같은 남자의 태도가 수상하기만 한 이루린이었다. 그녀는 차를 마시면서 생각했다. 나중에 케실리온이나 케디아니스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특히 군주에게는 말도 하지 않고 사라져서 더더욱 미안한 이루린이었다. 케디아니스는 따스함이 묻어나오는 꽃밭을 거닐다가, 긴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한 소녀를 볼 수 있었다. 소녀의 얼굴은 굉장히 예쁘고 청순해 보였다. 그녀는 얌전하게 앉아서 꽃을 만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케디아니스는 소녀에게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물었다. `이름이 뭐지?` 소녀가 고개를 들고 케디아니스를 응시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케디아니스는 마음이 괜히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갑자기 소녀의 표정이 변했다. 소녀는 케디아니스를 원망스럽다는 듯이 응시하다가 막 울기 시작했다. 케디아니스는 그런 소녀의 반응에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가만히 있다가, 소녀의 등에서 다리가 8개 뻗어져 나오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그리고 그 순간 소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를 질리게 만들었다. `뷰리풀이야.` "아악!" 케디아니스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숨을 몰아쉬었다. 등이 땀으로 인해 축축해지고, 심장은 놀랐는지 불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그는 방금 전에 자신이 겪은 일이 꿈이라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손으로 이마를 훔쳤다. 생각하기도 싫은 지독한 악몽이었다. 그는 손으로 가슴을 쓸면서 이불을 팽개치고 일어났다. 케실리온이 들여놓은 새 침대에서 잠을 보낸 케디아니스는 창 밖을 응시했다. 어느덧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불안해, 분명히 이 이상한 기분은..." 케디아니스는 일어나서 마왕성 입구로 향했다. 세 번째 관문을 위해서. 마왕성 입구. "언니, 미안해요. 정말로. 저를 용서하지 마세요. 제 잘못이에요, 괜히 난간에 올라가 달라고 부탁해서..." 세이젠이 울먹이면서 이루린를 꼭 껴안았다. 이루린은 세이젠이 보기보다 많이 여리다고 생각하면서 부드럽게 안아 주었다. 그러는 사이, 먼 곳에서 케디아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인상을 쓰면서 그녀와 세이젠을 번갈아 보았다. 마치 떫은감을 씹은 듯, 그의 표정은 굉장히 이상하게 변해 있었다. `약혼자라면서 저렇게 밖에 해주질 않다니.` 갑자기 세이젠이 불쌍해지기 시작한 이루린이었다. 케디아니스의 약혼녀가 되었으니, 앞으로의 길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착한 세이젠을 무참하게 괴롭힐 케디아니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왜 둘이 서로 껴안고 있는 거야?" 이루린은 케디아니스가 다가오자마자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갑자기 당혹스럽게도 케디아니스의 표정이 무시무시해졌다. 그는 금방이라도 검으로 누군가를 베어버릴 것 같은 눈동자로 세이젠을 응시했고, 세이젠은 두렵다는 듯이 이루린의 뒤로 몸을 피했다. 이루린은 당연히 케디아니스를 나무랐다. "케디아니스! 약혼녀를 그런 식으로 노려보면 안 돼. 네 약혼녀잖아, 최소한 예의는 갖춰야지! 네가 아무리 착한 드래곤을 괴롭히는 것을 많이 보긴 했지만 이건 좀 심하잖아." 그는 이루린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잠깐만 세이젠을 빌릴게." 케디아니스는 강제로 세이젠의 팔목을 잡고 어디론가 이끌기 시작했다. 세이젠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이루린을 응시하면서도 케디아니스를 순순히 따라갔다. 이루린은 세이젠이 걱정되긴 했지만 둘만의 비밀이 있을 거라고 추측하면서 말리지 않기로 했다. 대신에 케디아니스의 뒤에 대고 크게 외쳤다. "케디아니스! 해가 떠오르기 전까지는 이 곳 마왕성 입구로 와야 할거야!" 그래도 왠지 불안했다. "아주 순진하던데, 네가 좋아하는 그 여자." 케디아니스는 세이젠의 말을 수정하고 싶었다. 이루린에게 있어 치명적인 단점을 하나 꼽으라면, 자기에게 잘 대해주는 자에게는 서슴없이 친절하게 대해준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자기에게 적대적으로 대하면 배로 보복을 가했다. 케디아니스의 경우, 그는 이루린을 처음 봤을 때부터 악질처럼 굴었으니 그렇게 당한 것도 결코 이상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세이젠은 이루린에게 접근할 때부터 가식적인 미소를 날렸기에 그런 면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말조심해. 네가 뭔데 이루린을 죽이려고 해?" "전에도 말했지만 난 네가 행복해하는 꼴을 볼 수 없어. 그리고 하나 말해줄까? 네가 모르는 아주 충격적인 사실을" 세이젠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그려졌다. "세실리아는 정말로 어리석었지. 그녀가 왜 어둠의 드래곤을 만났는지 모르지? 그 사실은 로드도 몰라. 나밖에 모르지. 세실리아는 네가 너무나도 허약해서 곧 죽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 로드는 당연히 그 일에 무관심했고, 그것은 다른 드래곤들도 마찬가지였어. 세실리아로서는 도움을 청할 상대가 없었던 거야. 그래서 널 위해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예전에 사랑했던 남자를 만난 거지. 사랑하는 감정은 전혀 가지지 않고 오로지 널 위해서." 케디아니스는 세이젠의 입에서 나온 말을 곧바로 수용할 수 없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새로운 사실에 대한 충격이 너무나도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내가 본 거야. 워낙 어둠의 드래곤에 대한 나쁜 인식이 퍼져 있는 탓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 세실리아는 자신뿐만 아니라 너까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어차피 말할 거면, 그와 서로 사랑했다고 거짓으로 말해달라고 말야. 그리고 난 바보 같은 세실리아의 소원을 들어주었지." 그는 어느 정도 세실리아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왔었다. 어둠의 드래곤을 이성적인 존재로 만난 것은 분명히 로드가 정한 법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만난 이유가 단순히 사랑이 아니라, 바로 케디아니스 자신 때문이었던 것이다. 충격이 서서히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세실리아에게 아무 죄가 없었는데도, 세이젠은 거짓으로 그것을 말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세실리아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바닥에 넘어뜨렸다. 그녀를 흠씬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만이 자리잡을 뿐이었다. "꺄악!" 갑자기 세이젠이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까 전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로 케디아니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순진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처럼. 케디아니스는 그 모습에 기가 막혔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고 세이젠의 뺨을 때리기 위해 손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에 의해 잡혔다. 이루린이었다. 그녀는 경멸에 가까운 표정으로 케디아니스를 응시하면서 손에 힘을 주었다. 이루린의 그 표정이 처음으로 케디아니스의 마음을 들쑤셨다. "너 이것 밖에 안 되는 애였어? 힘도 없는 여자를, 그것도 네 약혼녀에게 이런 식으로 대응하다니! 실망이구나, 케디아니스." "잠깐, 이건 오해...." 케디아니스가 말하기도 전에, 세이젠이 그를 밀치면서 얼른 이루린의 품에 안겼다. 한 대도 때리지 않았는데도 세이젠은 진짜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서럽게 울었다. 정작 피해자인 케디아니스는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세이젠, 괜찮아? 케디아니스가 어떻게 대했지?" "갑자기 제게 협박하면서 때리려고 했어요. 전, 전 아무 잘못도 없는데... 난 그의 약혼녀가 될 자격이 없나봐요. 케디아니스는 정말로 절 싫어하는 걸까요?" 세이젠의 자신 없어하는 투에 케디아니스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는 정말로 세이젠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하른 실마이오스는 마왕성을 벗어나서 막 마계의 숲으로 들어갈 즈음, 아주 특이한 마물을 발견하곤 걸음을 멈추었다. 몸집이 굉장히 큰 자이언트 거미였는데, 웃기게도 머리에 빨간 리본을 달고 있었다. 몸통 부근에는 누군가에게 심하게 맞았는지 상처가 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거미가 하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른은 왠지 이 거미의 사정을 듣고 싶어, 관대한 태도를 취했다. "내가 누구인지는 잘 알고 있겠지. 어디 보자..." 거미는 머리도 꽤 똑똑했는데, 하른이 손을 내밀자마자 그 거미도 머리를 내밀었다. 하른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 거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거미가 겪었던 복잡한 슬픔과 과거를 몽땅 읽었다. "마족이 되고 싶다고? 네가 죽었다면 내가 어떻게든 널 마족으로 환생시킬 수 있지만 지금의 넌 그럴 순 없지 않느냐." 하른은 거미가 뭐라고 말하는지 똑똑히 들었다. "좋아, 딱 일주일만 널 마족으로 변하게 만들어주마. 겉만 변하는 것이니 거미로도 변할 수 있단다. 네가 사랑하는 남자와 재회하길 빌겠다. 그리고 그 남자를 괴롭히는 여자도 혼내주길 바라마." 하른이 간단하게 힘을 쓰자, 거미는 곧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여자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마족으로 모습을 바꾸고 보니 굉장히 귀엽고 예쁜 여자아이가 되었다. 다시 환생했으면 굉장히 예뻤을 소녀였다. "고맙습니다. 실마이오스 님.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마왕의아내-60 케디아니스&세이젠 케디아니스는 이루린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세이젠의 이중적인 면을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게다가 이루린이라면 당연히 자기에게 잘해주는 세이젠의 편을 들 것이 뻔했다. `빌어먹을 여자...` 케디아니스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끝까지 참으며 어느 마족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오는 모습을 응시했다. 그 남자는 후보생들을 한 번 둘러보더니 통을 내밀었다. "세 번째 관문은 일단 이 상자 안에 든 종이를 하나씩 꺼내어 펼쳐보면 알 수 있다." 어느덧 이루린 차례가 되었다. 이루린이 상자에 든 종이를 꺼내서 읽고 있을 때 케디아니스도 슬쩍 고개를 내밀어서 뭐라고 적혀 있는지 읽어보았다. [보이지 않는 성배 안에는 황금이 들어 있다.] - 스피노스. 이루린은 종이를 접지 않고 뚫어져라 응시하면서 이게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케디아니스 또한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상자를 들고 있는 마족이 입을 열었다. "그 종이에 적혀 있는 하나의 문장을 푸는 게 이번 관문이다. 요령을 조금 말하자면 문장은 어떤 장소를 가리키고 있으니 그 장소를 발견하는 게 먼저 해야할 일이다. 그리고 그 문장 옆에 적혀 있는 자에 대해 조사하는 것도 중요하겠지. 지적능력과 추리력을 시험하는 관문이니 열심히 응하도록. 기한은 일주일이다. 어떤 방법을 써도 상관없다." 모두들 모르겠다는 듯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것은 이루린과 케디아니스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였다. 갑자기 옆에서 가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이루린..." 케디아니스는 고개를 돌려 옆을 응시했다.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낯선 소녀가 이루린을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케디아니스는 어디선가 그녀를 봤다는 느낌을 가졌지만, 결국 알아낼 수 없었다. 단지 소녀가 너무나도 예쁘게 생겼다는 사실에, 케디아니스는 왠지 모르게 끌림을 느꼈다. 케디아니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낯선 소녀를 응시하다가 이루린에게 무언의 시선을 보냈다. 이루린 또한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잠깐 저와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어요. 이루린." 이루린은 경계하는 눈동자로 낯선 소녀를 응시하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자리에 모인 여성 마족들이 모두 사라지고 난 후에 10분 정도가 지났을 때, 이루린과 낯선 소녀가 서로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며 손을 잡고 걸어왔다. 이루린은 연신 그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즐겁게 웃고 있었다. 케디아니스는 그런 이루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행동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소녀도 이해할 수 없었다. `뭐야, 저 행동은? 왜 저렇게 자주 쓰다듬는 거지? 애완동물인 것처럼?` "케디아니스, 인사해. 뷰리프라고 하는 소녀인데, 나와 친한 사이야. 마족이지. 앞으로 서로 친하게 지내." 케디아니스는 뷰리프리고 불리는 소녀를 응시했다. 뷰리프는 밝게 미소를 지으면서 케디아니스를 살짝 껴안았다. 케디아니스는 그런 뷰리프의 솔직하고 친근한 행동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막막했다. "케디아니스, 만나고 싶었어." `예쁘다.` "그, 그래..." 케디아니스는 소녀가 절대로 나쁜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굉장히 예쁜 외모를 지니고 있었기에, 케디아니스의 마음을 묘하게 만들었다. 경계심을 버릴 수 없었지만. 피부의 접촉이 조금 떨떠름하기는 했지만 굉장히 호감이 갔다. 뷰리프라고 불리는 소녀가 처음으로 좋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소녀는 외모보다도 행동이나 말투에서 천진난만한, 그리고 순수한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케디아니스의 눈길을 끌었다. `좋아하게 될 것 같아.` 케디아니스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루린은 케실리온이 침대 위에서 읽고 있는 책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읽고 있는 책은 전혀 다른 문자로 구성되어 있는 어려운 책이었다. 복잡하게 뭔가를 설명해놓은 것 같았는데, 케실리온이 그것을 아무런 부담없이 일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케실리온, 궁금한 게 있는데 말야... 스피노스가 어떤 자지?" 스피노스는 세 번째 관문을 통과하게 해줄 열쇠를 쥔 수수께끼의 문장을 지은 자였기에, 먼저 그에 대해서 알아야만 했다. 케실리온은 대답 대신에 손가락으로 책상 위에 얹어져 있는 서류 묶음을 가리켰다. 이루린은 인상을 쓰면서 대답했다. "할거야. 난 안 한다고 안 했어! 그러니까 이제..." 역시 케실리온은 대답 대신에 두 손가락을 폈다. 이루린은 한숨을 푹 쉬면서 지친 어조로 말했다. "알았어, 내일 것까지 다 해놓을게. 그러니 스피노스가 어떤 자..." "서고." 그의 간단한 대답에 그녀는 할말을 잃었다. 그랬다. 서고로 가서 조사를 해보면 되는 것이다. 그 단순한 사실과 케실리온의 꾀임에 빠진 사실에 그녀는 인상을 썼다. 그러나 빠져나갈 방도는 없었다. 세이젠은 풀숲에서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를 노려보았다. 제 3자의 출현이 왠지 재수 없게 느껴졌다. 이루린을 먼저 끝장내놓고 케디아니스도 같이 끝장낼 작정이었는데, 그 사이에 다른 자가 출현한 것이다. 그것도 케디아니스에게 꼬리치면서 관심을 보이는 소녀가. 더더욱 열이 받았던 것은 케디아니스가 그 소녀에게 매력을 느끼는 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정말로 싫었다. `뷰리프라고 했겠다. 보아하니 마족인 것 같은데... 케디아니스에게 무슨 목적으로 접근하는 거지?` 세이젠은 일단 뷰리프라고 불리는 소녀에게 접근하기로 마음먹었다. 뷰리풀은 항상 이루린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집을 크게 만들어서 다른 자이언트 거미들에게 당하지 않게 해준 것과, 인간과 똑같은 지능을 주었다는 점을 말이다. 비록 마음이 아프게도 케디아니스는 그런 뷰리풀 자신을 매몰차게 거절했고 또 죽이려고 했지만 아직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항상 뷰리풀이 가까이 다가가면 멀어지는 관계였기에 이런 식으로라도 케디아니스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게 뷰리풀의 소망이었다. 물론 그 기간이 짧겠지만... 케디아니스에게 죽을 뻔한 이유로 뷰리풀은 항상 풀숲에서만 지냈다. 그러면서 이루린과 케디아니스, 그리고 세이젠이라고 불리는 여자에 대해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복잡한 관계와 돌아가는 상황까지... `그런 나의 창조주라고 할 수 있는 이루린을... 죽이려고 해? 약혼녀면서 케디아니스가 누리고 있는 행복을 파멸시키려고 했겠다?` 세이젠과 케디아니스 사이에서 벌어진 과거의 일들도 우연히 모두 들어서 잘 알고 있던 터라, 미움은 더 깊었다. 특히 사랑하고 있는 케디아니스를 농락하려고 하는 짓은 절대로 참을 수 없었다. `아직 이루린에게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지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내숭으로 나오면 똑같이 내숭으로 상대하면 되는 거야. 가식적으로 굴면 똑같이 가식적으로 굴면 돼.` 뷰리풀은 세이젠을 골탕먹이고도 남을 시나리오를 속으로 신속하게 짜고 있었다. 기한은 일주일이었다. 그 때가 지나면... 슬프지만 케디아니스는 전처럼 그녀를 죽이려고 들 것이다.... 어떻게든 그 때까지는 모든 일을 끝내야만 했다. 그녀는 하른이 거미인 자신을 배려해서 강한 힘을 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주 특별하고도 함부로 가질 수 없는 힘을. 일단 그녀는 공터에 있는 세이젠을 찾아갔다. 그리고 세이젠의 얼굴을 보았을 때, 뷰리풀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뷰리풀이 다가가자 세이젠이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세이젠은 굉장히 건방진 태도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뭐야? 나한테 볼일 있어?" "그럼, 당연히 볼일이 있지." 뷰리풀은 절대로 세이젠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 뷰리풀 = 뷰리프 그리고 치명적인(?) 오류 수정했습니다. 카이란스 = 성룡입니다 -_-;;;; 왜 헤츨링이라고 적었는지...-_- 마왕의아내-61 케디아니스&세이젠 세이젠은 뷰리프라고 밝힌 소녀를 응시하면서 속으로 깔보고 있었다. 어디서 굴러 들어온 천한 돌이 훼방을 놓으려고 한다는 사실이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뷰리프의 예쁜 외모가 그녀의 질투심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세이젠은 키가 비슷한 뷰리프를 노려보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너, 뷰리프라고 했니? 난 세이젠이라고 하는데, 케디아니스가 내 약혼자라는 거 알고는 있니? 함부로 접근하지마. 내가 언젠가 널 어떻게 할지 모르니." 당혹스럽게도 한없이 착하고 순진할 것 같은 뷰리프의 표정이 비웃음을 띄었다. "싫은데? 약혼녀가 약혼녀답지 못하게 구는데 누가 좋아하겠어? 못생긴 게 말이 많네." 마지막 대사에 세이젠은 은근히 화가 나고 기가 막히는 것을 느꼈다. 감히 자신에게 못생겼다니. 중간계에 있을 때도 못생겼다는 말은 듣지 않은 그녀였다. 오히려 예쁘다는 말은 자주 들어봤어도. "뭐, 뭐야? 너 나한테 한 번 죽고 싶어?" "당장 여기를 떠나는 게 좋을 거야, 못난이." "이게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세이젠은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는 뷰리프의 행동을 두고볼 수 없을 만큼 약이 올라, 두 손에 주먹을 쥐고 뷰리프를 넘어뜨렸다. 예상대로 뷰리프는 바닥에 넘어졌고, 세이젠은 그녀를 몸으로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세이젠은 뷰리프가 자신을 밀쳐내기 전에 손으로 그녀의 뺨을 번갈아 가면서 있는 힘껏 분노를 실어 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에서 힘이 빠질 만큼 때렸을 때, 세이젠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뷰리프의 울고 있을 얼굴을 응시했다. 당혹스럽게도 뷰리프는 울기는커녕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 때렸니? 그럼 몸을 풀었으니 재미있는 놀이를 해볼까?" 그 때였다. 갑자기 뷰리프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세이젠은 경악하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뷰리프의 팔이 갑자기 시커멓게 변하더니, 순식간에 8개로 늘어난 것이다.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세이젠은 어찌 해야 할지 몰라 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뷰리프의 모습이 완벽히 자이언트 거미의 모습을 갖추자, 세이젠은 비명을 지르면서 혼돈의 도가니에 빠지게 되었다. 거미를 그렇게 무서워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자신보다 훨씬 큰 거미의 모습은 충분히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도 남았다. "마, 마족이 아니었어? 뭐야, 자이언트 거미?" 세이젠이 놀라서 뒤로 물러서는 사이, 뷰리프의 입에서 하얀 무엇인가가 튀어나오더니 순식간에 세이젠의 몸을 감기 시작했다. 세이젠은 본능적으로 몸부림치면서 그 하얀 무엇인가가 자신의 몸을 감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기도 전에 그녀의 몸은 뷰리프가 내뿜은 그 하얀 어떤 것인 거미줄에 의해 몸이 칭칭 감겨지게 되었다. "무, 무슨 짓이야! 그리고 뭐야, 이 가증스러운! 너, 감히 마물 주제에 드래곤인 날... 꺅!" 뷰리프가 앞다리로 자신의 몸을 번쩍 들어올리더니, 마왕성의 벽에 던졌다. 세이젠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등에 가해지는 충격을 맛보아야만 했다. 세이젠이 막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뷰리프의 입에서 나온 거미줄이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리고 벽에 매달린 자신의 몸이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몸을 아예 벽과 함께 새롭게 거미줄로 덮어버렸다. 손과 발은 원을 그리듯이 대자로 뻗게 만들어져 있었고, 각 팔과 다리는 거미줄로 꽁꽁 묶여져서 마법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뷰리프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사이 세이젠은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바라면서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그러나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에 풀려나게 된다면, 그녀는 모든 사실을 이루린과 케디아니스에게 말할 작정이었다. 케디아니스가 과거에 거미를 보고 상당히 혐오스러워 했으므로, 사실이 밝혀진다면 뷰리프를 매몰차게 쫓아낼 것이다. 사라진 뷰리프가 빠르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거미의 모습이 아닌, 다시 청순하고 가련한 여자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두려웠던 것은 뷰리프의 손에 엄청난 수의 검이 잔뜩 들려 있었다는 점이다. 날카로운 검이 꼭 그녀를 죽일 것만 같았다. "우리 다트 놀이를 해볼까? 전에 이루린이 하는 것을 봤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 재미있게 보여서 말야." 세이젠으로서는 다트가 무엇을 뜻하는 단어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뷰리프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검을 하나 들고 자세를 자신이 있는 곳으로 향하게 하자, 비로소 대충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그녀였다.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놀이었다. "그럼 이제 시작해볼까?" 세이젠이 미친 듯이 발버둥치는 사이, 뷰리프가 검을 위로 치켜들더니 세차게 던졌다.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날아든 검은 공포스럽게도 그녀의 얼굴 바로 옆에 박혔다. 숨막히게도 살갗을 살짝 스쳐서인지 따가운 느낌이 들었다. 세이젠은 더 이상의 저항을 계속할 수 없었다. 너무나도 무서웠던 것이다. "방금 전의 그건 내 뺨을 때린 결과야." 뷰리프가 다시 검을 하나 들었다. 자세히 보니 검은 굉장히 심상치 않은 모습을 갖추고 있었는데, 세이젠은 그녀가 어디에서 그것을 가지고 왔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에, 다시 검이 세차게 날아들더니 이번에는 그녀의 목 바로 옆에 꽂혔다. 한 순간의 긴장도 놓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세이젠은 눈을 크게 뜨고 정신을 바싹 차렸다. 등이 축축해지는 것 같았다. "이건 이루린을 무식하게 10층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했던 결과고." 날카로운 뷰리프의 검이 이번에는 다리와 다리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꽂혔다. 세이젠은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다. 죽음과 삶의 기로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이건 케디아니스의 행복을 파멸시키려고 한 결과야." 뷰리프의 검이 이번에는 겨드랑이에 근처에 꽂히면서 극심한 통증이 일었다. 완전히 꽂힌 건 아니었지만 조금 깊게 베였는지 금새 팔에서 붉은 액체가 흘러 거미줄을 축축하게 적혔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팔과 다리가 떨리고, 저절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한낮 마물에게 당한다는 치욕스러운 감정이 그녀를 분노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뷰리프는 망설임 없이 검을 세 차례 더 던졌고, 다행스럽게도 모두 아슬아슬하게 비껴서 꽂혔다. 하지만 너무 놀래서 팔에서 고통이 일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이건 이루린과 케디아니스를 번갈아 가며 농락했던 결과야." 뷰리프는 자세를 달리하더니, - 세이젠은 왠지 불안하게만 느껴졌다. - 아까 전과는 비교도 안될 빠른 속도로 검을 던졌다. 순식간에 그 검은 세이젠의 허벅지에 정통으로 꽂혔다. 피가 찢어진 살을 뚫고 튀어나오면서, 겨드랑이에서 느껴지는 통증과는 비교도 안 될 고통이 전신을 휘감았다. 세이젠을 비명을 질렀지만 입이 막혀서 소리로 나오진 않았다. "자아, 이제 상급 마족들이 달려올 시간이로군." 세이젠은 뷰리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네 옆에 꽂혀 있는 검들은 사실 건드려서는 안될 물건이야. 만약에 훔쳤다가 걸리면... 고문 담당부로 끌려가서 고생 깨냐 해야 할거야. 참고로 말하자면, 헤츨링이라고 해서 봐주는 법은 없어. 법을 어긴 건 어쩔 수 없으니까." 세이젠은 여전히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훔친 건 뷰리프였는데 어째서 마치 세이젠 자신이 훔쳤다는 것처럼 말하는 것일까. 뷰리프는 마왕성 벽에 박힌 검들을 모조리 회수한 다음 호주머니에서 은빛의 무엇인가를 꺼냈다. "가발이야. 네 머리색과 똑같은 은색의 가발. 이제 무슨 뜻인지 알겠지? 좋아, 그럼 이제..." 세이젠이 그녀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깨닫곤 미친 듯이 발버둥쳤다. 그러는 사이, 뷰리프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마왕성 근처에 세워져 있는 작은 동상에 다가갔다. 소년의 형상을 띄고 있는 석고로 만들어진 작은 동상이었다. 뷰리프는 검 하나를 들고 동상을 향해 세차게 던졌다. 처음에 검은 소년의 머리를 향해 날아가다가, 점점 아래로 하강하더니 다리 사이의 민망한 그 곳에 박혔다. 세이젠이 당혹스럽게 그 동상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뷰리프가 즐거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런, 이런. 절도죄, 기물 파손죄, 거기에다가 풍기문란죄라... 아주 멋져. 고생 깨나 해야 할거야." 멀리서 상급 마족들이 창을 들고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뷰리프는 검으로 세이젠의 몸에 붙은 거미줄을 모두 다 걷어내고 친절하게 허벅지에 박힌 검까지 뽑아주었다. 세이젠이 손으로 입을 막아버린 거미줄을 떼어내려고 했으나 그것은 강철처럼 전혀 끊어지지 않았다. 당혹스러운 감정과 분노의 감정이 교차하는 동안 세이젠은 뷰리프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 때문에 공격할 수도,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뷰리프는 얼른 가발을 옷 속에 넣고 상급 마족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손버릇이 나쁜 소녀를 잡았어요. 심상치 않은 검을 들고 있어서 혹시나, 하고 의심했죠... 이 검들을 모두 드릴게요. 그리고 얼른 잡아가세요." "고맙구나, 꼬마야. 이름이 뭐지?" "뷰리프라고 해요." 세이젠은 웃고 있는 뷰리프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억울하게 상급 마족들에게 강제적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가 바득바득 갈리는 순간이었다. 마왕의아내-62 케디아니스&세이젠 3일 동안 한숨도 자지 못하고 취조 당한 세이젠의 정신은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어리다는 이유로 육체에 고문은 가해지지 않았지만, 마왕성 공터를 전부 청소하는 등의 육체적인 소모는 감수해야만 했다. 마왕성의 어마어마한 넓이의 공터를 전부 다 청소하는 건, 엄청난 정신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드래곤인 자신이 한낮 마물에게 당했다는 사실이 치욕스럽고 분하기만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뷰리프를 만나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으리라고 다짐한 그녀였다. `자기의 푸른 머리카락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은색 가발을 쓰고 검을 훔치다니! 마치 훔친 자가 은색 머리카락의 소녀인 것처럼 위장한 다음, 은색 머리카락을 지닌 내게 모두 그걸 다 덮어씌워?` 세이젠은 뷰리프를 떠올리면서 속으로 분을 삭였다. 뷰리프라는 마물에 대해서, 세이젠은 내심 의혹을 제기해 보았다. 뭔가가 이상했다. 뷰리프는 한낮 마물일 뿐이었는데, 어째서 드래곤을 농락할 정도의 지능을 지니게 된 것일까. 그리고 그렇게 커다란 자이언트 거미의 모습은 웬 말이며 또 마족으로 모습을 바꿀 수 있는 건 또 뭐란 말인가. `마물이 아닌 건가? 아냐, 그럴 리 없어. 마족이 자유자재로 거미의 모습으로 바꾼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어. 하지만 마물이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꿀 수는 없잖아. 도대체 뭐지?` 세이젠은 날카롭게 있을 법한 상황을 모두 따지며 이루린과 케디아니스가 있을 곳으로 향했다. 뷰리프가 한가지 실수한 게 있다면, 바로 자기가 거미라는 사실을 자신에게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그 사실만 알려지게 된다면 뷰리프는 절대로 케디아니스의 관심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케디아니스는 거미라면 지독하게 혐오스럽게 여겼으니까. 케디아니스는 뜻밖의 손님과 방에서 즐겁게 놀며 시간을 보냈다. 뷰리프가 나타남과 동시에 세이젠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한 그는 자신에게 처음으로 상냥하게 대해준 뷰리프에게 새로운 감정을 느꼈다. 그녀는 헌신적으로 그에게 잘해주었고, 그 영향 때문인지 케디아니스도 처음으로 상대방에게 좋게 대해주었다. 차츰 그는 뷰리프가 가지고 있는 매력을 느끼면서 - 사랑과는 별개의 - 순진하고 귀여운 면을 발견하게 되었다. 특히 뷰리프는 이루린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경향을 보였고, 이루린도 뷰리프에게 매우 상냥하게 대해주었다. 그러나 단 한 명, 케실리온의 태도만큼은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몇 일 전에 케실리온은 뷰리프를 조용히 밖으로 불렀는데, 뷰리프가 케실리온의 뒤를 따라갔다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케디아니스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뷰리프는 연신 고개를 저으며 아무 일도 아니라고 했다. 꼭 울 것만 같은 표정이 케디아니스의 마음을 편하지 않게 했다. 이루린은 서고에서 스피노스에 대한 책을 읽고 연구하고 있었다. 이 자는 마계의 인물이 아닌 중간계에 속하는 4000년 전의 인물인데, 굉장히 뛰어난 두뇌와 마법력을 가져 성룡급의 드래곤을 쓰러뜨릴 정도로 강했다고 한다. 대현자라고 불리기도 했던 이 남자는 100세가 넘어서까지 보름달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보아 문장이 시사하고 있는 중요한 열쇠는 보름달인 것 같았다. `좋아, 일단 이렇게 가정하고... 응?` 이루린은 스피노스에 대한 책을 제자리에 꽂다가 낡은 어떤 문서를 발견했다. `신들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스여진 책이었는데 작자미상에다가 어떤 목적으로 쓰여진 책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른 책들도 결코 새것은 아니었지만 그 책만 유독 너무 낡아빠진 것처럼 보였는데, 그 때문인지 그녀는 그 책에 대해 일종의 작은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는 책장에 몸을 기대고 책을 펴서 읽기 시작했다. "[아리아드네는 미의 여신으로 축복 받았다. 미의 여신인 만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고, 그 외모를 보는 자는 어느 누구도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녀와 결혼하려는 신들은 줄을 이었지만, 정작 그녀는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다. 성품도 차분하고 고와서 어느 누구나 좋아하고 따랐다. 그러던 어느 날, 2312년에 일어난 어느 대규모의 대륙 전쟁으로 인해 모든 차원계가 심하게 흔들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각 세 종족이 중간계에서 주도권을 사이에 두고 크게 분쟁한 것이었다. 처음에 사건을 일으킨 것은 천계로, 신계가 주도권을 지니고 있는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천계는 신계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다가 후에 마계도 같이 가세해서 싸우게 되었다. 세 종족 사이에 끼인 중간계는 발칵 뒤집혔고 곧 혼돈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야 말로 피바다였다... 용족은 애초에 이들에게 모두 조용히 싸우라고 말만 할 뿐, 인간들이 구축한 세상이 무너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2312년이면... 어느 정도지? 적어도 1000년 전 이상인 것 같은데.` [이 대규모의 전쟁을 막은 자가 두 명 있었으니, 그 중 한 명이 다름 아닌 아리아드네였다. 미의 여신이 무슨 힘이 있어서 전쟁을 막았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할 말이 없다. 얼굴로 막았나, 아니면 미인계를 썼나, 등의 질문은 피하겠다. 사실 아리아드네는 미의 여신이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로 굉장히 뛰어난 검술 실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단숨에 전 차원계의 주목을 받았다. 검의 신만이 유일하게 지닐 수 있는 소멸의 검이 주신에 의해 아리아드네에게도 하사된 이후로 그녀는 더 많은 활약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어느덧 검의 여제라고 불리게 되었다. 주신 다음에 강한 힘을 지닌 자에는 세 명이 있었는데 파괴의 신, 검의 신, 그리고 미의 여신이었다.... 그러나 아리아드네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절대 사랑에 빠져서는 안될 천족의 남자와 사랑에 빠져 노닥거린 것이었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신계는 발칵 뒤집히게 되었고, 시기하는 이들이 이 기회를 노려 아리아드네의 지위를 박탈하고 1000년 간 신계에서 추방했다. 검의 신인 예카트레스 또한 신계를 지배할 음모를 꾸며 지위를 박탈당하고 1000년 간 신계에서 추방당했다. 예카트레스는 그 당시에 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아리아드네보다 훨씬 더 큰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소멸되지 않았다. 물론...] "여기 있었어요?" 이루린은 책을 덮고 고개를 들어 옆을 응시했다. 세이젠이 미소를 지으면서 이루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 언니가 알아야 할 사실이 있어요. 사실 뷰리프는 자이언트 거미였어요!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이젠이 강하게 집착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루린은 어떻게 세이젠이 그 사실을 알았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이루린은 세이젠이 한 말이 케디아니스의 귀에 들어갈 까봐 노심초사하면서 딱 잘라서 둘러댔다. "그럴 리가 있나? 뷰리프는 마족인데, 어떻게 거미가 마족이 된다는 거지? 말도 안 되잖아." 이 부분은 이루린도 궁금해하던 것이었다. 어째서 뷰리프는 마족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이유를 물어보았으나 뷰리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좋아요, 그럼 이만 실례하겠어요." 세이젠은 신경질적인 태도로 이루린을 쏘아보더니 그대로 나가버렸다. 이루린은 세이젠이 저런 행동을 보이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이루린은 뷰리풀, 아니 뷰리프에게 상당히 미안해하고 있었다. 사실 처음부터 뷰리프를 만들었던 목적은 단순히 케디아니스의 검에 사라진 용도였다. 케디아니스라면 처음부터 뷰리프를 싫어했지만 이루린은 거미를 무서워하지 않았기에 잘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이루린은 자신이 뷰리프를 많이 아껴주고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뷰리프는 착하게도 그녀의 말을 무척이나 잘 들었다. 세이젠이 문을 열었을 때, 그녀의 눈에 펼쳐진 것은 케디아니스와 뷰리프의 다정한 모습이었다. 세이젠은 독하게 뷰리프를 노려보면서도, 한편으로는 케디아니스를 향해 회심의 미소를 지어주었다. 한마디면 이 광경도 막을 내리게 될 것이다. "사실 할 말이 있어, 케디아니스." 세이젠은 뷰리프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런데 신경에 거슬리게도 뷰리프 또한 케디아니스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면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뷰리프가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좀 더 앞으로 와줄래?" 세이젠은 신경질적인 태도로 앞을 향해 좀 더 나아갔다. 그리고 케디아니스를 향해 `뷰리프는 거미야`라고 말하려고 하는 순간, 뷰리프가 말했다. "잘 가, 세이젠. 여기까지 오느라고 수고했어." 세이젠은 뷰리프가 묘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손가락으로 천장에 매달려 있는 정체불명의 밧줄을 건드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뷰리프가 냅다 줄을 잡아당기는 순간, 세이젠은 자신의 몸이 바닥으로 꺼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비명을 질렀다. "가만두지 않을 거야아아!" 케디아니스는 바닥으로 꺼진 세이젠의 비명소리를 들으면서 뷰리프에게 물었다. "세이젠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거지?" 뷰리프는 시치미를 뚝 뗐다. "나도 몰라." "이제 어떻게 되지?" "내 계산에 의하면, 세이젠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부분에 교묘하게 고가의 장식품들을 놓아두었거든. 아마 추락하면서 미끄럼틀처럼 바닥으로 내려가면서 장애물이 좀 많을 거야." "최종 목적지는?" "아마도... 마물들의 집단 배설물을 모아 둔 거대한 통 속으로 들어가겠지?" 뷰리프는 끝까지 세이젠의 입을 막을 생각이었다. 물론 언제까지 그게 가능할지는 몰랐지만.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마왕의아내-63 케디아니스&세이젠 세이젠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참을 수 없는 무엇인가를 느꼈다. 그것은 뷰리프를 죽이고 싶은 증오심과 패배감이었다. 그녀는 케디아니스에게 사실을 말하려고 하려면 할 때마다 교묘하게 뷰리프의 방해를 빈번하게 받아서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이젠은 자이언트 거미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서고를 뒤졌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자이언트 거미에 대한 지식을 쌓은 후에 그녀는 서고를 나왔다. 그리고 수소문을 한 끝에 화학을 연구하는 유명한 연구가의 방을 찾아갈 수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어떤 물질을 달라고 부탁했다. 그 물질의 이름은 `베리즈`였는데, 어느 누구에게나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물건이었다. `베리즈가 이렇게 좋은 화학약품인 줄은 몰랐어. 아주 멋지군.` 세이젠은 더 이상 방심하지 않았다. 대신에 치밀하게 계획을 짤 생각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모욕을 준 뷰리프를 절대로 가만 놔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세이젠은 케디아니스와 이루린이 있는 방을 들락날락하는 아이나를 찾아갔다. 뷰리프는 우울한 심정으로 케디아니스를 응시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다시 강제적인 힘에 의해 거미로 변하게 되기 전에 케디아니스를 떠날 작정이었다. 그 생각을 하니 괜히 마음이 바늘로 쑤시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인간의 지능을 갖추기 전까지는 이런 기분을 느끼지도 못했었는데. `내 진짜 모습을 알고도 지금처럼 대해줄까?`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우울해졌다. 왠지 지금처럼 있는 게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시녀가 주스를 담은 컵 두 개를 받치고 있는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그 주스는 특별히 케디아니스가 아이나에게 가져오라고 시킨 것이었다. "오늘은 맛이 좀 특별할 거예요. 특히 케디아니스 님의 주스에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들어가 있어요. 일단 마셔보세요." 아이나가 상냥하게 웃으면서 케디아니스에게 잔을 내밀었다. 그 다음으로 그녀에게도 잔을 내밀었다. 아이나가 빈 쟁반을 들고 기다리는 사이, 케디아니스와 뷰리프는 잔에 든 주스를 한 번에 마셨다. 시원한 느낌이 목을 통해 전달되었다. 뷰리프가 빈 잔을 아이나가 내민 쟁반 위에 얹어 놓았을 때였다. 갑자기 잔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케디아니스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심한 경련이 일었는지 괴롭다는 듯이 몸을 비틀고 있었다. 놀라기는 아이나나 뷰리프나 마찬가지였다. "으윽...!" "케디아니스 님!" 아이나는 쟁반을 내려놓고 케디아니스의 몸을 흔들었다. 그녀는 매우 당황한 빛을 보이며 어찌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해했다. 뷰리프도 무슨 이유로 케디아니스가 마치 몸 속에 벌레가 들어간 것처럼 행동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가 당장 의사를 불러올게요. 그 때까지만 기다리세요!" 아이나가 재빨리 일어나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뷰리프는 케디아니스의 얼굴을 손으로 가볍지만 세게 쳤다. 그가 서서히 정신을 잃으려고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마에서는 땀이 흐르고 있었고 얼굴색은 매우 창백했다. 표정은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일그러져 펴질 줄을 몰랐다. "정신차려! 갑자기 왜 그래?" 케디아니스가 신음하며 말을 토해냈다. "괴로워... 속이 타 들어가는 것 같아...!" 뷰리프는 이 순간 침착해지려고 노력했다. 일단 그녀는 서고에 있을 이루린을 불러오기로 정했다. 그러나 케디아니스가 워낙 금방이라도 죽을 듯이 행동하는 바람에 이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세이젠이었다. 그녀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아주 즐거운 눈동자로 케디아니스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응시하면서 문을 닫고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무엇인가가 들려 있었다. "장담하는데 케디아니스는 머지않아 비명횡사할 꺼야." "뭐라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세이젠이 케디아니스가 죽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꺼냈다. 작은 약병 두 개였다. 그녀는 그것을 금방이라도 부술 것처럼 쥐고 있었다. "내가 아이나라고 하는 시녀에게 찾아가서 이걸 넣어달라고 부탁했지. 물론 아주 좋은 약품으로 가장하고 말야. 어리석게도 그 시녀는 내 말에 잘도 속더군?" 그녀는 오른손에 들고 있는 붉은 약병을 흔들었다. "이건 베리즈라고 하는 약품이야. 인간 같았으면 바로 즉사할 독극물이지. 그러나 케디아니스는 드래곤인데다가.... 잘났다 싶을 정도로 강한 힘을 소유하고 있으니 역시나 빨리 죽진 않는군. 죽는 모습을 기대했는데 말이야." 뷰리프가 그 말에 깜짝 놀라 다시 한 번 케디아니스를 응시했다. 그는 여전히 고통스러운 듯이 몸부림치고 있었다. "죽는다고?" 세이젠은 왼손에 들고 있는 초록색 약병을 흔들었다. "이게 해독제야. 지금이라도 먹이면 금방 살릴 수 있지." 뷰리프는 세이젠에게 금방이라도 달려들려고 했다. 그러나 세이젠은 해독제가 든 약병에 힘을 주며 뒤로 물러났다. "한 발짝이라도 다가오면 이 약병을 부수겠어. 그럼 케디아니스는 죽겠지? 그것 역시 내가 바라던 바야."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어서 그 약병을 내놔!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넌 케디아니스의 약혼녀가 아니었어?" 세이젠이 코웃음치면서 그녀의 말을 비꼬았다. "약혼녀 좋아하시네." 뷰리프는 케디아니스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어 쥐어짜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제발 장난 그만하고 약병을 이리 줘!" 세이젠은 약오를 정도로 가벼운 태도로 일관했다.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감에도 불구하고. "그냥 줄 수 없지. 한가지 조건이 있어." 세이젠은 뷰리프에게 오른손에 든 약병을 내밀며 잔인하게 미소를 지었다. "네가 이걸 마시면, 난 케디아니스에게 해독제를 주겠어. 어때?" 뷰리프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이 순간, 그녀는 세이젠을 정말로 죽이고 싶었다. 아니 처음부터, 아예 기회가 났을 때부터 죽였어야만 했다. 그래야 케디아니스가 위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뷰리프는 약병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다. 정말로 세이젠의 손에 들린 것이 해독제인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케디아니스는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케디아니스가 죽는 꼴을 볼 수가 없었다... 그것도 사랑하는 소년이 자신을 남겨두고 죽어 가는 꼴을... 세이젠이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똑똑히 들어. 사실 뷰리프는 자이언트 거미야, 케디아니스. 네가 지긋지긋하게 혐오스럽게 여기는 자이언트 거미!" 뷰리프는 케디아니스가 괴롭게 몸부림을 치는 과정에서도 고개를 들어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느꼈다. 그 시선이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차갑고 아프게 느껴졌다. 현재 그는 몸이 고통으로 가득 찬 상태라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필시 그녀를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다. 전에 그녀를 죽이려고 했던 것처럼. `그래, 난 거미야. 난 이 곳에 있을 근본이 아니었던 거야. 케디아니스가 진정으로 내 진실을 알아주기를 바랬던 것은 내 욕심이었던 것일까?` "으윽...!" 케디아니스의 신음소리와 함께 슬픔이 전신을 휘감았다. 뷰리프는 세이젠의 손에 들린 붉은 약병과 여전히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흘리고 있는 케디아니스를 응시했다. 케디아니스가 죽어가기 전에 그녀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어차피 거미인 이상 죽는 게 나을 것이다. 케디아니스를 위해 죽는다면 두려울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게 케디아니스가 원하는 길이고, 또 그녀가 원하는 길이기도 했다. 뷰리프는 손을 내밀며 처연하게 말했다. "좋아, 마시겠어." "잘 생각했어, 뷰리프." 세이젠은 그녀에게 병을 던졌다. 뷰리프는 그 병의 뚜껑을 열고 단숨에 들이켰다. 미련도 없었다. 기쁨도, 케디아니스와 함께 있었던 시간도 없었다. 단지 남아 있는 것은 이루지 못할 사랑이었다. 어차피 이루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게 케디아니스를 살리는 단 하나의 길이라면... "안 돼!" 케디아니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는 마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손이 떨리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죽음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케디아니스와 이별을 해야 한다는 슬픔 때문이었다... 가까스로, 그녀는 지독한 슬픔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난 드래곤이 아니니까 곧 죽겠지.` 금새 지독한 고통이 온 몸을 휘감았다.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손으로 닦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병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뱀이 똬리를 틀 듯, 몸이 크게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뷰리프는 더듬더듬 말하기 시작했다. "케, 케디아니스..." 세이젠의 비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감동적인 장면이야, 안 그래?" 뷰리프는 고통 때문에 말하기도 힘들었다. "이제 해독제를 줘! 난 어차피 죽을 테니까..." 그러나 세이젠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뷰리프는 그녀가 얼른 케디아니스에게 해독제를 넘겨주기를 바랬으나, 그녀는 웃기만 할 뿐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난 케디아니스가 살기를 바라지 않아! 이런 해독제 따위!" 녹색 약병이 세이젠의 손에서 산산조각 나면서, 뷰리프의 희망과 믿음도 유리조각처럼 날카롭게 산산조각 났다. 뷰리프는 자신이 세이젠을 믿었던 사실을 후회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홀가분하기도 했다. 어차피 자신은 케디아니스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뷰리프는 케디아니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미안... 케디아니스. 나 사실 자이언트 거미였어. 네가 지독하게도 싫어하는. 어쩌면 이 편이 널 위해 나을 지도 모르겠지... 그냥 내 소망은 단순히 너와 함께 있는 거였는데... 널 괴롭게만 했지?" 케디아니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뷰리프는 그 모습에 내심 놀랐지만 그럴 새도 없이, 곧 극심한 고통과 함께 의식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케디아니스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보야. 난 네가 거미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이루린이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서고에 갔다 온 사이에 케실리온의 방에서 참혹한 사태가 일어난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뷰리프는 죽었는지 벌써 몸이 거미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약물에 의해 녹았는지 몸통과 다리가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그리고 현재, 지금 케디아니스가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숨만 가쁘게 몰아쉴 뿐,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분노감이 극에 달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난 그렇게 했던 거야. 이제 알겠어? 어리석은 이루린 언니?" 세이젠에게 배반당했다는 분노감, 뷰리프가 죽은 슬픔, 그리고 케디아니스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정신을 극도로 날카롭게 만들었다. 모든 사실을 세이젠에게 들었을 때, 그리고 세이젠이 그렇게 나쁜 소녀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절대로 그녀를 용서할 수 없었다. "저 거미는 날 방해했어! 그래서 죽였지, 안 그래?" 이루린은 주저하지 않고 가우드를 뽑았다. 그리고 주춤하고 있는 세이젠을 향해 위협적으로 검끝을 겨누었다. "그렇다면 내 방해도 한 번 받아볼래?" 충격과 분노로 물든 복수의 시작이었다. 마왕의아내-64 케디아니스&세이젠 세이젠은 갑자기 싸늘한 표정으로 변하는 이루린을 경계했다. 그녀가 오랫동안 관찰한 결과 이루린의 성격은 너그럽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속일 수 있을 정도로 유순했다. 전형적인 여성향을 띄고 있는 - 검술의 검자도 모르는 - 여자였다. 그런데 현재 보이고 있는 이루린의 태도와 눈빛은 그러한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다. 청순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검을 똑바로 들고 있는 모습은 정말로 낯설게만 느껴졌다. "해독제를 꺼내." 이루린은 짧게 말한 후에 검을 세우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세이젠도 본능적으로 주변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는 검을 잡고 세웠다. 그 순간, 그녀는 이루린의 휘두르는 검을 받아쳤다. "윽!"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강한 힘이 손에 전달되었다. 분명히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마족인데 어떻게 이정도로 힘이 셀 수 있는 것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 강한 힘 덕분에 그녀는 크게 타격을 받고 뒤로 물러나야만 했고, 그 직후 이루린의 검을 또 받아야만 했다. "해독제를 꺼내라고 했을 텐데." 이번에는 조금 더 강한 한 어조였다. 그녀의 매서운 표정이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지금 당장 해독제를 꺼내지 않으면, 네게도 똑같이 그 독약을 먹이겠어. 설사 내가 널 죽여서 드래곤들에게 보복을 당한다고 해도 말이지. 아니, 드래곤과 마족과의 관계가 동등하니까 죽을 걱정은 할 필요 없겠군." 그녀는 이루린의 강한 힘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으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머릿속에서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었지만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겉으로는 비웃듯이 말했다. "내게는 해독제도, 그 독약도 없어. 모두 깨져서 없으니까. 날 죽일 테면 죽여. 어차피 케디아니스는 곧 죽을 테니까." 이루린이 냉소적이면서도 위협적인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래? 좋아, 마음대로 해. 그렇다면 난 널 절대로 곱게 죽이진 않을 거야." 이루린이 이번에는 좀 더 빠른 속도로 세이젠에게 다가왔다. 세이젠이 막 검으로 막으려는 순간, 이루린의 검은 이미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윽!" 팔이 아플 만큼 검에 전달된 힘도 엄청났다. 세이젠의 검이 허공을 가르고 어디론가 날아가자마자 이루린이 그녀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한 실력에 세이젠은 경악했다. 검을 옆에 차고 다니는 게 단순한 허영심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었던 것이다. "난 잔인한 짓을 하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아. 어느 누구를 제대로 죽이고 싶어서 죽인 적도 없지. 하지만,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어. 가령 네 손톱을 하나씩 뽑는 것부터 시작해서 2cm정도의 간격으로 육체를 분리해줄 수 있지. 혹은, 아예 옆에 놓고 널 죽지 않게 만드는 식으로 해서 평생 고통 속에서 살게 할 수도 있어. 내가 그렇게 못할 것 같아? 그런 꼴이 나기 싫으면 당장 해독제를 내놔." 세이젠은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루린의 표정과 행동 등으로 보아 분명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저항했다. "웃기지마!"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루린은 주저하지 않고 빠르게 검을 휘둘렀고, 그 순간 세이젠은 어깨에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팔이 떨어질 것처럼 아려왔다. 그리고 피가 전염병처럼 빠르게 옷을 적시기 시작했다. 세이젠은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곧 이를 악물고 이루린에게 덤벼들었다. 이루린은 세이젠의 공격을 모조리 피하면서 그녀를 넘어뜨렸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뚫을 듯이 검끝을 목에 세웠다. 여차하면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루린은 세이젠을 죽이고 싶은 생각에 검을 단단히 잡았다. 어쩌면 지금쯤 케디아니스가 죽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세이젠을 죽였다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고, 그것은 그녀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게다가 케디아니스를 살릴 수 있는 해독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지도 못한 상태였다. 갑자기 복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케디아니스 님, 치유사 렌틴 님을 데려왔습니다! 어서..." 그런데 그 때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모든 상황은 더 이상의 전개 없이 멈췄다. 그 문으로 아이나와 처음 보는 마족이 들어왔다. 그들은 충격을 먹은 듯 잠시 가만히 있다가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아이나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면서 신음하고 있었고, 렌틴이라고 불리는 남자는 놀라면서도 절제력이 흐르고 있는 굳어진 표정으로 이루린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것도 세이젠의 목을 겨누고 있는 이루린의 검끝을. "무슨 짓인가! 그대는 카란델의 여식이 아니던가!" 렌틴은 굉장히 엄격해 보이는 표정으로 세이젠을 날카롭게 주시했다. 이윽고 그의 눈이 점차 크게 뜨여졌다. "누워 있는 저 소녀는.... 마족이 아니질 않나! 그렇다면 이 곳에 들어올 수 있을 만한 종족이라곤 드래곤밖에 없지 않은가! 지금 어린 소녀를 검으로 죽이려 한단 말인가?" 이루린은 남자의 반응에 당황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닙니다, 그것은 오해..." 갑자기 세이젠이 그녀를 밀치면서 절박한 목소리로 외쳤다. "도와주세요! 지금 이 여자가 절 죽이려고 해요. 너무 무서워요, 저 좀 도와주세요!" 이루린은 순식간에 돌변한 세이젠의 태도에 기가 막혀 제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아이나와 렌틴이 문을 열고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악을 쓰고 달려들던 게 누구였던가. 바로 세이젠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은 마치 이루린을 험상궂은 폭력배인 마냥 묘사하고, 정작 자기는 연약하고 당하기만 한 모 순정 만화의 주인공처럼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렌틴은 경멸과 혐오가 섞인 표정으로 이루린을 응시하더니, 곧 쓰러져 있는 케디아니스에게로 다가가며 아이나에게 말했다. "이 소년인가? 이 소년은 케디아니스가 아닌가. 의식 불명이로군." 렌틴은 미동도 하지 않는 케디아니스를 이리저리 뜯어보더니, 손으로 맥을 짚어보고 심장 부근을 만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놀란 표정으로 다급하게 외혔다. "이런! 독극물에 중독되었군. 아직 살아 있는 게 다행이야. 넌 이 소년을 어서 내 방으로 옮기거라." 아이나가 대답하면서 케디아니스를 자신의 등에 눕혔다. 일단 이루린은 아직 케디아니스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해야만 했다. 렌틴의 말에 이루린은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살아 있습니까?" 렌틴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미안하지만 그대는 알 자격이 없네." 그의 태도 때문에 이루린은 괜히 기분이 나빠져서 따졌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오해가 있군요. 이 애의 상상도 못한 행각을 보지 못한 겁니까? 세이젠은..." 세이젠은 얼른 일어나서 렌틴에게 달려갔다. 그녀는 이루린이 계속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울음섞인 목소리로 렌틴에게 매달렸다. "제게 협박했어요. 독극물로 케디아니스를 죽이려고 했고, 보시다시피 저 이상한 거미도 죽였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도 죽이려고 했다구요!" 이루린이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전에 렌틴이 세이젠에게 미소를 지어줌으로써 사건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사실 그랬다. 어느 누구라도 이루린 자신이 세이젠을 눕힌 상태에서 검끝으로 목을 겨누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십중팔구는 이루린을 의심할 것이다. 게다가 세이젠이 가증스럽게 연약한 척 연기를 하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케디아니스의 말이 옳았어. 케디아니스가 옳았던 거야.` 이루린은 진작에 케디아니스의 말을 들어주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그러기는 늦었다. 렌틴의 말은 이때까지 벌어진 모든 상황을 뒤바뀌게 만들었다. "그대는 어떤 동기로 이 소녀를 죽이려고 했는지는 모르나,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법에 의해 엄격하게 처리될 걸세. 그리 알고 있게." 이루린은 세이젠이 회심의 미소를 짓는 것을 보았다. 렌틴이 밖으로 나가자, 세이젠은 다시 태도를 원상태로 바꾸며 말했다. "나의 승리야, 이루린. 넌 내가 저질렀던 모든 죄를 뒤집어쓸 거야. 케디아니스가 죽지 않은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워. 하지만 너라도 멀쩡하게 내버려둬서는 안 되겠지." 치를 떨리게 하는 세이젠의 말에 이루린은 격한 목소리로 외쳤다. "뭐야? 이 비열한!" "마음대로. 하지만 잘 되지 않을 거야."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렌틴이 다시 나타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뒤에 창을 들고 있는 20명 정도의 상급 마족들을 달고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세이젠을 뒤로하고 이루린을 포위하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렌틴이 외쳤다. "잡아라, 법을 어긴 여자다. 거칠게 저항하면 죽이지 않는 선에서 공격해도 좋다." 이루린은 긴급한 상환 속에서 도망칠 궁리를 했다. "난 아니라니까요!" "닥쳐라! 카란델의 여식이라고 해서 봐주는 법은 없다!" 이 순간, 이루린은 절대로 세이젠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괴롭히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그녀도 생각은 있었다. 힘이 아니라 오로지 머리로 상대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런 경우, 그녀는 충분히 세이젠을 파멸시킬 수 있었다. 어떠한 허점도 남기지 않고. 그러나 현재로서는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좋지? 만약에 이대로 누명을 쓴다면... 끝장이야.` 이루린은 창을 겨누고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상급 마족들을 망연자실하게 응시했다. 하른 실마이오스는 뷰리프의 최후를 느끼곤 씁쓸하게 생각했다. `뷰리프... 그래, 네 소원대로 해주마. 걱정 말거라. 후에 네가 사랑하는 남자가 장성해서 청년이 되면, 그 때 뭐로든 환생시켜 주마. 그때까지 기다리거라...` "실마이오스 님! 지금 누군가가 급히 찾고 계십니다." "알겠다, 나가 봐." 하른은 즐겁게 미래의 일들을 떠올렸다... 마왕의아내-65 케디아니스&세이젠 이루린이 창가 쪽으로 움직이는 사이 렌틴이 말을 이었다. "저항하면 죄가 더 추가되겠지." 이루린은 현재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재빨리 판단하며 검을 앞으로 겨누었다. "글쎄요, 죄도 없는 자를 잡는 게 더 큰 죄가 아닐까요?" 이루린은 말하면서 열린 창가에 몸을 완전히 밀착했다. 그 때 갑자기 한 상급 마족 중 하나가 그녀에게 창을 휘둘렀다. 이루린은 창 밖으로 몸을 뒤로 젖혀서 그 창을 가까스로 피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상급 마족이 그녀에게 창을 휘둘렀다. 몸을 똑바로 일으키지 못한 상태에서 그녀는 그 창을 받아쳤다. 그 결과, 그녀의 몸은 아슬아슬하게 창가에 걸쳐졌다. `잘못하면 떨어지겠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그녀의 검은 어느 창과 격돌했다. 문제는 그 힘이 워낙 강해서 그녀의 발이 바닥에서 완전히 떨어졌다는 점이었다. `이런 젠장!`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그러기도 전에 이미 몸은 머리부터 시작해서 아래로 추락했다.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순간 전율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나간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래에서 맹렬하게 몸을 치고 있는 바람을 느꼈다. 그녀는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그저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땅에 가까워질 즈음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음? 왜 안 아프지?` 부서질 것처럼 강한 고통이 아니라 뭔가 푹신한 느낌이 몸에 전달되었다. 그녀는 실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케실리온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였다. 그 사실에 놀란 그녀는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알고 보니 케실리온이 자신을 받아준 것이다. 별로 좋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이루린은 제일 처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잡아라! 도망쳤다!" 위에서 들려오는 급한 목소리에 이루린은 고개를 들었다. 상급 마족들이 창문 밖으로 창을 내밀며 이루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단 이루린은 급하게 케실리온에게 말했다. "여기서 벗어났으면 해. 지금은 급하니까 나중에 모든 걸 설명할게!" 상급 마족들이 검은 날개를 펴고 - 이루린은 그 광경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 뛰어내리려고 하자, 케실리온은 묵묵히 짧게 한숨을 휘더니 그녀를 든 채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이루린은 떨어지지 않기 위해 그의 어깨에게 눈을 감고 매달렸다. 그러기를 약 5분 정도,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이미 다른 공간에 와 있었다. 어느 작은 풀숲이었는데,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상급 마족들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루린은 그와 단 둘이 있다는 사실에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어 얼른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가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설명하라는 듯이. "좋아, 어떻게 된 거냐하면..." 이루린은 그에게 모든 사실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묵묵히 그녀의 말을 다 듣더니 한마디 던졌다. "도망쳤으니 죄목이 추가되었겠군." "하지만 난 죄가 없어! 어쨌든 날 좀 도와줘." 오후가 되었을 즈음, 세이젠은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루린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던 상급 마족들 모두가 철수한 것이었다. 더불어 길길이 날뛰던 렌틴 또한 세이젠을 회피하기 시작했다. "미안하구나, 음... 상층부의 명령이라서. 어쩔 수 없구나." 렌틴은 이렇게 말하면서 얼버무렸다. 세이젠은 그런 렌틴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니 것을 이해할 수 없어 괜히 화가 났다. 세이젠은 그런 렌틴에게 애원하듯이 매달렸다. 이루린을 기필코 감옥으로 보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죽을 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가 절 죽일 거예요. 당신이 절 구해주셔야 해요! 죄 없는 소녀가 죽어 가는 것을 바라진 않잖아요! 당신도 치유사인데!" 렌틴은 그런 세이젠을 달래듯이 말했다. "나도 그 이유를 알 수 없구나. 보통은 상층부 측에서도 이런 일에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는데, 이번 일만큼은 관여하지 말라고 하는구나. 아까 전에 그 소식을 들었단다. 뭔가가 있는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어떻게 그것을 알겠느냐? 잘못하다간 나도 소리 없이 암살당할 수도 있고 말이다. 아무리 고관대작의 딸이라고 해도 법은 똑같이 적용되는데 말이다." `제길... 이루린의 배후에 강력한 누군가가 있어.` 세이젠은 입술을 깨물며, 빨리 일을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이젠은 케디아니스가 어느 방으로 옮겨갔는지 알아내기 위해 마왕성 내부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지금이 케디아니스를 죽일 기회로는 적당했다. 밤이 되었기 때문인지 이루린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상급 마족들의 모습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아마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때였다. 홀을 지나 복도의 끝으로 갔을 때 갑자기 찌는 듯한 더위가 온몸을 휘감았다. 밤이 되면 혹독한 추위가 불어닥치는 게 마계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마치 온천탕에 있는 듯한 뜨거운 공기는 뭐란 말인가. 그 느낌은 사라지지 않고 몇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얼굴에서 땀이 흐르고 등이 축축하게 젖을 즈음, 그녀는 케디아니스의 방을 드디어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옆에 붉은 액체가 들어 있는 거대한 잔이 놓여져 있었다. `목이 마르네...` 세이젠은 너무 심하게 목이 타들어가는 느낌을 받았기에 주저하지 않고 그 잔을 마셨다. 그리고 잔을 아무렇게나 내팽게친 후에, 그녀는 케디아니스의 방으로 통하는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 순간 그녀는 속이 뒤틀리는 느낌을 받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심하게 당기는 느낌이 숨쉬기를 자연스럽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몸을 휘감았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바닥에 쓰러졌다. `내가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지? 케디아니스의 방 앞에 왜 잔이 놓여 있었는지를 생각했어야 하는 건데! 목만 마르지 않았더라면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을 것을...` 그 때 어두운 정적을 깨고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긴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는 여자였는데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왜, 너무 괴롭니?" 목소리를 듣고서야 그녀는 비로소 그 여자의 정체가 다름아닌 이루린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 이루린! 내게 무슨 짓을 한... 크윽!' 말하기도 힘들었다. 세이젠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사이, 이루린은 즐거운 듯이 말했다. "케디아니스도 너와 똑같은 심정이었을 거야. 아마 케디아니스가 죽었다면, 내가 널 어떻게 했을까? 곱게 살려뒀을까?" 세이젠은 죽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이루린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 때문에 이성이 날아가기 직전의 상태였다. 몸의 세포가 하나 하나 고통스럽게 날뛰면서, 그녀의 정신을 점점 조여갔다. 제대로 앞뒤 분간도 할 수 없었다. "이, 이...! 재수 없는 여자가!" 이루린은 옷 속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세이젠이 쓰러져 있는 바닥에 떨어뜨렸다. 세이젠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서 그것을 잡았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초록빛을 띄고 있는, 엄지손가락 정도의 크기인 알약이었다. 세이젠이 것을 들고 어렵사리 고개를 들자, 이루린이 알약을 응시하며 말했다. "네가 목이 타는 이유도 모두 내가 꾸민 거야. 악독한 네가 그런 단순한 방법에 걸려들 줄은 몰랐었는데 의외로군." 이루린은 차갑게 미소를 띄며 말했다. "네가 마신 게 뭔 줄 알아? 바로 케디아니스에게 먹었던 약품이야. 아마도 곧 죽겠지. 하지만 내가 널 죽이면, 전 용족의 미움을 사겠지? 마족과는 달리, 너희 드래곤들은 개인 행동에는 강하면서도 헤츨링에게는 무서운 집착을 보이더군. 그러니 내가 널 어떻게 함부로 죽이겠어." 이루린의 마지막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그러나 세이젠은 이루린이 당연히 자신을 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정도로 봐주지. 케디아니스도 별 탈 없다고 들었으니까. 그 알약은 해독제야. 그 약을 먹고 다시는 이 곳에 얼씬하지 않으면 돼." 세이젠은 그 말을 무시하면서 알약을 냉큼 삼켰다. 그리고 놀랍게도 잠시 후에, 그녀의 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고통이 잠재워진 것이었다. 세이젠은 이리저리 움직여본 후에,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이루린에게 외쳤다. "흥, 어리석군. 날 살려주다니. 내가 네 말을 들을 것 같아?" 세이젠은 일단 도망치기 위해 몸은 뒤로 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는 몸 속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놀란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고 이루린을 응시했다. 이루린은 아직까지도 불길한 미소를 거두지 않고 있었다. "말을 오해하는군. 난 널 살려준다고 하진 않았어. 물론 널 직접 죽이겠다고 하지도 않았지." 세이젠은 두려움 때문에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그럼 뭐야!" "잘 가, 세이젠. 다시는 이 곳에 오지마. 아니, 올 수 없겠지? 정도 많이 들었는데 말야. 지독할 정도로." 이루린은 세이젠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모습을 묵묵히 응시했다. 그녀가 세이젠에게 준 알약 속에는 워프 기능이 숨겨져 있어, 알약의 겉 부분이 녹으면 스스로 다른 공간으로 이동 당하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다른 공간은 결코 세이젠이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곳이었다. `직접적으로 죽이지만 않으면 내가 미움을 살 이유도 없지.` 원래라면 이루린은 세이젠을 곱게 죽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케디아니스가 죽지 않았기에 마음을 관대하게 써서 그냥 죽이기로 한 것이었다. 뭐, 따지고 보면 결코 그것도 곱게 죽이는 방법이 아니었지만. 이루린은 바닥에 놓여져 있는 잔을 챙긴 후에 케디아니스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전에 케디아니스와 함께 갔던 장소에서 세이젠의 최후를 감상하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세이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마계의 어느 공간이었다. 그녀는 현재 이상한 마을의 광장에 덩그러니 홀로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광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피바다를 이루고 있는 분수대 안에 인간들이 벌거벗은 채 몸이 분리되어 참혹하게 죽어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여긴 어디지?` 그 때 갑자기 땅이 흔들리면서, 그 사이로 무엇인가가 뚫고 나오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자세히 보니 검과 방패, 투구를 쓴 스켈레톤이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실력을 지닌. 그들의 숫자는 족히 300백 명은 되었다. 세이젠이 당황해하고 있던 차에, 그들은 순식간에 세이젠을 둘러쌌다. "꺄아아아악!" 그녀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면서 그들의 무수한 검에 파묻혔다. 마왕의아내-66 숨겨진 그녀, 숨겨진 사건 세이젠이 눈앞에서 사라진 이후 평화가 찾아왔다. - 죽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 이루린은 여전히 서고에 틀어박혀 세 번째 관문의 문장 해석에 몰두하곤 했고, 케디아니스는 그런 그녀를 돕기보다는 방에 틀어박혀 생각에 잠겼다. 뷰리프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왠지 뷰리프가 옆에 없으니 굉장히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슬픈 감정도 있었지만 드래곤인 특성상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그리고 그를 괴롭혔던 세이젠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으니 하루가 무료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케디아니스!" 갑자기 문이 열리자마자 이루린이 책 한 권을 들고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에도 간만에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해석 끝났어! 끝났다니까!" "그래?" 이루린은 어째서 저렇게 기뻐하고 있는 것일까. 갑자기 케디아니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이루린은,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생기는 케디아니스였다. 그녀도 다른 마족들과 다름없이 군주의 반려가 되는 것을 집안의 명예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군주의 아내가 되기 위해? 사랑이라는 감정은 조금도 가지지 않고?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괜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갑자기 이루린의 모습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전에는 단순히 이루린이 좀 악랄하며, 좀 포악하고, 좀 사악하면서, 여자다운 면은 조금도 없다는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전형적인 악녀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뭐야,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이루린은 세이젠의 최후를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지만 일단은 잊기로 했다. 일단 현재가 중요했으니까. 소중하게 여겼던 - 애완동물이었지만 - 뷰리프도 없으니 괜히 마음이 울적해지는 것 같았다. 사건은 끝났지만 아직도 이루린의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케실리온이었다. 믿을 수 없게도 그녀는 그 날 오후에 바로 죄가 풀렸고 - 어디론가 증발했다는 게 옳을 것이다. - 상급 마족들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녀를 대했다. 분명히 케실리온이 어떻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루린은 일이 그렇게 된 이유를 그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는 성격대로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케실리온이 렌틴과 알고 있는 사이인 건가?` 이루린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창을 통해 마계의 밤하늘을 응시했다. 한창 샛노란 보름달이 선명하게 밤을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케디아니스의 팔을 잡고 적막감이 감돌고 있는 복도를 걸으면서 방에서 챙겨 나왔던 물통에 물이 제대로 들어있는지 확인했다. 모레가 기한의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1층부터 2층까지 보름달이 가장 잘 보이는 장소를 찾아다녔으나 딱히 별다른 점을 찾을 순 없었다. 약 1시간 정도 걷자, 드디어 케디아니스가 지쳤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뭐야! 없잖아. 그만 자러 가고 싶단 말야!" "참고로 말하지만, 오늘밤은 너나 나나 다 잤으니까 알아서 해. 굳이 돌아가고 싶다면 돌아가도 좋지만, 다음날부터는 두 동강이 난 바구니 안에서 자게될 거야." 그렇게 3층의 거대한 홀에 진입했을 때, 그녀는 달빛이 비춰지고 있는 환한 둥근 난간 근처에서 어떠한 것을 감지했다. 그 곳에는 미약하지만 마력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얼른 그 곳으로 가보았다. 그리고 몸을 숙이고 앉아서 손으로 바닥을 여러 군데 쳐보았다. 있는 힘껏 세게. "뭐 하는 거야?" "잠자코 있어봐." 거의 난간 바깥쪽을 쳤을 때, 갑자기 바닥이 부서지더니 텅 빈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으로 안을 휘저어보니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루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마침 먹구름이 보름달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먹구름이 점차 걷히면서 보름달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 빈 공간 안에도 달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보름달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루린은 그 공간에서 아까 전만 해도 없었던 성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성배란 바로 이걸 말한 거야." 케디아니스도 더 이상 투덜거리지 않고 앉아서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보이지 않는 성배 안에는 황금이 들어 있다라. 하지만 성배 안에 황금이 어디에 있다는 거지?" 이루린은 손으로 성배를 만졌다. 성배가 그녀의 손에 잡히지 않고 그대로 통과했다. 케디아니스가 놀란 듯이 외치면서 성배를 손으로 휘저었다. "보름달이 없을 때나 있을 때나 잡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잖아." 이루린은 일단 품에서 물통을 꺼냈다. 그리고 물통의 뚜껑을 열어서 성배 안에 물을 부었다. 그러자 손에는 잡히지 않던 성배에 물이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이루린과 케디아니스는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면서 놀라워했다. 이윽고 성배에 물어 가득 채워졌을 때, 이루린은 수면에 보름달이 반사되어 비춰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말을 한 자가 스피노스라는 건 잘 알고 있겠지. 사실 스피노스는 보름달을 굉장히 좋아해서 보름달을 황금에 비유하곤 했지. 그러니까 이걸 잘 봐. 너도 지금 성배 안에 보름달을 볼 수 있지? 바로 그걸 두고 황금이라고 표현한 거야." 그 때 물의 무게에 의해 성배를 받치고 있던 바닥이 아래로 점차 내려가더니, 어두웠던 바닥 안에서 갑자기 어떠한 문자가 빛을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과일이라고 적혀 있군." "이제 끝났어." 이루린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다음날 이루린은 세 번째 관문 담당 마족에게 가서 모든 것을 말했다. 그러자 그 마족은 현재 그녀가 2위라고 했고, 1위는 엘리세아라고 했다. 점수 배분을 어떻게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루린은 왠지 그녀에게 지는 게 싫어 더 분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가우드가 자신을 인정해주기 전까지만 말이다. 가우드가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이상 섣불리 밖으로 나가는 것은 위험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루린 양, 곧 성마식이 있으니 준비하고 있어요." 이루린은 그 말을 흘려들었다. `마력을 느낄 수 있는데 어째서 날 자기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거지? 물론 가끔 그렇지 않을 때도 있긴 하지만. 최소한 마력을 아예 느끼지 못해 케실리온에게 수련으로 시달릴 뻔한 고비는 넘겼는데 말야. 그래, 잊지 말아야 해. 내가 이 곳에 있는 목적은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에 있어.`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한국에 계실 어머니의 얼굴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더불어 한국에서 있었던 기억들도 차츰 잊어가고 있었다. `이 곳에서 이루린이라는 여자로 살아가는 가야 하는 걸까?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에라, 모르겠다. 일단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결되겠지.` 태평스럽기만 한 그녀였다. 서고에 가서 오랫동안 몇 가지를 조사하고 온 케디아니스는 어젯밤 이루린에게 끌려 다니며 고생한 것에 대해 무척이나 화가 난 상태였다. 더불어 여태까지 이루린에게 당했던 수모가 떠올라 그러한 느낌은 심했다. 현재 이루린은 피곤한지 침대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상태였기에 이러한 수모를 갚아줄 기회로는 최고로 적당했다. `좋아, 이번에야말로...` 케디아니스는 사악하게 웃으면서 품에서 자신이 직접 만든 향수를 하나 꺼냈다. 잠에서 깨어난 이루린은 기지개를 펴면서 일어났다. 어젯밤에 고생해서인지 오늘은 꽤 오랫동안 낮잠을 즐긴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 해는 중천이었다. `뭐야, 침대가 이렇게 컸나?` 이루린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손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대로 주위를 인식하고 보니 그녀는 현재 매우 푹신하게 느껴지는 거대한 곳에 눕고 있었다. 주위의 모든 게 확대되어서 크게 보였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비명을 지르면서 일어났다. 정말로 모든 공간이 커져 있었던 것이다 . `뭐야, 왜 커져버린 거지?` 이루린은 뭔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곤 다시 생각했다. `이제 보니 내가 작아졌잖아!` 그녀는 경악했다. 마왕의아내-67 숨겨진 그녀, 숨겨진 사건 이루린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작아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 잠시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서 있었다. 모든 것이 커져버린 공간 속에서 그녀는 소리를 질러보았다. 그러나 그 소리는 바람에 파묻혀 메아리가 되어 들려왔다. `하루아침에 이런 빌어먹을 상황을 만들 자가 누구지? 마법에 능통해야 하고, 또 나에 대해 어느 정도의 불만도 가지고 있고, 또 마력도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 이루린은 푹신한 침대 위를 걸어다니면서 이를 갈았다. `보나마나 한 명뿐이겠지. 뷰리프가 죽은 게 아깝군. 나중에 원상태로 돌아가기만 해봐라, 내가 이번에는 고이 넘어가나.` 그 때였다. 갑자기 창문에 달린 커튼이 펄럭이더니, 강한 바람에 불어오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하늘하늘한 바람이었겠으나 현재의 그녀에게는 강력한 폭풍과도 같았다. 그녀는 바람에 휩쓸려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다급히 이불을 잡았다. 그러나 어디선가 날라든 나뭇잎에 의해 - 그녀의 몸보다 훨씬 더 큰 - 이불을 놓치게 되었다. 대신에 나뭇잎을 잡았고, 그 순간 나뭇잎이 공중에 치솟으면서 그녀의 몸도 같이 날아올랐다. 나뭇잎은 정신 없이 휘날리다가 결국 창문 밖으로 휩쓸렸다. `죽을 지도 몰라.` 이루린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면서 침착하게 행동하려고 애썼다. 일단 그녀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팔랑거리고 있는 나뭇잎 위에 간신히 올라탄 후에 힘겹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몸은 나뭇잎과 함께 맹렬하게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보니, 누군가가 마침 그 근처로 지나가고 있었다. 이루린은 죽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나뭇잎을 휘어잡아서 그 방향으로 떨어지게 했다.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절묘하게도 그 남자의 머리와 나뭇잎이 거의 근접했을 때, 그녀는 기회를 봐서 얼른 그 남자의 머리로 뛰어 내렸다. 나뭇잎은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지고, 이루린의 몸은 그 남자의 머리에 안전하게 착지했다. "저기,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와주세요!"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어디론가 걷기만 했다. "... 이런, 오늘 회의에 늦겠군. 군주님께서 기다리실 텐데..." "내 말 안 들려요?" "오늘 주제가..." 남자는 계속 뭐라고 중얼거릴 뿐 그녀의 말에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이루린은 그의 어깨로 내려가서 귀에 대고 말하려고 시도하려고 했으나 너무 위험한 처사라고 생각해 관두었다. 현재 그녀는 거대한 바위산에 놓여 있는 것과도 똑같아서 함부로 내려갔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는 날엔 바로 죽음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그의 풀숲을 연상하게 하는 그의 머리카락에 앉아서 일단 모습을 감추기로 했다. `머리 냄새가 지독하군. 도대체 머리를 감기는 하는 건가?` 이루린은 코를 틀어막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 지났을 때, 그녀는 공기가 틀려졌다는 것을 느끼곤 눈을 뜨고 머리를 살짝 내밀었다. 어두운 곳이었는데, 고위급으로 추정되는 마족들이 긴 탁자에 둘러앉아 있었다. 숨막힐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저절로 느껴지자 그녀는 왠지 자신이 이 곳에 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언짢았다. 그러나 버스는 지나가고 없었다. 어떤 남자가 데이비드에게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군주님께서 오늘 회의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네, 데이비드. 어서 자리에 앉게. 오늘은 카란델 님께서 회의를 주도하실 것이네." `카란델, 그러니까 아빠가?` 이루린은 과묵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카란델을 응시했다. 왠지 그녀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마계에 머무르고 있으면 있을수록 마리엔과 카란델이라는 이루린의 부모에게 점점 정이 가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같이 있거나 한 적은 없었는데도 마치 친부모처럼 말이다. 반면에 한국에 계실 어머니의 모습은 점점 잊혀져 가는데도. 데이비드가 자리에 앉자 카란델이 주위를 빙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 주제는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믿소. 바로 중간계와 마계를 잇는 차원의 문이 열렸다는 것이오. 이 주제로 벌써 몇 번의 회의를 거쳤는지 모르겠소." 주위의 고요한 침묵 속에서 - 이루린은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 카란델이 나직이 말을 이었다. "어째서 열렸는지 원인을 밝혀내는 게 급선무요. 단언한데, 아마도 그 원인은 누군가의 소행이 크지 싶소. 그 누군가는.. 군주님만큼이나 강력한 능력을 지닌 자겠지." 주위가 소란스러워지자, 주위를 둘러보던 카란델이 인상을 쓰더니 손으로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그러자 다시 주위가 잠잠해졌다. 그 때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그런 자가 있을 리가 없소. 그런 자가 현재 마계에 있다고? 어떻게 그것을 확신하는 거요? 꼭 누군가에 의해 차원의 문이 열렸다는 보장은 없소." 그 때 젊은 마족 하나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차원의 문은 자연적으로 열릴 성질을 지닌 것도 아닙니다." "그럼 자네는 군주님만큼이나 강력한 누군가가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젊은 마족이 난처한 기색으로 말했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하지만...." 카란델이 그들 쪽에 경고하듯이 말했다. "조용히 하시오. 일단 계속 진행합시다. 먼저 인간들의 침입에 관한 것인데..." 그렇게 회의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이루린은 자신도 모르게 데이비드라고 불리는 남자의 머리에서 잠들었다. 머리 냄새가 지독했지만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한 탓인지 금새 잠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잠에서 깼을 때, 그녀는 마지막으로 카란델이 데이비드에게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자네는 강력한 능력을 지닌 자들이 은거하고 있는 마을에 상급 마족들을 파견해서 차원의 문을 연 자가 있는지 조사하라고 이르게. 그리고 자네 스스로 해야할 일이 하나 있네. 내일 당장 차원의 문 근처에 마물들을 풀어놓게. 물론 인간들 중에서도 뛰어난 자는 마물들을 죽이고 계속 마계를 휘저을 수 있으니 자네가 적당히 기회를 봐서 한 번에 다 쓸어버리게. 저번처럼 군주님께서 수고하셔야 할 일은 없도록 해야할 걸세. 그런 일에 쏟을만한 시간이 없으신 분이니." 이루린은 마계 안에서 돌아가고 있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게 왠지 새로웠다. 조금 더 마계에 대해 알아간다는 기분이랄까. 문제는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은 것만 골라서 파악한다는 것이었다. 이루린이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사이, 회의가 끝났는지 데이비드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사라지는 긴장감과 탁 트인 공기가 그녀를 반겼다. 한참 시간이 지났을 때 그녀는 데이비드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머리가 가렵군." 데이비드가 거대한 손으로 - 이루린의 눈에는 그게 엄청난 바윗덩어리로 보였다. - 머리를 쓸어 넘겼던 것이다. 이루린은 미처 대비하지 못하고 그냥 그대로 얼어붙어 있다가 그의 손에 의해 공중으로 날리게 되었다. 몸이 허공에 날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허우적거렸다. `이제 끝이야!` 그녀는 비명을 지르면서 바닥으로 추락했다. 거의 바닥과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녀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이 뛰고 있었다. 그녀는 결국 바닥을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그녀의 몸은 바닥에 추락하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그녀는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알고 보니 그녀는 현재 바닥의 모서리 부근의 거미줄에 걸려 있었다. 잘 움직여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구사일생이었다. `다행인데.`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녀는 뼈저리게 후회해야 했다. 자이언트 거미가 모서리의 부서진 구멍에서 눈을 번뜩이고 있었던 것이다. 놀란 그녀는 사색이 되어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렸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하얀 거미줄이 몸에 칭칭 감기게 되었다. `날 먹이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이제 어쩌지? 큰일이다!` 이루린은 망연자실하게 거미가 거미줄을 타고 기어오는 모습을 응시하면서 되도록 침착한 마음을 가지려고 애썼지만 별반 소용없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경악하고 또 두려워했을 것이다. 물론 케실리온이라면 예외겠지만. 이윽고 거미가 그녀의 몸 근처에서 입을 열었다 닫았다 - 너무 입체적으로 봐서인지 징그럽고 혐오스러웠다. - 하면서 하얀 액체 같은 것을 내뿜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거미줄로 미라처럼 몸을 감기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일단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손으로 거미를 때렸다. 그러나 그녀가 때리기에는 거미는 너무 단단하고 거대했다. "엘리세아, 문 열어."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면서 강력한 폭풍이 그녀의 몸을 강타했다. 그녀는 바닥에 세게 나동그라졌지만 드디어 거미줄에서 벗어났다는 기쁨에 얼른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 자이언트 거미가 이번에는 경로를 바꿔서 바닥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녀가 살 수 있는 길은 하나였다. 열린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문이 열린 틈을 타서 재빨리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끈질기게도 자이언트 거미도 같이 딸려 들어왔다. 그녀는 있는 힘껏 달렸으나, 자이언트 거미가 내뿜은 거미줄에 의해 발목을 붙잡히게 되었다. `끌려간다!` 이루린은 거미줄을 앞으로 당기고 있는 자이언트 거미를 바라보면서 발목에 감긴 거미줄을 풀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거미줄은 마치 단단한 밧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막 거미의 앞다리 근처까지 끌려갔을 때 그녀는 기도했다. 제발 살려달라고. 그 순가 위에서 목소리가 울리듯이 들렸다. "뭐야, 내 방에 왜 자이언트 거미가 들어온 거지? 혐오스럽게!" 이루린은 거대한 발이 자이언트 거미를 짓밟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자이언트 거미의 비참한 최후였다. 일단 안도한 그녀는, 이번에는 이 공간이 도대체 어느 방인지 알아내려고 애썼다. 주위를 둘러보니 굉장히 화려한 물건들로만 - 특히 보석 - 치장된 방이었다. 그리고 당혹스럽게도 벽 중앙에 이루린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 붙여져 있었다. 문제는 그 그림의 정 중앙에 화살이 박혀 있다는 것이었다. "왜 찾아왔죠, 루시안?" "그렇게 야박할 필요는 없지 않나?" 이루린은 이 빌어먹을 사태에 묵묵히 이마를 짚었다. 하필 방을 들어와도 꼭 위험한 방으로만 들어오다니. 만약에 들키기라도 한다면.... `엘리세아의 방인가...` 마왕의아내-68 숨겨진 그녀, 숨겨진 사건 이루린은 일단 침대 밑쪽까지 뛰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10초도 안 걸릴 거리였으나 지금은 마치 사막을 걷는 기분이었다. "일단 들어와서 말해요." 이루린은 벽에 붙어서 열심히 달리는 도중에도 엘리세아와 루시안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뭐야, 어째서 서로 알고 있는 사이지?` 이루린은 예전에 루시안이 연회장에서 자신의 몸을 더듬어서 크게 마찰이 일었다는 것과, 일전에 무작정 자신의 방에 쳐들어와서 납치해가려고 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러니 어떻게 루시안이라는 남자를 잊겠는가. 엘리세아와 루시안의 공통점이라면 바로 이루린과 깊은 악연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쓸데없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이루린이 겨우내 침대 밑에 도착했을 때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당신이나, 나나 목적은 비슷하지만 반대의 성향을 띄고 있군요. 그렇지 않나요? 난 꼴도 보기 싫은 그 계집이 없어지는 것을 원하는 것과 동시에 군주를 원하고, 당신은 그 계집을 원하는 것과 동시에 군주가 사라지는 것을 원하고 있겠지요." 계집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잘 알고 있었던 이루린은 순간적으로 엘리세아에게 살인 충동을 느꼈다. 그녀의 발톱과 살 사이에 검을 박는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루린은 그들의 말이 결코 그냥 흘려들을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했다. 그들은 지금 누군가가 들었다면 큰일이 날 소리를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 "차원의 문이 열려서 상층부에서 비공식적으로 은밀하게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던데... 정말로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군요. 그들은 절대로 차원의 문을 연 자가 누군지 밝혀낼 수 없을 거예요. 뭐, 나조차도 그 자를 만나보긴 했어도 어떻게 생겼는지는 보지 못하지만..." 이루린은 그 말에 잠시 가벼운 충격을 먹었다. 그녀가 아까 얼떨결에 참석한 회의의 주제가 바로 차원의 문이 아니었던가. 그 때는 그것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엘리세아의 말을 듣고서 그 생각이 달라졌다. 엘리세아는 상층부조차도 모르는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루시안과 함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 걸까? 아냐, 만약에 알린다고 해도 엘리세아의 뒤에 있는 무시할 수 없는 배경 때문에 내 의견은 바로 묵살될 거야. 그리고 결정적으로 일단은 증거가 없으니...` 그 때 엘리세아의 신경질적인 말이 들려왔다. "그 여자를 생각하면 할수록 열 받아요. 이루린이 내 눈앞에서 얼쩡대는 것조차도 싫어요. 난 당신을 이해할 수 없군요. 어째서 그런 여자에게 접근하는 거죠? 당신은 나처럼 몸매가 좋은 여자에게 관심 있는 것 아니었나요?" 이루린은 엘리세아의 마지막 말이 귀에 거슬렸지만 묵묵히 참았다. 엘리세아가 침대에 걸터앉은 사이 루시안이 침대 근처로 다가오며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띄었다. "글쎄... 그렇긴 하지.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가 이지. 네가 모르는 이유..." 엘리세아는 루시안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불만스러운 투로 말했다. "이루린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그 하녀도 마음에 안 들어요. 아이나라고 했나? 원래는 제 담당 하녀였는데 이루린에게 뺏겼어요. 배아프게도 그 뒤로는 항상 우울해하던 표정 대신에 순진한 척, 바보 같은 표정만 짓더군요. 게다가 이루린에게 헌신적으로 대하는 것과 같이 붙어서 대화하는 것도 정말로 싫어요. 재수 없는 여자! 다시 생각해보니 적절한 때에 왔군요, 루시안.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겠어요?" 이루린은 자신이 원래대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케디아니스부터 손봐줄 게 아니라 엘리세아부터 손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그 계집, 그러니까 아이나라는 하녀, 없애버려요. 방법은 간단해요. 그 하녀가 자주 다니는 길에 죽일 수 있을 만한 돌덩어리를 설치하시면 되요. 물론 마법을 걸어서 보이지 않게 만들어야겠지요. 그 하녀는 주로 마왕성 공터 뒤쪽에 자주 가니까 기회를 봐서 돌덩이를 떨어뜨리면 될 거예요. 들어주시겠죠? 들키지 않게 죽여야 할 거예요. 난 이루린이 그 여자와 노닥거리는 걸 두고볼 수 없어요." 이루린은 엘리세아의 파렴치한 말에 단단히 화가 났다. `저런 나쁜!` 기가 막히게도 루시안은 누군가를 죽여달라는 부탁에 아무런 거리낌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요즘에는 한가하니까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지. 시기는?" "오늘 저녁. 아마 아이나가 그쯤에 공터를 지나가고 있을 거예요. 그 때 갑자기 적막감이 감돌았다. 이루린은 그들이 계속 대화하기를 기다렸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이루린은 침대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위를 응시했다. 루시안이 연신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표정을 굳히며 의미심장하게 말하는 모습에 이루린은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가 엿듣고 있군. 이 방 안에서." 케디아니스는 이루린이 없는 행복한 시간 동안 방에서 죽치고 놀았다. 그런데 예상치 않게도 그 때 문이 열리면서 케실리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케디아니스는 거의 방에 들어오지 않고 간혹 밤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자 알고 있었기에 조금 의아해했다. 그는 케디아니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는 침대 위에 눕지 않고 케디아니스를 가만히 응시했다. 정작 케디아니스는 그의 시선을 받는 게 매우 부담스러웠다. "왜, 왜 쳐다보는데요?" 케실리온은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서류를 응시하면서 말했다. "...이루린은?" "몰라요, 내가 어떻게 알아요? 어딘가에 가서 놀고 있겠죠." "서류가 밀려 있다. 어서 말해." 케디아니스는 그의 시선을 아예 피하면서 대답했다. "그게 이루린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예요? 하여튼 난 몰라요."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루린을 사라지게 해서 재미있나?" 케디아니스는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당연히 재미있죠. 지금쯤 작아져서 고생하고 있을.... 히익!" 케디아니스는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모든 건 케실리온의 교묘한 유도 질문에 걸려든 그의 잘못이었다. `내가 이렇게 단순무식 했다니...` 케실리온이 갑자기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서류가 쌓여 있는 책상 쪽으로 갔다. 그는 손가락으로 서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루린 대신에 해야할 분량이다. 물론 잘못 처리했을 경우 바깥 청소가 한 번씩 늘어나니 거기에 유의하도록." 케디아니스는 그 말에 사색이 되어 거칠게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내가 왜 해야 하는데요!" "원인을 제공한 자가 처리해야 하는 게 철칙이라는 말도 모르나?" 케디아니스는 끝까지 저항했다. "내가 그걸 어떻게 해요?" "쫓겨나고 싶나?" "......" 그 말에 그는 유령처럼 일어나서 서류가 쌓여 있는 책상 앞에 앉았다. 그 때 아이나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루린 님, 그 안에 계세요? 어? 어디 가셨지?" 아이나가 당황한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케디아니스는 자신이 해야할 청소가 늘어나기 전에 빨리 이루린을 찾아야되겠다 싶어, 얼른 아이나에게 말했다. "저기, 이루린이 사라졌으니까 좀 찾아봐. 내가 마법 향수를 써서 크기가 작아지게 했거든." 아이나는 그 말에 깜짝 놀라면서 외쳤다. "뭐라구요? 케디아니스 님, 그건 위험한 장난이에요. 이루린 님께서 죽으셨으면 어떻게 해요? 어쨌든 지금 당장 찾으러 가겠습니다." 아이나는 케디아니스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이나가 문을 닫고 사라지자 케디아니스는 침대 위에 눕는 케실리온을 보며 암울하게 생각했다. `정작 마법을 썼어야 할 자는 따로 있었어.` 엘리세아가 놀라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야?" 고함치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 웅웅거렸다. "미약하지만 마력이 감지되고 있다." 이루린은 루시안의 예리함에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크기가 매우 작아졌는데도 자신의 마력을 감지할 만한 실력을 지녔다는 사실은 꽤 놀라웠다. "그 정도가 너무 미미해서 어디 있는지는 찾을 수 없군." 이루린은 과감하게 - 밟힐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 루시안의 발을 향해 달렸다. 누군가를 이용하지 않으면 이 방에서 나갈 방법은 없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의 발에 매달려서 이 방을 나서야만 했다. 루시안의 발은 마치 절벽 같았지만 천으로 되어 있었기에 올라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일단 이루린은 어렵사리 주름진 부분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그의 발뒤꿈치에 조심스럽게 붙었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하고 나중에 일이 생기면 찾아오지." 루시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루린은 그의 발뒤꿈치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막 문 근처에 왔을 때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엘리세아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이루린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루린을 정면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루시안, 잠깐만..." 이루린은 너무 놀라서 순간적으로 숨쉬기를 멈추고 그대로 마네킹처럼 있었다. 루시안이 문을 반쯤 열다 말고 엘리세아를 응시하며 말했다. "왜?" 엘리세아는 심하게 갈등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그냥 가라는 손짓을 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루린은 루시안이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을 때야 비로소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만약에 엘리세아에게 들켰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을 것이다. 이루린은 그렇게 루시안의 발 냄새를 맡으면서 - 의외로 고문이었다. - 한참 그 상태로 있었다. "루시안 님. 어디 갔다 오셨습니까?" 이루린은 고개를 내밀어 웬 중년의 마족이 루시안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순간 눈과 귀를 의심했다. `루시안 님? 뭐야, 순 호색한 건달인 줄 알았는데...` "잠시 어디 갔다 오지." 루시안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어디론가 빨리 걷기 시작했다. 이루린은 바이킹을 타는 기분을 느끼면서 그가 어디로 향하는지 주시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마왕성 3층의 복도 끝이었다. 그는 갑자기 등에서 검은 날개를 펴더니 그대로 창 밖으로 날아올랐다. 이루린은 아래를 감상하면서 신기한 마음으로 그가 떨군 검은 깃털을 공중에서 잡았다. 그가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엄청나게 커다란 바위와 함께 커다란 그물이 소환되었다. 그는 그 그물을 적당한 나무에 설치하고 그 위에다가 마법으로 바윗덩어리를 얹어 놓았다. 그물이 튼튼한지 바윗덩어리로 얹었는데도 끊어지지 않았다. 이루린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난처하게도 하필 그 때 아이나가 그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막 이루린, 자신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면서. 마왕의아내-69 숨겨진 그녀, 숨겨진 사건 루시안은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아까부터 느껴지던 그 기운이 사라지지 않아..." 갑자기 루시안이 뒤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는 미처 그의 행동에 대비하지 못하고 움직임의 여파로 인해 떨어지게 되었다. `아뿔사! 떨어진다!` 이루린은 막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빠르게 아래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떨어지다 말고 어딘가에 내려앉게 되었다. 놀란 이루린은 황급히 아래를 응시하다가, 자신이 아슬아슬하게 그물에 떨어졌음을 깨달았다. 그러는 사이 루시안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물에 내려앉아 있던 돌덩어리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대신에 그물은 조금 희미하게나마 그녀의 눈에 보였다. "좋아, 알아서 떨어지도록 해놨으니..." 루시안이 마법으로 모습을 완전히 감추자 이루린은 상황이 잘못 돌아간다 싶어 고개를 돌려 아이나를 응시했다. 아이나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이제 어쩌지? 작아서 아래로 내려갈 수도 없고, 눈에 띄지도 않을 것이고, 불러봤다 대답은 하지 않을 테고... 방법이 없어. 이대로라면 줄이 알아서 끊어져서 아이나를 덮치겠지. 엘리세아.... 나중에 원래대로 커지면 한 번 두고보자.` 이루린은 엘리세아를 떠올리면서 일단 줄을 만져보았다. 원래라면 가늘었을 줄이 현재의 그녀에게는 꼭 기둥 같았다. 끊는 건 아예 불가능했다. 단지 이루린은 아이나가 이 곳으로 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 때 갑자기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 잘못 만나서 고생하는군. 뭐야! 도대체 왜 내가 작아진 거냔 말야! 그 얄궂게 생긴 꼬마의 짓이지? 당장 커지면 그 놈부터 잡아 족칠 거야!]" 이루린은 그 반가운 목소리에 - 평소 같았으면 귀를 틀어막았을 - 허리춤을 응시했다. 가우드가 푸른빛을 띄며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루린은 기쁜 마음에 얼른 허리춤에서 가우드를 뽑아서 막 껴안았다. 가우드의 볼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이봐. 난 20세 이상의 쭉쭉 빵빵한 여성들만 취급한단 말야.]" 이루린은 가우드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빠르게 말했다. "너, 네 능력의 한계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지?" "[내 능력에 한계란 없어! 당연한 것을 묻지마.]" 이루린은 손으로 그물을 지탱하고 있는 각 네 개의 굵은 밧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것들을 자를 만한 검날을 가지고 있니? 아무래도 너로는 어렵겠는걸." 이루린은 교묘하게 가우드를 도발하면서 걱정스럽게 밧줄들을 응시했다. 기둥 같은 밧줄들을 자그마한 가우드가 어떻게 자른단 말인가. 게다가 지금 아이나는 거의 밧줄 근처에 다다른 상태였다. 다급해진 이루린은 가우드를 세게 잡고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이 가우드 님을 무시하지마. 내가 그 정도도 못할 것 같아? 날 일반 검 따위로 취급하면 오산이야. 두 눈으로 나의 위대한 능력을 실감해봐.]" 이루린이 주먹을 들고 그를 한 대 때리기도 전에 가우드의 몸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 놀라운 광경에 이루린은 잠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검이 스스로 공중으로 치솟을 수 있다니. 아무래도 입만 산 검은 아닌 것 같았다. 왠지 그녀는 진작에 가우드의 능력을 일찍 알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나가 거의 그물 근처에 다다랐을 때, 가우드가 빠르게 날더니 아주 멋있는 동작으로 순식간에 그물을 지탱하는 네 개의 밧줄 중에 세 개의 밧줄을 잘라버렸다. 그러자 거대한 돌덩이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면서 바닥에 광음과 함께 떨어졌다. 이루린은 하나 남은 밧줄에 매달려서 아래를 응시했다. 아이나가 깜짝 놀라더니 밧줄과 바위를 번갈아 응시했다. 그녀는 매우 충격을 먹은 표정으로 한동안 사방을 둘러보다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 사실 아이나는 내성적이고 마음이 여렸기에 충분히 납득이 가는 반응이었다. - 두려운 듯이 어디론가 뛰어가 버렸다. "[잘 봤지? 어때, 내 능력이?]" 이루린은 공중에 뜨고 있는 가우드를 잡아서 하반신 아래에 놓으며 말했다. "그럼 날 태우는 능력도 있겠네?" "[내가 네 애마냐? 네 상상을 초월하는 무게를 짊어지고 나의 연약한 몸으로 운전하라고?]" "갑자기 케실리온에게 널 도로 넘기고 싶어지는데..." "......" 그 말은 상당히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가우드는 더 이상 잡소리하지 않고 평평하게 일자로 누웠다. 이루린은 기분 좋게 가우드의 검날에 올라타서 균형을 잡았다. 가우드는 잠시 심하게 비틀거리더니 -이 부분에서 이루린은 가우드를 손으로 막 때렸다. - 서서히 날기 시작했다. 이루린은 케디아니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위치는 케실리온의 방이야." 이루린은 케디아니스를 만나면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잘 알고 있었다. 케디아니스는 현재 마왕성 옆면의 공터 부근에 있는 폭포 근처에서 빗자루로 바닥을 쓸다말고 내심 갈등하고 있었다. 자신의 말 한마디면 이루린의 몸은 원래대로 커질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 또 당분간은 그렇게 하지도 않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케실리온의 강압적인 조치에 의해 그의 마음은 결국 흔들리게 되었다. `하루종일 마왕성 공터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쩐다?` 케디아니스는 위를 응시했다. 마왕성의 특이한 곳 중 하나인 공중 폭포는 굉장히 그에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5층과 6층 사이에 만들어진 공중 폭포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폭포로 통하는 구멍 안에는 기상천외한 능력을 지닌 마물들이 잔뜩 우글거린다고 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 안에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은빛의 머리카락처럼 넘실거리고 있는 폭포 아래의 작은 호수에는 요정들이 빛이 아른거리는 날개를 움직이며 부드럽게 거닐었다. 케디아니스는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예전에는 이루린이 거미와 관려된 일 때문에 너무나도 밉게만 느껴져서 장난을 쳤던 것인데, 지금은 거미를 가지고 훈련을 시키지 않으니 그러한 목적은 사라지지 않았던가. `분명히 목적이 있긴 했지만... 음... 잘 모르겠어.` 케디아니스는 이루린을 풀어줄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에 그랬다가 얻어터지는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지?` "왜 너 이상한 방향으로 온 거야!" "[이 길이 더 빠르다니까.]" 이루린은 이상하고 어두운 곳을 둘러보았다. 정말로 처음 보는 이상한 곳이었다.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한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특유의 이상한 냄새도 있었고, 습기가 찬 듯한 느낌도 있었다. 가우드가 5층으로 올라가더니, 복도의 어느 이상한 틈새로 들어간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 틈새 이후의 공간은 마왕성와는 완전히 틀렸다. 이루린은 조금 경계하는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노란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문을 발견하곤 그것을 미심쩍게 응시했다. 이런 어두운 공간에 웬 문이란 말인가. 그녀는 가우드에게 멈추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이미 가우드가 다른 통로로 들어가는 바람에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빛이다!` 통로의 끝 부분에 빛이 환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이루린은 좀 더 빛을 보기 위해 몸을 앞으로 움직였다. 그 때 가우드가 잘못 움직이는 바람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행히 가우드가 높지 않은 위치에서 날고 있었기 때문에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녀는 축축한 바닥에서 뭔가가 굼틀거리고 있음을 깨닫곤 벌떡 일어섰다. 그녀의 몸만한 거대한 벌레가 어둠 속에서 빛을 내뿜으며 기어오고 있었다. 마치 애벌레 같았다. 이루린이 팔을 위로 뻗고 있는 사이, 가우드가 알아서 그녀의 손에 들어왔다. "뭐지, 저건? 조그마한데도 이렇게 강력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니, 진짜 평범한 벌레 맞아?" "[아무래도 다 죽이기에는 무리인 듯 싶군. 위를 봐.]" 이루린은 위를 응시하다가 하마터면 아연실색할 뻔했다. 천장과 벽에 엄청난 벌레들이 바글바글거리고 있었다. 정말로 가우드의 말대로 다 죽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나뭇잎이 근처에 있군.]" "네가 날 다시 태우면 되잖아." "[힘들어! 그냥 나뭇잎에 올라타는 게 좋을 거야.]" 이루린은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근처에 그녀를 실을 만한 튼튼한 나뭇잎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앞에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도 밝은 빛을 향해서. 이루린은 달려드는 벌레들을 가우드로 죽이면서 나뭇잎을 향해 재빨리 나아갔다. 그리고 벌레들이 스멀스멀 기어오기 전에 나뭇잎과 함께 빠른 물살로 뛰어들었다. 다행히도 나뭇잎은 물에 휩쓸리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떠서 빠르게 빛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카누를 하는 기분이랄까. 어쨌든 물을 몸에 다 뒤집어 쓰면서 이윽고 밝은 공간에 다다른 그녀였다. 힘들게 고개를 빼서 밝은 부분을 내다본 이루린은 비명을 질렀다. "이런! 절벽이잖아!" "[아.. 맞다, 까먹었지. 미안.]" "미안하다면 다야!" 이루린이 가우드에게 다시 매달릴 시간도 없는 사이 나뭇잎과 함께 그녀의 몸은 절벽으로 떨어졌다. 이루린은 눈을 뜨고 앞을 응시했다. 가우드와 함께 바닥으로 추락하면서 그녀는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한 소년이 자신의 몸 바로 아래에 서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루린은 자신의 몸이 가우드와 함께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원래대로 해주자.` 케디아니스는 어디에선가 고함소리를 들었지만 무시하고 중얼거렸다. "해제!" "이 자식, 케디아니스!" 케디아니스는 귀에 낯익은 그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위로 들었다. 이루린의 무시무시한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이루린에게 파묻혔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엘리세아는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아이나가, 분명히 죽었어야 할 아이나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는 그녀였다. 그녀는 바닥을 응시하면서 음료수를 받친 쟁반을 들고서 어디론가 걷고 있었다. `좋아, 그렇다면 조금 극단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엘리세아는 독하게 마음을 먹으면서 아이나에게 의도적으로 가갔다. 아이나는 아까 전에 일어난 일 때문에 마음을 편하게 놓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평소에 죄 한 번 짓지 않고 살아온 그녀에게 이번 일은 커다란 충격이 되었다. 그녀는 현재 쟁반에 음료수를 받쳐서 심부름을 시킨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문제는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바람에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꺄악!" 그녀는 비명은 지르면서 누군가와 부딪혔다. 그 바람에 음료수를 앞으로 엎지르게 되었다. 그 엎지른 음료수는 누군가의 드레스에 고스란히 적셨다. 아이나는 고개를 들었다. 심한 표정으로 인상을 구기고 있는 엘리세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연신 음료수로 얼룩진 드레스와 아이나를 번갈아 보았다. 엘리세아는 머리끝까지 화가 난 표정으로 아이나를 노려보며 외쳤다. "건방진 년! 이 하녀를 붙잡아!" 아이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엘리세아를 응시했다. 곧 그녀는 두 병사들에 의해 잡히게 되었다. 마왕의아내-70 숨겨진 그녀, 숨겨진 사건 비명소리는 1시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마족들은 그 비명소리의 주인공이 전에 들었던 정체불명의 누군가의 것과 똑같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듣기만 했다. 인간들과는 달리 마족들에게는 그러한 비명소리가 싫은 것보다는 오히려 노랫소리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비명소리는 점차 수그러들었다. "누, 누나 잘못했어요. 아, 아니 엄마, 여왕 폐하! 한 번만 봐주세요!" 이루린은 케디아니스의 목덜미를 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 그녀는 울먹이는 케디아니스의 눈동자를 빤히 노려보았다. 매에는 장사 없다고, 역시나 케디아니스는 그녀의 주먹에 시간이 흐를수록 다른 태도를 보이더니, 곧 완전히 비굴한 태도를 취했다. 이루린은 때리기에 지친 나머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케디아니스에게 측은한 눈길을 주고 있는 상급 마족들을 둘러보았다. `이래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 10살짜리 꼬마를 잡고 무지막지하게 패는 내가 죄인이지.` 이루린은 걷은 소매를 앞으로 풀면서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내가 너 때문에 죽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 알아? 앞으로 그러면 내가 널 그 상황에 빠뜨려줄 테니 그리 알아. 참고로 난 너 때문에 거미한테 잡아먹힐 뻔했어." 케디아니스의 표정이 사색으로 변했다. 그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루린을 두려운 듯이 응시했다. 이루린은 케디아니스의 얌전한 모습이 얼마 가지 않으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힘만 빠질 뿐이었다. 그녀는 케디아니스를 질질 끌다시피 해서 마왕성으로 들어갔다. 아이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엘리세아를 움직였다. 몸이 뻣뻣하게 굳어서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윽고 엘리세아가 손을 들어서 그녀의 뺨을 있는 힘껏 세게 때렸다. "꺄악!" 아이나느 비명을 지르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번개가 치는 듯한 느낌이 볼에서 전달되었다. 얼굴이 치욕으로 확 달아오르면서 금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녀는 손으로 얼얼한 뺨을 쓰다듬으면서 엘리세아가 그만두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이나는 전에도 엘리세아에게 이것보다 더 심하게 당한 적이 많았기에 어느 정도 울지 않고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따라 엘리세아의 심기는 그리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아이나가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는 사이 엘리세아는 바닥을 지탱하고 있는 그녀의 손등을 뾰족한 굽으로 소리 없이 세게 눌렀다. 엘리세아가 체중을 다 실었기에 아이나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에 아이나는 반사적으로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하녀 주제에 건방지게 날 똑바로 바라보는 거지? 설마 너와 나의 신분이 같다고 착각하는 거니?" "자, 잘못했어요! 엘리세아 님. 제가 부주의하게 행동해서..." "말로만 하면 다야? 이 드레스가 한 벌에 얼마나 하는 줄 알아? 하녀 따위가, 이런 드레스를 갚을 능력이나 있니?" 엘리세아가 아예 구두 굽에 힘을 주면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아이나는 신음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면서 힘겹게 망가지고 있는 손을 응시했다. 벌써 피가 흘러서 바닥에 고이기 시작했다. 손이 마비되어서 감각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아이나는 급기야 고통을 참지 못하고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그래, 요즘에 기고만장해서 다니는 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어. 네가 모시는 그 여자가 그렇게도 좋니? 자기 잘난 줄로만 알고 설치는 그런 여자를?" 아이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밀치면서 외쳤다. "이루린 님을 욕하지 마세요! 엘리세아 님께서 이루린 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러시는 거죠? 이루리 님만큼 친절하고 좋은 분도 없어요!" 아이나는 그 말을 내뱉고 나서 후회했다. 엘리세아의 얼굴에서 비웃는 듯한 미소가 사라졌던 것이다. 엘리세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갑자기 아이나의 멱살을 거칠게 잡고 손으로 뺨을 갈기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렇게 두 뺨의 감각이 손만큼이나 사라졌을 즈음, 엘리세아는 숨을 거칠게 들이쉬면서 아이나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꽤나 지친 듯한 모습으로. 아이나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감히 하녀 주제에... 못할 말도 없구나. 채찍을 이리 내놔!" 엘리세아는 병사가 들고 있는 채찍을 거칠게 빼앗더니, 쓰러진 아이나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거 알고 있니? 난 네가 죽을 때까지 때릴 권리가 있다는 것을. 너 하나쯤 죽는다고 해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 아이나는 너무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방에 도착한 이루린은 아이나가 어디에 있는지 살폈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아이나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 엘리세아가 어떻게 나올지 심히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예감은 어느 정도 적중하는 것 같았다. 지금쯤이면 방에 도착해서 청소를 하고 있을 아이나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왜 안 오는 거지? 설마....` "어디 가는 거야!" 케디아니스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이루린은 무시하고 복도로 나갔다. 의식을 잃기 직전의 상태까지 간 아이나였다.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감각이 마비되어서인지 어느 곳이 망가지고 부러졌는지 알 수 없었다. 입가에서는 쓴맛이 느껴졌고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 걸레를 연상케 할 만큼 심하게 찢어진 옷은 바람에 춤을 추고 있었다. 온몸에 채찍 자국이 붉게 그여져 있었던 것은 기본이었고 몇 군데는 아예 부러져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심하게 통증이 일었다. "아악!" 채찍이 등을 휘감는 소리와 함께 다시 고통이 밀려왔다. 과다 출혈로 인해 죽는 것인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이나는 설마 엘리세아가 자신을 죽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나 후에 그러한 생각은 위험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엘리세아는 정말로 아이나, 자신을 죽일 생각이었다. 필사적으로 다리에 매달려서 빌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러나 어떻게 저항할 수 있겠는가. "살기를 바라니? 벌레만도 못한 네가 살아서 뭘 하겠니." 엘리세아의 웃음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후볐다. 엘리세아는 채찍을 거두고 아이나의 귀에 은밀하게 속삭였다. "정 살고 싶다면 내 구두를 너의 혀로 깨끗하게 만들어봐. 그러면 살게 해주지." 엘리세아가 아이나에게 구두를 내밀었다. 아이나는 잔인하게 미소짓고 있는 엘리세아의 얼굴과 구두를 번갈아 보았다. 다시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렇게나 힘들게 한다는 현실이 너무나도 싫은 그녀였다. 그녀는 속으로 크게 갈등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란 쉽지 않았다. "아이나! 엘리세아의 구두로 입을 가져가려는 순간, 아이나는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이루린은 너무 기가 막혀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기껏 살려두었더니 이런 곳에서 다시 엘리세아에게 혹사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루린에게는 언제나 자신을 뒷바라지하는 아이나가 소중한 존재였고 또 잃고싶지 않았다. 아이나는 내성적이지만 그만큼 착하고 성실했으며 이루린 자신을 그림자처럼 따른 하녀였다. 그런 하녀가 엘리세아에게 처참하게 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게다가 아이나를 때린 이유가 단순이 이루린 자신 때문이었다는 것에 더 분노를 느꼈다. 엘리세아의 행동은 그녀의 눈에 분명히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아, 이런 네 주인이 왔구나? 이제 살겠네?" 엘리세아의 비꼬는 목소리가 그녀의 화를 부추기고 있었다. 아이나는 엘리세아의 채찍에 맞아 앞을 분간하지 못하고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은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피로 목욕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엘리세아는 이루린을 쏘아보더니 채찍을 아이나의 머리로 던졌다. 그러더니 맥빠진다는 투로 말했다. "너무 재미없어. 다른 짓을 해볼까?" 엘리세아는 자기를 호위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미소짓고 있었다. 이루린은 핏자국과 함께 눈물이 메마른 아이나의 처연한 표정을 더 볼 수 없었다. 더불어 엘리세아가 저렇게 웃는 모습도 더 이상 두고볼 수 없었다. 이루린은 느긋하게 걷고 있는 엘리세아에게 다가갔다. 이루린은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잡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가 널 보면서 느낀 게 참으로 많아. 네 덕분에 인내심과 경계심을 기를 수 있었지만." 이루린은 엘리세아의 어깨를 거칠게 잡고 돌렸다. 이루린은 엘리세아의 어깨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세게 주었다. "지금 보니 그런 게 전혀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마왕의아내-71 성인식 "지금 보니 그런 게 전혀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엘리세아가 그녀를 향해 비웃음을 띄었다. "소용없으면 어쩔 건데?" 이루린은 쓰러져 있는 아이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지막하게 힘을 실어 말했다. "당장 사과해. 그럼 어느 정도 감안해주지." "웃기지마. 지금 누가 누굴 보고 사과하라는 거야? 흥, 둘 다 똑같군." 이루린은 엘리세아에게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래? 그럼 잠시 그대로 있어." 이루린은 최대한 손에 힘을 실어 엘리세아의 뺨을 향해 날렸다. 그러자 짝!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세아의 뺨이 돌아갔다. 따가운 느낌이 손에 전달되는 사이 엘리세아를 그대로 바닥에 쓰러뜨렸다. "꺄악!" 엘리세아는 바닥에 볼품 없이 쓰러진 채로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처절한 표정으로 뺨에 손을 갖다 대면서 훌쩍였다. 그녀의 얼굴이 모욕감과 분노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감히 내 뺨을 때리다니! 엘리세아는 표독스럽게 이루린을 쏘아보더니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손을 날렸다. 이루린은 재빨리 그것을 포착하고 뒤로 물러선 후에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고 온 힘을 실어서 그녀의 손목을 죄여나갔다. 엘리세아는 손목을 빼려고 거칠게 행동하면서 비명을 질렀다. "어쩌나?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않은 팔목....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은데." 이루린이 잔인하게 미소짓자 엘리세아가 악을 쓰듯이 외쳤다. "너 죽고 싶어? 당장 내 팔목 놓지 못해?" 이루린은 엘리세아의 팔이 부러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계속 힘을 주었다. "당장 사과해. 반복해서 말하지 않겠어." "내가 저런 계집 따위에게 사과하라고? 지금 날 우습게 본다 이거야? 내 팔목을 놓지 않으면 둘 다 가만두지 않겠어!" 그렇지 않아도 엘리세아에 대한 감정이 극에 달해 있었던 이루린이었다. 그녀는 일단 엘리세아의 손목을 놓은 후에 다시 한 번 그녀의 뺨을 갈겼다. 이번에는 좀 더 큰 소리가 홀에 울려 퍼졌다. "꺄악! 으흑..." 엘리세아는 바닥에 가녀린 척, 쓰러진 후에 어깨를 들썩였다. 세게 때리긴 했지만 뺨 맞았다고 울 정도로 엘리세아가 여린 마족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이루린은 일말의 자비심도 베풀지 않으려고 했다. 오히려 가증스러운 행동에 화가 났다. 마치 다른 마족들에게 `어서 와서 날 좀 보세요. 이 간악한 이루린의 파렴치한 행동을 보고 아무 죄도 없는 날 보세요. 저 여잔 자기 시녀도 저렇게 만들었어요.`라고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엘리세아에게 다가가자 이번에는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호위한답시고 앞을 나섰다. "아무리 이루린 님이라고는 하지만 더 이상 엘리세아 님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루린은 그들을 매섭게 쏘아보며 자신에게 들이대는 창을 거칠게 치웠다. "그럼 저 여자는 내 하녀에게 피해를 입혀도 된다, 이건가? 아이나가 내 분신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그런데 엘리세아의 호위병이라고 했나? 그 태도, 좀 건방지군." 이루린인 그들을 노골적으로 훑어보자 병사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주저하며 창을 거두었다. 이루린은 울먹이고 있는 엘리세아 앞에 앉아서 그녀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자 엘리세아가 다시 한 번 거칠게 저항했다. "당장 놓지 못해! 내 아버지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리고 저 하녀는 사형장으로 끌려가겠지!" 정떨어지게 만드는 엘리세아의 말을 그대로 받아넘긴 이루린은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엘리세아의 귀에 입술을 대고 작지만 아주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나는 네게 저항할 힘도 없고 헌신적인 면을 가지고 있을 만큼 순해. 너와 신분적인 격차고 심하고 뒷배경도 없지. 그래서 너 같은 여자에게 잘못 걸려서 저렇게 되었지만, 나와 똑같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뭐야...?" "생각나지 않아? 전에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 난 아이나와는 달리 널 죽일 힘도 있고, 어느 누군가에게 부당하게 당할 만큼 순하지도 않고, 둘 다 고위 마족이니까 신분적인 격차도 거의 없어. 그렇다고 뒷배경이 안 바쳐주나? 네 아버지를 믿고 설치는 것까지는 좋은데 상대를 잘 골라야지, 안 그래?" 엘리세아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화가 나고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두려워서 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이루린은 마지막으로 그녀의 귀에 대고 살벌하게 말했다. "마지막 경고야. 다시 한 번 아이나에게 그런 행동을 하면 너도 똑같이 그렇게 만들어주지. 내가 못할 것 같아? 난 누구처럼 가식적으로 구는 마족이 아니라서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충분히 망가뜨릴 수 있어. 명심해." 이루린은 나지막하게 웃으면서 엘리세아의 멱살을 풀었다. 엘리세아의 표정은 읽기 힘든 만큼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곤 당황한 표정으로 서있는 두 병사에게 말했다. "이봐요, 거기. 당신들 아이나를 내 방까지 옮겨요, 당장. 명령 불복종시 어떻게 되는 줄 알고 있다면 내 말을 거역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예요." 이루린은 엘리세아에게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날려주었다. 엘리세아는 잠시 신경질적인 표정을 짓다가 분한지 그대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루린은 아이나를 든 두 병사와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이루린은 밤새 아이나를 곁을 떠나지 않았다. 다행히 케실리온이 요즈음 자주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침대는 모두 이루린 차지여서 아이나를 그 곳에 눕혔다. 그리고 케디아니스가 편안하게 자는 것을 내버려둘 수가 없었기에 돌아가면서 간호했다. 아이나는 그 때의 기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지 자꾸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했다. 그리고 이루린에게 연신 고맙다고 말하면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을 불편해했다. 새벽쯤에 아이나는 깨어났고, 비로소 정상적으로 대화가 가능할 만큼 회복이 되어 있었다. 막 케디아니스가 바구니 안에서 자고 있을 때 아이나는 그녀에게 중대한 말을 꺼냈다. "곧 성마식이 시작될 겁니다. 원래는 태어난 날에 맞춰서 성마식을 치르는 게 보통이었는데, 이번에는 특별히 네 번 째 관문을 위해서 거의 같은 시기에 성마식을 올리게 되어 있습니다. 날짜는 같지 않겠지요. 성마식을 치르고 나면 드디어 이루린 님께서도 날개를 펴고 날 수 있게 됩니다." 날 수 있다는 말에 이루린은 괜히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날 수 있다고? 그런데 네 번째 관문의 내용이 도대체 뭐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아마도 날개를 펴고 날아서 무엇인가를 수행해야 하겠지요. 어쨌든 이루린 님께서도 한층 더 성장하실 거예요. 성마식을 치르고 나면 많은 변화가 있을 거예요. 몸 내부의 변화... 이루린 님, 왜 갑자기 표정을 지으세요?" 이루린은 애써 부정했다. "아, 아무것도 아냐." 내부의 변화. 이루린은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폭주하는 게 사라지고 나서 몸의 상태가 어느 정도 정상으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정체불명의 병이 있었다는 사실도 잊혀진지 오래였다. 그런데 성인식을 치르고 나면 과연 어떻게 변하게 될까. "그리고 모습도 변하실 거예요. 현재 이루린 님은 소녀라는 느낌을 조금 지니고 계시니까 성마식을 치르고 나면 그러한 느낌이 완전히 사라지시겠죠. 성인으로서의 권한도 생기실 것이고 현재 지니고 계시는 마력도 많아질 거예요. 물론 성공적이어야만 가능하죠. 만약에 성인식을 잘못 치르게 되면.." "그게 무슨 소리지?" 아이나의 표정이 흐려졌다. "몇 년 전에 한 마족이 성마식을 치르지 않아서 끔찍하게 변해버렸죠. 능력이란 능력은 모두 사라지고, 얼굴도 흉측스럽게 변했어요. 그 결과 그 마족은 마왕성에서 가출해버렸어요. 현재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몰라요...이름이... 뭐였더라, 레베카라고 했나?" `불쌍하군.` "성마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치른다는 거야?" "성마식은 형식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분류됩니다. 먼저...." 아이나는 그렇게 몇 시간 동안 그녀에게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엘리세아는 벽에 붙어 있는 이루린의 사진을 손으로 찢어버렸다.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감히 자신에게 뺨을 때리다니. 그녀를 어떻게 보고 그런 오만한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이루린, 그렇게 다닐 수 있는 것도 지금 뿐이야. 성마식을 아예 치르지 못하게 해주지. 그러고 보니 현재 중간계의 어떤 제국의 황실에서 마왕을 소환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데...` 엘리세아는 묘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루시안이 어서 방으로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루시안이 도착하면 중간계로 워프할 수 있는 물건이나 마법에 어떤 것이 있는지 물어볼 작정이었다. 마왕의아내-72 성인식 `이루린, 그렇게 다닐 수 있는 것도 지금 뿐이야. 성인식을 아예 치르지 못하게 해주지. 그러고 보니 현재 중간계의 어떤 제국의 황실에서 마왕을 소환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데...` 엘리세아는 묘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루시안이 어서 방으로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루시안이 도착하면 중간계로 워프할 수 있는 물건이나 마법에 어떤 것이 있는지 물어볼 작정이었다. 중간계, 알카서스 제국. 데자일이 마왕에게 죽은 후 로크가 수석 기사단의 단장이 되었다. 황태자 리안은 그런 마왕의 힘에 한동아 충격을 먹고 방에 틀어 박혀서 나오지 않았다. 이루린이라는 여자를 잘못 건드려서 생긴 결과였다. 대신들은 마계로 보내진 거의 모든 병력이 마왕의 힘 한 번에 사라졌다는 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고, 황태자 리안이 어떠한 일도 추진하려고 하지 않는 지금 마왕을 소환하려고 했다. 그들은 먼저 마법진을 황성에 설치하지 않고 그보다 좀 떨어진 널찍한 언덕에 설치했다. 그 주변에는 어마어마한 병력을 설치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차라리 마계로 가는 것보다 소환하는 게 더 편할 것이오." 로크 또한 그 날의 공포를 잊지 못한 리안과 같은 심정이었기에 대신들을 말리려고 해보았으나, 대신들은 모두 그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사실 대신들보다도 황제가 너무나도 강경한 태도를 - 그의 여동생이 마족에게 억울하게 죽은 탓이었다. - 보였기 때문이었다. 황성 내에는 알카서스 제국 내에서 최고의 검사라고 자부하는 이들로만 구성된 집단이 생겨난 건 물론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실력 또한 웬만한 마족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역시 말려야 해.` 로크은 이 제국이 마왕 한 명에게 멸망당하기 전에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고 보니, 그렇게 강력한 힘을 지닌 마왕이 인간이 친 마법진에 걸려들 이유 따윈 없는 것 같았다. 아무리 강력한 대마도사라고 해도 말이다. `걱정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나. 성공할 리가 없지.` "성공했소!" 안도하는 사이 한 대신이 황성 안으로 들어오면서 외친 이 기쁨에 찬 말은 그의 심장을 심하게 팽창시켜 놓았다. 2주일 동안 꼬박 마법진에 걸려들 누군가에 대해 연구하고 있던 대신들과 마도사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로크는 정말로 마왕이 허술하게 그 마법진에 걸려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얼른 황성 밖으로 뛰쳐나갔다. 로크는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는 언덕 위를 응시했다. 어느 날. 한적한 오후. 이루린은 케실리온의 삭막한 서랍을 정리하고 있었다. 케디아니스는 밖에 놀러다니고 있었고 케실리온도 오늘은 들어오지 않았다. 방에는 이루린 혼자 뿐이었다. `성마식인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어른이 된다는 느낌이랄까. 사실 지금까지 한 방에서 지내오면서 케실리온과 이루린의 모습을 놓고 보자면 뭔가가 어울리지 않았었다. 케실리온은 젊어도 어른이라는 느낌이 바로 들었는데 비해 이루린은 아직 소녀의 느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성마식을 치르고 나면 어느 정도 그와 대등한 위치에 서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사진은 뭐지?` 이루린은 서랍을 정리하다가 수건 사이에서 웬 낡은 한 장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 누가 그렸는지는 몰라도 마치 금방이라도 그림 속에서 튀어나올 것처럼 굉장히 사실적인 느낌의 그림이었다. 게다가 사진 속의 여자는 이루린과 굉장히 흡사했다. 얼굴은 믿기 힘들 정도로 똑같았다. 머리카락은 그녀보다 좀 더 붉고 길었으며, 키도 훨씬 컸다. 얼굴에는 부드럽지만 처연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이루린은 그 그림 속의 여자 덕분에 갑자기 케실리온에게 묻고 싶어졌다. 이 여자의 그림이 그의 것이 맞는지 말이다. `귀찮은데 그냥 말자.` 이루린은 그림을 제자리에 도로 놓고 서랍을 닫은 후에 아이나에게 들었던 것을 차례대로 떠올렸다. 먼저 성마식을 치르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방법으로 나뉜다. 먼저 성마식을 주관하는 방이 있는데, 그 방에 들어가서 방에 있는 누군가가 내는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시험이 무엇인지는 공개되지도 않고 마족마다 다 다르다. 시험에 통과하고 나면 방에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물건을 가지고 나온다. 그 때 능력을 얻고 나온다. 그것을 군주의 보좌관인 데이비드에게 넘기면, 저녁에 진짜 형식적인 성마식이 시작된다. 모두에게 시험을 통과한 마족이 성장했음을 알리기 위한 과정이라고 한다. 성마식은 그다지 어렵지 않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다 통과한다. 문제는 성마식을 주관하는 방에 시험을 치르겠다고 알려놓고 치르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것만 피하면 상관없었다. 그 때 아이나가 청소하기 위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몇 일 사이에 이루린도 놀랄 정도로 아이나의 몸은 빠르게 회복되었다. 아무래도 어렸을 때부터 일을 많이 한 결과인 것 같았다. 아이나는 순진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루린 님, 내일 열심히 하세요. 이루린 님께서는 후보들 중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성마식을 치르게 되네요." 드디어 내일이었다. 엘리세아는 루시안에게 받은 물건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겉만 번지르르한 작은 향수병이었다. 특별히 이루린의 머리카락으로 - 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 만든 향수였는데, 이루린에게만 반응하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단 그녀는 이것을 아무 황성을 청소하는 시녀에게나 넘겨주기로 했다. 그녀는 마침 지나가고 있는 하녀를 불렀다. "거기, 너 잠깐 여기로 올래?" "무슨 일이세요?" 엘리세아는 예쁜 병에 담겨져 있는 붉은빛이 돌고 있는 향수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 향수병을 이루린이라는 여자의 방에 선물해주겠니? 내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말고. 먼저 이 병을 이루린에게 주지말고, 그 하녀인 아이나에게 넘기면서 이루린에게 주라고 설명해. 만약에 내가 누군지 말하면 네 목은 어디론가 증발할 거야. 알겠니?" 엘리세아의 다분한 협박에 하녀는 두려운 듯이 향수를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엘리세아가 준 병을 받아든 하녀 에리는 향수병에서 풍겨져오는 향기가 굉장히 좋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제 막 황성에 들어온 신참이었기 때문에 엘리세아가 누구인지, 이루린이라는 여자가 어떤 자인지 모르고 있었다. 단지 그녀는 고위 마족으로 보이는 엘리세아의 명을 묵묵히 받아들일 뿐이었다. `엘리세아와 이루린이라는 분들은 서로 사이가 좋으신가봐...` 에리는 자신의 친구인 아이나가 어느 방을 청소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찾아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막 아이나가 청소하고 있는 방을 열었을 때 에리는 조금 당황했다. 여자의 방치고는 너무나도 삭막했기 때문이었다. 에리는 아이나가 자신을 보고 반갑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아이나? 이거 어떤 분께서 이루린이라는 분께 선물하라고 준 향수병이야." 아이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향수병과 에리를 번갈아 보았다. "누가 줬는데?" "그건 모르겠어. 그냥 내가 들은 바로는... 향기가 좋으니까 향수병의 뚜껑을 열어두라고 하시던데. 그러면 이루린이라는 분도 좋아하실 거라고." 아이나가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에리, 이루린 님이라고 해야지. 넌 아직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이루린 님의 위치가 얼마나 높으신데. 그리고 조용히 해야해. 지금 수면을 취하고 계시니까." 에리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엘리세아라는 여자의 위치도 생각해봐야만 했다. 에리는 엘리세아라는 여자가 줬다는 사실을 말할까하고 고민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만약에 일이 잘못되면 불똥이 튀는 것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아이나는 조금 미심쩍었지만 향수를 몇 번이고 맡아도 몸이 이상해진다거나 하는 증상이 없었기에 그대로 뚜껑을 열어서 책상 위에 얹어놓았다. 오히려 방에 향수가 가득하면 이루린 님께서도 좋아하실 것이다. 그녀는 내일 성마식을 위해 곤히 자고 있는 이루린을 응시했다. 그리고 이루린 님의 가슴 위로 이불을 더 덮어드렸다. 이루린은 굉장히 속이 메스꺼운 느낌을 받고 일어났다. 케디아니스는 바구니에서 곤히 자고 있었고, 케실리온은 오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가 어지럽다는 생각이 들어 깨끗한 공기를 마시기 이해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살을 시리게 만들었으나 이상하게도 머리가 어지러운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욱..!" 이루린은 몸이 당겨지는 느낌을 받고 바닥에 쓰러졌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뭐지, 이 이상한 느낌은...`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을 때, 그녀는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왕인가?" "아무래도 아닌 것 같습니다." "뭐라고! 그럼 실패인 건가!" 당혹스러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루린은 고개를 들고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가 시선을 주는 곳마다 창을 든 병사들이 뒤로 주춤하고 있었다. 창을 든 병사와 마도사의 경계어린 모습, 마족과는 틀리는 전형적인 인간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하늘의 색깔도 훨씬 밝고 화창해 보였다. 한적하지만 마계와는 다른 공기가 느껴졌다. "뭐지, 이 곳은?" 이루린은 자신을 에워싼 엄청난 숫자의 병사들을 망연자실하게 응시했다. 살기어린 시선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지금 엄청난 공간에 떨어진 것 같았다. 어째서 자다가 이런 이상한 공간에 오게 된 것일까. 설마 꿈은 아닐까. `설마... 중간계! 하필 성마식을 치를 때에!` 빨리 마계로 돌아가지 않으면, 그녀도 아이나가 말했던 레베카라는 여자의 꼴이 나게 될 것이다. 마왕의아내-73 성인식 이루린은 현재 펼쳐지고 있는 어이없는 상황에 잠시 헛웃음을 흘렸다. 잠깐 배가 아파서 쓰러졌더니, 보이는 게 마계가 아니라 중간계라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게다가 분명히 케실리온의 방에 서있었는데 갑자기 수많은 병사들과 마도사들에게 둘러싸여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 처해진다는 건 과연 무슨 뜻일까. 발 아래에 있는 마법진으로 보아 아무래도 소환당한 것 같았다. 권위자로 보이는 한 마도사가 지팡이를 내세우며 그녀에게 외쳤다. "넌 누구지? 신분을 밝혀라!" 이루린은 인간과 그리 좋지 않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에 차갑게 응수했다. "내 이름은 이루린, 고위 마족이다. 날 당장 마계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희를 모두 죽이겠다!" 이루린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허리춤에서 가우드를 뽑았다. 그들은 조금 놀라면서 서로와 급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고위 마족이라고?"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루린이 공격할 자세를 취하고 있는 사이 그들은 대화를 끝마쳤다. 역시 권위자로 보이는 그 마도사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심정에 뒤로 조금씩 물러섰다. "마왕은 어디에 있나?" 이루린은 그들의 말을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인간이 마왕을 소환한다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었다. 인간과 마족 간에도 엄청난 차이가 있는 판국에 인간과 마왕을 비교하려 한다니. 그 마도사는 그런 이루린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비웃나! 내 말이 우스운 건가?" "그러면 안 우습게 생겼나? 그렇게도 마왕이 보고 싶나? 그렇다면 너희들은 좀 어리석군. 마왕이 너희들의 소환에 응할 만큼의 낮은 능력을 지니고 있는 줄 아는가?" 그러자 한 병사가 이루린에게 화를 냈다. "감히 크레일 님을 무시하다니! 용서하지 않겠다!" 크레일이라고 불린 마도사는 손을 들며 그 병사를 제지했다. "그럼 넌 왜 소환된 거지?" 이루린도 그 이유가 알고 싶었다. 어째서 자신이 강제적으로 소환된 것인지. 아무래도 누군가의 인위적인 조작에 의해 소환당한 것 같았다. "그건 나도 모른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너희들의 어설픈 소환 마법에 걸려들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는 것이지. 그나저나 이 곳은 어떤 나라지?" "알카서스 제국이다." 이루린은 알카서스 제국이 어떤 나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알카서스라는 이름을 잊을 리가 없는 이루린은 갑자기 화가 났다. 일전에 인간에게 속아서 호되게 끌려간 적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알카서스 제국의 인간들이 아니었던가. 물론 군주가 거의 모두 죽였다고는 하지만. "멈추지 못해!" 제 3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루린을 포함한 이 곳의 모든 이들의 고개가 그 곳으로 향했다. 이루린은 그 남자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바로 황태자 리안이었다. 크레일은 거의 혼비백산해서 달려오고 있는 황태자 리안을 응시했다. 리안은 마치 일이 잘못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매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언제나 당당하고 침착했던 리안의 모습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마족들을 토벌하기 위해 마계로 간 이후 많이 자신감이 없어진 상태였다. "전하, 도대체 왜..." 리안은 그런 크레일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크레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소환한 건가! 왜..." 그런데 그가 더 말하기도 전에, 이루린이라고 밝힌 마족이 화를 냈다. "넌 그 때의 그 인간이로군! 날 납치해서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톡톡히 당했을 텐데..." 이루린이라고 하는 마족과 리안은 서로 알고 있는 사이인 것 같았다. 그런데 리안은 이루린을 보더니 눈을 크게 뜨면서 놀라워했다. 어떻게 보면 조금은 두려움이 섞인 듯한 표정이었다. 이루린은 다소 짜증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인간들은 앞뒤가 꽉 막혔군. 정말로 마왕이 이 자리에 나타났을 때, 무엇 때문에 이 자리에 나타나는지 몰라서 그러는 것인가? 마왕이 왜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너희들이 무서워서? 아니, 귀찮아서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너희들 같은 미미한 생명체를 상대하는 것에 시간을 투자하는 게 아까워서겠지. 정말로 마왕이 이 자리에 나타나면 수도가 날아가는 정도로 끝날 것 같은가? 제국이 한순간에 멸망당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나?" 크레일은 그 순간 느꼈다. 이루린이라고 하는 마족의 말에 많은 병사들이 동요하고 있음을. 그녀의 표정은 한치의 거짓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대마도사인 자신이 보기에도 이루린이라고 하는 여자는 마족이라서 그런지 인간과는 틀린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더 놀라웠던 것은 그녀가 들고 있는 푸른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막대한 마력의 기운이었다. 하지만 기왕 소환한 이상, 크레일은 이루린을 마계로 돌려보낼 수고를 하고 싶진 않았다. 그는 마왕의 능력이 강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그 때도 마왕에 의해 거의 몰살당한 주제에..." 이루린의 말에 더 많은 병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처음에 황태자 리안의 말이 거짓인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렇게 빠른 시간 내에 수천의 병사들이 죽는다는 것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저 마족의 입에서도 리안과 똑같은 말이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날 당장 마계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내가 너희들을 죽이겠다. 아니면..." 크레일이 움직일 시간도 없이, 이루린의 몸이 재빨리 움직이더니 이윽고 리안의 뒤로 갔다. 그녀는 정말 경악할 만큼 빠른 속도로 리안의 목을 움켜잡은 후에 푸른 예기를 띄고 있는 그 검을 들이댔다. "이 황태자를 그대로 죽여버릴 지도 모르지." 일국의 황태자가 위험에 빠지자 사태는 급변했다. "[날 움직이게 해! 이 위대하신 나의 힘으로 미천한 것들을 모조리 없애겠어.]" 이루린도 가급적이면 가우드를 움직이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도 한국에서만 살아왔는지라 누군가가 죽는 모습을 보는 건 아무래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이들을 모두 죽여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보다 높은 계급을 지닌 리안을 인질로 잡는 게 훨씬 편했다. "마왕이 소환에 응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 그리고 지금 당장 날 마계로 돌려보내! 그렇지 않으면 널 죽이겠어. 어차피 마계로 돌아가지 못할 바에야, 여기 있는 자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리안은 오히려 침착하게 그녀의 말에 응수했다. "좋아, 나도 네가 돌아가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마계로 돌아갈 수 있는 장소를 안내하지." 이루린과 리안은 그 자세 그대로 황성 내부로 빠르게 들어갔다. 리안이 오히려 더 빨리 움직이는 바람에 이루린은 그를 인질로 잡을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어쨌든 그렇게 뒤에서 ?아오는 무리들을 겨우 따돌렸을 때, 리안은 어느 작은 방에 들어갔다. 그 방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이 안에 들어가서 네가 가고 싶은 장소를 떠올리면 된다. 난 나가 있겠다." 그 말을 마치곤 리안은 이루린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루린은 제발 성마식에 늦지 않기를 바라면서 마법진에 올라섰다. 그리고 차분하게 속으로 케실리온의 방을 떠올렸다. 그러자 발 밑에서 마법진이 빛을 발하더니, 순식간에 그녀를 공중에 띄어 올렸다.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면서 크레일이 화난 모습으로 들어왔다. 그가 마법을 쓰려는 순간, 그녀는 아슬아슬하게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드디어 왔는가... 시험자여. 이름은 무엇인가?" 이루린은 현재 어두운 공간에 떨어진 것에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케실리온의 방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이상한 공간에 떨어진 것일까. 그런데 다행이게도 그녀는 지금 성마식의 일부인 시험을 치르기 위한 공간에 떨어진 것 같았다. 물론 성마식에 늦지 않아서 어찌 되었던간에 다행이었다. `하지만 왜 소환당했을까? 어떠한 낌새도 느끼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이유를 조사해봐야겠어.` 이루린은 괜히 긴장했다. "제 이름은 이루린이라고 합니다." 드디어 시작이었다. 마왕의아내-74 성인식 `분명히 케실리온의 방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뭐, 어차피 무사히 도착했으니까 다행이로군.` 이루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워서 앞은 보이지 않았다. 아까 전부터 계속 걸었는데도 끝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걸어도 소용없다, 이루린이여." 이루린은 중성적인 목소리가 귀에 은은하게 퍼지는 느낌을 받으면서 멈췄다. 그러자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하른 실마이오스의 능력을 하사받은 자, 크렌스... 성마식을 통과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그대가 더 이상 어린 마족으로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능력을 갖추고 있느냐이다." 이루린은 긴장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에 손을 갖다 대었다. 그런데 언제나 잡히던 그것이 지금은 전혀 잡히지 않았다. 당황한 이루린은 옷 전체를 더듬었으나 반드시 있어야할 것이 지금은 없었다. "네가 지니고 있는 검은 성마식을 치른 후에나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보통 검을 차고 들어오면 그대로 놔두지만 네 검은 굉장히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더군. 없애버리고 싶을 만큼 말을 많이 하긴 하지만.." 그녀는 수다를 잘 떠는 가우드라도 있었으면 덜 긴장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검은 아무래도 크렌스라고 밝힌 자가 치워버린 것 같았다. "자, 그럼 간단히 시작해 볼까..." 갑자기 온통 검기만 한 공간이 하얗게 빛났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빛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빛이 사라졌을 때, 그녀는 조심스럽게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끝없는 모래 언덕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도, 집도, 물도,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적당한 온도의 따사로운 태양과 그녀, 그리고 그녀와 똑같이 생긴 어떤 여자가 서 있었다. 눈앞에 있는 자가 이루린 자신과 똑같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진짜 이루린은 당황했다. 옷차림도, 서있는 모습도 완전히 똑같았다. 잠시 후에 각자의 발 앞에 똑같은 검이 생겨났다. 이루린은 어색하게 그 검을 뽑아들었다. "네 눈앞에 있는 자는 바로 너다. 바로 자신의 모습이지. 행동도, 말투도, 능력도, 모든 게 한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을 것이다. 이 방에서 무사히 빠져나가려면 이루린이라는 너 자신을 쓰러뜨려야 한다. 여태까지 통과했던 거의 모든 마족이 그렇듯, 그리 어렵진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좀 당황하겠지만." 이루린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굉장히 예쁘게 생긴 - 이렇게 말하면 좀 자화자찬이지만 - 여자가 여유 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뽑아들고 서있는 게 신기했다. 하지만 가짜 이루린을 어떻게 없애버릴 것인지가 문제였다. 다른 자라면 일단 특성을 파악해서 공격하겠지만 가짜 이루린에게는 그게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이루린은 검을 세우고 가짜 이루린에게 달려들었다. 가짜 이루린 또한 그녀와 똑같은 자세로 검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되도록 가장 빨리 끝낼 수 있는 방법을 택해서 하려고 했으나, 당혹스럽게도 가짜 이루린은 그녀의 공격을 모조리 피해버렸다. 이루린의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았다. 물론 이루린 또한 가짜 이루린의 공격을 모조리 피해버렸다. 그렇게 약 30분 간 헐떡이며 서로 공격한 결과 그녀는 혼란 상태에 빠졌다. 한국에서 배웠던 검술을 서로 똑같이 사용해서인지 공격을 해도 끝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예 공격이 불가능해. 저 여자는 곧 나니까 내 능력이 어떤지 다 파악하고 있을 거야. 그렇다면 어쩐다?" 가짜 이루린은 이루린 자신처럼 하품하면서 말했다. "뭐야, 가짜 이루린. 어서 공격하지 않고!" 가짜가 진짜보고 가짜라고 하는 게 그녀로서는 우스울 따름이었다. 이루린은 일단 체력을 보충하는 차원해서 공격하지 않고 머릿속으로 고민했다. 현재로서는 공격할 방법이 없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래, 맞아! 난 왜 이렇게 간단한 원리를 일찍 깨닫지 못했지? 내가 아니면 되잖아.` 그랬다. 여태까지 그녀가 배웠던 검술을 모두 버리고 다른 방식으로 싸운다면 승산은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이제는 어떻게 싸워야할지 막막했다. 다른 방법으로 싸우기에 이 장소는 적합하지 않았다. 최소한 도구라도 있어야 다른 방식으로 싸우기에 응용할 수 있을 터인데 문제는 그런 게 하나도 없지 않은가. `모래 밖에 없잖아. 그래, 모래가 있었지!` 이루린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 그녀는 검술을 배울 때 치사한 방법은 절대로 사용하지 말라고 배웠었다. 그리고 그런 윤리적인 생각이 머릿속에 뿌리깊게 박혀 있던 탓에 검을 들고 싸울 때도 치사한 방법을 절대로 쓰지 않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가짜 이루린은 절대로 치사한 방법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진짜 검술 시합도 아니고, 저 여자도 진짜가 아니지. 치사한 방법을 쓴다한들 비난할 자가 그 누가 있으며, 현재로서는 무슨 수를 써서든 이겨야만 하니까. 미안해, 가짜 이루린 양.` 이루린은 가짜 이루린이 잠시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는 사이, 전속력으로 가짜 이루린을 향해 달렸다. 가짜 이루린도 그 동안에 체력을 보충했는지 그녀만큼이나 빠르게 달려왔다. 검과 검이 섞이는 소리가 들렸다. 힘이 똑같았기 때문에 어느 쪽도 밀리지 않았다. 그리고 가짜 이루린이 잠시 검에다가 시선을 두고 있는 사이, 그녀는 재빠르게 몸을 숙여서 모래를 한 움큼 쥔 후에 미끄러지듯이 일어났다. 그리고 가짜 이루린의 눈에 뿌렸다. 가짜 이루린이 얼떨결에 검을 놓친 채 손으로 눈을 비볐다. 가짜 이루린이 화가 난 목소리로 외쳤다. "이런 치사한! 어째서 자기 실력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는 거지?" 이루린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미안, 이것도 실력이자 전략이야. 물론 이 곳에서만." 이루린은 재빨리 검을 눕혀서 가짜 이루린의 복부를 찔렀다. 물론 피가 흐르는 장면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꼭 감고서. 그러나 가짜 이루린의 복부를 찔렀을 때 관통하는 듯한 느낌 따위는 없었다. 단지 끝없이 펼쳐지는 모래 언덕의 공간이 사라지면서 들고 있는 검 또한 사라졌다는 사실만 알 뿐이었다. 이루린은 숨을 고르게 쉬면서 생각했다. `끝인가? 처음에는 좀 어려웠지만 간단한데?` "대단하구나, 이루린이여. 넌 평범한 마족들보다 비교적 훨씬 빨리 성마식을 치렀다. 넌 충분히 성마로서 살아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런데... 이루린이 안도하고 있는 사이 들려온 크렌스의 말은 그녀에게 가벼운 충격을 주었다. "난 벌써 셀 수도 없을 만큼의 마족들을 접해왔고, 그들의 운명과 과거를 보았다... 물론 난 완전한 능력을 갖춘 건 아니기 때문에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네 운명과 과거는 정말로 특별하군. 정말로 특별해... 하지만 그 만큼 위험해." 이루린은 순간 그가 자신이 윤세아로 살았을 때의 과거를 알아차린 것이 아닌지 의문을 품었다. "이것만은 알아두는 게 네게 좋겠지. 절대적인 힘을 가진 누군가가 이 곳에 있다. 무서운 자로군. 잘못된 복수를 시행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구나. 널 지켜보면서 말이다..." 이루린은 크렌스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평소에 어느 누군가가 원한을 품을 만큼 잘못을 저지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절대적인 힘을 가진 자라면 군주말고는 이 마왕성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마계로 오기 전에 진짜 이루린이 잘못을 저지른 건가? 도대체 무슨 말이지?` "잠깐만,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 자의 이름이 무엇이기에? 왜 그런 짓을..." "이 이상은 나도 모른다. 내 능력의 한계니까. 부디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도록. 이것은 네가 완전한 성마식을 치르기 위해 가져가야 할 물건이다. 그럼 난 이만..." 이루린은 어두운 공간 속에서 빛나고 있는, 화려한 보석이 박혀 있는 작은 잔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집어들어 호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녀를 덮었던 어둠이 사라지면서 크렌스의 목소리도 사라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녀는 처음 보는 웬 방에 서 있었다. 발 근처에는 가우드가 놓여 있었고, 앞에는 거대한 남자의 모습을 띄고 있는 석상이 새워져 있었다. 그녀는 성마식을 무사히 치렀다는 안도감에 미소를 지으면서 가우드를 다시 검집에 넣었다. 그러자 갑자기 발 아래에서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그녀는 거대한 마법진에 서있었던 것 같았다. 그 마법진의 빛은 그녀를 감싸더니 어느덧 공중으로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해주었다. 그녀는 따뜻한 빛에 몸이 나른하게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뭐였지, 그건.` 이루린은 눈을 뜨고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조금 어지러워서 벽을 기대고 있을 때, 그녀는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가깝게 보이던 바닥이 멀리 보이기 시작한 것이 확실한 변화였다. 아무래도 키가 커진 모양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신체의 변화였는데, 몸이 가벼워지고 마력이 크게 증폭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등이 간지러운 느낌도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보니 머리카락 색이 좀 더 진해진 것 같았다. 그녀는 아마 이것 외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맨 먼저 아이나가 이루린에게 미소를 지으면 다가왔다. "이루린 님! 성마식을 치르는 날에 사라지셔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특별히 케디아니스 님께서 방에 워프 마법을 건 물건을 구하셔서 만약에 방에 들어오시면 바로 성마식을 치르는 방으로 워프될 수 있도록 했어요." 이루린은 그제서야 자신이 왜 케실리온의 방을 떠올렸는데도 바로 성마식을 치르는 방에 올 수 있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정말로 많이 성숙해지셨어요." "고마워, 아이나." 이루린은 아이나와 함께 성마식을 치르는 방으로 통하는 긴 복도를 나왔다. 나오면서 마주치는 많은 고위 마족들이 이루린에게 축하한다는 말과 동시에 아름다워졌다고 말했다.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은근한 남성 마족들의 시선도 심심찮게 있었다. 아이나의 안내를 받으면서 막 복도를 돌아 거대한 홀로 향하고 있을 때 케디아니스, 그리고 이루린의 부모가 모습을 드러냈다. 케디아니스는 처음에 이루린을 보면서 반갑게 다가가려고 하다가, 곧바로 팔을 내리더니 그대로 가만히 서있었다. 더 이상했던 것은 바로 이루린의 부모였는데, 특히 마리엔은 이루린을 보더니 충격에 휩싸인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카란델은 애써 웃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뭐야, 다들 반응이 왜 저래? 다른 마족들은 저렇지 않았는데.` 마리엔은 갑자기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더니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러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모두들 깜짝 놀랐지만, 무엇보다도 놀란 것은 바로 이루린이었다. 카란델은 당황한 듯, 어찌해야 할 줄 모르다가 일단 마리엔을 업었다. 그리곤 케디아니스에게 황급히 뭐라고 말했다. 케디아니스는 주저하더니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왜 마리엔 님께서 기절하시는 거죠? 혹시 이루린 님의 자태가 너무나도 고와서 기절하신 건..." 이루린은 그건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다.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낀 이루린은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 거울을 찾으려고 했다. 이윽고 복도 근처에 거대한 거울이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한 그녀는 얼른 그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응시했다. `완벽한 여인의 모습이로군. 소녀 같은 느낌은 완전히 사라졌어. 거기다가, 머리카락 색도 붉어지고... 응? 설마?` 이루린은 자신이 얼마 전에 케실리온의 방에서 그림을 하나 발견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제 보니 자신의 모습은 그때의 그 그림 속의 여자와 거의 차이점이 없이 똑같았다. 하지만 설마 그렇다고 해도, 케디아니스는 왜 그런 반응을 보였단 말인가. `그 여자, 누구지?` 그 때 옆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루시안이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이루린을 위아래로 노골적으로 훑어보았다. "멋지군, 이루린. 설마 이렇게 똑같을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나?" 이루린은 루시안에게 말도 걸기 싫었지만 이번 만큼은 그에게 꼭 물어볼 것이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마왕의아내-75 성인식 케디아니스는 이루린이 처음 보는 남자와 대화하고 있는 사이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케디아니스로서는 미칠 지경이었다. 이루린의 모습은 자신의 어머니인 세실리아와 너무나도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설마 이루린이 세실리아의 모습을 닮게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외모가 똑같다기보다는 그 분위기가 너무나도 닮았던 것이다. 키가 커져서인지 그러한 느낌은 더했다. 기억 저편에 파묻었던, 자신의 눈앞에서 처참하게 죽어갔던 어머니의 모습이 다시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게 너무나도 두려운 케디아니스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다른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어머니의 모습만 떠올라서 두려운 걸까?` 그가 노골적으로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아아, 모르는 건가? 너의 부모는 네게 좋은 소리만 골라서 한 모양이로군." 이루린은 그에게 강경하게 외쳤다. "그게 무슨 소리지? 어서 말해!" "싫다면 어쩔 건가? 사실을 말해서 내 재미를 빼앗아갈 셈인가? 뭐, 좋아. 원한다면 말해줄 수도 있지." 루시안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막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그러기도 전에 그의 눈동자가 이루린이 아닌, 이루린의 뒤쪽으로 향했다. 그는 그 곳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이런, 불청객이로군." 이루린은 뒤를 돌아보았다. 마침 케실리온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그녀를 빤히 응시하다가 루시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루시안에게 차갑게 외쳤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도록." 루시안은 케실리온을 한참 노려보더니, 태도를 바꿔서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이루린에게 재차 시선을 던지다가 고개를 돌렸다. "사라지도록 하지요. 이 자리에서 죽기는 싫으니." 이루린은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응시하다가 케실리온을 응시했다. 케실리온과 루시안이 서로 알고 있는 사이였다니, 조금 의외였다. 하지만 적대적인 관계인지 우호적인 관계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자신의 부모가 보인 반응은 무엇이며, 또 케실리온과 루시안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녀였다. 또 케디아니스가 보인 반응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케실리온. 궁금한 게 있는데, 서로 어떻게 알고 있는 사이지?" 그는 그녀를 응시하더니 대꾸도 하지 않고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질문할 때마다 거의 이런 식으로 대답을 하지 않았기에 - 그의 주특기라고 해도 무방했다. -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는 그녀였다. 그녀는 일단 케실리온 앞을 가로막고 말했다. "뭐가 쓸데없는 말인데? 응?" 그는 표정이 없는 얼굴로 딱 잘라 말했다. "지금 그 말이." "......" 이루린은 케실리온의 방에서 자신과 똑같은 여자의 그림을 봤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만약에 그랬다가 케실리온이 재워주지 않는다고 말하면 큰일이었으므로 끝까지 그 사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했던 이루린이었다. 이루린은 케실리온이 가는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닦달해봤자 그녀의 입만 아플 뿐이었다. 모든 게 이상하고 의문스러웠지만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이루린은 그 날 저녁 아이나에게서 많은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아이나의 말에 의하면, 내일 저녁에 오로지 자신을 위한 형식적인 성마식이 행해진다고 했다. 형식적인 성마식은 굉장히 시간이 많이 걸리고 꽤 복잡하다고 했다. 더불어 성마식이 끝나면 이루린을 위한 성대한 연회가 따로 열린다고 했다. 자신을 위해 연다니 조금 부담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기대가 되는 이루린이었다. `다른 마족들이 성마식을 치렀을 때는 아무것도 열리지 않았잖아?` `카란델 님의 권한이 커서 그런 거예요. 사실 서열 10위 내 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데요. 아마 곧 엘리세아 님도 성마식을 치르고 나면, 성대한 연회를 마련할 거예요. 어쩌면 엘리세아의 아버지와 카란델 님께서 서로 사이가 좋으시니 공동으로 열 수도 있어요.` 이루린은 제발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생각했다. 엘리세아와 그녀는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어째서 그 위의 아버지들끼리는 사이가 좋은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보통 가문 대 가문으로 사이가 좋지 않아야 정상인데. 케디아니스가 밤에 돌아왔을 때 이루린은 그를 닦달했다. 그에게 빨리 무슨 이유인지 실토하라고 했으나, 그는 입에 실이 아니라 아예 철사를 꿰맨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구니 안에 들어가서 자버렸다. 대신에 그녀는 케실리온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그 또한 돌아오지 않아 완전히 포기해야만 했다. 다음날 아이나가 일찍 방에 들어와서 이루린을 깨웠다. "이루리 님, 빨리 2층으로 가셔야해요. 그곳에서 공식적인 성마식이 시작되니까요. 이 옷을 입으시면 정말로 예쁘게 보이실 거예요." 이루린은 아이나가 준비한 너무 복잡해서 옷같이 생기지 않은 옷들을 보고 억지로 웃었다. 그러나 아이나가 30분에 걸쳐 아주 기묘한 방법으로 복잡한 옷을 다 입도록 도와주었을 때, 그녀는 그 옷이 굉장히 기품아 있고 화려하다는 것을 느꼈다. 너무 남성적이지도, 그렇다고 너무 여성적이지도 않은 멋진 옷이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멋진 옷은 - 영화에서나 볼 법한 - 처음이었다. 실크로 만들어진 우아한 드레스가 보석과 어우러져 한층 매력적인 느낌을 자아내게 해주는 반면에 등에 무겁게 달린 화려한 망토는 중압감과 거친 느낌을 가지게 해주었다. 왕관처럼 생긴 무거운 물체가 머리에 쓰여지고 아이나가 환하게 웃으면서 그녀에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이루린의 손을 잡고 2층으로 이끌었다. 물론 성마식을 치르고 얻은 성배를 한 손에 들고서. 2층은 무도회장이 열리는 곳이었다. 구두 굽이 지나치게 높아서 걷는 게 힘들었지만 다른 마족들의 눈을 의식하느라 아파도 자연스럽게 걷게 된 이루린이었다. 무도회장에는 많은 고위 마족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시끄럽게 대화를 나누다가 이루린이 빨간 카펫 위에 서자 모두들 약속이라고 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아무도 없었다는 것처럼 정적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은 오로지 이루린에게로만 쏠리고 있었다. 이루린은 얼굴이 괜히 뜨거워짐을 느꼈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이루린 양, 앞으로." 아이나가 `잘하세요`라고 말하면서 이루린의 손을 놓고 마족들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숨막힐 듯한 시선 속에서 이루린은 차분하게 심호흡을 한 후에 앞으로 빨간 카펫 위에서 천천히 나아갔다. 꼭 신랑 없는 결혼식을 치르는 기분이었다. 이루린은 최대한 곧은 자세로 걸으면서 자연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때 그녀를 바라보는 훈훈한 눈동자들 사이에서 매섭게 빛나는 한 눈동자가 포착되었다. 이루린은 정면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금발의 여인이라는 사실만 가지고 그녀가 엘리세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순간 이루린은 처음으로 잔인한 생각을 했다. 물론 실행으로 옮길지는 미지수였지만. `아예 두 눈을 뽑아버려서 케디아니스의 음식에 갈아넣어 버릴까. 고문용으로.` 이루린은 일부러 노골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앞을 향해 걸어나갔다. 카펫이 끝나는 단상에는 군주의 보좌관인 데이비드가 두루마리와 비슷한 종이를 쥐고 서있었다. 그녀는 그것의 두께가 어마어마한 만큼 데이비드가 다 읽는 것에 걸리는 시간 또한 상당하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리고 데이비드가 그 무지막지한 것을 다 읽는 것에 걸리는 시간이 많은 만큼 자신에게 돌아오는 정신적인 피해도 상당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그녀였다. 그러나 겉으로는 밝게 웃으면서 두루마리를 펼쳐드는 데이비드 앞에 가서 섰다. 데이비드가 한 번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윽고 정적을 깨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루린 양, 가져온 물건을 앞으로." 이루린이 내어놓은 성배를 집어든 데이비드는 재차 그것이 진짜인지 모조품인지 평가하더니 단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만족스럽게 엷은 미소를 지은 후에 두루마리를 펼쳐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대는 성마식을 통과했다. 나, 데이비드는 그대가 성마식을 통과했음을 이 자리를 빌어..." 그 이후로 데이비드는 그녀의 우려대로 무려 2시간이라는 놀라운 연설 능력을 보여주었다. 웅변가가 되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조밀하게 따져보니 데이비드가 장황하게 늘어놓은 문장은 거의 다 비슷해서 단 한 줄로도 압축이 가능했다. 발바닥의 감각이 사라질 즈음 데이비드가 다시 두루마리를 도로 말았다. 그러자 주위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박수를 쳤다. 이루린은 얼른 아이나와 함께 그 곳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성마식은 끝나고, 그녀는 드디어 소녀에서 어른이 되었다. 그녀의 얼굴에 관한 비밀은 시간이 흐를 수록 잊혀져갔다. 딱히 기를 쓰고 알아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인지 그다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렇게 성대한 연회식의 날짜가 잡히고, 그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그녀는 의문의 쪽지를 받고 심하게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한 케디아니스의 수준에 가까운 단순한 쪽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보내온 쪽지에 적혀진 글자가 크게 바뀌어갔으며 색이 점점 붉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피처럼. 물론 내용은 한결같이 똑같았다. 대략 추상적인 내용이 담긴 간단한 쪽지였다. "그게 열리는 날, 운명의 문은 닫힌다." 그녀는 이 쪽지를 보낸 자에게 지금 시 쓰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대충 해석을 하자면... 연회가 열리는 날, 네가 죽을 것이다. 해석을 넓히자면 납치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군. 뭐 이런 건데, 기왕 보낼 거면 제대로 적지 꼭 이상하게 적어서 생각하게 만든단 말야. 이런 쓸데없는 협박편지를 보낼 만큼 할 일이 없는 스토커라면... 루시안말고는 없을 텐데? 수준을 보아하니 아닐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그리고 문제는 이게 꼭 나를 지칭한 말은 아니잖아?` 이루린이 고민할 때 아이나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사실 연회는 성마식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아직 성마식을 치르지 않은 엘리세아 님과 같이 연회를 열지도 몰라요. 두 가문이 워낙 사이가 좋아서... 아직 제대로 확정된 건 아니지만... 그리고 그 쪽지, 정말로 위험해요. 모두들 다 풀어져있을 연회를 노려 이루린 님을 공격할 가능성이 높아요. 혹은 이루린 님의 말씀대로 납치를 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요." `어쩌지? 방법이 없는 건 아냐. 그렇다면 그 방법을 써볼까. 케디아니스를 이용하면... 흐음.` 이루린은 아이나의 말을 들으면서 혹시라도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날이 저물 즈음 드디어 대규모의 성대한 연회가 시작되었다. 마왕의아내-76 성인식 이루린은 현재 아이나로 최대한 똑같이 분장했다. 온갖 화려한 기술과 도구를 사용해서 분장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머리카락에 초록색의 가발을 쓰고, 교묘하게 얼굴에 주근깨를 그리고, 하녀복을 어디서 하나 구해 입었다. 혹시나 그 누군가가 노리는 대상이 이루린 자신보다는 아이나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나는 딱 납치하기 좋은 대상이었으니까. 물론 아이나에게는 오늘 하루만 특별히 숨어 있으라고 주의를 주었고, 이루린 자신은 연회장에 참석한 것으로 할 예정이었다. 물론 다른 마족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케디아니스가 옆에서 자꾸 이루린의 신경을 건드렸다. "헤에. 그렇게 입으니까 꼭 내 하녀로 거느리고 싶어지는데? 흐음, 거기 하녀, 생수 대령해." 이루린은 쟁반으로 케디아니스의 머리를 내리쳤다. 죽지 않을 만큼만. "생수가 없어서 쟁반을 대령했으니 많이 드셔." 케디아니스가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 위를 구르면서 신경질을 부렸다. "아프잖아! 하녀가 막 반말을 쓰고 무식하게 폭력을 휘두르다니... 그리고 쟁반이 찌그러졌어! 아이나가 슬퍼할 거야." 이루린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다 말고 케디아니스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시끄러워! 네 머리가 돌이라는 거 누가 몰라?" 이루린은 삐진 듯이 돌아앉아 있는 케디아니스에게 말했다. "신신당부하지만 위험하니까 따라나오지마." 속이 끓게도 이루린의 마지막 문장에 케디아니스가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노골적으로 그녀를 따라나왔다. 연회장은 매우 성대했다. 많은 마족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군데군데 차려진 원형 식탁에는 식욕을 자극하는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주로 그들은 엘리세아에게 다가가 많은 관심을 보였고, 엘리세아 또한 화사하게 미소를 지으며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물론 겉으로만 그렇다는 것은 이루린 혼자만이 알뿐이었다. "이루린 양은 어디에 있죠?" "벌써 참석했다고 하는데 보이지 않는군요. 어딘가에 있겠지요." 이루린은 일단 겉으로는 하녀였으므로 얼떨결에 잡다하게 많은 일들을 떠맡아서 했다. 그러면서 주위에 수상한 자가 있는지 살폈다. 그러나 느긋한 대화만이 오가는 장소 속에서 그런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루린은 부러운 마음으로 케디아니스가 이것저것 음식에 손대는 모습을 응시했다. 그녀는 맨 정신으로는 그 정체불명의 음식들을 먹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연회는 무르익어 갔다. 초대받은 요정들로 인해 연회의 분위기는 꽃을 피웠다. 물론 이루린은 이것저것 심부름을 하면서 연신 주위를 감시했다. 그러나 딱히 수상한 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장난 쪽지였군. 아냐. 다르게 생각해보면, 지금 이루린은 이 장소에 없잖아? 차라리 아이나를 나로 분장해서 대신 연회를 즐기게 했으면 확인이 가능했을 텐데!` 이루린은 자신의 실수를 조금은 후회했다. `하지만 날 찾으려는 움직임조차도 없어. 없으면 찾아야 할텐데, 뭔가가 이상해. 확인된 것은 적어도 아이나를 노리고 온 건 아니라는 거야.` 이루린은 그렇게 결론을 지은 후 분장을 지우기 위해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막 연회가 벌어지는 거대한 홀을 지나 복도로 진입하고 나서 한참의 시간이 흘렀을 때, 누군가가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로 불렀다. "거기! 너 잘 만났다. 지난번에 그 여자랑 합심해서 내게 망신을 줘? 너 하녀 주제에 정말로 건방져. 그거 알아?" 이루린은 고개를 돌렸다. 엘리세아가 눈을 부릅뜨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운이 이렇게 나쁠 수가 있나?` 이루린은 엘리세아의 뒤에서 케디아니스가 다가오다 말고 서서 상황을 살피는 모습을 응시했다. "정말인지 이렇게 재수 없는 하녀는 처음 봤다니까. 그 여자가 나처럼 신분이 높다고 해서 너도 똑같이 그런 줄 알아? 착각하지마. 너같이 쓰레기만도 못한 건.." 거의 고문에 가까운 독설이 이어졌다. 이루린은 아이나가 엘리세아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도 잘 참을 수가 있는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엘리세아를 정말로 한 대 후려치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기 때문이었다. "넌 아주 죄책감에 빠지게 될 거야. 네가 건넨 그 향수, 그거 사실 이루린을 중간계로 보내기 위해 만든 거였거든? 그런데 그 빌어먹을 여자가 멀쩡하게 살아 돌아왔다, 이거지. 넌 이루린을 살해할 뻔한 거야. 알겠니? 경고하는데 이 사실을 이루린에게 말했다간 넌 어떻게든 내 손에 죽을 거야!" 이루린은 그 사실을 듣는 순간, 눈가에서 경련이 일고 있음을 깨달았다. 손에 주체할 수 없는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열 받기는 했지만 무사히 살아 돌아왔으므로 화가 그렇게 극도로 나진 않았다. 대신에 그녀를 어떻게 맛있게 요리해야 할지 생각했다. 엘리세아가 몸을 돌렸다. 이루린은 발 밑을 응시하다가, 드레스 끝자락에 굵은 실밥이 튀어나와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그것을 구두 끝으로 살며시 밟아주었다. 엘리세아가 빠르게 움직일수록 실밥이 풀리면서 놀랍게도 그녀의 옷의 일부가 사라지고 있었다. 자세히 보내 그녀는 치마를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투명한 기능성 속옷을 입고 있었고, 그 덕택에 실밥이 풀려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윽고 엘리세아가 거대한 홀로 진입했을 때, 그녀의 늘씬한 뒷다리가 드러났다. 이루린과 케디아니스를 경악스럽게 만든 것은 엘리세아의 속옷을 입지 않은 엉덩이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는 것이었다. 실밥은 계속 풀리고 있었기에, 이루린은 그것을 벽의 울퉁불퉁한 부분에 고정시킨 후 엘리세아를 따라갔다. 엘리세아의 모습은 이루린이 보기에도 굉장히 민망하면서도 웃겼다. 케디아니스는 눈물을 찔끔 흘리며 아예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고 포복절도했다. "푸하하하! 걸작이다! 완전히 한 폭의 그림이다!" 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엘리세아의 엉덩이를 가리켰다. 이루린은 엘리세아가 지나갈 때마다 많은 남성 마족들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곧 그들은 민망해서인지 보지 못한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그런 그들도 행동만 자연스러울 뿐, 뜨거운 시선은 은근히 엘리세아의 하반신으로 향해 있었다. 여성 마족들은 거의 경악의 얼굴로 엘리세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물론 엘리세아는 자기가 뜨거운 시선을 받는 줄 알고 더 의기양양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오늘밤에 좀 괴로울 거야. 여러모로." 일단 이루린은 방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케디아니스는 오랜만에 한참 웃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루린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이루린이 자신을 따돌리고 어디로 갔을까하고 생각했다. 그 때였다. 검은 망토를 입은 커다란 몸집의 5명이 어디선가 나타나 그를 둘러쌌다. 굉장한 무게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기에, 케디아니스는 자연히 그들을 경계했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그는 당황하면서도 침착하게 행동했다. "누구예요? 왜 날..." "잡아라." 한 남자의 명령에 케디아니스는 더 말할 새도 없이 그들에게 잡혔다. 그리고 둔탁한 무엇인가로 머리를 때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 그는 정신을 잃었다. 이루린은 방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때, 그는 탁자 위에 놓여진 충격적인 쪽지를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저번 쪽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쓰여져 있었다. "기한은 3일이다. 3일이 끝나면 죽을 것이다. 알아서 하도록. 이게 무슨 소리지?" 이루린은 쪽지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연회는 끝나가고 있고, 전번 쪽지에 따르면 이번 쪽지의 내용은 뭔가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연회가 시작되면 어떻게 한다고 했는데 기한이 3일이라니. 장난이 아니고서야 죽이거나 납치하는 것을 연기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결론은 하나였다. 그 때 아이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루린 님, 다 끝나셨나요?" 아이나는 분명히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자는 단 한 명이었다. `케디아니스.` 그녀는 핏기가 싹 가시는 것을 느꼈다. 마왕의아내-77 검은 날개 이루린은 케디아니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나하는 불안감에 얼른 분장을 치우고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은 후 밖으로 뛰쳐나갔다. 뒤에서 아이나가 불렀지만 일일이 대꾸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케디아니스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죽어가고 있을지도 몰랐다. 너무 걱정이 되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게 약 쪽지를 들고 2시간을 돌아다녔지만 케디아니스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일일이 지나다니는 마족들에게 케디아니스의 행적에 대해서 물었으나 그들은 전부 모른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게다가 거대한 마왕성을 다 뒤질 시간도 없었다. `그래, 일단 밖으로 나가보자.` 땀이 등을 흥건히 적시는 바람에 축축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그녀는 일단 마왕성 공터로 나섰다. 그리고 뒤쪽으로 막 뛰어가고 있을 때, 그녀는 벽에 기대고 서 있는 어떤 자를 볼 수 있었다. 얼굴부터 발끝까지 온통 천으로 가리고 겉에 망토로 몸을 가리고 있는 묘한 자였다. 이루린은 순간 그 자가 매우 낯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일전에 길을 잘못 들어서 케디아니스와 함께 어둠의 드래곤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가다가 마을이 가까워질 즈음, 길목에 서있었던 날카로운 느낌을 지닌 자였던 것이다. "혹시 작은 꼬마를 보지 못했습니까? 붉은 머리카락의 소년인데, 혹시나 끌려가고 있지는 않았나요?" 남자는 손을 들어서 마왕성 공터 뒤쪽으로 통하는 길을 가리켰다. 이루린은 일단 남자에게 고맙다고 말한 후에 그 장소로 얼른 달렸다. 현재 그녀의 머릿속에는 케디아니스를 구해야한다는 일념으로 꽉 차있었다. 마왕성 공터 뒤쪽에 도착했을 때, 이루린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다섯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기절했는지 죽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모두 검은 망토로 몸을 가리고 두건을 쓴 자들이었다. 이루린은 직감적으로 이들이 케디아니스를 끌고 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케디아니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루린은 일단 몸을 돌려 다시 왔건 길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벽에 기대고 서 있던 날카로운 느낌을 지닌 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케디아니스는 머리가 극심하게 아픈 느낌과 함께 눈을 떴다. 주위가 어두운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아직 밤인 것 같았으나, 서서히 정신이 제대로 돌아왔을 때 자신이 어느 공간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그는 지금 차가운 벽에 매달려서 발목과 손목이 쇠로 고정을 당한 상태였다. 그리고 입은 천으로 꽁꽁 가려져 있어 소리도 지를 수 없었다. 그 때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문이 열렸을 때 밖을 보니 아직도 밤이어서 누구인지 형체를 알아볼 수는 없었다. 지금처럼 두려운 적이 별로 없었던 케디아니스는, 불안한 마음으로 그 자를 응시했다. 그 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여태까지 느낄 수 없었던 굉장히 강력한 기운이 몸을 휘감았다. 그러자 절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반갑다, 케디아니스." 처음 들어보는 중성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그 자는 문을 닫고, 어둠 속을 천천히 헤치고 다가왔다. 창가로 스며드는 달빛 덕분에 그 자가 온통 천과 망토로 전신을 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때문에 얼굴조차도 알아볼 수 없었다. 단지 너무나도 생소할 만큼 음산하고 강력한 능력을 지닌 자라는 것뿐. "내 이름은 예카트레스... 널 5명의 마족들에게서 구해준 자지." 케디아니스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았다. 차갑고 위압적인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러던 차에 그는 입술을 열지 못하게 했던 천이 풀렸음을 깨닫곤 다시 눈을 떴다. 아무래도 그 남자가 천을 쥐고 있는 것 같았다. "난 너에 대해서 모두 다 알고 있다. 네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잘 알고 있지... 난 네 적이 아니다..." 케디아니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누구지? 왜 날 이런 곳에 가둔 거지? 당장 날 풀어!" 격렬하게 발버둥쳐도 발과 팔에 감긴 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예카트레스라고 소개한 남자는 그의 정곡에 은근하지만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난 네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다. 넌 네가 원하는 한도 내에서 가지고 싶은 걸 걸 가졌지만, 가지지 못한 것이 하나 있겠지... 그렇지 않나? 난 그걸 이루게 할 힘이 있다... 물론, 약간의 댓가가 있긴 하겠지만 네가 원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케디아니스는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허, 헛소리 집어 치워! 내게 그런 건 없어! 날 풀어주기나 해!" 그러자 예카트레스가 차갑게 웃었다. "강제라는 단어를 알고 있나? 억지로라도 도움을 줘야하는 건가..." 케디아니스는 그 순간 어둠이 물러갈 것처럼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 비명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이루린은 1시간 이상 다시 마왕성을 헤맨 끝에 방에 돌아갔다. 그런데 문을 열자, 그 곳에 아이나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게 아닌가. 놀란 이루린은 얼른 아이나를 흔들었다. 그러자 그녀는 잠시 몸을 뒤척이더니, 곧 이마를 부여잡고 눈을 떴다. 정신이 오락가락한지 인상을 찌푸리면서 의미 모를 말들을 내뱉었다. 이루린은 혹시나 아이나도 케디아니스처럼 위험에 처할 뻔한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괜찮아? 괜찮은 거야?" "왜 쓰러졌는지 모르겠어요. 누군가가 공격한 기억이 조금씩 살아나는 것 같아요. 두건을 쓴 남자였는데... 아니, 요즘에 몸이 좋지 않아서 자주 쓰러지곤 했어요. 그런 이유 때문인 것 같기도 해요. 괜찮아요, 이루린 님.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누가 공격했지? 두건을 쓴 남자라고?" "잘 모르겠어요. 그냥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죄송합니다." 아이나는 한참 비틀거리더니 이루린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나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루린은 아이나가 전에도 쓰러진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정말로 몸이 많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녀가 막 나갔을 때 위험에 처할 뻔하다가 다행히도 극적으로 살아났거나. 자식을 잃은 심정이라고나 할까. 그녀가 케디아니스에게 느끼는 감정은 그런 것이었다. 가족처럼 아끼고 - 때론 패기도 하고 - 소중하게 대하던 존재가 사라졌을 때의 그 기분이란 어떻게 말할 수 없었다.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눈물이 조금씩 났다. 그러나 이내 곧 마음을 강하게 먹고 일단 현실을 직시했다. 그 때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케실리온이었다. 이루린은 자신도 모르게 달려가서 그의 손을 세게 잡았다. 그가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케디아니스가, 케디아니스가... 어떤 자들에게 납치된 것 같은데 돌아오지 않아. 케디아니스를 납치한 자들은 마왕성 공터 뒤쪽에 쓰러져서 일어나지 않고 있어. 어째서 쓰러졌는지는 모르지만... 케디아니스는 사라지고 없어. 분명히 풀려났다면 방에 와있어야 할텐데 어째서..." 이루린은 케실리온을 따라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케디아니스가 널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모르는 건가." 그의 말에 이루린은 고개를 들면서 반문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케실리온의 말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그는 케디아니스의 과거에 대해 모두 알고 있는지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케디아니스의 과거는 그리 밝지 않았고, 그 사실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어째서 세이젠을 그렇게 미워했었는지 알 수 있었고, 막 자신이 성마식을 치르고 나왔을 때 보였던 그 반응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바로 그는 자신을 통해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처참하게 죽었던 어머니의 모습을. 더불어 케디아니스가 그렇게까지 비뚤어졌던 이유도 알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처음과는 달리 많이 좋아졌지만. 이루린은 더 이상 케실리온의 제안 때문에 케디아니스를 찾지 않기로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케디아니스가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어딘가에 잡혀있기 때문이고, 만약에 그렇다면 절대로 이렇게 늦은 시각에는 찾기가 불가능할 거라고 했다. 죽었다면 진작에 죽어서 벌써 그 소식을 들었을 것을 것이고, 그들이 의도적으로 케디아니스를 납치한 이상 그냥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그냥 오늘은 자고 내일부터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케실리온의 냉정한 판단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어야만 했다.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했다. 뭔지는 모르지만 불안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다. 케디아니스가 어디에선가 그녀를 부르고 있을 것 같았다. 몸이 절로 떨려오자, 이루린은 손으로 어깨를 감쌌다. 케디아니스가 없는 빈 바구니는 그녀에게 허무감과 공포감을 주었다. 그가 이렇게 자신의 생활에 깊게 파고든 줄은 몰랐던 그녀였다. 케실리온과 침대 위에 누운 이루린은 그에게 좀 더 가까이 갔다. 잠이 오지 않았다. "잠깐만 몸을 돌려서 어깨 좀..." 말이 목에 걸려서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그녀를 묵묵히 응시하더니 처음으로 그녀의 말에 반응했다. "마치 어린애를 보는 것 같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 그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자기의 어깨 쪽에 기대게 했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면서, 이루린은 무거운 마음을 떨쳐내야만 했다. 케디아니스가 잘못되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마왕의아내-78 검은 날개 다음날, 이루린은 엘리세아를 찾아갔다. 현재로서는 모두를 의심해 봐야 했기 때문에 기본적인 욕설을 들을 정도는 각오하고 그녀를 찾아갔다. 예상대로 그녀는 어제의 일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을 봤는지는 몰라도 상당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것 같아 보였다. 게다가 그녀의 방에는 전에 볼 수 없었던 각종 살인 무기와 밀림의 왕국을 방불케 하는 정체불명의 도구들이 즐비하게 설치되어 있었고, 책상 위에는 엄청난 편지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루린은 그것만 봐도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파악하고 속으로 웃었다. "네 얼굴을 보면 혈압 오르니까 저리 꺼져!" 엘리세아가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이루린은 발로 문이 닫히는 것을 막았다. "그러면 섭하지, 엘리세아. 케디아니스가 어디 있는지 당장 말해. 초특급 비밀 정보를 입수해 왔으니까." 물론 마지막 문장은 완벽한 만우절이었다. 넘겨짚기 식의 추궁이 통했는지, 예상대로 엘리세아는 아주 움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입에서 나온 말은 독하기 그지없었다. "헛소리하고 있군?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는 몰라도 감히 내게 추궁하려고 하다니!" 이루린은 엘리세아가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기에 미리 준비해둔 게 있었다. 그녀는 어둡게 웃으면서 품에서 그림을 두 장 꺼냈다. 그 그림은 다름 아닌 주위의 절묘한 시선과 함께 엘리세아의 엉덩이를 클로즈업한, 완벽한 입체감과 고밀도의 색채감을 자랑하는 그림이었다. 특별히 전에 고스톱을 치기 위해 카드를 만들어달라 했던 마화사에게 다시 부탁했었다. 그 마화사는 어제 연회가 열리는 장소에서 엘리세아를 보고 있어서인지 그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엘리세아는 거의 히스테리에 가까운 증상을 보였다. "내가 이 자리에서 그 그림을 없애버릴 거야! 어떻게 감히!" 오히려 이루린은 달려드는 엘리세아에게 그림을 넘겨주며 강압적으로 말했다. "같은 그림이 수두룩하게 있거든? 말하기 싫으면 퍼뜨릴까?" 엘리세아는 세게 쥔 주먹을 올렸다가 내리는 행위를 반복하다가 그림을 응시하면서 스스로를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몇 번 심호흡하더니, 길게 말하기 시작했다. "좋아, 하지만 그림을 퍼뜨리면 배로 보복을 가해 주겠어. 사실 나와 관련된 일이라기보다는 내 아빠인 마네리아와 관련된 일이야.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들은 건 있지. 마왕성 뒤쪽에 가면 커다란 고목이 있을 거야." 이루린은 케실리온이 자주 이용하는 나무라고 생각했다. "거기서 마왕성 벽으로 향해 쭉 가. 그리고 어떻게 여는지 모르기 때문에 손으로 여러 군데를 더듬어야할 거야. 그러면 문이 열리겠지. 아빠의 부하 다섯 명이 그 꼬마를 납치해서 그 곳에 가둬두려는 모양이던데." 이루린은 뭔가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 분명히 케디아니스를 납치했을 다섯 명의 마족들은 그 때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사실상 케디아니스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마네리아의 부하가 아니라 제 3자가 개입했다는 결론이 나게 된다. 그 제 3자의 모습이 그녀의 머릿속에 유력하게 떠올랐다. 바로 어젯밤에 마왕성 벽에 기대 있었던 정체불명의 남자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남자의 행동은 상당히 이치에 맞지 않았다. 또 이상한 점이 있었다. 어째서 마네리아가 케디아니스를 납치하려고 했느냔 말이다. "납치한 목적이 뭐지?" 엘리세아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알아! 이제 끝났으면 당장 꺼져!" 엘리세아는 이루린을 밀치고 매몰차게 문을 닫아버렸다. 이루린은 공터의 거대한 고목을 응시하다가, 마왕성의 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일단 고목에서 출발해서 똑바로 걸었다. 그리고 벽에 섰을 때, 그녀는 손을 뻗어서 아무렇게나 더듬어 보았다. 그렇게 약 30분, 막 지쳐서 의욕을 잃고 있을 때, 드디어 문이 저절로 열렸다. 이루린은 안에서 뻗어 나오는 묘하고 기분 나쁜 느낌에 잠시 멈칫했다. 안은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무엇을 하는 장소인지도 알 수 없었다. "케디아니스?" 이루린은 일단 크지만 약간 경계하며 불렀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 때였다. 갑자기 강력한 느낌이 몸을 휘감았다. 그 순간 그녀는 뒤로 넘어지듯이 물러섰다. 놀란 그녀는 문 이 열린 그 곳을 가만히 응시했다. 두 명의 발자국 소리가 안에서 울렸다. 이루린은 조심스럽게 다시 불렀다. "케디아니스?" 대답 대신에 어떤 두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루린은 키가 작은 자가 케디아니스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케디아니스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 자는 어젯밤에 마왕성에 기대고 있었던, 정체불명의 신비스러운 자였다. 거의 모든 부위가 천과 망토로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안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왜 케디아니스를 대리고 있는 거죠? 어제도 이상한 태도를 보이더니..." 그 자의 입에서 중성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이름은 예카트레스. 첫 번째 만남인가... 좋아." 그는 가만히 서서있다 이윽고 폭발적인 마력을 끄집어냈다. 그 놀라운 방출력과 위압감은 그녀가 처음 맛보는 새로운 어떤 것이었다. 남자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이건 그냥 심상치 않은 게 아니었다. 남자는 정말로 엄청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뭐라고 간단하게 중얼거리자, 이내 자신을 포함해서 거대한 방어막을 쳤다. 이루린이 당황해 하고 있는 사이 그가 말하기 시작했다. "이 방어벽은 절대로 평범한 마법으로는 풀 수 없다. 네가 말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밖에서 보면 투명해서 이 곳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이중 마법이기 때문에 이 곳에 오려는 자들은 모두 다른 방향으로 교묘하게 비껴서 가도록 만들었지..." 이루린은 뭐가 뭔지 몰랐다. 일단 그녀는 답답한 마음에 멍하니 바닥을 응시하고 있는 케디아니스에게 외쳤다. "케디아니스! 왜 거기에 가만히 있는 거야! 이리로 오지 않고!" 이상하게도 케디아니스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묵묵히 암울한 표정으로 바닥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의 눈이 풀려 있었다. 마치 자다가 일어나거나 아니면 생기 없는 인형처럼. "그럼 간단하게 실력을 측정해 볼까, 이루린."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죠?" "싸우는 도중에는 질문을 삼가는 게 목숨을 유지하는 지름길이겠지."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고개를 숙여서 케디아니스에게 뭐라고 말했다. 이루린은 어째서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현제 예카트레스라고 밝힌 자가 적인지 아군인지도 알 수 없는 사황이었다. 하지만 최소한 아군은 아닌 것 같았다. 이루린은 케디아니스에게 달려갔다. 그러자 갑자기 예카트레스가 고개를 들더니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케디아니스의 표정은 덤덤하기만 했다. 예카트레스의 어조가 한층 낮아졌다. "다가오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앞으로 대면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녀는 마지막 문장이 에매해서 이해하지 못했다. 대신에 그는 케디아니스에게 갖가지 동작을 펼치면서 눈길을 끌려고 노력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리고 케디아니스의 입은 납덩이인 마냥 굳게 닫혀 있었다. "실력 측정이라니! 내가 어째서 당신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겁니까?" 그러자 예카트레스가 막 기분 나쁘게 웃어댔다. "내가 왜 너와 싸워야 하는 건가. 네가 싸워야 할 상대는..." 예카트레스는 두 손으로 케디아니스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바로 이 소년인데." 이루린은 놀란 마음으로 케디아니스를 응시했다. 케디아니스의 날카로운 두 눈동자는 오로지 이루린을 향해 있었다. 그는 마치 처음 보듯이, 아니 적을 보듯이 이루린을 응시했다. 당연히 이루린으로서는 그런 케디아니스의 태도가 황당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잘 지냈던 소년이 갑자기 돌변하다니. `예카트레스라고 밝혀진 남자가 케디아니스를 저렇게 만든 건가? 용서 못해!` 그러나 그녀가 용서하기엔 무리가 있을 만큼 너무나도 힘든 상대였다. 그녀가 속으로 많이 갈등하는 사이 케디아니스가 검을 뽑아들고,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이루린은 케디아니스를 공격할 수 없었지만, 케디아니스는 그녀를 공격할 수 있었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마왕의아내-79 검은 날개 이루린은 어이가 없어 그냥 입을 벌리고 케디아니스를 응시했다. 분명히 심각한 상황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이루린에게는 그다지 충격을 먹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워낙 케디아니스가 작고 어리다보니 공격하기가 허탈했다. 긴장감조차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케디아니스는 확실히 뭔가가 변했다.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지도 않았다. 표정이 없어 마치 시체 같았다. 이윽고 케디아니스가 공격해 왔다. 그의 실력을 기준으로 해서 본다면, 분명히 전과는 다른 스피드였다. 게다가 그에게서는 뭔가가 이질적인 느낌이 존재하고 있었다. 알아낼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런데 맥빠지게도 그의 공격은 뭔가가 조금 허술했다. 일단 이루린은 그의 몸에 상처를 내지 않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공격했다. 마치 병정 놀이를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케디아니스! 이 바보야! 정신 좀 차리란 말야!" 갑자기 케디아니스의 행동 - 하녀복 입은 것 가지고 질리게도 놀려대고, 몸을 작아지게 하는 위험한 장난을 치고, 그녀에게 무조건적으로 반항하고, 마왕성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식사에 거미를 넣고 등 -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순간 화가 무럭무럭 솟아났다. 따지고 보면, 케디아니스 덕분에 수명이 10년 이상 단축된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루린은 케디아니스를 공격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잊고 일단 그의 검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녀 또한 가우드를 케디아니스를 잡고 묵사발내기 시작했다. 지금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원할 만큼 때려야 나중에 원한이 쌓이지 않았다. "그만, 그만. 정말 못 봐주겠군. 친한 사이가 아니었나. 공격하라고 해서 기회다 싶어 그렇게 무자비하게 팰 줄은 몰랐다. 불쌍하구나, 소년이여..." 그 말에 신경이 거슬린 이루린은 기절한 케디아니스를 바닥에 내려놓고 외쳤다. "이봐요, 시험해 본다면서 정말 맥빠지게 만드는데, 이런 어린애를 상대로 뭐 하는 짓이죠? 실력을 높인 것도 아니고." 갑자기 예카트레스를 중심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그가 마법 주문을 외우는 소리를 들은 것도 아니었기에, 이루린은 조금 당황했다. 빛이 마법진 위로 떠올랐을 때, 그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사실 내 시험의 기준은 따로 있었다. 그건 절대로 실력이 아니지... 그리고 이미 그 결과는 나를 만족스럽게 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겠지, 이루린." 예카트레스는 완전히 사라졌고, 그 이후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후로 케디아니스는 몸이 너무 아프다면서, 맞은 기억이 없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냐고 물었다. 이루린이야 물론 납치한 사람이 혹사시켜서 그런 거라고 박박 우겼다. 그는 몸살을 앓고 나서 조금 변했다. 간혹 가다가 바구니 속에 처박혀서 골똘히 생각하곤 했던 것이다. 전에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이었기에 그녀는 약간 놀라웠다. 혹은 창 밖을 바라보면서 목석처럼 가만히 있을 때도 있었다. "너 왜 그래?" 케디아니스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냐." 또 그는 더 악질적으로 변했다. 바로 자신이 케실리온과 대화하려고 들면 사사건건 끼어 들어서 못하게 막았다. 자려고 할 때면 바구니를 택하지 않고, 침대 위로 올라와서 자신과 케실리온 사이에 눕곤 했다. 케실리온이 위협적인 눈빛으로 쫓아내려고 할 때에도, 그는 전처럼 꼬리를 내리고 얌전해지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이루린의 뒤로 숨으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허리를 연신 찔렀다. 방패막이 되어 달라고. 왠지 케디아니스의 정신연령이 어려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케실리온, 부탁이 있는데.." 갑자기 케디아니스의 얼굴이 들어왔다. 이번에도 역시나. 케디아니스의 의미 모를 집요한 행동은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 차라리 장난을 쳤으면 쳤지. "뭔데?" 이루린은 강제적으로 케디아니스의 얼굴을 옆으로 치우며 말했다. "사실 어제 소식을 전달하는 마족이 7일 동안 날개를 펴고 연습하라고 했어. 아, 일단 그리고..." 이루린은 케디아니스를 응시하며 설명했다. "시험 내용은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거야. 참으로 안타깝고 비극적이게도 내가 널 업고 날아서 지정한 장소까지 날아가서 정한 물건을 회수하고 돌아오는 거지. 지정한 장소를 제외하고는 도중에 착륙하면 안 돼. 실수할 수 있는 기회는 딱 두 번이야. 어기면 점수가 0점으로 처리가 된다더군." 이루린은 케실리온이 읽고 있는 책을 세게 덮으며 말했다. "시험 내용이 네 번째 시험에 관한 건데, 사실 난 아직 날개를 어떻게 펴는 줄도 모르고 날지도 못해. 네가 좀 도와주었으면 좋겠어.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마, 이번에는 후불제야." 갑자기 케디아니스가 케실리온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급하게 외쳤다. "내가 도와줄 거야!" 이루린은 전에 케디아니스가 자신에게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내가 무겁다며? 네가 현신하면 되겠지만 오랫동안 못하잖아. 그리고 내가 떨어지면 네가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루린은 다시 책을 펼쳐드는 케실리온에게 인상을 쓰며 말했다. "물론 이쪽도 구하지 않고 그대로 놔둘 가능성이 높겠지만, 설마 죽게 내버려두겠어?" 케디아니스의 표정이 불만과 서운함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자기의 능력을 알고 있는 탓인지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는 케실리온을 심하게 째려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래, 그럼 마음대로 해!" 그렇게 쏘아붙인 케디아니스는 거의 신경질적인 발걸음으로 문을 세게 닫고 나가버렸다. 요즘에 그는 둥글둥글하게 대하지 않고 좀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그것도 이루린에게만. 갑자기 수업 시간에 도덕 담당이었던 담임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질풍노도의 시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이루린은 케디아니스와 케실리온 사이에 흐르는 묘한 신경전을 읽을 수 있었다. 때때로 케디아니스는 의도적으로 케실리온이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가 하면, 케실리온에게 대담하게 장난을 치려고 하다가 정작 그에게 걸려서 하루동일 빗자루로 복도를 쓴 적도 있었다. 전과는 달리 그는 케실리온에게 심술궂은 표정으로 일관했으며, - 정작 케실리온은 케디아니스를 귀찮은 파리로 보는 것 같았다. -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케디아니스도 아주 우연하게 봉변을 당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아야! 무슨 짓이야!' 케디아니스는 침대 곁을 지나가다가 뭔가에 걸려서 넘어졌다. 자세히 보니 그건 바로 케실리온의 발이었다. 케실리온은 그런 케디아니스의 험악한 표정을 쳐다 보는 것도 하지 않고 계속 자기 할 일만을 하고 있었다. 또 케디아니스가 심술궂게 행동하려 들 때면, 케실리온은 분명히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어느새 결과를 보면 케디아니스가 비참한 꼴로 당해 있었다. 그 원인은 언제나 케실리온의 간접적이고 자연스러운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상해, 정말로 이상하단 말야.` 이루린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둘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때때로 케디아니스는 그녀에게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질문을 하곤 했다. "사랑이라는 감정, 가져본 적 있어?" 이루린은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물론 다 사랑하고 있지." "그런 것말고, 이성간의 사랑." 새로운 질문이 가슴에 퍼져나가는 느낌이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침대 위에 눕는 케실리온을 응시하며 말했다. "잘 모르겠는데.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문제라서. 그리고 그런 쓸데없는 질문하지 말고 잠이나 자." 이루린이 가려고 하자 케디아니스가 매달렸다. "만약에... 그러니까, 결혼을 한다면 그 기준은 뭔데?" "적어도 어리지는 않아야겠지. 키는..." 이루린은 케실리온의 머리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보다 큰 키가 좋겠지. 저 정도면 될 거야." 갑자기 케디아니스가 외쳤다. "잠이나 자!" 돌변한 케디아니스가 심술궂은 표정으로 바구니 안에 들어가 버렸다. 이루린으로서는 그런 케디아니스의 반응이 기가 막히기만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 케디아니스의 미미한 변화가, 후에 겪었던 모든 기억 중에서 가장 잔혹하고도 끔찍한 기억의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을... 마왕의아내-80 검은 날개 이루린은 케실리온과 함께 마왕성 옥상으로 올라왔다. 물론 케디아니스는 따라오지 말라고 협박까지 했는데도 억지로 따라왔다. 그것도 그녀와 케실리온 사이에 끼어서. 그녀는 실제 자신이 이 높이에서 뛰려고 하니까 매우 무섭게 느껴졌다. 날개를 펴본 적이 없었기에 자신이 없는 건 당연했다. 이루린은 억지로 웃으면서 케실리온의 옷자락을 잡고 아래쪽으로 끌었다. "난 날지도 못하는데 굳이 이 곳으로 와야 할 필요가 있을까?" 마왕성을 돌아다니는 검은새 로우가 그녀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이루린은 전에 자신이 케디아니스를 번지점프 시킨다고 던졌다가 하마터면 목을이 잘려 로우의 밥이 될 뻔한 때를 떠올렸다. 그 때는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그녀가 어쩌면 그런 일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하늘을 나는 저 새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었다. 이루린은 뒤를 돌아보았다. 먼 거리에서 케디아니스가 표정을 험악하게 하며 케실리온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케실리온은 그런 케디아니스를 응시하다가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자 케디아니스가 그런 케실리온 앞에 서서 그의 옷깃을 잡고 강하게 뭐라고 말했다. 케실리온이 뭐라고 짧게 대답하자, 케디아니스는 할 말을 잃은 듯 완전히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리고 우연인지 우연이 아닌지는 모르나, 케디아니스가 꼭대기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케실리온이 그 쪽으로 가다가 몸을 틀어서 그녀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문제는 그 때 케실리온의 망토가 우연히 케디아니스를 쳤는데, 경악하게도 망토가 얼마나 무거웠으면 케디아니스가 망토에 의해 중심을 잃고 떨어졌다. "아아아아악!"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케실리온은 그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루린은 반사적으로 케디아니스가 떨어진 곳으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마침 그는 폭포가 흐르고 있는 작은 호수 속에 그대로 떨어지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졌지만 드래곤이고 호수가 워낙 깊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루린은 너무나도 황당해서 케실리온의 망토를 잡고 무게를 측정해보았다. 겉보기에는 매우 가볍게 보였는데 실제로 만져보니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무거웠다. `케실리온은 이런 망토를 입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하는 건가?` 이루린은 다시 케실리온에게 다가갔다. "시끄러운 목소리가 하나 줄었군."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그녀에게 빠르게 설명했다. "날개를 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먼저 의지. 펴고자하는 의지가 가장 중요한 조건이지. 속으로 펴고자하는 의지만 있으면 언제든지 가능하다. 물론 대개는 자유자재로 펴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 펴서 나는 건, 체력과 평형 감각, 그리고 민첩성이 따로 요구되기 때문에 시간이 더 걸릴 것이라 예상한다." 이루린은 절벽에 가까운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케실리온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럼 시작해 볼까." "잠깐, 뭐라고?" 이루린은 그 순간 짧게 비명을 질렀다. 케실리온이 그냥 밀어버린 것이었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이루린은 꽤 당황했다. 그러나 곧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을 고쳐먹고 아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강하게 염원했다. 지상에 도달한 즈음까지도 날개가 펴지지 않다가, 눈을 질끈 감고 필사적으로 날개가 펴지도록 노력했다. 그러자 갑자기 등뒤에서 뭔가가 솟구치는 느낌이 들더니, 일순간 공중에 떴다. 그러나 곧 중심을 잃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다행히도 늦은 속도로 떨어져서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이루린은 뒤에 날개가 있을까하고 손을 뻗었으나,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검은 깃털 몇 개, 그것 뿐이었다. 갑자기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비교적 빨리 배우는군." 어느새 케실리온이 등뒤에 서 있었다. 이루린은 몸을 털고 일어나서 케실리온을 응시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아직도 심장이 뛰고 있었다. 정말인지 너무 아슬아슬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런 식일 텐데." 이루린은 그 말에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주 쓰게 웃으면서 불만을 터뜨렸다. "위험하지 않은 쪽으로 해 줄 수 없어?" 그는 그녀의 의사를 전혀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마치 일부러 위험한 곳을 선택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왜였을까. 거의 스파르타식 교육이지 않은가. 그녀가 케디아니스의 상태를 걱정하는 사이, 갑자기 케실리온이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세게 안았다. 놀란 이루린은 케실리온에게 뭐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 순간 케실리온의 몸이 이루린과 함께 공중으로 치솟았다. 검은 깃털이 휘날리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그는 날개를 편 것 같았다. 그가 날개를 펴는 것과 이렇게 공중으로 날아오른 것이 처음이었기에, 그녀는 탄성을 지르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빠르게 공중으로 올라가자 마계가 한 눈에 들어왔다. 끝없이 광활한 초원과 마물들이 서로 싸우고 할퀴는 모습, 그리고 마족들이 생활하고 있는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공중에 세찬 바람이 굉장히 많이 불어닥쳐서인지 오랫동안 구경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둘이서 어딜 가는 거야!" 이루린은 물에 빠져서 귀신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케디아니스를 보고 슬그머니 웃었다. 그는 닭 쫓던 개처럼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케실리온과 그녀는 거대한 숲을 지나쳐서 거대한 호수에 도착했다. 호수 주변에는 꽃밭과 요정들이 널려 있어서 굉장히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호수 또한 거울처럼 맑고 깨끗하기만 했다. 순간 이루린은 케실리온이 이런 곳에 온 목적을 생각했다. `떨어뜨리려는 거야. 하지만 날 배려해서 좀 더 강도가 약한 곳에 와 주었구나. 케실리온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이야...` 그러나 호수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순간, 그 생각은 아주 잘못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호수 속에 그녀의 신체만한 정체불명의 거대한 생물체가 유유히 수면 위에 입을 드러냈다가 다시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라 굉장히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참으로 본능적이게도 모두 케실리온과 이루린 쪽으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먹이를 넣어달라는 것처럼. 이루린은 순간적으로 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육식성 어류에 속하는 타마리아다. 속력은 느리니까 물 속을 잘 헤엄칠 수만 있으면 빠져나오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 물론 가만히 있으면 저들에게 봉사하게 되겠지만." 그녀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꼈다. "이런 악랄한...!" 그녀가 다 말하기도 전에, 케실리온은 그녀를 잡고 있는 허리를 놓아버렸다. 이루린은 마왕성 꼭대기에서 떨어졌을 때보다 오히려 더 공포를 느꼈다. 그녀가 맹렬하게 아래로 추락하자, 타마리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하얀 이빨을 보이며 격렬하게 움직였다. 이루린은 더 필사적인 심정이 되어 날개를 펴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생존의 욕구 때문인지 타마리아의 입 속에 들어가기 전에 날개를 펼 수는 있었지만 날지 못했기 때문에 그대로 떨어졌다. 타마리아의 입을 보는 순간 이루린은 순간적으로 동굴 같다고 생각했다. `안에다가 염산을 뿌리고 싶다.` 물론 다행히 아직 날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 케실리온이 타마리아의 밥이 되기 전에 그녀를 두 손으로 받아주었다. 그 날 하루는 거의 초죽음을 맛보아야만 했다. 케실리온의 스파르타식 교육은 마치 1년 치 죽을 고비를 지금 다 겪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차라리 케디아니스가 있었다면 그나마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정말로 가차없이 그녀의 반대를 무시하고 거의 고문에 가까운 훈련을 시켰고, 그 덕택에 그녀는 눈부신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갑자기 이루린은 그 또한 이렇게 연습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넌 어떻게 연습했지?" "연습을 하지 않았다." "왜?"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 가끔 가다가 케실리온의 대답은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다. 바로 지금의 경우가 그런 것이었다. `겨우 날개만 펴는 수준이야. 게다가 그 날개도 완전히 펴지질 않아.` 이루린은 창밖에 팔을 걸쳐서 간만에 보름달이 뜬 하늘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내일은 어떻게 하지? 크게 다치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내일은 산으로 간다고 했으니... 음.` 그 때 케디아니스가 바구니 안에서 격렬하게 움직이며 외쳤다. "아악 쪼지마! 내가 무슨 거미인 줄 알아!" `잠꼬대가 좀 심하군. 특히 케실리온은 작은 소리에도 잠을 잘 깨던데...` 아니나 다를까 케실리온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케디아니스가 자고 있는 바구니를 들어서 창 밖으로 던졌다. 그리고는 이루린이 팔을 빼고 있는 창문을 닫아 잠그고 다시 잠을 청했다. 이루린은 케디아니스가 풀숲에 크게 다치지는 않을 만큼 안전하게 바구니와 떨어진 것을 확인한 후에 잠을 청했다. 물론 방으로 통하는 문도 잠갔기 때문에 케디아니스가 추운 곳에서 어떻게 견딜지는 미지수여서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마왕의아내-81 검은 날개 이루린은 네 번째 관문을 시작하기 전에 여러 가지 일들을 회상해 보았다. 거의 좋지 않은 기억들 밖에 없었지만, 케실리온의 도움으로 인해 7일째가 되었을 때 거의 자유자재로 날개를 펼 수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산 중턱으로 정면돌진 하다가 오히려 불어오는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휩쓸려 내려간 일, 날아가는데 케디아니스가 자꾸 양탄자처럼 부려먹으려고 한 일, 날아가다가 호수 속에 빠져 타마리아 떼에게 잡아먹힐 뻔하다가 필사적으로 헤엄쳐서 살아난 일, 날다가 나무에 부딪혀서 기절했던 일, 등등 모두 그녀에게는 좋지 않은 기억들 뿐이었다. "자, 규칙 설명은 끝났습니다. 이제 시작합니다!" 모두들 날개를 완전히 폈다. 거기까진 좋았으나 날아가는 자세는 확실히 그녀보다 엉성했다. 이루린은 여유 있는 자세로 그들에게 회심의 미소를 지어준 후에 케디아니스가 등에 매달리게 했다. 그리고 날개를 펴서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케디아니스, 멋지지? 우리가 얼른 따라잡는 거야." "......" 이상하게도 케디아니스는 얌전하게 입만 다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루린은 그가 혹시 자는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앞만 보고 빠르게 날기 시작했다. 일주일만으로는 장시간 나는 것은 무리였기에 적당히 쉴 곳을 정해야만 했다. 케디아니스가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기대는 것이 느껴졌다. 이루린은 그런 케디아니스의 피부를 느끼면서 어설프게 나는 마족들을 모두 제치고 선두에 올랐다. `어째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무엇을 위해서? 도대체 왜? 단지 군주라고 해서, 아무하고나 결혼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거야?` 케디아니스는 이루린을 이해할 수 없었고, 또 미칠 만큼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처음에 자신이 느꼈던 감정이 분명히 어머니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었고, 또 그 때문인지 그녀의 관심을 독점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 명의 이성으로서 보여지는 것이 아닌가. 그녀를 마음 속 깊이 좋아한다는 게 처음에는 너무나도 두려워서 그냥 피하기만 했다. 하지만 질투심이라는 게 절대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긴 케디아니스였다. 뷰리프는 물론 좋아했지만 단순히 친구로서였고, 그 이상의 감정은 없었기에 질투심 같은 건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이루린이 케실리온과 대화하고 있을 때를 보면 괜히 방해하고 싶어졌다.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현재 그는 그녀를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인간이라면 몰라도 마족과 드래곤들은 나이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몇 백년만 지난다면 그도 성인이 되고, 케실리온처럼 키도 훌쩍 클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아니었다. 서글프게도 이루린은 자신을 단순히 동생이나 아들 뻘로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곁에는 은연중에 케실리온이 있었다. 그는 성격을 제외하고는 단점이 거의 없는 연적이었다. 당연히 케디아니스가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오로지 곁에서 지켜본 케디아니스만이 알 수 있었다. 케실리온이 겉으로는 철저하게 아무런 내색을 하고 있지 않지만, 그녀에게 위협을 가하는 게 있으면 접근조차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물론 그게 애정에 의한 행동이라고는 단정지을 순 없었다. 케실리온이라면 충분히 어떠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서 행동을 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으니까. 그게 무슨 목적인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사실, 그는 케실리온이 어느 차원계에서조차 보기 드문 심상치 않은 검을 - 매일 케디아니스를 얄궂다고 하는 그 수다쟁이 검 - 이루린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에서부터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어쨌든... 이루린은 이 관문을 1등으로 통과할 거야. 그렇다면 그 다음이 마지막 관문인데... 지금까지 모든 상황을 따졌을 때, 이루린이 마지막으로 남은 자가 될 거야. 하지만 난 절대로 그냥 내버려두지 않아. 난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와 살아서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미안해, 이루린.` 케디아니스는 강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검을 꺼내서 이루린의 검고 힘있게 뻗어있는 왼쪽 날개를 완전히 잘리지 않을 만큼 베어버렸다. 금방 회복할 수 있도록. 그러자 예상대로 이루린의 입에서 고통에 찬 외침이 튀어나왔다. "무슨 짓이야! 케디아니스!" 그러나 그럴 새도 없이, 이루린은 점차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가속도가 붙어서 점점 아래로 빠르게 하강했다. 마족들이 놀란 눈으로 이루린과 케디아니스를 응시했지만, 시험이었으므로 어느 누구도 관여하지 않았다. 그녀의 날개에서 흘러나온 피가 케디아니스의 뺨을 적셨다. 처음에는 따뜻했지만, 그것은 그의 마음처럼 차갑게 굳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럴 수밖에 없는 사실이 그를 슬프게 만들었다. `당신을 저주할 겁니다, 예카트레스.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케디아니스는 검을 도로 집어넣으며 이루린이 다치지 않게 마법을 써주었다. 그러자 이루린은 좀 더 낮은 속도로 하강했다. 이윽고 운 좋게도 케디아니스와 그녀는 울창한 나무숲 사이에 안전하게 떨어지게 되었다. 물론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지는 도중에 여러 군데 긁혀서 피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멀쩡한 정신 덕분에 다행히 위험한 나뭇가지들은 피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루린이었는데, 그녀는 날개를 쓸 수 없는 탓에 그대로 위험한 나뭇가지와 부딪히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머리를 크게 다쳤는지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케디아니스는 그녀를 적당해 치료해주었지만 완전히 정신을 차리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날개를 치료해 주지도 않았다. 그냥 그대로 깊은 잠에 빠지기를 기다렸다. 그가 바라는 것은 이루린이 이번 관문에서 최하의 점수를 받는 것이었다. 이루린은 누군가가 부르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부딪혔는지 머리가 극심하게 아팠다. 그녀는 반사적을 손을 들어서 머리를 짚은 후에 크게 인상을 썼다. 그리고 흐릿하게 눈을 떠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케디아니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루린은 움직이려다가 왼쪽 날개가 부러질 것 같은 고통스러움을 느끼면서 다시 양미간을 모았다.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이 상태에서 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게다가 몇 일이 지났는지 알 수도 없었다. 어쩌면 벌써 시험이 끝났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화가 난 적도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케디아니스에게 화를 낸 적도 없었다. "케디아니스, 너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왜 내게 검을 들이댔지? 너무 심한 장난이잖아!" 이루린이 언성을 높여도 케디아니스는 잘못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더욱이나 놀랐던 것은 케디아니스의 표정이 매우 굳어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나, 오래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말이 있어. 왜 그렇게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거야? 무엇을 위해서?" 이루린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케디아니스의 말에 기가 막혀 더 언성을 높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노력하는 이유는..." 그 순간 그녀는 입을 완전히 다물었다. 이유가 전혀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가벼운 충격을 먹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가우드가 그녀를 인정하지 않아서, 그 때문에 관문을 통과해서 케실리온과 함께 있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가우드의 주인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고, 케실리온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가우드에게 인정을 받는 건 그녀가 노력하면 해결될 문제였다. `아차... 생각하지 못했다! 만약에 모든 관문을 다 우수하게 통과한다면 난 결국 군주와 결혼하게 돼. 난 거기에 관심 없어. 그래. 내가 원하는 건, 다시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러나 이미 한국에 대해서는 거의 잊은 상태였다.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목적이 불분명해진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케디아니스가 의미심장하게 말을 꺼냈다. "이런 관문은 다 필요 없어. 결국 도움되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 나와 함께, 나와 함께 중간계로 가자. 이루린은... 인간을 좋아하잖아. 거기서 유희도 즐기고, 그러니까... 나, 이루린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 언제까지나 내 어머니로서, 그리고 언젠가는 한 명의 여자로서... 마계는 잊고 나와 언제까지나 함께 살면 안 될까?" 프로포즈에 가까운 대사였다. 물론 이루린은 아직 어린 케디아니스가 절대로 그럴 말을 할 리가 없다는 전제 하에서 그를 응시했다. 케디아니스는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지 못하고 자신이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케디아니스는 일전에 자신이 케실리온에게 들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 때 그는 이루린이 없을 때 서고로 가서, 책을 읽고 있는 케실리온에게 묻고 있었다. `목적이 뭐예요? 이루린의 곁에 있는 이유! 그 이유가 뭐냐고 물었어요!` `그렇게 흥분할 필요는 없을 텐데.` `내가 당신을 모를 줄 알아요? 어째서 그 검을 이루린에게 준건가요?` `어린애가 알만한 내용이 아니니 사라지도록.` `어째서? 도대체 왜? 이해할 수 없어! 그리고 난 어린애가 아니에요!` 케실리온이 책을 덮으며 말했다. `위험하니까. 그것도 아주 복잡하게.` 그 말에 케디아니스는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말이었다.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나와 함께 있을 때도 위험한 건 하나도 없었어요! 뭐가 위험하다는 거죠? 마왕성에서 혈전이 벌어진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이루린이 아무리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가문의 딸이라고는 하지만, 그 검을 줄 정도로 위험한 건 아니잖아요! 그 정도는 이루린도...` `시끄럽군. 더 이상 내 일을 방해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조용히 말할 때 사라지도록.` `......` 케디아니스는 그 때의 씁쓸한 기억을 떠올렸다. 케실리온의 강압적인 말투가 그대로 생각났다. 갑자기 왜 그 생각이 나는 것이었을까. 케디아니스는 이루린이 무슨 대답을 할지 기다렸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마왕의아내-82 결혼식 이루린은 징징 울고 있는 케디아니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케디아니스가 이런 식으로 운다는 게 신기하기만 한 이루린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가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이 곳에 있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케디아니스를 따라 중간계로 가면 오히려 그녀에게 이득이 될 수도 있었다. 어차피 그녀도 원래는 인간이었으니까 차라리 익숙하지 않은 마계보다는 중간계가 훨씬 나았다. 그리고 중간계라는 곳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기에 언젠가는 한 번쯤 나가보기도 하고 싶었다. `마왕과도 결혼할 수 없어. 애초부터 거기에는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만약에 결혼한다면, 평생 이 곳에서 살아야 할지도 몰라. 그건 안 돼.` "네가 울다니 의외로구나." 케디아니스가 불만스럽게 고개를 다른 곳으로 홱 돌렸다. "내가 언제!" 이루린은 그런 케디아니스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좋아, 널 따라서 중간계로 가겠어." 케디아니스가 이루린을 천천히 응시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얼굴로 이루린을 응시하다가, 갑자기 그녀의 품에 뛰어들었다. 이루린은 그런 케디아니스를 안아주면서 생각했다. 만약에 마계를 벗어난다면, 최대한 카란델과 마리엔의 눈에는 들키지 않아야 했다. 그들이 알게 되면, 분명히 못 가게 막을 것이다. 그 후, 케디아니스의 부축을 받은 이루린은 날개를 다친 것 때문에 거의 0점으로 들어왔다. 엘리세아의 비아냥거림이 계속 그녀를 화나게 만들었지만 한 편으로는 오히려 점수가 많이 깎이는 것이 그녀에게 유리했다. 이 상태로 간다면, 엘리세아에게 자리를 내주겠지만 그것은 그녀가 바라던 바였다. "... 물론 마법을 쓰면 되지만, 아직 내 실력으로는 조금 무리야. 유일한 방법은 중간계로 통하는 문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그건 서고에서 조사를 해보면 해결되고도 남지. 들키지 않고 장기간 도망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게 좀 많은 것 같아." "일단 마왕성으로 돌아가면 조용히 하자." 이제 도망칠 기회만을 노리면 되는 것이다. 카란델은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방에 누군가가 놓고 사라진 쪽지를 읽고 한동안 충격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순종적이고 한없이 착한 자신의 딸이 저지르려는 행각이 믿어지지가 않는 그였다. 요즘 들어서 이루린의 성격이 많이 변했다고 느끼고는 있지만, 설마 이런 짓을 저지를 정도로 변한 줄은 꿈에도 몰랐던 그였다. 그는 절대로 이루린이 다른 마음을 품게 할 수 없었다. "하아... 결국, 생각해 왔던 일을 진행해야 한다는 말인가?" 카란델은 문에서 항시 대기하고 있는 마족 레크를 불렀다. 레크는 문을 열고 들어와서 절도 있는 동작으로 무릎을 꿇었다. "부르셨습니까." 카란델은 거침없이 말했다. "모두에게 알려라. 어떤 방식으로도 좋다. 로우를 써도 좋고, 아니면 전령을 따로 써도 좋다. 아니면 각 층 홀에 붙여둬도 좋다. 특히 장로들에게는 필히 알려야 할 사항이니, 혹시 그들이 그 소식을 듣고 나를 만나고자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전해라. 반발이 좀 심하겠지." 레크는 당황한 듯,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숙이며 말했다. "어떤 내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알려야 할 건 말이다..." 카란델은 `이루린과 케디아니스가 중간계로 도망치려고 하고 있습니다.`라고 적어놓은 쪽지를 심하게 구기며 말을 이었다. "여태까지 치러왔던 시험을 모두 중단한다는 것이다. 아예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이 옳겠지." 이루린은 방에 앉아서 케디아니스와 함께 중간계로 갈 날을 기다리며 날개가 어서 낫기만을 바랬다. 날개는 이제 몇 일만 더 지나면 완전히 나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 때가 되면, 그녀는 은밀하게 준비한 여행 도구들을 가지고 케디아니스와 마계를 여행할 것이다. 추격을 당할 수도 있겠지만, 목적지에 제대로 도착만 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케실리온...` 갑자기 케실리온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떠오른 것은, 날개가 거의 다 나을 때쯤이었다. 왠지 모르게 그와 떨어진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조금 씁쓸하고 예감이 좋지 않았다. 요즘에는 바쁘게 보내느라 서류를 처리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떠맡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조금 허전하다고나 할까. 케디아니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 "아냐, 아무것도." 이루린은 케실리온의 모습이 은근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에 약간의 혼란스러움을 느끼면서 한숨을 쉬었다. 역시 오랫동안 같이 생활한 결과인 것 같았다. 그 때였다. 갑자기 문이 세게 열리고 상급 마족들이 들이닥친 것은. 그들은 모두 위협적이고 날카로운 창을 그녀에게 겨누고 있었다. 이루린과 케디아니스가 당황해 하고 있는 사이 그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젊고 엄격해 보이는 고위 마족이었다. "이루린 님, 저희와 같이 가셔야겠습니다." 이루린은 자신이 죄를 지은 게 무엇인지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게 무슨 소리입..." 남자는 재빨리 이루린의 말을 잘랐다. "무엇을 하고 있나. 어서 모셔라!" 순식간에 들이닥친 상급 마족들이 그녀를 에워쌌다. 이루린은 너무 기가 막혀서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창으로 그녀의 허리를 아슬아슬하게 찌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뚫을 것처럼. 케디아니스는 다른 병사들에게 잡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잠깐만! 이게 무슨 짓이죠! 누구의 명입니까?" "카란델 님의 명이십니다." 이루린은 그 예기치 못한 대답에 잠시 그대로 서있었다. 카란델이 뭐가 아쉬워서 자기 딸을 잡아들인단 말인가. 도망치고 싶기는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반항했다가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리고 죄를 지은 것도 아니지 않은가. 카란델인 만큼 그녀는 순순히 그들의 처사에 응하기로 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상급 마족들에게 강제적으로 어디론가 가게 되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1층의 거의 감옥이나 다름없는 독방이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이루린은 도망치려고 했다. 이런 곳에 가두어진다는 건 언제 나올지 모른다는 것과도 같았다. 도망친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째서? 도대체 왜?` 그러나 결국 그녀는 그들의 힘에 의해 독방에 갇힐 수 밖에 없었다. 그 방은 매우 작았고 어두웠다. 있는 것이라곤 침대 하나 뿐이었다. 창문은 매우 작았으며 빛도 거의 들어오지 않아 마치 감옥에 갇힌 죄수 같은 기분이었다. 더군다나 케디아니스도 찾아오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꺼내달라고 소리도 쳐보고 문도 세게 두드려보았으나, 그 문 주위는 매우 외진 곳이었기에 마족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지쳐 포기하고 자신도 모르게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이루린은 자신 옆에 카란델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루린, 일어나거라. 중대하게 할 말이 있으니." 이루린은 카란델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왜 절 가두신 거죠? 왜 여기에...!" 카란델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대신에 착찹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이윽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말을 하면 갑작스러울 것이라 생각하지만, 네 결혼 상대자가 결정되었다." 마왕의아내-83 결혼식 "뭐라... 고요?" 이루린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카란델을 응시했다. 아니, 어떠한 생각도 현재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을 수 없다는 게 더 옳았다. 처음에는 카란델의 말이 꼭 장난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카란델의 얼굴은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시간이 차차 흐르자 그녀는 차츰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고, 이윽고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잠깐만! 아니, 잠깐만요! 그게 무슨 소리죠? 제가 뭘 어떻게 한다고... 아, 아니.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왜 갑작스럽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전 시험을 열심히 치르고 있잖아요. 저보고 시험을 포기하라는 말씀이신가요?" 이루린은 막 말하면서 혀가 꼬이는 것을 느꼈다. 카란델의 충격적인 말은 그녀를 혼란 상태에 빠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카란델은 인상을 쓰며 뒤로 물러났다. "잡아먹을 기세로구나, 이루린. 요즘에 자주 느끼는 거지만, 넌 마왕성에 오고 나서부터 좀 변했다. 얌전하고 순했던 네가..." 카란델의 조용한 말에 이루린은 황급히 정숙하게 보이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물론 그 덕분에 더 이상 카란델에게 물어볼 수 없었다. 그런 이루린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카란델은 그녀에게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사실 난 널 시험을 치르게 하지 않으려고 했다. 적당히 결혼 상대자를 고르려고 했지." 이루린은 자신이 결혼한다는 생각에 치를 떨었다. 그녀는 결혼해서 남편에게 평생 봉사하고 살아야 할 - 적어도 이 곳의 분위기는 그랬다. - 만큼 한가하지 않는, 아직 창창한 나이의 소유자였다. 아직 결혼을 생각할 만큼 성숙하지도 않았고 또 그럴 입장도 아니었다. 이루린은 카란델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말도 안 돼! 전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어째서 제 의사는 존중하지 않고...!" 카란델은 매서운 표정으로 이루린의 손길을 뿌리쳤다. "넌 케디아니스라는 헤츨링과 도망치려고 했다! 내가 그 사실을 모를 줄 알았느냐? 네가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면, 난 널 그대로 두었을 것이다. 굳이 결혼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네가 도망가려고 한다면, 난 널 결혼을 시켜서라도 속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루린은 어떻게 카란델이 자신과 케디아니스와 벌일 일들을 알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일을 알고 있는 것은 케디아니스와 자신 뿐이었는데, 어째서 카란델이 알고 있단 말인가. 제 3자가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내 주위를 감시하는 자가 있는 건가?` 이루린은 일단 그 생각을 접고, 카란델의 말 중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을 따졌다. "전 성마식을 치렀어요. 이제 중간계에 나갈 자격이 되죠. 어째서 안 된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전..." 카란델이 그녀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케디아니스는 아직 성년으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그리고 넌 시험을 포기하고 일부러 가려고 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중간계는 위험해! 절대로 보낼 수 없다!" "인간들 뿐이잖아요! 제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중간계에 인간만 있는 줄 아느냐? 유일하게 모든 차원계의 종족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이 중간계다. 그 곳에는 천족과 신족들이 은연중에 득실거린다. 겉으로는 평화니 뭐니 그런 소리를 지껄이고 있지만, 사실상 제일 치열하게 서로를 죽이려고 드는 자들이 있는 곳이 바로 중간계다. 특히 여자들은 중간계에 거의 가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라!" `천족? 신족이라고? 한 번도 보지 못한 자들이잖아...` 이루린은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중심이 카란델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전 잘할 수 있어요!" 카란델은 답답하다는 듯이 외쳤다. "어째서 모습은 같은데도 네 언니인 라이네와 이렇게도 판이한..." 카란델은 놀라면서 갑자기 멈추었다. 그는 당황한 듯, 잠시 시선을 이리 저리 옮기며 서 있다가 밖으로 빨리 나가버렸다. 그는 이루린이 어떻게 할 새도 없이 문을 닫고 잠근 후에 창살로 고개를 내밀었다. "어쨌든 넌 결혼하게 될 것이다. 물론 공식적이지만 공식적이지 않은 결혼이다. 합법적으로 결혼하게 되겠지만 마족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진행할 것이다. 그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잠깐만요! 언니라고요? 그게 무슨 소리죠?" 그러나 카란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루린은 작은 쇠창살을 흔들었지만 소용없었다. 카란델은 분명히 실수로 중요한 말을 내뱉었다가, 도로 주워담을 수 없어 당황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중요한 말은 분명히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외동딸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카란델은 분명히 라이네라고 하는 여자가 자신의 언니라고 말했다. 실수로 말한 것을 후회한 것으로 보아 분명히 사실이었다. `뭐야... 혼란스러워.` 이루린은 아직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현재 걱정해야 할 문제는 다름 아닌 결혼 상대자였다. 자신과 결혼하게 될 남자는 과연 누구일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케디아니스와 케실리온을 잊은 채, 그녀는 그렇게 독방에서 빛도 제대로 못 본 채 살아갔다. 탈출할 방법을 연구하고 또 연구해 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뭔가가 생각날 듯 하다가도 도로 머릿속으로 기어 들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는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약 3일 만에 다시 빛을 제대로 본 것이다. 그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씻지도 못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밤을 새서인지 눈이 반쯤 감긴 채로 비틀거려야만 했다. 그녀는 신속하게 여러 명의 하녀들에게 잡혀서 목욕을 하게 되었다. 이루린은 제발 혼자하게 해달라고 했으나 하녀들은 무조건 명령이라는 말만 반복하며 그녀를 목욕시켜 주었다. 덕분에 그녀는 피로와 쌓였던 화가 풀리게 되었고, 겉면도 굉장히 깨끗해지게 되었다. 그녀는 케디아니스가 어디에 있는지 찾으려고 했으나 찾지 못한 채로 이번에는 상급 마족들에게 이끌려서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그들이 이동하는 곳은 다름 아닌 마왕성 밖이었다. "어디로 가는 거죠?" 그녀를 감시하는 상급 마족의 관리자가 입을 열었다. "헤트입니다. 참고로, 더 이상의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카란델 님의 명이십니다." 이루린은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지만 꾹 참고 걸었다. 몇 번 도망칠 기회를 엿보기도 했으나, 상급 마족의 수가 굉장히 많았기에 함부로 움직이는 것조차도 할 수 없었다. 커다란 호수가 나와 - 전에 케실리온이 그녀를 빠뜨렸던 - 그 곳에서 쉬기도 했으나 모두들 이루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이루린이야 자연스럽게 휴식을 취하며 나무에 등을 기댔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러나 어쩔 도리는 없었다. 결국 그녀는 상급 마족들의 원치 않는 호위를 받으면서 몇 시간이 흐른 후에야 헤트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거의 해가 질 저녁쯤에. 헤트는 굉장히 활기차고 소란스러운 곳이었다. 마치 학교처럼 전문적인 교육 기관도 갖추어져 있는 곳도 많았고, 대도시를 연상케 할 만큼 광대했다. 화려한 조각상이 놓여져 있는 거대한 광장과 개성이 넘치는 집, 그리고 여행하는 마족들이 눈에 수시로 띄었다. 그 덕택에 이루린은 헤트에 거주하거나 지나가는 많은 마족들의 의혹에 찬 시선을 받았다. "누구지?" "옷차림을 보아하니... 평범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죄를 지은 건가?" 입도 뻥긋하지 않고 상급 마족들과 도착한 곳은 어느 저택이었다. 별장이라는 느낌을 가질 만한 곳이었다. 그녀가 그 안으로 들어서자, 많은 시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루린을 맞이했다. 그들은 그녀에게 쉴 틈도 주지 않고 방으로 안내하더니, 앉혀놓고 치장을 하기 시작했다. 시녀들이 3명이나 들러붙는 바람에 너무나도 힘겨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나가고 한 명만 들어왔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아이나도 와 있었구나." 아이나가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네. 이루린 님께서 결혼하신다고 하기에 빠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축하해요, 이루린 님." "다른 시녀들은 왜 내가 치장하는지 모르는데 아이나는 잘 알고 있구나." "아, 그거라면 아까 카란델 님께서 저에게만 살짝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실 제가 이루린 님을 오랫동안 모셨으니까요." 아이나는 그렇게 약 30분 동안 간단하게 마무리를 해 주었다. 그녀는 감탄하고 또 감탄하면서, 멀리서 이루린을 바라보고 황홀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이루린은 치장이 굉장히 여성스럽고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면서 천천히 일어나서 거울 앞에 섰다. 우아하고 화려한 실크로 이루어진 드레스가 가볍게 너울거렸다. 영롱한 보석 때문인지 기품이 있어 보였다. 이런 치장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이루린은 거울에 비친 모습에 순간적으로 감탄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자, 이제 가실 시간입니다.." 아이나가 그녀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이끌었다. 그녀는 저택을 나서서, 저택 뒤쪽으로 향했다. 구두 때문에 걷는 것이 불편했지만 곧 익숙해졌다. "어디로 가는 거야?" "결혼식장에 갑니다.." "뭐야!" 이루린은 그 순간 멈춰 섰다. 아무리 치장을 서둘러서 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빨리 결혼식을 올릴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도망치려고 했으나, 순간 아이나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아이나는 애원과 두려움이 섞인 눈빛으로 말했다. "가시면 전... 혼나는 정도가 아니라 죽임을 당할 지도 모릅니다. 가지 마세요, 이루린 님. 어째서 가려고 하시는 거죠? 오늘은 이루린 님을 위하는 날인데..." 이루린은 아이나의 처지를 고려해야만 했다. 그녀는 무겁게 긍정의 대답을 하면서 다시 아이나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한적한 신전에 도착했을 때, 이루린은 잠시 멈춰 서서 망설였다. 누가 신전 안에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카란델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혹시 케디아니스도 안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루린은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손으로 신전의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문을 천천히 열었다. 마왕의아내-84 결혼식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황하면서도 허탈한 기분이 들어, 그녀는 천천히 아이나를 응시했다. "아직 오지 않으셨어요. 자, 이쪽으로 오세요." 아이나는 먼저 신전 안으로 들어가면서 그녀를 이끌었다. 이루린은 넓고 큰 신전을 감상하면서 적막감이 흐르는 곳을 걸었다. 높은 제단이 먼저 눈에 띄었고 그 앞으로 적당한 수의 의자들이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제단에서 입구 근처까지는 빨간 카펫이 깔려 있었다. 화려한 꽃으로 이루어진 장식물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미리 준비를 해 놓은 것 같았다. 벽 근처에는 거대한 둘레를 자랑하는 원기둥이 굳게 세워져 있었다. 신전은 크기 만큼이나 복잡했는데, 가는 도중에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꽤 애를 써야만 했다. 아이나를 따라 드들어간 곳은 어느 자그마한 방이었다. 침대와 의자, 그리고 옷장과 화장대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여성들만 쓰는 방인 것 같았다. 이루린은 장시간 걸은 탓에 피로감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면서 침대에 쓰러지듯이 누웠다. 물론 치장 때문에 조심해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아이나가 화장대 위에 얹어져 있는 물병으로 잔에 어떤 불그스름한 액체를 채웠다. 그녀는 그 잔을 쟁반에 받쳐 이루린에게 가져왔다. "드세요, 피로 회복 작용이 있어요." 이루린은 억지로 일어나서 잔에 든 액체를 단번에 들이켰다. 그러자 놀랍게도 술을 마신 것처럼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기다려 주세요. 나중에 모두들 도착하면 제가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아이나가 나가버리자 이루린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고, 또 결혼 상대자가 누구냐에 따라 삶이 완전히 뒤바뀌기 때문에 더더욱 하기 싫었다. 만약에 사려 깊고 매사에 신중하며, 그녀를 잘 배려해 줄 수 있는 남자라면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만약에 잘못 걸리게 된다면 평생 중간계에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르고, 매일 힘들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서로 간의 대화도 없고, 이해심도 없으며, 거기다가 폭력적이라면 큰일이었다. 폭력적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휘어잡아야 하겠지만. `외모는 평범해도 상관없는데... 그럴 리는 없겠지만 결혼 상대자가 케실리온이라면 결혼 생활에 금이 갈지도. 뭐, 그가 싫은 건 아니지만...` 이루린은 매일 아침 냉랭한 식탁에서 밥을 먹고, 매일 케실리온이 건넨 서류에 파묻혀서 바쁘게 살아갈 끔찍한 모습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루린은 신속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빠져나가서 케디아니스를 찾은 후에 도망치는 길말곤 없었다. 그녀는 1층 창 밖을 응시했다. 뛰기에 적당한 높이였기에, 그녀는 얼른 창문을 열고 뛸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는 이마를 조여오는 느낌에 중심을 잃고 침대에 앉았다. 일어나려고 했으나 이상하게도 세상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흔들렸다. 힘이 전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약 한 시간 동안이나 지체한 그녀였다. `뭐지? 이상해... 약을 먹은 느낌.` 어느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리더니 아이나가 들어왔다. 이루린은 아이나를 응시하다가, 이상하게 몸이 나른하게 처지고 의식이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해지는 것 같아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속이 매우 뜨거워졌다. 그녀는 탁자 위에 얹어진 빈 잔을 응시했다. "죄송합니다, 이루린 님. 카란델 님의 명이셨습니다. 어쨌든 이제 가셔야 합니다." 이루린은 본능적으로 가지 않으려고 했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발걸음은 아이나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이끌리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운 느낌은 지속되었다. 신전 내부는 밖이 밤으로 변해짐에 따라 어두워져 있었다. 삭막한 느낌 속에서 이루린은 단지 촛불만이 여러 개 눈에 아른거린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고, 어떤 이들의 모습도 어렴풋하게 보였다. 단지 알고 있는 것은 오로지 아이나에게 이끌려서 앞을 향해 걷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문득 희미하게나마 정신이 들었을 때, 이루린은 자신이 아이나에게서 벗어나 제단 앞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 옆에는 키가 큰 남자가 서 있었다. 결혼할 남자였다. 그녀는 자세하게 보려고 했으나 꿈을 꾸는 것처럼 흐릿하고 주위가 워낙 어두웠던 탓에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대신에 중심을 가누지 못하고 연신 비틀거렸다. 친절하게도 그 남자는 그녀의 팔을 잡아주었다. 길고 긴 연설이 끝나자 박수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맹세의 키스를..." 거의 다 끝났을 즈음에는 몸이 너무 나른해서 키스를 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잠깐 필름이 끊기고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그녀는 자신이 누군가의 품에 안겨서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남자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으니 따뜻한 온기를 느껴졌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남자의 긴 머리카락을 만졌다. 검은 색이었다.... 이루린은 비몽사몽 중에 매우 춥다고 생각했다. 살이 에이는 추위 덕분에 그녀는 몸을 웅크렸다. 아무 생각 없이 이불로 몸을 완전히 덮었으나, 그래도 추웠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따뜻한 무엇인가가 손에 잡혔다. 그녀는 그것을 껴안았다... 이루린은 간만에 경쾌한 새소리를 들으면서 눈을 떴다. 오늘도 그녀는 그렇게 케디아니스를 닦달하면서 하루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주위의 공기부터가 틀리고, 또 그녀는 따뜻한 뭔가와 몸을 밀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확실히 일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았다. 이루린은 자신이 살아있는 누군가를 껴안고 있다는 사실에 짧게 비명을 지르면서 황급히 그 자리에서 떨어졌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자고 있는 남자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이루린은 그제서야 자신이 강제로 행해야만 했던 짓을 떠올렸다. 그 때는 하도 정신이 없어서 뭐가 뭔지 몰랐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녀는 바로 결혼했던 것이다. 그것도 생판 모르는 남자하고서. `이건 악몽이야.` 이루린은 떨리는 마음으로 죽은 듯이 자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남자의 고개를 그녀 쪽으로 돌렸다. 그 순간 이루린은 하마터면 숨이 멎을 뻔 했다. 결혼 상대자는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남자였던 것이다. 남자의 흑발을 봤을 때부터 그녀는 아주 낯익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설마가 사람잡는다고, 그 생각이 딱 들어맞았을 줄이야.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이루린은 그녀를 향해 천천히 눈을 뜨고 있는 케실리온을 응시했다. 케디아니스는 믿을 수 없었다. 몇 일 전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결혼 상대자란 없었다. 그러나 카란델에 의해 그녀는 강제적으로 결혼하게 되었고, 경악스럽게도 그 상대는 바로 케실리온이었다.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빨리 하게될 줄은 몰랐던 그였다. `첫사랑이었는데, 첫사랑이었는데!` 케디아니스는 화가 치밀고 서운하기도 해서 울고 싶기만 했다. 그는 괜히 잘 자라고 있는 나무를 발로 세게 걷어찼다. 물론 심술을 부려봤자 그의 발만 아플 뿐이었다. `아직 공식적인 결혼은 아냐. 외부에 알리지도 않았지. 그렇다면 가능성이 있기는 한 걸까?` 케디아니스는 이루린이 있을 곳을 응시했다. `시간이 없어.`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이루린은 자신이 속옷만 입고 있다는 사실이 창피해서 얼른 도로 이불을 덮고 누웠다. 그러나 시선은 케실리온에게서 떼지 않았다. 그는 이루린과는 달리 아주 자연스럽게 태도로 말했다. "당연한 걸 묻는군." 이루린은 그런 케실리온의 태도에 기가 막혔다. 그 때 아이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이나는 무슨 장면을 상상하는지 수줍은 듯, 잠시 서 있다가 "이루린 님, 그리고 케실리온 님. 이 곳에서 하루를 묶고 내일부터는 관례대로 마계를 여행하게 됩니다. 뜨거운 밤은 잘 보내셨나요?" 이루린은 절대로 아니라고 대답하려고 했으나, 케실리온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이나가 들고 온 잔을 들이켰다. 이루린은 화병에 쓰러졌으면 하는 심정으로 잔을 거칠게 들이켰다. 아이나가 부끄러운 듯 볼을 붉히며 - 이루린은 정작 미칠 지경이었다. - 두 빈 잔을 쟁반에 받치고 사라졌다. 그 순간을 기다린 이루린은 크게 소리를 질렀다. "뜨거운 밤이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의사를 표현한 이유가 뭐야! 난 내 의사대로 결혼한 게 아니란 말야!" 케실리온이 흥분한 이루린의 말을 잘랐다. "조용히 좀 했으면 좋겠군. 참고로 서로의 결혼은 합리적이고 실질적인 목적이 있어서다. 그러나 다른 자들이 보기에는 서로의 사랑으로 결혼했다고 믿게 하는 게 생활하는 면에서도 더 편할 것이다." 이루린은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와 결혼했다는 사실이. 그는 그녀에게 폭력을 휘두르지도, 구속하지도 않아서 좋긴 했지만 그래도 앞으로 험난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또 내일부터는 그와 단 둘이서 관례에 따라 여행해야 하는 처지가 아닌가. `케실리온이 내 남편이라니.` 이루린은 속으로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왕의아내-85 짧은 신혼 여행 이루린은 아직도 충격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케실리온과 억지로 여행 도구들을 챙겼다. 어째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일까. 심란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녀를 괴롭혔던 것은 바로 케디아니스였다. 힘들게 마왕성에서 달려온 그는 공포 영화에나 나올 법한 귀신처럼 이루린과 케실리온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막 신경질을 내기 시작했다. 보통 축하한다는 말이 나와야 정상이었는데 케디아니스는 얼마 가지 않아서 결혼 생활에 금이 갈 거라는 둥, 1년이 지나지 않아 둘 중 하나가 불륜을 저지를 거라는 둥, 쓸데없이 마구 저주를 퍼부었다. 이루린 또한 인정하기 싫었다. 처음에는 난동을 부리려고 작정했으나 케실리온의 강압적인 말 때문에 억지로 참아야만 했다. 가기 직전에 아이나가 마중해 주었다. "다녀오세요. 빨리 돌아오시길 빌겠습니다." 이루린과 케실리온은 그렇게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물론 그리 긴 여행은 아니었기에 부담이 적긴 했다. 문제는 그 여행에 케디아니스가 따라붙었다는 것이었다. 이루린은 따라오지 말라고 말렸으나, 케디아니스는 바락바락 악을 쓰면서 끝까지 따라왔다. 물론 케실리온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이루린이 케실리온에게 물었다. "어디로 갈 거지?" "펨하. 여행을 하기에는 가장 적당한 곳이지." 케디아니스가 불쑥 끼어 들었다. "지금 마왕성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 "무슨 소리야?" 케디아니스가 더 말하려다가, 케실리온을 응시하더니 움찔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이루린은 시선을 돌렸을 때 케실리온은 앞만 보고 있었다. 이루린은 그런 그들을 번갈아 보다가, 한마디 던졌다. "참 이상해. 어째서 넌 내게는 반말을 쓰면서, 케실리온에게는 깎듯이 경어를 쓰는 거지? 케실리온이 중년층이나 노년층에 속하지 않는데 말이지." 케디아니스가 이루린과 케실리온을 번갈아 응시하더니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면서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녀가 되물을 틈도 주지 않고 업어달라고 떼를 썼다. 이루린은 그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업어주었다. 그는 잔다면서 더 이상 질문하지 말라고 했다. 문제는 케실리온의 걸음이 워낙 빨라서 그녀가 케디아니스를 업은 채로 따라가기가 상당히 힘들었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체력이 소모되고 금새 지쳤다. 그러나 케디아니스는 절대로 내려오려고 하지 않았다. "절대로 내가 이루린을 고생하게 만들고, 하루종일 자거나 편하게 가기 위해 업어 달라고 한 건 아냐." "...왠지 과분하게 의도적이구나." 절벽과 폭포가 있는 울창한 숲을 지났을 때 이루린은 거대한 도시를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 곳이 펨하인 듯 싶었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전에 있던 도시보다 삭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길가에 지나다니는 마족은 아무도 없었고, 심지어는 작은 마물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약간이긴 하지만 피비린내가 조금 진동해서인지 공기가 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마을의 중심에는 거대한 성이 세워져 있었다. 마왕성 보다는 훨씬 작았지만 그래도 웅장하고 화려했다. 아무래도 인간으로 치자면 영주의 계급 정도 되는 자가 성 안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검문소에 막 지나칠 즈음 지키고 있는 병사가 밝게 외쳤다. "펨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부부가 동반했군요. 그런데... 일찍 결혼하신 것 같군요. 아이가 그 정도나 빨리 큰 것을 보니 말입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전혀 마을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태도였다. 이루린은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오해하는 병사를 입을 꿰매고 싶었다. 그녀도 그렇지만 케디아니스의 표정도 말할 것이 없었다. 갑자기 묘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이루린은 괜히 케실리온를 응시했다. 그는 별다르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이루린은 달랐다. 아이라는 말에 이렇게 기분이 이상해진 것은 처음이었다. `결혼을 해서인가? 케실리온이 남편이라고 생각하니 아주 새로운 기분이 들어...` 이루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에 개의치 않고, 일단 종일 걸었기에 피곤했던 그녀는 얼른 케실리온을 따라 여관으로 향했다. 여관은 예상외로 넓었지만 마족은 한 명도 없었다. "부부와 아이 한 명이로군요. 절 따라오십시오." 이루린은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여관 주인은 이미 2층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2층으로 올라갔을 때, 이루린은 여관 주인이 어느 방의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관 주인이 열쇠를 넘겨주며 사라지자, 그녀는 방에 들어갔다. 방에는 큰 침대와 작은 침대가 놓여 있었다. 이루린은 적당히 짐을 푼 후에 방 옆에 있는 탕에서 몸을 씻고 나왔다. 케디아니스는 침대 위에서 엎어져 자고있었고 케실리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도 없었고 피곤하긴 했어도 자기에는 조금 일렀기에 이루린은 일단 펨하라는 도시를 구경도 해보고 적당히 지리적인 위치도 파악할 겸 밖으로 나갔다. 밖은 이미 초저녁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피비린내가 완전히 사라졌어. 게다가...` 더 놀라웠던 것은 막 펨하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길거리에는 아무도 없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전부터 계속 그래왔던 것처럼 길가가 북적거리고 있었다. 어쨌든 이루린은 노점상이 밀집된 지역에 가서 물건도 구경하고 좋은 게 있으면 케디아니스에게 사 주기로 했다. 펨하에 살고 있는 마족들은 굉장히 좋은 표정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야시장의 풍경처럼 길가에서 시끄럽게 떠들면서 대화를 나누면서 즐거운 때를 보내고 있었다. 이윽고 시간이 흘러 막 광장에 도달했을 때, 이루린은 조금 쉴 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그 순간, 의자가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발목 부근이 부서졌다. 놀란 이루린은 얼른 일어나서 부러진 의자를 응시했다. 그 때였다. 갑자기 웃고 떠들던 모든 마족들의 시선이 이루린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적대적이고 어두운 표정만이 자리했다. 그들이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자 정말로 당혹스럽게도 주위는 다시 적막감으로 감돌았다. "왜, 왜들 그러시죠? 다들 일 보세요. 전 신경 쓰지 말고." 그러나 그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서 이루린을 응시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펨하의 소유물을 파괴했다. 저 여자가 내일의 산 제물이다!" 소유물을 하나 실수로 부러뜨렸다고 해서 제물이 된다는 건 조금 이상했다. 그리고 펨하에 제물을 바칠 만큼 높은 신분을 지닌 자가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인 카란델만 해도 제물을 받지는 않는다. 게다가 산 제물이라니. 그 순간 펨하 거주 마족들 사이로 창과 밧줄을 병사들이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이루린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족히 30명은 될 법한 마족들이었다. 이루린은 이 마을이 약간 이상한 낌새가 있고 뭔가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저항을 하기에는 펨하의 마족들 또한 덤벼들 기세를 취하고 있었기에 무리였다. "물건을 파괴한 것 가지고 너무 심한 처사로군요! 갚으면 될 것 아닙니까?" 병사들 중 하나가 홀린 듯이 외쳤다. "펨하의 규칙이 뭔지도 모르다니! 이 곳의 소유물을 파괴한 자는 험프 님의 산 제물이 될 것이다." "험프인지 펌프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자 또한 마족일 텐데 산 제물을 바친다니! 미쳤어요? 순순히 제가 산 제물이 되게." "긴말할 필요 없다. 잡아라!" 이루린은 저항했지만 곧 그들에게 붙잡혀서 성까지 압송되었다. 가는 도중 이루린은 자신이 그렇게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에 대해 생각하면서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다듬었다. 케디아니스는 실컷 자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잠에서 깼다. 침대를 보니 이루린과 케실리온이 없었다. 일찍 나갔다고 생각했는데, 그 때 문을 열고 케실리온이 들어왔다. "이루린은요? 당신은 어디에 갔다 왔어요?" "성에 가서 험프라는 자를 만나고 왔다. 이루린은?" 그는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그러나 이루린이 있을 턱이 없었다. 케실리온도 모르는 사실에 갑자기 불안해지는 케디아니스였다. 이른 아침인데 어디론가 사라진다는 건 확실히 이상했다. 갑자기 오싹한 기분이 들면서 직감적으로 이루린이 결코 좋은 곳에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위험해진 게 뻔했다. `날더러 다 아들이라고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확실히 이상해, 이 펨하라는 곳.` "저도 알 수 없어요. 저야 당연히 당신과 함께 있는 줄로 알았죠." 그리고 그 순간, 케디아니스는 다시 풍기는 피비린내에 코를 막았다. 어제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길가에 마족이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낯익은 얼굴의 여자가 묶여서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크게 비명을 질렀다. "이루린!" 마왕의아내-86 짧은 신혼 여행 "팔자가 꽤 사납군요." 케디아니스는 끌려가고 있는 이루린을 막막히 응시했다. 그리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마치 때를 기다리는 자처럼 그녀는 저항도 하지 않고 조용히 끌려가고 있었다. 하기야 그 수다쟁이 검만 잘 활용하면 그리 위험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케디아니스는 이루린을 응시하고 있는 케실리온에게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도대체 왜 이런 곳으로 오자고 한 거죠?" "최근에 이 곳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조사를 하기 위해 이 곳에 들렀을 뿐." 케디아니스는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하고 생각했다. "단순한 신혼 여행이 목적이 아니로군요. 당신답네요. 하지만 저 상황은 이제 어쩌죠? 물론 당신이 나서면 간단히 해결되겠지만." 케실리온은 간단히 장비를 갖추고 밖으로 나갔다. 케디아니스는 한숨을 쉬면서 제발 이루린에게 아무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랬다. 이루린은 도시 펨하의 마족들이 전부 미쳤다고 생각했다. 이곳의 영주 정도 되는 험프라는 마족은 사이비 교주였고 그 아래의 무리들은 전부 광신도인 것 같았다. 모두들 이루린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 이루린은 일단 저항하지 않고 그들을 따라갔고, 그 결과 이상한 장면들을 많이 목격할 수 있었다. 그녀는 밤에 배가 아프다고 경비병을 유인해서 열쇠를 빼앗은 다음 험프라는 남자의 방에 하녀로 분방해서 침입했다. 처음에 끌려가면서 험프라는 남자를 보았을 때, 그녀는 그가 매우 덕망이 높고 사려가 깊은 남자라고 생각했다. 얼굴만 봐도 그런 분위기가 풍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방에서 본 건 정말로 경악의 경악을 넘을 만한 것이었다. 그렇게 선하게 생긴 남자가 같은 여성 마족들을 닥치는 대로 토막내서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낮에 피비린내가 왜 진동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산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 낮에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약간의 충격을 먹은 이루린은 자신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감옥으로 다시 돌아왔다. 지금 이 상태로 도망가는 것보다는 좀 더 상황을 지켜보는 게 더 나았다. 물론 경비병은 창고에 처박아두고 비명을 지르지 못하게 입막음을 해두었다. `이상하단 말야, 중얼거리는 것이 꼭 누군가와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그 다음 날, 그녀는 예상대로 병사들에게 잡혀 끌려가게 되었다. 끌려가면서 가우드가 어찌나 주위 마족들에 대해 욕설을 많이 내뱉던지 귀가 멍멍해질 지경이었다. "[이 가우드 님께서 당장에 이런 발칙한 것들을 없애버리겠어! 내가 현역 시절에는 얼마나 이름을 날렸는데!]" "죽여라!" "없애버려!" 이루린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마족들의 적대적이고 흥분으로 가득 찬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찬찬히 그들을 살피면서 그녀는 조금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아이들까지도 산 제물로 바쳐진다고 하는데도 어른들과 합세해서 그녀를 매도하려고 했던 점이었다. 최소한 겁을 먹고 두려워하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막 돌을 던지는 이들도 있었지만 가만히 맞고만 있을 이루린이 아니었기에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그녀의 눈에 펼쳐진 거대한 사형 도구였다. 자세히 보니 양 기둥의 위에 거대한 날이 줄과 함께 매달려 있었고, 그 아래에는 목을 집어넣는 구멍이 있었다. 한마디로 단두대였다. `매일 사회 책에서만 봤던 거라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어.` 현재 그녀는 커다란 광장에 있었는데, 주위에 굉장히 피비린내가 짙게 진동하고 있었다. 바닥에 피가 말라붙어서 씻겨지지도 않은 것으로 보아, 어제도 이 곳에서 누군가를 죽였던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처럼 이렇게 펨하의 전 마족들이 모여서 제물로 바쳐지는 자를 구경했을 것이다. 단두대 앞에는 이상한 제단이 놓여져 있었다. 촛불과 정체불명의 음식들. 마족들은 그런 광경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루린은 하도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곳에는 험프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녀를 맞이했다. 피묻은 검을 들고서. 이루린은 다짜고짜 그에게 따졌다. "당신이 펨하를 다스리는 자인가? 겉으로는 선량한 척 하면서 누군가가 실수로 기물을 파손하면 바로 잡아들여서 제물로 사용해? 조사를 해 봤더니, 이 곳의 물건이나 가구들은 모두 조금만 건드려도 부서지게 되어 있더군. 이렇게나 발전한 도시에서 말이지. 이 곳의 펨하의 마족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공공 기물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고 말야." 이루린은 신분을 밝힐까, 하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그녀의 신분이 얼마나 효력을 발휘하는지는 몰랐지만 최소한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려면... "오늘은 아름다운 제물이 들어왔군. 하지만 세이젠 님께서 싫어하실 거야..." 험프가 거의 홀림에 가까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정작 그 말을 듣는 이루린은 경악했다. 믿을 수 없는 단어가 귀에 확실히 들린 것이었다. "잠깐만, 지금 뭐라고 했지? 뭐? 지금 누구라고?" 이루린은 죽은 세이젠이 살아있을 리가 없다고 판단했기에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쯤 되면 슬슬 난동을 부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기에 - 가만히 죽을 순 없지 않은가. - 가우드를 시켜서 밧줄을 풀게 만들었다. 가우드는 참으로 머리가 좋게도, 스스로 병사들을 위협해서 그녀와의 간격을 벌리게 해 주었다. 물론 그 덕분에 그녀는 이 이상한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전 마족들이 검을 모조리 뽑아드는 위험한 상황을 맞이해야만 했다. 수적으로 그들을 모두 상대한다는 건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상대해야 했다. 일단 이루린은 기선제압을 할 작정으로 창을 든 병사들부터 공략했다. 실력이 없어서인지 그들은 그녀의 검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 덕분에 일반 주민들은 그녀를 섣불리 공격하려 들지 않았다. 병사들이 당했으니 일반 마족들 또한 당연히 이기지 못하리라는 약은 심리였다. 험프가 길길이 날뛰었다. "무엇을 하는 것인가! 우욱...!" 그 때 험프의 몸에서 경련이 일었다. 그는 괴로운 듯 손으로 목을 감싸더니, 곧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 직후 놀랍게도 험프의 등에서 누군가가 유령처럼 빠져나왔다. 그 유령 같은 형상은 점차 익숙하게 보아왔던 누군가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바로 세이젠이었다. 그런데 세이젠의 모습은 상당히 많이 달라져 있었다. 몸은 거의 온갖 흉터로 망가져 있었고, 얼굴도 성하지 않았다. 땅에서 막 솟아 나온 좀비 같은 모습이었다. 세이젠은 차갑게 웃으면서 외쳤다. "오랜만이야, 이루린." 케디아니스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세이젠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처참한 몰골로. 험프라는 남자가 바닥에 쓰러졌다. 순간 주위는 혼란 속으로 빠졌다. 마을에 있던 전 마족들 모두 세이젠의 등장이 생소한 모양이었다. 그것도 자신들이 믿고 따랐던 험프의 몸 속에서 나왔으니 더더욱 그랬다. 케실리온은 일단 이루린의 상황을 방관만 하고 있었다. 케디아니스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이루린을 구하기 위해 달려나가겠지만 케실리온은 그게 아니었다. 그는 날카롭게 상황을 판단하면서 이루린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세이젠이 나오자마자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난 산 제물로 바쳐진 100명의 마족들의 피를 마시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모시게 된 분에게서 받은 힘으로 이 곳을 다스리는 자를 현혹했지. 그리고 그의 몸 속에 들어가 양기를 빨아먹으며 기생했다. 물론, 나는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한 힘을 얻고 그것으로도 만족하고 있지만 완전한 육체를 가지기 전까지는 그만 두지 않으면 안 되었지. 그리고 네 피를 이제 난 완전한 육체를 가지게 된다. 난 그 분을 모시는 것만 아니라 너와 케디아니스에게 복수할 기회만을 노려왔지. 자, 이제 넌 내 손에 죽을 것이다." 이루린은 본능적으로 몸이 굳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이젠은 전과는 다르게 몇 배에 달하는 힘을 얻게 되었고, 그 말은 전부 허풍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세이젠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공격해 왔다. 이루린 또한 대비를 하긴 했지만 워낙 세이젠의 힘이 빨라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마치 헤츨링이 아니라 고룡을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윽!" 세이젠의 검을 받고 이루린을 크게 뒤로 물러섰다. 세이젠의 몸에서 나온 폭발적인 힘이 그녀를 뒤로 물러서게 만든 것이다. 이루린은 넘어질 듯 뒤로 물러서다가, 중심을 잃지 못하고 뒤로 넘어지려고 했다. 그 순간 누군가에 의해서 부축 받게 되었다. 뒤로 돌아보니 그녀를 부축한 자는 케실리온이었다. 그의 시선은 세이젠을 주시하고 있었다. "케실리온!" 케실리온은 그녀를 완전히 세워주고 등에서 검을 뽑았다. 막 정신을 차린 험프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다, 당신은..." 케실리온은 위압적으로 세이젠에게 검을 겨누었다. 세이젠은 눈을 가늘게 뜨며 케실리온을 응시하다가, 이윽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크게 외쳤다. "다, 당신이 어째서 이런 곳에?" 케실리온이 차갑게 말했다. "펨하를 이렇게 만든 것이 네 소행인가. 배후에 누가 있는지 짐작이 가긴 하지만 웬만하면 네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케실리온의 몸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다. "살려두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가 검을 들고 세이젠을 겨누었다.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형성되었다. 마왕의아내-87 짧은 신혼 여행 이루린은 케실리온을 지켜보았다. 그가 검을 들고 싸우는 모습을 본 건 결코 흔하지 않았기에 이루린은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다. "다, 당신이 어째서 여기를 온 거지? 날 방해하려 들지마!" 세이젠이 필요 이상으로 당황해 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케디아니스가 다가오더니 이루린을 잡고 정신 없이 흔들었다. "괜찮아?" "난 문제가 없어. 그런데..." 그 때 세이젠의 검이 케실리온에게로 빠르게 다가갔다. 그러나 케실리온은 이루린이 피하기도 힘들어했던 세이젠의 검을 가볍게 피해버렸고, 여유 있는 자세까지 보였다. 세이젠은 역시 당황해 하는 듯이 입술을 깨물면서 케실리온을 노려보았다. "죽어! 죽으란 말야!" 세이젠의 노력은 아주 처절하기까지 했다. 항상 느끼는 것이었지만 케실리온이 상대가 되면 적의 실력은 항상 어줍잖게 보였다. 그만큼 그의 검술에는 굉장한 절제감과 강한 힘이 있었다. 세이젠이 무차별적인 공격에 들어갔지만, 케실리온은 거의 움직이지 않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방어했다. 눈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빠른 공격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약 30분이 흘렀다. 세이젠이 땀을 흘리며 완전히 지친 상태에 놓여있는 반면 케실리온은 땀조차 흘리지 않고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루린은 그가 땀을 흘리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었던 것 같았다. 세이젠이 공격하지 않고 잠시 쉬고 있자, 케실리온이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다 끝났나? 싸울 수 있을 때 더 공격해라. 그렇지 않으면..." 케실리온이 자세를 달리 바꾸었다. "네 목숨이 끝날 테니까." 뼛속깊이 오한이 들 정도로 섬뜩한 말이었다. 케실리온에게서 풍기는 차가운 느낌 덕분에 한층 더 삭막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주위가 고요해진 것은 물론이었다. 케실리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세이젠처럼 화려한 검술을 구사하기보다는, 실용적이게도 단번에 끝낼 만한 검술을 구사했다. 싱겁게도 세이젠은 몇 번 케실리온의 검을 받아치다가, 그가 순간적으로 빠르게 검에 힘을 주자 그만 놓쳤다. "으윽...!" 세이젠이 바닥에 쓰러졌다. 이루린이 고개를 돌릴 틈도 없이, 케실리온은 주저하지 않고 검으로 세이젠의 복부를 관통시켰다 세이젠이 이미 한 번 죽은 몸이라서 그런지, 그녀의 육체에서 피 대신에 징그러운 벌레들이 마구 기어 나왔다. 이루린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케실리온이 검을 도로 집어넣고 이루린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러는 사이 세이젠은 숨을 헐떡이면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육신은 빠른 속도로 썩어갔다. "예, 예카... 트레스 님...!" 작은 목소리였지만 이루린은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이루린 뿐만 아니라 케디아니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굉장히 무서운 표정으로 세이젠을 쏘아보았다. 아니, 어떻게 보면 세이젠을 쏘아보는 게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예카트레스라가 배후에 있는 건가? 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왠지 기분이 더러웠다. 뭔가가 좋지 않은 느낌이 전신을 휘감았다. 케실리온 또한 그 소리를 분명히 들었을 텐데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여행은 끝났다. 내일 속히 돌아가도록 하지." 케실리온의 저 태도란 또 뭐란 말인가. 그가 여행이 끝났다고 하면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끝났다는 것을 그녀가 모를 리 없었지만, 그래도 허무한 감정이 들었다. 아무리 짧은 여행이라고는 하지만 이 정도에서 끝난다는 건 좀 뭣했기 때문이었다. 마계에 널리 퍼져 있는 10개 이상의 도시 중에서 최소한 세 개 정도는 들러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녀는 오히려 여행보다는 다시 마왕성에 돌아가는 게 더 좋았다. "아아, 정말로 끈질기게 살아남네. 그래도 이제 죽었으니 정말로 다행이야." 케디아니스가 투덜거리면서 케실리온의 뒤를 따랐다. 그 이후로 펨하에는 거의 평화가 찾아왔다. 마족들은 더 이상 광신도처럼 굴지 않았고, 실질적인 우두머리인 험프 또한 마족 중에서는 드물게 도덕적이고 인간미가 넘치는 성격을 되찾았다. 성에서는 다시 마왕성으로 떠나기 전에 간만에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이루린은 거기서 거의 여왕 대접을 받았고, 그것은 케실리온이나 케디아니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케실리온은 험프와 단 둘이서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파티가 끝나고 성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그 날 밤이었다. 이루린은 홀로 정원에서 달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케디아니스가 다가오더니 심각하게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은 케디아니스의 얼굴이 보였다. "어떻게 할거야?" 이루린은 짧게 한숨을 쉬면서 살포시 꿈을 접었다. "어쩔 수 없잖아, 포기해야지. 중간계로 가는 건 나중에 케실리온을 억지로 설득해서 꼭 갈 거야." 케디아니스의 서운해하는 표정이 그녀의 마음에 걸리게 만들었다. 그는 처연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 나 있지... 처음에는 이루린이 불행하다고 생각했어, 케실리온과 결혼해서. 알다시피 그는 거의 목석에 가까운 남자니까.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이루린이 케실리온을 만나서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해." 이루린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너... 울어?" 케디아니스는 거칠게 고개를 흔들며 어둠 속으로 몸을 돌렸다. "아니, 안 울어. 나 이만 갈게." 이루린은 그가 왜 우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케디아니스가 완전히 사라지자, 이루린은 갑자기 카란델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라이네라고 했었나. 그 여자가 누구인지 심히 궁금했다. 어째서 그 여자의 그림이 케실리온의 옷장 속에 있었던 것일까. 그 순간 이루린은 갑자기 떠오른 자의 모습에 소리를 질렀다. "맞다, 정령왕!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갑자기 어리석어진 기분이었다. 위험해 처했을 때, 정령왕을 한 번이라도 떠올리고 불렀더라면 어렵게 끝낼 수 있었던 일도 쉽게 끝낼 수 있었을 것을.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은 정령왕을 한 번도 떠올리지 못했다. 건망증이 심해서인 것일까. "미네르바, 얼른 나와봐. 되도록 마력은 숨기고." 이루린의 중얼거리고 난 직후, 갑자기 그녀 앞에 마법진이 생성되더니 미네르바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요구대로 마력은 몽땅 숨기고서. 미네르바의 모습을 본 게 얼마 만인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주인이여 나와 계약을 해놓고 제대로 부르지도 않다니.-" "미안. 그런데 말야, 라이네라는 여자가 도대체 누구지?" "-고작 그걸 물으려고 날 불렀단 말인가? 전투가 아니라?-" "아니, 왠지 너라면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리고 케실리온에 대해서도. 난 그의 과거에 대해 하나도 아는 게 없거든." 정말로 이루린은 결혼한 남자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어차피 케실리온의 입으로 듣기는 불가능했으니, 이번 기회에 미네르바를 통해서 좀 알고 싶어졌다. 라이네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미네르바가 한동안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미네르바는 계속 침묵하다가, 이윽고 말을 꺼냈다. "-케실리온과 라이네에 대한 기억이라.. 말해주는 것보다는 보여주는 게 옳겠지. 좋아, 보여주겠다. 하지만 다른 자들에게는 이 사실을 말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미네르바가 뭐라고 중얼거리자, 갑자기 이루린의 몸에 흰 빛이 감싸기 시작했다. 그 빛은 그녀를 천천히 공중으로 올려주었다. "-과거의 장면을 보여주지. 하지만 결코 밝은 장면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하도록...-" 미네르바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루린은 순식간에 정신을 잃었다. 그녀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마왕성의 뒤쪽 공터였다. 마치 워프만 된 것처럼 변한 건 거의 없었다. 단지, 낮이라는 점과 항상 케실리온이 자는 용도로 사용했던 고목이 조금 덜 자랐다는 것만 빼면. "변한 게 없잖아?" 이루린은 계속 걸었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웃음소리가 들려 그 곳으로 향했을 때, 그녀는 한 작은 소년과 자신과 똑같이 생긴 한 여자를 볼 수 있었다. 너무나도 똑같았기에 그녀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긴 흑발을 지닌 소년 또한 어디선가 많이 보던 마족이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이루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디선가 본 듯한 젊은 남자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매우 잘생긴 얼굴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남자는 그녀를 그대로 지나치더니 소년과 여자가 앉아 있는 곳으로 향했다. "라이네! 여기서 더 이상 이러고 있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이루린은 또 한 번 경악했다. 그 젊은 남자는 다름 아닌 카란델이었다. 그리고 여자는 그림 속에서 보아왔던, 이루린과 꼭 닮은 여자인 라이네였다. `설마... 그럼 저 소년은 케실리온?` 케실리온이 라이네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카란델, 내가 잘못한 거예요. 라이네에게 너무 그러지 마세요."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년 케실리온의 얼굴을 처음 보는 이루린이었다. 마왕의아내-88 짧은 신혼 여행 "조금만 더 놀다가 공부하러 갈게요." 이루린은 하도 기가 막혀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케실리온의 키는 케디아니스의 키에서 머리 하나 만큼만 클 정도로 작았다. 여전히 긴 흑발에다가 거의 비슷한 외모였으나, 단 한가지 다른 게 있었다면 분위기였다. 케실리온에게서는 정말로 경악스럽게도 일반 소년들처럼 밝아 보였다. 그녀는 케실리온의 성격이 후천적인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설마.. 케실리온! 케실리온!" 이루린은 케실리온에게 다가가서 이름을 불렀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라이네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불러도 소용없다. 이 곳은 진짜 과거가 아니라 과거의 기억일 뿐이니까.-" 미네르바의 목소리에 이루린은 입을 다물고 케실리온을 빤히 응시했다. 서서히 라이네와의 관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머니 마리엔의 쓰러짐, 케실리온의 방에서 나온 사진, 그리고 지금 이 과거의 행동을 모두 종합한 결과, 그녀는 라이네가 자신의 언니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도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육체는 사라지고 그림 한 장만 남은. 카란델은 케실리온을 응시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핀잔을 주었다. "라이네, 적당히 놀고 들어오너라." 카란델이 사라지고 나자 케실리온이 라이네의 허리를 안으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나, 라이네를 지켜줘도 될까? 그냥 라이네의 곁에서 영원히 살고 싶어." 라이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으로 케실리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케실리온이 라이네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나이 차이가 너무 심했다. 아니, 케실리온이 너무 어렸다고 해야할 것이다. "안 돼. 너도 네가 사랑하는 여자를 찾아야지." 라이네는 케실리온을 동생으로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케실리온의 마음은 아직 알 수 없었다. 이루린을 믿을 수 없었다. 그에게서는 차가운 인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순수하고 밝은 눈동자만이 오로지 라이네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자연스럽게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때 짧은 흑발을 지닌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루린은 짧은 흑발을 지닌 그 소년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이윽고 소리를 질렀다. 바로 루시안이었던 것이다. 빈정거리는 말투까지도 완전히 똑같았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형?" 그 폭탄 같은 말에 이루린은 머리에 번개를 맞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분명히 루시안의 입에서 형이라고 했다. 그것도 케실리온을 향해서. 이루린은 케실리온이 부정하기를 바랬으나, 그는 그러지 않고 오히려 웃으면서 루시안을 불렀다. "아아, 루시안. 지금 라이네와 놀고 있는 중이었어." "그으래?" 이루린은 알 수 있었다. 루시안의 표정이 굉장한 환멸감으로 짙어지는 것을. 루시안은 라이네에게 차갑게 외쳤다. "그쪽은 잠깐 사라져 주시지요." 놀랍게도 라이네는 루시안에게 의례적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이루린은 또 혼란스러웠다. 그 당시에 카란델의 서열이 낮아서 라이네가 루시안에게 고개를 숙였던 것일까. 아니면, 루시안의 신분이 원래부터 특별했던 것일까. 라이네가 사라지자 루시안이 케실리온에게 은밀하게 속삭였다. "섞인 피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게 웃기는군. 형은 내 순수한 피와는 다르잖아? 능력도 없는 주제에..." 케실리온이 지쳤다는 듯이 말했다. "루시안. 그러지 마. 난 너와 싸우고 싶지 않아." 루시안이 갑자기 격하게 언성을 높였다. "내가 이길 거야! 내가 형을 누르고 이길 거란 말야!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다고 해서,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어림도 없지!" 그 때 루시안의 목소리가 줄어들면서, 갑자기 장면이 바뀌었다. 그녀는 어느덧 어느 방의 문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 문이 있는 복도는 굉장히 낯익었다. 바로 케실리온의 방으로 통하는 문이었던 것이다. 미네르바가 불쑥 끼어 들면서 이루린에게 설명해 주었다. "-케실리온은 저 때 아주 밝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아니, 라이네에 의해 겨우 회복했다고 봐야지. 어렸을 때 케실리온은 평범했기 때문에 동생인 루시안과도 잘 지내는 사이였었다. 덕분에 루시안은 케실리온을 경쟁자로 보지는 않고 대신 내리누르려고 했다. 내 기억 속에 루시안은 굉장히 자존심이 강하고 승부욕이 넘치는 소년이었다. 그러나 케실리온이 점차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루시안도 케실리온을 시기하고 질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이전에 결국 끔찍한 일을 저질렀었지.-" 이루린은 케실리온의 방으로 유령처럼 날아서 들어갔다. 그 방은 과거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달라진 게 없이 똑같았다. 단지,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어둡고 침침한 분위기였다. 어두운 침대 구석에 누군가가 웅크리고 있었다. 흑발을 지닌 남자애인 것을 보니, 아무래도 케실리온인 것 같았다. "-라이네와 친해지기 이전의 시기이다. 그리 보기 좋은 장면이 아니니 고개를 돌리고 싶다면 그렇게 해라." 미네르바의 그런 말은 오히려 이루린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갑자기 케실리온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놀랍게도 아직 생기발랄해야 할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가에는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그는 품에서 비장하게 검을 꺼냈다. 현재 케실리온이 가지고 다니는 검과는 사뭇 달른 종류의 것이었다. 케실리온이 차갑게 중얼거렸다. "드디어 오시는군요." `지금 생각하지는 거지만, 소년 때의 루시안과 케실리온의 옷차림이 지나치게 좋은 것 같아.` 그 때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머리를 산발처럼 풀어헤친 여자가 작은 단도를 들고 들어왔다. 민망하다 싶을 정도로 옷이 여기 저기 찢어져 있었고 몇 일을 씻지 않았는지 매우 더러워져 있었다. 여자의 검은 흑발 또한 단정치 못했다. 한마디로 미친 여자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호호호... 내 아들아. 네 어미가 왔단다, 날 반겨야지. 뭐하고 있니? 어서 네 목숨을 내게 바치지 않고?." 정말로 말투도 미친 여자를 연상케 만들었다. 더욱이 놀랐던 것은, 케실리온의 눈에 조금이나마 눈물이 고였다가 사라진 점이었다. 그는 굳게 검을 들더니 현재의 케실리온보다는 조금 느린 속도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치열하게 검을 맞대고 대결하고 있었다. 마치 목숨이라도 걸려는 것처럼. "저 여자는 도대체...." "-케실리온의 생모 이벨리아다. 사실 이벨리아는 첩의 신분을 지니고 있었지. 그 덕분에 케실리온은 어렸을 때부터 그리 밝은 성격을 지니지 못했다. 언제나 친구를 만들고 싶었는데도 사회적인 요인 때문에 그럴 수 없어서 이벨리아의 품에서 울곤 했지.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것에 익숙해질 즈음, 케실리온도 감정의 기복이 많이 사라진 상태였지. 정이 없을 정도로 냉정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이벨리아가 미쳐버려서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이었다." 이루린은 케실리온이 자기 어머니를 상대로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응시했다. 저렇게 어떻게 어머니를 상대로 죽이려고 할 수가 있는 것일까. 미네르바가 말을 이었다. "-그 원인은 바로 루시안에게 있었다. 루시안은 케실리온을 시기한 나머지, 좀 잔혹한 방법을 택하기로 결심했다. 바로 이벨리아를 미치게 만들어서 케실리온으로 하여금 그녀를 죽이게 만드는 것이었다. 케실리온이 이벨리아를 죽이든, 케실리온이 이벨리아의 손에 죽든 모두 루시안에게는 좋은 결과가 되었으니까." 미네르바의 말대로 루시안이 택한 방법은 너무나도 잔혹했기에 그녀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러는 사이, 이루린은 못 볼 것을 보게 되었다. 케실리온의 검이 이벨리아라는 여자의 목을 관통한 것이었다. 그 직후 끔찍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고, 이루린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단지 기억일 뿐이었기에 몸에 피가 튀지는 않았다. 케실리온이 자리에 주저앉아서 자기 어머니를 끌어안고 미친 듯이 울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정말로 세상을 떠날 것처럼 괴로워 보였고, 그것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제발, 제발..." 케실리온은 피묻은 자기 손을 혐오스럽게 응시하더니 곧 오열했다. 이미 이벨리아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 이루린은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한없이 맺혀서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보았다. 눈물은 이미 피와 섞여 버렸지만...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검을 들고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 루시안의 그러한 악한 행각은 나중에 라이네와의 복잡한 사건 이후로 모두 밝혀졌다. 그리고 이 사건도 영향을 받았지만 케실리온도 그 때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아...." 이루린은 자신이 언제나 생활하던 공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지금의 케실리온이 있게 된 결정적인 이유... 그게 보고 싶어. 라이네라고 했나? 어째서 현재는 그림만 존재할 뿐이지?" "좋아, 그것도 보여주지. 하지만 역시 이 일은 아까 것보다 더 복잡하고 좋은 일이 아니니 그렇게 알도록." 미네르바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루린은 공간이 또 바뀌고 있음을 느꼈다... 마왕의아내-89 짧은 신혼 여행 이루린은 케실리온이 라이네와 함께 들판을 뛰놀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모습을 응시했다. 아직도 그 충격이 가시지 않아 막막하기만 했다. 아무리 좋은 장면을 봐도,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 순 없었다. 갑자기 작은 의혹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케실리온이 자신과 결혼한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 전부터 그가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결혼한 게 아니라, 어떠한 목적이 있어서 결혼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 그녀였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한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케실리온이 나와 결혼한 이유가 설마 바로 라이네 때문인가? 내가 라이네와 똑같이 생겨서? 그럼 그는 나를 통해서 라이네만을 보고 있었나?`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대타가 된 느낌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뭐라고 할까, 마치 이용당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물론 케실리온에게 그런 의도가 있었는지는 미지수였다. 그가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자신과 결혼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감성적인 남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꾸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케실리온은 어느 누구에게나 가깝게 대하지 않고 멀리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가 가깝게 대하는 마족이 없는 줄로만 알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이루린은 그다지 케실리온이 누군가와 가깝게 지내는가에 대해서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과거에 그는 친했던 여자가 한 명 있었다... 그것도 그녀와 완전히 똑같은. 이루린이 심란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 장면은 바뀌었다. 그 장면 속에서 케실리온의 키는 좀 더 커져 있었다. 소년의 티를 거의 벗어날 즈음의 모습이었는데, 그는 아주 낯익은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바로 가우드였다. `그러고 보니, 저 검은 어렸을 때만 해도 케실리온에게 없었는데 언제 생겨난 거지?` 그 옆에 있는 소년을 본 이루린은 다시 한 번 눈을 의심했다. 케디아니스와 완전히 똑같이 생긴 소년이었던 것이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반항적인 케디아니스와는 달리 그 소년의 태도는 너무나도 어른스러웠다는 점이었다. 또 키도 케디아니스보다 컸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거의 모두 네가 죽기를 바라고 있어. 살고 싶으면 도망쳐야 해. 저 바람의 최상급 정령을 따라가." 그 소년은 심각한 표정으로 케실리온 주위를 맴돌고 있는 바람의 최상급 정령을 가리켰다. 그 때 바람의 정령왕이 불쑥 끼어 들었다. "- 저 최상급 정령이 바로 과거의 나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소년은 현재의 드래곤 로드이고.-" 이루린은 할 말을 잃고 케디아니스의 부친, 즉 드래곤 로드를 응시했다. 그는 정말로 붕어빵처럼 케디아니스와 똑같이 생겼다. 아무래도 케실리온과 친구인 것 같았다.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린 그녀는 새로운 마음으로 아직 정령왕이 되기 전의 미네르바를 응시했다. 케실리온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난 도망치지 않아." 현재의 드래곤 로드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네가 소중하게 여기던 그 여자가 죽을 지도 몰라! 이 곳에서 살아온 네가 무엇보다도 잘 알고 있잖아? 카란델은 네 편이고 다방면에 능력이 있지만 아직 젊기 때문에 세력이 그리 강하지 않다는 것을. 소수 핵심 계층의 횡포가 다수의 권리를 충분히 누를 수 있다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아무리 네가 잘못이 없다고 해도, 그들이 잘못을 만들어내면 끝인 거야! 그들이 그렇게 하라고 하면 그렇게 해야만 해! 마계를 존속시키는 게 다수라고 할지라도, 마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건 소수 핵심 권력층이란 말야. 이 상태로는 넌 이길 수 없어. 널 노골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네가 소중하게 여기는 그 여자부터 제거의 대상이 될 거란 말야..." 그가 케실리온의 손을 꼭 쥐었다. 갑자기 케실리온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만약에 라이네를 조금이라도 건드린다면, 나 또한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에 케실리온은 두건을 쓴 여러 마족들에게 둘러 싸여 치열하게 검술을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새 몇 년이 더 지났는지, 케실리온의 키는 상당히 커 있었다. 이제는 소년이 아니라 청년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불안정했던 검술도 몇 년 사이 균형이 잡혀 있었다. "- 케실리온은 그 이후로 많은 습격을 받았고, 그 덕분에 실전 감각을 충분히 키울 수 있었다. 그는 원래부터 그리 잔혹하게 누군가를 죽이거나 하진 않았으나, 워낙 죽이려는 이가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변했지. 머리가 뛰어나 책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검술에 그다지 많은 관심이 없었지. 그러나 라이네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검술을 연마했지. 저 시기에는 타고난 재능 덕택에 그의 능력이 루시안을 넘었을 때였지. 물론 루시안은, 케실리온의 세력이 빠른 속도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고 그대로 놔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라이네에게 아주 좋지 않은 짓을 저질렀지. 소수 권력층은 그 당시만 해도 루시안의 편이었기에 라이네를 어떻게 하는 것쯤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둘 다 도대체 신분이 뭐야?` 미네르바가 말을 이었다. "-어느 날 부터, 더 이상 케실리온을 공격하는 일은 없어졌다. 대신에 방향을 바꾸어서 라이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라이네는 선천적으로 병이 있었고, 그리 오래 살지 못할 운명을 타고났기에 아주 약한 몸을 지니고 있었지. 성격도 밝았지만 내성적인 면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니 라이네가 어떻게 그들의 공격을 견뎠겠나? 모두 케실리온이 나서서 막아주었지. 하지만 결국...-" 장면이 바뀌면서, 이루린은 케실리온의 등으로 검이 하나 날아드는 것을 보았다. 케실리온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누군가가 몸을 날려서 케실리온의 등을 감쌌다. 그 순간 빠르게 날아든 검은 그 누군가의 등에 그대로 박혔다. 케실리온이 놀라면서 재빨리 등을 감싼 손을 풀고 뒤를 돌아보았다. 검이 라이네의 심장을 그대로 관통하고 있었다. 염색약으로 물들이듯, 그녀의 등이 붉은 피로 번져갔다. 이루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서 그 장면을 잊으려고 했다. 그러는 사이 미네르바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사실 라이네가 그냥 저렇게만 죽었다면, 케실리온이 미래에 그렇게까지 변하진 않았을 것이다. 사실 그녀는 원인도 모르게 끌려가서 채찍에 맞고 죽을 뻔한 경험을 자주 했다. 결정적으로 그녀는 케실리온이 완전히 변하기 전에 루시안의 세력들에 의해 10명의 마족들에게 차례로 번갈아 가면서 강제로 수치스러운 짓을 당했지.-" "설마..." "그래, 사실 라이네는 케실리온의 얼굴을 볼 면목도 없고 자기의 몸이 깨끗하지 못하다고 여겨 자살을 결심하려고 했다. 그러나 원래 나약한 여자인지라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녀는 차라리 언제나 케실리온에게 받은 도움을 돌려주기로 했고,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마지막까지도 케실리온을 위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자기가 죽을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케실리온에게 몸을 날려서 대신 죽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났으면 케실리온이 복수하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겠지. 그녀는 자기의 사유를 편지로 남겨서 적어 놓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덧붙여 자기를 괴롭게 만든 모든 마족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케실리온은 그 때만 해도 루시안을 어느 정도 믿고 있었기에 편지를 읽은 충격은 꽤 컸지." 이루린은 케실리온이 라이네를 끌어안고 자기 어머니 이벨리아가 죽었을 때처럼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생모인 이벨리아가 죽었을 때보다도 더욱 오열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이 되어서인지 눈물을 많이 흘리진 않았다. 그는 정말로 슬퍼하고 있었지만 표정 속에 매서운 무엇인가가 서려 있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외쳤다. "어째서 내가 관심을 가지는 대상은 다 이런 꼴이 나는 거지?" 장면이 바뀌어서 이번에는 케실리온의 방이 보였다. 케실리온은 책상 위에 놓인 편지글을 읽어 내려가더니, 잠시 후에 그것을 조용히 내려서 천천히 찢었다. 그리고 검을 뽑아들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버렸다. "- 사실 케실리온은 어머니가 죽은 이후로 어린아이답지 않게 성숙하게 굴 만큼 성격이 밝지 않았다. 그러나 그 힘든 시기에 라이네를 만났고, 그녀는 케실리온에게 정신적으로 풍요를 얻어 주었다. 케실리온에게는 라이네가 어머니보다도 정신적인 지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 사실 이벨리아는 외모 치장에만 관심이 있었지 자기 아들에게는 관심이 없었으니까. 나는 케실리온이 모든 사실을 알았을 때 어느 정도 크게 상심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결코 루시안이 원한대로 사건이 흐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케실리온은 단신의 힘으로 소수의 권력층들을 모조리 몰살시켰고, 분노에 휩싸여 있는 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때 그 상황을 지켜보았던 많은 마족들이 공포에 떨어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고, 그들은 케실리온의 능력에 경악하며 이구동성으로 믿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의 능력은 정말로 대단했으니까." 이루린은 점점 케실리온의 과거를 알아 가면 갈수록 혼란스러워짐을 느꼈다. 케실리온이 강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 정도라고는 생각지 못한 이루린이었다. 게다가 루시안이라는 남자에 대해 그리 적대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았었는데, 이번 일로 인해 그가 엘리세아 만큼이나 싫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태까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던 그의 신분의 궁금증이 처음으로 생기게 되었다. "케실리온은 그 때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말수도 줄어들고, 미소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만이 얼굴을 대신했다. 그는 그 이후로 제대로 웃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는 성장하면 할수록 매우 잔혹해졌고, 모두들 그를 두려워하기 시작했지. 그는 자기를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게 있으면, 그게 설사 아군이라 할지라도 죽여버렸다. 단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실수를 용납하지 않고 죽인 마족만 해도 엄청나지. 그는 다른 마족이라고 생각될 만큼 짧은 시간 내에 변했던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그가 그렇게 변한 이유가 결정적으로 라이네의 영향 때문인 것 같다. 게다가 그는 자기가 가까이 두는 게 있으면, 자기 때문에 물건이든 생명이든 모두 죽거나 사라졌으니까 더 이상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라이네라는 어디에 묻혔죠?" "그게... 죽은 게 확실한 데도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그냥 그대로 사라졌지. 모두들 죽었다고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그 때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에 케실리온은 어느 화려한 방에 와 있었다. 그는 처음 보는 중년의 남자에게 머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전 그 여자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분명히 라이네가 죽고 난 후였다. 마왕의아내-90 두 여인 이루린은 케실리온의 그 발언에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의 경우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하나는 케실리온이 사랑하고 있는 제 3자가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라이네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실을 케실리온이 있는 경우, 그가 그녀에게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힘들텐데... 그래도 원한다면 네가 반드시 이뤄야 하는 것을 수행해야 한다." 케실리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졌다. 장면이 일그러지면서, 잠시 후에 그녀는 원상태로 돌아왔다. 여전히 주위는 밤이었고, 주변에는 어느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적막감만이 감돌 뿐이었다. 이루린 또한 할 말을 잃고, 미네르바가 입을 열 때까지 그냥 그대로 서서 난간에 기댔다. "-충격을 좀 먹은 모양인가. 그래도 할 수 없지. 그럼 난 이만 사라지겠다. 앞으로는 위험에 처했을 때 까먹지 말고 부르도록.-" 미네르바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사라졌다. 이루린은 어째서 케실리온이 자신과 결혼했는지, 그 이유를 반드시 물어보고 싶었다. 아니, 꼭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제 3자든, 아니면 라이네든. 케디아니스는 이루린에게서 뭔가가 심상치 않은 어떤 것을 읽었다. 그녀는 마왕성으로 돌아오는 내내 마치 케실리온처럼 냉정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입술은 일자로 꾹 다물려 있었고, 시선 또한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무엇을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젯밤에만 해도 그녀의 기분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었다. 마왕성에 도착했을 때 처음으로 이루린이 입을 열었다. "케디아니스, 네 또래 애들이랑 좀 놀고 있어." 케디아니스는 이루린의 냉랭한 분위기에 잠시 움찔했지만 퉁명스럽게 외쳤다. "왜? 난 여기에 있으란 법도 없어?" 이루린은 그의 말에도 평소처럼 농담조로 말하지 않았다. "좋은 말로 할 때 가라면 가." 케디아니스도 어느 정도 눈치가 있었기에 이번만큼은 순순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불만이야 엄청 많았지만. 무슨 이유인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분위기가 좋지 않았기에 그저 속으로만 생각할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어느 정도 멀어지자, 이루린이 케실리온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지는 모습을 슬프게 응시했다. 이루린을 포기하는 게 옳은 것일까. 그녀는 결혼을 했지만 특이하게도 모두에게 알리지 않은 상태이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그냥 그대로 무효가 될 수 있는 - 단순히 이루린이 중간계로 나서지 못하게 하기 위한 - 결혼식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지만 케실리온은...` 이루린은 케디아니스가 완전히 사라지자 케실리온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대답을 듣고 싶어." 케실리온이 말해보라는 식으로 응시했다. 이루린은 조금 원망이 섞인 투로 말했다. "나와 왜 결혼한 거야? 어째서?" 케실리온은 역시나 전혀 동요하는 빛이 없이 말했다. "전에도 말했을 텐데." 이루린은 강경하게 외쳤다. "아니! 넌 사실을 말하지 않았어. 결혼은 아빠가 강제적으로 하게 한 거야. 그런데 어째서 네가 거기에 동의한 거지?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루린은 미네르바의 약속을 상기하며, 최대한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떨림을 느끼면서 외쳤다. "네겐 사랑하는 여자가 있을 텐데? 내 말이 틀렸나?"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이루린은 한숨을 짧게 쉬었다. 이런 무의미한 말싸움을 해봤자 전혀 소용없는 일이었다. 분명히 케실리온은 절대로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은 항상 케실리온과 함께 있었던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럼 결혼도 무효로 하면 되잖아? 어차피 알리지도 않은 결혼인데 어째서..." 케실리온이 차갑게 거절했다. "그렇게 하진 않을 것이다." "어째서!" "......" 케실리온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상대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였다. 이루린이 물으려고 하자, 누군가가 케실리온을 불렀다. 가느다란 고성이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이루린은 경악했다. 그 여자는 마치 자신이 거울 속에서 빠져 나온 것처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녀보다 더 창백하다는 것이었다. 여자가 미소를 지으면서 케실리온에게 다가왔다. "몇 백년 만인가... 오랜만이야. 그런데 마왕성도 달라진 게 없네." 이루린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여자를 망연자실하게 응시했다. 케디아니스는 막 마왕성을 산책하고 있다가,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멈춰 섰다. -기한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명심하도록. "집어 치워! 난..." -내 말을 거역할 생각인가? 네 자신을 탓하지 말로 네가 사랑하고 있는 그 여자를 탓해라. 모든 일의 원인은 그 여자에게 있으니까. 케디아니스는 순식간에 기분이 아래로 추락하는 것을 느꼈다. 알고는 있었지만 일상적으로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한 태도는 바꾸지 않을 작정이었다. 최소한 이루린을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또 케실리온에게 끌려가서 무슨 추궁을 들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영원한 것이라고 믿었지만 시간을 흐르고 있었다. 그가 그런 기본적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나 하나만으로도 족해. 하지만...` 케디아니스는 마왕성을 한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을 즈음,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뭔가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연신 눈을 깜박였다. 이루린이 두 명이었던 것이다. 한 명은 할 말을 잃고 서 있는 이루린, 나머지 한 명은 좀 창백하지만 외모는 분명한 이루린이 케실리온에게 미소를 지으며 뭐라고 말했다. 그러다가 이루린을 발견하더니, 매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누구죠? 나와 똑같이 생겼군요. 도대체 누구죠?" 이루린 또한 놀란 나머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이 아주 복잡하게 변했다. "이루린이라고 합니다만... 당신은..." "이루린?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데..." 창백한 이루린이 굉장히 순수한 표정으로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곧 손뼉을 치면서 대답했다. "이루린이라면 당시에 곧 태어날 예정이었던 내 동생의 이름이라고 알고 있어요. 설마..." 심각한 표정의 이루린이 갑자기 그녀에게 강경하게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라이네, 라이네 카넬리안이에요." 케디아니스는 이루린의 표정이 충격과 어떠한 불안정한 것으로 물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왕의아내-91 두 여인 "설마... 내 동생이 이렇게나..." 그런데 그 때 케실리온이 그런 라이네에게 작은 목소리로 뭐라고 말했다. 라이네는 이루린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케실리온이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기자 그 쪽으로 따라갔다. 이루린도 뭐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충격 때문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살아있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자매였다는 생각 때문일까, 웬일인지 모르게 친숙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라이네는 분명히 몇 달 동안 카란델의 저택에도 없었고, 마왕성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분명히 마왕성 입구 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녀는 분명히 마왕성 밖에서 생활하다가 온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어째서 지금 나타났던 것일까. "무슨 일이야?" 케디아니스가 걱정스럽게 다가왔다. 이루린은 심란한 상태로 케디아니스를 응시했다. 항상 그랬다. 언제나 케실리온보다는 케디아니스가 매일 퉁명스럽게 말하긴 하지만 그녀를 걱정해 주고, 챙겨주고 - 가끔 열이 뻗치게 만들어도 - 생각해 주었다. 요즘 들어서 그는 철이 들었는지 장난도 많이 치지 않았다. "내 생각인데... 아무래도 케실리온이 사랑하는 여자가 나타난 것 같아. 이름은 라이네라고, 나의 언니야." 이루린은 케디아니스의 표정이 놀람으로 바뀌는 것을 망연자실하게 응시했다. 그 이후부터 이루린은 케실리온과 라이네가 단 둘이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간간이 볼 수 있었다. 케실리온은 가면을 썼다고 착각할 정도로 표정의 변화가 없었으나 라이네는 달랐다. 그녀는 즐겁게 웃으면서 케실리온과 대화하는 것이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랐지만 이루린은 그 광경을 보는 게 굉장히 마음이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라이네에게는 어디서 어떻게 왔냐고 물었으나, 교묘하게도 그녀는 말을 자연스럽게 돌려버렸다. 이루린은 어디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밝힐 수 없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라이네에게 약간의 의심을 품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별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라이네는 굉장히 얌전했고 이루린보다 훨씬 약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마족치고는 검술을 잘 하지 못했고, 심지어는 마법도 제대로 쓰지 못했지만 주로 앉아서 하는 일에는 매우 뛰어난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이루린은 엄두도 못내는 바느질을 하면서 순식간에 옷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러한 점이 그녀의 여성스러움을 돋보이게 했다. 정말인지 외모는 거의 똑같은 데도 이루린과는 극과 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라이네를 본 카란델과 마리엔의 반응은 정말로 경악 그 자체였다. 특히 마리엔은 너무 놀래서 거의 쓰러질 듯한 모습을 보였다. "난 네가 죽은 것을 분명히 봤다. 그런데 어떻게..." "모든 사실은 차차 말씀드릴게요. 그리고 마왕성에 제가 여기에 왔다는 것은 당분간 알리지 말아주세요." 라이네가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사라지자, 카란델은 이루린에게 라이네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그녀가 어째서 사라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케실리온과 알고 있는지 전부. 길고 긴 설명이 끝났을 때 이루린은 마왕성에 도착할 때부터 미치도록 궁금하게 여겼던 것을 물었다. "전 케실리온과 결혼해야 했을 이유가 없었어요. 단순히 절 가지 못하게 하려는 수단인 건가요?" 카란델이 한숨을 쉬며 마리엔과 시선을 교환하더니, 피로에 지친 표정으로 천천히 고백했다. "사실 결혼 상대자는 네가 아니라 라이네였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라이네를 좋아했으니까. 크고 나면, 나는 라이네를 그와 결혼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러기도 전에 그녀는 죽었었지... 아니, 그랬다고 믿었지. 네 말대로 단순히 중간계로 못 가게 하려는 수단일 뿐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반신반의한 내 제안에 동의했다. 어쩌면 네가 라이네와 똑같이 생겨서일까?" 마음으로 추측하는 것보다 직접 귀로 듣는 게 더 괴롭게 느껴졌다. 이루린은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고 카란델이 머무르고 있는 방에 나와 케실리온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라이네가 있었는데, 묘하게 미소를 지으며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케디아니스와 케실리온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었어, 이루린." "무슨 일입니까?" "형제인데 그런 말투를 쓸 필요는 없잖아. 그냥 말 놔." 이루린은 아무리 같은 형제라고는 해도 편하게 대하기가 좀 껄끄러웠다. 자꾸 그녀가 케실리온과 함께 있는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그녀는 그냥 어색하게 웃은 후에 옷을 갈아입기 위해 서랍을 열었다. 그런데 그 뒤를 이은 라이네의 말이 그녀의 행동을 멈추게 만들었다. "하지만 거의 남남이나 다름없지, 안 그래?" 약간 귀에 거슬리는 말이었기에 이루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라이네를 응시했다. 햇살을 등지고 앉아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빛으로 물들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신비스러운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었으나, 다른 면으로 보면 굉장히 수상해 보이는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라이네는 편안하게 웃으면서 일어섰다. "그렇긴 해도 앞으로 잘 지내면 되지 뭐. 그리고 이루린은 검술에 꽤 일가견이 있다고 들었어. 난 검술의 검자도 모르거든. 내게 검술을 가르쳐 주지 않겠어?" 이루린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으나 라이네의 부탁이었기에 들어주기로 했다. 그녀는 벽에 걸려 있는 두 자루의 같은 검을 잡으며 말했다. "좋아." 마왕성의 공터에 도착한 이루린은 라이네와 적당한 간격을 두고 함께 자세를 잡고 섰다. 이루린은 라이네에게 자세를 잡는 법부터 검을 쥐는 법까지 차근차근 설명했다. 의외로 라이네는 그녀의 말에 잘 따랐고, 이루린도 일단 기본만 설명하고는 실전 연습에 들어가기로 했다. 이루린과 라이네는 서로를 향해 검을 들었다. "정식 대련이니?" 이루린은 라이네를 배려하기로 했다. "응, 하지만 난 방어만 하겠어. 그럼 먼저 시작해." 이윽고 라이네가 먼저 덤벼왔다. 엄밀하게 평가해서 그녀는 달리는 속도도 좋지 않고, 검을 들고 휘두르는 것도 금새 힘겨워할 만큼 약골이었다. 게다가 자세도 금방 배웠기 때문에 엉성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답답하게 만들었다. 검술을 펼친다기보다는 그냥 검을 들고 무식하게 휘두르는 것 같았다. 그 덕분에 이루린은 거의 부담을 가지지 않고 방어만 했는데도 손끝하나 다치지 않았다. 물론 방심하진 않았다. 그런데 라이네가 접근해서 검을 휘두르려는 어느 순간이었다. 갑자기 이루린은 발등에서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곤 인상을 쓰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라이네가 구두 굽으로 그녀의 발을 밟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이루린은 공격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윽고 라이네가 힘을 조절하지 못하고 그녀의 복부를 찌르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루린은 짧고 굵은 통증이 발등에서 복부로 전이되는 것을 느꼈다. 아프긴 했어도 다행히 가볍게 스쳐서 피가 그렇게 많이 나오진 않았다. "검술을 그렇게 잘하진 않는 것 같네?" 악의가 담겨 있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은근히 그녀의 귀에 거슬렸다. 발등을 밟는 행위는 대련 규칙에 위배되기 때문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라이네는 규칙을 어기고 그녀를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아직 처음이었기에 라이네를 배려하기로 했다. 그런데 라이네의 말투는 분명히 친근했으나 그 내용물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난 몇 백년 동안이나 다르게 살아왔어. 그리고 다시 이 마왕성에 돌아왔지. 그런데 참 놀랍게도 그는 다른 여자와 결혼했어. 그것도 나와 똑같이 생긴 내 동생과." `설마 일부러 발등을...` "난 언제나 그 자리를 원했지. 그리고 그 자리를 다른 여자가 차자한다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돌아왔을 때 다른 여자가, 그것도 겉으로는 가족이지만 거의 남남이나 다름이 없는 여자가 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내 마음은 어떠했을까?" 이루린이 출혈을 막기 위해 손으로 배를 감싸고 있는 사이 라이네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가 왜 결혼했는지 아주 궁금해." 이루린은 배가 쓰려지는 느낌 때문에 거칠게 외쳤다. "그건 내가 알고 싶은 사항이야." "난 그가 왜 너와 결혼했는지 대충 윤곽이 잡히지만 말하지 않겠어. 그리고 또 한가지, 결혼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거의 없잖아?" "언니..." 라이네가 검을 검집 안에 넣으며 말했다. "난 절대로 물러서지 않아." 그녀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그건 이루린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마왕의아내-92 두 여인 이루린은 난간에 서서 보름달을 응시했다. 주위에 어둠이 짙게 깔려 있을 즈음, 한기가 몸을 시리게 만들었다. 난간에 있는 것은 그녀 혼자 뿐이었다. 그녀는 누가 오는지도 모른 채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심각하게 떠올렸다. 라이네는 분명히 케실리온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겠다고 선전포고했다. 이루린으로서는 그런 라이네의 변화가 기가 막히게 느껴졌다. 조용하고 얌전하고 온화한 그녀가 한 순간에 사악한 악마처럼 보인 것은 착각이었을까. `그 여자가 케실리온과 결혼하는 건 내가 알 바가 아냐. 하지만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 거지?` 이루린은 요즘에 케실리온이 거의 방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전부터 알고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는 대단히 바쁜 모양이었다. 그런 그의 행동도 불안했지만 무엇보다도 더 이상 시험을 치르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녀를 허탈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녀에게는 이득이었지만 갑자기 시험을 치르지 않는다는 이상했다. 시험이 중단되어서 이제 집으로 돌아가지 않느냐고 카란델에게 물으니까, 그는 조금 당황해 하면서 그냥 당분간은 그대로 살고 있으라고 말했다. 라이네가 있는 상황에서 그냥 확 케디아니스와 도망칠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케실리온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언제나 일정하게 유지되던 생활이 뒤틀린 느낌이었다. 케실리온도 그렇고, 케디아니스도 조금 이상했고, 또 새로운 마족이 등장한 것이 그 이유였다. 특히 라이네는 정말로 황당한 노릇이었다. 막 난간에 몸을 기대고 한숨을 쉬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누군가의 모습이 달빛에 서서히 드러났다. 자세히 보니 그 여자는 라이네였다. 라이네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나도 잠깐 끼어도 될까?" 이루린은 낮의 일 때문에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마음대로." "넌 내 동생인데도 너무 멀게 느껴져. 아무리 오래 떨어져 있었다고는 하지만 말이지..." 이루린은 차갑게 라이네의 말을 끊었다. "그래서 요점이 뭔데?" 라이네의 얼굴에 의미 모를 미소가 감돌았다. "이 말을 하면 넌 어떻게 반응할까? 사실 말이야, 난 네가 누군지 알아." 이루린은 그 말을 금방 이해하지 못했다. "난 언니의 동생이잖아? 왜 그런 걸 묻지?" 라이네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이루린이라는 껍데기가 그렇게도 마음에 들었니?" 그 말에 이루린은 간만에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라이네가 그녀가 진짜 이루린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그녀 자신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처음으로 라이네와 대면했는데 어떻게 그 사실을 안단 말인가. "어떻게..." "묻지는 마. 그런다고 내가 대답하진 않을 거니까." 별로 충격적이지 않은지 라이네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 있게 말을 이었다. "난 네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알고 있어. 그리고 말하는 김에, 넌 요즘 이 마계가 어떻게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이루린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잠시 가만히 있다가 마계에 인간이 들어올 수 있도록 차원의 문을 열어놓은 행위, 엘리세아와 루시안의 이상한 대화, 케실리온의 바쁜 행동, 예카트레스라는 남자의 등장 등을 토대로, "정치 분야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 그쪽 일과는 관계조차도 없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지? 대충은 현재 상황이 그리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하지만..." 라고 얼떨결에 대답했다. "이런 생각 해보지 않았니? 만약에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일이 너와 관계가 있다면? 그리고 그 일들이 일어나는 중심에 네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면? 네가 그 일이 일어나는 원인의 핵심이라면?" "...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갑자기 라이네가 말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케디아니스라고 했나? 그 소년은 나와 동질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더군. 난 꼬마가 마음에 들었어. 내가 제안을 하나 할까? 네가 케디아니스와 함께 영원히 중간계로 가면, 너와 나, 그 소년 모두 이득을 보는 거야. 내가 확실하게 도망치도록 도와주지." 이루린은 라이네의 질문에 고민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말하려고 하니 그리 쉽지 않았다. 분명히 중간계로 가고자 하는 마음은 있었으나, 옆에 케실리온이 딱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이유가 과연 그것 때문일까?` 잘 몰랐지만, 그녀는 항상 같이 지냈던 케실리온과 영영 이별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당연히 한 번 중간계로 가게 되면 다시는 마계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게 싫었다. 결국 그녀는 완강히 거부했다. "난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그와 결혼했으니까." 갑자기 웃고 있던 라이네의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이루린조차도 놀랄 정도로. 그녀의 매우 섬뜩한 얼굴이 시린 달빛에 의해 돋보였다. 뭔가가 예감이 좋지 않다고 판단한 이루린은 난간을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라이네가 그녀를 도망가지 못하게 막았다. "무슨 짓이지? 윽....!" 이루린은 갑자기 몸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어지럽고 굉장히 몸이 나른해졌다. 힘겹게 눈을 떠서 앞을 응시했을 때, 이루린은 라이네가 향수병처럼 생긴 것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다가 결국 난간은 잡은 채로 바닥에 앉았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나도 극단적인 방법을 쓰는 수밖에. 지금부터 나는 아주 재미있는 놀이를 할거야." "무, 무슨?" 이루린은 라이네가 향수병 든 채로 품에서 뭔가를 꺼내는 것을 응시했다. 점점 정신이 혼미해져서 앞을 제대로 분간할 수도 없었다.... 라이네가 이루린에게 그것을 들이밀었다. 이루린은 그것을 보지도 않고 일어나려고 노력했지만 마취향을 썼는지 몸이 완전히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그것을 자세히 봤을 때,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루린은 있는 목소리로 일단 쥐어 짜내듯이 외쳤다. "내 옷...? 무슨 짓이지? 내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넌 지금 이 순간부터 이 마왕성에서 자취를 감추는 거야. 바로 이 향수병에 가둬지는 거지." 라이네는 자조적으로 웃으면서 향수병을 흔들었다. 그리고 자조적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네 옷을 입고 이루린이 될 거야. 사실 거의 대부분이 우리 얼굴을 분간하지 못해. 그렇지? 케디아니스라는 소년도 내가 조금만 너처럼 꾸미면 알아보지 못하지. 케실리온이 미지수이긴 하지만, 그도 날 알아보지 못할 거야. 내가 이루린처럼 행동하고 옷을 입으면 말야." 이루린은 하도 기가 막혀서 말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현재 그 이상한 마취향만 마시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한참 라이네에게 보복을 가했을지도 모른다. 라이네가 만약에 자신처럼 꾸미고 의도적으로 나쁜 행동을 하고 다닌다면 그것이야말로 큰일이었다. 그 때 라이네의 말이 그녀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난 이 상태로 케실리온에게 가서 사랑한다고 거짓으로 고백할 거야. 그럼 어떤 일이 일어날까? 넌 멀리서 케실리온의 대답을 듣고는 비참한 기분을 느끼겠지. 그리고 죄도 좀 저질러 줘야겠지? 그리고 그 소년에게는 상처를 주는 거야. " 그 말에 그녀는 강제적으로 흐려지는 정신이 도로 돌아오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케실리온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려고 하다니...!"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점점 정신이 아득해져가자, 그녀는 난간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바닥에 쓰러졌다. 멀리서 라이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잘 지켜봐, 내가 어떤 짓을 저지르는지." 마왕의아내-93 두 여인 케디아니스는 침대 위에서 뒹굴뒹굴 구르고 있었다. 하도 할 짓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 또래의 소년들도 이미 중간계로 돌아갔고, 현재 이루린도 아침부터 사라져서 아예 눈에 띄지 않고 있었다. `하루종일 어디 간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케디아니스, 케실리온은 어디에 있지?" 이루린이었다. 그녀는 묘하게 웃으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케디아니스는 괜히 심심하던 차에 이제 나타났다고 생각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잘 알고 있잖아! 일에 쫓겨서 매일 이 방에 자주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 아니면 또 마왕성 뒤쪽 공터의 고목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 지도 모르지. 어? 그런데 그 병은 뭐야?" 이루린은 처음 보는 향수병을 흔들면서 문을 닫고 들어왔다. 향수병 안은 흐려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자신이 닿을 수 없는 높은 옷장 위에 올려놓고는 케디아니스에게 다가왔다. 그 직후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너, 나 좋아하지? 그런데 어쩌니? 난 네가 너무 싫어." 이루린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하고 무서웠기에 케디아니스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는 자신의 속마음을 들켰다는 당혹스러움, 그리고 단도 같은 것으로 예민한 응어리를 산산조각 내는 느낌, 거기다가 자신의 마음에 대한 이루린의 적대감이 너무 힘들게 다가왔다. 케디아니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너 같은 애송이가 사랑을 알아? 웃기지 마. 인간으로 따지면 고작 10살 밖에 되지 않는 네가 사랑을 안다고?" 그만 말해. 케디아니스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이루린의 독설이 케디아니스의 귓가를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당장 이 곳을 떠나! 네가 무슨 권리로 이 곳에 머무르고 있는 거지?" 네가 내게 너무 귀찮은 존재라는 것 알아?" 이루린이 이 정도로 남을 배려하지 않고 말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케디아니스는 이루린이 절대로 아이나처럼 당하고만 있는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긴 해도 이루린은 절대로 누군가에게 의도적으로 상처를 주거나 매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이루린은 너무나도 잔혹하게 그를 대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감정을 무참히 짓밟고 짓이겼다. 그는 울고 싶었지만 꾹 참고 입을 열었다. "내가 그렇게도 귀찮은 존재였어?" 이루린의 악질적인 미소가 그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당연한 걸 묻지 마." 갑자기 이루린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서운하고 원망스러운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신경질이 났다. 어떻게 감정을 다스려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루린에게 큰 소리로 화를 냈다. "좋아, 떠나겠어! 다신 날 찾지 마. 나도 이 곳에서 언제까지나 바라보기만 하는 것도 이제는 지긋지긋해." 마음에도 없는 말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이제는 떠나야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이미 이루린은 케실리온과 결혼한 상태였고, 케실리온이 원하지 않는 한 결혼을 깰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윤리적으로도 결혼을 깬다는 것 자체가 케디아니스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녀가 이미 케실리온과 결혼한 순간부터 떠나야 한다고 마음은 먹었었지만, 그게 제대로 되지 않았다. "넌 그거 모르지? 사실 난 케실리온을 깊이 사랑하고 있단 말야. 설마 그걸 깨뜨리진 않겠지? 진정으로 날 좋아한다면 떠나는 게 옳지 않겠어?" "그래, 어차피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케디아니스는 그렇게 이루린에게 차갑게 말하곤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이대로 워프 전용 방으로 가서 중간계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이제 마왕성과도 영영 안녕이었다. 아니, 영원히 안녕은 아니지만. 라이네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옷장 위에 얹어져 있는 향수병을 향해 말했다. "이 상황이 아주 멋지지 않아? 그 소년이 중간계로 가면 넌 해명을 하기 위해서라도 쫓아가야 할거야. 그러면 자연히 너는 마왕성을 벗어나게 되는 거지." 들리기도 할 것이고 안에서만은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단지 말할 수 없겠지만. "난 케실리온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네가 알고 있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그의 생각도 읽을 수 있지. 물론 지금은 미지수지만. 그다리고 있어, 그렇게. 그러면 내가 소식을 가지고 올 테니까." 라이네는 향수병을 향해 노골적으로 미소를 지은 후에 밖으로 나갔다. 라이네의 예상대로 공터에는 케실리온이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라이네는 그런 케실리온과 함께 어울릴 생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옛날에 케실리온과 함께 공터에서 놀던 기억이 생각났다. 그 때의 케실리온은 굉장히 그녀를 잘 따랐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았지만... "나야, 이루린. 오늘도 이 곳에서 자는구나?" 라이네의 말에 케실리온이 반응을 보였다. "여기는 왜 왔지?" 케실리온은 나무 위에서 일어나서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 사실은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 "......" "사랑하고 있어, 케실리온. 너와 같이 하룻밤을 보내고 싶어."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케실리온은 완전히 라이네, 그녀의 것이 되는 것이다. 케실리온은 그녀의 말에 즉각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한참 라이네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더니 그대로 다시 나무 위에 누워서 고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라이네는 그런 케실리온의 행동에 당황했다. "왜 대답을 하지 않는 거야?" 케실리온이 그 자세 그대로 말문을 열었다. "어설프군. 생각을 전하러 온 건 아닐 테고. 무엇이 널 그렇게 변하게 만들었나."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변했다니? 난 변한 게 없..." 케실리온이 빠르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함부로 행동하지 마라." 그 말에는 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라이네는 케실리온의 날카로운 직관력에 무엇인가가 찌르듯이 등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순간이었다.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싶다고? 그 여자가 그런 말을 직접 할 정도로 아무 감정이 없는 줄로 아는가. 이건 옛정을 생각해서 내린 경고다. 이 이상 허튼 짓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 라이네는 그 때까지도 케실리온이 자신을 이루린이라고 여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케실리온의 말은 그녀의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다. "몇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모양인데, 넌 이제 비참한 희생양일 뿐이다. 난 네가 그 때 죽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라이네는 그제서야 이루린으로 연기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갑자기 케실리온에게 두렵다는 감정을 느꼈다. 이제 보니 그는 자신과 쌓았던 좋은 추억을 모조리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안타깝고 서운한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왔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좀 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여차하면 이루린을 영영 죽이는 방법도 있었고, 일부러 이루린인 것처럼 죄를 저지르는 방법도 있었다. 물론 케실리온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마왕의아내-94 두 여인 라이네는 당황해서 주저주저했다. "어째서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거지? 넌 언제나 그랬잖아. 옛날에도 입버릇처럼 날 지켜주겠다고. 언제부터인가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그녀는 케실리온의 무관심한 행동이 싫었다. 그리고 케실리온이 그러면 그럴수록, 이루린에 대한 미움도 깊어졌다. 이루린만 아니었어도 자신이 케실리온을 차지할 수 있었다. 아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옛날부터 라이네,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라이네 또한 그 당시에 케실리온이 어렸기 때문에 좋아하는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 때부터 사이만 좋았지 남녀로서의 관계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케실리온은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라이네에게 차가운 시선을 날렸다.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나. 원한다면 이 자리에서 죽여줄 수도 있다." 그런 케실리온의 대답에 라이네는 큰 충격을 먹었다. 이렇게까지 냉정해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라이네는 목구멍을 뚫고 나올 것처럼 격한 어떤 감정을 억지로 삭이면서 말했다. "어째서... 그런 행동을 내게 할 수 있다는 거지? 네게는 기억도 없어? 예전에 너와 내가 가졌던..." 케실리온이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말을 잘랐다. "나는 그 날 분명히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이상의 대답은 필요 없겠지." 그 말에 라이네는 더 말할 수 없었다. 케실리온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케실리온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나무 위에서 가볍게 뛰어 내리더니 망토를 이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참 향수병에서 독한 향수만을 맡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자고 있다가 케실리온에 의해 구출되었다. 구해준 직후 멀리 떨어진 그의 행동이 그녀를 인상쓰게 만들었다. "지독하군. 안에서 향수로 물놀이를 했나?" 이루린은 케디아니스가 완전히 떠났다는 사실을 듣고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더불어, 허탈하고 공허한 마음을 더 횅하게 만들었다. 케디아니스를 막을 수 없다는 무력감과 라이네에 대한 패배감 때문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리석게 당했던 자신에 대한 분노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몰라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몸이 망가지거나 가볍게 충격을 먹는 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제 3자가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분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제 3자는 다름 아닌 케디아니스니까. 케디아니스가 그런 식으로 오해하고, 상처를 입고, 자신을 원망하며 떠났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지금쯤이면 중간계에 도착했을지도." 케디아니스가 오지 않는 한 ?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루린은 당장 가우드를 챙기고 케실리온에게 격한 어조로 외쳤다. "그 여자 지금 어디에 있어!" 케실리온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대꾸했다. "가족 맞나?" "지금부터 혈연이고 뭐고 없으니까 빨리 말해 줘!" 이루린은 케실리온의 대답에서 좀 더 확실한 무엇인가를 원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무책임하기만 했다. "어딘가에 있겠지." 이루린은 당장 검을 들고 나가려다가, 뭔가가 석연치 않아 그대로 있었다. 그러고 보니 라이네와 케실리온이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데 그런 그의 앞에서 라이네를 잡겠다고 길길이 날뛰는 건 좀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라이네를 잡으려고 하는 데도 아무렇지도 않아?" "... 상관없다." 이루린은 그런 케실리온을 한참 응시한 후에 밖으로 나갔다. 이루린은 모든 것이 자꾸 변해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특히, 케실리온과의 관계는 더 그랬다. 예전에는 그가 누구하고 있든 말든 그리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는데 결혼을 하고 나니 남편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까, - 물론 케실리온의 성격상 관리 자체가 필요 없었다. -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갑자기 그의 주위가 신경 쓰이는 것이었다. 또 변한 게 있다면 밤에 잠을 잘 때였다. 예전에는 추우면 바로 케실리온의 품에 애벌레처럼 기어 들어가서 자곤 했는데, 지금은 추워도 끝까지 참고 견디게 된 것이었다. 뭐랄까, 서로 접촉하는 게 상당히 불편하고 민망해진 기분이었다. 남편이라고 생각해서인지도 몰랐다. 라이네는 이루린을 거의 식물로 만들 작정으로 밤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밤이 되었을 때, 그녀는 이루린이 자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만약에 이루린을 거의 식물로 만든다면,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할 것이다. 물론 보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 무방비한 상태에서 없애면 어느 누구도 그녀가 이루린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물론 케실리온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였다. 그가 있으면 당연히 계획이 틀어지는 게 당연했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 이루린이 자고 있을 방에 당도했다. 그리고 한 번 주위를 둘러본 후에,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어두운 적막감이 감돌고 있었다. 단지 창가로 스며드는 달빛이 주위를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일단 그녀는 침대 쪽으로 다가가서, 뽑아든 검으로 이루린이 자고 있는지 건드려 보았다. 예상대로 그녀는 자고 있는지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라이네는 품에서 향수 한 병을 꺼냈다. 바로 뇌사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아주 강력한 향수였다. 그리고 바로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마개를 뽑아들려는 순간, 불이 켜졌다. 라이네는 어둠이 사라진 사실에 당황해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문 바로 옆에 이루린이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서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검을 위협에 가깝게 쥐고서. 라이네는 자신이 문을 열었을 때 바로 그 옆에 이루린이 있었다는 사실을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하며 후회하면서도 당황했다. 그녀는 검으로 황급히 침대 이불을 걷었으나, 그 곳에는 둘둘 말린 베개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루린이 차갑게 웃으면서 녹색 빛이 감돌고 있는 병을 하나 꺼내 노골적으로 흔들었다. "그 향수를 쓰려고? 그런데 어쩌지? 이건 해독제거든. 명의가 만든 물건이라, 웬만한 향수에는 끄덕도 하지 않지. 그리고 이차적으로 나도 후각을 마비 상태로 만들게 하는 약을 먹었으니, 향수를 쓰는 건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언니?" 이루린은 언니라는 단어에 이가 갈릴 정도로 힘을 주었다. 라이네는 자신이 그녀의 가벼운 꾐에 빠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죽일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적어도 라이네는 그렇게 생각했다. 또 놀랍게 생각했던 것은 착하고 순진하게만 보였던 이루린의 태도였다. 그녀는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케디아니스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응? 지독하게 상처만 주는 말을 골라서 했다면서? 나로 가장하고? 만약에 그 상태에서, 내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행동을 했다면 어떻게 처신했을지 몰라, 언니. 물건 한두 개 정도는 부수고 시작하게 될 거야." 이루린이 목을 위협적으로 푸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언니 말이 백 번 맞아.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가족이겠어? 정확하게는 피를 나눈 남남이나 다름없지 않겠어? 케디아니스는 당장 이 곳으로 데려오지 않으면 내가 지금부터 어떻게 나갈지 몰라." 분명히 경고성 어린 말이었지만 라이네는 일부러 코웃음쳤다. 그런 이루린의 협박 따위가 단지 말 뿐이라고 생각되어서였다. 실제로 그녀는 정말로 말만 번지르르하게 경고만 했지, 속으로는 무서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루린이 말만 앞세운 행동 따위는 모르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싫다면? 그 꼬마는 벌써 중간계에 도착해서 널 평생 원망하며 살 거야. 내가 그래야 할 이유는 없잖아? 차라리 지금 이 자리에서 널 죽여버리겠어." 갑자기 이루린이 자세를 바꾸더니 검을 치켜들었다. 라이네는 조금 놀랐지만 아직까지는 무시하기로 했다. "난 불륜 관계는 딱 질색이라서 말이야. 지는 자가 깨끗하게 물러나기. 어때? 만약에 내가 패배하면 차라리 언니의 손에 고이 죽겠어. 만약에 언니가 패배하면, 이 마왕성에서 그냥 깨끗하게 물러나기만 하는 거야. 어때, 언니에게는 좋은 조건이지?" 당연히 자신이 패배해도 물러날 리는 없었다. 괜히 두려우니까 일부러 라이네, 자신 쪽으로 좋은 조건을 달아서 응하게 만들려는 것을 보라. 진짜로 이루린은 순진한 것 같았다. 라이네는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갑자기 이루린의 입가에 따스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런데 좀 몇 대 맞고 시작했으면 좋겠어." 그 순간 이루린이 완전히 돌변했다. 마왕의아내-95 두 여인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분이 풀릴 때까지 마구 폭력을 휘두른 결과, 결국 라이네는 충격을 먹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는 이제 운동을 했으니 심판을 할 차례라고 생각했다. "케디아니스를 당장 이 곳으로 대려 와!" "......" "어서 대답해!" 라이네가 쓰게 웃으면서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그녀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어디 있는지도 모를뿐더러, 난 마계를 벗어나지 못해." 조금은 슬픈 듯한 그녀의 미소가 이루린의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일단 검을 그녀에게 겨눈 채로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언니가 날 죽이려고 한다면 내가 먼저 언니를 죽이는 수밖에는 없어?" 예상 밖이게도 라이네의 얼굴에 지친 무엇인가가 떠올랐다.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깔며 한숨을 쉬었다. "그럼 어서 죽여. 상관없으니까." 의외의 대답에 당황한 이루린은 잠시 그대로 있었다. 라이네는 정말로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무방비한 상태로 있었다. "이쪽에서 죽으나, 저쪽에서 죽으나 상관없겠지." 라이네의 의미 모를 중얼거림이 그녀의 귀에 또렷이 들렸다. "그거 알아? 난 널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어. 그런데 네 주위에 항상 케실리온, 그가 있어서 실행에 옮길 수 없었지." 결혼했으니까 남편으로서 지켜주는 건 당연했다. 아니, 어쩌면 이상한 결혼이었기 때문에 남편이 아닌지도 몰랐다. 라이네의 입에서 심상치 않은 내용이 흘러나왔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모든 사실을 말하겠어. 사실 난 그를 사랑하지 않아. 생각을 해 봐. 내가 죽었을 당시에, 그는 이제 겨우 청년이 되었어. 그렇게 어린 남자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을까?" 라이네의 그 말에 이루린은 당황했다. 그녀를 빤히 응시했으나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그럼 도대체 왜..." "케실리온의 마음을 억지로라도 내 쪽으로 돌리지 않으면, 조건에 의해 죽게 되어 있으니까. 겨우 살아난 게 아무 의미가 없어지니까." 라이네의 눈가에 갑자기 눈물이 고였다. "미안해. 난 단지 살아나고 싶었어. 그래서 내 가족들과 함께 단란하게 하는 게 꿈이었어. 난 죽지 않은 게 아니라, 죽었다가 나와 계약을 맺은 그 자에 의해 살아난 것 뿐이야. 물론 어리석게도 결국 난 희생양이 되었지." 이루린은 라이네의 말이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그 자라니. 그 자가 누구지?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난 네가 모르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어. 모든 사실을 말해주는 건 힘들어.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딱 한 마디야. 당장 이 곳에서 도망쳐! 그렇지 않으면...." 그 때였다. 갑자기 어떠한 기척도 없이 누군가가 그녀의 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을 쓴 것 같지는 않았기에 놀라웠다. 그 자리에 나타난 자를 보았을 때, 이루린은 그 자가 매우 낯익다고 생각했다. 천으로 모든 부위를 가리고 있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도 가지 않는 자였다. 그 자의 입에서 중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괘씸한 여자여... 기껏 살려두었더니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해서는 안 될 행동까지 하려 하다니. 그 죄, 죽음으로 갚을 것이다." 그 자가 말을 마치고 뭐라고 중얼거렸을 때였다. "아악!" 라이네의 입에서 짧은 비명소리가 터졌다. 그녀는 독약을 먹은 듯이 심하게 목을 부여잡고 꿈틀거리더니, 곧 바닥에 쓰러지는 것이었다. "예, 예카트레스... 님!" 그 자를 향해 부르는 그 이름에 이루린은 다시 한 번 멈칫했다. 전에도 한 번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아니, 한 번이 아니라 꽤 여러 번 들었던 이름이었다. 세이젠이 죽기 전에 라이네처럼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던가. 케디아니스가 풀려날 때, 그 옆에 예카트레스라는 자가 있지 않았던가. 결국 어느 순간에 심하게 튀어나온 근육들이 모두 수그러들더니 그녀는 곧 고개를 떨구었다. 분명히 죽은 것이었다. 어차피 이루린, 자신이 죽이려고 한 여자였지만 막상 다른 자의 손에 죽으니 너무 끔찍하게만 느껴졌다. 이루린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냥 말로만으로도 가볍게 죽인 그 자, 예카트레스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품었다. 죽음이 이렇게 허무하게 다가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너무 잔인하잖아!" "죽었는가. 어리석은 여자로군. 그럼..." 예카트레스는 이루린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다시 사라지려고 했다. 그러나 이루린이 그러기도 전에 선수를 쳤다. "도대체 왜 전부터 내 주위를 맴도는 거지? 언니와는 무슨 관계며?" 예카트레스가 등을 돌리더니, 천천히 이루린에게 다가왔다. 이루린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뭔가가 상대할 수 없는 강력한 느낌이 그 자의 몸에서 뻗어 나오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의미 모를 소름이 돋았다. "실제로는 진짜 자매도 아니면서... 잘도 언니라고 부르는군." 차갑게 비꼬는 듯한 말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당연히 피를 나눈..." 예카트레스가 빠르고도 여유 있는 투로 말을 잘랐다. "당연히 겉껍데기로 피를 나눈 남남이겠지. 참으로 멋지군. 여동생은 무늬만 이루린이고, 대신에 그 언니는 육체는 죽고 정신만 살아 있더라... 멋지지 않은가?" 이루린은 순간 놀랐지만 침착하게 있었다. 예카트레스는 라이네처럼, 자신이 겉만 이루린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차라리 태연한 척 하면서 그에게서 사건의 내막을 알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한 이루린의 속을 알고 있는 것인지 예카트레스를 입을 다물었다. "이런... 그가 오고 있군. 너의 사랑하는 남편이. 그래, 넌 항상 그런 식이지..."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이루린은 들어오고 있는 마족이 다름 아닌 군주라는 사실에 잠시 몸을 굳혔다. 그가 어떻게 알고 이 곳에 온 것일까. 그리고 예카트레스는, 어째서 남편인 케실리온이 온다고 말한 것일까. 또 예카트레스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일까. 모든 게 의문스러웠다. `케실리온이 뒤에 따라온 건가?` 그것도 아니었다. 분명히 문으로 들어온 남자는 단 한 명, 군주였다. 이루린은 도대체 케실리온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몰라 인상을 찌푸렸다. 어쩌면 예카트레스가, 자신의 결혼 상대자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 가면, 마음에 안 드는군. 기왕 이렇게 된 것, 이제 밝힐 때도 되지 않았나?" 이루린은 군주를 빤히 응시했다. 가면만 제외하면 누군가와 너무나도 닮았다. 예카트레스의 말을 자꾸 머릿속으로 상기하며, 그녀는 그가 이 곳에 나타난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누군가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그러나 이루린은 이내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해, 그 얼굴을 지워버렸다. 군주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좋다, 어차피 검을 들고 상대하기에 가면은 너무 거추장스럽지." 이루린은 군주가 가면을 푸는 것을 천천히 응시했다. 갑자기 두려워졌다. 군주의 본 얼굴을 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설마하는 심정으로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윽고 그가 벗은 가면이 바닥에 떨어졌다... 마왕의아내-96 두 여인 이루린은 순간 숨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뇌가 그대로 정지해 사고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한 번 눈을 뽑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너, 너... 아, 아니 당.. 당신은...." 이루린은 말을 하다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한참 입을 벌린 채로 몸을 굳혔다. 이건 정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군주의 가면이 사라진 그 곳에는 그녀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자의 얼굴이 있었다. "장소를 옮기도록 하지." 예카트레스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좋아, 마음대로." 그가 사라지려고 하자, 이루린은 다급한 마음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잠깐, 케실리온. 아, 아니.. 군주님." 이루린은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지 난감해서 말을 더듬었다. 케실리온이, 자신이 너무나도 편하게 대했던 케실리온이 군주였다는 사실은 그녀를 경악으로 몰아넣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그녀로 하여금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장난치는 거야. 분명히 그런 거야!" 이루린은 그렇다고 믿고 싶었다. "굳이 말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말하지 않는 게 당연하지 않나? 그리고 시체는 알아서 치우도록." 하기야 그가 말하지 않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여태까지의 상황을 모두 종합해 보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시험을 치르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게다가 시험을 통과하도록 도와주기까지 했다. 어째서 그랬던 것일까? 예카트레스가 사라지자, 케실리온, 아니 군주도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루린이 그와 예카트레스에게 질문공세를 퍼붓기도 전에. 이루린은 허탈한 마음으로 죽은 라이네를 응시했다. 놀랍게도 라이네의 몸은 급속도로 썩어가더니, 잠시 후에는 완전히 모래로 변했다. 다행히 시체를 치울 필요가 없어서 좋긴 했지만 씁쓸했다. 그녀는 모래를 적당히 치우고 나서, 적막감이 감도는 방에서 침대에 앉았다. 모든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나도 힘들었다. 라이네의 죽음, 케디아니스와의 이별, 예카트레스의 이상한 행동, 편하게 지냈던 케실리온이 알고 보니 군주였다는 사실 등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상황을 파악하고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케실리온이 군주였다. 그랬던 것이다. 그녀는 케실리온의 신분을 의심하긴 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가 어째서 그렇게 강했는지도 이해가 갔다. 그가 마계에서 최고의 권위자라는 사실은 그녀를 매우 난감하게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평소에 그녀는 케실리온에게 너무 편하게 대한 나머지 잘못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뭐, 그런 일로 일일이 시비 걸지는 않겠지. 그건 그렇고 예카트레스.. 상당히 기분이 나쁜 자야. 적군인지 아군인지 아직까지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아. 아니, 최소한 아군은 아니야. 그리고 라이네를 시켜서 그런 짓을 저지르게 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 자는 도대체 누구를 겨냥하고 있는 거지? 나? 아니면 군주? 그리고 내가 진짜 이루린이 아니라는 것도 그 자는 알고 있었어.` 이루린은 한숨을 쉰 후에 다시 생각했다. `케디아니스는 어떻게 설득하지? 아니, 현재는 이 마왕성조차도 벗어날 수 없어. 잠깐, 그러고 보니 난 케실리온과 결혼이 아닌 결혼을 했지. 또 그는 군주야. 그렇다면 난 지금 군주하고 결혼한 상태...? 그래, 이제 알겠어. 카란델은 서열 10위 이내의 마족이니까 케실리온이 누구인지도,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내가 군주하고 결혼하는 대신, 시험을 중지시켰던 거지. 시험의 핵심인 군주가 나와 결혼했으니까. 정말인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전개가...` 일단 이루린은 방을 서성이는 짓을 더 이상 그만두고 밖으로 나갔다. 카란델을 만나 보기 위해서였다. 카란델을 찾는 것에는 시간이 한참 걸렸다. 처음에는 그의 방에 갔었지만 시녀말고는 없었다. 시녀의 말에 의해 그녀는 회의가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고 한다. "아이나는 어디에 있어? 아이나에게 시킬 일이 많은데..." "모르겠어요, 아까부터 보이지 않네요. 어디에 쓰러져 있거나 자고 있나봐요. 워낙 몸이 허약한 애라..." 이루린은 한숨을 쉬면서 회의가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역시 그 곳에 있던 보좌관인 데이비드가 카란델이 원로들의 회의실로 갔다고 말했다. 그 즈음, 이루린은 계단을 엄청나게 오르내리는 탓에 신경질이 날 지경이었다. 겨우 원로들의 방이 있을 층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워낙 그 층에 방이 많았던 터라 원로들의 방이 어디에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결국 한참을 헤매고 헤매 복도를 지나 거대한 홀에 진입했을 때, 이루린은 거대한 진실의 거울이 홀 구석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전에 그 거울에서 워낙 신기한 것을 보았기에, - 이상한 나체의 금발 여자 - 이번에도 또 신기한 것을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이 그리 좋은 건 아니었지만 워낙 지쳤던 지라, 기분도 풀 겸 그 곳으로 향했다. 거울 앞에 선 그녀는 가만히 거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러자 역시나 그녀의 예상대로, 거울의 면이 갑자기 부드럽게 소용돌이치더니 곧 잠잠해졌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이상한 여자의 모습 대신에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 그 장면을 유심히 응시한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뒤로 물러섰다. 바로, 그녀의 끔찍한 기억 중 하나가 거울 속에 나타난 것이었다. `저건... 내 실수로 아빠와 동생인 윤이가 죽었을 때...` 악몽과도 같은 기억이었다. 꿈에서도 간간 자주 출현한 장면 중의 하나여서, 그녀는 그 장면이 어떻게 끝날지 다 알고 있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거울 밖에서 3인칭의 시점으로 어렸을 적의 모습을 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조금 새롭기도 했다. `뭐지?` 이윽고 사고는 났고, 거울 속의 그녀와 진짜 아버지, 그리고 윤이가 피를 흘린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데 장면이 조금 이상했다. 그녀가 알기로 분명히 아버지는 목이 부러진 상태로 죽었는데, 거울 속의 아버지는 목이 멀쩡했던 것이다. 그리고 경악스럽게도 아버지가 눈을 서서히 뜨더니, 손으로 피가 흐르는 머리를 부여잡고 잠시 후에는 살짝 흔드시는 거였다. 그 기가 막힌 광경에 이루린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 때였다. 거울 속에 있던 윤이가 서서히 눈을 떴다. 그런데 문제는, 뒷자석에 그녀와 나란히 앉아 있던 윤이가 품에서 이상한 밧줄을 꺼내더니 그대로 아버지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밧줄이 워낙 날카로웠는지 순식간에 그대로 목이 잘렸다. 아버지가 어떻게 밧줄을 풀 사이도 없이. 윤이의 충격적인 행동은 이루린에게도 그대로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윤이의 행동이 진짜인지, 아니면 거울이 꾸며낸 허구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이건 거짓말이야! 초등학교에 입학도 하지 않은 어린 아들이 아버지의 목을 잘라 죽여?` 이루린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또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갑자기 윤이가 손을 모으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윤이의 손에 거대한 다이아몬드 같은 돌이 생겨났다. 그는 그 돌처럼 생긴 것을 그대로 거울 속의 이루린, 바로 자신의 오른쪽 가슴 안에 넣었다. 그 때까지도 거울 속의 그녀는 기절한 채로 누워 있었다. 다시 윤이가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윤이와 똑같이 생긴 소년이 바로 옆에 생겨났다. 그는 그 소년을 차에 앉힌 다음 아버지를 죽일 때 썼던 이상한 밧줄로 목과 머리 부근을 조금 세게 힘을 주어 그었다. 그러자 그 소년에게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윤이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감돌았다. 잠시 후에 그는 다시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놀랍게도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배경이 현재 그녀가 있는 이 세계가 아니고 한국이었기에 순간적으로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아니, 그것을 떠나서 윤이가 한 행동들이 모두 이해가 가지 않는 그녀였다. 가뜩이나 혼란스러운데 더 충격을 먹은 이루린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윤이가 그런 짓을 하다니. 아니, 상식적으로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자기 아버지를 죽일 만한 행동 능력이 없을 나이이지 않은가. 아버지를 죽인다는 것 자체도 웃기는 일이었다. `사실일 리가 없어. 거짓말이야.` 이루린은 그렇게 단정하고는,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 진실의 거울을 적대적인 시선으로 응시했다. 뭐가 진실을 거울인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세계로 와서 초기에 피를 토했던 그 상황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항상 그녀는 폭주할 때도 오른쪽 가슴이 아팠었다. 그렇다면 설마 그 이유가 바로 윤이의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루린... 여기에 있었느냐? 네가 날 찾고 있다는 말은 들었다." 이루린은 뒤를 돌아보았다. 카란델이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루린은 일단 진실의 거울에 대한 생각은 접고 카란델과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그녀는 카란델과 함께 밤이 깊어가도록 대화를 나누었다. 예상대로 카란델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난 알지 못했지만, 나중에 군주님께서 그러시더구나. 진짜 라이네는 예전에 이미 죽었고, 최근에 나타난 것은 육체는 껍데기고 단지 기억만 살아 있는 라이네라고." "절 중간계로 보내주세요! 케디아니스가...!" 예상과는 다르게 카란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요즘 세 차원계의 신경전이 극도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느냐? 서로 첩자를 보내는 일도 다반사지. 로드의 아들과는 나중에 만났으면 한다. 그 쪽에서도 네가 오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케디아니스도 로드에게서 수업을 받아야 하고, 새로 약혼녀도 정해야 하니까. 그리고..." 카란델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널 군주님과 정식으로 결혼시키기로 했단다. 단지 전처럼 무늬만 결혼이 아니라, 세상에 알리는 대규모의 결혼식 말이다. 넌 진정으로 그의 아내가 되는 거지." 이루린의 귀에는 그 말이 악몽처럼 들렸다. 마왕의아내-97 죽음과 사랑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케실리온과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신다면, 이러시지 마세요, 아빠." 그 말이 이 곳에서 통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정식으로 그의 아내가 된다는 것,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평생 목석 같은 남자와 어떻게 산단 말인가. `물론, 그와 있으면 편하긴 하지만, 그렇지만... 한 번도....` 카란델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넌 해야 한다, 반드시. 그것은 나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또 너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만약에 하지 않는다면, 또 강제로 가두는 수밖에 없겠지." 카란델의 진지한 눈동자에 이루린은 어색하게 웃음으로 대꾸하면서 침을 삼켰다. 분위기로 봐서 카란델은 반드시 하게 만들 작정인 것 같았다. 갑자기 케디아니스가 보고 싶었다. 그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좋아요, 명령이라면 할 수밖에 없죠." 케디아니스는 드래곤 로드의 레어 앞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겨운 곳으로 돌아온 지 시간이 꽤 흘렀다. 예상대로 이루린은 중간계로 오지 않았다. 그 사실은 그를 너무나도 서글프게 만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곧 다시 이루린을 만날 테니까. 그것도 전과는 아주 다른 상황에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그는 원치도 않게 행해진 약속을 어겼고, 또 이제는 그 댓가를 치러야만 했다... 이루린과 케실리온이 원망스러워졌다. 차라리 그들에게 모든 사실을 다 털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말할 수 없었다. 아니, 말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로드에게조차도 말하지 않았다. 로드는 케디아니스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여겼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케디아니스 또한 시간이 흐를수록 몸을 타고 흐르는 긴장감이 배가 되는 바람에 주위에 관심을 쏟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약 2주일이 지났고, 홀로 산책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나. 그런데 함부로 사실을 말하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만약 그랬다간 그 사실을 들은 자까지도 죽인다고 말했으니까. "...어차피 당신이 내건 조건은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 네가 사랑하는 여자가 아주 밉지? 그렇지 않나? 넌 잘못한 게 없는데 그 여자는 네게 심한 말을 했으니까. 어떤가, 네가 살 수 있는 기회다. 지금 네게 남부럽지 않는 강한 힘도 주겠다. 이제 그 댓가를 행해야 할 차례다. 예카트레스의 마지막 말이 그의 귓가에 서글프게 맴돌았다... 케실리온이 돌아온 후에, 그녀는 그에게 많은 것을 물었으나 확실한 답변을 들을 수는 없었다. 대신에 그녀는 그가 자신과 정식으로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정식으로 결혼한다는 사실이, 그녀를 매우 묘하게 만들었다. `가만, 정식으로 결혼한다는 건 한 마디로... 첫날밤을 보낸다는....` 갑자기 볼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갑자기 케실리온을 보고 있자니 민망한 기분이 들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래, 분명히 그랬었다. 예전에는 그를 그리 의식하지 않고 살아 왔다. 그런데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이루린은 밤이 되어도 잠이 오지 않아 복도로 나섰다. 케디아니스 때문도 있었지만, 현재 어딘가에 있을 케실리온 생각이 나서이기도 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케실리온 생각이 간절하게 나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루린은 아무도 없는 홀에 있는 난간에 기대어 서서, 마계의 하늘을 응시했다. 거대한 붉은 달이 그녀의 눈에 고혹적이게 비춰졌다. 붉은 달이 은은하게 바닥을 비추고, 풀숲에 있는 나무들이 바람에 의해 이리저리 부대꼈다. 간간이 마물들의 안광도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마음이 편하지가 않아. 추워서 그런가...` 이루린은 손으로 어깨를 휘감으면서 생각했다. 케실리온과 함께 있었던 일들이 모두 생각났다. 서류 때문에 서로 옥신각신, 다툼 아닌 다툼을 벌였던 일, 케디아니스에게 거미로 고문을 가했던 일.... 등등 정말 마계로 와서 좋은 추억을 많이 쌓은 것 같았다. 정말로 신기하고 놀랍게도 이 곳에 온지 겨우 몇 달이 지났는데도 한국은 거의 잊혀진 상태였다. 어머니의 모습이 어땠는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의 생활이 굉장히 즐거웠다. 그 때,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고는 행동을 멈췄다. 케실리온이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와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단 둘이 있었던 적이 잘 없는 것 같았다. "여태까지 뭐 있었어... 요?" 확실히 경어를 써야 한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제대로 적응이 되지 않는 건 물론이었다. 이윽고 케실리온의 얼굴이 달빛에 드러났다. 그는 그녀의 옆에 와서 섰다. 이루린은 가볍게 숨을 내쉬면서 그에게 살짝 기댔다. "기억나지 않아요? 난 정말로 즐거웠어요.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이. 난 항상 궁금하게 생각했어요,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한번쯤 당신 뇌를 열어 보고 싶다고도 생각했지요." 막상 의식하고 말을 하니 자연스럽게 경어가 써졌다. "......" 지금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 이루린이었다. 그녀는 밖에 시선을 두고 있는 케실리온를 쓸쓸하게 응시했다. "내가 정말로 당신과 결혼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죠?" 그는 그녀의 말과는 무관하게 질문했다. "기억이 하나 떠오르는군. 전에 마계로 침입한 인간들에게 심하게 당하고 나서 내 방에 누워 있었을 때, 말하지 않았나. 내가 부담스럽다고. 지금도 그런가?" 그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루린 또한 그를 응시하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때는 당신에 대해서 알지 못했을 때였으니까요. 지금은 아니에요. 오히려 편해요." 갑자기 바람이 불어오자, 이루린은 몸을 움츠렸다. 그렇지 않아도 잠옷 차림에다가 마계의 밤은 거의 한국의 한겨울 수준이었으니까. 너무 추워서 발과 손끝의 감각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가 망토를 벗어서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이루린은 놀란 마음으로 케실리온을 응시했다. 그에게 이런 면이 있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루린은 주저주저했다. "고마워... 요." 망토는 무겁고 따뜻했지만, 잠옷 차림이었기에 그래도 추운 건 여전했다. 이루린은 케실리온에게 가까이 가서 그의 앞에서 등을 보이고 그대로 기댔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그가 바람막이가 되었다. 그의 가슴에 조용히 머리를 기대면서,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나와 정식으로 결혼한다는 게 아직도 실감나지 않는군요. 당신은 나와 결혼하면... 싫지 않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무슨 이유인지는 몰랐지만 케실리온의 말투에 깔린 얼음이 조금이나마 녹는 것 같았다. 그랬기에 이루린은 대답하기를 머뭇거렸다. "당신은 언제나 말도 많이 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차갑게 대하죠. 또 독단적이고 이기적이고 가끔 사악한 면도 보이고..." "...악감정이 섞여 있군." 갑자기 그가 팔로 그녀의 가슴 위를 자연스럽게 감쌌다. 이루린은 그의 행동에 잠시 당황하면서 몸을 굳혔다. 그가 그런 행동을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저절로 심장이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똑같은 마족인데 나라고 왜 감정이 없겠나. 단지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일 뿐." 이루린은 목소리를 침착하게 바꾸려고 애썼다. "아까도 물었지만 결혼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은 없어요?" 이루린은 그의 온기가 느껴지는 가슴에 그대로 몸을 기댔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귓가에 대고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지켜주겠다. 언제까지나 영원히. 나의 아내로서, 그리고 한 명의 여자로서." 오늘 그녀는 케실리온에 대해 여러 번 놀라야만 했다. 마왕의아내-98 죽음과 사랑 아이나는 그녀에게 연신 결혼을 축하한다고 말하면서 들뜬 표정으로 부산하게 결혼식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다른 마족들은 케실리온이 자신과 결혼한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했다. 아무래도 결혼식 전날에 발표할 생각인 것 같았다. 갑자기 엘리세아와 루시안이 지을 표정이 생각났다. 이루린은 침대에 앉아 있었다. 아직도 그 날 했던 케실리온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는 영원히 그녀를 지켜주겠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이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 때 문이 열렸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그녀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케디아니스였던 것이다. 그녀는 너무 반갑기도 하고 그가 오해를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조금 조바심을 냈다. "케디아니스! 중간계로 가지 않았던 거야? 일단 네게 말하고 싶은 게 있어. 라이네가..." 이루린은 모든 사실을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케디아니스는 엷게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루린은 그런 그를 꼭 안아주었다. 자그마한 체구가 그녀의 품에 그대로 들어왔다. 그녀에게는 케디아니스가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였기에 놓치기 싫었다. 아니, 놓칠 수 없었다. 그의 체온이 그녀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그래, 모두 오해였구나. 정말로 다행이야." 케디아니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팔을 뻗어서 그녀의 목에 걸쳤다. "잠깐만 이대로 있어 줘. 아, 그리고 소식은 들었어. 내일 결혼한다고... 그와?" 어딘지 모르게 케디아니스의 말에 쓸쓸함이 베어 나왔다. 이루린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 번, 누나라고 불러도 될까?" "계속 불러." 이루린이 인상을 쓰자 그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이루린은 언제나 반말만 하던 그가 갑자기 왜 개과천선했는지 알 수 없을 뿐이었다. "누나, 음... 부르기가 참 민망하네." 그는 숨을 들이쉬더니,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항상 잊지 마. 시간이 지나고 변해도 나는 그대로야. 그러니까, 이제 나도 곧 마왕성을 떠나게 될 테니까... 날 잊지 말라는 의미야." 갑자기 케디아니스가 이루린의 품에서 벗어나더니 불만스럽게 말했다. "도대체 이런 여자 같지 않은 여자와 왜 결혼하는 건지 몰라. 아, 그러고 보니 케실리온은 어느 누구라도 상관 없겠지. 정말인지 둘이 잘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안 어울린단 말야. 행여나 케실리온의 등쌀에 못 이겨서 중간계로 오지나 마. 쫓아낼 거니까." 이루린은 심각하게 한숨을 쉬었다. "너.. 얌전해졌다 싶더니 그대로잖아? 도대체 언제쯤 철이 들 건지..." 그러나 그녀는 속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사건은 그 다음날 터졌다. 마왕성은 한바탕 뒤집혀졌고, 각계 원로들과 고위 마족들 또한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모두들 모여서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렸다. 그리고 그 대화의 핵심에는 이루린, 자신도 들어 있었다. 그 날 이루린은 카란델과 논의할 문제가 있어서 그의 방으로 향했다. 마침 그의 방이 있는 층에는 모두들 연회를 즐기러 갔는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계속 걷다가 이상한 느낌을 받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섰다. 뭔가가 아주 기분 나쁜, 비릿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던 것이다. `뭐야? 이 이상한 냄새는?` 이루린은 일단 무시하고 카란델의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 이상한 냄새는 끊이질 않고 계속해서 그녀의 코를 자극했다. 이윽고 카란델의 방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손으로 코를 막고 나머지 손으로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평소 때처럼 편하게 들어가려고 했던 그녀는 그대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죽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그 자는 품위 있는 옷을 입고서 쓰러져 있었다. 문제는 남자의 목 정 중앙에 피에 젖은 검이 꽂혀있다는 점이었다. 시간이 상당히 지났는지 대부분 피는 말라붙어 있었지만 칼로 난도질을 당한 듯한 남자의 복부에는 아직도 피가 고여 있었다. 격렬하게 저항한 듯한 흔적이 옷에 나타나 있었다. 얼굴은 피로 범벅되어 있어서 누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에, 이루린은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 남자가 누구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결코 가볍지 않은 충격이 전신을 타고 그녀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서, 설마..," 죽은 마족은 다름 아닌 서열 10위 이내의 강한 실력을 지닌, 카란델이었다. 이루린은 큰 충격을 먹었다. 엄밀하게 따져서 친아버지는 아니었지만, 현재로서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였다. 힘든 일이 있으면 그와 상담하거나 기댈 수도 있었고, 때로는 정겹게 대화도 나누었다. 처음에는 몰랐으나 점점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애틋한 정도 급속도로 생겨났다. 어쩌면 점점 이루린처럼 되어가는 것인지도 몰랐다. 속에서 울컥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마음 속에 곧 있을 결혼식에 대한 느낌보다는 굉장히 허전하고 쓸쓸한 느낌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란델을 죽인 자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샘솟았다. 암살을 저지른 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뛰어난 실력을 지닌 카란델을 죽였다는 것 자체가 확실히 논란거리였다. `보이고 싶었는데... 결혼하는 모습을...` 이윽고 몇 몇 고위 마족들이 카란델이 경찰처럼 죽은 카란델을 둘러싸고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자 이루린은 방에 돌아갔다. 그리고 그렇게 종일 소리도 없이 울었다. 모르긴 몰라도 카란델에 대한 애정이 상당히 깊었던 것 같았다.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매우 괴롭게 죄여왔다. 그냥 쿡쿡 쑤시는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누가 죽였을까.` 그녀는 카란델과 반대되는 세력들 중에 누가 있는지 찾으려고 애썼지만 허사였다. 군주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능력을 지니 카란델이었다. 그랬기에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찾을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 그 다음날부터 이루린은 많은 이들의 수군거림을 동반해야 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으나, 자꾸 소문이 이루린을 카란델을 죽임 암살자로 몰아 넣자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최초로 카란델을 본 건 이루린이었으니까. 단서라곤, 카란델의 방에 남아 있던 작은 쪽지였다. 그 쪽지에는 끝이 아니다, 라고 이라고 적혀 있었다. 또 누군가가 죽는다는 암시일까. 엘리세아에게서도 신경에 거슬리는 빈정거림을 자주 들었다. "어머, 유감스러워서 어쩌니? 널 꾸며주던 자가 사라졌으니. 게다가 의심까지 받고 있다라?" "제발 그만 사라져!" "싫은데? 너, 그거 아니? 보호해주던 존재가 사라지면 위협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 넌 지금 보호막이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어." 이루린은 자신이 곧 군주와 결혼하기 때문에 그럴 걱정이 없다고 말하려고 했다.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죽은 것일까. 평소에 카란델은 미움 받을 짓을 하지는 않았다. 단지 신분이 높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적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 제외하고는. 하지만 소문에 그를 죽일 만한 자는 이 곳에 거의 없었다. 교묘하게도 상대는 카란델에게 어떠한 단서도 남기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루린은 카란델에 대한 그리움이 미친 듯이 속에서 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 아이처럼 더 이상 울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어째서 그런 일이... 괜찮아?" 케디아니스 또한 충격을 먹은 얼굴로 이루린에게 물었다. 그도 그녀의 상태를 알고 있었기에 장난을 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러던 어느 날, 마리엔이 쪽지 하나를 들고 이루린에게 찾아왔다. 그녀는 매우 두렵고 심란한 표정으로 이루린에게 쪽지를 내밀었다. "이루린, 이제 어쩌면 좋으니. 그가 받았던 쪽지를 나도 받았단다. 라이네도 갑작스럽게 사라진 판에... 너까지 괴로워하고 있으니.... 나라도 널 위로해 주어야 할텐데..." 이루린은 마리엔만큼은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이상했다. 이유는 몰랐지만, 한국에 있을 친어머니보다도 훨씬 마리엔의 존재가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오히려 친어머니의 얼굴은 점점 잊혀져 가는 반면에 마리엔의 얼굴은 뇌리에 각인되어 잊혀지지 않는 것이었다. 대화를 깊게 나누지 않았는데도. 이루린은 불안한 감정을 떨칠 수 없었다. 케디아니스는 홀로 침대에 앉아 밖을 응시했다. 이제 슬슬 마무리를 지을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아주 까다롭고 절망적인 것이었다. 그랬다. 그가 자살을 결심하거나, 아니면 이루린을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마왕의아내-99 죽음과 사랑 이루린은 요즘 들어 신경이 상당히 날카로워져 있었다. 카란델이 죽었다는 충격, 그 사실이 그녀의 슬프게 만들었던 것이다. 특히 엘리세아의 위협은 아주 노골적이었는데,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것이었다. 이루린이야 무시했지만 엘리세아의 행동은 자꾸 카란델을 떠올리게 만들어 찜찜했다. 특히 다른 마족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수군거리는 소리도 이제는 듣기 거북할 지경이었다. "이루린, 난 네가 그랬다고 의심하지 않는단다." 마리엔이 그녀를 안아 주었다. 마리엔의 눈동자는 생기로 가득 차 있지 않았다. 그녀보다 더 우울하고 허무해 보였다. 뺨은 눈물이 메말라서 창백해 보였다. 이루린은 그런 마리엔의 상태를 조금이라도 회복시켜 주고 싶었다. "죽지 않게 해 주겠어요, 반드시." 이루린은 떨리는 목소리로 분명하게 다짐했다. 그러나 기분이 영 편하지 않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냉정하게 판단해서 마리엔마저 죽으면 그녀의 위치가 위태로워지는 건 당연했다. 엄밀하게 따져서 여태까지 그녀를 지탱했던 것은 바로 카란델과 마리엔의 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위치였다. 그러나 모두 죽으면... 그녀는 무방비한 상태로 다른 자들에게 노출될 것이다. 특히 엘리세아나 루시안이라면 그녀를 충분히 모함할 수 있었다. `물론 그와 결혼하면...` 이루린은 한숨을 쉬었다. 케실리온에게 사실을 말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녀는 창가에 서서 하늘을 응시했다. 하늘이 오늘따라 어둡게 보였다 . 방으로 돌아왔을 때 케디아니스가 창 밖을 응시하며 앉아 있었다. 어딘가 결연해 보이는 표정... 그녀가 다가가자 그는 시선을 거두고 말을 함으로써 이루린의 화를 은근히 돋구었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케디아니스와 즐겁게 장난치며 웃고 놀았다. 그 또한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로드가 이런 말을 했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나도 성숙해진다고. 정말로 그런 날이 올까?" "믿어지지 않는데. 네가 성숙해진다고? 지나가던 오크가 웃다가 사람이 되겠네." 케디아니스가 인상 쓰며 그녀의 등을 눌렀다. "그렇게 웃지 말란 말야! 정말로 그런 날이 오면, 그래서 진짜로 멋있어진다면 내가 이루린을 데려갈 테니까." 케디아니스의 말을 별 뜻 없이 받아들인 이루린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유부녀를?" "....시끄러워." 이루린은 언제까지나 이 상태가 지속되기를 바랬다. 아니, 꼭 그래야만 했다. 예카트레스는 높은 나무 위에서 의미 심장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창가에 서 있는 이루린을 응시했다. 그는 이루린과 그 소년이 함께 놀고 있는 모습이 유리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너무 얄팍해서 곧 깨지게 될 유리로. 그 깨진 파편은 고스란히 이루린에게 박히게 될 것이다.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검을 뽑아들었다. 아주 좋은 느낌 - 날카로운 - 이 칼에 전달되었다. 그는 그것을 들고 현재 이루린의 옆에 차고 있는 검과 비교해 보았다. 색깔은 틀리지만 모양은 완전히 똑같았다. "그러나 내 검이 진짜지... 그렇지 않은가, 이루린?" 그는 팔과 검이 수평이 되게 들었다. 그리고 칼끝을 즐겁게 웃고 있는 이루린에게 겨냥했다. 그러다가 잠시 후에, 그는 천천히 케디아니스에게로 방향을 바꾸었다. 케실리온의 태도는 그 날 이후 원상태로 돌아왔다. 여전히 그녀에게 무심한 듯,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기 일만 묵묵히 하는 것이었다. 분명히 그의 말투나 태도가 약간 누그러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전혀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대할 때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무슨 일을 시킬 때도 아주 뻔뻔스럽게 자기 위치를 고수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놈의 서류... 그래, 어째서 케실리온이 그 많은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는지, 왜 내게 넘겨주기 위해 강제적으로 행동했는지 이해가 가. 그리 높은 관직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하아, 하기야 그 많은 서류를 맡아서 할 마족이 군주말고는 없지... 어째서 낮에는 잠을 많이 자고 밤에는 방에 들어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지 이제 알 것 같군.` 이루린은 언젠가 날 잡아서 서류들을 몽땅 없앨 계획을 세웠다. 물론 실행에 옮길 지는 미지수였다. 정말인지 그 서류들은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 하루 하루가 정신 없이 흘러가는 것이었다. 이루린은 괜히 침대 위에서 책을 읽고 있는 케실리온에게 소리를 질렀다. "왜 넌 서류를 맡지 않는 건데!" 그는 그녀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말했다. "그다지 중요한 사항들이 아니니까. 그리고 약속을 잊지 않았다면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없을 텐데. 그리고 더 이상 집중에 방해되니 말은 걸지 말았으면 하는군. 찾을 내용이 많으니까." 그러고 보니 전에 케실리온과 내기를 해서 그의 바램대로 서류를 무제한으로 처리하기로 했던 게 생각났다. 결국 그녀는 입을 다물고 불만스럽게 펜을 놀려야만 했다. 그러던 차에 이번에는 그가 말을 걸었다. "요즘에 뭐 느끼는 것 없나?" 이루린은 악을 쓰듯이 외쳤다. "아아주 많지! 많고 말고!" "그 꼬마에 대해서 말이다." 분명히 케디아니스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루린은 그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해 어리둥절했다. "별로, 가끔 조용하게 지내는 것만 제외하면 아주 활기차게 놀던데?" 그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날 밤이었다. 이루린은 심하게 목에서 갈증을 느끼고 눈을 떴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케실리온이 없는 건 이해가 갔지만, 오늘은 무슨 일인지 케디아니스도 보이지 않았다. 텅 빈 바구니가 그녀를 걱정하게 만들었다. 일단 그녀는 일어나서 간단하게 옷을 갈아입은 후에 밖으로 나갔다. "비명소리?"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그녀의 귀를 자극했다. 심상치 않다고 느낀 그녀는 가우드를 허리에 차고 복도로 나섰다. 비명소리가 끊이질 않자 그녀는 좀 더 속력을 내서 뛰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랐으나 분명히 심상치 않은 일임은 틀림없었다. 마왕이 버젓이 있는 마왕성 내부에서 함부로 비명을 지른다는 게 말이 되겠는가. 비명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들려왔다. 급기야 그녀는 손가락으로 귀를 살짝 틀어막았다. 어둠이 짙게 깔려 있어서인지 저절로 몸이 굳어지고 긴장하게 되었다. `윽... 이건...` 이루린은 코끝을 자극하는 냄새를 맡고 인상썼다. 그 냄새는 다름 아닌 피의 것이었다. 어찌나 피냄새가 진동하던지 저절로 손으로 코를 잡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비명소리는 점차 줄어들었다. 냄새를 따라 이동했을 때, 그녀는 불빛으로 은은하게 밝혀져 있는 거대한 홀에 도착했다. 보통 밤이 되면 불빛이 꺼져 있기 마련인데, 어째서 지금은 켜져 있는 것일까. 홀에 들어가는 순간, 그녀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주 낯익은 자가 홀에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반신반의한 상태로 중앙에 쓰러져 있는 자에게 다가갔을 때, 그녀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우려했던 데로 마리엔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가슴 부근은 이미 검으로 난도질당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얼마나 놀랬으면 눈을 뜨고 죽을 수 있단 말인가. "정신차리세요!" 카란델에게서 느꼈던 충격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 더 강도가 셌다. 이제 그녀 혼자만 남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막 머리로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울거나 하지는 않았다. 슬프고 허무한, 그리고 마리엔을 지키지 못했다는 감정이 그녀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 때였다. 마리엔의 근처에, 정확하게 조금 어두운 부분에서 키가 작은 누군가가 서 있었다. 워낙 조용히 있었고 어두웠기에 알아보지 못한 이루린은, 손에 들려 있는 피묻은 검을 보고는 그 자가 자신의 부모를 죽인 자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분노를 이기지 못해 검을 뽑아 들고 다가갔을 때, 그 자가 몸을 돌리더니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자의 얼굴을 보았을 때, 이루린은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약을 먹어서 신경이 마비된 듯한 느낌이었다. 급기야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케, 케디아니스... 도대체 이게..." "반가워, 이제야 오면 어떡해? 기다리고 있었잖아?." 이루린은 순간적으로 전처럼 케디아니스가 최면에 걸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두 눈동자는 멀쩡했고, 오로지 이루린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잔혹한 미소를 지으면서. 마왕의아내-100 죽음과 사랑 "케, 케디아니스...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사고의 흐름이 정지될 것만 같았다. 아니 벌써 느려지고 있었다. 머릿속이 혼잡한 교통로로 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재 그녀가 인식할 수 있는 건 그의 모습이었다. 케디아니스가 멀쩡한 얼굴로 잔혹하게 웃고 있다는 것, 그가 현재 한 손에 피묻은 검을 들고 있다는 것, 그리고 옆에 마리엔이 피로 이루어진 웅덩이 위에 쓰러져 있다는 것만이 눈에 보였다. 도저히 제대로 매치가 되지 않았다. "거짓말이지...? 그렇지? 너 지금 제정신이 아닌 거지?" "내 정신은 아주 멀쩡해. 그런데 말야, 항상 이루린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 지나치게 누군가에게 신뢰를 준다는 것 말야. 내가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이유라도 있어?" 이루린은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러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어떻게 어린 케디아니스의 힘으로 마리엔을 죽였는지에 대한 정당성의 여부를 떠나 그가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녀는 케디아니스가 실수라는 말만 했어도, 납득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루린이 기대하고 있던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더불어 그는 정말로 다른 자라고 착각할 만큼 달라 보였다. 풍기고 있는 분위기조차 달랐던 것이다. "죽이는 데에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 물론 카란델을 죽이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말이지." 카란델도 케디아니스의 손에 죽었다. 점차 충격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 "네가 케디아니스일 리가 없어! 내 부모를 죽인다는 게 말이 돼?" "이렇게 빨리 들킬 줄은 몰랐어. 그리고 똑똑히 들어, 난 분명히 케디아니스야. 그리고 이번에는 이루린, 네가 이 검의 마지막 희생자가 될 거야." 케디아니스가 검을 세우며 날카로운 눈동자로 이루린을 노려보았다. 그 즈음, 이루린은 복합적으로 느껴지는 감정들을 거의 모두 정리한 상태였다. 그녀는 마리엔을 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떨리지만 단호한 동작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케디아니스에게 힘차게 겨누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검끝이 흔들리고 있었다. "정말로 네가 내 부모를 죽였다면, 난 널 용서할 생각 따윈 없어." 이루린은 자신이 과연 케디아니스를 죽일 수 있을지 의문을 품었다. 아니, 어쩌면 죽인다는 건 생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내가 바라던 바야. 여기는 비좁으니까 밖으로 나가도록 할까. 장소는 마왕성 입구부터 보이는 넓은 평지야." 케디아니스가 검을 든 채 어둠 속을 향해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이루린은 그의 검에서 떨어져 바닥에 고인 핏방울을 가만히 응시했다. 차라리 이대로 케실리온에게 가버릴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일만큼은 혼자서 해결하고 싶었다. 바로 그녀의 부모와 관련된 일이었으니까. 믿을 수 없었다. 어째서 낮에만 해도 순진하고 장난기가 넘쳐흘렀던 케디아니스가 이렇게까지 돌변했는지를. 만약에 그가 카란델을 죽였다면, 낮에도 그녀에게 아주 가식적으로 대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 때만 해도 마치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행동하지 않았던가. 그녀 또한 정적이 흐르고 있는 홀에서 벗어나 마왕성 밖으로 나섰다. 하늘을 뒤덮고 있는 어둠 아래, 이루린은 케디아니스와 넓은 공터에 정당한 간격을 두고 마주보고 섰다. 귀를 따갑게 하고 볼을 얼얼하게 만드는 바람 덕분에 긴장감은 전보다 더 고조되었다. 숲이 없는 평지였으나 이상하게도 땅이 가끔씩 흔들려서 중심을 잃을 뻔 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케실리온에게서 밤에는 마계의 땅에 거대한 지진이 일어나기도 한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이루린은 조용하게 물었다. "왜 너와 내가 서로 검을 겨누며 서야 하는 거지? 도대체 이유가 뭐야?" "마음에 안 들었어.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라이네가 억울하게 죽은 건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알아? 날 쫓아냈을 때는 언제고 지금에서야 상냥하게 대하는 이유는 뭐지? 단지 라이네를 죽일 구실을 만들기 위해 그런 거짓말을 꾸며낸 건 아냐? 착한 라이네가 이루린의 꾐에 빠져 죽은 것인지... 내가 어떻게 알지?" "터무니없는 소리하지 마! 내게 그런 이유 따윈 없어!" 케디아니스가 냉소적인 표정을 지었다. "참고로 난 라이네가 죽었을 때의 상황을 보지 못했거든? 그리고 이루린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잖아. 케실리온이 라이네와 함께 지내고 있는 모습을. 아주 영악해, 정말인지 너무 놀라워. 착한 라이네를 그런 식으로 죽이다니... 내가 라이네를 얼마나 많이 좋아했었는데. 그래서, 라이네를 위해서라도 이루린의 부모를 죽인 거야. 그래야 정당하게 심판되지 않겠어?" 이루린은 그 앞뒤 맞지 않는 말에 맥이 빠졌다. 그리고 할 말도 잃었다. 케디아니스는 기계에 가까운 투로 말하면서 이루린을 노려보았다. 너무나도 진지하고 심상치 않은 살기가 느껴지는 눈동자였다. "넌 이런 애가 아니었어, 무엇이 널 그렇게 변하게 만든 거지?" 놀랍게도 케디아니스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바로 이루린이야." "어째서! 그렇게 서로 친하게 지냈는데... 어째서...." 이루린이 비명에 가깝게 외쳐도 케디아니스는 꿈쩍 하지 않았다. 그는 빈정거리면서 그녀에게 검을 겨누었다. "시간 끌 생각은 하지 마. 입다물고 공격이나 해." 이윽고 케디아니스의 선제 공격을 시작으로 대결은 시작되었다. 대결은 몇 시간 동안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거의 밤을 새도록 자지도 않고 대결을 펼친 까닭에 잠이 오진 않았다. 아직도 하늘의 어둠은 가실 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케디아니스의 실력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검술에 일가견이 없었던 그는 반신반의한 그대로 매우 뛰어난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마치 오랫동안 수련한 쓴 자처럼 아주 자유자재로 검을 구사하는 것이었다. 키의 차이가 분명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절대로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검술로 그녀를 압도하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지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검을 쉬지 않고 휘둘렀을 텐데도 케디아니스의 상태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마치 케실리온처럼 말이다. 게다가 땅이 점차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한 탓에 중심을 겨누지 못하고 허점을 드러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헉...헉..." 이루린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떨리는 검을 들었다. 가끔 케디아니스의 검을 칠 기회가 있긴 했으나 함부로 그럴 수 없었다. 케디아니스는 그녀를 죽이고 싶어했지만, 정작 그녀는 그의 몸에 상처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케디아니스는 공격만 하게 되고, 그녀는 방어만 하게 되었다. 케디아니스를 얼굴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검을 함부로 휘두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간신히 버티는 기분이야. 어떻게 케디아니스가 저 정도로...` "어째서 그렇게 강한 힘을 얻은 거지?" "내가 왜 말해야 하는데? 참고로, 난 아직 전혀 지치지 않았어." 그는 정말로 지치지 않아 보였다. 의혹의 의혹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나 물어봤자 제대로 대답할 것 같진 않았다. 그 때, 산에서 빛이 일렁이더니 이윽고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드디어 어둠이 물러가고 아침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본 케디아니스의 여유 있는 표정이 삽시간이 바뀌더니, 곧 입술을 깨무는 것이었다. 케디아니스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다시 검을 겨누었다. 그의 검날에 이미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그럼 이제 마무리를 지어볼까." 이루린은 숨가쁜 와중에서도 쥐어 짜내듯이 외쳤다. "제발 그만둬, 케디아니스! 자꾸 이러면..." "자꾸 이러면 뭐? 날 어떻게 할 건데? 난 이루린의 부모를 죽인 존재라는 걸 잊지 마. 더불어 이제 곧 이루린의의 목숨도 취할 테니까." 그 때 케디아니스가 아주 빠른 속도로 그녀에게 달려왔다. 여태까지 겪었던 몸놀림 중 가장 민첩하고 갑작스러웠기에 그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케디아니스의 검과 격돌했을 때, 그녀는 인상을 쓰면서 뒤로 물러났다. 신변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강한 힘이 검에 전달되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검을 치켜들어 일단 케디아니스의 검을 쳐내기 위해 검을 눕혀서 찌르듯이 공격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의 검 앞에 있던 케디아니스의 검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신에 그의 가슴이 그 위치를 대신했다. 뭔가가 관통하는 불길한 느낌과 동시에,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온기가 느껴지는 피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그녀의 검이 통과한 가슴을 응시하면서 구슬프게 웃고 있는 그를 향해 비명을 질렀다. "케디아니스!!" 마왕의아내-101 죽음과 사랑 이루린은 순간 당황해서 검을 놓을 뻔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케디아니스가 피묻은 손으로 힘겹게 그녀의 검을 잡고 자기의 가슴 안쪽으로 더 밀어 넣는 것이 아닌가. 이루린은 너무 놀라서 검을 도로 빼려고 했다. 그러나 케디아니스가 검을 세게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자기의 손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왜... 왜 이런 짓을...?" 이루린은 목구멍이 막혀서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자신을 저주했다. 케디아니스는 겨우 눈을 뜨고서 그제서야 표정을 풀고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를 향한, 온기가 서린 슬픈 눈물이. "미쳤어! 아까는 날 죽이고 싶어서 날뛰더니, 왜 지금은..." 이루린은 억지로 그의 배에서 검을 뽑아냈다. 그는 검에 시선을 두다가, 이윽고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놀란 이루린이 그에게 달려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무릎 위에다 얹어 놓았다. 사고의 흐름은 아까보다 더 느려지고 있었다. 케디아니스의 입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전처럼 다정하게 그녀를 응시하면서, 띄엄 띄엄 입을 열기 시작했다. "사실을... 말할게. 내가 왜 그랬는지를. 그리고 미안해, 누나. 누나를 위험에 처하게 했어...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케디아니스의 눈동자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이루린은 그를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외쳤다. "무슨 말이야! 케디아니스, 나랑 함께 어서..." 케디아니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모든 게 그 자의 짓이야. 예카트레스...." 또 그 이름이었다. "뭐?" "전에 내가 한 번 납치되었을 때... 기억나지? 예카트레스가 나타나서 구해주었어. 그런데 날 구해주는 댓가로 뭘 원했는지 알아? 난 그와 강제적으로 계약을 맺었어. 그는 내게 엄청난 힘을 주었지만, 일정한 기간 내로 이루린의 마음을 내 쪽으로 돌려야만 했어. 실패하면, 실패하면... 나와 이루린, 둘 중 한 명이 죽음에 이르는 거야. 내가 죽으면 아무 문제도 없었지. 차라리 자살을 하면, 그랬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거야. 하지만 그는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주변 용족들까지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어. 문제는 내가 살아 있으면 계약을 이행하지 못한 댓가로 예카트레스의 강제적인 힘에 의해 이루린을 죽이도록 되어 있어.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난 이루린을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내가 스스로 자살할 수도 없었기에... 차라리 죽는다면 누군가에게 죽는 게 훨씬 편하다고 생각했어." 이루린은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분명히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애절한 눈동자는 거짓이 아니었다. 그의 슬픔과 분노로 물든 눈물은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물론 이루린에게 알릴 생각은 없었어. 마왕성 밖으로 나가서 일부러 죽을 생각이었지. 그런데 그는 마왕성 밖으로도 나가지 못하게 만들었어. 내가 계약을 위반할지도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 그만 누군가가 죽었던 거야. 처음에는 알 수 없었지, 그러나 나중에 되어서야 예카트레스가 날 조종해서 카란델을 죽였다는 것을 알아차렸어. 그 때 난 생각했어. 차라리 이렇게 된 바에야, 이루린의 분노를 자극해서 날 죽이도록 만드는 게 편할 거라고... 그래서 마리엔도 죽였어. 나, 나쁜 아이지? 속으로는 수십 번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이루린은 케디아니스를 세게 껴안았다. 그가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거친 숨소리는 점차 옅어져가고 있었다. 이루린은 갑자기 속에서 울컥하는 느낌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를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케디아니스가 그 동안 예카트레스에게 시달렸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칼로 난도질당하는 것처럼 쓰라렸다. 케디아니스가 울고 있었다. 그의 눈가에 고인 눈물이 볼을 타고 뺨으로 흘렀다.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미친 듯이 울며 말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그것 또한 함정이었어. 결국 처음부터 이루린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지 않는 방법이란 없었어. 예카트레스... 그 자, 정말로 무서운 자야... 조심해.. 컥!" 케디아니스가 말을 내뱉기 힘들었는지 연신 기침했다.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자는 내가 결국 이루린의 손에 죽는 쪽을 택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아니, 그가 그렇게 하도록 유도했지. 내가 이루린을 죽이지 않으면, 나중에 미쳐서 이루린을 죽이게 될 거야. 반면에 내가 이루린의 손에 죽으면, 이루린은 모든 죄를 덮어쓰게 되는 거야... 용족의 분노를 사는 건 당연지사고, 덩달아 마족들은 마리엔과 카란델을 죽인 것도 이루린이라고 생각하게 되겠지..." 이루린은 그 말을 듣고 뼛속까지 차가운 얼음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은 케디아니스의 목숨이 훨씬 중요했다. 그녀가 모함을 받게 되더라도, 그래서 힘들게 되더라도 케디아니스가 죽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가 죽는다는 건 그녀에게 있어서 끔찍한 일보다 더했다. 그녀는 절규에 가까운 소리로 외쳤다. "말도 안 돼! 거짓말이지? 케디아니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네가 살아있기만 하면 돼! 네가 내 곁에 있어주기만 하면 된단 말이야!"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하고 슬픈 감정, 좀 더 케디아니스의 상태에 대해 일찍 깨닫지 못한 후회감, 그리고 예카트레스라는 자에 대한 치를 떠는 분노 등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그녀를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아니, 차라리 미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신은 너무나도 현실을 받아들이기에 또렷했다. "미안해, 누나. 왠지 어색하네... 그리고 나, 사실은 누나 많이 좋아했어. 단순히 친구가 아닌, 이성으로 말야... 예카트레스는 그걸 노리고 내게 접근한 거겠지. 누나는 너무 둔해서 그거 몰랐지? 바보..." 그런 와중에도 케디아니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 그의 웃음이 도리어 그녀의 마음을 도려내고 있었다. 일단 이루린은 케디아니스를 치료하기 위해 일어서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땅이 심하게 흔들리면서 케디아니스가 누워 있던 곳에 경계선이 생겨났다. "케디아니스!" 그러나 케디아니스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이미 그는 고개를 옆으로 떨구고 눈을 감고 있었다... 복부에 흐르는 뜨거운 피와 함께. 분명히 죽은 것이다. 잠시 후에 틈새가 점점 벌어졌다. 이루린인은 그를 잡으려고 했으나, 땅이 심하게 흔들리는 탓에 중심을 잡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눈물이 앞을 가려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막 눈을 비비고 다시 앞을 응시했을 때, 케디아니스는 그 틈새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안 돼!" 이루린은 비명을 질렀으나, 케디아니스의 육체는 이미 그 곳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 또한 그 틈새 속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오로지 케디아니스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엎드려서 틈새 속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루린은 제정신이 아닌 나머지 무작정 틈새 속으로 뛰어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누군가에게 강하게 손목을 잡혔고, 지진이 일어나고 있는 그 자리에서 공중에 뜨게 되었다. 뒤를 돌아보니, 그 자는 다름 아닌 케실리온이었다. 그는 막무가내로 날개를 펴고 그녀를 안았다. "미쳤군. 뛰어들면 어떻게 될지 알면서도 그런 짓을 저지르려고 하나?" 케실리온의 말이 옳았지만 현재로서는 감정에 휩쓸린 나머지 제대로 상황을 판단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처음으로 격렬하게 저항하면서, 오로지 케디아니스가 사라진 지진의 틈새만을 응시했다. 벌어진 틈새는 점차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루린은 지금 그 틈새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케디아니스를 다시는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괴로워서 견딜 수 없었다. "날 놔요! 제발! 케디아니스가, 케디아니스가!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오로지 나 때문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모르나? 이 일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조사할 것이다." 그녀는 케실리온의 팔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었다. 마음이 이리저리 어디론가 달아날 것 같아 초조했다. 케디아니스를 잃었다는 지독한 슬픔, 그것도 그녀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죄책감이 그녀를 가만 놔두질 않았다. 충격은 받을 대로 받고 상처는 있는 대로 받은 상태였다. 더 이상 그녀에게 받을 고통이란 없었다. 케디아니스의 존재는 이제는 애틋하고 아련한 기억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러나 그가 없었으므로, 이제 그 기억들은 점점 악몽처럼 바뀌어갔다. `내가 죽인 거야. 그것도 내 손으로.` 이러한 생각은 그녀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부모가 모두 죽은 이 상황에서 케디아니스가 죽었다. 그것도 그냥 죽은 게 아니라, 바로 자신의 손에 죽었다. 언제나 케디아니스를 쓰다듬고 안아주던 바로 그 손으로. 항상 상냥하게 대해주었던 바로 그 손으로! `날 좋아했었다고...` 점점 그 복합적인 감정들은 서서히 하나로 일치되어 가고 있었다. 바로 자신의 거의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것을 빼앗아간 예카트레스에 대한 살육의 욕구였다. 그녀는 그를 절대로, 그녀가 이 세상에서 죽기 전까지는 그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를 어떻게든 찾아내서 반드시 죽일 것이다. 그건 이미 그녀의 최대 목표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잔혹한 방법으로 누군가를 괴롭힐 만한 자라면 충분히 죽을 자격이 있었다. 케디아니스의 한을 달래주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도 모른 채. 마왕의아내-102 죽음과 사랑 그 날 이후로 그녀의 생활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음식을 자주 거르면서까지 생각에 잠기곤 했다. 심각한 폐인과도 다름없는 생활이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그냥 씻지도 않고,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그대로 침대 위에 앉아서 우두커니 창가를 바라보곤 했다. 당연히 창 밖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거의 몇 시간 동안 눈물이 원치 않게 나오기도 했다. 또, 밤새도록 자지 않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다가 억지로 잠든 것도 많았다. 케디아니스에 대한 생각말고는 그 어떠한 일도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때 누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케디아니스였다. 그가 환하게 웃으면서 전처럼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케디아니스... 살아 있었어?" "이루린 님..."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흐릿하게 뜬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문가에 서 있는 자는 케디아니스가 아니라 아이나였다. 실망과 체념 때문에 저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문가로 손을 들다가도, 그대로 바닥에 내렸다. 아이나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음식을 좀 드세요. 굶어 죽으실 것도 아니잖아요." 이루린은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제대로 식사를 챙겨먹지 않아 고개를 저을 힘도 없었다. 눈을 들어서 아이나를 응시했을 때, 이상하게도 그녀의 얼굴이 케디아니스와 겹쳐서 보였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의 바램인지도 몰랐다. "이루린 님, 케디아니스 님은 죽었어요. 이런 모습은 이루린 님에게 어울리시지 않아요! 제발 현실에 눈을 뜨세요." 아이나가 그렇게 애원 조로 말한 건 처음이었다. 그녀의 두 눈에 안타까운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그대로 음식을 탁자에 소리나게 올려놓더니, 그대로 문을 닫고 사라졌다. 이루린은 음식을 먹으러 갈 기운도 없었다. 아니,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럴수록 케디아니스에 대한 죄책감은 점점 깊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를 억울하게 죽여놓고, 자신만 음식을 먹고 생명을 유지해나갈 수 없었다... `내가 죽였어.` 그 생각은 결코 그녀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자신의 검이 케디아니스의 가슴을 관통할 때가 생각났다. 그 이상하고 혐오스러운 느낌이 손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이제는 단지 과거일 뿐인데도,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그 일이 자꾸만 현재로 되풀이되고 있었다. 케디아니스가 사라지고 나서 견딜 수 없는 허전함 때문에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특히 아이나를 케디아니스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아, 그러한 괴로움은 가중되었다. 무의식적으로 케디아니스의 이름을 부를 때면 멈칫하기도 했다. 또, 악몽을 꿀만큼 자는 게 두려워졌다. `내가 케디아니스를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었는데... 바보야, 차라리 날 죽이지 왜 네가...` 이루린은 케디아니스의 생각이 아련하게 떠오르자, 이불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다. 현재로서는 그녀에게 있어서 죽음이 전혀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렇게 비참하게 죽는 것을 예카트레스가 바라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자, 잠깐이지만 어딘가에 있을 예카트레스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욕을 상실한 덕분에 지금은 그대로 있고 싶었다. 생각 같아서는 마음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싶었으나, 그게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때때로 엘리세아가 일부러 찾아와서 그녀에게 빈정대기도 했다. "넌 이제 끝이야. 널 돌봐줄 마족은 이제 아무도 없어. 마족들이 뭐라고 말하는지는 들었니? 네가 카란델과 마리엔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어. 더불어 케디아니스까지도. 네가 죽였다고 믿는 눈치야. 물론 그 모습을 본 자는 아무도 없지만... 넌 결국 궁지에 몰리게 되겠지. 그건 바로 내가 바라던 바야. 아직 용족들에게 알리진 않았지만, 조만 간에 알게 되면 널 중간계로 보내라고 아우성치겠지. 바로 널 끔찍하게 죽이기 위해서 말야.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난 네가 죽는 모습을 꼭 보러 가겠어." 이루린은 엘리세아의 말에 대꾸할 힘도 없었다. "그렇게 못들은 척,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행동하지 마. 상당히 역겨우니까. 뭐, 어차피 이제 네 목숨은 내게 달려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곤 그대로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승리에 가득 찬 미소를 지으면서. 어느 밤이었다. 새벽에 자지 않고 있다가 지쳐 홀로 침대 위에 쓰러지듯이 누워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들러오는 발자국 소리가 났으나, 그녀는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가 누구든지 간에 - 심지어는 자신을 죽이러 온 암살자라고 해도- 이제는 그녀와는 상관이 없었다. 이제 거의 자포자기한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팔에서 아프고 강한 힘이 느껴졌다. 그녀는 그 강제적인 힘에 의해 절로 흐트러진 시트 위에서 일어나야 했다. 게슴츠레 눈을 뜨고 앞을 응시하니, 케실리온이 눈에 들어왔다. 며칠 동안 보이지 않았던 케실리온이었기에 그녀는 그가 왜 그러는 걸까, 하고 궁금하게 여겼다. "한심하군." 그가 차갑게 말하면서 강제적으로 그녀를 침대 위에서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그의 힘에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일어나야만 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해서 저항할 힘도 없었다. 바닥에 서자마자 그가 팔을 잡은 채로 어디론가 이끌었다. 그녀는 묵묵히 따라가다가,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면서 힘없이 말했다. "아파요, 이 손 놔요." 그러나 그는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복도를 지나 거대한 홀로 나왔다. 아무도 없었기에 복도는 싸늘한 적막감만이 감돌고 있었다. 더불어 추워서 절로 몸을 웅크리게 되었다. 그가 데리고 간 곳은, 전에 케실리온과 함께 단 둘이서 대화를 나누었던 장소였다. 그녀는 겨우 그를 따라가서는 난간에 기대듯이 섰다. 추워서 잠이 쏟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정신은 풀릴 대로 풀린 상태였다. "그렇게 짜증나게 행동을 해야 직성이 풀리나?" 그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나도 알아요. 내가 너무 어리석다는 것... 하지만..." 그는 그녀의 상태는 생각도 하지 않고 냉정하게 물었다. "케디아니스가 죽은 이유를 헛되게 만들 생각인가? 왜 죽었는지를 잊었나? 어린 아이처럼 구는 건 포기했으니 알아서 죽여달라, 이런 뜻인가?" 그의 냉혹한 말이 그녀의 심장에 파고들었다. 죄여드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애써 말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하지만? 그런 단어는 지금 필요 없다." 이루린은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저 죄인처럼 눈을 감았다. 갑자기, 그에게 그런 말을 듣고 나니 서러운 느낌이 들었다. 결국 눈가에 이슬이 맺히게 되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런 말을 듣고 흘릴 수 있었으나, 현재 그녀의 심성은 쇠약해질 데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막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는데, 케실리온이 나직이 한숨을 쉬더니 다가왔다. 그리고 그 때, 그가 천천히 그녀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녀는 그대로 케실리온의 따뜻한 품에 안긴 채로 흐느꼈다. 케실리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허리를 감은 손을 풀지 않고 있었다. 현재 그녀에게는 기댈 남자가 절실했기에 그를 뿌리치지 않았다. "이렇게 나약했었나." 그렇게 눈물이 마를 때까지의 시간이 지났다. 그녀는 케실리온을 올려다보곤, 그제서야 민망한 상황이라 생각하고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도 순순히 팔을 풀어주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 어떤 단어라도 입 밖에 낸다면 다시 눈물을 흘릴 지도 모를 테니까. 그에게 너무 약한 모습만 비춰지게 될 테니까. 차츰 케디아니스보다는 케실리온이 강하게 의식되었다. 민망하다는 생각 때문인지도 몰랐다. "나 때문에 죽었어요." "네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죽을 운명이지 않았나." 갑자기 화가 났다. 케실리온에 대한 화라기보다는, 그녀 자신에 대한 무력감 때문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거죠? 그가 죽은 건..." 그가 단호하고도 절제된 어조로 말했다. "그만하도록 하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주제니까." 이루린은 입을 다물고 케실리온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느꼈었는데 오늘따라 얼굴의 생김새가 눈에 세세하게 들어왔다. 이루린은 그런 그를 계속 응시하면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언젠가 물은 적이 있었죠.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고. 지금도 알고 싶어요. 지금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죠?"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루린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여전히 그녀는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루린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가, 더 이상 뒤로 갈 수 없음을 깨닫곤 난간에 기대어 섰다.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팔목을 자연스럽게 잡았다. 놀란 이루린은 슬픈 감정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힘은 여자인 그녀에게 있어서 절대적이었다. 이루린은 눈을 크게 뜨고 말을 더듬었다. "무, 무슨..." "알고 싶나?" 그가 속삭이듯이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더니 나머지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에 손을 넣고 앞으로 당겼다. 이루린은 저항하려고 했지만, 그의 팔을 뿌리치기에는 역부족인 힘을 지니고 있었다. 눈을 감았을 때, 케실리온이 그녀에게 갑작스럽게 키스했다. 마왕의아내-103 납치 이루린은 그 날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그 일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머릿속이 멍해졌다. 어째서 케실리온을 뿌리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싫다면 뿌리쳐야 정상이지 않은가. 어쩌면 갑작스러운 행동이었기에 미처 행동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이루린은 그 뒤로 그 일 때문에 그를 똑바로 응시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원래부터 얼굴에 철판을 깔았는지, 아니면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인지 평소처럼 행동했다. 그런 그의 행동 덕분에 그녀도 곧 그에게 평소처럼 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 속의 의문은 가시지 않고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그런 키스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현재 몇 몇의 멋진 여자들이 난간에 기댄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루린은 그런 그를 못마땅하게 응시하면서 노골적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지금 생각하는 건데, 그의 곁에 여자가 상당히 많은 것 같았다. 언제나 그가 여자들을 달고 있는 모습을 보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케실리온이야 그리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데 주위의 여자들이 그를 가만 놔두질 않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케실리온의 관심을 끌려고 필사적으로 웃으면서 매달리는 모습이란. `괜히 화가 나네.` 이루린은 그런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린 다음, 골몰히 케디아니스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케디아니스가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슬프게 만들긴 했지만 폐인 같은 생활은 이제 접기로 했다. 케실리온의 말을 받아들이는 게 현실적으로 옳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의 공백이 상당히 커서인지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이제 곧 결혼식... 하지만 역시 케디아니스와 내 부모를 죽인 일이 마음에 걸려. 그리고 나를 둘러싼 의혹이 사라지질 않아.` 밖에 나가기만 하면, 그녀를 힐끔 힐끔 쳐다보면서 서로 얼굴을 맞대고 뭐라고 속삭이는 것이었다. 또 어떤 이들은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보이기도 했다. 갑자기 엘리세아가 수십 명으로 불어난 느낌이었다. 결국 며칠 후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데이비드를 찾아갔다. 의외이게도 그는 그녀와 케실리온과의 관계를 다 알고 있었다. "잠시 중간계로 가셨습니다. 급한 일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아마 며칠 동안 오지 못하실 것 같습니다." "그렇게 높임말을 쓰지 않으셔도 되는데..." 데이비드는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면서 누가 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은 채로 그녀를 끝까지 높여 불렀다. 이루린으로서는 그가 한참 연장자인 관계상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가 며칠 동안 오지 않는 게 왠지 그녀에게는 불안하기만 했다. 뭐라고 할까, 마치 케디아니스가 현재 그녀의 곁에 없는 것처럼 케실리온 또한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물론 현실적으로 따졌을 때, 그건 좀 불가능했다. "이루린 님, 요즘에 즐거워 보이세요." 아이나가 따스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냈다. "응? 그런가?" "저도 요즘에 즐거워요. 이루린 님께서 즐거워 보이시니..." 이루린은 아이나처럼 착한 마족도 드물 것이라고 생각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아이나는 자기보다 한참 약한 인간도 제대로 죽이지 못해 살려 주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몇 몇 보수적인 마족들에게 경멸의 시선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걸로 내가 입은 상처와 죄책감을 씻을 수만 있다면...` 이루린은 간만에 밝게 웃었다. 그러나 그게 마지막 미소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밤이 깊었다. 막 잠에 들려고 할 때, 갑자기 문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뭔가가 귀를 날카롭게 자극하는, 조용하고도 날이 선 듯한 소리였다. 발자국 소리인 것 같기도 하고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듯한 소리인 것 같기도 했다. `누구지?` 주위가 어두웠기에 그녀는 자연히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서 숨을 죽이고 입을 다문 채로 검을 집었다. 그리고 그것을 최대한 소리를 죽여가며 천천히 뽑은 다음, 살며시 침대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리고 정확하게 소리가 나는 문의 손잡이를 주시했다. 조금이지만 손잡이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윽, 이게 뭐지!` 이루린은 순간적으로 이상한 냄새가 코끝을 찌르는 것을 느끼곤 몸을 앞으로 숙였다. 잠깐 맡았을 뿐인데도 코의 감각이 모두 사라졌다. 아무래도 마취향인 것 같았다. 차가운 바늘이 전신을 뚫는 느낌에 그녀는 재빨리 창가로 다가가서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창문에 기대서, 여차하면 뛰어내릴 자세를 취했다. 문제는 그렇게 하는 도중에 소리를 너무 크게 내었는지, 갑자기 손잡이의 일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문이 세게 열렸다. "알아차린 건가." 누군가가 중얼거리듯이 말하면서 들고 있던 것을 앞으로 세우고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달빛에 서서히 드러난 그것은, 아주 날카로운 예기를 띄고 있는 검이었다. 달빛에 드러난 그 자는 비교적 날렵하게 보이는 체구를 지니고 있었는데, 강도처럼 천으로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죠?" "얌전히 날 따라가기만 한다면 아무 짓도 하지 않겠다." 이루린은 그런 낯선 침입자를 향해 비꼬듯이 웃어주었다. "내가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들을 것이라고 예상하나요?" "네가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내뱉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따라하지 말아요!" 그 자가 검을 더 높이 들이대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널 생포하기 위해 몇 백 명의 천족들이 목숨을 잃었는지 알고는 있겠지?" "뭐? 그게 무슨 소리죠?" 천족은커녕 그녀를 죽이려는 암살자도 없었다. 언제나 평화롭게 생활하고 있었는데,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가 혹시 잡아가려는 목표를 잘못 잡은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그 다음 이어지는 그의 말은 그녀의 생각을 빗나가게 만들었다. "말로 안 된다면 무력을 행사하겠다, 이루린." 이루린은 그 자의 목소리를 처음 듣는데도, 그 자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일단 좁은 공간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창문으로 뛰어 내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기도 전에, 그 자가 그녀의 치마를 검끝으로 내리 누르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비겁한!" "손끝하나 대지 않고 생포해야 한다면 이 방법 밖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서 그에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치마를 놓은 그 검으로 받아쳤다. 그가 그렇게 힘을 주지 않았을 뿐인데도, 이루린은 쇳덩어리로 타격을 받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실력으로 봤을 때 결코 평범한 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와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나 그는 전혀 지치지 않았다. 대신에 의혹에 깃든 어조로 말했다. "이상하군, 내가 보낸 애들을 모두 죽일 정도라면 이 정도의 실력보다 더 뛰어나야 정상인데... 하여튼 끝내기로 하지." 그는 품에서 작은 고리 같은 것 꺼내더니, 그대로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는 숨막힐 듯한 느낌을 받곤,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무엇인가가 심장을 크게 죄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위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는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역시, 마취향의 효과가 있긴 했군. 바로 걸려드는 것을 보니. 자, 그럼 가볼까..." `조금 밖에 마시지 않았는데도...` 이루린은 자신의 팔이 허리와 함께 밧줄에 의해 꽁꽁 묶이는 것을 느꼈다. 심하게 몸의 압박을 받을 정도로. 그리고 희미하게 눈을 떴을 즈음, 그녀는 자기의 몸이 그 자의 어깨에 들쳐 메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자는 창가에서 아주 가뿐하게 바닥으로 뛰어 내렸다. 차가운 한기가 몸을 시리게 만들 즈음, 그 자가 바닥에 선 채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와 그 자를 중심으로 바닥에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빛이 주위를 휘감고 난 후에 그녀는 그 자와 함께 그 자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녀는 마왕성에서 사라지기 전에 그 자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네가 갈 곳은 천계다. 널 본 천족들이 아주 좋아하겠지, 다른 의미로 말이야." 마왕의아내-104 납치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다른 세상에 와 있었다. 마계와는 달리 굉장히 강한 빛의 뜨거움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빛의 세기가 너무 강해서 눈을 뜨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어쨌든 눈이 빛에 익숙해질 즈음, 하얗게 보였던 세상이 점차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현재 그녀는 그 자의 어깨에 포대 자루처럼 올려져 있었다.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니, 엄청난 숫자의 천족들이 남자를 둘러싸다가도 곧 길을 비켜주고 있었다. 젊은 천족들은 매우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고, 좀 나이든 천족들은 매우 적대적인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게 말로만 듣던 천사?` 이루린은 하얀 날개를 가지고 있는 그들을 신기하게 응시했다. 굉장히 아름다웠지만 뭐랄까, 표정이 매우 험악하다고나 할까. 그들의 표정을 보는 순간 이루린은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를 깨달았다. "이봐요! 당신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이 곳 천족들을 단 한 마리, 아니 한 명도 죽인 적 없단 말야! 당장 내려놓지 못해요?" 이루린은 심하게 발버둥쳤으나 그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래봤자 어차피 힘만 뺀다고 생각한 이루린은, 일단 기회를 엿보기로 하고 얌전하게 있었다. 얌전하게 있어야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서 도망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계라는 곳은 굉장히 신기했다. 바닥이 스프링처럼 구름으로 되어 있었고, 집들도 굉장히 독특한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마계의 풍경이 검은색 위주로 도배되어 있다면, 천계의 풍경은 흰색 위주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굉장히 아름다웠다. 날개를 단 어린 아이들이 폭포 주위를 맴돌고 있었고, 집들을 이루고 있는 중심에 사이사이에 신전으로 추정되는 것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 거대한 성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마치 마왕성을 보는 듯, 매우 흡사했다. 그 때 그 자가 비웃음을 흘렸다. "매우 사납군. 원래 성격이 그렇진 않을 텐데... 넌 협박용으로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그 자는 신전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루린은 자신을 향해 막 날아오는 돌들을 어렵게 피하면서 그에게 외쳤다. "왜 날 잡아가려는 거죠? 날 당장 내려놓지 않으면 케실리온이 와서 당신..." 그렇게 말하는 순간 놀란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어째서 자신의 입에서 케실리온의 이름이 튀어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탄스 님, 다녀오셨습니까. 그런데 이 여자는...?" 부하로 보이는 천족 한 명이 탄스라고 불리는 자에게 고개를 숙이며 그녀를 응시했다. 그 남자는 이루린을 벌레 보듯이 응시하고는, 탄스가 가라고 손짓하자 그대로 사라졌다. 이루린은 신전 입구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본능적인 느낌 때문에 몸을 굳혔다. 그리고 자신을 잡은 탄스의 힘이 느슨해진 틈을 타서, 있는 힘껏 몸부림을 치며 그의 등을 발로 타면서 바닥에 착지했다. 그러자 탄스가 놀라면서 그녀를 잡으려고 달려들었다. 이루린은 그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힘차게 펴준 후에, 묶인 채로 달리기 시작했다. "잡아!" 그녀는 탄스가 자신을 바싹 쫓아옴을 느끼면서 미친 듯이 달렸다. 탄스의 실력으로 보아 금방 잡히는 게 당연했으나 주위에 천족이 상당히 많았던 탓에, 어느 정도 시간을 끌 수 있었다. 천족들 사이를 이리저리 숨다시피 하면서 달린 결과, 그녀는 탄스를 따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천족들 모두 마족인 그녀의 적이 될 수 있었기에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까지 미친 듯이 달려야만 했다. "헉... 헉..." 그녀는 땀이 이마를 홍건히 덮을 때까지 달리다가 결국 지쳐 아무 벽에나 몸을 기댔다. 연신 천족들이 쫓아오거나 주위에 있는지 시선을 움직이면서. 어렵게 따돌렸으니, 이제 도망치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무슨 수로 도망친단 말인가. `평소에 마법이라도 배워뒀어야 하는 건데.` 이루린은 망연자실하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계로 돌아가는 문을 찾아야만 했는데, 그게 어디에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으니 문제였다. 천족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지 않은가. `변장하면 가능할까? 가령 얼굴과 몸 전체를 천으로 덮어버린다던가... 아냐, 내 기운 자체가 이 곳과는 틀려. 게다가 이상하게 이 곳 공기가 내게 맞지 않아. 너무 답답해...!` 이루린은 양미간을 좁히면서 일어났다. 그리고 힘없이 아무도 없는 골목 사이를 걸었다. 그런데 그 때,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제 자리에 섰다. 현재 그녀가 보고 있는 그 길이 어디선가 봤던 길인 것이다. 단편적으로 아련히 기억에 남는 그 곳을 어디에서 봤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 여기서 이 모퉁이를 돌면 넓은 나무를 둘러싸고 있는 공터가 나와.` 이루린은 그렇게 기억을 더듬으면서 하나씩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넓은 공터가 나왔다. 너무나도 낯익은 장소였다. 분명히 다른 곳은 처음 보는데도 이 곳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무엇인가가 떠오를 듯, 말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한동안 잠잠했던 오른쪽 가슴이 죄이듯이 아파 왔다. "누구입니까?"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루린은 고개를 돌렸다. 검은 흑발을 지닌 남자가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케실리온과 비슷한 외모를 지니고 있는 그 남자의 등뒤에는 하얀 날개가 달려 있었다. 남자의 옷은 굉장히 호화스러웠으나, 양 손목에 두꺼운 쇠가 채워져 있었고 발목에는 쇠로 만들어진 거대한 구를 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엇인가가 사유가 있는 듯 싶었다. `죄를 지은 건가? 아... 이 남자는!` 갑자기 불현듯 무엇인가가 생각났다. 전에 가우드의 기억이 꿈이 되었을 때 보았던 남자였다. 그 때 그 남자는, 꿈속의 주인공에게 어서 가자고 재촉했었다.... 그리고 그 남자의 입에서 그녀는 예카트레스라는 이름을 들었다. 그 때는 무심코 그 기억을 지우려고 했었다. 남자는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루린은 그 노골적인 시선에 잠시 당황했다. 이윽고 그 남자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족이로군요. 눈동자가 검은색에 가까워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1시간 이내로 돌아가지 않으면 몸이 타서 목숨을 잃습니다. 이 곳은 천계니까요." 이루린은 그 말에 속이 싸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시한 폭탄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얼른 가지 않으면 정말로 그 남자의 말처럼 될 것이다. 이루린은 그를 경계하며 말했다. "당신은 날 죽이려고 들지 않나요? 내가 마족인데?" 놀랍게도 남자가 매우 슬픈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뭐, 지금 당장 어쨌든 마계로 돌아갔으면 좋겠군요." "방법을 몰라요." "집에 마계로 갈 수 있는 마법진이 하나 있습니다. 정 힘들다면 그걸 사용하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이루린은 머리를 숙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남자의 집을 응시했다. 남자의 집은 다른 집들에 비해 매우 호화롭고 아름다웠다. 그런 집에 살면서도, 남자는 죄인처럼 속박되어 있었다. 뭔가가 매치에 맞지 않았다. 어차피 1시간이나 남았으니, 이루린은 이 남자와 대화해서 몇 가지 사실들을 물어보기로 했다. "가기 전에 물어볼 게 있어요. 당신은... 이 검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이루린은 쓰러지는 와중에 옆에 차고 온 검, 가우드를 들어 보였다. 가우드는 평소에 얌전하게 있다가 자기와 관련된 얘기가 나오면 수다를 떨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언제부터인가 매우 얌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검도 잠을 자나?` 뭔가가 이상했지만, 어쨌든 이루린은 그 남자에게 가우드를 보였다. 남자가 매우 놀라는 눈동자로 가우드와 그녀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가 어두운 표정으로 일관하기 시작했다. "알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던 여자의 물건이로군요." 역시 그는 가우드와 관련된 남자였다. "그 여자는 지금 어디에 있죠? 그리고... 예카트레스라는 자를 알고 있나요? 또 당신은 왜 지금 그런 몰골을 하고 있죠? 이런 집에 살면서?" 남자는 한참 동안 슬픈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하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여자는 지금 내 곁에 있습니다." 이루린은 그 여자가 지금 이 집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나볼까, 하고 생각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그냥 그에게 묻는 것으로 끝내는 게 더 편했다. 그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속박은 며칠 후에 풀립니다. 그 때가 바로 이 생활을 시작한 1000년째가 되는 날이니. 예카트레스는... 아주 잘 알고 있지요. 한때 서로 동료였으니까요. 물론 지금은 풀려나면 당장 죽이고 싶은 대상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그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결과적으로 모두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지만..." 이루린은 그가 무슨 이유로 그렇게 당하고 있는 것인지 물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그녀의 주위로 진한 살기가 느껴졌다. 나무 사이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것도 한 20명 정도. 그러한 그녀의 생각을 읽는 듯, 그가 자기의 집을 가리키며 외쳤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마법진이 보일 겁니다. 일단..." 그가 뭐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그러자 풀숲에서 창을 든 천족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탄스도 눈을 부라리며 그녀와 그를 번갈아 보았다. "여기서 뭘 하고 계셨던 겁니까. 또 1000년 동안 갇혀 지내고 싶으신 겁니까?" 아직 이름도 모르는 그가 고함을 질렀다. "어서 도망쳐!" "잡아라!" 이루린은 문을 세차게 열고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그의 말대로 마법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두 개였다. 이루린은 머뭇거리다가, 천족들이 들이닥치자 하는 수 없이 왼쪽에 있는 하얀 마법진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몸은 공중에 치솟았다. 이루린은 마계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다음 이어지는 남자의 외침에 경악했다. "오른쪽이 마계란 말입니다! 왼쪽은 신계로 가는 마법진이고!" 그렇게 그녀는 신계에 가게 되었다. 마왕의아내-105 납치 이루린은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공간이 너무나도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바닥은 여전히 구름이었는데, 주위는 매우 평온하기만 했다. 집들도 없어 마치 구름 위가 지평선처럼 보였다. 단지, 신전이 천계보다 훨씬 많았고 -마계보다도 더했다. - 천계보다 폭포나 나무들이 더 많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 외에 움직이는 생명체는 보이지 않았다. `신계... 말 그대로 신들이 사는 곳인가?` 그렇지만 신들의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루린은 오른쪽으로 갔어야 했을 일을 잘못 치른 것 때문에 매우 후회했다. 주위에 마법진이라곤 눈을 씻고 찾을 수가 없었기에 누군가에게 물어서라도 마계로 돌아가야만 했다. 일단 이루린은 주위를 감상하면서, 한편으로는 빠른 걸음으로 제일 큰 신전으로 향했다. 유난히 눈에 띄는 신전이었기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신이라는 자들을 만난다는 게 그녀에게는 매우 새롭고 긴장된 일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살고 있던 곳의 신과는 - 기독교나 천주교 - 너무나도 다른 개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신전 입구로 천천히 들어섰다. 한편으로는 가우드를 세게 쥐면서. 들리는 소리라곤, 그녀가 신전의 바닥을 밟는 발자국 소리밖에 없었다. 발자국 소리가 고요하게 신전 내부에 울리고 있을 때, 그녀는 신전 중앙에서 한 꼬마를 볼 수 있었다. `뭐야, 저 소년은?` 그 소년은 약 7세 정도로 보였다. 앙증맞게 생긴 외모에, 매우 편하게 보이는 흰 니트가 눈에 띄었다. 소년은 저울을 가지고 평행하게 맞추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거대한 신전 안에 이렇게 작은 소년이 있다는 건 뭔가가 맞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년에게 다가갔다. "뭘 하고 있니?" 이루린이 미소를 지으며 소년 옆에 쭈그려 앉았다. 소년은 정말 빨려들 것 같은 눈동자로 깜박거리더니, 이루린을 응시하지 않고 저울에만 시선을 두었다. "평행하게 만들고 싶어." 이루린은 소년의 말에 저울을 응시했다. 저울에는 하얀색과 검은색 받침대가 양쪽에 각각 놓여져 있었다. 이상하게도, 저울에는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는데 한쪽으로 자꾸 기울고 있었다. 그것도 검은색 받침대가 놓여 있는 쪽으로. "이 저울을 좀 똑바로 잡아 줘." 이루린은 그런 소년의 우울해 보이는 표정에 자신도 모르게 웃으면서 저울이 평행하게 되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러자 그 소년이 비로소 환하게 웃으면서 이루린을 응시하는 것이었다. "고마워. 이걸 바로 잡아줘서. 앞으로도 그렇게 해 주면 돼." 그녀는 소년의 이상한 말을 흘려들은 후 묻기 시작했다. "네 이름이 뭐니? " "라페스." "이 곳, 신계가 맞기는 하는 거지?" "응." "이 곳에 내가 있으면 죽거나 하진 않지?" 소년이 신비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영원히 죽지 않아." "이 곳의 주인이 누구지? 넌 아닐 테고."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루린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루린은 이렇게 귀여운 애가 있는 줄은, 케디아니스 이후로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이 곳은 주신이 살고 있는 곳이야." "그래? 어쨌든 고마워, 그럼 이만 갈게." 이루린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에 일어나서 신전 밖으로 나섰다. 밖으로 나서서 여러 곳을 돌아다닐 즈음, 그녀는 어느 폭포에 도착하게 되었다. 폭포는 은빛의 머리카락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주변에 어우러진 나무들 또한 울창하게 뻗어 있었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보는 순간, 어떠한 영상이 뇌리를 스쳤다. `뭐지? 이 곳도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어.` 이루린은 양미간을 좁히며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썼으나, 오른쪽 가슴이 아파서 그만두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자신이 그 소년에게 돌아가는 방법을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곤 비명을 질렀다. "아차! 물어봐야 하는 건데!" 그리고 어떤 곳을 보는 순간, 그녀는 그대로 몸을 굳혔다. 그 곳의 단편적인 일부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빠른 속도로 낯설지 않은 길을 걷기 시작했다. 울창한 나무들을 지나면 거대한 공터가 나오는데, 그 곳의 중앙에 마법진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곧 공터가 나왔고, 그 곳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펼쳐져 있었다. `한 번도 아니도 두 번씩이나... 뭐지? 이 불안한 느낌은. 마치 내가 속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불안하게 느껴졌던 오른쪽 가슴에서 심한 통증을 느끼곤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끔씩 아프긴 했지만 이렇게 고통스럽기는 처음이었다. 처음에 폭주했을 때처럼 가슴이 심하게 죄여왔다. 곧, 그녀의 목구멍에서 뜨뜻한 무엇인가가 올라오더니, 입가로 세어나가기 시작했다. 만져보니 붉은 피였다. 그 때 마법진에서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왕성에서 그녀를 납치했던 탄스와 일부 천족들이었다. "드디어 찾았다, 망할 계집..." 탄스가 검을 뽑아들자, 적개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던 천족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창을 들고 이루린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이루린은 순식간에 그들에게 포위되었다. 비틀거리면서 어렵게 일어난 그녀는 품에서 검을 뽑았다. 겨우 피가 멎고 심하게 뛰던 가슴이 진정되었다. "한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왜 날 데려가려는 거지? 그래서 너희들에게 이득 될 게 뭐지? 참고로 말하지만, 난 천족 같은 건 마왕성에 있을 때 보지도 못했고 죽이고 싶어도 죽이질 못했어." 탄스가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예카트레스 님의 명이시다. 아니, 우리의 뜻이기도 하지. 넌 이 세상에 살아서는 안 될 존재니까." 이루린은 이제 그 이름만 들으면 분노가 치솟을 지경이었다. 또 좋지 않은 그녀의 일에 그 자의 이름이 거론되었던 것이기에. "좋아, 그럼 덤벼. 모두 죽여줄 테니까!" 이루린은 호기 있게 외쳤다. 그러나 속으로는 내심 불안해하고 있었다. 피를 흘려서인지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살인 같은 건 금기하고 있는 세계에서 살아왔던 그녀였다. 그러니 어떻게 누군가를 죽이거나 하겠는가. `저 마법진으로 도망쳐야 해.` 그녀는 천족들이 자신 하나만을 보고 무더기로 달려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들의 창을 교묘하게 피하면서 마법진 근처로 가려고 애썼다. 그러나 마법진 정 중앙에 탄스가 자신만만하게 미소를 지으며 버티고 서 있었다. 결국, 마법진 근처로 가려면 이들과 탄스를 쓰러뜨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답답해, 얼마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숨쉬기가 힘들어. 그 소년이 거짓말을 한 건가?` "모두 멈춰." 나무 사이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단호하고 강한 힘일 깃들어 있는 단 한 마디에 모두들 행동을 멈췄다. 이루린이 키가 작은 그 누군가를 살펴보니, 아까 신전에서 보았던 그 소년, 라페스였다. 이루린이 혹시나 그가 창을 든 천족들에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피하라고 말을 열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천족들이 하나 같이 눈을 크게 뜨면서 당황해 하는 것이었다. 탄스와 창을 든 천족들이 갑자기 창을 바닥에 내려놓고 모두 무릎을 꿇었다. "라, 라페스 님." 놀란 건 비단 그들뿐만 아니라 이루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 작은 소년에게 `님`자를 붙여서 부르는 게 너무 아이러니했다. 라페스는 소년답지 않게 깊은 눈동자로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긴 내 구역이니 함부로 들어오지 마라. 신과 특정한 자들을 제외한 어느 누구든 이 곳에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소년의 목소리가 신비스럽게 울렸다. 탄스가 앞으로 나서며 라페스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루린은 뭐가 뭔지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죄송합니다, 주신 라페스여." 그 말에 이루린이 제일 경악했다. 마왕의아내-106 납치 "네가... 너처럼 작은 꼬마가 주신?" 이루린은 황당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주신이 여타의 신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이내 어렵사리 수긍할 수 있었다. 그녀가 알기로 주신은 일정한 형체가 없어 자유자재로 몸을 바꿀 수 있으며, 신계에서도 독립적인 존재였다. 즉, 주신은 세 차원계를 직접 통솔하지 않는다고 했다. 신이라는 대단한 존재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게 그녀로서는 매우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머릿속이 대단히 복잡하기도 했다. "그래, 내가 주신이지. 라페스가 미소를 이루린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귀에 울리고 미소를 짓고 있어도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겉만 사람처럼 보인다고나 할까. 라페스가 마법진을 가리키며 천족들에게 외쳤다. "당장 돌아가. 여긴 너희들이 있을 곳이 아니니까." 그들은 냉큼 일어서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이 마법진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외치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탄스는 두려운 듯이 라페스를 응시하면서도, 이루린을 아쉬운 듯이 노려보았다. 마법진에서 나온 빛이 그들은 완전히 감쌀 때까지도. 그들인 사라지자, 이루린은 그에게 물었다. "저..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높여서 부르지 않아도 돼." 그녀에게는 왠지 그 말이 명령처럼 들렸다. "아, 먼저 도와줘서 고마워. 이 곳은 대체 질서가 어떻게 잡혀 있는 거지?" "아니, 꼭 그런 것만은. 사실 오래 전부터 신계에서 모든 것을 주관해왔고, 그들이 모든 주도권을 지녔지. 마계나 천계, 중간계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지만 신계는 달랐어. 그들은 마음대로 각 차원계를 드나들었고, 세상을 지배하다시피 했지. 언제부터인가 제일 약한 중간계가 신계를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게 되었어. 그리고 최근에, 그러니까 몇 천 년 전에 처음으로 천계에서 오래 전부터 지배하다시피 했던 질서를 무너뜨리기 위해 전쟁을 선포했어. 그리고 이에 마계가 가세해서 싸우게 되었지. 그들이 모두 모일 수 있는 장소는 유일하게 중간계였고, 덕분에 그 곳이 크게 피해를 입었지. 내가 제일 관심을 두고 있었던 곳이 말야. 결국에는 현재까지 서로 휴전만 하고 지내고 있지. 신족을 제외한 모든 종족들이 - 각 차원계의 물론 우두머리는 신족처럼 마음대로 차원계를 나다닐 수 있지. - 각 차원계에 함부로 드나들 수 없다는 사실을 바뀌지 않았지만 말야. 특히 신계는 신족이나 각 차원계의 우두머리를 제외하곤 들어서는 것조차도 할 수 없는 곳이야. 하지만 그 휴전이 이제 곧 깨지려고 하고 있어... 그것도 아주 잘못된 방법으로. " "네가 개입하면 되잖아." "이 곳은 내가 창조한 세상이야. 하지만 난 창조만 했을 뿐, 이들에게 어떠한 질서도 부여하지 않았어. 그들이 알아서 질서를 성립하도록 내버려두었지. 사실 내가 개입하면, 창조한 보람이 없어지잖아? 모든 게 내 잣대로 결정된다면, 이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나라가 되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발전이 없고, 그냥 그저 영원히 그 상태로만 머무르게 되지. 그리고 지금 내가 개입하면 여태까지 구축했던 모든 질서들이 파괴될 것이고, 세상이 혼란스러워지겠지. 그래서 내버려둘 수밖에 없어." 라페스가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더니 다시 미소를 지었다. "행운을 빌어. 자, 이제 어서 마법진으로 가. 천계 중에서 네가 아는 장소를 떠올리면 될 거야." 이루린은 라페스의 말들을 곰곰이 되새기면서 마법진에 올라탔다. 순식간에 빛에 휩싸이자, 라페스가 고개를 돌리더니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그 순간 이루린의 몸은 신계에서 그대로 사라졌다. 갑자기 주위가 환해지고, 이윽고 제 빛깔들이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법진 바로 앞에 케실리온과 닮은 그 남자가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괜찮습니까? 신계에서 무슨 봉변을 당하지는 않았습니까? " 남자가 걱정스럽게 물으면서 이루린을 살폈다. 아까 그 남자의 저택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남자는 비틀거리는 이루린의 팔을 다정하게 잡아주며 의자로 이끌었다. 이루린은 그제서야 자신이 주신을 만났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기쁨에 미소를 지었다. 주신을 만난다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 이루린은 한참 남자와 대화하다가, 가장 알아야 할 내용을 물었다. "...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그런데 당신 이름이 뭐죠?" "타렌서라고 합니다." 타렌서라고 밝힌 남자가 그녀를 살피며 물었다. "혹시 현재 사랑하는 남자가 있습니까?" 갑자기 케실리온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루린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남자가 한 명 있긴 한데, 워낙 냉담해서 속마음 한번 털어놓은 적이 없거든요. 한 번도 내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도 없고... 당신은?" 타렌서의 눈동자가 검게 변했다. "오래 전부터 사랑해 왔던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런 몰골이 된 이후에도... 약 1000년 동안 변하지 않고 사랑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여자는 한 번도 날 쳐다보지 않았고, 지금은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 여자가 지금 이 저택에 있겠군요." "......" 애절한 빛을 띄고 있는 눈동자가 그녀에게 향했다. "당신은 참 순수한 남자 같군요. 여자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데도..." 이루린은 이제 가야 할 시간임을 깨닫곤 일어나서 오른쪽 마법진으로 향했다. 그 위에 올라서서, 그녀는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한 타렌서에게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어주었다. 타렌서가 희미하게 미소를 짓다가, 갑자기 심각하게 말을 꺼냈다. "지금 돌아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제 가도록 해요." 이루린의 몸이 빛에 휘감겼다. 그녀는 마왕성의 입구 부근에 있는 어느 공터의 장면을 떠올렸다. 그러자 서서히 그녀의 몸이 공중에 떠오르더니, 슬픈 표정의 타렌서를 마지막으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예상대로 마왕성 공터였다. 한적한 주위를 둘러본 만족스럽게 둘러본 그녀는, 아직도 자신이 신계와 천계를 넘나들었는지 믿어지지 않아 크게 심호흡했다. 그런 다음 마왕성 내부로 들어갔다. 그런데 들어가는 순간, 그녀는 한적해야 할 주위에 고위 마족들과 창을 든 상급 마족들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갑자기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며 들어온 이루린을 갑자기 빤히 주시했다. "왜들 그러시죠?" 이루린이 한마디했다. 그 말과 동시에 서열 10위 이내로 추정되는 고위 마족이 앞으로 나오며 손가락으로 이루린을 가리켰다. "그래, 신계와 천계에는 잘 갔다왔나 보군. 교활한 것... 마왕성에 숨어든 첩자다. 당장 잡아라!" 영문을 모를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그녀는 100명 가까이나 되는 상급 마족들에게 잡히게 되었다. 마왕의아내-107 진실 이루린은 그들이 자신을 밧줄로 묶으려고 하자 격렬하게 움직였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첩자라니, 그런 터무니없는 말이..." 제일 서열이 높은 고위 마족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닥쳐라! 신계에 들어갔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할 생각인가?" "물론 신계에 들어가긴 했지만 그게 지금 제가 잡힌 이유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이루린은 카란델과 마리엔이 죽은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날카롭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엘리세아가 한쪽 구석에서 조소를 흘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직감적으로 그녀는 모든 게 엘리세아의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끌고 가라!" "잠깐만! 잠깐만요! 제게도 발언할 기회를 줘야..." 그러나 상급 마족들은 그녀를 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고 강제로 끌기 시작했다. 그녀 하나를 잡기 위해 모인 숫자가 엄청났기에 도망친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설사 도망친다고 해도 가야 할 곳이 달리 없었다. 결국 그녀는 일단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켜보기 위해 그들에게 얌전히 끌려갔다. 그들에게 거칠게 끌려간 곳은 지하 감옥이었다. 습기와 짙은 어둠으로 둘러싸여 있는 그 곳은 상당히 불쾌했다. 정체 모를 물기가 바닥과 벽에 묻어져 있었고, 간간이 피로 추정되는 얼룩도 눈에 띄었다. "한시도 눈을 떼지 말고 감시하도록. 마왕성에 몰래 침입해서 이루린 님처럼 행세할 수 있었던 여자니까." 이루린이 그 말에 항의하려고 했으나, 보초병만 남겨두곤 감옥에서 나가버렸다. 그녀는 철창을 세게 흔들어대고 발로 차기도 해 봤지만 속수무책이었다. 힘만 뺄 뿐이었다. 이루린은 자신이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에 너무 기가 막혀서 한동안 그대로 구석에 앉아서 생각했다. 신세가 너무 처량하게만 느껴졌다. 신계에 갔다 온 사실이 그렇게 잘못된 것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이상해, 뭔가가. 케실리온이라면 알 수 있을 텐데... 어째서?` 갑자기 순조롭게 진행되던 무엇인가가 자꾸 일그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죽은 케디아니스의 얼굴이 떠올라 심정이 착잡해졌다. 몇 시간 후에 그녀는 최대한 감정을 추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어떻게 하면 마왕성을 몰래 탈출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가장 빠른 방법은 중간계야. 천계나 신계에는 오랫동안 머물 수 없으니까 중간계가 적격이지. 하지만 무슨 수로? 워프 마법진이 있어야 하는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설사 알고 있다고 해도 그 곳은 경비가 삼엄할 거야. 일단 밖으로 나가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목석처럼 서 있던 보초병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루린 님. 무슨 이유로 그렇게 잡혀 계신지는 모르지만, 전 당신이 절대 첩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딱히 댈 수 없지만 이루린 님의 모습에서는 거짓이 없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이루린은 저런 마족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고맙군요." 갑자기 보초병이 철창 안으로 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어떤 종이가 가지런히 접혀 있었다. "이건... 어떤 소년이 최근에 제게 남긴 종이입니다. 꼭 이루린 님께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이루린은 얼굴을 돌려버린 보초병을 응시하면서 종이를 받아서 펼쳤다. [그가 이루린을 바라보는 시선이 나와 똑같아.] 조금은 함축적인 내용이었다. 대충 종이를 남긴 소년이 누구인지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나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쪽지에 적혀 있는 내용은 간단하지 않은 암호처럼 보였다. "케디아니스..." 그녀는 서글프게 말하면서 쪽지를 접어서 품에 고이 넣었다. 그리고 벽에 몸을 기대어, 잠깐이지만 잠을 청했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잠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그녀는 잠결에 철창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끌고 가라." 비몽사몽 들려오는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은 억센 손에 의해 일어서서 끌려가게 되었다. 워낙 거칠게 행동해서인지,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절로 잠이 깨어졌다. 그리고 서서히 이성이 되돌아왔을 때, 그녀는 조금 당황했다. 최소한 1주일은 갇혀 지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겨우 하루만에 나간다는 사실이 너무 허무했다. `내가 비굴할 필요는 없어. 난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으니까.`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써서인지 오히려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걸을 수 있었다. 이럴수록 침착해야 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막 끌려가서 성에 있는 고위 마족들이 집결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자연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무섭게 응시하고 있는 그들 그 중심에 케실리온이 서서 그녀가 오는 것을 응시하고 있었다. 물론 가면을 쓰고서. 이루린은 그라면 절대로 그녀가 첩자가 아니라는 것을 밝혀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는 현명했고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실하게 가려낼 수 있었으니까. `설마, 곧 결혼할 건데...` 그녀는 둥근 원을 형성하고 있는 마족들 사이를 뚫고 들어가 중앙에 섰다. 상급 마족들이 팔을 놓아주자, 그녀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들 그녀를 경계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측근으로 보이는 자가 케실리온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 여자는 첩자입니다." 케실리온은 그에게 대답하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루린은 그가 무슨 말이라도 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믿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 풀어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케실리온은 그녀에게 냉정하게 대하는 것이었다. 평소보다도 더욱.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하도록." 그녀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하고, 침착하고도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납치를 당했어요. 탄스라고 불리는 천족에게. 그러나 천계에서 급히 그들의 손에서 빠져나왔고, 마계로 돌아가려고 했었는데 잘못 행동하는 바람에 신계로 갔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곳에서 라페스를 만나고 겨우 이 곳으로 돌아왔어요." 갑자기 내부가 술렁거렸다. 이루린은 그들의 반응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지만 적어도 좋은 뜻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말을 꾸며서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랬다가 거짓말인 게 들통나게 되면, 그 때는 사실을 밝힐 수 없을 테니까. 케실리온 근처에 엘리세아가 다가왔다. 그녀는 케실리온 옆에 붙어서 그녀에게 의미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그녀의 눈에는 상당히 거슬렸다. 힘만 있었다면 그들 사이를 떼어 놓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는 엘리세아의 존재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고 추궁했다. "신계에 간 게 사실인가?" "물론 그렇긴 하지만..." 케실리온이 차갑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난 신계에 간 사실만을 물었다. 그 사실만 대답해라." "...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케실리온은 주저하지 않고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상급 마족들을 향해 외쳤다. "당장 이 여자를 붙잡도록." 예상치 못한 케실리온의 명령에 그녀는 순간적으로 깜짝 놀랬다. 이윽고, 마음이 깊은 상처와 배신감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사고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왜 케실리온이 그런 판단을 내렸을까, 그게 신경 쓰일 따름이었다. 그녀는 그를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다른 마족들이 아무리 자신을 싫어하고 의심해도 케실리온 만큼은 진실을 똑바로 보고 믿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도 결국은... 그가 그녀를 지나치면서 나직이 말했다. "마족은 마왕을 제외하고는 신계에 갈 수 없다. 그 사실을 알고 있나? 천계는 그렇다 치고, 신계는 가면 바로 소멸되어 버리니까. 그게 네가 마왕성에 숨어든 첩자라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증거이다." 잔인하고도 충격적인 말에 그녀는 항의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엘리세아가 곧 그의 옆에 붙었고, 그녀는 그 모습에 다시 한번 마음이 쓰라렸다. 그러나 케실리온은 그런 엘리세아를 거부하지 않았다. 마치 연인처럼 다정하게 - 엘리세아만 - 걸어가는 것이었다. 적어도 평소라면, 달라붙는 여자들에게 상처를 줘서라도 떼어내는 게 정상이었기 때문이다. 케실리온이 문을 나서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저 여자를 마왕성에서 영원히 쫓아내고, 다시는 발을 붙일 수 없게 만들도록."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루린은 눈앞이 흐려져서 케실리온이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볼 수 없었다. 그에게 이런 기분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그를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안타까움, 첩자가 아니라는 진실을 벗겨낼 만한 게 없다는 억울함이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또, 그를 깊게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으니까. 마왕의아내-108 진실 "아니라고 했잖아요! 어째서!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죠?" 그녀는 상급 마족들의 우악스런 손길을 억지로 뿌리치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러나 곧 달려온 4명의 상급 마족들에 의해, 그녀의 몸은 공중에 들리게 되었다. 결코 마왕성 밖으로 쫓겨나지 않기 위해, 그녀는 검을 뽑아들고서라도 싸우려고 했다. 그리고 케실리온에게 그 이유를 직접 묻고 싶었다. "손목을 잡아!"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녀는 검을 뽑지 못하고 손목을 잡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마왕성 공터까지 강제적으로 나가게 되었다. 이윽고 그들이 성문 앞에 잠시 우뚝 서더니, 그녀를 내려놓은 즉시 세게 밀쳤다. 그녀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넘어지는 사이, 상급 마족들이 성문을 닫기 시작했다. 아픈 무릎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서 성문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문을 굳게 닫혀 있었다. "다시는 오지 말도록! 만약에 다시 들어왔다가 눈에 띄면 그 다음에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상급 마족들은 환멸에 찬 눈길을 이루린에게 던지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이루린은 성문을 잡고 거칠게 흔들었으나, 문을 열리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이러한 처지에 있는 이유가 케실리온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서운하고 슬펐다. "이루린 님! 괜찮으세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루린은 고개를 들었다. 아이나가 작은 보따리를 하나 들고 성벽에 붙어서 달려오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루린 님. 자, 어서 저와 함께 일단 도망치도록 해요." 이루린은 힘없이 말했다. "네 눈에도 내가 첩자로 보이지 않니?" 아이나가 이루린의 팔을 잡고 앞으로 끌었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이루린 님께서는 언제나 제게 친절하게 대해주셨어요. 전 이루린 님이 첩자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요. 그건 모두 모함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엘리세아 님과 루시안 님께서 이루린 님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셨어요. 암암리에 케디아니스 님과 카란델 님, 마리엔 님께서 타살된 사실만을 가지고 이루린 님이 첩자라고 우기고 다니셨던 거예요. 결정적으로 신계에는 정말로 아무도 들어갈 수 없으니, " 이루린은 눈물을 흘렸다. 아이나가 그런 이루린의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주었다. 그녀는 아이나를 올려다보며 자신없는 투로 말했다. "나도 내가 왜 죽지 않았는지 모르겠어." "물론 저도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전 이루린 님을 믿어요." 이루린은 그나마 아군이 있다는 사실에 아이나를 껴안았다. 아이나만은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모두 그녀를 믿지 않았는데도 아이나만은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고마워, 아이나. 일단은 앞으로 나와 함께 다니자, 어디든." 정말로 순수한 감정이 우러나온 말이었다. "네, 그럼 출발해요." 아이나는 이루린을 부축해 주었다. 충격과 충격의 연속이어서 제대로 걷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눈물을 보인 적도 없던 그녀였지만, 요즘 들어서 미칠 듯이 괴로워서 자꾸 울곤 했다. 자신 때문에 죽은 케디아니스와 이루린의 부모가 죽은 사실, 그리고 믿었던 케실리온의 배신... 갑자기 가슴이 죄일 듯이 아팠다. 이런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 괴로운 장면들이 연상되어 그녀를 괴롭히고 지치게 만들었다. 한 번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 곳에 와서 처음으로 자살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물론 단순히 충동에 그치긴 했지만. "이루린 님, 강해지셔야 합니다. 절대로 물러서지 마세요. 제가 곁에서 언제까지나 지켜드릴 테니까요." 아이나의 친절함에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지?" 아이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앞을 주시하며 말했다. "펨하에 갑니다. 제 기억으로는 펨하에 중간계로 이어지는 마법진이 있다고 들었으니까요." 펨하라면 세이젠이 죽었던 장소였다. 케디아니스가 죽지만 않았더라면 꼭 가고 싶었던 중간계였는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슬프기만 했다. 어쩌면 영원히 케실리온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째서 깨닫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그가 이성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다. 언제나 가족처럼 지내왔으니까.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랐지만, 그녀는 그를 다른 시선을 보고 있었다... `그는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그러고 보니,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소문만 믿고 그녀를 믿지 못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에게 사랑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표정이라도 한번 바꿨으면 좋으련만, 그는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나에게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뭐가 잘못된 거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난 가만히 있는데 왜 내 주위에서 문제가 일어나는 거지?" 다시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다. 아이나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루린 님께서 잘못하신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 때 갑자기 하늘의 구름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칼로 북을 찢는 듯한 소리도 간간이 들려왔다. 그 구름들은 마왕성 꼭대기를 기준으로 거대한 소용돌이를 그리기 시작했다. 땅에서 미약하지만 지진이 일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급기야는 땅이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마계에서는 지진이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현재의 지진은 느낌부터가 틀렸다. 게다가 아까 전까지만 해도 조용하게 풀숲을 거닐고 있던 미미한 마물들이 난폭하게 괴성을 지르면서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마치 세상이 곧 무너질 것처럼. "뭐, 뭐야?" 아이나도 놀랐는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피하셔야 해요!" 아이나가 이루린을 잡은 상태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뛰는 도중에, 그녀는 아이나의 치마폭에 처음 보는 검이 한 자루 채워져 있음을 알고는 물었다. "검을 쓸 줄 알아?" 뛰는 와중에도 아이나가 수줍게 웃었다. "거의 쓸 줄 모르지만, 이루린 님을 지켜드리기 위해서는 검을 챙겨야만 했어요." 그 말이 이루린의 가슴에 잔잔하게 와 닿았다. 아이나와 함께 있으면 절로 상처받은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루린과 아이나가 뛰어간 장소는, 울창하게 하늘로 뻗어 있는 어둡고 침침한 숲이었다. 밤처럼 어둡지는 않았기에 굳이 빛이 필요하진 않아 다행이었다. 둘 중에 마법을 쓸 줄 아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가우드가 말을 하지 않잖아?` 이루린은 가우드에게 말을 걸어볼까 하고 생각했으나, 아이나가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그만두었다. 밖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하필 마왕성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일이었으니, 어떻게 걱정이 되지 않겠는가. 생각 같아서는 돌아가고 싶었으나 케실리온의 차가운 행동을 떠올리곤 관두었다. `이대로 그를 잊을까? 그 편이 나은 걸까?` 중간계로 가면 그를 영영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잊는 편이 나았다. 아니, 차라리 끔찍했던 기억들을 모조리 지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억 상실증에라도 걸린다면 최소한 이런 비참한 기분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이루린은 다리가 아프고 저렸지만 힘을 내서 아이나와 함께 약 1시간 동안 걸었다. 아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아이나가 발걸음을 멈추고 섰다. 이루린은 먼저 앞으로 나가다가 멈춰서서 하늘을 응시했다. "시원하고 멋진 곳이야, 하지만 이 곳에서 이렇게 있을 순 없겠지? 마물들이 들끓으니까." 이루린은 말하면서 아이나가 따라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의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이나? 설마 다 왔다고 말할 건 아니겠지?" 아이나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여졌다. "아니, 이 곳이 네 무덤이야." 차가운 검날이 목에서 느껴졌다. 마왕의아내-109 진실 "아이나....?" 이루린은 잠시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목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검날에 이루린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고개만 돌려서 뒤를 응시했다. 아이나가 차갑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목에 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굳히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장난이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당장 이 검, 치우지 못해?" "뭔가를 크게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난 장난 따위를 할 만큼 유치한 성격이 아니다." 아이나의 목소리나 말투가 다르게 느껴졌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좀 더 중성에 가까웠다. "이제 시작되겠군, 나를 위한 모든 것이." 아이나는 그녀가 방심하지 못하도록 검을 세게 누르면서 여유 있는 눈으로 하늘을 응시했다. 이루린은 그런 아이나의 처음 보는 모습에 당황했다. 냉혹하고 차가운 눈동자가 마치 케실리온을 보는 듯 싶었다. 언제나 순수하고 밝게 웃던 아이나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이나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면서 이루린에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이루린, 그래... 고통을 맛보는 기분이 어떻지? 즐거운가?" "너... 누구야. 아이나는 어디에 있지?" 이루린은 자신이 속았다고 생각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진짜 아이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나는 차갑게 웃으면서 그녀의 말을 일축해 버렸다. "착각하지 마라. 네가 보고 있는 내가 바로 아이나다. 지금 생각하니 이 이름도 너무 유치하군." 아이나의 말에 정지된 사고가 점차 돌아왔다. 믿었던 아이나가 그녀를 배신했다. 케실리온에 이어서 또. 그녀는 뭐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이제 분간할 수 없었다. 유일하게 아군이라고 믿었던,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마족이라고 믿었던 아이나가 그녀의 뒤통수가 날아갈 만큼 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에게 충격을 주고 또 충격을 주었다. "잔꾀라도 부린다면 바로 죽여버리겠다, 이루린. 허튼 수작 하지 마라." 이루린은 살기가 깃들어 있는 아이나의 말에 검을 뽑으려던 행동을 그만두었다. 이상하게 허리춤에 묶여 있던 가우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네가... 어째서... 날..." 이렇게 슬픈 적이 없었다. 한국에 있을 때에도 이 정도로 마음에 상처를 받진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왕성이 지금쯤이면 꽤 혼란스러워져 있겠지. 나의 동료인 그 분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다. 자, 어떻게 할 것인가, 이루린. 또 과거 때와 마찬가지로 날 방해할 것인가?" 아이나가 이루린을 노려보며 대고 있던 검에 힘을 주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그녀의 눈빛을 마주하는 게 어려웠다. 게다가 몸이 빨리 도망치라고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아이나에게서 풍기고 있는 이상한 힘이 그녀를 점차 압도하기 시작했다. "아이나... 제발 그러지 마. 난 널 그렇게 믿었는데..." 또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렀다. 모든 게 엉망이 되어버렸다. 케실리온과도, 케디아니스와도, 그리고 그녀의 삶도. "네가 사랑하는 군주가 구해줄 것이라고 믿나? 그는 내가 여기에 있는 것조차 모를 것이다. 아주 괴롭겠지, 사랑하는 남자에게서 버림받는 기분이란." "아이나!" "모든 걸 알고 싶나? 네가 그렇게 된 이유.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도 말이다." 이루린은 억지로 눈물을 닦으면서, 아이나가 제발 돌아서기를 바랬다. 믿고 의지하던 존재가 지금은 단지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게 싫었다. 한편으로는, 도대체 아이나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 요지라고 알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엘리세아는 루시안의 옆에 붙어서 케실리온을 응시하고 있었다. "군주, 그 자리에서 나와줬으면 좋겠군. 이젠 내가 그 자리에 앉을 테니까." 현재 마왕성 내부는 루시안이 이끄는 대규모의 군대에 의해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서열 10위 이내의 마족들 중 몇몇은 벌써 루시안의 편이 되어 있는 상태였고, 나머지 몇몇은 루시안과 동맹을 맺은 파괴의 신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있을 것이다. 복도에 난무하는 피와 끊이질 않는 마족들의 비명소리, 검과 검이 서로 날카롭게 부딪히는 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오고 있었다. 루시안은 생각했다. 드디어 자신이 마왕이 된다는 꿈을 이루는 것이라고. 현재 케실리온이 차지하고 있는 이 방도 이제 곧 자기 것이 된다고 말이다. "나는 마왕비가 되는 거야." 엘리세아가 웃으면서 루시안의 팔에 매달렸다. 그녀는 단지 이루린 때문에 케실리온을 좋아하는 척,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고, 단지 마왕과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은 곧 권력을 잡고 싶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사실 권력의 핵심 층은 마네리아와 카란델에게 있었다. 그러나 카란델이 죽은 이후로 루시안은 그를 따르던 세력을 설득해서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마네리아는 딸인 엘리세아가 설득해서 간신히 싸움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딸과는 다르게 마네리아는 군주에게 품고 있던 충성심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게 루시안으로서는 심히 불만이었다. "이루린은 곧 위험에 처할 것이다, 군주." 군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루시안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비명소리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루시안이었다. "쫓아낸 걸 후회하지 않나? 혹시라도 나 때문에 목숨을 잃을까봐 아예 안전한 곳으로 보내다니. 철저하시군. 그게 네가 그 여자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나?" 군주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루시안을 응시했다. 태연한 군주의 태도가 루시안의 눈에 거슬렸다. "하지만 그 여자는 곧 죽을 것이다, 너의 그 짧은 생각으로 인해. 안전하게 피신시키게 하려던 게 오히려 무덤을 판 꼴이 되었겠지. 그렇지 않나?" 군주가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났다. 루시안은 처음으로 그가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한 군주의 표정에 당황한 건 엘리세아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그럴까." 그 때 갑자기 루시안은 자신을 향한 강한 살기를 느끼곤 몸을 움츠렸다. 그와 동시에 군주의 방에 수십 명 가까이 되는 마족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자신의 편이라고 믿었던 파괴의 신 테리아베스가 군주의 곁에 서 있었다. "테, 테리아베스 님! 도대체 지금..." 루시안은 그런 테리아베스의 행동에 당황했다. 테리아베스가 차갑게 미소를 지으면서 루시안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난 네 편이 아니다." "그, 그게 무슨... 당신을 꺼내준 게 예카트레스 님이라는 사실을 잊으신 겁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날 꺼내준 건 예카트레스가 아니라 군주였다. 예카트레스는 자기가 날 꺼내준 것이라고 믿고 있겠지만 말이야. 내가 이렇게 마계를 활보할 수 있는 것도 모두 군주의 덕택이다. 사실상 마계에 갇혀 지내는 것이기 때문에 군주의 권한 없이는 날 함부로 풀어줄 수 없다." "서, 설마 그런..." "군주는 날 풀어준 후 한가지 제안했다. 예카트레스와 거짓으로 내통해서 정보를 입수해 달라고 말이다. 나 또한 예카트레스와 타협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는 자기의 힘을 너무 과도하게 남용하려 들고 있으니까 말이다." 믿을 수 없었다. 루시안은 처음으로 군주에 대해 두려운 마음을 품게 되었다. 루시안으로서는 그의 계산된 행동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군주는 현재의 이 상황까지도 모두 꽤 뚫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내가 예카트레스와 타협해서 좋을 게 뭐가 있지? 그는 매우 비열하고 이기적이지. 자기 동료에게 누명을 씌워서 신계에서 내쫓았으니까. 하물며 나라고 그렇게 되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제, 제길.. 역시 무섭군. 모든 걸 알고 있었나? 하지만 이 게임의 승자는 내가 될 것이다.` 루시안은 예카트레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이루린은 검에 의해 목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꼈다. 목에서 흐르는 피가 눈물과 섞여서 아래로 흘렀다. "난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아, 더 이상. 지쳤어." 이루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이나가 검에 계속 힘을 주면서 그녀의 턱을 거칠게 위로 들어올렸다. "나에겐 이름이 세 개가 있다." 아이나가 심호흡을 하더니, 천천히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가까운 과거에는 윤세아의 동생 윤이." 그 말에 이루린은 충격을 먹었다. 왜 아이나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오는 것일까. "현재에는 이루린을 모시는 시녀 아이나." 아이나가 차갑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귀에 속삭이듯이 말했다. "미래에는 신계를 지배할 검의 신 예카트레스." 마왕의아내-110 진실 "가까운 과거에는 윤세아의 동생 윤이." 그 말에 이루린은 충격을 먹었다. 왜 아이나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오는 것일까. "현재에는 이루린을 모시는 시녀 아이나." 아이나가 차갑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귀에 속삭이듯이 말했다. "미래에는 신계를 지배할 검의 신 예카트레스." "......" 태어나서 이렇게 충격을 먹은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사실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나 아이나의 눈동자는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진지했다. 마왕성 어딘가에 있을 예카트레스가 아이나였다니. 항상 그녀를 챙겨주고 위해주었던 마족이 그녀를 위협했던 존재인 예카트레스가 아이나였다니. 항상 한국에서 아껴주었던 존재인 동생 윤이가 예카트레스와 동일 인물이었다니. 아이나, 아니 예카트레스가 낮게 웃으면서 말했다. "공통점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네게도 이름이 세 개가 있지." "과거에는 동생 윤이의 누나인 윤세아, 현재에는 마왕성에 살고 있는 마족 이루린, 그리고..." 이루린은 예카트레스가 하는 말에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사고와 몸이 굳어진 것 같았다. "미래에는 미의 여신 아리아드네... 그래, 바로 그게 네 모습이겠지. 하지만 결코 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지." 미의 여신 아리아드네. 그녀는 전에 책에서 그 여자에 대해 읽은 적이 있었다. 그 때 그 여자는... "난 네게 복수하기 위해 1000년 동안 기다렸다. 그래, 올해가 딱 1000년째지. 넌 네가 누구인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겠지? 그럴 수밖에." 이루린은 멍하게 그 말을 되풀이했다. "1000년째라고...?" "모든 사실을 말해 주겠다. 먼저 물어 보도록 하지. 언젠가 넌 폭주하곤 했었지? 피만 보면 주체할 수 없이 말이다. 그게 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아나? 내가 네 몸에, 아니 정확하게 영혼에 파멸의 돌을 심어 두었기 때문이다." 궁금하게 여겼던 모든 사실이 예카트레스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 일단 과거부터 밝혀볼까, 아리아드네. 신계에서 넌 미의 여신이었고, 난 검의 신 예카트레스였다. 원래 넌 계급 상으로는 하위에 속했고, 난 1인자인 테리아베스 다음으로 2인자라고 불릴 만큼의 위치에 서 있었다. 같은 신이었지만 너와 나의 신분 차이는 아주 넓었다. 물론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타렌서와는 만나 봤으니 알겠지. 그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너와 난 그리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그러나 천계가 먼저 신계에 전쟁을 선포했을 때, 타렌서는 신계의 편에 섰다. 아니, 정확하게는 신계는 건드리지 않고 마족들만 죽였지. 왜 그랬는지 알고 있나? 바로 너 때문이었다. 어쨌든 너와 나, 그리고 타렌서는 그렇게 동료였다. 난 오래 전부터 천계의 황태자인 타렌서를 사랑했고, 그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난 중성이었으니까 사랑하는 건 가능했다. 그러나 타렌서는 아주 잘난 널 사랑했지. 그리고 그는 나를 택하기보다는 널 택했고, 그 때부터 난 네가 싫어졌다. 물론 넌 타렌서를 동료로서만 대했지. 그 일부터 시작해서 내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전쟁에 참여할 필요가 없는 널 전쟁으로 끌어들여 신계로 영영 귀환할 수 없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건 나의 확실한 실수였지. 신계와 천계, 그리고 마계는 너의 존재에 대해 경악했다. 미의 여신임에도 불구하고 네가 검의 신에 필적할 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주신은 나의 존재를 뻔히 알면서도 네게 소멸의 검을 하사했다. 나에게는 무척이나 굴욕적인 일이었다. 주신을 제외한 어느 누구든 죽일 수 있는 소멸의 검은 이 세상에 단 한 자루, 바로 검의 신이 지닐 수 있는 유일한 특권이었기 때문이지. 불멸의 존재인 신들까지도 소멸의 검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검이 일개 미의 신 따위에게 돌아갔으니, 화가 나지 않는 게 이상하지." 예카트레스는 눈짓으로 이루린의 허리춤을 응시했다. "바로 네가 지니고 있는 그 검이 소멸의 검이다. 가우드라고 했나? 그리고 내가 지금 네 목을 베려고 하는 검도 소멸의 검이지." 이루린은 예카트레스의 말만 멍하니 듣고 있다가 그 말에 깜짝 놀랬다. 가우드가 평범한 검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소멸의 검이라는 것인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신계에서 네 존재는 무서울 정도로 급부상했다. 넌 미의 여신이 아닌 검의 여제라고 불리게 되었고, 결국 머지 않아 파괴의 신인 테리아베스, 검의 신 예카트레스, 미의 여신 아리아드네를 통틀어서 신계의 1인자라고까지 불리게 되었다. 물론 부작용이 없는 건 아니었지. 나이가 들거나 나를 따르는 신들은 순수한 여자인 널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틈만 있으면 모함하려고 했지. 하지만 네가 워낙 성실하게 지내다 보니 그럴 건수가 없었다. 그것조차도 내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신이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난 겉으론 동료인 척 했지만 타렌서의 사랑을 받는 네가 증오스러웠고, 없애버릴 존재로밖에 비춰지지 않았다. 물론 핵심적으로는 일개 미의 여신 따위가 내 지위를 위협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넌큰 실수를 저질렀지. 넌 소멸의 검을 누군가에게 넘겨주었고, 신계 측에서는 그 사실을 부풀려서 널 매장시키려고 했다. 그에 맞추어 나는 결정적으로 너와 천계의 황태자가 사랑하는 사이라고 모함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지. 타렌서는 황태자였고 내가 사랑하는 자였기에 죄를 경감시켜서 1000년 동안 자기 집에서 갇혀 지내는 형벌만 받았다. 그러나 넌 죄를 부풀려서 1000년 동안 아예 모든 능력을 지우고 신계에서 쫓겨는 형벌을 받았지. 거기까진 괜찮았다." 내용이 너무나도 장황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테리아베스는 마계와 천계, 신계를 모두 지배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난 일단 테리아베스의 편에 서서 그의 계획을 도왔고, 그것은 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테리아베스가 마침내 모든 것을 장악하면 난 소멸의 검으로 그를 죽일 생각이었지. 그러던 와중에 문제점이 하나 생겼다. 어느 누구도 테리아베스와 내 계획을 알 수 없었는데 그것을 유일하게 네게 들킨 것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너와 난 동료였고 아직 타렌서와도 만나기 전이었기에 증오심 같은 건 없었다. 대신에 불안했지. 네가 그 사실을 말할까봐. 그런데 결정적으로, 네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신계에서 쫓겨났을 때, 놀랍게도 타렌서의 입에서 모든 사실이 밝혀졌다. 그 말은 즉, 네가 타렌서에게 테이라베스와 내가 꾸몄던 계획을 모두 말했다는 사실이 되지. 그 때 내가 느꼈던 기분을 알고 있나? 널 갈가리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계획을 모두 망친 널 영원히 파멸시켜야겠다고 마음먹기 시작한 것도 그 때였다. 넌 내게 달갑지 않는 존재였으니까. 어쨌든 테리아베스는 마계에서 10000년 동안 갇혀 지내는 형벌을 받았고, 나는 1000년 동안 마계에서 지내는 형벌을 받았다. 물론 너와 내가 받은 형벌은 비슷했지만 테리아베스가 받은 형벌은 격이 틀렸지. 적어도 너와 난 환생이 가능했지만 그는 환생을 해도 중간계에서 마계로 쫓겨 나온 어둠의 드래곤의 몸 속에 갇혀 지내야 했으니까." 에카트레스가 그녀의 목에 힘을 주었다. "그 지경까지 이르렀을 때, 난 기필코 널 파멸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다행이게도 난 100년 동안 떠돌다가 너보다 훨씬 일찍 마족으로 환생했지. 빌어먹게도 낮은 층에 속하는 마족으로 말이다. 난 어렸을 때는 기억하지 못하다가, 점차 성장하기 시작하자 서서히 기억을 되찾기 시작했다. 885살이 되었을 때 나는 반 정도의 능력과 기억을 되찾았지. 능력을 감추고 그저 순진한 여자처럼 행동했다. 그 해에 난 네가 다른 세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소환하려고 했다. 바로 5층과 6층 사이에 있던 방에서. 거기는 나의 본거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필 그 장면을 마왕에게 들켜서 실패했지." 이루린은 전에 몸이 작아졌을 때 가우드를 타고 5층과 6층 사이의 어두운 비밀 수로를 지나가다가, 어렴풋이 그 이상한 방을 본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또, 전에 이루린은 몇 달 전에 자신이 혼탕에 들어갔을 때, 케실리온과 그의 측근이 하는 말을 떠올렸다. 그 말과 현재 예카트레스가 하는 말이 일치했다. 그 때 벌써 예카트레스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난 죽을 뻔했지만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덕분에 불안정했던 기억을 모조리 잃게 되었지. 가끔씩 기억을 되찾았을 때, 나는 그 기회를 이용해서 네가 살던 세상으로 갔다. 물론 네 동생이 태어나자마자 나는 그 아기를 죽이고 마치 내가 윤이인 것처럼 5년 동안 너를 관찰하면서 살아왔다. - 너와는 2살 차이가 났겠지. 어쨌든 너는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지. 그게 내 눈에는 아주 거슬렸다. 넌 윤세아였을 때 동생 윤이와 아버지가 자기 때문에 죽었던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겠지, 지금도. 그러나 그건 모두 내가 꾸민 일이었다." 이루린은 전에 진실의 거울에서 봤던 장면을 떠올렸다. 현재 예카트레스가 하고 있는 말과 일치했다... "그리고 내가 5살이 되었을 때, 난 일부러 힘을 써서 사고를 일으키게 만들고 네가 죄책감을 가지게 하게 위해 살아 있던 네 아버지를 죽였다. 그리고 네 육체, 아니 영혼에 일찍이 파멸의 돌을 심었다. 그리고 난 내가 죽은 것처럼 만들어서 다시 마계로 돌아가서 아이나인 마냥 행동했다. 어차피 아이나에게는 가족이 없었고 시녀가 워낙 많았기에 내가 없어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10년 동안 네가 이 곳에 오기를 기다렸지. 그리고 10년째인 지금이 바로 너와 나의 형벌이 끝나는 1000년째인 것이다." 이루린을 예카트레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넌 나와는 달리 983년 동안 영혼으로 지내다가 태어났다. 그리고 17살 동안 살다가 1000년의 기간을 채워 자동차 사고로 죽을 운명이었다. 그 즉시 넌 다시 신계로 귀환할 수도 있었지. 내가 그렇게 놔둘 것이라고 생각했나? 나는 정확하게 네가 귀환하는 그 날, 네가 다니는 학교에 차원의 돌을 심어서 마계로 오게 만들었다. 물론 그 시기에도 파멸의 돌은 네 영혼을 묶어두고 있었지. 참고로 파멸은 돌은 네 기억을 되찾지 못하게 만들게 하고, 네 육체를 갉아먹는 역할을 하지. 지금 네 오른쪽 가슴에 그 돌이 들어 있을 것이다." 이루린은 손을 들어서 가슴에 대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런 짓을.... 어째서?" "다시 내 계획을 방해하면 곤란하니깐 말이다. 또 넌 증오스럽고, 반드시 죽여야 할 눈엣가시지. 너 따위가 검의 여제라고? 웃기지 마라. 난 절대로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네가 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예카트레스가 차갑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의 결과로 넌 조금도 힘을 되찾지 못했고, 기억도 되찾지 못했다. 넌 한동안 마계에서 잘 지내다가 언젠가 정령왕과 계약을 맺은 후에 위협을 받은 적이 있었지? 그 때, 한 마족이 네 오른쪽 가슴에 검을 박으면서 말하지 않았나? `이상하게도 검이 더 이상 몸 속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라는 말과 비슷한 말을. 바로 파멸의 돌이 이루린이라는 여자의 육체에 정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파멸의 돌이 조금 부서져서, 넌 더 이상 피를 봐도 폭주를 하지 않게 되었지. 물론 그 때문에 한동안 마력을 되찾을 수 없기도 하고 말이다." 이루린은 아련히 그 기억이 떠오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전에, 케디아니스와 두 번째 관문을 치를 때 그는 어둠의 드래곤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오른쪽 가슴 안에 무엇인가가 있다`고. 이상하고 의문스러웠던 일은 그 이후에도 상당히 많았었다... 대표적으로 진실의 거울에서 봤던 그 여자가 아무래도 아리아드네였던 것 같았다. 금발을 지닌 아름다운 여자.... "그 무렵, 신계에 있는 난 내 측근 중 한 명에게 명령해서 네 몸을 불구로 만들라고 명령했다. 내 측근은 천계와 내통하고 있었기에 천족들을 이용해서 널 그렇게 만들려고 했지. 그러나 마왕이 아주 친절하게도 모조리 막아주더군." `케실리온이, 설마..` "난 네게 고통을 최대한 주기 위해, 널 사랑하는 케디아니스를 이용했다. 결과는 대 만족이었고, 너는 아주 괴로워했지. 아니, 지금도 괴로워하고 있을 테지. 사랑하는 자에게서 버림받고, 너와 친했던 케디아니스는 죽고. 네가 의지했던 양부모가 죽고, 넌 모함을 받고. 멋지지 않나? 그리고..." "너.." 분노. 그것은 예카느레스를 향한, 정말로 없애버리고 싶은 분노였다. 예카트레스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넌 결국 내 손에 죽게 되고." 예카트레스의 즐거워하는 눈동자가 살의로 번들거렸다.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전에 내가 네게 보냈던 쪽지를 기억하고 있나? `그게 열리는 날, 운명의 문은 닫힌다.` 라는 문구를 적어서 보냈지. 어리석게도 넌 그걸 누군가를 납치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지. 그렇지 않나? 그 날, 정말로 아이러니하게도 케디아니스를 납치하려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러나 쪽지를 보낸 건 나였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는 있나? 차원의 문이 열리면 바로 네가 내 손에 죽는다는 뜻이었다." 이루린은 그 때를 떠올렸다. 그 추상적인 문구가, 바로 예카트레스가 보낸 것이었다니. 믿을 수 없었다. "난 기억을 잠깐 씩이나마 되찾고 난 후에는 바로 바닥에 쓰러졌다. 깨어났을 때는 아무것도 기억하지못하는 아이나로 돌아와 있었지. 다른 이들은 아이나의 몸이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더군, 어리석게도." 이루린은 하녀들이 아이나의 몸이 좋지 않아 자주 쓰러진다고 했던 때를 떠올렸다... "차원의 문을 연 것도 바로 내 짓이었다. 일단 각 차원계를 통합해서 지배하기 위해선 그래야만 했으니까. 난 루시안과 엘리세아를 내 편으로 만들었고, 그들은 철썩 같이 나를 믿고 따랐지. 나는 그들에게 마왕성을 혼란스럽게 만들라고 명령시켰다. 구체적으로 내 편이 될 수 있는 자들을 만들라고 말이지. 그들에게도 각자의 목적이 있었기에 내 명령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예카트레스라는 존재에 대해서만 알 뿐, 내가 아이나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항상 두건과 천으로 몸을 가리고 다녔으니까." "그리고 나는 테리아베스가 같은 편이 될 조건을 달고 그를 풀어주었지. 그런 식으로 나는 세력을 확장시키고, 마계의 전 지역을 장악하려고 했다." 너무 한꺼번에 그가 많은 이야기를 해서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넌 케디아니스라는 소년과 도망치려고 했겠지. 그러나 나는 그걸 카란델이라고 하는 네 부모에게 쪽지를 보내서 도망가지 못하도록 알려 주는가 하면, 널 첩자로 몰아넣기 위해 소문을 퍼뜨렸다. 그리고 천계를 조종해서 널 납치하게 만들어, 마족들에게 첩자라는 인식을 확실하게 심어주도록 했다. 결과는 역시 대 성공이었지. 네게 고통을 맛보게 하는 것도 성공했고." 이루린은 더 이상 울 기운도 없었다. 그저, 이 모든 사실을 한꺼번에 감당하기가 힘들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가 옆에 있어주지 않는다면 바닥에 주저앉을 지도 몰랐다. "모든 건 내 계획이었다, 이루린. 아니, 아리아드네. 이런, 너무 말이 많았군. 왜 그런 표정을 짓지? 괴로운가?" 예카트레스가 즐겁게 웃으면서 하늘을 응시했다. 하늘의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이 소멸의 검에 죽을 시간이다, 아리아드네..." 예카스레스가 무섭게 그녀를 노려보며 검에다 점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마왕의아내-111 진실 지금으로부터 몇 천년 전. 운명의 신, 하른 실마이오스는 답답한 마음으로 아리아드네를 응시했다. "중간계에서 돌아오신 이후로 너무 나태해지셨습니다." "괜찮아요, 하른." 아리아드네가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웃으면서 일어섰다. 금발에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는 그녀는 요즘 많은 남성 신들의 표적이 되어 있었다. 미의 여신인 만큼 외모는 가히 말할 수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신들만이 입는 하늘하늘한 옷이 그녀에게는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측근인 그가 보기에 아리아드네는 정말로 신비스러운 여신이었다. 검을 들고 싸울 때는 매섭게 달라지다가도, 신계로 돌아오기만 하면 푼수 끼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러한 점이 많은 남성들을 매료시키고 있기는 했지만. "지금 마계로 갈 거예요, 하른. 자, 어서 출발해요." 하른은 묵묵히 한숨을 쉬면서 아리아드네와 함께 마계로 출발했다. 한 손에 그가 제일 아끼던 진실의 거울을 들고서. 상관인 아리아드네의 명령으로 눈물을 머금고 마계에 선물로 주기로 했던 것이다. 마계에 도착했을 때, 아리아드네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정말인지 마계는 매우 어둡군요. 분위기도 삭막하고 주변에 돌아다니는 생명들도 그렇고... " 아리아드네는 마계가 이렇게 죽어 가는 분위기를 가진 곳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미의 여신인 그녀가 판단하기에, 마계는 미적인 면이라고는 찾을 래야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마왕성을 올려다보았다. 적어도 마왕성은 천계의 천왕성과 상당히 비슷했다. "전 자주 온 곳이라서 그런지 그다지 낯설진 않습니다. 어쨌든 아리아드네 님, 여기서 기다리고 계십시오. 제가 일단 들어가서 상황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좀 시간이 걸릴 겁니다." 아리아드네는 언제나 임무를 도맡아서 하는 하른이 대견스러워 살짝 껴안아 주었다. 그 직후 하른이 당황해 하며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는 조금 부끄러워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머리를 숙이곤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그녀는 마왕성 공터를 돌아다니기로 했다. 돌아다니는 와중에 금발의 긴 머리카락이 상당히 거슬려서 자주 멈추곤 했다. 마왕성에는 이상하게 생긴 꽃과 나무들이 즐비해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그것들을 신기하게 쳐다보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응? 이게 무슨 소리지?` 그녀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그 방향으로 향했다. 막 공터의 뒤쪽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흑발을 지닌 한 소년을 볼 수 있었다. 매우 어른스럽고 생긴 외모를 지닌 소년이 검을 든 채 열심히 수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녀가 호기심을 가지고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소년이 검을 내리고 그녀를 응시했다. 케실리온은 금발의 여자를 본 순간, 하마터면 탄성을 지를 뻔했다. 조각상처럼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것이다. 그는 세상에서 라이네가 가장 예쁘다고 생각했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자는 거의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녀에게는 외모뿐만 아니라, 모습 전체에서 누군가를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누구도 가지지 못할 그 어떤 것이 그 여자에게는 있었다. 그녀가 몸을 숙이면서 친근하게 물었다. "귀엽게 생겼구나, 검술 수련 중이었니?" 케실리온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용기를 내서 그녀에게 물었다. "저... 당신은 이름이 뭐죠?" "아리아드네라고 한단다." 그 익숙한 이름에 케실리온은 속으로 다시 한 번 놀랬다. 요즘에 각 차원계에서 크게 주목을 받고 있는 신의 이름과 동일했던 것이다. "여신인가요? 그렇다면 당신이 검의 여제라고 불리는..."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케실리온은 언젠가 한번 만나고 싶은 자를 만났다는 기쁨에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그의 목표는 바로 아리아드네와 언젠가 겨뤄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아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다. "제 이름은 케실리온이에요." 그러자 이번에는 아리아드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가 그 다음 마계를 이을 차기 마왕이로구나. 네 소문에 대해서는 들었어. 천재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라면서?" "그건 괴찬의 말씀이에요. 그리고 아직 당신보다는 아니에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다시 꼭 만나고 싶어요. 검으로 한번 겨뤄 보고 싶었으니까요." 분명히 그는 여태까지만 해도 그게 목표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목표를 떠나서 아리아드네라는 여신 자체를 한번 더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아리아드네의 모습이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되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를 불렀다. "아리아드네 님, 이제 들어가셔야 합니다." "알았어요, 하른. 곧 갈게요!" 아리아드네는 그렇게 외친 후에, 허리춤에서 검 한 자루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케실리온에게 내밀며 말했다. "네 검이 나쁘진 않지만, 이 검이 훨씬 좋아.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검이니 널 지도해 줄 거야. 물론 지금은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겠지." 케실리온은 푸른 기류가 엿보이는, 심상치 않아 보이는 검을 받으면서 다시 고개를 들었다. "왜 이걸 제게..." "네가 마음에 들었다고나 할까? 뭐, 어쨌든 네가 훌륭하게 성장한 후에 그 검을 다시 내게 돌려주러 오면 되잖아? 그 때 대결하는 거야, 어때? 참고로 그 검의 이름은 가우드야." 케실리온은 가우드를 묵묵히 응시하다가 다시 아리아드네를 올려다보았다. 한눈에 척 봐도 굉장히 좋은 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리아드네가 매우 소중하게 여겼을 법한 검이었다. 그 순간, 케실리온은 굉장히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새로운 어떤 감정이 가슴에서 퍼지고 있었다. "잘 있어, 멋진 소년." 아리아드네는 손을 흔들면서 그렇게 사라졌다. 그는 검을 만지면서 그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응시했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였다. "여기서 뭘 하고 계신 겁니까!" 들려오는 고함 소리에 케실리온은 뒤를 돌아보았다. 카란델이 매우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카란델은 케실리온이 다가오자 애원조로 말했다. "제발 도망치지 마십시오." "지금 수업 받으러 갈게. 그런데 있잖아, 카란델." 카란델이 앞으로 먼저 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나, 아무래도 사랑하는 여자가 생긴 것 같아." 그 말에 갑자기 카란델의 얼굴이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물들었다. 케실리온으로서는 그런 카란델의 과한 반응에 적응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생긴 건 케실리온인데 왜 카란델이 기뻐한단 말인가. 어쨌든 케실리온은 그 이후로 두고두고 그 여자를 잊지 않았다. 아니, 잊을 수 없었다. 라이네가 곁에 있긴 했어도 그녀는 사랑보다는 단지 지켜주고 싶은 존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짐했다. 언젠가는 꼭 만날 수 있다면 아리아드네에게 그 검을 돌려주겠다고. 하른은 아리아드네에게 궁금해서 물었다. "도대체 저 소년은 누구입니까? 아리아드네 님께서 이렇게 기뻐하신 적이 별로 없으신 것 같습니다만..." "느낌이 새로웠다고나 할까요. 차기 마왕이라고 하더군요. 당신도 소문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겠죠? 전 그 소년에게 가우드를 주고 왔어요." 하른은 그 말에 경악하곤 고함을 질렀다. "아니! 주신께서 하사하신 그 검을 다시 만나지 못할 지도 모르는 꼬마에게 주다니! 지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저지르신 겁니까!" 예상외로 아리아드네의 표정은 꽤 강경했다. "마계와 손을 잡기 위해서 제 검을 희생한 게 잘못인가요? 물론, 그건 일차적인 이유지만..." "영영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영영 마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단 말입니다. 지금이라도 그 검을..." "전 그렇게 하지 않을 거예요. 뭣하면 당신의 능력으로 저와 그 소년의 미래를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아리아드네가 순식간에 얼굴을 바꾸고 차갑게 응수하곤 마왕성 내부로 들어갔다. 하른은 그녀가 한번 결정한 일을 번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중간계에서 뼈저리게 느낀 바 있었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른은 한숨을 쉬며 눈을 지그시 감고 그들의 미래를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그는 믿을 수 없었다. "몇 천년 후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만난다고?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하른은 그 말이 가져다 주는 미래가 어떤 것인지, 그 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 하른 실마이오스. - 10층에서 떨어지던 이루린을 구해주고 뷰리풀을 마족으로 만들었던... 아시죠? 거의 외전에 가깝습니다만, 시간이 부족해 정성을 거의 들이지 못했습니다. ㅠ.ㅜ 그리고 엔딩을 많이 추측하셨던데... 모 두 틀리셨습니다.^^ 그럼 이만 적습니다. 그럼.... 예카트레스가 구구절절 설명한 이유는 이루린이 아무것도 모르고 죽는 것보다 알고 죽는 게 더 열받을 것이라고 판단해서입니다.-_-;;; 그냥 죽이는 것보다 살려서 고문하다가 죽이는 게 더 괴로운 법이지 않습니까 -_-;;; 그게 복수죠 -_-;;; 마왕의아내-112 진실 "아이나..." 이루린은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아이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내 이름은 아이나가 아니라 예카트레스니까. 자, 어쨌든 이제 슬슬..." 일단 이루린은 살아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카트레스가 자꾸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를 노려 재빨리 뒤로 물러서서 검을 뽑았다. 예카트레스는 약간 의외인 듯, 그녀를 응시하면서 검을 내렸다. 틈을 줘서 후회하는 기색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네 힘은 과거에 조금도 미치지 못하지. 그러한 힘으로... 거의 모든 힘을 되찾은 내게 대항할 생각인가? 네가 어디로 도망치든 난 널 찾을 수 있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검을 휘두르는지도 알 수 있지. 네가 아무리 그 검을 가지고 발버둥쳐도 날 죽일 수 없다. 너와 나 사이에 있는 절대적인 실력의 경계선을 무시할 생각인가?" 그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랬기에 이루린은 예카트레스를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네가 들고 있는 소멸의 검으로 날 죽일 수 있지만, 나 또한 내가 가지고 있는 소멸의 검으로 널 영영 죽일 수 있어. 우습게 보지마." 예카트레스가 미친 듯이 웃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그는 얼굴에서 표정을 싹 없애고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 압도적인 시선에 그녀의 몸은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그가 시선을 주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제대로 마주 서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이런 느낌은 케실리온 이후로 난생 처음이었다. "최대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도록 해 주지."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그녀에게 공격해 왔다. 이루린은 그의 빠른 몸놀림을 거의 주시하지 못했고, 그의 검이 복부를 가격하고 있을 즈음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윽고 장이 뒤틀리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복부에서 느껴졌다. 그 순간에도 예카트레스가 비열한 웃음을 그녀에게 노골적으로 보였다. 그녀는 그가 일부러 검날이 아니라 손잡이 부근으로 피가 나지 않도록 쳤음을 깨달았다. 검으로 베어버리면 일찍 죽을 테니까, 피가 나지 않게 해서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만들려는 심산인 것 같았다. `너무 강해!` 그녀는 자신이 과거에 어땠는지는 몰랐지만, 예카트레스의 행동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건 복수가 아니라 단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예카트레스가 일방적으로 복수라는 이름 하에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이다. 서글픈 심정이 고통스러운 느낌과 섞였다. 그녀는 그렇게 그에게 검을 한번도 쓰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케실리온.` 케실리온이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가 어쩌면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만신창이가 되고 있음에도 오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그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버렸다. 케실리온은 분명히 그녀를 쫓아냈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마음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도와주지 않는 건 당연했다. 결국 10분도 채 되지 않아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서 헐떡였다. 옷이 찢어지고 자질구레한 상처가 온 몸을 뒤덮었다. 팔에 감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부러진 것 같았다. 검을 들고 휘두르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정신과 육체가 고통스러운 기분이 어떻지? 난 아주 즐거운 데 말야." 그녀는 바닥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단지 고개를 들고 희미하게 예카트레스가 발로 그녀의 손을 짓이기는 것을 보았다. 손가락이 부러지는 것 같았지만 워낙 육체적으로 고통이 심해 감각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전신에 마취제를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하늘 높이 세운 검이 정확하게 그녀의 목을 가리켰다. 그녀는 자신이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곧 예카트레스가 웃으면서 검을 그대로 내리찍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때였다. "-주인이여, 어서 도망가라.-" 바람의 정령왕 미네르바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녀는 놀란 마음으로 미네르바를 응시했다. 미네르바가 예카트레스의 검이 그녀를 찌르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예카트레스가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어서!-" 이루린은 미네르바의 단호한 외침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손에 든 가우드를 놓지 않고서. "-이 사실만은 알아주었으면 한다. 난 네가 신이라는 사실을 진작에 눈치챘었다. 반신반의한 탓에 단지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었지만...-" "미네르바..." "-자, 어서 도망가라! 지금까지 즐거웠다, 나의 세 번째 주인..." 이루린은 정령인 미네르바가 처음으로 웃는 듯한 착각을 하면서 억지로 다른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미네르바가 있을 곳은 쳐다보지 않고 있는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겪어왔던 모든 고통과 미네르바가 자신의 위해 희생하려고 한다는 생각 때문에 절로 눈물이 나왔다. 이루린은 그렇게 미네르바와 예카트레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물론 직선 방향보다는 곡선을 그리면서 달렸다. 최대한 예카트레스가 찾아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마왕성으로 가자. 살기 위해선...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선...` 이루린은 몸이 무거워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몸이 만신창의가 된 상태에서 달려봤자, 마왕성까지는 갈 수 없었다. 그 전에 과다 출혈로 쓰러지게 될 것이다. 벌써 그녀는 피를 많이 토하고 깊은 상처를 몸에 장식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약 30분 정도 달렸을 까, 마왕성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낼 즈음이었다. 그녀는 더 달리지 못하고 결국 바닥에 쓰러졌다. 손을 뻗으면서도,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이 마음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내게서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뒤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이루린은 억지로 고개를 들어서 뒤를 돌아보았다. 예카트레스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벌써 미네르바가 소멸되었거나 정령계로 돌아갔음을 뜻했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보인 미네르바의 강경한 태도로 추측하건 데 분명히 소멸될 때까지 싸웠을 것이다. 이루린, 자신이 조금이라도 살 수 있도록 최대한 시간을 내준 것이다. 그 사실은 그녀를 너무나도 서글프게 만들었다. `하지만 예카트레스에게는 소용없어.` "정령왕인가? 상당히 강해서 처리하는 데 좀 애를 먹었지. 자, 이제 널 구원할 자는 아무도 없다." 예카트레스가 검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억지로 허리를 일으켜서 조금씩 손과 발로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예카트레스가 다가와서 발로 그녀의 발을 밟는 바람에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비명을 질럿다. "끝이다." 그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속에 크게 와 닿았다. "소멸되었나..." 루시안은 급변한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서 있었다. 테리아베스가 케실리온의 편으로 돌아섰다는 사실을 어서 예카트레스에게 알려야만 했다. 그러나 현재 그럴 여건이 되지 못했다. 그 때, 갑자기 케실리온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적당한 마법진이 하나 생성되었다. 루시안은 그가 이렇게 좁은 곳에서 무슨 마법을 쓰려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문이 끝났을 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루시안이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두고 보면 알겠지, 나중에 예카트레스에게서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루시안은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때 테리아베스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중간계로?" 케실리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몇 백년 동안은 예카트레스도 모를 것입니다. 중간계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그 후이니까 말입니다." 루시안은 그들이 무든 소리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아차릴 수 없엇다. 이루린은 자신의 몸이 빛에 휘감고 있음을 깨달았다. 강한 빛에 예카트레스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그녀를 죽이려다 말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어떤 힘에 의해 공중에 치솟고 있음을 깨달았다. 솔직하게 말해 놀란 건 당연지사였다. 난데없이 발 밑에 마법진이 생겨나서 그녀를 공중으로 치솟게 만들다니. "안 돼! 멈춰!" 뒤늦게나마 눈을 뜬 예카트레스가 고함을 지르면서 다시 그녀에게 검을 휘두르려고 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몸은 완전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의식 또한 완전히 사라졌다.... 그게 마계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누구인지 기억하는 것도 그 때가 마지막이었다. 마왕의아내-113 에필로그 600년 후, 알카서스 제국 내의 어느 호수. 레게라 호수는 오늘도 여전히 잠잠했다. 금싸라기가 뿌려져 있는 수면 위에 요정들이 한가롭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적하고 고요한 수면이 정 중앙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그 중앙에서 금발의 머리카락을 지닌 한 아름다운 여인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이윽고 그 여인의 몸은 호숫가 근처로 향했다. 막 몸이 물가에 닿았을 때 그녀의 두 눈이 희미하게 뜨여졌다. 그녀는 어색하게 눈을 뜨고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맑고 깨끗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온통 울창한 나무로 덮여 있는 공간 속에서 새 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녀는 머뭇거리면서 두 손으로 몸을 더듬었다. 실크로 만들어진 예쁜 옷을 입고 있었다. "난 누구지?"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녀는 자신이 왜 홀로 이곳에 있는지, 그리고 왜 이런 옷을 입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분명히 살아 온 과거가 있을 텐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 어떤 것도. 정체성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며 앞을 향해 걸었다. 그냥 아무 생각도 없이 무작정 걸었다. 생각나는 게 없으니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 때였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앞으로 숙이고 날카롭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의식중에 손을 허리춤에 갖다 대면서. 그러나 허리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러한 반응에 스스로 놀라 어색하게 제자리에 섰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살기를 띈 생명체가 다섯 마리 정도 주위에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그녀는 풀숲에서 늑대 다섯 마리가 나타나자 무서움을 느꼈다. 으르렁거리는 그들의 무서운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번뜩이고 있었다. 손과 발이 떨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그들의 자세를 낮춘 위협적 동작이 그녀를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그 늑대들이 그녀를 금방이라도 죽일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면서 뒷걸음질 쳤다. "도, 도와 주세요!" 늑대들이 그녀에게 다가오면서 점점 구석으로 몰아 넣었다. 그녀는 공포심 때문에 더 이상 외치지도 못하고 나무에 기대어 섰다.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그리고 막 한 늑대가 달려오는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면서 눈을 꼭 감았다. "꺄악!" 뭔가가 달려오는 듯한 발자국 소리.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면서 두 손으로 팔을 꼭 감쌌다. "괜찮습니까?" 고운 미성이 들려오자 그녀는 실눈을 뜨고 앞을 응시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살기를 띄던 늑대 다섯 마리가 지금은 피를 흘린 채로 바닥에 널려 있었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돌려 피묻은 검을 대충 닦고 있는 남자를 응시했다. 그녀보다 훨씬 큰 키를 지닌, 붉은 머리카락을 위로 묶은 남자였다. 남자는 길에서 한번 마주치면 다시 고개를 돌려 볼 것 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도,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녀는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남자가 미소를 지으면서 검을 품에 넣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약한 체격의 소유자인 것 같습니다만.... 이런 위험한 숲 속에는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그녀는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름이?"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는 그녀가 대답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가 참 멋지다고 생각하면서 뭐라고 대답할지 머뭇거렸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때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아리아드네...라고 해요. 그, 그리고 일행을 놓쳐서 산 속에서 길을 잃었어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렇습니까? 좋은 이름이군요. 괜찮다면 목적지까지 같이 동행해 드리겠습니다. 금새 또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당신은 이름이 뭐죠?" "케릭스라고 합니다. 자, 그럼 가겠습니까?" 자신을 케릭스라고 밝힌 남자가 매너있는 동작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산속을 걸으면서 그녀는 케릭스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케릭스는 매우 친절하고 격식을 갖춘 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는 남자였다. 케릭시는 미소를 짓다가도, 진지하게 그녀를 응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예전에 내가 알고 있던 한 여자와 많이 닮았군요. 물론 성격은 극과 극입니다만..." "좋아했었어요?" "아주 많이. 하지만 결국 짝사랑으로 끝났습니다." 케릭스의 눈동자가 조금이지만 흔들렸다. 그녀는 바닥을 응시하다가, 검고 주먹막한 생명체가 기어다니는 것을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징그럽고 혐오스러운 감정이었다. 만지기도 힘들 정도로. 케릭스가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이끌면서 검으로 가볍게 그 검은 생명체를 죽였다. 그가 아주 즐거운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자이언트 거미로군요. 예전에는 왜 이런 별것도 아닌 것을 그렇게 무서워했는지... 당신을 보면 꼭 과거의 내 모습이 생각나는군요." "그런가요?" 아리아드네는 징그러운 거미를 아무렇지도 않게 밟고 지나가는 케릭스를 신기하게 응시했다. 그는 앞서 가다가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는 그녀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그녀가 따라가자 그가 물었다. "목적지는?" 그녀는 속으로 당황하면서 아무렇게나 말했다. "그러니까... 음... 이 숲을 지나서 2번째 도시예요." "헬트로군요. 그럼 그 곳까지 출발하겠습니까?"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손을 잡았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뭐가 뭔지 몰랐지만 일단 그녀 옆을 지켜줄 든든한 동행자가 있다는 사실이 불안함을 어느 정도 없애 주었다. 강한 햇살이 그녀와 케릭스가 지나가는 길을 환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시작이었다. <完>